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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Casey,Riley 2022. 12. 3.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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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1

...
한반도를 움직이는 거대한 힘은 과연 무엇
인가?
천재 변호사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뜨거운 
화두!
10.26의 비밀을 밝혀라!
죽음앞에서만 밝힐 수 있었던 역사의 진실
과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벌이는 숨막히는 
정보 전쟁,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배후!
또다시 한반도에서  제2의  비극은 일어날 
것인가!
...

케임브리지
하버드대학교 앞 케임브리지 광장.
행인들로 붐비는 광장에서  구성진 목소리
의 판소리 한마당이 벌어지고 있었다. 경훈
은 오봉펭 노천 카페의  의자에 앉아 아이
스 티를 한 모금씩 마시며, 한창 신이 올라 
걸쭉한 목소리를 뽑아내고 있는 인남을 바
라보았다. 개량 한복을  입고 합죽선을  든 
인남은 호기심에 사로잡힌  다양한 피부색
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한국의 1인 오페라를  이제껏 접해보지 못
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저  잠시 서서 
구경하다가 곧 땅바닥에 신문지 따위를 깔
고 앉았다. 그들의  표정에 인간의  목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오는가 하는 놀라움
이 차츰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서   
간간이 탄성이 터져나왔다.
 춘향이 비몽사몽간에 고개를 들어보니 꿈
에도 그리던 이 도령이라`…`…. 인남은 어
깨를 가로지른  삼베끈에 맨  북을 이따금 
두들겨가며 한껏 흥이 오른 목소리로 판소
리 <춘향가>의 절정을 넘어가다가 경훈을 
보자 짐짓 여유를  두며 눈짓을  보내왔다. 
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야 하는 정
식 공연은 아니었지만, 인남은 서둘러 마치
는 태가 역력했다.
 이젠 너 아주 제대로 하는 소리꾼이 되었
구나. 네 구성진 목소리에 제법  기분이 동
하던데. 경훈은 이제 삼십대 초반이지만 얼
굴은 서른이 채 안 돼 보였다. 담배를 피지 
않는 듯 소년처럼  입술이 붉었고,  체격은 
약간 가냘파 보였으며, 움푹 파인  눈은 그
가 속이 깊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일 것
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는 한여름의 태양
에도 불구하고  넥타이를 맨  긴 와이셔츠 
차림이었고, 그의 하얀 피부는 햇볕에 전혀 
그을리지 않은 듯했다.
 호호, 이것도 자주 하니까 이제는 정말 인
이 박였나 봐. 화장기 없는  건강한 피부가 
돋보이는 인남은 경훈과 동갑이었지만,  뒤
로 질끈 동여맨 말총머리에 거침없이 분방
한 태도 때문인지 신중한  경훈에 비해 훨
씬 어려 보였다.
 괜히 나 때문에 일찍 끝낸 거 아냐? 
 그래, 너  때문이야. 하지만  바쁜 사람이 
여기까지 와줬는데 내가  이거나 두들기고 
있으면 되겠어?  인남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북을 들어 보였다.
 그래도 예술인데`…`…? 
 예술? 호호호. 좀 부끄러운걸. 
인남은 1달러짜리 지폐가  수북이 쌓인 통
을 들여다보며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
녀는 재미  삼아 광장에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 이제는 제법 벌이가  되기도 해서 토
요일이면 어두워질 때까지  공연을 계속하
곤 했다. 
 오랜만에 너하고 맥주나  실컷 마시고 싶
어. 
인남은 편안한 표정으로 친구의 얼굴을 슬
쩍 곁눈질했다. 경훈의 반응을 떠보는 그녀
의 눈길에 기대감이  비쳤다. 사실  경훈은 
인남에게 마냥 편하기만 한 친구는 아니었
다. 
 그래, 바닷가에  나가서 바람이나  쐬면서 
마시자. 
 좋아. 
인남은 아예 차를 집에  두고 나왔던 터라 
경훈의 옆자리에 앉았다. 자동차는  시원한 
해안 도로를 상쾌하게 달렸다.
 우리가 미국에서 처음 만난  게 벌써 2년 
가까이 되는 것 같아. 
인남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럴 거야. 내가 연수오자마자 너를  봤으
니까. 
 참, 얘기 들어보니까 너 회사에서 아주 특
별한 대접을 받는다면서.  누가 그래? 
 일전에 한국에 물건 사러 들어갔을 때 마
침 동창회가 있어 나갔더니, 애들이  네 얘
길 많이 하더라.  회사는 모든 직원들을 동
등하게 대우해. 다만  순서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난 그렇게 어려운 말은  잘 몰라. 
하지만 너처럼 입사한 지 3년 만에 하버드
에 1년, 로펌에 1년 보내주는  케이스는 이
제껏 없었다던데. 경훈은 대답 없이 운전을 
하면서 한국을 떠나오던 때를 떠올렸다. 
─`이 변호사, 도대체 무슨 일이오? 어떻게 
사람이 이처럼 변할 수가  있소?`─`죄송합
니다.`
─`그렇게 정열적으로  일하던 사람이,  그 
불리한 소송들을 기적적으로  이겨내곤 하
던 이 변호사가 이렇게 나약해지다니, 미안
하지만 지금의 이  변호사에게는 나약하다
는 표현을 안 쓸 수 없소. 이제까지  이 변
호사는 영웅적 변호사들의 기록을 모두 깨
왔잖소?`─`큰 의미가 있는 일들은  아닙니
다.`
─`혹시 개업을  하려고 합니까?  물론 그 
실력이면 엄청난  돈을 벌겠지.  하지만`…
`…. 
─`아닙니다.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개
인적인 사정이 있습니다.`─`음, 나도 이 변
호사가 이렇게 성급하게 개업하려 들 사람
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틀림없이 말못할 사
정이 있겠지. 내가 관찰하기로는 마음의 병
을 앓는 것 같던데`…`…. 음,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이 변호사가  원한다면 지
금 연수를 떠나도록 하시오. 하버드 로스쿨
에서 1년, 그리고 로펌에서 1년. 세월이 흐
르면 마음의 병도  낫지 않겠소?`자동차는 
해안 도로에서 조금 벗어난 조용한 모래사
장에 바퀴 자국을 남기며 천천히 멈추었다. 
경훈이 문을  열고 나오자  소금기 머금은 
바람이 얼굴을 스쳐갔다. 대서양은  언제나
처럼 잔잔했다. 끼룩끼룩 울어대는  갈매기
가 그림처럼 파란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르
는 풍경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여긴 처음인데.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곳
이구나. 너는 자주 오니? 인남이  경훈에게 
말을 건넸다.
 가끔. 
 이런 데 올 땐 좀 데리고 오잖구? 
인남이 곁눈질로 경훈의 표정을 살폈다. 그
러나 경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먼바다만 바
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 비치 바가  있네. 찬 맥주나  한잔하
자. 그것도 소리라고 목이 컬컬하네. 두 사
람은 자리에 앉아  인남은 맥주를,  경훈은 
스카치를 시켰다. 인남이 맥주 한잔을 단숨
에 비우고는 경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
보자, 경훈은 자신이  너무 말이  없었다고 
생각했는지 인남을 향해 한마디 툭 던졌다. 
 인남이 네 얘길 좀 해봐. 
 나? 뭐 얘기할 만한 게 있어야지. 
인남은 반색하며 말했다.
 나처럼 따분한 인생은 아닐 것 같은데`…
`…. 
 글쎄, 그럴는지 몰라도 너처럼 우아한  인
생은 못 된다.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고등학교 때 공부는 
젬병이었잖아.   그래. 
경훈은 인남의 남자 같은  말투에 소리 없
이 웃었다.
박인남, 그녀는 경훈과 고등학교 동창이다. 
인남은 맑고 시원한 인상을 주는 미인이지
만 말썽꾸러기로 유명했다. 좋다고  소문난 
영화나 연극이 공연되면  수업을 제쳐두고 
거기에 가기 일쑤였고, 수업 시간에는 수필
집이나 잡지를 보다가 벌을 받곤  했다. 그
러나 그녀는 명랑하고 상냥해서 모든 친구
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아버지를 졸랐지. 제
발 억지로 대학에 집어넣으려 하지는 말아
달라, 일찍 결혼도 안 한다, 나도 남자처럼 
돈 벌겠다, 기왕이면 미국에서 스스로 인생
을 개척하고 싶으니 미국까지 가는 비행기 
요금과 한 달 간 머무를 수 있는 최소한의 
경비만 달라고 말이야. 이번에도 인남은 맥
주를 단숨에 쭉 들이켰다. 
경훈에게는 그런 모습이 그녀가 자신의 선
택에 대한 자신감을 내보이는 것으로 생각
됐다.
 처음엔 고생 좀 했어. 하지만 미국 생활이 
내게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었어.  적성에 
맞다고나 할까. 웬만큼 성공한 적도 있었으
니까. 인남은 다시 잔에 맥주를  따르고 나
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처음  왔을 때처럼 밑바닥
에서부터 뛰고 있어. 교포 아저씨  한 분을 
밀어드렸다가 같이 망했거든. 그러나  후회
는 안 해. 그 아저씬 좋은 분이셨어.   너, 
지금은 무슨 일하니? 경훈은  별로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한국에서 액세서리 수입해. 이젠 제법  규
모가 큰 가게에 공급하게 됐어.  틈틈이 하
던 아르바이트도 졸업했고.  판소리 공연은 
어떻게 하게 됐어? 
 호호. 그건 실은 내가 좋아서 시작했던 건
데, 뜻밖에도 제법 돈이 되네. 그러려고 했
던 것은 전혀 아닌데. 인남은  공연으로 돈
을 버는  것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보스턴 처음 와서  케임브리지 광장에 갔
는데 전세계의 수많은 민속 악기들이 연주
되고 있잖아. 근데  우리 것만  없는 거야. 
갈 때마다 찾았는데 우리 건 통 나오질 않
더라구. 열 받치지  뭐야. 우리 사물놀이며 
가야금 같은 게 나오면  히트 치겠다는 생
각이 들었어. 에이, 내가 못  나설 건 뭐야 
싶었지. 근데 뭐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 
그래서 아예 판소리를 배워버렸어. 내가 본
래 노래에는 소질이 있잖아.  데뷔  공연은 
어땠어? 
 대성공이었지 뭐니. 양코배기들이  사람의 
목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어? 이젠 광장에서  돈 제일 
잘 버는 사람이 바로 나야. 호호.  하하. 네
가 그걸 안 했다면 우리도 아마 못 만났겠
지. 그냥 지나치려다가 도대체 누가 이렇게 
우리 판소리를 하나 싶어 봤더니 너더라구.  
경훈이 넌 날 못 벗어날 운명인가 봐. 보스
턴에서 이렇게 만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뭐, 운명? 하하하. 
 하긴 내가 너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거
창하게 운명 운운하겠어.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다가 졸업 후 보스턴에서 우연히 만
난, 특별할 것 없는 관계일 뿐인데 말이야.  
자, 건배할까? 명창 박인남을 위하여! 
 위하여! 
인남은 미국에서 경훈을 다시  만난 후 그
를 좋아하게 됐다. 그녀는 경훈을  통해 똑
같은 무게의 뇌라도 그  성능은 무섭게 다
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인간에게 
머리란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삶이란 
오직 몸으로 뛰면 되는  거지 하는 태도로 
살아왔던 인남은 경훈을 만나면서 가끔 그 
머리의 성능에  대해 섬뜩한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인남은  자기와 경훈이  머리만 
아니라 성격까지도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잘 
알았다. 
경훈은 말이  별로 없는  편이지만 언제나 
사물의 원리를 꿰뚫었다.
 그의 목소리는 항상 같은 톤이었고,  결코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으며, 흥분하는  모습
은 한평생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반면 말이  많고 다정다감한  편인 인남은 
경훈의 군더더기 없는 언행을 보며 자신의 
경망함을 자책하기도 했고, 그의 약간 건조
한 성격조차 좋아하게 되었다.
 근데 네게는 하나 이상한 것이 있어. 
 뭔데? 
경훈은 빙그레 웃으며 인남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너는  유독  술만은 사양하지 
않고 완전히 취할  때까지 마시더라.  매사 
절제하는 스타일인데도 말이야. 너의  성격
과 술은 연결이 안 돼. 겉으로는 냉정해 보
여도 가슴속은 뜨거운 모양이지?  …`…. 
 취할 때까지 마시면서 무얼 생각하니? 
경훈은 말없이 씩 웃더니  스카치 잔을 들
었다. 인남은 과묵하지만 매력 있는 경훈의 
분위기에 취했다.
경훈은 인남에게 먼저 연락을 해오는 법이 
한 번도 없었다. 지난 2년 동안  언제나 인
남이 먼저 연락해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
었다. 그나마 경훈이 로펌에 들어가 소송에 
관여하고 나서는 더욱 만나기 힘들었고, 만
나도 그가  양복 차림으로  나타나 편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토요일 오후에  경훈 
스스로 인남의 공연장까지 와준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인남은 감정이나 행동의 낭비가 없는 경훈
이 이렇게 친절하게 자신을 찾아준 이유를 
생각하다가 이내 불안해졌다. 연수를  마친 
경훈이 보스턴을 떠날 날이 임박했다는 사
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인남은 문득 경훈에게 
도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곧 못 
보게 되리라는 생각과 지난 2년 간의 아쉬
움이 그녀를 부추겼다.
 참, 셰인이라고  내 남자  친구가 있거든, 
걔가 오늘 저녁때 댄스  파티에 같이 가자
고 하더라.  좋겠구나. 
경훈은 인남의 말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
았다.
 춤추고 나면 바로 헤어질 것 같지가 않아. 
교외에 있는  친구네 집에  여럿이 가기로 
했거든.  그럼 잘 갔다 와. 
인남은 경훈의 반응에  실망했지만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근데 약간 문제가 있어. 
 …`…. 
 내일 한국에서 전화가  올 게 있거든.  꼭 
받아야 되는 중요한  전환데`…`…. 경훈은 
무심하게 듣고 있었다.
 전화 때문에 약속을 취소할 수도 없고`…
`…. 
 무슨 전환데? 
 장사와 관련된  일이야. 여기에  액세서리 
대리점을 내려고 하는데 한국에서 확인 전
화가 올 거거든. 자동 응답기  같은 걸로는 
안 돼. 꼭 전화 받는 사람이 있어야만 하는
데, 한국 전화라 미국 애들한테  부탁할 수
도 없고`…`….  …`…. 
인남은 곁눈으로 경훈의 얼굴을 슬쩍 넘겨
다보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을 이었
다.
 네가 좀 받아주지 않을래? 
 내가, 어떻게? 
 나한테 오는 전화를  네 번호로 자동으로 
연결되도록 해두면  네가 집에서  받을 수 
있잖아. 한국인이  전화해서  물으면, 나는 
나갔고 전화  받는 곳은  가게라고 하기만 
하면 돼. 내가 가게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
하는 단순한 전화니까.  저쪽과 내가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대화가  될 리   있겠어?  
단순한 확인 절차야. 그냥 가게라고 하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야. 좀 도와줘. 경훈은 잠
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알았어. 내일 어차피 집에서 하루 종일 서
류 좀 들여다볼 게  있던 참이니까 받아주
지 뭐.  그럼 이따 저녁때 네 번호로  돌려
놓을게. 
인남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경훈을 이렇게 
하찮은 자기의 일에 매어놓을  수 있어 무
척 기분이 좋았다. 
한밤의 전화
 때르르릉 때르르릉 때르르릉`…`…. 
경훈은 벌써 열 번도  넘게 울리는 전화를 
향해 짜증이 밴 손길을 뻗으며 무의식적으
로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언뜻 눈에 
스치는 바늘의 위치가 턱없이 낯설게 느껴
지자 그는 눈가를 찌푸리며 숫자판에 동공
의 초점을 맞췄다. 
새벽 2시.
분명 잘못 걸려온  전화일 것이다.  경훈은 
전화를 향해 내밀던 손길을 거둬들이며 베
개에 머리를 더 깊이 묻었다.
 때르르릉. 때르르릉. 
그러나 전화 벨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이
때 경훈의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인남의 전화.
 제기랄! 
다음 순간 경훈의 손은  급히 수화기를 움
켜쥐었다.
 여보세요? 
그러나 수화기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경훈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메마른 목줄기를 타고 나왔다.
 여보세요? 
상대편에서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경훈
은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베개 속으
로 머리를 묻은 지 2~3분이나 지났을까, 전
화기는 다시금 요란한 벨 소리를  냈다. 무
슨 전화가 이런 한밤중에 올까.  경훈은 뭔
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전화를 인
남과 연결시킬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의 
전화, 혹은 인남이  친구들과 어울려  취한 
채 장난 전화를 해대는지도 몰랐다. 경훈은 
화를 참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역시 대답이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려
던 경훈은 이미 귀를  떠난 수화기에서 마
치 모기가 앵앵거리는 것처럼 작은 소리를 
들었다. 그는 황급히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인`…`…`남`…`…. 
고통에 찬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흘러나
왔다.
 말씀하세요. 
 인`…`…`남`…`…. 
생명이 꺼져가는 듯한 노인의 가냘픈 목소
리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분명 위급한 중에
도 인남을 찾았다.
 지금 박인남 씨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경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상태에서 인남의 
이름만 반복해 불러댔다.
경훈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목소리의  느낌
으로 어쩌면 상대가 죽어가는 중일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
했다. 상대가 그런 상태라면 경훈은 자신이 
인남 대신 전화를 받아주어야 한다고 판단
했다.
 네, 인남입니다. 
상대는 남자 목소리인지  여자 목소리인지
도 가늠하지 못한 채 계속 횡설수설하더니, 
인남이라는 이름이 귀에  들어오자 정신이 
드는지 낮고 가는 목소리가 실낱같이 이어
졌다.
 나`…`… 제럴드 현`…`… 제럴드 현`…`…
`이야. 
 네,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러세요? 
들끓는 가래  때문에 잘  이어지지도 않는 
목소리는 듣기에도 음산했다. 경훈은  이것
이 노인의 본래 목소리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아직도`…`… 내가`…`… 살아 있
나?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살아 있느냐구요? 
 그`…`…`그래`…`… 추워`…`…  춥`…`…`
다. 
 무슨 일이 있으세요? 사고가 생겼나요? 
 아`…`… 출혈이`…`… 너무 심해,  출혈이
`…`…. 이젠  가망이 없어.  이제 곧`…`… 
이제 곧`…`…  죽을 거야.  너무도 싸늘한 
노인의 목소리에  경훈은 약간  남아 있던 
잠이 싹 달아났다.
 911 신고는 하셨나요? 
 아니야, 이미`…`… 너무  늦었어. 너무`…
`….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911 신고`…
`… 근데 거기가 어디죠?  그러나 이미 상
대방은 완전히 체념을 한 상태였다.
 아냐`…`… 안 돼. 소용이`…`… 소용이 없
어. 
 무슨 일입니까? 사고가 생겼나요? 
 다``…`… 터졌어.  피가`…`…` 내장이`…
`…. 
 그래도 구급차를 불러야죠. 어디세요? 
 아니, 늦었어`…`….  이제`…`… 5분도`…
`… 안 돼`…`…  죽을 거야`…`….  그런데 
내 말`…`… 내 말 잘 들어. 꼭`…`…  기억
을``…`…`기억을`…`….  말씀하지 말고 가
만히 계세요. 구급차를 부르겠어요. 거기가 
어딥니까? 이때 경훈은 수화기가 무엇엔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노인이 수
화기를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경훈은  망설
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전화를 끊
고 교환을 부르면 상대방의  주소를 알 수 
있을까, 아니면 수화기를 그대로 든  채 노
인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오기를 기다려
야 할까.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무런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경훈은 버튼을 누르려 했다. 
이때 모기만한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아까
보다 훨씬 힘겨운 목소리였다.
 바`…`…`바`…`…`박 대통령`…`…`  아`…
`…` 그`…`…` 비밀`…`… 10·26`…`…` 비
밀을`…`…` 비밀을`…`…`  내가`…`…` 비
밀`…`…` 인남`…`…  하`…`…`하`…`…`하
우스`…`… 으`…`…`으`…`…`헉. 노인이 다
시 수화기를 떨어뜨리기 직전에 들린 것은 
분명 숨이 넘어가는 소리였다. 경훈은 수화
기를 귀에 더 바싹  갖다 대고 기다렸지만 
10분이 지나도록 저쪽에서는  아무런 소리
도 들려오지 않았다.
경훈은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놨다.  가슴이 
쿵쿵 뛰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고, 그때마다 
머리의 실핏줄도 같이 흔들리며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경훈은 냉장고에서 찬 얼음물을 
꺼내 들이켰다. 하지만 갈증은 가시지 않았
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어떻게 된 일인가. 
갈피를 잡지 못하던 경훈의 뇌리에 어쩌면 
이것은 인남의 장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처음부터 인남의 요구는 무리한 것
이었다. 자기는 놀러 가니 한국에서  올 전
화를 받아달라는 것부터 수상하기 짝이 없
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경훈은  고개를 가로 저
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노인의  목소리
가 너무나 절박했다. 이 늦은  밤에 한국인 
노인을 미리 대기시켰다가  어떤 연극배우
도 흉내내지 못할 죽음의 목소리를 들려준
다? 아무리 장난이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장난이라면 그냥 끝날 일이지만 만약 그렇
지 않다면`…`…. 
경훈은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든 
간에 지금은 일단 빨리  신고부터 해야 한
다. 경훈은 물컵을 내려놓고 수화기를 들었
다.
 교환, 지금 이리로 걸려온 전화 번호를 확
인해 주세요.  주소가  필요합니다. 저쪽에 
응급을 요하는 급한 환자가 있습니다.  911
에 신고해 주세요. 전화를 끊은  후에도 경
훈의 가슴은 쿵쾅쿵쾅  뛰었다. 혹시  전화 
벨이 울릴지 몰라 방안을 서성이며 한참을 
기다렸다. 그리고 긴장으로 지쳐 먼동이 틀 
무렵에야 스카치 몇 잔을  마시고 겨우 잠
이 들었다.
10·26의 비밀
점심 무렵 잠을 깬  경훈은 인남이 얘기한 
한국으로부터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는 사
실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한 번 모든 것이 
인남의 장난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무리 
장난이라도 그런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경훈은 인남에게 전화를 해봐야 자신의 전
화로 다시 연결될 테니 그녀로부터 전화가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인남에게서
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전화가 왔다.
 경훈아, 전화 왔었니? 
 …`…. 
 왜 그래? 기분 나쁜 일 있었니? 
경훈은 전화로 얘기할 상황이 아니어서 바
로 뛰어나가 시내의 한국 음식점에서 인남
을 만났다. 인남은 경훈의 표정이 심각하게 
얽혀 있는 것을 보자 불안해졌다.
 너 제럴드 현이란 사람 아니? 
 제럴드 현? 
 그래. 
 아니, 모르겠는데. 
경훈은 인남의 대답에 놀라지  않을 수 없
었다. 죽기 직전에 전화를 걸어올 정도라면 
보통 사이가 아니었을 텐데.
 널 알던데. 노인 목소리였어. 
경훈의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보자 인남
은 깊이 생각에 잠겼다.
 아, 참, 그래. 그렇구나. 그분의 미국 이름
이 제리 현이었어. 현 선생님, 바로 그분이
구나. 경훈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인남의 
입가를 응시했다.
 가끔 통화를 하곤  하는 분이야. 근데  왜 
그래? 그분한테 전화 왔었니?  응. 그런데 
어떤 사람이지? 
인남은 가슴 아린 기억이라도 있는지 표정
이 어둡게 변했다.
 왠지 모르게  처음부터  연민이 느껴지던 
노인이었어. 무척  쓸쓸해  보이셨지. 짧은 
순간 인남의 머리에 처음  그 노인을 만났
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꽤  오래 전, 인
남이 아르바이트하던  한국 식당에  온 그 
노인은 먹성 좋게 서너  가지 안주와 소주 
세 병을 비웠다. 그러고 나서는  인남을 불
러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식대가 없다
고 했다.
인남은 처음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지만 
육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 노인의 말투와 
행동에 왠지 모르게 끌렸다. 노인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결코 비굴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인이 나와 호되게 몰아치려는 순간 인남
은 자신이 대신 돈을  내겠다고 해서 노인
을 곱게 돌려보냈다.  뿐만 아니라  택시를 
불러 기사에게 집까지 잘 모셔다 드리라고 
부탁하고 요금도 치러주었다. 
그런데도 노인은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
의 비굴한 표정이나 인사치레가 없었다. 다
음에 와서 갚겠다는 말  한마디 없이 떠나
는 노인을, 주인은 경멸에 찬  눈초리로 쏘
아보았지만 인남은 왜 그런지 마음이 갔다. 
그후로 그 노인은  식당에 자주  나타났다. 
전처럼 돈을  내지 않는  경우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인남이 앞서 대신 내주었던 돈을 
갚지도 않았다. 적지 않은 돈이었으나 인남
도 달라고는 하지 않았다.
 표정이 무척 쓸쓸해 보이셨어. 하지만  어
딘지 모르게 기품이 있는 분이셨지.  그 사
람이 네 집 전화 번호는 어떻게 알지?  내
가 적어드렸어. 식당에 이따금 오시기에 여
쭤봤더니 혼자 사신댔어. 어쩐지 안돼 보여
서 외로우실 때  연락하라고 했지.  그후로 
가끔 전화를 하곤  하셨어. 그런데  도대체 
왜 그래? 뜬금없이 그분은  왜 물어? 경훈
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인남은 소스라
치게 놀랐다.
 그래? 그분이 전화를 하셨단  말이지? 그
것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경훈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남  역시 
비감한 얼굴로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
였다. 인남은 그 외로워 보이던  노인이 죽
기 직전에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는 사
실의 무게를 깊이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현 선생님이 정말 돌아가셨을까? 
 아마 그럴 거야. 
 혹시 모르니까 한번 확인해 볼래.  교환이 
911로 신고했댔지?  …`…. 
인남은 미련이 남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전
화를 걸러 갔다. 잠시 후 돌아온 인남의 눈
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정말 돌아가셨대.  어디 연락할  연고자도 
없어`…`…. 인남은 말 끝을 흐렸다.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나마 가끔 전화하셔서  나하고 얘기 나
누시는 것이 그분의 유일한 낙이었는데. 인
남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경훈은 
그 모습을 보며 기분이 미묘해졌다. 그다지 
특별한 관계도  아닌 노인의  죽음에 눈물 
흘리는 인남의 심성에 잔잔한 감동을 받았
다. 아까 그녀가 외로울 때  연락하라고 노
인에게 전화 번호를 적어주었다고 했을 때
는 적잖이  놀랍고 이상하기도  했던 것이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인남에게는 경훈 자
신이 가지지 못한, 세상을 향한  열린 마음
이 있는 것이다.
 진정해. 
경훈은 인남을 위로했다.
 그분은 불행하셨나 봐. 가끔 당신의  얘기
를 들려주셨는데   조울증으로 고생했다고 
하셨어.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통원 치료도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말
끔히 나았다고 하셨는데`…`….  가족은? 
 부인과는 사십대 초반에  이혼한 후로 보
지 못하셨대. 자식은  없고, 부인은 재혼했
다는 것 같았어. 이미 20년  넘게 만나보지 
못하셨대.  말년을 외롭게 보냈구나. 
 어쩌면 조울증도 그런 외로움에서 비롯되
었을지 몰라.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간이라도 현 선생님의 외로움을 덜어
드리려고 내 전화 번호를 일러드렸어. 낯선 
외국 땅에서  얘기 나눌  사람인들 제대로 
있으셨겠어. 인남은 노인의 외로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지만 경훈은  그보다 인남의 
착한 마음이 가슴에 와닿았다. 생김새는 시
원했지만 공부는 못했던 기억 속의 인남이 
이렇듯 갸륵한  마음씨를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경훈은 세상을 보는 자신의 시각이 
우등생과 열등생으로 너무  이분화되어 있
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하던 사람이었어? 
 당신 말씀으로는  은퇴하기  전에는 일반 
회사에 다니던 평범한  사람이었다는데 그
런 것 같지는 않아.  어째서? 
 연금을 받고 계셨는데 일반 사회보장연금
은 아닌 것 같았거든. 
게다가 그다지 돈이 궁한 모습도 아니었어. 
오히려 내키는 대로 쓰시는 편이었어.   무
슨 소리야? 소주 마시고 돈이 없어서 네가 
대신 내드렸다고 했잖아.  참, 그게 말이야, 
아주 우스운 일이었어. 언젠가 전화해서 고
백하시기를, 그때 돈이 없다고 한  것은 순
전히 장난이었다는 거야. 무척  외로우셨던
데다가 내 인상도 마음에 들고  해서, 한번 
그래 보셨던 거래. 돈이 없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셨대나. 경훈은  웃음
을 머금었다.
 틀림없이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던 분은 
아니셨어. 이따금씩 어딘지 모르게  오만한 
표정과 자신감을 내비치곤 하셨는데,  그것
은 무언가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
에게서만 볼 수 있는 표정이었어.  나는 그 
표정을 보고 ‘지금은  이렇게 퇴락했지만 
예전에는 보통   분이 아니었겠구나’라고 
생각했어. 인남은 말을 하면서 자신의 생각
을 더욱 굳혔다. 오랜 세월을  조울증에 시
달려 그 흔적이 많이  지워지긴 했지만 분
명 그 표정은 세상의 어느 한 부분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만의 것이
었다. 아마 처음 보았을 때에  느꼈던 연민
도 그 흔적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분은 결코 쓸데없는 
말씀을 하실 분은 아니야.  그렇겠지. 죽기 
직전에 전화를 걸어 거짓말할 사람은 없으
니까. 특히 너와 그 사람의  관계를 본다면 
더 그렇지.  나와 그분의  관계가 어떤 건
데? 
인남은 눈가를 훔치며 경훈의 입가를 빤히 
쳐다보았다.
 별 사이가 아니란 뜻이야. 
 …`…. 
인남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슨 생각이라
도 났는지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경훈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 
 어쩌면 그분에게는 내가  가장 가까운 동
무가 아니었을까?  글쎄`…`…. 
 내가 유일한 친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들어. 언젠가 그분은 아무도  안 만난다
고 말씀하셨거든. 게다가 조울증이라는  병
이 나았다  해도 사람  만나기를 즐기셨을 
것 같지는 않아.  그럴 수도  있겠지. 어쨌
든 그 사람은 네게 그  말을 하고 싶어 전
화했던 거야.  그분이 남기신 말을 다시 한 
번 그대로 해봐. 
경훈은 제럴드 현이 남긴  말을 그대로 전
했다.
 그게 무슨 뜻일까? 
 일단 그것은  제럴드 현이라는  사람이 1
0·26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뜻으로 해
석돼. 그리고 그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한 
것인지도 몰라. 인남은 미간을 좁혔다.
 10·26이라면 김재규  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사건 아니니?  그래, 김재
규가 경호실장과 대통령을  살해한 엄청난 
사건이지.  그런데 현 선생님은 왜  갑자기 
20년이나 지난 사건에 비밀이 있다며 밝히
려 하셨을까? 경훈도 인남을  따라 이맛살
을 찌푸렸다.
 ‘하우스’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숨이 넘어가는 상황이었지만  제럴드 현은 
비교적 명확하게 자신의 뜻을 전화를 통해 
전달한 것이다. 그러나  경훈과 인남은  그 
하우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한참이나 생각하던 인남이 여전
히 복잡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나름대로
의 짐작을 조심스럽게 내놨다.
 청와대와 얽힌 어떤  비밀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청와대를 영어로 블루 하우스라고 
하잖아. 여기서는 늘 영어를 쓰셨으니까 청
와대를 하우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경훈은 대답  없이 무심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러나 인남의 추리가 재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켜 보
아도 하우스와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은 역
시 청와대뿐이었다. 인남은 의외로  순발력
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무슨 얘기인지 도저히 알아
낼 수 없어. 그런데 하우스라는  말보다 더 
심각한 말이 있어.  그래? 그게 뭐지? 경훈
은 의아해하는 인남의 표정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저히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어. ‘박 
대통령, 그  비밀을’이라니,  ‘10·26 비
밀’이라니? 그  사람 얘기로는   10·26에 
얽힌 비밀이 있다는  것 같은데,  이상하잖
아. 10·26에 도대체 무슨 비밀이  남아 있
다는 거야? 인남도 물론 짐작할 수 없었다. 
경훈이 오래도록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오
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던  인남은 갑자기 
답답해졌다. 저렇게 생각한다고 얻을 수 있
는 것이 무엇인가. 무슨 일이든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인남의 철학이었다.
인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럴 게 아니라 가봐야겠어. 
 어디를? 
 어디긴, 병원이지. 가서 왜  돌아가셨는지, 
연고자에게 연락은  됐는지  알아봐야겠어. 
인남은 응급 구조 센터에  전화를 걸어 병
원을 확인했다. 메트로폴리탄 하스피틀이었
다. 
경훈은 서둘러 나서는 인남을 마뜩찮은 표
정으로 따라나섰다.
연고자 
병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
다. 구급차가 제럴드  현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사인이 뭐죠? 
 위정맥 출혈로 인한 쇼크사입니다. 
 위정맥 출혈은 왜 일어났는데요? 
 술이죠. 벌써 열 번도 더 터졌던  걸 때워
왔던데요.  세상에, 가엾어라! 지나친 음주 
때문에 그렇게 되셨단 말이죠?  그래요. 
단 세 마디로 제럴드  현의 죽음은 설명되
었다.
 연고자는 없습니까? 
 그런 건 원무과에 가서 물어보세요. 
경훈과 인남이 원무과에서 담당 직원을 찾
아 연고자에게 연락은 했는지 여부를 묻자, 
오히려 그  직원이 두  사람에게 신문하듯 
되물었다.
 사망자와 어떤 사이신가요? 
 아니, 특별한 사이는 아닙니다. 
경훈이 서둘러 대답했다.
 혹시 연고자를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다. 
경훈이 냉정하게 대답하는 것을 옆에서 우
두커니 지켜보던 인남이 불쑥 끼여들었다.
 지금 연고자가 없나요? 
담당 직원은 인남을 훑어보며 대답했다.
 그래요, 아무데도 연락할 곳이 없어요. 
 저를 연고자로 기입해 주세요. 그분은  아
마 연고자가 없을지 몰라요. 저라도 장례식
을 지켜보아야 할 거예요.  사망자와는  어
떤 관계입니까? 
 아무런 관계도`…`…. 
 그럼 안 됩니다. 
 연고자가 되려면 꼭  무슨 관계라야 하나
요? 
 가족이나 친척, 혹은 오랜 친구. 
 바로 그거예요. 친구, 제가 그분의 유일한 
친구였어요. 담당 직원은 잠시 인남의 얼굴
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서류를  한 장 내
주었다.
 빈칸에 기입하고 서명하세요. 
서류에는 ‘별도의 법적 서류  없이 이 신
고서만으로는 어떤 법적인  관계도 성립하
지 않는다’라고 씌어 있었다.
 이런 게 왜  여기 씌어 있지?  무슨 의미
야? 
인남이 서류를 들이밀며  쳐다보자 경훈은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경훈은 인남의 이런 돌발적인 행동이 마음
에 들지 않았다.
 이 서류만으로는 상속  등의 법적인 관계
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인남은 꼼꼼
히 읽어보지도 않고 서류를 작성하고는 서
명했다.
 연고자로서 상속과는 상관없이 공식적 비
용 외의 사적 비용을  부담할 용의가 있습
니까?  그게 무슨 뜻이에요?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사적 비용을 부
담하는 사람이 있다면 처리가 아무래도 좀 
부드럽단 뜻이지요.  장례는요? 
 장례는 치를 사람이  없으면 시에서 대신 
해줍니다만 아무래도  빈약하죠.  연고자가 
있으면 자비로 장례를 치릅니다.  제가  장
례비를 부담할 테니 장의사나 소개해 주세
요.  그럼요, 그게 낫습니다. 아무런 연고자
도 없이 혼자 쓸쓸히 죽는다는 건 이 세상
에서 가장 슬픈 일이죠. 담당  직원은 인남
이 장의사를 소개해 달라고  하자 뭐가 그
렇게 좋은지 신나는 표정으로 전화 번호를 
일러줬다.
 이 회사는 우리하고  협조가 잘되니까 모
든 것을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겁니다. 담당 
직원의 인사를 뒤로 하고  병원 문을 나서
면서 경훈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쉽게  연고자를 자처하고 나
설 만한 관계야?  아니. 
인남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 쓸쓸하던  얼굴을 잊어버릴 수
가 없어. 아무런  연고자도 없다는  사실은 
더 견딜 수가 없고. 경훈은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그만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무얼 하지? 
 집으로 가보자. 
경훈은 여전히  무거운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대답했다.
 집? 제럴드 현 선생님의 집 말이야? 
 그래. 
 참, 그래야겠네. 이혼한 부인에 대한 무슨 
기록이라도 있을지 모르니까. 
제럴드 현의 집은 보스턴대학 부근의 분위
기 좋은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머, 집이 꽤 크네. 
 정말 혼자 살기에는 너무 크군. 
경훈은 자동차를 현관 앞에  바로 갖다 댔
다. 어둠이 짙게 깔렸지만 불은  켜져 있지 
않았다. 문은 잠겨 있었다.
 이상하군, 아무 연고자도 없는데 누가  문
을 잠갔을까?  이웃집에서 잠그지  않았을
까? 
 확인해 봐야겠어. 
그러나 이웃집의 벨을 누르자 나타난 사십
대 남자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깊은 밤에 구급차가 와  사람을 실어간 사
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인남은 이웃 남자에
게 애원하듯 부탁했다.
 장례식에 와줄 사람이 없어서 그러는데요, 
동네 사람들에게 좀 알려주시겠어요? 이웃 
남자는 인남을 훑어보면서  냉담하게 대답
했다.
 교회에는 안  나가던  분이지만 목사님께 
연락하겠소. 
경훈은 인남을 집 앞의 거리에 내려줬다.
 차 한잔하고 갈래? 
 그러고 싶지만 오늘은 그냥 갈게. 
 장례식에 올 거야? 
 글쎄, 장례식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내일부터는 바쁘거든. 
경훈이 다소  무관심한 듯  말하자 인남은 
입을 비쭉거리다가 홱 돌아서서 집으로 들
어가 버렸다. 
집에 돌아온 경훈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
겼다. 
어젯밤의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
가. 
죽음의 순간에 전화를 걸어와 마지막 한마
디를 비명처럼 남기고 갔다면 그 한마디가 
결코 거짓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경훈의 
머리를 무겁게 짓눌러왔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죽음을 확신하는 순간
에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일부러 전화를 걸어서까지,  더군다
나 특별한 관계도  아닌 인남에게  말이다. 
비록 그 노인이 외로워서  인남과 가끔 통
화를 했다  하더라도 그녀가  그와 아무런 
손익 관계가 없다는 사실은 그의 진실성이 
더욱 강조되는 부분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
면? 그  말이 진실이라면?  그러나 경훈은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10·26에  무슨 
비밀이 있다는 말인가. 
김재규 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
철 경호실장을 쏘아 죽인  그 사건으로 말
미암아 한반도의 역사는  급격히 몸부림치
기 시작했지만, 사건 자체야 너무도 명명백
백하게 밝혀지지 않았던가. 한국뿐만  아니
라 미국, 일본,  아니 전세계에  그 사건의 
진상은 하나도 숨김없이  드러나지 않았던
가. 그런 10·26에 도대체 무슨  비밀이 있
다는 얘긴가. 
경훈은 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의 수사는 온 국민이 똑바로 지켜보았
다. 제럴드 현은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의 수
사가 조작되었다고 얘기하는 것일까? 그건 
더욱 불가능한 얘기였다.
 누가 그 시점에서 수사를 조작할 수 있었
단 말인가. 결국은 한 노인의 헛소리, 혹은 
인생의 벼랑에 선 정신병자의 독백일 수밖
에 없다고 생각하며 경훈은 미간을 찌푸렸
다. 하필 자신이  그 순간에,  그런 독백을 
듣다니. 
경훈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잊어야만  하는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기억에서  지워버려야만  하는 
불쾌한 주말이었다. 경훈은 일찌감치  자리
에 들어 잠을 청했다. 자고 나면 모든 것이 
잊혀지리라. 
하지만 이상하게도 잊으려  할수록 노인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귓전을  울려왔다. 
그 가쁜 숨소리와 더불어  토씨 하나 틀리
지 않고 전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한마디 
한마디를 떠올리던 경훈은  온몸이 떨려오
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자리에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 죽는 순간에 일부러 그런  전화를 걸
어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더구나 노인의 
의식은 남자의 목소린지  여자의 목소린지
조차 구분을 못하지  않았던가. 그는  죽기 
직전에 전력을 다해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
다. 만약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경훈은 자
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안을 서성거렸다.
과연 10·26의 진실은 무엇인가? 표면으로 
드러난 사실과는 다른 진실이 은폐되어 있
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한 노인의 헛소
리에 불과한가?  곰곰이 생각하던   경훈은 
일단 제럴드 현의  내력을 알아봐야겠다고 
결론지었다. 나머지는 그 다음에  생각해도 
충분했다. 제럴드 현이 무엇을 하던 사람인
가를 알면  그가 토해낸  말들의 신빙성이 
가려질 것이다. 경훈은 이렇게 생각을 정리
하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뜻밖의 유산
제럴드 현의 장례식은 초라했다.
 주님이시여, 여기  외롭고 가련한  영혼이 
주님의 곁으로 가나이다. 비록 그의 인생이 
힘들고 외로운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제 그
는 모든 고통을 접고  주님의 곁으로 가나
이다. 부디 이  불쌍한 영혼을 받아주소서. 
목사의 추도사는 지극히  짧고 형식적이었
다.
경훈은 인남이 검정  드레스까지 차려입고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어내는 것을 보자 마
음이 움직였다. 마치 상주인 양, 서둘러 떠
나가는 몇몇 동네 사람과 목사에게까지 인
사를 차리던  인남은 경훈을  보자 눈가에 
얼룩진 눈물 자국을 닦으면서 반가운 미소
를 지었다.
 경훈이 와주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켰는지 이내 얼굴이 밝아졌다. 
경훈은 인남을 위로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난 뒤  묘 앞에 섰다.  떠나는 
사람에게 묵념만 하는 것은 어딘지 아쉬웠
다. 
이 세상에서 그와 마지막으로 대화한 사람
으로서 무게를 느꼈기 때문이다. 경훈은 무
릎을 꿇고 절을 했다. 몸을  구부리고 머리
를 숙이자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리고 가슴 
한편에서 자신도 모르게 노인에 대한 약속
의 말이 흘러나왔다.
‘편안히 가십시오. 마지막 순간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었다면 얼마나 가슴에 맺혀 있
었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한 당신의 한
을 풀어드리겠습니다.’경훈이 몸을 일으켜
세우자 인남이 뒤이어  절을 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인남
은 다시 한 번 노인의 묘에 묵념을 올리고
는 주차장으로 걸어  내려오며 무의식중에 
경훈의 팔을 잡았다. 누군가를 저 세상으로 
보냈다는 허전함과 단둘이 그 의식을 치렀
다는 동질감이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자아
냈다. 
주차장에 이르자 인남이  경훈에게 묘지에
서부터 뒤를 따라오던  사나이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속삭였다.
 경훈아, 아까부터 저 사람이 나를  지켜보
고 있는 것 같던데 기분이 좋지 않다.  음, 
나도 느끼고 있었어. 하지만 나쁜  사람 같
지는 않은데.  어머, 저 사람  이제 우리에
게 다가오고 있잖아. 
과연 묘지에서부터 인남을  뚫어지게 바라
보던 사나이가 묘한 웃음을  띠며 두 사람
에게로 다가왔다.
 안녕하시오. 박인남 씨 맞지요? 
 예. 
 나는 윌리엄이오. 윌리라고 불러도 좋소. 
검정색 양복을 점잖게 차려입은 사십대 중
반의 사나이는 인남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런데 누구시죠? 
 변호사요. 제럴드 현 씨의 유언을  집행하
기로 계약을 맺었소.  
네, 유언이오? 
 그렇소. 
 아니, 현  선생님은 갑작스러운  쇼크사로 
돌아가셔서 유언을 하실 여유가 없었을 텐
데요?  사전에 유언을 해두셨소. 열흘 전에 
나를 찾아오셨소.  어머, 그럼 현 선생님은 
건강이 급속히 나빠지는 것을 진작에 알고 
계셨던 모양이네요.  다시 위정맥에 출혈이 
있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계셨소.  하지만 
도저히 술은 끊지 못한다고 하셨소. 마시다
가 죽겠노라고. 인남은 얼굴을 찡그렸다.
 아마 가족이 없어  의지가 그만큼 약해지
셨을지도 몰라요. 변호사는 인남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관찰이라도 하겠다는 듯 얼굴
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깜짝 놀랄 만한 얘
기를 전했다.
 제럴드 현 씨는  인남 씨에게  전 재산을 
남기셨소. 
 뭐라고요? 
 유산을 모두 인남 씨에게 주라고  하셨소. 
여기 유언장 사본이 있소. 인남은 유언장을 
받아들고 한참 읽어보다가  갑자기 소리쳤
다.
 안 돼요, 이럴 수는  없어요. 나는 그분의 
유산을 받을 수가 없어요.  네? 
 받을 권리가 없다고요. 아무런 연고가  없
단 말이에요. 변호사의  입가에 다시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뜻밖이군요, 모두가 횡재라 생각하고 덥석 
받을 텐데. 연고가  없다고요? 그럼 왜  이 
장례식에 검정 드레스를 입고 장례비를 부
담하는 거죠?  외로우셨던 그분한테  아무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나
섰을 뿐이에요. 그분에게는 이혼한  부인이 
계세요.  알고 있소. 하지만 그분은 유산을 
모두 인남 씨에게 남기셨소.
 부인에게는 이혼할 때 일시불로 합의금을 
지불하셨소. 어쨌든 나에게 못 받겠다고 얘
기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소.  나는 변호
사로서 유언대로 집행할 의무가 있소. 인남
은 경훈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
을 보이지 않았다. 경훈은 인남의  유산 상
속보다 오히려 제럴드 현의  내력을 알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는 사실에 관심이 끌리
는 눈치였다. 그는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끊어지자 변호사에게 물었다.
 제럴드 현 씨에 대해 잘 아십니까? 
 아니오. 열흘 전에 찾아오셨을 때 처음 뵈
었소. 
 그 사람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있었
을까요? 
 글쎄요, 그건 모르겠소. 하지만 아까도 얘
기했지만 머잖아 돌아가실  걸 예감하셨던 
것 같소.  유산 이외에 다른 얘기는 없었습
니까? 
 없었소. 
 유산은 모두 얼마입니까? 
 살던 주택을 빼곤 모두 현금이오.  현금만 
180만 달러요. 여기서 상속세와 몇 가지 사
소한 지불금만 빼면  되오. 인남은  놀라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 하느님. 안 됩니다, 안  돼요. 이건 뭐
가 잘못됐어요. 제가 그런 돈을 받을 순 없
습니다. 제 것이  아니에요. 변호사는 입가
에 미소를  지으며 인남의  놀라는 표정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경훈은 여전히 변호
사를 주시하며 물었다.
 그는 무엇을 하던 사람인가요? 
 그런 얘기는 나누지 않았소. 고객이  얘기
하지 않는 것은 묻지 않는 것이 내 원칙이
죠. 경훈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쳐갔다.
 유언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나의 의무는 
아니잖소. 변호사는 무심한 표정으로  인남
에게 편한 시간을 택해 사무실로 나와달라
고 요청했다.
 잠깐, 그런데 그 집의 열쇠는 누가 가지고 
있죠? 
경훈은 돌아서는 변호사에게 급히 물었다.
 열쇠는 내가  가지고 있소.  구급대원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갔기 때문에 내가 다음날 
아침 사람을 불러 바로 수리했소.   그런데 
제럴드 현 씨가 사망한  것은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아, 매일 오전 10시에 내가  전
화를 걸기로 약속했소. 안 받으면  무슨 일
이 있는지 확인하기로 했던 거요.   그랬군
요. 
제럴드 현이 사망한 것은 일요일 새벽이라 
변호사는 곧장 그의  집으로 갔던  것이다. 
경훈은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쇠를 줄 수 있나요? 
 안 되오, 당신에게는. 인남 씨가 요구하면 
줄 수 있지만.  변호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인남이 열쇠를 달라고 하면  그것은 곧 상
속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
 네, 그럼 제게 주세요. 
인남은 열쇠를 받아 바로 경훈에게 건넸다. 
경훈의 입장을 배려하려는 의도였다.  변호
사는 무슨 의미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며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가보자. 
 잠깐, 옷이라도 갈아입고. 
인남은 검정 드레스가 거추장스러운 듯 어
색한 몸짓으로 주춤거렸다.
 그런데 그 검정  드레스는 어디서  난 거
야? 
인남의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떠올
랐다.
 장의사에서 빌렸어.  검정 드레스는  입을 
일이 없어서`…`…. 아예 그 장의사에 가서 
갈아입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 
최상급 비밀 보호자
제럴드 현의 집은 큰  규모와는 달리 내부
가 매우 검소했다. 어느 집에나 몇 개쯤 걸
려 있을 법한 싸구려  그림조차 없는 하얀 
벽이 오히려 깔끔한 장식이었다.
 그렇게 많은 유산을 남긴 분이 이처럼 검
소하게 사셨다니`…`….
 인남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책상 서랍을 찾아봐. 뭔가 인적 사항이 나
오겠지. 
경훈은 인남과는 별도로 책장과 옷장 등을 
샅샅이 훑었다.
몇 시간 동안을 찾았지만  제럴드 현의 내
력을 얘기해 줄 신분증이나 면허증, 사회보
장 카드는 물론 보험 카드 하나 나오지 않
았다.
 경훈은 얼굴을 찌푸리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걸. 아무리  이혼하
셨다 해도 어쩌면 이렇게  전 부인의 사진 
한 장조차 없을까? 몇 번이나 책상 서랍을 
부지런히 뒤지던 인남이 고개를 가로 저었
다.
 인남아,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야. 뭔가 
이상해.  우연이 아니란 건 무슨 얘기야? 
 보통 사람이라면 이처럼 철저하게 사진이
나 기록이 없을 수는 없어.  인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럴드 현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을
까? 
 짐작조차 할 수 없어. 하지만 한  가지 분
명한 것은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른 분야
에서 살아왔을 거라는 점이야. 이렇게 돈이 
많은 사람이 사업상의 명함  한 장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설명이 되질  않아. 증권
이나 투자 관계 서류도  한 장 없고`…`…. 
이때 경훈의 머릿속을 번개같이 스치고 지
나가는 것이 있었다.
 너 저번에 연금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니? 
경훈의 날카로운 표정에 놀란 인남이 엉겁
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연금을 받으신다고 했어. 
 그렇다면 연금을  수령하던  통장이 있을 
것 아냐. 연금  증서와 번호도  있을 거구.   
그렇네. 하지만 지금 이 집에서는  연금 증
서를 찾을 수 없잖아. 왜 그럴까?  그런 걸 
딴 데다 보관하실 리도 없을 텐데.  어쨌든 
그걸 추적하면  제럴드 현이  무슨 연금을 
받았는지,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알  수 있
어.  연금 증서를 찾을  수 없는데 어떻게 
추적한다는 거니?  유산이 있잖아. 유산 통
장으로 추적하는 거야. 은행에 가서 통장을 
정리하면 되지. 이제 통장은 네  거니까 얼
마든지 정리해 달라고 할 수 있어.  아, 그
렇구나. 그 통장에  연금을 보내는  기관이 
기록되어 있겠구나. 역시  너는 머리가  좋
아. 그러면 먼저  변호사 사무실로  가야겠
네.  그래, 가서 연금을 보낸  기관의 이름
을 찾으면 내게 전화해  줘.  왜? 같이 안 
가고? 
 응, 회사에 일이 있어. 
 알았어. 
경훈이 회사에서 소송 관계 서류를 훑어보
고 있을 때 인남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경훈, 너는 역시 머리 하나는  알아줘야 
해. 
 무슨 소리야? 
 나왔어. 연금이 나오는 기관 말이야. 
 어디지? 
 공무원 연금관리공단이야. 
 공무원이라구? 
 그래. 
 연금 번호는? 
 그런 건 안 나와 있어. 
 연금 번호가 없을 리가  있나? 번호가 아
니라면 무슨 다른 표식이라도 있겠지.   아
냐, 아무것도 없는데. 
 다시 한 번 잘 살펴봐. 
 아니야, 정말 없어. 없다니까. 
 알았어. 내가 알아보지. 수고했어. 
 어머, 그냥 끊을 거야? 
 왜, 더 할말 있어? 
 지금 나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상속 때문에? 
 그래. 분명 내가 받을 돈이 아니야. 
 일단 받아둬. 네 말대로 네가 그분의 유일
한 친구이자 연고자니까.  그래도`…`…. 
 자, 그럼 또 연락하자. 
경훈은 전화를 끊고는 바로 비서를 불렀다.
 공무원 연금관리공단에 연락해서 이 사람
의 연금 종류와 수령액을 알아봐  줘요. 비
서는 늘씬한 허리와 금발을 흔들며 경훈의 
방을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흔들
며 돌아왔다.
 블랙이에요. 
 어느 정도요? 
비서는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최상
급 비밀 보호자라는  뜻이었다. 그  정도면 
공단과 아주  잘 통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알아낼 수 없었다. 미국 정부에서는 연금을 
지불하는 사람들의 인적 사항을 단계를 나
누어 보호하고 있었다.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제럴드 현은 역시 예상했던 대
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집에 인적 
사항을 알 수 있는 종이  한 조각 없던 것
도 이해가 갔다. 그는 철저하게  과거를 숨
기고 살았던 것이다.
 알았어요. 수고했어요. 
비서는 애교 있는  미소를 지으며  나갔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경훈은 인터폰을 
눌렀다.
 케렌스키 대표 자리에 계십니까? 
 네. 
 지금 올라가도 되는지 여쭤보세요. 
비서는 잠시 후 대답했다.
 기다리시겠답니다. 
경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윗도리를 챙겨입
고 건물 맨 꼭대기에  있는 케렌스키의 방
으로 갔다. 비서는  경훈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즉각 문을 열었다. 붉은  카펫이 깔
린 비서의 방은 웬만한  신입 변호사의 방
과는 비교도 안 되게 화려했다.
비서를 세  사람이나 쓰고  있는 케렌스키 
대표는 마치 자본주의의 화신 같은 인물이
었다. 직원들 사이에서 세상에 아무것도 부
러울 게 없는 사람을 들라면 바로 그를 뽑
겠다는 얘기가 돌 만큼  그는 모든 변호사
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케렌스키는 전 미
국을 뒤흔든 수많은 사건들을 끌어왔고, 일
단 맡은  사건이라면 승소하지  못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 변호사, 어서 오시오. 하버드대학 교수
들로부터 당신이 이제껏  봐오던 변호사들
과는 다르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이 정
도일 줄은 몰랐소.  한마디로 당신은  천재
요, 천재. 연수 기간이 끝나도 부디 한국으
로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나와 함께 일합
시다.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소.  고마운 말
씀입니다. 
 이제 그 허드슨 일렉트로닉 건은 끝난 거
나 마찬가지요. 이 변호사가 파헤친 그들의 
탈법 메커니즘을 재판부가 전부  인정했소. 
세상에, 어쩌면 그런  엄청난 비밀을  손금 
보듯 낱낱이 파헤칠 수 있었소? 내일 저녁 
우리 집에서 이 변호사를  위한 파티를 열
겠소. 
케렌스키는 경훈을   보자마자 칭찬하기에 
바빴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드릴  것
이 있습니다.  뭐요? 내  힘이 닿는 한 다 
해드리지. 
 이 사람의 인적 사항을 좀 알아봐 주십시
오. 정부에서 연금을 받는데 그  신분이 블
랙 3입니다.  블랙 3라`…`…  그렇다면 최
상급 비밀 보호자라는  뜻인데.  그렇습니
다. 
케렌스키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결단을 내렸다는 듯이 힘주
어 말했다.
 보스턴에 있는 그  누가 부탁을 해왔어도 
나는 거절했을 거요.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변호사가 부탁하는 일이니 반드시 
들어주고 싶소. 시간을  주시오, 안전한 루
트를 통해야 하니까. 내일 정오까지 알아봐 
주겠소.  고맙습니다. 
경훈은 회심의 미소를 애써 감추었다.
 그건 그렇고, 내일  저녁 파티 잊지  마시
오. 
 알겠습니다. 
