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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잃어버린 도시들 [클로드 보데]

Casey,Riley 2022. 10. 8.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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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야 잃어버린 도시들
클로드 보데 외

  
  잃어버린 도시, 살아 있는 자의 기억에서 지워져 버린 도시, 오랜 세월 이름조차 사라졌던 
도시. 찬란한 황금기가 지나고 9세기에 접어들면서 마야는 기근과 전쟁, 인구 감소현상을 겪
었다. 그리고 마야인은 도시를 버렸다. 밀림이 도시를  뒤덮기 시작했다. 나무뿌리는 돌기둥
을 친친 감아 무너뜨렸고, 나뭇가지는 신전 벽을 부수고 지붕을 뚫었다. 거의 800년이  흘러 
밀림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여행자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그는 잔뜩 뒤엉킨 수풀을 
비집고 쏘아보는 석상의 눈빛과 마주쳤다.  그것은 꿈이었다. 누가 이토록 정교한  기념물을 
세웠던 말인가? 군주와 총독은 탐험대를 파견했다. 그리고 화가와 시인, 호기심 많은 여행자
들이 그뒤를 따랐다. 19세기의 모험가들은 미지의 문명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었다. 영국의 고고학자 알프레드 퍼시벌 모슬레이는 팔렌케, 코판, 치첸 이트사, 키리과를 여
행했다. 그는 밀림을 밀어 버리고 사진을 찍고 평면도를 작성했다. 주석이 달려 있는 모슬레
이의 평면도는 놀라운 정확성을 지니고 있다. "치첸 이트사의  수녀의 집은 멋진 숙소를 주
었다. 우리는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키리과에서 우리는 2월 
초에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건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도르래와 임시로 설치해 놓은 
기중기를 이용해 돌기둥을 바로 세울  수 있었고, 거기에 새겨 있던  상형문자의 탁본을 뜰 
수 있었다."(코판) "2층, 3층, 그리고 맨 위층의 사방벽에는 각각 거대한 창과 문이 나 있다. 
창과 문에는 원래 나무로  된 상인방이 걸쳐져  있었다."(팔렌케) "팔렌케 유적에  도착했을 
때, 동쪽 뜰과 서쪽 뜰이 주변의 건물에서 무너져 내린 돌덩어리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
다." "팔렌케의 이 건물은 궁전 동쪽 지역의 북쪽 중간 지점에 있다.  중앙벽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평행한 복도로 이루어져 있다." "팔렌케 태양신전의 소벽 장식은 많이 손상되어 있
었다. 그러나 커다란 뱀의 몸통과 머리의 일부분은 식별할 수 있었다." "막대한 양의 돌덩어
리가 무너져 내렸기 때문에 치첸 이트차에서 카스티요의 정확한 크기를 측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고된 작업과 말썽을 일으키는 일꾼들, 끊임없이 괴롭혀대는 열병... 그렇지만 치
첸 이트차에서의 생활을 회상하면 언제나 즐거워진다."
  1502년, 마야력으로 4아하우와 카툰의 두번째 해였다.  커다란 나무를 파서  만든 카누에 
25명의 인디오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과나하섬으로 가는 길이었다. 온두라스만에서 그 특
이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제1장 정복자와 선교사
  뱃머리에는 스페인 탐험대 대장이 태양빛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원주민과 교역하
기 위해 유카탄에서 오는 길이었다. 목이 로프에 매인 노예들이 일사불란하게 노를 젓고 있
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 지역을  항해해 오는 동안 그들은 과나하섬 앞에  있는 
커다란 암초 세 개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잠시 후 더욱 커다란 비명소리가  잇달았다. 
암초들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명령이 내려졌으나 노예들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
다. 오싹한 전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불안한 시선만이 긴장상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선장은 동요하지 않고 전진명령을 내렸다. 배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반
쯤 물에 잠긴 부푼 공 같은 암초에는 껍질이 벗겨진 아름드리 나무뭉치들이 밧줄에 감겨 있
었다. 사람들이 타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고보니 어두컴컴한 그림자 속에 사람으로 보이는 
형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인간일까 아니면 신일까? 몸뚱아리만이  어렴풋이 보일 뿐 얼굴과 
손은 구별되지 않았다. 털로 뒤덮인 걸 보니 원숭이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용기백배하여 탐험대는 둥둥 떠가는 작은 암초를 향해 나아갔다. 문제의 생명체들이 꿈틀
거리면서 큰 소리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렇다면 암초들은 그 생명체가 건조한 배라는 말
인가? 그들은 탐험대에게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건너오라는 듯 밧줄로 된 사다리를 던졌다. 
대장은 밧줄에 자신들이 가져온 물건의 견본을 실어 보냈고  앞장서 암초로 건너갔다. 뒤이
어 선물들이 오고갔다. 이쪽저쪽에서 모여든 원주민은 무척이나 놀라는 눈치였다.  원주민은 
대원들의 옷과 살갗을 만져 보는가 하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 보기도 했다. '딴 세계에
서 온 사람들'의 모든 것에 신기해하는 듯했다. 물론 그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
들이었다. 대원들은 몸짓을 섞어 가며 자신들의 배가 어디에서 왔는지 방향을 가리켰다.  그
러자 인디오는 이렇게 대답했다.
  "마이암(maiam)."
  이것이 유카탄 반도의 마야인과 과나하섬 앞에 닻을 내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끄는 
카라벨(caravelles, 15,16세기에 탐험에  쓰인 범선)의  최초의 만남이었다. 서인도제도-후일 
이곳은 '아메리카'라고 부르게 된다-를 발견한 위대한 탐험가의 네번째 항해에서였다.
  짧은 만남이 있은 지 9년 후 스페인인이 마야 땅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마야의 땅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던 유럽인은 정복자가 아니라 자마이카 해안을  따라 
표류하다가 살아 남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코주멜섬 맞은편 유카탄  해안에 닻을 내릴 때
의 상황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13일 동안 돛마저 잘려 나간  배에서 식량도 없이 
표류하면서 동료 중 절반이 굶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뭍에 오른 그들은 백인
을 보내 주신 신께 감사를 드리는 한 무리의 인디오에게서 달갑지  않은 환영을 받아야 했
다. 신에게 바칠 제물을 힘들여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제물치고는 
변변치 못했지만 어쨌든 특이한 종류이긴 했다. 신들도 좋아하실 게 분명했다. 그리하여  생
존자들의 반은 심장이 도려져 제단위에서 죽어 갔다. 나머지는  우리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다음 의식 때 제물로 쓰기 위해서는 좀더 살찌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들 중 후일까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사람은 겨우 두 명이었다. 그중  한 사람인 게로니모 
드 아길라르는 족장에게 온갖 충성을 바쳐 그의 노예가 되었다.  또한 다른 부족에 남아 있
던 곤잘로 게레로는 전사가 되어 후일 부족 간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대장이 되었고, 원주
민 여성과 결혼하여 철저히 그들과 동화되었다.
  스페인의 식민지화는 섬에서 시작되었다. 섬주민보다 더 조직적이었던 육지주민은 스페인
인에게 쉽사리 굴복하지 않았다.
  쿠바와 이스파니올라(현재 이곳은 아이티와 산토도밍고로 분리되어  있다)의 주민을 순식
간에 굴복시킨 스페인인은 이 섬들을 신세계 경영을 위한  원정대 파견의 전초기지로 삼았
다. 1517년에 출발한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의 원정대도  그곳에서 출항했다. 코르도바의 
목적은 노예사냥-쿠바와 이스파니올라에는 노예로  쓸 만한 인디오가  더  이상 없었다-과 
혹시 있을지도 모를 황금 채굴이었다. 그는 서쪽으로 전진하여 코주멜과  같이 유카탄 반도
의 북동쪽 해안에 가까운 한 섬에 닻을 내렸다. 그곳에서   스페인인은 카리브의 허름한 오
두막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화려하고 견고한 건축물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위대한 문명 
앞에서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수많은 여인상으로 뒤덮이다시피한  신전을 본 스페인
인은 이곳을 '팜 제도(여자들의 섬)'라고 이름지었다. 이때 그들은 몇 점  안 되는 황금붙이
들을 배에 싣고 돌아왔는데, 이것은 훗날 이 지역이 약탈당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윽고 코르도바는 이곳을 떠나 북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돌다가 참포톤이라는 도시가  있
는 반도의 하단에 도착했다. 상륙하자마자 스페인인은  무방비 상태의 마야인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막강한 화력을 갖춘 코르도바는 선상에서 대포공격까지 퍼부었다.  이러
한 불세례 후-마야인이 가졌을 엄청난 두려움은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을 것이다-공포에 사
로잡힌 마야인은 스페인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참포톤 전투에서 36군데나 부상을 
입은 코르도바도 얼마 지나지 않아 쿠바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원정대가 귀환한 후 쿠바
에는 팜 제도에 쌓여 있을  황금에 관한 소문이 좍 퍼졌다.  그러나 스페인인은 유카탄에는 
황금이 전혀 묻혀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코르도바가 노략해 온  여러 가지 황금붙이도 
실제로는 마야인이 교역했던 온두라스 남쪽지방에서 유입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당시 쿠바 
총독이었던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이 소문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군함 네 척과 장정 
200명을 선발하여 조카 후안 데그리할바에게 지휘를 맡기고는 황금을 찾아오도록 명령을 내
렸다.
  코주멜에 도착한 함대는 이번에는 남쪽  해안선을 향해 나아갔다. 그  당시에는 유카탄을 
섬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그리할바는 그곳을 한 바퀴 돌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윽고 
아상시온만에 도착한 함대는 가던 길을 되돌아와서 반도 주변을 뱅뱅 맴돌았고 다시 참포톤
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스페인인은 원주민에게 뼈아픈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함대는 참포톤
을 뒤로 하고 1,200km 떨어진 리오 파누코로 출발했다.
  마야를 정복하기로 결정한 스페인인은 더 큰 규모의 원정대를 파견했다.
  이번 원정에서 스페인인은 처음으로 아즈텍인의 풍요로움과 위력에  대해 듣게 되었다. 5
개월 간의 여행 끝에 함대는 쿠바로 되돌아왔다. 마야를  빨리 정복하고픈 욕심에 스페인은 
매번 강한 원정대를 구성했다. 1519년 2월 18일, 에르난 코르테스는 11척의 군함과  508명의 
군사들, 그리고 말 16필을 마련하는 등 출항준비를 순조롭게 마쳤고, 마침내 코르테스의  원
정대는 항해를 시작했다. 항해 도중 코주멜에서 인디오에게 연락을   띄웠으나 아무 답신이 
없자 코르테스는 다시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는 물이 새는 배를 수리하기 위해 함
대를 서둘러 되돌려야 했다. 배가 수리되는 동안 아킬라르가 도착했다.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신의 은총에 감사했다. 아길라르는 그날이 수요일인가 물었다. 8년 동안이나 그는 카
톨릭의 기념일을 빠짐없이 지켜 온 터였다. 그러나 새 가족과 자기를 받아들인 인디오 부족
을 버릴 수 없었던 게레로는 죽는 날까지 마야 땅에서 떠나기를 거부했다.
  함대는 앞선 두 원정대의 경로를 따라 반도를 우회하여  북쪽으로 항해해 나갔다. 마야의 
땅을 벗어나니 타바스코와 베라크루스 해안선이 나타났고  함대는 해안선을 따라갔다. 마침
내 지금의 멕시코 땅에 상륙한 코르테스는 탈영병을 막기 위해 배를 불태워 버렸다. 코르테
스의 확고한 성격이 잘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1년 뒤 아즈텍  제국은 코르테스에게 무릎을 
꿇는다. 반면, 스페인인이 유카탄 반도를 평정하는데는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려야 했다. 숫
적으로 열세였던 그들은 스페인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원주민을 끌어 모으기 위해 여기
저기 헤집고 돌아다녔다. 그들은 비협조적인 원주민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지만, 인디오 부족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를 악이용하여 이들을 서로 갈등하게 만들고 미끼를 주어 회유하는 방
법도 알고 있었다.
  악마의 종교를 뿌리뽑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을 알아야 한다.  선교사도 마야의 종교와 관
습을 익히는 데 열심이었다.
  1546년, 스페인인은 그들에게 굴복한 투툴시우에게서 복종의 맹세를 받아 냈다. 투툴 시우
는 유카탄 북쪽 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큰 집단의 통치자였다.   반도 중서부 지역의 통치자
들도 그를 따랐다. 이제 남은 곳은 동부  지방뿐이었다. 이곳을 평정하기 위해서는 몇 개월   
동안 여러 차례 전투를 치러야 했다.
  마야를 정복하고 식민지로 만드는 일에 모든  스페인인이 열정적으로 참여했으나, 마야와 
그 문명에 가장 깊은 관심을 보인 이들은 사제들이었다. 1535년, 최초로 프란체스코회의  사
제들이 이 땅에 발을 디뎠다. 진정한 신앙의 길로 원주민을 이끌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신
도들이 하느님에게 다가서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물리쳐야 했다. 우상은 파괴되었고 
신전은 불살라졌으며, 원시제전이나 희생의식을  치르는 자들은 극형에 처해졌다.  사제들은 
원주민의 향연이나 노래와 춤, 지적이며 예술적인 행위(예컨대 그림, 조각, 천체관측, 상형문
자 등)조차도 악마의 혼이 깃들어 있다며 금지시켰고,  그것을 행하는 자나 만들어 내는 자
들은 가차없이 탄압했다. 한편 그 당시에 얼마되지 않았던 연대기 작가들 가운데 최초의 유
카탄 지역 주교였던 디에고 데 란다가 단연 눈에 띈다. 그가 쓴 '유카탄 지역 문물들의  제
관계'라는 책은 16세기 마야 문물에 대한 가장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자료이다.  성직자
이며 마야인의 생활을 엄격하게 규제했던 재판관의 몸이었지만 그의 마야 문명에 대한 전반
적인 판단은 완전히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란다는 이 책에서  마야 문명과 용기, 절제, 의
지, 서로 화합하는 기독교적 미덕을 보여 준 주민에게 자주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들은  결
코 야만인이 아니라는 점을 란다는 확인한 셈이다. 오히려  그들은 농경지를 부지런히 가꾸
고 나무를 심고 아름다운 초가집과 눈부시게 빛나는 도시를 건설한 선진문명의 창조자였다. 
마야인의 도시에는 신전과 대광장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수장과 신관의 거처가  있었으며, 
하위 관리의 집은 다음 차례였다. 따라서 평민의 집은 도시 외곽에 자리할 수 밖에 없었다.
  황폐화된 도시의 유적에 넋을 빼앗긴 란다는 그 엄청난 규모에 놀라고 말았다.
  폐허가 된 도시를 둘러본 란다는 웅장한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란다는 이렇
게 회상했다. "지금도 이 나라는 너무도 아름답다. 그러나 저 위대한 건축물이  세워졌던 시
대보다는 못하리라." 이사말에서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축물이  있었는데 그는 참고삼
아 스케치를 해두었다. 그리고 1542년 메리다라는 도시가 건설된 티우에서  그는 또 하나의 
매력적인 건물과 만날 수가 있었다. 란다는 욱스말에 있는  여승원과 비슷한 이 복합건축물
도 화폭에 담아 두었다.
  놀라운 것은 건축물만이 아니었다. 란다가 마야판에서 본 것과  같은 비문이 새겨진 돌기
둥들이 있었다. 이 도시는 마야인이 버리고 떠난 뒤 120년 동안 텅 비어 있었다. 란다는  치
첸 이트차도 스케치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인간을 제물로 바쳐  던졌다는 웅덩이(cenote)도 
있었다. 폐허의 엄청난 규모에 놀란 란다는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 "지배자가  백성을 혹사
하려 했던가? 아니면 건축  자체가 신을 숭배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던가? 어쩌면 마야인은 
도시의 위치를 자주 바꾸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그 지역에 널려 있는 양질의  건축재료 
덕분에 건축가가 작업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란다는 드실란에 서 있는 돌기
둥이 무척 궁금했다. 하루는 원주민에게 돌기둥에 대해 물었다.
  "우리 선조에게는 20년마다 돌기둥을 하나씩 세우는 관습이  있었다. 20이라는 숫자는 주
기를 계산하는 데 쓰였던 기본 숫자이다."라고 원주민은 일러주었다.
  반면 이사말에서 가장 빼어난 12개의 건축물은 누가 세웠는지는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못
했다. 결국 상식에 근거해 란다는 마야인만이 그러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란다는 유카탄 북쪽이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전성기에서 8세기  말엽에 이르기까지 마야  문명의 영향은 유카탄 반도 전역으로  확대
되었다.  이곳은 현재 멕시코의 치아파스주와 과테말라의 페텐 지방, 온두라스 서부 일부와   
 엘살바도르의 북부 지방을 포함한 지역이다. 9세기에 고전기문명이 몰락한 후, 마야의 많은 
주민들은 열대림 지역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산발적으로 모여 살기 시작했다.  몇  
세기 동안, 마야의 도시는 밀림에 파묻혀서 잊혀져 있었다. 사실 마야 유적의 발굴은 18세기 
말에나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20세기 말에나 끝난다.  무엇보다 지역개발이 시급한 문제였는
데,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우선 밀림을  통과하는 것 자체가 위
험천만한 일이어서 개발과정은 어렵고도 더딘 일이었고, 또 다른  이유로는 치아파스, 벨리
세  그리고 페텐 지역의 저지대는 식민지 개척자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정복자에게도 별다른  
매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풍부한 광물자원이나 쓸  만한 노동력이 있기는커녕 거친  환경만
이 널려 있었다. 이처럼 황량한 '밀림의 푸른 지옥'으로 들어가겠다는 자들은 가련한 영혼을 
찾아 천국으로 인도하겠다는 신념을 지닌 선교사들뿐이었다.
  한편, 1525년 코르테스는 타바스코에서 온두라스에 이르는  마야의 남쪽 지방을 횡단하게 
된다. 그 무렵 온두라스에 주둔하고  있던 그의 부하병사에 대한 좋지  못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위대한 정복자 코르테스는 직접 나서서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코르
테스는 140명의 스페인 병사와 3,000명의 인디오 전사와 짐꾼, 150마리나 되는 말과 돼지 따
위 필요한 군수품을 갖추고 온두라스를 향해 출발했다.
  6개월 가까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코르테스 일행이 맞닥뜨린 타바스코의  늪지는 다리나 
길을 내지 않으면 건너기 힘든  곳이었다. 또한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인 밀림이 기다리고 
있었고, 몇 번이고 사람과 말의 목숨을 앗아 간 아찔한 낭떠러지가 버티고 있었다. 스페인인
은 식량을 얻거나 길을 찾기 위해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마을들은 대부분 파괴되었거나 불살라진 뒤였다. 백인이 무서워 도망치려 했던 것
이다. 코르테스는 처참한 절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그는 원주민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노
력했다.
  프란체스코회의 광신적인 우상파괴자에 의해 파괴되어 버린 타야살의 말 조각상.
  이번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페텐 이트차 호수의 가장 큰 섬에 건설된 타야살이라
는 도시에서 발생했다. 타야살은 그 지역 마야 부족 가운데  가장 세력이 큰 이트차족의 수
도였다. 오보에와 트럼본 반주에 맞춰  성가를 부르며 거행된 성대한  미사에  깊은 감동을 
받은 족장 카네크는 즉시  자기들의 우상을 부숴  버리겠다고 선언하는 한편  스페인인에게  
십자가를 두고 가라고 간청했다. 코르테스는 한술 더 떠서 부상당한 말을 그에게  맡겼다. "
신께서 당신들이 병든 말을 보살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신께서  무엇을 기대하는지  모른
다." 사람들은 코르테스가 맡긴  말의 운명을 한  세기가 훨씬 지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1618년, 우르비타와 푸엔살리다라는 두 명의 프란체스코회 신부가 포교 임무를 띠고 타야살
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사원에 세워진 말 조각상을 발견했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코르테스가 출발한 후 인디오는  말에게 고기와 꽃을 바치는 등  상류층에게나 
허용된 극진한 예우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은 그다지 오래 살지 못했다. 커다란 말  조각
상은 말이  바닥에 앉아 있는 형상이다. 그러나 말 조각상은 놀라울 만치 완전히 인간의 분
위기를 풍겼다고 한다.
  마야인은 이 동상을 치민 차크라 부르면서 떠받들고 있었다. 이것은 치민(맥, 중남미에 서
식하는 말과 가장 닮은 동물)과 차크(비와 천둥의 신)의 합성어이다.  우상을 보자 우르비타 
신부는 분노에 사로잡혀 커다란 돌멩이로 말을 부숴 버렸다. 그러자 흥분한 군중이 그를 죽
이려고 덤벼들었다. 푸엔살리다 신부가 힘찬 목소리로  설교를 시작하여 상황을 가라앉히지 
않았다면 그들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 충직한 신부들은 단념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신념을 달성하기 위해 이듬해에 타야살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트차의 사제들은 그들을 다시 거절했다.
  1622년, 델가도 신부가 80명의 개종 인디오를 데리고 타야살에 도착했다. 원주민에게 열렬
한 환영을 받은 즉시 그들은 제물로 바쳐졌다.
  국왕의 훈령에도 불구하고 미로네스 대위는 이트차로 향하는 원정대를 구성할 수 있는 권
한을 유카탄 총독에게서 받아 냈다. 원정대는 타야살과 메리다의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필
요한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일행은 인디오에게 행패를  부린  나머지 오히려 
큰 손실을 입었으며 인디오 출신의 병사들마저 잃고 말았다. 한편  인디오는 미사를 드리는 
동안, 성당에 난입하여 그곳에 있던 스페인인의 심장을 도려냈으며, 마을에 불을 지르고  멀
리 도주해 버렸다.
