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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토토 [구로야나기 테츠코]

Casey,Riley 2022. 11. 30.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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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가의 토토

   구로야나기 테츠코

   프로메테우스 1권 (완결)



 

 1. 처음 가보는 전철역

 오이마치선 전철을 타고 가다가 지유가오카 역에 내리자, 엄마는 토토의 손을 잡고 
개찰구를 빠져 나오려 했다.

 토토는 그때까지 전철을 별로 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소중하게 쥐고 있던 표를 줘
버리기가 어쩐지 아까웠다. 그래서 개찰구에 서 있는 아저씨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 전철표, 나 가지면 안 돼요?"

 "암, 안 돼지."

 아저씨는 재빠르게 토토 손에서 전철표를 빼앗았다. 토토는 개찰구에 놓여진, 상자 
가득 담겨있는 전철표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다 아저씨 거예요?"

 아저씨는 밖으로 나오는 다른 사람들의 표를 낚아채면서 대답했다.

 "아저씨 게 아니고, 역 거지."

 "아아…."

 토토는 무척이나 아쉬운 듯 상자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저요, 이 담에 커서 전철 표를 파는 사람 될 거예요!"

 아저씨는 그때서야 토토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아들 녀석도 역에서 일하고 싶어하니까, 같이 하면 되겠구나."

 토토는 조금 떨어져서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뚱뚱한데다 안경을 끼고 있었
다. 찬찬히 살펴보니 마음씨가 좋아 보이기도 했다.

 "흠…."

 토토는 허리에 손을 대고 이리저리 관찰하며 말했다.

 "아저씨 아들하고 같이 해도 상관은 없지만, 한번 생각해 볼게요. 전 지금 새 학교에
가는 길이라 좀 바쁘거든요."

 토토는 그렇게 말하고 기다리는 엄마에게로 뛰어갔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엄마! 나, 전철표 파는 사람 될 거야!"

 엄마는 조금도 놀랍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스파이가 되겠다는 건 어떡하고?"

 토토는 엄마의 손을 잡고 걸으며 생각했다.

 (맞아, 어제까지는 꼭 스파이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하지만 상자 가득 전철
표를 담아두는 사람이 되는 것도 참 좋을 것 같애.)  

 "맞다!"

 토토는 좋은 생각이 떠올라 엄마를 쳐다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 있지, 원래는 스파인데 전철표를 판다고 하면, 그럼 어떨까?"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엄마는 지금 너무도 불안했던 것이다

 (혹시라도 지금 가고 있는 학교에서 토토를 받아주지 않으면….)

 작은 꽃이 달린 펠트 모자를 쓴 엄마의 예쁜 얼굴이 약간 심각해졌다. 그리고 깡충거
리면서 뭐라고 쉴새없이 종알대는 토토를 쳐다보았다. 토토는 엄마가 걱정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얼굴이 마주치자 신난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엄마! 나, 생각해 봤는데, 양쪽 다 그만두고 그냥 친동야(이상한 복장을 하고 악기를 
울리면서 거리를 돌아다지며 선전, 광고하는 사람-역주)될래!"

 엄마는 다소 절망적인 심정으로 말했다.

 "얘, 늦겠다. 교장선생님이 기다리시니까 이제 그만 종알대고 앞 좀 보고 걸어."

 
 두 사람의 시야에 조그만 학교 문이 들어왔다.


 2. 창가의 토토

 새로운 학교의 문을 들어서기 전에, 토토의 엄마가 왜 불안해하는가를 설명하자, 엄
마는 토토가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이미 퇴학을 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
었다. 겨우 1학년에!


 바로 지난주의 일이었다.

 엄마는 토토의 담임선생님에게 불려가 이런 말을 들었다.

 "댁의 따님은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다른 학교로 데려가 주셨으면 
해요."

 젊고 아름다운 여선생은 한숨을 내쉬면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정말 어째야 좋을 지를 모르겠어요."

 엄마는 깜짝 놀랐다.

 (대체 어떤 행동을…. 저 애가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다니, 대체 무슨 짓을 했기
에….)

 선생님은 구부려 올린 속눈썹을 깜빡거리고, 파마를 하여 안쪽으로 손질한 짧은 머리
카락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수업 중에 책상 뚜껑을 백 번도 더 열었다 닫았다 합니다. 그래서 제가 쓸데없
이 책상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지 말라고 하면, 댁의 따님은 노트부터 시작해서 필
통, 교과서를 다 책상 속에 넣어버린 다음 하나하나 꺼내요. 예를 들어서 말이죠. 받
아쓰기를 한다고 해요. 그러면 따님은 먼저 뚜껑을 열고 노트를 꺼낸다 싶기가 무섭게
쾅! 하고 닫아버립니다. 그리고는 바로 또 열어 머리를 안으로 들이밀고 필통에서 
'가'를 쓰기 위해 연필을 꺼낸 다음 얼른 닫고 '가'를 씁니다. 그런데 글씨가 마음에 
안 들거나 잘못 썼거나 하면 말이죠, 그러면 뚜껑을 열고 또 머리를 들이밀고 지우개
를 꺼내고 닫은 다음 얼른 지우개를 쓰고 나서는 또 무서운 속도로 뚜껑을 열어 지우
개를 넣고 닫아버립니다. 그런데 금방 다시 열기에 지켜보았더니 고작 '가' 한 글자만
달랑 쓰고는 학용품을 하나하나 다 넣어버리는 거예요! 연필을 넣고 닫은 다음 다시 
열어 노트를 넣고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는 '나'를 쓸 때가 되면 다시 노트에서
부터 시작해서 연필, 지우개…. 그때마다 제 눈앞에서 눈이 핑핑 돌을 지경이에요. 그
렇다고 일단은 책상 뚜껑을 열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데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고…."

 선생님의 속눈썹이 그때를 떠올리는 듯 빠르게 깜빡였다.

 거기까지 들은 엄마는 토토가 왜 책상 뚜껑을 그렇게 열었다 닫았다 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학교에 갔다온 날 토토가 아주 흥분된 목소리로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 것이다.

 "엄마, 학교는 정말 좋은 데야! 우리 집 책상 서랍은 이렇게 잡아당기는 건데, 학교
에 있는 건 뚜껑을 위로 올리게 되어 있어. 쓰레기통 뚜껑하고 똑같은데, 더 매끈매끈
하고 여러 가지를 넣을 수 있어서 참 좋아!"

 엄마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책상 앞에서 신기해하며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토토
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그건

 (그렇게 나쁜 행동도 아니고, 또 차츰 익숙해지면 그렇게 심하게 열었다 닫았다 하지
도 않을 텐데….)

 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선생님께서는

 "주의를 시키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더욱 더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만 돼도 괜찮겠어요!"

 엄마는 몸이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선생님은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어째 책상 소리를 내지 않는다 싶어서 돌아보면, 이번에는 수업 중에 서 있는 거예요! 
계속해서!"

 엄마는 또 깜짝 놀라서 물었다.

 "서 있다니, 어디에 말입니까?"

 선생님은 약간 화가 난 듯이 말했다.

 "교실 창가예요."

 엄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 계속해서 질문했다.

 "창가에서 대체 뭘 하는 거죠?"

 선생님은 거의 외치듯이 말했다.

 "친동야를 부르기 위해서죠!"


 선생님의 얘기를 정리해보니 대충 이랬다.

 1교시 내내 웬만큼 책상을 툭탁거리고 나면, 토토는 그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 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선생님이

 (조용히만 있어준다면 뭐, 서 있어도 상관없겠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큰 소리로

 "친동야 아저씨!"

 하고 밖을 향해 외친다. 공교롭게도 교실 창문이 토토에게는 행복하고, 그러나 선생
님에게는 불행하게도 1층에 있었고 게다가 길이 바로 코앞이었다. 그리고 경계라고 해
봤자 낮은 울타리만 있을 뿐이어서 토토는 쉽게 지나가는 사람과 얘기할 수 있었던 것
이다.

 어쨌든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지나가던 친동야는 창문 밑까지 다가온다. 그러면 토토
는 기쁘다는 듯이 반 아이들 전체를 부른다. 

 "왔어!"

 그 소리에 공부하고 있던 반 아이들은 일제히 창가로 몰려가 입을 모아 외친다.

 "친동야 아저씨!!"

 그러면 토토는 친동야를 조른다.

 "아이, 아저씨, 조금만 해 보세요."

 학교 옆을 지날 때는 일부러 소리를 낮추는 친동야도 모처럼의 부탁이라 성대하게 연
주를 시작한다. 클라리넷이며 꽹과리, 북, 샤미센을 총동원해서…. 선생님은 그러면 
한 곡이 끝날 때까지 혼자 교단에 서서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 한 곡이 끝날 때까지만 참자.)

 라고 스스로를 달래면서, 그리하여 한 곡이 끝나면 친동야는 다시 가던 길을 가고, 학
생들은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토토는 창가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선생님은 의아해하며 묻는다.

 "왜 여태 거기 있는 거니?"

 그러면 토토는 아주 진지하게 대답한다.

 "아이 참, 선생님도. 다른 친동야 아저씨가 그냥 지나가 버리면 어떡해요? 또 아까 
그 친동야 아저씨가 다시 올 지도 모르고요."
 
 "그래서야 어떻게 수업이 되겠어요! 상황을 대충 짐작하시겠죠?"

 얘기를 하는 동안 어느 새 선생님은 상당히 감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사실이 그렇다면 선생님도 무척이나 곤란하시겠군….)

 엄마는 생각했다. 순간 선생님은 한층 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게다가!"

 엄마는 놀라면서도 약간 비참한 심정으로 선생님께 물었다.

 "아직 뭐가 또 있는 모양이죠…?"

 선생님은 즉시 대답했다.

 "아직 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나 되면, 제가 이렇게 학교를 그만 둬 달라고 부탁드
리지도 않죠!"

 선생님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 다시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
했다.

 "어제 있었던 일이에요. 역시나 토토가 창가에 서 있기래 저 또한 <친동야를 기다리
나보다>생각하며 묵묵히 수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뭐 하니!?"하고 누군
가에게 묻고 있는 거예요. 제 쪽에서는 상대방이 보이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누굴까?>
하고 궁금해하고 있는데, 또 큰소리로 "얘, 뭐 하니!?"하는 거예요. 그것도 이번에는 
길이 아니라 위쪽을 보고 말이에요. 전 하도 신경이 쓰여서 도대체 상대방이 뭐라고 
대답하는 지나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였지만 영 대답이 없는 거예요. 따님은 그래도 계
속해서 "응, 뭐 하고 있는 거냐니까?"하고 계속 묻길래, 수업에 지장도 있고 해서 창
가로 가 따님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상대가 누군지를 봤죠….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위를 봤더니 글쎄, 지붕 밑에다 제비가 집을 짓고 있었어요! 따님은 그 제비한테 얘
기했던 것이죠! 물론 저도 아이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니까, 제비한테 그렇게 물
었다고 해서 잘못됐다고는 말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수업 시간인데 그렇게 큰 소리로 
제비에게 '뭘 하고 있냐!'고 떠들 것까진 없잖아요?"

 그리고 선생님은, 엄마가 (대체 뭐라고 사죄를 해야하나)하고 생각하면서 말을 꺼내
기도 전에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어요. 첫 미술 시간이었는데, 제가 국기를 그려보라고 했더니
다른 아이들은 도화지에다 제대로 국기를 그리고 있는데, 댁의 따님만은 「아사히 신
문」마크 같은 군함 기를 그리기 시작하더군요. 그것도 괜찮은 아이디어다 싶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깃발 가장자리에다 술을 그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글쎄 술! 보통 청
년단 깃발 같은 데에 달려있는 그런 술 말이에요! 어쨌거나 <그것도 뭐 어디선가 봐서
그러는 거겠지>하고 애써 생각했어요. 그런데 잠시 다른 것을 쳐다보는 사이에 글쎄,
책상에다가도 온통 노란 색 술을 칠하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도화지에 거의 꽉 차도
록 깃발을 그렸기 때문에 애당초 술을 그릴 여유가 얼마 없었는데도 노란 크레용으로 
술을 북북 그리는 거였어요! 그러다 보니 밖으로 튀어나와서, 도화지를 치워내고 보니
책상에 온통 삐죽삐죽하게 튀어나온 것이 세 방향뿐이었기에 다행이었지요."

 "세 방향이라면?"

 선생님은 슬슬 피곤해진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친절하게 대답했다.

 "깃대를 왼쪽 편에 그렸으니까 당연히 그 쪽으로는 튀어나오게 할 수 없잖아요."

 엄마는 그나마 다행이다라는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

 "아아, 그래서 세 방향만…."

 그러자 선생님은 아주 느릿한 말투로, 이번에 한마디씩 끊어 다시 말을 시작했다.

 "다만, 그 대신에, 아니나 다를까! 깃대 끝이, 책상까지, 튀어나와, 크레용 자국이, 
남아 있었죠!"

 그 말을 끝내자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주 냉정한 말투로 마무리를 짓듯 말
했다.

 "그리고 저 뿐만 아니고, 옆 반의 1학년 담임선생님도 곤란을 겪고 있는 모양입니다."

 사태가 이쯤 되자 엄마는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놔 뒀다는 다른 학생들에게 너무 많은 피해를 주게 될 거야. 어디 다른 학교
를 알아봐서 전학을 시키는 게 좋을 것 같군. 어떻게든 저 아이의 성격을 이해해주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행동하는 걸 가르쳐 줄만한 학교로….)

 그리하여 엄마가 여기저기 뛰어다녀 찾아낸 곳이 지금 막 교문을 들어서려는 학교인 
것이다.

 
 엄마는 이렇게 퇴학당한 사실을 토토에겐 말하진 않았다. 얘기를 해봐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를 게 뻔하고, 또 그런 일로 토토가 콤플렉스를 갖게 되면 안되겠다 싶
은 생각에 언젠가 크면 얘길 해주자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토토에게는 이렇게만 
말했다.

 "다른 학교에 한번 가보지 않을래? 좋은 학교라는데."

 토토는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가지 뭐…."

 엄마는 (이 애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하고 생각했다.

 (어렴풋이 퇴학당했다는 걸 알고 있는 걸까….) 

 다음 순간, 토토는 엄마 품으로 뛰어들며 말했다.

 "엄마, 이번에 가는 학교에도 맘씨 좋은 친동야 아저씨가 오겠지?"

 어쨌든 그러한 연유로, 지금 토토와 엄마는 새 학교를 향해 걷고 있는 것이다.


 3. 새 학교

 토토는 새 학교의 문이 확실하게 보이는 곳까지 오자, 그만 발걸음을 뚝 멈췄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다녔던 학교 문은 멋있는 콘크리트 기둥이었던 데다가 학교 이름
도 대문짝만큼 크게 쓰여 있었었다. 그런데 이 새 학교의 문은 낮은 나무였고, 그것도
잎이 달려 있는 게 아닌가!

 "야아! 땅에서 자라난 문이네!"

 토토는 놀란 표정으로 엄마에게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틀림없이 쑥쑥 자라서 얼마 안 있으면 전봇대보다 더 커질 거야!"

 그것은 진짜 뿌리가 있는, 나무 두 그루로 된 문이었다.

 토토는 문으로 다가가더니 갑자기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냐하면 문에 매달려 잇는, 
학교 이름이 적힌 팻말이 바람에 날렸는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모에 학원」

 토토는 고개를 옆으로 갸웃한 채 팻말을 따라 읽었다. 그리고는 엄마에게 '도모에가 
뭐야?' 하고 물으려 할 때였다. 토토는 눈가로 마치 꿈만 같은 것이 보였다.

 토토는 몸을 굽힌 채 두 그루 나무 문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무엇이 보였을까!

 "엄마, 엄마! 저것 진짜 전철 맞지? 교정에 늘어서 있는 거 말야!"

 정말 그랬다. 거기에는 달리지 않는 진짜 전철 여섯 량이 교실용으로 덩그러니 놓여
져 있었던 것이다.

 토토는 모든 것이 정말 꿈만 같았다.

 (전철 교실…!)


 전철의 창문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반짝이는 눈빛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토토의 뺨도 빛나고 있었다.


 4. 마음에 들었어
 
 다음 순간, 토토는 와! 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전철 교실 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달리면서 엄마를 향해 외쳤다.

 "엄마, 빨리 와! 안 움직이는 전철에 타 보자!"

 엄마는 놀라서 쫓아 뛰었다. 원래 농구 선수였던 엄마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서, 막 
문으로 다가서려던 토토의 치맛자락이 결국 엄마의 손에 잡혔다. 엄마는 토토의 치맛
자락을 꽉 잡은 채 말했다.

 "아직 안돼. 이 전철은 이 학교 교실이고, 넌 아직 이 학교에 다니지 않으니까. 만약
꼭 이 전철을 타고 싶으면 이제 교장 선생님을 뵐 테니까 말씀을 잘 드려봐. 그래서 
일이 잘 되면 이 학교에 다닐 수 있을 테니까. 알겠니?" 

 (당장 탈 수 없다니 좀 아쉽네….)

 토토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별 수 없었다.  그래서 엄마가 시키는 대로하겠다고 마음
먹고, 큰 소리고 "응"하고 대답한 후 얼른 덧붙였다.  

 "나, 이 학교가 너무 너무 맘에 들어!"

 (네 마음이 문제가 아니라 교장선생님이 널 마음에 들어할지 어떻지 그게 걱정이란다.)

 엄마는 토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토토의 치맛자락을 놓은 
후 손을 잡고 교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모든 전철이 조용한 걸로 보아 조금 전에 첫 시간 수업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교정 주변에는 담 대신에 여러 종류의 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화단에는 빨
갛고 노란 꽃들이 가득 피어있었다. 

 교장실은 전철이 아니었다. 문에서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부채꼴로 펼쳐진 일곱 계
단 정도의 돌계단을 올라가서 오른쪽 편에 있었다. 토토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계단
을 뛰어올라가다 갑자기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뒤를 쫓아가던 엄마는 하마터면 토토와
정면 충돌할 뻔했다.

 "왜 그러니?"

 엄마는 토토의 마음이 바뀌었나 싶어 황급히 물었다. 토토는 계단 맨 위에 서서, 진
지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소리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혹시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 역에 있는 사람 아냐?"

 엄마는 아주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랄까…, 어쨌듯  장난치는 걸 역시나 좋아했기 때
문에 토토처럼 똑같이 얼굴을 들이대고 나즈막히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토토는 더욱 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엄마는 교장선생님이라고 했지만, 이렇게 전철을 많이 갖고 있으니까 사실은 역에 
있는 사람 아니냐고?"

 하기야 전철을 교실로 사용하고 있으니 토토가 의문을 품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
각했지만, 엄마는 일일이 설명하고 있을 여유가 없는 터라 다시 조용히 말했다.

 "그럼 네가 직접 교장선생님께 물어보렴. 그런데 아빠를 한번 생각해봐. 아빠는 바이
올린을 연주하는 분이라서 바이올린을 여러 개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바이올린 장수
는 아니잖아? 그런 사람도 있는 거야."

 "그런가…."

 토토는 중얼거리면서 엄마의 손을 잡았다.


 5. 교장 선생님 

 토토와 엄마가 안으로 들어가자, 한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사람은 머리숱도 얼마 없는 데다 앞니까지 빠져 있었지만 혈색은 좋아 보였다. 또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아도 어깨와 팔은 우람하고, 다 낡은 양복을 조끼까지 단정하게 
차려 입고 있었다. 

 토토는 얼른 인사를 한 다음 씩씩하게 물었다.

 "교장선생님? 역에서 일하는 사람? 어느 쪽이에요?"

 엄마가 당황하여 설명을 하기도 전에 그 사람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교장선생님이지."

 그러자 토토는 아주 반갑다는 듯이 말했다.

 "아, 다행이다! 그럼 잘 부탁해요, 나 이 학교에 들어오고 싶어요!"

 교장선생님은 토토에게 의자를 권한 다음 엄마 쪽을 향해 말했다.

 "전 지금부터 토토와 할 얘기가 있으니까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토토는 아주 잠시, 좀 불안하기도 했지만 왠지 (이 사람이라면 괜찮겠다) 싶은 생각
이 들었다. 엄마는 주저 없이 교장선생님께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하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교장선생님은 토토 앞으로 바짝 의자를 당겨놓고 마주보고 앉아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부터 무슨 얘기든지 좋으니까 선생님한테 얘기해 보렴, 얘기하고 싶은 것 
전부."

 "얘기하고 싶은 것!?"

 (뭘 물어보면 그 때서 대답해야 하나…)하고 생각하고 있던 토토는 무슨 얘기든지 해
도 좋다는 말을 듣자, 너무나도 기뻐서 금방 조잘조잘 얘기하기 시작했다. 순서도, 말
투도 좀 뒤죽박죽이었지만 열심히 얘기했다. 

 지금 타고 온 전철이 아주 빨랐다는 얘기…, 역 개찰구에 있는 아저씨한테 부탁했는
데도 표를 주지 않았다는 얘기…, 전에 다니던 학교의 여자 담임선생님이 아주 예쁘게
생겼다는 얘기…, 그 학교에는 제비 둥지가 있다는 얘기…, 집에는 로키라고 하는 갈색 
개가 있는데, 손을 달라고 하면 손을 내밀고 문을 두드릴 줄도 알고, 또 밥을 먹고
나면 '아, 잘 먹었다'고 표현할 줄 안다는 얘기…, 유치원 다닐 때 가위를 입안에 넣
고 썩둑거리자 '혀 잘린다'고 선생님이 야단을 치셨는데, 들은 척도 안 하고 몇 번이
고 가위질했던 얘기…, 콧물이 나왔을 때는 계속 질질 흘리면 엄마한테 혼나니까 될 
수 있는 한 빨리 푼다는 얘기…, 아빠는 바다에서 수영을 잘하는데, 다이빙도 역시 할
줄 안다는 얘기…, 토토는 이런 얘기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교장선생님은 웃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그래서?"라면서 덩달아 맞장구를 쳐주기도 했다. 토
토는 신이 나서 계속 얘기했다. 그런데 마침내 얘기가 동이 나 버렸다.

 토토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자 선생님이 말했다.

 "이제 더 없니?"

 토토는 이대로 끝내버리기엔 무척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얘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무슨 얘깃거리가 더 없을까….)

 머리 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 다행이다!)

 마침내 새로운 얘깃거리를 찾았다.

 그것은 그날 토토가 입고 있는 옷에 관한 얘기였다. 토토의 옷은 대부분 엄마가 손수
만들어 주는데, 오늘 입은 옷은 산 것이었다.

 이제껏 토토는 밖에서 놀다가 저녁나절 집으로 돌아올 즈음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옷
이란 옷은 어디든 한 군데는 찢겨져 있고 또 어떤 때는 걸레처럼 너덜너덜한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흰 면 팬티까지 찢겨있는 때도 있을 정도였지만, 왜 그렇게 되는지 엄
마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토토의 말에 의하면 다른 집 정원을 가로질러 울
타리 밑을 기어 들어가거나, 공터에 있는 철조망 사이를 빠져나갈 때 '그렇게 돼 버린
다'는데…. 어쨌든 그런 사정으로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엄마가 만든 멋진 옷
은 하나같이 너덜너덜해서 입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전에 샀던 옷을 입고
온 것이었는데, 바로 연지 색과 회색 촘촘한 체크무늬 원피스다. 옷감은 저지라 그런
데로 괜찮은데, 엄마는 옷깃에 놓여진 빨간 꽃 모양 수가 '촌스럽다'고 했었다. 토토
는 바로 그 일을 기억해 냈던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의자에서 내려와 옷깃을 손으로 들어올리며, 선생님 곁으로 가서 이렇
게 말했다.

 "이 옷깃 말이죠, 우리 엄마는 마음에 안 든대요!"

 그 얘기를 해버리고 나자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었다. 토토는 
좀 슬픈 생각이 들었다. 토토가 한참동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교장선생님이 의
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토토의 머리에 크고 따뜻한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자, 이제부터 넌 이 학교 학생이다."

 그 때, 토토는 왠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짜 좋아하는 사람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긴 시간동안 자기 얘기를 들어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오랜 시간 동안 단 한번도 하품을 하거나 지루한 표
정을 짓지도 않고, 토토가 얘기할 때처럼 똑같이 몸을 앞으로 내민 채 열심히 들어주
었던 것이다.

 토토는 그때 아직 시계를 볼 줄 몰랐는데 - 그래도 오랜 시간으로 느꼈을 정도니까 -
만약에 시계를 볼 줄 알았다면 틀림없이 더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 교장선생님
에게 감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토토와 엄마가 학교에 도착한 것이 8시였고, 교장실
에서 얘기가 전부 끝나고 토토가 이 학교의 학생으로 결정되었을 때 선생님이 회중시
계를 보며 '아아, 점심시간이군'하고 말했으니까…. 결국 꼬박 네 시간 동안이나 교장
선생님은 토토의 얘기를 들어준 셈이었다.

 전후를 막론하고, 토토의 얘기를 그토록 열심히 들어준 어른은 정말이지 없었다. 한
편 아직 1학년밖에 안 된 토토가 무려 네 시간동안이나 혼자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얘깃거리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 엄마나 전에 다니던 학교의 선생님이나 분
명 놀랬을 것이다.

 
 그 당시 토토는 아직 퇴학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주위의 어른들이 자기로 인해 애 
먹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원래 밝은 성격인데다가 또 잘 잊어버리는 
편이라서, 어찌 보면 유난히 천진스럽기조차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으론 
왠지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혼자만 좀 싸늘한 눈총을 받고 있는 듯한, 소외감 비슷한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 교장선생님과 있으니 그런 불안감은 
차츰 사라졌고, 대신 푸근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이 사람하고는 얼마든지 함께 있어도 좋을 것 같아!)

 우리의 주인공 토토가 고바야시 소사쿠 교장선생님을 처음 만나고 느낀 감상은 바로 
이랬다. 이 사람하고는 얼마든지 함께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그리고 고맙게도 교
장선생님 역시 토토와 같은 느낌을 갖고 있었다.


 6. 점심시간

 잠시 후, 교장선생님은 모두가 점심을 먹는 곳으로 토토를 데리고 갔다. 점심시간에
는 전철이 아니라 모두 강당에 모인다고 교장선생님이 가르쳐 주었다.

 강당은 아까 토토가 올라왔던 돌계단이 다 끝나는 곳에 있었다. 들어가 보니 학생들
이 소란스럽게 책상과 의자를 날라다 강당 안에 둥그런 원 모양으로 놓고 있는 중이었
다. 구석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토토는 교장선생님의 웃옷을 잡아 당기며 물었다.

 "다른 애들은 어디 있어요?"

 그러자 교장선생님이 대답했다.

 "얘들이 전부야."

 "이게 전부!?"

 토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생수가 전에 다니던 학교의 한 학급 정
도인, 50명 정도밖에 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전교생이 겨우 요 정도예요?"

 교장선생님은 역시 그렇다고 대답했다. 토토는 모든 것이 전에 다니던 학교와는 다르
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학생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물
었다.

 "다들,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는 것 가져 왔니?"

 "네!!"

 아이들이 제각기 자기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자, 어디 한번 볼까?"

 교장선생님은 빙 둘러진 책상 안쪽으로 들어가 한 명 한 명 아이들의 도시락을 들여
다보며 걸었다. 학생들은 웃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며 떠들썩했다. 토토는 참 
이상하다 싶었다.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는 게 뭐지?)

 하지만 이 학교는 너무 너무 유별나고 재미있을 것만 같았다. 점심 시간이 이렇게 즐
겁고 재미있는 것인지 토토는 여태 몰랐다. 토토는 내일부터 자기도 저 책상에 앉아 '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는 것'이 담긴 도시락을 교장선생님에게 보여줄 것이란 생각을 
하자, 기쁨과 기대감으로 가슴이 벅차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다.

 도시락을 들여다보고 있는 교장선생님의 어깨에 한낮의 햇살이 부드럽게 머무르고 있
었다….


 7. 오늘부터 학교에 간다

 어제 '오늘부터 너는 이 학교의 학생이다'라는 교장선생님의 말을 들은 후부터, 토토
는 내일이 기다려져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이토록 내일이 멀게 느껴졌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평소 같으면 아침에 엄
마가 아무리 두들겨 깨워도 침대에서 미적거리며 멍해 있던 일이 많았던 토토가, 이 
날만은 누가 깨우기도 전에 벌써 양말까지 신고 책가방을 맨 채 식구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집 식구 중에서 가장 시간을 잘 지키는 셰퍼트 로키는 평소와는 
다른 토토의 행동을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도, 기지개를 쫙 켜더니 토토에게 찰
싹 붙어 '뭔가 시작될 것 같은' 일을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엄마는 정신없이 바빴다. 부랴부랴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는 것'으로 도시락을 싸고
토토에게 아침밥을 먹인 다음. 털실로 엮은 끈을 맨 셀룰로이드 정액권 지갑을 토토의 
목에 걸어주었다. 정액권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얌전하게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해."

 아빠는 빗지도 않아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말했다.

 "물론!"

 토토는 이렇게 대답한 후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문을 열고 나가는 듯 하더니, 갑자기
안쪽을 향해 홱 돌아서서 공손하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엄마, 아빠, 다녀오겠습니다."

 순간 배웅을 하는 엄마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렇게 생기 넘치고 예의 바르
고 활달한 토토가 바로 얼마 전에 '퇴학을 당했다'는 사실이 믿어져지지 않아서였다.

 (제발 새 학교에서 잘 해나가야 할 텐데….)

 엄마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빌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엄마는 펄쩍 뛸 정도로 놀랐다.
왜냐하면 토토가, 엄마가 애써 목에 걸어준 정액 권을 로키의 목에다 걸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엄마는 약간 불안했지만 아무 말 않고 결과를 두고 보기로 했다.

 토토는 정액 권을 로키의 목에 걸더니 쪼그리고 앉아 이렇게 말했다.

 "로키, 이 끈은 너한테 안 되겠다."

 아니나 다를까! 로키에게는 끈이 길어 정액 권이 땅에 질질 끌렸다.

 "알겠니? 이건 내 정액 권이지 네 것이 아니니까 넌 전철을 탈 수 없어. 교장선생님
한테 물어는 볼께. 역 아저씨한테도. 그래서 '괜찮다'고 하면 너도 학교에 갈 수 있을
테지만, 글쎄다…."

 로키는 중간 정도까지는 귀를 쫑긋 세우고 얌전히 듣는 듯 했지만, 설명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에는 정액권을 슬쩍 핥아보고 하품만 해댔다. 그래도 토토는 열심히 얘기
했다.

 "전철 교실은 움직이지 않으니까, 교실에서는 정액권이 필요 없을 거야. 어쨌든 오늘
은 기다려야 돼!"

 하기야 로키는 지금까지 매일 토토와 함께 걸어서 학교 문 앞까지 갔다가 혼자 집으
로 돌아왔기 때문에 오늘도 그럴 생각이었다. 토토는 정액권을 로키의 목에서 빼내어 
소중하게 자기의 목에 다시 건 다음, 엄마와 아빠에게 한번 더,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말한 후, 이번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책가방을 달그락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로키도 몸을 쭉쭉 뻗으며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역까지 가는 길은 전에 다녔던 학교 길과 별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도중에 토토는 
낯이 익은 개나 고양이, 전학 전의 동급생들과 스쳐 지나쳤다. 그때마다 토토는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정액권을 보여주고 놀래켜 줄까?)

 그러나 이내,

 (혹시라도 늦으면 큰일이니까 오늘은 관두자.)

 라며 마음을 고쳐먹고 부지런히 걸었다.

 역 근처에 오자 여느 때 같으면 왼쪽으로 가는 토토가 오늘은 오른쪽으로 돌아가기에,
어찌해야 좋을 지 모르는 로키는 아주 걱정스럽다는 듯이 멈춰 서서 두리번거렸다. 토
토는 개찰구까지 갔다가 돌아와 여전히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로키에게 말했다.

 "이제 전에 다니던 학교에는 안 가. 새 학교에 가거든!"

 그런 다음 토토는 로키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갖다대고 로키의 귓속냄새를 맡았다. 

 (늘 지독한 냄새가 나긴 하지만, 나한테는 좋은 냄새야!)

 토토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조촐한 작별 인사가 끝나자 토토는 얼굴을 떼고,

 "바이 바이."

 하고는 정액권을 역무원에게 보이고 나서, 조금은 높은 역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로키는 작은 소리로 짖으며, 계단을 올라가는 토토를 한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8. 전철 교실

 토토가 어제 교장선생님이 일러주신 전철 교실의 문을 열려고 했을 때, 아직 교정에
는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요즘과는 달리 옛날 전철은 밖에서 열 수 있도록 문에 손잡이가 달려 있었는데, 양손
으로 그 손잡이를 잡고 오른쪽으로 당기자 문은 쉽게 열렸다. 토토는 두근대는 가슴으
로 살며시 고개를 들이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우와! 이 정도면 공부하면서도 항상 여행하는 기분이겠는걸! 그물 선반도 있고 창문
도 전부 그대로고….)

 그랬다. 다른 점이라면 운전사 자리에 칠판이 있는 것과 전철의 긴 걸상을 떼내고 학
생용 책상과 의자가 진행방향을 향해 줄지어 있다는 것, 그리고 손잡이가 없다는 것뿐
이었다. 나머지는 천장이며 바닥이며 전부 전철일 적 그대로였다. 

 토토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아무 책상에나 앉아 보았다. 전에 다니던 학교와 
비슷한 나무 의자였지만, 계속 앉아있고 싶을 정도로 기분 좋은 의자였다. 토토는 기
뻐서 (이렇게 마음에 드는 학교는 절대로 빼먹지 않고 계속 다닐 거야!)하고 굳게 마
음을 먹었다.

 그리고 나서 토토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이게 또 웬일인가! 움직이
지 않아야 할 전철이, 교정의 꽃이며 나무가 조금씩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탓인지 마
치 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게 아닌가!

 "와아, 좋다!"

 토토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그리고는 얼굴을 유리창에 갖다
대고, 언제나 즐거울 때면 그러듯이 혼자만의 엉터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신난다 신나
 너무 너무 신난다
 왜냐하면


 거기까지 불렀을 때였다, 누군가가 올라탔다.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노트와 필통을 책가방에서 꺼내 책상 위에 놓은 다음, 발돋움을 해 책가방
을 그물 선반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서 신발주머니도 올렸다. 토토는 노래를 멈추고
얼른 따라했다.

 그 다음에는 남자아이가 올라탔다.

 그 아이는 문 앞에서 책가방을 농구공 마냥 그물 선반에다 던져 넣었다. 그물 선반의
그물이 휘청 흔들리며 책가방이 튕겨 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자 그 남자아이는 
"실패!"라고 외치면서 다시 같은 지점에서 그물 선반을 향해 또 책가방을 던져 넣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갔고 남자아이는 "성공!"하고 외쳤다. 그런데 갑자기 다시 "실
패!"라고 외치면서 책상으로 기어올라가, 그물 선반에 있는 책가방을 열고 필통이며 
노트를 분주하게 꺼냈다. 아마도 그것들을 꺼내는 걸 깜박 잊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번복한 것 같았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아홉 명의 아이들이 차례차례 토토가 잇는 전철에 올라탔는데, 
그 아이들이 이 곳 도모에 학원 1학년 전부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앞으로 같은 전
철을 타고 여행할 토토의 친구들이었다.


 9. 첫 수업
 
 교실이 진짜 전철이라서 특이하다고 생각한 토토가 그 다음으로 특이하다고 느낀 것
은 앉은 자리였다.

 전에 다니던 학교는 '누구는 어느 책상, 그 옆에는 누구, 앞에는 누구'라는 식으로 
각자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 학교는 그날의 기분이나 형편에 따라 어디든지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토토는 고민 고민하며 둘러본 끝에, 
아침에 토토 다음으로 교실에 들어온 여자아이 옆에 앉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토토가 좋아하는 귀가 길다란 토끼 그림이 그려져 있는 점퍼 스커트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이 학교의 수업 방식이었다. 대개의 학교는 첫째시간
이 국어면 국어를 하고, 둘째 시간이 수학이면 수학을 하는 식으로 시간표대로 수업을
하는데, 이 학교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아무튼 첫째시간이 시작될 때, 여 선생님은 그날 하루동안 공부할 시간표의 전 과목 
문제를 칠판에 가득 써놓고 이렇게 말했다.

 "자, 어떤 것이든지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그러니 학생들은 국어든 수학이든 자기가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해도 아무 상관이 없
었다. 그래서 글짓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글짓기를 하고, 또 교실 뒤쪽에서는 자연을 
좋아하는 아이가 알코올 램프에 불을 붙여 플라스크를 부글부글 끓이기도 하면서 뭔가
를 폭발시키곤 하는 광경을 어느 교실에서나 볼 수 있었다…. 이 수업방식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생 한 명 한 명이 관심을 갖고 잇는 분야나 관심의 정도, 사고방식, 그
리고 개성 같은 것을 점점 확실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에 선생님이 학생 개개인을 파악
하기에 더 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학생들 역시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부터 해도 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고, 설사 싫어
하는 과목이라도 수업이 전부 끝날 때까지만 어떻게든 해내면 되니까 그리 힘들게 여
기지 않았다. 따라서 자습 형식이 많았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선생님께 물으러 가든지

 자기 자리로 선생님을 불러 이해가 될 때까지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연습문제를 
받아 다시 자습에 들어간다…. 이것은 그야말로 참된 공부였다. 그러므로 선생님의 말
씀이나 설명을 멍하니 듣고만 있는 일은 거의 있을 수 없었다.

 한편 토토를 비롯한 1학년 아이들은 아직 자습할 정도의 공부는 시작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부터 공부한다는 점은 다른 학년이나 마찬가지였다. 덕분
에 글자를 열심히 쓰는 아이, 그림을 그리는 아이, 그리고 책을 읽는 아이…, 심지어 
체조를 하는 아이도 있었다. 토토 옆에 앉은 여자아이는 벌써 글자를 다 깨우쳤는지, 
노트에 뭔가를 부지런히 옮겨 적고 있었다. 그러나 토토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가슴 
설레어, 다른 아이들처럼 곧바로 공부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토토 뒷자리에 앉아있던 한 남자아이가 일어서서 칠판 쪽으로 걸어나갔다.
노트를 들고서…, 아마 칠판 옆 책상에서 다른 아이에게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선생
님께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문득 그 아이의 걷는 뒷모습을 본 토토는 갑자기 두리번
거리던 동작을 뚝 멈추고, 손으로 턱을 괸 채 가만히 그 아이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걸을 때 다리를 질질 끌고 있었다. 몸도 몹시 흔들렸다. 처음에는 일부러 
그러나 싶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잠시 보고 있던 토토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
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시 자기 책상으로 돌아오는 그 아이
를, 토토는 조금전과 다름없이 턱을 괸 채 쳐다보고 있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 
남자아이는 토토를 보자 싱긋 웃었다. 그러자 토토도 당황하여 빙그레 따라 웃었다. 
그 아이가 뒷자리에 앉자 - 앉는 것도 다른 아이들보다 시간이 걸렸지만 - 토토는 휙 
돌아다보며 그 아이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걷니?"

 그 아이는 상냥한 목소리로 조용히 대답했다.

 "나, 소아마비야."

 아주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소아마비!?"

 토토는 지금껏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되물었다. 그 아이는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소아마비, 다리도 손도…."

 그 아이는 긴 손가락과, 손가락이 달라붙어 휘어진 것처럼 생긴 손을 내밀었다. 토토
는 그 아이의 왼손을 쳐다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고칠 순 없는 거니?"

 그 아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토토는 물으면 안 되는 것을 괜히 물었나 싶어 
슬퍼졌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아이는 명랑하게 다시 말했다.

 "내 이름은 야스아키야! 너는?"

 토토는 그 아이가 갑자기 씩씩하게 묻는 바람에 너무 기뻐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토토!"

 이렇게 해서 야스아키와 토토는 친구가 되었다.

 전철 안은 따뜻한 햇볕 때문에 더울 정도였다. 누가 창문을 열었다. 신선한 봄바람이
전철 안을 통과하자, 아이들의 머리카락이 노래를 부르듯 흩날렸다…. 토토는 도모에
학원에서의 첫날을 이렇게 시작했다.


 10.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는 것

 드디어 토토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는 것'을 먹는 점심시간이 
왔다.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는 것'은 다름 아닌 교장선생님이 생각해 도시락 반찬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가령 대부분의 교장선생님들 같으면 도시락 반찬에 대해 '아이가 반
찬을 가리지 않도록 연구를 하십시오'라든지 '영양이 치우치지 않도록 부탁합니다'라
고 말하겠지만, 도모에 학원의 교장선생님은 언제나 단 한마디,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는 것을 싸서 보내 주십시오."

 하고 아이들 부모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산과 들은, 이를테면 야채나 육류 같은 것 - 육류는 산에서는 나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나누면 소나 돼지나 닭이 육지에 살고 있으니까 산에 속한다고 본다 -, 그리고 
바다는 멸치조림이나 해산물 등…. 그러니까 이 두 종류를 반드시 도시락 반찬으로 싸
보내라는 것이다.