케렌스키는 자리에서 힘차게  일어나 문을 
열어주면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경훈을 향해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과장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케렌스키
다음날 점심 무렵, 케렌스키는 경훈을 불러 
한 통의 봉투를  건넸다. 봉투는  테이프로 
단단히 밀봉되어 있었다.
 워싱턴에서 방금 도착한 거요. 아무도  보
지 못했소. 보스턴에선  오직 이  변호사만 
이 봉투를 뜯어볼 자격이 있소. 케렌스키는 
오만과 과장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경훈은 봉투를 받아 방으로 내려왔다. 그리
고 과연 이 사람의  정체가 무얼까 긴장된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다.
성국명 : Gerld Kngil Hyun
한국명 : 현강일
가국명 : `GH, 제럴드 현
생년월일 : 1930. 10. 14
직년월업 : (전) 미국방성 정보·공작 전문 
요원 
학년월력 1945. 3 서울 일신국민학교 졸업
1945. 4 보성중학교 입학
1951. 6 보성중학교 6년제 졸업
1951. 12 고려대학교 영문과 입학
1952. 3 국립서울대 문리과대학 영문과 2학
년 편입
1953. 미국 워싱턴주립대학 정치학과 전학. 
교환 유학
1955. 미국방성 언어대학원 교수(한국학)
1956. 미육군 소집, 교수 자격 2년 간 징집 
연기
1957. 11 미육군 소집, 입대
1958. 미국  태평양사령부  첩보정찰사령부 
소속  
일본 도쿄 신주쿠 지구  미육군 대위 현지 
임관
1959. 문관 자격  미태평양사 첩보사  극동 
지역  
한국 담당. 국내  정치·군사책(도쿄, 서울 
근무)
1960. 한국 육군 HID부대 미육군  고문 겸

1961. 미육군 8군사 G2 전적
1963. 한국 주둔 유엔군 총사령관 특별고문
관실
1972. 한미 관계  미의회 특별조사위  출두
(워싱턴 D.C.), 국제  관계 비밀  증언(한국 
국내 정
치·군사 전반)
1980. 12 미국방성  육군 대령  정보·공작 
전문 요원 전역(28년 근속)
경훈은 제럴드 현의 이력을  읽고 또 읽었
다. 마침내 그는 서류를 내려놓으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제럴드 현은 경훈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거물이었다. 경훈은 고시 합격 후 
바로 공군 검찰관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이
런 종류의  이력서를 읽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제럴드 현은 이미 1953년부터 미육군 첩보
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서울대학
교 영문과  재학 중  워싱턴대학으로 교환 
유학했다는 것은 미국의 정보 계통에서 그
를 포섭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미국방성 언
어대학원에서 한국학을   가르쳤다는 것은 
한국에 파견될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스파
이 교육을 시켰다는 얘기고, 1958년에 한국
인으로서는 드물게 미육군 대위로 도쿄 첩
보사에 임관했다는 것은  향후 한국에서의 
그의 역할과 영향력을 충분히 짐작하게 하
는 화려한 경력이었다. 
제럴드 현의 이력은 처음부터 전역할 때까
지 완전히 준비되고 예정된 것이었다. 결국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그것도 정보·공작 
전문 요원으로서는   미국인에게도 드물게 
주어지는 최고 계급인 미육군 대령으로 전
역했다는 사실은 그의 화려한 경력을 그대
로 증명해 주었다. 
경훈은 좀처럼 피우지 않는 담배를 빼어물
었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 정도 경력의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했
던 이야기라면  그냥 넘겨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 서서히 머리를 채웠다.
제럴드 현의  경력과 그가  마지막 순간에 
남기고 간 말을 보면  10·26에는 분명 어
떤 비밀이 있을 거라고 여겨졌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은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신변 안전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결정인 만큼 인남
과도 의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훈은 인
남에게 곧 전화를 걸었다.
인남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현 선생님이 보통 분은 아닐 것 같았지만 
이렇게까지 엄청난 경력을  가지셨을 줄은 
몰랐어.  대단한 이력이지.  한국인으로 미
국 정부에서 이 정도 역할을 한 사람은 없
었을 거야. 어쨌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 자리에서 결정해야 해.  그
분이 돌아가시던 순간에  전화를 걸어왔다
는 사실의  의미부터 생각해야  하지 않을
까?  나는 그 사람이 평소 깊은 갈등을 겪
어왔다고 생각해. 신분을 증명할 아무런 단
서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봐서 그는 철저
하게 첩보원으로서의 원칙을  지키면서 살
아온 거야. 물론 자기가 알고  있는 비밀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입을 다물었겠지.  인남
은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훈은 
쓸모 없는 얘기를 하는 법이  없었다. 언제
나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논리가  정연했다. 
인남이 경훈에게 갖는 호감의 근원은 바로 
이런 모습에 대한 신뢰감이었다.
 조울증도 입을 다물어야만 하는 정보원이
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나 봐.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남에게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지. 비밀
이 엄청난 것일수록 스트레스의 크기도 비
례할 테고.  그럼 결국  마지막 순간에 그 
비밀을 털어놓으신 것으로 봐야 하니?  그
렇지.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그런  말을 한 
데는 그 비밀의 가치가  크게 작용했을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지? 
 그도 인간이라, 자신이 생각해서 옳지  않
았던 일에 대해서는  회의를 느꼈을  거야. 
하지만 평소에는 정보·공작 요원으로서의 
본분에 가로막혀 있다가 죽음의 순간이 되
어서야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튀어나
온 거지.  그 전화를  내가 받게  된 거구.   
네 말은 언제나 어려워. 
인남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무언
가 떠오른 듯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분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신 것이 바
로 박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거지?  그래. 
 그분은 왜 10·26에  비밀이 있다고 하셨
을까? 
 그는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만
한 지위에 있었어. 그런 사람들은  결코 짐
작만 가지고 얘기하지는 않아. 무언가 분명
한 것을 알고 있었을 거야.  그렇다 하더라
도 설마 명백한 사건인  10·26에 어떤 비
밀이 있을까?  수사나  발표, 그후 언론의 
추가 확인 모두 완벽했어. 하지만  그 못지
않게 완벽한 것이 또 하나 있어.  그게  뭐
야? 
 바로 제럴드 현의 신분, 그리고 그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전화를 걸어왔다는  사실.   
하필 현 선생님은 왜  내게 전화를 거셨을
까?  네게 전화를 한 건 당연한 일일 거야. 
 왜 그렇지? 
 그의 갈등을 그대로 나타내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는걸. 난 너처럼 머리가 좋
지 않으니까 되도록 자세히 설명해 줘.  그 
사람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첩보원이었
어. 자기 이력에 대한 단서를  전혀 남기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그는  죽음의 
순간에야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알려야
겠다고 생각한 거야. 막상 그런  결심을 했
을 때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어. 유일하게 
전화 번호를 외고 있는 사람은 바로 너, 박
인남뿐이었지. 하지만 네가 그의 전화를 받
는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
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는  한 인간
으로서 갈등 끝에 비밀을 털어놓았지만, 결
국 무덤까지  비밀을 가지고  가야만 하는 
첩보원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볼 수  있지. 
미국방성의 현지  정보·공작  요원으로서, 
그리고 30년 간이나  한반도를 좌지우지해 
온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여실히 보여. 인남
은 경훈의  얘기를 들을수록  제럴드 현에 
대한 연민이 더해졌다.
 그러니까 현 선생님이 비밀을 털어놓아야
겠다고 결심하신 순간이 너무 늦게 찾아온 
것이구나.  늦은 게 아냐. 죽음의 순간에만 
가능한 일이라니까.  그래, 이제 이해가 돼. 
경훈의 시선이 인남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
락을 거쳐 가는 목줄기를 지나쳤다. 인남은 
자신을 바라보는 경훈의 시선이 한순간 강
렬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중요한 얘기
가 터져나올 것 같았다. 
한동안 침묵하던 경훈이 평소와 다르게 긴
장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어. 
 문제라니? 
 죽음의 바로 그  순간에야 나올  수 있는 
엄청난 고백을 들어버렸다는 사실이지.  그
렇구나. 이제 어떻게 하지? 다른  사람들에
게 알려야 하지 않을까? 경훈은 인남의 불
안해하는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소용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말만 전한다고 뭐가 되는 건  아니야. 우리
에게 주어진 선택은 둘  중 하나야.  하나
는? 못 들었던 걸로 해두고 그냥 넘어가는 
거지. 너는 그저 유산만 받는 거야.  또 하
나는? 
 우리가 직접 그 비밀을 파헤치는 거지. 
 우리 둘이서? 
 그래, 바로 우리 둘이서. 
인남이 마른침을 삼켰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어? 
 그것이 바로 우리가 봉착한 상황이야.  잘
못하면`…`….  경훈의 목소리가 더욱 긴장
되어 떨려나왔다.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어. 삶까지도 말이
야. 
 목숨까지란 뜻이야? 
경훈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가볍게 생
각하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한동안 침
묵의 시간이  흐른 뒤  인남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분의 바람은 묻어버린  채 유산만 받는
다는 것은 옳지 않아. 그렇다고  그런 엄청
난 일을 할 엄두도 나지  않아. 하지만, 하
지만 말이야`…`…. 인남은 잠시 말을 멈추
고는 경훈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녀의 얼굴
이 약간 달아올랐다.
 너하고 함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만년 경장 손 형사
반장은 형사들이  거의 다  출근하자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한쪽으로 밀어놓으며 조
회를 시작했다.
 뭐야, 아직 안 나온 친구가 있잖아. 
아침에 집에서 다투고  나오기라도 했는지 
반장의 눈은 사납게 직원들의 명패를 훑었
다.
 또 이 자식이구나. 
반장의 고리눈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반욕
설과 어울려 여우눈처럼 쪽 찢어지는 순간 
복도에서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급하게 뛰어들어왔다.
 손인영 이 자식, 또 너야. 
 아`─ 예, 반장님.  마누라가 늦잠을 자가
지고 밥을 늦게 하는  바람에 쪼매 늦었십
니데이. 아, 이  망할 놈의  마누라는 내가 
맨날 식은 밥을 남가나라 카는데도 밤마다 
지가 싹싹 다 긁어묵고는 아침마다 늦밥을 
하느라 부산을 떠는데 내 진짜 죽겠십니데
이. 근데 반장님, 지각을 한  거는 한 거고 
반장님 말투가 와 그렇십니꺼,  자슥이라꼬
예? 내가 반장님 자슥이라는 깁니꺼,  멉니
꺼?  시비하는 거야? 늦게 온 주제에. 
순간 사무실 안의 모든  사람들은 놀라 눈
이 휘둥그레졌다. 굽실굽실하던 손  형사의 
태도가 갑자기 딴사람이나 된 듯이 백팔십
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야, 임마, 늦게 오믄 니한테 자슥 소리 들
어야 되나. 이 새끼가 잘못했으믄 잘못했다 
캐야지, 칵  직이뿔라,  누구한테 자슥이라 
카노! 반장은 어안이벙벙해 한동안 벌린 입
을 다물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어대는 손 
형사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니 한 번만 더 자슥이니  뭐니 카믄 죽을 
줄 알아라. 이 자슥아, 나도 내일이면 형사 
생활 20년이다. 니처럼 시험치고  진급하는 
재주는 없지만 계급 좀  높다고 나대는 꼴
은 죽어도 몬 봐준다. 만년 경장을 못 면하
는 손 형사였지만, 반장의 실수를 질타하는 
입심으로 그의 기를 확 꺾어놓았다.
 당신, 전근 온 지 며칠도 안  되는 사람이 
벌써 사흘이나 지각을 하니 내가 반장으로
서 한마디한 것이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 
반장의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자 손 형사의 
목소리도 상대적으로 고른 톤을 유지했다.
 그라믄 이 자슥아, 점잖게 타이르믄 될 거 
아이가. 나도 임마,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
개치고 꼬박꼬박 니를  반장님이라 불러주
는데 계급  가지고 사람  그렇게 무시하는 
거 아이다.  하여튼 이따가 나하고  개인적
으로 얘기하고 우선 오늘 조회부터 하자구. 
녹녹치 않아 보이는 반장도  이 억센 사나
이 앞에서는 별도리가 없는지 떨어진 위신
을 ‘조회’라는 수단으로  만회하려는 태
가 역력했다.
 반장은 고소해하는 직원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업무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간
단한 업무 지시를 마친 반장은 마지막으로 
손 형사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손 형사는 이 사건 좀 알아봐요. 
반장의 말투가 어느새 바뀌었다.
 예, 반장님. 
손 형사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능청스럽
게 ‘님’ 자를 붙였다.
 그러나 서류를 잠시 훑어본 손 형사는 이
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건 교통 사고 조사반에서 할 일이 아인
교? 
 검찰에서 재조사 지시가 내려왔소. 
 재조사예? 그럼 먼가가  잘못됐다는 얘기 
아인교? 
 그러니까 당신처럼 노련한 형사한테 맡기
는 거 아니오. 손 형사는  반장의 한마디에 
우쭐해졌다.
 알겠십니더. 
조회가 끝나고 반장이 나가자 형사들이 다
투어 손 형사 곁으로 몰려들었다.
 형님, 진짜 대단하십니다. 그 여우 반장이 
찍소리도 못하고  ‘요’ 자를  붙이는 걸 
보니 꽤 겁먹은 것  같던데요.  아새끼 칵 
직일라 카다가 조회라서 고마 나    다. 중
키의 손 형사는 단단한 가슴팍하며 만만치 
않은 눈매가  결코 보통  깡다구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의 옆얼굴에는 10센티도  넘
는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반
대쪽 귀는 중간 부분이  달아나고 없는 것
을 아래위를  꿰매어놓아  우스꽝스러웠다. 
원래는 과히 못생기지 않은  균형 잡힌 얼
굴이었지만 워낙 큰 상처들이 마구 교차하
다 보니 이제는 인물을 논할 계제가 못 되
었다.
 이 상처는 어떻게 해서 생겼어요?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신참이 존경하는 
눈길로 손 형사의 상처를 쳐다보며 물었다. 
방금 반장과의 한바탕 드잡이질을 본 형사
들에게 손 형사는 영웅이 아닐  수 없었고, 
그런 큰 상처는 그의 과거를 담고 있을 것
임에 틀림없었다. 손 형사는 설명하기 싫지
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뭇거리며 말하
기 시작했다. 
 내 혼자서 치기배놈들 한  3백 명은 잡았
을 끼다. 그때  생긴 훈장들이다. 진짜배기
를 볼라 카믄 내 머리를 봐야 된다 아이가. 
아마 270바늘은  꿰맸을 끼다.  각목, 칼침 
안 맞은 기 없데이. 하지만  아무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지. 몰골만  숭악해지고, 이 나
이 되도록 어린 반장놈한테  자슥 소리 들
어가믄서`…`….  아, 형님도 참. 
저 여우 반장이 형님이  하신 일의 10분의 
일이나 했겠어요? 맨날 근무  시간에 책이
나 보고 약삭빠르게 시험이나 쳐서 올라간 
양반이. 형님이야말로 진짜 이 사회를 위해
서 그렇게 온몸에 상처를 입어가면서 봉사
하신 거 아닙니까? 젊은 형사는 어느새 손 
형사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하모, 형사는 검사가 아이제. 몸으로 뛰는 
기야. 이렇게  3백 바늘이나  꿰매가면서도 
말이다. 손 형사는 후배 형사가 치켜올리자 
기분이 좋은 듯 손으로 머리카락을 헤쳤다. 
그러나 이내 시무룩해졌다.
 근데 다 소용없다.  세상은 나 같은  똘빡 
형사는 아무도 안 알아주더라. 근무 시간에 
시험 공부나 해갖고 진급하는 놈들이나 업
소에 다니면서  공짜술 묵고  돈이나 받아 
챙기는 놈들 세상이니까. 
썩을 놈의 세상.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였
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단순히 
손 형사의 말에 동조하는 의미만은 아니었
다. 
손 형사처럼 우직하게 살지 않고 나름대로 
먹고 살 길을 찾아온  자신들의 인생에 대
한 안도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그들은 우
직하게 살면 저렇게 말년이 비참한 법이라
는 생각을 하며 손 형사를 떠났다.
 그나저나 이걸 우짜지? 
수다를 떨던 동료들이 모두 근무지로 나가
자, 손 형사는 자판기에서 뽑은  종이 커피 
잔을 입에 물고 반장이  준 서류를 찬찬히 
살폈다. 교통 사고 조사서였는데 술에 잔뜩 
취해 무단 횡단하던 피해자는 사망하고 가
해자는 도망친, 흔하디흔한 뺑소니  사건이
었다. 
한 가지 특색이 있다면 피해자가 외국인이
라는 사실이었다. 손  형사는 이런  사건은 
대부분 가해자를 잡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썩을 놈의 자슥! 
형사반장을 일컫는 말이었다. 발에  땀나도
록 돌아다니기만  하고 성과는  얻지 못할 
그런 사건이었다.
 게다가 검사로부터  재조사  지시를 받은 
사건 아이가? 보통 사건처럼  쓱싹하고 넘
어갈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하루  종일 
서투르기 짝이 없는  타자기를 두들겨가며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사실이 손 형사
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손 형사는 검사한테 잘못 걸리면 불편하고 
귀찮아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
다. 손 하나 까딱 안 하면서 밥  먹듯이 이
래라저래라 시키는 것도 그렇지만, 밥도 안 
먹고 뛰어다니면서 조사해 며칠 걸려 타이
프를 쳐서 가져가면 그  두꺼운 서류를 휘
휘 넘겨버리고는 재수사를 해라, 어째라 하
기 일쑤였다. 
손 형사는 될 수  있으면 검사와는 접촉을 
안 하는 것이 만수무강의 지름길이라는 것
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는 졸병이나  할 이
런 일을 자신에게 시킨  것은 순전히 간교
한 반장의 보복이라고  생각하면서 경찰서 
문을 나섰다. 
교통 사고
손 형사는 먼저 사건 현장을  찾아갔다. 현
장을 봐야만 영감이 떠오르든 냄새를 맡든 
할 수 있다는 것이 오랜 형사 생활을 통해 
얻은 지론이었다. 
유흥가라고는 하지만 리츠칼튼호텔 주변에
는 술집 같은 것이 별로 없었다. 모텔과 아
울러 식사 위주의 식당이 몇 개 있는 이곳
은 밤에는 인적이 드물 성싶었다. 
손 형사는 현장 보고서를 꺼냈다. 스케치한 
것을 보니 피해자는  리츠칼튼호텔 앞에서 
차도를 무단으로 건너다  중앙선을 지나자
마자 오른쪽에서 달려오던  자동차에 치여 
사고를 당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피해자는 
피할 새도 없이 차에 치여 하늘로 튕겨 올
라갔다가 떨어지면서 머리가  땅에 부딪혀 
현장에서 즉사한 것으로 보였다. 
사고 시각이 자정에  가까웠으므로 목격자
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교통 사고란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일
어났다 하더라도 의외로 목격자가 드문 편
이다. 그리고 목격자가 있었다면 이미 교통 
사고 조사반에서 탐문해 알아냈을 것이다. 
검사는 피해자가 외국인인데  간단하게 목
격자 없는 뺑소니로만 처리되어 있었기 때
문에 재조사를 지시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까 이 사건은 누가  맡더라도 엿먹을 수밖
에 없는 그런 부류였다.
 빙신 새끼들! 
손 형사는 혀를 찼다. 이런  경우는 보고서
에 피해 외국인의 인적  사항을 비교적 자
세히 기입하고, 어떤 경위로 사고를 당했으
며, 어떻게 조사를  했는지 빽빽히  채워야 
검사가 마음에 들어할 것이다. 경험에 의하
면 그 사건 내용의  진위 여부는 별문제가 
아니었다. 뭔가 열심히 일했다는 흔적을 보
여도 넘어가기 쉽지 않은  외국인 사망 사
건을 이렇게 무성의하게  보고했으니 검사
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외국인 사망자. 
손 형사의  눈길이 피해자의  인적 사항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로버트 숀.
누군가 원어 옆에 한국어로 이름을 써놓았
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손 형사는 이름조
차 읽지 못할 뻔했다. 로버트까지는 그런대
로 떠듬떠듬 읽었지만 숀이란 글자는 발음
하기조차 힘들었다. 
교통 사고 조사반의  탐문 결과에  의하면, 
어려운 이름의 이 사람은 리츠칼튼에 며칠
째 머무르고 있던 중이었다. 
손 형사는 다시 한 번 현장의 구조를 살핀 
후에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무단 횡단을 하
여 리츠칼튼호텔로 들어갔다. 특급  호텔이
라는 곳은 언제나 기를 죽게  만들었다. 손 
형사는 어깨를 약간 움츠리며 주위를 살피
다가 프런트 데스크로 갔다.
 강남경찰서 형사계의 손 형삽니더. 요  앞
에서 사망한 외국인에 대해 조사하고 있십
니더. 마침 근무  중이던 직원은  피해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 로버트 숀 씨  말이군요. 참 유감스러
운 일입니다.  이 사람이 언제부터  투숙했
는교? 
 지난 12일에 저희 호텔에 오셨습니다. 
 예약은 누가 했는교? 
 본인이 직접 하셨습니다. 
 영어로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그거 쫌 알아볼 수 없는교? 
 글쎄요`…`… 아마 알아볼  수 있을  겁니
다. 
직원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알
아보더니 밝은 안색으로 대답했다.
 공항에서 예약을 하셨더군요. 영어를 사용
하셨구요. 예약과 직원이 영어로 대화를 나
눴다고 합니다.  그럼  한국어를 몬한다는 
얘기네. 그런데 사고가 나던 날 밤 이 사람
은 호텔에 있다가  나갔는교?  네, 객실에 
계시다가 나갔습니다. 
 몇 시에 나갔는교? 
 글쎄요, 그건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알아볼 수 없는교? 
 아마 정확한 시간은 알기 어려울 겁니다. 
손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이해해
서가 아니었다.  부아가  치밀었던 것이다. 
옛날 같으면  겁을 주면  굽실굽실 대답을 
잘해 주겠지만 요즘은 겁준다고 통하는 세
상이 아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
면서도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가  종종 그
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보쇼, 내사 지금 살인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 아이요. 이 사람은 억수로  중요한 사
람이오. 협조 쫌 부탁하입시더.   네? 교통 
사고로 사망하지 않았습니까? 
 글쎄, 그기 교통 사고를 가장한 살인일 가
능성이 농후하단 말이오.  알겠는교? 살인, 
사람을 죽이는 것 말이오. 손  형사의 험악
해진 표정과 거칠어진  목소리에 놀랐는지 
뺀질뺀질하게 생긴 직원은  이내 전화기를 
들어 뭐라뭐라 통화를 했다.
 그날 근무하던 직원이 이제 곧 올 겁니다. 
저기 앉아서 좀 기다리시지요.  고맙소. 
손 형사는 자리에 앉으면서 속으로 낄낄거
렸다. 형사는 다루는 사건에 따라 대접받는
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인이라고 공갈을 치
자 당장 달라지는 직원의 태도가 고소했다. 
사실 사망자가  있긴 하지만  교통 사고를 
조사하러 다니는 것은 좀 창피하게 느껴졌
다. 자신에게는 역시 치기배 검거  같은 것
이 어울렸다. 
로비의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사건 
당일 근무자가 나타나 맞은편 자리에 앉았
다. 얼굴부터 친절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로버트 숀 씨가 몇 시에 나가셨는지 물으
셨다구요?  그렇소. 
 제 기억으로는 밤 11시 반쯤에 나가신 것 
같습니다.  술을 마셨다던데,  얼마나 마셨
던교? 
 제법 취하셨던 것 같습니다. 
 뭐라고 하지는 않았는교? 
 기분은 좋아 보였지만 별말씀은 없으셨습
니다. 
 어데 간다거나 길을  묻거나 하지도 않았
는교? 
 네. 
 잘 알겠소. 고맙소. 
 또 물어보실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오십
시오. 
 그라입시더. 아, 참, 나가기 전에 누군가로
부터 전화를 받거나 한 것은  없었소?  그
건 잘 모르겠는데요. 알아봐 드릴까요?  쫌 
부탁하입시더. 
그 직원은 프런트에 가서 교환실과 연락해 
통화 내역을 확인해 주었다.
 나가시기 10분쯤 전에  객실로 전화가 한 
통 왔었답니다.  전화를 받고 나간  것으로 
봐도 되는교? 
 그걸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호텔 손님의 경우 대개 어떤가 말이오? 
 나가기 직전에 전화를  받으신 것으로 보
아서는 아마 그런 것 같은데요.  아무튼 고
맙소. 
손 형사는 호텔에서 나와  차도로 길을 건
넜다. 느낌이 이상했다. 
이 길은 어쩐지 건너기 싫었다.  왜 그런가 
생각하던 손 형사는 이내  이 도로가 왕복 
6차선의 넓은  길인데다가  언덕이 있어서 
무단 횡단 하기에는 불안감이 든다는 것을 
알아냈다.
 빙신 같은 놈, 남의 나라 와서 와 술 쳐묵
고 무단 횡단까지 해쌌노. 괜히 애   은 사
람 하나 뺑소니로  만들어놓고. 손  형사는 
경찰서로 돌아와 피해자의  유류품을 살폈
다. 여권, 약간의 돈과 돌아갈 비행기표, 옷
가지와 세면 도구,  그리고 잡동사니  속에 
메모지 한 장이 있었다. 그는  이상한 생각
이 들어 교통 사고 조사반으로 내려갔다.
 형사계의 손 형사올시다. 그 외국인  뺑소
니 사건 말인데, 재조사 지시가  떨어져 지
가 맡고 있십니더. 담당자는 손  형사가 그 
사건을 다시 조사하는 것을  보자 약간 미
안해하는 표정이었다.
 개뿔도 나올 것 없는 사건인데 솜털 박힌 
신뺑이 검사라 조바심이 나서 그런가 보우. 
오십대 초반의 배가 잔뜩  나온 경사는 책
상 서랍에서 박카스를 내놓으며 손 형사의 
노고를 안쓰러워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인교. 최대한 써서 올려
야제. 그런데 그 친구 소지품이  너무 없던
데, 무슨 명함 같은 것도 없었는교?   주머
니에 있던 것하고 호텔  방에 있던 것하고 
소지품이란 소지품은 몽땅  가지고 왔는데 
그게 다였소. 손 형사는 전화  번호가 적혀 
있는 메모지를 내보이면서 물었다. 
 그라믄 이쪽에 전화를 걸어봤는교? 
그 메모지는  피해자의 유류품  중에 섞여 
있던 서울 어딘가의 전화 번호였다.
 그렇소, 하지만 피해자가 누군지 모른답디
다. 
 리엔지니어링, 여기는 어디라 카데요? 
 무슨 무역 회사라는 것 같던데요. 
 무역 회사? 
교통 사고 조사반에서는 더  얻을 것이 없
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손  형사는 메
모지의 필체와 호텔 숙박부에 기재된 숀의 
필체를 면밀히  비교했다. 7을  십자가처럼 
쓴 것이나 2의 끝을 짐승의 꼬리처럼 말아
올린 것이나 틀림없이 동일인의 필체였다. 
다음으로 종이의 질을 세심히 살폈다. 한국
의 종이와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숀은 미국에서부터 이 회
사의 이름을 적어왔단 얘기다. 그런데 문제
의 회사에서 숀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면 뭔가 이상했다. 
가슴이 뛰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오던 
사건이 손아귀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었
다. 사실 손 형사가 경찰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은 순전히 추리소설 때문이었다.  공부를 
죽기보다 싫어하던 손  형사는 중·고등학
교 때에는 무협소설에, 졸업 후 체육대학에 
다닐 때에는 추리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형사 콜롬보>를 하는 날은 
데이트도 미루고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와 
채널을 잡아둘 정도였다. 
손 형사는 대학에서 유도를 전공하고 졸업
한 뒤 자연스럽게 무술  경찰로 사회에 첫
발을 디뎠다. 
그후 경찰 생활 20년이 다 돼가지만 손 형
사는 한 번도 자신이 바라던 일을 한 적은 
없었다. 모두가 치기배나 강력범 검거가 그
의 주특기라고 알고 있었고, 자신도 그렇게 
행세해 왔다. 하지만 손 형사가  실제로 하
고 싶었던  일은 오리무중인  사건을 맡아 
치밀한 추리와  수사 끝에  지능범을 잡는 
것이었다. 마치 형사 콜롬보처럼. 
좌절
다음날 아침 반장은 깜짝 놀랐다. 일찌감치 
출근한 손  형사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공손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근무 보고를 
해왔기 때문이다.
 반장님, 이 사건에는 뭔가가 있십니더. 단
순한 뺑소니 사고는 아이라는 심증이 갑니
더.  그래?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반장
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손 
형사가 그 상처투성이의 얼굴과는 전혀 어
울리지 않는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까지 
바꿔가면서 늘어놓는 추리가  너무나 가당
찮았기 때문이다.
 명함 한 장  없이, 있는 거라곤  메모지에 
적힌 전화 번호 하나. 
그러나 그  회사에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합니더. 미스터리가 아일 수 없십니더.  그
런데 당신 목소리가 왜 그래? 
 아, 그건 추리에 너무 몰두하다 보니까 콜
롬보와 비슷한 목소리가 안 나는교. 주변에 
있던 형사들 사이에서 와  하는 웃음이 터
져나왔다.
 조용히 해. 뭐가 그리 우스워? 이 손 형사
처럼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쓰는 태도가 
형사로서는 얼마나 중요한데  그렇게 웃고 
난리들이야. 반장은 형사들에게 일갈한  후 
손 형사를 격려했다. 그로서는  무엇보다도 
어제 그렇게나  대들던 손  형사가 깍듯이 
반장님이라고 부르며 자청해서  보고를 하
는 것이 고마웠던 것이다.
 하여튼 소신껏 열심히 해봐요. 혹시  인력 
지원이 필요하면 바로 얘기하고.  고맙십니
더. 하지만  당분간은  혼자서 맡겠십니더. 
콜롬보도 늘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
십니꺼? 다시 한 번 형사들 사이에서 웃음
이 터져나왔지만 이번에는  반장도 말리지 
않고 같이 웃었다. 
조회가 끝난 뒤 손  형사는 바로 리엔지니
어링사로 갔다. 그  회사는 시내  중심가의 
고층 빌딩에 매우 넓은  사무실을 쓰고 있
었는데, 사무실 면적과는 어울리지 않게 직
원은 몇 사람에  불과했다. 사무실의  실내 
장식은 웬만한 호텔보다 격조 있는 분위기
를 자아냈다.
 야, 이 정도면 정말 일할 맛 나겠십니더. 
손 형사가 너스레를  떨자, 그를  쳐다보던 
삼십대 중반쯤 된 직원의  눈에 경멸의 빛
이 떠올랐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사장님 쫌 만나러 왔십니더. 
손 형사는  사무실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일부러 팔을 한차례 내저으며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콜롬보가 늘 그러는  게 이유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
기 자신이 생겨, 고개를 들  때에는 여유로
운 미소조차 머금을 수 있었다.
 지금 안 계십니다. 메시지를 남기시겠습니
까? 
 아입니더. 그라믄 그 다음으로 지위가  높
은 분을 만나믄 됩니더.
 아주 중요한 일로 상의를 좀 해야 합니더.  
용건을 먼저 말씀해 주시죠. 
철 지난 낡은 코트를  입고 나타나 간부를 
찾는 손 형사의 행색이 못마땅한지 직원은 
다소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아, 내는 지금  중요한 사건을 수사  중인 
형삽니더. 형사란 말입니더.   무슨 사건이
죠? 
손 형사는 약간 당황했다. 어디서건 형사라
는 신분을 밝히면 상대는 당황하거나 주눅
들기 일쑤인데, 이  친구는 전혀  놀라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귀찮다는 듯 물어오는 것
이 아닌가. 손 형사는 화가 치밀었다.
 아, 이보쇼. 간부를 만나야겠다는데 뭘 그
렇게 꼬치꼬치 묻소? 수사의  필요상 아무
에게나 함부로 얘기할 수 없단  말이오. 알
겠소?  소속이  어딥니까? 경찰청입니까? 
검찰청입니까? 어느 검사가 보내서 왔습니
까? 손 형사는 상대의 위압적인 태도에 다
시 주눅이 들었다. 직원의 그  한마디로 리
엔지니어링은 보통의 회사와는  뭔가 다르
다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서에서 나왔는데`…`…. 
 서? 경찰서 말입니까? 
 예, 뺑소니 교통 사고를 조사 중이오. 
 그런데 그게 우리 회사와 무슨 관계가 있
단 말입니까?  그게, 그게, 피해자가 이 회
사 전화 번호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요.  그
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그런 일로 여길 찾
아왔단 말입니까?  그게 유일한 메모라 뭘 
쫌 물어볼라꼬`…`…. 
 그럼 서면으로  보내십시오.  알겠습니까? 
경찰서장 명의로 서면 질의서를 보내란 말
입니다. 우린 그런 데 낭비할  시간이 없습
니다.  뭐, 이 자슥아!  시간이 없다꼬? 니 
머하는 새끼야! 이 새끼야, 내는 시간이 있
어서 이러고 돌아다니는  줄 아나!  이것이 
손 형사가 콜롬보와 다른 점이었다. 콜롬보
라면 더 심한 모욕을  받아도 교묘하게 상
황을 만들지만 손 형사는  바로 폭발해 버
리는 것이다.
 뭐, 당신, 말  다했어? 당신  어느 경찰서 
소속이야?  소속은 와 묻노, 이 자슥아. 
 당신 형사 맞아? 신분증 꺼내봐. 
손 형사는 아차했다. 사전에 신분증을 제시
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요즘  들어 간부
들이 늘 강조하는 게 신분증  제시였다. 손 
형사는 말단으로 보이는  직원조차 이렇게 
깐깐하다면 자칫하다간 꼬투리가  잡힐 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 여 있다. 이 자슥아, 똑바로 바라! 
손 형사는 고함을 치면서도 서둘러 신분증
을 내보였다.
 강남경찰서 경장. 겨우 경장이야? 당신 여
기가 어딘 줄 알고 경장 신분으로 감히 큰
소리치는 거야.  뭐, 이 자슥아! 경장이 어
때서. 내가 경장 되는  데 니가 뭐  도와준 
거 있나?  당신, 잠깐 기다려. 
직원은 바로 전화기를  들더니 114를 눌렀
다. 손 형사는 만류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버텼다.
 강남경찰서 서장실 대주시오. 
반장과 함께 서장실에서 실컷  혼이 난 손 
형사는 역시 자신에게는 치기배 검거가 가
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반장에게 미안
해진 손  형사가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점심을 사겠다고 했는데도, 속 좁은 반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후배 형사 한 명이 잔뜩 풀죽은 손 형사가 
안돼 보였는지 그에게 점심을 사겠다고 했
다.
 우짠지 그 회사  사무실이 호텔맨쿠로 고
급이더라`…`…. 손 형사는 설렁탕을 한 그
릇 먹고 나자  다소 마음이 풀린  듯 후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하는 회사랍디까? 
 무기 중개상이라나.  5·6공 때는  장관은 
보통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통령도 직접 
만나던 놈들이라 카더라고. 말단 직원 같아 
보이는 녀석도 글쎄 외국에서 명문 대학을 
나와 외국  정부의 관리로도  근무를 했다 
카니까.  진짜 센 놈들이구만요. 
 난 그런 놈들하고는 안 맞는다. 법이 어쩌
고저쩌고 하는  놈들은 역시  밥맛이 없다 
카이.  형사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인데  법
이 싫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나저나  손 선
배가 너무 앞서 나갔던데요, 뭘.   머라 카
노? 
 세상에, 뺑소니 교통 사고를 살인이니  뭐
니 하고 다녔다면서요. 
우리 나라에서 뺑소니 사고를 고의 살인으
로 기소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요?  
글쎄, 내사 마 잘 모르겠는데? 
 술 먹고 마구 차를 몰아  대형 사고를 낸 
운전사를 살인죄로 기소한 적은  있었지만, 
선배 생각처럼 살인 수법으로 뺑소니를 이
용했다고 기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즉 선배의 발상이 너무 지나쳤던  거죠. 돈
키호테처럼 말이에요.  그랬나? 
손 형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정말 자신
이 너무 심했는지도 몰랐다. 한반도에서 뺑
소니를 살인으로  기소한 적이  단군 이래 
한 번도 없었다면 자신의 가정부터가 황당
한 것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한편 손 형사는  자신이 잘못한 점
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뺑소니  사고 피
해자의 유류품 중에 어떤  회사의 전화 번
호가 있었고 그 번호가 미국에서부터 기록
된 것이라면, 피해자는  그 회사와  관계된 
어떤 일로 한국에 온 게  분명했다. 그렇다
면 그 회사를 찾아간 것이 잘못된 일일 수
는 없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일개 형사 신분으로, 장관
은 물론 사안에 따라  대통령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사람들의 회사에 찾아가서 너무 
무게를 잡았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센 작자
들인지, 재조사를 지시했던 검사조차  바로 
연락해 와서는 종결 보고를  하라고 할 정
도였다 선배, 싹  잊어버려요. 괜히 엉뚱한 
거 가지고 더 쑤석거리다가는 모가지가 열 
개라도 모자랄 거예요.  손 형사는  형사란 
신분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남은 
설렁탕 국물을 들이마시고는  자리에서 일
어섰다. 설사 무슨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영역 밖의 일이었다. 
손 형사는 오후 내내  검찰청에 보낼 종결 
보고서를 쓰면서도 가슴에 맺힌 의문이 풀
리지 않았다. 명함 한 장 없이 온 외국인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유일한  전화 번호.  그 
번호를 가진 회사에서 전화  한 통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얘기였다.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시달리면서  뺑소니 사고
로 결론지은 보고서를 마무리하던 중 뇌리
에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경훈 시보.
4~5년 전 손  형사가 검찰청에 파견나갔을 
때 검사실에 와 있던  새파랗게 젊은 검사
시보. 그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노련한 
부장검사도 쩔쩔 매던 화이트 칼라의 지능
적 범죄를 천재적 두뇌로 풀어냈던 인물이
다. 
손 형사는 망설였다. 전화를 해야  할지 말
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몇 번 수화
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던  손 형사는 가시 
돋친 반장의  목소리에 전화를  그만 멀리 
밀어놓았다.
 손인영, 뭘 그리 꾸물거려!  오늘 내로 검
찰청에 종결 보고서 갖다 주고 와. 또 어딘
가 전화해서 살인이니 뭐니 지껄이면 당신
은 즉각 모가지야. 알았어? 이 덜떨어진 인
간아! 이제 반장은  확실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로펌 
보스턴이라는 도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
는 사람들에게  가장 확실한  법률 회사를 
들라면, 그들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엄지손
가락을 세우며   ‘에이펙스로펌’을 꼽을 
것이다. 이름 그대로 지난 10여 년 간 단연
코 정상을 유지하고  있는 에이펙스로펌은 
유수한 보스턴의 로펌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훌륭한 법률 회사다. 
이 회사가 수많은 전통적 로펌들을 따돌리
고 업계의  선두를 다투는  것은 전적으로 
대표인 케렌스키 때문이었다. 천재로  소문
난 그는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졌고, 
자신이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쏟
아부었다. 
경훈은 원래 하버드의  로스쿨에서 수강만 
할 예정이었는데, 케렌스키가 그에게  지대
한 관심을 표했다.  이유는 경훈의  직관이 
특별하다는 것이었다.  로스쿨에서  벌어진 
모의 재판에서, 경훈은 초빙된  배심원들의 
얼굴을 보고 누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누구를 기피해야 하는지를  족집게처럼 집
어냈다. 
케렌스키는 그때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천
재란 본래 뛰어난 직관의 소유자라고 믿는 
그에게 경훈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케렌스
키는 이제까지 그 누구를 스카우트하던 때
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열정으로 경훈을 초
빙했다. 
경훈은 에이펙스 같은 일류 로펌이 보스턴
에 있는데 굳이 뉴욕까지  갈 필요는 없겠
다는 생각에서 케렌스키의  초빙을 수락했
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껏 케렌스키가 거둔 
가장 큰 성과 중 하나였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는 표현은 이
런 때 쓰는 것일까. 
경훈은 오직 논리와 거짓말이 횡행하는 법
정 싸움에서 전혀 색다른 무기를 선보였다. 
관상으로부터 오는 직관. 
케렌스키는 직관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판단이자 천재들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라고 생각했다. 사색이나 추론은 평범한 사
람들의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케렌
스키는 이 이상한 직관  능력을 지닌 경훈
을 천재 중의 천재로 여겼다. 
아닌게아니라 경훈은   사건의 당사자들을 
보는 순간 즉각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
는지 꿰뚫었다. 물론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겠다는 것도 훤히 내다보았다.  이미 
해답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소송을 진행하
는 것은 음모와 배신의 바다에서 하늘로부
터 내려온 밧줄을 잡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에이펙스에 사건을 의뢰하는  사람은 경훈
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야 했다.  소송의 
승패는 여기서 결정되었고, 에이펙스는  의
뢰인의 관상에 따라 사건을  골라 받을 정
도였다.
 이 변호사, 좀 올라와 주겠소? 
경훈은 인터폰에서   흘러나온 케렌스키의 
목소리를 듣자 쓴웃음을 지었다.  케렌스키
는 사람에 대한 차별이 유난스러웠다. 마음
에 들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언제 내가 
당신을 알았느냐는 식이지만, 자신이  가치
를 인정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여자보다 더 
섬세하게 대했다. 경훈은 윗도리를 입고 엘
리베이터로 향했다.
 어서 오시오, 이 변호사. 
케렌스키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경훈을 맞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반가운 
표정으로 경훈을 힘껏 포옹했다.  케렌스키 
특유의 제스처였다.
 여전하시군요. 
경훈의 의미심장한 인사에  케렌스키는 웃
음을 터뜨렸다.
 자, 들어가서 앉읍시다. 
방에는 여러 응접 세트가 있었다.  몇 사람
이 둘러앉아 회의를 할 수 있는 원탁과 손
님을 맞을 때 쓰는  소파, 그리고 탁  트인 
유리창 너머로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 있
는 위치에 두 개의  편한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친근한 사람과 같이 앉아서 앞뒤로 
흔들며 마치 소꿉친구 같은  기분을 낼 수 
있는 의자였다. 
케렌스키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표정
으로 경훈에게 안락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경훈이 자리에 앉자 케렌스키는 홈 바에서 
스카치를 꺼내왔다.
 이 변호사, 한잔하겠소? 
경훈이 대답할 새도 없이 케렌스키가 얼음
을 채운 온더록스 잔을 쥐어주었다. 얼음을 
채우고 술을 따른 케렌스키는 잔을 부딪쳐
왔다. 
경훈은 케렌스키가 스트레이트, 그것도  더
블로 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뭔가 이상했
다. 경훈이 알기로 케렌스키는 이렇듯 격정
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차가운 눈초리로 상
대방의 표정을 계산하며  술잔을 홀짝거려
야 제격인 그가 지금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로 경훈 자신의 얼굴을 훑어내리고 있
지 않은가. 경훈은 거대한 분노가 타오르는 
것 같은 케렌스키의 눈길이 낯설었다. 
경훈은 케렌스키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
유가 무언지를 생각했다. 불가능한 모든 것
을 가능하게 해왔던 사람,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고 질 수도 없는 위치에 오른 사람, 이
미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떠오른 
케렌스키가 한국의 일개  변호사에 불과한 
자신을 불러 이처럼 분노에  찬 모습을 여
과 없이 보이는 것을 경훈은 이해할 수 없
었다. 
경훈은 온더록스  잔을 들어  얼음에 혀를 
댔다. 그리고 위스키의 톡 쏘는 맛을 입 안 
가득 느끼며 케렌스키의 표정을  주시했다. 
자못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도대
체 무엇이 이 냉정한  사람을 이렇게 흥분
하도록 만들었을까.
 나는 인생을 원칙대로만 살아가는 사람들
을 경멸하오.  케렌스키는  경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푸른 창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낯선 모습이었다. 비록 목소리는 여전히 힘
이 있고  강했지만 이제까지  익히 봐오던 
케렌스키의 모습에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바로 자신감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은 천재들의 것이라고  강변
하던 그의 자신만만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케렌스키는 새장에 갇혀 자유
를 찾는 맹금류처럼 외로워 보였다. 상실된 
자신감의 빈자리에 파고든  외로움이 그의 
얼굴에서 여실히 느껴졌다. 소송 따위의 문
제 때문은 아닌 듯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는 같이  나눌 수 있
는 것이 아니라 케렌스키 혼자서 받아들여
야 하는 문제인 모양이었다. 
경훈은 어쩌면 케렌스키가 지금 헤어날 수 
없는 어떤 위기에 봉착한  것이 아닌가 하
는 의심이 생겼다.  그러자 궁금증이  더했
다.
 그들은 모험을 하지 않소. 원칙이란 것 자
체가 모험적인 요소를 다  빼버린 절대 안
전한 선 같은 것이 아니겠소.  경훈은 차츰 
자신의 짐작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되었
다.
 인생이란 자유를 향한  비상 같은 것이라
고 생각하오. 의식의  자유 말이오. 경훈은 
케렌스키 같은 사람에게 있어 어려움은 어
떤 것이며, 어째서  그 어려움을  자신에게 
얘기하는지 궁금했다.
 나는 바로 그 자유를 향한 비상에 인생을 
바쳐왔소.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인생의 또
다른 면을 보려고 애썼고, 원칙과 구질서를 
부정하며 사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
해 왔소. 경훈은 말없이 케렌스키의 얼굴을 
훑었다. 세계 최고의 강자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더욱이 어떤 어려움
에 봉착하여 자신에게 변명과도 같은 논리
를 늘어놓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
야 할지  고민하며 케렌스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원칙과 구질서에  대한 투쟁에서 늘 
이겼소. 나야말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할 자
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소. 천재, 천
재 말이오. 이 세상의 뭇사람들이  내가 생
각하고 본 대로 따를 것이라  믿었고, 그런 
점에서 나는 분명히 많은 새로운 시각들을 
세상에 제공했소. 나는 내 운명과의 싸움에
서 승리했던 것이오.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
다. 케렌스키는 분명  그렇게 살아왔고, 그
것은 경훈이 보기에도 성공한 인생임에 틀
림없었다. 멀리 볼 필요도 없었다. 당장 신
입 변호사를 스카우트하는 것만 봐도 그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도전해 왔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어떤 로펌도 감히 케렌스
키처럼 철저히 성적을 무시하고 신입 사원
을 뽑지는 못했다. 과연 케렌스키는 세상에 
신화를 남길 수  있는 승리자였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듯 자신감을 잃게 
만들었을까.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내가 이겨온  그 모
든 것들이 보잘것없는 허접쓰레기 같은 게 
아닐까, 혹은 나는 진정한 싸움은  한 번도 
치러보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회의에 빠
지게 됐소. 도대체  변호사로 성공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한가 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
했던 것이오.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
구나 품을 수 있는 회의였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회의일지도 몰랐다. 경
훈 자신도 이 같은 회의를 여러 번 느끼지 
않았는가. 인간이란 가끔 이런 종류의 회의
를 느끼곤 하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나 허무를 느끼는 법이지요. 
경훈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케렌스키
는 다시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따라 단숨
에 마셨다.
 모든 인간이 법대로 살 수는  없는 법 아
니오? 그러니 인간은 누구나  약점을 갖고 
살게 되어 있지. 바로 그  인간들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돈을 벌어온  것이 우리 
회사고 나라는 생각이 들자 괴로웠소. 물론 
그렇게 번 돈으로 무엇을 했는가는 논외의 
문제요. 범죄를 저질러 번 돈으로  자선 사
업을 했다고 해서 그  범죄 자체가 없어지
는 것은 아니지 않소. 나는 어떻게 보면 남
의 약점을  뜯어먹고 살아온  기생충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오.  아니 무슨 그런  말씀
을`…`…. 
경훈이 무의식적으로  끼여들었다.  그러나 
케렌스키의 허무감은 생각  이상으로 깊었
다.
 틀림없소. 어떤 면에서 나는 약자들을  뜯
어먹고 살아온 기생충이었단 말이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경훈은 잠자코 케렌스키를 
주시했다.
 소위 천재라는 내가  이제껏 약자들만 후
리는 짓을 열심히 해온  대가로 돈과 명성
을 거머쥐었다는  회의와 고민  끝에 나는 
나를 거부하기로  마음먹었소.  케렌스키는 
다시 술잔을 비웠다.
 나는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기 위
하여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소. 
더 이상 헛된 이름을 얻거나 돈을 벌지 않
고, 세상을 속이지 않으며, 나 자신과 진지
하고도 처절하게 대면해야만 하는 일을 찾
아야 했소. 나의 헛된 발판이나  인맥이 소
용없는, 오직 나의 능력만으로 해낼  수 있
는 일을 찾아야 했단 말이오. 그 순간 케렌
스키의 목소리는 당당하다  못해 오만하게
까지 들렸다. 
그가 보통 사람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패배와 허무를 넘어 새로운 지평에 다다르
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은 명백해 
보였다. 
경훈은 케렌스키가 과연 어떤 새로운 길을 
택했는지 궁금해졌다.
천재의 패배
 이 변호사, 내가 어떤 길을 택했는지 짐작
하겠소? 
경훈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세상에는 특별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소. 오지 탐험, 유적 발굴 등`…`…. 
하지만 그런 것은 나의  일은 아니라고 생
각하오. 그것은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나 
역사에 정열을 가진 사람들만이  할 수 있
는 일이지. 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천재라면 
새로운 물리 이론의 연구  등에 자신의 정
열을 바칠 수 있을 거요. 
하지만 나처럼 허무의 심연 속에서 가치의 
부재를 혹심하게 느낀 인문 분야의 사람에
게는 맞지 않는  일이오. 이  변호사, 나는 
말이오, 나는`…`…. 케렌스키는 이  부분에
서 감회가 솟구치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
다. 그러고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
시 후 케렌스키는 다시  눈길을 돌려 경훈
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택한 
것은 도박이었소. 
케렌스키의 이 한마디에  경훈은 뒷머리를 
꽝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냉정하리만큼  합
리적인 케렌스키 같은 인물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도박이라
니, 그 종말은 뻔하지 않은가. 그러나 경훈
은 애써  감정을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케렌스키의 눈을 지켜봤다.
 수학의 확률로부터  나온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도박의 룰과 수학만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강력한 기의 흐름 사이에서 
판을 읽고 승리를  일궈내는 도박이야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소. 케렌스키
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경훈은  그가 이
미 도박에  상당한 경험을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도박을 
얘기할 때 확률만 언급하겠지만, 지금 케렌
스키는 역시 천재답게  ‘기의 흐름’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의 입에서 기라는 동양적인 개념이 흘러나
오기까지에는 많은 경험이 필요했으리라.
 카지노의 테이블 위에서 나는 더 이상 명
성을 날리는 변호사 케렌스키가 아니오. 보
통 사람과 똑같은 위치에서 오직 자신에게
만 의지하여, 언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를 
험한 정글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오. 보통 
사람은 99퍼센트, 아니 100퍼센트 실패하고 
마는 무서운 정글이오. 물론 몇 번은 딸 수 
있겠지. 그러나 결국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 
도박의 속성이오. 나는 그 도박에 도전하고
픈 강한 욕구를 느꼈소. 이것이야말로 자신
을 시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게임이라는 생
각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쳤소.  강자
에게는 진실을 가지고도  질 수밖에  없고, 
약자에게는 거짓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군
림할 수 있는 로펌의 위선이  통하지 않는, 
오직 자신의 실력에 의해서만 성공과 실패
가 갈리는 도박이야말로 내가 갈 길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됐던 것이오.  이 혐
오스런 세상을 벗어나 무한한 자유의 세계
로 나아가는 탈출구였단 말이오. 경훈은 묵
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주식이 자본주의의 꽃이라지만, 나는 
돈이 알파요 오메가인 이 우스운 세상에서 
도박이야말로 꽃 중의 꽃이라고 생각하오. 
경훈은 케렌스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이
상한 생각이 들었다.  케렌스키는 왜  하필 
자신을 불러, 평소에 하지 않던  얘기를 이
렇게 강변하는 것일까. 경훈의 직관이 꿈틀
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
다.
 후후, 이 변호사. 지금  불안한 기색이 얼
굴에 스치는군. 그래요,  나는 천재가 아니
었소. 다만 천재를  좋아하는, 천재이고 싶
은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이오. 나는  일생 
동안 스스로를 기만하며 살아왔소. 나는 그
것을 카지노의 테이블 위에서 더욱 확실히  
깨달았던 거요. 갑자기 케렌스키의  목소리
가 비관적으로 바뀌는 게 뚜렷이 느껴졌다.
 짐작하겠지만 나는 다시금 인생에서 실패
했소. 도박에서  졌던  것이오. 케렌스키는 
표정까지 한없이 가라앉았다. 열을  띠었던 
그의 표정이 이렇게 가라앉자 경훈은 더욱 
심한 불안을 느꼈다.
 이 변호사, 당신은  내가 왜 당신을  불러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모를 거요. 사실 
내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소. 케
렌스키는 경훈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말
을 이어나갔다.
 나는 이 변호사의  직관력을 무한히 부러
워했소. 특히 카지노의 테이블 위에서는 말
이오. 나는 도박에서  지고 돌아올 때마다, 
아니 여기  보스턴에서도 하루  종일 내가 
진 이유를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는 데 몰
두했소. 그러나 수십 번이나 새로운 계획을 
세워가지고 도전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마
찬가지였소.  도박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
닙니까? 천재라고 해서 도박에  이기는 것
은 아니죠.  
아니오, 천재는 틀림없이  이기오. 동양 고
전을 섭렵할 당시 『삼국지』란 책을 읽었
소. 그 책에 나오는 제갈공명이  도박을 한
다면 이길 것 같소, 질 것 같소? 천재에 대
한 케렌스키의 신념은 아직도 대단했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도  도박을 한다면 
이기지 못할 것 같은데요.  그는  과학자일 
뿐이오. 도박에는 과학이나 수학으로는  풀
리지 않는 그 무엇이 있소.  제갈공명은 소
설에서 과장한 인물이라 그렇지, 실제로 도
박에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 아닐
까요?  아니오. 내가 왜 이 변호사를  부러
워하는지 알고 있소?  저를요?  그렇소, 당
신의 직관이 부럽소. 나는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에서 한 사람을 만났소. 그는 대단한 
직관력을 가지고 있었소. 마치 당신처럼 말
이오.  직관이 뛰어난 사람은 꽤 있을 겁니
다. 
 그렇겠지. 그러나 나는 직관이 문화의  차
이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소.  어떤 
특수한 문화권의 사람들은  매우 직관적이
거든.
 이 변호사가 잘 보는 관상이라는 것도 사
실은 직관의 소산이잖소. 카지노에서  만난 
그 사람도 바로 이  변호사와 같은 한국인
이었소.  네? 한국인이라구요? 
 그렇소.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이 변호사를 
생각했소. 그와 이  변호사는 무척 닮았소. 
두 사람 모두 직관력이 대단하다는 점에서 
말이오.  그러나 저는 도박에 대해서는  전
혀 모르는데요. 
 그것은 도박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
니오. 문제는 과학이나  확률로 설명할  수 
없는 분야에서 당신들이  발휘하는 힘이라
는 거지. 나는 그 힘의 근원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소.  그래서 이  변호사에게 
이렇게 넋두리를 하는지도 모르오.  경훈은 
미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이 강하기로 소문난 
케렌스키가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데는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 한잔 더 하시오. 
케렌스키는 술병을 들고 일어섰다.  경훈에
게 다가와 술을 따르고는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는 책상 속에서 작고  검은 가
방 하나를 꺼내들고 돌아와 심각한 표정으
로 말을 꺼냈다.
 부탁이 있소. 
 …`…? 
 지금 즉시 출발하여 이것을 라스베이거스
에 있는 그 한국인에게 전해주시오. 그러면 
내가 맡긴 물건을 줄 것이오.  그것을 나에
게 갖다 주시오.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 물건을 반드시  건네받아야 하오.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말이오. 이 말을  할 때 
케렌스키의 눈이 유난히 빛났다. 경훈은 직
감적으로 그  물건이 아주  중요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케렌스키는 경훈에게 검은  가방을 건네주
었다.
 이게 뭐죠? 
 돈이오. 
 얼맙니까? 
 70만 달러. 
 네? 
경훈은 놀랐다. 현금으로 주고받기에는  너
무나 큰 액수였다.
 라스베이거스의 엠지엠 카지노에 가서 그 
사람을 찾으시오. 이름은  필립 최요. 경훈
은 못마땅했다. 이런 일을 자신에게 부탁하
다니. 돈을 받을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사실
과 뭔가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 먼저 나갔다.