  이 참사는 그후 70년 동안 모든 새로운 시도를 망설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1692년, 유카탄
의 총독으로 부임한 마르틴데 우르수아는 이트차의 세력이 국왕과 관리에게 복종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디오가 분별력을  갖고 참된 신앙을 받아들
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카우이에서 시작해 페텐  이트차 호수까지 이어지는 통
로를 개척하기로 결정했다.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아벤다뇨 신부는 그 길을 따라 밀림을 횡단하여 1696년 1
월, 마침내 페텐 이트차 호수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신부 일행은 한 번 더 족장인  카네크와 
부족들한테 스페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과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했다. 한참을 
심사숙고한 끝에 마야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탁에 따르면  아직은 그들의 신을 저버릴 
시기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4개월 후에 다시 오시오.  그때 가서 생각해 봅시다." 돌아오
는 길에 아벤다뇨 신부와 일행은 길을 잃고 말았다. 밀림  속에서 여러 주일을 헤매던 그들
은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반죽음이 되다시피 한 상태에서 폐허가 된 건축물군의 잔해를 발
견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신부는 폐허 속에 우뚝 서 있는 피라미드위로 몸소 올라가서 그곳을 자
세히 관찰했다. "작은 회랑들과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많은 방들로 미루어 보아 이 건물은 
마치 수도원 비슷하다. 석회가 덧칠해져 있다."
  그가 본 폐허는 아마도 티칼의  유적이었음이 분명하다. 같은 해, 우수마신타에  들이닥친 
소규모 원정대가 거대한 도시의 유적을 발견했다. 이것이 후일 약스칠란이라는 이름으로 부
르게 된 유적이다.
  이트차 주민의 저항을 종식시키기 위해 우르수아 총독은 비상수단을 강구하기에 이른다.
  1696년 1월, 호수에 파견된 두 분견대는  호전적인 인디오의 저항에 부딪혀 후퇴해야  했
다. 오늘날에 보자면 겨우 한 분대 정도면 이트차인을 충분히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1
년이 넘게 스페인인은 최후의 공격을 준비했다. 군대는 병사들을 섬까지  데려다 줄 카누와 
갤리선을 건조하기 위해 목수들까지 합세했다.
  그들의 도시는 3월 13일, 동틀 무렵 함락되었다. 요란한 대포소리에 놀란 주민은 앞을  다
투어 호수로 뛰어들어 헤엄쳐 호수를 건너려 했다. 스페인인은  종일토록 황량한 도시를 누
비며 곳곳에 세워진 우상을 부숴뜨렸다. 저녁이 되자, 우르수아 총독은 장차 자신들의  교회
를 세울 자리를 지정했다. 대사원의 폐허 위였다. 이로써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지 두 
세기가 지난 뒤 마야 정복이 완료되었다. 사실 길고도  험난한 정복과정은 스페인인으로 하
여금 이 문명의 과거 흔적이나 그 의미에 관심을 기울일  만한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코
르테스마저도 위대한 유적의 곁을 스쳐 가면서도 그것이 거기 있는지조차 몰랐을 정도였다. 
한편 아벤다뇨 신부의 티칼 유적 발견이나 약스칠란의 발견  또한 우연한 사건일 뿐이었다. 
유적을 발견했던 사람들의 기록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으며 여러 세기가 지나서 유적이 다시 
발굴되었을 때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점에서는 과테말라 주재 최고 법관이었던 디에고 데팔라시오가 코판(지금의 온두라스)
에 대해 쓴 유려하고도 흥미로운 보고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576년도라고 서명이 된 이 편
지는 스페인 국왕에게 보내졌지만, 막상 그 논의의 대상이었던 유적들은 2세기 반 동안이나 
열대 원시림 속에 파묻혀 있었다. 
  1746년, 안토니오 데 솔리스 신부는 형제들과 그들의 아내, 그리고 여러 명의 조카를 이끌
고 팔렌케의 산토도밍고에 발을 디뎠다.  농사지을 땅을 찾아 숲 속을  헤매던 그들 일행은 
오래 전에 버려졌음직한 석조 건축물과  마주쳤다. 놀랍게도 그들은 가장  환상적인 마야의 
유적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되었다.
  
    제2장 예술가와 모험가
  마야 문명이 남긴 유적이 대부분이  20세기에 발굴되었지만, 실제로 유적에는 선교사,  군
인, 관리 들의 발길이 이미 닿아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아직도 전해지는 몇몇 오래된  기록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방문이 있은 뒤 마야의 유적은 완전히 망각 속에 묻
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팔렌케만은 예외였다. 솔리스 신부가 발견하여 세상에 알린 이 유
적은 사람들이 힘들이지 않고 접근할 수 있었다는 지리적 이점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비교
적 잘 보존되었기 때문이다(대다수의 건축물에는 아직도 지붕이 그대로 얹혀져 있다). 그리
하여 최초의 발견 이후 이  유적에는 학자와 모험가, 그리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라몬 오르도네스는 데 솔리스 신부의 조카에게서 신비에 싸인 팔렌케 유적의 발견담을 듣
는다.
  1773년, 성인이 되어 관직을 얻은 라몬 오르도네스는 과테말라  총독이었던 돈 호세 에스
타체리아에게 팔렌케 유적에 대해 얘기했다.  총독은 유적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면
서 1784년, 부랴부랴 지방 관리였던 호세 안토니오 칼데론을 팔렌케에 보냈다. 칼데론은  18
개의 궁전과 22개의 장대한 건축물과 168채의 가옥이 포함된 220개에 달하는 건물의 목록을 
하나하나 기록한 매우 사무적인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또한 그는 이  모든 건축이 도
로를 따라 배치되어 있다는 이상한, 그러면서도 완전히 잘못된 관찰결과도 첨부했다.
  1785년, 총독은 팔렌케로 안토니오 베르나스코니라는 건축가를 파견했다. 그의 보고서에는 
유적의 평면도와 함께 정확한 측량결과가 포함되어  있었다. 베르나스코니의 측정에 따르면 
유적은 24,835km의 둘레를 가진 원형 지대 안에 조성되어 있었다.
  한편, 베르나스코니는 건축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도 첨가했는데, 그중에서도  아
치형 천장의 단면도와 입면도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는 보고서의 결론을 통해 이 도시
가 폐허가 된 원인은 지진이나 화산폭발 같은 자연재해 때문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주민
들이 내버려둔 탓이라고 주장했다.
  스페인 왕은 유물을 직접 보고 싶었다. 왕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델 리오는 유물을 조직
적으로 약탈했다.
  진기한 문물의 애호가이며 고대문물 연구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스페인 왕에게  제출한 
팔렌케 보고서는 매우 면밀하고 상세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페인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나폴리의 군주였던 샤를 3세는 제1차 폼페이 발굴단의  재정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중
요한 고고학적 유물을 수집하고 있었다. 신세계의  역사에 정통했던 후안 바우티스타무뇨스
의 자문을 구한 다음,  왕은 과테말라 총독에게 발굴단을  계속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세상을 뜬 베르나스코니의  자리를 안토니오 델  리오 대위가 대신  맡게 되었다. 
1786년 5월 5일, 그는 '카사스 데피에드라(돌로 된  집들)'라고 부르는 유적에 도착했다. 그
러나 빽빽하게 들어찬 밀림 때문에 그들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지원 요청에 
따라 관리들은 79명의 인디오로 하여금 도끼를 들고  유적 주변 산림을 깨끗하게 벌채하도
록  지시했다. 
  델 리오는 샤를 3세의 훈령을 어김없이 지켜 건축물을 면밀히 측정하고, 그림으로 옮기거
나 기록했으며, 운반해 갈 수 있는  한 많은 유물을 약탈했다. 유적지의 여기저기서  회반죽 
두상이 잘려 나갔고 상형문자가 새겨진 석회석 패널이 뜯겨졌다. 정교한 조각이 아로새겨진 
다리를 잘라 내 옥좌는 파괴되었고, 잘 보존되어 있던 회반죽에 쓰인 상형문자 비문은 절단
나고 말았다. 궁전과 신전의 벽은 온통 흉물스런 구멍이 뚫리고 말았는데, 그는 닥치는 대로 
파헤쳐서 끌어 모았다. 약탈물은 마드리드 왕립 자연사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스페인인은 원주민의 능력으로는 그와 같은 걸작품을 창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델 리오의 보고서는 1822년에 런던에서 영어로 출판되었는데, 그  책에는 발덱이 새긴 판
화가 수록되어 있다.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리오에게도 위대한 문명이란 그리
스와 로마의 고적주의밖에 없었다. 따라서 델 리오는 그토록   경이로운 건축물에 고전주의 
문명을 낳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의 손길이 닿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추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컨대 정복자들(로마인)이 아주 오래  전에 
이 나라에 닻을 내렸을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말해 그  선진민족의 대표들이 이 땅을 방문
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말이다. 그들과 접촉을 가진 인디오는 로마인이 머무는 동안 극
진한 대접을 했고 그 보상으로써 로마인은  자신들의 예술정신을 전수했을 것이다."더 나아
가 델 리오는 자신의 관찰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점을 절대적으로 확신했다. "고대 유카탄 
주민과 팔렌케 주민이 고전주의 문명을 완성한  로마인과 동질성을 띠고 있음은 그들의  의
상, 건축물, 그리고 예술에 대한 심미안에서  명백히 증명된다."  20년 후, 팔렌케의  유적에 
새로운 방문객이 찾아왔다. 그는 스페인 왕위에 오른 샤를  4세의 명을 받고 멕시코 곳곳에 
널려 있는 정복 이전 시대의 모든 유적을  확인해 보기 위해 그곳에 도착한 기예르모 뒤페 
대위였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뒤페  대위는 이탈리아에서 훌륭한  고전주의자로서의 소양을  
쌓았고 스페인  본토와 멕시코  식민지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1805년에서 1807년 사이, 그
는 세 차례의 고고학적 탐사를 수행했는데, 그가 토니나와  팔렌케의  마야 유적을 찾은 것
은 그중 세 번째  탐사에서였다. 일행에는 루시아노 카스타녜다라는  멕시코 출신 삽화가가 
있었다.
  그가 스케치를 바탕으로 제작한 판화는 그 시대의 취향을 반영한 무척이나 우아하고 아름
답게 꾸며진 작품이다. 카스타녜다의 작품이 선배들의 작품에 비해 월등히 우수함은 사실이
다. 그러나 작가의 상상력이 지나칠 만큼 동원된 얕은 부조나 상형문자를 옮긴 스케치는 카
스타녜다가 재구성하려 했던 마야인의 예술적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반면에 뒤페 대위는 탁월한 관찰자였다. 그는 마야 문명이 남긴 모든 견고한 건축물은 벽돌
이 아니라 돌덩이로 지어졌다는 점(그 점에서 코말칼코는 마야 유적  가운데 유일하게 예외
적인 곳이다)과 상인방(기둥과 기둥사이의 벽 위에 가로지른 나무)은 목재가 쓰였고, 회반죽
으로 제작된 얕은 부조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법이  사용되었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카
스타녜다와 뒤페의 탐사기록은 오랜 동안 기억 저편에 묻혀 있었다.
  멕시코 독립전쟁이 끝나고 1828년 프랑스인 앙리 바라데르가 멕시코 정부에게 뒤페의  보
고서와 카스타녜다의 스케치를 입수하고 나서야 그 자료들은 비로소 빛을 볼 수 있었다. 그 
뒤 뒤페의 탐사기록은 에드워드 킹스버로 경이 1830년에 출판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1834년, 
파리에서는 '멕시코의 고대문명'이라는 두툼한 책 두 권이  출간되었다. 시대적 관심이 분명
하게 표출된 이 저서에서 뒤페의 탐사기록은 여러 저명 학자들의  논문(예를 들어 고고학자
이자 프랑스 문화재 전문가인 알렉상드르 르누아르의 '이집트, 인도 그리고 기타  고대문명
의 멕시코 고대문명의 비교'와 샤를 파르시의 '유럽 역사학회에 제출된 두 가지  문제에 대
한 담론: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에  관련된 기록의 가치를 토론하고,  여러 종족과 아프리카, 
인도 종족 간의 언어적 관계를 규정함') 저술에 근거  자료로 다양하게  쓰였음을 알 수 있
다.
  학자들이 고전주의 문명의 영향권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들보다 더 솔
직하고 덜 학구적인 사람이 훨씬 나은 분별력을 보여 주고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뒤페는 
아메리카의 원주민 문명을 누구보다 먼저 이해할 수 있던 선구자였다.
  연극배우의 아들로서 모험과 이국정취에 열광했던 후안 갈린도는 열여섯 살 때 고향인 아
일랜드를 떠나 아메리카로 향한다.
  1827년, 과테말라에 있던 후안  갈린도는 회원국 사이의 견해차이로  별 영향력을 행사하
지 못하던 중앙아메리카 연방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뒤 대령에  임명된  갈린도는 페텐주 
군인 주지사가 되었고, 이 같은 상황에서  팔렌케 유적을 답사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같은 
해  그는 약스아 호수 토포스테섬에  남아 있는 유적을 방문했고, 1834년에는  코판에서 한 
달 동안 머물렀다. 여기서 그는 기념건조물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을  남겼고 예리한  관찰
력을 보여 주는 스케치도 해두었다. 아울러 그는 유적의 평면도와 그 지역 지도도 그렸으며, 
특히 아치형 분묘를 포함한 몇 군데 유적에 대한 발굴작업도 실시했다.
  거의 두 세기 전에 란다가 그랬듯이 갈린도도 유적에서 발견되는 조각이나 조상의 옷차림
이 그 지방 주민의 옷차림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도 이 고대도
시를 건설한 사람들은 지금도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인디오와 같은 부족이었을 것이라는 결
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아즈텍인보다 더 앞선 시대의 사람들일 것이라는 점을 밝
히기 위해 집요하게 추적했다. 왜냐하면 아즈텍인과  그들이 동시대에 살았다면 아즈텍인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문자를 가지고 있었던 마야인에게서 상형문자를 빌려 썼을  것
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시 파리 지리학회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전세계에 나가 있
던 여행가와 탐험가는 그 학회지에 자신들의 연구가 실려 발표되기를 기대하면서  연구결과
를 담은 편지를 보내곤 했다.  갈린도 역시 서른두 편의 보고서를  파리 지리학회에 보냈고 
그 대부분은 출판되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그는 중앙아메리카  지역의 여러 나라에 대
한 보고서와 함께 지도까지 작성했다. 그 공로로 그는  중앙아메리카 연방에게 은메달을 받
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리학회는 메달을 수여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말았다.  갈
린도가 연방군이 패배한 뒤 내전의 와중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그를 알아보는 주민들의 칼에 
맞아 무참히 살해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마야 발견의 역사에서, 장 프레데릭 막시밀리안 드 발덱  백작은 최초의 위대한 예술가이
자 최후의 위대한 탐험가였다.
  발덱은 위풍당당한 체구와 단호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강한 인상을 풍기는 인물이었
다. 그는 자신의 이와 같은 장점을 유용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그는 뛰어난 언변으로 많은 
여성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처럼 재기발랄한 발덱은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얗게 센 백 
살이 넘은 나이에도 칠십줄로 보일 만큼 정열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빈에서 출생한 오스트
리아인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다른 자료에  따르면 프라하 출신이라고도 했다. 예술적  재능
을 타고난 발덱은 노력가이기도 했다. 그는 파리에 있는 다비드의   화실-만약 그곳이 아니
라면 베를린의 피에르 프뤼동의 화실이었을 것이다-에서 그림을 배웠다고 말했다. 어쨌거나 
발덱은 무척이나 다양하고 정열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학문적 연구에 시
간을 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들도 있다.
  1785년, 발덱은 프랑수아 르베이양이라는 탐험가와 남아프리카 희망봉까지 해양탐험에 나
서기도 했다. 어떤 젊은 여성에게 자신이 42차례나 혁명운동에 참가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던 
발덱은 군대생활에 낯설어 하지 않았다.  그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에  자원하여 툴롱 
전투에 참가했다. 나폴레옹을 열렬히 숭배했던  그는 이집트 원정에도 가담했다. 그를  따라 
다니는 수많은 일화 중에  모방기술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독설가들은 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모방가로서의 명성이 나폴레옹의 귀에 들어갔다. 나폴레옹은 접어 놓은 서류에 자신의 
서명을 해보라고 명령했다. 발덱이 서명을 마치자, 나폴레옹은 서류를 펴 들고 읽기  시작했
다. "벵상에 3개월 간 수감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동정심을 발휘해 2주 후  그를 풀어 주
었다고 전한다. 저녁 내내 계속되는 그의 가장 멋진 모험담  중 하나는 가장 비극적인 것이
었다. 터키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동료 네 명과 함께 아스완을 탈출하여 어떻게 동골라 사
막을 건넜는지 어떻게 동료들이 병과 허기에 지쳐 하나둘씩  죽어 갔는지, 4개월 동안의 온
갖 고생 끝에 어떻게 반죽음의 상태로 포르투갈의 진지에 도착하여 구조되었는지 등등을 막
힘 없이 들려주곤 했다. 어떤 날 저녁에는 이  모험담의 후속타로서 유명한 애국해적이었던 
쉬르쿠프의 사략선(전시에 적선을 나포할 수 있는 허가를 얻은 민간 무장선:역주)에 동승하
여 인도양에서 해적노릇을 했던 모험담을 들을 수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칠레 독립전
쟁에서 활약했던 이야기를 더 좋아했다. 사람들은 그가 코크레인 경과 함께 수백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치렀던 아슬아슬한 매복작전과 치열한 전투상황에 전율했고, 두 명의 백작이 
칠레를 탐험할 때 데리고 갔던 용병의  행동에 대한 생생한 묘사에 미소를 지었다.  1819년, 
그는 과테말라를 탐험했고 3년 후에는 런던에서 리카르도 알멘다리스라는 과테말라 출신 건
축가의 데생을 바탕으로 델 리오의 저서에 삽입될 판화를 제작하는 데 전념했다. 그는 판화 
제작에서 느낀 결정적인 경험을 요약하여 지리학회에 보냈다.  "런던에서 출판된 델 리오의 
저작에 모자라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저의 탓입니다. 그 문헌은 1822년, 매키 박사가 아메리
카에서 가져와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는 런던의 출판업자인 H.. 버스우드에게 그 책을 팔
았고, 그는  저에게 도판작업을  부탁했던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대부분의  도판  하단에는 
J.F.W.라는 이니셜이 들어 있고, 한곳에는 제 이름이 완전히 밝혀  있습니다. 델리오의 문헌
을 처음 보는 순간 저는 펜과 잉크로 그려진 그림이 정확성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현장을 확인한 다음 그려 보겠다는  은밀한 욕심을 키웠습니다."
  육십이 넘은 발덱은 팔렌케의 유적을 마음껏 그리기 위해 작은 오막살이에 1년 이상 기거
했다.
  1825년, 육십이 가까운 나이에 두번째 결혼식을 올린 발덱은 한곳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
리하여 그는 멕시코 서부의 미초아칸에 있는 은광에 기술자로  근무하기로 했다. 그러나 광
산에서의 생활은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약속한 계약기간이 끝나지  않았지만 그는 미련 없
이 광산을 떠나 멕시코시티로 갔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고대문명에 대한  관심을 더욱 깊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멕시코시티 국립박물관에 자주 들러 전시품을   그림으로 옮긴 발덱은 
이 그림들을 한데 모아 1827년 '멕시코 고대문물 모음'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마야 예
술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여러 유적지에도 발덱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
제 팔렌케의 유적을 그리겠다는 오랫동안  간직해 온 꿈을 이룰  차례였다.  멕시코 공화국 
부통령의 지원 아래 기부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금은 쉽게 모이지 않았다.  1년을  
기다리다 지친 발덱은 필요경비의 1/3밖에 안 되는 돈을   가지고 탐험을 떠났다. 1823년 5
월 팔렌케에 도착한 발덱은 십자가 신전 발치에  조그만 오두막을  짓고 짐을  풀었다.  그
리고 1년 넘게 오두막에 머물면서 건축물의 평면도와 입면도를 그렸고, 석상과 회반죽 부조
를 스케치했으며, 숲이나 사람들을 배경으로 고대의 유적을 보여 주는 풍경화를 제작했다.
  폭염과 모기떼, 후덥지근한 기후, 한치 앞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종일 내리는  폭우와 
싸워야 하는 험난한 생활에서 유적 주변의 수풀을 벌채하는 데 도움을 준 인디오나 혼혈인
말고는 그는 완전히 혼자였다. 그 모든 어려움을 견뎌내기 위해 이 60대의 노인에게는 남다
른 특별한 체력과 불굴의 용기, 무엇보다도 자신의 일에 대한 마르지 않는 정열이 필요했다. 
그의 작업은 킹스버로 경의 지원에 힘입어 계속될 수 있었다. 팔렌케뿐만 아니라 그는 마야
판, 토니나, 그리고 욱스말도 찾아가 스케치했다. 1866년, 발덱이 제작한 56개의 석판화가 브
라쇠르 드 부르부르의 '멕시코의 고대 유적, 팔렌케와 또 다른 멕시코 고대문명의 유적'이라
는 책의 삽화로 사용되었다.
  발덱은 19세기 전반부에 크게 활동했던 인물이다(1800년에 그의 나이는 서른넷이었다). 그
래서 당시 시대적 인식을 뛰어넘을 수 없었던 그는-브라쇠르 드 부르부르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그가 그렸던 유적들을 건설했던 위대한 문명은 고대 고전주의 문명의 세계에서 
기원을 찾아내야 한다는 사실에 공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마야 예술을 연구하면서 힌
두, 헤브루, 그리스, 이집트문명이 마야 예술에 끼친 영향을  증명해 줄 증거를 찾으려고 노
력했다. 그러나 그러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자신의  추론을 입증할 수가 없었
다. 어떤 때는 그럴듯한 증거를 찾기도 했지만 그것은 결코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정열이 학문적  엄밀성을 제치고 말았는데,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은밀히 사실을 왜곡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라서 매혹적이고 낭만적이며 약간은 신비
스럽기까지 한 발덱의 작품은 그 자신이 창조한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멕시코에서 11년을 보낸 뒤 파리로 돌아온 발덱은  멕시코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유카탄 
지역의 진기한 여행'이라는 책을 펴낸다. 그 책에는 마야 문명의 유적들뿐 아니라 당시  유
카탄의 풍물과 관습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놀랍게도  여든네 살의 노인은 겨우 
열일곱 살 된 젊은 영국  여성과 다시 결혼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가스통이라는 아들도 
태어났다. 말년의 발덱은 마르티르가에 있는 몽마르트르  아파트에서 수집품과 자신의 작품
에 둘러싸여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여전히 기사를 썼고 그림을 그리거나 전시회를 열
곤 했다.
