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본)리차드 위트컴
이 책은 리차드 위트컴이 보여 준 선행과 희망의 흔적을 모은 책이다. 리차드 위트컴은 6ㆍ25 전쟁 직
후 유엔군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복무하며 뛰어난 리더십과 인류애로 이주민 후생 주택 건립, 보
육 및 요양 시설 건립, 부산대 장전캠퍼스 부지 마련, 부산 메리놀 병원 건립 등등 수많은 선행을 실천
했다.
리차드 위트컴
▣ Short Summary
1950년 일어난 6ㆍ25 전쟁은 휴전 이후에도 온 국토에 깊은 흉터를 남겼다. 도시는 폐허로 변했고,
그 기능을 수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특히 피란민들로 북적이던 부산은 곳곳에 세워진 천막
등으로 인해 화재에 취약했는데, 1953년 1월 국제시장 대화재를 시작으로, 11월에 부산역전 대화재가
일어나 조금씩이나마 재건을 이루며 일상을 회복하던 부산 시민들의 희망을 삼켜 버렸다. 이렇게 모두
가 좌절에 빠져 있을 때, 3만 명의 이재민에게 잠을 잘 수 있는 텐트, 의류, 침구류, 식량 등 군수 물
자를 긴급하게 지원한 이가 있는데, 바로 유엔군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복무하던 리차드 위트컴이
다.
그런데 정작 위트컴 장군은 부산 시민에게 베푼 선행으로 오히려 고초를 겪었다. 군수 물자를 함부로
지원했다는 이유로 군법 회의에 회부되고, 미국 의회 청문회까지 불려 갔다. 하지만 그는 “전쟁은 총칼
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말로 미국 의회를 설득했고, 기
립 박수와 함께 많은 구호금을 받아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후로도 리차드 위트컴은 가용할 수 있
는 자원을 찾고, 이를 활용해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 아무튼 전쟁의 여파와 잇따른 화재로 피폐해
진 부산 시민들에게, 위트컴 장군의 리더십과 인류애는 그야말로 ‘종합 예술’이자 ‘선물’이었다.
이 책은 리차드 위트컴이 보여 준 선행과 희망의 흔적을 모은 책이다. 리차드 위트컴은 6ㆍ25전쟁 직후
유엔군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복무하며 뛰어난 리더십과 인류애로 이주민 후생 주택 건립, 보육 및
요양 시설 건립, 부산대 장전캠퍼스 부지 마련, 부산 메리놀 병원 건립 등등 수많은 선행을 실천했다.
저자는 리차드 위트컴 장군의 흔적과 생애를 돌아보며, 흩어져 있던 여러 자료를 선별해 하나의 저서
로 엮었는데, 구체적으로 위트컴 장군이 부산에 베풀었던 구체적인 선행은 물론, 평생의 연인이었던
한묘숙 여사와의 국적과 나이를 뛰어넘은 러브스토리, 그리고 그가 남긴 흔적들을 재조명하고, 부산에
오기 전 위트컴의 삶은 어떠했는지, 아울러 부산이 간직한 전쟁의 상흔은 무엇이 있는지 등을 살펴보
고, 마지막으로 여러 전문가의 칼럼을 통해 리차드 위트컴이라는 인물을 폭넓게 읽어 내려 시도한다.
▣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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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위트컴
머리말 / 프롤로그 : 위트컴 장군과 부산 - 사람이 먼저다
Ⅰ. 부산에 베푼 선행
1. 전쟁 폐허에 ‘희망꽃’ 피운 위트컴 유엔군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 2. “전쟁은 총칼로 하는 것이 아
니라,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 / 3. 문재인 대통령, 위트컴 장군의 부산 사랑 소개 /
4. 이승만 대통령과 담판 벌여 부산대 50만 평 부지 제공에 결정적 역할 / 5. 장병 월급 1% 떼 메리
놀병원 지원 / 6. 갓 쓰고 한복 차림으로 시내 돌며 병원 건립 기금 모금 / 7. 보리밭 출산 보고 조산소
설치 / 8. “위트컴 리더십은 종합 예술, 하나님 선물.” AFAK를 활용한 복구 프로젝트 / 9. 위트컴 선행
지도 / 10. 윤인구 총장, 종(鐘) 모양 그림 1장으로 50만 평 부지 얻어 / 11. 기생집에서 술판 벌인다
고 모함을 받다
Ⅱ. 위트컴 장군과 한묘숙 여사의 러브스토리
1. 31살 나이 차이 극복 / 2. 위트컴 장군, 왜 귀국하지 않고 한국에 남았나? / 3. 위트컴 장군의 유언
/ 4. 한묘숙 여사 북한 25번 방문…‘마타하리’, ‘이중 스파이’ 오해도 / 5. ‘부산대 마더’ 한묘숙 여사 별
세 / 6. 전호환 부산대 총장 추모사 - ‘부산대 마더’ 한묘숙 여사를 추모하며
Ⅲ. 남아 있는 흔적 재조명
1. 사라진 공덕비를 찾아라 / 2. “공덕비, 부산도시철도 중앙역 인근에 있었다” / 3. 부산 유엔평화기념
관에 ‘위트컴 장군 상설 전시실’ 개관 / 4. 대구 육군 제5군수지원사령부, 위트컴 장군실 개관 / 5. 양
정 이재민 주택 준공 기념비 59년 만에 재조명 / 6. 1950년대 화재에 취약한 부산은 ‘불산’ / 7. 윤정규
소설 『불타는 화염』에 기록된 부산역전 대화재 / 8. 부산 중구, 옛 부산역 터에 부산역전 대화재 표지
석 설치 / 9. 부산시, 한묘숙 여사에게 감사패 전달 / 10. 기념 조형물 건립 추진 / 11. 김재호 교수와
강석환 회장, “위트컴 장군 흔적 찾다 만난 우린 천생연분.”