 글쎄, 이런 일은 제가 하기에는 좀`…`…. 
 꼭 이 변호사가 맡아주시오. 
케렌스키는 강한 눈빛으로 경훈의 눈을 쏘
아보았다.
 무슨 돈입니까? 
 빌린 돈이오. 
 그런데 꼭 제가  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
까? 직원들을 보내기에는 액수가  크고 현
금이라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다른 까다로
운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오. 아무것도 
묻지 말고 갖다 주시오. 
경훈은 자신이 돈을 운반한다 하더라도 법
적으로 별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
지만 어딘지 모르게 께름칙했다. 그러나 애
써 좋지 않은 기분을 털어버렸다.  비록 이
상한 느낌이 들기는 해도, 회사  대표인 케
렌스키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는 없
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 사실은 나와 이 변호사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해주시오. 경훈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일을 누구에게 말한단 말인
가. 그러고 보니  케렌스키는 다른  직원을 
보내는 것보다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갈 
경훈에게 일을 시키는 편이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네. 
케렌스키는 양복 주머니에서  얼마간의 현
금을 꺼냈다.
 카드를 쓰지 말고  모든 비용을 현금으로 
지불하시오.  네. 
케렌스키는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려 애
쓰는 것 같았다.
 형제, 이것은 내 일이지만 동시에 이 변호
사의 일이기도 하오. 
언젠가 이  형제라는 단어가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오. 케렌스키는 방을 나서는 경훈
의 등뒤에 대고 뜻 모를 말을 던졌다. 경훈
은 그가 불쑥 내뱉은 ‘형제’라는 단어가 
몹시 신경에  거슬렸지만 왜  그런 단어를 
썼는지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의문의 죽음
라스베이거스. 세계 최고의 환락의  도시인 
라스베이거스는 매일 밤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한숨을 잉태한다. 일확천금의 꿈을 안
고 이 도시에 발을  디디는 사람들은 주변
을 스치는 단 한 번의 기회라도 놓치지 않
으려고 눈동자를 빛내며  신경을 곤두세운
다. 그러나 그들은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이 도시가 뿜어내는 마성에 시든 푸성귀처
럼 생명력을 잃고 만다. 
수많은 기회가 스쳐가지만 아무도 그 기회
를 주워담지 못한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무한한 욕망이 결국은  모든 것을 놓
치게 만든다. 
마침내 그들은 그 화려했던 꿈만큼이나 비
통한 한숨을 내쉬며 이  도시를 떠나야 한
다. 동전 한푼 남아 있지 않은 주머니를 만
지작거리며 다시는  이 괴물  같은 도시를 
찾아오지 않으리라 맹세하지만, 그들은  다
시 라스베이거스에 갈 날만 기다리며 한평
생을 살아간다. 탐욕은 나방의  애벌레처럼 
잠복하고 있다가 그 화려했던 순간을 못내 
잊지 못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마치 부나방
인 양 이 도시를 찾아들게 하는 것이다. 
경훈이 공항에 내려  게이트를 나서자마자 
어떤 사람이 그의 이름을  쓴 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리무진의 운전
기사였다. 그는 카지노 호스트로부터  나가
라는 얘기를 듣고 왔다고 했다.  경훈이 호
텔에 도착하자 VIP 서비스의 직원이  기다
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았다.
 여행은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어떻게 내가 올 줄 알고 
있었죠?  케렌스키 씨로부터 연락을  받았
습니다. 최고의 대접을 해드리라고  하셨습
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나는  게임을 
하지도 않을 텐데.  게임과는 아무런  상관
이 없습니다. 
경훈은 직원의 태도로 보아 이 카지노에서 
케렌스키가 VIP 중의 VIP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훈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카지노
에서 제공하는 펜트하우스로 들어갔다. 
32층의 펜트하우스에서   야경을 내다보던 
경훈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전
체 도시가 마치 네온사인으로  만든 듯 번
쩍거렸고, 불빛이 문자 그대로 불야성을 이
루고 있었다. 라스베이거스는 미국식  자본
주의가 만들어낸 걸작인 동시에 기형인 도
시였다. 
경훈은 샤워를 마친 뒤  돈을 금고에 넣어
두고 바로 카지노로 내려갔다.  케렌스키가 
얘기하던 한국인을 찾아  돈을 전해주어야
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경훈은 카지노 
호스트를 전화로 불러 필립  최가 묵고 있
는 방을 물었다.
 그분은 지금 어딜 가셨습니다. 이틀  후에 
돌아오겠다고 하셨습니다만`…`….   뭐요? 
가다니 어디로 가셨다는 얘깁니까?   그것
은 모르겠습니다. 
 언제 가셨습니까? 
 불과 세 시간도  안 됐을 겁니다.  그런데 
혹시 이 변호사가 아니십니까?  네, 맞습니
다. 
 그분이 무얼 맡기고 가셨습니다. 이  변호
사님께 전해드리라고 하시던데요.  뭐죠?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
까? 
 지금 방으로 올라갈 테니 거기로 갖다 주
시오. 
방으로 찾아온 카지노 호스트는 경훈의 신
분을 확인하고 나서 작은  나무 상자를 내
놓았다. 뚜껑과 몸체가 맞닿은 자리에는 얇
은 셀룰로오스 띠 같은 것을 붙이고 그 위
에 다시 테이프를 붙여 누구라도 열어보면 
당장 표시가 나게 해둔 목갑이었다. 케렌스
키가 아닌 다른 사람은 열어보지 못하도록 
장치를 해둔 것이었다. 
경훈은 자신이  찾아올 것을  아는 것으로 
보아 이미  케렌스키가 이  사람과 통화를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케렌스키가  얘기
하던 ‘그 물건’이란 바로 이것일 테지만 
돈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
다. 
경훈은 혹시 케렌스키가 아직 회사에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걸었다.
 네, 에이펙스로펌입니다. 
이상했다. 이렇게 밤 늦은 시각에 교환기가 
아니라 누군가 직접 전화를 받다니.
 저는 이 변호산데 누구시죠? 
 아, 이 변호사님. 비상 팀의 윌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죠?  기계 교환 장
치가 풀리고 비상 팀에서  직접 전화를 받
다니?  …`…`케렌스키 대표께서 돌아가셨
습니다.
 네? 
 대표께서 사망하셨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사망이라니? 
 너무나 급작스런 일이라  저희도 모두 당
황하고 있습니다만,  하여튼  돌아가셨습니
다.  아까  낮에도 사무실에   계셨잖아요?  
틀림없습니다. 
 아! 
오후에 케렌스키의  방을 나설  때 느꼈던 
께름칙한 기분은  결국 그의  죽음에 대한 
예감이었던가.
 모두 회사에 계십니다. 부대표께서 통화를 
하고 싶어하시니 잠깐 기다리십시오.  이내 
수화기에서는 부대표 사이몬  변호사의 목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변호사, 거기 어디요? 
경훈은 대답을 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케렌
스키는 철저한 비밀을 당부하지 않았던가. 
 시내에서 한잔하고 있습니다. 
 아까 케렌스키 대표의  방에서 단둘이 얘
기를 나눴다고 하던데,  뭐 특별한  내용은 
없었소?  글쎄요, 특별한 얘기는 없었습니
다. 
 케렌스키 대표께서 오늘 오후 돌아가셨소. 
 방금 들었습니다만 사인이 뭡니까? 
 실족사요. 마음이 울적하다면서 보트를 타
고 낚시를 하러 나갔다가 바다 한가운데에
서 빠지신 모양이오. 낚싯대가 드리워진 보
트만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신발 한 짝이 남아 있었소.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까? 
 자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
이오. 그러나 워낙 바다 한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라 정확한 사인은 아무도 알  수 없소. 
다만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사실만은 확실
하오. 조금 전, 그분이 입고 나가셨던 방풍 
재킷이 파도에 떠밀려다니는  것을 해안경
비대의 순찰선이 발견했다는 연락이  왔소.  
구명 재킷은 입지 않으셨나요? 
 보트 관리인에 의하면  오늘따라 구명 재
킷을 놔두고 나가셨다는  거요.  평소에도 
그러신 적이 있습니까? 
 부인의 말에 따르면, 그분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도 구명 재킷을  입지 않으면 보
트를 못 타게 할 정도로 구명 재킷에 대해
서는 철저하셨다고 하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런 분이 구명 재킷을  두고 배
를 타셨다는 것이`…`….  머리가  아주 복
잡하셨던 모양이오. 이 변호사도  알다시피 
그분은 머리가 복잡할 때면 주변에 잡동사
니가 널려 있는 것을  싫어하시잖소? 지금
은 나도 정신이 없소. 내일  아침 출근해서 
얘기합시다.  네. 
경훈은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석연치 않은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케렌스키가 갑자기 그렇게 사망한 것 자체
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깊은 바
다에서의 실족, 더군다나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던 구명 재킷을 놓고 간 날 하필 실족
이라니.
경훈은 이런  우연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살 가능성이 오히려 더  크게 다
가왔다. 그날 그렇게 흔들리던 모습을 보아
서는 낚시를 던져놓고  이것저것 생각하던 
그가 갑자기 감정이 격해져 바다로 뛰어들
었을 가능성이 있을 법도 했다. 
그러나 자살이라니. 아무리 도박에  졌다고 
해도 케렌스키는 여전히 세상에서 못할 것
이 없는 사람이다. 회사의 주식만 하더라도 
수백만 달러가 넘을  것이다. 더구나  그의 
진정한 힘은 재산이  문제가 아니다.  미국 
사회를 움직여나가는 그의  힘은 재산으로 
환산하기 곤란할 정도로 엄청나다. 그가 마
음만 먹는다면 이런 힘을 얼마든지 돈으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케렌스키의 자살은 
전적으로 정신적 문제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도대체 무슨 
정신적 문제가 있단 말인가. 그는  불과 대
여섯 시간 전에 경훈을  불러 삶과 도박에 
대해 이야기했고, 돈을  주면서 빌린  돈을 
갚아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70만  달러쯤은 
케렌스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경
훈은 잘 알고 있었다. 굵직한  소송을 이겼
을 때 들어오는 금액은 그보다 몇 배 혹은 
몇십 배가 아닌가. 
케렌스키는 정말 자신의 천재성에 대한 회
의를 품고 그 충격으로  자살했을까? 그러
나 경훈은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순간적으
로 자살 충동을 느꼈다면  구명 재킷을 두
고 나갔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는 차분
히 자살을  준비했다는 얘기일까?   아니면 
혹시 타살당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
리 그가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사고 직전
에 70만 달러라는  거액을 라스베이거스에 
갖다 주도록 부탁한 것은  결코 범상치 않
았다. 게다가 그 거액을 받기도  전에 물건
을 맡겨두고  사라진 필립  최라는 인물도 
여간 수상쩍지 않았다. 어떤 일도 현금으로 
70만 달러라는  거액을 받는  일보다 바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정황들로 보아 케렌스키의 사망은 단
순히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훨씬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것저것 생각하던 경훈은  빨리 보스턴으
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곧바로  호텔을 
빠져나와 공항으로 향했다. 일이 어떻게 되
어가더라도 일단은   케렌스키가 자신에게 
부탁한 것을 함부로 노출시키지 않기로 했
다.
다음날, 경찰은 케렌스키의 죽음을  자살이
라고 발표했다. 그 증거로 그가  구명 재킷
을 두고 나간 것을 내세웠다.  자살 의도를 
가진 케렌스키가  일부러 구명  재킷을 둔 
채 바다로 나갔다는 것이다. 
구명 재킷을 두고 나간  이유는 혹시 마음
이 변할까 봐 그랬을 것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자살의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직
원들은 여자 관계니 뭐니 하고 떠들었지만 
그저 헛소문에 불과했다.
 케렌스키 대표는 그야말로 천재였어. 자살
밖에는 달리 선택의 길이 없었을  거야. 사
무실에서 로펌의 변호사들은  영문도 모르
면서 케렌스키의 자살에 뭔가 의미를 부여
하려 했다. 경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동료들
의 근거 없는 짐작에 고개를 끄덕였다. 
경훈은 하루 종일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경찰은 신발 한 짝이  보트에 남아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었다. 
자살하는 사람이 신발을 벗고 싶어하는 심
리는 경훈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러나 하필 왜 한  짝이란 말인가. 이  남은 
신발 한 짝은 자살과  실족사라는 두 가지 
유력한 가능성  중 어느  하나를 결론으로 
채택하기 어렵게 했다. 타살도 역시 마찬가
지였다. 
누군가 그를 죽였다 하더라도 신 발 한 짝
을 남겨두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사인은 자살과 실족사로  압축되는데, 
경찰은 자살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경훈이 
생각해도 실족사는 너무  우연적이기에 사
인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왜 자살을 하고 말았나?’
경훈이 보는 한 케렌스키의 자살은 천재의 
광기 때문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재능이 천재에 미치지 못함을 절실
하게 고백하지 않았던가. 
며칠이 지나자 그나마 제기되던 다른 가능
성들은 사람들의 입에서 차츰  멀어져갔다. 
그것은 케렌스키의 부인이 발견한 메모 때
문이었다. 딱히 유서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지도 모르지만, 케렌스키가 실종되던 날 아
침 집에 써두고 나온 그 메모를 경찰은 유
서로 단정했다.
점점 숨이 막혀온다. 이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사랑하는 아내여, 이제 한 줄기  빛조차 스
러지고 나면 알바트로스의 날개에 올라 안
개 깔린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동안 안녕.
다시 일주일이 지나자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케렌스키가  자살했다고 단정
지었다. 특히 에이펙스의 이사회에서는  의
결권과 경영권  등의 문제  때문에 실종이 
아닌 사망으로 확정짓고자 했다. 그를 실종
으로 처리했을 때 오는  손실은 숫자로 따
지기 어려울 정도였다. 
케렌스키의 부인은 남편의  정열이 깃들인 
에이펙스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
녀는 모든 사람이 편하도록 케렌스키의 유
서와도 같은 메모를 경찰과 법원에 제출하
여 그의 실종을 자살로 단정짓는 데 큰 역
할을 했다. 
시신도 없는 상태에서  진행된 케렌스키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보
스턴의 저명 인사들뿐만 아니라 뉴욕과 워
싱턴에서도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 찾아왔
다. 그들은 검게 선팅된 자동차  안에 있다
가 입관 직전 잠깐  내려 애도를 표하고는 
그 길로 바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기대
에 들떴던 기자들을 실망시켰다.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이지.  케렌스키와 
같은 유대인들이야. 그들의 태도와  기자들
의 아우성을 보고 의아해하는 경훈에게 동
료 변호사가 말했다.
 저들은 평소에는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아. 
전설적인 인물들이지.
  그런데 왜  저들이 한두  사람도 아니고 
저렇게 많이 왔을까?  케렌스키 대표 역시 
유력한 멤버였지. 
 멤버였다고? 그럼 지금은 아냐? 
 문제가 있었어. 
 무슨 문제? 
경훈은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동료 
변호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팬암 사건 때문일 거
라고 짐작은 하지만`…`….  팬암 사건이라
니? 
 케렌스키 대표가 직접 뛰어들었던 소송이
야. 엄청난 사건이었지.
 결국 팬암은 그  사건으로 망하고 말았지
만.  케렌스키 대표는 어느 쪽이었어? 
 팬암 쪽. 패소했어. 
 패소했기 때문에 그들 그룹에서 축출됐다
는 얘기야?  그 내용은 자세히 몰라.  아마 
그 성격에 스스로 나와버렸겠지. 당시 팬암
의 상대는 정부였으니까. 순간 경훈의 뇌리
에 무언가가 스쳐갔다. 케렌스키의  자살이 
얼마 전  자신에게 부탁했던  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지나자 경훈은 이제 
그만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수 기간도 끝나가고 케렌스키도 없는 이 
마당에 에이펙스로펌에서의 근무는 무의미
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바
로 케렌스키가 자신에게 넘겨준 70만 달러
의 돈이었다. 그 돈을 필립  최에게 넘겨주
어야 할지 케렌스키의 부인에게 주어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작은 목
갑도 문제였다. 경훈은 생각 끝에 케렌스키
의 집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경훈은 택시가 케렌스키의 집 앞에 이르자 
감회가 교차하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불과 
얼마 전에  케렌스키는 이  집에서 경훈을 
위해 파티를 열어주었다. 경훈이  불가능해 
보이던 소송을 이겼다는  사실이 케렌스키
를 기쁘게 했던 것이다. 
케렌스키의 부인은 경훈을 보자 새삼 슬픔
이 복받쳐오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경훈
이 예상했던 정도로 파리한 얼굴은 아니었
다. 
의외로 부인의  작은 얼굴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안정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경훈
은 무심코 거실을 둘러보다가 한구석에 놓
여 있는 여자용 여행 가방을 발견했다. 
케렌스키의 부인이 차를 내오자 경훈은 정
중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케렌스키 변호사께서는  결코  보통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에는 분명  어떤 
뜻이 있을 겁니다.  그럴까요? 과연 그럴까
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분이  자살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비록  도박을 하셨지만, 
모든 것을 잃으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설사 재산을 다 잃었다  해도 그분의 실력
이면 얼마든지 새로 출발하실  수 있지 않
습니까?  그건 그래요. 제게도 돈은 있었어
요. 
 그분이 왜 그러셨어야  하는지 아직은 미
궁에 빠진 상태입니다. 
사실 그분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무슨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
다.  계획이라구요? 
부인의 얼굴에 작은 동요가 일었다.
 단지 제  느낌입니다만  그분이 돌아가신 
이유는 결코 간단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뭔가  이상한 점이 느껴
지긴 하는데`…`….  무엇입니까? 
경훈은 부인의 눈을 응시했다.
 남편은 요즘 와서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
을 자주 쓰곤 했어요. 무엇이  새로운 시작
이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어
떤 결의에  찬 표정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분의 서재를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사실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일하
던 동료들도 막상 남편이 돌아가시고 나자 
한번 찾아오지도 않는데 이렇게 와준 것만
도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경훈은 부인의 
안내를 받아 케렌스키의 서재에  들어갔다. 
그 서재는 수많은 책이  빽빽히 꽂혀 있는 
보통의 서재와는 좀  달랐다. 책들을  모두 
회사 도서관에 보관하고 있어서 그런지 서
재에는 별다른 책이 없었다. 다만  소송 기
록은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늘  천재를 부
르짖던 그였지만  소송 기록을  다 외우고 
있을 도리는 없었을 것이다. 
기록은 주로 소송에 관한 특이점,  전략 등
과 더불어 케렌스키 자신의 개인적 평가들
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소송에 관여한 
변호사들의 점수를 빠짐없이 기록해 둔 사
실이었는데, 경훈에게는 처음 한두 번을 빼
고는 항상 를 주었다. 
재판 기록에서 별다른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한 경훈은 케렌스키의  다이어리로 손길
을 돌렸다. 다이어리의 맨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을 때 경훈의 눈에는 낙서처럼 적어둔 
한 단어가 들어왔다. 날짜를 보니 케렌스키
가 실종된 날이었다.  
‘성전(聖戰).’ 
경훈은 이 글자를 제외하고는 특이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곧  다이어리를 덮고 
일어났다. 그가 서재에서 나오자, 거실에서 
여행 가방을 치우고 있던  부인은 놀란 표
정을 짓다가 이내 감추었다 어디 여행이라
도 가시는 모양이죠? 
 아, 네. 마음이  산란해서요. 여행을  하면 
좀 나을  것 같아서`…`….  경훈은 아직도 
상당한 미모를 간직하고 있는 부인의 얼굴
을 보며 말했다.
 따뜻한 서해안이 좋을 것 같군요.  샌프란
시스코나 시애틀이 분위기  전환에는 제격
일 거예요. 경훈이 가볍게 던진 이 말에 부
인의 얼굴은 이상하게 달아올랐다.  경훈은 
얼른 인사를 하고 케렌스키의 집을 나왔다.
성전이라. 만약 자살하던 날 아침에 적어둔 
단어라면, 거기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경훈은 택시 안에서 그  단어의 의
미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나  밑도끝도없
는 그 단어 하나만  가지고는 논리적 유추
를 할 수 없었다. 
한참 동안이나 그 단어의  의미에 푹 빠져 
있던 경훈에게 이윽고 하나의 영감이 떠올
랐다. 그것은 ‘성전’이라는 단어가  종교
에서 유래했다는 점과  케렌스키가 유대인
이라는 사실에서 유추한 것으로, 그의 죽음
은 어쩌면 성전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는 것이었다. 
케렌스키는 무슨 종교  전쟁이라도 치르는 
것일까? 게다가  케렌스키가 마지막   순간 
자신을 ‘형제’라고 부르면서  보였던 이
상한 태도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의 죽음은 
경훈 자신과도 무관하지 않을지 몰랐다. 그
렇다면 그가  자신에게 돈과  목갑을 맡긴 
것 역시 단순한  심부름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분명히 하나의 역할을 할당한 것
이다. 
경훈은 그 점이  궁금했다. 도대체  자신이 
케렌스키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역할을 맡
겼던 것일까. 그리고 자신의 역할은 무엇이
란 말인가. 
경훈은 생각  끝에 일단  돈은 케렌스키가 
말한 대로 부인보다는 필립 최에게 주기로 
했다. 케렌스키는 돈을 주고 물건을 받아오
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경훈은 출근하자마자  부대표의 호
출을 받았다.
 이 변호사, 내 방으로 좀 올라오시겠소? 
케렌스키의 사망 직후부터 바로 그의 자리
를 대신하고 있는 부대표의 호출에 경훈은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사실대로 밝혀야  할
지 어떨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만약 케렌
스키가 그날 회사의 공금을 주면서 라스베
이거스의 한국인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던 
거라면 문제는 간단치 않았다. 경훈은 일단 
부딪쳐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부대표는 어느새 케렌스키의  방을 차지하
고 있었다.
 안녕하시오? 이 변호사. 
 축하드립니다. 
경훈은 그동안 케렌스키에게  정이 들었는
지, 즉각 케렌스키의 자리를 차지하고 나선 
부대표에 대한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하, 무슨 말씀을. 
 무슨 일이 있습니까? 
경훈은 먼저 분위기를 짚어보았다.
 다름이 아니고 이  변호사가 그동안 우리 
회사를 위해 기여한 바가  워낙 커서 이제
는 정식으로  계약을 맺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요. 그래서  말인데,  어떤 대우를 
해주면 좋을지 의논하고자 하오. 경훈은 내
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부대표가 케렌스
키의 자금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면 무척 
곤란했을 것이다. 아마 할 수 없이 있는 그
대로 털어놓고 말았으리라.
 말씀은 고맙지만 이제  저는 한국으로 돌
아가야 합니다. 경훈은 단호하게 의사를 표
시했다.
 이 변호사, 한국에서 어떤 대우를  받을지
는 모르겠지만 아마 모든 변호사들에게 미
국은 최고의 기회를 보장할 거요. 미국이야
말로 변호사들의 천국이 아니겠소?   물론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수습직으로 받는 보수만 해도 제가 
한국에서 받는 보수보다  월등히 많으니까
요. 하지만 저는  한국의 로펌에서  연수를 
보내주어서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 그쪽에서  문제 삼는다면  배상을 하면 
되지 않겠소?  법률적으로는 해결책이  있
겠지요. 
하지만 인간적인  빚이란 숫자로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대표는 의외의 답변에 어
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경훈의  의지
가 확고한 것을 알고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저는 오늘부로 그만두겠습니다.  케렌스키 
대표와 언제든지 임의로 그만둘 수 있도록 
약속했기 때문에 문제는 없습니다.  경훈이 
아예 당장 그만두겠다고 하자 부대표는 은
근히 부아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회
사를 장악하자마자 유능한  변호사가 그만
둔다는 것은 보통 낭패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일을  위해서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황인종에게 고개를  숙
이며 사정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좋소, 마음대로 하시오. 경리부에 말해, 보
수는 구좌로 입금시키겠소. 당장  떠나라는 
얘기였다. 케렌스키 같으면 파티라도  열어
주겠지만 지금 부대표는  회사를 장악한다
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부대표로서는 자신
의 이미지에 해를  주는 일은 될  수 있는 
한 덮어두어야 했다.  경훈이 있어  준다면 
좋지만 굳이 떠난다면 다른 직원들 사이에
서 비난 여론이 일지  않게 조용히 가주어
야 하는 것이다.
경훈은 비서에게 자신의 짐을 챙겨 한국으
로 보내줄 것을 부탁한 후 가까웠던 몇 사
람에게만 작별 인사를 하고 회사를 나왔다. 
모두 안타까워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경
훈의 특별한 직관을 배우고 싶어하던 로버
트 변호사가 제일 아쉬워했다. 
경훈은 회사를 나와서  바로 집으로  갔다. 
이삿짐 회사에 전화를 걸어  모든 짐을 한
국으로 보내달라고   해놓고는 케렌스키가 
준 돈 가방만 들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은
행에 찾아가 대여 금고에  목갑과 돈을 집
어넣었다. 중요한 물건을 가지고 다닐 필요
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돈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라스베이거스에  들러 필립 
최라는 사람을 찾아  전해주어야겠다고 생
각했다. 
경훈의 직관은  자신도 모르게  모든 일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고 있었다. 
남과 여
경훈은 인남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
다. 약속 장소로 나온 인남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머? 지금 바로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그래, 지금 곧 가야 할 일이 있어. 
 왜? 현 선생님 일 때문이니? 
 아냐, 어차피 돌아갈 때가 되었어.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잖아. 상속 일도  네
가 도와줘야 하고, 무엇보다 현  선생님 일
을 같이 해결하기로 했잖니?  인남은 경훈
이 그녀와 상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결정
내린 것을 원망하는 기색이었다.
 자주 올 텐데 뭐. 
경훈은 차를 마시며 자신이 이렇게 서두르
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아마 
거기에는 제럴드 현이  얘기하는 10·26의 
비밀을 캐내고 싶은 마음도 크게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
다. 
경훈은 무의식중에 어떤 위험을  감지했다. 
물론 케렌스키가 부탁했던  일을 털어놓으
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아무 부
담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사라져버
린 케렌스키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강
박 관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네가 없으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모든 것이 두렵고 낯설어. 인
남의 말에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하지 마. 이 일이 어떤 형태로든 마무
리될 때까지는 나도 다른  일은 하지 않을 
작정이야. 일단 한국에 가서 10·26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 제럴드 현이라는  인물이 
과연 있었는지 알아볼게.
 인남의 얼굴에  불안감과  아쉬움이 짙게 
깔렸다.
 할 수 없지 뭐. 그럼 오늘  밤이 보스턴에
서 우리가 함께하는 마지막 밤이겠구나. 두 
사람은 잠깐 동안 서로의 생각에 빠져들며 
침묵했다. 
두 사람은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재즈 클
럽으로 갔다. 4인조 밴드가 흘러간  컨트리
로부터 최근의 헤비메탈에  이르기까지 여
러 장르를 연주해서, 나이에 상관없이 팬들
이 몰려드는 싸고 편안한 클럽이었다. 언제
나 그렇듯 인남은 맥주를, 경훈은 스카치를 
시켰다.
 역시 너는 고급 술을 마시는구나. 
 고급 술이 아니라 독한 술이지. 
 나는 감히 스카치를 시키지 못해. 
 왜? 
 수준에 맞지 않아서. 
 수준? 무슨 수준? 
 비싸서 말이야. 
 …`…. 
 독한 술은 비싸. 나는 맨날 살찌는  게 두
려우면서도 맥주밖에 못 시키거든.  스카치
도 한잔만 시키면 맥주보다  비쌀 게 없잖
아.  
얼음 잔뜩 넣고 겨우  요만큼 넣어주는 스
카치가 비싸지 않다고? 나는 일단 양이 어
느 정도는 돼야  안심이야. 경훈은 웃었다. 
인남의 얘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남은 돈보다도 미국에서  살아가며 느끼
는 불안에 대해 말한 것이다.
 이제 너는 부자가 됐어. 고급 위스키를 병
째 시켜도 되잖아.  안 돼. 현 선생님의 돈
을 그렇게 펑펑 쓸 수는 없어.  그분은  너
에게 돈을 쓰라고 주셨어. 
 그래, 알아.  하지만 일단  그분이 남기신 
숙제부터 풀어야지. 그분의 재산은 그 일에 
써야 한다고 생각해. 가령 네가 그 일과 관
련해 한국에서 활동한다면 내가 제반 경비
를 줘야 한다는 말이지.
 경훈은 말없이 웃었다. 인남이 비록  단순
하긴 하지만  돈에 휘둘리지  않는 깨끗한 
심성을 가졌다는 사실이 기분 좋게 다가왔
다. 
학교 시절엔 그저 문제아로만 알았는데 이
렇게 맑고 건강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경훈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인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니? 
경훈의 눈길을 의식한 인남은 얼굴을 붉혔
다.
 음, 역시 너는 미인임에 틀림없구나. 
 얘는,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럼 내가 미인인 줄  여태껏 몰랐단 말이
야? 인남의 해맑은 웃음이  스스럼없이 잘
게 부서졌다. 경훈은  인남의 맑은  웃음을 
보는 순간 갑자기 한국에서 선민과 헤어지
던 날 밤이 연상되었다. 그  밤에도 이별이 
있었고, 그 이별을  조롱이나 하듯  해맑은 
웃음이 있었다. 
경훈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을 본 
인남은 스카치를 한잔 더 시켰다.  오늘 밤
에는 경훈의 취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후후, 너는 뭔가를 아는 애 같구나. 
 애가 뭐니? 우리가  언제까지나 고등학생
인 줄 알아? 나이가 서른이 넘었으면 숙녀
라고 불러줘야지. 인남은 일부러  분위기를 
가볍게 돌리려 했다.
 그래, 너도 이제 숙녀지.  숙녀도 한참 숙
녀. 그런데 나는 뭐지?  신사. 
 신사? 신사라? 
 그럼, 너야말로 신사 중의 신사지. 
 그럴까? 과연 내가 신사일까? 
경훈은 스카치를 털어넣고 다시 한잔을 시
켰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을 이
었다.
 아닐걸, 나는 신사는 아냐. 
 왜 그래? 네가 신사가  아니면 누가 신사
야? 
 인남이 너는 나에  대해 얼마큼  알고 있
지? 
인남은 경훈의 표정이 무거워지는 것을 보
고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신사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경훈은 웨이터가 가져온 잔을 한번에 털어
넣고는 또 한잔을 주문했다. 인남은 경훈이 
약간 취했다고 생각했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냐? 
 마실 만큼만 마셔. 
 네 말은 언제나 알아듣기가 힘들어.  신사
가 아니란 건 무슨 뜻이야?  그만두자. 
경훈은 아무 말도 아니었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여자 문제 같은데? 
인남이 은근히 떠보아도 경훈은 별다른 반
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만두자.  내가 그런  얘기를 들을 
자격이나 있겠니? 네 옆에는 가문 좋고 돈 
많은 애들이 줄을 서 있겠지.  너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그들을 만날 테고, 사랑하겠
지. 인남의 말이 끝나자 경훈은  눈을 똑바
로 뜨고 그녀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난 말이야, 쓸데없는 일에 윤리적·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 바르게 살아야 하니 
어쩌니 해도 인간의 윤리란 건 고작 한 세
대 혹은 한 세기를 못 넘기는 것들이 대부
분이지. 나는 그런 쓸데없는 관념에 좌우되
진 않아. 인남은 농담 한마디에  과민한 반
응을 보이는 경훈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이
성적이던 그에게 이런 점도 있었나 싶었다. 
인남은 계속해서 물었다.
 그러니 마음 놓고  여자들을 마구 만난다
는 말이니?   나는 나를 지배하는 힘에 의
해 경험을 추구해. 
 그럼 너를 지배하는 힘은 뭔데? 
 호기심과 정열이야. 여자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 그리고 진리에 대한 끝없는 정열이 
나라는 인간을 이루고 있는 기본 개념들이
지.  또 어려운  얘기구나. 하지만  기분은 
좋다. 여자에 대한 끊임없는 정열이 있다면 
내게도 관심이 있다는 얘기니까. 어쨌든 나
도 여자잖아.  춤이나 같이 출까? 
 좋아, 너는 정말 엉뚱한  데가 있어. 도대
체 종잡지를 못하겠다. 
인남은 반가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4인조 
밴드는 어두운 실내에  묵직하게 깔리도록 
<오텀 리브스>라는 곡을 연주했다. 인남은 
취한 경훈의 팔이 허리를 휘감아오자 숨이 
멎는 듯했다.
 서울을 도망쳐 나왔어, 2년 전에. 
경훈이 인남의 귀에 입술을 스치며 얘기를 
꺼냈다.
 매일 밤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어. 그 여자
가 있는 도시로 말이야. 인남은  조용히 고
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귀에 닿을 듯 말 듯
하던 경훈의 입술이 그대로 느껴졌다. 인남
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런데 막상  돌아가려니까  그냥 이대로 
여기 있고 싶어.  너 겁내고 있구나. 
경훈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떤 사람이었니?  네가 그렇게  못 잊던 
그 여자는? 경훈의 목소리가  숨결과 함께 
인남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아름다운 여자지. 
 그런데? 
 이해할 수가 없어. 헤어지자더군. 모든 것
을 내게 바친 그 순간에 말이야. 경훈의 얼
굴에 아쉬움과 쓸쓸함이 교차되었다.  그는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인남은  뺨을 
앞으로 내밀어 경훈의 찡그린 뺨을 가볍게 
눌렀다. 경훈은 옅은 화장을 한  인남의 살
결에서 은은한 향기가 전해지자 숨이 막혔
다. 여인의 향기였다. 그는 지금 인남을 여
자로 느끼고 있었다. 
인남, 너무 가까운 곳에 있는 여자였다. 경
훈은 팔에 힘을 주어  인남의 허리를 끌어
당겼다. 그리고 인남의 잘록한 허리가 기분 
좋게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그녀
의 입술을 덮쳤다.
 아! 
인남의 두 가슴이 해면처럼 부드럽게 경훈
의 가슴에 밀착되었다. 
균형을 잃은 듯한 그녀의  무게 중심이 경
훈의 가슴으로 밀려왔다.
경훈의 혀가 인남의 입술을 부드럽게 축인 
후 새하얀 치아를 밀고 들어가서는 입천장
을 거칠게 훑었다.  인남은 자기도  모르게 
몸이 뜨거워졌지만 애써 경훈을 밀어냈다.
 왜 그래? 나  인남이야. 나를  딴사람으로 
혼동하지 마. 인남의  말에 경훈은  당황했
다.
 경훈아, 너 오늘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 
 …`…. 
 그만 돌아가자. 
경훈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굳어졌다. 
 그래, 내가 집까지 바래다 주지. 
 경훈아, 미안해. 
 괜찮아. 
택시는 인남의 집 앞에 멎었다.
 한국으로는 언제 떠나니? 
 네바다에 잠깐 들른 후 바로 떠날 거야. 
경훈은 라스베이거스라고 하지 않았다.  그
는 무의식중에도 조심하고 있었다.
 연락할 거지? 
 음. 
 기다릴게. 
 연락할 일이 있으면 이리로 해. 
경훈은 한국의 전화 번호를 적어주었다. 인
남은 안심했다. 경훈이 비록 화가  나긴 했
지만 자신과의 연락을 아주 끊지는 않으리
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남은 경훈의 뺨에 가볍게 키스하고 나서 
택시에서 내렸다. 인남이 내리자마자  택시
는 가속음을 남기고 야속하리만큼 빨리 시
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인남은 멀어지는  택
시를 바라보며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네 가지 조건
다음날 아침 일찍 경훈은  가방 하나만 들
고 공항으로 나갔다. 그는  라스베이거스행 
비행기를 타고 보스턴  상공에 떠올라서야 
비로소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즐겁고 유익했던 유학 생활이었다. 
하버드의 로스쿨에서 미국의  유수한 법률
가들과 논쟁을 벌이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특히 법률과 문화의 상관 관계에
서 문화적  관점의 우위를  주장한 자신의 
생각에 저명한 교수들이  전적으로 동의해 
준 것이 인상 깊었다. 한국의  경우 개인주
의에 치우친  조문대로의 법  집행이 고유 
문화 파괴에 앞장서기 때문에 늘 유감스러
웠다. 
라스베이거스는 여전했다. 늘 똑같은  방문
자들, 똑같은 서비스,  그리고 똑같은 결말
의 분위기가 이 기괴한  도시를 채우고 있
었다.
 케렌스키의 자살에  대해서는  이 도시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필립 최 씨 계신가요? 
 네, 아마  방에서 주무시고  계실 겁니다. 
저녁때 바카라   테이블로 나오실  거구요.   
바카라 테이블이라고요? 
 네, 세계의 큰  도박은 모두 이  바카라로 
한답니다.  어떤 게임이죠? 
 간단히 얘기하면 카드를  두 장씩 나누어
서 합이 ‘나인’에 가까운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손님이 카드를 선택할 수는  없나
요?  없습니다. 손님은  배팅을 할 뿐입니
다. 뱅커든 플레이어든 일단 배팅을  한 후
에는 카드가 규정에 따라 나누어지고 오직 
이기고 지고의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간
단한 게임이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도박은 가장  간단한 
게임이 가장 무서운 법이죠.  그럴  법하군
요. 
바카라는 아무런 테크닉이 필요 없는, 마치 
가위바위보와 같은 게임이었다. 경훈은  이 
게임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오로지 운이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케렌스키는 이 간단
한 게임에 인생을 걸  만큼 열중했다가 결
국 패하고 자살해 버렸다는  말인가? 경훈
은 의아했다. 이렇게  간단한 게임을  과연 
도박이라 할 수 있는가? 바카라는 누가 하
더라도 이길 확률과 질  확률이 정확히 반
반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기술도 필요  없
다. 개인의 테크닉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게임이다. 그런데도 이 바카라가 세계
에서 가장 크고 어려운 도박이라는 사실을 
경훈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새삼스럽게 
도박의 원리에 대해  흥미가 일었다.  또한 
케렌스키가 말한 엄청난 직관을 가진 사나
이에 대해서도 관심이 커졌다.
필립 최, 케렌스키로 하여금 존경과 감탄을 
자아내게 한 사나이. 
일개 도박꾼에 불과하다고 폄하해 버릴 수
도 있지만, 도박의  세계에서는 신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나이임에 틀림없
었다. 
경훈은 케렌스키는 절대로 최고가 아닌 사
람을 높이 평가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너
무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바카라라는 
게임의 단순성이 경훈으로 하여금 필립 최
란 사나이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도대체 필립  최는 어떤  기술을 가졌기에 
이 단순한 게임에서 명성을  쌓았을까? 경
훈은 어쩌면 이 단순함이야말로 오히려 최
고의 기량을 요구하는  함정일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다. 
라스베이거스의 밤은 카지노의  네온이 하
나 둘 켜지면서 시작된다. 이  사막 한가운
데 자리잡은 도시를 찾는 사람들이 관광이
니 오락이니 하면서  낮에 부산을  떨어도, 
정작 이 도시는 밤에  항해를 시작하는 것
이다. 검은 양복을 깨끗이 차려입은 딜러들
이 휘황한  샹들리에 밑에서  카드를 앞에 
놓고 옅은 미소를 띤 채 밤의 항해에 참가
할 손님을 기다린다. 
경훈은 식사를 마치고 느지막이 바카라 테
이블로 내려갔다. 경훈은 첫눈에 필립 최를 
알아봤다. 왜냐하면 아직 초저녁이라  그런
지 카지노에는 게임을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밖에 없었고, 그가 바로 동양인이었기 때
문이다. 
동양인이라 해서 한국인으로  단정지을 수
는 없지만 경훈의 안목은 한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중국인을 가려내는 데 실수한 적이 
없었다. 세 나라 사람은 아주  비슷해 보여
도 한국인에게는 일본인이나 중국인에게서
는 볼 수 없는 아집 같은 것이 엿보였다. 
필립 최는  엄청난 금액에  해당하는 칩을 
테이블 위에 놓고 있었다. 카지노에서의 게
임은 모두 칩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게임 
도중에 화가 난 손님이  현금으로 한두 번 
배팅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원칙적으로 모
든 거래는 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경훈은 한동안 말없이 필립 최가 게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필립  최는 엄청난  칩을 
쌓아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적은 금
액만 배팅하곤 했다. 
경훈은 처음  접하는 게임이라  지루한 줄 
모르고 구경을 했지만,  슈에 담은  카드가 
다되었을 때는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나 있
었다.
 이번 슈에서는 3만 달러를 땄군.  칩을 모
두 바꿔줘. 필립 최는 앞에 있던 칩을 딜러 
쪽으로 밀었다.
딜러가 몇 번씩이나 칩을 세고 또 세어 고
액 칩으로 교환해 주자  필립 최는 그것을 
모두 손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팁이야. 
필립 최가 일어나며 던지는 칩에 딜러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며  댕큐를 연발했다.  그 
광경은 마치 주인에게 먹이를 받은 강아지
들이 고맙다고 짖어대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경훈은 필립 최에게 한국
말로 물었다.
 혹시 최 선생님이신가요? 
필립 최는 의아스러운 듯  경훈을 잠시 훑
어보고는 대답했다.
 그렇소만`…`…. 
 저는 보스턴에서 왔습니다. 케렌스키 변호
사님의 일로 왔죠.  아, 이 변호사군요.  어
디 조용한 데서 얘기할까요?  그러죠. 
필립 최는 칩을 모두  캐시어에게 맡긴 후 
경훈을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방은 초호
화판이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야경이  대형 
유리창을 통해 한눈에 들어왔다. 필립 최는 
냉장고에서 마실 것을 꺼내왔다.
 돈을 전달해 달라고 하셨기에 왔습니다. 
경훈은 가방을 내밀었다. 필립 최는 가방을 
열고는 돈을  세어보지도 않고  눈으로 쓱 
훑은 다음 옆으로 치워버렸다.
 그분의 근황은 아시죠? 
경훈은 혹시 필립 최가 케렌스키의 죽음에 
대해 알지 모른다는 생각에 말을 꺼냈다.
 이상한 일이오. 
필립 최도 케렌스키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
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경훈은  케렌
스키가 필립 최를 대단하게 얘기하던 것이 
생각나 도박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고 싶었
다.
 케렌스키 변호사님은 왜  지셨을까요? 평
소 천재라 자부하시던 분이었는데`…`… 도
박이란 것이 그분의 머리로도 도저히 이겨
낼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겁니까? 경훈은 
쓸데없는 질문이라 생각하면서도  필립 최
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물었다.  도박에서 
항상 이기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문제는 머리가 아닌데, 케렌스키는 천재의 
능력에 너무 기대를  걸었소.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얘기요. 결국 그는 깨우치지 못하
고 말았지.  깨우치지 못하다니요?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는 말이오. 
 그럼 도박을 이기는  힘이란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이오.
경훈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면 이길 수 있
다는 말씀인가요? 경훈이 약간 비아냥거리
는 조로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필립 최는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다.
 도박에서 이기려면  일차적으로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하오.  그  조건들은 무엇입니
까? 
 우선 직업이 없어야 하오. 
 직업이 없어야 한다구요? 
 그렇소. 
 그건 무슨 의미죠? 
 무한히 많은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
오. 
 무한한 시간? 
 그렇소. 시간은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지. 
카지노와 손님을 비교해 보시오.  카지노에
서는 수십 명의 딜러가  교대로 손님을 대
하고, 무한한 자본과  시간을 가지고 있소. 
반면 손님은  혼자서 피곤에  절어 게임을 
하지 않소? 일을 잠시 제쳐둔  채 며칠 여
유를 내서 게임을 하기  때문에 마음이 조
급할 수밖에 없지. 자본도 카지노에 비하면 
새발의 피와 같소. 조건 면에서  도저히 상
대가 되지 못하오.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
다. 그도 미국에 있는 동안  가끔 카지노에
서 블랙잭을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잃었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카지노에 오는 손님의 
99퍼센트, 아니  100퍼센트가 잃고  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태백의 폐광  지역에 카지노를 
만든다고 하자  관련 기업의  주식이 무려 
열 배나 뛰지 않았던가. 현대  자본주의 사
회에서 카지노는  누가 뭐래도  황금 알을 
낳는 거위임에 틀림없고, 그래서  전세계적
으로 확산 일로에 있는 것이다. 
카지노를 상대해서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런데 경훈이 은근히 경
시했던 필립 최라는 사람은  그 이유를 합
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무엇입니까? 
 많은 돈을 잃어보아야 하오. 
그럴 법한 얘기였다.  이것은 설명이  필요 
없었다. 바둑을 이기려면 우선 많이 져보아
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러나 카지노 도박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경험을 얻을 만큼만 잃기는 어렵소.   무슨 
뜻이죠? 
 돈이 있는 동안은 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잃고 만다는 
뜻이오.  그러나 잃은 경험이 있다면  다음
에는 적은 돈으로도 재기할  수 있지 않습
니까? 필립 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안 되오. 왜냐하면 많은 돈을 잃는다는 것
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조건이기 
때문이오.  그  다음 조건은   무엇입니까?  
창조적 머리와 배짱, 그리고 무엇보다도 승
부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오.  창조적  머리
라고 하는 것은 그냥 좋은 머리로는 안 된
다는 뜻입니까?  그렇소. 
 배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승부에 대한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승부
욕이 승화되어 더욱 안정되고 깊이가 있는 
단계요.  어렵군요. 마지막 네 번째 조건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존재에 대한  존중과 
자신감이오. 
 그 의미는요? 
 항상 이길 수 있다는 굳센 자신감, 그리고 
비록 돈을 다 잃더라도  자신이 돈 따위에 
휘둘리는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고 여기는 
스스로에 대한 경애감을 뜻하오. 이것은 자
신이 세운 원칙을 존중하게 해주지.  참 어
렵군요. 
필립 최의 얘기는 다분히 철학적이었다. 경
훈은 만약 이 사람의 말이  맞다면, 케렌스
키가 비록 천재적 머리를 가졌다 하더라도 
도박에서 이기기는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가지  조건은 단순
히 외적·내적 조건뿐만이 아니라 보통 사
람으로서는 갖추기가 불가능한  경지의 것
들이었다. 
경훈은 이렇듯 합리적이고  철학적으로 도
박을 이해하고 있는 필립  최에게 차츰 호
감이 갔다.
 최 선생님은 그 네 가지  조건을 다 갖추
고 계십니까? 경훈이 웃으며 묻자 필립 최
도 미소를 지었다.
 그 네 가지 조건은 겨우 출발에 불과하오. 
 또 있습니까? 
 그렇소. 그 다음 단계인 자신과의  싸움에
서도 이겨야 하오.   자신과의 싸움이라구
요? 
 욕망과의 싸움이지. 
 …`…. 
더욱 어려운 얘기였다. 누가 욕망과의 싸움
에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수도사나 고승에게조차 쉽지 않은 
일인데요. 필립 최는 고개를 들어  창 밖으
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유난히  하얀 피부 
위에 건너편 엑스캘리버  카지노에서 내쏘
는 파란 네온 불빛이  비쳐 신비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는 손등으로 잔 수염이  나 있
는 턱을 문질렀다. 
 도박에서 이기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크
게 깨달은  수도사나 고승이  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오.  바늘 끝만한  실수도 
바로 파멸이나 죽음으로 이어지니까.  도박
이란 운이 좋아 이기는 게 아닙니까? 흔히 
처음 하는 사람이  딴다고 하잖아요.  처음 
하는 사람은 기술이 좋을  리 없으니까 운
이 모든 것을 좌우하지 않습니까?  프로는 
운을 얘기하지 않는 법이오. 
필립 최의 대답은  간단했다. 경훈은  그의 
수준이 이미 도인에 못지않다는 것을 간파
했다.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더라도 어
떤 사람인지 드러나는 법이다. 경훈은 케렌
스키가 이런  필립 최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경훈은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한국
행 비행기표를 샀다. 그는 자신이 2년 간의 
미국 생활 끝에 커다란 숙제를 얻어간다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는 우
연히 휘말리게 된 일에  대한 엄청난 압박
감을 느끼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추적
 여어, 이 변호사. 얼굴이 좋아졌어. 
법무법인 코리아인터내셔널 대표는 귀국한 
경훈을 반갑게 맞았다.
 그는 경훈으로부터 케렌스키의 자살에 대
해 듣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 케렌스키가  도박
에 져서 자살했다니. 얼마를 잃었는지 모르
지만 그 사람 능력으로는 얼마든지 헤쳐나
갈 수 있었을 텐데.  단순한 도박이 아닙니
다. 케렌스키 변호사는 인생의 의미를 도박
에서 찾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시고 말았
죠. 게다가 본인이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도 
도박을 통해 깨달으셨던  것입니다.  하긴 
이해할 만해. 그  사람 언젠가  모임에서도 
어찌나 천재를 부르짖던지`…`….  …`….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 변호사 칭찬을 했
는데`…`….  소송 몇 건 이긴 것밖에 없는
걸요. 
 그건 그렇고 다시 같이 일하게 되어 반갑
소. 
 좀 쉬었다가 나왔으면 합니다. 
 그렇게 해요. 쉬면서 이쪽의 감각을  회복
하는 것도 중요하지. 오자마자 일에 파묻혀
버리면 능률도 안 오를 거요.  하지만 주변
의 지인들이나 고객들에게  돌아왔다는 인
사 정도는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소.  이 변
호사를 아끼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잖소. 
내일부터 사무실도 마련해 둘 테니 당분간 
개인 사무실로 쓰시오.  고맙습니다. 
역시 대표는 깐깐하면서도 세심했다.
제럴드 현이 얘기한 10·26의 비밀을 추적
하자면 경훈은 회사를 며칠 쉬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휴
가를 내기도 곤란하던 참이었다.
경훈은 며칠 간 지인들과 고객들에게 전화
를 걸거나 잠시 만나 인사를 나눈 뒤 차분
히 도서관에 들어앉아 10·26에 관련된 내
외의 기사를 빠짐없이 검토했다. 국내 언론
의 보도는 거의  대동소이한 것으로,  당시 
보안사가 주축이 된 합수부의 발표를 근간
으로 하고 있었다. 
경훈은 기존의 발표와 분석을 무시하고 자
신만의 가설을 수없이  세웠다가 무너뜨리
곤 했다. 사건 자체가 워낙  최고 권력층에
서 일어난데다가 수사도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구가하던   보안사에서 독자적으로 
한 것이고 보면, 기존의 발표를  그대로 믿
을 수는 없었다. 열흘 간이나  당시 자료들
을 꼼꼼히 검토하던 경훈은 10·26에 대한 
의문점을 나름대로 새롭게 정리했다. 
막상 정리하고 나니 다시 새로운 의문점이 
불거져나왔다. 우선 같은 합수부의 수사 발
표와 기소 내용부터가 모순되었다.  합수부
는 김재규  정보부장의 박  대통령 시해를 
우발적 범행으로 발표하고 나서 기소할 때
는 내란 목적 살인죄를 적용한 것이다. 
또 김재규 부장의 진술도 백팔십도 달라졌
다. 그는 합수부에서 심한 고문을  당할 때
는 “야당에  대한 정보부의  공작 실패와 
부마사태에 대한 유약한  대응으로 대통령
으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따라서  정보부장
직에서 해임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던 
중 차지철이 말 끝마다 자신을 깔아뭉개고 
대통령이 동조하여 인격적  모멸감을 느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재
판을 받을 때는 “조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진술했다. 
경훈은 아무리 사소한 자료라도 놓치지 않
고 읽고 또 읽었다. 10·26에 관한 자료 중 
경훈의 눈길을 잡아끌었던  것은 박정희의 
‘자주 국방론’이다. 김재규가 정책상  박
정희를 반대한 가장 큰  이유로 들었던 자
주 국방과 관련된 모든  자료 검토를 끝내
자 경훈의 발걸음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
는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대충 넘어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경훈은 탐문 끝에 말이 좀 통할 만한 수사
관을 찾아냈다. 부장검사로 있는 선배를 통
해 만난 오십대 중반의  전직 수사관은 처
음에는 다소 불안한 눈길로 경훈을 아래위
로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이미 김재규 건과 
관련해서는 모든 공소 시효가 소멸된 것을 
떠올린 듯 곧 당당한 태도를 회복했다.  
경훈은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
를 만들기 위해 소주 한잔쯤 걸칠 수 있는 
편한 음식점으로 그를 안내했다. 전직 수사
관은 소주를  반 병쯤  마시자 거북살스런 
느낌이 없어졌는지 탁한  목소리로 얘기를 
꺼냈다. 그는 경훈보다  스무 살  이상이나 
나이가 많았지만 변호사라는  신분이 부담
스러운지 말투가 아주 깍듯했다.
 하루는 왼쪽만을,  또 하루는  오른쪽만을 
무자비하게 팼습니다. 
대통령을 시해한 인간이니까  보호할 가치
고 뭐고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왜  그렇게 
한쪽만을 때립니까? 
 그래야 더 고통스럽습니다. 사람이라는 게 
온몸을 다 맞으면 감각이 무뎌지거든요. 경
훈은 전직 수사관의 얼굴에서 표독스런 표
정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것
을 보며, 김재규가 서빙고에서 당했을 고통
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건강이 몹시 나빴는데 고문을 할 수 
있었습니까?  아마추어는 따귀 한 대 때리
다가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는 
전문가들입니다. 전문가들은  흔적도  없이 
지옥보다 심한 고통을 줄 수  있다 그거죠. 
건강 같은 것은 문제도 안 됩니다. 전직 수
사관은 일단 자신의 전공 분야에 들어가자 
학술적 설명이라도 하는 듯 진지해졌다. 
 김재규는 수사 중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김재규의  모든 
진술은 박 대통령을 존경한다는 베이스 위
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의 
여자 관계 등에 대해서도 부하들에게 입을 
다물 것을 요구했지요. 그것은 자신에 대한 
동정 여론을 구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요
소였는데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박 대
통령을 영화배우·탤런트·모델·가수,  심
지어 여대생까지 당대의  미인들이라면 가
리지 않고 탐닉한 독재자로 밀어붙이면 여
론이 얼마나 들끓었겠습니까? 사람들은 그
런 데 민감한 법이고, 그런 사실이 유신 독
재의 폐해를 간접적이지만  가장 감각적으
로 보여줄 테니까요.  여유가 있었던  모양
이군요. 
 네, 김재규는 처음에는 모진 고문을  당하
면서도 강한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자신은 
반드시 살아난다고 믿는 것 같았지요. 그러
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자신감은 엷어지고 
있었어요. 12·12 후에는 극도로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을 보였습니다. 무언가를  애타
게 기다리다가 결국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듯한 모습이었거든요.  그때부
터 그는 논리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자신
의 혁명론을 구성하기  시작했다는 말이지
요.  그에게 자유롭게 진술할 분위기가  주
어진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수사
관에게는 본능적 판단력이 있어요.  자신이 
신문하는 이 사람이 나중에  어떻게 될 것
인가를 정확하게  예측합니다.  우리에게는 
김재규가 죽는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큰일
을 저질렀는데, 나타나는 배후 세력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러니 그의 운명은 뻔한 것이
고 진술은 다만  형식적이었던 겁니다.  갈 
길이 정해져 있었단 말이지요. 그는 연행되
던 그날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경
훈은 잠시 그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사건이 있던 날 밤 김재규는 육군 본부 벙
커로 갔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대통령을 
살해한 사실을 숨기려고 했지만 결국 김계
원 비서실장으로부터 사실을  전해들은 정
승화, 노재현에 의해  체포된다. 그후 그는 
보안사 정동 분실에 감금되었다가 다시 서
빙고의 수사 분실로 옮겨진다. 수사 분실에
서 김재규는  이학봉 중령의  지시를 받은 
신동기 수사관에 의해  무참하게 얻어맞는
다. 
키는 작지만  갖가지 무술에  능하고 간이 
큰 신동기는 “이왕 어느 쪽으로든 결정을 
보아야 할 상황이라서  무식하게 밀어붙였
다”는 것이다. 그는 한 달  전 중앙정보부 
부설 정보학교에서  여섯 달  과정의 정보 
교육을 마칠  때 성적이  우수하여 김재규 
부장으로부터 상을 받은 적도 있고 호송하
는 과정에서 다소 정이 들기도  했었다. 그
러나 지금은 안면을 몰수할 때라고 판단했
다. 김재규와 공모한  반란 부대를  알아내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수사관
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긴급한 상황에
서 자백을 빨리 받아내는 방법은 물리력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어이, 김재규, 솔직히  이야기하자. 어느 
군부대를 몰고 올 거야? 우리도 알아야 손
들고 항복할 것이 아닌가.