  그는 평생을 통해 이룩했던 자신의 신화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그럴듯한 임종을 맞았다. 
아름다운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
했다는 것이다. 그의 백열번째 생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마야 문명의 진정한 발견자로 생각되는 존 스테판스는 1805년 뉴잉글랜드의 유복한  가정
에서 태어났다. 중앙아메리카 유적의 최초 발견자는 아니었지만, 글을 통해 대중에게 이  문
명을 널리 소개한 공로는 그에게 돌아간다. 스테판스의 등장과 더불어 마야 문명에 대한 낭
만적 접근방식은 종말을 고했다.
  
    제3장 학자의 시대
  대학에서 법률공부를 마치고 스물아홉 살이 되자 스테판스는 유럽과 동방 여행에 나섰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이집트, 아라비아,  페트레아와 성지 여행기'를 썼고, 곧  이어 '그리
스, 터키, 러시아, 폴란드 여행기'를 출간했다. 책이 호평받자 1836년  스테판스는 세번째 책
의 소재를 찾기 위한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런던에서 프레드릭 캐서우드라는 
젊은 영국인 건축가를 만났다. 캐서우드는 훌륭한 삽화가였을 뿐만 아니라 여행광이기도 했
다. 의기투합한 두 젊은이는 여행과 탐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캐서우드는 스테판스에
게 발덱의 삽화가 실려 있는 델 리오의 기록을 보여  주었고, 이것은 곧 스테판스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스테판스는 이러한 이국적이고 베일에 가려진 문명의 유적에 대한 기록이 대중의  무한한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직감했다.
  뉴욕에 돌아온 스테판스는 한 서점에서 발덱이 쓴  '유카탄지역의 진기한 여행'의 복사본
을 발견했다. 그 책에 담긴 예술성 높은 석판화는 유적의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그에게 확
신시켜 주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캐서우드에게 전했고 두  사람은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중앙아메리카에서는 중앙아메리카 연방(1838년까지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
르, 니카라과와 코스타리카 등이 속해 있었다)의 지지자들,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인디오 반
군들 간에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 여행을 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런데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부임을 기다리던 중앙아메리카 주재 미국 대리공사가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스테판스는 즉시 그 자리에 지원했고 정치계에 걸쳐 있는 연줄에 힘입어 대
리공사에 임명될 수 있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거의  10개월 동안 이루어지는 외교적이면서
도 고고학적인 위험한 활동을 수행하기 위한 여행길에 올랐다. 후일 캐서우드가 기술했듯이 
스테판스의 모험은 '종잡을 수 없는  외교적 업무와 폐허가 된 도시들에  대한 보다 유익한 
조사를 겸비'한 것이었다. 장시간에 걸친 여행기간 동안  스테판스와 캐서우드는 코판, 키리
과, 토니나, 팔렌케를 비롯하여 욱스말까지 두루 돌아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코판은 그들
의 발길을 가장 오래도록 붙잡았다. 그들은 이곳의 건축물과  유물을 그림을 곁들여 상세히 
묘사했다.
  고고학적 연구와 모험담을 담은 스테판스의 여행담은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
  스테판스는 1841년에 출간한 '중앙아메리카, 치아파스, 유카탄  여행기'에서  탁월한 이야
기꾼으로서의 재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 책에서 고고학적인 서술은 1/3정도가 할애되었
을 뿐이다. 대부분은 당나귀, 없어진 음식물, 급작스런 소나기, 병사들에게 체포당한 일 따위 
모험담과 그들이 지나온 아름다운 풍경과 마을과 도시에 관한  세세한 묘사, 여행중 만났던 
사람들에게 받은 인상, 중앙아메리카의 정치상황에 대한 분석, 심지어는 정복과 식민지 역사
에 관한 서술 등이 등장한다. 곳곳의 유머러스한 표현과 섬세한 감수성이 돋보이는 이 책은 
참다운 인간의 저작으로 평가되었다.
  스테판스는 선배들이 보여 주었던 천진난만한 열광과 절제되지 않은 상상력 대신  간결한 
표현, 신중한 해설과 함께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했다. 스테판스는 현대적인 시각으로 그 주
제를 다루었다. 그의 주장은 확신에 차 있었고, 판단은  믿을 만했다. 왜냐하면 그의 회상은 
언제나 확실한 지식에 근거해 있었기 때문이다.  스테판스는 선배들의 발견의 행적만큼이나 
그 정복의 역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발길에  닿았던 폐허에서 살고 있던 주민들
을 가리킬 때 마야 사람이라는  단어를 피하려고 했다.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기원에 관해서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테판스는  여러 가설을 검토한 끝
에 문제의 주민들이야말로 그 지역의 토착민이며, 불멸의 건축가이자 독창적인 조각가, 참된 
문자체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우상들(그들은 여전히 비석들이라고 
하지 않았다) 위에 새겨진 인물은 분명 그  부족의 족장들이었다. 스테판스는 발덱이 그 건
축물들 위에 조각된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던 코끼리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부정했
다.
  캐서우드의 예술적 정확성은 스테판스의 엄격한  서술방식에 잘 부합했고 당대의  새로운 
기준을 설정했다.
  캐서우드의 작품집에는 1844년 런던에서 출간된 유적을 소재로 한 석판화집에서뿐만 아니
라스테판스의 앞서 나온 두 저서에서 삽화로 쓰였던 풍경과 폐허, 유적의 판화가  포함되었
다. 판화들은 매혹적이었고 시정을 물씬 풍길 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사실성을 조금도 희생
시키지 않았다. 캐서우드는 유적의 독특한 균형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사생기를 많이 활
용했다. 그러나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특히 코끼리 머리라든가 설형문자와 같은  것은 
첨가하지 않았지만 상형문자들도 자세히 나타내지는 못했다. 
  그들은 유카탄 탐험을 시발로 여행을  계속할 예정이었으나 캐서우드가 욱스말에서  병이 
나 두 사람 모두 미국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1842년 10월, 그들은 마지막 여행기를 완성하기 위해 유카탄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그들
은 그곳에서 이듬해 6월까지 머물렀으며, 몇 달 후 책이 출간되었다. 이번 책은 지난번 책에 
비해서 고고학적인 내용을 많이 실었다. 즉, 그들이 답사한 44곳의 유적지에 대한 상세한 서
술과 함께 그림도 곁들인 것이다. 캐서우드는 유물이나 조각품보다는 건축물을 잘 그렸는데, 
여기에서도 아주 좋은 작품들을 남겼다. 유카탄에 관한 저작은 중앙아메리카에 관한 것만큼
이나 성공을 거두었는데, 19세기 내내 매년 재판을 찍었다. 스테판스가 마야 문명의  고고학
에 미친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사람들이 폐허의 잔재를 찾아 밀림을 탐험하는  동안 또 다른 사람들은 잊혀진  고문서를 
찾아 도서관을 뒤졌다.
  연구자의 관심을 끈 것은 세 가지 종류였다. 먼저 고문서 사본들이었다. 이것은 마야의 상
형문자로 쓰인 필사본으로서, 스페인인이 들이닥치기 전에 작성된 것이라야 했다.  두번째는 
정복 이후 토착민의 손으로 쓰인 마야인의 문헌이 라틴  문자로 번역된 것이었다. 세번째로 
스페인 정복자들, 사제들, 그리고 관리들의 연대기였다.
  마야인의 수천 권의 책을 썼지만 오늘날 단 세 권만 전해질 뿐이다(네번째 책의 일부분이 
최근 발견되었다). 마야인의 필사본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을 선교사들의 탓으로만 돌리는 
경향이 있는데, 실은 단순한 부주의도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필사본들이 
호기심의 대상으로 스페인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서 보존되거나 버려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
다.
  1739년, 드레스덴 왕립 색슨 도서관장이던 요한 괴체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갔다. 그는  이
탈리아로 가는 도중에 거친 빈을  여행하는 동안 상형문자로 된 필사본을  하나 샀다. 후에 
이 필사본을 드레스덴 고문서 사본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빈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스페인의 샤를 5세가 이 도시에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1519년 코르테스가 멕
시코에서 계속되는 정복활동중에 약탈한 전리품들을 보내 온 것이다. 그중에는 인디오의 필
사본들과 동유카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드레스덴  고문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1519년에서 1739년에 이르는 동안 이 문헌이 어떤 사람들에 의해 거쳐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날 이후 이 문헌은 드레스덴의 도서관 서고에서 근 1세기 동안 묵혀 있었으며, 단지 목록
표에만 기록이 되었다.
  한편, 1815년 옥스퍼드 대학에 재학중이던 에드워드 킹, 즉 젊은 킹스버로 경은 유명한 보
들레이안 도서관에서 멕시코(마야가 아닌) 필사본 연구에 빠져 있었다. 그는 다른 토착민이 
쓴 사본들이 로마, 파리, 드레스덴, 빈에서 멕시코시티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 걸쳐 산재되
어 존재하고 있음에도 각각에 대한 복사본은 하나씩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여행
가와 탐험가가 쓴 이야기도 대개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래서 킹스버로
는 평생 동안 신대륙 발견 이전 멕시코와 관련된 자료의 사본을 가능한 한 많이 출간하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학자들은 현존 자료들을 손쉽게 구해 비교하기가 수월하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드레스덴 고문서 사본이 몇 번 출간되었으나 원본에서 누락되었던 세세한 부
분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오늘날까지도 킹스버로판이 권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또한 발덱
의 탐험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관대한 성격과  계획의 방대함으로 인해 
파산했고, 급기야 감옥에 갇혔으며, 그곳에서 병을 얻어 1837년,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두번째 사본이 파리 국립도서관 휴지통에서 발견되었다.
  1859년 동양학과 아메리카학의 젊은 연구자였던 프랑스의 레옹 드 로스니의 몇몇  동료와 
함께 프랑스 아메리카 학회(현재 아메리카 학회)를 창립했다.
  로스니는 "새로운 모임의 회원들에게 연구할  과제를 제공"하고 문자해독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개인 또는 공공 소장품 속에 잊혀져 있을 법한 고문서를 찾아다니
기 시작했다. 당시 국립도서관에는 멕시코계 문헌의 목록조차 작성되어 있지 않아서 로스니
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수많은 자료들을 넘기고 있던 어느 날, 버린 허섭쓰레기만 담겨 있을 
것 같은 휴지통에서 마야의 두번째 고문서를 찾아냈다. 그는  이 고문서를 사진으로 찍어 5
년 후 '페리시아누스 사본' 또는 '파리 사본'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세번째 사본은 앞선 두 고문서보다도 더 우연히 발견된 것 같다. 이것은 중앙아메리카 연
구에 대단히 흥미를 느끼고 있던 인물들 증 하나인 브라쇠르 드 부르부르 신부와 밀접한 관
련이 있다. 브라쇠르 신부는 성직자로서의 임무와 학자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일찍
이 그는 미국과 로마를 여행했는데 그곳에서  읽은 책은 신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시켰
다. 31세에 멕시코행 배에서 그는 우연히  멕시코 주재 프랑스 전권공사를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곧 브라쇠르 신부를 프랑스 파견 사제장으로 임명되게 했다. 그로 인해 브라
쇠르는 박물관의 고문서와 유물을 마음껏 뒤져볼 수 있었다.  그는 간혹 멕시코를 벗어나서 
다른 고고학적 유적지를 가 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인디오의 언어에 가장 매력을  느꼈다. 
그는 멕시코에서 지금도 통용되는 아즈텍언어인 나우아틀어를 배웠으며, 고문서의 틈바구니
에서 첫번째 멕시코 고문서를 발견했다. 그는 이것을  나우아틀어 선생의 이름을 따서  '치
말포포카 고문서'라고 불렀다.
  지칠 줄 모르는 문헌의 발굴자 브라쇠르 신부는 유럽으로 돌아와 대단히 많은 글을 발표
했다.
  과테말라의 대주교는 프랑스에서 온 젊은 사제에 호감을 갖고 그를 키셰족의 거주지 한복
판에 있는 라비날의 주임사제로 임명하여 사제와  연구자의 임무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그곳에서 인디오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매우 값진 문헌
들을 발견했다. 그중에는 마야-키셰족의 서사시이자 역사책이며  신화  모음집인 '포폴 부'
와 함께 흔치 않은 마야인의 희곡 중 하나인  '라비날  아치'가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
지 않아 그는 칵치켈 부족 사이에서 산 후안 사카테페케스   신부로 명명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칵치켈 부족의 역사를 적은 '솔로라의 회상록'을 발견했다. 1857년 그는 유럽으로 돌
아가 보다 왕성한 저작활동을 펼쳤다.  1857년에서 1862년 사이에, 키셰어의 문법과  어휘는  
말할 것도 없고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의 문명국가들의 역사',  '포폴 부'의 번역본 그리고 
'테우안테펙 지협여행'을 출판했다. 그동안에 그는  마야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 중의 하
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디에고 데  란다의 '유카탄 지역 문물들의  제관계'였다.  그는 
1864년 이 책을 번역, 출간했다.
  브라쇠르 신부는 한 수집가에게서 고문서 사본 한 부를 기증받는 엄청난 행운을 얻었다.
  1866년 발덱의 삽화가 첨가된 팔렌케 유적 보고서를 출간할 때 브라쇠르 신부는 이 분야
에서 전문가로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많은  책을 출간한데다가 여러 학회
에 적극 참여했고, 소르본에서는 신세계의 고고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마드리드 여행길에 그는 로얄 아카데미 역사학회를 방문하여 탁월한 고대 고문서  수집가
인 돈 후안 데 트로 이 오르톨라노를 소개받았다.  그는 브라쇠르에게 애지중지하던 소장품 
하나를 보여 주었다. 브라쇠르 신부는 그것이 언젠가 팔렌케의 비석에서도 본 적이 있는 것
으로, 란다가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신부가 흥분하는 것을 본 고문서  수집가는 
기꺼이 그 고문서를 기증했다. 이 고문서는 원 소유주 이름의 일부를 따서 트로아노 사본으
로 명명되었다. 브라쇠르는 이 고문서를 2년 반 동안  가지고 있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연구
한 뒤 1869년 출간했다. 그리고 원본은 다시  후안 데 트로에게 돌려주었으며, 6년 뒤  그가 
세상을 뜨자 그의 아들은 이 원본을 마드리드의 고고학 박물관에 팔았다.
  익명의 상인에 의해 수상쩍은 경로로 거래된 세번째 사본.
  세번째 사본의 기구한 내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마드리드의  돈 후안 이그나시오 미
로라는 수집가가 욱스말에서 유출된 조각품 세 점과 코르테시아노 사본으로 알려진  고문서 
한 점을 바로 그 박물관에 팔았다.  이 고문서는 에르난  코르테스의  후손들에게서 구입했
는데 그 정복자가 소유하고 있던 세 권의 멕시코 고문서 중의  하나였다. 그 고문서가 파리 
국립도서관에 이야기될 때 레옹 드 로스니라는 젊은 학자는 견본으로서 원본의 사진 두 장
이 붙어 있는 그 고문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로스니는 이들 중의 하나를 출판했다.
  1880년 그는 스페인 정부가 그 원본을 구입했다는 사실을 듣고 그것을 보려고 서둘러 마
드리드로 달려갔다. 로스니가 원본을 찬찬히 살펴본  결과 코르테시아노의 첫장이라고 추측
되었던 것이 사실은 또 다른 문헌의 연결부라는 것을 알아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는 검
토를 계속한 결과 그것이 트로아노 고문서의 마지막 장임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결국 같은 
사본이 두 조각난 것이었으며, 이후 트로-코르테시아노  사본으로 명명되다가 1945년부터는 
마드리드 사본이라 불렀다.
  1864년에는 이 지구상에서 단 두 개의 마야 고문서만이 알려져 있었다. 1865년에 다른 하
나가 거래되었고, 1872년에는 네번째 사본이 나타났다.  그러나 후에 두 사본은 한 권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누군가 원본을 두 조각  내어 수집가들에게 판 것
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을 판 사람이 입을 다물고 있어서 수수께끼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남아 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브라쇠르 신부는 자신에게 좋게 작용하던 강렬한 낭만적  상상력이 
오히려 기묘한 망상으로 변해 갔다. 그는 트로아노 사본이  처음에는 지주가 사용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달력같다고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이 사본도 다른  모든 종교적이고 엄숙한 마
야의 문헌처럼 사라진 아틀란티스의 역사를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의혹이 사라졌고, 불확실함도 끝났다. 나는 한걸음 한걸음 이 기이한 영상들의 신비
를 파헤치고 밝혀 마침내 마지막 베일이 벗겨지고 그 비문들을 완전히 읽기 시작했다."  로
스니가 브라쇠르 신부에게 트로아노 사본의 앞부분을 끝부분으로 잘못 읽고 있다고  지적했
을 때 브라쇠르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이시스 신전의  푸른 베일을  벗겨 냈다."
고 외치면서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1839년 8월, 은판 사진술의 출현으로 지식인 세계는 희망에 부풀었다. 사진의 발전으로 말
미암아 사진기를 동반한 탐험가 세대가 출현했으며 그들은 '객관적인' 진실을 찾아 나섰다.
  
    제4장 탐험을 떠난 사진가
  19세기 중반 서구 학자들은 치아파스나 페텐, 그리고 유카탄의 유적들이 그리스나 이집트 
혹은 힌두 문명과 닮지 않은  하나의 문명권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마야 
문명은 새로운 가치를 가진 중요한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영토의 범위, 추측  가능한 
문명의 존속기간, 화려한 예술과 건축물 그리고 황홀한 복잡성  등은 서구문명과 비견될 만
했다.
  마야 문명의 유적은 더 이상 화가를 위한 아름다운  장식물도, 몽상가나 시인의 상상력을 
고취시키는 특별한 장소도 아닌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문명화된 민족'의 흔적이었다. 이제 
마야 문명은 학문적으로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주제가 되었다. 그 당시, 마야인은 인간 제물 
의식 때문에 야만인으로 생각되었던 아즈텍인보다 우월하게 보였다. 마야 문명은 신중한 주
의와 과학적인 객관성으로 연구되어야 할 가치가 있었다. 사진술의 발달로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두번째 여행부터 스테판스와 캐서우드는 은판 사진기를 가지고 떠났다. 그들은 우선 
자신들을 시험적으로 찍어 본 뒤 메리다의  젊은 아가씨들을 찍어 보았고 이윽고  욱스말의 
유적을 담았다. 그러나 몇 번 성공하기는 했지만 결과가 전반적으로 흡족하지 않아 끝내 이 
기계 사용을 포기하고 말았다. 오직 한 영상만을 재생할  수밖에 없는 사진기가 그들에게는 
별 효용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진술은 극히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탐험가들은 수백 킬로는 족히  되는 장비들을 
끌고 다녀야 했다.
  마야 유적을 찍은 사진을 최초로 출판하여 사진기의 명예를 회복시킨 이는 데지레 샤르나
이였다. 그는 여행광으로 뉴올리언스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스테판스의  책을  
읽고서 자신의 천직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멕시코와 마야의  유적지를 탐험하여 그 영상
을 섬세한 은판 위에 담기로 했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   장관들을 찾아다니며 약속을 기
다리고 있었는데, 1857년 마침내 교육부의  보조금을 얻어냈다. 그는 미국을 경유하여  그해  
11월 베라크루스를 향해 항해했다. 그리고 1858년 9월,  1,800킬로에 달하는 짐을 갖고서 멕
시코시티를 떠나 오아삭카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부담스러운 짐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따
랐다. 게다가 사진기와 받침대 외에도  갖가지 화학물질과 판유리를 며칠  동안이나 노새의 
등에 실어 운반하기 위해서는 모든 장비들을 하나하나 신경 써서 포장해야  했다. 여정중에 
그 나라는 정국이 불안정했다. 따라서 그로 인해 자신의 소중한  장비를  잃고 싶지 않았으
므로 시간은 더 걸리지만 안전한 다른 경로의 노새 몰이꾼에게  짐의  운반을 부탁했다. 오
아삭카에 도착한 뒤 샤르나이는 장비가 도착할 때까지 다섯 달이나 기다려야  했다. 아무것
도 할 수 없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던 그는 대용품을 사용해서라도 무언가를 하기로 결심
하고 우선  미틀라 지역부터 찍어 보기로 했다. 미틀라는 험한 산간지대로, 눈 덮인 산은 높
게 갈라진  좁은 계곡을 끼고 있었다. 이런 악조건 때문에  그의 작업은 성공하기 힘들었으
며, 그는 몹시 절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이런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결국 샤르나
이는  '아메리카의 도시와 유적'이라는 일련의 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다. 그는 47장의 사진
과 사진석판 두  본을 첨가한 커다란 값비싼 사진집을 만들어  낸 것이다. 여기에는 미틀라
를 비롯하여 밀타, 팔렌케, 이사말, 치첸 이트차, 그리고 욱스말까지 망라하고 있었다. 이 작
품은 1863년에 출간되었으며,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사진기는 건축물의 균형미를 잘 담았다. 그러나 시간은 유물을 손상시켜 갔다.