Ⅳ. 부산에 오기 전 위트컴의 삶
1. 위트컴 장군 일대기 개관 / 2. 위트컴의 리더십을 만든 가정 교육 / 3. 여동생 이사벨이 바라본 오빠
위트컴 / 4. 엄격하지만 딸 바보인 아빠 위트컴 / 5. 스트레스에 관한 세 가지 교훈 / 6. 2차 세계 대전
에서 발휘된 리더십 / 7. 전후 냉전 시대 기지 건설과 보급 작전을 위한 수송 지휘
Ⅴ.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부산
1.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11개국 2,311명의 영웅 영면 / 2. “판문점에서 북한군 시신과 맞바꾼 유엔
군 유해, 열차로 모셔와 안장.” / 3. 북한군 시신도 묻혀 있다 / 4. Stand or die(버텨라, 그러지 못하면 죽
는다.) / 5. 베트남 ‘보트피플’ 껴안은 부산 / 6. 국가 행사된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 뉴욕
타임스퀘어에 추모 영상 띄워 / 7. 턴 투워드 부산 최초 제안자 벤센트 커트니 씨 특별기고 - “대한민국
국가 기념일 지정, 참전 용사로서 무한한 영광.” / 8. 커트니 씨 “가상 세계(메타버스)로 지구촌 청소년
에 한국전 의미 알렸으면.” / 9. 유엔군 참전 용사에게 빼빼로 선물하는 부산 남구 / 10. ‘Never Forget
You All(당신들 모두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 11. 부산 시민, 2,300개 촛불을 든 까닭은? / 12. 네덜
란드 참전용사협회 “참전 용사 인정 못 받은 응어리, 한국인 배려로 풀겠다.” - 네덜란드 참전용사협회
(VOKS) 레오 슈뢰더스 사무국장 기고 / 13. 스웨덴과 부산 이어 준 어머니의 6ㆍ25 전쟁 간호 장교 참
전 - 부산 스웨덴야전병원 근무 고(故) 뷔비 블롬베리의 딸 피아 블롬베리 기고 / 14. 유엔기념공원은
망자 통해 산자 치유…국경 초월 인류 화합 보여 줄 유일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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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위트컴
Ⅵ. 위트컴 장군 넓게 읽기
1. 소설 위트컴 ‘유엔공원에 핀 휴먼 스토리: 아름다운 선물’ - 정인 소설가 / 2. 위트컴 장군 인류애,
세계인과 공유하자 - 김재호 부산대 전자공학과 교수ㆍ위트컴장군추모사업회 사무총장 / 3. 리차드 위
트컴 장군과 세계 시민 정신 - 강석환 부산관광협회 부회장ㆍ초량왜관연구회장 / 4. 리차드 위트컴
(Richard S. Whitcomb) 장군 연보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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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위트컴
리차드 위트컴
부산에 베푼 선행
전쟁 폐허에 ‘희망꽃’ 피운 위트컴 유엔군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1953년 11월 27일 발화한 부산역전 대화재는 6ㆍ25 전쟁으로 인한 폐허를 딛고 재건을 일구려는 부
산 시민의 희망을 삼켜 버렸다. 부산 중구 영주동 산비탈 피란민 판자촌에서 시작된 불은 당시 부산의
번화가였던 40계단, 동광동, 부산역(당시 중앙동 소재) 등지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화재로 2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주택 332채가 전소됐다. 피해 규모는 현재 가치로 1조 8,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
로 추산된다. 집을 잃은 6,000여 세대 3만 명의 이재민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어야만 했다.
이때 파란 눈의 구세주가 나타났다. 리차드 위트컴 유엔군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이 미군 창고를 열어
이들에게 잠을 잘 천막과 먹을 것을 나눠 줬다. 매일 2만 3,100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과 텐트, 의류,
침구류 등 군수 물자를 긴급하게 지원했다. 장군은 화재 다음 날부터 곧바로 공병 부대를 투입해 지역
을 정리했고, 일반 장병들은 4만 명이 기거할 수 있는 임시 천막촌을 준비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장군은 12월 9일에 첫 번째 텐트촌을, 12월 10일에는 두 번째 텐트촌을 제공하겠다고 계
획을 밝히면서 “이재민 중 누구라도 굶거나, 잠잘 곳, 진료 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을 것.”이라고 확고
한 의지를 밝혔다(1953년 12월 5일 자 《성 조지 태평양판》). 참고로 위트컴 장군이 쳐 준 천막에서
생활한 이종철 씨는 “천막촌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꿈을 키워 대학교수가 됐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전쟁은 총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
위트컴 장군은 19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 때 군법을 어기고 군수 물자를 이재민에게 나눠 줬다는
이유로 군법 회의에 회부되고 미국 의회 청문회에 불려 갔는데, 그는 청문회에서 “전쟁은 총칼로만 하
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War is not done with sword nor the rifle.
Genuine triumph is for the shake of the people in the country.)”라고 말해 의원들의 기립 박수와 함께
많은 구호금까지 받고서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쟁이 벌어진 현시
점에서 진정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전쟁을 하는지 되새겨 봐야 할 대목이다.
위트컴 선행 지도
위트컴 장군의 혼은 부산 곳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부산은 장군의 제2의 고향이다. 장군과 부산 사
람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돕거나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의로운 마음이 강하다
는 공통점이 있다. 6ㆍ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1월, 혹한이 예년보다 빨리 찾아오자 부산시가 피
란민과 당시 잦은 화재로 집을 잃은 이주민에게 자기 집의 방 한 칸을 비워 주는 운동에 나섰다.
