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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평전 (1)

Casey,Riley 2022. 10. 2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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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 평전
요아힘 C. 페스트


    예비관찰 : 히틀러는 역사상 위대한 인물인가?
  잘 알려진 역사는  히틀러와 같은 현상을 적절하게 분류하지 못한다.  그
를 '위대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환호성과 히스테리. 그리고  치유에 대한 
기대감을 히틀러만큼 많이 불러일으킨 사람은 없었다. 그토록  심하게 미움
을 불러일으킨 사람도 없었다. 불과 몇 년 동안 혼자만의  길을 가고 난 다
음에 시대의 흐름을 그토록  믿을 수 없을 수 정도로 재촉하고,  세계 정세
를 그토록 변화시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처럼 엄청난 폐허를  자신의 
뒤에 남긴 사람은  없었다. 거의 전세계가 연합전선을 펴서 6년여  동안 계
속된 전쟁을  하고 난 다음에야 마침내  그를 지상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독일 저항군 한 장교의 말을 빌자면  '미친 개처럼(게르스도르프 대령이 육
군 사령관 만슈타인에게 말한 것.)' 겨우 때려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의 독특한 위대성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과도한 특성들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척도를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에너지의 폭발이었다. 물론 
거대하다는 것이 역사적  위대성은 아니며 아주 하찮은  것도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거대한 것만도, 하찮은 것만도 
아니었다. 그가 뿜어낸  폭발력은 최후의 몇 주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단계에서 주도적인 의지력을  드러냈다. 연설을 할 때마다 그는 분명한  황
홀감을 감춘 채 처음 시작하던 시절을  기억해내곤 했다. "배우에 아무것도 
갖지 못했던 시절,  이름도, 재산도, 언론도, 아무것도, 전혀  아무것도 갖지 
못했던" 그  시절을 기억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해서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이 '불쌍한 인간'이 독일의 지배자로, 그리고 이어서 세계의 일부를 
지배하는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기억했다. "그것은 정말  굉장한 일이
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유례없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냈으
며, 모든 것을 자신 안에 지녔다. 자기 자신의 교사, 정당의 조직자, 정강의 
창시자, 전술가,  선동적인 복음전파사, 지도자,  정치가, 그리고 10년  동안 
세계 정세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모든 혁명은 자신의  자식을 잡아먹는다
는 경험법칙을 반박하였다. 그는 보통 말하는  대로 "자신이 일으킨 혁명에
서 루소, 미라보, 로베스피에르,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자신이 일으킨 혁명
에는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이었다. 성격이나 본질로 보아서 그
는 위에 열거한 사람들 대부분보다 열등한 인물이었지만,  이상스럽게도 자
기 앞의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일을  이룩하였다. 그는 자기 혁명의  모든 
국면을 지배하였으며, 심지어는 그 혁명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여전히 그것
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로 보아 그가 불러일으킨 엄청난  힘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힘들에 대해서 비상한 육감을 가졌으
며, 시대의 주도적인 경향에  현혹되지 않았다. 그가 정치에 입문하던 시절
은 완전히 시민적  자유주의 체제의 특성을 보이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는 
체제에 감추어진 저항감을  포착하고, 실로 대담하고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그것을 자신의 정치  프로그램으로 삼았다. 그의 태도는 정치적 이성에  어
긋나는 것으로 보였다.  오만한 시대정신은 여러 해 동안이나 그를  진지하
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불러일으키는 비웃음은 그의 외모와 흥분된 연설, 
그리고 그가 개발한  연극적인 걸음걸이 등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는 설명하기 힘든 방법으로 언제나 자신의 진부하고 공허한 모습을 넘어서 
있었다. 1935년에 네덜란드에서 (뮌헨의 동키호테)라는 이름으로 나온 초기
의 히틀러 전기에 지적된 것처럼  그의 특별한 강점은 공중누각을 세울 줄 
알았다는 점이 아니라 대담하고 날카로운 합리성이었다.

    한 시대를 장악한 개인
  10년 전만 해도 히틀러는  바이에른의 실패한 정치가의 모습으로 뮌헨의 
가구 딸린 어떤 방에 앉아서  정신나간 것으로 보이는 구상에다가 멋진 개
선문과 둥근 지붕 홀을 지어주고 있었다. 1923년 11월의  쿠데타 기도가 있
은 다음에 모든 희망이 무너져버렸는데도 그는 자신의 말을 하나도 철회하
지 않았고, 투쟁선언을 줄이지  않았으며, 세계 지배 야욕을 조금도 지우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은  당시 자기를 공사가로만 여겼다고 그는 나중에  말
했다. "그들은 언제나 내가 미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그가 생각했던 모든 것은 현실이 되거나 아니면 실현가능한 프로젝트가 되
었다. 스스로 항구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여겼던 힘들이 오히려  몰
락하였다. 민주주의,  정당국가, 노동조합,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의식, 유
럽의 연합체계와 국제연맹 등이었다. 히틀러는 승리감에 넘쳐서  이렇게 외
쳤다. "누가  옳았습니까. 공상가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입니까?  내가 
옳았습니다." (1937년 5월  20일지 연설) 자신의 내적으로  시대의 정신 및 
경향과 일치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이런 확신과, 시대의 경향을 밖으로  이
끌어내는 능력에는 분명 역사적 위대성의 요소가 들어 있다.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유명한 에세이  (세계사 관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위대성이란 초개인적인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 그 특성인 것  같다." 그리
고 중요한 개인의 이기심과 전체의지 사이에 '비밀스런 일치'가 이루어진다
고 말하고 있다. 일반적인 전제로 보나 단면적인 삶의  과정을 보나 히틀러
의 삶은 바로 이러한 위대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장들은 상
당한 정도로  그 사실을 입증해줄  것이다. 부르크하르트가 말하는  역사적 
인물을 형성하는  나머지 조건들도 사정이  비슷하다. 히틀러는 한  민족을 
구태의연한 상태에서 그가 없었다면 생각도 못할 새로운 상태로 이끌어 가
는, 남이 대신할  수 없는 특성을 가졌다.  그는 시대의 상상력을 사로잡았
다. '한 정당의  정강과 분노'를 대표할 뿐 아니라 일반적인  욕구를 대표하
였다. '말에 올라타고 심연을  건너뛰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역사적으로 위
대한 인물은 사태를  단순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져야 하며, 실질적인  힘과 
겉보기에 힘처럼 보이는  것을 구별하는 재능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일종
의 마적인 강제력을  지닌 비상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그러한  능력과 의지력을  가졌다. "가까이에서 저항한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저항하려는 사람은 관계자의 영역  바깥에서 적과 
더불어 살아야 하고,  관계자는 오직 전쟁터에서만 만나야  한다."(클라우스 
만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에서  고트프리트 벤은 히틀러를 관찰하면서 명백
하게 부르크하르트의 관찰을 인용하고 있다. "오늘  여기서 당신은 다시 이
런 질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히틀러가 이  운동을 만들었는가, 아니면 이 
운동이 그를  만들어냈는가? 이 질문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그 두  가지 
질문이 똑같기 때문에 그 두 가지를 구별할 수가  없지요. 여기서는 부르크
하르트가 세계사 관찰에서 역사적인 대사건의 위대한 인물들을 묘사하면서 
언급한 개인과 보편  사이에 마적인 일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위대한  남
자들, 모든 것이 여기 있습니다. 처음 시작의 위기,  거의 언제나 끔찍한 시
기에만 등장한다는  것, 무시무신한 지속성, 모든  것과 구조적인 기능에도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가벼움, 그리고 모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예감, 
바로 그만을 필요로 하고 그만이 가능한 그 일을 그가 해낼 사람이라는 예
감 말입니다." )

    히틀러의 역사적 위대성에 대한 의문
  그런데도 히틀러를  '위대하다'고 일컫기가  망설여진다. 이 사람의  정신 
병자 같은 얼굴에 드러난 범죄적인 모습이 이런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세계사는  '도덕성이 지배하는' 토대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
니기 때문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위대한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평범한 관습
법에서 특별히 면제되었다'는 의식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히틀러에 의해
서 계획되고 자행된 대량학살의 완전범죄는 그것과는 다른  종류가 아니냐, 
그리고 그는 헤겔과 부르크하르트가  같은 의견을 보이는 문명이라는 맥락
의 한계를 넘어간 것이 아니냐 하는 질문을 해볼수도  있을 것이다. 위대한 
인간이라는 현상은 무엇보다도 미적인 특성을 보인다. 그리고  극히 드물게
만 도덕적인  특성을 보이는 것이다.  히틀러는 도덕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특별면제를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미적인 영역에서는 그럴 수가  없
다.
  오래된 미학의 명제는 온갖 뛰어난 특성을 가지고 있어도 불쾌감을 주는 
인간은 영웅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히틀러가 바로  그러한 불쾌감을 주는 
인간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고, 금새 그 증거들을 찾을 수 있다. 그에게 독
특한, 본능과 연관된  수많은 어두운 모습들, 너그럽지  못한 성격, 복수욕, 
관대함의 결핍,  노골적인 물질주의, 그래서 오직  권력의 동기만 타당하고 
그밖의 것은 모두 헛소리로 여겨서 언제나 가장자리로  다시 밀쳐내버리는, 
분명하게 상스러운 이러한 특성들은  역겨울 정도로 비열한 요소를 지니고 
있어서 전통적인 위대성의 개념에 맞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비스마
르크는 어떤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상에서 출중하다는  것은 
언제나 추락한 천사와 가까운 친척관계에 있다. 추락한  천사는 아름답지만 
평화가 없고,  계획과 노력은 위대하지만 성공은  못하고, 자부심이 강하고 
슬픈 존재이다." 히틀러의 모습은 이것과는 무한히 거리가 멀다.
  그러나 위대성의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토마스 만은 망명 
중에 쓴 염세적인 정치 에세이에서 히틀러의 승리에  관해서 '위대성'과 '천
재'라는 말을 하고 있다.  다만 그것은 '망가진 위대성'과 열등한 단계의 천
재이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개념은 기존의 의미와 작별을 고하게 된다. 어
쩌면 위대성의 개념은 부분적으로는 지난 시대의 역사 이해에서 나온 것일
지 모른다. 과거의 역사 이해 방식은 역사의 진행에  등장하는 배우들과 이
념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이고, 힘들의 광범위한 그물망에  대해서는 무관
심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생각은 널리 퍼져 있다. 그러한 생각에 따르면 사
회 내부의 이해관계, 사정,  물질적 갈등에 비해보면 개인이란 그다지 중요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히틀러의 예에서  이러한 주장이 확
고하게 입증된다고  여긴다. 히틀러는  대자본의 '하인'이며 대자본을  위해 
'칼을 잡은  팔'로서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을  조직해서, 1933년에는 정치적, 
사회적 자기 결정을 요구하는 대중을 종속으로 이끌어들였다.  그러고 나서 
전쟁을 일으켜서 그러한 요구를 확장된 형태로 충족시켰다는  것이다. 대단
히 다양하게 변조된 이러한 명제들은 히틀러를 근본적으로 대체 가능한 존
재로 여겼다. 1929년에 이미 좌익측의 파시즘 분석가들 중  한 명이 서술한 
대로 그는 '극히 평범한 꼭두각시'에 불과하는 것이다.  아니면 수많은 요인
들 중의 하나의 요인에 불과할  뿐 절대로 결정적인 인자는 아니라고 보았
다.

    변명을 위한 전기 서술
  근본적으로 이것은 전기 서술을  통해서 역사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생각
에 반대하는  생각이다. 대단히 뒤엉키고 모순투성이인  역사, 수없이 많고 
쉬지 않고 바뀌는 긴장영역을 가진 역사의 진행과정을 어떤 개인이 드러내 
보여줄 수는 없다는  비난이다. 엄격하게 생각하면 개인 중심의 역사  서술
이란  옛날식의 궁정문헌과  숭배문헌의 전통을  이어받는 것이라고  본다. 
1945년에 제3제국 정권이 붕괴된 사건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옛날과 동일
한 방법에 징후만  바뀌었다고 본다. 구식 역사관처럼 여기서도 모든  것을 
움직이는, 저항할 수 없는 하나의 힘은 여전히 히틀러라는 개인이며, "다만 
그 질만 바뀌었다.  전에 기사가 차지했던 자리를 이제 악마적인  유혹자가 
차지했을 뿐이다."
  결국 전기 서술이  원하든 원치 않든 한때  수백만에 이르렀던 패거리의 
자기 합리화를 위해 쓰이고 있다는 비난인 것이다. 이  패거리는 그토록 대
단한 지도자의  '위대성' 앞에서 스스로  희생자였다는 여길 수 있게  된다. 
아니면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명령하는 악마적인 지
도자의 병적인 히틀러의 전기를 쓰는  것은 포괄적인 무죄 변명 전략의 일
부로서 위장된 면죄  공작이라는 것이다.(이러한 비난은 완전히  근거가 없
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히틀러 주변의 여성을 광범위하고 독립적으로  다
루고, 예를 들면 독재자의 약물남용이나 뇌염을 이데올로기적 기준점들, 세
계경제 위기, 혹은 도이치 국가관에 나타나는 권위적인 전통  등보다 더 중
요하게 취급하는 세밀한  생애 묘사에 들어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히틀러
가 산업가, 은행가, 대지주  등 '나치 패거리'들이 애써 '키워낸' 후보였다는 
식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해석들도 비슷한 생각을 드러낸다.  엄격하게 
보자면 남자들이 역사를 만들어낸다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주장을 뒤집어
서 '자본가들'에게 덮어 씌워버린 것이다. 변명의 동기를  감추고 있는 부정
적인 숭배문헌들도 여기 작용한다. ) 이러한  비난은 실제로 히틀러가 개인
적인 특성만으로는 우리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더욱 
힘을 얻게 된다. 그 개인은 여러 해를 통해서 이상할  정도로 색깔 없고 표
정 없는 존재로 남아  있다. 시대와 접촉을 해야만 비로소 그의  개성은 긴
장과 매력을 얻게 된다. 히틀러는 발터 벤야민이  '사회적 성격'이라고 부른 
특성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시대의 두려움, 저항감과 희망을 거의 모
범적이고 할 정도로 결합시킨 성격이다. 이 모든 것은  지나칠 정도로 과장
되고 왜곡되고 쓸데없는  것들을 많이 끼워넣은 것이긴 하지만, 절대로  시
대배경과 무관하거나  합당치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개인을 넘어선  경향과 
상황들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히틀러의  생애를 서술하고 해석할 가치가 없
다. 그의 전기는 언제나 시대의  전기일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모든 비난
에도 불구하고 이 전기 서술은 정당성을 얻게 된다.
  이런 사정은 보통의 전기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배경을 드러내 보이도록 
강요한다. 히틀러는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격려하고,  자신을 앞으로 
몰아가기도 하고 잠시 붙잡기도 하는 객관적인 인자들을 앞에 두고서 스스
로 발전해 나갔다. 물론 도이치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과 바
이마르 공화국을 뒤덮은 불쾌한 '잿빛'도 그런 인자에  속한다. 베르사유 조
약을 통한 국가의  추락, 인플레이션과 세계 경제위기를 통한 광범위한  계
층의 이중적인 사회적  추락도 거기 해당한다. 독일에 민주주의 전통이  약
하다는 사실, 공산주의 진영의 혁명 위협, 전쟁의  체험, 불안해진 보수진영
의 계산착오, 그리고  친숙한 질서에서 새롭고 낯선 질서로 이행하는  과정
에 생겨나는 광범위한 불안감.  여러 모로 뒤얽혀 꿰뚫어볼 수 없게  된 불
쾌감을 단순한 해결공식을 내주고자 하는 욕구, 시대가  마련해준 혼란상태
에서 명령적인 권위의  품 속으로 도망치고자 하는  욕구가 이런 배경들과 
합쳐졌다.

    개인심리와 사회심리의 결합
  히틀러는 시대의 모든 동경,  두려움, 원한 등의 합일점으로서 역사의 인
물이 되었다. 그 시기에 일어난 사건은 그가 없었다면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히틀러라는 인물을  통해서 한 개인이 역사 진행을 지배하는  놀라
운 힘을 한 번  더 보여주었다. 이 책은 선동의 천재, 탁월한  전략적 재능, 
이미 앞서 이야기한  '마적인 일치'의 능력이 한  개인 안에 합쳐지게 되면 
한 시대의 몹시  뒤엉킨 목소리들을 한데 모아  어떠한 강력함과 독성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역사는 때때로 한 인간  안에 응축
되어 나타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 전세계를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히
틀러의 부상은 일반적인 전제들과 개인의 전제들이 특이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지경이다. 이  남자와 
이 시대가, 이 시대와 이  남자가 하나가 된, 풀기 어려운 일치관계를 통해
서 그것이 가능했다.  이런 시대와의 연관성은 히틀러가 특별한 능력을  가
졌다고 인정하는 생각들과  거리가 먼 것이다. 악마적인 특성이 아니라  모
범적인 특성들, 그러니까  '정상적인' 특성들이 그의 길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의 삶의 과정은, 그가 시대와 그 인간들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대
립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론들이  얼마나 문제가 많고 이데올로기에 빠진 
것인가 하는 점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앞으로 끊임없이, 이러한 동일성의 
흔적들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는 주로 특별히  끼워 넣은 중간관찰들을 통해서 형식상으로도 
사회의 객관적 전제들의 중요성을 암시할 것이다. 이토록  객관적 전제들이 
중요하다면 다음의 질문을 해보게 된다. 역사진행에서 히틀러의  특별한 적
용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1920년대가 지나는 동안 민족적인 통합운
동은 그가 끼여들지 않고도 반향을 얻고 추종자를 얻었으리라는 주장은 물
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체제의  맥락에서 보면 약간 주목할  만한 
정치 그룹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히틀러는 그의 본
질인 상상력과  투철성의 혼합을 이  운동에 상당한 정도로  덧붙여주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나 요제프 괴벨스의 과격주의는 적절한 게임규칙을 위반
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위반에 그들의 지속적인 가치가 있다. 
그에 반해서 히틀러의 과격주의는  현존하는 전제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전
에 들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다. 그  시대의 수많은 비
상사태들과 불쾌감은 언제라도 위기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인물이 없었다면 분명히  그토록 날카롭고도 폭발적인 형태로 발전되지
는 않았을 것이다.
  1921년 여름, 당의  최초의 위기부터 시작해서 그가 괴링과 히틀러를  쫓
아낸 1945년 4월까지  그의 위치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이념이 자
기보다 더한 권위를 가지는 것을 절대로 참지 못했다.  참으로 대단한 방자
함으로 그는 역사를 만들었다.  자기 시대에 이미 시대착오였고, 아마 앞으
로 다시는 있을 수 없는 방식이었다. 주관적인 발상들이 사슬을 이루고, 놀
라운 기습과 발상의 전환, 숨가쁜 배신 행위와 이념상의 자기 부정, 그리고 
집요하게 추구한 비전을 배경에 두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독특
한 성격, 주관적인 요소의  어떤 부분을 역사에 강요하였고, 그러한 측면이 
'히틀러-파시즘'이라는 공식으로 표현되어 나왔다. 그것은 1930년대에  이르
기까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널리 퍼져  있던 공식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사회주의(나치즘)를 히틀러 주의라고 정의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개인이 만든 역사 역사가 만든 개인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해 불 수 있다. 히틀러는  상황과 이해관계의 중요성
을 전반적으로  무시할 수 있었던 최후의  정치가가 아니었을까? 객관적인 
인자들의 강제성이 점차 강해지고  위대한 행위자의 역사적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적 등급이란 행위자가 상황에 대
하여 확보하는 자유에 달려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히틀
러는 1939년 초여름에  어떤 비공개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황에 
적응함으로써 문제의 해결을 피하는 것이 원칙이 될 수  없다. 차라리 상황
을 요구에 적응시키는  편이 낫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공상가'라고 불
린 그는 극단까지 추진하다가 마침내 실패한 모험적인 시도에서 분명히 위
해한 인물의 모범을 좇아서 살았다. 다른 수많은 일들처럼  이것도 그와 더
불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베이징에도 모스크바에도 워싱턴에도  그와 
같은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혼란스런 꿈의 모습을 좇아 세계를 변
화시키는 일은 두 번 다시 생길 수 없다... 이제는 정상에 있는  단 한 사람
이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다. 그는 결정들을 조정할 뿐이다. 결정은 긴 손의 
모범에 따라서 짜여진다.  히틀러는 고전적인 '위대한' 정치의  마지막 실천
자였다."
  전통적인 영웅문학이 오랫동안 전제로  해온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남자들
이 역사를 만들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한 사람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역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동시에 극히  비상한 방식으로 역
사가 그를 만들어냈다.  다음 장들 중 한 곳에서 그는  '비개성'이라고 불리
게 된다. 미리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이 '비개성'  속으로 들어간 경우는 없
었다. 그러나 그의 속으로 들어간 것은 그것을 통해서  무서울 정도의 역동
성을 얻었다. 히틀러의 전기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매우  집중적인 상호교환 
과정의 역사이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적 위대성이란 무가치한,  혹은 존경할 만하지  못한 
개인의 생활  상태와 짝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히틀러를 
우선 깨워 일으켜서 수백만 명의  분노 및 방어 콤플렉스의 대변인으로 만
들어낸 저 상황을 역사가 그에게 허용해주지 않았더라면 거의 운명이 어찌
되었을까 그려보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니다. 그는  사회의 변두리 어
디에서 무시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분노와 인간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착
서 위대한 운명을 동경하면서, 자신에게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영웅의 역
할을 허용해주지 않은 삶을 용서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었다."고 히틀러
는 정치에 입문하던 시기에 관해서 적었다. 질서의 붕괴, 시대의 불안과 변
화의 분위기가 그에게  이름 없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기회를 주었다.  야콥
부르크하르트에 따르면, 위대함이란 무서운 시대의 필요성이라고 한다.
  히틀러의 출현은 위대함이 보잘것없는  개인을 동반하고 나타날 수도 있
다는 사실을 모든 경험을 압도할 정도로 가르쳐준다. 한참 동안이나. 이 개
인 해체되어버린 듯이, 비현실  속으로 도주해버린 듯이 보였다. 바로 이런 
허구의 특성이 그렇게 많은 보수주의 정치가들과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이 
이상스럽게도 한 목소리를 히틀러를 다른 사람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여기
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모든 위대함, 정치적 혹은 역사적 등급과 극히 무관
하게 그는 이상적인  '중개인' 유형의 인물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양측은 
다같이 실망하였다. 소시민드렝 대항한 계급상이 원한이 만들어낸  이런 착
오를 정치로 만들어낸 것은 히틀러의 전술적인 성공비법이었다.  그의 전기
는 또한 모든 면에서 서서히 진행된 각성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의 출현을 
보면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언제나 솟아  나와서 오직 희생자의 
모습을 보고서만 중단되는 저  아이러니컬한 과소평가도 그에게는 맞지 않
는다.
  이 사람의 삶의 길, 사건들의  과정이 이 책에서 밝혀질 것이다. 그와 나
란히 사고의 실험은  회의에 빠져들 뿐이다. 히틀러가 1938년 암살의  제물
로 쓰러졌더라면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가 도이치 사람들의 가장 위대한 
정치가들 중 한  명이었다, 혹은 도이치 역사의 완성자였다고 부르기를  망
설일 것이다. 공격적인 연설들과  (나의 투쟁), 반유대주의, 세계 지배의 계
획 등은 어쩌면  초기의 공상으로 여겨져 잊혀졌을 것이고, 어쩌다가  비판
자들이 국민의  의식 속으로 불러들이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6년  반의 
시간이 히틀러에게서  이 명성을 떼어놓았다.  물론 폭력에 의한  종말만이 
그에게 그러한 명성을  안겨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파괴를 
위한 사람이었고, 자신마저도 그  점에서 예외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
나 명성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우리는 그를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
을까?      
      1부 욕망에 사로잡힌 소년
    제1장 출생과 시작
  자신의 개성을 감추고 또한 미화시키는 것은 그의 생애의 근본적인 노력
들 중의 하나였다.  역사상의 어떤 현상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토록  억
지로 양식화되고, 개성을 드러내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는  한 인가의 것이라기보다는 기념동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일생 동안 그는 그 이미지 뒤에 숨으려고 애썼다. 일찍이 소명에 
대한 의식으로 딱딱하게 굳어져서 서른  다섯 살이 되었을 때는 위대한 지
도자의 모습, 집중하고 얼어붙은 접근 불가능의 모습 뒤로 숨어 버렸다. 전
설을 만들어내는 어둠과 특별한 선민의식의 광채가 그의 삶의 전사를 뒤덮
고 있다. 또한  불안, 비밀스러움, 특이한 역할 특성이 그의  존재에 각인되
었다.
  상승을 위해 애쓰던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당(NSDAP)의 당수 시
절에 그는 이미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관심을 모욕이라고 느꼈다.  수상이 
되었을 때는 자기  사생활에 대한 모든 출판을 금지시켰다. 학교  친구부터 
가장 친근한 저녁의 술자리 모임을  통해 그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그가 세심하게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고 
자신을 감추려고 노력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일생 동안  이상스럽게 거리
를 만드는 요소를  가졌다." 그는 젊은 시절 여러 해를  남자들만의 하숙집
에서 살았다.  그러나 거기서 그를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뒷날 그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는 낯설고도  눈에 띄지 않게 그들  곁을 
스쳐지나간 것이다. 뒷날 수소문을 해보아도 그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정치 경력을 쌓던  초기에 그는 자신의 사진이  출판되지 
않도록 열렬히 애를 썼다. 이런 점을 보고 자신의  효과를 확신하는 선동가
의 신중한 면모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는 처음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
아서 신비에 둘러싸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은폐 노력은 단순히 '오래된 예언자  방식'이나, 혹은 카리스
마의 마법적인 요소를 자기 생으로 도입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
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고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느낌으로 
압도된 은폐된 인간의  염려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언제나  흔적
을 지우고 동일성을  확인하지 못하게 만들고, 꿰뚫어보기 어려운 출생  기
원과 가족적  배경을 더욱  흐르게 만들기 위해서  세심한 노력을  하였다. 
1942년에 슈피탈 마을에서 그를  위한 기념패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그는 전혀 거침이 없는 그 유명한 분노의 폭발을  일으켰다. 자기 조상들은 
'가난한 소작농'이었다고  주장하고 아버지의 직업은 세관원이었건만  '우체
국 직원'이라고 거짓말하고,  자신에게 접근하려고 애쓰는 친척들을 가차없
이 밀쳐 내버렸다. 그리고 윗소금산에서 임시로 집안일을  보아주던 누이동
생 파울라에게는 다른 이름을 쓰라고 강요하였다.
  특이하게도 그는 개인적인 서신교환이 전혀 없었다. 인종주의  철학의 창
시자인 요르크 란치 리벤펠스에게서 그는 초기의 몇 가지 막연한 생각들을 
얻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로 진군한 이후 그가 편지쓰는  것을 금지시켜버
렸다. 그리고 남자  하숙집의 친구였던 라인홀트하니쉬를 죽이라고  명령했
다. 그는 그 누구의 학생도  되고 싶지 않았고, 모든 깨달음은 오직 자신의 
영감, 특권, 수호정령과의  대화 등에 힘입은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마찬
가지로 그 누구의 아들도 아니고  싶었다. 그의 책 (나의 투쟁)에서 부모의 
모습은 생애의 전설을 떠받쳐주는  한도 내에서 도식적으로만 등장하고 있
다,.

    가려져 있는 가족사
  국경 저편 출신이라는 사실은  주변을 은폐하는 의도에는 이로는 것이었
다. 알렉산더 대왕에서 나폴레옹을 거쳐 스탈린에 이르기까지  많은 혁명가
나 역사상의 정복자들처럼 그도 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이방인이었다. 이런 
아웃사이더의 느낌과, 거칠고  광대한 계획을 위해 한 국민을 몰락에  이르
기까지 몰고 가는  마음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적  연관성은 그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2차대전의 국면이 바뀌고 있던 시점, 피의 지구전이 계속되고 있
을 때 그는  새로 투입된 장교들에게서 막대한  인명손실이 난다는 보고를 
받자 짤막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젊은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타지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충분히  은폐될 수는 없었
다. 질서와 규칙, 시민성에 대한 그의 감각은 어둡게 가려져 있는 가족사와 
언제나 갈등을 빚었다. 출생과 요구 사이의 거리감, 자신의 과거에 대한 두
려움은 한 번도 그의  마음을 떠난 적이 없었다. 1930년에 그의  집인 배경
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의도가  밝혀지자 히틀러는 지나치게 불안한 태도로 
속마음을 드러냈다.  "이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알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내가 어디 출신이며 어떤 가문 출신이지 알아서는 안 된다."
  아버지 쪽으로나  어머니 쪽으로 보아서  이 집안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중왕국의 멀리 떨어진  가난한 지역 출신이었다. 그곳은 도나우 강과  보
헤미아 국경 사이의 숲이 우거진 지역이었다. 여러 세대에  걸친 근친 결혼
으로 복잡한 친척관계로 얽혀 있는 농사꾼들이 모여사는  곳, 은둔지역으로 
알려진 될러스하임, 슈트로네스, 바이트라, 슈비탈, 발터슐라크 등의 이름으
로 고대사에 이미 등장하고 있다. 무성한 숲 사이로  협소하게 자리잡은 지
역 여기저기에 작은 마을들이 흩어져 있는 곳이었다.  히틀러, 히들러, 혹은 
휘틀러라는 이름은 체코  이름으로 보인다. 여러 지역을 전전한 끝에  1430
년대에 처음으로 이 삼림지역에 그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세
대에 걸쳐서 소작인들만  나왔을 뿐 아무도 이곳의  사회적인 한계를 뚫고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1837년 6월 7일에 슈트로네스  13번지에 소작농 요한 트룸멜슐라거의 집
에서 결혼하지 않은  하녀 마리아 안나 쉬클로루버가 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같은  날 알로이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될러스하임  군
이 출생기록부에 아이  아버지의 인적 사항을 기록하는 난은 비어  있었다. 
어머니가 5년 뒤에 일정한 일자리도 갖지 못한 방앗간 견습공 요한 게오르
크 히들러와 결혼을 하고 난 뒤.에도 그것은 변함이 없었다. 아마도 그녀는 
같은 해에 자기 아들을 남편의  형제인 슈피탈 출신의 요한 네포묵 휘틀러
에게 주었던 것 같다.  아이가 아무 연고도 없이 자랄까 봐  두려웠던 모양
이다. 어쨌든 히틀러 일가는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너무나 가난해서 '잠자
리도 없이 가축의 여물통에서 잠을 잤을' 정도였다.

    베일에 싸인 할아버지의 존재
  방앗간 견습공인 요한 게오르크 히틀러와 그의 동생인 농부 요한 네포묵 
히틀러는 추측컨대 두 사람  다 알로이스 쉬클그루버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 같다. 히틀러의 가까운 주변에서 나온, 상당히 무모한 확인에 따르면 세 
번째 아버지 후보는  그라츠의 유대인 프랑켄베르거이다. 마리아안나  쉬클
그루버는 임신했을 때  그 집에서 집안일을 해주고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오랜 기간 히틀러의  변호사였고, 나중에 폴란드 총독을 지낸 한스  프랑크
는 뉘른베르크 해명서에서 다음가 같이 증언했다. 
  히틀러는 1930년에 이복형의 아들에게서  아마 협박 목적으로 쓰여진 편
지를 한 통 받았다고 한다. 그 편지는 히틀러 집안 역사의 '매우 특별한 상
황'에 대한  암시를 하였다. 프랑크는 사태를  극비리에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조사해본 결과,  프랑켄베르거가 히틀러의 할아버지라는 추측에  대한 
몇 가지 자료를 얻었다.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이  주장은 물론 
극단적으로 의문의 여지가  많은 것으로 여겨진다. 프랑크도  뉘른베르크에
서 히틀러가 유대인 조상을 두었다고 주장할 동기가 없었다. 
  최근의 조사 결과 그가 말한 내용의 신빙성이 더욱더 의심스럽게 되어서 
이 주장은 진지하게 논의할 가치가 거의 없다. 이러한  주장의 본래 의미는 
객관적인 신빙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히틀러가 프랑크의 조사  결
과를 통해서 자신의 기원을 의심하게 되었으리라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
고 심리적인 의미가  있는 일이다. 1942년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을  받고 
비밀경찰인 게슈타포가 다시 조사해 보았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그리
고 요한 네포묵 히틀러가 알로이스 쉬클그루버의  아버지라는 생각도 '절대
적 확실성에 가까운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되기는 하였지만 그밖의 
다른 할아버지 이론들보다 더 확실한 것은  아니다. (마저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는 입증하는 것 같은  말투로 자신의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심지어는 히틀러가 아내가  죽기까지 (1873년) 기다렸다가 
합법화 절차를 밟은 사실을 놓고  자신의 주장에 대한 강력한 뒷받침이 된
다고 여기고 있다. 실은  생각한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휘틀러가 자신이 아버지고 알로이스가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했어야 할 것
이기 때문이다. 모든 논거들도 이와 비슷하게 의심스럽다. 전체적으로 보아
서 마저도 휘틀러의 행동에 대해서 오직 자기 견해만을 뒷받침하고 그밖의 
해석들은 의심스럽게 만드는 어떤 행위동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휘틀
러가 알로이스  쉬클그루버를 상속인으로 지정하는  조건으로 이름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는 가정도 등장하고 있다. 그밖에도 이러한  맥락에서 할아버
지에 대한 의문이 부차적인 것이었다는 암시도 적지 않다.  다만 한스 프랑
크의 견해만은 이  문제에 새로운 심리적 차원을 마련해주었을 것이다.  심
리적 차원을 넘어서면  그것은 하잘것없는 흥미의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하나같이. 곤궁과 우중충함과 시골의 경건한 척하는  태도로 특징
지어지는 혼란스런 상황의  어둠 속에 파묻혀 있다. 결국 아돌프  히틀러는 
할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다. 

    이름 바꾸기
  마리아 안나 쉬클그루버가  '늑막염에 의한 기력소모'로 슈트로네스 근처
의 작은 모텐에서 죽은  지 29년이 지나서,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죽은 지 
19년이 지나서야 그의 동생 요한  네포묵은 세 명의 증인을 동반하고 될러
스 하임의 목사 찬쉬름에게 왔다. 그리고 자신이 '키운 아들', 그새 거의 마
흔 살이 다 된 세관원 알로이스 쉬클그루버의 신원확인을 하겠노라고 신청
하였다. 물론 그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죽은 형 요한 게오르크가  아이 아
버지라는 것이다. 요한 게오르크가 살았을 때 그 사실을 고백했고, 함께 온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한 증인이라고 했다.
  목사는 정말로 속았든지  아니면 설득당했다. 오래된 출생기록부에서  그
는 1837년 6월 7일자  기록의 짤막한 비고란에 적혀 있는 '미혼'을 '혼인'으
로 고치고 아버지의  신상을 요한 네포묵이 원하는 대로 적어넣었다.  그리
고 가장자리에 거짓으로 이렇게 토를 달아  놓았다. "아버지로 기록된 게오
르크 히틀러는 서명한 증인들이 잘  알고 있는 바이지만 아이 어머니 안나 
쉬클그루버에 의해서 알로이스의  아버지로 인정받았다. 그는 자기  이름을 
이 기록부에 적어넣기를 요청하였다.  그 사실을 증인 요제프 로메더, 증인 
요한 브라이테네더, 증인 엥겔베르트  파우크가 확임함." 세명의 증인이 자
기 이름을 쓸 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세 개의 십자가로  서명을 하였고, 
목사가 그들의 이름을  옆에 적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날짜를  적어넣
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서명과 (이미 오래전에 죽은) 아
이 부모의 서명도 물론 빠져 있다. 법적으로 어긋난  일일지 몰라도 어쨌든 
이 서류는 법적인  효력을 가졌다. 1877년 1월부터 알로이스  쉬클그루버는 
알로이스 히틀러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이런 시골식 음모는 의심할 바  없이 요한 네포묵 히틀러가 꾸며낸 것이
다. 그는 알로이스를 길렀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를 자랑스럽게 여
겼다. 알로이스는 승진했고, 결혼도 했고, 히들러 일가  중 누구보다 성공하
였기 때문이다. 요한  네포묵이 자기가 키운 아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얻어
줄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은 매우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러나  알로이스도 
이름을 바꾸는 일에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력적이고  의무
에 충실한 남자였고 그새 상당한 경력을 쌓았기 때문에 '결혼에 의한' 이름
을 가짐으로써 경력에  더욱 확고한 기반을 마련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
다.
  열세 살에 그는  빈으로 나가서 어떤 구두장이의 견습생을 들어갔다.  그
러나 곧 이 수공업 일을 포기하고 확고한 결심을 한 후 오스트리아 세부관
리로 들어갔다. 그는 빠르게  승진을 했고, 결국 자신이 받은 교육수준으로
는 최고직인 세무장이 되었다. 관청의 대표자로서 그는  공식석상에 나타나
기를 좋아했고, 정확한 직함으로  불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와 같은 
세관에서 근무한 한 동료는 그를 가리켜서 '엄격하고 정확하고 꼼꼼하다'고 
평했다. 그는 아들의 직업선택에 대해서 도움말을 구하는  친척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재무관리 일은 절대  복종과 의무감을 요구하며, '술마시는 사람, 
빚지는 사람, 카드놀이  하는 사람과 그밖에 부도덕한 생활태도를 가진  사
람들'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대개 승진의 기회에 
찍곤 하였던 사진들은  변함없이 당당한 남자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의심 
많은 공무원의 얼굴 속에 거칠고 시민적인 실속과 체면욕구를 드러내 보이
고 있다. 제복단추를 빛내면서 어느 정도 품위와 자만심을  지닌 모습을 보
여준다.
  그러나 정직함과 엄격함 뒤에는  분명히 불안정한 성질이 감추어져 있었
다. 그것은 충동적인 결심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수없이 이사를 한 
일은 세관원 일의 필요성만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불안을 암시하
는 부분이다.  25년 동안 적어도 열한  번 이사를 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그중 몇 번은 물론 직업적인 필요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알로이스 히틀러는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벌써 두 번째 부인이 임신을 하였고, 두 번째 부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 세 
번째 부인이 임신을 했다.  첫째 부인 안나 글라슬은 그보다 열네  살이 위
였고, 마지막 부인 클라라 ㅍ츨은 그보다 스물세 살이 젊었다. 클라라는 처
음에 그의 집의  가정부였다. 히들러 혹은 휘털러 일가와 마찬가지로  슈피
탈 출신이었고, 이름을 바꾼 뒤에 적어도 법적으로는 그의  조카로 되어 있
었기 때문에 결혼을 위해서는 교회의 특례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녀가 정
말로 그와 혈족이냐 하는 질문은 알로이스 히틀러의 아버지에 대해서와 마
찬가지로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녀는 가정의 의무를  눈에 띄지 않
게 양심적으로 해냈고, 남편의 소원에 따라서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갔으며, 
결혼계약이 성립된 뒤로도 그 집에  처음 들어올 때처럼 하녀와 정부의 티
를 완전히 벗지  못했다. 자신이 세관장의 아내라는 사실을 납득하기  위해
서는 여러 해 동안이나  노력을 해야 했으며 남편을 '알로이스 아저씨'라고 
부르곤 했다. 그녀의  사진들은 진지하고, 움직임이 없고,  약간 의기소침한 
태도를 가진 겸손한 시골처녀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인 강변의 브라우나우 교외 219번지에
서 이  세 번째 결혼의  네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세 명의  형제자매들이 
1885,1886,1887년에 태어났으나 모두 어린 나이에 죽었다. 두  명의 동생 중
에서는 누이인 파울라만 살아남았다. 이 작은 국경도시는  아돌프의 성장에 
거의 의미가 없다.  다음해에 벌써 아버지는 저지 오스트리아에 있는  그로
스 쇠나우로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가족이 다시 파사우로  이사했을 때 아
돌프는 세 살이었고, 다섯 살  때 아버지는 다시 린츠로 자리를 옮겼다. 람
바하 군 근처에  있는 유명한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여섯 살짜리 아돌프는 
소년합창단원과 미사의 복사  노릇을 했다. 그 자신의 서술에 따르면  거기
서 '극단적으로 빛나는 교회  축제의 화려한 행사에서 거듭 감격할' 기회를 
가졌다. 1895년에  아버지는 근처에 4헥타르의 토지를  샀다가 곧 다시  되 
팔았다. 2년 뒤에 린츠 교외에 있는 작은 레온딩 군에  집을 사고 은퇴하였
다.

    천재적인 조숙함
  신경질적인 요소들이 상당히  드러나지만, 그래도 일관성과 신중함, 시민
적인 착실함과 확신감을 보여주고  있는 아버지의 사진과는 반대로 히틀러 
자신은 비참한 상황,  가난, 협소한 집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그 모든 나쁜 상황과 게다가  이해심 없는 아버지의 폭군적인 복종의 요구
를 이  특별한 소년이 확고한  의지력으로 이겨냈다는 내용이지만,  아들은 
심지어 몇 가지 효과적인 결점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뒷날 아버지를 주정
뱅이로 만들고  말았다. 자신이 빌고  욕을 하면서 '끔찍한 수치'의  장면에 
'냄새나고 연기자욱한 술집에서' 아버지를 집으로 끌고 와야만 했다는 것이
다. 
  천재적인 조식에 어울리게  그는 마을의 공동 목장과  오래된 요새의 탑 
근처에서 또래 친구들에게 여러 가지 모험과 대담하게 앞을 내다보는 사려 
깊은 탐색계획들을 만들어내서 언제나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을 
뿐 아니라 타고난 지도자로서의 천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렇게 순진한 
놀이에서 영감을 얻은  전술과 용병술에 대한 관심은  그의 미래를 예측케 
해주는 대목이다.
  (나의 투쟁)의 저자는 옛날을 돌아보면서 '열한 살도 채  되기 전'에 나타
난 '특별한 중요한  두 가지 탁월한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자신이 민족주
의자가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역사를 '그 본래의 의미대로 이해하고 파악
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예기치 않은 아버지의  죽음, 궁핍, 사랑하는 
어머니의 질병과 죽음, 그리고  '열일곱의 나이에 객지로 나가서 자신의 밥
벌이를 해야 하는' 가련한 고아소년의 출발 등이 이  전설의 아주 효과적이
고도 감동적인 결말부분을 이루고 있다. 실제로 아돌프  히틀러는 영리하고 
활동적이고 분명히 재능을 가진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일찍부터 
나타나는, 규칙적인 노동을 견디지 못하는 성질 탓으로  약화되어버리고 말
았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특성에다가 다루기 힘든 폭발적인  성질까지 있었
으며, 언제나 변덕스러운 기분과 학교의 증명서들은 그가  완벽하게 우수한 
학생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1899년의 학급사진에서 그는 맨  뒷줄에서 보
란 듯이 오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초등학교 이어서 부모가 보내준  실업학교에서 그는 놀랍게도 완전히 실
패하고 있다.  두 번이나 진급을 못하고  한 번은 재시험을 보고서야  겨우 
진급을 했다. 성적표들은 거의  4등급(양)으로 채워져 있다. 행동발달, 그림 
그리기, 체육에서만 미 혹은 그보다 나은 평가를 받고  있을 뿐이고 나머지 
과목에서 그는 가  혹은 양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1905년  9월의 성적은 
국어, 수학, 속기에서  '불가'를 맞고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이어서 '학급에
서 남보다 앞서나갔다'고 말한 적이 있는 지리와 역사도 겨우 양을 맞았고, 
전체 평균점수 가를 맞아서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기질
  이토록 이상한 실패는 물론 복합적인 원인과 동기를 가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농사꾼들이 모여사는 레온딩에서는 친구들의  대장이라는 특별의식
을 아무런 문제 없이 확인할 수 있었지만 린츠라는 도시에서는 학가, 상인, 
고위직 공무원의 아들들 사이에서  시골 출신의 가련한 아웃사이더에 불과 
하다는 체험이 적지아니 작용했을 것이다. 20세기로 넘어올  무렵 인구 5만
명의 도시  린츠는 단 하나의 오페라  하우스, 단 하나의 시가전철을  당시 
도시의 상징으로 갖추고 있었지만 시골의 한적함과 나른함이 아직 남아 있
었다. 그래도 이  도시는 젊은 히틀러에게 사회적 계급질서에 눈뜨도록  해
주었다.
  어쨌든 그는 실업학교에서 '친구도 동료도 없이' 지냈고.  같은 나이 또래
의 친구들과 함께 임시로 하숙하고  있던 늙고 못생긴 재키라 부인 집에서
도 그는  무뚝뚝하고 조용하게 홀로 지냈다.  당시 그와 함께 지냈던  사람 
중 한 명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하숙생 다섯  명 중에서 누구도 그에게 가
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우리들 사범학생들끼리는 당연히 서로  '너'라고 불
렀지만 그는  우리에게 '당신'이라는 말을  썼다. 그리고 그 점이  이상하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특이하게도  히틀러 자신에 의해서 이  시기에 처음으
로 좋은 집안 출신이라는 확신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확신은 장차 그의 
스타일과 모습을 뚜렷하게 특징짓게 된다. 린츠의 어리숙한 멋쟁이나, 빈의 
프롤레타리아 시절 그에게 '계급의식'과 그것을 지탱하려는 의지를부여해준 
것이기도 하다. 
  히틀러는 뒷날  실업학교에서의 실패에 대해서  아버지가 자신을 관리로 
만들려고 해서  그에 대해 저항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버지와의 
대립을 두 명의 굽히지 않는  의지의 인간 사이의 싸움으로 극화시켜서 오
랫동안 계속되었다고 주장하였지만 그것은 상당부분 날조된 것으로 밝혀졌
다. 아버지가 그를  린츠의 세관본부로 데리고 갔던 이야기도 역시  마찬가
지다. 아버지는 그에게 이 직업의 좋은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데려 
갔지만 그 자신은  오직 '역겨움과 혐오'에 가득 차서 '늙은  남자들이 원숭
이들처럼 서로 바싹  붙어서 웅크리고 있는 국가의 원숭이 우리'를  보았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버지가 아들의 직업적인  성장과정에 대해서 그토록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돌보기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히틀러는 아버지가 열성을 가졌다고  꾸며내서 자신의 실패를 변명하려 했
던 것이고, 또한  어린 나이부터 확고한 결단력을 가졌다는 인상을  주려고 
하였다. 물론  아버지는 부족한 학교교육으로  자신에게 닫혀 있던  고위직 
공무원의 길을 아들에게 열어주고 싶어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묘사한 대로 
지속적인 긴장의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서
로 기질이 다른  데서 오는 것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아버지 자신이  오랫동
안 품어온 소망, 그리고 이상스럽게도 아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꿈을 실현시
키려는 아버지의 결심 때문이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1895년 여름에 쉰여덟의  나이로 은퇴를 해서 마침내 직업적인 
의무에서 벗어난 한가함을 누리며 자신을 취향대로 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들에게 그것은  심한 행동의 제약을  뜻하였다. 갑자기 어디서나  존경과 
규율을 요구하는 아버지의 강력한 모습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이룩한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가차없이 복종을  요구하였다. 
아들의 직업선택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차이보다는 오히려 이런 점이 분명
한 갈드의 이유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의 실업학교 시작부분만을 보았다. 1903년  초에 그는 
레온딩에 있는 비스빙거 술집에서 한  잔의 포도주를 시켜서 첫 모금을 마
시다가 그만 옆올  쓰러져 의사와 사제가 달려오기도  전에 옆방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공평한  (린츠 일보)는 그를 위해서  상당히 긴 추모기사를 
실었다. 그의 진보적인 생각, 소박한 명랑함과 정력적인 시민의식을 지적하
고, 그가 '노래의 멋'이었고, 양봉 분야에 권위가  있었으며, 절제 있고 가정
적인 남자였다고 찬양하였다. 아들의 변덕스러운 투정으로 흥미가  없는 학
교를 그만두었을 때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는 죽은지 이미 2년 반이 넘
어 있었다.
  병치레 잦은 어머니가  관리가 되라고 위협했다는 말도 맞지 않는다.  어
머니는 아들이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끊임없이 조르는 것을 얼마 동안 막았
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이기적으로 독선적인 기질에 맞설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많은 자식들을 잃고 난 뒤에 남은 두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염려는 
특별한 것이어서 무엇이든 양보하는 지경이 되었다. 아들은  어머니의 그런 
마음을 이용하는 방법을 재빨리 터득하였다. 1904년 9월에  그가 다니던 학
교를 그만두는 조건으로 진급이 되었을 때에 어머니는 마지막 시도로 그를 
슈타이르에 있는  실업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첫 번째 성적은 '가'로 판정이 났고. 히틀러 자신이 말한 바에 따르
면 술에 취해서 성적표를 화장지로 써버렸기 때문에 성적표 사본을 받으려
고 애써야만 했다.
  1905년 가을의 성적도 나아지지 않자 어머니는 마침내 포기하고 그가 학
교를 그만두는 것을 승낙하였다. 물론 이번에도 그녀는  완전한 자유의사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나의 투쟁)에서 슬쩍 고백한 바에 
따르면 '갑작스러운  병이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 병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그가 또다시 진급을 못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일로 보인다.

    예술을 통한 신분상승 욕구
  그것은 히틀러가 가끔 축하하곤 했던 파국적인 승리의  하였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도 그는 불량한 학교 성적을 통해서 강력한 아버지에게 증명을 
해보였다. 아버지가 원하던 대로 관리직으로 나가는 길을  자신에게 영원히 
막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었다. 동시에 그는 '원초적인 증오심을 품
고서' 학교를 떠났다. 그의 생애에서 학교는 증오의  주제였다. 천직에 대한 
암시로 자신의 실패에 대한 불안을 억지로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했지만, 실
패한 자의 원한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실용적인  교육기관의 요구에서 
벗어나자 이제 그는  자신이 생애를 '완전히 예술에  바치기로' 결정하였다. 
화가가 되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이 선택은 그가 지니고  있던 실질적인 스
케치 재능에서 나온 것이고, 또한 화가들은 자유롭고 속박  없는 생활을 한
다는, 시골 출신 관리 아들의 상당히 촌스러운 상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는 이미 일찍부터  독특한 스타일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어머니의  집
에 있던 하숙인 한 사람은 나중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고 있다. 
  그는 밥을 먹는  도중에 갑자기 종이에다가 미친 듯이 건물들,  아치문이
나 기둥을 스케치하곤  했다는 것이다. 몰론 거기에는 예술의 도움을  받아
서 자기가 속한 좁은 시민세계의 강요와 제한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합당
한 필요성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의 그림 연습, 
음악, 꿈을 위해서 헌신하려는 광적인 열성이 이러한 정역에  한 줄기 혼란
스런 빛을 주고 있다. 그는 특정한 직업, 그  자신이 경멸한다고 말한 '밥벌
이 직업'을 거부하였다.
  분명하게 그는  사회적 의미에서 예술을  통한 신분상승을 하려고  했다. 
성장기에 보이는 그의 모든 집착과 결심 뒤에서 어떤 '높은 존재'가 되려는 
매우 강한  욕구를 볼 수 있다.  예술에 대한 그의  지나친 정열과, 예술이 
'더 나는 사회'의 특권이라는 생각과 적잖이 결부되어  있다. 어머니는 아버
지가 죽은 뒤에 레온딩에 있는 집을 팔고 린츠의  아파트로 이사하였다. 여
기서 열여섯 살 난 히틀러는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면서 상당한 액수에 이
르는 어머니의 연금으로 미래의 계획들은  모두 뒤로 미뤄둔 채 자기가 중
요하게 여기던 특권적인  게으름을 누릴 수 있었다. 매일같이 그는  산책을 
하였고, 규칙적으로 '지방극장'에 가고,  음악협회에 가입하고, 국민교육연합
의 도서관 회원이 되었다.
  나중에 그가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성에 대한 관심이 깨어나기 시작해서 
밀랍 박물관의 성인을 위한 전시장에 가보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쯤 
그는 남부역 근처에  있는 작은 영화관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보았다.  전해
지는 서술을 보면 그는 키가  크고 창백하고 수줍었으며 언제나 지나칠 정
도로 꼼꼼하게 옷치장을 하고 대개의 경우에는 화려한 상아장식이 붙은 검
은 색 산책용  지팡이를 휘두르며 대학생인 듯 행동하였다. 아버지는  사회
적인 명예옥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이룩한 것을 하찮은 경
력이라고 여겼다. 그가  '아버지'의 경력을 추억하면서 상당히  관대하게 내
비친 말을 보면 자기 자신의 목적은  훨씬 더 높은 데 있다는 사실이 드러
난다. 그는 현실과 별개로, 혹은 현실 위쪽에다가 세운 꿈의 세계에서 천재
로서의 기대와 자의식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자기증명의 요구에서 실패한  뒤로 그는 점점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의 세계 속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아버지와 선생들  앞
에서 느꼈던  무력감을 극복했다고 여기고,  적들로 둘러싸인 세계에  대한 
고독한 승리를 축하하였다.  이곳으로부터 그는 악의에 가득 찬 세상에  대
해서 최초의 저주 판결을 내던졌다. 나중에 그를 기억한  모든 사람들은 그
의 진지하고, 폐쇄적인고 '소스라쳐  놀라곤 하는' 특성을 기억하였다. 아무
런 하는 일도 없이  모든 일에 열중하면서 세계는 "근본적으로 구석구석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깊은  밤까지 린츠 시의 도시계획 변경에 
대한 서투른 계획에 열을 올렸고, 극장건물, 호화주택,  박물관이나 혹은 도
나우 강에 세울 다리의 설계도들을 그리곤 하였다. 그  모든 설계도들을 그
는 35년 뒤에 독단적인 만족감에 휩싸여 애송이 시절의 계획대로 새우라고 
지시하였다.

    비현실적인 사랑
  그는 체계적인 작업을 할  능력이 없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거리, 새로
운 매혹, 새로운 목표를 필요로 하였다. 그가 졸라서 어머니는 피아노를 샀
다. 잠시 동안 그는 레슨을  받았다. 그러나 넉 달이 자나자 벌써 지겨워져
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의 젊은날의 유일한 친구인 린츠의 실내장식가  아
들 아우구스트 쿠비체크와는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결합되었는데,  그에게 
생일선물로 자신이 꿈의  세계의 일부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집 한 
채를 선물하였다. "그는 완성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나 계획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차이가 없었다."
  복권당첨에 대한 생각이  한동안 그를 비현실 세계로 이끌어갔다. 그  비
현실 세계에서 그는 도나우 저편을 내다볼 수 있는 전망을 가진 훌륭한 집
(린츠 우어파, 교회거리 2번지)의 2층에서 살았다. 당첨이 있기  여러 주 전
에 이미  그는 시설들을 고르고, 가구며  재료들을 검사하고, 장식문양들을 
계획하고 친구에게 고귀한  자유의 생활, 예술에 대한 관대한 사랑으로  넘
친 생활 계획을 들려주었다. '벌써 머리가 희끗해진,  그러나 대단히 고귀한 
부인'이 그러한 생활을  뒷바라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화려
하게 불을 밝힌 계단에서 잘 선별된 고결한 마음을  가진 친구들'을 손님으
로 맞아들이는 모습을 밀 맛보았다. 그것은 당첨날이 와서  그가 거의 확신
하고 있던 꿈을 망치기  전에, 그리고 그가 끝도 없는 분노의  광란 속에서 
자신의 불운을 저주하고, 점점 더 흥분해서 믿기 잘하는 인간의 기질, 국가
의 복권체계, 그리고  마침내 사기꾼 같은 국가 자체에 대해서까지  근본적
으로 저주를 퍼붓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가 이 시기에 자신을 가리켜서 '별난 사람'이라고 불렀던 것은 옳은 것
이었다. 실제로 그는  집중적이고 억누른 방식으로 오직 자기만의 삶을  살
았다. 어머니와, 최초의  청중 노릇을 했던 순진하게 믿기 잘하는  친구 '구
스틀(아우구스트의 애칭)'을 빼면 가장  중요한 청소년 시절의 풍경에는 사
람 모습이 없다. 학교를 그만두는 것과 아울러 근본적으로  사회를 떠난 것
이다.
  매일같이 중심가의 산책길에서, 어머니와 함께 언제나 일정한  시각에 대
장간 앞을 지나쳐가곤 하는 소녀를 만나게 되었을 때,  친구의 보고에 따르
면 그는 곧바로 정열적인 애정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은 집요하고 낭만적
인 애정으로 여러 해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소녀에게 말
을 걸고 자신을  알리는 일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그러한 거부는  자연스러
운 수줍음 탓만은  아니고, 현실에 대항해서 공상을 지키고 항상  몰취미한 
현실이 상상의 왕국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소원과도 관계된 것이
었다. 친구가 확인해준 것을 믿을 수 있다면 히틀러는 소녀에게 바치는 '헤
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랑의 시들'을 썼다고 한다.  그중 하나에서 그녀는 '꽃
이 핀 들판 위에서 백마를 타고 짙은 청색으로 나부끼는 빌로드 옷을 입은 
성주의 딸'로 등장하고 있다.  "풀어헤친 머리카락은 황금빛 파도처럼 어깨
에서 흘러내렸다. 밝은 봄하늘이 그 위로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것은 순수하
고 빛나는 행복이었다"고 한다.

    바그너 음악과의 첫 만남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 그 정열적인 효과와 매혹적이면서도  폐부를 찌
르는 듯한 음색, 유괴하는 힘을 지닌 그 음악은 그가 한번 빠져든 뒤, 그리
고 매일 밤 오페라를 방문하게  된 뒤로 적잖이 최면술적인 자기암시의 수
단으로 이용되었다. 이  음악만큼 그의 현실도피적인 성향에 잘 맞는  것도 
없었고, 현실에 대해서 자신을 그토록 절대적 우위에 서게  만들 것도 없었
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같은 시기에  이 음악에 잘 어울리는 그림을 사랑
하였다. 루벤스의 화려함과  루벤스를 퇴폐적으로 모방한 한스  마카르트였
다. 친구인 쿠비체크는 바그너 오페라 (리엔치)를 함께 관람하고 난 다음에 
히틀러가 보인 열광적인  반응을 서술하고 있다. 그 작품의 장엄하고  극적
인 음악성에 압도되고, 주변의 몰이해로 인해서 낯설고  비극적으로 부서져 
간 중세 후기의 반란자 호민관  리엔초의 콜라의 운명에 완전히 감동을 받
은 히틀러는 친구를 프라인 산으로  끌고 가더니 밤의 어둠에 잠긴 린츠를 
내다보면서 연설을  시작했다고 한다. "막혀  있던 강물이 터진 둑을  통해 
흘러내리듯이 말들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위대하고도 마음을  사로잡는 
그림으로 그는 내게 자신의 미래와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 들려주었다," 30
년도 더 지난  다음이 청년기의 친구들이 바이로이트에서  다시 만났을 때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그 순간에 시작되었어!"
  1906년 5월에 히틀러는  2주 예정으로 빈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는  수
도의 광채에 눈이 먼 듯했다. 마치 '(천하루 밤 이야기)에 나오는 마법처럼' 
보이는 링 거리, 박물관들, 우편엽서에 써보낸 대로  오페라의 '강력한 존엄
성'. 그는 궁정 극장을  방문하고 (트리스탄)과 (방랑하는 네덜란드 사람)을 
관람하였다. "그 강렬한 음의 파도가 홀 안으로 넘치고, 살랑거리는 바람소
리가 무서운 음의 파도에 압도되면(문법적인  오류!) 숭고함을 느끼게 된다
네." 하고 그는 쿠비체크에게 써보냈다.
  그가 빈에서 돌아온 다음 그곳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서 출발하
기까지 어째서 일년  반이나 더 기다렸는지 이유가 분명치 않다.  1907년부
터 점점 더  병약해진 어머니가 염려에 가득 차서  반대한 것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결정적인 이유는 그  자신이 이상적이라 
여긴 빈둥거리는 생활을 끝내고 새로이 학교에 종속되는 발걸음 내딛기 가 
두려워서 그랬을 것이다. 그는 아직도 여전히 매일매일을  기분내키는 대로 
지내면서 꿈꾸고 스케치하고 산책하고 밤늦게까지 책을 읽곤  하였다. 아니
면 끊임없이 방  안에서 오락가락하였다고 한다. 그는 여러 번이나  린츠에
서의 삶을 자기 생애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불렀다. '아름다운 꿈'이라
고 물론 그  그림은 학교에서의 실패의식에 의해서  쉽게 흐려지는 것이긴 
했기만 말이다. (나의 투쟁)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가 그 옛날 도시를 누가
서 "무엇인가 이루지 않고는 고향마을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자기 칭찬을 
하는 모습을 서술해 놓고 있다.
  그는 1907년 9월에 같은 의도를 품고서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예전의 
계획과 희망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동안에도 그 소망만은  남았다. 성공해
서 당당하게 린츠로 돌아서 그 도시가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경탄으로 자기 
발밑에 놓여 있는  것을 복 싶고, 한때의 '아름다운 꿈'을  실현시켜보고 싶
다는 소망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었다. 전쟁 동안에 그는  자주 지치고 초조
해져서, 린츠에다가 노후를  위한 집을 짓고 박물관을 건립하고 음악을  듣
고 책읽고 글쓰고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고 싶다는 의도를 이야기 하곤 하
였다. 그것은 다음이 아니라 아주 고귀한 노부인과 고결한  심성의 친구 내
부에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1945년 3월 소련의 붉은 군대가  베를린 코
앞에 당도했을 때 그는 제국수상관저 지하에 있는 벙커에서 새로운 린츠의 
건설계획을 가져오게 하더니 선  채로 오랫동안 그것을 꿈꾸었다고 전해지
고 있다.

    제2장 무너진 예술가의 꿈
  20세기로 넘어오던 시기에 빈은 여러 세기의 명성과 유산을 간직한 유럽
의 대도시였다.  그곳은 영광에 넘치는  모습으로 오늘날의 러시아와  발칸 
반도 깊숙한 곳까지  지배하였다. 이곳으로부터 열 개가 넘는 다양한  민족
과 종족들로 이루어진 5천만  명의 인구가 통치되고 하나로 통합되고 있었
다. 그들은 바로 도이치, 마자르, 폴란드,  유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
르비아, 이탈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루테니아 사람들이었다. '이 
도시의 천재성'은  모든 대랍들을 부드럽게  만들고 다민족 국가의  갈등을 
조정해서 유용한 것으로 만드는 능력에 있었다. 
  모든 것은 확고한 기반 위에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
는 1908년 60년 간의 통치를 축하받으며 마치 국가의  상징처럼 되었다. 그
는 품위와 지속성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나라를 
지배하는 높은 귀족의 지위 또한 전혀 흔들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 
비해서 시민계층은 부를 이루기는 하였으나 이렇다 할 영향력을 얻지 못하
고 있었다. 이즈음, 정당과 선동가들은 아직 보통,  평등 선거권이 없었지만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던 산업과  상업계의 소시민과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얻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현대적 요소와 번화함을 보여주고 있어도 이미 어제
의 세계였고, 의혹, 부서짐,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의혹에 가득 찬 세계였
다. 20세기로 넘어오던  시기에 빈이 보여주고 있던 영광은 몰락의  분위기
가 짙게 물든 것이었다. 문학 속에까지 스며들어간 그  모든 소모적인 축제
에도 불구하고 밑바탕에는 한 시대가  생명력을 다 썼고 이제 오직 아름다
운 현상으로만 남게 되리라는 의식이 드러나 있었다. 피로, 패배감, 불안감,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지는 민족들간의 갈등, 지배계층의  근시안적인 행태 
등이 풍부한 추억들로  가득 찬 건물을 서서히 붕괴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 강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이별과 탈진의  분위기가 이보다 더 
잘 느껴지는 곳은  없었다. 시민시대의 붕괴를 빈보다 더 화려하고  우수에 
넘쳐서 체험한 곳은 없었다.

    다민족 국가의 위기
  이미 19세기 말에 다민족국가의 내적인 모순이 점점 더 날카롭게 불거져
나왔다. 특히 1867년 헝가리가 저 유명한 '협상'에서  중요한 특별권을 얻게 
된 이후로 더욱  심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은 수없이 틈이  나
서 갈라진 항아리를 낡은 철사줄로  겨우 한데 묶어 놓은 것이라고 이야기
되곤 했다. 그 사이 체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도이치 말과 대등하게 
취급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사람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불거져나왔다. 히틀러가  태어나던 해에는 제국 황태자인  루돌프가 
마이얼링에서 자살을 하여 겨우 복잡한 정치적, 개인적 사정에서 벗어났다. 
20세기 초에는 렘베르크의 대로에서 갈리치아의 총독이 암살당했다.
  군대 기피자 수는  해마다 늘어만 가고, 빈 대학에서는 소수민족  학생의 
시위가 일어났다. 시내 중심가인 링 거리에서는 더러운 빨간  색 깃발을 내
걸고 노동자 집단이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제국의 모든 분야에서  불안과 
탈진의 조짐들이 보였고 그  모든 것은 오스트리아가 해체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1905년 독일과  러시아 신문에는 베를린과  페테스부르그 사이에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보도되었다. 오스트리아 황제국에  종
말이 올 경우에  이웃 국가들이 예상되는 영토확장을  위해서 미리 합의를 
하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이 너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서  베를린 
외무부는 11월 29일에 특별히 이 문제를 위해 이루어진 담화에서 오스트리
아 대사를 안심시켜야 했을 정도였다. 이 시기의 여러  가지 경향들, 즉, 민
족주의, 사회주의, 종족의식, 사회주의, 의회주의들은 이 불안정한 국가에서 
자연스럽게 특별한 폭발력을  보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정부가 사실상  용
납될 수 없는 승인을 통해서  개별 그룹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의
회에서 어떠한 법도 통과되지 못했다. 인구의  1/4을 차지하는 도이치 사람
들은 교육, 부, 개화상태, 등에서 다른 민족을 능가하였다.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언제나 배후에 머물러 있었다.  정부는 무심한 
임시변통 정책을 펼치면서 도이치  사람들의 충성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
다보니 그들을 소홀히  대했다. 불안한 소수민족들을 만족시킬수록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방어 이데올로기
  여기에 덧붙여서 각 민족의  민족주의는 전통적으로 침착한 도이치 지도
층하고만 부딪친 것이  아니었다. 전염병처럼 퍼져나간 민족주의는  1866년 
오스트리아가 독일 정책에서 배제된  이후로 특수한 국가동일성 감정을 지
니게 되었다.  쾨니히그래츠(사도바, 비스마르크가  '작은 독일'이라는 구호 
아래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벌이는 프로이센 대 오스
트리아 전쟁의 주요 전투지, 보헤미아 지역에 위치한다. 프로이센은 여기서 
승리함으로써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게 된다.) 전투는 오스트
리아의 얼굴을 독일에서  발칸으로 향하도록 만들었고, 오스트리아의  도이
치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서 소수민족의 지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분노하여 이중 왕국을 비난하였고, 특히 왕국이 친 슬라브  정책을 통해 외
국세력을 키우는 위험성을 간과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들의 분노
는 자기 자신을 추켜세우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이치'란  말은 이제 윤리적
인 내용을 가진 개념이 되었고, 지배자의 요구로 모든  낯선 것에 대항하는 
무기가 되었다.
  물론 그와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바탕에 깔린 두려움은 일반적인 적응 
위기라는 광범위한 배경에서  보아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 소리 없는  혁명
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이중왕국  영토에서 특히 시대착오적으로 오래 지속
되어 온 낡고 세계시민적이고  봉건적으로 농민적인 유럽이 붕괴되고 있었
다. 그리고 그러한 붕괴와 결합된 실망과 갈등은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아
니었다. 특히 시민  계층과 소시민 계층은 사방에서 위협당하고 있다고  느
꼈다. 진보에  의해서 무서울 정도로  커지는 도시들에 의해서, 기술,  대량 
생산, 경제력 집중 등을  통해서 위협당한다고 느꼈다. 오랫동안 신뢰할 만
한 개인적 혹은  사회적 유토피아를 뜻했던 미래라는  개념은 이 시기부터 
점점 더 광범위한 계층에게 불안이라는 범주로 바뀌었다.  빈에서만 1859년 
이후 30년 만에  거의 4만 개의 수공업체가 파산였다. 이러한  불안은 점점 
커지는 현실도피 욕구를  담은 수많은 저항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위
협받고 있는 세계의 구원론이라고 자칭하는 민족, 종족적인  방어 이데올로
기들이었다. 그것은 이해하기  힘든 불안감을 누구에게나 친숙한  그림으로 
바꾸어 보여주었다.

    반유대주의
  방어 콤플렉스는 특별히 유대인 배척주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게오
르크 리터 폰 쇠너러의  '모든 도이치 당'부터 칼뤼거의 기독교사회당에 이
르기까지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수많은 당의 강령에 공통을 나타났다.  19
세기의 70년대 초의 발생한 경제위기 동안에 반유대인  감정이 폭발하였다. 
그런 감정은 나중에 갈리치아,  헝가리, 부코비나 등에서 이민 행렬이 늘어
나자 다시 생겨났다. 합스부르크 대도시(빈)의 온건하고 균형잡힌 영향력에 
힘입어 탄생한 유대인 해방은 상당한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문에 더욱더 많은 유대인들이  동유럽에서 나와 자유로운 지역으로 들어왔
다. 1857년부터 1910년까지 대략 50년의 기간에 빈의  유대인 인구비율은 2
퍼센트에서 거의 네 배가  넘는 8.5 퍼센트로 늘어났다. 그것은 중부유럽의 
다른 어떤 도시보다 높은 비율이었다. 개별 구역, 특히 레오폴트 구역 같은 
데서 유대인은 주민의  1/3을 차지하였다. 상당수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생
활습관대로 전통의상을  입었다. 길다란 검은  카프탄을 입고 머리에  높은 
모자를 쓴 그들의 낯선 모습은 신비스러운 세계의 두려움을 일으키면서 거
리의 모양을 이상하게 지배하였다.
  유대인의 역사적 상황은 그들에게  특별한 역할과 경제적 활력을 부여하
였다. 그것은  선입견 없는 태도와 활동성을  만들어냈다. 그들이 위기감과 
상대를 능가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많은 숫자가 
고학력 직업으로 나가고 언론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빈의 거의 모든 
대은행들과 상당수의  토착산업을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뿐만이  아니었다. 
광범위하게 전통과 감상과 절만에 사로잡힌 채 미래를 내다보는 구식의 시
민적인 유럽 사람들과 견주어볼 때 유대인들의 생활방식은 새 시대 대도시
의 합리적 스타일에 훨씬 더 들어맞는 것이었다.
  유대인에 의해서 위협받는다는 의식은  특별히 다음과 같은 비난의 형태
로 나타났다.  즉 유대인은 뿌리가 없고  파괴적이고 혁명적이다. 그들에게 
거룩한 것이란 없다. 그들의 '차가운' 지성은 도이치  사람의 내면성과 심성
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등이었다. 이러한 이미지는 수많은  유대 지식인들에 
의해서 뒷받침되었다. 그들은 여러 세대 동안이나 배척받아  온 소수민족의 
반항심과 유토피아의 성향을  가지고서 노동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맡았다. 
그들이 원래 가졌던 역할에  거대한 모반이라는 치명적인 이미지가 합쳐졌
다. 두려움에  사로잡힘 영세 영업계층은  자본주의와 당시 다가오고  있던 
혁명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사업도,  시민적인 지위도 유대인들에 
의해서 일종의 이중공격을  받는다는 두려움이었다. 거기다가 종족의  특성
까지 가세하였다. (유대주의에 대항한  아리안 종족의 절망적 싸움)이란 제
목을 달고 있는 헤르만  알바르트의 책은 '사실기록'을 과거의 독일 상황에
서 인용하였다.  90년대 베를린에서 반유대주의가  유행했을 때도 그  책은 
어떤 아웃사이더가 화가 나서 쓴 망상 정도로 여겨졌다.  반면 이곳 빈에서
는 광범위한 계층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내용이였다.

    어머니의 죽음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던 이 도시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다음 몇 년 간
을 보내게 된다.  그는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빈으로 왔다. 자신을 압도할 
만한 인상들을 갈망하면서, 어머니의 돈으로 지속했던 과거 몇  년 간의 사
치스런 생활을 더욱 화려하면서도  도회적인 환경 속에서 계속할 속셈이었
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신
이 썼듯이 '자부심 강한 확신'에 넘쳐 있었다.
  1907년 10월 그는  쉴러 광장에 위치한 미술  아카데미에 스케치 시험을 
보겠다고 신청하였다. 그러면서 이 학교의 악명이 자자할  정도로 까다로운 
요구조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그는 첫날의  필기시험에 합격하
였다. 여기서는 120명의 지원자  중에서 33명이 낙방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종합평가를 담고 있는 등급기준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인다. '시험스케치 
불가 판정, 다음 사람들은  다음 단계 시험에 응시할 수 없음.  ...아돌프 히
틀러, 인 강변의  브라우나우, 1889년 4월 20일생, 도이치, 카톨릭,  부친 파
리, 실업학교 4년, 실력이 없고 시험스케치 점수 불가.'
  그것은 직접적이고 냉혹한  추락이었다. 히틀러는 깊이 실망하여  아카데
미 교장을 찾아갔다. 그는 히틀러에게 건축공부를 해보라고 설득하였다. 동
시에 그의 그림이  '비난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  화가로서는 부적합'하
다고 했다. 히틀러는 이 결과를 나중에 '날카로운 일격, 번쩍이는 번개'였다
고 표현했다. 그리고 실제로 꿈과 삶의 현실이 이토록  급격히 벌이진 적은 
없었다. 그가 실업학교를  너무 일찍 포기한 것도 이제와서 불리하게  작용
하였다. 건축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시험 합격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고 
난 다음에도  그는 이러한 교육과정의 전제조건이  '너무 어렵다'고 말하고 
고등학교 졸업시험이  뛰어넘을 수  없는 장애였다고 표현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척도로 보면 나의  예술가로서의 꿈은 실현가능하지 않은 것이었
다."
  그토록 비참한 실패를 한 후 겸손하게 린츠로 돌아가서,  특히 최초의 실
패였던 이전의 학교로  돌아가기 싫어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
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빈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시험에 떨어진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위풍당당하게  산책하고 오페라 구경을  가고 
그밖의 거창한 몸짓으로 '연구'라고 부르던 수많은 어설픈 계획들을 그만두
고 진지한 활동을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머니의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
져서 임종이 임박하였는데도 그는 돌아가지 못했다. 어머니는, 이 몇 주 동
안 근심스러운 태도로  아돌프는 '마치 이 세상에  혼자 있는 것처럼' 자기 
길을 가느라고 바쁘다고  말했다. 1907년 12월 21일 어머니가 죽은  직후에 
아들은 린츠에 나타났다. 임종 전까지 어머니를  보살핀 의사는 "그토록 고
통스러워하고 슬픔에 찬 젊은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적었다. 자신
의 말에 따르면 그는 울었다.
  실제로 그는  실패를 하였을 뿐  아니라 이제부터는 도피처도  없어졌다. 
이 경험은, 그렇지 않아도 극단적인 성향을 더욱더 심하게  하여 고독에 휩
싸이게 하였으며,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하였다. 어머니의 죽음과 더불어 이
상하게도 가족의 구성원 한 명을  향한 감정을 빼면 그가 사람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애착마저도 끝나고 말았다.

    후견인 아저씨, 전 빈으로 갑니다!
  히틀러는 아마도 이러한 두 가지의 충격 때문에 빈으로 돌아가려는 생각
을 더욱 강하게 한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린츠에 있는  친척들의 물어보
는 듯한 눈초리, 질책들으로부터 대도시의 익명성 석으로  도망치고자 하는 
소원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밖에도 고아연금을 타기 위해서는  공부를 끝 
마칠 것이라는 인상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래서 형식적  행사와 유산문제가 
타결되자마자 그는 후견인인 레온딩  군수 마이르호퍼에게 가-그가 나중에 
회고한 바에 따르면 오래 이야기하지도 않고- '거의 건방진 태도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후견인 아저씨, 전 빈으로 갑니다!"  며칠 뒤인 1908년 2월
에는 그는 린츠를 아주 떠났다.
  하나의 추천서가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살았던 집의 주인인 막달레나  하니쉬는 당시 가장 유명한 무대장치가였던 
알프레트 롤러와 아는 사이였다. 그는 궁정오페라의 장치감독  겸 미술실업
학교 교사이기도 했다.  1908년 2월 4일자 편지에서 막달레나 하니쉬는  빈
에서 살고 있는  자기 어머니에게 젊은 히틀러를  위해서 롤러와 만나도록 
주선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그는 진지하고 열성적인 젊
은이예요. 열아홉 살이지만  나이보다 성숙하고 신중하고, 친절하고 확고하
며 좋은 집안  출신이에요... 그는 훌륭한 것을 배우려고 굳게  결심하고 있
답니다! 지금까지  그를 쭉 보아왔지만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절대로 '빈둥거리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가 무가치한 사람을  위해서 애쓰
시도록 하고 싶지 않거든요! 좋은 일을 해 주세요." 며칠 지나지 않아서 룰
러가 히틀러를 만나볼 생각이 있다는 답이 왔다. 린츠의  집주인 여자는 다
시 편지로 어머니에게 감사했다. "어머니가 이  젊은이의 행복한 표정을 보
셨더라면 정말 수고한 보람을  느끼셨을 텐데요. ...그에게 어머니의 편지를 
주고 롤러 감독의 편지를 읽게 했어요. 마치 편지를  외우려고 하는 것처럼 
천천히 한마디 한마디 조용히 편지를 읽으면서 거의 경건하고 행복한 표정
을 보였답니다.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그는 편지를 내 앞에 도로  내려놓더
군요. 그리고 감사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어머니께 편지를 써도 되는지  내
게 물었어요."
  이틀 뒤 날짜 적힌 히틀러의  편지는 아주 애써서 관청서기 필체를 흉내
내고 있는데 이것은 보존되어 있다. "지극히 존경하는 부인, 제가 무대장치
의 위대한 대가 롤러 교수님을  만나뵐 수 있도록 주선해주신 노고에 대해
서 이 편지로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저로서는 외람되게도  부인
에게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해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그런
데 부인께서 이토록 성과가 있는  행동을 취해주신 데 대해서 진심으로 감
사드리며, 아울러  저에게 쓰라고 내주신  명함에 대해서도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 번 더 깊이 감사하며 존경심으로  부인의 손에 키스를 
올립니다-아돌프 히틀러."
  사실상 이 추천서는  그를 위해서 꿈의 세계를 열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음악과 그림을 오페라의 장엄한 가상세계와 결합시켜주는 자유로운 예술가 
생활로 안내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롤러와의 만남이  어떻게 끝났는지 
알겨진 게 없다. 히틀러 자신은  그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 
경탄할 만한 사람이 그에게 일하면서 배우다가 가을에 다시 아카데미에 지
원하라고 충고했던 것이 분명하다. 
  히틀러는 다음 5년을  뒷날 자기 생애에 '가장  슬픈 시절'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많은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시절이기도 했다. 그가 빠졌던  위기는 
그의 성격의 특성을 만들어내고,  다시는 포기하지 않는, 돌처럼 확고한 성
취형식들을 찾아내도록  해주었다. 이 덕분에  행동을 갈망하는 그의  삶은 
완고하다는 인상을 가지게 된다. 
  '곤궁과 힘든 현실'이 이 시기의 가장 잊지 못할 체험이었다는 표현은 히
틀러 자신이 조심스럽게  삶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그  위에 덧입힌 전설의 
일부다. "나에게 있어서 이 사치스런 도시의 이름에는  5년 간의 비참과 곤
궁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 5년 동안  처음에는 조수로, 다음에는 
싸구려 화가로  밥벌이를 해야 했다.  평소의 허기를 달래기에도  충분하지 
못한 보잘것없는 빵을  위해서 일했다. 배고픔은 당시 나의 충실한  파수꾼
이었으며 유일하게 내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당
시 그의 수입을 계산해보면 처음 빈 체류기간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산과 
고아연금 덕분에 그 자신의  수입을 빼더라도 매달 80내지 100크로네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배석판사의 한 달 월급과  같거나 아니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이다. 

