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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뿌리

Casey,Riley 2022. 10. 16.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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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군의 뿌리를 인적 차원, 제도/장비적 차원, 문화적 차원에서 추적하며 역사를 단편적으로
만 이해하는 현실을 일깨우며, 더 나아가 우리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확장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저자
는 한국군의 뿌리는 다양하다면서, 군대의 뿌리를 특정 진영 논리에 따라 규정하고 반복 학습하면 현
존하는 안보 위협과 앞으로 다가올 위협을 판단할 때 시야가 흐려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 Short Summary
지금 한국의 군사력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순위권이다. 한국은 높은 수준의 방위 산업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는 포병 전력과 기계화 군단, 초음속 전투기, 이지스 구축함 등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과학화 전투 훈련 시스템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하지만 불과 100여 년 전만 해
도 한국군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조선군은 옷도 무기도 없었고, 1948년
건군 초창기만 해도 한국군은 입을 전투복이 없어 일본군이 남기고 간 전투복 혹은 미군이 쓰던 전투
복을 입어야 했으며, 당시 한국은 소총 한 자루도 만들지 못한 군대였다.
한편 2018년경부터 ‘한국군의 뿌리는 독립군이다.’라는 슬로건이 나왔다. 대통령은 김원봉을 한국군의
정체성과 연결하려 하고, 육군사관학교는 독립운동가 5인의 동상을 교내에 세우며 한국군의 뿌리가 독
립군인 근거와 논리를 급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국군의 뿌리는 도대체 뭘까?
이 책은 한국군의 뿌리를 인적 차원, 제도/장비적 차원, 문화적 차원에서 추적하며 역사를 단편적으로
만 이해하는 현실을 일깨우며, 더 나아가 우리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확장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저자
는 한국군의 뿌리는 다양하다면서, 군대의 뿌리를 특정 진영 논리에 따라 규정하고 반복 학습하면 현
존하는 안보 위협과 앞으로 다가올 위협을 판단할 때 시야가 흐려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1장에서는 조선 중·후기의 조선군을 살펴보는데, 끊임없이 요동치던 동아시아 국제 환경과 그 속에서
혼돈에 빠진 조선군의 민낯을 살펴본다. 2장에서는 대한 제국 당시의 군대를 살펴보며, 3장에서는
1910년 한일 합방 이후 다양하게 갈라진 의병, 독립군,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중국군 등을 살펴본
다. 4장에서는 1945년 독립 이후 한국 정부의 수립, 육군‧해군‧해병대‧공군의 창설, 이승만 정권 이후
군사 정권을 중심으로 흘러간 현대사 등에 관해 간략하게 살펴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군의 뿌리
를 인적, 제도/장비적, 문화적 차원에서 정리하며 ‘한국군의 뿌리는 다양하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 차례
여는 말
제1장 저물다 - 조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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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뿌리

제2장 움트다 - 대한 제국군
제3장 갈라지다 - 의병, 독립군,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중국군
제4장 싹트다 - 남조선 경비대와 한국군
한국군의 뿌리는 무엇인가?
부록
닫는 말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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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뿌리

한국군의 뿌리
여는 말
한국군의 뿌리는 무엇일까? 2018년경부터 한 슬로건이 요란하게 나왔다. “한국군의 뿌리는 독립군이
다.” 대통령은 김원봉을 한국군의 정체성과 연결하려 하고, 육군사관학교는 독립운동가 5인의 동상을
교내에 세우며 한국군의 뿌리가 독립군인 근거와 논리를 급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국군의
뿌리는 도대체 뭘까? 군대는 시대별 정치, 제도, 인물과 리더십, 문화, 사상, 국제 관계 등에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다. 이 책은 조선 중·후기, 대한 제국, 일제 강점기,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국
전쟁 시기를 다루며 한국군의 뿌리를 드러낸다. 한국군의 역사를 더듬다 보면 결국 한국 근현대사를
만나게 된다. 어제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다. 한국군의 뿌리를 찾는 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저물다 - 조선군
일본이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꿀 때, 조선은 관직 다툼만 하고 있었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을 활용해 그때까지 창, 칼, 활로 싸우던
전쟁 양상을 바꿨고 당시 가장 강했던 다케다 신겐의 군대를 격파했다. 임진왜란 17년 전, 일본이 전
쟁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을 때 조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으로 따지면 ‘청와대 비서관’에 해당
하는 이조 전랑 관직을 두고 당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반면 국력을 키우는 것에 대한 논의는 뒤로
밀려나 있었다. 1592년 4월 13일(음력) 일본군이 동래(부산)에 상륙하며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지난
수십 년간 피비린내 나는 전투 현장에서 살아남았던 일본군은 조선군을 간단하게 섬멸하며 압도적인
속도로 북진했다. 7년간 이어진 이 전쟁을 한국에선 ‘임진왜란’, ‘정유재란’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1392년 조선을 건국할 당시의 군사 제도는 ‘진관 체제’였다. 각 도의 관찰사 아래 둔 병마절도
사와 수군절도사가 군사 업무를 담당하고 현장 지휘는 군/현의 수령이 맡는 방식이었는데, 지역을 지
키기엔 유리하지만 국가적 규모의 전쟁에는 취약한 제도였다. 또한 수령은 대부분 성리학을 공부한 문
관들이어서 군사적 전문성도 부족했다. 그래서 조선은 1555년 왜구 침략과 1583년 여진족 침입(이탕
개의 난)을 거치며 ‘제승방략 체제’로 바꿨다. 적이 대규모로 침입하면 각 지역에선 군사를 한데 모으
고, 중앙 정부는 지휘관과 중앙군을 내려보내는 방식인데, 북쪽에서 여진족을 상대할 때는 나름의 효
과도 있었다. 하지만 교통과 통신이 열악한 상황에서 대규모로 빠르게 침입하는 적을 적시에 상대하긴
어려웠다. 게다가 조선은 일반 양민이 스스로 돈을 들여 군인의 역할을 맡는 부병제를 채택하고 있었
다. 평소에 군사 훈련을 진행하기도, 위기 상황에서 병력을 빠르게 모으기도 힘든 현실이었다.
흥선대원군, 멸망하는 조선에 인공호흡기를 달다
1863년 12월 8일(음력), 철종이 사망했다. 철종의 어머니 조 대비는 흥선군의 12살짜리 둘째 아들 이
명복을 후임자로 지목했는데, 그가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이며, 흥선군은 어린 아들을 대신해 권력을
장악하며 흥선대원군이 됐다. 그는 기존 제도들을 보완하며 개혁을 시도했다. 흥선대원군은 내정 개혁
에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왕권을 강화하고자 경복궁을 중건하고 새로운 화폐(당백전)와 청나라 화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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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뿌리