국제신문 1951년 11월 13일 자 2면에는 ‘방 없는 전재피난민(戰災避難民)에 낭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정부가 겨울을 앞두고 요정, 여관, 음식점 같은 방 많은 집을 개방해 무주택 피란민을 수용하
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방이 모자라 원하는 피란민 모두에게 제공할 수 없었다. 이에 부산시 사회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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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위트컴
방을 구하지 못한 피란민, 이재민과 이들에게 방을 비워 줄 시민 가정을 알선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시는 피란민에게 방세를 비싸게 받으면 100만 원 이하의 벌금 및 과태료를 부과하고 구류 처벌까지
한다고 밝혔다. 참고로 부산시는 2012년 11월 1~3일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치유의 인문학’을 주제로
열린 유네스코ㆍ교육과학기술부 주최 ‘2회 세계인문학포럼’에서 이 같은 부산 시민의 휴머니즘을 국내
외에 알리고, 토론 소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장군은 전후 복구를 위한 미군대한원조처(AFAK) 기금을 수동적으로 집행하지 않고 부산 시민의 편에서
발 벗고 찾아다녔다. 부산 지역 역사 연구가인 강석환은 “위트컴 장군의 헌신적인 전후 복구 노력이 없
었더라면 부산의 재건은 훨씬 더뎠을 것.”이라며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장군을 제대로 재조명하
고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군이 부산 시민에게 베푼 주요 선행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부산대 장전캠퍼스: 부산대는 1946년 9월 부산 서구 충무동에서 단과 대학으로 개교했고 1953년 종합
대학으로 승격했으나, 이에 걸맞은 캠퍼스 부지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윤인구 초대 부산대 총장은
1954년 6월 8일 부산대를 찾은 위트컴 장군에게 종 모양의 캠퍼스 배치도를 그린 그림을 보여 주며
“교육에 대한 내 꿈을 사 달라. 부산대의 미래에 투자하라.”고 부탁했다.
윤 총장의 비전에 감동한 장군은 당시 경남 지사와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해서 50만 평의 장전동 부지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술 더 떠 장군은 캠퍼스 조성에 필요한 25만 달러 상당의 건축 자
재를 AFAK 사업을 통해 지원하는가 하면 당시 전차와 버스 등 대중교통의 종점인 온천장(현재 부산은
행 온천동 지점)과 부산대 무지개문을 연결하는 진입 도로(길이 1.6km)를 미군 434 공병 부대를 동원
해 건설해 줬다.
메리놀ㆍ침례ㆍ성분도병원: 위트컴 장군은 전쟁 후 각종 질병에 노출된 아픈 이를 위한 병원 건립에
주력했다. AFAK(미군대한원조) 프로그램으로 메리놀ㆍ침례ㆍ성분도ㆍ복음ㆍ독일적십자병원 등 각종
병원 건립을 지원했다. 참고로 병원 건립 기금이 모자라자 그는 한복 차림에 갓을 쓰고 부산 시내를
활보하며 거리 모금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또 그는 1950년 4월 메리놀수녀의원으로 출발한 메리놀
병원의 신축을 돕기 위해 예하 부대원에게 월급의 1%를 공사비로 기부하게도 했다. 메리놀병원은 우
여곡절 끝에 착공 8년 만에 1962년 11월 종합 병원으로 신축됐다. 아무튼 1950년대 중반부터 1960
년대 초반까지 부산 지역 의료 수준이 전국 최고로 평가받는 데는 장군의 역할이 컸다.
부산역전 대화재로 그을린 축대: 부산역전 대화재 때 그을린 축대가 중구 동광동, 영주동, 보수동 일대
에 남아 있다. 이들 축대에서 화재 열기에 돌이 달궈진 뒤 비바람에 식으면서 일부가 깨진 흔적을 확
인할 수 있다. 부산 시민들이 부산역전 대화재 발생 1주년을 맞아 1954년 11월 위트컴 장군을 기리며
세운 공덕비는 도시철도 1호선 중앙역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도 조산원: 위트컴 장군은 1954년 6월 영도구 피란민촌을 시찰하던 중 만삭의 임산부가 보리밭에
들어가 아기를 낳는 장면을 목격하고 조산원을 설치했다. 참고로 피란민촌 천막에는 7, 8세대 40여 명
이 집단 생활하는 터라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여건이었다.
양정동ㆍ청학동 이재민 주택: 위트컴 장군은 AKAF(미군대한원조) 기금과 부산시 시비를 투입해 부산
역전 대화재 이재민을 위한 주택을 양정동, 청학동, 동래 등에 지었다. 부산 미군군수사령부는 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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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위트컴
장병과 함께 양정동에 111세대 규모의 이재민 주택을 지었고, 이를 기념해 1954년 6월 30일 ‘부산시
화재 이재민 주택 준공 기념비’가 부산진구 양정2동 59의 6 도시철도 1호선 양정역에서 동의의료원으
로 올라가는 길가 씨엔에프치킨가게 앞에 높이 178cm의 첨두 피라미드 형태로 세워졌다.
UN기념공원ㆍUN평화기념관: 위트컴 장군은 ‘제2의 고향인 한국의 UN 묘지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
기고 1982년 7월 12일 숨졌는데, UN기념공원에 묻힌 유일한 장성이기도 하다. 부인 한묘숙 여사가
2017년 1월 1일 별세한 뒤 이곳에 함께 잠들어 있다. 인근 UN평화기념관 2층에는 위트컴 장군 상설
전시실이 2018년 7월 12일 문을 열었고, 장군의 따뜻한 인류애는 이곳을 찾는 시민과 교감하고 있다.