    잦은 공격성과 그 격렬함
  2월 중순에  히틀러에게 설득당한  아우구스트 쿠비체크도 빈으로  왔다. 
음악원에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함께 슈툼퍼 거리  29번지에 있는 
마리아 차크라이스라는 이름의  늙은 폴란드 여자의 집 뒤채의 '위안  없고 
가난한'방에서 살았다. 쿠미체크는  공부를 하였지만 히틀러는 이미 버릇이 
되어버린 계획  없이 빈둥거리를 생활을  계속하였다. 언제나 자신이  자기 
시간의 주인이라고 주장했다. 점심 때쯤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거리나 혹은 
쇤브룬 공원을 산책하고, 박물관들을 방문하고 저녁에는 오페라  극장에 갔
다. 나중에 고백한 바로는 거기서 완전히 열광하여  그 몇 년 동안 (트리스
탄과 이졸데)만 30~40번이나  보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책  속에 파묻혀서 
독학자로서 마음내키는 대로  영감이나 변덕에 따라서 이것저것을  읽었다. 
아니면 링 거리의 화려한 건축물들 앞에 넋을 잃고 서서 스스로 세우게 될 
위풍당당한 건축물을 꿈꾸곤 하였다.
  그는 거의  병적으로 공상에 빠져들었다.  깊은 밤까지 계획을  세우느라 
열을 오리곤 했는데,  이 계획에는 실질적인 능력의 결핍, 아는  체하기, 참
을성 없음 등이 서로 다투어 나타났다.  "그는 자기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벽돌이 '기념건축물
을 위해서는 견고하지 못한 것'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왕국을 부수
고 새로 지을 계획을 세웠다. 극장 건물, 성들, 전시회장 등을 구상했고, 알
코올 없는 국민음료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키고 담배 대용물을 찾으려 애쓰
고, 학교 운영 개혁계획도 세워보고 집주인, 관리 등에 대한 공격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관심, 원한, 잘난 척하는 비전 등을 담은 '도이치 사람
의 이상국가'를 구상하였다.
  그는 아무것도  배우지도 이룩하지도 못했으면서  어떤 충고도 거부하고 
가르침을 미워했다. 작곡 기법의 지식도 없이 리하르트  바그너가 중도에서 
그만둔 피비린내 나는  근친상간을 다룬 오페라 (대장장이 빌란트)의  구상
을 게속 할 궁리를 하였다. 그는 게르만 종족의  전설적인 소재들을 다루는 
극작가로 자처하고 (극장)혹은  (이념) 등을 썼다. 때때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으나 세부묘사에 치중한 작은 수채화들은 그가 느끼고 있던 압력을 보
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정당화하고 자신이 천재임을 입증해  보
이겠다는 초조감에 사로잡혀서 쉬지 않고 말하고 계획하고  몽상하였다. 그
러면서도 미술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떨어졌다는 말만큼은 방친구에게 하
지 않았다. 낮 동안에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가 하고 물으면  그는 이
렇게 대답했다. "나는 빈의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서 애쓰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특별한 연구를 하고 있다."
  모든 특이한 과장과 순수한 공상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태도에서 이미 뒷
날의 히틀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자신의 말은 세계개혁  의지와 신분
상승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관계를 암시해주고 있다. 무기력가 지나친 긴장, 
무관심과 발작적인 활동성의 독특한 결합이 장래의 모습을  보여준다. 쿠비
첵은 불안이 섞인 태도로 히틀러의 갑작스런 분노와 절망적인 발작을 적어 
놓고 있다.  잦은 공격성과 그  격렬함, 분명하게 드러나는 무한한  증오감, 
쿠비체크는 자기 친구가 빈에서  '완전히 규형을 잃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극히 격양된 흥분상태가 급작스럽게 좌절의 기분과 교차하곤 하였다. 
그럴 때 는  부당함, 미움, 적대감만을 보디고, "자신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전인류에  고독하게 맞섰다. 그는 인류 전체에 의해  쫓기
고 기만당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어디에나 "오직 그의 상승을  방해할 목
적으로 덫"이 쳐져 있다고 느꼈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
  1908년 9월에는 히틀러는 한  번 더 아카데미 회화반에 들어가려고 노력
하였다. 지원번호 24번에는, 그가  미리 제출한 작품이 시험의 기준에 합당
하지 않아서 '응시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더욱더 결정적인 이 거절은 한  해 전의 모욕적인 경험을 상기시키고 다
시 한 번 확인해  준 것이었다. 학교와 아카데미에 대해서 그는  일생 동안 
줄지 않는 미움을 가졌다.  학교는 '비스마르크와 바그너'도 잘못 평가하고, 
안셀름 포이어바흐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바보 같은 자식들'이나  학교를 
다니고 '천재를 죽이기  위한'곳이라고 했다. 35년이나 지난  뒤에 사령부에
서 총통이며 사령관인 그가 전에  마을 학교 선생을 지낸 가난한 사람들을 
놓고, 그들의 '더러운' 외양, '지저분한 칼라와 깎지 않은 수염 등'을 향해서 
이런 장광성을 늘어놓을 정도였으니  그가 어느 정도의 모욕감을 느꼈는지
는 짐작할 만하다.  그는 '결코 치유되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자기 정당화
의 욕구로 진정시키기 위해서 거듭 애쓰곤 했다.
  예를 들면 그는 30년대 초에  당의 위기를 맞이하여 쓰게 된 공개편지에
서 자신에게  부당한 운명을  원망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이렇게  적었다. 
"나는 돈 많은 부모의 자식이 아니었다.  대학에서 교육받지 못하고 인생이
라는 가장 혹독한  학교에서 곤궁과 비참을 통해 교육받았다. 표피적인  것
을 중히 여기는 세상은 무엇을  배웠는가를 묻지 않고 언제나 어떤 증명서
를 가지고 있는가만을 묻는다. 수많은 우리 지식인들보다 내가  더 많은 것
을 배웠다는 사실은 한번도 관심을  끌지 못했고 언제나 내가 학위증이 없
다는 것만을 관심을 끌었다."
  히틀러는 이 두  번째 실패 이후에 겸손하고  극단적으로 조용한 태도로 
모든 사람의 눈에서  사라졌다. 결혼해서 빈에 살고 있던 이복누이  앙겔라
와 소식이 끊어졌고  후견인도 짤막한 우편엽서 한 통을 받았을  뿐이었다. 
쿠비체크와의 우정도 동시에  끝나버렸다. 그가 잠시 빈을 떠나 있는  사이 
히틀러는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함께 살던 집에서 나가서 도시의 집 없
는 사람들의 숙소와 남자들만을 위한 하숙집에 숨어버렸다.  쿠비체크는 30
년이 지나서야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
  처음에 히틀러는 슈툽퍼  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파트를 세냈다.  15
번 구역 펠버 거리 22번지 16호였다.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어느 정도의 
열의를 가지고 그의 본질의 어두운 층을 특징짓고, 그의  삶에 전체적인 방
향을 제시해주는 이념들과  생각들의 공간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오랫동안 
성격의 강인함과, 조숙한 천재성과 세상의 몰이해의 증거라고  해석했던 이
번 실패는 구체적인 의미와 구체적인 적을 요구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즉흥적인 감정은  시민세계를 향했다. 시민사회의 성과규범, 그 
엄격성과 요구에서 실패를 한 것이었다. 물론 그의 성향과  의식을 보면 그 
자신의 시민계층에 속하고 있었다. 그가 이제부터 시민사회에  대해서 가지
는, 수없이 거듭 표현된  분노는 그의 존재의 파라독스의 일부였다. 시민세
계는 사회적인 추락에  대한 공포,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것에 대한  너무나
도 분명한 두려움에서 양분을  얻고, 또한 그것과 경계를 이루는 세계였다. 
그는 9나의 투쟁)에서 예상 밖의 공개적인  태도로 '노동자 계층에 대한 소
시민의 적대감'을  묘사하였다. 이러한  적대감은 그 자신에게도  나타났다. 
그것은 '오래되고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이 계층으로 다시 추락할까 봐서, 
아니면 그렇게 여기질까' 두려워서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계속해서 양친의 유산의 일정액을 받을 수 있었고,  다달이 받는 보
조금도 있었다. 그러나 미래의 불확실성이 그를 억압하였다. 그는 옷차림에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계속 도시의 오페라 극장, 카페  등을 드나들면서 그 
자신이 언급한 대로 세련된 언어와  신중한 태도로 더 가난한 계층을 향해
서 시민적인 계급의식을 보여주었다. 뒷날의 수많은 관찰자들처럼  어떤 이
웃집 여자도 그가 친절하고 특별하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눈
여겨 보았다고 했다. 이 빈 시절에 대한 또 다른  약간 불확실한 증언을 보
면 그는 이 시기에 제복을 입은 아버지 사진을 봉투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
서 자신의  "작고한 아버지께서는 황제폐하의 세관장으로  은퇴를 하셨다."
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보여주곤 했다고 한다

    거부보다는 참여를
  때때로 나타나는 적대적인  몸짓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동방식은,  그가 
본질적으로는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있고 소속감의 필요를 느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 것은  시민계층의 기본적인 요구다. 자기가 일찍이 예술
과 정치 영역에서 '혁명가'였다는  그의 주장은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금 음
미해보아야 한다. 사실상 이 스무 살 청년은 시민세계와  그 세계관에 한번
도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는  솔직히 존경심을 가지고서 그  영광과 
부유함에 압도된  채 시민세계로 접근하였다.  린츠 출신의 몽상적인  관리 
아들은 시민세계에 경탄을 하였지 그것을 뒤집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거부
보다는 참여를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욕구는 물리칠 수 없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시민세계로부터 거부 
당하고 깊은  모욕감을 느끼기는 하였으니  그렇다고 시민사회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민사회에  받아들여지고 인정받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가졌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특이한 이 초기 시절에서도  가장 특이한 사건
에 속하는 일이다. 이미 20년 전부터 유럽에 퍼지고  있던 체면을 중시하는 
시민사회에 대한 수많은 고발이 그의 손 위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스스로 
굴욕받은 것을 사회적으로 정당화시키고 비판을 통해 시민사회에 앙갚음하
라고 도와주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하고 나서도  이상스럽게 이런 
시대적 현상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 사이 거의 유행이  되다시피 한 전
체적인 가면 벗기기 분위기도 그를 사로잡지 못했다. 그  시대의 모든 예술
적 흥분과  이념논쟁들, 그리고 지적인  모험심은 그의 곁을  스쳐지나갔을 
뿐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는 세기가 바뀌기  직전에 이러한 시작의 중심지의 하
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음악을 통해서 청춘의 위대
한 해방을 경험한  젊은이, 감수성 있고 항의하고 싶어하는 젊은이가  쇤베
르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그가 자기 문하생들인 안톤  베베
른, 알반 베르크와 함께 바로  히틀러가 빈에 머물고 있던 시절에 '빈의 콘
서트 홀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게 된 이후로 가장 큰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구스타프 말러나  리
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해서도  못 들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은 
1907년 당시의 비평가 한  사람이 '음악세계의 폭풍 중심부'라고 불렀던 현
상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현상 대신에 그는 바그너나 브루크너 등  아버지 
세대의 도취체험을 뒤쫓아가고 있었다.
  쿠비체크는 1905년  (시도시집)을 냈던 릴케나 호프만스탈같은  이름들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확인해주고 있다. 히틀러가 미술 아카데미
에 지원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분리파 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었고 
구스타프 클림트, 에콘  쉴레 혹은 오스카 코코슈카 같은 분리파  화가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상도 받지 못했다.  그는 전전 세대에게서  예술감각을 
자극받았고 안셀름 포이어바흐, 페르디난트 발트 뮐러, 칼 로트만이나 루둘
프 알트를 존경하였다.
  원대한 계획들을 지닌 장래의 건축가는 자기 말대로 라면 몇 시간씩이나 
매료되어서 링 거리의 고전적인 혹은 신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 앞에 서 있
곤 했으면서도 바로 이웃하고 있는 새로운 건축의 혁명적인 주도자들에 대
해서는 전혀 몰랐다.  오토 바그너, 요제프 호프만, 아돌프 로스  등에 대해
서 아무것도 몰랐다.  아돌프 로스는 1911년에 미하엘 광장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왕궁 정문  바로 맞은 편에 매끈하고 장식  없는 얼굴을 가진 상사 
건물을 완성해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뻔뻔스럽게 여겨지는 태도로 
'장식과 범죄' 사이에 내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글을 썼다. 히틀러
는 그러나 빈의 살롱들과 귀족의  방을 장식하고 있는 양식에 대해서만 소
박하면서도 단호하게 열광하였다. 그는 예술에 나타나는 불안과  붕괴의 조
짐들을 못 보고 지나갔다. 다른 어느 시대보다 '예술적인 혁명의 결과를 겪
었던' 시대의 소란스러움이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기껏해야 
숭고함이 격하되는 경향만을 감지했던 것 같다. 그가 쓴  글에 따르면 그의 
시민적 본능으로는 놀라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는 어떤 낯설고 이상한 것
의 시작을 눈치챘던 것으로 보인다.

    저항자로는 안 어울리는 사람
  정치적 현실과의 첫 만남도 이상스럽게 그와 비슷한 조짐을 보이는 가운
데 이루어졌다.  그 모든 저항감에도  불구하고 혁명적인 이념들은  그에게 
조금도 매력이 없었다.  정치 분야에서도 그는 자기가 배척하는 질서를  옹
호하는 기득권자의 지지자로 나타난다. 이 거절당한 인간은  거절하는 쪽의 
일을 자기 일로  여김으로써 자신의 굴욕감을 없앴다. 이러한 심리적  과정
은 히틀러의 성격에 하나의 단층선을 만들어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건축노동자  시절 어느 날 그는 점심휴식 시간에 
'어딘가 한구석에서'  우유와 빵을 먹고  있었다. 그 때 노동자들  사이에서 
들리는 격렬한  사회적 거부의 감정에  '극단적으로 '놀랐다. "그들은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민족이란 '자본주의'  계층의 창안이라고 거부하고, 
조국은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기  위한 부르주아 계급의 수단이라고 거부하
였다. 법의 권위는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다. 학교는 노예를 
만들어내기 위한, 그리고  노예감독자도 만들어내기 위한 기관이다. 종교란 
착취하도록 만들어진 민중을  우둔하게 만들려는 수단이다. 도덕은  멍청한 
양 같은 참을성의 표지다,  하는 식이었다. 무시무시한 깊이의 진창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건축노동자들에 대항하여  그가 옹호하는 개념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민족, 조국, 법의 권위, 학교, 종교, 도덕 등 거의 완
벽한 시민사회의 규범목록을 포함하고 있다. 그 자신 이  시기에 이런 규범
목록들에 대해서 최초의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일생 동안 여
러 차원에서 언제나  새로 나타나는 분열된 관계였다. 시민적 요소를  경멸
하면서도 그것과 연합한다는 정치적인 책략에도 나타나고, 예를  들면 여비
서들에게 핸드키스로 인사를 한다거나 오후 휴식시간에 총통사령부에서 그
들에게 달콤한 생크림 빵을 대접한다는 따위의 우스꽝스러운 의식절차에도 
나타나는 분열이었다.
  온갖 반시민적인 원한을 가진  가운데 그는 시골의 왕처럼 '옛날식' 남자
의 면모들을  길렀다. 그러한 특성들은  열렬히 소망하던 사회적  소속감을 
보여주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젊은  히틀러의 이미지에서  오스트리아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특별한 권위의식이었다. 그러한  권
위의식을 가지고서  그는 시민이라는 특권을 옹호하였다.  모든 존재, 모든 
활동에 사회적인 등급을  부여하려 하고, 지나칠 정도로 호칭을 중히  여기
는 사회에서 그는 극히  제한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신사'가 되
려고 했다. 그리고 예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시대의 저항적인  힘들에 합류
하지 못하자  오직 신사가 되고자 하는  생각 이외에는 달리 하지  않았다. 
말투나 옷처럼 외적 행동방식의  선택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나 미적인 선
택들도, 별 거부감 없이 시민세계를 따르고자 하는 그의  욕구로 설명될 수 
있다. 사회적인 비참보다는  사회적인 무시를 더욱더 힘들게 받아들였으며, 
그가 낙담했다면 세계 질서의  잘못으로 고통스러워한 것이 아니라 세계질
서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이 불충분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항의를 피했고, 오직  의존과 동의만을 구했다. 대도시의 위대함과 매
력에 마비된 것처럼, 닫혀진 문들 앞에서 동경에 가득  차서 혁명적인 생각
을 키운 것이 아니라  오직 외로웠을 뿐이다. 저항자로 그보다 더  안 어울
리는 사람도 없었다.

    제3장 사상적 토대
  어떤 연구에 따르면 그의 숙소에서  멀지 않은 펠버 거리에 잇는 담배공
장에서 종족주의를  다룬 잡지가 발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발행부수  10만 
부 정도였고  특히 대학생들과 중간지식층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있었다. 
"당신은 금발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문화 창조자고 문화  보존자다! 당신은 
금발인가? 그렇다면 여러 가지 위험이 당신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므로 금
발과 남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책들을 읽어라!" 제1면에 큰 표제어로  이렇
게 광고하고 있었다. 수사노릇을  하다가 그만둔, 요르크 란츠 폰 리벤펠스
라는 그럴싸한 귀족  이름을 가진 사람이 발행하는 잡지였다. 그것은  게르
만의 봄의  여신인 '오스타라'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이 잡지는  아싱족 
(혹은 영웅족) 대 원숭이족 (혹은 숲의 종족)의 싸움에 대해서 상당히 변덕
스럽고 살기를 띤 이론을 전개하였다.
  저지 오스트리아에 있는 기사단의 성인 베르펜슈타인을 중심으로-그곳의 
수입이 그에게 산업의 촉진자 노릇을 가능하게 해주었다-란츠 폰 리벤펠스
는 아리안  영웅의 남자기사단을 창설하고 조직했다.  그 기사단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주인 종족이  열등한 혼합종족과 벌이는 피의 투쟁에서 주
인종족의 선발대 노릇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는 1907년에 벌써 갈고리  십
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내걸고, 사회주의 계급투쟁에 맞서서  '거세하는 칼'
에 이르기까지 종족투쟁을 계속하겠노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짐승인간의 
멸종을 위해서, 더 높은  새로운 인간의 발전을 위해서' 사육방법과 멸종방
법을 체계화하겠다고 했다. '원숭이 숲'의 불임 조치와 추방 프로그램, 그리
고 강제 노동이나  상인을 통한 청산 프로그램은  육종을 선별하고 종족을 
개량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움이 섞인 환호성을  울렸다. "여신께 공물을 바쳐라. 신의 
아들들아. 일어나라.  그분께 숲의 종족을  바쳐라!" 아리안 족의  이상형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도록 그는 종족간의 미의 대결을  제안하였다. 히틀러는 
간혹 란츠를 방문하였다. 란츠의 설명에 따르면 히틀러가 이  잡지의 옛 판 
몇 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젊고,  창백했으며, 겸손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초기의 이데올로기적 환경
  현존하는 자료로는 란츠가 히틀러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지, 혹은 '이
념의 전수' 했는지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이 우스꽝스러운 기사단 창설자의 
의미는 구체적인 충격이나 이념의 중개에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런 현상
이 드러내는 징후에  있었다. 그는 노이로제 증상이 보이는 시대  분위기를 
두드러지게 대변하는  사람의 하나였고, 당시  빈에서 싹트고 있던  상당히 
공상적인 이데올로기 분위기에  특징적인 색깔을 덧붙인 인물이었다.  이러
한 사실은 그가 히틀러에게 미친 영향을 보여주기도 하고 한정짓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이데올로기  자체보다는 그 바탕을 이루는 병리적 징후에  흔
적을 남기고 있다. 
  히틀러 자신이 젊은 시절 지식의  원천이었다고 부른 적이 있는 신문 논
설과 싸구려 잡지에서  얻은 여러 가지 지식들과  이런저런 영향들을 놓고 
결론을 내려보면, 그의 세계관은 시민문화에 대항하는 도착적인  하위 이질
문화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시민적 교양과 휴머니즘에  맞선 
이 천박한 대항의식은  그의 이데올로기 안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시
민문화는 얼마간 자신의 하위문화에  물들어서 스스로 자신의 모든 기반을 
부정하고 모독하기에 이르렀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세기가 바뀌던 무렵에 
민에서 히틀러가 란츠 폰 리벤펠스와  다른 현상들을 통해서 만나게 된 하
위 이질 문화란, 엄격한 의미에서 지배적 가치체계의 부정이  아니라 그 가
치체계의 타락한 모방형태에 불과했던 것이다. 히틀러는 시민적  결속의 필
요성을 느끼고 어디를 향하든지 싸구려  잡지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은 생
각들, 열등감, 공포심을  만났다. 다만 약간 더 고상하고 더  까다로운 형식
을 가진 것이었다. 그는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방향을  잡도록 도와준 저속
한 생각들을 하나도  포기할 필요가 없었다. 존경심으로 가득 찬  놀라움을 
품고 이 대도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그들의 
어떤 생각도 그에게 특별하게 들리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당시 가장 인기
가 있고 가장 자주 공연되던 작곡가의 작품들과 최고급의 궁정오페라를 보
아도 평소의 친숙한  생각들이 다만 더욱 기교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란츠,오스타라 잡지,쓰레기 같은  논문들은 그가 소속하고자 
하는 사회로 들어가는 뒷문을 열어주었다. 뒷문이지만 그래도  분명히 문은 
문이었다.
  이러한 소속감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꽉 붙잡을 필요를 느낀 그는 자신의 
원한에 이데올로기적인  겉모양을 보여하려고  노력하였다. 사회적  추락의 
취협을 받고 있는  인간의 병적으로 격앙된 자기가치  의식을 가지고 그는 
선량한 빈 사회의 편견들, 구호들, 두려움과 요구들을 점점 더 많이 받아들
였다. 반유대주의와 억압된 도이치 민족의 근심이 반영된  주인이론들이 여
기 속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에 대한  적대감과 이른바 사회적  다원주의
(적자생존)도 받아들였다. 이 모든  것은 지나치게 자극된 민족주의에 기초
를 두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지배자들의 생각에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기
간에 가졌던 전반적인 생각들이었다.
  그러면서도 히틀러는 개인적인 사색의 결과로 이 같은 세계관을 얻은 것
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즉 꿰뚫어보는 관찰력과 부지런한 인식의 결과  스
스로 그런 세계관을  얻었다고 표현하곤 하였다. 모든 결정적인 영향을  부
정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원래 가졌던 선입견 없는  입장도 검토하고, 예
를 들면 린츠 시절에  유대인들에 대한 '불리한 발언들'이 자기에게 혐오감
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세계관의  싹과 방향은 
고지 오스트리아 지방의 주요도시인 린츠의 이데올로기 환경에서 만들어졌
을 가능성이 크다.
  린츠는 세기가 바뀔 무렵 민족주의 그룹과 그 성향의 중심지 중 한 곳이
었다. 특히 히틀러가 다녔던 실업학교는 확고한 민족주의  분위기가 지배하
였다. 학생들은 노골적으로 도이치 민족을 상징하는 푸른  색 달구지국화꽃
을 단추구멍에 끼우고 다녔다.  그들은 도이치 통일운동의 상징 색인 검정, 
빨강, 노랑을 즐겨 사용하였으며 '만세(하일)!'라는 말로 인사하였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황제친미가 대신  같은 멜로디에 붙인 독일 노래를 불렀다.  그
들의 저항적인 민족주의는 특히 합스부르크 왕조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학
교예배와 성체축일 행렬에  반대하는 청소년 저항운동은 '개신교' 제국과의 
일체감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히틀러가 전쟁 중 원탁모임에서  털어놓은 것
에 따르면 그는 동급생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여러 가지 자유주의적인 
발언들을 했고 종교선생인 살레스 슈바르츠를 "절망에 빠뜨려서 어찌할 바
를 모르게 만들곤 했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의 대표자는 도이치 교구위원이며 실업학교 역사선생인 레
오폴트 푀치 박사였다. 그는 젊은 히틀러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 분
명하며, 수업시간에 능변과  두 세대 이전의 다채로운 그림을 통해서  소년
들의 상상력에 방향을 제시하였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그에게 바친 
페이지들이 과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히틀러가  역사과
목에서 겨우 '양'을 맞기는 했지만 그래도 국경지대  주민들의 두려움, 혼합
된 민족과 종족을 가진 제국에 대한 감정과 히틀러의 기본적인 반유대주의 
성향은 의심할 것 없이 그곳에서 나온다.
  그가 당시 린츠에서  발간되던 쇠너러 운동의 풍자적인  신문 (외괴의사, 
예술과 생활에 나타나는 정치와 기분을 위한 월간 티롤 화보)를 읽은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이 화보는 기고문과 만화에서 '교황숭배자' (카톨릭교도) 
,유대인, 의회, 여성해방, 풍기문란, 알코올 등에 반대하였다. 이 화보잡지는 
1899년 5월에 나온  제1호에 이미 도이치 민족  감정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된 갈고리 십자가상을 내걸었다. 이것은 게르만 신화에  따르면 세계창조의 
원래 재료를 뒤섞었던 '불 방망이'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나아가 젊은 히틀
러가 학생시절과 그 뒤 몇 년 동안 목적 없이 지내던 시절에 (모든 도이치 
신문)과 도이치 민족주의 시민들  사이에 널리 읽히던 (남부 국경연감), 그
리고 공격적인  반유대주의를 선언한 (린츠  팸플릿)지를 읽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나의 투쟁)의 저자가 주장하듯이 반유대주의는 정치사회적 변화
의 동반현상 중  하나로서 빈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고 지방에서도 이에 
못지 않게 격렬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2년 간의 영혼의 투쟁
  히틀러는 2년 간 계속된  '영혼의 투쟁'이 자신의 '가장 힘든 변화'였다고 
말한다. '허약한 세계시민에서 광신적인 반유대주의자'로  변화되는 그 기간 
동안 자신이  감정은 가차없는 이성에  맞서 '수없이' 저항했다고 한다.  이 
시기는 사실상 파악하기 어려운 거부감이 의식적인 적대감으로,  단순한 기
분이 이데올로기로 발전되는  시기였다. 그때까지는 아직 타협이  가능했던 
목가적인 린츠의 반유대주의가 원칙의 날카로움을 얻고, 광범위한  폭과 구
체적인 적의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이다.
  부모의 주치의였던 유대인 에두이르트 블로흐에게 히틀러는 처음에 빈에
서 '겸손한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변호사 요제프 파인골트, 특짜는 
목수 모르겐슈테른 등은 그의 소품 수채화들을 여러 번이나 사주어서 예술
적으로 그를  격려해준 사람들이었다. 아니면  남자 하숙집의 유대인  친구 
노이만에게 그는 터무니  없는 의무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 모든  유대인들
은 그의 인생 초기에 길 가장자리에 그림자처럼 나타났다가 이 몇 년이 지
나는 동안 뒤쪽으로 숨어버렸다. 그들의 모습 대신 점점  더 많아져서 신화
의 유령처럼  커지는 '검은 고수머리에  긴 카프탄을 입은  모습'(유대인)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 모습은 그가 '언젠가 도시 중심부를  지나쳐' 갈 때 그
의 눈에 띈 것이다. 그 일을 회상하면서 그는 이  우연한 인상이 그의 뇌리
에서 어떻게 '빙빙 돌고' 점차 모든 것을 지배하는 고정관념으로 변해 갔는
가를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유대인을 처음으로 유심히 지켜보자 빈이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어디를 가든지 오직 유대인만  보였으
며, 그들을 많이 보게  될 수록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다르게 보였
다. 특히 도시 내부, 도나우  운하의 북쪽 지역에는 얼핏 보아도 도이치 사
람과 닮지 않은  종족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대단히 매력적
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 선택된 민족의 육체적인 불결함을 넘어서  도덕
적인 얼룩들을 보게 되면 반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문화생활의 
영역이든지 유대인이 한 명이라도 끼지 않은 재앙과 파렴치 행위가 있었던
가? 조심스럽게 그런 종양을 갈라놓고 보면 썩어가는 몸에 들어 있는 구더
기처럼 갑자기  비춘 빛에 눈부셔하는 유대인을  볼 수가 있었으니...  나는 
차츰 그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광신적 반유대주의자'로 변함
  란츠 시절의 평범한 반유대주의가  광적으로 변해 그것에 완전히 사로잡
혀 문자 그대로 생애 최후의  순간까지 계속되는 유대인 증오로 바뀌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이 시절의 히틀러의  믿음직하지 못한 친구 
중 한 명은 그 이유를 추락한 시민계급 아들의  성적인 질투심으로 돌렸다. 
그리고 어떤 금발 소녀, 유대  혼혈인 라이벌, 그 소녀에 대한 히틀러의 강
간 시도 등에 대해 기묘하고도 별 설득력 없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일찍부터 나타나는 초긴장과  어두운 두려움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성에 
대한 히틀러의 생각은 그가 성적으로 문제가 있었으리라는 추측에 어느 정
도 무게를  더해준다. 어디서든 유대인이  등장하기만 하면 나타나는  그의 
표현법과 논리적 근거도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나의 투쟁) 곳곳에 들어 
잇는 노골적인 음란성의  냄새는 우연히 겉으로 나타난 특징이 아니고,  젊
은날 깨달음을 얻은 오스타라 잡지나 저속한 팸플릿의 음조와 문제에 대한 
기억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원한의 특별한  특성을 드러내주는 것이
다.
  전쟁이 끝난 뒤에 히틀러의 주변 인물들로부터 상당히 많은 그의 애인들 
목록이 출간되어  나왔다. 당연한 일이지만  거기에는 부유한 집안  태생의 
아름다운 유대인 여자도 들어 있었다. 그가 린츠나 빈 어디서도 '어떤 아가
씨와 실제로 만난'적이 없다는  확인도 상당히 믿을 만하다. 어쨌든 연극적
인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게 만들 정도의 정열적 사건이 없었던 것만큼
은 확실하다.
  이러한 결핍에 맞서  특이한 꿈들이 나타난다. 그 자신이 확인해준  것에 
따르면 그것은 '역겹고  다리가 구부러진 유대인 놈들이 수백수천 명의  아
가씨들을 유혹하는 악몽'이었다.  란츠도 아름다운 금발의 귀족여인들이 검
은 털투성이 유혹자들의 팔에 안겨 있는 끔찍한 모습에  고통을 받았다. 그
의 종족이론은 성적인 질투심과  마음속 ㄱ이 자리잡은 반여성주의 감정으
로 물들어 있다. 그에 따르면 여자는 이 세상에 죄악을 가져오는 존재이고, 
짐승같은 하급인간들의 쾌락적인 기술에  쉽게 넘어가는 그들의 특성이 북
방 혈통을 오염시키는 주요원인이라는 것이다.
  히틀러도 비슷한  형태로 뒤늦고 억압된  남성의 고민을 표현하고  있다. 
"검은 머리카락의 유대 청년이 얼굴에 악마적인 기쁨을 드러낸 채 몇 시간
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그  아가씨를 자기 피
로 더럽히고,  그럼으로써 아가씨의 종족에서  그녀를 훔쳐내려는 것이다." 
란츠나 히틀러나 다같이 불만스러운 몽상가들의 반반하고 몰취미한 그림을 
보여준다. 그리고 국가 사회주의 세계관의 전망에서 광범위하게  피어 올라 
오는 역겨운 냄새는 시민세계 내부에 나타난 억압된 성이라는 현상에서 나
오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젊은날의 친구 쿠비체크와 빈의 어두컴컴한 지하세계 친구들은 히틀러가 
일찍부터 온세상과 사이가 나빴고 어느 쪽을 바라보든 증오를 느꼈다는 사
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반유대주의는 그때까지 목적 없이  헤
매고 있던 그의 증오가 고정된 형태로 자리를 잡고,  마침내 확고한 증오의 
대상을 유대인을 찾아낸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나의 투쟁)에서 히
틀러는 적이 여럿이면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대중에게는 절대로 여
러 적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원칙
은 그  자신에게도 타당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분열되지 않는 강도로 단 하나의 현상에만 집중시키곤  했다. 그 하
나의 현상에 세계의 모든 재앙의 근원이 있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구체적
인 하나의 형태를  향해서 모든 비난을 집중시켰고,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원인들의 조직망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위압적인 히틀러의  유대인 콤플렉스를 설명할 만한 것이 
간단하게 파악되지 않더라도, 명예욕 강하고 절망한 아웃사이더가  개인 문
제를 정치 문제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출발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한 걸음씩  추락의 길을 걸었고 따라서  자신의 계급추락의 두려움을 
만족시킬 필요가 있었다. 유대인  현상으로부터 그는 자기 같은 '가련한 인
간'이 역사와  자연의 법칙을 자기편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히틀러 
자신의 묘사한 내용은 그가 부모의  유산이 다 떨어졌을 때 반유대주의 이
데올로기로 전환했으리라는 추측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는 정말  힘든 처
지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역시 힘들었고, 특히 예술가,  천재, 공적인 경탄 
등을 꿈꾸면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훨씬 깊이 추락하였다.

    원칙에 사로잡힌 분노한 인간, 쇠너리
  세기가 바뀔  무렵 도이치 시민의  도시이자, 히트럴가 사회적인  결속의 
욕구를 가지고 들어섰던 도시 빈은  세 가지 지배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었
다. 정치적으로는 게오르크 리터 폰 쇠너러와 칼 뤼거의 영향 아래 있었다. 
히틀러의 길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정치와 예술의 밝게 채색된 중
간영역은 리하르트 바그너가 압도적으로 지배했다.
  히틀러는 게오르크 리터 폰 쇠너러의 '추종자이며 숭배자'로 빈에 등장하
였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히틀러의 침대 위쪽에는 이 남자의  격언들
이 액자에 담긴 채 걸려 있었다고  한다. '유대왕국 없는, 로마 없는/게르만 
왕국을 건설하자. 만세!' 하나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고, 다른 하나는 도이
치계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국경  저편의 조국에 결합되기를 바란다는 내용
을 표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격언은 인기  있는 방식으
로 쇠너러의 '모든 도이치 운동'의 본질적인 프로그램을  이루고 있었다. 그
것은 독일에 있는 같은  이름의 단체와는 달이 '도이치 세계정책'이라는 표
어 아래 확장하는  제국주의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쇠너러의  운
동은 모든 도이치 사람들이 하나의  국가 안에 합쳐지는 것을 목표로 하였
다. 그것은 독일의 '모든  도이치 연합' 과는 반대로, 오히려 오스트리아 제
국의 도이치 아닌  지역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였고, 다민족 국가의 존립  자
체를 반대하고 있었다.
  이 운동의 창설자이며 지도자인 게오르크 리터 폰 쇠너러는 히틀러 일가
도 잘 알고 있는 저 국경 지역의 숲지대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과
격한 민주주의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과도한 외국세력 콤플렉스에  사로잡
힌 듯 그는 어디서나 도이치  민족과 정신이 치명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만 보았다. 유대인,  로마 카톨릭, 슬라브 사람, 사회주의자,  합스부르크 왕
조, 그리고 어떠한  형태의 국제화도 도이치 민족과 정신을 위협하는  것으
로만 여겼다. 편지에는 '도이치의 인사를 드리며' 서명을 했고, 게르만 관습
의 부활을 위해서 다양한  행사들을 마련했다. 침버 사람들과 튜튼(도이치) 
사람들이 로마군대를  절멸시키고 승리한 노레이아  전투가 있었던 기원전 
113년부터 도이치의  기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쇠너러는 
절망에 빠진  인간이었다. 원칙에 사로잡힌 분노한  인간이었다. 그는 저지 
슬라브 성직자의 민족주의적인  태도에 대한 답변으로 '로마에서  벗어나기 
운동'을 조직했다. 그로써  그는 카톨릭 교회의 적대자가  되었으며, 그때까
지는 주로 종교적, 경제적인 이유로 전개되던 유럽의  반유대주의를 처음으
로 정치사회적으로 특히 생물학적인 반유대주의로 변화시켰다.
  유치한 것들의  효과가 얼마나 강한지를  직감한 선동가인 그는  '종교는 
상관없다. 난잡성은 유전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모든 동화의 경향들에 
반대하였다. 유대인을 세계의 모든 재앙과 두려움의 원인으로  보는 편집증 
뿐 아니라 선전포고의 과격적으로 보아도 그는 히틀러의 선구자 중 하나였
다. 옛날 오스트리아의 우유부단하고 관용적인 삶의 분위기에서  그는 처음
으로 종족적, 민족적  두려움을 조직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들을 보여준  인
물이었다. 그는 깊은 불안감을 가지고 도이치 소수민족이 압도되고 '학살되
는' 날이 다가온다고 느꼈다. 그는 반유대 특별법을  요구하였고, 그의 추종
자들은 목매단 유대인을 나타내는 반유대 표지를 시계줄에  매달고 다녔다. 
그들의 빈 의회에서 유대인을 살해하면 돈이나 아니면 살해된 사람의 재산
으로 현상금을 주자는 주장도 하였다.

    마지막 위대한 도이치 사람, 뤼거
  그렇지만 히틀러는 또 다른 소시민 반유대주의의 대표자인 칼 뤼거 박사
에게서 더 강한 인상을 받았다. 빈 시장이며 기독교사회당의  말 잘하는 당
수인 그는 (나의 투쟁)이  가장 경탄하는 인물이다. 그는 '진짜 천재적'이고 
'모든 시대의 가장 강력한 도이치 시장'이라 불리고  있으며 또한 '동부국경
의 마지막 위대한 도이치 사람'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프로그램, 특히 
느슨하고 기회주의적으로 짜여진  반유대주의 프로그램과 썩어서 무너져내
고 있는 다민족 국가가 아직도  생존능력이 있다는 그의 믿음에 대해서 히
틀러는 솔직하게 비판하였다.  그럴수록 뤼거의 선동가적인 위대성은  더욱
더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그가 주도적인 사회적, 기독교적,  반유대적 
감정이나 확신들을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전략적인 유연성도 역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강력한 상대방에  대해서 건방지게 원칙을  고수하려 함으로써 영향력을 
잃어버린 쇠너러와는 달리 뤼거는 온화하고 능숙하며 인기가  있었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했을 뿐이고  속으로는 경멸하였다. 그는 전술적, 실용적
인 사고를 하면서 이념보다는 현실을 더욱 중히 여겼다.  그가 대략 15년간 
시장직에 있는 동안  교통망이 현대화되고, 교육체계가 완성되었으며  사회
보장이 개선되고, 녹지대가  만들어지고 빈에 거의 1백만이 일자리가  확보
되었다.
  뤼거는 카톨릭 노동자 계층과 소시민 계층을 기반으로  해서 상승하였다. 
시대의 흐름과 산업화를 통해서 사회적 추락이나 빈곤의 위협을 받고 잇는 
사무직과 하급공무원, 영세상인, 임대업자, 성직자  등이 그의 지지기반이었
다. 그도 또한  쇠너러와 마차가지로 널리 펴진 공포감을 이용하였는데  다
만 선별되고 극복될 수 있는 적에 대항해서만 이용하였다.  그는 어둡게 칠
해진 공포감을 불러들이지 않고,  "소시민은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와 같
은 말투에 나타나는 분명하고  인간적인 상투어들을 공포심에 대항하여 내
세웠다.
  히틀러의 지속적인  경탄은 능숙한 마키아벨리  신봉자였던 뤼거 시장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 남자의 교훈적이고도 친근한 모습에서  자
기와 개인적인  일치점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그 자신이 소박한  계층에서 
나왔듯이 뤼거도 온갖  반대와 사회적인 멸시를 딛고 일어섰으며, 그를  시
장으로 임명하는 것을 세 번이나  거절한 황제의 반대를 딛고 마침내 그토
록 열망하던 사회의 인정을 받아냈다. 용감하지만 무의미하게  사라질 적대
감을 가진 쇠너러와는 달리 뤼거는 지배계층과 조직화된 결속을 맺고서 확
고하게 위로 향한  길을 만들어나갔다. 히틀러는 그를 숭배하면서 결코  잊
을 수 없게 된 이 교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오래된 힘의 원천에서 
자신의 운동을 위해 가능한 한  최고의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이미 존
재하는 모든  권력수단을 이용하고, 현존하는  강력한 힘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뤼거가 감정적인 총체적  표어들의 도움을 받아서 결성한 대중정당은,  1
백 년 전에도 이미 성과가 있었듯이 두려움이란 계급이해를 넘어설 정도로 
강력한 유럽의 새로운 표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보헤미아 국가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의 이념도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
국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의  점점 커지던 산업지대의 도이치 노동자
들은 1904년에 트라우테나우에서 도이치  노동자당(DAP)을 결성했다. 시골
에서 공장지대로 흘러 들어와서 파업 대체노동자로 일을 하는 싸구려 체코
인 노동력에 대항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곧  여
러 가지 형태로  유럽 전지역에 작동될, 마르크스 사회주의의 딜레마를  해
결하려는 시도의 전조였다.  공산주의는 민족간의 대립을 절대로  극복하지 
못하였으며 인류 전체의  구호에 합당한 형태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보헤
미아와 모라비아에서 도이치 노동자의 민족적인 특별의식은 계급투쟁 이론 
안에 설 자리가 없었다. 새로운 정당의 참가자들은  이전의 사회민주당원들
에서 상당수를 충원하였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연대정책이 이  지역의 체
코 다수인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간다는 근심에서  자신들의 이전의 이념을 
버린 사람들이었다. 도이치 노동자당 강령은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프롤레
타리아 연대정책은  '실패했으며 중부유럽의  도이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손해'였다고.
  민족적 이해와 사회적 이해의  일치는 이들 도이치 사람들에게 직접적으
로 중요한 보편적인  진실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그러한  진실
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국제주의와 대립시켰다. 민족공동체의  이념에서 그
들은 사회주의와 민족감정의 화해를 구했다. 정당의 강령은  방어와 자기주
장 요구를 하나로 합쳤다.  그것은 확고한 반자본주의, 혁명적, 자유주의적, 
민주적 목표를 추구하고 있었으나 다른 한편 처음부터, 주로 체코, 유대 등 
이른바 이방민족들에  대한 공격과 결합된  권위적이고 비합리적인 형식을 
지닌 것이었다.  초기의 당원들은 소규모 광산  노동자와 방직공장 노동자, 
철도 노동자, 수공업자,  노동조합원들이었다. 그들은 못 배운  체코 노동자
들보다는 도이치 시민들, 약사, 기업가, 고위 공무원이나  상인들에게 더 가
까운 감정을 느꼈다. 얼마 안 되어서 그들은  국가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이  선구자 집단을 기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1차 
세계 전쟁이 끝난 직후  일시적으로 원래의 국가사회주의 집단과의 관계가 
상당히 밀집했는데도  그랬다. 보헤미아의  동지들은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당(NSDAP)의 지도자 히틀러가  20세기를 결정하는 자신의 원래 이
념보다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점을  너무나 분명하게 문제시하였
다. (나의 투쟁)에서 그는 쇠너러와 뤼거 사이를 확실하게 비교함으로써 자
기자신의 이념을 전개하려고 시도하였다. 자신의 생각이란 두  사람의 요소
를 어느 정도 결합시킨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기독교 사회당이 광범위한 계층을  잘 이해학 위해서 '모든 도이치 운동'
처럼 종족문제의 중요성을  올바르게 이해했더라면, 그리고 민족주의적  노
선을 취했더라면, 혹은 '모든 도이치 운동'이 유대인  문제의 목적과 민족감
정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기독교 사회당이 가졌던 실용적인 
지혜, 특히 그  사회주의적 생각을 받아들였더라면 내가 확신하기로 이  운
동은 당시에 이미 성공적으로 도이치의  운명 속으로 끼여들 수 있었을 것
이다.

  이러한 비난을 해서 그는 자기가 이 두 정당 어느 쪽에도 가입하지 않은 
이유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빈 시절에 오랫동안이 사색을 통해  얻은 
정치적 계획을 갖지 못하고  쇠너러와 비슷하게 극히 일반적으로 민족주의
적인 증오심을 방어심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쪽이 더 맞을 것이다.  유대인
과 다른 '열등종족'에  대한 몇 가지 우중충한 선입견들, 그리고  실패한 희
망에서 솟아 나온 충동적인 말참견 욕구가 여기 덧붙여진다.  그는 자기 주
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성적이기보다는 기분에 따라서 파악하고,  공개된 
사건들에 대해서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정치적 세계라기보다는 정치
화의 도중에 있는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는 처음에 예술가의 꿈에  부풀어 정치에 대해서는 '곁다리' 관심을 가
졌을 뿐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 '운명이 주먹'이 그의 눈을 뜨게 했다. 쓰라
린 적대감을 품은 젊은 건축노동자의 이야기는 뒷날 모든 교과서에 실려서 
히틀러 전설의  확고한 일부가 되지만,  그 이야기에서도 그는  노동조합에 
들어오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사태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라는 재미
있는 이유가 붙어  있다. 여러 가지로 미루어보아 정치는 오랫동안  괴로움
을 덜어내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세계가 잘못했다고 비난하고  자신이 운명
을 세계질서의 부족 탓으로  돌리면서 거기서 희생제물을 찾아내는 방법이
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반유대주의자 단체에 가입하였다.

    극단적인 비참 상태
  히틀러를 쿠비체크와 헤어진 다음에 들어간 펠버 거리의 집을 금방 다시 
나와서 1909년 11월까지 여러  번 이사했다. 그때마다 자기 직업을 '순수화
가', 한  번은 '문필가'라고 소개하였다. 몇  가지 사실은 그가  법적 의무인 
국방의무를 위한 '기록'을 피했으며, 이렇게 자주 이사를  해서 관청의 체포
를 피하려 했다는  짐작이 사실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이렇게 
자주 이사를 한 것은 아버지의 유산과 그이 목적 없는 불안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일지 모른다. 이  시기의 묘사들을 보면 그는 창백하고 움푹  팬 모
습에 머리카락을 이마에  깊숙이 드리우고 성급하게 움직이곤 했다. 그  자
신이 나중에 확인해준 것에 따르면 그는 당시 매우  두려움이 많았고, 유명
한 사람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다섯 사람 앞에서 연설을 하지도 못할 정도
였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처럼 고아연금으로 생계를 꾸렸다. 어떻게 해서인지  미술 아
카데미에 다닌다고 거짓말을  해서 고아연금을 받았다. 그러나 그 동안  근
심 없고  속박 없는 삶을 살도록  해주었던 아버지의 유산도, 부모의  집을 
팔아서 남은 돈도, 1909년에는 다 떨어졌던 것 같다. 어쨌든 그는 9월에 시
몬 기념 거리에 세든 사람 집에 다시 방 한 칸을 세들었다가 11월에 그 집
에서 나왔다. 처음으로  중요한 히틀러 전기를 쓴 콘라트 하이덴은  히틀러
가 그 당시  '극단적인 비참' 상태에 빠져들었으며, 며칠 밤은  지붕도 없이 
공원 벤치와 커피숍에서 잠을 잤지만  겨울이 닥쳐오자 그럴 수도 없게 되
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1909년 11월은 특별히 추웠다. 비가 많이 내리고 드물지  않게 비에 섞여 
눈까지도 내렸다. 같은 달에 벌써 히틀러는 집 없는  사람을 위한 마이틀링 
수용소 앞에 저녁마다  늘어선 사람들 대열에 끼여들었다. 여기서 그는  라
인홀트 하니쉬라는 이름의 떠돌이를 알게 되었다. 하니쉬는  나중에 손으로 
쓴 보고서에서  이렇게 묘사하였다.  "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이곳저곳 
떠돌아다닌 끝에 마이틀링의  집 없는 사람을 위한 수용소를 찾아냈다.  왼
쪽 간이침대에는  완전히 상처투성이의 발을  가진 야윈 젊은이가  있었다. 
그 당시 나는 강한 베를린 사투리를 쓰고 있었는데 그는 독일을 꿈꾸고 있
었다. 나는 그의  고향인 인 강변의 브라우나우를 지나왔기에 그의  이야기
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떠돌이 하니쉬와 함께한 생활
  1910년 여름까지 대략 일곱 달 동안 히틀러와 하니쉬는 가까운 친구이자 
사업상의 동지로 지냈다. 물론 하니쉬 역시 당시의 다른  증인들보다 더 믿
을 만하지는 못하다.  그렇지만 하니쉬가 히틀러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지
내고 싶어하는 성향을 가졌다고 강조하고, 그에게 함께  일자리를 찾아보자
고 설득했으나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적어도  심리적으로 상당히 그럴싸한 
부분이다. 사실상  히틀러의 시민계급에 대한  동경과 현실 사이의  모순이 
라인홀트 하니쉬 같은 문제투성이 실패자들과 함께 보낸 이 수용소 시절보
다 더 분명하게 드러난 적이 없었다. 
  1938년에 하니쉬를 잡게 되자 히틀러는 그를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인생
의 절정에서 그는 뒤를 돌아보면서  독특한 독선의 태도로 이 시절의 억누
르는 현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환상 속의  궁전에 살았
다."
  살아가는 수완이 있고 자기 계층의  온갖 곤궁, 술책, 기회 등을 잘 알고 
있던 하니쉬는 어느 날 히틀러에게 어떤 직업을 가졌었냐고 물어서 화가라
는 대답을 들었다.  페인트공인 모양이라고 생각한 그는 이 직업으로  돈을 
벌 수 있다고 대꾸했다. 하니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심들이 있지만 그
래도 다음의 보고에서  히틀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모욕감을 느끼
고 자신은  그런 종류의  화가가 아니라 공부한 사람이고 예술가라고 대답
했다."
  하니쉬의 제안에 따라서 그들은 함께 사업을 벌였다.  크리스마스 직전에 
그들은 20구연 멜데만 거리에  있는 싸구려 대중숙박시설인 남자 하숙집으
로 거처를 옮겼다.  침실 정리가 이루어지는 낮 동안에 히틀러는  독서실에 
신문을 펼쳐놓고 앉아  있곤 했다. 그는 대중적인 과학잡지를 읽거나  아니
면 빈 풍경을 담은 우편엽서들을 그렸다. 정밀한 수채화들이었다. 하니쉬는 
그것을 그림 판매상들, 목수들, 때로는 양탄자 짜는  사람들에게 팔았다. 그
들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서 "안락의자나 소파의 높다란 등받이 속에 그 그
림을 넣었다." 수익금은 나누어 가졌다. 히틀러는 이런 초라한 옷차림을 하
고 다른 사람 앞에 나설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을 판매할 처지에 있
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서 하니쉬는 자신이 '때로는 아주 좋은 주
문을 따낼' 수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럭저럭 살아갈 수가 
있었다... 그렇게 여러 주가 지나갔다."
  남자 하숙집의 거주자들은 온갖 계층 출신이었다. 주변의  공장과 기업체
에서 일하는 젊은  노동자와 사무직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와 함께  부
지런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니쉬는 악보 베끼는 사람,  가격표 그리는 사람, 
이름 머리글자 파는  사람 등이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사회적인  실
패자들이 그 구역의  상태를 더 잘 보여준다.  여러 가지 모험가들, 파산한 
상인들, 악사, 거지,  채무자, 혹은 쫓겨난 관리 등이  주요 거주자들이었다. 
다민족 국가의 모든 지방에서 모여든 떠돌이들이었다. 그리고  행상이나 가
두 판매를 해서 사회적 상승을 시도하려는, 제국동부에서  온 유대인들이었
다. 그들 모두를 결합시키는 것은 그런 가난에서 벗어나서  위를 향한 도약
을 엿보고 있는 의지였다. "연대감의 결핍이라는  것이 사회적인 추락자 계
급이 중요한 특징이다."
  히틀러는 하니쉬를  빼면 남자 하숙집에서  친구가 없었다. 그를  알았던 
사람들은 그의 참을성 없은 성질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영혼
에 거슬리는' 빈 사람 타입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
니쉬의 도움으로 수용소를  빠져나온 이후로 그가 더  이상 우정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친밀한 관계를  그를 화나고 지치게만 
했다. 그 대신에 그가 배운 것은 천박한 사람들 사이의 동료관계였다. 그것
은 접촉과 익명성을 보장하고, 아무 때라도 철회할 수  있는 충성을 제공하
였다. 그것은 사회의 여러 차원에서 거의 언제나 동일한  개성을 가지고 겪
는 늘 새로운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전쟁의 참호에서  자신의 당번병과 운전수들  한가운데서-그런 사람들이 
옆에 있는 것을 그는 당수  시절이나 나중에 제국수상 시절에도 언제나 좋
아했다. -그리고 총통 사령부의 방공호 속에서 언제나 히틀러는 남자  하숙
집의 생활방식을 되풀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생활방식은  황홀한 
공동생활 방식이었고, 일반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과  상당히 일치
하는 것이었다. 집의 관리자  입장에서 보면 그는 다루기 힘든 사람이었다. 
툭하면 정치 이야기를 해서 자극하는 사람이었고, 하니쉬의  보고에 따르면 
"주변이 뜨겁게 달구어지는  수도 많았고, 서로간에 불쾌하게  사나운 눈길
을 주고받았다."
  히틀러는 자신의 생각을 상당히 날카롭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과격한 대
안들, 모든 사건에  대한 지나친 관심 등은  그의 사색의 기본이었다. 그이 
기피적인 의식은 모든 것을 지나치게 몰고가고, 별 것  아닌 사건을 형이상
학적인 파국으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일찍부터 그는 위대한  모티프들의 유
혹을 받았다. 영웅적인  것, 숭고하게 장식적인 것, 이상적인 것을  향한 그
의 단순하고도 예술가 같은 회고적인 경향은 여기에 그 원인이 있다. 신들, 
영웅들, 거대한 것으로 확장된 의도, 혹은 무시무시한 최상급 등이 그를 자
극하고, 현재의 지겨운 생활상태를 덮어주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은 
그를 밝은  불꽃으로 데려갔다."고 하니쉬는  서투르지만 분명하게 적었다. 
히틀러는 나중에 자신이 이미 당시에 베를린 개축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상  끊임없는 계획입안의 충동도 이런  맥락에 들어 있다. 
건축청부업자에게 고용된 일도 옛날이  건축가의 꿈을 도로 일깨웠다고 한
다. 몇 가지의 모델  팸플릿을 보면서 그는 자신이 거대한 비행기  제조 회
사의 소유자가 되어서 '매우 부자'가 되어 있는 모습을 꿈꾸었다.
  그 사이에 그라이너의 소개로  머릿기름 광고판과 이불깃털 사업을 위한 
광고판, 그리고  '테디'라는 이름의 땀날  때 쓰는 파우더를 위한  광고판을 
그렸다. 분명하게 히틀러의 서명이 들어있는 작품이 발견되었다. 그 작품은 
경직된 학생  같은 서투른 솜씨로 두  명의 우편배달부를 그린 것이다.  한 
명은 지쳐 주저앉아서 굵고 푸른  색 땀방울이 양말에서 배어 나오고 있는
데 다른 사람은 자신의 '친애하는  형제'에게 매일 1천 개의 계단을 오르내
려도 '테디 파우더만 있으면 즐거움'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또 다른 광고판
에는 성  슈테판 교회의 탑이 비누더미  위로 장엄하게 솟아 있다.  히틀러 
자신은 이 시기의  생활상태에 대해서 자신이 마침내  자기 시간의 주인이 
되었다는 점이 기억할  만하다고 말했다. 그는 교외의 자그마한 싸구려  찻
집에 신문을 펼쳐들고 몇 시간  동안이나 앉아 있곤 했으며 반유대주의 신
문인 (도이치 민족지)를 즐겨 읽었다.

    위대한 바그너와의 내적인 동류의식
  그 모든 것을 합쳐보면 이 스무  살 청년이 삶과 담을 쌓고 엄격한 의미
에서 비정치적인 괴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는 
이 시기에도 자신이  별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이  시
기에 '음악'에서만 우상이었던  것이 아니다. 초기엔 삶에  실망하고 좌절도 
겪었지만 완강한  소명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가 마지막엔 '세계적  명성을 
얻어낸 그의 삶'을 히틀러는  자신의 삶이 모범으로 여겼다. 바이로이트 대
가의 모습에서 자신의 성취와 실책을 찾아내려는, 낭만적인  천재개념의 유
혹이 분명하게 보인다.  한 세대가 바그너는 통해서 혼란을 겪고  제압당하
고 시민세계에서 멀어졌다.
  젊은 히틀러가 학업을 포기하고, 약속들로 채워진 유혹적인  대도시로 탈
출해서 최초이 이미지를 완성하는  것도 리하르트 바그너에 대한 경탄에서 
연유한다. 수많은 동시대 사람들이 비슷한 기대를 가지고  밟았던 길이기도 
했다. 재주 잇고 위태로운 아웃사이더들의 왕도였던 것이다. 린츠의 세관원 
아들의 억눌린 잿빛  모습은 낭만에 젖은 도망친  학생들이 무리에 끼여든
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는 토마스 만, 하인리히 만,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헤르만 헤세 등이 있고, 학교에서 도망친 청소년 유형은  세기가 바뀔 무렵 
수많은 작품들에 등장한다.
  에밀  슈트라우스의  1901년이 단편소설  (친구  하인),  릴케의 (체육시
간)(1902년), 로버트 무질의 (젊은  퇴를레스)(1906년), 헤르만 헤세의 (바퀴 
아래서)(1906년), 프랑크  베데킨트의 (봄의  깨어남)(1906년), 그리고  일년 
뒤에 나온 프리드리히 후흐의 (마오) 등에 이런 유형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도망치거나 혹은 몰락한다는 점에서 그들 모두는 서로 연관성이 있다. 
  그들은 시민사회에서 겪는  고통을 미화하고, 일상의 의무목록에  짓눌려 
있는 아버지들의  평범한 세계에 맞서 사회적  생산성이 없는 '예술가'라는 
이상형을 내세웠다. 그 뒤에서 끊임없이 예술가와 시민성, 천재와 시민성이
라는 낭만적인 대립이 전개되었다.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시민의식을 칼모
어(프리드리히 쉴러의 희곡 (도둑떼)에 나오는  주인공 중 한 명)와 수많은 
다른 도둑 두목들, 그리고 우수에 젖은 반항자들 이후로  바로 이런 낭만적
인 대립에서  경탄할 만한 반주인공들을 얻었던  것이다. 시민성이란 질서, 
헌신, 지속성 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언제나 쓸모있는 것을  만들어
냈다. 그에 반해서  정신이 유례 없는 자기상승,  그 명성의 행위는 인간과 
사회에 대해 극단적인 거리를 두고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예술가나 천재 등  복잡한 인간은 내면 깊숙이  시민세계에 속하지 않으
며, 그들의 사회적인 위치는 저 멀리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 이런 
유형을 처음으로  분석한 사람이 고통스럽게  언급하고 있듯이 거기서부터 
자살자들의 관을 두는 곳, 불멸의 전당 등은 사회와  비슷한 거리만큼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고 보면 젊은 히틀러가 고차원적인 예술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했던 준비라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엉성한 것이었
던가. 그의 재능이란 얼마나 의문 투성이었던가, 남자 하숙집에서의 생활은 
그 비천한 고등사기술, 기생습관,  반사회성 등을 얼마나 잘 보여주는 것인
가. 그는 후기 시민사회적인 천재관념에서 이 모든  자기변명을 찾아냈으며 
리하르트 바그너에서 부정할 수 없는 모범을 찾아내고 있다.
  히틀러는 뒷날 스스로 밝히기를  리하르트 바그너를 빼면 "모범의 될 만
한 것은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분명한 어조로 음악가와 드라마 작가로서
의 바그너뿐 아니라 '도이치  민족을 사로잡은 가장 위대한 예언자 모습'을 
가졌던 그의 강력한 개성 전체를 들고 있다. 그는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서 
'도이치 사람의  발전을 위해서' 바그너가 얼마나  중대한 의미를 지녔는지 
지적하곤 하였다. 그는, '스스로 정치적이고 하는 의지 없이' 정치적으로 작
용한 바그너의 용기와  에너지를 경타하고 있으며, 이 위대한 남자와의  내
적인 동류의식이 자신에게는 '히스테리적인 흥분'을 일으켰다고 했다.

    히틀러와 바그너의 유사성
  실제로 두 사람 사이의  일치는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젊은 히틀
러의 모방으로 인해 더욱 비슷해진 기질상의 접근은 이상하게도 가족 같은 
유사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토마스 만이 처음으로  '히틀러 형제'의 초상화
를 그렸는데, 그는 1938년에 히틀러가 승리의 절정에 있을 때 이렇게 썼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이 현상에서 예술가의 한 출현양식을 보아야 하지 않
겠는가? 특별히 부끄러운 방법이지만 모든 것이 여기에도 나타나 있다. '힘
든 특성', 게으름, 어린시절을 정의하기 어려움, 어느 한 곳에 밀어 넣기 어
려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거냐고 묻고 싶은 성격,  가장 깊은 사회적, 영
적 보헤미안 상태 안에 반쯤 멍청하게 식물처럼 들어  있기, 근본적으로 오
만한 거부, 자신은 너무 훌륭해서 이성적이고 명예로운 활동을  할 수 없다
고 거부하는 것 등의 요소들이다. 그러나 어떤  근거에서인가? 무엇인가 규
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위해  자신을 아껴두려는 어두운 예감에서다.  그 
규정할 수 없는 것을 이름  붙여 말한다면 사람들은 분명히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게다가 양심의 가책, 죄의식, 세상을 향한  분노, 혁명 본능, 폭발적
인 보상욕구의 무의식적인 퇴적,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입증해야  한다는 끈
질긴 의식... 이 모든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유사성이다. 나는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 앞에서 눈을 감지는 않겠다."
  그밖에도 둘은 아주  특이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 조상의 신원을  확인하
기 어렵다는 점, 학교에서의  실패, 군대 도피, 병적인 유대인 증오, 채식주
의 등이다. 바그너의  경우 채식주의는 거의 광적인 상태여서 인간은  채식
을 통해서 구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감정상태가 좌절과 열광, 승
리와 파국이라는  양극단까지 직접 교차한다는  점도 두 사람이  비슷하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수많은 오페라에서는 자신의 법칙만 따르는 아웃사이더
와 전통에  결부된 완강한 질서와의  고전적 갈등이 나타나곤  한다. (리엔
치), (로엔그림), (슈톨칭),  (탄호이저) 등을 보면서 미술아카데미에서 거절
당한 히틀러는,  남자 하숙집의 독서실에  그림물감을 펼쳐놓고 앉아  있을 
때의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의 대립을 본다고 느꼈다. 
  때로 그는 그토록 추종하는 사람의 모범인 바그너를 따라서 살거나 바로 
그 모습을 따라 스스로를 양식화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양쪽 다 지나치게 
흥분된 권력의지와 폭군적인 성향을 가진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예술은 억
제할 수 없는 광범위한 정복의지의  도구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을 수 없게 
만든다. 대규모이면서 위엄 있는  것에 대해서 항거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예술적으로 이중적인 취향,  마취시키는 위대한 인물에 대한 애착 등은  바
로 이러한 성향에 근거한다.
  (리엔치) 이후 바그너의  최초의 대규모 작품은 2백 명의 남성  코러스와 
1백 명의 관현악단을 위한 것이었다. 날카로운 콜로포늄의 섬광 아래서, 전
사한 혼령들의 저당인 발할라, 열병식, 예배의식이 뒤섞이면서 펼쳐지면 바
그너 음악의  특징인 거리낌없고 노골적인  효과, 공허하게 위대한  잠파노 
효과를 통한 자기유혹  등이 나타난다. 제3제국의 행사양식은 바그너  오페
라의 전통, 이 선동적인 예술형식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두 사람 다 고도의 섬세한 심리적 감각을 보인다.  이것은 놀랍게도 진부
함에 대한  불감증과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천민적인  참칭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것은 수십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이야기되는  평가에 
나타나 있다.  고트프리티 켈러는 이  시인 작곡가를 '미용사 악당'  이라고 
불렀다. 날카로운 감각을 가진  동시대 사람 하나는 히틀러를 가리켜 '낙인
찍힌 급사장'이라고 말했고, 또  다른 사람은 '수사적인 강간살인자'라고 불
렀다. 그러한 표현들이  보여주는 통속적이고 저급한 평판의 특성은 두  사
람에게 공통적이다. 그것은  천재적인 사기술과 고취된 사기도바꾼의  모습
인 것이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혁명가  역할을 하면서 왕의 친구  노릇도 했듯이-칼 
마르크스는 '국가 음악가' 라고  빈정거렸다-젊은 아돌프 히틀러 또한 정확
하지 않은 방법으로,  사회에 대한 자신의 미움을 기회주의적인 본능과  화
해시킬 어떤 상승을 꿈꾸었다. 바그너는 예술을 존재의  목적이며 규정으로 
삼고 예술가를 존재의 최고  심판자라고 칭함으로써 명백하게 드러난 삶의 
모순들을 없앴다.
  "정치가가 절망하고 손을 내려놓을 때,  사회주의자가 쓸모없는 체계들로 
자신을 괴롭힐  때, 철학자도 겨우 해석만  할 뿐 미리 예고할  수는 없는" 
시간에 언제나 예술이  구원하며 개입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표현한  예
술의 이끌림에  따라 삶을 전체적으로 미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는 예술작품의 수준으로 올라가고, 정치는 예술의 정신에서  새롭게 완
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3제국에서 공식적인  생활이 연극화되고, 정부는 
연출의 정열을 보이고, 연극학은  정치적인 실제가 되고, 드물지 않게 정치
의 목적이 된 듯이 보이는데  이러한 바그너 강령의 요소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진다.
  그러나 그  이상의 공통점들이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당시  경탄하던 
친구(바그너)에 대해서  그 유명한 '시대에 안  맞는 관찰 4번'에서  말했던 
'딜레탕트가 되려는' 타고난  성향은 젊은 히틀러에게서도 나타난다.  두 사
람은 모든 영역에 독단적으로 간섭하려는 두드러진 욕구를  보였다. 사람들
에게 자신의 위대함을 입증하여 칭송받으려고 하는 고통스러운  명예욕, 금
세 활기를 잃어 버리는 어제의  명성을 오늘 더욱 화려한 모습으로 보이려
는 욕구를 가졌다. 두 사람  다 소시민들과 가까웠다. 그것은 더 높은 곳에 
오르려는 생각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이러한 성향은 타고난 
성품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다.
  바그너와 히틀러의 차이점은,  히틀러에겐 자제력과 노력이 완전히  결핍
되어 있다는 것, 거의  최면적인 게으름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프롤레타리아가 되지 않으려는  자기방어 태도임
을 알 수 있다. 어느  날인가는 들어보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절의 이 모든 고통스런  굴욕과 고통에 대해서 무시무시한 복수를 할 
것이라는 번쩍이는 예감으로 강화된 존경스러운 의지력의 작업이었다.

    비정치적인고 연극적인 세계관
  리하르트 바그너의  표지를 지닌 히틀러가  세계에 대해서 비정치적이고 
연극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징후들에 나타난다. 그  자신
이 표현한 대로 그는 '곰곰이  생각하고 파고드는' 여러 날을 보내고 난 다
음 어느 날 아무런 계획도  없이 어슬렁거리다가 빈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
위를 구경하게 되었다.  약15년이 지난 다음에 이 체험을 기억해서  서술한 
내용 속에 이 '끝없는 4열 행렬'이 그에게 얼마나 엄청난 인상을 불러 일으
켰는지 담겨 있다.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그는 링 거리의  가장자리에 서
서 '숨을 죽이고 천천히  지나쳐가는, 인간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용의 움직
임'을 구경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두려운 압박감을 느끼면서' 돌아서서 
집으로 달려왔다. 그 행렬이 남긴 장엄한 효과에 압도된 상태였다.
  어쨌든 그는 이 사건의 정치적인 동기나 배경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으며 이 대규모 인간집회가 어떤 효과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문
제에만 몰두하였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연극의 문제였으며 그가 본  것은 
정치가에게 무대연출의 의무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히틀러가  간혹 
연극작품을 시도하면서 '가능한 한 장엄한 연출'에 얼마만한 의미를 부여하
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미 친구인  쿠비체크의 눈에도 띄었던 일이다.  이 
최초의 히틀러 숭배자는 뒷날 연극의 내용은 거의 기억하지 못했지만 친구
가 '엄청난 경비'를 생각했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다.  그것은 바그너가 무대
에 요구했던 규모도 '완전히 뒤로 물러서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  5년 간의 빈 시절에 지적인 교양체험을 
했다고 선전하고 '무한히  많이, 그리고 철저한' 독서를  하였다고 지적하였
다. 건축물과 오페라  극장을 방문한 것을 빼면  그는 '책들을 유일한 벗으
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절의 중요한 인상들은 지적인 것이기보다
는 오히려 선동가적이고 정치책략적인 차원에서 구했다고 표현해야 적절할 
것이다. 다른  건축 노동자들이, 자만심 때문에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서서 
접촉을 기피하는 시민계급의 인물을 '현장'에서 쫓아버리려 한 사건을 통해
서 그는 이런 논쟁들을 간단히 끝내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은근
히 경탄하는  말투로 말한 바로는 '감히  반항하려 드는 자의 골통을  부숴 
놓는' 것이다. 그의 책 (나의 투쟁)에서 정치적 각성을  다루고 있는 부분은 
이론적 배경이 약하기 때문에 그가 인정한 당시의 이념들을 비판적으로 다
룬 흔적이  없다. 그는 여기서 분명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도이치  시민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좇고 있을 뿐이다. 그 대신 이념들의 조직화 문제, 대
중동원에 적합한 특성 등이 그에게 탐욕적인 관심을 일깨우고 최초의 번쩍
이는 깨우침들을 보이고 있다.
  그의 뒷날의 연설들과 공고문에  나타나는 수많은 특징적인 어법들은 빈 
시절에 이미 만들어졌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를 대중에게 강요하는 '배후의 
인물들' '어두운 조종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하니쉬의 보고에 따르면 어느  날 히틀러는 베른하르트 켈러만의 소설 (터
널)을 대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 '완전히 도취된 상태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 영화에서는 민중연설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이제 남자 하숙
집에서 열렬한 연설들이 이루어졌다."고 하니쉬는 확인해주고 있다. 요제프 
그라이너는 거짓 감사편지와 위조 증명서를 가지고 다니면서 비밀제조법에 
따라 만든 머리털 나는 약을 선전하는 안나 칠락이라는 여자를 히틀러에게 
소개시켜주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히틀러는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그 여자의 기술을 보며 감탄하고 나서 심리적인 영향력의 무서운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선전이야,  선전, 아주 오랫동안 선전
해서 마침내 믿음이 생겨나고 어떤 게 상상이고 어떤 게 현실인지 모를 정
도가 되기까지  선전하는 거지." 선전이란  "모든 종교의  본질적인 정수거
든... 하늘나라가 됐든, 머릿기름이 됐든 말이야."
  물론 히틀러가 사회민주당의 선전을 보고-사회민주당의 신문, 데모, 연설 
등-이끌어낸 결론을 읽어보면 더욱 확실한 근거를 보게 된다. 이  결론들은 
독특한 실천법을 규정하고 있다.

  광범위한 대중심리는 어중간하거나 약하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한다. 여
자의 영적인  감수성은 추상적인 이성의  근거를 통해서 규정되기  보다는, 
보충적인 힘을  향한 정의 내리기  어렵고 감정적인 그리움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여자는 약자를  지배하기보다는 강자에게 굽히기를 좋아한다.  마찬
가지로 대중은 간청하는  사람보다는 지배자를 사랑하고, 자유주의적인  태
도로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독불장군처럼 자기주장만 펴는 이론에 
대해 내심 더욱 만족한다.  대중은 자유를 가지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잘 
모르며 심지어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갖기도 한다. 뻔뻔스러운  정신적 테러
나, 인간적인 자유를 함부로 없애버리는 일 따위는 그들의  의식 속으로 들
어오지 않으며 그들은 그런 이론이  숨기고 있는 내적인 망상을 전혀 짐작
도 못한다. 대중은 오직 목적 의식이 확고한 표현들의  가차없는 힘과 잔인
성만을 보며, 그러한 잔인성 앞에  마침내 스스로 몸을 굽힌다... 개인을 향
한 육체적인 테러가 대중에게 미치는 의미도 역시 이해가  되는 일이다. 여
기서도 심리작용의 정확한  계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일터,  공장, 집회장의 
테러, 그리고  이따금 열리는 대규모 시위  등은 같은 정도의 테러가  그에 
맞서지 않는 한 언제나 효과가 있는 법이다.

  1910년 8월 초에 히틀러와 하니쉬 사이에 결별이  찾아왔다. 히틀러는 여
러 날 걸려서 빈 의회의 풍경을 그렸다. 그는  고전적인 사원양식에 매혹되
어서 그것을 '도이치 땅에 세워진 헬레니즘의 경이로운 걸작'이가고 불렀고 
극히 양심적으로 열성을  다해서 그렸다. 어쨌든 그는 이 그림이  50크로네
의 가치가 있다고  여겼으나 하니쉬가 그것을 10크로네를 받고 팔았다.  둘 
사이에 다툼이 있은 후 하니쉬가  나간 사이 히틀러는 하숙집 동료의 도움
을 받아서 그를  체포해서 고소했다. 하니쉬는 8월 11일 심문에서  7일간의 
구류를 받았다. 그는  남자 하숙집에서 프리츠 발터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
기 때문에, 양보를 해서라도 소송을 유리하게 만들어보려고 애썼다. 그림을 
산 사람의 아내는 나중에 자기 남편이 정말로 그림값으로 10크로네를 지불
했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하니쉬는 그 사람을  증인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어서 한동안은 역시 남자 하숙집에 사는 노이만이라는 유대인이 그림 판
매를 맡았다. 그리고  때로는 히틀러 자신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손수  고
객을 찾아나서기도 했다.
  3년 반  동안 히틀러의 이러한 교양  체험은 계속되었다. 거기서  인간에 
대한 그의 견해들과  사회에 대한 관점이 확고하게 형성되었다. 그가  드높
은 야망을 가진 채 이러한 환경에서 증오와 반역의 콤플렉스를 발전시켰다
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에도 그는 특히 자신이 살던 구역을 통과하는 길에  들어서면 나타나는 '쓰
레기, 역겨운 더러움과 어두운  가난의 모습들'을 기억만 해도 소스라쳐 놀
라곤 했다. 공감이라는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 시기의 체험들과 생활환경들은 히틀러에게 무엇보다도 전쟁철학의 토
대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그의 세계관에서 중심적인 생각, 
즉 '단단한 토대'가 되었다.  그가 뒷날 수많은 연설들과 발언문, 책의 페이
지들 혹은 총통 사령부의  원탁 대화에서 '가장 잔인한 싸움'의 이념, '가차
없는 자기주장'의 이념, 근절,  냉혹함, 잔인성 혹은 강자의 권리 등에 대한 
이념을 고백할 때마다, 그 속에는 언제나 이 남자  하숙집 시절의 세계관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것은 비속한 학교에서 얻은 잊을 수 없는 숙제였다.
  
    사회적 다윈주의
  히틀러의 생각에 들어 있는 사회적 다윈주의는 흔히 말해지듯 남자 하숙
집의 개인적인 체험에서만 생겨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과학에서 권위
를 얻은 한 시대의 성향이 그런 생각 속에 들어  있다. 스펜서와 다윈이 전
개한 생명체의 발전과 도태의 법칙들은 수많은 사이비 과학 출판물의 상위 
심급기준처럼 되었다. 그것은 '생존을  둔 싸움'을 기본법칙으로 삼고, 인간
과 민족들이 함께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강자의 권리"를 기본권으로 받아 
들이는 것을 널리  유행시켰다. 이른바 사회적 다윈주의 이론은 19세기  후
반에 어쨌든 잠시  동안은 모든 진영과 노선들, 정당들에 의해서  받아들여
졌다. 그것은 초창기에 통속적인 좌익 계몽주의의 요소를 지녔다. 그러다가 
점차 우익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해서 민주적 혹은 인간적 이념의 반자연성
을 입증하는 역할을 떠맡기에 이르렀다.
  자유 사냥터처럼 민족들의 운명과 사회적인 대립들도 생물학적인 전제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  출발점이었다. 도태와 육종양성을 포함하는  엄격
한 선별과정을 통해서 결함이 발전되는 것을 막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들
보다 우위를 차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당시 일상의 잡문들을 써서  널리 
인기를 얻고 있던 조르주 바셰 드 라푸지, 메디슨 그랜트, 루트비히 굼플로
비츠, 오토  아몬 등의 수많은 글에서  이러한 사상을 위한 풍부한  어휘와 
상상력이 제공되었다.
  무가치한 생명 없애기, 민족정책의 목표 만들기, 쓸모없는 인간들을 강제 
수용해서 불임으로 만들기,  머리 크기, 귀의 모양  또는 코의 길이 따위로 
생존경쟁을 위한 유전적 특성을 가려내기 등이 거론되었다.  약자를 두둔하
고 선별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들은 드물지 않게 기독교 도덕, 관용, 문명 
진보 등을 단호하게 거부하기도 하였다. 사회적 다윈주의는  포괄적인 체계
로 만들어지지 못했고 그 대표자들에 의해서 주장이 철회되기도 했기 때문
에 광범위하게 파괴적인  효과를 내지는 못 했다. 전체적으로 그것은  시민 
시대 고전적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였고, 제국주의적인 책략과  억센 자본주
의적 관철의지를, 피할 길 없는 자연법칙의 형식 아래 두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그 시대의 반민주적 경향들과 결합했다는 사실이 더
욱 중요하다. 자유주의, 의회주의,  평등이념, 국제주의 등은 자연법칙에 반
하는 것이고  종족혼합을 야기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최초의 중요한  종족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킨 고비노 백작은  (인간종족의 불평등에 대하여, 1853
년) 냉혹하고  귀족주의적인 보수주의로 민주주의,  민중혁명, 그리고 그가 
경멸적으로 '시골감각'이라고 불렀던 그 모든 것의 반대자로 나섰다.
  그러나 광범위한 도치이 시민계급에 더  큰 작용을 한 것은 원래 영국인
이었다가 나중에  도이치로 귀화한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작품이었
다. 이름있는 장교집안 출신이고 교육을 받은데다 신경질적이고  허약한 성
격의 그는 대학공부,  문필업,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히틀
러가 태어나던 해에 몇 주간 예정으로 빈으로 들어왔다가 20년 간 이 도시
에 머물렀다. 그는 합스부르크 다민족국가와 만난 결과로  종족적 역사이론
을 발전시켜서 경탄도 받고 배척도 받았다.
  특히 그의 잘 알려진 작품 (19세기의 기반)(1899년)은 개별적으로 파고든 
해석을 통해서 고비노의 광범위한  생각들을 뒷받침하고 대담한 사색을 펴
서 유럽 역사를  종족싸움의 역사로 해석하였다. 로마 제국의 붕괴를  보면
서 그는  이 몰락과정의 고전적인  모델을 혈통 혼합과정으로  파악하였다. 
종족의 우세가 혼란스럽게  진행되는 과정에 있었다. 그 옛날의 로마  제국
이나 현재의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어떤 특정한 국민, 어떤 민족,  어떤 종
족이' 파괴과정을 수행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집중'이 혼합현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가벼운 재능, 때로는 독특한 아름다움,  프랑스 사
람들이 '육감적인 매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 혼혈아들의  특색이다. 이러
한 것을 오늘날  빈처럼 다양한 민족들이 모이는  도시에서는 매일같이 볼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독특한 불안정, 약한  저항력, 
성격의 결함 등 도덕적인 퇴화를 볼 수 있다."
  체임벌린은 로마의 성문 앞으로  몰려드는 게르만족 고귀한 종족 프로이
센과 비교하였다. 프로이센은,  종족이 뒤죽박죽인 다민족국가와 비교해 볼 
때 당연히 우세하다고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  엘리트 개인주의자에겐 
두려움과 방어의 느낌이 압도적이다. 계속 되풀이되는 염세적인  비전을 가
지고서 그는 게르만 사람들이 '생사를 건 말없는 싸움에서  종족의 심연 가
장자리에' 몰려 있다고 보았으며 혼혈아가 되는 망상에 시달렸다.
  "아직 아침이지만 어둠의  세력은 그 촉수를 뻗쳐  우리 몸 수백 군대에 
달라붙어서 우리를 어둠으로...  끌어당기려고 한다." 그러므로 히틀러의 사
회적 다윈주의 사상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단순히 '집없는 자들의 철학' 만
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 접에서 히틀러와 시민 시대의 깊은  결속이 뚜
렷해지는 것이며, 그는  다만 시대의 불법적인 아들이고 그 파괴자였을  뿐
이다. 근본적으로 그는 교외의 카페에서 제공되는 신문이나 그 밖의 책, 저
질 잡지, 오페라, 그리고  정치가들의 연설에서 얻은 것을 받아들였을 뿐이
다. 그외  세계관에서 특별히 망가진 부분만이  하숙집의 경험을 반영한다. 
다름 아닌 저  저급한 표현방식이다. 그는 정치가로서 대륙의 지배자가  된 
뒤에도 여전히  '동쪽에서 온 더러운 것들'  '신부 새끼들' '병신  같은 예술 
쓰레기', 처칠을 가리키는  '네모 주둥이' 따위의 표현들을 썼다.  그리고 유
대인을 '한꺼번에 때려죽여야 할 돼지새끼들'이라고 불렀다.
  히틀러는 이 시절의 분위기와 색채를 결정하고 있는 복잡한 생각들을 예
술에서 배운 감수성을  가지고 받아들였다. 어떤 개인이 아니라 시대가  그
에게 이념들을 주었다. 반유대주의와 사회적  다윈주의말고도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가진 사명의식 역시 그렇다. 그것은 염세적인 두려운  꿈의 다른 측
면이었다. 처음에는 극히  혼란스럽다가 우연히 정리된 세계관에는, 세기가 
바뀔 무렵의 훨씬 더 일반적이고  지적인 유행의 영향을 받은 이념 조각들
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생의 철학, 이성과 휴매니티에 대한  회의, 그리
고 본능, 피,  충동에 대한 낭만적 찬양이었다. 초인의 힘과  빛나는 반도덕
성에 대한 니체의 주장은 저속화된 현실 감각, 명랑성과  이성을 향한 의지 
등은 받아들이지 않고 '야만적으로 열광하고 유혹되려고만' 한다고 말한 적
이 있다. 증명할 길 없는  의지 이론, 개인의 부정, 천재의 대한 몽상, 동정
론, 유대인에 대한 증오, 학문에 대한 증오 등만을 받아들이려 한다는 것이
다.