유통하는 과정에서 민생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도 가문을 몰아내 중앙 집권 체제
를 정비하고 군사력을 강화했던 덕분에 프랑스군, 미군과 맞붙으며 강제 개항을 조금 늦출 수 있었다.
즉, 흥선대원군은 이미 기력을 잃은 조선이 조금 더 살 수 있도록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껍데기만 남은 조선군
조선은 과거 제도를 통해 무관을 선발했는데, 1800년 정조가 사망하고 몇몇 세도 가문이 권력을 독점
하면서 등용 과정이 문란해졌고, 고종 때는 이름만 쓰면 벼슬을 주는 ‘공명첩’이 거래되는 등 관료 체
제가 망가졌다. 지방군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속오군+잡색군 체제’로 바뀌어 양민, 상민, 천민 등이 동
시에 복무했지만, 양민들은 천민과 함께하는 것을 기피했고, 매년 일정 금액을 내며 병역을 면제받았
다. 결국 상민과 천민만 남았고 무관들도 박한 대우를 받았다. 훈련도 없는 오합지졸이었다.
한국군의 뿌리와 아시아 정세 변화의 특이점 - 임오군란
군대의 뿌리를 인식하는 관점은 시기, 사건, 의사 결정 또는 인물 등에 따라 달리할 수 있다. 그중에서
도 임오군란은 중요한 특이점이다. 국가가 군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다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이
사건으로 인해 국내외 정세도 크게 요동쳤기 때문이다. 특히 이 사건을 계기로 한반도에 외국군이 처
음으로 주둔하게 되었다. 외국군은 주둔하는 국가의 정치, 사회, 경제, 군대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는 모든 제국이 이익이 걸린 지역에 군대를 배치하려 했던 이유기도 하다.
어쨌든 임오군란을 전후로 조선군은 매우 짧은 기간에 여러 번 개편됐다. 기존 군대 체제를 모두 없애
고 청나라식으로 5천 명 규모의 신건친군영을 창설했는데, 이는 ‘왕이 지휘하려고 새롭게 만든 군대’란
뜻이다. 이들은 청나라군의 옷을 입고 청나라 방식으로 훈련했다. 그리고 조선은 청나라의 지나친 간
섭을 조금이나마 견제하려고 일본식 군대인 친군 전영과 후영도 만들었다. 조선, 청나라, 일본 방식이
뒤섞인 부대들은 복장, 무기, 구령, 지휘, 훈련 등이 모두 달랐다. 1884년에 친군 5군영 체제로 개편하
며 겉으로나마 군사 제도를 통합했지만, 외세 침입에 대응하는 건 기대조차 할 수 없었고 기껏해야 궁
궐을 지키는 수준에 불과했다. 아무튼 국가 단위에서 국방 전략과 제도, 재정/행정 기반을 운영하고,
국가를 수호하려는 의지 등은 임오군란을 기점으로 소멸됐다.

움트다 - 대한 제국군
러시아식 군대로 탄생한 대한 제국 중앙군과 지방군
대한 제국은 조선과 달리 군사적인 면에선 근대적인 발전을 추구했다. 오래도록 군대다운 군대가 없어
수모를 당하고 벌벌 떨었던 고종이 그래도 군대, 정확히는 본인을 지키는 군사들을 기르는 데에는 과
감하게 투자했기 때문이다. 그는 1899년 6월 22일 <원수부 관제>를 반포하며 황궁 안에 원수부를 만
들었다. 말 그대로 군대를 지휘하는 ‘원수’의 부서다. 대한 제국 국군 통수권자인 고종 황제는 대원수,
황태자는 원수가 되었고, 전국 군사 행정권(군정권)과 군사 명령권(군령권)은 대원수가 장악했다.
군대 지휘 권한과 체계를 통합하긴 했지만 곪아 있는 문제는 많았다. 예산을 확보하는 것부터 힘들었
다. 각종 이권은 서구 열강과 일본에 넘어갔고, 경제 성장 동력을 스스로 찾아내지 못했다. 게다가 나
라 곳곳에선 부정부패가 성행했다. 군사 제도는 농민이 평소에 농사를 짓다가 유사시 무기를 들고 싸
우는 병농 일치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수시로 창설되고 혼합됐던 각 부대의 갈등과 반목도 극심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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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뿌리