  샤르나이가 욱스말과 치첸 이트차에서 성공적으로  포착한 풍경은 구조물들의 놀랄  만한  
기념비적 성격과 풍부한 장식을 동시에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풍경들은 쇠락의 슬
픔을 깃들이게 한다. 건물의 정면은 깨져서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담은 무너져 내렸다. 관
목과 파편으로 뒤덮여 있는 언덕 꼭대기에 신성한 손으로 지어진 듯한 정교한 신전의 원형
은 거의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본질은 남아 있게 마련이다. 사진의  전
경에는 멋대로 자란 나무나 덤불 때문에 불명확하게 보인다.  그래서 사진가와 인부들이 관
목들을 제거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나무는 기적과도 같이 돌무더기 사이를 비집고 나
왔으며, 나뭇가지와 칡뿌리가 정문의 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덥수룩한 관목이 사원의 꼭
대기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샤르나이는 이윽고 마다가스카르, 자바,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를 경유하는 또 다른  촬영
여행 계획을 추진했다. 1864년, 그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지원을 받고 있는 탐험대와 함께 멕
시코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다시 미국과 남아메리카로 향했다. 1880년, 마침내 그의 꿈이 
이루어졌다. 멕시코를 처음 탐험한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 사진가이자  고고학자로서 그의 
작업을 게속하게 된 것이다. 이  탐험의 일부는 프랑스계 미국인이며  문예옹호자인 피에르 
로리야르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그해 3월부터 11월까지 샤르니아는 주로 멕시코 중부지방
의 툴라와 테오티우아칸을 탐사했다. 그는  마야의 서쪽 코말칼코를 찾아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관목을 치우고 파괴된 건축물을 측량하는  동시에 구름이 걷힐 때마다 사진을  찍었
다. 그는 팔렌케에서도 5주일을 힘들게 보냈다. 벌목을 위해 고용했던 일꾼들이 지나치게 더
디게 일을 하는가 하면 멋대로 작업장을 이탈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거의 매일 비가 내렸기 
때문에 장비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사진기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샤르나이는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진기를 택했지만,  결국에는 딱딱한 종이를 사용하
여 주형을 떴다.
  샤르나이는 얕은 부조 위에 축축한 신문지 여섯  겹을 겹쳐 붙인 다음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말렸고 비가 많이 오거나 하면 불에 말렸다. 그러나 이 방법은 위험천만이었다. 1880년 
1월 26일 밤에는 갖고 있던 주형들이 모조리 불에 타 그가 자신의 수집품을 재건하기  위해
서 열흘 간의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했다. 그는 이번에는  본래의 조각품들을 세 분야로 나
누어 정밀하게 재생했는데 이 주형들은 오늘날 파리 인류학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1858
년에서 1860년 사이에 찍었던 사진에 비해 그때 샤르나이가 찍은 사진은 오래되어 그 사진
집 속에 보관된 본래의 모습대로  세상에 나오지 않았지만, 판화로 제작되어   여러 기사와 
책의 삽화로 사용되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885년에  출간된 '신세계의 고대도
시'였다. 여기서 축소될 때 잃었던 사진의 자연스러움을 되찾았다.
  샤르나이는 이제 밀림 속에 주둔해 있던 야영지를 찍는 것과 자신의 탐험과정에서 발견한 
유물과 팔렌케 궁정에 마련된 거처를 담는 것이 매우  행복했다. 따라서 이후의 샤르나이의 
사진에서는 촬영자가 소재에 훨씬 자연스럽게 접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장면 또한 
예전에 비해 정형화되지 않아서 훨씬 덜 어색해 보인다. 팔렌케 탐사 이후 샤르나이는 유카
탄의 유적들(이사말, 치첸 이트차, 카바, 욱스말 등)을 다시 방문하여 어디선가 들은  미지의 
유적을 찾아 거의 보름 간에 걸친 길고도 험난한 장정을 결행했다. 그는 오늘날 약스칠란이
라고 부르는 유적지의 최초의 '발견자'가 되고 싶어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하기 몇 시간 전
에 이미 다른 탐험가가 그곳에 도착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몹시 낙담하고 당황했다. 그는 
미지의 인물에게 초청장을 보냈고 다음날 두 사람은 만났다.  샤르나이는 자신보다 먼저 이 
곳을 찾아낸 스물두 살 된 젊은 영국 청년이  '사교계의 신사'라는 사실을 즉각 알아차렸다. 
젊은 신사는 자신을 런던 피카딜리가의 성 제임스 클럽 소속 알프레드 모슬레이라고 소개했
다. 프랑스 학자가 너무 상심해하자 모슬레이는 그를 위로하려고 "저는 재미로 여행하는 아
마추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문가이시니 이 도시는 선생님이 발견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샤르나이는 젊은이의 호의에 무척 감동했지만 영광을 젊은 영국인과 함께 나누리라
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후원자의 이름을 따서 이곳을 '로리야르시'라 명명했다.
  샤르나이와 모슬레이처럼 대조적인 성격도 흔치  않을 것이다. 라틴족의 불  같은 기질과 
차갑고 냉정한 앵글로색슨족의 전형
  인정 많고 외향적이며, 말 많고 허풍이 심한 샤르나이로서는  자신의 명예를 보장하는 발
견과 그 이론을 펼치고 싶어했다. 한편 신중하고 논리정연하며 냉소적인 모슬레이는 샤르나
이의 요란한 성격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분노했는지 자신의  일기장에만은 적어 놓았다. 그
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샤르나이는 
모슬레이에게서 딱딱한 종이에 주형 뜨는 기술을 배웠다.
  알프레드 모슬레이로서는 두번째의 중앙아메리카 여행이었지만 고고학적 사명을 띠고  방
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2년 전 스테판스의 책을 읽고서 그는 키리과와 코판, 티칼을  포함한 
과테말라를 여행하고자 했다. 키리과에서 발굴된 한 조형물의 이끼를  털어 내는 작업을 하
면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조각의 기묘한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우연히 내가 
몸을 굽혔다가 찾아낸 이 유물들이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
을 깨달았다. 오늘의 작업을 통해서 나는 이곳 중앙아메리카의  고고학에 대해 정말로 흥미
를 갖게 되었다. 단지 영국의 혹독한 겨울날씨를 벗어나기 위해 단행했던 이 여행은 고고학
적 탐사와 발굴을 목적으로 하는 영국의 일곱 탐사대가 그 뒤를 연이었다."  모슬레이는 식
민지의 행정관리직을 사임하고 트리니다드를 시작으로 해서 퀸즐랜드, 오스트레일리아와 피
지섬까지 갔다. 그의 새 계획에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그는  우선 
열대지방의 기후와 환경에 익숙했고, 자신이 머무르는 지역의 토속어와   문화에 관심을 가
지고 있었으며, 사진에 대한 그의 탁월한 재능도 있었다. 1850년 공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
는 개인적으로 특별히 부자는 아니었지만, 살기 위해 일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모슬레이는 성급하게 결정된 이론은 믿지 않았고 신뢰할 만한 자료를 중시했다.
  모슬레이는 샤르나이가 폐허로 남은 오래된 도시들에 대한 정교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냉
정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이 문화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남아 있는 유적을 조
사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물론 아직도 땅 밑에 묻혀서 곡괭이와 쟁기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
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마야의 세계도 있다(그들의 건축물과 조
각작품 등). 스테판스와 캐서우드,  샤르나이가 그런 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이 문명에 대해 이해의 폭을 더욱 넓히고 싶다면 완전히 신뢰할 만한 자료들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달리 얘기하자면 건축이나 조각상과 상형문자본은  최대한 정확하게 재현되어야 한
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모슬레이는 세 가지 기술을 사용했다.  사진술과 주형 제조, 그리고 
데생이었다. 1882년 그는 샤르나이에게 탐험의 성공을 보장할 만한 방법을 알려 주었다.  당
시는 마른 아교로 만든 음화(네가티브 필름)가 발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래
서 미리 판유리를 준비한다면(따라서 아교 같은 것으로 급하게 덧칠을 해야  할  필요가 없
게 됨) 노출 후에 바로 현상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기술의 진보는 탐험 사진가들의 
무거운 짐을 벗게 해주었다.
  모슬레이는 샤르나이가 전수해 준 주형  제조기술을 더욱 완벽하게 발전시켜  사진술만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코판의 비문에서 볼 수 있듯이 더욱 
선명하면서도 모양이 덜 와해된 고부조들을 재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시간
과 비용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나의 예로 코판에서의 작업의 경우, 꼬박  3개월이 
소요되었으며, 견본은 무려 4톤의 석고와 250kg의  종이가 소비되었다. 따라서 인디오 수송
대들이 둘세강 상류에 있는 이사말까지 주형을  운반하는 데는 여러 날이 걸렸고  그곳에서 
배로 뉴올리언스까지 수송되었다. 그리고 다시 다른 배로 영국에 보내졌다. 모슬레이가 제작
한 주형은 실물을 거의 완벽하게 재생했다는 점에서 전시회와 박물관 등에서 크게 호평받았
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군대로 파병되었던 말러는 멕시코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곳에 정착하기
로 결정했다.
  위대한 탐험가 시대를 마지막으로 장식한 사람은 테오베르트 말러였다. 그는 1842년 로마
에서 독일계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칼스루헤에서 기술과 건축을 공부했다. 그후 그는 빈으
로 가서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했다.  그리고 막시밀리안 황제가 멕시코  왕위를 계승하자 
그는 멕시코 제국 군대에 자원하여 1867년 황제령이 시행될 때까지 18개월 동안 각종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민간인이 되자 사진기를 메고 멕시코   각지를 여행하면서 은판이나 
필름에 도시와 유적들을 담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도 가장 찾기 쉽고  사진에 담기도 적
합한 미틀라를 시발로 여행을 시작하여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팔렌케를 1877년 한 해만도 
세 번이나 방문했다. 이듬해 유럽으로 돌아온 말러는 자신의 유산권을  둘러싼 기나긴 소송
에 휘말리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 아메리카학회는 멕시코에 대한 지식과  그가 찍은 사진의 
가치를 인정하여 그를 초빙했다. 그는 체류기간을 이용하여 기사를 작성하거나 지리학회 등
에서 환등기를 이용하여 강연을 하기도 했으며, 마야에 관한 많은 서적을 읽기도 했다.
  1884년 말러는 재판에 이긴 뒤 약간의 유산을 가지고 멕시코로 돌아와 마야의 유적 발굴
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유카탄의 조그만 도시인 티쿨에 정착한  뒤 유적을 여러 차례 탐방
한 뒤 이를 사진 찍었는데,  그중에는 그가 처음으로 찍은 것도  여럿 있었다. 1895년, 그는 
인디오 몇 명을 대동하고 유적과 그 주변을 벌채하기 위해 페텐유적지와  우수마신타강까지 
갔다. 그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촬영하기 좋은 지점을 찾았고, 필요한 경우에는  기구
를 받쳐 놓을 발판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셔터를 작동시키는 손잡이를 누르기 위해서 바
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거나 구름이 걷히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기도 했다. 그는 현장을 
떠나기 전에 찍었던 것을 언제나 현상해서  검토한 다음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에는 
재작업에 들어갔다.
  1898년 하버드 대학의 피바디 박물관은 그에게 마야와 관련된 일련의 전시회를 개최할 것
을 제의했다. 이 전시회에서 그의 유명한 사진들을 비롯하여 크로키, 건축물의 평면도, 지도, 
그리고 기록 등을 포함한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치아파스와 우수마신타 계곡, 그리고 페텐에 
산재한 소규모의 유적들과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중요한 유적(이를테면  피에드라스 네그
라스와 나란호)들이 처음 소개되었다.  1905년 말러는 네번째  마야탐험대를 다른 사람에게 
맡긴 자금주와 언쟁을 벌였다. 그 때문에 절망하기도 했지만 그는 강제로 후퇴할 만큼 체념
을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 그는 유럽에 2년 동안 더  머무르다가 
1907년 메리다에서 눈을 감았다.
  1891년까지 대부분 탐험가와 고고학자는 외부에 드러난 자취만을 연구하는 것으로 만족했
다.
  말러도 그가 방문했던 많은 유적지에서 직접 발굴작업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최초로 학술
팀을 구성하여 발굴작업을 시행한 것은 1891년에서 1895년 사이에 피바디 박물관의  주관하
에 이루어진 코판 유적에서였다. 그러나  이 발굴작업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유적의 규모나 연대, 그리고 그 지속기간 등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던 것
이다. 
그 건축물의 본래의 목적 또한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겨우 공
예품들이 도자기인지, 비취나 뼈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분간하는 정도였다. 그 많은 무덤  중 
극히 소수만 드러난 상황에서 어떻게 그들의 장례의식에 대해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었겠
는가?
  그러나 수백 개에 달하는 석조물을 사진에 담고 그림으로 옮겨지는 성과가 있었고 마야인
과 그들의 역사에 대한 주요한 연대기뿐만 아니라 고문서 사본 세 개가 출판되었다. 이것들
은 중요한 연구과제를 제시했다. 수천 가지의 상형문자와 수백  종의 조각과 그림이 해독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스테판스를 사로잡았던 다음과 같은 감동은 팔렌케 비문 신전에서 온통 상형문자로  덮인 
석판을 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된다. "비록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이 그림들을 
보면서 느낀 감동을 굳이 묘사할 필요가 있을까."
  
    제5장 돌에 새긴 상징
  캐서우드가 처음으로 마야의 사원과 조각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재생하려고 했다. 델 리오
의 보고서에는 각각 여섯 개의  상형문자가 적힌 두 개의 비문이  있었다. 하지만 갈린도는 
한 표본만을 제시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들은 이 상징적 기호들을 충실히 재현해 보
려고 시도하지 않았고 사실 그것은 알아보기도 몹시 힘들었다.  마야의 문자들이 어떤 모양
인지 보여 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 점에 있어서  탐험가나 동반한 화가들을 낙심시켰음이 
분명하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지도  못할 글자를 베껴 가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
가? 그러나 스테판스는 미래의 학술적인 발전에 희망을 걸고  있었지만, 그 역시 원본의 난
해함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1866년 브라쇠르는 "상형문자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찾아냈다. 이제는 이것을 이용하
는 방법만 찾아내면 된다."고 주장했다.
  마야 문자 해독의 역사는 1864년 란다가 펴낸 '유카탄 지역  문물들의 제관계'부터  시작
된다. 란다는   우선 20일(kin)의  18주기(uinal)는  360일이   되는데, 여기에  불길한  날   
5일(uayeyab)을 더하여 1년을 365일로 계산했다고 설명한다.
  "360일에는 20개의 문자나 상징적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머지 5일에는 불길하고 액
운이 따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한편 마야의 연대기 기록자는 각각
의 상징을 그림으로 나타냈으며 그 아래에 칸, 치찬, 시미, 마니크 등의 이름을 붙였다. 또한 
란다는 축제와 매달 거행되는 의식에  대해서도 묘사했으며, 이것의 명칭을 나타내는  포프, 
우오, 소츠, 체크 등의 상형문자를 제시했다. 란다는 이들이 사용했던 알파벳 체계를 이해하
고 싶었으나, 그들의 서술체계를 알파벳 순으로 아는 데 그쳤다. 한 예로 주교와 그의  정보 
제공자인 교육받은 마야인 사이에 있었던 소통 불가능한 대화의 한 토막을 보자. 란다는 마
야어로는 단음절이지만 스페인어로는 두  글자로 쓰여지는 단어를  골랐다. "그들의 문자를 
표기하기 위해서는 스페인어로는 그 단어가 두 개의 문자로 표기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이해
시켜야 했다."
  예컨대 마야 말로 '하'(ha:물을 의미한다)를 보자. 스페인어로는  두  개의 알파벳으로 쓰
여지는 것이다. 즉 h(스페인어로 '아체'로 발음된다)와 a('아'로 발음된다). 따라서 인디오는 
스페인 주교가 원하는 바에 가장 가까운 문자들로 글을 썼다.  즉 '아'에 대한 기호 하나 그
리고 '체'에 대한 기호,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 결과적으로 그는 스페인어 문자의 발음만
을 옮겨 버린 것이다. 만약 영어   '기차(wagon)'를 이 방법대로 인디오에게  쓰라고  하면 
알파벳 발음대로 '더블유에이지오엔'이라고 쓸 것이 뻔하다. 그러니 두  사람 사이에 의사소
통이 될 리 만무했고, 오히려 점점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란다가 인디오에게 무엇
이든  좋으니 한 문장만 써 보라고 하자 백인의 방법에  진력이 난 인디오는 마 인 카티(싫
소!)라고 갈겨썼다고 한다.
  마야의 달력을 해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학자들은 그 날짜가 무언가를 세고 있다는 사
실을 알지 못했다.
  애초에 해독자들이 숫자와 달력 앞에서 그토록 집착한 이유는 그들이 란다의 정보만을 토
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쇠르 드 부르부르, 그리고 레옹 드 로스니 등도 문제의 '알
파벳'을 이해하고 다른 연구에 응용하고 싶었으나  헛일이었다. 푀르스테만과 굿맨 등도 고
문서 사본과 기념물에서 날과 달을  표시하는  상형문자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했다.   그들
은 우선 달력의 기본 요소에서 시작해서 점차 다른  것들을 풀어 나감으로써 마야인이 창안
했던  그 주기를 알아내게 되었다. 그들의 작업은 비석에 새겨진  달력의  상대적 중요성에 
따라 보다 쉬워졌다. 예를 들어 팔렌케에 있는 96개의 상형문자가   있는 패널 상징의 거의 
절반은 달력에 관한 것이고 다른 특이한 의미는 없었다.
  흔히 연구자들은 풀리지 않는 다른 부분들은 제쳐 두고라도 자신들이 고생스럽게  이해하
기 시작한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일찍이 마야인이 일정한 간격(흔히 5년)을 두고 비석
을 세웠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마야인의 '비석 숭배'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또한 마야
인을 시간 숭배자로 만드는가 하면 일정한 시기나 숫자를 표현하는 사람의 모습을 닮은 상
형문자들에 대해 '신'이라는 명칭을 남용하곤 했다.
  고문서 사본과 건축물에는 대부분 그림이 첨가되어 있다. 글자만으로 구성된 것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그림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면 함께 쓰인 문자를 해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
고 그 반대의 경우도... 즉 만약 본문이 그림을 설명하는  식이라면 그림이 비문을 설명하고 
있는 셈도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림들에 대해 그 이상의  이해와 해석 요컨대 마야인에 대
한 소개와 그들의 풍습, 종교생활에 대한 다량의 정보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그림을 해석하기 이전에 이것이 구성하고 있는 이미지를 분명히 보아야   할, 즉 서로 다른 
모티프들의 의미를 구분하고 식별할 필요도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뱀의 의미를  결정하기
에 앞서 그림 안에 그려져 있는 뱀 모양을 식별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 일은 전
문가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마야인의 예술은 자연 그대로를 모방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들의  회화는 눈에 보이는 대
로가 아니라, 이해하는 대로 표현했다. 때문에 재현된 사물의 실제 모습은 최초의 형태를 거
의 잃어버리는 데까지 변형되었다. 마야의 예술가들은 사물의 황금률을 바꾸는가 하면, 눈을 
파서 상형문자를 새겨 넣기도 하고, 턱을 깎아 냈으며, 뱀에게 비취로 만든 커다란 귀를  장
식으로 달아 주기도 했다. 또 새의 날개를 파충류의 턱처럼 그리기도 했다.
  한 그림에 여러 영상이 혼재하여 그림의 해독을 더욱 어렵게 했다. 마야의 몇몇 부조들을 
처음 보면 마치 국수를 담은 쟁반같이 보인다. 흰 여백이라고는 전혀 없이 형태들이 사방팔
방으로 얽혀 있다. 어디다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모를 정도여서 모양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
다. 이것을 '여백에 대한 공포'라고 표현하지만 이는  오히려 동일한 '메시지'가 반복되더라
도 주저하지 않고 가능한 한 공간상에서 최대한 많이  표현해 보고자 하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대개는 같은 메시지라도 서로 다른 형태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차로 모티프를 구별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유명한 뱀의 모티프를 발견했다.
  최초의 탐험가들과 동반했던 화가들은 자신이 발견했던 그림을 이해하는 데 가장  어려웠
던 점은 각각의 형상을 구별하는 것이었다고 인정했다. 그들의 작품은  이러한 어려움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카스타녜다는 조상의 주춧돌을   장식하는 팔렌케의 마스크를 
그렸는데, 개개의 구성요소(눈, 코, 입 등)를 모두 재생해   놓았다. 그러나 그는 전체로서가 
아니라 단지 분리된 형상으로만 그것을 보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모슬레이는 그림들을 진정으로 이해한 최초의 인물이다. 더 나아가 그
는 독자들이 각각의 모티프들을 독립적으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서로 다른 색을 사
용하여 그렸다. 또한 그는 여러 장소에서 예를 모아 어떤  주제들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예컨대 '깃털 달린 뱀'의 모티프는 마야인의 화풍에서는 '깃털 달린  뱀의  소용
돌이꼴 머리장식' '기괴한 얼굴장식' 그리고 '새와 뱀이  합쳐진 모습' 등으로 표현되었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다.
  모슬레이의 마야 예술 연구에 뒤이어, 스핀든과  프로스쿠리아코프도 마야인의 가장 화려
한 형태의 조각품에 대해 연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각에  새겨진 그림의 의미보다는 형태
에 더 관심을 보였다. 즉 비석이나 패널, 혹은 상인방에 새겨진 남자, 이따금씩 있는 여자는 
누구였을까? 왕, 사제, 혹은 신이었을까? 그들의 옆에 작은 줄로 늘어선 사람들은 누구였을
까? 시종, 그 가족의 구성원, 아니면 다른 도시의 통치자였을까? 그리고 주요 인물들의 발치
에 그려진 인물이 반은 벗고 있는 것은 왜일까? 그들은 노예나 포로들, 아니면 제물로 바쳐
질 사람들이었을까?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는 찡그린 얼굴, 전설속의 피조물, 파충류 혹은 고
양이, 머리 위로 우글거리는 머리카락, 깃털이 달리거나 상징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생물체
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대 문자의 도움이 없이 단지 날짜만으로 이 그림을 해석해 내기란 매우 어려웠다. 한편
으로 고문서 사본은 여러 신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즉, 종종 발견되는  비문에 
새겨진 상형문자가 신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드레스
덴 사본의 25페이지에서 28페이지까지의 그림과 란다가 얘기한 신년 축제의 비문 간에 밀접
한 유사성이 증명되었다. 이 둘은 동일한 의식임이 분명해진 것이다.
  20세기 전반기 동안, 건축과 조각, 그리고 도기 발달을 연구하고 여러 기념물의 연대를 해
독한 결과, 고고학자들은 마야의 역사를 4기로 구분했다. 즉 전고전기(B.C. 1500-A.D.  300), 
고대고전기(300-600), 근대고전기(600-900), 그리고  후기고전기(900-1527). 특히  각 연대는 
고대와 근대로 세분했다. 이러한 연대 구분은 오늘날에도 통용되고 있다.
