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콘서트
만프레트 뤼츠 지음 / 더봄
이 책은 교양인이 알아야 할 기독교 2천 년 스캔들과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선
입견 없이 학문이라는 수술용 칼을 들고 스캔들로 점철된 기독교사를 해부하는데, 독자들
은 십자군 전쟁, 종교 재판 등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통해서는 깨달음과 통
찰을 얻고, 또 교황의 무류성, 여성과 교회 등의 주제에 대한 최신 학문적 성과도 읽을 수
있다.
기독교 콘서트
만프레트 뤼츠 지음
▣ 저자 만프레트 뤼츠
1954년생. 의학 박사이자 신학 학위 보유자로, 정신 의학, 심리 치료 전문의이자 신학자다. 현재 독일
쾰른 소재 성 알렉시오 병원의 수석 의사로 재직 중이다. 그는 강연자, 라디오, 텔레비전 출연자로 유
명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독일 최고의 대중 교양 분야 작가로, 수많은 베스트셀러의 저자로 명성이 높
다. 저서 중에서 『신-가장 위대한 존재의 짤막한 역사』는 코리네 국제문학상을 탔으며, 최근작으로
『필연적으로 행복해지는 법』이 있다. 그의 저서는 전 세계 12개 언어로 번역되어 200만 부 이상이
팔렸다.
▣ Short Summary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 기독교 교회사, 기독교 자체를 불쾌하다고 생각한다. 참고
로 지식인들의 논쟁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가 기독교를 믿는다고 신앙 고백을 하거나 기독교를 지지하
면, 대개 입 밖으로 표현을 잘 하지는 않지만, 그 사람과는 논쟁할 가치도 없다고 여긴다. 이는 현실의
기독교가 인류 문화 전반에 영향력을 끼치던 시절은 끝났다는 의미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독교가 치명타를 입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자체는 2천
년 동안 광범위하게 신용을 잃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독교 역사가 스캔들의 역사라는 것은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한 사실이 됐는데, 이러한 사실은 실제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뒤흔들고 있다.
한편 2000년 3월 1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순절 첫째 주일 미사를 집전하며 교회가 지은 죄를
고해하고, 다음과 같이 용서를 구했다. “다시는 사랑과 진리에의 봉사에 모순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 주소
서. 다시는 교회 공동체에 대적하는 몸짓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 주소서. 다시는 어느 민족에게도 상처를
입히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 주소서. 다시는 폭력의 논리를 또 수용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소서. 다
시는 가난한 이와 낮은 이를 차별하고 배제하고 억압하고 무시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소서.”
20세기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자백하면서 무너졌다. 반면 기독교는 자비로운 신의
은총으로 새로운 희망을 끌어냈다.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자각하고, 지은 죄를 확실히 세상에 고해했
다. 5백 년 전 루터가 지은 죄와 나란히, 새천년으로 들어서는 전환기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 고
해와 나란히. 기독교인은 신이 이 2천 년 기독교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만들었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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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콘서트
이 책은 교양인이 알아야 할 기독교 2천 년 스캔들과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일체의 선입견
없이 학문이라는 수술용 칼을 들고 스캔들로 점철된 기독교사를 철저히 해부하는데, 독자들은 십자군
전쟁, 종교 재판, 마녀사냥 등에 대한 최신 연구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통해서는 깨달음과 통찰을
얻고, 또 교황의 무류성, 여성과 교회 등의 주제에 대한 최신 학문적 성과도 읽을 수 있다.
