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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K, 그리고 민중음악의 발전

Casey,Riley 2022. 10. 29.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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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CK, 그리고 민중음악의 발전

                                                               


  1. 들어가며

  몇 개의 학내 락그룹, 그리고 민중 락그룹, 블랙홀, 크래쉬 등의 기성 락그룹. 요즘 몇몇 대학내
에서 기획되어지고 있는 초청 공연의 흐름이다. 이름하여 '락의  저항정신'이라고 하는 담론의 확
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젊음의 반란 락 훼스티발'인 것이다. 몇몇 평자들의 락에  대한 저항
의 담론형성과 서태지와 아이들, 강산에,  NEXT 등의 대중음악판 에서의 사랑타령이  아닌 강한 
사회비판의식의 등장, 그리고 천지인이라는  민중가요 락그룹의 탄생, 음악모임  작은하늘의 락을 
중심으로한 형식적 모색, 조국과 청춘의 락에 대한  전면적인 시도 등 민중가요의 역사성을 계승
한 락음악의 형성과 그리고 일부 대중들의 이러한 흐름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이 문화지형 속에서  
하나의 결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할까.
 사실 지금 몇몇 평자들이 락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마치 진보적 노래운동의  새로운 대안이 부상
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락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것은, 민중가요의 침체라는 90년대 이후의 
상황 속에서 일견 하나의 돌파구로 위치지워질 수 있다는 전술적인 측면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
된다. 물론 한 측면에서는 아직도 민중가요의 락 수용에 대하여 여러가지 측면(?)에서  심한 알레
르기를 보이는 사람들도 존재하고 있지만 이젠 민중음악내에서 락이라는 형식은  이미 하나의 지
형을 확보해 들어 갔다고 결론지어도 좋을 듯 싶다. 
  필자 또한 이러한 락을 통한 민중음악의 형식적 시도를 적극적으로 지지, 옹호하면서 몇가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2. 문제는 락이 아니라 민중음악 

  '형식주의'가 아닌, '내용주의'로의 복구 
우선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민중음악의 형식에 대한 문제이다. 천지인을 필두로 진행된 락
의 수용에 대한 논란은 개별생산자, 또는 어느 한팀의 차원을 넘어 전체 민중가요의 형식의 방향
에 대한 문제라는 점이다. 이러한 민중가요의 형식에  대한 문제가 먼저 짚어지지 않고서는 민중
가요의 발전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가 진행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민중가요의 형식과 수용에  
대한 문제는 굳이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동안의 민중가요에 역
사 속에서 이미 검토된  사실-신디사이저의 활용의문제, 김호철씨의 뽕짝풍의  민가 등등-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민중가요란 무엇이냐의  정의에 따라서 다소의  편차가 있겠지만, '민중가요'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형식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할 것
은 생산자의 시각과 내용, 그리고 유통과정(현실적 접합 지점)에 있다고 생각된다. 한마디로 이야
기해서 민중음악에서 표현방식에 대한  제한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해서도 않된다. 그러하기에 
더나아가서 힙합, 랩, 댄스, 블루스, 째즈 등등-사실 이러한 것은 그다지 신선한 것도 아닐  진대- 
대중음악이라고 해서 민중음악 내에서 수용해서는 안된다는 법칙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다. 형식에 대한 제한적 고착은 민중가요를 몇몇의 부류로 경향화 시켜낼 수밖에 없다. 그러한 경
향화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민중음악의 현실적 가능성을 열어 가기위해서 형식의 시도
는 오히려 더욱 장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과 각각의 형식에 대한  깊이 있
는 고민 속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시t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러하기에 민중가요 내에서 벌여지
는 그리고 앞으로 벌여질 이러한 형식적 확대를 위한 노력은 결과를 넘어 그  자체로 1차적인 유
의미성을 지닌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가 민중가요의 확대, 강화의  한 과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은 두말하면 잔 소리일 것이다. 

 '락의 정신이 아니라 민중가요의 정신'

  그동안 진행되어온 락에 대한 과대한 담론 속에서 대립된 '락이 본래 저항적이냐 아니냐'의 문
제는 결코 중요한 논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까놓고 얘기해서 락이 쓰레기이면 어떻고 저항이
면 어떤가? 락이 쓰레기이면 누가 어떻게하던 다 쓰레기인가? 아니면 락이 저항이면 누가 어떻게 
하던 다 저항인가? 이건 말도 안돼는 소리다. 그리고 어떠한 형식자체에 고착된 의미를 부여하거
나 절대화 시키는 것은 해서도 안되며 사실  가능하지도 않다. 그것은 어떠한 형식이든지 생산자
들의 의도나 감성에 따라서 다르게 표출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형식 자체에 어떠한 의미를 고
착하시키는 것은 또 한번 민중음악에 대하여 한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며 민중음악을 특정
한 형식의 흐름으로 고착화 시킬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락을 통한 민중음악의 형식적 
확대의 본질은 락의 정신에 있지  않다. 또한 형식적 시도에  있어서 '어떠한 형식은 이러이러한 
의미가 있다'라는 정의와 그에 따른 형식적 취사 선택이 아니라, 그동안 끊임없는 문제제기 속에
서 피지배 계급과 호흡하며 그들의 삶과 미래를 노래한 민중가요의 정신과 형식의 올바른 접목이
라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락은 민중가요의 대안이 아닌 것이다. 락은 민중가요의  일 부분일 뿐인 
것이다. 또 하나 민중음악의 정신은 비판적 저항의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사회와 삶(슬픔, 
즐거움, 좌절, 환히, 사랑, 절망 희망, 분노 등등)을 느끼며 호흡하는 계급적 시각'인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사회에서 문화적 저항성의 최고의 구현은 계급운동과의 접목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사실
이다. 그러한 접목방식은 주류(?)문화에 대한  반대속에서 비주류문화(언더그라운드 등등)의 형성
이 아닌것이다. 저항성이라고 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사의 구별(직설화법이냐, 간접화법이냐 
몇몇 단어의 유무)이나 형식의 정형화된 선언이  아닌, 노동자계급운동과의 직,간접적인 접합지점
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내용의 문제와 함께 구조형성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3. 생산자들의 형식적, 내용적 상상력을 복돋아 주어야 한다.