고, 원래 군부에서 담당한 작전, 군대 편성, 교육 등의 임무가 원수부로 통합되며 생긴 업무 혼란과 공
백도 컸다. 게다가 군대는 짬뽕 그 자체였다. 군대는 그전까지 각각 청나라식, 일본식, 러시아식, 미국
식으로 훈련받았다. 구령, 부대 편성, 병력 규모, 인원 배치, 무기, 복장, 훈련 방식, 생활 방법, 전술
교범 등도 전부 달랐다. 대한 제국 군인이자 훗날 독립군, 광복군 활동을 한 황학수(1879~1953)가 이
를 통합하기 전까지 대한 제국군은 큰 혼란을 겪었다.
참고로 대한 제국군은 서울 친위대(1895년 9월)와 시위대(1897년 3월), 지방 진위대와 지방대로 나뉘
었는데, 주력은 황실을 지키는 시위대(러시아식)였다. 대부분 보병으로 1개 연대에 2개 대대와 대포를
담당하는 포병 중대가 있었다. 1899년에는 기병 대대(정원 424명)를 창설했고, 1900년 12월 포병 중
대를 포병 대대(정원 215명)로 증강하고 군악대(정원 102명)를 배치했다. 이로써 시위대는 보병, 포병,
기병, 군악대를 갖춘 전투 부대의 모습을 갖고 덕수궁을 지켰다. 어느 정도 군대다운 모습을 갖춘 중
앙군과는 달리 지방군의 사정은 극도로 열악했다.
대한 제국 육군무관학교
대한 제국은 간부를 기르는 정책도 추진했다. 1898년 3월 군부대신 이종건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며 무산됐던, 무관 학교를 설립하자고 건의했다. 그리고 5월 14일 <무관 학교 관제, 칙령 제11호
>를 개정하며 대한 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했다. 학교는 6월에 1기를 모집했고, 약 1,700명이 지원
해 9:1 경쟁을 뚫고 200명이 뽑혔다. 1900년 1월 제1회 졸업 시험을 통과한 1기 128명이 졸업했는데
(중도 하차 72명), 그들은 1년 6개월 교육 과정을 마치고 육군 참위로 임관했다. 1903년 12월 제2회 졸
업 시험을 거친 37명이 졸업한 뒤, 1909년 해체되기 전까지 장교 약 500명을 배출했다.
대한 제국, 멸망하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 제국 통감 임기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 천황을 보좌하는 기구인 추밀원의 의
장으로 부임했다.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그 뒤를 이어 2대 통감이 됐다. 그리고 1910년 5월 30일, 병
에 걸린 소네 통감을 대신해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새롭게 임명됐다. 그는 러일 전쟁 전부터 육군 대신
을 맡은 일본 군부 최고 실력자였는데, 그는 대한 제국을 빠르게 병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일본은 그가 서울에 도착하기도 전인 6월 24일, ‘대한 제국 경찰 업무를 일본 부에 넘긴다’
는 각서를 내부대신(임시) 박제순에게 보내 체결하며, 공문서 하나만으로 경찰권을 빼앗았다.
그리고 7월 23일, 인천으로 들어오는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이완용 총리부터 모든 정부 대신이 나가 맞
이했다. 그리고 이완용은 자신의 심복이었던 『혈의 누』 작가 이인직을 시켜 한일 합방을 제의했고, 8
월 16일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만나 합방에 합의하고 2일 뒤 내각 회의는 이를 통과시켰다. 8월 22일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에서 순종, 내각 대신, 황족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일 합방안이 확정됐다. 순
종은 이완용에게 전권을 위임하며 조약 체결을 지시했고, 이완용은 곧바로 데라우치 통감을 찾아가 조
약에 서명했다. 이렇게 조선 왕조 27대 519년 역사는 모두 끝나고 대한 제국은 멸망했다.