    현실에 맞선 꿈들
  한 번  더 리하르트 바그너가 등장한다.  그의 예를 들면서 니체는  위의 
오해를 언급했다. 바그너는  젊은 히틀러의 위대한 생의 모범일 뿐  아니라 
스승이기도 했다 .히틀러는  그의 이데올로기적인 영향을 광범위하게  받아 
들였다. 그를  통해서 시대의 부패한 정신이  중개되었다. 히틀러는 세기가 
바뀔 무렵 널리  읽히던 바그너의 정치적 글들을 좋아했다. 바그너  문체의 
과장된 광대함은 히틀러의 문법감각에 영향을 남겼다. 오페라와  함께 바그
너의 이런 글들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요소들에서 히틀러가 얻게 된 세계
관의 종합적인 이데올로기 배경을 이루게 된다.
  즉 다위주의, 반유대주의("나는  유대종족을 순수한 인류와, 인류가  지닌 
그 모든 고귀함의  천적으로 여긴다.") 게름나적인 힘의 표상, 해방의  야만
성, (파르시팔)의 혈통정화에  대한 신비주의, 작곡하는 연극인의  연극예술 
세계 전부  등이었다. 그의 연극예술에서는  선과 악, 순수한  것과 타락한 
것, 지배자와 지배받는 자들이 날카롭게 이중적인 위치에서  적대적으로 대
립하고 있다. 황금의  저주, 지하에서 우글대는 열등종족,  지크프리트와 하
겐의 갈등,  보탄의 비극적 정신 등이었다.  피의 증기, 용 죽이기,  지배욕, 
배신, 성욕, 이교도,  그리고 마침내 구원과 연극 수난의 종소리  등으로 이
루어진 비상하게  해석능력이 있는 세계,  바로 이것이 히틀러의  두려움과 
승리의 욕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데올로기적 환경이었다.  보편적으로 타
당한 세계관을 향한 독학자의 열망을  품고서 그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세
계상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이미 확신이었고 '단단한 기분'이었다.
  히틀러는 빈 시절을 자기 생애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긴  하지만 가장 힘
든 학교'라고 불렀으며 거기서  '진지하고 조용해졌다'고 말했다. 일생 동안 
그는 이 거절과  모욕의 도시를 미워하였다. 이 점에서도 모범인  리하르트 
바그너와 비슷하다. 바그너는 젊은 시절에 경험한 파리에서의  실망에 대한 
원한을 극복하지 못 하고 파리가 화염 속에 몰락하는  환상을 사랑했다. 한
츠를 도나우 강변의  문화적 대도시로 만들려는, 이 모든 자연적인  조건들
을 넘어서는 히틀러의 거대한 계획이  빈에 대한 줄지 않는 원한에서 나온 
것이라는 추측은 억지가 아니다. 빈을 잿더미로 만들려는  환상으로 때늦은 
만족을 얻으려 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1944년 12월에 빈에 
대공포를 추가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하면서, 이 도시는  포탄전을 배워
야 한다고 말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도 그를 점점  억압하였다. 모든 증언이  똑같지는 
않았지만 1910년에서 1911년으로 바뀔  무렵에 그는 아주머니인 요한나 ㅍ
츨에게서 상당한 돈을 송금받았다. 그러나 이 돈은 새로운 시작, 어떤 진지
한 출발을 가능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목적 없이 방황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학생, 예술화가 혹
은 작가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여전히 건축가로서의  불
확실한 희망을 품었다.  그러면서 그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오직 그의  꿈들만이 원대하고 위대한  운명을 지향하였다. 그가  현실에 
대항하여 이꿈을 지속적으로 가졌다는 사실은, 그 모든  게으름과 수동적인 
목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전체에 분명한 내적인 일관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는 모든 면에서  확정되지 않고 임시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노동조
합에 가입하기를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시민적인  욕구를 유지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듯이, 남자  하숙집에서도 천재성과 미래의 명성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그의 가장 큰 근심은 시대적  상황이 위대한 운명을 향한 자신의 요구를 
망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건 없는 시대를 두려워했다. 그가 말한 
것에 따르면 소년시절에 그는 이미 자신이 "너무 늦게 지상에 나타난 것에 
대해서 화가 났다."고 하며 자기 "앞에  높은 평화와 질서의 시대가 자신이 
원하지 않은 운명의 비열함이라고  보았다." 혼란스러운 미래, 소란가 무너
지는 질서만이 현실과의  단절을 치료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극단적인 
꿈들에 유혹되어서 실망스런 삶보다는 차라리 파국을 맞는 삶을 바라는 사
람이 되었던 것이다.

    제4장 뮌헨으로의 도주
  1913년 5월  24일에 히틀러는 빈을 떠나서  뭔헨으로 이주하였다. 이  때 
그는 스물네 살이었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동경과 원한이 뒤섞
인 감정으로 바라보는 우울한 젊은이였다. 은둔시설의 실망들이  그의 본질
에 들어 있는 외곬적인 폐쇄적 특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는 빈에 친구도 
없었다. 비현실을  지향하는 그의 성격에  어울리는 일이지만 그는  오히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인물들과 교제하는 것을  좋아했다. 리하르트 바그
너, 리터  폰 쇠너러, 뤼거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가 '운명의  억압' 아래서 
얻은 '개인적 세계관의  줄기' 는 몇 개의  절대적인 원한으로 이루어져 있
다. 그러한 원한들은  어두운 부화기를 지난 뒤 때때로 정열적으로  폭발하
곤 하였다. 그는  나중에 언급한 대로 '절대적  반유대주의자, 마르크스주의 
세계관 전체의 적대자, 도이치 사람이 되어서' 빈을 떠났다.
  이러한 특성은 그의  자기 묘사가 언제나 그렇듯이, 자기가 일찍이  정치
적 판단력을 가졌다는  양식화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양식화  의도
는 (나의 투쟁)을 쓰는 동안 줄곧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도
이치 제국 수도인  베를린이 아니라 뮌헨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은, 그가  아
직도 비정치적인  동기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혹은 예술적, 낭만적 
동기에 더 많이 이끌렸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세계전쟁 이전의 뭔헨은 예술의 도시, 사랑스럽고 감각적, 인간적인 예술
과 학문의 중심지였다. "예술화가의 삶은 여기서 극히 합법적인 것이었다." 
뮌헨은 잊을 수 없는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강조되고 눈에 
띄기도 하는 특성은, 위협적이고 현대적이고 바빌론 같은  베를린에 대립하
는 요소들이었다. 베를린에서는  사회적인 것이 미적인 것을, 이데올로기가 
문화적인 것을, 즉 정치가 예술을 누르고 승리하고 있었다.
  뮌헨은 빈의 영향권 속에 들어 있었으며 그래서 히틀러는 자신이 저항하
는 것을 도로 선택하였다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 그가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베를린이 아닌 뮌헨을 선택한 것은 아주 일상적인 감정에 
따른 것이지 실용적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것은  막연한 문화영역
의 동기를 따른  것이다. 1931년판 (도이치 사회를  위한 안내서)에서 그는 
'자신의 정치활동을  위해 더 큰 영역'을  찾아내려고 뮌헨으로 옮겨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제국 수도 베를린으로 가야  했
을 것이다.
  
    절박한 우월감의 욕구
  이미 빈 시절부터  그러했지만, 내면적인 게으름과 접촉 빈곤은 뮌헨  시
절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래서 때로는 그가 아주 거대하고 공허한  공간
에서 청춘을 보낸 사람처럼 보인다. 분명히 그는 정당이나  어떤 정치 그룹
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데올로기적으로도 고독하였다.  인간들을 연결시켜 
주는 분위기를 가진,  지적으로 아주 불안한 이 도시에서는 고정관념도  독
창성의 증거라고 평가되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았다.
  민족 사상은 가장 극단적인 변이형태까지도 추종자를 가졌다.  특히 경제
적으로 불안한 소시민 계층에 추종자들이 있었다. 반유대주의와  극히 상이
한 좌익 과격파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ㅁ헨의 풍토를 통
해서 온건해지고 즐겁고 수사적이며 친근한 형식을 지니게  된 것들이었다. 
뮌헨 교외 슈바빙에는 무정부주의자. 보헤미안, 세계개혁가, 예술가, 턱없이 
새로운 가치의  전파자들이 모여 들었다.  창백하고 젊은 천재들은  세계가 
엘리트주의로 개편되기를 꿈꾸었고,  타락한 인류의 구원, 피의  등불, 정화
의 파국, 야만적 회춘요법 등을 꿈꾸었다.
  커피집 등에서 인물이나 이념을  중심으로 뭉치던 중요한 모임들 중에서 
중심을 이룬 인물은  시인 슈테판 게오르게였다. 그는 한패의 재능있는  추
종자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들은 앞을 다투면서  시민도덕을 경멸하고, 청
춘, 본능, 초인을 찬양하고, 엄격한 예술적 이상이란  면에서 그를 모방하였
다. 또한 태도와 양식화된 인상에 이르기까지 그를 닮았다. 그의 제자들 중 
하나인 알프레트 슐러는 도이치  영역을 위하여 잃어버린 갈고리 십자가를 
재발견하였고, 루트비히 클라게스는  때때로 그와 가까워져서 '정신이 영혼
의 적'이라는  것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에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비밀스런 몰락의 분위기를 분석하고  카이사르와 같은 인물들을 역사 속으
로 불러냈다. 그들은 피할  길 없는 서구문명의 몰락을 한 번  더 연기시켜 
줄 것이라고 했다. 슈바빙의  지크프리트 거리에는 전에 레닌이 살았다. 지
금은 히틀러가 불과 몇 집  건너 있는 슐라이스하임 거리 34번지에서 재봉
사인 포프 크바르티어가 세든 집에 다시 셋방을 얻었다.
  뮌헨에서도 빈처럼 지적인 불안이  당시 예술적 출발을 부추기고 있었지
만, 그런 것은  히틀러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바실리 칸딘스키,  프란츠 마
르크, 파울 클레 등은  수바빙의 바로 이웃한 곳에 살면서 회와  예술에 새
로운 차원을 열고 있었지만 이  화가 지망생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
했다. 뮌헨에 머무는 몇  달 동안 그는 겸손한 그림엽서 화가로  남아 있었
다. 그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악몽과 두려움을  가지기는 했지만 그
러한 것들을 예술영역으로 옮겨놓을 줄을 몰랐다. 진부하고  충실한 붓으로 
그는 자신의  콤플레스와 공격성으로 이루어진  유령세계를 순수한 목가로 
변화시켰다. 그 목가  세계는 성벽의 모든 돌, 풀포기 하나,  지붕의 기왓장 
하나까지도 정밀하게  잡아냈다. 이런 충실한 붓놀림은  보상받지 않은 것, 
이상화시키는 아름다움을 향한 비밀스런 요구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술적 능력이 불충분하다는 느낌, 자신이 실패하고 있다는  느낌이 내면
에 뚜렷하게 자리잡을수록 그는  더욱더 절박하게 자신의 우월성의 이유들
을 찾아낼 필요를 느꼈다.  냉소주의로써 그는 인간의 '무한히 원시적인 생
각'들을 알아보려고  했다. 어디서나 가장 천박한  충동의 작용을 찾아내는 
성향은 냉소주의와 같은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즉  부패, 배신적인 권력욕, 
가차없음, 질투, 미움 등이 어디서나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 세상
에서 자신이 겪는 고통을 포착하려는 성향이었다. 종족적인  소속감도 개인
적인 우월감의 욕구에 도움을 주었다. 자기 길을 가로막는  다른 모든 프롤
레타리아, 떠돌이, 유대인, 체코인 등과 자신은 다르고  그들보다 더 낫다는 
확신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반사회분자, 가난뱅이, 프롤레타리아 등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까
지 추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여전히 그를 짓눌렀다. 과거 남자  하숙집
에서 거의  곁을 스쳐갔던 수많은 모습들,  그 많은 망가진 희망과  개인적 
몰락을 반영하고 있는, 독서실과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보았던  얼굴들이 그
를 억눌렀다. 세기가 바뀔 무렵 빈은 세기말적 분위기를  가진 도시로서 아
주 지쳐빠진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인생의 학교는  정말로 그에게 무엇보
다도 몰락을 생각하도록 가르쳤다.
  다름아닌 공포가 그의 성장기의 주도적인 체험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보
겠지만 마지막에도 그랬다. 공포는 그의 삶의 숨막히는  역동성의 추진력이
었다. 야무지게 작용하게 될  거의 세계상과 인간상, 냉혹함과 비인간성 등
은 몇  명 안 되는 증인들이  젊은시절 그에게서 관찰하였던 '깜짝  놀라는 
본성'의 방어하는 몸짓이며 합리화 과정이었던 것이다. 어디를 바라보든 그
는 오직 탈진, 해체, 이별의  징후만을 보았다. 그리고 혈통의 오염, 종족적
인 우월감의 표지를  보았다. 또한 폐허와 파국을  보았다. 그는 이런 기본 
분위기를 지나오면서 19세기의 특성에 속하는 염세적 생활감정을 받아들였
다. 이러한 생활감정은  19세기 진보의 신념과 즐거운 학문에 분명히  어두
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두려움을 특별히  과격
하고 무분별한 방식으로 느낌으로써  그것을 자기만의 독특한 것으로 만들
었다.
  이러한 의식의 복합체는 그가 여러  해 동안이나 아무런 활동도 없이 극
단적인 백일몽에 사로잡힌 채  끊임없이 상상세계로 도망치곤 하던 세월을 
보낸 다음 마침내 빈을 떠난 이유의 배경에도 나타난다.  빈에 대한 증오를 
설명하는 그의  말은 에로틱하고 감상적인,  모든 도이치 운동의  이유들을 
혼합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에 나타난  있던 인종 혼합이 역겨웠다. 체코, 폴
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의 온갖 민족의 혼합이 역
겨웠다. 그 중에도  인류의 영원한 분열분자인 유대, 유대인들이  역겨웠다. 
이 거대한 도시는 혈통 오염의 화신처럼 보였다...
  이 모든 이유들로 해서 점점 더 강하게 그리움이  생겨났다. 젊은 시절부
터 내 은밀한 소망과 은밀한 사랑이 나를 이끌었던  그곳, 마침내 그곳으로 
가고자 하는 그리움이었다.  그곳에서 언젠가는 건축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운명이 내게 점지해주는 크거나 작은  테두리 안에서 민족을 위해 나의 정
직한 의무를 다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의 조국인  도
이치 제국에 내 고향을 합치려는, 타는 듯한 내  마음의 소망이 성취되어야 
할 그곳에서 활동하는 행운을 누리고 싶었다.
 
  실제로 그러한 동기도 빈을 떠나는 데 한몫을 했다.  그밖에 다른 생각들
도 이런 결심에 작용하였다. 그는 뒷날 '빈의  속어를 배우기'가 불가능했다
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도시에서 '순수하게  문화적인, 혹은 예술적
인 사건들의 영역에서  무기력의 온갖 징후들'을 보았으며 더 이상  머무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고 여겼다.  건축가에게 있어서 '링 거리가 완성된 다
음에는 적어도 빈에서의 과제란 중요하지 않은 것들 뿐이기' 때문이었다.

    병역 기피로 체포당함
  그러나 이 모든  이유들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정상적인  것
과 의무에 대한 그의 거부감이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다시 등장한다. 50
년대에 그의 병역관련  서류가 다시 발견되었다. 1938년 3월에  오스트리아
로 진군한 직후 그는  매우 열성적으로 그 서류를 찾았다. 그  서류들은 그
가 군대기피, 즉 병역 의무에서 도망쳤다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이 사실을 
지우기 위해서 그는 뮌헨의 입국 신고소에 무국적자라고 신고했을 뿐 아니
라 이력서에도 빈을 떠난 날짜를 속였다. 신고서에는 1912년  초에 빈을 떠
났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이듬해 5월에 빈을 떠났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병무청이 조사를  했지만 처음에는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1913년 8월 22일에 조사를  담당한 린츠의 위병 차우너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곳이나 우어파로 출두하지 않았으며  다른 어떤 
방향으로도 그의 거처를  알아낼 수 없음." 이전에  히틀러의 후견인이었던 
레온딩 군수 요제프 마이프 호퍼도  히틀러의 소재에 대한 질문을 받고 아
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두 명의 누이인 앙겔라와  파울라도 그에 대해서
는 "1908년 이후로 이무것도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빈의 조사 결과 그가 
뮌헨으로 이주했으며 슐라이스하이머 거리 34번지에 산다는 사실의 밝혀졌
다. 1914년 1월  18일 오후에 놀랍게도 형사가 그곳에 나타나서  용의자 체
포했고, 다음날 그를 오스트리아 영사관으로 인도하였다.
  그가 당면한 죄목은  무거운 것이었다. 히틀러는 오랫동안 안전한 줄  알
았는데 결국 판결받을  위험에 처하였다. 그것은 나중에도 여러 번이나  생
기는 일이지만 그의 인생행로에 전혀 다른 방향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평범
한 사건들 중의 하나였다. 그가 특히 사회적으로 체면이  안 서는 병역기피 
전과를 달고서 수백만 명을 징집하고  절반쯤 군대식 동원령을 내릴 수 있
었으리라고 가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셀  수 없이 여러 번 일어났지만 우연이  그를 도왔다. 
린츠 병무당국이 출두날짜를 너무 짧게  잡아서 그는 소환에 응할 수가 없
었다. 소환날짜가 연기되면서 그는 세심하게 계산된 서면상의  서유서를 제
출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여러 장으로 된 '린츠 시청 제2과'에  보낸 사유
서에서 그는 자기 변명을  하였다. 그 사유서는 그의 젊은 날의  가장 포괄
적이고 중요한 문서이다. 이 편지는 그의 도이치 말  지식과 철자법이 상당
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개인적인 상황의 서술을 보면  그
의 빈 시절의 사생활이 전체적으로 불규칙하고 목적 없는 궤도로 흘러갔음
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소환장에서 예술화가라고 지칭되었습니다. 나 또한 그  이름을 정당
한 것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일부만 옳은 것입니다. 나는 재산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아버지는 국가공무원이었습니다) 계속 공부를 하려고  독립적 예술
화가로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내  시간의 일부만 밥벌이에  쓰고 
있습니다. 나는 우선 건축화가가  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의 수입은 별 것이 나리고 겨우 지출을 감당할 정도입니다. 
  나는 그 증인으로서 나의  세금증명서를 동봉하며 그것을 이곳으로 다시 
보내주셨으면 하고 바랍니다.  이 서류에서 나의 수입은 1천 2백  마르크로 
되어 있습니다. 너무 적다기보다는  너무 많은 편이죠. 그러나 정확하게 한 
달에 1백 마르크라고 생각되어서는 안 됩니다. 달마다  수입은 매우 유동적
인 것이고 지금은  매우 나쁜 상태입니다. 이 시기 뮌헨에서  미술품거래는 
겨울잠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그가  내세운 설명은 뻔한 것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는 효과가 있었다. 그는 최초의 징집기한을 놓쳤다. 그래서 몇 번이나 자진 
신고를 하였지만 아마 서류가 가는  도중에 분실된 것 같다는 내용을 적었
다. 완전히 자기 연민에 가득 찬, 비굴한 약삭빠름을 보이는 애처로운 이유
를 달아서, 그는 징집에 출두하지 못한 것을 빈  시절의 절망적인 생활사정 
탓으로 변명하려고 하였다.

  1909년 가을 나의 태만죄로 말하자면 이것은 내게는 정말 힘든 시기였습
니다. 나는  어리고 경험없는 인간이었고, 아무런  보조금도 없이 그렇다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누구에게서 돈을 받는 일도 없었고 하물며 구걸하
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런  도움도 없이 오직 자신만을 의지하고 작품을  팔
아서 얻는 몇 크로네, 때로는 동전 몇 닢은  잠자리를 마련하기에도 모자랐
습니다. 2년 동안이나  나는 근심과 곤궁 이외에는  친구도 없었고, 영원히 
가라앉지 않는  허기 외에는 동반자도  없었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단어인 
청춘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추억은 손
가락과 손과 발에 동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절을 기억하면 어
느 정도의 기쁨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가장 나쁜  것을 넘어선 상태
니까요. 극히 힘든 곤궁 속에서,  절망보다 더한 환경 속에서 나는 내 이름
을 항상 깨끗하게 지켰으며 법과 내  양심 앞에 아무런 흠도 없이 나설 수 
있습니다...

  약 14일 후 1914년 2월  5일에 히틀러는 잘츠부르크의 심사위원 앞에 출
두하였다. 히틀러에 관한 소견이 이렇다. "병역의무와 보조의무에 적합하지 
않음. 너무 약함. 무기를  다룰 능력 없음." 곧 이어서 그는  뮌헨으로 돌아
갔다.
  모든 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뮌헨에서는  행운이 없지도 않았다.  나중에 
그는 이 도시를 향한 '내면의  사랑'이 첫 순간에 자신을 가득 채웠다고 말
했다. 그리고  이 특별한 애착은  무엇보다도 "자연 그대로의 힘과  섬세한 
예술적 분위기가 놀랍게 결합되었다는 점, 호프 양조장으로부터 오데온, 10
월 축제, 피나코텍에 이르는 이 단 하나의 선" 덕분이라고 했다. 
  이상하게도 이러한 호감의 바탕에  정치적 동기가 깔려 있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여전히 고독하게 슐라이스하임  거리에 웅크리
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관계의 결핍을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재봉사인 포프와  그의 이웃과 친구들하고만  느슨한 교류가 있었다.  그들 
모두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밖에는 출생지도 신분도 묻지  않고 누구나 똑같이 받아들여지는 슈바
빙의 맥주집에서 그는  유일하게 견딜 수 있는 교제형태를 찾아냈다.  그러
한 교제는 그에게 친근감과 낯선 느낌을 동시에 주었다.  그것은 쉽게 생겼
다가 쉽게 사라지는 맥주집에서의 우연한 만남이었다. 이것은  그가 이야기
하는 '작은 모임'들이었다. 거기서 그는 '대학나온 사람'으로 여겨졌고, 오스
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의  무너져가는 상태, 도이치와 오스트리아  결합의 
필연성, 합스부르크 왕조의 반도이치, 친슬라브적인  정책에 대해서, 유대인
에 대해서, 혹은 민족의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처음으로 반대 의견
보다는 더 많은 찬성을 얻었다. 아웃사이더를 받아들이고  극단적인 의견과 
등장방식을 대하고 그 뒤에  천재성이 숨겨져 있으려니 추측하는 환경에서 
그는 전혀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다. 어떤 질문이 그를  흥분시키면 그는 드
물지 않게 소리를 지르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말들은 아무리 정열적
으로 떠들어댄 것이라고 해도 그 논리성으로 해서 눈에  띄게 되었다. 그도 
또한 예언하고 정치적 발전을 예측하기를 좋아했다.

    적중된 예감
  벌써 거의 10년  전에 학교에서 도망치면서 그  이유로 들먹였던 결심은 
그 사이 벌써  잊혀졌다. 이때쯤 이미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사라졌다고 
나중에 그는 확인해주었다.  물론 그 대신에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생계를 유지하고 대학공부 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그러나 공부하겠다는  의도를 실현시
키기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자기 방 창가에  앉아서 그는 그 지방
의 풍경을 담은 소품 수채화들을 그렸다. '호프 양조장' '젠들링 성문' '국립 
극장' '식료품 시장' '사령관 저택' 그리고 다시 '호프 양조장', 여러 해 뒤에 
그것들은 장관령으로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되어서 신고 대상품이 되었다.
  때때로 그는 여러  시간 동안이나 시내의 카페에  앉아서 말없이 엄청난 
분량의 케이크를 먹으면서  신문을 읽었다. 아니면 창백한 얼굴로 호프  양
조장 바에 앉아서 약간 흥분상태로 생각에 잠기곤 했다.  때때로 그는 맥주 
집의 어둠 속에서  이웃 테이블 풍경이나 시골풍의 인테리어를, 끼고  다니
는 스케치 북에  끄적거리기도 했다. 언제나처럼 그는 옷차림에 세심한  주
의를 기울였다. 집주인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특힌  긴 프록코트를 좋
아했다. 그밖에도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고 하였다. "그는 속을 알 수가 없
는 사람이었다.  부모의 집에 대해서, 친구들이나  여자에 대해서도 절대로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그는 어떤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다기 보다는 사회적
으로 추락하지 않으려  애썼던 것 같다. 요제프 그라이너는 당시  뮌헨에서 
그를 만났다고 한다 그에게 어떤 인생을 설계하고 있는가 물었더니 대답은 
이랬다고 한다. "곧 전쟁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직업을 갖느냐 안 
갖느냐 하는 것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군대에서는  총지배
인이 강아지 이발사보다 더 나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예감은 적중했다.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전쟁 이전 몇 년 동안을 기
억하면서 아주 인상적으로 지진이 일어날 것 같은 당시의 분위기를 서술하
고 있다. 파악하기 힘들고  감당하기도 힘든 긴장감. 그것은 끊임없이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문장들이 이  책에서 문필적으로 성공
적인 부분들에 속한다는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빈 시절에 이미  발칸 반
도에서는 태풍을 예고하는  저 후덥지근한 잿빛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리고 때로 밝은 섬광 줄기가  번쩍였다가 재빨리 끔찍한 어둠 속으로 사라
지곤 하였다. 그러더니 발칸  전쟁이 일어났다. 그와 더불어 최초의 바람이 
신경이 날카로워진 유럽으로  불어왔다. 다가오는 시간이 무거운  악몽처럼 
사람들을 짓눌렀고 열대의 더위처럼 푹푹 쪘다. 그래서  파국이 다가온다는 
느낌은 계속된 근심의 결과  마침내 동력으로 변하고 말았다. 하늘이여, 이
제는 막을 길 없는 운명을 차라리 내려주소서, 최초의  강력한 번갯불이 땅
위로 떨어졌다. 뇌우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하늘의 천둥 속으로 세계전쟁의 
배터리가 진동하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아름다운 환상의 시간
  1914년 8월 1일에 선전포고가 이루어졌을 때 뮌헨의 오데온 광장에서 환
호하는 군중들을 찍은 사진 속에 아돌프 히틀러가 보인다.  그의 얼굴과 반
쯤 벌린 입, 반짝이는 눈길을 분명히 식별할 수 있다. 이날은 그를 자기 존
재의 그  모든 당혹스러움, 어찌할  바 모름, 고독에서 해방시켰다.  그래서 
그는 자기 감정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내게는  당시의 시간들이 화나는 청
춘으로부터의 구원으로 여겨졌다. 나는 오늘날에도 부끄러움 없이, 그날 폭
풍 같은 열광에 넘쳐 무릎을 꿇고서 하늘에 감사드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시대  전체가 느꼈던 감사였다. 그러나  이 시대는 1914년  8월에 
자신이 전쟁시넹 사로잡혀  있었다고 묘사하지 않았다. 전쟁이  "터지고 평
화가 사라지던 날을...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느끼기 위해서,  '도덕적인 동
경'이 이루어졌다고 느끼기 위해서 빈둥거리는 예술가  생활의 출구없는 상
태가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깊은 권태에 빠져 있던 독일과  유럽 전체
의 지배적인 의식은 전쟁이 이런 규범성의 지옥에서 해방시켜줄 거라고 느
꼈다.
  다시금 이 사실을 감안해보면 히틀러와 그의 시대 사이에는 매우 강력한 
일치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철저히 시대의 필요성과  그 
동경을 함께 나누었다. 다만  좀더 날카롭고 과격한 형태였을 뿐이다. 시대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그에게는 절망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환호성
을 올리며 무기를  잡는 곳에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근본적으로 한 시대가 
종말에 이르렀고 새로운  시대가 나타나려 한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시대의 탐미적인  경향에 맞게 전쟁은  정화 과정으로 여겨졌고,  평범함과 
자기 혐오에서 벗어나려는 거대한 희망이기도  했다. '성스러운 노래들'에서 
전쟁은 '보편적인 생명의 오르가슴'으로 찬양되었다.  그것은 혼돈을 만들어 
내고 수태시킨다. 그 혼돈에서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유럽에서 빛들이 꺼
졌다는 사실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영국의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 경이 
말했듯이 이별의 형식이었을 뿐 아니라 희망의 형식이기도 하였다.
  8월 처음 며칠 간의 그림은  과격한 축제, 출발의 분위기, 기대의 기분을 
포함하였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럽 대륙은 하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꽃들 속의 동원령, 거리  가장자리의 만세, 발코니 위에는 색색깔의 여름옷
을 입은  부인들, 국민적 축제 분위기이면서  동시에 즐거운 생동감이었다. 
유럽의 민족들은 결코 얻지 못할 승리를 축하하였다.
  독일에서는 이 처음 며칠 동안 견줄 데 없는  공동체 의식을 체험하였다. 
요술 방망이를 내리친 것처럼 여러 세대에 걸쳐 내려오던 대립이 사라지고 
널리 알려진 도이치의  반목이 끝났다. 그것은 거의 종교적인 특성을  지닌 
경험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뒤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 옛날에 그것을 체험
한 어떤 사람이 말하듯이 그  처음 며칠 동안의 경험은 "그것을 함께 체험
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되었다.
  거리나 사람들이 모여든 광장에서  목소리를 합쳐서 생겨난 표현은 1848
년 자유주의 혁명가의  독일 노래였다. 그것은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이  지
은 것으로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국가가 된 것이다. 8월 1일  저녁 베를린 
성광장에 모여든 1만여 명의 군중을  향해 빌헬름 2세가 말한 문장이 환호
를 받았다.  그는 "어떠한 당파도 종파도  모르며, 오직 도이치 형제들만을 
알 뿐"이라고 했다. 그것은 그의 가장 인기 있는 발언이 되었다. 서로 대립
하면서 고통받는,  내면 깊숙이 전통적으로  분열된 국민에게 그것은  잊을 
수 없는 한순간에 수많은 장벽들을 걷어 냈다. 정확하게  50년 전에 이루어
진 도이치의 통일은 이제야 실현된 듯이 보였다.
  그것은 아름다운 환상의 시간이었다. 이러한 통일의 느낌은  그러한 장벽
을 정말  없앤 것이 아니라 감추기만  했기 때문이다. 화해한 국민의  모습 
뒤에는 여전히 낡은 대립들이  살아 있었고 터져나오는 환호성에는 제각기 
다른 동기들이 숨어 있었다. 개인적이고 애국적인 소망들, 혁명적인 충동과 
넌더리, 반사회적인 반항심,  헤게모니를 쥐려는 의도, 그리고  시민적 질서
의 일상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험심 많은 마음의 동경 등, 이  모든 것
이 보여들어서 단 한순간 조국을 구원하려는 헌신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히틀러의 느낌도 그렇게 끼여들어온  여러 가지 생각들과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수백만의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자랑스런  행복감으로 마
음이 부풀어올랐다."고  그는 썼으며, 그러한  기쁨은 마침내 국민으로서의 
마음을 입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8월 3일 그는  바이에른 
왕에게 직소를 올려서 자신은  오스트리아 태생이지만 바이에른 연대에 지
원병으로 받아달라고 청했다. 그의 병역기피와 자원입대 사이의  모순은 실
은 모순이 아니다. 군대생활은 그를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강제상태에 밀어
넣겠지만 전쟁은 불쾌감, 이해되지  못한다는 감정의 고민, 방향 없는 삶으
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1870~1871년의 전쟁에 대한  두 권의 애국주의적
인 민간서들은 애송이  시절 처음으로 읽은 몽상적인 책이었다고 했다.  이
제 그는 어린시절 책 속에 있던 모험의 광채로 빛나는 강력한 군대로 들어
가려는 것이었다. 지금  생애 처음으로 그는 거대하고 두려운 단체의  세력
에 동참할 의무와 기회를  보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인간의  곤궁과 동경과 
두려움을 가르쳐주는 몇 가지 체험들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사회
적인 중간지대에 머물러  있었다. 운명의 동일성에 대한 감정 없이  아웃사
이더로 남아 있었다.  이제 그에게 이 내면의 필요성을 충족시킬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가 직소를 올린 다음날 벌써 답장이 왔다. 떨리는  손으로 그는 편지를 
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거기에는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리스트 연대라고
도 불리는 바이에른  제16 예비보병 연대에 출두하라고 되어 있었다.  히틀
러에게는 이제 "내 생애의 가장 잊지  못할, 가장 위대한 순간"이 시작되었
다.

    제5장 전쟁을 통한 구원
  겨우 10주간의 훈련기간을 거친 뒤  10월 후반에 리스트 연대는 서부 전
선에 배치되었다. 자신이 참전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초조
한 근심에 가득차서  히틀러는 수송을 기다렸다. 그러나 10월 29일  이프레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이른바 총알세례를 받으면서 그는 방금 시작된 전쟁
의 가장 치열한 전투 하나를 경험하였다. 해협 쪽으로  뚫고 나가려는 도이
치 군의 결정적인 대규모 시도에 맞서 이 지역에 투입된 영국 부대는 격렬
하게 대응하여 마침내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4일 동안이나  전투는 이리 밀
리고 저리 밀려왔다.  히틀러는 재봉사 포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연대는  이 
전투에서 3천 5백 명 중 6백 명 정도를 잃었다고  보고했다. 연대기록을 보
면 이 최초의 전투에서 349명이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연대는 바로 뒤
이어 베셀레르 마을  근처에서 지휘관을 잃었다. 그리고 대개는 경박한  명
령으로 인해서 '고통스러운 민중적 특성'을 얻었다.
  (나의 투쟁)에서 최초의  참전에 대한 묘사는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일
일이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이 부분에 바친 특별히  세심한 문체
와 시적인 노력은 이 체험이 그에게 얼마나 잊을 수 없는 인상을 주었던가 
하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고 나자 우리가 말없이 행진하고 있던 플란더스 지방에 축축하고 차
가운 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안개 속에 낮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갑자기 
우리 머리 위로 강철로 된 아침인사가 쉭 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날카로운 
폭음과 함께 작은 총알들이 우리  대열 사이로 쏟아져서 축축한 땅에 박혔
다. 그러나 그  작은 구름이 걷히기도 전에 2백 개의  목구멍으로부터 죽음
의 사자를  향해 최초의 만세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는 총소리, 대포소
리, 노랫소리, 외침소리가 시작되었다. 열에 들뜬 눈으로  모두가 앞을 향해 
점점 더 빨리 나갔다. 그렇게 계속 앞으로 나가다가  갑자기 순무밭과 울타
리 있는  곳에서 육탄전이 시작되었다.  멀리서부터 노랫소리가 우리  귀로 
울려오다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중대가 서로 맞붙었다. 그리고  죽
음이 재빨리  우리 대열 속으로 들어왔을  때, 적의 노랫소리가 바로  우리 
코앞에서 들리게 되었을  때, 우리도 다시 소리 높이 노래하였다.  독일, 모
든 것 위에 독일, 세상의 모든 것 위에!

    1급 철십자 훈장을 받다
  히틀러는 전쟁 내내 연대 사령부와 전초부대 사이에서 연락병 노릇을 했
다. 이 역할은  그의 고독한 천성에 알맞는  것이었다.. 그의 상관들 중  한 
명은 그가 "조용하고 군인처럼 보이지 않는  남자였으며, 처음에는 다른 병
사들과 전혀 구별\이 되지 않았다."고 회고하였다. 히틀러는 믿음직하고  의
무를 잘 알고 있었고, 진지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여기서도 히틀러는 별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동료들이 거의  한 목소리로 
확인해주고 있지만 '몽상가'였다. 자주 그는  "헬멧을 머리에 쓰고 귀퉁이에 
앉아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를 그런 무심한  상태에서 이
끌어낼 수 없었다." 4년여에 걸쳐 비교적 많은  수의 사람들의 증언은 거의 
그런 식이고 아무것도  그를 생생하게 묘사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  묘사
의 특성 없음은 바로 그 사람 자신의 특성 없음에서 나온 것이다. 
  남의 주목을 받는 극단적인  그의 특성들조차도 특별히 비개성적인 특성
을 가지고 있어서 개성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그가 추구하는 원칙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터져나오는  폭발도 
군대생활의 무사한 불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승리에 대한 염려, 배신이나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의심 등이었다.
  그의 개인적인 윤곽을  보여주는 일화도 그 어떤  특성을 보여주지 않는
다. 전해내려 오다가  나중에는 교과서의 일화로 실리게 된 어떤  이야기도 
그저 교과서  일화일 뿐이다. 그것은  히틀러가 몽디디에 근처에서  명령을 
전달하려 가는 길에 스물 다섯명의 프랑스 군대와 마주쳤는데 그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용감하게 기습해서  그들 모두를 사로잡아 상관애게 끌고왔
다는 이야기다.
  그의 모범적인 열성은 애국적  연감에서 흔히 그렇듯이 실제인물을 하나
의 이미지 뒤에 감추어버린다. 이것은 주변세계에서 도망쳐서  상투적 이미
지 속으로 들어가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전달사항을 물으러 갔다가  그는 
갑자기 날아온 적군의  대포알을 보고 지휘관을 끌어당겨 '보호하는'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연대가 짧은 시간에 두  번째로 지휘관을 잃어버리지 않도
록" 해달라고 그에게 간청하였다.
  뒷날 정치적인 동기에서 많은 의심을 받기는 했지만 그가 전쟁터에서 용
감했던 것만은 분명한  일이다. 1914년 12월에 그는 2급 철십자  훈장을 받
았다. 그는 재봉사  포프에게 이렇게 써보냈다. '그것은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동료들은 거의 모두 줄었습니다만."1918년 5월에
는 적을 앞에 두고 용감했다는 이유로 연대훈장을 받았고 같은 해 8월 4일
에 사병에게는 극히 드문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수여의 구체적 이유에  대해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알려져 있
지 않다. 히틀러 자신은 그에  대해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연대의 
유대인 부관 후고 구트만의 제안에 따라서 훈장을 받았다는 고백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연대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없고 그밖의 다른  보고들
은 서로 심하게 말이 틀리다.  어떤 보고에 따르면, 위에 언급한 일화와 비
슷하게 히틀러가 열다섯 명의  영국 정찰조를 사로잡았다고 주장하기도 하
고, 또 어떤 것은  열, 열둘, 심지어는 스무 명의 프랑스 군을  극적으로 체
포했다고도 한다.  이런 이야기에 따르면  히틀러가 프랑스 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는 사실상 아주  쉬운 말 몇 가지밖에 할  줄 
몰랐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대포알이 무섭게 날아오는 한가운데를 뚫
고 포병부대로 들어가서  아군이 심각한 포격을 당하는  것을 막았다고 한
다. 그러나  가장 그럴싸한 이유는 거가  행한 어떤 하나의 행동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 증명해 보인 끊임없는 노력의 덕으로 훈장을 받았다고  보아
야 할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이런 전쟁 장식품들은 히틀러의  미래를 
위해 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게 된다. 그것들은  오스트리아 사람인 그에
게 독일에서 더 높은 권리를 갖도록 해주었고, 그럼으로써  그의 경력의 탄
탄한 시작을 위한 조건들을 만들어주었다. 이 훈장들은  정치적인 발언권과 
복종권을 확보하고 정당화해주었다.

    새로운 질서를 향한 욕망
  전쟁터의 동료들 사이에서는 그의  과도한 책임의식과 군대 전체를 위한 
여러 가지 걱정이 자주 비판이  대상이 되었다. 어떤 동료 하나가 '우리 모
두 그를 욕했다."고 뒷날  그를 기억했다. 다른 병사들은 "저 미친 놈이 지
휘까지 하려  드네."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마르고 누르스름한 얼굴에는 
언제나 우울한 기색이 보였다. 물론 히틀러는 아주 인기가  없었던 것은 아
니다. 오히려  그쪽에서 동료들과 자신을 갈라  놓는 거리감을 보여주었다. 
그들과 달리 그는 가족도 없었고 거의 편지를 받거나  쓰지도 않았고, 그들
의 성향, 근심, 여자 이야기, 웃음 등을 함께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쓸데없는 일들보다 더 싫은  것이 없었다."고 이 시기를 돌아
보며 말하고 있다. 그런  일 대신 오히려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생각
하고, 호머, 복음서, 쇼펜하우어의 책 등을 읽었으며  전쟁은 자기에게 30년 
간의 대학생활을 대신할  만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아주 고집스럽게  자
기 혼자만 문제의 핵심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  고독과 접촉기피증을 가
지고 독특한 선민의식을  맞들어낸 것이다. 그 시절에 찍은 사진들에서  동
료들에 대한 뚜렷한 이질감과, 동기나  체험이 같지 않음을 볼 수 있다. 히
틀러는 창백하고 말없이, 다가갈 수 없는 태도와 뚫어질  듯한 표정으로 그
들과 나란히 앉아 있다.
  이런 인간 관계의 무능력이  아마도 히틀러가 4년 동안 상병까지만 진급
한 이유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리스트 연대에서 
여러 해나 부관을 지낸 사람이 히틀러를 하사관으로 진급시켜야 할까 하는 
이야기가 한두번  나왔다가 마지막에 취소되었다고 회고하였다.  "그에게서 
하사관으로서 필요한 지도력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히틀러 자신도 
진급에 끼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전쟁과 막사,  그리고 병사들의 숙소에서 찾아낸 것은 그의  본직에 
잘 어울리는 종류의 인간관계였다. 그것은 비개성적인 기회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만난 것은 다시 남자 하숙집의 생활방식이었다. 
물론 여기서는 그의 사회적인 특권의식, 내면의 불안, 숭고한 취향 등에 만
족을 준다는 점에서  달라진 점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인  테두리는 
그의 수줍음과 인간혐오증,  접촉기피증에 알맞은 것이었다. 그는 자기에게 
없는 고향을 전쟁터에서 찾아냈다.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은  이 세계야말로 
그의 집이었다.
  예전에 그의 상관이었던  사람의 말은 이러한 점을  뒷받침해준다. "히틀
러 상병에 있어  리스트 연대는 고향이었다." 이러한 암시는 전쟁  동안 거
이 잊어버린 사회편입 의지와 지난 몇 년간 보인 아웃사이더로서의 반사회
성 사이의 모순을  해결해준다. 어머니가 죽은 다음부터 그는 어느  곳에서
도 고향을 느끼지 못했다. 그  이후로 모험과 질서를 향한 욕구, 자유와 기
율을 향한 욕구가 이곳 전방 본부와 참호, 그리고  방공호 속에서처럼 이토
록 지속적으로 만족된 것은  한 번도 없었다. 전쟁은 지나간 여러  해의 상
처 많은 체험과는  달리 아돌프 히틀러의 긍정적인 교양체험이었다. 그  자
신이 표현한 대로  '굉장한 인상'이었고, '압도적인' 것이었으며,  '아주 행복
한' 것이었다. 은유의 영역에서지만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체험이었다.
  히틀러 자신도 전쟁이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확인해주고 있다.  무엇보다
도 그것은 감상적인  젊은 남자에게 힘과 자기 가치 의식을  마련해주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다시금 친척들 앞에도 모습을 나타냈다. 1917년  10
월과 1918년 9월의  휴가를 그는 슈피탈에 있는 친척들 곁에서  보냈다. 그
는 전쟁터에서 연합의  쓸모, 부분적인 자기억제와 운명에 대한 신뢰를  배
웠다. 운명에 대한  신뢰는 그가 속한 세대의 열정적인 비합리주의의  전반
적인 특징이기도 했다. 그가 격전지 한가운데를 뛰어다니면서  보여준 용기
와 냉혹함은 동료들 사이에서 그에게 일종의 후광을  마련해주었다. 그들은 
히틀러와 함께 있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이러
한 체험은 그 자신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가 
실패의 세월 동안 고집스럽게 간직했던 특별한 소명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
켜주었다.
  전쟁은 비판적  사고에 대한 히틀러의  성향도 키워주었다. 수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는 전쟁터에서 기존의  지도층이 실패하고 있다는 인식을 얻
었고, 자신이 옹호하고자 하는 질서가 내적으로 탈진상태에  있다는 인식도 
얻었다. "나는 이 전사자들에  대해서 지휘관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고 그
는 멍청해진 동료를 향해서 말하기도 했다. 정치적인 동기가  거의 없는 시
민계급 청년들이 자기들 앞에 놓여  있다고 여겼던 새로운 질서를 향한 욕
망이 막연히 그를 사로잡았다. 그가 말한 대로 처음에 그는 '정치화되지 않
았다',혹은 정치에 무관심했던  빈 시절에 '당시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그랬다. 그러나 여기서 
계속된 그의  사색은 모든  생각들을 뒤죽박죽 뒤섞었다.  그는 머지  않아 
"소시민의 원시적인  방식으로 정치 문제들과 세계관  문제들을 사색한다."
는 것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전쟁 초기에 그가 뮌헨의 아는  사람에게 쓴 
열두 쪽 길이의  편지는 이러한 관찰을 뒷받침해준다. 그가 참여했던  기습
공격을 상세히 묘사한  다음에 ("거의 기적처럼 나는 여전히 멀쩡했어요.") 
편지는 다음가 같이 끝을 맺고 있다.

  나는 자주 뮌헨을  생각합니다. 우리들 각자는 돈이야 얼마가 들든  빨리 
이 관계를 영원히  청산해버리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중에
서 행운을 얻은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다시 보기를,  고향이 더욱 순수해지
고 외국세력에서  깨끗이 벗어났음을 보게  되기를, 그리고 지금  매일같이 
우리들 수십만 명에게  닥치는 희생과 고통을 통해서, 여기서 매일매일  국
제적인 적군에 대항하여  흘리는 피의 강물을 통해서  외부에 있는 독일이 
적이 섬멸될 뿐 아니라 우리  내부이 국제주의도 섬멸되기를 바라는 단 하
나의 소원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토를 얻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와의 간계는 언제나 내가 이야기한  대
로 될 것입니다.

  이 문장들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빈 시절의 이데올로기와 
비슷한 것이다. 외국세력에 의해  압도될까 하는 두려움, 적들의 세계에 대
항한 방어감정 등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모든 도이치 운동'의 
생각에서 발전되어 나온  생각아 여기 처음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뒷
날 국내정치의 가장 중요한 방향으로 자리잡게 된다. 한  국가의 내적인 결
속이 국가의  외적인 권력확장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도이치  땅은 
우선 도이치가 실현되고 나서 위대함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를 꿈꾸다
  1916년 10월 초에  히틀러는 르 바르케 근처에서  왼쪽 허벅지에 가벼운 
부상을 입고 베를린  근교의 벨리츠 육군병원으로 수송되었다. 1917년  3월
초까지 거의 다섯 달 동안이나 그는 고향에 머물렀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볼 때 이 기간에 그는 정치에 더욱 접근하였다.
  1914년 8월과 전선에서의 체험들은  그에게 특히 민족의 내적 톡일이 경
험으로 의미가  있었다. 2년 간 이것은  하나의 행복하고도 손상받지  않은 
확실성이었다. 고향의 주소도  없었고 그 어떤 지향하는 곳도 없었기에  그
는 거의 모든 휴가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이 가상세계에서  열심히 움직였다. 
후에 그는 그리운 어조로 "그것은  옛날의 훌륭한 영운군대의 전선이었다."
고 회상하고  있다. 벨리츠에서, 그리고 처음으로  베를린을 방문해서 정치
적, 사회적인 풍경들과 다시 만났을 때 충격은 한층 더 컸다. 절망스럽게도 
시대는 전쟁 초기의 그 모든  열광을 다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
다. 고양된 운명의 결속 대신에 다시 당파들, 당파들 간의 싸움, 의견차, 대
항 등이 나타나 있었다.
  베를린 시에 대한 그의 일생 동안의 원망은 어쩌면 이 초기 체험에 원인
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불만,  배고픔, 체념 등을 경험하였다. 화가 잔
뜩 나는 일이었지만 그는 자기들이 '더 똑똑하다'고 떠벌리는 징병기피자들
을 만났으며, 위선, 이기주의, 전시의  여러 이득들을 보았다. 그리고 빈 시
절의 고정관념에 충실하게 이 모든 현상들 뒤에 유대인이 작용하고 있다고 
여겼다.
  거의 다 나온 상태에서 뮌헨의 예비대대로 돌아와보니 그곳도 사정이 마
찬가지였다. 그는 고향을 '더는 알아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허한 노여
움을 품고서 그는  마법에서 깨어나는 이런 체험을 만들어낸 자들,  내적인 
통일의 아름다운 꿈, 어린 시절 이후 최초의 긍정적인  사회 체험을 망가뜨
린 자들을 증오하였다.  한편으로는 저 '헤브라이의 민족  파괴자'들에 대한 
증오였다. 그들 중 1만 2천이나 1만 5천 명을  '독가스 아래' 세워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가와 언론인에  대한 증오가 생겼다. 
뒷날에도 그가 이용하는 언어표현들은 그의 격분의 정도를 보여준다. '수다
쟁이들', '해충', '혁명에 대한 거짓증언자들'은 없애버려야 마땅하다고 했다. 
'모든 군사수단을 다  동원해서라고 이 나쁜 질병들을 쓸어버려야 할  것이
다." 아직도 그는 정열적으로, 거의  신경질적으로 승리를 열망하였다. 이름 
없는 상태에서 일어서기 위해서는  오히려 패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예감
도 못하고 계산도 못했다.
  1917년 초에 전선으로  돌아가지 그는 다시금 해방된 듯이 느꼈으며,  한
번도 제대로 적응할 수가 없었던 문명세계로부터 다시  멀어졌다. 군대서류
는 그가 프랑스 플란더스 지방 진지 확보전투, 아라스의 봄 전투, 가을에는 
격렬했던 슈망  데 다메 전투에 참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  동안 
'생각 없는 여자들의 무의미한  편지'들이 세심하게 전쟁에 지친 고향의 분
위기를 전선에 전파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시기에 자주 화가  출신인 동료 에른스트 슈미트와 자기의 미래
의 직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슈미트는 히틀러가 당시에  정치
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하였다. 물론 그는  아직 
결심이 완전히 서지는  못했다. 한편 그가 여전히 화가로서의 경력을  믿고 
있다는 증거들도 있다. 1917년  10월, 제국의회의 논란 많은 평화결의가 있
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리고 제국이 동부에서  군사적으로 승리하기 바로 
직전에 그는 휴가를  얻어서 독일의 정치 중심지인 베를린으로 갔다.  거기
서 그는 슈미트에게 보내는 엽서에 이렇게  적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박물
관들을 더 잘 연구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나중에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당시 얼마 안 되는  친구들에게 자주 전쟁터에서 귀환하게 되면 건축
가로서의 직업과  나란히 정치활동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이미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연설가가 되려고 했다.

    선전은 대중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의도는, 모든  인간의 행동은 조종이 가능하다는 빈 시절의  확신
에 어울리는 것이다. 그를  두렵게도 만들고 동시에 매혹하기도 하는, 숨어
서 일하는 인형조종자들에 대한  생각은 언젠가는 스스로 인형조종자가 되
리라는 생각으로 대단히  마음이 끌렸다. 인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떠한 
임의성도 부정하는 것이다.  약간 어리둥절한 태도로 그 자신이 말한  것에 
따르면 올바른 인형조종자가 제때에  올바른 지체를 움직이게만 하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으며 '무섭고도  잘 이해가 안 되는 결말들'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민족들, 계급들, 혹은  정당들이 흥하고 망하는 
역사의 진행을 아주 얼토당토 않게 선전의 능력이 크냐 작으냐의 결과로서 
평가하였다. 그는 (나의 투쟁)의 유명한 제6장에서 도이치군과 연합군이 예
를 들어 선전술을 해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독일은  '형식상 불충분하고 본질적, 심리적으로  잘못된' 선
전을 했기  때문에 패전했다고 한다.  선전이라는 무기의 실로  무시무시한 
작용을 계산할 줄 몰랐던 지도부의 무능이 선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어
려운 선전이나마 방해하면서, '막연한 평화주의의  멀건 국물'만을 허용하였
다. 그것은 '사람이 목숨까지 바치면서 홀리기'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은 것
이었다. 이런 일을 위해서는 '극히 천재적인, 영혼의  지식을 가진 사람만이 
자격이 있지만' 도이치군 측은 아는 체나 하는 허풍선이  실패자에게 그 일
을 맡겨서 이익은커녕 손해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의견에 따르면 상대방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연합군측이 혐오
감을 불러일으키는 선전의 '가차없도고 천재적인 방식'에서 그는 깊은 인상
을 받았고,  이 거짓말의 절대적이고  뻔뻔스럽고 일방적인 완고함에  대해 
전문가적인 탐닉에 빠져들곤  하였다. 그는 이러한 방식에서  "끝없이 배웠
다."고 한다.  그는 대체로 상대방의 예를  들어서 자신의 확신과 원칙들을 
보여주는 성향이 있었다.  그래서 세계전쟁에서 적대자의 선전을  모범으로 
들어서 심리학적 영향에 대한 자신의 원칙들을 전개해 보이고 있다.
  상대방이 심리적 전쟁에서 우세했다는 주장은 도이치 여론 안에 널리 퍼
져 있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군대를 자랑삼던 국가가  너무도 
이해가 되지 않는 패배에 대해서, 군대 아닌 이유들로  설명하려고 하는 여
러 가지 전설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독일이 모든  전쟁터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고 그토록 애쓰고 수많은 희생을  지불한 다음에 전쟁에서 진 것에 대
해서 말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오류를 범하면서도  영리한 측면을 보이곤 했는데 이렇
게 특징적인, 명료함과  어리석음의 혼합 속에서 선전의 본질과 효과에  대
한 자기 생각의  결말부분을 예리하게 설명해보려고 시도하였다.  선전이란 
민중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교육받은 계층을 지향해서는  안 되고 '영원한 
대중을' 지향해야 하며  그런 대중들 중에서도 정신적 수용력이 가장  제한
된 사람에 맞추어 수준을 잡아야 한다. 표어처럼 주입하기  쉬운 형태로 극
소수의 설득력 있는  목표에 집중하여야 한다. 언제나 감정을 지향하고  절
대로 이성을 향해서는 안 되고 모든 객관성은 명백하게  포기해야 한다. 자
신의 권리에 대해서는 의심의 그림자도 보여서는  안 된다. 오직 "사랑이냐 
미움이냐, 옳으냐 그르냐,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것이 있을 뿐  절대로 반
은 옳고 반은 그르다는 것은 없다."는 등등이다.
  이 모든 것은 전혀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이  모든 것
을 생각한 에너지와  자유로운 태도는 대중의 사랑을  얻는데 있어서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상당한  우위를 확보해주는 요인이 된다. 그는 이러한  자
유로운 태도로 대중,  고루함, 협소함, 확고함 등을 전혀 경멸감  없이 완전
히 도구적으로 자신의 목적의식에 종속시켰다.
  벌써 그는 이러한  우월성을 처음으로 느꼈다. 전쟁 마지막 국면의  이러
한 체험을  보면서 그는 대중 없이,  대중의 약점과 장점과 민감성에  대한 
지식 없이 정치가 불가능하다는 빈 시절의 체험을  확인하였다. 민주주의의 
위대한 선동가들인 로이드 조지, 클레망소 등이 그가 한때  경탄했던 칼 뤼
거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인물이었으며 약간 창백하고 생각이 약하기는 하
지만 미국 대통령 윌슨도 여기 속한다.
  히틀러의 생각에  따르면 언제나 뚜렷하게  드러나는 도이치의 열등성의 
주요 이유 하나는 연합군측의 이러한 민중지도자들에 대응할 만한 독일 쪽 
상대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민중과 괴리되고, 민중이  점차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도이치 지도부는 보수적인 완고
함에 잠겨 오만하게 아무것도 모른 채 전통적인 입장에  붙박여 있었다. 이
러한 실패의 인식은  이 시절의 히틀러에게 거대한 인상들을 남겼다  .주춤
거리는 지도층의  특징적인 약점에서 벗어나, 선입견  없이, 그리고 냉정하
게, 이기심과 감상에서 벗어나 히틀러는 오직 효과만을 생각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상대방  선전의 몰취미한 우화적 작품들에 대해서
도 감탄하였다. 예를  들면 도이치 병정들이 어린이 손을 토막내거나  임신
부의 배를 가르는  학살자들로 묘사된 것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러한  그림
들이야말로 두려움의 마력과, 천박한 환상 속에서 두려움의  상상으로 끊임
없이 자신을 확대하는 기술을 이용한 것이다.
  
    승리의 팡파르에서 패배의 묘지송으로
  이념이 가진  동원력도 끈질긴 힘으로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연합군은 
야만과 심연의 힘에 맞서 세계와  그 거룩한 재보를 구한다는 수많은 아름
다운 가상을 십자군 형식에서 가져왔다. 상대방의 이러한  종교적 자기과시
에 대해서 도이치측은  맞설 것이 없었다. 초기에 군사적으로 성공한  듯한 
인상이 남아  있는 동안 순수한  방어전쟁이라는 주장을 포기하였다.  점점 
더 노골적으로 독일은 합병을 좋아하는 지크프리트라고 내세우면서 그러한 
노력이 세계의 눈앞에 변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했
다는 것은 더욱  치명적인 일이었다. 스스로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국민
이 공간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끼고 발전의 필요성을 느낀다는 이유만으로
는 어쨌든 설명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 사이 사회적인 구원이념의 약속에 사로잡혀 1917년 말에 패배한 러시
아에서, "모든 나라의 지치고 고생한 노동자  계급과 일하는 계층이 열렬히 
그리워하던, 국가  병합이 없으며 민족  자결권에 따른 올바르고  민주적인 
평화"의 제안이 나왔다.
  다른 한편 1918년 초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
에서 포괄적인 평화개념을 밝혔다.  그것은 '세계를 사람들의 삶을 위해 쓸
모 있고 안전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념이었다.  폭력도 공격도 없는,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자결권과  정의의 질서라는 자극적인 그림이었다.  이
념이 없어져버린 제국의  힘에 맞서 이러한 이념이  지쳐버린 나라 안에서 
끈질긴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대를  특징짓
는 일화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도이치의 참모장교 한 사람이  1918년 
가을에 갑자기 깨닫고서  손으로 이마를 탁 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이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그리
고 우리가 이 이념들에 대해서  전혀 몰랐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하게 되리
하는 사실도 말이야!"
  도이치의 패배는 군대 외적 요인들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은 수많은 변종
으로 만들어져서 뒷날  우익의 세력확보 전략에 포함된다. 그것은 정식  전
투에서보다는 오히려 음모와 배신으로 인해서 패배했다고 생각하는 도이치 
민족의 지크프리트 콤플렉스  탓만은 아니었다. 이런 주장은 훨씬 더  올바
른 핵심을 가지고  있었다. 민족의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
으로였지만 독일은 실제로 전쟁터 바깥에서도  패배하였다. 시대착오적이고 
낙후한 정치 체제가 시대에 더 잘 맞는 민주질서에 굴복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히틀러는 처음으로,  이념에 대항해서는 단순한 힘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 이념에 맞설 만한  다른 이념의 도움을 받아야 성공적으로 대응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권력수단으로 세계관에 맞서 싸우려
는 모든 시도는, 싸움이 새로운 정신적인 태도에 대한  공격의 형태를 취하
지 못할  경우 마지막에 실패하고 만다.  두 세계관의 싸움이 될  경우에만 
지속적이고 가혹하게 투입된 과격한 힘이라는 무기를 가진 쪽에 유리한 결
판이 나는 것이다."  전쟁 시절의 이런 사색은 뒷날 만들어낸  것으로 당시
에는 아직 막연하고 어슴푸레한 것이었으며 문제를 의식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만 예감한 것에 불과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불명확함
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들은 전쟁 때 얻은 사색들을 표현해주고 있다.
  1918년 여름에 한 번  더 도이치의 승리가 다가오는 듯이 보였다.  몇 달 
전에 제국은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제국을 더욱더 쇠약하게 만드는  이
런 순간적인 전투의  승리뿐만이 아니었다. 3월 초에는 러시아에  브레스트
리토브스크 조약을 강요하였다.  약 한 달 뒤에는 부카레스트 조약에서  루
마니아를 향해 한  번 더 인상적으로 힘을 과시하였다. 그로써  동부전선의 
전투가 일단락되고 도이치  서부전선은 2백 개 사단  거이 350만 병력으로 
연합군 세력에 맞서게 되었다.  장비와 무기는 여전히 열세였다. 예를 들면 
적군의 총기 1만 8천 정에 대해서 도이치측은 1만 4천  정 밖에 없었다. 그
러나 깨지지 않은 공식적인  자신감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병력을 지원받아
서 총사령부는 3월 말 이후로  다섯 개의 대공세 중 최초의 공격을 개시하
였다. 미군 병력이  개입하기 전에 병력을 최고로 투입하여 전쟁의  판도를 
결정지으려는 시도였다.  도이치 민족은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고 루덴도르프  장군은 어떤 담화문에서 밝혔다. 그것은 뒷날  히틀
러를 사로 잡은 것과 같은 거대한 도박을 향한 정열이었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수많은 승리들을 거두고 난 끝에  굳은 결심으로, 남
은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넓은 전선을 무너뜨리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도이치 중대들은 공격에  나섰다. 히틀러는 리스트 연대와 더불어 이  전투
에 참여하였다.  특히 몽디디에 느와용  근처의 추격전과 뒤에는  스와송과 
렝스 전투에 참전했다.  초여름에 도이치 군대는 영국과 프랑스 군대를  파
리 근처 60킬로미터가지 몰아붙이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나서 공격이 얼어붙었다. 도이치 군대는 한 번  더 겨우 껍질뿐인 
승리를 얻기 위해서 치명적으로 제한된 병력을 다 썼던  것이다. 그런 성과
를 얻기 위해 지불한 지나치게 많은 인명 손상 등이 도이치군이 전선을 꿰
뚫은 이후에 전선을  다시 고착시켜버린 것이다. 국내여론에 대해서 이  모
든 일을 부분적으로는 감추기도  했지만 부분적으로 국내여론이 지나칠 정
도로 현실을 거부하였다. 도이치군의 작전이 정지되고 한참이나 지났다. 연
합군측이 공세로 전환하였고 도이치 전선, 특히 아미엥  전선이 붕괴된 8월 
8일에도 최고 사령부는  여전히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령부는 
과격한 양자택일 결과 승리가 멈춘  직후 패배를 고백해야 할 처지에 있었
다. 사령부는 죽은 색깔의 물감을 써서 패하지 않는  독일이라는 전체 그림
을 그려내고 있었지만 전망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모든  이유에서 독일의  여론은 패배가  바로 눈앞에  닥쳐와 있던 
1918년 여름에 그 어느 때보다도  이번 전쟁이 승리로 끝나리라고 믿고 있
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망상은 도이치의  선전이 무력하고 효과가  없다는 
히틀러의 생각을 아주  잘 입증해주었다. 물론 히틀러 자신도 부정확한  상
상으로 인해서 올바른 결론에서 벗어났다. 책임있는 정치가들과  고위 장교
들조차도 잘못된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므로 1918년 9월 29일  총사령관 루덴도르프가 성급하게 정치지도부
를 소환해서 조속한 정전 요청을 해달라고 청했을 때,  이런 갑작스런 현실
의 붕괴는 더욱 날카로운 일격으로 모든 사람을 한방  먹였다. 신경의 힘이 
완전히 소모된 상황에서 그는 모든 전술적인 안전장치를  비난하였다. 이상
한 일이었지만 그는 대공세가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군사적  기도를 정치적으로 떠받쳐  주려는 
모든 의견을 아주  못마땅히 여기면서 물리쳤다. 그는 분명하게 표현할  만
한 전략적 목표도 제대로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는 그 점을 캐
묻는 황태자의 질문에 대해서 그답기는 하지만 몹시 흥분된 대답을 내놓았
다. "우리는  한 구멍을 팝니다.  다음 구멍도 나타나겠지요."  바덴의 막스 
왕자가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가  물었을 때도 루덴도르프는 이렇게 대답했
다. "그러면 독일은 망하는 거지요."
  심리저긍로나 정치적으로 제대로  준비도 안 된 채 '마치 복음서를  믿듯
이' 자기 나라  병력이 우세하다고만 믿었던 국민은 바닥도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였다. 많은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해하기도 힘든  힌덴부르크 장
군의 말은 국민의 망상이  얼마나 사라지기 힘든 것이었던가를 증언해주고 
있다. 패전했다는  루덴도르프의 고백을 듣고도  여전히 늙은 야전  사령관 
힌덴부르크는 외무장관에게 곧 벌어질  협상에서 로트링겐 지방의 금속 광
산을 합병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하라고 촉구했던 것이다. 여기서  처음으
로 저  현실거부의 독특한 형식이 나타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현실거부의 태도로 전후 여러 해 동안 국민적인 곤궁과 의기소침을 
견뎌냈고 마침내 1933년 봄의  소란스런 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승리의 
팡파르에서 패배의 묘지송'으로 이렇듯 충격적으로 전환된  결과는 극히 중
요한 것이다. 뒤통수를 맞고 망상에서 깨어나는 이런 경험은  다음 15년 역
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그 시기의 역사는 이 사실에 대한 이해 없
이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1차대전에서의 패배
  이 소식은 지휘관의 폭넓은 관점에서 전쟁을 관찰하고 있던 리스트 연대
의 사색적이고 과민한 상병에게 특히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중대는 1918년 
10월에 플란더스 방어전에 투입되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영국군은 10
월 13일에서 14일 밤에 이프레 남쪽에서 가스 공격을  해왔다. 워빅 근처의 
한 언덕에서 히틀러는  여러 시간 동안이나 빗발치는  가스 수류탄의 불꽃 
속에 있었다. 아침 무렵 그는 심한 통증을 느꼈고 7시쯤 그는 눈이 멀었다. 
그가 자기 상태를  기술한 것을 보면 눈이 불타는  석탄 덩어리로 변한 것 
같다고 한다. 곧  이어서 그는 포메른에 있는 파제발크 육군병원으로  수송
되었다.
  육군병원 숙소에서는  많은 소문들이 떠돌았다.  왕조가 붕괴되었다느니, 
전쟁이 곧 끝날  거라는 등의 어지러운 소문들이었다. 히틀러는 특유의  책
임감으로 그 지역의  불안, 파업, 불복종 등을 걱정하였다. 물론  그는 자기
가 보게 된  여러 징후들을 '각 개인들의  상상력이 폭발'한 것으로만 여겼
다. 그는 이상스럽게도 전국민  사이에 퍼져 있는, 벨리츠 시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강한 불만과  피로의 분위기를 보지 못했다. 11월 초에  눈이 상
태가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신문을 읽을 수가 없었고, 동
료들에게 다시는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말도 했다. 어
쨌든 독일 혁명은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붉은 넝마조각'을  휘날리기 위해서 전선이  아니라 이른바 '임질병원'에서 
나온 '유대인 몇  놈'이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주동한 것이라고 그는 믿었
다.
  1918년 11월 10일에야  그는 '내 인생의 가장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병
원 목사의 부름을 받고  모여든 입원환자들은 혁명이 일어나서 호엔촐레른 
왕가는 붕괴되고 독일에 공화국 (바이마르 공화국)이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히틀러는 이 과정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 늙은 성직자는 안으
로 조용히 눈물을 삼키면서 왕가의 공적을 생각했고, 거기  참석한 사람 중 
누구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그가 전쟁은 패배하
였으며, 제국은 적의 수중에  넘겨졌다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더 이
상 참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견디는 것은 불가능했다. 눈 주변이 다시 캄
캄해져서 나는 더듬고  비틀거리며 침대로 돌아와서 내  자리에 몸을 던졌
다. 타는 듯한 머리를 이불  속에 틀어박았다. 어머니의 무덤에 섰던 날 이
후로 나는 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히틀러에게 그것은 새로운  환멸이었다. 인생이 초기에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었던 기억만큼이나  과격하고 이해되지 않는 
환멸이었다. 그는 이 환멸을 신화화시키는 과장법으로 자기  인생의 지속적 
주제의 하나로 만들었다.  정치를 하겠다는 결심도 바로 거기서 나온  것이
다. 그로써 그의  초개인적인 주장의 의지가 얼마나 고집스럽고 격분한  것
이었는지 드러난다.
  거이 모든 중요한 연설에서 그는  거의 제의적인 방식으로 이 문제를 거
론하였으며, 혁명을 가리켜서  자기 인생을 각성시켠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언제나 역사서술이  뒤를 이었다. 전쟁의 그런 급격한 변화가  자
기에게 불러일으켰던  내동댕이치는 인상은, 심지어  1918년 10월 눈이  먼 
것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히스테리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추측까지도 만들어
냈다. 히틀러 자신도 때로는 그러한 추측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 주기도 했
다.
  1942년 2월 장교와 사관  후보생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그는 자신이 완전
히 눈이 멀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자기 민족이 노예가  된 세상만을 보
아야 한다면  눈의 빛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도대체  내가 
볼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라고 그는  말했다. 1944년 패전이 다가오고 
있을 때 그는 알버트 슈페어에게 의기소침해서 자신은 1차 대전 말에 그랬
던 것처럼 다시 눈이 멀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의 투쟁)의 한 구절도 그러한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히틀러는 거절
할 수 없이 귓속으로 울려오는 외침소리에 깨어났다고 한다.  그 외침은 자
신이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로부터  깨어난 것이었다. 천재란  "깨달음으로 
인도되기 위해서... 형식적인 자극"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런 뜻이다. "평범
한 일상사에서 보면 중요한 사람들도 자주 중요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
고 자기 주변의 평균수준을 거의 넘어서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사
람들이 실패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는 상황이 닥치면 눈에 보이지도 않던 평
범한 인간의 내부에서  갑자기 천재적인 천성이 솟구쳐 나오는 것이다.  그
때까지 시민적인 사소한 일상에서만  그를 바라보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는 일도 드물지 않다... 이러한  시련의 시간이 오지 않는다면, 보통 사람은 
이 수염도 안 난 어린 소년이  몸에 젊은 영웅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짐
작도 못할 것이다. 운명의  망치질은, 어떤 사람을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리
지만 어떤 사람은 연마하여 강철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한 언급은 물론 특수한  소명의식을 중개하기 위해서만 생각해낸 것
이다. 옛날 보헤미안, 무감각, 어두운 몽상의 시절을  선별된 인간의 천재성
과 연결시키기 위한 것이다. 11월의 체험은 그를 마비시키고  어쩔 줄 모르
게 만들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음을 알았다." 4년 간의 전쟁은 증오스
런 시민세계의 의무와  질서의 요구에서 그를 보호해 주었다. 직업과  생존
의 문제들을 미루어주었다. 그  모든 일이 이제 새삼스럽게 다시 밀려왔다. 
전보다 나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교육도 받지 못했고, 직업도, 목적도, 거
처도, 아는 사람도 없었다.  패배와혁명이 소식을 듣고 그는 절망감에 사로
잡혔다. 국민적인 상실감이 아니라 개인적인 상실감을 느꼈던 것이다.
  종전은 상병 히틀러에게서 전쟁터에서 얻은 역할을 빼앗아갔다.  그는 군
에서 제대했을 때 고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찌할 바 모른 채  자기 군대
의 명예였던  군기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동지들, 그리고 가까웠던 
사람들이 4년 간  견뎌온 짐을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것이라고 던져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병사생활의 두려움과  굴종을 애국심 
뒤에 감추는 일을 중단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헛일이었다. 
희생도 결핍도 헛일이고,  때로는 여러 달이나 계속된 굶주림도 갈증도  헛
일이고, 우리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의무를 행하던 그  모든 
시간들이 헛일이고 이 전쟁에서 죽은 2백만의 죽음이 헛일었다."
  혁명의 진행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히틀러를 그토록 가슴아프게 한 것이
었다. 왕가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제국 지도층에 대한 존경심만큼이나  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단순히  '우익' 만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패
전, 그리고 주어진 역할이 상실은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혁명을 가능케 한 
우울한 상황은 그에게  아무런 보충 역할도 제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마음속으로 존경하던 위대함,  정열, 죽음의 예찬 등을  부정하였을 뿐이다.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가장 원초적인 동기에서 나온 군사 파업이었다.  그 
동기는 그에게는 극히 진부한 것으로서 살아남으려는 의지였다.

    이념이 결핍된 혁명
  실제로는 혁명이 아니었던 이 혁명은 무엇보다도 어찌할 바 모르는 천박
한 몸짓으로 나타났다. 독일 전역에서 11월에 탈영병들이  길거리로 몰려다
니면서 장교사냥을  벌였다. 그들은 떼를  지어서 장교들을 노리고  있다가 
붙잡기만 하면 조롱섞인 모욕적인  말을 하면서 그들의 훈장, 견장, 계급장 
등을 떼어냈다.  그것은 몰락한 정권에  대한 때늦은 폭동이었으며  이해가 
되면서도 무의미한 짓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상당한  정도의 상처입
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장교들과 법과  질서를 옹호하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혁명에 대한  원한을, 그리고 아울러 이러한  부작용을 
수반하고 시작된 정권에 대한 원한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게다가 역사는 이 혁명에 적정의 순간을 주지 않았다.  혁명은 그런 절정
을 통과해야만 비로서  국민의 의식 깊숙이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1918
년 10월에 벌써 새로운 수상인 바덴의 막스 왕자는 미국 대통령과 국내 여
론에 따라 국내정치의 개혁을 행하였다. 독일의 의회주의  정부형태를 도입
하는 것이었다. 11월  9일 오전에 어느 정도 독단이 개입된  형태로 황제의 
왕권포기 결정이 선포되었다.  혁명은 채 시작도 되기 전에 목적지에  도달
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의지
를 보존할  가능성을 잃어버렸다. 프랑스  혁명에 나타나는 정구장  맹세의 
바스티유 함락과 같은 기회는 오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은, 가능하다면 단 하나의 전망만을 가지게 되었다. 
즉 모든 새로운  현상의 매력적인 힘을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
나 새로운  권력자인 프리드리히 에버트와  사회민주당은 부지런하고 걱정 
많으며 회의에 가득  차고 선량한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처음
부터 왕실 고문관과 상공업 고문관을 없애고 훈장과 명예훈장 등을 없애버
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겼다. 그들의 전체적인 행동방식은 매우  꼼꼼하
고 심리적인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들은 현재  이 순간이 요청을 헤아리는  감각과 사회적인 구상도 
가지지 못했다. 당시의  체험자가 말하듯이 '그것은 이념이  결핍된 혁명'이
었던 것이다. 어쨌든  패배하고 실망한 국민의 감정적인 고통에 대한  답변
은 아니었다. 1919년 전반기에 초안이 짜여서 8월  11일에 바이마르에서 가
결된 헌법  (바이마르 헌법)은 스스로의  의미를 설득력있게  정의내리지도 
못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 헌법은 민주적 권력질서의  기술적인 도구로
서만 이해되었을  뿐, 권력이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혁명세력은 우유부단과 용기의 결핍으로 인해 아주 일찌감치 두 번째 기
회를 잃었다. 새로운 권력자들은 사회의 지배적인 탈진상태와  러시아 혁명
의 끔찍한 모습에 대한  국민의 공포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무
력감과 패전국의 수많은  문제들에 짓눌려서 노동위원회와 사병위원회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정치적 개혁의지를 제한시켰다. 여러  가지 사건
들은 이제 쓸모없게 되어버린 전통적인 과제를 수행할 준비만을 위한 것이
었다. 혁명은  심지어 우익측에서도 환영받았고 '사회주의'와  '사회화'는 보
수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상황을 해결해주는 요술공식으로 여겨졌다.
  그에 반해서 새로운 지도부는  안정과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정치 계획밖
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전통적인 권력들과 결탁하여 안전과  질
서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단  한 번 소심한 사회화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토지 소유라는 봉건적 상황은 전혀  개혁되지 않았고 
관료계급은 서둘러서 자기 지위만을 확보하였다. 왕조만 빼면  그때까지 결
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회  계층은 새로운 국가체제로 넘어가는 과정
에서 거의 권력 손실을  입지 않았다. 히틀러가 나중에, 11월의 권력자들이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을 누가 방해했더란 말인가, 그들은 그럴  권력
을 가지고 있었다고 비웃은 것도 근거가 없는 일은 아니다.
  좌익 과격파는 혁명의 미래상을 구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대중의 추종도 없었고, 그들이 오랫동안이나  갈망하던 '반역자의 에너지'도 
없었다. 저 유명한  1919년 1월 6일에 1만여 명을 헤아리는  혁명지지 대중
이 베를린의 승리가도에 모여들어서, 저녁때까지 쉬지도 않고  토론을 벌이
던 혁명위원회의 신호를 기다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떨면서 지치고 
실망하여 흩어졌다. 이  사건은 사상과 행동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극복하
기 힘든 것인가 하는 사실만을 보여주었다. 좌익 혁명파가  특히 반혁명 군
부와 대립하면서 1월 중순에 나라  안은 큰 소요와 불안과 내전 비슷한 대
립상황까지 치닫게  되었고 공산당의 탁월한  지도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립크네히트가  살해당하였다. 혁명은  역사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결과도 초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방향을 상실한 여론은  그 국면의 싸움과 논쟁에서  공격이 아니라 오직 
방어만 새온  바이마르 공화국에 오히려  불리하게 돌아갔다. 국민의  의식 
속에서 이 모든  것은 '혁명' 탓이었다. 이렇게 불행한 시기에  태어난 국가
가 암암리에 모반, 패배, 민족적 치욕 등과 관련을  맺고 있다고 여겼다. 그
리고 이러한 생각이 전부터 국민이 무질서의 이미지들과  뒤섞였다. 공화국
이 '더러운 혁명',  그러니까 절반의 혁명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만큼 국민
의 의식 속에서 공화국과 그 성공을 해친 것은  없었다. 정치적으로 온건한 
편이었던 국민 다수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수치심, 슬픔, 혐오감을 느꼈다.