위트컴 장군과 한묘숙 여사의 러브스토리
31살 나이 차이 극복
위트컴 장군과 부인 한묘숙 여사의 러브스토리는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6ㆍ25 전쟁 이후 전쟁고아를
위한 활동을 하면서 서로 알고 지내다가 1964년 결혼했다. 참고로 31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
을 이루었으며, 한 여사는 재혼이었다. 한 여사는 결혼 이후 친정 가족과 생이별했다. 당시로는 이혼이
드문 데다 외국인과의 재혼으로 가족들은 여사와의 연락을 끊었다. 가족들은 ‘노랑머리 아기가 나올
수 있다.’며 반강제로 한 여사를 병원으로 데려가 자궁 적출 수술을 받게 했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없다. 위트컴 장군은 한 씨가 데려온 1남 1녀를 끔찍이 사랑했다.
위트컴 장군과 한 여사 모두 부산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위트컴 장군은 1953, 1954년 미군 부산군수
기지 사령관을 지냈고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잠들었다. 한 여사 역시 아버지 한석명의 직장 관계로 부
산에서 4년간 살면서 부산고등여학교(현 부산여고)를 다녔다. 한석명은 경찰관 출신으로 부산 동래군
수, 경남 하동군수 등을 지냈다. 한 여사의 친언니는 작고한 유명 여류 소설가 한무숙 씨다.
위트컴 장군, 왜 귀국하지 않고 한국에 남았나?
위트컴 장군은 준장으로 퇴역하고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위트컴 장군은 민간 차원의 한국 재건과
부흥 원조를 목적으로 하는 한미재단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전쟁고아를 위해 보육원을 설립하고 후원했
다. 그래서 그는 ‘한국 전쟁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위트컴 장군이 부인 한묘숙 여사를 만나 1964
년 결혼한 것도, 한 여사가 충남 천안과 서울 한남동에서 고아원을 운영했고 위트컴 장군이 이를 후원
한 게 인연이 됐다.
참고로 위트컴 장군과 부인 한 여사가 한평생 목을 매다시피 한 일이 있다. 1950년 장진호 전투에서
사망한 미군 해병대의 유골을 미국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저자는 2012년 6월 11일 한 여사를 서울 한
남동 자택에서 만나 인터뷰했는데, 위트컴 장군이 미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한국에 남은 까닭은 전쟁고
아 돕기와 북한 내 미군 유해 발굴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흔적 재조명
사라진 공덕비를 찾아라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로 집을 잃은 부산 시민들을 위해 위트컴 장군이 군수 물자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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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위트컴
눠 주고 천막촌을 직접 지어 줬다. 그가 베푼 선행에 도움을 받은 부산 시민들은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한 지 1주년을 맞아 1954년 11월 그를 기리는 공덕비를 세웠다. 부산 시민들은 공덕비에 ‘위트컴
장군은 우리 화재민을 위하여 이곳에 학교, 산원, 교회를 짓도록 후원하여 주었다. 우리는 영원히 그
공적을 찬양하는 바이다.’라는 글을 새겼다. 안타깝게도 위트컴 공덕비는 사진만 남아 있을 뿐 비석 존
재 여부와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편 위트컴 장군 재조명 작업을 벌여 온 김재호 부산대 전자공학과 교수와 강석환 부산관광협회 부회
장은 “위트컴 공덕비가 어디에,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조사하고, 시민 공감대를 전제로 필요하다면 다
시 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 교수는 부산대 문화콘텐츠개발원장 보직을 맡았을 당시 부산대 장전
캠퍼스 조성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위트컴 장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유튜브에 올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그의 휴머니즘을 널리 알렸는데, 그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것이 그에 대한 고마움을 나타
내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며 “나아가 대학 안에 위트컴 기념 공원을 조성하는 등 그를 기억
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에 오기 전 위트컴의 삶
위트컴 장군 일대기 개관
위트컴 장군의 리더십을 연구하고 있는 박주홍 경북대학교 경상 대학 교수는 장군의 삶 속에 묻혀 있
는 리더십의 뿌리를 찾고자, 그의 삶을 5개의 시기로 나눠 개관한다. 박 교수는 이 같은 내용을 2021
년 11월 11일 유엔평화기념관 3층 컨벤션홀에서 열린 ‘제3회 위트컴 장군 기념 세미나’에서 ‘위트컴의
삶에서 발견하는 참 군인의 리더십’이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했다. 박 교수는 5군수지원사령관을 지
낸 예비역 준장으로 사령관 재직 시절인 2017년 12월 부대에 ‘위트컴 장군실’을 만들었다.
박 교수는 어린 시절 가정 환경 속에서 어떻게 장군의 리더십이 형성되었는지, 임관 후 참전한 전쟁에
서 리더십이 구현됐던 과정을 추적하고, 마지막으로 한국에 부임해 폐허가 된 부산의 재건 과정에서
종합적으로 발현된 장군의 리더십에 관해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연구하고 있는데, 이는 장군이 부산에
오기 전의 삶을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여서 박 교수의 허락을 받아 이 책에 소개한다.
성장기(1894~1917)는 출생부터 대학을 졸업한 시기이다. 미국 캔자스주 토피카(Topeka) 지역의 유복
한 집안에서 훌륭한 부모의 가정 교육을 받으며 형제들과 함께 성장했다. 건전한 가정 환경은 위트컴을
따뜻한 가슴을 가진 자립심과 책임감이 강한 청년으로 성장하도록 했다. 캔자스의 워시번(Washburn)
대학 시절은 적극적인 학생 활동을 통해 미래의 삶에 대한 신념을 확고히 하는 시기였다.