  80년대 말의 문화실천가들은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자신의 의식과 일의 결합 속에서 일에 대한 
열정이 존재했으며, 일정정도의 쾌감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누구나 동의 
하듯이 지금은 상황은 분명히 다르다. 그러하기에 주체들이 뚫고 나갈 현실적  조건, 또한 다르게 
존재한다. 새롭게 형성되는 민중음악의 생산자들에게는 과거보다는  현실에 그리고 미래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문제는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은  이제 그들이 몫이
다. 그러한 방식이 올바르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외면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보고 애정어린 비판
을 가할 수 있는 자세라고 할 것이다.

- 진보적 대중이여 현실적 향유가 아닌 미래지향적 향유를 하자

 민중가요라고 하는 축척된 관성은 우리들에게 현실을 돌파해 나가는 하나의 지표가 되기도 하지
만 때로는 민중음악의 발목을 잡는 관념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락에 대한 대안적 담론과 비판의 
담론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도 드러났듯이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형식적  거부감을 벗어나고 있
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들이 느끼고 있는 것 보다 더욱 폭  넓게, 그리고 깊이 변화
해가고 운동하고 있다.문화예술의 진보는 저 거대한  자본과 현란하기만한 대중음악의 몫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진보는 자본주의 문화예술의 부정을 통해서 가능한것이 아니라 극복
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직접생산자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몫인 것이다. 그러하
기에 단지 자신의 취향에 의하거나, 익숙하지 못함, 그리고 몇 개의 가사 만을 가지고 외면하려는 
것은 노동,민중음악의 발전을 원천봉쇄하는 과정이 되고 말 것이다. 반복은 익숙함을 낳는다(길거
리에서든 어디에서든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듣게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음악은 논문이 아
니다. 머리로 듣고 단번에 결론 내리려 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재미가 있을 수 없다. 지금당장 익
숙하지 않더라도 의도적으로 들어보고 느껴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해야한
다. 그래야만 좀더 정확하고 애정어린 비판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렵다고 못 따라 부르겠
다고 단정 하지도 말아야 한다! 느낌이 오면 흥얼대고 그러다 보면 따라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전문가수가 아닌바에야 잘 못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자신의 취향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취향은 오랜동안  형성되어온 것이기에 억지로 바뀌거나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그러한 형식에 대한 주관적인 편견은  버려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취향이 전체가 
아님을, 또 바뀔 수 있음을 부정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열린 마음만이  폭넓은 섭취를 가
능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중가요를 전술적인 측면만으로 고수, 이해하거나 향유-일
상엔 대중가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민중음악을 죽이는 첫 번째 지름길인 것이다. 

  2. 생산자여 자신의 길을 가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예술은 본질적으로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그것은 구조로
부터 서서히 강제되어오는 지점인 것이다.  진보적 음악을 지향하는 생산자들  또한 현실 속에서 
예외는 아니며 결코 먼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하기에 진보적 음악생산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시각
과 음악적 길은 전술이 아닌 전략이 되어야 한다. 인위적인 강요가 아닌, 자신의  의식 속에서 스
스로의 당당한 자발성인 것이다. 작업을 생산하는 과정은 자신의 의식적인 형성과정과 그리고 가
치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어느 누구든지 생산자들은 작업 속에 자신
의 감정과 느낌, 그리고 생각을 표현하며 자기 기준을 가지고 생산에 임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
서 생산과정은 생산자들의 감정과 인식이 개입되어지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생산 속에서
의 자유는 무엇 보다도 생산자 주체의 의식 속에서 1차적으로 회득되어야만 한다.생산자 또한 일
반 대중과 같이 자신의 취향이 존재한다. 그 속에서 자신의 음악적 방향과 스타일이 형성 되는것
이다. 그러나 그동안 진보진영의 음악생산자들에게는 자신의  음악적 방향을 선택하는데 있어 여
러면에서 굴레가 존재해 왔다. 이제 생산자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자신있게 해야 한다. 문
제는 그 속에서 얼마만큼 자신이 솔직하게 현실을 느끼고 담고 있는가에 있다. 자신의 시각 속에
서 형성되어지는 감성과 느낌을 정서적으로 객관화시키는 능력을 개발해 나가야 한다. 그러한 과
정에서 자신의 인식과 경험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스스로 변화, 발전시키고자 노력하는 생산자만
이 스스로에게 자유와 대중들과의 새로운  정서적 교감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4. 마치며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락이라는 형식과  적당한 사회비판의식이 아닌 것이다. 항상 
소외받는 사람의 편에서 삶을 노래하고 누가 누구를 착취하거나 짓누르려는 것에 저항해온 노동,
민중음악의 부활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계급음악의 발전에 걸림돌인 형식에 대한 알
레르기는 버릴 수 있도록하자. 결국 문제는 민중문화, 민중음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의 지
향점이 아니겠는가? 노동,민중문화는 이땅의 노동자 민중들에게  하나의 문화적 해방구가 되기도  
해야겠지만 생산자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가치 속에서 최대한의 자유로움으로 남아있어야 할 것이
다. 제발 어설픈 편견과 굴레로 민중음악의 상상력을 죽이지 말자!

       민중음악의 형식적 반란과 계급문화의 자유로운 부활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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