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 주제의식의 역사적 변모양상
춘향전 주제의식의 역사적 변모양상
1. 머리말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걸친 판소리문학의 역사적 전개를 어떻게 볼 것인
가 하는 문제는 현재 국문학계의 주요 쟁점으로 자리잡고 있다. 전승5가 및 실전판소리를
대상으로 한 수많은 논의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제시돼 왔다. 판소리의 역사적 전개에 대한 연구의 경과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종철, {판소리사 연구}, 역사비평
사, 1996, 11-19면 참조.
그 논의의 중심에 놓여 있는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춘향전] 이하 '춘향전'과 '춘향가'를 따로 구별하지 않고 소설적인 텍스트와 판소리적인 텍스트를 통칭하여
'춘향전'으로 부르기로 한다.
이라고 할 수 있다. 논쟁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연구자들이 [춘향전]을 기
본
텍
스트로 삼아서 판소리사에 대한 관점을 입론해 왔다. [춘향전]을 주요 분석대상으로 삼아 판소리사에 관한 관점을 제시한 논문들 가운데 주요한 것을 발표
순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8집, 1979.
정병헌, [춘향가를 통해 본 신재효의 작가의식], {국문학연구} 제45집, 1979.
임진택, [이야기와 판소리], {민중연희의 창조}, 창작과비평사, 1981.
박희병, [춘향전의 역사적 성격 분석], {전환기의 동아시아 문학}, 창작과비평사, 1985.
박희병, [판소리에 나타난 현실인식], 장덕순 외, {한국문학사의 쟁점}, 집문당, 1987.
김흥규, [19세기 전기 판소리의 연행환경과 사회적 기반], {어문논집}(고려대 제30집, 1991.
김종철, [19세기-20세기초 판소리 변모양상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3.
김현양, [19세기 판소리사의 성격], {민족문학사연구} 제3집, 1993.
정출헌, [춘향전의 인물형상과 작중역할의 현실주의적 성격], {판소리연구} 제4집, 1993.
박일용,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의 사실적 성격], {조선시대의 애정소설}, 집문당, 1993.
설성경, {춘향전의 통시적 연구}, 박이정, 1994.
김종철, [19세기-20세기 초 판소리 수용양상 연구], {판소리사 연구}, 역사비평사, 1996.
이
처
럼
[춘향전]이 집중적인 관심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이 작품이 지니는 역사적 무게 때문일 것이다. [춘향전]은 현실적 삶의 양상을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리얼하고 생동감있게 형상화하고 있으며, 그에 걸맞게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전폭적인 호응을 얻으면서 자기 변신을 거듭해 온 작품인 것이다.
[춘향전] 분석을 통하여 도출된 판소리사에 대한 관점은 가지각색이다. 19세기 이래로 판
소리가 서민층은 물론 양반층의 의식까지 포용함으로써 국민문학으로 부상했다는 종래의 교
과서적 관점에 대하여, 19세기 이래로 판소리가 양반취향에 맞게 변질되는 가운데 본래의
민중문학적 생동감을 상실했다는 주장 이러한 관점은 김흥규의 일련의 논의(앞에 제시한 논저 목록 참조를 통해 뚜렷이 제기된 이후로 여러
문학사서와 개설류의 글에 두루 수용되고 있다.
과
이
시기에 판소리가 민중문학으로서의 특성을 유지 내지는 강화해 왔다는 주장 앞에 제시한 여러 연구 가운데 박희병의 논의에서 이러한 관점이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김현양과
정출헌의 논의 또한 유사한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이
맞
서 있다. 여기에 19세기말 20세기초를 거치며 판소리의 민중성이 근대적 시민성으로 전화되는 양상이 나타났다는 견해도 제출된 바 있다. 김종철, 앞의 논문들.
이제 이 쉽지 않은 문제에 대하여 하나의 췌론을 보태려 한다. 그 논제는 [춘향전] 주제
의식의 역사적 변모양상이다. [춘향전]의 주제가, 그리고 그 구현양상이 사적으로 어떠한
변모를 겪었는지를 주요 이본을 통해 추적함으로써 판소리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탐색하
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필자는 이전에 '신학균본 별춘향가'를 텍스트로 삼아서 [춘향
전]의 주제구현 양상을 새롭게 해명하는 작업을 작품론 차원에서 수행한 바 있는데, 졸고, [평민독자의 입장에서 본 춘향전의 주제--신학균본 별춘향가를 중심으로], 판소리연구 제6집,
1995.
이
번
의
논의는 그 관심을 역사적 전개 쪽으로 확대하는 작업에 해당한다.
춘향전 주제의 역사적 변모라는 새롭지 않은 논제에 대한 이번 논의 특유의 접근 방식을
든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작품의 문학적 성취를 제대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방향에서 문제
를 다루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의 많은 논의들이 '어느' 주제가 '얼마나' 부각되는가
를 다루는 데 그친 데 대하여, 이번 논의에서는 작품에 내재한 주요한 의미의 '속성'(또는
'질'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문학적으로 실현되는 양상을 분석하는 데 작업의 주안점을 두려
고 한다. 의미의 문학적 실현 양상을 살핌에 있어서 우리는, 전번의 논의에서 그랬던 것처
럼, 주인공과 주변인물, 독자(청자 사이의 역학관계를 논의의 주요 축으로 삼음으로써 문
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도출해내고자 한다.
이 논문의 논의 대상은 완판 판본들 및 이와 긴밀한 연관을 지니는 주요 이본들로 한정되
며, 경판 계열(남원고사계 이본들은 논외로 한다. 여러 계통의 이본을 한꺼번에 다루지 않
는 것은 서로 역사적 관련이 있는 이본들을 대상으로 하여 구체적 분석을 진행하는 것이 보
다 유효한 결론을 도출하는 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 때 완판 계열을 우선적인 논의 대
상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경판 계열보다는 완판 계열의 이본들 속에 판소리
의 숨결이, 판소리사의 곡절이 잘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분석대상으로 삼을 구체적인 텍스트는 모두 7편이다. 완판29장본, 완판33장본, 신재효본
(남창, 완판84장본, 신학균본, 박순호99장본, 장자백창본 등이 그들이다. 이 이본들 가운데 '신재효본'이나 '신학균본' 등은 딱히 '완판 계열'로 규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신재효본은 창작물로서의 성격이 강하며, 신학균본은 경판 계열과도 친연성이 있는 이본이다. 그러나
이들이 완판본과 깊은 역사적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 또한 내용상 뚜렷이 확인되는 사실이다. 서로 역
사적 연관이 있는 것을 묶어서 다룬다는 것이 우리의 취지인 만큼 이들을 논의대상으로 포괄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이 중 신학균본과 99장본, 장자백본 등은 기존의 논의에서 그리 주목되지 않았던 것들인데, 이번 논의에서 비중있게 다루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이번 논의가 판소리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도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이본들에 적잖이 힘입게 될 것이다.
2. [춘향전] 주제에 대한 시각
널리 알려져 있듯이, [춘향전]의 주제는 단일하지 않다. 여러가지 중요한 의미들이 작품
속에, 각 이본 속에 다각적으로 얽혀 있다. 이러한 특징은 '주제의 양면성'이나 '다양성',
'다층성' 등으로 규정돼 왔다.
[춘향전]의 주제에 관해서는 그간 아주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거니와, [춘향전] 주제에 관한 그동안의 논의에 대해서는 정하영, [춘향전의 주제], 장덕순 외, {한국문학사의
쟁점}, 집문당, 1987 및 [춘향전 주제론 재고], {춘향전의 종합적 고찰}, 아세아문화사, 1991 참조.
그 논의 결과를 무리를 무릅쓰고 단순화하면 이 작품에서 주제로 부각되고 있는 주요한 의미는 크게 네 가지 정도로 집약된다. '사랑', '정절', '신분갈
등
', '관민갈등' 등이 그것이다. 이밖에도 각 장면 차원에서 구현되는 다양한 의미들이 있지만, '주제'라는 이름에 걸맞는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위의 넷으로 압축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네 의미요소가 여러 [춘향전] 이본들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한데 얽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춘향전] 주제의 역사적 변모에 대한 논의는 일차적으로 그 의미요소들의 변주양상 및 관
계양상에 대한 고찰을 필요로 한다. 각 이본 속에서 어느 의미요소가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지를 해명하고 거기 얽힌 의식을 검출할 필요가 있으며, 여러 의미요소들이 어떤 상호 관련
속에서 작품의 전체적 의미망을 형성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런 다음 각 이본에 대한 분석
의 결과를 통시적으로 종합함으로써 작품 주제의 역사적 변모에 대한 개괄적인 밑그림을 그
릴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각 이본에서 나타나는, 또한 이본의 각 서사적 국면에서
나타나는 의미의 '속성'을 분석하는 일이다. '사랑'이나 '정절' 등의 의미요소는 그 구체적
속성 면에서 다양한 편폭을 지닐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다양한 이본을 놓고서 그 문
면을 세심히 살펴볼 때 실제로 그러한 차이가 포착이 되고 있다. [춘향전]에 있어 '사랑'이
나 '정절'이라는 의미는, 그리고 '신분갈등'이나 '관민갈등'이라는 의미는 어느것 하나도
그 속성이 단일하지가 않다. 그것은 여러 가지 미묘한 차이를 지니며, 때로는 서로 상반될
정도로 판이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1 [춘향아 우리 두리 업움질이나 좀 여보자.] [ 고 잡성시러워라. 업움질을 엇더케 잔
말리요.] [너와 나와 활신 벗고 등도 고 도 면 마시 나제야.] [나는 붓그려워 못것
소.] [어서 버셔라. 어서 버셔라.] [나는 붓그려워 못 벗것소.] [에라 이 게집아 안될 말리로다.
어셔 버셔라. 어셔 버셔라.] 만첩청산 늘근 범이 살진 암 무러다 노코 이는 져 먹던 못고
흐르렁 흐르렁 어루난듯, 북 상의 황용이 여의주를 물고 운간의 넘노난듯, 도련임 급 마
와락 달여들어 츙향의 가는 허리을 후리처안고 저고리 풀며 바지보션 다 벗겨노와 니 츈향이 못
이긔여 이 젼의도 구실 이 송실송실 [ 고 잡성시러워라.] [네가 뉘 간장을 녹일나고 이리 곱게
겨난야. 여 라 츈향아 이리와 업피여라.] 오슬 버신 게집아라 엇절주를 몰나 붓그려워 못전
는 아히를 업고 못 소리가 업다. [ 고 츈향아 네가 등의 업퍼 니 네 마 이 엇더야.]
[정이 업시 좃소.] (… [사랑노 다 바리고 탈승 노 드러보소. 타고노자 타고노자. 헌원
씨 시용간과야 능작 뭇지르고 탁녹야 사로잡어 지남거 빗겨타고 남원쳔 구경 제, 이적션 고
타고 안기 나구 타고 일모장강 어옹더런 일엽션 도도 타고 만경창파 어긔야 어기양 며
나간다. 나는 탈 것 바이 업서 츈향 자바타고 탈승 로만 둥둥둥 노라보자. 밤나지로 셰월 가는
줄 모로고 이 지경으로 노라노니 형용이 완젼리. <33장본. 9-10장>
(2 도련님 기가 막켜 우룸이란계 말이난 사람이 잇시면 더 우던 거시엿다. 춘향 홰를 여
[여보 도련임 아굴지 보기 실소. 그만 울고 력 말리나 오.] [사 계옵셔 동부승지 계시단
다.] 춘향이 조와여 [ 의 경사요. 그례서 그러면 웨 운단 마리요.] [너을 바리고 갈터인니
안이 답답야.] [언졔는 남원 으셔 평 사르실 줄노 알어곗소. 날과 엇지 함기 가기를 바 리
요. 도련임 먼저 올라가시면 나는 예서 팔 것 팔고 추후에 올나갈 거시니 아무 걱졍 마르시요.
말 로 엿스면 군속잔코 졸 거시요. 가 올나가드 도 도련임 큰 으로 가셔 살 수 업슬 거시
니 큰 각가이 조구만한 집 방이나 두엇 되면 족오니 연탐여 사 두소서. 우리 권구 가더 도
공밥 먹지 아니 터이니 그렁져렁 지 다가 도련임 날만 밋고 장 안이 갈 수 잇소. 부귀 영총
상가의 요조숙여 가리여서 혼졍신셩 지라도 아주 잇든 마옵소서. 도련임 과거야 벼살 놉파
외방 가면 실 마마 치 졔 마마로 셰우면 무삼 마리 되오릿가. 그리 아라 조쳐오.] [그게
일를 말인야. 사정이 그러켜로 네 말을 사 계난 못 엿주고 부인젼 엿자오니 종이 단시며
양반의 자식이 부형 라 하 의 왓다 화방작쳡야 다려간단 마리 젼졍으도 고이고 조졍으 드
러 벼살도 못다던구나. 불가불 이벼리 될박그 수 업다.] 춘향이 이 말을 듯더니 고닥기 발연 변
이 되며 요두졀목으 불그락 푸르락 눈을 간잔조롬게 고 눈셥이 여지면서 코가 발심발
심며 이를 도독 도독 갈며 온 몸을 쑤순입 틀덧며 차난 듯고 안던이 [허허 이게
웬 말이요.] 왈칵 여 달여들며 초 자락도 와드득 좌루욱 져 바리며 머리도 와드득 쥐여 더
싹싹 비벼 도련임 앞푸다 던지면서 [무어시 엇져고 엇졔요.] <84장본. 36-38장>
(3 츈 니 니 말을 듯고 [ 고 이겨 원말리오. 아 와셧든 님이 시예도 와셧단니 니야
시든야.] 급 마음 와락 여나오잔들 목으 젼모칼니오 수족은 항쇄 족 형문마진 두
달리 장독니 나셔 촌보 길 젼이 업고 만슈비봉 흣틀어진 멀리을 글령졀령 집어연 칼멀니을
일니 몽그작 졀니 몽그작 여 간신니 나오셔 [ 고 고 셔방님 와겻쇼.] (… 츈 니 는 말리
[아시시요 어만 그게 무신 말 니요. 여보시요 셔방님 울리 모친 신 말 쇽상여 노망니요.