신 수사관은 이때부터 한  30분 간 김재규
를 ‘거칠게’ 다루었다.
 정보부장 김재규는  살인범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어느 군단과 결탁했어?`
─`없습니다. 단독으로 시해했습니다.`
김재규는 쇠로 만든 의자에 앉았다가 나뒹
굴어질 때마다 스스로 의자를 바로세운 뒤
에 자세를 딱 바로잡고  앉아서 다음의 타
격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꼭 일본  무사 같
았다.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
다.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비판한 적은 없었
습니까? 
 없었어요. 그는 깍듯이 자신이 살해한  대
통령이 잠들어 있는 북망산을 향하여 무릎
을 꿇고 고개를 숙이곤 했습니다.  박 대통
령의 정책 등과 관련해서는 어땠습니까? 
 글쎄요. 김재규는 실상 철저한 박정희주의
자였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이념보다는 
감정으로 인간 관계를 설정하는 듯한 태도
를 느낄 수 있었는데, 그는 한평생 박 대통
령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
본의 사무라이를 추종하는  듯한 그로서는 
은혜를 배신으로 갚은 것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겁니다. 그는 틈만 나면 박정희 
대통령이 누운 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눈
물을 뿌렸으니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가 아무리 홧김이라고는 하나 그토록 존
경하는 대통령을  죽인 것은?   신문하다가 
혹시 나중에라도 그가 대통령을 살해한 무
슨 뚜렷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까? 전직 수사관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김재규는 무조건적으로  박정희를 추종했
지만, 굳이 들자면 한 가지  점에서는 비판
했습니다.  뭐죠, 그게?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 국방이었습니다. 그
는 어떤 때는 그것을 박정희의 잠꼬대라고
까지 표현했습니다.  자주 국방? 
 내 나라를 내가 지키자는 게 자주 국방인
데 그게 왜 나쁘다고 생각했을까요?  이념
적으로야 나쁠 것이  없겠지만 중앙정보부
장 자리에서 보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였나 
보죠. 아무튼 그게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비난한 유일한  진술이었으니까요.  경훈은 
전직 수사관을 통해 김재규가 박정희의 자
주 국방론을  부정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전직 수사관과  헤어져 
돌아오면서도 경훈의 머리에선  의문이 떠
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10·26의 비밀이 
무엇이든 간에, 의리의 사나이 김재규가 유
독 자주 국방을 박정희의 잠꼬대라고 했다
면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실마리
경훈은 제럴드 현의 한국에서의 활동을 알
아보려 했지만 그가 근무하던 주한 미군의 
고문관실이란 곳은 그리  만만하게 접근할 
수 있는 데가 아니었다. 매우  민감한 정보
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이  기관은 실제 주
한 미군의 귀와 눈인  동시에 수많은 한국
의 유력  인사들을 보이지  않게 지배하는 
곳이었다. 선이 닿을 만한 선배 몇 명을 찾
아가서 부탁해 봤지만 모두 난색을 표했다. 
그렇게 고전하다가 경훈은 제럴드 현이 조
울증에 걸렸던 것을 생각해 냈다.  군에 있
을 때 병을  얻었다면 그는 미8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미8군병원과 
접촉할 수 있는 길은 의외로 가까운 데 있
었다. 
점심때 경훈은 같은 회사의 변호사인 지미
를 불러냈다. 미국에서 예일대를  졸업하고 
2년 간 뉴욕의  로펌에서 근무하다가 한국
으로 온 그는  성품이 선량하고  친절했다. 
지미는 회사의 많은 변호사들 중에서 특히 
영어에 능통한 경훈과 가까이 지냈다. 
경훈은 지미를 인사동의  한식집으로 데려
갔다. 여느 외국인과 달리 한국  음식에 매
료되어 있던 지미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
다. 경훈은 식사를 끝내고 부근의  전통 찻
집에 들어가 차를 시킨  다음 얘기를 꺼냈
다.
 이봐, 지미. 8군병원 일을 맡고 있지? 
 그래. 그런데 왜? 
지미는 눈치가 빨랐다. 그는 경훈이 평소와 
달리 식사 도중에도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
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전담하다시피 한 
미국 대사관과 관련하여 어떤 부탁을 하려
는 게 아닌가 짐작했다. 
한국인들은 비자 발급이 여의치 않을 경우 
종종 자신에게 문제를 상의하곤 했기 때문
이다. 그런데 경훈의 입에서 나온  것은 뜻
밖에도 미8군병원이었다.
 8군병원의 기록을 좀 볼 수 있을까? 
 기록? 무슨 기록? 
 진료 차트 말이야. 
 음, 이런 부탁은 처음인데.  어려울 것 같
지는 않아.  아냐, 어려울 수도 있어. 
 글쎄, 그까짓 게 뭐 그리 어렵겠어. 
 그런 일이야 네가 더 잘 알겠지만 하여튼 
한 환자의 진료 차트를 좀 보게 해줘.   알
았어. 
경훈은 제럴드 현의 생년월일과 이름을 적
은 쪽지를 지미에게 넘겨주었다.
 어디가 아팠던 사람이야? 
 조울증. 
 조울증? 
 그래. 
지미는 조울증이란 말에 관심이 가는지 쪽
지를 살피더니 고개를 약간 흔들었다.
 나이를 보니 옛날에  근무했던 사람 같은
데`…`…. 
 기록이 없어지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환자 기록은 무엇에 쓰려고 그래? 소송이
라도 붙었나?  이유는 물어보지 마. 
 급한 거야? 
 가능한 빨리. 
 알았어. 병원에서  물어보면 내가  적당히 
둘러대지. 
지미는 오후에 바로 경훈에게 연락을 취해
왔다. 경훈이 찾아가자마자 그는 제럴드 현
에 관한 자료를 꺼내놓았다.
 찾느라고 고생 좀 했어.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짐작이 갔
다.
 차트실에는 기록도 안  돼 있는 사람이더
군. 
 그런데 어떻게 찾았어? 
 둘러대다 보니까 나도  몰래 정곡을 찔렀
더라구. 
 무슨 소리야? 
 차트에 없다  하더라도  엑스레이나 기타 
검사실에서 독자적으로 보관하는 기록에는 
이 사람의 이름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
지. 
다른 병원에서도 그렇게 기록을 찾아 환자
의 이익을 보장해 준  선례가 있다고 우겼
어.  천재적 거짓말이군. 
 병원에 있는 기록이란 기록은 모두 다 뒤
졌어. 컴퓨에 입력된  자료는 하나도  없더
군. 그런데 어떤 친절한 여직원이  서류 보
관 창고를 한번 뒤져보라고 했어.  혹시 거
기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통상 혈액형 대장
이 가장 잘 보관되어 있을  거라고 하더군. 
과연 그랬어. 긴급 수혈에 대비해  모든 입
원 환자들의 것을  기록해 두었더라구.  이 
사람 이름도 거기에 있었지.  고마워. 
경훈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서류를 펼
쳤다. 지미가 넘겨준 제럴드 현에  관한 기
록은 의외로 간단했다.  의무 기록이  아닌 
혈액형 대장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환자명`:`제럴드 현
병자명`:`조울증
입원일`:`1979년 10월 18일
퇴원일`:`1979년 10월 27일
혈액형`:`(RH+) 
내용을 훑어본 경훈의 눈길이 다시 거슬러 
올라가 제럴드 현의 입·퇴원일에 가서 멎
었다. 
79년 10월  18일에 입원하여  10월 27일에 
퇴원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경훈의 
직관은 날카롭게 번득였다. 제럴드 현은 바
로 10·26을 사이에 두고 입원했다가 퇴원
한 것이다. 특히 퇴원일은 바로  10·26 다
음날이었다. 10·26에 비밀이 있다는  마지
막 말을 남기고 죽은  그가 10·26 다음날 
병원에서 퇴원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중요한 것은 퇴원  날짜만이 아니
었다. 입원 날짜도  마찬가지로, 아니 오히
려 퇴원 날짜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을 
수 있었다. 퇴원 날짜가 제럴드  현이 10·
26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듯이, 입
원 날짜는 그가 어떤  형태로 10·26과 관
련을 맺고  있었나를 보여주는  단서일 것 
같았다. 
10·26을 피하려는 듯  입원했다가 10·26
이 발생하자마자 부랴부랴 퇴원한 것이 아
닐까? 그렇다면 그는 10·26이  발생할 것
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얘기인가?온갖 경
우를 떠올려보던 경훈은 마침내 고개를 흔
들었다. 어떤 뚜렷한  결론도 나오지  않았
다. 이 세상에 김재규 본인말고  과연 누가 
10·26을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설사 제럴드 현이 10·26이  발생할 줄 알
고 있었다 하더라도 왜  하필 병원에 입원
했다가 퇴원했다는 말인가. 
혈액형 대장은 짧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많
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기록은 경
훈의 가슴속에 최소한 제럴드 현이 10·26
과 모종의  관련이 있을  거라는 심증만은 
아주 뚜렷하게 남겨주었다. 
따라서 그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은 이제 신
빙성을 더했다. 
경훈은 제럴드 현의 한국에서의 행적을 좇
는 것이 10·26의 비밀을 알아내는 지름길
임을 더욱 확실하게 깨달았다.
케렌스키가 구해준 제럴드 현의 신상 명세
서에 따르면 그가 한국의  정보와 공작 전
문가로 근  30년 가까운  세월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었다. 따라서 경훈은 한국인 중에 
제럴드 현을 아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경훈은 공안검사로 있는  동기와 선배들을 
통해 수소문한 결과, 제럴드 현을  알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우선 순위로 
작성했다. 그러나 그 명단 속의  인물들 대
부분이 제럴드 현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답했다. 그들이 정말  제럴드 현을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알고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
는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정보와 공작 계통의  인물들은 경훈이 생
각했던 것 이상으로 입이 무거웠다. 
그러나 마침내 성과를  얻었다. 명단의  맨 
끝에서 한두 명을 남겼을  무렵 경훈은 뜻
밖에도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경찰에서 오
랫동안 정보 계통에 종사하다가 은퇴한 사
람이었다.
 제럴드 현? 혹시 그  사람 이름이 현강일
이오? 
 네, 그렇습니다. 
경훈은 귀를 곤두세웠다.
 나는 잘 모르지만, 그를 아주 잘  아는 사
람이 있소.  누굽니까?  오세희, 예전에 치
안본부 외사과 간부였소. 지금은  캐나다에 
가서 살고 있지.  캐나다에요? 
경훈은 맥이 풀렸다. 기껏 찾았는데 캐나다
에서 살고 있다니.
 혹시 주소나 전화 번호를 아시는지요? 
 그런데 무슨 일로 그러시오? 
 결코 그분에게 해가 되거나 할 일은 아닙
니다. 
 해 될 일이야 뭐 있겠소. 혹 모르니 이 변
호사의 전화 번호를 주시오. 비록  나이 든 
노인이었지만 아직도 정보  계통에서 일하
던 깐깐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웬만해서
는 남의 전화 번호를  쉽게 가르쳐줄 인물
이 아니었다. 그러나 경훈의 선량해 보이는 
얼굴과 말하는 품 등이  신뢰를 준 모양이
었다. 
노인은 경훈의  전화 번호를  받아적은 후 
낡은 수첩을 꺼내 한참  이름을 찾더니 상
대편 전화 번호를 불러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는 정직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오. 가끔은 
한국에 들어와  옛날 동료들을  찾아 술도 
사고 그러지. 캐나다에서는 크게  성공했다
더군. 노인은 오세희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처음과 달리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경훈은 집으로 돌아와  캐나다와의 시차를 
확인하고는 오세희라는   인물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오세희의 비서로  여겨지는 
한 여자를 거쳐 그에게 연결되었다. 한국에
서 온 전화라고 하자 오세희는 반가워했다. 
그런데 경훈의 질문을 듣고는 어투가 달라
졌다.
 뭐요? 제럴드 현을 아느냐구요? 
 그렇습니다. 
목소리는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오? 
 변호삽니다. 
 변호사, 그런데 무슨 일이오? 
 그분에 대해 뭘 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뭘 말이오? 
 전화로 여쭤볼 일이 아닙니다. 괜찮으시다
면 찾아뵐까 합니다. 
경훈이 다짜고짜 찾아가겠다고  하자 오세
희는 꽤 놀란 모양이었다. 다시  짧은 침묵
이 이어진 후에 오세희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분에게 무슨 법적 문제라도 생겼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캐나다까지 오겠다는 거요? 
경훈은 도저히  무언가를 얻어낼  수 없을 
것 같자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꺼내는 편
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현 선생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죽음과 관련하여 몇 가지  조사를 하고 있
습니다.  아니,  뭐라구요? 강일이  형님이 
돌아가셨다구! 
 그렇습니다. 
순간 저쪽에서 말이  끊겼다. 한동안  말이 
없던 오세희는 목이 메이는지 잠시 목소리
를 가다듬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뭘 조사하는 거요? 
 제 친구가 현 선생님의 상속인입니다.  친
구와 제가 그분의 마지막  유언을 듣게 되
었지요.  그게 무엇이었소? 
 수수께끼 같은 내용이라 저도 그 뜻을 알
아내고 싶은 겁니다.  오세희는 다시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짧게 말했다.
 그렇다면 오시오. 
 고맙습니다. 
천기누설
다음날 아침 경훈은 바로 공항으로 나갔다. 
캐나다행 비행기표는 어제 오후 전화로 예
매를 해두었다. 그는 제럴드 현을  아는 사
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경쾌하게 
비행기 트랩을 올랐다. 
제럴드 현이 죽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걸로 
보아 오세희는  제럴드 현과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비행기는 태평양을 가로질러  밴쿠버에 착
륙했다. 입국 수속을 마친 경훈은  다시 비
행기를 갈아타고 약 두  시간을 날아 오세
희가 살고 있는 에드먼턴에 도착했다.
 어서 오시오. 
공항에서 첫눈에 경훈을  알아본 오세희의 
눈매는 예사롭지 않았다. 비록 점잖고 온화
한 인상이었으나  그 예리한  눈빛은 결코 
평범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
었다. 관상에 특별한  조예가 있는  경훈도 
그의 나이를 쉽게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오세희요. 
 반갑습니다, 오 선생님. 현 선생님과는 가
까운 사이셨던 모양입니다. 오세희는  고개
를 끄덕이다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집게
손가락이 잘려나가고 없었다.
 이 손가락이 잘려나갔을  때 형님이 캐나
다까지 와서 나를  위로해 주셨소.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해  주셨는데`…`…. 오세
희의 굳건해  보이던 표정에  잠시 동요가 
일었다. 
두 사람은  주차장까지 같이  걸어가 차를 
탔다. 차가 공항을  벗어나자 금방  널따란 
평원이 눈에 들어왔다. 대지는 잔디와 추수
를 마친 밀밭으로 온통 덮여  있었다. 산들
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시내로 들어가는 길
은 무척 상쾌했다.
 매우 평화로워 보이는군요. 
 그렇소. 여기 사람들은 그저 조용히  살아
가지. 대자연을  완상하면서  인간으로서의 
겸허함을 배우며   살다가 돌아가는  거요.   
여기서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경훈은 대형 링컨컨티넨털  타운카를 유유
히 몰고 있는 오세희의  표정을 살피며 물
었다. 그가 마냥 편평해 보이기만  하는 이 
대지에서 어떻게 성공했는지 궁금했다.
 개발을 했소. 
 개발이라면요? 
 땅을 사서 거기에  전기와 상하수도를 놓
고 도로를 만든 다음  사람들에게 집을 지
을 수 있도록 분양하는 것이오.  그렇군요. 
경훈은 속으로 쓴웃음 머금었다. 이 사람도 
틀림없는 한국인인  것이다.  부동산이라면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는 데는 국내외에 차
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훈의 표정을 
슬쩍 훑은 오세희는 약간  힘이 들어간 목
소리로 말을 이었다.
 개발을 한다고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
니오.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성
실과 인내 덕분이오. 오세희는 자신의 성공
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나는 한국에서 단돈  1천 달러도 가
져오지 못했소. 요즘의 투자 이민과 비교하
면 하늘과 땅 차이지. 나는  공장에서 일하
다가 손가락 하나를 잃고 받은 보상금 3천 
달러로 빈병 수집 장사를 시작했소.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세희는 자수성가한  사
람이었다. 그에게 차츰 믿음이 갔다.
 나는 우리 나라의 이민 정책과 외환 정책
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오. 경훈은  말없이 
오세희의 입가를 주시했다.
 우리 나라의 잘사는 사람들, 가령  국민의 
상부 30퍼센트 가량에게는  마음대로 돈을 
가지고 외국에 이민 갈 수 있도록 해야 하
오.
 미국이든 캐나다든 돈 없이 오면 하류 생
활을 면치 못하오.  요즘 이민 가는 사람들
은 제법  돈을  가지고 나가지   않습니까?  
그 정도는 그냥 가게나  하고 생활을 즐길 
정도밖에 안 되오. 돈 있는  사람들이 큰돈
을 가지고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하오. 그래
서 사업을 할 수  있게끔 말이오.  언어도 
짧은데 사업이 잘될까요?  한국인들은  반
드시 성공하오. 사업을 하기에는 사실 한국
이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곳 중 하나요. 게
다가 국내에서 돈 잘  버는 사람들이 빠져
나가면 못사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계승하
여 돈을 벌 수 있지 않겠소. 그들이 부유해
지면 또 외국으로 나가는 것이오. 
한국은 이렇게 순환되어야  하오.  국부가 
빠져나가지 않을까요?  걱정 마시오. 한국
인들처럼 핏줄 근성이 강한 사람들은 없소. 
유대인이 유일하게 그  뒤를 따를  정도요. 
이 두 민족은 가히 불가사의라  할 만하지. 
중국인이든 유대인이든 모두  나가서 돈을 
벌었소. 세계 경제를 장악한 화교들을 보시
오. 유대인은 말할 것도 없고. 모두 밖에서 
번 돈으로 조국에 힘이 되고  있소. 한국도 
풀어놓아야 하오. 자원도 없는 나라에 똑똑
한 사람들만 득실거리니 갖은 사기 수법이 
나오는 것 아니겠소. 경훈은 오세희의 말에 
뭐라 당장 답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조국
에 대한 사랑은 느낄 수 있었다.
 아까 다치셨을 때 현 선생님이 와서 걱정
해 주셨다는데  그때가 언제쯤이었습니까?   
82년 가을 무렵이었소. 
 그분이 전역을 하신 후였군요. 
 그렇소. 미국 정부는 중요한 사람을  절대 
외국에서 살도록 하지  않소. 형님은  전역 
후에 바로 미국으로 들어가서 사셨소. 경훈
은 오세희가 제럴드 현에  대해서 생각 외
로 많이 알고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오 선생님은 어떻게 해서 현 선생님을 알
게 되셨습니까?  간부 후보생으로 경찰 생
활을 시작한 나는 어느  정도 경력을 쌓고
는 치안본부 외사과에 근무하게 되었소. 당
시 내가 하던 일은  주로 외국인들의 동태
를 살피고 그들 사이에  떠도는 정보를 수
집하는 것이었소.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위치라면 자연히 제럴드 현과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강일이 형님은 부정을 멀리하고 충직하게 
일하는 나를 상당히 좋아하셨소. 나에게 고
급 정보를 많이 주면서 키워주셨지. 덕분에 
나는 언젠가부터 대통령도 직접  뵐 수 있
었소.  대통령을요? 박정희 대통령 말입니
까? 
 그렇소. 대통령께 올라가는 경찰 보고서에 
내 이름 석 자가 박혀 있곤 했소.  나는 약
점이 없었기  때문에 오직  애국심 하나로 
좌충우돌할 수 있었지. 박 대통령께서는 민
감한 현안에  대한 서면  보고가 올라가면 
나를 직접 부르곤 하셨소. 대통령께서 일개 
경감에 불과한 나를 청와대로 부르셨던 것
은 우리 사이에 통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
이오. 바로 사심  없는 애국심이 그것이오. 
우리는 서로 느낄 수 있었소.  경훈은 오세
희가 사업을 한다지만 아직도 깨끗한 공직
자의 기개 같은 것이  살아 있는 사람임을 
느꼈다.
오세희는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달리면서 
간간이 바람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
렸다. 그의 빈틈없고 깨끗한 매무새에서 한
국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던 모습이 선
연히 떠오르는 듯했다.
 나는 죄질이 나쁘면  고위 공직자든 재벌
이든 가리지 않고  보고서를 써댔소.  어떤 
때는 감히 대통령께도  달려들었소.  무슨 
일로요? 
 지금 생각하면 대통령의 입장이 이해되지
만`…`… 당시 나는 젊었겠다, 오직 애국심 
하나로 사리를 판단했기  때문에 대통령께
서 통치적  이유로 몇몇  부패한 사람들을 
보호하시는 것을 참을  수 없었소.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부패를 경멸하는  젊
은 공무원과 나라를 끌고  가야 하는 대통
령 간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갈등이었다.
 사실 내가 민감한 보고를 잘할 수 있었던 
것은 강일이 형님  덕이었소. 그분은  모든 
정보를 알고 계셨으니까.  마치 구름  위를 
노니는 신선 같았다고나 할까.  현  선생님
은 무엇을 하시던 분입니까? 모든 것을 다 
하셨소. 
 네?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관장하시던 분이
오. 
경훈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제럴드 현이 
한국의 정보와 공작을  관장하던 인물이었
다고 하나 그렇게까지 표현하는 것은 심하
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세희는 경훈의  그런 심리를  짐작한 듯 
말을 이었다.
 형님은 5·16혁명 때부터  관여하시기 시
작했소. 형님과 한국  정부의 관계는  바로 
한국의 현대사와 다름없소.  그분은 5·16 
이전에 한국에 오셨나요? 
 그렇소. 형님이 한국에 오시고 얼마 안 돼 
바로 군사 혁명이 났소. 그런데  형님은 이
미 5·16이 날 것을 아시고는 앞으로 한국
에서 당신이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소. 당시 태평양사령부 소속으로 한국
에 건너오셨으니까.  5·16이 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구요? 
 그렇소. 형님은 조국에 깊은 애정을  품고 
계셨소. 도쿄의 사령부에서 정보장교로  근
무하시던 때부터 틈만 나면 한국으로 날아
와 정보를 수집하시곤 했소. 그러다가  5·
16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셨지.  도대체  어
떻게 그런 극비 정보를 얻으셨을까요? 
 거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소. 
오세희는 옛날이야기라도 하는 듯 감회 어
린 얼굴로 서두를 꺼냈다.
 당시 박정희 소장은 이미 군사 혁명을 결
심하고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소. 
워낙 큰일이라 노심초사하던  그는 종내는 
대여섯 명의  부하를 데리고  동대문 옆에 
사무실을 내고 있던 지창룡을 찾아갔지. 지
창룡은 6·25를 예견하고 동작동 국립묘지 
자리를 지정하는 등, 이승만 대통령의 국사
(國師)로서 이름이 높았소.  
박정희 소장이 거사 전에  그를 찾아간 것
은 무모한 행동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면
도 있겠지.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계산이 
서 있는 행동이었다고도 할 수 있소. 즉 성
공할 관상이라면 지창룡이 입을 굳게 다물
고 있으리라 확신했던 거요.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혁명을 일으킨 사람다운  대담한 
행동이었다.
 동대문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하오. 
1961년 벽두였다. 
사복 차림의 다부진 사내  다섯 명과 군복 
차림의 사내 두 명, 이렇게 일곱 명이 동대
문운동장 옆 을지로 7가에 있는 내 사무실
로 찾아왔다.
군복 차림을 한 두 사람의 계급을 보니 하
나는 육군 대령이요 다른 하나는 중령이었
다. 나머지 사복  차림들도 단정한  머리와 
절도 있는  거동 등으로  봐서 군인들임을 
알 수 있었다.
 선생, 선생의 역술이 귀신 같다기에  이렇
게 찾아왔소. 오늘이 마침 토요일이고 해서 
오후에 잠깐 시간을 냈소이다. 우리 모두의 
신수나 좀 봐주시오. 순간 나는  놀라지 않
을 수 없었다. 대령 한 사람만 빼고 나머지 
여섯 사람 모두가 얼굴  가득 상서로운 기
색으로 차 있는 게 아닌가.  아무리 일행이
라고 하지만  이렇게 모두가  길상일 수는 
없었다. 중령의 얼굴을  보니 머지않아  곧 
차관급으로 영달할 상이었다. 나머지  사람
들은 모두  장관급에 오를  대길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아찔했다.
나는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핑계를 
대고는 자리를 피해 바깥으로 나왔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연방 눈을 비벼보았다. 참 
별스런 일이었다. 그간 수많은 사람들을 상
담해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던 것이
다. 직감적으로 와닿는 게 있었다. 나는 냉
정한 마음으로 다시 들어갔다. 한 번 더 그
들의 상을 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두 번 보
아도 분명 만면달기의 기색들이었다.
 당신의 나이가 올해 몇이오? 
더 이상 거칠 게 없었다. 나는 사복 차림을 
한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나이를 물으면
서 선언하듯 일러줬다.
 곧 장관이 될 것입니다. 
네 사람 다 장관이 될 거라고 하자, 모두가 
어이없어하는 기색들이었다.
다음은 중령의 나이를  물었다. 처음에  본 
대로 장관은 어렵겠고, 차관급은 될 상이었
다.
그 다음은 대령이었다.
 당신은 일심을  가지면 충신인데,  지금은 
분명 이심을  가지고 있으니  부디 관재를 
조심하시오. 화를 당할  것이 염려되오. 그
랬더니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그의  상을 
보니 인당이 붉고 준두에  흑기가 끼어 있
었다.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모두 다 보아주고 이제 한 사람만 남게 되
었다. 아주 다부진 인상의 키가  작은 위인
이었다. 두 눈에서 불꽃 같은  영채가 쏟아
져나오고 있었다.
 선생, 나는 왜 안 봐주는 거요? 나도 마저 
보아주시오.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허허, 물론 봐드려야지요.  여러분들은 잠
시 나가서 기다려주시오. 이분만 남게 하고 
말이오. 나머지 여섯 명이 두말  않고 자리
를 비켜주었다. 이들이 꾸미는 일이 무엇이
겠는가. 지금은 정치적  혼란기였다. 4·19
의거를 계기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고, 
7·29총선을 통해  집권한  민주당은 신구 
양파로 분열되어 원색적인 권력 투쟁을 벌
이고 있었다. 국민들의 정치 의식도 성급하
게 고양된 나머지 남북 분단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다소 잊고 있는 시점이었다.
 뿐더러 군부 내부에는  파벌간의 대립 구
조가 심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자
명했다.
혁명, 그리고 새로운 제왕, 대통령의 출현!
이들은 성공할 것인가.
찰나에 걸쳐 생각을  달려야 했다.  입술이 
타들어 오는 결단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감췄다.  천기누설을 
하지 않으려는 뜻이었다. 오직  마음으로만 
전해야 하는 극비 사항이었다.
나는 사복 차림의 마지막 사람과 마주앉아
서 아주 조용히 말했다.
 먼저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 
 실례의 말씀이오나 오해는  마시고 제 말
씀을 들어주시오. 지금 선생님께서는  뭔가 
계획하고 계신 일이 있습니다. 아마 4월 며
칠쯤으로 잡아놓고 있을 겝니다. 이날은 실
패의 날입니다. 한 달 뒤인 5월로 연기하여 
거사하시면 뭔지는 몰라도  대성하실 겝니
다. 
내가 여기까지 말해도 그는 아무런 응답이
나 미동도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나
는 계속해서 그 까닭을 설명해 주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선생 얼굴  전체가 
좋은 기색으로 충만하기는  하온데 이마의 
일각 옆의 보각 부위가 꽉 막혀 있어서 선
생이 생각하신 날에 거사하시면 실패로 끝
납니다. 반드시 내가 일러준 날을 참고하십
시오. 그는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거였다. 물론 입은 열
지 않았다.
이로써 나의 감정은 끝났다. 그가  밖에 있
는 사람들을  보고 그만  들어오라고 하자 
모두가 들어와 앉았다.
그중 한 사람이 내게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보시오. 우리는 선생이 관상을 잘  보신
다고 해서 심심풀이로 신수나  좀 볼까 하
고 왔는데 엉뚱하군요. 선생 같은 엉터리는 
처음 봤소이다. 아니, 저 친구가 이제 중령
인데 곧 장관급에 오른다니  어디 생각 좀 
해보십시오. 장관급이 되자면 적어도 별 셋 
정도는 달아야 하지 않겠소? 나도 장관, 저 
사람도 장관, 아니  선생은 장관  병이라도 
걸린 사람 같소이다. 너무도 틀리니 없었던 
걸로 하십시다 그려.  그럼 그러십시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돌아갔다. 없었던 걸로 
하자는 말은 일종의 묵계 같은  거였다. 그
쪽에서는 비밀을 보장해 달라는 뜻이고, 이
쪽에서는 염려 말라는 뜻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하루하루 초조한 나날을 보
내야 했다. 정월 대보름, 여느 때처럼 지방
으로 별자리를 보러  갔던 나는  북방 8수 
가운데 하나인 위성이 심하게 요동치는 걸 
똑똑히 보았다. 세 개의 별로  구성된 위성
이 움직이면 군사가 일어날 징조였다. 과연 
몇 달 뒤 5·16군사혁명이 터졌고,  예전에 
찾아온 눈이 서리한 군인이 박정희 소장이
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떠올랐다.
─`지창룡,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
여』
혁명가
오세희는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
다.
 그들은 모두 비밀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형님의 정보망을 빠져나가진 못했소.  아마
도 그 대령이`…`…. 
 자세한 것은 모르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지금이나 당시나 미국의  정보망이 대단하
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지.  당시 형
님은 미국의 눈이요, 귀였으니까. 일선에서
의 정보를 독식하셨소.  현 선생님은 그 정
보를 상부에 보고하셨습니까? 
 아니오. 형님은 진지하게  고민하셨소. 당
시의 남북  대치 상황에서  민주당 정부는 
갈피를 못 잡아  흔들리고, 사회는  혼란에 
빠져 있었소. 군부조차도 파벌이 갈려 있는 
상황이라 형님은 과연 어떤 길이 최선인가
를 깊이깊이 생각하셨소. 그러다 그 지창룡
이라는 사람을 직접 찾아가 보기로 하셨던 
거요.  그를 취조하셨습니까?  아니오.  과
연 그가 용한가 어떤가를 알아보시려 했던 
거지.  그거 참 재미있군요. 
 형님은 지창룡에게 신수를 봐달라고 하셨
소. 그러자 그  양반은 첫마디에  “당신은 
물 건너서 온  분이군요” 하더라는  게지.  
그래서요? 
 형님은 시침을 떼고 무슨 일을 하면 먹고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소.  그랬더니요? 
 그 양반 얘기가 “세상에서 제일 큰 나라
가 평생 먹여 살리는데 무슨 먹고 살 일을 
걱정합니까” 하더라는 거요. 형님은 그 소
리를 듣고 얼른 나와버렸다고 하셨소.   그
래서 그  지창룡이라는 사람의  말을 믿고 
박정희 소장을  밀어주셨습니까?  아니오. 
혼자서 고민을 거듭하시던 어느 날 혁명이 
터져버렸던 거요.  그럼 현 선생님은 5·16
을 방관하셨나요? 미국의 정보장교로서 모
든 것을 알면서도 방조하셨나요?  그런 것
은 아니오. 형님은 박정희 소장을  깊이 있
게 관찰하셨다고 했소. 그의 행적, 사상 등
을 철두철미하게 좇으셨지. 형님은  태평양
사령부에 청원을 내 아예  주한 미군 사령
부로 자리를 옮기셨소. 형님으로서는  박정
희 소장의 우국충정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즉각 그를 도태시킨다는 복안을 가
지고 관찰하셨지만, 형님이 보시기에  박정
희 소장은 신념을 가진 애국자였소.   그래
서요? 
 형님이 그를 찾아가셨지. 형님은 5·16 직
후 박정희 소장과 직접 맞대면하셨소. 비밀
리에 관찰하던 입장에서 벗어나 이제는 상
부의 명령을 받은 미국  정보 담당자의 입
장에서 박정희 소장이 어떤 인물인가를 심
사하고 평가하기 위해 만나셨던 거요.   대
단한 위치에서 한국의  1인자를 만나실 수 
있었군요.  그렇소. 항상  비상시에는 정보
와 공작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가장 무서운 
법이오. 당시 미국에서는 형님에게 한 장의 
서류를 보냈소. 그  서류는 박정희  소장의 
신상 명세서였는데 거기에는  박정희 소장
이 적색 분자로 기록되어 있었지.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의 사상, 특히  그가 공
산주의자인가 아닌가를   엄밀히 판단하여 
즉각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던  것이오.  
그 신상  명세서는 누가  작성했던 것입니
까? 
 형님은 그것이 CIA 본부에 있던 서류라고 
하셨소. 
 박정희 소장은 그 서류에 대하여 현 선생
님에게 해명했습니까?   아니오. 미육군의 
대위 계급장을 달고 나타난 형님을 대하는 
박정희 소장의 태도는 당당했소. 그래서 형
님이 상당히 힘드셨지.  그러나 현실적으로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 했던 박정희 소장으
로서는 마냥 당당하게만 나올 수는 없었을 
텐데요.  거기에 박정희 소장의 풍모가  있
었소.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일본인 밑
에서 머리 숙이고 살아야  했던 그는 자기 
일생일대의 혁명이 성공하는  순간 또다시 
미군 계급장을 달고 나타난 사나이에게 고
개를 숙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러나 
상대의 기분을 거스를  수도 없었을  테고. 
박정희 소장이 어떻게 했는지 아시오?  …
`…. 
 형님은 박정희 소장과  사흘 간 마주앉으
셨소. 그의 모든 것을 알아내야겠다는 투지
로. 당시 형님은 진정 그가 공산주의자인지 
어떤지를 알아내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절
실히 느끼셨던 것 같소. 그  상황에서 공산
주의자에게 정권을 넘길 수는 없다는 것이 
형님의 신념이었으니까.  그랬군요. 
 박정희 소장이 너무  당당하게 나오는 터
라 형님은 몹시 화가 나셨소.  그런 태도가 
자신을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  막 
혁명에 성공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으
로서 미국에  고개 숙이며  권력을 구걸할 
수 없다는  박정희 소장의  신념 때문임을 
깨닫기에는 당시 형님의 나이가 너무 어렸
던 것이오.  그렇겠군요. 현 선생님의 입장
에서는 일찍 거세할 수도 있었지만 그동안 
봐주고 있던 박정희 소장이 딱딱거리는 것
이 곱지 않았겠습니다.  그럴 수밖에. 
이미 혁명을 일으키기 전부터 미군 당국은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박정희  소장을 거세
할 것을 종용했소. 그런데 형님이  약간 보
류를 시키셨지. 형님은 그 키  작은 장군에
게서 신념 같은  것을 느끼셨기  때문이오. 
그러던 터에 혁명이 일어났고, 명색이 미군 
정보 담당관인데다가 혁명을  추인해 주느
냐 마느냐를 결정할 권한조차 가지신 형님
이었으니 박정희 소장의  태도를 불손하게 
보신 것은 당연했지.  두 사람이 심하게 충
돌했겠군요. 
 아니오. 형님은 결국 박정희 소장에게  머
리를 숙이시고 말았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마치 미국의 사냥개에게  머리를 숙일 수 
없다는 듯 끝까지 당당하게 나오던 박정희 
소장이 마지막 순간 머리  끝까지 화가 치
밀어 일어나시려는 형님을  부르더니 말없
이 손을 꼬옥 쥐었소.  현 선생님은 당혹스
러우셨겠군요. 
 그랬겠지. 그러나 박정희 소장은 손을  붙
잡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형님의 눈을 지
그시 들여다보았소. 한참이나 눈 속 깊숙이 
응시하던 박정희 소장의  눈에서는 이윽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소. 형님은 그때 느
끼셨던 거요. 마치 순간적으로 해탈에 이르
듯이 그 눈물의 의미를 일순간에 깨달아버
리셨지. 형님도 억장이 무너지는 듯해 그만 
눈물을 흘리셨소.  박정희  소장의 눈물은, 
지난 1백 년 간 강대국의  간섭과 지배 속
에서 쌓여온 한과 분노를  안고 혁명을 일
으켰건만, 또다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
는 상황에  빠진 한  민족주의자가 흘리는 
눈물이었던 것이오. 형님은 후에 박정희 소
장의 눈물과 티우의 웃음을 곧잘 비교하시
곤 했소.  티우라면? 
 미국의 쿠데타 공작에  의해 월남의 육군 
중령에서 일약 대통령이  된 사람  말이오. 
그는 대통령이 되자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미국 대사는 물론 미군의  정보 담당관 앞
에서까지 자진해서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
을 했소. 잘  부탁한다고 거듭거듭  고개를 
숙이면서. 
그러나 박정희 소장은  혁명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결정적   순간에도 비굴하지 
않았소. 미군 정보관으로 한국의  쿠데타를 
심사하러 나타난 형님 앞에서 끝까지 당당
하게 처신했던 것이오. 하지만 그 가슴속은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했겠소. 형님은  그의 
눈물에서 약소국을 이끌어 진정 민족의 미
래를 밝혀보겠다는 투지를 불태우는 한 인
간의 진실을 보셨던 거요. 그러면서 혁명의 
성공을 위해 한민족의  자존심까지 내팽개
칠 수는 없다는 한  한국인의 고뇌도 읽으
셨던 게지. 협잡꾼의  가벼운 웃음이 아닌, 
영웅의 진정한 눈물이 형님의 가슴을 적셨
던 것이오. 오세희의 눈에는 어느새 물기가 
어려 있었다.
 형님은 그 길로  물러나와서는 본국에 타
전했던 거요. 박정희  소장은 한국을  이끌 
확실한 지도자이며 투철한 반공주의자라고 
말이오. 경훈은 가슴이 뭉클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군요. 
 형님은 이렇게 한국사의 전면에 등장하시
게 되었소.  그렇다면 현 선생님은  박정희 
정부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이셨겠군요?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것 같소. 형님에게는 
세상일을 냉정하게 보실 수  있는 눈이 있
었지. 박 대통령이  잘하는 것은  지원하고 
못하는 것은 과감하게 철퇴를 가하셨소. 그
것이 바로 형님의  임무였으니까.  잘하고 
못하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셨던 겁
니까?  음, 그것은 미국의 기준이었소. 
 그러면 그분도 역시 어쩔 수 없는 미국의 
허수아비였군요.  형님은 기본적으로 미국 
정부의 공무원이셨소. 다만 그분의  가슴속
에 민족에 대한 끓는 피가 있었던 거지. 경
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혁명 직후 박정희와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로도 충
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경훈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저는 지금 10·26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
습니다. 현 선생님이  마지막 순간에  저와 
통화하시면서 10·26에는   비밀이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형님의 유언
이 그것이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저는 
우연찮게 고인의 유언을 듣게 된 셈입니다. 
오세희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떻게 된 연유인지 자세히 듣고 싶소. 
경훈은 인남의 이야기며 그로 인해 자신이 
전화를 받게 된  이야기, 그리고  10·26에 
비밀이 있다는 마지막  말까지 오세희에게 
들려주었다.
 그렇게 된 것이군. 그래 형님의 장례는? 
 예, 조금 전 말씀드린 인남이란 친구가 장
례를 치렀습니다.  고마운 일이군. 
 슬픔이 크시겠지만`…`… 마지막에 하우스
라는 말도 하셨는데 혹시  짐작 가는 일이 
없습니까?  하우스라`…`…  글쎄, 청와댄
가? 오세희는 얼굴을 찌푸리며  한참 골똘
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미안하오. 나는 그  부분
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소.  그러나 경훈은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제럴드  현이 어
떤 사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에게서 뭔가 얘기를 끌어내야 했다.
공작
 기이하게도 현 선생님은  1979년 10월 18
일에 8군병원에  입원했다가  10월 27일에 
퇴원하셨습니다. 27일에 퇴원하신 것은  틀
림없이 박 대통령의  서거 때문일  겁니다. 
막중한 책임을 지고 계시던  분이 그런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침대에 누워 계실 수
는 없었겠지요. 그런데  그분은 왜  18일에 
입원하셨을까요? 오세희는 경훈의 말을 듣
자 다시 한 번 얼굴을 찡그렸다.
 마치 10·26을 피하려고 하신 듯하군. 
 그렇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병명도  무
슨 급성 질환이 아니라 조울증입니다. 오세
희도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를 일이군. 
 혹시 그분은 사전에  10·26을 알고 계시
지 않았을까요?  잠시 생각하던   오세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는 없소. 형님은 박 대통령을 매우 
존경하셨소. 뿐만 아니라 대통령가의  사람
들과도 친하셨지. 당신이 대통령의 영애 근
혜 씨를 사모한다고 나에게 고백하신 적도 
있으니까.  네?  놀랄 것은 없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형님이 혼자 사모하셨을  뿐이오. 사실  그 
당시 한국인치고 근혜 씨의 조용하고 사려 
깊은 모습을  흠모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소? 경훈은 쓴웃음을 지었다.
 형님한테는 낭만적인  기질이 있었소.  늘 
바바리 코트  차림으로 기분이  나면 가끔 
영시 한 편쯤 읊조리기도 하셨고,  비 오는 
날이면 대낮부터 스탠드바에  앉아 스카치
를 홀짝거리기도 하셨소.  그럴 때면  가끔 
내가 대작을 해드렸지.  키는 크신  편이었
습니까?  아니오. 키는  그리 크시지 않았
지. 중키에 어깨를 약간 꾸부정하게 굽히시
고 다녔소. 선량한 눈빛에 늘  점잖은 어휘
를 구사하셨고. 그랬을  것이다. 그 시절에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다니다 워싱턴대학으
로 유학 갔다면 그  정도의 낭만은 구가하
던 인텔리였을 것이다.
 형님이 10·26을 미리 아셨을 리는  없소. 
하지만 이 변호사 말대로  형님이 10월 18
일에 입원했다가 27일에  퇴원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한번 확인을 해봐야겠소.  네? 그 
이유를 물어볼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오세희는 경훈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렇소, 아주 적격인 사람이 있소. 
 누굽니까? 
 언젠가 형님이 내게 의사 한 사람을 추적
하여 연락이 닿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셨
소. 알아보니 그 의사는 캐나다의 몬트리올
에 있는 한 병원에서  연구원으로 오래 근
무했더군.  그래서 오 선생님께 부탁을  하
신 모양이군요. 
 그렇지는 않소. 그때까지도 형님은 그  사
람이 어디에서 근무하는지  알지 못하셨으
니까. 사람을 찾는  일은 내가 전문이었소. 
또 나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기도 
했겠지.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가 누구기에  현 선생님이 연락
이 닿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셨을까요?  
그 의사는 한동안  용산 미8군병원에서 재
직했던 사람이오.  8군병원에요? 그렇다면 
현 선생님이 입원해 계셨던 당시의 의사기 
쉽겠군요.  바로 맞혔소. 그는 형님의 주치
의였소. 
 그랬군요. 그래서 연락이 닿았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소. 
 왜 그렇습니까? 
 그 의사를 찾고 나서 기쁜 마음으로 연락
을 드렸지만 당시 형님은  병세가 매우 악
화되신 상태였소. 누구를 만나기는커녕  하
루 종일 말씀도 한마디 안 하실 때였지. 그
후로는 나와도 거의 연락을 끊으셨소.   현 
선생님은 왜 그 의사를 찾으셨을까요? 
 보시고 싶었겠지. 형님은 그에 대해  무척 
좋은 인상을 가지고 계셨소. 전역하실 때에
도 그가 형님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서류를 
작성해 주었다고 하셨소.  서류를 유리하게 
작성해 주었다는 것은 무슨 얘깁니까?  형
님이 공직 수행을 하다가 업무상 스트레스
를 너무 심하게 받아 평생 낫기 힘든 병을 
얻었다고 적어주었소. 상당한 연금을  받으
실 수 있게 해주었던 거지.   그랬군요. 그
래서 현 선생님은 그  의사에게 애정을 느
끼고 계셨고, 조울증 환자에게 흔히 나타나
듯이 그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
리라 믿으시고는 오 선생님께 그와의 연락
을 부탁하셨던 거군요.  그랬던 것 같소.  
 어쨌든 두 분을  만나게 해드릴  수 있지 
않았나요? 
 그런데 그 의사는 당시 매우 불우한 처지
에 놓여 있었소. 개업을 했다가  환자가 사
망하는 의료 사고가 생겼지. 처방해서는 안 
되는 약을, 그것도 약사를 통하지  않고 직
접 환자에게 주었다가 환자가 사망하고 만 
거요. 그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는  복역 
중이었소.  현 선생님이나  주치의나 모두 
불행하게 되고 말았군요. 오세희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비장한 목소리로 물
었다.
 이 변호사, 분명히 강일이 형님이  10·26
에 어떤 비밀이 있다고 하셨소?  틀림없습
니다. 
 그것도 돌아가시던 바로  그 순간에 말이
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  변호사의 일이기 이
전에 나의 일이기도  하오. 나는  평소에도 
형님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  없었소. 내
가 캐나다로 몸을 뺄 수 있었던 것도 형님
이 도와주셨기 때문이오.  무슨 어려운  일
이라도 있었습니까? 
 나는 정치 권력 사이의 희생양이 될 뻔했
소. 당시  정민혁이라는  실력자가 있었지. 
그는 정부의 고관이면서도  자녀들을 모두 
외국인학교에 보내는 등  애국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했소. 또 장충동에  기가 막히게 
예쁜 마담이 있었는데, 몇 사람의  고위 관
리와 사랑싸움을 벌여가며  그곳에 수시로 
드나들었소. 나는 그런 자들을 박 대통령께 
직보했는데, 대통령께서는 다른 사람은  다 
쳐도 정민혁만은 놔두시더군. 그가  국회의
장에 연임되자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지. 
그런데 일촉즉발의 순간에  형님이 전화를 
걸어오셨소. 
즉시 출국하라는 얘기였지.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가족이고 집이고  다 내팽개
친 채 캐나다행 비행기에 올랐소. 아슬아슬
했지.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사무실에 들
어가면 그대로 연행되어  구속될 참이었더
군.  그런 인연도 있었군요. 
오세희는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10·26에  어떤 비밀이 있다
는 얘기는 박 대통령의  죽음이 세간에 알
려진 것과는 다르다는 얘기가 아니오?  그
렇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형님의  일이기 전에 나
의 일인 셈이오. 남들은 박  대통령을 비난
하고 매도하지만, 내가  봬온 박  대통령은 
그런 분이 아니셨지. 그러니 도대체 거기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  나도 궁금하오. 경훈
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확실치 않은  일에 
오세희를 끌어들이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
았다.
 모든 것은 불확실합니다. 저도 실제  어떻
게 되었다는 확신이 있는 게 아니라`…`…. 
경훈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니오.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
은 분명한 일이오.  오 선생님이  도와주신
다면 한결 수월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긴 합
니다만`…`….  같이합시다. 아마 그것이 형
님의 희망이었을 거요.  일단 이렇게  합시
다. 나는 형님을 치료했던 그  주치의를 다
시 찾아 형님이 10·26을 전후해 입·퇴원
하신 경위를 알아보겠소. 결과가 나오는 대
로 이 변호사에게 통보하리다. 그리고 형님
과 나누었던 예전의 통화  기록 같은 것도 
꼼꼼히 살펴봐야겠소.  통화  기록이 남아 
있습니까? 
 나는 정보 계통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
과 나눈 대화는 꼭 녹음해 두곤 하오. 직업 
때문에 몸에 밴  버릇이지.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외에도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연락
을 해주시오. 그 당시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내가  이 변호사보다  좀더 아는 
편이니까. 오세희는 의외로 여러 면에서 경
훈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오세희가 미리 예약해 둔 호텔에 자동차가 
닿을 즈음에는 할 이야기가  거의 끝나 있
었다.
 저는 내일 돌아가는 비행기를 예약해야겠
습니다. 
 짧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너무도 먼 거리
를 온 것 같소. 부근의 재스퍼에 가서 로키 
산맥이라도 둘러보고  가는 게   어떻겠소? 
잠시 생각하던 경훈은  그것도 괜찮겠다고 
결론 내렸다. 이 사람 오세희에게서 제럴드 
현에 대해  들어두면 틀림없이  도움이 될 
것이다.
저녁 식사 후 경훈은  호텔 방에서 오세희
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참고해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경과를  정리했다. 
아직까지 특별히 밝혀진 것은 없었지만 제
럴드 현이 한국에서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를 알게 된  것만 해도 결코  작은 소득은 
아니었다. 
경훈은 지금껏 인남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
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는 보스턴으로 전화
를 걸었다. 다행히 인남은 집에 있었다.
 잘 있었어? 
 어, 경훈이구나. 지금 거기 한국이야? 
 아니, 여기 캐나다야. 
경훈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인남에게 대
략 설명해 주었다.
 그랬구나. 그런데 경훈이 네 속에  그렇게 
무서운 집념이 있을 줄은 몰랐어.  나는 네
가 가고 나서는  별로 한  일이 없는데`…
`…. 
단지 인간 이경훈만 생각나더라.  아무래도 
내가 한국에 있었으니까 열심히 다녔던 거
지. 거기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
니?  그래도 아주 없지만은 않았어. 
 그래? 
 내가 뭐 부탁해 놓은 일이 있는데,  그 결
과가 나오면 너에게 연락할게. 그때 적어준 
그 번호로 하면 되지?  그래. 
 그리고 아무때나 보고  싶을 때 전화해도 
돼? 
 그럼. 
인남은 밝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경훈은 
전화기 속에서 잘게 부서지는 인남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한국으로 왔으면 좋
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오세희는 지프를 몰고 경훈이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왔다.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나요? 예순둘이오. 
경훈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이제  겨우 
사십대 후반이나 기껏해야  오십대 초반의 
얼굴로 보였기 때문이다. 오세희는  재스퍼
까지 왕복 열네 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조
금도 피곤한 기색 없이 차를 몰았다.
 요즘 한국의 상황은 어떻소? 
 IMF가 터졌을 때보다는  다소 경기가 회
복된 듯하나, 실업 문제는 여전히 심각합니
다.  대통령이 고민이  많겠군. 원래도  일 
욕심이 많은 양반이 IMF를 떠안았으니 오
죽하겠소.  한국의 정치인들을  잘 아십니
까? 
 강일이 형님과 내가  나누던 대화가 거의 
그런 것들이오. 우리는 한국의 모든 정치인
들에 대해 정보를 교환했소. 그러면서 우리 
나름대로 진짜와 가짜를 판단하곤 했지. 형
님은 워낙  힘이 있는  분이라 정치인들이 
형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
곤 했소. 형님에게 잘 보인다는 것은 곧 미
국에게 잘 보이는 것이었니까.
      그랬겠군요. 
 언젠가 형님은 김영삼, 김대중 씨와  같이 
서명한 문건을 내게  보여준 적이  있었소. 
세 사람이 민주화를 위해 같이 노력한다는 
내용이었는데, 형님의  괴짜로서의  면모를 
한눈에 보여주는 문건이었지. 미국의  정치 
공작 전문가가 야당의 두 대표와 공동으로 
서명한다는 건 당시로서는 꿈도  못 꿀 일
이었지.   심각한 외교적 문제를 불러일으
킬 수도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형님은 그
런 것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두 야당의 투
사를 보호하려 했던 거요. 정치 테러로부터 
말이오. 그런 점에서  형님은 이후락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소. 그러다 기회를  잡
으셨지. 바로 용금호 사건이오.  용금호 사
건이라면 김대중 납치 사건이 아닙니까? 
 그렇소. 그 사건 때야말로 형님과 내가 일
사불란하게 함께 움직였지.  그 내막은  어
떤 것입니까? 과연 김대중  대통령 말대로 
미국 비행기가 나타났습니까?  어땠을  것 
같소? 
 저는 늘 그 부분이 의심스러웠습니다.  온
몸이 묶이고 눈까지 가려진 상태에서 김대
중 대통령이 비행기 소리를 들었다는 것도 
그렇고, 더군다나 그 비행기가 미국에서 자
신의 위기를 알고 보낸 것이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음,  사실 김
대중 씨 이야기가 틀린 건  아니오. 분명히 
그것은 미국 비행기였고, 그분은 비행기 소
리를 들었소. 그것도 오랫동안 말이오.  어
떻게 된 일입니까? 
오세희는 담배를  꺼내 한  대 피워물더니 
차창 밖을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그는 아
침의 서늘한 공기 속으로 흩어지는 연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이
야기를 이어나갔다.
 이후락의 지시에  따라  일본에서 김대중 
씨를 납치한 중앙정보부원들은  그분을 용
금호에 싣고 한국으로 향했소. 도중에 그들
은 김대중  씨를 갑판에  끌어냈다가 바로 
위에서 비행기 소리가  들리자 혼비백산했
지. 비행기는 미국  공군의 마크를  선명히 
드러낸 채 한순간도 용금호를 떠나지 않았
소.  미국은 김대중 납치를 어떻게 알고 그 
비행기를 즉각 보냈을까요?  그것은  전적
으로 김대중 씨의  운이 좋았기  때문이오. 
사실 그 비행기는 미국이  납치 사실을 알
고 보낸 것은 아니었소. 당시  어선을 가장
한 북한의 간첩선이 자주 해상에 출몰했기 
때문에 늘 바다를 경계하던 주한 미공군의 
정찰기가 일본에서 곧장  한국으로 달려가
는 그 배를 주목했던 것이지.  속도가 빠르
고 어구가 시원치 않은 그 배를 집중 감청
한 결과 김대중 씨를  납치하고 있다는 사
실을 알고는 본부에 보고했던 거요.  그 보
고는 즉각 강일이 형님에게 올라갔고, 형님
은 정찰기로 하여금 단  한순간도 그 배를 
떠나지 않도록 하셨소.  그렇게 됐던  것이
군요. 
 형님은 즉시 나에게 그 고급 정보를 주셨
소. 
 왜 그러셨을까요? 
 경찰로 하여금 증인의  역할을 맡도록 하
신 거지. 즉 중앙정보부의 범행을  제3자인 
경찰에게 확인시켜, 꼼짝못하고 김대중  씨
를 댁까지 모셔다 드릴  수밖에 없게 만들
었던 거요.  이후락 씨는요? 그 배의  행적
이 모두 카메라에 담기고 중앙정보부의 공
작이란 사실이 밝혀진 이상 누군가는 책임
을 져야 했소. 형님은 이후락을 지목하셨던 
거요. 형님이 청와대로 들어가셨지. 이후락
은 즉각 해임됐소.  다만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해 모든 것은  비공식적으로 진행되었
지. 나는 일본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다
시 한 번 특수 작전을 펼쳐야 했소.   특수 
작전이라면?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학생들의 회합이 
있었고, 학생들은 그 전단을 한  일본인 강
사를 통해 외국으로 내보내려 했소. 그런데 
일본인 강사가  그 사실을  자신의 애인인 
술집 마담에게 털어놓았지.
 마침 그 마담은  약점이 있어 치안본부의 
정보원 노릇을 할 때였소. 나는  그 일본인
을 일본 정부와 연결시키려 했지.  결국 김
대중 납치 사건과  그 사건을  맞바꾸었소. 
정보원들의 명암이 교차하는 사건들이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자동차는 
어느새 해발 3천 미터 이상의 로키 산맥에 
올라가 있었다. 한여름인데도 머리에  눈을 
이고 있는 웅대한 산들과  콸콸 소리를 내
며 흘러 내려가는 로키 산맥의 눈 녹은 물
들이 경훈의 가슴에 시원하게 흘러들었다. 
웅장한 자연이 숨쉬는 땅, 언제  봐도 부러
운 나라였다. 경훈은 한국인의 상층부 30퍼
센트를 이민 보내야 한다는 오세희의 말이 
실감났다.
 이 변호사, 조심하시오. 어젯밤 많은 생각
을 했소. 형님의 유언을 전해듣고  보니 이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소. 사
실 나도 박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서는 석
연치 않았소. 내 경험에 따르면, 이런 일은 
물밑에 숨겨져 있을 때는  아무런 일도 벌
어지지 않지만  막상 그  중심에 끼여들게 
되면 소용돌이치게 되어 있소. 
어쩌면 이제부터, 아니 그 유언을  듣는 순
간부터 이  변호사의 신변엔  많은 변화가 
생겨났을 거요. 괜한 걱정인지 모르지만 이 
변호사는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을 수도 
있소.  잘 알겠습니다. 
경훈은 숙연해졌다. 그만큼 책임감도  무거
워졌다.
 정말 김재규는 의도적인  살인을 행한 것
일까요? 