갈라지다 - 의병, 독립군,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중국군
수많은 갈래로 나뉜 ‘독립군’
‘한국군의 뿌리는 독립군이다’에서 뜻하는 독립군은 도대체 누구를 지칭하는 걸까? 현재 대한민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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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뿌리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독립군’은 매우 다양한 갈래로 나뉜
다. 민족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 이념과 가치관, 자본과 이해관계, 활동 지역과 시기 등을 기준
으로 수많은 단체와 개인이 ‘독립군’이란 하나의 관념으로 퉁쳐서 정의된다. 이제부터는 수많은 단체의
이름이 등장한다. 전체적인 흐름을 짚으며 때에 따라 세부적으로 들여다볼 예정이다. 독립군을 한국군
의 뿌리로 여기는 근거는 무엇인지, 타당한 주장인지, 그래서 독립군이라는 게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어느 지점에서 독립군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되는지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1910년대 국제환경과 독립운동의 기반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 후 처리를 논의하는 회의가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렸다. 미
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각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고, 다른 민족이
간섭할 수 없다’는 ‘민족 자결주의’를 선언했다. 당시 식민 지배를 당하던 국가들은 큰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이는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이 지배했던 식민지에만
해당되고,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들은 전혀 관련이 없는 주장이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이런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채 ‘서구 국가들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란 막연한 희망을 가졌다.
한편 의병들은 일제 총독부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경기, 강원, 황해, 함경도 산악 지역에서 소규모로
뭉쳐 활동하며 지역 경찰서, 헌병소 등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 횟수와 병력 규모는 판을 뒤집거나 국
권 회복을 꾀할 수 있는 수준이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총독부는 조선인 헌병 보조원과 일제에 우호적
인 조선인을 활용해 일반인과 의병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색출했고, 조선인끼리 서로를 감시하고 일제
에 밀고하는 경우도 잦았다. 그 결과 의병은 급속도로 사라졌다.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사망했다. 서울에 ‘일제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조선인들이 일제
에 가진 반감은 더욱 커졌다. 이후 2월 8일,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 600명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자 국
내외 독립운동가들도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고종 장례식을 이틀 앞둔 3월 1일, 천도교·불교·기독교 계열
대표 주자들이 독립 선언을 하면서 3·1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해외에서도 만세 운동이 펼쳐졌다.
이에 조선 총독부는 온갖 폭력을 동원해 가며 어렵사리 운동을 진압했다. 한편 뜻있는 사람들은 본격
적이고 체계적으로 독립을 추구하려고 임시 정부를 조직했다. 동시다발적으로 7개가 등장했고 3곳이
주로 활동했는데, 3월 1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의 대한국민의회(의장 문창범), 4월 11일 상하이의 대
한민국 임시 정부(국무총리 이승만), 4월 23일 서울의 한성정부(집정관 총재 이승만)가 바로 그것이다.
상하이와 서울은 동시에 이승만을 지도자로 추대했고, 인재 구성도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었지만, 각
정부마다 이념, 이해관계, 방향성이 서로 달라 갈등했다.
끝없는 내부 갈등과 반목, 배반으로 와해된 임시 정부
독립운동가가 맞서야 할 대상은 민족주의도, 사회주의도, 출신과 지역 할당도 아닌 ‘일본 제국’이었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했다는 대다수 기간은 조선인끼리 서로 싸우고, 이를 봉합하려고 회의를 열곤 중재
기관을 만들고 다시 분열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서로를 밀고하고 암살한 경우도 많았다. 일
본 제국은 이런 ‘조선인의 성향’을 활용하며 독립운동을 치밀하게 방해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대 조직이 와해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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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뿌리

임시 정부에는 다양한 행정 조직이 있었고 군무부가 군사 업무를 맡았다. 구성원 대부분은 대한 제국군
출신이었다. 총장 노백린, 차장 김희선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대한 제국군에서 복무했고, 참사 황학수
는 대한 제국 육군무관학교 1기 졸업생이었다. 군무부는 <대한민국 육군임시군제>, <대한민국 육군임시
군구제>, <임시 육군무관학교 조례> 등을 발표하며 임시 정부 군사 활동을 계획하고 추진했다. 먼저 외
부에서 지원받은 자금으로 무관 학교를 세워 만 20세 이상 남자들을 선발했다. 학교에선 육군 예식, 보병
조전, 체조, 지리, 지형학, 축성학, 병기학, 전술학 등을 가르쳤다. 1920년 6월 8일, 약 6개월간 훈련받은
1기생이 졸업하고 곧바로 2기 훈련을 시작했는데 국방을 총책임지던 무관 학교장 김희선이 변절해 일본
제국으로 투항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도인권과 황학수가 교장, 교관을 맡았지만 잘 운영되지 않고 자
금도 떨어졌다. 12월 2기 24명이 졸업하고 3기가 입교했지만 결국 중간에 폐교됐다.
신흥무관학교와 무장 투쟁
34년 11개월 일제 식민 지배 기간을 통틀어 ‘독립군’이 가장 활발하게 일제와 전투를 펼친 곳은 간도
(남만주) 지역으로, 그 시기는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초반이다. 1911년 5월 서간도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자치 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해 농업, 교육, 군대 등을 꾸렸다. 그리고 6월 10일, 이상룡,
윤기섭, 이시영, 이회영 형제와 김형선, 이장녕, 이장직, 이동녕 등 대한 제국군 출신들은 지린성 류허
현 삼원포에서 중국인에게 빌린 옥수수 창고를 기반으로 신흥 강습소를 설립했다.
무관 학교 학생들은 산악 지형에서 체력을 다지고 군사 훈련을 받았는데, 특히 조선 역사에 대해 철저
하게 교육받았다. 지린성 합니하 등에는 분교도 뒀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뜻있는 조선 청년들이
몰려오자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통일했다. 다음 해 8월 폐교될 때까지 본교와 분교 4곳을 합쳐 졸업
생 약 3,500명을 배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가 신흥무관학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19년 김좌진(1889~1930)은 북간도 연변 지역에 무장 독립운동 단체 ‘북로 군정서’를 이끌었다. 주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강화린, 김훈, 박영희, 백종렬, 오상세 등)이 사관 연성소에서 군인들을 길렀고
1920년 9월 9일 1기 298명이 졸업했다. 한편 서간도 지역에선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주도해 ‘서로
군정서’를 조직했다. 그 외 대한 제국 육군무관학교 1기 졸업생 김학소(1875~1936)는 ‘흥업단’, 홍범도
(1868~1943)는 ‘대한 독립군’, 최진동(1883~1941)은 ‘군무 도독부’를 만들고 서로 통합해 ‘대한 의용군’
을 결성했다. 청산리 전투 후 모든 독립군은 ‘대한 독립 군단’으로 통합했다. 한편 1919년 11월 김원봉
(1898~1958)이 만주 길림에서 조직한 ‘의열단’에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다수 활동했다.
1920년 6월 홍범도, 최진동 등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가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승
리했다. 독립군이 처음으로 일제를 무찌른 이 전투는 조선인들에게 큰 감동이었고 파급력도 컸다. 소
식을 들은 각 지역 독립군 단체들은 전투력을 한데 모으고자 했다. 10월에는 북로 군정서와 대한 독립
군 약 4천 명이 청산리에서 일본군 약 3만 명을 격퇴했다. 일본군은 봉오동, 청산리에서 패배한 뒤 독
립군을 강하게 토벌하고, 다음 해 4월까지 간도 지역에 있던 모든 조선인을 마구잡이로 탄압했다.
공산주의의 확산과 독립군의 소멸, 자유시 참변
독립군 부대는 각 지역 조선인 사회를 기반으로 조직을 꾸렸지만 일제가 모두 무너뜨렸다. 상하이 임시
정부가 ‘국민 대표 회의’를 두고 설전을 벌이던 때의 일이다. 독립군은 소련과 만주 국경 지역으로 이동
하고, 약 10개 부대를 ‘대한 독립 군단’으로 통합했는데, 2개 여단 약 3,500명 규모였다. 이들은 대부분
민족주의 계열로 종교와 사상이 달라도 비교적 잘 단합했다. 그런데 3‧1 운동 후 본격적으로 전파된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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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뿌리