사회 활동기(1915~1940)는 워시번대학을 졸업 후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전까지의 시기이다. 위트컴은 대학 졸업 후 하와이의 YMCA에서 일하면서 1917년 주
방위군 및 예비군 장교로 임관했다. 그는 다양한 회사에서 간부로 근무하고, 지역 사회의 활동에 적극적
인 참여를 통해 기업 및 정부 기관의 예산, 조직, 기술 등에 관한 많은 지식과 경험을 습득했다.
여러 통신 회사에서 세일즈 매니저, 지역 책임자로 근무했고, 보스턴 시 정부의 업무 개선을 위해 다양
한 지원 활동을 했다. 또 300만 달러 이상의 실업자 구호 펀드를 모금했으며, 시 정부의 자문 위원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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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위트컴
서 정책에 관한 조언을 통해 100만 달러 이상의 예산을 절감하는 역량을 발휘했다. 위트컴의 다양한 사
회 활동의 경험은 차후 참전과 재건 과정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는 중요한 토대가 됐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및 냉전 시대 임무 수행기(1941~1952)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혁혁한 전
공을 세우고, 종전 후 냉전 시대에는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그린란드 일대 기지의 수송 및 보급 작
전을 지휘했던 시기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뒤 미군의 참전이 결정되자 장군은 미군 최초로
1941년 아이슬란드에 파견돼 모든 항만을 지휘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출중한 임무 수행 덕분
에 대령으로 진급한 이후 1944년에는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핵심적인 군수 부대인 11
항만단의 지휘관으로 보직되어 오마하 해변 상륙 작전 지원은 물론, 계속되는 보급 지원 및 폐허가 된
도시의 재건 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이후 유럽 전선이 안정화됨으로써 1945년 11항만단은 미국 본국으로 귀국했으나, 장군은 어려움을 겪
고 있던 필리핀 마닐라 항만의 지휘관으로 보직되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종전 후 1950년
부터 그린란드 툴레 공군 기지 건설을 위한 상륙 작전을 지휘했고, 1952년까지 뉴펀들랜드 항만 등 다
수의 항만과 기지에 대한 수송 및 보급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는 발판
을 마련했다.
부산 재건기(1953~1954)는 1953년 한국에 부임한 이후 1954년까지 화재로 인해 폐허가 된 부산을
재건했던 시기이다. 장군은 19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하자 가능한 모든 예산, 부대, 정부
기관 등을 총동원해 도시를 재건하는 데 매진했다. 부산 재건 프로젝트는 단순히 이재민을 구호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거주 단지 조성, 도로포장, 교량 건설, 병원 건립, 고아원 건립 등 도
시 전체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데 중점을 뒀다. 그리고 이 같은 위트컴 장군의 헌신적인 노력 덕
분에 부산은 1년도 안 돼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전역 후(1955~1982)는 1954년 전역한 이후부터 별세한 1982년까지의 시기이다. 장군은 전역 후 이
승만 대통령의 정치 고문을 맡았으며, 아이젠하워 대통령, 밴 플리트 장군과 함께 한미재단을 설립해
한국의 전쟁고아를 돕는 일에 헌신했다. 그리고 1964년 한묘숙 여사와 결혼해 어려운 한국 국민을 돕
는 사회사업에 매진하다가, 1982년 7월 12일 심장 마비로 유명을 달리한 뒤,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
장됐다. 부인 한묘숙 여사는 장군의 유지를 받들어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들의 유해를 송환하기
위해 여생을 헌신하다가 2017년 1월 1일 별세한 뒤 유엔기념공원에 장군과 합장됐다.
위트컴의 리더십을 만든 가정 교육
위트컴 장군은 1894년 캔자스주 토피카에서 5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위트컴은 친가는 물론 외가
가 모두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집안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보스턴대학에서 수학한 법률
가로서 보스턴의 변호사를 거쳐 캔자스주의 법관으로 오랫동안 근무했으며, 워시번대학의 명망 있는
법대 교수였다. 어머니는 남편의 보스턴대학 법대 동창생으로 남편의 법률 파트너일 뿐만 아니라 여러
책을 저술한 유명한 작가였으며, 남편과 함께 미국 초대 장로교회의 이사회에서 활동했다.
어머니가 쓴 글인 ‘미간행 자서전’에는 어린 시절 위트컴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녀의 교육 철학은
자녀들이 독립심을 가지도록 성장하는 것이었다. 이를 설명하는 사례 하나가 소개되고 있다. 그녀는 위
트컴이 15살 되던 해에 자녀에게 어려운 숙제를 냈다. 5개의 문과 6개의 큰 창문이 달린 방을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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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위트컴
데 필요한 자재 소요량을 계산하고, 이를 목재 공장에 주문하도록 했다. 목재 공장은 24마일이나 떨어
진 곳에 있어서 다녀오는 데 2일 걸렸다. 보통의 목수에게는 별일 아니었겠지만, 아이에게는 힘든 일이
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인내심과 추진력을 발휘해 결국 숙제를 해냈다. 어머니는 자녀에게 도전과 흥미
를 같이 제공하면서 스스로 문제를 풀어 가도록 한다는 교육 철학을 가진 것으로 풀이된다.