 우발적 범행이라고 보기에는 시대 상황이 
너무나 절묘했지. 시대는 박 대통령의 죽음
을 요구했소.  시대가 그분의 죽음을  요구
하고 있었다구요? 
 그렇소. 어차피 그분은 아무에게도 권력을 
넘겨주지 못할 상황에 처해 있었소. 차지철 
같은 충복을  데리고 끝까지  권력을 쥐고 
있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얘기
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박 대통령은  어려서부터  군을 동경했던 
분이오. 대구사범을 나와  교사 노릇을  꽤 
오래 하다가 가장 나이  많은 생도로 만주
군관학교에 들어갔던 걸 보면 그분의 군에 
대한 남다른 집착을 알 수  있잖소. 그분은 
애국심이란 군인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
지. 민간인을 믿지 못했던 거요. 이승만 정
부를 못 믿었고 4·19 후의 민주당 정부를 
못 믿었소. 김대중이나  김영삼 같은  민간 
지도자에게도 권력을 넘겨줄 수 없다고 생
각했지.  그럴 법하군요. 그러니 정권 이양
이라는 것은 박 대통령의 죽음이 전제되어
야 가능했다는 말씀이군요. 현 선생님은 한
국의  정치인들과는  어떤   관계셨습니까?  
모두가 강일이 형님을 추종했소. 그럴 수밖
에 없는 것이 형님은  미국을 대리하여 한
국에 나와 있는 분이었으니까. 물론 대사가 
있고 CIA 지부장이 있었지만, 실제로 한국 
사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는 이는 바로 
그분이었소. 20여 년을 한국에서 순전히 정
보·공작 요원으로 근무하셨으니 오죽했겠
소.  재야와의 관계는 어떠셨습니까? 
 물론 형님은 재야와도  은밀한 관계를 맺
고 계셨소. 공작이란 모든 것을  다 고려해
야 하는 일 아니오.  그랬겠군요. 
경훈은 박정희의 죽음에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면 정치인이나 재야  운동가들도 혐의
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
다. 
어찌됐든 그들의 목표가 정권 이양과 유신 
철폐였다면 박정희를 제거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김재규 역시 중앙정보부
장으로서 숱한 정치인 및  재야 인사와 은
밀한 관계를 가졌을 것이다. 그들  중 누군
가가 충심으로 김재규를  설득했을 가능성
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경훈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추리로는 제럴드 현과 10·26의 관계를 설
명하지 못한다.
 저기 좀 보시오. 
머리에 화려한 뿔을 단 사슴 한 마리가 도
로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건너고 있었다. 오
세희는 자동차의 속도를 줄이더니 사슴 앞
에 가서는 완전히 정지시켰다.
 이들이 자연을 보호하는  것을 보면 소름 
끼칠 정도요. 야생 동물이 다니는 지역이면 
어떤 개발도 허용하지 않지. 1년에  나들이 
몇 번 하는 야생 동물들 때문에 땅 사놓고 
헛된 세월만 보내는 사람들도 많소. 교회에
서 야생 동물들이 제발  다른 길로 다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  
우리에게도 그럴 정도의 땅이 있으면 좋겠
네요. 
두 사람은 수많은 호수와 강을 구경하면서 
로키 산맥의 산길을 상쾌하게 달렸다. 이윽
고 돌아올 무렵에는 오세희도 약간 피로해 
보였다. 그러나 경훈은 오세희가  휴게소에
서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이내 피로를 회
복하는 것을 보고는 놀랐다.
 저는 바로 공항으로  데려다 주시면 고맙
겠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시계를 들여다본 오세희는  곧장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그 의사에게서 무슨 이야기라도 들으시면 
꼭 연락해 주십시오.  
알겠소. 여기 일은  걱정 말고  몸조심하시
오. 특히 사고를 조심하시오.  오 선생님도
요. 
두 사람은 게이트 앞에서  굳은 악수를 나
누었다.  
질투
경훈은 귀국  후 한나절  동안 사우나에서 
피로를 풀고는 사무실로 나갔다.  사무실에
는 언젠가 같이 일한 적이 있던 손 형사로
부터 전화 메모가 남아 있었다. 
이틀 간의 캐나다 방문이었지만 경훈은 큰 
수확을 얻었다. 경훈은  처음 제럴드  현의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얻게 된 정보를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아직은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대통령 시해 사건에 대한 수사가 일사불란
하게 군 기관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치
명적이었다. 
수사에 미심쩍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지
만 그간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10·26 
이후의 소용돌이치는 역사 속에서 그 수사
의 책임자였던 전두환,  노태우가 10여  년 
간 집권했으니 그 사건에  대해 누구도 반
론을 제기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하다. 더욱
이 당시  김재규 본인의  자유로운 진술이 
확보되지 못한데다, 이제 와서는 증언할 사
람도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설사 거기에 
어떤 비밀이 있다 하더라도  밝힐 수 있는 
성질의 사건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훈은  투지가 샘솟았
다.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는 덮을 수 없는 
역사다. 경훈은 그  역사의 한가운데  서게 
된 셈이다.
 때르르릉. 
생각에 잠겨 있던 경훈은  전화 벨 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  벌써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시각에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없었다.
 네, 이경훈입니다. 
그러나 수화기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
리지 않았다.
 말씀하세요. 
 …`….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경훈은 전
화를 끊어버렸다. 늦은  밤에 혹시  여자가 
전화를 받으면 농지거리라도  하려는 장난 
전화일 거라고 애써 치부했다.
 때르르릉. 
5분이나 지났을까, 다시 걸려온 전화에  경
훈은 불쾌한 기분으로  전화기를 낚아채듯
이 들었다.
 도대체 누구요? 
경훈의 거친 말투에 저쪽에서는 조금 멈칫
하는 듯싶더니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훈아, 나 인남이야. 
 어! 인남이. 
 그래, 그런데 무슨 전화를 그렇게  무섭게 
받아? 
 아니, 아냐. 방금 네가 전화했었니? 
 아니, 이번이 처음인데. 무슨 일 있어? 
 별일 아니야. 장난  전화 같은 게  왔었거
든. 
 그래? 네게도 그런 게 오니? 
 네게도라니? 그럼 너도? 
 글쎄, 장난 전화인지 뭔진 몰라도  예전에 
없던 일들이 자꾸 벌어져.  어떤 일인데?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누군가가  엿보
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전화도 엿듣지 않
나 싶어 불안해.  변호사하고는 상의했어? 
 응, 그런데 별 방법은  없어. 변호사는 보
디가드를 붙이라고  하는데 그런  게 어디 
내 체질에 맞겠니?   그래도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한국으로 나가겠다. 
 여기로?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정말? 
 이리 와. 그래야 안심이 될 것 같아. 
 나도 사실 좀 불안하거든. 
 이것저것 정리한다고 시간  끌지 말고 바
로 출발해.  그래,  그럴게. 네가 반가워할 
것이 있어. 
 뭔데? 
 전에 얘기했던 건데 가서 보여줄게. 
경훈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오히려 인남이 
자신보다 더 생각이 깊다고 느꼈다. 그녀는 
누군가 도청이라도 하고 있을까 봐 염려하
는 것이다.
 떠나기 전에 비행기 시간 알려줘. 
 공항에 마중 나오겠다는 뜻이니? 
 그래. 
 어머, 경훈이 너 사람 됐구나. 
 …`…. 
인남의 목소리가 갑자기 밝아졌다. 
 조심해서 와. 
전화를 끊고 난 경훈은  문득 인남이 안됐
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지만, 자신과 인남이 이 일에 빠져들게 
된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인남과의 통화
에서 새삼스럽게 느꼈기 때문이다.  오세희
도 염려했던 바지만 지금 상황에서 인남을 
혼자 미국에 둔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 걸려왔던  장난 전
화로 인해 경훈의 공포심이 더 커졌는지도 
모른다.
며칠 후, 인남은 뉴욕에서 출발한 대한항공
의 점보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렸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스커트를 입은 그녀
는 여느 때보다 성숙해 보였다. 
인남은 수많은 출영객들을  눈으로 살피다
가 경훈을  발견하자 반가운  가운데도 한 
줄기 부끄러움이 뒤섞인 미소를 지었다. 경
훈은 케임브리지 광장에서  판소리를 열창
하던 인남의  어디에 저런  면이 있었을까 
싶어 웃음을 머금었다.
 어서 와. 힘들진 않았어? 
 전혀. 네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
각하니 야릇한 기대감조차 생기던걸.  엉뚱
하기는. 누구 다른 사람은 마중 안 나왔어?  
얘기 안 했어.  사실 이번에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있을까 해.  거부의  상속녀
답게 말이지. 
 놀리는 거니? 
 놀리긴. 어쨌거나  잘 왔어.  곧장 집으로 
갈 거니? 
 아냐, 집에도 연락 안  했어. 기다리는 사
람도 없는걸 뭐. 마침 오피스텔을 관리하는 
친구가 있는데, 작은 걸로 한 달 간 빌려주
겠대. 그래서 거기에서 묵기로 했어.  잘됐
구나. 
 자, 이거 받아. 
 뭔데? 
 선물이야. 
인남은 정성  들여 은박지로  포장한 작은 
상자를 내놓았다.
 지금 여기서 풀어봐야 해? 
경훈이 혼잡한 공항 청사를 의식하면서 물
었다.
 아니, 이따가 밤에 봐. 혼자서. 
 그래, 고맙다. 
 지금 그 오피스텔로 갈 거니? 
 응, 피곤해서 좀 쉬고 싶어. 
 저녁은 어떻게 하지? 
 사먹어야 할 것 같아. 
 그럼 같이 먹자. 
 호호, 서울에 온 보람이 있네. 
경훈은 인남이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자 즐
거웠다. 인남은 사람이 꾸밈없이  솔직해야 
하는 이유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이제 인남에게는 괜찮은 상대만 있으면 아
무것도 모자랄 게 없어 보였다.  다만 그녀
가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이 한국의 
고루한 풍토에서 어떻게  평가받을지 몰랐
다. 그녀 역시 돈에만 관심  있는 잘생기고 
속 빈 남자에게  빠질지도 모른다.  애정도 
책임감도 없이 돈만 탐하는 남자가 득시글
거리는 세상이 아닌가. 
바로 그 순간 경훈의  뇌리에 미국을 떠나
기 직전 재즈 클럽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
랐다. 그때 인남은  키스를 거절했다. 사실 
그것은 경훈에게 뜻밖이었다. 그는  인남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물론 자
신이 그날 밤 인남에게 그런 행동을 한 데
는 술기운과 외로움,  또 미국이라는  땅이 
주는 자유로움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훈은 인남이 자신을  갑자기 밀쳐내리라
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곰곰 생각하던 경훈의 뇌리에 인남이 언젠
가 주말 밤을 미국인  친구 집에서 보낸다
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  관계를 천
연덕스럽게 털어놓은 것은  인남이 미국에
서 어떻게 생활해 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 셈이다. 
‘셰인이라는 미국 친구와  아직도 가까이 
지내고 있을까?’ 경훈은 이런  생각을 하
다 보니 인남이 다소 부담스러워졌다. 
오피스텔 앞에 도착한 인남이 트렁크를 열
려고 하자 경훈이 눈에  띄는 식당을 가리
키며 말했다.
 밥부터 먹자. 
 왜 바쁘니? 잠시 올라갔다 오면 안 돼? 
 응, 어디 갈 데가 있어서. 
 그래, 그럼 식사부터 해. 
경훈은 차를 식당 앞에  대고 앞장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종업원이 갖다 준 메뉴판을 
말없이 인남의 앞으로 밀어놓는 경훈의 손
길에는 싸늘함이 배어 있었다.
 뭐 먹을래? 공항까지  나와주었으니 저녁
은 내가 살게.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으
니 얼마든지 살 수 있겠지. 인남은 놀란 표
정으로 경훈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인남
의 서글서글한 눈동자에 불안감이 배었다.
 셰인은 잘 있어? 
 누구? 
 셰인, 네 남자 친구 말이야. 
경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덤덤한 어조
로 말했다. 
인남은 가늘게 웃었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
를 할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래, 잘 있어. 
 …`…. 
종업원이 다가오자 경훈은  손가락에 짚이
는 대로 아무거나 시켰다  같은 걸로 주세
요. 
두 사람은 식사 도중 내내 말이 없었다. 경
훈은 몇 숟가락 뜨는 둥 마는 둥하고는 먼
저 일어나 계산을 하고 왔다.
 내가 산다니까. 
인남이 공항에서의 유쾌함을  모두 상실한 
채 그녀답지 않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훈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일어섰다.
 경훈아, 이제  우리 일에  대해 얘기하자.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경비는 물
론 내가 댈 거구.  아냐. 필요 없어. 
 그런데 갑자기 왜 그래? 
 뭐가? 아무 일도 없어. 
냉랭한 분위기는 자동차  트렁크에서 인남
의 짐을 꺼낼 때까지 이어졌다.  인남은 웃
으면서 짐을 받아들었다.
 너, 내가 부담되는가 보구나. 참,  여긴 미
국이 아니라 한국  땅이지. 내가 깜빡했어. 
인남의 말에 경훈은 약간 과장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약속이 있어서 그래. 
 내가 괜히 시간을 뺏은 거 아니니?  그래, 
너는 바쁜 사람인데 내가 또  깜빡했네. 인
남은 민망함을 없애려는지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경훈은 웃어  보였으나 
이미 그것은 어색했다.
 미안해. 어서 가봐. 연락할게. 
 그래. 
경훈은 인남을 뒤로하고  자동차를 출발시
켰다. 그러면서 무거운 가방을 든  채 종종
걸음으로 오피스텔에 들어가는  인남의 모
습이 백미러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
다. 
왜 그랬을까, 왜 그 가식 없고 선량한 인남
에게 그렇듯 용렬한 태도를 보이고 말았을
까 하는 후회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결국 
경훈은 운전조차 못할 지경이 되어 길가에 
차를 세웠다. 
경훈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마음을 가라
앉히고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처음 자
신은 인남의 투명한 인간성에 감동하지 않
았던가. 그런데 왜 갑자기 인남에게 그렇게 
차갑게 대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참 
생각하던 경훈은 쓴웃음을 지었다.
질투하고 있는 건가. 언젠가 인남이 얘기했
던 셰인이라는 친구. 
인남은 그 친구와 같이  밤을 보낼 작정이
라면서 자신에게 전화를 받아달라고  했다. 
경훈은 ‘셰인’이라는   이름을 떠올리자 
감정이 복잡해졌다.
인남, 경훈은  그녀를  여자로 생각하지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단
지 고등학교 동창에 불과했다.  
학창 시절, 경훈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인남
은 공부에 관심 없는  여학생들이 흔히 그
렇듯 떠들고 웃고  노는 데에만  열중했다. 
유치한 액세서리로 머리며  교복이며 여기
저기를 장식했고, 수업 시간에는 교과서 대
신 연예인의 사생활을 다룬 책이나 읽었으
며, 선생님과 학교에 대해 남에게 뒤질세라 
별별 한심한 꼬투리를 다 잡아내는 우스운 
여자애였다. 
그런 여자라면 단신으로 미국에 가서 어떤 
생활을 했을지 뻔하지 않은가. 그런데 우연
히 미국에서 인남을 보게  되자 그저 아무
런 부담 없이 만났던 것이고,  제럴드 현의 
사건를 계기로 가까워진 것뿐이다. 
그렇다. 그것뿐이다. 어찌되었건 인남은 열
심히 공부해야만 하는 고등학교 시절을 소
홀히 보낸 낙오자였다. 그후 그녀의 인생이 
어떻게 변했다 해도 이미  출발이 한껏 부
실해져 버린 이류 혹은 삼류  인간이다. 아
마 셰인이라는 이름의 그 애인인지 친구인
지 모를 미국인도 보나마나 사회의 중심부
에 자리할 기회는 평생 한 번도 얻지 못할 
것이다. 
경훈은 인남의 모든 것을 무시하기로 마음
먹었다. 제럴드 현이란 특수한 사건이 없었
다면 어차피 잊혀질  사람이었다고 생각하
니 마음이 다소 가라앉았다. 
경훈은 거울을 한 번  흘끗 보고는 자동차
의 키를  돌린 다음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그러나 자동차는 여느 때처럼 경쾌
하게 출발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액
셀러레이터를 힘주어 깊이 밟았다.
낡은 수첩
집에 돌아온  경훈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썩 맑지 않은  기분도 전환하
고 깨끗한 머리로 앞으로  할 일을 정리해 
보기 위해서였다. 
눈을 막 감으려던 경훈은  문득 인남이 준 
선물을 떠올렸다. 일어나 끌러볼까  하다가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궁금증이 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러   일어나 끌러보기에는 
자존심이 많이 상해 있었다. 
경훈은 그냥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인남아! 
 어, 누구십니까. 어떻게 들어오셨죠? 
경훈은 소리 없이 들어와  현관에 서 있는 
그림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야, 나, 제리 현. 
 제리 현, 그럼 현 선생님? 
 그래. 저분을 봐. 
제럴드 현은 손을 들어  한 사람을 가리켰
다. 키가 작은 그 남자가 경훈의 앞으로 걸
어나왔다.
 아, 박 대통령. 
키가 작은 박 대통령의  어두운 형체는 한
동안 아무 말없이 경훈을 바라보고만 있다 
그의 옆을 지나쳐 사라졌다.
 저분을 지켜드리려고 그렇게나 애를 썼건
만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어.  하지만 인남
아, 그분 죽음의 배후는 꼭  밝혀야 해. 그
래야만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을 거
야. 그러지 못하면 또 우리  대통령이 죽거
든. 알겠어? 또 죽는단 말이야.  아니, 독재
는 끝났는데 왜 대통령이 죽는단 말씀입니
까?  인남아, 그게 아니야. 박 대통령은 독
재 때문에 죽은 게 아니야. 더 깊이 생각해 
봐. 10·26에는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 
담겨 있어. 나는 할 만큼 했어. 
이제 모든 것은 인남이에게 달려  있어. 이
제 나는 가야 해. 저분을  구천에서나마 보
호해야 하거든. 저분은 얼마나 야속하게 생
각하실까. 대통령을 누가 죽였는지도  모르
는 국민들을`…`….  현 선생님! 현 선생님! 
꿈이었다. 하지만 생시와 조금도  다름없는 
생생한 꿈이었다. 경훈의 꿈속에서  제럴드 
현은 인남을 찾아 일을 맡기고  있었다. 경
훈은 인남 대신 그의  전화를 받았던 것처
럼 꿈속에서도 인남을 대신해 뭔가 계시를 
받았다. 경훈은 제럴드 현의 얼굴을 기억하
려 애썼지만 형상이  잡히지 않았다.  단지 
키가 작은  박 대통령의  얼굴만 또렷하게 
떠올랐다. 
꿈은 경훈의 뇌리에 강한 직관을 불러일으
켰다. 20년이나 묻혀 있던 거대한 미스터리
가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경훈은 생
각을 가다듬고  제럴드 현의  전화를 받은 
후부터 이제껏 진행된 상황을 하나하나 정
리해 보았다. 
1. 제럴드 현은 죽음 직전의 순간에 전화를 
걸어와 10·26에는 비밀이 있다고 했다.
2. 전화를 건  시점이나 그의 신분으로  보
아, 그 전화는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다.
3. 합수부 발표는 김재규 행위의 의미를 축
소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대통령 시
해가 우발적 단독 범행이라고 발표한 것이 
단적인 증거다.
4. 그러나 실제 군검찰의 기소시 적용 죄목
은 내란 목적 살인죄였다. 합수부는 김재규
를 신속히  죽이기 위하여  재판 일정까지 
잡아놓고 서둘렀다. 따라서 합수부의  수사 
및 발표는 신뢰하기 힘들다. 
5. 그동안 국내 언론의 10·26에 대한 분석
과 보도는 모두 합수부의 발표를 근간으로 
한 것이고 독자적인 내용은 없었다.
6. 제럴드 현은 10·26을 전후하여  입·퇴
원했고, 몇 달 후에는 아예 전역해 버렸다.
경훈은 마지막 6번 항에 주목했다. 역시 가
장 의심스러운 것은 제럴드 현이 10·26을 
전후하여 입·퇴원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미8군병원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모
든 정보는 고작 입·퇴원일에 불과했다. 
지금으로서는 역시 오세희의  말대로 당시 
제럴드 현을 치료한  의사로부터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경훈은  캐나
다로 전화를 넣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며칠 간 겪어본 오세희의 성품으로 미루어 
무언가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전화를 주
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경훈은 인남에게 전화를 걸었
다.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다. 인남은 직접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자동 응답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그
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경훈아,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어  연락하
려고 했는데 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구나. 먼저 다른 일부터 보고  나서 전화
할게.  `경훈은 생기 없는 인남의 목소리를 
귓전에 남겨둔 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저
녁에 전화가 오면 어떤  어조로 대할까 생
각하며 그는 치워두었던 인남의 선물을 꺼
냈다. 
사실 인남에게 셰인이라는 친구가 있든 그 
친구와 어떤  관계든 경훈  자신이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경훈은 자신이 인남의 사생
활을 심각하게 생각할 이유도 자격도 없다
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
신이 어제  인남의 단점을  발견하기 위해 
생각에 잠겼던 것이 어처구니없었다. 
인남이 준 선물을 풀어보는 경훈의 손길이 
담담했다. 상자 안에는 인남이 미국에서 산 
넥타이나 전자 수첩 같은  것이 들어 있으
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너무도 예쁘게 싼  선물 상자 안에
는 포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낡은 수
첩이 들어 있었다. 경훈은 손을  천천히 뻗
어 수첩을 집어들었다. 이렇게 낡은 수첩을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준 이유가 뭘까. 어쩌
면 인남 자신의 일기장일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잠시 스쳐갔다.
경훈은 수첩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모두 
한글로 씌어 있었다.  단어나 필체로  보아 
인남이 쓴 것은  아니었다. 수첩의  앞뒤를 
살피던 경훈이 눈썹을 꿈틀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이름이  낡은 글씨  사이에서 눈에 
들어온 것이다. 
`제럴드 현.
수첩은 제럴드 현의 것이었다. 그제야 경훈
은 인남이 상상 외로  치밀했다는 것을 깨
달았다. 선물이란 형태는 일종의 안전 장치
였다. 인남은 무언가  매우 중요한  자료를 
자신에게 전해준 것이다. 
이것에는 틀림없이 10·26의  비밀이 담겨 
있으리라. 기대감을 잔뜩 담은 그의 눈길이 
번개처럼 수첩의 내용을 훑었다.
수첩에는 제럴드  현이 겪은  정신 장애가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낡을 대로 낡아 
빛바랜 연륜만 담고 있는 수첩에는 제럴드 
현이 수없는 단상을 썼다가 펜으로 지우고 
또 지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수첩의 대부분은 케네디에 대한  것이었다. 
약 여덟 페이지 분량의  얇은 수첩은 대체
로 깨끗하게 기록되어 있었으나 마지막 페
이지는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하얀 여백 하
나 없이 전체가 검정  볼펜의 잉크로 두껍
게 칠해져 있기도 하고, 네댓 줄의 문장 위
로는 마구 황칠이 되어 있어 알아볼 수 없
었다. 경훈은 노트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제
럴드 현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이 되살아났
다. 
경훈은 수첩을 덮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인남은 변호사로부터 제럴드  현의 유품을 
넘겨받았을 것이다. 그중에서 이 수첩은 제
럴드 현이 글로 무언가를  써둔 유일한 자
료인 셈이었다. 
경훈은 다시 한 번  차분히 수첩의 내용을 
처음부터 훑었다. 역시 마지막 페이지는 도
저히 읽어낼 수 없었다. 검게  덧칠이 되어 
있는 글자들은 한 자도 알아볼 수 없었다. 
수첩을 덮는 경훈의 머릿속에 케네디와 관
련된 한 문장이 자리를 잡았다. 
케네디의 동서 화해와 박정희의 자주 국방. 
이들은 출신  성분은 달라도  너무나 닮은 
이상주의자들이었다. 죽음조차도`…`….
장군의 회한
경훈은 이 문장과 제럴드 현,  그리고 10·
26과 박정희, 김재규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
어보았다. 저녁때가  되도록  인남에게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제럴드 현의 수첩과 씨름하던 경훈은 시간
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나설 채비를  했다. 
오늘은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귀국
하자마자 10·26에  관한 자료를  읽고 또 
읽으면서 찾아낸 사람. 10·26 당시의 상황
을 검증하기에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날을  손꼽아 기
다렸던 것이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술잔이 테이블에 꽂
히듯 떨어졌다.
 싱거운 양반. 
노인은 눈을 감은 채 독백을  계속했다. 안
주엔 젓가락도 대지 않고 벌써 몇 잔째 소
주잔만 거푸  기울이고 있는  그의 미간이 
몇 번이나 찌푸려졌다가 다시 펴지곤 했다.
 이해가 되질 않아`…`…. 
우람한 몸집에 강직하게 생긴 그의 얼굴은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같은 표정으로 휘감
겨 있었다. 그 복잡함 위로 진한 감정이 솟
는 듯 얼굴 근육이 가끔 씰룩거렸다.
 망할 놈의 영감. 
그의 입가에서 급기야는 원망에 찬 목소리
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듣기에 
따라서는 단순한 원망이라기보다는 어딘지 
애타는 안타까움 같기도 했다.
 손님, 오늘은 술이 좀  과하신 것 같네요. 
이제 그만하세요. 사십대 후반의  나이지만 
아직도 매력이 얼굴에 가득한 여주인이 노
인을 지켜보다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
 내가 술이 과하다고?  아니야, 오늘은  좀 
마시고 싶어. 노인은 다시 술잔을 채웠다.
 아유, 안 되겠어요. 저라도 술을 따라드려
야지, 이러다간 폭음하시겠는걸요. 이제 나
이를 좀 생각하셔야죠. 여주인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노인의 앞자리에 앉았다.
 나이를 생각하라고`…`… 그래, 이제 나도 
내일이면 칠십이구먼.
 그러나 잡티 하나 없는 얼굴과 우렁찬 목
소리의 그는 이제 겨우  육십이 넘어 보일 
뿐이었다.
 어머, 벌써 그렇게나 되셨어요? 저는 이제
껏 모시면서도 그러신 줄을 몰랐네요. 그렇
다면 더욱 조심하셔야죠. 여주인의 이 말에 
갑자기 노인이 언성을 높였다.
 조심해? 이 나이에 무엇을 조심하란 말이
야! 
대단한 기력이었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
리는 결코 칠십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느
닷없이 노인의 목소리가 노기를 띠자 여주
인은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평소에 
늘 점잖던 노인이었기에 놀라움은 더했다.
 어머, 왜 그러세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
도 있으세요?  갑갑한 양반! 당신은 머저리
야, 머저리! 
술이 오른 노인의 눈에서  광포한 빛이 뻗
쳐나왔다.
 도대체 아까부터 누구를 그렇게 머저리라
고 하시는 거예요?  김재규. 
 네? 
 김재규, 김재규 몰라?  그 천하의 얼간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몰라?  알다마다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염없이 그분을 욕하고 
계세요?  망할 놈의 영감. 
노인은 허탈한 표정으로 다시 술잔을 기울
였다.
 가고 없는  사람인데  이렇게 원망하시는 
걸 보면 각별한 관계셨던 모양이죠?.  각별
한 관계? 각별해도 너무 각별했지. 그 망할 
놈의 영감하고는 말이야.  그런데 왜  이렇
게 원망하시느냐구요. 
 영감이 그럴 줄이야`…`…. 
 대통령을 시해한 것이 못마땅하신 거로군
요. 
노인은 고개를 들어 여주인의 얼굴을 흘끗 
쳐다봤다.
 그게 아니야. 
 그럼요? 
 당신은 몰라도 돼. 
노인은 한 손으로 탁자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잠시 기우뚱했지만 이내 균
형을 잡았다. 나이는  들었어도 오랜  세월 
운동으로 단련된 몸이었다.
 나는 안 죽어. 절대로 죽지 않아! 
노인은 취중에도 잔돈까지 꺼내 셈을 정확
히 치르고는 밖으로 나섰다. 여주인의 걱정 
섞인 배웅을 받으면서 집을 향하여 걸어가
던 그의 눈에 달빛이 반사되면서 반짝했다. 
눈물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고인 눈물을 닦
으려 하지 않고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걷지 않아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노인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피와 땀이 서려 있는 
이 고지 저 능선에
쏟아지는 별빛은 
어머님의 고운 눈길
전우야 이 몸바쳐
통일이 된다면
사나이 한 목숨
무엇이 두려우랴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입가에서 자신도 
모르게 군가가 흘러나왔다. 감상에 젖은 노
인의 몸이 비틀거렸다.
 내가 이젠  요만한  술에도 비틀거리다니
`…`…. 
노인은 몸을 꼿꼿이 하려고 애를  썼다. 그
러나 그럴수록 만취한 몸은 한쪽으로 기울
어지다 또 반대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는 손
을 이마에 갖다 댔다. 집까지는  가파른 언
덕이었다. 심장이  쉴새없이  벌렁거렸지만 
노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쉬지 않고 언
덕을 올랐다. 그러나 지나치게 취한 탓인지 
평소 같으면 금세 다  올랐을 언덕 중간에
서 발을 헛디뎌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
러자 그의 입에서는 오기  섞인 소리가 튀
어나왔다.
 난 안 죽어. 절대로 안 죽어. 
노인은 일어나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대로 드러누워버리고 싶었다. 그
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주정꾼들처럼 길바
닥을 헤맬 수는 없었다. 일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노인의 귀에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
다.
 장군님,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순간 노인의 눈이 번쩍 빛났다.  노인은 고
개를 돌려 소리의 주인공을 날카롭게 쏘아
봤다.
 누구냐, 네 놈은? 
 먼저 일어나시지요. 
 네 놈의 정체를 밝혀! 
노인은 거짓말처럼 날쌘  동작으로 일어났
다.
 저는 이경훈이라고 합니다. 
 누가 네 놈의 이름을  듣자 그랬어? 뭐하
는 놈이냔 말이야? 경훈은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술집에서부터  따라왔지만  그토록 
취해서 비틀거리던 노인이  자신이 나타나
자 몸을  꼿꼿이 세우고  날카로운 눈매로 
쏘아볼 줄이야. 역시 한평생을 군에서 보낸 
장군의 정신력은 보통 사람의 것과는 현격
한 차이가 있었다.
 변호삽니다. 
 뭐야? 변호사라. 이놈 거짓말 한번 엉뚱하
게 해대는구나. 이  밤에 변호사란  족속이 
취한 노인을 일으켜준단 말이야?  이 나라
가 그렇게나 된 나라야? 거짓말하지  마라, 
이놈. 솔직하게 취객털이라고  해. 먹고 살
기 힘들어 나왔으니까 한푼  달라고 왜 솔
직히 말 못하나?  내가 한  번이라도 그런 
사람들을 모른 체한  적이 있나?  장군님, 
저는 정말 변호삽니다. 불안해하지  마십시
오.  불안? 하하하. 이놈아, 내가 이 천하의 
김정호가 취객털이에게   불안해한단 말이
야? 이놈 참 웃기는군. 김정호는 경훈의 차
림새나 말씨로 보아서  취객털이는 아니라
고 생각했는지 음성에서 냉기를 거두었다.
 경훈 역시 김정호의  기백으로 보아서 취
객털이 따위를 불안해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아까 술집에서부터 장군님을 지켜보
았습니다.  나를 지켜봐? 이놈 봐라, 너 스
파이냐?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변호삽니다. 
김정호는 그제야 진지한 눈길로 경훈을 바
라보았다.
 변호사? 변호사가 무슨 이유로 나를 지켜
본단 말이야?  뭘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
습니다. 
 하하하. 요놈, 너  기자지? 기자란 놈들이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이젠 변호사라고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안  돼. 아무것도 얘
기할 수 없어.  기자가 아닙니다. 
 그래? 그럼 신분증을 내놔봐. 
경훈은 신분증을 꺼내 김정호에게  주었다. 
김정호는 신분증을 한참  뚫어지게 보더니 
말투가 약간 부드러워지며 이해할 수 없다
는 듯이 물었다.
 변호사가 내게 웬일이야?  뭘 물어보겠다
는 거지? 
 길거리에서 드릴 말씀은 아닙니다. 어디로 
좀 들어가시죠?  무얼 물어보려는지  알아
야 어디 가서 앉든 서든 할 것 아냐.  몸도 
불편하시니까 어디 편한 데  앉는 게 낫겠
습니다. 김정호는 경훈의 예의바르고  진지
한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집을 꺾었다.
 그래, 요 위에 작은 맥주집이 하나 있는데 
거기 가서 자네가 도대체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지 한번 들어보지. 주택가가  시작
되는 어귀에 있는 작은  카페를 찾아 들어
가 자리를 잡자 젊은  아가씨가 메뉴를 들
고 왔다. 경훈은 맥주를 시켜  김정호의 잔
에 따랐다. 김정호는 목이 컬컬했는지 단숨
에 잔을 쭉 비웠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늘 보던 사람들하고
는 분위기가 좀 다르구먼. 그런데  왜 나를 
만나러 온 거지?  저는 일부러  오늘을 택
해서 찾아뵈었습니다. 
 오늘을 택해서라고? 그럼  자네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안단  말이야?  네. 장군님도 
그래서 이렇게 취하시지 않았습니까?   오
늘이 무슨 날인데? 
 정보부장이 돌아간 날 아닙니까. 
 아는구먼. 자네는 그래도 보기보단 예의가 
있는 모양이군. 아무때고 전화질이나  삑삑 
해대는 기자놈들과는 무어가  달라도 한참 
달라. 김정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내 
눈을 부릅뜨고 화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무슨 잡지던가  최  아무개라는 기자놈이 
있는데, 그 새끼는 새벽 1시만 되면  꼭 내 
집에 전화를 걸어서 뜬금  없이 한번 만나
자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야,  이 쌍놈의 
새끼야. 너는 가정도 없냐? 기자란  놈들은 
이 한밤중에 남의 집에  전화를 걸어도 되
는 무슨 특권이라도 있냐?” 그랬더니,  그 
새끼가 “역사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 자꾸 
안 만나주니까 이러는 거 아니오” 하길래, 
내가 “네가 날 보자고  하면 나는 무조건 
너를 만나야 되냐?” 했더니  “만나줄 때
까지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이러겠다”고 
하더구먼. 새끼, 진짜 독종이야. 정말  매일 
밤 전화가  오는데 번호를  바꿔도 소용이 
없더라구. 그 새끼 때문에  한 달 동안  잠 
못 잔 거 생각하면 잡아죽이고  싶어. 세상
에 어째 그런 새끼가 다  있는지. 김정호는 
기자 기피증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하필 오늘을 택해 나를 찾아온 이유
가 뭐야? 그것도 내가 한참 취하기를 기다
렸다 말이야. 김정호는 경훈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안다고 하자 뜻밖에도 동지적 유대
감을 느끼는 듯했다.
 김재규 부장의 박  대통령 시해에 대해서
는 당시 합수부에서 조사한 것이 결론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온 
세계 사람들이 합수부의 수사를 그대로 믿
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
이지. 당시 합수부말고 어느 누가  감히 나
설 수나 있었나?  합수부의 결론에 따르면, 
김 부장은 박 대통령의  총애를 받기 위해 
차지철 경호실장과 벌인 충성 경쟁에서 몰
리고 중앙정보부의 정치 공작도 번번이 실
패한데다, 김 부장의 유약한 스타일을 대통
령이 나무라고 그것을 옆에 있는 차지철이 
부추기자 순간적으로   격분하여 차지철을 
해치우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밖
으로 나가 “똑똑한 놈으로 셋만 준비해”
라고 말하며  부하들을 대기시킨  후 총을 
들고 들어와 먼저 차지철을 쏘고, 차지철이 
화장실로 숨자 대통령을 쏜 다음,  다시 차
지철을 쏘아 죽인 후  대통령을 확인 사살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김정호는 경훈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김재규의 사
형 집행일에 찾아온 이  정체 불명의 변호
사가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김 부장의  행위에 대해 합수부와는 
다른 시각에서 범행을  재구성하고 싶습니
다.  어떻게? 
김정호의 눈이 번쩍 광채를 발했다.
 우선 결론부터가 다릅니다. 김재규는 박정
희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것이 아니라 미리 
범의를 갖고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것입니
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저는 법정에서 소송  사건을 많이 다룹니
다. 따라서 실제 일어났던 사실과 법정에서 
다루어지는 진실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
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음,  좀 혼란스
럽군. 지금 술을 마셔 머리가  썩 명쾌하지 
않으니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나? 김정호는 40년  세월을 정
보 계통에서 살아온 거물답게 경훈이 꺼내
는 이야기의  수준이 그간  다른 사람들이 
운위하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
실을 깨달았다. 이런  이야기를 술에  취한 
상태에서 들어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인 의
식이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내일 어디서 뵙지요? 
 내 집으로 와주겠나? 
 몇 시가 좋으십니까? 
 아침 10시가 좋을 것 같군. 
 알겠습니다. 
역사의 증인
다음날 아침, 김정호와 마주앉은 경훈은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의 다소  감상적이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노장군의 무게만이  묵직하게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어제는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것 같소. 나
는 김정호요. 김정호가  웃음을 띠며  손을 
내밀었다.
 이경훈입니다. 
 그래, 이 변호사는  이 일과 무슨  관련이 
있소? 
 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그런데 내 눈에는 
이 변호사가 상당히 깊숙이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군.  저는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이 일의 수수께끼를 풀어보고자 하는 것입
니다.  수수께끼라? 무엇이 수수께끼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전체가 제게는 
수수께끼입니다.  그렇소? 
김정호는 날카로운 눈길로  경훈의 얼굴을 
훑었다.
 그런데 그게  설혹  수수께끼라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풀어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물론 나도 흥미는 있지만 말이오.   일단은 
제 얘기를 들어만  주셔도 좋습니다.  사실 
김 장군님은 그 당시  김재규 부장의 대통
령 시해 사건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판단하
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분이 아니십니까? 
김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는  얘기
였다. 사실 김재규의 그 일이  우발적 범행
인지 준비된 거사인지 김재규 자신보다 잘 
아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가고 없다. 그렇다면 김재규 다음으로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김정호 자신이 그
런 질문을 받았어도  스스로 “김정호요”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김정호는 젊은 변호
사가 의외로  사건 주변의  사람을 정확히 
짚고 있다고 생각했다.
 김재규 부장이 수사  기관에서 뭐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수사 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묻히거나 변질되
어 버리고 맙니다. 당시 상황에서  감히 누
가 김재규의 신문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
겠습니까?  그건 그렇소. 
 당시 김 장군님은 현역 소장 계급으로 중
앙정보부 감찰실장이라는 직위에 계셨습니
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앙정보부의 제2인자
셨지요. 김재규 부장은  모든 일, 그야말로 
모든 일을 김 장군님과 의논했기 때문입니
다. 김정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 부장은 보안사령관  시절부터 당시 참
모장이던 김 장군님을 신뢰하여,  중앙정보
부로 옮길  때에 특별히  장군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김정호에겐 좋았던 시절이다. 권
력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기백이 살
아 있었던 시절이다.  당시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던 윤필용 사령관에게  단신으로 찾
아가서 “당신 똑바로 하시오. 천하가 당신
을 두려워해도 나 김정호는 추호도 두렵지 
않소” 하고 일갈했던 적도 있지 않은가.
 박 대통령도 복잡하고  긴급한 사항에 대
해서는 김 장군님이 직접 들어와서 브리핑
하시도록 했습니다. 김정호의 입가에  미소
가 피어올랐다. 박정희는 이따금씩  김재규
에게 “그 뚱땡이 보고  들어와서 직접 설
명하도록 해” 하고 지시하곤 했다. 
박정희는 김정호의 단도직입적이고 간결한 
브리핑을 좋아했다. 지나치게 유약했던  김
재규 부장이 대통령의 눈치를 봐가며 브리
핑하던 것에 반해 김정호는 번뜩이는 안광
을 내쏘며  마음에 있는  말을 거리낌없이 
내뱉곤 했다. 배석한 부장은 몇  번이나 안
색이 바뀌었지만 대통령은  시원하다는 표
정으로 “뚱땡이가   성격 하나는   화끈하
군” 하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럴  때면 
김정호는 왜소한 대통령에 비해 체구가 너
무 큰 게 죄송스럽기까지 했다. 
부장도 쩔쩔맸던   차지철이지만 김정호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청와대에 들어오는 모
든 사람을 제압하고 통제했던 차지철도 김
정호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먼저 미소부터 
지으며 “김 장군 들어오셨소” 하며 비위
를 맞추지 않았던가.
김정호는 순간 분노가 울컥 치밀었다. 그런 
작자가 경호실장이 되어 각하의 눈과 귀를 
막음으로써 역사가   이렇게 비참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인물은 대통령이 
총격을 당하는 순간 대통령을 버려두고 자
기만 살자고 화장실에 숨지 않았던가. 대통
령이 죽어가는데도 화장실에서  고개만 빼
꼼 내밀고 “각하, 괜찮습니까” 했던 차지
철. 김정호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욕지
거리가 튀어나왔다.
 개새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패죽여 버
렸을 텐데. 경훈은  뜻밖이었다. 수사와 정
보 계통에서 40년 세월을  보낸 사람의 성
격이 이렇게나 직설적이라니. 자신도  공군 
검찰관으로 근무해서 익히 아는 바지만 수
사나 정보  계통에 오래  근무한 사람들은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경훈은 김정호의  성
격이 이러니  신군부가 권력을  잡고 여러 
가지로 회유했어도 권력 한 줄기에 유혹되
지 않았구나 싶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대통
령과 정보부장에 대한  김정호의 의리였을 
것이다.
 김재규 부장은  자신의  병이 심해질수록 
점점 더 김 장군님을  의지하게 됐을 겁니
다. 대통령도 좋아하고 차지철도  두려워하
는 김정호, 게다가 이 김정호는  내가 보안
사 시절부터 가장 예뻐하던 인물이 아닌가, 
아마 이것이 김 장군님에  대한 김 부장의 
생각이었을 겁니다. 김정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  그랬다.  김정호는 나이 
어린 변호사가 신통했다. 그러나 쉽게 입을 
떼지 않았다. 경훈이 결론적으로 하고자 하
는 말이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었기 때문
이다.
 심지어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인사인 삼
군 참모총장을 임명하는 데에도 김 장군님
의 영향력이 가장  컸습니다. 이미 보안사, 
아니 그 이전 방첩대  시절부터 전국의 장
성이란 장성은 모두 꿰고  있던 김 장군님
은 복수 혹은 세  배수로 정보부에서 청와
대로 추천하던 서류에 자신이 가장 괜찮다
고 생각하는 사람을  대통령이 선택하도록 
하실 수 있었습니다.  즉 대통령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계셨던 거죠. 추천서를 대
통령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써올리면 되었
으니까요.  자네 뭐하는 사람인가?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알지?  김정호가 느끼기에 
경훈은 누구에게 당시 상황을 전해들어 그
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
다. 자신의 마음 저 깊숙이 묻혀 있는 사실
을 이 세상의 누가 안단 말인가. 경훈은 김
정호가 질문한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자신
의 얘기를 계속했다.
 마지막 군 인사에서  정승화 장군이 육군 
참모총장이 되도록 하신 것은 참 잘하셨다
고 생각합니다. 당시 고위 장군들이 권력자
에 빌붙어 출세를  하려는 어지러운  판에, 
평생을 야전으로만 돌던  강직하고 합리적
인 장군을 총장으로 앉힌  것은 군과 나라
의 안보를 위해서 잘된 인사였으니까요. 그
랬다. 당시의 어지럽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군이라도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김정호는 참군인이었던 정승화를 필사적으
로 밀지 않았던가.
 본시 간이 좋지  않았던 김  부장은 쉬이 
피로를 느끼고 어떤 때에는 매사를 귀찮아
했습니다. 중앙정보부의 그 방대한  업무를 
정력적으로 수행해 나가기가  어려웠던 것
이죠. 그 상황에서 부장 역할의  상당 부분
은 다른 사람이  대신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 
 바로 김 장군님이었습니다. 
 맞소, 바로 나였소. 그런데 그것이 자네가 
얘기하는 수수께끼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말이지?  틀림없이 있습니다. 누구라도 김 
장군님의 증언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방금 말씀드린 대로  김 장군님은  반쯤은, 
아니 그 이상으로 정보부장의 역할을 수행
하셨기 때문입니다.  글쎄,  그건 이제  그 
정도 하면 됐고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거냐구?  10·26 당일에도 김재규 부
장은 김 장군님을 생각하고 있었을 겁니다.  
…`…. 
김정호는 그날  오후 늦게  받았던 전화를 
떠올렸다. 어쩌면 당시 정승화를 만나러 갔
던 김정섭  차장보 대신  자신이 궁정동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정호, 저녁에 무슨 일 있나?
─`네, 각하께서  조사하라시던 일을  오늘 
밤 안으로 마무리지어야 됩니다. 내일 보고
해야 합니다.
─`참, 그렇지. 그 일이 있지.
─`왜,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응, 육군  총장을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오라 그랬는데 각하와 행사가 겹치게 됐어. 
자네가 나가서 총장하고 대신 식사를 하면 
했거든. 어쨌거나 자네가 만나던  사람이니
까 실례도 안 되고.
─`저도 그러고 싶지만  보고서 때문에 어
렵겠습니다.
─`할 수 없지. 안면은 없지만 김정섭 차장
보를 보내야겠군.
─`예의를 다하라 그러십시오. 정  총장 그 
양반, 사람은 점잖아도 보기보다 예의에 민
감합니다.
─`알았어, 자네는 보고서나 잘 만들어. 각
하께서 요즘  들어 부쩍  “뚱땡이  잘 있
나” 하고 자네를 보고 싶어하시던데.
도상 훈련
 아마 합수부에  가서도  고생깨나 하셨을 
겁니다. 김재규 부장 행위의 의미를 확산시
키려던 그들이 제2의  부장인 김 장군님으
로부터 내부  모의 혐의를  캐보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을 테니까요. 
김정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신문을 견뎌낼  수 있는  인간은 없을 
것입니다. 아는 사실은  모조리 불게  되어 
있죠. 김 장군님도  예외는 아니셨을  겁니
다. 김정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
하고 싶지 않은 그때의 기억들이 스쳐갔다.
 거기서도 장군님은 같은 대답을 하셨겠죠. 
왜냐하면 그것이  장군님의  진실이니까요.  
그래, 자네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하군. 
그런데 뭘 그리 길게 얘기하는 건가? 도대
체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뭔가?  김 
장군님은 그 당시 숨기신  것이 전혀 없었
습니다. 역사를 진실되게 증언하셨죠. 하지
만 저는 그 진실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
습니다.  무슨 의문? 
 장군님은 왜 그것이 김 부장의 단독 범행
이라고 결론을  내리신 겁니까?   장군님을 
대통령 시해 현장에 참석시키지 않았기 때
문입니까? 김정호는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
만 다시 한 번 그때의 정황을 검증해 보려
는 듯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누가 뭐래도  나는 그 사건이  김재규 
부장의 우발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을 확신
할 수 있소. 한국에서  누가 나보다 더  김 
부장의 의중을 잘 알고 있었겠소?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실 수 있습니까? 
김정호는 잠시 망설이더니 마침내 입을 열
었다.
 바깥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우리만의 
방법이 있었소.  그것이 무엇입니까? 
 김 부장은 보안사령관 출신, 나는  보안사 
보안처장 및 참모장 출신이오. 우리는 보안
사령부의 모든 것을 아는 상태에서 중앙정
보부를 장악했지. 즉  한국의 모든  기밀을 
망라했던 거요. 거기에 비하면 청와대 경호
실은 차지철이가 까불긴 했어도 각하 주위
를 맴도는 강아지 격이었지. 이번에는 경훈
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 부장과 나는 수십 번이나 도상 훈련을 
했소. 만약의 경우`…`… 만약의 경우에 대
한민국을 장악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이오.  만약의 경우라면`…`…? 
 아, 그것을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소. 
김정호는 손을 내저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한국에  무슨 일이 생긴
다면이라는 뜻이오,  어떤  이유에서건. 즉 
순수하게 안보적 측면에서 그런 도상 훈련
을 했던 거요.  그 훈련의 내용은 무엇이었
습니까? 
 우리는 전쟁이 아닌  상태에서 한국을 장
악하려면 열두  시간 이내에  연행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과 거처, 움직임 따위를 철저
하게 파악하고 있었소. 모두 합쳐 1백 명이 
좀 안 되었지. 무슨 뜻인지 알겠소? 그들만 
연행하면 대한민국은 당분간  공백 상태가 
되고 마는 거였소. 누가 무슨 짓을 해도 나
설 사람이 없었던  거지.  그러나  대중(大
衆)이 있지 않습니까? 
 대중? 김대중은 있을지 몰라도 그냥 대중
은 없는 거요. 대중이란 늘  선전과 공작에 
당하는 존재들 아니오. 그들이 도대체 무엇
을 할 수 있겠소? 김정호의 얼굴에 비웃음
이 일었다.
 첩보란 처음부터 끝까지 조작이오. 그리고 
그 희생자는 언제나 대중이지. 40년을 수사
와 정보로 살아온 김정호의 대중관은 철저
하게 냉소적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날 밤, 부장이  나
에게 한마디만 했으면 상황은 끝이었소. 단 
한마디 말이오. 김정호의 눈빛이 갑자기 살
기를 띠었다. 이 세상 무엇이라도 집어삼킬 
듯 살벌했다. 그러나 이내 그 눈빛은 두 갈
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하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후회와 아쉬움으로, 그리고  또 하
나는 원망으로 서서히 바뀌어갔다.
 “김정호, 시작해”라고 한마디만  했으면 
세상은 모두 끝나는 것이었소. 김정호의 가
슴이 점점 벌렁거렸다.
 우리는 혁명을 할  수 있었던 거요.  당시 
부장이나 나나 부마사태를 보면서, 그 절규
하는 민중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제는 끝
이라고 생각했지.  김재규  부장이, 그리고 
이 김정호가 차지철처럼 아양만 떠는 애완
견이었을 것 같소? 우리의  가슴에는 뜨거
운 것이 있었지. 조국을 위해  한평생 일해 
왔다는 신념이었소. 나  김정호, 40년을 방
첩대·보안대·정보부의 최고   핵심직으로
만 돌았지만 부정하지 않았소.  축재하지도 
않았소. 아무 놈 모가지만 비틀어도 하룻밤
에 몇 억은 나오던 시절이었지만,  이 김정
호 그런 짓 한 번도 안 했소. 나는 평생 동
안 죽일 놈 죽이고 살릴 놈 살렸소. 
그런데 유신 독재가 이대로  더 가면 끝장
이라는 생각이 우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
렀던 거요. 그 도상 훈련에는  어쩌면 우리
의 이런 신념이 깃들여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요? 
 그런데, 그런데 나는 끝끝내 그  한마디를 
못 들었던 거요. 그 한마디, “김정호, 시작
해”라는 한마디를 말이오. 경훈은 이제 모
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김정호가 왜 김
재규 부장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날 홀
로 술잔을 기울이며 ‘망할 놈의 영감’이
라며 아쉬움과 그리움에 가슴 저몄는지, 그
리고 어째서 김재규 부장의 행위를 우발적 
단독 행동이라고 확신하는지도`…`….
 지시가 떨어졌다면  그날  밤으로 애들을 
풀어 모두 다 잡아들였을 거요.  그리고 설
득하는 거지. 이대로면 온 나라  학생이 다 
죽는다, 지금 봉기는 학생이 아닌 중산층이 
일어나는 시민  봉기다,  민란이다, 어차피 
대통령은 죽었다, 우리가 일어나 나라를 바
로잡아야 한다고. 그리고 밤사이에  혁명위
원회를 조직하고 김재규 부장은 다음날 아
침 혁명위원장이 되어 있는 거요.  바로 긴
급조치를 해제하고, 양심수를 전원  석방하
며, 신문사·방송국을  장악해서  “부장이 
구국의 일념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이
제 전 국민이 진정한 민주 조국의 길로 나
가자”고 공포하는 거지. 남산에서 말이오. 
경훈의 머리가 번개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그랬을 경우 혁명의 성공 가능성은 어떠했
을까.
 아마 성공했을 거요. 하고도 남았겠지. 부
마사태에서도 보이듯 모든  국민이 유신의 
폭압 정치에 절망하고 있었으니까.  ‘유신
의 심장을 쏘았다’라는 이유 하나로도 모
두가 우리의 편이 되었을 거요.  군부는요? 
 부장이나 나나 군 출신이오. 그리고  정승
화 총장은 신중한 인물이었지.  차지철처럼 
독재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는 강아지
는 아니었소. 그런 순간에는 아무도  못 나
서는 거요. 일단은  눈치를 보게  돼 있지. 
모르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는 인간이 
있겠소? 가장 중요한 것은 모른다는  거지. 
권력이 돌아가는 그 무서운 속도를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거요.   김 부장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나 수없이 
도상 훈련을 해놓고도?  수수께끼요, 수수
께끼. 나도 도무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소.  
당황해서 그러지 않았을까요? 
 모든 언론이 그렇게 얘기했지, 우발적  범
행이었기 때문에 김재규의  머리에는 박정
희 시해 후의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고. 그
것은 바로 합수부의  수사 결과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그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
소. 그토록 훈련을 했는데 아무리 창졸간이
라지만 남산을 코앞에 두고 용산으로 간단 
말이오? 그럴  리는 없소.  이해가  안 돼. 
“김정호, 시작해”라고 하면 모두  끝나는 
일이었는데`…`….  혹시 김 부장이  정 총
장으로부터 협박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을
까요?  무슨 협박? 
 육본으로 가지 않으면 부하들이 정보부로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든지 말입니다. 말
은 완곡하게 하더라도 그  정도면 김 부장
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게 아닙니까?  
천만에, 오히려 그  반대지. 정보부로 들어
가기만 하면 10·26은 부장과 총장이 공모
한 쿠데타가 되고 마는 거요.  누가 총장이
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
리는 거지. 총장이 부장을 협박해? 어떤 총
장이라도 그럴 순 없소. 운전사든 박흥주든 
김정섭 차장보든 김 부장이든 정 총장이든 
합수부에서 그렇게 진술한 사람도 없고. 아
직도 모르겠소? 합수부 조사라는  것이 무
엇을 말하는지를.  그렇군요. 
 나는 그  수수께끼를 두고두고  생각했소. 
도대체 왜, 도대체 왜 김 부장은 남산을 그
냥 지나쳐 용산으로 갔을까?  자기 편이라
고는 하나도 없는 그 낯선  곳으로 말이오.  
김재규 부장이  혼자말처럼 어디로   가지? 
남산? 육본? 했을 때  박흥주가 육본이 낫
겠다고 했고  이어서 정  총장이 육본으로 
가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즉 그  당시 김 
부장은 당황해서 옆사람들의  말을 들었던 
게 아닐까요?  결코 아니오. 김 부장은  유
약했지만 어떤  때에는 황소  같은 고집이 
있었지. 한번 생각해 둔 것은 무슨 일이 있
어도 끝까지 밀고 나갔소. 그가 그 황망 중
에 김계원 부장에게 “형님, 저는  한번 한
다면 하는 놈입니다”라고 얘기한 것도 그
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지. 나는 합수부의 
발표나 언론의 추측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그렇게 도상 훈련을 많이  했던 사람
이 남산을 지나칠 무렵 흔들려서 박홍주에
게 물었고 그의 얘기에  따라 육본으로 갔
다는 것 말이오. 즉 김재규는  천하의 바보
라는 결론 말이오.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
다. 김정호의 말은 경험 법칙에 비추어봐도 
틀림없었다.
 사람은 당황할수록 자신이 익숙한 것,  안
전한 것을 따라가게 마련인 법이다. 
경훈은 10·26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넘어
야 할 첫  번째 관문은 김재규  부장이 왜 
남산을 지나쳐 용산으로 갔는가 하는 수수
께끼를 푸는 것임을 깨달았다.
남산과 용산
 남산으로 가면 살고  용산으로 가면 죽게 
되지. 그러나 김재규  부장은 철저한  도상 
훈련 시나리오를 버리고 용산으로 갔소. 죽
을 곳으로 말이오. 나는 끝내  그 수수께끼
를 풀지 못했소.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부장은 그날 밤 절대로  혁명을 하려고 하
지 않았다는 것이오. 혁명을 하려고 했다면 
틀림없이 나에게  “김정호,  시작해”라고 
말했을 테니까. 이  부분에 대한  김정호의 
결론은 단호했다. 경훈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김재규를 대리했던 사람 김
정호, 이 사람의  결론이 그대로  10·26의 
결론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경훈의 뇌리 한편에서 강하게 치고 
올라오는 또 한 갈래의 생각이  있었다. 만
약 김재규가 김정호에게도 밝히지 못할 그 
어떤 사정이 있었다면? 그렇다면 김정호의 
결론에 안주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언가가 
잡힐 듯 말 듯했다. 그러나 경훈의 깊은 사
색은 투박한 김정호의 목소리에 의해 깨지
고 말았다.