▣ 차례
저자의 말 / 들어가는 말
1장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 유일신교는 인류의 위협인가? : 유일신교의 출현 / 세계 사회는 어떻
게 발명되었는가 / 이슬람교는 왜 논리적으로 가장 관대할까
2장 기원후 천 년 - 사랑의 종교가 폭력과 마주하다 : 쭉정이는 어디로? 비유가 종교사를 바꾸다 / 기
독교의 비폭력과 국가 폭력 / 야만인을 개화시키다 - 기독교와 게르만족 / 유럽의 본보기로 작센족을
학살한 카를 대제 / 여교황 요한나와 세상의 종말
3장 중세와 성전(聖戰) - 새로운 인간의 발명부터 기형아의 최후까지 : 서양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
약삭빠른 여우와 우물쭈물하는 목동 / 신은 진정 유대인 살해와 학살을 원했는가? / 유럽 연합과 십자
군, 그리고 터키
4장 원죄 - 중세 이교도 박해와 마침내 등장한 보르자 가문 : 왕이 백성을 화형시키다 / 종교 재판의
진실 / 『장미의 이름』에 대한 팩트 체크 /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스페인 보르자 가문
5장 종교 재판 - 오래된 문제, 새로운 해결책 : 마르틴 루터와 면죄부 / 검은 전설과 스페인 종교 재
판(1484~1834)의 진실 / 로마 종교 재판(1542~1816)과 그 희생자 / 가톨릭 신자와 프로테스탄트의
경쟁
6장 마녀사냥에 대한 놀라운 사실 - 사법 기관이 저지른 역사상 가장 커다란 오판 : 마녀사냥에 대한
다양한 견해 / 중세의 마녀가 있다는 믿음 / 근대의 마녀가 있다는 믿음 / 마녀 박해의 종말
7장 아메리카 인디언 선교의 전설 - 무엇을 알고 있으며, 무엇을 알아야 할까 : 선교와 인간 제물 문
제 / 선교에 효과적인 사상 - 자연법, 인권, 국제법 / 프로테스탄트 선교와 가톨릭 선교 / 거대한 침묵
- 잊힌 인디오 옹호자
8장 계몽주의 - 인권은 실제로 어디에서 비롯됐으며, 누가 노예를 해방시켰을까? : 기독교 종파 간의
싸움과 계몽주의 / 하느님의 형상 - ‘인권의 계보학’에 대하여 / 노예 제도의 폐지와 인권 / 계몽주의의
그림자 - 혁명의 희생자들
9장 19세기 교회 - 대랑 학살 이후의 기독교 : 교황 또한 인간일 뿐 / 가톨릭 신자는 교황의 말씀대로
따르지 않는다 / 교황 무류성 - 자유주의적 교의인가? / 기독교인이 카를 마스크를 따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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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20세기 교회 - 기독교인과 국가 사회주의, 원죄와 안락사, 교회와 유대인 : 민주주의의 길에 들
어선 기독교인 / 기독교인과 저항 세력 / 나치가 원죄를 증오한 이유 / 홀로코스트에 직면하다 / 새로
운 시작과 ‘제2차 교황 혁명’
11장 현재도 진행 중인 논쟁들 - 항상 알고 싶었지만 감히 묻기는 두려웠던, 기독교에 관한 모든 것 :
여성 해방과 여성 성직자 / 교회, 독신, 섹스 - 엄청난 오해에 대하여 / 기독교와 아동 성범죄
12장 21세기 교회 - 기독교의 위기와 난민 : 면죄(免罪) - 저항과 이성의 칼날 / 희생자를 위해 희생
을 치른다
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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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프레트 뤼츠 지음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 유일신교는 인류의 위협인가?
신은 위대하다! 오늘날 세상에서는 어디선가 이러한 외침이 들리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몸을 피한다.
사람들은 종교란 말을 들으면 폭력, 배타주의, 몰상식을 떠올린다. 평화를 사랑하는 상당수 무슬림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기독교 신자는 기독교에도 폭력의 역사가 있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인도에서 힌두교도들이 이슬람 사원에 불을 지르고, 미
얀마에서는 불교도들이 무슬림 자국민을 모조리 절멸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결국 종교를 완
전히 배제하고 사랑과 평화를 추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20세기에 이러한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3명의 독재자인
이오시프 스탈린(Josef Stalin),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마오쩌둥(毛澤東)은 공통적으로 무신론 이
데올로기를 신봉했는데, 그들의 국가에서 약 1억 6천5백만 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2천 년 전 인류
전체 수가 이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대한 회의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유일신교의 출현
고대 이집트를 연구하는 고고학자 얀 아스만은 유일신만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
는 논제를 발표해 세계적으로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이 오로지 자기들만 진실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고약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한편 철학자 오도 마르쿠아르트는
다신교를 열렬히 찬양한 바 있다. 왜냐하면 다신교 신자는 여러 신 중에서 자신이 섬길 신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으며, 다른 신을 믿는 이들을 죽이는 일은 없기 때문이란다.
한편으로는 납득이 될 만한 주장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론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과학이 추악한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이 멋진 이론을 없애 버릴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기반
으로 삼아, 오늘날 역사학은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그 민족만 섬기는 신들로 이
루어진 민족 신화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권리, 특히 생존권이 전적으로 자기 민족에게만 있으며 다른 민족에게는 없다고 여기는 바람에, 다
른 민족을 상대로 벌이는 무자비하고 잔혹한 전쟁이 일상다반사로 일어났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에게
살인과 살육은 전혀 살인과 살육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기 민족에 소속되어 있으면 다른 사람
과 이 민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데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대략 기원전 1300년에 어떤 민족에 속하는 어떤 사람들이 위태
롭고 막연하게 유일신을 믿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유일신의 정체는 점점 명확하게 드러났다.
즉 이 유일신은 온 세상을, 온 민족을, 온 인류를 창조했다. 이것은 혁명적이었다! 각각의 종족이 섬기
는 신들은 자기 부족만 관장하는 존재일 뿐이었고, 이 신들은 자신을 섬기는 민족이 치르는 유혈이 낭
자한 대전투에서, 자신의 시각에서는 허약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상대방 민족의 신들에게 분노를 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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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싸우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모두를 위한 신이 등장한 것이다!
