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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찬더] 행복한 오리고기 아저씨

by Casey,Riley 2023.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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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오리고기 아저씨
한스 콘라드 찬더 지음


  내 것은 누가 챙겨주나요?

  위대한 신부 로수스 슈피커가 세상을 뜨던  날이었습니다. 쾰른의 도미니크 수
도원에 있는 그의 방에서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숨을 거뒀다고 의사가 선언한 후, 로수스  신부는 임종병상에서 한 번 더 
눈을 떴습니다. 죽은 줄로만 믿고 있던 사람들은 자기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의 방에는 뭐  하나 남아 있는 게 없었습니다. 책들이며  그림, 책상과 의자, 
게다가 요강이나  침실용 탁자까지 그가 죽은  지 반 시간 뒤에,  그의 동료들이 
이미 몽땅 가져가버렸습니다.
  로수스 슈피커는 꽥 비명을 질렀습니다. 소리는  작았지만 동료들이 모두 그의 
침대로 달려올  정도로 푸르르 분노에  떨었습니다. 기절했다 깨어난  그는 침대 
곁에 모인 위선자들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습니다.
  “전부 내놔. 당장 모두 돌려줘.”
  잠시 후 모든 게  되돌아왔습니다. 요르단 사제는 타자기를 도로 가져왔고, 안
젤름 사제는  성인 토마스의 전집을  도로 가져왔으며, 브루노  사제는 부끄러워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 요강과 침실용 탁자를 도로 가져왔습니다.
  모든 게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서야 로수스 슈피커는 눈을 감고 두번째로 고요
히 잠들었습니다. 복되게 웃는 모습으로 신의 품안에 안긴 것이지요.
  자신을 방어할 줄 아는  사람은 복되도다. 나쁜 적들에 대항하여, 그리고 가장 
좋은 친구들에 대항하여,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까지.

  최악의 편견

  함부르크 풀스뷔텔에 있는 공항에서였습니다.  쾰른에서 본으로 가는 비행기가 
탑승 준비를 하는 중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그러자 그 많은 승객들이 모
두들 한꺼번에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어찌나 사납게  달리는지 나는 그저 놀라
서 쳐다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통로에 어수선하게  떼지어몰려 욕을 하며 야
단법석을 떨었습니다. 물론 물에 쫄딱 젖은 채였습니다.
  `누가 독일 사람들 아니랄까봐!`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스위스  사람이 하는 
행동을 했습니다.  몇 걸음 가서 나는  비행기 날개 아래에 서  있다가 여유있게 
웃으면서, 혼자 비를 피하며 기다렸습니다.
  이 순간 뜻밖에 또  다른 승객이 와서, 나와 똑같이 여유있게  웃으면서 내 옆
에 섰습니다.
  순간 나는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아, 이건  편견이었어.` 계단을 올라 비행기 
안으로 몰려가는 무질서하고 한심한  모습을 올라 비행기 안으로 몰려가는 무질
서하고 한심한  모습을 전형적인 독일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편견일 
뿐이었습니다. 내 옆의 이 독일 사람도 나와 똑같이 행동했단 말입니다!
  나는 그에게 뭔가 친절한 말,  아니 뭔가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말
을 건네려고 했습니다.
  그때 그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나쁜 날씨죠, 그렇죠!”
  세상에! 그의 입에서 너무나 심한 스위스 억양이 튀어나오는 게 아닙니까?
  와우, 정말 최악입니다.  종종 편견이 사실로 드러났을  때, 그것이야말로 최악 
중에 최악입니다.

  위대한 성인이 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

  독일의 위대한 시인 괴테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톨릭 교회에는 성자가 하나도 없다.”
  괴테는 로마의 평민귀족인  성인 필리포 네리를 좋아했습니다.  필리포 네리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로마에 살았던 사람으로,  예수교의 창시자인 성인 이그
나티우스 로욜라가 사는 집에서 얼마쯤  떨어진 곳에 집을 두 채 가지고 있었답
니다.
  어느 날, 누군가 필리포 네리한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성인이 될 수 있었습니까?”
  “거야 아주 쉽지.  난 항상 뭔가를 할  때, 스스로에게 물어 보곤  하지. 성인 
로욜라는 지금 무엇을 할까 하고 말야. 그리고 나는 그 반대로만 하면 돼.”
  필리포 네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괴테는 이 이야기에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나 역시 이 방법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위대한 성인이 되고 싶
다면 당신의 친척이나 직장 사람들  가운데 이미 특별히 거룩한 역할을 하고 있
는 사람을 눈이 빠지도록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러고 나서,  바라건대 그 사람이 하는  것과 반대로만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이상한가요? 걱정  마세요. 그렇게만 하면 당신도  틀림없이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충칭의 빨간 모자

  가난에 찌들어 황폐하고  음울해 보이는 중국의 한 도시, 충칭  교외에서 일어
난 일이었습니다. 시끌벅적한 길거리에는 남루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떼지어 몰
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초라한  사람들과는 옷차림부터 달라 보
이는 한 여자가 연방 웃음을  띠며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그
녀를 유심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녀는 아이처럼 가냘픈  몸매에다가, 금방이라도 넘아갈 듯  구부정한 허리에 
얼굴은 온통 주름투성이인  노파였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내 눈길을 끈  것은 늙
고 흉한 그녀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노파는 빨간 모자를 쓰고, 팔에도 빨간 가방을 들었던 것입니다. 모자도 가
방도 닳고 닳아서, 거의 그녀 자신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것 같았죠.
  하지만 빨간 모자와  가방은 모두 그녀에게 놀랄 만큼 잘  어울렸습니다. 게다
가 그녀는 내 옆을 지나가면서, 살짝 수줍어하는  표정과 함께 강한 자존심이 찬 
시선을, 빨간 모자와 빨간 가방과 함께, 내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인간의 정신에 대해, 또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가치와 자아실현만
이 다인 양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만 믿지는 말길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겉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도 언젠가는 충칭의 음침한 거리에  있는 늙고 가난한 노파가 될 수도 있
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당신의  겉모습을 당당하게 내세우고 거리를 걷는 한, 당
신은 영원히 늙지 않는 여성입니다.

  아름다운 여성이란

  여자를 볼 때 가장 흥미있는 부분은 언제나 얼굴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죠?
  우리가 러시아의 리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상하게도 내 눈을 끄는 게 있었습
니다. 러시아, 즉 옛 소련의 여자들 얼굴은 묘할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깊고 밝은 색의 속눈썹이  마음을 설레게 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눈썹이 신
선한 느낌을 주는 걸까요? 그도 아니면 하얗고 신선한 피부색 때문일까요? 모스
크바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그 후 3,4년쯤 후 옛 동독에서였습니다. 그곳에서 만나본 동독 여자들 역시 러
시아 여자들과 비슷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며 나는 또다시 리가에 있는  한 카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
고 언제나처럼, 더 이상 모를 때는 아내에게 물어봅니다.
  “저 여성들, 어쩜 저리 투명할까, 그렇지?”
  “투명한 게 아니라 투박해요.  당신, 모르겠어요? 여기 여자들은 아직 화장도 
안 하고 있다구요.”
  야, 애석한 노릇입니다. 내 아내가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죠. 그랬
다면 훨씬 더 아름답고 순수하게 말했을 텐데요.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엣 소련 여성들은 말이지. 신이 창조해 낸 피조물 중에 가장 아름답다구.”

  늙은 파비앙, 너 현명한 자태여

  서남아프리카에 있는 나미브  사막을 여행하던 때였습니다. 좁은  골짜기를 지
나는 길에 떼지어  가는 원숭이 무리와 마주쳤습니다. 수컷과 암컷이  마구 뒤엉
켜서 몰려가는 원숭이들이  어찌나 사납게 날뛰던지 참으로  장관이더군요. 다시 
길을 가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문득 원숭이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늙은 파비앙(비비 속의 미국  또는 아라비아 산 원숭이)이었습니다. 무리와 떨
어져서 혼자 바위 위에 똑바로  앉아 있는 녀석은 팔은 느슨하게 앞으로 늘어뜨
린 채 입에는 나뭇잎 하나를 물고 있었습니다.
  난동을 부리는 무리들 가운데서  어쩜 그렇게 의젓하게 아래쪽을 바라보는 것
처럼, 그 원숭이의 얼굴에는  정말 신과 같은 호탕함과 쾌활함이 있었습니다. 그 
늙은 원숭이는 꼭 부처님처럼 거기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나에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쳐 줬던 동방의 위대한 
현자들이 떠올랐습니다.  라즈니쉬, 사이 바바, 바크티브단타  스와미 프랍후파타 
같은 사람들 말이지요.
  그들 중에서도 그 원숭이만큼  초탈한 모습으로 슬기로워 보이는 이는 없었습
니다. 어리석은  무리들에게서 벗어나 그토록  큰 내면의 행복을  보여준 사람은 
없었지요.
  너 늙은 원숭이여, 나미브 사막  바위 위에 있는 너 늙은 파비앙이여,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명상가이리라.

  마호멧의 특별한 지혜

  예언자 마호멧이 어느  날 아침 명상에 깊이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처
럼 저쪽 구석에서 혼자 놀고  있던 고양이 미미가 슬금슬금 다가오는 게 아닙니
까? 미미는 마호멧이 입은 아라비아식 외투의 넓은 소매 위에 턱 올라앉는 것이
었습니다. 마호멧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때 하인이  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밖에 마호멧의 친구  한 사람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마호멧은 깜짝  놀라 명상에서 
깨어나버렸습니다.
  마호멧이 언짢아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자기 옷자락 위에  눈을 지그
시 감고 앉아 있는 고양이를 보았습니다.
  순간 옷자락이 움직이자 고양이도 역시 눈을  떴습니다. 그러나 미미는 잠에서 
덜 깬 듯 눈을 가느다랗게 치켜뜨더니 도로 감아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고양이는 마호멧  때문에 자기의 명상이 방해  받았음에도 불구하
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명상에 잠겼습니다.
  마호멧은 하인을  불러 얼른 가서  가위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가위를 
받아 들고는 조심스럽게 고양이가 앉아 있는 자리 주위를 돌아가며 자기의 넓은 
소맷자락을 둥글게 잘라냈습니다. 그러고는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에게로 
간 거죠.
  그런데도 고양이는 아직까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소리 
하나 없는 고요 속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미미는 계속 명상에 잠겨 있었
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동물을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마치 자기 노리갯감이나 장난
감 대하듯 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호멧의 자세는 그와 반대입니다. 그는  동물에게도 정중한 친절과 절
대적인 존중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존중한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진실하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언자  마호멧이 하듯이 
그런 식으로  동물과 어울리는 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아마도 천국에 
들어가는 게 어렵지 않을까요.

  조국애에 대하여

  나의 집 정원은  높고 빽빽한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에
는 이웃집 아이들이  울타리 뒤에서 뛰어놀지요. 그 아이들이 서로  뭐라고 말하
는지 귀담아 듣지 않게 된 것도 벌써 오래됐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놓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말투지요. 평
화적일 때도 있지만 그런  일은 거의 드뭅니다. 아이들의 말투에는, 거의 언제나 
협바적이고 독선적이며, 때로는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이 드러나 보이고, 비굴하
게 복종하는 느낌이 담겨 있을 때도 많습니다.
  어린아이란 본래 그렇지요. 내가 어릴 적에도 그랬으니까요. 자기만의 작은 공
간을 빼앗으려는 다른  사람에 대항하여서, 아이는 쉴 새 없이  방어해야만 합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추억은 아름답습니다. 왜일까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사방으로  끊임없이 나를 지켜내야만 한다
면, 적어도 내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 나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말이죠.
  그러나 자신의 영역을  갖기 위해 겪어야 하는  이런 경험은 매우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 과정은 무척 고통스럽습니다.
  이리하여 일찍이 어린 시절부터 내게 끊임없이 혹독한 대우를 했던 곳이 이제
는 나의 고향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조국입니다.
  그걸 갖지 못한 사람은 슬프답니다.

