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벽
빙벽(9)완결
제3부 또 하나의 신화(하)
----- 차 례 -----
작가 소개
108. 1981 년 3월 23 일 ②
109. 1981 년 3월 24 일 ①
110. 1981년 3월 24일 ②
111. 1981년 3월 24일 ③
112. 1981년 3월 25일 ①
113. 1981년 3월 25일 ②
114. 1981년 3월 25일 ③
115. 1981년 3월 26일 ①
116. 1981년 3월 26일 ②
117. 1981년 4월 ①
118. 1981년 4월 ②
119. 1981년 4월 ③
120. 1981년 4월 ④
121. 1981년 7월
108. 1981 년 3월 23 일 ②
"그게 무슨 소립니까?"
대뜸 소리를 지르면서 튀어오르듯 일어난 것은
유정호 하사였다. 그리고 소대원들의 얼굴마다 그
의미를 분명히는 알 수 없는 어떤 동요의 빛이 스쳐
가는 것을 철기는 보았다. 최 중사는 오히려 말이
없었다. 아마 엄청난 충격을 안으로 다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철기는 그를 무시하고 말을 이어 갔다.
"놀랠 건 없다. 우리 소대는 고인택을 구하기 위해
여기에 남는다. 아니다. 저 분교장으로 들어가겠다."
"소대장님!"
유 하사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올리고 있었다. 최
중사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철기는 역시 유
하사에게는 대꾸하지 않았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나 나는...... 한 개인의
생명이 군대 그 자체보다 소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해 고인택을
구하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이제 이건 최후의
방법이다. 나는 저 안으로 들어가 고인택과 같이
있겠다. 물론 여러분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나하고
같은 생각인 사람만 따라와 주면 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냥 철수를 해. 알겠나?"
"안 됩니다. 소대장님!"
다시 소리치는 유 하사를 향해 철기는 싸늘하게
씹어 뱉었다.
"넌 닥치고 있어라. 싫으면 그냥 가면 된다고
했잖아."
스스로 느끼기에도 섬득하도록 살기 어린 목소리에
질렸는지 유하사는 슬그머니 최 중사 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소대장님!"
다시 일어선 것은 상병인 황운이었다. 늘 굼뜬
동작으로 빈축을 사곤 했지만 어딘지모르게 지성미를
풍기곤 하는 녀석이었다.
"뭔가?"
"소대장님 생각은 알겠습니다.우리도 물론 고인택이
죽는 건 싫습니다. 하지만 고인택은 어쨌든 사람을
죽이고 탈영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호를 해야
합니까?"
그것은 황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었다.
소대원 모두의 눈빛이 같은 질문을 던져 오고 있엇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소대장님은 알고 계신
것 같은 데요."
철기는 땅거미가 덮여 오는 나루터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황운의 질문에는
대답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소대원들은
움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고인택의
탈영이유를 설명하는 일은 철기의 당연한 의무라고
느껴졌다.
"좋다, 말을 하겠다."
유 하사와 최 중사까지도 시선을 모아 오고 있음을
느끼면서 철기는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광주 사태를 기억할 것이다. 여기서 그
일의 시시비비를 가릴 여유는 없다. 다만 한 가지,
고인택과 본부중대의 박도기 중사는 그 광주에서
만났었다. 물론 고인택은 학생이었고, 박 중사는
출동한 공수부대원이었다. 박 중사의 부하들은 거기서
고인택의 친구들을 죽였다. 고인택은 그걸
목격했고...... 고인택은 우리 대대에 전입해 와서 박
중사를 보고 그 때의 공수부대원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겁을 먹기도 하고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면서 고인택은 괴로워했다. 그러다가 바로
탈영하던 날 밤, 박 중사가 본부중대 주번이라는 걸
알고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 통신대장은 갑자기 박
중사가 주번을 바꿔 달라는 바람에 대신 들어가 자고
있다가 죽었다. 고인택은...... 쏘고 난 직후에야
상대가 박 중사가 아니라 통신대장이라는 걸 알고
탈영을 하게 된 거다. 이상이다......"
소대원들은 깊은 침묵에 잠겨들고 있었다. 고인택과
박 중사의 기묘한 관계가 그들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고 있음이었다. 하지만 철기는 그들을 그런
감상에 빠져 있게 놓아 둘 여유가 없었다.
"자, 이제부터 나와 함께 저 안으로 들어갈 사람은
일어나서 내앞으로 나오도록. 다시 말하지만 강요는
하지 않는다. 한 개인의 생명과 군대라는 조직의
가치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나를
따라가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철기는 최 중사를 돌아보며
일렀다.
"선임하사는 돌아갈 병력들을 인솔해 줘요."
최 중사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정렬해 앉아 있던
소대원들 속에서 하나 둘 일어나는 병사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역시 권 하사였다. 그리고 최정식, 신영모,
손영화, 박삼환 하사, 윤성건, 이상호, 황운,
이태후...... 줄줄이 일어나는 소대원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철기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우직한 성격의 병장 김동술이 에이 쌍...... 하면서
일어났다. 철기는 빠르게 앞으로 나온 병사들을 세어
보았다. 열여섯 명이었다. 그리고 앉아 있는 병사는
유 하사까지 쳐서 열세 명......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수가 철기에게 동조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맙다......"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심정으로 한 마디를 간단히
하고 철기는 최 중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미안해요, 선임하사. 나머지는 선임하사가
인솔해서 귀대해요."
서둘러야 했다. 철기는 굳어진 얼굴로 서 있는
16명의 소대원들에게 명령했다.
"가자."
그들이 돌아서는 순간까지도 최 중사는 아무 말도
건네 오지 않았다.
"뛰자!"
철기는 병력을 구보로 인솔해서 곧 분교장의 담장
아래 닿았다. 그리고 철기는 담장 너머로 목청을 높여
소리질렀다.
"고인택! 나다, 소대장이다."
고함소리는 고인택에게만이 아니라 텐트에 있는
대대장이나 사단장에게도 들릴 것이었다. 그리고 최
중사는 즉시 병력을 이끌고 달려가 보고를 할
것이었고, 이제야말로 시간이 없었다. 만약에
고인택이 철기 일행의 진입을 거부한다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철기는 믿었다. 고인택은 애초 자신과의
면담을 요청해 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고인택은 즉시
대답을 해 오지 않고 있었다.
"고인택! 소대장이다, 대답해라!"
그제야 대답이 있었다.
"무슨 용건입니까?"
현 중위! 하고 누군가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하지만 무시하고 철기는 분교장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우리가 널 구하겠다! 지금부터 나하고 소대원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간다! 알겠나? 우리는 네 편이다.
쏘지 마라!"
고인택은 다시 대답이 없었다. 뒤쪽에서는 현 중위,
무슨 짓이야? 돌아와! 하는 소리들이 어지럽게
들렸다. 철기는 목이 터져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를 믿어라, 고인택! 나를 못 믿겠나!"
숨이 막히는 듯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고인택의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철기는 재빠르게 담장을 타고 넘었다. 안 돼! 하고
다시 누군가가 울부짖듯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16명의 소대원들은 서슴없이 철기의 뒤를 따라 담을
넘고 있었다.
고맙다......
역시 목멘 소리로 말하면서 고인택이 가운데 교실의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사위어
가는 석양빛을 받아서 안경알이 번쩍, 하고 빛났다.
"무슨 일을 이 따위로 하나?"
사단장이 지휘봉을 쳐든다 싶더니 대대장의 어깨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대대장은 흠칠,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최 중사는 마치 무슨 악몽을 보듯 그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도무지 지금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사실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사단장은
다시 한 번 대대장을 후려갈겼다.
"어떻게 할 거야, 이 자식아!"
"죄송합니다......"
잔뜩 주눅 든 소리로 대대장은 겨우 한 마디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사단장의 군홧발이 대대장의 무릎을
걷어찼다.
"죄송? 임마, 이게 그따위 말로 해결될 문제야?
"......"
대대장은 더는 변명하지 못하고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서 있었다.
"어떻게 수습은커녕 일을 점점 더 엉망으로
만들어놔? 임마,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 그 현
중위란 놈이 그렇게 말썽을 부리고 있으면 맨 먼저
철수를 시켜야지, 왜 맨 나중으로 남겨 놨다가
이런꼴을 당해?"
"전...... 그저 배치되어 있는 위치대로 가까운
쪽부터......"
"닥쳐, 이 자식아!"
사단장은 다시 대대장을 걷어찼다. 그 모양을
바라보면서 최 중사도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보아도 사단장의 판단이 옳았다. 소대장
현 중위가 그런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대대장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까. 그럴 리 없었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현 중위는 사단장과 대대장에게 학교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어디보다도 최 중사의 석천소대를 먼저 철수시켜야만
했다. 대대장은 왜 그러지 않았을까? 그 정도의 상황
판단도 할 수 없는 인물인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대대장은 바보가 된 것처럼 두 눈을 멀뚱거리면서 서
있을 뿐이었다. 다시 사단장이 분통을 터뜨렸다.
"뭘 멍청하게 서 있기만 하나? 빨리 남은 병력을
철수시켜!"
"알겠습니다."
대대장은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
뛰쳐나갔다. 이제 텐트안에는 사단장과 최 중사만이
남겨졌다. 3월의 저녁이요, 야지의 텐트 안인데도
불구하고 최 중사는 온몸에 진땀이 배어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사단장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선임하사"
"예, 중사 최도천."
"정말로 그 열여섯 명이 소대장을 자발적으로
따라갔나?"
사단장의 목소리는 왠지 떨리는 듯했다.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최 중사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조금도 소대장이 강압하지 않았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정말로?"
"네."
사단장은 잠시 촛점을 잃은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더니 천천히 돌아서서 물러났다. 후우...... 하는
한숨 소리가 텐트 안을 숨막히게 채웠다. 정말이지 최
중사로서도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현 중위가
자기를 따라갈 사람만 나오라고 했을 때 최 중사는 권
하사를 비롯해서 잘해야 서너명, 최악의 경우라도
육칠 명에 불과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쩌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 분교장 안으로 16명이나
들어가고 말다니. 오히려 남은 병력이 13명으로
들어간 수보다 적어지다니...... 고인택과 대대에
남은 박지섭을 빼고, 팀스피리트 때의 사고로 후송간
세 명을 뺀 전체 소대원들 중에 반이 넘는 숫자가
따라간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박 중사와 고인택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다니...... 최 중사는 자신의 마음도 심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주사태의 성격이 어떤것인가를 떠나서, 자신이
고인택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역시 그런 짓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후우......
사단장의 흉내라도 내듯 한숨을 몰아쉬었을 때였다.
텐트 안으로 불쑥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필승, 수색 일개 중대 도하 완료했습니다."
수색대 대장이었다. 그제서야 사단장의 표정에
군인다운 생기가 도는 것을 최 중사는 보았다.
"수고 했어. 빨리 배치시키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안에 합류한 병력이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사실이야. 십육 명이...... 아니지, 소대장까지
십칠 명이 더 들어갔다. 원래 있던 놈까지 해서 십팔
명이야."
사단장의 목소리는 침통하기만 했다. 최 중사는
제가 죄를 지은것 같은 생각으로 고개를 떨궜다.
"소대장까지요?"
수색대 대장은 차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묻고
있었다.
"그래."
"전부 그 석천소대원이라는 겁니까?"
"그렇다니까.빨리 배치해. 우습게 보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를 상황이야. 무장한 놈들이 십팔 명이야."
"알겠습니다. 필승."
경례를 하고 돌아서 나간는 수색대 대장을
사단장은,
"아, 잠깐."
하고 다급하게 불러세웠다. 수색대 대장이
돌아섰다. 사단장은 빠르게 명령하고 있었다.
"배치 완료한 후에 일개 중대만 더 증원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합해서 2개 중대, 그것도 최고로 잘 훈련된 수색대
병력으로 2개중대...... 최 중사는 입 속으로 가만히
뇌까려 보았다. 저 분교장 안에 있는 18명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현 중위, 그가 죽게 될까?
어쩐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문득 장석천의 얼굴이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최 중사는 버릇처럼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더욱 가슴이 옥죄어드는 듯했다. 석천
소대가 이렇게 되고 말다니. 현철기의 전입 후로 날이
갈수록 흔들리기만 하던 석천소대가 끝내 이런 궁지에
몰리고 말다니. 대대장을 향한 현 중위의 그 끈질긴
추적도 이제 끝이 난다는 말일까. 콧수염을 엷게 기른
대대장의 얼굴이 눈앞에 스쳐 가는 순간 최 중사는
갑자기 온몸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혹시?
현 중위가 이대로 죽기라도 한다면 가장 반가워할
사람이 대대장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대대장은 일부러 석천소대의 철수를 맨 마지막으로
남겨둔 것은 아닐까. 현 중위가 분교장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린 것은 아닐까.
아무리......
최 중사는 속으로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일을
자초하기까지 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그렇게 생각을 하니 미심쩍은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팀스피리트 때만 해도 대대장이 현 중위를
향해 권총을 쏘았다고 하지 않던가.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병사들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 최 중사는
역시 같은 의문에 잠겼었다. 싸움을 말린다는 핑계로
대대장이 현철기를 죽이려 하진 않았을까 하는.
최 중사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한번
어지러워진 마음은 한없이 착잡하게 꼬이기만 하고
있었다. 최 중사 자신은 과연 언제까지나 대대장의
편에 서서 입을 다물고 있어도 좋은 것일까. 현
중위를 일부러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언젠가는 자신도 같은 입장에 놓이게
되지는 않을까. 비밀을 지키기 위해 대대장이 최 중사
자신을 죽이려고 드는 일은 영영 없다고 장담할 수가
있을까. 최 중사는 스스로에게 억지를 쓰듯 소리치치
않을 수 없었다.
아니야!
그 때 사단장이 한 걸음 이 쪽으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선임하사, 남은 병력이 얼마라고 그랬지?"
"네, 저까지 열네 명입니다."
사단장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더니 곧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여기 남아 있도록 해.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대답하면서도 최 중사는 더욱 가슴속이 욱죄어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할 일이란? 아니, 이제 이 분교장이
있는 마을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이란?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불안감에 최 중사는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종말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
형태는 분명치 않았지만.
이미 교실 안은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지만
소대원들의 모습을 분간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아까부터 울먹거리는 고인택을 권 하사와
최정식이 다둑거리는 모양을 이윽히 바라보고 있던
철기는 고인택을 뺀 16명을 2개 조로 나누어
분산하려던 생각을 취소하기로 마음먹었다. 흩어 놓은
것보다는 그냥 모아 두는 편이낫지 싶었다. 어쩌면
순간적인 충동에 못이겨 들어와 놓고도 시간이 흐르면
마음이 달라질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2개 조로
분산시켜 놓으면 예상 외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또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강요할 건 없지 않나?
그건 그랬다. 철기는 험, 하고 목청을 돋구었다.
"다들 편히 앉은 채로 들어라."
교실 여기저기에 퍼질러져 있던 소대원들이 새삼
긴장하는 기척을 온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여기 들어온 걸 후회하는 사람은
나가도 좋다. 나갈 사람은 말을 하도록."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조용히 않아있는
소대원들의 마음속까지 읽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철기는 비아냥거리는 투가 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부연했다.
"언제든지 좋다. 그만 나가고 싶어진 사람은
소대장한테 말을 해라, 알겠나?"
네...... 하고 억눌린 목소리로 하는 대답을
들으면서 철기는 권 하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권 하사."
"예, 소대장님."
"전투식량을 모두 거둬라."
출동한 병력들은 모두 식사 추진이 여의치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건빵과 드롭프스, 그리고 미숫가루가
함께 들어 있는 전투 식량을 한 봉지씩 지급받고
있었다. 그것만이 앞으로의 유일한 삭량인만치
통제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권 하사가 소대원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모습에서 눈을 돌려 어두운 창 밖을 바라보면서
철기는 망연히 생각에 잠겨들었다. 이틀? 사흘?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역시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저 창 밖의 무리들에게 지지
않겠다는 고집이었다. 그래, 하고 철기는 스스로에게
깊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되리라는 예감이 보기 좋게 들어맞고 말았다.
세상모두를 향해 이렇듯 외롭게 버티고 설 날이
오리라고 늘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가. 16명이 동조를
해주었지만 그 감격은 순간뿐, 결국에는 혼자가 될
것이라는고 믿고 있었다. 16명은 말하자면 순진한
인질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들을 내걸고 사단장을
비롯해서 저 밖에 있는 무리들과 담판을 벌여야 했다.
철기는 요구할 생각이었다.
첫째, 고인택의 탈영 이유를 사실대로 밝혀 줄 것.
둘째, 장석천의 죽음에 얽힌 의문을 풀어 줄 것.
그 모두기 거부되고 최악의 상황에 부딪치게 되면
자신과 고인택을 제외한 모두를 내보낼 생각이었다.
혼자라도 싸운다.
중얼거렸을 때 권 하사가 다가왓다.
"다 거뒀습니다."
철기는 긴 상념에서 깨어나듯 그에게로 돌아앉았다.
"앞으로 그건 권 하사가 관리하도록 하고, 우선
고인택이한테 좀 먹여라. 미숫가루부터 풀어서 마시게
하고, 건빵도 좀 먹게 해."
"알겠습니다."
권 하사가 허리를 잔뜩 굽힌 걸음으로 고인택을
향해 다가가는 모양을 보면서 철기는 킥, 하거
치밀어오르는 웃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게 뭔가?
자신이 무슨 반군대장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소대장님."
조심스럽게 부르면서 다가온 것은 박삼환 하사였다.
조금은 철기를 당황하게 한 가담자 중의 하나였다.
"왜 그래?"
"수색대들 배치가 다 끝난 것 같습니다."
늘 말이 없는 편인 박 하사는 지금까지 밖을
경계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왠지 떨리는
듯했다.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고 철기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박 하사, 떨리나?"
"네."
박 하사는 부인하지 않았다. 철기는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의
어깨를 투덕투덕 두드릴 수 있었다.
"나도 겁난다."
어둠 속에서 이빨을 하얗게 드러내면서 박 하사는
웃고 있었다. 철기는 마주 웃어 주면서 소리를 낮춰
불렀다.
"권 하사, 이리 와 봐."
권 하사가 곧 다가왔다. 철기는 두 하사에게
일렀다.
"따라와."
엉거주춤 허리를 굽힌 걸음으로 따라오는 둘을
데리고 철기는 옆 교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창이 있는
쪽에다 바싹 등을 대고는 플래시를 켰다.
"수첩 있지?"
권 하사가 군인수첩과 볼펜을 내밀었다. 철기는
이미 머릿속에 짜 둔 16명의 편성표를 빠르게 적어
나갔다.
1조: 하사 권기호, 상병 손영화, 상병 황운, 이병
민병철.
2조:병장 이상호, 병장 신영모, 상병 윤성건, 일병
이태후.
3조:하사 박삼환, 병장 이홍우, 상병 김홍석, 상병
김용범.
4조:병장 김동술, 상병 최정식, 상병 김원종, 일병
황인성.
"이렇게 사 개 조로 나뉘어서 각각 두 시간씩
경계를 선다. 근무가 아닌 조들은 최대한 휴식을
취하도록. 식량이 얼마 없으니까 가능하면 밤낮 가릴
것 없이 취침을 하는 게 좋겠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소대원들의 동태를 잘 살펴 줘.
꼭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나가고 싶어하는 눈치가
보이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을 하도록. 단 한 사람도
여기 억지로 남아 있어선 안 돼. 또...... 고인택을
더욱 잘 살피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두 사람은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철기는 수첩을 쭉 찢어서 권 하사에게 주고는
플래시를 껐다.
"근무조 사 명 중 조장을 포함한 두 명은 운동장
쪽을 맡도록 하고, 나머지 두 명은 복도로 나와서
뒤편을 경계하도록 해. 자, 일조부터 근무에
들어가도록 해."
두 사람이 교실을 나가고 나자 철기는 아예 벽에
머리를 대고 길게 누워 버렸다. 문득 지섭의 얼굴이
떠올랐다. 철기는 그를 향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마치 앞에 있는 것처럼.
난 저질러 버렸다.
지섭은 웃지도 않고 그저 무표정할 뿐이었다.
흐흐흐, 하고 제풀에 철기가 키들거렸을 때였다.
누군가가 교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뻣뻣이 서서.
"소대장님."
고인택이었다. 철기는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앞섰지만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무리 밤이라도 허리 굽히고 다녀."
하지만 고인택은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가와 섰다.
"소대장님."
그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앉으라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주저앉히면서 고인택은
신음처럼 내뱉고 있었다.
"소대장님, 이러지들 마십시오. 돌아가십시오."
철기는 누운 자세 그대로 시큰둥하게 대답을 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좀 쉬어라.
피곤할텐데."
"소대장님!"
고인택은 달려들기라도 할 것처럼 처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어쩔수 없이 철기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고인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인택."
"예."
"이 일은 너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야. 알겠나?"
"......"
"우린 누가 뭐래도 널 혼자 둘 수가 없어. 꼭
고인택,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런 처지였다고
해도 우리는 이렇게 들어와 행동을 같이했을거다.
그러니까 부담감 가질 것 없어."
그러나 고인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툭툭 두드려 주고 나서 철기는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돌아가서 쉬어. 겁내지 말고. 내 생각으로는 아마
별다른 충돌 없이 끝낼 수 있을거다. 우리가
이길거야."
그래도 묵묵히 앉아만 있던 고인택은 이윽고
소리없이 몸을 일으켜서 교실을 나갔다. 어둠 속을
유영하듯 빠져 나가는 고인택의 등뒤에 대고 철기는
다시 한 번 다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이긴다.
"대대장."
사단장이 부르는 소리에 대대장 박민 중령은
혼자만의 상념에서 깨어났다.
"네, 각하."
사단장은 못마땅한 듯 잠시 이 쪽을 노려보고
있다가 질문을 던져 왔다.
"안에 들어간 놈들...... 먹을게 없지?"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네, 하고 대답하려던
대대장은 곧 떠오르는 생각에 얼굴을 찌푸려야 했다.
식량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대대장은 자신의
잘못이기라도 한 것처럼 맥풀린 소리로 대답을 했다.
"전투식량이 한 봉씩 지급돼 있을 겁니다."
"전투식량?"
사단장도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네. 그...... 건빵하고 미숫가루......"
"그걸로 얼마나 먹을 수 있을까?"
"아주 아껴 먹는다면 이틀은...... 먹지
않겠습니까?"
이틀......? 아주 깡다구로 버티면 사나흘은
버틴다고 봐야겠구만."
대대장은 사단장의 말에 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미 증원되어온 수색 1개중대도 배치를 마친
상황이었다. 현 중위와 고인택, 그리고 16명의
탈영병은 2개중대의 병력에 포위되어 있는 것이었다.
달아날 수는 없었다. 공격을 하기로 한다면 5분 안에
해치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사단장은 신중한
장기전을 펼칠 모양이었다. 대대장은 속으로만 혀를
찼다.
해치우면 될걸.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생각에 잠겨 가는 사단장을
두고 대대장은 역시 자신만의 궁리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대대장이 은근히 바랐던 대로 현 중위는 분교장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현 중위가 두 번이나
분교장으로 들어가겠다고 나섰을 때에는 기를 쓰고
막았던 대대장이었지만, 대대를 철수시킬 때가 되어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놈이 들어간다면?
어쩌면 공식적으로 현 중위를 해치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의 입을 영영 봉해 버릴
수가 있었다. 장석천과의 관계를 끈질기게 추적해
오는 놈을 떼어 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놈은 뭐라고
말했던가.
만약 고인택이 죽으면...... 제가 가만 있지
않겠습니다. 제가 알고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겠습니다.
그렇다면 두 놈을 한꺼번에 죽여 버리면 된다......
이것이 대대장의 머릿속에 뒤늦게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래서 대대장은 석천소대를 포함한 1중대의 철수를
맨 마지막으로 정했고, 소대에 대해서도별다른 통제를
하지 않고 방치해 두었다. 예상대로 현 중위는 분교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움직이는 것을 알고 대대장은
돌아오라고 소리를 지르는 척해 보기도 했지만 실상은
기대대로 돌아가는 상황에 크게 웃고만 싶었었다.
사단장에게 당한 일쯤이야 문제도 되지않았다. 문제는
단 하나...... 현 중위를 따라간 병력이 예상외로
많다는 점이었다. 대대장은 최 중사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속으로만 혀를 찼다.
멍청한 놈.
최 중사가 조금만 똑똑하게 굴었더라면
그렇게까지는 따라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전부해서 18명이라는 숫자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사단장이라 해도 몰살을
기도하기에는 무리라고 해야 옳았다. 하지만 달리
어떤 방법이 있을 것인가.
해치워야 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그리고 현 중위란 놈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위협을 가하기까지 해 온 이상
어떻게든 여기서 해치워야만 했다. 놈을 살려둘 수는
없었다.
"대대장."
박 중령은 다시 부동자세를 취해야 했다.
"예, 각하."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알고 있지?"
"예."
한껏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대장은 대답했다.
"난 아직까지 우리 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소릴 들은 적이 없어. 자넨 들어 봤나?"
"죄송합니다."
"죄송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지 않나? 책임을
져야지."
"알고 있습니다."
대대장의 대답에 사단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푸념처럼 말을 잇고 있었다.
"대대장 하나가 책임져서 끝날 일이라면 내가
이러겠나......?"
사단장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대대장은
속으로만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다.
사단장으로서도 이 일은 중요했다. 결고 대대장
자신만의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에는
강경진압밖에는 없었다. 현 중위란 놈이 섣불리 이
편에서 나댈 일은 아니었다. 때를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현철기...... 하고 대대장은 어금니를 악물며
불러 보았다.
너는 살아날 수 없어.
"그, 남은 병력들은 어디 있나?"
사단장은 최 중사와 13명의 석천소대원들을 말하고
있었다.
"네,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뭔가?"
"그 병력들은 역시 귀대를 시키는 게
좋지않겠습니까? 사기문제도 있고, 혹시 또 동조자가
나올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사단장은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더니
또박또박 끊는 목소리로 명령해 왔다.
"잔소리 말고 잘 통제나 하고 있어. 나한테 다
생각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대대장은 거수경례를 해 보이고 텐트를 빠져
나왔다. 사단장은 더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개자식들......
텐트를 나오자 당장에 분교장 쪽으로 시선이 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저 분교장을 흔적도 없이
날려 보낼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에 대대장은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고인택, 현철기...... 그리고
또 다른 몇 사람의 얼굴을 함께 떠올렸다가 대대장은
황급히 지워 버렸다.
앞선 중대들과는 상당히 간격을 두었다가 1중대는
대대로 들어섰다. 참모부 앞에서 바라보고 있던
지섭은 중대의 행렬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다른 중대보다도 더 기운이 빠진듯한
모습들이기도 했고, 어딘지 숫자가 모자라는 것
같기도 했다.
왜 저러지?
참모부 앞에 와 서는 병력들을 살피다가 이윽고
지섭은 깨달았다. 자신의 소대인 1소대가 보이지
않았다. 어찌된 일일까? 또 무슨 사고가 생기지는
않았을까. 1소대를 뺀 중대병력은 도열을 끝냈고,
중대장을 대리한 노주헌 중위가 저녁부터 돌아와
대대를 통제하고 있는 작전관에게 보고를 했다.
작전관 김진우 소령은 별다른 지시없이 중대를
해산시켰다. 하지만 노 중위는 병력을 중대로
돌아가도록 지시하고 나서 조심스럽게 작전관에게
다가섰고, 빠르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지섭은 분명히 보았다.작전관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그리고 느낄 수 있었다. 철기와
소대원들에게 다시 무슨 사고가 발생했음을.
"정말이야?"
"네 정말입니다."
두 사람이 나직하게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애들이 좀 모자라지 않은가 했지......"
작전관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대대병력이 철수하고 대신 수색대
1개중대가 투입되었다는 것까지는 지섭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작전관과 노 중위가 나누고 있는
밀담은 그 외에 다시 무언가 사건이 터졌으며, 그것은
바로 철기의 1소대가 저지른 일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얘기를 끝내고 돌아서던 노 중위의 시선이 지섭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무언가 말을 할 듯 할 듯하던 노
중위는 끝내 입을 열지 않고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지섭은 생각했다.
혹시?
철기가 모종의 반란을 시도한 것은 아닐까. 어젯밤
풀려나온 후로 지섭은 안준호 등 참모부 요원들의
입을 통해서 철기가 고인택의 편지를 발견하고 또
보안대로 끌려가다가 달아나서 현장에 가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풀려난 것도 철기의 도주로
해서였음도 짐작할 수 있었다. 즉 보안대장은 지섭
자신과 철기를 하나로 엮어서 무슨 혐의인가를
만들려다가 포기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렇게
현장으로 간 철기가 수색대의 투입을 보고 그냥 있을
리 만무했다. 작전관은 침통한 얼굴로 돌아서서
참모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지섭은 얼른
비켜났지만 작전관의 시선은 비켜가 주지 않았다.
"박지섭."
"네, 상병 박지섭."
"현철기가 네 형이지?"
"네."
"그 죽일놈......"
지섭은 달아오르는 얼굴로 제 책상 앞에 가 앉았다.
모든 참모부 요원들은 24시간 대기였다.
본부중대원들이야 교대로 정훈실이나 취사장 같은
곳에 틀어박혀서 잠들을 자고 나오는 모양이었지만
지섭은 꼬박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무슨 일입니까?"
이제는 별달리 살필 것도 없는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던 교육관 김승일 중위가 현철기라는 이름에 귀가
번쩍 뜨였는지 나서고 있었다.
"현철기 그 자식이 소대원들을 데리고 분교장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야."
작전관의 한 마디에 참모부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져 버렸다. 어지간한 김 중위도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 멍해져서 서 있었다.
"죽일놈......"
다시 중얼거리면서 작전관은 의자에 몸을 던졌다.
그제야 김 중위가 다가서며 묻고 있었다.
"소대원 전부가 들어갔단 말입니까?"
지섭은 작전관의 대답에 귀를 곤두세웠다. 지섭뿐
아니라 전참모부 요원이 다 마찬가지인 듯했다.
"전부는 아니지만...... 반 이상이 들어갔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김 중위의
얼굴에 스쳐 가는 엷은 웃음을 지섭은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그런 웃음을 짓고 있을 사람이
결코 김승일 중위 혼자만이 아님을. 또한 짐작할 수
있었다. 소대원들 중 분교장에 들어간 반수가
누구누구이며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이
누구누구인지를. 하나하나 이름을 대라면 적어도
3분의 2 정도는 맞힐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요? 어떻게 한답니까?"
김 중위는 신바람이 나는 목소리로 다시 묻고
있었다.
"어떻게하긴? 수색 일개중대가 더
증원된다니까......"
작전관은 거기서 말을 흐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져야 할 말을 모를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제야 지섭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철기는......
끝내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 새끼 참......"
김중위는 혀를 차면서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지섭은 책상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다시 누군가가 소리치고 있었다.
일어나라, 박지섭!
지섭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일어나, 뭘 하고 있는거야?
안 돼......
cp텐트가 빤히 눈앞에 보이는 민가의 토담벽에
이리저리 기대어 누워 있는 13명의 소대원들을 한참
바라보고 서 있다가 최 중사는 돌아섰다. 아까부터
텐트에서 멀리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배기에 나와 서
있는 대대장을 향해서였다. 아무래도 그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픈 일이 있어서였다. 그 쪽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에도 자꾸만 분교장 쪽으로 눈길이 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저 안에 있는 소대원들은 어떤 모양으로 잠들을
이루고 있을까. 최 중사는 혼자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봤자 괴롭기만 한 일이었다. 걸음을 빨리해서
다가가자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하던 대대장이 홱,
돌아보았다. 최 중사는 두어 걸음 앞에서 발을
멈추면서 서둘러 말을 꺼냈다.
"여쭤 볼 게 있습니다. 대대장님."
"뭐야?"
대대장은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있었다.
"박도기 중사 얘기를 들었습니다. 박 중사하고
고인택이 얘기는 사실입니까?
"무슨 얘기 말이야?"
대대장은 처음 듣는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하지만 최 중사는 알 수 있었다. 대대장은 이
편의 얘기가 무슨 뜻인지를 다 알고 있었다. 이제는
그의 표정이라면 훤하게 읽을 수가 있는 최 중사였다.
"박 중사가 광주에서 고인택의 친구들을 쏴
죽였다는......"
"현철기가 그러던가?"
대대장은 날카롭게 최 중사의 말허리를 자르고
있었다. 최 중사는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입니까?"
"왜 그런 걸 알려고 하지?"
대대장은 냉혹하게 최 중사의 물음을 회피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 중사도 이 대목에서만은 물러날 수
없었다. 아무리 대대장이 시키는 대로 모든 것을 따라
해 온 일개중사라 해도. 그의 공범자라 해도.
"전 알고 싶습니다."
"글쎄, 왜?"
대대장은 최 중사의 턱밑에 지휘봉을 내밀어 보이고
있었다. 최중사는 가슴속에서 발끈 일어나는 노기를
누르면서 다시 대답했다.
"저는 석천소대 선임하삽니다. 고인택이 그런 짓을
한 이유가 있다면 저도 알아야 합니다."
순간 대대장은 흥, 하고 크게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선임하사? 그래서 저 새끼들을 다 저기로
들여보냈나?"
대대장의 지휘봉이 끝내 쿡, 하고 턱밑을 찔렀다.
보는 사람이라곤 없는데도 수치심이 화끈 두 볼을
달아오르게 했다.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최
중사는 집요하게 다시 물었다.
"사실입니까?"
"사실이면 어떻할거야, 임마!"
대대장의 지휘봉이 이번에는 뺨을 후려갈겼다.
찢어지는 듯한 통증보다도 더한 아픔이 가슴을 가르고
지나가는 듯했다. 입술을 깨물면서 최 중사는 혼자
입속으로 뇌까렸다.
사실이군요......
109. 1981 년 3월 24 일 ①
"이와 같이 지금 당선권에 진입했다고 판단되는
것은 우리와 무소속의 김동호 후보, 둘뿐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른 군소후보들은 신경을 쓸 것이
없다고 보고 문제는 김 후보와 우리의 순위에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일위로 당선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의 전망은 백중세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겠습니다. 원천지역에서는 우리가
앞서고 있는 것으로 분석이 되고 있습니다만, 김
후보의 출신지역인 통화에서는 아무래도 우리가
불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거일까지
딱 하루를 남겨 놓은 오늘, 우리가 마지막으로 총력을
경주해야 할 곳은 역시 통화지역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통화지역의 공략에 있어서......"
선거사무장은 마치 사단장 시절에 많이 받아 본
브리핑을 하듯 미니차트를 넘겨 가면서 장광설을 펴고
있었다. 이병우 후보는 갑자기 머리끝으로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느끼고 그의 설명을 제지했다.
"그만."
사무장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며 말을 멈추었다.
동석해 있던 군수와 경찰서장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이병우 후보는 손을 내저었다.
"피곤하구만, 그만하세."
"의원님....."
사무장은 언제나 이병우 후보를 의원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그 호칭마저도 역겹기만 했다.
이병우 후보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그만 하자니까. 이제 다 끝난 거 아니겠어?"
"그래도 오늘은 마지막 고빕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밀어부쳐야......"
"자네가 다 알아서 해. 난 좀 쉬고 싶어."
따라서 엉거주춤 일어나고 있는 군수와
경찰서장에게 가볍게 고개만을 까딱해 보이고 이병우
후보는 사무실을 나와 버렸다.
"의원님"
사무장이 따라 나왔다. 이병우 후보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일렀다.
"난 좀 쉬겠네.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알아서
다 해줘."
"의원님......"
하지만 이병우 후보는 더는 대꾸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차에 올랐다.
"가자."
이병의 후보의 우울한 목소리에 운전사는 행선지를
묻지도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
빌어먹을......
차창으로 스쳐 가는 원천읍의 아침풍경을
바라보면서 이병우 후보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 시들하기만 했다. 선거는
무엇이고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또 무엇 한다는
말인가. 자신이 믿어 온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이
때에. 국회의원이 되고 앞으로 어떤 정부의 요직을
맡게 된다고 해도 이제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은
허수아비의 삶일 뿐이었다.
"추모탑으로 가자."
이병우 후보는 나직하게 일렀다. 그리고 시트
깊숙히 몸을 묻었다. 정말이지 아주 오래오래 잠에
빠져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모든 것을 잊고. 하지만
어젯밤도 이병우 후보는 영 잠을 이루지 못했다.
뒤척이다가 뒤척이다가 새벽녘에 겨우 눈을 붙였는데,
그 꿈 속에 나타난 것은 장석천 대위였다. 그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이병우
후보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두 손을 허위적거리면서
멱살을 붙잡으려고 했다.
살려 줘요. 살려 줘요......
그 모습이 너무도 생생해서 이병우 후보는 악-
비명을 지르면서 잠에서 깨어났었다. 그리고 지금도
섬뜩하기는 마찬가지였다.장석천...... 그가 대대장에
의해 살해된 게 사실이라면 이병우 후보 자신도
일종의 공범자라고 해야 옳았다.자신은 군신 장석천
대위의 추모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대대장의 범죄를
은폐시키는 일을 도운것이 아니겠는가. 이병우 후보의
귓가로'장석천의 노래'의 가락이 스쳐 가고 있었다.
장부로 태어나서 이 땅 위에 한평생
나만을 생각하랴 목숨만을 생각하랴
한 목숨 내던져서 열 목숨을 얻는다면
한 순간 불꽃 되어 영원 충성 밝힌다면
너도나도 따르리라 님의 길은 군인의 길
너도나도 따르리라 님의 길은 대한의 길......
그만...... 속으로만 비명을 내지르면서 이병우
후보는 머리를 흔들고 또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차가 갑자기 멈춰서는 바람에
이병우 후보는 눈을 떴다. 추모탑으로 가는 다리,
장석천교 앞이었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한
사내가 차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을. 그 사내가
누구인지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엊그제 추모탑
앞에서 장석천 대위가 대대장에게 떼밀려서 죽었다고
말하던 사람, 여준구 씨였다. 어쨌으면 좋겠느냐는
얼굴로 운전사는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이병우
후보는 말없이 차에서 내려섰다. 3월 아침의 공기가
싸늘하게 뺨에 닿았다.
"죄송합니다."
여준구 씨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
사람은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이병우 후보는
긴장으로 몸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만...... 절 기다리신
겁니까?"
여준구 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병우
후보는 무너진 추모탑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럼 올라가면서 얘기합시다."
이병우 후보가 앞을 서자 여준구 씨는 곧 따라와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아드님은 괜찮습니까?"
다리를 건너면서 이병우 후보는 물어 보았다.
자신으로 인해 장석천 대위가 죽었다는 죄책감으로
미쳐 버렸다는 친구...... 따지고 보면 그도 지신과
대대장이 저지른 일의 희생자였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녀석 일쯤은 문제도
아니구요."
"......"
이병우 후보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여준구 씨의
말은 다시 대대에 무슨 사건이 생겼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혹시 탈영한 그 병사가 죽은
것일까. 하지만 물어 보기가 두려웠다. 그런 이병우
후보의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여준구 씨는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이병우 후보도 멈춰서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병우 후보는
여준구 씨의 눈빛에 기가 질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무엇일까. 여준구 씨를 이렇게 당당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은 진실이었다. 진실......
"현철기 중위네 소대가 집단으로 탈영을 했답니다."
"뭐라구요?"
이병우 후보는 저도 모르는 새 소리를 높이면서
여준구 씨에게로 다가섰다. 집단탈영이라니? 여준구
씨는 침착하게 말을 잇고 있었다.
"제 눈으로 본 건 아닙니다만 확실할 겁니다.
어젯밤 대대병력은 다 돌아왔습니다. 수색대하고
교대를 했다는 군요."
"그러면 그 탈영병을 찾았다는 겁니까?"
"예,그리고 수색대로 교대를 하니까...... 현
중위는 그 탈영한 고 일병을 죽이려고 하는 것으로
판단을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소대원들을
데리고 그...... 고 일병이 있는 분교장 안으로
들어가서 합류를 했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현
중위의 소대를 수색대가 포위하고 있는 형국인
모양입니다."
"......"
이병우 후보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로 자신이 겪고 있는 일처럼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수색대 투입을 결심하기까지의 사단장과
대대장의 심리와, 거기에 반발하는 현 중위의 마음과,
지금 현재의 양쪽의 상황을. 일은 걷잡을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음이었다.
"이대로 두면 현 중위는 죽습니다. 아니, 어디 그
사람 하나뿐입니까? 소대가 몰살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소대가 다 들어갔답니까?"
이병우 후보는 겨우 한 마디를 할 수가 있었다.
"그건 아닙니다만, 절반 이상이 들어간
모양입니다."
소대의 절반이라 해도 어림잡아 열다섯 명
정도...... 적은 수가 아니었다. 여준구 씨는 제
아들이 죽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간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든 살려야 합니다."
"장소가 어디랍니까?"
"모곡리......라고 들었습니다."
"알았습니다."
이병우 후보는 여준구 씨를 두고 돌아섰다. 그리고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승용차를 향해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들어와."
사단장의 목소리에 최 중사는 텐트 안으로
들어섰다. 사단장은 야전침대에 걸터앉아 있었고,
대대장은 그 옆에 옹색하게 부동자세를 취하고 서
있었다.
"중사, 최도천......"
보고를 하려는 최 중사를 사단장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제지했다.
"아, 됐어,됐어. 생략하고 이리 가까이 와."
사단장의 그런 태도부터가 심상치 않은 요건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층 더해지는 긴장으로 몸으
굳히면서 최 중사는 그에게로 다가섰다. 그렇게 불러
놓고도 사단장은 잠시 말이 없이 허공을 쳐다 보는
눈빛이었다. 최 중사는 부동자세로 서서 명령을
기다렸다. 한참 만에야 사단장의 입이 열렸다.
"선임하사."
"예, 중사 최도천...."
"자네도 저 안으로 들어가 줘야겠어."
"...."
최 중사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안으로? 사단장은 분교장으로 들어가라고 말하고
있음이었다.
"지금 곧 좀 들어가 줘야겠어."
사단장은 거듭 말하고 있었지만 최 중사는 여전히
말뜻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사단장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대대장이 빠르게 불을 붙여 주고 있었다.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지.... 그 외엔
방법이 없어. 말하자면 희생을 최소화하자는
얘긴데.... 자네가 저 안으로 들어가. 선임하사니까
소대원들하고 같이 있겠다고 핑계를 대고.... 그래서
소대원들을 하나씩 하나씩 설득을 해보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제야 짐작이 갔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최선을 다해서 소대원들을 설득해. 물론 현 중위
같은 놈이야 말을 안 듣겠지만.... 그러니까 그 놈
모르게 하나씩 설득해야 할거야. 다 데리고 나오라는
소리는 안 해.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라는 얘기야.
그래서 몇 명이든 좋으니까 데리고 나와. 알겠나?"
"...."
"시간은 앞으로 사십팔 시간을 준다. 그러니까
이십육일 아침까지 기다린다는 말이다. 그 때까지
설득에 성공한 병사들만을 데리고 나오도록. 단 한
명이라도 좋다. 그렇지만 아마 적어도 반수 이상은
성공시킬 수 있을거야. 자네 책임이 커. 최선을 다해
봐."
"최 중사는 할 수 있을 거야."
대대장이 부추기듯 하는 말이었다. 순간 최 중사는
한 가닥 의심이 가슴속을 스쳐 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혹시?
이 일은 대대장의 계획이 아닐까. 그리고 대대장이
노리는 것은? 하지만 곧 최 중사는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리야 없을 것이었다. 또 사단장은
어제저녁에 말하지 않았던가.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남아 있으라고. 그래도 최 중사는 어쩐지
대대장이 의심스럽기만 했다.
"지금 곧 준비를 하도록."
사단장은 잘라서 명령하고 있었다. 대대장이 또
나섰다.
"혼자 들어가지 말고 몇 명 데리고 들어기는 게
좋지 않겠나? 설득력 있는 고참병으로 몇 데리고
들어가라구."
"알겠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따라갈 병사들이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분교장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곧
사지로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정권오나 유 하사가 최
중사의 말을 잘 들어 왔다고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래 줄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단장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어깨를 두드리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손을
잡아왔다. 꺼름칙한 촉감이었다.
"수고해 줘. 이 일만 성공하면 자넨 훈장감이야."
훈장.... 최 중사는 부르르르 진저리를 쳤다.
무너진 추모탑의 모양이 눈앞에 스쳐 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언제 들어가겠나?"
대대장이 다그치듯 묻고 있었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눈앞에 선 두 사람이 너무도 끔찍하게 여겨져서 최
중사는 서둘러 텐트를 나와 버렸다.
민가 앞에서 남은 13명의 소대원들은 수색대대에서
얻어 온 밥과 부식을 하나로 섞어 '개밥'을 만들어서
먹고들 있었다. 최 중사가 다가가자 유 하사가
일어났다.
"식사하십시오."
"아니야, 먹어라들."
손을 내저어 사양을 해 놓고 최 중사는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민가의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웬만큼
양이 찼는지 스푼을 바지에 벅벅 문질러 닦으면서
정권오가 걸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뭐, 별거 아니다."
시큰둥하게 대답해 놓고 최 중사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리고 시선을 분교장 쪽으로 들었다. 저
안에 들어 있는 녀석들은 아침식사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정권오가 옆에 와 앉았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최 중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려웠다. 자신이 말을
꺼냈을 때
아무도 동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사안이
사안인 이상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선임하사님."
정권오는 끈질기게 재촉하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기분으로 최 중사는 입을 열었다.
"나보고 저 안으로 들어가라는 지시다."
"...."
어지간한 정권오도 질린 표정이 되고 있었다. 최
중사는 넋두리를 하듯 말을 이었다.
"내가 들어가서 설득을 하라는거야. 그래서 단
몇명이라도 데리고 나오라는 거다."
"현 중위가 보내 줄까요?"
아예 경칭 없이 현 중위라고 부르면서 정권오는
묻고 있었다. 최 중사는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대답했다.
"보내 줄 거다. 그 사람은."
정권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더니 이윽고
결심했다는 듯 내뱉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데리고 가 주십시오."
최 중사는 왠지 믿어지지가 않아서 정권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제법 의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던 참입니다. 쌔끼들....
워낙 정신없이 설치는 통에 현 중위를 따라갔지만....
내 말을 들을 놈들도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저도
가겠습니다."
최 중사 편에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정권오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유 하사님도 데리고 가지요."
하고 아직 밥을 먹고 있는 소대원들을 향하고
있었다. 최 중사는 무엇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우두커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물내리 쪽에서 야산을 끼고 돌아나오자 모곡리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길을 따라 집들이 늘어선
모곡리 마을에서 북쪽으로 조금 동떨어져서 분교장은
있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그 안에 있다는
석천소대원들도, 포위를 하고 있다는 수색대 대원들도
눈에 띄지를 않아서 그저 평화롭기만 했다. 이병우
후보는 시선을 앞으로 돌려서 cp텐트를 찾았다.
텐트는 이 편에서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어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세워."
이병우 후보는 텐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다 차를
멈추게 했다.