  1944년 사진작가 질르 힐리는 라칸하강 서쪽의 치아파스 밀림지대를 향해 출발했다. 유나
이티드 프루트사의 간부가 이 깊은 계곡에 모여 사는 마야의 라칸돈족 사진을 부탁했던 것
이다. 그들은 고대의 전통을 거의 손상하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는 그곳까지  찾
아 들어간 탐험가는 거의 없었다.
  
    제6장 관념에서 현실로
  라칸돈족은 조상들이 남긴 유적에 신들이  거주한다고 믿고 이를 몹시  숭배하고 있었다. 
또한 정기적으로 찾아와서 제물을 바치고  향을 태우면서 기원을 드리곤  했다. 그들은 '툰
(돌이라는 뜻. 그들은 단순히 유적을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이라는 이  신성한 장소에 백인
들이 접근하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그러나 질리 힐리만은 예외였다. 
  힐리는 이 부족에게 크나큰 문명의 '혜택', 즉 사냥총과  군수품, 의복, 식량, 그리고 약품
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힐리는 라칸돈족 친구들의  도움으로 20군데 남짓한 유
적을 가 본 경험이 있었으나 대부분 그다지 중요한 곳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1946년 5월의 
어느  날, 그의 사냥동료 중의 한 사람인  호세 페페 찬 보르가  이제까지 보아  온 곳보다 
훨씬 거대한 유적지로 안내했다. 힐리는 폐허화된 피라미드 꼭대기에 안치되어 있는 신전들
을 조사하고 사진에 담았으며, 우연히 조각이 매우 인상적인 비석들을 발견했다. 이윽고  그
는 세 개의 문이 달린 그 유적의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
다. 칠흑같이 컴컴한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횃불을 들고 다시 들어
갔다. 어둠에 익숙해지기까지 몇 초나 흘렀을까.  잠시 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그만 방에는 형형색색으로 된 십여  명의 인물이 벽과 천장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그는 
두번째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는  서 있거나 누운 자세의 더  많은 인물상이 그려져 
있었다. 세번째 방도, 그리고 마지막 방도 마찬가지였다. 몰리는 즉시 이 유적을 보남파크라
고 명명했다. 이 유적의 발견은 무척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이었다.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했
던 마야의 회화들이 뜻하지 않게 거의 완벽한 상태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전문가들조차 처음에는 보남파크 벽화들의 존재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1947년과 그 이듬해에 카네기 재단과 멕시코 인류학회는 일단의 학자와 화가들을  파견하
여 이곳의 벽화들을 직접 그리고 복사해 오도록 했다. 보남파크에   대한 최초의 중요한 연
구결과가 1955년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야에 관해 기존에  받아들여진 이론 중 어
떤 것에도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림에  나타난 보다 공격적이고 잔인하기 그지없는(참
수형과 고문 등) 장면들이 축소되었고, 정치적인 의미를 띠고 있는 궁중의 장면도 배제되었
다. 그러나 몰리와 같은 학자가 애초의 가설들을 고집한다 해도 그림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
았다. 폭력적이고 잔인한 고문 장면들이 주목받으면서  학자들은 마야인을 온순한 민족으로 
묘사하는 데 차츰 주저하기 시작했다. 신정정치라는 단어가  비웃음의  대상이 되면서 사람
들은 '달력을 주관하는 사제들'의 전지전능한 권능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장
면 속에서  반복되는 인물들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그림에 덧붙여진 짤막한 설명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렇듯 그림들의 역사적 성격은 받아들이기가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
다.
  1949년 멕시코의 고고학자들이 체계적인 팔렌케 발굴작업을 시도하여 학계의 중심으로 등
장했다.
  루스의 인솔하에 2년 반이 소요되는 발굴작업이 시작되었다. 루스는 모든 신전 중에서 가
장 웅장한 '비문 신전'을 탐사하기 원했는데, 이제까지 발견된 것보다  훨신 오래된, 요컨대 
마야시대 이전의 건조물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모슬레이 이후 
이 유적에 굴착작업을 시도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루스가  신전의  내부와 연결되어 
있던 피라미드와 그 주변의 덤불을 깨끗이 치우는 과정에서 발견한 세 개의 비석 중에는 현
재까지 알려진 가장 장문의(617개의 상형문자가 새겨진) 비문도 있었다. 중앙에 있는 방에서 
루스는 석판 바닥 중의 하나에 있는 두 줄의 홈을 발견했다. 이는 아마  비석을 옮길 때 밧
줄이 지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 옆에 널려 있는 깨진   석판  조각들은 델 
리오들에 의해 거칠게 파헤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루스는  신전 벽이 바닥에서 끝나
지 않고 그 밑으로  계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 지점을 계속  파 본 결
과, 80cm쯤 아래에서 아치형의 돌이 가로질러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2m쯤  더 
파 내려갔을 때 계단이 하나둘씩 드러났다. 그는 완전히 흙으로 덮여  있는  아치형 계단에 
관심을 가지고는 서쪽으로 가면 피라미드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에 
계단 아래로 15m 정도 파  내려가니 땅이 나왔다. 거기서 계단은  더 내려가기  전에 오른
쪽 각도로 꺽어져 북쪽으로, 그다음에 동쪽으로 나 있었다.
  작업을 시작한 지 세번째 계절이 되자 추가로 13개 계단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네번째 
발굴 초기 단계-그때가 1952년이었다-에서  루스는 그가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을 밟고 서 
있었기 때문에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들은 그곳에서 돌과  점토로 된 두터운 
벽과 마주쳤고, 2m쯤 더 나가자 그보다 훨씬 잘 다져진 다른 돌벽이 나타났다. 이 두 벽 사
이에 튼튼한 제물이 담겨 있는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도자기, 조개껍질, 진사
(가루로 된 수은:역주), 그리고 비취 등이 있었다. 거기서 계단은 끝나고 복도가 나타났다.
  루스는 매년 정말 놀랄 만한 발견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었다.
  두번째 벽은 4m는 족히 됨직한  돌과 석회로 만든 단단한 것이었다.  그곳을 지나 두 걸
음 더 나아가자 다른 곳으로 이어졌다. 이곳에도 상자가 하나 있었다. 여기에는 제물로  바
쳐진 여섯 명의 잔해가 있었다. 복도의 맨 끝에는 삼각형의 커다란 석판이 가로막고 있었다. 
  인부 중의 한 사람이 쇠지레로 조그만 구멍을 내자 석회와 자갈 부스러기가 가득 들어 있
었다. 루스는 한 손에 손전등을 든 채 무릎을 꿇고서 이 자그마한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그
는 한참을 마치 얼어붙은 듯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모두들 조바심이 나서 질문을 해
댔다. 이윽고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더니 벽이 온통 석회장식 부조로 치장된 커
다란 아치형 방을 묘사했다. 그 방 한복판에는 방을 가득  채울 정도의 거대한 석판이 있었
다. 그들은 이 지하 납골당을 가로막고 있는 석판을 옮기고서  네 계단을 내려가 안으로 들
어갔다. 그 벽면에는 열 명의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었고, 역시 조각으로 장식된 여섯  명의 
인물이 떠받치고 있었다. 이 석판은 가로 3.8m에 세로 2.2m 크기로 전체가 부조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부조는 우주를 상징하는 위대한 창조물 앞에 선한 인간-죽은 자-이 대지의 신의 
턱뼈로 만들어진 열려진 입 속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  석판 모서리 주위 
여기저기에 비문이 있었다. 루스는 흩어져  있던 제물을 주워 모은 다음  석관을 보기 위해 
기중기로 석판을 들어냈다. 그러자 꼭대기에 뚜껑이 덮인 병 모양의 틀이 있었다.
  이것을 들어올리자 장례용 마스크를 쓴 한 남자의 해골이  있었는데, 그의 눈이 조개껍질
과 흑요석으로 만들어져 있는 등 온통 보석으로 뒤덮여  있었다. 예컨대 펜던트, 왕관, 귀걸
이장식, 목장식, 가슴장식, 팔찌, 반지 등 장신구들 모두가 마야인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투
명한 비취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 보물의 발견으로 흥분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햇고 피라미
드에서 보여 준 그들의 뛰어난  기술에 사로잡혔으며, 각종 장신구 조각이  보여 주는 미적 
감각은 학자들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고대 마야인의 피라미드도 이집
트의 피라미드처럼 장례의식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루스조차 자기의 발견에서  일종의 
장례의식이었다는 결론을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그는 팔렌케를  예외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곧 다른 왕의 분묘 특히 티칼의 유적도 이 새로운 학설을 뒷받침해 줄 뿐이었
다.
  보남파크 유적과 팔렌케 분묘의 발견으로 통설이 결정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1930년대 피에드라스 네그라스 유적에서 화가로 작업하고 있던 타티아나  프로스쿠리아코
프는 이 유적의 돌기둥들은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그룹은 하나의 특별한 건
물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후일 다양한 상형문자의 뜻이 해독되고서야(이를테
면 왕의 즉위, 재위기간, 자기 희생 의식과 노획 등) 그녀는 이 유적의  왕조 전체의 역사를 
다시 그려 낼 수 있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즉 마야인이  자료에 
남긴 비문의 내용은 그들의 역사에 관한 것이었고, 비석에  새겨진 인물은 그들의 문서에서 
인용되고 찬양된 인물이며, 기념비에 새겨진 왕과 동일했다. 비문의 해독에 발맞추어 최근에
는 그림의 해독 속도도 빨라져 제사의식에서  왕이 수행했던 역할과 마야인의 우주관  등을 
조명할 수 있게 되었다. 왕은 세상이 순조롭게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많은 제사를 집전해
야 했는데, 우리는 그 복잡한 풍습의 일부만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
고  자주 행해진 것이 바로 피를 흘리고, 수족을 절단하는 등 체형을 가하는 자기 희생의식
이었다.
  이제는 돌기둥 세우는 것을 더 이상 '기일제'의 표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양한 달력상
의 주기와 왕조의 연혁을 검토한  결과, 그것은 어느 일정 기간을  명확히 표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실 마야인은 그들의 사고 속에서 왕위의  계승을 태양의 주기와 비교
했다. 마야 지역의 남동부(코판과 키리과)에서 이러한 개념은 그들의 기념물에 삽입되어 있
다. 왕위에 즉위한 젊은 왕은 대지의 신의 턱에서 떠오르는 태양과 마찬가지였으며, 젊은 왕
에게 왕위를 인도하고 세상을 떠난 왕은 대지의 신이 벌리고 있는 입 속으로 사라진다고 믿
었다.
  20세기 중반까지 마야 문명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너무나 협소했으며 그 가설들 또한 단
순하기 그지없었다. 따라서 고고학자들은 마야 문명의 정확한 기원을 피력할 수가 없었으며, 
자연재해와 전염병, 지진, 혁명 등에 의한 사회적 혼란으로 인한 고전문명의 붕괴로  설명하
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이 문명의 각 시대에 도기, 석기, 아치형 건물, 공놀이 경기장, 비
석들, 그리고 조각으로 장식된 제단 등의 특징을 가장 먼저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다른 국면에서 적용되었을 때는 훨씬 덜 명확해진다.
  의식의 중심부를 둘러싼 주변 지역에 대한 최근의 연구 결과 왕실 가족이 거주하는 거대
한 왕가 주변에 관청과 종교의식을 지내기 위해 건축물이 있고, 그 주변의 오두막집에서 주
민들이 무리를 지어 한 도시를 이루며 살았음이 밝혀졌다. 비록 도로도 없었고, 가옥들도 여
기저기 흩어져 있었지만, 이 공동체는 주민이 농부 이외에 수공업인, 사제, 군인, 관리, 상인 
등이었다는 의미에서 수만 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커다란 도시가 있었는가 하면 많은 
작은 도시도 있었는데, 소규모 도시들은 큰 도시에 예속될 수도 있었고 또는 독립적일 수도 
있었다. 작은 도시, 촌락, 외따로 떨어진 농가도 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동일한  하나의 문
명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각 도시국가는 정치적으로 경쟁적 관계에 있었고, 문화적으로는 각
기 개성 있게 발전해 갔다. 사회는 지극히 경쟁적이었고,  그들의 역사는 전쟁과 병합, 노획
물과 조공, 그리고 연합 등으로 점철되었다.
  대도시에서 지배 가문은 고유의 상징문양을 가졌으며, 신과 다름없이 추앙받던 왕은 세상
이 원활히 움직이도록 책임지고 있었다. 왕들은 신하와 경쟁자에게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서 
매우 화려한 궁전을 지으려고  했고, 조상들을 기리기 위하여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매우 
화려하게 꾸민 신전을 지으려고 했으며, 왕권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매우 웅장한 기념물
을 세우려고 했다. 통치자들 간  주권 다툼에 에너지가 더욱 더  소모됨에 따라 국가경제는 
피폐해 갔고 백성들은 지치게 되었다.  거기에다 흉작과 인구과잉, 내전과 외적의  공격으로 
마야의 고전문명은 급격히 몰락했다.
  그러는 동안 페텐이나 치아파스, 그리고 벨리세 등의 대도시들이 9세기 말에 멸망했고, 폐
허가 되었다. 유카탄 지역에서의 마야 문명은  스페인인의 정복욕과 기독교화하려는 정열로 
무자비하게 공격할 때까지 얼마간 존속하고 있었다. 위대한 문명의 흔적이 망각속으로 사라
져 갈 뻔했으나 어느 날 호기심 많은 탐험가들이 마야의 유적지를 찾아오기 시작했고, 시인
들은 그곳에서 꿈을 노래했으며, 마침내 학자들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하기 시작했
다. 초기의 연구는 그들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그 사회의 낭만적인 관점에서 결론을 끌어내
리려 했으며, 피비린내 나는 인간 제물 의식도 모른 채  평화롭고 심오한 종교적 사회로 생
각했다. 최근의 연구는 그러한 선입관을 뒤집고도 남는다. 오늘날 우리는 마야인이 호전적이
고 거만했으며 쉽게 과오를 범한 민족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야말로 더욱 인간적인 모
습일 것이다.
  
    기록과 증언
  최초의 여행가의 통찰력
  마야인이 남긴 유적을 최초로 찾은  방문객은 놀랄 만한 직관력의  소유자였다. 팔라시오
는 유카탄 지역의 원주민을 잘 알고 있었으며, 하신토 가리도   수사는 토니나의 비석에 새
겨진 신비한 무늬가 문자일 것이라고 처음 생각한 사람이었다. 과연 그의 판단은 옳았다.
  1530년에 프란체스코회의 한 수사가 토니나로 발송한 이 글은 정확한 증언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주목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토니나에 온 프란체스코회 신부
  오코싱고시에서 동쪽으로 약 25km 떨어진  '지배자(주인, 군주, 신)의 손' 또는  '손을 가
진 군주' 라는 의미의 아하리캅이라는 아주 오래된  거대한  건물군이 남아 있다. 이중에는  
대단히 뛰어난 솜씨로 조각한 여덟 개의 거대한 탑이 있다. 그  벽에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
이 새겨져 있다. 이를테면 군복을  입었거나, 깃털을 꽂은  철기투구를  썼거나,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벨트를 매었다든지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은  모습이
었다. 이런 모습은 코판 동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옷과 비슷했다. 다만  리본이 아니라 벨트
를 매고 있다는 점이 다른 곳과 달랐다.
  그 언덕 아래 대광장에도 멋지게 조각된 석상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조각된 인물
들의 의상은 또 다르다. 이들은 차양이 없이 뾰족하게 마무리된  빵모자 같은 것을 쓰고 있
다. 의상은 사각형으로 파인 목 부분을 빼고는 전체가 자루처럼 생긴 망토형태로, 소매는 팔
꿈치까지 내려오고 길이는 엉덩이 중간까지  내려왔는데 허리 아래에서 묶어  맸다. 그리고 
허리주변에는 신기하게도 바로 그 돌에 새겨 있던 에비야스를 리본으로 매고 있는 것도 있
다. 그리고 발에는 반장화를 신었다.  가슴에 팔을 교차시키고 있는  조각상도 있고, 가슴에 
팔을 얹고는 있으나 교차시키거나 특별한 자세를 취하지 않은  것도 있다. 건물에서는 부싯
돌처럼 단단하고, 지름이 5카르타 정도 되는 매끄럽고 윤이 나는 돌로 된 방패도  발견했다. 
그 가장자리는 오래된 섹스마(sexma:4-5레이알에 해당하는  화폐)처럼 생겼고 둘레에는 하
신토가리도 신부가 찰디안 문자라고 했던 다양한 기호와 숫자가 장식되어 있다.
  이 방패와 동상 중 다수는 내가 그것들을 본 적이  있는 오코싱고 마을로 옮겨졌다. 방패 
가장자리에 새겨진 기호들은 문자라기보다는 행위나 사건과 관련된 상형문자의 암호처럼 보
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각각 뚜렷이 구별되는 작은 가두리장식 속에 들어 있고, 그 장식들
은 단순한 문자라기에는 너무도 공을 들여 새겨져 있었으며,  이것이 문자일 뿐이라면 방패 
한 개당 한 단어 이상은 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건장한 남자 한 명의 전신
상이 새겨져 있는 방패가 있는데, 원 안에 잘  배치되어 있어 지름이 1바라(길이의 단위-스
페인에서는 0.835m, 포르투갈에서는 1.10m:역주)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신체 각 부위를 모
두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이 방패의 조각을 통해 적국의 왕자나 다른 부족의 족
장을 항복시켰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듯했다. 방패 속의 남자는  인디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더벅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포박당한 채 발가벗겨져 있는  꼴이 항복하는 듯한  모습이다. '
역사 예찬 서론'
  탐사여행중에 식민지 고관이 코판 유적의  폐허를 발견했다. 스페인 왕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는 1576년으로 적혀 있으나 1860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코판 유적
  온두라스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도시 산 페드로로 향하는 길목에는 많은 인구가 살
았던 흔적과 유적이 보이는 코판이란 곳이 있습니다. 원시적인 사고를 가진 이 지역 주민들
이 어떻게 그처럼 호화스럽고 정교한 유적을 건설할 수 있는 좋은 입지를 생각해 낼 수  있
었는지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 유적은 넓게 펼쳐진  평야의 한복판으로 아름다운 강
이 흐르고 있는 강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사냥감과  생선이 풍부한 비옥한 땅입니
다.
  유적 중에는 주목할 만한 유물들이 많이 들어 있는 듯한 볼록한 봉우리들이 있습니다. 그
리고 그곳에 다다르기 전에 거대한 담장들의 흔적과 가슴에 1바라 길이의 정사각형이 새겨
져 있는 거대한 독수리상을 발견했습니다. 사각형 속에는 뜻을 알  수 없는 몇 개의 문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유적에 도착하면, 우선 한 거인의 석상이 눈에 띕니다. 고대 인디오들은 그 거인을 이  성
역의 수호자라고 했습니다. 성역의 내부에는 높이가 3팔모(고대의 측량  단위, 1/4바라:역주)
에 이르고 팔이 떨어져 나간 십자상이 있었습니다. 유적에 좀더 깊이 들어가자, 상당히 숙련
된 솜씨로 다듬어진 석조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4바라  이상은 족히 됨직한 이 돌조
각에는 모자를 쓰고 반지를 끼고 사제복을 입은 한 제사장이 아주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
습니다. 이 석상 옆에는 로마 시대의 콜로세움과 비슷한 계단석과 함께 완벽하게 건축된 광
장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80개이 관객석을 갖춘 이 광장의 포석  중의 어떤 것은 무척 정교
하고 숙련된 솜씨로 다듬어져 있었습니다. 이 광장에는 여섯  개의 거대한 조각상이 있는데 
그중 세 개는 무장을 한 남자로 모자이크무늬의 무기를 들고 다리 주위에는 양말 대님으로 
장식을 하고 팔도 장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두 석상은 길다른 의상을 걸치고 로마풍의 
머리장식을 한 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상자 같은  소포 또는 작은 트렁크를 
손에 들고 서 있는 사제의 형상인 듯 했습니다. 아마도 이 석상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각 조각상 앞에 제물이 흘린 피를 받을  수 있도록 저수지 모양으로 파
인 커다란 돌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그릇은  향을 피우며 제물을 봉헌하는 제
기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광장 한복판에는 의식 때 쓴 것  같은 커다란 돌로 만든 그릇이 
놓여 있는데 이 거대한 그릇에다 제물을 바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광장을 지나서 우리는 그들이 축제나 의식 같은 것을 행했던 높다란 정상으로 향하는 
많은 돌계단을 올라갔습니다. 이 계단 하나하나가 정확한 크기로  지어져 있는 점으로 보아 
상당히 신경을 써서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유적지 옆에는  매우 높은 탑 내지는 주랑
처럼 보이는 조형물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은 손실되어 버린 상태여서 그 건축물의 하단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정교하고 
깊게 파인 두 개의 구멍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 건축물이  세워진 이유와 용도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또한 거기에는 강으로 내려가는 수많은 계단들이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이 유적에는 아주 대단한 세력, 그리고 많은  인구가 살았으며 건축물과 형상에
서 알 수 있듯이 예술이 상당히 발달했음을 보여 주는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저는 주의를 
기울여 과거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을 검토하고 과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았으
며 그들이 알고 있거나 혹은 그들의 조상에 대해 들었던 것을 알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난 역사에 대해 쓰인  책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다른  지역에서도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 유카탄지역의 한 위대한 지도자가  이곳에 와서 건축물을 짓도
록 한 후 이곳을 황량하고 적막하게 남겨 둔 채 자신의 땅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이야
기는 비교적 신빙성이 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유카탄인은 이곳을 정복한 
뒤 아이야할, 라칸돈, 베라파스, 치키물라지역과 이곳 코판  지역까지 정복했다고 하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통용되고 있는 아파이 언어가 유카탄뿐  아니라 위에 열거한 지역
에서 통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곳 건축물의 양식이 초기 스페인인이 유카탄이나 
타바스코지방에서 발견했던 십자가의 형상이나 무장을 한  남자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위에
서 열거한 지역 외에는 이러한 양식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동일한 민족이 제작했으
리라고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곳을 떠난 뒤에 저는 과테말라로  돌아왔습니다. 왜냐하면 몇몇 지지자들이  병이 났고 
또 총독께서 저에게 부탁하셨던 임무를 위해 출발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지역 어디
에나 산재해 있는 거대한 아름드리 소나무, 떡갈나무,  삼나무, 실편백이 우거진 울퉁불퉁하
고도 추운 지역을 지나왔습니다. 이상이 제가 폐하의 명에 따라 수행한 여행을 통해 보고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입니다. (하략) (돈 디에고 가르시아 데 팔라시오 올림, 1576년 
스페인 왕에게 보낸 편지)
  최초의 발견자와 최초의 발굴자
  1839년 미국의 외교관 존 로이드 스테판스와  영국의 화가 프레드릭 캐서우드는 노새  등
을 타고 중앙아메리카의 밀림지대를 지나고  있었다.  스테판스는 열대 밀림 속에   파묻혀 
있는 고대도시의 웅장한 모습에 사로잡혀 있었다. "물론 나는 델 리오의 보고서도, 갈린도의 
이야기도 믿고 있소. 나는 그들이 그걸 지어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며  캐서우드를 신
뢰했다. 갈린도, 스테판스, 샤르나이는 정열적인 여행가로 한  세계를 되살려내려 했던 집념 
어린 탐험가들이었다.