허물치 말의시요. 의 말 들어보시요. 쳡의 즁심 원기을 유졍낭군 귀니 되야 이 셜치을
여 쥴가 쥬야츅수 발 던니 졀엇타시 글읏되야 결 으로 와셧신니 니도 팔 라 한탄들
어니며 통들 무엇 리. 여보시요 어만니 니졔는 하일업시 십분구 되얏씨니 목슘 나 크
잔오나 의든 금봉 을 자 함의 너헛신니 시문 여다가 되는 로 팔어셔 셔방님 관망근과 의
복을 날 본다시 여쥬고 월광단 남 쥬먼니 당팔 벌 답 고 일광단 홍 엽낭 경팔 고 영
초쌈지 여 함의 넛니 여쥬시오. 나는 이무 쥭건니와 어만니가 아무죨록 시시공양 맛츄
어 착실리 밧들의시고 쳔 으로 도령님니 귀니 되면 셜마 괄셰올잇가.(…] 한슘짓코 안는 모양
아물리 쳘셕인들 안니 울고 젼들숀야. 잇 의 어삿도니 마음니 긔가 켜 동원을 바 보며 어언간
의 일리 나것고 츈 모와 상단니며 눈이 붓계 울고 어삿도는 엇지 울엇던지 눈이 붓고 목니 슈
여 졍 은 못볼네라. (… 잇 의 어삿도니 곰곰 각니 졀 잇는 계집니라 밤일을 알슈업
셔 단단이 부탁 되 [여바라 츈 아 가 셔울셔 네 쇼식을 듯고 훌연 장과 병죠판셔 두 신젼
의 편지을 맛더다가 슈영무의다 붓치고 왓신니 일 오시면 너을 방으로 노흘리라. 울리 둘리
다시 맛나 업시 이 말 일으고 살어야졔 죽어셔야 씰 일리야.] <99장본. 84-88장>
이는 모두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의 역정과 관련되는 낯익은 대목들이다. (1은 춘향과 이
도령이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고, (2는 이도령이 춘향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이
며, (3은 걸인 행색의 이도령이 옥에 갇힌 춘향을 만나는 장면이다. 우리가 유의할 것은
이들 각 장면에서 두 인물이 빚어내는 사랑의 성격이 서로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1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풍정(風情' 차원의 분방한 사랑이다. 아직 세파를 겪지 않
은 철없는(? 청춘남녀가 본능으로서의 애욕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희열을 찾고 있는 모습이
다. 이해관계라든가 윤리의식 등에 앞서는 원초적 차원의 사랑이다.
이에 대하여 (2에서 우리는 두 인물의 애정 속에 이해관계가 얽히고 있음을 본다. 자신
의 전로를 위하여 춘향을 떼치는 이도령의 모습이나, 물정 모르고 장밋빛 계산--이도령을
따라 한양에 가서 살림을 차렸다가 뒷날 이도령이 외방에 부임할 때 실내마마 행세를 하려
는 식의--을 하고 있다가 그것이 오산이었음을 알고 펄쩍 뛰는 춘향의 모습은 매우 현실적
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도령은 무책임하게 애욕을 채워 왔고 춘향
은 나름의 계산속에서 애정행각에 동참했다고 생각하게 하는 면이 없지 않다. 현실적·세속
적 사랑이다.
(3에 형상화되고 있는 사랑은 또 다르다. 모진 형벌을 당한 몸으로 옥중에서 형언하기
힘든 참혹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살아날 희망을 잃고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된 상황에서 오
히려 상대방을 걱정하고 있는 춘향의 사랑은 이해관계를 초월한 순수한 사랑이며, 상대방을
나의 소중한 일부로 삼는 자타합일적 사랑이다. 그러한 춘향의 마음에 감동하여 울면서 춘
향을 위로하는 이도령의 모습을 통하여 자타합일의 사랑은 일방의 것이 아니라 서로의 것으
로 완성이 된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피어나는 그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은 감동 속에 독자
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있다.
'사랑'을 하나의 예로 들었지만, '정절'이나 '신분갈등', '관민갈등'의 의미요소 또한 작
품 속에서 그 속성이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타나고 있다. 춘향이 지키는 정절은 유교적 이념
의 의식적 구현으로서의 정절일 수 있는 한편으로, 그와는 차원이 다른 자연적·자발적인
신념으로서의 정절로 구현되기도 한다. 춘향의 정절을 유교적 이념과 구별되는 '자발적 신념'으로 해석하는 입장은 박희병에 의하여 표명된
바 있다. 박희병, 앞의 논문(춘향전의 역사적 성격, 111-115면. 성현경 또한 춘향의 수절을 "권리로서
쟁취하여 능동적으로 수호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수절이요 맹목적이고도 불합리한 수절이 아니고, 어디
까지나 합목적적이며 합리적인 수절"이라고 평한 바 있다. 성현경, [남원고사본 춘향전의 구조와 의
미], {고전소설 연구의 방향}, 새문사, 1985.
'신분갈등'의 의미는 특수한 개인의 '신분상승'을 문제삼는 차원에서 표출되기도 하고, 사회의 제도적 불평등을 문제삼으면서 '인간해방'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부
각
되
기도 한다. 기생 신분을 벗어나려는 춘향의 노력에서 '인간해방'의 지향을 검출하는 시각은 조동일([갈등에서 본
춘향전의 주제], {계명논총} 7, 1970, 22면 이래 여러 연구자들에 의하여 가다듬어져 왔다.
'
관
민
갈
등
'
또한 변학도에 대한 춘향이라는 인물의 개인적 저항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부정한 관권에 대한 민중의 집단적 저항으로서 구체화되기도 한다. 졸고, 앞의 논문에서 관권의 부당한 횡포에 대한 민중의 집단적 항거의 양상에 대하여 상세히 논한
바 있다.
이
러
한
차
이
들은 아주 본질적인 것으로서, [춘향전] 주제 논의의 필수적 분석대상을 이룬다.
그런데 그 의미의 속성이란 실상 특정 장면을 따로 떼어가지고 따질 성질의 문제는 아니
다. 그것은 작품의 서사의 맥락 속에서만 제대로 규명될 수 있다. 한 예로 (1에서의 춘향
과 이도령의 사랑의 행위를 '풍정(風情'으로 규정한 것은 그에 앞선 두 인물의 만남의 과
정 및 작가의 서술시각 등을 고려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요컨대, 작품의 주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의미가 '서사적으로 실현되는 양상'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작업을 필
요로 한다.
중요한 것은 의미의 서사적 실현 과정에서 그 속성의 질적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아
니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서로 속성이 다른 '사랑'의 양상을 제시했거니와, 그
차이는 실상 서로 다른 이본이 아닌 동일 이본 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전반부에 있어 다
분히 철없고 자기중심적으로 그려지던 이도령과 춘향의 사랑이 작품 후반에 있어 순수하고
성숙된 자타합일적 사랑으로 변화되는 양상이 여러 편의 이본에서 뚜렷이 확인되는 것이다.
서사적 전개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의미의 질적 변화는 작품의 의미를 역동적으로
상승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춘향전]에서 춘향과 이도령의 성격이 성숙하고 그들이 이루는 사랑이 질적으로 상승하고 있음은 여
러 논자가 지적한 바 있으며, 필자 또한 그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핀 바 있다. 윤세평, {고전 춘향전 연
구}, 국립 인문출판사, 1948({판소리연구} 제3집에 [춘향전에 대한 분석과 연구]로 재수록, 오세영,
[춘향의 성격 변화], {국어국문학} 70, 1976, 박희병, 앞의 논문(1985, 정출헌, 앞의 논문, 졸고, 앞
의 논문 참조.
의미요소의 속성이 질적으로 변화하는 양상은 '신분갈등' 및 '관민갈등'의 요소에서도 뚜
렷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신학균본을 대상으로 하여 의미의 변전 양
상을 상세히 살핀 바 있다. 그 논의 결과는 독자가 작중인물 및 상황에 정서적으로 밀착돼
나가는 가운데 작품의 의미가 신분상승으로부터 신분해방으로, 개인적 항거에서 집단적 항
거에로 확장돼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결론을 일부분 옮겨 본다.
작품 전반부에 형상화된 춘향과 이도령의 형상은 본질적으로 '솜씨 좋은 기생'과 '부귀있는 양
반자제'의 그것으로서, 평민 독자들의 전폭적인 공감을 얻기에는 특수하고 이질적인 것이다. 그들
의 만남과 결연은 독자들에게 '한가한 사랑놀음'으로서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면모를 지니
고 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닥친 이별을 통해 춘향의 가련한 신세가 부각되면서 중요한 공감의 계
기가 마련되지만 이 장면에서의 공감은 아직 부분적이고 밀도가 낮은 것이었다.
그러던 중 작품 중반에서 발생하는 '춘향 사건'을 통해 그 양상은 결정적으로 변화한다. 춘향
은 수청을 거부한 결과 변학도로부터 참혹한 형벌을 받거니와, 이 지점에서 변학도의 탐관으로서
의 본질이 폭로되면서 민심이 이반함과 동시에 춘향은 관권에 의한 억울한 피해자의 표상, 저항의
화신으로 떠오르게 된다. 독자들은 이 장면에서 눈물 속에 춘향과 하나가 되는바, 이때의 일체감
은 그야말로 전폭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일체감 속에서 한편으로 관권의 부정한 횡포에 대한
저항의식이라는 의미가 구현되며, 또한 춘향의 신분상승과 사랑에 대한 지향이 '반봉건적 인간해
방'으로서의 의미를 부여받는 가운데 사람들의 가슴 속에 각인된다. 졸고, 앞의 논문, 217면. 이 결론은 '신학균본 별춘향가'라는 한 이본에 대한 것으로, 아직 일반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편, 신분갈등 내지 관민갈등의 의미가 개인적인 것
에서 집단적인 것으로 확산돼 나간다는 인식은 필자가 처음 제기한 것은 아님을 밝혀 둔다. 조동일([갈
등에서 본 춘향전의 주제], {계명논총} 제6집, 1969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가 이를 지적한 바 있다. 이
에 대하여 필자의 논의는 독자와 작중상황의 역학관계에 기초하여 의미의 변전 양상을 더욱 세심히 고
찰한 것이었다.
필자는 이와 같은 '의미의 질적 비약'의 성취 여부를 살피는 것이 [춘향전] 각 이본의 문
학적 가치를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고 보고 있다. 과연 그러한 의미의 비약이 나타나
고 있는지를, 그것이 얼마나 현실적·필연적으로, 역동적으로 부각되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문학적 감동으로서 각인되는지를 가려 따져야 한다. 우리의 이본 대비는 이 점에 주안점을
둘 것임을 예고해 둔다.
3. 주제의식의 변모양상
3.1. 본래의 구도 - 완판29장본, 33장본
[춘향전]은 판소리로서의 오랜 구비적 전승과정을 거쳐, 19세기 중엽부터 활발하게 국문
텍스트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완산에서 '별춘향전'이라는 표제가 붙은 29장본의 판각본이
나온 것이 이 무렵의 일이며, 33장본 열녀춘향수절가가 그 뒤를 이었다. 이 이본들을 통하
여 우리는 완판 계열 [춘향전]의 '본래의 모습'과 만날 수 있다. 이 자료들이 나온 시기가
이른 것도 그렇지만, 이들이 모종의 '의도적인 개작'의 세례를 입지 않은 '순수한' 이본들
이라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한 가지 짚고넘어갈 문제는 완판33장본의 간행시기이다. 30장본이 19세기 중엽의 자료임이 인정되고
있는 데 비하여 33장본(병오판 열녀춘향수절가에 대해서는 1846년설(김동욱·설성경 등과 1906년설
(유탁일·성현경 등이 엇갈리고 있다. 1846년설은 내용상의 특징을, 1906년설은 문헌적인 특징을 논거
로 삼고 있는데, 어느쪽이 옳다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이 논문에서는 고심 끝에 이 이본의 내용이 신재
효본보다 앞선 시기의 모습을 반영한다는 점을 중시하여 30장본과 함께 전시기 자료로 다루기로 하였
다. 설사 이 이본의 간행연도가 1906년이라고 하더라도, 이 이본이 30장본과 맺고 있는 깊은 친연성을
통해 볼 때 그 내용이 이전 시기 춘향전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라는 전제는 여전히 유효하리라고 본다.
완판29장본과 33장본은 뚜렷한 친연성을 지니는 이본이다. 인물의 성격이나 서사적 골격
이 유사하며 행문이 그대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이는 33장본이 29장본의 내용을 수용한 결
과로 이해가 된다. 그렇지만 두 작품은 그 구체적 장면에 있어 크고작은 차이를 보이고 있
으며, 그것은 주제 구현양상의 차이로 이어지고 있다.
3.1.1. 완판 29장본
완판29장본에 있어 작품의 주요한 의미요소들은 이도령과 춘향의 만남 부분에서 두루 그
모습을 선보이고 있다. 두 인물의 대면은 다음과 같이 그려진다.
(4 이도령의 거동보소. 단슌호치 반 야 웅 교담으로 말 야 일은 말니 [네 얼골 보와
니 일국의 졀 미라. 네 밧비 올으거라.] 츈향니 거동보소. 츄파를 잠간 드려 이도령을 살펴보니
당셰의 호걸니요 진셰간 기남 라. 쳔졍니 놉파시니 소년공명 기시오 오악니 조구니 닐국츙신
거시 츈향니 흠모야 미을 슈기고 념슬단좌 니로다. 이도령 난 마리 [네 연셰 얼마며
네 셩은 무어신다.] 츈향니 엿 오 [년셰 십뉵셰요 셩 셩가라 나니다.] 이도령 거동보
소. [어허 그말 반갑도다. 네 연셰 드르니 날과 한 동갑니요 셩 를 드르니 니셩지합니라. 쳔연
일시 분명다. 날 셤기미 엇더요.] 츈향니 엿 오 팔 쳥산 긔며 쥬순을 반 야 간은목
계우 여러 엿 오 [츙불 이군이요 열블경이부졀은 옛글의 일너 오니 도령님은 귀공 요 쇼녀
천쳡니라. 한번 탁졍 후 인야 바리시면 독슈공방 누어 우 안니고 뉘가 할고. 그런 분
부 마옵소셔.] 이도령 니른 마리 [네 마를 드러보니 어이 안니 긔특리. 우리 두리 인연 질제
금석뇌약 지리라. 네 집니 어 요.] 츈향이 거동보소. 셤셤옥슈 놉피 드러 한곳 넌즛 갈으치
되 (… <5장>
이 대목에서 우리는 사랑, 정절, 신분갈등의 여러 의미를 한꺼번에 접할 수 있다. 춘향과
이도령이 상대방에게 연심을 품는 모습이 보이며, 춘향의 대사를 통해 '열불경이부절'의 정
절에 대한 지향과 함께 '천쳡'으로서의 신분의식이 표출되고 있다.