명색이 cp인 텐트 앞까지 차를 몰고 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실례일것 같았다. 아무리 권정준 소장과는
서로 동기이고 자신이 전임 사단장이라고 해도, 지금
자신은 현역이 아니었다. 차에서 내려서서 이병우
후보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텐트 주위에서 경계를
서고있던 병사 하나가 안에다 대고 뭐라고 보고를
하는 것 같았다. 이병우 후보는 다시 분교장 쪽에다
눈을 주었다. 정말이지 그림처럼 작고 아름다운
학교였다. 저기에 수십 명의 병사들이 들어가
그들로서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명령에 저항하고
있으며 상황이 극적으로 반전되지 않는 한 죽음을
면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이병우 후보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 또한 자신은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여기를 찾아왔다는 말인가. 자신은 이제
사단장이 아니지 않는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야.
하지만 이병우 후보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어쨌든
모른 척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이 사건에 책임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병우
후보는 걸음을 빨리 했다. 그리고 텐트안에서 사단장
권 소장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대대장도
따라나와서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고가 많네."
이병우 후보는 웃어 보이려고 애를 쓰면서 손을
흔들었다. 권 소장은 말없이 미간을 찌푸리고만
있었고, 대대장은 거수경례를 해왔다. 왠지 온 몸이
풀을 먹인 듯 뻣뻣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이병우 후보는
권 소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지못한 듯 잡아 오는
권 소장의 손은 차디차다.
"왠일인가?"
그 목소리는 손보다도 더 싸늘했다. 이병우 후보는
두 볼이 저릿저릿 저려 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억지로 다시 웃는 얼굴을 했다.
"그냥.... 좋지않은 소식을 들어서.... 어떻게 됐나
하고 와 봤지."
"바쁘지 않은가?"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기색을 드러내는 권
소장이었다. 드러내 놓고 하는 냉대에 점점 더
거북살스러운 마음이 되어 가고 있었지만 이병우
후보는 권 소장에게로 다가서며 나직하게 말했다.
"얘기 좀 하세."
하지만 권 소장은 태도를 바꾸지 않은 채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여기서 그냥 하지. 길게는 나도 시간을 내지
못해."
이병우 후보는 대대장 쪽의 눈치를 얼핏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준구 씨와 명옥의 말에 의하면
장석천 대위를 떼밀어 죽게 만들었다는 장본인 박민
중령은 분교장 쪽을 바라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 말을 꺼내기는 싫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병우 후보는 분교장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안에 다른 소대원들이 들어갔다면서?"
"그게 무슨 소린가?"
권 소장은 아예 딱 잡아떼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이병우 후보는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자신은 현역이 아니었다. 자신은 실패한 순수
야전군인이면서 더러운 정치군인이었다. 권 소장에게
화를 낼 자격이 없었다.
"다 들어서 알고 있네. 정확하게 몇 명이나
들어갔나?"
순간 권 소장의 눈이 희게 빛나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한 대 후려치기라도 할 것처럼 바싹 다가서고
있었다.
"몇 명이 들어가 있건 자네하곤 상관이 없는 일
아닌가? 왜, 뭣 때문에 여기 나타난 건가?"
얼굴로 화악 뜨거운 기운이 몰려들었다. 얼마
전까지의 부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수모였다. 하지만 꾹 눌러 참고 이병우 후보는
벼르고 왔던 한 마디를 해야 했다.
"하나도 죽이면 안 되네"
"닥쳐!"
권 소장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불끈 치미는
노기에 이병우 후보는 자칫 주먹을 내뻗을 뻔했다. 권
소장은 미친 듯이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자네가 아직도 사단장인 줄 아나? 어디 와서
그따위 소리를 하는 거야? 건방지게...."
"너무 심하지 않나?"
이병우 후보는 겨우 한 마디를 할 수 있었다.
"심해? 자넨 자네 처지를 너무 모르고 있구만.
국회의원이 된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지만.... 자네가 옷벗은 이유를 벌써
까먹었나?"
"...."
이래도 참아야 할까? 그러나 이병우 후보는 끝까지
이를 악물고 견뎌 냈다.
"뭐라고 말해도 좋아. 그렇지만 저 안에 있는
친구들.... 죽이진 말아. 하나도....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살려 내게. 그래야 되네. 특히 현 중위란
친구.... 할 말이 많을 거야."
말끝에 이병우 후보는 다시 대대장을 노려보았다.
박 중령은 역시 외면을 하고 이 쪽을 바로 보지 않고
있었다.
"지휘관은 나니까 다른 소리 할 것 없네, 돌아가."
권 소장의 손이 이병우 후보의 등뒤를 가리켰다.
이병우 후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네. 돌아가지. 하지만 정말 명심해둬. 죽이면
안돼."
"돌아가라니까!"
이병우 후보는 더는 대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왠지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만 같았지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할 말은 다 한 셈인가?
아니었다. 대대장에게 할 말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하고 이병우 후보는 스스로를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아무것도 아니다.
권 소장의 말대로였다. 이병우 후보는 차에 오르기
전에 다시 한번 분교장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살아야 한다들.
"수고들 해줘."
사단장은 세 사람의 손을 번갈아 잡았다가는 크게
흔들면서 놓아주었다. 하지만 최 중사의 가슴은 큰
고깃덩어리라도 걸린 듯 답답하기만 했다. 방금 전
사단장인 이병우 후보가 다녀가는 모양을 최 중사는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언쟁도 또렸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최중사를 섬뜩하게 한 것은
현 중위도 할 말이 많을 거라는 한 마디였다. 그 말은
충분히 암시를 해주고 있었다. 이병우 후보도 이제
장석천 대위의 일을 알고 있음을.
"빨리들 가."
대대장이 재촉을 해서야 최 중사는 정신을 차렸다.
사단장에게 거수경례를 해 보이고는 유 하사와
정권오에게로 돌아섰다.
"가자."
남은 소대원들로부터 거둔 전투식량을 야전상의
주머니마다 채워 넣어서 퉁퉁하게 부푼 모습이 된
정권오와 아직도 볼이 부은 표정의 유 하사는 아무 말
없이 최 중사의 뒤를 따라 왔다. 곧 정훈관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졌다.
"현 중위, 들어라. 현 중위는 들어라. 지금 최 도천
중사가 들어간다. 쏘지 말아라. 선임하사 들어간다."
그리고 최 중사 일행이 학교 담장에 이를 때까지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담 앞에서 최 중사가
머뭇거리고 있자 다시 정훈관이 방송을 했다.
"현 중위, 최 중사가 들어간다. 쏘지말아라!"
"알았다! 들어오라!"
그제야 현 중위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려퍼졌다.
최 중사가 눈짓을 하자 정권오가 먼저 담을 넘었다.
그리고 최 중사와 유 하사는 거의 동시에 훌쩍 몸을
날렸다.
110. 1981년 3월 24일 ②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을 보고 근우는 벌떡 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
놀라는 근우를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띠고
바라보면서 다가오는 사람은 바로 건호였다. 박태환
선생의 작은아들, 진호의 동생.
"어떻게 여길....?"
근우는 바보처럼 중얼거리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여전히 훌쭉하니 마른 몸매였지만 얼굴만은 그전과는
다르게 검게 그을린 모습이었다. 근우는 건호의 손을
당겨 잡았다. 그리고 크게 흔들었다. 건호는 근우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겨두고만 있었다.
"오랜만이야.... 얼마만이지?"
"십 년하고.... 한두 해 지났죠?"
건호는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랬다. 벌써
12년 전의 일이었다. 근우에게 박태환 선생의 비밀을
담은 노트를 건네 주고 떠났던 것이. 그 때를
떠올리자 근우는 다시 가슴속에 큰 구멍이 뚫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앉아, 응?"
근우는 건호의 손을 잡아 끌며 소파에 앉혔다. 어쩔
수 없이 정우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갔지만 근우는
보이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벼운 농담을
던지듯 물어 보았다.
"참 이렇게 내 사무실까지 나타나도 되는 건가
모르겠네, 자네?"
건호는 이빨을 하얗게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만은 옛날과 꼭 같았다. 정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근우가 사퇴를 하기로 되어있던 22일에는 보안대장이
하루만 있으면 풀려날 거라고 했었지만 이제 근우
편에서 그들에게 등을 돌려 버렸으니 약속을
지켰으리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아닌게 아니라 좀 겁나더군요. 이 사무실도 이제는
본격적으로 감시를 받을 텐데 말이죠, 나 때문에 최
사장님까지 얽혀 들어가면 어쩌죠? 꼬투리를 못
잡아서 안달일 텐데...."
"난 상관없어"
서양사람들처럼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근우는
말했다. 건호는 다시 이빨을 드러냈다.
"배장이 대단해지셨네요."
"원래 이렇지 뭐."
하하하하.... 하고 근우는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지만 건호는 금세 긴장한 얼굴이 되고
있었다.
"빨리 말씀을 드리고 말지요. 보안대장이 아마
정우를 풀어 준다고 했을 겁니다만, 정우는 못
나왔습니다. 쉽게 나올 것 같지도 않구요."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어."
근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 오늘 떠납니다. 제가 힘이 될 것 같지도 않고,
이제 여기서 더할 일도 없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말씀 드리고 갈려구요."
건호의 두 눈에 돌연 광채가 어리는 듯했다. 근우는
저도 모르는 새 긴장으로 몸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엊그제만 같았어도 이런 말씀 드리러 오지 않았을
겁니다만, 이제는 입장이 달라지셨으리라고 믿고
찾아왔습니다."
건호는 잠시 말을 끊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눈치였다. 근우는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꼭 선거를 하셔야
합니까?"
"무슨 소린가?"
"긴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최사장께서도 이번
일을 통해서 지금 이 나라를 장악하고 있는 정권이
얼마나 사악한 무리를인지 알았을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네."
근우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건호는 조금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선거에 계속 매달리려고 합니까?"
"그 자들과 싸우기 위해서야."
"그게 아닙니다. 선거에 임하는 것 자체가 저들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최 사장께서 과감하게 저들을
공격하는 일에 나서 주지는 않겠습니까?"
"나를 보고 반정부 운동이라도 하라는 말인가?"
건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있었다.
"왜 안 됩니까? 예전에 우리 아버지를 공격하시던
패기는 어디로 갔습니싸? 그 동안 보안대장을
위시해서 저들에게 당해 온 일을 낱낱이
털어놓으세요. 그리고 선거를 거부하세요."
"그런 일이 가능할 거 같은가?"
"물론 어렵겠지요. 그렇지만 이제는 잃을 것은 다
잃은 상태가 아닙니까? 더 무슨 미련이 남아
있습니까?"
근우는 건호의 말대로 하고 싶다는 충동을 한순간
뜨겁게 느꼈다. 하지만 충동은 어디까지나 충동일
뿐이었다.
"난 그런 사람이 못 돼"
"최 사장님."
건호는 두렵게 느껴질 만큼 나직한 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근우는 그의 말을 미리 자르기로 했다.
"아니야, 내 말을 듣게. 자네 말뜻은 나도 알아.
그렇지만 난 자네나 우리 정우 하고는 됨됨이가 달라.
알겠나? 자네가 보기에는 이미 저 사람들의 눈 밖에
나서 벌써 여러가지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처지에,
선거에 이기지도 못할 것이고, 앞으로도 또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판국에 왜 선거라는 방법으로 싸우려
하느냐.... 하고 어리석게 생각 되겠지. 하지만 이게
내가 아는 유일한 투쟁 수단이야. 난 말이지.... 내가
교육받고 경험해 온 방법으로밖엔 싸울 수 없는 거야.
최근우가 반정부 운동? 웃기지 말게."
"...."
건호는 이제 싸늘한 표정으로 근우를 뚫어져라고
바라볼 뿐이었다. 근우는 꼭 건호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라는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난 이 나라 전체가 얼마나 부당하게
장악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해. 하지만 나는....
부당하든 정당하든 정해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싸우는
것 뿐이라네."
"떨치고 나오지는 못하십니까?"
건호의 질문에 근우는 후후, 하고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나는 말이지.... 자네와는 자라 온 환경이 달라.
우리 아버지.... 자네아버님의 종이었던 그 분은 바로
이 테두리 안으로 들어 오기 위해서 평생을 뼈를 깎는
고통으로 보낸 분이라네. 자네네를 원망한다는 뜻은
아니야. 다만 우리는 그렇게 법과 제도가 인정해 주는
테두리 안으로 들어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애를
썼다는 말일세. 자네하고 나는 본의 아니게 둘이서
같은 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건 외형뿐이고,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자네가 자네 아버지에대해
품었던 감정 같은 건 일종의 사치라고까지 생각했네."
반발을 예상했지만 건호는 아무런 대거리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근우는 그런 건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계속했다.
"그렇게 들어온 테두리 안에서 내가 내 발로
나가라는 말인가? 그렇게는 못해. 나는 싸워도 내
방법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 이말이야. 정우도
그래, 안됐지만 이제 난 그 애한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네. 자기가 저지른 일이니 자기가 책임 질 수밖에
없는 거지."
"그건 정우도 바라지 않을 겁니다, 저는 다만...."
못마땅한 듯 뇌까리는 건호를 향해 근우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 둬!"
"...."
"이유가 뭐든간에 자네는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알겠나? 자네 아버지는 언제나
정당해서 우리 아버지를 손가락질하고, 또 나한테까지
그랬고, 이제 와서는 자네까지 나를 보고 잘못됐다,
고쳐라, 이래라, 저래라할 텐가! 그만하라구, 이제
그만해 두란 말이야!"
제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있음을 근우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슴 어딘가가 쨍, 쨍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것 같은 아픔이 온몸을 휩쌌다. 그리고
근우는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뭐냐?
자신이 싸우려고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어느 순간에는 명확해졌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는 가물가물 흐려지곤 하는 것이 그 상대였다.
무엇일까? 누구일까? 아니, 어쩌면 적은 존재하지도
않고 혼자서 자기 그림자를 상대로 지치도록 싸우고
있지는 않을까. 박태환 선생? 보안대장? 정태산 장군?
민정당의 후보? 그 모두가 적인것 같기도 했고, 그
모두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근우
자신이 아마도 평생 이 싸음을 그만두지 못하리라는
예감이었다. 그리고 그 싸움은 그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해야만 했다. 돈에는 돈으로, 술수에는
술수로, 권력에는 권력으로.... 건호나 정우와 같은
길을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근우는 자신의 적들과 같은 부류인
것이다. 다만 강하고 약하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근우는 더 강해져야만 했고, 그들을 피해 가서는
안되었다.
"알았습니다."
한참만에야 건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치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고 난 것처럼 몸을
늘어뜨리고서. 근우는 그를 따라 일어설 수가 없었다.
다만 아득하게 높은 허공에 매달린 것 같은 건호의
얼굴을 향해 한 마디 해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어쨌든 고맙네. 정우를 도와 줘서."
묘한 인사라고 스스로도 느껴졌지만 실제로 근우는
그런 기분이었다. 같은 반정부 운동을 해도 건호 같은
사내라면 정우를 여러모로 감싸 주었을 것이라고
믿어졌다. 건호는 다시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욕하지 마십시오. 어린애는 들어가고, 나이깨나
먹은 놈은 도망가는 거나 한가집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네."
앉은 채로 말하는 근우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서
있더니 건호는 한숨처럼 한 마디를 토해 냈다.
"최 사장님은 분명히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
같군요"
근우는 씁쓸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밉지가 않군요. 그 방법대로
멋지게 싸우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건호는 근우를 등지고
돌아섰다.
"잘 가게."
근우는 겨우 그 말 한 마디만을 해줄 수가
있ㅇㅆ다.
몸을 웅크리고 교실을 막 나서려던 철기는 복도에서
누군가가 낮게 얘기하는 소리에 귀를 세우고
쪼그려앉았다.
"자, 먹어. 배 많이 고프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권오였다. 복도 쪽의
근무자에게 무언가 먹을 것을 권하고 있는 눈치였다.
아마도 전투 식량 따위일 것이었다. 철기는 이미 최
중사가 정권오를 데리고 들어왔을 때부터 녀석이
야전상의 속에 무언가를 잔뜩 간직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정권오와 근무자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잠시 먹는 일에 열중하는 듯했다.
철기는 그대로 일어나서 나갈까 어쩔까 하고
망설였다. 녀석들의 기척을 엿듣는다느 게 왠지
치사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최 중사와 정권오의
진심을 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들이 철기의 생각에 동조해서, 아니면 소대원들을
진심으로 염려해서 분교장으로 들어왔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대대장과 사단장의 지시를 받았을
것이었고, 그 지시가 어떤 내용인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곧 정권오의
낮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 오기
시작했다.
"이게 뭐 하자는 짓들이냐? 다 쓸데없는 일이라구."
하지만 누구인지 모를 근무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정권오의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고인택이가 안됐다는 건 나도 알아. 그렇지만
그런다고 해서 사단장이 그래, 내가 잘못 생각했다.
너희들 다 용서해 주마.... 이럴 것 같애? 임마,
죽으면 죽은 놈만 억울한 게 군대야. 아, 제대해서
장가는 안 가고 취직은 안 할거야? 살아야 제대도
하지."
"누가 듣겠어요."
조심그럽게 대꾸하는 것은 이태후였다.
"놔 둬. 아까 보니까 자고 있더라. 하여튼 배짱은
편한 사람이야. 우리를 이렇게 사지에 몰아 놓고는
잠이 오나?"
"들어요...."
"아, 놔 두라니까. 너, 잘 들어 둬."
정권오의 목소리는 갑자기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아지고 있었다. 철기는 더욱 바짝 귀를 세워야
했다.
"여차하면 나하고 선임하사님하고 둘이서
소대장하고 한판 붙을지도 몰라. 너도 알아서 해라.
소대장편 들지 말라는 얘기야."
"...."
"이러고 있어 봐야 개죽음밖에 당할 일 없어.
미쳤냐? 안 그래?"
저 자식이.... 철기는 주먹을 불끈 쥐며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돌연히 나타난 철기를 보고 정권오는
당황해서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한 대 후려갈겨
주려던 생각을 철기는 빠르게 거두었다. 구태여
소란을 떨 것은 없다 싶었다. 녀석을 야단치는 일이
오히려 소대원들을 더욱 동요시키는 결과가 될지도
몰랐다. 그 또한 저 자들이 바라는 일이 아니겠는가.
"앉아라, 위험하다."
철기는 최대한 감정을 억제한 소리로 일렀다.
의아한 얼굴로 정권오는 몸을 굽혀 앉고 있었다.
철기는 한 마디 비아냥거려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심해, 총알은 얼굴 가려 가면서 날아다니지
않으니까."
정권오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여유를 보이려고
엷은 웃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얼굴이
밉살스러워서 철기는 다시 덧붙였다.
"건빵도 남는 게 있으면 권 하사한테 맡겨라.
얼마를 있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정권오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고 있었다. 철기는
몸을 굽히고 그들을 등졌다. 복도를 걸어 나와
수돗가를 향해 걸어가다 보니 물탱크에 기대앉은
최중사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잠이 들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깊이 숙인 그를 보고 철기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교장으로 들어올 때부터
왠지 맥이 풀린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최
중사였다. 철기는 교실 입구에서 물탱크까지의 공간을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그제야 최 중사가 눈을
떴다. 그에게 눈을 찡끗해 보이면서 철기는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셨다. 아무리 물을
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를 않고 있었다. 과연
자신은 이 대결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철기는
철모를 벗고 손바닥으로 물을 움켜서는 얼굴을
씻었다. 겨우 머릿속이 맑아지는 듯했다. 전투복
소매로 아무렇게나 문지르면서 철기는 최 중사의 옆에
가 앉았다. 왠지 최 중사의 몸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철기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었다. 최 중사 역시 말이 없었다.
바람이 전나무 가지 끝을 스쳐가고 있었다. 교무실
앞에 매달아 놓은 종이 딸랑딸랑 울렸다. 한순간
철기는 자신들이 마치 한가로운 수색정찰이라도 나온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만
같았다. 그랬다. 지금이라도 훌훌 털어 버리고 나가면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게 아닐까. 모든 일에 눈을
감아버리면 이렇듯 한가로워지리라.... 하지만 철기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철기는 슬며시 눈을 돌려서 최 중사의 옆 얼굴을
살펴보았다. 눈을 내리깔고 앉아서 최 중사는 한없이
착잡하기만 한 표정이었다. 아까 정권오가 이태후를
달래던 말에서도 알 수 있었지만 이들이 들어온
이유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하지만 지금 최 중사의
착잡한 표정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드디어 최 중사에게도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말일까.
"선임하사."
"네."
최 중사는 짧은 대답에도 한숨을 섞고 있었다.
철기는 오히려 잠시 망설여야 했다. 오래도록 벼르고
별러 온 그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는 것일까.
"말씀하시죠."
최 중사 편에서 재촉을 하듯 말하고 있었다. 철기는
불쑥 내뱉어 버리고 말았다.
"장 중위는 대대장이 죽였어요."
"...."
최 중사의 몸이 다시 푸르르 떨렸다고 철기는
생각했다. 그리고 이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선임하사는 그 걸 봤고, 알고 있어요. 그렇지요?"
"...."
최 중사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 자체가
인정하고 있는 셈이었다. 모든 게 사실임을.
"증거도 있고, 난 그 사실을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어요. 그런데 모를 것은 .... 왜 죽이려는 마음을
먹었느냐 하는 거예요. 명옥이와 관계된 일이라는
것까지는 또 짐작을 하겠는데, 그게, 그 정도로
사람을 죽여야 하는 건지..."
"전 모릅니다."
최 중사는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선임하사, 앉아요."
"모릅니다."
다시 한 번 대답하고는 최 중사는 성큼성큼 교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허리도 굽히지 않은 채.
저격병이 노리고 있으면 어서 쏘아라는 듯이. 철기는
교실 안으로 들어가는 최 중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의 대답이 귓속을 맴돌고
있었다.
모릅니다.
좋다.... 하고 철기는 중얼거렸다. 분명히 최
중사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뜸을 들일
때가 아니었다. 스르르 눈을 감으면서 철기는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의 수순을 따져 보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을 보고 이병우 후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수고가 많구만."
지휘봉을 모자 차양에 대 보이면서 웃고 있는 것은
바로 기계화 사단장 민 소장이었다. 이병우 후보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민 소장은
껄껄껄 소리를 내어 웃으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눈
앞에 내미는 그의 손을 이병우 후보는 쉽게 잡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아, 내 손이 부끄러워."
민 소장이 넉살좋게 말을 해서야 이병우 후보는
그의 손을 잡을수 있었다. 기분과는 달리 그의 손은
따뜻했다. 쿠데타를 공모하던 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뭐, 선거야 이기게 되어 있는 거 아닌가? 일등할
거란 예상이던데?"
민 소장은 사무실 안을 휘잉 둘러보면서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이병우 후보는 겨우 한 마디를 했다.
" 꼭 그렇지도 않아."
"그렇지 않기는. 나가지, 내가 점심이나 사겠어."
"아니, 점심은 좀 곤란해. 약속들이 있어서."
"섭섭한데? 난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건데.... 자네
지쳐 있을까봐 위로하러 온 거란 말이야."
"미안해, 군수니 서장이니 하고 선거 때문에 만나는
거라서."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았지만 이병우 후보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 소장과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만은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잠시 앉는 거야
괜찮겠지?"
이 쪽의 심정을 짐작한다는 듯 싱글거리면서 소파에
앉는 민 소장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병우 후보도
책상 앞을 떠나 그의 앞으로가 앉았다. 하지만 얼굴을
마주 바라볼 기분은 아니어서 그의 어깨너머 유리창
밖에 펼쳐진 3월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병우 후보는 모곡분교장을 떠올렸다.
거기에 갇혀 있다는 현철기라는 중위와 그
소대원들을. 여준구 씨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장석천 대위는 스스로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누구냐
하면.... 대대장입니다. 대대장이떼밀었어요.
"이보게."
민 소장이 부르는 소리에 이병우 후보는 어쩔 수
없이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그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자네의 기분을 모르지않으니까.... 긴 말은 하지
않겠고, 한마디만 하겠네."
"...."
"미안하네. 하지만 난 자네와의 우정보다 이 나라가
더 소중했어. 아니, 나라라는 게 지나치게 거창하다면
우리 군의 단결이 더 크게 여겨졌다고 해도 좋아.
자네가 보기에 난 몹쓸 친구겠지만, 난....
군인으로서 지킬 것은 지켜야 했어."
나라,군의단결, 군인으로서 지킬것.... 이병우
후보의 귀에는 그 모두가 공허하기만 했다.
"이해를 해줘.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들렀네."
"그러면 내 부탁을 하나 들어 주겠나?"
불쑥 내뱉어진 한 마디에 이병우 후보는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탁?"
민 소장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래, 들어 주겠나?"
잠시 생각에 잠기던 민 소장은 이윽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병우 후보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다시 현 중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대대장과 후임 사단장 권정준의 모습이.
"권정준이를 좀 만나 주게."
"권정준? 그야 어려울 것 없지만, 왜? 선거에
협조를 안 해주나?"
"그런 게 아니라.... "
이병우 후보는 마치 자신의 죄를 고해하는 기분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장석천과 고인택이라는 일병과
현철기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민 소장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기는 쉽게 믿어지지 않을지도 몰랐다. 이병우
후보는 담배를 피워 물며 말했다.
"도와 줄 수 있겠나?"
민 소장 또한 따라서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무얼 어떻게 도우라는 말인가?"
"권정준이를 만나서 그 소대원들을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그 친구들을 죽이면 안 돼."
민 소장은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는
참으로 야릇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대답을
이병우 후보는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무리였던가.
"이보게."
"안 되겠나?"
"되고 안 되고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나?"
"사람을 살리자는 거야"
"그런 놈들을 어떻게 살려?"
민 소장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담배를 눌러
끄고 벌떡 일어나는 그를 이병우 후보는 망연히
올려다보고만 앉아 있었다.
"자네 정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자네가
옷을 벗게 된건 아주 잘 된 일이야. 다시는 자넬 찾지
않겠어."
민 소장은 선언하듯 말하고는 돌아서서 거칠게 문을
열고는 나가 버렸다. 이병우 후보는 눈을 감으면서
중얼거렸다.
죽겠구나....
분교장 쪽에서 무언가 고함소리가 들려와서 대대장
박민 중령은 얼른 텐트를 뛰쳐나왔다. 누군가가 담장
뒤에 올라서서 소리를 치고 있었다.
"사단장님께 전할 말이 있습니다 - "
"저 자식들이...."
대대장은 본능적으로 위기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 사단장을 찾겠는가.
"뭐야?"
어느새 사단장이 등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뭐라고
꾸며댈 여유도 없이 담장 위의 녀석은 소리지르고
있었다.
"사단장님께 전할 말이 있습니다 - "
사단장은 대대장의 어깨를 잡아채듯 옆으로
밀어놓고는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사단장이다, 말해라!"
그러자 소리치던 녀석의 머리가 쑥 들어가고 다른
얼굴이 솟아올랐다. 현 중위였다.
"소대장 현철깁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만나 주십시오!"
대대장은 얼른 사단장의 곁으로 다가서면서 말했다.
"안 됩니다,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가만히 있어!"
사단장은 와락 대대장을 밀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한 발 앞으로 나가면서 대답하는 소리가 대대장에게는
마치 까마득한 산골짝을 울려 나오는 메아리처럼
들렸다.
"만나겠다!"
111. 1981년 3월 24일 ③
신한수 중위는 마치 독배를 마시는 듯한 기분으로
커피잔을 비웠다. 이제는 말을 해야만 할 때였다.
미우는 가지런한 눈섭을 보이면서 약간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신 중위는 결심을 해놓고도
다시 얼마간을 망설여야 했다. 이제 입을 열어 버리면
영영 미우는 자신의 손에 닿지않는 곳으로 가 버릴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야만 했다. 자신이나 미우나
더는 서로를 속여선 안 되었다. 신 중위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미우 씨"
잠시 차나 하자는 신 중위의 전화를 받고 나온
미우는 조용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그윽한 눈빛에
접하는 순간 신 중위는 가슴속에서 누군가가 목이
터져라고 절규하는 소리를 들었다.
안 돼!
그러나 꼭 해야만 할 말이었다.
"사과드릴 게 있습니다. 미우 씨."
"뭔데요."
신 중위는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저는 사실 현 중위의 친구로 미우 씨를 찾아온 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저는 .... 미우 씨를 하나의 여자로만 보고.... 한
남자로 찾아왔던 겁니다. 현 중위의 친구라는 허울을
빌려서 말이지요."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가 있나요?"
미우는 눈도 깜빡이지 않으면서 묻고 있었다. 그
말뜻은 무엇인가. 자신도 역시 하나의 남자로 신
중위를 대했다는 말일 터였다. 신 중위는 다시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낄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었다. 자신들은 연극을 하고 있다.
계속될 수는 없는 연극이었다.
"미우 씨는 현 중위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미우는 세차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옛날엔 그랬어요."
신 중위는 더욱 완강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지금도 그 친구를 사랑하고 있어요."
".... "
"우리는 둘 다 서로를 속이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도 상대방이 속지 않는다는 걸 너무도 잘 알면서
말이지요.... 그러지 맙시다. 그 날 사실, 아파트 문
앞에서 오래 망설였습니다. 얼마나 다시 미우 씨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러지
못 했습니다. 그건.... 나 스스로, 미우 씨가 현
중위의 여자라는 걸 한시도 잊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요, 아마 그 날 내가 다시 돌아섰으면 우리는
일을 저질렀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요. 미우 씨도 사실은 내가 그대로 돌아간 걸
내심으로는 다행으로 생각했을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미우는 비명처럼 소리지르고 있었지만 그 소리가 더
더욱 미우의 진심을 드러내 주고 있는 듯했다. 신
중위는 정말로 그 날 밤 자신의 용기 없었음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우 씨는 현 중위를 사랑합니다. 현 중위 또한
마찬가지구요."
"그 사람은 날 사랑하지 않아요"
"천만에요, 사랑합니다. 나도 사랑했습니다."
마지막 한 마디의 뜨거움에 신 중위는 가슴이 아려
왔다. 이런 순간에야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내....
그것이 자신이었다. 미우를 목이 마르도록 가지고
싶을 때에는 꺼낼 수 없었던 말, 이제 포기하고 나니
할 수 있는 말.... 그랬다. 자신은 평생을 이렇게
살아갈 사람이었다. 미우는 이 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말이 없었다.
"미우 씨, 현 중위에게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십시오. 현 중위는 어쩔 수 없는 미우 씨의
남잡니다. 미우 씨는 절대로 다른 남자를 좋아할 수
없어요. 미우 씨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마세요. 현
중위가 좋고, 현 중위가 필요하잖습니까? 그 친구를
모르는 것도 아닐테고.... 더 다가가세요."
"신 중위님은 달라요, 전 신 중위님을 좋아했어요."
순간 다시 신 중위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그
말을 믿어 버리고 싶었다. 억지로라도 매달리고
싶었다. 미우가 평생을 속으로는 현철기를 생각하며
살든 어쨌든 그녀를 붙잡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신 중위는 쓴 웃음을 삼켜야 했다.
속아선 안 돼, 착각하지 말라구.
"그 말씀은 고맙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우정이라는
뜻으로요. 그렇지만 그 우정 자체도 현 중위에 대한
반감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걸 미우 씨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실 겁니다."
아무리 못난 남자라도 대역은 싫습니다.... 이
말만은 꺼낼 수가 없어 안으로 깊숙히 삼켜 버렸다.
마음속 어디엔가 담배불로 지지는 듯한 상처가 나고
있을 것이었다. 미우는 다시 대답이 없었다.
"전 오늘 귀대합니다."
"며칠 더 남았지 않아요?"
그나마 기억해 주는 미우가 고맙게만 생각되었다.
신 중위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습니다만, 왠지 모르게 빨리 들어가고 싶군요.
현 중위도 보고 싶고.... 어쩌면 나는 현 중위, 그
친구의 생활 방식에 대해 질투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미우 씨에게 접근을 했는지도
모르고...."
"절 사랑하신다면서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어쩐지 그런 기분이에요. 미우
씨나 나나 두 사람 모두 현철기에게 일종의 투정을
부리고 있었던 것 같은...."
".... "
이제는 결론을 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신 중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입을 열었다.
"이제 다시는 미우 씨를 혼자서는 만나지 않을
겁니다. 늘 현 중위의 좋은 친구로서 나타나고
싶습니다. 미우 씨도.... 공연히 겉돌지 마시고 현
중위를 붙드세요."
미우는 이제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조금씩
들먹이는 어깨가 안스러웠지만 신 중위는 애써
외면해야만 했다. 그녀는 이제 완벽하게 마음속의
여자일 뿐이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신 중위는 믿고 싶었다. 미우를 붙잡는
일은 한 여자의 몸뚱이만을 소유하고 사랑의 실체를
잃는 행위였다. 그뿐인가, 현철기의 우정까지도. 이제
자신의 가슴속의 한낱 열망을 잠재움으로 해서 미우와
현철기 둘 모두를 잃지 않게 되었다고 신 중위는
자신을 달래고 또 달랬다. 갑자기 미치도록 현 중위가
보고 싶었다. 신 중위는 모자를 들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그제야 미우가 고개를 들었다. 젖어 있는 검은
눈.... 다시 한 번 신 중위의 마음은 격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미우는 말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한수 씨"
그 한 마디는 신 중위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신 중위는 어떤 안도감과 서운함이
동시에 파도처럼 가슴속에 밀려들어 와서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가겠습니다."
가볍게 거수경례를 해 보이고 신 중위는 돌아서서
다방을 빠져 나왔다. 셈을 치르고 문을 미는 순간까지
뒤통수를 따라오는 미우의 시선을 느낄 수가 있었다.
3월의 스산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는 길로 나서자
그제야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잠시
멈춰서서 신 중위는 스스로를 타이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잘 한거야, 신한수....
분교장의 녹슨 교문을 사이에 두고서 사단장과 현
중위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대장 박민 중령은 텐트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면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현 중위는 사단장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최악의 상황만을
가정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개자식 같으니....
대대장은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현 중위를 쏘아
버리고 싶은 충동에 몸을 떨었다. 최 중사란 놈은 또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빌어먹을....
대대장은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현 중위를 분교장
쪽에다 대고 걷어차 날렸다. 그런다고 분이 풀릴 일은
아니었다. 그저 눈 딱감고 쓸어 버리면 될 것을
사단장은 왜 또 저렇게 만나자는 대로 만나 주고
있다는 말일까.
쌍!
다시 돌맹이 하나를 걷어찼을 때 사단장이 돌아서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대장의 가슴은 쿵쿵
소리내어 뛰기 시작했다. 사단장은 무슨 말을 듣고
와서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 참고 기다릴 수가
없어서 대대장은 마주 달려나갔다.
"뭐라고 합니까?"
"...."
사단장은 말없이 대대장은 흘겨보기만 하고 있었다.
역시 최악의 상황인 모양이었다. 휘적휘적 앞서가는
사단장을 따르면서 대대장은 빠르게 궁리하기
시작했다. 변명할 말들을. 아무 말 없이 사단장이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대대장은 잠시 밖에서
머뭇 거렸다.
"들어와."
사단장의 분을 참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대장은 쭈뼛거리면서 텐트 안으로 들어섰다.
사단장은 선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놈이 뭐라고...."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단장의 두툼한 손바닥이
뺨을 후려쳤다. 마치 얼굴에서 불꽃이 이는 듯했다.
그리고 다시 한 대.
"야, 이 자식아!"
"네, 중령 박민...."
"너 이 자식, 누굴 속이려고 드는거야? 어서 바른
말을 못 해?"
"무슨 말씀...."
"이 자식이 그래도!"
이번에는 지휘봉이 철모 위를 탕탕탕 때렸다.
따귀를 맞는 것보다 더한 모멸감에 대대장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래도 최후까지 버텨 보아야만
했다.
"말씀을 해주십시오, 각하."
"장석천이를 네가 죽였다면서?"
역시 그랬다. 현 중위는 그 사실을 사단장에게 알린
것이었다. 순간 아득하게 어딘가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대대장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래도 날 속이겠다는 건가?"
"아닙니다. 저는.... "
"이것봐, 바른 대로 똑부러지게 말을 해봐.
장석천이를 자네가 죽이지 않았어? 사실이아니야?"
"아닙니다, 어떻게 그런일이...."
사단장은 불끈 주먹을 들어올렸다가는 부르르 몸을
떨면서 내리고 있었다.
"이봐, 그 현 중위란 놈은 자네 전투복에 달렸던
견장과 계급장까지 가지고 있었어. 죽은 장석천이가
주먹에 잡고 있었던 걸 병참부 영현처리반에서 찾아낸
거라더구만. 그게 자네 것이라는 건 자네 당번을
조사해도 알게 된다고 했어. 이래도 사실이 아닌가?"
결정적인 충격에 대대장은 휘청, 하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런 것이 있었던가. 장석천이 주먹에 잡고
있었다고? 현 중위의 목소리가 귀를 울리는 듯했다.
제가 가만 있지 않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겠습니다.
"그래도 아니야? 자네는 장석천을 떠밀었고,
장석천이는 넘어가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리다가 자네의
견장을 잡아뜯었다는거야. 틀린가?"
장석천.... 그 지독한 놈은 최후의 순간에도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대대장은 더 이상
잡아뗄 일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다행한 것 한
가지는.... 그 배경이 되는 일까지는 현 중위가
모르고 있으리라는 점이었다. 그것만은 최 중사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과 김승일 중위만이 알고
있었다. 대대장은 땅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용서하십시오, 각하."
".... "
사단장은 타는 듯한 시선으로 쏘아볼 뿐이었다.
"각하, 제 실수였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는 워낙 경황중이라서.... 저도
제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저도
당시에는 장 대위가 그냥 몸을 날린 걸로 알았습니다.
나중에야.... 찬찬히 생각해 보니 내가 나도 모르는
새 떼밀었다는걸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단장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서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대대장은 더욱 간절한 소리를
내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사실 저는.... 그 죄책감 때문에 더욱더
장석천 대위를 추켜올리고, 추모사업에도 열을 올렸던
겁니다. 각하, 용서해 주십시오...."
"그건 사실인가?"
네, 각하. 이제 와서 무슨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사실입니다. 제가 저도 모르는 새...."
"그만해 둬, 일어나."
사단장은 조금 누그러진 듯한 목소리로 이르면서
야전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었다. 대대장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각하."
"그 놈이 무슨 조건을 내걸었는지 알아?"
사단장의 물음에 대대장은 공손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무슨...."
사단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허공에 두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첫째, 고인택의 사고와 탈영 이유를 사실대로 밝혀
줄 것. 둘째 장석천의 죽음에 얽힌 의문을 밝혀 줄
것. 셋째, 그 두 가지를 밝히기 위해 군사령관,
원천군수, 원천경찰서장, 그리고 장석천과 고인택의
가족 또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중앙언론사의 기자를
두 명 이상 여기로 불러 줄 것. 넷째, 그들을 데려올
동안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으로 인질을 한
명 들여보내 줄 것.... 기가 막혀서...."
과연 현 중위다운 짓이었다. 미친놈.... 하고
욕설을 삼키면서 대대장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인질이라구요?"
"그래, 그것도 아주 지명을 해 왔어. 김승일이라고,
교육관이라면서?"
".... "
대대장은 다시 아찔한 충격에 휩싸였다. 하필이면
김승일이겠는가. 현 중위는 눈치채고 있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비밀의 열쇠는 김승일이 쥐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다 들어 주실 생각입니까?"
"미쳤나!"
사단장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대대장은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었다. 사단장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다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대한민국 육군이 중위 하나 손바닥에서 놀아날 것
같은가! 어림없는 소리! 하나도 들어 줄 수 없어!"
대대장은 사단장의 흥분에 장단을 맞추고 싶었지만
속을 드러내는 일이 될까 싶어서 조용히 차려자세로
서 있었다. 하지만 사단장은 곧 열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인질은 우선 들여보내야겠지. 안심을 시키기
위해서."
"각하, 그건..."
"어쩔 수 없어, 내일이 국회의원 선거야. 내일은
넘겨야 해. 내일까지는 총소리를 낼 수 없다, 이
말이야. 큰 말썽이 생길지도 몰라."
대대장은 다시 목구멍이 타오르는 듯한 느낌으로
사단장에게 다가섰다.
"각하, 인질도 역시 시간을 끌면서 내일을 넘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사단장은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모르는 소리 말아. 가능하면 오늘 밤 안으로,
아무리 늦어도 내일 아침 열시까지는 보내라는거야.
그 놈도 내일이 선거일이라는걸 계산에 넣고 있다 이
말이야. 저기 표촌국교가 투표소인데.... 여기서
총소리라도 나 봐. 소문은 크게 나고 마는거야. 아니,
소문이 문제가 아니지. 선거와 연관시켜서 어떤
말썽이 생길지 모른다 이 말이야. 알겠어?"
"각하,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아, 한 놈 더 들어가나 안 들어가나 마찬가지
아니겠어?"
역정을 내는 사단장의 말에 대대장은 옳지, 싶어서
소리를 낮췄다.
"모르셨습니까? 그 김승일 중위는 김창성 장군
아들입니다."
".... "
역시 효과가 있었나 보았다. 사단장의 안색이
달라지는 것을 대대장은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잠시
후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하는 사단장의 말은
뜻밖이었다.
"그렇다면 더욱 이런 일에 앞장을 서야지."
더는 어째 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대대장은 한숨을
내쉬면서 물러났다. 현 중위.... 그 놈이 바짝 자신의
목을 졸라 오고 있음이었다.
"박 중령."
텐트를 소리없이 빠져 나가려는 대대장을 사단장이
불러 세웠다.
대대장은 흠칫 놀라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예, 중령 박민."
"우선은 이 일을 해결하는 게 먼저야. 그 후에 자네
일은 다시 따져보도록 할 거고.... 허튼 짓 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따르고 있도록 해. 자네가 별을
다느냐 정도의 문제가 아니야. 알아?"
사단장의 목소리는 소름이 끼치도록 싸늘하기만
했다. 대대장은 신병처럼 군기가 든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나가 봐. 김승일이란 친구는 내가 직접 데리고 갈
테니까 그리알고."
대대장은 조금은 마음이 놓여서 텐트를 나왔다.
사단장의 말은 어느 정도 암시를 해주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저 안에 들어 있는 놈들만 잘 처치해
버리면 다시 사건은 유야무야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개자식들....
다시 분교장을 바라보면서 대대장은 욕설을
씹어뱉었다. 김승일을 들여보내라고? 정말이지
끔찍하도록 질기고 영악한 놈이었다.
현철기는.
가만있자....
대대장은 뒷짐을 지고 걸으면서 김승일을
들여보내지 않을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다들 모였나?"
철기는 교실 안에 둘러앉은 소대원들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권 하사가 대답했다.
"좋다, 근무자는 정위치한 채로 들어라."
철기는 스스로 긴장이 되어서 험, 하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이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비밀을 여러분에게
털어놓을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소대원 전원, 아니
적어도 대대 전 병력이 모인 장소에서 밝혀야 할
일이지만 이제는 더 미룰 수가 없게 됐다.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여러분은 이 일을 꼭
기억해 주기 바란다. 지금부터 내가 아는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기억해 주기만 하면 된다."
철기는 이 대목에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최 중사의
표정이 긴장으로 해쓱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대원들도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여러분은 아마 내가 전입온 이후로 장석천 중위에
대해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보이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내 생각은 이랬다.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느냐는 거다. 아니, 한 개인은 순간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그를 욕하자는 게 아니다.
나는 다만.... 그런 희생을 최고의 미덕으로 받들고
그런 희생을 따라 주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리고 나는 알아냈다. 그런 강요의 배경에는
반드시 어떤 속임수와 거짓이 숨어 있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나는 장석천 중위의 죽음에도
그런 속임수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눈으로 보니 우리 대대에는 너무도 수수께끼가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장석천이란 사람이 결코 그렇게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장석천과 중학교를 같이 다녔다. 그래 그를 잘 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야심 많은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별을 따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그렇게 수류탄을 덮칠 수
있엇을까? 천만에! 그러면 오히려 누구보다도 먼저
피하려고 했을 것이다!"
스스로의 열기를 가라앉히려고 철기는 말을
멈추었다. 소대원들은 다들 놀란 얼굴들을 하고
있었고, 최 중사는 지그시 눈을 감아 버리고 있었다.
눈을 떠라, 하고 철기는 속으로만 그에게 외쳤다.
진실을 보라고.
"그래서 나는 결국 알아냈다. 여러분, 장석천은
살해되었다. 누군가가 그를 떠밀었다."
여기서 철기는 분명히 보았다. 충격으로 술렁거리는
소대원들 사이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떨궈 버리는 얼굴
하나를. 그랬구나, 하고 서늘하게 생각하면서 철기는
전투복 주머니에서 견장조각과 계급장을 꺼냈다.
그리고 모두가 볼 수 있게끔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보다시피 이것은 중령 계급장과 간부들이 쓰는
견장이었다. 나는 이 계급장을 가고 현장에 있는 호
속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이 견장은 그 날 죽은
장석천이 손바닥에 움켜 쥐고 있었던 물건이다. 나는
이 견장조각을 병참부 영현처리반 관계자로부터
입수했다. 당번인 유창호는 사고가 나던 그 날 밤에
보니 대대장의 견장이 뜯겨져 나가고 없었다고 나한테
말해 주었다. 이것은 무얼 말하는가! 바로 장석천이
넘어지면서 대대장의 견장을 잡아뜯은 것이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그러면 왜 장석천은
쓰러졌느냐.... 대대장이 떠밀었기 때문이다.
대대장이 그를 죽인 것이다!"
"거짓말 말아요!"
소리를 지르며 일어난 것은 정권오였다. 힐끗 보니
최중사는 감은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정권오는
손가락질을 해 가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대대장님은 그 때 길가에 서 있었어요, 난
기억해요, 똑똑히!"
철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맞아요!"
"틀린다. 물론 처음에는 길가에 서 있었지만,
여종일이 수류탄을 잡는 순간 무슨 예감을 느꼈는지
호 쪽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수류탄이 떨어지는
순간에는 선임하사, 장석천, 대대장이 나란히 서
있었다.
"본 사람이 있습니까?"
정권오는 금방 기절을 할 것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대들고 있었다.
"물론 있다."
"누굽니까?"
"그 하나는 여종일이다."
정권오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미친놈이라고 마음 놓고 말하시는군요."
"또 있다. 선임하사다."
모두의 시선이 뒤를 향했지만 최 중사는 여전히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냥 숨을 멈춰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정권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는 소리만 하는 군요.... "
철기는 후욱 숨을 들이마시면서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잔인하게 상대를 몰아 버리기로 했다.
"또 한 사람을 대면 믿을거다."
"그게 누굽니까?"
"바로 너다. 정권오. 너도 봤다."
".... "
순간, 정권오는 몸을 푸들푸들 떨기 시작했다. 입을
벌려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모로
쓰러지는 것을 권 하사가 달려들어 부축을 했다. 교실
한 구석으로 끌고 가는 모양을 바라보면서 철기는
속으로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철기 자신도
정권오가 당시 그 모양을 목격했다고는 생각한
적이없었다. 하지만 아까 누군가가 장석천을
떠밀었다고 말을 했을 때 정권오는 혼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거기서 철기는 좀 지나친 듯한 추측을
해보았던 것이다. 정권오도 당시 상황을 목격했거나
최소한 최 중사로부터 듣기라도 했을 것이라고.
