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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몽고메리] 에이번리의 앤

Casey,Riley 2022. 11. 29.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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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성난 이웃 


   친구들이 적갈색이라고 부르는 머리카락과 진지한 잿빛 눈을 가진 "열여섯 살짜리" 소녀가 있었다. 키는 껑충하지만 몸매가 가냘픈 이 소녀는 고대 로마의 시인인 베르길리우스의 숱한 시구들을 해석하려고 단단히 벼르며, 8월 어느 무르익은 오후에 프린스 에드워드 섬 농가 현관의 넓고 붉은 사암 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추수기의 비탈밭 주위로 푸르스름한 안개가 깔리고 산들 바람이 포플러나무들 속에서 작은 요정들처럼 속삭이는가 하면, 타는 듯한 붉은 양귀비가 벚나무 과수원 구석의 어둑한 어리 전나무 숲을 배경으로 하늘하늘 눈부시게 빛나는 8월의 오후는 이미 잊혀진 언어에 눈길을 주기보다는 꿈의 나래를 펴기에 더 어울렸다. 
   베르길리우스는 이내 무시된 채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앤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고서 제이(J) 에이(A) 해리슨 씨 집 너머 거대한 흰 산처럼 쌓여 있는 눈부신 솜털 구름 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앤은 한 선생이 장래의 지도자감을 만들기 위해 젊은이다운 기상과 높고 웅대한 야망을 불러넣은 훌륭한 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유쾌한 세계 속으로 아득히 빠져 들었다. 
   물론 앤은 어쩔 수 없이 해야할 때까지는 그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지만, 누군가 그런 가혹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면 에이번리 학교에는 유명 인사가 될 유명한 재목들이 많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이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려 한다면 누구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앤은 선생이 열성을 대해 올바로 가르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많은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장빗빛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은 앞으로 40년 후에 유명 인사와 함께 있는 흐뭇한 꿈의 정경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 사람이 정확히 무엇으로 유명해졌건 간에, 대학 총장이나 캐나다 주지사가 되어 있으면 좋을성싶었다……. 그 유명 인사는 쭈글쭈글해진 앤의 손을 붙잡고 깊숙이 고개 숙여 절하며, 자신의 야망에 첫 불을 지핀 사람은 바로 앤이며 오늘날의 모든 성공은 오래 전에 에이번리 학교에서 가르쳐 준 앤의 수업 덕분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런 즐거운 환상은 가장 불쾌한 일이 일어나느 통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저지종의 새침한 얼니 젖소 한 마리가 샛길로 허둥지둥 내려오더니 5초 뒤에 해리슨 씨가 뒤따라왔다. '뒤따라왔다'는 말은 해리슨 씨가 들 안으로 들이닥치는 모습을 너무 부드럽게 표현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해리슨 씨는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울타리를 뛰어넘어 들어와서는 깜짝 놀란 앤을 살기 등등하게 노려보았다. 앤은 벌떡 일어나 당황스런 눈길로 해리슨 씨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해리슨 씨는 초록 지붕 집 오른편에 이사 온 새 이웃이었는데, 이제껏 한두번 보긴 했어도 이렇게 직접 맞닥뜨린 적은 처음이었다. 
   앤이 퀸스 전문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기 전인 4월 초에 로버트 벨 씨는 서쪽의 커스버트 땅에 인접한 농장을 팔고 샬럿타운으로 이사했다. 로버트 벨 씨의 농장은 제이 에이 해리슨이라는 사람이 샀는데, 그 사람에 관해 알려진 것이라고는 고작 그 이름과 뉴브런즈윅 출신이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나 해리슨 씨는 에이번리에서 지낸지 한 달도 못 되어 별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레이첼 린드 부인은 "괴짜"라고 말했다. 이미 린드 부인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기억하고 있듯이, 린드 부인은 거침없이 말하는 여자였다. 해리슨 씨는 확실히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괴짜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우선 해리슨 씨는 혼자 힘으로 집안 살림을 꾸려 갔고, 이웃 여자들이 좀 어리석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대 놓고 떠들어 댔다. 에이번리 여자들은 해리슨 씨네 살림살이와 식사 문제를 가지고 무시무시한 말을 퍼부어 앙갚음을 했다. 해리슨 씨는 화이트샌즈 출신의 존 헨리 카터라는 어린 남자 아이를 일꾼으로 들였는데, 이 아이가 소문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첫째로 그 집에는 식사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해리슨 씨 집에서는 그저 출출해지면 "간단하게 때웠는데", 마침 존 헨리가 근처에 있으면 먹지만 그 자리에 없으면 해리슨 씨가 다시 배가 고파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존 헨리는 일요일이면 집에 가서 실컷 먹고 월요일 아침마다 어머니가 "음식" 한 박니를 들려 보내 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자기는 어쩌면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애처로이 말했다. 
   설거지만 해도 그렇다. 해리슨 씨는 비가 오는 일요일이 아니면 아예 설거지를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날, 해리슨 씨는 일을 마치고 와서 빗물을 받아 놓은 큰 통에 그릇을 넣고 한꺼번에 씻은 뒤 다 마를 때까지 내버려 두곤 했다. 
   게다가 해리슨 씨는 "구두쇠"였다. 앨런 목사가 봉급을 기부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도 해리슨 씨는 먼저 앨런 목사의 설교가 몇 달러 어치나 되는지 두고 보겠다고 했다……. 해리슨 씨는 잘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언젠가 레이첼 린드 부인이 집 안도 구경할 겸 선교 단체에 기부해 달라고 찾아갔을 때, 해리슨 씨는 자기가 아는 곳 그 어디보다도 에이번리에 사는 늙은 수다쟁이 여자들 중에 이교도가 가장 많은 것 같은데 린드 부인이 그 이교도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문제를 책임지고 맡아 준다면 선교 단체에 흔쾌히 기부하겠다고 했다. 레이첼 린드 부인은 자리를 뜨면서 불쌍한 로버트 벨 부인이 무덤 속에 고이 있는 게 천만 다행이라고 했다. 로버트 벨 부인이 살아 생전에 그렇게도 자랑스러워하던 집이었는데, 지금의 이 꼬락서니를 본다면 가슴이 찢어질 일이었던 것이다. 
   린드 부인은 열을 내며 마릴라 커스버트에게 말했다. 
   "글세, 로버트 벨 부인은 이틀마다 부엌 바닥을 빡빡 닦았다구요. 어휴, 당신이 지금 그 집 꼴을 본다면! 부엌 바닥을 지나가는데도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야 했다니까요." 
   끝으로 해리슨 씨는 진저라는 앵무새 한 마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제껏 에이번리에서는 아무도 앵무새를 기른 적이 없어서 그 행동은 그리 점잖은 일이 아니라는 평을 얻었다. 그리고 그 앵무새! 만일 존 헨리 카터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처럼 괘씸한 새는 다시 없을 것이다. 앵무새는 끔찍스럽게 욕을 퍼부어 댔다. 헨리의 어머니 카터 부인이 다른 일자리만 얻어 줄 수 있었다면 당장에 아들을 데려갔을 것이다. 게다가 진저란 앵무새는 존 헨리가 새장 가까이 몸을 수그린 틈을 놓치지 않고 그 즉시 헨리의 오른쪽 목덜미를 쪼아 버렸다. 가엾은 존 헨리가 일요일에 집으로 돌아가면 카터 부인은 누구한테나 그 자국을 보여 주었다. 
   해리슨 씨가 몹시 화가 나서 말없이 앤 앞에 서는 순간, 이 모든 것들이 앤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해리슨 씨는 아무리 상냥하고 붙임성 있게 나오더라도 잘생겼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뚱뚱한 몸집은 땅딸막하고 대머리였다. 그런데 지금 그 똥그란 얼굴은 화가 나서 붉으락푸르락하고, 가뜩이나 툭 불어진 푸른 눈은 거의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앤은 해리슨 씨야말로 자기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해리슨 씨가 침묵을 깨고 총알처럼 퍼부어 댔다. 
   "난 도저히 못 참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구. 아가씨, 내 말 듣고 있어? 이럴 수가, 벌써 세 번째야, 세번째라구! 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난 아가씨 숙모한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마지막으로 경고했어……. 그런데 아가씨 숙모는 그냥 내버려 뒀다구…… 젖소는 기어코 일을 저질렀고……. 대체 아가씨 숙모는 무슨 속셈을 갖고 있는 거야.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이냐구." 
   앤은 최대한 고상하게 물었다. 
   "뭐가 문제인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요즘 앤은 개학을 앞두고 고상한 태도를 몸에 배게 하려고 꽤 노력해 왔다. 그러나 성난 제이 에이 해리슨 씨한테는 별로 통하지 않았다. 
   "문제라고 했나? 맘소사! 문제도 이만저만한 게 아니지. 아가씨. 그 문제란 말이야, 아가씨 숙모의 저지종 젖소가 우리 귀리밭에 또 들어왔다는 거야. 30분도 안 됐다구. 벌써 세 번째야. 잘 들어. 난 그 젖소를 지난 화요일에도, 어제도 발견했어. 그래서 여기 왔던 거고, 아가씨 숙모한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얘기했어. 한데 그냥 내버려 뒀단 말이야. 지금 그 아줌마 어디 있어? 대 놓고 말 좀 해야겠어. 이 제이 에이 해리슨이 말이야." 
   앤은 한 마디 한 마디에 품위를 실어 말했다. 
   "만일 마릴라 커스버트 아주머니를 찾으신다면, 그 분은 제 숙모님이 아니란 걸 알려 드리고 싶군요. 아주머니는 중병을 앓고 계신 먼 친척 분을 뵈려고 이스트그래프턴에 가셨어요. 제 젖소가 아저씨네 귀리밭을 망쳤다니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건 제 젖소지 커스버트 아주머니 젖소가 아니에요. 3년 전, 저 젖소가 송아지였을 때 매슈 아저씨가 벨 아저씨한테 사서 저에게 주셨거든요." 
   "죄송하다고! 아, 죄송하다면 다야? 저놈이 내 귀리밭을 얼마나 망쳐 놨는지 가서 보라고……. 밭 한복판부터 가장자리까지 깡그리 뭉개 놓은 꼴을 말이야." 
   앤은 거듭 단호하게 말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저씨께서 울타리를 튼튼하게 수리하셨더라면 돌리가 부수고 들어가지 못했을 거예요. 아저씨네 귀리밭과 우리 목장을 나누고 있는 것은 아저씨 울타리예요. 저는 그 울타리가 허술하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했었어요." 
   해리슨 씨는 더욱 화가 나서 싸울 듯이 대들었다. 
   "내 울타리는 멀쩡해. 교도소 철장도 저 괴물 같은 젖소를 막을 수는 없을 거야. 잘 들어, 이 빨간 머리 애송이야. 아가씨 말대로 젖소가 아가씨 거라면 여기 앉아 누런 소설책 따위에 빠져 있지 말고 젖소가 남의 밭에 못 들어가게 지켜야 할 거 아냐." 
   해리슨 씨는 앤의 발치에 놓인 황갈색 장정의 애꿎은 베르길리우스를 쏘아보며 말했다. 
   순간 앤의 얼굴은 머리카락만큼이나 빨개졌다. 빨간 머리는 늘 앤의 약점이었다. 
   앤은 발끈해서 쏘아붙였다. 
   "귓가에 몇 가닥 남지도 않은 대머리보다야 빨간 머리가 훨씬 낫겠네요." 
   그 말은 치명타였다. 해리슨 씨는 대머리라는 사실에 무척 민감했다. 해리슨 씨는 말문이 막힐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라 입을 꾹 다물고 말없이 앤을 노려보았다. 
   앤은 다시 냉정을 되찾고 자기한테 유리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아저씨 말씀 잘 알겠어요. 상상이 가네요. 아저씨네 귀리밭에서 젖소 한 마리를 찾아 내려고 얼마나 애쓰셨을지 쉽게 짐작이 되니, 아저씨 말씀을 가슴에 담아 두고 꽁해 있진 않겠어요. 다시는 '돌리'가 아저씨네 귀리밭에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드리죠. 제 명예를 걸고 약속드려요." 
   해리슨 씨는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좋아.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어." 
   그러나 해리슨 씨는 여전히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뜰을 나가면서도 계속 씩씩거렸다. 
   앤은 심란한 마음으로 뜰을 가로질러 말썽꾸러기 젖소를 우리 안에 가두어 버리고는 곰곰히 생각했다. 
   "이제 울타리를 부수지 않고서는 밖으로 나오지 못할 거야. 이젠 좀 얌전해졌군. 하기야 귀리에 싫증이 나기도 했겠지. 지난주에 시어러 아저씨가 사겠다고 할 때 팔아 버릴 걸 그랬어. 하지만 그 땐 가축을 한꺼번에 데려가서 경매에 부치는 게 낫겠다. 싶었는데. 해리슨 아저씨는 정말 괴짜라니까. 확실히 아저씨한테는 이웃이라는 의식이 눈곱만큼도 없어." 
   앤은 늘 이웃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왔던 것이다. 
   앤이 막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마릴라 커스버트가 마차를 몰고 뜰 안으로 들어왔다. 앤은 얼른 차 마실 준비를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젖소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릴라가 말했다. 
   "어서 경매가 끝났으면 속이 후련하겠구나. 그래, 여기서 이렇게 많은 가축을 기르는 건 무리야. 게다가 마틴말고는 딱히 그 많은 가축을 돌볼 사람도 없잖니. 어휴, 마틴 녀석, 제 숙모 장례식에 가게 하루만 휴가를 달라더니 지난밤에 꼭 돌아오겠다고 해 놓고 여태껏 안 돌아오는 것 좀 봐. 도대체 그 녀석은 숙모가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어. 일 년 전에 녀석이 여기 온 뒤로 벌써 숙모 장례식만 네 번째라니까. 후유, 이제 추수만 끝내면 고맙겠고, 그 때부터는 배리 씨가 농장을 떠맡을 게다. 마틴이 돌아올 때까지 돌리 녀석이나 우리에 가두고 잘 지켜야겠다. 뒤 방목장 울타리를 손봐서 거기다 젖소를 둬야겠구나. 레이첼 말마따나, 여긴 정말 골치 아픈 곳이야. 불쌍한 메리 키스는 지금 죽어 가고 있어. 앞으로 두 아이들은 어찌 될지, 원.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 메리의 오라버니 한 분이 사는데, 메리가 아이들 문제로 편지를 보냈지만 아직 답장이 없다는구나." 
   "아이들은 어때요? 몇 살인데요?" 
   "여섯 살이 넘었지…… 둘이 쌍둥이야." 
   앤은 남의 일 같지 않아 간절히 물었다. 
   "아, 저는 해먼드 아줌마가 그렇게 많은 쌍둥이를 낳은 뒤부터 특히 쌍둥이한테 관심이 많았어요. 애들은 예뻐요?" 
   "안됐지만…… 별로야. 너무 지저분해. 데이비가 진흙 장난을 하러 나가 있어서 도라가 부르러 갔더니, 데이비 녀석이 도라를 진흙탕에 거꾸로 처넣어 버리더라구. 도라가 마구 울어 대니까 데이비 녀석은 그게 별것 아니라는 걸 보여 주려고 저도 진흙탕 속에 냅다 뛰어들어 뒹굴지 뭐야. 메리 말이 도라는 착하고 얌전한데 데이비 녀석은 못 말리는 장난꾸러기래. 하긴 데이비는 보살핌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지. 데이비가 갓난아기였을때에 남편이 죽은 후로 메리까지 죽 앓아 누워 있었으니 말이다." 
   앤은 사뭇 진지했다. 
   "저는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 늘 마음이 아파요. 저 역시 아줌마께서 맡아 주시기 전까진 아무도 없었다는 거 아시죠? 그 애들 외삼촌이 꼭 돌봐 줬으면 좋겠네요. 아줌만 메리 키스 아줌마와 어떤 사이예요?" 
   "메리하고? 아무 상관도 없어. 메리의 남편이 우리 먼 친척뻘일 뿐이야. 저기 린드 부인이 마당에 들어서고 있구나. 메리 소식이 궁금해서 오는 것 같아." 
   앤이 간청하듯이 말했다. 
   "린드 아줌마한테 해리슨 아저씨와 젖소 얘긴 하지 말아 주세요." 
   마릴라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약속은 곧 허사가 되고 말았다. 레이첼 린드 부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그 얘기부터 꺼냈던 것이다. 
   "오늘 카모디에서 돌아오는 길에 해리슨 씨가 이 집 젖소를 자기네 귀리밭에서 쫒아내는 걸 봤어요. 뭐 거의 미친 것 같더군요. 해리슨 씨가 꽤 소란을 피웠죠?" 
   앤과 마릴라는 싱긋 의미 있는 미소를 주고 받았다. 에이번리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별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린드 부인의 시야를 벗어날 수 없었다. 바로 오늘 아침에 앤이 "아줌마가 자정에 방에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블라인드까지 끌어내린 다음 재채기만 해도, 린드 아줌마는 다음 날 '감기 좀 어떠세요?' 하고 물어 볼 거예요" 라는 말을 했었던 것이다. 
   마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을 거예요. 나는 집에 없었는데, 해리슨 씨가 앤한테 잔소리를 퍼부었대요." 
   앤은 빨간 머리 운운한 얘기가 떠올라 다시금 분개해서 불쑥 내뱉었다. 
   "그 아저씬 정말 기분 나쁜 사람이에요." 
   린드 부인이 짐짓 점잔을 빼며 말했다. 
   "앤, 좀더 본질적인 얘기를 해야지. 나는 로버트 벨씨가 자기 밭을 그 뉴브런즈윅 사람한테 팔았을 때부터 문제가 생길 줄 알았어. 바로 그거야. 갑자기 다른 지방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몰려드니 앞으로 에이번리가 어찌 되려는지, 원. 이제 머지않아 우리 잠자리조차 불안해질 거야." 
   마릴라가 물었다. 
   "그럼 다른 지방 사람들이 더 들어오고 있단 말인가요?" 
   "아니, 아직 못들었어요? 자, 먼저 돈넬 가족이 있어요. 돈넬 가족은 피터 슬론의 낡은 집을 빌렸대요. 피터가 제분소를 운영하려고 돈넬을 고용했거든요. 돈넬네는 동부 출신이라는데, 다들 그것밖엔 모른대요. 다음으로 쓸모 없는 티머시 코튼네가 화이트샌즈에서 이사 올 예정인데, 그 집 식구들은 이웃 한테 그저 짐만 될 뿐이예요. 티머시는 폐인이나 돼야 도둑질을 그만둘 위인이니까요. 어디 그 뿐인가요. 아내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할 만큼 게을러터진 사람이죠. 그 여자는 그릇도 앉아서 씻는다니까요. 또 조지 파이 부인은 고아가 된 남편의 조카 앤서니 파이를 데려왔어요. 앤, 그 애는 너희 학교에 다니게 될거야. 한바탕 난리가 날지도 몰라, 아무렴, 여부가 있겠어. 새 학생이 또 있다. 앤. 폴 어빙이 자기 할머니와 같이 살려고 미국에서 온단다. 마릴라, 스티븐 어빙이라는 그 애 아버지 기억나세요? 스티븐 어빙은 그래프턴의 라벤더 루이스를 차 버렸잖아요." 
   "스티븐이 라벤더를 찼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둘이 다툰 거겠죠. 난 양쪽 다 잘못이 있다고 봐요." 
   "글쎄, 어쨌든 스티븐 어빙은 라벤더 루이스와 결혼하지 않았죠. 소문에는 라벤더 루이스가 스스로 '메아리 오두막집'이라고 이름붙인 작은 돌집에서 혼자 아주 별나게 살고 있대요. 스티븐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자기 삼촌과 사업을 하다가 양키 여자랑 결혼했어요. 그 뒤론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고, 스티븐의 어머니만 아들을 보러 한두번 미국에 다녀왔죠. 스티븐은 2년 전에 아내가 죽어서, 한동안 어머니한테 아들 폴을 맡아 달라고 보내는 거래요. 폴은 열 살인데 모범생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어요. 마릴라, 당신은 양키들이 어떤지 몰라요." 
   린드 부인은 불행히도 프린스에드워드 섬이 아닌 다른 곳에서 태어났거나 자란 모든 사람들을 "나사렛 같은 보잘것없는 곳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단호한 태도로 바라보았다. 물론 이주민들이 좋은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의심하는 게 안전하다. 레이첼 린드 부인은 "양키들"에 대해 심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린드 부인의 남편이 한때 보스턴에서 일할 때 고용주에게 10달러나 사기당한 적이 있었는데, 천사는 물론이고 군주나 지배자조차 그 일을 미국 전체의 책임으로 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레이첼 린드 부인에게 설득시킬 수 없었다. 
   마릴라가 쌀쌀맞게 말했다. 
   "어린 전학생들 때문에 에이번리 학교가 더 나빠지진 않을 거예요. 또 폴 어빙이 제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괜찮은 아이일거구요. 스티븐더러 거만하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마을에서 누구보다도 훌륭한 젊은이였잖아요. 어빙 부인은 손자와 살게 되어 여간 기뻐하지 않겠네요. 남편이 죽은 뒤로 몹시 외롭게 살았잖아요." 
   린드 부인이 그 문제를 매듭이라도 짓듯이 말했다. 
   "그래요, 폴은 분명 괜찮은 아이겠죠. 하지만 에이번리 아이들하곤 다를 거라구요." 
   레이첼 린드 부인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장소, 어떤 일에 대해서도 자기 의견을 굽히려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앤, 네가 지역 개선 협회를 만들 거라던데, 그게 뭐니?" 
   앤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지난번 토론 클럽에서 그저 몇몇 젊은이들과 같이 지역 개선 협회얘기를 나눴을 뿐이에요. 친구들은 괜찮은 생각이라고 했고, 앨런 목사님 부부도 동의했어요. 지금 많은 마을에 지역 개선 협회가 있거든요." 
   "음, 그 일을 맡으면 넌 끝도 없는 어려움에 처할 거야. 앤, 그만두는 편이 나을 거다, 낫고 말고. 사람들은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단다." 
   "저희는 사람들을 개선시키려는 게 아녜요. 에이번리 마을을 개선시키려는 거죠, 좀더 나아지기 위해 했어야 할 일들이 제법 많아요. 이를테면 우리가 레비 볼터 아저씨를 설득해서 그 댁 윗녘 농장의 으스스한 옛집을 헐어 낸다면, 그런 게 개선 아니겠어요?" 
   린드 부인도 인정했다. 
   "그 폐가는 여러 해 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눈엣가시였지. 만일 너희 '개선론자'들이 레비 볼터 씨를 설득해서 마을을 위해 자기한테 아무 소득도 없는 일을 하게 하다면 나도 개선 과정을 지켜볼 거다. 아무렴, 그래야지. 앤, 비록 어떤 쓰레기 같은 양키 잡지에서 얻은 생각 같긴 하지만, 네게도 뭔가 생각이 있는 모양이니 말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너는 학교 일만 해도 눈코 뜰 새 없을 거야. 거기에다 개선 협회 일로 더 성가시게 될까 봐 이웃으로서 충고하는 거란다. 단지 그 뿐이야. 하지만 네가 그 일에 마음을 쓰기로 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밀고 나가리란 걸 알지. 너는 늘 어떻게든 일을 성취해 왔으니까 말이야." 
   린드 부인의 이러한 평가가 결코 틀리지 않다는 사실은 앤의 굳게 다문 입술 선이 말해 주고 있었다. 앤의 마음은 온통 개선 협회를 구성하는 문제에 쏠려 있었다. 화이트샌즈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예정이지만 금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아침까지는 항상 집에 있게 될 길버트 블라이드는 지역 개선 협회에 대해 열광적이었다. 또 마을 젊은이들 대부분도 임시 회의와 그에 따르는 자잘한 "재미"에 끼고 싶어했다. 앤과 길버트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히 알지는 못했다. 앤과 길버트는 개선에 대해 토론하며서 이상적인 에이번리가 바로 자신들 마음속에 단단히 새겨질 때까지 계획을 짰다. 
   레이첼 린드 부인에게는 또 다른 뉴스 거리가 있었다. 
   "프리실라 그랜트가 카모디 학교로 온다는 구나. 앤, 혹시 그 애와 퀸스 전문 학교에 같이 다니지 않았니?" 
   앤이 소리쳤다. 
   "네, 맞아요! 어머, 프리실라가 카모디에서 가르치는 군요! 너무너무 기뻐요!" 
   앤의 잿빛 눈동자는 저녁별처럼 반짝거렸다. 린드 부인은 앤 셜리가 정말 예쁜 아가씨인지 아닌지 언제쯤 제대로 알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새삼 사로잡혔다.  


 2장 성급한 매매와 때늦은 후회 


   다음날 오후, 앤은 다이애나 배리와 함께 물건을 사러 마차를 타고 카모디에 갔다. 다이애나 역시 지역 개선 협회 회원이어서, 둘은 카모디에 갔다 오는 길에 줄곧 협회 이야기만 나누었다. 
   마차가 에이번리 마을 회관을 지나고 있었다. 에이번리 마을 회관은 사방에 가문비나무가 빽빽이 우거진 골짜기에 자리잡은 초라한 건물이었다. 그 때 다이애나가 말했다. 
   "앤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을 회관에 페인트 칠을 하는 거야. 너무 불명예스러워 보이잖아. 그리고 우리가 집을 부술 수 있게 해 달라고 레비 볼터 아저씨를 조르기 전에 먼저 여기에 모여서 힘을 모아야 해. 우리 아버지께서 그러시는데, 그 일은 아마 어림도 없을 거래. 그 아저씨는 너무 인색한 사람이라 그런 일로 시간을 허비하진 않을 거라셨어." 
   그러나 앤은 희망을 갖고 말했다. 
   "남자 애들이 볼터 아저씨를 위해 판자를 뜯어내어 땔감으로 쪼개드리겠다고 한다면, 아저씨도 기꺼이 집을 헐으라고 하실 거야.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처음엔 천천히 해 나가야겠지. 모든 게 한꺼번에 개선되길 바랄 순 없잖아. 물론 우선 여론을 모아야 해." 
   다이애나는 여론을 모은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왠지 그럴싸하게 들려 그런 목적을 가진 협회에 속한 것이 더욱 자랑스러웠다. 
   "어젯밤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해 봤어, 앤. 카모디와 뉴브리지와 화이트샌즈에서 나오는 길이 만나는 곳에 삼각 구획지 한 군데가 있는 걸 알고 있지? 어린 가문비나무들이 울창한 그 곳에 그 나무들을 다 쳐내고 자작나무 두세 그루만 남겨 둔다면 멋있지 않겠니?" 
   "어머, 멋지다.! 그리고 자작나무 아래에 마을 사람들이 앉아 쉴 수 있는 벤치를 만들자. 또 봄이 오면 가운데에 화단을 꾸며 제라늄도 키우는 거야." 
   다이애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다만 우린 하이럼 슬론 부인이 길가에 젖소를 풀어놓지 못하게 무슨 수를 써야 할거야. 안 그러면 그 젖소가 제라늄을 다 먹어 치울걸. 앤, 이제 여론을 모은다는 말뜻을 알 것 같아. 저기 볼터 아저씨네 낡은 집이 보인다. 저렇게 빈민굴 같은 집을 본 적이 있니? 그것도 길가 바로 근처에 말야. 난 창문이 떨어져 나간 낡은 집을 보면 눈알이 뽑힌 채 죽어 있는 뭔가가 생각나." 
   그러나 앤은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난 버려진 낡은 집이 무척 슬퍼 보여. 늘 저 집의 과거가 떠오르고 한때는 즐거웠을 옛 시절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곤 해. 마릴라 아줌마 말씀이 오래 전엔 저 낡은 집에도 대가족이 살았는데 언제나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넘쳐흘렀대. 그 때는 예쁜 뜰도 있고 집 전체가 덩굴장미로 뒤덮힌 아름다운 집이었다지. 그런데 지금은 텅 빈 채 휑하니 바람만 떠돌고 있잖아. 얼마나 외롭고 애처로운 느낌이 드는지! 달 밝은 밤이면 오래 전 저 곳에 살았던 어린아이들의 유령과 장미와 흥겨운 노랫소리가 돌아올지도 몰라. 그러면 저 낡은 집은 잠시라도 다시금 새롭고 즐거운 곳이라고 꿈꿀 수 있겠지." 
   다이애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상상하기 힘들어, 앤. 우리가 유령의 숲에 유령이 있다고 상상했을 때, 우리 어머니와 마릴라 아줌마가 얼마나 꾸짖으셨는지 기억 안 나니? 지금도 난 날이 어두워지면 마음 편히 그 숲을 지나갈 수가 없어. 볼터 아저씨네 낡은 집도 그렇게 상상한다면 겁이 나서 도저히 지나갈 수 없을 거야. 더군다나 그 아이들은 죽지도 않았잖아. 다들 커서 잘살고 있는데, 뭐. 그 중 한 사람은 푸줏간주인이고 말야. 꽃과 노래도 유령이 될 수는 없잖아." 
   앤은 낮은 한숨 소리를 얼른 삼켜 버렸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다이애나와는 변함없이 절친한 친구였지만, 상상의 세계 속에 빠져들면 언제나 혼자여야 한다는 사실을 앤은 이미 오래 전에 터득했다. 상상에 사로잡히는 것은 가장 친한 친구조차 함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앤과 다이애나가 카모디에서 물건을 살 때부터 천둥이 치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비는 금새 그치고, 빗방울이 나뭇가지에 걸려 반짝거리는 좁은 길을 따라 흠뻑 젖은 고사리들이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나무가 우거진 자그마한 골짜기를 지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즐거웠다. 그러나 커스버트 샛길로 막 접어들자, 아름다운 경치를 망쳐 놓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눈앞에는 비에 촉촉히 젖어 더욱 비옥해 보이는 해리슨 씨의 잿빛 나는 푸른 귀리밭이 오른쪽으로 쭉 뻗어 있는데, 바로 그 밭 한복판에 반지르르한 옆구리를 귀리 속에 묻은 채 뻔뻔스레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저지종 젖소 한 마리가 버티고 서 있지 않은가! 
   순간 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마차 고삐를 떨어뜨리며, 제멋대로 남의 곡식을 훔쳐먹고 있는 그 동물한테는 통하지도 않겠지만, 입술을 꼭 다문 채 벌떡 일어났다. 앤은 말 한마디 없이 곧장 마차 바퀴를 기어 내려와서 다이애나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울타리를 가로질러 쏜살같이 달려갔다. 
   다이애나는 사태를 깨닫자마자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앤, 돌아와! 저 축축한 밭에 들어가면 옷이 엉망이 된다구! 어휴, 내 말은 듣지도 않네! 어쩌나, 혼자선 도저히 젖소를 몰아 낼 수 없을 텐데. 어서 가서 앤을 도와 줘야 해." 
   앤은 미친 듯이 귀리를 헤치고 나아갔다. 다이애나도 마차에서 깡충 뛰어내려 말을 말뚝에 단단히 매고 나서, 예쁜 줄무늬 원피스를 어깨까지 들쳐 올리고는 울타리를 넘어가 제정신이 아닌 듯한 친구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앤이 흠뻑 젖어 착 달라붙은 치마 때문에 빨리 달릴 수 없는 통에 다이애나는 곧 앤을 따라잡았다. 
   해리슨 씨가 여기저기 찍힌 발자국으로 짓뭉개진 귀리밭을 보았다면 아마 가슴이 터져 버렸을 것이다. 
   가엾은 다이애나가 헐떡거렸다. 
   "앤, 제발 멈춰. 숨차 죽겠어. 너도 흠뻑 젖었잖아." 
   앤도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해리슨 아저씨가…… 젖소를 보기 전에…… 몰아…… 내야 해. 어떻게든…… 그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나…… 물에 빠져 죽어도…… 좋아." 
   그러나 저지종 젖소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쾌적한 땅에서 자기를 쫓아 내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이 숨이 턱에 찬 채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젖소는 엉덩이를 휙 돌려 반대편 구석으로 곧장 뛰어갔다. 
   앤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젖소를 막아! 뛰어. 다이애나, 뛰라니까!" 
   다이애나는 정신없이 젖소를 쫓아 뛰었다. 앤도 빨리 뛰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못된 젖소는 자기 밭인 양 귀리밭을 헤집고 뛰어다녔다. 둘은 10분도 넘게 쫓아다니다가 겨우 젖소를 붙잡아 한 모퉁이 틈새를 통해 커스버트 샛길로 몰아냈다. 
   앤은 바로 그 순간 만큼은 그저 하늘로 날아 오를 것 같은 마음뿐이었다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었다. 샛길 밖에 멈춰 서 있는 마차를 보았을 때도 그 마음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마차에는 카모디의 시어러 씨와 그 아들이 느긋하게 앉아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시어러 씨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앤, 지난주에 내가 그 젖소를 팔으라고 했을 때 팔았더라면 좋았잖니." 
   옷이 엉망이 된 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앤이 대꾸했다. 
   "원하신다면 당장이라도 팔겠어요. 지금 막바로 젖소를 가져가셔도 돼요." 
   "좋아. 전에 제안한 대로 20달러를 쳐주지. 여기 우리 아들 짐이 곧장 카모디로 젖소를 몰고 갈 거야. 젖소는 다른 가축들과 함께 오늘 저녁 샬럿타운으로 갈거다. 브라이턴에 있는 리드 씨가 저지종 젖소를 갖고 싶어하거든." 
   잠시 후 짐 시어러와 저지종 젖소는 길을 떠났다. 흥분한 앤은 20달러를 가지고 초록 지붕 집 길을 따라 마차를 몰았다. 
   "마릴라 아줌마가 뭐라고 하지 않을까, 앤?" 
   "아니, 아줌마는 괜찮아. 돌리는 내 거고, 마릴라 아줌마가 판다고 해도 경매에서 20달러보다 더 받을 것 같진 않으니까. 하지만 맙소사, 젖소가 또다시 자기 귀리밭을 헤집고 다닌 걸 해리슨 아저씨가 안다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명예를 걸고 맹세까지 했는데! 아무튼 젖소를 두고 맹세 같은 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어. 울타리를 뛰어넘거나 우리를 부수는 젖소란 놈은 믿을 만한 동물이 못 돼." 
   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린드 부인 집에 다녀온 마릴라는 벌써 앤이 젖소를 팔아 치운 일과 젖소가 실려 간 일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린드 부인이 부엌 창가에 앉아 젖소 파는 장면을 거의 다 보고 나머지 일까지 추측해서 얘기해 준 것이다. 
   "앤, 어지간히도 급하게 일을 처리했다만 나도 젖소가 없는 편이 낫다고 본다. 그런데 젖소가 어떻게 우리에서 빠져 나왔는지 모르겠구나. 아마 널빤지 몇 장은 뜯어 냈나보다." 
   "미처 그 생각은 못했어요. 지금 가서 살펴보고 올게요. 마틴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죠. 아무래도 숙모 몇 분이 더 돌아가셨나 봐요. 꼭 피터 슬론 아저씨와 팔순네 일 같아요. 어느 날 저녁에 슬론 부인이 신문을 읽다가 슬론 아저씨한테 물었대요. '방금 팔순네 한 사람이 죽었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팔순네란 무슨 뜻이죠. 여보?' 그러자 아저씨는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지만 그들은 이미 죽어 가고 있으니까 매우 위독한 사람들이라는 사실밖엔 모르겠어' 라고 말했대요. 마틴네 숙모들도 그런 경우인가 봐요." 
   마릴라는 넌더리를 내며 말했다. 
   "마틴은 다른 프랑스인들과 똑같아. 그 사람들은 단 하루도 믿을 수가 없다니까." 
   마릴라가 앤이 카모디에서 사 온 물건들을 훑어보고 있을 때 뒤뜰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1분 뒤에 앤은 손을 꽉 쥐고서 부엌으로 뛰어들어왔다. 
   "앤 셜리, 무슨 일이니?" 
   "오, 마릴라 아줌마, 어떡하면 좋아요?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 다 제 탓이예요. 아, 무모한 일을 하기 전에 잠깐이라도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순 없을까요? 린드 아줌마가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죠. 언젠가는 제가 엄청난 일을 저지를 거라고. 어떡하면 좋아요. 지금 제가 그런 짓을 저지르고 말았어요!" 
   "앤, 도대체 왜 이렇게 사람 속을 태우니! 그 엄청난 일이란 게 대체 뭐냐?" 
   "시어러 아저씨한테 판 그 저지종 젖소는 해리슨 아저씨네 거예요. 벨 아저씨한테 산 그 젖소라구요. 돌리는 지금 우리 속에 있어요!" 
   "앤 셜리, 너 지금 꿈을 꾸고 있니?"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이 일은 악몽 같을 뿐 꿈은 아니에요. 지금 쯤 해리슨 아저씨네 젖소는 샬럿타운에 있을 거예요. 아, 마릴라 아줌마, 저는 궁지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제 생애에서 가장 큰 곤경에 빠지고 말았어요! 어떡하죠?" 
   "뭘 어떡해? 가서 해리슨 씨한테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해리슨 씨가 돈으로 받고 싶어하지 않는 다면 대신 우리 젖소를 줘야지, 뭐. 우리 젖소도 그 집 젖소만큼 좋으니까." 
   앤은 신음을 토했다. 
   "하지만 보나마나 아저씨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아마 그럴 거다. 원체 화를 잘 내는 사람이니까. 괜찮다면 내가 가서 얘기해 보마." 
   앤은 절규하듯 큰 소리로 말했다. 
   "안돼요, 정말이에요. 전 그렇게 비겁하지 않아요. 모든 게 제 탓인데, 아줌마한테 대신 벌을 받게 할 순 없어요. 제가 갈게요, 지금 바로요. 안 좋은 일일수록 빨리 긑내야 좋잖아요." 
   가엾은 앤은 모자와 20달러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오다가 빠끔히 열려 있는 식품 저장실 문틈으로 흘끔 안을 들여다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그 날 아침에 앤이 특별히 맛있게 조합한 분홍색 당의를 입히고 호두로 장식해서 구워 낸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금요일 저녁에 에이번리의 젊은이들이 개선 협회를 만들기 위해 초록 지붕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그 날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케이크였다. 그러나 당연히 펄펄 뛸 해리슨 씨와 친구들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앤은 직접 요리해서 먹어야 하는 특별한 한 남자의 마음을 이 케이크로 누그러뜨려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케이크를 얼른 상자 속에 넣었다. 해리슨 씨한테 화해의 선물로 줄 셈이었다. 
   앤은 샛길 울타리를 타고 넘어가 꿈을 꾸는 듯한 8월 저녁 별빛 속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들판을 가로질러 지름길로 접어들면서 침울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제발 아저씨가 말할 기회만이라도 주셨으면. 아, 사형장에 끌려가는 사람의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아."