여기에 담긴 의미는 겉보기보다 훨씬 더 많았다. 즉 이제 사람들은 이 유일신을 신심의 차원은 물론
이성적 차원으로도 믿었거나, 아니면 아예 믿지 않았다. 또한 사람들은 신의 말씀에 기꺼이 귀를 기울
였거나, 아니면 전혀 경청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내면적인 것, 심리적인 것, 그러니까 정신적인 것
이었다. 그리고 이는 개인적인 것이었다. 참고로 얀 아스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은 “공생하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해방되고, 세상 밖에 있지만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유일신과
파트너 관계를 맺어 자주적이거나 또는 신의 지배를 받는 개인으로 발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더 이상 단순히 외적 의식을 통해 부족의 영원한 질서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복수심에
찬 신들의 욕구를 진정시키기 위해 희생 제물, 심지어 사람을 희생시키는 제도를 유지하지 않았다.
욕구가 없고 초월적인 유일신은 개인적이고, 자유로우며, 윤리적인 판단을 인간에게 요구했다. 신은
내면적인 것을 요구했다. 결국 시대는 이러한 신들의 법정에 서게 됐다. 이후 인간은 오로지 홀로, 단
독으로, 신 앞에 섰다. 이제부터는 인간보다 신에게 더 복종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의 그런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명백해져서, 인간은 자유로웠고, 자유롭게 판단했고, 자신이 내린 판
단이나 대답에 책임을 져야 했다. 여기서 대답이란 신의 심판도 감수한다는 의미에서의 대답이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은 종교의 자유라고는 전혀 모르던 부족 종교라는 감옥에서 탈출했고, 관용을 배워
야 했다. 신 자신은 오로지 내면적인 복종만 바라서, 강요된 복종은 전부 의미가 없게 됐다. 자유롭게
신앙을 갖는 유일신교이기 때문에, 유일신교의 기원은 오늘날 인간의 자유와 자율로 이해할 수 있는
성향을 보인다. 그런데 당연히 이 모든 것은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게 아니라, 수 세기 동안 발전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스라엘 예언자들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다신교에서 해방되어 외부
종교 유형과는 거리를 둔 채 이와 같은 발전을 촉진시켰다. - 얀 아스만이 말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에
서는 ‘마음의 문화’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영혼의 문화’로 향했다.
세계 사회는 어떻게 발명되었는가
유일신교를 통해, 하나뿐인 신 앞에 자유로울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시각도 등장했다. 십
계명 중 제6계명인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같은 부족 사람을 살해하지 말라는 것뿐만 아니라, 결국
에는 인간을 죽이지 말라는 보편적인 의미로 해석됐다. 첫 번째로 이 유일신을 상대로 인류라든가 세
계사에 대해 말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우선 이를 지나칠 정도로 분명하게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된 민족뿐만 아니라 모든 민
족에 기독교 교리를 전파할 신자들을 보냈다. 그리고 결국 유대인인 베드로도 이를 깨닫는다. “베드로
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
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사도행전 10장 34~35
절) 기독교는 모든 민족이 평등한 권리를 행사하도록 했다.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이 단언하기를, 세
계 종교는 “말하자면 세계 사회를 미리 구현한다.”
예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예수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요구했다. 원수 죽이기를 포기할 뿐
만 아니라 심지어 사랑하라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세상 물정에 어두운, 정신 나간 도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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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전에는 친척, 씨족, 부족, 인종을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여긴 반면, 기독교는
사람들을 어떤 민족이냐에 상관없이 완전히 동등하게 교회로 불러 모았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는
더 이상 선택된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바로 선택된 민족이고, 이
는 모든 민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독교는 처음부터 사람들이 사는 세상 전체를, 또는 오늘날 쓰는 용어로는 글로벌화를 목표로
삼았다. 아울러 유일신교에는 또 다른 기원이 싹을 틔우고 있다. 선사 시대 우주론적인 종교에서는 일
상적으로 남성은 태양, 여성은 달과 일치시켰다. 이로 인해 여성은 항상 남성을 반영하는 존재일 뿐이
며 절대 동등한 권리를 얻지 못했다. 이와 반대로 유일신교는 남성과 여성 모두 똑같이 인간의 품위를
누린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예를 들어 결혼에 대한 개념도 바꾸었는데, 이제 결혼은 점차 동반
자 관계에 합의하는 형태가 되었다.
세계사의 전개 과정을 보면 자유, 평등, 인간의 품위는 유일신교를 통해 비로소 실현됐다. 근대 법치
국가는 이러한 정신적 토대를 바탕으로 한다. 근대 법치 국가는 시민의 내적 동의를 기반으로 법과 정
의를 열렬히 추구하며, 이에 따라 폭력의 감소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유일신교는 혁신적, 혁명적이
었던 반면, 부족 종교는 기존 관계가 옳다고 계속 고집했다.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신의 심판은 억압받
는 자, 약자, 인생의 희생자를 위한 희망이었고, 신의 정의가 마침내 성취될 거라는 희망이었다.