그런데 역시 정권오는 목격을 한 모양이었다. 사실
철기로서도 그 점은 오랜 의문이었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고 다들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고 해도 어떻게
소대원들 중에 단 한 사람도 목격자가 없을 수
있을까. 하지만 정작 그 목격자가 정권오라니....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저도 봤습니다."
등뒤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철기는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근무자인 황운 상병이 머엉해진 표정으로
서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도 봤습니다. 똑똑히.... 대대장이 소대장님을
밀었어요. 그리고 대대장이 소리쳤습니다. 엎드려....
하고요. 나도, 나도 언젠가는 말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처음 투표할 때 난 공표를 찍었어요.... "
넋두리처럼 늘어놓은 황운의 말을 들으면서 철기는
가슴 한 구석이 따스해져 오는 듯한 감동에 몸을
떨었다. 여기도 있었구나. 목격자가. 그는 그 동안 또
얼마나 공포와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인가. 그리고
석천소대라는 명칭을 버리자는 1차 투표에서 0표를
해준 세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여기 있었구나. 실상
철기는 그 세 개의 0표에 힘입어서 싸울 용기를
가지게 되었지 않았던가. 2차 투표에서 5표, 3차
투표에서 10표로 늘어났던 그 숨은 지지자들이야말로
철기의 힘이었다. 철기는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10개로까지 늘어났던 그 0표의 주인공들이
거의 애초에 분교장으로 그를 따라 들어온 16명 속에
있으리라고. 황운은 이제 총을 든 채로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철기가 눈짓을 하자 박 하사가
다가가 그를 얼싸안으며 주저앉혔다. 남은 소대원들은
이제 무엇에 홀린 듯한 표정들이었다. 철기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잠시 교실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한 가지 아직도 모를 것은 왜 대대장이 장석천을
떠밀었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역시 우연히 실수를
한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사단장에게
김승일 중위를 보내라고 했다. 김승일 중위가 오면 그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사고 이전의
일들에 대해서 무언가를 분명히 알고 있다."
이제 할 말은 다 한 셈이었다. 철기는 소대원들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천천히 교실을
걸어 나왔다. 심술궂던 유 하사도 그저 멍청히 앉아
있을 뿐이었고, 최 중사는 정말 숨을 멈춘 것처럼만
보였다. 그의 가슴속에 지금 오가고 있는 생각들은
어떤 것일까.... 어쨌든 이제는 상관없었다.
소대원들은 이제 장석천 신화의 허구성을 다 알게
되었다. 아니, 모든 신화와 우상의 뒷그늘에는 음험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으리라. 복도를 걸어 나와 철기는 교사의
바깥벽에 등을 기대고섰다. 등에 닿는 감촉이 기분
좋게 서늘했다. 그러고 보니 온몸에 땀이 배어나
있었다. 지나치게 흥분을 했었나 보았다. 철기는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이젠 됐나?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이상하게 가슴이 허전할
뿐이었다. 이제는 올 데까지 다 왔다는 말인가.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 그렇게 악착스럽게 저항하며
살아 왔다는 말인가.
아니다.
철기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무슨일이 있어도 이 일을 소대원들만이 아닌
모두에게 알리고 고인택을 살려야 했다. 장석천의
한을 풀어 주어야 했다. 장석천.... 늘 역겹게만
여기고 있던 그가 갑자기 그리워지는 느낌이었다.
보고 싶었다. 그렇게 신분상승의 욕구에 불타고 있던
소년 장석천이.... 어쩌면 자신을 원천으로 끌어들인
것이 바로 장석천의 원혼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과연 사단장은 자신이 제시한 조건들을
받아들일 것인가. 알 수 없었다. 내일 아침까지
김승일을 보내 달라는것만은 틀림없이 들어 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내일은 선거일이다. 표촌면의 투표소 중
하나인 표촌국교는 겨우 이 분교장에서 3,4km
거리밖에 안 된다. 절대로 공격을 해 오지는
못하리라. 문제는 선거가 끝나고 난 모레였다.
사단장이 수색대 병력을 투입한다면 모레가 될 확률이
가장 높았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철기는
만약에 무력진압이 닥치면 소대원들을 투항시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고인택만을 데리고
어디로든 빠져 나간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믿고 싶었다. 사단장이 그 정도의 얘기를 듣고
갔으니 막무가내로 진압을 해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가슴속 어딘가에 무겁게 자리잡은 예감마저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올 데까지 왔다. 철기는 파란 하늘로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근우는 방파제 끝에서
엉덩이를 일으켰다. 제주해협 어두운 바다를 스치고
온 바람이 머리칼을 날렸다. 헝클어지는 대로 바람에
머리칼을 맡겨 두고서 근우는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돌아가야 했다. 어쨌든 이제 선거를 하루 남긴 3월
24일의 날은 저물었다. 남은 것은 패배의 소식을
기다리는 일뿐이엇다. 하지만 근우는 기도라도 하고
싶었다. 결코 외로운 패배가 아니기를. 그들과 함께
패배할 수 있기를. 근우는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놓았다. 어차피 아버지의 피땀과 눈물이 어린 돈만이
있었을 뿐, 그다지 화려할 것도 없는 인생이었다.
돈근우, 똥근우라는 비아냥거림을 받던 신세가
아니었는가. 거기에다 어떻게든 국회의원이라는 호칭
하나를 얹어 보려고 애를 써 온 게 벌써 14년 동안의
도전에는 거의 언제나 중기가 따르고 있었다. 그런
중기를 끝내 잃고 만 것이 가슴 아팠다.
미안하다.
바다를 향해 재라도 날리는 심정으로 중얼거리면서
근우는 어쩔 수 없이 철기의 얼굴을 떠올렸다. 참으로
그 집 식구들은 묘하게도 근우네 집과 연관이 되어
있다 싶었다. 중기는 죽었으니 철기에게라도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주어야 할 것이었다.
미안하다, 중기.
다시 한 번 뇌까렸을 때였다. 누군가가 툭, 어깨를
치는 바람에 근우는 바다를 향해 던져 두고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바로 눈 앞에 보안대장이 서
있었다. 뱀을 보듯 머리끝이 쭈뼛 일어서는
느낌이었다.
"아주 좋으시군요, 한가하게 산책이나 하고."
보안대장은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입가에
흘리고 있었다. 근우는 지지 않고 대꾸했다.
"뭐, 어차피 낙방인데 애쓸 것 있습니까?
아슬아슬한 사람들이야 돈봉투도 돌리고 하느라고
바쁜 모양이지만."
"욕할 것 없지요. 돈 봉투는 최 사장도 옛날에 많이
돌렸다면서요?"
근우는 피식 웃어 주었다.
"다 부질없지요. 이젠 욕심도 없습니다."
"욕심없다는 사람이 이렇게 우리를 골탕먹이는
이유는 뭐요?"
시비를 거는 듯한 보안대장의 태도에 근우는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솟는
오기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죽은 사람 영전에 한 표라도 더 바치고
싶어서지요. 내가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난다면 얼마나
섭섭해 하겠습니까?"
보안대장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아무튼 이제 얘기를 해도 다 때가 늦었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당신은 그 깡패 하나
때문에 너무 큰 걸 잃게 될거요."
근우는 아무 대답도 더는 하지 않고 그를 지나쳐서
걷기 시작했다. 보안대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를
따라왔다.
"선거 결과가 좋기나 기도해요, 그러면 또 혹시
모르니까.... "
뒷덜미에 송충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근우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참모부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들어선 것은 지대장
신한수 중위였다. 그는 안경이 흘러 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다급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섭은 책상의
시건장치를 확인하고는 슬그머니 그의 옆을
지나치려고 했다.
"잠깐, 박지섭."
신 중위가 지섭을 불러 세웠다. 어쩔 수 없이
지섭은 멈춰섰다.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는 김승일 중위의 시선이 뺨에
닿아 간지러웠다.
"어떻게 된 거냐? 박지섭?"
신 중위는 숨찬 소리로 묻고 있었지만 지섭은
무어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신 중위는 다시
재촉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니까? 현 중위네 소대가 수색대
병력에 포위돼 있다는 게 사실이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데 김 중위가 나섰다.
"그런 걸 쫄따구들한테 물어보면 돼요? 야, 박지섭.
넌 나가."
"아니야, 좀 기다려."
신 중위가 말리는 바람에 지섭은 도로 책상 앞에 가
앉았다. 자꾸만 얼굴이 붉어지려고 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넌 뭘 하고 있는 거냐, 박지섭?
철기는 죽을지도 모른다, 고인택도.
정우의 목소리로 최상민 선배의 목소리로 언제나
귓속이 우렁우렁했다. 아무리 털어 버리려고 애를
써도 별 수 없었다.
"그나저나 지대장은 휴가중 아니던가요?"
"설명이나 해줘요, 김 중위. 출동하기까지 얘기는
대충 들었는데.... 지금 현 중위네 소대가 포위되어
있다는 게 정말이에요?"
"참, 박도기는 잘 있습디까?"
김 중위는 엉뚱하게도 연대 의무대에 누워 있는
박도기 중사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신 중위의
약을 올리고 있음이었다.
"김 중위!"
사람 좋은 신 중위도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제야
김 중위가 손을 내저으며 미안하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 미안해요. 사실입니다. 수색 이개중대가
포위를 하고 있지요 하여튼 미친놈은 어쩔 수가
없어요, 그 탈영병을 뭣 하러 살리겠다고 그 속엘 제
발로 들어갑니까? 또 들어갈려면 혼자 가지, 애들까지
끌고 갈 건 뭐요?"
"소대원들은 자원해서 따라갔다면서요? 남을 사람은
남고."
신 중위는 말은 김 중위에게 하면서도 시선은
지섭에게로 던져오고 있었다. 하지만 김 중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누가 거길 자원해서 가겠어요? 만약에 갔다면 그
놈들도 미친놈이지. 소대장이 미친놈이니까 뭐."
김 중위가 다시 비아냥거리자 신 중위는 놀랍게도
한 손으로 안경을 벗고 있었다. 그리고 김 중위에게로
다가섰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김승일...."
그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한 대 후려칠
기세에 김 중위는 당황한 기색으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아니, 왜 이래?"
"다시 한 번 말해 보라구. 누가 미쳤다구?"
신 중위가 한 걸음 더 다가섰을 때였다. 다시 문이
열리면서 들어서는 사람이 었었다. 지섭은 놀라서
벌떡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단장이었다.
"필승...."
김 중위도 놀라서 겨우 경례하는 시늉을 했고, 신
중위는 안경을 도로 쓰면서 뒤로 물러났다. 세 사람을
둘러보던 사단장은 김 중위를 향해 대뜸 묻고 있었다.
"자네가 교육관 김승일인가?"
"네, 그렇습니다."
사단장은 잠시 김 중위의 얼굴을 살피듯
들여다보다가 짧게 한 마디를 했다.
"따라와."
그뿐, 사단장은 성큼성큼 참모부를 나가 버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지섭은 밖을 내다보았다.
사단장은 멈춰선 지프에 김 중위를 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 쪽을 향해 소리질렀다.
"야!"
지섭은 참모부 밖으로 뛰어 나가면서 대답했다.
"예, 상병 박지섭!"
"지금 대대는 누가 통제하고 있나?"
"예, 작전관님입니다."
"내가 김 중위 데려갔다고 그래, 현장으로."
지섭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사단장은 지프에
올라탔다. 그리고 휘잉 바람을 일으키며 지프는
어두워진 대대를 빠져 나갔다. 지섭은 넋을 잃고
참모부 앞에 서 있었다. 계속 근무하겠음 - 하는 위병
근무자의 목소리만이 오래 귓가에 남았다. 현장에는
또 무슨 사고가 벌어진 것일까. 왜 김 중위까지
데려가는 것일까. 사단장이 직접.
얼마나 지났을까. 신 중위가 등뒤에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낮은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현 중위는 죽지 않는다."
순간 가슴 한 구석이 따스해지는 듯한 느낌에
지섭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던가. 자신은
그 점을 걱정하고 있었던가. 놀라웠다.
표촌리 쪽을 돌아온 지프에서 사단장과 김 중위가
내렸다. 대대장은 얼른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각하, 만나러 온 사람들이 있는데요."
"누구야?"
사단장은 못마땅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표촌면장하고 모곡리 이장입니다."
그들은 내일 투표에 지장이 없겠는지, 그리고
모곡리 주민들은 언제쯤 돌아올 수 있겠는지를
확인하겠다고 온 것이었다.
"면장하고 이장 정도면 대대장이 처리할 수 없나?"
꼭 각하를 만나겠다고들 해서...."
"알았어, 김 중위는 잠시 기다려."
사단장은 내던지듯 말하고는 ㅌ트를 향해 걸어갔다.
텐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면장과 이장이 기척을
알고 밖으로 나왔다.
"아, 이거 미안합니다.... 하하하."
사단장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두 사람을
끌어안다시피해서 텐트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대대장은 엉거주춤 서 있는 김승일에게 다가섰다.
"어떻게 된 겁니까?"
김 중위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아마
사단장이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리 와"
대대장은 그를 텐트에서 떨어진 민가 옆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소리를 낮춰 일러 주었다.
"자넨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해."
"학교에 말입니까?"
"그래."
"아니, 왜요?"
김 중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 자식을 믿을
수 있을까 하고 대대장은 보이지 않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넨 인질이야."
"인질요?"
"그래, 현철기가 자네를 들여보내 달라고 했어."
".... "
어두운 분교장 쪽에다 시선을 주며 넋을 잃고 서
있는 김 중위에게 대대장은 더욱 낮은 소리로 겁을
주었다.
"저 안에 들어가고 싶나?"
"싫습니다."
김 중위는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말하고
있었다. 대대장은 그의 귓가에 바싹 입을 갖다 댔다.
"나도 자넬 저 안에 보내긴 싫어.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우선 지금 사단장이 들어가라고
얘기를 하면 밤이라서 위험하니까 내일 아침에
들어간다고 말을 해. 그리고 부대에 들어가서 준비를
좀 하고 나오ㄲ다고 하란 말이야. 그러면 내가 내일
아침에 데려오겠다고 거들어 줄 테니까."
"그래서요?"
김 중위가 물었을 때 텐트 안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게 보였다. 대대장은 얼른 김 중위의 등을 밀었다.
"우선 그렇게만 해. 가 봐."
"악수를 나누고 면장과 이장이 표촌리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나자 사단장은 이 쪽을 보며 소리치고
있었다.
"둘 다 들어와."
사단장이 설명을 마치자 김 중위는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가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사단장이 반색을 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김 중위는
요령 좋게 말을 끼워 넣고 있었다.
"네, 하지만.... 지금은 밤이라서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내일 아침에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좀
준비를 할 것도 있고 해서 말입니다."
"준비?"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의 사단장에게 김 중위는
덧붙여 설명을 하고 있었다.
"네, 간단한 식량 같은 걸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하다 못 해 건빵이라도요."
"그건 왜?"
"다들 배가 고픈 상태일 테니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겁니다. 그걸 이용해서 단 몇 명이라도 회유를
해보겠습니다."
대대장은 김 중위의 등이라도 쳐 주고 싶었다. 역시
머리 하나는 좋은 녀석이었다. 시킨 것보다 몇 배는
잘 해내고 있었다. 사단장도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그렇게 할까? 그러면 부대에 들어갔다 나와야
하지 않나?"
때를 놓치지 않고 대대장은 앞으로 나섰다.
"제가 지금 태워다 주겠습니다. 식량도 식량이지만
마음의 준비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근히 인질로 들어간다는 부담감을 암시하자
사단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그러면 내일 아침 기상과 동시에 도착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김 중위의 연기는 완벽했다. 절도 있게 경례를 하는
그의 모습은 대대장이 보기에도 의심할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거리낌없이 인질로 들어가려는 자세였다.
"가지."
대대장은 김 중위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자신의
지프를 향해 걸어가는데 김 중위가 따라붙으면서 물어
왔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사단장 앞에와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다시 겁먹은 목소리였다. 대대장은 빠르고 낮은
소리로 일렀다.
"나중에 얘기하지. 어쨌든 개죽음 당할 수는
없잖아?"
112. 1981년 3월 25일 ①
대대장 박민 중령은 참모부 앞에서 지프를 내렸다.
어느새 알아차리고 작전관이 걸어 나오며 경례를
했다. 답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대대장은 서둘러
물어 보았다.
"김승일이는 준비 끝났나?"
"아직 안 왔는데요."
대대장은 얼른 시계를 보았다. 아홉시를 막 넘고
있었다. 대대장은 미간을 잔뜩 찌푸려 보이면서
지휘봉으로 제 허벅지를 탁탁 때렸다.
"이 친구가 아홉시까지 출발 준비를 해
놓으랬더니.... 빨리 데려와!"
"비오큐로 전화를 하겠습니다."
"아니야, 직접 가서 데려와."
화난 목소리로 명령하자 작전관은 황급히
B.O.Q.를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대대장은 입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잘 했을까?
조금 초조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잘 해냈으리라고
믿고 싶었다. 아니, 잘 안 되어서는 곤란했다.
작전관이 아무리 빨리 다녀온다고 해도 5분은 걸릴
것이어서 대대장은 천천히 참모부 안으로 들어섰다.
우르르 일어서는 참모부 요원들 중에서 유독 박지섭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개자식....
현철기를 보는 듯한 느낌에 치를 떨며 대대장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야!"
"예, 상병 박지섭."
"복창 소리 봐라, 이거...."
대대장은 다짜고짜 박지섭의 무릎을 내질렀다. 으,
하고 신음을 삼킬 뿐 박지섭은 꼿꼿이 부동 자세를
취하고 서 있었다. 이 자식이.... 하고 욕설을
씹으면서 대대장은 다시 자세가 더욱 가증스럽게
생각되어서 대대장은 지휘봉으로 뺨을 후려쳤다.
그래도 박지섭은 어떤 고통의 기색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개새끼!"
대대장은 방탄 헬멧을 벗어서 박지섭의 가슴을 퍽,
하고 때렸다. 그제야 박지섭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아랫도리를 발길로 걷어차기까지
하고서야 대대장은 돌아섰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않았다. 씩씩거리면서 참모부를 나서자
작전관이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헐떡거리는
그 모양새부터가 김승일이 사라졌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김 중위는 왜 안 오나?"
짐짓 대대장은 소리를 높여 물어 보았다.
"없습니다."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작전관은 헉헉 가쁜 숨을 내쉬면서 대대장의 앞에
와 멈춰 섰다.
"방에도 없고, 오늘 아침엔 본 사람이 없답니다."
"뭐야?"
내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대대장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김승일은
대대장이 어제밤에 일러준 대로 서울로 달아난
모양이었다. 대대장은 대대에 도착해서 그에게 이렇게
얘기했던 것이다.
거기 들어갔다가 개죽음밖에 당할 게 없어. 달아나.
서울에 가서 어디든 숨어 있으라구. 길어야 이, 삼
일만 넘기면 돼. 내가 책임을 질게. 하다 안 되면
자네 아버님이 나서면 될 거고. 우선은 집에 들어가지
말고 어디든 숨어 있어.
대대장은 지휘봉으로 작전관의 어깨를 탁, 때렸다.
"뭐 하고 있어? 빨리 위병소에 확인해 봐!"
네, 하고 대답하면서 작전관은 위병소를 향해
달려갔다.
운동 잘하는군....
대대장은 속으로만 킬킬거렸다. 위병소까지 달려간
작전관은 위병조장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곧
되돌아왔다. 더욱 가쁜 숨소리를 내면서.
"오늘 아침 일찍 나ㄱ답니다."
"뭐가 그렇게 애매해? 몇 시라는거야?"
"공칠시 십분이랍니다."
일곱시 십분.... 대대장은 작전관이 알지 못하게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기상 시간 직전에
나가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 왜 그렇게 늦게
떠났다는 말일까. 운 좋게 택시나 걸리지 않았다면
지금쯤에나 서울행 버스를 타고 있을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지.
그만해도 성공이라고 자위하면서 대대장은
작전관더러 들으라고 크게 혀를 찼다.
"개새끼.... 일을 망쳐 놓는구만. 이건 탈영 아냐?
사단장님한테는 뭐라고 하느냔 말야. 정말 일 안
풀리는구만...."
"겁이 났던 모양이지요....?"
작전관은 조심스럽게 묻고 있었다. 대대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겁? 아, 그게 군인이야? 쌍...."
대대장은 빠른 걸음으로 돌아서서 지프를 향했다.
그리고 뒤를 따라오는 작전관에게 차에 오르기 전에
한마디를 남겼다.
"혹시라도 김 중위가 돌아오면 잡아 놓고 즉시
보고해."
"알겠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잔뜩 긴장해 있는 작전관을 보니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 대대장은 시선을 돌리면서
지프에 올라탔다.
"가자."
경례를 하는 작전관을 남겨 두고 지프는 출발했다.
정문을 나서면서 운전병 곽용길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김 중위님이 없어졌습니까?"
늘 곁에 있어 온 녀석이니만치 이편의 기색을
알아차릴까 신경을 쓰면서 대대장은 짧게 화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래, 죽일 놈.... "
언덕 길을 다 내려와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서
곽용길은 피식, 싱거운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교육관님 겁 많은 건 알아줘야죠."
대대장은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장 상사 집 앞을
지날 때였다. 가게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내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사복을 입은 박주열 대위였다.
짧은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지만, 대대장은 곧
얼굴을 돌려 버렸다. 얼핏 보기에도 마치 딴사람처럼
수척한 모습이었다.
"일중대장님 아닙니까?"
곽용길이 말했지만 대대장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박지섭을 두들겨 팰 때처럼 격한 분노가 치말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부하라고 데리고 있던
것들이 왜 다 저 모양이란 말인가. 장석천에,
현철기에, 박지섭에, 여종일에, 고인택에, 박도기에,
저 박주열에.... 명장은 부하를 잘 만나야 한다는데
자신은 거꾸로였다. 그 작자들 모두가 대대장 자신의
앞길에 암초를 드리우는 놈들이었다. 웃범골을 지날
무렵에야 대대장은 저도 모르는 새 중얼거렸다.
"중대장은 무슨 중대장이야?"
뭐야?달아났어?"
사단장은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대대장은 여기서도 연기를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침울하게 대답했다.
"네, 아침 공육시에 대대를 나갔답니다."
일부러 한 시간을 당겨서 말한 것은 이미 사단
지역을 다 벗어났으리란 판단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단장은 빠득, 하고 이빨을 갈고 있었다.
"그 자식, 어젯밤에 나한테 그런 말을 할 때부터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구만, 교활하기는 .... 제
애비를 닮았나?"
제 애비를 닮았나, 하는 사단장의 목소리에는
부인과 김승일의 아버지 김창성 장군에 대한 분노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대대장은 속으로만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대대장."
"예, 각하."
"어젯밤에 대대로 들어갈 때는 무슨 이상한 눈치
같은 건 없었나?"
"없었습니다만...."
"없었습니다만. 뭐야?"
"생각해보니 제가 너무 부담을 주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일이 잘 처리되느냐 아니냐가 김
중위한테 달려 있다고 누차 강조를 했더니...."
사단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내심을 살피려는 듯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대장은 참으로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떠올리며 서 있었다. 이윽고
사단장이 머리를 힘차게 옆으로 저었다.
"아니야, 이놈을 가만히 둘 수 없지."
사단장은 어젯밤 새 사단 통신대에서 가설해 놓은
전화기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며
퉁명스럽게 말해 왔다.
"대대장은 나가 있어."
어쩔 수 없이 대대장은 텐트를 빠져 나왔다. 하지만
멀리 가서는 안 될 상황이었다. 텐트에 바싹 붙어서서
귀를 기울였다. 사단장은 사단 상황실을 부르더니
빠른 소리로 이르고 있었다.
"지금 빨리 서울, 춘천, 원주, 인제 방면
검문소마다 연락을 해서 장교 한 명을 수배하도록 해.
이름은 김승일, 중위야.... 그래, 그 문제의 일대대
소속이야. 탈영이다. 거기 율목 검문소에도 협조를
요청하도록 해. 알았지? 아니, 율목만이아니고 서울로
진입하는 모든 검문소에서 잡아 주도록 요청해. 꼭
잡아야 해. 알겠지?"
낭패였다. 김승일이 아무리 잽싸게 움직안다고 해도
아직은 차를 타고 있을 시간이었다. 사단장이 이
정도로 집요하게 김승일을 잡으려고 할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분명히 김승일의 아버지 김창성 장군에
대한 사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대대장이 김
장군 얘기를 꺼냈을 때도, 그러니까 더욱 보내야
한다고 말했던 듯했다. 그것까지 미쳐 짐작하지 못한
자신의 실책이었다.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김승일이
여섯시에 대대를 나가기만 했다면 아무 탈이 없었을
것이었다.
일났군....
한숨을 내쉬면서 대대장은 텐트 앞을 떠났다. 왜
모든 일이 이렇게 꼬이기만 하는 것일까, 절로 눈길이
분교장 쪽으로 갔다.
개새끼들.
자기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송두리째 포격으로
날려 버리고만 싶었다. 그 안에 있는 모두를.
"오늘 낮 동안은 근무자를 두 명으로 줄여도 된다.
나머지들은 푹 쉬어 두도록 해."
권 하사에게 이르는 현 중위의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최 중사는 슬그머니 교실을 빠져나왔다.
소대원들은 마치 홀린 것처럼 그의 통제를 빈틈없이
따르고 있었다. 어쩌면 현 중위가 이기고 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대대장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가 조작해 놓은
장석천의 신화는? 거기에 맹목적으로 동조했던 자신의
처지는? 고인택의 처리는? 박도기는? 최 중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비어 있는 옆 교실로
들어섰다. 혼자 있고 싶었다. 하지만 교실 안에는
선객이 있었다. 책걸상을 다 치워 버린 텅 빈 교실
한복판에 정권오가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최
중사는 말 없이 입구에 서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죽음에 이를지도 모를 제 몸의 상처를 핥고
있는 짐승처럼만 보였다. 정말이지 최 중사 자신도
정권오가 그 상황을 목격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면서
누구보다도 장석천의 신화를 소대 안에 심는 데
앞장을 섰다고 할 수 있는 정권오가.... 그렇다면 그
동안의 그의 행동은 뭐라는 말인가. 역시
연극이었다는 말 밖에는 안 되었다. 아아.... 하고 최
중사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도대체 진실은
무엇이고 거짓은 또 무엇인가. 그제야 인기척을
느꼈는지 정권오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왠지 부어오른 듯한 정권오의 얼굴에는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게 착잡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그의 눈빛은
.... 그 또한 피해자일 뿐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최
중사는 천천히 그를 등지고 돌아섰다. 오래울고 난
뒤처럼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뒤를 따라왔다.
"미안합니다. 선임하사님."
"아니다."
최 중사는 복도를 걸어서 수돗가로 나섰다. 그리고
언젠가처럼 다시 물탱크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바로 자신이
맨 처음 장석천을 떼민 사실을 따지고 들었을 때
대대장이 설득하던 소리였다.
내 실수야.... 괴로운 건 최 중사가 아니라 나야.
내가 죽고 싶어.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
정말.... 나도 모르는 새 그렇게 된거야.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이지.... 이제 와서 어쩌겠나? 지금 와서
내가 떼밀었다고 말한다고 해서 죽은 장석천이 살아
오느냐는 말이야. 아니지? 분명 아니다 이 말이야.
그렇다면 이대로 그냥 두는 게 더 장석천을 위하는
길이 아니겠어? 우리 육군의 영웅으로 그냥 놔
두자구. 죽은 본인도 그걸 더 원할지도 몰라. 자네와
나, 이렇게 둘이만 입을 다물면 돼. 우리는 이 비밀을
무덤까지 기지고 들어가야 한다 이 말이야. 알겠나?
그러면 모든 게 끝나는 거야.
아니다, 하고 최 중사는 이제야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결국 현철기는 모든 비밀을 알아내고 말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두 사람의 숨은 목격자가 나타나서
현철기의 폭로를 사실로 입증해 주기까지 하고
말았다. 아니, 그것으로 끝나는게 아니었다. 대대장이
장석천을 떼민 것은 그의 말처럼 돌발적인 실수가
아니라 다분히 고의적인 것이었음을, 그 배경에는 또
무언가의 사건이 숨어 있음을 현 중위는 암시하고
있었다. 그 비밀을 김승일 중위가 알고 있으며,
인질을 요구한 그의 조건대로 곧 김승일이 이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고 했다. 현철기는 십중팔구 김승일의
입을 열 수 있으리라.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은 또
얼마나 엄청난 것일까. 아아.... 하고 최중사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나게 긴 악몽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번
소스라치며 깨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르르 눈을 감았을 때였다. 삐이 - 하고 스피커
소리가 귀를 찢더니 곧 사단장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현 중위는 들어라. 열시까지 김 중위를
들여보내기로 했었는데, 이 쪽의 사정으로 조금
늦어지겠다.... 늦어도 오후 두시까지는 보낼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 알았는가? 오후 두시까지다...."
다시 한 번 되풀이하는 사단장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최 중사는 대대장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김승일이 들어오는 시간을 늦어지게 하는 저 쪽의
사정이란 무엇일까. 혹시 또 대대장이 농간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쩐지 그럴 것만 같았다.
대대장은.... 필요하다면 김승일이라 해도 충분히
죽여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온몸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옷깃을 세웠을 때였다. 교실로 들어가는
통로에 누군가가 쓰러지듯 나와 앉더니 이 쪽까지
들리는 소리로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고인택이었다. 최 중사는 가슴을 누군가가 마구
헤집어 놓는 것만 같았다. 지금 고인택의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고통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죄책감, 두려움, 무력감.... 그 모든 것 앞에
고인택은 함부로 내던져져 있었다. 최 중사는 저도
모르는 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고인택에게로
다가갔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드는 그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최 중사는
순간 한마디 소리 지르고만 싶었다.
"누구냐?"
고인택을, 아니 우리들 모두를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만든 것은, 하지만 그 책임은 자신도 한 몫 짊어져야
함이 최 중사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고인택은 최 중사를 향해 중얼거리고 있었다.
"선임하사님, 어쩌면 좋지요...."
".... "
"죽어 버리고 싶어요. 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
말을 끝맺지 못하고 다시 울음을 터뜨리는
고인택이었다. 고문관으로 고통받던 그와 그를
다그치던 자신이 이런 모습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
왠지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치는 야릇한 동지 의식에 최 중사는 고인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죽지 마라."
".... "
"죽으면 안 돼. 죽으면 모든 게 끝이야. 산 자만이
말을 하는거야...."
오토바이 소리에 놀라 대대장은 텐트에서 뛰쳐
나왔다. 이미 저만치에 와서 멈추고 있는 오토바이를
보는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욕설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연대 수송관이 몰고 온 오토바이 꽁무니에서
내리는 사람은 바로 지대장 신한수 중위였다.
대대장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소리쳤다.
"뭐야, 너희들은?"
경례를 하는 수송관과 신 중위를 그대로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누르면서 대대장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여기가 무슨 야유회장인 줄 알아? 이놈 저놈
아무나 들락날락하게? 누가 여기 오라고 했어?"
"전, 그저....좀 태워다 달라고 해서...."
수송관이 머리를 긁으면서 변명을 했다. 경황중에도
대대장은 그에게 심하게 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도 수송관에게는 협조를 구할 일이 많을
것이다. 하다 못 해 101호차를 한번 만져 주더라도.
대대장은 신 중위에게로 바싹 다가섰다.
"자넨 뭐야? 왜 여기 왔어? 대대는 철수한 걸
몰라?"
하지만 평소 유약하게만 보이던 신 중위는 안경을
당겨 쓰면서 제법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도 저 안에 들어가겠습니다."
"뭐야?"
"제가 현 중위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보내
주십시오."
"야, 임마!"
대대장은 신 중위의 코앞에 얼굴을 대고 소리쳤다.
신 중위가 흠칫 뒤로 물러났다.
"야, 이 자식아! 이게 무슨 어린애 장난인 줄 알아?
이놈 저놈 다 설치고 나서게.... 빨리 돌아가!"
"대대장님, 부탁입니다. 혹시 제 말은 들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안에 있는 병사들은 탈진 상태일
겁니다. 제가 필요할 겁니다."
그러고 보니 신 중위는 작은 가방 하나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아마 약품이거나 음식일 것으로 보였다.
대대장은 더욱 격렬해지는 분노로 몸을 떨면서 한걸음
더 다가섰다.
"지대장."
"네.... 보내 주십시오."
"너, 이자식.... 진심은 그거지? 현 중위란 놈을
도와 주겠다 이거지? 같은 패거리들이니까....
그렇지?"
"대대장님.... 아닙니다. 전 그저.... "
"아니긴 뭐가 아냐, 자식아!"
대대장은 지휘봉으로 신 중위의 가슴을 쿡, 찔렀다.
정말이지 군의관만 아니라면 호되게 패 주고만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신 중위는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제발, 대대장님. 제가 설득을 해보겠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대장은 허리에서 권총을 빼어 들었다. 그리고 신
중위의 얼굴을 겨누었다.
"빨리 돌아가."
".... "
하얗게 변하는 신 중위의 얼굴 위에 대대장은
현철기의 얼굴울 겹쳐 떠올렸다. 정말이지 방아쇠를
당기고만 싶었다.
"돌아가."
꼼짝 못 하고 굳어 버린 신 중위에게로 수송관이
재빨리 다가서며 팔을 잡아 끌었다.
"갑시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신 중위는
수송관에게 끌려서 도로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다.
격한 충동에 몸을 떨면서 대대장은 권총을 도로 집어
넣었다. 수송관은 가겠다는 보고도 없이 얼른
오토바이를 돌려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멀어져 가는
오토바이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 신 중위가 지금
휴가 기간 중이라는게 떠올랐다. 어떻게 돌아온
것일까. 제 휴가나 제대로 찾아먹지 않고 항상 제
분수를 모르고 설쳐 대는 놈들이 문제였다. 그런
놈들이 군대를 흔들어 놓는다. 퉤, 하고 침을
뱉으면서 대대장은 돌아섰다. 텐트안의 사단장과
수색대대장은 나와 보지도 않고 있었다.
"빌어먹을.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투덜거리면서 텐트로
돌아오는 대대장의 귀가에 사단장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뭐라고? 잡혔어?"
대대장은 놀라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소린가. 김승일이 잡혔다는 말인가.
"율목 검문소에서? 알았어, 내가 직접 가겠어."
서울로 넘어가는 길목의 기계화사단 지역인 율목
검문소에서잡힌 모양이었다. 대대장은 꾸욱 입술을
깨물었다.
멍청한 놈....
수색대대장에게 다급하게 이르는 사단장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인 것처럼 들려 왔다.
"내가 곧 다녀올 테니까 통제 잘하고 있어. 어떤
경우에도 모든 병력을 현위치에서 이동시키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곧 사단장이 텐트를 뛰쳐 나왔다. 운전병이 눈치
빠르게 지프를 댔다. 대대장이 밖에 서 있는 모양을
보고 사단장은 무슨 말인가를 할 듯 할 듯하다가는
그대로 지프에 올라타고 있엇다. 대대장을 웃듯
지프는 요란하게 잔돌맹이를 튕겨 내며 출발했다.
따라 나온 수색대대장은 필승, 하고 경례를 하고
있엇지만 대대장 박민 중령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몰내리 쪽으로 멀어져 가는 지프에 시선을 던져 두고
있었다. 또 탈이 난 것이었다.
멍청한 놈.
투표를 하러 나온 사람들로 제법 흥청거리고 있는
거리를 지나서 신 중위는 밀림이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다행히 밀림은 열려 있었다. 오늘과 같은
고휴일에는 아침부터 영업을 하는 게 이 거리
술집들의 영업 방식이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좀은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취해 보자."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신 중위는 밀림의 문을
밀었다. 어두운 조명이 벌써 마음을 축 늘어지게
했다.
"어서 오세요."
명옥 미스 윤이 주방 안에서 나왔다. 다행히도 홀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신 중위는 털썩 의자에 몸을 던지면서 말했다.
"술 좀 주지."
"아니, 룸으로 안 들어가시구요?"
명옥의 의아하다는 듯한 질문에 신 중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여기서, 빨리 줘."
룸으로 들어가면 늘 현 중위와 마시던 생각이 나서
괴로울 것 같았다. 아니 그 뿐인가. 지난 겨울 미우와
마시기도 했었다. 명옥은 배시시 웃으면서 도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되게 급하신 모양이군요."
주방 안에서 들려 오는 명옥의 목소리였다. 신
중위가 대답을 하지 않자 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공휴일이라고 열었더니 웬걸, 손님이 그림자도 안
비치는 거 있죠? 비상이라면서요?"
그제야 신 중위는 한마디를 던졌다.
"어, 비상인지 모르고 있어?"
짧운 침묵 끝에 명옥은 짧게 대답해 왔다.
"알아요. 들었어요."
그리고 더는 말이없었다. 신 중위 또한 마땅하게 할
말이 없었다. 옆에 내려놓은 가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장 마담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오늘 같은 날은 다른
장교들처럼 아무 여자라도 끌어안고 뒹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철기.... 그는 과연 살아날 수
있다는 말일까. 어쩐지 신 중위 자신에게도 일단의
책임이 있는 것 같은 죄책감을 영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현 중위가 그런 고난에 처해 있을 때 자신은
미우와 술을 마시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느냐
아니냐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니. 아니, 휴가 가기
전의 얼마 동안 자신은 분명히 현 중위에게 막연한
적개심 같은 것을 품고 있었다. 모든 일을 참아
넘기지 못하고 즉각 반응하곤 하는 현 중위의 태도가
역겹다고 느낀 시기가 있었다. 그러한 자신의
마음먹음이 현 중위를 이런 궁지로 모는 한 요인이
되지는 않았을까. 휴가 출발하는 자신에게 미우의
여락처를 적어 주면서도 현 중위는 내심으로 질투심에
떨고 있지는 않았을까.
"술 드세요."
어느새 맥주를 들고 앞자리에 와 앉은 명옥이
말하고 있었다. 신 중위는 말없이 잔을 들었고,
명옥은 역시 말 없이 술을 따랐다. 한잔을 단숨에
들이키자 타는 듯하던 갈증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아?"
다시 잔을 채우는 명옥에게 신 중위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뭐가요?"
"현 중위가 그런 꼴이 됐다는데 아무렇지도
않느냐구."
"제가 무슨 상관인데요?"
반문하는 명옥의 목소리는 차디차기만 했다. 신
중위는 조용히 다시 잔을 비웠다. 현철기란 사내는
도대체 얼마나 외로워야 하는 것일까. 그 모든 것이
아무리 스스로 자청한 일이라고는 해도.
"마담은 안 나왔나?"
어색해진 분위기를 고려해서 던진 질문에 명옥은
피식, 헤식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 쪽도 요즘 복잡하죠. 비상이에요."
"박 대위가 옷을 벗는다면서? 안됐어."
그랬다. 귀대해서 들은 소식에는 박 대위의
이야기도 있었고, 그 또한 신 중위의 가슴을 아프게
한 일이었다. 하지만 명옥은 다시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물론 안됐죠. 그렇지만 그 일 때문만은 아니예요."
"그럼 뭐지?"
"그런 얘기 캐물으려고 오신 거예요?"
명옥은 슬그머니 물러나고 있었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더는 캐묻지 않는 게 도리일 듯했다. 명옥의
말마따나 그런 일 때문에 온 것은 아니었다. 신
중위는 다시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리고 채우라는
시늉으로 잔을 내밀어 보였다. 명옥이 입술을
내밀었다.
"전 안 줘요?"
신 중위는 고개를 저었다.
"미스 윤은 마시지 마. 나 혼자 마실 테니까 그렇게
앞에만 있어줘."
"재미 없군요."
투덜거리는 체하며 따라 주는 것을 다시 입에
대었을 때였다. 문이 쾅, 거칠게 열리면서 장 마담이
들어섰다.
"어서 와요."
신 중위는 나직하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장
마담은 대꾸하지 않고 우두커니 문 앞에 서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다시 돌아보니 장 마담의 몸이
앞뒤로 건들건들 흔들리는 품이 취한 모양이었다.
이 시간부터?
신 중위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명옥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그제야 신
중위는 방금 명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박 대위의
전역 때문만은 아닌 큰일이 있다더니 아마 최근에는
늘 술에 절어 있는 듯했다. 신 중위는 그녀 쪽을
무시하기로 했다. 오늘은 남의 기분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오늘은 오히려 신 중위가 주정을 하고
위로받고 싶은 날이었다.
"대낮부터 웬 술이에요?"
비틀거리면서 신 중위의 곁으로 걸어온 장 마담이
하는 말이었다. 신 중위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마담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호호호.... 하고 장 마담은 소리를 높여 웃었다.
명옥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자리에 장 마담이
펄썩, 무겁게 주저않았다.
"우리 순정파 신 중위님.... 나도 한잔 주세요."
순정파라는 말에 발끈 신경질이 일었지만 신 중위는
억지로 삼켜 버렸다.
"그만 해요. 많이 취한 것 같은데요, 뭐."
"상관없어요."
장 마담은 맥주병 하나를 들더니 입에다 거꾸로
세우고는 나팔을 불기 시작했다. 신 중위는 끝내 참지
못해 소리치고 말았다.
"그만둬요!"
취한 중에도 놀라서 병을 내려놓은 장 마담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이고 있었다. 신 중위는 조금은
어색해져서 낮게 타이르듯 말했다.
"많이 취했어요. 그만 해요."
호호호.... 다시 웃어 대던 장 마담은 곧 정색을
하며 다가앉았다.
"한 가지만 물어 볼게요."
".... "
"물론 신 중위님도 일대대 소식은 들으셨을
테고.... 신 중위님은 물론 현철기 편일 테죠?"
하필 또 화제가 그 일이라니.... 신 중위는 미간을
찌푸라면서 대답했다.
"누구편이고 말고가 어디 있소? 잘 해결돼야지."
"난 누구 편일 것 같아요?"
"모르겠다니까요."
발끈 소리를 높였지만 장 마담은 물러나지 않고
더욱 집요하게 달라붙고 있었다.
"맞혀 봐요, 누구 편을 들 것 같아요?"
귀찮은 김에 신 중위는 대답해 버렸다.
"역시 현 중위 편을 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호호호.... 찢어지는 듯한 웃음고리가 이어지더니
장 마담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요. 난 대대장 편이에요. 박, 민, 중,
령.... 그 사람 편이라구요."
".... "
"알았어요? 난 그 사람 편이라구요. 현철기가 죽어
버리길 바란 다구요.... "
"그만 해요."
정말이지 한 대 후려치고 싶은 노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누르면서 신 중위는 잔을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맥주도 더 이상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알 리가 없지, 신 중위님 같은 순정파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호호호호....!"
"그만 하라니까!"
신 중위는 끝내 소리치면서 테이블을 손으로
내리치고 말았다.
맥주병과 잔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쨍 하고
깨어지는 소리는 신 중위의 마음 어딘가를 예리하게
베어 내고 있는 듯했다. 명옥도, 장 마담도
순간적으로 놀란 듯 아무 말이 없었고, 견딜 수 없는
분노와 모멸감으로 신 중위의 얼굴은 붉게 달아
올랐다. 나가야 한다고 가방에 손을 댔을 때였다.
"어서 와요."
장 마담이 문 쪽을 보며 말했다. 슬쩍 돌아보니
양복을 입은 사내가 하나 서 있었다. 박주열
대위였다. 신 중위는 저도 모르게 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대위님.... "
순간 박 대위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진다 싶더니
재빠르게 문울 밀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박 대위님!"
신 중위는 얼른 뒤를 쫓아 나갔다. 등뒤에서 장
마담의 웃음소리가 다시 요란하게 들려 왔다. 호호호,
호호호호.... 밖으로 나서 보니 박 대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려서 벌써 골목 입구를 나서고
있었다. 신 중위는 밀림 문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박 대위님....
사단장에게 이끌려서 지프에서 내린 김승일은 대뜸
땅바닥에 무릎을 털썩 꿇고 있었다.
"살려 주십시오, 사단장님.... "
눈을 돌려 버리고 싶을 만큼 추잡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대대장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대대장이
달아나라고 시켰다는 것을 그가 불어 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사단장은 어이가 없는 듯 무릎 꿇은 김승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 들어가기 싫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애원하는 그에게 사단장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누가 저 안에 들어가면 죽는다던가? 너, 그러고도
육군 중위라고 할 수 있나?"
김승일의 시선이 이편을 향해 오는 바람에 대대장은
흠칫, 놀라서 외면해 버렸다.
"김 중위."
"예.... "
"저 안에 들어가도 넌 죽지 않아. 저 놈들이 왜 널
죽이겠나?"
"그게 아니라.... 결국에는.... "
"우리가 공격을 할까봐서 그러나?"
김승일은 염치불구하고 대답하고 있었다.
"예.... "
"내가 약속한다. 우린 공격하지 않는다. 어차피
공격을 할 거면 왜 널 인질로 보내겠나? 들어가, 내가
책임진다."
".... "
그래도 김승일이 몸을 일으키지 않자 사단장은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김승일에게 겨누었다.
"일어나."
"사단장님.... "
"지금은 전시나 한가지다. 명령에 불복종한다면 쏠
수밖에 없다. 일어나... 얼른!"
사단장이 김승일의 코빼기를 총구로 쿡, 찌르자
어쩔 수 없이 김승일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다시
애원하는 시선이 돌아왔고, 대대장은 역시 외면해
버렸다. 등뒤에서 수색대장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사단장은 이번에는 김승일의 가슴을 찔렀다.
"앞으로 가."
김승일은 사단장에게 떼밀려서 한 걸음 분교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말로 죽으러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분교장의 교문을 50미터쯤 남긴
곳에서 사단장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김승일도 멈춰 섰다.
"걸어!"
사단장은 총구를 내밀며 냉혹하게 명령하고 있었다.
김승일은 휘청거리는 듯한 걸음으로 느릿느릿 교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사단장은 계속 그의 등뒤에
권총을 겨누고 서 있었다. 정말로 김승일의 아버지
김창성 장군과 사단장은 어떤 끔찍한 원한 같은 게
있는 모양이라고 대대장은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끝까지 대대장이 도주를 부추겼음을 말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저 안에 들어가서 현철기의 추궁을
받으면 모든 일을 털어놔 버릴지도 몰랐다. 아니,
십중팔구 확실하다고 보아야 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사단장에게도 알려지고 자신의 거짓말은
영락없이 탄로나고 만다. 어찌해야 하는가.
김승일은 교문 앞에서 다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사단장이 크게 소리 질렀다.
"들어가!"
그래도 역시 결심이 서지 않는 듯 김승일은
쭈뼛거리기만 했다.
"저것도 군인이라고... "
뒤에서 수색대장이 중얼거렸다. 사단장은 다시
소리치고 있었다.
"쏜다!"
그제야 김승일은 더욱 흔들리는 걸음으로 교문
안으로 들어갔다. 분교장의 교실 안에서 누군가가
창을 넘어서 운동장으로 나서고 있었다. 현 중위였다.
이제 어떻게 되려는가. 대대장은 눈을 감아 버렸다.
정말로 자신에게 종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수고 하셨습니다, 각하."
사단장은 힐끗 흘겨보고는 시선을 분교장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현 중위와 김승일이 나란히 교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 넘기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수색대장이 묻고 있었다. 사단장은 잠시 사이를 둔
후에야 대답했다.
"상황을 보면서."