    평화를 경시한 베르사유 조약
  베르사유 평화협정은 분한  마음만 더하게 만들었다. 국민감정에  따르면 
전쟁은 방어전이었다. 전쟁  후반부에는 과장된 전쟁을 위한 토론 같은  것
은 국민의식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발언은 독일 국민에
게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왕조가 몰락하고 서유럽의 헌법을  받아들이면 전
승국은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미리 만들어진 정권을 위하여  사후업무를 수
행하는 사람들에게 화해의 마을 가질 것이라는 착각이었다.  베르사유 조약
의 기본 원칙이 되는 '세계평화의 질서'라는 선언서는  모든 보복행위, 명백
한 부당함, 강제적인 조약형식 등을 금지하고 있었다. 합리적이면서도 비현
실적인 이 희망의 시대를  '평화협정 기간의 꿈나라'라고 부르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다가  1919년 5월 초에 평화를  위한 조건들이 공표되었을  때 
온 나라는 더욱더  제정신을 잃고 분노로 들끓었다. 공적인 흥분상태는  정
치적으로 필립 샤이데만 수상과 브로크도르크 란차우 외무장관의 퇴진으로 
표현되었다. 
  외적인 상황은 악의와 모욕적인  생각을 가진 전승국들에 의해 결정되었
다. 1919년 1월 18일로부터 정확하게 50년 전에 도이치 제국이 선포되었다. 
1월 18일에 회의가 열리고 서명장소도 50년 전과 동일한 선택된 것은 이해
된다고 치자, 그러나  오스트리아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
에서 암살당한 5주기가 되는 6월  28일을 조약서명 날짜로 정한 것은 윌슨 
선언의 야단스런 순진성에 대한 냉소적인 반대행위였다.
  이 조약에서, 우익이나  좌익 가리지 않고 모든 진영과 당파들에  이르기
까지 잊을 수 없는 치욕감을  느끼도록 만든 악몽은 물질적인 부담보다 오
히려 심리적인 부담이었다. 회의에서 논쟁의 대부분을 이루는  영토반환 요
구, 전비 보상, 수리비  요구 등은 '카르타고식의 냉혹성'만을 가진 것이 아
니라, 의심할  것이 없이 제국이  브레스트-리토브스크 조약에서  러시아를 
향해서, 그리고 부카레스트 조약에서 루마니아 향해서 얻어냈던  부당한 조
건들에 비길 만한 것이었다.
  참을 수 없는 모욕적인  '수치감'은 머지않아 우익의 선동에서 가장 공격
적인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이것은 국가적인 체면문제였다. 무엇보다도 일
일이 지명된 도이치 장교들이  연합군 군사재판의 판결을 받도록 인수하라
는 제228조항과 독일이 전쟁발발에 대해서 유일하게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
는 그 유명한  제231조항이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440개 항목이  조약
문안에는 너무나  명백한 모순과 부당성이  드러나고 있다. 전승국은  세계 
심판자 같은 몸짓으로 자신들의  합법적인 요구에 대해서 죄를 고백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사실은 모두가 이해득실이 달린 문제들이었다.
  이 조약문안들은 복수심에 불타는  도덕성의 무의미한 행진으로 아주 많
은 증오와 정당한 비웃을 샀다. 연합국 내에서도 그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예를  들면 미국 대통령의  선언문에서 세계를 화해시키는  원칙의 
품위를 지녔던 민족자결권 조항도  그것이 도이치 제국에 유리하게 작용하
게 될 성싶으면  언제나 제외되곤 하였다. 남부 티롤, 수데텐  지방, 단치히 
같은 순수한 도이치 영토들도 분리시키거나 독립시켰다. 그에  반해서 분열
된 합스부르크  왕조의 도이치 부분이  독일에 통합되는 것도  금지하였다. 
여러 민족이 섞인 지역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주왕국의 경우에는 파괴
되고, 유고슬라비아나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에는 새로 건국되었다. 민족주
의는 전체적으로 승인되었으나 국제 연맹의 이념이라는 측면에서는 거부되
었다. 이  조약은 1차대전이 일어난 1914년에  등장하였던 원래의 갈등  중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평화조약의  최고 목표는 평화'라
는 생각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경시하였다.
  그 대신에 조약은  전쟁과 고통을 넘어 세대를  지나면서도 보존되어 온 
유럽의 연대감과  공동의 유산이라는 의식을 광범위하게  파괴하였다. 새로
운 평화질서는  이러한 의식을 부활시키려는  의도를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엄밀하게 살펴보면  독일은 언제나 배제되어 있었고,  민족단합조차
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차별대우는  도이치 사람들이 유럽의  결속에 
감정적으로 더욱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전승국들의 말꼬리를 잡아서 그들의  위선을 강제로 보여줄 남자가 나타
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실제로  히틀러는 처음에 충실하게  윌슨과 
베르사유 조약문의 가장 중요한  신봉자인 척함으로써 외교적인 성공을 거
두었다. 이 조약은 사라져버린 낡은 질서의 반대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
을 옹호하였다. 당시의  눈 밝은 어떤 관찰자가 파리에서 펴오하조약이  승
인되던 날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 무시무시한 시간이 시작되고 있다. 그것
은 아마도 세계대전 보다 더욱 무서운 폭발로 끝나게 될 폭풍 전야의 무더
위"라고 적었다.
  국내정치적으로 보면 평화조약의 결정에 대한 분노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원한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공화국은 이러한  '치욕적 강제명령'의 강
도와 수차를  모면할 능력이 없음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공화국이 
적어도 어떤 모습으로 얼마나 무능한지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당황, 우연, 
평화의 기대, 피로의 결과였다.  공화국의 무능에서 생겨난 수많은 의심 말
고도 이제는  대외적인 약점에서 생겨난  악평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공화국이라는 개념을 수치,  불명예, 무기력과 동의어로 
여기게 되었다.  기만과 강요를 통해서  완전히 낯선 공화국이라는  형태가 
도이치 민족에게  억지로 주어졌다는 감정은  이제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 
그 모든 부담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기회가 없지도 않았다는 것
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그 행운의 기간 동안  공화국은 "사
람들의 충성심도 정치적인 상상력도 진짜 자기편으로 삼을 줄을 몰랐다."


    히틀러는 어디 있었나
  이러한 과정들은 공공의식의 정치화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그때까지는  정치 이전 공간에 움츠리고 있던 광범위한  계
층이 갑작스럽게 정치적인 정열, 희망, 절망 등으로  가득 채워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또한 육군병원에  있는, 서른 살 가량된 히틀러를 사로잡은  것이
기도 했다.  막연하지만 과격한 불행과 배신감이었다.  그것은 그를 정치에 
한걸음 더 가까이  데려오기는 했다. (나의 투쟁)에  보면 정치가가 되려는 
결심을 1918년 11월 사태와 연결시키고 있지만 그것은 아직 그렇게 확고한 
것은 아니었다. 거의 일년쯤 지나서 그는 어떤 작은  집회에서 열기에 취한 
듯 일어서서 말하는  중에 연설가로서의 자기 재능을 발견하고, 희망  없이 
막혀 있던 존재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출구와 미래를  갑자기 보게 된
다.
  어쨌든 이런 해석은 다음  몇 달 동안의 그의 태도를 설명해  준다. 히틀
러는 그 사이에 눈이 다  나아서 11월 말에 파제발크 육군병원에서 나오자 
뮌헨으로 가서 자기 연대의  보충대대에 신고하였다. 뮌헨은, 11월 사태 과
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도이치  영주가문의 붕괴가 시작된  곳으로, 
정치적인 흥분과  활기에 넘치는 도시였지만  그는 거기 끼여들지  않았다. 
정치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고 거기 휩쓸려들거나 자극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빨갱이의 지배가  싫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뒷날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공화국 관심이 적었다는  사실을 입증하지는 못한
다. 어떤 활동이든지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는 2월 초에  오스트리아 국
경에서 멀지 않은 트라운슈타인  근처 전쟁포로 수용소에서 위병근무를 자
청하였다. 그러나 몇백  명의 프랑스군과 러시아군 포로들이 한 달쯤  뒤에 
석방되고 나자 그는  다시금 당혹스런 처지에 빠졌다. 아무런 결심도  못한 
채 그는 뮌헨으로 돌아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는 다시 위풀밭 있는 막사에 숙소를 
얻었다. 아마도 그 결심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당시 지배
하고 있던 공산군대에 속해서 붉은 완장을 차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붉
은' 군대 바깥에  있는 의용군이나 단위부대에 합류할 수도 있었겠지만  어
쨌든 붉은 군대 안에서 지배적인 혁명사정을 계속 들여다볼 기회를 덤으로 
얻었다. 이 시기에 그의 정치 의식이 얼마나 미약했고  감수성이 얼마나 약
했던가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일은 없다. 뒷날 그는  '볼셰비즘'이란 말
만 들어도 흥분하고 화를 냈다. 뒷날의 온갖 양식화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에 그는 세계혁명의 본부에서 병졸 노릇을 하고 있다는 모욕감보다는 정치
적 무관심이  더 강했던  것이 분명하다.(1918년부터 191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안 독일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 계속되었다.  1919년 4월에는 
뮌헨 시 일대에 소련식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당시 사회민주당의 
지배 아래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이 공산주의 폭동을 과거의 군인
들과 의용군의 힘을  빌어 진압하였다. 히틀러는 반공주의자였으면서  뮌헨
의 공산군대에 들어간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는 군대  바깥에서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군대  세계는 
그가 자신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사회체제였다. 제대  결심은 난파한 인간
들의 이름 없는  세계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개인적 상황이 전망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꼈다. "이 시기에  내 머리
에서는 끝도 없는 계획들이  줄을 이었다. 하루종일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모든 사색의 종말은  언제나, 이름 없는 인간인 
나는 그 어떤  행동을 하기에 가장 형편없는  전제조건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확인이었다."
  이 말은 노동이나, 생업, 시민적인 지위에 대한 생각이 그에게 얼마나 멀
리 있었나 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름 없다는  의식이 그를 괴롭혔다. 그의 
삶에 관한 서술에 따르면 그는  이 시기에 정치계에 진출해서 소비에트 정
부 '중앙 위원회의 불쾌감'을 사게 되었고, 그래서  4월 말에는 체포될 지경
에 이르렀지만 자기가 지니고 있던 기총을 들고 체포명령을 피해서 도망쳤
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때 중앙위원회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은 오히려 당시  그가 당혹감, 수동성, 기회주의적인 적응력 등이 
뒤섞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용군 에프의 군대가  다
른 부대와 힘을  합쳐 뮌헨을 떨게 만들고, 소비에트 지배를  붕괴시켰던 5
월 며칠 시끄럽던 시기에도  그는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않았다.  한 동안 
그의 추종자였던 오토  슈트라서는 뒷날 명백하게 질문했다.  "이날 히틀러
는 어디 있었나?  우리 대열에 끼어서 싸웠어야 마땅한  이 병사는 뮌헨의 
어느 구석에 박혀  있었는가?" 아돌프 히틀러는 진압군에  섞여 있지 않았
다. 뮌헨에  진입하던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가  그를 아는 몇몇  장교들이 
개입해준 덕분에 석방되었다.  중앙위원회가 체포하려 했다는 이야기는  아
마 이 사건을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에프의 뮌헨 진군에 뒤이어서 소비에트 지배 시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 
졌다. 이 조사작업에서  히틀러가 어떤 역할을 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
지 추측들이 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제2보병연대에서 투입한  조사위원회
를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했다는 사실이다. 아직 덜 끝난  전투의 영향을 
받아서, 심문은 시작되자마자 너무나 냉혹한 판결로 끝나곤 하였다. 이러한 
심문을 위해서 히틀러는 정보를 물어오고, 소비에트 정권에  합류하였던 동
료들을 찾아내는  등 자신의 의무를  아주 충실하게 실천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얼마  안 되어서 '국민적 사고'를  위한 교육과정에 파견 되었
다.

    혁명에 대항하는 혁명가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을 짓눌러온  익명성에서, 그
리고 얼굴 없는  대중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자신이 조사위원회를  위
해서 '최초로 어느 정도 순수하게 정치적인 활동'이라 부를 만한 임무를 맡
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는 이리저리 밀려다녔다. 그러나 이 새로운 
방향은 그에게, 반사회성과 소명의식의 이상한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만 빛나는 성장기를 갑자기 종결지어 주었다.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면  정치적으로 세기의 현상이  될 아돌프 히틀러가 
서른 살이 되도록 정치에 아무런  활동적인 참여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극
히 이상하다. 비슷한 나이에 나폴레옹은 이미 제1통령이  되어 있었고 레닌
은  추방기를 거쳐  망명중이었으며, 무솔리니는  사회주의적인 (아반티(전
진))지의 주간이 되었다.  그에 반해서 히틀러는 곧  그를 세계정복 의지로 
몰아갈 이념들 중  어느 것도 이렇다할 정도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빈의 반유대인 단체말고는 어떤 정당이
나 그  시대의 그 많던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의 정치활동  욕구를 
암시라도 해주는 증언은 없으며, 시대의 상투어들에 더듬거리며  참가한 사
실 이상을 암시해주는 것도 없다.
  정치에서 이토록 거리를 둔  이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의 성장과정
의 특별한 외적 상황과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빈의 고독, 일찍이 뮌
헨으로 이주한 것, 그곳에서 외국인으로 취급당하다가 전쟁이  터지자 전선
으로 갔다는 것 등이다.  그런 인상은 이 시절에 그와 함께한  사람들의 특
성에 의해서도 생겨나는  것이다. '젊은시절의 친구'와 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그들의 기억은 어쩌면 그가  정말 그랬던 것보다 더 결함투성이일 수
도 있다. 그러나 또한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가 그에게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는 뜻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자신 1939년 11월 23일 권력의식의 절정기에 자신의 군 최고사령관들
을 앞에 놓고 혼란스러운 발언을 하였다. 자신은 아주  오랫동안 내적인 싸
움을 한 끝에  1919년에야 비로소 정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
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결심'이었다고 했다. 이러한  발언은 시작의 어려움
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정치적인 경력을 앞에 놓고 내면적으로 
망설였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발언에는 아마도 위대한  창조적 
활동에 비해 '시사 정치'를  개념적으로 하위에 두는 도이치의 전통적인 정
치 경시 풍조도 한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잡을 수 없게  되어버린 젊은 날의 꿈,  '독일 최고의 건축가는 아니라도 
최고 건축가 중 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꿈과 관련시켜 보면 더욱 그렇다. 
전쟁이 한창일 때 그는 차라리 '이름 없는 화가'가 되어 이탈리아를 떠돌아
다녔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다만 자기 종족이 맞이한  죽음의 
위협이 낯선 정치의 길로 자신을 몰아 넣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혁
명이 그에게  정치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는지 이해가 된다.  11월 
사태, 모든 권위의 붕괴, 왕조의 몰락, 세상을 뒤덮은  혼란 등이 그의 보수
적인 본능에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를 적극적인 저
항으로 몰아가지는  못하였다. 소동과 혁명적  책동에 대한 반감은  정치에 
대한 불신보다 훨씬 더 강하였다. 25년이 지난 다음에도  그는 원탁에 앉은 
사람들을 향해서 11월 혁명의  체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혁명가들을 범죄
자들과 동일시하였다. 그들은 '반사회적인 도당'에  불과하고 일찌감치 때려
죽여야 할 존재였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동기, 그리고  자신의 연설의 재능을 체험하고 난 뒤에야  그는 
모든 망설임을 물리쳤다. 정치 경력에 대한 망설임과  질서파괴자라는 무서
운 평판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사라진 것이다. 이제  처음으로 그는 정치로 
다가갔다. 4년 뒤  뮌헨 국민재판 앞에서 변명한 것에 따르면  혁명에 대항
하는 혁명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독특한 세계치유의  열망과 괴물 같
은 특별한 재능에 의해 정치로 이끌려 들어간, 생에  지치고 억눌린 예술인
은 아니었을까? 그의 생이 진행되면서  이 질문이 되풀이해서 나타나게 된
다. 정치는 그에게  오히려 수단으로서 더 중요했던 것이 아닐까  질문해보
게 된다. 즉 정치의 도움을  받아서 연설의 위압, 행진, 퍼레이드, 전당대회
의 연극적 요소, 전쟁에서 군사력을 사용한 멋진 장관  등을 연출해보려 했
던 것이 아닐까?
  낡은 질서의 붕괴가 그에게 그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은 물론 옳은 말이
다. 시민세계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정치가 시민의 경력인 시절에 그는  이
름과 성공을 얻을 전망이  극히 적었다. 그의 불안정한 기질로 보면  이 세
계가 형식적인 엄격성과 진지한 요구를  가지고 있는 한 출세 가능성이 별
로 없었다.  1918년이 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쓰라린 근심만 만들어주었던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에 큰소리로 웃지 않
을 수 없었다."고 그는 썼다.
  그렇게 그는 정치 장면으로 들어섰다.

    중간관찰 : 거대한 공포
  1차대전이 끝났을 때 민주주의  사상의 승리보다 더 확실해 보이는 것은 
없었다. 전후의  혼란과 계속되는 민족간의  다툼과 새로운 국경선들  위로 
민주주의 사상은 시대의 통일원칙으로서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고 높이 솟
아 있었다. 전쟁은 권력요구뿐 아니라 지배체제에 대해서도  결정을 내려주
었다. 거의 모든  중부와 동부 유럽국가들이 붕괴되고 혁명과 소요를  겪으
면서 수많은 새로운  국가들이 생겨났다. 그 국가들은 철저히 민주적  질서
의 개념에 기초한 것이었다. 1914년에 유럽에는 세 개의  공화국과 열 일곱 
개의 왕조들이 있었는데 4년이 지난 지금 왕국과  공화국의 수가 같아졌다. 
의심의 여지 없이 시대정신은  다양한 형식으로 국민주권을 지원하는 듯이 
보였다.
  독일은 잠깐 이 사상에 휩쓸려 보고 난 다음 이런 시대의 경향에 저항하
였다. 민족정당과 클럽들, 전투적인 질서의 의용군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의 혼란 속에서, 전쟁을 통해 만들어진 현실 거부감이 조직화되어 갔다. 이
런 집단들의 눈으로  보면 혁명은 배신행위였으며, 의회민주주의는  낯설고 
강제적인 것이었다. 민주주의란 '연합국(1차대전 승전국) 자본에  의한 착취 
기관'이 아니면 고작해야  '도이치 국민의지에 반대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
는 말이라고 여겨졌다.
  독일의 적국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국가적 저항의 징후들을 보
고, 반항적이고 영원히 권위주의적인 도이치 민족이 민주주의와  시민적 자
결권에 대해서 보이는 반응이라고  여겼다. 물론 여기서 전례 없는 정치적, 
심리적인 부담을  부인할 수 없다. 충격적인  패전체험, 저주받을 형식들을 
포함함 베르사유 조약, 영토 상실, 전쟁배상금 요구,  광범위한 계층의 빈곤
과 영적인 혼란 등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언제나  도이치 사람들과 이웃
나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뚜렷한  문화적 거리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웃나라들은, 이 수수께끼  같은 나라가 원한을 품고서 교화시킬 수  없는 
태도로 옛날의 낡은  상태에 머무르려 한다고 여겼다. 이렇게 시대에  뒤떨
어진 상태를 민족의 특별의식으로  삼고 서유럽의 이성과 휴매니티를 거부
할 뿐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에도 항거하려 한다고 여겼다.  수십 년이 지나
도록 이러한  생각은 국가사회주의의 발생원인에  대한 탐구에서 지배적인 
입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희망들을 약속하고 있는 승리에 찬 민주주의의 이미
지는 사실은 망상에 불과했다. 민주주의가 역사적으로 실현된  것처럼 보인 
순간이 바로 민주주의  위기의 시작이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민주주의 
이념의 원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의문시되었으며, 방금 승리한  것은 또 다
른 운동의 훨씬 더 거친  승리에 추격당하거나 아예 치명적인 위협을 당하
였다. 그러한 반민주적 방향은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에서  거의 비슷한 징
조를 보이면서 나타났다.
  전쟁이 뚜렷한 불만상태를  만들어냈거나 의식화시킨 나라들, 전쟁에  뒤
이어서 좌파 혁명운동이 일어났던  나라들에서 이러한 반민주적 운동은 가
장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운동들 중의 일부는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것이었고, 그  추종자들은 인간이 아직 존중받고,  골짜기는 평화롭고, 
돈이 더 가치가 있던 저 좋던 옛날을 그리워하였다.  다른 일부는 혁명지향
적이고 기존질서를 더욱 무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일부는  소시민 대
중을 이끌었고 다른 일부는 농민이나 노동자층을 이끌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운동에서 사회계층, 이익, 표지들이 서로 뒤섞였지만 그들 
모두는 사회의 더욱 어둡고 더욱 생동적인 심층부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였
다. 국가사회주의는 세계상태를 뒤집어엎을 준비를 하는 유럽  스타일 저항 
운동의 게임규칙을 따른 것이었다 
  국가사회주의는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히틀러가 비웃은  것처럼 지루하고 
고루한 모임들이었다. 그들은  뮌헨의 선술집에서 보잘 것 없는 모임을  가
지면서 국가와 가족의  곤경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이러한 작은  집회
들이, 강력하고 고도로 조직화된 대중을 이끌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에 
도전하고 능가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믿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다음  몇 
년 동안 이 촌스런 연설가들의 모임이 제대 제군들과 프롤레타리아 시민들
이 합세하면서 엄청난  역동성이 생겨났다. 그리고는 적절하게  일깨워지고 
집결되고 제자리에 투입되기만 기다리게 되었다.
  처음에 이런 모임들이 다양했던 만큼이나 내부적으로도 다양한 추진요소
들이 있었다. 1919년에 뮌헨에만 일시적으로 50개 정도의  정치적인 모임들
이 있었다. 그 추종자들은 주로 전쟁 이전 정당의 남은 찌꺼기들로서, 전쟁
과 혁명을 통해서 깨지고 해체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조국' '정신 
노동 위원회' '지크프리트의  반지' '우주당' '노바 바코니아' '사회주의 여성
회' '자유 사회주의 학생회' '오스타라 당'  따위의 이름을 내걸었다. '도이치 
노동자당'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치고,  개념상으로나 현실적으
로 한데 모든 힘은 다름 아니라 압도적인 공포감이었다. 
  우선 아주 직접적인 것으로 혁명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
후로 19세기 내내  유럽 시민 계급을 꿈속에서  괴롭힌 저 '거대한 공포'가 
그것이었다. 혁명이란 자연의 폭력과 같다는 인상, 참가자들의 의지를 고려
하지 않고 원초적인  자연의 힘으로 독특한 결과를 초래하고, 강제로  공포
정치, 파괴, 살인, 혼란 속으로 이끌어들인다는 인상이  사라지지 않고 사람
들의 의식 속으로 파고들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얻게  된 체험은 칸
트가 말하는 인간의 개선시키는  능력이 아니라, 바로 이 공포심이었다. 이 
공포심은 특히 독일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서 모든 실질적인 혁명의지를 변
조시키고 저 '평화의 광신주의'를 만들어냈다.  1918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에
서는 평화와 질서의지를 호소하는  것만으로 거의 모든 혁명봉기가 막혀버
렸다.

    혁명의 위협
  독일 안에서 혁명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지 이  오래된 공포가 되살아났
다. 특히 러시아 10월  혁명과 그 결과 드러난 위협들을 보면서  이 공포는 
더욱 커졌다. 러시아 혁명을 피해 뮌헨으로 모여든  도망자들과 망명자들을 
통해서 야만적인 피의  축제인 붉은 테러에 대한  공포가 민족의 상상력을 
정열적으로 사로잡았다.  뮌헨의 민중지 하나는  1919년 10월에 그  시대의 
공포심과 망상을 잘 보여주는 이런 기고문을 싣고 있다.

  기독교를 미워하는, 할례받은 아시아 사람들은 어디서나 피를  뚝뚝 흘리
는 손을 쳐들고  우리를 집단으로 목조르려고 하는 슬픈 시대다!  이사샤르 
체더블룸, 본명  레닌이라는 유대인이 행한  기독교도 학살은 칭기즈  칸을 
무색케 할 정도이다. 헝가리에서는 그의 제자인 콘, 본명 벨라 쿤이 살인과 
약탈의 훈련을 받은 유대인  테러집단을 거느리고 불행한 나라를 휩쓸면서 
끔찍한 교수대 사이로 다시 이동 교수대 기계까지 끌고다니며 시민과 농부
들을 학살하고 있다. 훔쳐서  만든 궁중행렬, 화려하게 치장된 하렘이 명예
로운 기독교도 처녀들을 열 명  이상씩 유린하고 치욕을 주는 데 이용되고 
있다. 그의 장교인  사무엘리는 지하감옥 한 군데서만 60명의 기독교  사제
를 잔인하게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의 몸을 찢고 살이  피범벅이 
되도록 팬 다음에 그 시체를 토막냈다. 여덟 명의  살해된 성직자는 자기가 
봉직하던 교회문에서 십자가에 매달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뮌헨도 이제... 
이와 똑같은 잔혹장면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쪽에서 건너온  잔인한 소식을 들으며 얻게  된 공포는 완전히 
근거가 없는 것만은 아니었으며 믿음직한 증언들도 있었다.  소련 비밀경찰 
우두머리의 한 사람인  레테 라치스는 1918년 말에, 죄냐 무죄냐가  아니라 
사회적인 소속계층이 바로 형벌과 숙청을  뜻하게 된 이유를 이와 같이 제
시하였다. "우리는 부르주아지라는 계급을 근절시켜야 한다. 여러분은 어떤 
개인이 소비에트 권력에  해로운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필요가 없
다. 체포된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질문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은 이렇다. 즉 
그는 어떤 계급에  속하고 있는가, 어디 출신이며, 어떤 교육을  받았고, 직
업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피고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것이 붉은 테
러의 정수다."
  이것은 국가사회당 지도부의  초기 호소문에 대한 답변처럼  들린다. "여
러분은 도시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가로등 기둥에 내달리는 것을 보려고 
하는가? 여러분은 러시아와 비슷하게 볼셰비키 살인 위원회가 각 도시에서 
활동하기를 기다리려는 것인가...?  여러분은 여러분의 처자식의 시체를  넘
어가려는 것인가?" 혁명의 위협이 흘러나오는 원천은 유럽 전체에 퍼져 있
는 몇 명의  배신자들이 아니라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러시아, 히틀러가  표
현한 대로 '잔인한 권력 덩어리' 자체였다.
  러시아의 새로운 혁명정부는  승리를 확신하고서 국제프롤레타리아의 단
결된 힘으로 독일을 정복하는 것이 세계혁명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한 걸음
이며, 승리가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이것은 필립포
투라티가 '볼셰비키의 도취'라고 명명한 증세의  일부였다. 소비에트 밀정들
의 보이지  않는 활동, 계속되는  불안, 바이에른의 소비에트 혁명,  1920년 
루르 지방의 소요,  그 이듬해 중부 독일의  궐기 함부르크의 반란, 뒤에는 
다시 작센과 튀링겐  지방의 반란 등, 소비에트 정권의 항구적인  혁명위협
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배경이되고 국민적인  거부감에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위협은  특히 초기 히틀러의  연설에서 지배적인 것이었다.  그는 
'붉은 학살사령부'의 활동,  '살인집단' '볼셰비즘의 피의 늪'  등을 날카로운 
색채로 묘사하였다. 그의  말로는 3천만 명 이상이 러시아에서  "고문을 받
아 천천히 죽어가고, 일부는  단두대에서, 일부는 기관총이나 그 비슷한 방
법으로 일부는 진짜 도살장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수백만  명의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 굶주림의 파도가  계속 밀려오고 있
음을 안다... 그리고  이 재앙이 가까이 다가와 독일 위로  넘쳐들어오는 것
을 본다."고 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지식인층은 집단학살로  근절되어버렸고, 경제는  아예 
망가졌으며, 네바에 있는  수천 명의 도이치 전쟁포로는 물에 빠뜨려  죽였
거나 아니면 노예로 팔았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에  '끝없이 계속되는, 영원
한 두더지 방식으로' 독일에서도 혁명적인 파괴를  위한 전제조건들이 무르
익어 간다고  했다. 언제나 되풀이되는 주장은  '러시아가 우리 앞에  있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이미 권력을 장악한 다음에도 히틀러는 경
력의 초기에 자기를 사로잡았던 '국제적인 공산주의의  증오독재에 대한 두
려움'을 다시 이용하였다.  "볼셰비키 혁명의 혼란이 성공하게 될  경우, 사
람으로 가득 찬  이 오래된 대륙이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립니
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 혁명 위협에 대한 거부감에 힘입어서 국가사회주의
는 정열, 공격성, 내적인 결속 등을 얻었다.  히틀러는 언제나 국가사회당의 
목표는 "극히  간단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이  절멸과 근절"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것도 "비할 바 없는, 천재적으로 만들어진 선전기관과 계몽
기관"의 힘으로, 그리고 "모든 마르크스주의  테러에 대해서 그보다 10배나 
큰 테러로 맞설 준비가 되어 있는, 가차  없는 힘과 가장 잔혹한 결단력"의 
운동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와 비슷한 생각들을 가지고  비
슷한 시기에 무솔리니가 '전사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새로운 운동은 그로
부터 '파시스트'라는 칭호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혁명공포만으로 저 격렬하고  집요한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세계적인  추세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도록 하고, 게다
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뜻하고 있던 혁명에  의문을 가지도록 만드는 
에너지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하고 원소적인  추진력이 덧붙여
져야 한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전통적인 표상을 향하여 훨씬  더 
광범위한 공격을 펼치는 혁명의 전위로서 두려운 것이었다.  은유적인 전복
이념의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현상, 즉  근본적으로 '유럽의... 문화에  대한 
선전포고'가 두려운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자체는 이러한 시대의 공포심
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극적인 이미지에 불과하였다.

    유럽의 문명비관주의
  공포심은 단순한 정치적 전복이념을 넘어서서 시대의 지배적인 기본감정
이었다. 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위대성, 친근감, 왕조들,  극히 확실한 서류 
등을 지닌 전쟁 이전의 유럽뿐  아니라 한 시대의 작별을 고했다는 막연한 
느낌이 공포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낡은 지배형식과 아울러 삶의  친근한 
형태들도 망가졌다. 불안, 정치화된 대중이 과격주의, 혁명의  혼란 등은 전
쟁의 후유증이었을 뿐 아니라, 낯설고 혼란스럽게 다가오는  시대의 전조로 
이해되었다. 새로운 낯선 시대에는 전에 유럽을 위대하고  친근하게 만들었
던 것들이 더는  소용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발밑에서  딸이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실제로 한 시대가 스스로의 과도기를 이토록 뚜렷하게 느낀 경우는 역사
상 매우 드물었다.  전쟁은 분명하게 이 과정을 촉진시켰고 변화과정에  대
한 표상을 아주  일반화시켰다. 이제 처음으로 유럽은 미래의 삶의  형식이 
어떤 모양이 될까  하는 개념을 가졌다. 그 동안은 극소수의  기본감정이었
던 염세주의가 이제 시대 전체의 기본 분위기가 되었다.  시대는 유명한 책
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내일의 그림자 속에' 들어 있었다.
  그 그림자가 모든  것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전쟁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본주의 질서를 시대의 현상으로 만드는, 새롭고 거대한  조직화 형식들을 
도입하였다. 합리화와 컨베이너  벨트, 기업합동, 재벌 등의  현상들은 모든 
작은 존재들의 구조적인  무기력을 전례 없이 분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세
계전쟁 이전의 마지막 30년 동안에 대도시의 자영업자 수는 이미 절반  가
량이나 줄었다. 이제 그  숫자는 다시 급격하게 줄었다. 전쟁과 인플레이션
이 물질적 기반을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개인을 빨아들여서  소비하고 내버
리는 익명의 경쟁사회에 대한 공포가 전보다 더욱 뚜렷하게 느껴지게 되었
다. 수많은 당시의 상황분석에  보면, 이러한 공포가 확대되어 개인의 존재 
가능성 자체가  없어진다는 공포가 되었다. 개인은  해체되어 기능이 되고, 
인간은 '의식 없는 기계'가 되어서  조망할 수 없는 과정 속의 일부로 편입
된다. 그것은 광범위한 거부문학이 내용이었다. "존재는 다름아닌 공포로만 
보인다."
  규격화된 흰개미 같은  존재방식에 대한 공포는 점점 커가는 도시화,  엄
청나게 많은 집들, '잿빛  도시의 벽' 등에 대한 표현들에도 나타난다. 그리
고 고요한 골짜기에 부패처럼 번져나가는 공장 굴뚝을 가진 산업체에 대한 
탄식 등에도 나타난다. 가차없이 계속되고 있는, '지구가  지상의 재료와 에
너지를 다 써버리는  단 하나의 공장으로 바뀌는' 과정을 겪으면서  진보에 
대한 믿음이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뒤집혔다. 문명이 세계를  파괴할 것이며 
지구는 "농업지역이 섞여 있는 시카고"로 변하게 될 것이라는 항의의 말이 
나왔다. (민족관찰자)지의  초기 발행본들은 이렇게  친숙한 것이 몰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의 기록이다.  "우리 도시들은 얼마나 더 커질 것인가. 반대
의 움직임이 나타날 때까지, 막사들을 부수로 돌더미를  깨뜨리고 구멍들을 
만들어 바람을 통하게 하고... 성벽들 사이에 정원을  만들고 사람들이 숨을 
쉬게 될 때까지인가?"
  미리 생산된 부분들을 조립해서 만드는 조립식 건축물,  르 코르뷔지에의 
거주용 기계, 바우하우스 양식, 강철관으로 만든 가구  등은 '기술 신즉물주
의'로서 전통적인 의식에 저항감을 불러일으켰다. 전통적인 의식은 이 새로
운 양식을 오직 '감옥 양식'이라고만 여겼다. 현대  세계에 반대하는 정서는 
20년대의 광범위한 전원주택 운동, 특히 아르타만동맹에서 나타난다. 이 운
동은 땅과 결합된 단순한 생활의 행복을 '아스팔트  문명'에 대비시키고, 대
도시 대중세계의 인간성 상실에 맞서 자연과의 결합을  내세웠다. 갑작스럽
고도 도전적으로 ,타당한  규범과 결별하는 것은 도덕의 영역에서 가장  두
드러지게 나타났다.  (공산주의의 성윤리)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다름아닌 '자본주의의 나쁜  소산'일 뿐이다. 혁명은 결혼제도를  없애고 낙
태, 동성애, 이중결혼,  근친 상간 등에 대한 형벌규정도 없앨  것이라고 했
다.
  그러나 '규범적 도덕의  대표자이고 옹호자'라고 자처하면서 도덕에 대한 
도전을 개인적인 위협이라고  느끼는, 광범위한 중간계층 시민들이  감정에 
있어서, 초기 소련에서 생각하듯이 결혼이 단순한 등록업무라는  생각은 참
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성적인 욕구는 갈증처럼  하나의 기본적인 욕
구이므로 다른 사정 없이 간단히  만족시킬 수 있다고 여긴 '컵의 물 이론'
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폭스트롯 춤과 짧은  치마, '제
국 하수구  베를린'에서의 오락욕구,  성 병리학자  마그누스 히르쉬펠트의 
'지저분한 그림들'이나  시대의 남성상 ('찰스턴 바지에  크레이프 신발창을 
댄 고무신사, 올백으로  빗어넘긴 번쩍이는 헤어스타일') 등은 대다수 사람
들의 의식에 상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 돌아보면 역사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이다. 20년대의 도전적인 연극  무대에서는 부친살해, 근친상간, 범죄, 시대
의 저급한  취향 등이  시대를 비웃고 있었다.  브리히트와 바일의  오페라 
(마하고니)에서 배우들은 무대  앞쪽 가장자리로 나와서 다음과 같은  말이 
적인 플랜카드를 보여주었다. '우리 도시들의 혼란 상황을  위해서!' '사랑을 
사고팔기 위해서!'  '살인자의 명예를  위해서!' '비열함이  영원히 계속되도
록!'
  미술에서의 혁명적인 시작은  이미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완성되었다.  히
틀러 자신이 처음에  빈에서, 그리고 뒷날 뮌헨에서 참여하지 않은  증인이
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한줌 몽상가들의 아웃사이더 행위로  여겨 
지나쳐버렸지만, 전복, 혁명, 해체에 관한 그림들이 홍수를  이루게 된 지금 
전통적인 유럽의 인간상에 대한 선전포고로 여겨지게 되었다. 야수파, 푸른 
기사파, 다리파  혹은 다다 등은 혁명만큼이나  과격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인기있는 용어였던 '문화 볼셰비즘'이란 말은 이러한 내면적인 맥락의 의식
을 보여준다. 무정부주의,  멋대로 구는 것, 형식 없음 등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반응이 나타났다 .현대예술이란 '혼돈의 졸작'  이라는 판결이 내려졌으
며, 이 모든 징후들이  뭉쳐서 복합적인 공포심이 되었다. 시대의 유행이던 
염세주의는 이러한 공포심을 위해서 '서양 몰락'의 형식을  찾아냈다. 이 모
든 원한들이 뭉쳐져서 단 하나의  절망적인 방어의 행동이 되는 날을 두려
워해야 하지 않겠는가?

    계몽주의에 반대하는 거대한 경향
  시대에 뒤진, 혹은 체면을  잃은 사회적, 문화적 형식들에 대한 파괴욕구
는 도이치 사람들의  보수적 기질에 특별히 거슬리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저항감은 바로 독일에서  19세기 말의 분위기와 논점들과  결합될 수 있었
다.
  기술적, 경제적 현대화 과정은  독일에 뒤늦게 나타났지만, 다른 어느 곳
보다 빠르고 과격하게 진행되었다. 도어스타인 베블렌이 요약한  것처럼 이 
나라는 과격하게 산업혁명을  수행하였다. 그 정도로 빠른  발전의 "전례는 
서유럽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 따라서 이  과정은 더욱더 거친 극복의지를 
일깨웠고 더욱  격렬한 반작용을 불러일으켰다.  널리 퍼진 생각과는  달리 
독일은 성취와 뒤늦음, 봉건적  요소와 진보적 요소, 권위적 요소와 사회국
가적 요소가 거의 해체할 수  없도록 결합된 가운데 다채로운 모범이 되어
서 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유럽의 가장 현대화된 국가로 간주되었다.
  지난 25년 동안 국민총생산은 두 배 이상이 늘어났고,  납세의무를 질 정
도의 수입이 있는 인구가 30퍼센트에서 60퍼센트로 늘었고,  강철 생산량은 
1887년에 영국의 절반 수준이던 것이  대전 직전에는 영국의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식민지들이 정복되고 주식회사의 수는  2,413개에서 5,340개로 늘
었고, 함부르크 항의 화물 선적량은 뉴욕, 암스테르담에는 뒤지지만 런던을 
앞질러서 세계 3위에 올랐다. 동시에 이 나라는  정확하고 절도있게 통치되
었으며, 온갖 부자유스런 잔재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정도로 내면적인 자유, 
행정상의 정의, 사회적인 안정 등을 누렸다.
  독일 제국의 전체 이미지에 나타나는 어느 정도 시대착오적인 표현은 경
제외적인 현상들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측량하기 힘든  봉건적 구
조에서만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얼핏  보기에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바쁜 
나라, 성장하는 대도시와 산업지구 위에는 상당히 낭만적인  하늘이 덮여있
었다. 이 하늘의  어둠 속에 신화적인 인물들,  고대의 거인과 신들이 살고 
있었다. 독일의 뒤처짐은  이데올로기적인 특성을 가진 것이었다. 반계몽주
의, 게르만 민속학,  시민계급의 장식욕구 등이 여기에  작용하였다. 시민계
급은 스스로 그토록  쉬지 않고 열심히 추구하던  물질적 목적들을 넘어서 
장식에 더욱더 높은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취향의  바
탕에는 여전히 현대세계에 대한 문화시민적인 저항감이 드러나  있었다. 그
러한 저항감은  정열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자극을  받게 된다. 새로운 
산문적인 현실에 대한  저항의 몸짓은 회의적인 정신이 아니라 염세적,  낭
만적인 정신에서  유래한 것이며, 반혁명적  저항을 위한 준비상태가  되어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저항은 특히  확장된 문명비판적인 분위기에서 알아 볼 수  있다. 
그리고 파울 드 라가르드, 율리우스 랑벤, 오이겐 뒤링 등이 대표하는 문인
들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주는 불쾌감은 일반적인  문
명위기의 분위기 징후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대의 재치없고, 실용적인 
낙관론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세기가 바뀔 무렵에 그러한  문명위기의 분위
기는 미국과 프랑스에서도 보였다 .드레퓌스 사건, 프랑스  행동파, 혹은 모
라와 바레스의 선언에서 공감과  추종자를 볼 수 있다. 가브리엘 다눈치오, 
엔리코 코라디나,  미구엘 우나무노, 디미트리 메레슈코브스키,  블라디미르 
솔로브요브, 크누트 함순  , 야콥부르크하르트,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등
도 각각 아주 다른 형태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비슷한 두려움과 저항을 표
현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독일을 그 우직한  은둔주의에서 갑작스럽게 현대성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계속 고통스러운 단절과 이별을 요구하였던 저 급격하고 자른 듯
한 변화는 이곳의 저항이 유럽  다른 어떤 곳보다도 과격한 음조를 갖도록 
만들었다. 현실에 대한 과격한 두려움과 혐오감은, 이미 사라져버린 낙원의 
질서를 향한 낭만적인 그리움과 결합되었다.
  이러한 전통도 아주 멀리서 온 것이다. 문명화  과정의 '황폐화'에서 고통
받는 것은 루소나,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불쾌감을 표현한 사람들은 진보를  경멸하였고, 어느 정도 
긍지를 가지고 시대에  뒤처진 것을 고백하였다. 그들은 철저히 시대에  맞
지 않는  관찰자들이었다. 라가르드가 쓰고  있듯이 이런 사람들은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절대로 존재하지 않을 독일을 보고 싶어하였다.  자
기들에게 마주서 있는 사실들에  대해서 그들은 오만한 경멸을 드러냈으며 
'외눈박이 이성'을  비웃었다. 부분적으로는 예리하기도 한  비합리주의로써 
그들은 주식거래,  도시화, 강제접종, 세계경제, 실증과학  등에 반대하였고, 
'빨갱이'와 최초의 비행  시도에 반대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현대세계 전
체의 해방과정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현상들을  파국에 이른 
'영혼의 몰락'이라는 총체적 이미지로  만들었다. 그들은 '분노한 전통의 예
언자'로서 파괴과정에  정지를 명령하고  "옛날의 신들이 다시금  파도에서 
떠오르는" 날이 오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들이 현대세계에 마주 세운 가치관은 자연성, 예술, 과거, 귀족주의, 죽
음에 대한 사랑, 강한 개성의 권리 등이었다. 특이하게도 도이치 문화의 붕
괴를 고발하는 항의는  자주 제국주의적인 사명의식과 결합되었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공포는  공격으로 바뀌고, 절망은 위대한 것에서 위로를  구하
려고 하였다. 이러한  시대추세를 반영한 가장 유명한 책은 율리우스  랑벤
의 (교육자  렘브란트)였다. 그것은 1890년에  출간되었는데 굉장한 성공을 
거두어서 2년 만에 40판을 거듭하였다. 거대한  공포, 반현대, 민족주의적인 
소명에 대한 망상 등을 다룬 극단적인 문서에 대한 광범위한 동의는 이 책 
자체가 정열적이고 분노한 위기의 표현이라는 사실 뒷받침해준다.
  이 반문명적인 감상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된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낸 
것은, 사회적  다원주의와 종족이론들의 경우에도  비슷했지만, 반민주적인 
이념들과 결합되면서였다. 반문명적인 감상주의는,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
의 원칙에서  정치질서를 얻은 자유주의적인  서구사회의 몰락을 진단하고 
있었다. 이러한 표현도 전유럽적인  성격을 가졌다. 줄리앙 방다는 뒷날 이
렇게 썼다.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1890년경의  문필가들은 "절대적 
권위, 기율, 전통, 자유정신의 멸시, 전쟁과 노예제도의 도덕적 정당성 등의 
신조가 자부심 강하고 굽히지 않는  태도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놀
라울 정도로 날카롭게 의식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신조가  감상적인 자유주
의와 휴머니즘보다 단순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였다."
  현대성의 문제는 온갖 문학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지적인 소수 
계층의 문제였지만-다시  독일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반문명적 감
상주의의 정서는, 특히 그  정서에 사로잡혀 있을 뿐 아니라 바로  그 정서
를 몽상적이고 순수하게 표현하였던  젊은층의 운동을 거치면서 점차 지속
적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렇게 묘사하였다. "도이치 
사람들의 성향은 계몽주의에  반대하고, 계몽주의의 결과라고 오해되고  있
는 사회의 혁명에 반대하고 있다.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존경심은 과거
에 존재한 적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존경심으로  바뀌려는 경향을 가졌다. 
심정과 정신은 기존의 것으로 가득  차서 미래와 새로운 목적을 위한 자리
가 남지 않을 정도다. 감정 숭배가 이성 숭배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마지막으로 시대의 반문명적인 정서는 반유대주의와  결합되었다. 헤르만 
바르는 전 유럽에 걸친 조사의  결과 "도이치 반유대주의는 반동적이다."라
고 적고 있다. "산업발전에 대항하는 소시민의 폭동이다." 유대인과 모더니
즘의 동일시는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자본주의의 경쟁체제에서 
유대인이 특별한 적응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도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온갖 공포의 가장 강력한 근거였다. 베르너 
조바르트 는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촉진시키는 것이 유대인의 사명"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아직도 보수적인 초기 자본주의  조직의 찌꺼
기를 없애고, 최후의 수공업 및 수공업적인  소매방식을 없애는 것"도 역시 
유대인의 사명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발전을 배경에 놓고 보면 전통적으로 종교적 동기를 가진 유대인
에 대한 증오가  19세기 후반기에 생물학적인 혹은  사회적인 근거를 가진 
반유대주의로 발전하였다. 독일에서 특히 철학자 오이겐 뒤링과  실패한 언
론인 빌헬름 마르는 ((비종파적인  관점에서 관찰한, 게르만에 대한 유대의 
승리, 패배자여  슬퍼하라!)는 특별한 제목을  가진 책에서) 이러한 경향의 
인기를 높이기 위해서  애ㅆ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유럽 전체에  대해서도 
타당한 반성이었다. 독일의 반유대주의는 분명히 프랑스보다 더  강하지 않
았다. 그리고 러시아나  오스트리아 이중왕국의 반유대주의보다 훨씬  약했
다. 그래서  당시 독일에서는 반유대주의  출판물들이 그토록 널리  퍼져도 
이념 자체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다고 탄식하곤 했다. 그러나  비합리
적인 동경이 주인 잃은 개들처럼 이리저리 떠돌던 시절에 반유대주의는 바
로 절반의 진실만을  가진다는 이유로 광범위한 불만을  담는 그릇 노릇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적인  크기로 확대된 불안의 표현형식에  불과하였다. 
다른 누구보다도  리하르트 바그너가 모든  현상들에 나타나는 현대세계의 
탈마법화 과정에 반대하면서 예술의 마법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시대의 분
위기를 신화적으로 번역하여 작품 속에서 압도적인 효과를 내도록 만든 것
이 바로 그의 작품의 효과와 반항의 원천이었다.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 황
금지배가 시작되었다는  의식, 종족적인  두려움, 반물질적인 의도,  천박한 
자유와 평등의  시대에 대한 경악, 다가오는  몰락의 예감 등이 바로  그의 
작품에 나타난 시대분위기였다.
  전쟁은 시민 시대가 자기 자신의 반항하는 다양한 감정들을 마구 풀어놓
고 과격하게 만들었다. 전쟁은 황폐한 문명의 일상에서 사라져버린, 들어보
지도 못한 자기상승의 가능성을 존재에 되돌려주었으며, 폭력을  신성한 것
으로 만들고 구조해체에 승리를 마련해주었다. 에른스트 융거가  끈 것처럼 
화염방사기로 이룩된 '허무에 의한 거대한  청소'였다. 전쟁은 자유주의적이
고 인문주의적인 문명이념의 거부였다. 다시금 유럽 스타일의  폭넓은 변용 
문학에서 불려나온,  다양한 개혁이념의 출발점이  된 전쟁 체험의  마적인 
힘은 바로 이러한 체험에  그 원천을 두고 있었다. 동시에 전쟁은  그 후계
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성급하고 고독한 결정의 감각,  절대적인 복종
과 일치단결한 마음의 감각을 가르쳐주었다. 의외주의 질서의 타협적 성격, 
허약한 결정력, 빈번한 마비상태 등은, 전쟁에서 완벽한 군사적 업적집단의 
신화를 불러온 세계에게는 아무런 설득력도 갖지 못하였다.

    베르사유의 배신
  이러한 맥락들은 어째서 민주공화국과, 비록 패배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었다고 해도 베르사유 조약 체계  속으로 독일을 편입시키는 것이 쉽지 않
았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반문명적인 분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민
주공화국이나 베르사유 조약이란 정치상황의 변화일 뿐만 아니라,  자기 민
족에 대한  하나의 죄악, 형이상학적인 배신행위,  깊은 불충행위로 여겨졌
다. 그것은 낭만적이고 생각이  깊고 비정치적인 독일을, 순간의 입장을 위
해서 서유럽적인 문명이념에 넘겨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민족관찰
자)는 베르사유  조약을 '매독평화'라고 불렀다. 그것은  매독처럼 "짧은 한 
순간의 금지된 쾌락에서 생겨나와  조그만 종기로 시작되어서 점차 사지와 
관절로 퍼져나가서 마침내 죄인의 심장과 뇌속까지 덮치는" 질병이라는 것
이다.
  '체제'에 대한 정열적이고 근본적인 저항은, 친권,  진보측의 선동, 계몽의 
불길, 통속성, 부패,  복지를 찬양하는 '문명의 제국주의' 등에  대한 참여거
부로 나타났다. 당시  수많은 고발장에서 충성, 신의 은총, 조국애  등과 같
은 도이치  이상들은 '혁명과 혁명 이후  시대의 태풍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 대신 '민주주의, 폭로운동, 거침없는 자연주의, 동지애적 
결혼' 등이 나타났다고 주장하였다.
  공화국이 계속되는 동안 언제나  빌헬름 시대의 반문명적인 출발점을 이
어받은 우파 지식인  쪽에서 소비에트 연방, 혹은 정확하게 말해서  러시아
와의 결속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게  된다. 러시아는 어머니의  땅, 심정의 
땅, '제 4차원', 기대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오스발트 슈펭글러가 '내부의 영
국'에 대한 전쟁을 촉구하였다면, 민족의 영적인 동일성을 찾으려는 저항의 
기수, 에른스트 니키쉬는 이렇게  썼다. "눈길을 동쪽으로 돌리는 것만으로 
이미 도이치의 각성이다... 서쪽으로  가는 것은 도이치의 몰락이었다. 동쪽
으로 돌아서는 것은 도이치이 위대함을  향해 다시 상승하는 일이 될 것이
다." 서유럽의  '천박한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프로이센-슬라브  원칙'을 내
세웠다. 유물적이고 탈신화된 서유럽 세계를 통해서 도이치  본질이 압도될
까 하는 두려움이 여기서는  공산주의 세계지배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강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 
  전후 처음의 상황은 혁명에 대한 두려움뿐 아니라 반문명적인 원한을 활
성화시켰다,. 그 두가지는 합쳐져서 독자적으로,  그러나 번갈아가며 상대방
을 밀쳐올려  주면서 비상한 역동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밑바탕까지 
흔들린 사회에서  생겨난 증오와 방어  콤플렉스와 결합되었다. 이  사회는 
황제의 영광, 시민질서,  민족적 자의식, 복지, 권위, 사회적인  상하 체계까
지 다 잃어버리고 이제는 분노에 사로잡혀 부당하게 잃어버린 것으로 보이
는 것을 되찾으려고 하는 사회였다.
  이런 전반적인 불만은  충족될 길 없는 다양한  집단 이기주의를 통해서 
커지고 점점 과격하게  되었다. 특히 점점 늘어가던 샐러리맨 계층은  전체
적인 비판의 거대한 몸짓이 특별히 민감하였다. 산업혁명은  이제 처음으로 
사무실을 기습하여 '자본주의의 하사관'들을 '현대적 노예제도'의 마지막 희
생자로 삼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노동자와는 달기  자기들만의 계급
의식이나, 아니면 현존질서가 붕괴될 경우 자기들의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일종의 유토피아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대기업, 백화점,  합리화된 
경쟁자 등에 대해서  공포심을 느낀 중간층 상인들  역시 적잖이 민감하였
다. 전통적으로 행동이 느리고,  방책도 없이 이미 오래전부터 시대에 뒤떨
어진 구조에 붙박여 있던 광범위한 농업계층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지식
인층과 예전의  견고한 시민계층도 사회가  프롤레타리아화하는 이 거대한 
궤도에 자신들이  이끌려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마찬가지 기분을  느꼈다. 
생계대책이 없으면 "금방  쫓겨나고 신분이 추락하고 실업자가  된다. 그것
은 공산주의자와 같이  되는 것이다." 라고 당시 설문지에 어떤  사람이 썼
다.
  인플레율, 자살자 통계, 파산 등에 대한 어떤 통계도 실업, 빈곤, 실직 등
의 위협을 받는  사람들의 심정을 표현하지 못한다. 혹은 아직은  무엇인가
를 가지고 있지만 수없이 쌓인 불만의 폭발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근심을 
표현해주지 못한다. 공공기관들은 언제나 허약한 태도로, 흔들리는 기반 위
에서 마구 뒤섞인  집단 감정에 대항하여 어떠한  안심도 제공하지 못하였
다. 두려움은 이제 라가르데와 랑레벤의 시대처럼 무기력한  말만으로 국한 
되지 않았다. 전쟁이 공포심에 무장을 시켜준 것이다.
  일부는 개인 주도로, 일부는  위장된 국가기관 주도로, 특히 공산주의 혁
명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민방위대와  의용군은, 상황 전체에  대한 
막연하지만 확고한 저항심리 속에서  자기들을 새로운 질서로 안내해줄 어
떤 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밖에도 처음에는 군대 에너지를 저장한  저수 
탱크 같은 대규모의  귀향군인들이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전후에
도 군대막사에서 목적  없는 군인생활을 계속하였다. 어쩔 줄 모르는  태도
로 청춘의 야망이었던  전쟁의 꿈과 작별하기를 미루고 있었다. 전선의  참
호 속에서는 불확실하고  새로운 삶의 의미에 대해서  윤관이라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단하게  시작되고 있는 이 평화시대에는 의미 같은  것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옛날 적들의 찌꺼기에  밀려가는 이토록 허
약한 정부를 위해서 4년  동안이나 드높은 이상을 가지고 전선에서 싸우고 
고통받았던 것이 아니었다. 귀향군인들은 전쟁을 체험한 다음  이제 시민적 
일상에서 자기들을 추락시키는 힘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파시스트 유형 히틀러
  히틀러는 처음으로 이러한 불만들, 시민들의 불만과 군인들의  불만을 한
데 합치고 거기서 영도력과 추진력을 찾아냈다. 실제로 그의  출현은 이 모
든 불안, 염세주의, 이별과 자기방어의 느낌들을 종합한  것처럼 보인다. 그
도 전쟁 중 강력한 구원 및 성장체험을  쌓았다. '파시스트적인' 유형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가  그런 유형이었다. 그가 얼마간 망설이면서 활동을  시작
한 뒤로 급격하게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한 추종자들 중 누구도 히틀러 자
신만큼 심리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적인  추진력을 드러낸 인물은  없었다. 
그는 그들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들의 대표자였다.
  이미 초년의 체험들이  그에게 강력한 공포의 체험을 마련해 주었다.  그
것은 그의  사고와 감정의 전 체계에  각인되었다. 그의 모든 말과  반응의 
배경에서 그런 점을 엿볼  수 있다. 모든 것 뒤에 공포와  불안이 감추어져 
있고, 공포는 일상적이면서도  우주적인 차원을 보였다. 린츠의  대부, 대모
와 아우구스트 쿠비체크,  그라이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초기의  관찰자들
은 그가  창백하고 '깜짝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그것은 
일찍부터 환상적인 생각들의 토대가 되었다.
  낯선 사람이 건드리는  것을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일이나,  사람을 극단
적으로 불신하는 것이나, 뒷날 점점 강해지는 결벽증 등은  바로 여기에 근
거하고 있다. 성적인 오염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어떤 형태든 전염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같은  콤플렉스에서 나온 것이다. "미생물들이  나를 공격한
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모든 도이치 운동이 표방했던 
외세에 대한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러시아와 폴란드의 유대인이 메
뚜기 떼처럼 덮여'오는  것, '도이치 사람들이 깜둥이로 변화되는  것', 도이
치 사람들이 '독일에서  쫓겨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근절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민족관찰자)에 그는  이른바 프랑스 병사의  시를 게재하였는데  그것은 
이러한 후렴구를 가진 것이었다. "도이치 사람들아. 우리가 너희 딸들을 소
유하리라!" 미국의 기술, 슬라브인의  출생률 증가, 대도시, 제한도 없고 해
로운 산업화,  국민의 경제적 낭비,  익명의 주식회사, 진흙창 같은  대도시 
향락문화, 그리고 푸른색 초지와  녹색 하늘을 그려서 '민족의 영혼을 죽이
려고'하는 현대 예술 등에 대해서도 불안감이 있었다.
  이러한 부패과정을  막아보려는 확고한 의지에서  히틀러는 다른 나라의 
파시스트 지도자들과 연합하였다. 그러나 광적인 배타성이 그를  다른 사람
과 구별시켜준다. 그는 이제껏 느낀 공포의 모든 요소들을  단 하나의 원인
으로 돌렸다. 거대하게 쌓아올린 공포체계 한복판에 검은  ㅌ복숭이 유대인
의 영원히 오염시키는 모습이 서 있다. 나쁜 냄새가 나고, 입맛다시며 금발
처럼, 아리안족보다 '종족적으로 더욱 강한' 유대인이었다. 이렇게 제압당한
다는 고정관념에 깊이  사로잡힌 채 그는 독일이  음모의 대상이라고 여겼
다. 볼셰비키 당원들, 프리 메이슨, 자본주의자, 예수회 등이 사방에서 포위
하고, 그들이 모두 힘을 합쳐서 전략적으로 '피와 돈에 굶주린 유대인 폭군
들'의 명령을 받으며 독일 멸망작업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은 세계자본의 75퍼센트를 이용하고, 주식과  공산주의를 지배하고 
있으며, 황금 인터내셔널과  붉은 인터내셔널을 장악하고, 산아제한과 이민
사상을 전파하고 있으며,  국가들을 안으로부터 붕괴시키고, 종족을 오염시
키고, 형제살해를 조장하며, 내전을  조직하고, 천박한 것을 정당화하고, 고
상한 것을 더럽힌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류 운명의 조종자'였다. 전세계가 
이 '히드라의 마수의 걸려'들어서 위험에 빠졌다고 히틀러는 외쳤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이미지들을 동원해서 자신의 두려움을  보여주었다. 
'살금살금 기어들어오는  독'을 보았고, 유대인들이  '구더기' '회충' '민족의 
몸을 파먹는 독사'라고 여겼다. 공포를 표현할 때 가장 재치 있고 우스꽝스
러운 표현들을  이용하고, 그러한 표현들은  인상적인 혹은 매우  지속적인 
이미지들이 되었다. 그는'우리 영혼의  유대인화' '우리의 짝짓기 욕구의 배
금주의', 그리고 '거기서 유래하는  민족의 매독 감염'이라는 표현들을 찾아
냈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유대인이 공산주의 신앙고백으로 이 세계 민
족들을 정복하면, 그의 왕관은 인류의 죽음의 화환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
면 이 혹성은 수백만  년 전처럼 사람의 그림자도 없이, 대기를  가르며 흘
러갈 것이다."

    지도자 이념
  위태로운 조건 아래서 정치적으로 거대한 힘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던 
에너지는 히틀러가 가세하면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파시스트 운동은  사회
적인 배경으로 보아  세 가지 요소에 기반하였다. 첫째 도덕적,  경제적, 반
혁명적 불만을 가진  소시민의 요소, 둘째 군사적, 합리적 요소,  셋째 독특
한 지도자의 카리스마라는 요소였다. 지도자란 혼란시에 명령을  내리는 질
서의 확고한 목소리이고, 멀리 내다보고 깊이 생각할 줄 알며, 절망도 알지
만 구원의 방책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지도자 유형은 도이치 민중설화에 거슬러오르기까지 수많은 문학적 약속
들 안에 드러나 있었다. 역사상 불행한 수많은 다른  민족들의 신화도 그렇
듯이 도이치 민중설화도  수백 년 동안 잠에 빠진  채 산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지도자의 모습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 돌아와서 민족을  구
하고 죄 많은  세계를 벌줄 것이다. 그리고 20년대에도 염세적인  문인들은 
바로 이러한 동경과  연결된 수많은 주문들을 읊어대고 있었다. 슈테판  게
오르게의 유명한 시에서 그런 표현을 볼 수 있다.
  
  그는 쇠사슬을 끊고 일어나 폐허에 질서를
  일으키고, 길잃은 자를 채찍질하여 올바른 곳으로
  돌려보내다. 그곳에선 위대한 것이 다시 위대해지고
  주인이 다시 주인이 되고, 기율이 다시 기율이 되다. 그는
  민족의 깃발에 참된 상징을 덧붙이도다.
  폭풍과 거친 신호를 뚫고 안내하시고
  새벽 여명에 충실한 부하들을 일터로 보내
  밝은 대낮에 새로운 왕국을 세우나니.

  같은 시기에 막스 베버는 탁월한 지도자의 품성에 대한 이미지를 전재하
였다. 그는 국민적인 정당성, '맹목적인' 복종에 대한  요구 등을 들었다. 그
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미래의 비인간적인 관료주의 이  시대는 매우 다른 
원천과 매우 다양한 동기에서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었다. 막연하고 
감정적인 차원에서, 시에서, 그리고 과학적인 이성에서도 이러한 이념에 대
한 지지가 있었다.
  파시스트 운동에서 발전해 나가는  지도자 이념은 다시금 전쟁의 체험에
서 활성화를  얻었다. 이러한 운동은  전통적인 의미의 정동활동이  아니라 
군사적 세계관을 가진 단체,  '정당들 위에 있는 정당' 이었다. 전쟁의 어두
운 상징과 확고한 얼굴로 단행한  싸움은 전쟁의 수단을 거의 고스란히 이
용해서 정치영역에서 전쟁을 계속하였다. "현재  우리는 계속적인 전쟁상태
에 있다."고 히틀러는 거듭 외쳤다. 이탈리아의 외무장관 치아노 백작은 파
시스트가 '전쟁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도자 숭배는  '항구적인 전쟁이라는 허구' 안에서  군사적 서열 원칙을 
이 운동의 내부조직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지도자의 출현은, 초인간적인 
높이까지 오도된 믿음의 요구이며 헌신의 열망으로서, 마법의  영역으로 올
라선 장교상이었다. 유럽의  모든 포도 위에 울려퍼진 행진의 발검음  소리
는, 사회문제들도 군대식  모델을 통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는 신념을 보여주었다. 비로 이러한 엄숙주의가 장래를  생각하는 젊은층에
게 강력한 매력  포인트였다. 그들은 전쟁, 혁명, 혼돈에서  '기하학적' 질서 
계획을 찾아냈다.
  동일한 동기에서 파시즘 운동은 준군대적인 방식으로 출현하게  된다. 즉 
제복입기, 인사, 신고, 직립부동  자세 등 의ㄹ적 부분, 몇 가지의 기본요소
로 축약되는  요란한 상징성, 특히  여러 가지 형태의  십자가들, 노르웨의 
'의외'의 올라프 십자가부터, 포르투갈 급진노동자들의  붉은 색 안드레아스 
십자가에 이르까지 여러 가지 십자가들, 화살, 고대 로마의 속간(권위를 상
징하는 막대기), 큰 낫 등 모든 것이 끊임없이 깃발, 휘장, 군기, 완장 등에 
그려졌다. 이러한 요소들은 코트와 깃을 치켜세우는 오래된  시민적 관습만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엄격하고  기술적이며 익명성의 
윤리로 무장한 현대정신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동시에  제복과 군인
장식 아래서 사회의  대립들이 감추어지고, 시민사회 이상이 광채 없고  감
정 없는 상태를 뛰어넘는 것이기도 했다.

    문화혁명으로서의 파시즘
  무엇보다도 국가사회주의의 특징이 되는 소시민적 요소와 군사적 요소의 
결합은 처음부터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당에 독특한 이중성격을 부여
하였다. 국가사회주의 돌격대와 정치기구를 조직적으로  분리하였다는 점에
도 나타나며, 추종세력이 매우  다양했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확산
을 가진 이상주의자들이  사회적 실패자들, 절반 범죄자들이나  기회주의자
들과 어울려서 업적을 세우려고  열올리고, 보수윤리와 노동 혐오, 이익 찾
기, 비합리적인 행동주의 등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집단이었다. 대부분의 파
시스트 조직에 특징적인 엉터리 보수주의는 이 사실에서  유래한다. 망가지
고 모욕당한 세계질서를  지키려 한다는 주장하면서도, 힘을 얻게 되면  전
통과 무관한 변화의지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중세와 현대성의  혼합은 그들
의 특성이 되고 있다.  미래에 등을 돌린 전위의식과, 전체주의적 강제국가
의 아스팔트 위에서  민속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아득하게  빛
바랜 선조들의 꿈을 한 번  더 꾸고, 과거를 찬양하였다. 그것이 로마 제국
이었든, 에스파냐 카톨릭의 지배였든,  대 벨기에, 대 헝가리, 대 핀란드 되
었든 간에 과거의 몽롱한 윤곽 속에서 영토확장을 지향하는 미래의 약속이 
눈에 보였던 것이다.
  현대 기술수단의  모든 도움을 받은  가운데, 가장 계획적이고  냉혹하고 
현실주의적인 기도로 이루어진 히틀러의 권력장악 출발은 복잡하고 소도구
와 상징들을 동반하였다. 그것은  초가지붕, 세습농지 농지계급, 민속춤, 태
양 축제, 어머니 십자가들이었다.  토마스 만은 그것을 '폭발하는 고대풍'이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반성을 모르는 반도의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히틀
러의 요구는  세계의 치유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는 절대로 그 좋던  옛 
시절을 단순히 불러오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며, 그의 길을  눈 감고 따
라갔던 감상적인 반동주의자들이  생각했듯이 과거의 봉건제도를 불러오겠
다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아니라  문명
화 과정에서 생겨난 인간의 자기소외 현상이었다.
  물론 그는 자신이 경멸했던 경제적 혹은 사회적 방법으로 그러헥 하지는 
않았다. 이탈리아  파시즘 지도자의 한 사람처럼  그는 사회주의를 '오른쪽 
배 위편의 역겨운 자극'이라고  여겼다. 그의 의지는 피와 영혼의 어둠에서 
내적인 갱신을 지향하였다.  정치를 지향한 것이 아니라 본능의 복권을  지
향한 것이다. 의도나 구호로 보면 파시즘은 계급혁명이  아니라 문화혁명이
다. 그것은 인간의 해방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봉사한다고 주장하였다. 파
시즘이 공감을 얻은  것은, 인간정신의 자연적인 움직임에 따라 모든  잃어
버린 낙원이 있는 곳, 즉 그 옛날 신화적인  원초상태에서 유토피아를 찾았
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당시 지배적이던 미래에  대한 불안은 모든 신성한  것을 과거에 두려는 
성향을 강화시켰다. 파시스트 '보수주의'에는 역사  발전을 혁명적으로 바꾸
어서 한  번 더 출발점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이 작용하였다. 이  모든 
오류가 시작되기 이전의, 자연적이고 조화로우며 더 나은  시대로 돌아가려
는 소망이었다. 1941년의  한 편지에서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지난 1,500
년은 하나의 단절에  불과하며, 역사는 '그 옛날의 길로 되돌아'  가려고 한
다고 썼다. 예전의 상황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모든 측면
에서 터져나오는 해체의 힘들을 보며서 그 옛날의 가치체계, 그 스타일, 그 
도덕성 등을 회복하는  것이 히틀러에게 중요했다. "다가오는  혼돈을 막을 
댐을 건설하자!"고 히틀러는 부르짖었다.

    감정의 동일화
  혁명적인 요소를 아무리 강조해도  국가사회주의는 한 번도 방어적 기본 
자세를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국가사회주의의 본질이며, 툭하면 내보이곤 
했던 대담한  검투사 자세에 모순되는  것이다. 콘라트 하이덴은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도망중의 허풍'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상승에 대한 공포, 새
로운 경향과 모르는 별들에 대한 공포이며, 쉬지 않는  정신에 대항하며 새
로운 경향과 모르는 별들에 대한 공포이며, 쉬지 않는  정신에 대항하며 쉬
고 싶은 육체의 항의"라고 했다. 이러한  방어자세에서 히틀러는 대소련 전
쟁 발발 직후 자기는 이제서야 중국인들이 어째서 만리장성을 쌓였는지 이
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기 자신도  "중앙 아시아의 대중으로부터 새로운 
동유럽을 지켜줄 거대한 성벽을 소망하였다. 방벽 안에서는  힘이 약해진다
는 사실을 역사가 가르쳐주는데도 그렇다."
  수많은 경쟁세력들에 비해서 파시즘이 우세했던 것은 그것이 시대위기의 
본질을 더 날카롭게 파악했다는 것과 상관이 있다. 파시즘  자체가 바로 위
기의 징후였다. 다른 모든 정당들은 산업화와 해방과정을 긍정하였다. 오직 
파시즘만이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를 함께 느꼈다. 그래서  파시즘은 사람들
을 소란스런 행동과  드라마 속에 몰아넣고 두려움을 잊게 만들려고  했다. 
낭만적인 의식을 통해서 산문적이고 지루한 일상을 잊게 만들려고 했던 것
이다. 횃불행진, 해골들, '하일'하는 외침과 전투의  외침, '삶을 위험과 짝짓
게 만들기' 등이었다.
  파시즘은 과거를 암시하는 가장행렬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현대적인 과제
를 내주었다. 파시즘의 성공은 물질에 대한 관심을 맨 끝으로 돌리고 '정치
를, 개인들이  이념을 위하여 자기를 부정하고  희생하는 영역'으로 취급한 
데서 온 것이다. 대중에게 더 높은 기준임금을 제시한  다른 정당들보다 파
시즘은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깊은 욕구를 제대로 맞춘 것이다.  파시
즘은, 공산주의나  자유주의 진영처럼 오직  이성과 물질에 관심만  따르는 
인간은 괴물 같은 추상이라는 사실을 모든 경쟁자들보다 앞서서 제대로 인
식하였던 듯하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반동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은 전면적인 변화
에 대한 시대의  동경에 경쟁자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대처하였다. 오직  파
시즘만이, 모든 것이 완전히  잘못되었다. 세계는 엄청나게 잘못된 길로 빠
져버렸다는 시대의 감정을 조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는  계급 정
당이며 낯선 세력의 보조부대라는 명성 때문에만 매력이 적었던 것은 아니
다. 공산주의는 바로 이 잘못된 길을 자기편으로 삼고  처방을 내놓고 있지
만, 실은 공산주의야말로 저 질병의 원인균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공산주의
에 치명타를 입혔다. 공산주의는 시민적 물질주의의 과격한  부정이 아니라 
물질주의를 뒤집은  것이라는 것, 부당하고  무능한 질서의 극복이  아니라 
오직 그 질서의 원숭이며 위아래가 바뀐 거울상이라는 생각이었다.

    권위를 위한 궐기
  히틀러의 분명한, 그리고  과도한 성공에 대한 확신은 자신이 기존  질서
에 대한 유일하게  현실적인 혁명가라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인
간의 본능을 다시금  제자리에 돌려 놓았다. 본능과 결탁된 상태에서  그는 
자신이 꺾이지  않으리라고 확신하였다.  본능은 '경제적인 이익에  맞서서, 
여론의 압력에 맞서서, 심지어 이성에 맞서서' 언제나 스스로를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본능을 끌어들인 일은 수많은 열등감과  인간적인 약점들을 
드러냈다. 파시즘이 명예 회복시키려고 하는 전통도 실은  일그러진 전통상
이며, 파시즘이 축하하는 질서도 단순한 질서의 연극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파시스트  추종세력을 '인간 쓰레기'라고 얕잡아보았다면,  그것
은 인간과 인간의 욕구와 그  충동에 대한 좌익세력의 무지를 드러낸 것일 
뿐이다. 좌익은 스스로 인간의 정신과 그 본질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주장
하면서도 시대를 판단하는 데 수많은 심각한 오류들을 범하였다.
  파시즘은 단순히 낭만적인 욕구에만 답변한 것이 아니었다.  시대의 불안
에서 생겨난 파시즘은  권위를 위한 원초적인 궐기, 질서를 위한  폭동이기
도 했다. 이러한 표현이 보여주는 모순이야말고 파시즘의 본질이다. 파시즘
은 궐기이며 복종이고, 모든 전통과의 단절이며 그 복구이고, 민족공동체이
며 가장  엄격한 위계질서이고, 사유재산과 사회적  정의이고 했다. 그러나 
파시즘이 자기 것으로 삼은 그 모든 요청들은 강제로  만들어진, 강력한 국
가의 권위를 포함하였다.  "다른 어느 시대보다 오늘날 민중은  권위, 인도, 
질서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무솔리니는 확인하였다.

    시대경향의 급전환
그는 '자유여신의 약간  부패한 시체'에 대해 말하면서  자유주의는 '사람들
이 떠나버린 사원의  문을 닫으려고' 한다. '현대의 모든 정치  체험은 반자
유주의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유럽 전역에서, 특히  1차 세
계대전 말에 자유주의적인 의회  체제로 바꾼 국가들에서 의회주의의 능력
에 대해 점차 더 많은 의구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국가들의 현대화가 
단호하게 이루어졌을수록 이러한  의심은 더욱더 강했다. 과도기의  폭발적
이고 힘든 위기 조선에서는  자유 민주주의의 수단들만으로 충분치 못하다
는 느낌,  자의식을 가진 대중에게  민주주의의 지도력은 너무  미약하다는 
느낌이 사방으로 퍼졌다. 정당간의  쓸데없는 다툼, 정당 정권의 온갖 유희
와 힘없는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정사실을  앞에 놓고 
아무런 선택권도 없던 옛시절에 대한 동경이 되살아났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중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제외한 모든 중부와 동부 
유럽 국가들, 그리고 상당수의 남부 유럽 국가에서 의회제도가 몰락하였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에스파냐, 포르투갈, 그리고 독일 등이었다. 1939년
에는 아홉 개  나라만 의회국가로 남았다. 그들 중 일부는  프랑스 제3공화
국처럼 '이상한 국가'였으며  일부는 군주제에 의해서 안정을  얻고 있었다. 
'파시스트 유럽이 가능한 상황' 이었다. 
  그러므로 어느  한 국민의 공격적인  원한만이 세계상황을 전복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염증과 경멸과 체념의 분위기가 국경선에  관계 없이 자
유주의 시대에 작별을 고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반동적인  형태로도 진보
적인 형태로도 나타났으며,  탐욕스런 형태로도 사욕없는 형태로도  나타났
다. 1921년  이후로 독일에는 신념을  가지고 의회주의를 표방하는  의회의 
다수파가 없었다. 자유주의 사상은 거의 옹호자가 없었고  수많은 잠정적인 
적대자들만 있었다. 이러한  의회주의의 적대자들에게 하나의 동기, 불붙이
는 구호, 지도자만 나타나면 되는 상황이었다.