  바보란 어떤 건가

  우리집 건너편에는 나이많은  여선생님이 살고 있습니다. 나는  그 선생님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요즘 아들이 40년 전과 어떻게 다른가 하고요.
  “거의 모든 것이 변했지요. 같은 것은 딱 한 가지예요. 반마다 다른 아이들을 
위해 뭔가 좋은 일을 하는 아이들 숫자가 적다는 것이지요. 그런 아이들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더 나은 지성을 가진 아이들이랍니다.”

  그리스인들은 `이디오트`(바보)란 단어를 만들 때,  분명히 이런 것을 생각했습
니다. 즉 `이디오트`란 말은  `스스로`란 뜻으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말하지요.
  지성인은 그 반대입니다. 사회 속에 개인이  존립하며 공동체 속에서 행복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 항상 뭔가를 하
는 것입니다. 심사숙고한 지성에서 나오는 행동이지요.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방식을 `엘렌보겐  사회`(팔꿈치 사회)라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기주의 사회`에 관해서도 이야기하지요.
  지금 우리들은 서로 대치하며 상반되고 또 각자가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처신하는 것을, 그 옛날 지혜로운 그리스인들이라면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요.
  내 생각에는 그들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우리  귀에다 대고 이렇게 말할 
것 같은데요.
  “당신들은 정말 바보집단이군요.”

  *팔꿈치 사회:  팔꿈치로 생각없이 남을 툭  치며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그냥 
지나가는 것을 이르는 데서  나온 말. 즉 남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독단적 태
도를 뜻한다.

  행복한 오리고기 아저씨

  나는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사람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중국 북경에 있는 `천
안문 북경오리구이 식당`에서 오리고기를 써는 아저씨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오리를 잡아 요리했습니다. 
왼손의 구부러진 손가락  하나는 오리고기의 꽁지 부분을  잡기 위해 있는 것이
지, 다른 일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 보였습니다.
  왼손이 꽁지를 잡고 있는 동안에 오른손으로는 젓가락으로 먹기 좋을 만한 크
기로 번개처럼 고기조각을 썰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 싫증이나 지루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완벽한 
장인의 자부심 넘치는 행복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요.
  이것이야말로 바로 `동양의 지혜`입니다.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요소는 결
코 `창조성`이나 `자아실현` 같은 어려운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겸손하게 자기의 일을 그렇게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많은 
사람에게 행복한  한 순간을 선사할 수  있지요. 확신하건대, 이런 사람이야말로 
북경오리구이 식당에서 오리고기 써는  이 아저씨처럼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비겁에 대한 찬양

  불경기에 악덕 고용주 밑에 있는 기독교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하인리히 8세 시대의 재상이었던  성인 토마스 모루스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
는 가장 악질적인 고용주 밑에 있었습니다.  하인리히 8세는 영국 내의 거지들을 
모두 길가에서 목매다는 것으로 실업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토마스 모루스는 왕의 폭정에 반대하여 혼자서 용기있게 건의서를 제출했지만 
파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지요.
  이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토마스 모루스가  참수되기 전 마지막으로 무
슨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세상은 입만 살아 재잘대는 자들로 가득 차  있다.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에게 
그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 나약한 신하에게 충고하는 허풍 말이다.
  `그`는 그러한 허풍선이들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반대로 오랫
동안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약자가 느끼는 공포심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무책임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 그리고 군주와의 싸움을 진행하는 자기 
가족들마저 적대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용기는 아주 심사숙고하여  힘들게 고민한 후에 양심에서 우러나온 것
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가 험악한 시대에 
군주를 따른다 해도 올바르게 행동한 것이다.
  성인 토마스 모루스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지금 곧  직장으로 일하러 간다면, 이 불경기에 고용주를  위해서 딱 1
분만이라도 간절하게 기도하십시오.
  
  악마도 소름끼쳐 하는 것

  단테가 `신곡`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가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날 때였다. 그는 뭔가 억누르는  듯한 중압
감을 느꼈다. 지옥문 앞에서 그는 입장시켜달라고  애원하며 고통에 허덕이는 불
쌍한 영혼들을 만났다. 그러나 악마는 그들을 영원히 들여보내지 않았다.
  단테는 계속 썼습니다.
  그들은, `뜨뜻미지근한 영혼들`이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인생에서  자기의 결
정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있다. 그들은 목적을 두고 하는 것도 없고, 누군가의 편
에 서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입장이나 관점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다.
  입에 쩍쩍 달라붙도록 아첨하는 자, 어정쩡한 위선자, 그들은 저승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신은 그들을 천국에 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뿐
인가, 악마마저도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위협한다.
  별 하나 반짝이지 않는 캄캄한 밤중에 폭풍에 떠는 나뭇잎처럼 고통에 신음하
는 이 `뜨뜻미지근한 영혼들`은 영원히 지옥문 앞에서 갈 곳 없이 해매고 있다.
  혹자는 현대인들이 지옥으로 떨어질  거라는 걱정이나 공포감이 전혀 없이 살
아가는 것이 무척이나 다행스럽고 진보한 것이라고  말하지도 모르지만, 나는 오
히려 그것이 걱정스럽습니다.
  현대를 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들은 결국 어느 날, 굳게 잠긴 지옥문 앞에 
서서 절망에 떨며 제발 지옥에라도 들여보내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될지도 모
릅니다.
  
  창녀와 성자가 만났을 때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가 카톨릭  교회에서 딱 한 가지  마음에 든 점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성인을 취향대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성인은 `사막의 신부` 시메온 에메사입니다.
  시메온은 3년 동안  사해(지중에 옆에 있는 바다) 근처에 혼자  살면서 기도했
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살던 곳을 그대로 둔 채 아버지의 도시 에메사로 
돌아왔습니다.
  시메온은 곧바로 모든 사창가 중에서도 가장  악평이 자자한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한 창녀의 방을 찾아가, 한구석 바닥에 앉아서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하루종일 그는 거기  앉은 채 의연하게 명상에 잠겼습니다. 그  동안에 창녀도 
마찬가지로 의연하게 자기의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시메온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이곳이 정말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고 느끼십니까?”
  성인은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사막에 있을  때 그곳은 나에게 맞는 곳이었소. 그리고  이곳 사창가에
서도 나는 올바른  곳에 있다고 느끼오. 왜냐하면 신은 이런  사창가에도 똑같이 
계시니까. 그리고 당신이 여기서 하는 일은...글쎄,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렇다
고 기도하는 데는 방해되지 않아요.”
  
  정말 아름다은 정원은요...

  겨울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습니다. 반대로 여름에 모두들 찾아오지요.
  어제는 심리치료사가 왔습니다.
  “당신은 참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군요.”
  이 얘기 저 얘기 하더니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더군요.
  “당신이 정원에서 즐겁게 지낸다는 게 그대로 피부에 와닿는군요.”
  이것은 칭찬으로 한 말이었지만 나는  걱정스러웠습니다. 왜냐고요? 한번 들어
보세요.
  제 이웃에 사는 어떤 사람은 자기 정원에  있는 것을 모두 베어버렸습니다. 나
무 한 그루, 덤불  하나 차례차례 베어내 민둥 뜰밖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거의 사막이 된 뜰 한가운데다 고독해  보이고 보
잘것없는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환하게 웃으며 소나무 둘레를  끊임없이 빙빙 돌았습니다. 사람들
은 그렇게 벌거숭이  뜰에서 즐겁게 있는 게  하도 이상해서 그를 쳐다보았겠지
요. 나도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 남자는 아주 오랜 세월 감옥에 갇
혀서 살았던 것입니다.
  정원이란 게 모두  이렇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주인과  어울리는 모
양이 되는 거지요.  그리고 그렇게 각자가 자기 정원에서 자기  방식대로 즐거움
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괜한 찬사는 아닙니다. 오히려 보기보다는 왜 정원
이 그렇게 아름답지 않은지, 아니 끔찍하게까지  보이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입
니다.
  아름다운 정원이란 전혀  다른 그 어떤 것입니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정
원이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내 곁에 있음으로써 행복하
다고 느끼는 정원이 진짜 아름다운 정원이 아닐까요?
  
  한꺼번에 해서는 안 되는 것

  어릴 적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스위스의 취리히, 위틀리산 위에 사는 그리틀리
라는 친구입니다.
  “그리틀리, 앙겔리카는 어떻게 지내?”
  “걔, 요즘 몹시 어렵게 지내고 있어.”
  그리틀리는 침울하게 말했습니다.
  “걔는 큰 실수를  했어. 어리석게도 여자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실수를 저지
른 거지. 남자도 갈아치운 데다가 또 직장과 집도 한꺼번에 바꿔버렸어.”
  그리틀리는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녀의  눈길은 이상하게도 맥빠져 보였습니
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모든 걸 할 수 있어.  하지만 세 가지는 한꺼번에 해서는 
안 돼.”
  이 순간 나는 마치  모세가 시나이 산 위에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십계명을 받았지요.
  만약 오늘날 모세가  산에서 내려온다면, 십계명 판에 무엇이  적혀 있을까요?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과연 어떤 계명이 내려질까요?
  나는 이 질문을 항상 나 자신에게 던져봅니다.  지금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겠군
요.
  여섯번째 계명 : 여러분은 남자를 바꿀 수 있다.  직장과 집도. 그러나 세 가지 
모두 한꺼번에 바꾸는 일은 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이 장수하고 지구 위에서 행
복하기를 위해 건배한다.
  
  양쯔강에 비가 내리면

  중국 대륙을 유유히 흐르는 양쯔강에 한줄기 비가 내리고 나면 급류의 더러운 
황토색은 배에서 떨어지는 녹, 산업 찌꺼기의 그을음, 양쪽 강둑 열대의 썩은 것
들과 함께 형형 색색 장대한 교향악을 이루어냅니다.
  나는 중국식 우산을 쓰고 한코우에서 한양으로 가는 배 위에서 완전히 낯설고 
이국적인 세계를 바라보며 느끼는 경이로움 앞에 할말을 잊었습니다.
  때마침 그때 석탄을 가득 실은 화물선이  양쯔강을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데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배는  우중충한 황록색도 아
니었고, 다른 배들처럼 녹슨 갈색도 아닌, 티 하나 없는 맑은 흰색이 아니겠습니
까? 마치 상아처럼 하얀 배였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토록 더럽고 시커먼 석탄  뒤에는 하얀 색 나일론 셔츠
를 입은 선장이  조종칸을 잡고 서 있는 게  아니에요? 너무나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어서 마치 전세계에 뭔가를 선포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양쯔강 전체에서 가장 깨끗한 선장이라구요.”라는 듯이 말이지요.
  자, 보세요. 중국에서도 모든 것이 우리와  정말 똑같습니다. 가장 청결한 자야
말로, 몸소 가장 더러운 것을 운반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신이 불행할 때는

  어떤 날은 아무에게도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고 하루가 지나갈 때가 있습니
다. 왜일까요. 나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내가 잘 지내고 있어서 아
무도 내가 뭘 하는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3년 전에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나는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돼버렸습니
다. 속된 말로 잘나가지  못하고 있었던거죠. 그때는 모두들 내게 전화를 걸어서 
내 근황이  어떤지, 새로운 일자리는 찾았는지  등에 대해 무척 궁금해했습니다. 
가령은 이런 물음들이었습니다.
  “하느님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니?  너같이 유능한 애가, 참 안됐다.