이 여러 의미요소 가운데 두 사람의 만남의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는 '사랑'으로 판
단된다. 춘향에 대한 이도령의 '풍정'이 일종의 연심이라 할 수 있는데 더하여, 춘향의 심
리에서도 이도령의 빼어난 풍모에 대한 흠모의 감정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도령이 '금석뇌
약'을 맺겠다고 하는 말에 춘향이 선뜻 자기 집을 가르쳐주는 것은 이미 마음이 이도령에게
이끌렸다는 증좌다.
일단 실마리를 찾은 둘의 사랑은 쾌속으로 진행된다. 춘향의 집을 찾은 이도령을 춘향이
반갑게 이끌어들이고(춘향모의 개입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도령의 언약과 함께 술자
리가 펼쳐지며, 첫날밤의 사랑의 행위가 이어진다. 양반자제와 기생 사이의, 특별히 거리낄
것 없는 '평범하고 순탄한' 사랑이다. 30장본에서 춘향은 '기생'으로 설정돼 있으며, 실제 기생으로서의 행동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이도령과 춘향의 결연은 관습을 넘는 자유 연애로서의 파격성을 잘 갖추지 못하고 있다. 또한 30장본은
초야 사설이 아주 간략하여, 십여줄의 사랑가가 전부이며 업음질 등의 질탕한 사랑놀음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청춘남녀의 분방하고 흥성한 환락적 사랑이 드러내는 파격성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둘의 사랑
을 '평범하다'고 표현한 것은 이러한 특성에 따른 것이다.
춘향과 이도령의 이별은 그 만남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손쉽게 이루어진다. 이도령은
별다른 고뇌 없이 춘향에게 이별을 통고하며, 춘향은 이를 현실로서 받아들인다. 미혼의 양
반자제와 기생 간 결연의 예정된 행로인 셈이다. 춘향이 "날갓턴 방천쳡니야 숀톱만치나
각릿가. 날만날만 달리가오" 하고 한탄하는 대목에서 천민의 설움을 공감하게도 되지
만, "엇다 이년아 우리 너만할 行娼으로 열어번 여시되 져다지 여본 일이 업다"하
고 춘향을 꾸짖는 춘향모의 모습은 그 이별을 '억울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되돌리고 있다.
작품의 의미는 춘향이 변학도와 싸우는 과정에서 전환의 계기를 맞는다. 춘향이 수청을
거부하다 옥에 갇혀 시련을 겪는 일련의 과정에서 작품의 의미가 다각적으로 확장 내지 심
화된다. 이도령에 대한 춘향의 깊은 사랑이 확인되는 한편으로, 춘향이 절개가 매우 뛰어난
인물임이 천하에 드러나면서 정절의 의미가 선양된다. 이와 함께 자신을 천시하여 모욕하는
변학도에 맞서 항변하다가 엄중한 형벌을 당하는 춘향의 모습을 통하여, 신분차별의 부당성
에 대한 인식과 함께 관의 횡포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식이 환기된다.
그러나 그 싸움의 과정에서 작품의 의미가 확산되고 비약되는 데는 일정한 제한이 있다고
판단된다. 춘향에 대한 주변인물의, 나아가 독자의 공감의 계기가 마련되기는 하나 그것이
충분히 서사적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29장본의 십장가 대목은 아주 소략하게
돼 있고, 춘향이 받는 모진 형벌에 대한 사람들의 감응의 과정이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남원부민이나 기생들이 악형을 받는 춘향에 대하여 심정적 일체감을 가지면서 관에
대한 저항감이나 천민의 설움을 표출하는 장면이 보이지 않는다. 단지 남원 한량들이 찾아
와 소동을 피우면서 춘향을 위로하는 장면이 들어 있을 뿐이다.
(5 열치고 박 가 삼십도을 아 칙가엄슈 영니 난니 연약 로셔 호흡니 막킨 중의
졍신을 찰릴손야. 고즁의 큰닥헌 젼목칼을 옥갓턴 목의 무릅시고 항 슈 죡 고 칼머리예 닌
봉고 검멀못 쳘박야 옥으로 러온니 춘향니 통곡며 일은 말리 [국곡투식야던가 엄형즁슈
무 일고. 살닌죠ㅣ 안니여든 항 죡 무 일고.] 정니 등의 업피여셔 긔 야 나올젹의 잇
남원 냥 거슥이 무슉이 평슉이 진슉이 여슉이 부슉니 문쥬가 올젹의 잇 츈향이 즁장고
나오물 보고 작 놀 달녀들여 츈향손 덥벽 잡고 [업다 니 어닌 일이나. 정신 려 진졍라.]
[동변을 들리라.] [쇼합환 들리라.] [쳥심환 들리라.] 무슉이 쎡 다라 [ 쥼지여 잇던니라.]
[그려면 속히 소.] 한쥼을 ㅈ여 제 톡기 이 분명다. <17-18장>
요컨대 29장본에서 변학도와 춘향의 싸움은 변학도의 횡포에 대하여 춘향이 한 개인으로
서 맞서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깊은 사랑과 절개심을 지닌 여인이 그것을 깨뜨리려는 방
해자와 맞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그 과정에서 구현되는 사랑과 정절의 의
미는 중요한 것이지만, 그 의미가 독자들에게 '나의 것', '우리 모두의 것'으로 실현되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와 함께 신분 차별의 현실과 관권의 부정한 횡포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또한 문제점이 된다.
그러나 이 이본에서 작품 주제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고 단정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비록 그 변전의 과정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작품 후반
부에서 변학도에 대한 춘향의 싸움이 어느 사이에 남원고을 백성 전체의 문제로 확산돼 있
는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
(6 어 의 일른 말리 [이 골 졍쳬 엇 고.] 농부 답하되 [우리 졍쳬 엇 할 것
닛쇼. 원임은 노망이요 좌슈은 쥬망니요 아젼는 도망이요 셩은 원망인니 사망니 물미듯 지
요.] 어 다시 무르되 [들른니 츈향이가 슈쳥들시 분명헌가.] 니 농부 골리 츌야 난
말리 [옥갓턴 츈향몸의 누츄 말 어니 함난닛가. 구관 졔 니도령닌가 난졍의 아들린가 츈
향과 연가략 졋 지 니도령 오기만 기다리고 독슈공방 빈방안의 슈졀던니 신관 도님쵸의 급
피 불너 슈쳥들나 니 슈졀리 졍졀리라 슛쳥 안니 든다 고 무죄 츈향을 옥갓턴 달리의 쇄골
되기 여도 장호야 항쇄슈쇄예 금슈옥즁야 명 경각엿쓴니 셰상의 그릭키 원통고 불상
니리 닛시이요.]<21-22장>
춘향이 억울하게 매를 맞고 옥에 갇힌 일은 벌써 시골의 농부들에까지 퍼져 관에 대한 원
망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른바 '춘향 사건' 필자는 변학도가 춘향을 잡아들여 치죄하고 하옥한 일이 하나의 중요한 사회적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지닌가고 보아 이를 '춘향 사건'으로 칭한 바 있다. 졸고, 앞의 논문, 196면.
이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백성들이 표현하는 '
원통함'은 일차적으로 관의 부당한 횡포에 대한 불만이지만, 그 속에는 신분제하 하층민의 억울한 처지에 대한 저항감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는 대다수 서민 독자(청자에게 있어 문면에 나타난 것 이상으로 묵직하게 다가왔을 것임이 분명하다.
작품에 내재한 다양한 의미는 옥중재회와 어사출도 대목을 거치며 완결된다. 걸인행색의
이도령을 맞이하여 "죽어도 한이 없다"면서 죽어서 오히려 상대방을 걱정하는 춘향의 모습
을 통하여, 그 장면묘사가 대체로 소략하여 울림이 다소 약하기는 하지만, 이도령에 대한
춘향의 사랑 또는 정절 자발적인 인간 본연의 마음으로서의 참다운 사랑과 참다운 정절은 그 자체 둘이 아니라고 할 수 있
다. 이 지점에서 양자를 분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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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고
조
에 이른다. 그리고 어사출도를 통한 재상봉의 장면에서 그 사랑은, 정절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완성이 된다. 그 축제의 장은 사랑과 정절의 가치를 선양하는 장인 동시에 관(官에 대한 하층백성의 불만과 저항감이 승리감으로 바뀌는 장이기도 하다.
정리하면, 완판29장본은 춘향과 변학도와의 싸움을 계기로 하여 사랑과 정절, 신분갈등,
관민갈등 등의 여러 의미가 확산 내지 격상되는 기본 구도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
들이 뚜렷하게 부각되지는 못한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랑과 정절의 의미에 비하여 신
분갈등이나 관민갈등의 의미는 부수적이고 희미하다. 의미의 변전 과정을 생동감있게 살리
지 못하고 있음으로 해서, 질적 비약과 확산을 동반한 의미의 통합이 그리 효과적으로 실현
되지 못하고 있다. 독자를 문학적 감동으로 이끌기에는 부족함이 있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본이 보이는 주제 구현상의 미흡한 점을 곧 [춘향전] 본래의 한계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 29장본은 완본이라기보다는 절략본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김종철, [완서신간본 별춘향전에 대하여], {판소리연구}제7집, 1996, 31-32면에서 완판29장본이 26장
본(완서신간본과 함께 절략본임을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필자 또한, 26장본만큼 심한 것은 아니지
만, 29장본이 부분적으로 절략본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 이본이 나타내 보이는 문제점은 그 '절략'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필요한 대목을 생략 내지 축소하고 디
테
일을 세심하게 엮어나가지 못한 결과 작품의 형상에, 주제에 손상이 왔다는 것이다.
3.1.2. 완판33장본
완판29장본이 부적절한 절략 때문에 작품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면,
절략을 겪지 않은 완판 [춘향전] 본래의 모습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33장본을 통하
여 그 모습에 다가설 수 있다.
완판33장본의 전반부는 29장본과 흡사하다. 춘향과 이도령의 결연 과정은 그 구체적 행문
까지도 거의 일치한다. 당연한 결과로, 의미요소의 표출 양상 또한 서로 통하고 있다. 사
랑, 정절, 신분갈등 등의 의미요소들이 드러나는 가운데 특히 사랑의 의미가 크게 부각되고
있으며, 그 사랑은 양반자제와 기생 사이의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사랑으로서의 면모를 드러
낸다.
두 이본은 첫날밤 사랑 대목에서 큰 차이를 나타낸다. 29장본에서 이 대목이 아주 소략하
게 그려진 데 비하여 33장본의 사랑놀음 대목은 아주 길고 흥성하다. 권주가와 사랑가에 이
어 업음질, 탈승자 놀음 등이 상세하게 그려진다. 앞의 인용 (1에 업음질과 탈승자 놀음의
일부를 옮겨놓았거니와, 앞서 설명한 대로 이 대목은 청춘남녀의 풍정으로서의 질탕한 사
랑, 원초적인 사랑의 형상을 잘 그려내고 있다. 그 사랑의 의미는 29장본에 비하여 더욱 강
하고 파격적이다.
중요한 것은 이 대목이 단순히 의미를 강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물의 성격을 구체화함
으로써 작품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29장본에 있어 다소 불투
명하던 이도령과 춘향의 성격이 33장본에서는 질탕한 사랑놀음의 과정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드러난 모습은, 이도령은 바람기 있는 양반자제이고 춘향은 '솜씨 좋은 기
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 대목에서 보이는 두 인물의 형상은 군자나 요조숙녀와는 상당
한 거리가 있다.
이러한 인물형상은 주변인물의, 나아가 독자들의 시각을 규정한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그들의 파격적인 자유분방함은 물론 긍정적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즐
겁고 흥성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질탕한 사랑놀음이란 고단
한 생활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는 한가한 남의 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있다. 특히 작중의
주변인물에게 있어 양반자제가 기생과 눈이 맞아 벌이는 사랑놀음은 눈살을 찌푸릴 만한 마
땅치않은 일일 수 있다. 춘향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내렸을 때 사령들이 보이는 다음과 같
은 태도는 그러한 시선의 반영으로서,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다.
(7 [걸이엿다 걸이엿다 츈향이가 걸이엿다. 조을시고 조을시고. 양반셔방 어던노라 고 도고
도 도고고 도량터니] 이 대목은 29장본에도 있지만, 29장본의 경우 솜씨 좋고 콧대높은 기생으로서의 춘향의 이미지가 잘
살아나지 않고 있어 의미맥락이 자연스럽게 닿질 않는다.
<15장>
그러나 솜씨 좋고 콧대 높은 기생으로서의 춘향의 이미지는 변학도와의 싸움의 과정에서
일대 전변을 겪게 된다. 그 전변의 과정은 33장본에 있어 29장본보다 훨씬 리얼하게, 긴박
감있게 형상화되고 있다.
신관이 부임하여 위의있게 거조를 차리는 상황. 그 자리에 끌려나온 춘향은 구경꾼들의
속된 예상에 반하여 변학도의 협박과 회유를 단호히 뿌리치고 수청을 거부한다. 그 결과는
유혈이 낭자한 악형이다. 그럼에도 춘향은 이를 악물고 형벌을 견디면서 '십장가'로써 더욱
매몰차게 항변을 한다. 사람들은--작중의 주변인물들, 나아가 독자들은--이 장면에서 일종
의 충격 속에 춘향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된다. 춘향의 사랑은 한순간의 풍정이 아니었고,
정절은 말로만의 정절이 아니었다. 그것은 참다운 인간적 요구이며 신념이었던 것이다. 사
람들은 이제 일종의 경애감 속에 춘향에 대하여 정서적 일체감을 경험하게 되고, 그 과정에
서 사랑과 정절의 의미는 비약적으로 확산된다.