      2부 선동가에서 정치가로
    제1장 도이치의 미래
  1919년 이른 여름 히틀러의  등장은 바이에른의 특수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자꾸 바뀌면서 등장하는  수많은 배우들을 순식간에  어둠에서 
날카로운 무대조명을 받는 자리로  밀어내면서 빠르게 밀려가는 혼잡한 흐
름 사이에서 차츰  창백하고 뚜렷하지 않은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혁명과 
반혁명의 혼란 속에서, 아이스너, 나키쉬, 루덴도르프, 로소브, 로스바흐, 카
르 같은  사람들 중에서 히틀러보다 덜  중요한 사람은 없었다. 그보다  더 
보잘 것 없는 재력, 그보다  더 이름 없는 출발점을 가진 사람은 없었으며, 
그보다 더 아무 방책 없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영원히 병영에 사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뒷날 자신이 '1차  대전의 이름없는 상병'이었다고 말하기를 좋아했
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자신도 전혀 예측하지 못 했던, 오직 신화적인 맥락
에서만 이해되는 자신의  출세를 설명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3년이  지나자 
벌써 그는 1919년 전반기에 저항하면서, 혹은 머뭇거리는  발걸음으로 들어
섰던 정치무대를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어떤 도시도 뮌헨처럼  심하게 혁명적인 사건들과 전쟁 직후의 
저항에 사로잡히고 뒤흔들린 곳도 없었다. 베를린보다 이틀이나  앞서 1918
년 11월 7일에 이곳 뮌헨에서 좌파 성향을 가진 몇몇 아웃사이더들이 세계
를 개선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서  비텔스바흐 가문이 통치해 온 바이에
른 천년 왕조 (1180~1918년)를  무너뜨리고 기습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수염을 기른 보헤미안이며 (뮌헨 포스트)의 연극비평가였던  쿠어트 아이스
너의 지휘를 받은 그들은 윌슨  대통령의 14개 조항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
해서, 독일의 상황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켜서  '국제연맹을 위해 무장시키고' 
이 나라를 '가장 나쁜 상황에서 보호해 줄 평화를 일깨우려고' 하였다.
  미국 대통령의 허약함과 자기부정, 우파의 증오심이 아이스너의  모든 전
망을 망가뜨렸다. 우파의 증오심은 오늘날까지도 '나라도 종족도 다른 떠돌
이들'과 슈바빙의  볼셰비스트들을 헐뜯는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아이스너 
혹은 새로  등장한 사람 중 그  누구도 바이에른 출신이 없었고,  반시민적 
지식인, 드물지 않게 유대인 지식인 유형이 각광받았다는  사실에서 지역감
정이 분명한 이 지역에서 혁명정부의 실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아이스너의 구경거리  정권이 만들어낸 쉬지 않는  시위며, 공개 음악회, 
깃발 대행진, 그리고  '빛과 아름다움과 이성의 왕국'에 대한 열화  같은 연
설도 그의 위치를  확정해주기에 전혀 적합하지 못한 것이었다. 오히려  이
러한 통치방식은 비웃음과 분노만 불러일으켰을 뿐, 아이스너가 '선의를 통
한 통치'에서 기대했던 애착은  전혀 만들어내지 못했다. 너무나 먼 철학적 
지평을 배경으로 서류상으로만 권력을 입증하였던 유토피아 상황은 현실의 
입김을 받지 무너져버렸다. 아이스너 '쿠어트 1세'로  자처하면서 자신이 붕
괴된 왕가의 전통과 결합되었다고 생각하였지만 비웃음을 표현한 후렴구를 
가진 유행가 하나만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스너가 레비엔, 레비네, 악셀로트 같은 기이한 극좌
파 세계혁명의 지도자들과  별로 좋지 못한 관계에 있었고, 문필가  에리히 
뮈잠의 무정부주의적 몽상에 대해서 비판하고, 널리 퍼진  바이에른의 분리
주의 분위기에 대해서 말로만이라도 동조한 것 등도 그의 처지를 개선시키
지 못했다.  그는 베른의 사회주의자  회합에서 전쟁발발에 대해서  독일이 
책임이 있다고 인정한 직후 잘 조직된 항의 캠페인에  포위되었다. 이 캠페
인은 잠시도 쉬지 않고 그를  공략해서 마침내 그의 시계를 멈추게 만들었
다. 뒤이어 치른 선거에 참패하면서 그는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2월 21
일 두 명의 동지와 더불어  정계은퇴를 선언하러 주의회로 가는 길에 그는 
스물두 살 난 우파 안톤 포아르코  발라이 백작이 뒤에서 쏜 총에 맞아 죽
었다. 그것은 무의미하고 사실상 불필요하고, 파국을 부르는 살인행위였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살해된  사람을 위한 추모식이 벌어지는 동안 극좌
파 성향의 정육업자 겸 술집 종업원인 알로이스 린트너가 주의회로 뛰어들
어오더니 아우어 장관을 쏘아 쓰러드리고 주변으로 총을 마구 쏘아대는 바
람에 두 명이 더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의회는  무시무시한 공포에 사
로잡혀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아르코 발라이가 희망했던  것과는 달리 
여론은 좌파 쪽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립크네히트의 
살해 직후처럼 이 암살행위는 힘을 모아서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으려는 반
동측의 행위로 여겨졌다.      바이에른 전체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총파
업이 실시되었다.  학생들 중 일부가  아르코 발라이를 영웅으로  추대하지 
대학이 문을 닫았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체포되고 엄격한  검열이 실시되었
으며 은행과  공공건물들은 붉은 군대에  점령되었다. 그러는 동안  병사를 
가득 실은  전차들이 거리를 달리면서 확성기를  통해서 "아이스너를 위해 
복수합시다!"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한 달 동안 사법권은 에른스트 니키쉬
가 이끄는 중앙위원회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고 난 뒤에야 의회정부가  구
성되었다.
  그러나 4월  초에 헝가리에서 벨라 쿤이  권력을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선포하였으며, 그로써  소비에트 시스템이 러시아 밖에서도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막 안정되기  시작
하던 상황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독일이여,  뒤를 따르자!" 라는 구
호 아래 소수의 좌파 몽상가들은, 분명하게 보이는 대중 의지에 반하고, 전
통과 여론의 감정에 반해서 대중의 지지도 없이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하
였다.
  에른 스트 톨러와  에리히 뮈잠 등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낭만주의,  세계
에 대한 몰이해,  허약한 지도력 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포고문에서  세상
은 이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몫을    꺾을' 수 있는 '꽃들로 가득 찬 들판'
으로 변했다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노동,  억압상황, 법적 사고 등은  이미 
없어졌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신문 표제면에는 최근의 혁명  포고문과 나
란히 휠덜린이나 쉴러의  시들을 싣도록 명령하였다. 밤베르크로  피신했던 
정부의 장관들과 에른스트 니키쉬는 그 사이 사임해버리고,  지도자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주정부를 시인들의 정신나간 복음, 카오스, 시민들의 공
포 속에  그대로 맡겨두었다. 이어서  일단의 냉혹한 좌파  직업혁명가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것은 잊을 수  없는 체험이었다. 압류 위원회, 인질 체포,  시민계급 사
람들에 대한 압류, 혁명의 자의,  점점 커지는 굶주림 등이 러시아 10월 혁
명의 끔찍한 이미지들을 일깨워서 현실로 만들었다. 그때의  공포심은 아주 
끈질기게 작용해서 5월 초에 우파인 방위군(정규군)과 의용군  동맹이 뮌헨
으로 들어와서 자행한  잔혹한 살상행위를 별 것  아닌 것처럼 만들어주었
다.
  이들 우파 동맹군은 풀려난 러시아 전쟁포로 50명 가량을 수용소에서 살
해하였다. 슈타른베르크에서 멀지  않은 철도 둑에서는 소비에트군의  의료
반이 살해되었다. 카톨릭  장인조합에 소속된 회원 21명은 아무 죄도  없이 
뮌헨의 집단거주지에서 체포되어 카롤리네 광장의 감옥으로 끌려갔다가 총
살당했다. 혁명에 가담하지 않았던 페를라하 출신 노동자  12명도 살해되었
다.
  이들은 모두 뒷날 조사 보고서가 말한 대로 '스스로  경박함이나 심술 궂
은 우연 때문에' 살해당한 184명에 끼게 된 사람들이다. 맞아죽거나 총맞아 
죽은 소비에트 체제실험의 지도자들, 쿠어트  에글호퍼, 구스타프 란다우어, 
오이겐 레비네  같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재빨리  잊혀서 
관심의 대상에서 사라졌다.  그에 비해서 모반을 일으켰던 극우파 툴레  결
사 소속 인질 8명은  좌파정권에 의해 루이트폴트 고등학교 지하실에 갇혔
다가, 어떤 하급  공무원의 비행에 대한 보복을 살해되었는데 그들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공포의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당시 
어떤 일기에 기록되어 잇듯이 우파 진입부대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손수건
을 흔들고, 모두들 창문을 통해 내다보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보다 더 큰 
열광은 있을 수 없었다...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혁명의 땅이었던 바이
에른은 이제 반혁명의 땅이 되었다.

    반혁명의 조직화
  전후 처음 몇 달 간의 체험은 좀더 냉정하고 덜 낙담한 시민계층에서 새
로운 자의식을 일깨웠다. 이 혁명의 의지력은 혼란스럽고  전체적으로 지나
치게 허약한 것이어서 도이치 좌파의 무기력과 개념의 혼란을 드러내 보였
다. 그것은 혁명적인  용기보다는 오히려 혁명의 과도한 열정에 의해  움직
였다. 사회민주당은 혁명을 강력한 질서의 인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바이에
른에서 소비에트 방식의 지배를 시도해본 결과 그러한 시도는 권력에 대해
서나 민족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
졌다. 몇 달 동안의 혁명기간에 처음으로 시민계급, 혹은 이 소란에 무관한 
도이치 노동자 계급에게 자기들이  절대로 군복하지 않았다는 인식에 도돌
하였다.
  시민계층에 이  새로운 자의식을 불어넣어주려고  애쓴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중간급 장교들, 즉 행동을  열망하는 대위와 소령들이었다. 
에른스트 융거의 말을 빌자면 그들은 포도주를 즐기듯 전쟁을 즐기는 사람
들이었고 아직도 여전히  전쟁에 도취되어 있었다. 여러 모로 압도적인  반
대세력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도 패배했다고 느끼지 않았다.  중앙정보
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자  그들은 저항하는 반군과 소비에트 군사위원회들
을 평정하고 바이에른의 소비에트 기도를 제거하였다. 불안정한  도이치 동
부국경, 특히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와 접하는 국경에서 그들은  방위기
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베르사유 조약과, 군대를 10만 명으로 제한한다는  규정이 장래
의 전망을 없애자 자신들은 사회적으로 추락하였고 민족적으로는 망신이라
고 느꼈다.  자의식과 상실감이 합쳐진 상태로  그들은 정치계로 몰려갔다. 
많은 사람들은 무질서한 군대생활과 무기 다루는 기술,  남자들간의 동지애 
따위를 버릴 수가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전쟁에서  얻은 체험과 폭력
을 사용하는 기술  등을 이용해서 그들은 혁명에  대항하기 위한 방어군을 
조직하였다. 국민의 두려움과  질서의식 속에서 혁명은 이미  제압되어버린 
상태였지만 말이다.
  곳곳에서 생겨난  사조직 민병대는 각  지역을 군대병영으로 바꾸어버렸
다. 겉으로는 민족적 장식과 정치투쟁이라는 영광스런 외관을 내세웠다. 그
들은 전쟁중에 가지고 있다가 비밀장소에 감추어두었던 기관총, 수류탄, 대
포 등으로 무장하고서 정치기관들이  무능한 것을 이용하여 지역마다 다르
지만 상당한 정도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바이에른에서는 특히  소비에트 시
절의 악몽 같은 체험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들은 거의 활동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모든  수단을 다 써서  반혁명군을 조직하라."는 것이 사회민주당 
정부가 소비에트 지배 시절에 내린 명령이었다. 정규군은 방위군과 나란히, 
또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방위군과 힘을 합쳐서, 에프 의용군, 고지 결사
대, 무쇠주먹 장교단,  에셔리히 부대, 도이치 민족  수비공격대, 옛 제국기 
부대, 바이로이트  의용군, 뵈르츠부르크 의용군,  볼프 의용군, 보겐도르프 
멸동대, 프롭스트마이르 별동대와 그 밖에도 수많은, 명예를 갈구하면서 정
상적인 생활을 기피하는 정치군사 조직체들이 활동하였다.
  이 모든 부대들은 정부와  국가관료뿐 아니라 광범위한 민족계층의 소리
가 자기들을 지지하는 것을 보았다. 군사전통에 익숙한  사회의 오해이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개인적인 이유에서 행동하는 의용군이 제복을  입고 발걸
음을 맞추어 행진하는 것을  보자, 곧바로 민족적, 도덕적 타당성을 인정해 
준 것이다. 혁명과  소비에트 정부라는 혼란스런 배경을 놓고 보면  군대조
직은 그 자체가 이미 모범적인 반대세력, 가장 타당한  형태의 생활과 질서 
이념으로 여겨졌다. 엄격한 태도로 보무도 당당하게 에프  의용군 단위부대
들은 루트비히 거리를  행진하였고, 발트 해 연안 전투에서 앙블렘을  가지
고 돌아온 에르하르트  연대의 단위부대도 마찬가지 였다. 그 앙블렘은  부
대의 통합 행진곡에서 뽑아낸  것으로 '철모에 달린 갈고리 십자가... '였다. 
그들은 지나치게 도발적인 방식으로, 이제는 오직 그리움으로 추억하는, 영
광과 안전이 지배하던  지나간 시대의 어떤 것을  구현하는 존재로 일반의 
의식에 비쳤다. 제국방위군이  1919년 6월의 바이에른 제4지역사령부의  기
본노선을 가리켜 '토대'라고 부른  적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당시의 지배적
인 생각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 토대에 맞추어서 '모든 국내 사정을 의
미심장하게 새로 건설'해야  하고, 활발하고 광범위한 선전활동의 정당화도 
바로 이 토대에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 정당들이, 두려움과 희생
을 무릅쓰고 전쟁을 수행한  병사들에게 전쟁과 민족학살에 대한 거부감을 
순진하게 떠넘긴 반면, 우파는 그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병사들의 상
처받은 자존심과 그 많은 기대들이 좌절된 데 대한 충분한 설명의 요구 등
을 받아들인 것이다.

    히틀러, 연설 실습과정을 갖다
  지역사령부 계몽과, 혹은  선전과가 맡고 있는 수많은 활동 중에는  부지
런한 마이르 대위가 담당한 '국가시민적 사유'를 위한  강좌도 있었다. 히틀
러는 소비에트 공화국 추종자들에  대한 색출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다음 
이 강좌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대학 강의실에서 열린 이 강좌들은, 
수강자들이 민족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유명한  대학교수들을 통해서 특히 
역사, 민족경제, 정치문제에 접촉해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자기가 어떤 확실한 영향도 받은 적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려는 
열망에서, 이 강좌들이 지식의 측면보다는 오히려 그를 통해서  얻게 된 여
러 관계들이라는 측명에서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생
각을 가진 몇 명의  동료를 알게 되었고, 그들과 더불어 시국에  대해서 깊
이 있게 토론할"  기회를 얻었다고 한다. 경제이론  분야에서만 고트프리트 
페더를 통해서 생전  처음으로 '국제증권 및 차관자본에 대한 원칙적인  설
명'을 들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이 강좌의  중요성은, 히틀러가 가진  격렬함과 
지적인 기질로 이와 같이 정선된  청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
다. 참가자들의 토론에서 그는 생전 처음으로, 우연히 만난 상대가 아닌 사
람들을 청중으로  가지게 되었다. 선생 중  한 사람이었던 칼 알렉산더  폰 
뮐러는 어떤 강의가  끝나고 난 뒤 점점 비어가는  강의실에 남아 있던 몇 
사람이 자신의 시선을 붙잡은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한가운데 어
떤 남자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는데, 그는 이상한 후두음을 내는  목소리로 
쉬지 않고 점점 더 정열적으로 그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가 사람들
을 흥분상태로 몰아가고,  동시에 사람들의 흥분이 그를 더욱 열렬히  말하
도록 만들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군인답지 않게 머리카락을  앞
으로 떨어뜨리고, 짧게  자른 콧수염을 기른 창백하고 깡마른 얼굴이  보였
다. 그는 이상하게 키가 크고, 밝은 금발에 광적으로 냉혹하게 번쩍이는 눈
을 하고 있었다." 다음번 강의가 끝난 뒤  연단으로 부르자 그는 '공손하게, 
일종의 뻣뻣한 당혹감으로, 옆으로  움직여서' 앞으로 나왔다. 그러나 '대화
는 별 소득이 없었다'.
  이러한 관찰에서 초기의 히틀러에게  들어맞는 특이한 현상을 만나게 된
다. 중요하지 않은 개인적인 대화에서 자신의 연설능력에  대한 도발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인다. 그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유대인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을" 때 도전적으로 격렬한 
답변을 해서 최초의 잊을  수 없는 설득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폰 뮐
러는 마이르 대위에게 자기 과목  수강생들 중에 천부적인 언변을 가진 사
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두었다. 히틀러는  지역사령부가 '신뢰하는 인물'이 
되어 뮌헨 연대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곧 이어서 이른바  레히펠트 
귀향자 수용소를 위한 사령부 계몽팀 명단 17변에 히틀러의 이름이 나타난
다. '보병 히틀러, 아돌프, 제2보병연대, 청산부' 이 팀의 목적은 포로수용소
에서 귀향하는 병사들 중에서 의심스럽다고 여겨지는 병사들에게 민족적으
로 반공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연설가  및 선동가 코스의 실
습'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레히펠트  수용소의 막사와 숙소에서 히틀러는  연설가
로서 수사적,  심리적 체험들을 쌓았다. 여기서  그는 고정된 세계관이라는 
미리 준비된 재료에  시사적인 내용을 채워넣는 법을 배웠다. 원칙들을  저
항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정치적 일상사들이 운명적인 크기의  전망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고집스러운 국가사회주의(나치즘) 
이데올로기에 원칙이 없다는 인상을  주는 기회주의적인 속성들도 상당 부
분 이 초보 연설가 시절의 불확실성이 원인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열광
상태가 공적으로 효과를 얻는지 시험해보고, 자신의 과도한  고정관념을 위
해 공감을 얻는 형식들을 찾아내야 했던  것이다. "이 주제는 참석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들의 얼굴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다."
고 수용소의 어떤 체험수기가 연설자 히틀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보니  자신의 청춘에 위대함과 무게를  주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느끼는 귀향자들의 깊고도  공격적인 실망감을 향해
서, 그토록 헛되이 바친 영웅주의, 그 수많은 허망한 승리와 부조리한 신뢰 
등을 설명하고 나서 그는 원수의 모습을 분명하게 그려  보이곤 했다. 그의 
연설연습을 들은 보고서에 따르면 가장 뚜렷한  특징들은 연사의 '인기있는 
무대등장' '파악하기 쉬운' 묘사방법, 정열적인  '광신주의' 등이었다. 이러한 
연설의 중심점은  그가 뒷날 '11월 범죄자들'이라고  불러서 유명하게 되는 
집단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자들)을  향한 공격이었다. '베르사유 수치', '망
할 놈의 국제주의'에  대한 분노의 표현들이 타나난다. 이 모든  것은 '유대
인 공산주의의 세계음모'라는  배경설명에서 한데 합쳐지고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유대인이 오늘날 우리 민족에게 끼치는 위험'
  슬쩍 읽은 것,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것을 지적인  부끄러움도 없이 한
데 엮어서 내놓는  그의 능력이 여기서 입증되고 있다. 레히펠트에서  행한 
그의 강연들 중  하나는 극히 최근에 고트프리트 페더에게서 전수받은,  자
본주의와 유대인의 관계에 대한 지식을 '매우  근사하고 분명하고 열광적으
로'전달한 것이다. 생각을 움켜쥐는 그의 능력은 난폭하고도 지속적인 것이
었다. 이 시기에  개별적인 확신들이 지하 벙커의 수난까지 계속될  최종적
인 형태를 어느 정도나 얻었는가 하는 것은, 구체적인  정치문제에 대한 히
틀러의 최초의  문서상의 발언에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이 오늘날 
우리 민족에게 끼치는 위험'에 대한 편지였다.
  뮌헨 지역사령부에서 예전에  '신뢰받는 인물'이었던 울름 출신의 아돌프 
겜리히가 마이르 대위에게 입장표명을 청하였다. 마이르는 이  편지를 군대
의 서열체계에서 보면 아주  이상하게 들리는 '매우 존경하는 히틀러 씨'라
는 칭호로 시작되는  의견서를 붙여서 히틀러에게 답장하라고  넘겨주었다. 
상세한 서술에서 히틀러는 우연하고도 개인적인 인상들에 근거하는  , 널리 
퍼진 감정적인 반유대주의에  반대하였다. 정치운동으로 만들어야 할  반유
대주의란 '사실의 인식'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와 같습니다.  우선 유대인은 종족집단이지 종교집단이  아니라
는 점입니다. 보통 가장 협소한 집단  내에서 1천 년간의 동족교배(철자 틀
림!)를 통해서 유대인은 일반적으로 자기들이 섞여 살고  있는 수많은 민족
들보다 자기 종족과  자신의 독자성을 훨씬 더 예민하게 보존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사이에는  도이치 아닌 낯선 종족이 살고 있습니다.  자기들
의 종족상의 특성을 희생하거나, 자기들만의 독특한 감정,  생각, 욕망을 부
정할 마음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종족이 정치적으로 우리와 똑같은 권리
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감정이 순수하게  물질적으로만 움직인
다면 그 생각과  욕망은 더욱 그렇습니다... 인간을 더 높은  곳으로 향하게 
하는 모든 것은  종교, 사회주의, 민주주의 등이라고  말하지만, 유대인에게 
있어 모든 것은 돈과 권력욕을 만족시키겠다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
다. 유대인의 활동은 다른 민족들에게 종족 폐결핵을 유발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의 결론이  나오는 것이지요. 순수하게 감정적인  이유에서 
나온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박해 (철자 틀림!) 라는  형태로 최종표현을 얻
게 됩니다. 그러나 이성적인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의 특권에  대해서 계획적
이고 법적인 투쟁을 벌여서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 최종적인 목적은 
유대인 자체를 확실히  제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민족의 힘을 지닌  정권
만이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할 능력이 있으며 민족적 무능의 정권은 절대
로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쓰기 4일 전 1919년 9월 12일에 마이르 대위는 신뢰하는 인물 
히틀러에게 과격협회와 도당들이 마구 뒤섞여 만들어진 작은 정당들 중 하
나를 방문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이러한 도당들은 아주 짧은 순간에만  하
나를 방문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이러한 도당들은 아주 짧은 순간에만  격
렬한 활동을 위한  활기를 얻고, 서로 결합했다가는 새로운 단체로  탄생하
기도 전에 다시  흩어져버리곤 했다. 그것은 공명과 추종세력으로 변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잠재력이었다.  종파적이고 두서없는 특성은 오랫동안  정
치적 관심이 없던 시민계급이, 자신들이 느끼는 민족적인  저항감과 사회적 
위기감을 진정시키주기를 거의 맹목적으로 갈ㄱ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툴레 결사와 도이치 노동자당
  툴레 결사는 음모적인  기획과 특별한 선전활동의 출발점으로서,  그리고 
극우 세력들의 접촉장소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 결사는 특급  호텔 
'사계절'에 본부를  두고 바이에른 사회의 광범위한  계층과 연결되어 있었
다. 한때는 회원이 대략 1천 5백 명까지 이르렀던, 영향력이 있는 회원들도 
일부 가진 모임이었다. 그들은 갈고리 십자가를 상징으로 삼고, (뮌헨 관찰
자)라는 독자적인 신문을  발행하였다. 수상쩍은 과거를 가지고  있는 정치
적 풍운아가 결사의 대표자였다. 그는 근동지역으로 밀려간  오스트리아 귀
족에게 입양되었던 덕분에 제보텐도르프의 루돌프 후작이라는 상당히 그럴
싸한 이름을 가진 사내였다. 어떤 증언에 의하면 그는  일찍이 테오도르 프
리치나 란츠 폰 리벤펠스 같은 과격 이론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생
각 없고, 심령술적인 특성까지 지닌 종족이론은 젊은  히틀러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것이었다.
  제보텐도르트에 의해서 1917년 1918년 해가 바뀔 무렵 창설된 상당히 열
에 들뜬  활력을 가진 툴레 결사는  전쟁 전 민족적, 반유대적인  모임들의 
전통에 선 것으로, 이름만 보면 1912년 라이프치히에서  만들어졌던 게르만 
툴레 종파를 연상시킨다. 그  회원들은 '아리안 혈동'이어햐 했다. 프리메이
슨 비슷한 이 모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체 어느 부위에 털이 있는지 없
는지 말해야 하고 동시에 종족상의 인식표로서 발의 모형을 제출해야만 했
다.
  제보텐도르프의 결사는  아직 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1918년 1월에 특히 
반유대주의 색채를  띤 통제되지 않은  선전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선전은 
유대인을 '도이치 민족의  철천지 원수'라고 보았고, 나중에는  소비에트 혁
명 시대의  혼란스런 유혈체험들을 그에  대한 증거라고 내놓았다.  이것은 
증오의 거칠고도 과격한 구호들을  만들어서 본질적으로 의식 없고 지저분
한 종족  증오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민족적 과격주의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속적인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
  1918년 10월 이미 이들 모임에서는 우파에 의한 정부전복 계획들을 만들
어냈다. 쿠어트 아이스너 암살을  위한 여러 가지 계획들을 꾸몄고, 1919년 
4월 13일에는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 쿠데타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 중에 뮌헨에 본부를  둔 러시아 이민자 그룹과의 수많은 관계
들이 생겨났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라는 이름의 발트 출신  어떤 젊은 건
축학 대학생은 소비에트 혁명의 악몽이  너무 깊은 방에서 모임이 있는 날
이면 다음 몇  년 간 바이에른의 풍경을 극적으로  지배하게 될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여기 모여들었다. 미래 히틀러 당의 대표자 몇  명도 여기서 처
음으로 서로 만났다. 디트리히 에카르트, 고트프리트 페더, 폰 한스 프랑스, 
루돌프 헤스, 칼 하러 등의 이름이 번갈아가며 나타나고 있다. 
  툴레 결사의 위임을 받고 스포츠  기자인 칼 하러는 공구 제조공인 안톤 
드렉슬러와 함께 1918년 10월에 '정치적인 노동자 서클'을  만들었다. 이 서
클은 '정치적 사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연구할  목적으로 선택된 사람들
의 모임'으로 되어  있었으나 발기인들의 의도는 대중과 민족주의 우파  사
이의 이질감을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회원은  드렉스러의 직
장동료 몇 사람에 한정되었다. 드렉슬러는 조용하고 무뚝뚝하고  약간 기묘
한 인물이었다. 그는 뮌헨의 철도공작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정치
적 활동의 욕구가 현존하는 정당들에 의해서 제대로 대변되지 못한다고 여
겼다. 1918년 3월에 그는 스스로  발기인이 되어서 '평화를 위한 자유 노동
자 위원회'를 소집하였다. 그 목적은 고리대금업자와 싸우고 노동자 계급의 
승리의지를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 사회주의는  민족문제를 극복하
지 못하거나 아니면 이론적으로 충분히  답변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이 공
구 제조공의 정치적 체험이었다.
  이 안경 쓴 진지한 사람이  1918년 1월에 발표한 기사의 제목에 이런 인
식이 반영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의 실패와 형제애  이념의 
좌절".  그것은 1914년 8월 사회주의자들이 전쟁에  찬성했을 때 확인된 것
과 동일한 체험이었다. 그리고 1904년에 도이치 보헤미아  노동자들이 트라
우테나우에서 도이치 노동자당을 창설하게 만든 체험이기도 했다. 같은 '도
이치 노동자당'이라는 이름으로 안톤 드렉슬러는 자기  직장의 노동자 25명
과 함께 1919년 1월  5일에 영주 저택에서 자신의 당을 만들었다.  며칠 뒤
에 이 당은 툴레 결사의 자극을 받아서 '사계절 호텔'에서 민족적인 조직체
가 되었고, 칼 하러가 스스로 '전국의장'직을 맡았다. 그것은 과장된 직함이
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골짜기 54변지 '별모서리 양조장'의  방에서 모임을 
갖는 새로운 정당의 면면은 사실상  이루 말할 수 없이 보잘것없은 것이었
기 때문이다.
  드렉슬러가 때때로 시인 디트리히  에카르트나 고트프리트 페더 같은 유
명인사를 연사로 모셔오기도 했지만  그들의 상황, 동기, 목적 등은 시시한 
정치 이야긴 주고 받는 수준에 불가했다. 이상하게도 이  정당은 공적인 활
동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정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시절 뮌헨의 특징이 되었던  비밀결사와 초저녁 맥주 마시는 모임을 뒤
섞여놓은 꼴이었다. 서로 의견을 나누어보고 싶다는 막연한  필요성이 그들
을 한데 끌어모으는  힘이었다. 참석자 명단은 대체로 10명에서 40명  사이
의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독일의 수치, 패배한 전쟁의  악몽, 
반유대주의 분위기, '질서,  권리, 도덕의 유대'가 깨진 것을  탄식하는 일이 
이 모임에서 주로 이야기되는 것들이었다.
  드렉슬러가 창설모임에서 낭독하였던  '당 노선'은 이 정당이  부자들, 프
롤레타리아, 유대인, 바가지 요금, 민족들의 선동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 차 
있으며 우물거리는 정직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연간 이자액
을 1만 마르크까지로 한정시킬 것을 요구하고, 도이치  외무부와 동등한 내
국인 부서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직업훈련을 받은  정착한 노동자들을... 중
간층으로 간주할 것'을 요구하였다. 행복이란 '관용구나  공허한 말투, 모임, 
시위, 선거에 '  있는 것이 아니고 선량한 것이  아니고 '선량한 노동, 가득 
찬 요리 냄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정당의 상태가 전체적으로 매우 편협하고 지적으로 별볼일 없는 것처
럼 여겨지지만 그래도 이 '노선'의 첫 문장은 어떤  사상을 담고 있다. 그것
은 역사적 체험과 광범위한 필요성을 정책으로 바꾼 것으로,  어찌할 바 모
르고 뒤틀린 안톤 드렉슬러를 '별모서리 양조장'의 방에서 시대정신의 높이
까지 끌어올리는 사상이었다. 도이치 노동자당은  계급과 무관한 "사회주의 
조직으로, 도이치  지도자들에 의해서만 영도받는다."고 되어  있다. 드렉슬
러의 '위대한 사상'은 민족과 사회주의를 화해시키는 방향을 잡은 것이다.
  이런 생각은 드렉슬러 혼자만 가졌던  것도 아니고 또 최초의 것도 아니
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요리냄비에 대한 염려가 그에게서 모든 정열을  빼
앗아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소박한 생각이었고 민족적  안전에 
대한 평범한 갈망에서 나온 것이지만, 마르크스주의 세계해석  및 역사해석 
체계로는 측정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상을  발전시킨 드렉슬러가 
처해 있던 상황이  이 사상에 강력한 메아리를 만들어주었다. 그것은  패배
하고, 모역당하고, 혁명의 도전을 받은 나라의 병적으로  열에 들든 상황과, 
이 정당이 아돌프 히틀러와 결합된다는 사정이었다.

    '내 생애 가장 결정적인 결심'
  1919년 9월 12일 도이치 노동자당 모임에서  고트프리트 페더는 "어떻게, 
그리고 어떠한  수단으로 자본주의를 제거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였다. 약 40명 가량의 참석자들 주에는 마이르의 명을  받은 아돌프 히틀
러도 끼여 있었다. 페더가  잘 알려진 주장을 펼치고 있는 동안  이 손님은 
이 새로운 당에 대해서 "다른 수많은  정당들과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
다. 그는 '우스꽝스러운 속물근성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페더가 마침내 
말을 끝내가 나는 기뻤다.  그것은 이미 실컷 보았다." 이어서 벌어진 토론
이 끝나기를 히틀러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바이에른을 제국에서 분리시켜서 오스트리아와 통
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자 그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섰다. "그
때 나는 안 그럴 수가 없었다." 는 그 연설자를 정열적으로 공격하였고, 드
렛슬러는 자기 옆에 앉은  기관사 로터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저봐, 저 사
람 연설할 줄 아네.  쓸모가 있겠는걸." 히틀러가 '지겨운 모임'에서 연설을 
마친 다음 곧바로 돌아가려고 나가는데  드렉슬러가 그를 쫓아 와서 또 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문간에서  그는 손수 쓴 조그마한 팸플릿 책자를  히틀
러의 손에  쥐어주면서 "나의 정치적  각성이요"하고 말했다.  힘깨나 들인 
이 장면의 묘사에서 히틀러는 다음날 아침 병영에서 쥐새끼들이 흘린 빵부
스러기를 놓고  서로 먹으려고 다투고 있을  때 이 글을 읽기  시작하였고, 
드렉슬러의 인생역정에서 자기 자신의 발전과 같은 요소들을 발견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테러를 통한  일자리 폐쇄, 절반쯤 예술적인 활동을 해서  밥
벌이를 한 일  9드렉슬러의 경우에는 야간 카페에서  바이올린 연주), 그리
고 어느 정도 공포의  느낌을 가지고 알게 된 일인데, 어떤  안트워프 유대
인이 독살 기도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깨닫게 된,  유대종족이 세계를 파멸
시킨다는 인식 등, 그의  관심을 일깨운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이러한 유사
점들이었다. 히틀러가 지치지도 않고 거듭 말하는 것이었지만  이러한 체험
들은 노동자의 삶에서 얻은 것이었다.
  며칠 뒤에 청하지도 않았는데 555번 번호가 붙은 당원카드가 배달되었을 
때 그는 약간  불쾌하고 약간 재미있다는 기분으로, 그러나 무엇보다도  뚜
렷하지 않은 당혹감에서  위원회 모임의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나중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헤렌 거리에 있는 '옛 장미관'이라는 '아
주 허름한 음식점'의 탁자에서 '절반쯤 부서진 가스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 
앉아 있는 몇 명의  젊은 사람들을 보았다. 방 바깥에는 음식점  주인 내외
와 한두 명의 손님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작은 카드놀이 패거리의 간부처
럼' 회의록을 낭독하고, 남은  회비를 계산해보고 (잔고 7마르크 50페니히), 
장부를 기입하고, 북부  독일의 뜻이 통하는 단체들에게 보낼 편지  초안을 
작성하였다. 그것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종류의 협회 관리모임'이었다.
  이틀 동안이나 히틀러는 혼자 심사숙고하였다. 그리고 뒷날  자기 인생의 
결정적인 상황을 서술할 때마다, 결심이 어려웠다고 회고할  때마다 그렇듯
이 '힘들고' '무겁고' '쓰라린' 기분을 느꼈다.  어쨌든 선전과 홍보를 담당하
는 7분과  위원회 소속으로 그는  도이치 노동자당에 가입하였다.  "이틀간 
고통스러운 천착과 숙고 끝에 나는  마침내 이 일을 하겠다는 확신에 도달
하였다. 그것은  내 생애의 가장 결정적인  결심이었다. 되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어법에는 뒷날 자신의 삶의 궤적에 극적인 조명을 하려는 히틀러
의 성향만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다. 외적인 상황의  효과를 전부 빼고라도 
이러한 결심 자체를 고독하고 고난에  찬 투쟁  결과라고 표현한 것은 모
든 자료들과 잘  일치되는 부분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을 상당히 주저하고 깊이 두려워하였다.  뒷날의 상황에서
도 보고되는 것이지만, 그는 어떤 문제를 어지럽고 모순에  이를 정도로 생
각해본 다음 지쳐빠져서, 우연에 내맡기고 동전을 던져서  결정하는 성향을 
가졌다. 그러한 성향은  운명과 섭리를 신봉하는 경지로 치닫게 되는데  쉽
게 결심을 못하는 성향을 그는 그렇게 변명하곤 하였다.
  그의 모든 개인적인 결정들과 심지어는 일부 정치적인  결정들도, 절박하
게 느껴지는 다른 대안을 위해서 일종의 대피수단으로 나온 것이라는 생각
은 상당히 근거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학교를  그만둔 것, 빈과 뮌헨으로 
옮긴 것, 전쟁에 지원한 것,  그리고 정치에 입문한 것에 이르기까지 이 모
든 일에서 일종의 도피  동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도피 
동기는 또한 어찌할 바 모른 채 맞아하는 종말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나오
는 수많은 행동방식의 원인이 된다.
  제대해서 시민의 생활 속으로  쫓겨들어가기 전에 시민세계의 의무와 질
서의 요구에서 벗어나려는 소망의 귀향자  숙소에 사는 이 남자의 모든 행
동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있었다. 그것은 점차  그를 바이에른 정
치무대로 이끌어갔다.  현재도 직업이 없지만  앞으로도 직업을 갖고  싶지 
않은 이 삶은 정치를 이해하고 정치를 직업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굉장한 
몸짓을 하면서 이루어진 1919년 가을 도이치 노동자당 입당 결심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전의 생의 결심들이나 마찬가지로 시민질서에  대한 거부
였고, 시민적 사회규범의 엄격함과 의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
온 것이었다.
  일생 동안 도피  동기의 흔적들은 아주 격렬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격렬
함으로 히틀러는 여러 해 동안이나  막혀 있던 활동욕구를 위한 공간을 드
디어 찾아낸 것이다.  마침내 형식상의 요구들로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그
가 가지고 있는  전제들만을 요구하는 영역을 만나게  된 것이다. 즉 정열, 
상상력, 조직의 능력, 선동가의 재능 등이었다. 막사에서  그는 지치지도 않
고 집회 초청장을 쓰고  타이핑하고, 그것을 손수 배달하였다. 그는 주소들
을 추천받아서 추천받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여러 가지 관계와 후원, 새
로운 회원들을 찾아다녔다. 처음에  성과는 보잘 것 없었다. 행사에서 모르
는 얼굴을 만나면 열심히 기록해두었다. 여기서 히틀러가  다른 경쟁자들보
다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뒷날 거의  신성하게 추앙되는 카페 가
스타이크 구석구석 탁자에서 매주  한 번씩 모이던 7인 당위원회에서 그는 
빠른 속도로 위로 올라갔다. 생각이 많고 능숙하고 정열적이었기 때문이다.

    침묵의 껍질을 깨다
  당의 조용하고 협소한 상황을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여기는 당원들이 당
황한 눈길을 보내는 가운데 그는 이 '지루한 모임'이 공식적으로 활동할 길
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 16일에 노동자당은 이 새로운  남자의 
선택을 따르게 되었다.  111명이 참석한 최초의 공식적인 집회에서  히틀러
는 그날  저녁의 두 번째 연사로  연설하였다. 30분에 걸쳐 계속된  연설은 
점점 상승하는 능변으로 화려한 효과를 냈다. 남자 하숙집  시절 이후로 우
울한 독백 속에 담아두었던 증오의 감정들, 말없고 사람  접촉 없던 은둔시
절 쌓아두었던 것들에서 문장들, 망상적인  이미지들, 고발들이 터져나왔다. 
마지막에는 '작은  방안에 모인 사람들이  저기가 오른 듯' 했다.  히틀러는 
전에 '알아채지는 못하고  다만 막연히 느끼기만 했던 일이 현실을  통해서 
입증되었다."고 이 놀라운 체험을 적고 있다. "나는 연설할 수 있다!"
  알을 깨고 나와 자신으로 되는 순간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일상의 껍질'을 깨뜨리는 '운명의 망치질'이었다. 
그것이 가진 구원의  의미가 이날 저녁의 회상에  황홀한 어조를 불어넣고 
있다. 그는  이미 지난 몇 주  동안 연설의 힘을 되푸이해서  시험해보면서 
설득력과 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힘을 깨닫고 있었다. 그가  말하 ㅎ고가 사
실이라면 이날 저녁의  연설에서 처음으로 연설의 주관적인 힘, 땀을  흘리
고, 어지럼증을 일으키고, 힘이  쭉 빠지는 망아의 경지를 경험하였다고 한
다. 모든 것이 극단적으로 폭발하였다. 두려움, 자의식, 혹은 1백 번도 넘게 
들었던 (트리스탄)의 황홀경  등을 그는 광포한 연설  안에 쏟아부었다. 이 
시절은 회상하면서 자신을 가리켜 말한 대로 이 '가련한 놈'의 욕망이 여기
서 단 한  번 일깨워진 다음에는 모든 정치적인  정열보다 앞에 놓이게 된
다. 그것은 언제나 새로이 그를 단상으로 몰아가서, 그 옛날 느꼈던 망아의 
충만감을 찾아서 자기 확인을 하도록 만들었다.
  정치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파제발크 야전병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저 
'11월의 배신'을 보고 깊이 절망한, 그러나 흔들이지  않는 애국자의 반응이
었다고 그는 전설적인 주장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1919년  가을의 데뷔 체
험이 더 가까이 있다.  당시의 회원 및 참석자 명단에 그는  자산을 화가라
고 혹은  가끔 작가라고 적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위대함과 예술에  대한 
젊은날의 사라져 가는 꿈을  붙잡아두려는 생각에서 나온 당혹스런 진술이
었던 것 같다.
  1919년 11월 중순에 기록된  뮌헨 경찰 정보라 보고서에는 "그는 상인이
며 직업적인 선전 연설가"라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도, 정치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지 일년이나  지났건만 그런 흔적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는 연설
을 하려 하고,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이미 쿠비첵이 관찰
한 바가 있었다.  그는 연설의 재능이 가진  압도적인 힘을 깨달았다. 서른 
살 된 이 남자는 이런  연설재능으로 실패한 경력에서 빠져나올 출구를 보
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도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정확한 개념을 갖지  못했다. 그는 직
업적인 선전 연설가가 될 생각이었다. 그것은 한 번 더 도피행동이었다. 이
러한 도피행동과,  일찍이 자기 머리에  수많은 소명의 광채가  쏟아졌다는 
뒷날 그의 주장 사이의 차이는, 정치 입문에 대한  개인적인 동기와 사회적
인 동기 사이의 차이다. 많은 증거들은 도피 의도가  더욱 강력한 동기였다
는 것을 보여준다. 어쨌든  히틀러는 정치적인 각성체험을 갖지 못했다. 그
리고 '세계의 불의가 산의 홍수처럼 가슴으로 쏟아져내려서' 마침내 착취자 
겸 사기꾼을 절멸시키기로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순간을 알지 못했다.

    공개적 활동을 시작한 노동자당
  히틀러는 노동자당 입당 직후에 활동이 없고 두려워하는  위원회 모임을, 
공개를 염두에 둔 시끄러운 전투적 정당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착수하였다. 
툴레 결사에서 이어받은 구식의  비밀결사적인 특성을 버리지 못하고 노동
자당을 계속 정치적인  남자들의 서클 정도로 이끌어 가면서, 친밀한  양조
장 방의 어둠 속에서 자신의 특별의식을 지키려 하는 칼 하러의 반대를 무
릅쓰고 히틀러는 처음부터  대규모 대중정당을 지향하였다. 대규모  대중정
당이 협소한 서클에는잘 들어가지 못하는 그의 사고방식에 맞을 뿐 아니라 
오래된 보수정당들의 실패의 원인에 대한 그이 통찰에도  들어맞았다. 하러
의 견해에는 우스꽝스럽게도 황제시대 시민적인 유명인사 정당들의 약점이
었던 배타적인 성향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소시민 대중과 보수적인  생각
을 지닌 노동자 계층과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1919년 말이 되기도 전에 노동자당은 히틀러가 몰아붙은 끝에 아치형 천
장을 가진, 빛도 들지 않는 별모서리 양조장의 지하실에  상설 사무소를 차
리게 되었다. 임대료는 원 50마르크였다. 히틀러는 계약서에다가 자기 직업
을 '화가'라고 적었다. 탁자  한 개와 빌린 의자 몇 개가 놓였고  전화기 한 
대, 당원 카드와 당비를  보관하기 위한 금고가 마련되었다. 이어서 옛날의 
독수리표 타이프라이터 한 대와 인장이 마련되었다. 기분이  나빠진 하러는 
보통의 관공서 같은 이런 설비를 보고 히틀러가 '과대망상' 이라고 말했다.
  이 시기에 히틀러는  위원회의 수를 처음에는 열, 다음에는 때로  열둘이
나 그 이상까지 확대하였다.  그는 주로 자기의 개인적인 추종자들이나, 드
물지 않게 막사에서 알게 된 동료들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이렇게 사무실을 
갖추고 보니 손으로 적은 종이 쪽지에다가 원시적이고 효과도 없는 행사광
고를 하는 대신,  기계를 이용하여 다채롭고 만들어진 초청장으로 바꿀  필
요가 생겼다. 동시에 (뮌헨 관찰자)지에다 광고를 냈다.  행사장의 탁자들에
는 선전문구와 팸플릿들이 펼쳐 놓였다. 히틀러는 처음으로  상당히 근거가 
없고 현실적으로 뒷받침되지도  않은, 따라서 대단히 도전적으로  여겨지는 
선전기술상의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한 자신감은 그렇게 작고도  알려지지 
않은 정당의 공개행사로는 어울리지도 않는 일들을 감행하고,  입장료를 올
려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나타나고 있다.
  연설가로서 점점 명성이 커지면서 히틀러의 당내 지위도  확고해졌다. 해
가 바뀔 무렵에는 별써 완고한 하러는 당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최초
의 길이 그의 앞에  방해 없이 열렸다. 곧 이어서 당수  드렉슬러는 회의적
인 태도로, 그리고 공개석상에서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몹시 염려하면서
도 야심만만한 선전담당 위원  히틀러의 고집스런 요청에 굴복하여 대중에
게 호소하기로 하였다.  히틀러가 입당한 지 채  반 연도 지나지 않은  2월 
24일에 당은 호프 양조장의 연회실에서 최초의 대규모 행사를 계획하였다.
  이제는 신화가 되어버린 이 집회를 알리는 새빨간 벽보에 히틀러의 이름
은 나와 있지 않다. 이날 행사의 주인공은 이름난  민족주의 연설가인 의사 
요하네스 딩펠더 박사였다.  그는 게르마누스 아그리콜라기를 기묘한  방식
으로 설명한, 지적으로 형편없는 경제이론을 내놓은 인물이었다. 그의 염세
적인 생각에 따르면 자연의 생산성이 파업을 일으켜서 농산물이 줄어들 것
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해충들이  먹어치우게 되니 인류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대단히 절망적인 것인데 국민적으로  새
로운 다짐을  한다는 희망을 통해서만 겨우  빛을 보이고 있다. 그는  이날 
저녁에도 연설에서  이런 내용을  말하였다. 경찰보고서에 따르면  "철저히 
냉정한 태도였고, 자주 깊은 종교적 정신을 드러내 보였다."고 한다.

    25개 조항 공표
  그러고 나서 히틀러가 나섰다. 그는 이러 대규모의  청중에게 노동자당의 
의도를 알릴 단 한 번의  기회를 이용하기 위해서 하나의 강령을 만들어내
자고 주장했다. 당시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연설에서 정부의 비겁함과  베
르사유 조약을 비난하고, 안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성향을  비난하고 유대인
과 암매상과 고리대금업자 등 '거머리 도당'을 비난하였다.  그러고 나서 여
러 번이나  박수와 소동으로 중단되는  가운데 새로운 강령을  읽어나갔다. 
마지막에 "어떤 외침이 끼어들었다.  이어서 거대한 소란이 일어났다. 모두
들 의자와 책상  위로 올라갔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나가
자'는 구호가 터져나왔다."  이 집회는 전체적인 소동 속에서  막을 내렸다. 
과격좌파 당원 몇 명은  인터내셔널과 소비에트 공화국이라는 구호를 큰소
리로 외치면서  호프 양조장에서  시청문까지 행진해갔다. "그밖의  소동은 
없었다."고 경찰보고서가 밝히고 있다.
  대중적인 노선을 취한 언론들조차, 온갖 소란 속에서도  일상적인 면모를 
드러낸 이 집회에 대해서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이
루어진 자료연구를 통해서  아닐 집회의 사건을 재구성해볼 수 있다.  물론 
히틀러는 집회가 상당히 강력하였고, 싸움으로 시작되어서 끝도  없는 확신
의 환호 속에서 계속된 대중의 고백으로 이어졌다고 신화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여기 모여든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점점 더 한 목소리로" 25개 조
항들에 공감하였고, "마지막  조항이 대중의 마음에 이르는 길을 열어놓자, 
내 앞에는 하나의 새로운 확신, 하나의 새로운 믿음, 하나의 새로운 의지로 
뭉친 사람들이 가득 찬 홀이 놓여 있었다."
  히틀러는 이제 이토록 불붙은  대중을 바라보면서 바그너 오페라식의 상
상에 빠져들어간다. "이  불꽃에서 게르만의 지크프리트에게 자유를... 찾아
줄 그 옛날의  칼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는 "용서를  모르는 복수의 여
신이... 1918년 11월  9일의 그 수치스런 행동에  복수하려고"내려오는 소리
를 들었다. 그에 반해서 민족주의적인 (뮌헨 관찰자)는 단순히 히틀러가 딩
펠더 박사의 연설에 이이서 "몇 가지 적절한 정치적 이미지들을 전개하고" 
노동자당의 정치강령을 읽었다고만 적고 있다.
  더 큰 의미에서 보면 (나의 투쟁)의 저자가 옳았다. 이 행사와 더불어 드
렉슬러가 창설한 보잘 것  없는 맥주모임이 아돌프 히틀러의 대중정당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신은 뒤쪽에 숨은 조종자의  역할
만 했다. 그런데도 그날 모여든 대략 2천 명의 사람들은  호프 양조장 대형
홀을 가득 채우고 히틀러의 정치적 생각을 인상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 이
제부터 계속적으로, 점점 더 오직 자신만을 상승시키면서,  그의 의지, 그의 
스타일, 그의  연대가 당을 앞으로  밀어붙이고 성공이나 실패를  결정하게 
된다.
  나중에 정당은 1920년 2월  24일의 행사를 마르틴 류터가 비텐베르크 성
문에 95개 조항 반박문을 붙인 일에 비교하였다. 그러나  루터나 이날 행사
나 전해내려 오면서 원래의 역사적  의미에 별로 맞지 않는 이미지를 얻은 
것이다. 역사는 극적인  장면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무시하는 경향을  가
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날의 정당 창설이 미리 계획된 것도 아니었고, 주요 
연사는 당원도 아니었으며, 히틀러는 이 행사를 정당운동의  창설이라고 뒷
날 거듭 축하한 것은 근거가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이날 저녁 낭독한 강령은  안톤 드렉슬러가 아마도 어느 정도 고트
프리트 페더의 영향을 받아서 작성한 다음 꼼꼼히 검토하라고 위원회에 넘
겨준 것이었다. 히틀러의 참여는 항목별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몇 개의 항
목에 나타난 표어식의  표현에서 교열과정의 참여를 짐작할 수 있다.  전부 
25개 조항으로  나뉘어 있지만, 옛날  민족적인 이데올로기 현재  국민적인 
항의욕구 및  현실거부 성향과 제멋대로  결합되어서 전체적으로 감정적인 
매력을 통한 통일성을  지닌다. 부정의 조항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  두드
러진다. 그것은 반자본주의, 반공산주의, 반의회주의, 반유대주의 등이고 전
쟁의 종결과 결과를 극히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
  그에 반해서 중산층이 보호를 위한 다양한 요구 같은 긍정적인 조항들은 
대단히 모호하고 드물지 않게 안톤 같은 소시민의 두려움과 욕망을 자극하
는 요구들을 담고 있다. 예를 들면 노동을 통하지 않고  번 수입은 모두 몰
수할 것(11조), 전쟁 동안 거둔 모든 이익은 압류할 것 (12조), 대기업은 노
동자에게 이익분배를 해 줄 것(14조) 등이다. 그밖의  강령조항들은, 대규모 
백화점들을 지방 자치단체가 인수해서 '싼 가격으로' 소규모 기업체에 임대
해 줄 것(16조),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토지투기를 금지할 것(17조) 등을 포
함한다.
  기회주의적이고, 서둘러서 즉석에서  만들어진 요소들이 들어 있지만  이 
강령의 의미는 일부에서 생각하듯이 그렇게 하찮은 것만은  아니다. 어쨌든 
그것은 장차 당 지도자인 선동가적인 능력의 전개를 위해서 유혹적으로 빛
나는 배경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그것은 적어도  소질
면에서 뒷날  국가사회주의 지도이념이 모든  본질적인 경향들을 포함하고 
있다. 공격적인 생존공간 조항(3조), 반유대주의 원칙(4,5,6,7,8,24조), 그리고 
해롭지 않게 지방자치단체 뒤에 숨은 형태로 나타나서 분명 굉장한 박수갈
채를 받았을 전체주의적인  요구, 즉 언제라도-공동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
에 앞선다는 형식으로- 전체주의 국가의  원칙으로 바뀔 수 있는 원칙들로 
뒤덮이고 하지만 그래도  국가사회주의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남용되
고 있는 자본주의를 제거하겠다는 것, 공산주의의 계급투쟁  노선을 극복하
겠다는 것, 마지막에는  강력하게 통합된 국가 공동체 안에서 모든  계층의 
화해를 이룩하겠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민족적,  사회적으로 깊이 분노한 나라에서  특별한 
매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의  지배적인 두가지 사상을  하나로 
합친 '(민족)국가  사회주의'라는 이념 혹은  공식은 시대의 수많은  정치적 
강령들과 질서계획들의  토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능공 
안톤 드렉슬러가 자신의 '정치적  각성'에 대해서 쓴 소박한 체험적 보고서
에도 나타나는 것이며, 또한  1918년에 이미 산업체의 후원을 얻어서 '반볼
셰비키 연합'을 결성한  에두아르트 슈타틀러의 베를린 강연들에도  나타나
는 생각이었다.그것은 뮌헨의  방위군 지역사령부에 의해서 도입되었던  계
몽강좌의 주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프로이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제목을 
가진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저서에 대해 도발적인 공명을 불러 일으킨 사싱
이기도 했다.
  이 생각은 사회민주당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어서, 제2차  인터내셔널
의 실패에 대한 실망에서 전쟁 발발 무렵에 몇 명의 독립적인 인물이 국가 
사회주의 혁명 계획의 길을  걷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도이치 사회주의 노
동자당'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철도  기술자 루돌프 융이 1919년에  펴낸 
광범위한 이론서의 제목은 (민족국가적 사회주의의 형성과 목적)이었다. 국
가사회주의는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가지고서 자기들이 마르크스적 사회주의
를 성공적으로  물리칠 수 있는  시대적 정치사상이라고 자신하였다.  모든 
인터내셔널의 노력들과 아주 다르게 융은 1918년 5월에 벌써 오스트리아의 
동지들과 힘을 합쳐서  '도이치 국가사회주의 노도자당'이라고 이름을 바꾸
고 있다.
  호프 양조장의 모임이  있은 지 일주일 만에  노동자당도 이름을 바꾸었
다. 수데텐 지역과 오스트리아 그룹을 본받아서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
자당'이라고 바꾸었다. 동시에  국경 저편 동지들의 전투상징을 받아들여서 
갈고리 십자가를 상징으로  채택하였다. 오스트리아 국가사회당 당수인  발
터 릴 박사는 바로 직전에 모든 국가사회주의 정당을 결속시키는 서비스를 
맡을 '국가간  사무처'를 만들었다. 이제  여러 가지 댜앙한 결속을  위해서 
국가사회주의 강령들 간의  활발한 접촉이 이루어졌다. 특히  뒤셀도르프의 
기술자 알프레트 브루너의  '도이치 사회주의당'과 활발한 접촉을  했다. 이 
정당은 "극좌이며 우리의 요구는 볼셰비키들의 요구보다 더 극단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중간급 도시에 지구당을 두고 있었고, 뉘
른베르크 지구당은 교사인 율리우스 슈트라이허가 이끌고 있었다.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하다.
  1920년 4월 1일에  히틀러는 마침내 군에서 제대하였다. 이제 그는  대안
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전적으로 정치에  헌신하여서 국가사회
당의 지휘를 맡고 당을 자기 생각대로 개편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이 자
르 강 가까운 곳에 있는 티어슈 거리 41번지에 방  하나를 세웠다. 하루 대
부분 시간을 그는  지하실에 있는 당사무소에서 보냈다. 그러나 당의  직원
이 되는  것만은 절대로 피했다. 당이  최초의 위기를 맞이하자 그가  어떤 
수단으로 생계를 꾸려갔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의 셋방  주인집 
여자는 언제나 똑같은 일을 하는 더러운 젊은 남자를 '진짜 보헤미안' 이라
고 생각했다.
  그는 더 잃을 것도 없었다. 그의 자신감은 주로  연설가로서의 재능과 냉
정함과 위험에 대한 각오에서 나온  것이지 이념의 확신에서 나온 것은 아
니었다. 이념 자체가 아니라 이념이 제공하는 도구적 가능성, 그 자신의 말
로는 그것이 '강력한 구호'를 내놓는가 하는 것만이 그의 관심사였다. '고루
한 민족 이론가들'과 '말만  하는 인간들'과 '사상 도둑들'에 대한 '불쾌함과 
깊은 역겨움'을  가졌다는 사실에서 그가  정치적으로 형성 가능한  실체가 
없는 단순한 사상의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리고 자기가 논쟁에서 남을 물리칠  수 있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폭발적
인 연설을 시작했다는 사실에도 드러나고 있다.
  그는 사상이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사상의 입증을 통해서가 아니라 능숙
한 사용을  통해서라고 여겼다. 진실이  아니라 무기로서의 속성의  사상에 
설득력을 부여한다고  본 것이다. 그는  반박하기 힘든 불확실한  표현으로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모든  이념은 최고의 이념이라고 하더라고  이념 자
신이 목적이 될 경우에 위험하게 된다. 사실상 이념이란  목적을 위한 수단
일 뿐이다." 다른 자리에서 그는 정치투쟁에서  폭력은 언제나 이념의 뒷받
침을 위해서 필로 하는  것이며 그 반대가 아니라고 하고 있다.  이제 자기
가 들어선 '국가사회주의'도 그는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는 야심만만한 목적
을 위한 수단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이제 그가 무대에 가지고 들어선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표어가 되
었다. 국가사회주의  이념이 포함하고 있는 화해의  이념은, 특히 전선에서 
남자들 사이의 유대라는  전쟁을 경험하고 난 다음  그들의 미래의 일부를 
빼앗아가기 시작한 계급투쟁의 구호보다  훨씬 더 현대적이고 시대에 가까
운 것으로  여겨졌다. 세기가 바뀐  직후에 벌써 국가사회주의적인  생각을 
보여주었던 작가 아르투어  묄러 반 덴 브룩크는 국가사회주의는 이제  '도
이치 미래의 일부'라고 말했다. 전통적인 것에 대한  존경심도 없고, 간교하
고, 건강한 인간이성을 경멸하는,  발상이 풍부한 정치가의 손 안에 들어가
자 그것은 정말 그렇게 되었다. 이 이념은 수많은 지원자를 얻었다. 그러나 
머지 않아서 히틀러가  대중의 환호성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자기  자신이
야말로 바로 도이치의 미래라는 확신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제2장 위대한 연설가
  1920년 봄, 그가 정치에 들어서던 힘들고도 취한  것 같던 시절 히틀러는 도이
치 미래에 대한 어떤 요구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는 밤마다  맥주거품이 부글거
리고 담배연기가 자욱한  맥주집들을 돌아다니면서, 처음에는 거의  적대감을 드
러내는, 아니면 그냥  재미로 자기 말을 듣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자기편으로 만
들려고 애쓰는 뮌헨의 지역 선동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명성은 점점 더 올라갔다. 극단적인  몸짓에 쉽
게 넘어가는 수사적인 도시의  분위기는 이 연설가의 연극적인 자기연출 스타일
과 통제되지 않은 폭발성에 대단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 분위기는 다른 역
사적 요인들 못지  않게 그를 자극하였다. 히틀러의 출세는 시대의  조건들에 의
해서 결정적으로 촉진되었다는 주장은  그가 사회적 상승을 시작한 장소인 뮌헨
의 특별한 조건 아래서만 완전한 타당성을 가진다.
  그가 보여주었던 목적의식과 사고의 정도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는 비상하
고도 여성적인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감수성으로 그는 시대의 분위기
를 조절하고  이용할 수 있었다.  최초로 그의  전기를 쓴 게오르크  쇼트(Georg 
Schott)는, 그의 내부에서 말하고  있는 악마적인 힘에 대해서 어느 정도 근심스
러운 경탄을 지닌 채  그를 '꿈을 우물거리는 사람'이라고 불렀다.(게오르크 쇼트
(G.  Schott). 1924년에  간행된  인기 있는  히틀러 묘사(Das  Volksbuch  vom 
Hitler)의 서문.) 히틀러는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혹은  그 자신이 표현한 대로 
'몽유병자의 본능으로 '(본능적인 정확성으로 :역주)  자신의 길을 갔다. 히틀러가 
이렇듯 본능의 인간이라는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퍼져 있어서 그이 합리성
과 냉정한  계획의 능력을 흔히  지나쳐버리곤 한다. 합리성은  그의 행동방식의 
기초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온갖 능력들 못지 않게 그이 출세의 바탕이
기도 했다.

    히틀러의 합리성과 짜맞추는 능력
  사람들은 특히 그의  비상한 학습능력, 이 시절 그를 지배하고  있던 충족되지 
않는 배웅의 열망을 간과해버리곤 한다. 연설가로서의  승리로 얻게된 열병 같은 
상태에서 그의 감수성과  흡수능력은 보통보다 훨씬 컸다.  그의 '짜맞추기 능력'
(하이덴,(Geschichte),   11쪽   히틀러의   다음  언급에   대해서는   라우슈닝
(Rauschning).(Gesprache),225쪽.)은 극단적으로 상이한  요소들을 붙잡아서 김밀
한 형태로 짜맞추었다. 자신의 선배들이나 동료들한테서  배우는 것 이상으로 그
는 적들에게서도 배웠다. 자신은  언제나 적에게서 매우 많은 것을 배웠고, 바보
나 약자만이 적에게서 배우는  도중에 원래 자신의 생각들을 잃어버리는 법이라
고 확언하였다.
  그래서 그는 리하르트 바그너 , 레닌, 고비노, 니제, 르 봉(Le Bon),  루덴 도르
프, 노스클리프 경(Lord Northcliffe), 쇼펜하우어, 찰 뤼거 등을 조합해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제멋대로이고  기묘하여, 잘 모르는 사람의 대담성으로 이
루어진 것이지만 그렇다고 완결성이 없는 것도  아니였다. 이러한 이미지 안에서 
무솔리니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도  점점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른바 시온의 현자들과  분명하게 위조된 그들에 관한 기록도 스승으로 
삼았다.(이른바 보고문에  대해서는 귄터 슈베르트. 위의  책, 33쪽 이하.  최초로 
완벽하게 기록된 1920년  8월 13일자 연설에서 그는 펠프스(R.H phelps)가  입증
한 대로 이른바 보고서의 수많은 주제들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특히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장 오랫동안 배웠다.  내면적으로는 이
데올로기에 무관심했으면서도 그가  국가사회주의 세계관을 만들어내기 위해 바
쳤된 에너지는 마르크스주의가 그에게  모범으로 작용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전통적인 시민 정당은 좌익의 대중조직이 가진 힘과 투쟁 에너지에 못 미친다는 
것이 그가 처음부터 가졌던 생각이었다. 좌익 조직과 비슷하게 조직되고, 더욱더 
단호한 세계관을 가진 정당만이  마르크스주의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
다.(Mein Kampf. 186쪽 이하 참조.  여기서 히틀러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특
별한 정신적 기반을 가진  운동들은... 스스로가 새로운 사상 , 이념 혹은 세계관
을 지닌 적들에 의해서만 붕괴될 수 있다" 두 페이지 뒤에 다시 이렇게 적고 있
다. "권력수단들을 가지고 세계관을 물리치려는 시도는 이 싸움이 새로운 정신적 
태도에 대한 공격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  한 결국 실패했다." 비슷한말이 1920년 
8월 13일자 히틀러의 연설에도 나온다. 위의 책 415쪽, 417쪽.)
  그는 특히 혁명시대의  경험에서 전략을 배웠다. 러시아의  사건들과 바이에른
의 소비에트 지배는 그에게 목적의식이 확고한 몇 명의 주축인물이 원력을 장악
하는 기회를 보여주었다.  레닌이 혁명적인 충동을 어떻게  상승시켜서 이용하는
가를 가르쳐주었다. 히틀러는 나중에 이와 같이 말하였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사실을  거리낌없이 고백합
니다. 지겨운 사회이론과 유물사관 따위의 부조리한 것을 말하는게 아니에요. 나
는 그들의 방법을  많이 배웠어요. 소매상과 비서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유순하
게 시작하였던 일을  나는 진지하게 여겼던 것이죠. 국가사회주의는 전부  그 안
에 들어 있습니다. 좀더  정밀하게 들여다보십시오...  이새로운 정치적 투쟁방식
은 본질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는  다만 이 방법을 받아들여
서 발전시키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나는   사회민주주의가 
민주주의 틀 안에서  혁명을 실현하려고 했기 때문에  열 번씩이나 중단한 일을 
꾸준히 계속해올 뿐이죠.  국가사회주의란, 마르크스주의에서 부조리하고 인위적
인 민주주의와의 결속만 끊으면 가능한 형태입니다.(라우슈닝 147쪽이하)
  그는 자기가 받아들인  것에 일관성만 부여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언제나 그
것을 발전시켰다. 그이 본질에는 남을 능가하는  위대한 몸짓을 지향하는 유아적 
요소가 들어 있다. 최고를 꿈꾸고, 가장  과격한 이데올로기와, 뒷날에는 가장 막
강한 건축물, 가장  무거운 탱크를 확보하려는, 경탄받고  싶어하는 욕구였다. 그
는 자신의 세계관,  전략 목표들을 '삶의 길 양쪽에 나타나는  온갖 덤불 숲에서' 
긁어모았다. 그는  모든 일에 부여한 단단함과  일관성, 그리고 최종적인 조치를 
보고도 물러서지 않는 특성은 그 자신의 것이다.
  합리적인 배려는 처음부터  그의 전략의 특징을 이룬다. 그는 처음에  이름 없
는 자의 소굴에서 빠져나오고 경쟁관계의 집단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단연 돋보
이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였다. 뒷날 그의  정당사 연설에 거듭 등장하는 무명의 
출발에 대한 언급은, 오랫동안 기회를 잡지 못한 그의  공명심이, 자신이 위대하
지만 알려지지  않고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의식아래서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증언해 주고 있다. 단호함은  그의 데뷔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였고, 규칙이나 인
습을 거부하는 그의  태도에도 나타난다. 숨이 멎을 듯한 단호성으로  그는 이제 
자신의 이름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쉬지 않고 활동하고, 소동과 스캔들을 이
용하고, 도당을  이루었다. 법칙 이외에 테러가  사람들의 침묵을 깨뜨리고 매일 
매일의 이름을 만들어줄 전망만 보이면 테러까지 감행하였다. "그들이 우리를 어
릿광대로 묘사하든 범죄자로 묘사하든  중요한 것은 그들이 우리 이야기를 한다
는 사실, 그들이  계속 우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는 사실이다."(Mein Kampf 
544쪽)

    붉은 깃발과 제복의 힘
  이러한 생각은 모든 활동의 양식과 수단을  결정하였다. 깃발들의 요란한 붉은 
색은 심리적으로 효과를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좌익의 색깔을 
도전적으로 찬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임을 알리는  거대한 벽보들은 완전히 붉
은 색인데 평이한 구호들 사이 거대한 크기로  인상적인 사설을 담고 있었다. 위
대하다는 인상과 단호한 타격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상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서 국가사회당은 툭하면  거리행진을 벌였다. 길거리에서 전단을  나누어주고 벽
보를 붙이는 일이 거의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히틀러는 내놓고  좌익의 선전술을 모방하면서 사람을  가득 실은 자동차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도록 했다.  자동차 위에는 시민들의 거주지역에서  혐오감을 얻
었던, 주먹을 휘두르는  소련식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제대군인들의  단정한 과
격주의가 올라앉아 있었다.  이들은 전쟁의 포화가 멎고,모두 제대를 하였으면서
도 구가사회당의  돌격기 아래서 또  다른 방식으로 전투를  계속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히틀러의  행사에 위협적이고  군사적인 배경을 만들어주었다.  히틀러는 
뮌헨에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도시에서도 이런  행사들이 파도처럼 
계속되도록 계획하였다.
  군인들은 당의 사회적인  얼굴을 점차 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노동자들과 영
세 기업자들로 이루어진 단골  모임을 폭력에 익숙한 직업군인의 단단한 모습으
로 바꾸어 나갔다.  당의 가장 초기 당원명단에 보면 193명의  이름 중에 직업군
인이 22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정당활동에  시민적인 생존문제를 피할 가
능성을 보았다. 뿐만  아니라 참호속에서 전우애를 체험하면서 확인했던, 새로운 
공동체 형식을 향한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하였다.  시대가 그들을 그렇게 키워냈
던 것이지만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삶과 죽음에 대한 경멸을 표현하려고 하
였다.
  군대식의 엄격한  복종, 기율, 헌신에 익숙한  이 새로운 가입자들의 도움으로 
히틀러는 점차 당의  확고한 내부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뮌헨의  방위군 사
령부는 새로운 사람들을  적잖이 그의 휘하로 보냈다. 히틀러는 뒷날  자신은 이
름도 없이, 아무런 방책도 없이 오직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적들로 둘러싸인 세
계에 맞서 일어섰노라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그가 지배적인 시대의  성향에 맞
섰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은 없었다. 처음부터 
그는 오히려 상당한  정도로 방위군가 의용군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한 후
원이야말로 이러한 형태의 데뷔를 가능케 해준 것이었다.

    에른스트 룀의 후원
  누구보다도 에른스트 룀이 국가사회당을  지원하였다. 그는 대위계급으로 에프 
연대 사령부에서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바이에른 위장 군사정권의 실질적인 
수뇌였다. 그는 당의  추종자, 무기, 재정 등을  이끌었다. 이러한 노력을 하면서 
그는 방위군과 의용군 연합의 감시위원회 장교들의  후원을 받았다. 그들은 여러 
가지 동기에서 이 불법적인 활동을 돕고 있었다.  그 동기의 일부는 독일의 시민
전쟁 비슷한 상황에서 자신의 이익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일부
는 사방에서 시끄러운 좌익에 대항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나아가 자기 동료들
이 과거의 적을 눌러 이기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군인이 되겠다는 소망밖에' 없었던 룀은 전쟁 말기에 총사령부
에서 일하면서 탁월한 조직능력을  보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고참병 유형의 인물
이었다. 탄환으로 망가진, 언제나  불그스레한 얼굴을 가진 이 작고 뚱뚱한 남자
는 대단히 저돌적인 사람이었고 전쟁에서 수많은  상처를 입었다. 그는 사람들을 
간단히 병사와 시민, 친구와 적으로 분류하였다. 정직하고 책략이 없고 실팍하고 
무미건조한고 사려 깊고 솔직한 병사였고, 양심의 가책 따위로 구애받지 않았다. 
불법적인 책략을 쓰던 옛날 동지들중의 누군가가, 룀은 어디에 나타나든지 '모임
에 활기를' 가져왔다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분명히 많았다.
  바이에른 방식의  세속성을 지닌  그는 이데올로기적인 망상과는  무관하였고, 
언제나 서둘러 만들어내는 온갖 형태의 소란을 통해서 국가 안에서 병사가 우위
를 차지하도록 노력하렸다.  이러한 생각에서 그는 총사령부 안에 선전  및 정치 
그룹들에 대한 정보업무를  위한 특별 부서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 부서
의 명령을 받고  아돌프 히틀러는 도이치 노동자당의 모임을 방문했다.  거의 모
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젊은 선동가의 천재성에 감명받은 그는 히틀러가 정
치가들과 군인들과 접촉하도록  도와주었는데 그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었다. 그
는 아주 일찍이 당에 가입해서 당적 번호 623번을 얻었다.
  룀의 부하들이 당에 도입한  군지휘부적인 특성은 정치적 상징과 장식을 써서 
요란스럽게 단장되었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주장하듯이 갈고리 십자가 기
는 그 자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원의 한 사람인  치과의사 프리드리
히 크론(F.Krohn)이 1920년 5월 중순에 슈타른베르크 지역의 창립집회를 위해서 
초안한 것이었다.(프란츠 빌링. 초기 당원의 한 사람인 크론은 수  많은 이데올로
기상이 자극과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었는데 슈타른베르크의 당 창설모임에 안톤
드렉슬러도 초대하였다.  드렉슬러가 홀에  들어서면서 연당에서 깃발을  보았을 
때 그는 소리쳤다. "어. 여기 우리 당기가 있네!" 다음날 국가 사회당의 당위원회
는 기를 넘겨받고  그 모범에 따라서 당휘장을 부착하였다. 크론은  왼쪽으로 꺾
어지는 갈고리  십자가를 반납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또한 검정...하
양...빨강 색깔을 선택하였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검정은  패전
으로 인한 슬픔의 상징이고, 하양은 1914~1918년  전쟁에 대한 우리의 죄 없음을 
, 그리고 빨강은 고향에 대한 사랑의 상징, 특히 잃어버린 국경지대에 대한 사랑
을 나타낸다."  그에 대해서 히틀러의 설명은  이렇다. "빨강에서 우리는  운동의 
사회적 성격을 보고, 하양은 민족주의적인 특성을, 갈고리 십자가는 아리안 인종
의 승리를 위한 투쟁의 사명과 아울러 영원히 반 유대주의적이었고 앞으로도 반 
유대주의적이 도리  창조적 과업의  사상이 승리하리라는 것을  나타낸다."(Mein 
Kampf)557쪽 참조. 히틀러의 역할은 마저에  의해서 훨씬 더 강력하게 부각되어 
있다.) 히틀러이 공적은 최초의  발상에 있지 않고, 이 널리 알려진  상징물이 가
지는 심리적 효과를 첫눈에 알아보고 그것을 당의 상징물로 삼았다는 사실에 있
다.
  그가 이탈리아 파시즘의 군기를 도입해서 돌격대에 군기로 준 것도 비슷한 태
도다, 그는 '로마식'  인사법을 도입하고, 계급과 제복을 군대식으로 정확하게  만
드는 것을 중시하고,  형식적이 ㄴ문제들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겼다. 등장방식을 
연출하고, 세부장식을 하고, 군기수여식, 행진, 열병식 등을 점점 더 거대한 의식
으로 만들었다. 그는  전당대회 날이면 거대한 돌배경 앞에서 인간  사각형 방진 
을 지휘하였고, 그러면서 자신의 희극적이고도 건축적인  재능을 잔뜩 부풀려 만
족시켰다.
  그는 오래된  예술잡지와 뮌헨 국립도서관의 문장  코너를 오랫동안이나 뒤진 
끝에 독수리  도안을 찾아서 당의 인장에  사용하도록 했다. 1921년  9월 17일자 
국가사회당 당수로서의 최초로 회람 장은 특별히 세심하게 당 상징물을 위한 것
이었다. 이어서 지역구  지도부에 "회의를 위해서 철저하게 당 휘장을  선전하고, 
어디서나 언제나  당 배지를 달고  다니라고 지시하였다. 그것을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유대인에게는  즉각 가차없이  응수해줄 것"을 명령하였다.(프란츠  빌링. 
위의 책 87쪽에서 베낌)

    연설가로서 명성이 커지다
  제의적인 형식과 경직된 테러  형식의 결함은 옹색하나마 초기의 시작을 결정
지었다. 그리고  히틀러의 가장 효과적인  광고발상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독일에서 정치에 인기를 만들어준  전통적 요소들이 이러한 형식으로 시대에 알
맞는 형태가 외어  다시 등장하기 때문이다. 국민오락이자  미화시키는 구경거리
로서 팔을 높이  쳐드는 일은 절대로 거부감을  주지 않았고 운명적인 진지함을 
덧붙여주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 역사의 순간에는  어쨌 전통적인 당 운영 방
식의 거짓 친절보다는 더 적합한 것으로 보였다.
  국가사회당이 예전의 민족주의 정장처럼 사회적인 배타성을 요구하지 않는 정
당으로 출발하였다는 점도  대단히 유리한 부분이었다. 계급의식에서  벗어난 있
었기에 이 정당은, 원래 애국심이란 유명인사들의  특권이며 재산가 교양을 갖춘 
사람만이 조국을 가진다는  전통과 단절하였다. 이것은 민족적이며  동시에 대중
적이고, 거칠고 주먹질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국가 사회당은 민족주의적인 생각
을 길거리와 합쳤다.  대중을 철저히 사회적 위협 요소라고만 여기고  방어적 생
각만을 가비던 시민계급은 이  정당이 처음으로 공격적인 보호를 제공한다고 생
각하였다.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서 우린 폭력이 필요하다".고  히틀러는 거듭 확
인하였다. "다른 사람들이야....  자기들의 클럽의장에 깊이 파묻히겠지만,  우리는 
맥주탁자 위로 올라가려는  것이다".(1920년 8월 13일자 뮌헨  호프 양조장의 연
설.VJHFZ 1968/4,  418쪽에서 베낌. 나아가 1920년  5월 15일 뮌헨 호프  양조장 
연설, 도이얼라인(Hilters   Eintritt), in:VJHFZ 1959/2 213쪽(Dok. 21).)  그를 따
라다닐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맥주홀과 서커스 천막에서 대중을 흘리고 
있는 이 연극적인 선전꾼은  자신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기술을 터득한 사람으
로 보였다.
  그의 수완은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하였다. 그는  끊임없이 무슨 일인가를 벌였
다. 원칙은 일주일에 한번씩 대규모 시위를 벌인다는 것이었다. 1919년 11월에서 
1920년 11월까지 48회의  정당행사에서 그는 31번이나 연사로  출연하였다. 그의 
등장이 점점 더  성과를 거두는 것은 대중과의  만남이 열광적인 성격을 띤다는 
사실에 드러나고  있다. "히틀러 씨가.....  분노에 사로잡혀서 소리지르는  바람에 
뒤쪽에서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어떤 보고서가 전하고 있다.
  1920년 5월에 벌써 그의 등장을 알리는 어떤 벽보에서 그는 '빛나는 연설가'라
고 불리고 있으며  방문객들에게 '특별히 자극적인 저녁'을  예고하고 있다. 이때
부터 집회 보고서는 참석자 수가 점점 더  늘어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때로는 
3천 명이나 그 이상이 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리고 그가 제복을 고쳐 만든, 푸
른색 물들인 양복을 입고 연단에 등장하면 "우레와 같은 환영을 받았다."(프란츠 
빌링. 위의 책71쪽, 도이얼라인,  위의책, 펠프스, 위의책301쪽 이하 참조)는 말이 
자꾸 나타나다. 이 시기에 쓰여진 보고서들은  연설가의 승리를 일종의 거울글씨
처럼 반사해주고 있다.  그 졸렬함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진짜라는  인상을 받는
다.
  집회는 7시반에  시작해서 10시 45분에  끝났다. 강연자는  유대주의에 대해서 
연설했다. 강연자는 어디를 바라보나 유대인이 있다고 했다. 독일 전체가 유대인
에 의해서 지배된다.  도이치 노동자들이 머리가 되었든 손이 되었든  모두 유대
인의 지시를  받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다.  물론 유대인이 손에 돈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정부안에  앉아서 암거래를 하고 있다. 유대인이 호주머니를 
다시 두둑이 채우면  노동자를 사주하여 다시금 정권을 잡고, 우리  가련한 도이
치 사람들은   그 모든 일을  참아야 한다. 유대인은 러시아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누가 그 모든 것을 끝냈던가? 물론 유대인이다. 그러므로 도이치 사람들
이여, 하나가 되어서 유대인에 맞서 싸우자. 그들은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한 조
각까지 뺏어먹는다.  연설자의 마지막 말은 이와  같다. 우리는 마지막 유대인이 
도이치 땅에서 떠나기까지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쿠테타나 심지어는 혁
명에 이른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연설자는 큰 박수 갈채를 받았다. 그는 언론
에 대해서도 욕을  했다... 지난번 모임에서 어떤 지저분한 놈이  모든 말을 받아 
적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자리에 1920년 8월 28일자 호프 양조장 연설을 되풀이하면서 이런 말
이 나오고 있다.
  연설자 히틀러는  전쟁 이전에 우리  형편이 어땠는지, 그리고  오늘날 형평이 
어떤지 상세히 묘사하였다.  사채업자와 암거래자들을 모두 교수대로  보내야 한
다. 나아가  용병대에 대해서 말했다. 그런  일은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 
특히 오늘날 젊은이들은 나이든 사람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다.  이들은 기율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연설자는 
당 강령에서 매우  많은 박수 갈채를 얻은 항목들은 나열하였다.  홀은 만원이었
다. 히틀러  씨를 원숭이라고 부른 남자는  모두가 조용해진 가운데 밖으로 쫓겨
났다.(도이얼라인 , 위의 책211쪽과 215쪽)
  점점 커지는 자의식을 가지고서   정당은 '질서인자'라고 자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좌익집회를 해산시키고, 토론 연사는 고함을 질러대고, '팸플릿'을  나누
어주고, 이른바 국민정서에  안맞는 조각품 하나를 공공전시장에서  치우도록 했
다. 1921년 1월 초에 히틀러는 킨득  맥주집에 모여든 천중들에게 이렇게 장담하
였다. "뮌헨의 국가사회주의 운동은 앞으로 가차없이 모든 행사와 강연들을 방해
할 것입니다-필요하다면 폭력을 써서라도 말이죠- 이미 병든 민족정서에 파괴적
으로 모든 행사와 강연들 말입니다."(하이덴(Geschichte)42쪽 인용)

    카프 쿠테타
  당이 그 사이에 뮌헨 방위군  사령부의 비호를 받을 뿐 아니라 비이에른 주정
부의 '버릇없는 응석받이 귀염둥이'(올덴 위의책 75쪽)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독
자적 행동이 가능해진  것이다. 3월 중순에 베를린 우익집단에서  그때까지 이름
이  없던 지역  풍경을  관리하던 총감독  카프  박사(Dr.  Kapp)가 에르하르트
(Ehrhardt)연대의 후원을 받아서 쿠테타 시도를 하였다. 이 시도는 자체의  미숙
함과 총파업으로 인해서 실패로 돌아갔다. 바이에른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의
용군 연합의  시도는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  3월 13일에서 14일  밤에 호프만이 
이끄는 사회민주당 시민정부는  실질적인 권력주체에 의해 밀려나고 '강한 남자'
구스타프 카르(G.v Kahr)가 이끄는 우익정부가 들어섰다.
  이 과정은 당연한  일이지만 좌익측에 경종을 울렸다. 좌익 과격파  핵심 세력
은 자신들의 혁명적인 목적을  위한 투쟁과 우익세력의 저항감을 결합시킬 가능
성을 알아보았다. 카프에 반대하는 총파업 기간에  좌익세력은 특히 중부 독일과 
루르 지방에서 지도권을 쟁취하였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의 무장이라는 구호를 
가지고 쉽사리 동조 분위기를 얻어냈다.
  곧 이어서 거의 마찰도 없이 군대식으로 조직해서 라인과 루르 강 사이에만 5
만 명이 넘는  '붉은  군대'를 정비하였다. 며칠만에 이들  좌익세력은 루르 동업
지대를 거의  전부를 장악하였다. 이  전진에 맞섰던 허약한  방위군과 경찰력은 
패배하였고 여기저기서 정식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살인,  약탈, 방화의 파
도가 이 지역을 휩쓸었다. 중부 독일, 작센과 튀링겐 지방에서도 이 어설픈 혁명
의 진압과정에서  밀려났던 사회적...이데올로기적인  긴장들이 단번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어서 투입된 군대의 피의 보복, 즉 즉석  체포, 복수전, 총살 등은 골이 깊은 
원한과 참을 수  없는 갈등을 드러냈다. 역사상 언제나 분리된  상태에서 다양한 
대립들로 찢겨온 이  나라는 점점 더 절망적으로  질서와 화해를 갈구하게 되었
다. 그러나 질서와 화해 대신에 출구도 없이  증오, 불신, 무정부 상태의 혼란 속
으로 점점 더 빠져들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상황  덕분에 바이에른은 지금까지보다 더 우익세력의 결집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질서와 화해 대신에 출구도 없이 증오,  불신, 무정부 상
태의 혼란 속으로 점점 더 빠져들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상황  덕분에 바이에른은 지금까지보다 더 우익세력의 결집
장소가 되었다. 연합국의  강요에 따라 내려진 준군사조직을  해체하라는 요구는 
바이에른의 카르 정부의  저항에 부딪쳤다. 카를 정권은  그러한 준군사조직체에 
권력기반을 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30만 명 이상을 헤아리던  민방위와 의용군대에 점점 더 많은 공화국 적
대자들이 밀려들어왓다. 그들은 다른 지역에서는 국가  공권력에 밀려 났거나 아
니면 형사처벌까지도 각오하지  않은면 안되는 사람들이었다. 도망친  카프 추종
자들, 동부지역에서 해체된 의용군  잔당들, '국민사령관'루덴도르프, 정치적 암사
자들, 온갖 모험가들, 극히 다양한 방향의 혁명가들, 그들 모두가 증오하는 '유대 
공화국'을 전복시키겠다는 의도만큼은 같았다.
  그들은 프로이센...개신교세력...베를린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는, 전통적인 바이
에른의 선별의식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한  선별의식은 이제 '질서의 중심지 
바이에른'이라는 구호 아래서(베를린, 즉 공화국 정부에  대한) 전통적 원한에 민
족적인 사명감을 덧붙였다. 점점 더 공개적이고  도전적으로 주정부의 지원을 받
으면서 그들은 무기창고를 설립하고, 지역의 성과  수도원을  비밀거점으로 이용
하였고, 암살, 전복, 시위계획들을   세울 수 있었다. 그들은 지치지도 않고 음모
를 꾸미고, 서로 겹치는 수많은 국가반역 계획들을 꾸몄다.