  “그래, 넌 지금 뭘 하고 있니?”
  나참, 그들은 모두 전에 안 보이던 관심을 저에게 쏟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본래  이렇습니다. 불행한 일에  대해서는 어떤 큰  값을 치르더라도 
일일이 간섭하고 싶어하죠.
  그런가 하면 신문의  인물 동정란을 한번 보세요. 하나같이 불행한  일을 알리
는 소식들뿐이지요.
  신학자로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를 아시죠?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행 그 자체가 인간을 고독하게 하지는 않는다. 고독에 빠지게 하는 것은, 오
직 다른 사람들을 자기의 불행에 간섭하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무능력이다. 
어떤 사람은 우정 때문에, 또 어떤 사람은  남의 불행을 고소하게 여겨서 간섭하
고 싶어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히 호기심 때문에라도 그런다.
  그러나 우정 때문이건  고소해서건, 그것도 아니면 호기심  때문이건 간섭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똑같다.
  간섭하는 자들에게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불행이 당신을 덮치고 
있는 동안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불행을 위로하는 듯한 말로 아무리 간섭하더
라도 그냥  모른 척 내버려두십시오.  조금만 지나면 아무도  당신을 간섭하려고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당신도 나처럼 다시 평온을 되찾을  겁니다. 누구도 더 이상 당신
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테니까요.
  
  행운이 찾아올 때는

  “보나 레룸 세쿤다룸 옵타빌리아, 아드베르사룸 미라빌리아.”
  철학자 세네카가 쓴 글입니다.  내 친구는 이 문장을 어떻게 번역하는지, 그리
고 도대체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지 서로 토론한 후, 여기  다음과 같은 보고를 
했습니다.
  1941년 겨울, 나는 대역죄라는 죄목으로, 라이프치히 베토벤 거리에 있는 미결
심 감옥소에 앉아  있다. 내가 앉아 있었던 제3제국의 모든  감옥소와 야영지 중
에서 이곳이 유일하게 기분좋은 곳이다. 그 이유는  내 감방이 나무로 된 마루청
으로 되었고, 벽을 따라 천장으로 올라가는 다섯  개의 관이 딸린 증기난방 시설
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이미  전쟁이 발발했다 한다.  그 추운 겨울  전선에서는 최악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이 감방  안 나의 세계는 단 두 권의 책뿐이었다. 나는 
그걸 1주일에 두  번 감옥소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었다.  나를 감시했던 교도관
은 나이가 지긋한 사람으로,  내게 관대한 편이었다. 그는 내가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메트리스를 증기난방 장치  옆에 세워놓고, 거기에  기대어 독서할 
때도 뭐라 잔소리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그 순간  어떤 희열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으며, 그것은 생전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런 기분은 앞으로도 느낄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지금 내가 러시아 벌판에 누워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모르긴 몰라
도 코와 귀가 꽁꽁  얼어붙을 것이다. 나는 이런 멍청한 전쟁에서  나 자신과 다
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미결심 감옥소에 앉아 
있으며, 등을 따뜻한 증기난방 장치에 대고, 로마제국의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어
리석음을 조롱한 세네카의 시를 숨죽인 긴장감 속에서 읽고 있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합니다.
  행운이 찾아오면 당신은 당신이 받으리라 기대하는  것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이 당신에게 선사하는 것은, 전혀 예측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놀라 자빠질 
만한 것들뿐입니다.
  
  쓰레기를 위하여

  성경은 `분리 시스템`에  반대하는 뭔가를 가지고 있는 걸까요? 요  근래 간단
한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에 다녀본 후로는 왠지 그렇게 느껴집니다.
  성당에 딸린 병원이었는데, 한번은 원장 수녀님이  나를 창가로 데려가서 창밖
을 보며 말했습니다.
  “저기 아래를 보세요. 우리  병원에서 새로 만든 5개의 쓰레기통이에요. 투병
한 유리병, 색깔 있는 유리병, 두꺼운 종이, 얇은 종이, 플라스틱, 모든 게 엄격하
게 나뉘어 있어요. 이제 이것들은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라, 자원인 셈이죠.
  우리가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작은 요구르트 병까지도 
우리는 정말 깨끗하게  씻는답니다. 그리고 하루종일 주사병에서  나오는 생철로 
된 고리도  뜯어낸답니다. 그래서 모든 게  깨끗하게 나눠지도록 하지요. 투병한 
유리병, 색깔 있는 유리병, 얇은 종이, 플라스틱, 두꺼운 종이 등등...”
  수녀님이 이야기를 계속 하는 동안, 아래 뜰에 쓰레기차가 왔습니다. 자동차는 
크레인으로 5개의 통을 차례차례 위로 들어올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그 통들을 모두 한데다 쏟
아넣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너무 당황해서 쳐다보았습니다.
  “수녀님, 저 사람들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봐요!”
  “내가 보기에 저  사람들은 `마태복음 19장 6절`의 말씀을 아주  엄격하게 지
키고 있어요. 하느님이  연결한 것을 인간이 함부로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했
거든요.”
  
  진실을 위한 거짓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한 번은 진실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나의 친구 칼의 인생에도 그러한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아침, 평소에는 여섯 시에 도매시장에서  집으로 오던 그가 어쩐 일인
지 여덟 시나  되어서야 도착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곧바로 뭔가  낌새를 알아차
렸습니다.
  “칼, 사실대로 말해줘요.”
  물론 칼은 거짓말을 했지요.  그러나 그의 아내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
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칼, 나는 진실을 알아야겠어요. 진실은 그렇게  힘든 게 아니에요. 그보다 힘
든 것은 당신이 내게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그것뿐이에요.”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습니다. 칼도 버틸 때까지 버텨보았습니다.
  `말 못할 것도 없지. 진실대로 말하지 못할 이유가 뭐 있겠어?` 이렇게 생각한 
칼이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당신이 정 진실을 알고 싶다면... 그래, 나는 헬가와 함께 있었어.”
  나머지는 내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군요. 둘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내는 복수심에서 자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겼고 결국 
둘은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부부관계라는 사업은 여자  없이는 이끌어갈 수 없으므로  결국 파산해버렸고, 
그들의 두 아이는 어린 시절을 부모 때문에 망쳐버렸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남자가  그놈의 진실을 말할 정도로 어리석었기 때문이지요. 그
렇다면 또 어리석음이란 과연 무엇인가요? 그건 바로 무책임함을 뜻합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적어도 한 번은 진실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진실
이란 어떤 경우에는 거짓말을 하는걸 의미합니다. 참말이 아닌 거짓말 말입니다!
  
  친구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

  서기 280년  경입니다. 나일강 상류에서  하류까지 이집트  전역에 센세이션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사막의 바깥, 소위 말하는 테벤의 뒤쪽에 한 사람이 혼자서 앉아 있습니다. 그
에게는 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는 혼자서도 더 이상 바
랄 것 없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안토니우스, 그는 고독한 자이다!`
  이런 소문이 도화선처럼 퍼지기도 전에, 테벤에서는 첫번째 카라반(대상)이 이
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두번째 카라반도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또 카
라반들이 수도없이 이동해 왔습니다.
  마치 전 이집트인들이  이런 놀라운 일을 한번 보았으면 하는  것처럼요. 철저
히 혼자서 행복해질 수 있는 인간을 보려는 것이지요.
  아테네에서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건너왔습니다. 먼 로마에서도  여행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에바그리우스가 보고한대로, 늘  약 9천 명의 사람들이 신성한 안
토니우스의 암자 주위에 천막을 치고 머물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혼자서도 
그렇게 완벽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를 자신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 말이지요.
  수많은 젊은이들이 헌신적으로  돌보아준 덕에 안토니우스 은사는 105세의 고
령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생전에 이미 성인으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의  비밀은 종교와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
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많은 친구를 원한다면, 우선 혼자 있는 법을 배워야 할 겁니다.

  영국식 아침의 지혜

  우리 할머니는 영국 맨체스터에서 왔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있는 첫 크리스마
스 축제는 영국식이었죠.  할머니는 플럼 푸딩을 만들고 차 한  잔을 부어주었지
요. 나는 유심히 쳐다보고 있다가 흉이라도 보듯이 말했습니다.
  “할머니, 찻주전자에서 물방울이 떨어져요.”
  나의 영국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이 찻주전자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지. 세상에 있는 모든 찻주전자에
서 물방울이 떨어진단다.  신이 그러기를 원했단다. 인간들이 거만해지지 않도록 
말이야. 동시에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알도록 말이지. 그래서 신이 물리
의 법칙을 그렇게 창조하신 거란다. 인간이 물방울이 떨
어지지 않는 찻주전자를 생산하는 것은 성공할 수 없도록 한 거야.”
  할머니가 크리스마스 날  이런 말씀을 하신 지 반 세기가  지나갔습니다. 이제 
20세기 후반에 드디어 인간은 컴퓨터를 발명했습니다. 달나라에도 날아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는  찻주전자는 발명하지 못한 거지요.  물방울이 떨어지
지 않는 찻주전자는 아마 기적일 겁니다. 나의  영국 할머니는 축제 분위기에 들
떠 플럼 푸딩에 꽂힌 양초에 불을 붙이는 동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은 말이지, 기적은 신만이 행하시는 거란다.”
플럼푸딩: 건포도를 넣어  만든 푸딩으로,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때면 즐겨 만들
어 먹는다.
    똑같은 것은 싫어
  50년대의 일입니다. 사람들은 내게 라드치빌 후작을 언제나 `전하`라는 호칭으
로 부르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오버 슈바벤에 있는 전원주택에서 살던  그 폴
란드 귀족은 놀랍게도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한번은 수행원  몇 명과 재정고문, 경리,  부동산 중개인, 그리고  나이든 노인 
한 명을 데리고 스페인에 있는 자기 농지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노인은 다른 
동행자들과는 특별히 나쁜  사이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녁 내내 말  한마디 하
지 않았습니다.
  “저 노인은 내 고백성사 신부요”하고 후작은 내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곳이나  서 있느 곳이나, 항상 내 고백성사  신부를 곁에 두
고 있소. 수년 전부터 언제나 같은 분이었지.”
  나는 잠깐 주저한 뒤에 물었습니다.
  “후작 전하,  생각해보십시오. 항상 같은 사람에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게 
지루하지 않습니까?”
  아, 그 어떤 사람도  내게 이 순간 라드치빌 후작같이 그렇게  깊고 그윽한 눈
길을 보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물론 당신 얘기처럼  꽤 지루하지요. 그렇다고 왜 내가 고백성사  신부를 바
꾸어야만 하겠소?  신도 내가 몇 년  씩이나 하는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는걸요. 
내 기도는 다른 게 아니라 이런 것이었소.
  `주여, 저를 죄 짓도록 그냥 두셔도 됩니다. 그러나 항상 똑같은 짓은  하지 말
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말이요.”