순간 대대장은 문득 어떤 서광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그랬다. 어쩌면 더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상황을 보면서.
대대장은 사단장의 그 한마디를 다시 입 속으로
뇌어 보았다.
113. 1981년 3월 25일 ②
박주열 대위는 비틀 거리면서 집으로 들어섰다.
아내도 떠나고 없는 빈 집이었지만 그래도 찾아들
곳이라곤 여기밖에 없었다. 폐가 처럼 활짝 열린
대문을 들어서려니 취중에도 콧등이 시큰거렸다.
헤어진 아내가 보고 싶었다. 박 대위는 피식 헤식은
웃음을 흘렸다.
미친놈....
머리를 흔들며 들어서던 박 대위는 무언가 평소와
다른 기척에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입을 딱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큰아버지 원도 씨였다. 그는
이제 오느냐는 말도 없이 물끄러미 박 대위를
바라보고 있었고, 박 대위 또한 선뜻 인사를 건넬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마주 보고만
서 있었다. 큰아버지는 이미 모든 것을 알아 버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긴 그럴것이었다. 주성이
그만한 사고를 저질렀는데 고향으론들 소식이 가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리고 이 집을 와 본 적이 없는
큰아버지가 이렇게 찾아들었을 때에는 마을에서
수소문을 했을 터였고, 박 대위가 처한 입장까지를 다
알게 되었을 게 틀림없었다.
"앉아라."
한참 만에야 입을 여는 큰아버지였다. 박 대위는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앉아라."
큰아버지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의 고즈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박 대위는 그의 옆에 가 조용히
앉았다. 큰아버지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발 앞에
떨어진 꽁초 무더기가 그의 고통스러운 기다림을 말해
주는 듯했다. 박 대위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니라니까.... 네가 죄송할 게 뭐 있냐? 하나하나
따지자면 다 내 잘못인데.... 너도 주성이도 잘못한
거 하나 없다..... "
큰아버지의 목소리는 담배 연기를 따라 풀풀
날려가는 것 같았다. 박 대위는 고개를 깊이 떨궈
버렸다. 큰아버지는 내친 김에 말해 버리자는 것인지
여전히 허허로운 목소리로 말을 잇고 있었다.
"우리 지나간 일은이야기 하지 말자. 잘잘못을 따질
것도 없고 .... 문제는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인데....
우선은 네 어머니가 문제구나. 소식을 듣고 쓰러져서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박 대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주성의 월북은
박 대위보다 몇 배 더한 충격일 것이었다.
어머니로서는. 더욱이 그 모든 불행이 어머니 자신의
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죄책감이 겹쳤을 테니
쓰러지지 않는 편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집을 몰라서 우선 부대로 찾아갔다가 알게
되었다만 너.... 옷을 벗어야 된다면서?"
".... "
박대위가 대답 대신 더욱 깊게 고개를 숙여 버리자
큰아버지는 길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냐? 이런 일이 생겼을 것 같아서 투표도
않고 달려왔다만....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래,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모르겠습니다."
박 대위는 솔직한 심정 그대로 말을 해 버렸다.
이제 와서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꾸미겠는가.
큰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더니 다시 꽁초가 된 담배를
발 밑에 버렸다.
"내려오너라."
박 대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큰아버지는 이편의 심정을 충분히
짐작한다는 듯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거북한 건 잠시다. 사람들은 곧 잊어버린다.
걱정하지 말고 내려와라. 이제는 너 혼자 몸이니
편하지 않니? 내려와서 네 어머니도 보살펴 줘야 할
것이고.... 무엇이든 네가 마음 붙일 만한 일을 내가
찾아보마."
큰아버지의 목소리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렇듯
비참하게, 모든 꿈을 잃은 몸으로 고향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박주열은 결코 패배자가 되어선 안 되었다.
"살다 보면 다 이런 저런 좌절에도 부딪히게 되는
거 아니겠니? 다 이리 돌아가고 저리 돌아가고 하는
거야. 어렵게 생각하다 보면 아무것도 안 된다.
결심을 해 버려. 나하고 같이 내려가자."
"생각해 보겠습니다."
박 대위는 겨우 한마디를 할 수 있었다. 큰아버지가
나직한 소리로 혀를 찼다.
"그 생각이라는 게 끝이 없다니까. 그냥 결심을 해
버리는 거야."
"아직은 부대에 정리할 것도 좀 남았구요. 아무래도
그렇게 서두를 수야 있겠습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미덥지 않은 대답을 하면서 박
대위는 어쩔 수 없이 장 마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와 함께이기만 하면 어떤 방법으로든 새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이제 더는 자신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대대장 박민 중령의
여자였다. 그 잔인하고 간교한 자의.... 사랑이란
인간의 선악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일까. 대대장을
떠올리자 현철기 중위의 얼굴이, 그리고 분교장의
상황이 손에 잡힐 듯이 줄줄이 떠올랐다. 그들은 지금
어찌되어 있을까. 갑자기 현 중위가 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넌 행복한 놈이다.
그랬다. 싸워서 극복할 상대를 명료하게 가지고
있는 그는 행복하다고까지 생각되었다. 그러다
죽을지라도.
"알겠다.... "
큰아버지는 힘없는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뭘 정리한다는 거냐?"
"서류상으로도 정리를 해야 하고.... 짐도 챙겨
와야 하구요.... "
큰아버지는 갑자기 더욱 허탈해진 표정으로 또 한
개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마지막 담배인지 갑을 구겨
던지면서.
"짐이라면 저 안에 있는 거 아니냐?"
큰아버지는 방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잠시 말뜻을 몰라 어리둥절해졌던 박 대위는 뒤늦게야
날카롭게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에 얼른 방문을 열어
보았다.
".... "
방 한복판에 낡은 더블백이 하나 내던져져 있었다.
주둥이가 풀려서 박 대위의 트레이닝복이 비죽이
삐져나와 있었다. 박 대위의 사물들을 챙겨서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모양이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삐져나온 옷자락이 더욱 박 대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박 대위는 말없이 문을 닫았다. 그
더불백이야말로 박 대위의 군대 인생이 드디어
종지부를 찍었음을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증명해 주고
있었다.
"끝난 일이다, 미련 갖지 말아라."
박 대위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큰아버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박 대위는 그의 얼굴을 망연히
올려다보고만 앉아 있었다.
"난 내려가마. 있어 봐야 네 속만 상할 테고....
빨리 정리하고 내려오너라, 어머니도 기다리니까."
큰아버지는 대문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나갔다. 순간
박 대위는 무엇인지 모를 충동에 치받쳐서 소리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주성이는 누구 아들입니까?"
큰아버지는 우뚝 멈춰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두
눈에서 번쩍, 하고 빛이 튀는 듯했다. 박 대위는
마지막 몸에 남은 기운을 다해서 큰아버지의 얼굴을
뚫어져라고 바라보았다. 한참 만에야 큰아버지의
눈에서 빛이 가시면서 나직하고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네 아버지 아들이다."
그 말을 마치고 큰아버지는 대문을 나갔다. 박
대위는 그제야 툇마루 위에 길게 몸을 늘어뜨렸다.
그것으로 좋았다.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큰아버지의 입으로 그 말을 들었으니 그것으로
좋았다. 눈을 감으면서 박 대위는 누군가에게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제 됐다....
제 몫의 투표를 하고 나오면서 근우는 쓴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후보 같으면 기자들이
따라붙고 수행원들이 줄을 이으면서 법석을 떨텐데
근우 자신의 주변은 너무나 한산하기만 했다. 자신이
수행원들을 따라오지 못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근우는 짙은 외로움을 느껴야만 했다. 맞아 주는
선거종사원들이나 투표하러 나온 유권자들의 시선도
싸늘하게만 느껴졌다. 투표장 분위기로도 어느 정도
대세 판단이 가능하다고 본다면 과연 근우는 얼마나
선전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하기는 근우
자신도 한참을 망설인 끝에 무소속 후보에게 기표를
하고 나왔다. 자신을 찍지 않는다는 게 어이없는
일이긴 했지만 민정당 후보를 이길 것으로 예상되는
그에게 단 한 표라도 몰아 주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어차피 개판인 선거니까.
근우는 혼자 조소하면서 투표장을 나왔다. 언론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이번 선거는 돈과 폭력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었다. 중기가 죽은 다음날에도
영득이란 놈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이 나타나서
패싸움이 벌어졌고 10대의 칼잡이 둘이 죽었다고
했다. 물론 서로 다른 후보를 지지하며 선거운동을
하던 끝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일의 배후에
보안대장이 있음은 물론이었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 불쾌해져서 근우는 걸음을 빨리 했다. 투표장인
학교 앞에 세워 둔 승용차에 막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두 명의 청년이 달려들었다.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낀 근우가 얼른 차 안으로 몸을 실으려는데
청년 중의 하나가 팔을 붙들었다.
"무슨 짓이야?"
근우가 소리를 질렀지만 청년은 대답도 하지 않고
완강한 힘으로 근우를 끌어냈다. 또 한 청년이 역시
달려들어 다른 쪽 팔을 잡았다.
"놓지 못해?"
청년들의 신분을 얼른 헤아린 근우는 몸부림을 치며
다시 소리쳤다. 하지만 근우의 운전기사는 운전석에
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청년 중의 하나가 귓가에 대고 음산하게
속삭였다.
"조용히 가십시다. 해치진 않아요."
다시 어디선가 작은 승용차가 달려와 근우의 차
옆에 멎었다. 청년들은 근우를 그 차 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근우는 교문 앞에 카빈총을 메고
경비를 서고 있는 두 명의 경찰을 향해 구원을
청했다.
"이봐요! 나, 최근우요! 날 도와 줘요!"
하지만 그들 역시 못 들은 척 외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경찰! 뭐하는 거야?"
그래도 그들은 묵묵부답이었다. 투표를 하러 오던
사람들도 이런 소동을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을 뿐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려고 들지 않았다. 근우는 힘을
다해서 몸을 뒤채었다.
"놔, 이놈들아!"
"가만히 있으라니까요.... "
나직하게 말하면서 한 놈이 팔을 비틀었다. 근우는
저도 모르게 아, 하는 비명을 내질렀다.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근우는 짐짝처럼 승용차
뒷자석에 틀어박혔다. 두 청년이 빠른 동작으로 양쪽
문을 열고 올라타서 근우를 사이에 끼고 앉았다. 곧
차가 출발했다.
"뭐냐? 네놈들은?"
더 이상의 몸싸움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근우는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물어 보았다. 오른편의 녀석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가 보면 아시게 됩니다."
그러자 왼편의 녀석이 붉은색 보자기 같은 것을
하나 꺼냈다.
"눈을 가리셔야 되는데.... 협조하시겠지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근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청년이 곧 붉은 천을 근우의 눈에 대고는
뒤로 돌려 묶고 있었다. 붉은 보자기 속에서 근우는
눈을 감아 버렸다. 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하지만 이제부터 있게 될 그와의
싸움이 어떤 형태가 될지 짐작을 할 수 없다는게
두려웠다. 무엇을 요구해올 것인가. 이미 그는 예고를
해 온 바 있었다. 많은 것을 잃게 되리라고. 충분히
각오는 했던 일이었다. 선거가 끝나면 어떤 식으로든
위해를 가해 올 것은. 하지만 너무 의표를 찌른
기습이었다. 개표가 완료되고 결과가 나온 후에야
그가 손을 써 오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한 발 먼저
선수를 치고 나온 것이었다. 근우는 자신이 열세에
놓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근우는 입술을 아프게 깨물면서 다짐했다.
지지않겠다.
어딘지 모르지만 바람 소리가 심하게 들리는 곳에
차는 멈췄다. 그리고 두 청년에게 이끌려 내려간
근우는 잔돌들을 깔아 놓은 길을 지나서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느 방안으로 안내된 뒤에야 눈을
가린 보자기가 풀어졌다. 근우는 눈을
껌뻑껌뻑거리면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터무니없이
넓은 방안에 철제 책상 하나와 의자 둘만이 놓여 있는
휑 - 한 정경이었다.
"앉아서 기다리세요."
그렇게 짧은 한마디만을 남겨 놓고 청년들은
나갔다. 하지만 앉을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근우는
우두커니 선 채로 다시 사방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이 넓은 방안에 창이라곤 하나도
없다는것을. 어떤 목적으로 쓰이고 있는 방인지를
여실히 증명해주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근우는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고집처럼
중얼거렸다.
지지않아.
오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들어서는 사람은 역시
보안대장이었다. 근우는 타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보안대장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환영합니다. 오시는데 불편한 점은 없었지요?"
"이런 짓을 해도 됩니까?"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최근우
씨, 당신이 더 잘 아실텐데.... 자, 앉아요. 간단한
얘기가 아니니까. 물론 협조를 해주신다면야 간단하게
끝날 수도 있지만.... 우리도 병석에 계신 당신
아버지한테까지 충격을 주고 싶진 않아요,
하하하하.... "
근우는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이대로 얘기를 끝냅시다. 용건이 뭐요?"
보안대장은 끌끌 소리내어 혀를 차고 있었다.
"참 답답하네, 앉아!"
그는 이제 노골적으로 하대를 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근우는 천천히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가 앉았다. 보안대장은 건너편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었다.
"우리는 참 오래 거래를 해온 셈인데 말이지....
이젠 결산을 할 단계가 된 것 같애. 안 그래?"
숫제 무슨 피의자를 다루는 듯한 그의 태도에
근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보안대장은
놀리는 듯한 웃음을 섞어가면서 혼자 얘기를 계속해
나갔다.
"참, 나로서는 잘해 보고 싶었는데.... 당신이 그
모양으로 일을 망쳐 놓았으니 어쩔 수가 없지.
이것만은 알아두라구. 난 당신을 도우려고 했어. 그건
사실이야. 그렇지만 이제는 정리를 해야지."
"왜 이렇게 서두는 거요?"
근우는 노골적으로 물어 보았다. 상대가 이렇게
나오는데야 이러니저러니 말을 돌려가며 할 이유가
없었다. 보안대장은 흐흐, 하고 잇몸을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다 이유가 있지. 선거결과가 나온 다음에야 모시면
자칫 치사한 보복이라는 게 되지 않겠어? 난 그런 건
싫다구. 물론 결과는 두고 봐야 알긴 하지만.... 하긴
결과가 좋게 나오기를 당신도 빌어야 할 걸? 결과에
따라서 난 대접을 달리할 생각이니까."
보안대장의 말은 여러 가지를 암시하고 있었다.
적어도 여기서 하루 이상은 있게 되리라는 것, 정말로
민정당 후보가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혹독한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 근우는 문득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작년 10월, 조정수를
국장으로 앉힌다는 소문에 격분한 사원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켰을 때 현 부장이 이들에게
끌려가는 사건이 벌어졌었다. 그 때의 현 부장도 이
방에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근우는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의 분노를 담아서 나직하게 물었다.
"자, 여기서 내가 할 일이 뭐요?"
흐흐흐흐.... 음산한 웃음부터 흘리고 나서
보안대장은 입을 열었다.
"일종의 비즈니스지."
근우는 온몸이 싸늘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비즈니스? 그렇다면? 칼로 베는 듯한 예감이 가슴을
스쳐갔다. 보안대장은 즐기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잇고 있었다.
"모종의 거래를 하나 주선할까 하는데.... 최근우
씨, 남도신문사를 팔지 그래?"
".... "
근우는 책상을 탁, 짚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둥글게 살찐 조정수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갔다. 안 된다!
"앉아."
보안대장은 손가락으로 의자를 가리켜 보였다.
"어림없는 소리 말아요."
"앉으라잖아!"
이번에는 버럭 소리를 지르는 보안대장이었다.
근우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의자에 몸을 주저 앉혔다.
하지만 선언을 하듯 한 마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사는 못 팔아요. 팔 수 없소."
"그러면 동양운수는 팔 수 있다는 건가?"
"그것도 안 돼요."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상황판단이
원래 그렇게 무디던가? 공천을 안 하기를 잘했구만."
너무도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에 근우는 몸을 떨었다.
하지만 보안대장은 유들유들하기만 했다.
"뭐, 공짜로 가지자는 게 아니니까 잘 생각을
해보시지.... "
그러면서 보안대장은 안주머니에서 몇 장의
서류들을 꺼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서류들을
들여다보면서 협박 아닌 협박을 계속했다.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남도신문 주식이 삼만
육천 주니까.... 정확하게 전체의 삼십육
퍼센트라.... 그걸 넘기시지. 값은 액면가대로
정확하게 오백원 씩 쳐서 얼마가 되나.... 그렇지, 천
팔백원."
죽일 놈.... 근우는 욕설을 안으로 삼켜야 했다.
액면가야 5백원이지만 남도신문의 주식은 시가가 지금
2만 원을 웃돌고 있었다. 만에 하나 판다고 해도 7억
2천은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근우 자신이 인수한
가격만 해도 1만 2천 원씩 해서 4억 2천 3백만
원이었다. 그것을 1천 8백에.... 그냥 달라는
것보다도 더 염치 없는 소리였다. 다시 조정수의
싱글거리는 얼굴이 떠올랐다. 1천 8백만 원을 가지고
신문 하나를 삼키려는 그의 얼굴이. 명목상의
사장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인
모양이었다. 근우는 흐흐, 하고 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팔지는 않겠지만 한 가지 알아나 둡시다. 그렇게
터무니없는 값으로 사겠다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요?
어떤 날강도요?"
보안대장은 껄껄껄.... 어깨를 흔들면서 웃고
있었다.
"그건 아직 미정이지. 우리는 누가 사느냐는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당신은 사는 사람이 밝혀지지
않은 문서에 사인만 하면 되는 거야. 매수인이 누군가
하는 건 우리가 천천히 결정할 문제고...."
"조정수라고 왜 말 못 하시오?"
보안대장은 더 요란하게 웃어 제끼고 있었다.
"애매한 사람 끌어들이지 마시지. 하기는 우리도 그
사람을 생각해 보기는 하고 있지만.... "
"난 팔지 않아요."
"팔게 될걸?"
근우가 얼굴을 붉히자 이번에는 보안대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야, 이새끼야!"
".... "
"내가 이런 말까지 꺼내 놓고도 널 그냥 내보낼 것
같으냐? 너 하나 꺾어 놓지 못하면서 내가 무슨 일을
하겠느냐구!"
근우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씩씩거리던 보안대장은 거칠게 서류를 챙기더니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곧 방안의 불이
꺼졌다. 창이 없는 방은 순식간에 칠흑같은 어둠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 앉아서 근우는 다시
다짐했다.
지지 않아....
탄약현황판을 고쳐 놓고 나니 일은 다 끝난
셈이었다. 대대가 출동할 때 가지고 나갔던 실탄의
정리가 이제야 마쳐진 것이었다. 아니, 완전한
정리라고는 할 수 없었다. 석천소대의 탄약이 남아
있었으니까. 지섭은 길게 늘어놓은 탄박스 위에 몸을
눕혔다. 어쩔 수 없이 철기 생각이 떠올랐다.
김승일이 그 소동을 피운 후의 현장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을까. 그들은 살아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나무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뭐하고 있는 거야, 박지섭?
지섭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아침, 대대장으로부터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지섭은 아무런 분노를 느낄
수가 없었다. 얻어맞고 있는 동안에도 지섭은 속으로
중얼거리기만 했다.
지나간다, 지나가면 편안해지는 거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꾸만 충동질하는
목소리에게도 그렇게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다 지나가는 거야. 지나가면 편안해지게 돼 있어.
그들은 죽어 가고 있어, 최상민처럼....
지나간다니까.
지섭은 머리를 흔들면서 탄박스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상한 충동에 휩싸여서 방화삽 한
자루를 들고 탄약고 방벽 뒤로 돌아샀다. 거기엔
팀스피리트 훈련에서 돌아온 직후에 한 하사가
가리켜준 장소가 있었다. 이제 제대날짜가 1주일쯤
남은 한 하사는 그 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건 내가 너한테도 말 안 했던 건데, 이 밑엔
수류탄이 한 발 묻혀 있다. 내가 사수한테 인수
인계받을 때 보니까 수류탄이 장부수 보다 한 발이 더
있는 거야. 그걸 어떻게 처리하겠냐? 숨길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고.... 고민하다가 여기 묻어 버린 거야.
너한테 알리지 않고 제대할려고 했다만 혹시나 또
무슨 작업이라도 하다가 수류탄이 나오면 또 난리날까
봐서 얘기해 두는 거야. 그러니까 이게 발견되지 않게
늘 조심하란 말이야. 알겠어?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기운에 사로잡혀
지섭은 한 하사가 가리켜 준 자리를 파기 시작했다.
한 삽, 두 삽.... 얼마 파지 않아 곧 쨍, 하고 삽날에
닿는 것이있었다. 탄통이었다. 더욱 삽질을 빨리해서
지섭은 곧 탄통을 들어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아닌게아니라 세열수류탄이 한 발 얌전하게
들어 있었다. 지섭은 한 손으로 수류탄을 가만히 들어
보았다. 무언가 광폭한 기운이 온몸을 뒤흔드는
듯했다. 손이 떨렸다.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돼!
안 된다니까.
일어나, 박지섭!
지섭은 더욱 손을 떨면서 수류탄을 도로 탄통 속에
내려놓았다. 탄통을 닫고 다시 흙 속에 들이밀고는
서둘러 흙을 덮기 시작했다. 다시는 꺼내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지섭은 한순간 자신을 흔들어 놓았던
거칠고 뜨거운 기운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가는 거야.
버릇처럼 중얼거리면서 지섭은 발로 땅을 다져
놓고는 방화삽을 들고 방벽 뒤를 돌아나왔다. 그리고
지섭은 하마터면 아, 하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탄약고 앞에 박도기 중사가 우뚝 서 있엇다.
".... "
지섭은 굳어져서 멈춰서 버렸다. 언제부터 박
중사는 이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일까. 혹시 지섭이
수류탄을 꺼내는 모양까지 지켜본 것은 아닐까.
하지만 박 중사도 지섭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디 있었지?"
지섭은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예, 작업 좀 하느라구요.... "
연대 의무대에 있다고 들었던 박 중사가 언제
대대로 들어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그는
위험인물이었다. 지섭은 열린 탄약고 문 앞을
가로막듯이 안으로 들어섰다. 박 중사도 한 발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부탁이 있다, 박지섭."
박 중사는 우람한 덩치로 위압하듯 버티고 서서
말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폭약을 달라고 조르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뭔데요?"
"실탄을 한 탄창만 줘. 응?"
박 중사는 한 손을 펴서 지섭에게로 내밀면서
애원하듯 말하고 있었다. 지섭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안 돼요, 병기관님한테 말씀하세요."
하지만 박 중사는 지섭이 물러난 그만큼 더
다가오며 손을 코밑으로 내밀었다.
"한 탄창, 스무 발만 달라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께."
그의 눈빛은 어떤 광기 같은 것으로 해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지섭은 욱죄어드는 공포로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박 중사는 억지로
실탄을 가져갈지도 몰랐다.
"줄 거지?"
박 중사가 숨막히게 다시 졸랐을 때였다.
"뭐하고 있는 거야? 박 중사!"
누군가가 박 중사의 등뒤로 나타났다. 바로
작전관이었다. 그 뒤에는 부관 이 준위도 따르고
있었다. 에이, 하고 박 중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왜 여기 와 있는 거야?"
부관이 다그치자 박 중사는 퉤, 하고 탄약고 바닥에
침을 뱉고는 돌아서서 작전관과 부관을 밀치며 나가
버렸다.
"박 중사!"
작전관은 다급하게 부르면서 쫓아나갔고, 부관은
지섭에게로 다가왔다.
"실탄 달라고 그랬어?"
"네."
"안 줬지?"
안 줬습니다."
"앞으로도 주의해야 해. 절대로 실탄 주면 안 되는
거야?"
이 준위는 쥐를 닮은 두 눈을 빛내면서 다짐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빨리 문 잠그고 나와. 작업 다 끝났지?"
예, 하는 대답을 뜯고야 이 준위는 돌아서서
탄약고를 나갔다. 지섭은 천천히 탄약고 안팎의
자물쇠를 차례로 채웠다. 박 중사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사그라들었던 마음속의 불씨가 다시
이글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지섭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 불씨의 존재를. 하지만
밖으로 피워 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았다. 더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안 된다, 박지섭.
탄약고 밖으로 나와 보니 작전관과 부관, 그리고 박
중사가 취사장 앞에서 한 덩어리가 되어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마도 연대 의무대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박 중사가 거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화장실을 나서던 김승일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본다
싶더니 갑자기 교문 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철기는 숨어서 지켜보던 전나무
그늘에서 뛰쳐나왔다. 이 편을 발견한 김승일은 더욱
걸음을 빨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기에 관한 한
철기를 따를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철기는 바로
교문에 몇 미터쯤 못미친 지점에서 김승일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목을 휘감으며 철기는 김승일과 한
덩어리가 되어 쓰러졌다.
"놔!"
김승일은 짐승처럼 소리치며 몸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철기는 그의 허리를 완강하게 끌어안았다.
"못 가."
"놓으라나까!"
"애기하기 전엔 못 가."
"제발.... "
김승일은 숫제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녀석이었다. 낮에 분교 안으로 들어온 이후로
아무리 다그쳐도 입을 열지 않고 있더니 이렇게
기회를 보아 달아나려고 들다니. 철기는 김승일의
목덜미를 낚아채서 나란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목을 잡은 손에 힘을 가하면서 다그쳤다.
"말을 해. 대대장하고 장석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지?"
"난 몰라.... "
김승일은 장석천을 대대장이 죽였다고 얘기를 해도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연극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까 대대장은 그
누구에게도 진실을 다 털어놓지는 않고, 하나의
비밀은 김승일과, 또 하나의 비밀은 최 중사와 나누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만치 김승일의 증언을
들어야만 이미 밝혀진 사실들과 함께 한 가닥으로
사건이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철기는 목을 조른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말해, 작년 여름에 그 이중대 이등명 말이야,
자살한 게 아니지? 대대장이 죽였나?"
"천만에, 난 몰라.... "
김승일은 철기의 손을 떼어내려고 애를 쓰면서
숨가쁜 소리로 부인을 하고 있었다.
"왜 몰라? 네가 순찰 돌다가 발견했다면서?"
".... "
"말해. 대대장이 죽였나?"
"아니야.... "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상황에서도 김승일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철기는 그의
목을 놓아 주었다. 후우.... 하고 숨을 몰아쉬면서
김승일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있었다. 넋이 나간
듯한 그의 모습을 철기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걷으로는 강한 척해도 속은 형편없이 약하고 치사한
녀석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대장에관한 일만은 끈질기게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알 수 없는 놈이었다. 철기는 군화발로
그의 엉덩이를 툭, 걷어찼다.
"일어나."
반발하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김승일은 툭툭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고분고분한
자세가 오히려 더욱 밉살스러웠다. 철기는 더 세게
엉덩이를 걷어찼다.
"들어가!"
김승일은 고개를 푹 숙이고 교실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더러운 것을 피하듯 철기는 사이를
충분히 두고 그의 뒤를 따랐다. 김승일이 소대원들이
모여 있는 교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서서 수돗가를 향하는데,
"소대장님."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돌아보니
고인택이었다. 아주 무거워 견딜 수가 없다는
모습으로 소총을 끌어안은 고인택이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철기는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전해지는 통증을 느끼면서 그에게 마주 다가갔다.
고인택은 평소보다도 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경알에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지?"
".... "
입술을 찡긋찡긋하면서 고인택은 선듯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철기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 말해봐."
"저.... 제가 나가면 안 될까요?"
"뭐라구?"
"제가 자수를 하면.... 안 됩니가?"
뜻밖의 소리를 하는 고인택이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의 성품으로 보아 꺼낼 만하기도 한 소리였다.
아니, 그의 마음을 철기는 들여다보듯 읽을 수가
있었다.
"왜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하나?"
"저 때문에 일이 이렇게.... 저만 자수를 하면 다들
살 수 있을 텐데.... 제가 나가겠습니다."
"고인택."
"예, 소대장님."
철기는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고인택의
귓속에 불어넣듯이 말을 했다.
"약해지면 안돼. 약해지면 또 당하는 거야. 알겠나?
네가 나가면 너 하나만 죽는 거고, 끝까지 우리가
버티면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다. 알겠나?"
".... "
나를 믿지?"
그 말에는 고인택도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철기는 다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돌아가서 쉬고 있어. 나한테 맡겨."
"알겠습니다."
돌아서서 교실로 들어가는 고인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철기는 자신에게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는 김승일 뿐만 아니라
고인택에게서도 눈을 떼어선 안 되겠다고.
아까부터 내내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던 사단장이
고개를 들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끝났겠구만."
수색대대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대대장은 알 수 있었다. 이제 투표시간이 끝났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는 무언가
중요한 결심을 암시하는 기운이 들어 있다고 대대장은
생각했다.
"어떻게 될까요?"
대대장은 일부러 눈앞의 현안과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뭐가 어떻게 돼?"
"이 장군 말입니다. 당선 되겠죠?"
사단장은 피식 웃어 버리고 있었다.
"선거 말이야? 당선 못 되면 배 가르고 죽어야지
뭐."
"일등할까요?"
"일등 못하면 그것도 창피한 노릇이고.... 그런데
그 친구 하라는 선거운동은 안 하고 엉뚱한 짓이나
하고 다녔으니, 만에 하나 이등을 하는 일이 생기면
다 그 때문이라고 봐야지. 안 그래?"
동료의식과 시새움과 적개심이 아주 묘하게 뒤섞여
있는 사단장의 질문에 대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원래 본말이 좀 전도된 것 같은 일을 많이 하시는
양반이지요."
"본말? 대대장은 뭐가 본이고 뭐가 말인가?"
".... "
이죽거리는 듯한 사단장의 말뜻을 새길 수가 없어서
대대장은 눈만 말똥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빨을
드러내보이면서 사단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군인으로서 뭐가 본이고 뭐가 말이냐 이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
"답답하기는.... 군인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뭐야?"
군인으로서 자네가 가장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일이
뭐냐구."
"그야.... 국토방위를 위한 정병육성입니다."
사단장은 잇몸까지 벌겋게 드러내면서 웃어 보였다.
"정말 그래?"
"네, 그렇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별을 따는 게 아니고?"
".... "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수색대대장이 소리를 낮춰
킬킬거렸다. 하하하.... 하고 숫제 소리내어 웃던
사단장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있었다.
"박 중령."
"예, 각하."
"내가 지난번에도 얘기했지? 지금이 중요한
시기라고."
"네."
"잘해야 돼. 알았어?"
"명심하겠습니다."
"내 손으로 자네 어깨에 별을 달아 주지는
못하지만, 달게 될 별을 달지 못하게 하는 방법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여러 가지 뜻이 담긴 듯한 사단장의 말에 대대장은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단장은 다시 시계를
보고 있더니 이윽고 뚝뚝 잘라 던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내일 정오까지 시간을 주겠어. 그 때까지 투항을
하지 않으면 공격하는 거야. 더는 기다리지 못해."
대대장은 순간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다만 현철기와 최도천과
김승일과 고인택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렸을 뿐이었다.
아무런 감정의 흔들림도 없이.
다 끝난다.
나직하게 중얼거리면서 대대장 박민 중령은 그
얼굴마다 마음속으로 붉은 줄을 그어 나갔다.
114. 1981년 3월 25일 ③
갑자기 팟, 하고 불이 들어오는 바람에 근우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흐흐흐, 하는 보안대장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근우는 약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따가울 만큼이나 눈이 부셨지만 억지로 눈을
떴다. 보안대장은 느물거리는 웃음을 지으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막 개표가 시작됐지. 궁금하지 않아?"
그 말에서 시간을 대충 어림해 보면서 근우는 한
마디 쏘아 주었다.
"개표가 시작됐다면서, 후보자를 이렇게 잡아
놓아도 상관없는 거요?"
하지만 보안대장은 배를 내밀면서 대답하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그러겠어? 그나저나 지금까지는
상황이 우리한테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이지. 최
사장한테는 다행이지. 아 뭐.... 그렇다고 내가
추진하는 거래를 취소하지는 않을 테지만 아무래도 좀
대접이 후해질 수 있지. 계속 기도라도 해 두라구."
근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 버렸다.
하지만 사방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벽밖에 없는 방....
과연 자신은 여기를 무사히 나갈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생 정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정우는 이런 방에서의 이런 경험을 수
없이 가지고 있으리라. 이런 공포를 감수하면서까지
그 아이가 고집하는 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해할
수는 없어도 이제 인정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근우
자신이 이렇게 고집스레 지켜야 할 것이 있듯이
정우에게도 꼭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으리라.
근우는,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빠져
있음에 분명한 동생 정우에게 이제는 격려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
지지 말아라.
"고개를 드시지."
보안대장의 말에 근우는 얼굴을 들었다. 개기름이
번들 거리는 보안대장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최 사장, 잘 들어요."
그는 예전처럼 경어를 쓰고 있었다. 중요한 고비에
이르렀다는 말일 터였다. 근우는 그저 그림이나 조각
같은 것을 바라보듯 멍하니 그에게 시선을 던져 둔
채로 앉아 있었다.
"한번 우리 입장이 되어서 생각을 해보시오. 당신을
데려다가 그런 얘기를 이미 꺼냈는데.... 당신이
싫다고 해서 호락호락 우리가 굽히겠는가 말이야....
무슨 수를 쓰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않소?"
"나도 한 마디 할까요? 천팔백만 원에 신문사를
사겠다는 건 도둑질이라고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누가
뭐래도."
"그러면, 액수만 맞으면 넘기겠다는 거요?"
"그런 건 아니지만.... "
"이새끼가!"
보안대장은 책상을 쾅, 하고 내리쳤다. 그리고
윗도리를 들춰서 권총을 꺼내고 있었다. 근우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안대장은 총구로 근우의
이마를 쿡, 찔렀다.
"야, 이자식아! 지금이 어떤 세상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어? 네 깟놈 하나 죽이려고만 들면 죽이지
못할 것 같애?"
".... "
"솔직히 말해서, 그래도 한동안 친하게 지냈던 일만
없었으면 벌써 떡이 되도록 패줬을 거야. 네
동생년처럼 다뤄 줬을 거다. 이 말이야!"
보안대장의 말은 정우가 당하고 있을 고초를 마루어
짐작하게 해주고 있었다. 근우는 눈을 감아 버렸다.
여자인 정우가 당하고 있는 모양이 바로 눈앞인 듯
떠올라서였다.
"눈 떠!"
보안대장은 다시 총구로 이마를 찔렀다. 뚫어지는
듯힌 통증과 함께 근우는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보안대장은 계속해서 툭, 툭 총구로 이마를
건드리면서 얘기를 계속했다.
"곱게 대해 줄 때 사인을 하는 게 나을 거야.
정말이지 옛정을 생각해서 충고하는데 말이지, 몸
버리고 못 볼 꼴 다 보고 나서 포기하지 말고 미리
현명하게 판단을 하라구. 당신.... 신문사 안 해도 살
수 있잖아?"
"신문사 경영은 내 꿈이었소."
"웃기지 마. 국회의원 되는 게 꿈이라고 왜
솔직하게 말을 못해?"
그 말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보안대장은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모르겠어? 이제는 여여 그 꿈은
물을 건너가 버렸다. 이 말이야. 이 나라에서 당신
같은 사람이 금배지를 달 기회는 사라졌다.... 이
말이라구. 그런데 신문사만 붙들고 있으면 뭐하나?
당신이 언제부터 언론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구?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신문사도 그래. 조정수 씨가
힘쓰지 않았다면 살아남아 있겠어?"
보안대장의 말은 역시 조정수가 인수자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근우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정수가 사는 거요? 그렇지요?"
"그게 무슨 상관이오? 누가 사든 당신이
내놓는다는게 중요해 나한테는, 알겠수?"
"천만에, 나한테는 누가 사는가도 중요해요.
조정수라면 더더욱 내놓을 수 없소."
"최근우!"
보안대장은 방안이 떠나가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자식이 그래도 말귀를 못 알아듣네? 임마, 네가
좋고 싫고 할 단계가 아니라니까! 내가 널 설득하려고
이러는 줄 알아? 너하고 타협을 하려고 이러는 줄
아느냐구?"
".... "
"네 항복을 받아낼 방법이 없어서 이러는 줄 아느냔
말야! 웃기지 마, 응? 가능하면 부드럽게 대해 주려고
이러고 있는 거야. 내 호의란 말이야! 좋아. 이제
악랄하게 굴어 주지. 기다리라구."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총구로 찌르고는 보안대장은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다시 불이 꺼졌다.
정우야.
자신이 누이동생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에 근우는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병우 후보가 밀림의 문을 밀고 들어서자 우선
요란한 음악이 귀를 때렸다. 그리고 어둡고 붉은
조명이 겨우 밝히고 있는 실내에서 몇 사람이
어지럽게 몸을 흔들며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병우 후보는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차츰 어둠에 눈이 익으면서 그들이 셋이며, 둘은 장
마담과 명옥이라는 아가씨, 그리고 또 하나가 중위
계급장을 단 장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이병우
후보가 들어선 것도 모르는 채 광란하는 음악에 몸을
맡겨 둔 채 어지럽게 사지를 흔들며 돌아가고 있었다.
이명우 후보는 이상하게 그런 그들이 흉해 보이지
않았다. 두 여자는 물론이고 장교까지도. 아니,
자신도 저렇게 격렬한 음악에 맞춰 흔들어 대고만
싶었다. 가슴속 어딘가에 답답하게 억눌린 것들을
터트려 버리고만 싶었다. 진행중인 개표에서 이병우
후보는 줄곧 2위를 달리고 있었다. 3위와는 현격한
차이를 둔 2위였으니 당선은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1위를 따라잡을 것 같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실망한
빛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그러나 2위에 머물 것
같은 선거결과를 답답해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저 모곡분교장에 갇혀 있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죽어 가게 놔 둘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어머?"
백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던 장 마담이 그제야
인기척을 느끼고 놀란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제야
다른 두 사람도 이병우 후보의 존재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엉거주춤 동작들을 멈추고 있었다.
"나요."
이병우 후보는 왠지 겸연쩍은 기분으로 말했다. 곧
밝은 불이 켜졌다.
"어머, 누구시라구요? 국회의원 나리 아니세요?"
장 마담은 비꼬듯 말하고 있었다. 이병우 후보는
어색하게 대꾸했다.
"아직은 아니요. 떨어질지도 모르고."
명옥, 미스 윤은 어쩐지 많이 취하지 않은
표정이었고, 중위는 숫제 몸이 휘청거리는
상태이면서도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의식한 듯 자세를
추스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의 손이 이마에
올려졌다.
"필승...."
이병우 후보는 허허, 하고 웃어 버렸다.
"이젠 안해도 되네. 마담, 나 술 좀 주시오."
이병우 후보는 홀을 가로질러서 열려 있는 룸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 외에는 손님도 하나 없는 듯 룸은
비어 있었다. 이병우 후보는 제법 푹신한 의자에 몸을
던졌다. 오늘은 정말로 저 중위처럼 취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곧 장 마담이 흐느적거리면서 들어왔다.
그리고 이병우 후보의 옆에 몸을 붙여 왔다. 진한
여인의 체취가 코를 찔렀다. 이병우 후보는 무섭게
꿈틀거리는 욕망을 느꼈다. 정말이지 그렇게 살아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술과 장미의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그 병사들 중 누군가는 총에 맞아
쓰러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일에는 이병우
후보 자신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오늘은 웬일이세요? 이제 더 조사할 일도
없을텐데?"
장 마담은 혀가 말린 소리로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이병우 후보는 피식 웃어 보였다.
"술집에 술 마시러 오지, 뭐하러 오나?"
"당선 축하파티를 여기서 하시게요?"
"마담은 나가 있어요."
퉁명스럽게 말한 것은 아까의 그 중위였다. 이병우
후보는 오히려 어리둥절해져서 막 들어선 그를
바라보았다. 중위는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거듭
재촉을 하고 있었다.
"나가 있어요."
장 마담도 그런 중위의 기세에 놀랐는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서는 비틀거리며 룸을 나갔다. 중위는 선
채로 말을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런 꼴을 보여 드려서."
이병우 후보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거기앉게."
하지만 중위는 앉지 않았다. 그리고 엉뚱한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사단장님."
"난 사단장이 아니야. 뭔지 모르지만 자네 부탁을
들어줄 입장도 아니고. 자, 앉아. 술이나 같이 하지."
중위는 잠시 말없이 이병우 후보를 내려다보고
있더니 이윽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현철기를 살려 주십시오, 사단장님...."
이병우 후보는 온몸에 찬물을 끼얹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현철기라는 이름을 중위는 입에 올리고
있었다.
"부탁입니다, 사단장님. 그 사람을 살려 주십시오.
그 사람은 지금...."
"그만 하게."
이병우 후보는 손을 내저어서 그의 넋두리를
제지했다. 중위는 무릎을 꿇은 채로 이병우 후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병우 후보는 화난 목소리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넨 소속이 어딘가?"
"노도연댑니다. 일대대 지대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랬구나.... 그러니 현철기의 일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지금가지의 일을, 현재 처해 잇는
상황을.... 모두 다.
"이리 앉게. 술이나 해."
"그럴 때가 아닙니다, 사단장님."
"그럴 때가 아니기는? 자네도 술을 마시고 있었지
않나?"
"죄송합니다. 하도 답답해서.... 하지만 일개
중위인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사단장님은 할 수
있으십니다. 그 사람들을 살려 주십시오. 저는.... 그
현장에까지 갔었습니다만.... 아무것도 할수
없었습니다. 십.... 오륙 명이 학살을 당할 판인데도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중위는 룸의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숫제 통곡을
하고 있었다. 안경이 떨어져 굴렀다. 이병우 후보는
길게 한숨을 토해 냈다.
"나도 갔었네."
".... "
중위는 안경을 주워 걸치면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병우 후보는 고해라도 하듯 말을 이었다.
"나는 사실 일이 그렇게 된 데 대해서 내 책임도
크다고 생각을 하고 있어. 그래서 현장을 갔었네.
하지만.... 자네처럼 나도....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어. 나는 민간인이고, 사단장은 이제 다른 사람이
아닌가?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네."
울고 싶은 것은 오히려 나다.... 그 말만은 안으로
삼켜 버렸다. 중위는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떨궈 버리고 있었다.
"그러니 일어나. 오늘은 나하고 술이나 마시세."
"아닙니다!"
갑자기 중위가 소리쳤다. 숙이고 있던 얼굴을 발딱
들어올리면서 중위는 흐느끼는 소리로 말을 잇고
있었다.
"할 수 있으실 겁니다.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단장님. 분명히 방법이 있을 겁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
순간, 이병우 후보의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랬다. 방법이 있기는 있었다. 체면을 가릴
것 없이 대든다면.... 이병우 후보는 홀린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중위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맞아, 한 가지 방법이 있어, 해보겠네."
"사단장님...."
"사단장은 아니라니까.... 자네 이름이 뭔가?"
"예, 중위 신한수...."
"고맙네."
신 중위의 손을 한 번 흔들어 주고 이병우 후보는
얼른 룸을 나섰다. 장마담과 미스 윤은 홀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룸에서 나누는 얘기를 다 들은
듯한 표정들이었다.
"미안해, 나 그냥 가야겠어."
이병우 후보가 손을 들어 보였어도 그녀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병우 후보는 빠른 걸음으로
밀림을 빠져나왔다.
해보는거야.
"못 나갑니다. 일체 유동병력이 없게 하라는
지십니다."
위병조장은 겁에 질린 표정이면서도 할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도기 중사는 물러나지 않았다.
어린애 머리통만한 주먹을 들어 올려 위병조장에게
내밀어 보였다.
"씹새끼가.... 너 나, 누군지 몰라?"
".... "
위병조장이 흠칫, 뒤로 물러나자 박 중사는 지섭의
등을 떼 밀었다.
"가자."
지섭은 그가 시키는 대로 위병소를 지나 정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박 중사는 다시 위병소에다 대고
소리치고 있었다.
"술 한 잔 하고 곧장 들어올 거야. 개새끼들,
지랄하면 정말로 개판쳐 버린다고 그래!"
그리고 박 중사는 곧 큰 걸음으로 다가와서 지섭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대대 울타리를 끼고
돌아서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갔다. 지섭은 알 수
있었다. 내무반에 혼자 누워 있는 자신을 박 중사가
왜 불러냈는지를.... 그리고 이미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에 지섭은 적지않이 당황하고 있었다.
줘 버릴까?
지섭이 떠올리고 있는 것은 박 중사의 요청대로
실탄이 아니라 묻혀 있는 수류탄이었다. 왠지 그
수류탄을 박 중사에게 주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래서.... 지섭은 보이지
않게 머리를 흔들었다.
안 돼.
그렇게 복잡한 마음으로 지섭은 백 과부집을
들어섰다.
"아줌마!"
박 중사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소리를 쳤지만
대답이 없었다. 양쪽 방에 모두 불이 켜져 있는데도.
"아줌마!"
박 중사는 백 과부의 방을 거칠게 열어ㅈ혔다.
방안은 비어 있었다. 부엌을 열어 보고 끝내는 여준구
씨네 방까지 열어본 박 중사가 혀를 차면서 돌아섰다.
"아무도 없네? 씨팔.... 가자, 박지섭."
박 중사가 이끄는 대로 지섭은 다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채 문을 나서기도
전에 누군가가 헐떡거리면서 달려들어오고 있었다.
"누구요?"
박 중사의 호통에 놀라 멈춰서는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둘이었다. 바로 여준구 씨와 여종일이었다.
"거긴 누구요?"
여준구 씨의 물음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박 중사가 투덜거렸다.
"난 또 누구라고.... 여기 백보지 할망구는
어디갔소?"
"모르겠소."
여준구 씨는 아직도 숨찬 소리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지섭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을 보고 놀랐다기보다는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기색이었다.
"어디로 간 거야, 쌍.... 장사도 안 하고....
가자."
박 중사는 다시 지섭의 등을 밀었다. 지섭은 말없이
여준구 씨와 여종일의 옆을 지나쳤다. 여종일은
아버지의 등뒤에 숨듯이 서 있었다. 아직도 그들의
숨소리는 거칠기만 했다.
무슨 일이지?
박 중사와 지섭이 문을 나서서 대대 쪽을 향해 몇
걸음 내디디지 않아서였다.
"잠깐만.... "
여준구 씨가 나서면서 부르고 있었다. 박 중사가
거칠게 대답했다.
"뭐요?"
여준구 씨는 박 중사에게가 아니라 지섭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무언가 지섭에게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저....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현 중위 사촌
된다는.... "
여준구 씨는 어느새 그 정도를 짐작할 만큼 대대
사정에 훤한 모양이었다. 까닭모를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지섭은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습니다만."
"역시 그랬군요. 그러면 말씀드려도 되겠네요."
여준구 씨는 더욱 긴장한 기색으로 잠시 머뭇거리고
있더니 이윽고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기, 추모탑에.... 사람이 죽어 있어요."
".... "
지섭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죽어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박 중사가 여준구 씨의
멱살을 잡기라도 할 것처럼 나서고 있었다.
"뭐라고요?"
"사람이 죽어 있어요, 아마.... 중대장 같은데....
"
"중대장 누구요?"