3장 해리슨 씨 집에서 




   무척 구식이고 나지막한 처마에다 온통 회칠을 한 해리슨 씨 집은 울창한 가문비나무 숲을 배경으로 서있었다. 해리슨 씨는 셔츠 바람으로 포도 덩굴 아래 그늘 진 베란다에 앉아서 저녁 식사 후의 담배 맛을 즐기고 있다가, 문득 낯익은 사람이 길을 따라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벌떡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해리슨 씨는 그저 너무 놀란 나머지 불편하기도 하고 또 그 전날 발끈 화를 낸 것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앤이 품고 온 일말의 용기마저 앗아가 버렸다. 
   앤은 문을 두드리면서 비참한 기분으로 곰곰히 생각했다. 
   "아저씨가 아직도 저렇게 흥분해 있는데, 내가 한 일을 들으면 어떻게 나올까?' 
   그러나 뜻밖에도 해리슨 씨는 유순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문을 열어 주고는 약간 흥분하기는 했지만 아주 온화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해리슨 씨는 파이프를 옆에 내려놓고 겉옷을 걸친 후 정중한 태도로 먼지가 자욱한 의자를 권했다. 새장의 빗장을 통해 짓궂은 금빛 눈을 반짝이는 수다쟁이 앵무새만 없었더라면 앤의 환영식은 충분히 기분 좋게 지나갔을 것이다. 앤이 자리에 앉자마자 앵무새 진저가 재잘거렸다. 
   "저런, 저 빨간 머리 애송이가 여긴 뭐 하러 왔지?" 
   해리슨 씨와 앤 중에 누가 더 얼굴이 빨개졌는지 모른다. 
   해리슨 씨가 몹시 화난 눈길로 진저를 쏘아보았다. 
   "저 앵무새는 신경 쓰지 마. 저 놈은 항상 허튼 소리만 조잘대거든. 선원인 내 동생한테서 저 앵무새를 얻었지. 선원들이란 워낙 말을 함부로 하는데다 앵무새란 놈은 흉내를 아주 잘 내거든." 
   가엾은 앤은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고 자기 볼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런 상황에서 해리슨 씨에게 반박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인도 모르는 사이에 허락도 없이 그 사람의 젖소를 팔아 버렸다면, 앵무새가 아무리 무례한 말을 지껄인다 해도 상관해서는 안된다. 그래도 역시 "빨간 머리 애송이"란 말은 수월하게 참아 넘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앤은 굳게 결심하고 말했다. 
   "아저씨께 고백할 게 있어서 왔어요. 저…… 저…… 저지종 젖소에 관한 거예요." 
   해리슨 씨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맙소사, 젖소가 튀어나와 또 내 귀리밭을 망쳐 놨구나! 하지만 괜찮아. 어쩔 수 없지, 됐어. 어제는 내가…… 내가 너무 경솔했어, 정말이야. 젖소가 그랬어도 괜찮아." 
   앤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그 뿐이라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그 보다 열배는 더 나쁜일이에요. 전 말할 수……." 
   "세상에. 그럼 젖소가 내 밀밭에 들어왔단 말이냐?" 
   "아니…… 아니에요…… 밀밭이 아니에요. 저……." 
   "그럼 양배추밭이구나! 내가 박람회에 내놓으려고 기르고 있는 양배추를 망쳐놨지. 그렇지?" 
   앤은 깊이 생각한 끝에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양배추밭도 아니에요, 아저씨. 제가 다 말씀드릴게요. 여기 온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그러니 제발 제 말을 가로막지 마세요. 그러시면 제가 몹시 초조해져요. 제가 다 말할 수 있도록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주세요. 제 말이 끝나면 하실 말씀이 많으실 거예요." 
   "음, 더 이상 말하지 않으마." 
   해리슨 씨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진저만은 그 약속에 아랑곳하지 않고 앤이 정말로 고약한 앵무새라고 느낄 때까지 틈틈이 '빨간 머리 애송이'를 내뱉었다. 
   "저는 어제 제 젖소를 저희 우리 안에 가둬 놓았어요. 그런데 오늘 아침. 카모디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젖소가 아저씨네 귀리밭에 있는 걸 봤어요. 다이애나와 저는 기를 쓰고 젖소를 몰아 냈지요. 저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저씨는 상상도 못하실 거에요. 그러고 나니까 온 몸이 흠뻑 젖고 지쳐서 짜증이 났어요 그때 마침 시어러 아저씨가 다가와서 그 젖소를 사겠다는 거예요. 저는 그 자리에서 20달러를 받고 젖소를 팔아 치었죠. 제 잘못이었어요. 당연히 기다렸다가 마릴라 아줌마와 상의해 봤어야 했는데 말예요. 하지만 저는 생각 없이 일을 처리하는 나쁜 버릇이 있거든요. 저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아저씨께 그렇게 말할 거예요. 시어러 아저씨는 젖소를 오후 열차에 실어 보내려고 곧장 끌고 갔어요." 
   그 때에 진저가 경멸에 찬 소리로 다시 주절거렸다. 
   "빨간 머리 애송이." 
   이번에는 해리슨 씨가 벌떡 일어나 앵무새가 아니라 다른 어떤 새였더라도 간담이 서늘할 표정으로 새장을 옆방에 처넣고 문을 닫아 버렸다. 진저는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고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 해 보았지만 결국 홀로 남은 것을 알고는 골이 나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해리슨 씨가 돌아와 앉으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계속하렴. 선원인 내 동생은 저 새한테 예절이라곤 눈곱만치도 가르치지 않았어." 
   앤은 커다란 잿빛 눈동자로 해리슨 씨의 당황한 얼굴을 호소하듯 그윽이 바라보며. 예전의 어린애 같은 몸짓으로 손을 꼭 쥔 채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저는 집으로 돌아와 차를 마시고 나서 젖소 우리로 갔어요. 그런데 아저씨! 제 젖소는 우리에 그대로 있었어요. 시어러 아저씨한테 판 건 바로 아저씨네 젖소였어요." 
   해리슨 씨는 뜻밖의 결말에 화들짝 놀라서 멍하니 소리쳤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터무니없는 일이!" 
   앤은 한탄하듯 말했다. 
   "아, 제 자신과 다른 사람을 궁지에 빠뜨린 건 저로선 전혀 터무니없는 일도 아니에요. 저도 주의는 하고 있어요. 제 나이면 그렇게 생각 없는 행동을 그만둘 때도 됐다고 여기시겠지만, 저는 도무지 그러질 못하는 것 같아요. 3월이면 열 일곱 살이 되는데도 말예요. 해리슨 아저씨, 용서를 바라기엔 너무 엄청난 일이죠? 너무 늦어 버려 젖소를 돌려 받지도 못할 것 같아서 여기 젖소 값을 가지고 왔어요. 원하신다면 제 젖소를 대신 가지셔도 좋아요. 제 젖소도 품종이 아주 좋거든요. 제가 이번 일을 얼마나 죄송하게 생각하는지 표현할 길이 없네요." 
   해리슨 씨는 기운차게 말했다. 
   "쯧쯧, 더 이상 말 안 해도 돼, 아가씨. 그건 중요하지 않아,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구. 일이란 늘 터지는 법이지. 나도 때때로 너무 서두르지, 아주 심하게 말야. 그렇지만 난 내 생각을 그 즉시 다 말하지 않고는 못 참는 성미지. 어쩌다 동네 사람들이 그걸 보면 그저 본대로 나를 생각해 버리는 거야. 지금 그 젖소가 양배추밭에 있다 해도 상관없어. 하물며 거기 있지도 않은데 뭐가 문제야. 네가 젖소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 같으니 그냥 네 젖소를 갖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머, 고마워요, 아저씨. 아저씨가 화내시지 않아서 너무 너무 기뻐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여기 와서 말하기가 끔찍했겠지. 내가 어제 그 난리를 피웠으니 말이다. 그렇지? 하지만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그저 좀 심하게 속에 있는 말을 다 해 버리는 늙은이거든, 그데 다야……. 너무 있는 그대로를 내뱉는 버릇이 있어서 탈이지." 
   앤은 자기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다. 
   "린드 아줌마도 그래요." 
   해리슨 씨가 흥분하며 말했다. 
   "누구? 레이첼 린드 부인? 나를 그 늙은이 수다쟁이와 같다고 말하지 마라. 절대 그렇지 않아. 한데 그 상자 안에 든 건 뭐지?" 
   "케이크예요." 
   앤은 예상치도 못했던 해리슨 씨의 온화함에 마음이 놓여 날아 오를 듯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장난스레 대답했다. 
   "제가 아저씨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아저씨는 케이크를 자주 못 드실 것 같아서요." 
   "그래, 사실이야. 난 케이크를 아주 좋아한단다. 정말 고맙구나. 위쪽이 맛있어 보이는데. 케이크가 다 맛있으면 좋겠다." 
   앤은 기분이 좋아서 자신 만만하게 말했다. 
   "다 맛있어요. 혹은 앨런 부인이 아저씨께 말씀하셨는지도 모르지만, 전에는 가끔 맛없는 케이크를 만들곤 했어요. 하지만 이 케이크는 잘된 거예요. 지역 개선 협회를 위해 만든 건데, 다시 하나 더 만들면 돼요." 
   "그럼 이봐, 아가씨, 내가 케이크를 먹을 수 있게 좀 도와줘. 내가 주전자를 올려 놓을 테니 함께 차를 마시자구. 어때?" 
   앤은 미덥지 않은 눈치로 물었다. 
   "제가 차를 끓이면 안 될까요?" 
   해리슨 씨는 싱긋이 웃었다. 
   "내가 차 끓이는 솜씨를 못 믿겠단 말이지. 잘못 짚었어. 아가씨가 마셔 본 어떤 차보다 더 맛있게 끓일 수 있어. 그래도 아가씨가 하지. 다행히 지난 일요일에 비가 와서 깨끗한 그릇이 많아." 
   앤은 날 듯이 일어나 차를 끓이러 갔다. 차를 넣기 전에 찻주전자를 물로 여러 번 헹구고 나서 스토브를 깨끗이 청소하고 식탁을 차린 다음 찬장에서 그릇을 꺼냈다. 앤은 찬장의 상태를 보고 적잖이 놀랐지만 현명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리슨 씨는 앤에게 빵과 버터와 복숭아 통조림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었다. 앤은 정원에서 꽃을 따 와 식탁을 예쁘게 꾸미며 지저분하게 얼룩진 식탁보는 보지 않으려고 애써 눈길을 돌렸다. 곧 차가 준비되자 앤은 해리슨 씨 맞은 편에 앉아 차를 따라 주며 학교와 친구들 얘기며 자기의 여러 가지 계획을 거리낌없이 이야기했다. 앤은 지금 느끼는 이 편안함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해리슨 씨는 불쌍한 진저가 외로울 거라며 다시 데려왔다. 앤은 어떤 사람이든 어떤 일이든 모두 용서 할 수 있을 것 같은 푸근한 마음으로 진저에게 호두를 건넸다. 그러나 진저는 기분이 몹시 상해서 친해지자는 호의를 싹 거절해 버리고는 횃대에 시무룩이 앉아 깃털을 곤두세웠다. 그 모습이 꼭 초록빛과 황금빛으로 어우러진 공 같았다. 
   "아저씨는 왜 저 앵무새를 진저(붉은빚이 도는 갈색이라는 뜻:옮긴이)라고 부르세요?" 
   앤은 적절한 이름을 좋아하는데, 진저란 이릉은 그토록 멋지고 화려한 깃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았다. 
   "선원인 내 동생이 그렇게 지었지. 아마 저 새의 성격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난 저 녀석을 좋아한단다. 내가 저 녀석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물론 저 새에게 단점이 있긴 하지. 이런 저런 일로 제법 돈도 많이 들어. 어떤 사람들은 저 새가 욕하는 걸 싫어하지. 하지만 버릇을 고칠 수가 없어 . 나도 노력해 봤고, 남들도 해 봤을 거야. 또 몇몇 동네 사람들은 앵무새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어. 어리석지 않니? 나는 앵무새를 좋아해. 진저는 좋은 친구야 어떤 일이 있어도 저 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말야, 아가씨." 
   해리슨 씨는 마치 앤이 진저를 포기하도록 설득할 속셈이라도 있는 것처럼 마지막 말을 힘 주어 말했다. 그러나 앤은 별나고 까다롭고 성마른 이 키 작은 남자가 좋아지기 시작했고, 케이크를 다 먹기도 전에 둘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해리슨 씨는 개선 협회에 대해 이해했고, 찬성할 마음이 우러나왔다. 
   "맞아, 해 봐. 이 지역에는 개선할 거리가 많지. 사람들도 그렇고." 
   앤은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음, 글쎄요." 
   앤은 자기 자신과 특별한 친구들 앞에서는 에이번리 마을과 주민들이 쉽게 개선 될 수 있는 작은 결점들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리슨 씨처럼 실질적으로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저는 에이번리를 사랑스러운 곳이라고 생각해요. 이 곳 사람들 역시 매우 좋구요." 
   해리슨 씨는 발그레하게 뺨을 붉히며 흥분한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얼굴을 의식하고는 덧붙였다. 
   "약간 골이 난 것 같군. 그 머리카락에 썩 잘 어울리는데. 에이번리는 아주 좋은 곳이고, 그래서 나도 여기에 자리잡았지. 하지만 에이번리에 다소 결점이 있다는 건 아가씨도 인정하는 것 같은 데, 그렇지?" 
   앤은 의리를 지키며 말했다. 
   "저는 에이번리에 결점이 있어서 더 좋아요. 아무 결점도 없는 마을이나 사람들은 별로예요. 정말로 완벽한 사람들한텐 흥미가 없거든요. 밀턴 화이트 부인은 완벽한 사람을 한 번도 만나 보진 못했지만 그런 사람 얘긴 여러 번 들었다고 하더군요. 자기 남편의 첫 부인이 그랬대요, 첫 부인이 완벽한 사람이었던 남자와 결혼하는 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 같지 않으세요?" 
   해리슨 씨는 별안간 설명하기 어려운 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완벽한 여자와 결혼하는 게 훨씬 불편할 거야." 
   차를 마시고 나자 앤은 해리슨 씨가 앞으로 몇 주 동안 집안 일을 할 시간이 넉넉하다고 큰소리 치는데도 극구 그릇을 씻겠다고 우겼다. 물론 바닥까지 깨끗이 쓸어 주고 싶었지만 빗자루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아예 없을까 봐 물어 보고 싶지도 않았다. 
   앤이 돌아가려 하자 해리슨 씨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가끔 건너와서 얘기 좀 해주려무나. 멀지도 않고 서로 이웃답게 지내야잖아. 난 네가 하는 개선 협회에 상당히 관심이 있단다. 재미있을 것 같아. 맨 먼저 누구하고 맞붙을 생각이냐?" 
   "우리는 사람들한테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개선하려는 건 오로지 마을뿐이예요." 
   앤은 품위 있게 대답하면서도 해리슨 씨가 그 계획을 조롱하고 있지나 않나 의심스러웠다. 
   앤이 떠나자 해리슨 씨는 창문 너머로 해질녘 저녁 노을이 진 들판을 가로질러 나긋나긋하고 숙녀다운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퉁명스럽고 외롭고 까다로운 늙은이야. 하지만 저 조그만 아가씨한테 있는 뭔가가 나를 다시 젊어지게 했어……. 이건 내가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었던 즐거운 감정이야." 
   해리슨 씨가 큰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진저가 조롱하듯 목 쉰 소리로 외쳤다. 
   "빨간 머리 애송이." 
   해리슨 씨는 앵무새에게 주먹을 쳐들어 보였다. 
   "이런 심술궂은 새야. 내 동생이 너를 데려왔을 때 차라리 네 목을 비틀어 버렸더라면 좋았을걸. 또 나를 곤경에 빠뜨릴 셈이냐?" 
   앤은 즐겁게 집으로 달려와 마릴라에게 자신의 모험담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마릴라는 앤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 안절 부절못하고 있다가 방금 막 앤을 찾아 나서려던 참이었다. 
   앤은 행복하게 말을 맺었다. 
   "정말 좋은 세상이에요. 그렇죠, 마릴라 아줌마? 전에 린드 아줌마는 세상이 별로 좋지 않다고 불평했어요. 즐거운 일을 기대할 땐 언제나 적잖이 실망하게 마련 이랬어요. 어떤 것도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친다고 말예요. 글쎄요, 아마 맞는 말이겠죠. 하지만 세상엔 역시 좋은 면도 있어요. 안 좋은 일도 우리의 예상과 항상 같지는 않잖아요? 그런 일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좋게 바뀔 수 있어요. 오늘 밤 해리슨 아저씨네 집에 갈 때까지만 해도 전 지독히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반대로 해리슨 아저씨는 아주 친절했고 저는 너무너무 유익한 시간을 보냈어요.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우린 정말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아요. 모든 일이 최고로 바뀌었어요. 어쨌든 마릴라 아줌마, 저는 앞으로 젖소가 누구 것인지 똑똑히 알기 전에는 절대로 팔지 않겠어요. 음, 그리고 전 앵무새가 정말 싫어요!"  


  
4장 견해 차이 




   어느 날 해질 무렵에 제인 앤드루스와 길버트 브라이드, 앤 셜리는 부드럽게 살랑이는 가문비나무 가지들의 그늘 아래 울타리를 따라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자작나무 길이라고 알려진 그 숲길은 큰길과 만난다. 앤은 오후를 함께 보내려고 기다리고 있던 제인과 같이 집으로 걸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울타리 부근에서 길버트를 만난 것이다. 세 사람은 지금 운명적인 내일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드디어 내일은 9월의 첫날이자 개학날이다. 이제 제인은 뉴브리지, 길버트는 화이트샌즈로 가게 된다. 
   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너희는 나보다 나아. 너희는 잘 모르는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난 같이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잖아. 린드 아줌마 말씀이 학생들은 낯선 사람을 더 어려워하니까 내가 처음부터 엄하게 하지 않으면 만만하게 볼 거래. 하지만 난 선생님이 꼭 엄해야 한다고 생각진 않아. 아, 책임감 때문에 어깨가 무거워." 
   제인은 마음 편하게 대꾸했다. 
   "우린 잘 할거야." 
   제인은 남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려는 포부 때문에 고민스러워하진 않았다. 적당히 월급을 받고, 학교 운영 위원회를 만족시키고, 장학사의 우수 교사 명단에 이름이 오르면 그만이었다. 제인은 그 이상의 욕심은 없었다. 
   "중요한 건 질서를 유지하는 일이니 교사는 좀 엄해야 돼. 난 학생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벌을 줄거야." 
   "어떻게?" 
   "물론 회초리를 드는 거지." 
   "어머. 제인. 그러지마! 그러면 안 돼!" 
   앤이 깜짝 놀라 소리치자 제인은 딱 잘라 말했다. 
   "난 맞을 짓을 하는 애는 매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해. 또 그렇게 할거야." 
   앤 역시 단호하게 맞섰다. 
   "난 절대로 아이들을 때리지 않을 거야. 난 그런 말은 전혀 믿지 않아. 스테이시 선생님은 우리를 한 번도 때리지 않았지만, 다들 말을 잘 들었잖아. 하지만 필립스 선생님은 언제나 매를 드셨지. 그래도 전혀 먹혀 들지 않았어. 그래, 매를 들지 않고는 가르칠 수 없다면 난 차라리 그만두겠어. 아이들을 잘 따르게 할 방법이 있어. 내가 아이들한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고 또 그렇게 된다면, 아이들은 저절로 날 따르고 싶어할 거야." 
   현실적인 제인이 되물었다. 
   "하지만 애들이 너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 
   "그래도 때리지는 않을 거야. 때리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돼. 제인. 아이들이 무슨 짓을 하건 때리지 마." 
   "길버트, 네 생각은 어때? 맞아야 정신 차리는 아이들이 간혹 있다고 생각지 않니?" 
   앤은 얼굴이 상기된 채 심각하게 소리쳤다. 
   "어떤 아이건 간에 아이들을 때리는 건 잔인하고 야만스런 짓이잖아!" 
   길버트는 자기 신념과 바람이 앤의 이상에 부합되도록 애쓰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글쎄, 둘 다 일리 있는 얘기야. 난 대부분의 아이들한테 매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진 않아. 앤, 네 말대로 대개는 아이들을 다룰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있고 육체적인 징벌은 최후의 수단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한편으론 제인 말대로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은 특별한 아이들, 그러니까 때려야만 더 발전하는 아이들도 가끔은 있겠지. 육체적인 징벌은 최후의 수단이라는 게 내 원칙이야." 
   길버트는 두 사람의 기분을 다 맞춰 주려고 했지만, 흔히 그렇듯이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제인은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 
   "버릇없이 구는 애들은 때려야 돼. 그게 정신 차리게 하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야." 
   앤은 길버트에게 실망스러운 눈길을 던지며 힘 주어 말했다. 
   "난 절대로 안 때릴 거야. 그건 옳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아." 
   제인이 물었다. 
   "네가 한 아이한테 뭘 시켰는데 뒤에서 건방지게 굴면 어쩌겠니?" 
   "수업이 끝난 뒤에 남으라고 해서 다정하면서도 따끔하게 꾸짖어야지. 좋은 점이란 찾으려고만 하면 누구에게나 있는 거야. 그걸 찾아서 키워 주는 게 선생님의 임무고. 너도 알다시피 그건 퀸스 전문 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이 강의한 내용이잖아. 때리면서 어떻게 아이들의 장점을 찾을 수 있겠니? 레니 교수님 말씀대로. 아이들에게 읽기와 쓰기와 셈을 가르치는 것보다 바르게 자라도록 도와 주는 게 훨씬 중요한 거잖아." 
   "하지만 장학사는 학생들이 읽기와 쓰기와 셈을 얼마나 잘 하는지를 보고 모든 걸 평가해. 더욱이 아이들이 장학사의 기준에 못 미치면 너는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없어." 
   제인의 반박에 앤은 단호하게 말했다. 
   "난 장학사의 우수 교사 명단에 이름이 오르는 것보다 아이들한테 사랑받고 오래도록 진정한 친구로 기억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 
   길버트가 물었다. 
   "아이들이 나쁜 짓을 해도 법을 주지 않을 거야?" 
   "그건 아니야.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벌을 줘야 할 경우가 있겠지. 하지만 쉬는 시간에 교실에 남아 있게 한다든지, 복도에 세워 두든지, 쓰기 숙제를 내준다든지 할 수 있잖아." 
   제인이 장난 스레 말했다. 
   "넌 여자 애를 남자 애 옆에 앉게 하는 벌은 주지 않을걸." 
   길버트와 앤은 마주 보며 어이없이 웃고 말았다. 예전에 앤은 길버트 옆자리에 앉는 벌을 받고서 몹시 슬프고 비참해한 적이 있었다. 
   헤어질 때에 제인이 철학자처럼 말했다. 
   "그래,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은지는 시간이 말해 줄 거야." 
   앤은 나뭇잎이 바람에 바스락 거리고 고사리 향이 그윽한 그늘진 자작나무 길을 따라 초록 지붕 집으로 향했다. 제비꽃 골짜기를 넘어 전나무 숲 아래로 빛과 어둠이 어우러진 버드나무 연못을 지나가니, 예전에 다이애나와 함께 이름 붙인 연인의 오솔길에 이르렀다. 앤은 숲과 들판의 향내를 맡으며 벌써부터 별이 드문드문 떠오른 여름 황혼을 즐겼다. 그리고는 내일부터 시작될 새로운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앤이 초록 지붕 집 뜰에 들어서자, 부엌 창문 틈으로 린드 부인의 단호하고 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앤은 얼굴을 찡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린드 아줌마가 내일 일을 충고하러 오셨군. 하지만 집에 들어가지 않겠어. 아줌마의 충고는 매운 고추 같거든. 도움 될 얘기도 있지만, 한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쿡쿡 찔러. 대신 길 건너 해리슨 아저씨한테 가서 맘놓고 수다나 떨어야지." 
   유명한 젖소 사건 이후로 앤이 해리슨 씨 집에 드러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벌써 몇 번인가 찾아갔고, 해리슨 씨가 자랑으로 여기는 솔직함 때문에 앤은 가끔씩 힘들어 하긴 했지만, 두 사람은 매우 절친한 친구였다. 앵무새 진저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초리로 앤을 볼 때마다 "빨간머리 애송이"라고 놀리는 걸 잊지 않았다. 앤이 나타나기만 하면 "저런, 귀여운 꼬마가 또 오는군" 하는 말들을 지껄일 때마다 해리슨 씨는 흥분해서 벌떡 일어나 진저의 버릇을 고치려고 애써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진저는 해리슨 씨의 마음을 꿰뚫어 보면서 비웃기까지 했다. 앤은 해리슨 씨가 뒤에서 얼마나 자기를 칭찬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해리슨 씨는 앤 앞에서는 절대 칭찬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해리슨 씨가 베란다 계단을 올라오는 앤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내일 쓸 회초리를 구하려고 다시 숲에 온 거냐?" 
   앤이 발끈했다. 
   "아니에요." 
   앤은 항상 무슨 일이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놀림감이 되곤 했다. 
   "전 절대로 학생들에게 회초리를 휘두르지 않을 거예요. 해리슨 아저씨. 지휘봉이야 
   물론 있겠지만, 그건 단지 뭔가를 가리킬 때만 쓸 거예요." 
   "그럼 회초리 대신 채찍을 휘두를 생각이냐? 그래, 네 생각이 옳을지도 모르겠구나. 기를 꺾어 놓기에는 회초리 만한 게 없지만, 고통이 오래 가는데는 채찍이 최고지. 그건 맞아." 
   "전 그런 거 절대 안 쓸거예요. 학생들을 때리지 않을 거라구요." 
   해리슨 씨가 정말로 깜짝 놀라서 물었다. 
   "맙소사, 그럼 애들을 어떻게 다스릴래?" 
   "해리슨 아저씨, 전 사랑으로 다스릴 거예요." 
   "사랑만 갖고는 안 돼, 어림도 없다, 앤. '매를 아끼면 아이 버릇을 그르친다' 는 말도 있잖아? 내가 학교 다닐 때는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는데도 선생님이 일을 꾸미고 있었다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날 때렸다구." 
   "해리슨 아저씨, 그 뒤로 교육 방법이 많이 바뀌었어요." 
   "하지만 천성은 쉽게 바뀌지 않아. 아이들을 벌주려고 매를 준비해 두지 않으면 절대 그 조무래기들을 다스릴 수 없을 게다. 암, 어림도 없지." 
   "글쎄요, 우선은 제 방식대로 해 볼래요." 
   앤은 워낙 의지가 강하고 미련스러울 정도로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편이었다. 
   해리슨 씨는 예의 그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런 고집 불통 녀석. 그래, 좋아, 어디 두고 보자. 아이들한테 실컷 당하고 나면, 언젠가는 너도 지금 떠들어대는 맹랑한 이야기 따윈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이들을 마구잡이로 팰걸. 너처럼 머리칼이 빨간 사람들은 여차하면 기분이 바뀌거든. 아무튼 넌 누굴 가르치기엔 너무 어려. 너무 어리고 철이 없어." 
   결국 앤은 그 날 밤 우울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 때, 마릴라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창백하고 침울한 앤을 보고 깜짝 놀라 뜨거운 생강차를 마시라고 억지로 권했다. 앤은 생강차를 마시면 기분이 나아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참을성 있게 홀짝거렸다. 생강차에 인생의 경험을 넣어 주는 마법의 힘이 있다면, 앤은 기꺼이 단숨에 들이켰을 것이다. 
   "마릴라 아줌마, 저 실패하면 어쩌죠?" 
   "얘야, 어떤 일이든 하루만에 실패하는 법은 없어. 시간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잖아? 문제는 말이다. 앤, 너는 네가 알고 있는 걸 아이들한테 다 가르쳐서 하루아침에 모든 잘못을 싹 고치길 바란다는 거야. 그러고는 제대로 안 되면 실패했다고 낙담하겠지."  





  5장 훌륭한 여선생 




   그 날 아침, 앤은 생전 처음으로 전혀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 채 자작나무 길을 지나갔다. 학교에 이르렀을 때 교실 안은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전임 선생이 아이들에게 새 선생이 오면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일러 두었던 것이다. 앤이 교실에 들어서자, "빛나는 아침의 얼굴들"이 책상 줄을 가지런히 맞추고 앉아 호기심에 찬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냈다. 앤은 모자를 걸고 아이들을 마주 보고 섰다. 앤은 자신이 느끼는 것만큼 그렇게 긴장되고 바보스런 모습으로 보이지 않기를, 또 자신이 얼마나 떨고 있는지 아이들이 눈치채지 않기를 바랐다. 
   어젯밤 앤은 개학날 아이들에게 할 인사말을 쓰느라 거의 자정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앤은 수도 없이 인사말을 고쳐 쓰고 공들여 다듬고 나서 완벽하게 외워 두었다. 이 훌륭한 인사말에는 특히 서로 돕고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등의 멋진 생각들이 강조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순간, 그 인사말을 한 마디도 기억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10초밖에 안 되었는데 한 일 년쯤 지난 듯한 시간이 흐른 뒤, 앤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성경책을 꺼내세요." 
   곧 책상 뚜껑을 딸그락 거리는 소리를 틈타서 앤은 숨을 죽이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앤은 아이들이 성경을 읽은 동안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어른의 나라로 가고 있는 어린 순례자의 행렬을 죽 훑어보았다. 
   물론 대부분은 앤이 잘 알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앤의 동창들은 작년에 졸업했지만, 1학년 아이들과 에이번리로 전학 온 열 명을 빼고는 모두 앤과 함께 학교에 다녔다. 앤은 이미 가능성을 자세히 알고 있는 그 아이들보다는 내심 전학 온 열 명에게 마음이 더 끌렸다. 어쩌면 전학생들도 나머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할지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그 아이들 중에 아주 뛰어난 아이가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앤은 이런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 있는 아이는 앤서니 파이였다. 앤서니는 까맣고 작은 얼굴에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서 적의를 나타내는 새까만 눈으로 앤을 빤히 쳐다보았다. 앤은 즉시 앤서니가 자기를 좋아하게 만들어서 파이 집안 사람들을 완전히 눌러 버려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반대편 구석에는 명랑해 보이는 꼬마 아티 슬론이 있고, 그 옆으로 주근깨투성이 얼굴에 들창코인에다 희끄무레한 속눈썹이 덮인 왕방울 만한 푸른 눈의 낮선 남자 아이가 앉아 있었다. 아마도 돈넬씨의 아들 같았다. 그리고 요모조모 닮은 것으로 보아 그 아이의 누이 동생인 듯한 여자 아이가 메리 벨과 함께 옆줄에 앉아 있었다. 앤은 어머니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딸을 저렇게 입혀서 학교에 보냈을까 궁금했다. 그 아이는 면 레이스가 잔 달린 연분홍빛 실크드레스를 입고 실크 스타킹에 더러운 흰 실내화를 신고 있었다. 아이의 옆은 갈색 머리칼은 아주 심하게 곱슬거려 부자연스럽게 똘똘말린 채 자기 머리보다 더 커다란 화려한 나비 리본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표정으로 보아 자만심이 넘쳐흐르는 아이 같았다. 
   황갈색 머리카락을 어깨에 찰랑찰랑 늘어뜨린 창백한 꼬마는 아네타 벨인 것 같았다. 뉴브리지 학군에서 살던 아네타는 북쪽으로 45미터 가량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에이번리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 한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핼쑥한 여자 아이 셋은 코튼 네 아이들이 분명했다. 그리고 성경책 너머로 잭 길리스에게 살살 눈웃음을 치고 있는 담갈색 눈동자의 긴 머리 꼬마 미인은 의심할 여지없이 프릴리 로저슨이었다. 얼마 전에 재혼한 프릴리의 아버지는 그래프턴에서 프릴리를 집으로 데려왔다. 뒷자리에 앉아 있는 불품 없이 생긴 키 큰 여자 아이는 팔다리가 몇 개나 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앤은 처음에 그 애가 누군지 생각나지 않았다. 나중에야 그 애 이름이 바바라 쇼이고 에이번리에서 고모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앤은 또 바바라가 서두르다가 자빠지거나 누군가의 발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통로를 빠져 나온다면 그것은 에이번리 학생들이 그 일을 축하하기 위해 학교 벽에 써 붙일 정도로 특별한 사건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앤은 자기 책상 바로 앞에 앉아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마치 천재를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에 이상한 전율을 느꼈다. 앤 생각에 이아이는 폴 어빙이 틀림없었는데, 폴이 에이번리 아이들과는 다를 거라고 했던 레이첼 린드 부인의 예견이 꼭 맞아 떨어졌음을 알았다. 앤은 에이번리 뿐 아니라 세상 어디에서도 폴 같은 아이는 찾아보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앤은 열심히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폴의 짙푸른 눈동자 속에서 묘하게도 자기와 비슷한 한 영혼이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앤은 폴이 열 살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기껏해야 여덟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폴은 여태껏 앤이 보아온 어떤 아이보다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 아름답고 섬세하고 순수한 얼굴은 밤색 곱슬머리가 둘러싸고 있었다. 폴의 입은 구김살이 전혀 없어 유쾌해 보였으며, 빨간 입술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겨우 보조개를 면한 곳쯤에서 멋지게 끝나 있었다. 폴은 몸집에 비해 훨씬 성숙한 영혼을 가진 아이처럼 해맑으면서도 진지하고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앤이 살며시 미소를 보내자 그런 표정은 사라지고 거기에 답하듯 미소가 떠올랐다. 폴의 미소는 갑자기 어떤 등불이 그의 내부에 불을 지핀 듯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환히 빛나는 것이 완전한 존재의 계시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 미소는 일부러 꾸며 낸 것이 아니라 선하고 따뜻한 폴의 성격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앤과 폴은 서로 한마디도 나누어 보지 않았지만 잠깐 주고받은 미소로도 영원한 친구가 된 듯했다. 
   하루가 꿈같이 지나갔다. 앤은 나중에 그 날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자기가 아닌 사람이 아이들을 가르친 것 같았다. 앤은 기계적으로 책을 읽히고 셈을 가르치고, 글씨 쓰기를 시켰다. 아이들이 매우 말을 잘 들어서 벌을 받은 아이는 두 명밖에 없었다. 몰리 앤드루스는 훈련된 귀뚜라미 두 마리를 통로에서 몰고 다니다가 앤에게 들켰다. 앤은 벌로 몰리를 한 시간 동안 교단에 세워 두고 귀뚜라미를 압수했다. 몰리는 벌서는 것보다 귀뚜라미를 뺏긴 데 더욱 가슴 아파했다. 앤은 귀뚜라미를 상자에 넣어 두었다가 학교에서 돌아가는 길에 제비꽃 골짜기에 풀어 주었다. 그러나 몰리는 그 뒤로 내내 앤이 귀뚜라미를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가서 혼자만 갖고 논다고 믿었다. 
   벌을 받은 또다른 아이는 앤서니 파이였다. 앤서니는 자기의 회색 물병에 남아 있던 물을 오렐리아 클레이의 뒷덜미에 전부 쏟아 부었던 것이다. 쉬는 시간에 앤은 앤서니를 남겨놓고 신사는 절대로 숙녀의 목에 물을 붓지 않는다고 타이르면서 신사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앤은 자기 반 남학생들이 모두 신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앤의 짧은 가르침은 친절하고 가슴 뭉클한 것이었으나 불행히도 앤서니는 조금도 감동 받지 않았다. 앤서니는 예의 부루퉁한 얼굴로 잠자코 듣고 있더니 조롱하듯 휘파람을 불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앤은 한숨을 쉬고는 로마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듯이 앤서니가 자기를 좋아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추슬렀다. 사실 파이 집안 사람들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의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앤은 앤서니를 좋게 보고 싶었다. 앤서니의 퉁명스러움 뒤에 숨겨진 속마음은 오히려 착한 아이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자 앤은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비참할 정도로 실망감을 느꼈다. 무슨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니 사실 특별히 낙담할 만한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앤은 너무나 지쳐서 가르치는 일 같은 건 전혀 좋아하지 않게 될 것 같았다.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40년 동안 매일같이 해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울어버릴까,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 자기만의 하얀 방에서 마음놓고 울까 망설이고 있었다. 앤이 채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문 쪽에서 또각또각하는 구두 소리와 실크 치맛자락이 사각사각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부인이 들어와 앤 앞에 섰는데, 그 부인의 옷차림을 보니 해리슨 씨가 얼마 전에 샬럿타운의 어느 가게에서 보았다는 요란한 차림새를 한 여자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여자는 멋있게 옷을 입는 것과 꼴사나운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 같아." 
   그 부인은 할 만한 여지가 있는 부분은 온통 다 부풀리고 주름잡고 프릴을 단 연한 하늘색 실크 여름옷을 사치스럽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머리에는 커다란 흰 시폰(비단, 인조견의 직물로 매우 얇고 부드러워 베일, 모자의 장식 등에 쓰임:옮긴이) 모자를 썼는데 모자에 달린 타조 깃털이 길다 못해 축 늘어져 있었다. 검고 큰 점이 잔뜩 박힌 분홍색 시폰 베일은 모자 끝에서 어깨까지 파티복 주름 장식처럼 늘어져, 뒤에 달린 두 개의 가벼운 장식 리본과 함께 나풀거렸다. 그 작은 몸집에 보석을 치렁치렁 매달고, 독한 향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 여자가 말했다. 
   "나는 돈넬 부인이에요. 에이치(H) 비(B) 돈넬이죠. 오늘 우리 딸 클래리스 앨마이러가 학교에서 돌아와 한 말이 사실인지 물어 보러 왔어요. 난 그 애 말을 듣고 너무너무 화가 났어요." 
   앤은 아침에 돈넬네 아이들과 관련하여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기억하려 애쓰며 우물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선생님이 오늘 우리 애들을부를 때 돈넬이라고 했다면서요? 이봐요. 셜리 양, 돈넬의 정확한 발음은 돈넬이에요. 뒷음절에 악센트를 주면서 돈넬이라고 해야 된다구요. 앞으로 주의해 주세요." 
   앤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노력할게요. 누가 자기 이름 철자를 잘못 쓰면 대단히 언짢다는 건 저도 겪어 봐서 압니다. 자기 이름을 이상하게 부르면 무척 기분이 나쁘겠죠." 
   "물론이죠. 그리고 클래리스 앨마이러가 그러던데 선생님은 또 내 아들을 제이콥이라 불렀다면서요?" 
   앤이 이유를 설명했다. 
   "댁의 아드님이 저한테 자기 이름이 제이콥이랬어요." 
   에이치 비 돈넬 부인은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으면 애들이 눈곱만치도 생각이 없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말했다. 
   "그랬을 거란 생각은 했어요. 셜리 양. 그 앤 취향이 아주 서민적이요. 그애를 낳고 난 세인트 클레어라고 부르고 싶었어요. 아주 귀족적인 이름이죠, 안 그래요? 하지만 그 애 아버지가 자기 삼촌 이름을 따서 제이콥이라 부르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뭐예요. 제이콥 삼촌이 돈 많은 노총각이라서 결국은 내가 양보를 했죠.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무튼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 애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제이콥 삼촌이 덜컥 결혼을 헤 버리더니 지금은 아들이 셋이나 있어요.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더니! 제이콥 삼촌은 뻔뻔스럽게도 결혼식 초대장까지 보냈다구요. 난 초대장을 받자마자 미안한 일이지만 제이콥이란 이름을 이제 사양하겠다고 했지요. 그날로 난 우리 아들을 세인트 클레어라 불렀으니까 남들도 그 애를 그렇게 불러야겠죠? 남편이 자꾸 제이콥이라고 불러서 그런지, 그 앤 이상하게도 그 촌스런 이름을 더 좋아해요. 하지만 그 애 이름은 세인트 클레어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셜리 양, 제 말 잊지마세요. 아셨죠? 고마워요. 전 딸애한테 선생님이 잘 몰라서 그랬을 테니 얘길 하면 고쳐질 거라고 했어요. 뒷음절에 악센트를 넣어 돈넬이라고 불러 주시고, 우리 아들을 부를 땐 반드시 제이콥이 아니라 세인트 클레어라고 해야 돼요. 잊지 않으시겠죠? 고마워요." 
   돈넬 부인이 유유히 교실을 나가자 앤은 교실 문을 잠그고 집으로 돌아갔다. 언덕 기슭에서 앤은 자작나무 길에 서 있는 폴 어빙을 보았다. 폴은 에이번리 아이들이 "쌀백합"이라 부르는 우아하고 작은 야생난초 다발을 앤에게 내밀며 수줍게 말했다. 
   "저, 선생님, 라이트 아저씨네 들판에서 이 꽃을 보고 선생님 드리려고 갖고 왔어요. 선생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그리고……." 
   폴은 크고 예쁜 눈을 살며시 치켜 떴다. 
   "전 선생님이 좋아요." 
   앤은 향기로운 난초를 받아 들며 감격했다. 
   "어머, 착하기도 하지." 
   앤은 폴의 말을 들으니 마치 마법사의 주문처럼 방금 전의 좌절감과 피로가 사라지고 솟구치는 분수처럼 마음속에서 희망이 샘솟아 올랐다. 앤은 축복이 가득 담긴 향기로운 야생란을 들고 가벼운 걸음으로 자작나무 길을 걸어갔다. 
   마릴라가 궁금해했다. 
   "그래, 잘했니?" 
   "한 달 뒤에나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뭐라 말을 못하겠어요. 전 저 자신을 너무 몰라요. 생각이 온통 흐리멍덩하게 뒤죽박죽이 됐어요. 오늘 제대로 해낸 일은 클리피 라이트한테 에이는 A라고 쓴다고 가르친 것 밖에 없어요. 걘 그걸 모르고 있었거든요. 한 영혼을 셰익스피어나 《실락원》(영국의 시인 존 밀턴이 쓴 대서사시:옮긴이)으로 이끄는 길에 첫발을 내딛게 하는 건 정말 멋지잖아요?" 
   나중에 린드 부인이 앤의 사기를 더욱 북돋워 주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그 선량한 부인은 학생들을 자기 집 대문 앞에 불러 세워 놓고 새 선생님이 얼마나 좋으냐고 묻고는 대답을 듣고 온 것이다. 
   "앤, 앤서니 파이만 빼고 다른 애들은 모두 네가 너무너무 좋다더구나. 난 그애가 싫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단다. 그 애는 네가 다른 여선생과 마찬가지로 시시해 보인대. 파이 집안 애들은 하나같이 너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구나. 하지만 신경쓰지 말아라."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앤서니 파이도 조만간 저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참고 잘해 주다 보면 언젠가 저를 좋아할 날이 오겠죠." 
   앤의 조용한 대답에 린드 부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글쎄다, 파이 집안 아이에 대해 그렇게 자신하지는 말아라. 그 애들은 두 번에 한 번 꼴은 꼭 정반대로 엉뚱하게 행동한단다. 그건 그렇고, 돈넬 부인 이야긴데 말이야, 내 장담하지만 절대로 난 그 여자한테 돈넬이라고 하지 않을 게다. 그 사람들 성은 옛날 부터 원래 돈넬이야. 그 여편네, 정말 정신나갔지. 그 여자 집에 '여왕'이라는 퍼그종의 개가 한마리 있는데, 글쎄 그 집 식구들이랑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댄다. 그것도 그 비싼 도자기 접시에 담아서 말이야. 내가 그 여자라면 하늘이 무서워서라도 그렇게는 못할 거야. 토머스 말로는 돈넬 씨가 분별있고 성실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마누라 고르는 재주는 지지리도 없다고 하더구나."  