  남자도 여성신문을 보나요?

  왜 내가 병원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지 아세요?
  쉿! 큰 소리로  얘기할 수는 없어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병원 대기실에 앉아 
여성신문을 읽거든요.
  성공한 남편 옆에  말쑥하게 빼입고 서 있는 부인들이 읽으라고  만든, 그림이 
번쩍거리는 그런 신문이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내가 내 인생을 위해 기꺼이 읽
는 것은, 500원짜리로, 그냥 보통 여성을 위한 아주 평범한 신문입니다.
  그 신문 말고는 다른 어디에서도 나는 남자로서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데 그만
큼 도움을 주는 꾸밈없고 실질적인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곰팡이를 막는 새로운 방법이라든가 혹은 컴
퓨터에 앉아 일하는 여비서한테 필요한 새로운 보호경  등, 이것은 또 내가 맑은 
정신으로 일하고 생각하는데 적잖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세 번 양치질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혀도 꼭 닦으라는 여성신문
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벌써 오래 전에 지구를 떠났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30년 전에 여성신문을 펼쳤을 때, 어리석고 저질스런 기사들
이 우수수 떨어지는 걸 보았을 때는 어찌나 역겹던지요.
  그러나 이제는 바로 그 여성신문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매료된 나머지 나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가 소수의 사람들만이 중시하는 그 뭔가로 살고 있음을 깨닫
는 것입니다. 흠없는 보통 여성의 실제적인 사고방식으로 말입니다.

  자전거를 타세요

  내가 전에  메사추세츠 주의 캠브리지에  있을 때였습니다. 거기서  나는 교수 
한 분을 사귀었습니다. 그는  로버트 바이스라는 나이 많은 유태인 교수로, 지금
껏 살아오는 동안 고독이라는 테마 말고는 아무것도 연구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어느 날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못믿어 도저히 함께 있으
려고 하지 않을 만큼 지독하게 고독을 느끼는 사람에게 어떤 충고를 하겠느냐고
요. 그는 주저없이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지하실에서 저전거를 꺼내 공원으로 산책을 가라고 하겠소.”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은 누가 자기를 쳐다보기만 해
도 겁을 집어먹지요. 그러나  자전거를 타면 그는 약간 위에 앉게  되고 길을 가
는 어느 누구도  그에게 눈길을 고정시킬수 없을  정도로 빨리 가볍게 움직이지
요. 이것은 아름답습니다.
  시몬는 드 보봐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아름다움이란, 일찍이 원래 부유한 사
람들이 누렸던 게 아니냐고요.  마차 위에 앉아서 공원을 지나다니고, 약간 높이 
앉아 있는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경쾌하게 보였지요. 그  시절은 상당히 
아름다웠던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사람들 중에 있되 매여  있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면, 그의 인생은 신
성한 것이다.
  바울이 그  당시 생각했던 것을 알고  싶다면, 어떠세요? 창고에  묵혀 두었던 
자전거를 꺼내 공원으로 산책을 가볼까요.

  더욱 신선한 말의 느낌에 대하여

  나는 친구들 중에서  아직 아내가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친구들은  모두 뭔
가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아도취에 빠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다 툭 내뱉
습니다.
  “소개하겠어요. 나의 반려자예요”
  그러나 이 말은 얼마나 자랑스럽고 자유롭게 들리는지요.
  `나의 반려자.` 그것은 세상에서 흔히 하듯  울림이 있고 성숙하며, 현대적이고 
인생의 명철이 느껴집니다.
  그와는 반대로 “나의 아내는...”하고 말하는 것은 구식인데다, 종속적이고 굴
욕스럽게 들립니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서라도,  `나의 아내`는 몹시 불안하
게 들립니다. 뿐만 아니라 견고하지 않은 것처럼도 느껴집니다.
  언제라도 `그녀`가 `그`로터 도망칠 수 있으며,  먼저 이혼할 수도 있는 것이 `
나의 아내`란 말이지요.  그와는 반대로 `나의 반려자`는 지속적이고  성실하다는 
느낌이 울려나옵니다.
  그러면 나도 이혼을 해야만 할까요?  `나의 아내`가 `나의 반려자`가 될 수 있
도록 말이에요.  어쨌든 우리가 부부로서 사람들  사이에 끼기를 원한다면, 뭔가 
새로운 걸 떠올려야만 할 겁니다.
  예를 들면  아주 새롭고, 자극적인 시대에  맞는 표현을 쓰는  것은 어떨까요? 
이렇게 말이죠.
  “소개해도 될까요? 나의 반려자, 결혼한 반려자를요.”

(독일 사회에서 `나의 반려자를...` 이라고 소개하는 말은 결혼은 안  했지만 함께 
사는 남녀를 뜻하는 표현으로, 요즘 젊은 층에서는 이보다는 `친구`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변치 않는 암스테르담의 창녀

  암스테르담의 창녀들이 쇼윈도 뒤에 앉아 네온 불빛 속에서 풍만한 몸을 내놓
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의 유년기에 나쁜 영향을 끼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또다시 암스테르담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매우 긴장된 마음
으로 갔겠지요.
  모든 것이 옛날처럼 아직 그럴까? 잔뜩 긴장하고 호기심에 가득 찬 채 기차역
에서 내려 예전처럼 왼쪽으로 꺽어 골목으로 들어가보았습니다.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요. 모든 것이 예전과 똑같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오래된 운하, 바로 그 낡고  작은 배, 오래된 쇼윈도, 낡은 
네온관의 불빛 속
에서, 내 오래된 두 눈이 지나친 곳은, 여전히 오래된 똑같은 섹스....
   변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내가 옛날에 와봤을  때는 암스테르담
의 창녀들은 뜨개질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암스테르담의 창녀들은 더 이상 뜨개질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하쉬
시 마약을 피우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이것이 예전과 달라진 것입니다.
  정말 뭔가 변한 건가요? 아니오.  뜨개질 혹은 하쉬시 마약, 하쉬시 마약 혹은 
뜨개질. 둘 다 지루합니다. 둘 다 고루합니다.

  경극배우의 가면

  오늘 아침에 여러분은 아마 나에게 이렇게 물을 겁니다.
  “그 왜, 중국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것 있죠. 그게 대체 뭡니까?”
  TV프로그램이 게재된 신문이  없어도 나는 말해줄 수 있습니다.  중국 방송에
서 나오는 것은 늘  똑같거든요. 대답은 경극. 거기서는 매일같이 경극을 방영하
니까요.
  모든 대사가 완전히  고대 중국어로 되어 있느니 뭔  말인지 알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이국적이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지요.  무엇보다도 가느다랗고 날카롭게 
내지르는 노랫소리하며 그 무시무시한 가면들. 그  중에서 내게 친근하게 다가오
는 것은 딱 한 가지뿐입니다.
  지금이야 텔레비전 경극에서 여성들도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가면은 여전히 
남자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독일 방송에서는 좀처럼  경극을 볼 
수 없는 이유지요.
  굳이 경극 같은 것을 예로 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바로 그러
하니까요. 다시 말해, 여성들만이  자기의 인간적인 얼굴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겸손하므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유명하고 오래된  가면들은 모
두 남자들이 쓰게 된 것이죠.
  그렇습니다. 경극에서 보듯이,  독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도 늑대와 같은 탐
욕자들, 호랑이 가면을  쓴 잔인한 자들, 또는  원숭이 같은 풋내기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돈이 있는 곳에

  자본주의 신학자 칼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을 찬양하라!  돈은 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축복으로 내리는 신의  순수한 
은총이다.”

  구약 시대 족장들은 늘 낙타 수를 세어  신의 은총을 헤아렸습니다. 하지만 그
렇다고 아브라함이 소유한 모든 낙타를 200억 원의 돈에 비교할 수 있나요?
  낙타는 영원히 낙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200억 원은 내가 
꿈꾸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이 있는 곳에서는 검은 것이  희게 되고, 추한 것이 아름답게 되고, 천한 것
이 귀하게 되고, 오래된 것이 새 것이  되고, 비겁한 자가 용감해지고, 낮은 것이 
높아진다.

  그러므로 돈이 모든 행복의 열쇠이기 때문에, 돈  때문에 그토록 죄를 짓게 되
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죄 가운데 내게는 이것이  가장 가벼운 죄
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200억  원을 손에 쥐는 것을 꿈꾸며 1주일  내내 복권을 산다
고 합시다. 그는 정말 오로지 돈만 바라는 걸까요?
  힌두교의 새  경전 안에 있는 (바가바트기타)(고대  인도의 종교적, 철학적  시
가) 중에는 다음과 같은 끔찍한 글이 실려 있습니다.
  최고의 신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의 온갖  사기와 협잡중에서 나는 자칭 
`도박`이니라.”

  마틴 루터라면 오늘날 이런 문장을 어떻게  번역했을까요. 도박사 국민들의 허
풍을 보고 이렇게 쓰지는 않을까요?
  최고의 신이 이렇게 말했다. “모든 복권당첨 중에서 나 혼자 `장땡`이니라.”

  고통에 대처하는 능력에 대하여

  나는 오늘 치과에게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불안해 하지는 않습니다. 어린 시
절과는 달라졌죠. 치과에  가려면 끔찍하기만 했던 고통스런  기억은 사라졌습니
다. 오리혀 그 반대예요.  의사가 조심조심 놓아주는 주사는 가벼운 마약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서 몇 시간 뒤에 나는 이상하게 유쾌한 기분이 들지요.
  얼마 전에 암으로 죽은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 몇 방울의 
주사액에 매달려  숨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죠. 그이 몸으로  들어가는 주사액 
중에 한 방울 정도는 아마도 모르핀이었을 듯 싶습니다.
  그 주사액 덕분에 죽기 하루 전날에는 침대에 똑바로 앉
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나게 낱말퀴즈를 풀었습니
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의학적인 보살핌을 받고 있었
던 겁니다.
  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군요. 나 자신도 고통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고통에 찬 죽음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데 때마침 내 치과의사가  그리스 사람이므로 나느 고대 그리스인의 가르
침을 한번 생각해 봅니다.

  고통을 대처하는 능력이란, 때론 삶을 살기 위한 능력과 똑같은 의미가 있다.

  그리고 가끔은 이 다음에 나의 자손들이 의학이 아주 발달하여 완벽한 치료를 
받게 되면, 삶에 대해  그 어떤 것도 못 느끼고 살게 될까 봐  겁이 나기도 합니
다.

  딱 한 잔만 마셔요

  요즘 들어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의사가 잠자기 전에  수면제 한 알
씩을 먹으라고 해 그래로 했더니 정말 신기하게도 잠이 오더군요.
  하지만 다음날 아침, 머리가  몹시 무겁고 둔하더군요. 그래서 저녁에는 약 한 
알을 쪼개서, 10분의 1만 먹었습니다.  나 자신도 우습더라구요. 그날은 너무나도 
잘 잤으며 아주 상쾌한 기분으로 깨어났습니다.
  와인도 그렇지요. 나는 오래된 보르도 와인을 제일 좋아합니다. 하지만 두잔째 
마시면 머리가 무겁고 둔해집니다. 딱 한 잔만  마실 때가 가장 기분좋고 상쾌하
고 몸도 자유롭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반 시간만 지나보십시오. 벌써 머리가 
무겁고 띵해집니다. 처음 반 시간동안은 들뜨고  긴장되어 기분도 좋지만 말입니
다.
  이것이 바로 그 옛날 이집트의 전설적인 행복한  `사막의 아버지들`이 가진 비
밀이 아닐까요?
  아타나시우스가 기록한 것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막의 야자수 아래에 앉아 일출과 일몰을  즐겼고, 때로는 물 한 모금
을 마시며 즐겼고,  마치 성인 안토니우스처럼, 적은  양으로도 모든 걸 즐길 수 
있듯이 행복하게 100살이 되도록 살았다.
   아타나시우스: 삼위일체설을 주창한 그리스 교부철학자.