 토토의 엄마는 그 말을 듣고 (정말 이 어른은 필요한 것을 간단하고 쉽게 표현할 줄 
아는 분이로구나!)라며 감탄하고 말았다. 그런데다 엄마는 산과 들과 바다로 나뉜 것
만으로도 무슨 반찬을 쌀까 궁리하기가 전혀 번거롭지 않게 여겨졌으니, 참 신기한 일
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산과 들과 바다에 덧붙여 '무리하지 말 것', '사치스럽지 않을 것'이라
고 당부했기 때문에 산과 들은 우엉조림과 달걀부침, 바다는 오징어포 조림이라도 괜
찮았으며, 더욱 간단한 예를 들자면 김과 매실장아찌도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
도 토토가 어제 처음 보았을 때 너무너무 부러웠던 것처럼, 점심시간에 교장선생님이 
자기들의 도시락을 들여다보며,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는 것, 다 싸 왔지?"

 라며 한 사람씩 확인해주는 것이 우선 즐거웠고, 또 어떤 것이 바다에서 나는 것이고
어떤 것이 산과 들에서 나는 것인지를 발견하는 스릴도 즐기게 되었다.

 하지만 때로는 엄마가 바쁘거나 그 밖의 사연으로 손이 미치지 못해 산과 들에서 나
는 것만 싸 오거나 바다에서 나는 것만 싸오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아이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도시락을 들여다보며 도는 교장선생님 뒤를, 
하얀 앞치마를 두른 교장선생님 부인이 양손에 냄비를 하나씩 들고 따라다녔기 때문이
다. 그러다 교장선생님이 어느 한 쪽이 모자라는 아이 앞에서

 "바다!"

 라고 하면 사모님은 바다 쪽 냄비에서 어묵조림을 2개정도 그 아이의 도시락 뚜껑에 
올려주었고, 교장선생님이 또

 "산과 들!"

 이라고 하면 산과 들 쪽 냄비에서 감자조림이 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입에서 '어묵은 싫다'는 등의 불평은 들으려야 들을 
수 없었다. 또한 누구의 반찬은 좋고 누구의 반찬은 늘 형편없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
고, 단지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는 것이 다 갖추어졌다는 사실이 기뻐서 서로 웃기도 
하고 재잘거리기도 하였다.

 토토도 이제야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
니 (엄마가 오늘 아침에는 도시락을 급하게 싸 주었는데, 괜찮을까?)하고 약간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 도시락 뚜껑을 연 토토의 입에서는,   

 "우와!"

 하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한마디로 그것은 너무 멋진 도시락이었다. 노란 달걀말이, 완두콩, 갈색 덴부(생선  
살을 으깨서 설탕으로 맛을 내며 볶는 것 - 역주), 그리고 달달 볶은 핑크색 명란, 그
런 알록달록한 색깔을 한 반찬이 마치 꽃밭처럼 보기 좋게 담겨 있었던 것이다.

 교장선생님은 토토의 도시락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주 예쁘구나."

 토토는 그 말을 듣고 기뻐서

 "우리 엄마는 반찬을 참 잘 만들어요!"

 하고 말했다. 교장선생님은

 "그러니?"

 하고 말한 후, 갈색 덴부를 가리키며 토토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건 바다에서 나는 거니? 산과 들에서 나는 거니?"

 토토는 덴부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글쎄, 어느 쪽이지?)

 색깔로 봐서는 산에서 나는 것 같은데 - 그도 그럴 것이 흙처럼 짙은 갈색이었으니까

 - 하지만 잘 모르겠다 싶어서 결국엔

 "모르겠어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은 큰 소리로 모두에게 물었다.

 "덴부는 산과 들, 바다 중 어느 쪽이지?"

 아이들은 잠시 생각한 후 제각기 '산!'이니 '바다!'니 하고 외쳐댔다. 그래서 어느 
쪽인지 쉬 정해지지 않았다.

 아이들의 외침 소리가 잠잠해지자 교장선생님은 말했다

 "잘 듣거라, 덴부는 바다란다."

 "왜요?"

 뚱뚱한 남자아이가 물었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은 책상으로 이루어진 원의 한 가운데
에 서서 이렇게 설명했다.

 "덴부는 삶은 생선살을 잘게 으깨서 볶아 만든 것이니까."

 "아하!!"

 아이들은 일제히 감탄했다. 그때 누군가가 불쑥

 "선생님, 토토네 덴부 좀 봐도 돼요?"

 하고 물었다. 교장선생님이

 "그래, 그러렴."

 하고 말하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우르르 토토에게로 몰려가 덴부를 봤다. 물론 덴부가
뭔지 알고 있고 먹어본 적도 있지만, 교장선생님의 말을 듣고 갑자기 흥미가 생긴 아
이도 있을 것이고 또 자기네와 토토네는 어떻게 다른지 궁금한 마음에 보고 싶어하는 
아이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덴부를 보러온 아이들 중에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
보는 아이도 있어, 토토는 혹시 콧김에 덴부가 날리지 않을까 조금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첫 점심시간은 이토록 가슴이 두근거리고 즐겁고, 또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
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재미있고, 게다가 덴부가 생선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엄마
는 엄마대로 '바다에서 나는 것과 산에서 나는 것'을 제대로 넣어 주었고…. 토토는 
기분이 한없이 좋아졌다.

 (모든 게 다 좋아!)

 그리고 엄마가 싸 준 도시락이 맛나서 더더욱 기분이 좋았다. 
 

 11. 꼭꼭 씹어요
  
 그런데 다른 학교 같으면 이쯤에서 대개 '잘 먹겠습니다!'라고 할텐데, 도모에 학원
은 또 그전에 모두가 합창을 한다는 것이 특이했다.

 교장선생님이 원래 음악가이기도 해서, 점심 먹기 전에 부르는 노래를 만들었던 것이
다. 이 노래는 영국 사람이 만든 곡에다 교장선생님이 가사를 붙이신 곡이었다. 하기
야 원래부터 있던 노래에 선생님이 가사를 바꿔 달았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아무튼 원래의 곡은 그 유명한 「배를 저어라(Row Your Boat)」의

 
 로우 로우 로우 유어 보트
 젠트리 다운 더 스트림
 메릴리 메릴리 메릴리 메릴리
 라이프 이즈 밧 어 드림


인데, 여기에다 교장선생님이 붙인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꼭꼭 씹어요
 모든 음식을 
 씹어요 씹어요 씹어요 씹어요
 모든 음식을


 그리고 이 노래를 다 부르고 나면 그때서야 아이들은 '잘 먹겠습니다!'라로 일제히 
외치는 것이었다.

 「배를 저어라」의 멜로디에 「꼭꼭 씹어요」는 놀라울 만치 딱 들어맞았다.(참고로 
이 노래는 우리 식으로 따라 부르자면 '도 도 도자로 끝나는 말은-' 바로 그 노래이다
). 그래서 이 학교 졸업생들은 웬만큼 커서까지도, 이 곡은 애초부터 점심을 먹기 전
에 부르는 노래로 만든 것이라고 믿을 정도였다.

 교장선생님 당신은 이가 없으셔서 이 노래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꼭꼭 
씹기 위해서이기보다는 여유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천천히 먹어
야 한다는 뜻으로 아이들에게 늘 설명했기 때문에, 그 점을 명심하라고 이런 가사가 
붙여진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학생들은 큰 소리로 이 노래를 부른 다음, '잘 먹겠습니다'라고 외치고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는 것을 먹기 시작했다. 토토도 물론 그랬다.

 강당 안은 잠시 동안 조용해졌다.


 12. 산책

 도시락을 먹은 후 다른 아이들과 교정에서 신나게 뛰어 놀던 토토가 전철 교실로 돌
아오자, 여 선생님이 물었다.

 "여러분, 오늘은 아주 열심히 공부를 했어요. 이제 오후에는 뭘 하고 싶어요?"

 (흐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건….)

 토토가 이렇게 채 생각하기도 전에 아이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산책!"

 그러자 선생님은

 "좋아요, 그럼 갈까요?"

 하며 일어섰고, 아이들도 전철문을 박차고 나가 신발을 신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토토는 아빠랑 로키와 함께 산책을 하러 간 적은 있지만, 학교에서 산책을 하러 간다
니 생소하고 놀라웠다. 하지만 토토 역시도 산책을 아주 좋아하므로 얼른 따라 신발을
신었다.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되었지만 도모에에선 선생님이 첫째시간에 칠판에 써놓
은, 그날 분량의 학습 내용을 모두가 열심히 해서 오전 중에 다 끝나면 오후에는 대부
분 산책을 하였다. 이것은 1학년이든 6학년이든 마찬가지였다.

 학교 문을 나서자 아홉 명의 1학년 아이들은 여 선생님을 빙 둘러싸고 작은 개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개울 양쪽에서는 바로 얼마 전까지 꽃을 활짝 피었던 커다란 벚
꽃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한 눈 가득 온통 유채꽃밭이었다.

 "구혼부츠로 산책하는 거야."

 토끼그림 점퍼 스커트를 입은 여자애가 말했다. 이 여자 애의 이름은 삿코였다. 삿코
는 또,

 "나, 얼마 전에 구혼부츠 연못 옆에서 뱀 봤다!"

 "구혼부츠 절에 있는 낡은 우물 속에는 별똥별이 떨어진대!"

 라는 얘기를 해 주었다.

 아이들은 제멋대로 종알대며 걸어갔다.

 하늘은 푸르고 나비들이 팔랑팔랑 날아다니고 있었다.

 10분 정도 걸었을 때 여 선생님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노란 유채 꽃을 가리키며,

 "이건 유채 꽃이란다. 어떻게 꽃이 피는지 아니?"

 하고 물었다. 그리고 나서 곧 암술과 수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아이들은 모두 길
가에 쭈그리고 앉은 채 유채 꽃을 관찰했다. 선생님은 나비도 꽃이 피는 걸 도와준다
고 말했다. 정말 그런지 나비만 유난히 바빠 보였다. 선생님이 다시 걷기 시작하자, 
아이들도 관찰을 끝내고 그만 일어섰다. 그때 누군가가 다시금 물었다.

 "그러니까 수술하고 암술하고는 다른 거 맞지?"

 (아마 다를걸….)

 토토는 이런 생각은 했지만 정확한 것은 잘 몰랐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 함께 암술
과 수술이 어쨌든 모두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그 후 10분 정도 더 걷자 울창한 작은 숲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 곳에 구혼부츠 
절이 있었다. 경내에 들어서자 아이들은 제각기 관심이 있는 쪽으로 와와 소리를 지르
며 달려갔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우물, 보러가지 않을래?"

 삿코가 말했다.

 "응!"

 토토는 좋아하고 대답한 후 삿코 뒤를 따라 뛰어갔다.

 우물은 돌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두 아이의 가슴께 정도의 높이였으며 나
무 뚜껑이 덮여 있었다. 둘이서 뚜껑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안은 캄캄하고 암만 
자세히 봐도 콘크리트나 돌덩어리 같은 것이 있을 뿐, 토토가 상상했던 것처럼 반짝반
짝 빛나는 별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참동안 우물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있던 토토는
고개를 들고 삿코에게 물었다.

 "별님 봤어?"

 "한번도 못 봤어…."

 삿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왜 반짝이지 않는 걸까?)

 토토는 잠시 생각하다가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이 말했다.

 "별님이 지금 자고있는 거 아닐까!"

 삿코는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말했다.

 "별님도 잠을 자!?"

 토토는 자신이 없어서 빠른 말투로 말했다.

 "별님은 있지, 낮에는 자고 밤에 일어나서 빛나는 게 아닐까…." 


 그로부터 아이들은 금강역사의 배를 보고 웃기도 하고, 어슴푸레한 법당 안의 부처님
을 (좀 무섭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들여다보기도 하고, 덴구사마(얼굴이 붉고 코가 높
으며 신통력이 있어 하늘을 자유롭게 날면서 깊은 산 속에 산다는 상상의 괴물 - 역주
)의 커다란 발자국이 남아있는 돌에 제 발을 올려놓고 비교해 보기도 하고, 연못가를 
돌다 보트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기도 하고, 묘지 주변
에 있는 검고 반들반들한 기름 돌을 빌려 돌 차기를 하기도 하며 실컷 놀았다. 특히 
이런 일이 처음인 토토는 흥분한 나머지, 무슨 발견을 할 때마다 쉴새없이 탄성을 질
러댔다.

 봄 햇살이 조금 기울었다.

 "자, 이제 돌아갈까요."

 선생님이 말했다.

 아이들은 다시 유채 꽃과 벚나무 사잇길을 줄지어 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는 마냥 즐겁고 신나는 놀이 시간으로만 여겨지는 이 '산책'이 실은 귀중한 자연이나 
역사, 생물 공부 시간이라는 것을 아이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토토는 어느 틈에 아이들과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전부터 줄곧 같이 지내왔던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모두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내일도 산책하자!"

 아이들은 깡충깡충 뛰며 대답했다.

 "그래!!"

 나비들은 아직도 분주하게 날아다녔고 새들은 가까이 에서, 또 멀리서 재재거렸다….

 토토의 가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함에 벅찼다.


 13. 교가

 토토에게는 그야말로 새롭고 놀라움으로 가득 찬, 도모에 학원에서의 하루하루가 흐
르고 있었다.
 
 어제도 오늘도 어서 어서 학교에 가고 싶어 아침까지 기다리기가 지루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로키를 비롯하여 엄마와 아빠에게 '오늘 학교에서 무엇을 했는데 
얼마나 재미있더라'는 둥, 또 '오늘 무엇 때문에 깜짝 놀랐다'는 둥 재잘거리느라, 기
다리다 지친 엄마가 

 "얘기는 좀 있다 하고, 간식이나 먹거라."

 하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도무지 얘기를 멈추지 않았다. 토토는 아무리 학교에 익숙
해져도, 역시 매일같이 할 얘기가 산더미처럼 많았던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할 야기가 많다는 건 감사할 일이야.)

 엄마는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했다.

 
 어느 날 토토는 학교에 가는 전철 안에서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 도모에에 교가가 있었던가?)

 그런 생각이 들자 빨리 학교에 가고 싶어, 앞으로 두 역이나 남아 잇는데도 지유가오
카 역에 도착하면 바로 내릴 수 있도록 <준비, 땅!>하는 자세로 문 앞에 서서 기다렸
다. 덕분에 한 구간 전에 문이 열렸을 대 올라타려던 한 아줌마는, 웬 여자아이가 문 
앞에서 <준비, 땅!> 하는 자세로 있는 것을 보고 내리려나 보다 했는데, 그대로 움직
이지 않고 있자 "왜 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냐?"며 올라탔다.

 그럴 정도였으니 역에 도착하자마자 토토가 총알처럼 재빨리 내렸으리란 상상은 취 
할 수 있는 일이다. 젊은 남자 차장이 멋진 포즈로, 아직 완전히 멈추지 않은 전철에
서 한쪽 발을 플랫폼에 디디고 내리면서 "자, 지유가오카! 내리실 분은!" 하고 말할 
때, 이미 토토의 모습은 개찰구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학교에 도착하여 전철 교실에 들어가자 토토는 당장 먼저 와있던 타이에게 물었다.

 "얘, 타이. 이 학교에 교가 있니?"

 과학을 좋아하는 타이는 아주 신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없을 걸, 아마."

 "그래!?"

 토토는 약간 뽐내는 듯한 목소리로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전에 다니던 학교에는 아주 멋진 교가가 있었거든!"

 라고 말한 후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센조쿠 연못은 얕지만 위인의 가슴을 깊게 퍼 올려 -


 비록 짧은 기간이었고, 1학년에게는 어려운 말도 많은 가사였지만 토토는 잘 기억하
고 있었다. 물론 기껏해야 이 한 소절뿐이었지만.

 다 듣고 난 타이는 조금 감격한 듯 머리를 두 번 정도 가볍게 흔들며 

 "흐음…."

 하고 말했다. 그때쯤에는 다른 아이들도 와 있었는데, 모두들 토토가 어려운 말을 사
용하는 것을 보고는 존경과 동경심을 내비치며

 "우와!!"

 하고 감탄했다. 그러자 토토가 말했다.

 "얘들아, 교장선생님한테 교가 만들어 달라고 하자!"

 마침 토토의 노래를 들었던 아이들도 그런 생각을 하던 중이라

 "그래, 그러자!!"

 하며 모두가 우르르 교장실로 몰려갔다.  

 교장선생님은 토토의 노래를 듣고, 또 모두의 희망을 들은 후

 "좋아, 그럼 내일 아침까지 만들지."

 하고 말했다. 아이들은 

 "약속이에요!!"

 하고는 다시 우르르 교실로 돌아갔다.

 
 이윽고 다음 날 아침이 왔다.

 교장선생님은 모두 교정으로 모이라는 사항을 각 교실에 전달했다. 토토와 아이들은 
기대에 부푼 가슴으로 교정에 모였다. 교장선생님은 교정 한 가운데에 칠판을 옮겨다 
놓고 말했다.

 "자, 여러분의 학교, 도모에 학원의 교갑니다."

 교장선생님은 칠판에 오선을 그린 뒤 다음과 같이 음표를 달았다.

 그리고 손을 지휘자처럼 힘차게 들어올리더니

 "자, 다같이 불러보자!"

 며 휘휘 저어 박자를 맞추었다.

 전교생 50명은 모두 선생님의 목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도모에, 도모에 도-모에!!"

 "…겨우 이것뿐이에요?"

 잠시 후 토토가 물었다.

 교장선생님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그래."

 토토는 아주 실망한 목소리로 선생님에게 말했다.

 "난 좀 더 어려운 게 좋은데…. 센조쿠 연못은 얕지만 - 처럼."

 선생님은 빨개진 얼굴로 웃으면서 말했다.

 "맘에 안 드냐? 난 좋은 것 같은데…."

 이윽고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투덜거렸다.

 "이건 너무 간단해서 싫어요!!"

 교장선생님은 약간 섭섭해하는 것 같았지만, 딱히 화는 내지 않고 말없이 지우개로 
지워버렸다. 토토는

 (선생님한테 너무했나?)

 싶기도 했지만, 결국 

 (우리가 바랬던 건 좀 더 멋진 곡이었는걸 뭐, 어쩔 수 없잖아….)

 하고 생각했다.


 사실은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학교를. 그리고 학생들'을 사랑하는 교장선생님의 마음
이 담겨있는 교가도 없었는데, 아이들로서는 아직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어쨌든 시간이 지나 아이들도 교가에 대해선 잊어버렸고, 선생님도 필요 없다고 생각
했는지 지우개로 지워버린 이후, 끝내 도모에 학원에는 교가라는 게 없었다. 
 

 14. 원래대로 해 놓거라

 오늘은 토토가 대작업을 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토토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지갑을 그만 학교 화장실에 빠뜨렸기 때문이
었다. 돈은 한 푼도 들어있지 않지만 화장실까지 갖고 다닐 정도로 소중한 지갑이었다. 
그것은 빨강, 노랑, 초록 체크무늬 헝겊으로 된 납작한 네모 모양에 삼각형 뚜껑이 
달려있고, 또 단추가 달린 곳엔 은색 영국 개 모양의 브로치 같은 것이 달려있는, 정
말 세련된 것이었다.

 
 토토는 어렸을 때부터 화장실에 가서 용변을 본 후에 꼭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덕분에 이미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도 밀짚모자나 레이스 모자를 몇 개
나 밑에 떨어뜨렸었다. 그러면 오늘날처럼 수세식도 아닌데다 아래는 정화조였기 때문
에, 모자는 대개 그 곳에 뜬 채 버려지곤 했었다. 그래서 엄마는 언제나 '볼일이 끝나
도 아래를 보지 말 것!'이라고 토토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었다.

 그런데도 토토는 이날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화장실에 가서 결국 아래를 또 보고 말
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잘못 들고 있었던지 그 소중한 지갑이 퐁당! 하고 밑으로 떨어
져버렸던 것이다.

 "어 - 어!"

 하고 토토가 비명을 질렀을 때, 이미 어두컴컴한 정화조 속 어디에도 지갑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토토는 울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토토는 곧장 사환 아저씨(요즘의 기사)의 헛
간으로 달려가 물뿌리개용 자루바가지를 둘러메고 왔다. 아직 키가 작은 토토에게 자
루바가지의 손잡이는 키보다 두 배는 길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토토는 학교 뒤편으로 돌아가 분뇨 퍼내는 구멍을 찾았다. 화장실 외벽 근처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럴듯한 것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동안 찾다보니 벽에서 1미
터 떨어진 지면에 둥근 콘크리트 뚜껑이 있었다. 토토는 아무래도 그것이 분뇨를 퍼내
는 구멍 같다고 판단했다. 간신히 뚜껑을 들어내자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그 곳은 
틀림없이 분뇨 퍼내는 구멍이었다. 머리를 들이밀고 들여다 본 토토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도니 게 구혼부츠에 있는 연못만큼 크네…."

 
 그때부터 토토의 대작업이 시작되었다. 자루바가지를 안으로 밀어 넣어 분뇨를 퍼내
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대충 지갑이 떨어진 쪽 언저리를 떠냈지만, 어찌된 게 깊기도 하고 어둡기
도 한 게, 위는 세 개의 문으로 나뉘어져 있는 화장실의 밑은 하나의 연못처럼 상당한
크기였다. 게다가 머리를 너무 들이밀면 안으로 빠질 것 같아 우선은 퍼내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퍼낸 것을 구멍 주위에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물론 한 바가지
씩 퍼낼 때마다 지갑이 섞여있지 않은지 꼼꼼하게 검사를 했다.

 그런데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지갑은 어디에 숨어있는지, 도무지 바가
지 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수업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리
고 말았다.

 (어떡하지?)

 토토는 약간 망설였지만, 이내

 (애써 여기까지 했는걸….)

 하고 작업을 계속하기로 했다. 대신 아까보다 더욱 열심히 퍼냈다.

 제법 분뇨더미가 쌓였을 때였다. 마침 교장선생님이 화장실 뒷길을 지나갔다. 선생님
은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토토에게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뭐 하는 거니?"

 토토는 손을 멈추는 시간도 아까웠다. 그래서 자루바가지를 계속 밀어 넣으며 대답했
다.

 "지갑을 떨어뜨렸어요."

 "그래?"

 교장선생님은 단지 그렇게 말한 후, 늘 산책하던 모습으로 뒷짐을 지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그로부터 또 시간이 한참 지났다.

 지갑은 아직 찾지 못했다. 분뇨더미는 점점 높아져만 갔다.

 그때 교장선생님이 또 지나가며 물었다.

 "찾았니?"

 땀에 흠뻑 젖고 뺨까지 새빨개진 토토는 분뇨더미에 온통 둘러싸인 채 대답했다.

 "아뇨, 아직…."

 선생님은 토토의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서 쳐다보며 친구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끝나고 나면 전부 원래대로 해 놓거라."

 그리고는 또 아까와 마찬가지로 어디론가 가버렸다.

 "네!"

 토토는 씩씩하게 대답한 후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분
뇨더미를 쳐다보니 앞이 캄캄했다.

 (끝나고 나면 전부 원래대로 해 놓기는 하겠지만…. 물은 어떻게 하면 좋지?)

 정말 그랬다. 수분은 점점 지면으로 스며들어 이미 그 형태가 없었던 것이다. 토토는
일하던 손을 멈추고, 지면으로 스며든 수분을 어떻게 처리해야 교장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 지 생각해 보았다.

 (수분이 스며있는 흙을 조금 떠서 제자리에 갖다 넣으면 되겠지….)     

 마침내 분뇨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화장실 연못은 거의 바닥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지갑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화장실 언저리나 바닥에 착 달라붙어 있는지도 모
를 일이었다.

 하지만 토토는 지갑을 찾지 못했어도 만족스러웠다. 제 힘으로 이렇게까지 찾아보았
으니까. 실은 그 만족스러움 속에는 '교장선생님이 자기가 한 행동을 야단 치기는 커
녕 신뢰해 주었으며, 또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 주었다.'는 충족감이 포함되어 있었겠
지만. 당시의 토토로서는 그렇게 어려운 내용은 아직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다른 선생님들이나 어른들 같으면 이런 때의 토토의 행동을 보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라든지 '위험하니까 그만 두라'고 말했을 것이고, 또는 반대로 '도와
줄까?'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모에 학원의 교장선생님은

 "끝나고 나면 전부 원래대로 해놓거라."

 하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엄마는 나중에 토토한테서 이 얘기를 듣고는 다시 한 번 
(너무 멋있는) 교장선생님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건 이후, 토토는 화장실에서 절대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교
장선생님을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이라고 생각했으며, 전보다 더 선생님을 좋아
하게 되었다.

 토토는 교장 선생님과 약속한 대로 분뇨더미를 무너뜨려 원래 있던 화장실 연못에 도
로 넣었다. 퍼낼 때는 그렇게 힘들었는데, 도로 넣는 것은 금방 끝이 났다. 수분이 스
며든 흙도 바가지로 조금 긁어 넣었다. 그리고 지면을 평평하게 만든 후 콘크리트 뚜
껑을 정확히 원래대로 닫아놓고, 자루바가지도 헛간 제자리에 갖다놓았다.

 그날 밤, 자기 전에 토토는 어둠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예쁜 지갑을 떠올리며 역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낮 동안의 피로로 금방 잠이 왔다…. 그 시각, 토토가 
그토록 분투했던 주변의 지면은 아직도 마르지 않은 채, 달빛 아래서 아름다운 물건처
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지갑도 어디선가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을 것이다…. 


 15. 내 이름은 토토
 
 토토의 진짜 이름은 '테츠코'이다.

 어쩌다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느냐면, 태어나기 전에 친척들이며 엄마, 아빠의 친구
들 모두가 

 "분명 사내아이일거다!"

 라고 들 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아이를 가진 아빠와 엄마가 무작정 그 말을 믿고 '도
오루'라고 이름을 정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태어나고 보니 여자아이였다. 엄마 아빠는 좀 난감해 했지만 '철'이라는
글자만은 마음에 들어서 그 글자를 살리고, 거기에다 여자아이를 뜻하는 '자'를 붙여
결국 '테츠코'라고 이름지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주위 사람들은 토토를 
'테츠코짱'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당사자는 달랐다. 예컨대 누가 

 "얘, 이름이 뭐니?"

 하고 물으면, 반드시 

 "토토짱!"

 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어릴 때에는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단어를 많이 알지 못하
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가 종종 자기 식으로 들리곤 한다. 토토의 소꿉친구 
남자아이 중에도 아무리 해도 '비누거품'이 '빙우거품'이 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간호사'를 '간고사'라고 하던 여자아이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토토 역시도 그런 연유로

 "테츠코짱, 테츠코짱!"

 하고 부르는 것을, 

 "토토짱, 토토짱!"

 이라고 듣고 또 믿었던 것이다! 게다가 한술 더 떠 '짱'까지도 자기 이름이라고 여겼
었다.

 그런데 아빠만은 언제부터인가

 "토토스케!"

 라고 불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빠만은 그렇게 불러 주었던 것이다.

 "토토스케, 장미꽃에 붙어있는 상비충 좀 잡아야겠는데, 도와주겠니?"

 하는 식으로.


 결국 초등학생이 된 후에도 아빠와 로키 이외의 사람들은 

 "테츠코짱!"

 이라고 여전히 불렀고, 토토는 노트 앞에다가는 '테츠코'라고 썼지만…. 진짜로는 여
전히 자신이 '토토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6. 만담
 
 토토는 어제 너무도 실망을 했다.

 왜냐하면 엄마가

 "더 이상 라디오 만담을 들으면 안돼!"

 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라디오는 덩치가 컸고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또 대개가 세로로 긴 사각
형에다 꼭대기는 둥글었고, 정면은 스피커였기 때문에 핑크색의 비단 천 같은 것이 붙
어 있었고 한 가운데에 당초무늬가 조각되어 있는 우아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스위
치는 딱 두 개밖에 없었다.

 토토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 라디오의 핑크색 부분에 귀를 파묻듯 갖다대고 만
담 듣기를 좋아했다. 만담이 너무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제까지는 엄마도 그
런 토토에게 별 꾸중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제 저녁, 현악 4중주를 연습하기 위해 아빠의 오케스트라단 동료들이 토토
네 집에 모였을 때였다. 첼로를 하는 다치바나씨가 바나나를 선물로 가져왔기에, 엄마
는 토토에게 말했다. 

 "다치바나 아저씨가 너한테 주려고 바나나 가져 오셨어."

 토토는 바나나를 받아들고는 너무 기쁜 나머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다치바나씨에
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이 놈은 감지덕지에요!"

 
 그 일 이후로 토토는 아빠와 엄마가 집에 안 계실 때만 몰래 만담을 들었다. 만담가
가 잘하면 토토는 큰 소리로 웃었다.

 어떤 어른이 이런 토토의 모습을 보았다면 "요 조그만 애가 용케도 그런 어려운 얘기
를 알아듣고 웃는군." 하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아무리 어린애라도 진짜로 
재미있는 것은 반드시 아는 법이다.


 17. 전철이 온다
 
 오늘, 학교 점심시간에 미요가 말했다.

 "오늘밤에 새 전철이 온대!"

 미요는 교장선생님의 셋째 딸로 토토와 같은 학년이었다. 교실용 전철이 교정에 여섯
대나 놓여 있는데, 또 한 대가 더 온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건 '도서실용 전철'이라고 
미요가 귀띔해 주었다.

 모두들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어디서 달려서 우리 학교까지 올까…?"

 아이들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잠시 쥐 죽은 듯 침묵이 흐른 뒤 누군가가 말
했다. 

 "중간까지 오이마치선 선로를 달려와서, 저기 있는 건널목에서 내려 여기로 오지 않
을까?"

 그러자 누군가가 말했다. 

 "그럼 탈선하는 거나 마찬가지겠네."

 또 다른 아이가 말했다.

 "그럼, 혹시 리어카로 나르는 게 아닐까?"

 그러자 곧 누군가가 말했다.

 "야, 세상에 그렇게 큰 전철을 실을 수 있는 리어카가 어디 있어!"

 "하긴…."

 이쯤에서 모두의 생각이 멈춰버렸다. 과연 전철 한 대를 실은 리어카는 물론이고 트
럭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있잖아…."

 생각 끝에 토토가 말을 꺼냈다.

 "선로를 학교까지 쭈욱 놓는 거 아닐까?"

 곧 누군가가 물었다.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터이긴, 지금 전철이 있는 데서 부터이지…."

 토토는 말하면서도 (역시 좋은 의견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데다가, 집이며 뭐며 다 때려부수고 학교까지 곧바른 
선로를 놓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모두들 한참동안이나 이
러쿵저러쿵 옥신각신했다.

 "그럼, 오늘밤에 집에 가지 말고 전철 오는 거 구경하자!"

 결국 모두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대표로 미요가 아빠인 교장선생님한테 모두 함께 
밤까지 학교에 있어도 좋은지 물어보러 갔다.

 잠시 후 미요가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전철은 아주 밤이 늦어서야 온대. 달리는 전철이 다 끊기고 나서, 그렇지만 꼭 보고
싶은 사람은 일단 집에 들어가서 엄마, 아빠한테 물어보고, '괜찮다'고 허락하면 잠옷
과 담요를 가지고 저녁 먹은 후에 학교로 다시 오래."

 "와아!!!"

 아이들은 더욱 더 흥분했다.

 "잠옷이라고!?" "담요하고!?"

 그날 오후는 모두들 공부를 하면서도 마음은 온통 딴 데 가 있었다.

 방과 후 토토네 반 아이들은 모두 총알처럼 집으로 돌아갔다. 서로 옷과 담요를 가지
고 모일 수 있게 될 행운을 빌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토토는 엄마에게 말했다.

 "전철이 온대! 어떻게 오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잠옷하고 담요! 응, 가도 되지?"

 이 정도 설명으로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엄마는 거의 없을 것이다. 토토의 엄마 역
시 무슨 소린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토토의 진지한 얼굴로 보아 (뭔가 아주 신
기한 일이 벌어지나 보다!)하고 판단했다. 

 엄마는 이것저것 토토에게 질문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어떻게 된 일인지, 아
이들이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엄마는 토토가 그런 것을 
볼 기회가 그다지 흔치 않을 테니까 보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편 
당신도 (나도 좀 보고 싶은데…)하는 생각마저 떠오를 정도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엄마는 토토의 잠옷과 담요를 준비하여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
다. 학교에는 소문을 듣고 온 상급생들까지 전부해서 열 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그리
고 토토의 엄마 외에도 두 명 정도 바래다주러 온 엄마들이 있었는데, 다들 '보고 싶
어…'하는 눈치가 여력 했다. 하지만 교장선생님에게 아이들을 부탁하고는 순순히 발
길을 돌렸다.

 "전철이 오면 깨워주마."

 교장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모두 강당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자게 되었다. 물론 아
이들의 생각이야 (그 큰 전철이 어떻게 옮겨질까? 그걸 생각하면 잠이 안 올 것 같아!
)그랬지만, 이미 그때까지의 흥분으로 다들 피곤했기 때문에 

 "꼭 깨워줘야 돼요!"

 라고 말하면서 모두들 끄덕거리다 끝내 잠이 들어 버렸다….    


 "왔다! 왔어"

 갑자기 떠들썩한 소리에 토토는 벌떡 일어나 교정을 뛰어 문밖까지 나갔다. 마침 아
침 안개 속으로 전철이 그 커다란 모습을 막 드러내는 참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마침 
꿈 같았다. 선로가 없는 그냥 길을 전철이 소리도 없이 달려왔으니까….

 전철은 오이마치 조차장에서 트랙터로 운반되어 왔다. 토토와 아이들은 자신들이 몰
랐던, 리어카보다 큰 트랙터라는 것의 존재를 알고는 역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커다란 트랙터를 타고, 아무도 없는 아침거리를 따라 전철은 유유히 운반되어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아직 대형 크레인 같은 게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전철을 트랙터에서 내린다고 해야 할 지, 아무튼 떼어내서 교정 구석의 정해진
장소로 옮기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운반해 온 아저씨들은 굵은 통나무
를 몇 개씩 전철 밑에 간 다음, 조금씩 그 위로 굴리듯 하면서 전철을 트랙터에서 교
정으로 내려놓았다.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설명했다.

 "잘 들 봐 두거라. 저건 굴림대라고 하는 건데, 굴리는 힘을 응용해서 저렇게 큰 전
철을 움직이는 거다."

 아이들은 진지하게 구경했다. '영차, 영차'하는 아저씨들의 구령 소리에 맞추어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바쁘게 선로 위를 오가며 일해 온 그 전철은 이 학교에 와 있
는 다른 여섯 대의 전철과 마찬가지로, 이미 차륜이 떨어져 있어서 더 이상 달릴 필요
가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만을 싣고 느긋하게 지
내면 될 것이다….

 아이들은 다들 잠옷 차림으로 아침햇살 속에 서 있었다. 그리고 전철이 운반되는 현
장에 있게 된 것을 진심으로 행복하게 생각했다. 아이들은 너무 기쁘고 신이 나서 잇
달아 교장선생님의 어깨며 팔에 매달리고 엉겨붙었다. 교장선생님은 비틀거리면서도 
즐거운 듯이 웃었다.

 교장선생님의 웃는 얼굴을 보고 아이들은 더욱 즐거워하며 웃었다. 모두가 웃었다….

 그리고 이때 웃었던 것을 아이들 모두는 언제까지고 잊지 못했다.
   

 18. 알몸으로 수영해요

 토토에게 오늘은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난생 처음으로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벌거벗은 채!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교장선생님이 모두에게 말했다.

 "갑자기 날씨가 더워져서 수영장에서 물을 넣을 생각이다."

 "와아!!"

 아이들은 탄성을 지르며 발을 굴렀다.

 "와아!"

 1학년인 토토도 물론 상급생들보다 더 높이 깡충거렸다.

 도모에 학원의 수영장은 대부분의 수영장처럼 사각형이 아니라 - 땅이 그렇게 생긴 
때문이겠지만 - 앞쪽이 약간 좁은 보트 모양 같았다. 장소도 바로 교실과 강당 사이에
있었는데, 토토와 아이들은 수업 중에도 궁금해서 몇 번이고 수영장을 보려고 창문 밖
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물이 채워져 있지 않을 때의 그것은 마치 낙엽 운동장 같았지
만, 일단 청소를 하고 물이 채워지기 시작하자 아주 크고 멋있는 수영장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이 모두 수영장 주위에 모이자 교장선생님은 말했다.

 "자! 그럼 체조를 한 다음에, 어디 수영을 해볼까?"

 (잘은 모르겠지만 보통 수영을 할 때는 수영복을 입는 게 아닌가? 전에 엄마하고 아
빠랑 가마쿠라에 갔을 땐 수영복이랑 튜브랑 여러 가지를 갖고 갔었는데…. 선생님이 
오늘 가지고 오라고 그랬었나?)

 토토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은 토토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이
렇게 말했다.

 "수영복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자, 어서 강당으로 가 보거라."

 토토와 1학년 아이들이 강당으로 달려가 보니 벌써부터 큰 아이들이 꺄아꺄아 소리를
질러대며 옷을 벗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옷을 벗고 나서는 마치 목욕탕에 들어갈 
때처럼, 벌거벗은 채 교정으로 차례차례 뛰어나가는 게 아닌가!

 토토와 친구들도 서둘러 옷을 벗었다. 벗은 몸에 뜨거운 바람이 오히려 상쾌하게 느
껴졌다. 강당에서 나와 계단 위에 서자, 벌써 교정에서는 준비체조가 시작되고 있었다. 
토토는 맨발로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수영선생님은 미요의 오빠, 즉 교장선생님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도모에 학원의 선생
님이 아니라 다른 대학의 수영 선수였다. 그리고 이름은 학교와 똑같은 도모에라고 했
다. 그만이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아이들은 도모에 씨를 따라 체조를 하고 몸에 물을 끼얹은 다음,

 "꺄 - 꺄 - 와 - 와!!"

 갖가지 소리를 내면서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토토는 잠시 주춤거리며, 아이들이 들어
가 물이 키까지 안 차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들어갔다. 

 목욕탕은 물이 따뜻한데, 수영장은 찬물이었다. 하지만 수영장은 커서, 아무리 팔을 
뻗어도 온통 물이었다. 마른 아이도 좀 뚱뚱한 아이도 남자아이도 여자아이도 모두 태
어날 때의 모습 그대로, 웃기도 하고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잠수를 하기도 했다.

 토토는 (수영장은 정말 재미있고 기분 좋은 곳이야!)라고 생각하며 로키와 함께 학교
에 올 수 없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했다. 안 그렇겠는가! 수영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더라면 로키도 틀림없이 첨벙! 뛰어들어 수영을 했을 테니까.

 그런데 교장선생님은 왜 수영복을 안 입고도 수영하게 했을까?

 물론 규칙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수영복을 가지고 온 아이는 입어도 상관없었고, 
오늘처럼 갑자기 수영을 하게 된 날은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까 벌거벗어도 상관없었다.
따라서 그냥 벌거벗은 채 수영을 허락하는 까닭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서로 신체의 
다른 점을 이상한 눈으로 훔쳐보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과 '자신의 몸을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숨기려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은연중에 '어떤 몸이든 저마다 아름다운 것'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도모에 학원의 아이들 가운데는 야스아키처럼 소아마비에 걸렸거나 키가 유난
히 작다는 등의 신체적인 결점을 가진 아이들도 몇 명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벌거
벗고 같이 놀다보면 그런 아이들의 수치심도 없어지고 나아가 열등감도 완화되지 않을
까 하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교장선생님의 바램대로 처음에는 그런 결정을 
부끄러워했던 아이들도 점차 아무렇지도 않아졌고, 사실 즐겁고 신나는 마음이 먼저이
다 보니 '부끄럽다'는 생각 따위는 어느 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들 가족 중에는 걱정이 돼서 "꼭 입도록 해라!"면서 굳이 수영복을 챙
겨보내는 집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도 결국에는, 토토처럼 아예 (수영은 역
시 벌거벗고 하는 게 좋아!)하고 결정한 아이나 또 '수영복을 잊어먹었다'며 헤엄을 
치고 잇는 아이들을 보면, 그 편이 훨씬 좋아 보여 같이 벌거벗고 신나게 헤엄을 친 
다음, 돌아갈 즈음에야 부산을 떨며 수영복에 물을 끼얹곤 했다.

 이렇듯 도모에 학원의 아이들은 언제나 온몸이 새카맣게 타기 때문에, 여느 아이들처
럼 수영복 자국만 하얗게 남는 일은 거의 없었다.    


 19. 통지표

 토토는 지금 책가방을 덜거덕거리면서, 한눈도 팔지 않고 역에서 집을 향해 달리고 
있다. 언뜻 보면 무슨 중대한 사건이라도 일어났는가 싶을 정도인데, 학교 문을 나선 
후부터 줄곧 이렇게 서두르고 있다.

 마침내 집에 도착하여 현관문을 열자, 토토는

 "다녀왔습니다!"

 라고 큰 소리로 말한 후 로키부터 찾았다.

 로키는 베란다에 배를 찰싹 붙이고 시원한 바람을 쐬고 있었다.

 토토는 아무 말 없이 로키의 얼굴 앞에 앉은 다음, 등에서 책가방을 내려 안에서 무
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토토가 처음으로 받은 통지표였다.

 토토는 로키한테 잘 보이도록 눈앞에다 성적 부분을 쓰윽 펼친 다음, 

 "볼래?"

 하고 짐짓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거기에는 수니 우니 여러 가지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하기야 토토가 수보다 우가 좋은
건지, 아니면 수가 좋은 건지 그런 것을 아직 알 리 없었으니, 로키에게는 말할 필요
조차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토토는 처음으로 받은 이 통지표를 누구보다 먼저 로키에게 보여줘야겠다고 
작정했었고, 로키가 보면 분명 좋아할 것이라고 믿었다.