  1834년, 지리학회 회장에게 보낸 편지는 후안 갈린도의 코판 유적 탐사에 대한 최초의 불
어 보고서이다. 순수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던 그는 이 편지에서  거의 전문가와 다름없는 식
견을 보여 주고 있다.
  코판의 마야 무덤
  별다른 성과가 없던 몇몇 발굴작업을 끝낸  후에 우리는 광장으로 통하는 높다란  입구가 
있던 지점을 파기 시작했다. 먼저 입구를 발견하고 더 깊이 파고 들어가니   광장에서 3.6m 
지하에 묘실이 있었다. 가로 1.6m에  세로 3m, 높이가 1.8m였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바로 
그 묘실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해 있었다. 고전적인 원의 분할에 따르면, 이 지방은  동쪽
으로 9도 가량 편차가 있다. 우리는 측면의 바닥에서 0.468m와 0.42m 높은 곳에 웅덩이처럼 
생긴 두 개의 방(벽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로가 0.728m, 높이가 0.5m로 깊숙이 파인 
것이었다. 방의 타일은 석회로 두텁게  덮여 있었는데 뼈조각과 붉은 색  안료가 칠한 도기
들이 뒤죽박죽된 채 나뒹굴고 있었다. 이미 얘기했던 벽감에는 접시나 대야, 또는 작은 냄비
와 비슷한 도기들이 가득했다. 나는 몹시   힘겨운 작업 끝에 50개 이상의  도기들을  따로 
골라낼 수가 있었다. 그중 몇  개의 석회와 뒤섞인 사람의  뼈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또한  
예리하고 날카로운 차야의 검도 있었다. 멕시코인은 자그마한 손잡이가  죽은  사람의 모습
과 닮은 이 칼을 이츠틀리라고 부른다. 이 손잡이의  두 눈은 거의  감겨 있으며  아래턱은 
늘어져 있고 입술은 불쑥 튀어나온  형상이다. 그리고 후두부는 평평하며  웅덩이 모양으로 
파여 있다.  몇 개의 대칭되는 구멍이 파여 있는데 이 칼의 손잡이 뒷부분의 둘레를 측정하
기가 쉽지가 않다.
  이 지하공간에서 두 종류의 공 혹은 찰치후이테라는 목걸이용 구슬들을 발견했다. 아마도 
어떤 미신에 따라 소망을 비는 의미에서 바다에서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 무더기의 
굴과 달팽이껍데기도 함께 발견되었다. 어쩌면  발굴 당시 발견했던 종유석  조각들도 이런 
목적에서 여기다 가져다 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칼의 손잡이 또한  그 두 개의 공과 같은 
재질의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 섬세한 수공작업으로 녹색 안료를  표면에 칠한 듯했다. 마치 
부싯돌과 닮은 모습이었다. 바닥에 깔린 타일만큼이나 모든 분묘들  또한 돌로 견고하게 깔
아 놓았다. 그 돌은 대개 가로, 세로가 0.26m에 두께는 0.156m였다. 굳이 접착을  시키지 않
았지만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D형 광장 서쪽에는 계단을 쌓아 놓고 세워 놓은 일곱번째의 거대한 흉상이 서 있었다. 흉
상의 높이는 1.68m로서 머리장식은 머리를  만든 돌과는 분리되어 있었다. 바로  그 계단의 
약간 아래쪽으로 거대한 괴물의 모습을 한 석상이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은 마치 뒷발로 서 
있는 커다란 두꺼비의 모습 같았다. 그러나 그 팔은 인간과 닮았고 발톱은 호랑이와 비슷했
다.
  사원의 계단은 앞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발 뒤축이 약간 들리는 느낌을 준다. 그 계단
들 높이는 대략 0.321m, 폭은 0.43m 정도였다. 광장에서  제단으로 향하는 첫 두 계단이 이 
정도의 크기였고 다른 것은 1m에서 1.5m 사이였다.  도면에 표시된 벽의 측면에서 4층까지 
희생자의 계단으로 올라가는 벽면은  직각으로 꺾어져 있다.  그 둔덕의 또  다른 부분에는 
3.09m 높이의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이 오벨리스크의 서쪽 면에서 우리는  제11번 부조를 
식별할 수 있다. (후안 갈린도, '중앙아메리카에 대한 추억과 기록, 그리고 소묘들')
  오늘날에는 설명서만 제대로 따른다면 바보라도 자동카메라를 쉽게 다룰   수 있다. 데지
레 샤르나이가 살았던 시대에는 기념물이나 풍경을 찍는다는  것은 직접 그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작업이었다.
  사진, 그리고 슬픈 열대
  욱스말에 머물면서 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어려움을 겪었다. 살인적인  더
위, 화학약품의 변질과 갖가지 사고들 때문에 나의 탐사작업은 성공하기 어려워 보였다.  게
다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는 밤들... 나의 처지가 어떠했는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앞에서 나는 여승원에 자리잡은 내 거처가 남쪽에 있는 방 중 하나라고 얘기했다. 첫날밤
은 그럴듯했다. 나는 문에 쳐져 있던  휘장을 걷어 냈다. 흔들리는 그물침대에 누워  있으면 
더위를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잤다. 인디오들이 폐허 속에서 밤을  지
내기를 극구 거부했기 때문이다. 안토니오(샤르나이의 안내자?)는 매일  밤마다 아시엔다(농
장)로 가서 자자고 졸라댔다. 그렇지만 너무 시간이 소요되는데다가 그물침대를 쳐 놓고 자
는 데는 하등의 문제가 없어서 안토니오는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서 자도록  내버려두었
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와 인디오들이 일할 준비가 되어 있도록 지시했다.  그러
나 나는 혼자 지내면서 일에 열중하다 보니 그물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지곤 했다. 셋째 
날, 나의 평화로운 휴식에 방해꾼이 나타났다.  오후 4시쯤 엄청난 폭우를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쳤다. 덕분에 나는 저녁산책을 취소하고 내 거처의 문 앞에 앉아서 몇 자끄적거리는 것
으로 만족했다. 밤이 되자 나는 그물침대 위에서 여느 때처럼 곧바로 잠이 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나는 바로  잠이 들 수 없었다. 갑자기  따끔한 통증이 나를 
깨웠던 것이다. 곤충의 날개소리가 온  방에 울려 퍼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 그곳에는 
바퀴벌레만한 곤충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공포에 휩싸였다. 한 무리가 내 얼굴 위
를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촛불을 켰다. 나는  끔찍한 광경에 기겁했다. 내 그물침대 
안에는 200마리가 족히 넘는 끔찍한 곤충들이 우글거렸다. 나는 벌레를 흔들어서 떼어 내려 
했지만 30마리 정도는 여전히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얼굴과  손을 비롯하여 온몸은 찌르는 
듯한 통증으로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물침대에 남아 있는 곤충 중에는 내 피를 한껏 빨아먹어서인가 배가 제법 통통한 놈도 
있었다. 벽도 이 벌레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마치 배불리 피를 빨아먹는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도대체 이처럼 많은 적들을 어떻게 없애야 할 것인가? 나는 조그만 판자를 들
고 닥치는 대로 놈들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속이 메스꺼울 만치 끔찍하고 기분 나쁜 작업이
었다. 무자비한 전투가 두 시간  가량 계속되었다. 드디어 나는  적들을 모조리 궤멸시켰다. 
곤충들의 잔해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도록 바닥을 깨끗이 청소한 뒤 나는 문을 완전히 밀폐
시키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나 두 시간이 지나서 똑같은 전투를 다시 치러야 했다. 이 곤
충들은 마치 날개 달린 창 내지는 압정 같았다. 다음날 나는 잠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내 적
들은 여전히 나를 따라다녔으며, 내  생활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중략)  여드레  동안이나 
나는 이 고통을 참아 내야 했다. 이  사건은 나의 여행기간중에 가장  끔찍한 일 중 하나였
다. 보름이 지나도 몸에는 물린 상처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원기왕성하게 일을 하
고 있지 못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땀을 흘리느라고 기력을 다 소모해  버렸다.
(중략)
  나의 촬영작업은 매번 두세 번씩  반복해야 했다. 혹시 성공적으로  촬영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예기치 않은 사고로 소실되거나 인디오들에게 주의를 주었음에도 밖에서 말리고  있는 
완성된 판들에 부주의한 인디오들이 손을 갖다 대곤 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나
의 최종 목표인 총독 궁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재생하는 일을 망치게 될지도 모를 예기
치 않은 일이 꼭 따라다니곤 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주의를 다  쏟아 붓기 위해 총독 궁전
을 맨 마지막 작업으로 남겨 두었다. 이 궁전은 피라미드  위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작업
을 위해서는 그 앞에 있는 망루 위에 돌을 12피에(약 3.84m) 쌓아 그 위에 카메라를 올려놓
아야 했다. 커다란 입방체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검정색 기계는 노출 장소에서 24m나 떨어
져 있어 그 위에 축축한 보자기를 씌워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왔다갔다 
하는 사이에 미리 칠해 놓은  아교층이 마를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능하면 짧은 
시간 내에 일을 끝내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이 궁전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두 부분으로 나누어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래야 더 
세부적인 면을 찍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포착할  수 있는 가장 많은 것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완전히 풀어 놓은 아교가 담긴 별도의 플라스크를 옆에 두었다. 그리
고 그 위에 남은 것 전부라고 생각되는 판유리 두 장을 올려놓았다. 나에게는 더 이상 약품
이나 판유리가 남지 않았다. 태양광선이 변해 감에 따라 궁전의  두 부분을 비추는 빛도 달
라지기 때문에 곧바로 성공해야 했다.
  나는 작업을 시작했다. 첫번째 판은 성공이었다. 얼룩도 없고 선명해서 각 부분을  명확히 
구별할 수 있었다.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작품이었다. 두번째 작업을 시작할 때  태양광선 
한 줄기가 틀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판유리에  검은 줄이 가서 음화를 찍어낼 수가 없었
다. 나는 서둘러서 판유리를 깨끗이 닦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교가 모두 지워져 버렸고 나는 
그것이 부족할 경우 생기는 문제를  알고 있는 터라 조심스럽게 아교를  부었다. 그 정도의 
양이면 위기는 모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일이 잘  진행되어서 음화가 성공적으로 
제작되었다. 처음 것과 같은 색상과 선명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처럼 까다로운 
일을 성공적으로 치러 낸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방금  완성된 것을 처음 것과 대조
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따져 보기 위해 늘어놓은 뒤 손에 들고 훤히 비춰 보았다. 그리고 판
유리 뒤쪽에 얼핏 드러나는 흐린 부분을 손가락으로  지워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누군가가 판유리를 뒤집어 놓아서 내 손자국이 그대로 감광시켜 놓은 판 위에 찍혀 버리지 
않았겠는가. 순간 나는 일을 망쳤음을 깨닫고 험악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마구 욕설을 퍼부
어댔다. 그리고 이런 실수를 저지른 자가 누구냐고 다그쳤다. 성난 호랑이처럼 날뛰는  나를 
보고 인디오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감히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문득 여승원에 감광제로 쓰는 여분의  아교를 플라스크 몇 개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나는 그것을 맨 먼저 갖다 주는 사람에게 1피아스터를 주겠다고 말
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딱한 그들은  쏜살같이 내달렸다. 쓰러진 나무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가며 달려가는 그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자 사진 때문에 치밀었던 화는 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네 명의 경주자 중에서  상금을 탄 사람은 세 명이나 되었다. 한  사람이 
플라스크 한 개씩을 가져왔던 것이다. (중략) (데지레  샤르나이, '아메리카의 도시와 유적')  
  스테판스의 '여행기'는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많이 팔린  여행서 중  하나였다. 이 책은 
유려한 문체만큼이나 흥미로운 주제가 돋보인다.
  두 신사에게 닥친 고난
  아침이 되어도 숲을 뒤덮고 있던 구름은 걷힐 줄 몰랐다.   태양이 떠오를 쯤이 되어서야 
구름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일꾼도 하나둘씩 나타났다. 9시가 되자 우리는 막사를 떠
났다. 나뭇가지들은 축축히 젖어 있었으며 땅은 질퍽한 진창투성이었다. 우리의 행진은 힘겨
웠다. 주요한 유적들이 밀집되어 있는 구역을 다시 한번 지나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방
대한 작업량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즉각 완벽한  탐사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의 안내자는 이 구역밖에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마을에서 1리그  가
량 떨어진 지점에서 기둥을 본 적이 있으므로 다른 방향으로도 유적들이 분산되어 있을 거
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숲 속에 완전히 파묻혀서 이제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미지의 유적들이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숲은 
너무도 빽빽해서 그곳을 통과하리라는 꿈을 애당초 꾸지 않는 게   좋을 듯 싶었다. 정말로 
세심하게 탐사를 하고 싶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나무를 모두 베어 태우는 것이다.  그
러나 이 일은 우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무작정 그 일에  매달릴 수도 없거니와 그 
일은 건기에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략)
  격렬한 토론을 거친 후에 우리는 '우상들' 중 하나를  선택했으며, 주위의 나무를 베기 시
작했다. 이 일 또한 쉽지 않았다. 우리는 도끼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인디오들이 갖고 
있는 도구라고는 농경용 큰 칼이나 커다란 외날 단검이 전부였다. 그 도구들은 지방에 따라 
모양도 가지각색이었다. 사람의 손으로 갈아서 만든  물건인지라 나뭇가지나 관목을 치기에
나 적당하지 큰 나무를 베기는 무리였다. 인디오들은 스페인인이 그들을 발견했던 당시처럼 
열성적으로 작업을 시작했으나 이내 피곤하다며 다른 사람에게 일을 넘겨주고는 앉아서  쉬
곤 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옆에서 지켜보는  꼴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칼을 들고 일을 하는  인디오들을 바라보면서 초조감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
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쉽게 일을 해나갔다. 마침내 우리의 장애물이 없어지자 우상 주
변이 훤해졌다. 캐서우드는 그곳에 작업대를 설치한 뒤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이 유적에 대해 내가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차마  형언할 수 없으리라. 이곳은 전혀 
오염이 되지 않은 곳이다. 보물을 숨기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안내자도 없는 순결한 땅인 
것이다. 우리는 약 9m 앞도 보지 못하고 우리의 발밑에 무엇이 잠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런데 정면을 뒤덮고 있던 나뭇가지와 넝쿨을 걷어 내자 조각의 한 귀퉁이가 지면 위로 삐쭉 
솟아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인디오들이 일을 하는 동안, 초조감을 억누르지 못하고 들
여다보았다. 눈 하나, 귀 하나, 손, 그리고 다리 하나가 보였다. 그 순간 그들의 칼과 무엇인
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인디오들을 밀어 제치고  손으로 땅바닥을 파기 시작했
다. 미를 한껏 발산하고 있는 신비스러운 조각품-재잘거리는 앵무새들과 바스락거리는 원숭
이만이 장중한 침묵을 깨뜨리고 있었다.-이 도시에 맴돌고  있는 비애와 신비... 이 모든 것
이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흥분감을 느끼게 했다. 몇 시간 후, 나는 캐서우드에
게 가서 앞으로 그려야 할 대상이 50개는 넘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중략)  우리는 시야가 
소용없기를 바라면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그것을 가져갔다. 그러나 거의  기어올라야 할 
정도로 가파른 언덕빼기에 다다르자 시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물건은 나무로 만
든 쐐기들을 가는  가죽끈으로 엮은 육중한 의자 같은  것이다. 나를 태워다  줄 인디오 한 
명이 왔다. 그도  다른 인디오들처럼 왜소한 체격이었다. 167cm  정도의 키에  무척 깡말라 
보였으나 균형이 잘 잡힌 체격이었다. 그는 나무껍질로 만든  끈을 의자의 손잡이에 고정시
키더니 무릎을 꿇고 등을 갖다 댔다. 그리고는 끈을 세로로  묶어 자신의 이마에 둘러맨 다
음 끈 밑으로 작은 쿠션 같은 것을 집어 넣었다. 그렇게 해야  무게가 주는 압력을 덜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두 명의 인디오가 시야를 양쪽에서 들어올렸다. 그들은 몸을  일으키더니 
잠시 움직이지 않다가 한두 번 몸을 뒤척여서 자신의 어깨 위에 있는 내 몸의  위치를 바로
잡고 출발했다. 양옆에는 남자가 한 명씩 따라붙었다. 이 때문에 몸은 훨씬 편해졌고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도 생생히 느껴졌다. 심지어는 그들이 내쉬는 숨결 하나하나까지도... 이  오
르막길은 전체 여정 중에서 가장  가파랐다. 운반인은 몇 분 가더니  멈춰서서 인디오 출신 
짐꾼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일종의 커다란 휘파람소리 같은 
것인데 그것을 들을 때마다 내 마음은 항상 편치 않았고 그때처럼 불편한 적은  없었다. 나
는 뒤돌아보았다. 앞쪽에서는 우리가 온 방향을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인
디오가 줄곧 왼쪽으로 뒷걸음질해서 온 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그의 고통을 배가
시키지 않기 위해 꾹 참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깨  뒤를 흘긋 보니 320m
는 족히 되는 낭떠러지 끝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알았다. (중략) 걷는다기보다는 오히려 기다
시피 하면서 우리는 행진했다. 우리는 숨을 돌리기 위해 자주 멈춰 서야 했다. 거의  불가능
한 상황이었지만 노새 등에 올라타기도 하면서  우리는 간신히 밤을 보낼 만한  초가지붕의 
헛간 한 채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물이 없었다.
  우리는 목적지인 노파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산의 정상일 거라
고 생각되는 노파에서 머물기로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물어 볼 때마다 인디오들
은 "1레과(1리그)만 가면 되요"라고 대답했다. 1리그가 그다지 먼 거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
았기에 계속 올라갔다. 그렇게 깎아지른 듯한 경사면을 한 시간쯤 계속 올랐을까. 갑자기 우
리 앞에 무시무시한 내리막길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미 해도 저문 뒤였다. 시커먼 구름이 
나무 사이를 비집고 나오더니 산 꼭대기에서 천둥이 요란하게  치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동
안 강풍이 휘몰아쳤다. 거센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마른 나뭇잎들이 쓸려 가곤 했다.  서로 
뒤엉킨 나뭇가지들이 부러졌다. 커다란 나무도 바람에 휘어졌다. 심한 폭풍우가 밀어닥칠 모
양이었다. 한시라도 바삐 산을 내려가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빨리 하산하기가 불가능했다. 폭풍우와 대홍수에 휩쓸리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발길을 재촉
했다. 그러나 내려가는 길은 끝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편편하게 튀어나온 부분 하나 없는 가
파르기 짝이 없는 바위투성이 산이었다. 노새도 계속 내려가기가 겁이 났던지 자주 멈춰 섰
다. 그리하여 교대한 노새들은 울창한 숲으로 돌진하듯 마구 내달렸다. 그러나 다행히  그것
은 우리의 마지막 산행이었다. 그 산은  지금까지 본 산 중에서 가장 험난했다.  단언하건대 
어떤 여행가도 폭풍우를 만났을 때 우리보다 빨리 그 산을 내려갈  수 없을 것이다. 5시 15
분 전에 우리는 드디어 평지에 다다랐다. 우리가 넘어왔던 산은  이미 구름 뒤에 숨어 보이
지 않았으며 폭풍우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우리는 강을 건너고 울창한 숲을 지나 
노파의 한 건물 앞에 다다랐다.
  그 집의 벽은 건축용 석재로 공들여 쌓아 올려졌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했다. 우리는 큰 돌
계단을 올라갔다. 손상되지 않은 부분도 있었으나 틈 사이를 비집고 자란 나무들 때문에 간
간이 파헤쳐진 곳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테라스에 도착했는데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이 뒤덮고 있어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형체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우리의 안
내인이 큰 칼을 사용하여 앞 길을 터 주고 있었다. 섬세하게 조각되어 지면에 반쯤 묻혀 있
는 돌덩이의 한 귀퉁이를 돌자마자 옆으로 기울어진 계단이  딸린 건축물이 나타났다. 나무
들 틈으로 언뜻 비치는 모습으로 짐작컨대 그 형태나  외관이 피라미드의 측면과 비슷했다. 