  경애하는 독자들에게

  책을 훔치는 일은 왜 그토록 참기 어려운 쾌감을 줄까요?
  나는 그것이 사랑의 본질과 관계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한 여자를 진정 사랑
한다 해도, 솔직히 나는  그녀의 사랑에 보답할 만한 사랑을 줄  준비는 되어 있
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막판에는 그녀를 위해 가장 극단적인  행동까지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 여자를  데리고 멀리 도망갈 각오까지 되어 
있다는 것이죠.
  모차르크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주)에 나오는 `세라일`에서의 유괴 장면
은 사랑을 갈구하는 정열적인 애인들한테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이것은 책사랑에 흠뻑 빠진 애서가들이 서점에서 책을
훔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그러니 어떡합니까.  내 마음이, 나를 사로잡는 책
을 위해 단 한푼도 지불하고 싶지 않다고 명령하는 겁니다.
  나는 내 명성, 사회적 지위-- 혹시 나에게 이미 전과가 있다 해도-- 심지어는 
나의 자유까지도 도마 위에 올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책에 대한 열정적인 사
랑은 나로 하여금, 책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사랑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속물들은  매주 베스트셀러 순위 차트를  게시해놓으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어리석음과 지루함의  원단이 아닙니까. 아둔함의 `넘버 1`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죠.
  아,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후
각이 예리하게 발달한 독자들이라도 어떤  책이 가장 좋은 책인지 금세 냄새 맡
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것은 오직 열정에  사로잡힌 애인만이 알아챌 수 있는 것입니다.  여인을 사
랑하듯 책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만이 말입니다.
  어쨌든 귀한 보배를 캐내듯 좋은  책을 발견해내는 나의 비결은 뭐 특별한 게 
아니라 바로 이런 것입니다. 아주 간단하죠.
  지금 당장 서점으로 가서  아주 정중하고 진지하게 주인에게 이렇게 물어보세
요.
  “요즘 가장 많이 도둑맞은 책이 어떤 책입니까?”

  담배를 찬양하라

  인도의 현자들 중에서  캘커타의 위대한 스승, ‘다다 지’만큼 내  마음에 드
는 사람도 없습니다. 몇  년 전 나는 명상의 도를 배우기  위해 그를 찾아갔습니
다.
  그는 똑바로 소파에 앉은 채 나를 맞이했고  나는 그의 발 아래에 앉았습니다. 
둘 다 한마디 말 없이 침묵만 지키며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호주머니를 뒤지더니 내게 담배를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다 지, 나는 당신에게  담배를 배우기 위해 이 먼 캘커타까지  온 것이 아
니라, 깨달음의 도를 배우기 위해 왔어요.”
  그의 행동에 놀란 나머지 나는 소리를 꽥 질렀습니다.
  다다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했습니다.
  “들어보시오. 긴장을 푸는 것은  모든 깨달음의 시작이오. 좋은 담배 한 개비
는 힘들고 복잡한 요가자세보다도 훨씬 더 긴장을  잘 풀어줍니다. 왜냐구요? 한
번 생각해보시오. 어째서  지금까지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줄  아시오? 대통령
들이 명상을 하기 때문에? 아니오. 그건 그들이  극도로 긴장되는 순간에는 항상 
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오. 그래서 인류가 아직까지 살고 있는 것이오. 
신은 인간에게 담배를 선사했소. 이걸로 긴장을 풀라고 말이지.”
  캘커타의 담배 피우는  스승은 내게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스승에  대한 존
경의 마음이 든 나는 그에게 담배불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긴장이 서서히 풀리는  평화로움 속에서 우리는 함께 담배를 피웠습니
다.

  평범한 정원사에 대한 찬양

  정원에 나와 가만히 서 있노라면 나는 마치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부활한 
예수처럼 느껴진답니다. 그녀는 요셉 폰 아리마테의  정원에서 예수를 처음 보았
을 때 그를 알아 보지는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성경의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그를 정원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
다.”
  부활한 예수처럼,  그렇게 태초에 첫 인간이  탄생했습니다. 신은 사원이 아닌 
에덴 동산에서  아담을 창조했습니다. 그렇게 신이  존재하는 곳,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곳이 바로 동산, 말하자면 정원입니다.
  옛날 페르시아인과 고대  그리스인들이 일컫는 단어 ‘파라다이스’는 원래는 
‘정원’이란 뜻입니다.
  교황의 권위가 약해졌다며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요일에  아무도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나는 이런 것이 전혀 걱정되
지 않습니다.
  부활한 예수는 성직자의 모습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정
원사로서 나타난 것입니다.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정원사는 세상의  모든 목사보
다도 훨씬 더 신과 가까웠기 때문이지요.
  왜냐하면 그는 파라다이스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능력에 대하여

  성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생을 살아가는 능력을 위한 기도>에서 다음과 같
은 어이없는 기도를 했습니다.

  신이시여, 겨울에는 제게 휴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하노버에 사는 나의  친구는 이런 기도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
나 12월이면 휴가를 받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창문에서 바깥을 보렴. 12월에는  모든 나무와 덤불이 쉬고 있어. 온 자연이 
휴식을 취하고 있지. 나의 육체는 모든 나무나 덤불과 똑같이 자연에 속한 거야. 
내가 지금 뭔가 시작하는  것은 서툴게 되기만 할 거야. 내  경험으로 봐서는 그
래. 그래서 나는 항상 12월에 휴가를 가지.”
  크리스마스가 있는 주간에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상한 현상을 한번 생각
해 봅니다. 마치 그해에 놓친 것을 모두 다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말입니다.
  직장에서 놓쳐버린 일이나 잃어버린 사랑은 대충  선물로 때우려 하고, 사무실
이나 집이나 길거리에서도 모두가 조급하게 서두르고 우왕좌왕합니다.
  이때에 나는 진정 이렇게 기원합니다.

  신이시여, 제게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지력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기원하건대, 12월에는 휴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가짜들의 세상

  오쇼가 자칭 바그반(힌두교에서 종교적 스승에게 쓰는 존칭)이라 하며, 푸나에
서 설법을 펼 당시, 매일 아침 약  2천여 명의 신봉자들과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명철한 그에게서 지혜를 배우고자 온 것이지요.
  그래서 나도 바그반  앞에 무릎꿇고 앉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한창 
설교가 진행중일 때 뒤쪽에서 느닷없이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유럽인인 듯한 웬 여자가 꽥 소리를 지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그반, 너는 사기꾼이고, 야바위꾼이야. 이 가짜야!”
  순간 바그반은 충격을 받은 듯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더니 잠시 후 푸하하 웃
기 시작했습니다.
  “이 여성이 나더러 가짜라고 하는군요. 그렇다면 정말 가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네 가짜 젊은이들은 죄다 어디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
  바그반이 이렇게 뭔가 슬기로운 말을 몇 마디  하자, 우레 같은 박수갈채가 끊
임없이 쏟아졌다가 곧 쥐죽은듯한 정적이 뒤덮었습니다.

  우리들은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만 합니다. 누가 대체  ‘가짜 젊은이들
’이란 말인가요.
  아마도 나나 혹은 당신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속기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
다. 그들이 있으므로 그토록 많은 사기꾼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입니다.

  당나귀에게 경의를

  중세시대 독일의 도시 쾰른에서  열렸던 축제에는 당나귀 한 마리를 대성당으
로 끌고 가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배에  싣기 위해 엉덩이부터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머리쪽을 끌고 지극히 거룩한 곳, 성당으로 인도하는 거지요.
  주교의 품위를 나타내기  위해 당나귀 머리 위에 주교관을 씌웠는데,  그걸 본 
사람들은 대성당  길목에 서서 당나귀가  마치 대주교인 양  경의를 표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아닌 한낱  당나귀에게 경의를 표하는데도 쾰른의 대주교는 이
런 광경이 밉지만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미있다며 사람들과 함께 웃었답니다.
  적어도 중세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쾰른의 대주교는 새해 미사를 드릴 때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곤 
합니다.
  “기독교와 우리 대성당에 대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신성모독과 명예
훼손’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뿐입니까? 그 중에  가장 심한 것
은 독일 라디오방송이 저지르고 있는 신성모독입니다.”
  쾰른에서 신성모독이라니? 그것도  독일 라디오에서? 그렇게 정직한 방송에서 
신성모독이라니요?
  자, 이제 또 축제를 맞이하여 나는 추기경 마이스너에게 이렇게 바랍니다.
  “그대는, 그 옛날 교회의 힘이 강력했던 때에도  그 지독한 조롱과 풍자를 여
유롭게 참고 넘겼던 쾰른의 주교에게서 많은 점을 배워야 할 것이오.”

  잔인한 아침의 지혜

  희생자는 여러 사람,  여러 민족입니다. 리베리아의 어린  아이들, 체코의 백발 
노인들, 사라예보의 부녀자들....
  그러나 가해자는 항상 똑같습니다.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승리자의 자세로 
총을 어깨 앞에 받치고, 이마에는 람보처럼 띠를  두른 새로운 전사들은 모두 젊
은 세대들입니다.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건 이들  가해자는 18세에서 25세 사이의 
젊은 남자들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는 걸까요?

  역사가 타키투스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야만족들은, 소년이 자라 자기의 적 1명  정도는 완전히 때려눕혔을 때에야 남
자로 인정해준다. 그러나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

  정말 이 말처럼, 오늘날 이 야만적인 젊은이들이  성인이 되기 위해 고대식 경
험을 한답시고 날뛰다가  불구가 된 어린아이, 불에  탄 외국인, 차에 치이는 노
인, 성폭행당하는 여성들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분명 남성적  성의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젊은  남자에게는 평화적
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잔인한 충동이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걸 해소하기 위
해서는, 조금은 잔인한 해결책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조금 심하지만 이렇게 부르짖기라도 해야 할까요?
  “18세에서 25세 사이의 모든 젊은이들을 감옥에 가두라!”
  보디빌딩도 하고  심리치료도 하는, 게다가  아침식사 때는 텔레비전도  볼 수 
있는 아주 아늑한 감옥으로 말입니다.
  18세에서 25세  사이의 모든 젊은이들을  감옥으로 보내라. 그러면  땅 위에는 
깊고 깊은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남은 것은 침묵뿐이랍니다.

  미국 독립기념일 축제 동안 메사추세츠 주의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 나이 많은 부인이 일곱 명의 영국 군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답니다.
  며칠 뒤에 그녀는 영국 사령관에게 찾아와, 군인들  일곱 명이 자기 집에 침입
해서 값나가는 책을 약탈해 갔는데 꼭 다시 찾고 싶다고 호소했습니다.
  성폭행 사건에 대한  얘기를 들을 줄 알았던  장교는 뜻밖에도 다른 이야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왜 성폭행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느냐고 물
었습니다.
  나이든 미국 여성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했습니다. 병사들이  그녀에게 했던 
일은 너무나 비속하고 파렴치한 일이라서 단 한마디도 말할 가치가 없으므로 이
야기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 책만큼은 자기에게 중요한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
으므로 반드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방송에서 물밀듯  쏟아져 나오는 포르노  물결에 대해, 
불의에 대하여 분노하지요.
  결국, 비속함과 파렴치한 행위는 아까 중년부인이 보여주듯, 침묵하는 경멸 밖
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법입니다.