 6장 각양 각색의 사람들 



   9월에 접어든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는 모래 언덕을 넘어 상쾌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들판과 숲 사이를 뚫고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 길다란 붉은 길은 울창한 가문비나무 수풀 한구석을 휘감아 돌아 커다란 이파리를 하늘거리는 고사리 덤불 위에 들어찬 싱그런 단풍나무 숲을 누비고 지나가 시내가 언뜻 보이는 숲 속의 골짜기 아래로 쪽 내려갔다가 이젠 미역취와 남빛 과꽃의 덤불 사이에서 따뜻한 햇볕을 쬐고 있었다. 여름 언덕에 깃들여 살던 조그만 귀뚜라미들이 떼 지어 흥겹게 노래하는 소리가 대지에 울려 퍼졌다. 살찐 갈색 조랑말 한 마리가 그 길을 걸어가고 청춘 시절의 소중한 기쁨으로 가슴이 부푼 두 소녀를 태운 마차가 뒤따르고 있었다. 
   앤은 행복에 겨운 한 숨을 내쉬었다. 
   "아, 다이애나, 이런 날은 에덴 동산에서나 있을 수 있는 날이야, 그렇지? 바람이 요술을 부리고 있어. 저 단풍든 계곡에 가득한 자줏빛을 봐. 어머, 죽어 가는 전나무 냄새 좀 맡아 봐! 이 냄새는 에벤 라이트 아저씨가 울타리에 쓸 나무를 베고 있는 저 그늘진 골짜기에서 나는 거야. '이런 날 살아 있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고, 죽어 가는 전나무 향을 맡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천국이라네.' 앞구절은 위즈워스가 한 말이고 뒷구절은 이 앤 셜리가 지어낸 거야. 천국에는 죽어 가는 전나무는 없을 거야, 그치? 하지만 전나무 숲을 거닐면서 죽어 가는 전나무 향을 맡을 수 없는 곳이라면 이상적인 천국은 아니야. 아마 천국에선 죽음 없이도 이런 향기를 맡을 수 있겠지. 그래 그럴거야. 저 향긋한 냄새는 틀림없이 전나무의 영혼이겠지. 물론 이 영혼의 향기는 천국에서도 그대로일 거야." 
   현실적인 다이애나가 말했다. 
   "나무는 영혼이 없어 하지만 죽은 전나무 냄새는 정말 향긋해. 베갯잇을 만들어서 전나무 잎으로 속을 꽉 채워야지. 앤, 너도 만들어 두는 게 좋을 거야." 
   "나도 하나 만들어서 낮잠 잘 때 쓸 생각이야. 그럼 틀림없이 숲이나 나무의 요정이 되는 꿈을 꾸겠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화창한 날 마차를 몰고 가는 에이번리 학교의 선생님, 앤 셜리라는 사실이 너무나 만족스러워." 
   다이애나가 한숨을 쉬었다. 
   "좋은 날이긴 하지만 우리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닌걸. 앤, 도대체 왜 뉴브리지 거리를 맡겠다고 한 거야? 에이번리에서 괴팍하다고 소문난 사람들은 거의 다 이 거리에서 산단 말이야. 우린 거지 취급을 당할 거야. 여긴 에이번리에서 가장 인심 사나운 곳이라구." 
   "그래서 뉴브리지 거리를 택한 거야. 물론 우리가 부탁했으면 길버트와 프레드가 여길 맡았겠지. 하지만 다이애나, 너도 알다시피 에이번리 지역 개선 협회를 만들자고 처음 제안한 사람은 나니까, 내가 책임을 져야지. 그러니 가장 힘든 일은 내가 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네 생각을 미처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야박한 집에 가면 넌 한마디도 안 해도 돼. 린드 아줌마 말씀이 난 말을 잘 한다니까 내가 이야기할게. 린드 아줌마는 우리 일을 찬성할 지 말지 망설이고 계셔. 앨런 목사님 부부가 우리 생각에 동의한다 싶으면 린드 아줌마도 찬성할 마음이 드실거야. 하지만 최초로 생겼다는 사실이 우리한텐 불리해. 그래서 린드 아줌마는 이렇다 할 얘기없이 그냥 지켜보고만 계신거야. 그러다가 우리가 성공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 옳다는 걸 인정하실 거야. 프리실라는 다음번 회의에서 발표할 보고서를 쓸 거야. 고모가 뛰어난 작가이고 프리실라 집안 사람들은 글재주가 있으니까 잘됐어. 샬럿 이(E) 모건 부인이 프리실라네 고모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절대 잊지 못할거야. 《숲에서 보낸 나날》과 《장미정원》을 쓴 작가를 고모로 둔 친구가 있다는 건 굉장한 일이잖아," 
   "모건 부인은 어디 사셔?" 
   "토론토에, 프리실라가 그러는데 모건 부인이 다음 여름에 우리 섬에 오신대. 그리고 가능하면 우리가 그 분을 만날 수 있도록 말해 보겠대. 너무 멋진 일이라서 믿어지지가 않아. 하지만 잠자리에 들어가 상상하는 일만으로도 즐거워." 
   드디어 에이번리 지역 개선 협회가 구성되었다. 
   길버트 불라이드가 회장, 프레드 라이트가 부회장, 앤 셜리가 서기, 다이애나 배리가 회계를 맡았다. 이른바 "개선론자"라 불리는 이들은 한 주 걸러 한 번씩 회원의 집에서 모임을 갖기로 했다. 개선론자들은 계절이 너무 늦어 버려 많은 사업을 벌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버려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내년 여름에 진행시킬 일을 계획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고, 논문을 써서 발표하고, 앤이 말한 대로 널리 알릴 생각이었다. 
   물론 반대하거나 비웃는 사람들도 다소 있었다. 개선론자들은 자신들의 노력을 비웃는 사람들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엘리샤 라이트는 협회 이름을 "연애 클럽"이라고 짓지 그랬느냐고 비꼬았다. 하이럼 슬론 부인은 개선론자들이 길섶을 다 갈아엎고 제라늄을 심을 거란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레비 볼터씨는 개선론자들이 주민들 집을 모두 부수고 협회에서 정한 대로 다시 지으라고 강요할 거라고 이웃사람들에게 경고했다. 제임스 스펜서 씨는 개선론자들에게 교회언덕을 깍아 주면 좋겠다는 전갈을 보냈다. 에벤 라이트 씨는 엔에게 개선론자들이 조시아 슬론 할아버지가 구레나룻을 가지런히 다듬도록 설득해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로렌스 벨 씨는 개선론자들이 굳이 원한다면 헛간이야 흰색으로 칠하겠지만 외양간 창문에 레이스 커튼은 절대로 치지 않겠다고 했다. 메이저 스펜서 씨는 카모디 치즈 공장으로 우유를 실어 나르는 일을 하는 개선론자 클리프턴 슬론에게 내년 여름에는 주민들 모두가 자기 우유통을 손수 페인트 칠하고 거기에 장식보를 깔아야 되는 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그런 법이기에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사람들의 냉담한 시선 속에서도 협회는 올 가을에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단 한가지 사업을 과감하게 진행시켜 나갔다. 베리 팔러의 집에서 열린 두 번째 모임에서 올리버 슬론은 마을 회관의 지붕을 고치고 페인트 칠을 할 기부금을 모으자고 제안했다. 줄리아 벨은 자기가 여자답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꺼림칙했지만, 올리버의 의견에 동의했다. 길버트가 표결에 부친 이 안은 만장 일치로 통과되었고 앤이 엄숙하게 회의록에 기록했다. 다음 안건은 그 일을 추진할 소위원회를 구성하는 문제였다. 거티 파이는 줄리아 벨이 모든 영광을 독차지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과감하게 제인 앤드루스를 소위원회 위원장으로 추천했다. 이 의견 역시 재청을 받고 표결에서 통과되었다. 제인은 답례로 거티를 길버트, 앤, 다이애나, 프레드 라이트와 함께 소위원회의 구성원으로 지목했다. 소위원회는 따로 모여 활동 지역을 나눴다. 그리하여 앤과 다이애나는 뉴브리지를, 길버트와 프레드는 화이트샌즈를, 제인과 거티는 카모디를 맡았다. 
   길버트는 앤과 함께 유령의 숲을 지나 집으로 오면서 말했다. 
   "카모디에 모여 사는 파이네 사람들은 자기 집안 사람이 부탁하지 않는 한 어림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어." 
   그 다음 토요일, 앤과 다이애나는 일을 시작했다. 둘은 뉴브리지 거리 끝까지 말을 몰아 "앤드루스 자매"를 제일 먼저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이 집 저집에 기부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이애나가 말했다. 
   "캐서린 아줌마 혼자 있으면 기부금을 받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엘리자 아줌마가 있으면 우린 헛고생하는 거지 뭐." 
   별로 나다니지 않은 엘리자는 집에 있었는데 평소보다 더 굳은 얼굴이었다. 엘리자는 인생이란 눈물 바다요, 소리 내어 웃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미소 짓는 일 조차 비난받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여기는 사람 같았다. 앤드루스 자매는 50여 년을 결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자매"로 살아왔는데, 아마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그 상태로 지낼 것 같았다. 캐서린은 결혼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지만, 원래 비관론자였던 엘리자는 결코 희망 따위는 품은 적이 없다고들 한다. 두 사람은 마크 앤드루스네 소유의 너도밤나무 숲 한 귀퉁이에 있는 양지바른 곳에 작은 갈색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엘리자는 그 집이 여름에 푹푹 찌는 찜통처럼 덥다고 투덜대는 반면, 캐서린은 겨울이면 따사롭고 포근한 집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엘리자는 헝겊 조각을 누비고 있었다. 누빈 감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캐서린이 코바늘하고 있는 별것 아닌 레이스에 그저 질투가 났기 때문에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앤과 다이애나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엘리자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캐서린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들었다. 예상대로 캐서린은 엘리자가 눈길을 줄 때마다 죄지은 사람마냥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에서 웃음이 싹 거두었다. 그러나 캐서린의 얼굴에는 이내 다시 미소가 번졌다. 
   엘리자가 딱 잘라 말했다. 
   "낭비할 돈이 있으면 태워서 불구경이나 하면서 놀겠네. 난 회관 고치는 일 따위에는 단 한 푼도 낼 수 없어. 회관은 주민들에게 도움될 게 하나도 없어. 그저 젊은애들이 집에서 잠을 자도 시원찮을 시간에 재미 볼 장소로나 쓰이겠지." 
   캐서린은 반박했다. 
   "그래도 언니, 젊은 사람들은 좀 즐기면 살아야 되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캐서린 앤드루스. 우린 젊었을 때 회관 같은 데서 얼쩡거리지 않았어. 이놈의 세상은 갈수록 썩어 간다니까." 
   캐서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난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너나 그렇게 생각하지 ! 캐서린 앤드루스.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 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사실은 사실일 뿐이야." 
   엘리자가 노골적으로 얕잡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언니, 난 항상 좋은 면을 보고 싶어." 
   "좋은 면은 애당초 있지도 않아." 
   앤은 엘리자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듣다못해 소리를 질렀다.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세상엔 좋은 점이 얼마나 많은데요.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잖아요." 
   엘리자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너도 나만큼 오래 살다 보면 그런 고상한 생각일랑 없어질 거다. 그리고 세상을 더 좋게 만들어 보려고 그렇게 애쓰지도 않을 거다. 다이애나, 어머니는 어떠시냐? 쯧쯧, 요즘 기력이 쇠했더라구. 완전히 약해진 것 같아. 앤, 마릴라는 얼마나 있어야 눈이 아예 멀어 버릴 것 같으냐?" 
   앤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 생각으로는 조심만 하면 더 이상 나빠지지는 않는 댔어요." 
   엘리자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의사들이란 사람들 듣기 좋으라고 늘 그런 식으로 말하지. 내가 마릴라라면 희망을 갖지 않겠다.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게 최고지." 
   앤은 애가 탔다. 
   "최선의 경우를 바라고 살면 안되나요? 나빠질 가능성만큼 좋아질 가능성도 있잖아요." 
   앨리자는 쌀쌀맞게 되받았다. 
   "내 경험으로는 아니야. 너희 둘은 고작해야 열 여섯이지만 난 쉰일곱 살이다. 그래, 일은 잘되어 가니? 이번에 새로 만든 너희 협회가 에이번리를 더 이상 내리막길로 이끌지 않기를 바란다. 뭐 별로 기대하지도 않지만." 
   앤과 다이애나는 그 집을 미련 없이 나와 살찐 말이 달릴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마차를 몰았다. 앤과 다이애나가 너도밤나무 숲을 끼고 돌 무렵 앤드루스 자매의 목장에서 어떤 뚱뚱한 사람이 미친 듯이 손을 흔들며 뒤쫒아 왔다. 바로 캐서린 앤드루스였다. 캐서린은 숨이 차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앤의 손에 50센트를 쥐여 주었다. 
   캐서린이 헉헉거리며 말했다. 
   "회관을 칠하라고 주는 돈이야. 1달러를 내고 싶은데 쌈짓돈이라서 그 이상은 낼 수 없어. 그랬다간 엘리자 언니가 눈치챌 테니까. 난 너희들이 만든 모임에 정말 관심이 많고 좋은 일 많이 하리라 믿고 있단다. 난 낙천적인 사람이야. 언니랑 같이 살려니 낙천가가 될 수밖에. 엘리자 언니가 찾기 전에 어서 돌아가야겠다. 언니는 내가 닭모이를 주고 있는 줄 알거든. 기부금 많이 걷거라. 그리고 엘리자 언니 말에 너무 낙심하지 말고.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어.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지." 
   그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다니엘 블레어 씨 집이었다. 
   마차가 바퀴 자국이 깊이 팬 좁은 길을 덜컹거리며 가고 있는데. 다이애나가 입을 열었다. 
   "여기는 블레어 아줌마가 집에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어. 블레어 아줌마가 있으면 우린 기부금을 한 푼도 못 받을 거야. 모두들 블레어 아저씨가 부인 허락 없이는 머리카락 한 올도 자르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잖아. 블레어 아줌마는 확실히 꼼꼼한 사람이야. 좋게 말하면 말야. 블레어 아줌마는 너그럽기 이전에 사리를 따지다 못해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이래." 
   그 날 저녁 앤은 마릴라에게 블레어 씨 집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 주었다. 
   "우린 말을 매어 놓고 부엌문을 두드렸어요.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문만 활짝 열려 있었는데, 갑자기 식품 저장실에서 누군가가 무섭게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어요. 무슨 말인가 알아들을 수는 없었죠. 다이애나는 말소리를 봐서는 욕하는 소리가 틀림없다고 했어요. 블레어 아저씨는 늘 조용하고 온순한 분이라 난 그 분이 욕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하지만 적어도 아저씨가 굉장히 화가 나신 것만은 분명해요. 그 불쌍한 분이 홍당무처럼 얼굴이 빨개져서는 땀을 뻘뻘 흘리며 문가로 나왔을 때, 자기 부인의 커다란 줄무늬 앞치마를 입고 있었어요. 아저씨가 그러시더군요. '이놈의 앞치마를 벗어 버릴 수가 있어야지. 너무 단단하게 묶어서 풀 수가 없어. 그러니까 아가씨들, 이런 차림새를 너그럽게 봐 줘.' 우린 괜찮다고 말하고 들어가서 앉았어요. 블레어 아저씨도 앉으셨죠. 아저씨는 앞치마를 뒤로 돌려 돌돌 말아 올리고는 몹시 쑥스러하시면서, 가엾다고 흉보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어요. 그래서 다이애나가 말했죠. 우리가 때를 잘 못 맞춰 온 것 같아 미안하다고요. 아줌마도 아시다시피 블레어 아저씨는 아주 예의 바른 분이잖아요. 그 분은 애써 웃으며 '아, 아니야. 케이크 구울 준비를 하는라 좀 바쁠 뿐이지. 마누라가 오늘 몬트리올에서 처제가 온다는 전보를 받고 역으로 마중 나가면서 나더러 찻상에 낼 케이크를 좀 구워 놓으라고 했어. 마누라가 케이크를 만드는 법을 써 놓고 설명까지 해줬는데도, 어쩌라는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어. 그래, 여기 '입맛에 따라 향을'이라고 적혀 있구나. 이게 무슨 뜻이냐? 설명해 줄 수 있겠니? 내 입맛이 다른 사람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지? 조그만 레이어 케이크 하나 만드는 데 바닐라를 큰 숟가락으로 하나 정도 넣어도 되니?' 하고 말씀하셨어요. 난 그 아저씨가 너무 안돼 보였어요. 그 분은 남편 대접을 전혀 못 받는 것 같았어요. 공처가에 대해서 들어 본적이 있지만 블레어 아저씨를 보고서야 이런 사람이 바로 공처가구나 싶더라구요. 제 입안에선 '블레어 아저씨. 회관을 고칠 기부금을 내시면 제가 케이크 반죽을 해드릴게요.' 하는 말이 맴돌았어요. 하지만 그러잖아도 곤경에 빠져 있는 분과 흥정을 한다는 건 이웃으로서 도저히 못할 일이란 생각이 불현듯 들더군요. 그래서 아무 조건없이 그냥 케이크를 반죽해 드리겠다고 했어요. 블레어 아저씨는 뛸 듯이 좋아했어요. 아저씨는 결혼 전에는 곧잘 빵을 구워 먹었지만 그 실력으로 케이크는 어림도 없다고 했어요. 하지만, 아저씨는 아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거죠. 블레어 아저씨는 제게 앞치마를 하나 가져다 주셨어요. 다이애나는 계란을 풀고, 전 반죽을 했어요. 아저씨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재료를 챙겨주셨죠. 아저씨는 앞치마 따윈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아저씨가 뛰어다닐 때마다 앞치마가 뒤에서 나부꼈어요. 다이애나는 그 모습을 보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보지 않았대요. 블레어 아저씨는 케이크 굽는 건 혼자 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런 일엔 익숙하시대요. 그리고는 기부금 걷는 장부를 보여 달라고 하시더니 4달러를 내겠다고 적었어요. 결곡 우린 보답을 받은 거죠. 하지만 설령 블레어 아저씨가 한 푼도 내지 않겠다 해도 그 분을 도와 드린 건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한 도리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앤과 다이애나는 다음으로 시어도어 화이트 씨 집을 찾아갔다. 둘은 그 집에는 가 본적이 없고, 화이트 부인과는 거의 얼굴만 알고 지낼 뿐이었다. 화이트 부인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뒷문으로 들어가야 할까, 현관으로 들어가야 할까? 앤과 다이애나가 소곤거리며 의논하는 데 화이트 부인이 신문지를 한아름 들고 현관으로 나왔다. 화이트 부인은 조심스럽게 현관 바닥과 계단에 신문지를 한 장 한 장 깔더니 낯선 방문객들 앞까지 걸어왔다. 
   화이트부인이 걱정스러워하며 말했다. 
   "잔디에 발을 깨끗이 턴 다음 신문지를 밟고 들어오겠니? 방금 집안을 구석구석 청소해 놔서 더럽히고 싶지 않거든. 어제 비가 와서 이 길은 진흙투성이야." 
   신문지를 밟고 지나가면서 앤이 다이애나에게 귀엣말로 경고했다. 
   "웃으면 안 돼. 다이애나 부탁인데, 화이트 부인이 무슨 소리를 하든 절대 나를 쳐다보지 마. 그렇지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있을 수 없을 거야." 
   신문지는 현관을 지나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응접실까지 깔려 있었다. 앤과 다이애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아 용건을 말했다. 화이트 부인은 예의 바르게 듣고 있다가 딱 두번 이야기를 끊었는데, 한 번은 겁 없이 들어온 파리를 쫒아내느라고, 또 한 번은 앤의 옷자락에서 양탄자로 떨어진 실오라기 같은 풀을 줍느라고 그랬다. 앤은 아주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화이트 부인은 가부금 징수 장부에 2달러를 내겠다고 썼고 그 자리에서 돈을 냈다. 
   그 집을 나오면서 다이애나가 말했다. 
   "기부금을 받으러 또 올까봐 그러는 거야.' 
   화이트 부인은 앤과 다이애나가 매어 놓았던 말을 풀기도 전에 신문을 주워 모았고, 두 사람이 말을 몰아 마당을 지나면서 보니 현관에서 바삐 비질을 하고 있었다. 
   그 집을 완전히 벗어나자 다이애나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세상에서 시어도어 화이트 부인만큼 깔끔한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그 소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겠어." 
   앤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야. 엄마가 저러면 아이들은 정말 끔찍할거야." 
   스펜서 씨 집에서는 이사벨라 스펜서가 에이번리 사람들 하나 하나마다 험담을 늘어놓는 바람에 앤과 다이애나는 비참해졌다. 토머스 볼터 씨는 20년 전 회관을 지을 때 자기가 제안한 터에 짖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부금을 내지 않겠다고 했다. 건강하기로 소문난 에스터 벨 부인은 반 시간 동안이나 쑤시고 아픈 데를 구구절절이 늘어놓더니, 내년 이맘 때 자기는 여기 없을 거라며, 아니 무덤 속에 있을 거라며 처량하게 50센트를 내겠다고 적었다. 
   그러나 앤과 다이애나가 가장 야박한 대접을 받은 곳은 사이먼 플레처 씨 집이었다. 둘은 그 집 뜰 안으로 말을 몰고 들어가면서 현관 창문 사이로 두 얼굴이 자기들을 유심히 살피는 걸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기다려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약이 바짝 올라 화가 머리끝까지 난 두 소녀는 사이먼 플레처 씨 집에서 서둘러 나왔다. 앤마저도 힘이 쭉 빠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슬론 집안 사람들이 줄줄이 모여 사는 농장을 돌아다니면서 앤과 다이애나는 후한 기부금을 받았고, 딱 한 번 냉대를 받은 것 말고는 일이 순조로웠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연못의 다리 옆에 있는 로버트 딕슨 씨의 집이었다. 앤과 다이애나는 그 곳에서 집이 가까웠지만, 까다롭기로 소문난 딕슨 부인의 성미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차를 내오겠다는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거기에서 차를 마셨다. 
   앤과 다이애나가 딕슨 씨 집에 머무르는 동안 나이 든 제임스 화이트 부인이 잠시 그 집에 들렀다. 
   "방금 로렌조네 집에 다녀오는 길인데, 이 순간 에이번리에서 가장 기쁜 사람은 로렌조야. 어떻게 생각해? 사내아이를 낳았더라구. 계집애 일곱을 낳은 뒤에 본 사내아이니 정말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 
   앤은 그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가 딕슨 씨네를 나오면서 말했다. 
   "곧장 로렌조 화이트 아저씨네로 갈 거야." 
   "하지만 그 아저씨는 화이트샌즈 거리에 살고 여기서 꽤 멀잖아. 길버트와 프레드가 찾아갈 거야." 
   그래도 앤은 단호하게 말했다. 
   "길버트와 프레드는 다음 토요일에나 돌아다닐 텐데 그 땐 너무 늦어. 그 집의 훙겨운 기분이 다 사라진다구. 로렌조 화이트 아저씨는 아주 인색하지만 지금이라면 다만 얼마라도 기부 할 거야. 다이애나. 이런 절호의 기회는 놓칠 순 없어." 
   앤의 예상은 적중했다. 
   화이트 씨는 마당에서 부활절 태양처럼 환한 얼굴로 앤과 다이애나를 맞았다. 앤이 기부금 이야기를 꺼내자 화이트 씨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래. 그래. 제일 많이 기부한 사람보다 1달러 더 낸다고 적어 두렴," 
   앤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말했다. 
   "그럼 5달러를 내셔야 하는데요…… 다니엘 블레어 아저씨가 4달러를 기부하셨거든요." 
   그러나 로렌조씨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5달러라, 옜다. 이제 우리 집에 들어가자. 집 안에 굉장한 게 있거든. 아직 몇 사람밖에 못 봤단다. 들어가서 너희들 생각을 말해다오." 
   신이 난 로렌조 씨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면서 다이애나가 걱정스러운 듯이 소곤거렸다. 
   "아기가 예쁘지 않으면 뭐라고 하지?" 
   앤이 태평스레 대꾸했다. 
   "걱정 마, 틀림없이 좋은 말이 생각날 거야. 아기에겐 해줄 말이 많은 법이니까." 
   그러나 아기는 예뻤다. 화이트 씨는 작고 통통한 새 생명을 보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두 소녀에게 5달러를 낸 것이 조금도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로렌조 씨는 그 때가 기부금을 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앤은 좀 피곤하기는 했지만, 여러 사람을 위해 그 날 밤 한 번 더 애를 썼다. 들판을 가로질러 해리슨 씨를 만나러 갔더니, 해리슨 씨는 평소처럼 진저를 데리고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해리슨 씨는 카모디 거리에서 산다. 하지만 제인과 거티는 미심쩍은 소문 외에는 해리슨 씨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앤더러 해리슨 씨에게 기부금 이야기를 해 보라고 안달복달하며 졸랐던 것이다. 
   그러나 해리슨 씨는 동전 한 푼 낼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앤이 아무리 설득해도 해리슨 씨는 끔쩍도 하지 않았다. 
   앤이 투덜거렸다. 
   "전 말예요, 해리슨 아저씨, 아저씨가 우리 모임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물론 좋아하고 말고. 하지만 내 코가 석자니 어쩌겠니?" 
   앤은 잠자리에 들면서 자기 방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며 중얼 거렸다. 
   "오늘 같은 일을 몇 번만 더 겪고 나면, 나도 엘리자 아주머니 못지 않은 비관론자가 되어 있을 거야."  