 로키는 눈앞의 종이를 보자 슬그머니 냄새를 맡은 다음, 토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
다보았다. 토토는 말했다.

 "잘했지? 한자가 많아서 너한테는 좀 어렵겠지만."

 로키는 한번 더 종이를 찬찬히 보는 것처럼 머리를 움직이더니, 이번엔 토토의 손을 
슬쩍 핥았다. 그제야 토토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일어서면서 말했다.

 "다행이다, 그럼 엄마, 아빠한테도 보여주고 올께!"

 
 토토가 가버리자 로키는 좀 더 시원한 곳을 찾기 위해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앉더니 눈을 감았다…. 그것은 마치 토토의 통지표가 아니더라도 나는 늘 통지표에 대
해 생각하고 있다는 식의 느긋한 표정이었다.


 20.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내일은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합니다. 담요와 잠옷을 가지고 저녁 때 학교로 오세요.>


 토토는 학교에서 이런 통신문을 가지고 와 엄마에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내일부터 
여름방학이었다.

 "야영이 뭐야?"

 토토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도 막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대답했다. 

 "글쎄…. 어디, 밖에다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자는 것 아닐까? 텐트라면 자면서도 
별님하고 달님을 볼 수 있거든. 그런데 어디에다 텐트를 치는 걸까? 교통비도 없는 걸
보니, 아마 학교 근처인가보다."

 그날 밤, 토토는 침대에 들어가서도 영 잠이 오지 않았다. 내일 야영할 생각을 하면 
(좀 무서울 것 같긴 한데 아무튼 대단한 모험이겠어!) 하고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이
룰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벌써부터 토토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옷을 넣은 
배낭 위에 담요를 올려주자, 짜 부러질 듯한 모습으로 엄마와 아빠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저녁 무렵에 집을 나섰다.   

 모두들 학교에 모이자 교장선생님은 말했다.

 "자, 다들 강당으로 오너라."

 아이들이 강당에 모이자 교장선생님은 작은 무대 위에 '초록색 뻣뻣한 것'을 들고 올
라왔다. 그것이 바로 텐트였다. 선생님은 텐트를 펼친 다음 설명했다.

 "지금부터 텐트 치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잘 보거라."

 교장선생님은 혼자서 끙끙거리며 저쪽 끈을 잡아당겼다. 이쪽 지주를 세웠다 하며, 
눈 깜짝할 새에 아주 멋진 삼각형 텐트를 쳤다. 그리고는 다시 말했다.

 "자, 됐지. 지금부터 너희들은 서로 힘을 합쳐서 강당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한단다."

 엄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밖에다 텐트를 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교
장선생님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강당이라면 비가 오거나 밤에 약간 쌀쌀해져도 괜찮지!'


 아이들은 일제히 "야영이다! 야영!" 하고 외치면서 몇 명씩 조를 나눈 다음, 선생님
들의 도움을 받아 강당 바닥에 부지런히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한 텐트는 세 명 정도
가 잘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토토는 부랴부랴 잠옷으로 갈아입고 기운이 빠지도록 
이 텐트, 저 텐트를 기어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다른 아이들도 똑같이 남의 텐트를 
서로 방문하느라 정신없었다.

 어느 덧 모두가 잠옷으로 갈아입자,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이 다 보이는 한 가운데에 
앉아 선생님이 여행했던 외국 얘기를 해주었다. 

 텐트에서 고개를 반쯤 내밀고 누운 아이, 반듯이 앉은 아이, 상급생의 무릎에 머리를
기댄 아이…. 아이들은 각기 편한 자세를 취하고, 가 본 적은 물론이요 그때까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외국 이야기에 마냥 귀를 기울였다. 

 선생님의 얘기는 신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바다 건너의 어린이들이 친구처럼 친근하
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고작 그런 정도의 일이…. 강당에 텐트를 치고 자는 일
이…. 아이들에게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 즐겁고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의 얘기가 끝나고 강당의 전깃불이 꺼지자, 아이들은 바스락거리며 자기들 텐
트 속으로 들어갔다. 저쪽 텐트에서는 웃는 소리가…. 이 쪽 텐트에서는 소곤거리는 
소리가…. 그리고 건너편 텐트에서는 티격태격…. 그러다 점차 조용해졌다.

 별도 달도 없는 야영이었지만 마음 속 깊이 행복한 아이들이 작은 강당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은 수많은 별님과 달님도 강당을 감싸듯 언제까지나 빛나
고 있었다….


 21. 대 모험

 강당에서 야영을 한 다음 날은, 그야말로 토토가 대 모험을 하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사실 토토는 야스아키와 어떤 약속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또 야스아키네 식구들에게도 비밀이었는데, 다름 아닌 '토토의 나무에 야스아키를 초대'
하는 것이었다. 
 
 도모에 학원 아이들은 언제부턴가 교정에 서 있는 나무들 중 한 그루씩을 자기만 올
라탈 수 있는 나무로 지정해 놓고 있었다. 

 토토의 나무는 교정 저 끝, 구혼부츠로 가는 좁은 길과 울타리 사이에 서 있었다.  
그 나무는 가지도 굵고 오를 때는 미끈미끈하지만, 기어서 오르면 아래에서 2미터 정
도 부분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으며, 그 갈라진 부분이 해먹처럼 넉넉했다. 그래서 
토토는 쉬는 시간이나 방과후, 곧잘 그곳에 걸터앉아 먼데를 구경하기도 하고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또 길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곤 했었다. 

 이런 식으로 제각기 자기 나무를 지정해 둔 탓에, 행여 다른 아이의 나무에 올라가고
싶을 때는 반드시 

 "계십니까?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라고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그만큼 아이들은 자기 나무를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야스아키는 소아마비였기 때문에 나무에 올라가 본 적도 없었고 또 자기 나무
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토토는 오늘 자기 나무에 야스아키를 초대하기로 마음
먹고 야스아키와 약속을 했던 것이다. 더구나 용이 주도하게 모두가 반대할 것에 대비
하여 비밀로 삼기까지 하였다.

 토토는 집을 나서면서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덴엔쵸후에 있는 야스이키네 집에 다녀올게요."

 이 순간만큼은 거짓말을 하는 셈이라서, 토토는 되도록 엄마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신발끈 쪽만 열심히 쳐다봤다. 그런데 역까지 따라나온 로키에게는 헤어질 때 그만 
사실대로 말해버리고 말았다.

 "실은 야스아키를 내 나무에 초대했어!"


 토토가 목에 맨 정액권을 펄럭거리며 학교에 도착하자, 여름방학이라 아무도 없는 교
정의 화단 옆에 누군가가 벌써 와 있었다. 토토보다 한 살 위였지만 언제나 훨씬 큰 
아이처럼 말하고 하는, 바로 야스아키였다.

 야스아키는 토토가 눈에 띄자, 다리를 질질 끌면서 팔을 앞쪽으로 내미는 듯한 자세
로 토토 쪽으로 달려왔다. 토토는 아무도 모르는 모험을 지금부터 한다고 생각하자, 
너무도 즐거워서 야스아키의 얼굴을 보며 

 "후후후"

 하고 웃고 말았다. 야스아키도 따라 웃었다.

 토토는 우선 자기 나무가 있는 곳으로 야스아키를 데려간 다음, 엊저녁부터 궁리한대
로 사환아저씨의 헛간으로 달려가 사다리를 끌고 왔다. 그리고 그것을 나무가 두 갈래
로 갈라지는 부분에 기대어 세운 다음 척척 올라가, 위에서 그것을 누르면서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됐어, 올라와 봐!"

 하지만 야스아키는 팔과 다리에 힘이 없어서 혼자서는 도저히 한 계단도 올라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러자 토토는 휙! 뒤로 돌아 사다리를 씩씩거리며 내려오더니, 이번에
는 야스아키의 엉덩이를 뒤에서 밀어 위로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토토는 몸집이 작고
깡마른 아이였기 때문에 야스아키의 엉덩이를 미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 휘청거리는 
사다리를 어쩔 방법이 없었다.

 야스아키는 사다리에 올렸던 다리를 도로 내리고선, 아무 말 없이 고개 숙인 채 사다
리 앞에 서 있었다. 그제서야 토토는 이 모험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든 일임을 알
았다.

 (어떡하지….)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야스아키의 기대를 이루어주고 싶었다. 토토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야스아키의 앞쪽으로 돌아가서, 우선 입안에다 공기를 잔뜩 집어넣고 뺨을 
부풀러 재미있는 표정을 지은 다음 기운차게 말했다.

 "기다려 봐, 나한테 더 좋은 생각이 있으니까!"

 그리고는 다시 헛간으로 달려갔다.

 (뭔가 좋은 게 없을까…?)

 토토는 이것저것 차례차례 끄집어 내 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접사다리를 발견했다.

 (그래! 이거라면 흔들거리지 않으니까 잡고있지 않아도 될 거야!)

 토토는 그 접사다리를 질질 끌고 나왔다.

 (와아! 내가 이렇게 힘이 센 줄은 정말 몰랐네!)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힘이었다.

 접사다리를 세워보니 나무가 두 갈래로 갈라진 지점까지 거의 닿았다. 토토는 마치 
야스아키의 누나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됐지? 하나도 안 무서워. 이젠 흔들거리지 않으니까."

 야스아키는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접사다리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땀에 흠뻑 젖은 토토
를 바라보았다. 야스아키도 땀이 비오듯했다. 

 야스아키는 천천히 나무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마음을 정한 듯 첫 번째 단에 천천히 
발을 올렸다. 그때부터 야스아키가 접사다리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데 어느 정도 시간
이 걸렸는지는 두 사람도 알지 못했다. 내리쬐는 여름 땡볕 아래서 둘 다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단지 무슨 수를 써서든 야스아키가 접사다리 위까지 올라가면 된다는 
생각 외에는….

 토토는 야스아키의 다리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다리를 들어올리며, 머리로는 야스아
키의 엉덩이를 받쳤다. 야스아키도 있는 힘을 다해 마침내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갔다.

 "만세!"

 그런데 그 다음이 또 절망적이었다. 두 갈래로 갈라진 곳으로 뛰어오른 토토가, 아무
리 잡아당겨도 접사다리 위에 있는 야스아키를 나무 위로 옮겨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
다. 야스아키는 접사다리 끝을 꽉 잡은 채 토토를 쳐다봤다. 갑자기 토토는 울고 싶어
졌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내 나무에 야스아키를 초대해서 정말로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하지만 토토는 울지 않았다. 행여 자기가 울면 덩달아 야스아키까지 울어버릴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토토는 소아마비로 손가락이 들러붙은 야스아키의 손을 잡았
다. 자기 손보다 훨씬 손가락이 길고 커다란 그 손을…. 토토는 그 손을 한참동안 잡
고 있다가 말했다.

 "한번 누워볼래? 잡아당겨 보게."

 이때 만약 접사다리 위에 엎드린 야스아키를 나무 위에 서서 잡아당기기 시작한 토토
를, 지나가는 어른이 봤다면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을 게 분명하다. 그 정도로 두
사람은 불안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야스아키는 완전히 토토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이때 토토도 자
기의 온 생명을 걸고 야스아키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토토는 조그마한 손으로 야스아키의 손을 꽉 붙잡고, 있는 힘껏 잡아당기기를 계속했
다. 지나가던 소나기구름이 때로 강한 햇볕을 가려주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두 사람
은 나무 위에서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다! 

 토토는 땀에 흠뻑 젖은 옆 가르마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면서,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다음 말했다.

 "어서 오세요."

 야스아키는 나무에 기댄 자세로 약간 쑥스러운 듯 웃으며 대답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야스아키는 처음 보는 경치에 너무도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듯 했다.

 "나무에 오르는 기분이 어떤 건지, 이젠 알겠어!"


 그로부터 두 사람은 한참동안 나무 위에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눴다. 야스아키는 열
띤 목소리로 이런 얘기도 했다.

 "미국에 사는 누나한테 들었는데, 미국에서 텔레비전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대! 그게 
일본에 들어오면 집에 편안히 앉아서도 국기관에서 하는 씨름을 볼 수 있다는 거야! 
꼭 상자처럼 생겼다던데."

 하지만 먼 곳에 나가기 힘든 야스아키가 집에서 여러 가지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
나 기쁜 일인지, 아직 토토로서는 실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상자 안에서 씨름을 하
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씨름선수들은 덩치가 큰데, 어떻게 집까지 와서 상자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아무래도 믿기 어려운 얘기라는 생각마
저 들었다. 물론 그 때까지 아무도 텔레비전이라는 걸 모르던 시절의 일이었으니…. 
결국 토토에게 최초로 텔레비전 얘기를 해준 사람이 바로 이 야스아키였다.


 매미가 여기저기서 울고 있었다. 나무 위의 두 아이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그러나 야
스아키한테는 이때 나무에 오른 경험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나무 타기가 되었다.


 22. 귀신은 안 무서워

 "무섭고 냄새나고 맛있는 게 뭐게?"

 이 수수께끼는 몇 번을 내도 그때마다 재미있어서 토토와 아이들은 답을 알면서도

 "얘, 또 '무섭고'하는 그 수수께끼 내 봐!"

 하면서 서로 수수께끼를 내고는 즐거워했다. 정답은 <귀신이 화장실에서 만두를 먹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밤 도모에의 '담력 테스트'에서는 이런 수수께끼 같은 결과가 나왔다. 즉, 
"무섭고 가렵고 웃긴 것은 뭘까?" 하는 식으로.

 강당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던 그날 밤, 교장선생님이

 "밤에 구혼부츠 절에서 '담력 테스트'를 할건데, 귀신이 되고 싶은 사람은 손들어 보
렴."

 하고 말해 남자아이 일곱 명 정도가 앞을 다투어 귀신이 되겠다고 나섰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저녁, 모두가 학교에 모이자 귀신이 되는 아이들은 제각기 손수 만든 귀
신 의상을 준비하고,

 "무섭게 해야지!!"

 라고 말하며 구혼부츠 절 어딘가에 숨으러 갔다. 그러면 나머지 30명 정도의 아이들
은 5명씩 조를 짜서 시간차를 두고 학교를 출발, 구혼부츠 절과 묘지를 돌아서 학교까
지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교장선생님이 짤막하게 설명했다.

 "무서움을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 담력 테스트를 하는 것인데, 무서우면 언제든지 도
중에 돌아와도 상관없단다."

 토토는 엄마한테서 "잃어버리면 안 돼!"라고 단단히 주위를 받고선 손전등을 빌려왔
다. 그런데 남자아이들 중에는 귀신을 잡겠다고 잠자리채를 갖고 온 아이가 있는가 하
면, 또 귀신을 붙들어 맨다면서 밧줄을 들고 나온 아이도 있었다. 어쨌든 교장선생님
의 설명을 듣고 가위바위보로 그룹을 정하는 사이에 날이 꽤 어두워졌다.

 "출발해도 좋다!"

 드디어 제1조에게 지시가 떨어졌다. 모두들 들떠서 꽥꽥 소리를 질러대며 교문을 빠
져나갔고…. 마침내 토토네 조의 순서가 되었다.

 (선생님이 구혼부츠 절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귀신이 안 나온다 그랬는데, 정말로 도
중에는 안 나올까….)

 토토네 조 아이들은 다들 오들오들 떨면서 간신히 금강역사가 보이는 절 입구에 도착
했다.  한밤중의 절은 달이 떠 있는데도 어두웠다. 평소에는 널찍해서 기분 좋던 경내
어디에선가 귀신이 나올는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토토네 조는 너무나도 무서워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바람에 나무가 조금만 흔들려도 "꺄악!", 또 발에 물컹한 것
이라도 밟히면 "으악, 귀신이다!", 끝내는 서로 손을 잡고 있는 상대방마저도 (혹시 얘가 
귀신이 아닐까?)하고 걱정이 될 정도였다.

 토토는 묘지까지 가고 싶지 않았다. 귀신은 틀림없이 묘지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자기는 이미 담력 테스트가 무엇인지 이 정도로 충분히 알았으니까 그만 돌아가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마침 다른 아이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있던 참이었다. 

 토토는

 (아, 다행이다. 혼자가 아니라며….)

 라고 생각했고…. 모두들 돌아오는 길엔 그야말로 쏜살같았다.

 학교로 돌아오니 앞서 갔던 조도 이미 돌아와 있었고, 다른 아이들도 대부분 무서워
서 묘지까지는 가지 못했다고들 했다. 그러고 있는데, 하얀 천을 머리에다 푹 뒤집어 
쓴 남자아이가 엉엉 울면서 선생님의 손을 잡고 문으로 들어왔다. 귀신이 된 그 아이
는 줄곧 묘지 안에 쭈그리고 앉은 채 아이들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결국 아무도 오지 않은 데다 점점 무서워져서 묘지에서 뛰쳐나와 길에서 울음을 터뜨
리고 만 것이다. 그러다가 다행히 순회하던 선생님에게 발견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모두가 그 아이를 위로하고 있는데, 또 다른 귀신과 남자아이가 울면서 돌아왔다. 귀
신 아이는 누군가가 묘지로 들어오자 "귀신이다!"하고 놀래켜 주려는 생각에 앞으로 
뛰어나갔다가, 그만 달려 들어온 그 남자아이와 정면충돌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둘 다 놀라기도 하고 아프기도 해서 같이 엉엉 울면서 돌아온 것이다.

 아이들은 우습기고 하고, 한편으로 무서운 '담력 테스트'가 다 끝났다는 안도감에 너
도나도 깔깔대며 웃었다. 귀신도 울다가 웃었다. 그때 신문지로 만든 귀신가면을 쓴, 
토토네 학년인 미키타가 또 돌아와서는

 "너무들 해, 여태껏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며 모기에게 물린 다리와 팔을 북북 긁었다. 그것을 보고 누군가가 

 "야! 귀신이 모기한테 물렸다!"

 하고 말해 모두들 또 한바탕 웃었다

 이러는 동안에 5학년 담임 이마루야마 선생님이,

 "그럼, 이제 남아있는 귀신을 데려 와야겠지?"

 라며 나갔다. 그리고 외등 아래서 두리번거리고 있던 귀신이며, 무서워서 아예 집으
로 도망쳤던 귀신을 전부 데리고 들어왔다.

 이 날 이후, 도모에 학원의 아이들은 더 이상 귀신을 무섭다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귀신도 무서움을 탄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23. 아빠의 연습실

 지금 토토는 반듯하게 또박또박 걷고 있다.

 로키 역시 간간이 토토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또박또박 예의바르게 걷고 있다. 이
유는 단 한 가지, 바로 아빠의 연습실을 구경하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평소 같으면 토토는 쏜살같이 달리거나, 떨어뜨린 것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면서 왔
다갔다하거나, 남의 집 정원을 차례차례 가로질러 울타리 밑을 기어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식으로 길을 다닌다. 그러니 오늘처럼 얌전하고 똑바르게 걷는 일은 드물다. 따
라서 사람들은 이런 토토의 모습을 보면 '연습실에 가는 모양이로군' 하고 금방 알아
차릴 수 있다.

 
 아빠의 연습실은 토토의 집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토토의 아빠는 오케스트라의 콘서트마스터였다. 콘서트마스터라는 건 바이올린 연주
자를 말하는데, 연주가 끝나면 지휘자가 지휘대에서 내려와 악수를 청하는 연주자이다.

 언젠가 토토는 연주회에 따라갔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연주가 끝나고 청중들이 박수
를 치자 땀에 흠뻑 젖은 지휘자 아저씨가 객석 쪽으로 휙 돌아서더니, 지휘대에서 내
려와 바로 옆에 앉아서 연주를 한 토토의 아빠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을 보았다. 게다
가 그때 아빠가 일어서자  오케스트라의 모든 단원이 일제히 일어서기까지 하는 것이
었다.

 "왜 악수하는 거야?"

 작은 소리로 토토가 묻자, 엄마는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

 "저건 아빠하고 단원들이 열심히 연주를 했기 때문에 지휘자가 '고맙다, 수고했다'는
뜻에서, 대표로 아빠한테 악수를 청하는 거야."

 아무튼 토토가 연습실을 좋아하는 이유는 학교는 아이들뿐이지만, 이곳엔 언제나 어
른들만 모여 있었고, 게다가 여러 가지 악기로 연주를 했고, 특히 지휘자인 로젠슈토
크 씨의 서툰 일본어가 무척이나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로젠슈토씨는 요셉 로젠슈토크라고, 유럽에서는 아주 유명한 지휘자였는데 '히틀러라
는 사람이 무서운 짓을 하려고 해서,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 도망쳐 이렇게 먼 일본까
지 온 것'이라고 아빠가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 아빠는 론젠슈토크씨를 존경하고 있다
고 했다. 토토로서는 아직 세계 정세를 알 수 없었지만, 그때 이미 히틀러는 유태인 
탄압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로젠슈토크 씨는 일본
에 올 일이 없는 사람이었고, 또 이 오케스트라도 그렇게 급속하게 성장하지 못했을지
도 모른다.

 어쨌든 로젠슈토크 씨는 단원들에게 유럽의 일류 오케스트라와 똑같은 수준의 연주를
요구했으며, 항상 연습을 마치고는 눈물을 흘리며 울곤 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당신들 오케스트라는 호응을 해주지 않는다."

 면서, 그러면 로젠슈토크 씨가 연습으로 쉬거나 할 때 대신 지휘를 맡는, 가장 독일어
를 잘 하는 첼로 톱주자 사이토씨가 

 "모두들 열심히 하고 있지만 실력이 따라가지 못해서 그러는 겁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에요."

 라고 단원들의 심정을 전달하며 위로했다.

 토토는 이런 경위를 잘 몰랐지만 때때로 로젠슈토크 씨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머리에
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듯한 표정으로 독일어로 고함치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었
다. 그럴 때면 토토는 턱을 괴고 들여다보는 자기만의 창문에서 재빨리 머리를 쏙 내
리고, 로키와 함께 땅바닥에 웅크린 채 숨을 죽이고 다시 음악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평소의 로젠슈토크 씨는 상냥했고 그의 일본어는 특히 재미있었는데, 어쩌다 
모두가 연주를 제대로 하기라도 하면 "구로야나기 씨, 아주 좋아요!" 또는 "훌륭합니
다!"라고 연신 외치곤 했다.

 토토는 한번도 연습실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그저 몰래 창문으로 들여다보
면서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래서 휴식시간이 되어 모두가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와서야,

 "앗! 토토 녀석, 또 왔구나!"

 하고 아빠가 알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로젠슈토크 씨도 토토를 발견하면 "안녕
!"이라든지 "잘 있었니?"라고 반기며, 이젠 다 컸는데도 어렸을 때처럼 번쩍 안아 올
려 뺨을 갖다 부벼대곤 했다. 좀 부끄럽기도 했지만 토토도 가는 은테안경을 쓰고 코
가 높고 키가 작은 로젠슈토크씨가 좋았다. 그는 한 눈에 예술가라는 것을 척 알 수 
있는 멋지고 아름다운 얼굴의 소유자였다.

 
 센조쿠 연못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연습실의 음악 소리를 아주 멀리까지 실어 갔다. 
그리고 어쩌다 그 음악 소리에 '금붕어 사려! 금붕어!'하고 외치는 금붕어 장수의 소리가 
섞을 때도 있었다….

 아무튼 토토는 이 서양식 저택 스타일의 연습실이 썩 마음에 들었다.


 24. 온천여행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다.

 도모에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에겐 그야말로 메인 이벤트라 할 수 있는, 온천여행 출
발 날이 성큼 다가왔다. 

 "친구들이랑 온천여행 가도 돼?"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은 엄마도, 여름방학 전 어느 날 토토가 학교에서 돌아와 이
렇게 물었을 때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모여서 온천으로 놀
러간다면 이해를 하겠지만, 이제 겨우 1학년 아이들이….

 하지만 엄마는 교장선생님의 통신문을 꼼꼼히 읽어보고는 과연 재미있을 것 같다며 
감탄했다. 시즈오카의 이즈반도에 도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곳은 바다 안에서 온천수
가 솟아오르기 때문에 아이들이 수영도 할 수 있고, 게다가 온천 욕도 즐길 수 있다는
「임해(臨海)학교」에 대한 안내문이었다.

 기간은 2박 3일…. 마침 도모에 학원에 다니는 한 아이네 별장이 그 곳에 있어서 1학
년부터 6학년까지 전교생 약 50명이 너끈히 묵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당연히 
찬성을 했다.

 그리하여 오늘 도모에 학원 아이들은 각자 온천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서 학교에 모
였다. 다들 교정에 모이자 교장선생님이 말했다.

 "다 모였지? 기차도 타고 배도 탄단다. 미아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 자, 그럼 출발이
다!"

 교장선생님의 주의 사항은 단지 이것뿐이었다. 하지만 지유가오카 역에서 도요코 선
으로 갈아탄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고 뛰어다니는 아이도 없었으며, 또 옆에 
앉은 아이와 할 얘기가 있을 때에는 얌전하게 소리 낮춰 얘기를 나눴다.

 사실 도모에의 학생들은 한 번도 학교에서 '예의바르게 한 줄로 서서 걸을 것!'이라
든지, '전철 안에서는 조용히 할 것!'이라든지, '음식물 찌꺼기를 버리면 안 된다'는 
따위의 주의사항을 배운 적이 없었다. 다만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자기보다 어린 사
람이나 약한 사람을 밀쳐 내거나 난폭하게 행동하는 것은 자신에게 부끄러운 일이며, 
또 어질러져 있는 곳을 보면 자기가 알아서 청소를 하는 등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
은 되도록 삼가는 습관이 어느 틈에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수업 중에 창가에서 친동야를 불러 모두에게 피해를 
주었던 토토가, 도모에 학원으로 온 그 날부터는 자기 책상에 얌전히 앉아서 공부하게
된 것을 보면 여간 신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지금도 토토는 전에 다니던 
학교 선생님이 보면 '아마도 내가 사람을 잘못 봤겠지…?'할 정도로 얌전히 아이들과 
같이 앉아서 여행을 하고 있었다.

 
 누마즈에서부터는 모두가 그토록 꿈꾸던 배를 타게 되었다.

 그다지 큰배는 아니었지만 모두들 들떠서 여기저기 들여다보기도 하고 만져보기도 하
고 매달려보기도 하였다. 또 배가 항구를 떠날 때는 동네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도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아이들은 갑판에서 선실로 들어가야 했
고, 배도 몹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바람에 토토는 속이 울렁거리고 웬일인지 기
분도 나빠졌다. 다른 아이들도 대부분 그랬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고학년인 한 남
자아이가 흔들리는 배 한 가운데서, 두 다리에 잔뜩 힘을 주며 중심을 잡고 서 있다가
배가 흔들릴 때마다,

 "으샤샤샤샤!"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좌우로 뛰어 다녔다.

 그 모습을 모자 하도 재미있어서, 울렁거리는 속 때문에 울고 싶다가도 곧 웃음을 터
뜨렸고, 그렇게 웃다보니 어느 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다들 배에서 내려 
뱃멀미가 가라앉을 즈음에야 "으샤샤샤샤!" 하던 남자아이만 속이 울렁거린다고 하소
연하였으니, 참 안 된 일이었다.

 도이 온천은 정말 조용한 곳이었다. 바다와 숲이 있고, 또 바다에 접한 야트막한 언
덕도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아이들은 일단 한숨을 돌리고 나서 선생님을 따라 바다로 나갔다. 학교에 있는 수영
장과는 달랐기 때문에 모두들 수영복을 입고서.

 그런데 바다 안의 온천이라니! 너무도 신기했다. 그것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온천
이고, 또 어디부터가 바다라고 하는 경계선이나 울타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가 온천이에요!"

 라고 선생님이 알려 준 곳을 기억해 두었다가 쭈그리고 앉으면, 마침 목 부분까지 온
천수가 닿아 정말로 목욕탕처럼 따뜻하고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온천 탕에서 
게걸음으로 5미터 정도 가면 점점 미지근해지는데, 거기서 좀 더 차가워져서 '여기부
터가 바다!'라는 걸 금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 추워
지면 얼른 따뜻한 온천으로 들어가 몸을 푹 담궜다. 그러면 왠지 집에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푸근해졌다.

 어쨌든 바다 부분에 가면 수영모자를 야무지게 쓰고 헤엄을 치던 아이들도, 보기엔 
바다와 다름없는 온천에 들어와 있을 때는 빙 둘러앉아 편안한 모습으로 얘기를 나누
고 있으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만약에 누군가가 옆에서 이 광경을 봤다면 이렇게 생
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결국 아이들도 온천에 들어가면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똑같이 
행동하는구나!'라고 말이다.

 이때 바다에서는 다른 사람들은 거의 없어서, 해안이며 온천을 모두 도모에 학원 아
이들이 전세낸 것 같았다. 그래서 모두들 마음껏 이 신기한 온천 해수욕을 즐길 수 있
었고, 덕분에 저녁때가 되어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 아이 할 것 없이, 너무 물
에 오래 들어가 있은 탓에 손가락 끝 피부가 쪼글쪼글해졌을 정도였다.

 밤에는 밤대로, 이불 속에 들어가자마자 번갈아 '귀신'이야기를 했다. 그러면 토토를
비롯한 1학년 아이들은 모두 무서워서 훌쩍거리고 울었다. 그런데 울면서도 꼭 이렇
게 물었다. 

 "그래서!?"


 도이 온천에서의 사흘간은 학교에서 야영을 하거나 담력 테스트를 했을 때와는 달리,
마치 실제 생활처럼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저녁 반찬거리를 사러 순서대로 채소가게나 생선가게로 가야 했
으며, 혹 모르는 어른들은 "어느 학교 학생들이니?"라든지 "어디서 왔니?"하고 물으면
정확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숲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뻔한 아이도 
있었고, 너무 멀리까지 헤엄을 쳐 간 탓에 돌아오지 못하여 남은 사람들을 걱정시킨 
아이도 있었다. 게다가 모래사장에 떨어져 있는 유리에 발을 베인 아이도 있었다. 그
때마다 아이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다할 수 있을 까 고민했다.

 한편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울창한 숲에는 매미 소리가 무성했고, 아이스캔디 장수
도 있었다. 그리고 혼자 해안에서 큰 나무배를 만들고 있는 아저씨도 만났다. 제법 배
모양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면 모두들 어제보다 얼마만큼 더 만들
어졌는지 보러 달려갔다. 토토는 아저씨한테서 얇고 길게 잘려 나온 대팻밥을 선물로 
받고서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어떠냐, 기념사진을 찍어야 되겠지?"

 마지막 날, 교장선생님이 말했다.

 그때까지 모두 함께 사진을 찍은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또 들떠서 웅
성거렸다. 그래서 

 "자, 찍어요!"

 하고 여 선생님이 말하면 누군가가 화장실에 간다고 이탈했고,

 "자, 이제 됐지?"

 하면 운동화를 바꿔 신었다면서 고쳐 신는 아이가 있기도 했고, 또 그 동안 줄곧 긴
장한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가 진짜로,

 "자, 찍어요!"

 하면 

 "아아, 힘들어, 더 이상 못 참겠다!"

 면서 드러눕는 아이도 있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하지만 바다를 배경으로 제각기 포즈를 취한 이 기념사진은 훗날 아이들의 귀중한 보
물이 되었다. 그 사진을 보면 배에 대한 추억이며 온천에 대한 추억, 또 귀신 얘기에 
대한 추억, 그리고 "으샤샤샤샤!"했던 그 선배에 대한 추억을 한꺼번에 떠올릴 수 있
기 때문이다….

 이렇듯 토토의 첫 여름방학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즐거운 추억을 남기고 지
나갔다.


 25. 리드미크
 
 여름방학도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여름방학 동안 여러 가지 모임이 있을 때마다 토토는 반 아이들하고는 말할 것도 없
고, 선배언니나 오빠들과도 친해졌다. 그리고 도모에 학원이 더욱 더 좋아졌다.

 도모에 학원은 보통 학교와 수업방식이 다른 것 외에도, 색다른 점이 참 많았다. 우
선 음악 시간이 아주 많았다. 음악 공부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리드
마크 rhythmique' 시간은 매일 있었다.


 리드미크라는 것은 달크뢰즈라는 사람이 고안해낸 특별한 리듬 교육인데, 1905년 경 
이 연구가 발표되자 전 유럽과 미국 등의 나라가 재빨리 주목하여 그 양성소나 연구소
가 각국에 속속 생겨났다. 그런데 어떻게 이 도모에 학원에 달크뢰즈의 리드미크가 들
어왔느냐 하면, 바로 이런 경위에서였다.

 고바야시 소사쿠 교장선생님은 도모에 학원을 세우기 전에, 외국에서는 어린이 교육
을 어떤 식으로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그리하여 여러 어린이 
학교를 견학하기도 하고, 많은 교육자들의 얘기를 직접 듣기도 했다.

 그때 파리에서 고바야시 선생님은 훌륭한 작곡가이며 교육자이기도 한 달크뢰즈라는 
사람과 만났는데, 이 달크뢰즈가 오랜 세월 '어떻게 하면 음악을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고 느낄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 생기가 없는 교육이 아닌, 움직임
이 있는 살아있는 음악을 느끼기 하긴 위해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감각을 일깨워
줄 수 있을까?'하고 궁리하다가, 마침내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 노는 점에 착안하여
창작한 리듬체조인 '리드미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고바야시 선생님은 파리
에 있는 이 달크뢰즈 학교에 1년 이상이나 체재하면서 리드미크를 몸소 익혔다.

 물론 리드미크가 모든 예술의 기초라는 생각에, 달크뢰즈에게 직접 사사 받았던 이가
고바야시 선생님 한 사람만은 분명 아니다. 무용, 연극, 모던댄스 등의 분야에서 현
재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들도 그 당시 앞다퉈 사사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리드미크를 어린이 교육에 도입해 보려고 시도한 것은 고바야시 선생님이 처음이었다.

 
 "리드미크란 어떤 것이죠?"

 언젠가 이런 질문에 고바야시 선생님은 대답했다.

 "리드미크는 우리 신체의. 이를테면 '기계 조직'을 더욱 정교하게 하기 위한 놀이입
니다. 즉, 리드미크는 마음에 '운전 기술'을 가르치는 놀이죠. 또 리드미크는 몸과 마
음에 리듬을 이해시켜 줍니다. 따라서 리드미크를 하게 되면 성격도 그에 따라 리드미
컬해집니다. 그리고 리드미컬한 성격이란 곧 아름답고 강하고 순수하게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거죠."


 좀 더 여러 가지 얘기가 있지만, 아무튼 토토네 반은 몸이 리듬을 이해할 수 있는 초
보적인 동작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

 우선 교장선생님이 강당의 작은 무대 위에 있는 피아노를 친다. 거기에 맞춰 아이들
은 그 자리에서 걷기 시작한다. 이때 어떻게 걷든 상관없었지만, 남들의 흐름과 반대
로 걸으면 부딪쳐서 아프기도 하고 기분도 안 좋으니까 자연히 같은 방향으로, 즉 원 
모양을 그리며 걷게 된다. 그렇다고 반드시 한 줄로 서서 걷는 것은 아니고 자유롭게 
흐르듯이 걷는 것이었다.

 그리고 음악을 듣고 그것이 두 박자라고 생각되면 두 박자에 맞추어, 지휘자처럼 양
팔을 크게 아래위로 흔들면서 걷는다. 이때 발은 쿵쿵거리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발
레처럼 발끝으로 걷는 것은 아니고, 그저 '몸을 편안하게 하고 엄지발가락을 끌 듯이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모습으로 걷는' 것이었다. 여하튼 이 경우에도 자연스러움이 제
일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각자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걸음걸이로 걸으면 되었다.

 하지만 리듬이 세 박자가 되면 양팔을 즉시 세 박자에 맞추어 크게 흔들면서, 걸음걸
이도 템포에 맞춰 빨라졌다 늦어졌다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양팔을 지휘하는 
것처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도 여섯 박자까지 있었는데, 네박자 정도면 그나마

 "내리고 돌리고 옆에서 위로."

 하는 정도지만, 다섯 박자가 되면 

 "내리고 돌리고 앞으로 밀고, 옆으로 당기고 그대로 위로."

 그런데 여섯 박자가 되면

 "내리고 돌리고 앞으로 밀고, 한번 더 가슴 앞으로 돌리고 옆으로 당기고 그대로 위
로."

 해야 했기 때문에 박자가 바뀌면서 차츰 더 어려웠다.

 그런데 더욱 어려운 것은 교장선생님이 피아노를 치면서 간혹, 

 "피아노의 박자가 바뀌어도 곧장 바꾸지는 마라!"

 하고 큰 소리로 말할 때였다.

 예를 들어 두 박자에 맞추어 걷고 있는데, 갑자기 피아노가 세 박자의 리듬으로 바뀐
다고 치자, 그러면 세 박자의 리듬을 들으면서 두 박자의 걸음걸이로 걸어야 하는 것
이다. 이것은 아주 힘든 동작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에게 집중력이나 확고한 의
자 같은 것을 기를 수 있다고 교장선생님은 생각한 것 같았다.

 이윽고 선생님이 외친다.

 "됐다!"

 그러면 아이들은 '와, 신난다!'며 즉시 세 박자로 다시 걷는데, 이때 갈팡질팡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순간적으로 좀 전의 두 박자를 잊고 머리의 명령을 몸으로, 즉 근
육의 실행으로 옮겨 다시 세 박자 리듬에 순응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리듬은 어느 새 다섯 박자로 바뀌기가 일쑤였
다. 이같이 아이들의 동작이 제각기 엉망진창이어서

 "선생님, 잠깐만요! 잠깐만!"

 하며 처음에는 끙끙거렸지만, 나중에 곧 익숙해지자 아주 신도 나고 혼자서도 여러 
가지 리듬과 동작을 생각할 수 있게 되어 상당히 재미있었다. 이를테면 어떤 부분은 
다른 아이들과의 흐름 속에서 혼자 해 보기도 하지만, 기분이 내킬 때는 다른 사람과 
나란히 하기도 하며 또 두 박자일 때만 한쪽 손을 붙잡은 채 하거나 아니면 눈을 감고
해보기도 했다. 다만 어떤 경우든지 말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엄마들도 간혹 학부형 모임 같은 때에 몰래 밖에서 구경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아이
들 제각기 그 아이 나름의 표정으로 팔다리를 쭉쭉 뻗으며 정말이지 기분 좋게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는 모습은, 더구나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모습은 참으로 흐뭇한 광경
이었다.

 리드미크는 이런 식으로 몸과 마음에 리드미크 이해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이것
이 정신과 육체와의 조화를 도와, 이윽고 상상력을 깨우치고 창조력을 발달시키게 되
었으면 하는 발상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니까 첫 날, 토토가 학교 문 앞에서 엄마에게  

 "도모에가 뭐야?"

 하고 물으려고도 했지만, 이 학교의 이름인 「도모에」는 흰색과 검은 색으로 이루어
진 문장의 일종인 두 개의 소용돌이 모양으로, 바로 아이들의 심신 양면의 발달과 조
화를 바라는 교장선생님의 진심 어린 발로였던 것이다.

 리드미크의 종류는 아직 더 많지만, 어쨌든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은 제각기 몸에 지
니고 있는 태어나는 소질을 주위의 어른들이 손상시키지 않고 어떻게 키워줄 수 있을
까'하는 문제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리드미크만 하더라도,

 '문자와 말에 너무 치중하는 현대의 교육이, 오히려 아이들이 마음으로 자연을 보고 
신의 속삭임을 듣고 또 영감을 느끼는 것과 같은 감성과 직관을 쇠퇴시키지는 않았을
까? 해묵은 연못에 개구리 뛰어드는 소리… 그 연못 속에 개구리가 뛰어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이 비단 시인 바쇼 만이 아니건만…. 게다가 물이 끓는 주전자를 본
사람,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을 본 사람이 동서고금을 두고 와트 한 사람, 뉴턴 한 사
람 뿐이 아니건만…. 어쩌면 세상에서 진실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눈이 있어도 아름
다운 걸 볼 줄 모르고, 귀가 있어도 음악을 듣지 않고, 또 마음이 있어도 참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동하지도 못하며 더구나 가슴속의 열정을 불사르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고 한탄한 교장선생님이 언젠가는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으리라 확신하
고 수업 내용에 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토토 역시도 마치 이사도라 던컨처럼, 맨발로 달리고 뛰어 다는 것 자체가 수
업이라는 사실이 아주 아주 즐거웠다.


 26. 평생의 소원
 
 토토는 난생 처음으로 잿날 구경을 하로 갔다. 

 재는 전에 다니던 학교 옆 센조쿠 연못의, 변재천 상이 있는 작은 섬에서 지내지고 
있었다. 아빠와 엄마를 따라 어둑어둑한 길을 걸어가다 갑자기 밝아졌다 했더니, 그 
곳이 바로 재를 지내는 곳이라 갖가지 전등이 켜져 있었다.