이 모든 것은 유일신교가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제대로 고려할 수 있다. 얀 아스만은
인간이 자기만이 진실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으면 유혹에 빠진 것이라고 했는데, 그의 말이 확실히 맞
다. 그리고 유일신을 믿는 종교의 광신도들의 경우, 이론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비관용과 과도한 폭력
을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은, 역사적으로 보면 대안, 즉 유일신교가 없는 세상이 훨씬 평화적이
고 인간다웠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결과는 최근에 이루어진 학문 연구에서 명확하게 나
온다. 즉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결론이다!
심지어 얀 아스만도 원래 주장했던 논제를 2015년에 수정했는데, 그는 결국 유일신교의 전환기에는
“과도한 폭력과 유혈 사태가 뚜렷하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전의 부족 종교도 똑같은 현상이 있었으
며 이러한 폭력 형태 중 상당수는 “유일신교 세력이 신장되는 변화 과정에서, 유일신교에 의해 억제되
고 교화되고 근절되었다.”고 옹호했다. 그래서 얀 아스만이 결국 다음과 같이 요약하는 상황은 전혀
놀랍지 않다. “유일신교가 세상에 폭력을 몰고 왔다고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와 반대로 유일신교
는 살인을 금지하고, 사람을 희생물로 삼는 것과 억압을 혐오하고, 하나뿐인 신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옹호하고, 이 세상에서 폭력적인 행위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중세와 성전(聖戰) - 새로운 인간의 발명부터 기형아의 최후까지
유럽 연합과 십자군, 그리고 터키
십자군 전쟁은 엄청나게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 수천 년 동안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로 두드러진 면모
를 보였다. 전쟁을 저지할 수 없는 곳에서도, 기독교는 전쟁을 막고 호전적인 정신 상태를 약화시키려
고 애썼다. 비잔틴 제국은 여전히 그렇게 했다. 하지만 이제 서양 기독교의 최고위 대표자가 무기를
들라고 호소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성전(聖戰)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십자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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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언자 무하마드가 무슬림에게 명령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성전이었을까?
이슬람학자 틸만 나겔은 이슬람에서의 성전은 ‘이슬람 영역을 인간이 사는 세계 전체로 확장한다는,
모든 인류사의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이슬람 성전은 맨 처음에는 내부 투쟁이
전개되지만, 이후 추가로 ‘이교도에 맞선 전쟁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게 된다. 하지만 버
나드 루이스는 예언자의 시대 이후 지하드라는 개념이 주로 군사적인 의미로 사용된다고 보고, 한스
큉은 이슬람은 “시작과 유래부터 군사적인, 신의 전사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 이러한 관점에서 초
기 기독교보다는 초기 유대교 및 그들이 내세운 ‘여호와의 전쟁’에 훨씬 가깝다.”고 설명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기독교는 항상 평화의 종교였으며, 성전이라고는 전혀 몰랐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라고 촉구하자 기독교 비판가들, 특히 교회법학자들은 반대했으며, “사라센인(중세 유럽인이 서
아시아의 이슬람교도를 부르던 호칭)이 기독교인과 평화롭게 살면 공격받거나 살해당해서는 안 된다.”
는 견해를 보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학자 벤야민 Z. 케다르는 기독교 진영이 일반적으로 이슬람을
증오한다고 추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특히 교회가 전쟁에 대해 적대적인 견해를 보였다.
1139년에 실시된 제2차 라테란 공의회는 ‘석궁술과 궁술이라는 치명적이면서 신의 미움을 사는 전쟁
기술’을 비난했다. 훗날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대략 1467~1536)는 자신이 보기에 전쟁은 ‘모든 재앙
이 모인 거대한 바다’라고 했다. 그리고 에라스무스는 기독교가 평화주의를 지켜 나가도록 다음과 같
이 요구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리는 사람은 언제나 평화도 알린다. 당신은 검으로 형제의 심
장을 찌르면서, 입으로는 공동체의 아버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외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당시 기독교도는 진공 공간에서 살지 않았다. 현대 국제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
신의 법을 옹호할 수 있어야 했다. 교회도, 교황도 그래야 했다. 5세기에 교황 레오 1세는 훈족을 되돌
려 보냈고, 150년 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호전적인 랑고바르드족을 방어했다. 이후 교황은 피핀의
기증(756년 프랑크 왕 피핀 3세가 교황에게 자신이 점령한 옛 라벤나 총독부 지역을 기증한 사건) 덕
분에 세속 권력으로부터 자주성을 확보하기는 했다. 피핀의 기증으로 교황은 자신의 영토를 소유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 평화의 종교인 기독교의 대표자인 교황은 실제로 호전적인 분쟁이 일어나는 상황에 말
려들었다. 846년 아라비아인들이 바다를 건너와 로마를 파괴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을 약탈하자, 교황
레오 4세는 극도의 노력을 기울여 결국 적을 퇴각시켰다. 당연히 군사적 노력을 통해서였다. 이 시기
에는 불가피하게 치러야 할 자유의 대가였다. 심지어 교황이라도 말이다.