부산대 김재호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어린 시절 위트컴의 꿈은 놀랍게도 필리핀에서 선교사를 하는 것
이었다고 한다. 워시번 대학생 시절에 학생 자원 봉사단의 청년 리더 활동을 하면서 그 꿈을 키워 갔
는데, 부모의 사회적 위치와 유복한 가정 환경을 고려한다면 높은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는 직업을 추
구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어린 위트컴은 떡잎부터 달랐던 것이다. 이는 청교도 정신에 기반을 두고 겸
손함과 자립심을 갖도록 자녀 교육을 했던 건전한 가정 환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부산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11개국 2,311명의 영웅 영면
부산은 전쟁과 평화의 기억이 공존하는 도시이다. 6ㆍ25 전쟁 당시 전투는 없었지만 전쟁의 흔적이 짙
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시내 한복판인 부산진구 부전동 롯데백화점 부산 본점 인근 ‘스웨덴 참전 기념
비’에서부터 남구 부경대 대연캠퍼스 내 미8군 사령부 지휘소 ‘워커하우스(일명 돌집)’까지 전쟁의 기
억을 간직한 곳이 많다. 그중에서도 ‘유엔기념공원’은 세계에서 유일한 유엔군 묘지로, 아주 특별하고
상징적인 공간이다. 해마다 백발의 노인이 된 참전 용사와 그 후손들이 유엔기념공원을 찾고 있다. 한
국을 방문하는 외국 국가 원수나 장관들에게도 이곳은 필수 코스다.
2021년 4월 5일 준공 70주년을 맞은 유엔기념공원은 이곳에 잠든 리차드 위트컴 장군을 위시해
2,311명(사후 안장 포함)의 영웅과 함께 전쟁과 평화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유엔기념공원은
1951년 1월 18일 유엔군 전사자 매장을 위해 유엔군 사령부가 조성했다. 3개월 뒤인 4월 5일 묘지가
완공되면서 개성과 인천, 밀양 등지에 가매장됐던 유엔군 전몰장병의 유해가 지금의 자리에 묻히게 됐
다. 현재 한국(37명)을 비롯해 영국(886명)과 터키(462명), 캐나다(380명) 등 11개국의 유엔군이 안장
돼 있다. 미군은 전쟁 당시 가장 많이 전사했지만 3만 6,429명의 유해 모두 본국으로 이장됐으며, 휴
전 후 한국에 주둔해 있던 미군 중 여기 안장되기를 희망한 40명만이 현재 이곳에 잠들어 있다.
1974년부터 대한민국을 포함해 호주,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남아공, 터키,
영국, 미국 등 이곳에 전사자가 안치된 11개국으로 이루어진 ‘재한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위원회’가 유
엔기념공원의 관리를 맡고 있다. 1955년 12월 유엔 총회에서 유엔이 영구 관리하기로 결의한 뒤 1974
년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가 관리해 오다 지금의 운영 체계가 정착된 것이다. 해마다 10월 24일 ‘유
엔의 날’을 전후해 11개국의 주한 대사들이 참석하는 정기 총회가 열린다. 국제관리위원회 의장국과
의장은 위원국별 알파벳 순으로 정해지고 재임 기간은 11월 1일부터 다음 해 10월 31일까지다. 국제
관리위원회는 1년에 한 번 각국 대사가 만나 정기 회의를 통해 안건을 결정한다.
베트남 ‘보트피플’ 껴안은 부산
독일은 1954년 5월 17일 부산 시민의 건강을 보살펴 주기 위해 서구 서대신동 부산여고 건물을 빌려
서독적십자병원을 개원하고, 서독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은 1958년 12월 31일 독일로 돌아가기까지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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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위트컴
7개월 동안 27만여 명을 진료하며 부산의 의학 발전에 큰 도움을 줬다. 독일적십자병원이 떠난 자리에
월남난민수용소가 마련됐다. 베트남 전쟁에서 월맹에 패망해 나라를 잃은 월남 난민의 슬픔을 달래 주
고 희망을 일굴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부산여고는 1975년 초 사하구 하단동으로 이전했다.
베트남 난민 1,557명은 1975년, 5, 6월 두 차례 우리 해군 북한함, 계봉호와 화물선 쌍용호를 타고 부
산항에 도착했다. 이들 난민은 1년 4, 5개월간 부산 시민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은 뒤 1976년 10월 본인
의사에 따라 한국에 잔류하거나 미국, 캐나다, 프랑스, 대만 등지로 망명해 새 삶을 찾았다. 부산 시민
들은 6ㆍ25 전쟁 때 받은 국제 사회의 도움을 ‘베트남 보트피플’에게 되갚은 셈이다. 이후 1977년 베트
남 해상 탈출 난민인 ‘보트피플’이 폭증하자 우리 정부와 대한적십자사는 유엔의 지원 아래 부산 해운대
구 재송동 1008번지에 2,000㎡ 규모의 난민 보호소를 다시 설치해 1993년까지 운영했다.
세월이 흘러 우리나라는 외국의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2021년 초 아
프가니스탄에 주둔한 미군이 철수하면서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자 우리나라 공군 제5공중기동
비행단은 같은 해 8월 현지로 날아가 아프가니스탄 특별 기여자와 가족 391명을 수송하는 ‘미라클 작전’
을 말 그대로 기적처럼 성공시켰고, 이들 특별 기여자 및 가족들은 울산에 정착해 생활하고 있다.
국가 행사된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 뉴욕 타임스퀘어에 추모 영상 띄워
2007년부터 매년 11월 11일에 개최된 ‘턴 투워드 부산 유엔 참전 용사 국제 추모식’이 2020년부터 법
정 기념일인 ‘유엔 참전 용사 국제 추모의 날’로 격상됐다. 2020년에는 국가보훈처장에서 격을 높여 국
무총리(정세균)가 기념사를 하며, 지역에만 송출되던 KTV 중계방송도 전국에 방영됐다. 6ㆍ25 전쟁 70
주년 사업추진위원회와 국가보훈처는 첫 법정 기념일로 지정된 ‘유엔 참전 용사 국제 추모의 날’(11월
11일)을 맞아 참전 용사를 추모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했다.