  7장 책임감 



 
   따뜻한 10월의 어느 날 저녁, 앤은 교과서와 과제물이 널려있는 탁자 앞에서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앉아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앤 앞에 놓여 있는 종이에는 수업이나 학교 업무와는 상관없는 내용들이 빽빽이 씌어 있었다. 
   부엌문에 막 도착해 앤의 한숨 소리를 들은 길버트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앤은 얼굴을 붉히며 아이들이 낸 과제물 밑에 종이를 숨겼다. 
   "별 일 아니야. 해밀턴 교수님이 권하신 대로 생각을 글로 적어 보려는 중이었어. 하지만 막상 써 놓은 걸 읽어보니 영 형편없어. 글이 너무 딱딱하고 우스꽝스러워서, 그냥 흰 건 종이고 검은 건 잉크구나 싶어. 상상은 마치 그림자 같아서 종잡을 수가 없어. 날갯짓하며 걷잡을 수 없이 날아오르니까. 하지만 계속 노력하면 언젠가는 상상의 세계를 글로 옮기는 비결을 알게 되겠지. 너도 알다시피 난 여가 시간이 별로 없잖아. 애들이 낸 과제물과 작문 검사를 끝낼 때까지는 내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단 생각도 잘 들지 않아." 
   길버트가 돌계단에 앉으면서 말했다. 
   "앤, 넌 학교 일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어. 아이들 모두 널 좋아하잖아." 
   "아니, 모두는 아냐. 앤서니 파이는 날 좋아하지도 않고 좋아하려고 하지도 않아. 게다가 그 앤 날 존경하지도 않아…… 그래, 존경하지 않아. 그 앤 날 경멸할 뿐이야. 너한테 털어놓자면, 난 그런 생각 때문에 비참해져. 앤서니는 아주 못된 애는 아니야. 장난이 심하긴 하지만, 다른 애들보다 그렇게 심한 것도 아니야. 앤서니는 대체로 내 말을 듣는 편이야. 하지만 그 앤 내 말이 대들 가치도 없으니 참아 주겠다는 식이야. 앤서니의 그런 태도가 딴 아이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줘. 그 애를 꺾으려고 별의 별 방법을 다 썼는데 이제는 아주 꺾지 못할까 봐 걱정이 돼. 앤서니가 파이 집안 사람이기는 하지만 아직 귀여운 어린애니까 바로잡아 주고 싶어. 앤서니가 내 마음을 받아 주기만 한다면, 난 그 애를 좋아할 수 있어." 
   "아마 앤서니가 집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들어서 그럴 거야." 
   "그래서만은 아니야. 앤서니는 독립심이 강한 녀석이라 자기 나름대로 판단의 기준이 있어. 그 앤 전에도 늘 남자 어른들한테 가서 여교사는 별볼일 없다고 했대. 어쨌든 참고 잘해주다 보면 어떻게든 결판이 나겠지. 난 어려움을 극복하는 걸 좋아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정말 재미있어. 다른 아이들이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폴 어빙이 다 채워 줘. 길버트, 폴은 정말 귀엽고 아주 특별해. 머지 않아 세상에 이름을 날릴 아이란 생각이 절로 들어." 
   앤이 확신에 차서 말을 마치자 길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가르치는 게 좋아. 우선 가르치면서 내가 많이 배우니까. 글쎄, 지난 몇 년 동안 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것보다 몇 주간 아이들에게 화이트샌즈가 어떤 곳인가를 가르치면서 배운 게 더 많아. 우리 모두 아주 잘하고 있는 것 같아. 뉴브리지 사람들이 제인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어. 화이트샌즈 주민들은 이 못난 종을 그럭저럭 봐줄 만한가 봐. 앤드루 스펜서 아저씨만 빼고 말이야. 어젯밤 집에 가는 길에 피터 블루엣 아줌마를 만났는데, 그 분은 스펜서 아저씨가 내 교육 방법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 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대," 
   앤이 자기 경험을 더듬으면서 물었다.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너에게 알려 주는 게 자기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할 땐, 기분 나쁜 말을 들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왜 사람들은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건 도리로 여기지 않는 걸까? 돈넬 부인이 어제 또 학교에 와서 하먼 앤드루스 부인이 내가 아이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탐탁잖게 여기고 있고, 로저슨 씨는 프릴리의 산수 실력이 빨리 늘지 않는다고 짜증낸다는 사실을 나에게 알려 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고 하더군. 석판 너머로 남자 애들한테 눈웃음치는 데 들이는 공을 조금만 아껴도 프릴리는 산수 실력이 훨씬 나아질 거야. 내가 그 현장을 잡을 수는 없다해도 잭 길리스가 프릴리의 산수 문제를 대신 해 주는 건 확실한 것 같아." 
   "돈넬 부인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아들은 결국 그 고상한 이름을 받아들이게 됐니?" 
   앤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응, 하지만 정말 힘들었어, 처음엔 세인트 클레어라고 두세 번 씩 부를 때까지 이 녀석이 들은 척도 안하는 거야. 다른 아이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 그제야 뿌르퉁한 얼굴로 쳐다보더라구. 자기를 존이나 찰리라고 부르기나 한 것처럼 자기를 부르는지 몰랐다는 듯이 말이야. 그래서 어느 날 저녁 수업이 끝난 뒤에 세인트 클레어를 붙잡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했어. 네 엄마가 널 세인트 클레어라고 부르길 원하시니까 내가 거역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야. 세인트 클레어는 이해를 잘하는 아이라서 내가 설명을 끝낼 쯤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그 앤 내가 세인트 클레어라고 부르는 건 괜찮지만 다른 아이가 그러면 '주둥이를 날려 버리겠다'고 말했어. 물론 나는 그런 상스러운 마을 쓰면 안 된다고 다시 한 번 타일러야 했지. 그 후로 난 그 애를 세인트 클레어라고 부르고 아이들은 제이콥이라 불러. 그 밖에 다른 일은 없었어. 세인트 클레어는 내게 목수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돈넬 부인은 클레어를 대학 교수로 만들고 말 거래." 
   대학이란 말에 길버트는 곧 딴 생각에 빠져 들었다. 미래는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지만, 앤과 길버트는 젊은이들이 흔히 그렇듯이 부푼 꿈을 안고 진지하게 자신의 계획과 소망에 대해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사이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굳힌 길버트는 열심히 설명했다. 
   "의사는 정말 멋진 직업이야. 사람은 평생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싸워야 해. 전에 누군가가 인간은 투쟁하는 동물이라고 말했지. 난 질병과 고통과 무지와 싸울 거야.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문제지. 앤, 난 나에게 주어진 숭고한 임무를 완수해서, 역사가 시작된 이래 훌륭한 사람들이 쌓아 온 인류의 지식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나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날 위해 많은 것들을 베풀어 줬으니, 나도 후세를 위해 뭔가를 이룩하여 보답하고 싶어. 그것만이 한 인간이 인류에게 입은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 같아." 
   앤은 꿈꾸듯이 말했다. 
   "나는 사람들이 인생에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싶어. 학문적 업적을 남기는 일이 아주 고귀한 포부라는 건 알지만, 난 사람들에게 그저 지식만을 전해 주고 싶지는 않아. 그보다는 사람들이 나로 인해 더욱 기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 싶어. 그리고 내가 살아 있지 않았다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작은 기쁨이나 행복한 생각들을 간직하고 싶어." 
   길버트가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넌 하루하루 그 꿈을 실현시키고 있는 것 같아." 
   길버트의 말이 옳았다. 앤은 본래부터 밝은 아이였다. 인생 길을 걸어오면서 여린 햇살처럼 흩어져 있는 미소와 말을 잃지 않고 살아 온 덕분에. 그 인생의 주인공인 앤은 적어도 현재의 삶을 희망적이고 달콤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길버트는 아쉬워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난 이만 맥퍼슨 네 댁에 가봐야겠어. 오늘 무디 스퍼전이 안식일을 지키려고 퀸스 전문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온 댔거든. 보이드 교수님이 나에게 빌려주신 책을 무디가 가져오기로 했어." 
   "난 집에 가서 다과상을 준비해야 해. 마릴라 아줌마가 오늘 저녁 키스 아줌마를 만나러 가셨는데 곧 돌아오실 거야." 
   마릴라가 돌아왔을 때 앤은 상을 차려 놓았다. 
   장작불이 탁탁 소리를 내며 활활 타오르고, 서리를 맞아 하얗게 바랜 고사리와 빨간 단풍잎이 꽂힌 꽃병이 식탁을 빛내고 있고, 맛있는 햄 샌드위치 냄새가 집안 가득 퍼졌다. 그러나 마릴라는 깊이 한숨을 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앤이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 
   "눈이 아프세요? 두통인가요?" 
   "아니다. 그냥 좀 피곤해…… 정말 걱정이구나. 메리와 그 자식들 말이다. 메리는 몸이 아주 안 좋아. 얼마 못 살 것 같대나. 그 쌍둥이들은 어찌 될지." 
   "쌍둥이네 외삼촌한테서는 아직 연락이 없나요?" 
   "아니, 편지를 받긴 받았대. 그 사람은 벌목장에서 일하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기 쳐박혀'있대나. 어쨌거나 그 사람은 봄이 올 때까지 쌍둥이를 데리고 있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는 구나. 봄이 오면 결혼을 하고, 아이들과 살 집을 장만하겠단다. 그러니 이번 겨울엔 아이들을 돌봐 줄 만한 이웃을 찾아보라고 했대. 메리는 부탁할 사람이 없다는 구나. 이스트그래프턴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거든. 그건 사실이야. 앤, 결국 메리는 내가 그 아이들을 돌봐 주길 바라고 있는 것 같아.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그렇게 씌어있더구나." 
   앤은 흥분해서 두 손을 꼭 잡았다. 
   "어마나! 마릴라 아줌마, 물론 아이들을 데려 오실거죠. 그렇죠?" 
   마릴라는 약간 날카롭게 말했다.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 난 너처럼 무슨 일에나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 들지 않아. 팔촌은 꽤 먼 친척이야. 여섯 살짜리 아이 둘을 데리고 있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닐 거야, 그것도 쌍둥이를 말이다." 
   마릴라는 쌍둥이들은 보통 애들 보다 훨씬 버릇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쌍둥이가 얼마나 재밌다구요. 한 쌍일 때에는 말예요. 지겨워지는 건 두 쌍, 세 쌍 있을 때죠. 제가 학교에 가고 없을 때도 누군가가 아줌마께 재롱을 떨어 주면 좋잖아요." 
   "난 별로 좋을 것 같지 않구나. 오히려 근심만 늘고 귀찮아지겠지. 그 아이들의 나이가 네가 처음 왔을 때 만큼이나 된다면 또 모르겠다. 도라는 착하고 얌전해 보여 별 걱정이 없는데 데이비라는 애는 말썽꾸러기라서." 
   아이들을 좋아하는 앤은 키스 부인의 쌍둥이들이 걱정스러웠다. 앤에게는 어느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었다. 앤은 마릴라의 유일한 약점이 자기 일이다 싶으면 무서우리 만치 애착을 갖는 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점을 이용해 교묘하게 자기 생각을 늘어놓았다. 
   "마릴라 아줌마, 데이비가 말썽꾸러기라면 더욱더 교육을 잘 받아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우리가 그 애들을 돌봐 주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맡아서 어떤 환경에서 키울지 누가 알겠어요? 키스 아줌마 옆집에 사는 스프러트네가 그 애들을 데리고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린드 아줌마는 헨리 스프러트 씨만큼 교활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그 사람 자식들이 하는 말은 한 마디도 믿지 말라고 하셨어요. 쌍둥이가 그런 걸 배우며 자라야 하다니,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또 그 애들이 위긴스네로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위긴스 아저씨는 집에 있는 쓸 만한 물건은 몽땅 내다 팔아서 그 집 가족들은 탈지유를 먹고 산대요. 아무리 팔촌이라도 친척인데, 그 애들이 굶어 죽는걸 보고 싶으시진 앉죠? 마릴라 아줌마, 그 애들은 우리가 데리고 있어야 해요." 
   마릴라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럴 것 같구나. 내일쯤 메리한테 그 애들을 데려오겠다고 할까 보다. 앤, 그렇게 좋아할 건 없다. 아이들이 오면 넌 일거리만 늘 뿐이니까, 난 눈이 나빠 바느질도 할 수 없어. 그러니 애들 옷을 만들고 고치는 일은 네가 맡아야 할거야. 넌 바느질하기를 싫어하잖니?" 
   앤이 조용히 대꾸했다. 
   "네, 싫어하죠. 하지만 아줌마가 의무감을 가지고 기꺼이 그 아이들을 데려오신다면, 저도 의무감을 가지고 애들 옷을 꿰맬 수 있어요. 때로는 싫어하는 일도 기꺼이 해야만 할 때가 있거든요. 어느 정도는요."  




  8장 마릴라가 쌍둥이를 데려오다 





   레이첼 부인은 몇 년 전 어느 날 저녁 매슈 커스버트가 "입양아"를 데리고 마차를 몰아 언덕을 넘어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침대보를 뜨며 부엌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봄이었고 지금은 늦가을이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들판은 메말라 갈색 빛을 띠고 있었다. 해가 자줏빛, 금빛 햇살을 뿌리며 에이번리 서쪽 어두운 숲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을 때, 작은 갈색 조랑말 한 마리가 마차를 끌고 언덕 아래로 한가롭게 내려오고 있었다. 
   린드 부인은 그 마차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부엌의 긴 의자에 누워 있는 남편에게 말했다. 
   "마릴라가 장례식에 갔다가 돌아오고 있어요." 
   요즘 토머스 린드 씨는 전보다 자주 의자에 눕곤 했는데, 자기 집일보다 남의 일에 눈치가 더 빠른 린드 부인은 아직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릴라가 쌍둥이를 데리고 오네요. 맞아요. 데이비가 흙받이 너머로 몸을 숙여 조랑말 꼬리를 잡으니 마릴라가 애를 잡아끌어 자리에 도로 앉히고 있어요. 도라는 얌전하게 의자에 앉아 있네요. 도라는 언제 봐도 깔끔하고 말쑥해요. 이런, 불쌍한 마릴라는 분명히 올 겨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예요. 하지만 마릴라로서는 이런 상황에서 데려올 수밖에 없다고 봐요. 앤에게 도와 달라고 하겠죠. 앤이 이 사실을 알면 너무 기뻐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겠네요. 앤은 정말 애를 잘 봐요. 어쩜, 죽은 매슈가 앤을 데려오고 마릴라가 애를 키운다고 사람들이 비웃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번엔 마릴라가 쌍둥이를 데려오다니, 죽는 날까지 놀랄 일이 아주 없진 않을 거예요." 
   살찐 조랑말이 린드 골짜기에 있는 다리를 건너 초록 지붕 집으로 이어 지는 샛길을 터벅 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마릴라의 얼굴은 약간 일그러진 상태였다. 이스트그래프턴에서 16킬로미터를 오는 동안, 데이비 키스는 무엇에 홀린 아이처럼 잠시도 가만있지 못했다. 데이비를 얌전히 앉아 있게 하는 것은 마릴라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마릴라는 돌아오는 길 내내 데이비가 행여 마차 뒤로 굴러 떨어져 목이 부러지지나 않을까, 조랑말 발굽에 차이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막막해진 마릴라는 데이비더러 집에 가기만 하면 회초리 맛을 톡톡히 보여 주겠다고 겁을 줬다. 그 말을 들은 데이비는 이제 고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릴라의 무릎에 기어 올라가 통통한 두 팔을 마릴라의 목에 두르고 꼭 껴안았다. 
   데이비는 마릴라의 쪼글쪼글한 뺨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 
   "정말? 아줌마는 얌전하게 굴지 않는다고 아이를 마구 때릴 것 같진 않아요. 아줌마도 나만할 땐 가만히 있기가 굉장히 힘들지 않았어요?" 
   마릴라는 데이비의 다정한 포옹에 마음이 누그러졌지만 애써 딱딱하게 말했다. 
   "아니, 이야기를 들을 땐 언제나 가만히 있었다." 
   데이비는 마릴라를 다시 한 번 꼭 껴안고 슬금슬금 자리에 앉으며 대꾸했다. 
   "하기야 아줌마는 여자니까. 아줌마가 여자 애였다니, 생각만 해도 너무너무 재밌다. 도라는 얌전히 앉아 있을 수 있고 또 재미없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아요. 하지만 난 여자 애가 되는 건 재미없어. 야, 도라, 내가 재미있게 해줄게." 
   데이비가 "재미있게" 해주는 방법이란 도라의 머리카락을 손에 잡고서 홱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도라는 비명을 지르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마릴라가 냅다 호통을 쳤다. 
   "어쩜 바로 오늘 네 엄마 장례를 치르고도 이렇게 버릇없이 굴 수가 있니?" 
   데이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엄만 잘 돌아가신 거예요, 난 알아요, 엄마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엄마는 아파 누워 계신 게 지긋지긋해진 거야. 엄마가 죽던 날 밤. 우린 한참 동안 이야기했어요. 엄마는 마릴라 아줌마가 도라와 저를 겨울동안 데리고 있을 거라면서 착한 아이가 되라고 했어요. 착하게 굴게요.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는 것과 똑같이 뛰어다니는 것도 착할 수 없나요? 엄만 나한테 항상 도라에게 잘해 주고, 도라 편이 되어야 한다고 했어요. 난 그럴 거예요." 
   "도라 머리를 잡아당기는 게 잘해주는 거니?" 
   데이비는 주먹을 꼭 쥐고 얼굴을 찡그렸다. 
   "딴 사람이 도라 머리를 잡아당기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한번 해보라지. 하지만 난 도라를 아프게 잡아당기지는 않았어요. 도란 여자 애니까 그냥 우는 거지. 난 남자로 태어난 건 다행스럽지만 쌍둥이로 태어난 건 별로야. 지미 스프러트 아저씨네 여동생이 지미 아저씨에게 말대답을 하면 아저씨는 '내가 오빠니까, 당연히 내가 더 잘알아' 하고 말해요. 그럼 그 아줌마는 아무 소리도 못해요. 하지만 난 도라에게 그렇게 말할 수가 없어요. 도라는 나하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아줌마, 난 남자니까 잠깐만 말을 몰게 해주세요." 
   결국 마릴라는 갈색 잎들이 가을 밤바람에 살랑대는 마당으로 접어들고 나서야 한시름 놓았다. 대문까지 마중 나온 앤이 쌍둥이를 마차에서 내려주었다. 도라는 뽀뽀를 해도 얌전히 있었지만, 데이비는 앤을 와락 껴안더니 의기 양양하게 자기를 소개했다. 
   "난 데이비 키스예요." 
   저녁 식사 때, 도라는 요조 숙녀처럼 굴었지만 데이비는 예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마릴라가 야단을 치자 데이비가 대꾸했다. 
   "난 너무 배가 고파서 얌전하게 못 먹겠어요. 도라는 나 반만큼도 배가 고프지 않을 거야.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했던 일을 생각해 보세요. 이 케이크는 정말 맛있네. 건포도도 잔뜩 들어 있고. 우린 아주 오랫동안 집에서 케이크를 먹어 보지 못했거든요. 엄만 아파서 케이크를 만들 수 없었고, 스프러트 아줌마는 우리한테 빵을 구워 줄만큼 구워 줬다고 했어요. 그리고 위긴스 아줌마는 절대 케이크에 건포도를 넣지 않아요. 해도 너무해! 하나 더 먹어도 돼요?" 
   마릴라는 안 된다고 하려 했는데, 앤이 커다랗게 케이크 한 조각을 더 잘라 주었다. 그러면서 앤은 데이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말라고 했다. 데이비는 앤을 보고 그냥 씩 웃더니 케이크를 한 입 덥석 물었다. 데이비는 한 조각을 다 먹어 치우고 나서 말했다. 
   "한 조각 더 주면 고맙다고 할게요." 
   마릴라는 앤이 익히 들어온, 데이비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배우게 될 말투로 말했다. 
   "안 돼, 넌 이미 먹을 만큼 먹었다." 
   데이비는 앤에게 눈을 찡긋하더니 식탁 위로 몸을 뻗어 도라가 쥐고 있는 케이크 한 조각을 낚아챘다. 그 케이크는 도라가 이제 겨우 한 입 베어먹고 나서 손에 쥐고 있던 것이었다. 데이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도라에게서 뺏은 케이크를 한 입에 다 집어넣었다. 도라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고, 마릴라는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앤이 교사답게 즉시 타일렀다. 
   "아니, 데이비, 그건 신사답지 못한 행동이야." 
   데이비는 입 안에 든 케이크를 삼키기가 무섭게 대꾸했다. 
   "그건 나도 알지만, 난 신사가 아니야." 
   앤이 놀라서 물었다. 
   "그럼, 넌 신사가 되고 싶지 않니?" 
   "물론 되고 싶어. 하지만 어른이 되기 전에는 신사가 될 수 없잖아." 
   앤은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을 생각으로 맞받아 말했다. 
   "아니야, 넌 될 수 있어. 신사는 어릴 때부터 되기 시작하는 거야. 그리고 신사는 절대 숙녀의 음식을 뺏지 않아. 고맙다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고. 다른 사람의 머리를 잡아당기지도 않아." 
   데이비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럼 신사는 정말 재미없겠다. 난 어른이 돼서 신사가 될 때까지 그냥 기다릴래." 
   마릴라는 혀를 내두르며 도라에게 케이크 하나를 다시 잘라주었다. 마릴라는 그 때 데이비를 상대할 기분이 아니었다. 장례식에 다녀오느라 오랫동안 말을 몰았기 때문에 무척이나 고단했다. 그 순간 마릴라는 엘리자 앤드루스처럼 비관적으로 미래를 내다보았다. 
   도라와 데이비는 쌍둥이지만 서로 똑같이 닮지는 않았다. 도라의 머리칼은 차분하고 윤기가 흐르며 길었다. 데이비는 동글동글한 두상에 헝클어진 노란 곱슬머리였다. 도라의 옅은 갈색 눈동자는 부드럽고 온화해 보였지만, 데이비의 눈동자는 개구쟁이처럼 익살맞게 요리조리 굴러다녔다. 도라는 콧날이 오뚝했지만, 데이비는 누가 보아도 확실한 들창코 였다. 도라의 입매는 "다소곳"했지만, 데이비는 늘 입가에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데이비는 한 쪽 볼에만 보조개가 있어서 웃을 때는 귀엽고 익살맞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모습이었다. 데이비의 작은 얼굴은 구석구석 웃음과 장난기가 넘쳐흘렀다. 
   아이들을 주눅들게 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생각에 마릴라가 말했다. 
   "애들은 일찍 자는 게 좋겠다. 도라는 내가 데리고 잘 테니, 넌 데이비를 서쪽 방에 데리고 가거라. 데이비, 혼자 자도 무섭지 않겠지, 그렇지?" 
   데이비가 태평스럽게 대답했다. 
   "무섭지 않아요, 하지만 아직은 자고 싶지 않아요." 
   "아니, 지금 자야 돼." 
   기진 맥진한 마릴라가 짤막하게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데이비조차 꼼짝 못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데이비는 앤과 함께 순순히 계단을 올라갔다. 
   데이비가 앤에게 소곤거렸다. 
   "내가 어른이 되면 맨 먼저 밤을 꼴딱 새워서, 밤이 어떤 건지 알아 볼테야."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에도, 마릴라는 쌍둥이가 초록 지붕 집에 머물렀던 첫 주를 생각할 때마다 진저리를 쳤다. 첫 주가 다음 몇 주 보다 훨씬 끔직해서라기 보다는 첫 주에 겪은 일들이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데이비가 장난을 치거나 제멋대로 굴다가 일을 저지르지 않고 지나간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하지만 가끔 끔찍한 사건은 데이비가 온 지 이틀 째 되는 일요일 아침에 일어났다. 그 날은 포근하고 화창하고 9월처럼 아지랑이가 낀 맑은 날이었다. 마릴라가 도라를 챙겨 주는 동안, 앤이 데이비에게 교회에 갈 옷을 입혔다. 
   처음에 데이비는 세수를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마릴라 아줌마가 어제 씻어 줬어. 위긴스 아줌마도 장례식이라며 따가운 비누로 빡빡 문질러 씻어줬구. 그럼 일주일 치는 다 씻은 거잖아. 난 너무 깨끗한 건 싫어. 더러운 게 훨씬 편하단 말이야." 
   앤이 꾀를 냈다. 
   "폴 어빙은 하루에 한 번씩 제 손으로 세수를 한단다." 
   데이비는 초록 지붕 집에서 고작 이틀밖에 지내지 않았지만 벌써 앤을 잘 따랐다. 그리고 앤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칭찬하는 폴 어빙을 싫어했다. 폴 어빙이 매일 얼굴을 씻는 가고 하기만 하면 문제는 해결되었다. 데이비 키스는 설령 세수를 하면 죽는다 해도 세수를 했을 것이다. 앤은 똑 같은 방법으로 데이비가 몸단장하는 일을 하나하나 신경 써서 고분고분 말을 듣게 부추겼다. 다 끝났을 때, 데이비는 정말 말쑥한 꼬마가 되었다. 앤은 데이비를 데리고 교회로 가서 커스버트 집안 지정석에 앉으면서 자랑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데이비는 남자애들을 일일이 흘끗흘끗 두리번거리면서 누가 폴 어빙인지 찾아내느라 처음엔 그런 대로 점잖은 편이었다. 찬송가 두 곡을 부르고, 성경 구절을 낭송할 때까지도 별 탈없이 넘어갔다. 사건은 앨런 목사가 기도하고 있을 때 터졌다. 
   데이비 앞자리에는 로레타 화이트가 앉아 있었다. 금발을 두 갈래로 길게 땋아 늘어뜨린 로레타가 약간 고개를 숙이자, 헐렁한 레이스 위로 탐스러운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로레타는 차분해 보이는 통통한 여덟 살짜리 아이였다. 생후 여섯 달째 엄마 품에 안겨 교회에 처음 왔을 때부터 교회에서 늘 나무랄 데 없이 행동하는 참한 아이였다. 
   데이비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털이 촘촘히 난 꿈틀거리는 쐐기벌레를 꺼냈다. 마릴라가 보고 말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데이비는 쐐기벌레를 로레타의 목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앨런 목사가 한창 기도를 하고 있는데, 별안간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났다. 목사는 깜짝 놀라 기도를 멈추고 눈을 떴다. 신도들도 모두 고개를 들었다. 로레타 화이트가 옷의 뒷자락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펄쩍 펄쩍 뛰고 있었다. 
   "꺅…… 엄마…… 엄마…… 으…… 이거 떼 줘…… 으악!! 치워줘……. 으…… 저 못된 놈이 내 목에다 그걸 떨어뜨렸어…… 꺅! 엄마…… 아래로 내려가고 있어…… 으…… 으…… 으……." 
   화이트 부인은 굳은 얼굴로 일어나서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로레타를 교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로레타의 비명 소리가 멀어지자, 앨런 목사는 다시 예배를 진행했다. 그러나 모두들 그 날 예배는 그것으로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마릴라는 난생 처음 성경 구절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앤은 창피해서 새빨개진 얼굴로 앉아 있었다. 
   마릴라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데이비를 방에 가두고 하루 종일 못 나오게 했다. 
   마릴라는 데이비에게 저녁 식사를 주지는 않았지만, 빵과 우유로 대충 떼우는 것은 허락했다. 앤은 데이비에게 음식을 갖다 부고서 전혀 뉘우치는 기색 없이 음식을 먹고 있는 데이비 옆에 슬픈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슬픔에 잠긴 앤의 눈을 보자 데이비는 당혹스러웠다. 
   데이비는 깊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폴 어빙이라면 교회에서 여자 애 목덜미에 쐐기벌레를 떨어뜨리지는 않겠지, 응?" 
   앤이 슬프게 대답했다. 
   "절대 그러지 않지." 
   데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아까 일은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쐐기 벌레는 굉장히 컸어. 교회에 들어가면서 계단에 내려놓으려고 했는데, 그치만 그냥 버리기엔 너무 아깝잖아. 누나는 그 애가 소리지르는 거 재밌지 않았어?" 
   화요일 오후, 초록 지붕 집에서 지역 개선 협회 모임이 있었다. 앤은 마릴라에게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학교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도라는 깨끗하게 다림질한 하얀 원피스에 검은 허리띠를 묶어 말쑥하게 차려 입고서, 협회 회원들과 함께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도라는 누가 말을 시키면 얌전하게 대답하고 그렇지 않으면 조용히 앉아 있었기 때문에 어느 모로 보나 착한 아이다웠다. 흙으로 뒤범벅이 된 데이비는 헛간 앞마당에서 진흙 만두를 만들고 있었다. 
   마릴라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그러라고 했다. 그래야 더 못된 장난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 봤자 더러워지기밖에 더 하겠니? 데이비를 불러들이기 전에 어서 차를 내놓자. 도라는 같이 먹어도 되지만, 데이비는 절대로 회원들하고 같은 식탁에 앉아 먹게 할 수가 없어." 
   회원들에게 차를 권하러 간 앤은 도라가 응접실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데이비가 현관문 앞에서 도라를 불러냈다고 제스퍼 벨 부인이 말해 주었다. 마릴라와 앤은 부엌에서 의논을 하여 두 아이 모두 나중에 간식을 주기로 했다. 
   차를 반쯤 마셨을 때 불쌍한 아이 하나가 부엌에 들이닥쳤다. 회원들은 모두 깜짝 놀랐고 마릴라와 앤은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고만 있었다. 저게 도라란 말인가? 흠뻑 젖은 몸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마릴라가 한푼 두푼 모아 산 새 양탄자를 버려 놓은 아이가? 
   앤은 죄인이나 된 것처럼 가족들이 속을 썩이지 않기로 유명한 제스퍼 벨 부인을 힐끗 바라보며 소리쳤다. 
   "도라, 무슨 일이니?" 
   도라가 엉엉 울면서 말했다. 
   "데이비가 돼지 우리 담 위를 걸으라고 했어요. 하기 싫었지만 자꾸 겁쟁이라고 놀리잖아요. 담 위를 걷다가 그만 돼지 우리로 굴러 떨어져서 옷이 더러워졌는데, 돼지들이 마구 덤벼들었어요. 옷이 엉망이 되니까, 데이비가 펌프 밑에 서 있으면 자기가 씻어 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시키는 대로 했어요. 하지만 데이비가 아무리 물을 끼얹어도 옷은 하나도 안 깨끗해지고 예쁜 허리띠랑 구두만 걸레가 돼 버렸어요." 
   마릴리가 도라를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가 전에 입던 낡은 옷으로 갈아입히는 동안, 앤은 식탁에 혼자 앉아 남은 차를 마저 마셨다. 데이비는 마릴라에게 잡혀 밥도 못 먹고 방에 갇혔다. 해질 무렵, 앤은 데이비 방에 가서 야단부터 치지 않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건넸다. 앤은 데이비의 행동에 몹시 실망했다고 말했다. 
   데이비도 잘못했다고 인정했다. 
   "지금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난 말썽을 일으키고 난 후에도 그 일이 별로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단 말이야. 도라가 옷 버린다고 진흙 만두 만드는 걸 안 도아 주겠다기에 너무너무 화가 났어. 폴 어빙이라면 떨어질 걸 뻔히 알면서 자기 동생한테 돼지 우리 담 위를 걷게 하진 않겠지?" 
   "그래, 폴이라면 그런 일은 꿈도 못 꿀 거야. 폴은 완벽한 꼬마 신사거든." 
   데이비는 눈을 감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잠시 그 문제에 대해 고민 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데이비는 앤에게 다가와 목을 끌어안고는 앤의 어깨에 뜨겁게 달아오른 작은 얼굴을 묻었다. 
   "누나, 내가 폴 어빙처럼 착한 아이가 아니어도 날 조금은 좋아하지?" 
   앤은 진심으로 대답했다. 어쨌든 앤은 데이비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 물론이지. 하지만 그런 못된 장난만 안하면, 지금보다 훨씬 널 좋아할 거야." 
   데이비는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오늘 장난친 게 또 있는데, 누나가 들으면 아주 깜짝 놀랄 일이야. 야단 안 칠거지, 응? 마릴라 아줌마한테 이르지도 않을 거지?" 
   "모르겠다. 데이비, 그래도 말씀은 드려야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하면 나도 마릴라 아줌마한테 얘기 안 한다고 약속할게." 
   "알겠어, 다신 안 그럴게요. 하여튼 앞으로 이보다 더 재미난 일은 없을 거야. 이건 지하실 계단에서 생각해 낸 거거든." 
   "데이비,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니?" 
   "마릴라 아줌마 침대에 두꺼비를 넣어 놨어. 하고 싶으면 가서 두꺼비를 꺼내서 던져 버려도 괜찮아. 하지만 두꺼비를 침대에 그냥 놔두면 아주 재밌는 일이 생길 거 같지 않아?" 
   "아니, 너!" 
   앤은 찰싹 매달려 있는 데이비를 떼어내고 거실을 지나 급히 마릴라의 방으로 갔다. 마릴라의 침대는 약간 흐드러져 있었다. 앤이 숨을 몰아 쉬며 이불을 홱 젖히고 보니, 정말로 두꺼비 한 마리가 베개 아래서 눈을 끔뻑이며 앤을 쳐다보고 있었다. 
   앤은 몸서리를 치며 신음 소리를 토했다. 
   "이 징그러운 걸 무슨 수로 떼어 낸담?" 
   앤은 언뜻 부삽을 생각해 내고는 마릴라가 부엌에서 일하느라 분주한 틈을 타 조심조심 삽으로 두꺼비를 떼어 냈다. 진짜 골치 아픈 일은 두꺼비를 아래층으로 옮기면서 일어났다. 두꺼비는 세 번씩이나 삽에서 뛰어내렸는데, 한 번은 홀에서 두꺼비를 잃어버릴 뻔했다. 앤은 벚나무 과수원에 두꺼비를 던져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만약 마릴라 아줌마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돌아가실 때까지 영원히 침대에서 편히 주무시지 못했을 거야. 그 꼬마 죄인이 때맞춰 뉘우쳐 줘서 정말 다행이야. 다이애나가 창문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네. 정말 반가워. 학교에서는 앤서니 파이가, 집에서는 데이비 키스가 내 속을 있는 대로 긁어 놓으니 뭔가 다른 일을 바랄 수밖에."  





 9장 회관 색깔 소동 




   해리슨 씨가 화가 나서 말했다. 
   "그 늙은 골칫거리인 레이첼 린드 부인이 오늘 또 여기에 들른다고 했어. 교회 예배실에 깔 양탄자를 살 기부금을 가지고 또 날 성가시게 하려고 말이야. 난 세상에서 그 여자가 제일 싫어. 그 여자는 장황한 설교와 성경 구절과 이러니 저러니 온갖 예를 다 들어서 맹렬히 퍼부어 댈 거야." 
   앤은 베란다 끝에 앉아 꿈꾸는 듯한 얼굴을 어깨 너머로 돌렸다. 앤은 쓸쓸한 11월의 황혼 녘에, 뜰 아래 빽빽이 들어찬 전나무 숲에서 야릇한 선율을 울리며 새 개간지를 넘어 불어오는 부드러운 서풍에 취해 있었다. 
   "문제는 아저씨와 린드 아줌마가 서로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사람들이 서로 싫어할 때를 보면 십중팔구 그것 때문이라구요. 나도 처음엔 린드 아줌마를 싫어했어요. 하지만 린드 아줌마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니까 좋아지더라구요." 
   해리슨 씨가 투덜거렸다. 
   "린드 부인도 사람들과 살다 보니까 그런 성향이 생긴 건지도 몰라. 하지만 바나나를 계속 먹으면 바나나를 좋아하게 된다는 말에 계속 바나나를 먹을 순 없어. 그리고 린드 부인으로 말하자면, 남의 일에 간섭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란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린드 부인한테도 그렇게 말했지." 
   앤은 나무라듯이 말했다. 
   "아, 린드 아줌마가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속상해 했을까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나도 예전에 아줌마한테 아주 끔찍한 말을 퍼부은 적이 있었지만, 그 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난 일부러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아요." 
   "그건 사실이고, 난 누구한테나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앤이 반박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모든 사실을 말하는 건 아니잖아요.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만 이야기하지요. 보세요, 아저씨는 내가 빨간 머리라는 말은 열 번도 넘게 했으면서도 내 코가 예쁘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잖아요." 
   해리슨 씨는 낄낄거렸다. 
   "그거야 말 안 해도 뻔히 알잖아." 
   "내가 빨간 머리라는 것 역시 잘 알아요. 비록 전보다 훨씬 진해졌지만요. 그러니까 그런 말도 할 필요가 없단 말이예요." 
   "그래 그래 네가 그렇게 신경 쓰니 다시는 입에 담지 않으마. 용서해라, 앤. 난 원체 말을 함부로 하니까 사람들도 신경 쓰지 않더구나." 
   "하지만 신경 쓸 수밖에 없어요. 그게 아저씨 버릇이라고 해서 문제가 다 풀리지는 않아요. 누가 사람들을 바늘로 콕콕 찌르고 다니면서 '미안하지만 신경 쓰지 마세요. 이건 내 버릇이니까요' 라고 한다면 어떻겠어요? 아저씨는 그 사람을 보고 미쳤다고 생각하겠죠. 안 그래요? 린드 아줌마가 남의 일에 간섭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란 건 사실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린드 아줌마가 아주 친절한 마음씨를 갖고 있고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며, 티머시 코튼 아저씨가 아줌마네 농장에서 상한 버터를 훔쳐다가 아내한테는 린드 아줌마에게 샀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모르는 척 넘어가 준 사실은 왜 얘기하지 않은 거죠? 코튼 부인이 그 다음에 린드 아줌마를 만났을 때 버터에서 순무 맛이 난다고 하니까, 아줌마는 버터가 그렇게 심하게 상했다니 미안하다고만 하고 말았잖아요." 
   해리슨이 마지못해 인정했다. 
   "린드 부인에게도 장점은 있지. 대개의 사람들이 그러니까.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한테도 장점은 있어. 어쨌든 나는 양탄자 사는 덴 한 푼도 안 낼 거다. 이곳 사람들은 한도 끝도 없이 돈을 내라고 졸라대는 것 같아. 그래 회관 페인트 칠 작업은 어떻게 돼 가고 있냐?" 
   "잘 되고 있어요. 지난 금요일 밤에 에이번리 지역 개선 협회 모임이 있었는데, 회관을 칠하고 지붕을 새로 고치려고 모은 기부금이 제법 많더라구요. 아저씨, 대개의 사람들은 흔쾌히 기부금을 냈어요." 
   앤은 상냥한 아가씨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은근한 독설을 퍼부을 줄도 알았다. 
   "회관에 어떤 색을 칠할 거냐?" 
   "아주 진한 초록색을 칠하기로 했어요. 지붕은 물론 빨갛게 칠하고요. 로저 파이 아저씨가 오늘 읍내에서 페인트를 가져올 거예요." 
   "누가 칠할 건데?" 
   "카모디의 조슈아 파이 아저씨가요. 조슈아 아저씨는 지붕 일도 거의 끝냈어요. 이번 일은 조슈아 아저씨한테 맡길 수밖에 없었어요. 아저씨도 알다시피 에이번리에는 파이네가 네 집이나 되는데, 하나같이 조슈아 아저씨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기부금을 낼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으니까요. 파이 집안 사람들은 12달러나 냈어요. 우린 그 정도면 양보해도 손해 볼 게 없겠다 싶었죠. 사람들은 절대 파이 집안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니지 말라고 했지만요. 린드 아줌마는 그 사람들이 모든 걸 쥐고 흔들려고 한댔어요." 
   "문제는 조슈아란 사람이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겠지. 그 사람이 일만 잘한다면야 성이 파이건 푸딩이건 무슨 문제겠니." 
   "그 아저씨는, 일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에요. 괴짜라는 소리도 있지만요. 그 아저씨는 거의 말이 없어요." 
   해리슨이 비꼬듯이 말했다. 
   "그럼 제법 쓸 만한 괴짜겠네. 적어도 여기 사람들이 괴짜라고 부를 정도라니. 난 에이번리에 와서야 비로소 수다쟁이가 무엇인지 알았으니까. 그 때부터 난 대꾸를 해야 했는데, 안 그랬다간 린드 부인이 내가 벙어린 줄 알고 수화를 가르칠 기부금을 걷으러 다녔을 지도 모르지. 앤, 여태 집에 안 가도 되니?" 
   "가야 해요. 오늘밤에 도라 옷을 손봐야 하거든요. 게다가 데이비는 어쩌면 지금쯤 새로운 장난을 쳐서 마릴라 아줌마를 까무러치게 했을 지도 몰라요. 오늘 아침에 데이비가 일어나서 한 첫마디가 뭔지 아세요? '누나, 어둠은 어디로 가? 알고 싶어' 였어요. 난 데이비에게 세상이 반대쪽으로 가는 거라고 했지요. 그런데 아침 식사를 하면서 데이비가 내 말이 틀렸다는 거예요…… 어둠은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면서요. 마릴라 아줌마 말이 데이비가 오늘 어둠을 잡으려고 우물에 매달려 있는 것을 네 번이나 봤대요." 
   해리슨이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개구쟁이로구나, 그 녀석이 어제 여기 와서 내가 헛간에 가고 없는 틈에 진저의 깃털을 여섯 개나 뽑았단다. 가엾은 진저는 그 꼴을 당하고 나서 내내 울적해 있지. 그딴 짓을 하는 녀석이라면 틀림없이 골칫덩어리일 거다." 
   앤은 데이비가 자기 대신 진저에게 앙갚음을 해준 셈이기 때문에 데이비가 다음에 무슨 잘못을 하더라도 용서해 줘야겠다고 몰래 마음먹으면서 말했다. 
   "소중한 것은 뭐든지 조금씩 문제가 있어요." 
   로저 파이 씨가 그 날 밤 회관을 칠할 페인트를 사 왔고, 무뚝뚝하고 말없는 조슈아 파이 씨는 그 다음 날부터 칠을 시작했다. 조슈아 씨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해 나갔다. 회관은 말 그대로 "낮은 지대"에 있었다. 
   늦가을이면 이곳은 항상 질퍽거리는 진창길이 되었기 때문에 카모디로 가는 사람들은 "높은" 지대의 먼 길로 둘러갔다. 회관은 전나무 숲에 에워싸여 있어 가까이 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다. 조슈아 파이 씨는 별로 사교적이지 않은 자기 마음에 쏙 들도록 한적하고 독립적인 분위기가 나게 회관을 색칠해 나갔다. 
   금요일 오후에 조슈아 씨는 페인트 칠을 끝내고 카모디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조슈아 씨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 단장을 한 회관이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진 리드 부인이 질퍽질퍽한 저지대의 진창길로 과감하게 말을 몰았다. 가문비나무 골짜기를 돌아가자 바로 회관이 보였다. 
   린드 부인은 회관을 보고는 완전히 얼이 빠졌다. 린드 부인은 채찍을 떨어뜨리고 손을 번쩍 쳐들며 말했다. 
   "하나님 맙소사!" 
   린드 부인은 자기 눈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몇 번씩이나 보고 또 보았다. 잠시 후, 린드 부인은 기가 막힌 듯이 웃어댔다. 
   "뭔가 잘못됐어, 틀림없이. 파이네 사람들이 일을 망쳐 놓을 줄 알았다니까." 
   린드 부인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몇 사람을 만나 회관 이야기를 가지고 수다를 떨었다. 그 이야기는 불길처럼 번져 갔다. 집에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던 길버트 블라이드는, 해질 녘에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아이한테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정신없이 초록 지붕집으로 달려가다가 프레드 라이트를 만나 함께 뛰어갔다. 길버트와 프레드는 초록 지붕 집에서 다이애나 배리, 제인 앤드루스, 앤 셜리가 잎이 다 진 커다란 버드나무 아래 대문 가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길버트가 소리쳤다. 
   "앤, 사실이 아니지?" 
   비극의 여신처럼 보이는 앤이 대답했다. 
   "사실이야, 린드 아줌마가 카모디에서 돌아오면서 그 소식을 알려 주려고 집에 들렀어. 어쩜, 이렇게 끔찍한 일이! 뭔가 좋게 해 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무슨 소용이 있어?" 
   마릴라를 위해 시내에서 상자를 사 가지고 방금 초록 지붕 집에 도착한 올리버 슬론이 물었다. 
   "뭐가 끔찍하다고?" 
   제인이 화를 내며 말했다. 
   "아직도 못 들었단 말야? 좋아, 간단히 설명해 주지. 조슈아 파이 아저씨가 회관을 초록색이 아니라 파란색으로 칠했대. 손수레를 칠할 때나 쓰는 번쩍번쩍 빛나는 짙은 파란색으로 말이야. 린드 아줌마 말로는, 그 색깔을 건물에 칠해 놓으니 상상도 못할 만큼 추하더래. 특히 지붕이 빨간 색이라서 더 심하다는 거야. 난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라서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우리가 얼마나 애를 썼는데." 
   다이애나가 흐느끼며 말했다. 
   "세상에 어쩜 그런 실수를 할 수가 있어?" 
   이 엄청난 재난에 대한 비난은 결국 파이 집안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개선론자들은 모턴 해리스표 페인트를 쓰기로 결정했는데, 그 페이트는 색깔 견본 카드에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구매자는 견본에서 마음에 드는 색을 골라 거기 적힌 번호대로 주문하면 되었다. 
   개선론자들이 원하는 색은 147번 초록색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로저 파이 씨가 아들인 존 앤드루 파이 편에 전갈을 보냈는데, 자기가 시내에 가는 길에 페인트를 구해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전갈을 받은 개선론자들은 존 앤드루에게 147번 페인트를 사 오라고 전했다. 존 앤드루는 들은 대로 아버지한테 전했다며 펄쩍 뛰었는데, 로저 파이씨는 존 앤드루가 157번이라고 했다는 주장을 끝내 굽히지 않았다. 결국 그 날엔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 날밤, 에이번리 개선론자들의 집에는 참담한 분위기가 흘렀다. 초록 지붕 집을 짓누르는 우울한 분위기는 데이비마저 주눅들게 할 정도였다. 앤은 내내 흐느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마릴라 아줌마, 내가 열 일곱 살이 다 된 처녀래도 지금은 좀 울어야겠어요. 너무 억울해요. 우리 협회는 이제 끝났어요. 우린 그저 비웃음만 사다가 잊혀지겠죠." 
   그러나 인생이란 꿈에서처럼 종종 상황이 갑자기 바뀌기도 한다. 에이번리 주민들은 그 일을 비웃기는 커녕 오히려 대단히 안타까워했다. 회관을 칠하라고 돈을 낸 사람들은 주민들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일이 그렇게 된 걸 아주 불만스러워했다. 사람들의 노여움은 파이 집안 사람들에게 집중되었다. 로저 파이 씨와 존 앤드루 파이가 일을 그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들이고, 조슈아 파이씨는 페인트 통을 열어 안에 든 색깔을 보고서도 잘못되었다고 의심하지 않았으니 바보가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혹평을 들은 조슈아 파이 씨는 에이번리 사람들이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는 자신의 취향과 상관없지 않느냐고 일축했다. 또, 자기는 페인트 색깔에 대해 나불거리라고 고용된 것이 아니라 회관을 칠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니까 일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개선론자들은 치안 판사인 피터 슬론을 찾아가 의논한 끝에 쓰라린 가슴을 안고 조슈아 파이 씨에게 돈을 지불했다. 
   "당신들은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조슈아 파이 씨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조슈아 씨는 페인트 색에 대해 사전에 아무런 통고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페인트 통을 받았고, 계속 하라는 말만 들었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사실 그런 주장을 한다는 건 낯 부끄런운 일이죠. 그 회관은 아주 흉측해 보이니까요." 
   운수 사나운 개선론자들은 에이번리 사람들이 협회를 전보다 더 싫어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히려 대중적인 동정심이 일어 개선론자들을 지지하는 쪽으로 상황을 싹 바꾸어 놓았다. 주민들은 자기네를 위해 땀 흘려 일하던 열성적인 젊은이들의 모임이 아주 고약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린드 부인은 개선론자들에게 하던 일을 끝까지 밀어붙여서 세상에는 일을 망치지 않고 잘 해내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을 파이 집안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라고 했다. 메이저 스펜서 씨는 개선론자들에게, 자기네 농장 앞길에 있는 나무 밑동을 죄다 뽑아 내고 자기 돈으로 거기에 잔디 씨를 뿌리겠다는 말을 전해 왔다. 하이럼 슬론 부인은 어느 날 학교에 찾아와서 뜻밖에도 앤을 현관으로 불러내더니. 개선 협회가 봄에 교차로에다 제라늄 화단을 만들고 싶다면 자기 젖소는 걱정 말라고 하면서 제라늄 화단을 망치는 짐승은 화단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가둬 둘 생각이라고 했다. 해리슨 씨조차 웃음이 나와도 속으로만 낄낄대면서 겉으로는 몹시 안타까운 척했다. 
   "앤, 신경 쓰지 말아라. 페인트는 대개 해가 갈수록 구질구질하게 색이 바랜단다. 회관에 칠한 파란색은 애당초 더 이상 보기 싫을 수 없을 정도니까,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서 더 나아 보일 거다. 게다가 지붕 널을 얹어서 칠도 잘했잖아. 새지만 않으면 이제부터 사람들이 회관에 모일 수 있을 거야. 아무튼 넌 큰 일을 해냈다." 
   앤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에이번리의 새파란 회관은 이제부터 마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거예요." 
   그리고 사실이 그랬다.  