 그런데 어제 자네가  얘기하던 골자는 뭐
지? 법정에서 뭐가 어쩌고 했었는데`…`…. 
경훈은 잡힐 듯 말  듯하던 생각의 단초들
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잔잔한 목소리
로 입을 열었다.
 사건이란 일어난 그대로가 가장 상식적이
란 얘깁니다. 법정에서  다툼을 하다  보면 
사건이 사실과는 아주  어긋나버리는 경우
가 많지요. 변호사가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검사나 판사도 나름대로 사건을 비
트는 데 일조를 하게 됩니다.  모두 사건을 
뜯어먹고 사는 사람들이니 사건 속에 자신
을 실으려 하겠지. 김정호가 날카롭게 지적
했다.
 상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10·26에 대한 
지금까지의 해석은 몇 가지 모순점을 가지
고 있습니다. 김정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경훈의 입가를 주시했다.
 그 첫 번째는 대통령 시해 행위를 김재규 
부장의 우발적 범행으로 몰고 가려는 일관
된 시도입니다. 김정호는 자신이  단호하게 
결론 내렸던 부분을 경훈이 다시 거론하자 
이맛살을 찌푸렸다. 경훈이 어떤 말을 해도 
이 부분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경훈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법정에서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는 데 있
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당사자 혹은 참
고인의 진술입니다.  진술이란  터무니없이 
당사자의 일방적 입장만을 대변할 수도 있
고 혹은 당사자에게 불리하기 쉽습니다. 펜
을 주고 마음대로 쓰라고  하면 전자의 경
우가 발생하고, 수사 기관에서 고문을 하면 
후자의 경우대로 됩니다. 김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첩대 시절부터 수십 년을 수사
통으로 지내온  그는 이런  상황을 너무도 
잘 알았다. 죄 없는 사람도  닦달하면 살인
범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지 않은가.
 지금껏 합수부, 또 합수부의 결론에서  조
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언론은 언제나 
사람들의 진술을 판단 근거로  삼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김재규 부장은 합수부의 진술
에서는 충성 경쟁에서 밀린 소외감으로 우
발적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고,  재판에서는 
민주화의 열망으로 오랜 준비 끝에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했습니다.
 그중 어떤 것이 진실입니까. 그중의  하나
를 믿는 것만큼 잘못되기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김 부장의  행위가 
우발적이 아니란 것을 말해  주는 무슨 단
서라도 있단 말이오? 경훈은  잘 들으라는 
듯이 김정호의 눈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대부분의 일은 상식적으로 볼 때 쉽게 이
해가 됩니다. 김재규 부장은 당일 오후 4시 
10분쯤 남산에 있는  부장실에서 차지철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녁 6시에 각하를  모
신 대행사가 있다는 내용이었지요.  김정호
는 당시의 기억을 되살렸다. 그날 김재규는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궁정동으로 갔다.
 김재규 부장은 전화를  받고는 곧 궁정동
으로 출발했습니다. 짧은 거리라 불과 10분 
정도 걸려 궁정동에 도착했지요. 4시  40분
쯤 김 부장은 궁정동의 집무실에서 인터폰
으로 아래층에 있던 박흥주 대령에게 정승
화 육군 참모총장한테 전화를 걸라고 지시
했습니다. 그러자 박흥주 옆에 있던 윤병서 
비서가 즉각 총장실로 전화를 했지요. 김정
호는 순간 당혹스러웠다.
 아시겠습니까? 김 부장은  대통령과의 대
행사에 참석하러 궁정동으로 와서 정 총장
에게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조용히 얘기나 나누자구요.  너무
도 잘 아시겠지만  ‘대행사’란 대통령과 
비서실장, 경호실장, 그리고 정보부장이 같
이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며 노는 것입니
다. 노래부르는 여자와 대통령을 모실 여자
까지 불러서요. 행사 장소는 궁정동의 정보
부 안가고 주최자는 정보부장입니다.  경호
실 직원들도 여기까지 와서는 대통령의 경
호를 정보부에 넘깁니다. 김정호는  경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정보부장은 대통령이 자리를 떠나는 밤늦
은 시간까지 만찬장을  떠날 수  없습니다. 
즉 정승화 총장하고 저녁을 먹으면서 조용
히 얘기를 나눌 수는 없다는  얘깁니다. 김
정호의 숨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명색이 육군 참모총장입니다. 경우에 따라
서는 나라의 제1인자기도 하지요. 그런  사
람을 6시 30분에 저녁 먹자고 불러놓고 자
신은 9시가 넘어야 끝나는 다른 만찬에 가 
있겠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
다. 김정호의 눈언저리가 파르르 떨렸다.
 오후 4시에 이미 남산에서 김재규 부장을 
만났던 김정섭 차장보는  5시에 다시 전화
를 받습니다. 6시 30분까지 궁정동으로  와
서 정승화 총장과 같이  식사를 하라는 것
이었습니다. 김 부장은 정 총장과는 식사를 
할 뜻이 아예 없었던 것이지요.  경훈의 논
리에도 “김정호, 시작해” 못지않은  힘이 
있었다.
 김 부장이 총장을  엿먹이려고 오라고 하
지 않은 것은  확실하겠지만`…`…. 김정호
는 뒤를 흐렸다.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십시오. 합수부니 언
론이니 하는 장막을 다 걷어내고 말입니다. 
그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그래야만 그 다음 
수수께끼가 해결됩니다.  김정호의  눈길이 
경훈의 얼굴에 화살처럼 박혔다.
 그 다음 수수께끼라니? 
 바로 김 장군님의 수수께끼. 왜 김 부장은 
남산을 지나쳐  용산으로 갔나  하는 의문 
말입니다.  으음. 자네  얘기는 정  총장이 
김 부장과 공모했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경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아냐, 절대 그럴 수는  없어. 만약에 그랬
다면 합수부 수사에서 나오지 않았을 리가 
없지. 그것은 방첩대로부터 정보부까지  수
십 년을 수사와 정보  계통에서 살아온 김
정호의 신념이었다.
 장군님, “김정호, 시작해”를 버리십시오. 
주관을 버리고 객관으로 보십시오.  김재규 
부장의 행위는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닙니
다. 합수부는 김  부장을 왜소하게  만드는 
데 총력을 다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행위를 우발적인 것
으로, 그가 박정희에게  총애를 받지  못한 
반발심에서, 인사에서 밀릴 것을 염려한 용
렬한 심리에서, 차지철에 대한  콤플렉스와 
스트레스에서 일을 저지른  것으로 만들어
야 했습니다.  그 부분은  나도 생각해 본 
적이 있소. 
 만약 10·26을 김재규 부장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 아니고  치밀하게 준비해서 
시행한 거사라고 발표하면  세상은 뒤집어
집니다. 김재규 개인이  명분을 얻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민중에게 어마
어마한 힘을 주게 되지요. 최측근의 정보부
장조차 유신 폭압에 저항하는데 우리가 그
냥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구호가 터져나왔
을 겁니다. 김재규  살려라를 외치며 학생, 
지식인, 일반 시민 할 것 없이 모두가 뛰쳐
나왔을 겁니다. 그런데  전두환, 그의 보안
사는 치밀했습니다. 그들은 김 부장의 행위
와 민중의 염원이 이어지는 것을 차단했던 
겁니다.  우발적이 아니란 얘기는 바로  유
신을 결딴내겠다는 얘기가 되니까  말이지.  
그렇지요. 하지만 합수부 발표의 허구는 이
내 밝혀지고 맙니다. 그들은 10·26을 김재
규 부장의 우발적 범행으로 규정하고 발표
했지만, 김 부장을 기소할 때의  죄목은 내
란 목적  살인죄였습니다.  우발적이 아닌, 
치밀하게 계획하여 대통령  및 경호실장을 
살해한 범행이라고 기소한  것입니다.  둘 
중 하나는 조작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군. 
 역사는 아무리 조작해도 결국은 밝혀지게 
마련입니다. 만약 그 당시 계엄이 실시되지 
않았다면, 즉 정 총장이 무소불위의 계엄사
령관이 아니었다면 그 역시 사건의 초기에 
연행되었을 테고 김 부장과 공범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입
니다. 계엄이 정  총장을 살리고  10·26을 
김 부장만의 우발적 범행으로 규정짓게 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 총장도  나중
에 결국 12·12로 추락하지 않았나?  그때
는 이미 상황이 달라진 후입니다.  그때 상
황 역시 복잡했죠. 여하튼 10·26  직후 합
수부는 김  부장을 왜소하게  만드는 일에 
전력을 다했고, 대중은 결국 속아넘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김정호는 쓴웃음을  지었
다. 대중은 속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자
신이 강변했던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나의 수수께끼는  어떻
게 해석할 건가? 경훈은  입가에 의미심장
한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아직 추리 중입니다. 확실한  추론
이 갖추어지면 다시 찾아뵙지요. 다만 이런 
정도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제 장군님
이 술집에서 하시던 독백을  듣고 느낀 것
인데 10·26은 김재규 부장을 천하의 바보
로 만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비웃었
지요.
 어제 장군님의 독백도  그런 뜻이었지 않
습니까. 아니 김 장군님뿐 아니라 어린아이
들도 김 부장을  비웃었을 겁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과연 김 부장이 그렇게 맹
추였을까요? 중학생만도 못한 지능을 가진 
사람이었을까요? 경훈은  김정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김
정호는 이 괴이한 변호사가  과연 무슨 말
을 하려나 싶어 그를 주시했다.  이제 경훈
의 한마디 한마디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의미로 다가왔다.
 혹시`…`… 혹시 이랬을 가능성은  없을까
요? 
경훈은 목소리를 낮추며 김정호의 눈을 깊
숙이 들여다봤다. 의아해하는 김정호의  귓
전에 경훈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어와 박
혔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김 부장
만이 아는 어떤  비밀은 없었을까요?   김 
부장만이 아는 비밀이라구? 
 그렇습니다. 그만이 아는 비밀 말입니다. 
 어떤 걸 말하는 거지? 
 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김재규  부장이 
우발적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거사 후에
는 갈팡질팡하여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모든 이의 비웃음을 사는 어리석음을 범했
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논리는 너무나 
허술합니다.  어째서? 
 거사에 앞서 정승화  총장을 불러둔 것에
서도 알 수 있듯이 김 부장은 시해 전후의 
상황과 대책에 대하여 생각을 해두었을 겁
니다.
 정 총장을 불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까요? 정 총장의 힘, 즉 군의  힘을 이용한
다는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
지. 군을 배후에 업지 않고선  아무것도 하
지 못하니까.  김재규 부장은 두 가지 복안
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는 
정승화 총장을 데리고  남산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이 경우 김 부장은  정 총장에게 
얘기해서 수경사라든지 군을  동원하여 정
보부를 호위하게 했을 겁니다. 나머지 하나
는 실제 그랬던 것처럼  아예 육군 본부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단 이때에는 확실한 보
장이 필요합니다. 군이 확실히 자기 편이라
는 보장 말입니다. 그러나 정  총장은 사전
에 김 부장으로부터 어떤  말도 듣지 못했
고 군의 누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외견
상 군이 김재규의 편이라는 아무런 징후도 
없었죠. 게다가 대통령 유고로 김  부장 자
신이 주장하던 계엄령이 선포되면 정 총장
이 1인자가 될 것이 뻔하고,  육본에서라면 
총장은 김  부장을 구속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것을 다 알면서도  용산으로 갈 이유
는 절대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용
산으로 간 거요? 
 김 부장은 군이 자기 편이라는 확신이 없
었으면 절대로 용산으로  안 갔을  겁니다. 
군이 틀림없이 자기 편이라는 신념이 있었
기에 정  총장만을 불러두고  그와 행동을 
같이했던 겁니다.  그러나 정 총장과는  사
전 모의가 전혀 없었잖소?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저는 한참 애를 먹
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
했기 때문에 김재규를 얼간이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거구요. 하지만 저는  깊은 사
색 끝에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결론이오? 
 중간에 누군가  있었다는 겁니다.  김재규 
부장으로 하여금 군이 자기 편이라고 믿도
록 한 사람이 말입니다.  그게 누구요?  그
게 누구인가가 10·26  최대의 수수께끼입
니다. 김 부장이  남산으로 들어가지  않고 
용산으로 간 것,  즉 “김정호, 시작해”라
는 카드를 쓰지 않은  데에는 엄청난 음모
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음모? 엄청난 음모
라? 그게 뭐지? 
 그것은 지금 추론 중입니다. 아까  말씀드
렸던 대로 완전한 추론이  서면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경훈은 고개를 숙였다. 엉거주
춤 인사를 받는 김정호의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케네디와 박정희
사무실에 돌아온 경훈은 커피 한잔을 앞에 
놓고 앉았다. 자신의 추론을 반추하면서 과
연 어떤 인물이 김재규와  군을 이어줄 수 
있을지를 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10·
26을 분석한  어떤 자료에도  그런 인물의 
존재를 떠올릴 만한 단서는 없었다. 
경훈은 김재규가 보안사에  연행되어 최초
로 작성한 자필 진술서를 꺼내  읽었다. 경
력 및 범행 동기부터  사후 처리 계획까지 
번호를 매겨 작성한 진술서는 읽기가 역겨
웠다. 비록 김재규의 손에 의해서 씌어지기
는 했지만 말이 자필  진술서지 사실은 고
문 기록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8. 사후 처리  상황은 다음과 같이  하려고 
하였습니다. 
궁정동에서 육군 총장과  김정섭 차장보를 
대동, 육본에 도착(차후  행동을 망설임)하
여 혁명으로 유도하느냐, 총장을 협박할 것
인가 사살할 것인가 망설였고 벙커에서 김
계원 비서실장을 전화로 유도, 보안 유지를 
당부시키고 육본 벙커, 총장실에 각군 수뇌
와 각료가 소집되면 출입구를 잠그고 위협, 
연금 조치하여 혁명으로  유도할까 망설였
습니다. 이상 진술은 사실 그대로 명확하게 
진술하였습니다.
1979년 10월 28일 진술인 김재규
1~7항까지의 진술서가  합수부의 의지대로 
된 것이라면 8항은 좀 특이했다.  8항에 있
는 김재규의  진술은 가능성이  전혀 없는 
환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정보부가 아닌 육
군 본부에 가서 육군  총장을 협박할지 사
살할지 망설였다는 진술에는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진술서 전체가 이렇듯이  우스꽝스러운 내
용들로 꽉 차  있었다. 합수부나  언론이나 
모두 이 웃기는 진술서에 기초해서 10·26
의 성격을 규정지었지만, 엄청난 고문 끝에 
나온 이 진술서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역
사의 날조에 동참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었
다. 
경훈의 눈빛은 8항에서  예사롭지 않게 번
득였다. 이 잠꼬대와도 같은 진술에 김재규
의 의지가 강하게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
었던 것이다.   그가 정승화에  대해  ‘협
박’, ‘사살’이라는 표현을 쓴 데는 간단
치 않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 표현에서는 정승화를  보호하려는 목적
이 엿보였다. 엄청난 고문 끝에  작성한 이 
진술서에서조차 정승화를 보호하려는 김재
규의 의지는 애절하기까지 했다. 거사에 대
한 아무런  사전 협의도  없었던 정승화를 
이토록 보호하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김재규는 끝까지 육군 총장을 자신의 목숨
을 구해줄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얘기다. 
김재규가 이처럼 육군 총장 정승화에게 기
대를 걸었다면 그와 정승화로 대표되는 군
을 연결시키는 어떤 사람이 있었을 거라는 
추리가 굳어졌다. 김재규는 측근 중의 측근
인 김정호에게조차   그 존재를  숨겼지만, 
“김정호, 시작해”까지 보류하면서 용산으
로 간 것을 보면 그  제3의 인물의 존재가 
더욱 분명해졌다.
 음`…`…. 
경훈은 다 식어버린 커피를 입가로 가져갔
다. 마치 커피에 알갱이라도 떠 있는 양 어
금니로 천천히 씹으며 한  모금을 넘길 때
였다.
 때르르릉. 
경훈은 손을 뻗어 전화기를 들었다.
 나 인남이야. 
 전화 기다렸어. 마음 상했지? 
 무슨, 오히려 내가 바쁜 너를 괜히 귀찮게 
하는 것 같아 잠도 못 잤어. 경훈은 어색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선물 얘기를 
꺼냈다.
 내게 선물이라고 준 것 말이야. 
 응. 
 그게 도대체 뭐지? 케네디에  대한 몇 마
디 기록밖에 없던데.  내용은  나도 잘 몰
라. 하지만 경훈아,  현 선생님이 유일하게 
남기신 기록이라면 뭔가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좀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래?  
그래, 알았어. 글자  사이사이에 무슨 비밀
이라도 있는지 눈 크게 뜨고 살펴볼게.  그
래. 참, 그리고  수첩 마지막  페이지의 안 
보이는 문장은 내가 전문가한테 부탁해 두
었어.  어, 그래? 그런 걸  해독해 주는 전
문가도 있니? 
 응, 미국을 떠나기 전 보스턴에서 맡겼어. 
나도 현 선생님이 케네디말고 무엇을 써두
셨는지 궁금증이   나서 못  견디겠더라구.   
잘했어,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 며칠 간 지방에 좀  다녀올 거
야. 
 왜, 무슨 일 있었어? 
 그냥 다음에 기회되면 이야기해 줄게. 
 그래, 올라오면 연락 줘. 
전화를 끊고 난 경훈은  제럴드 현의 수첩
을 다시 첫 페이지부터 샅샅이  살폈다. 우
선 글자 사이사이에 무슨 암호라도 없는지 
면밀히 검토했다. 그런  다음 촛불을  켜고 
수첩을 서서히 그을려보았다. 혹시  불기를 
받으면 나타나는 특수한  잉크로 무언가를 
써놓았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
나 그는 이 모든  방법들이 아무런 효과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참 생각하던 경훈은 수첩을  다시 첫 페
이지부터 차분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어
쩌면 수첩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하다 보면 
제럴드 현이 말하려는 바를  깨닫게  될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수첩의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존슨의 행정  명령 88호는  나를 분노하게 
만든다. 어째서 케네디 암살의 수사 결과를 
2039년까지 공개하지 못하게 했는가.  그때
에는 사건에 관계된 사람은  모두 이 세상
을 떠나고 없다. 결국 존슨의  명령은 사건
을 묻어두자는 것이 아닌가. 
오즈월드는 결코 총을 쏘지 않았다.  이 세
상의 누구라도 그 위치에서  총을 쏘아 케
네디를 죽일 수는 없다.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지은 것은 결국 
케네디 암살이 아닌가.
 흰 것과 검은  것의 대결에서  결국 검은 
것이 이겨버리지 않았는가. 
케네디의 가두 행진 경로를 바꾼 장본인인 
댈러스 시장이 찰스 카벨의 친동생이란 사
실을 우리는 우연으로만 받아들여야 하나.
피그만 사건. 일단 케네디의 승리로 보였지
만 결국 그들은 대통령에게 죽음을 선물하
지 않았는가.
케네디의 최대 실수는 동생 로버트를 법무
장관에 임명한 것이다. 
그가 로버트를  CIA 국장으로  임명했던들 
이 패기만만한 두 이상주의자는 죽지 않았
을 것이다.
케네디의 죽음  직후 떨어진  존슨의 월맹 
폭격 명령. 이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케네디는 월맹 폭격을 그리도 완강하게 거
부하지 않았던가. 
케네디의 동서 화해와 박정희의 자주 국방. 
이들은 출신  성분은 달라도  너무나 닮은 
이상주의자들이었다. 죽음조차도`…`….
수첩의 내용을 꼼꼼히 확인하고 난 경훈은 
다시 수첩을 촛불에 비춰보았다. 그러나 아
무런 변화도 없었다. 결국 드러난  내용 속
에서 정보를 캐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첩은 단순한 유품에 불과할 것이다. 곰곰
이 내용을  생각하니 경훈의  뇌리에 남는 
것은 역시 그 문장이었다.
케네디와 박정희. 이 두 사람이  도대체 어
떤 점에서 닮았다는 것인가.
한 사람은 대부호의 아들로 하버드를 거친 
엘리트, 또 한 사람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피지배 국민으로서  고독과 슬픔을 
가슴 깊이 품은 군인 출신이 아닌가. 둘 다 
대통령이란 직위에 올랐었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 닮은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음`…`…. 
경훈은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처음에는 
그냥 무심하게 지나친  메모였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제럴드 현
이 유일하게 남긴 수첩이라면 인남의 말처
럼 뭔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경훈은 이 마지막 구절을  몇 번이나 되뇌
면서 정신을 집중하여 도대체 어떤 의미에
서 두 사람이 닮았을까를 생각했다. 뭔가가 
떠오를 듯 말 듯하면서 머릿속에서 아물거
렸다.
 아! 
불현듯 경훈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
었다. 혹시 제럴드 현은 두 사람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
닐까.
케네디도 박정희도 현직  대통령의 신분으
로 죽음을 당했다. 
암살, 이것이 두 사람의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제럴드 현이 
굳이 이  구절을 메모까지  했다면 그것은 
단순히 암살이라는 공통적  현상을 상기시
키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었으리라. 
그렇다면 제럴드 현은 이  구절을 통해 두 
사람의 암살 동기를 나타냈을 가능성이 있
었다. 두 사람의 암살 동기가  같다는 관점
을 채택한다면,   ‘너무나 닮은  이상주의
자’라는 얘기는 이들을 암살한 세력이 결
국 기득권을  가진 보수  세력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경훈은 일전에 
만났던 전직 수사관의 얘기가 떠올랐다. 그
리고 그 얘기는 경훈이 신문사 자료실에서 
찾아낸 김재규가 재판에서 한 진술과도 일
치하는 것이었다. 경훈은 서류를 뒤져 재판 
기록을 꺼냈다.
박 대통령의  자주 국방은  엄청난 혼란과 
불안을 야기시켰습니다.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본인은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명백한 판단을  가지고 있었습니
다. 그러니까 자주 국방은 잠꼬대  같은 것
이었습니다.
기묘한 일치였다. 제럴드 현은 케네디가 살
해당한 이유로는 동서 화해를, 박정희가 살
해당한 이유로는 자주 국방을 꼽았다. 그리
고 암살의 실행자인 김재규의 진술에서 자
주 국방이라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경훈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제럴드 현은 이  단어를 꼽
고 있을까.  
도청
김재규, 그는 과연 혼자서 암살을 감행했던 
것인가. 
경훈은 일단 합수부의  결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생각을 전개해 보기로 했다. 
이것은 재판에서 흔히 쓰는 방법이다. 재판 
당사자들은 거짓말을 하게 마련이라,  재판
관은 당사자들의 진술을 일단 그대로 받아
들이고 따라가 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것이 상식에 어긋나지  않고 자연스러우
면 진실성을 인정해 준다. 그러나 무언가를 
숨기거나 거짓말을 한다면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것이다. 재판관은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추궁한다. 
합수부는 김재규의 암살 동기가 순전히 우
발적인 것이었다고  발표했다.  술자리에서 
격분한 김재규가 차지철을 쏘고 나서 흥분 
상태에서 다시 박정희를 쏘았다는 것이다. 
경훈은 그 결론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노력하면 할수록 반감이 더욱 강하
게 치밀어올랐다. 합수부의 결론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모순이 도저히 덮어지지 않
았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정승화의 대기였
다. 김재규가 주빈이 되어 오랜  시간이 걸
리는 만찬을 치르면서 정승화에게 같이 식
사를 하자고 해놓은 다음 김정섭 차장보를 
불러 대신  접대를 시킬  정도로 꼼꼼하게 
준비한 사실을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
다. 
인과 관계,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
로 이 인과 관계를 따지는 일이다. 즉 원인
과 결과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느냐 
아니면 우연에 불과하느냐를  따지는 것이
다. 
인과 관계로 볼 때, 김재규가  전적으로 우
연히 정승화와  같이 자동차를  타고 육군 
본부로 갔다는 결론은 얼마나 우스운 것인
가. 
김재규는 자신이 못 나갈  것을 뻔히 알면
서 정승화를  불렀고 사람을  시켜 접대를 
하게 했다. 즉 모든 것은  김재규의 머릿속
에 들어 있었고, 결국 김재규는  준비한 대
로 정승화와 같이 차를  타고 육군 본부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에서 김재규의 
범의가 우연이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 어떤 재판관이라도  이 중대한  인과 
관계를 그냥 넘기지는 않으리라. 
경훈은 김재규가 틀림없이  사전에 범의를 
가졌다는 확고한 결론을 내렸다. 그는 다음
으로 제럴드 현의 메모와 김재규의 진술을 
떠올렸다. 그러자 또다시 ‘자주  국방’이
라는 단어로 돌아가게 되었다.  기묘하게도 
두 사람은 마치 의논이나 한 듯이 자주 국
방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언급되고 있는 케네디의 동
서 화해. 
경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벽에 부딪힌 것
이다. 돌아가야 할  길이다. 일단 케네디의 
죽음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비교가 가능할 
것이다. 
경훈은 순간 하버드에서 같이 공부했던 스
테파니를 떠올렸다. 그녀가 근무하는  로펌
에서 케네디와  관련된 여러  건의 소송을 
진행해 왔던 것이다. 경훈과 동갑인 스테파
니는 조를 짜서 토론을 할 때 매력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
고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언제나 자
기의 주장을 결론으로 가져갈  줄 아는 능
력의 소유자였다. 스테파니는 날씬한  몸매
에 금발이었고,  언제나  상냥했으며, 아직 
미혼이었다. 
스테파니는 다른 변호사들과는  어딘가 다
른 경훈에게 상당한  호감을 보였다.  다른 
변호사들이 말의 화려함을 추구하는 데 반
해 경훈은 언제나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경훈은 스테파니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미
소를 지었다. 그녀는 일류를 구가하는 변호
사였지만 의외로 순진한 면을 지니고 있었
다. 
언젠가 그녀는 경훈과 저녁 식사를 같이하
는 자리에서 와인을 마시고는 동양의 신비
를 가진 남자와 사귀어보고 싶다면서 수줍
게 웃었다. 
경훈은 시계를 보고는 바로 수화기를 들었
다. 교환과 비서를 거친 다음에  나온 스테
파니의 목소리는 반가움으로 가득 차 있었
다.
 어머, 경훈 씨. 어디예요? 
 한국이에요. 
 언제 그리로 갔어요? 나는 보스턴에 있는 
줄 알고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어
쨌거나 잘 지내죠? 
 그럼요, 경훈 씨 보고 싶은 것 빼고는. 
스테파니의 농담은 경쾌했다.
 그렇게 연락하기   어렵더니 웬일이에요?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요.  스테파니 회
사에서 케네디 관련 소송을 몇 건 맡았죠?  
네, 주로 우리 팀에서 맡았어요. 
스테파니의 목소리에서는   금세 호기심이 
묻어나왔다.
 케네디의 죽음에 대해 스테파니는 어떻게 
생각해요?  내 생각이라면요? 
 누가 어떤 동기로 죽였는가 하는 거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건 왜 묻죠? 
약간의 경계심이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그냥`…`…. 
경훈은 무의미한 대답을  던져놓고는 뭐라
고 덧붙여야 할지 잠시 생각했다.
 개인적인 호기심이에요, 아니면 일과 관련
된 거예요? 스테파니는 혹시  경훈이 케네
디와 관련된 소송을 진행하는가 싶어 신경
을 곤두세우는 것 같았다.
 하하, 스테파니. 나는 더 이상 에이펙스로
펌에서 일하지 않아요.
 지금 한국에서 잠시 쉬고 있어요.  순전히 
개인적 호기심에서 알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 일은 너무도 복잡해요. 경훈 씨도 잘 알
다시피, 우리는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은 털
어놓을 수 없잖아요.  
비밀까지 알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다만 
나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들을 정리해 보고 
싶을 따름이에요.  호호, 몇 가지 알려주고 
싶은 일이 있긴 하지만 그냥은 안 되죠. 나
를 책임진다면 몰라도.
 스테파니는 경훈에게 뭔가 호의를 베풀고 
싶기는 한데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한국에  와서 국제 변호사
를 하면 돼요. 능력 있는  사람이 남자에게 
의지하면 안 되죠.  그럼 정말  가요. 지금 
전화상으로 아는 것 다 말해 주고 즉시 쫓
겨나면 제일 빠르잖아요.  
마음에 없는 말은 그만  하고 방법이나 강
구해 봐요. 제3자를  통한다든가.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나도 그런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테리, 알죠? 하버드에서 같이 스
터디하던 홀쭉한 샌님 말이에요. 테리가 팀
장이거든요. 같이 의논해 볼게요. 어쨌거나 
미국에 한번 와요.  거기까지요? 
 물론이죠. 귀하의 소중한 호기심을 위해서 
말이에요.  알았어요.
 며칠 내로 출발할게요. 
 경훈 씨가 많이 급한가  보죠? 아무튼 기
다릴게요. 
수화기를 내려놓는 경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역시 스테파니는 기분을 좋게 해주
는 여자였다. 또 한편으로는 하버드 로스쿨
의 잠재력이 느껴졌다. 하버드  출신끼리의 
돈독한 의리는 미국 사회에서 거대한 세력
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막 자리에 누웠던 경훈은 
머리맡에서 울리는 날카로운 전화 벨 소리
에 놀라 일어났다.
 여보세요? 
그러나 저쪽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인남이 
전화를 걸어오던 그날과 똑같았다.  경훈은 
전화를 끊으려다가 잠시 들고 있었다. 그냥 
끊어버리기에는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
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장난  전화가 아
닌 것 같았다.
 이 변호사, 안녕하시오. 
수화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영어였다. 
경훈은 흠칫 놀랐다. 지극히 기분  나쁜 목
소리였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목소리에 인
간의 감정이라곤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은 
듯했다.
 누구요? 
경훈은 목소리가 떨렸다.
 알려줄 것이 있어서 전화했소. 
경훈은 상대방의 목소리가 왜 이럴까 생각
하다가 짚이는 게 있었다.
 음성 변조기를 쓰고 있군요. 
 그렇소. 미안하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미안하지만 밝힐 수 없소. 
 그런데 이 늦은 밤에 웬 전화요? 
 이 변호사, 지금 휴대폰 가지고 있소? 
 있긴 하지만`…`…. 
 번호를 말해 주시오. 위험에 대해  알려줄 
일이 있어서 그렇소.  
위험이라뇨?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휴대폰으로 통화합시다. 
경훈이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
자 잠시 뒤에 신호가 울렸다.
경훈은 상대방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는 
없었지만 구사하는 어휘로 보아서 막된 사
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
에게 닥칠  위험에 대해  알려준다는 데야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휴대폰은 안전할까요? 
 점검해 봤소. 아직까지는 문제가 없소. 
 알려줄 일이란 뭡니까? 
 뉴욕에 갈 계획이 있소? 
 네, 뭐라구요? 
경훈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시오. 
 예. 
 그렇다면 존에프케네디  공항에는 내리지 
마시오. 뉴어크든 라과디아든 어디든  다른 
곳에 내리시오.  그러나 한국에서 가는  비
행기는 존에프케네디  공항에  내리는데요.  
그래서 하는 얘기 아니오. 
 도대체 어떤 위험이 있다는 겁니까? 
 정확하게는 알 수 없소. 하지만 뭔가 상서
롭지 못한 일이  준비되어 있을지  모르오.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뇨? 
 글쎄, 납치나 사고 같은 것이겠지요. 
 누가 무슨 이유로 내게 그런 일을 한다는 
겁니까? 
 아직은 얘기할 수 없소. 그러나 이 변호사
를 위한 우리 측의 방어 기제도 동원될 테
니 너무 두려워하진 마시오. 위축되면 끝이 
없으니 당당하게 행동하시오.   그런데 왜 
당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거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소. 다만 당신의 적이 
아닌 것은 분명하오. 
 그런데 도대체 내가 뉴욕에 갈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 변호사의  전화는 
도청되고 있소. 
 뭐라구요? 도청되고 있다구요? 
 그렇소. 
 누가 내 전화를 도청한다는 얘깁니까? 
 짐작은 가지만 아직 말할 순 없소. 
 도대체 이해할 수 없군요. 뭐가 뭔지 하나
도 모르겠어요. 당신의 정체도 내게는 수수
께끼고. 당신도 나를  도청하고 있는  겁니
까?  아니, 나는 아니오. 나는 당신을 도청
하는 자들을 도청하고 있소. 그러다가 당신
이 뉴욕에  간다고 그들이  얘기하는 것을 
듣고 지금 전화를 거는 거요.  일전에 전화
를 한 사람도 당신입니까?   밤에 말이오? 
그래요, 내가 했소. 
 그런데 그때는 왜 끊었습니까? 
 뭔가 느낌이  이상했소. 도청당하고  있을 
거란 느낌이 들었소.  
아까 방어 기제가 동원된다고 했는데 그건 
무슨 얘깁니까?  이 변호사, 지금은 얘기하
기 어렵지만 나중에 다 알게 될 거요. 이제 
그만 끊읍시다. 경훈은  뭐가 뭔지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다. 일단 전화를  걸어와 도
청 사실을 알려준 상대는 자신에게 해로울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경훈은 머리를 가로 저으며 전화기를 이리
저리 살펴보았다. 별다른  점은 발견할  수 
없었지만 경훈이 뉴욕에  가겠다고 하자마
자 사나이로부터  연락이 온  것으로 보아 
도청되고 있음은 분명했다. 
경훈은 기분이 나빠 전화기의 선을 뽑아버
리려다가 일단 신고를 해서 도청하는 상대
방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
했다. 그리고 지난번 전화 메모를 남겨두었
던 손 형사를 떠올렸다. 
콤비
다음날 손 형사가 보낸 기술자들이 경훈의 
전화선을 정밀히 조사한 끝에 도청 장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고성능이군요. 외부 전화선에 붙여만 놓아
도 도청이 되는 장치입니다. 기술자는 신기
한 듯 도청 장치를 들어 보였다.
 그런데 뭘 하시는 분입니까? 
 그런 것도 밝혀야 합니까? 
경훈은 도청으로 기분이  찜찜하던 참이라 
약간 과민하게 반응했다 수사에 도움이 된
다 아입니꺼. 
등뒤에서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에 흠칫 놀
라 뒤를  돌아보던 경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 손 형사님. 
 안녕하셨는교? 이 변호사님. 
 반갑습니다. 여전하시군요. 
 지는 아직까지도 변호사님  덕택에 이 짓
을 하고 있십니더.  제 덕택이라뇨? 
 와 그때 그  검찰청에서 마약  수사할 때 
끄나풀 감시하다 놓쳐서 모가지 될 뻔했던
`…`…. 경훈은 가볍게 웃었다. 그때 손  형
사가 큰 실수를 한 것을 자신이 조용히 덮
어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런데 무신 일입니꺼? 
무슨 사건이든 당장 해결해  줄 듯이 달려
들던 손 형사는 경훈으로부터 대강의 자초
지종을 듣고  나자 그저  두툼한 손등으로 
목덜미만 쓱 문지를 뿐이었다.
 지문도 다 없어졌을  끼고 딱히 의심가는 
사람도 없다면 수사로 밝혀내기는 쫌 어려
운`…`…. 경훈도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는 기술자들을  보내고 나서  손 형사와 
자리에 앉았다. 경훈이 차를 타오자  손 형
사는 황송해했다.
 그래, 지난번에는 무슨 일로 전화를  걸었
던 거예요? 경훈의 질문에 손 형사는 이것
저것 주워대다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지가 얼마 전에  뺑소니 사건을 맡았는데 
안 있십니꺼, 틀림없이 뺑소니를 가장한 살
인 사건이라예. 근데 그걸 채  익기도 전에 
그만 터자뿌따 아입니꺼. 경훈은 미소를 지
으며 손 형사로부터 그  사건 진행의 전말
을 자세히 들었다.
 그래서 그 검찰에서도 마, 종결시키  뿌라 
했다 아입니꺼. 지로서는 살인 사건  한 건 
놓친 기라예.  아직 미련이 남아 있는 모양
이군요. 
 여부가 있십니꺼. 사실 그때 지가  전화드
린 것도 이 시보님, 아니 이 변호사님께 도
움을 쫌 받을 수 없을까 해서였십니더.  그 
외국인은 나가기 전에 이미  술에 제법 취
해 있던 상태라고 했죠. 
그런데 어디서 술을 마셨답니까?  그 근처
에서 마신 것 같지는 않십니더.  그런 사람
에게 술을 팔았다는 가게가 없으이까예. 지
가 짐작하기로는 딴 데서  술을 잔뜩 마시
고 호텔로 돌아와 방에서  쉬다가 다시 전
화를 받고 나가서 변을 당한  것 같십니더.  
그 사람이 명함 한 장도 없이 한국으로 왔
고 유일하게 미국에서부터 적어온 전화 번
호의 소유자는 피해자를  모르는 사람이라
고 했다면 뭔가  이상하긴 하군요.  속단할 
수는 없지만 한번 생각해  볼 필요는 있는 
것 같으니까   이따가 사무실로  나오시죠.   
아이고, 고맙십니더. 
손 형사가 돌아간 뒤  경훈은 지방에 다녀
오겠다던 인남이 걱정되어 전화를  걸었다. 
역시 예상대로 인남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경훈은 전화가 도청되었다는  것과 자신이 
곧 미국으로 떠난다는  것, 그리고  서울로 
올라오면 전화 번호를  바꾸고 조심하라는 
것 등을 음성 메시지로 남겼다. 
경훈이 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나가니 손 형사는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
었다. 박카스 한 통을 팔에 낀 채 대기실에 
앉아 있는 손 형사를 보자 경훈은 절로 웃
음이 나왔다.
 일찍 오셨군요. 
 아이구, 이 변호사님. 바쁘신데 방해나 하
는 게 아인지 모르겠십니더.  방해라뇨. 자
주 오세요. 
 그럴 수가 있는교. 
손 형사는  경훈의 방을  휘휘 둘러보더니 
탄성을 내질렀다.
 캬, 대단하네예. 세상에 무신 책을 이렇게
나 마이 보십니꺼? 지는 제목을 보고도 무
신 책인지 모르겠십니더. 경훈은 웃었다.
 차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아무거나 주이소. 
경훈이 인터폰으로 차를 주문하고 나자, 손 
형사는 경훈이 아침에 자신이 품었던 의문
점을 인정해 준 게  생각났는지 재차 물어
왔다 그러니까 지가 머  잘못한 것은 없지 
않십니꺼? 
 네, 당연히 의심스런 부분을 짚은 겁니다. 
 그런데 와 그 시점에서 수사 종결을 해야 
했던 겁니꺼?  압력을 받았던 거지요. 
 그라믄 그 회사가  더 수상한  거 아입니
꺼? 
 수상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의심받는 것
을 싫어하지요. 더군다나 피해자의  주머니 
속에서 전화 번호가 나왔다고 마구 조사하
는 식은 곤란합니다. 또 그런  식으로 해서
는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않구요.  누가 전
화 번호 메모 하나  있다고 자신의 범행을 
순순히 시인하겠습니까?   그렇네예. 그럼 
이 사건은 포기해야 합니꺼?  아닙니다. 문
제점은 정확하게 포착했어요. 다만  방법이 
잘못된 거죠. 일단 피해자가 그  회사와 모
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입증해야 하는 책임
이 수사관에게 있지요. 이렇게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피해자가 미국인이고 그  회사는 
무기 거래를 한다고  했으니, 우선  미국제 
무기의 판매에 관여한 적이 있는지 어떤지
부터 알아보세요. 그것은 아마 관할 세무서
를 찾아가 확인하면 될 겁니다. 일단 그 회
사가 미국제 무기의  판매에 관여되었다면 
다음으로는 대사관을 통해  피해자의 신원
을 알아 연고자에게 연락을 취하세요. 그리
고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아보는 거죠. 만약 피해자가 한국과 무기 
거래가 있는 회사에 근무했다면 그 회사와
의 연관성이 입증되는  겁니다. 그럴  때에 
그 회사를 방문해서 조사를 할 수 있는 것
이지요. 경훈이 수사의 절차를 차근차근 설
명해 가는 동안 손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
면서도 풀이 죽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지  능력 밖의 일이
네예. 
 서에서는 사건을 종결했나요? 
 네. 검찰에서도 끝냈십니더. 
경훈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렇다면 이런 방법을 써볼 수 있겠군요. 
 어떤 방법입니꺼? 
경훈은 인터폰에 대고 말했다.
 《동아일보》의 윤민기 기자한테 전화 연
결시켜 줘요. 곧 벨이 다시  울리자 경훈은 
수화기를 들었다.
 응, 나 경훈이야. 부탁이 있어. 리엔지니어
링이라는 회사가 미국의 어떤 회사들을 대
행하는지 여부와 그 회사들의 팩스 번호를 
좀 알아봐 줘.  이 친구,  오랜만에 전화해
서 고작 그런 거나 부탁하는  거야?  친구 
좋다는 게 뭐야. 
 하긴 그래. 그나마 일이라도 없으면  전화
도 하지 않겠지. 이놈의 서울 생활이란. 자
네 팩스 몇  번이야? 경훈은  팩스 번호를 
불러주었다.
 고마워. 다음에 술 한잔하자구. 
늘 하는 빈말 같은 인사에 두 사람은 웃었
다. 필경 다음에 술을 한잔하기는  할 것이
다. 그러나 그 다음이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그런 인사였다. 
윤 기자는 그냥 전화를  끊을 것처럼 하다
가 이래선 안 되겠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
로 말했다. 
 다음달에 고등학교 동창  몇몇 불러서 네 
귀국 모임이라도 가져야겠다. 내가  연락할 
테니 그땐 꼭 나와.  그래, 고맙다. 
얼마 후 경훈의 비서가  윤 기자에게서 들
어온 팩스를 가지고 왔다. 이런  일련의 과
정을 손 형사는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
었다.
 자, 이게  리엔지니어링과 거래하는  미국 
회사들의 명단입니다. 
그 피해자가 이 회사들 중 한 곳에 근무했
다면 최소한 리엔지니어링에  가서 피해자
의 행적과 관련한 질문을 해볼 수 있는 겁
니다. 
 그러나 그  회사들한테  어떻게 물어봅니
꺼? 
 제가 하죠. 
경훈은 비서를 불러 내용을 일러주며 타이
프를 쳐서 팩스로 보내도록 지시했다.
 회신이 오기를 기다려야죠. 
 이거 참 미안합니더. 번거롭게 해드렸십니
더.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손 형사님께 감동했습니다.  부끄
럽십니더. 언제 연락할까예? 
 번호를 알려주세요.  소득이 있으면  제가 
연락드리죠.  고맙십니더. 
 참, 그리고 도청 방지 장치를 좀 해야겠는
데요. 
 그라지예. 지가 도와드리겠십니더. 
경훈은 손 형사와 같이  시내에 가서 도청 
방지 장치를 파는  업자를 만났다.  형사가 
소개해서 그런지 업자는  친절하게 대해주
었다.
 도청 방지 장치를 끝낸 경훈은 바로 캐나
다의 오세희에게 전화를 했다.
 예상했던 일이오.  어떤 놈들인지  정체가 
드러날 때까지는 조심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소.  그 의사는 추적해 보셨습니까?  아
직 소득이 없소. 그때 이후로 그 사람은 종
적을 감춘 것 같소.
 어려서 살던 고향에서부터 마지막 근무하
던 병원까지 샅샅이 찾고  있지만 어떤 근
거 있는 연락처는 없소. 그러나  최선을 다
하고 있으니 좀더 기다려봅시다. 
다음날 사무실로 나간 경훈은  한 장의 팩
스도 와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실망했다. 손 
형사는 경훈이 연락도 안  했는데 일찍 찾
아왔다.
 인자 우짜지예? 
손 형사는 끈질겼다. 비록 팩스는  오지 않
았지만 그렇다고 손 형사가 포착한 혐의점
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외국에  나온 사
람이 아무 관련도 없는  회사의 전화 번호
를 가지고 왔을 리는 없으니까.
 정리를 한번 해봅시다. 피해자는 미국에서
부터 리엔지니어링의 전화 번호를 적어 가
지고 왔습니다. 명함  따위나 서류가  없는 
걸 보면 그는 비즈니스로  온 것은 아니지
요. 미국에서부터 전화 번호가 적힌 메모지
를 가지고 왔다면 그는 틀림없이 리엔지니
어링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
다면 그가 리엔지니어링에 전화를 걸지 않
았을 리가 없죠. 그러니  리엔지니어링에서 
그런 사람을 모른다고 대답한 것은 거짓말
입니다. 이런 경우는  통화 기록을  조사해 
봐야죠. 관할  전화국에  가서 알아보세요. 
그리고 피해자가 묵었던 호텔에 가서도 통
화 기록을 조사하시구요.   피해자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밖으
로 나갔다 카데예.
  그렇다면 그  전화가 어디서  온 것인지 
확인하세요. 그 전화를 걸었던 사람이 현재
로서는 노출된 용의자입니다.  알겠십니더. 
변호사님이 도와주시니까 머리가  홱홱 돌
아가는데예.  …`…. 
 사건이 끝날 때까지 부디 쫌 도와주이소. 
 그러죠. 
손 형사는 경훈에게 고개를 90도로 숙이고 
나서 나갔다. 경훈은 그런 손  형사가 부러
웠다. 손 형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모르는 것은 도움을  청할 사
람도 있었다. 그러나  경훈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오직 추리에 
의해서만 문제를 풀어가야 했다. 그나마 지
금까지의 추리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
지만 앞으로는 약도 한  장 없는 상황에서 
목적지를 찾아가야 했다. 철저하게  은폐되
어 있는 사실에서 역사를  조합해 내야 하
는 것이다. 
오후가 되자 손 형사가  다시 경훈을 찾아
왔다. 그는 이제 아예 경훈을 수사반장쯤으
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쁜 놈들,  그 피해자는  리엔지니어링에 
다섯 차례나 전화를 했던데예. 그런데도 그
런 사람을 모른다고 했다면  이건 뭐가 있
어도 단단히 있을 것 같십니더.  손 형사는 
흥분했다.
 꼭 그런 것은 아닐 수도 있으니까 차분히 
생각하세요. 그가 누군가를 찾았다가  그냥 
끊었을 수도 있고,  이럴 경우  회사에서는 
모른다고 대답할 수 있으니까요. 사건 당일 
피해자가 묵던  호텔로 전화를  한 사람은 
있던가요?  네, 있었십니더. 
 그 사람이 유력한 용의자예요. 누구였죠? 
 그런데, 그게`…`…  그 전화는   미국에서 
걸려왔십니더.  미국에서? 
 네. 
 그렇다면 일이 어려워지는군요. 
 웬만한 놈들이라면 칵 조지삐리겠는데`…
`…. 이거야 말단 사원이  서장에게 전화를 
거는 상황이니 옴치고 뛸  수가 없다 아입
니꺼.  그럴 것은 아니고`…`…  좀 생각해 
봅시다. 
경훈은 손  형사가 건네준  자료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음, 이상한 점이 있군요. 
 먼데예? 
 피해자의 통화 기록을 보세요. 
손 형사는  통화 기록을  유심히 살폈으나 
별다른 이상을 찾을 수 없었다.
 글쎄, 지는 잘 모르겠십니더. 
 그는 첫 번째 전화를 하고 나서 3일 간은 
아무 연락이 없다가  4일째부터 하루에 한
차례씩 통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전화의 통화 시간이 다른 네 개에 비해 현
저히 길잖아요?  아, 그렇네예.  그런데 그
게 무신 의미가 있십니꺼?  다른  네 번의 
전화는 모두 20초 안에 끝났죠.  그런데 처
음의 전화는 무려 7분이 넘고 있습니다. 이
상하지 않은가요?   그렇십니더. 이상하네
예. 하지만 우째 해석해야 할지는  잘 모르
겠십니더.  20초라는 시간은 용건을 얘기하
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즉  누가 있
느냐고 묻는 정도의  간단한 전화죠.  물론 
그가 찾는 상대는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 
정도에 걸리는 시간이 20초예요. 하지만 처
음의 7분이라는 시간은  제대로 통화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통화 시간을  통해서 
처음에 피해자와  대화를 나눈  사람이 그 
다음부터는 전화를 피했거나  계속 부재중
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
에 있으면서 걸려오는 전화를 계속 피하기
만 한다는 것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도
움은커녕 손해만 될 겁니다. 따라서  첫 번
째 전화를  받은 사람이  그후로는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죠.   
아, 변호사님은 진짜 억수로 머리가 좋십니
더. 우째 그런 걸 다 생각해 낼  수 있십니
꺼? 경훈을 바라보는 손 형사의 눈에 감탄
과 존경의 빛이 역력했다.
 공식적으로 회사에 안 나올 수 있는 이유
는 휴가나 출장입니다. 
리엔지니어링에서 첫 번째 전화와 두 번째 
전화 사이에 휴가나 출장을  간 사람이 있
는지 알아보면 되겠군요.  알아보고 오겠십
니더. 
 다른 사건 때문에도 바쁘실 텐데,  수고가 
많으시군요.  수고라꼬예? 지가 변호사님만
큼 머리는 안 돌아가지만  발로 뛰는 것만
큼은 자신 있십니더. 손 형사는  자기 말처
럼 자신감이  실린 힘찬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돌아온 것은  경훈이 퇴
근하려고 막 일어설 때였다.
 어이쿠, 변호사님. 이거 지가 너무 괴롭혀
드립니더.  아니 괜찮습니다. 이젠 저도 재
미있는데요. 
 헤헤, 이러다가 허탕치면 미안해서 우짜지
예? 
 출장을 간 사람이 있던가요? 
 변호사님은 귀신이데예.  우째 통화  기록 
하나 가지고 그렇게나 섬뜩한 추리를 해냈
는지, 지는 아무리 해도 따라갈  수가 없십
니더.  …`…. 
 출장을 간 사람은  그 회사의 사장이었십
니더. 
 그렇군요. 
경훈은 짐작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전화가 오후  5시에 회사로 걸려
왔는데 그날 아침 사장은  해외 출장을 갔
던데예.  그 피해자는 사장이 돌아올  때까
지 하루  한차례씩 전화를  걸며 기다렸던 
거군요.  지도 그렇게 생각했십니더. 
 그런데 사장은 어디로 출장을 갔습니까? 
 해외 출장입니더. 미국이던데예. 
 음, 미국이라구요. 
경훈은 예사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미국이라는 지역이  어떤  의미가 있십니
꺼? 
 이상한 예감이 드는군요. 피해자를 밤늦게 
불러낸 전화도 미국에서 왔다고 했죠?  네. 
 그 전화를 조사해 보세요. 미국의  어디서 
걸려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네. 또다른 
것은 없십니꺼? 
 그게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그 전화가`…
`…. 
 만약`…`…? 
 하여튼 일단 조사부터 해보세요. 
 알겠십니더. 
손 형사는 그날 밤 아예 경훈의 집으로 찾
아왔다. 경훈은 사건을 뒤쫓는 그의 열의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옥스퍼드팰리스호텔, 로스앤젤레스에 있십
니더. 
 역시 그랬군요. 사장의 이름이 뭡니까? 
 해리 제임스라는 이름이던데예. 
 제임스? 그럼 사장이 외국인인가요? 
 네. 알아보니 많은 무기 거래상이  외국인
과 합작하거나 사장은 이름만 빌려주고 실
제 주인은 외국인이던데예. 경훈은 잠시 생
각하더니 바로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
다.
 국제 전화 접수죠?  로스앤젤레스의 옥스
퍼드팰리스호텔 부탁합니다.  아니, 프런트 
데스크면 됩니다. 상대가 나오자 경훈은 사
장의 이름을 댔다.
 체크아웃하셨다구요. 언제, 벌써 한참이나 
되었다구요? 아, 여기는 회사 경리  담당자
인데요, 숙박 비용 명세서를 팩스로  좀 보
내주세요. 네? 사장님께 드렸다구요?  하지
만 사장님은 늘  그런 걸 버리고  안 갖다 
주세요. 그래서 우리는 사장님이 출장 가실 
때마다 호텔에 전화를 걸어야 한답니다. 손 
형사는 어안이벙벙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알 수 없었
다. 경훈은 손  형사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자신의 팩스 번호를 수화기에 대고 불러줬
다. 전화를 끊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옥스
퍼드팰리스호텔에서는 바로 팩스를 보내왔
다.
 지는 봐도 모르겠는데요. 
손 형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경훈의 어깨 
너머로 대충 영어로 인쇄된 팩스를 훑었다.
 역시 제 짐작이 맞았군요. 이 전화 번호를 
보세요. 그 사장은 피해자에게 전화를 하고 
바로 다른 누군가에게도 전화를 했잖아요. 
시간대를 확인해 봅시다.  보자`…`… 한국 
시간으로 11시가 좀 넘었군요. 사고가 났던 
시간대입니다. 이 전화 번호를 메모하세요. 
손 형사는 얼른 수첩을  꺼내 경훈이 부르
는 번호를 받아적었다. 
휴대폰 번호였다.
 이 휴대폰의 소지자를 추적해 보세요. 
 이자가 하수인이란 뜻입니꺼?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검거해도 됩니꺼? 
 안 됩니다. 아직 떠오른 것은 아무것도 없
어요. 물증이 없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우
찌 돌아가고 있는지 설명 쫌 해주이소. 
 로버트 숀이라는 이름의  이 미국인 피해
자는 리엔지니어링과 모종의  관계가 있습
니다. 미국의 무기 회사들이 팩스를 보내지 
않은 것을 보면 정당한  무기 거래를 둘러
싼 일 같지는 않군요. 좌우간  숀은 한국에 
와서 리엔지니어링의 사장  제임스와 통화
를 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만났겠죠. 
제임스는 숀과  만난 후  무슨 이유에선가 
그를 살해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러고는 
미국으로 간 거지요.  와 숀은  살해하겠다
고 마음먹은 후 미국으로 갔십니꺼?  알리
바이 때문이죠. 제임스 사장은 교묘하게 머
리를 썼습니다. 
그는 하수인을 대기시켜  놓고는 미국에서 
숀에게 전화를 한 겁니다. 일부러  늦은 밤
에요. 자동차로 치어  죽이기 위해서  말이
죠. 
숀에게는 길 건너편에 있으니 바로 나오라
고 얘기했던 겁니다. 아마 술이라도 한잔하
면서 툭 털어놓고 의논하자는 투로 말했겠
죠. 
숀은 아무런 의심 없이  호텔을 나와 길을 
건넜을 겁니다.  세상에. 그렇게 머리를 쓰
는 인간이 다 있십니꺼? 누가 미국에서 걸
려온 전화를 의심하겠십니꺼? 참으로 약아
빠졌네예.  거의 완벽하죠. 
제임스라는 사람의 범행을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겠군요. 손 형사의 표정이  금세 어
두워졌다.
 일단 제임스 사장의  이력을 알아봐 주세
요. 숀이 무기 판매 쪽으로 연결이 안 된다
면 두 사람의 사적인  관계가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권도 복사해서 주세요. 
저도 개인적으로 알아볼 테니까요.  아이고
마, 고맙십니더. 변호사님은 진짜 천잽니더. 
지는 아직도 머가 우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르겠십니더.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손  형사는 다시 경
훈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손 형사는 어느새  제임스의 이력을 손에 
넣고 있었다.
 어떻게 이리 쉽게 알아냈습니까? 
 다 수가 있십니더. 
손 형사는 자랑스럽게 턱을 내밀면서 뻐기
는 눈치였다.
 다시 봐야겠는데요. 
경훈이 웃으며 칭찬하자 손 형사는 너털웃
음을 터뜨렸다.
 같이 순경에서 출발했는데 지금은 경정까
지 올라간 동기가 있십니더. 부탁을  쫌 했
다 아입니꺼.  그랬군요. 그런데 어떻게 그
렇게 계급 차이가  납니까?  가는 공부로, 
지는 주먹으로   세상을 살았다  아입니꺼.   
이해가 가는군요. 
경훈은 웃으며 제임스의  이력을 살펴보았
다.
 이 사람은 주한 미군에 오래 있었군요. 
 네, 그 경력으로 먹고 살 깁니더. 
 무슨 얘기죠? 
 무기 거래라는 게 모두 로비에 의해 좌우
된다 카데예.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과 숀의  이력에서 공통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겠군요.  참,  여기 숀의  여권 
사본이 있십니더. 