  잔치

  성경 ‘마태복음’ 11장에, “예수는 먹고 마시는  것을 즐겼다”라고 씌어 있
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잠깐이었지만  레스토랑 비평가를 직업으로 삼을  정도로 먹
고 마시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레스토랑을 평가하기 위해 그곳에서 꼭  시식을 한 번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
구요. 레스토랑 안을 한번  휘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요. 그러고 나서 잠
간 동안 웨이터나  요리사들과 대화를 해보는 겁니다. 그들의 기분이  좋은지 어
떤지 알아보는 것이지요.
  이것은 내 경험에  의하면 거의 틀림없는 법칙입니다. 즉 일하는  사람들이 기
분이 좋으면, 음식 맛도 분명 좋습니다.

  나는 예수가 다시 올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웠습니다. 그는 기꺼이 직접 먹고 
마시기만 했을 뿐  아니라, 또한 종교를 -  마태복음 22장에서 - 잔치에  견주곤 
했습니다.
  그 당시 자기 교회의 모습을 혹독하게 비평했던 예수가 현대의 미셰랑 식당에 
들어오면 별점 세 개는 줄까요? 또 가울밀라우 레스토랑에는 몇 점의 점수를 매
길까요? 그리고 ‘특별히  독창성을 발휘한 요리’에는 영예로운 관을 얹어줄까
요?
  나는 예수가 웨이터나  요리사와 짧은 대화를 나눈 후에, 시식하는  것을 정중
히 거절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기분이 너무 나빠지면, 훌륭한 잔치가 될 수 없거든요.

  천사주의 병에 걸리지 맙시다.

  아는 사람 하나가 집을  크게 새로 지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축하도  할 겸 구
경차 그 집을 처음 방문했습니다.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집주인인 부인이 이
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당신 좋은 곳으로 가세요.”
  그리고 자랑하려는 뜻은 없지만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우리 집엔 화장실이  넷 있어요. 아래위층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있
어요.”
  60년대부터 이런 일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손님용 화장실을  따로 만
드는 집들이 생겨나더니 곧이어 세번째 화장실을  만들었고, 부부 각자가 화장실
을 따로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겨우 두  식구 살면서 화장실이 
네 개나 필요하단 말인가요?
  손님용 화장실이라는 것도 사실은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 집 화장실에 들여놓
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집 안에 들여놓아서는 안  될 테니까요. 
부부가 서로 다른 화장실에 간다는 것도 잘못된 발상이지요.

  오래 전부터 이런 것을 가리켜 일컬어온 말이 있습니다.
  ‘천사주의!’
  천사처럼 순수해지려는  병적인 욕구를 말합니다.  천사주의는 죄입니다. 다른 
사람의 신체에 거리감을 너무 많이 갖는 것은 창조물의 참모습을 부인하는 것이
니까요.
  신은 인간을 만들  때 하나의 장과 하나의 항문을 갖도록  창조하였습니다. 그
리고 그것들을 절대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올바른 길을 가르쳐주는 말

  철학자 막스 쉘러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독일정신의 한 사람으로 손꼽힙니다. 
또한 독일 전체에서 가장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했지요.
  그는 독일 청년들에게 미덕과 기독교적 도덕을 실행하라고 열정적으로 외쳤습
니다. 쾰른의 추기경  칼 요셉 슐테는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아주 기뻐하였지만 
막스 쉘러의 사생활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교수님, 당신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덕목과 기독교적 도덕의  길을 가르쳐주
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길과는 달리, 정작 당신 자
신은 변하질 않나요?”
  철학자는 당황하며 추기경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머리를 흔
들었습니다.
  “추기경님, 당신은 제게 전혀 가능하지 않은 일을 요구하고 계시는군요. 길을 
묻는 다른 사람에게 가리키는  방향으로 같이 가는 길안내인을 본 적이 있나요?


  쾰른의 커튼 가게

  라인 강 가의  도시 쾰른의 크렙스 골목에는  동화처럼 번창하는 커튼 가게가 
있었습니다. 가게 이름은  ‘비트겐슈타인’이었습니다. 그 가게를 알고 있던 모
든 사람들은 오늘날도 그 가게에 대해서  같은 생각입니다. 한마디로 ‘비트겐슈
타인’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커튼 가게였습니다.
  그런데 7년 전 어느 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비트겐슈타인’
이 문을 닫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커튼 가게가 파산을 한 것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예전에 ‘비트겐슈타인’에서 판매원으로 있던 사람을 만났습
니다.
  나는 너무나 궁금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커튼 가게 중에서 가장 좋은 데가 어떻게 파산을 할 수 있나요?”
  “그건 간단해요. 너무 좋았던 거죠. 손님들이 절대로 다시 안 올 만큼 말이에
요. 우리 커튼은 너무 좋아서 아주 오랫 동안 사용할 수 있었거든요.”

  나는 우리  마을의 교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교인들이 
다시는 오지 않는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물으면서 스스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지
요. 쓰라린 자책을 하며 자신들이 모든 걸 잘못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교회들이  그렇게 커다란 잘못을 한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아
니, 오히려 너무 잘하기 때문에 손님들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너무 좋기 때문에 기독교라는 커튼을 너무 오래 사용했던 겁니다.

  청바지여 영원하라

  어떤 사람들은 50년 간의 승리를 자축하고 어떤 사람들은 50년의 패배를 축하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는 뭔가 피부에 아주 가깝게 와닿는  감촉을 자축합니
다. 이름하여 ‘50년간의 청바지라’...!

  독일에서 전쟁이 채 끝나기 전의 일입니다.  아버지가 취리히에서 청바지를 사
오셨습니다.
  “여기 좀 봐. 뭔가 아주 새로운 거아.  미국에서 온 거지. 이런 바지를 청바지
라고 한단다.”
  나의 첫 청바지!  1945년 내가 처음으로 청바지를 엉덩이 위로  당겨 입자마자 
마치 나의  영혼이 청바지를 입은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사람이라도 
된 듯, 젊고 자유롭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1950년대에 나는  시골로 옮겨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늙지 않은  나는 계속 
청바지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젊고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내 아들이 그 
구식 바지를 입은 날 보면 놀릴 거라는 염려도 되었지만 천만의 말씀!
  나는 이 간편한 청바지를 입고 1968년에  학생운동에 참가했습니다. 그때도 역
시 자유와 젊음을 느꼈지요.
  훗날 50년 뒤에 내 손자가 나의 ‘태고적’ 이 옷차림을 보며 웃을까요? 아니
에요, 확신하건대, 그는  웃지 않을 겁니다. 아마 나의 이  청바지는 어떤 유행이 
아니라, 종교처럼 되어서, 나의 손자 또한 청바지를 입을 것입니다.
  내가 만일 이 다음에 죽는다면, 청바지를 입힌 채 장례를 지낼 것입니다! 그리
고는 비석에 이렇게 새기겠지요.
  “하느님, 그에게 영원한 청바지를 선사해주세요. 그러면 그는 영원히 젊고 자
유롭다고 느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파티

  소크라테스가 심포지움에서 자기 친구들과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2
천 년도 훨씬 전에 그 자리에서는 매우 흥미진진한 주제가 펼쳐졌습니다.
  플라톤이, “그들은 동성애에 대하여  찬양하듯이 이야기했다”라고 진술할 정
도였으니까요
  바로 이러한 심포지움에 대해 물론 다른  보고도 있습니다. 그것은 크세노폰에
게서 나온 말이지요.  소크라테스와 그의 친구들은 그 후에도 뭔가  더욱 흥미로
운 건수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크세노폰은 공공연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여성의 해방에 관해 열광하며 이야기했다.”
아마도 두 가지  다 맞을 것입니다. 그대의 파티는 다음날  아침까지오 계속되었
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그의  친구들이 여성해방과 동성애를  찬양했다는 
예기는 그다지 놀라운 것은 아닙니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다른데 있습니다.  언제나처럼 올여름에도 파티에 초대
받아 가보았더니, 내 친구들이 이 두가지 주제에  대해 아주 격한 감정으로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입니다. 여성해방과 동성애에 대하여 말입니다.
  나는 원칙적으로 두 가지를 다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2천 년이라는 
세월은 말 그대로 2천 년만큼이나 흘러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여성의 해방
이나 동성애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 이상 발전시킨 것은 없습니다.
  내 생각이지만, 2천  년도 더 지난 뒤에 우리의 여름  파티에서는 새로운 주제
를 찾아내야만 할 것 같군요, 예를 들면  아주 예사롭지 안은, 아주 드문, 그럼에
도 불구하고 고귀한 남녀 간의 사랑이야말로 진정 찬양받을 만하지 않나요?

  일본에서 깨달은 것

  나는 일본 어느 마을에 있는 신을 믿습니다.
  야추가타케의 산 길가에  서 있는 이 작은 제단은  한 쌍의 남녀가 축제 때의 
옷차림을 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꽃으로 장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신을 뭐라고 부르는지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메-오토-도-우소진’이라고 
하더군요. ‘한 쌍의 신’ 또는 좀더 자유롭게 번역하면, ‘신에 가까운 한 쌍’
이 되겠네요.

  서양에서는 100년째  서로들 죽어라 치고박으며 싸우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회교도를, 회교도는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서로 싸우는 거죠. 왜냐하면 교황은 신
이 세 사람으로이루어진다고 가르치고, 반면에 마호멧은  신은 단지 한 사람일고 
가르치지요.
  그런데 우리들 중에서 아무도 동양의 그  지혜를 생각해내지 못했습니다. 신이 
하나나 셋이 아니고, 둘이라면 어떨까 하고요.
  자신을 위해 혼자 있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또한 사람들과 어울려 교제를 하
는 것도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곳에서, 그들은 두 가지 경
우를 모두 가지고 잇는 것입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동시에 자신만을 
위해 혼자 마음 편하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참 완벽하지요. 이것이  훨씬 신다운 모습이 아닌가요? 하지만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 꼭일본인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겠죠?

  맘에 드는 거지와 사귀세요

  거지 앞을 지날 때, 그에게 뭔가 조금이라도  주지 않고 그냥 지나치면 당신도 
마음이 좀 꺼림칙하지 않나요? 언젠가 나도 정말 안됐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
습니다.
  서부 아프리카 다카르라는 도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나는 길거리 카페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 늙은 남자가 들어오더니  내게 동냥
을 구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날 아침에는 나는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
게 적선을 했기 때문에, 이 거지의 동냥만은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그 늙은 거지
가 채 가버리기도  전에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인
상 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아프리카 상인은 놀라서 말했습니다.
  “그 거지가 측은한 마음이  들면 왜 아무것도 주지 않았나요? 여기 다카르타
에서는 다들 그렇게 하는데요.”
  그는 계속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 거지들이 많아서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거지 몇  사람을 찾아요. 
그리고는 친구로 만들지요.”