 10장 말썽꾸러기 데이비 




 
   11월의 어느날 오후, 앤은 자작나무 길을 지나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삶이란 아주 멋진 거라는 생각을 새삼 확인했다. 그 날은 즐거운 날이었다. 학생들 모두 앤의 작은 천국에서 잘 지냈다. 세인트 클레어 돈넬은 이름 가지고 다른 아이들과 싸우지도 않았고, 프릴리 로저슨은 치통으로 얼굴이 퉁퉁 부어 가까이 있는 남자 애들에게 살랑거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바바라 쇼는 양동이에 담긴 물을 교실 바닥에 쏟는 단 하나의 실수밖에 저지르지 않았고, 앤서니 파이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어린 시절의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는 앤이 말했다. 
   "이번 11월은 정말 멋진 달이야! 11월은 보통 별로 맘에 들지 않는 달이었는데. 마치 한 해가 늙어 간다는 사실을 별안간 깨닫고는 울며 초조해하는 일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하지만 올해는 흰머리가 성성하고 얼굴이 주름살투성이라도 자기 매력을 아는 기품 있는 노부인처럼 아주 우아하게 저물어 가는 것 같아. 날씨도 화창하고 황혼도 아름다웠지. 지난 두 주일은 너무나도 평화로웠어. 데이비조차 대부분 얌전했으니까. 데이비는 정말 한결 좋아지고 있어. 오늘 숲은 참 조용하다! 산들바람이 나무 꼭대기를 쉭쉭 스치는 소리 말고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바람소리는 마치 멀리 해변에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 같아. 숲은 너무 사랑스러워! 아름다운 나무들아! 너희는 모두 나의 좋은 친구들이야." 
   앤은 걸음을 멈추고, 어리고 가는 자작나무에 손을 뻗어 우윳빛 나무 줄기에 입을 맞추었다. 그 때 길모퉁이를 막 돌아 나오던 다이애나가 앤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앤 셜리. 넌 겉으로만 어른일 뿐이야. 혼자 있을 때면 옛날의 조그만 어린아이로 돌아가 버린다니까." 
   앤이 즐겁게 재잘거렸다. 
   "세 살 버룻이 여든까지 간다잖아. 너도 알다시피, 난 14년 동안 어린 아이였어. 어른이 된 지 고작 3년밖에 안됐다구. 더군다나 숲에 있으면 언제나 아이이고 싶어. 잠들기 전 30분 말고는 학교에서 집으로 걸어가는 이 시간이 내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구. 아이들 가르치고 내 공부하고, 마릴라 아줌마를 거들어 쌍둥이를 돌보느라 너무 바빠서. 난 이런 때가 아니면 상상할 틈이 없어. 넌 내가 매일 밤 침대에 누워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엄청난 모험을 하는지 모를 거야. 난 항상 여배우. 적십자 간호사. 여왕과 같은 아주 영리하고 자신 있고 화려한 사람이 되는 상상을 한단다. 어젯밤에 난 여왕이 됐어. 여왕이 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멋진 일이야. 아무 불편 없이 즐겁게 보내다가 싫증나면 언제나 여왕을 그만둘 수 있어,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지만 말야. 하지만 이 숲속에서는 아주 다른 것을 상상하고 싶어. 난 오래 된 소나무에 사는 숲의 요정이 되거나.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뒤에 숨어 사는 조그마한 갈색 나무 요정이 돼. 내가 입 맞추다가 들킨 저 자작나무는 내 여동생이야. 그 애와 내가 다른 점은 단 한 가지. 그 앤 나무고 난 여자 아이라는 거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참, 다이애나, 어디 가는 길이었니?" 
   "딕슨 아저씨네. 앨버타가 새 옷 재단하는 걸 도와 주기로 했거든. 앤, 저녁에 딕슨 아저씨네 집으로 오지 않을래? 그래서 우리 함께 집으로 걸어오자, 응?" 
   앤이 아무 생각 없는 순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프레드 라이트가 시내에 가고 없으니까 대신 나라도 갈까?" 
   다이애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이더니 계속 걸어갔다. 그러나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날 저녁. 앤은 딕슨씨 집에 가려고 마음먹었으나 갈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다른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 있었던 것이다. 앤은 뜰에서 마릴라와 마주쳤다. 마릴라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앤, 도라가 없어졌어!" 
   "도라가요? 없어졌다뇨?' 
   앤은 대문에 매달려 몸을 혼들고 있는 데이비를 보았다. 눈이 재미난 듯이 반짝이는 게 수상했다. 
   "데이비. 도라가 어디 있는지 아니?" 
   데이비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몰라요. 하늘에 맹세하는데, 저녁 먹은 다음부터 진짜 한번도 못 봤어." 
   마릴라가 말했다. 
   "한시 이후에 난 쭉 집에 없었어. 토머스 린드씨가 갑자기 병이 나서, 레이첼이 허겁지겁 나를 데리러 왔거든. 내가 집을 나설 때 도라는 부엌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고, 데이비는 헛간 뒤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어. 30분 전에 겨우 집에 돌아와 보니 도라가 보이지 않더구나. 데이비는 내가 떠난 뒤로 도라를 못 봤다는 거야." 
   데이비가 진지하게 말했다. 
   "전 정말로 못 봤어요." 
   앤이 말했다. 
   "근처 어딘가에 있겠죠. 도라는 혼자 멀리 가지 못해요. 그 애가 겁이 많은 건 잘 아시잖아요. 어쩌면 어느 방에 선가 곯아떨어져 있는지도 모르죠." 
   마릴라가 고개를 저였다. 
   "벌써 집 안은 샅샅이 뒤져 봤다. 집 주위 어딘가 다른 데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앤과 마릴라는 도라를 찾으려고 이 잡듯이 집 근처를 뒤졌다. 
   앤과 마릴라는 각자 집, 마당, 헛간 등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앤은 도라를 부르며 과수원과 유령의 숲을 돌아다녔다. 마릴라는 양초를 들고 지하실을 살펴보았다. 데이비는 앤과 마릴라를 번갈아 쫓아다니며 도라가 있을 만한 곳을 여기저기 생각해 냈다. 결국 세 사람은 다시 마당에 모였다. 
   마릴라가 신음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나." 
   앤이 처량하게 말했다. 
   "도대체 도라는 어디에 있는 거지?" 
   데이비가 신바람 난 목소리로 넌지시 말했다. 
   "어쩌면 우물에 빠졌을지도 몰라요." 
   앤과 마릴라는 화들짝 놀라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 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감히 입밖에 내지 못했던 것이다. 
   마릴라가 조용히 말했다. 
   "도라가, 도라가 혹시……." 
   기운이 쭉 빠진 앤은 우물로 가서 안을 들여다 보았다. 
   두레박은 안쪽 선반에 놓여 있었다. 우울 바닥 깊이 고인 잔잔한 물이 희미하게 빛났다. 초록 지붕 집 우물은 에이번리에서 가장 깊었다. 만약 도라가…… 하지만 앤은 그런 생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앤이 몸서리 치며 뒤로 물러났다. 
   마릴라가 두 손을 틀어쥐며 말했다. 
   "어서 가서 해리슨 씨를 불러오거라." 
   "해리슨 아저씨와 존 헨리는 둘 다 집에 없어요. 오늘 시내에 갔거든요. 배리 아저씨를 불러올게요." 
   배리 씨가 밧줄을 가지고 앤과 함께 왔다. 밧줄 한쪽 끝에는 갈퀴에 다는 갈고리 모양의 쇠가 달려 있었다. 배리 씨가 우물을 뒤지는 동안, 마릴라와 앤은 입을 꾹 다물고 두려움에 벌벌 떨며 곁에 서 있었다. 데이비는 문에 걸터앉아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우물가에 있는 세 사람을 구경했다. 
   마침내 배리 씨는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물 바닥에는 없어요. 하지만 도라가 갈 만한 곳이 어딘지 정말 궁금하군요. 얘, 꼬마야. 너 정말 동생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니?" 
   데이비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몰라요. 열두 번도 넘게 모른다고 했어요. 어쩌면 수상한 장사꾼이 와서 데려갔을지도 모르죠." 
   우물 때문에 철렁했던 마음이 다소 진정된 마릴라가 쏘아붙였다. 
   "쓸데없는 소리! 앤, 도라가 혹시 해리슨 씨네 가다가 길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네가 도라를 데리고 그 집에 갔다 온 뒤부터 걘 항상 해리슨 씨네 앵무새 이야기를 했잖니?" 
   "도라한테 혼자 거기까지 갈 만한 용기가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일단 가서 찾아는 볼게요." 
   그 순간 누군가 데이비를 보았다면, 별안간 데이비의 얼굴색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데이비는 살그머니 대문에서 내려와 있는 힘을 다해 헛간으로 달려갔다. 
   앤은 별 기대 없이 들판을 지나 해리슨 씨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문은 잠겨 있고 유리창도 닫혀 있었으며 주변엔 인기척이라곤 전혀 없었다. 앤은 베란다에 서서 큰 소리로 도라를 불러 보았다. 
   앤의 등뒤에 있는 부엌에서 갑자기 진저가 꽥꽥거리며 욕을 퍼부어 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앤은 진저가 소리지르는 와중에서도 해리슨 씨가 연장 창고로 쓰는 뜰 한 켠의 작은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들었다. 앤은 급히 연장 창고로 달려가 빗장을 열었다. 거기에는 얼굴이 온통 눈물 범벅이 된 아이 하나가 뒤집힌 못통 위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아니, 도라! 너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왜 여기 있는 거야?" 
   도라가 흐느꼈다. 
   "데이비랑 함께 진저를 보러 왔는데, 문이 닫혀 있어서 진저를 볼 수 없었어요. 데이비가 문을 걷어차는 바람에 진저한테 욕만 먹었어요. 그리고 나서 데이비가 나를 이리로 데려와서는 나만 남겨 놓고 혼자 나가더니 문을 잠가 버렸어요. 그래서 나갈 수가 없어 계속 울기만 했어요. 너무 무섭고, 또 너무 배가 고프고 추웠어요. 앤 언니, 안 오는 줄 알았어요." 
   "데이비가?" 
   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앤은 무거운 마음으로 도라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도라가 별 탈없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할 틈도 없이, 앤의 마음은 데이비 때문에 괴로웠다. 도라를 가둔 짓은 쉽게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데이비는 거짓말을 했다. 비열하게도 새빨간 거짓말을. 꺼림칙하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임이 밝혀졌다. 앤은 너무나 실망스러운 나머지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절실히 깨닫지 못했지만, 앤은 데이비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데이비가 깜쪽같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쓰라렸다. 
   마릴라는 잠자코 앤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릴라의 그런 태도는 데이비에게 불호령이 떨어질 징조였다. 배리 씨는 웃음을 터뜨리며 데이비를 따끔하게 혼내 주라고 충고했다. 배리 씨가 돌아간 뒤, 앤은 벌벌 떨면서 흐느끼는 도라를 따뜻하게 달래 주고 저녁을 먹여 침대에 뉘었다. 그리고 나서 앤은 부엌으로 갔다. 바로 그 때 마릴라가 마지못해 따라오는 거미줄투성이 데이비를 데리고, 아니 끌고 무서운 표정으로 부엌으로 들어왔다. 마릴라는 헛간 속의 어두컴컴한 구석에 숨어 있던 데이비를 지금 막 찾아 낸 것이다. 
   마릴라는 부엌 바닥 한가운데 양탄자 위로 데이비를 밀어 넣고는 동쪽 창가에 가서 앉았다. 앤은 슬금슬금 서쪽 창가로 가서 앉았다. 앤과 마릴라 사이에는 범인이 서 있었다. 데이비는 마릴라를 등지고 있었는데 뒷모습이 무서움에 떠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앤을 보고 있는 얼굴은 부끄러워하는 빛이 살짝 어려 있기는 해도, 눈은 친구를 보는 듯이 반짝반짝 빛났다. 데이비의 표정은 잘못했으니까 벌은 받겠지만 나중에는 앤과 이 일을 이야기하며 실컷 웃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앤은 은밀한 미소가 담긴 눈으로 데이비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앤의 눈빛에는 오직 잘못에 대한 추궁만이 어려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씁쓸해하는 기분 나쁜 표정이 담겨 있었다. 
   앤이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데이비, 왜 그랬니?" 
   데이비가 거북해하며 머뭇머뭇 대답했다. 
   "그냥 재미로 그랬어요. 한참 동안 집이 너무 조용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해주면 재미있을 것 같았어. 그리고 아주 재밌었어." 
   데이비는 무섭기도 하고 찔리는 구석도 있었지만 자기가 했던 일을 생각하니 절로 씩 웃음이 나왔다. 
   앤은 더욱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데이비, 넌 거짓말을 했어." 
   데이비는 어리둥절해했다. 
   "거짓말이 뭔데? 뻥까는 거야?" 
   "사실이 아닌 얘기를 말하는 거야." 
   데이비가 솔직하게 시인했다. 
   "맞아, 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어. 내가 사실대로 말했다면 아무도 놀라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그렇게 말 할 수밖에 없잖아." 
   앤은 이렇게 놀라워하는 자신과 이제까지의 노력에 대해 회의스런 생각마저 들었다.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는 데이비의 태도는 앤을 막바지까지 몰고 갔다. 앤의 눈에서 커다란 눈물 방울이 흘러내렸다. 
   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데이비, 어쩌면 그럴 수 있니? 그게 얼마나 나쁜 짓인지 모른단 말이야?" 
   데이비는 어안이 벙벙했다. 앤 누나가 울고 있다…… 내가 앤 누나를 울렸어! 데이비의 작고 여린 가슴에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데이비는 앤에게 달려가 무릎 위에 올라가서 앤의 목을 감싸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데이비가 흐느꼈다. 
   "난 뻥까는 게 나쁜 건지 몰랐어. 뻥까면 안된다는 걸 내가 아는 줄 알았어? 스프러트 아저씨네 애들은 맨날맨날 뻥을 깠고, 그 때마다 가슴에 십자가를 그렸어. 폴 어빙이었다면 뻥까는 짓은 안 하겠지? 난 폴 어빙처럼 착한 아이가 되려고 애써 왔지만, 이제 누난 다시는 날 사랑하지 않을 거지? 하지만 누나가 뻥까는 게 나쁜 일이라고 말해 줬다면 안 그랬을 거야. 누나를 울게 만들다니, 정말 미안해. 다시는 뻥까지 않을게." 
   데이비는 앤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그 순간 앤은 데이비를 이해하게 되었고 다시 마음이 밝아져 데이비를 꼭 껴안고 숱많은 데이비의 곱술머리 너머로 마릴라를 바라보았다. 
   "마릴라 아줌마, 데이비는 거짓말 하는 게 잘못인지 몰랐대요. 다시는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 이번엔 용서해 줘야 하지 않을까요?" 
   데이비를 훌쩍거리며 다짐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뻥까는 것이 잘못인지 알았으니까. 내가 한번 더 뻥을 까다 들키면 그 땐……." 
   데이비는 적당한 벌을 찾느라 고심했다. 
   "누나, 그 땐 피가 나도록 때려도 돼." 
   앤이 학교 선생님답게 말했다. 
   "데이비, '뻥'이라 하지 말고 '거짓말'이라고 해야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앉아 있던 데이비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앤을 빤히 쳐다보며 캐물었다. 
   "왜? 뻥까는 거랑 거짓말하는 게 뭐가 다른데? 알고 싶어. 그게 그거잖아." 
   "그건 상스러운 말이야. 어린애가 상스러운 말을 쓰는 건 나빠." 
   데이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면 안되는 게 굉장히 많네. 난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어. 뻥…… 아니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아직 거짓말이란 말이 연습이 안 돼서 그래. 하지만 이제부턴 뻥이란 말은 다시는 안 쓸게. 거짓말한 벌은 뭐야?" 
   앤이 애원하는 듯 마릴라를 바라보았다. 
   "나도 아이를 심하게 다루고 싶진 않다. 아무도 데이비에게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 주지 않았어. 또 스프러트네 아이들은 본받을 만한 친구가 아니었지. 불쌍한 메리는 너무 아파서 데이비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고. 내 생각엔 데이비가 처음부터 나쁜 일인지도 모르고 거짓말을 한 것 같구나. 하지만 데이비는 도라를 가둔 데 대해서는 벌을 받아야 한다. 끼니를 굶기고 방에 가둬 두는 것 말고는 생각나는 벌이 없는데, 그 벌은 너무 많이 써먹었어. 앤, 뭐 생각나는 거 없니? 네가 항상 말하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생각해 낼 법도 한데 말이다." 
   앤은 데이비를 부둥켜 안으며 말했다. 
   "벌은 너무 끔찍한 일이라서 늘 즐거운 상상만 하는 제게는 맞지 않아요. 세상은 이미 더 나쁜 일을 상상해 낼 필요가 없을 만큼 나쁜 일이 많으니까요." 
   결국 데이비는 늘 하던 대로 방에 갇혀 다음날 정오까지 나오지 못했다. 데이비는 무슨 생각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앤은 잠시 후 자기 방에 올라가다가 나지막히 자기를 부르는 데이비의 목소리를 들었다. 앤은 데이비가 침대 위에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데이비가 진지하게 물었다. 
   "앤 누나, 누구든지 뻥…… 아니 거짓말을 하면 나쁜 사람이야? 알고 싶어." 
   "그럼, 나쁜 사람이구말구." 
   "어른이 거짓말을 해도?" 
   "그럼." 
   데이비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럼 마릴라 아줌마는 나빠. 아줌마는 거짓말을 했어. 아줌마는 나보다 더 나빠. 난 거짓말이 잘못인 줄 몰랐지만 아줌마는 알면서도 거짓말을 했으니까." 
   앤이 발칵 화를 냈다. 
   "데이비 키스, 마릴라 아줌마는 평생 한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으셔." 
   데이비가 볼멘 소리로 대꾸했다. 
   "마릴라 아줌마는 거짓말을 했어. 지난주 화요일에 아줌마가 나더러 매일 밤 기도하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생길 거라고 했어. 난 일 주일이 넘게 기도도 안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안 일어났는 걸." 
   앤은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간신히 웃음을 참으면서 마릴라의 권위를 세워 주려고 애썼다. 
   "세상에, 데이비 키스. 오늘 바로 끔찍한 일이 일어났잖아." 
   데이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밥도 못 먹고 방에 갇힌 것 말야? 하지만 그건 하나도 끔직하지 않아. 물론 이렇게 벌받는 건 싫지만 여기 온 뒤로 방에 갇히는 벌을 너무 많이 받아서 벌써 이골이 났는걸, 뭐. 밥을 못 먹게 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아. 항상 아침 밥을 두 배로 먹으니까." 
   "방에 갇혀 있는 걸 얘기하는 게 아니야. 네가 오늘 거짓말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지. 그리고 데이비……." 
   앤은 침대 위로 몸을 수그려 어린 죄인을 향해 집게손가락을 흔들었다. 
   "어린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만큼 나쁜 일은 없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짓이지. 그럼 이제 마릴라 아줌마가 너한테 사실을 말했다는 걸 알겠지." 
   데이비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나쁜 일이 더 재밌네." 
   "그런 생각이 잘못된 거지, 마릴라 아줌마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야. 나쁜 짓이 언제나 재미있지는 않아. 그런 짓은 비겁하고 바보스럽게 보일 때가 많아." 
   데이비가 자기 무릎을 꽉 껴안으며 대꾸했다. 
   "그래도 마릴라 아줌마와 누나가 우물을 내려다보는 건 진짜 재밌더라." 
   앤은 아래층으로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는데, 거실에 발을 디디자마자 허리가 끊어져라 웃음을 터뜨렸다. 
   마릴라가 다소 엄하게 말했다. 
   "왜 그렇게 웃어대는지 모르겠구나. 오늘은 그렇게 웃을 만한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앤이 장담했다. 
   "아줌마도 들으시면 분명히 웃을 거예요." 
   마릴라도 앤의 이야기를 듣고 깔깔 웃었다. 마릴라가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웃어 넘어가는 걸 보면, 앤을 입양한 뒤로 마릴라의 교육관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마릴라는 곧 한숨을 쉬었다. 
   "데이비에게 그런 얘길 하지 말 것 그랬구나. 목사님이 어떤 아이한테나 그런 말을 하는 걸 듣고 해준 얘긴데. 하지만 데이비 때문에 화가 나진 않는구나. 네가 카모디 음악회에 갔을 때, 데이비를 재우면서 그런 말을 했었지. 데이비는 커서 하나님이 소중한 분이라는 걸 알기도 전에는 기도의 효력을 믿지 않겠다고 했어. 앤, 난 앞으로 그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겠다. 도저히 그 앨 못 다루겠어. 막막하기만 해." 
   "마릴라 아줌마,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 얼마나 골칫덩이였는지 생각해 보세요." 
   "앤, 넌 절대 골칫덩이가 아니었다, 전혀 그렇지 않았어. 진짜 속을 썩이는 애를 보고 나니 이제야 알겠구나. 물론 너도 늘 말썽을 일으키기는 했지. 하지만 넌 늘 좋은 의도를 갖고 있었어. 한데 데이비는 별 생각없이 그냥 말썽을 피우는 것 같아." 
   "아니에요, 데이비도 정말 나쁜 맘은 없어요. 그냥 장난일 뿐이지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여긴 너무 심심하잖아요. 같이 놀아 줄 남자 애가 없으니 대신 그걸 채울 일을 궁리하는 수밖에요. 도라는 새침하고 얌전해서 남자 애 놀이 상대로는 적당하지 않아요. 아줌마,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 어떨까요?" 
   마릴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우리 아버지께선 늘 어떤 아이도 일곱 살이 되기 전에는 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앨런 목사님도 똑같은 말을 하셨구. 집에서 아무리 가르치기 힘들어도 일곱 살이 되기 전엔 절대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 
   앤이 활기차게 말했다. 
   "그럼 집에서 데이비를 바꾸려고 노력해야겠네요. 데이비는 못된 짓을 많이 하긴 하지만 정말 사랑스러운 꼬마예요. 난 그 애를 미워할 수가 없어요. 아줌마, 말씀드리기는 뭐하지만 솔직히 난 도라보다 데이비가 더 좋아요. 도라가 아무리 착하게 굴어도 말이에요." 
   마릴라도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래, 사실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건 공평하지 못해. 도라는 말썽을 일으키지 않잖니. 도라보다 착한 애는 세상에 없을 거다. 그 앤 너무 조용해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잖아?" 
   "도라는 너무 얌전해요. 어떻게 하라고 일러주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잘하구요. 도라는 애초부터 어른스러워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죠. 그리고……." 
   앤은 핵심을 찌르는 말을 덧붙였다. 
   "우린 항상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데이비한테는 지긋지긋할 만큼 우리가 필요하잖아요." 
   마릴라도 동감했다. 
   "맞아, 데이비는 필요한 게 많은 애다. 린드 부인은 데이비에게 필요한 건 사랑의 매라고 그러더구나."  







 11장 이상과 현실 




   앤은 퀸스 전문 학교 새절의 단짝한테 편지를 썼다. 
    
   가르치는 일은 정말 즐거워. 제인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단조롭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매일같이 재미있는 사건이 터지고, 아이들은 정말 기발한 말을 해. 제인은 아이들이 엉뚱한 말을 하면 벌을 준대. 그래서 아마 제인은 가르치는 일이 단조롭다고 생각하나 봐. 오늘 오후에는 꼬마 지미 앤드루스가 "점찍다"란 단어를 쓰려고 낑낑대다가 끝내는 철자가 틀렸지 뭐야. 마침내 지미가 이렇게 말하더군. "쓰지는 못해도 무슨 뜻인지는 알아요." 내가 물었지. "무슨 뜻인데?" "세인트 클레어 돈넬의 얼굴이란 뜻이에요, 선생님." 세인트 클레어 얼굴에 주근깨가 많은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난 다른 아이들이 그 애 주근깨를 보고 놀리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쓴단다. 나도 어렸을 때 아이들이 주근깨투성이라고 놀려 대던 기억이 지금까지 생생하니까. 하지만 세인트 클레어는 주근깨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세인트 클레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지미를 두들겨 팬 건, 지미가 그 애더러 "세인트 클레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어. 나는 치고 받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수업이 끝난 뒤라서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했어. 
   어제는 로티 라이트한테 덧셈을 가르치느라 진땀을 뺐어. 내가 물었지. "한 손에 사탕 세 개를 가지고 있고 다른 손에 두 개를 가지고 있으면, 네가 가지고 있는 사탕은 모두 몇 개지?" 로티가 대답했어. "한 입요." 그리고 자연 시간에는 아이들에게 왜 두꺼비를 죽이면 안 되느냐고 물었더니 벤지 슬론이 심각하게 이렇게 대답하는 거야. "다음날 비가 오니까요." 
   스텔라, 웃음을 참느라고 얼마나 애를 먹는지 몰라. 집에 갈 때까지 웃음을 모두 모아 둬야 하거든. 마릴라 아줌마는 내 방에서 난데없이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려 오면 걱정이 된대. 아줌마 말로는, 그래프턴에 어떤 미친 사람이 있는데, 맨 처음 증상이 미친 듯이 웃어 대는 것이었대. 
   너 토머스 베킷(12세기에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와 헨리 2세의 대법관을 지낸 인물로 헨리 2세의 교회 정책에 반대하여 죽음을 당했으며 뒤에 성인으로 추증되었다:옮긴이)이 교회에서 뱀(성인(saint)과 뱀(snake)의 철자를 혼동한 것을 빗대어 하는 이야기이다:옮긴이)으로 시성되었다는 얘기 아니? 로즈 벨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윌리엄 틴들(16세기 영국의 종교 개혁가로 성경을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한 사람이다:옮긴이)이 신약 성서를 썼다는 거야(영어로 번역했다는 것을 직접 쓴 것으로 잘못 표현한 것을 빗대어 하는 이야기이다:옮긴이). 또 클로드 화이트는 "빙하"가 창틀을 끼우는 사람이래! ("빙하"는 영어로 "클래셔(glacier)"라고 하는데, 클로드는 이 말이 유리를 뜻하는 "글래스(glass)"와 발음이 똑같으니까 이 글래스에다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어미 "er"이 붙은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옮긴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재미있고도 어려운 문제는 사물에 대해 자기 생각을 발표하게 하는 일인 것 같아. 지난주 폭풍우가 치던 날 저녁 시간에는 아이들을 주위에 모아 놓고 나를 같은 반 친구라고 생각하고 같이 이야기해 보자고 했어. 난 아이들에게 가장 바라는 게 뭐냐고 물었지. 몇 명은 인형, 조랑말, 스케이트 같은 걸 갖고 싶다고 평범하게 대답했지만 어떤 애들은 아주 기발한 말을 했어. 헤스터 볼터는 "매일 외출복을 입고 거실에서 식사하는 것'이 소원이고, 한나 벨은 "힘들게 일하지 않고도 잘사는" 게 꿈이래. 열 살짜리 마저리 화이트는 "과부"가 되고 싶대. 왜냐고 물었더니 결혼하지 않으면 노처녀라고 놀림받고 결혼하면 남편에게 쥐여 살지만, 과부가 되면 두 가지 위험이 모두 없다고 진지하게 말하더라구. 그 중 가장 황당한 것은 샐리 벨 얘기였어. 샐리는 "신혼여행"을 가고 싶대. 샐리더러 신혼여행이 뭔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멋진 새 자전거인 것 같다는 거야. 몬트리올에 사는 자기 사촌 오빠는 항상 최신형 자전거를 갖고 있었는데, 그 오빠가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갔기 때문이라는 거야! 
   또 어떤 날은 아이들에게 자기가 이제까지 했던 일 가운데 가장 나쁜 일을 말해 보라고 했어. 고학년 아이들한테는 별 효과가 없었지만 3학년 아이들은 거리낌없이 얘기하더라구. 엘리자 벨은 자기 고모 공책에 불을 질렀다는 거야. 일부러 그랬느냐고 물으니까 반은 그렇고 만은 아니래. 엘리자는 그냥 공책이 어떻게 타는지 궁금해서 "끝만 살짝" 태우려고 했는데 순식간에 한 권이 다 타 버렸대. 에머슨 길리는 헌금하라고 준 10센트로 사탕을 사먹은일. 아네타 벨은 "묘지에 있는 월귤나무 열매를 따먹은 일"이 가장 잘못한 일이래. 윌리 화이트는 "외출복 바지를 입고 가축 우리 지붕에서 몇 번이나 미끄럼 타기"를 한 일을 꼽고는 "하지만 난 여름 내내 주일 학교에 누더기 바지를 입고 가는 벌을 받았어요. 나쁜 짓을 해서 그만한 벌을 받았으니까 반성하지 않아도 돼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더군. 
   아이들이 쓴 글을 네가 읽어 봤으면 좋겠다 싶어서 최근 작품 몇 편을 적어 보낸다. 지난주에 4학년 아이들에게 아무 얘기나 좋으니 나한테 편지를 쓰라고 했어. 놀러 갔던 얘기나 재미있는 물건이나 또는 자기가 아는 사람에 대해서 써 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넌지시 힌트를 주면서 말이야. 아이들한테 누구의 도움도 받지 말고 종이에 편지를 써서 봉투에 넣어 나한테 부치라고 했어. 지난 금요일 아침에 학교에 가 보니 책상 위에 편지가 수북이 쌓여 있더구나. 그 날 저녁에 난 교육은 어려움이 따르지만 즐거움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지. 아이들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뿌듯해져. 이건 네드 클레어가 써 보낸 편지를 하나도 안 고치고 그대로 옮겨 쓴 거야. 
    
      프린스에드워드 섬 
      초록 지붕 집의 
      설리 선생님께 
    
      새 
    
   저는 친애하는 선생님께 새에 대해 쓸 꺼에요. 새는 아주 쓸모있는 동물이에요. 우리 집 고양이는 새를 잡아요. 고양이 이름은 윌리엄인데 아빤 톰이라고 불러요. 우리 고양이가 몸뚱이에 줄이 왕창 그어져 있는데, 저번 겨울에 한쪽 귀가 얼어서 없어졌거던요. 딱 그래서 우리 고양이는 진짜루 잘 생겼어요. 우리 삼촌도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어요. 어떤 날 고양이가 삼촌 집에 들어오더니 도망 안 갔는데 삼촌이 고양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가장 머리가 나쁘다고 해요. 삼촌이 고양이를 삼촌의 흔들의자에서 자라고 했는데, 숙모는 삼촌이 자식보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대요. 그건 나빠요. 우리는 고양이한테 잘해 주어야 하고 새 우유도 주지만, 우리 어린이보다 더 잘해 주면 안 대요. 이제 더 할말이 생각 안나요. 
                                                                                   에드워드 블레이크 클레이. 
    