 한 눈에 벌써 들뜬 토토는 작은 야시장 하나 하나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기저기서
피! 하거나 퐁! 하거나 슉슉!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여러 가지 냄새도 퐁퐁 풍
겼고,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천지였다. 게다가 빨갛고 노랗고 분홍색의 릴리
안에 매달린 박하 파이프… 개나 고양이, 베타의 얼굴도 파이프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솜사탕, 거북사탕, 또 죽통 안에 바림 기법을 염색한 흰 황매화나무에 시지를
쑤셔 넣고, 막대기로 밀어 넣으면 "퐁!"하고 튀는 소리가 나는 황매화나무 총…. 심지어 
어떤 아저씨가 길에서 칼을 삼키거나 유리를 먹는 재주를 부리는가 하면, 사발 가장자
리에 대면 사발이 와왕! 소리를 내는 가루를 파는 아저씨도 있었다. 그리고 돈이 사라
져버리는 요술 쇠고리며 일광사진, 게다가 수중화(물에 넣으면 퍼져서 꽃 모양이 되는 
일조의 조화 - 역주)까지….

 그러나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걷고 있던 토토의 걸음을 정작, 

 "와아!"

 하면 멈추게 한 것은 바로 샛노란 병아리였다. 작고 동글동글한 병아리들이 조그만 
상자 안에 가득 담겨 삐약삐약 울고 있었던 것이다.

 "이 병아리, 갖고 싶어!"

 토토는 아빠와 엄마의 손을 잡아당겼다.

 "응, 이거 사 줘!"

 병아리들은 토토 쪽을 향해 조그만 꼬리를 흔들며 주둥이를 위로 쳐들고 더욱 큰 소
리로 울었다.

 "아, 귀엽다…."

 토토는 쪼그리고 앉았다. 이렇게 작고 귀여운 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
었다.

 "응?"

 토토는 아빠와 엄마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빠와 엄마는 토토의 손을 잡아
끌며 그냥 지나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으응 뭐 사준다고 그랬잖아. 나, 이거 갖고싶단 말이야!"

 엄마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 병아리는 금방 죽으니까 불쌍하잖아, 사지 마."

 "왜?"

 토토는 금방 우는소리를 했다. 아빠는 병아리 장수에게 들리지 않도록 약간 떨어진 
곳으로 가서 설명했다.

 "저건 말이지, 지금은 귀엽지만 몸이 약해서 금방 죽어 버린다고, 그럼 너 울 거잖아! 
그러니까 엄마 아빠가 안 된다는 거지."

 하지만 토토는 이미 병아리를 본 이상, 아빠의 설명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죽지 않게 할게. 잘 돌볼 거니까, 사 줘."

 그래도 아빠와 엄마는 완강하게 병아리 상자 앞에 쪼그리고 있는 토토를 잡아끌었다.

 토토는 끌려가면서 병아리들을 쳐다봤다. 병아리들은 모두 토토를 따라가고 싶다는 
듯이 더욱 더 울었다.

 토토는 병아리가 아니면 이제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빠와 
엄마에게 절까지 하며 말했다.

 "부탁이에요! 병아리를 사 주세요."

 하지만 엄마와 아빠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네가 울게 될 게 뻔하대두!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게 좋겠구나."

 토토는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 쪽으로 계속 울면서 걸어갔다. 어두컴컴한 
곳까지 오자 토토는 흐느껴 울며 말했다.

 "부탁이에요. 내 평생의 원이에요! 죽을 때까지 뭐 사달라고 하지 않을게요, 저 병아
리를 사 주세요!"

 마침내 아빠도 엄마도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잠시 후, 울다가 웃으면 똥구멍에 털 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 토토
의 손에는, 어느 새 두 마리 병아리가 담긴 조그만 상자가 들려 있었다.

 
 다음날, 엄마는 목수에게 부탁해서 창살이 달린 특제 상자를 만들고 그 안에다 전구
를 달아 공기를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토토는 하루 종일 병아리를 보며 놀았다. 노란 병아리는 정말로 귀여웠다. 그런데 끝
내 나흘 째 되던 날 한 마리가, 이윽고 닷새 째 되던 날은 나머지 한 마리가 더 이상 
움직일 지 몰랐다. 아무리 손으로 어루만지고 불러도 더 이상 삐약삐약 하고 울지 않
았다. 그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눈을 뜨지 않았다…. 아빠와 엄마의 말이 결국 옳았던 
것이다.

 토토는 울면서 혼자 정원에 구덩이를 파고 병아리를 묻었다. 그리고 작은 꽃 한 송이
를 무덤에 바쳤다…. 병아리가 없어진 상자는 텅 비어 더 크게만 보였다. 상자 안쪽에
작고 노란 깃털이 떨어져 있는 것을 문득 발견한 토토는, 잿날에 자기를 보며 울어대
던 병아리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라 이를 악물고 또 울었다….

 
 평생의 소원은 이렇게 금새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토토가 인생에서 최초로 맛본 '이
별'이란 것이었다.    


 27. 가장 허름한 옷을 입히세요

 교장선생님은 도모에 학원의 학부형들에게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다.

 "가장 허름한 옷을 입혀 학교에 보내 주십시오."

 왜냐하면 '더럽히면 엄마한테 혼난다'든지, '찢어지니까 아이들하고 놀 수 없다'는 
금지 사항이, 그야말로 아이들에게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흙투성이가 되고 찢어져도 상관없는, 가장 허름한 옷을 입혀 
보내 달라는 부탁이었다.

 도모에 학원 근처에 있는 학교에서는 이미 교복을 입는 애들도 있었고, 또 세일러복
이나 학생복에 반바지 차림에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도모에의 아이들은 정
말로 평상복을 입고 학교에 왔다. 그리고 선생님이 허락한 이상, 옷에 대해서는 조금
도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뛰어 놀았다. 그러나 요즘처럼 진 같은 튼튼한 옷감은 아직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어느 아이 할 것 없이 바지에는 덧대어 꿰맨 자국이 있었고
여자아이들의 치마도 될 수 있는 한 튼튼한 천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토토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다른 집 울타리나 공 터 울타리 밑을 틈만 나면 기어 
들어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옷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건 정말 잘된 일이었다.
그 당시의 울타리는 아이들이 흔히 '철조망'이라고 불렀는데, 가시가 달린 철망이 나
무 울타리 위에 빙 둘러쳐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때로는 지면에 닿을 정도로
아래 부분까지 단단히 감겨져 있는 것도 많았다. 이런 데를 어떻게 기어 들어가는지 
궁금하겠지만, 사실은 울타리 밑에 머리를 들이밀고 철조망을 밀어 올려 구덩이를 파
고 기어 들어가는 여느 개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이럴 때는 말괄량이 토토도 
어느 정도는 조심하지만, 제 아무리 조심을 해도 뾰족뾰족한 철선에 옷이 걸려 찢어지
기 일쑤였다.

 언젠가 꽤 낡고 질도 좋지 않은 모슬린 원피스를 입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이때는 
치마가 걸려 찢어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등에서부터 엉덩이까지 일곱 군데 정도가 너
덜너덜하게 찢어져, 아무리 봐도 등에 먼지떨이를 달고 잇는 것 같은 꼴이 되어버렸다. 
비록 낡기는 했어도 엄마가 마음에 들어하는 옷이란 걸 아는 토토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요컨대 '철조망을 기어 들어가다 찢어졌다'고 말하면 엄마한테 미안하니까, 
뭐라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도저히 찢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단 말이야!"

 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토토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거짓말을 엄마에게 말했다.

 "좀 전에 말야, 길을 걷고 있는데 어떤 애들이 내 등에 칼을 던져서 이렇게 찢어졌어."    

 그리고선 속으로 생각했다.

 (엄마가 이것저것 자세히 물어보면 곤란한데….)

 그런데 다행히도 엄마는,

 "어머, 그래? 큰일 날 뻔했구나."

 라고 할뿐이었다.

 (아아, 다행이다!)

 토토는 마침내 안심하며 생각했다.

 (이것으로 엄마가 좋아하는 옷이 찢어진 것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는 걸 엄마도 
이해를 하게 됐어!)

 물론 엄마가 등에 맞은 칼 때문에 옷이 찢어졌다는 얘기를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뒤
에서 등에다 칼을 던졌는데 몸에는 상처 하나 나지 않고 옷만 쭉쭉 찢어질 리가 없었
고, 그보다도 토토가 전혀 무서워했던 것 같지도 않은 걸 보면 단번에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변명을 하는 토토의 모습이 평소와는 달라서, 옷 때문에 걱정을 하는 
모양이라 여기고 그저 (착한 애)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다만 엄마는 전부터 궁금하게 
여겼던 것을 이 기회에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칼이나 뭐 그런 것 때문에 옷이 찢어진다는 것은 알겠는데, 왜 매일같이 팬티까지 
너덜너덜해지는 거니?"

 면 레이스 같은 것이 달려있는 흰 고무줄 팬티의 엉덩이 부분이 매일 찢어져 있는 것
이 엄마로서는 좀처럼 이해가 안되었던 것이다.

 (팬티가 흙투성이라든가 닳은 정도라면 미끄럼을 탔다던가 엉덩방아를 찧어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겠지만, 도대체 쭉쭉 찢어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러자 토토는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그게 말야, 처음 기어 들어갈 때는 꼭 치마가 걸리는데 나올 때는 엉덩이부터 나오
기 때문에 울타리 끝에서부터 계속 '실례합니다'하고 '그럼, 안녕히 계세요'를 하기 
때문에 팬티가 금방 찢어지는 거야!"

 엄마는 도무지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고 우습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게 그렇게 재미있니?"

 엄마의 질문에 토토는 놀란 표정으로 엄마를 보며 말했다.

 "엄마도 한번 해봐, 틀림없이 재미있을 테니까! 그런데 말야, 엄마도 아마 팬티 찢어
질 걸!"

 토토가 너무도 스릴있어하고 재미있어하는 놀이는 이런 것이었다.

 일단 공터에서 철조망이 죽 쳐져있는 긴 울타리를 발견했다고 치자. 그러면 철조망 
끝을 들어올려 구덩이를 파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실례합니다'이고, 다음으로 방금
기어 들어온 바로 옆 철조망을 이번에는 안에서 들어올려 또 구덩이를 파고 '그럼, 
안녕히 계세요'하고 엉덩이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때 치마가 걷혀 올라가면서 팬티가 
철조망에 걸리는 것이다. 엄마도 그때서야 사정을 알아차렸다.

 이런 식으로 토토는 차례차례 구덩이를 파고, 치마나 팬티가 걸리는데도 쉬지 않고 
"실례합니다!"와, "그럼, 안녕히 계세요!"를 반복한다. 결국 위에서 보면 울타리의 끝
에서부터 시작해서 지그재그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식이니…. 과연 팬티가 찢어질 
만도 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어른이라면 도무지 피곤하기만 하지, 뭐가 재미있나 싶은 그런 행
동이 아이들한테는 그토록 재미있는 놀이라니…. 정말 부럽다!)

 엄마는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손톱과 귓속까지 흙투성이인 토토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교장선생님의 '더러워져도 상관없는 허름한 옷'에 대한 제안은, 정말로 아이
들의 세계를 잘 이해하고 있는 어른의 생각이라고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28. 새로운 친구
 
 오늘 아침에 아이들이 교정에서 뛰어 놀고 있을 때였다.

 교장선생님이 모두에게 다가와 말했다.

 "새 친구가 왔다! 다카하시라고 한단다. 1학년 전철에 같이 탈 친구니까 다들 사이좋
게 잘 지내거라."

 토토와 아이들은 다카하시를 쳐다보았다. 다카하시는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한 다음, 

 "안녕."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토토와 아이들도 아직 1학년이라 작았지만, 다카하시는 남자아이인데도 키가 아주 작
았고 팔과 다리도 짧았다. 모자를 쥐고있는 손도 작았다. 하지만 어깨는 딱 벌어져 있
었다.

 다카하시는 왠지 불안한 표정이었다. 토토는 미요와 삿코에게,

 "우리, 저 애하고 얘기해 보자."

 하며 다카하시에게 다가갔다. 

 토토와 친구들이 다가가자 다카하시는 상냥하게 웃었다. 그래서 토토와 친구들도 따
라 웃었다. 다카하시의 눈은 동글동글했고 뭔가를 얘기하고 싶어하는 눈이었다.

 "너, 전철 교실 한번 볼래?"

 토토가 마치 선배처럼 말했다. 다카하시는 모자를 머리에 얹고는, 

 "응."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토토는 빨리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쏜살같은 기세로 전철 
안으로 달려들어가 문 입구에서 

 "빨리 와!"

 하고 불렀다. 다카하시는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저만치 뒤쳐져 있었다.

 "미안해, 곧 갈게…."

 토토는 그제서야 소아마비인 야스아키처럼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걷는 것도 아닌 다카
하시가, 좀처럼 전철에 도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토토는 더 이상 외치
지 않고 다카하시를 쳐다보았다.

 다카하시는 있는 힘껏 토토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토토는 "빨리!"라고 말하지 않아
도 다카하시가 서두르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다카하시의 다리는 아주 짧고 
안짱다리 모양으로  휘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과 어른들은 다카하시의 키
가 이대로 멈춰버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카하시는 토토가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고는, 양손을 앞뒤로 흔들면서 마구
서둘렀다. 그리하여 문 앞에 도착하자,

 "너 정말 빠르구나!"

 하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난, 오사카에서 왔어."

 "오사카!?"

 순간 토토는 아주 큰 소리로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토토에게 있어 오사카는 환상
의 도시, 아직 본 적도 없는 도시였던 것이다.

 
 토토한테는 대학에 다니는 외삼촌이 있는데, 가끔 집에 놀러오면 늘 토토의 귀를 두 
손으로 잡고 그대로 높이 들어올리며 

 "자, 오사카 구경시켜 줄게. 잘 보이니?"

 하고 묻곤 했다. 물론 이것은 어린아이와 놀아주는 어른들이 흔히 하는 장난에 불과
한데도, 토토는 정말로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얼굴 피부가 전부 위쪽으로 늘어나고,
눈도 치켜 올라가고, 또 귀도 약간 아팠지만 필사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먼 곳을 보았
다. 하지만 오사카가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보일 것이란 기
대에 외삼촌만 오면, 

 "오사카 구경시켜 줘, 응?"

 하고 졸랐다. 그러니 토토에게 오사카란 꿈에 그리던 동경의 도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데서 온 다카하시!


 "오사카 얘기 한번 해봐."

 토토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다카하시는 기쁜 듯이 웃었다. 

 "흐음, 오사카 얘기라…."

 또박또박하고 어른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때 수업을 시작하는 벨이 울렸다.

 "아깝다!"

 토토는 몹시 분한 듯이 말했다.

 다카하시는 책가방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몸을 흔들면서 씩씩하게 맨 앞
자리에 앉았다. 토토는 재빨리 그 옆에 앉았다. 이런 때야말로 이 학교의 자유석 제도
가 고맙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토토는 

 (그와 멀리 떨어져 앉는다면 아까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이리하여 토토는 다카하시와도 친구가 되었다.


 29. 뛰어들면 안 돼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집 근처에서 토토는 아주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도로 가장자리 쪽에 높다랗게 쌓여 있는 모래더미였다.

 (와아! 바다도 아닌데 모래가 있다니, 이렇게 꿈같은 얘기가 있을까!)

 너무도 신이 난 토토는 한번 폴짝! 높이 뛰어올라 탄력을 붙인 다음, 전속력으로 달
려가 그 모래더미 꼭대기로 휙! 뛰어 올랐다. 그런데 모래더미라고 생각한 것은 순전
히 토토의 착각이었다. 그 속은 잘 이겨진 흙색 벽토였던 것이다.

 철퍼덕! 하는 소리와 함께 토토는 가방에다 신주머니까지 든 채, 그 끈적끈적한 반죽
속에 동상처럼 가슴까지 빠져버렸다. 그런데 나오고는 싶었지만 발버둥치면 발 밑이 
미끄러워 신발이 벗겨지려 하는 데다, 까딱 잘못하면 머리까지 반죽 속에 묻혀버릴 위
험도 있었다. 그래서 토토는 왼손에 든 신발주머니를 반죽 속에 넣은 채 계속 서 있었
다.

 "저어…."

 때로 지나가는, 누군지 모르는 아줌마에게 작은 소리로 구원을 요청했지만, 모두들 
놀고 있는 걸로 생각했는지 그냥 웃으면서 지나치기만 할뿐이었다.

 마침내 저녁이 되어, 사방이 어두컴컴해졌는데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토토를 찾으
러 나온 엄마는 깜짝 놀랐다. 토토의 얼굴이 모래더미 위에 얹혀 있었기 때문이다. 엄
마는 침착하게 막대기를 구해 와, 그 한쪽을 토토에게 건네준 다음 잡아당겨서 밖으로
끄집어 내어 주었다. 손으로 잡아 당겼다간 자칫 엄마의 발까지 반죽 속에 빠져버릴 
것 같아서였다.

 거의 온 몸이 '흙색 벽'으로 변한 토토에게 엄마는 말했다.

 "요전에도 말했지. 무슨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더라도 바로 뛰어들지 말라고 말이야. 
가까이 가서 잘 살펴본 다음에 뛰어들어야지!"

 요전이라는 것은 얼마 전 학교 점심시간 때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토토가 강당
뒤 좁은 길을 어슬렁거리다 보니, 길 한 가운데에 신문지가 놓여 있는 것이었다. 순간 
(재밌겠다!)고 생각한 토토는,

 "와아!"

 하며 늘 그러듯이 조금 뒤로 물러나서 깡충! 뛰어올라 탄력을 붙인 다음, 신문지의 
한 가운데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 뛰어올랐다.

 그런데 그것은 요전에 지갑을 빠트렸던 그 화장실의 분뇨 퍼내는 구멍이었다. 사환 
아저씨가 일을 하던 도중에 자리를 비우면서 냄새가 나면 안되니까 콘크리트 뚜껑을 
들어낸 구멍 위에 신문지를 덮어두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토토는 그래도 풍덩! 하고
정화조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결국 여러 가지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어쨌든 운 좋게 
토토는 다시 깨끗한 아이로 돌아왔었다. 엄마는 그때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다시는 안 뛰어들게…."

 토토는 벽처럼 조용히 말했다. 엄마는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뒤이어 토토가 하는 말
을 듣고, (역시 안심하기는 일러)하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토토가 그 뒤에 이렇게 말
했기 때문이다.

 "신문지하고 모래더미에는 이제 안 뛰어들게…."

 즉, 다른 것에는 또 뛰어들 것이라고 엄마에게 분명히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므
로….

 해지는 시간도 점점 빨라져가고 있었다.


 30. 그리고 말이지

 안 그래도 모두들 즐거워하는 도모에 학원의 점심시간에, 요즘 들어 재미있는 일이 
한 가지 더 늘었다.

 도모에의 점심시간은 지금까지는 교장선생님이 전교생 50명의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는 것' 반찬을 점검한 다음, 어느 한쪽이 부족한 아이에겐 사모님이 두 손에 하나씩
든 바다와 산과 들 냄비에서 반찬을 나누어주고, 그런 다음에 '꼭꼭 씹어요 모든 음
식을' 노래를 다함께 부른 뒤에 

 "잘 먹겠습니다!"

 하고 도시락을 먹었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잘 먹겠습니다' 다음에 '누군가의 얘기'
라는 순서가 새로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얼마 전,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제안했었다.

 "너희들이 좀 더 얘기를 잘 하는 어린이들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어떠냐? 앞으로 점
심시간에 모두가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 매일 누군가 한 사람씩 원 한가운데에 들어
가서 얘기를 하는 건?"

 순간 아이들은 (내가 얘기하는 건 좀 그렇지만…. 듣는 건 재미있겠다!)든지, (와아!
모두에게 내 얘기를 할 수 있다니, 너무 신난다!)는 등 각양각색의 생각이 들었다. 

 토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어떤 얘기를 해야 될 지 아직 모르겠지만 한번 해 보는 거야!)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교장선생님의 의견에 찬성했기 때문에 다음 날부터 곧바로
그 '누군가의 얘기'가 시작되었던 것인데, 실은 평소부터도 교장선생님은 외국에서 생활
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밥을 먹을 때는 조용히 먹거라"는 주의를 대개 집에서 받던 
아이들에게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식사라는 것은 될 수 있는 한 즐겁게, 그러니까 급하게 먹지 말고 여유롭게 하는 게
좋단다. 그러니 점심시간에도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면서 먹는 게 좋겠지?"

 그리고 또 한가지! 아이들이 앞으로 남들 앞에서 자기 생각을 정확하고 자유롭게, 또
부끄러워하지 않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슬
슬 시작해 보자)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래서 교장선생님은 모두가 

 "찬성!!"

 이라고 대답하자,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 토토도 열심히 들었다.

 "잘 들 듣거라, 굳이 얘기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단다. 얘기 내용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든, 또는 무엇이든 좋으니까 말야. 어쨌든 시작해 보자꾸나."

 자연스럽게 순서도 정해졌다. 또 얘기를 할 순서가 된 사람은 '꼭꼭 씹어요' 노래가 
끝나면 먼저 도시락을 먹어도 된다는 방침도 정해졌다.

 하지만 쉬는 시간에 고작 세 명 정도의 작은 집단 내에서 얘기하는 것과는 달리, 전
교생 50명 앞에서 얘기한다는 것은 용기도 필요하고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그저 "킥킥킥" 웃기만 하는 아이가 있었는가 하면, 또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생각해 왔는데 막상 앞에 나가는 순간 잊어버리고는, 얘기의 제목인 듯한
 
 "옆으로 뛰는 개구리… 개구리… 개구리…."

 라는 말만을 몇 번이고 되풀이한 끝에 결국 

 "… 비가 오면, 끝."

 이라고 말한 다음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가는 아이도 있었다.

 토토는 아직 자기 순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순서가 되면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
공주님과 왕자님 얘기를 해야지!)하고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공주님과 왕자님」
은 토토가 하도 많이 해댄 얘기라서 쉬는 시간에 이 얘기를 해줄 때마다 모두가 '또 
그거야, 이젠 질렸어!'라고 할 정도였다. 그래도 토토는 역시 그 얘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매일 돌아가면 앞에 나가 얘기를 하는 습관이 조금씩 붙은 어느 날, 순
서가 됐는데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한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할 얘기가 하나도 없어!"

 라며 계속 고집을 피웠다.

 토토는 '할 얘기가 없다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라웠다. 하지만 그 아이
는 역시 할 얘기가 없었다. 교장선생님은 그 아이의 텅 빈 도시락이 놓인 책상 앞으로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할 얘기가 없단 말이지?"

 "네, 하나도 없어요!"

 그 아이는 대답했다. 절대로 삐딱하거나 반항을 하고 잇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없는 
것 같았다.

 "하하하하"

 교장선생님은 이가 빠져 있다는 사실도 신경 쓰지 않고 웃은 다음 말했다. 

 "그럼, 만들면 되잖아!"

 "만든다구요!?"

 그 아이는 놀란 듯이 말했다.

 교장선생님은 그 아이를 모두가 앉아있는 원의 한 가운데에 세운 다음, 당신은 그 아
이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말했다.

 "자, 네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올 때까지 있었던 일을 기억해 보렴. 제일 
먼저 뭘 했니?"

 그 남자아이는 머리카락을 북북 긁으며 

 "그러니까…."

 하고 일단 말했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이 말했다.

 "그것 봐, 넌 '그러니까'하고 지금 말했잖아. 할 말이 있었잖아! 자, '그러니까' 다
음에는 어떻게 됐지?"

 그러자 그 아이는 또 머리를 북북 긁으며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났어요!" 

 하고 말했다. 토토를 비롯한 모든 아이들은 좀 우스웠지만 귀 기울여 들었다. 그러자
그 남자아이는

 "그래서 말이죠…."

 하고 말한 후 또 머리를 긁적거렸다.

 선생님은 깍지 낀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 웃는 얼굴로 가만히 그 아이의 행동
을 쳐다보고 있다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이렇게 해서 네가 아침에 일어났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
었으니까 말야. 재미있는 얘기나 웃기는 얘기를 해야만 똑똑한 건 아니란다. '할 얘기
가 없다!'고 했던 네가 얘깃거리를 찾아냈다는 것이 중요한 거야." 

 그러자 갑자기 그 아이는 아주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그리고 나서 말이죠!"

 모두들 일제히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 아이는 크게 한숨을 쉰 다음 말했다.

 "그리고 나서 말이죠…. 엄마가 있죠, 이를 닦으라고 해서 이를 닦았어요."

 갑자기 교장선생님은 박수를 쳤다. 아이들도 따라서 박수를 쳤다.

 그러자 그 아이는 조금 전보다 더욱 큰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서는 요!"

 아이들은 박수를 그치고 더욱 귀를 기울이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아이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나서는, 학교에 왔습니다!"

 이때 몸을 내밀고 있던 고학년 중에는, 마침내 앞으로 고꾸라져서 도시락에 머리를 
부딪히는 아이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주 즐거워했다.

 (저 아이에게도 할 얘기가 있었어!)

 교장선생님은 다시 크게 박수를 쳤다. 토토와 아이들도 아주 힘차게 박수를 쳤다. 그
러자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그리고 나서 말이죠'만 연발하던 그 아이도 덩달아 박수
를 쳤다. 강당 안에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그 남자아이는 이 날의 박수 소리를… 아마 어른이 되어서도 결코 잊지 못했을 것이
다.


 31. 장난을 쳤을 뿐이야

 오늘도 토토에게 큰 사건이 일어났다.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기 전까지 방에서 잠깐 놀던 때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장
난에서 시작되었는데, 토토와 로키가 '늑대놀이!'를 할 때 그만 사건이 터져 버린 것
이다.

 오늘도 둘은 평소처럼 '늑대놀이'를 하기 전에, 서로 방의 반대편에서 데굴데굴 굴러
오다 부딪치면, 잠시 엉겨붙어 씨름을 한 다음에 다시 떨어지곤 하는 동작을 몇 번이
고 되풀이하였다. 그러다가 '좀 더 어려운 것을 해 보자!' 싶어서 ― 물론 그래봐야 
토토가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지만 ― 데굴데굴 굴러와서 부딪혔을 때,

 "늑대처럼 보이는 쪽이 이기는 쪽!"

 을 하기로 정했다. 

 셰퍼드인 로키가 늑대 흉내를 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입을 크게 벌리면 안쪽까지 빽빽한 이빨도 드러나거니와, 눈도 얼마든지 무섭게 부라
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토한테는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양손을 
귀처럼 머리 부분에 대고, 입을 있는 대로 크게 벌리고, 눈도 있는 힘껏 크게 뜨고,

 "우 ― 우!"

 하고 으르렁거리면서 로키에게 달려들어 물어뜯는 시늉을 했다.

 로키도 처음에는 흉내만 곧잘 냈다. 그런데 아직 새끼인 로키가 그만 장난과 진짜를 
구별하지 못하고, 갑자기 달려들어 토토를 물어뜯고 만 것이었다. 암만 새끼라도 몸은
토토의 두 배에 가까웠고 이빨도 날카로웠기 때문에 "앗!"하고 토토가 정신을 때는 이
미 오른쪽 귀가 물어 뜯겨 덜렁 덜렁거리고 있었다. 곧 피가 엄청나게 줄줄 흘렀다.

 "아야!"

 비명 소리에 놀란 엄마가 부엌에서 뛰어왔을 때, 토토는 오른쪽 귀를 양손으로 누른 
채 로키와 함께 방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옷은 물론 주위가 온통 피로 가득한
채…. 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있던 아빠도 달려왔다. 로키는 그때서야 자기가 큰 일을
저질렀다는 걸 알아챘는지 꼬리를 늘어뜨리고 토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때 토토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아빠와 엄마가 너무 화가 나서 로키를 내다버린다거나, 다른 집에 줘 버리
면 어떡하지….)   

 그것은 토토한테는 무엇보다도 슬프고 두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토토는 로키에게 바
짝 붙어 웅크린 채로, 오른쪽 귀를 누르면서 큰 소리로 반복해서 말했다.

 "로키를 야단치지 마! 로키를 야단치지 마!"

 아빠와 엄마는 로키보다는 우선 귀가 어떻게 되었나 보려고 토토의 손을 귀에서 떼내
려고 했다. 그러나 토토는 여전히 손을 떼지 않은 채 외치듯이 말했다.

 "아프지 않아! 로키한테 화내지마! 화내지마!"

 토토는 이때 정말로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로키 걱정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피는 자꾸 흘러 나왔다. 아빠와 엄마는 마침내
로키가 문 것 같다는 걸 눈치챘지만, 어쨌든 화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제서야 
토토는 손을 뗐다.

 덜렁덜렁 대는 귀를 보고 엄마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나서 엄마가 길 안내를 하고, 
아빠는 토토를 안은 채 의사선생님께 달려갔다. 다행히 신속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
던 덕분에, 귀는 원래 모습대로 붙을 수 있었다. 아빠와 엄마는 겨우 안심을 했다. 하
지만 토토는 아빠와 엄마가 화내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과연 지켜줄 지 걱정스러울 
따름이었다. 

 토토는 머리에서 턱까지 붕대를 둘둘 감은 채, 마치 흰토끼 같은 모습으로 집에 돌
아왔다. 그런데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아빠는 '로키에게 한마디하지 않고는 
역시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가 '쉿, 약속했잖아요!'하고 자꾸 눈짓
을 하는 바람에 억지로 억지로 참았다.

 토토는 로키에게 '이젠 괜찮다, 아무도 화 안 났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빨리 알리고 
싶어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로키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토토는 그제
서야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도 애써 참으며 울지 않았는데… 울면 그만
큼 로키가 더 야단을 맞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토토는 울면서 로키를 마구 불러댔다.

 "로키! 로키! 어디 갔니?"

 몇 번인가 불렀을 때였다. 눈물범벅이 된 토토의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번지기 시작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에 익은 갈색 등이 소파 뒤에서 조금씩 조금씩 보였으니까….

 로키는 토토에게 엉금엉금 기어 다가오더니, 붕대 틈새로 보이는 토토의 다치지 않은
쪽 귀를 살며시 핥았다. 토토도 로키의 목을 얼른 끌어안고 귓속 냄새를 맡았다. 아
빠도 엄마도 구린 냄새가 난다고 싫어하지만, 자기는 늘 맡아도 좋기만 한 그 냄새를
…. 

 어느 덧 로키도 토토도 지쳐서 잠이 들었다.

 여름의 마지막 달이 전보다 훨씬 더 사이가 좋아진, 온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은 여
자아이와 이제 다시는 '늑대놀이'를 하지 않을 개를, 마치 저 위쪽에서 내려다보며 웃
고 있는 것만 같았다.
 

 32. 운동회
 
 도모에 학원의 운동회 날은 늘 11월 3일로 정해져 있었다. 

 교장선생님이 여러 곳에 물어본 결과, 가을 중에 비가 내릴 확률이 가장 적은 날이 1
1월 3일이라는 것을 알고 그렇게 정한 것이었다. 그래서 매해 이 날 어김없이 운동회
가 열린다.

 아이들은 며칠을 두고 교정에 장식을 다는 등 갖가지 준비를 하면서 비가 오지 않기
를 기대하는데, 교장선생님의 날씨정보 수집이 성공을 했는지 아니면 아이들의 마음이
하늘의 구름과 해님에게 통했는지, 정말 신기할 정도로 이 날만은 비가 내린 적이 없
었다.

 
 도모에 학원의 운동회 역시도 여느 학교와 달리 조금은 특별난 데가 있었다. 가령 줄
다리기와 2인3각 달리기 정도만 다른 학교와 엇비슷했고, 나머지는 전부 교장선생님이
고안해낸 경기였다. 그것도 특별한 기구를 사용하거나 야단스러운 것은 하나도 없고,
전부 학교에 있는 친숙한 물건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것들 뿐이었다.

 예를 들면 '고이노보리(단오절에 깃대에 달아 올리는, 천 또는 종이로 만든 잉어 - 
역주)경주'라는 게 있는데, 이것은 출발점에서 '준비 땅!'하면 조금 달려나가 교정 한
가운데 놓여있는, 천으로 만든 커다란 고이노보리의 입으로 들어가서 꼬리로 나와 다
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경주였다. 잉어는 파란색 두 마리와 빨간색 한 마리로, 모두 
세 마리였기 때문에 세 사람이 동시에 준비 땅! 하면 출발했다.

 이 경기는 쉬운 것 같아 보여도 의외로 어려웠다. 왜냐하면 일단 안에 들어가면 캄캄
하고 몸통이 길기 때문에 한참동안 부스럭대기가 일쑤이며, 그러다 보면 어디로 들어
왔는지 헷갈려 토토처럼 몇 번이나 잉어 입으로 고개를 내밀고 밖을 내다봤다가, 다시
얼른 안으로 기어 들어가곤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경기는 보는 아이들한
테도 무척 재미가 있었는데, 친구들이 안에서 부스럭대며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마치 
잉어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엄마 찾기 경주'라는 게 있는데, 이 역시도 고이노보리 경주 마냥 '준비,
땅!'하면 앞으로 조금 달려나간다는 점에선 시작이 비슷했다. 하지만 이 경주는 그런
다음에 옆으로 길게 눕혀져 있는 나무 사다리 구멍 사이를 통과해 그 건너편에 있는 
바구니 안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어, 예를 들어 거기에 '삿코 어머니'라고 적혀 있으면
학부형 석으로 뛰어가서 삿코 엄마를 얼른 찾아 함께 손을 잡고 골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옆으로 뉘여 있는 사다리의 네모난 구멍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인지 
고양이처럼 잘 하지 않으면 엉덩이 같은 데가 곧잘 걸렸다. 게다가 '삿코 어머니'같으
면 쉬 알 수 있어도, '어느 어느 선생님의 누님이나 어머니, 또는 아드님'이 되면 사
정을 달라진다. 이제껏 본 적이 없으므로…. 결국 이때는 관람객들 틈으로 가서 큰 소
리로 불러내어 찾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약간의 용기도 필요했다. 그러니 운 좋게
도 자기 엄마가 걸린 아이는 날아갈 듯이 기뻐하며,

 "엄마, 엄마! 빨리!"

 하고 깡충깡충 뛰면서 외쳐댔다.

 그리고 이 경기는 아이들도 그렇지만, 학부형이나 관람객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
어야 했다. 아이들이 차례차례 달려와서 누군가의 엄마이름을 목청 높여 불러대기 때
문에 이름이 불린 엄마는 멍하니 있으면 안되고 즉시 앉아있던 벤치나 자리에서 일어
나, 앉아있는 다른 아빠나 엄마들 사이를 "죄송합니다!"라고 하며, 그것도 얼른 빠져 
나와 누군가의 아이와 손을 잡고 함께 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이
들이 달려와 어른들 앞에 멈추면, 어른들도 숨을 죽이고 '누구의 이름을 부를까?'하고
일제히 그 아이를 주목했다. 덕분에 어른들도 잡담을 하거나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
을 새가 없어 아이들과 함께 운동회에 참가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편, 줄다리기는 교장 선생님을 비롯하여 선생님들 모두가 두개 조로 나뉘어 아이들
사이에 섞여서,

 "영치기, 영차!"

 하고 잡아당겼다. 그리고 줄 한가운데 손수건이 묶여있는 곳에 늘 주목을 하며,

 "어느 쪽 조의 승리!"

 하고 말하는 것은 야스아키나 몸이 부자유스러워 줄다리기를 할 수 없는 아이들의 역
할이었다. 

 마지막 순서인 전교생 릴레이 또한 도모에 학원다운 것이었다. 릴레이라고는 하지만 
운동장이 넓은 것도 아니고, 따라서 오래 달릴 만한 곳이 별로 없기 때문에 승부가 결
정 나는 곳은 대부분 학교 중앙의, 즉 문을 향해 부채꼴로 펼쳐져 있는 강당으로 오르
는 콘크리트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내려오는 코스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계단 한 칸 
한 칸의 높이가 보통 계단보다 훨씬 낮고, 경사 또한 상당히 낮다는 데 있었다. 

 이 계단 오르내리기 릴레이는 다른 학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언뜻 보기엔
쉬워 보였지만, 몇 계단씩 한꺼번에 올라가면 안 되고 신중하게 한 계단 한 계단씩 
올라갔다 다시 한 계단 한 계단씩 내려와야 했기 때문에, 다리가 긴 아이나 키가 큰 
아이에게는 오히려 불리했던 것이다. 

 하지만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그저 매일 점심시
간이면 뛰어 오르내리던 계단이, 운동회용으로 바뀐 그 자체만으로도 신선하고 재미있
었어 모두들 꺄아꺄아 소리를 질러대며 오르내렸다…. 그 광경은 멀리서 보면 마치 아
름다운 하나의 만화경처럼 보였다. 계단이라고 해 봐야 꼭대기까지 모두 합해 겨우 여
덟 계단에 지나지 않았지만.

   
 토토를 비롯한 1학년 아이들이 처음으로 맞는 운동회도 교장선생님의 바램대로 맑게 
개인 날에 열렸다. 

 모두가 전날부터 색종이로 만든 사슬이며 금색별을 운동장 가득 장식했기 때문에 그
야말로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그 뿐이겠는가! 레코드 음악도 한껏 기분을 들뜨게 하
는 행진곡이었다.

 토토는 하얀 블라우스에 감색 짧은 바지 차림이었다. 사실은 주름이 많이 잡힌 블루
머를 꼭 입고 싶었지만…. 토토가 블루머를 동경하게 된 것은, 바로 얼마 전 수업이 
끝난 다음 교장선생님이 교정에서 유치원 보모들에게 리드미크 강습을 할 때였다. 몇
몇 보모들이 블루머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토토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그 블루머를 입은 언니들이 다리를 탁! 하고 땅바닥에 내디디면 블루머 밖으로 나와
있는 허벅지가 덜렁! 하고 흔들렸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어른스러워 보여 토토는 (좋
겠다!)며 동경심을 품었던 것이다. 그래서 토토는 집으로 달려가자마자 짧은 바지를 
꺼내 입고 다리를 방바닥에 탁! 내디뎌 보았다. 하지만 아직 1학년밖에 안 된 여자아
이의 야윈 허벅지는 전혀 '덜렁!'거리지 않았다. 몇 번이고 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여서, 토토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 언니가 입고 있던 블루머 같으면 덜렁거릴 거야!)

 그래서 엄마에게 언니들이 입고 있었던 옷에 대해 설명했더니, 엄마는 그것이 '블루
머'라고 가르쳐 주었다. 토토는 운동회 때 꼭 블루머를 입고 싶다고 엄마에게 부탁했
지만, 작은 사이즈를 구하지 못해 애석하게도 '덜렁!'거리지 않는 짧은 바지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운동회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떤 경기에서든 - 대부분 전교생이 같이 하는데 - 학
교에서 가장 팔다리가 짧고 키도 작은 다카하시가 1등을 도맡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꿈지럭대는 고이노보리 경기를 다카하시
는 재빨리 통과했는가 하면, 엄마 찾기 경주에서 모두가 사다리에 머리를 들이밀고 끙
끙거리고 있을 때도 이미 사다리를 빠져 나온 다카하시는 몇 미터 앞서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강당계단 오리기 릴레이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서툴게 한 계단 한 계
단 오르기 있을 때도 다카하시의 짧은 다리는 마치 피스톤처럼 단숨에 올라갔다가 영
화필름을 되감는 것처럼 휙! 하고 내려왔다.

 결국 모두가 "다카하시를 이기자!"는 맹세를 굳게 하고 진지하게 임했음에도 불구하
고 다카하시가 일등을 독차지했다. 토토도 꽤 열심히 했지만 다카하시를 이길 수 없었
다. 그냥 달리는 데서는 앞서 갔지만, 그 다음 여러 가지 난관에서 결국 지고 말았던 
것이다.

 다카하시는 자랑스러운 듯 코를 약간 실룩거리며, 기쁨과 즐거움을 한껏 몸으로 표현
하면서 일등상을 받았다. 게다가 거의 모든 경기에서 일등을 했기 때문에 상을 몇 개
나 받았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부러워하며 다카하시가 상 받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내년에는 꼭 다카하시를 이겨야지!"

 모두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결국 해마다 운동회의 스타는 다카하
시가 되곤 했다.

 그건 그렇게 이 운동회의 상이라고나 할까, 그것이 또한 교장선생님다운 것이었다. 
요컨대 '1등은 무우 하나, 2등은 우엉 두 뿌리, 3등은 시금치 한 단' 등 이런 식이었
으니까…. 그래서 토토는 제법 성장했을 때까지도 운동회에서는 다들 채소를 상으로 
주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물론 그 당시 다른 학교에서는 대부분 노트나, 연필, 지우
개 등을 상으로 주었다.

 그러나 굳이 다른 학교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모두들 채소를 상으로 받는다는 점에서
조금씩 저항감을 갖고 있었다. 토토만 하더라도 우엉과 파를 받았는데, 그것을 들고 
전철을 타기가 어째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3등 이하인 아이들에게도 이러한 상
은 골고루 나누어졌기 때문에 운동회가 끝났을 때, 도모에 학원의 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채소를 들고 있었다. 

 왜 채소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창피하게 여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좀 이상
한 애!'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싫다고 한 아이도 있었던 것 같다. 집에서 엄마 심부름
으로 시장바구니 같은 것을 들고 채소가게에 가는 것이라면 그렇게까지 창피하진 않겠
지만…. 그러니 양배추를 받은 한 뚱뚱한 남자아이는, 들고 가기가 무척 힘들다는 듯
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바꾸어 들어보다가 끝내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아, 성가셔. 이런 거 들고 어떻게 가. 버려버릴까…."