지섭은 박 중사를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이미 어떤
예감이 빠르고 날카롭게 가슴속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박 대위 말이오.... "
역시 그랬다. 지섭은 갑자기 머리 속이 텅 비어
버리는 것 같았다. 여준구 씨는 변명을 하듯 말하고
있었다.
"내가 늘 밤이면 우는 아이를 데리고 탑 있는 델
갑니다. 그런데 아까는 뭔가 이상한 물체가 그 무너진
탑 앞에 걸쳐져 있지 않겠소? 불을 비춰 보니까
사람인데.... 죽어 있어요. 겁이 나서 얼핏만 보고
도망치기는 했지만, 그.... 박 대위가 틀림없어요."
여준구 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 중사는 홱,
하고 여준구 씨의 손에서 플래시를 나꿔채더니 후닥닥
뒷산 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지섭도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지섭이 다가서기 전에 플래시 불빛이 꺼졌다.
그리고 박 중사는 가로막듯 지섭의 앞에 버티고 섰다.
"보지 마."
하지만 지섭은 이상하게 속에서 북받쳐오르는
열기에 취해서 그의 옆을 지나쳤다. 박 중사가 옷깃을
잡아당겼다.
"보지 말라니까. 박 대위가 맞아."
"놔요!"
지섭은 박 중사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 서슬에
놀랐는지 박 중사는 더 붙잡지 않았다. 지섭은 천천히
탑을 향해 다가섰다. 무너지다 남은 탑의 기단 위에
박 대위의 시신은 걸쳐져 있었다. 지섭의 심장은 이제
고동을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박 대위가 죽었다.
지섭은 왠지 믿어지지가 않아 입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가장 군인다운 군인이 되고 싶어하던 사람,
군에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 그가 죽었다. 군이 그를
죽였다. 장석천도 그랬다....
"동맥을 잘랐어."
등뒤에서 박 중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플래시 불빛이 어깨 너머로 뻗쳐 왔다. 지섭은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늘어뜨린 팔과 그 아래
흥건하게 탑의 기단을 물들이며 흘러내린 핏줄기를.
불빛은 곧 꺼졌다. 하지만 그 모습은 지섭의 뇌리에서
언제까지고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박 중사님."
지섭은 온몸이 옥죄어드는 듯한 느낌으로 그를
불렀다. 박 중사는 말없이 등뒤에서 어깨에 손을 얹어
왔다. 지섭은 끝내 말해 버렸다.
"내일 아침에 내무반으로 오세요."
삐이 하고 스피커 소리가 밤의 정적을 찢고 있었다.
얼핏 잠이들었던 소대원들이 다들 깨어나고 있었다.
철기는 누운 채로 귀를 기울였다. 바로 옆에서
김승일이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스피커는 잠시
더 삐삐거리고 있더니 이윽고 투박한 목소리를 토해
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분교장 안에 있는 병력들에게 알린다."
사단장이었다. 철기는 누운 채로 온몸을 긴장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밤중에 왜 방송을 한다는
얘기일까. 사단장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너희들의 조건은 하나도 들어줄 수 없다.
알겠는가? 우리는 너희들이 내건 조건을 단 하나도
들어줄 수 없다. 현 중위는 똑똑히 들어라. 아무 조건
없이 병력을 끌고 나오면 모든 것을 용서하고 불문에
붙이겠다. 시간은 내일 정오, 십이시 정각까지다.
알겠는가?"
소대원들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철기는 놀라지
않았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다만
너무도 악랄한 그들의 태도에 이가 갈릴 뿐이었다.
방송을 하고 있는 사단장의 내심과 사단장을 부추기고
있을 게 분명한 대대장의 속셈을 철기는 손바닥으로
들여다 보듯 읽을 수가 있었다. 대대장은 아마도 이
안에서 모두가 죽어 버리기를 바라고 있으리라. 철기
자신과 최 중사와 김승일까지도.... 그러면 모든
비밀은 묻혀 버리고 만다. 적지 않은 인명이
희생된다는 게 부담이 되기는 하겠지만 그의 죄과가
드러나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이리라. 그리고 죽는
자는 말이 없다. 대대장이 로비를 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조작하고 은폐해 버릴 수가 있으리라.
"다시 한 번 반복하겠다.... "
사단장은 거듭 위협을 하고 있었다.
"아무 조건 없이 투항하라. 내일 정오까지 투항하지
않으면 우리는 공격하겠다. 내일 정오까지 아무 조건
없이, 전원 투항하라. 투항하지 않으면 무차별
공격하겠다. 전원이 투항한다는 걸 명심해 주기
바란다. 개별적으로 나오는 병사가 있을 시는 그
의도를 알 수 없으므로 사격하겠다. 전원이 나올
경우에만 투항을 인정한다. 이상이다.... "
선전포고군....
철기는 입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소대원들은 말이
없었지만, 그들 위에 깔린 공포와 긴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냉철하게 판단해서 저들을
내보내야 할 때라고 철기는 생각했다. 하지만
사단장은 개별적으로 나오는 사람에게는 사격한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어떻게 고인택과 자신은 빠질
것인가. 누군가의 손이 철기의 팔을 붙들었다.
"현 중위."
착 가라앉은 목소리는 김승일의 것이었다. 김승일은
바싹 옆으로 다가오면서 사정하듯 말하고 있었다.
"난 내보내 줘."
철기는 훗, 하고 코웃음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듣고도 모르나? 개별적으로 나오면 쏘겠다잖아?"
"난 아니야. 난 다르잖아."
철기는 하하하. 하고 소리를 높여 웃고 말았다.
"바로 너 때문에 저런 소리를 하는 거야."
".... "
놀라는 김승일에게 철기는 결정적인 한 마디를
해주고 말았다.
"대대장은 네가 여기서 죽기를 바라는 거야.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잠시 말이 없던 김승일은 이윽고 고집스럽게 부인을
하고 있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내 말이 맞아. 널 들여 보낸 것부터가 네가 죽기를
기대하고 있어서야. 난 정말로 널 보내 줄지
반신반의했었어."
"아니야!"
소대원들이 이제는 다 이 편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김승일은 개의치 않고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절대로 그렇지 않아! 대대장은 나보고 도망
가라고까지 했었어. 난 율곡검문소에서 잡혀 왔어!"
그랬구나, 하고 철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늦어진 모양이었다. 김승일의 비열함에, 그리고
대대장의 교활함에 새삼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철기는 몸을 일으켜서 김승일을 향해 앉았다.
"잘 들어, 김 중위."
"난 나갈 거야."
"살고 싶으면 내 얘길 잘 들어. 그래, 대대장은
네가 도망 쳤으면 그걸로 좋았겠지. 하지만 도망을 못
가고 잡혀 온 바에는 여기서 죽어 버리기를 바라고
있을 거야.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왜? 왜 내가 죽기를 바라나?"
"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 넌 대대장의 비밀을 알고
있어. 장석천은 그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죽었지....
너라고 예외일 수는 없어. 대대장은 너, 나, 그리고
최 중사까지 모두 여기서 죽어 버렸으면 하고 바라고
있을 거야."
"거짓말이야.... "
하지만 김승일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왜 한 명씩 나오면 쏜다고 하겠나?
널 살려 낼 생각이 없는 거야. 대대장도,
사단장도.... 사단장이 왜 그러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말이지.... 이제 너는 좋으나 싫으나
우리하고 생사를 같이하게 된 거야."
"난 갈 거야."
김승일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철기는 싸늘하게
내뱉었다.
"가봐. 시범케이스로 죽는 꼴을 좀 보게."
".... "
김승일은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엉거주춤 서
있더니 이윽고 무너지듯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
머리를 다리 사이에 쳐박고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철기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까 말을 해봐."
"말할 게 없어."
"아니야, 넌 알고 있어. 대대장이 그 이등병을
죽였나?"
"말할 게 없다니까!"
김승일은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철기는 그
쯤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곧 입을 열게 되어 있었다.
철기는 다시 드러누우면서 소대원들에게 심드렁하게
일렀다.
"밤 사이엔 아무 일 없을 테니까 잠들 자거라. 내일
아침에 얘기하자."
115. 1981년 3월 26일 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꽈당, 하고 제 몸이
바닥에 굴러 떨어지는 서슬에 근우는 흠칫 놀라
정신을 차렸다.
"팔자 좋구만."
이죽거리면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 아닌
보안대장이었다. 아마 앉은 채로 깜빡 잠이든 근우를
보고 의자를 잡아뺀 모양이었다. 그렇게 허술한
모습을 보였다니.... 근우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기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쓰러진 의자를 바로
세워 그 위에 몸을 정좌시켰다. 보안대장은 잔뜩 볼이
부은 표정이었다. 혹시.... 하고 근우는 생각했다.
개표가 끝나고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닐까. 흘깃 시계를
보는 근우의 턱에 아찔한 충격이 와 닿았다. 억,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근우는 다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런 근우에게로 달려들면서 보안대장은 구둣발로
머리를 밟았다. 머리통이 부서져나가는 것 같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매라는 것을 맞아본 일이 없는
근우였다. 견디기 힘들었으나 비명을 내지르지
않으려고 근우는 애를 썼다. 하지만 고통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수치였다. 최 근우가 이런 꼴을 당하고
있다니. 그리고 저항 한 번 할 수 없다니. 보안대장은
근우의 머리를 짓이기면서 계속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개자식.... 너 같은 거 하나 죽이는 게 문제인 줄
알아? 여기서 네가 죽어나가도 누구 하나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구. 알아, 이자식아!"
고통과 치욕에 몸을 떨면서도 근우는 속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분명하게 실재하던 사람이 어떤 엄청난 악의와 폭력에
의해 완벽하게 사라져 버릴 수도 있겠다는 것이 이
방에 들어온 이후의 절실한 느낌이었다. 근우 자신도
사라질 수 있다....
"개새기!"
마지막으로 목덜미를 구두코로 날카롭게 찍고 나서
보안대장은 발을 거둬 갔다. 신경조직이 갈갈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에 입술을 깨물면서 근우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주저앉은 근우를 내려다보면서
보안대장은 씹어뱉듯 말하고 있었다.
"다 틀렸어."
그 한 마디는.... 근우가 이겼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민정당의 변 의원이 낙선한 모양이었다.
근우는 하마터면 아아, 하고 쾌감어린 신음소리를 낼
뻔했다. 보안대장은 품속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고
있었다.
"좋아 한 가지 서비스는 해주기로 하지. 보라구."
무릎 위로 나풀나풀 떨어져내리는 쪽지를 근우는
얼른 잡고 들여다보았다. 급히 써갈긴 듯한 그것은
최종 득표상황이었다.
1. 무소속 강보성 48,929표
2. 무소속 현경대 48,836표
3. 민정당 변정일 47,241표
4. 무소속 최근우 29,290표
이겼다.... 하고 근우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29,290표.... 그 한 표 한 표가 모두 피와 땀의
결정이었다. 근우는 그 숫자만큼의 얼굴들을
떠올리려고 애를 써보았다. 2만 표로 보았던 애초의
예상을 크게 넘어서는 선전이 아닐 수 없었다. 예상을
초과한 그 표수만큼 민정당 후보의 표가 깎였다고
보아야 했다. 민정당 후보와 2위로 당선한 후보와의
차이는 불과 1,600표였다. 자신의 당선 가능성은
없어도 최대한 표를 깎아 먹어 보겠다는 근우의
작전이 멋지게 성공한 것이었다.
좋다.
근우는 자신을 향해 다짐했다. 이제 어떤 고통이
닥쳐온다고 해도 이겨내자. 차마 국회의원
입후보자이기도 했던 자신을 감쪽같이 없애거나 하는
엄청난 일은 하지 못라리라. 때리려면 때려 보아라.
견뎌 주겠다. 그랬다. 무참하게 죽운 중기를 생각하며
견뎌내리라.
"기분이 어떻소?"
보안대장은 뜻밖에도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근우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물론 통쾌하시겠지."
역시 근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보안대장은 의자를
근우 쪽으로 미는 시늉을 해보였다.
"올라 앉아요."
아직도 머리와 목부분이 욱신거렸지만 근우는 아픈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보안대장은 이 편을 비웃는 듯,
스스로를 비웃는 듯 묘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번 선거에서 최고의 승리자는 최 사장이오.
인정하겠소."
근우는 뜻 모를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보안대장이
얼굴을 별다른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안심해서는 안
될 상대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아니나다를까. 그의 표정이 사늘하게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곧 무얼 말하느냐.... 우리가 최
사장에게서 그만한 보상을 받아내야 한다는 말이 되지
않겠소? 최 사장도 이렇게 우리 일을 그르쳐 놓고서
대가를 치르지 않겠다는 생각은 아니실 테고.... "
"신무는 못 넘깁니다."
근우의 대답에 보안대장은 흐흐흐, 하고 이빨을
드러내며 웃어보이고 있었다. 근우는 새삼스러은
혐오감으로 부르르르 진저리를 쳤다.
"좋아요, 어차피 이것도 또 하나의 승부니까....
해봅시다, 어디."
보안대장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또박또박
걸어나가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에다 대고
명령했다.
"들여 와."
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두 청년이 들고
들어온 것은 또 하나의 책상이었다. 그들은 그 책상을
근우에게서 2, 3미터 떨어진 곳에 놓고 나갔다.
보안대장은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면서 근우에게로
돌아왔다.
"최 사장."
"....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결심을 하시지."
그의 목소리는 지금부터 펼쳐질 일이 끔찍한 고통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뒷덜미가 서늘하게
공포심이 일어났지만 근우는 고개를 저었다.
"신문사는 못 넘겨요."
"할 수 없군요."
열린 채인 문밖을 향해 보안대장이 다시 소리쳤다.
"데려와."
순간 근우는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하는가를. 아니나다를까. 아까의 두 천년이
데리고 들어선 것은 바로 정우였다. 근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앉아요."
보안대장이 두 손으로 근우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청년들에게 양팔을 잡힌 정우는.... 겉으로 보아서는
아무런 고문의 흔적도 없이 말끔하기만 했다. 근우를
바라보는 얼굴 또한 그저 하얗게 무표정하기만 했다.
"올려."
보안대장이 지시하자 청년들은 정우를 달랑
들어서는 책상 위에 주저앉혔다. 보안대장은 그
책상을 향해 히죽거리면서 다가서고 있었다. 청년
중위 하나가 마치 곤봉처럼 생긴 막대기를 하나
그에게 건네고 있었다. 사태는 분명했다. 근우는 다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안 돼!"
"앉아!"
보안대장은 날쌔게 달려들면서 근우의 어깨를
내리쳤다. 불 같은 통증에 몸을 웅크리면서도 근우는
울부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해, 안 돼.... "
보안대장은 막대기로 근우의 턱을 치켜 올렸다.
"안 된다.... 안 된다고....?"
"그만둬."
"아, 물론 그만둘 수 있지. 사인만 하시겠다면."
"이럴 수 있는 거요? 정말 이래도 되는 거냐구!"
보안대장은 다시 흐흐흐, 하고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최 사장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은 것처럼 우리도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줘야지 않겠소? 그렇다고 최 사장쯤 되는 인물을
개패듯 할 수는 없는 일이고.... 결국 생각해낸 게
이런 방법인데.... 자, 시행하느냐 아니냐는 최
사장께 달렸소이다. 어떻게 하시겠소?"
"이럴 수는 없어.... "
"아직 판단이 확실하게 되지 않으시는 모양이군."
보안대장은 돌아서서 정우에게로 다가갔다. 정우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벌려."
그의 지시대로 두 청년은 한 팔씩을 뻗어서 정우의
다리를 활짝벌리고 있었다. 보안대장이 막대기로
정우의 치마를 들췄다. 치마아래는 그대로
맨살이었다. 정우의 아랫도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근우는 눈을 감아 버렸다.
"눈 떠!"
보안대장이 소리쳤지만 근우는 아예 고개마져 돌려
버렸다. 좋아, 하고 이를 앙당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으으, 하는 정우의 억눌린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근우는 두 손으로 귀를 감싸 쥐었다. 그래도 소리는
들려 왔다. 으으으.... 아무리 도리질을 해도 다리를
활짝 벌린 정우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그
중심부를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보안대장의 막대기....
근우는 아아아, 하고 짐승같은 소리를 내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개새끼.... "
피어린 정우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근우는 머리
속이 터져 나갈것만 같았다.
"그만해!"
끝내 근우는 소리치고 말았다. 곧 보안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데려가!"
정우가 끌려 나가고 문이 닫히는 것을 소리로
확인할 때까지 근우는 눈을 뜨지 않았다.
"눈 뜨시지."
바로 코앞에서 보안대장이 말했을 때야 근우는 눈을
떴다. 이제는 책상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지만
근우에게는 아직도 정우가 다리를 벌리고 유린당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결심이 섰소?"
하지만 막상 그렇게 다그침을 받자 역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근우는 다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궈 버렸다. 1천 8백만 원이라니. 단돈 1천 8백만
원에 남도신문을 넘겨야 하다니.
"좋아요, 시간을 좀더 드리지."
보안대장은 큰 인심을 쓰듯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결심을 하지 못하면 더 험한
꼴을 보게 될거요. 그 기집애뿐만이 아니라 당신
아버지까지도 끌어 올 수 있다 이 말이야."
".... "
근우는 발끈 고개를 들어 보안대장을 노려보았다.
보안대장은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꼴 보지 않도록 결심을 하라는
거요. 아닌 말로 식구들이야 무슨 죄가 있나?"
보안대장은 하하하.... 하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면서 방을 나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따르르르.... 교실 유리창을 뒤흔드는 총소리에
철기는 얼핏 들었던 잠에서 깨어났다. 소대원들도
모두 놀라 일어나고 있었다. 권 하사가 창가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뭐야?"
철기는 빠르게 주위를 살피면서 물어 보았다.
김승일은 어젯밤에 잠이 들었던 자리에서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다. 최 중사도 제자리에 있었다.
고인택도. 권 하사가 털썩 몸을 주저앉히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철기는 창가로 달려들면서 물었다.
"누가.... 맞았습니다.... "
권 하사의 설명과 함께 철기는 볼 수 있었다.
어슴푸레 밝아 오는 운동장 한구석 담장 밑에 뒹굴고
있는 어느 병사의 몸뚱이 하나를. 아마도 담을 넘어
도망 가려다가 포위하고 있는 수색대의 사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사단장의 말은 엄포가 아니었다.
하지만.... 엄포가 아님을 입증하기에는 너무도
지나친 희생이었다.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분노를 겨우 이기면서 빠르게 지시했다.
"권 하사, 빨리 인원점검해 봐. 누구야?"
권 하사의 대답보다도 앞서서 정권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 하삽니다."
".... "
그 말에 유심히 시선을 주고 보니 아닌게아니라
덩치가 유 하사와 비슷했다. 정권오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쩐지 나가는 눈치가 이상하다 했는데.... "
"유 하사가 맞아요."
최 중사도 확안해 주고 있었다. 김승일도 어느새
다가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스피커
소리가 들렸다.
"다시 경고한다, 다시 경고한다...."
사단장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마 수색대장인
듯했다.
"아무도 개별적으로 나오지 못한다. 알겠는가?
전체가 투항할 경우에만 받아 주겠다. 더 이상의
희생이 없기를 바란다.
철기는 손에서 피가 나도록 창틀을 쥐어뜯었다.
이자식들이....
분교장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집단의 비정함이
다시 한 번 뼈에 사무치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유
하사는 여기 있다가는 죽고만다는 공포에 시달린
나머지 날이 밝자마자 담을 넘어가려 한 모양이었다.
손을 들고 나가면 차마 쏘기야 하랴.... 하는
생각이었으리라. 철기는 천천히 창가에서 돌아섰다.
김승일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권 하사, 나가자."
철기는 권 하사에게 이르면서 교실을 나왔다. 곧
하사가 따라 나왔고,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최 중사도 따라오고 있었다. 정권오도.
하지만 철기가 막 통로를 거쳐 운동장으로 한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이었다. 다르르륵.... 다시 총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철기는 흠칫 놀라 안으로 물러났다.
다르륵, 다르륵.... 총소리는 몇 번 더 이어졌다.
넋을 잃고 있는 귓가에 다시 요란한 스피커 소리가 와
닿았다.
"거듭 경고한다. 교실 밖으로도 나오지 못한다.
알겠나? 운동장으로 나오는 병사가 있을 경우에는
역시 사살하겠다.... "
쌍, 하고 철기는 통로의 시멘트 벽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유 하사의 시체마저도 거둬 올 수
없음이었다.
"들어갑시다."
등에 와 얹어지는 것은 떨리는 최 중사의 손이었다.
지섭은 탄약고 앞에서 부관 이태기 준위와
마주쳤다.
"야, 박지섭."
추모탑에서 오는 듯 후문을 들어서고 있던 이
준위는 마침 잘됐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대대는
아침부터 박주열 대위의 시체 발견으로 해서
술렁거리고 있었다. 어젯밤 박 중사는 곧장 참모부로
달려와서 그 사실을 알렸던 것이었다. 하지만 대대의
분위기는 어떤 충격이나 슬픔이라기보다는 다분히
귀찮다는 기색들이었다. 다가오는 이 준위의 표정도
그랬다.
"박지섭, 네가 어젯밤 박도기하고 같이 있었어?"
"네, 그렇습니다."
"자식아, 왜 맘대로 돌아다니고 그래? 박도기가
어떤 위험 인물인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지섭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준위는 소리내어 혀를
차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들이나 하고 다니고 말야."
".... "
"조심해, 알았어?"
눈을 부라려 보이고 돌아서는 이 준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지섭은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처리됩니까?"
이 준위가 홱, 돌아섰다.
"뭐가?"
"시체.... 말입니다."
흥, 하고 이 준의는 코웃음을 치고있었다.
"내가 아냐? 경찰에 신고했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이미 전역했으니까 민간인 아니겠냐?"
심장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준위는
태연한 얼굴로 돌아서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그의
등뒤에 대고 탄약고 앞 근무자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씨팔, 군대 좆같구만.... "
그 소리를 귓가로 흘리면서 지섭은 탄약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화삽을 들고 방벽 뒤로 돌아갔다. 이미
결심은 선 일이었으니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바깥의
기척을 살펴가면서 땅을 파고 탄롱을 캐냈다. 그
안에서 수류탄을 꺼내 야전상의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리고 탄통은 그 자리에 다시 묻었다.
방화십을 원위치시키고 나서야 지섭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내무반으로
가야 했다. 지섭은 서둘러 탄약고 문을 잠갔다.
"어이, 탄약계."
돌아서는 지섭을 근무자가 불러 세웠다. 혹시나,
하고 지섭은 긴장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근무자는
3중대의 병장이었다.
"현 중위네는 또 무슨 소식 없냐?"
지섭은 나직하게 대답했다.
"없어요."
"거.... 다 죽게 되는 거 아니냐?"
".... "
"그러게 가만히들 있지. 장교라고 국방부 시계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너네 중대장 봐라.
그저 죽은 놈만 억울한 거 아니냐? 그나저나 이놈의
대대는 무슨 귀신이 씌었나? 줄줄이들 죽어 가니....
"
근무자의 넋두리를 뒤로 하고 지섭은 탄약고를
등졌다. 근무자가 아닌 누군가의 시선이 뒤를
따라오는 것만 같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지섭은
조심스럽게 수류탄을 매만졌다. 이제 자신은 이
수류탄 한 발을 박 중사에게 넘겨 줌으로써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대답할
말을 지섭은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뱃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치는 뜨거운 기운을 자꾸만 지섭을
충돌질하고 있었다.
깨라, 박지섭!
때려 부수는 거야!
그 거친 기운이 결코 어제 하룻밤에 생겨나지 않은
것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일까. 또 하나의 지섭은 언제나처럼 냉정한
목소리로 물어 오고 있었다. 지섭은 도리질을 했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아.
다만 박 중사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줄 뿐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수류탄을 가지고 박
중사가 무슨 짓을 하든 알 바 아니었다.
"박지섭!"
참모부 앞에서 소리쳐 부르는 사람은 병기관이었다.
지섭은 흠칫 놀라서 네, 하고 대답했다.
"탄약고 이상 없지?"
네, 이상 없습니다."
다행히 병기관은 그렇게 말만으로 확인하고는 도로
참모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 식은땀이 흘러
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지섭은 빠른 걸음으로 내무반을
향했다.
문을 열고 내무반으로 들어서자 박 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와."
텅빈 내무반 침상 위에 박 중사가 앉아 있었다.
"가져 왔냐?"
지섭은 말없이 그에게로 다가서서 수류탄을 꺼내
내밀었다. 덩치에 비해 기형적으로 작은 박 중사의
얼굴에 경탄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수류탄 아냐?"
지섭은 그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생각했다.
이제 이 사람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눈치로 보아
분교장을 찾아갈 것만은 분명했다. 거기서 이 사람은
무엇을 할 것인가. 고인택으로 하여금 그런 탈영을
하게 만든 장본인인 이 사람은. 하지만 자기 자신도
군대조직의 희생자임에 틀림없는 이 사람은.... 박
중사가 수류탄을 아주 소중한 장난감처럼 챙겨
주머니에 넣으면서 일어났다.
"고맙다, 박지섭. 실탄보다 이게 훨씬 나아. 입은
다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정말 고맙다."
이 사람의 어디에 이런 목소리가 들어 있었나 싶게
다정하기만 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지섭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두툼한 손이 눈앞에 내밀어졌다. 지섭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았다. 뜻밖일 만큼 따뜻한
손이었다.
"고마워."
잡은 손을 흔들면서 다시 한 번 말하고 나서야 박
중사는 돌아섰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고 있다가 지섭은 쓰러지듯 침상
위에 주저앉았다.
"할 말이 있어, 현 중위."
김승일이 다가오면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했을 때 철기는 알 수 있었다. 드디어 때가 왔음을.
이제 김승일은 입을 열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
하사가 총에 맞은 것을 보고는 마음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철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야, 모든 게 최후의 상황에 이르른 이제야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될 모양이었다.
"저쪽으로 가지."
김승일은 옆교실 쪽을 턱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철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여기서 그냥 하지."
김승일은 입술을 깨물면서 교실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마다 시선들을 돌리고 있었지만,
소대원들의 신경은 모두 이쪽으로 쏠리고 있을
것이었다. 철기는 김승일을 달래듯 다시 말했다.
"괜찮아. 이제 와서 뭘 감추고 말고 하겠나?"
김승일은 후우,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입을 열게 하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던가 생각하니 참으로
아득하기만 했다.
"그 날은 비가 억수로 쏟아 부었었어.... "
김승일의 목소리도 어떤 회한으로 젖어드는 듯했다.
김승일은 그날 본부중대 주변사관이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23시 에서 24시 사이에 순찰을 돌게 되어
있었다. 마침 사단에서 경계강화 지시가 내려온
직후라서 각 중대 주번사관들이 교대로 순찰을 돌아야
했다. 우의를 갖춰 입고 김승일은 순찰에 나섰다.
장대처럼 쏟아 붓는 비로 해서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연신 투덜거리면서 BOQ를 끼고 돌아서
6초소, 7초소를 지나 후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누구냐!"
후문 근무자가 수하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김승일을 발견할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김승일은
긴장해서 멈춰서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 외부에서
후문 쪽으로 접근하고 있음이었다. 혹시 사단에서
불시에 순찰을 나온 것은 아닐까.
"누구냐!"
근무자는 다시 한 번 소리치고 있었다. 아마
상대방의 응답이 없는 모양이었다. 김승일은 더욱
긴장해서 귀를 기울였다. 상대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이 튀어 나갈 수는 없었다. 어떤
덤터기를 쓰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야, 이자식아.... "
투덜거리듯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대장이었다.
하지만 근무자는 아마도 신병인 듯, 더욱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손들어!"
"나라니까.... "
대대장은 몹시 비위가 거슬린 듯했다. 그런
기색이니 더욱 나가기가 망설여졌다. 김승일은 좀더
지켜보기로 했다.
"손들어, 쏜다!"
근무자는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이세끼가 정말.... "
대대장의 화난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억, 하는
비명이 뒤를 이었다. 그제야 김승일은 후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 사이에도 비명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후문에 다다라 보니.... 대대장은 소총으로 근무자를
개패듯 두들기고 있었다. 아마 근무자의 소총을
뺏은모양이었다. 퍽,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난다 싶더니
근무자는 비에 젖은 땅 위에 털썩 쓰러졌다. 그래도
대대장은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김승일은 뒤에서
달려들어 대대장을 껴안았다.
"대대장님."
갑자기 달려드는 서슬에 놀란 듯하던 대대장은
상대가 김승일임을 알고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뇌! 이자식들이 대대장을 뭘로 보고.... "
"참으십시오, 대대장님. 제가 교육시키겠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승강이를 벌이고 나서야 대대장은
소총을 내던졌다. 김승일은 쓰러진 근무자를 발로
걷어찼다.
"일어나!"
하지만 근무자는 쓰러진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퍼뜩 뇌리를 스쳐가는 불길한 생각에 김승일은 얼른
플래시를 비추며 무릎을 꿇고 근무자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 "
근무자는 콧구멍에서 피를 흘리면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김승일은 그만 그 머리를 털썩 놓아 버리고
말았다. 비명이 절로 새어 나왔다.
"죽었습니다!"
김승일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나서 설명을
계속했다.
"한참 우리는 비를 맞으면서 서 있었다. 근무자는
대대장이 소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때렸을 때
치명상을 입은 모양이었어. 대대장이 녀석의 맥박을
짚어 보았지만 역시 뛰지 않았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라. 대대장이 내 팔을 잡았어. 그리고
말하더군. 김 중위, 날 살려 줘.... 그게 무슨 뜻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어. 우리는 둘이서 시체를 들고
강물에다 던졌지.... 그리고 우리 둘이 부대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같이 근무를 서고 있던 고참놈은
돌아오지 않았어. 나중에 들으니까 장 상사집에서
술을 먹었다고 하더군.... 결국 그 신병은 자살을 한
것으로 처리가 되어 버렸지. 대대장과 나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어.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장
중위가 그 현장을 목격한 모양이야.... "
623탄약고 근무에서 돌아온 장 중위가 신고를 하러
들어가자 김승일은 CP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나 장 중위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는 김승일로서는, 그와 관계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관심이있을 수 없었다. 마침 참모부 안은 정보과의
상병 하나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김승일은 그 상병을 손짓해서 불렀다.
"너, 피엑스 가서 우유 하나만 사 와."
그렇게 상병을 내보내고 나서 김승일은 마음놓고
CP문에 붙어섰다. 공식적인 신고는 벌써 끝난
모양이고, 두 사람은 이런저런 싱거운 얘기들을
나누고 있더니, 갑자기 한껏 낮아진 소리로 장석천이
말하고 있었다.
"대대장님. 전 파견 나가 있는 동안 고민 많이
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대대장님, 전 그날 다 봤습니다."
".... "
"그, 백 과부집에 왔다 가신 날 말입니다. 자실한
걸로 알려진 그 신병.... 그 신병이 어떻게 당하는지
전 봤습니다."
".... "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군인에겐 거짓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참 만에야 대대장은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어떻게 하시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 사실을 밝히고.... 책임을 지십시오."
두 번째의 침묵은 더 길었다. 이윽고 대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을 줘."
"이상이야.... "
김승일은 후련함과 허탈함이 엇갈리는 표정으로
털썩, 벽에다 등을 기대고 있었다. 소대원들도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멍 - 하니들 앉아 있었다. 철기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모든 게 자신의
짐작대로인 사건의 전말을 하나하나 정리해 보았다.
1. 그날 밤, 명옥을 범하려다가 장석천에게 들킨
대대장은 기분이상한 상태로 후문으로 들어오려 했다.
2. 고참은 술을 마시러 가고 혼자 근무를 서고 있던
신병은 원칙대로 몇 차례나 수하를 했고, 가뜩이나
심기가 안 좋은 대대장은 화가 난 나머지 소총을
뺏아서 신병을 구타했다. 그 매질에 머리를 잘못
맞아서 신병은 즉사하고 말았다. 마침 그 광경을
목격하고 나타난 김승일을 꼬여서 대대장은 시체를
마침 불어 난 강물에 던져 버렸다.
3. 하지만 그 광경을 장석천은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도망 가는 대대장을 쫓아왔었던
듯.
4. 다음날, 시체는 하류로 조금 떠내려간 곳에서
발견되었고, 몸 곳곳에 외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살로 처리되었다.
5. 얼마 있지 않아 장석천의 1중대 1소대는
623탄약고로 경계근무를 위해 파견되었다. 애초에는
2중대가 가게 되어 있었으나 대대장이 바꿨다.
6. 파견 나가 있는 동안 장석천은 심각하게 고민을
한 듯. 묵인할 것이냐, 밝힐 것이냐.... 그러나
장석천은 그런 일에 눈감아 버릴 성미가 이니었다.
7. 파견에서 복귀하던 날 장석천은 사실을 밝히고
책임을 지라고 대대장을 다그쳤다. 대대장은 시간을
요구했다.
8. 그런 상태에서 수류탄 투척훈련이 있게 되었고,
여종일이 수류탄을 들고 머뭇거리는 순간 거리를 두고
있던 대대장은 자신도 자신도 모르게 새 호 옆으로
다가갔다.
9. 여종일이 끝내 수류탄을 코앞에 떨어뜨린 순간
대대장은 장석천을 떼밀었다. 그리고 자신이
소리쳤다. 엎드려 - 하고.
10. 앞으로 넘어가는 순간 장석천은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면서 대대장의 어깨에 달린 견장을
잡아뜯었다.
11. 장석천의 신화는 조작되고, 김승일은 신병 살해
부분만 아는 상태에서,그리고 최 중사는 장석천을
떼민 일만 아는 상태에서 각각 대대장의 범행을
묵인해 왔다.
이렇게 머리 속으로 정리를 해보고 나서 철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들 앉은 채로 들어라."
넋을 잃고 있던 소대원들이 새삼스럽게 긴장하는
표정으로 시선을 모아 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고인택에게 주의를 기울이면서
철기는 입을 열었다.
"이제 너희들은 모두 나간다."
"소대장님은요?"
당장에 날아드는 질문이었다. 최정식이었다.
"나는 여기 고인택과 같이 남는다. 너희들은
선임하사가 인솔해서 여기를 빠져 나간다. 알겠나?"
"안됩니다! 나가면 다 같이 나가야 합니다."
이번에는 권 하사였다. 철기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딴소리들 하지 말도록. 나는 내가 내건
조건을 가지고 끝까지 저 사람들하고 싸워야 한다.
그게 이런 일을 저지른 데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이다.
나하고 고인택은 남는다. 너희들은 나가라."
"모두 함께가 아니면 안 되잖습니까?"
박 하사가 볼멘 소리였다.
"내가 교섭을 해보겠다. 남는 게 나하고
고인택이라고 하면 들어줄 거다, 아마."
"차라리 다 함께 탈출을 합시다.!"
최정식은 선동하듯 소리치고 있었다. 철기는 히죽
웃으면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됐다. 이제는 너희들이 장석천 중위에 대한 모든
진실을 알았으니까.... 그것으로 됐다. 다들 희생을
할 필요는 없어. 나하고 고인택만 남겠다. 내가
교섭을 할 테니까 마음의 준비들을 하고 있도록.
열한시에 나가도록 하자."
선언하듯 말을 마치고 철기는 소대원들을 등졌다.
비어 있는 옆교실로 들어가서는 마룻바닥에 활짝
사지를 벌리고 드러누웠다. 교섭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나마 쉬고 싶었다.
마지막이다....
누군가가 뱃속 깊은 곳에서 낮은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래, 하고 철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116. 1981년 3월 26일 ②
(10시 30분)
누구의 것인지 모를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박도기
중사를 바라보면서 대대장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오냐, 다들 모여드는구나.
정말이지 할 수만 있다면 데려오고라도 싶었던 박
중사였다. 그런데 제 발로 기어들다니.... 그가 이제
요구할 것이 무엇인지도 대대장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당하게 박 중사를 대할 수가 있었다.
"여기는 왜 왔나, 박 중사?"
"사단장님은 어디 있습니까?"
대대장과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투로 박 중사는 묻고
있었다.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지만 대대장은
내색하지 않고 돌아섰다.
"따라와."
텐트를 향해 걸어가는 대대장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한 시간 삼십 분....
그만큼만 버티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 이었다.
박도기까지 들여보내 죽여 버리면 완벽한 뒷처리가
아니겠는가. 박 중사가 안에 들어가 어떤 파란을
일으킬지 몰랐지만 아무리 박 중사라 한들 겹겹이
둘러싼 수색대 병력을 당해낼 수는 없으리라. 아니,
박 중사가 난동을 부리기라도 한다면 일은 더
쉬워진다. 공격을 할 명분이 더 확실해지는 게
아니겠는가.
"잠깐 기다려."
텐트에서 4,5미터 떨어진 곳에 박 중사를 세워 놓고
대대장은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야?"
이미 오토바이 소리를 듣고 있었던 듯 사단장은
찌푸린 얼굴로 묻고 있었다. 대대장은 박 중사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박도기 중삽니다."
"박도기? 그 놈 말이야? 그 놈이 왜?"
눈을 크게 뜨는 사단장을 향해 대대장은 더욱
소리를 낮추었다.
"용건은 각하께 직접 얘기하겠다고 합니다만, 아마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것 같습니다."
대대장은 분명히 보았다. 사단장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지나기는 것을. 역시 사단장 또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이었다.
"들어오라고 그래. 아니, 내가 나가지."
사단장은 헬멧을 손에 들고 텐트를 나갔다.
대대장도 황급히 그뒤를 따랐다. 커다란 덩치를
웅크리고 서서 분교장 쪽을 바라보고 있던 박 중사가
경례를 했다.
"무슨 일인가?"
사단장의 물음에 박 중사는 대뜸 대답하고 있었다.
"저 안으로 들여 보내 주십시오."
"왜?"
"이 일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제가 책임을
지고 다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보내 주십시오."
잠시 생각하는 시늉을 하고 있던 사단장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들어가. 하지만 명심해 둬. 우리는 저 안에
있는 놈들에게 오늘 정오까지만 시간을 주고 있어. 그
안에 해결이 되지 않으면 자네도 위험해."
"알겠습니다."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대답을 하면서 박
중사는 이번에는 경례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분교장을 향해 걸어 내려갔다. 오히려
믿어지지 않는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는 대대장의
옆구리를 사단장이 쿡, 찔러 왔다.
"방송해 줘. 들어간다고."
(10시 45분)
근우는 보안대장이 내민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각서
본인 최근우는 본인 소유의 남도신문 주식 3만 6천
주를 액면가
5백원씩 합계 1천 8백만 원에 매도할 것을
약속합니다.
1981년 3월 24일 최근우
시가로 쳐도 7억 2천만 원, 아니 그렇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근우 자신의 꿈이 걸린 신문사를 넘겨
주는 문서치고는 너무도 간단했다. 누구에게 넘긴다는
것도 명시되어 있지 않았고, 날짜도 이틀전인 24일로
되어 있었다. 혹시 훗날에라도 선거결과와 연결시키는
해석을 막자는 생각인 모양이었다.
"사인도 하고.... 도장도 찍어요."
보안대장이 펜과 도장을 내밀었다. 도장은
동양운수의 사장실에 깊숙히 간직해 놓곤 하던 근우의
인감이었다. 놀랄 것도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근우는 펜을
잡았다. 기왕에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일이라면 빨리
해치워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이럴 수도 있다는
말이던가. 자신은 지금 대체 어떤 나라에 살고 있다는
말인가. 사인을 하고, 그 위에 다시 인감을 찍자,
보안대장의 손이 각서와 도장을 한꺼번에 낚아채
갔다. 근우는 이제 분노도 느끼지 못하면서 한 마디
했다.
"도장은 주시오."
보안대장은 키들키들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아니, 아직 필요한 일이 남았으니까."
그는 각서의 문구를 음미하듯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근우는 고개를 깊이 떨구었다.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10시 50분)
박 중사는 고인택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있었다.
"미안하다.... "
고인택은 넋이 빠져나가 버린 사람처럼 우두커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박 중사는 머리까지 깊이
숙이고는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울고 있음이었다.
철기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왠지
자신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정말 미안하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죄값을
갚겠어.... "
".... "
고인택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
"그렇지만, 넌 살아야 해. 넌 죽으면 안 된다,
고인택. 내가 널 살리겠어.... "
말끝에 울음 소리가 섞인다 싶더니 박 중사는 끝내
꺼이꺼이 소울음을 울고 있었다.
(10시 55분)
명옥은 화장실로 가기 위해 룸을 나왔다. 신 중위는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져 있었다. 만 24시간을 꼬박
마신 셈이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어제 낮을 술로
보내고도 모자라서 다시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겨우
새벽녘에야 시체처럼 쓰러져 잠이든 것이었다.
주정처럼 늘어 놓는 그의 이야기들로 해서 장 마담과
명옥은 지금 모곡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더욱
상세하게 알 수가 있었다.
빌어먹을....
내실 옆으로 나 있는 화장실로 가면서 보니 장
마담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잠을 자고 있었다.
자장쯤에 신 중위가 토해 놓은 오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누면서 명옥은
이미 까마득한 옛 흑백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만
여겨지는 광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명옥은 그
날 뭔지 모를 불안감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사격장
뒤 숲에 숨어서 각개 전투교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떨어지는 수류탄, 장 중위의 등을 떼밀던 대대장의
손,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면서
넘어가던 장 중위, 그리고 쾅.... 장 중위의 몸은
잠시 허공으로 떠오르는 듯했다. 벌건 조각들이
사방으로 날았다.
부르르르 진저리를 치면서 명옥은 치마를 추스리고
일어났다. 아무래도 술을 더 마셔야 할 모양이었다.
홀로 나와서 주방으로 들어가 맥주를 두 병 더 들고
나오는데 장 마담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표정으로
보아서 잠이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술 더할래요?"
명옥의 물음에 장 마담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명옥은 그 앞에 가 앉아서 맥주를 땄다. 그리고
병째로 장 마담에게 내밀고 하나는 자신이 입에 대고
한 모금을 들이켰다. 장 마담은 병을 든 채로 굳어진
듯 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마셔요, 언니."
명옥이 재촉하자 장 마담은 불쑥 질문을 던져 오고
있었다.
"늬 애인이 이기겠니? 내 애인이 이기겠니?"
".... "
잠시 멍해졌던 명옥이 다시 한 모금의 맥주를
들이키자 장 마담은 호호호호.... 하고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명옥은 웃을 수도 없었다. 장석천의
얼굴과 현철기의 얼굴이 번갈아 눈앞에 스쳐갔다.
살 수 있을까?
(11시 00분)
다시 스피커를 통한 사단장의 목소리가 찌렁찌렁
들려 오기 시작했다.
"경고한다. 앞으로 정확하게 한 시간 남았다. 한
시간 이내에 전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한
시간이다!"
개새끼들, 하고 크게 소리내어 욕설을 내뱉으면서
박 중사가 다가왔다.
"물론 나갈 생각은 아니시겠죠?"
철기는 그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안 나가면? 다들 죽으란 말이오?"
박 중사는 기형적으로 작은 눈을 더욱 찌푸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러려고 들어오셨습니까?
여기서 버팁시다. 나가면 그걸로 끝이에요. 머든 게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맙니다. 군대가 어떤 사횐지
모르십니까? 잘 아시잖아요?"
"박 중사."
"여기서 버팁시다. 저도 있잖습니까? 하나도 안
나가고 버티면 사단장이라고 해도 별 수 없을 겁니다.
말이 그렇지, 우리를 다 죽이겠어요?"
철기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야, 저 사람들은 다 죽이려고 들거요."
".... "
"왜 위험인물인 박 중사까지 순순히 손들고
나간다고 한들 살려 줄 것 같지가 않군요.
탈출합시다. 현 중위님."
철기는 잠시 박 중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 마디를 했다.
"남거나 탈출을 하거나 그건 나하고 고인택, 그리고
박 중사까지 세 사람만이 하는 걸로 합시다. 나머지는
나가야 해요."
"안 됩니다!"
소리치는 것은 권 하사였다.
"저도 안 나갑니다.... "
철기의 등뒤에서 최 중사도 말하고 있었다.
(11시 04분)
"우리 애 좀 잘 부탁합니다."
여준구 씨는 벌써 몇번째인지 모를 부탁을 다시 백
과부에게 하고는 돌아섰다. 백 과부가 뒤를 따라왔다.
"걱정은 마세요. 어쨌든 바깥출입은 한 발자국도 못
하게 할 테니까요. 그나저나 언제 오시겠어요?"
여준구 씨 스스로도 막연하기만 한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이틀 후면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네에, 하고 백 과부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지만
여준구 씨는 혼자서만 중얼거렸다.
그 때까지 살아 있을가들.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서울행이
어떤 성과를 얻어 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토록 엄청난 비밀들을 묻어
두고 다시 십수 명의 병사들이 죽어 가도록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백 과부는 대문 앞에서
떨어졌고, 여준구 씨는 추모탑 쪽을 흘깃 시선을
주었다. 박주열 대위의 시신은 경찰에서 수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제 민간인이라는 것 이었다. 왠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에 여준구 씨는 푸르르 몸을
떨었다.
가자. 해봐야 해.
여준구 씨는 스스로 격려의 말을 떠올리면서 걸음을
내디뎠다.
(11시 10분)
"이제 오십 분 남았다. 전원 비무장으로 투항하라.
오십 분이다."
사단장은 다시 경고방송을 마치고 마이크를 놓았다.
그리고 버릇처럼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숨가쁘게
움직이는 시계바늘은 운명의 시간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서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뒤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대대장이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고
있었다.
"각하, 정말로 투항해 오면 다 받아 주실
생각입니까?"
그 대대장의 마음속에 오가는 복잡한 생각들을
사단장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작자였다. 하지만 군은 그런 작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사단장은 씨익 웃으면서 뒤를 돌아 보았다.
"자네 생각은 어때?"
".... "
짓궂은 질문에 대대장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말해 봐. 자네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
"저는.... "
역시 대대장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큰 선물을 안겨
주는 기분으로 사단장은 그에게 말해 주었다.
"아마 자네 생각이나 내 생각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순식간에 대대장의 표정이 밝아지는 모양을
바라보면서 사단장은 한 마디를 보탰다.
"죽이든 살리든 군 전체를 먼저 생각해야지, 안
그래?"
(11시 17분)
고인택은 비어 있는 교실로 들어가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버렸다. 옆 교실에서는 박 중사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
일은 어떻게 풀려 가려는가. 고인택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만 했다.
너는 뭐냐?
자신은 왜 박도기를 죽이려 했던가. 갑자기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몽롱함이 고인택을 휩싸고 있었다.
자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은 박 중사의 모습은 더
이상 광주에서의 살인귀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박 중사에게 겨누려 했던 자신의 총부리는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통신대장이 아니라 박 중사를
제대로 쐈더라도더 나아질 것이 없었으리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아, 하고 고인택은 머리를
쥐어 뜯었다. 자신의 어슬픈 복수극으로 해서 애꿋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지 않은가. 통신대장이 죽었고,
유 하사가 죽었다. 그리고 지금 저 교실 안에 모인
사람들 또한 모두가 죽어 갈지도 모른다. 고인택,
자신으로 해서.
너는 뭐냐?
영원히 총을 못 소는 고문관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는 생각이 가슴 아프게 훑어 내리고 있었다.
박도기가 타깃이 될 수 없었다면 대체 누구를, 무엇을
겨눠야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자신은 이미 한 사람을
직접 죽이고 여러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니 누군가의 타깃이 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 않겠는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분명한 것은
없었다.