    권력자들의 은총
  이러한 사태전개는 발돋움하려고 애쓰는 국가사회당에 어느 정도 성공을 보장
해 주었다. 이제부터 이 정당은 언제나 분명하게 군사적 권력을 쥔사람 , 준군사
적 권력을 쥔  사람, 시민적 권력을 쥔  사람들의 은총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의 계획이 성공할 때마다 더욱더 열렬한 은총을 얻었다.
  폰 카르가 히틀러를  받아들인 다음에 히틀러 추종자  중의 한 사람인 대학생 
루돌프 헤스는 주 정부  수반인 카르에게 이런 편지를 써보냈다. "대중 세력, 특
히 노동자들을 민족주의 편으로  끌어들려야만 재기가 가능하다는 것 이 히틀러
의 핵심적인 생각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히틀러 씨를 잘 압니다. 거의 매일 그
를 만나 이야기하고 인간적으로고 가까운 편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극히 단정하
고 순수한 사람이며, 마음은  깊은 선의에 가득차 있고, 경건하고 선량한 카톨릭
교도입니다. 그는 단  한가지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지요. 즉  조국의 안녕입니다. 
이 목표를 위해서 그는 자기 자신을 버리면서 헌신하고 있습니다."
  주지사가 마침내 주  의회에서 히틀러를 찬양하고, 경찰 총수 푀너가  점점 더 
많은 것을 그에게  허용하였을 때, 파시스트 세력의 부상과 권력장악  과정에 특
정적인 정치적 역할도구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히틀러는 언
제나 안정된  보수세력과 결탁하게 된다.  그는 공동의 적인  공산주의자에 대한 
싸움에서 자신이 언제나  보수세려그이 보호자라고 자처하고 나서는  것이다. 보
수세력은 이  버릇없는 선동가의 에너지와 최면기술을  이용하고 적절한 순간에 
자신들의 정신적, 경제적,  정치적 이점을 이용해서 그를 눌러버리겠다고 생각하
였다. 반면에 그의 생각은, 선의에 넘친 지도세력의 비호아래 구축한 전 부대가 
적들을 물리치고 난 다음 파트너를  향해 행진해 나가서 권력 자체를  장악하겠
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환상과  배신과 수많은 거짓 맹세들로 뒤얽힌 권력  게임이었다. 이러
한 권력 게임 덕으로 히틀러는 거의 모든  성공을 얻었고, 카르와 뒷날 후겐베르
크, 파펜,  체임벌린등을 속였던 것이다.  반대로 전쟁에서의  패배에 이르기까지 
그의 실패들은,  그가 초조함이나 변덕에서, 혹은  성공에 자만한 나머지 이러한 
권력구도를 위태로운 도박에 걸었다가 실패하고,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도 그
러한 구도를 회복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실패의 여러 이유들 중 하나였다.

    디트리히 에가르트
  미래의 남자를 점점 더 보살펴주는 영향력 잇고 부유한 사람들 덕으로 1920년 
12월에 <민족관찰자>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디트리히 에카르트와 에른스트 룀
은 구제할 길 없이 빚을  진 이 잡지를 사들일 기금으로 6만 마르크를 조성하였
다. 이 잡지는 당시 일주일에 두 번 발행되고  대략 1만 1천 명의 구독자가 있었
다. 돈을 낸 사람들 중에는  수많은 뮌헨 상류층 인사들의 이름이 들어 있다. 히
틀러는 디트리히 에카르트의 도움을  받아서 뮌헨 사교계로 들어가서 자신의 관
계를 확대할 수 있었다.
  두텁고 둥근 머리모양을 가진 다부지고 익살맞은 에카르트는 포도주를 즐기고 
유치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성공은  못했지만 시인이며 극작가였다. 
입센의 <페르 귄트>를 모방한 작품이 그의 작품 중에서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두
었다. 그는 정치적인 보헤미안  그룹에 끼어들었다. '도이치 시민사회' 라는 정치
적인 결사를 만들었지만 물론  성공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가 발간하느 잡지<좋
은 도이치>로 날카롭고  어느 정도 교양 수준을 갖춘 상태에서  널리 퍼진 반유
대주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고트프리트 페더를  따르면서 그는 
이자에 대한 의한 노예상태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켜 '참다운 사회주의'르 건설
하고자 요구하였다. 란츠  폰리벤펠스의 영향을 받아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종족
혼합 금지를  위하여 싸우고 순수한  도이치 혈통의 영향력  확보를 요구하였다. 
소련을 가리켜서  '기독교도를 죽이는 유대인  구세주 레닌의  독재'라고 불렀고, 
자신은 "모든 유대인을 한 기차에 태우고 그들과 함께 홍해로 뛰어들고 싶다."고 
확언하였다.
  에카르트는 일찍이 히틀러를  알게 되었다. 1920년 3월에 카프  쿠테타가 일어
나고 있던 때에 이 두  사람은 민족주의 배후인물들의 명을 받고 관찰을 위해서 
베를린에 갔다.  책을  많이 읽고 인간을 잘 알고 광범위한  지식과 수많은 선입
견을 지닌 사람이었기에 그는 촌스럽고  어쩔 줄 모르는 히틀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복잡하지  않는 태도를 지녔기  때문에 히틀러는 처음으로  마음속 깊은 
곳의 열등감을 터뜨리지 않고 시민적인 교양을 지닌 이 사람과 함께 지낼 수 있
었다. 그는 히틀러에게 책들을 추천해주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을 만날 때의 행동
방식을 가르치고 표현을 고쳐주고  그에게 여러 곳으로 통하는 문들을 열어주었
다. 한동안 그들은 뮌헨 사회에서 떨어질 수 없는 단짝이 되어 돌아다녔다.
  1919년 에카르트는 기교적인 시에서 국민적인 구원자의 도래를 예언하기도 했
다. 다른 자리에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그런  인물은 "기관총 소리를 들을 수 
잇는 친구다.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장교는 아니다.  장교들에 대해서 
민중은 존경심을 갖지  않는다. 가장 좋기로는 말을 아주 잘하는  노동자일 것이
다.. 그런 사람이 그다지 큰 지성을 가질  필요는 없다. 정치란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업이므로 ." 빨갱이들에게 언제나 '외설적인 대답'을 해줄 준비가 된 사
람, 그런 사람이 자기에게는  "한 무더기의 학식 풍부한 교수보다 더 낫다. 교수
들이란 두려워 벌벌 떨면서 사실이라는  바지에 오줌이나 싼 채 앉아 있는 존재
다." 그는 이렇게  요구한다." 젊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야 여자들을  우리편으
로 얻는다." 그는 히틀러를 보자 바로 이 모델을 실현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
였다. 그리고 1921년 8월에 <민족관찰자>의 어떤 기사에서 처음으로 그를  '지도
자'라고 부르고 있다.
  국가 사회당 초기의 투쟁가들 중 하나인  <폭풍, 폭풍, 폭풍이여!>라는 노래는 
그가 만든 것이다. 후렴같은 마지막 구절에  당의 가장 효과적인 구호인 "독일이
여 깨어나라 !"라는 말이  붙은 노래다. 히틀러는 어떤 찬사에서 에카르트는 "괴
테처럼 멋있게 시를  썼다."고 말했다. 그는 이 시인을  공개적으로 '아버지 같은 
친구'라고 부르고 자신은 에카르트의  제자라고 했다. 그는 로젠베르크와 발트 3
국 출신 도이치 사람들과 더불어  이 시절 히틀러에게 가장 지속적인 영향을 미
쳤던 사람으로  보인다. 동시에 그는  히틀러에게 처음으로 본래의  서열에 대한 
안목을 열어주었다.<나의  투쟁> 제 2권은  강조된 글씨체로 인쇄된  이 시인의 
이름으로 끝맺고 있다.

    뮌헨의 사교계
  에카르트가 안내해준  뮌헨 사교계에서 히틀러가 거둔  성공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다. 미국 출신의 한프슈텡글 부인은 처음으로  자신의 살롱에 그를 받아들
여준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는 자기 집에서  교류를 가지고 있던 작가, 화가, 바
그너 해석자, 교수 등 고상한 보헤미안들의 모임에 그를 받아들여 주었다.
  전통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이 집단은 무시무시한 생각들과 세련되지 못한 태도
를 가진 이  젊은 민중연설가의 특이한 모습을  오히려 기묘한 재미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는  '11월의 범죄자들'에 대해서  거칠게 흥분하였고, 포도주에 설탕을 
타기도 하였다. 어쨌든 그런 충격적인 행동은  그를 맞아들인 살롱 주인들에게는 
황홀한 것으로 여겨졌다. 마법사의 묘한 분위기, 서커스 세계와 비극적인 분노의 
분위기, 유명한 괴물'의 날카로운  광채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접촉점은 예술,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였다.  바그너에 대해서 그는 언제라도  연설하면서 몽상하
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 바그로이트 예술가를 통해서 극히 안  어울리지만 마음
을 사로잡는 결속이  이루어졌다. '히틀러 형제'는 궤도에서  벗어나 있기는 하지
만 정치적 상황에서 모험을 한 것이다.
  이 시절 그의 등장에 대한 묘사들은 극단적이고 좌익적인 성향이 뒤섞인 모습
을 보여준다. 명성을 얻은 사람들을 상대로 히틀러는 억눌리고, 궁리하면서 비굴
한 자세도 드러냈다.  이 무렵 루덴도르프와의 대화에서 그는 장군이  문장을 맺
을 때마다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반쯤 절을 하면서 극히 공손한  목소리로 '그렇
습니다. 각하!' 아니면 '지당하신 말씀이지요!'" 하고 말하곤 했다.
  시민 시민사회에 대한 그이  불확실성과  고통스런 아웃사이더 의식은 오랫동
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위에 나온 보고를 믿을  수 있다면 그는 이 장면에 어울
리기 위해서 무지 애를 썼다. 그는 늦게 나타났고, 특히 커다란 꽃다발을 가져왔
으며, 몸을  더욱 깊이 굽혀 절하였다.  무뚝뚝하게 침묵하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흥분하여 말을  내뱉고 했다. 그이 목소리는  거칠고, 무의미한 일들조차도 몹시 
정열적으로 말했다.
  어떤 증언에 따르면 한 번은 한 시간 동안이나 말없이 피곤한 태도로 앉아 있
을 때  여주인이 친절하게 유대인에 대해서 언급을 하였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 
시작하였다. 일단 시작하자  끝이  없었다. 잠시  뒤에 그는 의자를 뒤로 밀치고 
일어서더니 여전히 연설조로 아니, 차라리 소리를  지르면서 너무나 쟁쟁한 목소
리로 말을 해서  옆방에 있던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 울기  시작하였다. 반시간이 
넘게 유대인에 대해서 대단히 재미있는 그러나 극히 일방적인 연설을 하고 나더
니 갑작스럽게 중단하고 여주인에게로 달려나가서 실례하겠다고 말하고 손에 키
스를 한 다음 사라져버렸다.
  사회적으로 무시당할까 하는  두려움이 분명히 그를 괴롭혔다.  한때는 피난민
이었던 그의 두려움은 시민사회에 대해서 돌이킬수 없이 혼란된 관계속에서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나중에 돌격대의 최고  지휘자가 되는 페퍼폰  살로몬이 그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히틀러는 낡은 모닝코트를 입고 누런 가죽구두에 등에는 륙
색을 짊어지고 있었다.  이 의용군 대장은 말을 잃어버리고 자기  소개를 포기해 
버렸다. 한프슈텡글은  히틀러가 푸른 양복에 보라색  셔츠, 갈색 조끼에 새빨간 
넥타이를 매고 엉덩이의 돌출부는  자동 무기에 앉았던 자국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 회고하였다.
  히틀러는 아주  느리게 스스로를 양식화하는 법을  배우고 거대한 민족무대에 
어울리는 모험적인 작업복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이미지도 내면에 깊이 자리잡
은 불안을 드러낸다.  그것은 한때의 '리엔치'의 꿈, 알  카포네. 루덴도르프 장군 
등에게서 얻은 요소들을  가장 진기한 방식으로 합쳐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
런데도 '당시의  묘사들에는 그가 자신의  불안을 이용하려 하고  서투른 태도를 
자기 연출의 수단으로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나타나고 있다. 어쨌든 그
는 편안하게  활동하려는 소만보다는 자신의 출현을  인상깊게 만들려는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칼 알렉산더 폰  밀러는 히틀러가 정치가로서의 자의식을 만들어 나가
던 시절에 그를 만났다. "에르나 한프슈텡글의 집에서 수도원장 알반 샤흘라이터
가 그를 만나보고 싶다는 소망에 따라 이루어진  커피 모임에서였다. 내 처와 나
는 이 모임의 장식품 정도였다. 우리들은 모두  4시 정각에 이미 창가에 있는 번
쩍이는 마호가니 탁인에게 거의 비굴할 정도로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
였다. 그는 승마용  채찍, 비롤드 모자, 트렌치 코트 등을  벗더니 연발권총이 달
린 혁대도 풀어서  옷걸이에 걸었다. 그것은 신기한 광경이었으며 칼  마이를 연
상시켰다. 우리는  당시만 해도 의상이면  행동이 세밀한 데  이르기까지 벌어진 
아름답지 않은 코밑에  눈에 뛸 정도로 너무 짧게 깎은  콧수염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길에는 벌써  성공에 대한 의식이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
색한 요소가 여전히 그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래서 불쾌감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린 것을 기분 나쁘게  여겼다. 얼
굴은 너무나  좁고 창백하였으며 거의  고통스러운 인상이 나타난  있었다. 다만 
둥글고 푸른 눈만이  이따금 냉혹한 모습으로 쏘아보았다. 강력한 미간  사이 코
부리 근처에 단단하게  솟구쳐 오른 형태로 광신적 의지력이 뭉쳐  있었다. 이번
에도 그는 거의 말이 없었고 대부분 특별한 주의력을 가지고 경청하였다.
  그가 불러일으킨 이러한 효과로 부인네들이 몰려와서 그를 보살펴주기 시작하
였다. 특히 나이든 귀부인들은 이  성공한  젊은 연설가의 경련과 열등감 뒤에는 
복잡한 사정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본능적으로 어떤 갈등이 있으리라
고 추측하였다. 그러한  갈등은 문제를 잘 아는 손길을 통해  해결되기를 갈망하
는 것이다. 히틀러 자신은 뒷날 어머니 같은  확고함으로 열렬히 자기 주변을 둘
러쌌던 이 부인네들의 질투심을 비꼬았다. 어떤  여자를 알게 되었는데 "내가 다
른 여자와 몇 마디 말만 주고받아도  흥분해서 그녀의 음성이 쉬어버렸다."고 했
다.
  그는 뮌헨 교의  졸른에 있는 어떤 고등학교 교감의 미망인,  '히틀러 엄마' 카
롤라 호프만의 집에서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편하게 느꼈다.  체임벌린의 작품
을 출판하였던 출판업자 브루크만부인은 유럽의 오래된 고위귀족 출신의 여자였
는데 그를  위해서 자기 집을  개방하였다. 그리고 피아노  공장주 베히슈타인의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내  아들이면 좋겠어요."라고  그녀는 말한 적이  있
다. 그리고 나중에  감옥에 있는 그를 면회하기 위해서 자기가  그의 양어머니라
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모든 여자들, 그들의  집과 그들의 사교계는 히틀러의 
주변 범위를 넓혀주었고 그에게 명성을 만들어 주었다.
  
    주변의 인물들
  그에 반해서 당에서 그는  우직한 중간층과 절반 범죄적인 뜨내기의 환경속에 
남아 있었다. 이러한 뜨내기 속성은 공격성과 물리적  폭력을 행한 마음 속 깊은 
곳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다.  몇 안 되는 친한 친구중에는 싸움꾼  유형의 에밀 
모리스 뚱뚱한  배를 가진 말 장수  크리스티안 베버 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떤 수상쩍은 맥주집의 경호원 노릇을 했다.  히틀러처럼 언제나 회초리를 가지
고 다녔다. 푸줏간 견습공 울리히 그라프도 가까운 친구 서클에 들었다. 그는 동
시에 보디가드 노릇도  했다. 히틀러의 옛날 상사인 막스 아만은  우직하고 충직
한 수행원으로 때로는 당과 출판사의 대표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거의 끊임없이  히틀러를 둘러싸고 있었고 시끄럽고  부지런하였다. 그
는 저녁에 당의 행사가 끝나고  나면 그들에 둘러싸여서 성모 교회 근처에 있는 
'오스체리아 바바리아'나 '구운소시지 집'으로 몰려가곤 하였다. 그들과 함께 화랑 
거리에 있는 '카페 울타리'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시켜놓고 몇 시간이고 잡담하
면서 보내곤 하였다.  그 곳 어둑한 뒷자리에  단골 손님 테이블을 만들었다. 이 
자리에서 자기 모습은 남에게 보이지 않으면서 길다란 커피집을 관찰할 수가 있
었다.
  일찍부터 그는 혼자  있는 일을 고통스럽게 여겼다. 그는 언제나  주변에 사람
들을 필요로 하였다. 청중, 경호원, 하인, 운전사, 그리고 이야기 상대자, 혹은  예
술의 친구들과  이야기꾼, 사진사 하인리히  호프만, 에른스트  푸치, 한프슈텡글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그의 모임에 '보헤미아 세계와 용
병 대장 스타일'이 뒤섞인  색채를 만들어주었다. 그는 '뮌헨의 왕'이란 호칭으로 
불리는 것을 별로 싫어하지 않았다. 아주 늦은  시각에야 그는 티어슈 거리에 있
는 가구 딸린 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주변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은  젊은 헤르만 에서다.  그는 신문사에 
견습사원으로 있으면서 방위군  지역사령부위 언론 담당자로 일하고  있었다. 히
틀러를 빼면 당이 이용할 수  있는 사람 중에서 그가 유일하게 선동가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일을  히틀러보다도 더의 더 잘 할수 있는 소동꾼, 저급한 
지옥 출신이기는 하지만 연설의 악마"였다. 그는 깬 사람이었고 민속적인 비유를 
이용해서 표현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유대인과 암표상들의  집에서 밝혀냈
다는 거실비밀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당의    정직한 소시민들은 곧 그의 캠
페인의 '빌어먹을 목돌 같은 말투'를 비난하였다.  이미 고등학생 때 그는 군인위
원회에 몇몇 시민들을 목매달아 죽이라고   요구하였다. 디트리히 에카르트와 더
불어 그는 가장  초기에 가장 열렬하게 히틀러  신화를 퍼뜨린 사람들에 속하였
다. 자료들을 믿을 수  있다면 히틀러 자신은 이  과격한  동료를 그다지 좋아하
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에서가 불량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
를 써먹을 수 있는 동안에만 그를 데리고 있었다고 거듭 주장하였다.
  여러 가지 점에서 에서는  뉘른베르크 출신의 교감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와 비
슷하였다. 그는 외설적이고 지저분한 반유대주의 대표자  노릇을 하였고 인신 제
물, 유대인의 욕정, 세계모반, 근친상간 등에  관한 온갖 난잡스런 상상에 사로잡
힌 듯이 보였다. 순결한 아리안 여자들의 살을 탐하는, 검은 털로 뒤덮인 호색적
인 악마들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있었다. 슈트라이허는 더  편협하고 멍
청하기는 하였지만 지역적인  성공이라는 점에서 히틀러와 겨룰  만하였으며, 처
음에는 상당한 정도로 히틀러와 경쟁관계에 있었다.
  뮌헨 국가 사회당 지도자인  히틀러는 자신이 목표를 위하여 슈트라이허의 인
기를 이용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자신도 또한 이러한  증오의 콤플렉스와 
강박관념들에 결부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슈트라이허를 얻으
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일부 자료들이 보여주고  있다. 모든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랑크 지방의  지도자'에게 충실하게 머물렀으며 전쟁중에도 이렇게 선언
하였다. 디트리히  에카르트는 슈트라이허가  많은 점에서 바보라고  말하였지만 
히틀러는 이 '성급한 사람'에 대한 비난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실상 슈트라이
허는 유대인을 이상화 시켰다."
  대중적인 추진력에도  불구하고 당에 협소한 양식을  부여하고 당을 천박하고 
편협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이 모든 사람들과  달리, 전설적인 전투비행대대 리흐
트호펜의 마지막 지휘자 출신  공군대위인 헤르만 괴링은 히틀러의 주변에 사교
적인 분위기를 가져왔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때까지만 해도  주변을 경멸적으로 
내려다보던 고독한  한프슈텡글 혼자만  보여주었던 것이다. 당당하고  쾌활하고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괴링은 히틀러 추종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인 기
묘하고도 정신병적인 모습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당이  방종과 활동
과 전우를 필요로  하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것이기 때문에 당에 가입한 
인물이었다. 자신이 주장하듯이  '잡동사니 이데올로기'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여
행을 많이 했고 상당히 폭넓은 관계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매력적인 스웨덴 아내
를 동반하고 나타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어서, 바이에른 바깥에도 사람들
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당이 어느 정도 눈을 뜨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가 고등사기꾼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막스 에르빈 폰 쇼이브너리히
터와 비슷한 점이었다. 쇼이브너 리히터는 활동적인 과거를 가진 사람이었고, 이
익을 가져오는 정치적 뒷거래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모험가였다. 돈을 구하는 
그의 능력  덕분에 히틀러는 초기  몇 년 동안 활동  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쇼이브너 리히터는 관청의 기록에  따르면 '엄청난 액수위 돈'을 모아
들이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상당한 사회적인 안정성을 지
녔고 말재주가 있었으며 재계와 비텔스바흐 왕가, 키릴 대영주, 종교계에 수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히틀러에게 미친 영향은 상당한 정도였다..  1923년 11월 
9일  장군홀에서 죽은 동지들 중에서 히틀러가 대체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애석
해 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쇼이브너 리히터는 수많은 발트 3국 출신  도이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들
은 과격한 러시아 이민자드로가  함께 초기 국가사회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
사하였다. 히트러는 나중에 우스갯 소리로 이 시기의 <민족 관찰자>는  '발트3국
판'이란 부제를 달아야 옳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로젠베르크는 쇼이브너 리히터
를 이미 리가에서 알았다.
  로젠베르크는 정치에 무관한  젊은 대학생일 때 쇼펜하우어, 리하르트 바그너, 
건축상의 문제들과  인도의 지혜에만 관심을  가졌다. 러시아 혁명이  그에게 반 
볼세비키와 반 유대주의  특성을 가진 세계관을 만들어주었다.  히틀러가 가지게 
된 공포스런 표상들과 은유들은 상당 부분  로젠베르크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는 
당내 러시아 전문가로  꼽히고 있었다. 그밖에도 공산주의와  세계관에 덧붙여준 
것이었다. 히틀러가 처음에 했던 식민지 반환의  요구를 포기하고 광범위한 러시
아 땅에서 도이치 사람의 생존공간  요구를 만족시키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 적지 않은 자극이 그에게서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다음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권력장악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
용하는 실용적인 히틀러와 뒤틀린 성격의 로젠베르크는 거의 종교적인 진지함을 
가지고 자신의 요구를 고집하였고  수많은 환상적인 생각들이 섞여든 가운데 부
조리한 사고체계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하였다.

    당의 세력확장
  강령을 발표한 지 근  일년이 지나자 당은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뮌
헨에서 40개 이상의  행사를 치렀고 바깥 지역에서도 거의 그  정도였다. 슈타른
베르크, 로젠하임, 란츠후트,  포르츠하임, 슈투트가르트 등에서 지구당이 설립되
거나 적어도 당원을 얻었고 당원 수는 10배 이상 불었다.
  국가사회당이   민족운동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은  '뮌헨 게르만 
기사단'의 '디트리히' 형제가 1921년 2월초에  키일의 동지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
나 있다. " 일년이 지나는 동안 정당이  45회 이상의 대중행사를 치른 곳이 있는
지 말해보십시오.  뮌헨 지구당  중 그와 비슷한  숫자를 자랑하는 곳이  있습니
까?" 그는 쾰른, 빌헬름스하펜, 브레멘에 있는 기사단 형제들과 연락을  취했다고 
했다. "모두들, 히틀러 정당이 미래의 정당이라는 의견이었습니다."
  점차 실현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모욕감을 불러일으키게 된 베르사유조약 규
정들이 이러한 상승의 배경이 되었다. 그것은  화폐가치의 하락을 부채질하고 경
제적 위기를 증가시켰다. 1921년 1월에 연합군의 손해배상회의는, 독일이 앞으로 
42년 동안 총 2,260억  황금 마르크에 이르는 손해배상을 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나아가 같은 기간 수출액의 12퍼센트를 양도하라는 결정도 나왔다.
  뮌헨에서 조국 결사대, 민방위대와 국가사회당이  2만 명의 사람들에게 오데온 
광장에서 열리는 항의 시위에 모이라고 호소하였다.  이 집회 주체자들이 히틀러
에게 말할 기회를  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다음날 저녁에 독자적으로 
대중집회를 열  준비를 하였다. 드렉슬러와  페더는 그가 마침내  절도와 이성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였다. 깃발과  구호합창대, 급히 만든 구호 플래카드를 실은 
트럭들이 돌아다니며서 시민들에게 2월3일 왕관 서커스 장으로 오라고 선전하였
다. '아돌프 히틀러 씨'가 '미래냐, 몰략이냐!'에  대해서 연설하게 될 거라고 예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장래를 걸고 내건  구호였다. 그가 들어섰을 때 이 
거대한 천막은 가득  차 있었다. 6천 5백명의 사람들이 환호하면서  그를 맞아들
였고 마지막에는 국가를 함께 불렀다.
  히틀러는 오래전부터 어차피 자기 힘으로 만들어진 당의 당수가 될 기회를 기
다려 왔다. 그 시대가 '강한 남자'  유형에 끌리던 시대였으므로 히틀러에게 유리
하였고 그의 의도에도 장 맞았다. 당 지도부에서는  때때로 이 선전 담당자의 과
잉활동에 대한 근심이 표현되어왔다.  1921년 2월 22일자일자에는"히틀러 씨에게 
활동을 자제하라고 권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고트프리트 페더가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히틀러의 건방짐에 대
해서 탄식을 하자 안톤  드렉슬러는 "모든 혁명 운동은 독재적인 사람을 필요로 
하며 그  때문에 나는 바로 히틀러를  우리 운동에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본다. 
그렇다고 나 자신이 배경으로 밀려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다섯 달 뒤
에 드렉슬러는 배경으로 밀려났다.
  히틀러의 일생 동안 가장 막강한 동맹자였던 상황과 적들이 그에게 기회를 만
들어주었다. 그는 위기 때마다 보여주곤 하는  냉혹함과 계략, 단호함, 위험에 대
한 각오 등으로 국가사회당의 권력을 장악하고,  동시에 민족운동 내부의 지휘권
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1921년 여름 위기
  몇 달 전부터  시작된 경쟁적인 정당들, 특히 도이치 사회주의자  정당과의 밀
접한 협력을 위한 협상이 1921년 여름 위기의  출발점이 되었다. 모든 결합의 시
도는 번번이 히틀러의 비타협적인 주장에 부딪쳐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상대방 
정당들의 완전한 굴복을 요구하면서 그들이 정당 차원에서 국가사회당과 연합하
는 것을 반대하였다. 각 정당이나 모임들이 우선  해체된 다음 그 회원들이 개별
적으로 국가사회당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히틀러의 고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드렉슬러의 무능은 절대적인 권력욕구
와 당 창설자의  협조적인 특성의 차이를 보여준다. 당내의 적수들이  당을 이끌
어 가면서 분별없는 결정에  이르도록 내버려둘 속셈으로 히틀러는 이른 여름에 
6주 예정으로  베를린으로 출발하였다. 헤르만  에서아 디트리히  에카르트가 그 
동안 당에 남아서 관찰하고  그에게 신속하게 보고 하였다. '광신적으로 잘난 척
하는 '히틀러를 따돌리려는  친구들의 영향 아래서 아무런 눈치도  못 챈 드렉슬
러는 실제로 이 시간을 이용하여 중단된 당 연합협상 혹은 모든 사회주의  우익
정당의 협조에 대한 협상을 계속하려고 하였다.
  베를린에서 히틀러는 민족주의 클럽에서 연설하고 보수적 극우 동지들과 연락
을 가졌다.  그는  루텐드르프를 알게  되었고, 레벤틀로브 백작을  알게 되었다. 
그의 아내 달레몽  백작부인은 그가 이전의 의용군  대장 발터 슈텐네스와 다시 
힘을 합치도록 주선하였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그를  '장래의 메시아'라고 소개
하였다.
  이 도시의 그 유명한 20년대의 과격한 광란  증세, 그 경박함과 욕구들은 히틀
러의 거부감 에 새로운 근거를 만들어주었다. 이  도시는 그의 음울한 기분에 너
무나 맞지 않았다.  그는 이곳의 지배적인 상황을 몰락하는 로마의  상황에 견주
기를 좋아하였다. 로마에서 '이질적인 기독교'가  로마의 취약한 상태를 이용하였
다면 오늘날 볼세비키주의가  독일의 도덕적인 몰락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절 히틀러의 연설은 대도시 죄악, 부정부패, 성적인 방탕 등에 대한 공격으
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프리드리히 거리나  선제후 갬 지역에 이글거리는 아스팔
트 위에서 이러한 악덕을 관찰하였다. "우리의  비참함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사
람들은 즐기고 춤춘다."고 그는 가끔씩 외쳤다. "계속  새로운 즐거움이 만들어지
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은 인공적으로 우리의 신경을 진정시킨다."
  17세기 빈에 도착했을 때처럼 그는  이 대도시 현상을 보고 어쩔 바를 모르며 
낯선 모습으로 서 있었다. 수많은 소음, 소란, 온갖 것이 뒤얽힌 대 도시의 은둔, 
전체적인 조망의 가능성, 질서잡힌  도덕 등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 
대도시의 밤의 행태에서  그는 원수종족 유대인의 아이디어를  찾아냈다. 즉 "한 
종족의 자명한 위생규칙들을 뒤집으려는" 체계적 책략을 본 것이다.
"그들은 밤을 낮으로 만들고  악명이 자자한 바의 생활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천
천히, 그러나 아주 분명히  작용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신체를 
망가뜨리고 , 어떤  사람은 정신을 , 그리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바라보는 동안 마음속에 미움을  키우는 것이다." 극장이란 "리하르트 바그
너 같은 사람이 최고 수준의 신성함과  진지함을 만들어내기를 바라던 장소인데, 
개인이 온갖 근심과 비참에서  벗어나는 일들이나 하고 있으니 죄악과 몰염치의 
산실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이 도시가 뚜쟁이들로 가득 차 있고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최고 행복 아
니면 최고 불행을 의미하는' 사랑이 상품이 되고 ' 사업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있음을 보았다. 그는 가족 생활을  비웃는 것, 종교의 쇠퇴 등을 탄식
하고 모든 것이 망가지고 격하되었다고 했다.  "오늘날 이 비천한 기만과 어지럼
증의 시대에 여기서  벗어나려는 사람에게는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이 남아 있
다. 절망해서 목을 매달거나 아니면 비참한 룸펜이 되는 것이다."
  그는 베를린에서  드렉슬러의 독단적 행태에 대한  소식을 듣자마자 지체없이 
뮌헨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힘과 자신감을 갖게된 당 위원회가  그에게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라고  요구하자 히틀러는 예상도 못한  극적인 방식으로 반응하였
다. 7월 11일에 그는  짤막하게 탈당선언을 했다. 사흘 뒤에 보낸 상세한 설명서
에서 끝없이 비난을 퍼부은 다음 자기가 당으로 돌아가기 위한 조건들을 최종적
으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전권을 가진 당수  자리'와 오늘날 당  속으로 들어온 
이질적인 요소들의 정화'를 요구하였다. 당명도   당의 강령도 변경시킬 수 없다. 
뮌헨 국가사회당의 절대적 우위는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 다른 정당과의 연합
은 있을 수 없으며 흡수 통합만이 가능하다.  이미 뒷날의 히틀러의 면모를 보이
는  확고함으로  그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우리측에서의  보상이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히틀러의 명망과 힘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러 있었는가 하는 것은 당 위원
회가 다음날 날짜로  지체없이 보낸 답신에 드러나 있다. 감히  그에게 맞서려고 
하지 않고 위원회는 히틀러의 비난을 고분고본  받아들였다. 완전히 굴복하고 심
지어는 지금까지의 당수였던 안톤  드렉슬러를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
언하였다. 뒷날의 신격화하는 비굴한 톤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니 글의 결정적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위원회는 이미 당신의 엄청난 지식을 인정하고  있으며, 당신이 보기 드문 희
생정신을 가지고 이 운동의 번영을  위해서 정직한 공을 쌓아 올린 것을 인정하
고 있습니다. 연설가로서의 희구한 재능을 인정하여  당신에게 독재적 권한을 양
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위원회는 당신이  당으로 돌아와서 드렉슬러가 이미 
오래 전부터 여러번이나 당신에게 양도하려고   한 당수의  직분을 맡아 주시다
면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그러고  나면 드렉슬러는 위원으로  남게 되며 
당신이 바라신다면 당  행동위원회에도 위원 자격으로 남게 됩니다. 그가  이 운
동에 완전히 물러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다면 다음번 연례 전당대회에서 
그 사실을 발표할 것입니다." 
  이 사건의 시작과 정점이  히틀러가 위기상황에서 얼마나 능숙하게 키를 잡고 
헤엄쳐나가는지 보여주고 있다면,  사건의 결말은 그가 성취한  승리를 지나치게 
부풀려서 망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당 위원회가 굴복하
자마자 그는 자신의 승리를 실컷 맛보기 위해서 독단적으로 임시 전당대회를 소
집하였다. 굴복하려던 드렉슬러도 더 이상 동의하려고 하지 않았다. 7월 25일 드
렉슬러는 뮌헨 경찰국 6분과에 출두해서 임시전당대회 소집의 서명자들은 고 히
틀러는 혁명과 폭력을 의도하고  있지만 자신은 당의 목표를 합법적이고 의회주
의적인 방식으로 실현할  생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경찰국은  자기들 소관
이 아니라고 응수했다. 동시에 히틀러는 어떤  익명의 팸플릿에서 배신자라고 공
격을 받았다. '권력의  망상과 개인적인 명예욕'이 그를 부추겨서   "우리 대열에 
불화와 분열을 만들어 내고,  그럼으로써 유대인과 그 동조자들을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그의 의도는  당을 깨끗하지 못한 목적을 위한 도약대로  이용하는 것이
다. 그가  사생활과 출신배경을 그렇게  감추는 것도 이유가  없지 않다고 했다. 
"그가 무엇으로 사는가,  전에 어떤 직업을 가졌는가  하고 당원들이 개별적으로 
질문을 하면 그는  언제나 분노와 흥분상태에 빠져들곤 했다. 그의  양심이 깨끗
하지 못한 모양이다.  특히 그가 부인들과 지나치게 교류하는 일,  그는 자주 '뮌
헨의 왕'이라고 불릴 정도니까. 그런 교류는  분명 많은 돈이 드는 일이다." 경찰
의 허락을 받지 못한 어떤 불법 팸플릿은  히틀러를 가리켜서 '병적인 권력욕 망
상가' 라고 비난하였으며  이러한 요구로 끝을 맺고 있다. "독재자들를  쓰러뜨려
야 한다."
  디트리히 에카르트가  중간에 끼여들어서야  겨우 싸움을  조정할 수  있었다. 
1921년 7월 29일의  임시 전당대회에서 위기는 끝났다. 히틀러는  자신의 승리를 
화려하게 자랑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히틀러가  탈당한 사이 드렉슬러가 헤
르만 에서를 형식적으로  국가사회당에서 추출해 버렸지만 히틀러는 전당대회를 
자기 심복인 에서의  사회로 치러냈다. '끝날 줄 모르는 박수  갈채'로 환영을 받
으면서 그는  그간의 싸움을 교묘하게 표현해서  554명의참석자 가운데 553명의 
찬서을 얻었다. 드렉슬러는 당고문직으로 만족해야했다. 정관은 히틀러 마음대로 
고쳐졌다. 위원회는  온통 그의 추종자들로  채워졌으며 그 자신은  독재적 당수 
자리를 차지하였다. 국가사회당을 손아귀에 쥐게 된 것이다.

    '지도자'로 칭송되다
  같은 날 저녁  히틀러는 왕관 서커스건물에서 헤르맨 에서에  의해서 '우리 지
도자'라는 호칭으로 축하를 받았다. 에서는 온갖 음식점이나 맥주집에서 거의 종
교적인 열광으로 지도자  신화를 열렬하게 전파하는 전도사가  되었다. 디트리히 
에카르트는 <민족관찰자>지에  계획적인 추켜세우기 글을 연재하였다.  8월 4일
자에 그는 이미  히틀러에 대해서 '자신을 잊고 희생정신을  가진 헌신적이고 정
직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냈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그는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깨어 있다'고 찬양되었다. 며칠 뒤에  그는 같은 자리에, 에카르트가 그
려낸 남성적인 윤곽에다가 초지상적인  은총의 윤곽을 덧입혀 그린 그림으로 나
타나고 있다. 그것은 루돌프 헤스가 만든  것으로 히틀러의 '너무나 순수한 의지' 
그의 힘, 연설가로서의 재능, 경탄할 만한 지식과 명료한 이성 등을 찬양하고 있
다.
  짧은 시간 안에 히틀러 개인을 둘러싼 숭배의 과도함이 어느 정도까지 과장적
으로 발전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대략 일년 뒤에 루돌프 헤스가 쓴 찬양문에
서 찾아볼 수  있다. "독일을 다시 높여줄 사람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까?" 
헤스는  자신의 묘사의 바탕에 히틀러의 그림을 놓고 있다.
  국가 생활과 역사의  모든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 거기서  교훈을 이끌어내는 
능력, 자신의 일이 순수하며 결국 승리하리라는 신념, 무제한의 의지력이 그에게 
대중이 환호성을 지르는 감동적인 연설의 힘을  주었다.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는 선전술, 구호, 거리행진 등과 같은 적들의 무기를 이용하는 것도 꺼리지 않
는다. 그 자신은 대중과 관계가 없으며 위대한 사람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시대의 곤궁이 그런  일을 강요하기 때문에 그는  피를 흘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위대한  문제들은 언제나 피와 강철로  결정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자신의 목적을 이루겠다는  일념뿐이며 그 과정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들조
차 치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와  같은 독재자의 상을 가지고 있다. 정신은  날카롭고 분
명하게 참되고, 정열적이면서도  자신을 통제하고 , 차갑고  대담하고, 결단을 거
침이 없고,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가차없고, 무자비하도록 냉정하면서도 국민에 
대한 사랑에서는 한없이  부드럽고, 노동에 지칠 줄 모르고 부드러운  장갑 속에 
강철 같은 주먹을 지니고 있으며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도 가진 사람이다.
  그가 언제 구원하러  나타날지 우리는 모른다. 이  '사람' 말이다. 그러나 그가 
온다는 사실은 수백만 명이 느끼고 있는 일이니.....

    돌격대, 공격과 정복의 도구
  당을 장악한 직후인  1921년 8월 3일에 돌격대도 창설되었다. 그  이니셜은 원
래는 스포츠 혹은 방어부대를 뜻하는 것이었다.  당내 반대세력들은 이미 히틀러
가 '훔치거나 약탈한다는  이유로' 쫓겨난 의용군 출신들을 이용하여 유급친위대
를 만들었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돌격대는 전쟁을  벗어나서도 계속 무장을 생
각하는 폭력조직으로만  여겨져서는 안되고,  좌익의 유사한 테러부대에  대항한 
우익의 방어개념으로 생각도리 수도 없다. 이런  생각이 처음부터 상당히 개입된 
것은 사실이다. 좌익의, 예를 들면 사회민주당의 '에어하르트 아우어 친위부대'처
럼 군사적인 전투조직이 존재해Y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입증되고 있다. "다른 어
떤 시대적인 현상보다 더 많이 테러에 의존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파벌은 우리 
운동에 대해서도 이 수단을 사용하였다."고 히틀러는 돌격대 창설의 이념 하나를 
거론하였다.
  그러나 돌격대 이념은 방어적인 목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처음
부터 공격과 정복의 도구였다. 히틀러는 이  시기에 '권력 장악'을 오로지 혁명적
인 폭력행위의 범주에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돌격대  창설 요강에 따르면 그것은 
'파괴조' 노릇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원들을  복종시키고 무한한 혁명
의지를 키우는 역할도  맡고 있다. 히틀러의 특징적인 사고 방식에  어울리는 것
이지만 시민세계가 마르크스주의에 종속하게 된 원인은 정신과 폭력을 분리시키
고, 이데올로기와 테러를  분리시킨 시민사회의 원칙에 있다고 보았다. 시민적인 
세계에서 정치가들은 오로지  정신적인 무기만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으며, 따라
서  병사는  정치에서 엄격하게 제외되어 있다고 그는 설명하였다.  그에 반해서 
마르크스주의는 "전신과  잔인한 폭력을 조화시켰다." 돌격대는  바로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부대지침서 첫 장에서  이렇게 말하
고 있다. 돌격대는 "운동의  보호를 위한 도구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장차 다
가올 내부의 해방 전쟁을 위한 예비학교인 것이다." 따라서  <민족관찰자>도 '과
감한  돌격 정신'을 찬양하고 있다.
  사설 부대를 창설하기 위한  외적인 조건은 1921년 6월 민방위 부대의 해체였
다. 그리고 한 달 뒤에 고지 슐레지엔  지방에서 귀향하는 고지 의용군의 해체였
다. 이 부대의  속했던 수많은 병사들이 갑자기 친밀감, 병사의  낭만, 그와 더불
어 삶의 의미까지 한꺼번에 잃어버렸다고 믿고서 낙오된 용병 무리와 모험에 굶
주린 젊은  건달 패거리에 합류했다. 그들은  모두 국가 사회당에 받아들여졌다. 
전쟁 체험을  간직하고 전쟁에서 돌아온 이들은  군대식으로 조직된 돌격대에서 
계급과 사령부 제복  등을 보고 , 무질서하게 보이는 공화국  사회에서 그리워하
던 저 친숙한 생활 방식을 다시 발견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소시민  계급 출신이었다. 이 계급은 독일에서  오랫동안 사회적 
신분상승에 제약을 받다가  전쟁에서 장교계급의 인명손상이 많아지면서 새로운 
지휘자 계급으로 올라갔다. 거칠고 지치지도 않고  행동을 열망하는 그들은 전쟁
이 끝난 다음에도  새로운 경력을 기대하고 있었다. 베르사유 조약  규정들이 국
민적인 치욕 말고도 그들을 사회적으로 다시  추락시키기 전까지는 그랬다. 초등
학교 강단, 가게의 계산대, 관청의 창구,  이런 생활방식은 너무 협소하고 비참하
고 낯선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히틀러를 정계로 몰아넣은 것과  똑같은 규범
으로부터 도피가 그들을 히틀러에게로 데려온 것이다.  히틀러 자신은 이와 같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당이 펼치는 운동의 군사적 전초부대를 위해 알맞은 자
원이라고 여겼다. 이  사람들의 원한과 에너지와 폭력에 대한 신념을  권력을 향
한 자신의  전략에 포함시켰다. 제복을  입은 폭력성을 보여주는  것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매력을 가지게 되리라는 것, 테러는 독특한  선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그이 심리적, 논리적인 원칙들에 포함되어 있었다.  "잔인
성은  경탄을 받는다."고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표현하였다. "사람들은 치유력을 
가진 두려움을 필요로 하죠 그들은 두려워할  그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누군가 두려운 사람을 필요로  하며, 떨면서 복종할 누군가를 원하는 거죠. 어디
서든지 싸움이 있고 나면 실컷  두들겨 맞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새로운 회원으
로 당에 가입하는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잔인성에 대해서 뭐라고 떠들
면서 고통에 대해서 격분하는 겁니까?  대중이  그것을 원해요. 대중은 잔인성을 
위한 그 무엇을 원합니다."
  점점 더 커지는 확신으로 히틀러는 수사적이고 제의적인 선전수단에만 의존하
면서 완력의 선전효과를 무시하지 않도록 더욱  세심하게 주의하였다. 그의 심복
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구호를  가지고 돌격대 집회를 격려하였다. "제군들은 
상대방 몇 명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더욱더 악착같이 대들어라.  그것은 해롭
지 않은 일이다."

    호프 양조장의 싸움
  돌격대가 자기들의 신화로  만든, 1921년 11월 4일의  이른바 '호프 양조장 싸
움'도 적지 않게 히틀러의 이러한 발언들에 자극 받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는 
호프 양조장에서 어떤 항의시위를 하겠다고 예고했는데 상당수의 사회민주당 방
해공작대가 찾아왔다.  히틀러는 그들의 수가 7,8백  명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
다. 그에 비해서 돌격대는 이날 당 사업부가  이사가는 바람에 겨우 5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히틀러 자신이 묘사한 바에 다르면 그는 미리부터 불안해하는 소수부대를  열
정적인 인사말로 격려해서 싸울 각오를 하도록 만들었다. 꺾느냐, 꺾이느냐의 문
제라고 그는 외쳤다. 죽어서 시체로 들려나가는 것이  아니면 홀을 떠나선 안 된
다. 자기가 손수  겁쟁이들에게서 완장과 계급장을 뜯어버리겠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고 소리쳤다. "세 번의  '하일' 하는 인사말이 대답이었다. 이번 이  인사는 
전보다 훨씬 더 거칠고 더 쉰 소리였다." 이 보고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그러고 나서 나는 홀에  들어가서 내 눈으로 직접 사태를 볼  수 있었다. 그들
은 빽빽하게 들어앉아서 벌써 눈으로 나를  꿰어버리려고 들었다. 이글거리는 증
오를 품은 수많은 얼굴들이 나를 향했다. 다른  패거리들은 비웃듯이  얼굴을 찌
푸리고 아주 분명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오늘 '우리를 끝장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내장을 잘 간수해야 할거라는 말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는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연설을 계속 할 수가 있었다
고 한다. 그리고 이미 상황을 장악했다고 믿을  무렵 갑자기 어떤 남자가 의자위
로 뛰쳐 오르더니  "자유!"하고 외쳤다. 
  "몇 초만에 홀 전체가 한데 어울려 으르렁거리고 소리지르는 사람들의  덩어리
로 가득 찼다. 유탄자들처럼  커다란 맥주 잔들이  수 없이  이리 저리 날아다녔
다. 그 사이에 의자 다리 부러지는 소리,  맥주 잔 째지는 소리, 우악스럽게 소리
지르고 악쓰는 소리, 외침소리가 쉴새없이  터져나왔다. 정말 엄청난 장관이었다. 
춤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나의 돌격대원들은 -이날부터 그들은 이런 이
름이다- 공격을 하고 있었다.  늑대처럼 그들은 여덟이나 열 명이 떼를  지어 적
들에게 덤벼들어서 그들을  두들겨 패서 정말로 홀에서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5
분이 지나자 나는 피투성이가  되지 않은 적을 거의 볼 수  정도였다. 그때 갑자
기 홀 입구에서 단상을 향해서 권총이 두  번 발사되었다. 이제 거칠게 폭발하고 
말았다. 옛날 전쟁체험이  그렇게 되살아나는 것을 보자 마음이 기뻐서  거의 환
호성이 나올 지경이었다.
  약 25분이 지났다. 홀은  수류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모습이다. 나의 추종자들
은 상당수가 붕대를  감고 있었고 일부는 들여나가야 했다. 그러나  우리가 사태
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날 저녁에 모임의 사회를 맡았던 헤르만  에서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모임은 계속됩니다. 연사께서 말씀하시
겠습니다.'
  실제로 이날부터 히틀러는 뮌헨에서 훨씬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말을 하게 되
었고 그 자신의 보고 에  따르면 1921년 11월 4일부터 이 거리는 국가 사회당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듬해가 시작되면서  그것은 바이에른 지방으로 점점 넓게 퍼
져 나갔다. 주말이면  그들은 지방으로 선전 여행을 나가서 시끄럽게   행진하였
다. 처음에는 오직  완장으로만 구분이 되었지만 다음에는 잿빛 방풍  재킷을 입
고 이른바 '하켈 지팡이'를 들고서 지역을  통과해가면서 , 울리는 음성으로 돌격
대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일찍이  히틀러를 추종하였던 사람의  묘사에 따르면 
그들의 모습은 '예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그들은  오히려 '가능하면 거칠고 
호전적인 모습'을 가지려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집과 공장 담벼락에 
구호들을 붙이고 적대자를  만나면 붙어 싸우고 , 검정, 빨강,  금색 깃발을 끄집
어내리거나 아니면 군대의  기본원칙에 따라서 암거래상이나 자본주의적인 고리
대금업자에 대항하는 지휘부를  조직하였다. 그들의 노래와 구호들은  피비린 내
나는 과도한 용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시민  양조장에서 열린 어떤 모임에서는 
참석자들에게 "유대인 학살을  위해서  기부금을 냅시다"라는 구호가 붙은  모금
상자를 내밀었다.
  이른바 '조정자들'이  여러 가지 행사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음악회를 방해하였
다. "우리는  대단한 싸움꾼!' 이라는 것이  돌격대의 익살스런 구호였다. 실제로 
돌격대의 유례없이 난폭한 등장은 히틀러의 기대에 맞게 당의 성장을 전혀 방해
하지 않았다. 견고하고  성실한 시민 계급 안에서도 그것은 운동의  매력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으로 전쟁과 혁명에 의해서 풀어져버린 규범 탓만을 할 수
는 없다. 오히려  히틀러 정당은 바이에른 스타일의 촌스러움을 이용할  줄 알았
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정치적 유희 방식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리저
리 쓰러진  의자들과 뒤엉킨 맥주잔들이 널린  맥주 홀 싸움들,  '학살' 운운하는 
말, 살인 의지를  드러낸 노래들, '대단한 싸움꾼'등은 모두 폭력적인  농담들이었
다. 특히 이 시기에 '나치'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것은 원래는 '국가
사회주의자'의 약자였지만  바이에른 사람들의 귀에는 오히려  '이그나츠'라는 사
람들의 의식 속에 널리 자리잡게 되었다.
  돌격대의 초기 핵심을 이루었던  전쟁참가자 세대에 뒤이어서 곧 젊은 세대가 
들어왔다. 그러면서  이 운동은 실제로  '불만스러운 젊은이들의 반란'이 되었다. 
폭력에 대한 애착, 엘리트  남자들의 공동체, 이데올로기로 감싼 모반 등의 요소
가 뒤섞여서 새로이 강하고 낭만적인 매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히틀러는 이 
시기의 대중연설에서 이렇게 확인해주고 있다. "사람들을 결합시킬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이상을 함께하는 것과  악당노릇을 함께 하는 것이다."
  돌격대에서 그 두 가지는 구별할 수 없도록  서로 뒤섞여 있었다. 1922년이 경
과하는 동안 돌격대는 비약적인 발전을 해서 가을에는 벌써 루돌프 헤스의 지휘
아래 순수하게 대학생으로만  만들어진 11번째 백인부대가 만들어졌다.  같은 해
에 에드문트 하이네스 소위가   이끄는 예전의 바흐 의용군 그룹이 돌격대에 단
체 가입하여 독립부대가 되었다. 수많은 독자조직을  이루면서 돌격대에 점점 더 
군사적인 특성이 생겨났다.  로스바흐 자신은 자전거 부대를 만들었다. 그밖에도 
정보 부대, 오토바이 부대, 포병대, 기마대 등이 있었다.

    중산층의 불안감을 이용하다
  '돌격부대'들의 중요성어  커지면서 그것은 국가사회당에  새로운 유형의 정당 
특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돌격대는 수많은 참가자들이 회고록에서  변명을 하고 
있는 것과 달리 가장 일반적인 민족적 투쟁 및 돌격 프로그램을 넘어선 어떤 특
징적인 이데올로기도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깃발을 휘날리며 거리를  행진할 때
에도 새로운 사회질서를 향한 행진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돌격대는 유토피
아적 이상을 갖지 못한 채 다만 거대한 불안이었을 뿐이며 어떤 목적도 갖지 못
한 채  스스로 통제도 못하는 역동적인 에너지였을 뿐이었다.
  엄격하게 보자면 이 집단으로 들어간  사람들 대부분이 다 S한번도 정치적 병
사들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의 허무주의,  불안, 복종의 욕구 등을 그럴싸
하게 들리는  정치적 용어들 뒤에  감추어 보이려는 건달들에  가까웠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란 대단히 불확실한 일반적인  신념과 복종의 욕구라는 배경 뒤에 숨
은  활동이었다.  거의 동성애에 가까운 남자들만의  특성을 가지고서 '지도자들' 
이외에는 별다른 강령도 없었다. 이들 지도자들은  평균적인 돌격대 사나이의 헌
신의 욕구를 일깨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히틀러는 공식적인  호소문에서 이
렇게 말하고 있다.  "지도자들에게 복종하고자 하는 사람, 필요할 경우에는  죽음 
속으로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 오시오!"(1922년 12월 6일자 경찰 기
록, 바이에른 내무장관의 서류, 프란츠 빌링)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무관심이 돌격대를 모든 분파적인 고유성
과 무관하게 어떤 명령이든지 따르는 극단적인  핵심집단으로 만들어 냈다. 그것
은 전통적인 시민정당이 몰랐던  당 전체의  결속을 가져왔다. 그리고  아주  상
이한 분위기와 불만  집단에 하나의 통합된 당이  되도록 하는 기회를 만들어냈
다. 돌격대에서 형성된 핵심집단이 규율이 잡히고  믿을 만할수록 히틀러는 거의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계층을 향하여 자신의 호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국가사회당의 특징이 되는 통합되지  못한 이미지의 원인을 이런 특성에서 찾
을 수는  없다. 이 정당의 불확실성은  '중간층 정당'이라는 널리  퍼진 공식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물론 소시민적인 중간층이 당에  상당히 많은 특성들을 부여하
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히틀러가  예고한 강령도 '노동자 당'이라는 표현
을 하고는 있지만 많은 점에서 중산층의 두려움과 공황적인 심리를 요약하고 있
다. 대기업과 백화점들에게 경제적으로 압도될까 두려워하는 마음, 쉽게  만들어
진 부에 대한 소시민의 원한, 고로 중산층을  겨냥한 것이며 예를 들면 알프레드 
로젠베르크 같은 사람은  중산층을 '세계의 기만에 대항하는 '유일한 계층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히틀러는 빈 시절의  존경하는 선배 칼 뤼거에게서 배운 교훈을  잊지 않았다. 
그는 '몰락의 위협을  받는 중산층'을 동원하고 이러한  방식으로 '감동시키기 힘
든 추종세력이 상당한 희생과 단단히 싸움의 각오'를  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
이다. "중산층 세력에서 투사들이 나와야 한다. 우리들 국가사회주의자들의  대열
에는 우익과 좌익의 상속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서로 협력해야 한다."
  초기의 여러 가지 회원 명부는 이러한 이미지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약 30퍼
센트가 공무원이나 샐러리맨이고,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다시 거의 30퍼센트, 상
인이 16퍼센트, 그들  중 상당수는 국가사회당이 노동조합의  압력에서 자기들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중소기업 소유자들이었다. 나머지는  군인 학생 자유직이고, 
당  지도부는 낭만적인  대도시 보헤미안들이  압도적인   수를 차지하고  있다. 
1922년 당지도부의 지시에 따르면  각 지구당은 지역내의 사회학적 이미지를 반
영해야 하며, 당 지도부에 대졸자가  절대로 1/3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박
고 있다. 이시기에 당이 모든 출신 계급, 모든 사회적 색채의 사람들을 끌어들이
고, 상충하는 집다,  이해, 감정 등을 통일하는  운동으로 역동성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1921년 8월에 린츠에서 '계급정당'이라고  규정했을때 이 
자리에 히틀러는 참석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국가사회당을 언제나  계급간의 엄
격한 통합이라고 보았고, 민족 대립을 위해서  계급대립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여
겼다.
  1922년 12월의 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중산층과 시민계급의 사람들과 함께  매
우 많은 노동자들이 국가사회주의 깃발을 따르고  있다. 오래된 사회주의 정당들
은 자기들의 존속에 상당한 위협이 된다고  보고 있다." 사회주위가 지적하는 수
많은 사회적 모순과 대립들에서  공통분모를 얻었지만 방어적인 태도가 된 것이
다.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는 국가사회당에 서 F자리가 없다. 계급의식을 가진 
시민도 마찬가지"라고 히틀러는 확언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초기에 국가사회주의의 말이 먹혀들고  추종자를 얻게 된 
것은 계급이 아니라  마음상태였다. 비정치적인, 그러나 실제로는 권위를 좋아하
고 지도를 필요로  하는 의식상태는 모든 계층과 계급에 존재하고  있었다. 공화
국 체제로 변화된 상황에서  공화국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에 버림받았다. 그들을 채웠던 막연한 공포심은, 새로운 국가형태가 자신들의 충
성심에 어울리는 권위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점점 강화되기만 하였다.
  패배라는 재앙에서 공화국이  탄생하였고, 전승국들, 특히 프랑스에 의해서 복
수심에 불타는  마음으로 추구된 황제시대의  원한 맺힌 죄악에  대한 보복정책, 
굶주린, 혼란, 화폐가치 하락 등 두려운  체험들, 민족적인 파렴치의 표현으로 오
해된 베르사유 조약의 조건이행  등은 국가질서와 자신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도
이치 사람들의 전통적인 욕구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도이치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가치를 일부를 국가와의 동일시에서 얻
어온 사람들이었다. 광채도  없고 비굴한 이런 국가는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
었다. 그것은 국민의 충성심을  얻을 만한 의미가 없었고, 상상력을 위해서도 아
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들이 혼란스런 시대를  지나면서도 암담한 저항의 심정으
로 보존해  왔던, 질서와 존경이라는 엄격한  개념은 공화국 치하에서 민주주의, 
언론자유, 논쟁, 정당교섭 등을  통해서 헌법 자체에 위해서 이미 문제시되는 것
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국가형태에서 세계를 더 이상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안감에 빠져 있던 그들은  단호한 거동으로 자기들의 혼란을 정치적으로 조
직해낸 국가사회당을 만나게  된 것이다. 하필이면 여러모로  기묘한 인생배경을 
가진 히틀러 정당의 모험가적인 대표자들이 자기들의  질서, 도덕, 혹은 충성, 신
념 등에 대한 욕구를 가장  잘 이해했다고 그들이 느꼈다는 역설적인 사실은 이
런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는 질서, 청결, 정확성만이 전부였던 전쟁 전
의 독일을 현재의 혁명 독일과  비교하였다."고 히틀러의 초기 연설에 대한 어떤 
보고가 전하고 잇다.  나날이 상승하던 선동가 히틀러는 바로 민족의  특징이 되
는 질서와 기율에 대한 
본능에 하소연해서 점점 더 많은 동조를 얻었던 것이다.
  이런 눈으로 보면 세계는 질서가 잡혀 잇거나 아니면 아예 참을 수 없는 것으
로 여겨졌다. 히틀러는 공화국을 도이치 역사와 도이치  본질의  부정이 라고 불
렀다. 그것은 소수계층의  일이며 사업이고 경력이라는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평화를 원할 뿐이지 돼지우리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1923년 4월 20일자 연설
문)
  히틀러는 아직 1923년 여름의  끔찍한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중산층   
대부분의 실질적인 재산상실을 야기했던  인플레이션을 시대의 핵심 문제로  잡
았다. 1920년에  마르크는 전쟁 이전 가치의  1/10에 이르렀다. 2년 뒤에는  무려 
1/100에 이르렀다(페니히 마르크). 전쟁 이후 1천 2백 억의 빚을 졌고, 아직 미결
상태인 손해배상 협상에서 새로운 부채를 짊어질 수밖에 없는 국가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부채를 벗어났고, 대신에 국민이 그 빚을 떠 안았다.
  빚을 끌어쓴 사람들, 상인들, 제조업자들, 특히  거의 세금 없이 최저 임금으로 
생산하는 수출업자들에게 인플레이션은 유리한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아직도 
통화가치 하락에  관심이 있었다. 어쨌든  적어도 돈 가치를  떠받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돈 가치가 떨어지면서 점점  더 싸게 먹히는 싸구려  돈을 가지고 
그들은 태연하고도 거침없이  자기 나라 돈에 불리한 투자를 하였다.  재빠른 사
업가들은 몇 달 안에 신화적인 부를 쌓았다.  그리고 거의 한푼도 없는 상태에서 
엄청난 경제 왕국을  건설하였다. 자기들의 경제적 부가 거의 모든  사회 집단의 
빈곤화, 프롤레타리아화에 기초한 것이고, 차용증서를 가진 사람, 연금생활자, 소
규모 저축생활자들이 전재산을 날리는  상황이 벌어져도 그런 광경은 오히려 도
전의식만을 부추겼다.
  환상적인 자본가들의 경력과 대중의 빈곤화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막연한 
추측은 당사자들에게 사회적인  냉소의 감정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지속적인 원
한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반자본주의적인 분위기
는 이러한 체험과 적잖이 연관이 있다. 전통적인  관념으로 보면 사욕이 없고 올
바르고 통합적인 기관이어야 하는  국가가 인플레이션의 힘을 빌어 국민에게 기
만적으로 파산을 떠넘겼다는  인상도 마찬가지로 파급효과가 컸다.  엄격한 질서
의식을 가진 소시민들,  특히 파산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한 인식은  그들의 얼
마 안 되는 재산의 상실보다도 오히려 더 파괴적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타격을 받으면 그토록 엄격하게 신중했던 세계가 철회할 수 없는 형태
로 몰락하게 마련이다. 지속적인 위기는 사람들이 다시 믿을 수 있는 음성, 따를 
수 있는 의지를  찾도록 만들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공화국의  불행을 거의 전부 묘사할 수 있을 정도
다. 그러므로 대중선도가  히틀러라는 현상은 오직 부분적으로만  그의 특이하고
도 기만적인 연설가 재능의 덕을 입었다. 그가  이렇게 분노한 보통 사람들의 기
분을 정확하게 알아맞히고, 그들의 소원을 어느 정도  그려 보일 수 있는 감수성
을 가졌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 자신 바로 그러한  현상에 위대한 
연설가의 비밀을 두고 있었다. "그는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필요한 말
들이 바로 청중들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도록 언제나 광범위한 대중의 소리에 귀
를 기울였다."
  근본적으로 보자면 한때의 실패한  미술 학교 지원자가 체험했던 일이 초개인
적인 차원에서 한번 더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생활감정과 동경에 맞지 않는 현
실에서 고통을 당하는  일이었다. 히틀러 개인의 상황과 사회 병리적  상황의 이
런 일치를 모르면 일반적인  감정에 대해서 그토록 마법적으로 작용한 히틀러의 
부상을 이해하기 힘들다. 민족이 이 순간 비로소 체험한 일, 즉 마법에서 깨어나
는 체험, 몰락과 계급추락,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질 대상을 찾는 감정 등
을 그는  이미 오래전에 겪었던 것이다.  그 뒤로 그는 이유와  변명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형식과 책임자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그이 본래의 의식에 모범
적인 특성을 부여하였고,  사람들은 전기에 감전된 듯이 그에게서 그  사실을 확
인하였던 것이다.
  그들을 사로잡은 것은  그의 논거가 반박할 수 없는 것이거나,  그의 구호들이 
대단히 예리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실패한 시민  아돌프 히틀러가 
어찌할 바 모르고 똑같은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서 불러일으켰던 똑같은 체험, 
똑같은 고통과  희망의 감정이 그들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광증과 신들린 상태, 
특별하게 달라붙은 비속성의 혼합  속에 드러나는 그의 특별한 카리스마는 대부
분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역사는  때때로 한 인간 속에 응축되
어 나타나기를 좋아하며 세계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야콥 부르크하르트
의 말은 그에게서  현실로 나타나 것이다. 시대와 사람이 하나의  위대하고 신비
로운 계산착오 속으로 들어선 것이다.

    치밀하게 계산된 연극무대
  히틀러가 장악한  '비밀'은 그가 가진 다른  본능들과 마찬가지로 실은 합리적 
계산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었다. 중요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
이 깨달았지만, 그러한 깨달음이 대중 심리적인  계산을 포기하도록 만들지는 않
았다. 그 시대의 과장된 양식에 따라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일련의 사진들은 상당
히 재미있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선동가적인  천재성에 대해서 얼마나 연구하고 
시험하고, 실수를 통해서  배웠는가 하는 인식이 그러한 재미 속에  파묻혀 슬며
시 사라져버렸을 뿐이다.
  그는 일찍부터 무대에 등장할 때의 특별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특수한 
양식은 심리적인  고려에 따른 것이었으며,  특히 그이 연극적인  특성을 통해서 
전통적인 정치집회의 과정과 구별된 것이었다. 선전 트럭들과 '거대한 공식적 광
고'를 위한 벽보로 요란스럽게 선전하면서 그는  서커스와 대형 오페라의 구경거
리 요소를  교화적인 교회의식과 교묘하게 혼합하였다.  높이 매단 깃발들, 행진
곡, 혼영의 구호, 노래들, 언제나 되풀이되는  '하일' 하는 외침 등은 지도자의 연
설을 위해서 점점  긴장 넘치는 준비과정이 되곤 하였다. 연설의  예고적인 특성
은 이러한 방식으로 인상 깊게 선전되었다.
  점점 개선되면서 연설자 과정과 안내서에도 등장하는 행사규칙들은 단한 가지 
세부사항도 소홀히 취급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벌써 당 전략이라는  거대한 노
선을 결정할  뿐 아니라  가장 하찮은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집요한 관심을 
가지는 히틀러의 성향이  드러나고 있다. 그는 때때로 뮌헨의 모든  중요한 집회
장소들의 음향을 손수 조사하였다. 하커 양조장이  호프 양조장이나 킨들 지하술
집보다 더 큰  음량을 요구하는지 알아내려고 했으며,  집회장소의 분위기, 통풍, 
전략적 위치 등을 세밀하게 검사하였다.  어떤 홀은 너무 작아서 추종자의 1/3만 
와도 가득 차게되겠다는 등의 일반적인 지적도  나타난다. 소시민적인 중산층 운
동이라는 인상을 피하고 노동자들의  신뢰도 얻기 위해서 히틀러는 추종자들 사
이에서 때때로  '바지주름에 반대하는 싸움'등을 주도하였다.  부하들을 넥타이와 
칼라 없이  선전에 내보내기도 하였다.  적들의 주제와 전략을  알아내기 위해서 
부하들을 상대방 교육과정에 참여시키기도 하였다.
  1922년부터 그는 자신이 주요 연사로 등장하는 여덟, 열, 혹은 열 두개의 행사
를 시리즈로 하룻밤에  열곤 하였다. 그러한 방법은 그의 수량  콤플렉스와 반복 
욕구에 잘 어울리는 것이었고  게다가 집중적인 선전활동의 원칙에 맞는 일이었
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오늘날 중요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은 점차 상승
하는 군중집회를 조직하는 것이다. 실내와 거리에서 항의를 거듭하는 것이다. 정
신적인 저항이 아니라 저항, 항의, 쓰러진 분노의 타오르는 파도가 우리 민족 속
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뮌헨의 '사자 양조장'에서  열린 시리즈 행사에 참석하였
던 어떤 증인은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고 있다.
  나는 이미 이 홀에서 얼마나 많은  정치집회를 체험하였던가. 그러나 들어서면
서부터 벌서 그토록 후끈  달구어진 최면상태의 대중적인 흥분의 기운이 불어오
는 경우는  전쟁중에도 혁명중에도  겪어보지 못했다.  나는 혼자서 생각하였다. 
'독자적인 투쟁가, 독자적인 깃발, 독자적인  상징들, 독자적인 인사법, 군대와 비
슷한 정돈자들, 하얀 바탕에 검은 갈고리 십자가를 그린 새빨간 깃발들의 숲, 군
인과 혁명가의  혼합,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이상한  혼합이로군-청중도 
마찬가지다. 추락하는 중산층이  압도적인데-중산층은 여기서 다시 결집될  것인
가?' 여러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는 끊임없이 꽝꽝 울리는 행진 음악, 여러 시간 
동안이나 이어지는  하급 지도자들의 짤막한 연설들,  그는 언제 오는  걸까? 그 
사이에 어떤 예기치 못한 일이라도 생겼나? 자신을 둘러싼 이 분위기 속의 열기
를 아무도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뒤쪽 입구에 움직임이 일어났다. 명령
의 구호들, 단상의 연설가는 문장 중간에  말을 멈추었다. 모두들 일어서면서 '하
일' 하고 외쳤다. 소리  지르는 대중과 펄럭이는 깃발 한가운데로 지금껏 기다려
온 사람이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오른손을 높이 쳐들고 빠른 걸음으로 연단으로 
다가갔다. 그는 바로  내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는 내가 여
기저기 개인 집에서 만났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의 연설 구조는  언제나 똑같은 모범을 따랐다. 현실을 대단히  헐뜯는 말로 
청중의 동의를 얻고 최초의 결론을 도출하였다. "모든 영역으로 분노가 퍼져나가
고 있습니다, 1918년 약속했던 것은 품위도  아름다움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1922년 9월에  어떤 연설을 그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그러
고 나서 역사적 회고, 다의 강령 해설, 유대인, 11월 범죄자들에 대한 공격, 아니
면 조건이행 정책을 펴는 자들에  대한 공격을 하고 난 다음 대개는 개별적으로 
소리지르는 사람들, 아니면 돈주고 고용한 박수부대를  통해 점점 더 흥분상태에 
빠져서 황홀한 일체감의 호소로 끝을 맺는 것이다.  그 사이에 언제나 순간의 열
기, 박수 갈채,  맥주 냄새, 혹은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말들을  슬쩍 끼워놓곤 했
다.
  그런 경향을 그는 회가 거듭할수록  점점 더 확실하게 파악해서 이용할 수 있
게 되었다. 패배한 조국에 대한 탄식, 제국주의의 죄, 이웃나라의 질투심, '도이치 
여자의 공유화', 자기  과거 낮추기, 아니면 천박하고  좀스럽고 웃기는 서유럽에 
대한 적대감 등이었다.  새로운 국가형태와 베르사유수치조약, 연합국의 통제 위
원회, 검둥이 음악, 여자들의 단발, 현대음악  등은 다 서구에서 온 것이고, 직업, 
안전, 방 등은 그곳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일은 민주주의로 굶어죽는다!"
라고 그는 인상  깊게 요약하였다. 신화적으로 음울한 맥락에 대한  집착은 장광
설에 폭과 깊이를  주었다. 일시적인 맥주집의 행사장 앞에 세계  드라마의 전망 
전체가 펼쳐지는 것이다. "오늘날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세께 전쟁보다 더 위대
합니다."라고 언젠가 그는 외쳤다.  "그것은 전 세계를 위해서 독일 땅에서  결정
될 것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희생양이 되거나 아니면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1923년 9월 12일자 연설)
  현학적으로 사려 깊던 안톤  드렉슬러는 그와 같은 자아도취적인 발작 직후에 
때때로 끼여들어서 히틀러에게는  몹시 실망스러운 일이었지만 냉정한 이성으로 
정정하는 맺음말을 덧붙이곤 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가 위대한 선동가의 몸짓으
로 자기가 권력을 잡으면 평화조약을 넝마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위협하거
나 자기는 프랑스와 새로 전쟁을 벌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확언해도 아무
도 그의  말을 고치지 않았다. 한  번은 '쾨니히스 베르크에서 슈트라스부르크에 
이르고, 함부르크에서 빈에  이르는' 강력한 제국의 전망을  제시한 적도 있었다. 
사람이 점점 더 몰리는 것은 이 대담하고 불합리한 도전의 어조야말로 사람들이 
당시의 체념의 분위기 속에서  듣고 싶어하던 목소리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
이다. "체념하고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겉보기에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을 감행하
는 것이 중요하다."
  원칙 없는  기회주의자라는 널리 퍼진 이미지는  분명히 히틀러의 가차없음과 
독창적성을 과소 평가한  것이다. 천박한 것을 분명하게  고백한다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라는 신화를  예비한 남성다
움, 분노, 경멸 등의 분위기를 그의 주변에서 만들어냈다.
  그가 스스로 양식화한  역할은 아웃사이더 역할이었다. 그것은  공공연한 불만
의 시대에 엄청난 
인기를 만들어 주었다. <뮌헨 포스트>지가 그는 '현재 뮌헨에서 못된 짓을 일삼
는 가장  교활한 선동꾼'이라고 비나하자  그는 이 비난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렇다, 우리는 민족을 선동하고 끊임없이 부추기려고 한다!" 처음에 자신이  등
장하는 천박하고 야비한 형식들이 그에게도 역겨웠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이 서
커스 천막에서 인기를 만들어줄 뿐  아니라 사교계의 살롱에서도 점점 더 큰 흥
미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근 점점 더 거침없이 그러한 방법을 쓰게 
되었다.
  말썽꾸러기들에 대해서 비난하자 근 프랑스 백작보다는 차라리 도이치 뜨내기
가 되겠다고 대꾸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선동술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반유대주의자 행패꾼이라고들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태풍을 일으키려는 겁
입니다. 사람들은  잠만 자지 말고 뇌우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
다. 우리 독일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는 일을  피하고 싶은 겁니다.! 비인간적이
라고 해도 좋아요!  그러나 우리가 독일을 구하면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일을 성취한 것입니다."
  극단적인 수사적 점층법을 위해서 종교적 이미지들과 모티프들을 사용하는 것
은 어린 시절의 감동을  반영한다. 람바흐 수도원에서 복사로 일한 기억들과, 승
리에 찬 구원의 확신을 뒤에  둔 고통과 절망의 이미지들에 의해 정열적으로 압
도당했던 기억들이었다. 그는 카톨릭 교회가 그런  결합을 통해 보여준 심리적인 
지식과 천재성에 경탄하고  그것을 배웠다. 그는 자신의  반유대주의적인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망설임도 없이 '나의 구세주'를 뻔뻔스럽게 불러댔다. "나는 기독교
로서 무한한 사랑에  가득 차서, 주님께 마침내 몸을 일으켜서  채찍을 움켜쥐고 
고리대금업자, 뱀과  독사의 무리를  성당에서 쫓아내셨다는 성경구절을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독에 대항하는 주님의 무서운 싸움을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나는  봅니다. 그분이 그 일을 위해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셨다
는 사실에 너무나도 깊이 감동되어서 말입니다.