산주의 사상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념 체계가 극명하게 달랐다. 민족주의 계열은 ‘한민족 정통성
을 복원하고 공화주의에 따른 자주독립 국가’를 목표로 한 반면, 공산주의 계열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세계 부르주아 계층을 타도하고 소비에트와 같은 노동자 혁명 국가’를 추구했다. 두 계열은 일제라는 공
공의 적을 상대하려고 협업하기도 했지만, 자유시 참변과 ‘조선 공산당’과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이 세
력을 갖춘 뒤로는 사사건건 격하게 충돌하고 서로를 향한 공작과 암살을 펼쳤다.
중일 전쟁 발발 그리고 임시 정부의 피난
식민 지배가 30년 넘게 이어지고 만주국이 생긴 뒤론 국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란 불가능에 가까
웠다. 임시 정부의 활동도 지리멸렬한 상태였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1939년 11월, 임시 정부는 ‘독립운동
방략’에서 ‘일제와 직접적인 독립 전쟁을 시작해 광복을 완성한다’는 목표로 3개년 계획을 세웠다.
1940년 1기, 1941년 2기, 1942년 3기로 나눠 기수마다 장교, 무장군, 유격대를 양성하려 했다. 국내,
만주, 연해주, 미주 등에서 사람을 모집하고, 연해주 지역에 군사 근거지를 마련하며, 필요한 자금은
미국, 멕시코, 하와이 교포들의 모금 운동으로 확보하려 했다. 군대를 갖기 위한 노력도 조금씩 이어져
1939년 10월 1일 조성환, 황학수, 나태섭, 이웅(이준식) 등이 ‘군사특파단’을 조직하고, 각 지역을 돌
며 병력을 모집했다. 1940년 임시 정부가 충칭으로 이동하며 정치는 충칭에서 군사 활동은 서안에서
진행됐다. 조선인 청년들은 일본군 감시를 피해 군사특파단에 참여했다.
한국광복군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을 열고 10월 9일 임시 정부 헌법을 개정하며 집단 지
도 체제에서 단일 지도 체제인 주석제로 바뀌었으며, 김구가 주석으로 선임되고 국군 통수권을 행사하
게 됐다. 이로써 임시 정부 주석에서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이어지는 군 통수 체계가 완성됐다. 병력은
서안 군사특파단, 충칭 총사령부 성립식에 참여한 인원 등 약 30명이 전부였다. 광복군 창설 인물은
다음과 같다. 총사령관 지청천(이청천)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 제국군에서 활동한 뒤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 활동을 지휘했다. 참모장 이범석은 중국 운남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신흥무
관학교에서 교관을 한 뒤 청산리 대첩에서 활약했다. 그는 훗날 대한민국 제1대 국무총리이자 제1대
국방부 장관이 되고, 여수 순천 사건과 제주 4·3 사건의 진압을 총지휘했다.
서안에서 총사령관 대리 임무를 맡은 황학수는 대한 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 제국군, 상하
이 임시 정부 군무국을 거쳐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과 함께 서로 군정서, 신민부, 생육사에서 활동하고
한국 독립군 창설을 주도했다. 광복군은 서안에 총사령부를 두고 황학수가 총책임을 맡았다. 그는 단위
부대인 지대(사단)를 편성하고, 각 지대장으로 만주 독립군 출신들을 임명했다. 1지대장 이준식은 운남
강무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정의부에서 군사 위원장, 조선 혁명군 군사 위원장 등을 맡았다. 2지대장 공
진원은 한국 독립군에서 활약했다. 3지대장 김학규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군정서, 조선 혁명
군에서 활약했다. 그 외에도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지달수, 노태준 등도 합류했다.
1941년 1월,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1939년 무정부주의 청년들이 충칭에서 결성한 무장 조직) 약 100
명이 광복군에 편입하면서 5지대를 만들었다. 5지대장 나월환은 중국 중앙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
국군 헌병 장교로 복무했다. 이로써 광복군은 3개월 만에 4개 지대 총 100명을 넘는 규모로 확대됐다.
그런데 일제의 감시를 피해 가며 곳곳에서 비밀리에 병력을 모집했지만, 발각되거나 밀정의 배신으로
인해 체포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5지대장 나월환은 한국광복군에 합류한 1년 뒤 내부 변절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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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뿌리