 숀의 행적을 수사해  보세요. 한국에  6일 
간이나 있었다면 어디엔가 흔적이 있을 겁
니다.  알겠십니더. 
 어쩌면 숀이 제임스에게는 무시무시한 방
문자였을지도 몰라요. 
사소한 약점 따위가 아니라  모든 것을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핵폭탄을 가지고 
온 사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장같이 만
만치 않은 사람이 죽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겠죠.  
그렇십니꺼? 
손 형사는 마치 언젠가처럼 검찰청에서 경
훈과 같이 일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경
훈은 예나 지금이나 일  처리에 빈틈이 없
었다.
 참, 그리고 저는 내일  미국에 갑니다. 갔
다 와서 전화를  하겠습니다.  알겠십니더. 
잘 다녀오이소. 
해독
손 형사가 나가자 경훈은  바로 지미의 사
무실로 내려갔다.
 지미, 부탁 좀 들어줘. 
 뭔데? 
지미는 하던 일을 멈추고  경훈의 눈을 빤
히 들여다보았다.
 왜 그렇게 겁내? 
 시간 걸리는 일은 안 돼. 
 세상에 시간 안 걸리는 부탁도 있어? 
 팀워크 때문에 정신이 없어. 당신 나라 수
재들하고 보조 맞추려니까 시간이 너무 모
자라. 하여튼 말해 봐. 뭔데?  변사한 미국
인이 있거든. 그 신원 좀 알아봐 줘. 
 여기서 죽었어? 
 그래, 교통 사고로. 
 그럼 간단하겠네.  영사한테 물어보면  알 
것 아냐? 
 신원 조사까지 했을까? 
 물론. 미국 영사관에서는 한국 정부  측과
는 별도로 사고를 조사하니까 신원 파악이 
다 돼 있을 거야. 어디 그 사람 여권 줘봐. 
경훈이 내민 로버트 숀의  여권 사본을 유
심히 살펴보던 지미는 뭔가 기억해 내려는 
듯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이 이름 어디서 들은 적 있는데`…`…. 
 그래? 
경훈이 귀를 곤두세웠다.
 어디서였더라? 
 잘 생각해 봐. 
한참 기억을 더듬던 지미는 고개를 흔들었
다.
 기억이 안 나. 
 하여튼 신원을 파악해 줘. 
 알았어. 
지미는 여권 사본을 받아들고는 손을 살랑
살랑 흔들었다. 시간 축내지 말고 사라져달
라는 의미였다.
다음날 경훈은 집을 나서기 전에 인남에게 
몇 차례나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인남은 
아직도 지방에서 올라오지  않았는지 전화
를 받지 않았다. 경훈은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음성 메시지를 남기고는   바로 공항으
로 향했다. 
경훈은 늘 타는  비행기지만 사나이로부터 
경고 전화를 받은 후라 마음이 썩 편치 않
았다. 사나이의 경고를 무시하고 뉴욕 직행 
비행기를 예약하려다가 혹시나  해서 디트
로이트에 기착하는 항공권을 끊었다.  디트
로이트에서 갈아타고 뉴욕으로  가는 편이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국내선을 
타면 라과디아 공항에 내리게 될 것이다. 
디트로이트에 내린 경훈은  공항에서 기다
리는 동안  집으로 전화를  걸어 메시지를 
확인해 보았다. 인남의 메시지가 남아 있었
다.
 세상에, 전화가 도청되고  있었다고. 끔찍
하구나. 현 선생님  일이겠지. 위기가 있을 
걸로 생각은  했지만 막상  이렇게 닥치니 
몸이 떨려. 미국에는 무슨 일로 가는 거니? 
얘기라도 해주었으면 불안하지 않을  텐데. 
참, 그리고 그때 현 선생님 수첩의 안 보이
던 글자가 해독됐는데 지금 불러줄게. 미국
에 잘 도착하면 연락해 줘. 
인남이 불러준 메모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제 노벰버를 스터디하는 것이 대세다. 
그리고 그 일은 내가 해야 한다. 모두가 등
을 돌리고 있다. (79. 3. 26)─`하문, 이놈은 
왜 나를 슬슬 피하는 걸까?  나 모르게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걸  잘 아는 
녀석이 왜 그러지? (79. 10. 11)─`제리, 네
가 원하는 것은 모두 해줄게라고? 하문, 네
가, 네가 그럴 수 있는 거야? 그 자식은 이
미 빼돌리고. (79. 10. 27)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인남의 목소리는 경
훈의 불안감을 한결 가시게 해주었다. 그러
나 인남이 남겨놓은 수첩의 내용은 경훈이 
디트로이트에서 뉴욕까지 가는  동안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 글자들이 씌어진 날짜가 중
요하게 느껴졌다. 10·26을 중간에 두고 기
록된 날짜와 문장의 내용과는 밀접한 관련
이 있을 것이다. 특히 맨 마지막 문장이 씌
어진 것은 10·26 바로 다음날이었다. 하지
만 ‘노벰버’니 ‘하문’이니  하는 말들
의 뜻을 모르고는 알  수 없는 내용들이었
다. 경훈은 오랜  시간을 곰곰  생각하다가 
일단 이 말들을 머릿속에 접어두었다. 
비행기가 라과디아 공항에  도착하자 경훈
은 주변을 살폈으나 별  이상한 점은 없었
다. 심장병 어린이들을  위해 모금을  하는 
자원 봉사자 한 명이  다가와 잠시 긴장하
기는 했지만 별다른 일은 아니었다. 경훈은 
밖으로 나와서 택시를 잡아탄  뒤 일단 호
텔로 향했다. 
호텔 방에 짐을 푼  경훈은 오세희에게 인
사차 전화를 했다. 그러자 오세희는 뉴욕에 
오겠다는 뜻을 밝혔다.
 옛날 녹음해 둔 테이프들을 듣다 보니 아
주 중요한 일이 생각났소. 마침  뉴욕의 거
래 회사에 볼일도 있으니 내일 출발하리다. 
경훈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스
테파니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반색
을 했다.
 어머, 정말 왔어요? 
 얼른 나와요. 퇴근 시간 됐잖아요. 
 그럼요, 누구 명령이라구. 저녁은 뭘 먹을
까요? 
 그건 스테파니가 알아서 해요. 
 그럼 뉴욕 스테이크 전문점에 갈까요? 
 좋죠. 
 호텔 로비에서 기다려요. 
잠시 후,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스테파니가 
온 얼굴에 웃음을 띤 채 호텔 로비로 들어
섰다.
 눈부시게 아름답군요. 
 경훈 씨도 여전하네요. 
스테파니는 악수로는   부족했는지 경훈을 
잠시 껴안았다. 두 사람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은 뉴욕 스테이크와  시푸드를 
전문으로 하는 분위기 있는 식당이었다.
 와인 한잔 나눌까요? 
 연인들처럼 말이죠. 
 맞아요. 연인이라고  못할 것도  없죠 뭐. 
가끔 경훈 씨 생각을 하니까요.  농담도 늘
었네요. 
스테파니는 식사를 하는 동안 줄곧 경훈에
게 정감 있는 눈길을 보냈다.
 여기서 같이 일하지 않을래요? 
 스테파니 회사에서? 
 그래요. 경훈 씨가 온다면 최고의  대우를 
해줄걸요. 최고급  아파트에  캐딜락, 특별 
보너스만 해도 연봉보다 많을 거예요.   스
테파니는 어떤 대우를 받고 있나요? 
 나는 한 10년 있어도 그런 대접 받을까말
까죠. 
 이거 왜 이래요, 하버드 최고의 토론꾼이. 
 그게 우습더라구요. 토론은 어떨지 몰라도 
소송은 힘에 부쳐요. 
번번이 상대의 술수에 넘어가고  말거든요.  
착해서 그래요. 상대를 너무 신뢰하니까 그
런 거죠.  그건 좀  모순되는 얘기 같은데
요. 언젠가 경훈 씨가 말하길, 세상에서 가
장 큰 힘이  착한 거라  그러지 않았어요? 
그리고 두 번째 큰 힘이 뭐라 그랬더라`…
`…?  무식한 거라 그랬죠. 
 맞아, 호호. 무식한 게  그렇게나 큰 힘이
에요? 
 그런 게 있어요.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어요. 나는  유식한 
힘을 갖고 싶단 말이에요. 어쨌거나  그 착
한 힘이란 건 언제 나오는  거죠?  쌓아야
죠. 
지금은 그렇게 착하게 해서  지는 게 좋은 
거예요.  그게 운명의 힘이란 건가요? 어쨌
든 경훈 씨를 이해하긴 힘들어요.  그 엉뚱
함이 매력이긴 하지만. 스테파니는  경훈의 
말을 반쯤은 이해하는 눈치였다.
 참, 그리고 경훈 씨가 얘기했던 일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 부탁을 해두었어요. 내일 그 
사람 사무실로 가서 만나면 돼요.   뭐하는 
사람인데요? 
 케네디 연구가라고나 할까요. 일전에 우리
가 도와준 적이  있었거든요.  저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녜요? 
 언젠가 경훈 씨도 날 도와주면 되잖아요. 
 그야 물론이죠. 
스테파니와 헤어져 호텔 방으로 돌아온 경
훈은 테라스의 커튼을 걷고 시내를 내려다
보았다. 멀리 자유의 여신상에서 비치는 불
빛이 짙은 밤안개를 뚫고 어슴푸레하게 눈
에 들어왔다. 
경훈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생각해 보
았다. 누가 뭐래도 미국은 세계를 이끌어가
는 초일류 국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신
들의 대통령을 죽인 배후도 분명히 밝혀내
지 못하는 이해할 수  없는 나라이기도 하
다. 이 불가해한 측면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피그만 사건
다음날 경훈은 스테파니가  일러준 38번가
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스테파니가 시간 약속까지 해둔 덕분에, 그
는 편하게  케네디 연구가와  마주앉을 수 
있었다.
 앉으시오. 난 빌이라고 하오. 무얼 마시겠
소? 
상대는 경훈이 누구든 개의치 않는다는 듯
이 인사부터 음료수까지 한번에 물어왔다. 
경훈은 케렌스키가  생각났다.  케렌스키는 
기분 좋은 손님을 만날  때면 아침부터 스
카치를 마시곤 했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중요한 사람을 만나면 그날  하루는 더 일
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아침부터 마셔도 
된다는 것이었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들
만의 특별한 습관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경훈은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음료수를 
부탁했다.
 괜찮으면 스카치 한잔합시다. 이 빌어먹을 
케네디 얘기를 하려면 한잔 마시지 않고는 
못 배긴단 말이오.  좋습니다. 
마침 경훈도 케렌스키를  마지막으로 만났
던 날을 떠올리던 참이었다. 그날 케렌스키
도 스카치를 권했었다. 빌은 얼음  채운 스
카치 두 잔을 가지고 와 경훈의 앞에 놓고
는 자신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스테파니의 부탁도 있었지만 당신을 보니 
기분이 좋아지는구먼. 
그 진지한 자세가 마음에 든단  말이오. 빌
은 오십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선물이라도 준비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
다. 
 당신은 자꾸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구먼. 
그 깔끔한 모습하고 점잖은 말씨가 케네디
를 생각나게 한단  말이야. 당신들은  닮았
소.  
케네디는 미남이었잖습니까. 
 하하, 당신은 그 이상이야. 어디, 한국에서 
왔다고 했소?  네. 
 그런데 당신은 케네디의  무엇을 알고 싶
은 거요? 
 누가 죽였는지, 왜 그랬는지 알고  싶습니
다. 
 그렇겠지. 
빌은 다시 잔을 입에 갖다 댔다. 한참을 홀
짝거리는 것으로 보아  이야기를 어디에서
부터 시작해야 할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빌은 경훈이 만난 보통의 미국인들과 달리 
얼음을 입에  넣어 와자작  소리가 나도록 
깨물어 먹었다. 그런  다음에야 입을  열었
다. 빌은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자  거칠어 
보이던 태도와는 달리 목소리를 낮췄다.
 케네디 사건은 의외의  곳에서 그 본모습
이 드러났소.  의외의 곳이라면? 
 워터게이트요. 
 네? 
경훈은 뜻밖의 얘기에 놀랐다.
 워터게이트, 민주당사 말이오. 
 …`…. 
 민주당사에 침입했던 세 놈 중 하나가 닉
슨을 협박했소. 현직 대통령인 닉슨을 말이
오. 이 친구는  일단 현행범으로  붙들리자 
앞날이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오. 그 통화 
내용이 연방수사국에 감청당했지.  어떤 내
용이었는데요? 
 백만 달러를 내놓으라는 것이었소. 
 큰돈이군요. 
 그렇지, 비상식적으로 큰돈이지.  그 돈을 
주면 입을 열지 않겠다는 거였소.   닉슨이 
워터게이트 침입을 직접  지시했던 모양이
군요.  아니, 그게 아니오. 
 워터게이트 사건이란 닉슨이 민주당사 침
입을 은폐하려다 들켜  대통령직을 사임한 
것 아닙니까?  그 일은 그렇지. 그러나  이 
친구가 닉슨을 협박한 것은  전혀 다른 내
용이었소. 이미 그때 워터게이트와  관련한 
닉슨의 추행이 드러났을 때라  그 일은 협
박 거리가 되지 못했지.  그러면 협박 내용
이 뭐였습니까? 
 옛날의 그 일을 털어놓겠다는 것이었소. 
 옛날의 그 일이라구요? 
 그렇소, 옛날의 그 일. 
 그게 뭐죠? 
 그걸 알려면 먼저 이 친구가 무엇을 하던 
자인지부터 알아야 하오. 빌은 다시 스카치
를 입에 갖다 댔다.
 옛날, 그러니까 이 친구가 말하던 그 옛날
이지. CIA와 군부가 쿠바 망명인들로 조직
한 부대로  하여금 쿠바를  공격하게 했던 
일이 있었소. 소위 얘기하는 피그만 사건이
오.  네, 알고 있습니다. 
 이 친구는 그때  활약했던 CIA  대원이었
소. 
 그렇다면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
이군요. 
 케네디 암살은  그  피그만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지. 당시 미국은 CIA와 군부가 지배
하고 있었다고 보면  돼요. 냉전이  한창일 
때였으니까. 모든 정보를 그들이  수집하고 
분석하며 허수아비 대통령에게 들이밀기만 
하면 됐소. 미국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아니 그것은 그때의 일만은 아닌지도 모른
다. 지금도 누가 CIA와 군부에서 분석하는 
정보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가.
 그러나 케네디는 달랐소. 그는 철두철미하
게 검증하려 들었지. CIA든 군부든 무턱대
고 믿으려 하지는 않았소. 케네디는 피그만 
사건 직전에 미사일을 싣고 쿠바로 향하는 
소련 함대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CIA와  군
부가 엄청나게 상황을  과장하고 극단으로
만 몰고 가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됐소. 그래
서 피그만 사건 때는  절대로 미국 공군의 
비행기가 직접  출격할 수  없도록 엄명을 
내렸지. CIA는 일단 미국의 공군기가 절대 
출격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케네디한테서 
작전 승인을 얻었지만 원래의 계획은 그것
이 아니었소. 공군기를 출격시키는 거였지. 
그래서 그들은 상황을  과장하여 케네디한
테 조르고 또 졸랐소. 심지어는 새벽 3시에 
잠자리에 있는 케네디한테까지  전화를 걸
어 공군기의 출격을 졸라댔소. 물론 케네디
는 단호하게 거부했지. 미국의 공군기가 나
타나지 않자 피그만을 공격했던 쿠바 망명 
부대는 전멸하고 말았소. 그때부터  카스트
로는 안정된 정부를 구축할 수 있었지.  케
네디는 미움을 많이 받았겠군요. 
 피그만 사건은 CIA와 케네디에게 모두 엄
청난 상처를 입혔소. 케네디는 군사 모험주
의자들이 언제 무슨 수를 써서든지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지. 
그래서 CIA의 간부들을 대폭 물갈이해  버
렸소. 한편 군부나 CIA는 케네디야말로 자
신들의 적이란 생각을 갖게 되었지. 케네디
가 있는 한은  무슨 일도 그들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거요.   그후로 
CIA 및 군부와 케네디는 반목하게 된 것이
군요.  그들뿐만이 아니라 케네디에게는 더
욱 큰 적이 생겼소.  더욱 큰 적이라면? 
 군수 산업체들이지. 
 그들이 어떻게  케네디와  적이 되었을까
요? 
 음, 케네디의 세계 정책 원칙은 평화 공존
이었소. 그는 쿠바의 미사일 위기도 후루시
초프와 대화를 통하여 풀어냈지. CIA와 군
부의 대결 논리를 무시하고 끝까지 대화를 
추구하여 결국 성공한 거요. 그후 케네디는 
세계적 군축을 시도했소. 그는 지구적 차원
에서 생각할 줄 알았지. 그러나  그것은 미
국의 군수 산업체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
던 거요. 존폐를  좌우하는 문제로  떠올랐
지. 군수 산업이라 하면 직접  무기를 만들
어내는 업체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오. 군
복을 만든다든지 식량을 공급한다든지,  그 
개념은 매우 넓소.  줄잡아 약 2만여  개의 
대기업들이 있지. 그들이 케네디를  반대한 
거요. 게다가 거기에는  수천 개의  별들이 
들어가 있었소. 
 별들이라뇨? 
 국방성에서 그만둔 자들이 모조리 그리로 
들어간다는 뜻이오. 즉 군수 산업체란 군부
와 마찬가지지.  알 만합니다. 
 결국 군수 산업체가 냉전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지. 그들은 소련과의  대화를 완강
히 반대했소. 그리고 소련으로 하여금 군비 
증강에 모든 힘을 쏟도록 유도했지.   그랬
군요. 
 그들은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
쟁을 공산주의와의 대결로 규정지었소.  피
그만 사건  이후 그들은  케네디에게 월맹 
폭격을 졸라댔소. 그러나 케네디는  완강하
게 거부했지. 생각해 보시오. 
CIA와 군부, 그리고 막강한 군수 산업체가 
케네디를 어떻게 생각했겠는가를.  결국 그
들이 케네디를 죽였나요? 
 아니오, 더 있소. 
 그 정도로도 충분할 텐데 적이 더 있습니
까? 
 암살을 직접 실행한 것은 CIA지만 그  뒤
처리에는 마피아가 개입했소.   아니, 어떻
게 CIA와 마피아가 연합할 수 있죠?  CIA
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소.  일단 하수인
인 오즈월드를 범인으로  가장하여 댈러스 
경찰서에 넣어두고는 마피아의  킬러가 그
를 죽이러 간 것이오. 붙들려도  아무런 연
관이 드러나지 않는 자들이지.  그  킬러가 
경찰서에서 오즈월드를 죽였나요? 
 그렇지. 그러고는 그 킬러 역시  누군가에 
의해 죽음을 당했소.  
굉장하네요. FI의 엄청난 수사가  이루어졌
겠군요.  아니오, 사건은 갑자기 미궁에 빠
져버렸지. 법무장관이던  로버트  케네디는 
힘을 잃었고, FI와  댈러스 경찰은  관할권 
논쟁으로 티격태격했소. 
결국 의회에 진상조사위원회, 즉  워렌위원
회가 구성되었지. 그러나  그들이 기껏  한 
일이라곤 엉터리 범인  오즈월드를 진범으
로 확정지은 것뿐이오. 그들은 어떤 진정한 
증인도 부르지 않았지.  더욱 가관인  것은 
존슨 대통령의 행정 명령이었소. 케네디 암
살에 대한 수사 기록을 2039년까지 공개해
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 경훈은  제럴드 
현의 메모에서도  같은 내용을  본 기억이 
났다.
2039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행정 명령이 가능했을까요? 2039년이 되면 
모든 관련자들이 죽고  없을 텐데,  도대체 
존슨 대통령의 명령은 범인을 잡자는 겁니
까, 말자는 겁니까.   워렌위원회의 엉터리 
조사나 그 행정 명령이나  모두 배후를 짐
작하게 해주는 일이지. 닉슨, 그자가 그 모
든 현상의 배후에 있었던 것이오.  아니 정
확하게 말하자면 닉슨을 앞세운 그들이 있
었던 거지. 
 그러니까 암살 동기를  정리하면 세계 평
화와 군축을 이상으로 삼았던 케네디가 강
경 일변도로  치닫던 CIA와  군부, 그리고 
군수 산업체를 견제하고  압박하자 그들이 
케네디를 제거할 필요를  느꼈다는 것이군
요. 여기에 쿠바에 이권을 둔 마피아, 아울
러 로버트 케네디의 철저한 범죄와의 전쟁
에서 생존 위기를 느낀 마피아들까지 합세
했구요.  바로 그렇소. 
 암살은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실행됐습니
까? 
 가장 중요한 것이 카 퍼레이드  경로였지. 
원래의 경로에서는 케네디를  저격하기 위
한 적절한 지점을 찾을 수가  없었소. 길은 
넓고 직진 코스인데다가  주변의 건물들은 
모두 비스듬히 서 있어서, 자동차가 충분히 
안전 속도를 유지하면서  달릴 수  있었지. 
그러나 그 경로는 갑자기 변경되었소.   저
런, 누가 그렇게 함부로 경로를 바꿀 수 있
단 말입니까?  카 퍼레이드의 경로를 결정
하는 권한은 댈러스 시장에게 있었소. 그가 
경로를 바꾼 것이지.  바꾼 경로는  저격에 
적절한 여러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소.   시
장은 어떤 이유로 경로를 바꾸었습니까? 
 당시 시장은 대로를  통행하는 많은 자동
차들에게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 경로를 
바꾸었다고 했지만 그  얼마나 터무니없는 
대답이오? 퍼레이드의  본질이란 게   원래 
대로에서 행해지는  것 아니오?   케네디는 
그 퍼레이드를 마치고 바로 공항으로 달려
가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소. 공항으로 가는 
직진 코스가 원래의 길이었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요. 
 아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댈러스 시
장이 누군가만 상기한다면.  네? 그가 누구
인가요? 
 마이클 카벨, 찰스 카벨의 친동생이지. 
 찰스 카벨은 누굽니까? 
 그가 바로 피그만 사건 때 케네디에게 쫓
겨난 CIA 차장이오. 그는 쫓겨나면서 케네
디를 죽이고야 말겠다고 공언했소.  경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어떻게 그런? 
빌의 눈에도 핏발이 섰다. 우연이라면 너무
나 이상한 우연이었다.
 케네디를 살해한 자들은  바뀐 카 퍼레이
드 경로의 한 지점에서 그를  기다렸고, 경
로를 바꾸도록 지시한 시장은 케네디를 죽
이고야 말겠다고 공언한  사람의 친동생이
라니. 경훈은 그들의  관계가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것에 대해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
까? 
 전혀! 
빌의 대답은 단호했다.
 다음은요? 
 그들은 일단 오즈월드를 희생양으로 삼았
소. 그에게 카 퍼레이드가 펼쳐지는 거리의 
한 빌딩 6층에  총을 들고  숨어 있으라고 
지시했지. 케네디가  지나갈  동안 말이오. 
그러고 나선 시내의 한  극장에 권총을 소
지한 채 돈을 내지 말고 들어가 앉아 있으
라고 지시했소. 이 정도면 알 만하오? 경훈
은 고개를 끄덕였다.  케네디를 막  암살한 
사람의 처신으로는 너무나 어처구니없었다. 
총기를 모두  버리고 나서  자동차를 타고 
댈러스를 빠져나가는 편이  가장 안전하고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했습니까? 시키는 대로 했나
요? 
 그렇소.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즉각 
체포될 것이 명백한데. 
대통령의 암살로  모두가 법석일  때 돈을 
내지 않고  극장에 들어간다면  당장 거동 
수상자로 체포될 텐데?  그러나  오즈월드
로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소.  그는 바
로 옆에서 일어난 대통령의 죽음과 자신이 
무슨 관계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아니,  그는 대통령이 죽었
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가능성이 매우 크오.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수사가 제대로  될 턱이  있나? 아무것도 
모르는 자에게 대통령  암살자라고 몰아붙
여 봐야 나올 것이 있겠소? 더군다나 경찰
은 그에게 질문도 몇 번 던져보지 않고 킬
러의 손에 죽도록 방치했는데. 
 오즈월드란 사람은 원래  무슨 일을 하던 
사람입니까?  CIA의 하수인이었지. CIA는 
그를 이런저런 하찮은 일에 써먹었소. 소련
에 망명을 시켰다가 다시 미국으로 빼오기
도 하고 뉴올리언스에서 혼자 삐라를 뿌리
며 반정부 데모를 하게도 했소.  케네디 암
살 얼마 전에는 전직 CIA 간부가 댈러스의 
한 회사에 직장을 알선해 주었지.   오즈월
드 혼자 삐라를 뿌리며  데모를 하도록 한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까요?   반케네디주
의자라는 것을 일부러  나타낸 것이지.  즉 
잡힌 후를 대비한 것이오. 물론  그는 제거
될 운명이었지만.  오즈월드는 극장에서 체
포되었습니까? 
 물론이오. 체포된 직후 그가 한  건물의 6
층에서 총을 들고 서성대던 것이 신고되었
고, 즉각 범인으로 단정지어졌지. 오즈월드 
혼자만 사람들이 왜 부산을 떠는지 원인을 
몰랐던 거요. CIA는  평소에도 오즈월드에
게 그처럼  이상한 훈련을  시켰기에 그는 
스파이 훈련이란  늘 이런  것인가 보다고 
생각해 왔으니 하등 이상할 게 없었지.  그
리고 오즈월드는 경찰서  유치장에서 살해
됐나요?  그렇소. 케네디를 존경한다는 인
물이 나타나 신문지에 싸갖고  온 총을 꺼
내 그를 즉사시켜  버렸소.  저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대통령 암
살범에 대한 관리가 그렇게  허술할 수 있
나요?  그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한 
일투성이요. 
 오즈월드를 수사한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
니까? 지시한 자의 인적  사항을 알아냈나
요?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소. 그는  끝
까지 입을 다물었지. 설사 입을  열었다 하
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요. 그 자신
도 누가 자기를  시켰는지 몰랐을  테니까. 
경훈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 케냐에서  일어났던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사건 때 보았던 장
면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케냐  경찰뿐만이 
아니라 미국의 연방수사국  직원들까지 FI
라는 문자가 생생히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철두철미하게 현장 조사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자국의 대통령이 암살된 사건을 그
처럼 허술하게 처리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결국 암살의 실행자들을 마피아가 공급했
다고 보시는 겁니까?  그렇소. CIA든 뭐든 
공무원이 암살의 실행에까지  가담하는 것
은 나중이 위험하니까.  나중이라면? 
 누구 하나라도  양심  선언하고 나오든지 
협박하든지 하는 문제가 대두될 수 있잖소. 
그러나 마피아라면 그걸로 끝이오. 아마 하
수인들 중 대통령 암살과 보스가 관계된다
는 것을 안 자들은 모두 죽었을 거요. 그들
의 목숨은 바로 파리 목숨이니까.   케네디 
암살과 연관시켜 볼 만한 마피아의 죽음이 
있었습니까?  날카로운 질문이오. 플로리다 
마피아의 소두목 셋이 의회의 케네디 암살 
관련 참고인으로 소환된 적이 있었소. 그들
은 바로 죽고 말았지. 그후  사람들은 의회
의 소환장을 받으면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
혔소. 그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
으니까. 케네디 암살과 관련하여 16명의 증
인들이 죽음을 당했소.  모든 조사는  끝이 
났지. 결국 아무도 무엇인가를 증언하지 못
했소.  나라가 그 증인들을 지켜주지  못했
나요? 
빌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미국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 
희대의 사건이 그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을 
보고도 가만있었다는  말입니까?  케네디 
암살은 미국에게, 그리고 온 세계에 뼈아픈 
상처를 남겼소. 빌은 스카치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그의 얼굴이 분노와 슬픔으로 씰룩
거렸다.
 먼저 케네디 암살이  처리되는 과정은 미
국민에게 끝없는 패배 의식을  안겨주었소. 
국민들은 가장 인기가 있던 대통령의 암살
이 처리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멀리서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아야 
하는가를 깨달았소. 또한 자신들이  사랑하
는 조국이  때에 따라서는  매우 폭력적인 
수단으로 경영된다는 사실도  절감해야 했
소.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합법이니  뭐니 
하는 단어들이 처참하게  유린당한다는 것
을 말이오. 경훈은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
다. 미국인들이 얼마나 폭력과 가까운 거리
에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
었지만, 대통령까지 폭력 앞에서 그처럼 완
벽하게 사라지고 말았다는 사실은 적지 않
은 충격이었다.
 다음으로 케네디의 암살은 국제 사회에서 
미국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 심각한 불안
을 야기시켰소. 케네디는 세계 평화와 모든 
민족의 공존을 부르짖었지. 다양한  문화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미국과  각국 간의 
동등한 관계를 천명했소. 그러나 국제 사회
는 그런 케네디가 결국은  죽고야 마는 미
국의 현실을 생생하게 지켜본 것이오. 미국
을 끌어가는  힘은 평등한  공존이 아니라 
미국의 국가 이기주의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지. 이후 미국은 세계 정책에  있어 미
국의 국익을 맨 앞에 내세우게  되었소. 생
각해 보시오, 세계 최강의 국가가 타국과의 
관계에서 항상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할 때 세계에 안정과 평화가  올지, 아니면 
분란과 불안에 휩싸일지.  가치관이라는 관
점에서 볼  때 미국의  이기주의는 지도적 
위치에 큰 결함을 야기시키는 것이 사실입
니다.  그렇소. 미국은  이미 정의를  잃은 
거요. 가치관을 상실한 힘은 폭력으로 나타
나지. 약소 국가들을 상대로 휘두르는 폭력
적 자본주의가 결국은 세계적 경제 불안을 
가져오는 거요. 이 모든 게  케네디의 죽음 
때 이미 예상되었던  일이오. 빌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경훈은 빌이 케네디 죽음의 
미스터리를 파헤칠  뿐 아니라  그 죽음의 
의미와 세계사적 파장까지도  갈파하는 것
에 놀랐다.
 케네디 암살 후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
습니까? 
 한마디로 군사적  모험주의, 아니  모험은 
아니지. 미국의 군사 작전이 모험이  될 수
는 없지. 어쨌든 미국은 강력한  군사 우선
주의 정책을 채택했소. 어떤 문제든지 일단
은 군사적 관점에서  해결책을 모색한다는 
것이었지. 존슨은 당장 월맹 폭격을 허락했
소. 그리고 베트남전을  벌였지. 지금에 와
서야 미국인들은 그것이 얼마나 민족의 자
주권을 짓밟은 잘못된  전쟁이었는지 반성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모두들 환호했소. 미국
인들은 군사 행동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전통이 있지 않소.  빌은 쓴
웃음을 지었다. 경훈은 케네디를  좋아했던 
것이 분명한 이 도전적  정치 비평가의 눈
을 들여다보았다. 빌의 눈에서는 슬픔과 분
노가 활활 타올랐다. 경훈은 자리에서 일어
났다.
 고마웠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도움이 되었소? 
 물론입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경훈은  손에 
약간 힘을 주어 빌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
했다. 빌의 사무실을 나오는 경훈의 머리에
는 제럴드 현이 그리고 있던 큰 그림이 떠
오를 듯 말 듯했다. 
제럴드 현은 케네디와 박정희가 너무나 닮
은 이상주의자라고 하지 않았는가.  케네디
의 이상이 동서 화해라면 박정희의 이상은 
자주 국방이라고 했다. 이 부분은  언뜻 연
결시키기 어려웠지만, 제럴드 현은 그 이상
을 구체화하는 방법이 무엇이었든 두 사람
의 암살 동기는 동일한  고리에 꿰어져 있
다는 사실을 얘기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암살 동기. 믿을 만한 케네디  전문가 빌의 
생각에 따르면, 케네디 암살이란 군사 대결
로 가지 않으려던 젊은 이상주의자 케네디
와 군사주의로 이끌고 가려던 CIA·군부·
군산 복합체, 그리고 쿠바에 막대한 재산과 
이권을 가지고 있던 마피아와 닉슨을 비롯
한 정치가들의 대결이었다. 
그렇다면 박정희의 자주 국방은 도대체 어
떤 관점에서 케네디의 암살 동기와 연관된
다는 얘긴가. 
김재규의 배후
경훈이 택시를 잡아타고 시계를 보니 오세
희와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약속 장소인 46번가의  우래옥에 도착했을 
때 오세희는 한갓진 자리에  앉아 이미 맥
주 한잔을 기울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 변호사, 어서 오시오. 
 오 선생님, 제가 늦었습니다. 
 아니오. 
두 사람은 먼저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했
다. 같은 이름의  식당이 한국에도  있지만 
역시 육류의 나라 미국이어서 그런지 고기
가 푸짐하게 나왔다. 더군다나  꼬리곰탕이
니 족탕이니 하는 것은  미국 사람들이 아
예 먹지를  않는 부위기  때문에 제공되는 
양이 상상을 불허했다.
 그 의사를 찾으셨습니까? 
경훈이 본론을 꺼내자 오세희는 주변을 힐
끔 살폈다. 오랜 정보원 생활을  거쳐서 그
런지 그에게는 본능적으로  조심하는 태도
가 배어 있었다.
 사라져버렸소. 그후로는 어디에서 무얼 하
고 사는지 모르겠네. 
흔적을 찾을 수 없소. 경훈은  그렇다면 오
세희가 무슨 일로 자신을 만나러 뉴욕까지 
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오세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언젠가 강일이  형님의  사무실 직원들을 
소개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중에 브루스라
는 자가 있었소.  그런데요? 
 미남인데다가 인상이 좋길래 형님에게 그
자가 어떤 임무에 종사하는지  물어보았소.  
대답해 주시던가요? 
 아니, 형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소. 한참 시
간이 흐른 후 같이  스탠드바에서 술을 한
잔하다가 형님이 불쑥 내뱉으시는  거였소. 
“그 잘생긴 젊은  친구 말이야,  그래봬도 
아주 중요한 친구야”라고. 그래서 내가 궁
금증이 일어  일부러 놀라는  척하며 “그 
기생 오라비 같은 친구  말입니까?” 했더
니, 형님이 껄껄 웃으시며 “김재규를 조종
하는 게 바로 그 친구야.  우리 사무실에서 
김재규를 전담하는 친구지. 카터의 주한 미
군 철수가   왜 중단됐는데”라고  하셨소.   
그래서요? 
 나는 더욱 궁금증이 일어 다시 변죽을 울
렸지. 참, 이  변호사, 싱글 러브라는  사람 
기억하오? 그 당시 주한  미군 참모장이었
는데`…`….  네, 기억합니다. 주한 미군 철
수를 반대하다 카터 대통령에 의해 예편당
한 사람이죠?  그렇소.  내가 “싱글 러브 
같은 사람들이 기를 쓰고 반대하니 카터가 
안 되겠다 싶어 그런 게 아닙니까?” 했더
니 형님이 배를 잡고 웃으시더구먼. 중요한 
정보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  정보를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쭐해지는  심리가 있
지. 한편으로 추켜주면서 한편으로는  의심
스런 듯한  태도를 보이면  정보가 나오는 
법이오. 경훈이 웃음을 터뜨리자  오세희도 
비로소 잔뜩 긴장했던 얼굴을 펴면서 잔을 
들었다.
 형님은 “미국놈들이 그렇게 김재규를 키
운다니까” 하시고 말더군. 나는 지금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소. 경훈은  오세희
가 왜 갑자기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지 의
아해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 친구 말이오, 브루스라는. 김재
규를 전담한다던 바로 그자를 찾았소.  네? 
 형님과 전화상으로 옛날이야기를 했던 테
이프를 듣다  보니 기생  오라비라는 말이 
나오지 않겠소. 이 친구다 싶어  즉각 추적
했소. 
물론 돈을 좀 썼지, 한국과 미국에서. 경훈
은 역시 돈과 경험이 합치면 안 되는 일이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브루스라는 친구를 한번  회유해 볼 참이
오. 
 어떻게요? 
 그자는 은퇴하고  나서 그랜드캐니언에서 
모텔을 경영하고 있었소. 그런대로  살아왔
던 모양인데  최근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조사됐소.  무슨 문젭니까? 
 모텔이 넘어가게 됐소. 아니 모텔뿐만  아
니라 인생이 거덜나게 생겼지.  왜요? 
 그랜드캐니언은 바로  라스베이거스 옆에 
있잖소. 거의 붙어 있는 셈이지. 그런데 그
자가 최근에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에서 
엄청난 돈을 잃었소.  모텔을 잡혀  급전을 
구한 것까지 몽땅 잃고 말았지.   위기로군
요. 
 그렇소. 그자의 위기는 곧 우리의  찬스라
고 말할 수 있겠지.  돈으로 회유하실 생각
인가요? 
 아니, 돈으로 회유하는 것은 실패할  공산
이 크오. 상대는 욕심을 부릴  테고 그러다 
보면 우리 쪽이 함정에 빠질  위험도 있소. 
상대가 우리를 간첩 혐의로 넘기면서 자신
의 어려움을 해결하겠다는 계산을 할 수도 
있을 테니까. 오세희로서는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미 큰 성공을 거둔 그로서는 
책 잡힐 행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하자면  큰돈이 들 거
요. 브루스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분명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오.  그렇다면? 
 도박판에서 그자를 추궁하는 것이오. 우리
의 정체는 숨기고. 다만 이것을  위해서 우
리는 한 사람을 사야 할 필요가 있소.   무
슨 뜻입니까? 
 일단 도박판에서 돈을  잃은 사람은 별짓
을 다 하게 되어 있소. 
도박꾼은 마누라도  잡힌다고 하지   않소? 
브루스는 지금 정신적 평정을 잃었기 때문
에 하면 할수록 지게 되어 있지. 당연한 말
이었다. 설사 정신적  평정을 잃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느 누가 카지노에서 돈을 그리 
쉽게 딸 수 있단 말인가.
 브루스가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가 약간의  돈, 그자에게는  매우 
큰돈이겠지만, 하여튼  돈을  주는 것이오.   
정보의 대가로 말이죠? 
 그렇소. 
현실성이 있는 방법이었다. 도박에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에게 주는  돈은 온전한 정
신을 가졌을 때의 금액보다  수십 배 이상
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정보를 요구하는 것
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또  너무 급작스럽
고 낯설지 않을까요? 틀림없이  의심을 살 
텐데요.  그래서 한 사람을 사야 한다는 말
이오. 거기에서 늘 도박을 하던  사람을 구
해야 한다는 뜻이지. 그것도 괴짜로.  괴짜
라구요?  그렇소. 카지노에는 왕왕 괴짜가 
있소. 아주 희한한  괴짜들 말이오.   어떤 
괴짜들인데요? 
 돈을 우습게 쓰는 자들이지. 처음 보는 사
람에게 받을 기약도 없이  만 달러를 그냥 
준다든지 말이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긴장을 해소
하기 위해서  그러는 사람도  있고 자신이 
선행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소. 어떤 
이상한 종교관, 혹은  신관에 의해  선행을 
해야만 도박에서 계속 이길  수 있다고 생
각하는 사람들이지. 또는  상대를 돈  앞에 
철두철미하게 굴복시키는 데서  쾌감을 느
끼는 사람도 있소.  어쨌든 모두  괴짜들이
지.  그러면 그 괴짜는 브루스에게 돈을 주
는 대신 무엇을 요구합니까?   브루스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되겠지. 
브루스는 처음엔 적당히 얘기할 거요. 그러
나 괴짜가 별로 관심 없는 듯이 하품을 하
면서 겨우 몇 푼 집어줄 듯한 태도를 취하
면 브루스의 얘기는 점차 깊어지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럴듯하군요. 
 그런데 그 괴짜를 구하는 일이 그렇게 쉬
울 듯싶지는 않소. 경훈은 필립  최를 떠올
렸다. 이미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사로  이
름난 필립 최라면 이런  일에 적격일 듯했
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긴 한데`…`… 제가 한
번 연락해 볼까요?  이 변호사가? 원, 세상
에! 어떻게 그런 사람을 다 알고 있소?  경
훈은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는 별  이상한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고, 이상한  일도 이
루어지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두 사람은 경훈이 묵고  있는 호텔로 자리
를 옮겨 밤새 술잔을 나누었다.  비록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큰일을 같이한다
는 생각 때문인지 서로가  아주 가깝게 느
껴졌다. 
깊은 밤 뉴욕 거리에서 왱왱거리는 경찰차
의 경보음이 묘하게도  분위기를 돋우어주
었다. 경훈은 오랜만에 마음놓고 술잔을 비
웠다오세희는 참으로  부지런했다.  경훈이 
눈을 떴을 때 그는 벌써 비행기를 타고 캐
나다로 날아가고 있었다. 경훈의 음성 메시
지에는 오세희의 말짱한  목소리가 남겨져 
있었다.
 이 변호사, 일이 진행되는 상황에 따라 우
리 자주 연락합시다. 
브루스가 라스베이거스로 가면  내가 연락
을 하겠소. 한 2~3일 후에 가면  기회를 잡
을 수 있을 거요. 그리고  무엇보다 몸조심
하시오.  경훈은 룸 서비스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스테파니에게 전화를 걸
었다.
 어쩌면 그렇게 연락이 없었어요? 빌이 잘
해 주던가요?  당신 덕분에. 
 잘됐군요. 저녁에 만날까요? 
 아니, 오후에 떠나야 해요. 
 벌써요? 그럼 점심은 어때요? 
 그럽시다. 이번에는 내가 사죠. 
 누가 사든. 
점심때 만난 스테파니는 한결 싱그러운 젊
음을 발산했다. 햇빛을 받아 일렁이는 금발
이 새하얀 얼굴과 조화되어 더욱 아름다웠
다.
 오늘은 유난히 더 아름다운데요. 
 고마워요. 
 결혼하자는 사람 없어요? 
스테파니는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긴 남자들이 겁내겠지. 날카로운 변호사
에 눈부신 미녀라 함부로 말이나 붙이겠어
요?  사실 회사에서 좀 문제가 있어요. 
경훈은 스테파니의 약간 어두운 듯한 목소
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두세 명의 간부가 
사건 배당과 관련하여 시간을 내달라고 해
요. 
늘 거절해 왔지만 눈에  띄게 그러는 것도 
아니어서 대처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요. 그
러다 보니 남들보다 사건에  뒤지는 것 같
기도 하고`…`…. 문제는  어디에서나 누구
에게나 있다.
 경훈 씨, 이렇게 하면 어때요? 
 …`…? 
 같이 사무실을  차리는 거예요.  혼자라면 
엄두가 안  나지만 경훈  씨와 같이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경훈은 깜짝 놀랐다. 경훈은 스테파니의 제
안이 가벼운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경훈은 그 제안이 갖는  의미를 잠시 생각
해 보았다.
 스테파니, 고마워요. 나를  그렇게까지 생
각해 주니. 하지만 나는 지금 사실 매우 중
요한 일에 연루되어 있어요. 한국에서는 회
사 일도 제쳐놓고 이  일에만 매달리고 있
죠. 그래서 뉴욕에 온 지 이틀 만에 떠나야 
하는 거구요. 스테파니, 이 일이 끝날 때까
지 나에게 시간을 줘요. 그때까지  깊이 생
각해 보고 나서 대답할게요. 
스테파니는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
다. 경훈은 그런  스테파니가 좋았다. 자신
에게 지금 아무런 일도 없다면 스테파니의 
제안에 ‘예스’라고 대답을  했을지도 모
른다. 한국처럼 인간 관계가 애증으로 끈끈
하게 얽힌 사회를 떠나, 모든  것이 깔끔하
고 합리적인 미국 사회로 옮겨와 스테파니
같이 아름답고 능력 있는  여성을 직장 동
료로, 아니 인생의 동반자로 삼는다는 것은 
정말 마음 끌리는 유혹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경훈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선민, 선민이 있었다.  비록 선민이 결혼은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고  획을 긋고 떠났
지만 자신과 그녀의 관계가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경훈
의 마음 한구석에서 인남의 모습도 조그맣
게 떠올랐다. 
변사자의 정체
 아니, 무슨 미국 여행을 그렇게나 급히 갔
다 오셨십니꺼.  본전도  안 나오겠십니더.   
본전이라뇨? 
 비행기값 말입니더. 
 하하하. 
 그런데 미안해서 우짜지예? 
 왜요? 
 변호사님 지시대로 조사를 했는데, 하수인
으로 보이는 자의 휴대폰은 신규로 가입한 
것이었십니더. 기재한 인적 사항도 모두 가
짜였십니더. 아예 범죄를 위해 준비를 했더
라니까예.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게다가 로버트 숀의  행적도 지 혼자서는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다 아입니꺼.  호텔 
직원이 숀이 8군  클럽하우스에 가는 교통 
편을 물어본 적이 있다고  진술해 줘서 그
쪽을 쫌 탐문해 볼라꼬 했는데 그기 참, 잘 
안 되더라고예. 지는  출입증도 없고`…`… 
사실 그거야 용산서에 있는 동료에게 부탁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영어
가 안 되니`…`…. 학창 시절에 공부 안 한 
기 두고두고 후회가 됩니더. 경훈은 쓴웃음
을 지으며 지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기 내 조국이야? 
 아니 내 조국이야. 
 뭐? 벌써 왔어? 
 그래. 
 원, 표값 아까워 죽겠네. 아, 간 김에 우리 
집에 가서 내 안부도 좀 전하고 오지 그랬
어? 경훈은 지미가 농담을  길게 늘어놓는 
것으로 보아  전에 부탁했던  일에 성과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좀 알아봤어? 
 그럼. 그런데 건방지군. 내가 힘들게 구한 
정보를 전화로 듣겠다는 거야?  알았어. 내
려갈게. 
지미는 경훈에게 서류를 내놓았다.
<신원 확인서>
성명`:`로버트 숀 
주소`:`…`…
사회보장 카드 번호`:`…`…
운전 면허 번호`:``…`…
직업`:`의사
특이점`:`…`…
 의사? 이 사람이 의사야? 
 낸들 어떻게 알겠어? 서류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 그런 줄 알아야지.  의사가 왜 무기 
거래상에게 죽어? 
경훈은 지미가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지
미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경훈, 실토해. 무슨 큰 건을 하나 잡은 거
지? 
 무슨 말이야? 
 잡아떼도 소용없어.  큰 건이면  같이하자
구. 
 도대체 무슨 얘기야? 
 정말 이러기야? 이러면 나 섭섭해져. 
 …`…. 
지미의 표정으로  보아 그가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사람 말이야, 로버트 숀. 
 그래. 
 이 사람 누군지 알아? 
 몰라. 
 잡아떼기는. 이 사람, 내가 어디선가 이름
을 들은 기억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
래, 그랬지. 
 이 사람이 얼마 전에 나에게 알아봐 달라
고 했던 그 군인, 조울증으로  예편했던 제
럴드 현인가 하는 사람 말이야,  그 사람의 
주치의였어. 혈액 대장에 이 사람이 기명하
고 사인했더라구.  뭐? 그게 정말이야? 
 그래. 
경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런데도 잡아뗄 거야? 
경훈은 키들거리는 지미의  웃음을 뒤로한 
채 자신의 사무실로 급히 돌아와 수화기를 
들었다.
 오 선생님, 그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 사람이라니? 
 제럴드 현의 주치의 말입니다. 
 뭐라구? 그게 정말이오? 
 혹시 그의 이름이 로버트 숀인가요? 
 로버트 숀, 그렇소! 바로 그 이름이오. 
 맞군요. 그는 최근 서울에서 살해당했습니
다. 
 허, 저런! 그런데 무슨 이유로? 
 그것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심상찮
은 예감이 드는군요. 
오세희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튼 대단한 사실을 알아냈군. 나도  여
기서 브루스를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있소. 
그는 지금 어떻게든 라스베이거스로 갈 자
금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오. 오늘내일 사이
에 떠날 것 같소. 내가 곧 전화하리다.  알
겠습니다. 
손 형사는 영문을 몰라 입을 꾹 다문 채로 
경훈만 쳐다보고 있었다. 경훈이 전화를 끊
은 뒤 손 형사에게 말했다.
 역시 증거가 없어 어렵겠어요. 
 그럼 우짜면 좋십니꺼? 
 일단 철저히 보안을 유지해야 합니다.  상
대가 보통이 아닌 자이기  때문에 이 얘기
가 새어나가면 모든 게  허탕이 되고 말아
요. 자칫하면, 이미 종결된 사건에 너무 깊
이 관여했다가 손 형사님의 목까지 위태로
워지구요.  뭐 여부가 있겠십니꺼? 
 구체적인 것은 생각을 좀 해보도록  하죠. 
일단 미국에 갔다 와서요.  미국엔 이제 막 
갔다 오시지 않았십니꺼? 
 바로 또 갈 일이 생겼어요. 
 저런, 쯧쯧`…`…. 
손 형사는 비행기값이 아까워 자신도 모르
게 혀를 찼다.

한반도 2

바카라

경훈은 오세희의 전화를 기다렸다. 이제 김
재규를 전담했던 브루스를 만나면 많은 의
혹이 풀릴 것이다. 경훈이 미국에서 돌아온 
지 3일 만에  오세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
다.
 이제 갈 시간이 된 것 같소.  브루스가 이
틀 전 라스베이거스로 떠났소.  내일쯤이면 
둘 중 하나로 판가름이 나겠지.  저는 바로 
떠나겠습니다.  어디서  만나면  좋을까요?   
필립 최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소? 
 주로 엠지엠 카지노에 있습니다. 
 그래요? 그거 마침 잘됐군. 브루스도 엠지
엠에서 하니까. 그럼  거기서 만납시다. 경
훈은 일이 제대로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이
제 남은 건 라스베이거스로 날아가는 일뿐
이다.
여행사 직원은 경훈이 돌아온 지 3일 만에 
다시 미국 여행을 떠나자 혀를 내둘렀다.
 이번에 가시면 한 달쯤은 있다 오세요. 
경훈은 웃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연결   편으로 갈아타고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   경훈은 오세희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갔다. 오세희는 이미 
프런트 데스크에 메시지를  남겨두고 있다
가 바로 내려왔다. 경훈은 오세희의  옆 방
에 짐을 푼 뒤 오세희의 방으로 건너갔다.
 예상외로 브루스는 상당히 따고 있소.  이
러다간 우리의 계획이  틀어질지도 모르겠
는걸. 오세희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제껏 잃었던 돈을  다 만회할 정도입니
까? 
 그렇소. 한 시간 전에 보았을 때에는 거의 
만회한 듯했소.  그럼 낭패로군요. 
 그 친구는 본전을  찾으면 그만둘 가능성
이 매우 높소.  그렇겠죠. 인생을 날렸다가 
다시 찾게 되었으니 즉각 그만두겠죠.   다
른 방법을 강구해야겠소. 
그러나 다른 방법이 들어먹힐 가능성은 거
의 없어 보였다. 브루스가 잃었던  돈을 만
회하고 나면 그때는 어떤 비밀을 알아내려 
해도 이쪽의 약점만 드러낼 뿐이다.
 일단 필립 최  씨에게는 연락을 해야겠습
니다. 한국에서 미리 전화를  넣어두었거든
요. 경훈은 필립 최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
다. 
필립 최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더니 
곧 오세희의 방으로 찾아왔다. 그는 경훈의 
소개로 오세희와 인사를 나눈 뒤,  방을 한 
번 둘러보고는 수화기를 들어 카지노 호스
트를 찾았다.
 이 방하고 이 옆 방에  계시는 분을 펜트
하우스로 모셔. 내가  있는 층으로 말이야. 
최고로 모셔야 할  분들이거든. 필립  최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경훈에게 물었다.
 여행은 힘들지 않았소? 
언제 들어도 필립 최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그러면서도 겸손했다.
 경훈은 이제 오십이 다 돼보이는 필립 최
로부터 이런 공대를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
다. 하지만 필립 최는 결코  경훈을 나이로 
압도하려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경훈은 그 점이 의아했다. 여기는 라스베이
거스, 필립 최의  홈 그라운드였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필립 최의  도움을 받으러 왔
고 그는 이 방면의 전문가였다.  그러나 그
는 거꾸로 무슨 힘든 부탁을 하러 온 사람
처럼 공손했다. 경훈은 그에게서 마치 수도
사 같은 인상을 받았다.
 아니오, 쾌적했습니다. 그나저나  괜히 번
거로움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천만에. 그
런데 어떻게 된 연유인지 자세히 들어보고 
싶소. 일단 장소를 옮깁시다. 필립 최는 경
훈과 오세희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가장 안전한 방이오. 도청 같은 것은 염려
하지 않아도 되오. 여러 면에  세심하게 신
경을 써주는 필립 최를  보며 경훈은 직업 
도박사란 결코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
했다. 자리에 앉아 차 한잔을  마시고 나자 
오세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것은 나라를 위한 일이오. 
이때 필립 최의 얼굴에 냉소가  번졌다. 오
세희가 얘기를 계속 하려  하자 필립 최가 
말허리를 잘랐다.
 하나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소.  이 
일이 어떤 종류의 일이든  나는 즐거운 마
음으로 해드리겠소. 그러나 나라를  위해서
는 절대 아니오. 미안하지만 나는  오 선생
님 같은 애국자가 못 되니까요. 내가 이 일
을 기꺼이 해드리는 것은  이 변호사의 부
탁이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조국이니  뭐니 
그런 단어는 가급적 쓰지 않았으면 좋겠소. 
오세희는 약간 당황했지만  이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알겠소. 
이어 오세희는 필립 최에게 이제까지의 상
황을 있는 그대로 설명해 주었다.
 그럼 일단은 브루스가 가진 것을 도로 다 
잃도록 해야겠군요. 그의 입에서 정보가 나
올 때까지 말이오.   그렇소. 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하오? 바카라는 손님끼리의 싸
움이 아니고  카지노와의 게임이지   않소? 
그러나 필립 최는 그 물음에 대한 대답 대
신 애매한 미소를 띤  채 이야기를 계속했
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 따도록 해야 하구요. 
 `…`…. 
오세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경훈도 커
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세희와 경훈은 단지  브루스가 
잃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이 
도박사는 브루스가  가진 것을  잃게 해서 
정보를 알아낸 다음에는 다시 그가 따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경훈은 마음속
에 잠재해 있던 희미한  죄의식 같은 것이 
씻겨져 내려감을 느꼈다.
‘아, 세상에는  참으로  기인들이 많구나. 
나 같은 범인들로선 그들이 생각하는 각도
나 사는 방법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큰 인물이란  언제나 이처럼  심성이 착한 
모양이다. 내가 이제껏 우수한  인간이라고 
자부해 온 것은 얼마나 허술하고 이기적이
었던가. 나의 가치관이란  기껏 해봐야  나 
하나의 입신양명을 위한  처세술에 불과하
지 않았나.’필립 최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
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내려가서 그가  얼마를 가지고 있는
지 보아둡시다. 그리고 나중에 지금의 액수
까지만 다시 올려주면 되겠지요.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립 최는 앞장서서 두 
사람을 도박장으로 안내했다. 동대문운동장
보다도 세 배쯤 커보이는 카지노였지만, 필
립 최는 누군가를 찾아 몇 마디 하더니 금
방 브루스를 찾아냈다.
 역시 바카라 테이블에 앉아 있군요. 그 정
도 돈을 잃었다면 당연히 바카라를 했겠죠.  
어떻게 금방 그를 찾았소? 이 넓은 카지노
에서. 
 모든 손님들의 정보는 빠짐없이 컴퓨터에 
기록되오. 엄청난 금액의 돈이  왔다갔다하
지만 티끌만한 부정이나 실수도 없는 곳이 
바로 카지노죠. 브루스와 일면식이 있는 오
세희는 두  사람과 떨어져  약간의 거리를 
두고 경훈에게 브루스가  누구인지를 턱짓
으로 알려줬다. 잠시  서서 판이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던 필립 최는 브루스의 반대편
에 앉았다. 브루스는  한창 게임에  몰두해 
있었다.
필립 최는 사람을 불러 이것저것 물어보았
다. 경훈은 그가 브루스의 현재  상황을 확
인하는 것으로 짐작했다.
 1백만 달러 가져와요. 
필립 최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
온 금액은 게임을 하고  있던 사람들을 놀
라게 했다. 1백만 달러라는 금액은  딜러가 
가지고 있는 칩의 합계에 해당하는 것이었
다. 카지노 측은  칩을 날라오기에  분주했
다. 게임은 잠시  중단되고 딜러들은  칩을 
세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안합니다, 여러분. 
필립 최는  게임을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천만에요. 
사람들은 자기의 일은 아니었지만 이런 장
면을 보는 것  자체가 신나는  모양이었다. 