 교장선생님은 모두가 투덜거리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당근이니 무 등을 들고있는 아
이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왜 그러니, 싫으냐? 하지만 오늘 저녁에 엄마한테 이걸로 반찬을 만들어 달라고 해 
보렴. 너희들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채소야, 이것으로 가족 모두의 반찬을 만들 수 있
잖아! 얼마나 좋으냐, 틀림없이 맛있을 걸!"

 그 말을 듣고 보니 분명 맞는 말 같았다. 토토 역시 자기 힘으로 저녁 반찬거리를 얻
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래서 토토는 교장선생님께 말했다.

 "나, 우엉으로 엄마한테 우엉볶음을 해 달라고 할거예요! 파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요."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제각기 자기가 생각한 식단을 선생님께 말했다. 선생님은 얼굴
이 빨개진 채 웃으면서 기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이제 잘 알겠지!"

 
 아마도 교장선생님은 그런 채소들로 반찬을 만들어 저녁을 먹으면서, 가족끼리 오순
도순 오늘 있은 운동회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특히 혼자 힘으로 일등을 독차지하였고, 그 상으로 저녁 식사를 풍성하게 장
식할 다카하시가 '그 기쁨을 기억해주면 좋겠다'고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키도 더 이
상 크지 않고 형편없이 작다는 육체적 콤플렉스를 갖기 전에, '일등을 한 자신을 영원
히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랬던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어쩌면 교장선생님은 다카하시를 위하여 도모에 학원식 경기를 고안해냈
는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불과하지만.
    

 33. 어느 소박한 시인에 대하여
  
 "고바이샤 잇사! 대머리 아저씨 잇사!"

 아이들은 곧잘 교장선생님을 이렇게 놀려대곤 했다.

 그건 교장선생님의 이름이 우선 '고바야시 소사쿠'인 데다, 또 교장선생님이 곧잘 하
이쿠가 가장 훌륭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기에, 아이들이 두 이름을 섞어 그렇게 부르
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교장선생님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잇사 씨도 친구 마냥
여겨졌다.

 선생님은 일상 속에서 배어 나온 솔직 담백한 잇사의 하이쿠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선생님은 몇 십만 명이나 되는 당시의 하이쿠 작가들 중에서,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
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동심 어린 하이쿠를 지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 잇사 선
생님을 존경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아이들에게 잇사의 
하이쿠를 가르쳐 주었고, 아이들은 소리 높여 외웠다.

 
 여윈 개구리 지지 마라 잇사가 여기에 있다
 아기참새야 저리가라 저리가라 말 지나가는구나
 때리지마라 파리 손발이 닳게 비는구나

 
 그리고 교장선생님이 즉흥적으로 작고한 멜로디에 맞추어 「우리랑 같이 놀자구나, 
엄마 아빠 없는 참새」를 다함께 노래한 적도 있었다. 어쨌든 교과 과정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교장선생님은 종종 하이쿠 시간을 가졌고 또 자기의 생각을 정지하
게 하이쿠로 표현해 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토토가 맨 처음 지은 하이쿠는 이랬다.


 노라쿠로는 군대를 그만두고 대륙으로 간다네
 (노라쿠로는 당시 어린이 만화 속에 나왔던 주인공 개의 이름이다 -역주)

 
 토토의 하이쿠는 사실 제대로 된 하이쿠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적어도 요즘 
토토가 무엇에 관심이 있고 또 무엇을 생각하는지 하이쿠를 통해 잘 알 수 있었다. 그
리고 세어 보니, 5·7·5조가 아니라 5·7·7조가 되어 버렸지만.

 (잇사 아저씨도 '아기참새야 저리가라 저리가라 말 지나가는구나'에서는 5·8·7조이
니… 괜찮겠지, 뭐.)

 그렇게 토토는 생각했다.

 
 구혼부츠로 산책하러 갈 때나 비가 내려 다들 밖에서 못 놀고 강당에 모였을 때, 그
때마다 도모에 학원의 '고바야시 잇사'는 아이들에게 하이쿠를, 또는 하이쿠를 통해서
인간과 자연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잇사의 소박한 싯구는 도모에 
학원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기도 했다. 이처럼 말이다.

 
 눈이 녹으니 온 동네 아이들로 가득하구나


 34. 정말 이상해요
 
 토토는 어제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을 주었다. 바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였다.

 
 지유가오카에서 오이마치선을 타고 가다 보면, 다음 역인 미도리가오카 조금 못 가서
급한 커브 길이 있기 때문에 전철은 항상 끼익! 하고 옆으로 기우뚱한다. 토토는 늘 
당하는 일이라서 어제도 두 다리에 힘을 꽉 주고 아이쿠! 하며 놀라는 일이 없게끔 만
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토토가 타는 자리는 항상 달리는 전철 맨 끄트머리, 진행 방향을 향해 오른쪽 문 앞
으로 정해져 있었다. 토토가 항상 그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자기가 내릴 역에서는 오
른쪽 문이 열리므로 금방 내릴 수 있었고, 또 역 계단과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이 문
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의 일이었다. 끼익! 커브 길이 들어섰구나 싶은 순간, 토토는 발 근처에 
얼핏 돈처럼 생긴 것이 떨어져 있는 걸 보았다. 그렇지만 예전에도 돈이라고 생각하고
주웠더니 그만 단추였던 적이 있어서, 

 (우선 돈인지 아닌지 잘 보고 나서 생각하자!)

 싶었다. 그래서 커브 길을 지난 전철이 다시 똑바로 달리자, 고개를 숙이고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그것은 틀림없는 돈, 5전짜리 동전이었다.

 주위에 있는 누군가가 떨어뜨려서 전철이 기우뚱했을 때 굴러왔나 보다고 생각했지만, 
그때 그 곳에 서 있는 사람은 토토 혼자뿐이었다.

 (어떻게 하지…?)

 그 순간, 누군가가 '돈을 줍게 되면, 곧바로 파출소에!'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렇지만 전철 안에는 파출소가 없잖아…?)

 그때 맨 끝 차장실에 있던 차장 아저씨가 문을 열고 토토가 있는 칸으로 들어 왔다. 
그 순간에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는지는 토토 자신도 몰랐지만, 얼떨결에 그 5전
짜리 동전 위로 오른발을 올리고 말았다.

 낯익은 차장 아저씨는 토토를 보자 활짝 웃었다. 토토는 오른발 밑이 마음에 걸려 편
한 마음으로 웃진 못했지만, 그래도 살짝이나마 웃었다. 그때 전철은 토토가 내릴 역
에서 한 정거장 전인 오오카야마 역에 도착해서 반대쪽 문이 열렸다. 그런데 이 날 따
라 어찌된 일인지 평소보다 어른들이 많이 타면서, 그 기세에 토토가 밀려날 지경이었
다. 그러나 오른발을 움직일 수는 없었으므로 토토는 있는 힘을 다해 방어했다. 그러
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내릴 때 이 돈을 주워서 꼭 파출소에 갖다 줄 거야!)

 그런데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발 밑에 있는 돈을 주울 때, 만약 어른들이 보면 도둑! 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잖아?)

 그 시절에 5전이라면 캐러멜 작은 상자 하나나 초콜릿 한 개를 살 수 있는 정도의 금
액이었다. 그러니 어른한테는 대수롭지 않은 돈이지만 토토한테는 거금이었기에 몹시 
걱정스러웠다.

 (그래! '어, 내가 돈을 흘렸네…. 어서 주워야지.' 라고 조그만 소리로 말하고서 줍
게 되면 다들 내 돈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렇지만 이내 다른 걱정거리가 떠올랐다.     

 (만약 내가 그렇게 말해서 모두가 날 쳐다보게 되면, 그 중에 누군가가 '그건, 내 꺼
야!'라고 나설 수도 있잖아. 아아, 끔찍해….)

 내릴 역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토토는 머리를 굴려 온갖 궁리를 했다. 결국 쪼그리고 
앉아 신발 끈을 묶는 척하면서 살짝 줍자고 생각했고…. 마침내 그 계획은 성공했다. 

 땀에 흠뻑 젖은 손으로 5전 짜리 동전을 들고 플랫폼에 내려선 순간, 토토는 심한 피
로감을 느꼈다. 그리고 전철역에서 한참 걸리는 파출소에 들렀다가 집에 들어가면 너
무 늦어져서 엄마가 걱정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토토는 계단을 통통 내려가면서 심
사숙고한 끝에 이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오늘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감추어 두었다가 내일 학교 갈 때 갖고 가서 아이들과 
의논하자. 더구나 돈을 주워 본 아이는 없으니까 '이게 바로 주운 돈!'이라고 보여 줘
야지.)

 토토는 돈을 숨길 장소를 물색했다. 집에 들고 갔다가는 엄마가,

 "이거, 어디서 난 거지?"

 하고 물을지도 모르니까 집이 아닌 곳으로….

 토토는 역 바로 옆에 있는 나무숲을 헤치고 들어가 보았다. 거기는 누구한테 들킬 염
려도 없고, 누가 들어올 것 같지도 않아 아주 안전하게 느껴졌다. 토토는 막대기로 조
그만 구멍을 파서 그 한 가운데에다 소중한 5전짜리 동전을 넣고는 흙을 듬뿍 덮었다.

 그리고 표시 삼아서 생김새가 특이한 돌멩이를 찾아 그 위에 얹어 두었다. 그리고는 
수풀을 빠져 나오자마자 서둘러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토토는 그 날밤, 여느 때 같으면 '이제 잘 시간이잖니!'라고 엄마한테 잔소리를 들을
때까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거렸을 텐데, 별로 떠들지 않고 일찌감치 잠이 들
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아침!

 (무슨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싶은 느낌으로 잠에서 깨어, 그것이 (아, 참 나의 그
비밀스런 보물이지!)라고 생각났을 때, 토토는 정말이지 너무도 기뻤다. 

 여느 때보다도 서둘러 집을 나선 토토는 로키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무숲으로 뛰어
갔다.

 "와, 있다! 저기야!"

 어제 토토가 표시 삼아 단단히 얹어 둔 돌멩이가 그대로 있었다.

 "잠깐 기다려, 내가 멋진 거 보여 줄게."

 토토는 로키에게 자랑스럽게 말하고는 돌을  치우고, 살짝 흙을 긁어내며 구멍을 파
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그 5전짜리 동전이 감쪽같이 사라져 벌린 
것이 아닌가!

 '누가 내가 여기다 숨기는 걸보고 있었던 걸까?' 

 '동전에 발이 달려 움직인 걸까?' 

 등등 온갖 추리를 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토토는 혹시나 하고 이곳
저곳 계속 파보았다. 하지만 끝내 5전짜리 동전은 나와주지 않았다.

 토토는 도모에 학원의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지만. 그보다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훨씬 강하게 들었다. 그 후로도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나무숲에 들
어가 땅을 파 보았지만, 두 번 다시 그 주운 5전짜리 동전과 해후하는 일은 없었다.

 (두더지가 가져간 걸까?) 

 (그게 간밤의 꿈이었을까?)

 (하느님이 보신 걸까?)

 토토는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그렇지만 암만 생각해 보아도 이상하기 짝이 없는, 
세월이 흘러도 흘러도 잊을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35. 손으로 말해요
 
 토토는 오늘오후 지유가오카 역 개찰구 근처에서 참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토
토보다 조금 큰 남자아이 둘과 여자아이 하나가, 얼핏보면 가위바위보를 하는 듯한 몸
짓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건 가위바위보의 손짓보다 훨씬 더 다양했다.

 토토는

 (와, 무지 재미있겠다!)

 는 생각에 가까이 다가가 지켜보았다.

 세 아이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소리는 전혀 내지 않고, 먼저 한 아이가 손
을 움직여서 여러 모양을 만들면 다음 아이가 그걸 보고선 금세 다른 모양을 손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세 번째 아이가 잠깐 손짓을 하며, 그러다가 
갑자기 아주 재미있다는 듯 약간 소리를 내어 함박 웃음을 짓곤 했다. 토토는 잠깐 구
경하는 동안에 그것이 손으로 말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도 손으로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토토는 부러웠다. 그래서 그 아이들 틈에 끼어 볼까도 생각했지만 손으로 "나도 시켜
줘." 라고 말하는 법을 모르기도 하거니와, 도모에 학원의 학생도 아닌데 말을 걸면 
실례일 것 같아, 세 아이들이 도여코선 플랫폼으로 올라갈 때까지 그저 잠자코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 나도 꼭 손으로 말하는 사람이 될 거야….)

 토토가 아직 이 세상에 청각 장애인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또 그 아이들이 토토가 
타고 다니는 오이마치선의 종착역에 있는 오이마치 부설 농아학교의 학생들이라는 사
실도 물론 알지 못할 때였다.

 단지 토토는 눈을 반짝이며 상대방의 손짓을 열심히 쫓고 있는 아이들이 참 아름답다
는 생각이 들어서 언젠가는 친구하고 싶다고, 그냥 그렇게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36. 센가쿠 절

 도모에 학원 고바야시 선생님의 교육 방법은 다분히 유럽이나 그 밖의 여러 나라의 
교육 방식의 영향을 받고 있어 독특했다.

 이를테면 리드미크를 비롯한 새로운 리듬교육과 식사나 산책할 때의 매너가 그러했고, 
또 점심 시간에 부르는 '꼭꼭 씹어요, 모든 음식을'은 영국의 '로우 로우 로우 유어 보
트'의 가사를 바꾼 것이었으며,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바야시 교장선생님의 오른팔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 학교라면 교감 선생님
에 해당하는 마루야마 선생님은 어떤 면에서나 고바야시 선생님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마루야마 선생님은 이름자의 마루처럼 두상이 아주 동그랗고 정수리는 머리카락 한 
오라기 없어 반들반들했지만, 자세히 보면 귓가부터 뒤쪽에 걸쳐 반짝이는 짧은 백발
이 성성한 것하며 동그란 안경에 새빨간 뺨하고, 겉모습부터가 우선 고바야시 선생님
과는 달랐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벤케이 훌쩍훌쩍 밤 강을 건너네


 라고 한시에 가락을 붙여, 아이들한테 들려주는 점이 무척이나 달랐다. 사실은

 
 채찍 소리 조용조용 밤 강을 건너네

 
 란 뜻의 한시인데, 토토와 아이들은 그것이 벤케이(헤이안 시대의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심복이었던 장사 - 역주)가 밤에 훌쩍훌쩍 울면서 강을 건너가는 때의 노
래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마루야마 선생님이 읊조리는 이 한시는 아이들 사
이에서 상당히 유명했다.

 
 그런데 12월 14일의 일이었다.

 아침에 아이들이 모두 등교를 하자. 마루야마 선생님은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지금으로부터 150여년 전, 충성심이 많은 아코의 무사 마흔 일곱 명이 주군
의 원수를 갚은 뜻 깊은 날(1702년, 아코의 무사 47명이 결속하여 적장 카라여시나카
를 습격, 거사에 성공한 날 - 역주)이라서 센가쿠 절에 참배를 하러 가겠습니다. 각자
의 집에는 미리 연락을 해 두었습니다."

 고바야시 선생님은 마루야마 선생님이 하고자 하는 일에 굳이 반대는 하지 않았다. 
'나쁘게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만, 토토의 엄마는 도모에 학원과 마흔 일곱 무
사를 위한 참배란 왠지 모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발하기에 앞서 마루야마 선생님은 마흔 일곱 무사에 대하여 대충 설명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마흔 일곱 무사의 무구를 조달한 아마노야리헤이라는 사람은, 막부의 관
리에게 아무리 추궁을 당했어도

 "나, 아마노야리헤이는 사내대장부!"

 라면서 복수의 비밀을 결코 누설하지 않았다는 부분을 거듭 강조하였다. 아이들은 마
흔 일곱 무사에 관한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수업도 없는 데다 구혼부츠 절보
다 더 먼 센가쿠 절까지 도시락을 들고 걸어간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들떠 있었다.


 전교생 50명 모두는 교장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께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마루야마 선생님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 이내 아이들 사이에서

 "나, 아마노야리헤이는 사내대장부다!"

 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여자아이들도 커다란 소리로,

 "나, 사내대장부다!"

 라고 외쳐대 길 가던 사람들이 웃으며 뒤돌아보기도 했다.

 지유가오카에서 센가쿠 절까지는 12킬로미터 정도 거리였다. 하지만 오가는 자동차도
거의 없고, 푸르기만 한 12월 도쿄의 하늘 아래에서

 "나, 아마노야리헤이는 사내대장부다!"

 를 외쳐대며 줄지어 걷는 아이들은 조금도 힘든 줄을 몰랐다.

 센가쿠 절에 도착하자 마루야마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향과 물과 꽃을 나누어주었다. 
센가쿠 절은 구호부츠 절보다는 작았지만, 무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이
곳에 마흔 일곱 무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생각하니, 토토도 엄숙한 기분이 되어 
향과 꽃을 올리고 잠자코 마루야마 선생님이 하는 대로 따라서 절을 했다.

 학생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이런 조용함은 도모에 학원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모
든 무덤 앞에서는 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하늘에다 길고 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

 
 그날 이후, 토토한테 향냄새는 곧 마루야마 선생님의 냄새였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벤케이 훌쩍훌쩍'의 냄새이기도 했고, '아마노야리헤리'의 냄새
이기도 했고, 또 '정적'의 냄새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벤케이나 마흔 일곱 무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 이야기를 열정
적으로 해 주신 마루야마 선생님을 고바야시 선생님과는 또 다른 의미로 존경하며 친
숙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토토는 마루야마 선생님의 도수 높은 두꺼운 렌즈 너머에서 
자상하게 빛나는 작은 눈과, 큰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아주 좋아했
다.

 
 설날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37. 다 똑같은 친군데
 
 토토가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집과 역 사이엔, 그 당시 조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공동
주택이 있었다.

 토토는 물론 그 사람들이 조선 사람이란 것은 몰랐다. 단지 알고 있는 것은, 그 중 
한 아줌마가 머리 한가운데에 가르마를 낸 머리를 뒤로 아무렇게나 올렸으며 약간 살
이 쪘고, 끝이 뾰족한 조그만 보트 같은 흰 고무신과 긴 치마에, 가슴께를 커다란 리
본 같은 것으로 묶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과, 언제나 큰 소리로

 "마사오짜 ― 앙!"

 하고 제 아이를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그 아줌마는 매일같이 마사오짱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도 일반적인 발음은 
'사'와 '오'에 악센트가 있는데, 그 아줌마는 '사'에 악센트를 넣고 '짱'을 높고 길게
늘어뜨리는 탓에 토토에게는 아주 구슬프게 들렸다.

 공동 주택은 토토가 타고 다니는 오이마치선 선로를 따라 약간 경사진 언덕빼기에   
있었다. 토토는 마사오짱이란 아이를 알고 있었다. 토토보다 좀 크니까 한 2학년 쯤 
될까…. 아무튼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는 모르지만 머리를 부스스하고 언제나 개를 데
리고 다녔다. 

 어느 날, 토토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 언덕빼기 아래를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마사오짱이 거기에 장승처럼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아이는 두 손을 허
리에다 대고 여봐란 듯한 폼으로 서서, 다짜고짜 토토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조센진!"

 악의에 찬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토토는 겁이 났다. 그리고 별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짓궂게 군 적도 없는 남자아이가, 
뭔지 모를 악의를 품고 높은 곳에서 자기한테 그런 말을 한 것에도 깜짝 놀랐다. 

 토토는 집으로 얼른 돌아와서 엄마한테 알렸다.

 "나한테 마사오짱이 조센진이라고 그랬어."

 엄마는 토토의 말을 듣더니 가만히 손을 입에 갖다댔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눈에 눈
물을 가득 고였다. 토토는 깜짝 놀랐다. 굉장히 나쁜 말인가 보다 하고 퍼뜩 생각했었
으니까.

 엄마는 빨개진 콧잔등에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가없게도…. 다들 마사오짱한테 '조센진! 조센진!'이라고 그러는 모양이로구나. 그
래서 '조센진!'이란 말이 남에게 하는 욕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마사오짱은 아직 몰
라. 어리니까. 흔히들 욕을 할 때 '바보!'라고 하잖니? 마사오짱은 그런 식으로 누구
에겐가 욕을 하고 싶으니까, 항상 자기더러 사람들이 그랬듯이 '조센진!'하고 너한테 
해 본 거겠지. 정말 다들 왜 그렇게 심한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서 엄마는 눈물을 닦더니 토토에게 천천히 말했다.

 "토토는 일본 사람이고 마사오짱은 조선이란 나라의 사람이란다. 하지만 너도 마사오
짱도 똑같은 어린아이야. 그러니까 절대로 '저 사람은 일본인'이라든지 '저 사람은 조
선인'이라든지 그런 걸로 구별하면 못쓴다. 마사오짱한테 친절히 대해 주렴. 조선 사
람이라고 해서 그것만으로 욕을 먹어야 하다니, 얼마나 슬프고 또 좋지 못한 일이니…."

 토토는 아직 그런 상황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적어도 그 마사오짱이 까닭 없이 
사람들한테 욕을 먹는 아이라는 건 알았다. 그래서 항상 엄마가 마사오짱을 걱정하며 
찾고 있나 보다 생각했다.

 
 이튿날 아침 그곳을 지나갈 때, 마사오짱의 엄마가 또 구슬프게

 "마사오짜 ― 앙!"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토토는 (마사오짱은 대체 어디 간 걸까?)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다짐했다.

 (나는 조센진이라는 사람이 아닌 것 같긴 하지만, 만약 마사오짱이 또 다시 나한테 
그렇게 말하면 '우리는 다 똑같은 어린이야!'라고 하고, 친구하자고 그래야지!)

 그렇긴 해도 마사오짱네 엄마의 목소리는 애타는 느낌과 불안감이 섞인 특별한 울림
으로 길게 꼬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옆을 지나가는 전철 소리에 묻혀
버리는 일도 있었다. 아무튼  

 "마사오짜 ― 앙!"

 그것은 한 번 들으면 잊으려야 잊을 수 없을 만치, 애달피 우는 듯한 소리였다….


 38. 처음으로 땋았어요
 
 요즘 토토에게는 부러운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요전번 운동회의 불루머. 다른 하나는 두 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다. 언젠가 
전철 안에서 큰언니들의 땋은 머리를 보고서는 (나도 저런 머리를 하고 다녀야지!)라
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래선지 친구들은 다들 짧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데, 유독 토토만은 옆으로 가르마
를 타고 머리를 리본으로 조금만 묶고는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다. 물론 그건 엄마의 
취향이기도 했지만, 토토 역시도 언젠가는 머리를 땋겠다는 바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엄마는 토토의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주었다.

 고무줄로 끝을 묶고 가느다란 리본으로 묶으니, 토토는 금세 상급생이 된 듯 기뻤다. 
그리고선 거울을 보고 얼마나 근사한지 확인하고 - 사실 언니들에 비하자면야 숱도 적
고 머리도 짧아서 꼭 아기돼지 꼬리 같았지만 - 로키한테로 달려가서 조심스레 땋은
머리를 잡고 보여 주었다. 로키는 눈을 두세 번 깜박 깜박거렸다. 토토는 말했다.

 "네 머리칼도 땋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리고 토토는 (흐트러지면 안 되지!)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며 전철을 
탔다. 혹시 전철 안에서

 "어머, 근사하다! 그 머리."

 라고 누군가가 말해주지 않을까 잔뜩 기대했지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학
교에 가자, 같은 반 친구 미요와 삿코와 케이코가 

 "우와! 토토 머리 땋았네."

 라고 말해줘서 무척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모두에게 살짝 땋은 머리를 만져보게 하기
도 했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은 아무도 "우와!"하고 말해줄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어? 토토 머리, 다른 때하고 다르네!"

 토토는 (드디어 남자아이들도 알아주는구나!)싶어 기쁜 나머지,

 "그래, 나 머리 땋았어!"

 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자 오에는 토토 곁으로 와선 대뜸 땋은 머리를 두 
손으로 낚아채고는,

 "아, 오늘 아침 피곤한데 매달리기 딱 좋은 걸! 전철 손잡이보다 훨씬 편하네."

 라고 노래 부르듯 말하는 게 아닌가!

 토토의 슬픔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에는 반에서 가장 덩치도 크고 뚱뚱한 터
라 조그맣고 가냘픈 토토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그런 오에가

 "우와, 편하다!"

 라면서 뒤로 또 잡아당겨 버렸으니…. 토토는 비틀거리다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
다. 그러나 '손잡이'라는 말에 상처를 받은 데다 엉덩방아까지 찍은 토토가 마침내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한 건, 오에가 일으켜 세워주려고 땋은 머리를 쥔 채 농담
으로 

 "영차! 영차!"

 하면서 운동회 때 줄다리기처럼 응원 소리를 내며 끌어당겼을 때였다. 

 사실 토토의 생각에 땋은 머리는 '숙녀가 되었다'는 상징이었다. 그러니 머리를 땋은
토토를 보고 다들, 

 "이런, 제가 실례를 했군요."

 라고 말해줄 줄 알았는데….

 "으앙!"

 토토는 울면서 곧장 교장실로 달려갔다. 토토가 울면서 노크를 하자 교장선생님은 문
을 열곤, 언제나처럼 토토와 같은 눈높이로 몸을 낮춰서 물었다.

 "무슨 일이냐?"

 토토는 땋은 머리가 아직 그대로인지 확인하고 나서 말했다.

 "오에가 이걸 끌어당기면서 영차! 영차! 했어요."

 교장선생님은 토토를 쳐다보았다. 짧고 가느다랗게 땋은 머리가 우는 얼굴과는 반대
로, 건강한게 마치 춤이라도 추는 듯 했다. 선생님은 의자에 앉아서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토토를 앉히곤 여느 때처럼 빙그레 웃었다. 빠진 이가 다 보이는 것도 개의치 
않고.

 "이제 그만 그치렴. 네 머린 아주 근사하단다."

 토토는 눈물범벅인 얼굴을 들고 좀 쑥스러운 듯 말했다.

 "선생님, 이 머리 정말 맘에 들어요?"

 그러자 선생님은 말했다.

 "그럼, 아주 멋져 보이는데!"

 이 한 마디에 토토의 눈물이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이젠 오에가 영차! 라고 그래도 울지 않을 거예요."

 교장선생님은 고개를 끄덕거리곤 또 웃었다. 토토도 웃었다. 웃는 얼굴이 땋은 머리
와 잘 어울렸다. 

 토토는 인사를 하고 운동장으로 달려가서 다시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그리고는 울
었다는 것도 거의 잊어갈 쯤 이었다.

 저 쪽에서 오에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다가오더니, 토토 앞에 서서 잠시 뜸을 들이다
가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아까 잡아 당겨서. 나, 교장선생님한테 야단 맞았어. 여자아이한테는 친절
하게 하라고…. 여자아이를 소중하게 아껴줘야 된다고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토토는 좀 놀랐다. '여자아이한테 친절하게 하라'는 말은 여태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이제껏 잘난 건 언제나 남자아이들의 몫이었다. 게다가 토토가 잘 
알고 지내는, 아이들이 많은 어떤 집에서도 늘 밥이든 간식이든 남자아이가 우선 이었
다. 만일 그 집안의 여자아이가 무슨 말을 할라 치면, 이내 그 엄마는

 "계집애는 입 다물고 있거라." 

 고 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은 '여자아이를 소중하게' 대하라고 오에한테 말한 것이다. 토토는
기분이 묘해졌다. 그리고 한편 기쁘기도 하였다. 누구나 귀하게 여겨진가든 건 기쁜 
일이지 않은가.

 한편 오에한테도 이 날의 일은 꽤 큰 충격이었다.

 '여자아이한테는 상냥하고 친절하게!'

 그리고 이건 언제까지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그 까닭은 바로 오에가 도모에
학원을 다니면서 교장선생님에게 꾸중을 듣기는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므로.


 39. 땡큐

 겨울방학이 되었다.

 여름방학 때와는 달리 학교에 모이는 일은 없어, 도모에 아이들은 모두들 가족과 지
내게 되었다.

 미기타는 "할아버지가 사시는 규슈에서 설을 쇤다!"고 아이들에게 자랑하듯 퍼뜨리고
다녔으며, 화학 실험을 좋아하는 타이는 "형이랑 어떤 물리연구소에 견학 간다"고 기
대에 부풀어 있는 것 같았다. 다들 이런저런 계획을 말하며 "잘 가, 잘 가!"하고 헤어
졌다.

 
 토토는 엄마 아빠와 스키장에 갔다.

 아빠 친구이기도 한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인 사이토 씨는 시가 고원에 자그마한 별장
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 해마다 겨울이면 놀러 갔기 때문에, 알고 보면 토토는 유치원
때부터 스키를 시작한 셈이었다.

 역에서 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시가 고원에 이르자, 눈으로 뒤덮인 순백의 세계로 리
프트 같은 것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또 군데군데 나무 둥치가 튀어나와 있기도 했다. 
엄마는 사이토 씨처럼 시가 고원에 별장이 없는 사람은 하나 씩 밖에 없는 여관이나 
호텔에 묵어야 한다고 토토에게 말했다.

 어쨌든 올해에는 이상하게도 외국인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지난해에 비해 올해 토토에게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엿한 1학년생이 되었
다는 것과 또 영어 한 마디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빠한테 배운 그 영어는 바로 
"땡큐!"라는 말이었다.

 사실은 스키를 신은 토토가 눈 위에 서 있으면 지나가는 외국인들이 다들 뭐라고 한 
마디씩 하고 가는데, 아마도 귀엽다거나 뭐 그런 뜻의 말이었을 테지만 토토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작년까지는 잠자코 있었는데, 올해는 그럴 때 머리를 살짝 
숙이고선

 "땡큐."

 하며 일일이 대답해 보았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외국인들은 다들 활짝 웃더니, 제
각기 뭐라고 말하면서 토토의 뺨에 제 뺨을 갖다대는 여자도 있었고, 심지어 꼭 껴안
는 아저씨들도 있었다.

 토토는 '땡큐'라는 한 마디 영어로 이렇게 외국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다니 참 재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그들 중에 친절하게 생긴 청년이 토토에게 다가오더니,

 "내 스키 앞쪽에 타지 않을래?"

 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빠에게 물었더니 괜찮다고 하기에, 토토는

 "땡큐!"

 하고 그 사람에게 말했다. 

 그 사람은 제 발치의 스키 위에 토토를 웅크려 앉게 하고는 양쪽 스키를 나란히 모으
고, 시가고원에서 가장 경사가 완만한 긴 슬로프를 마치 바람처럼 미끄러져 내려갔다.

 토토의 귓가에서 공기가 휙휙 소리를 냈다. 토토는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앞으로 
고꾸라지지 않게 조심했다. 그런데 좀 무섭긴 했지만 무척 신이 났다. 이윽고 토토가 
스키를 타고 내려오자,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쳐주었다. 

 토토는 일어나 사람들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또,

 "땡큐!"

 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더욱 더 큰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슈
나이더라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스키 선수이며, 또 은으로 된 진귀한 스키 스틱을 늘
지니고 다닌다는 걸 안 것은 훗날의 일이었다.

 아무튼 토토는 스키를 타고 내려와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은 뒤, 그가 허리를 굽
혀 토토의 손을 잡고 마치 소중한 사람을 쳐다보듯 내려다보며

 "땡큐!"

 라고 말한 순간, 그만 그 사람이 좋아지고 말았다. 그는 토토를 아이 취급하지 않고 
어엿한 '숙녀'로 대해주었던 것이다. 허리를 굽힌 그의 모습에서 토토는 정말 그 사람
의 다정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는 순백의 세계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40. 도서실이 생겼어요

 겨울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에 모인 아이들은 방학 동안에 엄청난 사건이 생겼음을 
발견하고 함성을 질렀다.

 교실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전철 반대쪽, 그러니까 강당을 끼고 맞은 편 화단 옆에 전
철 한 대가 더 있었는데, 겨울방학 동안에 그 전철이 도서실로 탈바꿈해 있었던 것이
다. 무슨 일이든 척척 해결하여 아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료아저씨가 무척 
애를 써준 모양이었다.

  
 전철 안에는 선반이 죽 만들어져 있었고, 거기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책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그리고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책상이며 의자도 놓여 있었다. 교장선생님
이 말했다.

 "여긴 너희들의 도서실이란다. 여기 있는 책은 누구든 마음대로 읽어도 좋다. 또 '몇
학년은 이런 책'이란 규정도 없으니까 언제든 마음 내킬 때 도서실에 와도 상관없단
다. 그리고 빌리고 싶은 책이 있으면 집에 가져가서 읽어도 좋다. 그 대신 다 읽고 나
면 갖다 놓기다! 집에 있는 책 중, 친구들과 같이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도서실에 갖
다놓는 것도 대환영이다. 아무튼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구나." 

 아이들은 제각기 선생님에게 말했다. 

 "선생님, 오늘 첫 시간은 도서실에서 수업해요!"

 "그러냐?"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의 흥분된 모습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럼, 그렇게 할까."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모에 학원의 전교생 50명이 한 대의 전철에 올라탔다. 
그런데 다들 야단법석을 떨며 책을 고른 뒤 의자에 앉으려 했지만 채 절반도 앉을 수 
없었다. 나머지는 그냥 선 채로 였다. 정말 만원 전철 속에서 선 채로 책을 읽는 듯한
광경이어서 보고 있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아이들은 한없이 기쁘기만 했다. 

 토토는 아직 글자를 많이 읽지 못했기 때문에 재미있는 그림이 듬뿍 담긴 책을 읽기
로 했다. 아이들 모두가 책을 손에 쥐고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하자 전철 안은 조금 조
용해졌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 동안이었고 이내 여기저기서 책 읽는 소리며, 모르는 글자를 
옆 친구에게 묻는 소리며, 책을 서로 바꿔보는 소리며, 까르륵대는 웃음소리로 전철 
안이 가득해졌다. 개중에는 「노래하며 그림 그리는 책」이란 걸 읽기 시작한 탓에 큰
소리로  

  
 동그라미에 점 동그라미에 점
 세로 세로 가로 가로
 동그라미 그리고 점찍고
 마 - 루코 씨
 머리칼 셋 머리칼 셋 머리칼 셋
 눈 깜짝할 사이에 아줌마

 
 라구 노래를 부르면서, 동그랗게 머리를 올린 아줌마 그림을 그리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데 도모에의 아이들에게는 이 '동그라미에 점' 노래도 그다지 신경에 거슬리지 
않은 듯 했다. 함께 따라 부르기도 하면서 그저 각자 읽고 있는 책에 열중한 따름이었
다. 그것은 항상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부터 공부를 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다른 아이
가 내는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공부를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 주위가 아
무리 시끄러워도 금방 집중할 수 있도록!'하라는 교육을 자주 받고 있었던 탓이었다.

 토토가 읽고 있는 책은 만화집 같은 것이었다.

 하도 방귀를 뀌어대서 시집을 못 간 부잣집 딸이 드디어 시집을 가게 되자 너무 기쁜
나머지 첫날밤에 평소보다 한층 심하게 방귀를 뀌어, 자고 있던 신랑이 그 방귀 바람
에 방에서 일곱 바퀴 반을 돌고는 기절한다는 이야기였다. 삽화로는 신랑이 방안에서 
날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 이 책은 나중에 아이들이 서로 보려고 야단할 만
큼 인기를 독차지했다 - . 

 옴짝달싹 못할 만큼 비좁은 도서실이었지만 전교생이 유리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열심히 책을 읽는 모습은, 교장선생님에게는 참으로 흐뭇한 광경
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날은 온종일 독서실에서 지내고 말았다.


 그 날 이후로 비가 와서 밖에 나갈 수 없을 때나 이런저런 일이 있을 때, 도서실은 
모두 집합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교장선생님이 제안하였다.

 "도서실 옆에다 화장실을 만들자꾸나!"

 왜냐하면, 다들 아슬아슬할 때까지 참으면서 책을 읽느라 화장실에 한 번 갈라 치면,
너나할 것 없이 우스꽝스런 꼴로 강당 건너편에 있는 거기까지 쏜살같이 뛰어가곤 했
기 때문이었다….


 41. 꼬리

 오늘 오후의 일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주변을 정리하고 있는 토토한테 오에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리고선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있지, 교장선생님이 화내고 계셔."

 "어디서?"

 토토는 곧장 물었다. 교장선생님이 화를 다 내다니…. 여태까지 몰랐던 사실이어서 
무척 놀랐던 것이다. 오에도 놀라서 정신없이 뛰어왔는지 선한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코를 벌름거리고 있었다.

 "교장선생님 집 부엌에서."

 "가 보자!"

 토토는 오에의 손을 꼭 잡고선 교장선생님의 집 부엌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교장선생님의 집은 강당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부엌이 학교 뒷문 가까이에 있었다.

 언젠가 토토가 화장실 정화조로 뛰어 들었을 때 말끔하게 씻겨준 곳도 그 부엌을 통
해 들어간 욕실이었고, 점심시간에 나오는 산과 들과 바다의 반찬을 만드는 곳도 바로
그 부엌이었다. 

 토토와 오에가 살그머니 발소리를 죽여 다가가자, 닫혀 있는 문안에서 정말 교장선생
님의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선생님이 그렇듯 경솔하게 다카하시에게 '꼬리가 있다'는 따위의 말씀을 했
단 말입니까!"

 그 화난 목소리에 토토의 담임인 여선생님이 대답하였다. 

 "별 뜻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다만 다카하시가 눈에 언뜻 띄길
래 귀엽단 생각에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그 말에 얼마나 깊은 뜻이 있는지 선생님은 잘 모르는군요. 제가 다카하시에게 얼마
만큼 마음을 쓰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선생님이 알아주시겠소!"

 토토는 오늘 아침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오늘 아침 담임선생님은 옛날에는 인간에게도 꼬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얘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다들 좋아했다. 어른들 세계에서는 그저 진화론의 기초쯤 되는
이야기일 테지만, 어쨌든 아이들로서는 너무 신기했던 것이다. 특히 선생님이

 "그래서 지금 여러분에게도 미저골이란 게 남아 있는 거예요."

 라고 말했을 땐, 토토를 비롯하여 반 아이들 모두가 어떤 게 미저골일까 만져보느라 
교실이 떠들썩했었다. 그리곤 이야기 끝에 선생님이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었다.

 "아직 꼬리가 남아 있는 사람도 있을까? 혹 다카하시, 너한테 남아 있는 거 아니니?"

 그 순간 다카하시는 얼른 일어나 작은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없습니다."

 그러나 다카하시의 표정은 밝지 않았고 무척이나 심각한 듯 했다.


 토토는 그 일로 교장선생님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교장선
생님의 목소리는 화를 내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슬프게 들렸다.

 "선생님은, 다카하시가 선생님한테 꼬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 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선생님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토토는 교장선생님이 왜 그토록 꼬리에 관한 일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선생님한테 '꼬리 있니?' 라는 소릴 들었다면 기분이 좋았을 텐데….)

 물론 그랬을 것이다. 토토의 몸에는 정말이지 아무런 장애가 없으니까. 그러니 "꼬리
가 있니?"라는 소릴 들어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카하시는 키가 자라지 않는 체질이었고, 본인도 이미 그걸 알고 있었다. 그
래서 교장선생님은 운동회에서도 다카하시가 이길 수 있도록 경기에 신경을 썼고, 또
한 몸에 대한 수치심을 없애기 위해 다함께 수영복을 입지 않고 풀에 들어가는 방법까
지 생각하였던 것이다.

 교장선생님은 다카하시나 야스아키, 그 밖에도 육체적인 장애가 있는 아이들한테서 
'다른 아이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였고, 덕
분에 아이들은 실제 별 다른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귀여워 보
였어도 하필 다카하시에게 꼬리가 남아 있지 않느냐고 무심하게 묻는다는 것은 교장선
생님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이 같은 사실을 우연히 아침
수업을 뒤에 서서 듣고 있다 알게 된 것이다.

 잠시 후 토토의 귀엔 울먹이며 얘기하는 여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제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 다카하시에게 어떻게…. 뭐라고 사과해야 될까요…."

 교장선생님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순간 토토는 유리창에 가려 보이지 않는 교장선생님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지 교장선생님은 정말 우리의 친구라고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오에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토토는 교장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이 모여있는 교무실이 아니고, 부엌에서 담임선생
님을 나무랐던 일이 좀처럼 잊혀지지 않았다. 그러한 배려 역시 고바야시 선생님의 진
정한 교육자로서의 모습이 담겨 있었으니까…. 당시의 토토로서는 자세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왠지 그때 교장선생님의 목소리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었다.

  
 어느 새 토토에게는 도모에 학원에서의 두 번째 봄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42. 두 번째 봄
 
 교정에 나란한 나무들에서 연둣빛 새싹이 쑥쑥 돋아났다.

 화단에 사는 꽃들은 앞다투어 꽃망울을 틔웠다. 사프란(그로커스), 나팔수선화, 팬지
들이 차례차례 도모에 학원의 아이들에게,

 "안녕!"

 이라고 인사했다. 마침 튤립도 발돋움을 하듯이 줄기가 자라나고, 벚꽃봉오리는 마치
"준비, 땅!"하는 신호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으로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수영장 옆의 작고 네모난 콘크리트 수돗가에 살고 있는 금붕어들은 또 어떤가! 까만
색 눈이 튀어나온 금붕어를 비롯하여 다들 여태껏 꼼짝 않고 있다가, 마침내 평화롭게
즐겁게 헤엄치기 시작했다. 누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모든 것들이 반짝반짝 새롭
게 생기에 넘치는 이 계절이 "봄!"이란 것을 금세 느낄 수 있었다.