암살당하고 말았다. 2022년 현재 한국 정부는 ‘한국군의 뿌리는 독립군 또는 광복군’이라고 홍보하고 가
르친다. 그런데 광복군은 인적/제도적 차원에서도 하나로 규정하기 힘든 배경을 갖고 있었다.
한국광복군은 임시 정부 기관지 <광복>에 드러낸 것처럼 국내 진격 작전을 꿈꿨다. 총사령관 대리 황
학수는 중국군 출신 조선인, 만주 지역 독립군과 연계하고 중국군과 연합해 싸워 보려 했다. 그런데
광복군을 창설하는 시점부터 있던 갈등이 터졌다. 중국 군사 위원회가 서안의 광복군 총사령부 철수를
명령하고,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엄격하게 통제하라’는 지시를 전국에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김원봉의
조선 의용대가 공산당이 장악한 화북 지역으로 이동해 버렸다.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지원받다가 이처
럼 공산당(8로군)에 붙어 버리자 장제스는 분노했다. 중국 정부는 1941년 11월 15일 <한국광복군 행
동 9개 준승>을 하달하고 조선인의 군사 활동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이에 따라 한국광복군은 중국 군사 위원회 판공청에 소속되며 중국군의 일개 부대가 됐다. 광복군 지
휘부의 상당수는 중국군 간부로 채워졌다. 총사령부 간부 45명(편제 77명) 중 한국인은 12명, 나머지
33명은 중국인이었다. 그리고 제5항에 따라 1942년 10월 약 2년간 우여곡절을 겪으며 기반을 닦았던
서안을 떠나 충칭으로 이동하며 광복군의 독자적인 업무 체계는 모두 망가졌다.

싹트다 - 남조선 경비대와 한국군
대한민국 육군, 해군, 해병대, 공군의 창설
한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기존에 국방 경비를 맡던 통위부는 ‘국방부’로, 국방 경비대와 해안 경비대는
가각 ‘육군’과 ‘해군’으로, ‘경비사관학교’는 ‘육군사관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병역도 자발적으로 지원하
는 의용병 제도에서 1949년 8월 6일 병역법(법률 제41호)에 따라 국민개병제와 징병제로 전환했다.
한편 미국은 신생 자유주의 국가인 한국을 다방면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군사적인 부분을 살펴보
면, 육해공군 설립과 방위력 건설을 지원하고 한국군 장교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그리고 미군의
각종 교범을 한국군에 적극적으로 보급했다. 또한 병과별로 전문성을 기르도록 1950년 1월까지 보병,
포병, 공병, 항공, 통신, 헌병 등 13개 병과 학교를 설립하도록 도왔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간부들
은 각 학교에 배치되어 다른 간부들을 교육하고 수많은 영어 교범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한국 현대사와 빼놓을 수 없는 한국군
한국군은 한국 현대사와 빼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대한민국이 흘러온 과정에 군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 이후 현대사를 간추리면, 이승만 정권은 부정 선거, 부정부패 등으
로 분노한 민심에 몰락했다. 그리고 1961년 5월 16일, 육군 2군부 사령관 박정희 소장은 육사 3~5기
출신 장교 약 250명 포함 약 3,500명과 함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이후 주로 만주국
과 일본 제국을 경험했던 각 분야 전문가와 군인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사회
보장 제도 도입 등을 추진했다. 또한 농업, 제철, 조선, 기계, 석유 화학, 자동차, 건설 등 각종 산업을
구축하고, 고속 도로/철도 건설 등 사회 인프라에도 투자했다.
박정희 정권은 식민 지배에 대해 일본에게 배상받고 외교 관계도 수립했다. 이들은 자주국방을 기치로 삼
아 국방 과학 연구소를 설립해 기초 기술을 개발하고 육해공군 역량도 강화했다. 그리고 1964년부터 9년
간 국군을 베트남 전쟁에 파병해 미국으로부터 국군 현대화를 지원받고, 산업화에 필요한 각종 원조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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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뿌리