기독교도의 평화에 대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서 비롯됐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인간의 천성
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에서도 기인한다. 그래서 라둘푸스 니제르는 제3차 십자군 원정이 단행되자,
“무슬림의 천성은 우리와 똑같다.”라고 상기시켰다. 그리고 이교도도 우리와 대체로 같으며, “비록 신
앙이 없기는 하지만 엄연히 인간이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인간의 천성에서 권리가 나온다는 생각은
이슬람교도에게는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신의 계율만 알았다. 이는 터키의 술탄 메흐메드 4세
(1642~1693)가 한 말만 보아도 설명할 수 있다.
또 다른 질문은 십자군 전쟁이 과연 기독교 신앙을 힘과 폭력으로 전파하려 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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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또한 스캔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선교에 대한 생각이 십자군 전쟁에서 결여됐다는 사실은
놀랍다. 교황 우르바노 2세의 호소를 다룬 보고서는 여러 차례 나왔지만, 이 중 어느 것도 교황이 무
슬림의 개종을 촉구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은 없다. 그리고 벤야민 Z. 케다르가 연구 조사에서 찾아낸
것처럼, 나중에 나온 교회 성직자들의 호소에도 비신자의 개종을 요구하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이는 기독교도가 기본적으로 선교를 대하는 방식과 완전히 일치했다. 하지만 중요한 신학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1090~1153)가 선교에서 때로는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
다. 반면 1140년에 편찬된 중요한 교회법 법령집인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
씀을 설명하는 부분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누구에게도 신앙을 강요할 수 없다.”
아무튼 십자군 전쟁은 알라의 이름으로 전 세계에 이슬람 영토를 확장하려는 지하드 같은 성전이 아니
었다. 불과 검을 앞세운 선교도 아니었다. 십자군 전쟁은 공격전이 아니라, 성지에 사는 기독교도를 보
호하기 위한 방어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십자군 전쟁은 대단히 독특한 전쟁이었다. 처음에는 종교
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무장한 이들의 성지 순례였고, 교황들이 십자군 전쟁을 이끈 것은 아니었다.
유럽 권력층이 연합해 주도했는데, 그들은 오늘날 유럽 연합(EU)의 선배 격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교
황이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도록 역할을 했고 후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전쟁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대변하고 옹호하던 것에 전부 위배됐다. 십자군 전쟁은 게르만족의 폭력적인 전통
과 기독교의 평화를 사랑하는 전통 사이에서 태어난 기형아였다.
십자군 전쟁 시대 말기에는 에스파냐 출신의 후안 루이스 비베스(1493~1540)가 우뚝 서 있다. 당시
터키인은 신의 재앙과도 같았다. 그들은 1453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콘스탄티노
플을 유혈 정복했고, 1529년에는 빈을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베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터키인들도 사랑받을 수 있다. 그들 역시 인간이므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지시를 따르려는 이들
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진실한 사랑의 표징인 선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게다가 그들에게 유일하면서도 진실한 선이 함께하기를, 즉 진실을 깨닫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진실은
비방과 저주를 통해서는 이를 수 없고, 우리 자신이 오로지 사도의 도움과 은혜를 통해 그들을 인도하
는 방법으로만 도달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터키인들이 그들과는 상이한 우리 삶에 가까이 다가
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간직한 신앙의 말씀을 선물로 줄 수 있다.”
20세기 교회 - 기독교인과 국가 사회주의, 원죄와 안락사, 교회와 유대인
새로운 시작과 ‘제2차 교황 혁명’
1945년 이후, 독일 양대 교회는 국가 사회주의에 반대한 많은 기독교인 덕분에 특별한 존경을 누렸다.
또한 기독교인은 새로운 국가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필요했다. 예를 들어 사법부는 가톨릭교회가 항상
높이 평가하는 자연법을 다시 수용하지 않고서는 업무를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들이 불의한 국가의 불의한 법을 따른 데 대해 단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의 천성으로 인해 그 법이 불의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말이다. 법철학자 구스타프 라트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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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콘서트
루흐(1879~1949)는 이렇게 강조하기도 했다. “잘못된 법은 정의에 양보해야 한다.”