 
 토토가 엄마를 따라 처음 도모에 학원에 왔던 날 아침, 땅에서 자라난 교문에 놀라고
전철 교실을 보고 팔짝 뛰어오를 만큼 기뻐하고, 교장선생님인 고바야시 소사쿠 씨를
'친구!'라고 생각한 지 꼭 1년이 지났다. 이제 토토네 반 아이들은 어엿한 2학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1학년 꼬마들이 1년 전에 토토네가 그랬던 것처럼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교문을 들어섰다.

 토토에게 지난 1년은 정말 알찼고, 날마다 아침이 오길 기다렸던 그런 한 해였다. 여
전히 친동야 아저씨도 좋았지만, 훨씬 더 재미있고 좋은 일들이 주위에 얼마든지 많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문제아'로 퇴학을 당한 토토가 지금은 
가장 도모에 학원의 학생답게 자란 것이다.

 그런데 '도모에 학원의 학생답다'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오히려 걱정거리이기도 했
다. 교장선생님에게 자식을 맡기고 전면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는 토토의 엄마 아빠조
차도 더러는 (괜찮을까?)하고 생각한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 하물며 고바야시 선생
님의 교육 방침을 반신반의하며,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부모들 중에
는 (더 이상 아이를 맡겼다가 큰일나겠군!)하는 생각에 다른 학교로 전학 수속을 밝는
사람도 꽤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도모에 학원을 떠나기가 싫어 울었다. 다행히 토토네 반에는 전학 간 
아이가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한 학년의 위인 남자아이는 넘어졌을 때 생긴 상처딱
지를 너덜거리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주먹 쥔 손으로 교장선생님의 등을 때렸었다.

 교장선생님의 눈도 새빨갰었다. 하지만 결국 그 아이는 엄마 아빠의 손에 끌려 학교
를 떠났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뒤돌아보면서…. 마침내는 손을 흔들면서 떠났다.

 그러나 슬픈 일은 그 정도였다. 토토는 다시 경이와 기쁨의 날들로 이어질 2학년이 
된 것이다.

 등에 멘 책가방도 이제는 토토와 한 몸이나 다름없었다.


 43. 백조공주를 꿈꾸며

 토토는 엄마를 따라 하비야 극장에서 상연하는 「백조의 호수」공연을 보러갔다. 토
토의 아빠가 바이올린 솔로를 연주하고, 또 아주 훌륭한 발레단이 출연하기 때문이었
다.

 토토가 발레를 구경하기는 처음이었다. 

 백조 공주님이 반짝반짝 빛나는 조그만 관을 머리에 쓰고, 진짜 백조처럼 아주 가볍
게 공중을 날고 있는 것(처럼, 토토에게는 보였다)…. 왕자님은 그런 백조 공주님을 
너무 좋아해서, 누가 뭐라든 그녀 외의 다른 여자는

 "필요 없습니다!"

 라고 말하듯 춤을 추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야 간신히 둘이서 다정하게 춤을 추었다. 
음악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토토는 내내 오늘의 공연을 떠올리며 감동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다
음날 토토는 눈을 뜨자마자 머리도 빗지 않을 채, 부엌에서 일하는 엄마한테 달려가 말
했다.

 "나, 스파이랑 친동야랑 역에서 전철표 파는 사람이랑 다 그만두고 백조춤을 추는 발
레리나가 될 거야!"

 엄마는 별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러니?"

 라고 말했다.

 토토는 발레를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지만 전부터 교장선생님한테서 이사도라 던컨이
라는, 멋진 춤을 추는 미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었다. 던컨 역시 고바야시
선생님처럼 달크뢰즈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토토는 존경하는 고바야시 선생님
이 좋아하는 던컨이 무조건 좋았고 - 본 적은 없어도 - 친구처럼 가깝게 느끼고 있었
다. 그러니 자기도 역시 춤을 추는 사람이 되겠다는 건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 무렵 도모에 학원엔 고바야시 선생님의 친구가 리드미크를 가르치러 오곤 했었다.

 그리고 마침 그 선생님의 스튜디오가 학교 바로 근처에 있어서, 엄마는 그 선생님에
게 부탁을 드려 학교가 끝나면 스튜디오에서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조처해 주었다.

 언제나처럼 엄마는 '무엇을 하라'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았지만, 토토가 '무엇을 하고
싶다'고 하면 그러라면서 이것저것 캐묻지도 않고 어린애가 하기 어려운 절차를 도맡
아 밟아주곤 했던 것이다.

 토토는 '어서 빨리 「백조의 호수」춤을 추는 사람이 되야지'하고 기대에 부푼 마음
으로 스튜디오에 다녔다. 그런데 춤을 가르치는 그 선생님의 방식은 참 유별났다. 도
모에 학원에서 하는 리드미크 외에 피아노나 레코드 음악에 맞추어

 "산의 날씨가 좋구나."

 하면서 터벅터벅 걷고 있다 갑자기

 "포즈!"

 라고 외치곤 했던 것이다.

 그러면 학생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포즈를 취하고 그대로 정지했다. 그리고 선생님도 
포즈를 취할 때는 학생들과 함께 소리를 지르며 '하늘을 우러러보는 자세'를 취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처럼 두 손으로 머리를 싸안고 웅크리기
도 했다. 하지만 토토의 이미지 속에 있는 건 반짝반짝 빛나는 관과 하얗고 보드라운 
의상을 입은 백조였지. '산의 날씨가 좋구나'가 아니었다.

 토토는 어느 날 용기를 내서 그 선생님한테 다가갔다. 선생님은 남자인데도 앞머리는
단발머리 스타일이었고 머리칼도 약간 곱슬곱슬했다. 토토는 두 팔을 한껏 빌리고 백
조처럼 나풀거리며 말했다.

 "선생님! 우리, 이런 거 안 해요?"

 오똑한 코에 눈도 크고 잘 생긴 그 선생님은 말했다.

 "우리 집에선 그런 거 안 한단다."

 
 그 후로 토토는 점차 그 선생님의 스튜디오에 가기가 싫어졌다. 물론 발레 슈즈를 신
지 않고 맨발로 돌아다니며 자기가 생각한 포즈로 춤을 추는 것이 꼭 싫어서만은 아니
었다. 하지만 토토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짝거리는 조그만 은빛관을 써 보고 싶었던 
것이다.

 헤어질 때 선생님은 아쉬운 듯이 말했다.

 "백조도 좋지만 자기 스스로가 창작해서 추는 춤도 네가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이 선생님이 바로 이시이 바쿠라는 일본 자유무용의 창시자이며, 바로 여기 조그만 
동네를 지나는 도요코선 역에 '지유가오카(자유의 언덕)'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이란 
사실을 토토가 안 것은 훗날 어른이 되고 나서였다.

 당시 쉰 살이었던 이시이 바쿠 씨는 어린 토토에게도 진심으로 '자유롭게 춤추는 즐
거움'을 가르쳐 주고자 했던 것이다.


 44. 농부 선생님
 
 "다들 준비됐느냐? 오늘 선생님이시다! 뭐든지 가르쳐 주실 거야."

 교장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고 아이들에게 남자선생님 한 분을 소개했다. 지금 토토와
아이들은 구혼부츠의 연못가에 있다….

 
 토토는 구석구석 그 선생님을 관찰했다.

 어째 그 선생님의 차림새는 유별났다. 윗도리는 줄무니 한텐(그모노 위에 있는 겉옷 
- 역주)를 걸쳤는데, 가슴께에는 메리야스가 비져나와 있고 목에는 넥타이 대신 수건
을 두르고 있었다. 그런데다 바지는 잠방이처럼 폭이 좁은 군청색 면이었고, 신발도 
구두가 아닌 작업화였다. 더구나 머리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토토는 그 선생님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음을 느꼈다.  

 (그러니까… 그게 어디서지?)

 얼굴빛이 햇볕에 타 새까맣다. 그리고 그 얼굴은 주름살이 져 있었지만, 마음씨는 어
쩐지 모르게 좋아 보였다. 허리에 묶인 혁대 같은 검은 끈에 매달린 담뱃대도 왠지 처
음 보는 것 같지 않았다….

 (알았다!)

 토토는 갑자기 생각이 났다.

 "있잖아요, 선생님! 항상 저기 강가에 있는 밭에서 일하는 농부 아저씨 맞지요!?"

 토토는 신이 나서 말했다. 그러자 작업화를 신은 그 선생님은 주름 가득한 얼굴로 환
히 웃으며 말했다.

 "그렇단다. 너희들 구혼부츠 절로 산책 갈 때 우리 집 옆 지나가지? 지금 유채 꽃이 
피어 있는 저 밭, 저게 바로 우리 밭이란다."

 "우와! 아저씨가 오늘은 선생님이야!?"

 토토네 반 아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아저씨는 손을 내저었
다. 

 "아니, 난 선생님이 아니고 그냥 농사꾼이야. 오늘은 교장선생님께 부탁을 받고 온 
거란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은 농부 선생님 옆에 나란히 서더니 말했다.

 "아니죠. 이제부터 밭을 일구는 법을 선생님한테 배울 텐데요. 밭일에 관한 한 당신
은 선생님입니다. 빵 만들기를 배울 땐 빵집 주인을 선생님으로 모시는 거나 마찬가지
죠. 자, 어서 아이들한테 이것저것 필요한 걸 지시하고 시작하세요."

 다른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교사자격증'을 
갖고 있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을 선택할 테지만, 고바야시 선생님은 
그런 것들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진짜'를 보여 주어야 마
땅하고, 그것이야말로 중요한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시작해 볼까!"

 농부 선생님은 환희 웃으며 말했다.

 
 모두가 있는 곳은 구호부츠 연못가에서도 아주 조용한, 못에 드리워진 나무의 그림자
가 운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이미 교장선생님은 삽이니 괭이니 그 밖의 밭일
에 필요한 도구를 넣어 두는 창고로 쓰려고, 보통 전철 반만한 크기의 전철을 옮겨놓
았다. 그 전철은 조그만 밭이 될 땅 한복판에 앙증맞고도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농부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전철 안에서 삽과 괭이를 가져오라고 지시하고, 먼저 잡초
뽑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잡초는 상당히 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잡초의 
종류에 따라서는 씨를 뿌린 작물보다 더 빨리 자라는 게 있어, 그 탓에 작물은 햇볕을 
쬐지 못한다.', '잡초는 나쁜 벌레가 숨기 좋은 곳이다'. '잡초는 땅의 영양분을 빨아들
이기 때문에 뽑아 주어야 한다'는 등을 알아듣기 쉽게 차례차례 가르쳐 주었다. 더군다
나 말하면서도 손은 쉴새 없이 잡초를 뽑아냈다. 아이들도 모두 따라서 했다.

 그리고 나서 선생님은 또 괭이로 땅을 일구는 법, 밭이랑을 만드는 법, 무 씨 등의 
씨를 뿌리는 법, 비료를 주는 법 등등…. 밭을 일구는 데에 필요한 일을 실제로 해 보
이면서 설명했다. 도중에 작은 뱀이 머리를 내밀고 나와 상급생 하나가 하마터면 손을
물릴 뻔하기도 했지만, 농부 선생님은 

 "이 근처에 있는 뱀은 독도 없고, 사람이 건드리지만 않으면 뱀이 먼저 무는 일은 절
대로 없단다."

 라고 안심시키기도 했다. 

 여하튼 농부 선생님은 밭일뿐만 아니라 벌레, 새, 나비, 날씨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재미나게 해 주었다. 울툭불툭 마디가 굵지만 건강한 손이, 그런 이야기는 
모두 농부 선생님이 직접 체험하고 발견한 것이란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
다.

 아이들은 농부 선생님의 자상한 가르침 아래 땀을 뚝뚝 흘려가며 드디어 밭을 완성했
다. 이랑이 어느 쪽에서 보나 좀 빼뚤빼뚤했지만…. 어쨌든 완벽한 벽이었다.

 이날 이후로 도모에 학원의 아이들은 그 아저씨를 만나면,

 "농부 선생님!!"

 하고 멀리서도 존경 어린 목소리로 불렀다. 그리고 농부 선생님은 자기네 밭에 뿌리
고 남은 비료를, 아이들이 땀흘려 만든 학교 밭에 뿌려주기도 했다.

 아이들이 뿌린 씨앗은 별탈 없이 쑥쑥 자라났다.

 그리고 날마다 누군가가 둘러보고 와서는 교장선생님과 아이들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아이들은 '제 손으로 뿌린 씨앗에서 싹이 튼다'는 사실이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우며,
그리고 기쁜 일인지를 직접 체험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들 삼삼오오 모이
기만 하면 밭의 성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세상 여기저기서 이제 막 무섭고 두려운 일이 시작되고 있었건만…. 그러나 이 조그
만 밭을 화제 삼아 진지하게 얘기 나누는 아이들은, 고맙게도 아직은 평화로움 그 자
체 속에 있었다.    


 45. 앗! 뜨거

 학교 수업이 끝나자 토토는 아무 말도 없이, 친구들에게 안녕 이란 인사도 하지 않고
입 속으로 뭐라고 중얼중얼 거리면서 지유가오카 역까지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무슨 만담 같기도 한데, 토토는 지금

 "토도로키 계곡 코펠로 밥 짓기."

 란 어려운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만약 옆에 누군가가 와서

 "주게무주게무 고코노스리키레(원래 만담 속의 아이 이름으로, 전하기 긴 이름을 비
유. 불경의 여러 말을 모은 것이라고 함 -역주)."

 라고 말하면 듣는 순간 까먹을 게 뻔하고, 또 "영차!"하고 물웅덩이를 뛰어 넘기라도
하면 곧바로 잊어버릴 테니, 어쨌든 입 속으로 반복하는 편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
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행히 전철 안에서도 토토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오늘만큼은 토토도
굳이 재미난 일을 찾아내려 애쓰지 않고, 또 '우와, 좀 이상하네!'라고 놀랄 만한 일
도 안 생겨 무사히 내려야 할 역에서 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개찰구를 나서는 찰나, 
때마침 토토를 알아본 역무원 아저씨가

 "잘 다녀왔냐?"

 고 말을 걸었을 때 하마터면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할 뻔했다. 그러나 인사를 하고 나면 그만,

 '학교 다녀왔습니다, 밥 짓기.'

 하고 중얼거릴 것만 같아 그냥 오른손으로 바이 바이만 하고, 왼손으로 입을 막으면
서 집까지 달려왔다. 

 토토는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현관에서 엄마에게 고함을 질렀다.

 "토도로키 계곡 코펠로 밥짓기!"

 순간, 엄마는 그 말이 마흔 일곱 무사의 습격이나 도죠야부리(다른 파의 무예 도장에
서 시합하여 이기고 오는 것, 혹은 그런 사람 - 역주)흉내인 줄로만 여겼다. 그러나 
이내 엄마는 알아들었다.

 토도로키 계곡에서 코펠로 밥짓기…. 토도로키는 토토의 학교가 있는 지유가오카에서
세 정거장을 더 가는 역으로, 그 곳엔 도쿄 명소 중의 하나인 폭포며 냇가며 숲이 아
름다운 '토도로키 계곡'이란 곳이 있다. 바로 거기서 밥을 지어먹는 거라고 알아 차렸
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엄마는 생각했다.

 (이런 어려운 말을 용케도 기억했네. 아이들이란 제가 흥미 있어 하는 거면 똑똑하게
기억하는 모양이지?)

 이윽고 간신히 어려운 말로부터 해방된 토토는 엄마에게 줄줄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금요일 아침, 학교에서 모여서 간다. 준비물은 밥공기와 그릇과 젓가락, 그
리고 쌀 한 홉 등등.

 "한 홉은 밥공기로 꼭 하나 정도래! 그리고 그것으로 밥을 지으면 두 공기가 된대!"

 토토는 잊지 않고 덧붙였다. 그리곤 돼지고기 된장 찌개를 끓일 거니까 찌개에 넣을 
고기와 채소, 그리고 간식도 좀 가져가도 된다는 말까지.

 이날부터 토토는 부엌에서 일하는 엄마 곁에 착 달라붙어 칼질하는 법, 냄비 잡는 법, 
밥 푸는 법 등을 연구했다. 엄마가 일하는 걸 지켜보는 건 무척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토토의 마음에 쏙 든 건, 엄마가 냄비 뚜껑을 손에 들고 

 "앗! 뜨 뜨거…."

 라고 하고선, 그 손을 재빨리 귓불에 갖다대는 모습이었다.

 "우리 몸에서 귓불이 가장 차갑기 때문이란다."

 라고 엄마는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토토한테는 그 동작이 다른 어떤 동작보다도 어른스럽고, 마치 '부엌 전문가
만이 취할 수 있는 행동'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도 토도로키 계곡 코펠에 밥짓기, 저
렇게 해야지!)하고 결심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전철에서 내려 토도로키 계곡에 도착하자, 교장선생님은 숲 속에 모인 아이들을 둘러
보았다. 키 큰 나무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눈부시도록 환한 아이들의 얼굴은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불룩한 배낭을 메고,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아이들의 뒤론 폭포의 힘찬 물줄기가 아름다운 리듬을 새
기고 있었다.

 "어디 보자, 우선 몇 사람씩 조를 짜서 가져온 벽돌로 아궁이를 만들자꾸나. 그런 다
음에 일거리를 분담해서, 개울에서 쌀을 씻어 불에 올려놓고 그 다음은 찌개를 끓이자. 
그럼 시작해 볼까." 

 아이들은 가위바위보를 하거나 이런저런 방법으로 조를 짰다. 전교생 이래봐야 50명
도 채 안되므로 금방 여섯 조로 나뉘었다. 그런 다음 아이들은 구멍을 파고, 벽돌로 
아궁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철로 된 가느다란 창살 같은 걸 올려놓아 냄비와 
코펠을 올린 받침대를 만들었다. 그 동안에 다른 아이들은 나무숲에 잔뜩 떨어져 있는
땔나무를 주워왔다. 그리고 몇몇 아이들은 개울에 내려가 쌀을 씻었다.

 이렇듯 아이들은 스스로 일거리를 나누어 분담했다.

 토토는 자청해서 채소 써는 '찌개 당번'이 되었다. 토토보다 두 학년 위인 남자아이
도 채소 썰기를 맡았는데, 그 애가 썰면 크기도 제각각이고 모양도 엉망진창이었다. 
그렇지만 그 남자아이는 콧잔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정도로 열심이었다.

 토토는 아이들이 가져온 가지, 감자, 파, 우엉들을 엄마가 했던 것처럼 보기 좋게 먹
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그런 다음 오이와 가지를 얇게 썰어 소금에 잠시 절였다가, 
물기를 짜내어 즉석 오이 김치를 만들었다. 그리곤 채소를 써느라 열심인 상급생인 남
자아이에게

 "한 번 이렇게 해봐."

 라고 가르치기도 했다.

 토토는 마치 자기가 엄마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모두들 토토가 만든 오이 김치에 감
탄하자, 토토는 두 손을 허리에 대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냥 한 번 만들어 본 거야."

 
 찌개는 모두의 의견을 들어 간을 맞추기로 하였다.

 다들 신이 나 재잘거리면서 우와!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숲 속의 새들도 덩달아 재
잘재잘 지저귀고 있었다. 여기저기 냄비에서 찌개가 끓는 맛있는 냄새가 났다…. 지금
까지 대부분의 아이들은 식탁에 앉아 차려진 밥을 먹는 데만 길들어 있었다. 음식이 
끓기를 지켜보거나 불의 세기를 조절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직
접 만들어 보는 즐거움과 함께 수고스러움, 그리고 음식 완성되기까지의 이런저런 과
정을 알게 된 것은 큰 발견이었다.

 드디어 모든 음식이 완성되었다. 교장선생님은 풀밭에 동그랗게 앉을 수 있도록 자리
를 잡으라고 하였다. 아이들은 찌개 냄비와 코펠을 각 조 앞에 놓았다. 그런데 토토네
조는 토토가 꼭 하고 싶었던 그 동작, 바로 냄비 뚜껑을 두고 

 "앗! 뜨 뜨거…."

 를 할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만 했다.

 마침내 토토가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앗! 뜨 뜨거…."

 라고 소리를 지르고 양 손가락을 두 귓불에 갖다대더니

 "됐어."

 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다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제서야 음식을
자기 조 앞에 내놓았다.

 토토는 귓불을 만지작거리는 자기의 동작을 아무도 멋있다고 칭찬해주지 않았지만….

 정작 본인은 아주 뿌듯해 하는 듯 했다.

 
 아이들은 제 앞에 놓인 밥공기와, 또 국그릇에서 모락모락 오르는 김을 오랫동안 신
기하게 쳐다보았다. 배는 고팠지만 무엇보다 자기들이 직접 만든 요리였으므로…. 이
윽고 아이들은


 꼭꼭 씹어요
 모든 음식을 


 노래에 이어서 "잘 먹겠습니다!"를 소리 모아 외치자, 갑자기 숲 속이 조용해졌다.
폭포만 콸콸콸 힘찬 소리를 내고 있었다.
 

 46. 사실은 착한 아이란다
 
 교장선생님은 토토를 볼 때마다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넌, 사실은 정말 착한 아이란다."

 그때마다 토토는 활짝 웃으면서 신이 나 대답했다.

 "그럼요, 난 착한 아이예요!"

 그리고 스스로도 착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토토는 착한 아이의 일면도 많이 갖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특히 육체적인 장애 때문에 다른 학교 아이들한테 놀림을
받는 친구들을 위해서라면 혼이 나는 한이 있어도 상대방한테 악착같이 달려들어선 
친구들의 힘이 되고자 했고, 또 상처 입은 동물이 눈에 띄면 정성껏 돌봐주곤 했던 것
이다.

 그러나 한편, 신기한 것이나 호기를 자극하는 것을 발견하면 제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선생님들이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을 몇 번씩이나 저지르기도 했다.

 예를 들면 토토는 조회 시간에 행진을 할 때면, 곧잘 두 갈래로 땋은 머리를 양쪽 겨
드랑이 아래로 빼내 팔에 끼고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걷기도 한다. 게다가 청소 당번일
때는 전철교실 바다의 널빤지를 - 그건 모터를 점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뚜껑이었
는데 - 들어올리면 휴지를 버리고 - 막상 닫으려고 하자 다시 닫히지 않아 야단법석
을 떨기도 했다.

 또 이런 날은 누구한테 소고기는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갈고리에 매달려 있는 것'이
란 말을 듣고선, 아침부터 제일 높은 철봉에 한 손을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도 하였다.

 여자 선생님이 "왜 그러고 있니?"라고 묻자 "저는 오늘, 소고기예요!"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뚝 떨어져 "앗!"하고 소리 지른 채, 하루종일 아파서 끙끙거리기도 했다.

 게다가 점심 시간에 학교 뒷마당을 공연히 어슬렁거리다가 신문지가 펼쳐져 있는 것
을 보고는 신이 나서, 저만치서 달려와 휙! 신문지에 올라탔다가 그만 정화조 구멍으
로 풍덩 빠진 일도 있었다. 그 신문지는 청소하는 아저씨가 정화조 뚜껑을 열어두었다
가 잠시 일손을 놓는 사이에 냄새가 날까봐 덮어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토토는 자기 호기심에 자기가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교장선
생님은 그런 사건이 몇 번씩 생겨도 절대로 엄마 아빠를 학교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늘 그런 문제들은 교장선생님과 아이들의 대화로 충분히
해결되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처음 학교를 찾아간 날, 토토의 이야기를 네 시간 동안이나 들어주었던 교
장선생님은, 말썽을 일으킨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도 끝까지 다 들어주었다. 더구나 변
명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정말 그 아이가 한 행동이 바람직하지 않았을 때는, 그리고 
그 아이가 스스로 나쁘다는 걸 인정했을 때는,

 "사과하렴."

 하고 언제나 다정하게 말했다.

 분명 토토에 관한 불만이나 노파심 섞인 견해가, 아마도 학부형이나 선생님들을 통해
교장선생님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교장선생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
다, 토토에게

 "넌, 사실은 정말 착한 아이란다."

 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만약 신경 써서 이 말을 듣는 어른이 있다면, 이 '사
실은'에 아주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너한테는 사람들이 말썽꾸러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 면이 여러 가지로 많지만, 사실 
네 성격은 밝고 아주 착하지. 교장선생님은 그걸 잘 알고 있단다."

 고바야시 교장선생님은 토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안타깝게
도 그 말의 깊은 뜻을 이해한 것은 몇 십 년이 훨씬 지나서였다…. 그러나 깊은 뜻이
야 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토토의 마음속에 '나는 착한 아이!'라는 자신감을 심어준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안 그렇겠는가! 그 후로 항상 무슨 일을 할 때면, 선생님의
그 말씀을 떠올리곤 했으니까…. 다만 저지르고 나서 '앗! 왜 그랬을까?'하고 후회할
때가 가끔은 있었지만 말이다.

 
 고바야시 교장선생님은 토토의 인생에서 크나 큰 지침이 도니 이 중요한 말을, 토토
가 도모에 학원을 다니는 동안 줄곧 들려주었다.  

 "토토, 넌 사실은 정말 착한 아이란다."

 라고….


 47. 색시가 될 수 없어

 오늘 토토는 슬펐다.

 벌써 3학년이 된 토토는 같은 반 친구인 타이를 무척 좋아하고 있었다. 타이는 똑똑
하고 자연도 잘 했다. 영어 공부를 하고 있어서 '여우'를 영어로 가르쳐 준 것도 타이
였다.

 "토토, 있지! 여우는 폭스라고 해."

 (폭스….)

 그날 토토는 온종일 '폭스'라는 발음의 울림에 푹 잠겨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매일 
아침 전철 교실에 가면, 맨 처음 하는 일이 타이의 필통 속에 있는 연필을 전부 칼로 
가지런히 깎아주는 것이었다. 자기 연필은 이로 뜯어서 쓰는 주제에 말이다.


 그런데 오늘 그 타이가 토토를 불러 세웠다.

 때는 점심이었고, 토토는 강당 뒤쪽, 예의 그 정화조 뚜껑이 있는 부근에서 어슬렁거
리고 있던 참이었다.

 "토토!"

 하고 부르는 타이의 목소리가 왠지 화가 나 있는 것 같아 토토는 흠칫 놀랐다. 타이
는 잠깐 숨을 돌리고선 이렇게 말했다. 

 "나, 어른이 돼서 네가 아무리 애원해도 내 색시 삼지 않을 거야!"

 타이는 단지 그 말만 내뱉고는 고개를 숙인 채 되돌아 가버렸다. 토토는 멍하니 서서
타이의 머리가…  뇌수가 꽉 차게 들어 있는, 그러나 자기가 존경하는 머리가… 가분
수란 별명을 가진 그 머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쳐다보고 있었다.  

 토토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한참을 생각했다. 왜 타이가 그런 소리를 했는
지 짐작이 안 갔다. 어쩔 수 없이 토토는 같은 반 친구인 미요와 의논했다. 미요는 토
토의 이야기를 듣더니 어른스런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거야, 당연하잖아. 토토 너, 오늘 씨름하면서 타이를 냅다 던져버렸잖아! 타이는 
머리가 무거우니까 씨름판 밖으로 아주 나가 떨어져버렸고 말야. 화를 내게도 생겼지."

 
 토토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정말 그랬다. 날마다 연필을 깎아 줄 정도로 좋아하는 사
람을, 왜… 씨름 시간에는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던져버렸을까…. 하지만 이젠 늦었다.

 토토가 타이의 색시가 될 수 없다는 건 이미 결정 나버렸다.

 (할 수 없지, 뭐. 그래도 연필 깎아주는 건 계속해야지.)

 좋아하는 건 변함없으니 말이다….


 48. 누더기학교

 토토가 전에 다니던 학교도 그랬었지만, 언제부턴가 어린 학생들 사이에선 돌림 노래
를 부르는 유행이 번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토토가 퇴학을 당한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교문을 나와 자기들의 학교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노래했다.

 "아카마츠 학교, 누더기 학교! 들어가 보면 좋은 학교!"

 그러다가 이때 우연찮게 다른 학교 아이가 지나가거나 하면, 그 아이는 아카미츠 학
교를 손가락질하면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이렇게 깔보는 것이었다.

 "아카마츠학교 좋은 학교! 들어가 보면 누더기 학교! 우 - 우!!"

 일단 건물이 새 것인지 낡은 것인지로 '누더기'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모양인데, 정
작 중요한 것은 '들어가 보면…'이란 부분이다. 이 노래에는 아이들 역시도 '학교는 
겉모양보다 내용'이라는 인식이 분명히 있고, 따라서 '들어가 보면 좋은 학교!'가 진
짜 좋은 학교라는 그 나름의 진실미를 풍기는 구석도 있었다. 물론 이 돌림노래는 혼
자서는 부르지 않고 대여섯 명 가량 모였을 때 불러대곤 했다.

 
 그런데 오늘 오후의 일이었다.

 도모에 학원의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이 이름 정한 '추방의 종'이라는 마지막 종이
울릴 때까지 하고 싶은 걸 하면 되는 것이다.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시간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수업이 끝난 뒤인 
이 시간만큼은 여느 학교보다 넉넉하였다.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는 아이, 철봉이나 모래 놀이터에서 흙투성이가 되어 놀고 있
는 아이, 꽃밭을 손질하는 아이, 또 지붕이 있는 조그만 계단에 앉아 수다를 떠는 고
학년 여자아이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나무를 타는 아이들도 있었다. 더러는 타이처
럼 교실에 남아 플라스크에 물을 담아 공기방울이 생기도록 흔들어보기도 하고, 시험
관 같은 걸 이것저것 체크하는 아이들도 간혹 있었다. 또 도서실에서 책을 읽는 아이
도, 동물을 좋아하는 아마데라처럼 주워 온 고양이의 몸을 뒤집어보기도 하고 귓속을 
들여다보면서 뭔가를 열심히 연구하는 아이도 있었다.  

 어쨌든 모두 자유롭게 신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학교 밖에서 돌림
노래를 부르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도모에 학원, 누더기 학교! 들어가 봐도 누더기 학교!"

 그 순간 토토는 심각했다.

 (이건 너무 심하네!)

 그때 마침 토토는 교문 - 이라지만 뿌리가 있고 잎이 돋아 있는 나무다 - 바로 옆에 
있었으므로 그 노래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너무하잖아, 둘 다 누더기라니!"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다들 교문쪽으로 우르르 달려왔다. 그러자 다른 학
교 남자아이들은 더욱 큰 소리로,

 "누더기 학교! 우 - 우!!"

 라고 떠들어대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토토는 부르르 화가 났다. 그리고 분한 마음을 풀기 위해서라도 그 남자아이들을 뒤
쫓아야 했다. 그것도 달랑 혼자서 말이다. 그러나 그 발빠른 남자아이들은 순식간에 
골목길을 돌아 사라지고 말았다.

 토토는 속이 아주 상했지만 힘없이 걸어 학교 쪽으로 되돌아 왔다. 그런데 이때였다.

 토토의 입에서 무심코 이런 노래가 흘러 나왔다.

 "도모에 학원, 좋은 학교!" 

 그리고 두 걸음쯤 걸으니 이어서 그 다음 소절이 흘러 나왔다.

 "들어가 봐도 좋은 학교!"

 토토는 이 노래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학교로 들어오자마자, 일부러 다른 학
교 아이처럼 나무울타리 담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큰 소리로 불렀다. 모두에게 들리게
끔 말이다.

 "도모에 학원, 좋은 학교! 들어가 봐도 좋은 학교!"

 교정에 있던 아이들은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조용했지만, 이내 그것이 토토가
부르는 노래임을 알고 모두 재미있어 하며 밖을 나와 합창을 했다. 그리고 결국은 다
들 어깨동무를 하고 더 큰소리로 노래부르며 줄줄이 학교 둘레를 돌기 시작했다.

 사실은 노랫소리보다 각각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는 자체가 더 중요했지만 그런 것
은 미처 알지 못하고, 아이들은 그냥 재미있고 즐거워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학교 주
위를 빙빙 돌면서 노래한 것이다.

 "도모에 학원, 좋은 학교! 들어가 봐도 좋은 학교!"

 물론 아이들은 교장실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는 교장선생님이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귀기울여 이 노래를 듣고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어떤 교육자나 마찬가지겠지만 진심으로 아이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교육자는 하루
하루가 고뇌의 연속이다. 하물며 이 도모에 학원처럼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독특
한 학교가, 다른 교육 방침을 지닌 사람들한테 비난을 사고 있지 않을 리가 만무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와중에 이 아이들의 합창 소리는 교장선생님에겐 그 어떤 것보다 값진 선
물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싫증도 안 나는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끝도 없이 노래를 불렀다. 그날은 
여느 때보다 '추방의 종'이 늦게 울렸다.


 49. 리본
 
 점심을 먹고 난 휴식 시간이었다.

 토토는 한 발로 깡충깡충 뛰어 강당을 가로질러 가다 교장선생님을 만났다. 하기야 
조금 전에 같이 점심을 먹었으니 만났다고 하기도 뭐하지만, 아무튼 토토의 반대쪽에
서 선생님이 걸어왔으니 만나기는 만난 셈이었다. 교장선생님은 토토를 보고 말했다.

 "마침 잘 됐구나. 너한테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뭔데요!?"

 토토는 자기가 선생님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다 있나 싶어서 기쁜 마음으로 얼른
물었다.

 선생님은 토토의 머리에 묶여 있는 리본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 리본 말이다. 어디서 났니?"

 그 말을 들었을 때의 토토의 얼굴, 그 기뻐하는 표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안 
그렇겠는가! 토토는 그 리본을 어제부터 하고 다녔는데, 사실 그것은 토토가 찾아낸 
진품이었던 것이다. 토토는 리본이 잘 보이도록 선생님에게로 다가가서 자랑스럽게 말
했다.

 "고모가 예전에 입었던 하카마(기모노의 겉에 있는 주름 잡힌 하의 - 역주)에 달려 
있었는데, 서랍장에 넣을 때 제가 발견했거든요! 그랬더니 고모가 나더러 '토토는 눈
도 밝지'라면서 주었어요!"

 선생님은 토토의 이야기를 듣더니,

 "역시 그랬었구나…."

 라고 생각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

 토토가 자랑거리인 그 리본을 갖게 된 경위는 이렇다.

 얼마 전 고모 집에 놀러갔더니 고모는 곰팡이가 슬지 말라고 기모노 여러 벌과 함께 
여학교 시절에 입었던 자줏빛 하카마도 내다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거둬들일 
때, 토토의 눈에 예쁜 리본이 언뜻 비친 것이다.

 "어! 이거, 이거 뭐예요?"

 고모는 그 소리에 손길을 멈추었다. 그 예쁜 것이 바로 이 리본이었고, 그건 하카마 
뒤쪽 허리춤에 달려 있었다. 고모는 말해 주었다.

 "이건 치마 뒤에 멋으로 다는 리본이야, 여기에다 손뜨개질한 레이스를 붙이기도 하
고, 또 폭이 넓은 리본을 달아 커다란 나비처럼 묶는 게 고모 학교 다닐 때 유행했었
거든."

 그리고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갖고 싶은 듯 그 리본을 줄곧 만지작거리는 토토를 보고
는,

 "너한테 줄게, 이젠 안 입는 옷이니까."

 하고는 가위로 실을 잘라 리본을 떼어내어 토토에게 준 것이다. 

 그 리본은 정말 예뻤다. 고급스런 비단에다 장미꽃과 여러 가지 무늬를 수놓은 그림 
같은 리본이었는데, 폭이 넓고 태피터(일명 호박단이라고도 하며 광택이 있는 견직물 
- 역주)처럼 팽팽해서 묽으면 토토의 머리 크기만 하게 커졌다. 그리고 고모는 '외국
제'라고 말했다.

 토토는 말을 하면서도 가끔씩 머리를 흔들어, 바스락바스락 리본 스치는 소리를 선생
님에게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선생님은 좀 난감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랬었구나. 어제 미요가 토토 같은 리본이 갖고 싶다고 해서, 지유가오카에서 리본
파는 집을 한참이나 뒤졌는데도 없더니…. 그랬구나, 외국 거였구나."

 교장선생님은 마치 선생님이라기보다는 딸의 성화에 난감해 하는 아버지의 모습 그대
로였다. 그리고선 선생님은 다시 토토에게 말했다.

 "토토야, 그 리본, 미요가 샘나는 모양이니까 학교에 올 땐 안 하고 왔으면 좋겠구나. 
그래 주면 고맙겠는데, 어떻게 안 되겠니? 정말 미안하구나."

 토토는 팔짱을 끼고 선 채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뜻밖에도 토토의 입에서 금
방 대답이 굴러 나왔다.

 "그럴게요, 내일부터 안 하고 오겠어요!"

 그러자 선생님은 감격한 듯이 말했다.

 "그래!? 정말 고맙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토토는 참 서운했다. 하지만 (난 괜찮아도 교장선생님이 난처해지
면 안 되잖아)싶어 얼른 결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심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남자어른이, 더구나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교
장선생님이… 리본 가게를 열심히 찾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니 문득 가엾단 생각이 들
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이지 도모에 학원에서는 이런 식으로 나이에 상관없
이 서로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돕는 게 어느 새 일상처럼 되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토토가 학교에 간 뒤, 청소를 하러 방에 들어간 엄마는 토토가 애지중지
하는 커다란 곰인형의 목에 리본이 묶여 있는 걸 문득 발견했다. 엄마는 토토가 그토
록 좋아하며 묶고 다니던 리본을 왜 갑자기 안 하고 다니게 되었을까 몹시도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엄마의 눈에는 리본을 단 회색 곰이 도리어 화려해져서 마치 황송해 하
는 것처럼 보였다….


 50. 문병
 
 오늘 토토는 난생 처음,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군인 아저씨가 많이 있다는 병원을 찾
았다.

 서로 다른 학교에서 모인 낯선 아이들이 대략 서른 명쯤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라
에서 그렇게 하라고 지시를 내린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한 학교에서 두세 명씩, 도모
에 학원처럼 학생 수가 적은 학교는 한 명씩 문병 갈 학생들이 정해지면, 서른 명이 
한 그룹이 되어 어느 학교 선생님의 인솔하에 군인 아저씨들이 있는 병원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도모에 학원에서의 토토의 차례였다.    


 오늘의 인솔 담당은 안경을 쓰고 깡마른 어느 학교의 여자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을
따라 병원에 들어가자 흰 잠옷을 입은 군인 아저씨가 열 다섯 명쯤 침대에 누워 있거
나 일어나서 아이들을 맞이했다. 부상을 당했다는데 얼마나 아플까 하고 토토는 내심 
걱정했었는데, 아저씨들은 모두 싱글벙글 웃기도 하고 손을 흔들기도 하였다. 토토는 
아저씨들의 모습이 건강해 보여 안심했다. 그렇지만 머리에 붕대를 감은 군인 아저씨
도 꽤 있었다.

 여자 선생님은 병실 한 가운데다 아이들을 모아 놓고 먼저 군인 아저씨들에게,

 "여러분, 문병을 왔습니다!"

 라고 인사를 했다. 아이들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런 다음 선생님은 

 "오늘은 5월 5일 단옷날이니까, 다같이 고이노보리 노래를 부릅시다!"

 라고 말하고는 손을 지휘자처럼 높이 들어올렸다.

 "자, 준비됐죠? 하나, 둘, 셋! 시작!"

 여선생님은 힘차게 들어올린 손을 흔들었다. 서로 낯설어 하던 아이들은 잠시 머뭇거
리다, 다들 큰소리로 입을 모아 노래하기 시작했다.

 
 즐비한 기와집의 물결과 구름의 물결 -


 그러나 토토는 이 노래를 몰랐다. 도모에 학원에서는 이런 류의 노래를 배우지 않기 
때문이었다. 토토는 그때 침대 위에 똑바로 앉아 있는, 다정해 보이는 한 군인 아저씨
의 침대 가에 붙임성 있게 걸터앉아 '어떡하지?'하고 생각하며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 노래가 끝나자 여선생님은 다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히나마츠리(3월 3일 여자아이의 명절에 지내는 행사로 재단에 인형
을 진열하고 떡, 감주, 복사꽃들을 차려 놓는다 - 역주)입니다!"

 토토를 제외한 아이들은 또 고운 소리로 노래했다.

 
 불을 밝혀요 조그만 초롱에 -


 토토는 여전히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노래가 끝나자 군인 아저씨들이 박수를 
쳤다. 그러자 여자 선생님은 싱긋 웃더니  

 "그럼."

 하고 나서

 "여러분, 이번에는 엄마말과 아기말이예요. 자, 씩씩하게! 하나, 둘, 셋! 시작!"

 하더니 다시 지휘를 시작했다. 역시 토토가 모르는 노래였다.

 아이들이 「엄마말과 아기말」을 다 불렀을 때였다. 토토가 걸터앉은 침대의 군인 아
저씨가 토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넌 노래를 안 하니?"

 토토는 무척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문병하러 와 놓고 노래를 한 곡도 부르지 않다니
…. 그래서 토토는 침대에서 내려와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럼, 제가 아는 걸 부르겠습니다!"

 여자 선생님은 상부의 지시와는 다른 엉뚱한 사태에 약간 당황해 

 "무슨 일이죠?" 

 라고 물었지만, 토토가 이미 숨을 들이쉬고 노래를 시작하려 했기에 잠자코 듣기로 
한 모양이었다.