원도 받았다. 한편 한국군은 이를 통해 실전 경험을 쌓으며 강력한 전투력을 갖추게 됐다. 한편 북한이
박정희를 암살하려고 파견한 무장 공비들이 청와대 근처까지 침투한 사건(1·21 사태) 이후 정부는 육군3
사관학교를 설립해 장교를 더 육성하고, 북한의 위협에 대비해 향토 예비군도 도입했다.
아무튼 한국은 1960년대 필리핀, 캄보디아, 스리랑카, 아프가니스탄, 요르단, 시리아보다 경제적으로
빈약했지만, 박정희 정권을 거치며 현대 산업 국가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헌법을 1인
독재 체제로 바꾸고 국민들의 인권을 탄압하고, 정적 제거를 위한 각종 공작과 부정부패 등이 극심해
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박정희는 1979년 부가 가치세 도입, 부산·마산 항쟁 등 대중의 큰 반발심에 맞
물려 10월 26일 육사 동기생이자 중앙정보부장을 맡고 있던 김재규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12월 12일,
육사 11기 졸업생 일부가 꾸리고 운영한 사조직 하나회가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보안 사령관 전두환
이 그 중심이었다. 그를 따르는 일부 육사 출신들은 정치, 군사 권력을 독점했다. 참고로 전두환 정권
시기에는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에 힘입어 수출 산업이 급성장하고, 한국 경제는 세계 10위권으로 도
약하는 발판을 갖췄다. 하지만 그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 언론 탄압, 정치인 탄압, 삼청교육대
운영 등으로 국민 인권을 유린하고 탄압했다. 그리고 1987년 6월 10일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이 펼쳐
지고 난 6월 29일, 전두환은 민간 정부에 권력을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전 국민의 자유선거로 선출된 첫 대통령은 육사 11기 하나회 소속이자 12·12 사태 주역인 노태우다. 그
는 냉전 체제 몰락과 함께 소련, 중국, 동부 유럽과 외교 관계를 구축하는 데 앞장섰다. 또 적극적인 북
방 외교를 추진해 국제 사회에서 김일성을 고립시키고, 대한민국의 세계관을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시켰
다. 하지만 여전히 군사 권력은 하나회, 알자회 등 일부 육사 졸업생들이 만든 사조직이 독점했다. 이후
김영삼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군대 비밀 사조직을 숙청했다. 참고로 그때까지 하나회는 육사
11~36기 약 250명, 알자회는 육사 34~43기 약 120명이 활동했다. 또한 전두환, 노태우의 각종 범죄
행위를 수사해 기소했는데, 법원은 내란죄, 뇌물죄 등으로 전두환에겐 사형을, 노태우에겐 유기 징역
최고형을 선고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국내 사조직 숙청 후 한국군은 헌법에 명시된 정치적 중
립을 준수하며 문민 통제를 받고 있다.
그런데 2010년대 후반까지도 하나회, 알자회 출신 일부는 공직에서 출세했다. 하나회 강창희는 대한민
국 국회 의장을 지냈고, 하나회 막내 기수인 육사 36기는 대장까지 진급해 2016년 한미 연합군 사령
부 부사령관을 지냈으며, 알자회 막내 기수는 2019년까지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며 특전사령관, 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국군이 과연 군내 사조직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는지, 나름의 자정 작용을 충실히 하고
있는지 많은 의문이 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2022년 현재 대한민국은 세계 10위 경제 대국, 세계 6위 군사력을 갖춘 국가다. 이승만 대통령이 체결한
한미 군사 동맹은 북한, 소련, 중국 등 위협에 맞서 국방에 투입했어야 할 예산을 아껴 경제에 투자하도
록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고, 대한민국이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 빠르게 건국, 산업화, 민주화란
과제를 해결하는 동안 국가 안보의 중심축이었다.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은 미국, 유럽 연합, 중
국 모두와 자유 무역 협정을 맺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가 됐다. 참고로 1948년 건군 초창기 육해공
군은 입을 전투복이 없어 일본군이 남기고 가거나 미군이 쓰던 전투복을 입어야 했다.
이제 한국은 스스로 만든 전투복을 입는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방위 산업 기술까지 갖춰 소총, 기관총,
자주포, 박격포, 수류탄, 각종 미사일을 만들어 수출한다. ‘포방부’라 불릴 만큼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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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뿌리

포병 전력과 세계 최강 기계화 군단도 보유하고 있다. 수송용 헬리콥터를 만들고 직접 운용하며 공군의
국산 훈련기와 초음속 전투기는 세계 곳곳으로 수출되고, 4.5세대 스텔스 전투기, 조기 경보기, 공중 급
유기, 고고도 무인 정찰기, 군사 위성도 갖고 있다. 해군은 이지스 구축함, 경항공 모함급 상륙함,
3,000톤급 잠수함 등을 비롯해 각종 미사일과 어뢰 등을 만들고 있다. 잠수함과 함정을 수출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화 전투 훈련 시스템을 갖춰 실질적인 훈련도 하고 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옷도 무기도 없고, 한국 전쟁 당시 소총 한 자루도 만들지 못한 군대는 이렇게 기
적을 이뤘다. 한강의 기적이자 한국군의 기적이다. 그리고 2022년 현재 한국군은 전시 작전 통제 권한을
유엔군/한미 연합 사령부에게서 넘겨받고, 한국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내는 종전 선언을 추구하고 있다.
그런 한편, 오래도록 실전 경험 없이 PPT와 마우스로 훈련하며, 조직은 관료주의에 더 깊이 물들어 가고,
온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방산 비리, 인구 감소로 인한 병역 자원의 급격한 감소, 일제 강점기보
다 높은 징집률, 장군단의 정권 눈치 보기와 표리부동한 줄서기, 일부 구시대적 조직 문화와 각종 악성
사고, 책임 회피 등 다양한 내홍도 겪고 있다. 국민 의식과 동떨어져 비판받는 경우도 종종 있고 특히 집
권 정당의 진영 논리에 따라 국방 원칙이 통째로 흔들리는 모습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가장 강한 힘이자 최후의 보루이며,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돕
는 든든한 친구다. 지금부터 이제까지 서술한 바에 따라 한국군의 뿌리를 살펴보자.