너는 뭐냐구....
(11시 30분)
"알았는가? 이제 삼십 분 남았다. 삼십 분이다....
"
되풀이해서 시간을 알리고 나니 텐트 안으로 수색대
대장이 들어왔다.
"필승, 부르셨습니까?"
사단장은 잠시 그를 바라보고만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열두시까지
응답이 없으면 무조건 공격한다. 그리고.... 그 전에
만약 놈들이 나올 경우에도.... 인원을 확인하고,
분교장 밖으로 나오기 전에 전원 사살하라. 무슨
소린지 알겠나?"
수색대 대장은 긴장해서 표정을 굳히고 있었지만 곧
대답을 해왔다.
"알겠습니다.... "
(11시 33분)
지섭은 탄약 박스 위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차디찬 촉감이 등에 느껴지면서 철기와 박도기,
그리고 고인택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박도기는
지섭이 준 수류탄을 가지고 가서 무슨 일을
벌이려는가. 철기와 고인택은 살아 올 수 있을까.
박주열 대위와 같은 몰골이 되지는 않을 것인가.
갑자기 그들의 얼굴 위에 할아버지 박 태환 선생의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울려 왔다.
아까 말한 두 손자를.... 분수를 알고 지조를
지키는, 참 얼이 있는 인재로 키워 보고 싶군요. 그
녀석들의 나이가 열세 살이니, 아마 죽을 때까지 그
일에 매달릴 것 같습니다.
안 돼!
저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지섭은 탄약 박스 위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 거칠고 뜨거운 기운이
온몸 가득히 차 오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억눌러 온 것이었던가. 지섭의 목구멍에서는 끝내 한
마디 외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깨 버려!
(11시 40분)
저만치 집이 보이는 골목 어귀에서 차가 멈췄다.
"내리십시오."
운전사는 공손하게 말하고 있었다. 끌고 갈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였지만 근우에게는 오히려 더
소름끼치게만 들렸다.
"내리자."
근우는 정우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 자신을
달래듯 생각했다. 신문사를 잃었지만 누이동생을 얻은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덜 억울한 것
같기도 했다. 정우는 아무 말없이 근우를 따라 차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아직 기척을 모르는 집안에서는
아무도 나와 보지 않았다. 승용차는 두 사람을 남겨
두고 출발했다. 근우는 더욱 힘주어 정우의 팔을
잡았다.
"들어가자."
순간 정우는 놀랄 만큼 완강하게 근우의 팔을
부리쳤다. 근우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우야.... "
"난 안 들어가요."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지도 않고 서서 정우는
싸늘하게 내뱉고 있었다. 넋을 잃은 듯하던 차
안에서의 태도와는 정반대였다. 근우는 조심스럽게
다시 손을 뻗었다.
"들어가자. 너도 쉬어야 해."
"오빠!"
팔을 다시 뿌리치면서 정우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앙칼진 목소리로 쏟아붓기
시작했다.
"신문사를 나 때문에 희생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내가 없었다 해도 그자들은 어떻게든
오빠한테서 신문사를 뺏아 냈을 테니까. 오빠가 날
위해서 희생하고 나 때문에 그 자들에게 졌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엄청난 오해예요. 그걸 핑계로 날 저
집안에 들여 놓을 생각은 하지 말아요. 물론 지금
오빠가 완력으로라도 끌고 간다면어쩔 수는 없겠죠.
하지만 내가 저 집안에 머물러 있을지.... 잘 판단을
해봐요. 여기서 내가 그냥 떠나는 게 모두에게 이로운
거예요. 아시겠죠?"
근우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정우의
말대로였다. 정우는 아버지 최일권 씨 앞에서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모르는 아이였다. 어쩌면 신문사를
뺏겼다는 사실보다도 더 큰 충격을 아버지에게 줄
수도 있는 아이였다.
"그러니까 혼자 들어가요."
"정우야.... "
"그렇지만 단 한 가지.... 이제야 난 오빠가 정말
내 오빠구나 하는 걸 실감했어요. 그거 하나는 잊지
않을게요."
그 말을 끝으로 정우는 돌아섰다. 근우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입 속으로만 중얼거릴 뿐.
정우야....
한참을 집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근우는 이윽고
정우가 걸어간길을 따라 골목을 빠져 나왔다.
아버지를 뵙기 전에, 이제는 완전히 남의 것이 되어
버린 신문사를 먼 발치로나마 한 번 보고 싶었다.
(11시 45분)
평일이라 그런지 원천행 직행버스는 텅 비어
있었다. 미우는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지긋이 눈을 감아 버렸다. 어두워지는 세상에 단
하나의 표적처럼 철기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우는 입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기다려, 철기.
이제 더는 지리한 줄다리기를 하지 않으리라. 그와
담판을 지으리라. 사랑한다고, 결혼을 해달라고
떳떳하게 말하리라. 그가 거절한다면 발 밑에 쓰러져
사정이라도 하리라. 그래도 그가 끝내 거절한다면....
그 때는 용기를 내어 혼자가 되리라.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오빠의 소식을 듣고도 오히려 원천을 향해
떠나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이런 상태를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미우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기다려, 철기....
(11시 50분)
신한수 중위는 깨어질 것 같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룸을 나왔다.
"일어나셨네요?"
초점이 잘 안 맞은 화면처럼 일렁거리는 홀의 풍경
속에서 명옥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곧추세워서 두 눈에 힘을 주고 보니 한쪽
테이블에 장 마담과 명옥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신 중위는 저도 모르는 새 부르르 진저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술, 술, 술.... 대체 얼마를
마시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 술을
마시지 않고는 또 어떻게 견딜 것이겠는가.
"한잔 더 해요."
장 마담이 잔을 들어보이고 있었다.
"좋지요.... "
신 중위는 마치 꿈 속을 헤매이는 것 같은 기분으로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잠시 현 중위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갔지만, 곧 고개를 저어 떨쳐 버렸다.
술이나 마시는 거야.
장 마담의 옆에 앉아서 신 중위는 따라 주는 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막 잔을 입가로 가져 가는데
무언가 뜨뜻한 기운이 다리를 감싸는 듯했다.
뭐야?
불쾌한 느낌에 아래를 살펴보니.... 자신의
오줌줄기가 질펀하게 아랫도리를 적시고 있는
중이었다. 아아아아.... 신 중위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목메인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끄흐흐흐....
(11시 55분)
사단장은 다시 마이크를 당겨 잡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제 정확하게 오 분 남았다. 앞으로 오 분이다.
오 분 이내에 전원 투항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다시
한 번 말한다.... "
그 때, 차량의 엔진 소리가 다가온다 싶더니 멈추는
소리가 나고 곧 누군가가 텐트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대대장이었다.
"각하! 군사령관님이 오셨습니다!"
".... "
사단장은 마이크를 떨구고 일어났다. 그러나 턴트
밖으로 뛰쳐나갈 시간도 없었다.
"비켜!"
대대장을 발로 걷어차듯 하면서 텐트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분명히 군사령관이었다.
"필승!"
넋이 나간 듯한 와중에도 사단장은 거수경례를
했다. 그러나 군사령관은 답례도 하지 않고
지휘봉으로 어깨를 내리치고 있었다. 끊어지는 듯한
통증에 사단장은 하마터면 아, 하고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이번에는 군사령관의 군화발이 무릎을
걷어찼다.
"뭐하는 짓이야, 이 자식아! 네가 대한민국 육군을
다 말아먹을 거야?"
"각하!"
"비켜!"
군사령관은 거칠게 사단장을 밀어젖히면서 자신이
마이크를 잡고있었다. 그 때 사단장은 보았다. 텐트
입구로 들어서는 양복차람의 사내를. 바로 전사단장
이병우였다. 사단장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저 놈 짓이구나....
(11시 57분)
철기는 박 중사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쩔 수 없어, 다같이 나갑시다."
"야, 임마!"
박 중사는 갑자기 욕설을 버럭 내뱉고 있었다.
하지만 말투와는 달리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뭐가 이래? 그렇게 항복을 할 거면 왜 여기
들어왔어?"
"박 중사.... "
철기는 박 중사에게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하지만 박 중사는 철기가 다가간 그만큼 다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이젠 저 놈들한테 더는 당하지
않아. 나가면 또 당하는 거야. 난 안 나가. 아니,
아무도 안 내보내.... "
철기는 눈을 감아 버렸다. 이제 2, 3분 남짓 남은
이 시간에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도
정확하게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사단장과 대대장의
경고는 결코 엄포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려고 하고 있다. 그러면 모든 비밀이
완벽하게 지켜질 것이므로. 박 중사의 말처럼 소대를
이끌고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정도의
인원으로 수색대대의 포위망을 뚫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면 투항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저들은 다시 모든 진실을 은폐하려 하겠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소대원들은 모두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더는 조작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은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모두를 죽게 할 수는 없다고
다짐하면서 철기는 박 중사에게로 다시 다가섰다.
"박 중사.... "
"오지 마!"
박 중사는 놀랍게도 품 속에 수류탄을 꺼내고
있었다. 안전핀을 한 손가락에 걸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오지마, 거기 그냥 있어.... "
수류탄.... 장석천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갔다.
수류탄.... 철기가 부르르 진저리를 쳤을 때였다.
탕!
한 방의 총성이 고막을 찢었다. 옆 교실이었다.
철기는 저도 모르는 새 부르짖었다.
고인택이다!
(11시 59분)
막 마이크에 대고 말을 하려던 군사령관은 총소리에
놀라 동작을 멈추었다.
"뭐야?"
하지만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뭐야?"
다시 한 번 소리치면서 군사령관은 텐트를 뛰쳐
나갔다. 곧이어서 사단장과 대대장, 이병우
전사단장까지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텐트를 빠져
나왔다.
(12시 00분)
머리가 반 아상이나 날아가 버린 비참한 모습으로
쓰러진 고인택의 시체 앞에서 철기는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모여든 소대원들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을 멈춰 버린 듯이 굳어져 있었다.
고인택....
아마도 총구를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겨 버린 듯한
고인택의 마음이 너무도 절실하게 공감되어서 철기는
마치 제 가슴이 총알로 뚫려 버린 것만 같았다. 결국
이런 결과를 가져 오고 말았다는 말일까. 자신의
투쟁이란 이 주검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ㅁ말일까.
만족하느냐, 현철기?
누군가가 낮고 음산한 소리로 묻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철기 자신의 목소리였다.
모르겠다....
철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때였다.
"다들 물러나.... "
박도기 중사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박 중사가 천천히 고인택의 시체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한 손이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고 있었다. 그 수류탄을 제 가슴께에 들어 올리면서
박 중사는 다시 한 번 말하고 있었다.
"더들 물러나, 빨리.... "
"안 돼, 박 중사.... "
박 중사의 모습은 저주에 걸린 마왕과도 같았다.
철기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로 미친 듯이
중얼거리고만 있었다. 안 돼, 안 돼....
"미안하다, 고인택.... "
그렇게 마지막으로 중얼거리면서 박 중사는
고인택의 시체 위로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안 돼!"
피맺히게 소리치는 철기의 어깨를 누군가의 손이
거칠게 잡아당겼다. 뒤로 벌렁 나자빠지는 철기의
귓가로 세상을 갈기갈기 찢는 듯한 폭음이 들려 왔다.
콰앙....
117. 1981년 4월 ①
k-300트럭이 위병소 앞을 지날 때 지섭은 보았다.
면회대기실의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미는 여자 하나를.
미우였다. 순간 지섭의 가슴에는 파아란 금 같은 것이
길게 그어지는 것 같았다. 아직도 미우는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야 휘파람을 불고 소리를
지르고 한바탕 요란을 떨었을 소대원들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두 대의 트럭에 나눠 탄 소대원들은 그
쪽으로 시선도 제대로 돌리지 않고 있었다. 참모부
앞에는 중대장직을 대리한 노주헌 중위가 대대장과
함께 나와 기다리는 중이었다. 멈춰 서는 트럭들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하차."
소대장도 선임하사도 없는 소대를 인솔해서 다녀온
인사계 송회용 상사가 메마른 목소리로 지시하자
소대원들은 마치 무성영화의 배우들처럼 소리없이
차에서 내려섰다. 이어지는 지시대로 대대장앞에 3열
횡대로 역시 소리없이 모여서는 소대원들의 모습은
하나하나가 모두 유령들 같기만 했다. 사단
보충대에서 보안부대의 교육을 받으며 보낸 3박 4일
때문이 아니었다. 3월 26일, 현장에서 귀대한 이후로
소대원들 모두는 그대로 넋이 나가 버린 듯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유 하사가 죽었고, 고인택이
죽었고, 박도기 중사가 죽었고, 소대장 철기와
선임하사 최 중사는 상태를 모르는 중상을 입고
후송되지 않았던가. 그 모든 일이 바로 소대원들의
눈앞에서 일어났다. 만약 제정신인 사람이 있다면 그
편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왠지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송 상사가 보고를 했다.
"일중대 일소대 이십 구 명, 보안부대 교육 마치고
귀대했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수고했어요."
맥빠진 목소리로 겨우 한 마디를 해 놓고서, 대대장
박민 중령도 더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휘봉을 두 손에 모아쥔 채로 눈을
내리깔고 서서 한참을 말이 없었다. 어지간한 그라도
해도 충격이 크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아니다!
하지만 지섭은 혼자서만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박민이 누구인가. 결코 두 손을 들 인물이 아니었다.
또 무언가 일을 꾸미리라. 소대가 3박 4일간
보충대대서 받고 온 교육이 바로 그 준비작업이
아니겠는가. 이상하게 온몸으로 밀려드는 한기에
지섭이 푸르르 진저리를 쳤을 때 대대장이 입을
열었다.
"교육받느라고 수고들 많았다. "
그렇게 한 마디를 꺼내 놓고 대대장은 천천히
소대원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소대원들은 그 시선이
닿기도 전에 이미 고개를 깊게 떨구고들 있었다.
하지만 지섭은 목을 빳빳이 세우고 대대장의 시선을
마주 받았다. 그런 지섭을 발견하고 대대장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지섭은 시선을 떨구지
않았다. 마치 눈싸움을 하듯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마주보고 서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눈을 돌리는
대대장의 얼굴에 노기가 서리는 것을 지섭은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그 표정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아니다.
대대장은 변할 사람이 아니다. 지섭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아직은 스스로도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충동이 격하게 가슴속에 일고 있었다. 대대장이 험,
하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간 우리 대대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해서 대대장도, 여러분들도 더는 언급을 피하도록
하자. 이미 보충대에서의 교육을 통해서 여러분이
군인으로서, 또한 우리 대대의 구성원으로서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충분히 알게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대대장이 잠시 말을 끊은 사이에 지섭은 빠르게
그간의 교육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사고가 난 지 사흘
만에 소대원 전원이 불려 들어간 보충대에서
보안부대의 주관으로 3박 4일간 행해진 교육의
요지는, 한마디로 소대원들이 보고 들은 사건의
진상을 기억 속에서 지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건에 대한 새로운 설명이 주어졌고, 숙지를
강요받았다.
고인택은 군복무에 성실한 모범사병이었으나 첫
휴가길에 만난
애인으로부터 절교선언을 받고 큰 충격 속에
귀대했다가 결국
무장탈영하기에 이르렀다. 통신대장은 주번사관으로
야간순찰
중에 울타리를 넘어가던 고인택과 마주쳐서
만류하던 끝에 사살
되었다. 즉시 비상출동한 대대는 모곡분교장에 숨어
있는 고인
택을 발견하고 포위, 설득을 계속하던 차에 소대장
현 중위와
선임하사 최 중사, 그리고 박도기 중사와 유하사가
자청해서
특공조로 분교장 안에 침투했다. 고인택을 생포하기
위해 접근
하던 중에 유 하사는 사살되고, 나머지 세 사람이
고인택과 몸
싸움을 벌이던 중 고인택이 가자고 있던 수류탄 한
발을 터뜨리
는 바람에 사고가 발생했다.
만 72시간 동안 그 내용을 숙지시키기 위한 교욱은
지저리가 나도록 계속되었다. 사건의 개요뿐만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상황까지도 주어진 내용대로 줄줄
외워야만 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귀대하던 날 피엑스에 함께 갔었는데 고인택이 빵을
먹다 말고
눈물을 주룩 흘리면서... 쌍년, 죽여 버리겠다....
하고 말했습
니다. 처음에는 소대장님과 선임하사님 둘만이
들어가려고 했는데,
유 하사가 내무반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낀다면서
자원했습니다.
그리고 박 중사는 공수부대 시절 이런 일을 겪어 본
경험이 있다
면서 끼여 들었습니다.
이런 수십 가지의 상황 설명을 되풀이 주입시키는
틈틈이 보안대 요원들은 노골적인 협박을 해 오곤
했다. 만에 하나, 지금 제공되고 있는 모범답안과
어긋나게 '유언비어'를 퍼뜨릴 경우에는
남한산성감이다. 제대하고도 입 조심하지 않으면 큰
봉변을 당한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잘 알지
않느냐.... 지금 대대장이 말하는 군인으로서, 또
대대원으로서 취해야 할 태도란 바로 그 모범답안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고 있음이었다.
"어쨌든 여러분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고 있는지
대대장은 잘 알고 있다. 대대장의 마음도 여러분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군대란 그런 감상은로 유지될
수는 없는 집단이다. 우리 대대를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 개개인을 위해서 앞으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여러분 개개인을 위해서, 라는 대목에서 대대장의
두 눈은 날카롭게 번득였다. 지섭은 다시 몸을
떨면서도 대대장을 쏘아보는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다.
"자세한 교육은 중대에서 계속될 테니까 잘 따라
주기 바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해 둔다. 자랑스러운
석천소대의 신화를 더욱 빛낼 수 있도록 행동과
발언에 특히 유의하도록,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목소리는
하나뿐이었다. 인사계 송 상사였다. 나머지
소대원들은 고개를 떨군 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소대원은 이제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장석천의 신화로 위장되었다. 소대원은 이제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장석천의신화로 위장되었던
대대장의 추악한 범죄를. 아니, 대대가 모두 알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현장에서 철수하고 보충대에
불려가기까지의 사흘 동안, 대대장은 한사코 1소대를
다른 병력를과 격리하려고 애를 썼지만, 분교장은
안에서 있었던 일과 그 안에서 밝혀진 모든 진상들은
이미 대대 안에 쫘악 퍼져 있었다. 그런데도 장본인인
대대장이 석천소대의 신화 운운하고 있었으니 아무리
철저한 교육을 받고 온 소대원들이라 한들 거부감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소대원들의 반응이
의외였던지 대대장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더
무어라고 토를 달지는 않았다. 인사계 송 상사의
경례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참모부로 들어가는
대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지섭이 다시
아니다.... 하고 중얼거렸을 때였다.
"대대장님!"
대열 중에서 누군가가 크게 소리쳐서 대대장을
불렀다. 권 하사였다. 대대장은 마치 불에라도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뭔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대대장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참모부 문 앞에 서서
대답을 하고 있었다.
"해봐."
"지금 우리 소대장님과 선임하사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추궁하듯 다부진 권 하사의 질문에 대대장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섭은 문득 들은 말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장에서 후송될 때 철기는
두 다리가 피투성이였고, 최 중사는 얼굴이 역시 피에
젖어 있었다고 했다. 그런 두 사람의 상태에 대한 권
하사의 질문은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소대원들 모두가 대대장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대장은 무슨 이유에선지 한참 뜸을 들이다가
대답을 하고 있었다.
"나도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너무도 어이없는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대답을 듣는 순간 지섭의 가슴속에는 어떤 불안감이
파랗게 일어나고 있었다. 저들은 혹시 철기를
죽이려는 것이 아닐까. 벌써 죽은 것은 아닐까.
철기가 죽는다면 저들은 훨씬 수월하게 뒤처리를 할
수 있으리라.
"대대장님은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알려
주십시오."
권 하사는 볼멘 소리로 거듭 묻고 있었다.
"모른다지 않나!"
"그러면 한번 확인을 해주십시오."
끈덕진 권 하사의 질문에 대대장은 꾸욱 입술을
깨물어 보이고 있었다. 치미는 부아를 참는 듯했다.
"권 하사. 그만 해."
노주헌 중위가 슬그머니 나무랐지만 권 하사는
물러나지 않았다.
"저희 소대원들은 알아야 합니다. 확인을
해주십시오."
대대장은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달려들어 발길질이라도 했을 상황이었다.
도열한 소대원들 사이에 아연 팽팽한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지섭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이었다. 보충대에서의 그 철저한
교육도 그다지 효과적이지는 못했던 모양이라는
자각이었다. 대대장은소대원 전체의 따가운 눈길
속에서 무언가를 한참 생각하고 있더니 울분 어린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상부에 그런 일을 확인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줄 아나?"
그리고 홱, 몸을 돌려서 걷어차듯 문을 열고 참모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대장님!"
권 하사가 대열 속에에서 뛰쳐 나가자, 노 중위가
재빨리 가로막았다.
"그만해 둬, 권 하사."
"벌써 일 주일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상태를
모른다는 게 말이됩니까?"
"우리도 몰라. 하지만 죽지는 않았을 거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말 한 마디에 고무된 듯 권 하사는 되돌아서고
있었지만, 지섭은 혼자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부상자체는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가 아니라고 해도, 철기는 결국 살아 남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그걸 바라고 있다. 송
상사의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 중대로 가자."
소대 병력이 느릿느릿 중대 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참모부 문이 열리고 병기관 윤 중위가
밖으로 나왔다.
"박지섭!"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지섭은 흠칫 놀라면서 멈춰
서지 않을 수 없었다. 병기관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인 송 상사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지시했다.
"박지섭, 빠져라."
지섭은 군장을 맨 채로 뒤로 쳐졌다. 대열의 맨
뒤에 있던 권 하사가 어깨를 툭, 쳐 주고 지나갔다.
지섭은 문득 그의 울음소리를 떠올렸다. 보충대에서
교육을 받은 동안 권 하사는 밤마다 혼자 소리를 죽여
울곤 했다. 모포 속에 얼굴을 파묻고 우는
울음이었지만 바로 옆에서 자던 지섭은 또렸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이리 와, 박지섭."
지섭을 손짓해 부르는 병기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지섭은 새삼스러운 긴장으로 몸을
굳히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필승, 하고 경례를 하자
병기관은 권 하사의 흉내라도 내듯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지섭은 가슴속에서 들끓어 대고
있는 격한 기운을 다스리려고 애를 쓰면서 고개를
숙이고 그 앞에 서 있었다.
"군장도 벗고 철모도 벗어."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병기관의 지시에 지섭은
순순히 따랐다. 하지만 철모를 벗고 군장을
내려놓았어도 조금도 헐거워진 듯싶지 않았다. 무언가
육중한 것이 어깨를 계속 내리누르고 있었다.
"이리 와."
군장을 벗어 참모부 방벽에 기대 놓은 지섭을
병기관은 본부중대 화장실이 있는 울타리 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무언가 긴장을 가라앉히려는 듯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지섭은 그가 꺼내 올 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고가 난 직후에 했던
것처럼, 박 중사가 터뜨린 수류탄의 출처를 캐물어 올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지섭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었다. 병기관이 치밀하게 조사를 했지만
장부에도 탄약고에도 이상이 없어서 그대로
넘어갔었다. 그러나 병기관은 못내 의심스러운
기색이었는데, 아마도 다시 추궁을 해 올 것 같았다.
지섭은 처음과는 다른 대답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이 어떻게 되든 사실 그대로
얘기를 해 버리고 싶었다.
"한 하사가 그저께 제대한 거 알고 있나?"
병기관은 엉뚱한 얘기를 꺼내 오고 있엇다. 그런
이야기로부터 우회해 들어올 심산인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그 링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다. 이런
사건의 와중에서도 제대할 사람은 제대를 하는구나,
하는 느낌에 왠지 가슴이 텅 비어 오는 듯했다.
"그랬습니까?"
"그래, 그저께 제대를 했다. 박지섭, 네 걱정을
많이 하더라. 그리고 나한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알려
주고 갔다."
순간 지섭은 무언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한 하사가 마지막으로 알려 주고 갔다면....
그것은 수류탄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럴 수가.... 한 하사 편에서 둘만이 아는 일로
하자고 신신당부를 했던 일이 아닌가. 하기는 그럴 수
있는 일인지도 몰랐다. 겉으로는 큰소리를 치면서도
사실은 뒤가 무르기 그지없는 한 하사의 성품으로 볼
때 아무래도 편안한 마음으로 부대를 나설 수가
없었으리라. 그래서 전적으로 지섭에게 책임을 씌우는
선에서 병기관에게 털어놓았을 수 있었다.
"한 하사가 너한테 장부에 올라 있지 않은 수류탄
한 발을 넘겨 줬다던데? 사실이지?"
"네, 그렇습니다."
지섭은 서슴없이 대답해 버렸다. 오히려 더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사실대로 말해 버리자는 충동에
휩싸여 있던 지섭 자신의 결단을 도와준 셈이었다.
병기관은 착잡한 표정으로 담배연기를 내뱉고 있었다.
"한 하사하고 나하고 둘이 그 수류탄 묻어 둔
자리를 파 봤다. 빈 탄통뿐이던데.... 그 수류탄은
어디 갔지?"
지섭은 후우욱 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대답했다.
"박 중사가 가지고 갔습니다."
너무 순순한 자백에 병기관은 오히려 당황한
듯했다. 담배를 붙든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섭은 눈을 내리깔고 그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이 일이 어떻게 처리될지 모르지만
어리석은 거짓말로 우스운 꼴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병기관은 한참 뜸을 들이고 나서 다시 묻고 있었다.
"박지섭, 넌 배울 만큼 배운 놈이지?"
지섭은 대답하지 않았다. 병기관은 스스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래, 배울 만큼 배웠으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거야."
병기관은 최후의 한 모금까지 깊숙이 빨아들이고 난
담배를 발앞에 내던져 밟아 버리고 나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수류탄 건은 한 하사하고, 나 두 사람만 알고
다들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너까지 셋이 아는
거지. 우리만 입을 다물면 아무도 알 수가 없다는
말이지. 박지섭이, 네가 무슨 이유로 박 중사한테
그걸 줬는지는 모르겠다. 묻지도 않겠고.... 그렇지만
이제 와서 누가 그 일을 안다면....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되겠지. 안 그래?"
역시 지섭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석천소대 얘들 기분은 안다. 박지섭이, 네 기분도
알 수 있어. 그렇지만 더 이상 사건을 확대해서는 안
돼. 솔직히 말하자. 너도 다쳐선 안 되겠지만, 나도
피해를 보기는 싫다, 이 말이다. 알겠나?"
".... "
"그러니까 이 일은 아무한테도 발설하지 말도록.
알겠지? 제대가 얼마 남았지?"
제대.... 까마득하게만 여겨지던 그 한 마디가
갑자기 생생한 실감을 가지고 가슴속에 떠올랐다.
"한 삼 개월 남았습니다."
"그것 봐. 지금까지도 참았는데 앞으로 삼 개월....
좆으로 뭉쳐도 지나가게 되어 있어. 절대로 쓸데없는
생각하지마. 알겠지?"
"알겠습니다."
스스로도 신뢰가 가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병기관은 그 정도로도 좋다는 듯 흡족한 웃음을
띠면서 다시 어깨를 두드렸다.
"넌 말이 통하니까 좋아. 아, 그리고 면회 온
아가씨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대대
전체가 일체 면회를 통제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우선
참고 있어. 내가 기회를 봐서 대대장님한테 얘기를 잘
해볼게."
"괜찮습니다."
그것은 지섭의 진심이었다. 지금 미우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병기관은
괜히 빼지 말라는 듯 야비한 웃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알아서 주선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빨리
정리하고 업무에 복귀하도록 해. 내가 한 말
명심하고. 알았지?"
지섭의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서는 병기관이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지섭은 시선을 위병소 쪽으로
돌렸다. 반쯤 열린 대기실 문 틈으로 미우의 모습이
보였다. 얼핏 이 쪽을 향해 손짓을 해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지섭은 그녀에게 갈 수 없었다.
면회금지라는 통제가 없다고 해도. 지섭은 천천히
걸어가 군장을 도로 메고 철모를 썼다. 그리고 미우의
시선을 따갑게 느끼면서 중대를 향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보안대장이 브리핑을 마치자 사단장 권정준 소장이
찌르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 왔다. 대대장
박민 중령은 다시 앉은 채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여 보이자 사단장은 끌끌끌 소리 내어
혀를 차고 있었다.
"누가 지금 그런 소리를 듣자는 거야? 보안대장이
얘기한 시나리오에 대해서 다른 생각이 없느냐, 이
말이야."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정말.... 아, 그런 소리는
집어치우라니까!"
울컥 얼굴을 붉히는 사단장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계산에 들어 있던 일이었다. 대대장은 다시 한
번 이마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저는 사단장님께서 결정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겠다는 태도를 보이자
사단장은 다시 혀를 차고 있었지만 그다지 불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고 지그시 눈을 감는
사단장의 옆얼굴을 훔쳐 보면서 대대장은 머리 속으로
보안대장의 시나리오를 정리해 보았다. 그 정도로
마무리를 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다행한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고인택과 박도기가 광주사태로 해서 얽힌
사연도 공개가 되지 않을 것이고, 대대장자신과
장석천을 둘러싼 사건들도 묻어 버릴 수 있었다.
보안대장의 시나리오로 인해 가장 덕을 보게 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러니만치 사단장에게
이러니저러니 하고 견해를 밝힐수가 없었던 것이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니 보안대장이 찡긋 한 눈을
감아 보이고 있었다. 대대장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정말이지 그에게는 어떻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일을
정리하지고 사단장에게 건의를 한 것이 바로
보안대장이었다. 그리고 완벽한 시나리오를 작성함은
물론 석천소대원들에 대한 교육까지 자청해서 맡아
주었다. 오늘 대대에 돌아와서 보인 태도로는 확실한
효과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지만.
"좋아. 우선 이걸로 결정을 하지."
한참 만에야 사단장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내뱉는
말이었다. 대대장은 후우 하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는 살았다. 하지만 사단장은 조심스럽게 덧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 선에서 최종 결정될 일은 아니니까,
확실한 것은 오늘 내가 원주에 다녀와야 알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뭐, 군사령관님인들 뾰족한 수가
있겠나? 대강 이런 선에서 결재를 받을 테니까
대대장은 다시 한 번 철저하게 교육시킬 준비를 해
둬."
"알겠습니다."
대대장은 다시 깊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정말이지
사단장의 발밑에 엎드려 군홧발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미 놓쳐 버린 줄 알았던 별을
향한 꿈이 다시 살아난 셈이었다. 사단장은 시선을
보안대장에게로 돌리고 있었다.
"자네가 수고 많이 했어."
"아닙니다. 저야 무슨.... 박 중령은 사단장님께
앞으로 결초보은해야 할 겁니다. 아시고 계시겠지만."
보안대장이 대대장 쪽을 힐끗거리며 아부하듯
덧붙이고 있었지만, 그런 태도가 하나도 얄밉지
않았다. 대대장은 보안대장의 말을 되풀이해 입에
올렸다.
"앞으로 결초보은하겠습니다."
사단장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얘기할 건 없어. 박 중령을 내가 잘
보고 있는 편이기는 하지만 자네 한 사람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할 수는 없지. 다 우리 군 전체를 위해서
나나 보안대장이나 애를 쓰는 것뿐이야. 그런
견지에서 군사련관님도 동의를 해주실 것으로
믿고.... 어쨌든 계급의 고하를 떠나서 우리는 같은
군무에 몸을 담은 사람들이 아닌가? 서로 도우면서
서로가 함께 커야지. 그렇지 않나?"
"물론입니다. 각하."
보안대장이 맞장구를 치자 잠시 사단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렇게 부하가 잘되면 그 상관이 자연히 잘될
수밖에 없는 건데 말이지.... 모든 군인들이 다 그런
건 아니야. 개중에는 부하를 희생시키면서 혼자
크려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이거든.... "
어딘가 분노를 담은 그 목소리에 대대장은 혹시
김승일의 아버지 김창성 장군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창성 장군은 현역 시절
고지식하기로 이름났던 사람이었고, 이번 사건의
와중에서 사단장은 이상할 만큼 김승일을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태도를 보였었다. 역시 김창성과 권정준
두 사람 사이에는 무언가 해묵은 감정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하면서 사단장이 말머리를 돌렸다.
"문제는 보안유지인데 말이야. 확실하게 하고
있겠지?"
보안대장은 자신에 찬 태도로 대답하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당분간 전사단 내에 휴가는 물론
외출외박까지 금지를 시키고 있고, 이번 주
전역병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교육을 시켰습니다. 또,
앞으로 우리 요원들이 각 예하부대를 방문해서 철저한
교육을 시킬 계획으로 있습니다. 빨리 원주에
다녀오셔서 확정된 시나리오를 내려 주시면 됩니다."
"알았어."
"그런데.... 현철기하고 최도천, 두 놈들 상태는
어떻습니까?"
보안대장은 대대장으로서도 궁금했던 일을 언급하고
있었다. 사실 아까 권 하사라는 놈으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도 대답을 못했지만, 둘 다 목숨을 건졌다는
것뿐, 자세한 부상 정도는 알지를 못하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면서 사단장은 빠득, 하고 이빨을
갈았다.
"그 자식들.... 거기서 그냥 즉사하는 편이 더
나았을 걸 말야.... 최도천이란 놈은 왼쪽 눈이
보이지 않게 된 모양이고, 현철기는 오른쪽 다리를
잘라냈다는구만."
왼쪽 눈, 오른쪽 다리.... 사단장은 아무런 감흥도
없이 말하고 있었지만 대대장은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애꾸눈이
된 최 중사, 한쪽 다리가 없는 현 중위.... 그렇게
끔찍한 모습으로 두 사람이 자신을
찾아온다면....복수심에 불타 자신을 찾아온다면....
끔찍한 일이었다. 사단장의 말마따나 그들은 죽어
버렸어야 했다. 사단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뭐, 그런 놈들 이야기는 그만두고.... 이제
칼자루는 우리가 잡았으니까 걱정할 건 없어.
대대장."
"예, 각하."
"자네는 석천소대원들 거듭거듭 철저하게
교육시키는 거 잊지말고, 특히 김승일이한테 신경을
좀 써. 그 자식, 허튼 소리 하고 다니지 않게 말이지.
무슨 소린지 알지?"
사단장은 김창성 장군의 귀에 이 이야기가
들어갈까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내가 오늘 원주에 다녀온 다음에 얘기를
하기로 하고, 돌아들 가. 수고 많았어."
사단장은 피곤하다는 듯 소파에 머리를 걸치고
있었다. 대대장과 보안대장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유난히 붉은 저녁노을을 어깨에 받으면서 미우는 백
과부집으로 들어섰다. 툇마루에 신한수 중위와 여준구
씨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미우를 본 신 중위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미우는 어두운 얼굴로 앉아 있는
여준구 씨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가볍게 고개짓을
하면서 여준구 씨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냥 여기서 기다리지 뭘, 하루 종일 가 있다
옵니까?"
미우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제 방문을 열었다. 원래
백 과부가 쓰던 방을 빌린 것이었다. 주인인 백
과부는 깨끗한 제 방을 미우에게 내주고 바깥채를
치워 쓰고 있었다.
"저, 잠깐만."
신 중위가 미우의 등 뒤로 다가섰다. 미우는 말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여 선생님이 내일 떠나신다고 해서 이별주를
나누던 참입니다. 잠시 같이 좀 앉지 않으시겠어요?"
그러고 보니 툇마루에는 맥주병과 잔, 마른안주
등이 조촐하게 차려진 술상이 놓여 있었다. 하루 종일
위병소와 대대 주변을 맴돌다 보니 온몸이 꺼져
들어갈 것처럼 무거웠지만, 여준구 씨가 내일
떠난다는 데야 도리가 없었다. 이 백 과부집에
거쳐하는 일 주일 동안 여준구 씨와는
눈인사만으로나마 제법 친숙해진 사이엿다. 그 여준구
씨와 아들 여종일의 사연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여준구 씨가 철기를 구할 방도를 찾기 위해 서울까지
다녀왔다는 사실이 미우를 감동시켰다. 그 여준구
씨가 친구의 또 친구라는 연줄로 어렵게 만난 한
신문사의 논설위원은 지금 그런 문제를 신문에서 다룰
수 있는 상황인 줄 아느냐고 꼬리를 사리더라고 했다.
그게 마치 자신의 잘못이기라도 한 양 여준구 씨는
미우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했었다. 미우가 신
중위가 앉았던 자리에 가서 앉자 여준구 씨는 제 잔을
내밀어 채워 주었다. 신 중위는 미우를 지키듯 옆에
와 서 있었다.
"우리만 떠나게 됐습니다."
여준구 씨가 창백한 웃음을 흘리면서 건네는
말이었다.
"차도가 있었으면 좋았을 걸요."
미우의 말에 여준구 씨는 조용히 고개를 젓고
있었다.
"틀린 것 같아요. 더 매달린다는 게 오히려 아이를
악화시킬지도 모르고.... 아득바득 매달리는 나
자신이 같이 미쳐 버릴 것만 같고.... 평생 저렇게 살
수밖에 없지요 뭐."
가슴을 후벼내는 듯한 여준구 씨의 말에 미우는 더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여준구 씨는
슬며시 시선을 들어 신 중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군의관님께서 정신과 전문의를 한 분
소개해 주셨으니까 거기에나 기대를 해봐야지요. 뭐,
산 사람이야 어떻게든 살아가지 않겠어요? 문제는 현
중위 그 양반인데.... 군의관님이 오늘 원주에 다녀온
모양이에요."
그 말에 미우는 번쩍 고개를 들어서 신 중위를
올려다보았다. 신 중위는 한숨을 내쉬면서 안경을
고쳐 쓰고 있었다.
"뭐, 다녀온 것뿐이지. 아무 소득도 없었지요.
면회는커녕 지금상태가 어떤지도 알아낼 수가
없었어요. 내 동기 하나가 그러는데, 병원 안에서도
지금 두 사람은 완전히 격리 수용되어 있는
상태랍니다. 차트마저도 보안부대에서 파견되어 온
요원이 관리하고 있는 실정이라니까...."
"가족이 가도 면회가 안 된단 말인가요?"
철기의 양아버지인 현 교수를 떠올리며 미우가
물었지만 신 중위는 한 숨을 섞으면서 대답할
뿐이었다.
"어려울 겁니다."
미우는 고개를 떨궈 버렸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현
교수에게 연락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자신은
현 교수에게 연락을 꺼리고 있을까. 상태를 알고 난
이후에.... 라는 대답을 준비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꼭 그것뿐일까. 현 교수는 5공 출범 이후, 새로운
정권의 이론가로 군림하고 있는데다가 이번 선거에서
민정당의 전국구로 당선되기까지 했으니만치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는
철기를 구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왜
연락을 안 하는가. 그것은 철기가 그런 도움을 바라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현 교수가 권력의 힘을
빌려 철기를 도우려 한다면 철기는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게 두려웠다. 하지만.... 하고
미우는 다시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을까?
더 나빠진다면 그것은.... 상상하기도 두려웠다.
미우는 잔을 들어 타는 듯한 목구멍으로 맥주를 흘려
보냈다.
"미안해요."
여준구 씨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나이 든 사람이 옆에 있으면서 뭐 하나 도움도
되지 않고.... "
"별말씀을요."
눈물이 왈칵 솟을 것만 같은 기분으로 반쯤 비운
잔을 내려놓으면서 보니 바깥채의 문이 열리고 백
과부가 마당으로 나서고 있었다. 이 편을
힐끗거리면서 무언가 얘기를 할 듯 말 듯하던 그녀는
이윽고 샌들을 끌며 대문을 빠져 나가 버렸다. 미우는
다시 혼자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야릇한 분위기를 가진 여자였다. 1주일간 미우와 나눈
얘기는 아마 열 마디도 채 되지 않을 듯했다.
의식적으로 이 편을 멀리하려는 듯싶으면서도 시선은
늘 미우의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미우는
늘 미행을 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처음
신 중위가 미우를 데리고 와서 방을 얻을 때 '현 중위
약혼잡니다' 하고 소개를 하자 그녀의 두 눈에서 짧은
한 순간 일어났던 광채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광채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혹시? 오십이 넘은
나이라는데도 아직 여체로서의 굴곡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백 과부의 몸을 떠올리면서 미우는 제 상상의
끔찍함에 놀라 눈을 감아 버렸다.
"기상!"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지섭은 얼핏
들었던 잠에서 깨어났다. 팟, 하고 내무반 안의
전등이 모두 켜졌다. 통로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은
대대장이었다. 그 뒤에 노 중위도 서 있었다. 모포를
걷고 일어나면서 보니 시간은 막 자정을 넘고 있었다.
그런 시간인데도 깊은 잠에 빠졌던 소대원은 하나도
없는 듯 다들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침구를 깐 채로 전원 삼선에 정렬!"
대대장이 직접 목청을 돋워서 지시를 하고 있었다.
보충대에서 교육을 받았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인지 소대원들은 말없이 일사불란하게 침상에
정렬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늘어선 소대원들의
몸에서는 무언가 불만스러운 기운이 물씬 풍겨 나오고
있음을 지섭은 느낄 수 있었다. 통로에 버티고 선
대대장도 그런 기척을 알아차렸는지 무척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하기야 낮에 있었던 일만으로도 기분이
몹시 상했음직했다. 지휘봉을 탁, 탁 손바닥에 대고
두드리면서 대대장은 천천히,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취침중에 미안하게 생각한다만, 석천소대원들의
교육상태를 불시에 체크하라는 사단장님의 특별지시가
있었다."
좆도.... 하고 누군가가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대대장은 무표정하게
소대원들을 올려다보다가 이태후의 배를 쿡, 찔렀다.
"예, 일병 이태후!"
"고인택이가 탈영한 이유가 뭔가?"
"네.... "
이태후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대대장이 다시 지휘봉으로 배를 찔렀다.
"탈영한 이유가 뭐야? 교육받은 사항을 벌써
잊었나?"
"네, 사회에 두고 온 애인이 변심했기 때문입니다."
좋아, 하고 이태후를 지나친 대대장은 이어서
윤성건을 지적했다.
"너!"
"네, 상병 윤성건!"
"귀대한 고인택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나?"
"네,누구를 죽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보고하지 않았나?"
"네, 첫휴가를 다녀온 뒤에는 누구나 안정을 찾지
못해 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에.... "
윤성건이 말을 이어가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을
때였다.
"그만둬!"
권 하사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통로로
뛰어내렸다. 낮에 했던 것처럼 노 중위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권 하사, 무슨 짓이야?"
"그만둡시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권 하사는 대대장을 한 대 치기라도 할 것처럼 노
중위를 떠다밀면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지 못해?"
노 중위가 권 하사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러자 권
하사는 마치 총에 맞은 것처럼 통로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엉.... 하고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만, 그만들 하란 말입니다. 우리가 다 봤는데,
우리 눈앞에서 다들 죽었는데.... 이게 뭡니까? 그만
해요. 그만들 해.... "
소대원들 속에서 또 누군가가 울음을 터뜨렸다. 노
중위는 울부짖는 권 하사를 내려다보고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말없이 서 있던
대대장은 이윽고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면서 반대편
문으로 나가 버렸다. 그래도 권 하사의 소울음소리는
그치치를 않았다.
118. 1981년 4월 ②
참모부 앞에서 지섭은 잠시 머뭇거렸다. 어쩐지
남의 집처럼 어색한 기분이 앞서서 선뜻 들어설 수가
없었다. 공연히 본부중대 내무반 쪽을 기웃대면서
방벽 앞을 서성거리는 지섭의 귓가에는 그날밤의
총소리가 들려 오는 듯했다. 타앙.... 이어서 지섭
자신의 목소리가 가슴속에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너는 뭐냐, 박지섭.
그토록 무력하던 고인택도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니 누군가의 웃음소리도
들려 오는 듯했다. 흐흐흐흐.... 철기였다. 그는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일까.
"뭐하는 거야, 박지섭?"
낮익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밤에 지섭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병기관 윤 준위가 막 참모부를 나서고 있었다.
"안 들어오고 뭐해?"
병기관의 목소리는 그래도 제법 부드러웠다. 지섭은
얼굴을 붉히면서 그 앞으로 다가섰다. 열린 문틈으로
부관 이 준위의 얼굴이 빼꼼히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한 발 앞에 멈춰서자 병기관의 손이 어깨에
얹혀졌다.
"거북하게 생각할 거 하나도 없다, 박지섭. 모든 게
옛날 그대로야. 알겠나? 누구든 너한테 뭐라고 하는
놈 있으면 즉시 나한테 얘기해.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안전을 위한 배려겠지만 그래도
곰살맞게 대해 주는 윤 준위가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연대에 좀 들어갔다. 올 테니까 들어가서
장부나 한번 맞춰보고 있어. 어쩌면 전체적인 검열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내가 한 번
확인은 했지만 숫자야 네가 더 잘 알잖아?"
"네 알겠습니다."
병기관은 제법 웃움까지 떠올리면서 지섭의 어깨를
참모부 쪽으로 떼밀었다.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챙길
여유도 없이 지섭은 인으로 들어서야 했다. 여러
사람의 시선이 지섭에게로 쏠려 왔다. 그 시선들은
마치 이렇게 묻고 있는 듯했다.
여기 왜 왔지? 뻔뻔스럽게.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힐책해 오지는 않았고,
지섭은 제 책상을 찾아 앉을 수가 있었다. 건너편
작전과 책상에는 교육관 김승일이 멍한 얼굴로 허리를
뒤로 젖히고 앉아 있었다. 보충대에서 교육을 받은
동안 분교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전부 들었던 터라
지섭은 그런 김승일이 더욱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부르르르 진저리를 치면서 서랍을 여는데
312전화기가 요란한 신호음을 울렸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데 부관 이 준위가 잽싸게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인사과 이 준윕니다, 하는 소리가 거북한
침묵에 휩싸인 참모부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
준위의 말투는 금세 반말로 변하고 있었다.
"아, 박 병장? 아, 그래. 나라니까. 그거 어떻게
됐어? 어, 인사명령이 났어? 알았어. 명령지는 오후
문서전편에? 알았어, 알았어."
이 준위는 신바람이 난 듯한 모습으로 전화를 끊고
있었다. 인사명령? 누구의? 때가 때이니만치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뭡니까. 부관?"
김승일이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묻는 말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긴장한 기색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추기면서 이 준위는 히죽이 웃어 보이고
있었다.
"뭐긴 뭐겠어요? 김 대위 인사명령이지."
그 말에 김승일은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이 준위에게 다가섰다. 대위? 그제야
지섭은 그의 어깨를 살펴보았다. 다이아몬드 세 개가
달려 있었다. 4월 들어 진급을 한 모양이었다. 한
하사가 제대한 사실을 알았을 때처럼 지섭은 혼자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진급하는 사람은
진급을 하는구나.
"내 말 못 들었어요. 부관? 난 못한다고 하지
않았냐구요!"
한 대 후려치기라도 할 것처럼 김승일은 키 작은 이
준위의 얼굴을 가슴팍으로 떼밀듯 다가서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겁먹은 얼굴로 CP 쪽을
힐끗거리면서 이 준위는 잔뜩 목소리 낮추고 두 손을
내저었다.