  아프리카의 다카르에서는 모두들  거지와 이렇게 지내고 있고,  그리고 유감스
럽지만 지금 독일의 많은 도시에서도 그렇습니다.
  당신이 모든 거지들에게 뭔가  줄 수는 없습니다. 너무 많으니까요. 그럴 때는 
거지의 얼굴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그가 마음에 들면, 그와 친구가 되십시오.
  그렇게 거지들과 만든  작은 모임은 약간은 돈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만나는 보통 친구들의 모임처럼 그렇게 오래,  많은 돈이 들지는 않을 것
입니다.
  그리고 아마 그들은 당신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될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가장 
믿음직한 친구가 되어줄 것입니다.

  천국에서 가장 위대한 자?

  천국에서 가장 위대한 자가 누구인가?
  당신이 내게 이렇게 묻는다면, 내 대답은 간단합니다.
  천국에서 가장 위대한 자는 지기스버트 신부입니다.
  20년 전에 지기스버트 신부는 독일에서  가장 큰 라인 주에 있는 한 수도원의 
원장이었습니다. 내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수도원 앞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깨 
손수 배를 따며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 이 수도원은 원래 80명의 수사들을 위해  지은 거였는데, 지금 우리는 겨우 
열여덟 명이에요.  나는 이렇게 큰 집을  더 이상 경제적으로 유지해  나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걸  허물고 대지를 팔아서 그 수익금으로 새로  작은 수도원을 
짓고, 나머지로는 수사들 각자를 위해 연금을 만들 생각이에요.”
  두번째 작은  수도원을 지운 후, 나는  다시 지기스버트 신부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여전히 활기 넘쳤지만 수도원  복도는 유령이라도 나올 것처럼 텅 비어 있
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우  다섯 멍이에요. 경제적으로 더 이상 이  집을 이끌어나갈 
수가 없어서 팔려고 내놓았어요.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평범한 연립주택
이랍니다.”

  천국에는 대단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의 몰락을  크게 불
평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큰 개혁을 구상하기도 하지요.
  겸손하고 매우 용감한 몇몇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퇴보를 여유있게 받아들이
고 담담하게 헤쳐나갑니다.
  내 말을 믿으세요. 언젠가 하늘나라에서는, 지기스버트 신부가 가장 위대한 사
람이 될 것입니다.

  공평하게 하는 정의

  브라질에서 보낸 휴가는 짧았지만 참 드라마틱했습니다.  온천이 있는 모로 드 
상 파울로에 미처 도착하지도 않았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복면한 한 젊은이가  놀랍게도 내 앞을 막고 서서 내게  권총을 들이댔습니다. 
그리고는 내 배낭과 돈을 뺏어 가지고서 가버렸습니다.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분노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기
독교인으로서, 브라질에서 겪은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장 알퐁스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가난한 사람이 부자에게서 뭔가 빼앗는 것이 꼭 죄가 되지는 않는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지요.
  “가난한 사람이 가난해지는 만큼 부자는 부유해진다.”

  즉 도둑질이란 ‘유스티티아 콤펜사티바’ 즉 ‘공평하게 하는 정의’를 증명
하는 것입니다. 나를  강탈했던 그 젊은 브라질인은 구걸을 할  만큼 가난했을까
요? 혹은 그의 눈에 내가 큰 부자로 보였을까요?
  공평하게 하는 정의라....
  문제는 오로지, 신학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 경계선이 어디에 있느냐 하
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브라질에서의 불운을 겪은 후 지금은 아주아주 가난하답니다.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그러니까 내일 복면을 한  늙고 불쌍한 한 남자가 당신
의 지갑을 빼앗는 일이  생기더라도, 제발 날 비난하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내가 
아니라 성자 알퐁스니까요. 그가 말한 대로 했을 뿐이니가.
  그리고 그것은 그저 ‘공평을 위한 정의로운’ 행동일 뿐이니까요.

  아름다운 자연으로 떠나는 여행

  휴가철이 되면 우리는 모두 원시적인 장소를  찾습니다. 나도 3주 동안이나 휴
대용 보트를 타고 포이티어의 늪지대를 횡단했습니다.  그곳은 프랑스 서쪽에 있
는 아주 원시적인 강과 늪지대이지요.
  가끔씩 두 사람이  벌린 팔길이보다 좁은 곳도 나타납니다. 나는  마법에 걸린 
것 같은 수로 위를 떠가다 며칠 뒤에 깊고 깊은 늪지에 있는 한 어부의 집에 이
르렀습니다. 듣기로는,  그 근처에 회색 왜가리가  많이 서식하며 보금자리를 튼 
곳이 있다던데....
  흰 페인트를 칠한  집 앞 작은 뜰에서 늙은  부인 한 사람이 일하고 있었습니
다. 그녀가 입고 있는 폭이 넓은 검정색 치마와, 펑퍼짐한 얼굴에서 생기있게 반
짝이는 검은 눈 때문인지 그  프랑스 여인은 마치 발자크의 초기 소설에 나오는 
인물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보트를 기슭에 대놓고 왜가리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저, 실례합니다. 왜가리는 어디로 가야 볼 수 있나요?”
  “저쪽으로 가세요. 걸어서 가는 게 나아요. 5분밖에  안 걸릴 거예요. 바로 우
리 집 뒤에서 오솔길이 시작되지요.”
  그녀는 이렇게 말한 뒤 웃으면서 한마디 더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왜가리들은 무척 아름다울 거예요. 텔레비전에서 보았거든요.”

  차라리 하와이로 가!

  나는 내가 사는 이 작은  집이 가장 소박하고 검소한 안식처가 되었으면 하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인터넷까지 연결한 집이 되었습니다.
  내 컴퓨터에 모뎀을 설치했던 침착해 보이는 젊은이가 뻐기면서 물었습니다.
  “자,  가장 먼저 어디로 바람을 쐬고 싶나요? 제가 도와드리죠.”
  “어디로? 물론 바티칸이지.”
  “그건 아주 간단해요”
  젊은이는 이렇게 대답하며 ‘vatican.va/'이라고 입력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
급하게 마우스를 몇번 눌러댔습니다.
  조용해졌습니다. 잠시 동안  화면 위에 진행중이니 기다리라는  뜻의 ‘모레시
계’그림이 나타났습니다.
  “바티칸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중이에요. 좀더 기다려야만 해요”
  침착한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침착하게 기다렸습니다.  14분 동안이나. 그리고 나서 마침내,  화면 왼
쪽에 바티칸의 노란  깃발이 보이고, 계속 기다려  6분 뒤에, 메뉴를 선택하라는 
표시가 나왔습니다.
  바티칸의 ‘언론 서비스’와  ‘교황님의 개인적인 알림방’중에서 나는 당연
히 알림방을 골랐습니다. 젊은이는 딸깍 마우스를 눌렀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그ㄸㅒ 다시 모래시계가 보였습니다. 22분 
동안 모래시계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이쯤 되니 그 젊은이도  더 이상 
침착한 태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난 지금 가야겠어요.”

  친애하는 여러분,  내 말을 믿고 브라질  리오로 가보세요. 그도  아니면, 홍콩 
앞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을  느끼시든가, 아니면 차라리 하와이로  먼저 접속하세
요.
  그러나 처음부터 바티칸 같은 곳으로는 절대  시도하지 마세요. 교황님과의 신
성한 만남은 지독히 초만원이랍니다.

  전문가의 행운

  일요일이나 공휴일이면 나는 옛 친구들과 만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이번에
는 롤랑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그는 보덴(독일과 스위스 사이에 있는 호수) 호숫
가에 있는 관절염 전문 병원의 의사이지요.
  그는 우리를  지하실로 안내하여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는 포도주  병이 가득 
들어차 있었습니다. 그는 병들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전부 다 환잗르이 고맙다고 선물로 준 것들이야!”
  그리고는 조용히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우리끼리니까 말이지만, 너희가  관절염이 어떤 병이냐고 묻는다면, 수십 년
이 지나도 난 몰라.”
  그러자 곁에 있던  친구 알버트가 헉기침을 했습니다. 그는 현재  바슬러에 있
는 어떤 민간은행의 투자고문으로 있습니다. 거기서는  요즘도 손님이 오면 악수
를 하며 정중히 맞이합니다. 알버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끼리니까 말하는데, 내일  증권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한테 물어
보지 마.”
  나도 빠질 수 있나요? 나는 이렇게 당당하게 마래ㅎㅆ습니다.
  “나는, 나는 설교자가 되었어. 아침의 설교자. 하지만 우리끼리니까 말하는데, 
너희들이 내게 묻는다면, 나도 몰라, 신이 도대체 뭔지....”
  그러나 더 이상은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롤랑은 샤토 페트루스 포도주 한병을 따는 데 성공했습니다.
  “내게 특별히 고마워하는 환자가 준 거지.”
  그는 잔을 들면서 말했습니다.
  그의 목구명으로 샤토 페트루스 포도주 방울이 흘러 들어가는 동안 우리 세명 
모두 찡하며 느껴지는 게 있었습니다.
  윌는 인생에서 뭔가를 해냈습니다. 그리고 각자 자기의 특수한 분야에서, 전문
가로서 두말할 여지없이 인정을 받았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문가의 걱정

  라인강 가에 있는  도시, 본 근교에 작고  아름다운 교회 하나가 서 있습니다. 
성 에버기스루스 교회입니다.
  나는 그 교회안에 있는 진열상자 앞에서 서성거리며 교회의 풍부한 종교 프로
그램에 대해 기쁨을  느낍니다. 요즘은 교회 프로그램에도 어느 정도는  아주 현
실적인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성 에버기스루스  교회에서는 즐거운  저녁시간을 위해서,  아름다은 새  영화 
<성직자>를 감상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이런 것은 사실 당연한 발상입니다만, 교인들이 <성직자>라는 영화를  보듯이, 
저녁에 알프스 산 위에서 알프스 사람들은 재미삼아 <알프스 호른>이라는 영화
를 봅니다. 혹은 도둑들이  한밤중에 금방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감방>이라는 
영화를 보듯이, 이런 것은 늘 우리 주변에 가깝게 놓여 있는 것들이지요.
  그러나 뭔가 다른  일이 나를 매우 혼동스럽게  했습니다. <성직자>를 상영하
면서 성 에버기스루스  교회는 영화 평론가, 여성 사회학자와  심리치료사 1명씩 
모두 3명의 전문가를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렇게 좋은  영화를 두고 
세 전문가들은 서로 죽어라도 지껄여대는 것입니다.
  다음에 또  이 교회에서 영화감상의  밤을 ㅐㄱ최해야 한다면,  이번에는 다른 
좀더 유익한 영화인 <교황>을 상영해야 할 것입니다.
  내 생각이지만 그렇게 해서  영화 평론가와 여성 사회학자를 초대하는 수고를 
덜어야만 합니다. 이런  주제라면 혼자서도 전문가가 되고, 훌륭한 김리치료사가 
될 수 있으니까요.
(알프스 호른: 양치는 목자가 부는 3~4m의 긴 나무로 만든 피리.