 토토는 도모에 학원의 대표로 부르기에는 도모에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가 좋을 거라
고 생각했다. 그래서 숨을 들이쉬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꼭꼭 씹어요
 모든 음식을 


 이내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어떤 아이는

 "어!? 이거 무슨 노래야?"

 하고 옆에 있는 아이한테 묻기도 하였다. 여자 선생님은 어떻게 지휘해야할 줄을 몰
라, 손을 그저 허공에 치켜든 채였다. 토토는 좀 창피하긴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불렀
다.

 
 씹어요 씹어요 씹어요 씹어요
 모든 음식을 


 노래를 끝낸 토토는 인사를 했다. 그런데 고개를 들었을 때, 그 군인 아저씨의 눈에
서 눈물이 흐르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뭐 잘못했나….)

 그러자 아빠보다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이는 그 군인 아저씨는 다시 토토의 머리를 쓰
다듬으며 말했다.

 "고맙구나, 정말 고맙다…."

 머리를 쓰다듬는 아저씨의 눈에서는 좀처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 때 여자 선생
님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럼, 이제 여러분의 선물인 작문을 군인 아저씨들께 읽어 드리도록 하세요."

 아이들은 자기가 쓴 글을 한 명씩 읽기 시작했다. 토토는 군인 아저씨를 다시 쳐다보
았다. 아저씨는 빨개진 코와 눈으로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토토도 웃었다. 그러
고선 생각했다.

 (다행이야, 군인 아저씨가 웃었어!)

 
 군인 아저씨의 눈물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것은 그 군인 아저씨만이 아는 일이었다. 
어쩌면 고향에 있을지도 모르는 토토 또래의 자식이 생각나서였을 지도 모르겠다. 아
니면 토토가 너무나 열심히 노래를 불러서 사랑스럽고 귀엽다고 생각해서였는 지도 모
르겠다. 또 어쩌면 전쟁터의 체험으로 (머지않아 먹을 것도 없어질 텐데, 아이들은 아
무 것도 모른 채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구나!)하고 불쌍히 여겨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군인 아저씨는 이렇듯 발랄하게 노래하는 아이들의 앞날을 가릴 먹구름의 실
체를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작문을 읽는 아이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태
평양전쟁이란 것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51. 건강 나무껍질  

 토토는 이젠 제법 친숙해진 지유가오카의 개찰구 아저씨에게, 끈을 달아 목에 두른 
정기권을 쓱 보이고 역을 나왔다. 그런데 오늘은 그곳에서 아주 재미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젊은 남자가 역 앞에서 돗자리를 깔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는데, 그 앞에 
무슨 나무껍질 같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구경꾼 대 여섯 명
이 그를 에워싸고, 잠자코 그 사람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토토도 얼른 구경꾼들 틈에 끼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 아저씨가

 "자, 여길 보세요! 여길 보세요!"

 라고 소리쳤기 때문이다. 토토가 구경꾼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저씨
가 말했다.

  "자, 사람은 건강이 제일! 아침에 일어나 내 몸이 건강한지 병들었는지 알아보는 게
이 나무껍질이에요! 아침에 이 나무껍질을 씹어 봐서 만약 쓰다면, 그건 몸이 안 좋
단 증겁니다! 만약 씹어도 아무렇지도 않으면 당신은 괜찮아, 병든 게 아닙니다! 단돈
20전으로 건강을 확인하는 나무껍질! 자, 거기 아저씨, 시험삼아 한 번 씹어 보세요!"

 그러자 구경꾼 중 약간 마른 체구의 한 사람이 나무껍질을 받아들고, 조심스레 앞니
로 질겅질겅 씹었다. 그리곤 잠시 후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점 쓴…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젊은 남자는 펄쩍 뛰며 외쳤다.

 "아저씨, 위험신홉니다! 조심하세요, 근데 아직 그렇게 나쁜 건 아닌 것 같군요. '쓴
것 같다'고만 하셨으니 말입니다. 자, 그럼 거기 아줌마! 아줌마도 이것 좀 씹어 보세
요!"

 시장 바구니를 든 한 아줌마가 꽤 큰 나무껍질을 우드득 힘 좋게 깨물었다. 그리곤 
기분 좋게 말했다.

 "어머, 어쩜! 하나도 안 쓰네요!"

 "다행이네요, 아줌마. 건강합니다, 당신은!"

 그리고 나서 젊은이는 한층 목청을 돋구어 말했다.

 "20전이요, 20전! 단돈 20전으로 매일 아침마다 자기 건강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쌉
니다, 싸요!"

 토토도 그 회색 빛이 감도는 나무 껍질을 한 번 씹어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도요!"

 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 대신 토토는 아저씨한테 이렇게 물었다.

 "학교 끝날 때까지 여기 있어요?"

 "그럼, 있지."

 아저씨는 힐끗 토토를 쳐다보고 말했다.

 토토는 책가방을 탈랑거리며 부리나케 뛰기 시작했다. 학교에 좀 늦을 것 같았고, 또
하나는 일이 생겨서였다. 그 할 일이란 교실에 도착하는 대로 아이들에게 이처럼 물어 
보는 것이었다.

 "누구, 20전 빌려 줄 사람?"

 그러나 20전을 갖고 있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긴 갑에 든 캐러멜일 10전이었으므
로 그리 큰돈은 아니었지만, 아쉽게도 20전을 가진 아이는 없었다.

 "아빠나 엄마한테 한번 물어 봐 줄까?"

 이런 떼 미요가 교장선생님의 딸이라는 게 정말 다행스러웠다. 강당 옆이 바로 자기 
집이니 엄마도 항상 학교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점심 시간이 되자 미요가 토토를 보고 말했다.

 "아빠가, 빌려 줘도 되는데 어디에 쓸 거냐고 하셨어."

 토토는 교장실로 찾아갔다. 교장선생님은 토토를 보더니 안경을 벗고 말했다.

 "20전이 필요하다고? 그래, 어디에 쓸 거지?"

 토토는 몹시 다급하게 말했다.

 "병에 걸렸는지 아닌지, 씹으면 알 수 있는 나무껍질을 사려고요."

 "그래? 어디서 파는데?"

 교장선생님은 꽤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전철역 앞이요!"

 토토는 얼른 대답했다.

 "그러냐. 좋다, 네가 그렇게 사고 싶다니. 나중에 선생님한테도 좀 줄래?"

 교장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곤 양복저고리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20전을 토토의 손
바닥에 올려놓았다.

 "우와! 고맙습니다. 엄마한테 타서 꼭 갚을 게여! 책은 늘 사주시지만, 다른 건 물어
보고 사 주거든요. 그렇지만 '건강 나무껍질'은 모두한테 필요하니까 꼭 사 주실 거예요!"

 토토는 학교가 끝나자 20전을 손에 꼭 쥐고 서둘러 전철역 앞을 갔다. 아저씨는 여전
히 큰 목소리로 외쳐대고 있었다. 토토가 주먹 쥔 손을 펴 보이자 아저씨는 싱긋 웃으
며 말했다.

 "착한 아이로구나, 엄마 아빠가 기뻐하실 거다!"

 그러자 토토가 말했다.    

 "로키도요?"

 "누군데, 로키가?"

 "우리 집 개! 셰퍼드!"

 아저씨는 나무 껍질을 고르던 손길을 갑자기 멈추더니,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개라고? 음… 뭐 괜찮을 거야. 개도 쓰면 싫어할 테니. 아무튼, 그럼 병에 걸린 거
다."

 아저씨는 폭이 3센티에 길이가 15센티쯤 되는 껍질을 골라내면서 다시 말했다.

 "잘 들어라, 아침에 씹어서 쓰면 병에 걸린 거다. 아무 맛도 안 나면 건강한 거구."

 토토는 아저씨가 신문지에 싸 준 나무껍질을 소중히 껴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자기가 먼저 씹어 보았다. 그런데 입안에서 가칠가칠하게 느껴지는 그 나무 껍질에서는 
쓴맛도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야아! 난 건강하다!"

 엄마가 영문도 모른 채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건강하고 말고. 그래서?"

 토토는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곧 엄마도 따라서 껍질을 씹어 보고는 말했다.
 
 "엄마도 하나도 안 쓴데."

 "와아! 그럼 엄마도 건강한 거야!"

 그리고 토토는 로키한테 달려가 입 앞에다 나무 껍질을 내밀었다. 로키는 킁킁 냄새
를 맡더니 혀로 슬쩍 핥았다. 토토는 급하게 말했다.

 "씹는 거야, 로키. 씹으면 병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다니까!"

 그러나 로키는 나무 껍질을 씹으려 하지 않고, 귀 뒤쪽만 자꾸 발로 긁어댔다. 토토
는 나무껍질을 로키의 입가에 바짝 갖다대고 다시 말했다.

 "로키, 씹어 봐! 병에 걸렸으면 어떻게 해!"

 로키는 할 수 없다는 듯 껍질의 끝 부분을 살짝 물었다. 그리곤 또 다시 냄새를 맡더
니 그다지 싫어하는 기색 없이 입을 쫙 벌려 하품을 했다.

 "야아, 만세! 로키도 건강하다!"

 
 다음날 아침 엄마는 용돈으로 20전을 주었고, 학교에 도착한 토토는 맨 먼저 교장실
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나무껍질을 내밀었다.

 교장선생님은 아주 잠깐,

 '이게 뭐지?'

 하는 표정으로 나무 껍질을 쳐다보곤, 다음 순간 토토가 쥐고 있던 손을 펴서 20전을
선생님에게 건네주려고 하자 그때서야 어제 일이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씹어 보세요! 씹어서 쓰면 병!"

 교장선생님은 나무 껍질을 입안에 넣고 씹었다. 그리고는 그 껍질을 찬찬히 들여다보
고 또 뒤집어 보기도 했다.

 "… 써요?"

 토토는 교장선생님의 표정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아무 맛도 안 나는데."

 교장선생님은 나무 껍질을 토토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선생님은 건강하단다. 고맙구나."

 "정말요!? 와아, 다행이다! 교장선생님도 건강하시다!"

 토토는 그날, 아이들 선생님 할 것 없이 학교의 모든 사람들한테 그 껍질을 돌아가며
씹어보라고 하였다. 그런데 쓰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모에 학원의 모든 사람들이 
그야말로 건강 그 자체였던 것이다. 토토는 정말 기뻤다.

 한편, 나무 껍질을 씹고 난 아이들은 저마다 교장선생님한테

 "나는 건강해요!"

 라고 알리러 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선생님은 정답게 말했다. 

 "그래, 다행이구나."

 그러나 군마현의 자연 속에서 태어나, 하루나산이 바라다 보이는 강가에서 자란 교장
선생님은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껍질은 누가 씹더라도 절대로 쓴맛이 나지 않는
다는 것을….

 하지만 모두가 '건강하다!'는 걸 알고 기뻐하는 토토를, 선생님은 그저 흐뭇하게 여
기고 있었기에 굳이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가 "아휴, 써!"라고 했다면 그
사람 때문에 토토가 얼마나 걱정을 하겠는가 싶기도 하고, 또 그렇게 다정다감한 아
이로 자라고 있음을 선생님은 진심으로 기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 즈음 토토는 학교 근처를 지나던 떠돌이 개에게조차 그 껍질을 입에 넣으려했다
가 물릴 뻔한 일도 있었다. 그래도 토토는 결코 당황하지 않고 소리쳤다.

 "병에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 금방 알 수 있단 말야! 조금만 씹어 봐, 네가 건강하다
는 것만 알면 그걸로 끝나!"

 드디어 토토는 그 낯선 개한테도 나무 껍질을 씹게 하는 데 성공했다. 토토는 신이 
나서 자기도 개처럼 깡충깡충 개 주위를 맴돌면서 말했다.

 "다행이야! 너도 건강해!"

 그러나 개는 고개를 숙이고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다는 양 어슬렁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교장선생님의 추측대로 그 날 이후, 그 아저씨는 두 번 다시 지유가오카에 모습을 나
타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토토는 아침마다 학교 가기 전, 마치 비버가 열심히 깨물
어 너덜너덜해진 것 같은 나무 껍질을 책상 서랍에서 조심스레 꺼내 씹어 보고는,

 "나는 건강합니다!"

 외치곤 집을 나서곤 했다.

 그리고 정말로 토토는 건강했다. 고맙게도.


 52. 영어를 하는 아이
 
 오늘은 도모에 학원에 새로운 학생이 들어왔다.

 어린 아이치곤 키도 훌쩍 크고 체격도 굉장히 좋았다. 토토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찌된 게 꼭 중학생 오빠 같네.)

 게다가 입고 있는 옷도 무척 어른스러웠다. 교장선생님은 아침에 교정에서, 아이들한
테 그 새로운 학생을 이렇게 소개했다.

 "미야자키라고 한단다. 미국에서 나서 자랐기 때문에 일본어를 잘 못해. 다른 학교보
다 우리 도모에 학원에 들어오면 친구도 빨리 사귈 수 있을 테고 또 차근차근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 오늘부터 함께 지내게 됐단다. 자, 몇 학년이 좋을까? 
어떠냐, 타이네랑 같은 5학년이면?"

 그림을 잘 그리는 타이는 언제나처럼 5학년 오빠답게 말했다.

 "좋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씽긋 웃으며 말했다.

 "일본어는 서툴지만, 영어는 아주 잘 하니까 너희들이 배우면 되겠구나. 그리고 아직
일본 생활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너희들이 친절하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기도 하고, 그
리고 미국 생활 얘기도 들어보면 좋겠구나, 재미있을 거야."

 미야자키는 자기보다 한 뼘이나 키가 작은 동급생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타이네 반 아이들도, 또 다른 반 아이들도 덩달아 인사를 하기도 하고 손을 흔들기도
했다.

 점심 시간에 미야자키가 교장선생님 집 쪽으로 가자 아이들도 우르르 따라갔다. 그런
데 미야자키가 현관으로 들어서면서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다다미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아이들은 

 "신발을 벗는 거야!"

 라고 야단스럽게 떠들며 가르쳐 주었다. 미야자키는 깜짝 놀라 얼른 신발을 벗더니,

 "미안합니다."

 라고 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제각각

 "방에서는 벗지만 전철 교실이랑 도서실에서는 안 벗어도 돼!"

 "구혼부츠 절에서도 마당에선 괜찮지만 본당에선 벗는 거야!"

 라며 종알종알 가르쳐 주었다. 아이들은 같은 일본이라도 외국에서 오래 살면 생활 
습관이 많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선 아주 흥미로워하는 듯 했다.

 
 다음날 미야자키는 영어로 된 커다란 그림책을 학교에 가져왔다.

 점심 시간에 아이들은 미야자키를 몇 겹이고 에워싸고 그 그림책을 구경했다. 그런데
그걸 본 아이들은 깜짝 놀랐다. 세상에 그렇게 예쁜 그림책은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알고 있는 그림책의 색깔이란 빨강, 초록, 노랑 정도였는데 이 그림책의 색
깔은 연한 살색 같은 핑크와, 같은 파란색이라도 흰색과 회색빛이 도는 상큼한 색깔 
등 크레용에는 없는 색깔이 섞여 있었다. 게다가 24색 크레용에는 물론이고 유일하게 
타이만 갖고 잇는 48색 크레용에도 없는 색깔이 많았다. 아이들은 그저 감탄하기에 바
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이들이 놀란 것은 그림이었다. 첫 페이지에 강아지가 아기의 기
저귀를 물고 잡아당기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아기가 그림 같지 않고 정말로 분홍색 
보드라운 엉덩이를 내놓고 거기에 살아 잇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는 크고 두꺼운 데다가, 그렇게 매끈한 종이로 만들어진 그림책은 처음이라 더욱 놀라
지 않을 수 없었다. 토토는 물론 그림책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그것도 미야자키 곁에
붙임성 있게 꼭 들러붙어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미야자키는 먼저 영어로 문장을 읽어 주었다. 너무도 유창한 발음이라서 아
이들은 다시금 황홀해 했다. 그리고 나서 미야자키는 더듬더듬 일본말로 해석해 주었
다. 정말이지, 지금 미야자키는 도모에 학원에 색다른 그 무엇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아기, 베이비."

 미야자키가 하는 대로 아이들이 따라 소리를 냈다.

 "아기는 베이비!"

 그러자 또 미야자키가 말한다.

 "아럼답다는 뷰티풀."

 "아름답다는 뷰티풀."

 아이들이 미야자키의 일본어 발음을 고쳐서 말하자, 미야자키는 곧 자신의 일본어를 
정정했다.

 "미안해, 아럼답다, 발음 틀렸지…. 아름답다?"


 이렇게 하여 도모에 학원의 아이들은 미야자키와 금방 친해졌다. 미야자키는 날마다 
그림책을 가져와 점심 시간이면 친구들에게 열심히 읽어 주었다. 덕분에 미야자키는 
아이들의 영어 선생님이 된 듯 뿌듯해 했다. 물론 일본어 실력도 하루가 다르게 부쩍
부쩍 늘어갔다. 그리고 도코노마(일본식 방의 상좌에 바닥을 한층 높게 만든 곳, 족자
나 꽃병으로 장식한다 - 역주)에 걸터앉는 일도 없어졌다.

 토토와 아이들도 역시 미국이란 곳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도모에 학원에서
는 일본과 미국이 친구가 된 셈이었다. 그러나 도모에 학원 밖에선 미국을 비롯한 여
러 나라는 적이었고, 따라서 영어는 적국의 언어라는 이유로 모든 학교 수업에서 배제
되었다. 심지어 정부에서는 '미국 사람은 귀신!'이라는 발표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 같은 때, 도모에 학원의 아이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외치곤 있었다.

 "아름답다는 뷰티풀!"

 도모에 학원 위를 스쳐 지나는 바람은 아직 따스했고, 아이들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53. 학예회
 
 "연극이다, 연극! 학예회다!"

 갑자기 교실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도모에 학원이 문을 연 이래 첫 학예회를 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날마다 점심 시간이면 앞에 나가 한 사람씩 이야기하는 시간이 계속되고는 있지만 강
당에서 학부형들을 모시고 학예회를 열다니…. 더구나 리드미크 시간에 교장선생님이 
연주하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는 조금만 무대에 오를 수 있다니! 아이들은 꿈만 
같아했다.  


 연극이란 것을 본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토토만 해도 발레 「백조의 호수」외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학년 별
로 무대에 올릴 작품을 열심히 검토했고, 마침내 토토네 반은 사실 도모에 학원의 분
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교과서에 나와 있는 「불전 장부」를 공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마루야마 선생님이 연극지도를 맡게 되었다.

 그 다음엔 배역을 정했다.

 스님으로 변장한 벤케이 역은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사이쇼가 적격이라는 의견이었고,
토가시 역은 성실하고 목소리가 쩌렁쩌렁한 아마데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요시츠네
역은 모두들 의논한 결과 토토가 맡게 되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수도승 역이었다.

 우선 아이들은 연습에 들어가기에 앞서 대사를 외워야만 했다.

 그런데 토토와 수도승 역은 대사가 없어서 매우 편했다. 수도승은 내내 잠자코 서 있
으면 되었고, 또 토가시가 지키고 있는 '아타카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 벤케이
가 주인인 요시츠네 앞에 나서서 "이 자는 보잘 것도 없는 수도승입니다."라고 할 때,
요시츠네 역을 맡은 토토는 그냥 웅크리고 있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벤케이 역을 맡은 사이쇼는 정말 큰일이었다. 토가시와 이런저런 대사가 오가
는 장면 말고도 아무 것도 씌어 있지 않은 두루말이 문서를 꺼내, 토가시가

 "읽어보십시오."

 라고 하는 장면이 있어

 "본디 도다이 절 건립을 위해… 이러쿵저러쿵…."

 하고 즉흥적으로 대사를 지어, 적인 토가시를 감동시키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사이쇼는 "본디… "하며 중얼중얼 자기 대사를 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토가시 역의 아마데라도 벤케이에게 윽박지르는 대사가 많았으므로 숨가쁘게 외우고 
있었다.

 
 드디어 연습이 시작되었다.

 토가시와 벤케이가 마주 서 있고, 벤케이 뒤에 수도승들이 죽 섰다. 물론 토토는 수
도승들 앞에 있었다.

 그런데 토토는 이야기의 내용을 미처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벤케이가 요시츠네인
토토를 밀쳐내고 몽둥이로 때리자 사납게 저항했다. 사이쇼의 다리를 차기도 하고 할
퀴기도 하면서…. 결국 사이쇼는 울음을 터뜨렸고, 수도승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했
다.

 이야기는 아무리 벤케이가 요시츠네를 때려도 요시츠네가 당하고만 있어서, 결국은 
토가시가 벤케이의 괴로운 심증을 헤아리고 '아타가 관문'을 통과시켜 준다는 내용이
었다. 그러므로 요시츠네가 반항해서야 연극이 아예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마루야마 선생님은 토토에게 그러한 상황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러나 토토는 고집
을 부리며 말을 듣지 않았다.

 "사이쇼가 때리면 나도 때릴 거예요!"

 
 연습은 제자리걸음을 하였다.

 몇 번이나 그 부분을 반복해도 토토는 가만히 있지 않고 반항하였다. 보다 못한 마루
야마 선생님이 토토에게 말했다.

 "휴…. 안 됐지만 요시츠네 역은 타이에게 맡겨야겠다."

 토토에게도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자기 혼자만 맞고 나동그라지기는 싫었으므로. 
그리고 마루야마 선생님은 말했다.

 "그 대신 토토는 수도승을 하렴."

 그래서 토토는 수도승 줄 맨 끝에 섰다.

 (자, 이젠 아무 문제없겠지!)

 다들 이렇게 생각했겠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수도승들이 산을 오르내릴 때 사용하는 
긴 막대를 토토에게 건넨 게 잘못이었던 것이다.

 토토는 서 있다 지루해지면 그 막대로 옆에 있는 수도승의 다리를 쿡쿡 찌르거나, 한
명 건너 서 있는 수도승의 겨드랑이를 간지르기도 했다. 또, 그 긴 막대로 지휘자 흉
내를 내기도 하여 주위에 있는 아이들이 찔릴 뻔하기도 했다. 덕분에 연습이 다시 엉
망이 되고 말았다. 결국 토토는 수도승 역도 못하게 되었다. 

 한편, 요시츠네가 된 타이는 이를 악물어가며 맞기도 하고 걷어차이기도 하여 보는 
아이들의 동정심을 찼다. 모두들 그 예전의 토가시가 그랬던 것처럼,

 (아유, 불쌍해….)

 하고 생각할 게 틀림없었다.

 
 연습은 토토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외톨이가 된 토토는 교정을 나왔다. 그리곤 맨발로 '토토식 발레'를 추기 시작했다. 
자기 스타일로 춤을 추면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곤 했으니까…. 토토는 백조가 되었다
가 바람이 되었다가, 또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가 나무가 되기도 하였다.

 토토는 아무도 없는 교정에서 하염없이 혼자 춤을 추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역시 요시츠네를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하게 되면 또 사이쇼를 할퀴고
때리고 할 게 분명했다.

 그리하여 도모에 학원의 역사상, 전후를 막론하고 딱 한 번뿐이었던 학예회에 토토는
아쉽게도 참가할 수 없었다.


 54. 분필 낙서

 도모에 학원의 아이들은 남의 집 담벼락이나 길거리에 낙서를 하는 법이 없었다. 왜
냐하면 그런 낙서는 이미 학교 안에서 충분히 하고 있었으므로…. 그 낙서란 바로 이
런 것이다.


 음악 시간에 아이들이 강당에 모이면 교장선생님은 모두에게 하얀 분필을 나누어 준
다. 그러면 아이들은 강당 마룻바닥, 자기가 차지하고 싶은 자리에서 뒹굴거나 쪼그리
고 앉거나 아니면 반듯하게 앉은 자세로 분필을 들고 준비한다. 아이들이 이러한 준비
를 다 끝내면, 이윽고 교장선생님이 피아노를 친다. 그러면 모두가 그 강당 바닥에서 
선생님이 들려주는 음악의 리듬을 음표로 그리는 것이다….

 연갈색의 매끈한 마룻바닥에다 쓱쓱 분필을 그어대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로 좋았다. 그리고 넓은 강당에는 고작해야 토토네 반 아이들 열 명 정도가 흩어져 있
으므로, 아무리 큰 음표를 그려도 다른 친구들과 부딪칠 염려가 없었다. 게다가 음표
도 오선 위에 정해진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리듬을 그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그건 교장선생님과 학생들이 의논해서 결정한, 이른 바 '도모에식 음표'였다.

 이를테면, 


   는 깡충 리듬 (깡충거리고 뛰기에 적합한 리듬이므로)
   는 깃발 (깃발처럼 보이므로)
   는 깃발깃발
   는 겹깃발 (깃발 두 장)
   는 검정
   는 하양 
   는 하양에 점 (혹은 하얀 점)
   는 동그라미 (온음표)


 등 이런 식이라 음표에 쉬 익숙해질 수 있고 재미도 있어, 모두들 이 시간만큼은 신
나게 수업했다. 

 그렇게 강당 바닥에다 분필로 음표를 그리는 발상은 물론 교장선생님한테서 나온 것
이었다. 종이면 자꾸만 비져나가기 십상이고, 또 칠판은 다함께 그리기엔 비좁다. 그
러나 강당 바닥을 커다란 칠판 삼아 분필로 그리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있고, 아무
리 빠른 리듬이라도 척척 마음껏 크게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음악을 한
껏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도 시간이 남으면 비행기든 인형이든 마음대로 그려
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 옆 친구 그림까지 이어지게 하면서 모두가 이어
가기 놀이를 하면, 온 강당 바닥에 하나의 그림이 그려지기도 하였다.

 그렇게 한 곡을 음표로 그리는 작업이 다 끝나면, 교장선생님이 이윽고 무대에서 내
려와 한 사람씩 돌아보는 식으로 음악 수업은 진행되었다. 그러면서 

 "잘 그렸구나."

 "여긴 깃발깃발이 아니라 깡충 리듬이지."

 라고 지적해 주었다.

 그렇게 모두들 바로 고치고 나면, 교장선생님은 같은 음악을 다시 한 번 들려준다. 
그러면 아이들은 리듬을 듣고 확인하면서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아
무리 바빠도 이 시간만큼은 다른 선생님한테 맡기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 역시 고바
야시 교장선생님이 아니면 그다지 재미있어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곤란한 것은, 이 음표 수업이 끝난 다음 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우선
칠판 지우개로 분필을 닦아내곤 한 명도 빠짐없이 손걸레나 장대걸레로 바닥을 말끔
히 닦아내야 했는데, 강당 전체를 다 닦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도모에 학원의 아이들은 '낙서를 하면 뒤처리가 큰일이다!'란 사실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러기에 강당 바닥 이외에는 결코 낙서를 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
히 말하자면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이 수업을 통해서 낙서의 즐거움을 충분히 만끽하고
있었으므로 다른 곳에다 낙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도모에 학원의 아이들은 '분필의 감촉은 어떻다'든지, '어떻게 쥐고, 어떤 식으로 움
직이면 잘 쓸 수 있다'든지, 또 '분필을 부러뜨리지 않는 방법' 같은 것도 아주 잘 알
고 있었다. 다시 말해 아이들 모두가 '분필 평론가'로 나서도 될 만큼 분필에 정통해 
있었던 것이다.   


 55. 야스아키가 죽었다

 봄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에 나온 첫날 아침이었다.

 교정에서 고바야시 선생님은 여느 때처럼 두 손을 윗도리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모습
으로, 아이들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더니 호주머니에서 두 손을 빼고, 아이들을
쳐다보며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야스아키가… 죽었단다. 오늘 다함께 장례식에 가도록 하자. 야스아키는 너희들 모
두의 친구였지…. 무척 유감스럽구나. 선생님도, 슬픈 마음을 금할 길이 없구나…."

 거기까지 말하곤 선생님은 눈시울을 붉히며 끝내 눈물을 떨구었다.

 아이들은 멍하니, 누구도 한 마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아이들 가슴에 저마다 야스아
키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나고 있음이 분명했다. 지금껏 이토록 슬픈 정적이 도모에 학
원의 교정을 감싼 일이 없었다.

 토토는 생각했다.

 (그렇게 빨리 죽다니…. 봄방학 하던 날 야스아키가 읽어보겠냐며 빌려 준 「엉클 톰
의 오두막집」, 아직 끝까지 다 읽지도 못했는데….)

 토토는 마음속으로 야스아키를 떠올리고 있었다. 

 봄방학 하던 날, 헤어지면서 책을 건네던 굽은 손가락…. 그리고 처음 만난 날,

 "왜 그렇게 걷니?"

 라고 묻던 토토에게,

 "나, 소아마비야."

 라고 상냥하게 조용히 일러주던 때의 그 목소리와 살짝 웃음 띤 얼굴…. 그리고 그 
여름, 둘만의 대 모험…. 비밀로 간직한 나무 타기도(토토보다 나이도 많았고 키도 컸
지만 토토를 믿고 모든 걸 맡겼던 그때, 자기가 느꼈던 그 야스아키의 무게까지 그리
웠다)…. '미국에는 텔레비전이란 것이 있다'고 가르쳐 준 것도 다름 아닌 야스아키였
다.

 토토는 야스아키를 좋아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이나 학교 끝나고 전철역까지 
갈 때도 둘은 항상 함께였다…. 그 모든 것이 지금 너무도 그리웠다. 그러나 토토는 
이제 두 번 다시 야스아키가 학교에 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죽음이란 건 
그런 거였으니까…. 그 귀엽던 병아리가 죽었을 때도, 아무리 불러도 병아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었다. 


 장례식장은 야스아키 집이 잇는 덴엔조후의 테니스 코트 근처에 있는 성당이었다. 야
스아키의 집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도모에 학원의 아이들은 한 줄로 서서 지유가오카에서 성당까지 묵묵하게 걸어갔다. 
항상 두리번거리는 토토도 줄곧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처음 교장선생
님한테 소식을 들었을 때와 지금의 생각이 조금 다르다는 걸 느꼈다. 아까는 (믿을 수
없다!)는 마음과 (그립다!)는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꼭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살아 있
는 야스아키를 만나고 싶다.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
았다….

 성당 안은 하얀 백합 향기가 그윽했다.

 야스아키의 예쁜 누나와 엄마, 그리고 친척들이 검은 옷을 입고 입구에 서 있었다. 
가족들은 아이들을 보더니 더욱 슬피 울었다. 다들 흰 손수건을 꼭 쥐고 있었다. 토토
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장례식을 보았다. 그리고 장례식은 슬픈 거라는 걸 알았다. 말
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르간만이 조용히 찬송가를 연주하고 있었다.

 교회 안은 햇살이 들어 환했지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밝은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팔에 검은 리본을 두른 남자가 도모에 학원 아이들에게 하얀 꽃을 한 송이씩 나누어주
며, 그걸 들고 한 줄로 서서 성당 안으로 들어가 야스아키가 잠들어 있는 관에 살짝 
넣으라고 설명해 주었다.


 야스아키는 관속에 있었다.

 꽃에 둘러싸인 채 영원히 잠들어 있었다. 비록 죽었지만 여느 때처럼 상냥하고 영리
해 보였다. 토토는 무릎을 꿇고 야스아키의 손에 꽃을 올려놓았다. 그리곤 야스아키의
손을 살짝 만져 보았다. 토토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잡아당겼던 그리운 손…. 지저분
하고 조그만 토토의 손에 비하면 야스아키의 손은 하얗고 손가락도 길어서 참 어른스
러워 보였다.

 (안녕.)

 토토는 조그만 소리로 야스아키에게 말했다.

 (언젠가 우리가 아주 많이 자라거든, 또 어디선가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땐 소아마비
가 다 나아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토토는 일어나 다시 한번 야스아키를 바라보았다. 그래, 중요한 걸 잊고 있었
다.

 (「엉클 톰의 오두막집」, 이제 돌려줄 수 없겠네. 그렇담 내가 맡아 둘게.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그렇게 말하고 토토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야스아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토토, 여러 가지로 즐거웠어. 널 잊지 않을 거야!'

 (그래.)

 토토는 성당 출구에서 뒤돌아보며 말했다.

 (나도 야스아키를 잊지 않을게!)


 환한 볼 햇살이…. 처음 전철 교실에서 야스아키를 만난 날처럼, 그렇게 봄 햇살이 
토토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토토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만은 야스아키를 처음 만
난 날과 달랐다….


 56. 여자 스파이

 야스아키의 일로 도모에 학원의 아이들은 한동안 슬픔에 잠겨 지냈다. 특히 토토네 
반 아이들은 아침마다 수업이 시작되어도 오지 않는 야스아키가, 지각이 아니라 이제
는 영영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적응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평소에는 한 반
에 열 명밖에 없어서 좋았는데 이런 땐 (참 안 좋다)고 다들 생각했다.

 '야스아키가 없다!'

 는 사실이 아무래도 눈에 띄기 쉬운 탓이었다.

 그나마 아이들의 자리가 한 군데로 정해져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만약 야스아키의 
자리가 정해져 있어 그 자리가 늘 비어 있었다면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도모에 학원 아이들은 날마다 자리를 바꿔가며 앉아도 상관없기 때문에, 그 점은 감사
할 일이었다.

 요새 토토는 이 다음에 크면 '뭐가 될까?'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보다 어렸
을 때는 친동야나 발레리나를 꿈꾸었고, 처음 도모에 학원을 찾던 날에는 전철역에서 
표를 파는 사람도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좀 여성스러우면서도 뭔가 독특한 일
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간호사도 좋겠다!)

 하고 토토는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토토는 금방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얼만 전에 군인 아저씨들 문병하러 병원에 갔을 때, 간호사 언니가 주사 같은 것도 
놓고 그랬었지! 흐음…. 좀 어려울 것 같네. 그렇다면 뭐가 좋을까?)

 이렇게 중얼거리다 갑자기 토토는 가슴이 벅차오는 것을 느꼈다.

 (아이 참, 내 정신 좀 봐! 벌써 다 정해놓고서!)

 토토는 타이한테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때마침 타이는 교실에서 알코올램프에다 불을
붙이고 있었다. 토토는 우쭐해하며 말했다.

 "나, 스파이가 될까 해!"

 타이는 알코올램프의 불빛을 쳐다보던 눈길을 토토한테로 돌리고는, 토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깐 생각이라도 하듯 시선을 창 밖으로 주었다가 다시 
토토를 바라보더니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그리고 토토가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말했다.

 "스파이가 되려면 머리가 좋아야 돼. 게다가 여러 나라 말도 할 줄 알아야 되고, 그
리고…."

 거기까지 말하더니 타이는 잠깐 숨을 돌렸다. 그리곤 다시 똑바로 토토를 쳐다보고 
말했다.

 "…무엇보다 여자 스파이는 얼굴이 예쁘지 않으면 될 수가 없어."

 토토는 천천히 타이한테서 시선을 거두어 아래로 떨구고는 고개마저 약간 숙였다. 타
이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이번에 토토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심사숙고하여 하는 
말이라는 양 조그맣게 말했다.

 "더구나 수다쟁이는 스파이가 될 수 없지 않을까…."

 토토는 깜짝 놀랐다. 타이가 스파이가 되는 걸 반대해서가 아니었다. 타이의 말이 전
부 옳았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타이의 말은 하나같이 수긍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토토는 자기가 스파이가 될 수 있는 재능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음을 마침내 알았다.

 타이가 심술을 부리느라 하는 소리도 물론 아니었다. 스파이는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의논하길 잘했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토토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대단하네! 타이는 나이도 나랑 같은데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알고 있지? 만약 타이
가 나한테 '나, 물리학자가 될까 생각하는데!'라고 말하면 나는 대체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넌 알코올램프에다 불을 잘 붙이니까 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런 말은 좀 유치하지 않을까.

 (넌 영어로 여우를 폭스라고 하고, 신발을 슈즈라고 한다는 것도 알고 있잖아. 될 수
있을 거야…?)

 이것도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토토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타이는 어쨌든 머리 좋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잘 어울릴 거야!)

 그래서 토토는 잠자코 플라스크 속의 거품을 들여다보고 있는 타이한테 다정하게 말
했다.

 "고마워. 나, 스파이는 관둘래. 그치만 너는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타이는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펼쳐진 책 속에 얼굴을 묻
어 버렸다.

 (스파이도 되긴 틀렸으니…. 이젠 뭐가 되면 좋을까?)

 토토는 타이와 나란히 알코올램프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57. 아빠의 바이올린

 전쟁은 어느 틈엔가 토토네 생활 속에서 그 무시무시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이웃에 사는 아저씨와 오빠들이 국기와 '만세! 만세!'소리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갔다. 가게에서는 먹을 것도 가뜩이나 구하기 어려워 졌다. 그러니 도모에 학원
의 도시락, '산과 들과 바다'를 실천하기도 힘들어졌다. 그래도 엄마들은 그럭저럭 김
과 매실짱아찌 산과 바다의 구색을 갖추긴 했지만, 그나마 차츰 어려워지고 있었다. 
또한 무엇이든 모두 배급제가 된 탓에 과자 같은 건 아예 구경할 수도 없었다.

 
 토토는 집으로 가는 전철역에서 한 정거장 전인 오오카야마 역 계단 아래쪽에, 동전
을 넣으면 캐러멜이 나오는 기계가 있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 기계의 위쪽에
는 먹음직스런 캐러멜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작은 상자가 5전, 길쭉한 상자가 10전이
었다.

 그렇지만 그 기계 속엔 벌써 오래 전부터 캐러멜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돈을 넣고 두들겨 봐도 감감무소식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토토는 다른 아이보다 집요
했다.

 (혹시 한 상자쯤 남아 있을지도 몰라!)

 (어딘가에 걸려 있다가 쏙 나올지도 몰라!)

 이런 생각으로 매일같이 일부러 도중에 내려 5전짜리와 10전짜리를 넣고 시험해 보
곤 했다. 하지만 번번이 동전만 땡그랑! 소리를 내며 도로 나올 뿐이었다.

 그 즈음에 아빠한테 누군가가 제의를 하였다. 무기나 기타 전쟁 물자를 만드는 군수
공장이라는 곳인데 그 곳에서 바이올린으로 군가를 연주해 주면 설탕이나 쌀, 양갱 같
은 것을 듬뿍 주겠다는, 여느 사람들 같으면 귀가 솔직해질 제의였다. 특히 그 무렵 '
우수 음악가'로 표창까지 받은 아빠는 이름이 꽤 알려진 바이올리니스트이니까 선물도
섭섭지 않게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제의를 한 사람은 덧붙였다.

 엄마가 아빠한테 물었다.

 "어떡할래요, 가 볼 거예요?"

 그러고 보니 근래 들어 아빠의 연주회 횟수가 부쩍 줄었다. 무엇보다 오케스트라 멤
버들 가운데 군대에 소집당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결원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또 라디
오 방송 쪽도 전쟁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 차지해 아빠의 일은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그러니 지금은 이런 일도 감지덕지해야 할 터였다.

 그렇지만 아빠는 엄마의 물음에 시간을 들여 이렇게 대답했다.

 "…내 바이올린으로, 군가를 연주하고 싶지 않아."

 엄마는 말했다.

 "그래요, 거절해요, 먹을거리는 무슨 수가 나겠지요."

 아빠도 토토가 먹을 것이 변변치 못하여 매일 헛수고인 줄 알면서도 캐러멜 판매기에
돈을 넣어 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잠깐 가서 군가를 연주하고 선물을 받아 오
면 집안이 다소나마 풍족해지고, 더군다나 토토한테도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일 수 있
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아빠에겐 자신의 음악이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그리고 엄마도 그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잠깐 갔다 오면 좋을 텐데…."

 라는 말 따위를 하지 않았다.

 아빠는 힘들여 말하고는 슬픈 얼굴로 토토에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토토야…."

 토토는 아직 예술이나 사상, 그리고 일이 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아빠가 너무나 바
이올린을 사랑한 나머지 의절까지 하였고, 그 때문에 가족이나 친척 사이에서 없는 사
람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후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
고 바이올리니스트의 길을 걸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도 아빠가 싫어하
는 건 연주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토토는 아빠 주위를 맴돌면서 씩씩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나도 아빠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걸!"

 
 하지만 다음날도 역시 토토는 오오카야마 역에서 내려 캐러멜이 나오는 입구를 들여
다보았다. 결코 아무 것도 나올 리 없는 그 입구를….


 58. 약속

 점심 도시락을 먹고 둥그렇게 놓여 있는 책상과 의자를 치우면 강당은 저만치 넓어진
다…. 지금 토토는 이렇게 마음먹고 있었다.

 (오늘은 내가 맨 먼저 교장선생님을 올라타야지!)

 하지만 이 생각은 이제껏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늘 생각만 그럴 뿐이었다. 잠
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강당 한가운데서 가부좌를 하고 있는 선생님의 다리 사이로 
벌써 누군가 기어 들어가고, 또 등에는 둘쯤 올라타선 법석을 떨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교장선생님은 벌개진 얼굴로 웃으면서 말했다.

 "얘들아, 그만! 그만!"

 그럴수록 아이들은 일단 점령한 선생님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필사적이었다. 
그러니까 할 발 늦으면 왜소한 교장선생님의 몸은 이미 북새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토토도 오늘만큼은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선생님이 오기 전부터 강당 한가운
데서 선생님을 기다렸다. 그리고는 선생님이 다가오자 이렇게 외쳤다.

 "선생님, 저기요! 얘기, 얘기할 게 있어요!"

 선생님은 가부좌하려고 앉으면서 흔쾌히 물었다.