우리는 빽빽하게 서 있는 나무를 헤집고 그 건물까지 가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
각으로 절단된 비석 위로 떨어졌다. 높이는 대략 4.25m이며 한 변의 길이가 0.91m 정도  되
는 것으로 네 변들과 아래 위 전부에 커다란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정면에는 기묘
하고 화려한 치장을 한 남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떤 인물의 초상을 묘사한 것
으로 그 모습이 하도 엄숙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뒷면은 지금까지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표현기법이었고 측면은 상형문자로 뒤덮여 있었다. 우리의 안내인
은 이것을 '우상'이라 불렀다. 이 우상 앞으로  0.91m쯤 되는 거리에 커다란 돌덩어리가 놓
여 있었다. 여기에도 인물들의 실루엣과 상징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안내인은 이것을 제단이
라고 했다. 뜻하지 않게 발견한 이 기념물은 아메리카의 고대문물에 관해 우리가 품고 있는 
의혹을 일소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요컨대 우리가 찾아 헤매던 그 유물은 미지의 종족이 남
긴 자취로서뿐 아니라 예술작품으로서도 우리의 주목을 끌 만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근저에 발견된 모든 역사적 기록을  뒷받침해 줌과 동시에 한때 아
메리카 대륙을 정복했던 그 종족들이 미개인이 아니었다는 점을 증명해 주는 것이리라. (존 
L. 스테판스, '중앙아메리카 여행기')

  해독에 이르는 길
  사원과 비석에 새겨져 있는 수수께끼 같은 상징들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
다.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이 문제에 매달렸으나 헛일이었다. 그러나  서서히 그 베일이 벗
겨지는 것도 있었다. 그것이 날짜와 달력의 주기에 관한 것이었다. 학자들이 진정한  마야의 
구문론에 의거해 해독방법의 정립을 시도한 것은 20여 년  남짓되었다. 오랫동안 신비로 남
아 있던 판본들이 서서히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고고학자들에 의해 빛을 보게 된 가장 큰 보물이라면 국립도서관의 쓰레기통 속에 버려져 
있던 고문서 사본일 것이다.
  1859년, 페레시아누스 고문서가 발견되다.
  나는 모든 출판물의 총람과 특히 우리의 중요한 문헌과  고문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것
들을 통해 새로운 학회의 회원들에게 몇 가지 연구 소재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였다. 나는 국립도서관에 버려져 있던 멕시코의 고문서들이 다양한  측면을  언급하고 있다
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리셸리외가의 보관소에 있던  이 고문서들에 대한 일람
표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그 자취를 추적하기 위한 조사연구를 위해 청원서
를 내야 했다. 고문서 분야를 담당하고 있던 헤이즈와 레이노, 그리고 친절한 조마르 씨  역
시  내가 기대했던 결과를 얻는 데 기꺼이 동의했다.
  어느 날, 반쯤 찢겨 나간 낡은 표지에 '목청껏'이라고 쓰인  문헌 한 부가 우연히 눈에 띄
었다. 그후에는 관리자들의 보관창고 속에 보존하게 되었지만 당시는 헐린 벽난로옆 쓰레기
통 속에 버려져 있었다. 오늘날에는 멕시코의 문헌들로 분류되어  있지만 당시에 이 장정에
는 여러 고문서들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쓰레기통 안에 뒤섞여  있던 그 의미 없는 종이뭉
치 속에서 무언가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거기에서 칙칙한 먼지가 두텁
게 내려앉은데다가 누더기처럼 되어 버린  종이뭉치 하나를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멕시코 
고문서 제2번, 다시 말하자면 고대 마야 시대에 작성된 희귀한 세 개의 사본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나는 즉시 이 소중한 기록을 수거하여 여러 장으로 나누어  다시 복사했다. 그들 중 하나
는 수채화 복사를 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나의 부친의 수집품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나
는 쓰레기통 안에 있던 종이 하나하나를 면밀히 검토했다. 그 너저분한 잔해 속에서 고문서
를 싸 두었던 종이봉투에서 찢겨 나옴직한 종이조각을 발견했다. 이 조각에서 나는 16 내지 
17세기에 통용되던 스페인어의 잔해를 읽을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옮겨 놓았던 그 글자들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한편 내가 자문을 구했던 도서관의 관리인들은 이 단어들이 이른바 ex 
libris(장서표)와 같다는 것, 그리고 이 고문서 사본의 옛날 소유자  중 한 사람의 이름이 페
레즈였으리라는 확신을 더해 주었다. 다수의 아메리카  연구자들도 페레즈라는 이름을 사용
하고 있는데 사실 이 제2사본의 원래 소유자를 정확하게  밝혀 낼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고
증학적 연구작업을 요구하는 기록은 명확한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이 항상 바람직하듯이  나
는 이 문제의 사본 또한 세번째처럼 페레시아누스 고문서라 부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
한다. (레옹 드 로스니, '중앙아메리카의 상형문자  해독에 관한 연구')
  오늘날 서방세계에서는 위치상에 따르는 산술체계를 쓰고 있다. 즉 우리가 쓰는 10진법의 
체계에서는 어떤 수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갈 때의 계산은 앞의 계산보다 10배의 가
치를 갖는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1987이라는 수는, 7이라는 일자리와 8이라는 십자리, 9라는 
백자리, 그리고 1이라는 천자리의 수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마야의 산술과 달력체계
  마야인의 등가의 수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계산과정은 아래에서 위로 이루어졌
다. 각 단계는 전단계보다 20배나 더 높았다. 즉 그들은 수체계의 기본을 20으로 삼는  20진
법을 사용했다. 계산은 5의 단위를 의미하는 선과 1의 단위를 의미하는 점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1987이라는 수의 경우, 가장 낮은  단위로 선 하나와 점 두 개(=7),  그리고 다음 단
위가 세 개의 선과 점 네 개(19*20=380), 그리고 가장 높은 단위는 다시 점 네 개로만 표현
이 될 것이다(4*400=1600). 이것을 다시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또한 숫자는 머리 모양의 상형문자 형태로 표현했다. 마야인은  날짜 계산을 위해 다음과 
같이 다양하고 독립적인 주기를  사용했다. 촐킨(tzolkin):제식과 점술용  달력으로 여기에서 
각 날은 숫자(1부터 13까지)와 각 날의 이름(총 20개)이 합쳐져 지칭되었다. 한 주기는 같은 
이름의 숫자가 되돌아오는 260일(13*20)로  이루어졌다. 아브(haab):윤년이라고도 한다(태양
년과 같아지려면 하루의 4분의 1일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브는 각기 20일로 이루어진 18개
월과 5일로 이루어진  '짧은 달'이  있고, 이것이  합쳐진 365일이  기본 단위였다. 대주기: 
5,200개의 툰(tun)으로 이루어졌다. 마야인의 모든 역사가 있는 출발점은 서구력이 시작되기 
전인 3114년 8월 13일에 해당된다. 이 '기나긴 시간'을  계산하는 데는 박툰(baktun,  400개
의 툰으로 이루어진 기간),  카툰(katun, 20개의 툰), 툰(365일이  아닌 360일), 우이날(uinal, 
20일) 그리고 킨(kin, 날) 등이 그 기본 단위로 사용됐으며  0으로 시작되는 출발점부터  거
슬러 내려왔다. 마야 연구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러한 체계에서 '긴 세월로 표현되
는  그들의 연대는 다음과 같이 계산된다. 9. 13.  17. 15. 12. 5eb 15macs. 이는   9박툰, 13
카툰, 17카툰, 15우이날, 12킨, 5에브(촐킨에 속한 시기),   그리고 15막(아브에 속한 시기)으
로  풀어 쓸 수 있다. (클로드 보데)
  레이든 장식판
  이 장식판은 일종의 훈장으로 왕족의 의상을 장식했다. 이  훈장은 상형문자나 상징이 새
겨진 비석을 축소시킨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오늘날 이 두  가지는 비교적 많이 연구된 부
분이다.
  밝은 초록색의 반투명 비취로 만든  레이든 장식판은 왕의 허리띠의  머리장식중 하나다. 
잘 다듬어진 표면에는 마야왕의 즉위 당시 초상이 새겨져 있다. 왕은 위용을 과시하는 의상
을 입고, 팔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머리가 둘 달린 뱀 모양의 왕홀을 안고 있다. 왕의 뒤편과 
발밑에는 제물로 매장된 희생자가 있다.
  이 조각은 고대고전기 마야의 조각기법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왕권을 나타내
는 상징들이 복잡한 구성으로 얽혀 있어, 왕이 어색하게 묘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머리
는 옆으로 향해 있고 어깨는 정면을 향해 있으며 다리는  옆으로 향해 있으나 벌어져 있다. 
이런 자세는 이 인물이 치장하고 있는 장식 하나하나를 선명하게  알 수 있게 한다. 고대고
전기 양식은 인간의 사실적인 재현보다 상징적인 의미를 중시했다. 반대쪽에는 그림의 주인
공과 사건 날짜가 있다. 얼굴을 옆으로 하고 상체가 정면으로  향해 있기 때문에 그의 몸에 
있는 것들을 확연히 알아볼 수 있다. 그의 어깨 뒤로  등뼈처럼 생긴 막대기가 불쑥 튀어나
와 있는 것이 보인다. 가슴에 있는 사람 모습의 두꺼운 칼라가 목에 달려 있다. 허리에는 지
하세계의 표범신의 형상을 한 마스크와 원반, 새끼처럼 꼰  벨트, 마스크 하나, 그리고 오른
편에는 훈장 같은 원반들이 가장자리가 섬세하게 손질된 치마  상부를 장식하고 있다. 또한 
각종 장식이 된 파뉴(허리에 두르는 옷:역주)가 무릎까지 내려와  있다. 왕은 가죽끈에 비취 
원반을 매단 활 같은 것으로 팔을 장식했고, 신고 있는 샌달은 당시의 특징적인 양식이었다.
  애초에는 허리의 뒤쪽에 있던 남자 마스크는 완전히 옆으로  돌려져 있었다. 입에서 비취
장식 하나를 뱉어 내고 있는 뱀 모양의 두상이 사슬 하나로 허리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왕
의 머리 모양 또한 이 차림새에서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머리장식은 둥근 통 모양의 
비취와 둘레에 진주를 두른 챙 없는 모자 위에 올려져 있다. 얼굴 옆으로 날개 모양의 장식
을 머리장식부터 늘어놓았는데 이것은 귓불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비취 장신구의 무게를 덜
어 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투구에 조각된 표범머리는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지만 
삐쭉 튀어나온 코에서 보듯 다소 과장된 장식도 있다. 이 투구는 메꽃으로 추정되는 꽃무늬
로 마감된 띠가 둘러져 있다. 왕은 머리 둘 달린 뱀 모양의 왕홀을 양팔로 안고 있다. 왕홀
은 마야의 왕에게 가장 중요한 상징이며 그들의 전통이었다.  왕홀의 상부를 장식하고 있는 
두 개의 머리는 뱀의 몸으로 보이는 일직선 막대로 연결되어  있다. 한편 뱀의 벌어진 입으
로는 왕권을 축성할 신들이 몸을 내밀고 있다. 오른쪽이  K신이고 왼쪽은 태양신이었다. 왕
의 발 뒤편으로 왕의 즉위식 희생 제물인 포로가 몸부림치는  듯한 자세로 엎드려 있다. 제
물의 머리 위로 장식된 '아하우'로 보아 신분이 높은 사람이 분명하다. 그 또한 귀에 커다한 
장신구를 달고 있으며 세모꼴의 수건으로 얼굴을 묶고 있다.  레이든 장식판에는 그 시기와 
날짜를 알 수 있는 문자가 있다.  맨 처음에 보이는 8. 14.  3. 1. 12. 1에브 0약스킨은  서기 
320년 9월 17일이라는 뜻이다. 나중 다섯 개의 상형문자는 왕과 그 업적에 관한 것이다.
  처음에 상형문자는 앞으로 전개될 일련의 내용의 도입부로서 시작, 즉 '긴 세월'의 주기만
을 알려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기호는 툰(tun)이라는 '북모양의 원통형' 기호이다. 
그 위에 있는 머리 모양이 태양신이다. 그는 약스킨의 수호신으로  그 날짜가 있는 달을 의
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섯 개의 상형문자는 주기에  덧붙이는 수를 나타내고 있
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례적으로 박툰과  카툰을 나타내는 상형문자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예컨대 첫번째 숫자인 8(5를 나타내는 선 하나와 3을 나타내는  점 세 개)이 카툰을 의미하
는 '새'의 뒤에서 '400년의  8주기'라는 의미를 기록하고 있다.  그다음의  상형문자는 14라
는 수와 박툰을 의미하는 '새의  머리'를 포함하여 '20년의 14주기'를  기록한 것이다. 세번
째의 상형문자 전체가 3이라는 수와 신을  의인화한 모습,  즉 툰(tun, 360일로 이루어진  1
년)으로 '3년'을 의미한다. 이 '툰'을 묘사한 상형문자가 특히  걸작으로  머리 위에 고동과 
비슷한 패류모양의 장식을 하고 척추 위에는  용-물고기 신을 형상화한 지느러미로 장식했
다. 용의 꼬리를 깨무는 물고기 형상이랄까.  이 상상의 생물은 바로 수련꽃-물고기 괴물로 
추정된다.
  위의 세 부분들을 합치면 바로 400년이 8번(3200년), 20년이 14번(280년), 그리고 3년을 더
해 총 3483년이 된다. 따라서 0부터 출발했을 때 마야력으로는 3483년이 흘러갔음을 의미한
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마야의 달력체계에서 1년, 혹은 툰이 오직 360일로  구성되
어 있다는 점이다. 그 아래에 파인 두 개의  상형문자는(제5상형문자, 제6상형문자) 그 다음
해로 이어지는 달과 날수이다. 이러한 계산은 서구력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묘하게 느껴진다. 
우리들이 볼 때 최초의 1년에서 하루가 지나면 서기 1년  1월 2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
구력에서는 마야인과 달리 0년이 없다. 따라서 레이든  장식판은 그들의 달력으로 3483년이
며, 그 다음해로 1우이날(한 달)과 12일이 흘러갔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레이든 장
식판의 정확한 날짜는 마야력으로 3484년에서 32번째 날(20+12일)이  흘러간 것이다. (중략) 
0 이후의 (처음의) 8, 14, 3, 1, 12라는 기록들은 촐킨(tzolkin, 한 주기가 260일로 됨)에 속해 
있는 1에브라는 날임을 말한다. 여덟번째  상형문자는 아홉 명의 밤의  왕 중에서 다섯번째 
왕이 통치하고 있던 날을 의미한다. 그날은 아브(365일)의 120번째 되는 날, 혹은 술(아브의 
18개 달 중의 하나)의 스무번째 날과 맞아떨어진다. 우리가 발견한 비석에서는 이날을 '약스
킨의 도래'라고도 했다. 이것은 이어지는 달을 지칭하는 말로  세번째 상형문자는 춤, 즉 즉
위이며, 네번째는 약스킨을 의미한다. 요약하자면  이 달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약스킨의 
수호신이 지배하고 있으며 8바툰, 14카툰, 3툰, 1우이날과  12일이 0년에서 흘러왔다는 말이
다. 또한 이날은 촐킨의 1에브에 속하는 날이며, 다섯번째 밤의 왕이 통치하고 있다는  얘기
이기도 하다. 한편 이날은 약스킨이라는 달이  365일로 이루어진 에브에 속해 있는  날이다. 
훨씬 실제적인 방법, 즉 우리의 숫자로 써 본다면 이날은 8, 14, 3, 1, 12 leb G5 0 yaxkin으
로 쓸 수 있다. 서구력으로 이날은 320번째 되는 해,  태양년의 주기에서 9월 17일, 1주일에
서 금요일을 말한다. 즉 서기 320년 9월 17일 금요일이다. 마지막 다섯 개의 상형문자는  어
떤 행위와 그 주인공에 관한 것이다. 즉 "그가 앉았다(왕좌에)"라는 문장과  다른 부분에 새
겨진 것으로 보아 즉위식임을 알  수 있다. 두번째 상형문자는 이  사람이 이어받을 책임과 
이름의 일부를 나타낸 것으로 보여진다. 이어지는 두 개의 상형문자는 아하우(군주)라는 상
형문자로 보아 새로운 왕을 칭하는 명칭이다.  왕은 찬(하늘)의 상징 뒤에 나오는 해독되지 
않은 머리 모양의 상징과 표범가죽으로 반쯤 덮여 있다. 따라서  이름 가운데 읽을 수 있는 
부분을 합쳐 보면, 미흡하나마 왕의 이름을 발람(표범)-아하우-찬이라 추정할 수 있는 것이
다. 마지막 상형문자는 대체로 홈이 많이 발견되는  지역인 티칼의 제4비석(그보다 59년 후
로 추정되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제4비석의 출처는 티칼임이  의심의 여지가 없으므로 
레이든 장식판에서 발견된 동일한 상형문자를 보건대 이 장식판도 티칼에서 제작되지  않았
을까 추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티칼의 다른 비문들은 '표범의 다리'라고 불리는 왕이 레이든
에 표시된 날짜보다 3년이 빠르고 56년을 더 길게 그 도시를 통치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만약 레이든 장식판과 티칼의  제4비석에 나타나는 두 이름이  동일한 왕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이 즉위식이 행해질 무렵에는 다른 왕이 티칼을 통치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레
이든 장식판은 티칼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린다 쉘레, 메리 E, 밀러 공
저, '왕들의 피')
  마야-키셰족의 경전
  '포폴 부' 혹은 '경전'이라고 하는 이 기록은 몇 세대에 걸쳐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신
화와 전래 역사의 모음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과테말라와 온두라스의 고원지대에 살았
던 마야-키셰족의 조상들이었다. 이 경전은 스페인의 프란체스코회  수사들과  마야-키셰족
과의 만남을 계기로 17세기에 '포폴 부'라는 제목으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브라쇠르 드 부르부르 신부는 키셰어와 프랑스어 번역판을 동시에 출간하여 오래된  이야
기를 세상에 알렸다.
  이제부터 우나푸와 스발란케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그들의   탄생 때 이야기는 
이렇다. 그들이 세상에 나올 날이  다가왔다. '피의 여인'이라고 하는  젊은  여자가 그들을  
낳았는데 그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에, 할머니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들의 어머니는  깊
은 산속에서 갑자기 그들을 낳았던 것이다. 그들이 바로 쌍둥이 우나푸와 스발란케였다.  어
른들이 그들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그들은 좀처럼 잠을  자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그
래서   할머니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것들을 밖으로  던져 버려라! 정말 시끄럽기 짝이 
없구나."  사람들은 아이들을 개미집 위에 데려다 놓았는데 그들은 거기에서  깊이 잠이 들
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가시덤불 속에다 버렸다. 가시덤불에서도  그들은 죽지 않았다. 그러
나 개미집과 가시덤불속에서 이들이 죽기를 바란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이들의 형 운 
바츠와 운 추엔이었다. 운 바츠와 운 추엔은 못된  성격의 소유자들로서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동생들을 잘 모른다는 이유로  집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우나푸와 스발란케는 산속에서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다. 운 바츠와 운 추엔은 훌륭한 피리
연주자와 가수였다. 젊은 시절, 그들은 큰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것은 훌륭한  
명인이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였다. 모든  과정을 거치고 난 뒤 그들은 각각 피리,  노
래,  글씨, 조각 등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
이 타고난 재능의 소유자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시발바(지옥)로 가게 된  그들의 
아버지, 즉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갔다.
  운 바츠와 운 추엔은 대단한 예언가였기 때문에 그들의 동생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들의 분노는 매일 문고
리를 잡아당기는 우나푸와 스발란케를 쫓아내도록 했다. 우나푸와 스발란케는 운 바츠와 운 
추엔뿐 아니라 할머니에게조차 사랑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는 먹을 것도 얻지 못했다.  그들
의 식사로 준비된 음식은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운 바츠와  운 추엔이 모조리 먹어 치웠다. 
그러나 우나푸와 스발란케는 화를 내지 않았다. 비록 그들은  자신들의 집이 어디인지를 정
확히 알고 있었지만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집에  올 때마다 새를 가져왔는
데 운 바츠와 운 추엔은  이것마저 먹어 버렸다. 우나푸와 스발란케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운 바츠와 운 추엔이 하는 일이라고는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
를 부르는 일뿐이었다. 하루는 우나푸와 스발란케가 새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러자 할머니는 
화가 나서 펄펄 뛰었다.
  "왜 새들을 가져오지 않았지?"
할머니는 우나푸와 스발란케에게 물었다.
  "할머니, 새는 많이 있어요. 그렇지만 새들은 나무에 매달려 있어서 그것들을 잡으러 나무 
위에 올라갈 수가 없었어요. 사랑하는 할머니, 그러니 그 새들을 잡으러 형들과 함께 가도록 
해주세요."
  "그래, 좋다. 너희와 함께 그 나무로 가자."
형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나푸와 스발란케의 꾀가 결국 성공한 것이다. 둘은 운 바츠와 운 추엔을 떨어뜨릴 궁리
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말로 꾀어 그들의 운명을 뒤바꿔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아멘. 그것은 그들이 우리
를 무척 괴롭혔고 자기의 동생들인 우리가 죽어서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이
다. 그들이 우리를 노예로 삼으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가 그들을 이길 수 있
을 것이다.'
  그들은 노란 나무라고 하는 나무 아래로 형들을 데리고 갔다. 나무 아래에 도착하자 그들
은 활을 쏘기 시작했다. 나무 위에는 수많은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형들은 이 새들을  보
자 넋이 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한 마리도 맞출 수 없었다.
  "새들이 떨어지지 않는군요. 아무래도 직접 잡아와야겠어요."  "물론 그래야지."형들은  대
답했다. 그리고는 나무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무는 점점 옆으로 뻗어  가고 나뭇가지
는 더욱더 가늘어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내려오려고 했으나 내려올 수가 없었다.  그들
은 나무 위에서 소리쳤다.
  "도대체 어디를 붙잡아야 하는 거냐? 동생들아! 우리를  도와 다오! 지금 이 나무는 무시
무시한 괴물 같구나. 오, 사랑하는 동생들아, 도와  다오." 그들은 나무 위에서 소리쳤다. 그
러자 우나푸와 스발란케는 이렇게 대답했다.
  "형들의 파뉴를 풀어서 꼬리처럼 기다랗게 뒤로 늘어뜨린  다음 엉덩이에 묶으세요. 그렇
게 하면 훨씬 움직이기가 쉬울 거예요."
  "그래, 알았다."