가톨릭교와 개신교는 박해를 받은 공통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이 양대 기독교 교회는 하나로 화합했고,
이로써 가톨릭 중앙당 같은 종파 정당의 시대는 끝을 맺었다. 여러 기독교 연합 정당을 통해 가톨릭
교인과 개신교인은 기독교 사회 교리의 정신으로 새로운 국가를 형성할 기회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들
은 실행에 옮겼다.
전체주의 독재라는 충격적인 경험의 여파로, UN은 1948년 세계 인권 선언을 발표하게 됐다. 이 선언
문은 기독교 교회 대표들의 도움을 받아 마련됐다. 이미 양대 세계 대전 사이 시기에도, 특히 개신교
신학자들이 국제 평화 기구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교회들은 점점 더 급진적으
로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의견을 피력했고, 양심적 병역 거부권을 열렬히 지지했다. 2003년 제2차 이
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동맹국 정치인들이 집단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했는데, 고령의
교황은 병이 든 상태였음에도 완강하게 전쟁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프랑스에서는 독일과 화해하자는 주교의 촉구에 따라 팍스 크리스티(‘그리스도
의 평화’라는 의미) 운동이 일어났는데, 1948년 팍스 크리스티 운동 독일 지부가 설립됐고, 이를 통해
양대 세계 대전 사이 시기에 활동했던 ‘독일 가톨릭평화협회’와 연계될 수 있었다. 유럽의 화해와 일치
를 추진한 인물들은 알치데 데가스페리, 로베르 쉬망, 콘라트 아데나워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정치인
이었다. 또 1962년 7월 8일 샤를 드골과 콘라트 아데나워는 랭스 대성당에서 열린 미사에 함께 참석
했는데, 이는 독일과 프랑스의 새로운 우정을 상징하는 순간이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두 사람 모
두 가톨릭 신자라는 점이, 독일과 프랑스가 다시 가까워지는 데 특별한 역할을 했다고 동의했다.
한편 1963년 교황 요한 23세는 ‘지상의 평화’ 회칙을 공포했는데, 이 회칙은 오래된 전통을 바탕으로
작성됐으며, 인권을 주제로 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인간 개인의 존엄성을 신의 계시에 따른 진리라고 여긴다면, 그만큼 존엄성의 가치를 아주 높이 평가
해야 합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린 피로 진정 구원받았고, 이로써 하늘의 은총을 받아 신의
자녀와 친구가 되었고, 영원한 영광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인권과 관련해, 일
단 이것부터 확실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즉 인간은 살 권리가 있습니다. 또한 신체를 온전히 유지할 권
리는 물론, 삶을 적절히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꼭 필요한 수단을 마련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
라 인간은 자유롭게 진리를 추구할 권리, 그리고 도덕 질서와 공익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
고 전파할 권리, 어떤 직업이든 자유롭게 선택하고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천부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공적 사건에 대한 진실을 타당하고 정확하게 알 권리가 있습니다. 올바른 양심 규범
에 따라 신을 경배하고 자신의 종교를 공적, 사적으로 표명할 권리도 인권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다음과 같이 엄숙히 선언했다. “이처럼 인간 개인이 종교
의 자유를 누릴 권리는 시민권으로 자리매김되어, 사회 법질서 차원에서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고 공
의회는 다른 항목에서는 “정치 체제의 결정과 통치자의 선택은 국민의 자유 의지에 맡길 것”을 촉구한
다. 이는 국민 주권을 명백히 인정하는 내용이다. 이후 후임 교황들도 인권에 관한 발언을 많이 했는
데, 특히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독일의 유력 신문인 《프랑크푸르터 알게
마이네 차이퉁(FAZ)》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망에 즈음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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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콘서트
“오늘날 세계에서 기독교가 우세한 지역 중에 독재 체제를 유지하는 곳은 거의 없다. 이는 요한 바오
로 2세가 남긴 유산이다(1978년만 해도 상황은 아주 달랐다). 반면 비기독교 국가의 경우는 독재 체제
를 유지하거나 심지어 새롭게 세울 수 있었다.” 저명한 역사학자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빙클러는 이를
중세 그레고리오 개혁 이후 두 번째로 일어난 교황 혁명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 혁명은 세속 세계가
자유화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교황 혁명은 폴란드 자유화를 훌쩍 뛰어넘어, 공산주의 통치의 공동
(空洞)화는 물론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개신교 측에서는 1985년에 제출한 <루터 교회와 자유 민주주의> 각서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입장을 밝
혔다. 이에 대해 개신교 사회 윤리학자 트루츠 렌트로드프는 각서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 각서에서 자유 민주주의 국가 체제는 상세하면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는 그동안 있었던
개신교 교회의 입장 표명 중 처음 있는 일이다.” 개신교가 오랫동안 주장한 것과는 다르게, 이제 인간
의 품위와 존엄성은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교리는 물론 다음과 같은 로마서 말씀과
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위에서 다스리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고, 현재의 권위들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로마 신자들에게 보
낸 서간 13장 1절) 이 발언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
다.”(사도행전 5장 29절)라는 성경 말씀 뒤에 명시적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이후 20세기에는 마침내 에큐메니칼 운동(기독교인이 국가, 지역, 종파를 초월해 하나로 결속
하고 근본적으로 연합하자는 운동)도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이 운동은 종파 분리라는 스캔들을 극복
하기 위해 교단 간의 이해와 소통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어쨌든 기