   세인트 클레어 돈넬의 글은 대개 짧고 간결해. 세인트 클레어는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단다. 나는 세인트 클레어가 직접 주제를 정했거나 악의를 갖고 계획적으로 추신을 덧붙였다고 생각하지 않아. 세인트 클레어는 글재주도 없고 상상력도 빈약한 아이야. 
    
   친애하는 셜리 양께 
   선생님께서 우리가 본 이상한 것을 써 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에이번리 마을 회관에 대해 쓰겠습니다. 회관은 문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안에 있고 하나는 밖에 있습니다. 창문이 여섯 개 있고, 굴뚝이 하나 있습니다. 회관은 네모난 건물입니다. 회관은 파란색입니다. 그래서 이상해 보입니다. 회관은 카모디 거리 낮은 곳에 있습니다. 회관은 에이번리에서 세 번재로 중요한 건물입니다. 다른 중요한 건물은 교회와 대장간입니다. 회관에서는 토론회, 강연회, 연주회가 열립니다. 
                                                                                   선생님의 제자 
                                                                                   제이콥 돈넬 
   추신 : 회관은 아주 새파란 색입니다. 
    
   아네타 벨의 편지는 너무 길어서 깜짝 놀랐단다. 아네타는 수필을 쓰는 데 소질이 없어서 세인트 클레어의 글만큼이나 간단하거든. 아네타는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지만 독창성이 없어. 이건 아네타의 편지야. 
    
   사랑하는 선생님께 
   저는 제가 선생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쓰겠습니다. 전 제 온몸과 마음을 다 바쳐 선생님을 사랑해요……. 제 가슴에 있는 모든 사랑을 다해서…… 선생님을 영원히 섬기고 싶습니다. 그것은 저의 가장 고귀한 특권입니다. 그래서 저는 학교에서 얌전하게 지내고 열심히 공부할라고 애쓴답니다. 
   나의 선생님, 선생님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를 음악 같고, 선생님의 눈동자는 이슬 맺힌 팬지 같습니다. 선생님은 키 크고 기품 있는 여왕 같습니다. 선생님의 머리칼은 황금 물결 같습니다. 앤서니 파이는 선생님 머리가 빨갓다고 했지만, 앤서니 말에는 신경쓰지 마세요. 
   제가 선생님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선생님을 모르고 지낸 시간이 있었다는 게 상상이 안……. 선생님은 제 인생을 축복해 주고 제 인생을 신성하게 했습니다. 전 언제까지나 선생님이 제 곁에 오신 올해를 제 인생 최고의 해로 기억할 겁니다. 게다가 올해는 제가 뉴브리지에서 에이번리로 이사 온 해이기도 해요. 선생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고 저를 불행과 죄악에 빠지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이 모든 게 선생님 덕분입니다. 
   며칠 전에 까만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꽃을 꽂고 있던 선생님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저는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세월이 흘러 백발이 되어도 전 영원히 선생님을 그렇게 아름다운 분으로 기억할 겁니다. 선생님은 제게 언제까지나 젊고 아름답게 보일 거예요……. 아침에도, 한낮에도, 해질 무렵에도 전 항상 선생님을 생각한답니다. 선생님이 웃을 때도, 시름에 잠길 때도 전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오만해 보일 때까지도 말입니다. 앤서니 파이는 선생님이 늘 신경질을 부린다구 하지만 전 선생님이 그러시는 걸 한번도 본적이 없어요. 하지만 앤서니는 야단맛을 짓을 하니까 선생님이 앤서니에게 화를 낸다고 생각해요. 어떤 옷에서든 저는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새로운 옷을 입을 때마다 먼젓번 옷보다 훨씬 사랑스럽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안녕히 주무세요. 이제 해가 지고 별이 빛나고 있습니다……. 별들은 선생님 눈처럼 밝고 아름답습니다. 나의 사랑, 선생님의 손과 얼굴에 제 입술을 전합니다. 주여, 선생님과 항상 함께 하시어 모든 악에서 구하옵소서.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아네타 벨. 
    
   이 희한한 편지를 읽고 난 좀 황당했어. 아네타가 이 편지를 썼다고 믿느니 차라리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믿는 게 낫겠다 싶었지. 다음날 학교에 가서 쉬는 시간에 아네타를 데리고 시냇가로 갔어. 그리고 편지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라고 했지. 아네타는 엉엉 울다가 사실을 털어놨어. 아네타는 편지에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더래. 그런데 엄마 옷장 맨 윗서랍을 열어 보니 엄마의 옛날 애인이 보낸 편지 묶음이 있더라는 거야. 아네타는 울먹이며 말했어. "그 사람은 우리 아빠는 아니에요. 성직자가 되려고 공부하던 사람이었죠. 그래서 그렇게 아름다운 편지를 쓸 수 있었죠. 하지만 엄마는 결국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어요. 엄마는 그 때 그 사람이 하려고 했던 일을 반도 이해할 수 없었대요. 하지만 전 편지 내용이 아주 근사하니까 여기저기서 조금씩 베껴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전 그 사람이 '아가씨'라고 쓴 곳은 '선생님'이라고 썼고, 생각나는 게 있으면 제 생각도 쓰고, 단어 몇 개도 바꾸었어요. '분위기'라는 말 대신 '옷'이라고 썼죠. '분위기'가 무슨 뜻인지 잘 모르지만 '옷'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았거든요. 난 선생님이 모르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선생님은 어떻게 그 편지를 제가 쓰지 않았다는 걸 아셨어요? 선생님의 정말 머리가 너무 좋아요." 
   난 아네타에게 다른 사람의 편지를 베껴서 자기가 쓴 것처럼 꾸며서 보내는 건 아주 나쁜 일이라고 꾸짖었어. 하지만 아네타가 자기 잘못을 깨닫기나 했는지 모르겠어. 
   아네타는 울면서 말했거든. "하지만 전 진짜로 선생님을 사랑해요. 목사님이 쓴 편지를 베끼기는 했지만 거기 있는 말은 다 사실이에요. 전 정말 진심으로 선생님을 사랑해요." 
   그런 상황에서 아이를 야단치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야. 
   이건 바바라 쇼가 보낸 편지야. 원본에 배어 있는 잉크 얼룩까지는 베끼지 못했어. 
    
   친애하는 선생님께 
   선생님께서는 놀러갔던 곳을 써도 된다고 하셨죠? 전 어디에 놀러 간 게 딱 한 번밖에 없어요. 지난 겨울에 저는 메리 고모 집에 갔었어요. 메리 고모는 매우 특별한 여자이자 훌륭한 주부예요. 그 집에 간 첫날 밤, 우리는 차를 마셨어요. 전 사기 주전자를 뒤집어엎어 깨뜨리고 말았어요. 메리 고모는 그 주전자를 결혼하고 나서 쭉 갖고 있었는데, 드디어 제가 그 주전자를 깬 거래요. 다 같이 식탁에서 일어나는데 제가 고모 치맛자락을 밟아서 치마주름이 모두 뜯어져 버렸어요. 다음날 아침에는 물주전자를 양동이에 부딪혀서 둘 다 찌그러뜨렸고, 아침 식사를 하면서 식탁보에 차를 엎질렀어요. 고모가 저녁 설거지하는 걸 도와 드리다가 그만 중국제 접시를 떨어뜨려 박살을 내 버렸지요. 그리고 그 날 저녁, 계단에서 굴러 발목을 삐는 바람에 저는 일 주일 동안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어요. 메리 고모가 조셉 아저씨더러 차라리 다행이라면서 만약 안 다쳤으면 집 안에 있는 걸 몽땅 박살냈을 거라고 얘기하는 소릴 들었어요. 저는 발목이 다 낫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죠. 저는 어디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학교 다는 게 훨씬 좋아요. 특히 에이번리에 전학 온 다음부터는요. 
                                                                                   선생님을 존경하는 
                                                                                   바바라 쇼. 
    
   이번엔 윌리 화이트의 편지야. 
    
   존경하는 선생님께 
   전 무척 용감한 우리 고모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어요. 고모는 온타리오에서 사세요. 어느 날 고모는 헛간에 가다가 마당에서 개 한 마리를 발견했어요. 고모는 개가 거기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작대기로 개를 쫓아 헛간으로 몰아넣고 문을 잠가 버렸어요. 금방 어떤 사람이 서커스단에서 도망친 상상의 사자(윌리는 순회 동물원의 사자를 얘기한 걸까?)를 찾으러 왔어요. 그래서 그 개가 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용감한 우리 고모가 작대기로 사자를 헛간에 몰아넣었던 거예요. 무서워하지도 않고 그렇게 용감한 행동을 하다니 정말 신기해요. 에머슨 길리스는 우리 고모가 그게 개인 줄 알고 진짜 개한테 하듯이 똑같이 한 거니까 하나도 용감하지 않다고 했어요. 하지만 에머슨은, 자기 삼촌만 있지 용감한 고모가 없으니까 샘이 나서 그런 거예요. 
    
   끝으로 가장 훌륭한 편지를 적는다. 내가 폴을 천재라고 생각한다면 넌 비웃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폴이 쓴 편지를 읽고 나면 너도 그 애가 보통아이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리라 믿어. 폴은 멀리 떨어져 있는 해변에서 할머니와 산단다. 그 애는 놀이 친구가 하나도 없어, 진짜 친구 말이야. 퀸스 학교 교장 선생님들이 교사들은 학생들 중에서 누구 한 사람을 편애해서는 안된다고 했던 말 기억하지? 하지만 난 폴을 제일 예뻐하지 않을 수 없어. 특별히 그 애를 좋아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해. 다들 폴을 좋아하니까. 린드 아줌마까지도 폴을 귀여워한단다. 린드 아줌마는 자기가 미국인을 좋아하게 된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셨어. 다른 아이들 역시 폴을 좋아해. 폴은 꿈과 환상의 세계에서 살지만, 결코 나약하거나 계집애 같진 않아. 폴은 무척 씩씩해서 누구하고 싸워도 지지 않을 거야. 얼마 전에 세인느 클레어가 영국기는 미국기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세다고 했다가 폴과 싸움이 붙었어. 결국 무승부로 끝나서 둘이 모두 앞으로 서로의 애국심을 존중하기로 약속했지. 세인트 클레어가 자기는 매서운 한 방이 특기고 폴은 빠른 주먹이 특기래. 폴의 편지야. 
    
   사랑하는 선생님께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아는 재미있는 사람에 대해 써도 된다고 하셨죠? 제가 알고 있는 가장 재미있는 사람들은 바위 사람들인 것 같아요. 선생님께 바위 사람들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어요. 전 할머니와 아빠를 빼고는 아무한테도 바위 사람들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이해를 잘하시니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사람들한테는 말해 줘도 소용이 없어요. 
   바위 사람들은 해변에서 살아요. 전 겨울이 오기 전에는 거의 매일 저녁 그 사람들을 찾아갔어요. 지금은 봄이 올 때까지 갈 수 없지만, 그래도 바위 사람들은 해변에 있어요. 바위 사람들은 변함이 없는 것을 좋아하니까요. 그게 바로 바위 사람들의 훌륭한 점이에요. 노라는 제가 처음으로 알게 도니 바위 사람이에요. 그래서 제가 노라를 제일 좋아하나 봐요. 노라는 앤드루스 만에서 사는데 머리카락도 까맣고 눈동자도 까만색이에요. 노라는 인어와 물의 요정에 대해서라면 뭐든 다 알아요. 언제 한번 노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바위 사람들은 노라말고도 쌍둥이 선원도 있어요. 쌍둥이 선원은 집도 없이 언제나 바다를 떠돌아다니죠. 하지만 그 선원들은 해변에 와서 자주 내게 말을 걸어요. 이 유쾌한 선원들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보았고 또 세상 밖에 있는 것도 보았어요. 한 번은 동생 쌍둥이 선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그 선원은 항해를 하다가 달숲에 이르렀대요. 달숲은 보름달이 바다에 떠오를 때 물위를 지나면서 만든 흔적이라는 거 선생님도 아시죠? 아무트 그 동생 선원은 달자리를 따라 달에 다다를 때까지 항해를 했어요. 달에 작은 황금 문이 있어서 선원은 그 문을 열고 달 속을 지나며 항해했어요. 동생 선원은 달에서 신기한 모험을 했어요. 하지만 그 모험담까지 이야기하면 편지가 너무 길어지겠죠. 
   이제 동굴에 사는 황금 부인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어느 날 저는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큰 동굴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황금 부인을 만났답니다. 그 부인은 금빛 머리카락이 발까지 늘어져 있었고, 드레스는 살아 있는 황금처럼 반짝반짝 빛났어요. 그리고 그 부인은 황금 하프를 갖고서 하루 종일 연주했어요. 해변을 거닐면서 귀를 기울여 보면 언제나 그 선율을 들을 수 있어요.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그 소리가 바위 틈에서 나는 바람소리라고만 생각하죠. 저는 노라한테 황금 부인 이야기를 해 본적이 없어요. 황금 부인 이야기를 하면 노라가 마음 아파할까 봐 걱정스럽거든요. 쌍둥이 선원 이야기를 오래 늘어놓아도 노라는 마음 아파해요. 
   저는 언제나 쌍둥이 선원을 줄무늬 바위에서 만나요. 동생은 아주 착하지만 형은 가끔 사나워 보여요. 그 형은 수상쩍은 데가 많아요. 어쩌면 해적일지도 몰라요. 참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한번은 그 사람이 상스러운 말을 하는 걸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난 우리할머니한테 욕쟁이하고는 절대로 사귀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다시 욕을 하려거든 해변에 나오지 말라고 했어요. 그 사람은 깜짝 놀라서 자기를 용서해 주면 해가 지는 곳으로 저를 데려가 주겠다고 사정했어요. 다음날 저녁 내가 줄무늬 바위에 앉아 있을 때, 그 사람이 마법의 배를 몰고 배를 건너와서 저를 배에 태웠어요. 그 배는 마치 조개 껍데기의 속처럼 온통 진줏빛과 무지개빛으로 반짝거렸어요. 마법의 배는 달빛처럼 부드럽게 항해를 했어요. 이렇게 우리는 해지는 곳에 이르렀어요. 선생님, 해가 해지는 곳에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 곳이 어땠을 것 같아요? 해지는 곳은 커다란 정원처럼 꽃이 만발해 있었어요. 그리고 구름은 꽃들의 침대였구요. 황금빛 항구로 들어가 장미만큼 큰 미나리아재비가 가득 피어 있는 넓은 풀밭에 내렸어요. 저는 거기서 아주 오래 있었어요. 한 일 년쯤 지난 줄 알았는데 쌍둥이 형이 겨우 몇 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어요. 아시다시피, 해지는 나라는 시간이 여기보다 훨씬 느리잖아요. 
                                                                                   선생님의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폴 어빙. 
   추신 : 선생님, 물론 이 이야기를 사실이 아니에요.  




12장 불길한 하루 



   불길한 하루는 사실 쿡쿡 쑤셔대는 치통으로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끙끙거리던 전날 밤에 이미 시작되었다. 잔뜩 흐리고 쌀쌀한 겨울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앤은 인생이 따분하고 시들하고 아무 쓸모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앤은 언짢은 기분으로 학교에 갔다. 치통 때문에 볼이 퉁퉁 부어 올라 얼굴이 온통 쑤시고 아팠다. 교실 안은 난롯불이 잘 타지 않아 연기만 자욱하고 추웠다. 아이들은 와들와들 떨며 떼 지어 난롯가에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앤은 전에 없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각자 자기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앤서니 파이는 평소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으스대는 걸음걸이로 자리에 가 앉더니 제 짝과 무슨 말인가를 소곤거리다가 씩 웃으며 앤을 쳐다보았다. 
   그날 아침만큼 끽끽거리는 연필 소리가 많이 난 적도 없는 것 같았다. 바바라 쇼는 수학 문제를 가지고 앤의 책상으로 걸어오다가 석탄통에 걸려 우당탕 넘어졌다. 결국 교실 곳곳에 석탄이 나뒹굴고, 바바라의 석판은 산산조각이 났다. 바바라가 석탄 가루를 뒤집어쓴 채 거뭇거뭇해진 얼굴로 일어나자, 사내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앤은 2학년 읽기반 아이들이 책 읽는 것을 듣고 있다가 돌아서면서 쌀쌀맞게 말했다. 
   "아니, 바바라, 넘어지지 않고 다닐 자신이 없으면 자리에 꼼짝 말고 앉아 있는 게 낫잖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여자 애가 그렇게 덜렁대다니 참 한심하구나." 
   가엾은 바바라는 비틀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얼굴은 온통 재투성이에다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정말로 괴기스런 모습이었다. 다정하고 소중한 선생님은 한 번도 그런 말투나 표정으로 바바라를 꾸짖은 적이 없었다. 바바라는 비탄에 잠겼다. 앤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그 때문에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를 뿐이었다. 2학년 읽기반 아이들이 아직도 그 수업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뒤에 계속된 잔인한 수학의 고통 때문만이 아니었다. 앤이 딱딱거리며 수학 무제를 풀고 있던 바로 그 때, 세인트 클레어 돈넬이 헉헉대며 들어왔다. 
   앤이 차갑게 물었다. 
   "세인트 클레어, 30분 지각이다. 왜 늦었니?" 
   세인트 클레어는 한껏 공손함을 담아 얘기했지만 다른 아이들을 웃기려고 작정한 말투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오늘 저녁 집에 손님이 오시는데 클래리스 애마이러가 아파서 엄마가 푸딩 만드는 일을 도와 드려야 했거든요." 
   "벌로 네 자리에 가서 수학책 84쪽에 있는 여섯 문제를 다 풀도록." 
   세인트 클레어는 앤의 말투에 조금 놀란 듯했지만 얌전히 자리에 가서 석판을 꺼냈다. 그리고는 옆줄에 앉은 조 슬론에게 작은 꾸러미 하나를 슬쩍 건넸다. 그 모습을 눈치챈 앤은 그 꾸러미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성급한 판단을 내렸다. 
   요즘 하이럼 슬론 부인은 가난한 살림에 보태 쓰려고 "도넛"을 만들어 내다 파는 일을 시작했다. 도넛은 특히 남자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지난 몇 주 동안 앤은 도넛 때문에 이만저만 애를 먹은 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등교 길에 용돈으로 도넛을 사서 학교로 가져와서는 어떻게 해서든 수업 시간에 친구들과 나누어 먹었다. 앤은 아이들에게 한 번 더 교실에 도넛을 사 들고 오면 압수해 버리겠다고 경고했다. 그런데 뻔뻔스럽게도 세인트 클레어 돈넬은 지금 앤의 눈앞에서 하이럼 슬론 부인이 쓰는 파랗고 하얀 줄무늬 종이에 싸인 물건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앤이 나지막이 말했다. 
   "조, 그거 갖고 와." 
   깜짝 놀라 당황한 조는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통통한 개구쟁이 조는 놀라면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그 순간 불쌍한 조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 같았다. 
   앤이 말했다. 
   "그거 불 속에 던져." 
   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서……선생님, 제……제, 제발." 
   "조, 시키는 대로 해. 아무 소리 말고." 
   조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헐떡거렸다. 
   "하……하지만 서……선생님……이, 이, 이건……." 
   앤이 소리쳤다. 
   "조, 시키는 대로 할 거야, 안 할 거야?" 
   조 슬론보다 더 대담하고 침착한 아이라도 앤의 매서운 눈초리와 그 목소리에는 위압당하여 꼼짝을 못했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앤은 아이들이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이었다. 조는 고통스런 얼굴로 세인트 클레어를 흘끗 바라보고는 난로가로 가서 커다란 사각 문을 열고, 벌떡 튕겨 일어난 세인트 클레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파랗고 하얀 줄무늬 종이에 싸인 꾸러미를 불 속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나서 조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 순간 겁에 질린 에이번리 학교 아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진이 일어난 건지, 화산이 폭발한 건지. 앤이 하이럼 슬론 부인이 파는 도넛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했던 그 죄 없는 꾸러미에는 사실 세인트 클레어 돈넬의 아버지가 그날 저녁 시내에서 생일 잔치를 가질 워런 슬론에게 보내는 폭죽과 회전 불꽃 세트가 들어 있었다. 폭죽들은 연달아 퓽, 쾅쾅 하는 우렛소리를 내며 터졌고, 난로에서는 회전 불꽃들이 튀어나와 타다닥, 쉭쉭거리며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앤은 당황하여 하얗게 질린 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고, 여자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책상 위로 기어 올라갔다. 조 슬론은 난장판이 된 교실 한복판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고, 세인트 클레어는 웃음을 참지 못해 통로에서 앞뒤로 몸을 흔들어 댔다. 프릴리 로저슨은 까무러쳤고, 아네타 벨은 정신이 나간 아이처럼 날뛰었다. 
   회전 불꽃이 다 타서 사그라들 때까지 실제로는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주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정신을 차린 앤은 급히 교실 문과 창문을 열어제치어 교실에 자욱한 가스와 연기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는 여자 애들과 함께 의식을 잃은 프릴리를 현관으로 옮겼다. 현관으로 나가자마자 바바라 쇼는 말릴 겨를도 없이 살얼음이 낀 물 한 양동이를 프릴리의 얼굴에 냅다 끼얹었다. 
   꼬박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교실은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느껴질 뿐이었다. 아이들 모두 선생님이 그 난리를 겪고 나서도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았음을 알았다. 앤서니 파이만 제외하고는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수학 문제를 풀다가 무심코 끽끽 하는 연필 소리를 내는 바람에 앤의 눈에 띈 네드 클레이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리 수업을 받는 아이들은 앤이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빠르게 설명하는 통에 한 대륙이 순식간에 휙 지나갔다. 문법 수업을 받는 아이들은 문장과 해석과 문법 설명을 듣느라 초죽음이 되었다. "향기로운"을 "항기로운"이라고 잘못 읽은 체스터 슬론은 그 때 느낀 수치심을 줄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앤은 스스로 남의 비웃음을 살 짓을 자초했으니, 그 날 밤 이 집 저 집에서 차를 마시며 입에 오르내릴 웃음거리가 되리라는 걸 알았으나 그런 생각이 들수록 더욱 화가 났다. 마음이 안정된 때였다면 가볍게 웃어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에 앤은 애써 차갑게 오만을 떨며 무시하고 있었다. 
   점심 후 앤이 교실로 돌아갔을 때, 앤서니 파이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평소처럼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앤서니 파이는 호기심과 조롱이 섞인 까만 눈을 빛내며 책 너머로 앤을 엿보고 있었다. 앤이 분필을 찾으려고 책상 서랍을 열자 별안간 그 안에서 생쥐 한 마리가 튀어 올라와 책상 위를 쏜살같이 가로질러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앤은 뱀이라도 본 양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화들짝 뒤로 물러났고, 앤서니 파이는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잠시 소름 끼치는 거북한 침묵이 흘렀다. 아네타 벨은 쥐가 어디로 갔는지 몰라 다시 날뛰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아네타는 가만히 있기로 해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채 눈빛을 이글거리며 서 있는 선생님 앞에서 어느 누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있겠는가? 
   "내 서랍 안에 쥐를 넣은 게 누구지?" 
   앤의 목소리를 아주 낮았지만 그 소리를 들은 폴 어빙은 등골이 오싹해 졌다. 
   조 슬론은 앤과 눈이 마주치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으로 책임감을 느낀 나머지 더욱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나, 나, 나, 난……아, 아, 아니에요. 서, 서, 선생님…… 나, 나, 난…… 아, 아녜요." 
   앤은 불쌍한 조한테서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앤서니 파이를 노려 보았다. 앤서니 파이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앤서니, 너니?" 
   "네, 저예요." 
   앤서니가 무례하게 대답했다. 
   앤은 책상에서 지휘봉을 꺼냈다. 단단한 나무로 만든 지휘봉은 길고 무거웠다. 
   "앤서니, 이리 나와." 
   앤서니 파이는 한 번도 호된 벌을 받아 본적이 없었다. 그 때까지 앤은 아무리 화가 치밀어도 아이들을 인정 사정 없이 벌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앤의 지휘봉은 사정없이 앤서니를 내리쳤고 마침내 앤서니가 멋모르고 허세를 부리던 시절은 막을 내렸다. 앤서니는 움찔하더니 곧 눈물을 흘렸다. 
   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지휘봉을 떨어뜨리고는 앤서니에게 가서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다. 앤은 자기 자리에 앉아 부끄럽고도 후회스러운 마음에 몹시 가슴이 쓰라렸다. 한 순간 울컥했던 노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눈물로 지울 수 있는 일이라면 며칠이라도 울고 싶었다. 앤의 긍지는 이렇게 끝이 났다. 결국 자기 학생들 가운데 한 아이에게 매질을 하고 만 것이다. 제인이 얼마나 의기 양양해 할까! 해리슨 씨는 얼마나 비웃을까! 그러나 그런 생각들보다도 앤을 훨씬 괴롭힌 것은 앤서니 파이와 친해질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는 점이었다. 앤서니 파이는 이제 절대로 앤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뼈를 깎는 듯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앤은 그 날 밤 집에 돌아갈 때까지 눈물을 참았다. 집에 돌아온 앤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앤이 하염없이 울자 깜짝 놀란 마릴라가 방으로 뛰어 올라와 무슨 일인지 말하라고 다그쳤다. 
   앤이 훌쩍이며 말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그래요. 아, 마릴라 아줌마, 오늘은 정말 힘겨운 하루였어요. 전 제 자신이 부끄러워서 죽고만 싶어요. 자기 분을 못 참아 앤서니 파이를 때렸어요." 
   마릴라가 힘주어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내 속이 다 후련하구나. 벌써 오래 전에 해야 했던 일이야." 
   "오, 아니에요, 마릴라 아줌마. 전 다시 아이들을 볼 낯이 없어요. 그 일을 생각하면 너무 챙피해요. 제가 얼마나 심술궂고 밉살맞고 무자비하게 굴었는지 모르실 거예요. 전 폴 어빙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앤 너무나 놀라고 실망하는 눈치였어요. 아, 마릴라 아줌마, 앤서니와 친해지려고 그렇게 참고 노력했는데 이제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말았어요." 
   마릴라는 일을 많이 해서 거칠고 단단해진 손을 내밀어 다소 헝클어진 앤의 보드라운 머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앤의 흐느낌이 점점 잦아들자 마릴라는 상냥하게 말했다. 
   "넌 마음에 담아 두는 일이 너무 많아, 앤.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란다. 하지만 사람들은 금방 잊어버리지. 힘겨운 날은 누구에게나 오는 거야. 앤서니 파이가 너를 좋아하건 말건 그게 무슨 문제니? 널 싫어하는 애는 그애 밖에 없잖아." 
   "전 그럴 수 없어요. 모두가 저를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한 사람이라도 저를 좋아하지 않으면 마음이 아파요. 앤서니는 이제 절대롤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오, 마릴라 아줌마, 전 오늘 정말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어요. 제 얘기 좀 들어 보세요." 
   마릴라는 이야기의 전말을 귀기울여 듣다가 이따금 살짝살짝 미소를 지었지만 앤은 알아채지 못했다. 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마릴라는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저런, 걱정 말아라. 네가 항상 얘기하듯이 오늘은 다 지나갔고 아직 실수를 저지르지 않은 내일이 오잖니. 자, 훌훌 털어 버리고 내려가서 저녁이나 먹자. 따뜻한 차 한 잔에 오늘 구운 건포도 케이크를 먹고 나면 기분이 풀릴테니 두고 보렴." 
   앤이 허탈하게 말했다. 
   "건포도 케이크를 먹는다고 마음의 병이 낫진 않을 거예요." 
   그러나 마릴라는 앤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한결 나아진 증거라고 생각했다. 
   앤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밝은 얼굴로 앉아 있는 쌍둥이와 함께 마릴라가 만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건포토 케이크를 먹었다. 데이비는 네 조각이나 먹어 치웠다. 앤은 결국 마릴라의 말대로 "용기를 얻었다". 앤은 그 날 밤 푹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깨어난 순간 앤은 자기 자신과 온 세상이 달라졌음을 알았다. 어둠의 시간 속에서 부드러운 눈이 수북이 쌓여 싸늘한 아침 햇살 아래 아름답게 반짝이며 마치 자비로운 망토처럼 지나간 모든 잘못과 부끄러움을 덮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앤은 옷을 입으며 노래했다. 
    
            아침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아침마다 세상은 새로워지네. 
    
   눈 때문에 앤은 길을 돌아서 학교에 가야 했다. 초록 지붕 집에서 막 나와 샛길을 벗어날 때쯤인데 앤서니 파이가 눈길을 헤치고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앤은 이 모두가 운명의 장난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입장이 바뀐 것처럼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앤서니는 모자를 벗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인사까지 건넸다. 앤서니가 모자를 벗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걷기 힘드시죠? 제가 대신 책을 들어 드릴까요, 선생님?" 
   앤서니에게 책을 넘겨 주면서도 앤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앤서니는 학교까지 묵묵히 걸어갔다. 그러나 앤서니에게 줬던 책을 다시 받으면서 앤은 미소 지어 보였다. 그전처럼 판에 박힌 "친절한" 미소가 아니라 절친한 친구에게 보내는 꾸밈없는 미소였다. 앤서니도 방긋 웃었다. 아니, 사실 앤서니는 앤을 보며 이빨을 드러내고 씩 웃었다. 그런 웃음은 대개 예의 바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 앤은 앤서니에게서 얻어낸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 것, 바로 존경을 얻은 것이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 다음 주 토요일에 들른 레이첼 린드 부인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앤, 어쨌든 네가 앤서니 파이를 제압한 것 같더구나. 앤서니 말이 네가 여자이긴 하지만 이제는 그런 대로 괜찮다고 했단다. 너한테 맞을 때 남자 선생님한테 맞는 것처럼 아팠다면서 말이야." 
   앤은 자신의 이상이 잘못된 쪽으로 흐르는 것 같아 후회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앤서니를 때려서 제압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애들을 때리는 것은 옳지 않아요. 친절해야 한다는 원칙이 옳다는 걸 전 확신해요." 
   레이첼 부인이 확고하게 말했다. 
   "그래, 하지만 파이네 집안 사람들은 원칙이란 걸 무시하고 사는 사람들이지." 
   학교에서 있었던 사건을 전해들은 해리슨 씨는 "그럴 줄 알았다"고 했고, 제인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두고두고 그 얘기를 들먹였다.  