한편, 변학도는 어떠한가? 순간의 모욕을 설치하려고 연약한 여인에게 눈뜨고 보기 힘든
악형을 내려 부임 첫날을 피로 물들이는 인간이다. 그 한 가지 행위를 통해 그는 탐관으로
서의 본질을 여실히 폭로하고 만다. 그리고 민심은 한순간에 그를 떠난다. 다음 대목은 이
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8 말못고 기절니 업제엿던 형방도 눈물지고 질던 집장사령도 서를 [사 의 자
식은 못 보것다.] [모지도다 모지도다 우리 사 모지도다. 저것슬 리면 이나 치제 저것 몸의
질다니 모지도다 모지도다 우리 사 모지도다. 가 가 어서 가 사 은 차마 못 보건
네.] <17장>
민심의 이반과 함께 신분문제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이루어지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남원기생들이 떼지어 나와 춘향을 붙들고 울부짖는 눈물겨운 모습을 통하여 기생 춘향의 설
움은 그 혼자만이 아닌 천민 전반의, 상민 전반의 설움으로 뚜렷이 부각된다. 그와 함께 봉
건적 신분차별의 부당성에 대한 인식이, 부당한 차별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지향이 자연스럽
게 각인된다. 의미의 또 하나의 질적 비약이다.
(9 이 남원 기 드리 츈향이 맛고 죽게 되얏단 말을 듯고 리 동무지여 일홈 불너 나
오난 [ 고 형임] [ 고 동 ] [ 고 츈향아] 조고만 동기는 [ 고 션 임. 청가묘무를 뉘
틔 울잇가.] 참 이러 제 엇던 기 나 춤추며 나오난듸 [얼시구 절시구 조을시구] 여러 기
듯더니 [저년 밋쳐 나. 츈향은 를 맛고 거의 죽게 되여난 너는 무삼 혐우 잇셔 춤을 추고
길기난야.] [형님네 드러보소. 셔기 농션이는 동설영의 죽어잇고 평양기 월션이는 소셥의
목을 베여 김장군게 드리고 쳔추혈식엿고 진주기 논 는 왜장의 목을 안고 남강의 러젓긔로
천추의 사여 니 우리 남원도 현판감이 삼겨 나.] 참 이리더니 와락 달여드러 츈향의 목
을 안고 [ 고 셔울집아. 불상여라.] (8과 (9의 대목은 완판29장본에는 들어 있지 않다.
<
1
8
장
>
일련의 '춘향 사건'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하면서 관에 대한 저항의식을 환기함은 29
장본에서도 보이는 특징이지만, 33장본에 있어 훨씬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다. 춘향 사건은
농부가의 한 사설을 이룰 정도로 "모지도다 모지도다 우리골 사 가 모지도다. 월삼동취 독 형벌 몹시도 려셔 거의 죽게
겨 되 종시훼절 안이고 죽기로만 졀단니 그런 열녀 어 잇나. 어이여여루 상사뒤오." <23장>
사
람
들
마
음
속
에 크게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백성에 대한 관의 횡포를 대변하는 상징적 사건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춘향의 훼절을 운운하는 이어사에 대한 농부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 대목은 앞에 인용한 (6과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러한 반응에서 우리는 남원 백성들의 춘향에 대한 강한 정서적 일체감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일체감은 물론 독자들의 몫이기도 하다. 그 일체감 속에서 한편으로 춘향이 지키고 있는 참사랑과 정절의 의미가 선양되며, 다른 한편으로 억울하게 핍박받아야 하는 하층민의 설움과 권력의 부당한 횡포에 대한 저항감이라는 의미가 구현된다. 의미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어지는 옥중상봉 장면 및 어사출도 대목 역시 33장본이 29장본보다 훨씬 상세하고 리얼
하다. 옥중상봉 장면은 앞의 인용(3--이는 박순호99장본의 대목이다--과 흡사하거니와, 옥
중 춘향의 참혹한 정경 "도 반가워 급 마 와락 여나오잔들목의난 젼모칼이요 수족의난 황쇄 족쇄 형문 마진 다리 장
독이 나셔 수족 놀일 길 젼이 업네.(…" <29장>
과
어
진 마음씀이 독자를 눈물짓게 한다. 이도령이 '눈이 붓고 목이 쉬도록' 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 장면에서 실현되는 정절의 의미는, 사랑의 의미는--이는 물론 둘이 아니다--지극히 순수하고 아름답고 숭고하다. 그 의미가 이별 전의 질탕한 사랑놀음에서 표출되던 그것과 질적으로 다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편, 어사출도 장면에서 혼비백산하는 관장들의 모습, 춘향이 기꺼워하고 춘향모가 즐거
워 춤추는 등의 모습 또한 29장본에서보다 더욱 흥취있고 생동감있게 표현되고 있다.
(10 이렁저렁 흣터질 제 방이 눈치 고 삼반인 수군수군, 예서 수군 졔셔 수군, 셔리는
눈을 적. 청 역졸 거동 바라. 달갓탄 마 를 갓치 둘너메고 삼문을 더치며 [암 어 출도
야.] 번을 고함니 강산이 문어지고 두번을 고함니 초목이 난 듯, 셰번을 고 니 남원이
우군우군. [공형 공형.] [공형이 드러가오.] 등 로 휘닥 , [ 고 허리야.] [공방 공방.] 공방이
자리를 둘둘 모라 엽푸 고 [안할나고 는 공방을 부득이 하라더니 저 불 속의 엇지 드러가랴.]
등 로 휘닥 , [ 고 박 터젓네.] 좌수 별감 넉실 일코 이방 호장 정신업셔 [네가 누구냐.] 운봉
곡셩 겁을 여 말을 로 타고 삼 나졸 넉실 이러 엇지 졸 모로난듸 지난이 거문고요 궁
구난이 북장구라. 본관의 거동 보소 칼집 쥐고 오좀 누며 탕건 일코 요강 머 갓 일코 전립 쓰며
인통 일코 연상 들며 [문 드러온다 바 다더라. 물 마르다 목 드리여라.] <31-32장>
이처럼 부당한 횡포를 부리던 관원이 된서리를 맞는 장면을 통하여, 그리고 뒤이어 춘향
과 이도령이 상봉하고 백성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축복하고 즐기는 흥성한 축제의 장면을
통하여 작품의 의미는 절정에 이른다. 진정한 사랑과 정절의 가치가 한껏 선양되고, 봉건적
권력의 부당한 횡포에 대한 저항감과 승리감이 확인되며, 신분해방과 인간해방의 정신이 구
현된다. 환희와 감동의 마당이다.
애초에 한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개인적이고 특수한 차원에서 제기되던 사랑과 정절, 신
분갈등의 의미가 권력의 부당한 횡포에 맞서 유발되는 싸움과 시련의 과정에서 관민갈등의
의미와 맞물리면서 질적 비약과 확산,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 필자는 이것이 완판 계열 [춘
향전] 주제의 본령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완판 33장본은 그러한 주제를 안정감 있게, 감
동이 우러나도록 구현해내고 있다.
3.2. 개작의 방향 - 신재효본, 완판84장본
그 동안 [춘향전]에 관한 논의에서 가장 많이 거론된 이본은 아마도 신재효본 남창 춘향
가와 완판84장본일 것이다. 이들은 독특한 개작의식에 의해 이루어진 이본으로서, 또는 [춘
향전]의 사적 변모에 큰 영향을 미친 이본들로서 주목을 받아 왔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이들이 주목에 값할 만큼의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좀더 냉
정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얼핏 눈에 띄는 서사적 안정감이나 합리성, 또는 디테일의 수려
함과 풍성함 등을 가지고 문학적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작품의 주제의식 및 그
구현양상에 대한 엄정한 분석이 필요하다.
3.2.1. 신재효본 남창 춘향가
신재효가 엮은 판소리사설은 판소리사에서의 신재효의 위치 때문에 많은 관심을 끌어 왔
다. 그 중에서도 남창 춘향가(이하 '신재효본'으로 지칭는 그 독특한 개작의식으로 인하여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대하여 [춘향전]에 합리적 현실성을 부여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작품의 민중문학적 발랄함을 훼손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교차적으로 속출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제 신재효본에서 이루어진 주요한 변개의 양상을 짚어 보고 그 결과 주제의 구
현 양상에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신재효본에 있어 내용의 변개는 작품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특히 전반부에 있어 두
드러진 것이었다. 그 변개의 핵심은 애초에 아리땁고 솜씨좋은 기생 정도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던 춘향의 모습을 요조숙녀에 가깝도록 바꾸어 놓은 점이다. 춘향은 천상 도화(桃花의
화신으로 세상에 태어난 인물로 그려지며, "春香어모 退妓로서 四十이 너문 后어 春香을 쳐음 제 가온 엇 仙女 桃花李花 두 가지를
두 숀의 갈나ㅈ고 날노 려와셔 桃花를 여쥬며 [이 슬 잘 각고와 李花接을 부쳐씨면 모연 낙
죠흘이라. 이화 갓다 젼 곳이 時刻이 急긔로 이 나노라.]" 김진영 외 편저, {춘향전전집} 1,
박이정, 1997, 11면. 이하 신재효본의 원문은 이 책에 실린 가람본 자료를 인용하기로 한다.
이도령을 만날 당시 대비 넣고 정속하여 규방 행실을 닦고 있던 인물로 설정돼 있다. 그리하여 이도령과 춘향
의
결
연은 양반자제와 여염집 규중 처자의 결연으로서 그려진다. 이는 단지 신분과 처지가 그렇게 설정되어 있을 뿐이 아니고 구체적 행동양상이 또한 그렇게 돼있다. 춘향과 이도령의 언행은 품위와 격조를 지닌 것으로 가다듬어져 있다.
(11 잇 의 방 놈 春香을 못 부르고 저 혼 도라가셔 츈향과 던 酬酌 낫낫치 고니
도련임 죠와하여 [그 아히 난 行實 듯든 말과 다름업다. 불너셔 안이온기 제 도례난 당연나
請다가 못 보면은 긔상이 엇지 되리.] 쥬지축 푸러노코 두어 쥴 셜셜 쎠셔 견봉여 방 주
니 방 놈 바다들고 번 갓치 건네가셔 편지 여 春香 쥰이 春香이 회피부득 편지바 여본이
아무 말도 안이고 五言 귀 이로다. [녹쥬(綠珠가 우셕슝(遇石崇 홍불(紅拂이 슈이졍(隨
李靖] 春香이 안마음의 [ 죠 잇난 사람이라 이 일을 엇지할 ] 良久의 각다가 셜화지 여
여 잠 젹어 근봉야 방 쥬며 말이 [閨中의 處子 몸이 쇼 平生 도련임 편지 긔 不
當되 有文不答할 슈 업셔 부득니 답장이 갓다가 딀인 후의 닷시난 오지 마라.] 방 놈 다
야 셰거름의 어와셔 도련임 올이온이 도련임 여본이 당신 편지 이여든 [文王이 求呂尙 皇
叔이 訪公明]이라 하엿씬이 도련임이 무릅치며 [ 여로다 민여로다. 경각간의 씬 答狀이 이러케
통창하리.] {춘향전전집} 1, 17면.
이와 같은 결연의 장면에 있어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것은 다름 아닌 '연애의 감정'이다.
상대방의 용모와 글솜씨를 확인하면서 이도령과 춘향이 서로를 연모한 끝에 결연에 이르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연애를 주제로 한 한편의 전기소설(傳奇小說을 연상시키고 있다.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의 격조는 작품 속에서 시종일관 유지된다. 첫날밤의 사랑의 정경은
흥성하지만 난하지 않으며, 이별의 모습 또한 슬프지만 경박하지 않다. 앞의 인용 (2에서
와 같이 춘향이 이도령에게 대들면서 따지는 장면은 신재효본에는 당연히 들어 있지 않다.
서로 헤어짐을 서러워하면서 훗날을 기약할 뿐이다.
(12 도련임이 삼으로 春香 눈물 씩 면셔 [우지 마라 우지 마라. 네 셔럼이 그리할 제
마음이 엇 컨나. 우리 졍지 의논면 결발의 부부로셔 이질 길이 잇 난야. 네 의심 그러니 後
日 가고 信物 쥬마.] 錦囊을 션 푸러 面鏡을 여 쥬머 [大丈夫 平生 마음 셱경빗과 갓튼지라.
멧 가 지 가되 변치 안이할 신이 깁피 깁피 갈마두고 각 날 제마닥 날 본다시 여러 바
라.] 春香이 셕경 밧고 든 玉指環을 한 버셔 듸리면서 [女子의 졍졀 이 白玉無瑕 갓싸온이
賤妾의 一片丹心 일노 信物 삼무시요.] 위의 책, 26면.
춘향과 이도령이 이루는 이와 같은 애틋하고 격조있는 사랑의 모습은 작품의 중·후반부
로 자연스럽게 연결돼 나간다. 이도령이 떠난 뒤 춘향이 수절하는 것은 이미 예견됐던 것이
며, 변학도의 수청 요구를 거부하는 것 또한 뜻밖의 일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와 백년가약
을 맺고서 훗날을 기약한 '규중 처자'의 입장에서 관장의 수청 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
한 일인 것이다.
신재효본에서 이루어진 이와 같은 변개는 인물의 성격 및 작품의 서사적 전개에 합리적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아마도 신재효는 [춘향전] 전반부에서 춘향이 솜
씨 좋은 기생으로서 행하는 질탕하고 파격적인 사랑과 후반부에서 춘향이 정숙하고 도덕적
인 여인으로서 나타내 보이는 숭고한 사랑과 절행 사이에 나타나는 불일치를 서사적 모순으
로 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작품 전반부를 대폭 변개하여 후반부의 형상과 나란하게
맞춤으로써 그러한 모순을 해소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재효의 의도는 실제 작품에서
무리없이 잘 실현되었다고 평가된다. 인물의 성격이 그가 뜻한 대로 재창조되었고, 서사적
전개에 있어 전후반부의 불일치가 해소되면서 일관성과 합리성이 갖추어진 것이다. 판소리
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던 신재효의 뛰어난 작가적 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
다. 신재효는 남창 춘향가 외에 동창 춘향가를 남겼거니와, 그는 동창 춘향가에 있어 솜씨좋은 기생의 질
탕한 사랑놀음을 아주 잘 살려서 표현하고 있다. 남창 춘향가에서 작품 후반부에 걸맞게 전반부를 수정
하는 대신, 춘향전 전반부 본래의 모습을 살린 독립된 한 작품을 만든 것이다. 춘향전의 불합리성을 극
복하면서 또 한편으로 그 본래의 면모까지도 놓치지 않기 위해 작품을 둘로 나누어 만든 것에서 [춘향
전]에 대한 신재효의 애정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두 작품을 각기 잘 살려낸 데서 그의 작가적 역량
을 확인할 수 있다.