    방황하는 자들을 사로잡다
  그의 연설 구조가  똑같다는 것은 감정의 단조로움을 드러내 준다.  아무도 이 
연설에서 무엇이 개인적이고 고정관념이고 무엇이 심리적 고려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시절 그이 지나치게 손질된  원고들을 읽어보면 그가 자기를 사
로잡았던 수백 가지 원한들을  똑같은 고발, 비난, 복수의 맹세로 바꾸는 숨가쁜 
장면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는 "오직 저항과 증오, 증오 그리고 다시 
증오가 있을 뿐!"이라고 외친  적이 있다. 의기소침하고 불안한 국민의 한가운데
서 소리 높여 적에 대한 미움을 외치면서 대담한 뒤집기 원칙을 자기 것으로 삼
았다.  자신은 적에 대한  증오를 동경한다고 고백하였다. 그의 연설 중 어느 것
도 자의식의 구호를 포기한 것이 없다. "우리가 키를 잡으면 우리는 물소처럼 앞
으로 나갈 것입니다."라고  그는 정열적으로 외쳤다. 그리고 집회의 보고서에  언
급한 것처럼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해방을 위해서는  합리적이고 신중한 
정책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긍지, 의지, 반
항, 증오, 또다시 증오가 필요합니다!"
  지칠 줄 모르는 그의 과장법은 시대의 모든 일에서 거대한 부정부패와 광범위
한 국가반역의 전략이 작동중인  것을 보았다. 그리고 모든 연합국측 외교 통첩, 
프랑스 의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연설 뒤에서 인류의 적의 음모를  보았다. 그런 
말을 할 때 그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팔을 비스듬하게 앞으로 뻗쳐 땅을 가리키
면서 특징적인 자세를 취하고서 이 신기한 스타일의 바이에른 지역 선동가는 연
설에 도취된 상태에서 정부와  나라 사정뿐 아니라 바로 세계정세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아니, 우리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구합니다.  복수
를!"
  그는 우스꽝스럽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그것의 치명적인 효
과도 무시해버렸다. 그는  뒷날의 황제와 같은 몸짓을 아직 터득하지  못한 상태
였다. 그리고 대중에 대해 이질적인 예술가의  느낌을 완전히 통달하지 못했기에 
그는 드물지 않게 토속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 그런 다음에는 청중들에게 
맥주 잔을  높이 쳐들어 보이거나 아직  서투른 "쯧쯧"하는 소리를 내서  자기가 
불러일으킨 소란을 진정시켰다.
  사람들도 분명히 정치적 동기보다는  연극적인 동기에서 구경삼아 모여들었다. 
어쨌든 1922년 초만  해도 등록된 회원이 6천  명이었지만 청중은 1만여 명이나 
되고 있다. 움직임도 없이 사람들은 고저오딘 눈길로 그만을 응시하였다. 때로는 
폭발하는 것 같았다. 마치 수천 개의 자갈돌이  갑작스럽게 북 위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고 어떤 관찰자가 묘사하였다.
  '웅크렸던 인간'의 소박하고도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히틀
러는 이 열광과 중심의식을 우렸다. 그는 주위사람들에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렇게 10개의 홀을 돌면서 어디서든지 사람들이 열광하여 소리치는 것을  경험
하면 정말 격양된  느낌이 든다." 드물지 않게 그는 충서의  맹세를 하고 모여든 
사람들이 복창하는 가운데 연설을 끝맺었다. 때로는  홀 천장에 눈길을 고정시킨 
채 거칠고도 실성할 듯한  정열로 계속 이렇게 외쳤다. "독일! 독일!"  마침내 사
람들이 끼어들어서 외침 소리는  전쟁노래나 유대인 박해의 노래로 넘어가는 것
이다. 그러한 노래 소리는  이어서 밤의 길거리로 퍼져나가곤 하였다. 히틀러 자
신은 연설을 끝낸 다음에는  "흠뻑 젖어버리고 4 내지 6파운드의 몸무게가 빠지
곤 했다." 그이 물들인 유니폼 양복은  "모임이 있을 때만다 속옷을 푸르게 물들
이곤 하였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 모든 선전술을 완전히 익혀서 '이 분야의 전문가'라
고 느끼기까지 2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였다.  자기가 처음으로 미국 선전방식을 
응용하였고, 그때까지 가장  창의력이 풍부하던 정치적 투쟁개념을  자신의 선동
가적인 상상력과 결합시켰다고 지적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세계무대>지
가 나중에 표현한 것처럼 어쩌면 저 위대한 바넘(Barnum)이  그이 스승이었을짇 
모른다. 그러나 이 잡지가 자신들이 발견한  것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했다는 것은 
바로 그 우스꽝스러운 수단을  보고 목표도 우스꽝스러운 것이라고 짐작한 것은 
좌파에서 우파에 이르기까지 자신감에 넘친 수많은  당시 사람들의 오류였다. 그
는 쉬지 낳고  하나의 세계를 붕괴시키려고 하였으며  그 자리에 새로운 세계를 
대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목표로  삼고 있던 세계전쟁과  종말론은 그가 
서커스의 심리학을 이용하는 것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히틀러의 온갖 성공에도  불구하고 배경에는 더욱더 돌출한  현상이 있었으니, 
바로 민족주의 진영의  통합적인 대표자, 민족 사령관 루덴도르프의 모습이었다. 
히틀러는 적지않은 존경에  찬 눈길로 자신을 단순히  앞서 길 닦는 사람으로만 
여겼다. 1923년  초에 말한 것처럼 '아주  작은 세례 요한'으로서  그는 자기보다 
더 위대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위대한 사람에게 민족과  칼을 마련해주
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효과는 점점 A더  메시아적이 되었다. 그보다 먼저 민중이 그가 바
로 자기들이 기다리는 기적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그들은 '마치 구세
주처럼' 그를 향하여 몰려갔다고 어떤 주석에 표현되어 있다.
  수많은 자료들은 이  전체주의 운동이 준종교적이고 구원에  집착하고 있으며, 
그러한 과정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각성 체험들과  개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 시기에 처음으로 그의 연설을 들었던 에른스트 한프슈텡글은 온갖 
비난에고 불구하고 이 연설과 더불어 자기에게 '새로운 삶의 단계'가 시작되었다
는 느낌을 가졌다고 한다. 한동안 히틀러의  중요한 추종자였으며 나중에는 체포
되어 오라니엔부르크 수용소에 들어갔던 상인 쿠어트 뤼데케는 연설자 히틀러와
의 만남이  자신과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러일으켰던 히스테리컬한 감정의 
흥분상태를 외국으로 도망친 다음에 이렇게 표현하였다.
  일순간 나의  비판적인 능력들이 멈추었다.  이 남자가 연설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를   사로잡은 감정들을 어떻게  묘사하면 좋을 지 모르겠다.  그가 독일의 
수치를 말하면 나는 어떤 적을 향해서도 덤벼들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꼈다. 도
이치 남자의 용기에  호소하는 것은 무기를 들라는 외침 같았고,  그가 설교하는 
가르침은 계시가 되었다.  그는 마치 제 2의   루터처럼 보였다. 나는 이 사람에 
정신이 팔려서 다른  것은 잊었다. 주의를 둘러보자 그의 최면술은  수천의 사람
을 사로잡아 단 한 사람처럼 만들었음을 알았다.  물론 나는 이런 체험에 대해서 
충분히 성숙한 상태에 있었다. 서른 두 살의  남자로써 실망과 불쾌감에 지쳐 있
었고, 삶의 내용을 찾고  있었다. 그러니까 활동영역을 찾지 못하고 영웅적인 것
에 열광하지만 영웅을 갖지  못한 애국자였던 셈이다. 이남자의 의지력, 그이 정
직한 설득의  정열이 내 위로 넘쳐  들어오는 듯했다. 나는 종교적  개종에 비할 
만한 체험을 하였다.
  1922년 초에 당원의  숫자도 비약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집단으로 당에 
가입하는 일이 여러 번이나 생겨서 여름에는 벌써 대략 50개의 지구당을 가지게 
되었고 1923년 초에는 사람들이 너무  몰려드는 통에 뮌헨 당 사무소를 임시 폐
쇄해야 할 정도였다. 1922년  1월말에 6천 명 정도 되던 당원  숫자가 이듬해 11
월에는 5만 5천명이 넘었다.  이러한 번창은, 당원 한 명당 3개월마다3명의 신규 
당원과 한 명의 ,민족 관찰자. 정기 구독자를 확보하라는 다의 명령에 의한 것만
이 아니었다. 그것은 연설가로서, 행사 지휘자로서 히틀러의 위치가 점차 확고해
진 것과 관련이 있었다. 방향 감각을 상실한  사람들의 소망에 따르기 위해서 국
가사회당은 당원들의  개인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당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도록 
애썼다. 그러한 점에서도 국가사회당은  사회주의 정당들의 실천방안을 받아들였
다. 매주 열리는 연설의 밤의 의식-당원들은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다-함께 하
는 소풍, 음악회, 하지의 횃불 놓기  의식, 다함께 노래하기, 야외캠프, 손 쳐들기 
등은 유쾌한  형식이 되어서 점차  당의 회합과 돌격대  숙소에서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특성들은 이미 사회의 정당들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모방할 
수 없는 것으로,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고향을  잃어버린 심정의 욕구를 폭넓
게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수많은 초기 당원들을 위해서  당은 이러한 방식으로 일종의 종교적이고 세련
된 대체 세계를  만들었다. 히틀러는 그것을 여러 가지로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비교하였다. '도이치 크리스마스 축제'는 당의 가장  인기 있는 행사들 중의 하나
였다. 이 행사에서 당이 마련하는 대체 세계는 원래의 이상에 이르렀다. 이 행사
들은 바깥의 어둡고 적대적인 세계에 맞서서 감상주의, 선별의식, 안전하다는 느
낌 등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당시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운동의 최
고 의무는 "무엇인가를  구하면서 방황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적어도 어딘가에
서 마음에 평화를 주는 장소를 찾을'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라고 하였다. 

    추방 위협
  상당 부분 이러한 이유에서  히틀러는 무조건적으로 당을 확대하는 일을 포기
하였다. 그리고 유능하고 개인적으로 확신을 가진  지도자기 나오는 경우에만 새
로운 지구당을 만들었다. 그런 사람은 궁극적으로는  분명히 공허감에 이르게 되
는 저  권위의 욕구를 작은 일에서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어쨌든 
초기에 당은 구체적인  정치적 목적을 위한 집단보다 그 이상이  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일상의 사건들에 몰두하느라,  당원들에게 비극적인 진지함이라는 세계해
석과 천박한 위안을  마련해 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일상의 곤
궁과 외로움에서 그러한 위안을 필요로 하였다. 고향이 되고, 존재의 중심점이며 
인식의 원천이 되고자 하는 당의 경향에는 뒷날의 전체주의 요구들이 씨앗이 이
미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일년 이내에 국가사회당은 당시  어떤 관찰자의 말처럼 '남도
이치 민족주의의 가장  강력한 권력인자'가 되었다. 수많은 민족단체들은 국가사
회당에 흡수되었다.  북도이치 그룹들도 점점 더  이쪽으로 휩쓸려 들었다. 특히 
붕괴되고 있던 도이치  사회주의 정당의 퇴물들이 상당수  이쪽으로 흘러들었다. 
1922년 6월에  외무장관 발터 라테나우가 어떤  민족주위 모반자 그룹에 의해서 
암살되자 프로이센, 바텐, 튀링겐  등 일부 지역들은 이 정당의 활동을 금지하였
다. 그러나 소비에트  시절의 기억들을 잊지 못하는  바이에른에서 국가사회주의
는 가장 과격한 반공 전초기지로 남았다.
  뮌헨 시 경찰국에는 수많은 히틀러 추종자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경찰청과 
푀너와 국장인 프리크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힘을 합쳐서 국가사회당에 반대하
는 광고들을 억압하였다.  그리고 추진증인 활동에 대해서  당  지도부에 정보를 
주거나 이러한 활동들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도록 노력하였다. 프리크는 나
중에 이때만 해도 국가사회당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억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사회당과 히틀러씨에  대해서 보호의 손길을 유
지하였다." 히틀러 자신도 프리크의 원조가  없었다면 "작은 집단을 벗어나지 못
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922년 바이에른 주 내무  장관 슈바이어가 그를 부담스런 외국인이라는 이유
로 오스트리아로 쫓아  보내야 하지 않을까 고려했을  때 히틀러는 진짜 위협을 
느꼈다, 당시 모든 정당 지도자들이 인정한 바로는 뮌헨 거리의 건달 패거리, 싸
움질, 시민들을  괴롭히고 선동하는 일  등은 거의 견디기  어려운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  당수인 에어하르트 아우어가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원
칙들'에 근거하여 히틀러를 추방하는 일에 반대하였다. 그래서 히틀러는 계속 방
해받지 않고 공화국을  '온갖 외국인 사기꾼들의 피난처'라고  모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권력을 잡게 되면  "신께서 너희들에게 은총을 베푸시기를!" 하고 
외치고 국가반역자인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에게는 "단 한가지 형별, 즉 교수대i가 
기다리고 있다"고 공공연히 떠들어대면서 정부를 위협할 수 있었다.
  그가 만들어낸 흥분상태는 공화국  내에서 뮌헨 시를 거의 반공화국적 적성지
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을  혼란시키는 쿠테타, 내전 군주제 
부활 등의 소문이 무성하였다. 공화국 대통령인  프리드리히 에버트가 1922년 여
름에 뮌헨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역전에서 이미 욕설과 야유,  그리고 빨간 수
영팬티 등으로 환영인사를 받았다. 중앙정부 수상인  비르트는 예정되어 있던 뮌
헨 여행을 중단하라는  경고를 측근에서 받았다. 반면에  힌덴부르크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망명중에  죽은 비텔스바흐 왕가의 마지막 군주  루트비히 3세의 
유해가 이송되어왔을 때는 도시  전체가 상복을 입고서 슬픔과 추모의 심정으로 
거리로 몰려나왔다.

    대외활동을 시작하다.
  뮌헨 안에서의  성공은 히틀러에게 용기를 주어서  최초의 대외활동을 벌이게 
되었다.1922년 10월 중순에  코브르크의 조국 연맹은 시위를  기획하고 히틀러를 
초청하였다. 그러나 '몇  명의 수행원'을 데려오라는 요구를  그는 도전적으로 잔
뜩 부풀려 해석해서 이 모임을 자신의 편으로 이끌어 스스로 압도하려는 속셈으
로 약 8백 명 가량의  임시부대를 이끌고 깃발을 날리고 대규모  음악을 연주하
며 코부르크로 들어갔다.
  당황한 그 지역 우지들이  이렇게 대열을 이루어서 들어오지 말라고 요청하자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그런 요청을 '쌀쌀맞게 거절하고'  자기 도당들에게 '풍악
을 울리며' 출발하라고 명령하였다.  길 양편에 적대감을 품은 무리가 잔뜩 몰려
들어 있었는데도 기대한 대로 신문의 제목을 장식할 만한 패싸움이 벌어지지 않
자 히틀러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시위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오던 길을 되돌
아가라고 시켰다. 이번에는  긴장을 고조시키는 연극적인 발상으로  음악을 빼고 
북만 치도록 만들었다.  결국 기대했던 개로 거리의 패싸움이 벌어져서  일부 패
거리들이 하루종일, 그리고  밤까지 계속 싸워대는 것을  보고 국가사회주의자들
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고 여겼다.
  이것은 국가 공권력에  대한 최초의 도전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도전들은 이
듬해에도 계속될 참이었다. 이상스럽게도  코부르크는 국가사회당의 가장 믿음직
한 근거지들  중 하나가 되었으며  그날 참가자들은 기념메달을  받았다. 히틀러 
패거리들이 지나친 반응의 결과 다음  몇 주 동안 새로운 쿠테타 소문이 나돌자 
슈바이어는 히틀러를  불러서 그이 거침없는 행동의  결과들에 대해서 경고하였
다. 폭력 사용에  이르게 될 경우 자신은 경찰에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는 것이었
다. 그러나 히틀러는 '평생 절대로 쿠테타를  일으키지 않을 것 '이라고 장관에게 
명예를 걸고 장담하였다고 한다. (하이덴 165쪽)
  그는 이제 자기  차례라는 확신을 점차 키웠다. 금지령, 소환장,  경고 등은 자
신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그사이 얼마나 많은 것을 떠맡았나 하
는 사실만을 확인해주었다.  자기 도취 상태에서 그는 스스로 위대한  시대적 역
할을 떠맡았다. 그것은 무솔리니 패거리가 방금  성공적으로 로마로 향하여 행진
해가고, 터키에서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권력을 장악하였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에게 확신을 주 s역할이었다. 그는 잔뜩  긴장해서 심복이 보내오는 보고에 귀
를 기울였다.  이탈리아의 검은 셔츠  다원들이 온갖 열광과  확고한 결단력으로 
동시에 군대가 선의의 수동성으로 맞아주는 덕분에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폭풍
과 같은 승리의 행진을 계속하면서'빨갱이 '들을 물리치며 나아가고 있다는 소식
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 '역사의 전환점'이 자신에게  전례 없는 격려를 보내주었다고 
말했다. 1923년 대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은 그이 이름을 '히틀러, 게오르크'라고 
잘못 적고, 몇 줄 안 되는 설명만을 붙였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가 이미 오래전
에 초월해버린 현실이었다. 마치 소년 시절처럼 줄지
않는 적극성으로  그는 자신의 부풀어오른  상상력을 계속 추진하였다. 그리고는 
갈고리 십자가 깃발이  '베를린 성과 농부들의 초가지붕 위에서 펄럭이는'모습을 
아주 뚜렷하게 눈앞에  그려보곤 하였다. 혹은 길가에서 어떤 평화로운  커피 타
임에 느닷없이 먼 꿈나라에서 떠오른 듯이, 다음번 전쟁에서는 "폴란드와 우크라
이나의 곡창지대를  장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점점 더  자신이 모범으로 삼았던 사람들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하였다. 코
브르크에서 그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제부터 나는 내 길을 홀로 가련다.'고 그는 
선언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고한 s 사람으로 자처하고 "어느 날인가 어쩌
면 더러운 장화를 신고 있지만 순수한 양심을 가 강력한 주먹을 가진 강철의 사
람이 나타나서   이 관람석 영웅의 연설을  중단시키고 민족에게 행위를 선물할 
것"을  꿈꾸었지만  이제 그는 망설이고 기회를  보아 가면서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을 나폴레옹과  견주기도 
하였다.
  전쟁터의 상관들은 그가 존경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겨 하사관으로 승진
시키는 것도 거부하였다.  그러나 충성심을 만들어내는 비상하고  때로 파괴적인 
재능을 통해서 그는 이제 천부적인 지휘능력을  드러냈다. 그의 추종자들은 오직 
그를 위해서 아무것도  꺼리지 낳게 되었고, 오직 그이 모습이  보여야만 희생과 
수치스러운 일과  특히 처음부터 범죄적인 행위를  할 각오가 되는 것이었다. 그
리하여 국가사회당은 점점 더 정치적 정당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일종의 잗당한 
공동체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가장 가까운 측근들은  그를 '늑대'라고 부르곤 하였다.  남성적인 브루크만 부
인은 그를 이  이름으로 부른 특권을 누렸다. 그는 이  이름을 '아돌프'의 게르만
어 원형태라고 생각하였고, 이  이름은 세상이 정글이라는 그의 생가, 그리고 강
인함과 공격성, 고독의 이미지와  잘 맞는 것이었다. 때때로 그는 볼프라는 이름
을 가명으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뒷날  자기 집안 일을 맡아 하는 누이에게도 이 
이름을 주었다. 폴크스바겐  자동차 도시의 이름도 이런 유래를 가졌다.  "당신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는 '늑대성'이라는 이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로버트 
라이가 공장이 완성되기 직전에 그에게 설명하였다.
 
    자기양식화의 시작
  이 시기부터 그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자기 자신의 출현을 양식화하면서 전설
적인 모습들과 뒤섞기 시작하였다. 이미 일찍부터 그는 자신의 일거일동을 "역사
의 여신"의 눈 아래 둔다는 의식을 가졌다. 이제 그는 자신의 실제 당원번호 555
번을 계속  부인하고 스스로 당원번호  7번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럼으로써 빠른 
번호를 가질 뿐 아니라 이 마법적인 숫자의  후광을 얻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그
는 자신의 개인적인  특성을 지워 나가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가장  가까운 측근
도 원칙적으로 자기  집으로 초대하지 않게 되었고  가능하면 한 사람씩 멀어졌
다. 이 시기에 어린 시절에 그를 알고 있었고  이제 뮌헨에서 다시 만난 어떤 사
람에게 그는 "누구에게도  , 자신의 가장 가까운 당 동지에게도  빈과 뮌헨 시절 
자신의 청년기에  대해서 일체의  정보를 알리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였다. 그의 
'옛날 전우들 중 한 명은 뒷날 어느 정도  감동을 지닌 채 히틀러가 이보다 얼마
전에만 해도 때때로 자기 아내와 춤을 추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는 자세와 몸가짐, 조각상  같은 태도를 배웠다. 처음에는 많은 것이 서투른 
상태로 남아 있었고  경직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습득한 자기  통제와 글
자 그대로의 분별없음, 카이사르식 거만함과 멍청함, 꾸며낸 태도와 자연적인 태
도 사이의 쉴새없는  변덕은 자세히 관찰해보면 완전히  구분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자기 양식화  과정 초기에 그가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낸 이미
지의 일관성을 완전히 유지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여러 가지 요소들은 서로 어
울리지 않고  겉돌았다. 어떤 이탈리아 파시스트는  그를 가리켜 '티롤식 모자를 
쓴 율리우스 카이사르"라고 했다.
  어쨌든 그의 청춘의 꿈은  이제 거의 다 이루어진 셈이었다. 부담스러운 '밥벌
이 직업'을 갖지  않고도 속박 없고 오직 기분 내키는  대로  '자기 시간의 주인
'이 되었고, 그 위에  극적인 무대 효과, 광채와 박수갈채까지 얻었다. 그는 빠른 
자동차를 몰았고, 살롱의  중심인물이었고, 귀족, 실업가들, 명사들, 학자들,  사이
에  섞여  '큰 세상'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다. 불안한 순간에  그는 자신이 
현존하는 삶의 상황속에  시민적인 형태로 적응하는 모습을  생각해보았다. 그러
고 나서 자신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저  이 운동이 계속되고 
나는 <민족 관찰자>의 발행인으로 착실하게 살아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기분일 뿐이었다. 목숨을 걸고, 과도하게 언제나 전체
를 지향하는 그이 본질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균형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
이 에너지는 그를 언제나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아갔다. "그이 내부에서 모든 것
은 과격하고  전체적인 해결을 자향하였다."고  젊은날의 친구가 판단했다. 다른 
사람은 그를 가리켜 광신자이며, "광증의 경향이 있고 응석꾸러기로 전혀 거침이 
없다"고 말했다.
  고통스러운 무명의 시간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히틀러는 알았다.  돌아보면 놀
라운 길이 놓여  있었다. 초기의 히틀러에게 폭력적 요소를 덧붙이지  않는 편견 
없는 관찰자라도 여기서 뚜렷한 단절을 보게  된다. 그가 이제는 3중으로 극복하
였지만,30년 세월을 창백하고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것을 그냥  슬쩍 지나쳐버릴 
수는 없다. 그이 삶은 접합되지  않는 두 개의 부분을 합쳐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비상함 대담성과  냉담으로 비천한 상태에서 벗어났다. 이제 몇  가지 전략
적인 불확실성들을 극복하고 몇 가지 판에 박힌  형태를 얻기만 하면 되었다. 나
머지는 위대하고 가차없는 상황들 덕분이었다. 어쨌든  히틀러는 자신이 처한 상
황들의 절정에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 이해관계, 힘, 이념 등을 한눈으로 파악하
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였다. 그 목적이란 권력의 상승이었다.

    경직된 사람
  그리 전기작가들이 자주 특별한  단절체험을 찾으려 했다는 것도 이유가 없는 
일이 아니었다. 잠복기,  불확실한 결합, 심지어 악마의  힘이라는 오래된 생각들
을   애써서 찾아냈다. 그러나 그가  이전과 다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는 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요소들을 하나의 새로운 개성형식으로 
정리해내는 전체적인 접착제를  찾아냈을 뿐이다. 그리하여 괴짜였던  사람이 이
제 힘을 가지 선동가 되고 '몽상가'가 '천재적인'사람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
가 대중에게 새로운 것을 덧붙이지 않고도 위기 과정을 강력하게 촉진하는 작용
을 하는  대중의  촉매였듯이 대중도  그에게 촉매작용을  하였다.  대중은 그의 
피조물이었고, 그는  그들의 피조물이었다. 그는 뒷날  대중을 향하여 거의 성서 
같은 말투로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현재의 여러분은 나를 통
하여 드러나고, 현재의 나는 오직 여러분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거의 처음부터  이 현상을 지배하는 독특한 경직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의 세계상은 그가 강조하곤  하였듯이 사실상 빈 시절 이
후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  같은 요소들이 그대로 남았고, 대중의 기상신호가 이 
요소들을 강력한 긴장으로  가득 채웠다. 감정들도 그대로였다. 분노와  열광, 히
틀러의 예술적 취향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의 개인적인 기호도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 이후로 완전히 고착되어 있었다.  트리스탄과 푸딩, 신고전주의, 유대인
에 대한 증오 , 그리고 크림 케이크를 한없이  좋아하는 것까지 그 모든 것은 계
속 되었다. 그가 뒷날  빈 시절  자기는 '정신적인 의미에서 우유로 키운 아이'였
다고 말했다면 그는 많은 점에서 언제나 그랬다.
  세기가 바뀌고 나 다음에 일어난 어떤 지적인  혹은 예술적인 사건도, 어떤 책
도 어떤 사상도  그에게 도달하지 못했으며 그에게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리
고 스무 살  시절 우편엽서 화가의 스케치나 꼼꼼한 수채화를  세계대전의 용사, 
혹은 20년 뒤 수상의  그림들과 비교해보면 갑작스러운 경직이라는 똑같은 인상
을 받게 된다.  어떤 개인적인 체험도, 발전과정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는 과
거의 모습 그대로 돌처럼 응고된 상태에 멈추어 있는 것이다.
  오직 방법론과 전략적 차원에서만  그는 적응력이 있었으며 끊임없이 배울 각
오가 되어 있었다.  1923년 여름부터 도이치 국민은 위기와 곤궁으로  포위된 듯
하였다. 상황은 그것을  무시하는 사람에게 풍성한 기회의 전망을  주는 듯했다.. 
정치가 아니라  운명에 도전하고, 상황을  개선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과격하게 전면적으로 뒤집어엎으려는 사람이었다.  히틀러는 사정을 이렇게 요약
하였다. "불가능한 일이  언제나 잘되는 법이라고 여러분께 보장합니다. 가장  있
을 법하지 않은 일이 가장 확실한 일입니다.

     제 3장 권력의 도전
  히틀러는 1923년 1월의 마지막 며칠 간 뮌헨에서 전당대회를 열겠다고 광고하
였다. 이 전당대회에서 그는 자기의 권력을 확실하게 보여주려는 속셈이었다. 바
이에른 지역 5천 명의  돌격대 대원들에게는 지휘자를 앞세우고 시 외곽의 어떤 
광장, 이른바 연병장으로  모여들어서 최초의 화려한 돌격대  연대기의 축성식을 
하라는 소환령이 내려졌다. 동시에 대형행사를 위해서  시내의 홀 12개에서 행사
준비가 이루어졌다. 민속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이해서 악단들, 바이에른 민속
춤 단체, 코미디언 바이스  페르들을 참석시켰다. 이대규모 준비와 이미 몇 주전
부터 떠돌던 국가사회당의 쿠테타가 임박했다는 소문은 정계에서 히틀러의 의미
가 커졌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바이에른 당국이 히틀러의 도전적인 예고에 대해서 보인 반응은 국가사회당에 
대해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당국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당의  빠른 상승은 아직 
본래의 역할이 정해지지 않는 권력판도를 만들어  냈다. 당은 민족주의적이고 좌
파에 대항하는 쓸모있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국가사회
당은 게임  규칙을 전혀 존중하지  않았고, 스스로 질서를  주장하면서 쉴새없이 
질서를 파괴하였다.
  국가에서 허용하는 권력의 한계를 히틀러에게 보여주려는 당국의 의도에 따라 
그는 3개월의  금고형을 받고 1922년 7월에  4주 동안 감옥에  들어가야만 했다. 
부하들과 더불어 '바이에른 연합'의 집회를 방해하고 연합의 대표인 기술자 오토 
발러슈테트(O.Ballerstedt)를 두들겨팬 탓이었다.  구류를 살고 나서 처음으로  다
시 태어났을 때 그는'끝없이 이어지는 환호성  속에서 손으로 쳐들여서 연단으로 
운반되어' 갔다. <민족 관찰자>는 그를 '뮌헨에서 가장 인기 있고 가장 미움받는 
남자'라고 불렀다. ((VB) 1922년  8월 2일자) 그것은 그 자신으로서도 계산할 수 
없는 위기를 품은 상황이었다. 1923년에 전략적으로  선전과 위협을 번갈아 해가
며 규정하기 힘든 구가권력에 대한 관계를 명백하게 하려는 히틀러의 노력이 계
속되었다.    
  약간 수상쩍지만 분명히 민족주의적인  남자를 유용하게 쓸 수 있는지 불확실
한 상황에서 당국은  타협안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노천에서의  연대기 축성식을 
금지하고 히틀러가 예고한 시위도  역시 금지하였다. 경찰청장으로 국가사회주의
에 동정적이었던 에른스트 푀너의 자리를 물려받은 에두아르트 노르츠는 히틀러
가 금지를 풀어달라고  애원하여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되면  민족주위 애국
운동에 무서운 타격이 될뿐더러 조국에 대해서도 재앙이 될 것이라는 말에도 끄
떡하지 않았다. 
  이 냉정하고 머리 희끗한 사람은  몇 마디 짤막한 말로 국가의 권위를 알려주
었다. 국가권위 앞에서는  애국자들도 반드시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밖으로 나와서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돌격대 대원들을  행진시키겠다. 경찰 
따위는 무섭지 않다. 자기  자신이 맨 앞에서 행진하겠다. 경찰이 쏠테면 쏴봐라
고 소리치기 시작했는데도  이 사람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임시로  소집된 각의
는 오히려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그럼으로써 전당대회의 모든  행사를 금지시켜
버렸다. 국가사회당의당수에게 게임 규칙을 알려줄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절망하였다.  한 순간 동안  그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정치적 장래가 
걸린 문제였다.  그가 이해하는 게임  규칙에 따르면 국가권력은  도전을 받아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야 했다. 자신의 요구들이 국가의 노력보다  더욱 일
관된 것이고 더욱 과격한 표현이다.
  드렉슬러 시대 이로 당을  후원해온 방위군이 개입해서야 비로소 해결책이 열
리는 듯이  보였다. 에른스트룀과 리터  폰 에프는 바이에른  군사령관인 로소브 
장군이 히틀러와 협상을  하도록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신경질적이고  불안한 상
태에서 빠신 국가사회당  당수는 어떤 일에 대해서든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
다. 그는 1월 28일 정당대회 직후에 '다시 각하께 출두'할 것을 약속하였다. 히틀
러의 극단적인 행동방식을 이상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어쨌든 로소브는 정부측에
"국가방위의 관점에서 민족주의 단체들 간에 충돌이 있다면  유감스러울 것"이라
고 알렸다. 곧 이어서  금지령이 풀렸다. 그러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노르츠는 
국가사회당 당수를 다시 만나서  집회의 숫자를 여섯으로 제한하고 연대기 축성
식은 연병장에서 하지 말고 바로 이웃한 왕관 서커스 장에서 하라고  청했다.
  자기가 승리했음을 알아챈  히틀러는 불확실하게 동의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
는 "독일이여 깨어나라!'는  기치 아래 12번의 집회를 모두  열었다. 그리고 짙은 
눈발 사이로 5천 명의 돌격대 대원들은 그가 기획한 대로 연병장에게 성대한 축
성식을 가졌다. "국가사회주의 도이치 노동자당은 독일 미래의 운동입니다.  그렇
다면 어떤 악마라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운동은 파
괴되어도 마땅합니다."라고 그는  추종자들에게 외쳤다. 돌격대는 환호하면서  수
많은 자체  군악대를 거느리고 비상사태를 알리는  벽보와 플랭카드을 지나쳐서 
거리를 행진하고, 유대 공화국에 반대하는 노래들을 불렀다. 백조골 거리에서 히
틀러는 제복을 입은 연대의 분열식 사열하였다.
  그것은 국가권력에 대한  인상적인 승리였다. 동시에 다음 몇 달간의   갈등의 
종결점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경과를 보고 히틀
러가 상대방보다  더 효과적으로 연설하는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더 능숙하고 배짱도  더 두둑한 증거라고 여겼다. 등장할 때의  광포한 열정으로 
해서 그가 언제나 오래전부터   당의 심리적 이미지를 결정해 온 분노한 단순한 
사람들 이외에 미래에 대해 섬세한 후각을  가진 사람들도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 2월부터 11우러 사이에 국가사회당의 신규 가입은 대략 3만 5천 건에 이
르렀고, 돌격대는 거의 1만 5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당의 재산도 황금 17만 3천 
마르크에 이르게 되었다. 선동과 행사를 위한  그물망도 바이에른 전역에 빽빽하
게 만들어졌다. <민족 관찰자>는 2월 8일자 이후로 일간지가 되었다. 성격이 까
다롭고 명으로 골골하면서 디트리히  에카르트가 몇 달 더 발행인으로 일하였지
만, 그러나  이 신문의 책임자는  3월초에 이미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에게 넘어가 
상태였다.

    루르 투쟁에서 이탈하다
  히틀러가 군사상의 문제나 민간의 문제에서 드러내  보였던, 상당히 성과가 있
는 양순한 태도는 이 나라를 뿌리까지 흔들어 놓은 위기 탓이라고 돌일 수 있을 
것이다. 이웃  나라 독일에 대한 공포심을  극복하지 못한 프랑스는  1923년 1월 
초반에 문자 그대로의 베르사유 조약에 근거하여  루르 지방을 점유하였다. 그로
써 위기를  억제하고 있던 인자들에서 마지막으로  안전장치를 풀어내는 신호를 
울린 셈이 되었다.
  전후의 불안들, 엄청난 손해배상 액수, 일반적인 자금도피와 온갖 종류의 생필
품 부족은 전재의 상처에  경제를 되살리는  일을 대단히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
가 독일 안정에 대한 어차피  빈약한 외국의 신용은 좌익과 우익 과격파의 지속
적인 활동을 통해서 끊임없이 방해를 받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1922년 6월 
도이치 외무장관 발터 라테나우가 암살되었을 때 마르크화는 처음으로 엄청나게 
곤두박질 쳤다. 프랑스  측이 공격한다는 인상을 가지게 된 이  시점에서 인플레
이션은 파국적인 속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 속도는 인플레이션을 더욱 기묘하게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 마음에서 현존 
질서를 긍정할 동기를 파괴하였을 뿐 아니라  한참 동안이나 감정을 파괴하였다.  
사람들은 '불가능성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일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 그 개념, 규범, 도덕을 붕괴시키는 일이었다. 그 파급효과는 짐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순간 여론의  관심은 국가적인 자기  주장에 매우 강렬하게 집중되었다. 마
지막에는 무게로 달아서 지불될  지경에 이르는 지폐는 사건의 환상적인 배경일 
뿐이었다. 1누어 11일에 정부는  소극적 저항을 호소하였다. 곡 이어서 공무원들
에게 프랑스  점령당국의 명령에 따르지  말라는 지시도 내려왔다.  루르 지방에 
진입한 프랑스 군대는 거리에  모여들어 차갑고 분노한 태도를 '라인 강 수비'라
는 옛 노래를 부르는 거대한 인파의 환영을 받았다.
  이런 도전적인 태도에  대해서 프랑스군은 굴종목록을 공표해서  답변했다. 가
혹한 점령군의 법  진행은 멋대로 중벌을 내렸고, 수많은 충돌들은  양측의 분노
를 점점  높였다. 3월말에 프랑스군은 에센에  있는 크루프 제철  공장 난간에서 
시위하는 노동자들에게 기관총을 쏘아서 13명의 사망자와 3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거의 50만 명의 사람들이 이들의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한편 해당지
역 프랑스 군법회의는 회사의 사장과 간부 8명에게 15년에서 20년형을 선고하였
다.
  이런 사건들은 1914년 8월 전쟁이 터지던 무렵 이후로는 볼 수 없었던 단결심
을 일깨웠다. 그러나  이러한 단결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수많은 힘이  각기 자기
들의 이익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법적으로 금지된  의용군들 은 이 시간을 이용
하여서 불법성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며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서 중앙정부의 호
소한 소극적  저항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좌익 과격파는 작센과  중부 독일에서 
잃어버린 지위를 회복하였고 하였다. 한편 우익은  바이에른의 아성을 확고히 하
였다. 주 경계선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백인 부대와 에어하르트  의용군 부대들이 
한때 무장대립하기도 하였다.(놀테 (Krise) 92 쪽)   수많은 대도시에서 굶주림의 
폭동이 일어났다. 그  사이에 서부에서 프랑스와 벨기에 사람들은 이  기회를 이
용하여 분리  운동을 호소하였다. 그것은  어차피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서 금세 
실패하고 말았다.  적대적인 상황에서 건설되어  4년간 힘들게  버텨온 바이마르 
공화국은 붕괴에 직면한 듯이 보였다. 
  히틀러는 도전적이고 대담한 태도로 새로 얻은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그는 민
족적인 통합전선에서 이탈하였다. 그리고  갈팡질팡 하는 추종자들에게 프랑스에 
대한 저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는 모두 국가사회당에서 제명시키겠다고 위
협하였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이런 위협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흐리멍덩한  화해
는 우리의 종말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다."면
서 그는 모든 이의를 엄격하게 물리쳤다.(1923년 1월 6일자 노이마이어 카페에서 
행한 히틀러의 연설에 대한보고 )
  그는 이러한  결정의 문제점을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그이  특별 의식과 
전략적 고려가 그런  결정을 하도록  만들었다. 수많은 다른  단체들 광범위하게 
진행되는 민족저항 운동에 끼어서  무명의 존재로 격하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이었다. 그는 루르 투쟁을  통해 국민이 정부를 따르게 되고, 현정권이 강화될까  
두려웠다. 그리고 자신의  방해공작을 통해 야기된 혼란 상태가 정권  전복 의도
에 유리하게  작용하기를 희망하였다. <민족 관찰자>에  그는 이렇게 썼다.  "한 
국민이 국경선 안의 살인자들을 몰아내지  않는 한  밖을 향한 성공은 불가능한 
법이다. 프랑스에 대항하여  구호나 글로 항거가 이루어지는 동안   도이치 민족
의 진짜 원수가 이 성벽안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
  특이할 정도로 일관되게,  모든 적대감에도 맞서고 심지어는  루덴도르프의 권
위에 대항하면서까지 그는 우선 내부의 적을  없애야 한다는 요구를 고집하였다. 
육군 총수인 제크트  장군이 3월초에 어떤 담판에서, 적극적인  저항으로 넘어가
는 경우에 히틀러가  방위군에 합류할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우선  정권을 무너
뜨려야 한다는 답변이 나왔다.. 2주 뒤에 수상 쿠노(Cuno)의 대리인을  향해서도 
그는 우선 내부의 적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랑스가 아니라 조국의 배신
자들, 11월 범죄자들을 타도해야 합니다."(하이덴 113쪽, 히틀러가 제크트와 나눈 
이야기에 대해서는 마이벨커에 나옴)

    국내정치 우선정책
  이런 히틀러의 태도는 완전히  원칙이 없는 단호함을 보여주는 예라고 해석이 
되어왔다. 그러나 그가 인기 없는 모호한 결정을  위해 보인 단호함은 오히려 그
의 원칙들이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런 선택으로 자기 경력의 핵심적인 결단  하나를 내린 것이다. 그의 상승
을 함께하고 촉진시켜준  사람들, 명사들과 보수 진영 사람들은 그를  언제나 자
기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와  친근한 관계를 맺으면서  무엇보다도 이 
국수주의적인 남자를 얻으려 하였다. 그러나 지역의  특성을 넘어선 히틀러의 최
초의 정치적 결단은 카르부터 뒷날 파펜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사람들의 잘못된 
동지애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해의  여지없이 분명하게 그 자신은 선
택을 앞두고 진짜 혁명가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노골적으로 그는 민족적인  태도보다 혁명적인 태도를 우선으로  여겼다. 실제
로 그는 뒷날에도  다르게 반응한 일이 없었다. 1930년에도 그는  폴란드가 침입
할 경우 현정권을 위해서 방어전에 나서기보다는  동 프로이센과 슐레지엔 지방
을 임시로 포기할 것이라고 확언하였다. 그는  '갈등의 순간에 우선 도이치 사람'
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경멸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패거리들보다 냉정하고 효과적으로 그의 전략은 애국적인 장광
설에 이끌리지 않았다. 게을름을 부려서 적을  물리치겠다는 소극적 저항에 대해
서, 그리고 태업을 통해서 프랑스의 무릎을  끓게 만들겠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웃고 공격을 퍼부었다.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독일에 국제주의자는 한  명
도 없고 오직 국가사회주의자들만  있다면 오늘날 프랑스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
가! 6천만의  사람들이 단 하나의 의지만을  가진다면, 광신적으로 민족주의적인 
생각에 몰입해 있다면,  주먹은 무기가 될 것이다."  히틀러의 모든 생각이 여기 
들어 있다. 괴물 같은 의지력을 통해서 높여진 합리적인 사색이 나타난다. 그 뒤
에는 자극적인 비전이 숨어 있다.
  물론 히틀러의 방어의지가 모든 다른 세력이나  정당보다 못했던 것은 아니다. 
저항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저항이 소극적이며 절반의 저항일 뿐이라는 사실
이 위에 언급한  이유 말고도 그의 거부감을 만들어냈다. 일관되고  성공적인 외
교정책은 오직 하나로 뭉친, 혁명적으로 통합된  민족의 뒷받침을 받아야만 가능
하다는 생각이 그 뒤에 숨어 있다. 독일의  정치적 전통과는 반대로 그것은 일종
의 과격한 국내정치  우선 정책이었다. 그것은 그가 이미 1915년에  전선에서 보
낸 편지에서 말했던 것이고 마지막 권력의 순간까지 전략적인 원칙이 되었던 생
각이다. 소극적 저항이 중단되고, 히틀러가 멜로드라마 같은 생각으로 독일의 새
로운 붕괴와 루르 지방의 분리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정열적인 
연설에서 정부를 향하여  진정한 저항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1945년 3
월 '불타는 지구' 명령을 미리 보여주는 비전을 여기서 전개하고 있다.
  현재의 난국 속에서  산업지역이 붕괴된다면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용광로들
은  터지고, 탄갱은 막히고  집들은 잿더미가 될지도 모릅니다. 한 민족이 그 뒤
에서 일어나기만 한다면,  강하고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확고한 민족 말입니다! 
도이치 민족이  일어서기만 한다면 나머지  모든 것도 다시  일어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서 있다 해도 민족이 내면의 게으름으로  몰락해간다면, 벽난로며 
산업체이며 집의 담벼락들은  이 민족의 묘비석에 불과할 것입니다!   루르 지역
은 도이치의 모스크바가 되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1923년의 도이치 민족이 
더는 1918년 그  민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어야 합니다.  명예를 빼앗
기고 수치를 얻은  민족은 이제 다시 영웅의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런 민족이라
면 불타는 루르  지방을 보고 생사를 걸고 저항을 조직하였겠지요.  그렇게 행동
했더라면 프랑스는 오직 망설이는 걸음을 옮겼을 것입니다. 난로에 이어 난로를, 
다리에 이어 다리를 파괴하였겠지요!  독일이여 깨어나라! 프랑스 군대는 그러한 
세계 붕괴의 두려움  속으로 감히 들어서지 못했겠지요! 맹세코 우리는  다른 모
습으로 여기 서 있을 것입니다!



    당의 재정적 원천
  히틀러가 루르 투쟁 참여를  반대하기로 한 사실을 당시 겨우 몇 사람밖
에 몰랐다는 사실은, 국가사회당이 프랑스 자금으로 조직을  확장하고 선전
활동을 하고 제복과  장비를 갖추었다는 소문이 퍼지는 원인이 되었다.  이
러한 소문은 한 번도  믿을 만한 입증자료를 제시한 적이 없다.  그리고 도
대체 어떠한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해단체가 확장 일로에 있던  이 정당에 
영향을 미치려 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도 오늘날 이르기까지 오직 짐작
으로만 설명되고 있다. 
  어쨌든 국가사회당이 사용한 경비는  특히 히틀러가 당수직을 맡은 뒤로 
당원의 수와 맞지 않는다. 재력이 있는 기부자를 찾으려  한 일은 좌익측의 
악마 콤플렉스만으로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다. 좌익은 자기들이 '역사에 역
행하는 국가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  잊을 수 없는 패배를 맛본 것에  개해
서 국가사회당이 독점자본가와  배후에서 결탁했기 때문이라고만 해석하였
다. 국가사회주의자 본인들도  재정문제를 알리지 않고 히스테리컬하게  감
추려 애썼기에 가장 대담한 추측에도 여지를 남겨준 셈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계속 새로 고발되었다가 조정 받기에 이른 수많
은 명예훼손  재판의 서류들은 1933년  이후에 없애거나 소각하였다.  아주 
처음부터 기부금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는다는 원칙이 
통용되었다. 당사무소 일지는  아주 드물게만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을  남기
고 있다.  대개는 이런 말이 덧붙여져  있다. '드렉슬러가 개인적으로  처리
함'. 때때로  히틀러는 뮌헨 지하술집의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보고한 거래의 세부사항을 기록하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마저 (Hitler) 
405쪽 수많은 다른 세부사항들도 여기서 인용)
  당의 재정적 근거는 의심할 바 없이 회원의 당비, 자발적인 헌금, 히틀러 
연설이나 그밖에 당의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서 걷은 입장료 등이었
다. 이것은 자주 수천 마르크에 이르곤 하였다. 초기에 추종자들 중 일부는 
예를 들면 11월 9일 장군 홀 앞에서 죽은 오스카 쾨르너 같은 사람은 조그
마한 장난감 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강을 위하다가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
렀다. 가게 소유자들은 할인권으로 도움을 주었고, 다른 사람들은 장신구나 
예술품을 기부하기도 하였으며  혼자 사는 여성들은 밤 집회에서 히틀러의 
모습에 도취해서 꿈도 못 꾸던  감동이 격앙 상태에 이른 다음에 국가사회
당에 유산을 기증하겠다고  유언장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베히슈타인, 부르
크만, 에른스트 '푸치' 한프슈텡글 같은 재산이 있는  히틀러의 친구들은 상
당한 기부금을 내서  당을 도와주었다. 당은 또한 당원들에게 당비  말고도 
채권을 발행해서 비용을 장만하였다. 대개 당원이나 추종자들이  이 채권을 
샀는데, 경찰 통계에  따르면 1921년 전반부에만 10 마르크 짜리  채권이 4
만 장 이상 발행되었다.(프란츠 빌링, 뤼데케는 50세 여인이 히틀러 연설을 
듣고 난 다음에 당 사무소를 찾아와서 당에 유산을 기증하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당은 초기 몇  년간 지속적인 자금부족으로 고생을 하였다. 그리고  1921
년 중기에도 입출금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초기 당원이었던 사람의  보고
에 따르면 때로는 벽보 붙이는 데 필요한 접착제 비용조차 없을 때도 있었
다. 1921년 가을  히틀러는 왕관 서커스 장에서 열기로 계획되었던  대규모 
행사를 재정적인 이유로 포기한 적도 있었다.
  물질적인 형편은 열렬한 활동 덕분에 당이 점점 더 사람들 눈에 뜨기 시
작한 1922년 여름부터 좋아졌다. 그때부터 당은 헌금자들과  밀접한 접촉을 
갖게 되었다. 이들 헌금자들은  원래 당원은 아니지만, 재산은 가지고 있고 
공산주의 혁명의  위협을 두려워하는  시민사회의 대표자들이었다.  그들은 
우익의 군사적인 전투조직부터 종파적인  주간지 혹은 저항적인 생각을 가
진 수많은 잡문작가들 패거리까지 모든 우익 방어조직을  지원해주었다. 그
들은 히틀러를  출세시키려 했다기보다는 공산주위  혁명에 반대하는 가장 
정력적인 힘을 이용하였다.
  히틀러가 바이에른 사회의 영향력 있고 재력이 막강한 그룹과 관계를 가
지게 된  것은 디트리히 에카르트  덕분이었다. 에카르트 다음으로는  특히 
막스 에르빈 폰 쇼이브너 리히터 루덴도르프의 덕을  입었다. 루덴도르프는  
스스로 실업가와  대지주의 대표자들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지ㅝ을 받아서 
임으로 여러 민족주의  전투조직에 나누어주었다. 에른스트 룀이  돈, 무기, 
장비 등을 동원할 때 디트리히 에카르트의 친구인 에밀  간서 박사는 '국민
클럽'에서 결성된 바깥 지역의  경제계 인사들과 접촉을 만들어 냈다. 히틀
러는 1922년에 처음으로 그 런 사람들 앞에서 의견을  밝혀 보였다. 기부자
들 중에는 기관차 제조업자 보르지히 제철소 연합의 프리츠  티센, 추밀 고
문관 키르도르프, 다이믈러 공장, 바이에른  산업연합, 그밖에 체코슬로바키
아, 스칸디나비아, 스위스 경제계도 성공적으로 등장한 당에 재정적 후원을 
해주었다.
  1923년 가을에 히틀러는 취리히로  여행을 하여T다. 그리고 소문에 다르
면 '스위스 프랑과 달러 지폐가 가득 든 대형 트렁크'를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속을 알 수가 없고 아이디어가 풍부한 쿠어트  뤼데케도 지금까지 확
인되지 않은 외국의 어떤 단체에서 상당한 금액을 지원  받아왔고, 그 돈으
로 마침내 단원이 50명이 넘은 '자신의' 돌격대에  재정지원을 했다. 헝가리
에서도 기부금이 왔고, 러시아,  발트 지역 도이치 이민자 그룹에서도 기부
금이 들어왔다. 당  임원들 몇 명은 인플레이션 기간에 외국돈으로  봉급을 
받았다. 예를 들면 돌격개 지휘부 상사이며 뒷날 히틀러의  기사가 된 율리
우스 슈레크(J. Schreck)나  돌격대의 임시 사령관 호프만  대위가 그런 사
람들이었다. 쇼이브너 리히터의 제안을 받고 예전의 장교였던  사람이 베를
린 타우엔트치엔 거리에 만든 유곽도 민족의 일에 봉사하기 위해서 수익금
을 뮌헨 중앙당으로 보내왔다.
  당에 주어진 이러한  재정적 후원은 그 원천이  다양한 만큼이나 후원의 
동기도 다양하였다.  1922년 이후 히틀러의  대규모 사업들은 이러한  후원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은 옳다. 그러나 광포하게  상승하던 선동가 히
틀러가 오랜 고독의 세월을 보낸 다음 처음으로, 그리고  취한 듯이 항거할 
수 없는 자신의 힘을 체험한 지금 물질적인 도움을 얻기 위해서 어떤 구속
력이 있는 의무를  지지 않았다는 주장 역시 옳다. 국가사회주의의  반자본
주의  감정은 그들을 질투하던  좌익측에 의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받아들
여진 적이 없었다. 이러한 감정은 막연히 합리적 근거가  없는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것은 고리대금업자, 밀매상, 백화점  등에 대한 
항거에서 온 것이기에 집사와 가게 소유자의 관점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 아무런 빛나는 체계도 제시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 분노에  신뢰를 얻어주었다. 이러한 감정은 유산계급의   도덕성
을 문제삼았을 뿐, 그 물질적  기반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초기의 당 연설
가들 중 한 사람이 절망하고 불안한 대중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외쳤을 때  
그는 이  운동의 선전효과가 큰 비합리성을  잘 표현해낸 것이다. "여러분, 
잠깐만 참으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여러분을 부르면 저축은행을  보호하십
시오.  우리 프롤레타리아들은  그곳에 얼마 안 되는 돈을 맡겨놓으니까요. 
그러나 큰 은행으로 몰려가서 거기  있는 돈을 모두 꺼내다가 거리에 뿌리
고 무더기로  태우십시오! 그리고 거리전차를  교수대 삼아 유대인의 목을 
매답시다!"
  히틀러도 인플레이션과  비참한 대중을 배경으로  그와 비슷한 요구들과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자본주의의 기만성을  되풀이 공격함으로써 엄청난 
추종세력을 얻었다. 자본가들로부터 상당한 기부금을 얻었으면서도 그랬다. 
당의 사무장 막스 아만은 1923년 11월 쿠테타 시도가 끝난 직후 뮌헨 경찰
의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히틀러는 헌금자들에게  "영수증 조로 당 강령만
을 주었을"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모든  의심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인 고
백 이상을 그에게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밖에 부
정부패는 히틀러의 이미지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러한  이미지는 그
의 확고함, 그 사이 커진 자신감과 그의 망상의 힘을 과소 평가한 것이다.

    전투동맹
  1월말에 공권력에 맞선 힘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일은 국가사회주의를 
바이에른 극우파 그룹들의 선두에 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파도처럼 연속된 
집회,  시위, 행진 등에서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전보다 더 소란을 피웠고 미
래를 확신하였다. 쿠테타 소문, 정부전복 계획 등이  자꾸 나타났다. 국가사
회당의 지도자가 정열적인 구호로 선전한 여러 가지 분위기들은 상황이 전
체적으로 바뀔 시기가  임박했다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히틀러가  표현하였
듯이 '경박한 쿠테타가 아니라  전례 없는 전체적 청산작업'이 눈앞에 왔다
는 분위기였다. 
  그와 동시에 지난 몇 주 경험을 이용하여 지도자  선전이 강화되었다. 이 
경험자들은 잘못을 범하지 않는  지도자라는 후광이 충분히 퍼지기만 한다
면 예기치 못한 도전적인 결정들도 추종자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그 에게 
가르쳐주었다. 이 선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히틀러는 '운동 
전체의 이념을 분명하게 눈앞에' 가지고 있다. 그는  '새로운 민족주의 독일
을 위해   부름받은 지도자'다 . '우리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널리 퍼져서 종교적 형식이 된 지도자 숭배는 히틀러의 
생일이 들어 dT는 4월  하반기에 절정에 도달하였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는 <민족관찰자>에다 히틀러라는 이름의 '신화적 울림'을 찬양하는 찬사를 
썼다. 왕관 서커스에서는  당 지도부, 국민연합 대표자들, 9천  명의 추종자
들이 모여서 이 투쟁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서 히틀러 헌금이 모금되
었다. 사뢰자 헤르만 에서는 히틀러를 보고 그 잎에서  길을 비키기 시작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맞아들였다.(VB,1923년 4월 18일부터 23일까지.1923
년 1월 31일과 3월 22일자)
  그토록 분명하게 다가오는 결단의 순간에 대비하기 위해서 2월초에 벌써 
룀의 재촉에 따라 국가사회당은  몇 개의 국수주의 민족적인 군사조직체와 
동맹을 맺었다. 하이스 대위가   이끄는 '제국기'와 그밖에도 '고지연합' '뮌
헨 조국연합'  '저지 바이에른  전투연합'등이었다. '조국전투연합들의  노동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공동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모임의 군사적  지휘권
은 헤르만 크리벨 대위에게 맡겨졌다.
  그럼으로써 이미 존재하고  있던 국수주의 단체들을 상부조직인  '바이에
른 통일 조국연합'에 맞서는 대응단체가 결성된 것이다. 조국연합은 예전의 
주지사였던 폰 카르와 김나지움 교사였던 바우어의 지휘 아래 극히 다양한 
단체들, 즉 하양,  파랑운동, 모든 도이치 운동, 왕당파,  그밖에도 제각각의 
종족적인 단체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편  크리벨의 검
정, 하양, 빨강 전투동맹은 군국주의적이고 과격하고 '파시즘적인' 성향이었
으며, 무솔리니 혹은  터키의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의 예를 복  국가전복에 
대한 생각을 얻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지금까지 무제한이었던  자신의 명령
권을 일부 빼앗아간 당의 이런 확장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 것인가 하는 것
을 5월 1일에 경험하게 되었다. 그는 정치적 도박에서  의 행운에 익숙해져
서 국가 공권력에 한번 더 대립을 시도하였다.
  '전투동맹'에 강령을  마련해주겠다는 시도가 벌써  파트너들의 병사적인 
이성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봄이 지나는 동안 그는   크리벨, 룀, 방위군 
등이 자기가 개인적으로 혁명군대로  쓰기 위해서 만들었던 돌격대를 빼앗
아 가는 꼴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10만 병사를 비밀리에  양성하겠다
는 목적으로 그들을 돌격대 연대들을 훈련시키고 밤 훈련과 분열식을 계획
하곤 하였다.
  그 자리에 히틀러는 언제나 보통 시민의 차림으로 등장하곤 하였으며 때
로는 인사말을 하기도  하였으나 지휘권을 주장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는 화가 잔뜩 나서 돌격대 부대가 자기 목적에서  멀어지고, 전위적인 세
계관에 의해서 방위군의 보충 부대로 전락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독자적인 
명령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는 몇 달 뒤에 자신의 옛 전우인 요제프 베르
히톨트 소위에게 일종의  사령부 수비대를 만들라고 위임하였다.  수비대는 
'히틀러 돌격부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것은 뒷날 친위대의  토대가 되었
다.

    5월 1일의 실패
  4월 말 히틀러와 전투동맹이 모여서 회의를 한 끝에 좌파 정당들의 연례
적인 5월 1일  집회를 도전으로 간주하고 온갖  수단을 다하여 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 동시에 그들은 소비에트 정권이 종말을  고한 4주년을 기념하
기 위하여 자기들의 대규모 집회를 계획하였다.
  우유부단한 폰  크닐링 (바이에른 주정부)  정부는 지난 2월의  패배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전투동맹의 최후통첩을 절반만 승인하였다 좌익
측에는 테러지아 풀밭의  집회를 허가하였으나 시가행진은 거부하였다.  그
러자 히틀러는  잔뜩 흥분한 모습을 드러냈다.  1월에 그랬던 것처럼  그는 
민간의 판결에  대해서 군사적  힘을 개입시키려고  시동하였다. 4월  30일  
극단적으로 긴박한  상황에서 크리벨, 바우어, 신임  돌격대장 헤르만 괴링 
등이 정부청사에 출두하여 죄익측에 대하여 비상사태 선포를 요구하였다.
  그 동안 히틀러는  룀과함께 다시 폰 로소브  장군을 찾아가서 방위군이 
개입해줄 것, 합의에  따라 병참기지에 있는 조곡연합의 무기들을 내줄  것
을 요청하였다. 히틀러로서는  끝도 없이 놀라운 일이었지만 장군은 두  가
지 요청을 다 거절하였다.  그는 자신이 조국의 안전을 위해 어떤  일을 해
야 하는지 안다고 했다. 그리고 소동을 일으키는 자는  누구는 쏘겠다고 말
하였다. 바이에른 주경찰국장 자이서(Seisser)도 그 비슷한 말을 하였다.
  히틀러는 다시 전망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을 시끄럽게 예고된 
5월제 방해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특징
적인 행동으로 패배를 부인하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준비를 강화하였다. 로
소브 앞에서 '빨갱이 시위'는 시위대가 오직 자신의 '시체를 넘어서 행진'할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면서 허풍스러운 운명론과  흥
행주의 싸구려  정열도 함께 내보였다.  이때나 뒷날이나 지나치게  긴장된 
진지함을 통하여 모든 퇴로를 차단하고 자신의 존재를 전부나 무냐하는 양
자택일에 내놓은 극단적인 과격함이었다.
  어쨌든 히틀러는 준비를  재촉하였다. 무기, 대포, 자동차  등이 준비되었
고 마지막에 방위군을  기습적으로 속이기까지 하였다. 로소브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룀과 몇 명의 돌격대 대원들을 병참부로 보내서 5월 1일 좌
익 세력이 폭력행위를 할까 봐 주 정부가 염려하고 있다는 핑계를 대고 특
히 기총과 기관층을 구했다. 쿠테타 비슷한 그런 행동을  보고 동맹 파트너 
몇 명이 주저하면서 토론을 하기도 하였으나 그러는사이 사건 자체가 사건 
주동자들보다 앞서 나가고 있었다.
  경계명령을 들은 히틀러의 부하들이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프라이
징 등에서  뮌헨으로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상당수는 무장상태였다. 툇츠 
온천에서 온 패거리는  화물차량에 낡은 야포를 매달고 왔다. 그레고어  슈
트라서와 하인리히 히믈러가 이끄는  란츠후트 부대는 몇 대의 경기기관총
을 가지고 오T다 모든  사람은 히틀러가 수백 번도 더 약속하였다고  여러 
해 동안이나 기다려온 혁명봉기를,  '11월 수치의 제거'를 기대하고 있었다. 
경찰총장인 노르츠가 크리벨에게  경고하였지만 겨우 이런 대답을  들었다. 
"이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너무 멀리 와버렸어요. 유혈사태가 벌어지든 말
든 마찬가집니다."(에두아르트 노르츠가  대화를 계속하면서 , 드레세  검사
에게 보낸 1923년 5월 23일자 편지, 국가사회당의 예전의 중앙문서고)
  동이 트기도 전에 벌써  위풀밭, 막시밀리안 광장과  그밖의 몇  군데 도
시 중심지에  '조국연합'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른바 위협적인  사회주의 
쿠테타를 막기 위해서였다. 히틀러는 약간 늦게 위풀밭에 등장하였다. 그는 
군대의 야영지 비슷한 가장자리로 들어서서 매운 극적인 태도로 철모를 머
리에 쓰고 1급 철십자 훈자을  달았다. 그이 수행원 중에는 괴링, 슈트라이
허, 루돌프 헤스, 그레고어 슈트라서, 그리고 뮌헨  돌격대를 지휘하는 의용
군 대장 게르하르트 로스바흐 등이 섞여 있었다. 돌격대가  아직도 오지 않
는 진군명령을 기다리면서 훈련을 시작하였다. 룀이 약속한  신호를 보내오
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 지휘자들은  어찌할 바 모르고 의견도 일치하지 않
은 채 점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사이 테레지아 풀밭에서는  노동조합들과 좌익 정당들이 전통적인 혁
명적 구호들도 간간이 외치긴 하였지만 평화롭게 공동의식으로 뭉쳐서 5월
제를 지냈다. 경찰이  위풀밭에서 도시로 통하는 방향을 상당히 넓게  차단
하였기 때문에 예상되었던 죄우익간의 충돌도 일어나지 않았다.
  룀은 이 순간에 자신이 상관인  전해듣고 화가 잔뜩 나서 훔쳐간 무기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정오가 조금 지나서 룀 대위는  무장병사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위풀밭에 나타나서 장군의 명령을 전했다.  슈트라서와 크리
벨이 좌익과 충돌을  일으키면 방위군이 마지막에는 자기들  편을 들게 될 
것이라는 이유로 진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여기서  포기하였다. 즉석에서 무기를 돌려주는  치욕은 
피하여"T지만 족구연합은 어쨌든  무기를 자진 반납하였다. 분명한 참패였
다.. 그날 저녁 왕관 서커스  무대를 가득 채운 추종자들 앞에서 행한 연설
의 강렬한 빛도 그러한 패배를 지우지는 못하였다.

    첫 번째 위기
  수많은 징후들은  히틀러가 상승하던 시절에  여기서 처음으로 개인적인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5월 1일의  실패를 동맹 파트
너들, 특히 까다롭고 고집  센 민족주위 연합에 의존한 탓으로 돌릴  수 있
었고 그것은 어느  정도 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파트너들의 태도  뒤에는 
분명히 자신의 약점과  실책도 들어 있다고 혼자 생각했던 것이다.  무엇보
다도 그는 잘못된  생각을 좇았다. 급한 성질이 멋대로 튀어나와서  완전히 
잘못된 명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힘이 되어 주었
던 공화국 방위군을 자신의  배후세력으로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에게 
맞선 위협적인 적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일년 간 폭풍같은 상승을  경험한 
다음 겪어보는 최초의  퇴각이었다. 여러 주 동안 히틀러는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면서 디트리히 에카르트를 찾아가서 베르히테스가덴에  은둔했다. 가
끔 가다가  연설하러 나타나거나 아니면  기분전환을 하러 뮌헨으로  갔다. 
그의 전략적인 행동방식은 그때까지 주로 의존본능에 이끌리고  있었다. 이
제 그는 이 5월제의  인상아래서 논리적인 전략 시스템의 특성들을 발전시
켜 나갔다. 그것은  국가 공원력과 대립하지 않고 공권력을 자기편으로  만
들어서 성공하는  것 '주지사의허가를  받은 혁명'이라고  적절하게 표현된 
'파시스트' 혁명개념에 대한  최초의 윤곽 들었다. 그는 자기 생각들  중 일
부를 기록하였고 그것은 나중에 <나의 투쟁>안에 삽입된다.
  그러나 여론의 비판적인 반응은 더욱 의심쩍은 것이었다.  수많은 채찍질
하는 연설에서 히틀러는 지도자의  행동, 의지, 이념 등을 화려하게 묘사했
다. 5월 1일 행사가 있기 일주일 전만 해도  영웅이 필요한데 수다쟁이자만 
쳐다보는 민족을 언변 좋게 탄식하였다. 그러면서 몽상적인  행동의 믿음을 
찬양하였다. 위풀밭에서 보여준 망설임과 어쩔 줄 모르는  태도의 코미디는 
그런 자화자찬과는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히틀러와 그  패거리들이 허풍 
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고 당시 어떤 보고에  나타나고 있다. 헤르만 에서
가 6월초에 <민족관찰자>에 억지 비명을 지르면서 밝힌 '위대한 아돌프'에 
,뮌헨 포스트>지가 아이러니컬하게 이런 수식어를 붙였다.  대한 암살 음모
설도 그의 인기를 회복시키지 못했다. 이미 4월에  비슷한 폭로가 출간괴기
도 하였지만 그것은 국가사회주의자들 쪽의 창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히틀러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지  못하게 되었다."고 <뉴욕 신문>
의 어떤  특파원은 적어보냈다. 사태를 잘  아는 당시의 관찰자가  5월초에 
지적하였듯이 그의  볕은 '대단히 빛바래' 보였다.(뷔르템베르크  공사 모저
의 상세한 보고서, 도이얼라인 61쪽에서 인용)
  베르히테가덴의 풀죽은 고독 속에서 매우 감정적인 그의 눈에 아마 이별
의 빛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처럼 매우 보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대단히 위축되었다.  완전히 기가 죽어서  로소브와 깨진 유대를  회복하는 
일을 완전히 포기하였다. 고트프리트  페더, 오스카 쾨르너와 그밖에 몇 명
의 추종자들이 그를  정상으로 회복시키고, 특히 '푸치'  한프슈텡글을 제외
시키고 시도해보았지만 그는  거의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한프슈텡글은 
그에게 '아름다운  여인들'을 소개해주었고 그녀들은 도전적으로  '비단바지
를 입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술판'을 벌였다. 옛날의 무기력과 무관심 
상태에 다시 떨어진 것 같았다.
  처음에는 분명히 뮌헨 지방법원 감찰측이 5월 1일 사건에 대해서 이끌어
낼 처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유죄판결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
는 상황이었으나 그와는 별개로  발러슈테트는 사건으로 두 달간의 금고형
을 살아야 할 처지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바이에른 내무장관 슈바이어는 
히틀러가 약속을 어겼다는 이유로 옛날의  의도를 실행에 옮겨서 그를  추
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히틀러는 바이에른의 힘있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국수주의적인 성향
을 이용하여  교묘한 역습으로 선수를  쳤다. 담당검사에게 보낸  진정서에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조국에  바치는 경의에 알맞은 공개적인  변호의 
기회를 주지도 않으면서 몇 주전부터 언론과 지방의회가 아주 끔찍하게 나
를 욕하고 있기 때문에,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그럼으로써 이러한 경
의에서 일체 자유로워지는 일이 내게 허락된다면 나는 운명에 감사할 따름
입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이 진정서를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러한 암시는  물론 제대로 이해되었다.  담당 검사의 걱정스런  소견서와 
함께 이 편지를 받게 된  국수주의적인 법무장관 귀르트너는 이 편지를 보
고 아직도 유효한 옛날의 합의들을 기억해냈다. 그  자신이 국가사회주의자
들을 가리켜 "우리  살 주의 살'이라고 불렀던 것이다.(하이덴  130쪽 참조) 
인플레이션, 대규모 파업,  루르 투쟁, 배고픈 폭동자들 여러 가지  소요 등
은 좌익에 의해서 폭발점으로 이끌려가는 상황이었고, 매일  심해지는 이러
한 곤경은 국수주의적 지도자를 보호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비록 그 자
신이 이러한 국가적 곤경의  일부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사건조사의 경
과를 궁금하게 여기는 내무장관에게   알리지도 않고서 귀르트너는 검찰청
에, 이 사건을 '좀더  조용한 시기'로 미루는 것이 좋겠다는 소망을 알렸다. 
1923년 8월 1일 조사는 일시 중단되었다가 이듬해 5월 22일에 계속되었다.

    극적인 반전
  9월초의 사건을 보면 히틀러가  그 동안 얼마나 엄청난 체면손상을 입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조국연합이 세당 승리 기념일에 뉘른베르크에서 '도
이치 알' 행사를 위해 모였다. 이것은 해만다 바이에른의 여러 지역에서 번
갈아 가면서 화려하게  벌이는 행사였다. 깃발, 꽃들,  퇴역장정들이 화려하
게 둘러선 가운데 수십만 인파를  앞에 두고 연설과 행진을 벌이면서 모독 
받은 국민감정과  더 아름답고 나은 미래 전망의 필요성을 찬양하였다.
  이날 1922년 9월 2일 행사에  대해서 뉘름베르크 퓌르트 소속의 어떤 장
관은 직무를  잊고 열광하여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천둥과도  같은 
만세소리가 내빈과 행렬을  둘러쌌다. 손수건을 든 수 없는 팔들이  행렬을  
향해 뻗어 나왔다. 꽃과 화원의 불경이 사방에서 행렬을 향해 쏟아졌다. 수
십만의 낙담하고 짓밟히고 절망한 사람들에게 노예상태와 곤궁에서 해방되
리라는 희망의 빛줄기가 뻗쳐 나와서 즐거워 외치는 것  같았다. 남자고 여
자고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 서서 눈물을 흘렸다.(도이얼라인 
170쪽에서 인용)
  같은 보고서에 따르면 수십만  행진 참가자들 중에 국가사회주위 자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그러나 하늘로 솟아오르는 환호성  한가운데에 루젠도
르프가 이었다. 그 사이 자신이 잃어버린 영역을 잊지  않고 있던 히틀러는 
이런 대규모 행사의 영향 아래서 다시 대열에 끼려고  하였다. 그는 하위스 
대위의 '제국기' 연합과 프리드리히  베버가 이끄는 '고자 동맹'과 연합하여 
'도이치 전투동맹'을 만들었지만 지도자 자리를 요구할 권리가 없었다.
  5월 1일 패배뿐 아니라 뮌헨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그에게 빠른 몰락
을 예비했다. 그가 등장하여 센세이션을 만들어내지 않게 된  순간 벌써 이
름 권위 선동가의 영광  등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끈질긴 룀이 
3주 동안이나 쉬지 않고 졸라서야 전투 동맹 지도자들 사이에서 친구인 히
틀러는 명성을 겨우 어느  정도 되찾았다.   이제서야 히틀러는  동맹의 정
치적 지휘권을 장악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모든 힘을 소진하며 계속되는 루르 투쟁을 중단하기
로 한 중앙정부의 결정이 그가  지휘권을 장악하게 된 외적인 요인을 만들
어주었다. 정부를 떠맡은 지 6주 만인 9월 24일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소
극적 저항을 중단하고 프랑스에 대한 전쟁비용 보상금 지불을 다시 시작하
였다. 히틀러는 지난 몇 달 동안 소극적인 저항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혁명적인 목적의식은 이렇게 인기 없는 정부의 새로운 조치를 수치스
런 반역의 증거라고 낙인찍고  그럼으로써 정부전복을 위한 명분을 얻어내
려고 하였다.
  벌써 다음날로 그는 전투동맹 지도자들인 크리벨, 하이스,  베버, 괴링 룀
과 모임을 가졌다. 두  시간 반 동안 계속된 열렬한 연설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들과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자기에게  '도이치 전투동맹'의 지휘권
을 넘겨잘라는 부탁으로 연설을 끝맺었다. 룀의 보고서에  따르면 하이스는 
마지막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베버도 감동되었고, 룀 
자신은 울리면서 마음속으로는 흥분해서 몸이 떨렸다. 사건  발전이 결정적
인 순간을 향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그는 다음날로 군에서 제대하고 완전히 
히틀러에 합세하였다.
  전투동맹의 지도자들로서 히틀러는 자신의 결심의 힘을 보여주어서 모든 
회의론자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일 속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각적으로 그는 1만  5천 명의 돌격대 부대에  경계태세를 취하라고 명령하
고, 자신의 폭발력을 높이기 위해서 국가사회당원들에게 다른  민족주의 연
합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과격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거의 언제나 그렇듯이 이 모든  계획들, 전략, 명령 등의 원래 목적은 거칠
고 화려한 선진활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란스런 선전활동  장면은 그에
게 있어서 누구보다도 우세하다는 느낌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미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지만 그는 9월 27일 저녁에 한꺼번에 14개의 
대규모 집회를 열어서 14번이나 똑같이 무한히 상승하는 느낌을 만들어 내
기로 계획하였다.  전투동맹의 의도는 물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노예상태와 수치에서' 해방을  , 그리고 수도 베를린으로  진군하여 국수주
의적 독재정부를  만들어내고, '내부에  있는 저주스런 적들'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벌써 3주인 전인 9월 5일에 그러한 의도를 발설하였다. 
'베를린이 행군하여 뮌헨에서 끝을 맺느냐 아니면  뮌헨이 행군하여 베를린
에서 끝을  맺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볼세비스트의 북부 독일과 민족주위 
바이에른이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그가 어떤 계획을 추구하고 있었는지,  특히 그가 쿠테타
를 계획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말만 하는 것이었는지 분명치가 않다.  상당
수의 증거들은 그가 자신의 작용력과 대중의 분위기에 따라서 앞으로의 일
을 결전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다. 선전술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대중의 열광을 통해서 국가권력까지 조종해보려고 하였다.  위에 언
급한 행사에서 그는 '끝없는  말싸움에서' 새로운 독일이 자라 나온다고 말
했다. 어쨌든 전투동맹 회원들에게는 엄격한 명령이 전달되었다. 뮌헨을 떠
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심각한 경우에 대비하여 암호가 전달되었다.
  뮌헨 정부는  떠도는 쿠테타 소문에 밀리고  '공산주의' 중앙정부에 대한 
불신과 여러 가지로  특수한 바이에른의 원한을 가지고, 또한 구석에  처박
히고 싶어하는 소망들을 가지고 히틀러를 앞질러 버렸다.  사전예고도 없이 
주지사인 폰 크닐링은  9월 26일에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이미  1920년에
도 한 번 그랬지만 이번에도 구스타프 폰 카르를 독재적 전권을 가지 계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카르는  전투동맹과 협조하는 것은 환영이라고  말
했지만 히틀러에게는 일체  '과격 행동'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계획되어 있던 14개의 집회를 금지하였다.
  히틀러는 화가 나서 제 정신을 잃었다. 그것은 뒷날  여러 자기로 묘사된 
발작 형태로서 자신의  열변과 분노의 외침에 스스로  열이 올라서 일종의 
의식불명 상태로까지 치솟아  오르는 것이다. 그러한 광란상태에서  히틀러
는 혁명과 유혈사태로  협박을 하였지만 카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가장 
막강하고 폐쇄적인 방위력인 전투동맹의 대표로서 히틀러는 자신이 국가권
력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카르는 그를 공권력의  한 대
상으로 격하시켰다. 한 순간  그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듯했다. 밤이 
지나면서 룀, 푀너, 쇼이브너 리히터 등이 그를 설득하여 이 의도를 거두어
들이게 만들었다.
  어차피 사태는 이미 히틀러의 의도를 훨씬 넘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 베
를린에서는 공화국  대통령 에버트가 의장으로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각의를 소집하였다. 폰 카르는  너무나 자주 '조국을 구하기 위한 바이에른
의 사명'을 부르짖어 왔다.  그리고 이런 표현은 공화국의 붕괴와 보스적인 
귀족정권의 수립, 바이에른의 계속적인 독립상태와  바이에른의 왕정복고를 
의미한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자신이 새로운  직위에 오른 다음  너무나 
분명한 걱정거리를 만들어 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라의  화폐가 붕괴되고 
경제가 무너진 절망적인 상황에서 작센과 함부르크에서 공산당이 영향력을 
확보하였고 서부의 분리주의 운동을  놓고 중앙정부의 권위가 마구 흔들리
고 있어서 뮌헨 사태는 실제로 정세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신호가 될 수 있
는 상황이었다.
  이토록 극적이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나라의 장래는 방
위군에 달려  있었다. 반위군  사령관 제크트 장군은  그 자신이  광범위한  
사람들에 의해서  우일 독재권력의 대상자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 
비상한 상황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약간 늦게 회의장에 나타났다.  실질적
인 권력자로서 냉정한 특별의식을 지닌채 그는 흥분한 각료회의 탁자로 걸
어갔다. 에버트가 이 순간 방위군은 어디 있는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
였다. "방위군은 지금  제 뒤에 있습니다. 대통령 각하."  그럼으로써 한 순
간 실질적인  권력 상황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는 같은 날  국가 
비상사태 선포와 더불어 공화국 전국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자 적어도 형식
상의 충성심을 가지고 정치 지도층 복종하였다.
  참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소란스럽고 예측이 되지 않는  가운데 다
음 몇 주간의  사건이 진행되었다. 제크트는 두 가지 주요문제를  서둘러서 
해결하였다. 9월  29일에 퀴스트린에서  불법적인 검은 방위군이  부흐루커 
소령의 지휘를 받아 궐기하였다. 이 부대는 루르 투쟁이  중단된 이후 자기
들이 해체될까 두려워서  수많은 혼란스런 표지들을 만들어 내서 우익,  특
히 방위군에게 진군  신호를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성급하게  이루
어져서 충분한 협조도 얻지 못한 이런 시도는 짧은 시간 포위를 당하고 난 
다음에 곧장 무너지고  말았다. 곧 이어서 제크트는 혁명시대의 잊지  못할 
감정들을 증명하는 단호한 행동으로 작센, 튀링겐, 함부르크 등에서 좌익의 
위협을 물리쳤다. 그런 다음 그는 바이에른과의 힘겨루기에 나섰다.
  그 사이 바이에른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전략적 구성에 맞게 카르를 자기
편으로 삼았다. 카르와 로소브는 어떤 분노하고 모욕적인 기사 때문에 <민
족 관찰자>를 발간 금지하라는 제크트의 요구를 전혀  따르지 않았다 이어
서 로스바흐, 하이스 소령,  에르하르트 대위를 체포하라는 명령도 역시 무
시되었다. 로소브가  파면되자 바이에른  계엄사령관은 헌정  중단상태에서 
그를 바이엘는 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새로운 도전을  통해서 베를
린과의 갈등을 날카롭게  하기 위해서 가능한 일을 다하였다. 마지막에  그
는 중앙정부의   개편을 요구하였고, 에버트 대통령의 편지에 대해서  공개
적인 선전포고를 답하였다.  대법원에서 지명수배한 이전의 의용군  지휘자 
에르하르트 대위를  잘츠부르크 은신처에서 데려다가  베를린 진군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진군계획서는 최초의 공격날짜를 11월 15일로 잡았다.
  이런 간한 행동에 이어 강경한 말들이 나왔다. 카르  자신은 바이마르 헌
법의 비 도이치 정신을 공격하였다. 정부를 가리켜서  '점토덩이' 라고 불렀
다. 자신은 국제  공산당 유대주의에 맞선 세계관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사
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시끄러운 반응을 보여서 계엄사령관으로  임명
된 데 따르는  다양한 기대들을 충족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히
틀러의 의도를 도와준  꼴이었다. 5월 1일의 운명적 상황을 뒤집기  위해서
는 카르가 오락가락하는  사이 <민족 관찰자>의 기사  하나로 충분하였다. 
베를린과의 갈등은 히틀러에게  바이에른 권력자들과의 동맹관계를 만들어 
주었다. 히틀러는  중앙정부에 맞서 혁명적인  출발을 하기 위해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제크트가  로소브의 퇴진을 요구하자 베를린과  대림하
기 위해서 민족주의 연합이 모두 모여들었다.
  히틀러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거대한 기회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겨울이면 결정이 날 것이라고 그는 <이탈리아 소식>지와의 인터뷰에서 말
했다. 짧은 간격으로  여러번이나  로소브를 찾아가서 화해를 하려고  하였
다, 자기들은 이제 공동의 이해와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다고 행복하게 말 
할 수 있었다.  한편 로소브도 자기는 "히틀러의 생각과 열에  아홉까지 완
전하게 일치한다."고 확언하였다. 진다 그런 일을  바라지도 않았건만 바이
에른 방위군 사령관 로소브는 중심 역살 하나를 떠맡고 무대중심부로 나오
게 되었다. 그러나 반역자  역할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비정치적
인 군인이었다. 그는  결정을 내리는 것을 꺼리고 자신이 빠져든  갈등상황
을 견뎌내기가 힘들었다 히틀러는 그를 계속 앞으로 밀어  붙여야 했다. 로
소브의 딜레마를 그는 적절하게 이렇게 요약하였다. 그토록  광범위한 우익
을 거느린 지도자가 "자신의 상관에 반항하려면  마지막 순간도 넘어갈 정
도로 확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평범한 폭도나 모반자일 뿐이다."
  카르와 합의를 보기는  이보다 더 어려웠다. 히틀러는 9월 26일에  이 계
엄 사령관이 배신한 것을  잊을 수 없었다. 반면 카르는 자신이  이 과격하
고 어떤 공격적인 미친 짓도  할 각오가 된 선동가를 하얗고 푸른이성으로 
데려올 임무를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히틀러에 대한 그의  관계
는 이 허풍선이 재주있는 소동꾼에게 언제든 '정치에서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리고야 말겠다는 속셈을 가진 것이었다.
  이 모든 속셈과 상호  불쾌감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와의 대치상황은 그 
들을 한데 뭉치게 만들었다. 계속되는 의견차이는 지휘권에  관한 것이었으
며 특히 진군시기에 관한  것이었다. 로소브, 자이서와 더불어 재빨리 합법
적인 힘의 '3거두'가 된 카르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약간의 신중을 기하고 히
틀러의 대담한 말에  대해서 어느정도 거리를 두려고 하였다. 히틀러는  초
조하게 행동을 촉구하였다. "단  하나의 질문만이 민족을 움직일 것입니다. 
'언제 시작합니까?'라고 그는 소리치고 거의 몽상적으로 종말론적인 표현을 
하면서 임박한 붕괴를 축하하였다.
 그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 자 이제  운동이 이 순간을  위하여 준비해온 
그 날이 왔습니다! 우리가  이 순간을 위해서 싸워온 그 순간이 된 것입니
다. 국가사회주의 운동이 독일의 승리를 위하여 행진을  할 순간입니다1 우
리는 한번의 선거를 위해서 결성된 겋이 아닙니다. 이  민족이 두려움과 절
망에 가득차서 붉은  괴물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는  최고 위기에서 최후의 
도움을 주기 위해서 이 운동이 결성된 것입니다. 우리  운동에서 이제 구원
이 나옵니다. 오늘날 이미 수백만 그 사실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의 
새로운 종교적 신앙처럼 확고한 것이 되었습니다!"