"나한테 그러지 마슈. 내가 무슨 죈가?"
"내가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도...."
"좀 기다려요. 이따 얘기합시다."
부관 이 준위는 잽싸게 김승일을 등지고 돌아서서
CP 문을 두들겼다. 네, 하는 대대장의 대꾸가 있기
무섭게 이 준위가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리자 김승일은
닭 쫓던 개처럼 씩씩거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지섭은
백지만이 끼워져 있는 체크 리스트를 꺼내 놓으면서
속으로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승일에 대한
인사명령이라니. 그것도 눈치를 보아 하니 본인은
싫어하는 것을 대대장과 부관이 추진을 한
모양이었다. 어떤 내용일까?
"이놈의 군대, 더러위서 정말.... "
부아를 삭이지 못해 가쁜 숨을 내쉬고 있던
김승일은 퉤에, 소리내어 참모부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러고는 군홧발로 걷어차듯 거칠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하기는 그 누구든 달라지지않을 수 있으랴. 허허,
하고 헤식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작전과의 최
병장이었다.
"겨우 일박이일 교육받고 오더니 또라이가 다 됐네?
삼박사일씩 뺑뺑이 도는 놈들도 있는데.... 야,
박지섭, 고생 많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 참모부 안에는 병들뿐이었다.
지섭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임마. 니가 사고 쳤냐? 군대란 게 맨날
이 모양 아니냐. 사고 친 놈 따로, 좆뺑이 치는 놈
따로.... 하여튼 또라이부대야, 또라이부대. 나도
특명이나 잘 받아서 하루라도 빨리 나가야지,
전염될까 겁난다. 어젯밤에 권 하사가 또 깽판
놨다면서?"
깽판이라.... 그렇게 말해 버릴 수 있을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울컥 치미는 격한 기운 때문에
지섭은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최
병장은 더 다그치지 않고 말머리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야, 안준호. 인사명령이 뭐야? 교육관이 일중대장
되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완전히 결정된 거야?"
"아까 통화하는 걸러 봐서는 오늘 오후에 명령지가
온다는 거 같은데요?"
김승일이 1중대장.... 지섭은 마치 호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최 병장은 자못
유쾌하다는 듯 킬킬킬.... 탁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이쿠, 말년병장 최 병장, 제대말년이나마 좀
편하게 지낼모양이구만, 그런데 왜 저러는 거야?"
"모르겠습니다. 일중대장 시킬 거면 차라리
전출기켜 달라고 했다는데요?"
"왜, 박 대위 귀신이라도 나올까 봐서?"
최 병장은 연신 키들거리고만 있었다. 김승일이
죽은 박주열 대위의 후임이 된다. 하지만 정작 김승일
자신은 그런 인사명령을 거부하고 있다.... 그런
대대장과 김승일의 각각 다른 마음이 이해될 것
같기도 하고, 영 모를 것 같기도 했다. 그보다도 더
모를 것은, 네 사람이나 죽고 둘이 중상을 입은
대참사가 자대에서 발생했는데도 농담 비슷하게
이죽거릴 수 있는 최 병장의 태도였다. 더욱이
통신대장 같은 경우는그들이 자고 있던 내무반 안에서
총을 맞지 않았던가. 아무도 몰래 한숨을 내쉬면서
지섭은 나직하게 중얼거려보았다. 중대장 김승일....
처참한 모습으로 늘어져 있던 박주열 대위의 모습이
따라서 눈앞에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중대장 시켜 줘도 싫다.... 내가 마지막으로
중대장 한번 해보고 갈까? 하하하하.... "
최 병장은 계속 이죽거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따라
웃지 않았고, 대신 CP 문이 열렸다.
"교육관, 들어와요."
이 준위가 쥐처럼 생긴 얼굴을 내밀면서 하는
소리였다.
"나가셨는데요."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최 병장이 대답하자 이 준위의
등뒤에서 대대장이 나타났다.
"뭐라고? 나갔다고?"
"네, 방금 밖으로 나갔습니다."
최 병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대답하자 대대장은
미간을 잔뜩찌푸리면서 크게 소리내어 혀를 차고
있었다.
"이 자식이 점점 더.... 부관, 당신이 직접 가서
빨리 찾아와."
"알겠습니다."
부관은 고깝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참모부를
나갔다. 실내를 빙 둘러보는 대대장의 눈빛을 피해
지섭은 다시 체크 리스트에 얼굴을 묻었다. 뱀처럼
싸늘하게만 느껴지는 대대장의 시선이 뺨에 와 닿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지섭은 백지 위에 공연히
볼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M-16 Ball 316,448. M-60
Ball.... 대대장은 다행히 아무런 말없이 꽝,
소리내어 문을 닫으면서 CP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마에 땀이 배인 것을 느끼면서 지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박지섭?"
모자를 쓰는 지섭을 향해 최 병장이 묻는 말이었다.
순간 빠르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농지거리나 하고 있었지만, 사실
참모부 안에서 지섭의 행동을 감시하도록 최 병장이
지시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관 이 준위도, 병기관
윤 준위도, 대대장까지도 그런 지시를 하고도 남을
사람들이었다.
"탄약고에 좀 가 보려고요."
"병기관님이 열쇠 가지고 있지 않나?"
비아냥거리듯 던지는 말에 지섭은 하마터면 얼굴을
붉힐 뻔했다.
"그냥 탄약고 주변 청소라도 좀 해두려고요."
"그래? 알았어."
그냥 별뜻 없이 해본 말이라는 투로 최 병장은
서랍에서 잡지책을 꺼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섭은
모든 참모부 요원들의 따가운 시선이 뒤통수에 와
닿는 느낌을 떨쳐 버리지 못하면서 참모부를 나섰다.
문을 닫자마자 등뒤에서 들려 오는 소리들이 있엇다.
"박지섭이도 이젠 중대로 돌려보내야 하는 거
아냐?"
최 병장이었다.
"제대도 얼마 안 남았는데요, 뭐."
안중호였다.
"얼마 남았지?"
"한 석 달 남았습니다. 칠월에는 제대할 거예요.
교련혜택 있으니까 이십칠 개월이거든요."
"정말 군대 좆같구만. 누구는 삼십삼 개월 만땅으로
채우고, 어떤놈은 육 개월씩이나 공짜로 벌고.... 육
개월이면 짬밥이 몇 그릇이냐?"
최 병장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지섭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7월이면 제대를 한다....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남의 이야기 같기만
했다. 여기를 나갈 수 있을까. 저도 모르는 새 위병소
쪽을 힐끗거리던 지섭은 곧 우뚝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흙먼지를 날리면서 막 정문을 통과하는
지프가 눈에 익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지섭 자신도
타본 적이 있는 보안대 지프였다. 그 지프는 지섭이
서 있는 참모부 앞을 향해 꺾어지지않고 1중대로
통하는 방벽 앞에서 끼이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춰
서고 있었다. 그리고 전투복 차림의 두 요원이
날렵하게 내려서는 중대 막사를 향해 후다닥 달려가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김 일병, 아니 김 상병임을
지섭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왜
나타났는지 짐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섭은
참모부 앞에 못박힌 것처럼 멈춰 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1중대 쪽을 바라보았다. 두 명의 보안대요원이
권 하사를 끌고 나오기까지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둘에게 양팔을 붙들린 권 하사는
별다른 저항도 없이 방벽을 돌아나와서 지프에 오르고
있었다.
안돼!
제 가슴속에서 울려 퍼지는 고함 소리에 지섭은
푸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것뿐, 서 있는
자리에서 단 한 발짝도 옮겨 놓을 수가 없었다.
노주헌 중위와 인사계 송 상사가 방벽 앞에까지
따라나왔지만 그들 역시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권 하사를 태운 보안대 지프는 발정한
황소처럼 씩씩거리면서 위병소 앞에서 한 바퀴 원을
그리더니 다시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정문을
빠져나갔다.
"혼 좀 나야 돼.... "
바로 등뒤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놀라서 지섭은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대대장이 참모부 앞에
나와 서 있었다.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마저 떠올라
있었다. 머리끝이 꼿꼿이 일어서는 듯한 느낌에
지섭은 얼른 걸음을 떼어 놓았다. 마치 사금파리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대대장이 불러
세울 것만 같았다. 아니, 달려와 뒷덜미를 낚아챌
것만 같았다.
연병장 한복판에서 지섭은 부관에게 끌리듯
걸어오는 김승일과 엇갈렸다. 대위 계급장을 단 그의
얼굴은 핼쑥하게 질려 있었다. 두 사람은 무언가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다가 지섭과 마주치자
입을 다물어 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지나쳐 몇
걸음 가지 않아서 지섭은 혼잣말처럼 웅얼거리는
김승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난 전역할 거예요."
철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언제나처럼 거의
잿빛으로 보이는 하얀 커튼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햇빛 한 오라기 들어올 틈새도 ㅇ이 두껍게 드리워
놓은 그 창을 바라볼 때마다 갇혀 있다는 생각이 새삼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곤 했다. 철기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천천히 시선을 침대 옆으로 돌렸다.
"깨셨군요."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침대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위생병은 박 상병이었다. 감시를 하자는 것인지
치료를 돕자는 것인지 셋씩이나 배치되어 있는
위생병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드는 친구였다. 흐흐,
하고 애매한 웃음을 박 상병에게 보이고 나서 철기는
다시 시선을 비스듬히 위로 들어 올렸다. 링게르액은
아직도 반 이상이나 남아 있었다. 바늘을 꽂아 놓은
팔목이 뻐근했다.
"이거, 그만 좀 맞으면 안 돼나?"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불평을 하자 박 상병은
귀찮은 기색도 없이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고 있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염증 때문에 계속 맞아야만
됩니다."
철기는 흥, 하고 소리내어 코웃음을 쳤다.
"이 이상 더 나빠질 게 뭐 있다고 염증이니 뭐니
걱정을 하고 앉았나?"
박 상병은 말없이 하얀 이빨을 보이면서 웃을
뿐이었다. 그 너무도 선량한 표정에 오히려 철기는
종종 심술궂은 기분이 되곤 했다.
"박 상병, 부탁 하나 할까?"
"말씀하십시오."
"내 발바닥 좀 긁어 줘. 당최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어."
쓰디쓴 것을 삼킨 사람처럼 박 상병의 표정이
변하고 있었다. 철기는 손가락으로 시트에 덮인 허리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 오른쪽 말야."
마치 울음을 참는 아이 같은 얼굴로 박 상병은
돌아서서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 한없이 선량해
보이는 뒷모습을 향해 철기는 스스로 듣기에도
소름끼치게 키들거렸다.
"난 그게 말짱 거짓말인 줄 알았거든. 왜 그런
소리들을 하잖아. 다리를 잘라낸 놈들이 그 잘린
다리가 가려워 죽겠다고들 한다는 소리 말야. 세상에
없어진 다리가 가렵다니 엄살도 그 정도면 득도할
수준이라고 생각했다구. 그런데 웬걸. 나도 가려운 거
있지? 나 참, 꼭 오른쪽 발바닥이 간질간질 가려운데
정말 환장하겠구만.... "
"주무시는 동안 식사 시간이 지났거든요. 조금
식었지만 식사를 하셔야죠?"
박 상병은 여전히 뒷모습만을 보인 채로 식기를
챙기고 있었다.
"그것보다도 내 발바닥 좀 긁어 달라니까."
"죄송합니다."
고개까지 숙여 보이면서 식기를 들고 돌아서는 박
상병의 모습은 마치 잘 길들여진 집짐승 같기만 했다.
빌어먹을 .... 철기는 입술을 깨물지 않을 수 없었다.
박 상병은 식기를 제가 앉았던 의자 위에 얹어 놓고는
철기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가
용을쓰면서 자신의 상체를 세워 주는 동안 철기는
온몸으로 전해져 오는 사람의 온기에 무언가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이었다. 이래서는 안된다.... 하고
철기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몸을 일으키는 서슬에
설핏 드러난 잘린 다리를 박 상병은 황급히 시트로
가렸다. 철기는 흐흐, 하고 심술궂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침대 위에 식기를 올려놓으려는 박 상병을 한
손으로 제지했다.
"두 가지만 물어볼게."
"식사를 하시면서 물으시죠."
"아니야, 지금 대답해 줘."
철기가 고집을 부리자 박 상병은 식기를 든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건 내 느낌인데 말야. 우리 선임하사 있지?
최도천 중사 말야. 여기서 가까운 병실에 있지? 바로
옆인가?"
벽 쪽을 가리키면서 물었지만 박 상병은 그저
희미하게 웃어 보일 뿐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곧 대답인 셈이었다. 그랬다. 최 중사는
옆병실에 있었다. 엊그제 깊은 밤중에 들려 왔던 그
소름끼치는 비명 소리는 틀림없이 최 중사의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철기는 문득 자신도 가끔
그런 비명을 질러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비명이 최 중사에게 철기 자신의 존재를 알려 주는
역할을 하리라.
"그런데 왜 우릴 못 만나게 하는 거지? 이유가
뭐야?"
역시 박 상병은 웃음으로 얼버무릴 뿐이었다. 그
웃음은 한없이 선량해 보였지만, 그 뒤에 숨은 의미는
결코 그렇게 순진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누군가가
다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철기는 흥, 하고 다시
크게 코웃음을 쳤다.
"대답하지 않으면 식사고 뭐고 없어."
그제야 마지못한 듯 상병이 입을 열었다.
"전 모릅니다. 그냥 상부의 지시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상부의 지시라.... 대대장과 사단장의 얼굴이
차례로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더 높은
누군가가.... 군사령관? 그도 현장에 떴었다고 했지.
"그래? 그럼 한 가지만 더 묻지."
"이제 식사를 하셔야지요. 저희들 입장도 좀 생각을
해주시지요."
박 상병은 숫제 울상을 짓고 있었다. 철기는 이렇게
고분고분한 위생병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바가
없었다. 제 아무리 장교라고 해도 위생병들에게는
반말짓거리나 듣기 십상인 게 원주통합병원의
관례라고들 했다. 하지만 이렇듯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 자체가 철기를 둘러싼 음모의 한 증거일 수도
있었다.
"하나만 대답해 주면 돼. 이건 박 상병도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거야. 김 병장하고 이 병장 중에 누가
보안대지?"
철기를 전담하고 있는 다른 두 위생병을 입에
올리자 박 상병은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그
둘 중에 안경을 쓴 김 병장 쪽이 아마 보안부대
요원일 것이라고 철기는 짐작하고 있었다.
"말해 봐, 누구지?"
"그건.... 없습니다. 우린.... "
"그러지 말아. 어느 쪽이야? 김 병장이지?"
"김 병장님은 우리 고참이고, 이 병장님도
마찬가집니다."
그것으로 좋았다. 철기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기
위해 후우 하고 심호흡을 했다. 이렇게 박 상병
혼자만이 있는 기회는 쉽게 다시 찾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알아낼 수 있느 것을 모두 알아내야만한다.
하지만 이번만은 목소리가 떨려 나온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좋아, 다른 건 더 묻지 않겠어. 그렇지만 이거
하나만은 사실대로 대답 해줘. 우리 최 중사, 어딜
다쳤지?"
박 상병은 대답 대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철기는 몸을 수그리며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게 왜 비밀이어야 하나? 박 상병도 생각해 봐.
내가 소대장이고, 그 친구가 선임하사야. 그리고 우린
한 장소에서 그런 일을 당했단 말이야. 나는 알아야
할 거 같지 않나?"
철기가 힘을 주어 흔드는 대로 흔들리면서 박
상병은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얘기만 해주면 되는 거야. 나도 그냥 혼자 알고만
있겠어."
그제야 박 상병이 눈을 떴다. 대답은 간단했다.
"왼쪽 눈입니다."
왼쪽 눈.... 철기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뇌어
보았다. 애꾸가 된다는 말이었다. 왼쪽 눈, 오른쪽
다리.... 애꾸눈에 외다리.... 누군가 얄궂은 장난을
친 것만 같은 어울림이 아닐 수 없었다. 뜨겁고 격한
기운이 욕지기처럼 목구멍을 타고 올라왓다. 눈치를
챈 박 상병이 얼른 식기를 내려놓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철기는 한 손을 뻗어 링게르병을 움켜쥐고는
바닥을 향해 내팽개쳐 버렸다. 쨍 - 하고 병은 박살이
나고 주삿바늘이 팔에서 뽑혀 나갔다.
"왜 이러십니까!"
박 상병이 달려들었지만 철기는 와락 그를 밀쳐
버렸다. 그리고 한 발로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휘청,
하고 균형을 잃으면서 유리조각들 위로 나뒹굴면서도
철기는 한사코 두 팔과 성한 한 다리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서려고 애를 썼다. 다시 달려드는 박 상병을 향해
의자를 들어 휘둘렀다.
"비켜! 난 선임하사만 만나면 돼!"
"안 됩니다."
"비키라잖아!"
철기는 머리 위의 창틀을 향해 의자를 휘둘렀다.
커튼에 덮인 유리창이 챙 - 하고 깨어져 나갔다. 문이
열리면서 김 병장과 이 병장이 뛰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 병장은 작은 주사기를 들고 있었다.
"안 돼, 이자식들아.... "
철기는 그들을 막으려고 기를 썼지만 곧 등뒤로
다가온 김 병장이 익숙한 몸짓으로 의자를 붙들어
버렸다. 그리고 박 상병이 두 팔을 잡고, 이 병장이
주사기를 내밀고.... 늘 당해 온 대로 깊고 긴 잠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더는 안 된다! 철기는
유리조각 위에서 몸부림을 쳤다.
"안 돼.... "
끼이익 소리를 내면서 101호는 장 상사네 집 앞에서
멈춰섰다. 대대장 박민 중령은 차 앞을 가로막은
여자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장
마담이었다. 장 마담.... 뒤이어서 떠오르는 그녀의
원래 이름을 대대장은 머리를 흔들어 지워 버렸다.
지금의 저여자는 그저 술집 밀림의 장 마담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뭡니까?"
새로 온 운전병인 이 상병은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대답도 없이 장 마담이
얼굴이 호로를 씌운 차창으로 다가왔다. 마치 빗물에
젖은 유리창 너머로 보는 것 같은 여자의 얼굴. 창을
긁어내리고 있었다. 가슴 어딘가에서 뜨거운 기운이
꿈틀, 하고 용트림치는 것을 느끼고 대대장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된다. 더 이상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저 여자는 불행의 씨앗이다.
자신의 여자가 아니다. 박 주열의 여자였으며 수도
없이 많은 놈팽이들의 여자였다. 지나가야 한다.
대대장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장 마담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고 술냄새가 났다. 그래도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우리, 얘기 좀 해요.... "
두 손을 부여잡을 듯 다가서는 그녀의 가슴을 향해
대대장은 들고 있던 지휘봉을 내밀었다. 그리고 힘을
주어 밀어 버렸다. 가슴을 움켜쥐면서도 여인은 비명
소리도 없이 뒤로 나동그라지고 있었다. 빠르게 문을
닫고, 대대장은 짧고 분명하게 지시했다.
"가자."
"정말 이게 최선의 방법일까요?"
막 인제 방면에서 들어오는 버스를 보면서 미우는
다시 힘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 한없이 연약해
보이는 어깨를 와락 껴안고 싶은 충동을 누르면서
신한수 중위는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최선의 방법이라기보다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 분만이 현 중위를 구할 수
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현철기의 양아버지인 현치훈 씨를
생각해 냈을 때 신 중위는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고 제 머리를
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경황중에 살필 생각도
하지 못했던 총선관계 신문기사를 새삼스럽게
찾아보았다. 민정당의 전국구의원 후보명단에 오른
것을 본 적이 있는 현치훈 씨는 역시 당선이었다.
전사단장인 이명우 씨도 원천, 통화지역에서 2등으로
당선이 되었다. 그 둘이야말로 현철기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병우 의원은 서울에
체류중이라고 했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은 현
의원뿐이었다.
"신 중위님, 난 아무래도 내키지가 않아요."
다른 승객들이 버스에 오르는 모양을 우두커니
바라보면서 미우는 다시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현
의원 얘기를 꺼낸 어젯밤부터 내내 이 모양이었다.
미우 자신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라면서도.
이유는 하나였다.
"철기 씨는 절대로 좋아하진 않을 거예요. 철기
씨라면 그 분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할 거예요.
양아버지라고는 하지만.... "
이런 와중에도 현철기라는 사내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애를 쓰는 여자, 현철기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여자.... 신 중위는 새삼스러운 질투심에
가슴 한복판에 금이 가는 듯한 느낌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지금 좋아하고 아니고를 따질 때가 아닙니다.
이건.... 목숨이 걸린 문젭니다. 아시겠습니까? 그
분, 현 의원만이 현 중위를 살릴 수 있어요. 그
분뿐입니다."
거듭 힘을 주어 말하는 동안 미우는 물기 어린 검은
눈으로 가만히 신 중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신
중위는 다시 한 번 뻐근한 가슴의 통증을 느껴야
했다.
"빨리 타십시오. 떠납니다."
그제야 미우는 고개만을 끄덕여 보이고 돌아서서
버스에 올랐다. 문을 오르면서 돌아보는 그녀를 향해
신 중위는 한 마디 더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힘을 내십시오."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거린 미우가 자리를 잡자
서울행 버스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버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신 중위는 혼자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힘이 필요한 건 너다, 신한수.
"그게 정말입니까?"
대대장 박민 중령은 비명처럼 소리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입니다."
보안대장이 씁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대장은
무엇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현철기의 양아버지가
민정당의 전국구국회의원이라니.... 이럴 수도 있다는
말인가. 사단장 권정준 소장도 입맛이 쓴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앉아 있었다. 보안대장이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되면 우리 시나리오를 조금 수정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만.... "
"나도 여러 가지로 생각은 해봤지만.... 어쩔 수
없겠지."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단장을 향해 대대장은 황급히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사단장은 대신 보안대장이 나섰다. 그는 입술을
혀로 핥으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보안을 위해서라도 현철기란 놈을
설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현치훈 의원이란 사람도
여당의 전국구로 나선 것을 보면 말이 통하지 않을
사람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만, 막상 자기아들의 일이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장담 못하지요. 그러니까
현철기를 설득할 수밖에 없는데.... "
"말을 들을 놈이 아닙니다."
대대장이 말을 가로막고 나서자,
"자넨 좀 가만히 있어!"
사단장이 냅다 호통을 치고 있었다. 대대장은
머쓱해서 입을 다물었다. 보안대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시나리오의 성격을 조금 바꾸기로
합시다. 앞부분은 그냥 두지만.... 뒷부분에서는
현철기가 마치 장석천이를 흉내내는 것 같은 행동으로
부하들을 구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럴 수가.... 다시 끼여들려는 대대장을 눈으로
제지하면서 보안대장은 설명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바꾸기로 하지요. 소대가 몽땅
출동해서 결국 그 고인택이를 붙잡았다. 그 과정에서
고인택이가 발포를 해서 박 중사하고, 그 .... 유
하사가 죽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무장해제를
시키고 돌아오는길이었는데 고인택이가 몰래 숨겨
두고 있던 수류탄을 꺼내 자살을 시도했다. 그냥 두면
고인택은 물론 주위의 소대원들이 많이 다치게 된
위기에서 현철기가 수류탄을 터트리려는 고인택을
덮쳤다. 그 결과 고인택은 폭사하고 현 중위와 최
중사는 중상을 입었으나 다른 소대원들은
무사했다.... 그래서 현철기에게는 훈장을 상신하는
겁니다. 장석천 대위와 똑같으면 좋겠지요.
어떻습니까?"
사단장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로 대답이 없었다.
다시 면박을 당할지 몰랐지만 대대장은 탄식처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놈의 주둥이는 훈장으로도 막을 수가 없을
겁니다.
"현철기는 몰라도 그 현치훈 의원이란 사람은
그걸로 납득을 해줄 겁니다. 우리가 막으려는 건 그
현 의원의 입이지, 현철기의 입이 아닙니다. 물론
본인이 이해를 해주면 그 이상 좋을 게 없지요.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현철기를 설득해야 합니다."
보안대장의 차분한 설명에 대대장이 입을 다물자
사단장이 감았던 눈을 뜨면서 말했다.
"그 방법밖에 없겠어. 난 그대로 다시 군사령관님께
결제를 받겠어. 두 사람은 석천소대원들 다시 교육을
시켜 놔."
어쩔 수 없었다. 현철기의 가슴에 훈장이 달린다니
분통이 터질일이었지만 대대장 자신이 만류하고 나설
입장이 아님을 인정해야만 했다. 사단장이 곧 그 점을
지적해 오고 있었다.
"박 중령은 왜 그래? 우린들 그놈을 영웅으로
만들어 주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나? 우리가 이러는
게 다 누굴 위해서야? 어린애 같은 생각 버리고 기왕
할 바엔 철저하게 그놈을 영웅으로 만들어 낼
생각이나 해! 장석천처럼 말이야."
"알겠습니다."
대대장은 붉어진 얼굴을 숙여 보이면서 대답했다.
장석천처럼.... 현철기를 살아 있는 장석천으로? 몸을
일으킨 사단장은 책상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보안대장이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엔 보충대에서 했던 교육이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은데, 대대장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다렸던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대대장은
사단장은 사단으로 오는 차 안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입에 올렸다.
"내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다시
재교육을 하고 싶습니다. 유격장에 한 일주일 집어
넣고 정말로 맛을 보여 주는 겁니다. 완전히 정신을
개조해 놓는 거지요.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보안대장이 고개를 끄덕거렸을 때였다. 갑자기
사단장이 쾅, 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그 개새끼한테 훈장을 줘.... ?"
119. 1981년 4월 ③
"제일중대 일소대 이십칠 명 집합 끝!"
이제 유일하게 남은 하사인 박삼환 하사가 보고를
하자 대대장은 쉬어, 라는 지시도 없이 막바로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지금 우리 대대와 석천소대가 어떤 난관에 봉착해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대대장보다도 여러분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고 믿는다. 우리는 지금
전시를 제외하고는 우리 대한민국 육군의 역사에
찾아볼 수 없었던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참이다. 그러나 이 대대장이 판단하기에 장본인인
석천소대원들의 정신자세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나뿐만 아니라 사단장 각하의 판단도 역시
동일하다. 그래서 사단장 각하의 특별지시로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부터 특별 정신교육에 임하게
되었다..... "
이것이었구나.... 하고 지섭은 군장을 메고 선 채로
생각했다. 자정이 지난 시각에 완전군장으로 집합을
시킨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아마도 이 한밤중에
연병장에서 뺑뺑이라도 돌리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두려울 건 없었다. 보충대에서의 교육을 통해서
지섭은 다시 한 번 육신이 고통스러울 때일수록
정신이 평안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땀을
흘리면서 땅바닥을 구르는 동안만은 현철기도
고인택도 박도기도 모두 잊을 수가 있었다.
얼마든지 오너라.
대열 속에서 지섭이 중얼거렸을 때였다. 부르릉
부르릉 하고 차의 엔진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곧
K-300트럭이 정문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저건 뭐지?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으로 지섭은 몸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소대원들도 모두 같은 기분인
듯 동요하는 기색들이 피부로 느껴졌다. 대대장이
더욱 목청을 돋웠다.
"석천소대원 전원은 이 특별 정신교육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이나라 군의 사명이 무엇이며 진정한
군인정신이란 무엇인가를 깨달음과 동시에, 지금
우리에게 닥친 위기를 여하히 넘겨야 하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해주기 바란다. 조금 힘이 들겠지만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 무사히 교육을 마쳐 주기를
바란다. 이상!"
대대장의 훈시가 끝났지만 박 하사는 넋이 나간 듯
보고를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박
하사를 노려보던 대대장도 구태여 경례를 받을 필요도
없다는 듯 돌아서 버렸고, 작전관 김진우 소령이
앞으로 나섰다. 이미 K-300트럭은 소대가 정렬해 선
바로 옆에 와서 멈춰서고 있었다. 작전관이
나직하지만 힘이 담긴 목소리로 명령했다.
"전원 승차!"
뭐야, 어디로 가는 거야.... 소대원들은 이제
소리를 내어 술렁거렸다. 아무리 선뜻 승차하려 하지
않는 속에서 작전관을 향해 걸어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정권오 병장이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작전관님."
"잔소리 말고 빨리 타!"
작전관은 호통을 쳤고, 대대장은 한발짝 뒤로
물러서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작전관님.... "
정 병장이 다시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작전관의
군홧발이 그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억.... 하고
허리를 꺾는 정 병장을 박 하사가 부축했다. 작전관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소대원들 속으로 뛰어들어서
아무나 가릴 것 없이 어지럽게 발길질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자식들이, 명령에 불복종하겠다는 거야? 빨리
타지 못해?"
그제야 소대원들은 마치 죽으러 가는 짐승들처럼
느릿느릿 움직여서 하나둘 차에 올라탔다. 지섭도
그들을 따라 트럭 위에 올랐다. 맨 마지막으로 박
하사와 정권오가 차에 올랐고, 대대장에게 무어라
낮은 소리로 보고를 하고 난 작전관이 역시 적재함
위로 뛰어올랐다. 운전석에 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 다른 선탑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 가는 거지?"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하는 말이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으리라. 지섭은 어둠에
묻힌 대대를 마치 마지막으로 보는 것처럼
돌아보았다. 어쩔 수 없이 시선은 이제는 무너져 버린
추모탑 쪽을 향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음산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K-300트럭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참모부
앞에 서 있는 대대장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면서
어둠에 묻혀 가고 있었다.
"죽이기야 하겠어?"
누군가가 불쑥 내뱉는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트럭
위의 분위기는 더더욱 침울하게 가라앉는 듯했다.
소대원들 모두의 불안감을 대변하는 한 마디가 아닐
수 없었다.
아래범골 삼거리에서 5번 도로를 타고 연대 앞을
지나 춘천 방면으로 한참이나 어둠 속을 달리던
트럭이 동산 면사무소 앞에서 왼쪽으로 꺽어들자
누군가가 나직하게 외쳤다.
"유격장이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괜찮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저절로 백과부집을 향하게 되는 발길을 어쩔 수가
없었다.
넌 도대체 뭣 하는 놈이냐?
허허, 하고 스스로를 비웃으면서 신한수 중위는 백
과부집의 문을 밀고 들어섰다. 문은 열려 있었고,
누군가 손님이 있는 듯 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제 여종일 부자가 묵기 시작한 이후로는
1대대에서도 이 집을 찾는 사람이 없었고, 더더욱
지금은 술타령을 하러 나올여유들이 없을 터였다.
"계십니까?"
마당에 서서 소리를 지르자 미우가 묵던 방문이
열리면서 백 과부가 허여멀끔한 얼굴을 내밀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우? 아무도 없는 거 잘 알면서."
"술이나 한 잔 주십시오."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 백 과부의 등뒤에서 젊은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물어 볼 건 뭐 있어요? 술집에 술이 없을 리 있나?
들어와요, 들어와."
밀림의 미스 윤, 명옥이었다. 벌써 잔뜩 술기운이
오른 목소리였다. 아차, 싶은 생각이 앞섰다. 오늘은
그녀의 술주정을 받아 줄 기분이 아니었다.
"다음에 오지요."
그렇게 한 마디 던지고 돌아서는 신 중위의
등뒤에서 명옥의 고함 소리가 터져나왔다.
"야, 신한수! 사람 이렇게 무시할 거야?"
신 중위는 그래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다시
등뒤에서 명옥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신 중위님, 내 말 한 마디만 듣고 가요."
아까와는 달리 촉촉히 젖어드는 듯한 목소리였다.
안 된다, 하고 자신에게 이르면서도 신 중위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백 과부를 타고넘듯이
방을 나온 명옥이 맨발로 다가오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하기는 지금 누군들 비틀거리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저도 내일은 여길 떠나요. 마지막으로 술 한잔
하자는 부탁은 안 들어주실 것 같고, 내 말 한 마디만
들어주고 가세요, 네?"
겨우겨우 몸을 가누는 명옥의 입에서는 술냄새가
역겹게 풍겨나오고 있었다. 신 중위는 말없이 서서
그녀의 말 한 마디라는 것을 기다렸다.
"지금 이러니저러니 말들이 많은 모양인데.... 사실
따지고 보면 장 중위가 죽은 거나, 현 중위나 최
중사가 일을 당한 거나 다 내 탓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장 중위도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랬으면 현 중위나 최 중사도
그런 꼴이 되지 않았을 거고.... 모든 게 내
탓이에요. 뭐, 이런 말 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지만.... 누구한테고 이 말 한 마디는 해야 여길
떠날 수가 있을 것 같았어요. 이젠 됐어요. 다 이 죄
많은 년 때문이라는 거.... 혼자라도 알고 계세요,
네.... "
명옥은 선 채로 허억허억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신 중위는 장 마담을 언급하기로 했다.
"언니는 어떻하고 혼자 떠나?"
서럽게 울어대던 중에도 명옥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언니도 떠날 거예요. 잘하면 저기 대대장 관사
앞에 와서 밤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소리야?"
명옥은 팽, 소리를 내어 코를 풀고 나서 흐흐흐,
하고 괴기스러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신 중위님은 모를 거예요. 우리언니, 장 마담....
원래 박민 중령하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대요.
애까지 있다구요. 물론 우리 위대한 박민 중령께서
언니를 차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지만.... 그
남자를 못 잊어서 여기 원천까지 찾아온 거예요.
대단한 순정이죠?"
그랬구나. 그제야 신 중위는 장 마담이 술에 취해
하던 말들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자기는 대대장
편이라느니, 현철기가 죽기를 바란다느니....
그랬구나.
"웃기는 여자죠. 박 대위하고 결혼을 약속했다가
그렇게 취소를 한 것도 다 박 중령 때문이었다구요.
그 박 대위가 자기하고 함께 여길 떠나자고 애걸을
했는데도 거절한 이유도 박민이 때문이구요. 그렇지만
지금 박민이가 언니를 거들떠보기나 하나요? 언니가
함께 가겠다고만 했어도 박 대위는 죽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지금 마지막으로 박민이를 한 번
만나고 가겠다고 관사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다구요.
뭐, 아이 이름이라도 가르쳐 주고 가겠다나? 흐흐흐,
미쳤어요, 미쳤어. 다들 미쳤어."
명옥은 정말로 미친 것처럼 푸들푸들 떨며 웃고
있었다. 그렇게 웃으면서 신 중위에게로 바싹
다가오더니 덥썩 가슴에 안겨 왔다. 질겁을 하고
뿌리치려 하자 명옥은 두 팔로 목덜미를 힘주어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지 말아요. 일 분만 안아 줘요. 딱 일
분만.... "
".... "
"이 원천땅에서 미치지 않은 건 신 중위님
하나예요. 이렇게 가슴이 편안한 사람도 신 중위님
하나....
신 중위도 울컥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천만에, 나도 미쳤어.
정말로 일 분이 지났을까. 명옥은 약속대로 팔을
풀고 떨어져나가 주었다. 그리고 깊이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를 하고 있었다.
"늘 잘되시길 빌겠어요. 안녕히 가세요."
이제 비틀거리지 않으면서 돌아서는 명옥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신 중위는 백 과부네 집을
나섰다. 술보다 더 독한 무엇인가에 잔뜩 취해 버린
느낌이었다. 1대대 정문 옆을 지날 때 관사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장 마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K-300트럭은 원천강이 둥글게 휘어 돌아가는 자갈밭
옆에 멈춰섰다. 뒤늦게 떠오른 달빛 아래 끝도 없이
펼쳐진 자갈밭.... 악명높은 소위 '십리돌밭'이었다.
사단유격장 입구에 자리한 이 자갈밭은 정규
유격교육의 첫날, PT체조와 선착순 달리기로 병사들의
진을 빼놓는 곳이었다.
"하차!"
작전관이 짧게 이르면서 먼저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를 따라 차에서 내리면서 보니 벌써 차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그림자들이 눈에 띄었다. 한 이십여
명이나 될까, 달빛 아래 거의 검게 보이는 붉은
모자들이 유격장 조교들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박
하사의 지휘로 소대원들이 정렬을 하는 동안 작전관은
운전석에서 내린 사복차림의 사람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가를 지섭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보안대장이었다.
"자, 빨리 빨리 정렬해."
소대를 지휘하는 박 하사의 목소리는 벌써 겁에
질려 있었다. 다른 소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정렬을 마친 소대를 향해 작전관이 천천히 걸어왔다.
보고를 하려는 박 하사를 손짓으로 제지하고 그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이 유격장에서 앞으로 교육을 받게
된다. 별다른 사고 없이 교육을 마칠 수 있도록
노력들 하기 바란다."
그것뿐이었다. 작전관은 역시 경례를 받지 않고
트럭에 올라 버렸고, 보안대장도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곧 K-300트럭은 자갈을 튕겨 내며 방향을
돌리더니 요란한 굉음을 내면서 오던 길로 되돌아가
버렸다. 어떨떨해 서 있는 소대원들 앞으로, 늘어서
있던 조교들 중 하나가 저벅저벅 자갈을 밟으면서
걸어왔다. 아마 장교인 듯 했다.
"보고 안 하나?"
쇳소리 나는 음성으로 그가 재촉해서야 박 하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를 하고 있었다.
"제일대대 일중대 일소대 이십칠 명 교육준비 끝."
경례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손을 올려 보이고
나서 장교는 밤하늘에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고 있었다.
"앞으로 여러분의 교육을 담당할 교관이다. 우선 몇
가지 알려 줄 것이 있다. 첫째, 여러분의 교육 기간은
무기한이라는 점이다."
소대원들 속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교관은 그 술렁거림을 즐기는 듯한 태도로 한참이나
내버려 두었다가 다시 목청을 가다듬었다.
"하루가 될지, 이틀이 될지, 일 주일이 될지, 한
달이 될지 교관인 나 자신도 모른다. 문제는 여러분이
얼마나 교육에 협조적이고 적극적인가에 달려 있다.
내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들어서 단 하루라도
교육기간이 단축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 바란다. 다음,
우리 사단의 정규 유격훈련은 오월부터 시작하도록
되어 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지금 이 유격장에는
여러분들 이십칠 명 외에는 아무런 훈련병력이 없다는
뜻이다. 좀 멍청한 친구들을 위해서 설명을
한다면.... 한두 놈쯤 죽어나가도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말이다. 알아듣겠나?"
대답소리가 있을 리 없었다. 소대원들은 하나같이
머리칼이 곤두서는 듯한 섬뜩함에 몸을 굳히고 있을
뿐이었다. 교관은 달빛 아래 하ㅇ게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또 실제로 우리는 교육목적상 불가피하게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상부의 지침을 받고 있다. 내말을 새겨듣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조교들은
우리 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조교 인력 중에서도 가장
능력있고 악명 높은 알짜들로만 뽑았음을 알아두기
바란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모든 교관과 조교들은
모처럼의 공반기 휴식을 반납한 이유로 해서 지금
대단히 심리적으로 불만스러운 상태다. 물론
교육과정에 있어서 개인적인 감정을 내세우는 것은
금물이지만 어디까지나 조교들도 인간인만치, 아마
여러분을 다루는 자세가 그다지 점잖치는 못할
것이다. 이 점 명심해 주기 바라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하겠다. 지금 이 유격장 안에는 여러분들
외에 아무도 없다. 알겠나?"
역시 소대원들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교관도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이 자식들이 귀가 먹었나? 내 말 알아듣겠나?"
그제야 네 - 하는 대답 소리가 나왔지만 지섭이
듣기에는 기어들어가는 듯한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자식들 복창 소리 봐라? 초장부터 개겨 보겠다,
이거지? 좋다, 조교, 위치로!"
교관의 지시가 떨어지자 저만치 도열해 있던
조교들이 저벅저벅 자갈을 밟으면서 내달려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소대원들은 조교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대개가 수색대대에서 차출되어
오게 마련인 조교들은 유난히도 우람한 덩치들을 하고
있었다.
"실시해!"
교관이 짧게 이르자 조교들은 무작정 소대원들을
향해 주먹과 발을 날리기 시작했다. 퍽,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군장을 멘 채로인 소대원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쓰러졌다. 지섭도 턱에 한 방을 얻어 맞고
나가떨어졌는데, 다시 군ㅎ발이 명치께를 짓밟고
지나갔다. 철모가 나뒹굴고 총이 떨어지는 소리들이
요란했다. 비명이 자갈밭을 뒤덮었다. 지섭은
누군가에게 멱살을 잡혀서 일으켜졌다. 머리하나가 더
있는 것처럼 키가 껑충한 그 조교는 괴기스러운
웃음을 흘리면서 우선 아랫배에 주먹을 박고는,
흡.... 하고 허리를 꺾는 지섭의 턱을 모질게
무릎으로 올려쳤다. 순간 달빛을 받은 크고작은
자갈들이 지섭의 얼굴을 향해 왈칵 달려들었다.
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고 철기는 벌떡
상체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좀 어떤가, 현 중위."
한 손을 들어 보이면서 다가오는 사람은.... 사단장
권정준 소장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따라 들어오는 것은 대대장 박민
중령이었다. 앉은 채로나마 예를 표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철기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한 느낌이었다. 또
무엇을 꾸미려는가.... 우선 떠오른 생각이었다. 박
상병이 경례를 하면서 뒤로 물러나고 사단장은 바로
침대 옆에까지 다가왔다. 두껍게 살찐 손이 철기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진작 오지 못해서 미안하네. 이것 저것 뒤처리를
좀 하느라고 말이야."
"미안해, 현 중위."
사단장과 대대장이 번갈아 말했지만 철기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의문만이 더 커질 뿐이었다.
이럴 사람들이 아닌데 왜 이러는 것일까? 음모의
하나일 뿐이리라.
"상태는 좀 어떤가?"
사단장이 자못 걱정스럽다는 듯 묻고 있었다.
분교장 안에 있는 병사들은 전부 몰살시키려 했던
사람이.... 철기는 아랫도리를 덮고 있는 시트를
제손으로 홱, 걷어 버렸다.
"보시다시피 이렇습니다."
두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서 철기는
다시 심술궂게 이죽거렸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이제 마음이 놓이시지요?"
사단장은 창가로 시선을 돌려 버렸고, 대대장 또한
얼굴을 붉히면서 엉뚱한 곳을 보고 있었다. 황급히
다가온 박 상병이 시트를 도로 덮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내리깔리는 속에서 철기는 속으로만
부르짖었다.
오너라, 무엇이든!
침묵을 깨트린 것은 사단장이었다. 그는 박 상병을
향해 잠시 나가 있으라고 말을 했고, 지시대로 박
상병이 병실을 나가자 험,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현 중위, 자네의 부상에 대해서는 정말 안됐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렇지만 이건.... 누가 잘하고
못하고를 따질 성질의 일이 아니지. 그렇지 않나?
자네도 물론 할 말이 많을 거고, 우리로서도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기왕 이렇게 된 마당에
왈가왈부해 봤자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일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야. 그렇지 않나?
"제 다리가 다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철기가 이죽거렸지만 사단장은 오히려 좋은 빌미를
잡았다는 얼굴로 바싹 다가서고 있었다.
"바로 그 점이야, 현 중위. 우리 피차가 너무
지나친 희생을 치렀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제 이런
식의 싸움은 무의미하네. 우린 솔직히 말해서 더 이상
부대내에 말썽도 일어나지 않게 하고, 자네에게는
자네대로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네. 그걸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어. 내가
이렇게 부탁하네."
"왜들 이러십니까? 전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근요."
그러자 사단장이 등뒤에 선 대대장을 향해 턱을
까닥거려 보였고, 대대장 박 중령이 앞으로 나서면서
들고 있던 체크 리스트를 내밀었다.
"이걸 보면 이해가 갈 거야. 자넨 머리 좋은
친구니까."
철기는 묵묵히 그 체크 리스트를 받아들었다.
'공적서'라는 이름이 붙은 양식부터가 눈에 거슬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달필로 써 놓은 내용을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면서 철기는 부르르부르르 계속해서
진저리를 쳐야만 했다.
여자 문제로 인한 고인택의 탈영, 야간순찰 중에
고인택을 발견하고 제지하다가 사살되는 통신대장,
모곡 분교장에서의 대치, 특공조의 침투, 박 중사와
유 하사는 고인택의 총에 사살되고, 고인택을
붙잡아서 대기하던 소대, 숨겨두었던 수류탄으로
자살을 기도하는 고인택, 그 고인택과 소대원 전체를
살리기 위해 뛰어드는 철기 자신... 흐흐흐, 하고
철기는 몸을 떨며 웃었다. 그 공적서에는 그토록
철기가 깨트리고 싶어하던 것들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한 쪽 다리를 잃은 현철기는
장석천에 못지 않은 영웅으로 부각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체크 리스트를 손에 든 채로 연신
웃음만을 흘리고 있자 조금 겸연쩍은 표정으로
사단장이 철기의 어깨를 짚었다.
"현 중위의 기분이 어떠하리라는 건 우리도 충분히
짐작을 해. 하지만 이제는 현 중위도 예전과 같은
입장이 아니라는 걸 생각하고, 조금은 어른스러운
판단을 해주기 바라네. 그게 서로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야."
"그래서 저한테 훈장이라도 주시겠다는 겁니까?"
"바로 그거야. 우린 훈장을 상신할 거야."
훈장이라.... 병신이 된 철기의 가슴에 달리는
훈장, 대대장의 모든 비밀은 덮어져 버리고,
석천소대의 신화는 그 빛을 더하게 되고, 대대장과
사단장은 한껏 명예를 누리게 되고.... 철기는
체크리스트에 끼워진 공적서를 와작 손으로 구겨
버렸다. 그리고 체크 리스트와 힘께 병실 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현 중위!"
병실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사단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대장의 얼굴도 잔뜩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서 철기는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선언했다.
"잘들 들어 두십시오. 내가 원하는 건 그
분교장에서 요구하던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대로 이행해 주지 않으면 나대로 방법을 찾아서
진실을 세상에 알리겠습니다. 돌아들 가십시오."
두 사람은 무어라 대답을 하지 못하고, 병실 안으로
무거운 침묵이 내리깔렸다. 철기는 일으켰던 몸을
눕히면서 눈을 감아 버렸다.
"너!"
교관이 지휘봉으로 명치께를 쿡, 찌르자 황운은
기압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네, 병장 황운!"
황운의 바로 뒤에 선 지섭은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전투복 하의의 재봉선에 정확하게 갖다 댄 황운의 두
주먹이 추르르 떨리고 있음을.
"고인택 사건 때 죽은 사람의 이름과 그 상황을
차례대로 대 본다, 실시."
벌써 소대원 하나하나마다 수십 차례씩 거듭되는
질문이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긴장감은 여전했다.
황운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쇳소리가 날 만킴
쉬어 버린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네, 소위 조영수 고인택이 사살, 중사 박도기
고인택이 사살, 하사 유정호 고인택이 사살, 일병
고인택 수류탄으로 자살.... 이상입니다!"
"다음은 고인택이 자살을 하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실시."
교관은 여유를 주지 않고 황운을 다그치고 있었다.
그들이 모범답안을 제시해 준 그 설명들은 이제 무슨
주문처럼 소대원들의 뇌리에 박혀 있었지만 여전히
입에 착 붙지 않는 거부감을 어쩔 수가 없었다. 황운
역시 잠시 머뭇거렸다.
"네, 고인택을 무장해제시킨 소대장님은 함께
근무했던 전우라는 정리에서 고인택을 결박하지 않고
그대로 교실 안에 둔 채 경비만을 하도록 했습니다.