정부는 유엔군 참전 용사 초청 등을 기획했으나, 코로나19로 추진이 어려워지자 특별영상을 제작해 참
전국 주요 도시 전광판 및 방송사 광고를 통해 영상을 송출하기로 했다. 그렇게 미국 뉴욕, 영국 런던,
태국 방콕 등 전광판에도 6ㆍ25 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용사를 추모하는 특별 영상이 송출됐다. 30초
분량의 영상은 2021년 12월 6일까지 뉴욕 타임스퀘어에 있는 전광판 3개와 영국 카나리 워프, 켄싱턴
하이스트리트에서 상영됐다. 또 아리랑 TV를 통해 103개국에 영상이 제공되었고, 영국 BBC 등 방송
사 광고를 통해서도 방영되며 유엔군 용사의 희생과 공헌에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유엔기념공원은 망자 통해 산자 치유…국경 초월 인류 화합 보여 줄 유일한 공간 - 이흥곤 국제신문
문화사업국장, 국제신문 2018년 12월 11일 27면 칼럼
지난달 중순 우편물을 하나 받았다. 발신자는 부산 남구청, 타블로이드판 신문 2부였다. 하나는 국문
판, 다른 하나는 영문판이었다. 제호는 ‘NEVER FORGET YOU ALL(그대들, 모두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는 지난달 11일 유엔기념공원에서 6ㆍ25 전쟁 전몰용사를 추모하는 국제 행사인 ‘턴 투워드 부산
(Turn Toward Busan)’이 열렸을 때 참석자들에게 나눠 주기 위해 남구청이 특별히 만든 신문이었다.
‘턴 투워드 부산’은 캐나다의 6ㆍ25 참전 용사 빈센트 커트니(89) 씨가 2007년 제안, 22개 참전국에서
매년 11월 11일 오전 11시(한국 시간) 전몰장병이 안장되어 있는 유엔기념공원 쪽을 향해 1분간 묵념
하는 행사다. 2008년부터 국가보훈처가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
20쪽 분량의 국문ㆍ영문 2,000부씩 모두 4,000부가 발행된 이 신문은 행사 당일 영문과 국문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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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위트컴
2,000부가량이 배포됐다. 남구청은 이후 이 신문을 국내 주재 22개 참전국 대사관에 우편으로 발송했
고, 앞으로 해외 참전 용사 단체 등에 보낼 예정이다. 이 신문에선 특히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2,297
명의 전몰장병 명단의 편집이 눈에 띈다. 나라별로 모두 8개 면에 걸쳐 실린 명단에는 전몰장병의 풀
네임과 계급, 소속 부대, 사망 일자 등 구체적인 인적 사항을 담아 동료 참전 용사나 유족이 지면을 통
해 확인할 수 있게 배려했다. 일종의 지상 롤콜(ROLL-CALL OF FALLENㆍ호명식)인 셈이다.
단순 기록물에 그치지 않고 읽을거리도 흑백 사진과 함께 담았다. ‘전쟁고아의 아버지’ 위트컴 장군이 한
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이야기, 가슴을 저미는 사후 안장자 및 합장묘 사연들, ‘턴 투워드 부산’을
제안하고 유엔기념공원에 캐나다 전몰용사 기념비를 세운 신문 기자 출신의 빈센트 커트니 씨와 전쟁
당시 2년 6개월간 시신 수습팀으로 복무하며 90여 명의 주검을 거둔 영국군 참전 용사 제임스 그룬디
(88) 씨의 기고문 속의 한국 사랑은, 우리가 그들을 백년손님처럼 대해야 하는 이유가 들어 있다.
이 글을 보며 4년 전 미국 현지 취재 후 ‘6ㆍ25 참전 용사의 한국 사랑’이라는 기획 기사를 연재한 적
이 있는 기자는 그때 만난 분들이 오버랩됐다. 수술 후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코리아 기자가 온다
는 말에 한파가 몰아치는 와중에도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었다는 미주리주의 한 참전 용사는 눈물을
글썽이며 악수 대신 기자를 안아 주었고, 뉴욕의 또 다른 참전 용사는 거실 테이블에 전쟁 당시 작전
지도와 빛바랜 사진, 군부대 마크, 각종 훈장 및 배지 등을 꺼내놓고 기자를 기다렸다. 백발의 노병들
은 피로 지킨 코리아를 절대 잊지 않고 있었다.
참전 용사의 이런 일방적인 한국 사랑에 정작 은혜를 입은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올해
‘턴 투워드 부산’ 행사 땐 단 한 명의 참전 용사도 초청하지 않았다. 대신 유족만 일부 초청했다. 아이
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의 연령은 현재 8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이다. 5년 후면 아마 초청해도 기
력이 없어 올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 해도 이런 점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닌가. 4년 전 기자가 만난 대부분의 미국 참전 용사는 목숨 걸고 싸운 당시의
전장과 부산의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이번 신문 발행을 계기로 본 정부의 참전 용사에 대한 인식도 기대 이하였다. 청와대에 이 신문 발행
의 취지를 설명하고 대통령의 인사말을 공문으로 부탁하자 전례가 없다고 거절했고, 주무 기관인 보훈
처 역시 신문 발행의 취지에는 관심이 없고 이 신문이 ‘턴 투워드 부산’ 행사에 방해가 안 됐으면 한다
고 신문 제작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역만리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조그만 나라에서 목
숨 걸고 싸운 이들에 대한 대접이 너무 야박하지 않은가.
이참에 유엔기념공원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이곳은 유엔이 관리하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전몰장병 묘지다. 여행 작가 패트리샤 슐츠가 쓴 『죽기 전에 가봐야 할 곳 1000곳』이라는 책이 있다.