  문명인과 야만인의 차이

  일본의 사원에는  십자가 위의 예수상이  없습니다. 제단 위에는  태양 여신을 
상징하는 희고 둥근 면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하루종일 이 오래된 상징 앞
에 서서 대단한 경외심을 가지고 허리를 굽힙니다.
  그렇지만 일본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태양  여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것, 바로 그것 때문에  오히려 일본인들은 오래된 종교적 상
징을 존경심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그와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오래된  믿음이 옅
어질수록, 더욱더  그 상징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았나요?  키스하는 수녀의 
사진을 광고에 써먹는 이탈리아 제 스웨터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잖아요.
  또 퀼른의 한 예술품 가게  진열장에 있는 그림에는 음탕기가 줄줄 흐르는 한 
수녀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허리에 걸친 그 빈약한 천가리개를 움켜쥐고 있
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퀼른의 한 음식점에는  예수의 심장을 그린  그림을 화장실 
입구에 걸어두었고, 손님들은 그걸 우스워 죽겠다는 듯 쳐다봅니다.
  드디어 독일의 모든 학교에 십자가를 내걸어야 할  때가 온 것 같군요. 학생들
이 기독교 신앙이 지배하는 나라를 믿도록 말입니다. 일본처럼, 우리에게도 믿음
이 있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바로 이걸  배워야만 합니
다.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경외심을 갖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와  야만의 차이입니다. 교양있는 사람은, 오래되어 변두리로 
밀려난 것들까지도 존중합니다.  그러나 야만인은 심술궂게 웃으며  그것을 무시
하고 던져버리지요.

  똑똑한 두 살짜리에게 선거권을 주라

  독일 빌레펠트 시의 청소년 연구가로 유명한 클라우스후렐만은 지금보다도 훨
씬 낮은 연령부터 선거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열여섯 살이 아니라, 열
두 살 때부터 선거권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후렐만 교수는 이렇게 확신합니다.
  “열두 살이면 벌써  그들의 지적인 판단력은 아주 넓게 발달해  있습니다. 또
한 열두 살 정도 되면 이미 `사회 전체의 대중매체와  소비영역으로 연결되는 자
기 나름의 통로`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왜 열두 살짜리라고 선거를 할 수 없
겠습니까?”
  나는 자랑스런 할아버지로서 후렐만  교수의 요구를 아주 힘있게 후원하고 싶
습니다.
  그래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내게 전혀 먼 얘기는 아닙니다. `모든 대중매
체와 소비영역으로의 통로`는 열두 살 짜리라야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 친척 중에는 다섯 살짜리 꼬마도 있습니다.  그들이라고 왜 선거를 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뿐입니까? 그새 두 살짜리도, 장차 모범적인 선거인이 되는 `지적
인 성장`의 첫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내 귀여운 두 살짜리 손자는  텔레비전에 헬무트 콜 수상이 나오면 척 알아보
는걸요. 꽤나 기쁜 듯이 그 작은 팔을 앞으로 내뻗고는 신이 나서 “아빠!”하고 
부른답니다.

  참회의 침묵

  5월 8일이 다가올  때면 나는 오싹 소름이 돋습니다. 거드름부리는  사람들 때
문이지요. 이날은 국가가 정치적으로 해명하고, 책임과 속죄를 천명한 끔찍한 날
입니다.
  교황에게 제발 도와달라고 간청하고 싶을 정도로 혐오스런 날입니다.
  거룩한 교황이시여, 제발  미사를 집전하시고 5월 8일 전 독일에  널리 참회의 
침묵을 덮으소서. 나이든  사람들에게 참회의 침묵을, 젊은이들에게도 참회의 침
묵을 주소서.

  민주주의에 대해 다  안다는 듯이 잰 체하는 젊은이들, 그리고  책임과 속죄에 
대해 뭔가  깨닫고 있는 나이든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보다는  훨씬 비슷합니다. 
양쪽 다 거드름부리는 데는 참을 수 없는 버릇을 가지고 있죠.
  누가 더 잘 아는가는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법정에 선 피고인이 
자기의 죄가 무언지 아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이날은 거드름부리는  것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연
설이라고 하는 것이 늘 독재의 희생자를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희생자들
은 5월 8일에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두컴컴한  무덤 속에서도 
영원히 침묵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무덤조차 없을 테지요. 하지만 
만일 그들이 말할 수 있다면, 분명히 도와달라고 외칠 것입니다.
  거룩한 신이시여, 산  자들이 거드름부리는 것을 끝장내시고,  5월 8일, 이날만
큼은 독일이 `참회의 침묵`을 지키도록 하소서.
- 참고. 5월 8일은 독일이 2차대전에서 패망한 날이다.

  아프리카에서 깨달은 것

  아프리카 대륙 깊숙한 곳, 보보-디울라소에 있는 마을에서  나는 빵 굽는 사람
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내게 자기 아내를 소개하였습니다. 그녀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녀와 반  년 전에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벌써  두번째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어요.”
  나는 깜짝 몰라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려고 합니까? 여기 이 부인도 너무 아름다운데요.”
  그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아내가 여섯이나 되었어요.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지만 아
내를 하나만  두는 것도 좋지는 않아요.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거든요. 혼자 
있는 여자는, 말하자면 문제가 있는 여자예요.  따라서 `1부 2처 시스템`이야말로 
그와는 반대로 현대적이고, 진보적이며 심리적으로도 건강하지요.”
  나는 그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며, 세상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만큼 현
대적이고 진보적이며 정신적으로  건강해지기를 원하면서도 어쩜 이다지도 퇴보
적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나라는 왜 이렇게 지루하죠?

  벨기에의 뤼티히 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나는 죽어가는 한 늙은 부인의  침대 곁에 서서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했습니
다.
  “이제 당신은 곧 하늘나라에 있게 될 겁니다.”
  노부인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습니다.
  “하늘나라는 지루하지 않을까요?”
  그녀는 이렇게 묻고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빨리  죽은 것은 유감이었습니다. 어떻게든  그녀한테서 하늘나
라가 왜 지루한지 알아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하늘에서는 왜 지루할까요.  그것은, 하늘에는 순수한 평화  밖에 없다는, 현대
인들의 착각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옛날 사람들은 아주 딴판으로 상상했습니다. 중세  때는 천사장 미가엘이 루시
퍼와 그의  무리들을 상대하여 폭력적인  싸움을 시작할 때면,  하늘에서는 뭔가 
일이 터진다고 상상했습니다.  또한 구약에서도 천사들이 열정적으로  서로 싸우
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구약의 (다니엘 서)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천사는 30일 간이나 유태인의 천사와 싸웠다.”
  또 헤라클레이토스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싸움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다.”
  싸움이 없는 곳은 지루함이 말도 못할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도 온통 
싸움이 벌어지길 바라는  거죠. 그 늙은 벨기에 여인이 죽음을  맞이하는 침대곁
에서 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녀에게 영원한 고요함을  허락하지 마시고, 천사의 전투장에서  싸우기 좋
은 높은 자리를 주시옵소서.”

  천사의 노래

  나는 신을  의시한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천사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내 주위에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어요. 나한테는 오래도
록 풀리지 않는 신비한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천사들은 어떻게 노래할
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친구들은 내게  바흐의 (솔로-소나타)를 새롭게 해석한 레코드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기대와 흥분에 떨며 나는 그 판을 틀었습니다. 그러나 15분도 채 지
나지 않아서 실망하며 꺼버렸습니다.
  나를 언짢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바흐를 듣고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직 연주자이  해석만 들
었을 뿐입니다. 그는  나와 클래식 작품 사이에다 괴로운 강요를  밀어넣었던 겁
니다. 오직 뭔가 대단하고 중요한 체하는 서투른 솜씨만 들린 것입니다.
  바로 그때 나는  천사가 어떻게 노래하는지 알았습니다. 천사들은 신  그 자신
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동안에 한 번도 듣지  못할 너무나 아름
다운 노래를 말입니다.

  과거의 우물은 깊다.

  아프리카 대륙 깊숙한 곳, 오와가도우고우 교외에서  나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
습니다. 어둡고 조그마한 광장을 건너려고 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내 앞에 뻥 뚫
린 구멍이 나타났습니다. 평평한 땅에 있는  우물인데, 테두리도 없고, 적어도 10
미터는 될 만큼 깊었습니다.
  “하느님 맙소사, 왜 우물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만들지 않았나요?”
  나는 그 옆에 웅크리고 앉아 이쓴 늙은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우리 우물은 테두리가 필요 없어요. 여기, 내가 파는 이런 부적을 갖고 있으
면 절대 우물 속으로 떨어지지 않지요. 모두들 이 부적을 사요.”
  그러고서 배에 두른 작은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목걸이를 꺼내 건네는 것이었
습니다. 그 부적은 500원도 되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에  이 늙은 남자는 엉뚱한  곳에서 태어난 것 같았습니다.  그가 만일 
우리가 사는 유럽 같은 데서  태어났더라면 훨씬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을 텐
데. 분명히 지방관리, 대통령이나 주교, 또는 대주교는 되어 있을 텐데 말이지요.
  누가 아니까, 교황님까지 될 수 있을지요.

  세계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현기증에 대하여

  아내에게 아주 작고  예쁜 성물함을 선물했습니다. 상자를 열면 빌로드  천 위
에 기도하는 성 프란체스코의 조각이 금빛으로 반짝이는 것입니다.
  쾰른의 로마탑 옆에 있는 한 골동품 가게에서 바로크 시대의 성물함을 발견하
고는 그 자리에서  샀습니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가게 주인에게 농담  삼아 물어
보았습니다.
  “이거 진짜예요?”
  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주 친절했던 주인 여자가 갑자기 차갑고 딱딱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진짜냐구요?”
  그녀는 싸움이라도 할 듯이 되물었습니다.
  “카톨릭 교회에 그렇게 골치 아픈  일들이 많은데 무슨 수로 진짜가 있을 수 
있겠어요?”
  그녀의 뜻밖의 말에 나는 주저하면서 대답했습니다.
  “내가 만약 골동품 가게  주인이라면 같은 직업동료에 관해 그렇게 깍아내리
는 말은 하지 않겠네요.”
  그녀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자 나는 덧붙
여 말했습니다.
  “교회는 골동품 가게나 같습니다. 물론 카톨릭  교회의 몇가지 점들이 비난받
을 만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내가 아는 모든 골동품 상인들  중에서는 교회야말
로 가장 엄숙합니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무

  아브라함 아 상타  클라라가 황궁 앞에서 설교할 때였습니다. 그는  단상에 올
라가서, 성경책을 펴고는  아무데나 한구절에 손가락을 갖다댔습니다. 전에는 알
지도 못했던 이구절을 가지고 클라라는 원고도 없이 즉흥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시기와  부러움을 살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곤 했
습니다. 사람들은 클라라가 즉석에서 설교하는 게  아니라 성경구절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들 했습니다.
  어느 일요일, 사람들은  황제의 농가 앞에서 그를 테스트하고 창피를  주기 위
해 성경을 감추어버렸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클라라는 단상 위로 올라갔습니다. 
성경이 보이지 않자, 그는 잠시 당황하였지만 곧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기 나의  성경이 놓여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습니
다!... 이처럼 신은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한 시간 내내  클라라는 무에 대해 즉흥설교를 했습니다. 황후는  그에게서 눈
길을 전혀 떼지 못한  채 푹 빠져 있었습니다. 또한 황제  레오폴트는 그토록 흥
분되는 연설은 아직 한번도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평판 나쁜 목사는  실력 없는 신무기자와 같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문
장 하나하나는 하나같이 중요한 것들로 꽉 차  있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납덩이
처럼 무겁습니다.
  그러나 신은 다릅니다.  그는 아주 가벼운 환상놀이를 하듯이 무로부터  이 세
상을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것은, 독일에 있는 교회에서는 늘 `무`에 관한 거룩하고
도 자유로운 설교를 들을 수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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