13장 즐거운 소풍



   앤은 비탈 과수원 집으로 가는 길에, 유령의 숲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 위에 걸린 이끼 낀 통나무 다리에서 마침 그 쪽으로 오던 다이애나와 만났다. 둘은 조그만 고사리들이 낮잠에서 막 깨어난 곱슬머리의 초록색 꼬마 요정들처럼 펼쳐져 있는 드라아스의 샘 가에 앉았다. 
   앤이 반갑게 말했다. 
   "토요일의 내 생일 파티에 너를 초대하러 가는 길이었어." 
   "생일이라구? 네 생일은 지난 3월이었잖아!" 
   앤이 깔깔거렸다. 
   "그건 내 탓이 아냐. 부모님이 나랑 의논했더라면 난 3월에 태어나지 않았을 거야. 당연히 봄에 태어나고 싶다고 했을 테니까(캐나다는 아한대 기후로 겨울은 몹시 춥고 오랫동안 계속 눈이 내리는데, 3월은 아직 겨울 기후이다:옮긴이). 제비꽃과 갖가지 봄꽃이 필 때 세상에 태어난다는 건 참으로 기쁜 일일 거야. 봄에 피는 꽃들이 언제나 친자매처럼 친근하겠지. 하지만 어차피 봄에 못 태어났으니까 그 대신 봄에 생일 파티를 하기로 했어. 프리실라와 제인도 토요일에 온댔어. 넷이서 숲에 놀러 가서 마음껏 봄을 즐기며 멋진 하루를 보내자. 우리 모두 아직 봄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제대로 모르지만 다른 데서는 봄을 만날 수 없으니까 우리가 숲으로 마중 나가는 거야. 아무튼 난 들판과 한적한 곳은 다 돌아다니고 싶어. 누구나 그냥 보고 지나칠 뿐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구석진 아름다운 곳이 많을 거야. 바람과 하늘과 태양과 친구처럼 놀다가 가슴 가득 봄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거야." 
   다이애나는 속으로 앤의 꿈에 젖은 말을 미심쩍어하면서 말했다. 
   "정말 멋진 생각이긴 해. 하지만 아직 축축한 곳이 있지 않을까?" 
   앤은 현실적인 문제를 어느 정도 수긍하면서 대꾸했다. 
   "아, 그럼 덧신(비 올 때 신발 위에 덧신는 방수용 신발:옮긴이)을 신지 뭐. 그리고 토요일 아침 일찍 와서 점심 준비 좀 도와줘. 가능하면 아주 운치있는 것들로 준비하려고 해. 물론 봄에 잘 어울리는 것들이야. 조그만 젤리 파이, 분홍색과 노란색 당의를 입힌 쿠키랑 미나리아재비 케이크 같은 것 말이야. 그리고 운치는 없지만 샌드위치도 준비해야지." 
   토요일은 소풍 가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목장과 과수원에서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고 하늘은 푸르렀으며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날이었다. 양지바른 고지대와 들판은 꽃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연한 초록빛이었다.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해리슨 씨의 마음에조차 누가 마술을 부렸는지 봄이 찾아들었다. 해리슨 씨는 살랑대는 봄 기운을 느끼며 농장 뒤꼍에서 쟁기질을 하고 있다가 바구니를 들고 자작나무와 전나무 숲과 맞닿은 자기 밭둑 가장자리를 가로질러 사뿐사뿐 걸어가는 네 소녀를 보았다. 소녀들이 명랑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해리슨 씨에게도 들렸다. 
   앤은 과연 앤다운 철학을 가지고 재잘거렸다. 
   "오늘 같은 날은 누구나 행복할 것 같지 않니? 얘들아, 오늘을 언제라도 기쁘게 돌이켜 볼 수 있는 정말 멋진 날로 만들자. 다른 것은 쳐다보지도 말고 오직 아름다움만 찾아 다니는 거야. '물러가라, 지겨운 걱정거리들!' 제인, 어제 학교에서 있었던 안 좋은 일을 생각하고 있지?" 
   제인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어떻게 알았어?" 
   "그야 표정을 보고 알았지. 나도 자주 그런 표정을 짓는걸. 하지만 '그까짓 것' 하면서 털어 버려. 아니면 월요일까지 묻어 두든지. 아예 걱정거리가 없어진다면 더욱 잘된 일이고. 어머, 얘들아, 저 제비꽃들 좀 봐! 저 모습은 내 가슴 속에 그림처럼 남을 거야. 내가 여든 살이 되어도, 만약 여든 살까지 산다면 말이야, 눈을 감으면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제비꽃들이 생생하게 떠오를 거야. 제비꽃은 오늘 얻은 첫 선물이야." 
   프리실라가 말했다. 
   "만약 입맞춤이 눈에 보이는 거라면 아마 제비꽃을 닮았을 거야." 
   앤이 흥분하여 말했다. 
   "네가 그걸 혼자 속으로만 생각지 않고 말로 나타내다니 정말 기뻐, 프리실라. 어쨌거나 지금도 재미있는 세상이지만 사람들이 자기 속마음을 거리낌없이 말한다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재미있는 곳이 될 텐데." 
   제인이 사려 깊게 지적했다. 
   "낯뜨거운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지만 역겨운 것을 생각하는 건 자기들 탓이야. 아무튼 오늘 우린 아름다운 생각만 할 거니까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잖아. 다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말하는 거야. 그거야말로 진짜 대화잖아. 여기에 전엔 본 적이 없는 작은 길이 있네. 한번 가 보자." 
   그 길은 꾸불꾸불하고 좁아서 한 줄로 서서 걸어도 전나무 가지가 얼굴에 스쳤다. 전나무 아래는 부드러운 이끼가 자라나 있고 조금 더 들어가자 나무들의 키가 작아지고 듬성듬성해지면서 땅에는 갖가지 초록 식물들이 무성했다. 
   다이애나가 탄성을 질렀다. 
   "야! 코끼리 귀(잎이 코끼리 귀 모양으로 생긴 식물로 베고니아라고 한다:옮긴이)가 한창이네. 너무 예쁘다. 꺾어서 꽃다발을 만들어야지." 
   프리실라가 물었다. 
   "저렇게 깃털처럼 우아한 꽃에 어쩌다 그런 기분 나쁜 이름을 붙었을까?" 
   앤이 대답했다. 
   "맨 처음 이름을 붙인 사람이 상상력이 빈약했거나 너무 지나쳤나 보지. 아, 얘들아, 저것 좀 봐!" 
   "저것"은 그 작은 길이 끝난 자그마한 공터 한가운데에 있는 얕은 물웅덩이였다. 머지않아 웅덩이는 말라 버리고 그 자리에 고사리들이 무성하게 자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잔잔하게 반짝이는 그 곳은 쟁반같이 둥글고 수정처럼 맑았다. 가늘고 여린 자작나무들이 웅덩이를 빙 둘러 서 있고 조그만 고사리들이 그 둘레를 장식하고 있었다. 
   제인이 감탄했다. 
   "어쩜 저렇게 예쁠까!" 
   앤은 바구니를 떨어뜨리고 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우리, 숲 속의 요정처럼 물 웅덩이를 돌며 춤을 춰 보자." 
   그러나 땅이 너무 질퍽하고 제인의 덧신이 벗겨지는 바람에 춤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덧신을 신고 숲 속의 요정이 되는 건 꿈도 못 꾸겠다." 
   제인이 결론을 내리자 앤은 하는 수 없이 말했다. 
   "그럼 떠나기 전에 이 곳에 이름을 지어 주자. 모두 한 가지씩 말해서 제비뽑기 하는 거야. 먼저 다이애나?" 
   다이애나가 즉시 제안했다. 
   "자작나무 연못." 
   이번에는 제인이 말했다. 
   "수정 호수" 
   앤은 다이애나와 제인 뒤에 서서 프리실라에게 너만이라도 그런 이름은 말하지 말라는 눈빛을 애절하게 보냈고, 그 순간 프리실라는 기지를 발휘해 "빛나는 거울"을 내놓았다. 
   앤의 선택은 "요정의 거울"이었다. 
   교사인 제인이 자작나무 껍질에 펜으로 그 이름들을 써서 앤의 모자 속에 넣었다. 그러자 프리실라가 눈을 감고 하나를 뽑았다. 제인이 여봐란 듯이 으스대며 "수정 호수"라고 읽었다. 그렇게 해서 그 연못은 수정호수가 되었다. 앤은 이것이 연못에게는 짖궂은 운명의 장난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소녀들은 덤불을 헤치고 가다가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는 외진 사일러스 슬론 씨의 뒷목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 곳을 지나다가 숲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발견하고는 따라가 보기로 했다. 길을 따라가다가 소녀들은 잇따라 나타나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처음에 본 것은 슬론 씨 목장을 에워싸고 있는 양벚나무가 활짝 핀 아치 길이었다. 소녀들은 모자를 팔에 걸고 탐스러운 우유빛 꽃들을 엮어 머리에 썼다. 그 길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자 가문비나무 숲이 나타났는데 숲이 너무나 울창해서 하늘 한 조각, 햇살 한 줄기도 보이지 않았다. 소녀들은 저녁 어스름 같은 어둠 속을 걸어갔다. 
   앤이 속삭였다. 
   '여기가 못된 숲의 요정이 사는 곳이야. 못된 요정은 장난꾸러기에다 심술쟁이지만 우릴 해칠 순 없어. 봄에는 나쁜 짓을 못하게 돼 있거든. 저 말라비틀어진 전나무 근처에서 누군가 우릴 엿보고 있어. 우리가 방금 지나쳐 온 저 커다랗고 얼룩덜룩한 버섯 위에 못된 요정들이 있는 게 보이지 않니? 착한 요정들은 항상 햇살이 비치는 곳에서 살아." 
   제인이 말했다. 
   "정말로 요정이 있으면 좋겠다. 요정이 세 가지, 아니 한가지 소원이라도 들어준다면 멋지지 않겠니? 얘들아, 만약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면 너희들은 어떤 소원을 빌 거니? 난 부자이면서 아름답고 똑똑해지고 싶어." 
   다이애나가 말했다. 
   "난 키가 크고 날씬해졌으면 좋겠어." 
   프리실라가 말했다. 
   "난 유명해지게 해 달라고 하겠어." 
   앤은 문득 머리카락 색깔을 떠올렸으나 이내 하찮은 것이다 싶어 그 생각을 떨쳐 버리고는 말했다. 
   "난 사람들의 마음과 우리 모두의 인생이 항상 봄이라면 좋겠어." 
   프리실라가 말했다. 
   "근데 그건 이 세상이 천국 같아지길 바라는 거잖아." 
   "천국의 일부와 같을 뿐이지. 천국의 다른 곳은 여름이거나 가을일 수도 있어…… 그래, 겨울일 수도 있고. 난 가끔 천국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눈발과 흰 서리가 있었으면 해. 넌 안 그러니, 제인?" 
   제인은 난처한 듯이 대꾸했다. 
   "난…… 난 잘 모르겠어." 
   제인은 착한 아가씨이자 교회 신자였고 자신의 신앙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애쓰면서 자기가 배운 모든 것을 믿었다. 그런데도 제인은 필요 이상으로 천국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다이애나가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미니 메이가 천국에 가면 매일매일 제일 좋은 옷만 입느냐고 묻는 거야." 
   앤이 물었다. 
   "그래서 그럴 거라고 말하지 않았니?" 
   "어머나, 안 그랬어! 난 미니 메이에게 천국에선 옷 같은 데 신경도 안 쓴다고 했어." 
   앤이 진지하게 말했다. 
   "난 조금은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해. 영원히 사니까 중요한 것들을 소홀히 하지 않고도 옷에 신경 쓸 시간이 많을 거야. 내 생각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을 것 같아. 옷이 아니라 의상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난 처음 몇 백 년 동안은 분홍색 의상만 입을 거야. 분홍색 의상에 싫증이 나려면 그 정도는 입어야지. 난 분홍색을 정말 좋아하는데 이 세상에선 입을 수 없거든." 
   오솔길은 가문비나무 숲을 지나 내리막길이 되어 양지바른 조그만 공터로 이어졌다. 그 곳에 통나무 다리 아래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곧 이어 싱싱하고 푸른 잎사귀를 지닌 너도밤나무가 투명한 황금빛 포도주 같은 대기 속에서 눈부신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고, 그 나무 밑동 주위로 찬란한 햇살이 다양한 무늬를 만들며 일렁거렸다. 다음으로 양벚나무 몇 그루와 날씬한 전나무들이 있는 골짜기가 이어졌다. 계속 가다 보니 언덕이 하나 나타났는데 너무 가팔라 소녀들은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갔다. 꼭대기에 이르러 탁 트인 곳으로 나오자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카모디 도로 위쪽으로 뻗어 있는 농장들의 "뒷밭"이 저 너머에 보였다. 뒷밭 바로 앞에는 남쪽만 트이고 전체가 너도밤나무와 전나무로 둘러싸인 외딴 곳이 있는데 그 안에 정원이 있었다. 아니 한때 정원이었던 곳이 있었다. 이끼와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 곧 무너질 것 같은 돌담이 정원 주위로 둘러싼 채 눈송이처럼 하얀 벚나무가 동쪽 면을 따라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 곳에는 아직도 옛길의 자취가 남아 있고 정원 한가운데까지 장미 덤불이 두 줄로 자라고 있었다. 나머지 공간은 온통 푸른 잔디 위에 노랗고 하얀 수선화가 바람에 하늘거리며 우아한 자태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세 소녀는 동시에 감탄의 소리를 내질렀다. 
   앤은 치밀어 오르는 감동을 어쩌지 못하고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프리실라가 놀라움에 가득 차서 말했다. 
   "세상에, 어쩜, 이런 곳에 정원이 다 있었을까?" 
   다이애나가 말했다. 
   "틀림없이 헤스터 그레이의 정원일 거야. 엄마가 하시는 말씀을 듣긴 했지만 본 적은 없었어. 그래서 아직 정원이 남아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앤, 너도 그 얘기 들었지?" 
   "아니, 근데 이름은 들어 본 것 같아." 
   "아, 묘지에서 봤을 거야. 헤스터는 포플러나무 아래 구석에 묻혔지. 너도 '헤스터 그레이를 기념하여, 당시 스물 두 살' 이라고 새겨진 갈색 비석을 알지? 조던 그레이도 바로 헤스터 곁에 묻혔지만 비석은 없어. 마릴라 아줌마가 그 얘길 안 해주셨다니 뜻밖이구나, 앤. 하기야 30년 전의 일이라 모두들 잊어버렸을 거야." 
   앤이 말했다. 
   "그래, 그런 이야기라면 들어야지. 여기 수선화 사이에 앉아 다이애나 얘길 듣자. 얘들아, 어떠니? 수선화가 온 사방에 피었잖아. 이건 마치 달빛과 햇빛으로 짠 융단을 깔아 놓은 정원 같아. 정말 발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야. 6년 동안이나 코앞에서 살았는데 한번도 이 정원을 보지 못했다니, 참! 자, 다이애나, 얘기해 줘." 
   다이애나가 이야기를 꺼냈다. 
   "옛날에 이 농장은 데이비드 그레이라는 노인 거였대. 그레이 노인은 농사를 지어먹고 산 건 아니었지만, 지금 사일러스 스론 아저씨가 사는 곳에서 살았대. 그 노인에게는 조던이라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해 겨울 조던은 보스턴으로 일하러 갔다가 헤스터 머리라는 아가시와 사랑에 빠졌대. 헤스터는 가계에서 일했는데 그 일을 싫어했대. 헤스터는 시골에서 자라서 항상 시골로 돌아가고 싶어했는데, 때마침 조던이 청혼을 하자 나무와 들판이 있는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 줄 수만 있다면 결혼하겠다고 했대. 그래서 조던은 헤스터를 데리고 에이번리로 온 거야. 린드 아줌마는 조던이 양키와 결혼하는 위험 천만한 짓을 했다고 떠벌리고 다니셨대. 헤스터는 몸도 연약하고 집안 일도 잘하지 못했나 봐. 하지만 엄마 말로는, 헤스터는 몹시 아름답고 상냥했대. 조던은 헤스터가 걷는 땅까지 숭배할 정도로 사랑했고, 어쨌든 그레이 노인은 조던에게 이 농장을 물려줘서 조던은 여기에 작은 집을 짓고 헤스터와 4년 동안 살았대. 헤스터는 별로 밖으로 돌아다니질 않았고 우리 엄마와 린드 아줌마 빼고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대. 조던이 이 정원을 만들어 주자 헤스터는 
   무척 좋아하며 정원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대. 헤스터는 살림하는 건 시원찮았지만 꽃을 가꾸는 데는 재주가 있었다나 봐. 그러다가 헤스터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는데, 엄마 말로는 에이번리로 오기 전부터 폐결핵을 앓았었대. 헤스터는 몸져눕지는 않았지만 날이 갈수록 허약해졌지. 조던은 다른 사람에게 헤스터를 맡기지 않고 직접 돌봤대. 혼자 모든 간호를 도맡아 했는데, 엄마는 조던이 여자 못지 않게 부드럽고 온화하게 헤스터를 돌봐 주었대. 조던은 날마다 헤스터를 숄로 감싸서 정원에 데리고 나갔고 헤스터는 매우 행복해하며 벤치에 누워 있곤 했대. 사람들 말로는 아침저녁으로 조던은 헤스터의 부탁에 따라 그녀 곁에 무릎을 꿇고서, 때가 되면 헤스터가 정원에서 숨을 거두게 해 달라고 함께 기도했다고 해. 그리고 하나님은 헤스터의 기도를 들어 주셨지. 어느 날 조던은 헤스터를 정원 벤치에 눕히고 장미를 몽땅 꺾어 헤스터의 몸 위에 덮어 주었대. 헤스터는 조던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미소짓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대……. 그게 끝이야." 
   다이애나는 조용히 말을 마쳤다. 
   "아, 정말 애절한 사랑 얘기구나." 
   앤은 눈물을 훔치며 한숨을 쉬었다. 
   프리실라가 물었다. 
   "조던은 어떻게 됐어?" 
   "조던은 헤스터가 죽자 농장을 팔고 보스턴으로 갔대. 자베즈 슬론 아저씨가 그 농장을 사서 헤스터와 조던이 살던 작은 집을 도로 쪽으로 끌어낸 거야. 조던은 10년 후에 죽었고 고향으로 옮겨져 헤스터 곁에 묻혔지." 
   제인이 말했다. 
   "헤스터가 왜 모든 것을 버리고 여기서 살고 싶어했는지 모르겠어." 
   앤은 생각에 잠겨서 말했다. 
   "난 충분히 이해가 돼. 나라면 단조로운 생활을 바라진 않겠지. 들판도 좋고 숲도 좋지만 사람들이랑 지내는 것도 좋거든. 하지만 헤스터를 이해할 수는 있어. 헤스터는 대도시의 소음과 자기에게 관심도 없이 오가며 북적대는 사람들에게 지쳐서 죽을 맛이었을 거야. 헤스터는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쉴 수 있는 조용하고 푸르고 인정 많은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겠지. 그리고 헤스터는 자기가 바라던 것을 얻었어. 자기가 바라는 걸 얻은 사람은 드물지만 말야. 헤스터는 죽기 전 4년 동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거야. 그래서 난 헤스터가 불쌍하다기보다는 부러워. 더군다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는 가운데 눈을 감고 장미에 파묻혀 영원히 잠들다니…… 아, 정말 아름다워!" 
   다이애나가 말했다. 
   "헤스터는 저쪽에 벚나무를 심었어. 헤스터가 우리 엄마한테 그랬다. 자기는 그 벚나무에 열매가 열릴 때까지 살진 못하겠지만 자기가 심은 것들은 앞으로 영원히 남아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거라고 생각하고 싶다고." 
   앤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리로 온 건 참 잘한 일이야. 너희들도 알다시피 오늘은 내가 정한 내 생일인데, 이 정원과 정원에 얽히 이야기가 바로 생일 선물이 됐으니 말이야. 다이애나, 너네 엄마께서 헤스터 그레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얘기 안 하셨니?" 
   "아니, 그냥 아름다운 분이었다고만 했어." 
   "차라리 잘됐다. 사실에 구애받지 않고 헤스터의 모습을 마음껏 상상해 볼 수 있잖아. 헤스터는 곱슬거리는 부드러운 검은 머리에 겁먹은 듯한 크고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와 애절하고 창백한 얼굴을 한 가냘프고 자그마한 여자였을 거야." 
   소녀들은 헤스터의 정원에 바구니를 놓아두고 주위의 숲과 들판을 돌아다니며 오후를 보내다가 경치가 좋은 외진 곳과 오솔길을 여러 군데 발견했다. 그러다 시장기가 돌자 경치가 가장 좋은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 곳은 하얀 자작나무가 들어선 긴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시내가 졸졸 흐르는 가파른 제방 위였다. 모두들 나무 밑동에 앉아 앤이 싸 온 음식을 실컷 먹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돌아다녀 왕성해진 식욕 덕분에 운치 없는 샌드위치까지 맛있었다. 앤은 친구들을 위해 레모네이드와 컵을 가져왔지만 자기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컵으로 시원한 시냇물을 떠서 마셨다. 나무껍질 컵에서 물이 새고 봄이면 으레 그렇듯이 시냇물에서는 흙냄새가 풍겨 나왔지만 이런 때는 레모네이드보다 시냇물을 마시는 게 제격이라고 앤은 생각했다. 
   앤이 갑자기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얘들아, 저기 시가 보이니?" 
   "어디?" 
   제인과 다이애나는 자작나무에 옛날 북유럽의 시라도 적혀있나 하고 유심히 살폈다. 
   "저기…… 저 아래 시냇물이 살랑살랑 잔물결을 일으키며 이끼 낀 푸른 통나무 위로 흘러가고, 한 줄기 햇살이 통나무를 비껴 깊은 물 속으로 떨어지는 모습 말야. 아, 정말 이렇게 아름다운 시는 본 적이 없어." 
   "한 폭의 그림이라고 해야 되지 않니? 시는 행과 연으로 되어 있잖아." 
   제인의 말에 앤은 벚꽃 화관을 쓴 머리를 단호하게 흔들어 댔다. 
   "아이 참, 아니야. 행과 연은 시가 걸친 의상에 불과해. 제인, 네 옷에 달린 주름 장식이 너 자신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지. 진정한 시는 행과 연에 깃들인 영혼이고, 그 아름다운 단편들이 바로 아직 씌어지지 않은 시의 영혼이야. 영혼이 깃들인 시를 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야." 
   프리실라가 꿈꾸듯 말했다. 
   "인간의 영혼은 어떻게 생겼을까?" 
   앤이 자작나무 사이로 흘러 들어가는 눈부신 햇살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것처럼 생겼을 거야. 몰론 형태만 그렇지. 난 영혼이 빛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상상하는 게 좋아. 어떤 영혼은 파르르 떨리는 장밋빛 방울들이 아롱거리고, 어떤 것은 바다를 비추는 달빛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어떤 것은 새벽 안개처럼 어슴푸레하게 비쳐 보일거야." 
   프리실라가 말했다. 
   "어느 책에선가 영혼은 꽃과 같다고 했어." 
   앤이 말했다. 
   "그럼 네 영혼은 황금빛 수선화고 다이애나의 영혼은 붉은 장미야. 제인의 영혼은 건강해 보이는 사랑스러운 분홍 사과꽃이지." 
   "그리고 앤의 영혼은 한가운데 자줏빛 줄무늬가 있는 하얀 제비꽃이야." 
   프리실라가 마무리를 지었다. 
   제인은 다이애나에게 앤과 프리실라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귀엣말을 했다. 사실 제인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소녀들은 고요한 황금빛 노을과 함께 헤스터의 정원에서 꺾은 수선화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앤은 공동 묘지에 가서 헤스터의 무덤 앞에 수선화를 바쳤다. 전나무 숲에서 울새가 음유 시인처럼 노래하고 늪지대에서는 개구리가 울어댔다. 둔덕 사이에 있는 웅덩이마다 노랑과 에메랄드 빛이 넘치고 있었다. 
   다이애나는 출발할 때는 아무 기대 하지 않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오늘 정말 즐거웠어." 
   프리실라가 말했다. 
   "그래, 정말 멋진 날이었어." 
   제인도 한마디했다. 
   "숲은 너무너무 좋은 곳이야." 
   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멀리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헤스터 그레이를 생각했다.  



 14장 위험을 모면하다




   앤은 어느 금요일 저녁 우체국에 갔다 오는 길에 린드 부인을 만났다. 린드 부인은 여전히 교회와 나라 일 등 온갖 세상 이에 대한 걱정거리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린드 부인이 말했다. 
   "방금 티머시 코튼네에 가서 앨리스 루이스가 며칠 동안만 날 도와 줄 수 있는지 알아보고 오는 길이란다. 지난주에도 그 여자에게 일을 시켰거든. 앨리스가 느려 터지긴 해도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근데 앨리스가 아파서 못 온다는 구나. 티머시도 앉아서 기침을 해대며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고 있더라구. 티머시는 10년 전부터 아파서 오늘내일 했는데 앞으로도 10년은 더 그럴 것 같아. 그런 사람들은 죽을 수도 없고 무언가를 끝낼 수도 없어. 그들은 무슨 일이든 끝까지 버텨 낼 만한 끈기가 없으니까. 심지어 아픈 것조차 그것을 끝내기에 충분할 만큼 오랫동안 참아 내지를 못한다니까. 정말 대책 없는 게으른 집안이라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겠어. 어쩌면 신의 섭리인지도 모르지." 
   린드 부인은 신의 섭리에 그런 것까지 포함되는지 의심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마릴라가 화요일에 눈 때문에 다시 병원에 갔다면서? 의사가 뭐래?" 
   앤이 밝게 대답했다. 
   "의사 선생님은 매우 다행이라고 하셨어요. 눈이 많이 나아져서 이제 시력을 잃어버릴 위험은 없대요. 그래도 책을 많이 보거나 꼼꼼하게 손으로 하는 일은 못하신대요. 자선 바자회 준비는 잘돼가요?" 
   부녀 봉사회에서는 바자회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린드 부인은 그 일의 책임자이자 간판 인물이었다. 
   "아주 잘되고 있어, 그러니까 생각나네. 앨런 부인이 옛날식 부엌같은 노점을 차려서 구운 콩이나 도넛, 파이 같은 것들을 저녁 식사로 내놓으면 멋질 거라고 하더라. 그래서 우린 여기저기서 구식 물건들을 모으고 있어. 사이먼 플레처 부인은 자기 어머니가 쓰던 양탄자를 빌려 준댔고 레비 볼터 부인은 낡은 의자를, 메리 쇼 아줌마는 찬장을 빌려주기로 했어. 마릴라가 놋쇠 촛대를 빌려 줄 수 있을까? 또 될 수 있는 대로 접시도 많이 필요해. 앨런 부인은 구할 수만 있다면 진짜 푸른색 버드나무 접시를 쓰겠는데 아무도 그런 접시가 없나봐. 누구한테 있는지 아니?" 
   "조세핀 배리 할머니한테 있어요. 편지로 바자회 때 쓸 접시를 빌려 줄 수 있는지 여쭤 볼게요." 
   "그래, 그래 주면 좋겠구나. 바자회는 2주일 쯤 뒤에나 열게 될 것 같아. 에이브 앤드루스 아저씨는 그 때쯤 폭풍우가 올 거라고 하더라. 그러니 날씨가 좋을 건 확실해." 
   지금 말한 "에이브 아저시"는 마을에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점쟁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사실 에이브 아저씨는 동네 웃음 거리였다. 에이브 아저씨의 일기 예보는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었다. 자기가 마을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엘리샤 라이트 씨는 에이번리 사람들 누구도 샬럿타운 신문에서 일기 예보를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에이브 아저씨에게 내일 날씨를 물어 보고 그 반대로 예상하곤 했다. 에이브 아저씨는 조금도 꺾이지 않고 계속 일기 예보를 했다. 
   린드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우린 선거 전에 바자회를 열려고 해. 후보자들이 와서 돈을 많이 쓸 테니까. 토리 당원들은 닥치는 대로 돈을 뿌리고 있으니 한 번쯤 좋은 일로 돈 쓸 기회를 주는 것도 괜찮은 일일 거야." 
   매슈의 영향을 받은 앤은 열렬한 보수당 지지자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앤은 린드 부인에게는 정치 이야기를 꺼낼 구실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앤은 마릴라 앞으로 온 브리티시 컬럼비아 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를 가지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앤은 흥분에 들떠 말했다. 
   "아이들 외삼촌한테서 온 편지일 거예요. 마릴라 아줌마, 편지에 아이들에 대해 뭐라고 씌어 있는지 궁금해 죽겠어요." 
   "편지를 뜯어서 읽어 보면 되잖니."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릴라 역시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만 마릴라는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무뚝뚝하게 말했다. 
   앤은 편지를 뜯어 다소 엉성하게 쓴 편지를 훑어 보았다. 
   "애들 삼촌은 이번 봄에 아이들을 데려갈 수 없대요. 겨울 내내 앓는 바람에 결혼식도 연기됐대요. 가을이면 아이들을 데려갈 수 있을 테니까 그때까지 우리가 좀 맡아 줄 수 있는지 알고 싶대요. 물론 우리가 맡아야죠, 그렇죠?" 
   마릴라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 내렸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 대꾸했다. 
   "할 수 없잖니, 어쨌든 그 녀석들이 예전만틈 말썽을 부리는 건 아니니까. 어쩌면 우리가 그 애들한테 익숙해진 건지도 모르지. 데이비는 참 많이 좋아졌어." 
   앤은 데이비의 품행에 대해 뭐라고 말할 처지가 못 된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데이비의 태도가 훨씬 예의 발라졌어요." 
   앤이 전날 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마릴라는 봉사회 모임에 가고 없었다. 도라는 부엌 소파에서 잠이 들었고 데이비는 거실 벽장 속에서 마릴라의 유명한 노란 자두 통조림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데이비는 그것을 "손님용 통조림"이라고 불렀는데 마릴라는 그 통조림에 손도 못 대게 했다. 앤이 갑자기 나타나서 벽장 밖으로 쫓아내자 데이비는 몹시 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데이비 키스, 저 벽장 앞에 있는 건 어떤 것도 절대 손대지 않겠다고 하고서도 그 통조림을 먹다니 네가 얼마나 잘못한 건지 모르겠니?" 
   데이비는 겨우 인정했다. 
   "내가 잘못했다는 건 알아. 하지만 앤 누나, 자두 통조림은 너무 맛있어. 그냥 들여다보기만 했는데 어찌나 먹음직스러워 보이는지 조금 맛만 보려고 했어. 손가락 끝에 살짝 찍어 봤을 뿐이란 말야." 
   앤은 신음 소리를 냈다. 데이비는 계속 설명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깨끗이 핥아먹었어. 근데 생각보다 훨씬 더 맛있어서 숟가락으로 막 퍼먹기 시작했지." 
   앤은 데이비에게 자두 통조림을 훔쳐 먹은 죄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를 해 주었다. 결국 데이비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참회의 입맞춤을 했다. 
   데이비가 흐뭇해하며 말했다. 
   "아무튼 천국엔 통조림이 많다니, 너무 좋아." 
   앤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우리가 바라면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왜 그렇게 생각하지?" 
   "교리 문답서에 나오잖아." 
   "오, 아냐. 데이비, 교리 문답서엔 그런 얘기는 없어." 
   데이비가 우겼다. 
   "분명히 있어. 마릴라 아줌마가 저번 일요일에 가르쳐 준 문답에서 나왔단 말야. '우리는 하나님을 왜 사랑해야 합니까?' 답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존 식품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였어. 보존 식품이란 통조림을 경건하게 말한 것 뿐이잖아." 
   앤은 허둥대며 말했다. 
   "물 좀 마시고 올게." 
   앤은 곧 돌아와서 단어 하나로 문장의 의미가 크게 바뀐다는 사실을 데이비에게 설명하느라 한동안 진땀을 흘렸다(프리저브(preserve)란 영어 단어에는 지키다, 보호하다란 뜻과 보존 식품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데이비는 후자의 뜻만 알고 있어 문장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옮긴이). 
   데이비는 결국 앤의 설명에 실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너무 좋다 했어. 게다가 찬송가에 나오는 것처럼 안식일이 끝없이 계속되면 하나님이 통조림 만들 시간이나 있을지 모르겠더라구. 이젠 천국에 가고 싶지 않아. 누나, 천국에도 토요일이 있을까요?" 
   "그럼, 토요일뿐만 아니라 다른 멋진 날도 있어. 천국에서 지내는 하루하루는 그 전날보다훨씬 아름다울 거야." 
   앤은 마릴라가 옆에 있다가 충격받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마릴라는 쌍둥이에게 안전한 구식 방법으로 신학을 가르치며 멋대로 공상하지 못하게 했다. 마릴라는 일요일마다 쌍둥이에게 찬송가 하나, 교리 문답 한 대목, 성서 두 구절을 가르쳤다. 도라는 얌전히 배우며 마치 작은 기계처럼 모두 다 이해하고 관심이 있는 것처럼 암송했다. 반대로 데이비는 왕성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어 마릴라가 데이비의 장래를 우려할 만한 질문을 해댔다. 
   "체스터 슬론이 그러는데 천국에 가면 하얀 드레스를 입고 걸어다니면서 하프를 켜기만 하면 된대. 그래서 체스터는 노인이 돼서나 천국에 가고 싶대. 그 때쯤이면 그러는 걸 더 좋아할지도 모르니까. 게다가 하얀 드레스를 입고 다닐 걸 생각하면 끔찍하대. 나도 그런게 싫어. 누나, 남자 천사는 바지 입으면 왜 안 되는 거야? 체스터는 그런 것들에 관심이 많아. 식구들이 걔를 목사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야. 할머니가 체스터를 위해 대학에 보낼 돈을 남기셨는데 목사가 안 되면 그 돈을 받을 수 없으니까 꼭 목사가 되어야 한대. 걔네 할머니는 집안에 목사가 있는 걸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로 생각한대. 체스터는 대장장이가 되고 싶지만 목사도 그리 싫진 않대. 하지만 목사가 되면 재미나는 일이 별로 없을 테니까 목사 수업을 받기 전에 마음껏 놀거래. 난 블레어 아저씨 같은 상점 주인이 돼서 사탕이랑 바나나를 가득 쌓아 둘 거야. 그렇지만 하프 대신 하모니카를 불어도 된다면 누나가 말한 천국에 가는 게 더 좋아. 천사들이 허락해 줄까?" 
   "그럼, 네가 바란다면 그렇게 해줄 거야." 
   이것이 앤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날 저녁 하먼 앤드류스 씨 집에서 에이번리 지역 개선 협회 모임이 열렸는데 중요한 문제를 의논할 예정이어서 모두 빠짐없이 참석해 달라고 요청했다. 지역 개선 협회는 사업이 잘되어 이미 대단한 일들을 이루었다. 초봄에 메이저 스펜서 씨는 약속대로 자기 농장 앞의 모든 길에 나무 그루터기를 파내고 땅을 골라 거기에 씨를 뿌렸다. 또 다른 남자들 열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사람은 스펜서 씨보다 잘해 보려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스펜서 씨를 따라 했다. 그 결과 눈에 거슬리는 덤불과 잡목만 무성하던 곳에 부드러운 잔디밭이 길게 쭉 뻗었다. 앞길에 잔디를 깔지 않은 농장들은 그와 대조적으로 무척 흉해 보여서 그 농장 주인들은 속으로 부끄러워하며 다음해 봄에 무슨 일을 하는지 보라고 벼르고 있었다. 교차로에 있는 삼각 구획지도 정리되어 씨가 뿌려졌고, 다행히 소가 짓밟지 않은 앤의 제라늄 화단이 그 가운데에 놓였다. 
   레비 볼터 씨같이 자기네 앞농장에 있는 낙은 집을 헐으라고 개선 협회에서 아무리 구슬리고 설득해도 그런 일에 끼어 들고 싶지 않다고 퉁명스럽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체로 개선론자들은 일이 훌륭하게 진척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특별 모임에서는 운동장 주위에 울타리를 세우자는 학교 운영 위원회에 제출할 진정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협회 기금에 여유가 생기면 교회 주변에 관상용 나무를 심을 것도 의논하기로 했다. 앤의 말대로 회관이 계속 파란색인 한 다시 기부금 모금을 시작해도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원들은 앤드루스 씨네 응접실에 모였다. 제인은 교회에 심을 나무의 가격을 알아내서 보고할 위원을 임명하자는 제안을 하려고 일어섰다. 그런데 그 때 거티 파이가 앞머리를 있는 대로 높이 올리고 주름 장식이 잔뜩 달린 옷자락을 끌며 들어왔다. 거티는 항상 늦게 나타나곤 해서 심통 사나운 사람들은 그것을 "남의 눈을 끌려는 수작"이라고 했다. 이번 거티의 출현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거티는 극적으로 마루 한가운데에 우뚝 서더니 손을 쳐들고 눈을 두리번거리며 외쳐 댔다. 
   "기가 막힌 소식을 들었어요. 주드슨 파커 씨가 자기 농장 길가에 있는 담장을 제약 회사에서 광고를 그리는 데 빌려 주겠답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거티 파이는 바라던 대로 난생 처음 대단한 화제를 몰고 왔다. 거티가 희희나락하고 있는 개선론자들에게 폭탄을 던졌다 해도 그런 파란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어." 
   앤이 딱 잘라 말했다. 
   그래도 거티는 신이 나서 말했다. 
   "내가 처음 듣고 말하는 거라니까. 주드슨 파커 씨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나도 그랬어. 하지만 오늘 오후 아버지가 파커 씨를 만나서 물어 봤더니 사실이라고 했대. 상상해 봐! 뉴브리지 길가에 있는 파커 씨 농장을 따라 온갖 약 광고가 쭉 늘어서 있는 꼴이란 얼마나 끔찍하겠니? 무슨 말인지 알겠어?" 
   개선론자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상상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8백 미터 정도나 되는 담장을 따라 약 광고가 그려져 있는 모습이랑 무척 해괴해 보일 거라는 것은 상상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위험 때문에 교회니, 학교 운동장이니 하는 문제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회의 규칙이나 규정들도 자취를 감추었고 앤은 낙심하여 회의록을 쓸 생각도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떠드는 바람에 분위기는 온통 시끌벅적했다. 
   앤은 그 중 가장 흥분해 있었는데도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다들 진정해, 그리고 막을 방법을 생각해 보자." 
   제인이 비통하게 소리쳤다. 
   "그 일을 무슨 수로 막겠어? 다들 주드슨 파커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잖아. 파커 씨는 돈이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야. 그 사람은 공동체 정신이나 미적 감각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어." 
   전망은 불투명해 보였다. 주드슨 파커 씨와 그 누이 마사 파커는 에이번리에 다른 친척이 없었기 때문에 인척 관계를 빌미로 압력을 넣을 수도 없었다. 마사 파커는 젊은이들, 특히 개선론자들을 마땅찮게 생각하는 꼭 그만한 연배의 여자였다. 주드슨 씨는 명랑하고 말주변이 좋고 친절하고 상냥해서 친구가 얼마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아마 너무나 많으 사업 거래에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별 인심을 얻지 못한 탓일 것이다. 주드슨 씨는 빈틈없기로 유명했고 지조가 없는 사람이라는 게 대분분의 의견이었다. 
   프레드 라이트가 단언했다. 
   "주드슨 파커 씨는 자기 식의 '정직하게 돈 버는' 기회를 잡으면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앤은 낙담하여 말했다. 
   "누구든 파커 씨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없을까?" 
   캐리 슬론이 제안했다. 
   "파커 씨는 화이트샌즈에 사는 루이자 스펜서를 만나러 다니는데, 루이자라면 담장을 빌려 주지 못하게 설득할 수 있을지 몰라." 
   길버트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난 그 여자를 잘 알아. 그 여잔 개선 협회 따윈 믿지도 않아. 돈만 믿는다구. 오히려 주드슨 씨를 부추길 거야." 
   줄리아 벨이 말했다. 
   "주드슨 씨를 찾아가 항의할 소위원회를 만드는 수밖에 없겠어. 그리고 반드시 여자를 보내야 해. 그 사람은 남자 애들에겐 함부로 대하거든. 하지마 난 안 갈거니까 날 지명하지는 말아." 
   올리버 슬론이 제안했다. 
   "앤이 가는 게 좋겠어. 주드슨 씨와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앤뿐이야." 
   앤은 기꺼이 가서 얘기를 나눌 수는 있지만 "옆에서 거들" 사람이 필요하다고 제기했다. 그래서 다이애나와 제인이 앤을 거들기로 하고, 개선론자들은 분개하여 성난 벌처럼 웅성거리다가 해산했다. 앤은 걱정이 되어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학교 운영 위원회가 학교에 담장을 두르고 거기에다 "피부약을 먹어 보세요"라는 글씨로 가득 메우는 꿈을 꾸었다. 
   소위원회 위원들은 다음날 오후 주드슨 파커 씨를 방문했다. 앤은 파커 씨에게 악독한 계획을 그만둬 달라고 사정했고 제인과 다이애나도 든든하게 거들어 주었다. 파커 씨는 말솜씨 좋고 친절하고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이었다. 방문객들에게 해바라기처럼 우아하다고 몇 마디 칭찬을 늘어놓다가 매력적인 숙녀분들의 제의를 거절하니 정말 유감이지만, 사업은 사업이니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감정에 얽매일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파커 씨는 경박스러운 눈을 빛내며 덧붙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얘기하지. 담당자에게 빨간색이나 노란색처럼 고상한 색깔을 사용하라고 말이야. 절대 파란색 같은 건 쓰지 말라고." 
   퇴짜를 맞은 위원들은 부아가 치밀었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왔다. 
   제인이 자기도 모르게 린드 부인의 말투로 말했다. 
   "할 만큼 했으니 나머지는 신의 섭리에 맡기는 수밖에." 
   다이애나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앨런 목사님이 도와 줄 수 없을까?" 
   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특히 지금은 목사님네 아기가 몹시 아픈데 이런 일로 걱정시켜 드릴 수는 없어. 파커 씨는 우리에게 한 것처럼 앨런 목사님을 교묘하게 따돌릴 거야. 요즘 들어 착실히 교회에 다니는 모양인데, 그건 단지 루이자 스펜서의 아버지가 워낙 연세가 많고 그런 일에 까다로운 사람이기 때문이야." 
   제인이 불끈 화가 치밀어 말했다. 
   "주드슨 파커 씨는 에이번리에서 담장을 빌려 줄 생각을 하는 유일한 사람일 거야. 레비 볼터 아저씨나 로렌조 화이트 아저씨는 구두쇠라고는 해도 그런 창피스런 짓은 하지 않아. 그 분들은 여론을 아주 존중하니까." 
   그 사실이 알려지자 주드슨 파커 씨에 대한 여론은 확실히 나빠졌지만 그렇다 해도 실제 일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파커 씨는 혼자 낄낄거리며 무시했고 개선론자들은 뉴브리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광고 때문에 꼴사나운 거리가 되리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그러던 참에 그 다음 모임에서 회장이 소위원회 보고를 요구하자 앤은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앤은 주드슨 파커 씨가 제약 회사에 농장 담을 빌려주지 않겠다고 개선 협회에 전해 달라고 자기에게 알려 왔음을 발표했다. 
   제인과 다이애나는 잘못 들었나 자기 귀를 의심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개선 협회에서 엄격하게 시행되는 회의 때 예절 때문에 궁금해도 그 당장 물어 볼 수가 없었다. 회의가 끝나자 사람들이 설명을 들으려고 앤을 에워쌌다. 앤은 설명해 줄 말이 없었다. 전날 주드슨 파커 씨가 길 가던 앤을 따라와서 개선 협회가 제약 회사 광고에 대해 갖고 있는 유별난 편견에 자기도 따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 당시나 그 후로도 앤은 더 이상 자세히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인 앤드루스는 집에 가던 길에 올리버 스론에게 자기가 보기엔 주드슨 파커 씨가 결심을 바꾼 데에는 앤 셜리가 말한 것보다 더 많은 우여곡절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제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 전날 저녁 앤은 해변에 있는 어빙 부인 집에 갔다가 지름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앤은 낮은 해변 기슭의 들판을 지나 로버트 디킨슨 집 아래에 있는 너도밤나무 숲을 거쳐 작은 오솔길로 갔다. 그 오솔길은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배리 연못으로 알려져 있는 반짝이는 호수 바로 위의 큰 길로 이어져 있었다. 
   오솔길이 시작되는 길목에서 두 남자가 한 켠에 마차를 세워 놓고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주드슨 파커 씨고 다른 사람은 제리 코코런 씨였다. 코코런 씨는 린드 부인이 장황하게 강조한 것처럼 한번도 뒤가 구린 일이 드러난 적이 없는 뉴브리지 사람이었다. 농기구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는 코코런 씨는 매우 정치적인 인물로 온갖 정치 문제에 관여하고 있었다. 캐나다에서 총선이 있기 직전 코코런 씨는 자기 당 후보 선거 운동을 하느라고 몇 주 동안 바쁘게 돌아다녔다. 앤은 우연히 너도밤나무 가지가 늘어져 있는 곳 아래를 지나다가 코코런 씨의 말을 듣게 되었다. 
   "이봐, 파커, 자네가 만약 아메스베리한테 투표한다면…… 지난 봄에 샀던 쟁기 한 벌 값을 쳐 주지. 그 돈을 돌려 받는 게 싫지 않겠지?" 
   파커 씨는 씩 웃고 거드름을 피우며 느릿느릿 말했다. 
   "뭐, 정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에는 누구나 제 잇속을 차려야죠." 
   그 순간 두 사람은 앤을 보았고 하던 말을 뚝 그쳤다. 앤은 쌀쌀맞게 인사를 하고 평소보다 더 턱을 높이 쳐들고 계속 걸어갔다. 곧 주드슨 파커 씨가 앤을 뒤따라와서 상냥하게 물었다. 
   "태워다 줄까, 앤?" 
   "고맙지만, 됐어요." 
   앤은 예의 바르게 대답했지만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경멸은 주드슨 파커 씨의 무딘 양심을 파고 들었다. 파커 씨는 화가 나서 시뻘게진 얼굴로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신중하게 자신을 추슬렀다. 파커 씨는 똑바로 앞만 보면서 차분히 걸어가는 앤을 꺼림칙하게 바라보았다. 만약 앤이 속이 빤히 보이는 코코론의 제의를 내가 허락하는 소리를 들었다면? 빌러먹을, 코코런 녀석! 내가 미지근한 말로 표현했기에 망정이지 두고두고 곤란할 뻔했어. 그리고 하필 너도밤나무 숲에서 몰래 엿보기나 하는 버릇없는 저 빨간 머리 여선생도 지옥에나 가라. 주드슨 파커 씨는 속담에도 있듯이 앤을 자기 잣대로 판단하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자기 꾀에 넘어가 앤이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파커 씨는 여태껏 그래 왔듯이 마을 사람들의 평판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뇌물을 받아먹었다고 알려지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소문이 아이작 스펜서의 귀에까지 들어간다면 부유한 농부의 상속녀로서 안락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루이자 제인과 결혼할 희망은 영영 사라질 것이다. 파커 씨는 스펜서 씨가 자기를 미심쩍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험을 할 생각은 없었다. 
   "저, 그러니까…… 앤, 요전에 우리가 의논했던 문제로 좀 만나려던 참이었어. 제약 회사에 담장을 빌려주지 않기로 했거든. 너희들 같은 뜻을 가진 그런 단체는 밀어 줘야 돼." 
   앤은 다소 마음이 누그러져서 대꾸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저……제리와……나 사이에 있었던 하찮은 대화 따윈 들먹일 필요가 없겠지." 
   앤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어떤 경우든 그런 일을 입에 담을 생각은 전혀 없어요." 
   앤은 자기 투표권을 팔아먹으려는 사내와 부끄럽게 흥정을 하느니 에이번리의 모든 담장이 광고로 뒤덮이는 걸 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파커 씨는 서로를 깨끗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하고는 맞장구를 쳤다. 
   "바로 그거야, 그래야지. 난 네가 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물론 난 제리를 속이고 있었던 거지. 제리는 자기가 굉장히 영리하고 똑똑한 줄 알아. 하지만 난 아메스베리한테 표를 던질 생각은 없어. 선거가 끝나면 알게 되겠지만 난 늘 해 온 대로 그랜트를 찍을 거야. 난 그저 제리의 뜻이 분명한지 떠본 것 뿐이야. 담장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라. 개선론자들에게 그렇게 말해 줘." 
   앤은 그 날 밤 집에 돌아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하나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선 별별 사람이 다 필요하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쓸모 없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어쨌든 영혼을 더럽히는 일은 입에 담지 않을 거야. 그래야 내 양심이 떳떳하니까. 이번 일은 누구에게 감사하고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어. 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주드슨 파커나 제리 코코런이 지지하는 그런 정치가들이 활동하는 게 신의 섭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15장 방학이 시작되다