하지만 1,000곳 중 한국은 한 곳도 포함돼 있지 않다. 남구청이 발행한 신문 마지막에 이런 대목이 나
온다. ‘만일 작가 슐츠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죽기 전에 가봐야 할 1,000곳으로 추천하고 싶은 곳이 바
로 유엔기념공원’이라고. 망자를 통해 산 자가 치유되는, 세계에서 가장 거룩한 공간이며 동시에 국경
을 초월해 인류가 화합할 수 있음을 보여 줄 수 있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위트컴 장군 넓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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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위트컴
위트컴 장군과 세계 시민 정신 - 강석환 부산관광협회 부회장, 국제신문 2018년 9월 17일 25면 기고
부산에는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참전 우방국 2,300여 기의 영령이 안식 중이다.
1950년 6ㆍ25 전쟁에 참전해 자유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우방국의 영웅이 그들
이다. 해마다 부산시와 국가보훈처 그리고 지역 민간단체는 그분들의 희생을 기리고 추모하는 행사를
연다. 국가보훈처는 2010년 6ㆍ25 전쟁 60주년을 맞아 전 세계 참전 용사 한국 방문 프로그램을 만들
어 그분들이 가족과 함께 다시 한국을 찾도록 했다.
백발이 성성해진 노인이 되어 다시 한국을 방문한 그들은 오늘의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직접 확인하고 청
년 시절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이 절대 헛되지 않았다는 자부심과 보람을 느꼈다. 그중 한 분이 미국 출신
클리포드 스트로버스(클리프) 씨다. 그는 1953년부터 1954년 11월까지 부산 자갈치에 있는 미군 44공병
여단 본부에 근무했는데, 마침 그때 새로 나온 코닥 컬러 필름으로 틈틈이 부산과 부산 근교의 모습을 컬
러 사진으로 담아냈다. 그는 2010년 서울 행사를 마치고 자신이 근무했던 부산을 찾았고, 당시 필자가
위탁 운영하던 용두산 공원 부산 타워를 방문했다. 그게 인연이 되어 그가 소장한 1950년대 부산과 한국
의 생생한 모습이 담긴 컬러 사진 230여 점과 흑백 사진 50여 점을 입수할 수 있었다.
유독 그 사진 속에는 메리놀병원 기공식, 보육원 준공식, 부산역전 대화재 재건 등을 주관하는 군 장군이
눈에 띄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분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리차드 위트컴 장군이었다. 『부산대
60년사』, 『메리놀병원 50년사』, 국가기록원 자료 등에 리차드 위트컴의 업적이 그대로 실려 있다. 위
트컴 장군은 부산 주재 미 육군 군수 지원 사령관으로서 1953년부터 1954년 12월까지 한국군과 부산 재
건 임무를 맡았다. 그는 이를 위해 스스로 미 육군 한국 지원 프로그램(AFAK)을 만들어 부산대 등 교육
시설, 메리놀병원, 성분도병원 등 각종 의료 시설, 고아원 건립, 양정과 청학동 주택 단지 건립, 도로 교
량 건설, 부산역전 대화재 이재민 구호를 포함한 수많은 인도적 사업을 펼쳤다.
그는 1954년 말 전역과 함께 미국으로 귀국했으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아이젠하워 대통령, 밴플리
트 장군과 함께 ‘한미재단’을 설립해 미국에서 한국을 돕는 공공과 민간의 지원이 끊임없이 이뤄지게 하
고, 특히 한국 전쟁 고아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 고아원 지원에 온 힘을 다했다. 그가 1982년 7월 12일
영면했을 때 동아일보는 ‘한국전쟁 고아의 아버지 위트컴 장군 영면하다’는 부음 기사를 썼다.
1960년대에는 고령에도 서울을 근거로 하여 베트남, 캄보디아, 중국을 돌며 이곳의 낙후된 의료 시설
을 보고 ‘위트컴희망재단’을 설립해 한국의 재건과 전쟁고아의 성장뿐 아니라 중국과 아시아 지역 의료
시설 확충과 북한 땅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미군 장전호 전투 전사자의 유해를 찾아오는 일을 여
생의 임무라고 믿고 실천했다. 또한, 그는 스스로 한국인임을 자처하고 한국 여성인 한묘숙 여사와 결
혼했다. 한 여사는 이후 북한을 23차례나 방문해 유해를 찾았다. 그는 죽어서도 미국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묻히기를 원해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돼 있는데, 장군급으로서는 유일하다.
부산대 김재호 교수와 필자는 위트컴 장군의 부인이 서울 용산에 계신 것을 알고 그분을 찾았고 추모
사업회를 만들어 매년 7월 12일 유엔기념공원에서 추모식을 열어 왔다. 그리고 2012년 국제신문에 위
트컴 장군을 조명하는 기획 시리즈 기사가 보도된 이후 부산시가 그해 10월 24일 유엔의 날 기념행사
에 맞춰 부산 시민의 감사 뜻을 담은 감사패를 위트컴 장군 부인에게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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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오랜 기간 수많은 국제 교류 역사가 배어 있는 곳이다. 오늘의 부산 역시 세계와 무역하며 해
운과 수산의 중심지로 역할하고 있다. 열린 세계인의 마음과 인류애를 바탕으로 협력과 선행으로 상생
하는 위트컴 장군의 모습에서 세계 시민으로서 인류 공영에 어떻게 이바지하는지를 잘 볼 수 있다. 이
또한 부산 시민의 DNA와 너무도 일치한다. 리차드 위트컴 장군. 그는 영원한 한국인, 부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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