동창 춘향가와 관련하여 그간 대다수 논자들은 남창과 동창의 분화를 판소리 창의 분화로 설명하였으
며(서종문, [신재효본 춘향가 동창, 남창의 판의 분화에 대하여], {한국고전산문연구}, 동화출판사,
1981이 대표적이다, 동창을 미완성 작품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필자는 위와 같은 견지에서 남창과 동
창의 분화가 주제의식에 따른 것이라고 보고 있으며, 동창은 이별 대목을 끝으로 일단락된 작품이라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후고를 기약하기로 한다.
문제는 그가 [춘향전] 전·후반부의 불일치를 모순으로 보았을 뿐 미처 발전적 변화로 이
해하지 못하였다는 데 있다. 앞서 살폈듯이 [춘향전]의 서사적 전개의 묘미는 변학도의 출
현과 '춘향사건'을 축으로 한 상황의 극적 변전 및 의미의 질적 비약에 있다. 전반부에 솜
씨 좋은 기생으로 등장하여 행동하던 춘향이 이별을 겪고 변학도와 싸우는 일련의 과정에서
참사랑과 정절의, 저항의 화신으로 변모하는 데에 [춘향전]의 탁월함이 있는 것이다. 그런
데 신재효는 이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로 작품에 손을 댔다. 그리하여 그의 개작은 평면
적 일관성을 획득한 대신 춘향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역동적 발전성을 오히려 상실하는 결
과를 낳고 말았다. 이러한 지적은 신재효의 양반 취향이 작품의 생동성을 훼손했다는 식의 입장(김흥규, 앞의 논문,
1978과는 차이가 있다. 필자는 지금 그의 양반 취향보다는 작품을 재해석하는 관점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작품 중반에서 이루어지는 극적 변전 과정의 소거는 변학도와 춘향의 싸움에 얽힌 의미를
개인 차원의 특수한 것으로 머물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재효본에 있어 춘향사건은 춘
향의 견고한 정념과 변학도의 불같은 성질이 부딪쳐 발생한 하나의 특수한 사단으로 형상화
되고 있다.
(13 사 가 두 인군 말의 홰가 엇지 나 지 상투 고가 너무가고 망건 편 탁 터지고 목이
ㅅ여 나. [네 인연 바 라.] (… 九 낫 부친이 [구즁분우 관장되야 구진 짓 그만고]
十채 낫 붓친이 [十伐之木 아지 마오.] 가드키 분난 쇽을 풀슉 풀슉 질너논이 오직 홰가 나시
것나. 손으로 무턱 잡고 숀으로 書案 치며 집장 령을 에울너 [엇 케 리긔에 그연이 그
져 사라 말을 게 단 말가.] 낫낫치 신칙야 열다셧 시물 넘겨 三十度 즁治니 죵 갓탄
다리 流血이 狼藉되 의 분 마음 죡금도 안이 풀여 착가구격 옥니 가지록 불상다.
잇 의 春香어모 상단고 川邊의로 갓다 이 消息 늣게 듯고 십젼구도 급피 온니 {춘향전전집} 1, 31-34면,
변학도가 춘향에게 엄형을 내린 것은 춘향의 '두 임금' 소리에 격노한데다가 춘향이 십장
가로 대꾸하는 데 대하여 더욱 화가 난 때문으로 돼 있다. 변학도의 일방적 횡포보다는 춘
향의 지나친 정심(貞心과 경솔한 부추김이 문제를 낳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른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사령이나 구경꾼, 기생 등이 엄형에 쓰러져 유혈이 낭자한 춘향을 동정하며 변
학도를 원망하는 등의 삽화는 신재효본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서로간의 정서적 일체감의
구현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있어 춘향은 남다른 정절행을 지닌 고귀한 인
물로, 특수한 타자로 남는다. 그리고 '춘향 사건'은 하나의 특수한 사건으로 남는다. 이러한 특징은 단지 신재효본에 있어 인물의 성격 변화에 따른 극적 변전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
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서술자가 애초에 춘향을 하나의 특수한 인물로, 고귀한 열녀로 설정하려고 의
도했다는 점을 소홀히할 수 없다. 이 또한 [춘향전]에 대한 신재효 나름의 재해석 방법으로서, 옳고그
름을 논할 성질의 문제는 아니다. 다만 그 문학적 효과가 어떠한가 하는 것이 문제일 뿐인데, 이에 대
한 필자의 입장은 그것이 의미의 축소와 약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이다.
변학도와 춘향의 싸움이 지니는 이러한 성격은 작품 후반부에서 일관되게 이어진다. 완판
33장본에서 춘향 사건이 백성의 원성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면서 어사가 출도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과 달리, 신재효본에 있어 그것은 어사 출도의 주요 사유가 되지 못한
다. 이도령이 농부의 입을 통해 춘향의 수절을 확인하는 대목이 나오지만 그것은 하나의 삽
화에 불과하며, 어사가 뒤에 이곳 저곳 다니면서 변학도의 실정을 확인하는 내용이 나오면
서 출도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요컨대, '춘향 사건'은 민원의 중심에 있지 않고, 변두리에
있다. 그것은 관민갈등의 축이 되지 못하며, 주인공과 주변인물을, 또한 작중상황과 독자를
역동적으로 엮어주는 중심축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작품의 의미는 애정의 삼각관계
라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축소되고 만다. 이러한 특징은 서술자가 이도령과 춘향이 만백
성 앞에서 재결합하는 일을 우세스런 일로 보아 그 만남을 뒤로 미룬 데서 명명백백하게 드
러난다.
(14 어 안마음의 아무리 귀긔로 가 네의 낭군이다 졍당으로 불너 올여 두리 셔셔
면면 쇼즁신 봉명 그 우셰가 엇 컨나. 다시 分付시기를 [네 말만 가지고난 쥰신을 못
할테니 다시 염문 작쳐게 아직은 방숑하라.] 관문 박긔 물너나니 잇 으 춘향어모 어 츌도
후의 졔의 를 올여씬이 혹장을 마지면 활이나 여볼가 관문의셔 바장이다 다 이 白放된
이 오죡키 죳컨난야. {춘향전전집} 1, 59면.
[춘향전]에 있어 본래 이도령과 춘향의 재결합이란 어떤 것이었던가. 그것은 춘향과 더불
어 남원부민들이 겪어 온 아픔과 고통을 씻어버리고 다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일종의 숭고한
의식이다. 온갖 의미가 한데 어우러지며 구현되는 작품의 클라이막스다. 그러나 신재효는
그것을 희생하고서 굳이 이도령과 춘향의 결합을 백성들의 눈으로부터 떼어놓았다. 이 대목
에 있어 춘향은 백성의 소중한 일부가 아니라 이도령이라는 개인의 애인일 뿐이다.
이처럼 춘향을 특수한 인물로 그려 나간 결과, 곧 춘향과 사람들 사이의 정서적 일체화를
차단한 결과, 신재효본에 있어 작품의 의미는 그 편폭이 현저히 좁아지고 말았다. '양반자
제와 여염처자 간의 가연(佳緣' 내지는 '한 미천한 여인의 가상한 정절' 정도로 이 작품의
최종적 주제가 귀결되어 버리고 만다. 작품 후반에서 관에 대한 백성의 원성이 두루 나타나지만, 작품의 서사적 줄기와 역동적으로 맺어지
지 못한 채 제시되는 이러한 삽화들에 담긴 의미는 수단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작품 주제로서의 자격
을 갖지 못한다.
좀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신재효본의 주제의식은 양반과 여염 처자의 결연을 소재로 하는 야담 수준의 주제의식을 크게 뛰어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3.2.2. 완판84장본
완판84장본은 한편으로는 29장본, 33장본의 흐름을 이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신재효본의
영향을 적지 않게 입은 이본이다. 물론 거기에 더해 그 나름의 특유한 개성을 나타내고 있
기도 하다. 이러한 특징은 주제의식의 측면에 잘 나타나고 있다.
29장본이나 33장본과 비교할 때 84장본 역시 신재효본과 마찬가지로 작품 전반부에서 중
요한 변개가 나타나고 있다. 그 변개의 방향은 춘향을 출천열녀로서 이상화하는 쪽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첫머리에서부터 이 방향으로의 의도적 변개가 나타나고 있다.
84장본은 춘향의 출생을 거창하게 그리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이 부분은 내용이나 표현이
신재효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양상을 보인다. 춘향은 성참판의 서녀이고, 기자정성을 통
해서 태어난 인물이며, 선녀가 적강한 인물이다. 여러 차례 지적됐듯이, 춘향의 출생담은
영웅소설 주인공의 탄생담과 흡사한 모양을 갖주고 있다. 워낙 잘 알려진 대목이므로 원문 인용을 생략한다.
춘향을 정절심을 지니고 있는 열녀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작품 전반부에서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방자는 처음 이도령에게 춘향을 소개하면서 그녀를 다음과 같이 여중 군자
로 칭송하고 있다.
(15 도련임이 엉겁졀의 한는 말이 [장이 좃타. 훌융하다.] 퇴인이 알외되, [제 어미는 기 이
오나 춘향이 도도하야 기 구실 마다하고 화초엽의 글 도 각하고 여공 질이며 문장을 겸
젼하야 여렴처자와 다름이 업 이다.] 도령 허허 웃고 방자을 불너 분부하되 [들은즉 기 의 이
란이 급피 갈 불너올라.] 방 놈 엿자오되 [셜부화용이 남방의 유명키로 방쳠 병부 군슈 현감
관장임네 엄지발가락이 두 가옷식 되난 양반 외입 이덜도 무슈이 보려 하되 장강의 과 임
의 덕 이며 이두의 문필이며 의 화순심과 이비의 졍졀얼 품어스니 금천하지졀 이요 만고여
즁군자오니 황공하온 말삼으로 초 하기 어렵 다.] <9장>
이러한 태도는 방자뿐만 아니라 수로(首奴이나 사령 같은 다른 인물에게서도 나타난다.
변학도가 춘향에 대해서 묻자 수로는 춘향이 "덕 이 장한" 인물로서 수절하고 있는 중이라
고 한다. 그리고 춘향 촉래의 명을 받은 사령들 또한, 33장본에서처럼 힘을 뽐내는 것이 아
니라, 춘향의 정절을 생각하며 그녀를 걱정해 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6 육방이 소동 각쳥 두목이 넉실 일러 [김번수야 이번수야 일런 별이리 잇난야. 불상
다 춘향 졍졀 가련케 되기 쉽다. 사 분부 지엄니 어셔 가자 밧비 가자.] <51장>
이렇게 춘향을 열녀로서 이상화하는 양상에 대하여 그것을 시민문학적 지향의 하나로 보
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견해도 있지만, 김종철, 앞의 논문, 1993, 154-157, 176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작품의 현실성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서사의 맥락상 사람들이 춘향을 열녀로 받아들일 만한 상황적 근거가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춘향은 열녀다'라는 서술자의 관념이 추상적·일방적으로 작중인물들에게 투사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작중에서의 춘향의 실제의 행동양상이 이러한 서술자의 의식적 관념
과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춘향이 방자와 주고받는 말수작도 그러하거니와, 이도령의
부름에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집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광한루로 그를 만나러 가는 춘향의 모
습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33장본에서보다 훨씬 더 길고 자세하게 묘사돼 있는 첫날밤의 질
탕한 사랑놀음 또한 '열녀'의 형상과 어울리지 않으며, 이도령이 이별을 선언할 때의 발악
에 가까운 행동 역시 그러하다. 춘향이 이도령을 원망하는 대목을 앞서 인용(2에 제시하였
거니와, 여기 나타난 춘향의 모습은, 뜻밖의 이별이 가져온 정신적 충격을 고려한다고 하더
라도, 절개 있는 요조숙녀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84장본의 서술자가 춘향을 처음부터 열녀로 부각하려고 한 것은 후반부에서의 춘향의 모
습을 염두에 둔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이 점 신재효본과 성격이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
나, 신재효본에 있어 인물의 성격과 행동 양상이 서술자의 의식에 따라 새롭게 창조된 데
비하여, 84장본에서는 실제 형상화된 양상이 서술자의 의도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춘향의
구체적 행동 양상은 33장본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솜씨좋은 기생'의 그것이 많은 부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와 실제의 불일치는 어색한 양면성 속에 현실성
의 약화를 가져오고 있다.