한국군의 뿌리는 무엇인가?
인적 차원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인간과 조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고종 때 조선군은 러시아,
일본, 청나라, 영국, 미국에게 교육받은 혼종이었다. 대한 제국군은 러시아군과 일본군에게 교육받았다.
그리고 한국군은 일본군, 만주 관동군 그리고 중국군 출신들이 중심이었고 광복군 출신은 소수였다. 참고
로 육군 참모 총장 1~16대, 1대 및 5대 공군 참모 총장, 해병대 1~3대 사령관 등이 일본군, 만주군 출
신이다. 반면 해군 창설은 민간 업체 출신들이 주도했다. 그리고 1948년부터 교육과 제도, 장비와 물자
가 본격적으로 미국화됐고,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등을 거치며 미국식 군대가 됐다.
제도 / 장비적 차원
군사 제도는 선발, 편성, 조직, 장교 양성(교육), 훈련, 작전, 전술, 군수, 최고 지휘관 권한(군령권/군
정권 등)과 책임 등을 포함하는데, 대한 제국기는 러시아식과 일본식이 섞였다. 그리고 독립군과 광복
군은 대한 제국, 중국군에게 영향을 받았다. 한편 한국군은 초기 일본군, 만주군 경험자들이 주도한 결
과 일본식이었다. 이후 미국은 1948년 정부 수립 전후로 온갖 제도와 장비가 뒤섞인 체계를 통합하려
고 군사 교범 통일과 교육 기관 설립, 장교 유학, 장비 보급 등에 공들였다. 그렇게 군사 고문단이 한
국에 오래도록 주둔하며 각종 역할을 맡은 결과 한국군은 미국화되었다.
문화적 차원
문화는 사람, 제도, 공간, 인식, 시간 등이 상호 작용하며 형성되는데, 일본군, 만주군 출신은 어려서
부터 일본 문화에 익숙했다. 참고로 일제는 특히 모든 국민과 식민지인들에게 교육에 관한 칙어(교육
칙어)를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신사 참배, 조회, 대회 등 다양한 의식에 참여하도록 했다. 교육 칙어는
천황을 위해 목숨마저 바치도록 세뇌시킨 명령서인데, 1911년 제1차 조선 교육령 제2조에도 담아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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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뿌리

선인 교육에도 반영했다. 또한 일본군과 만주군은 군인칙유를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아무튼 교육 칙어
와 군인칙유는 개인과 사회의 다양성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통제하며 경직된 세계관을 심었다. 또한 일
본군 특유의 엄격한 위계질서, 가혹 행위, 연좌제식 처벌, 기합(얼차려), 내리 갈굼, 상호 감시 등은 한
국군 문화에도 여과 없이 전달됐다. 물론 조선군, 대한 제국군 등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고, 각종 독립
군과 한국광복군도 마찬가지였다. 하급자를 가혹하게 다루고 모욕하며 학대한 악습은 심지어 고려, 조
선 시대에도 뿌리 깊었다.
한편 공산주의 계열은 민족보다 계급을 앞세웠다. 민중 혁명을 일으켜 부르주아 계급과 봉건 사회를 타파
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관점이었다. 한국군에 남조선 노동당 공산주의자
들이 대거 입대하며 군 문화와 이념에도 일부 영향을 미쳤지만 대규모 숙군을 통해 정화됐다. 그리고
1948년을 전후로 군사 제도와 인적 구성은 점점 미국화되었다. 그러나 군 문화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2022년 지금도 ‘한국군 문화에서 일제 잔재를 없애야 한다’는 비판이 수시로 제기된다. 결론적으
로 창군 당시의 한국군은 일본군, 중국군, 만주군, 독립군, 광복군, 대한 제국군, 미국군, 러시아군, 청
나라군 등에 직간접적인 뿌리를 둔다. 그리고 인적, 제도적, 문화적 뿌리는 대부분 일본군과 만주군,
일부는 중국군과 광복군에서 왔다. 그리고 한국 전쟁 전후로는 인사, 보급, 교육, 훈련, 부대 관리, 시
설, 물자, 장비, 보급, 수송, 통신, 정보 등 모든 분야에서 미국식 군대로 탈바꿈했다.
2022년 현재 국방부 정신 교육 자료는 주장한다. “우리 헌법 전문에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듯이 우리 국군 역시 의병, 독립군, 광
복군을 계승하고 있다.” 의병, 독립군, 광복군과 한국군을 연결하는 건 옳고도 마땅하다. 그들이 보였
던 투쟁 정신과 민족을 위한 충정도 기려야 한다. 그런데 ‘독립군’으로 불린 수많은 단체 중 도대체 누
구를 계승하는 걸까? 일제와 싸우기보다 서로 싸워 죽인 경우가 많았는데, 어떤 ‘독립군’을 계승한다는
걸까?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정해 놓은 답만 외우도록 강요한다.
군대는 현존하는 안보 위협에 대비해 훈련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합법적 폭력 조직이다. 현대
한국군이 상대해야 하는 안보 위협은 무엇일까? 한국군의 뿌리는 무엇일까? 역사는 말한다. “한국군의
뿌리는 다양하다.”고. 역사를 스스로 왜곡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자. 국제 관계에 따라 긴박하고 압
축적으로 멸망, 식민, 해방, 건국, 건군하며 생겨난 각종 모순과 역설들을 이젠 품고 보듬어야 한다.
일부 사실을 전체라고 호도하며 억지로 외우도록 강요하는 건 거대한 폭력이다. 손자병법이 강조하는
‘지피지기 백전불태’와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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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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