독교 내부의 갈등은 오랫동안 외부인의 짜증을 북돋웠을 뿐이다. 그리고 세 번째 기독교 천 년이 시작
되면서, 신에 대한 문제가 서구 사회의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기독교인은 이 문제에 대해 설득력 있
게 대답하고, 이 대답에 걸맞은 삶을 살아 설득력을 강화하는 게 중요하다. 또한 기독교인은 각자 다
양한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하나로 일치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21세기 교회 - 기독교의 위기와 난민
면죄(免罪) - 저항과 이성의 칼날
기독교의 역사를 다루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다룬다. 오래전에 과학적으로
반박된 거짓 정보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뢰를 얻고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오류를 바
로잡아도 감사하다는 인사는커녕, “말도 안 돼!”라는 다소 짜증 섞인 반응을 받을 때가 많은 이유는 무
엇일까? 심리학적 관점에서 이성적 반응보다 감정적 반응이 더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사람은 삶의 의미에 대해 자기만의 생각이 있고, 자신만의 세계관을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평
생 동안 완성해 나간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의 세계관에 어긋나는 상황에 직면하면 맞서 싸울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기본 신념을 건드린 순간, 세계관을 완성하기 위해 평생 들였던 노력과 수고가 돌연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그걸 다시 한번 들추고 싶지는 않다는 심리에 빠진다. ‘기본 신념 같은
건 없다.’는 게 기본 신념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는 당연히 이해가 간다. 날마다 새롭게 자신의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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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콘서트
신념을 시험대에 올리면서 산다면, 인생 부적응자 취급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오로지 이런 이유 때문에 고도로 이성적인 사람이 극도로 불합리한 세계관을 피력하고, 이성의 칼날로
이러한 세계관을 교정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관이 불합리하면
불합리할수록, 산들바람처럼 약한 논박으로도 카드로 만든 집처럼 허망하게 무너질 거라는 위기감이
무의식중에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질문을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아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막아 버리고, 공격성을 발동해 자신의 기초 정신이 도전받는 상황을
거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과학적 세계관’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이 주제에 대해 합리
적이면서도 과학적으로 논증하기가 절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이 설명하는 기독교의 실제 역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적 근거는 있다. 독일 역사뿐
만 아니라 서구 전체의 역사도 자기네가 심한 잘못을 저지른 시기를 잊지 않고 있다. 홀로 코스트뿐만
아니라 십자군 전쟁, 마녀 박해, 다른 대륙을 착취한 만행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런 부담을 떠맡으려
면 자신감이 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고유의 정체성을 건강하게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
지만 이렇게 하기 어렵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자기네 역사의 답답한 부분을 일단 부인하고 재빨리 다
른 이에게 떠넘긴다. 또 이렇게 함으로써 부담을 덜었다고 느낀다. 이는 사람들이 교황 비오 12세가
나치의 만행에 침묵했다고 부당하게 비난했을 때 명백하게 드러났던 현상이다.
이 사회는 이러한 사회 심리에 적극적으로 봉사하기 위해 상당한 기간 동안 기독교, 특히 가톨릭교회
를 이용했다. 구약 성경은 이런 종류의 메커니즘을 ‘속죄양의 희생’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유대 민족
은 의식을 거행하며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속죄양에게 뒤집어씌운 다음, 홀가분한 심정으로 광야로
쫓아 버린다. 그렇게 모든 부담을 떠안은 속죄양은 언젠가는 광야에서 죽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죄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2005년 3월, 프랑스 종교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차이트》지와의 인터뷰에서 다
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금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악을 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종교들 탓으로 돌리는
과정 중에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안도한다. 이 모든 죄를 기독교 탓으로 돌리
니, 우리는 그동안 폭력과 은밀하게 공모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시인할 필요가 없다.”
이런 수법을 활용하면, 심지어 자신이 진보적이고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사실은 둘
다 해당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런 수법으로 결국 이탈리아 출신 교황이 독일 홀로코스트에
연루된 죄과가 있으며, 폴란드 출신 교황이 유대인 대량 학살에 책임이 있다는 인상이 세상에 널리 퍼
진다. 이는 기이한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지나치게 부각
시켜 비판할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이 기독교를 면밀하게 연구하며 밝혀낸 여러 성과까
지 반발하고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이유에 대해 조금이라도 해명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당연히 자기 역사를 제대로 직시해야만, 건전한 자신감을 발전시킬 수 있다. 또 개인 및 국가 정체성
에 대한 적절한 감각을 개발할 수 있다. 아울러 개인이나 국가를 요란하게 과장하는 것도 멈출 수 있
다. 나는 독자가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도록 돕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편견도 없는 무신론자를 위한 책이기도 하다.