그 과정이야 어떻든, 84장본은 신재효본과 달리 작품 전반부에서의 인물의 행동 양상에
있어 [춘향전] 본래의 모습--말하자면, 양반자제와 기생 딸의 자유분방하고 질탕한 애정행
각--이 유지었고, 84장본에서는 그 모습이 오히려 강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 사랑놀음 대목이 대폭 확장된 것이라든가
인물의 성격과 행동이 33장본 등에서보다 더욱 강하게 형상화된 것 등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한 모습
은
작
품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변모를 겪는다. 변학도와의 싸움을 계기로 하여 춘향은 진정한 열녀로 드러나게 되고, 신분차별이나 관의 횡포에 얽힌 의미 등이 부각되면서 의미의 확산이 이루어진다. 84장본 후반부에서 부각되는 사랑과 정절의 의미는, 그리고 신분해방적 지향은 자유분방한 애정 내지 '신분상승'의 지향이 주조를 이루던 작품 전반부와는 뚜렷이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그 변화의 과정이 얼마나 문학적으로 살아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앞서 이 작품
전반부에 투사되고 있는 서술자의 관념을 지적했지만, 84장본에 있어 의미의 질적 변전이
이루어지는 양상은 33장본과 비교할 때 어색한 면이 많고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된다. 춘향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이미 춘향이 열녀로 내세워지고 있었으니, 사람들의
시선에 있어서의 역동적 변화와 그에 따른 의미의 비약이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는 것은 자
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84장본에 있어 변학도와 맞서는 춘향의 모습은 아주 '장하게' 그러진다. 변학도의 수청
요구에 대하여 춘향은 한치도 굽히지 않고 허유와 백이·숙제에 자신을 비교하면서 '정절'
의 가치를 내세우고 있다. 84장본에는 고사의 인용이 많은 편인데, 이는 의미를 관념적으로 추상화하여 현실성을 약화시키는 면
이 있다. 춘향이 변학도에 항변하는 장면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일
개 아녀자로서 관장의 권위에 당당히 맞서고 있는 이러한 춘향의 형상은 말 그대로 '정절의 화신'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17 춘 이 엿자오되 [츙불 이군이요 열불경이부졀을 본밧고자 하옵난듸 수차 분부 이러한이
불여사이옵고 열불경이부온이 쳐분 로 하옵소셔.] (… 춘향 다시 사 젼의 엿자오되, [당초의
이수 만날 의 산 셔 구든 마음 소쳡의 일심 졍졀 분갓턴 용 인들 여 지 못할 터요
소진장의 구변인들 쳡의 마음 옴계가지 못할 터요 공명션 놉푼 조 동남풍은 비러씨되 일편단
심 소여 마음 굴복지 못하리다. 기산의 허유난 붓촉수요 거쳔고 셔산의 숙 양인은 불식쥬속
하여쓴이 만일 허유 업셔쓰면 고도지산 뉘가 하며 만일 이 숙졔 업셔쓰면 난신젹자 만하리다.
쳡신이 수쳔한 계집인들 허유 을 모르잇가. 사람의 쳡이 되야 부기가 는 볍이 볘살하난 관
장임네 망국부쥬 갓싸오니 쳐분 로 옵소셔.] (…춘향이 포악하되 [유부겁탈하난 거슨 죄 안
이고 무어시요.] 사 기가 막켜 엇지 분하시던지 연상을 달일 졔 탕건이 버셔지고 상토고가 탁
풀리고 마듸여 목이 쉬여 [이연 자바 리라.] <54-56장>
이처럼 변학도에 당당히 맞서다가 악형을 당하는 춘향에게 사람들이 보내는 애정과 지지
는 뚜렷한 편이다. 그러나 84장본에 있어 사람들이 춘향과의 정서적 일체감을 형성하는 과
정은 33장본과는 다른 미묘한 뉘앙스를 담고 있다.
(18 말 못하고 기졀니 업졋던 형방 퇴인 고 드러 눈물 씃고 질하든 져 사령도 눈물 씃
고 도라셔며 [사람으 자식은 못하건네.] 좌우의 구경하난 사람과 거 는 관속드리 눈물 씃고 도
라셔며 [춘향이 맛는 거동 사람 자식은 못 보것다. 모지도다 모지도다 춘향 졍졀리 모지도다.
출쳔열여로다.] 남여노소 업시 셔로 낙누하며 도라셜 졔 사 들 조흘 이가 잇스랴. [네 이연 관졍
의 발악고 마지니 조흔 계 무어신야. 일후의 그런 거욕관장할가.] 반 반사 저 춘향이 졈졈
포악 는 마리, [여보 사 드리시요. 일런 포한 부지상사 어이 그리 모르시요. 계집의 곡 마
음 온유월 셔리 침네. 혼비즁쳔 단이다가 우리 셩군 좌졍하의 이 원졍을 알외오면 사 들 무사
가. 덕분의 죽여 주오.] 사 기가 켜 [허허 그연 말 못할 연이로고. 큰 칼 씃여 하옥하라.]
<59장>
(17에서 (18로 이어지는 대목에 있어 사람들의 관심은 변학도의 횡포와 춘향의 절개 양
쪽을 향하고 있다. 이 점 33장본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그런데 84장본에 있어 그 초점은
33장본과 달리 '춘향의 절개' 쪽으로 치우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서술자는 변학도의
형벌을 춘향의 포악이 유발한 것으로 설정하고 또한 변학도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고 함으로
써 그의 악형에 상당한 면죄부를 주고 있다. 애초에 84장본은 변학도를 단지 여색에 '흠'이 있는 풍류남아로 표현하고 있거니와, 이러한 설정은
이 장면의 서술 시각과 서로 맥락이 통하고 있다.
그
런
한편으로 사람들이 탐관의 모진 형벌에 저항하기보다 '출천열녀' 춘향의 모진 정절에 찬탄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서 장면을 구체화하고 있다. 작품 전반부에서 그런 것처럼 '정절'의 관념에 대한 경도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의 춘향의 정절행은 작품 전반부에서 이미 서술자가 예고했던 것으로서, 의미
의 질적 변전은 그리 역동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리고 관심의 초점이 춘향의 '특출한
정절'에 맞추어짐으로써, 부정한 권력의 횡포에 고통받는 운명공동체로서의 춘향과 사람들
--남원부민, 그리고 독자들--의 정서적 일체감은 효과적으로 구현되지 못한다. 사건의 정황
은 그러한 일체감을 형성할 만한 것이되, 서술자의 관념적 편향이 오히려 이를 방해하고 있
는 형국이다. 물론 서술자의 의도는 춘향을 지고지순의 숭고한 인물로 부각하고자 한 것이
겠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춘향에 대한 거리감을 유발하는 작용을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서사적 전개의 양상은 작품 후반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남원부민들은 '춘향
사건'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며 그 추이를 주시하지만, 그것은 '나 자신의 일'로서 살아나지
는 못하고 있다. 본래 춘향 사건은 변학도가 저지르는 갖은 수탈과 횡포의 상징적 표상으로
서 민원의 중심에 놓이는 것인데, 84장본에서는 그러한 구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변학도
의 학정의 흔적은 작품 문면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농부들은 대풍을 이룬 농사를
돌보며 태평하게 일하고 있는 것으로 돼있다. '춘향 사건'이 농부들의 삶과 역동적으로 맺
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농부들은 춘향의 정절에 대해서는 칭탄
을 아끼지 않는다.
(19 어사 반말기 공셩이 낫졔. [져 농부 말 좀 무러보먼 조커 만.] [무삼 말.] [이 골
춘향니가 본관의 수쳥드러 뇌물을 만이 바더묵고 민졍의 작페한단 말이 올흔지.] 져 농부 열을
여 [게가 어 삽나.] [아무듸 사든지.] [아무듸 사든지란이. 게난 눈콩알 귀 알리 업나. 지금
춘향이를 수쳥 아니 든다 하고 형장 맛고 갓쳐쓰니 창가의 그련 열여 셰상의 드문지라. 옥결갓튼
춘항 몸의 자 갓턴 동낭치가 누셜을 지치다는 비러먹도 못고 굴머 뒤여지리. 올나간 이도령인
지 삼도령인지 그놈의 자식은 일거후 무소식하니 인사가 그러코는 벼살은컨이와 좃도 못하졔.]
<72장>
이처럼 백성들이 춘향에 대하여 나타내는 경애의 감정은 그것이 백성들 자신의 삶과 역동
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음으로 해서 현실적 생동감이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서사적 전
개의 긴장감이 대폭 약화되고 있다. 이어사에게 주어진 일은 관에 대한 백성의 원성을 다스
리고 민심을 다독이는 일이 아니라 단지 춘향을 구하여 그 정절을 기리고 전날의 가연(佳
緣을 잇는 일일 뿐이다. 그리하여 84장본의 어사 출도 장면에는 긴박감이 잘 살아나지 않
는다. 오히려 관헌에 출도하여 본관을 봉고파직하는 행위가 춘향이 당한 고통에 대한 설치
내지 보상--그것은 물론 사람들이 모두 바라고 있는 일이지만--이상의 명분을 제대로 갖추
지 못하고 있는 양상이다. 탐관의 횡포 밑에서 말 못할 고통을 겪고 있던 백성들이 수난의
표상이었던 춘향과 더불어 축제의 한마당을 벌이는 모습을 형상화한 33장본에 비하여 상황
적 진실성이, 또한 의미와 감동이 대폭 축소된 모습이다.
84장본은 장점이 많은 이본으로서, 주제의식에 있어서도 전보다 진전된 측면이 없지 않
다. 예컨대 84장본은 춘향의 신분적 자의식이나 고귀한 정절의 가치 등을 그전의 이본들보
다 더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진전보다 후퇴가 두드러지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다. 서술자가 '정절'의 관념에 경도된 결과는 득(得보다는 실(失을 더
많이 가져왔다. 인물의 행동 및 사건전개의 현실적 생동감을 약화시켰으며, 상황의 극적 변
전에 따른 의미의 질적 비약과 확산을 감당해내지 못하였다. 그 결과 의미의 편폭이 좁아지
고, 의미의 문학적 실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84장본에서의 이러한 개악과 관련하여 필자는 그것이 판각본 업자의 어설픈 개입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지만,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든 작품의 문학적 성취
도라는 측면에서 볼 때 84장본이 완판 [춘향전]의 대표 판본이 되기 어렵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3.3. 저변의 흐름 - 신학균본, 박순호99장본, 장자백창본
그동안 학계에서는 신재효본과 완판84장본을 19세기말 20세기초 [춘향전]의, 나아가 판소
리문학의 향방을 대변하는 이본들로 받아들여 왔다. 그러한 관점을 받아들일 경우, 앞 절의
논의 결과는 이 시기 판소리가 주제의식 면에서 질적으로 후퇴하였음을 드러내 준 셈이 된
다.
그러나 우리는 신재효본이나 84장본이 이 시기 춘향전의, 나아가 판소리문학의 성격을 대
변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특수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제 20
세기초에 나온 또 다른 춘향전 이본을 통하여, 특히 판소리적 성격을 짙게 지닌 필사본 자
료들을 통하여 이 시기 판소리 문학의 또다른 모습을 보기로 한다. 문학사 표면에 요란하게
떠오르지 않았던, 저변의 흐름이다.
3.3.1. 신학균본
신학균본 별춘향가 이 이본은 김동욱 선생이 {문학사상} 1974년 2월호에 소개한 자료로, 기유년에 납품된 것으로 돼있
다. 1909년에 필사된 것으로 이해된다.
는 필자가 20세기 초의 춘향전 이본들 가운데 특히 주목하고 있는 자료다. 주제의식을 포함한 작품성 면에서 완판 계열 춘향전의 정점
에
놓
인다고 감히 평하고 싶다. 판소리적 흥취를 적절히 살리면서도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이 이본은, 정곡을 찌르는 섬세하고 날카로운 표현을 통하여 심도있는 현실인식과 함께 문학적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이 이본의 주제 구현양상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상세한 분석을 수행한 바 있거니와, 졸고, 앞의 논문.
이
를
길
게
되풀이하는 것은 생략한다. 단지 이 이본이 나타내는 주제구현상의 주요한 특성을 요약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신학균본의 주제의식은 본질적으로 완판33장본의 맥을 잇고 있다. 변학도와의 싸움을 계
기로 한 의미의 비약과 확산을 주제구현의 기본 축으로 삼고 있다. 초반부의 흥성하고 분방
한, 이기적 요소가 있는 사랑이 후반에서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으로 비약해 가는 과정이 뚜
렷이 부각되며, 춘향사건을 축으로 하여 사람들이 춘향과 한몸이 되어 부정한 권력에 맞서
는 양상이 잘 그려지고 있다. 부언하자면, 신재효본이나 84장본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변개
는 신학균본에 있어 전혀 수용되지 않고 있다.
신학균본의 장점은 풍부하고 섬세한, 정곡을 얻은 장면묘사를 통하여 작품의 의미를 훌륭
하게 형상화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 이본에 있어 인물의 행동과 심리는 33장본과 비교할
때 훨씬 생동감 있게 살아나고 있다. 신학균본은 작품 분량이 33장본은 물론 84장본을 훨씬 능가하는 대작이다. 이러한 양적 확대는 기본
적으로 장면묘사의 확장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목할 것은 그 장면묘사가 거의 군더더기라고 할
만한 것 없이 인물의 성격 창조 및 의미의 서사적 실현에 효과적으로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 중 한 장면을 아래에 제시해 본다. 그 내용을 차근히 음미해
보
면 인물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실감있게 그려져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0 춘향이 찔찔 웃어 화기로 하는 말이, [도련님 올라가면 내가 집안 살림 하나나 두고 갈
까. 모두 방매하면 후에 우리 모녀 신교 타고 가거더면 한달 안에 만나볼걸 그다지 서러워하며,
또 한스럼으로 의논하면 남녀가 분명한데 사대부 체면으로 그다지 상서합쇼.] [네가 누구 청으로
말을 한다마는 끓는 국에 멋물 났다. 내가 층층시하일 뿐더러 미성년 아이가 애비 골에 따라와 작
첩하여 간다 하면 집안은 망가되고 동년동갑 보실는지 노형 소제간이라도 버린 인사로 알 것이니
이 일을 어쩌잔 말이냐? 영영사정 너 데려갈 길 내 없으니 이 아니 답답하냐.]
춘향이 앉아 들으매 종시가 틀리고 표리가 부동하니 십상 좋은 영이별이라. 도화같이 고운 얼
굴색이 변색하여 보도독 나앉으며 [애고 그 말씀이 웬말이오?] 바느질 그릇 집어 놓고 실패 골무
가위 누비띠 등물 좌르륵 흩어 되는 대로 집어 얹고 사랑하던 면경 체경 각장장판에 땅땅 부딪치
며 [속 보이는 그 말씀을 입으로 나오는가. 어찌 그리 향내 나는 말 따위를 하오.] 와락 뛰어 달
려들며 향단이 부르더니 [여쭈어라. 여쭈어라. 마루하님께 여쭈어라. 오늘밤에 내가 죽노라고 마
루하님께 여쭈어라. 여보 도련님 상봉한 지가 한달이요 두달이요. 데려간단 말이 몇번이오. 어제
저녁 서울자랑 온갖 골목 다 섬기며 세간까지 걱정터니 왼 이때 금석언약 시각을 못 지내어 일조
에 잊잔 말이요. 야속하고 인정없는 그 소리를 살아있는 나를 두고 차마 입을 붙이는가. 산색은
고금 같고 인정은 변한다 한들 저녁 한 말 아침 변코 아침 한말 또 변하니 군자소인 있으리까. 말
게 말게 그런 법이 없습네다. 매우 점잖소. 백불이삼지기우를 헛말로 알았더니 십상팔구 해오인을
오늘 보니 내 알것네. 어서어서 올라가오.]