   학교 운동장을 둘러싼 가문비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기분좋게 살랑거리고 나무 그림자가 한가로이 길게 드리워진 황혼 녘에 앤은 조용히 교실 문을 잠갔다. 앤은 만족스런 한숨을 토해 내고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마침내 한 학기가 끝났고 앤은 다음 학기에도 가르치게 되었다. 하먼 앤드루스 씨만이 앤에게 더 자주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고 했을 뿐 모두들 만족해하는 가운데 이제 가슴 설레는 두 달 간의 즐거운 방학이 손짓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앤은 평온한 마음으로 꽃바구니를 들고 언덕을 내려갔다. 첫 봄꽃이 핀 이후로 앤은 일 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매슈의 무덤을 찾아갔다. 마릴라를 제외하고 에이번리 사람들은 모두 말이 없고 수줍음 잘 타고 평범했던 매슈 커스버트를 벌써 잊어버렸지만, 매슈에 대한 추억은 아직도 앤의 가슴에 생생히 남아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앤은 사랑에 굶주린 어린 시절에 그토록 갈망하던 사랑과 연민을 처음으로 자기에게 베풀어 준 그 자상한 노인을 잊을 수 없었다. 
   언덕 아래에 이르니 한 남자 아이가 가문비나무 곁에 앉아 있었다. 꿈을 꾸는 듯한 커다란 눈에 아름답고 예민해 보이는 얼굴을 한 아이는 앤을 보자 웃으며 줄달음칠쳐 왔다. 그러나 아이의 뺨에는 눈물 자국이 나 있었다. 
   아이는 살며시 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전 선생님이 묘지에 가실 거라는 걸 알고 기다렸어요. 저도 거기에 가거든요. 할머니 부탁으로 이 제라늄 꽃다발을 할아버지 묘에 꽂아 드리려구요. 보세요, 선생님, 이 백장미 다발은 우리 엄마를 생각하며 할아버지 묘 옆에 바칠 거예요. 엄마 무덤에는 꽃을 바치러 갈 수 없거든요. 그래도 엄마는 다 아시겠죠?" 
   "그럼, 아시고말고, 폴."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지 꼭 3년째예요. 그렇게 오래 됐는데도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마음이 아프고 엄마가 보고 싶어요. 가끔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참을 수가 없어요." 
   폴은 울먹울먹하며 입술을 파르르 떨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괜히 장미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앤이 부드럽게 달랬다. 
   "아직은 마음이 아프지 않기를 바라선 안 돼. 설령 네가 엄마를 잊을 수 있을 때에도 잊어버려 해선 안 되는 거야." 
   "네, 절대로 잊지 않겠어요……. 전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예요. 선생님은 잘 이해하시네요. 할머니조차 제 마음을 잘 몰라요. 저게 무척 잘해 주시긴 하지만요. 아빠는 잘 이해해 주시지만 엄마 얘길 하면 여전히 괴로워하시니까 많이 할 수 없어요. 아빠가 손으로 얼굴을 감쌈녀 전 얘길 그만 해야 한다는 걸 알아요. 가엾은 아빠, 아빠는 제가 없어서 무척 외로우실 거예요. 그래도 아빠는 가정부밖에 없는 집에서 가정부 손에 어린아이를 맡기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특히 아빠가 사업 때문에 얼마간 집을 비우실 대는 더 그렇죠. 엄마 다음으로 할머니가 낫잖아요. 언젠가 제가 크면 아빠한테 돌아가서 다시는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 거예요." 
   폴이 부모님 이야기를 수도 없이 해주어서 앤은 원래부터 알고 지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앤이 보기에 폴은 성격이나 기절이 자기 어머니를 꼭 닮은 듯했고, 아버지인 스티븐 어빙은 깊고 다정한 성품을 남에게 잘 드러내지 않는 과묵한 남자인 것 같았다. 
   언젠가 폴이 이런 말을 했다. 
   "아빠와 친해지기는 쉽지 않아요. 저도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야 친해졌어요. 그렇지만 선생님도 아빠를 알게 되면 멋진 분이란 걸 아실 거예요. 전 아빠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고 그 다음엔 할머니, 그 다음엔 선생님이 좋아요. 할머니가 그렇게 잘해 주시니 저도 할머니를 많이 사랑해야 하지만, 그것만 아니라면 아빠 다음으로 선생님을 좋아할 거라는 거 아시죠? 전 잠이 들 때까지 등잔을 제 방에 그대로 뒀으면 좋겠는데 할머니는 겁쟁이가 되면 안 된다면서 이불을 덮어 주고는 바로 등잔을 들고 나가세요. 겁이 나는 게 아니라 저는 불빛이 있는 게 좋아요. 엄마는 언제나 제가 잠들 때까지 옆에 앉아 내 손을 잡아 주시곤 했어요. 엄마가 제 버릇을 잘못 들였나 봐요.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엄마들은 가끔 그러잖아요?" 
   아니, 앤은 상상은 해 보았지만 이런 일은 잘 알지 못했다. 앤은 자기 "엄마"를 슬프게 떠올렸다. 엄마는 앤이 "완벽하게 예쁜" 아기라고 생각했고 아주 오래 전에 죽어서 젊은 남편 옆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무덤 곁에 묻혔다. 앤은 엄마를 기억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폴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6월의 햇살 아래 몸을 드러내 놓고 있는 불그스름한 긴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폴이 말했다. 
   "다음주가 제 생일이에요. 그래서 아빠는 내가 가장 좋아할 만한 것을 보내겠다는 편지를 보내셨어요. 그게 벌써 도착한 것 같아요. 할머니가 책상 서랍을 잠그셨는데 그건 새로운 게 있다는 뜻이거든요. 제가 할머니께 왜 잠갔느냐고 물으니까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어린애들은 호기심이 너무 많아선 안된다고 하셨어요. 생일을 맞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에요, 그렇죠? 전 이제 열한 살이 돼요. 선생님도 제가 열한 살짜리 같아 보이진 않죠? 할머니는 제가 나이에 비해 몸집이 작은 건 포리즈(오트밀이나 녹말을 물이나 우유로 걸쭉하게 쑨 죽:옮긴이)를 잘 먹지 않아서래요. 전 열심히 먹지만 할머니가 너무 많이 퍼주시는 것 같아요. 할머니께 나쁜 뜻은 없겠지만, 전 다 먹기가 힘들어요. 주일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이랑 기도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죠? 선생님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뭐든지 기도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 다음부턴 아침마다 할머니가 담아 주시는 포리즈를 다 먹을 수 있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매일 밤 기도 했어요. 하지만 아직도 다 먹지 못해요. 제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건지, 포리즈가 너무 많은 탓인지 정말 모르겠어요. 할머니는 아빠도 그 포리즈를 먹고 자랐고 확실히 효과를 봤대요. 선생님도 우리 아빠 어개를 보셔야 해요. 그렇지만 가끔 전 포리즈 때문에 죽을 것만 같아요." 
   폴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앤은 폴이 자기를 보지 않는 사이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에이번리 사람들은 어빙 부인이 옛날식으로 손자를 키운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앤이 명랑하게 말했다. 
   "포리즈 때문에 괴롭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래, 네 바위 사람들은 잘 지내고 있니? 쌍둥이 형은 여전히 얌전하니?" 
   "당연히 그래야죠. 얌전히 굴지 않으면 제가 안 놀아 줄 걸 아니까요. 제 생각에 그 녀석은 정말로 심술이 가득해요." 
   "노라는 아직 황금 부인에 대해 모르니?" 
   "네, 하지만 짐작은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난번에 제가 동굴에 갔을 때 노라가 절 봤거든요. 노라가 알아도 상관없어요. 노라가 모르기를 바라는 건 다 노라를 위해서였거든요.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요. 하지만 자기가 상처받을 일을 굳이 알려고 한다면야 어쩔 수 없는 거죠." 
   "너랑 밤에 바닷가에 가면 나도 너의 바위 사람들을 볼 수 있을까?" 
   폴은 심각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선생님은 제 바위 사람들을 볼 수 없어요. 저만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선생님의 바위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선생님은 그럴 수 있는 분이세요. 우린 둘 다 그럴 수 있어요." 
   폴은 친밀하게 앤의 손을 꼭 잡으며 덧붙였다. 
   "있잖아요, 선생님, 그럴 수 있는 사람이란 건 멋지지 않아요?" 
   앤은 반짝이는 잿빛 눈으로 파랗게 빛나는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멋지고말고." 
   앤과 폴은 둘 다 "상상력의 왕국이 얼마나 아름답게 환히 펼쳐져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고 그 행복한 나라로 가는 방법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산골짜기와 시냇가에 영원히 시들지 않는 환희의 장미꽃이 피어 있고, 구림이 가린 적 없는 태양이 빛나는 하늘,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 "해의 동쪽, 달의 서쪽"에 있는 그 나라의 위치를 안다는 것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지식이며 시장에서 돈 주고 살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태어날 때 마음씨 좋은 요정이 준 선물이며, 세월이 흘러도 기억 속에서 지워지거나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상상의 나라를 마음에 품고 다락방에서서 사는 것이 상상 없는 궁전에 사는 것보다 더 낫다. 
   오랜 전부터 에이번리 공동 묘지는 늘 잡초로 뒤덮힌 쓸쓿나 곳이었다. 개선론자들은 그 공동 묘지를 눈여겨 보고 있는 가운데 프리실라 그랜트는 지난번 협회 모임이 있기 전에 공동 묘지에 관한 서류를 읽었던 게 분명했다. 앞으로 개선론자들은 이끼가 잔뜩 끼고 흔들거리는 판자 울타리 대신 산뜻한 철조망을 두르고, 잡초도 베고 기울어진 비석들도 똑바로 세울 작정이었다. 
   앤은 매슈의 무덤 앞에 꽃을 놓고 헤스터 그레이가 잠들어 있는 그늘진 포플러나무 쪽으로 갔다. 앤은 봄소풍 간 날 이후로 매슈의 무덤을 찾을 때마다 헤스터의 무덤에도 꽃을 놓았다. 그 전날 저녁에 앤은 미리 숲 속에 있는 작고 황량한 정원에 가서 헤스터의 흰장미를 꺾어 왔다. 
   앤이 무덤에 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어떤 꽃보다 당신 정원에 피어 있는 꽃을 가장 원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앤은 땅거미가 질 때까지 풀밭 위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묘지를 찾아온 앨런 부인을 만났다. 두 사람은 함께 집을 향해 걸어갔다. 
   앤런 부인은 이제 5년 전 앨런 목사가 에이번리로 데려온 앳된 신부의 얼굴이 아니었다. 건강미와 아가씨다운 몸매는 사라지고 눈과 입 주위로 고난을 견디느라 생긴 자잘한 주름이 나 있었다. 주름 중 일부는 바로 그 공동 묘지에 있는 조그만 무덥 때문에 생긴 것이고, 새로 난 주름은 지금은 다행히 나았지만 근래에 병치레를 한 막내아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앨런 부인의 보조개는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웠고 눈동자도 여전히 맑고 밝게 빛나며 진실했다. 얼굴에 아가씨다운 아름다움은 없지만 연륜으로 얻은 온화함과 강인함은 그것을 보충하고도 남았다. 
   "앤, 방학을 무척 기다렸지?" 
   묘지를 나오면서 앨러 부인이 물었다. 
   "네. 혀로 사탕을 굴리고 있는 것처럼 즐겁게 말할 수 있어요. 이번 여름은 멋질 것 같아요. 우선 모건 부인이 6월에 섬에 오시는데 프리실라가 여기로 모시고 올 거래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요." 
   "재미있게 보내려무나, 앤. 올 한해는 정말 열심히 일했고 참 잘해냈어." 
   "아, 잘 모르겠어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은 걸요. 작년 가을 처음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에 하려고 마음먹은 대로 해내지 못했어요. 제 이상에 따라 살지 못했어요." 
   앨런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그렇게 살지 못해. 하지만 앤, 로웰이 한 말 알지? '실패는 없고 낮은 목표는 범죄다'라는 말 말야. 썩 잘해 내진 못해도 이상을 갖고 거기에 맞춰 살려고 애써야지. 이상이 없다면 인생은 정말 구차한 거야. 이상을 가진 인생은 위대하고 장엄하지. 앤, 네 이상을 꼭 간직해라." 
   앤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노력할게요. 하지만 제 이론들을 많이 포기했어요. 교사 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훌륭한 이론들을 갖고 있었지만 궁지에 몰릴 때마다 그 이론들을 하나씩 포기하게 되네요." 
   "아이들을 때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말이지?" 
   앤은 얼굴이 붉어졌다. 
   "앤서니를 제 손으로 때린 일은 영원히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말도 안돼, 그 아인 맞을 짓을 했어. 합당한 벌이었지. 그 뒤로 그 애 때문에 골치 아픈 일도 없고 앤서니 본인도 너처럼 좋은 선생님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잖니. 네가 친절했기 때문에 '여자란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고집 센 앤서니의 생각도 바뀌고 너는 그 아이의 애정을 얻어 낸 거야." 
   "앤서니가 맞을 짓을 했다 해도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제가 벌을 주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해서 냉정하고 사려 깊게 앤서니를 때리기로 마음먹었다면 전 지금처럼 괴롭진 않을 거예요. 그게 옳은지 그른지도 생각지 않았어요. 앤서니가 맞을 만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예요. 제가 부끄럽게 생각하는 건 바로 그 점이에요." 
   "그래,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지. 그러니 이제 잊어버리렴. 실수를 뉘우치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어야겠지만 언제까지나 마음에 담아 둬선 안 되지. 저기 길버트 블라이스가 자전거를 타고 가네. 방학이 돼서 집에 가는가 보다. 너희들 공부는 잘돼 가니?" 
   "아주 잘 되고 있어요. 우린 오늘 밤 베르길리우스를 끝낼 거예요. 스무 줄밖에 안 남았거든요. 그러고 나면 9월까지는 공부를 쉴거예요." 
   "네 생각엔 대학에 갈 수 있을 것 같니?" 
   앤은 저 멀리 푸르스름한 수평선을 꿈꾸듯이 바라보았다. 
   "아, 잘 모르겠어요. 마릴라 아줌마의 눈이 더 나빠지지 않은 데 감사해야겠지만 지금보다 더 나아지지도 않을 것 같아요. 게다가 쌍둥이도 데리고 있잖아요. 아무래도 그 애들 외삼촌이 데려갈 것 같지가 않아요. 어쩌면 대학이 길모퉁이쯤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전 아직 그 모퉁이까지도 못 갔고, 괜히 불만만 더 커질 수도 있으니까 그 생각은 많이 하지 않으려고 해요." 
   "글쎄다, 앤. 난 네가 대학에 가는 걸 보고 싶은데. 하지만 못 가더라도 불만스러워하진 말아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결국 자신의 길을 가는 거야. 대학이란 그 길을 쉽게 가도록 도와 줄 뿐이지. 그 길은 우리가 무엇을 얻어 내느냐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넓어질 수도 좁아질 수도 있어. 인생은 어디서나 풍요롭고 충만하지. 우리가 그 풍요로움과 충만함에 온 가슴을 여는 법을 깨닫기만 한다면 말야." 
   앤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그리고 전 저의 일과 폴 어빙, 귀여운 쌍둥이와 모든 친구들이 얼마나 고마운 줄도 알아요. 사모님, 제가 우정을 무척 감사히 여긴다는 걸 아시죠? 우정이야말로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에요." 
   "진정한 우정은 정말 도움이 되지. 우리는 고귀한 우정을 잊지 말고 조금이라도 진실하거나 성실치 않은 행동으로 우정을 더럽혀서는 안돼. 우정이라는 말이 가끔 진정한 우정이 아닌 그저 친밀한 사이 정도로 타락하는 게 두려운 일이지." 
   "맞아요, 거티 파이와 줄리아 벨처럼요. 둘은 매우 친해서 어디든 붙어 다니지만, 거티는 항상 뒤에서 줄리아 험담을 하죠. 거티는 누가 줄리아를 욕하면 아주 고소해하기 때문에 다들 거티가 줄리아를 시기한다고 생각해요. 친구를 사귄다면 그 친구의 가장 좋은 점을 찾아내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가장 훌륭한 것들을 줘야 하지 않아요? 그러면 우정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될 거예요." 
   앨런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우정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지, 히지만 언젠가는……." 
   앨런 부인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솔직한 눈과 풍부한 표정이 깃들인 섬세한 앤의 얼굴은 여인이라기보다는 아직도 어린 아이였다. 앤의 마음은 오로지 우정과 포부의 꿈을 품고 있었다. 앨런 부인은 달콤한 공상에 빠져 자기도 모르게 홍조를 띤 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하려던 말을 몇 년 뒤로 미루었다.  





  16장 가장 소망하는 것


 
   데이비는 초록 지붕 집 부엌에 있는 반들거리는 가죽 소파 위에서 뒹굴다가 편지를 읽고 있는 앤에게 하소연했다. 
   "누나, 누나, 나 배고파 죽겠어. 얼마나 고픈지 상상도 못할 거야." 
   앤이 멍하니 대꾸했다. 
   "금방 빵이랑 버터를 갖다 줄게." 
   일고 있던 편지에 흥미 있는 소식이 적혀 있는 게 분명했다. 앤의 뺨은 바깥에 핀 덤불 속 장미처럼 발그레했고 두 눈은 앤 특유의 초롱초롱함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데이비는 넌더리난다는 듯 말했다. 
   "난 버터 바른 빵은 싫어. 자두 케이크가 먹고 싶단 말이야. 그것 때문에 배가 고픈 거라구." 
   앤은 편지를 내려놓고 웃으며 데이비를 껴안으려고 팔을 뻗었다. 
   "그래서 배가 고프다면야 쉽게 참을 수 있어, 데이비. 마릴라 아줌마가 간식으로 버터 바른 빵만 먹으라고 하신 거 기억나지?" 
   "음, 그럼 한 조각만 줘……주세요." 
   데이비는 드디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배웠지만 대부분 나중에야 갖다 붙이기 일쑤였다. 앤이 버터를 듬뿍 발라 갖다 주자 데이비는 만족스럽게 빵을 바라보았다. 
   "누나는 항상 버터를 듬뿍 발라 준다니까. 마릴라 아줌마는 너무 얇게 발라 주는데. 이렇게 버터를 많이 발라야 입에서 살살 잘 넘어가." 
   빵 조각이 게눈 감추듯 사라지느 것으로 보아 꽤 잘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데이비는 소파에서 거꾸로 미끄러져 내려와 양탄자 위로 두 번 공중제비를 넘더니 똑바로 앉아서 야무지게 말했다. 
   "누나, 천국에 대해 맘을 정했어. 난 천국엔 가고 싶지 않아." 
   "왜?" 
   앤이 심각하게 물었다. 
   "천국은 사이먼 플레처 아저씨네 집 다락에 있으니까. 난 사이먼 아저씨는 싫어." 
   앤은 놀라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천국이…… 사이먼 플레처 아저씨네 집 다락에 있다고? 데이비 키스, 도대체 누가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릴 한 거야?" 
   "밀티 볼터가 그랬어. 지난주 일요일, 주일 학교 때. 엘리야와 엘리샤(둘 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예언자로 엘리샤는 스승인 엘리야로부터 예언자의 의식용 겉옷을 물려받는다:옮긴이)에 대해 배웠는데, 내가 일어나서 로저슨 선생님에게 천국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어. 로저슨 선생님은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았어. 선생님이 엘리야가 천국에 갈 때 엘리샤에게 무엇을 남겼느냐고 물으니까 밀티 볼터가 '자기가 입던 옷요.' 하고 대답했는데 우리가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막 웃었거든. 그래서 선생님은 화가 났나 봐. 누나는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보길 바라. 그러면 그런 행동은 안 할 테니까. 하지만 밀티가 버릇없이 굴려고 그런 건 아냐. 그냥 그 물건의 이름의 생각나지 않았던 거야. 로저슨 선생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하시면서 나더러 그런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어. 그 때 밀티가 팔꿈치로 나를 쿡쿡 찌르더니 귓속말을 하는 거야. '천국은 사이먼 아저씨네 다락에 있어. 이따가 집에 가는 길에 얘기해 줄게.' 그리고 집에 오는 길에 밀티가 말해 줬어. 밀티의 말솜씨는 진짜 대단해. 밀티는 잘 모르는 것도 이것저것 꾸면서 얘기해 주는데 그래도 걔 말을 들으면 설명이 다 된 것 같거든. 밀티는 자기 엄마와 함께 사촌인 제인 엘런의 장례식에 갔대. 사이먼 아줌마의 딸 말이야. 밀티네 엄마는 사이먼 아줌마의 동생이거든. 그런데 제인은 밀티 눈앞에 놓인 관에 누워 있는데도 목사님은 제인이 천국에 갔다고 하셨대. 하지만 밀티는 나중에 관을 다락에 올려 좋을 거라고 생각했대. 그래서 장례식이 끝나고 엄마의 모자를 가지러 이층에 올라가다가 엄마한테 제인 엘런이 갔다는 그 천국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 봤대. 그랬더니 엄마가 바로 천장을 가리키며 '저 위에 있지' 했다는 거야. 천장 위에는 다락밖에 없잖아. 그렇게 해서 밀티는 드디어 알아 낸 거야. 그 뒤로 밀티는 사이먼 아저씨네 집에 가는 게 아주 겁난대." 
   앤은 데이비를 무릎에 앉히고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바로잡아 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런 일에는 앤이 마릴라보다 훨씬 나았다. 앤은 자기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래서 어른들에게는 아주 분명하고 간단한 문제도 일곱 살짜리 어린 아이는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받아들이는지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앤이 데이비에게 천국은 사이먼 플레처 씨네 다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막 납득시키고 나자, 마릴라가 뜰에서 도라와 함께 완두콩을 따 가지고 들어왔다. 도라는 그 오동통한 손으로 할 수 있는 자질구레한 일을 "거들" 때 가장 즐거워하는 부지런한 꼬마였다. 닭 모이를 주고 나뭇조각을 줍고 접시를 닦고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도라는 깔끔하고 성실하고 말 잘 듣는 아이였다. 그래서 한 번만 가르쳐 주면 알아서 척척 해냈고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잊어 버리는 법이 없었다. 반대로 데이비는 조심성 없고 무엇이든 잘 잊어버렸다. 그러나 데이비는 날 때부터 사람을 끄는 성향을 타고나서 앤은 물론이고 마릴라까지도 데이비를 더 좋아했다. 
   도라는 자랑스럽게 완두콩을 까고 데이비는 콩깍지 위에 성냥개비로 돛대를 세우고 종이로 돛을 달며 배를 만드는 동안, 앤은 마릴라에게 근사한 편지 내용을 들려 주었다. 
   "아, 마릴라 아줌마, 어떻게 생각하세요. 프리실라한테서 편지를 받았어요. 모건 부인이 이 섬에 있는데 날씨가 좋으면 목요일에 에이번리로 오겠대요. 열두 시쯤엔 우리 집에 도착할 텐데. 오후는 우리와 보내고 저녁때쯤엔 모건 여사의 미국인 친구들이 머물고 있는 화이트샌즈 호텔로 갈 거래요. 아, 마릴라 아줌마, 멋지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모건 부인이라도 보통 사람들과 그리 다르진 않을 게다." 
   마릴라도 약간 설레는 감이 없진 않았지만 무덤덤하게 말했다. 
   모건 부인은 유명이라 그런 부인이 이 곳을 방문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럼 여기서 점심을 들겠구나." 
   "그럼요. 아참, 마릴라 아줌마, 제가 점심 준비를 다 하면 안 될까요? 《장미 정원》의 작가를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요. 겨우 점심 한끼 대접하는 일이지만요, 괜찮죠?" 
   "아이고, 난 7월에 뜨거운 불가에서 스튜를 만드는 것은 딱 질색이라 다른 사람을 시키려고 했는데, 네가 해준다면야 좋지." 
   앤은 마릴라가 커다란 은혜라도 베푼 것처럼 기뻐했다. 
   "정말 고마워요. 오늘 밤에 당장 식단을 짜야겠어요." 
   마릴라는 "식단"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해서 주의를 주었다. 
   "지나치게 멋 부리려고 하지 마라. 그러다 휘회하게 될 테니까." 
   "멋부릴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축제날 같은 때도 감히 먹어 보지 못하는 그런 음식을 만들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건 겉치레일 뿐이에요. 저는 열 일곱 먹은 아가씨나 선생님답게 분별 있고 의젓하진 못해도 허세를 부릴 만큼 어리석진 않아요. 하지만 되도록 훌륭하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요. 데이비, 콩깍지를 뒷계단에 버려 두지 마라. 그러다 누가 미끄러지겠다. 일단 간단한 수프를 만들래요. 제가 양파 수프 하나는 잘 만들잖아요. 그리고 닭 두 마리를 통째로 구울 거예요. 하얀 수탉 두 마리를 쓰겠어요. 회색 암탉이 솜털이 보송보송한 노란 병아리를 부화할 때부터 그 두 놈은 쭉 제 귀염둥이였고, 꽤 정이 들었는데. 하지만 어차피 희생물이 될 테니 이렇게 뜻 깊은 날 쓰는 게 좋겠죠. 아, 마릴라 아줌마, 그래도 제 손으론 못 잡겠어요. 아무리 모건 부인을 대접하기 위한 거라도 말예요. 존 헨리 카터에게 대신 해 달라고 할래요." 
   데이비가 나섰다. 
   "내가 할게. 마릴라 아줌마가 다리만 잡아 주면 돼. 도끼를 들려면 두 손다 필요하니까. 닭이 목이 잘려서도 깡충깡충 뛰어 다니는 게 얼마나 재밌다구." 
   앤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완두콩과 콩 요리에다 크림 얹은 감자 요리를 하고 야채로는 양상치 샐러드를 만들 거예요. 후식은 휘핑 크림(세게 저어서 잘게 거품이 나게 한 크림:옮긴이)을 얹어 레몬 파이와 커피, 치즈, 레이디 핑거(스펀지 케이크용 반죽을 손가락 모양으로 만들어서 구운 과자:옮긴이)로 하겠어요. 내일 파이와 레이디 핑거를 만들고 흰 모슬린 드레스를 빨아야지. 오늘 밤에 다이애나에게 알려 줘야겠어요. 다이애나도 깨끗한 옷을 준비해 둬야 하니까요. 모건 부인의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항상 하얀 모슬린 옷만 입어요. 그래서 다이애나와 저는 언젠가 모건 부인을 만나면 꼭 하얀 모슬린 옷을 입기로 했어요. 그럼 아주 세심하게 경의를 표하는 것 같지 않아요? 데이비, 얘, 바닥 틈새에 콩깍지를 쑤셔 넣으면 안돼. 앨런 목사님 부부와 스테이시 선생님도 점심 식사에 초대하겠어요. 그 분들도 모건 부인을 무척 만나고 싶어했거든요. 스테이시 선생님이 여기에 계실 때 모건 부인이 오시게 되어 정말 잘 됐어요. 데이비, 콩깍지 좀 양동이 물에 띄우지 마라. 나가서 여물통에나 띄워. 아, 목요일에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날씨는 좋겠죠. 에이브 아저씨가 어젯밤 해리슨 아저씨한테 와서 이번 주엔 비가 자주 온다고 했다니까요." 
   마릴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징조로구나." 
   앤은 그날 저녁 비탈 과수원 집에 가서 다이애나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다이애나도 매우 흥분해서 둘은 배리네 정원 버드나무에 매달린 해먹(기둥 사이나 나무 그늘 아래 달아매어 침대로 쓰는 그물:옮긴이)에 앉아 그 일을 의논했다. 
   "앤, 나도 식사 준비를 거들면 안될까? 내가 양상치 샐러드를 잘 만드는 건 너도 알잖아." 
   다이애나가 간청하자 앤은 아무 사심없이 말했다. 
   "그래, 같이 하자. 집안 꾸미는 것도 도와 줘. 난 응접실을 온통 꽃으로 꾸밀 거야. 식탁은 장미로 치장하고. 아, 다 잘됐으면 좋겠어. 모건 부인의 여주인공들은 곤경에 빠지거나 안 좋은 일을 당하는 법이 없잖아. 그리고 그 여인들은 항상 침착하고 훌륭한 주부들이야. 정말 타고난 살림꾼 같아. 《숲에서 보낸 나날》에 나오는 거트루드가 여덟 살 때부터 아빠를 위해 집안 일을 돌봤다는 거 너도 기억하지? 내가 여덟 살 땐 애 키우는 일 밖에 할 줄 몰라쓴ㄴ데. 여자들을 소재로 그렇게 많은 글을 쓴 걸 보면 모건 부인은 틀림없이 여자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야. 모건 부인이 우리를 좋게 봤으면 해. 난 모건 부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말을 할지, 나는 또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지 열두 가지 경우나 상상해 봤단다. 그런데 코가 너무 걱정이 돼. 여기 주근깨가 일곱 개나 있는 게 보이지? 에이번리 지역 개선 협회에서 소풍 갔을 때 생긴 거야. 그 때 모자도 안 쓰고 돌아다녔거든. 하기야 콧등의 주근깨를 걱정하는 건 주제넘은 짓일지도 몰라. 옛날처럼 주근깨가 온 얼굴을 뒤덮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 뭐. 그래도 이젠 주근깨가 안 생기면 좋겠어. 모건 부인의 여주인공들은 모두 완벽한 피부를 가졌잖아. 주근깨 난 주인공은 하나도 없었던 것 같아." 
   다이애나가 위로했다.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아. 오늘 밤 레몬 즙을 좀 발라 봐." 
   이튿날 앤은 파이와 레이디 핑거를 만들고 모슬린 드레스를 빨았다. 그리고 방방이 돌아다니며 온 집 안을 쓸고 닦았다. 초록 지붕 집은 언제나 마릴라의 마음에 들게 질서 정연히 정돈되어 있어서 굳이 대청소를 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앤은 샬럿 이(E) 모건 부인의 방문을 받는 영예로운 집에는 먼지 한 톨이라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앤은 모건 부인이 그 안을 들여다볼 일이 전혀 없을 계단 아래 "잡동사니" 창고까지도 다 청소했다. 
   앤이 마릴라에게 말했다. 
   "모건 부인이 보지 않더라도 완벽하게 정리해 놓고 싶어요. 모건 부인의 작품 《황금 열쇠》에 나오는 주인공 앨리스와 루이자는 롱펠로의 시를 자신들의 좌우명으로 삼았죠. 
    
         일을 처음 배웠을 때 
         목수들은 성심껏 일했다네 
         순간순간,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신은 무엇이든 보시기 때문이라네 
    
   그래서 두 주인공은 지하실 계단을 빡빡 문지르고 침대 밑까지 쓸어 내는 걸 잊지 않았어요. 모건 부인이 집에 왔을 때 이 창고가 지저분하면 전 죄책감을 느낄 거예요. 다이애나와 저도 지난 4월에 《황금 열쇠》를 읽고 나서는 이 시를 좌우명으로 정했거든요." 
   그 날 밤 존 헨리 카터와 데이비는 하얀 수탉 두 마리를 잡느라고 애를 썼다. 앤은 닭 두 마리를 깨끗이 다듬었다. 보통 때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으나 이번만큼은 포동포동한 닭들의 용도를 생각하니 두 눈이 영광으로 빛났다. 
   앤이 마릴라에게 말했다. 
   "닭털을 뽑는 건 정말 싫어요. 그래도 손이 하는 일에 온 정신을 쏟지 않아도 된다는 건 참 다행스럽지 않아요? 저는 지금 손으로는 닭털을 뽑고 있지만 머리 속으로는 은하수를 산책하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어쩐지 다른 때보다 마룻바닥에 깃털을 더 많이 흘린다 했더니." 
   마릴라가 주의를 주었다. 
   일을 다 마치고 앤은 데이비를 재우며 내일 얌전하게 행동하겠다는 다짐을 받아 냈다. 
   "내일 하루 종일 착하게 굴면 그 다음날엔 내 마음대로 해도 돼?" 
   앤이 신중하게 말했다. 
   "그럴 순 없어. 하지만 도라와 너를 데리고 연못으로 가서 뗏목을 타고 연못을 구석구석 돌며 뱃놀이를 할 생각이야. 그리고 모래 언덕 기슭에 닿으면 거기에 올라가 소풍을 즐기자." 
   "야, 좋아라! 그럼 얌전히 굴게. 금요일엔 해리슨 아저씨 집에 가서 새 딱총으로 진저에게 완두콩을 쏘며 놀려고 했는데 다른 날 해도 되지, 뭐. 내일은 일요일처럼 재미없는 날이 될 줄 알았는데 다음 날 모래 언덕 기슭으로 소풍을 가니까 참을 만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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