 "그래, 뭐냐? 할 얘기란 게."

 토토는 며칠 전부터 마음속에 담고 있던 말을 오늘 분명하게 선생님한테 말할 생각이
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가부좌를 하고 앉자마자,

 (에이, 오늘 올라타는 건 관두자.)

 고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런 이야기는 정식으로 마주 앉아 하는 것이 옳지 않
을까 싶어서였다.

 토토는 선생님한테 바짝 다가가 마주하고 자기도 정좌를 하였다. 그리곤 얼굴을 약간
숙이고선, 어려서부터 엄마나 다른 사람들이 '이쁜 얼굴!'이라며 칭찬하던 표정을 지
었다. 이를 약간 드러내고 웃는 의젓한 얼굴이다. 물론 토토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자기가 착한 아이란 자신감이 강하게 있을 때다.

 선생님이 무릎을 내밀면서 바싹 다가앉아 물었다.

 "무슨 얘기니?"

 토토는 마침 선생님의 누나나 어머니라도 된 양, 천천히 부드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 크면 이 학교 선생님이 되겠어요. 꼭이요."

 선생님은 웃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진지한 얼굴로 토토에게 물었다.

 "약속할 수 있지?"

 선생님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토토가 '그렇게 해 주길' 바라는 빛이 역력했다. 토토는
고개를 끄덕 하고는,

 "약속!"

 이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며

 (정말이야. 꼭 될 거야!)

 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 순간 토토는 처음 도모에 학원을 찾았던 아침, 벌써 먼 옛날처럼 느껴지지만 그 1
학년 때… 교장실에서 선생님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네 시간씩이나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선생님을…. 이전에도 이후에도 자기 이야기를 네 시간씩이나 이토록 들어
준 어른은 없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오늘부터 넌 이 학교의 학생이란다."

 라고 말씀해주시던 선생님의 따스한 목소리…. 지금 토토는 그때보다 훨씬 더 (고바
야시 선생님이 너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선
생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토토의 결심을 듣고서는, 언제나처럼 이가 빠진 입 속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토토는 선생님 앞에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선생님도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뭉툭하나, 강하고 믿음직스러운 새끼손가락이었다.

 토토와 교장선생님은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선생님은 웃고 있었다. 토토 역시 기뻐하는 선생님의 모습에 안심하며 웃었다. 도모
에 학원의 선생님이 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내가 선생님이 된다면….)

 토토가 이런저런 상상 끝에 생각해 낸 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공부는 조금만 하고, 운동회랑 코펠로 밥짓기랑 야영 같은 걸 많이 하고, 그리고 산
책!)

 고바야시 선생님은 무척 기뻤다. 그리고 어른이 된 토토를 상상하기는 물론 어려웠지
만, 틀림없이 도모에 학원의 선생님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누구든 도모에
를 졸업한 아이라면 동심을 잃어버리지 않을 터이므로….

 폭탄을 실은 비행기가 언제 상공에 나타날지 그건 시간 문제라는 소문이 나돌 무렵, 
그러나 전철이 늘어선 도모에 학원의 교정에서는 교장선생님과 아이들이 십 년도 더 
먼 앞날의 약속을 하고 있었다. 


 59. 로키가 사라졌다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군인들이 죽어가고, 먹을 것이 없어지고….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지내는 동안에도 여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태
양은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에도 패배한 나라에도 골고루 빛을 뿌려주었다.


 토토는 가마쿠라의 친척집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고 지금 막 도쿄의 집으로 돌아온 참
이었다. 도모에 학원에서의 즐거웠던 야영이나 도이온천 여행 같은 것은 이제 가능하
지 않았다. 학교 친구들과 함께 보냈던 여름 방학도 두 번 다시 누릴 수 없을 것 같았
다. 

 그리고 해마다 찾아가 사촌들과 지내는 가마쿠라의 친척집도 다른 때와는 딴판이었다. 
매번 무서워서 모두가 울음보를 터뜨릴 정도로 귀신이야기를 들려주던 친척오빠가 
입대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이젠 귀신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

 게다가 미국의 이런저런 생활을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모를 만큼 재미있게 들려주던 
큰아버지도 전쟁터로 가고 없었다. 큰아버지는 일급 보도 카메라맨이었는데, 이름은 
다구치 슈즈라고 한다. 그는 토토 아빠의 바로 위형으로, 친형제이면서도 토토네 아빠
만이 육도 할머니 집안의 성을 따랐기 때문에 이름이 달랐다. 사실 토토의 아빠도 다
구치란 성을 이어 받았어야 했다.

 어쨌든 큰아버지가 찍은 여러 뉴스 영화가 영화관에서 수시로 상영되었지만, 전쟁터
에서 필름만 보내오는 것이라 큰 엄마나 사촌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왜냐
하면 보도 카메라맨은 항상 군인들의 위험한 상황을 찍기 때문에, 그들보다 훨씬 앞서
가 기다리고 있다가 찍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뒤따라갔다가 군인들의 
뒷모습밖에 찍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길이 없으면 군인들보다 먼저 그 없는 길을 헤
치고 나가 앞이나 혹은 옆에서 찍는 게 일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가마코라의 바닷가도
어딘지 모르게 허전했다.

 그런 와중에 이상한 건 큰집의 맏아들인 남자아이, 야라는 아이였다. 토토보다 한 살
아래였는데, 이따금 잠들기 전 토토와 다른 아이들의 잠자리인 모기장 안에서 "천황
폐하, 만세!"라며 풀썩 고꾸라져 전사하는 군인 흉내를 몇 번이나 진지하게 내곤 했던
것이다. 그건 어찌 보면 참 슬픈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런 날 밤이면 무슨 까닭인
지 꼭 한밤중에 깨서는 툇마루에서 굴러 떨어져 한바탕 소동을 벌이곤 했다.


 토토의 엄마는 아빠의 일 때문에 아빠와 함께 도쿄에 그냥 있었다. 그리고 여름방학 
마지막 날인 오늘, 마침 도쿄로 돌아가는 친척 언니가 있었기에 토토를 집까지 데려다
준 것이었다.

 집에 돌아온 토토는 우선 늘 하던 대로 로키부터 찾았다. 하지만 로키는 어디에도 없
었다. 집안은 물론이고 마당에도, 또 아빠가 취미로 기르는 난이 있는 온실에도…. 토
토는 걱정이 되었다. 평소 같으면 어디에 있든 달려오는 로키였으므로, 토토가 집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큰길까지 나가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그리운 로키의 눈과 귀, 그리고 
꼬리는 계속해서 보이지 않았다.

 토토는 문득 자기가 밖에 나와 있는 동안, 혹시 로키가 집에 돌아와 있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에 다시 집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로키는 역시 돌아와 있지 않았다. 그제서야 
토토는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로키는?"

 아까부터 토토가 로키를 찾느라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엄
마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토토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다시 물었다.

 "엄마, 로키는요?"

 엄마는 몹시 대답하기 곤란한 듯 말했다.

 "없어졌단다…."

 토토는 믿을 수 없었다.

 (없어졌다니!)

 "언제?"

 토토는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엄마는 (어떻게 해야 하나…)하는 애처로운 심정으로 말했다.

 "네가 가마쿠라고 떠나고 나서, 바로…."

 그리고는 엄마는 서둘러 덧붙였다.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 멀리까지 가보고 사람들한테도 물어봤지만 소용없었어. 너한
테 뭐라고 해야 좋을지 엄마가 쭉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껏 자기가 아무리 먼 곳으로 여행을 가도 로키는 절대로 멀리 나간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토토가 꼭 돌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한테 말도 없이 로키가 나갔다니, 절대로 그럴 리 없어!)

 그건 차라리 확신에 가까웠다. 그러나 토토는 더 이상 엄마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
다. 엄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던 것이다.

 토토는 고개를 떨군 채 엄마가 들으라는 듯 말했다.

 "어디로 간 거지…."

 그리고 간신히 그렇게 말하고는 2층 제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로키가 없는 집안은 마치 딴 집만 같았다. 토토는 방에 들어가서 복받치는 울음을 참
으며 다시 생각해 보았다. 로키한테 자기가 심술궂게 하지는 않았는지, 또 집을 나가
고 싶게끔 하진 않았는지…. 고바야시 선생님도 언제나 도모에 학원의 아이들에게 말
하곤 했었다.

 "동물을 속이면 못쓴다. 너희들을 믿고 따르는 동물을 배신하는 짓을 하면 얼마나 가
엾은 일이겠니. 개 더러 '손 내밀면 과자 줄게'하면서 손을 내밀게 해놓고, 아무 것도 
안 주고 그러지 말거라. 개는 너희들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될 게고 성격도 아주 나빠
진단다."

 따라서 그 말씀을 평소 잘 지키고 있는 토토가 로키를 속일 리 없는 데다 짐작이 가
는 일도 없었다.

 그때 토토는 마룻바닥에 놓여 있는 곰 인형의 발치에 무언가가 달라붙어 있는 걸 보
았다. 그러자 터져 나오는 눈물을 여태 참았던 토토는…. 마침내 소리내어 울기 시작
했다.

 그건 로키의 연갈색 털이었다. 토토가 가마코라로 떠나는 날 아침, 로키와 여기로 장
난치면서 뒹굴 때 빠진 털이었다. 토토는 몇 오리가 안 되는 로키의 털을 손에 쥔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토토는 야스아키에 이어 또 한번 소중한 친구를 잃고 만 것이었다.


 60. 다과회
 
 도모에 학원의 아이들한테 언제나 인기 만점인 료 아저씨가 마침내 전쟁터로 불려나
가게 되었더니, 아이들보다 나이가 한참 많았지만 다들 정답게 친구 부르듯, 

 "료 아저씨!"

 하고 부르곤 했었는데,

 료 아저씨는 아이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늘 구세주가 되어주었다. 그는 무엇이
든 가능했다. 언제나 소리 없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려움에 처해 도움이 필
요한 아이의 상황을 금세 파악할 줄 알았다. 토토가 정화조의 뚜껑을 열어놓은 줄도 
모르고 멀리서 달려와 정화조에 푹 빠졌을 때도 금방 꺼내주고, 또 싫은 기색도 없이 
씻겨 준 것도 바로 료 아저씨였다.

 고바야시 선생님은 입대하는 료 아저씨를 위해 다과회를 열자고 했다.

 "다과회!?"

 과연 뭘까? 아이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무언가 미지의 것을 알게 된다는 건 언
제나 즐거운 일이므로.

 물론 아이들은 '송별회'라고 말하지 않고 일부러 '다과회'라고 불러 준 고바야시 선
생님의 마음 씀씀이까진 알지 못했다. 만약 송별회라고 하면 당장에 (그건 슬픈 것!)
이라며 큰 아이들은 알아차릴 게 분명했으니까. 그런데 '다과회'라는 게 무엇인지 아
무도 몰랐으므로 다들 흥분에 들떠 있을 따름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고바야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점심 시간 때처럼 강당에 책상을 둥
그렇게 놓으라고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빙 둘러앉자, 고바야시 선생님은 마른 오징어
를 구워 가늘게 찢은 것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아주 귀한 것이었
다. 그런 다음 선생님은 아저씨와 나란히 앉더니, 술을 조금 컵에 따라 료 아저씨 앞
에다 놓았다. 입대하는 사람에게만 배급되는 술이었다.

 이윽고 교장선생님이 말했다.

 "자, 도모에 학원의 첫 다과회다. 재미있는 시간을 만들자꾸나. 그리고 다들 료 아저
씨께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해 보렴. 료 아저씨뿐만 아니라 친구들한테 얘기해도 괜
찮단다. 한 사람씩 가운데로 나와서, 자 시작할까?"

 학교에서 오징어를 먹어보기도 처음이었거니와 료 아저씨가 아이들과 한 자리에 함께
앉는 일도, 더구나 홀짝홀짝 술을 마시는 료 아저씨를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아이들은 차례차례로 료 아저씨 쪽을 보고서서 제 생각들을 말했다. 그리고 앞서 얘
기한 몇몇 아이들은 그냥 "잘 다녀오세요!"라든지 "아프지 마세요!"라는 간단한 말로 
끝냈는데, 이윽고 토토네 반 미기타가

 "이번에 시골 가면 장례식 만두(주로 시골에서 장례식을 끝내고 돌아가는 조문객들에
게 만두를 나누어주었다고 함 - 역주)를 가져와서 여러분한테 주겠습니다!"

 라고 말한 때부터 강당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왜냐하면 미기타는 벌써 1 년전에 
시골에서 먹었던 이 장례식 만두 맛을 잊지 못해, 툭하면 모두에게 '주겠다!'고 약속
하곤 했지만, 여태껏 한번도 갖다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처음엔 이 미기타의 '장례식 만두'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쿵! 하
고 내려앉았다. 일반적으로 불길한 소리로 여겨지니까 말이다. 그러나 미기타가 실로 
천진난만하게 '모두에게 맛있는 걸 먹이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곧 함께 웃을 
수 있었다. 료 아저씨도 활짝 웃었다. 료 아저씨 역시 오래 전부터 미기타한테 "아저
씨한테도 갖다 줄게요!"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오에는,

 "저는 이 나라에서 최고의 원예가가 되겠습니다!" 

 라고 약속했다. 오에는 토도로키에서 굉장히 큰 원예 농장을 하는 집안의 아이였다. 

 한편 케이코는 잠자코 서 있더니 언제나처럼 수줍은 미소를 띄고, 말없이 꾸벅 인사
를 하곤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토토가 불쑥 나서서 한 가운데로 가더니 케이
코 인사에 이렇게 덧붙였다.

 "케이코네 집 닭은 하늘을 날아요! 제가 얼마 전에 진짜 봤어요!"

 이어 아마데라가 상냥하게 말했다.

 "다친 고양이나 개가 있으면 저한테로 데려와 주세요. 제가 치료해 줄 테니까요."

 다카하시는 책상 밑으로 쏜살같이 기어나가 한 가운데 서서 씩씩하게 말했다.

 "료 아저씨, 정말 고마워요. 지금까지 있었던 일 모두모두 감사드려요!"

 사이쇼는 또 이렇게 말했다.

 "료 아저씨, 언젠가 제가 넘어져 다쳤을 때 붕대 감아주셔서 감사했어요. 잊지 않을
게요!"

 사이쇼는 사실 아주 유명한 장군이 자기 큰삼촌이고, 또 메이지 시대의 오우타도코로
(궁내청에 속하여 황족의 단가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곳 - 역주)의 시인으로 잘 알
려진 사이쇼 아츠코의 친척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아이였다. 하기야 도모에에선 그런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지만.

 교장선생님의 딸인 미요는 료 아저씨와 가장 친한 사이였다. 그래선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건강하세요, 료 아저씨. 꼭 편지 쓸게요."

 토토는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하지만 
고르고 골라 이렇게 말했다.

 "료 아저씨가 떠나도 우리는 매일 다과회를 하겠어요!"

 교장선생님과 료 아저씨가 크게 웃었다. 아이들도 덩달아 웃고 토토마저 웃고 말았다.

 그런데 토토의 이 말은 그 다음날부터 당장 실천되고 말았다. 아이들이 틈만 나면 그
룹을 지어 '다과회 놀이'를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마른 오징어 대신 나무 껍질
같은 걸 빨고, 또 술이라 생각하고 물이 든 잔을 훌쩍훌쩍 마시면서,

 "장례식 만두, 꼭 가져올게."

 하곤 웃으며 저마다의 생각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물론 먹을 게 없어도 
다과회는 그 자체로 즐겁기만 했다. 

 이처럼 '다과회'는, 료 아저씨가 도모에 학원에 남겨 놓고 간 멋진 선물이었다. 그리
고 그때는 아무도 몰랐겠지만, 이 놀이가 실은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까지, 도모
에 학원에서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마지막 즐거운 놀이였기도 했다.

 
 료 아저씨는 도요코 선을 타고 출발했다.

 정답던 료 아저씨가 떠남과 동시에 B29가 드디어 도쿄 하늘에 나타나 매일같이 폭탄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61. 안녕! 안녕!
 
 도모에 학원에 불이 났다.

 밤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학교 바로 옆, 교장선생님의 집에 있던 미요와 언니 미사, 그리고 사모님은 다행히도
구혼부츠 절의 연못 근처에 있는 도모에 농원으로 급히 피해 화를 면했다. 하지만 B2
9는 계속해서 도모에 학원의 전철교실로 폭탄을 떨구었다.

 
 교장선생님의 평생 꿈이었던 학교는 지금 화염에 휩싸여 있다.

 선생님이 무엇보다도 사랑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며 노랫소리 대신, 학교는 지금 끔
찍스런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있다. 그 불길은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이 학교를 불
태워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유가오카도처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교장선생님은 그 한가운데 서서 도모에 학원이 불타는 걸 꼼짝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약간 구겨지긴 했지만, 검은 양복 차림에다 윗도리의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모습이 평소와 다름없었다. 

 오랫동안 불길을 바라보던 선생님은, 이윽고 곁에 있던 대학생 아들인 도모에에게 미
소를 띄우며 말했다.

 "얘야, 이번에는 무슨 학교를 만들까?"

 순간 도모에는 제 귀를 의심하며 고바야시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랬다. 아
이들에 대한 고바야시 선생님의 애정이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지금 학교를 휩싸고 있
는 저 불길보다 훨씬 강했고 뜨거웠던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여전히 건강했다….

 
 그즈음 토토는 만원 피난열차 안에서, 어른들 틈에 끼여 막 잠이 들려는 참이었다. 
열차는 도호쿠 지방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토토는 헤어질 때 선생님이 한 말,

 "또 만나자꾸나."

 그리고는 늘 들려주었던, 

 "넌, 정말은 착한 아이란다."

 (… 이 말씀들을 잊지 않도록 해야지!)

 하고 다짐했다. 그리고 어두운 창 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곧 고바야시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토토는 그 덕분에 안심하면서 잠이 들었다.


 열차는 불안에 젖은 사람들을 태우고, 깜깜한 어둠 속을 소리내어 달리고 있었다.


 62. 작가후기

 도모에 학원에 관한 추억을 쓰는 것은 제 오랜 숙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모자란 글, 읽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글은 모두 꾸며낸 것이 아니라 실제 있
었던 일들입니다. 그리고 고맙게도 저는 이런 일들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그 추억을 글로 남기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약속」이라는 대목의 글에서 밝힌 것
처럼 고바야시 선생님과 '어른이 되면 꼭 도모에의 선생이 되겠노라' 한 약속을 지키
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족하나마 고바야시 선생님이란 존재, 그가 아
이들을 얼마나 큰사랑으로 대했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아이들을 교육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전하고 싶었습니다.

 애석하게도 고바야시 선생님께선 1963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오래 전에 돌아가셨
습니다. 살아 계셨더라면 훨씬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셨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써 내려가다 보니 젊었을 적엔 그저 재미있는 추억으로만 남아 있던 도
모에 학원에서의 일들이 '아, 고바야시 선생님은 그때 그러실 생각이셨구나!'라든지, 
'선생님은 이런 것까지 염두에 두고 계셨구나….'라는 걸 깨닫고, 그때마다 놀라고 감
동하여 감사하게 여길 따름이었습니다. 저로서는 (넌, 정말은 착한 아이)라고 끊임없
이 말씀해 주셨던, 이 한 마디가 얼마나 큰 버팀목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만약 도모에
학원에 다니지 않았고, 고바야시 선생님도 못 만났더라면 저는 아마 무엇을 하든 '못
된 아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콤플렉스에 고뇌하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채 어른이
되었을 것입니다.

 도모에 학원은 1945년에 불타버렸습니다. 고바야시 선생님의 사재로 설립한 학교였기
때문에 재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만큼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전후, 선생
님은 우선 불탄 자리에 자그마한 유치원을 세움과 동시에 국립음악대학의 보육과(지금
의 유아교육과)를 창설하는 데 협력하기도 했고, 또한 국립음악대학에서 리드미크를 
가르치고 거기에 초등학교가 생길 때도 협력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꿈이자 이상을 담은 학교를 미처 세우기도 전에 69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
다…. 

 이 글에 등장하는 도모에 학원의 자리는 도요코선의 지유가오카 역에서 걸어서 3분, 
현재는 피코크 슈퍼마켓과 그 주차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얼마 전 문득 그리운 생각에, 
옛 자취는 흔적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차를 몰고 가서 지금 주차장이 들어서 있는 
부근 - 전철 교실과 운동장이었던 터 - 을 둘러보려고 서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곳에 계시는 주차장 아저씨가 제 차를 보고는, "만차요, 만차! 지금 주차 못합니다
!"라고 소리치는 겁니다. 그 순간 저는, "아니에요, 단지 제가 다니던 학교 생각을 하
고 있었어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심정을 누가 알아주랴 싶어 부랴부랴 그곳을 
떠나왔습니다. 한데 왠지 모를 슬픔이 밀려와, 달리기 시작한 차 속에서 하염없이 눈
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일본에, 나아가 전세계에도 수많은 훌륭한 교육자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모두 이상
과 애정과 꿈을 지니고 있을 터인데, 그것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기가 보통 힘들지 않
다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고바야시 선생님의 경우도 이 도모에 학원을 세우기 전, 
몇 년씩이나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본격적으로 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 1937년, 
그리고 1945년에 불타버렸으므로 참으로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다니던 
때가 선생님께서 가장 열정적으로 자신의 꿈을 꽃피웠던 시기였으리란 생각에, 그 점
은 행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만 없었더라면 '더욱 많은 학생들이 선생님
의 손을 거쳐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을 텐데'하고 생각하면 아쉽고 서글픈 마음뿐입니
다.

 고바야시 선생님의 교육 방침은 이 책에도 썼듯이 항상 (어떤 아이든지 갓 태어났을 
땐 선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점점 커가면서 이러저러한 주위 환경이나 어른들의 영향
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러니 이런 '선한 기질'을 일찌감치 찾아, 그걸 키워주며  개성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자연을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아이들의 성격도 되도록 자연스러워야한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도 자
연을 좋아해 막내딸인 미요의 말로는 어릴 적에 "자연 속에서 리듬을 찾아보자꾸나." 
하는 선생님을 따라 늘 산책을 나서곤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그때마다 어김없이 커
다란 나무가 있는 데로 가서 (바람을 맞고 있는 나뭇잎이며 나뭇가지의 흔들림, 그리
고 가지 하나를 보고 나면 그 윗가지와 그 이파리… 다시 줄기와의 관계, 바람의 세기
에 따라 잎의 흔들림은  어떻게 다른가?)이런 걸 가만히 관찰하고, 바람이 없으면 언
제까지고 위를 쳐다보았다고 합니다. 이는 나무뿐만이 아니라 강도 마찬가지여서, 가
까운 다마강에 나가서도 강물을 쳐다보며 싫증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전쟁 중이었는데 왜 국가나 문부성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운영되는 학교
를 그냥 놔두었는지 의문이 생기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직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고바야시 선생님이 선전을 싫어하는 분이어
서, 요샛말로 매스컴을 기피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학교의 사
진 촬영을 허락하거나 독특한 학교라고 선전하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 아니
었나 생각합니다. 덕분에 이 조그마한, 전교생 50명도 채 안 되는 학교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구요. 도모에 학원의 학생이었던 우리는 학
년에 관계없이 지금도 해마다 11월 3일(그 멋진 운동회가 열린 추억의 날)이면 구혼부
츠 절의 방을 빌려서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두 마흔이 넘어 쉰
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삿코!"니 "오에!"니 어렸을 적 이름을 그대로 부르면서 어린 
시절처럼 허물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 또한 고바야시 선생님이 남겨주신 귀중한 
선물입니다.

 제가 처음에 다니던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는 것도, 사실은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친동야며 책상뚜껑 사건 따위도 어머니가 얘기해 준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정말일까? 
난, 내가 그렇게 심한 말썽꾸러기라곤 생각 안 했는데'라며 내심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5년 전, 아사히 TV의 「나라카즈 모닝쇼」에서 만남의 시간이 있어 "누굴까?"
하고 궁금했는데, 퇴학을 당한 바로 그 학교의 옆 반 담임선생님이었습니다. 그 선생
님의 이야기를 듣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테츠코 씨는, 그때 옆 반 학생이었어요. 수업 중 내가 교무실에 볼일이 있어 아이들
한테 자습하라고 해놓고 복도에 나가면, 매일같이 복도에서 벌을 받고 있었지요. 그리
고 내가 지나가면 불러 세워선, "선생님! 나, 왜 여기 서 있어야 돼요?" 라는 둥, "내
가 무슨 나쁜 짓을 했나요?" 라는 둥, "선생님은 친동야 아저씨 싫어해요?" 라는 둥 
계속 말을 걸어서 난처하기 짝이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에 교무실에 볼일이 있어도 문
을 열어 보고 테츠코가 있으면 아예 안 나갔어요. 테츠코 담임선생님도 곧잘 교무실에
서 나한테 "쟤는 도대체 왜 저럴까요?" 라고 말씀하시곤 했지요. 그래선지 테츠코 씨
가 나중에 텔레비전에 나왔을 때, 이름만 보고도 금방 알겠더군요. 워낙 오래된 일인
데도 테츠코 씨의 1학년 때 일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으니까요."

 벌을 받고 있다니? 저는 전혀 기억에 없는 일이어서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른
시간인데도 나와주신 백발에 인상 좋아 뵈는 선생님의 젊을 적 모습과, 복도에서 벌
받는 와중에도 '호기심쟁이 테츠코'다운 모습을 발휘하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고는 우
습기도 하고, 아울러 '퇴학을 당한 게 역시 사실이었구나!'하고 그때서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제 어머니께 진심으로 고맙단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건 '퇴학을 당
했다'는 사실을 제가 스물이 넘을 때까지 단 한번도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스물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가

 "그때, 왜 학교를 바꿨는지 아니?"

 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응?"

 하고 되묻자, 엄마는

 "사실은, 너 그때 퇴학을 당했었단다."

 라고 가볍게 말했습니다. 만약 그 무렵,

 "어쩜 좋으니? 벌써 퇴학이라니! 너, 만약 요번에 갈 학교에서도 또 퇴학당하면 이젠
정말 갈데 없는 줄 알아!"

 어머니가 이런 식으로 저를 다그쳤다면, 저는 얼마나 비참한 심정으로 겁에 질려 도
모에의 문을 들어서야 했을까요…. 그랬다면 그 뿌리난 교문도, 또 전철 교실도 그토
록 재미있어 보이진 않았을 겁니다. 저는 이런 어머니의 품에서 자랄 수 있었던 것, 
역시 행복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전쟁 중이었으므로 도모에 학원 시절의 사진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몇 장 안 되는 사진 중에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은 압권입니다. 졸업
생들은 대개 강당 앞 중앙 계단께 에서 사진을 찍는데, "사진 찍는다! 사진!"하고 졸
업생들이 늘어서면, 재학생들도 함께 찍고 싶어해 여기저기서 얼굴을 내미는 통에 누
가 진짜 졸업생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사진이 나온 후에는 모두 모여
서 "이건 누구네 반 졸업 사진이지?"하며 한참을 연구해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도 고바야시 선생님은 잠자코 계시기만 할 뿐 결코 제지하지 않으셨습
니다. 아마도 졸업식이란, 틀에 박힌 사진보다 모두가 생기발랄하고 자유롭게 찍는 편
이 좋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요….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이 사진만큼 도모에 학원다운
것도 없다 싶습니다. 

 도모에 학원에 관해서는 아직도 쓸거리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토토같
은 아이라도, 주위 어른들의 가르침으로 모두와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잇는 어른으로 성
장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도모에 학원이 있다면, '등교를 
거부하는 학생이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곤 합니다. 도모에 학원에서는 수업이 끝나도
다들 집에 가기 싫어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는 어서 빨리 학교에
가고 싶어 안달한 정도였으니까요…. 도모에 학원은 정말 그런 학교였습니다.


 이번에는 도모에 학원의 전철교실에서 저와 함께 여행했던 친구들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간단하게 써보겠습니다.

 운동회 때면 늘 일등을 도맡아 차지했던 다카하시는 초등학교 때의 키 그대로 고교에
보란 듯이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메이지 대학의 전기공학부를 졸업하여 현재는 한 
전기 주식회사의 '조사담당'으로 있습니다. 이 업무는 사원들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들어주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자리입니
다. 오랜 체험으로 타인의 어려움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다카하시야말로 잘 해나갈
수 있겠죠. 다카하시는 이 회사의 첨단대형기계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후배들
에게 그 기술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일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을 쓰기에 앞서, 
그녀 자신도 마치 다녔던 것처럼 도모에를 잘 알고 있는, 친절하고 너그러운 그의 반
려자를 만나 여러 가지 얘기를 들었습니다. 다카하시는 육체적인 핸디캡에서 오는 콤
플렉스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더군요. 저도 동감합니다. 만약 어떤 류의 콤플
렉스가 있었다면 그렇게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더 나아가 사원들의 
화합을 도모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없었겠죠.

 다카하시가 직접 들려 준 '도모에 학원에 처음 간 날'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
니다. 자기하고 어떤 면에서 비슷한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첫날부터 안심하면서 
도모에 학원에 다닐 수 있었고, 그 후로는 하루하루가 즐거웠으며 덕분에 게으름을 피
우거나 결석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고요. 수영 시간에 옷을 벗어야 하는 것도 처음에
는 부끄러웠지만, 곧 한 겹 한 겹 옷을 벗을 때마다 이윽고 수치심도 한 겹 한 겹 벗
겨져 사람 앞에 나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바야시 선생님은 다카하시가 자기 키보다 훨씬 높은 뜀틀을 넘어야 할 때도 (괜찮
아, 다카하시! 뛸 수 있어! 반드시 할 수 있을 거야!)라고 격려하면서 마지막 단계에
서만 손을 빌려주었고, 거의 다카하시가 스스로 뛰어넘은 듯한 생각이 들게 하여 (지
금 생각하면) 매번 자신감을 심어주었다고 합니다. 뜀틀을 뛰어넘었을 때, 다카하시가
얼마나 기뻐했을 지 쉽게 상상이 가시겠죠. 그리고 뒤꽁무니에서 우물쩍거리고 있으
면 앞으로 나오라고 더욱 채근하셨기 때문에 보다 적극적이지 않을 수 없기도 했다고
요. 다카하시는 그때와 조금도 변함없이 반짝이는 눈과 신중한 목소리로, 그 운동회 
날의 후련하고도 기뻤던 마음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자상한 부모님 밑에서 올바른 가정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다카하시의 성격
을 완만하게 다독여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우선 보이는 것보다 먼 
앞날을 내다보며 우리들을 가르쳐주셨던 고바야시 선생님…. 선생님께서 저에게 (넌 
사실은 착한 아이란다!)라고 늘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다카하시에게도 (너는 반드시 
할 수 있어!)라고 늘 말씀해 주셨을 겁니다.

 헤어질 무렵이 거의 다 되었을 즈음, 다카하시는 저는 전혀 기억에 없던 일화를 얘기
해주었습니다. 자기도 도모에 교문을 나섰다가 다른 학교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풀
이 죽어 다시 들어오면, 제가 (왜 그러니? 누가 그랬어?)라고 묻기가 무섭게 밖으로 
달려나갔고 잠시 후에 또 달려와서는 (이제 괜찮아, 안심해)라고 했다는군요.

 막 헤어지려고 할 때 다카하시는 다시 한 번 (그땐 정말 고마웠어)라고 말해 주었습
니다. 하지만 천만에, 다카하시! 너야말로 나는 잊어버리고 있었던 일, 기억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


 교장선생님의 셋째 딸이었던 미요는 현재 자그만 초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있습
니다. 항상 어린아이들과 호흡하며 가르치고 싶어하신 고바야시 선생님의 뜻을 이어받
은 것이죠. 고바야시 선생님은 미요가 세 살이 될 무렵 리듬에 맞추어 걷고 몸을 움직
이며 말하게 된 것을 참고로 어린이들을 접했던 것 같습니다.

 도모에 학원에서 수업을 받기 시작한 첫 날, 토끼 점퍼 스커트를 입고 와서 절 무척
이나 들뜨게 만들었던 장본인인 삿코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YWCA에
서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여름 캠프 때는 예전의 도
모에 학원 시절의 경험을 살려 대활약을 펼친다는군요. 일본 알프스의 호다카를 등산하
면서 만난 남자와 결혼, 이제는 대학교 2학년 짜리 아이들의 엄마이기도 합니다.

 나를 색시감으로 삼지 않겠다던 타이는 지금 미국에 살고 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물
리학자가 되었습니다. 일리노이 주에 위치한 「페르미 국립 가속 연구소」의 부소장을
맡고 있는데, 이 연구소는 물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는 굉장
한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타이가 얼마나 천재적인지 충분히 짐작이 가시겠죠. 원래 머
리가 좋았던 타이었으니 어떤 초등학교에 갔더라도 지금처럼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겠
죠. 하지만 아침마다 학교에 오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부터 할 수 있었던 도모에의 수
업 방식이 그 재능을 한층 꽃피우게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는 으레 타이의 모습 
하면 늘 알코올램프와 플라스크 옆에 있는 모습이라든지, 아니면 자기 자리에서 조용
히 앉아 어려운 과학 책이나 물리학 책을 읽던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으니까요.

 나의 땋은 머리를 잡아당겨 고바야시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던 아이. 하지만 다카하시
의 「꼬리」사건 때는 멋진 뉴스를 전해 주었던 오에는 현재 '동양란 전문가'입니다. 
들은 얘기지만 동양란은 한 촉에 몇 억원이나 하는 것도 있답니다. 그래서 전문가가 
필요한 것이죠. 그리고 판매나 배양도 몹시 힘이 드는데, 오에는 그런 일을 터득해 전
국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 후기를 쓰기 위해 막 여행길에서 돌아온 오에와 전화로
잠깐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나 : 너 학교 어디였지?

오에 : 난 아무 데도 안 갔는데.

  나 : 안 갔다니! 그럼 도모에만 다니고 끝?

오에 : 응.

  나 : 정말? 중학교도 안 갔어?

오에 : 아아, 그러고 보니 피난지 근처에서 잠깐 다녔던 적은 있긴 해.

  나 : (정말 느긋한 성격이로군요. 전쟁통에 자기네 화원이 불에 다 타버렸을 때도  
      그토록 마음이 넉넉하더니만….)

오에 : 그보다 꽃 중에서 제일 향기가 좋은 꽃이 뭔지 알아? 나는 중국의 춘란이라고 
      생각하는데, 춘란의 향기는 정말이지 어떤 향수도 당해내지 못한다니까!

  나 : 춘란? 비싸?

오에 : 음… 좀 비싼 것도, 싼 것도 있지.

  나 : 동양란은 어때? 대체 어떤 꽃이 피는데?

오에 : 글쎄 뭐랄까… 아주 소박한 꽃이야. 그런데 그게 정말 좋다니까!

 도모에 학원 시절과 조금도 다름없는 느긋한 오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오에
는 겨우 중학교를 중퇴한 학력밖에 없지만, 스스로 연구하고 스스로 뭔가를 개척해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열등감 없이 자신감에 차 있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정말이지 감동하였습니다.

 동물을 좋아하던 아마데라의 어린 시절 꿈은 수의사가 되어 목장을 경영하는 것이었
습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의축한 전문학교에서 백 팔십도 전향하여, 현재는 병
원에서 임상조사원으로 전력투구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사립 초등학교를 다니다 도중에 도모에 학원으로 들어온 사이쇼는, 그 시절 
우리는 '얌전한 아가씨'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미 아버지를 여윈 상태
였다고 합니다. 여고를 졸업하고 건축가와 결혼, 현재 큰아들은 건설회사에 다니고 있
고 둘째아들도 취직자리가 정해져 한 시름 놓은 참이라는군요. 간혹 노래를 짓기도 한
다는데, 전화로 목소리를 들어보니 무척 온화한 가정이 상상되더군요.

 이 밖에 장례식 유명했던 미기타는 원예과를 나왔지만, 역시 어린 시절부터 좋아한 
그림 공부를 다시 하기 위해 미술 디자인과에 재입학, 현재는 친구와 함께 그래픽디자
인 회사를 설립해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또 하늘을 나는 닭을 길렀던 케이코는 벌써 
은혼식이 지났고 결혼한 딸까지 있다고 합니다. 한편, 전쟁터로 불려나갔던 료 아저씨
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11월 3일에는 우리들과 함께 모임을
갖습니다.

 이제 고바야시 소사쿠 선생님의 간단한 경력을 써보겠습니다.

 선생님은 1893년 군마현의 자그만 한 마을에서 태어나셨는데, 어렸을 적부터 음악을 
좋아하여 하루나 산이 보이는 집 앞 개울가에서 항상 지휘봉을 휘두르며 놀았다고 합
니다. 6형제에 그다지 윤택하지 못한 농가의 막내였기 때문에 검정시험을 거쳐 교원자
격증을 땄다고 하구요. 그리고 오늘날의 도쿄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세케 초등학교의 음
악선생이 되셨는데, 이 독특한 학교를 설립하셨던 분의 교육방침에 큰 영향을 받았다
고 합니다. 그는 (교육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 아래 학생수도 많아
야 한 반에 서른 명, 그리고 자유로운 교육, 아이들의 개성을 존중하는 교육방침을 내
세웠고 또 실천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수업은 오전 중에 끝내고 오후에는 산책을 
한다든가 식물을 채집하고, 그림을 그리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노래를 부르는 식
으로 말입니다. 훗날 고바야시 선생님이 도모에 학원에서 실행한 수업방식이었죠. 어
쨌든 이 학교에서 고바야시 선생님은 어린이를 위한 오페레타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우연히 보고 감동한 그 설립자가 유럽 교육실태를 시찰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게 
되었으며, 이윽고 선생님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유럽 유학길에 올랐다고 합니다. 당시
선생님이 서른 살 때의 일이었죠.

 유럽의 많은 학교를 견학하고 2년만에 돌아온 고바야시 선생님은 곧바로 세케유치원
을 설립하셨는데, 이 유치원에서 선생님은 (어린이를 교사의 계획에 맞추지 말며 자연
속에 풀어놓아라, 교사의 계획보다는 어린이들의 꿈이 훨씬 크다)고 각 선생님들을 
교육하셨고, 결국 종래의 유치원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유치원을 꾸려 나갔습니다. 그
리고 그 후 현장에서 실제로 가르쳐 본 결과, 리드미크 공부를 다시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고바야시 선생님은 두 번째 유럽 유학길에 올라 둘크뢰즈에게 다시 사사하고 여
러 학교를 견학한 후, 자신의 구상을 펼칠 수 있는 학교를 세울 결심을 굳히고 귀국하
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37년, 도모에 유치원과 도모에 학원(초등학교)를 설립하
였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도모에 학원이 소실된 후, 끝내 도모에 같은 초등학교를 
다시 설립하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공습으로 불탄 도모에를 바라보면서 "
이번에는 어떤 학교를 만들지?"라고 말씀하셨던 선생님의 정열이 되살아나기 전에 말
입니다…. 

 전후 고바야시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선생님은 상당히 과묵하신 
분)이었다는 인상을 갖고있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도모에 시절, 곧잘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던 선생님을 생각하면, 전후의 선생님은 여러 가지로 슬픈 일이 많았던 
게 아닌가 싶어 저도 슬퍼집니다. 어쨌거나 고바야시 선생님이 실천하셨던 어린이 교
육의 구체적인 예를 알고있는 사람은 당시의 우리들 외에 이제 극소수밖에 남지 않았
습니다. 그러나 저는 많은 분들의 연구와 노력으로 고바야시 선생님에 대해 더욱 자세
하게 알 수 있게 되기를 지금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이 책의 제목을 「창가의 토토」로 한 까닭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무렵 '창
가족'이란 말이 유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소외되어 있는 층, 이미 현역이 
아니라는 말의 울림…. 저 역시도 친동야 아저씨를 기다리기 위해 늘 창가에 있었습니
다. 처음 다니던 학교에서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늘 느끼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 까닭에
이런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아름답고 귀여운 그림의 화가 이와사키 치히로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안타깝게도 치히로 씨는 7년 전에 돌아가셨죠. 아시다시피 치히로씨는 어린아이 그림
의 천재였고, 이렇게 생생하게 어린아이를 그린 화가는 세계적으로 드물리라 생각합니
다.

 늘 어린아이들 편에서 그 아이들의 행복과 평화를 바라마지 않았던 그녀의 그림을 도
모에를 다룬 글에 함께 실을 수 있기를 저는 꿈꿔왔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문장과 치히로씨의 그림이 너무 잘 어울리는 탓에, 돌아가
시기 전에 이미 그려 둔 것은 아니냐고 여기는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저를 도
와주신 치히로 씨의 아들 마츠모토다케시 씨와 그의 부인 유리코 씨, 그리고 그림의 
사용을 기꺼이 허락해 주신 남편 마츠모토 요시아키 씨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치히로 미술과의 관장이며 저에게 (얼른 얼른 도모에에서의 일과 교장선생님 
얘기를 써라)고 격려해 주신 극작가 이이사와 선생님에게도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물
론 미요를 비롯한 도모에 시절의 여러분의 협력에도 감사를 드리고요.

 「창가의 토토」는 이렇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도모에 학원은 이
제 없지만, 독자 여러분들이 이 글을 읽는 동안에나마 옛날처럼 도모에의 모습이 되살
아날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한 중학교 졸업식장에서 선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경찰관이 학교에 진입했다는 뉴스를 들은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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