이때 춘향모 (… 난간마루 뛰어 올라 밑창을 열뜨리고 팔뼘 내어 딸 겨누며 [내 평생에 이르
기를 태도도 너와 같고 인물도 너와 같고 행실도 너와 같은 봉황의 짝을 지어 안하에 노는 양을
목전에 보잤더니 잘되었다 잘되었다. 에 요년 썩 죽어라. 너 죽은 시체라도 저 양반이 지고 가
게.] [신학균본 별춘향가], {문학사상} 1974 2월호, 371-372면.
신학균본은 다양한 의미의 복합적 제기와 종합적 통일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도 33장본보다
주제의식이 진전된 면이 있다. 특히 신분갈등 문제가 잘 부각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
다. 신학균본은 33장본과 달리 작품 전반부에서부터 '사랑'에 대한 지향과 함께 신분제의
불합리성이 낳는 고통을 뚜렷이 부각하고 있다. 춘향의 신분적 자의식과 신분상승 의지가
뚜렷이 나타나며, 위 인용문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기생이라는 천한 신분 때문에 춘향의 겪
는 아픔이 리얼하게 살아나고 있다. 위 인용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춘향과 춘향모는 '하방 천첩' 또는 '하방 기생'의 설움을 자주 토로
하고 있다. "하방천첩 내 딸 춘향 일분 생각 하오리까."(372면, "내 팔자는 어이하여 하방 기생 되어
나서 임이별이 웬일인고"(373면, "내 아무리 기생인들 기생마다 기생인가"(373면 하는 등이다.
이
렇
게
부각된 신분갈등의 의미는 작품 중반 '춘향 사건'의 전개과정을 통해 더욱 강화되고 확산되며, 종국적으로 '인간해방'의 구현 차원에서 사랑·정절의 의미와 하나로 맺어지게 된다.
필자가 [춘향전] 서사적 구성의 관건이라고 보고 있는, '춘향 사건'을 축으로 한 의미의
변전 양상을 신학균본은 다른 어떤 이본보다도 잘 살리고 있다. 신학균본에 있어 변학도가
춘향에게 매질을 가하는 것은 단순한 순간적 분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힘으로 다스
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 억울하고도 참혹한 형벌을 보면서 남원부민들
은, 바로 전까지만 하더라도 양반서방 얻고서 잘난 체한다고 춘향을 모욕하던 그 모습에서
돌변하여 춘향과 한몸이 되어 변학도의 횡포에 함께 저항하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 춘향의
일은 곧 '나 자신의 일'이 되는 것이다. 이제 춘향과 사람들--남원부민, 나아가 독자들--사
이에 강한 정서적 일체감이 형성되는 과정이 나타난 장면을 아래에 제시한다. 앞서 인용한
33장본과 84장본의 같은 대목(인용 8-9, 19과 비교해 보면 작고큰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
이다.
(21 애고애고 우는 소리 동정추수 넓은 물에 짝 잃은 원앙조요, 목단화 웃분장에 나비 잃은
꽃이로다. 춘향이 거동 보소. 정신이 캄캄 살아날 길 전혀 없다. 도화 같은 두 귀 밑에 흐르느니
눈물이요, 백옥 같은 두 다리에 솟느니 유혈이라. 하나 치고 그만둘까 둘 치고 그만둘까, 별전 삼
십도에 남원 읍내 남녀노소 이른 말이 [불쌍하다 열녀춘향 저 매 맞고 어찌 살리.] 여기저기 손가
락질 구석구석 닦는 눈물, 우는 기생 몇명이며, 집장사령 잡은 형장 내던지고 군복자락 들어다가
얼굴을 체면 불구하고 눈물을 씻으면서 하는 말이 [못하겠네, 못하겠네 사령구실 못하겠네. 다시
이런 매 잡는 놈은 제밀 붙고 밟고 갈 놈일세.]
한참 이러할 때 실색발광 저 향단이 함부로 달려들어 춘향 다리 검쳐 잡고 [비나이나 비나이다
사또전에 비나이다. 일전에 토사병을 앓은 때가 이틀인데, 어제 아침 어제 저녁 오늘같이 굶은 속
에 죄 있어서 맞건마는 만일 맞아 죽었으면 백발노모 소녀까지 살아날 길 없사오니 한 분부 어진
덕택 세 목숨 살아지이다.] 사또 더욱 분을 내어 [삼목 칼 씌워 하옥하라.]
사장이 분부 듣고 커다란 삼목칼을 춘향의 가는 목에 함빡 씌워 칼머리 인봉 치고 삼문 밖에 끌
어내니 남원 왈자 모였으되 호가각제 노는 사람 이호장 승방 공방 굵직굵직한 통인 방자 여러 기
생이 모였으되, [산월아 옥낭아 청심환 이리 내어라.] [냉수는 금한단다. 따뜻한 물 떠오너라.]
중놈이는 대접 들고 정신없이 오락가락, 계심이는 청심환을 옥수로 덥석 잡고 비죽비죽 우는 눈
물. 군분이는 숟가락 들고 춘향 입에 떠넣는데 칠선이는 부채질과 공형들은 들락날락. [부디 찬물
권하지 마라. 중장 끝에 죽느니라.] 행수군관 왔다갔다 [너무 과히 헌화 말라.]
한참 이러할 때 춘향어멈 거동 보소. 백발머리 뒤흔들며 거문 대문 땅땅 몸부림을 드러내며
[의쇼의쇼 이 사람들 속이 내워 나 죽겠네. 늙은년이 살았다가 청춘딸을 잃게 되니, 형문에도 법
이 있지 불효강상 범하더냐 남의 굴총 하였던가. 천신만고 곱게 길러 음식이며 바느질과 온갖것을
가르쳐도 뺨 한번을 아니친 걸 저 매 맞고 어찌 사리. 아가 정신차려라.] [헌화를 금하라.] 사장
이 재촉하니 향단은 춘향 업고 여러 기생 칼머리 들고 옥으로 내려갈 때 춘향 어멈 달려들어 얼굴
을 한테 대고 목탁입을 비죽비죽 검버섯 돋은 귀밑에 눈물이 그저 좔좔. [신학균본 별춘향가], 381면.
신학균본에 있어 관민간의 갈등과 대립은 다른 어떤 이본보다도 날카롭게 부각된다. 백성
에 대한 변학도의 위세가 등등하며, 백성들의 반발 또한 그에 비례하여 전면적이다. 흉흉한
민심이 일촉즉발의 형세를 이루고 있는 형국이다. 민란의 기운이 감돌기까지 하는 이러한
긴장된 상황에서 어사의 파견과 출도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나라에서 민의(民意에 부응하여 관의 부당한 횡포를 징치함으로써, 관과 민의
첨예한 갈등이 해결되는 것이다. 권력의 횡포에 대한 민의의 승리다.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졸고, 앞의 논문, 200-213면 참조.
권력에 대한 민중의 항거라는 의미는 물론 신학균본에 있어 여타의 의미요소와 분리되어
따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33장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사랑, 정절, 신분갈등의 의
미와 한데 맞물려 있다.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참사랑, 인간적 신의와 자존심으로서의 정절,
부당한 신분적 차별로부터의 탈피, 권력의 부당한 횡포에 대한 항거, 이 모든 의미는 궁극
적으로 '인간 해방'의 차원에서 하나로 만난다. 그 경지를 [춘향전]은 보여주고 있다.
이상 신학균본을 통하여 우리는 20세기초의 [춘향전]이, 나아가 판소리문학이 그 본래의
주제의식을 더욱 강화하면서 현실성을, 문학성을 확대하고 있는 모습을 단면적으로 볼 수
있다. 신재효본에서 완판84본으로 이어지는, 그리고 대중적 활자본으로 이어지는 표면의 흐
름 뒷면에서, 아랫면에서 가꾸어져 온 [춘향전]의 참모습이다. 20세기초에 나타난 이러한 변화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이 때는 이미 [춘향
전]류의 전통적 판소리문학이 시대적 의의를 상실한 시기라는 관점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시각에
동의할 수 없다. '진정한 사랑과 정절의 구현', '부당한 인간차별로부터의 탈피', '권력의 부당한 횡포
에 대한 저항'과 같은 [춘향전]의 주제는 조선시대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제시대에도, 아
니 오늘날까지 여전히 유효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한 이본이 그러한 의미를 문학적으로 가다듬고 강
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면 그것은 시기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소중한 일이라 할 수 있다.
(2 박순호99장본·장자백창본
박순호99장본과 장자백창본은 1910년대 이후 판소리문학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자료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박순호 99장본은 1917년에, 장자백창본은 1925년에 필사된 것이다. 장자백창본에 대해서는 1865년 필
사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으나, 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장자백의 활동기간과 맞지 않을 뿐 아
니라, 내용상으로도 신재효본이나 84장본보다 앞선 것으로 보기 힘들다(춘향이 성참판의 서녀로 돼있는
점 등. 참고로, 두 자료의 원문은 김진영 외 편, {춘향전전집} 1, 박이정, 1997에 실려있으며, 장자백
창본의 경우 김진영 외 역주, {춘향가--명창 장자백 창본}, 박이정, 1996에 원문과 함께 해제, 주석까
지 이루어져 있다.
이 두 이본은 대목마다 장단이 명시돼 있는 등 판소리 창본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거니와, 이들을 통하여 우리는 이 시기 대중적 소설본과 구별되는 '판소리' 춘향전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
99장본과 장자백본은 둘 다 창본이라는 것 외에 구체적 내용 면에서 깊은 친연성을 지니
고 있다. 전체적인 서사적 전개는 물론 행문까지도 상당한 부분이 서로 유사하다. 이제 이
둘을 한데 묶어서 그 주제구현상의 특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99장본과 장자백본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완판84장본과의 밀접한 관련성이다. 앞서
두 이본의 행문이 유사하다고 했지만, 그 유사한 행문은 기실 완판84장본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이본의 사설 가운데 아니리를 제외한 '창' 부분은 84장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
다. 99장본 및 장자백본이 84장본과 유사한 것을 두고 84장본이 이 두 이본의 모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
다. 다른 모본이 있어 거기로부터 이 세 이본이 산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이본의
필사 연대가 늦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들을 84장본의 후본(後本으로 전제한 가운데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두 이본이 84장본의 아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84장본이 범했던 무리
를 답습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것을 극복하여 높은 문학적 문학적 성과를 성취하고 있
다. 이제 그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두 이본은 우선 작품 첫머리에서 춘향을 천상 선녀의 적강으로 설정하는 거추장스러운 영
웅소설식의 서두를 걷어내 버렸다. 작품 전반부에 있어 춘향은 관념적으로 이상화되지 않는
다. 곧 요조숙녀 내지 열녀로 그려지지 않는다. 서술자는 춘향과 이도령의 성격을 미화하는
대신 오히려 골계적이고 비속한 대사와 언행을 되살림으로써 이들을 발랄하게 살아 움직이
는 인물로서 부각시키고 있다.
(22 [아나 엿 이 츈향아.] (말노 불러 논이 츈향이 작 놀 여 근의 아 러지며
[ 고 호겁시럭게 삼긴 식. 너의 션산의 불이 낫는야. 눈 치 긴 것이 어름의 밋 러져 쥭은
거멍쇼ㅣ 눈 쳐로 긴 식 한마트면 낙상할 변 보왓 .] (… [엇 그 식 밋친 식일시. 도
련님이 날를 엇지 아라 부른단 말린야. 네가 도련님 밋 안져 츈향인지 난양인지 긔 인이 비
상인이 네미니 네 할민이 죵죠리 열씨 듯 죠랑죠랑 외야 밧치라든야. 이 씹의로 나셔 쇼ㅣ졋
먹 도야지 등의 업피여 라난 이 두덕이 잠연네 식가.] 99장본도 이 대목의 표현이 이와 유사하다.
<
6
장
>
이와 같은 인물의 발랄한 성격 장자백본이 보이는 서민적 발랄성에 대해서는 김진영 외 역주, 앞의 책, 해설 부분에 자세한 설명이
이루어져 있다.
은 첫날밤의 질탕한 사랑놀음 장면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있다. 그러면서 파격적이고 흥성한
사랑이라는 의미가 자연스럽게 구현된다. 84장본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어색한 이중성이 해소된 양상이다.
작품 전반부가 이렇게 되돌려짐으로 해서 작품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의
상황의 극적 전변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솜씨 좋은,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기생으로만 알았던 춘향이 뜻밖에도 사랑과 정절의, 저항의 화신으로 새롭게 살아나면
서 사람들이 그와의 정서적 일체감 속에 관의 횡포에 맞서게 되는 식의 변화다. 이러한 변
화는 84장본에서 그리 생동감있게 살아나지 못하고 있던 것인데, 99장본과 장자백본에서는
그 변전의 양상이 잘 형상화되고 있다. 힘을 뽐내며 춘향을 잡으러 나가는 사령의 모습과,
악형으로 처참한 몰골이 된 춘향을 보며 눈물을 삼키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선명
한 대비를 이룬다.
(23 굴노 령니 나온다. 굴노 령니 나온다. [예바라 짐변슈야] [워야 워야.] [예바라 니변
수야.] [글예셔야.] [예바라 번슈야] [멋 난야.] [걸니엿다 걸니엿다.] [뉘가 뉘가 걸니여.]
[춘 니가 걸니엿다.] [올타 올타 그연 일 잘 되얏다. 신통다. 구관 졔 셔방야 울니 보면
괴가 만아 혜을 며 거만실엽게 걸음 걸텬니라. 민 돌의 졍 맛는니라. 그물코가 쳔
코 되면 걸일 코가 잇는이라. 우리 동관 슈삼인 즁의 일분 사졍 두는 놈은 난졍 급살 식니리라.