    쿠테타를 준비하다
  10월이 지나는 동안  모든면에서 준비를 강화하였다. 음모,  비밀, 배신의 
분위기에서 쉬지 않고 토론들이 이루어지고 어사 계획이  세워졌다. 진격의 
순간을 위해서 암호들이  교환되었다. 무기도 집결되고 전투연습도  이루어
졌다. 10월초에  이미 히틀러 일파의  쿠테타가 임박하였다는 소문이  아주 
확실한 것이 되어서 전투동맹의 군사  지휘자 크리벨 중령은 폰 크닐링 지
사에게 편지를 보내 모든 혁명의도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여T다. 
  덤불처럼 뒤엉킨 이해타산,  조약, 견제작전, 잠복 속에서  서로 감시하고 
수천명이 그 어떤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의 담벼락에는 구호와  반대 
구호들이 쓰여지곤  했다. '베를린  진군'은 한꺼번에  모든 문제의  해결을  
약속하는 마법공식이 되었다. 여러 주전부터 히틀러는 출발  징후를 퍼뜨렸
다. "이 11월 공화국은  이제 끝입니다. 점차 뇌우는 올 것입니다.  폭풍 속
에서 공화국은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그만큼 성숙하였으니까요"
  카르에 비해서 히틀러는 어느 정도 확고한 입장인  듯이 보였다. 3거두가 
히틀러를 빼놓고 진군하거나  아니면'베를린으로 진군!"이라는 혁명적 표어
가 아니라 '베를린에서 덜어지자!"는 분리주의자들의 구호를 가지고 대중을 
동원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때때로 히틀러는 이  잘
못된 것이 아니라면 10월 초에  벌써 그는 어떻게 동맹자들을 속여서 시작
하였다. 그러나 올바른  시기만 놓치지 않는다면 갈등이 벌어질 경우  주민
들이 카르가 아니라 자신의 편에 서리라는 사실 또한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이들  둔감한 부르주아지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들의 잘못된 오만, 
대중 앞에서의 무능 등을 경멸하였다. 부르주아지 계급은  그에게서 대중을 
빼앗아가고 싶어했다.  그는 어떤 인터뷰에서 카르를  '전쟁 이전의 허약한 
관료'라고 불렀다. 그리고 "모든 혁명의 역사는 낡은 체제의 인물이 정대로 
혁명을 장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직 혁명가만이 혁명을  장악
할 수 있다."고 했다.
  권력은 물론 3거두가  가지고 있었다. 자신은 그러나 '국가  사령관' 루덴
도르프와 '두 다리로  굳건하게 서 잇는 군단'을 자기편으로 하고  있다. 그
는 군대의 정치적 한계성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온갖 멋진 말로 그들을 이
용하는 법을 알아냈다. 그는 당시 이미 무한 자신감의  경향을 보이고 있었
다. 그의 동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비웃었지만 그는  자신을 감베타 아니면 
무솔리니에 견주었다. 크리벨을  어떤 방문객에게 이렇게 설명하였다. 히틀
러는 지도적 위치에 대해서는 물론 생각지도 않는다. 그는  선전에 대한 생
각만 머릿속에 잔뜩 넣고 다닌다고 했다. 히틀러 자신은  로소브 측근의 어
떤 고위 장교에게  자신은 독일을 구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그리고 방위군을 얻기  위해서 루덴도르프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
는 정치에서는 내게  전혀 간섭하지 않아요. 나는 베트만 홀베크가  아닙니
다. 아시다시피 나폴레옹도  통령이 되는 도중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
람들만을 주변에 두지 않았습니까?"
  10월 하반기에 베를린에 진격하려는 뮌헨 쪽의 계획은 더욱 확고한 윤곽
을 잡았다. 10월  16일 크리벨은 북부에 국경수비를 세우라는 명령에  서명
하였다. 그것은 물론 불안한 튀링겐 지역에 맞서기 위해  경찰의 필요에 따
라 세우는 것이라고 했지만 실은 전쟁에 대비한 것이었다. '진군거점' '적대
감의 표출'이라는 말이 나왔고,  '공격정신' '전투 열의 ' 적대 세력의 '섬멸'
이라는 표현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시민전쟁을 위한 공개적인  동원령의 가
능성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 사이  임시지원병들은 베를린 시의  지도를 
손에 들고서 전투훈련을 받았다. 특히 포병학교의 기수들  앞에서 히틀러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혁명의 속성을  찬양하였다. "제군들의 국기 맹
세의 최고 의무는  국기를 꺾어버린다는 것이다." 동맹자들의  전투력을 혼
란시키기 위해서 국가사회주의 자들은  지방 경찰 소속 경찰관들에게 돌격
대에 가입하라고 호소하였다.
  나중에 히틀러의 진술에 따르면 60에서 80대에 이르는 야전  유탄포 , 유
탄포, 중포 등을 조심스럽게  은닉처에서 꺼내왔다고 한다. 10월 23일 전투
블랙 리스트를 준비할 것을 권고하였다. "가장  잔혹한 테러가 행해져야 합
니다. 별 어려움 없을 만한 사람들을 쏘아버려도 됩니다. 그러나 제거가 필
요한 지도자들은 한 사람 한사람 찾아내어야 합니다 적어도 한사람은 본보
기로 포고가  떨어지자마자 즉시 사살되어야  합니다."  '독일의  앙카라'가 
출발을 위하여 무장하였다.
   
    경쟁자들의 질투
  잘못된 경쟁의 분위기에서 이런 저런 기도들이 이루어졌다.  10월 24일에 
로소브는 방위군 사령부에  방위군, 지방경찰, 조국연합의 대표들을 집결시
켰다. 그들에게 베를린 진군시 방위군의 동원계힉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구
호는 '해돋이'라고 했다 이  모임에 그는 전투동맹의 군사지휘자 헤르만 클
히벨을 초대했지만 히틀러와 돌격대 지휘자들은 빼놓았다. 그에  대한 대답
으로 히틀러는 즉시 당시 어떤 목격자가 표현한 것처럼  '거대한 군사쇼'를 
벌였다. "이른 아침에  벌서 북소리와 음악소리가 도시에서  울려나오는 것
을 들었다. 하루종일  온갖 장소에서 히틀러의 갈고리 십자가를 칼라에  붙
이거나 아니면 고지  에델바이스를 모자에 붙인, 제복을 입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소문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카르는 
자발적으로 자신은  현재의 중앙정부와 모든  협상을 거절한다고 선언하였
다.
  그것은 조용하고 분노한  경쟁과도 같았다. 누가 먼저 맨 먼저  출발해서 
마침내 구원된 국민의 손에서 '승리의 월계관을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받아
쓰느냐 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지역적으로 채색된 열광이  모
든 계획을  철저히 환상적인 요소로  채웠다. 그리고 수많은  활동계획에는 
병졸들의 인디언 놀이 요소가 덧붙여졌다. 실질적인 역학관계를  오랴 생각
해보지도 않고서 이 주인공들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이제는 '행군에서 어떤 
무제들은 마침내  비스마르크 식으로 해결해야할  할' 시간이라고 도  어떤 
사람들은 '질서 세포 바이에른', 혹은 '베를린의 돼지우리를 깨끗이 치울 바
이에른 주먹' 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수도 베를린을 거대한 바빌론으로  묘사하는 익숙한 이미지에는 마음 편
한 어둠이 깃들여 있었다. 수많은 연설자들은  "차돌 같은 바이에른이 베를
린으로 형벌의 출정을 떠나서. 이거대한 묵시록적인 매춘부에게  승리를 거
두고 어쩌면 그녀와 약간  재미도 본다."는 그림을la을 그려 보여서 인기를 
끌었다. 함부르크에서 온 어떤  증인은 히틀러에게 이렇게 알려주었다. "북
부 독일의  수백만 명이 앙갚음의 날  그의 편에 서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출신, 모든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가  출정하기만 하면 뮌헨
의 폭동에 가담하게 돌 것이고 "도이치 민족이 1813년에 그랬듯이 이른 봄
처럼 일어나는 일"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다고 했다. 10월  30일에 히틀
러는 카르에게 돌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철회하였다.
  카르 자신도 물론  거사를 결심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카르나  로소브는 
스스로 앞장서서 쿠테타의 길로 나설 생각은 거의하지 않았을  것 같다. 오
히려 3거드는 그 모든 도전들, 위협 출정계획들을  가지고 단순히 제크트와 
보수적인 '북쪽의 신사분들'을  자극하여 꾸며낸 독재개념을 실현하도록 만
들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이 계획의 전망에 따라서  그리고 
바이에른의 이익을 가져다줄 순간에 끼여들려는 심산이었던 것  같다. 11월 
초 그들은 사정을 살펴보라고 자이서 국장을 베를린으로  파견하였다. 그의 
보고는 물론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광범위한 지지를 기대할 수는 없고, 특
히 제크트는 소극적인 자세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들은  11월 6일 조국연합 지도자들을  불러모아 놓고 열정적인 
톤으로 알렸다,  자기들만이 앞으로 닥쳐올  행동에 대한 권한과  명령권을 
가지며 모든 독단적 힘을 꺾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들이 수
많은 심정의 말들과 현재의 망설임 사이에서 잃어버렸던 행동의 법칙을 되
찾으려는 최후의 시도였다. 히틀러는 이번 모임에서도 배제되었다. 같은 날 
저녁 전투동맹은 가장 가까운 기회를 잡아 출정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3거
두와 아직 결심하지 못한 사람들을 행동으로 자극하여 가능하면 많은 사람
이 베를린 진군에 동참케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흔히 이 결정은 히틀러의  연극적이고 과민하고 망상적인 성격의 증거라
고 이야기되어 왔다. 그리고  '비오 홀 쿠테타'니 '정치적 사육제'니 '뒷계단 
쿠테타' 아니면 '서부극  놀이' 등의 말로 공개적인 조롱을 받아  오T다. 이 
행동에는 이 모든 요소들이 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도한 히틀
러의 상황 판단  능력, 용기, 그의 전략적  일관성 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토록  뒤얽힌 상황에는 익살극, 도둑놀이의  요소와 아울러 냉정한 
합리성도 들어 있는 것이다.

  
    히틀러의 딜레마와 정당화
  실제로 1923년 11월  6일 저녁에 히틀러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5월 1일의 심각한 패배가 있은  다음에 이러한 행동을 할 절박성은 분명하
였다.   그는 추종자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수많은  정당들과 정치가들 중에
서 단연  돋보였고 신뢰를 얻는 중이었는데,  그 모든 것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려면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과격하고 거의 실존적으로  진지한 분노를 
계속 유지해야 했다. 어느 경우에도 굽히지 않아서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
이므로 이제 와서 은밀히 타협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전
투 동맹 지도자로서 그는 병력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 병력의 행동의지는 
집단지도체제의 알력으로  방해를 받지 않았고  게다가 돌격대도 초조하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불안은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여러  주간이나 
준비를 해온 다음 마침내 출정하여 목표를 이루고 싶다는 직업군인의 모험
욕구를 반영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미래의 민족주의 독재가  베르사유 조약
의 제한을 무시하고  방위군을 확대하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몇 주  동안이
나 행군준비 상태에 있으면서  일부 동맹은 방위군의 '가을철 연습' 작전에 
참가하였다. 그러는사이 모든  물자가 동났고 히틀러의 비축물자도  바닥났
다. 대원들은 굶주리게 되었다. 오직 카르만이 동맹을 후원할 수 잇는 상황
이었다. 에르하르트 대위는  뉘른베르크의 실업가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2
만 달러를 가져왔다.
  히틀러가 빠져든 딜레마는 뮌헨  돌격대 연대 지휘자인 벨헬름 부뤼크너
가 나중에 진행된  재판의 비밀회의 진술한 말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방
위군 장교들도  베를린 행군이 시작되지  않아서 불만스러워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히틀러도 다른 사람들처럼 거짓말쟁이라고들 말했지요. 
당신들은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시작하든  우리한테는 마찬가지였죠. 
우린 무조건 따라갈  참이었으니까요. 히틀러에게도 직접 말했어요. 그날이 
오면 나는  람들은 배신할 거라고 말이죠. 이들  중에는 실업자들이 상당수
였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옷, 마지막 남은 신발, 마지막  남은 10페니
히까지 교육받는데 다 썼어요. 그리고 이렇게들 말했죠. 이제 곧 시작될 거
야. 그럼 우린 방위군으로 들어가는 거고 그럼 이  모든 곤란에서 벗어나는 
거지, 하고 말입니다." 히틀러 자신이 11월초에 자이서와 나는 대화에서 이
제 무슨 일이든 일어나야 한다. 안 그러면 전투동맹  대원들은 경제적 곤궁
에서 공산주의 진영으로 넘어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전투동맹 부대들이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다는 히틀러의 고민에다가 시
간이 흐르면서 너무 오래 끌다가 혁명적인 불만이 스러질지도 모른다는 두
려움까지 덧붙여졌다. 루르  투쟁이 끝나고 좌익이 패배한 것은 사회가  정
상화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인플레이션도  전보가 분명하게  통제되는 
듯이 보였다. 이모든 위기가  사라지면서 유령들도 함께 물러갔다. 그 동안 
국가의 위기상태가 히틀러에게 엄청난  선동의 여지를 마련해 주었다는 것
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는 이제 망설일 수가  없었다. 이런 결심이 자기가 
산 이런 저런 약속에  어긋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더  걱정되는 것은 
자기의 전략적  개념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주지사  각하의 
동의 없이 혁명을 감행하기로 했다.
  어쨌든 자신의 행동결심을 통해서  각하의 동의와 심지어는 참여를 얻어
내기를 희망하였다. "우리는  바라는 것을 위하여 하나의  의지가 나타나면 
거사가 이루어지리라 확신했습니다." 라고 뒷날 히틀러는 법정에서 말했다. 
거사를 해야 할 그 모든  이유에 맞서서 계획된 쿠테타가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3거두를 끌어들이지 못할지 모른다는 위험이 여전히 존재하
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 위험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듯하다. 
그들이 어차피 계획해 왔던 일을 강요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판은 마지막에 전체 계획을 망치고 히틀러의 현실 감각
부족을 드러내 보였다. 그는 물론 이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현
실을 무시한 자신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리고 성공적인 결말에 대해  51퍼
센트의 확신만이라도 있었다면 자신은 쿠테타에 동참하였을 것이라는 로소
브의 유명해진 말을 일종의 희망  없는 현실감각의 예라고 해서 어느 정도 
경멸하였다. 그러나 계산 가능한 이유에서만 이러한 행동  결심이 옳았다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독특한 붕괴로 끝나버린 이 쿠테타 기도는  히틀
러에게 권력을 향하여 나아가는  결정적인 통로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
문이다.

    바이로이트와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벨린
  이 모든 과격한 준비며  작전이 펼쳐지고 있던 9월말에 히틀러는 바이로
이트에서 '도이치의 날' 행사를 개최하면서 반프리트 저택에서 리셉션을 요
청하였다. 깊이  감동한 마음으로 그는  방들을 둘러보고 커다란  도서관이 
딸린 바그너의 작업실을 살펴보고 정원에 있는 무덤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사위인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을 소개받
았다. 그는 젊은 날  히틀러가 인상 깊게 읽었던 책들 중 한 권을  쓴 바로 
그 사람이었다.
  거의 마비상태에 이른 노인은  아주 힘들게 그를 맞아들였으나 히틀러에
게서 뿜어나오는 에너지와  목적의식을 알아보았다. 일주일 뒤인 10월  7일
자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히틀러는 더 위대한 사람을 위한 선구
자이며 동반자일 뿐  아니라 히틀러야말로 기사 자신이고 도이치 반혁명의 
주동적 인물이라는 찬사를  서보냈다. 그는 보통 수준의 광신적 인물을  만
나게 되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자신의  감각은 히틀러는 다른 사람과 다르며 
훨씬 더 창조적이다. 그리고 qs명하게 느껴지는 의지력에도  불구하고 폭력
적인 인물이  아니라고 느꼈다고 했다.  자기는 마침내 안심하게  되었으며 
영혼의 상태는  갑자기 변했다고 말했다.  "독일이 가장 큰 곤궁의  순간에 
히틀러 같은 인물을  탄생시켰다. 그것은 독일이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해준
다."고 했다.
  불안으로 동요하면서 오직 거친  환상 속에서만 확신을 가졌던 선동가는 
거대한 생애의 결심을 바로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서 바이
로이트의 선생님이 자신을 격려하는 소리라고 여겼다.

      제 4장 쿠테타
  11월 8일가지 이틀동안  신경질적인 활동들이 이어졌다. 모두들 서로  협
상하고 뮌헨 전체가 전쟁 준비롸 소문들로 와글와글하였다.  전투동맹의 원
래 계획은 11월 10일 저녁 어둠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뮌헨 북부에 있는 
프뢰트마닝 들판에서 대규모 야간연습을  실시하고 다음날 새벽에 보통 행
진 듯이 뮌헨으로 들어와서 민족주의 독재체제를 선포하고 3거두에게 행동
을 촉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준비회의를 하는 동안에  카르가 11월 8일 저녁에 시민 양조장에
서 강연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곳에는 주정부 내각과 로소브, 자이
서 곤청과 경제계의 책임자들, 조국연합 대표들도 초대되었다는 것이다. 카
르가 자기보다 선수를 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히틀러는 다음 
순간 모든 계획을 뒤집어엎고 바로 이튿날로 거사 날을  잡았다. 급히 서둘
러서 돌격대와 전투동맹 부대들이 소집되었다.

    서막을 알리는 총소리
  집회는(1923년 11월 8일0  20시 15분에 시작되었다. 길다란  검은 외투를 
입고 철십자 훈장을  매단 히틀러는 시민 양조장으로 차를 달렸다.  최근에 
구입한 빨간 벤츠 자동차의  옆좌석에는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울리히 그라
프와 아무것도 모르는  안톤 드렉슬러가 앉아 있었다. 안톤 드렉슬러는  이
날 저녁 마지막으로 중요한 모임에 등장하였다. 비밀을  지키려는 이유에서 
그에게는 시골의 집회에  가는 중이라고만 말했다. 이 자동차 속에서  비로
소 히틀러가 모든 것을 털어놓고 8시 반에 거사가 시작된다고 알리자 드렉
슬러는 침울하게 이 모든 계획을  위해 행운을 빈다고 말하고 소극적인 태
도로 물러서 버렸다.
  홀 입구 앞에는 대규모 대중이 모여 있었다. 계획대로  방금 시작된 집회
를 덮치지 못할까 두려운 나머지  히틀러는 그곳에서 경비를 맡은 경찰 간
부에게  재빨리 입구를 비워놓으라고 명령하였다. 카르가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면서 '독재의 도덕적 권한'의  근거를 말하고 있을 때 히틀러가 홀문
에 나타났다.
  증인들의 보고에 다르면 밖에서  대원들의 차가 도착하고 히틀러 돌격대
가 몰려들어 건물을  전시처럼 봉쇄하자 그는 몹시 흥분하였다. 그의  특징
이지만 과장된 장면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면서 맥주잔을 높이 쳐들었다가 
무거운 기관총이 자기 옆에  세워지자 마지막으로 연극처럼 맥주를 쭉들이
키고 잔을 바닥으로  내리쳐서 깨뜨렸다. 그러고는 권총을 빼서 높이  쳐들
고 무장한 돌격대의  선봉에 서서 홀 가운데로 돌진해 들어갔다.  주위에서 
맥주잔들이 바닥에 떨어지고 의자가  뒤집어지는 동안에 그는 탁자위로 뛰
어올라가 유명한  일화가 되어버렸지만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서 천장에 
권총을 발사하였다. 그리고는  어찌할 바 모르는 청중을 뚫고 단상으로  나
아갔다.
  "민족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고 그는 외쳤다. "이 홀에 6백 명의  중무장 
병사들이 장악하였습니다. 아무도  홀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얼른 조용해하
지 않으면 기관총을 회랑에 배치하겠어요. 바이에른 정부와  중앙정부는 제
기되었습니다. 임시정부가  세워질 것입니다. 방위군과  지방경찰 청사들은 
점령되었습니다. 방위군과 지방경찰은  이미 갈고리 십자가 아래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카르, 로소브, 자이서에게 '거친 명령조로' 자기를 따라 
옆방으로 오라고 요구하였다.  그 사이 정신을 되찾고서  큰소리로 "연극이
다!" "남아메리카냐!"하고 외치고 사람들 사이에서 돌격대가 지난번 맥줄홀 
전투때와 같은 방식으로 질서를  잡기 시작하자 히틀러는 이상한 방식으로 
유령 같은 국가권위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승리냐, 죽음이냐!
  전체 맥락이 온통 모슨 투성이고 불확실한 것이지만 그래도 사건의 기본
적인 윤곽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권총을 거칠게 흔들어대면서  히틀러는 그
들 중  아무도 살아서 이 홀을  떠나지 못하리라고 세 사람을  협박하였다. 
그러면서도 형식적인 태도를 이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일이 진행된 것을 사
과하였다. 자신은   세분께서 새로운 직책을 떠맡은 것을 쉽게  해드리려는 
것 뿐 이라고 했다. 어차피 그들은 동참하는 길밖에 없다고.
  푀너는 독재적  전권을 가진 바이에른  지사로 임명되고 카르는  통치자, 
그리고 자신은 새로운  중앙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루덴도르프는  베를린을 
행한 행진에서 국민군대를 지휘하는  역할을 맡고 자이서는 경찰 장관직을 
맡으라고 하였다. 그는 점점 더 흥분하면서 계속하였다.
  "이런 발걸음이  여러분들에게 힘들게  여겨지리란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물론 여러분의 도약을 쉽게 해드려야지요. 여
러분은 각자  맡은 바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을 수행하지 않을  경우 
존재근거가 없는  거죠. 여러분은 나와함께  싸우고 나와 함께  승리하든지 
아니면 나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일이 잘못되면 나는  총알 네발을 장전하
겠습니다. 세 발은 나를  떠나는 동료들을 위한 것이고 마지막 한  발은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보고에 다르면 근 연극적인 몸짓으로 권총을 자기 관자놀이
에 갖다대고 확인하였다고 한다.
  "내일 오전에 승리자가 안되어 있다면 나는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히틀러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세 남자들은  그다지 감동을 받지 
않았고 특히 카르는 이 상황을 이겨내고 있었다. 이런  미친 도둑질과 자신
에게 해당된 역할에 기분이 상해서 그는 말했다.
  "히틀러 씨 , 당신은  나를 쏘라고 명령할 수도 있고 당신 자신이   나를 
쏠 수도 있소 하지만 죽거나 안 죽거나 내게는 별 의미가 없어요."
  자이서는 히틀러가 약속을  어겼다고 비난했고 로소브는 침묵하였다.  문
과 창문에는  이따금 무장한  히틀러 추종자들이 나타나서  무기로 위협을   
하곤 하였다.
  한순간 이 세상의 말 없는  무관심 탓으로 기습작전은 실패한 듯이 보였
다. 히틀러가 맥주잔을   바닥에 던져서 기습신호를 주자 쇼이브너  리히너
는 자동차를 타고  출발해서 거기 참석하지 않은  루덴도르프를 데리러 갔
다. 히틀러는  루덴도르프와 그의 권위를  통해서 사태가 변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사이에 그는 한 번 더 불안한 호로 돌아갔다. 자신의 실패에 실
망해서 신경질적으로 그는 자기가 좀더 확실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대중
에게 돌아간 것이다.
  역사가인 칼 알렉산더  폰 뮐러는 중인의 한  사람으로 이곳에 붙잡혀서 
조롱당하고 거친 돌격대 지휘자 히틀러는 흥분해서 연단으로  달려갔다. 배
경이 없고 불손한 이 젊은 남자는 정신이상의 발작증세가  있었고 보통 사
람들에 대해서  특이한 작용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스꽝스럽고  술집 
웨이터 같기도 했으며 검은 코트로  위장한 듯한 모습으로 이 지방의 자신
만만하고 냉정한 유력자들 앞에 섰다.
  그리고 대단히 능숙한 연설을 해서 그는 "집회의 분위기를 단 하나의 문
장으로 뒤집었다. 마치  장갑처럼. 나는 그런 일은  겪어본 적이 거의 없었
다. 그는 연단으로 갔지만  소동이 너무 커서 주목을 받기 위해서  총을 한 
방 쏘았다. 나는 그  움직임을 보았다. 그는 브라우닝 권총을 뒤주머니에서 
꺼내들었다. 그는 10분  만에 사태가 해결될 것이라는 자신의 예언이  맞지 
않은 것을 보러온  셈이었다." 그러나 거기 모인 사람들 앞에  서서 얼굴들
이 자기를 향하고 있고. 그 얼굴들이 기대에 차  있으며 불안한 목소리들이 
잦아들어 속삭임으로 변하는 것을 보자 그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는 이 사람들에게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사실들을 
나열하듯이 짤막하고 명령적인 말투로  그때까지 희망과 예감과 소원의 극
단적인 집합체에 불과한 것을 되풀이하였을 뿐이다. 새로운 이름들, 새로운 
직위들, 그리고 새로운 제안들을 말했다. 그러고 나서 소리쳤다.
  "임시 도이치 민족정부의  과제는 이 나라의 온 힘을 다해서,  그리고 도
이치 관구들의 모든힘을 끌어모아서 죄악의 바벨탑인 베를린으로 행진하고 
도이치 민족을 구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저밖에 세 사람이 있습니다. 카르와 로
소브와 자이서 말입니다. 이 결심이 그들에게는 정말 어렵답니다. 여러분은 
도이치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
은  자만과  이기심이 아니고 우리는 우린 도이치   조국을 위해서 마지막 
순간에 싸움을 떠맡으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방국가를 건설하고자  합니
다. 연방국가 내에서 바이에른은 바이에른에 어울리는 것들을  유지하게 되
지요. 내일 이 나라에는 도이치 민족정부가 서 있거나  아니면 우리가 죽어 
있을 것입니다!
  그가 청중에게 펼쳐 보인 설득력과, 카르, 로소브,  자이서도 이미 자기와 
한편인 것 같은  기만술책은 '완벽하게 뒤집기 효과'를  일으켰다. 히틀러는 
홀을 나설 때 "카르가 합류한다면  홀 전체가 자기의 편에 서게 될 것이라
고 말 할 수 있는 전권을 가지게 되었다."

    루덴도르프 등장
  그러느 s사이 루덴도르프가 나타났다. 그느 히틀러의  비밀주의와 제멋대
로 관직을 분배하고 자신에게는 군대만 떠맡긴 것 때문에 초조하고도 화가 
나 있었다. 물어보지도  않고 사방을 둘러보지도 않고 근 말하기  시작하였
다. 세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고 자기도 놀라기는 했지만, 그러는 위대한 역
사적 사건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전설적인 민족영웅의  모습을 직
접 보고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한 삶씩 굴복하기  시작하였다. 로소브는 루
덴도르프의 말을 장교식으로  일종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자이서도  그를  
따랐다. 오직 카르만이 고집스럽게 반항하였다. 히틀러가 흥분해서 그가 자
기들과 함께 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말
하자 카르는 냉정한 태도로 자신은  그런 일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고 대꾸
하였다. 효과만 노리는 히틀러의  연극적 기질과, 정치적 관료의 냉정한 권
력이해 사이의 차이가 이 두 문장 안에 분명하게 집약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는 사방에서 압력을 받고 카르도 마침내 굴복하였다.  이삶들은 함게 
동지와 같은 장면을 연출하면서 홀로 돌아왓다. 겉보기에  합의가 이루어진 
듯한 모습을  보고 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의자 위로 올라갔고,  열화와 
같은 환성을 들으며 주연배우들은 악수를 하였다. 특히  루덴도르프와 카르
가 창백하고 굳은 표현으로 과열된 태도를 보이는 대중  앞에 나섰던 반면,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는  '기쁨으로 빛나고 카르를 움직여서 동참케 한  것
을 행복해' 하였다.
  짧고 소중한 한 순간  그는 그 동안 꿈꾸어온 것을 성취한  듯이 보였다. 
유명인사들 사이에 섞여  환호성을 듣고 있었다. 그들의 박수갈채는 빈  시
절 이후 수많은  개인적인 쓰라림을 보상해주는 것이었다. 카르와 국가  공
권력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국민 사령관 루덴도를프와 나란히 서서 잠정적
인 국가 독재관의 역할을  이미 거머쥐게  되었으니, 그토록 오랜  세월 동
안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수없이 실패를 거듭해 온 실업자인 그가 
그토록 출세한  것이다. '이 일은  후세에 동화처럼 여겨질 것'이라고  그는 
자기 생애의 대담한 전진을 바라보며 놀라워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리고 사
실상 이 쿠테타가 어떻게 끝나든지  상관없이 그는 이순간부터 지난 몇 해 
동안의 지방무대에서 놀지  않고 전국적인 무대로 진출하였다고  말 할 수 
있다. 충심으로 그러면서도 모르는 사이 우스꽝스러운 어조로  그는 인사말
을 끝맺었다.
  "나는 5년 전 육군병원에서 눈먼 병신의 몸으로 자신에게 맹세하였던 일
을 이제  실현할 것입니다. 11월의  배신자들이 땅에 쓰러지기까지  현재의 
비참한 독일의   폐허에서 권력과 위대함, 자유와 장엄함의 독일이  부활해 
일어나기까지 쉬지 않고 일하겠습니다. 아멘!"
  대중이 소리  지르고 환호하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은  짤막한 인사말을   
하였다. 카르는 군주제, 바이마르 고향, 도이치 조국 등에  대한 몇 마디 알
아들을 수  없는 고백을 했다.  루덴도르프는 전환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여전히 히틀러의 태도에 대해서 화가 난  채로 단언하였다. "순간의 위대성
에 사로잡히고 깜짝  놀라서 나는 자신의 권리에  따라 도이치 민족정부에 
자신을 맡겼다."
  흩어지면서 그들은 주지사인  폰 크닐링과 현재의 주장관들.  경찰청장을 
체포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체포된 사람들이 돌격대  대학생부대 지휘장인 
루돌프 헤스에 민족 출판사 율리우스 레닌의 저택으로 호소오디는 동안 히
틀러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공병부대 막사 앞에서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가 22시 30분경 홀을 떠나자마자  로소브, 카르, 자이
서는 동지와 같은 태도를 루덴도르프에게 인사를 하고서 그 밤중으로 사라
져버렸다.

    약속위반 대 약속위반
  쇼이브너 리히터와  되돌아온 히틀러가 그들이  의십스럽다는 말을 하자 
루덴도르프는 잔득 성이 나서 도이치 장교의 약속을 의심하는 행위는 사절
이라고 소리쳤다.  두시간쯤 전에 자이서는  히틀러에게 이 쿠테타  시도로 
약속을 깨드렸다고 비난했다. 이 두 개의 장면은 두  세계의 대립을 보여주
는 것이다.  한편에는 기본원칙, 명예심 예비소위의  특징적인 명예심 등을 
지닌 시민세계가 다른한편에는 권력목적만을 지향하는 새로운 남자의 아무
런 배경도 없는  세계가 있었다. 시민적인 규범과 명예개념은 히틀러가  무
시하는 게임 규칙을  언제나 다시 불러들이곤 하였다. 시민세계는 그런  규
범과 명예개념을  계속 사용함으로써 히틀러에게  여러해 동안이나 상당한 
정도로 감상적이지 않은 실질적인 우월성을 확보해 주었다.  기본적 원칙들
을 믿지 못하며서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주변세계 한가운데서 히틀러
에게 성공의 원칙을  마련해 준 것이다. 이날 밤에 히틀러는  "약속 위반에 
대해서 약속위반으로 응답하고 게임에서 이기는 상대자들을"을 보았다.( 집
회가 해산되었을 때 거기  참석한 내무장관 슈바이어는 히틀러에게 다가가
서 그날 저녁의  승리자가 느끼고 있던 히틀러의 가슴을 '화난  학교선생처
럼' 툭 치고 " 이 승리는 약속위반"일뿐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그것은 히틀러에게는 위대한 밤이었다. 그가 소원하는  모든 것을 
다 담은 밤이었다. 극적 요소, 환호성, 반발,  행동할때의 병적인 쾌감, 현실
이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반쯤 실현된 상태에서의 느끼는 비할 바 없는 
흥분 등이  있었다. '승리의 행진'을  점점 더 과장된 화려함으로  준비하는 
뒷날의 기념식에서 그는 바로  이순간의 체험가 위대함을 보존하려고 하였
다.  그는  룀의 포옹하면서 열렬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더 좋은 시절이 
옳거야 독일을 곤궁과 수치에서 구한다는 위대한 목적을 위해서 우리 모두 
밤낮없이 일하게 될  거야." 도이치 민족에게 보내는 성명서 하나와  두 개
의 포고문이 만들어졌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 범죄를 판결하기 위한  정치
법정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1918년 11월  9일 국가반역 주모자들에게 
오늘 날짜를 추방을  선언하고" 그들을 "죽여서는 산채로든 민족국가 정부
에 양도하는 것"을 하나의 의무로써 요구하는 내용이다.

    위기와 결말
  그 사이에 반대행동이 시작되었다. 로소브는  시민  양조장에서 돌아오자
마자 지도급 장교들에게서 위협적으로 들리는 인사를 받았다.  그들은 히틀
러와의 단결장면은 협박에  의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로소
브 장군은 꿰뚫어 볼 수 없는 마음속에서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였던 간에 
격분한 장교들  앞에서 쿠테타 의도를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 곧  이어서 
카르도 하나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는 자심의 쿠테타  동의를 철회한다
고 밝혔다. 해면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밝히고 있듯이 쿠테타   동의는 위
협을 받는 가운데  나온 것이라고 했다. 동시에 그는 국가사회당과  전투동
맹의 해산을 선언하였다.
  계엄사령관 카르가 히틀러 추종세력이 뮌헨으로 진입하는 길을 차단하라
는 명령을 내렸을 때도 히틀러는 아무것도 모른채 계획된 베를린 대행진을 
위해서 아주 바쁘게  병력을 동원하고 있었다. 혁명적인 시작의 분위기  속
에서 돌격대는 사회민주당의  <뮌헨 포스트>건물을 파괴하였고 다른 소대
들은 집에서 인질을 끌어내고 이리저릴 돌아다니며 무차별적으로 약탈하기
도 하였다. 한편 룀은 쇤펠트 거리에 있는 방위군 지휘본부를 점거하였다.
  아무도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가볍고 축축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였
다. 자정이 지나서도  카르와 로소브에 대한 소식이 없자 히틀러는  불안해
졌다. 심부름꾼을 보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프리크는 체포된 듯했다.  시
간이 좀더 흐르자  푀너의 소식도 끊겼다. 이때쯤 히틀러는 자신이  속았다
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다. 생애에서 후퇴나 실망이 있을 때만다  그랬지
만 모든 것도 함께 무너졌다. 밤이 지나는 동안  슈트라이허가 대중에게 정
열적으로 하소연해서 밀어 붙여보자는  시민 양조장의 제안을 가지고 나타
났을 때 슈트라이허의 보고에 다르면 히틀러는 멍한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
더니 체념하고 어찌할 바 모른 체 종이쪽지에 적어서 '조직 전체'를 그에게 
엄4겨주었다. 히틀러는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듯했다.
  무감각의 단계를 지나자  절망의 발작이 뒤따랐다. 그 통제되지 않은  히
스테리 발작은 뒷날의 경련과 미친  듯한 분노의 발작을 미리 보여주는 모
습이었다. 미칠  듯한 저항을 결심했다가  모든 것을 과격하게  내던지듯이 
다음날 시위행진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잘되면 좋다. 잘되지 않으면 우리
는 목매달아 죽자"고  그는 말했다. 이 말도 두 번째로  승리를 기대하거나 
아니면 몰락을 기대하는 말로   승리와 자기 파괴 사이에서 흔들리는 뒷날
의 모습을 예견케 한다.
  그가 파견한 정찰조가 유리하게 들리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자 그는 순
간적으로 선동의 힘에 대한 희망과 열광과  신뢰를 되찾았다. "선전이야 선
전, 이젠 오직 선전에만  달렸어." 하고 그는 외쳤다. 즉시 그날  밤을 위해
서 자신이  주요 연사로 등장하는  14개의 대규모 군중집회를  기획하였다. 
두 번째 행사는  그 다음날 1만 명의 사람들이 국민의 궐기를 기념하여 쾨
니히 광장에서 축하를 하는 것으로 정했다. 새벽 무렵에는  벌써 그 행사를 
위해서 플래카드를 주문하였다.
  그것은 특이한 방법이었을 뿐 아니라 사실상 히틀러에게 남겨져 있는 유
일하게 성공적인 해결책이기도  하였다. 역사서술에 일관해서 등장하는  비
난 즉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혁명가로서의  능력이 마비되었다는 비난은 
그다지 근거가 있는 말은 아니다. 그러한 비난은 히틀러의   전제와 목적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신경은 마비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신국도 내각부서도 점거하지 못했고, 정거장도 군대막사도  아직 그
의 통제 아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뮌헨에서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할 길
이 없었고, 오직  뮌헨의 힘을 등에 업고서 베를린으로 행진해가려는  의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순간 그의 체념은 비판자들의 판단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현실적으로 동지들이 떨어져나간 것과 동시에 쿠테타 기도 전
체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간파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시위행진과 계획된 선동의 물결을 통해서 그는 분명히 어떤 구면의 전환
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근본적으로 두터운  여론의 벽을 형성
하여, 내란 기도에 참가한  사람들을 정치적, 형사상의 결과에서 보호할 장
치를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다. 물론 그날  밤 여론이 미친 듯이  급변하는 
과정에서 대중을 함께 끌여 들여서  뮌헨을 너무 오래 기다려온 베를린 행
진을 시작할까 하는  생각이 간혹 떠오르기도 하였다. 자기의 상상력에  이
끌려서 히틀러는 아침 무렵 선동대를 거리로  내보냈다. 그들은 "깃발을 답
시다!"하고 외치며 거리로  달려나갔다. "우리가 호응을 받는지 보고 싶다"
는 것이다.(빌헬름 회그너)
  실제로 이러한   기획이 전망이 그다지 불리한 것만이 아니었다.  아침에 
분명해졌지만 여론의 소리는 완전히 히틀러와 전투동맹 편에  있었다. 시청
에 , 그리고 도시의 수많은 건물과 주택에도 갈고리  십자가 깃발이 내걸렸
다. 일부는 손수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아침신문들은 간밤 시민 양조장 사
건을 호의적으로  보도하였다. 전날부터  당은 287명의 신규등록을  받았고 
전투동맹이 도시 여러 곳에 만들어둔 하급장교와 일반병사들이 노골적으로 
히틀러의 행동과 행진계획에  동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슈트라이허가  거리
로 내보낸 연설자들은  쌀쌀한 11월 아침에 열에  들뜬 분위기에서 생생한 
박수갈채를 얻었다.

    목적 없는  행진
  그러나 공식 여건과  차단된 채, 사방에서 사람들의 추진력과 격려에  둘
러싸여 있었지만  오전이 경과하는 도안  히틀러는 다시 주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대중은 완전히 헌법상의 의미에서  , 그와 그의 안전, 
에너지, 그의 용기를 북돋우거나 아니면 꺾어버리는 요소처럼  보이게 되었

  그는 이른 아침 전투동맹의 정보책임자 노인체르트 소위를 베르히테스가
덴의 왕세자 루프레히트에게 보내서 중재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소위가 돌
아오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는 시위대가  무장병력
과 충돌할 수도 있으며 잊을 수 없는 5월 1일의 패배가 훨씬 더 비참한 방
식으로 되풀이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였다.
  히틀러가 망설이고 절망하면서  노인체르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오랜 토론을 거친  다음 루덴도른프는 정열적으로 "행진합시다!"하는  한마
디로 모든 말을 끝냈다.  이어서 정오 무렵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기수 뒤
에 대열을 만들었다. 지휘자들과 장교들은 앞으로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루덴도르프는 시민 복장이었고 히틀러는 지난밤의 프록코트 위에 트렌치코
트를 입었다. 그이 옆에는  울리히 그라프와 쇼이브너 리히터, 다음에 베버
박사, 크리벨, 괴링 등이 섰다, 히틀러는 뒷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것
이 마지막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걸었다. 우리가  출발할 때 저 바깥  계단 
위에서 누군가가 '이제 마지막이군!'하고 말하는 것을 알고 있다. 각자가 이
런 확신을 마음에 지니고 있었다. "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출발하였다. 
  이자르 강의 다리 위에서 행렬을 막아선 강력한 주경찰 초소 한 곳은 암
발만 쏘면 체포된  인질 전부를 죽이겠다는 괴링의  위협을 받고 당황하였
다. 불안해진 경찰관들은 시위대에게 순간적으로 밀려서 군중  한 가운데서 
무장해제 당아혹 군둥들이 뱉은 침과 따귀를 맞았다. 뮌헨  시청 앞 마리아 
광장에서 슈트라이허는 몰려든 군중을 앞에 놓고 높은 단상에서 연설을 하
였다. 히틀러가 군중이 '구세주'인 양 자기에게 몰려드는  것을 보고도 묵묵
히 행진만했다느 사실에서  그가 처해 있던 위기의 정도를 읽어낼  만하다. 
그는 쇼이브너 리히티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것은 이상하게 기댈  곳을 
찾는 종속적인 태도로 그가 말하는 지도자의 이미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태
도였다. 행인들의 환호를  받음녀 행렬은 목적도 없이 나가다가 도시  중심
부의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왕궁 거리에 접근하게 되었을 때  지휘부는 
<오 명예로운 독일이여>를  불렀다. 오네온 광장에서 다시금  경찰의 바리
케이트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어떻게  깆행되었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일부는 
상상력이 넘치고 일부는 변명조로  말한 혼란스런 증언들에서 오히려 성급
한 교전이  60초 정도 계속되었다. 맨  먼저 쇼이브너 리허터가 총을  맞고 
쓰러져 죽었다. 그과 함께 히틀러도 휩쓸려 쓰러지면서 팔을 삐었다. 두 번
째로 당수 노릇을 했던 오스카 콰르니도 쓰러졌다. 고지  재판소 판사인 푀
너도 쓰러졌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 14명과 경찰관 3명이 거리에서 죽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고 그 중에는 헤르만 괴링도 끼여 있었다. 
  비오듯 하는 총알 속에서  쓰러지거나 모두들 뿔뿔이 도망치는데 루덴도
르프만 분노에 몸을 떨면서 꼿꼿한 자세로 경찰 바리케이트 한가운데로 걸
어갔다. 단지 몇 명의 용감한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랐더라도 그날의 결과
는 완전히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 대부분
의 사람들을 바닥에 누워있게  만든것음 비겁함이 아니고 국가공권력의 총
구에 대한 우익의 본능적인 존경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총사령관 루덴도르프는  동지들의 비굴한 관점을  훨씬 넘어서는 장대한 
자부심을 진고 광장에서 담당 장교를 기다렸다가 체포되었다.  그와 더불어 
브뤼크너, 프리크, 드렉슬러, 베버  박사 등도 체포되었다. 로스바흐는 잘츠
부르크로 도망쳤고, 헤르만  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국경 저편으로  도망쳤
다. 오후가 지나는  동안 방위군 지휘본부를 점령하였던 에른스트 룀도  짧
은 교전 끝네 전투동맹소속 대원 2명이 목숨을 잃었다ㅡ 사실을 알게 되었
다. 이날 그의 기수는 안경을 쓴 여자 같은 얼굴에, 뭔헨의 명망있는 한 고
등학교 교장의 아들이었는데 이름은 하인리히 히믈러 였다.  죽은 사람들을 
어깨에 메고 무기도 없이 말도 없이 이별의 행진을 하면서 연맹은 도시 중
심부를 지나서 해체되었다. 룀은 체포되었다. 

    체포당하다
  루덴로드프의 단단한  용맹성은 특히  히틀러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었ㄷ. 
그는 같은 날  두 번이나 마비되었다. 오직 중요하지 않은  세부사항에서만 
그의 추종자들의 증언이 서로 모순된다. 그는 모든 것이  겨정되기 전에 엄
호하는 추종자들이 물에서 몸을 일으켜 무모하게 멀리  내다보았다고 한다. 
죽은 사람과 부상자들을 뒤에 버려두었다. 그는 혼란중에  루덴도르프가 이
미 죽은 줄  여겼다고 나중에 사과하듯이 말했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거기 
머룰렀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전체적인 혼란중에 구급차의  도움을 받아서 
도망칠 수 있었다. 몇  년 뒤에 그 자신이 만들어서 전파한  전설에 따르면 
그가 어찔할 바  모르는 아이를 포화중에 구해냈다고  하면서 자기 주장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 아이를  보여주기까지 하였지만 루덴도르프 일파에 의
해서 반박받았다. 
  히틀러는 뭔헨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슈타벨 호숫가 우핑에 있는 에른
스트 한푸슈텡글 부부는  그를 만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틀 뒤에 그는  체
포되엇다. '창백하고 지친  얼굴에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모습이
었다. 그는 레히 강변에  있는 란츠베르크 요새로 이감되었다. 생애의 이런 
파국상황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그는 끌려가기 전에 체포
조의 장교에서 일급 철십자 훈장을 달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감옥에서도 그는  어두운 절망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처음에 그는 '총살 
될 것'을 믿었다. 다음 며칠 동안 아만,  슈트라이허, 디트리히 에카르트, 드
렉슬러 등이 이감되어  왔다. 뮌헨의 감옥에는 베버 박사, 푀너,  프리크 박
사, 룀과 같은  사람들이 갇혀있었다. 루덴도르프만은 체포되지 않았다.  히
틀러 자신은 그가 자기에서 부당하게 행동햇다고 느꼈다.  그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자기 일을 망쳐놓았다. 며칠 동안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
다 앞장서야 하며, 단식투쟁으로  생명을 끝내야 겠다는 생각을 지녔다. 안
톤 드렉슬러는 나중에  그의 이런 생각을 말렸다고 주장하녔다. 죽은  친구
인 쇼이브너 리히터의 미망인도 그가 이 어두운 시절의 절망을 이겨내도록 
도왔다. 장군홀 앞에서  벌어진 예기치 않았던 총격은 쉬지 않고  계속되던 
3년간의 상승과 전략적 전제조건들에 갑작스런 종말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
라 현실과의 무서운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최초의 관란적인 연설 체험 이후로 그는 위대한 영웅 역할의 박수갈채와 
소음에 휩싸여서 점점 더 환상적인 가상세계로 빠져들어갔다.  꿈결과 같은 
높이에서 대중최면과 자기 최면의 기만술을 발전시켰고, 깃발과  군대와 승
리의 행진을 보고 있던 참인데, 백일몽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갑자기 사납
게 찢겨나간 것이다. 
  정상적인 재판절차가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그는 이상하게도 잃
어버렸던 자신감을 되찾았다. 한순간 그는 위대한 장면의  낌새를 알아채고 
그것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연극적인 등장, 청중, 박수갈채 등이었다. 그는 
나중에 1923년 11월  9일의 실패한 시도는 자기 생애에서 '어쩌면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표현하였다. 물론  재판의 기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 기회는 
그를 절망과 자포자기의 분위기에서  빼내서 바라던 연지자로서의 ㅊ로 되
돌려놓았다. 새로 시작하여 모든  것을 되찾고, 계획도 없이 부끄럽게 끝나
버린 쿠데타의 파국을  민족 선동가의 승리로 바꾸어놓을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1924년 2월 24일에 블루텐부르크 거리에 있는 예전의 사관학교 건물에서 
열린 쿠데타 관련자 재판은 모든 사람들이 "사건의 '본질적인 부분'은 절대
로 건들지  않겠다. "는 침묵의 합의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특징이다. 
히틀러, 루덴도르프, 룀, 프리크, 푀너, 크리벨, 그리고 네 사람이 더 고발되
었다. 반면에 카르, 로소보, 자이서 등은 증인으로 참석하였다. 그리고 이런 
재판 절차상의  대립에서 히틀러는 모든  이점을 이끌어냈다. 피고와  증인 
사이의 이런 대립은  복잡한 과거의 사정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
다. 
  그는 카프 쿠데타의 주동자들처럼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맹세하지는 않
았다. "각자 모두  오른손 손가락 세 개를 세우고 맹세하는  자세를 취하며 
자기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햇다. 자기ㅡ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으며 바
라지도 않았다. 그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고백하고 의장 앞에 나서서 '그렇
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했습니다. 우리는  국가를 전복시키려 했습니다'라
고 말할 용기를  갖지 목했다는 사실이 시민세계를 파괴시켰다. "  그에 반
해서 히틀러는 분명하게 자신이 의도했던 것을 고백하였다.  그러면서도 내
란죄라는 비난만은 수긍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는 죄가 있다고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런 행동을 했다고는 고백하지만 내란죄를 범했다고는 고백하지 않겠습니
다. 1918년 국가반역죄에 대항하는 행동에 내란죄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밖에도 11월 8일과  9일의 행동만으로 내란죄가 구성될 수는 없습니다.  적
어도 그보다 몇  주, 몇 달 전부터  행동과 관계들이 다 포함되어야합니다. 
우리가 내란을 꾸미고  있었다면, 당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내 옆에 나란히 앉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나  이상합니다. 우리와 더불
어 같은 행동을 했던 저  신사분들이 자기들도 함께 이야기 하고 세부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준비하였다고 시인하지  않는 한 나도 내란죄를 지었다
는 부분을 거부합니다. 나는 스스로 내란죄인이라고는 느끼지  않으며 그저 
민족을 위하여 최상의 것을 바란 도이치 사람이라고만 느끼고 있습니다. "
  공격받은 사람 중  누구도 이런 주장에 맞서지 못했다. 실제로  히틀러는 
이런 방법으로 어떤 증인이 서술했듯이 재판을 '정치적 카니발'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피고의 역할을 고발자의  역할로 바꾸어버렸다. 검사는  어쩔줄 
모르고 한때는  3거두의 변호사 노릇을 맡게  되었다. 의장은 거의  아무런 
이의도 달지 못했다. 우레퍼럼 쏟아지는 관중의 박수갈채가  온화한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푀너가  '에버트 프리체'에 대해 말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
을 가리켜서  "그 조직도 법도 나에게는  무관한 것"이라고 표현했을 때도 
전혀 제지를 받지 않았다. 재판정은 당국이  "피고들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목하였다."고  3월 4일 내각회의에서  바이에른의 
주 장관 한 사람이 말했다. 
  카르와 자이서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곧바로 체념하였다.  예전의 계엄사
령관인 카르는 어두운 표정으로  앞만 쏘아보다가 수많은 모순점에도 불구
하고 히틀러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려고만 들었다. 그러면서  이러한 시도
가 얼마나 히틀러를 돕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로소브만은 정력적으로 자신을  방어하였다. 거듭해서 그는 상대방의  수
많은 약속위반을 비난아혔다. "히틀러씨가 아직도  그렇게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 그는 자기 계급의  경멸감을 모두 내몽며 국가사회당의 
당수가 "전략도 업고 고루하고 지루하고 때로는 난폭하고 때로는 감상적이
며 어쨌든 열등하다."고 묘사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심리적 전문가의 
견해를 펼쳤다. "그는 도이치의 무솔리니,  도이치의 감베타로 자처하며, 군
주제의 비잔틴 양식(아첨)을  계승한 그의 추종세력은 그를 가르켜  도이치
의 메시아라고 한다. "
  히틀러가 격분하여 장군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의장의  의견에 따르면 '실
질적인 가치도 거의 없는' '무례죄'를 얻지는 않았다. 다만 자제하라는 경고
만 들었을 뿐이다.  수석검사조차도 구형의 근거를 히틀러의 눈에 띄는  태
도하고만 연결시켰다.  그의 '독특한 연설능력'을 칭찬하고  "그렇다고 그를 
민족선동가라고 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선의의 존경심에 넘쳐서 
그는 말을  계속하였다. "그는 사생활을  언제나 순수하게 유지하였습니다. 
정당의 당수로서 자연스럽게 따르는  유혹을 생각해보면 특별히 인정할 만
한 특성입니다... 히틀러는  대단한 재능을 가진 인물로서 단순한  환경에서 
나와서 공적인 분야에서  존경받는 지위를 쟁취하였습니다. 물론  진지하고 
열심히 일해서 쟁취한 것입니다. 그는 풍부한 발상들을  위해서 자기희생에 
이르기까지 헌신하였으며  병사로서 최고로  자기 의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지위를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용하였다는 비난을 할 
수는 없습니다. 
    
    실패를 역이용하다
  이 모든 상황의 이점이 함께 작용해서 히틀러가 재판을 역이용하기 쉽게 
해주었다. 그러나 수없이  비웃음을 산 실패한 쿠데타를 가지고 하나의  승
리를 만들어내고, 11월 9일 새벽의 고통과 우유부단함을  대담한 민족적 거
사처럼 만들어버린 것은  결국 그 자신의 능력이었다. 히틀러는 무거운  패
배를 겪은 직후에 심문을 받으면서  실패한 거사의 모든 책임을 스스로 떠
맡았다. 그러고 나서 자기 행동은 조국을 위한 것이고  역사적 의무를 이행
한 것이었다고 더 높은 차원에서 정당화하였다. 
  그러한 주장에 나타나는 직관적이면서도 도전적인 확신은 의심의 여지없
이 그의 가장 인사억인 정치적 성공에 속하는 것이다.  그의 재판태도의 자
신감 넘치는 특성을 반영하는 최후 진술에서 그는 로소브가 자기를 가리켜 
'선전꾼이면 기상신호'라고 부른 말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인배란 생각이  얼마나 작은지요! 내가  장관자리를 얻는 것을 그다지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십시오.  장관이 되었다
는 사실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고  하는 것이 위대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일
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추구하였던 것은  첫날부터 장관보다는 1
천 배나 더 큰 것이엇습니다. 나는 마르크시즘을 파과한  사람이 되고자 하
였습니다. 나는 이  과제를 이룰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과제를 이루면 
장관이란 직합은 내게는 웃기는 것에 불과하지요, 내가  처음으로 바그너의 
무덤 앞에 섰을 때, '여기 추밀고문관 음악감독 리하르트 폰 바그너 각하가 
잠들다'라고 쓰지 못하게 한 사람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에  내 가슴은 자랑
으로 넘쳐 흘렸습니다. 나는 이 남자와 도이치 역사의  수많은 남자들이 후
세에 자신의 직함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으로 만족했다는 사실
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당시 나는 겸손해서 '북치는  사람'이 되고자 했
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최고이고 다른 것이 작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바랐던 것입니다. 

    전환점
  그가 스스로 위대한 남자라고  자처하고 로소브에 맞서서 자신을 방어한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굴고, 거리낌 없이  자신을 칭찬하는 어
조로 말을 한  것이 처음부커 기습적인 작용을 하였으며, 재판과정에서  자
신을 중심인물로 부상시켰다.  공식적인 기록은 엄격한 서열의식을  가지고 
이루어졌기에 끝까지 루덴도르프 - 히틀러 서열을 지켰다. 그러나  1차대전
의 총사령관을 보호하고자 하는 다방면의 노력은 히틀러에게 또 하나의 기
회를 마련해주었는데, 그는 그 사실도 알아채고 이용하였다. 오직 혼자서만 
책임을 떠맡음으로써  그는 루덴도르프라는 인물을  넘어서 공석으로 남아 
있는 민족운동 전체의 지도자 역할까지 떠맡게 된 것이다. 
  심리가 계속되는 동안 그는 가지들의 시도에 들어 있던  도둑의 속성, 비
현실성, 완전한 절망 등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대단히 
수동적이고 어찌할 바 몰랐던 거사일 아침 자신의 행동도 슬며시 없어지게 
만들었다. 모든  사람이 어리둥절하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사건의 경과는 점점  더 똑똑하게 계획되고, 철저히 목적지향적인 멋진  걸
작품이었다는 인상을 얻게 되었다. "11월 8일의 행동은 실패하지 않았다. "
고 그는 이미  법정에서 선언을 했을 정도였다. 그럼으로써 아주  공공연히 
뒷날 신화를 만들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최후 진술에서 그는  감동적으로 
정치와 역사에서 자신의 승리의 비전을 펼쳐 보이고 있다. 

  우리가 양성한 군대는  나날이 시간 시간 더 빠르게 성장하였습니다.  바
로 이날 나는 이 거친  떼거리가 대다가 돠고, 대대는 연대가, 연대는 사단
이 될 순간이 다가온다는 자랑스런 희망을 가졌습니다. 낡은  포를 먼지 속
에서 꺼내고  낡은 깃발을 다시 펄럭일  시간, 우리가 들어갈 각오가  되어 
있는 영원한 신의 최후의 심판에서 용서를 얻을 시간이 다가온다는 희망을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뼈, 우리의 무덤에서 법정의 소리가 들리게 될 것
입니다. 오직 우리를 재판할  권능을 가진 법정 말입니다. 우리에세 판결을 
내릴 사람들은  여러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 대한 고발에  판결을 
내리는 것은 바로  영원한 역사라는 법정입니다. 여러분이 내릴 판결을  나
는 압니다.  그러나 저 법정은  우리에게 '너희들은 내란을 꾀했는가,  아닌
가?' 하고 묻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법정은 우리를  심판할 것입니다. 낡은 
군대의 병참감을, 그 장교와 병사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도이치 사람으로서 
자기 민족과 조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싸우다가 죽으려  한 이 사람
들을 역사라는 법정이  심파할 것입니다. 여러ㅈ분이 우리가 유죄라고  1천 
번이나 판결하여도 영원한 역사  법정의 여신은 미소지으며 검사의 구형과 
이 법정의 판결을 찢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 여신은  우리에게 무죄를 선
고하기 때문입니다. 

  뭔헨 국민법정의 판결은 정확하에 말하자면 히틀러가  예견한 '영원한 역
사법정'의 판결에 가까운것이었다. 의장은 아주 애써서 3명의 민중판사들이 
유죄 선언을 내리도록 만들 수 있었다. 히틀러를 바른  시일 내에 사면한다
는 확답을 주고서야  겨우 그들의 동의를 얻어ㅓ냇던 것이다. 선고  자체가 
자시들이 말썽꾼을 축하하는  뭔헨 사회의 한 사건이었다. 판결 근거는  한 
번 더 피고의 '순수한 애국정신과 가장 고귀한 의지'를 높이 평가한 것이었
다. 
  히틀러에게 5년 간 금고형이라는 최저형량이 선고되었고 6개월의 형기를 
마치면 집행유예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루덴도르프는  무죄선고를 받
았다 부담스런 외국인 강제추방 규정은 '히틀러처럼  도이치 방식으로 생각
하고 느끼는'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법원의  결정이 내려지자 법정에 
있던 청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판사들이 법정을  떠날 
때 부휘크너는 두  번이나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옳아!"하고.  이어서 히
틀러는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법원건물의 창문에 모습을 보였다. 그의  뒤
에는 꽃다발이 쌓였다. 국가는 한 번 더 대립에서 패배하였다. 
  그러고 나자  히틀러에게 상승의 시기가 끝난  것처럼 보였다. 11월  9일 
직후에 뭔헨의 대중은 때를 지어  모여들어서 그를 위해 억지 시위를 하였
다. 이어서 실시된 바이에른 주의회 선거와 전국의회  선거에서 민족주의자
들은 상당한 의석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당, 혹은 당활동이 금지된 이후 만
들어진 위장 단체는 히틀러의  마력과 마키아벨리적인 능력에 근거한 결집
력이 없어지자 짧은 기간에 서로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혀 의미도 없이 싸
우는 집단들로 찢어지고 말았다. 드렉슬러는 이미  히틀러가 "당을 그 빌어
먹을 쿠데타로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고 불평했다. 
  1923년 말에 나라 안의 사정이  점차 안정되자 거의 오로지 공공연한 불
평에서 양분을 얻었던  선동의 기회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무렵  인플레
이션이 극복되엇고 운도 없이 시작된 바이마르  공화국에 그런대로 '행복한 
시절'이 시작되었다. 온갖 지역적인  충돌들에도 불구하고 11월 9일 사건은 
바이마르 역사라는 대규모 드라마의 급전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이 사건
은 전후 시대를  종결지었다. 장군홀 앞의 총격전은 특이한 각성을  가져왔
다. 비현실성에 빠져들어  방황하던 국민의 눈길을 부분적으로라도  현실로 
돌리는 데 기여하였다. 
  히틀러 자신과 그의 당 역사에도 실패한 11우러 거사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가  거기서 이끌어낸 전략적  교훈들과 개인적인 교훈들은  그의 
앞길을 결정짓는 것이다.  그의 뒷날 해마다 연기오르는 물들 사이로  기념
행진을 하고 쾨니히 관장에서 저  희미한 11월 아침에 죽은 자들에게 청동
의 관에서 나오라고 외치곤 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이러한 어두운 제례의
식은 역사적 재로를 가지고 정치적 쇼를 보여줄 기회로 삼곤 하던 그의 연
국적 성격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성곡한 정치가가, 자
신의 중요한  정치적 성장체험에 바치는  숭배 의식이었다. 사실상  그것은 
그의 생애 '가장 큰 행운'이었고, 당의 '진짜 탄생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선 바이에른을 훨씬 넘어서는, 독일까지도 넘어서는  여론을 그
에게 마련해 주었다.  당에는 순교자들, 전설, 박해받은  열성이라는 낭만적 
후광, 그리고 확고함의 영광까지 마련해준 사건이었다. 히틀러는 뒷날 기념
식사에서 이 모든 이점들을 찬양하고 그것을 '섭리의  지혜' 덕으로 돌렸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 당시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절대로 혁
명적인 운동을 창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게 '당신도 다른 사람
들처럼 말하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전혀 행동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 
말이 옳았을 것입니다. "
  장군홀 앞에서 국가 공권력의 총구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국가의 힘에 
대한 히틀러의 관계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었고, 계속적인  권력장악 과정
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과정을 그는 다음 여러 해 동안  서서히 전개시키
고 모든 저항과,  자시편의 초조함에서 나온 반항에 맞서서 지켜나가게  된
다. 그는 전에도 이미  권력과 그 총애를 구했다. 그리고 "1919년부터 1923
년까지는 오직 쿠데타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는 그의  고백을 말 그대로 받
아들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느 이제 권력의 비호 속으로 들어가려는  본
능적인 충동을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고, 국가 사회주의  혁명의 전략체계로 
발전시키는 것을 배우게 된 것이다. 

    선동가에서 정치가로
  11월의 체험은 현대 국체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복한다는 것은 전망없
는 일이며 권력장악은 헌법의 토대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물론 히틀러가 권력욕을  향한 행진에서 헌법을  구속력이 
있는 제한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단순히  합법
성의 보호 안에서  불법적인 일을 해나가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다음  여러 
해 동안 행한 수많은 헌법에 대한 선서가 권력을 얻기 위한 싸움의 적법성
을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헌법을  청산할 
시간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고  하였다. 쇼이브너 리히터는 1923년 9월  24일
자 기념 글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 "민족주의 혁명은 정치 권
력의 인수를 전제로  해서는 안되며, 국가의 경찰력 확보가 민족주의  혁명
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동시대의 어떤  아이러니컬한 표현처럼 '합법적인  아돌프'로서 히틀러는 
엄격한 ㅈ거의 사나이가 되었다. 유력인사들과 권력을 가진  기고나의 호감
을 얻으려 애썼으며 언제나 좋은 행동을 하겠다고 맹세하고 자신은 통편에 
서 있다고 고백함으로써 혁명적인 의도를 감추었다. 폭력적인  공격성을 지
닌 초기의 어조들은 누그러지고 아주 가끔씩만 두려운 모습을 드러내곤 하
였다. 그는 국가를 패배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다듬어 나가려고 했다. 그것
이야말로 히틀러의  혁명적인 야심에 대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찰자와 해설자들을 기만하고,  보수적인 아니면 평범하게 반동적인  소시
민 정당이라는 단순하게 왜곡된 모습을 만들어낸 전략적인  자세였다. 히틀
러의 개념은 무엇보다도 방위군에 대한 관계를 변화시키도록  만들었다. 11
월 9일의 실패를 그는  무엇보다 군가 지도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목
한 탓으로 돌렸다.  뮌헨 재판의 최후진술이 이미 방위군을 자기편으로  끌
어들이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런 자세는 뒤집을 수 없는, 거의 절대적
으로 옹호된  새로운 전략원칙이 되엇다. 재판정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언젠가 방위군이 우리편이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예를 들ㅇ면 
1934년 6월 30일 유혈사태 때까지 정당 내부의 장체 군대의 역할을 엄격하
게 이 목적에  종속시켰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돌격대가 군대에  종속되지 
않도록 만들었다. 돌격대는 방위군의 일부도 라이벌이 되어서는  아되는 것
이다. 
  히틀러가 장군홀 앞의 패배에서  이끄러낸 것은 강화된 전략뿐은 아니었
다. 그것은 나아가서 정치에  대한 그의 관계 자체를 변회시켰다. 그때까지
만 해도 그는  무엇보다도 범주적인 절대성을 통해서, 과격하 ㄴ대안을  통
해서 두드러지게 되엇고  마치 '자연의 힘처럼' 작용하였다.  정치란 전쟁터
에서 배웠떤 존재방식대로  적을 향한 돌진이며, 전선을 뚫고 나가는  것이
고, 격돌한 다음에는 승리냐 패배냐가 있을 뿐이라고 여겼다. 
  이제야 비로호 히틀러는 정치적 게임, 전략적 술책들,  겉보기 타협, 지루
한 훈련  등을 완전히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치에 대해서  그저 
감정적인, 단순하게  선동가적이고 '예술가적인'관계를 마침내 극복한  것으
로 보인다. 사건들과 자신의 충동적인 반응에 이끌려가던  선동가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11월 9일의 실패한 쿠데타는 히틀러의  생애
에서 위대하고 결정적인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 그는  수업시절을 끝낸 것
이다. 정확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그것이야말로 히틀러의  정치입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살자 체질
  히틀러의 변호사이며 뒷날 폴란드  총독을 지낸 한스 프랑크는 위른베르
크 조사 보소서에서 이렇게 말햇다. 히틀러의 '역사상의 삶의 전체', 그리고 
'그의 성격 전체의 본질'이 11월 쿠데타 과정에 핵심으로 나타나 있다고 했
다.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극히  모순되는 상태들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자기상승과 감정의 팽창, 이것은 애송이 도시 계획가,  작곡가, 발명가 시절
의 히스테리컬한 백일몽과  공상을 기억하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바로  이
어서 폭삭  주저 앉는 태도, 절망한  도박꾼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몸짓이 
나타난다. 무감각 상대로 침몰해 버리는 것이다. 
  9월에만 해도 그는 추종자들 중 한 사람에게 자신감에 넘쳐서 이렇게 말
했다. "로마 역사를 아시오?  나는 마리우스고 카르고 술라요. 나는 민족의 
지도자지만 그는 지배계층을  대표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번에는  마리수스
가 이길거요."  그러나 최초의 저항의  표지가 나오자 그는 행위의  인물이 
아니라 행위를 알리는 사람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
았다.
  분명히 그는 위대한  과업에 자신을 맡길 능력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그
의 신경이 그의 행위욕구를 따라가지 못하였다. 그는  '거인족의 싸움'을 예
언하였고 시민 양조장에서 흥분의 순간에, 후퇴란 없다고  확언하고 사태는 
'이미 세계적인 사건'이  되고 말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세계가를 마주
보며 수치스럽게  멀리 도망치고, "이  허위의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고 법정에서 진술하였다. 그는 한 번 더 위대한 운명을 걸고 
도박을 하였다가 판을 잃었떤 것이다. 
  연설의 능력으로 그는 모든 것을 구하였다. 패배를 뒤집은  일은 그가 얼
마나 현실에  정통하지 목한지, 또한  현실을 표현하고 채색하고  선전으로 
마무리 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얼마나 비상하게 통달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가 법정에 등장하는 태도의 냉정함과 침착함은  그의 행동의 
성급함, 무모하고 흔들리고  졸렬한 불안상태에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모습
이었다. 
  노름꾼 기질, 행운을  찾는 모험가적 요소는 출구 없는 상황으로  뛰어드
는 성향 속에 나타난다. 1923년 결정적인 상황마다 그는  전략적인 후퇴 가
능성을 남겨두지  않으려는 성향을 입증하였다.  처음에는 등을 기댈  벽을 
찾는 듯하다가는 어차피 캄캄한 사태를 더욱 암담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
인다. 정말 자살자 체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근느 무
자비한 대안을 피하려고 하는 정치적 노력을 '정치적인 난쟁이'의 이데올로
기라고 비웃었다. 그리고 '결코 지나치게 긴장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
멸감을 표현하였다. 비스마르크가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말한  것은 
'싸구려 변명'일 뿐이라는 것이다. 1905년 이후로 일련의  자살 위헙들이 그
의 존재를 늘 따라다녔던 것은 분명이 멜로드라마적인 기질의 표현 이상이
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극단적인 도전으로 나타나고, 다음에는 세계권력이
냐 몰락이냐 하는  대안 없는 돌진에 나타났다가, 제 3제국  수상관저의 지
하 벙커에 있는 소파에서 끝나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가 위대하 ㄴ
정치로 들어서는  순간에는 그러한 자살의  위협이 함께 등장하였다.  그의 
수많은 등장들은 분명히  훨씬 더 긴장된 것이고, 그가 벗어버리지  못했던 
장중한 익살의 경향을  띤 것이다. 그러나 초창기에 흥분된 쿠데타  주동자
의 주변에 이미 거대한 파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볼 수 있다고 말
한다면, 그것은 뒷날의 체험을 그의 이전 생애에 투사한  것에 불과한 것일
까?
  1923년 11월 9일을 돌파구였다. 그날 낮에 시위행렬이  오데온 광장에 접
근해 가고 있을 때,  어떤 행인이 저기 행렬 맨 앞에 있는  히틀러가 "정말 
저 거리 모퉁이에 있던 그 자식"인가고 물었다.  이제 그는 역사 속에 있게 
되었다. 11월  9일이 그의 생애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은 그가  패배를 
이용하여 역사로 통하는 출구를 억지로 열었다는 사실도  포함한다. 뒷날에
도 그렇지만, 파괴적으로  커진 틀 안에서 파국의 도움을 받아서  지속적인 
역사의 장소에 억지로 도달했던 것이다. 

    3부 <나의 투쟁>   
    제 1장 국가 사회주의의 세계상
  히틀러가 ㄹ츠베르크 요새에 있는  자기 감방 벽에 걸어두었던 월계관은 
걔지지 않은 의도에  대한 도전적이 ㄴ암시 이상의 것이었다. 체포  당해서 
정ㅊ거 사건에서 강제로 격리된 일이 그에세는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너무나 잘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11월 9일의 재앙이  당에 가져온 
결과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분노하도 ㅉ어진 추종자들이  불만을 멀리서 
관팔하고, 게다가 민족주의를  위한 순교자라는 고난의 영광까지  둘러쓰게 
되었다. 몇 년을 거의 아무 정신 없이 불안하게 보낸  다음 자기 자신을 돌
아볼 기회도 생겼다. 자신과 자신의 사명에 대한 믿음을  돌아보게 된 것이
다. 
  격앙된 감정이 잦아드는  동안, 처음에는 머뭇거리면서 요구했지만, 재판
이 진행되는 동안 점점 강해진  민족 우익의 지도자 역할이 메시아적 과업
을 지닌 유일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점차 확고한 윤곽을 잡아나갔다.  일관
성과 아주 높은 역할의식을  가지고 히틀러는 자신이 특별히 선택받았다는 
의식을 동료 수감자들 사이에 퍼뜨렸다. 
  이 순간부터 이 선별의식은 그의 외양에 가면을 쓴,  얼음장 같은 ㅁ모를 
부여하였다. 그것은 미소도, 독특하지 않은 몸짓도, 자신을  잊은 태도로 일
체 없애버렸다. 알  수 없는, 거의 추상적인  비개성의 모습으로 그는 장차 
자기가 등장하는 장면들을  통과하게 된다. 11우러 쿠데타 전에 이미  디트
리히 에카르트는 히틀러의  위대함의 망상, 그의 '메시아  콤플렉스'에 대해 
불평했다. 이제 그는  점점 더 의도적으로 조각상의 자세로 얼어붙어  버린
다. 그것은 위대함과  지도자 능력에 대해 그가 가진 이미지의  기념비적인 
영역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감방생활은 계획적인 자기 양식화 과정을 전혀 방해하지  못했다. 이어진 
판결에서 40명의  쿠데타 참가자들이 선고를  받고 란츠베르크로 이송되었
다. '히틀러 돌격대' 대원들인 베르히톨트, 하우크, 모리스, 아만, 헤스, 하이
네스, 슈레크와 대학생인 발터 헤벨이었다. 교도소측은 히틀러에게 별 갱제 
없이, 오히려 친근한  방식으로 이런 추종세력 한가운데 머무는 것을  허용
해주었다. 그의 특별한 요수들은 거의 모두 받아들여지다시피 했다. 거대한 
회의실에서 식사시간에 그는 갈고리 십자가 아래서 의장 노릇을 하였고 다
른 죄수들이 그의 방을 정돈하였으며 그는 유회와 잡일에  끼지 않았다. 그
의 뒤를 이어  감옥으로 온 동료들은 '즉시 지도자께 신고하러'  가야 했다. 
그리고 어떤 체험자의  보고에 의하면 바 10시에 규칙적으로 '대장이  참석
한 가운데 강연'이 있었다. 
  낮 동안 히틀러는  광범위한 서신교횐에 몰두하였다. 언어적으로  특기할 
만한 숭배문서는 요제프 괴벨스라는 어떤 젊은 문헌학 박하과정 학생의 글
이었다. 거기에는  히트럴의 법정 최후진술에 대해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이 거기서 말한 것은  붕괴되고 신을 잃어버힌 세계의 절망 한다운데
서 나온 새로운  정ㅊ거 신념의 신앙 고백입니다... 어떤 신이  당신에게 우
리가 고통받는 것을  말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신은 구원의 말로 우리  민족
의 고통을 파악하엿습니다... " 그리고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도 그에게 
편지를 썼다. 로젠베르크는  '수백만 개로 갈라진 우리  지도자의 상징'이라
는 '히틀러의 엽서'를  전파하였다. 외부 세계가 수감된  사람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히틀러는 자주  감옥의 뜰을 산책하엿다.  그는 아직도 옛날의  불아정한 
스타일을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심복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카이사르의 얼
굴을 하였고, 짧은  가죽바지, 민속적인 제킷을 입고 모자를 자주  썼다. 그
가 이른바 동지들의 밤에 연설을 하면 "바깥 계단실에서 소리 없이 교도관
들이 모여서 연설을 들었다."
  패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이 그는 자기 생애의 전성들과 비전들
을 전개하였다. 아누 특이한  연관성 속에서 들려주곤 하였다. 뒷날의 언금
에 따르면 고속도로 건설과 국민차 이념으 바로 이  시기에 나온 것이었다. 
면회 시간은 일주일에 여섯 시간으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히틀러는 매일 여
섯시간까지 추종자들,  청원자들, 친한  정치가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으 
란츠 베르크로 찾아왔고, 그런  사람들 중에는 여성들도 아주 많았다. 그러
므로 이 감옥을  '최초의 갈색집'(갈색집이란 뒷날 국가사회당의 당사 건물
을 칭한다)이라고 말한 것도 틀리지만은 않는다.  재판이 끝난 직후 있었던 
히틀러의 서른다섯 살 생일에는 이 유명한 죄수에게 배달되어 온 꽃다발과 
소포들의 여거 개의 방을 가득 채웠다. 

    변칙적인 독서
  억지로 숨돌릴 시간을 얻은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재고조사를 해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감정들을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전에 읽다만 것, 절반  쯤 생각해 둔 것 등을 최근의  독서결과와 합쳐서 
세계관 체계의 윤곽으로 만들어 나갔다. "이  시기는 나에제 그때까지 오직 
본능적으로만 느끼고 있던 수많은 개념들을 분명히 할 기회를 주었다. "
  그가 실제로 무엇을 읽었는가는 저체적으로 간접증거에 따르거나 아니면 
제 3자의 발언에서 얻어온 것들이다. 그 자신은  정신적 종속이라는 의심을 
받을지 모른다는 독학자의 근심에  사로잡혀서 책이나 어떤 작가를 언급하
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쇼펜하우어의 이름만 여러 번이나  서로 다른 맥락 
속에 등장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히틀러는 이미 전쟁중에도 지니고  잇었
다고 하며, 상당히 긴 구절들을 인용할 수 있었다. 니체, 쉴러, 레시으이 경
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인용을 피하였고, 이러한 방
법으로 독자적으로 깨달았다는 인상을 만들어냈다. 
  1921년의 자전적인 묘사엣 그는 천년기에 "민족경제 이론들을 철저히 연
구하였다. 당시 이용할 수 잇는 반유대주의 문현도 전부 연구하엿다."고 말
햇다. "스물두 살부터 나는 특별한 열의를  가지고 군사정치 문헌들을 잡았
으며, 아주 집중적으로  일반적인 세계사 문제를 탐구하는 일을 결코  중단
한 젓이 없다.  "그러나 한 번도 어떤 작가나  제목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어느 정도 동떨어진 방식으로 분량을 말하고 자기가 공부하는 전체
적인 영역만을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상당히  멀리 내다보는 몸짓으로 예술사,  문화사, 건축사, 
'정치적인 문제들'을 읽는다고 거론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때까지 원전들이 
아니라 두 번째, 세 번째 손을 거친 요약으로만  지식을 섭취했다는 의심이 
든다. 한스 프랑크는 란츠베르크 시절에 그가 읽은  책들로 니체, 체임벌린, 
랑케, 트라이치케, 마르크스, 비스마르크 등을 거론하였고, 도이치측과 연합
국축의 전쟁  회고록들을 거론하엿따. 그러나 그런  책들과 나란히, 그리고 
그보다 먼서 그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거의 찾아내기도 힘든  원전들에서 
추려낸, 학문적이지 않은  소책자들이 제시하는 침전물에서 자신의  세계상
을 걸러냈다.  즉 종족주의적이고 반유대적인 책자들,  게르만 정서에 대한 
이론서, 혈통의 신비와 우생학, 역사철학적인 논문들과 다원주의 이론 같은 
것들이었다. 
  히틀러의 독서에 대한  상당수의 동시대 증언들에서 믿을  만한 것은 그 
집중도와 열의이다. 쿠비체크는 히틀러가 린츠에서 이미 세  개의 도서관에 
동시에 등록하고 있었고,  '책들에 둘러싸인 모습밖에는' 기억에  없다고 증
언하고 있따.  그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자기는 책을 '그냥  열어보았거나' 
아니며 '얼추 읽곤'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원탁대화에 이르기까지 히틀러
의 연설과 글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기억은 이상할  정도로 정신적인 무
관심과 문자에 대한 무관심을 보여준다. 거의 2백  번의 원탁독백에서는 간
혹 두세 명의 고전작가가 등장할 뿐이다. <나의 투쟁>은  단 한 번 몰취미
한 유대주의 맥락에서 괴테와 쇼펜하우어를 거론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지식은 그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는 지식의  높은 감정도 수
고도 알지 못했고,  오직 그 쓸모만을 알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올바른 
독서의 기술'이라고 말한 연습은 자기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에 대
해서 사용형식을 찾고 존경받는 선서보증인을 찾는 행위에 불과하였다. '어
떻게든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에 적합하게 꾸려넣는 방법'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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