희생자를 위해 희생을 치른다
이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영적 기반이 필요하다. 이는 단순히 국민 총생산을 증가시키기 위해 국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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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콘서트
소비를 촉진해야 한다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순전히 기술 관료적인 접근법만으로는 더 이상 첨예
화된 사회, 정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누구나 이 사실을 잘 안다. 마찬가지로 순전히 자연 과학적
관점만으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이 ‘정신의 귀화’를 두려워한다.
“이 ‘정신의 귀화’라는 소실점은 인간의 이미지를 물리학, 신경 생리학, 진화론 차원으로 확장해 과학
화한 개념으로, 이를 통해 인간의 자아 개념도 완전히 탈사회화된다.”
아무리 인지 능력이 뛰어나고 일을 관철하는 능력이 엄청나더라도, 개인만으로는 국가를 만들 수 없다.
20세기 들어 전면적인 세속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에 따라 국가 질서를 새롭게 합법화시켜야 하는 문
제에 직면했다. 국가는 세계관 차원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래서 독일 연방 헌법 재판소
재판관을 역임한 에른스트 볼프강 뵈켄푀르데가 한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이러한 취지에 잘 맞는다. “세속
화된 자유주의 국가는 스스로를 확실하게 보장할 수 없는 조건 아래에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너 이 희생자 자식!”(Du Opfer!)이
라는 말은 오늘날 독일 학교 운동장에서 매우 불쾌한 욕설로 취급받는다. 희생자를 경멸하는 짓은 단
순히 비인간적인 행위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기반까지 타락시킨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희생자는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밝혔다. 왜냐하면 ‘타인을 위한 개인의 희생’은 모든 사회
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 연구자 사회에서는 이러한 희생이 필수 불가결하
다. 자신이 기꺼이 희생되겠다는 의향이 없었다면, 20세기 독재에 대한 저항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위르겐 하버마스는 ‘공동 이익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
음과 같은 하버마스의 발언만으로 과연 충분할까? “자유 공동체 일원인 시민이라면, 경우에 따라서는
이름도 모르는 낯선 동료 시민을 대신해 분연히 일어나 공동 이익을 위해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단순히 이런 요구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 나라
는 그런 나라가 아닐 것입니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난민 위기라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아
우려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천명했다. 신념에 따라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게 아닌데도, 어쨌든 낯선 사
람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것 자체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게 과연 타당한가?
난민 위기를 계기로, 우리 사회의 기독교 뿌리에 대해 새롭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 적나라하
게 드러났다.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난민에게 도움과 보살핌을 베풀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선 기독교
인과 기독교 공동체가 사방에 있었다. 몇 년 전, 무신론자로 유명한 독일 좌파당 원내 대표 그레고르
기지는 “신을 부정하는 사회에서는 연대 의식이 사라질 수 있다.”고 우려한 적이 있다. 이러한 두려움
은 이미 독일 일부 지역에서 현실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이 수많은 무신론자가 강렬
한 인도주의 충동에 사로잡혀, 잔혹한 전쟁에 희생되어 우리나라로 탈출했지만 더 이상 오도 가도 못
하게 된 난민을 돕기 위해, 사심 없이 희생할 의향이 전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희생이라는 종교 개념을 영성 차원으로 승화시킨 것은 문화적으로 위대한 성취였다. 초기 그리스 시대
철학자 헤라클테이토스는 신전에 희생 제물을 바치는 관례를 냉소적으로 반대하면서, 차라리 영적 희
생을 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예언자 이사야는 거룩한 영적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선포한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야서 1장 11절, 17절)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 예수는 예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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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콘서트
호세아가 했던 발언을 다음과 같이 두 번 언급한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
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아서 6장 6절)
일반 사회에서는 종교를 조롱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많은 이가 이러한 사회적 충동을 억제하지 못할
수 있다. 최근 르네 지라르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교사를 살펴보면, 기회만 생겼다
하면 기독교 성찬 전례를 식인 잔치와 비교하지 않고 못 배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비교는
성찬 전례에 담긴 사회 혁명의 잠재력을 완전히 간과하는 것이다. 제대에서 성찬 전례를 거행할 때,
모든 신자는 누구나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받는다. 그 결과 모든 이는 사실상 같은 피로
맺어진 관계, 즉 혈연관계를 이룬다. 참고로 기독교인은 종교적인 충동으로, 종교가 저지른 폭력에 희
생된 이가 입은 상처를 보듬어 준다. 하지만 이때 기독교인은 “어떻게 기독교에서 관용과 폭력이 공존
한단 말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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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콘서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