어셔 가 어셔 가 .] <99장본. 47장>
(24 말 못고 긔졀니 업졋든 형방도 누물짓코 질든 집장 령도 발굴니며 셔도
며 [사 의 식은 못 보것다.] 좌우 틈셕의셔 남여노쇼 업시 구경는 덜도 [아셜라. 츈
맛는 거동은 의 식은 못 보것다. 모지도다 모지도다 우리 골 삿도가 모지도다. 독도다
독도다. 나는 간다 나는 간다 거리고 나는 간다.] (말노라 삿도 니글 분니 덜 풀여셔
[네 그연 항 죡 고 큰 젼목칼 씨여 장방굴리라.] 어다가 삼문간의 다 논니 잇 여 남
원 긔 덜리 츈 니 맛고 쥭게되야단 말을 듯고 리 동무지어 각각니 일홈을 불너 나오며 일
언 야단니 업는 것시엿다. [ 고 형임.] [ 고 동 .] [ 고 츈 아.] <99장본. 59장>
이와 같은 역동적 전변의 과정을 통하여 의미의 확산과 비약이 이루어지고 있음은 앞서
살핀 33장본이나 신학균본 등에서와 유사하다. 참사랑과 정절의 의미가 선양되며, 이와 맞
물려 신분제의 모순과 관의 부당한 횡포에 대한 저항감이라는 의미가 부각된다. 그 의미요
소들이 부각되는 정도를 굳이 다른 이본과 비교해 본다면, 신학균본에 비하여 다소 약한 듯
하나 33장본에 비하면 더 뚜렷한 쪽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재효본이나 84장본은 물론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99장본과 장자백본은 작품 후반에 있어 주제의식상 하나의 중요한 차이를 나타내
게 된다. 그것은 바로 관민갈등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99장본이 관민갈등의 의미요소를 약
화시키고 사랑 내지 신분갈등이라는 의미를 핵심 주제로 부각시키는 쪽으로 작품을 귀결시
킨 데 비하여, 장자백본에서는 관민갈등의 요소를 뚜렷이 의식하면서 다른 의미와 더불어
작품의 핵심적 주제로 부각시키고 있다.
앞에 인용한 대로 99장본에는 춘향이 받는 악형에 대하여 남원부민들이 함께 눈물지으면
서 변학도를 욕하는 내용이 나와 있다. 관의 횡포에 대한 저항감을 내면화하는 양상이다.
그러나 서술자는 뒤이은 서사적 전개 과정에 있어 관에 대한 저항감보다는 춘향에 대한 경
애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사의 민정시찰 과정에서 '춘향 사건' 이외의 관의 횡포는 구
체적으로 문제시되지 않고 있다. 춘향의 훼절을 운운하는 춘향에 대한 농부들의 반응이 무
척이나 과격한 데서 사람들의 울분을 감지하게 되지만, 농부가 어사의 멱살을 잡고 덤비면서 이도령을 ' 져 쥭일 놈', ' 말국 먹여 죽일 놈'으로 욕
하고 있다.
그
것
이
곧
관에 대한 저항감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이 이본의 서술자가 작품 말미에서 변학도를 용서하는 쪽으로 문제를 결말짓고 있다는 것이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한다.
(25 본관니 들어와 졀을 의 코가 닷커 고 인병부을 너 올니며 죄을 는듸 [과연 악
졍티민고 호열을 몰나 죄을 지엿씨니 죄당만 로쇼니다.] 고 묵묵키 안졋거늘 어삿도 말
리 [일을 각면 본고파직고 왕명을 보고자 나 글어티 안니고 그져 죄을 니 글니 알
고 이후로는 티민되 션티션졍거을 심씨쇼셔. 본관니 안니면 호열을 엇지 알고. 그간의 슈고가
단오. 감 감 니다.] 춘향어모 말니 [어삿도 부 본관은 죄어 쥬시오.] <95장>
이 대목에서 변학도의 횡포는 단지 춘향의 정절을 드러내 준 수단 정도로 격하되고 있다.
이러한 변개는 관민갈등의 의미요소를 크게 약화시킨 84장본의 전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거의 그것을 무화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작품을 떠받치고 있는 하나의 중요한
의미요소를 스스로 약화시킴으로써 의미의 편폭을 좁히고 있는 모습이다.
99장본 말미에서의 다소 뜻밖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변개는 서술자가 '민중의 항거'보다
는 '사랑' 내지 '신분갈등' 쪽에 의미의 무게중심을 둔 데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
서사의 일관성 면이나 의미의 효과적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아쉬움이 있지만, 서술자의 선택
을 존중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이 이본에 있어 참사랑과 신분 해방이라는 의미요소
는 사람들과의 정서적 일체감 속에서 잘 구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춘향과 이도령의
옥중상봉 대목을 인용(3에 제시하였거니와, 그 순수하고 숭고한 사랑이 주는 감동은 다른
어느 이본에 못지 않다. 참고로 이 장면을 84장본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84장본의 옥중장면에는 99장본과 달리 이도령이 춘향의 마음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좋은 말로
춘향의 심경을 다독여 주는 부분이 없다. 그저 "우지 마라. 하나리 무너져도 소사날 궁기가 잇난이라.
네가 날를 엇지 알고 이러타시 셔러야" 하고 말하고 떠나는 것이다. 아픈 상봉의 자리에서조차 체통
을 차리는 듯한 이러한 이도령의 태도로 인해 둘의 사랑은 상호간의 자타합일적 사랑으로 충분히 살아
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는 서술자의 관념적 허위의식이 개입한 결과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99
장본에는 그러한 개입이 배제되어 상황적 진실성을 획득하고 있다.(이는 앞서 살핀 33장본이나 신학균
본, 뒤에서 살필 장자백본에서도 마찬가지다.
99장본과 달리 장자백본에서는 작품 후반부 및 말미에서 관민갈등의 요소를 오히려 뚜렷
이 되살리는 방향을 선택하였다. 장자백본에 있어 '춘향사건'은 관과 민의 갈등과 대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서의 요소를 선명히 갖추고 있다. 변학도는 '저승차사 강림'하듯이 부임
하여 첫 사업으로 춘향을 잔혹하게 다스린다. 춘향은 "팔도방 각읍수령 치민하려 보 셧
졔 학졍려 보 셧쇼." 하면서 폭력에 정면으로 항거한다. 그 참혹한 정경에 백성들이 너
나없이 눈물짓고 통곡함은 물론이다. 이 장면을 통해 예고된 변학도의 횡포는 어김없이 백
성에 대한 수탈로 이어지고, 민원은 고조된다.
(26 [여보 농부덜 말 듯쑈. 우리 남원이 판일네. 어이여 판인가. 우리 골 원님은 농판
이요 상쳥죠ㅏ슈난 퇴판이요 육방관쇽은 먹을 판 낫씬이 우리 셩들은 쥭을 판니로다. 얼널널 상
뒤. <49장>
(27 어 보시다가 [농부 한나 이리 오면 말 죰 무러보게.] 한 농부 나오며 [무신 말삼 무
를남나.] [원의 졍쳬가 엇 한고.] 져 농부 답되 [ 망이 물밀 듯지요.] [ 망이란니 무신
말린지.] [원님은 쥬망이요 죠ㅏ슈는 노망이요 아젼은 도망이요 셩은 원망 그리여 망이요.]
어 가 실금이 젼을 보것 . [본관이 호 여 츈향이란 긔 을 작쳡여 두고 쥬야로 호강만
한단이 그 말이 오른지.] (휘모리 져편의 엇 농부 우루루 펄젹 여 나와 거문 낫빗 변 되며
운에눈을 부름 고 [군쇼리 분한 말이. 용심불칙 져 거린아 본관의 편역인가. 열여 츈향 몰나보고
거짓 리 츄런야 무암잡는 져 쥬둥이 쿡쿡 여 벙어리 되게 .] 왈칵 여 달여든이 (말노
늘근 농부 말니는 말리 더 밉것 . [마라 마라. 네 쥬먹의로 그 람 강이넌 말고 도야지 강
이라도 리면 터지것 .] <49장>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민심이 들썩이는 가운데 어사가 났다는 소문이 떠돈다는 점이다.
임금은 이도령을 전라어사로 삼으면서 "학졍난 탐관덜"을 "임의 휘지쳐참"하는 권한을 주
거니와, 이도령이 민심을 탐지하는 대목에서 방자를 통하여 어사가 내렸다는 소문에 고을이
떠들썩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남원고을 백성들은 불안한 긴장감 속에서 어사의 출두를 기
대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에서 개입하여 관권의 부당한 횡포를 바로잡아야 된다는 여론이
다. 이러한 내용은 앞서 살핀 여러 이본들 가운데 신학균본에서만 보인다. 신학균본에서는 춘향의 죽음에
대한 불안과 어사 출두에 대한 기대가 맞물리면서 긴장이 감돌고 있는 상황이 그려지고 있다. 어사의
출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춘향이 죽을 경우 남원부민들이 봉기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
러
한
민
심은 마침내 반영이 되어서 어사가 출도하고 변학도가 추출된다. 그리고는 그 동안의 온갖 시련과 고통을 딛고서 춘향과 이도령, 남원부민, 독자들이 모두 다 함께 기쁨을 나누는 축제의 한 마당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 축제의 마당 속에 참사랑과 인간해방의 의미가 구현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장자백본은 99장본보다도 여러 해가 더 지난 뒤에 나온 이본이다. 장자백본이 나온 1926
년 무렵은 이미 [춘향전]이 대중적인 소설본으로, 창극으로 개작되면서 두루 변질되고 있던
시점이다. 그렇지만 그 격랑의 세월 속에서도 판소리가 그 본래의 주제의식을 힘있게 지켜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장자백본은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4. 맺음말
이 논문에서는 완판 계열에 속하는 [춘향전] 주요 이본들을 대상으로 하여 작품의 주제의
식 내지 주제 구현양상의 변모 양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우리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의 판소리문학의 전개양상에 대하여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었다. 19
세기말 20세기초를 거치면서 판소리 본래의 주제의식이 변질되어 나가는 것이 하나의 흐름
을 형성하는 가운데 그 저변에는 그것을 유지 내지는 더욱 강화하는 또 하나의 흐름이 이어
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자료를 분석한 기본 관점은 작품의 문학적 성취를 제대로 고려하자는 입장이
었는바, 그것을 가늠하는 주요 잣대로서 작품 중반의 '춘향 사건'을 축으로 하여 의미의 질
적 비약과 확산이 이루어지는 양상을 중점적으로 고찰하였다. 애초에 개인적이고 불완전한
형태로 제기된 사랑과 정절, 신분갈등 등의 의미요소가 '춘향 사건'을 계기로 춘향과 사람
들--남원부민, 나아가 독자--의 정서적 일체감이 형성되는 가운데 관권의 횡포에 대한 항거
라는 의미요소와 맞물리면서 참사랑과 신분해방, 인간해방의 의미로 격상돼 나가는 것이
[춘향전] 주제 구현양상의 핵심 줄기라는 것이 우리의 관점이었다. 그 구도를 완판29장본과
33장본, 특히 33장본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춘향전]의 대표적인 개작본으로 손꼽히고 있는 신재효본이나 완판84장본은 그러
한 구도를 뒤바꾸거나 흐트린 것으로 나타났다. 서사적 전개에 나름의 일관성과 합리성을
부여하고자 한 신재효의 개작은 결과적으로 서사 전개의 극적 전환을 소거함으로써 의미의
질적 비약과 확산을 약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더하여 그가 춘향의 형상을 일반 백성
과 구별되는 지점에 있는 특수한 개인으로 엮어 나간 것 또한 의미의 확장에 걸림돌로 작용
하였다. 한편, 완판84장본에서는 서술자가 정절의 관념에 경도된 결과로서 의미 변전의 구
도가 약화 내지 와해되고 말았다. 작품 전반에서부터 춘향을 무리하게 열녀로 부각시키고자
한 의도는 실제 인물형상과의 어색한 불일치를 가져왔고, 작품 중반에서의 진정한 열녀로의
극적 변전을 희생하고 말았다. '열녀 춘향'에 대한 서술자의 집착은 작품 후반에도 계속 이
어져서, 의미를 '가상한 정절'이라는 좁고 특수한 것으로 몰고 가는 양상을 나타냈다. 그
결과 참사랑이나 신분해방, 권력에의 항거 등과 같은 의미들이 충분히 살아나지 못하고 퇴
색되었다.
이에 대하여 20세기초의 이본들인 신학균본이나 박순호99장본, 장자백본은 오히려 춘향전
본래의 주제의식을 유지 내지는 진전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신학균본은 '춘향 사건'을
축으로 한 의미의 질적 비약과 확산이라는 구도를 다른 어떤 이본보다도 잘 살린 수작으로
판명되었다. 현실적 생동감과 짙은 감동이 우러나도록 묘사된 세심한 디테일이 안정된 서사
적 구도와 더불어 이 이본의 문학적 성취를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99장본과 장자백본 역
시 상황의 극적 변전과 의미의 질적 비약을 잘 살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완판84장본의 영향
속에서 그 한계를 극복하고서 얻은 성과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단 두 이본은 의미
를 최종적으로 집약하는 방식에서는 차이를 드러냈다. 99장본이 관민갈등보다는 사랑과 신
분갈등이라는 의미요소에 초점을 맞추어 주제로 삼은 데 비하여, 장자백본에서는 관민갈등
을 여타 의미요소에 못지않은 중요한 의미로 부각시키면서 다양한 의미요소들을 한데 통합
하는 방향성을 나타냈다. 말하자면 장자백본이 정도를 선택한 셈이다. 장자백본의 이러한
선택은 20세기에 들어서고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에까지 판소리가 정도를 걷고 있었음을 보
여주는 좋은 실례가 되고 있다.
우리가 내린 이상과 같은 결론은 아직 완전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수많은 이본을 대상
으로 하여 그 주제의식의 허실을 한꺼번에 가려 따지겠다는 것이 애초에 지나친 욕심이었음
을 인정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번 논의의 의의를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는 데 두고 있다.
이 글에서의 문제 제기가 판소리문학의 역사적 전개에 대한 활발한 논쟁을 되살리는 데 조
금이나마 이바지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