우리 소대는 사단헌병대에서 고인택을 인수해 갈
때까지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습니다.
교실 안에는 소대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고, 고인택은
내내 울면서 잘못했다는 말을 계속하고 있어서 별다른
사고가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소대원들의 주의가 조금 산만해진 순간 갑자기
엎드려! 하는 고함 소리가 들렸습니다.... "
"그래서! 그게 누구지?"
"소대장님이었습니다. 저는 그 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습니다. 고인택이 수류탄을 들고 있었고,
소대장님이 달려들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고인택의 손에서 수류탄이 떨어졌고....
소대장님과 고인택이 그 위를 굴렀고, 쾅, 하고
수류탄이 터졌습니다, 이상입니다.... "
"좋아, 아주 좋다."
교관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지휘봉으로 제
손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그리고 다음 목표물을 찾아
눈을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소대원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들 있었다. 벌써 닷새째 거듭된
지옥훈련으로 해서 모두들 이제 넋이 나가 버린
듯했다. 숨돌릴 새 없이 몰아치는 유격훈련과 끝날
때를 모르는 얼차려 -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느닷없이 닥쳐 오는 뭇매질.... 첫날 교관이 했던
말마따나 하나 둘쯤 죽어나가도 상관없다는
분위기였다.
"너!"
교관의 지휘봉이 지섭의 철모를 두들겼다. 지섭은
황운 못지 않게 힘을 주어 대답했다.
"네, 상병 박 지섭!"
견뎌 내면 된다. 견뎌 낼 수 있다.... 지섭은 피가
맺히게 속으로만 소리쳤다. 그리고 조작된 현철기의
신화를 암송할 준비를 했다.
상체를 일으켜 앉은 철기를 향해 군사령관은
뚜벅뚜벅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허리에 권총을
찬 대령 하나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철기는
앉은채로 경례를 했다. 어쩌면.... 하는 기대가
가슴속에 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은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별 네 개를 어깨에 단
군사령관의 첫마디부터가 철기의 기대를 허무하게
무너뜨리고 있었다.
"들으니까 훈장을 거부하겠다고 했다는데....
그러지 말아, 중위."
형식적인 위로의 말도 없이 군사령관은 위압적인
목소리로 이르고 있었다. 역시 다를 수가 없다.... 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뒤에 서 있던 대령이
눈을 부라려 보였고, 군사령관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더욱 묵직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장석천, 보국훈장 천구장.... 철기는 아래로
늘어뜨린 주먹에 불끈 힘을 주면서 대답했다.
"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유가 뭔가?"
"첫째로 전, 훈장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
"그건 우리가 판단하지, 자네가 판단하는 게
아니야. 또?"
"각하께서 얼마나 알고 계실지는 모르지만 이건
진실을 은폐하는 일입니다."
"자네도 나이가 들면 깨닫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진실을 곧이곧대로 말하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야. 때로는 거짓말을 하는편이 더 정의롭고
올바른 선택일 때도 많다네."
군사령관의 태연한 대꾸는 철기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그래도 철기는 몸부림을 치듯 한 마디를 더
보태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라도
저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 귀신들이 저를 보고
타협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 자네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 "
철기는 하마터면 억, 하고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군사령관의 한 마디는 가슴 한복판을 뚫고 지나기는
치명상이 아닐 수 없었다. 자네 때문에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나.... 현철기 때문에. 아주 멀리서인
것처럼 군사령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내 말을 잘 들어, 현 중위. 아는지 모르지만 그 날
나도 현장에 갔었어. 왜 갔겠나? 자네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였네. 전시에도 가장 원통한 게 부하를
잃는 거야. 하물며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런 희생이
있어서야 되겠나?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일은 터져
버렸고, 기왕에 죽은 사람은 살아나지 않지. 상황이
이런데, 적어도 야전군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내
입장에서 최선의 수습책을 찾아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지 않나? 난 그 사람들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런 기분 때문에 전체 야전군의
기강과 도덕성을 훼손할 수는 없어. 자네는 일개
중위니까 진실이니 타협이니 하는 소리를 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이 이상의 방법을 찾아낼 수가 없어. 잘
새겨 듣게. 자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 훈장을
받는 건 자네의 의무야."
철기가 무어라 항변할 사이도 주지 않고 군사령관은
돌아서서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병실을 나가 버렸다.
그리고 권총을 찬 대령이 침대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거의 철기의 귓가에 입을 대는 듯한 자세로 낮고
음산하게 이르고 있었다.
"쓸데없는 고집은 부리지 말고, 이러니저러니
헛소리도 하지 말아. 이 안에서 너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 "
"경고는 한 번뿐이야."
대령은 허리에 찬 권총집을 한 손으로 툭툭 쳐
보이고는 돌아섰다. 빈틈없는 걸음걸이로 병실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철기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입니다."
보고를 마친 작전관이 수첩을 덮자 대대장 박민
중령은 흡족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대병력에 대한 교육은 이제 99% 완료되었다고
보아도 좋았다. 물론 대대내에 이미 마음속의 의문을
완전히 씻어 버리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하달된 시나리오 외의 어떤 이야기도
나오지 않으리라. 그것으로 좋았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었다. 요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했다.
"유격장 쪽은 어떤가?"
"역시 순조롭다는 연락입니다. 성과를 보아서
3,4일내로 귀대를 시킬지도 모른다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알았어."
대대장은 호기롭게 대답하면서 일어났다. 이제
문제는 현철기에게 훈장을 달아 줘야 한다는 게
불쾌하긴 했지만, 대신 대대장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지 않았던가. 잠시 멀어져 가는 듯하던
별자리가 이제 다시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잘됐어, 모든 게.
스스로에게 웃어 보이면서 대대장은 작전관과
나란히 CP를 나섰다. 참모부에 혼자 남아 있던 김승일
대위가 부동자세를 취하면서 일어났다. 대대장은
천천히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최대한 다정하게
느껴지도록 두드려 주었다.
"수고가 많지, 일중대장."
"아닙니다, 대대장님."
일중대장을 맡을 수 없다느니 전역신청을
하겠다느니 하고 엄살을 부리던 김승일이 갑자기
고분고분해진 것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고인택
사건을 정리할 시나리오와 함께 현철기가 훈장을 받게
될 것이란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달라진 태도였다.
물론 현철기가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것까지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어쨌든 김승일은 아직도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상대였다. 한때의 공모자였던 녀석은
어쩌면 자기를 죽게 할 생각으로 분교장에 밀어
넣었다는 사실까지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른다.
"군인을 평생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한테 별의별
일들이 다 일어나게 되어 있는 거야. 그런 사건들을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따라서 군인으로서의 그릇이
정해지는 거고.... 지난 일들은 잊고 한번 능력을
보여 봐."
"노력하겠습니다."
김승일의 표정과 태도에서는 털끝만한 반감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 어깨를 다시 한 번 툭, 때려
주고 나서 대대장은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기분으로
참모부를 나섰다. 오늘 아침에 관사에 도착한
마누라를 생각하니 더욱 흔쾌하기만 했다.
이제야말로 다시 진정한 대대의 지휘관으로 복귀한
것 같은 기분으로 대대장은 모처럼 정문을 통과해서
관사로 들어가기로 했다.
"근무중 이상 - 무!"
위병 근무자의 복창 소리도 우렁차기만 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랬다.
현철기 따위는 한순간 스쳐 지나가는 악풍에 지니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
다 끝났다.
하지만 대대장은 정문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부대를 끼고 돌아가는 길모퉁이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얇은 원피스 자락을 저녁바람에
날리면서 이 편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는.... 장
마담이었다.
빌어먹을.
모처럼 회복된 기분이 다시 흐려지려는 순간이었다.
에이, 하고 진저리를 치면서 대대장은 얼른 관사를
향해 오른쪽으로 걸음을 꺾었다. 장 마담이 서둘러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더욱 걸음을 빨리했지만
대대장은 결국 관사 문 앞에서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말았다.
"한 가지만 알려드리려고 기다렸어요."
대대장은 막 문에 손을 댄 자세로 멈춰섰다.
"아이 이름요. 대성이예요. 큰 대 자, 별 성 자....
"
마치 무언가 뜨거운 것이 가슴을 꿰뚫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대장은 문을 밀고 관사 마당으로
들어섰다. 아이? 대성이? 그럴 리가 없다. 난 저
여자를 모른다. 대대장은 누군가에게 발악이라도 하듯
안을 향해 소리질렀다.
"여보!"
120. 1981년 4월 ④
처음 커튼을 젖힌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얼굴에 받으면서 들어서는 사람을 보는 순간 철기는
아, 하고 낮은 비명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만이구나."
이제 반백이 된 머리를 하고 호인스런 웃음을 짓고
있는 사람은 .... 현치훈 교수였다. 철기 자신의
양아버지였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철기는
휠체어에 앉은 채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역시 어떤
함정인지도 모른다.... 하고 생각하자 어쩐지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서늘하게 가슴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천천히 다가오는 현 교수를 향해서
철기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축하합니다."
순간 현 교수의 얼굴이 가볍게 상기되는듯했다.
그는 이제 현 의원이었다. 마지 못한 듯 철기의 손을
잡는 그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손만은 오랜 세월 동안 철기에게 힘이 되어
주었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럴 것인지?
"상태가 좋아보이니 안심이 되는 구나."
철기는 비어 있는 환자복의 오른쪽 다리를 툭툭
두들겨 보였다.
"이 이상 더 나빠질 게 있습니까?"
허허.... 하고 쓴웃음을 흘리면서 현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그 얼굴에 야릇한 그늘이
드리워 있음을 철기는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꼭
철기의 처지에 대한 연민만이 아니었다. 철기는
창가에 서 있는 박 상병을 향해 나가 있으라는 눈짓을
해 보였다. 낌새를 알아차린 박 상병이 서둘러 병실을
나가는 것을 보면서 현 교수는 새삼 긴장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철기는 휠체어 위에서나마 꼿꼿이 몸을
세우려고 애를 쓰면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병신이 되고 나니까 제 성질이 더
급해졌습니다."
"철기야, 그런.... "
"그렇지만 늘 이렇게 지내다 보니까 이상한 직감
같은 게 생깁니다. 저한테 꼭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 "
"제 직감대로라면 누군가를 만나고 오셨을 텐데요?
사단장입니까? 군사령관인가요?"
눈을 내리깔면서 쓰디쓰게 내뱉는 현 교수의
대답이었다. 역시 그랬구나. 철기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대대장과 사단장의 얼굴이, 그리고
군사령관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잘도 찾아냈구나
싶었다. 현철기의 아킬레스건을. 현 교수의 체취와
목소리가 살갗에 닿을 듯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가 네 마음을 알고, 네가 나를 모르지 않을 테니
더 긴 얘기는 하지 않으마. 그렇지만 이건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일이 아닌 것 같다. 그 사람들 제의를
받아들여라. 그 방법밖에는 없다."
"진상이 어떤 건지는 아십니까?"
"물론 안다. 미우가 날 찾아와서 다 얘기했다."
미우.... 그 이름이 스치고 지나간 가슴 한구석이
파르르 떨리는 것만 같았다. 미우가 이 사건을 알고
있다면 그녀는 3월 26일을 전후해서 원천에 와
있었다는 말이 되는가.
"네가 왜 그런 싸움을 계속해 왔는지, 네가 꺾어
보이려는 게 무언지 모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젠
그만둘 때가 된 것 같구나."
"정말로 현실주의자가 되셨군요."
"뭐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난 언제나 네
편이었다는 걸 잊지말아라. 그래, 부당한 것에는
항거를 해야지. 그렇지만 사람이 평생투쟁만을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언젠가는 현실로 돌아와야
해. 넌 이제 그만 물러날 때가 됐다."
"병신이 되었으니까 말이죠?"
철기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키들거렸다. 현 교수의
숨소리가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 말을 들어라, 넌 그 사람들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네가 거부한다고 해도 훈장은
나온다. 네가 아무리 부인해도 어쩔 수가 없게 되어
있어.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이제 네가 더
이상 어떻게 저항을 할 수가 있겠니? 넌 이제 제대를
해야 해. 민간인인 네가 군 내부의 문제를 가지고 뭘
왈가왈부 한다는거냐? 이런 말 하면 날 비웃을 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천구백팔십일년의 바깥 사회도
마찬가지야. 네 이야기를 받아들일 분위기가 아니야.
수백 명의 무고한 국민을 살륙해 놓고도 당당하게
권력의 정상에 버티고 ㅇ은 사람들이 지배하는
나라다. 알겠니?"
"난 못합니다."
"내 말을 들어야 해. 딱 한 번만 굽히고 지나가자.
언젠가는 모든걸 사실대로 밝힐 수 있는 때가 온다."
철기는 번쩍 눈을 떴다. 현 교수는 철기의 휠체어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러지 마세요,
제발.... 철기는 으아아 하고 비명을 지르고만
싶었다. 현 교수의 두 손이 철기의 손을 부여잡았다.
"부탁이다, 철기야. 네 양아버지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다. 훈장을 받아라. 그렇지 않으면
넌.... "
현 교수는 목이 메이는 듯 잠시 말을 끊더니, 한
차례 긴 탄식을 내뱉으면서 말을 이었다.
"넌.... 여길 영영 나가지 못해."
".... "
가슴 깊은 속살을 섬뜩하게 저며들어 오는 듯한 한
마디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이미 경고를 받지 않았던가. 철기는 현 교수의 체취가
배어 있는 공기를 가슴속 깊이깊이 들이 마셨다.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현 교수와 함께해 온 십수
년의 하고많은 사연들을 철기는 단 한 마디로 토해
냈다. 이제 모든 것을 잃는다는 허탈함에 푸르르 몸을
떨면서.
"전 못합니다."
"교육들 잘 받았나?"
어둠 속에 늘어선 소대원들을 향해서 대대장은
호기롭게 목청을 높여 묻고 있었다. 네 - 하는
소대원들의 복창소리는 크고 높기만 했다.
"교육 기간중에 별다른 애로사항은 없었겠지?"
다시 네 - 하는 복창소리. 열흘간의 지옥 훈련에서
돌아온 소대원들은 이제 아는 것이라곤 소리지르는
일밖엔 없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불빛을 등지고 서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대장은 아마도
득의의 웃음을 흘리고 있는 듯했다.
"무사히들 돌아온 모습을 보니 대대장도 기쁘다.
석천소대 여러분들이 대대장의 지휘방침을 이해하고,
그 동안의 불미스러운 일들을 수습하는 데 적극
협조하겠다는 결의를 보여 준 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한 대견그럽게 여기는 바이다. 여러분의
희생과 결단으로 인해서 우리 대대는, 아니 우리
야전군 전체는 자칫 잃어버릴 뻔했던 군 본연의
명예를 되찾았다. 다들 거듭된 교육으로 피곤할 테니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거니와 지금 이
자리에서는 한 가지 기쁜 소식만을 알리기로 하겠다."
대대장은 잡시 소대원들을 내려다보면서 뜸을
들이더니 이윽고 밤하늘을 향해 찌렁찌렁 울리는
소리로 선언하고 있었다.
"여러분의 소대장, 현철기 중위에게 보국훈장
천수장을 수여하기로 결정됐다는 사실을 알린다!"
지섭은 무언가 크고 육중한 것이 뒤통수를 내리치는
것만 같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우르르
무너져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소대원들도 모두
충격을 받은 듯 아무런 반응들이 없었다. 대대장은
조금 머쓱해진 듯했다.
"장석천 대위와 똑같은 보국훈장 천수장이다!"
그대로 소대원들은 그저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저만치 뒤에 서 있던
부관 이 준위와 인사계 송 상사가 짝짝짝....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대대장 자신도 지휘봉을 옆구리에
끼고는 박수를 쳤다. 그 박수소리가 조금씩 대열
속으로 옮아와서 이윽고 소대원들도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 짝짝짝짝.... 결국
소대원들이 다들 박수를 치게 되고 말았지만 지섭은
끝까지 두 손바닥을 마주치지 않았다. 오히려 불끈
주먹을 움켜쥐면서 멀리 원주에 있을 철기를 향해 한
마디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네가 진거야.
황운 병장과 함께 맨 먼저 내무반으로 들어서던
지섭은 우뚝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텅 빈 침상
한가운데 권기호 하사가 앉아 있었다.
"권 하사님.... "
반가움에 다가가려는 지섭의 팔을 황 병장이
다급하게 붙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그제야 유심히
살펴보니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는 듯 권 하사는 허공에다 초점
없는 시선을 던져 두고 있었다. 헤 - 벌어진 입가에는
줄줄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어서 들어오는
소대원들을 황 병장이 제지했다. 영문을 몰라하는
소대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도 권하사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히죽이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면서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거, 거짓말이야.... "
군사령관, 사단장, 대대장 세 사람이 차례로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도 철기는 휠체어에 앉은채로
아무런 동작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 버렸는데도 세 사람은 희희낙락 자못
반갑다는 태도로 다가오고들 있었다.
"고생이 많아, 현 중위."
군사령관이 어깨를 툭, 건드리며 하는 말이었다.
"워낙 미남이니까 환자복 차림도 멋들어지지
않습니까?"
사단장이 거드는 말이었고,
"대대에서도 다들 좋아하고들 있어. 특히
석천소대원들이."
대대장도 빠지지않고 있었다. 그 말에만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철기는 홱 고개를 돌려서
대대장을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사단장이 군사령관의 흉내를 내듯 어깨를 툭, 쳤다.
"무슨 말은 무슨 말이겠나? 자네가 훈장을 탄다니까
그러는거지."
"전 분명히 안 받는다고 했습니다.... "
철기가 으르렁거리듯 항의했지만 세 사람은
하하하.... 하고 소리를 모아 웃어 버리고 있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소름끼치게 느껴지는 웃음
끝에 사단장이 허리를 굽히면서 철기의 귓가로 입을
가져왔다.
"다른 사람 게 아니야. 바로 자네의 훈장이야.
모르겠나?"
"안 됩니다, 전.... "
"가만히 있으라니까!"
나직하게 혀를 차면서 사단장은 철기의 뒤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어서 군사령관도 대대장도 그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모두 철기의
등뒤에 와 섰다. 무얼 하자는 것일까. 철기는 바퀴를
굴려 그들에게서 떨어지려고 했지만 이미 그들의 손이
휠체어를 꼼짝 못하게 붙들어 버린 다음이었다.
사단장이 밖을 향해 소리질렀다.
"준비 됐어, 들어와!"
채 닫히지 않았던 문으로 들어서는 것은 안경을 쓴
병장이었다. 그의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그제야 철기는 사태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안 돼!"
두 손으로 아무리 휠체어를 움직이려고 해도
허사였다. 발버둥을 치며 일어나려고 하자 등뒤에서
뻗어나온 손들이 어깨를 내리눌렀다. 병장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안 돼, 싫어!"
"좀 어른스럽게 굴어."
군사령관이 혀를 찼다. 세 사람 중 누군가의 주먹이
옆구리를 쥐어질렀다. 허억.... 고통스럽게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펑, 하고 플래시가 터졌다.
"안 된다니까!"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사진병에게로 달려들려고 애를
썼지만 철기는 끝내 세 사람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플래시가 다시 터졌다. 철기의 패배를
확인하는 것처럼.... 펑!
"그거, 정말일까?"
잔반통에 식기를 털면서 황운 병장이 하는
말이었다. 무슨 뜻인지 분명하게 알면서도 지섭은
시큰둥하게 반문했다.
"뭐 말이야?"
한 달이 고참인 그와는 진작부터 말을 트고 있는
사이였다. 황 병장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소대장 말이야. 정말 훈장을 받는 거야?"
지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부관 이 준위가
그 문제로 날마다 사단 부관부를 드나들고 있음을
지섭은 잘 알고 있었다. 철기는 훈장을 받게 되어
있었다. 황 병장은 침울하게 입을 다물었고, 두
사람은 빈 식기를 든 채 천천히 중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지섭의 눈 앞에는 가슴에 훈장을 단 철기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는 어떤 표정일까. 훈장을
목에 건 현철기....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모습같기도 했고, 오히려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늘 그랬지 않은가.
현철기란 사내는 모든 것을 거부하면서도 끝내는 그
모든 것을 얻어 내지 않았던가. 그의 심술궂은
웃음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흐흐흐흐,
흐흐흐흐....
"사실 난 말이지.... 자대로 돌아오면 탈영을
하겠다고 생각했었어."
대대장이 장석천을 떠미는 것을 목격했다는 황
병장은 씁쓸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나란히 연병장을
걸어가면서 지섭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누구에게든 우리 부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알려야 한다고 결심했었지.... 그렇지만 이게
뭐야? 이럴 수가 있어?"
".... "
"현철기란 사람이 그럴 줄은 정말 몰랐어. 그
동안의 일은 다 뭐라는거야? 우린 배신당한거야.
아니, 농락당한 거라구."
지섭은 꾸욱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피가 섰인
가래를 뱉어 내듯 가슴에 통증을 느끼면서 황
병장에게 일러 주었다. 아니, 지섭스스로에게.
"흥분할 거 없어. 탈영이니 뭐니 할 것도 없고....
우린 말이지, 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는거야. 장석천이든, 현철기든.... 지금 황 병장이
실망하고 있는 게 바로 그들의 실체라구."
박 상병이 붉은 줄로 테를 둘러 준 신문기사마다
똑같은 사진들이 실려 있었다. 철기의 휠체어를
둘러싼 군사령관과 사단장과 대대장이 활짝 웃고 있는
그 사진 속에서 철기의 뒤틀린 표정은 이상할 만큼
눈에 띄지 않았다. 아니 누군가 그 표정을 알아챈다고
한들 달리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또다시 재현된 살신성인의 군인정신'
'군인의 혼은 살아 있다.'
'수류탄 덮쳐 부하들 구해'
이런 표제들 아래 실린 기사의 내용은 한결같았다.
군신으로 추앙받는 고 장석천 대위의 신화가 어려
있는 육군 00부대에서 또다시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제 몸을 던져서 부하들의 생명을 구한
살신성인의 소대장이 다시 한 번 나타난 것이다.
육군 00부대 1대대 석천소대의 소대장인 현철기
중위가 바로 그 주인공. 장석천 대위의 후임자로
근무하던 그는 평소부터 유달리 책임감이 투철하고
업무 수행능력이 뛰어나 주위의 기대와 찬사를 한
몸에 받아 온 청년장교였다. 이런 그에게 위기가
닥쳐온 것은 지난 3월 하순. 휴가길에 애인이 변심을
확인한 이 부대 소속 고모 일병이 야간경계 근무중에
무장탈영을 감행한 것이었다. 긴급히 출동한 부대병력
중에서도 현 중위의 석천소대가 선두에 선 것은
물론이었다. 현 중위는 타고난 지휘능력으로 특공조를
조직하기까지 하면서 결국 부대 인근 마을의 폐교가된
분교장에 숨어 있는 고 일병을 생포하기에 이른다. 현
중위는 고모 일병을 무장해제시키고 사단 헌병대에
인계하기 위해 분교장에서 소대병력과 함께 대기를
하게 된다. 그러나 천려일실. 빼앗긴 소총과
실탄외에도 수류탄 한 발을 숨겨 가지고 있던 고
일병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안전핀을 뽑고
자살을 기도한다. 소대원들이 밀집해 있는 교실
안에서 수류탄이 터질 경우 고 일병 뿐 아니라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절대절명의 순간, 소대장인 현철기 중위가 마치
전임자인 장석천 대위의 뒤를 따르기라도 하듯 몸을
날려 고 일병과 수류탄을 덮쳤다.... 그 과감하고도
영웅적인 행동으로 해서 당사자인 고 일병을 제외한
다른 소대원들은 전원 무사했으나 정작 현 중위는
오른쪽 다리를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한 다리를
잃은 대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찬란한
군인정신을 우리 군에 선물한 것이다.... 정부는
현철기 중위에게 보국훈장 천수장을 수여해서 그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기로 했다. 이 훈장은 그의
전임자인 군신 고 장석천 대위가 받은 것과 동일한
것이다....
흐흐흐흐,꺼칠꺼칠한 웃음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만 것이었다. 와작, 하고
움켜쥐었던 신문들을 철기는 힘없이 떨어뜨렸다.
세상의 모든 신문들을 구겨 버릴 수는 없다. 휠체어에
앉은 영웅 현철기.... 이런 자리에 이르기 위해
그렇게 피를 흘리면서 살아 왔던가. 싸워 왔던가.
이런 걸 원하진 않았나?
텅 비어 버린 듯한 가슴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부르르 몸을 떨었을 때였다. 쾅, 하고 거칠게 문이
열리면서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한 다리로나마
철기는 휠체어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바로 최
중사였다.
"선임하사.... "
하지만 한 쪽 눈을 안대로 가린 최 중사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어쩐지 비틀거리는 듯한
걸음걸이로 철기를 향해 다가왔다.
"보고싶었어, 선임하사."
철기는 진심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최
중사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그가 철기의
무릎에 내던진 것은 .... 전우신문이었다. 그 조작된
기사가 가장 크게 실려 있는. 비어 있는 한쪽 다리를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신문을 보면서 철기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빠드득, 하고 최 중사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은 당신도 이런 사람이었군 그래."
".... "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었어. 당신은 그저.... 장
대위님을 이기고 싶었을 뿐이야. 어림없는 소리....
당신에 대면 장 대위님은 진짜였어. 넌 가짜야.
사기꾼이야."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최 중사를 멍 -
하니 바라보면서 철기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안대로 가리지 않은 한쪽 눈에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나쁜 놈 같으니.... 이럴 바엔 왜 우리 앞에
나타났어? 왜 그따위 일들을 벌인거야? 그냥 놔
뒀으면 됐잖아. 그냥 뒀으면 모두가 좋았을 거
아냐.... "
최 중사는 스르르 허물어져 바닥에 주저앉고
있었다. 허엉허엉 소울음소리 같은 통곡이 이어지고
있었다. 철기는 오히려 히죽이 웃음을 흘리면서 앉아
있었다. 억울할 것도 원망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을 넘어선 사람처럼 담담하기만 한
기분이었다. 안대로 가린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남은 한쪽눈도 실명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던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치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듯 철기는
자신과 최 중사를 바라볼 수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멍청이.... "
최 중사가 주저앉은 자세대로 철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리가 없는 쪽의 환자복을
움켜쥐었다.
"이 다리로.... 피하지 그랬어? 도망가지
그랬어.... "
다시 허어엉 울음을 터뜨리는 최 중사를
내려다보면서 철기는 씨익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스스로를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다 끝났다.
권 하사를 앰뷸런스에 실으면서 황운 병장은 자꾸만
훌쩍거리고 있었다.
"그만해 둬."
지섭은 그의 어깨를 감싸안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사단 의무대에서 나온 위생병이 앰뷸런스의 문을
닫았다. 권 하사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순순히
응해 준 것만도 다행이었다. 이제 그는 어떻게 될까.
여종일에 이어 또 하나의 정신병자가 나온 것이었다.
아니, 어디 두 사람뿐이겠는가. 장석천과 현철기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미치광이가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지섭 자신은?
난 아니다.
세차게 고개를 저었을 때 지대장 신한수 중위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앰뷸런스 운전걱에
선탑한 사단 의무장교에게 무언가 서류를 넘겨 주고는
곧 지섭에게로 다가왔다.
"필승."
경례를 해 보이자 신 중위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히죽이 웃어 보이고 있었다. 많이 수척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황 병장을 비롯한 소대원들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고, 지섭은 지나가는 말처럼 질문을 던져
보았다.
"소식 들으셨습니까?"
신 중위는 말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안경알이
오늘따라 두꺼워 보였다. 부우웅 하고 나직한
엔진음을 토해 내면서 앰뷸런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잘가요, 권하사.
멀어져 가는 앰뷸런스를 바라보며 입 속으로만
중얼거렸을 때 신 중위가 불쑥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제 슬슬 막이 내리려는 모양이군."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
저도 모르는 새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신 중위는
다시 어깨를 으쓱 추켜 보이고 있었다.
"그걸 모르겠어, 박형."
외다리인 철기가 어딘가 어두운 복도 같은 곳을
걸어가고 있었다. 거의 내달리듯 다급한 걸음이었다.
헉헉, 여름날 개처럼 헐떡거리는 자신의 숨소리가
세상에 가득했다. 무언가에 쫓기듯 점점 걸음을
빨리하는 철기.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하지만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 하나뿐인 다리. 쫓는 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다가오고 있다. 점점 더 숨이
차 온다. 어두운 통로에 문이 하나 나타난다. 철기는
왈칵 그 문을 연다.
오랜만이야.
장석천이 걸어나온다. 피에 젖은 군복을 입고 있다.
내미는 두 손에는 장교의 푸른 견장이 달려 있다.
기다렸어, 넌 내 친구야.
으아아 - 비명을 지르면서 철기는 황급히 문을
닫는다. 그리고 다시 어두운 통로를 외다리로
달려간다. 쫓아오는 발소리는 점점가까워지고 있다.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난다. 열어야 한다.
사랑해요, 철기 씨.
하얗게 웃으면서 미우가 서 있다. 그녀가 죽었던가.
아니다, 철기는 고개를 저으면서 문을 닫는다. 여긴
미우가 올 곳이 아니야. 더 급박하게 철기는 쫓긴다.
또 하나의 문이 있다. 잠시 망설여 보지만 열 수밖에
없다.
미안합니다, 소대장님.
고인택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고인택!
네, 소대장님.... 눈 앞으로 불쑥 튀어오르는 것은
머리통이 없는 고인택의 몸뚱이다. 그 몸뚱이가
다가온다. 팔을 벌린다.
난 외로워요, 소대장님. 죽어서도 외로운 것처럼
불행한 일이 있을까요?
역시 비명을 지르면서 철기는 물러난다. 다시
어두운 통로를 달려간다. 기우뚱 기우뚱.... 다시
문이 있다. 철기는 그냥 지나친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 온다.
내가 뭘 잘못했나요?
유정호 하사다.
난 제대를 해야 해요. 살려 주세요.
통신대장의 목소리도 겹쳐 들린다.
난 뭐야? 난 뭐냐구?
머리를 감싸쥐고 철기는 달린다. 쫓아오는 그
누구인가는 금새라도 뒷덜미를 잡아챌 듯하다. 또
하나의 문을 지난다. 박도기 중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싸웁시다, 우린 죽어서도 싸워요.
으아악 - 통로 가득히 철기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추격자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거기 서, 현철기. 아니, 민철기.
최 중사의 목소리다. 철기는 뒤를 돌아본다. 다시
아악 -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 최중사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타조의 알처럼 커다란 한 개의
눈알이다. 피가 흐르고있다. 통통통 공처럼 튀면서
쫓아오고 있다.
거기 서라, 현철기.
철기는 다시 외다리로 달아난다. 넘어진다.
일어난다. 또 넘어진다. 갑자기 앞쪽에서 들려 오는
소리들이 있다.
도와 주마.
살려 줄게.
철기는 고개를 든다. 눈 앞에서 손짓하고 있는
것은.... 대대장이다. 사단장이다. 군사령관이다. 현
교수다. 그리고 외할아버지 박태환이다.... 그 손을
잡으면 된다.... 아아아.... 철기는 돌아선다. 거대한
눈알이 다가온다. 통통통.
이젠 달아나지 못해.
그 눈알이 노려보는 것은 철기의 가슴팍이다.
철기는 제 가슴을 내려다본다.
광채도 찬란한 훈장이 달려 있다. 황금의 훈장이다.
이것이었구나, 표적은.... 철기는 훈장을 떼어 낸다.
던진다. 하지만 어느새 가슴에는 또 하나의 훈장이
달려 있다. 다시 떼어 던진다 그래도 다시 생겨나는
훈장.... 두려움에 질려 철기는 돌아선다.
우리가 살려 주마.
대대장이, 사단장이, 군사령관이, 현 교수가,
박태환 선생이 달콤하게 속삭인다. 아니다, 아니야.
고개를 흔들면서 돌아서면 거대한 눈알이 피를
흘리면서 다가온다. 철기는 문득 부르짖는다.
신 중위 어디 있어?
지섭이, 지섭이 어디 있어?
형, 형은 어디 있는거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낄낄거리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백 과부인가, 명옥인가,
장 마담인가, 애순이인가, 아니, 어머니인가....
거대한 눈알이 작은 총알이 된다. 섬광처럼 철기의
가슴을 관통한다. 최초이자 최후의 고통.... 문득
내려다보면 가슴에 꽂혀 있는 것은 철기 자신의
손이다. 피가 흘러내린다. 하지만 끝끝내 외다리로
버티고 서서 철기는 죽어 간다. 죽어 가면서
부르짖는다.
어머니!
어머니 - 병실을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철기는
눈을 떴다. 꿈이었다. 악몽이었지만 전혀 놀랍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철기는 희미한 실내등에 의지해서
박 상병이 가져다 준 탁상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새벽
세시였다. 이제 세 시간 후면 철기가 퇴원하는 날의
일과가 시작될 것이었다. 자대로 돌아가고, 훈장을
받고.... 영웅으로서의 나날이 시작되려는 것이었다.
웅장한 바리톤의 노랫소리가 들려 오는 듯했다.
석천 장석천 우리의 표상
석천 장석천 우리의 자랑....
철기 현철기 우리의 표상
철기 현철기 우리의 자랑....
안 된다, 하고 철기는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이제
시간이 없었다. 망설일 것도 없었다. 이미 준비해
두었던 일이 아니가. 아니, 예정되었던 일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 까. 이미 오래 전부터. 철기는 언젠가는
이런 선택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시작해라, 현철기.
스스로에게 이르면서 철기는 베게 밑에 숨겨 두었던
유리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주저할 것도 없이 왼쪽
손목으로 가져갔다.
내가 졌다.
철기는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무릎 꿇지는 않아.
121. 1981년 7월
하얀 천이 벗겨지자 나란히 선 두 탑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도 환성을 지르지 않았다. 천을 벗겨
낸 주역들만이 스스로 짝짝짝 손뼉들을 두드렸을
뿐이었다.
'군신 장석천 대위 추모탑'
'군신 현철기 대위 추모탑'
두 사람의 이름만 제외하고는 쓰인 글씨마저 똑같은
두 개의 탑은 쌍둥이처럼 보였다. 그 앞에 놓인
향로는 하나뿐이어서 오히려 더더욱 두 탑의 일체감을
강조하고 있는 듯했다. 군사령관을 위시해서 사단장과
연대장, 대대장, 그리고 유족을 대표한 현 의원과
미우는 눈이 부시다는 듯 두 탑을 올려다보고 서
있었다. 지섭은 내빈석 맨 뒷줄에서 흐흐, 하고 혼자
웃음을 깨물었다.
군인들과 민간인이 반반씩 섞여 앉은 내빈석에서
예비군복을 입은 지섭 혼자만이 이방인인 듯했다.
나, 제대해.
지섭은 여름햇살 아래 저만치서 희게 빛나고 있는
추모탑을 바라보면서 입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이제
자신은 여기를 떠나지만 철기는 남았다. 저런
모습으로 영원히.... 시신이야 국립묘지에 묻혔지만
남은 것은 모두 여기에 남았다.
넌 진거야.
지섭이 계속해서 뇌까렸을 때 누군가가 등뒤에서
어깨를 툭, 건드렸다. 지섭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여름양복을 입고
안대를 한 위에 다시 검은 안경을 쓴 최 중사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화악 술냄새가 끼쳐 왔다.
"한 가지 가르쳐 줄까?"
지섭은 대답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고
들여다보기만 했다. 장석천의 신화는, 그리고 새로이
조작된 현철기의 신화는 이 사내의 가슴속에 어떤
형태로 남았을까. 최 중사는 벌건 잇몸을 보이면서
키들거리고 있었다.
"현 중위는 다리를 절단한 후유증으로 죽은 게
아니야."
".... "
"자살했지. 유리조각으로 동맥을 잘랐어."
최 중사는 한 손가락을 팔목에 대고 스윽 긋는
시늉을 해 보이고 있었다. 그의 팔목에서 피는 솟지
않았다. 지섭은 의외로 담담해질 수 있는 자신에게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구나.
1중대장 김승일 대위는 두 개의 탑 앞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연단에 올라가 서는 대대장 박민 중령을
보면서 새삼 두렵다는 생각이 앞섰다.
무서운 사람.
그 무서운 대대장은 험, 하고 목청을 가다듬고 나서
입을 열었다.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제법 침통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경과보고를 하기에 앞서 우선 본인은 이 자리를
빛내 주시는 군사령관 각하와 사단장님, 연대장님,
그리고 군과 민간을 망라하여 성황을 이루어 주신
내빈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외람되게도 지휘의 책임을 맡고 있는 이
부대에서 저의 재임기간 중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
사람의 신화적 영웅들이 탄생했다는 점은 무엇보다도
과분한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먼저 밝혀 두고
싶습니다.... "
김 대위는 그 비오던 날 밤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대장은 살인자였다. 장석천도 죽이고
말지 않았던가. 그리고 또 김 대위 자신을 분교장으로
밀어넣어 함께 몰살을 시키려고 했다. 그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었고, 결국 그는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해치웠다. 그의 비밀은 영원히 묻혀 버렸다. 최
중사가 살아 남았지만 이제 그는 민간인 신분에다
폐인이 되어 버렸고, 또 하나의 증인인 김 대위
자신은 저항할 생각을 버린 지 오래였다. 그를 적으로
돌려선 안 된다. 그러니만치 가슴속에 내내 맴돌고
있는 한 가지 의문도 이제는 영영 덮어 버려야만
했다. 현철기의 죽음에도 대대장의 의도가 작용하고
있지는 않을 까 하는.
"....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첫번째의 군신인 고
장석천 대위는 지난 칠십구년 시월 십구일 십사시경에
여러분이 앉아 계시는 바로 이 자리에서 부하사병이
훈련중 잘못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서 자신의 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지는 대신 수많은 부하들의
목숨을 건져 내는 장거를 이룩했습니다.... "
그래, 하고 김 대위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장석천.... 하고 죽은 옛친구에게 마지막 고별의 말을
들려 주었다.
이제야말로 고이 잠들어라. 너는 죽어서 신화가
되었지만.... 난, 살아서 별을 딸거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군신 현철기 대위는 장석천
대위의 후임으로 현지에 부임하여 그 군인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에 지난 삼월 이십육일,
당대대에서 불미스러운 무장탈영 사고가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소대를 지휘, 그 무장탈영병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그 탈영병이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소대원을 구하고 현장에서 자신은 장렬하게
산화하였습니다.... "
후우 - 하고 전사단장인 이명우 의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옆에 앉았던 사단장 권 소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지만 개의할 것 없었다.
자신의 가슴에 가득한 무력감을 이겨 내기에도
힘겹기만 했다. 참된 야전군인을 자부했던 자신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군의 정치참여를 반대해서
정면대결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여당의
국회의원으로 행세하고 있다. 현철기 등의 무고한
희생을 막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 또한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삼류연극과도 같은 각본으로 연출되는
무대에 한 들러리로 나와 앉았을 뿐이다.
"이에 당대대에서는 군사령관 각하의 각별한 관심과
사단장님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그들의 군인정신을
기리고, 영원히 우리 군의 귀감으로 삼도록 하기 위해
지극히 명예로운 상징물로서 두 개의 나란한 추모탑을
세우기에 이른 것입니다.... "
이병우 의원은 한때 자신이 멋모른 채 건립을
추진하기도 했던 추모탑을 허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폭파되었던 장석천의 원래 추모탑과
기념관은 깨끗이 철거를 해 버리고 조금은 보기
흉했던 산화비도 뜯어 낸 자리에 하얗게 두 개의
탑만을 세워 놓은 모습은 겉보기로는 산뜻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저 안에 담겨 있는 것들은....
추악한 거짓과 위선과 죄악일 뿐이었다. 사건현장에서
즉사한 것으로 지금 대대장이 얘기하고 있는
현철기는, 후송된 이후, 다리를 절단한 후유증으로
죽었다고 듣고 있지만 그 또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럴 수는 없다!
이 의원은 억지로 힘을 내려고 해보았지만 곧
어디선가 들려 오는 듯한 소리에 쥐었던 주먹을 풀지
않을 수 없었다.
너도 마찬가지야.
대대장의 치사가 끝나고 별로 내용이 다를 것 없는
군사령관의 치사가 계속되는 동안 현치훈 의원은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피가 거꾸로 도는 듯한 역겨움을
이겨 낼 수가 없었다. 철기의 죽음은 이제 그들의
노리개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토록 강권을 해도
참석을 거부했다는 장석천의 형 장익천 쪽이 훨씬 더
현명한지도 몰랐다.
미안하다.
어딘가 추모탑 언저리를 떠돌고 있는 것처럼만
느껴지는 양아들 철기에게 현 의원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자신이 조금만 용기 있게 처신을
했더라면, 그래서 같은 편에 서 주기만 했다면,
철기는 죽지 않았으리라. 현 의원은 철기의 죽음에
대한 설명을 믿지 않았다.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철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리란 직감을 가지고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녀석이었다.
그런 줄 알면서 왜?
스스로도 영원히 변명할 수 없는 실책이었다.
자신이 지조를 꺾었다고, 자신이 현실과 타협을
했다고 다른 이들도 모두 그럴 수밖에는 없으리라고
여겼다는 말인가.
"이 두 사람의 젊은 장교는 세월이 가도 영원히
살아 남아서 우리들에게 참다운 군인정신과
희생정신의 실체를 일깨워 줄 것입니다. 나는
선언합니다. 이들은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
현 의원은 바로 옆에 소복차림으로 앉아 있는
미우를 향해서도 남몰래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내가 죽인거야. 미안하다.
분향차례가 되어서 미우는 현 의원의 부축을
받아가며 몸을 일으켰다. 목에 건 훈장의 무게가
감당할 수 없도록 벅차기만 했다. 미우는 마치
꼭두각시처럼 현 의원이 이끄는 대로 탑을 향해
나아갔다. 이제는 그가 도망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편에서 손을 뻗을 때마다
그토록 안타깝게 빠져나가 버리곤 하던 그가 이제는
그만 멈추어 섰다. 하지만 현철기는 이제 미우의 것이
되었는가? 아니었다. 그는 죽어서조차 미우에게
속하지 않는 남자였다. 아니,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그는 속하지 않는다. 이런 탑 하나를 남겨
놓고, 국립묘지에 묘비 하나를 남겨 놓고, 아니
미우의 목과 가슴에 쇠붙이 훈장만을 남겨 놓고 그는
영원히 훨훨 날아가 버렸다. 현 교수가 거들어 주는
대로 분향을 하면서 미우는 고개를 들어 탑을
바라보았다. 그 탑 꼭대기에 철기가 장난스럽게
올라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그렇다, 그는 죽어서도 이 사람들을
비웃고 있으리라. 하지만, 하고 미우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철기를 향해 입술을 앙당물었다.
난 네 미망인이야.
마지막 순서는 예상했던 대로 '장석천의 노래'였다.
격식을 갖춘 군악대의 전주가 울려퍼지고, 1대대의
전병력은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장부로 태어나서 이 땅 위에 한평생
나만을 생각하랴 목숨만을 생각하랴.
흥, 하고 현철기가 코웃음 치는 소리를 신한수
중위는 들은 것 같았다. 처음 연대로 찾아왔을 때
현철기는 뭐라고 말했던가.
우선 체질적으로 전 그런 걸 참아 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군대
자체를 위해서도 결코 좋지 않다고 생각을 하구요.
그런 현철기는 그가 가장 혐오하던 모습으로 여기에
남고 말았다. 이제는 누가 현철기의 그림자에 가려
희생을 강요당할까? 현철기처럼 거기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또 출현할 수 있을까?
한 목숨 내던져서 열 목숨을 얻는다면
한 순간 불꽃되어 영원 충성 밝힌다면
너도 나도 따르리라 님의 길은 군인의 길
너도 나도 따르리라 님의 길은 대한의 길
저만치 앞줄에 앉은 미우의 어깨가 들먹거리는 것이
보였다. 현철기가 죽은 다음부터 그녀는 완전한 그의
여자가되었다. 국립묘지의 안장식에서,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보는 그녀는 행복한 비탄에 잠겨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철기, 하고 신 중위는
죽은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죽어서도 넌 나보다 나아.
석천 장석천 우리의 표상
석천 장석천 으리의 자랑....
군악대의 간주가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노래는 다시
처음부터 되풀이되고 있었다.
장부로 태어나서 이 땅 위에 한평생....
그만! 하고 최중사는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다. 이게
아니야! 하고 달려가서 두 개의 탑을 무너뜨리고만
싶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에 진실을 아는
자는 누구인가. 뻔한 거짓을 퍼뜨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알고도 모른 척 속아 주는 것은 또
누구인가. 거짓을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 축들은
누구누구인가.
다 거짓말이야.
어떻게 하면 지울 수 있다는 말인가.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기만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대대장에게 떼밀린 장석천이 두 손을 허공에
휘저으면서 수류탄위로 쓰러진다. 엎드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무언가 뜨뜻한 것이 뺨에 닿아
떨어진다....
깊은 잠이 든 것처럼 현철기는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워 있다. 늘어진 한쪽 팔에서 아직도 피가
흘러내린다. 침대 아래 흥건하게 고인피....
"최 중사."
옆자리로 누가 다가와 앉았다. 몽롱한 눈을 들어
보니 작전관 김진우 소령이었다. 그가 내미는
것은.... 4홉짜리 소주병이다.
"고맙습니다."
최 중사는 소주병을 받아 거꾸로 목구멍에 세웠다.
취해야만 했다. 깨어나지 말아야 했다. 점점 멀어지는
노랬소리....
철기 현철기 우리들의 표상
철기 현철기 우리들의 자랑....
모든 순서가 끝났다. 지섭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웅성거리는 내빈들 사이를 지나 탑을 향해
걸어 나아갔다. 현 의원과 미우가 나란히 서 있는
앞을 지나면서도 지섭은 가볍게 고개만을 숙여
보였다.
"아, 박 병장. 제대 축하해."
대대장이 나서면서 손을 내밀엇지만 지섭은 대답도
하지 않고 그를 지나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곧장 걸어나가서 탑 앞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뻗쳐 올라간 현철기의 추모탑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숙일 수는 없었다.
잘 가.
그제야 철기가 남이 아니라 자신의 한 부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박지섭의 절반은 현철기였다.
그 절반이 이제 죽었다. 절반만이 남은 것이다. 그
절반만으로 살아 가야 했다. 살아 있는한 절반으로서
죽은 다른 절반을 향해 지섭은 나직하게 일러 주었다.
네가 진거야.
철기는 어쨌든 제 손으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또
하나의 신화로 남아 버렸다. 하지만 지섭은 견뎌서
살아 남았고, 그 어느 신화에도 물들지 않았다.
자유로웠다. 누구처럼 탑을 세우지도 않을 것이고, 그
탑을 허물려고 기를 쓰지도 않을 것이고, 탑이 되어
남지도 않으리라.
고마워.
마지막 일별을 던지고 지섭은 탑을 등지고
돌아섰다.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으면서 사람들
속을 헤치고 산 아래를 향했다. 장석천교를 지나,
대대옆을 지나, 넓은내, 웃범골, 아랫범골을 지나,
5번 도로를 지나....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들이 마치
은을 발라 놓은 것처럼 너무도 뚜렷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