  그런데 그들이 파뉴의 끝자락을 늘어뜨리는 순간 갑자기 그것들이 꼬리로 변해 버리는 것
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진짜 원숭이 같은  모습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크고  작은 
나무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그들은 울부짖으면서 숲 속을 배회하고, 어떤 때는 나뭇가지  아
래에 잠잠히 웅크리고 있기도 했다. 우나푸와 스발란케의 계략에  그들은 넘어가고 만 것이
다. 그들은 바로 자신들의 재능 때문에 그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온 우나푸와 스발란케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보자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형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그들은 지금 흉칙한 모습
으로 변해 버렸답니다. 마치 짐승들처럼 말이지요."
  "만약 너희가 형들에게 무슨 짓을 했다면 그것은 나를  해친 것이나 다름없다. 제발 부탁
이니 얘들아. 형들에게 아무 짓도 하지 말아 다오."
  할머니는 우나푸와 스발란케에게 간청했다. 그러자 그들은 할머니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너무 슬퍼 마세요. 할머니. 형들이 집에  오게 되면 그들의 얼굴을 다시 보시게  될 거예
요.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운명을 시험하는 동안 할머니는 웃으시면 안 돼요."  그리고는 그
들은 '우나푸 원숭이'라는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피리와 북을 곁들여 노래했
다. 그들이 연주를 할 때 할머니는 곁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연주를 할  때마다 우나푸 원
숭이라는 구절을 반복했는데 후일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윽고  원숭이로 변한 운 
바츠와 운 추엔이 음악을 듣고 찾아왔다.  그들은 춤을 추면서 집으로 들어왔다.  할머니가 
눈을 들어 그들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것들은  흉칙한 짐승의 얼굴이었다.  할머니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도저히 웃음을 그칠 기미를  안 보이자 그들은 다시 길을 떠
났다. 할머니의 시야에서 사라져 머나먼 숲으로 들어갔다.
  "왜 그렇게 하신 거지요? 우리는 그들을 네 번밖에 부를 수가 없어요. 이제 세 번밖에 남
지 않았어요. 우리는 피리와 노래로 그들을 불러들이려 했어요. 그러니 할머니, 제발 웃음을 
그쳐 주세요. 다시 그들을 찾아야겠어요."
우나푸와 스발란케는 이렇게 말했다. 이윽고 다시 음악을 듣고 운 바츠와 운 추엔이 돌아왔
다. 그들은 여전히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안뜰까지 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할머니는 웃음
을 터뜨리고 말았다. 원숭이들의 모습은  정말로 우스꽝스러웠던 것이다. 그들의 배에  붙어 
있는 말라 비틀어진 성기와 가슴 앞으로 꿈틀거리는 꼬리가 영락없는 원숭이였다. 할머니가 
도저히 웃음을 그치려 하지 않자 그들은 다시 산속으로 떠났다.
  "할머니, 제발 그러지 마세요. 이제 세번째로 다시 부르겠어요."우나푸와 스발란케가 말했
다. 그들이 다시 음악을 연주하자 형들은  춤을 추면서 왔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웃음을 참
지 못했다. 이제 운 바츠와 운  추엔이 집 안을 가로질러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얇고 불그스
름한 입술과 형언키 어려운 우스꽝스러운 얼굴, 입술을 뒤틀어  입과 얼굴을 닦거나 갑자기 
핥기도 하는 모습에 할머니는 또다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번에도 할머니 때
문에 그들은 떠나야 했다.
  "할머니가 그러시더라도 우리는 다시 그들을  부를 거예요."네번째로 그들은 피리를 불었
다. 그러나 영영 떠나 버린 운  바츠와 운 추엔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포폴 부'  마야
의 어제와 오늘
  마야를 찾는 연구자들을 매혹시키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그들의 우상숭배적인 과거와 혼합
적인 현대적 모습 사이의 만족할 만한 조화일 것이다. 오늘날도 마야인은 고대의 풍습, 세계
의 창조, 고대 신들의 전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또한 기도할 때 카톨릭 성인의  이름과  
그들만의 고대 신의 이름도 함께 암송한다.
  라칸돈족은 멕시코 최남단에 위치한 치아파스숲에 살고  있는 인디오들이다. 그들은 저지
대에서 마야의 후기고전기 문화를 대표하는 마지막 종족으로 오늘날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페텐(과테말라의 밀림) 지역에서 이동해 온 그들의 선조는  식민지 기간 동안 우수마신타와 
라파시온강을 따라 정착하여, 18세기 말에는 치아파스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신들의 거처
  치아파스와 페텐 지역의 밀림에는 폐허화된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사원과 피라미드, 비석
은 마야의 고전기(A.D. 250-900) 동안에 고대 마야인에 의해 건립된  것들이다. 라칸돈족은 
'쿠(신들)'라고 부르는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이것을 만들었다고 믿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한때 신들이 지상에 살았는데 그 집들이 그곳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신들의 집이야
말로 '참된 인간'(그들 자신)의 집과 닮았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는 종려나뭇잎으로 
된 지붕 대신에 돌멩이들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라칸돈 인디오들이   신성시 
여기지 않는 폐허란 없다. 호숫가 주변에 서 있는 커다란 바위라든가   예전에 치아파스 밀
림을 지배했던 종족의 무덤이나 납골당으로 쓰였던 동굴이 모두   그들의 숭배대상이다. 라
칸돈족에 따르면 동굴바닥에(인간들이 무덤을 모독했으므로) 나뒹구는 뼈는 한때 죽은 것처
럼 가장했던 신의 뼈로서 그들의 혼은 바윗돌 아래 깊숙이 숨어 있다고 한다.  또한 약스칠
란에 살고 있던 신들은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테라코타 기법으
로  제작된 향로를 매개로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신과 교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들의 집(우 이-아토 쿠)'이라는 말은 신전(향로를 모셔 놓은 오두막이나 대부분의 종교
의식이 열리는 장소)뿐 아니라 넓게는 폐허,  바위, 그리고 동굴까지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곳에는 신들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한때는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하곤 했다.
  인디오들의 종교생활은 식민지 전시대의 다양한 종교적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 고전기 마
야 문명이 멸망한 후 서구력으로 9세기 무렵, 재앙에서 살아 남은(혹은 새로운 종교의 전파
자에게서 살아 남은) 밀림 속의 거주민들은 버려진 주요 장소들을  찾아와 은밀히 종교의식
을 거행하곤 했다. 고고학자 패트릭 퀼베르에 따르면 티칼에서 향료를 바치는 의식은 그 의
식을 집전할 수 있던 대제사장들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비정상
적인 위치에 놓인 비석들이 눈에 띄는  것으로 보아 '돌들의 숭배자'들은  신들이 되어  버
린 선조들이 거행했던  불가사의하고도 호화로운 의식의  전부를 이어받지는  못했으리라고  
퀼베르는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금세기 초, 고고학자 알프레드  토저는 신전 내부(첸달레족
의 폐허)에 있는 비석 앞에 일렬로 서 있는 다섯  개의 향로를 발견했다. 면밀히 관찰한 결
과 석조물이 외부에서 옮겨져 방 안쪽의 벽을 마주하고 다시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
다. 그 때문에 벽과 천장은 시커먼 그을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폐허화된 신전을  숭배하는 
행위는 이렇듯 향로를 사용했고, 저지대, 즉 유카탄, 페텐, 치아파스 밀림 지역  마야인의 후
기고전기 종교의식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대륙발견 이전 시대 의식의 특징은 자
신들의 전통종교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아 위니크들 사이에서  존중되고 있다. 의식과 순
례,  그리고 매장 등의  용도로 동굴을 찾는  것은 "전고전기로 거슬러  올라가 근대고전기  
말엽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오늘날에도 치아파스  고원지대와 과테말라에 거주하는 인디오
들은 여전히 동굴을 숭배하고 있다.
  그렇다면 향로와 신의 거처는 어떤 관계일까? 이 동굴은 애초에는 매장장소와 관계가 있
었음이 분명했다(그러나 여러 차례에 걸쳐  그곳은 훼손되었다). 동굴 입구에는  '우 무쿨란
(묘비)'이라는 돌로 된 둔덕이 있다. 아마도 곳곳에  산재한 뼈들(두개골, 턱뼈, 대퇴골  등)
이 이곳에서 흩어져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제물이  유물과  뒤섞였을 가능성도 
많은데 그것은 분명 도굴당했을 게 뻔하다. 반면 동굴바닥에는   버려진 향로와 마찬가지로 
라칸돈족이 신들에게 바쳤던 단지나 호리병박  조각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동굴  깊숙이 들
어가 보면 커다란 암벽과 마주하고  서 있는 제단들이 눈에  띈다. 이 제단들은 신과  여신,  
여신의 남편, 동굴의 수호신, 그리고 아주  가까이 있는 호수의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남신상은 여신상보다 훨씬 크다. 하지만 돌들은 코펄(니스의 원료가 되는 수지:역주) 찌꺼기
와 그을음으로 완전히 뒤덮여 있는 까닭에 원래 높이를 측정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돌의 '우 오르(머리)' 위에 점액질(진) 같은 것을 바른 후 자그마한 조약돌로 원을 
만든 다음 그 안에서 이른바 '참된 인간들'을 향으로  태웠다. 한편 마야인은 신에게 바치는 
향로를 만들기 위해 그 조약돌 중 몇 개를 골라 집으로 가지고 가서 향로의 역할을 하는 우 
라키 쿠(신의 단지)라는 질그릇에 깊숙이 넣는다. 유인원의 모습 같기도 한 향로의 머리 부
분은 의식 때 바치는 제수를 받도록 아래 입술이 돌출되어  있다. 그렇게 하여 인간들은 향
로 안에 놓여진 '우 칸체 쿠' 이른바 성스러운 돌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신과 교감할 수 있
게 된다. 그 돌 위에다 그들은 코펄의 진을 태운다. 의식을 행하는 동안 신의 영혼이 내려와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다(거기에서 이 성스러운 유물의 이름이 유래한 것이리라).
  한편 오늘날까지도 전해 내려오는 아 위니크들의 신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의 종말
은 완전히 어둠에 쌓인 태양의 이지러짐,  즉 밤에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향로 안에  코펄을 
태우며 그들의 신들을 애타게 부르짖지만 한낱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좇아와
서 게걸스럽게 잡아먹는 천상과 지하세계의  표범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순결한 
남자와 여자를 약스칠란으로 데려가 창조자이자 최고의 신인 아차큠이 그들의 목을  자르게 
했다.
  신들은 제물의 피로 자기들의 집을 칠했다. 한편 어떤  종교의식 가운데는 라칸돈족 자신
이 스스로의 얼굴과 튜닉(무릎까지 내려오는 옷:역주), 향로, 그리고 신전의  기둥을 로코(황
적색의 염료)를 칠하는 행위가 있다. 이것이 바로 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인간의 피는 
신들의 염료다"라는 말의 의미이다. 이러한  신화는 신의 모습을 인간의  피 냄새를 즐기는 
잔인한 존재로 형상화했다. 이 인간 제물들의 영혼은 이윽고 세상의 종말이 닥치면 항상 밤
만이 존재하는 우주의 가장 높은 단계에까지 다다른다고 한다. 아 위니크들은 이 세상의 종
말이 멀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라칸돈족의 몇몇 가족들은 기독교로 개종했다.  왜냐
하면 이 세상의 종말이 도래할 때 그들의 영혼은 '주 예수와  함께' 천국으로 향할  것이라
는 믿음에서였다. 영원한 암흑과 공포, 추위로부터  벗어나서. (디디에 보르망스, '참된 인간
들')
  다음의 글은 영국의 저명한 고고학자이자 비석 연구가의 글로 그는 마야의 문자와 달력에 
관해 많은 발견을 했을 뿐만 아니라 연구과정에서 접근하게  되었던 인디오들의 사회, 종교
적인 생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고고학을 역사와 민족학과도 관련 지어 연구해야 한
다고 줄곧 주장한 사람이다.
  마야의 기도문들
  산 안토니오에 체류하는 동안, 그리고 훨씬 후 산 안토니오 출신의 남자들을 산의 암소라
는 유적지의 인부들로 고용했던 무렵, 나는 벌목과 덤불을 태우고 씨를  뿌리는 등 한 해의 
농번기 때마다 암송되던 일련의  기도문들을 수집했다. 전형적인  기도들은  '밀파(들판)'를  
만들기 위해 숲을 베기 전에 암송되던 것이었다. 또한 이 기도들은 한   달 후쯤 나무를 베
어 낸 자리에 남아 있는 덤불을 태울 때도 바람을 부르기 위해  암송되곤  했다. 이 일에는 
무엇보다 강한 바람이 필요했다. 만약 죽은 삼림을 완전히 태워    버리지 않으면 두번째로 
태울 때는 더욱 일이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그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오 신이시여. 나의 아버지이자 나의  어머니이신 성스러운 위츠오크시여. 언덕과  계곡과 
숲의 주인이시여. 참아 주옵소서.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당신께 나의 제문을 바칩니다. 당
신의 뜻을 거스르고 당신에게 고통을  주려 합니다. 당신에게 해를 입히고  내가 살기 위해 
당신의 땅에 상처를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행여 어떤 짐승도  내 발자국을 따르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 드리오니, 어떤 독사나 전갈, 말벌에게서 나를 지켜 주옵소서. 어떤 나무라도 
내 머리 위에 떨어지지 않게 하옵시고, 도끼나 칼 또한 나를 해치지 않게 하옵소서.  진심으
로 당신께 폐를 끼칩니다."
  그리고 "신이시여. 성스러운 바람이시여. 이제 내가 살기 위하여 당신의 힘을 빌리려 합니
다. 붉은 바람이시여. 어디에 계시나이까?  하얀 바람, 회오리 바람이시여. 어디에  계시나이
까? 당신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저 하늘 한구석, 저 웅장한  산속, 저 길고 깊은 골짜기 어
딘가에 계시나요? 이제 내가 일을 하려 하오니 당신의  모든 힘을 불어넣어 주옵소서."  첫
번째 기도에서 "당신에게 해를 입힌다"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마야인이 숲을 벌채함으로써 
땅의 표면, 다시 말해 대지의  신 위츠 오크의 얼굴과 산과 계곡의  신 얼굴에 상처를 입힌
다고 여겼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이 신은 출타카의 모판과 동등한 존재였다. 또  다른 기
도문도 신의 얼굴을 손상시키는 것을 기조로 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중요하
게 여기지 않는 어떠한 원시부족도  없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때로  나는 
이 기도가 얼마나 진실된 것인가를 깨닫고 새삼 놀라기도 한다. (하략)  비유들  마야의 언
어는 멋진 비유로 인해 생기가 넘친다. 예를 들어 혼기가 가까워진 소년과 소녀를 '꽃이 핀 
옥수수 꽁지'라고 표현한다. 바빠서  쳐다볼 여유도  없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왜 너는 네 것도 아닌  옷을 걸치고 있는 거니?"  불그스름한 깜부기불은 '불의 꽃'이라고 
표현한다. '무한'이라는 추상적인 용어도 '사슴 등에 난 털보다 훨씬   많은'으로, 아버지의 
상을 당한 사람이라면 "내 아버지의 뼈들이 잔뜩 쌓였다."고 한다. 수완 좋은 장사꾼에 대해
서는 '비쭉 튀어나온 코'(사업을 잘 처리할 때 '후각이 예민하다'라는  우리 식의 표현과 비
교해 보라)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상인들이  섬겼던  마야  신은 아마도 피노키오의 
코를 갖고 있었나 보다.  게다가 아즈텍 상인들이  섬겼던 주요한 상업의  신 또한 '뾰족한   
코를 가진 자'라고 했으니 말이다. 한편  노인들은 '굳센 바위'로, 냉혹한 사람은 '나무기둥 
같은 얼굴을 한 사람'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기가 말하려는 바를 잊어버리는 사람
에게는 '박쥐가 이야기를 훔쳐 가버렸나 보다.'라고 넌지시 일러주기도 한다.
  단어 선택에 조금만 신경 쓴다면 나쁜 결과를 훨씬 감소시킬  수 있다. 만약 개미에 물렸
을 때 "마른 나뭇잎 하나가 찔렀다."라고 표현해 보자. 개미에게 물렸다고 생각을 하면 아픈 
생각이 더 나지만 나뭇잎에 찔렸다고 하면 아픈 생각이 약간은 가셔질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심리적 거부를 스컹크의 냄새와 관련해 생각해 보자. "참 향기롭다. 우리 할머니가  볶아 주
는 호박씨 냄새처럼 고소한데." 이렇게 얘기를 함으로써 악취가 조금은 덜 독하게 날 수 있
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호박씨가  호박을 마야인은 기가 막
히게 맛있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마야인은 사랑의 슬픔에 대해서도  잘 간파하고 있는 사람
들이다. 야일(yail)이라는 단어는 사랑과 고통을 동시에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이런 말을 알아 두는 것은 마야 예술세계의 상징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
컨대 마야의 조각에서 종종 옥수수와 닮은 식물과 합쳐져 길이가 늘어나는 도끼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설명은 추크(tzuc)라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말은 옥수수이삭, 
말의 갈기, 그리고 도끼날의 뒷면을  지칭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들이 
선조들의 몸짓 중에서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 있다. 고대 마야의 조각과 장식 그릇에서
도 이와 동일한 자세를 볼 수 있다. 이 모습은 필경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취하던 자세였으
리라는 생각이 든다. (J. 에릭, S.  톰슨, '마야 고고학자')  후안 페레스 홀로테의  이야기는 
한 남자가 살아가면서 서구문화에 나타난 인디오  집단의 문화를 그대로 보여 주는 이야기
이다. 차물라 인디오들은 초칠어를 쓰는 1만 6,000명  이상으로 구성된 인디오 집단으로 그
들은 파라헤스(치아파스주 중부에 있는 인디오 마을로 구성된 토지상의 구역)나 시우다드라
스 코사스에  가까운 산  크리스토발 고원지대의   비탈에  흩어져 살았다.  다음  증언은  
1952년에 정리된 것이지만  후안 페레스 홀로테의  이야기는 1910년부터 1920년 사이에 경
험한 것이다.
  나의 선조들의 땅은 쿠출므틱 구역에  있는 '그란 푸에블로'(큰 마을,  즉 차물라) 근처이
다. 내가 태어난 집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의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우리는 이곳에 다시 
왔다. 나의 형제들이 자기들 몫의 대들보와 벽들을 떼어 갔다. 나는 그곳에 새로 짚으로  지
붕을 엮고 마른 진흙으로 벽을 발라 집을 지었다. 땅을 태워 만든 양을 기르는 목초지가 펼
쳐져 있었다. 모든 것이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그대로였다. 내가 죽고 내 영혼이 다시 돌아
올 때는 내가 다니던 오솔길을 알아보고 내가 살던 집도 찾아올 수 있으리라.
  아버지의 장례식
  뜰에서는 여자들이 옥수수를 빻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장례식에 올 사람들에게 대접할 닭
을 잡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옷과  아버지의 차마로(직사각형의 양털로 짠 직물.  이  직
물은 정복시대 이전에 직조기로 짠 것으로 가운데에 머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세로로 된 구
멍이 있다)를 손질하셨으며, 아버지의 여행에 필요한 소지품을 정리하셨다(차물라록에  의하
면  죽은 사람은 한참을 걸어 개가 우글거리는 호수를 그중 한 마리를 타고 건너야 한다).
  사람들은 아버지 곁에 아버지가 드실 음식을 차려 놓았다.  접시 하나에는 병아리를 올려
놓고 다른 하나에는 토르티야(오믈렛 혹은 옥수수 부침:역주)를, 그리고 작은 접시에 소금을 
담았다. 아버지의 음식을 준비한 후 우리도 먹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우리는 길을 
떠났다. 나이가 들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여행을 하는 동안  쉬 지치기 때문에 마실 것을 
준비해 주어야 했다. 나의 숙모이신 마리아 페레로 홀로테는 우리가 숨을 돌리기 위해 멈출 
때마다 아버지에게 물을 주었다. 우리가 관 뚜껑을 열자, 숙모는 월계수잎을 후아칼(호리병) 
속에 담궈 아버지의 입에 세 번 부어 주었다. 우리가 묘지 근처에 이르렀을 때 숙부인 마르
코스는 준비해 간 음식이 든 망태에서 작은 바구니 하나를  꺼내 음식을 셌다. 토르티야 열
두 장과 포졸(옥수수로 만든 음료) 세 병이었다. 그는 나무관의 뚜껑을 열고 아버지의 차마
로를 걷어 올린 다음, 포졸과 토르티야를 담은 접시를 아래쪽과 오른쪽에 놓았다. 그리고 이
렇게 말했다. "자, 이제 여행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신  것이니 도둑맞지 않게 잘 
지키기 바랍니다." 그리고 역시 작은 바구니 속에 있던 3페소(에스파냐 중남미의 화폐 단위)
를 꺼내 아버지의 옷 속에 넣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자, 이것으로 지차(사탕수수로 
만든 음료)와 레몬, 바나나 두 개, 그리고 먹을 것을  사세요. 이 돈이면 사고 싶은 것을 살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묘지의 대십자가상 앞에 도착하자 관을 내려놓았다. 이윽고 촛불을 켰고 남자들이 
땅을 파는 동안 여자들은 관  주위에서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 출토틱(태양)이  올론틱(죽은 
자들의 왕국)으로 돌아가려면 좀더 기다려야 했다. 태양이  완전히 지지 않을 때 죽은 사람
을 매장하면 그들의 영혼은 이 지상을 떠돌아다니게 된다. 나의 숙모께서 관 속의 차마로를 
정성을 다해 가지런히 매만졌다. 아버지가 입고 있는 옷도 그 분과 함께 여행할 것이다.
  태양이 졌다. 하늘에는 붉은 구름만 떠 있었다. 구름이 하늘 전체를 뒤덮어 캄캄해지자 관
을 내려놓고 흙을 덮기 시작했다. 혼령이 다시 오지 못하도록 여인네들은 곡을 해댔다. 무덤
이 메워지자 지면을 잘 다지고 난 뒤 손을 씻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캄캄한 밤중
이었다. (후안 페레스 홀로테, '초칠족'(리카르도 포자스가 수집한 인디오들의 생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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