미국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상상조
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을 가진다. 돈을 
가진 자가 곧 정의롭고 강한  자며, 멋있는 
자다.
이윽고 필립 최의 앞에  산더미 같은 칩이 
쌓이자 사람들은 우군을 얻은 듯한 표정으
로 다시 게임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이렇게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라면  필시 실력도 
상당하리라 믿었다. 강자와 같이 게임을 한
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특히 자신감을 잃은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자, 여러분 배팅하십시오. 
딜러의 입에 밴 채근에  따라 사람들은 각
자 칩을 옮겼다.  ‘뱅커’ 혹은  ‘플레이
어’의 두 자리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이 게
임은 무척 단순해 보여  초심자도 쉽게 빠
져든다. 그러나 20~30년의 경력을 가진  도
박사들에게 가장  어려운 게임도  역시 이 
바카라다. 
어느 카지노든  바카라 룸을  따로 마련해 
놓는데, 물론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한 그
곳은 제일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모두 배팅하셨습니까? 이제  마지막 콜입
니다. 
딜러는 필립 최를  흘끗 쳐다봤다.  배팅할 
기미가 안 보이자 바로 카드를 건넸다.
카드는 우선 플레이어에 배팅한 사람들 중 
최고액자에게 보내진다. 처음에는 두  장의 
카드, 그리고 경우에 따라 한 장을 더 받기
도 하고 그냥 이기거나 지기도  한다. 독일
에서 만들어진 이 게임은 상당히 복잡하다. 
뱅커와 플레이어  간의 숫자  관계에 따라 
각각 한 장의 카드가  더 주어지거나 않거
나 한다.
브루스는 이제껏 늘  최고액을 배팅함으로
써 항상 자신이 카드를  받아 쪼아보곤 했
다. 이번 판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중한 손길로 자신의  카드를 귀퉁이부터 
천천히 밀어올렸다. 바카라(0)가 먼저 보이
고 다음으로 올라오는 카드에는 점이 찍혀 
있었다.
 포 사이드. 네 면에 모두 점이  찍혀 있었
다. 10 아니면 9였다.
카드를 들추는 브루스의 손이 가늘게 떨렸
다. 배팅액은 1만 5천 달러. 엄청난 배팅이
었다. 카지노 측과  특별히 배팅  상한액에 
대해 협의하지 않은 한 최고액의 배팅이었
다. 10이라면 상하에  하나씩의 점이  찍혀 
있을 것이다. 9라면 상하는 텅 빈 공간이고 
가운데에 하나의 점이  박혀 있을  것이다. 
가늘게 떨리던 브루스의 손길에 점차 자신
감이 배었다.
 내추럴. 
브루스의 자신 있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8이나 9를 내추럴이라고 한다. 이것은 상대
에게 카드가 한 장 더 갈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뱅커에 배팅한 상대가 한  번에 두 
장의 카드로  이편을 이기지  못하면 그냥 
지고 마는 것이다. 상대는 브루스의 내추럴
을 보자 이내 포기한  손길로 카드를 날려
버리고 말았다. 그가 던진 두  카드의 합계
는 6이었다.
플레이어에 배팅해서 이기면  커미션이 없
다. 반면 뱅커에 배팅하면 5퍼센트의  커미
션을 카지노 측에 내야 한다.  따라서 룰은 
뱅커 쪽에 약간 유리하게 되어  있다. 커미
션도 떼지 않은 1만 5천 달러의 칩을 끌어
당기는 브루스를 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경
외감이 서렸다. 기껏해야 2~3백 달러, 혹은 
5백 달러 배팅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존
재가 어떻게  비칠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브루스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망설임의 기
색이 비쳤다. 그는 원래 이번  판만 이기면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브루스를  바라보
는 사람들의 표정과  다시 한 번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은 요행  심리가 그를 부추기
는 모양이었다.
 모두 배팅하셨습니까? 이제  마지막 콜입
니다. 
다시 반복되는 딜러의 음성에 브루스는 무
의식적으로 손을 칩에 갖다 댔다.  다시 플
레이어에 1만 5천 달러를  갖다 놓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사람들은 다투어 그의 
뒤를 따라 플레이어에 배팅을 했다. 사람들
은 그를 이 판의 리더로 보고 있었다.
 뱅커에 3만. 
너무도 안정된 필립 최의 목소리가 사람들
의 귀에 들어와 박혔다.
 사람들은 필립 최의  얼굴에 시선을 모았
다. 안정된 목소리만큼이나 안정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사람은 얼른  배팅 금
액을 줄이고, 또 어떤 사람은  아예 배팅을 
바꿔놓았다.
브루스의 표정이 상기됐다. 불안에 떠는 모
습이 역력했다. 그러나 이 무서운 판에서도 
인간의 자존심은 고약하게 작용했다.  그는 
이제까지의 영웅적 위치에서  스스로 떨어
지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
였다. 브루스는 오기가 발동하는지  냉소를 
흘리며 필립 최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필립 
최는 게임 이외의 것에는  아무 신경도 쓰
이지 않는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딜러가 
카드 나누는 동작만 쳐다보고 있었다.
카드는 먼저 브루스에게 배달되었다.  브루
스의 가늘게 떨리는 손길이  두 장의 카드 
위에서 잠시 멈추었다. 브루스는 남몰래 심
호흡을 했다. 한 장의 바카라가  먼저 보였
다. 다음은 제법 많은 점이 보였다. 브루스
의 표정이 밝아졌다. 7, 8, 아니면 9거나 10
일 것이다.
 세븐. 
약간의 불안이 깔린  목소리였으나 어쨌거
나 상당한 우위를 점한  데서 나오는 자신
감이 묻어 있었다.  7도 역시 다음  카드를 
받지 않는다. 상대는 8 혹은 9일 경우 무조
건 이기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는 다시 한 
장의 카드를 받는다. 그러나 7이 못  된 상
황에서 한 장의 카드를 더  받아 7을 이긴
다는 것은 확률이 무척  낮기 때문에 플레
이어의 7은 사실 매우 높은 수였다.
필립 최가 뱅커의 카드를 받았다.  그의 손
길은 무심하게 두 장의 카드를 밀어넘겼다. 
6이었다. 7과 6은 상극이다.  6은 7에 대해
서 무조건 지는 것이 룰이다. 한 장의 카드
를 더 받을 기회가 없는 것이다.
 식스. 
필립 최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순간 브루
스는 자신도 모르게 테이블을 쳤다.
 예스. 
참으로 깊은 감회가 밴 목소리였다.
 플레이어 윈. 세븐 오버 식스. 
딜러의 목소리가 채 귀에서 사라지기도 전
에 브루스는 1만 5천  달러를 같은 플레이
어에 놓았다. 기세가  올랐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브루스를 따라 배팅했다.  브루스
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길이 다시금 경외감
으로 물들었다. 이제  필립 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역시 
이 테이블에서는 브루스가  리더라는 의식
이 그들의 눈빛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필립 최를 바라보는 브루스의 눈은 우월감
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 다시 한 번  너를 꺾어주고 말겠다는 
결의가 그의 살벌한 눈길에서 느껴졌다.
 플레이어에 1만. 
필립 최의 다소 기가  꺾인 듯한 목소리가 
테이블 위에 떨어지자 브루스는 적의 어린 
눈길을 거두었다.
 내추럴 플리즈, 캡튼. 
필립 최는 부드러운 눈길을 브루스에게 보
내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당신이 최
고라는 표시였다.
 노 프라블럼(문제 없소). 
브루스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를  점잖게 내
뱉으며 자신에게 배달된  카드를 차분하게 
밀어올렸다. 첫 카드는 3이었다. 다음 카드
를 뽑는  브루스의 손길에  강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투  사이드. 4 아니면  5였다. 
카드를 밀어올리며 가운뎃점을  찾는 브루
스의 눈동자에 잔뜩 쌓인 칩이 반사됐다.
 예스. 
브루스는 카드를 던졌다.
 내추럴. 
합계 8이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기쁨과  더
불어 약간의 후회를 머금었다. 왜  좀더 배
팅하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었다.  딜러는 
무심한 손길로 뱅커의 카드를 뒤집었다. 뱅
커에 배팅한  사람이 없을  때에는 딜러가 
대신 뒤집는다.
 하우에버(그러나)`…`…. 
딜러의 이상한 발음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가 싶더니 이윽고  떨어져내린 카드를 
보고 사람들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
왔다.
 싯(빌어먹을)! 
딜러는 모든 사람들의 배팅을  거둬들였다. 
딜러의 무심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잔
인하게 들어와 박혔다.
 뱅커 윈. 나인 오버 에잇. 
브루스의 눈에 핏발이 서는가 싶더니 다시 
손길이 플레이어로 거침없이 나갔다.  역시 
1만 5천 달러였다. 필립 최의  배팅이 즉각 
뒤를 이었다.
 아임 서포팅 유(당신을  지지하는 배팅이
오). 
브루스가 짐짓 여유를 가장한 미소를 지었
다. 필립 최의 배팅은  5천 달러였다. 다시 
브루스에게 카드가  배달되었다.  이번에는 
브루스의 손길이 유난히 심하게 떨렸다. 브
루스에게는 본전 근처의  배팅이었던 것이
다. 이기면 몇 천 달러를 따는 것이고 지면 
약 2만 달러를 잃는 것이다. 브루스는 세븐
을 뒤집어냈다.
 뱅커 윈. 에잇 오버 세븐. 
딜러의 무심한 손길이 사람들의 칩을 거두
어갔다. 브루스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플
레이어가 네 번 연달아  나오고 뱅커가 두 
번 연달아 나왔다. 이제 어디에  배팅을 할 
것인가. 브루스는 뱅커가 두 번  다 내추럴
로 이긴 것을 중요하게 보고  있었다. 이즈
음에서는 뱅커가 센 것이다.
브루스의 손이 칩을 옮겼다. 칩은 뱅커라고 
쓰인 바닥을 묵직하게 가리며 버티고 섰다. 
필립 최의 배팅이 뒤따랐다. 높게  쌓인 브
루스의 칩에 비해 필립  최의 칩은 형편없
이 낮았다.
딜러가 건네준 카드를 뒤집는 브루스의 손
길에는 신중함이 상실되어 있었다. 두 장의 
바카라가 나왔다. 자신 없는 손길은  또 한 
장의 바카라를 뽑아냈다.
 플레이어 윈. 파이브 오버 나씽. 
브루스는 떨리는 손길로 다시  한 번 칩을 
옮겼다. 이번엔  플레이어  쪽이었다. 필립 
최는 더욱 적은 칩을  브루스를 따라 플레
이어에 옮겼다. 브루스가 매판 1만  5천 달
러를 거는 데 비해 필립 최는 대략 5백 달
러를 배팅했다.
브루스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잔뜩 굳어 있
었다. 건네진 카드를  뒤집는 손길이  더욱 
심하게 떨렸다.
 뱅커 윈. 에잇 오버 파이브. 
카지노의 음모
그 판 이후로  브루스는 근 두  시간 동안 
계속 풀 배팅했다. 이제 사람들은  모두 브
루스와 반대로 배팅하고 있었다. 카드는 희
한하게도 브루스의 반대편으로만 떨어졌던 
것이다. 자포자기한 브루스의 눈이 점차 초
점을 잃었다. 브루스는 무슨 까닭인지 사람
들과 반대로만 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기는 쪽과 반대로만 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필립 최는 브루스와 엇
갈려 이기는 쪽으로만 배팅하고 있었고, 사
람들은 희희낙락거리며 필립 최를 따라 칩
을 옮겼다.
누가 바카라를 쉬운 게임이라고  말했던가. 
두 시간 후 브루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배팅한 2백 달러마저 
잃고 나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기다 말고 필립 최의 뒤에 멈춰섰다.
필립 최 앞에 수북하게 쌓인 칩을 넋을 잃
고 바라보는 브루스의 얼굴은 끝없는 회한
과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필립  최는 가
끔씩 그에게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흔들었
다. 왜 그런 식으로 게임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제스처였다.
브루스는 방으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자 단  한 걸음도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는 가끔  자신을 돌
아보며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고갯짓하
는 필립 최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억지
로 웃음을 지었다.  그것만이 절망에  빠진 
브루스가 바깥 세계와 교신할  수 있는 유
일한 신호였다.
이윽고 필립 최는 50만  달러나 불어난 칩
을 밀어내며 일어섰다.
 좀 쉬어야겠어. 이 칩을 보관해 줘. 
딜러들은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필
립 최의 칩을 세었다. 
황송한 표정, 그것은 이긴 자에  대해 카지
노 딜러들이 보이는 본능적인 모습이다. 브
루스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는 패배자일 뿐
이다. 패배자란 늘 비참하지만  카지노에서
의 패배자만큼 처량한 존재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패배자의 내면적  갈등을 상상하
면서 동정심과 복수심이  교차하는 눈길로 
쳐다본다. 복수란 불과 얼마 전까지  온 판
을 호령하며  빅 배팅을  해대던 화려함에 
대한 비난인 것이다.  ‘우린들 왜  그렇게 
화려하게 쳐대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마치 겁쟁이처럼 조심하면서  쩨쩨한 배팅
으로 일관한 것은 바로  당신처럼 되지 않
기 위해서였다’라는   시선을 패배자에게 
사정없이 쏘아대는 것이다.
브루스는 비록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안됐
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 속에 담
겨 있는 다른 의미를 너무도 잘 알았다. 그
러나 필립 최는 달랐다. 브루스는  필립 최
가 자신의 오기 섞인  배팅에 대해서 여러 
번 지지를 해준 것과  아울러 자신을 바라
보는 눈길에서도 어딘지 따스함을  느꼈다. 
그 느낌은 카지노에서는 처음 대해보는 낯
선 것이었다.
브루스는 카지노 호스트를 통해 필립 최가 
진정한 도박사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기분에 따라서는 턱없는 짓을 하는 괴짜라
는 사실도. 브루스는 무엇보다도 그가 한국
인이라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한국인
에게는 자신도 할 얘기가 있었던 것이다.
브루스는 필립 최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
이자 은밀히 뒤쫓았다. 
그리고 필립 최가 엘리베이터를 타기 직전 
간신히 말을 붙여볼 기회를 잡았다.
 게임을 참 잘하시더군요. 
필립 최는 브루스를 보자 무척 반가워하다
가 이내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는 왜 그렇게 했소? 그렇게 흥분해서
는 이길 수가 없잖아요.
  고통스럽습니다.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
겠어요. 
 참`…`…. 
필립 최가 안타까운 한숨을 남기고 엘리베
이터를 타려 하자 브루스는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저어`…`…. 
 …`…?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얘기요? 
필립 최의 목소리가 갑자기 건조해졌다. 브
루스는 바뀌어버린 필립 최의 반응에 그만 
용기를 잃고 말았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데요? 
 어디 좀 앉아서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식사를 하려던 참이오. 
 그럼 식사를 같이할 수 없겠습니까? 
브루스는 필사적이었다. 어려운 말을  간신
히 뱉어내는 브루스의 표정은 안쓰럽다 못
해 처참할 정도였다.
 식사를? 
필립 최는 망설이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음, 그럽시다. 
필립 최는 앞장서서  중국 식당으로  갔다. 
브루스는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필립 최가 
요리를 서너 가지 시킬  때까지 계속 자신
이 어떻게 잃었는지, 얼마를 잃었는지에 대
해 반복적으로 설명했다. 이런 브루스의 얘
기를 필립 최는 지루한 표정 한번 짓지 않
고 들어주었다. 요리가 나오고 술이 얼근해
지자 브루스는  드디어 마음에  품고 있던 
얘기를 꺼냈다.
 언젠가 저는 2천 달러를  가지고 20만 달
러를 딴 적이 있었습니다.  오호, 그래요? 
 아주 침착하게 했죠. 저는 그것을  잃으면 
끝이라는 생각에 최저  배팅으로 일관했습
니다. 시간과의 싸움이었죠.   시간과의 싸
움? 대단하군요. 바로 그게 게임에서  이기
는 원칙이지. 어떻게  그런 원리를  깨달았
소? 브루스는 용기를 냈다.
 저는 꼭 따야만 할 때는 달라집니다. 절대
로 아까와 같이 한번에  치거나 하지는 않
죠.  그래야만 하오. 
 사실은 내일이면 집에서  돈을 부쳐올 텐
데, 오늘 이렇게  허탈한 상태에서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
  말씀해 보시오. 
 2천 달러만 좀 빌려주시면 내일 갚아드리
겠습니다. 브루스는 한번에 1만 5천 달러를 
배팅하던 때와는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단
돈 2천 달러를 구걸하는 그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필립 최는 표정을 냉랭하게 바꾸
었다.
 잘 아시겠지만 도박판에서는 절대로 돈을 
빌려주거나 받는 법이 아니오. 운을 바꾸기 
때문이지. 푹 쉬면서 기다렸다가 내일 돈이 
오면 게임을 시작하시죠. 브루스는 애가 닳
았다. 필립 최라는 인물은 손에  잡힐 만한 
거리에 있는 듯하면서 아니었다. 그러나 여
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면서 매달렸다.
 미안합니다. 너무 잘 알지만 워낙  사정이 
다급해서`…`…. 이제   브루스의 입에서는 
집에서 돈을  부쳐온다는 등의  얘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잘생긴 모습에 어울리
지 않게 비굴한 기색이 얼굴에 가득 찼다.
 잘 아시겠지만 나는 프로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카지노 호스트가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더군요.  필립 
최는 잠시 브루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브
루스는 그의  시선을 받자  최대한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평범한 사람들을 싫어하오. 뭔가  특
별한 인간을 좋아하지. 
알겠소? 브루스는 무슨 말인지  몰라 필립 
최의 입에 시선을 모았다.
 남들은 나를 괴짜라 부르지. 아무리  불쌍
해도 평범한 인간을  돕지는 않소.  그들은 
결국 거품처럼 사라져버리고  말기 때문이
오. 
나는 뭔가 좀 특별한 사람,  특별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가끔 도와주
기도 하오. 브루스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그림자가 스쳐갔다.
 사실 저도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
은 아닙니다. 그러나 필립 최는  믿지 못하
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네. 
브루스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떠올랐다.
 어떻게 특별합니까? 
 혹시 한국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소만`…`…. 
 아, 잘되었군요. 사실 저도 한때 한국에서 
근무했거든요.  무슨 근무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을  꼽자면 아마 
도박일 것이다. 도박에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무엇을 못하랴. 브
루스는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 
그러나 브루스는 마지막 순간 망설였다. 본
능적인 보안 의식이 그를 붙들어맨 것이다.
 뭐,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소. 
필립 최는 흥미 없다는  듯이 술잔을 입에 
갖다 대면서 눈길로는 계산서를 훑었다. 브
루스는 당황해하면서 술을  입에 털어넣고
는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특수한 일이었습니다. 혹시 주한 미군  철
수에 대해 아십니까?  미군 철수요? 
 사실 제가 주한 미군 철수를 막은 사람입
니다. 당시 미군이 철수했다면  한반도에서
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을 겁니다. 브루스는 
초조하게 필립 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표정에 변화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자신
의 목숨이 좌우될 판이었다.
 나는 한국에 대해 잘 모르오. 부모가 한국
인일 뿐이지 나는  미국 시민이오.  어려서 
여기로 왔으니까. 필립 최가 시큰둥한 표정
을 짓자 브루스는 다시 다급해졌다.
 당시 한국의 정보부장  김재규와 제가 미
군 철수를 막아냈습니다.
 우리가 아니었으면  한국은  북한의 무력 
앞에 그대로 주저앉았을  테고, 지금  같은 
발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한단 말이오?   아무리 
돈이 필요하다 해도 그런  억지는 쓰지 마
시오. 그리고  김재규 부장이라구요?  그가 
죽고 없다고 해서 함부로 얘기하지는 마시
오.  정말입니다. 저는 김 부장과  보통 사
이가 아니었습니다. 필립 최는 귀찮다는 듯
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렇다 치고 당신이 어떻게 주한 미군 철
수를 막았단 말이오?  당시 카터 대통령은 
주한 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걸었죠. 과연 
카터는 대통령이 되자 주한 미군을 차례로 
철수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의  한국 대통
령을 미워한 카터는 오히려 철수에 가속도
를 붙였어요. 필립 최는 손을 내저었다.
 잠깐, 나는 그런 일에  흥미가 없소. 하지
만 흥미를 느낄 만한 내 친구가 있지. 그는 
소설가요. 만약 당신이  그런 얘기를  하고 
싶다면, 그 친구를  부르겠소. 어쩌면 그가 
당신 이야기를 소설의 소재로 삼을지도 모
르지. 만약 그가 흥미 있어  하면 당신에게 
2만 달러를 주겠소.  네? 얼마라구요? 
 2만 달러. 
 오, 하느님!  아마 그  친구분은 틀림없이 
흥미로워하실 겁니다. 
분명합니다. 브루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2
만 달러라는 금액은 이  절망에 빠진 사나
이를 완전히 흔들어놓았다.
 그럼 내일 만납시다. 
 아니, 그 친구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랜드캐니언에 관광  갔소. 하지만  전제 
조건이 있소. 내 친구가 흥미  있어 한다는 
전제하에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오.   제
발 그 친구분에게 제가  꼭 이야기할 기회
를 주십시오.  노력은 해보겠지만 그  친구
가 흥미 있어  할지는 모르겠소.  브루스는 
초조했다. 하지만 내일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필립 최는 노련하게 상대의 
심리를 조종했다.
두 개의 태양
다음날 식당에  나타난 브루스의  두 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2만 달러라면 그가 회
생을 꿈꾸어 볼 수 있는 돈이었다. 그가 간
밤을 어떻게 보냈을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
었다. 초조한 브루스에게 경훈의 여려 보이
는 얼굴은 위안이 되었다.
 여기는 내 친구 미스터 리요. 상당한 재산
가지만 취미로 시나 소설을 쓰고  있소. 경
훈과 악수를 나누는 브루스의 손이 떨렸다.
 주한 미군 철수가 어떻고 했다면서요? 
경훈의 시큰둥한 태도는  브루스에게 절망
을 안겨주었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얘
기가 있습니다.  저는 별로 흥미가  없습니
다. 그저 취미로 쓰는 글인데  무슨 흥미가 
있겠습니까? 브루스는 다급해진 나머지 눈
물마저 글썽이며 사정했다 제발`…`…. 
경훈은 난감한 눈길로 필립 최를 바라보았
다. 필립 최는 알  바 아니라는 듯  양손을 
들었다 놓았다. 경훈은  뭐 이런  재미없는 
사람을 만나라고 했느냐는 듯 필립 최에게 
질책의 눈길을 던졌다.
 한번 들어나 보지 그래요. 
필립 최가 넌지시 권유하자  경훈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무관심한 표정
으로 말을 꺼냈다.
 그럼 어디 들어나 보죠. 한국에서 무슨 일
을 했습니까?  육군 중위로서 주한 미군의 
정보 및 공작을  담당했죠. 그리고  한국의 
중앙정보부장에게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음, 그래요, 그러면 정보부장과 인간적으로 
가까웠겠군요.  네, 그래요. 
 정보부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정이 많고 의리가 강했습니다. 
브루스는 경훈이 질문을  던지자마자 바로
바로 대답했다.
 그런데 선생의 그  정보 및  공작 임무와 
정보부장은 어떤 연관이 있었습니까?   우
리는 일단 한국의 최고  권력자 곁에 우리 
사람을 심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인물이  김재규 정보부장이
었죠.  최고 권력자라면  대통령을 말하는 
겁니까?  네. 
 어떻게 정보부장을 당신네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지요?  우리는 김 부장에게 최고의 
정보를 제공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이중의 
효과가 있었지요. 먼저 그는 우리의 예상대
로 대통령에게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
다. 그가 정보부장으로서는 건강도 좋지 않
고 정치 공작에도 서툴렀지만 대통령의 신
임을 계속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에게
서 나가는 고급 정보 때문이었지요. 이것을 
너무도 잘 아는 그는  우리와 밀접한 관계
를 갖는  것만이 자신이  정보부장 자리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
의 효과란?  우리도 필요한 정보를 그에게
서 공급받았습니다.  즉  상부상조한 거죠.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간단하지
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선생이 주한  미군 철수를 막았다
는 것은 무슨  얘깁니까?  언젠가  미국을 
방문한 김재규  정보부장에게 CIA의  터너 
국장이 한 가지 소원만  말하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김 부장은 정색을 하고
는 주한 미군 철수를  중단해 달라고 하더
군요. 나는 그것이  중요한 이야기다  싶어 
최선을 다해서 터너 국장께  전달했습니다. 
단순히 통역만 한 게  아니라 전력을 다해 
한반도의 상황까지 전달했던 겁니다.  나의 
눈앞에는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그 
위대한 한강의 기적이 포화로 뒤덮이는 광
경이 선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미군 철수를 막는 것이 내가 
한국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
각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근무하게 된 
것 자체가 신의 섭리라고 생각하고는 혼신
의 힘을 다해 터너  국장께 설명했던 겁니
다. 사실 그것은  통역이 아니었습니다. 차
라리 절규에 가까웠습니다. 브루스의  텁수
룩하게 웃자란 수염이 가늘게 떨렸다. 그때
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 브루스의 입에
서 터져나오는 소리야말로 절규였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필립 최의 얼
굴에 가느다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런데 왜 터너  국장은 김재규 정보부장
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했습니까?   하나는 
거대한 시험이라고나 할까요, 우리는  김재
규라는 인물을 테스트했던 것입니다.  그의 
그릇 크기를 시험했던 거죠. 
그에게 과연  나라의 큰  고민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또 하나는 김재규가 그런 저돌적인 인물일 
경우 확고하게 우리  편으로 만들어두자는 
뜻이 있었습니다.  김 부장은 왜  하필이면 
주한 미군 철수를 중단해 달라고 부탁했을
까요?  그것은 그  당시 대다수  한국민의 
바람이었습니다. 또 김 부장으로서는  자신
의 자리를 영구히 보전하는, 그리고 우리로
서는 우리 사람을 최고  권력자 옆에 언제
까지나 근접시켜 놓는 최선의  방법이었죠. 
사실 그때 한국의 대통령은 몹시 불안해하
고 있었습니다. 
미군 철수는 바로 박  대통령의 실권을 의
미하는 것이었으니까요. 
미군 철수를  막지 못하면  보수 중산층의 
이탈은 물론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든 시민 
봉기가 일어나든 그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 뻔했습니다. 박 대통령
은 매일  고민을 하고  회의를 했습니다만 
카터 대통령의 주한 미군  철수 의지는 요
지부동이었습니다. 그러니  정보부장으로서 
김재규의 고민도 당연히 미군 철수를 막는 
일이었죠. 그러나 누가 미국 대통령의 결정
을 저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터너 국장은 김재규 부장의 말을 듣고 즉
각 대답했습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김 부장
의 특별한 부탁이니만큼  들어주겠다고 말
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죠? 
 터너 국장은 신속히  남북한 군사력 비교
라는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북한의  군사력
이 남한보다 세 배는  강력하고 북한은 그 
어느 때보다 호전적이라, 미군 철수는 바로 
남한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리고 그   자료를 은밀히   《워싱턴포스
트》에만 넘겨주었습니다. 이슈화시키는 방
법이었죠. 거대한 신문 하나에만 특종을 만
들어주면서 붐을 조성하는 겁니다.  잘되었
나요?  물론입니다. 삽시간에 워싱턴이 들
끓기 시작했죠. 언론과 공화당 의원들이 한
국이 공산권으로 넘어가는 데 대해 책임을 
지겠느냐고 카터 대통령을 몰아붙였습니다. 
한국이 넘어가면 일본도 넘어가고,  미국은 
아시아를 몽땅 소련과 중국에 넘겨주게 되
며, 그 다음은 유럽에 이어  미국까지 모두 
공산주의의 제물이 되고 마는데, 도대체 카
터 대통령은 뭐하는 사람이냐는 여론이 도
처에서 물 끓듯  했지요. 심지어는  민주당 
의원들조차도 카터 대통령을 공격했습니다. 
결국 카터 대통령은 철수를 중단시킬 수밖
에 없었지요. CIA가 마음먹고 나서서 하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김재규 부장은 박 
대통령에게 큰 칭찬을 받았겠군요? 선생도 
한국 정부로부터  훈장이라도 받았습니까?   
아니, 나는 곧 교체되었습니다. 
 이상하군요. 왜 교체되었습니까? 
 당시 나도 의외라고 생각했습니다. 상례에
서 벗어난 인사였으니까요.   교체 시기가 
아닌데 교체되었다는 얘깁니까? 
 그렇습니다. 
 후임으로 누가 왔습니까? 
 홀리건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계급은요? 
 소령이었습니다. 
 이상하군요. 선생은 중위였는데 소령이 그 
일을 맡으러 오다니. 
그도 영어를 가르쳤습니까?  그것은  모릅
니다. 나는  곧  미국으로 떠났기   때문에.  
홀리건은 원래 주한 미군이 아닌가요?  네, 
그는 본토에서 왔습니다. 희미하게 들린 소
문에 따르면, 그는  국방성 소속이  아니라 
CIA 본부에서 나온 전문가라는 것  같았습
니다.  그런 경우도 있나요? CIA가 군인으
로 위장해서  오기도  합니까?  네,  군과 
CIA는 사람이나  업무를 교환하기도  합니
다. 그래서 두 가지 신분을 다 가진 사람도 
있지요.  그런데 본토에서 온 사람이  바로 
정보부장을 담당할 수 있습니까?  그는 한
국어도 못하잖아요?   아닙니다. 홀리건은 
한국어를 꽤 유창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선생은 그후 한국에 없었습니까? 
 나는 니카라과로 옮겼습니다. 새로운 임무
를 맡았죠.  그후 그 일에 대해 들은  적은 
없습니까? 
브루스는 더 할 얘기가  없는지 경훈의 눈
치를 힐끔힐끔 봤다.
 그후는 잘 모르겠습니다. 
 알았습니다. 
경훈은 별다른  흥미가 없다는  듯 포크를 
집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브루스는 조마
조마한 심정으로 경훈의 표정을 관찰했다.
 참, 언젠가 내게 소설의 소재를  주겠다고 
한 분이 있었는데, 그분도 역시  주한 미군
이었습니다. 제럴드 뭐라고 그랬는데`…`…. 
 혹시 제럴드 현 아닌가요? 
 아, 그래요. 제럴드 현이었습니다.  그분을 
압니까?  네, 알다마다요. 나의 상관이었습
니다. 
브루스는 경훈이 제럴드 현의 얘기를 꺼내
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주한 미군 철수와  관련해서 제럴드 현이 
한 일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 일은 
나하고 김재규 부장 둘이서만 했던 일입니
다.  지금 제럴드 현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후로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소문도 못 들었습니까? 
 정신이상으로 전역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만 만나거나 하지는  못했기 때문
에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릅니다.   그
분은 왜 정신이상이 되었습니까? 원래부터 
문제가 있었나요?  아닙니다. 제럴드 현은 
매우 날카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그렇
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경훈은 
이쯤에서 끝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알았습니다.  
경훈이 말을 마치자 필립  최는 측은한 표
정을 짓고 있는 브루스를 데리고 나갔다.
정보 계통에서 잔뼈가 굵은 오세희는 역시 
판단이 날카로웠다. 그는 경훈에게서  브루
스와의 대화를 전해듣고는 즉각 소리쳤다.
 이번 일은 된 것도 안 된 것도 없는 결과
가 되었군.  무슨 말씀입니까? 
 브루스에게서 알아내야 할 일이 홀리건이
란 자에게 넘어갔다는 말이오. 아마  그 홀
리건이 브루스보다는 훨씬  심각한 얘기를 
김재규와 나누었을 거요.  이 변호사, 생각
해 보시오. 터너 국장이라는 놈이 김재규에
게 주한 미군 철수를  막아주겠다고 한 것
은 고도의 심리 전술이었소.  어떤 심리 전
술이죠? 
 김재규에게 강한 믿음을 주는 거지.  머릿
속에서 그림을 그려보시오, 주한 미군 철수
를 두고 끙끙대며 안절부절못하는 박 대통
령과 주한 미군 철수를 막아주겠노라고 흔
쾌히 수락하는 터너 국장의 당당한 모습을.  
박 대통령이 너무도 초라해 보였겠군요. 
 그렇소, 마인드 컨트롤이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당시의 상황이 짐작 가는군요. 
 이후 김재규의 가슴속에는 하나의 태양이 
더 뜬 거요. 주인이  하나 더 생겼던  것이
지.  바로 미국이라는 태양. 
 그렇소. 김재규의 가슴속에는  미국이라는 
새로운 주인이  차츰 자리를  잡기 시작한 
거요. 초라한 한국 대통령을 서서히 밀어내
면서 말이오.  박 대통령으로서는 서글프기 
짝이 없는 일이었군요. 가장 믿었던 정보부
장이 대통령보다 미국을 더 상전으로 생각
하고 있었다니.  김재규로서도 어쩔 수  없
었을 거요. 일단 미국이 노리고  공을 들이
면 그렇게 안 될 수 없을 테니까. 김형욱을 
보시오. 
정보부장 시절 미국놈들이 박 대통령의 뒷
조사를 해달라고 하자, 박 대통령에게는 알
리지도 않고 샅샅이  조사하여 미국놈들에
게 갖다 바치지 않았소?  한국  사회의 서
글픈 현실이군요. 대통령의 최측근조차  미
국을 추종했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했
겠습니까?  조국과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잃어서 그렇소. 비록  과학과 물질  문명이 
좀 뒤떨어졌다고는 하나  왜 한국인들은 5
천 년을 이어온 민족의  저력을 생각지 못
하는가 말이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홀리건이라는 자를 추적해야겠소. 김재규는 
죽고 없으니 그를 추적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겠지.  그러나 쉽게 입을 열까요? 어
쩐지 홀리건은 녹녹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오세희도 자신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해봐야지 어떡하겠소. 나는 미국에
서 가장 비싼 탐정을 고용해서라도 반드시 
그를 찾아내고 말 거요. 이  변호사는 어떻
게 할 작정이오?  만약 이  10·26이 김재
규의 우발적 범행이  아니라면, 즉  누군가 
배후에 있었다면, 박  대통령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 원인을 밝히는  것이 가장 중요
하다고 봅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현실, 우
리의 한계에 대해 분명히 인식할  수 있고, 
앞으로의 국가 경영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요.  맞는 말이오. 역사는 언제나 되풀이되
고, 그 진상을  모르는 인간에게는  예방이 
있을 수 없소. 
오세희는 경훈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럼 나는 먼저 가겠소. 몸조심하고 또 연
락합시다. 경훈은 늘 바삐 움직이는 오세희
를 보며 그가 성공한 데는 그럴 만한 충분
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호텔 로비까지 오세희를  배웅하고 돌아오
던 경훈의 시야에 브루스가 들어왔다. 브루
스는 가방을 들고 체크아웃을 하다가 경훈
을 보자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경
훈에게 비굴한 모습으로 사정했던 것을 지
우기라도 할  양으로 다소  거만하게 손을 
내밀었다.
 필립 최가 내  돈을 다 찾아주었소.  운이 
좋았지. 
경훈은 놀랐다.
 아니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롱 플레이어가 나왔소. 열여섯 번이나  연
속해서. 
 그럴 수가? 
 그는 역시 프로요. 강철 심장이오. 
브루스는 필립 최에게 감탄과 더불어 존경
을 표하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잘됐군요. 다시는 도박을 하지  마
십시오. 
 후후, 그건 당신이 염려할 문제가 아니오. 
다만 다시는 당신한테 소설의 소재를 주기 
위해서 주절거릴 일은 없을 거요.  이젠 지
옥에 빠질 리 없으니까. 브루스는 선글라스
를 끼고는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필립 최
경훈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확률이란 것을 배울  때 동전의 앞면
이 열여섯 번이나 연속으로 나올 확률은 2
의 16승분의 1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열여
섯 번이나 플레이어가 연달아서  나왔다면, 
대충 암산해도 그 확률은 6~7만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경훈은 잠시 혼돈스러웠다. 수학의  법칙이 
도박이라 해서 적용되지  않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브루스는  6~7만분의 1이란 
확률을 잡아냈단 말인가.
경훈은 머리를  흔들며 필립  최의 방으로 
갔다. 필립 최는 경훈을 보자  호탕하게 웃
었다.
 이 변호사, 어떻소? 소득이 있었소? 
 물론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브루스의 돈을 그렇게 짧은 시간에 찾아줄 
수 있었습니까?  하하, 샴페인이나 한잔하
면서 기분을 좀 풉시다. 
필립 최는  홈 바에서  샴페인을 꺼내서는 
두 개의 글라스에 따랐다 건배! 
 위하여! 
 하하, 이 변호사. 놀랄 것 없소. 그 시간에 
4백 달러를   땄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소?  
그거야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똑같소. 20달러씩 배팅하여 스무 번을  이
기면 4백 달러고, 2만 달러씩  배팅하여 스
무 번을 이기면  40만 달러요. 4백  달러를 
따는 사람들은 세상에 흔하지.  그러나  누
가 감히 한번에 2만 달러를  배팅할 수 있
겠습니까?  칩을 돈으로 보지 않으면 가능
하지. 돌멩이로 생각하는 거요.  보통 사람
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렇소. 그래서 사람들은 한번 잃으면  회
복하지 못하는 거지. 인간의 심리란 도박을 
하는 데 있어 가장 거추장스런 거요. 큰 방
해가 되지. 잃을 때에는 화가  나서 곱으로 
씌워 죽고 딸 때는 불안해서 쥐꼬리만큼씩 
배팅하는 거요.  그게  인간이라는 존재지.   
그럼 도박사는 그런 심리를 극복한 사람인
가요?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소.  도
박사는 그 두려움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
로운 존재랄까, 아니 그것보다는 그 두려움
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때론 그것을 이용
하거나 피한다고   얘기하는 편이  옳겠지.   
두려움을 이용한다구요? 
 그렇소, 언제나  겁을 집어먹고  테이블에 
앉는 거요. 그래서  가장 안전한  플레이를 
지향하지. 가령 1백  개의 칩을 가지고  한 
개만 배팅하는 거요.  그렇게 해서 이길 수 
있나요? 
 그렇게 이겨야만 하오. 위험하게 이겨서는 
안 되지. 위험하게 이기는 것은  아무리 이
겨도 가치가 없소.  도박이란 게  본질적으
로 위험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 승부는 오
로지 운에 의해 좌우될 뿐이구요.  필립 최
는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한동안 침
묵이 흘렀다. 경훈은  지난번에 필립  최가 
프로는 운을 얘기하지 않는 법이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였다.
 나는 운과는 상관없이  항상 이기는 길을 
연구하는 데 오랜 세월을 보냈소.  역시 깜
짝 놀랄 만한 대답이 필립 최의 입에서 튀
어나왔다. 그전에도 필립 최가 도박에서 이
기는 힘이란 게 있다고는 말했지만, 이처럼 
운과 상관없이 항상 이기는 길을 연구했다
고 하자 경훈은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그래서요? 과연 그런 길이 있습니까? 
 그렇소. 
필립 최의  대답이 묵직하게  경훈의 귀를 
눌렀다. 경훈의 머릿속에 불현듯  케렌스키
가 떠올랐다. 케렌스키라면 이 대답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까 생각하면서  필립 최에
게 물었다.
 케렌스키 변호사님도 깊은 연구를 하셨다
는데 왜 실패했을까요?  미스터 케렌스키, 
보통 사람이 아니었지. 그는 처음에는 도박
을 철저히 수학적으로 파악하려 들었소. 사
실 수학자나 과학자들이 가장 도박에 약한 
사람들이오. 늘 그들이 제일 먼저 잃지. 그
들은 기(氣)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무한한 
수양의 세계로 깊이 들어갈 수가  없소. 도
박을 보면 동서양 문화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데 서양인들은 대체로  공격적이고 도
전적이오. 참고 기다리는 수양의 단계를 넘
어 참선으로까지 들어가는 정(靜)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지. 진정한  힘이란 바로  그 
기다리고 참는 것에 있는데 말이오.  못 참
으면 도박은 끝이오. 케렌스키는 오래지 않
아 수학의 세계를 넘어 이 정의 세계를 깨
달았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이기는 길
에 이르는 원리는 파악했지만 자신의 마음
을 다스리는 데는 실패했지. 철저히 자기를 
비워야 하는데 그게 안 된 거요. 자기를 버
려야 하오. 자존심을  버리고 자기가  이룬 
것을 버려야 하오.  또한 성품이  선량해야 
하오. 착하지 않으면 역시 이길  수 없으니
까.  최 선생님은 마치 도인처럼  말씀하시
는군요. 
 비슷할 거요. 도인만큼이나 도박사도 정신 
세계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니까. 도박에서
는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오.   감정
을 다스리는 일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
은데요.  아니오, 도박에서는  그것이 가장 
어렵소. 예를 들어 절에서 10년  이상 도를 
닦은 승려의 방에 천하절색의 미녀가 매일 
들어온다고 합시다. 승려는 이성으로는  그 
미녀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실제로는 아마  파계하고 말 거
요. 도박에서 감정을 다스린다는 것은 그것
보다도 훨씬 어려운 일이지. 그러니 도박에
서 항상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오. 
말을 마친 필립 최는 홈 바에서 술과 얼음
을 꺼내 온더록스를 만들어서 가지고 왔다. 
경훈이 술잔을 넘겨받으며 물었다.
 최 선생님은 어떠십니까? 
 작게 지고 크게 이기지. 감정을  조절하면
서. 
 도박에는 운이라는  것이  따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거개의 도박사들은 소위  이 끗
발을 중시하는 게 아닌가요?  한두  번 끗
발이 붙을 수는 있겠지. 그러나  그런 것은 
모두 궁극적인 패배를 앞당기는 현혹에 불
과하오. 경훈은 필립 최의 철학이  매우 견
고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의 한
마디 한마디는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절절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터득한  철학은 
인류의 스승들이 제시했던 삶의 원칙과 다
를 바 없었다.
경훈은 『장자』에 나오는 소 잡는 사람의 
얘기를 떠올렸다. 하찮은 직업이지만  소를 
잡는 것도 한 가지만  성심성의로 하다 보
면 나중에는 칼이 힘줄이나 뼈 사이사이로 
빠져다녀 칼을  갈지 않고도  순식간에 소 
한 마리를 잡는다고 했다. 매일  승부를 하
면서도 그 좁고 좁은  승패의 갈림길 사이
를 빠져다니는 필립 최  역시 어느 정도는 
도인의 경지에 올라 있는 듯했다.
경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필립  최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자, 이 변호사, 이제는  내가 이 변호사에
게 부탁을 하나 해도 괜찮겠소? 뜻밖의 얘
기였다.
 `…`…? 
 케렌스키에게서 이  변호사의  얘기를 몇 
번이나 들었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천
재라고. 사실 그래서  몹시 만나고 싶었소.   
케렌스키 변호사님의  과찬입니다.  그분은 
천재 예찬론자시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만족시켜 줄 사람을 찾아 억지로 짜맞추는 
격이었죠.  어쨌거나 상관없소.  나도 사람 
보는 눈은 있으니까. 하여튼 내  부탁을 들
어줄 테요?  물론입니다. 
경훈은 달리 대답할 도리가 없었다.
 이 변호사의 머리를  좀 빌려줄  수 있겠
소? 
 제 머리를요? 
 그렇소.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일이  있는
데 혼자서는 결론을  내기가 어렵소.  필립 
최의 얘기를 듣자 경훈은 본능적으로 호기
심이 발동했다.
 무슨 일입니까? 한번 들어보고 싶은데요. 
경훈이 관심을 보이자 필립 최는 기다렸다
는 듯이 서두를 꺼냈다.
 김형욱이란 사람을 알고 있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김형욱 
말입니까? 
 그렇소. 
 물론입니다. 
 그의 실종과  관련한 내용이오.  지금까지 
나는 그의 실종을 추적해 왔소.  하지만 역
시 미궁에 빠져 있지. 결론도  아마 추리로 
끝날 수밖에 없겠지만`…`….  실존했던 한 
사람의 실종을 추리로 결론  낼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 변호사의 머리를 좀 
빌려보자는 거요.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이 
변호사라면 추리 이상의 뭔가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소.  최 선생님이  못하시
는 일을 제가 감히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
까? 경훈은 필립 최의 머리가 자신에 못지
않다고 생각했으므로, 머리를 빌리자는  그
의 얘기가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필립 
최는 그런 경훈의 생각을 꿰뚫어보는 듯했
다.
 우리는 머리가 다르오. 나에게는 참고  수
양하는 머리가 있는 반면 이 변호사에게는 
날카로운 직관이 있소. 김형욱 사건을 분석
하는 데는 이 변호사의  머리가 훨씬 나을 
거요.  그럼 한번 말씀해 보시죠. 
경훈은 더욱 호기심이 커졌다. 파리에서 증
발해 버린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그의 
실종을 놓고 이제껏 수많은 추측이 난무했
지만 누구도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경훈은 필립  최로부터 이런  얘기를 듣는 
것이 의외였으나, 그의 무게로 볼  때 근거 
없는 추측에 다른 하나를 보태는 무의미한 
작업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신비한 사나
이 필립  최가 누구보다도  폭넓게 정보를 
접하고 있으리라는 신뢰감이 들었다.
 나는 그의 실종  직전의 행적을  보면 이 
미스터리가 풀린다고 생각하오. 다만  내게
는 완벽하게 추리해 낼  머리가 없을 뿐이
지.  
같이 생각해 보죠. 그런데 최  선생님은 김
형욱과 무슨 각별한 관계셨습니까? 어째서 
그의 실종을 추적하셨나요? 
김형욱 실종 미스터리
 사실 내가 도박을 시작한 것도 어쩌면 김
형욱 그 사람 때문인지 모르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사람은 참 멋있었소. 나는 그에게서 이 
메마른 현실에서 자신의  세계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았소.  어땠는데요? 
 김형욱은 항상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도
박을 했소. 나는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할 
액수를 배팅하며 좌중을 노려보던 그 매서
운 눈길을 잊을 수가 없소.  황색인들을 깔
보던 모든 미국인들이 존경과 두려움에 떠
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지. 나는 그것을 
보며 유색 인종 이민자도  그런 대접을 받
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소.  동기
가 재미있군요. 
 김형욱은 예측할 수  없는 괴상한 행동을 
즐겼소. 마치  돈키호테처럼  말이오. 그는 
그렇게 이민 생활의 외로움을 해소하고 있
었소.  김형욱이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김형욱은 카지노 측에서 제공한 보디가드
를 수시로 두들겨팼소. 
그가 배팅한 후면 보디가드들은 항상 긴장
을 하고 있어야 했지. 
언제 뒤로 돌면서 따귀가 날아올지 몰랐거
든. 그는 크게 배팅을 했다가  잃으면 어김
없이 뒤로 돌면서 등뒤를  지키고 서 있는 
정장 차림의 보디가드들에게  따귀를 날렸
소. 그래서 보디가드들은 그가 게임하는 것
을 지켜보다가 잃으면 황급히  뒤로 한 발
짝씩 물러섰지. 그러자 김형욱은 수법을 바
꿨소. 어떤 때는 이겼을 때도 뒤로 돌며 따
귀를 날렸고 반대로 졌을  때도 후하게 팁
을 뿌렸지. 그러자 보디가드들은 당황했소. 
잃고 따는  걸로는 뭐가  날아올지 짐작할 
수 없었으니까. 어떤 때는 따귀  대신 후한 
팁이 날아오니 보디가드들은  멀리 가지도 
못하고 가까이 가지도 못하는 희한한 촌극
을 연출했소.  김형욱은  사람들을 놀렸군
요. 
 아마 사람보다 돈을 높이 보는 사회에 대
한 조롱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소. 나
는 김형욱을 보면서  돈으로부터 자유로워
지면 저렇게 멋있구나 하고 느꼈지. 모두가 
두려워하는 돈, 이 미국 사회에서 멸시받지 
않는 유일한 길은 돈을  버는 것이란 진리
가 단순 명쾌하게 머리에 들어왔소. 그래서 
실패한 이민 생활과 유색  인종에 대한 차
별로 절망해 있던 내가  목숨 걸고 승부를 
겨뤄볼 만한 데는 도박판밖에 없다고 생각
했지. 김형욱은 나의 인생을 결정지은 사람
이오.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민한 필
립 최가 미국에서 유색 인종으로서의 열등
감에 시달리다가 마음껏  미국인들을 농락
하는 김형욱을 보고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이해가 갔다.
 김형욱은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돈을 땄
나요, 아니면 잃었나요?  어땠을 것 같소? 
 잃었을 것 같군요. 
 물론이오. 아마 김형욱이 카지노에서 돈을 
따면 이 세상에  돈 못 딸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얘기할 수 있을 거요.  용기와 기백
만으로 도박을 해서는 이길 리가  없지. 그
는 돈을 가지고 놀았소. 따려고 한 게 아니
라 놀려고 한 거요.   그러나 돈은 무한정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결국 그 돈이  김형욱을 죽음으로 이끌었
소. 
 돈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구요? 
필립 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훈의 
가슴에서 불 같은 호기심이 솟아올랐다. 중
앙정보부에서 김형욱을 암살했다는  게 세
상에 떠도는 소문이 아닌가.
 남들은 다 김형욱을 욕해도 나는 그를 호
쾌하고 배포 있는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오. 
누가 감히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백인
들의 따귀를 그렇게 마음내키는 대로 후려
칠 수 있겠소?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
니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깊은  호감을 가
지게 되었지. 게다가  그는 의외로  따스한 
면을 보이기도 했소. 모두가 김형욱을 도깨
비로 알지만 사실 그에게도 인정은 있었소.  
골프채로 캐디의 머리를  후려치기도 했다
는데, 그런 그에게 인정이 있었다구요?  언
젠가 나는  김형욱이 카지노의  인적 드문 
공간에서 한 한국인 청년의 따귀를 때리며 
호통을 치는 것을 본 적이  있소. 욕지거리
를 해대며 몹시 화를  내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지켜봤지. 알고 보니 그  청년은 한국
에서 유학 온 학생이었소. 그런데 카지노에
서 유학 비용을 모두  잃고는 절망에 휩싸
여 넋 나간 상태로 멍하니 몇 시간이나 앉
아 있다가 김형욱의 눈에 띄었던  거요. 김
형욱은 그렇게 그 학생을 호되게 나무라더
니만 선뜻 잃은 돈 모두를  내주었소. 나는 
그가 얼마나 어려운 일을 했는지  잘 아오. 
도박꾼들에게 그런 것은 금기 중의 금기거
든.  김형욱을 잘 아시는 모양이군요. 그와 
같이 도박을 하신 적도 있습니까?  김형욱
과 나는 도박의 차원이 달랐소. 무엇보다도 
스타일이 너무 달랐지. 하지만  카지노에서 
자주 마주치다 보니 그와 정이  들었소. 그
리고 그의 처지가 안타까웠지.  김형욱에게
는 어떤 종류의 울분 같은 것이 있었소. 이
유야 어찌됐든  조국에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에 응어리가 되어 남았던 
거요. 그는 아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이 남
달랐는데, 그것도 아마 피붙이 외에는 모두 
그를 따돌렸기 때문이겠지. 그는 그런 울분 
때문에 더더구나 도박에서 이길 수가 없었
던 거요.  김형욱이 거액을 잃은 것을 보고
는 최 선생님도  기분이 안  좋으셨겠군요. 
카지노에서는 내심 그를 조롱했을 것 아닙
니까?  조롱 정도가 아니었지. 이제껏 쌓였
던 것이 일시에 폭발했소. 김형욱에게 욕을 
먹으며 카드를 나누어주던 딜러, 매를 맞던 
보디가드, 짐승 취급을  받던 매니저, 직원
들로부터 끊임없이 불평을  들었던 경영자 
할 것 없이 그가 돈을 잃고 마커를 쓰기를 
바랐던 거요. 김형욱이 안하무인 격인 태도
를 버리고  빚 독촉에  쫓겨 초조해하다가 
마침내는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
을 보고 싶어했던  자가 한둘이  아니었소.  
마커가 뭡니까? 
 카지노 측에서 빌려주는 돈이오. 물론  칩
으로 빌려주어 계속  도박을 하게  하지만, 
일단 그 마커를 쓰면  그것을 갚기 위해서
라도 카지노에 발을 끊을 수가  없소. 마커
는 결국 대다수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지. 
라스베이거스의 사람들은 증오든 사랑이든 
모든 감정을 돈으로 표시하오. 철저하게 숫
자를 신봉하며 사는 사람들이지. 여기 미국
이 어차피 그런 사회지만.  그런데 아까 돈
이 김형욱을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하셨는
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중앙정보부가  그를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억측이오,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의. 
 억측이라구요? 그렇다면 중앙정보부가 한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경훈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렇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김형욱의 
실종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모든 사람들이 
중앙정보부를 지목하는데요.  모두 엉터리
요. 
나는 그의 실종을 오랫동안 추적했소. 증거
를 잡지는 못했지만 증거보다 더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경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세상에 증거보다  더한 확신이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필립  최의 얼굴은  신념에 
차 있었다.
 자신의 확신만으로 어떤 주장을 믿어달라
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모두
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상황 논리
를 제시한다면?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외
투를 꺼내 입은 것은  날씨가 추웠기 때문
이라는 식으로 말이오.  그것은 거의  증거
와 맞먹는 설득력을 가지지요. 
 나는 그런 정도의  상황 논리를 세워보자
는 거요. 내가 가진 정보를 가지고 말이오. 
경훈은 필립 최처럼 한  방면의 정점에 도
달한 사람이 근거 없는  정보를 신봉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자 그의 상황 논리라는 
것에 흥미가 생겼다. 경훈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던 필립 최가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자, 자리를 옮겨 얘기합시다. 새로운 이야
기는 새 공간에서  하는 게  낫지 않겠소? 
필립 최는 리무진을  불러 라스베이거스가 
한눈에 들어오는 니들타워로  경훈을 데려
갔다. 필립 최는 회전 전망대의  창가 자리
에 앉아 스카치를 한잔  따르고 나서 라스
베이거스의 사막 너머를 바라보았다.
경훈은 필립 최가 황량한 사막을 더듬으며 
촉촉한 상념에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 
상념이란 한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것
이고, 그 인간은  김형욱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필립 최는 자신의 말로도 김형욱과 
같으리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해할 수 없군요. 확신이 있으시다면  왜 
완벽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사건에 대해 
그간 침묵을 지키셨습니까?  김형욱의  마
지막 행적에  대해 자신이  없어지곤 했기 
때문이오. 그의 모든 행적을 설명할  수 있
어야 하는데, 그가 파리로 가서  실종될 때
까지 일주일 간의 행적을  내 머리로는 설
명할 수가 없소.  아무튼 들어보고  싶습니
다. 
필립 최는 서서히 상념을 거두어들이며 힘
있는 눈빛을 내쏘았다. 
그는 목소리 톤조차 바꾸었다.
 김형욱의 실종 미스터리를 다루는 사람들
은 맨 먼저 박정희와  김형욱의 갈등을 떠
올리지. 무조건 그것을 원인이라  생각하는 
거요.
 다음으로는 박정희의 지시를 좇아 김형욱
을 죽일 수 있는 기관을 떠올리지. 바로 중
앙정보부요. 그러나 그렇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바로  결론을 내려버리고  그에 따른 
상황이나 인물을 추적하는 것은 심각한 오
류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 경훈은  필립 최
가 상당히 논리적으로  출발한다고 생각했
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대통령들의 입
장을 봅시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
중, 이렇게 네 대통령을 거치는  동안 이들
이 김형욱의  실종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리가 없소. 특히 김형욱의 실종  직후 권력
을 잡은 전두환은 그  사건을 김재규 제거
에 이용하려고 집중적으로 파헤쳤지.  김재
규가 그런 짓을 했다면  민주 투사니 뭐니 
그를 가리키던  얘기들을 일축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오. 그러나 아무 성과도 없었
소. 김재규도 사형 직전 그  사건에 대해서
는 아는 바 없다고 고백했지.  그후 중앙정
보부 직원들도  오명을 씻기  위해 전력을 
다해서 그 사건을 추적했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소.  혹시 그 이후 다른 대통령들은 알
고 있지 않을까요?  아니오. 대통령들이 안
다는 것은 그들의 지시를  받아 사건을 조
사한 사람들이 안다는 얘기고, 그렇다면 이 
미스터리를 아는 이들의 수는 수십  명, 아
니 그보다 훨씬 많아지지. 하지만  이 사건
에는 그들이 모두 입을  꼭 다물고 비밀을 
지켜줘야 할 공동의  가치가 없소.  오히려 
공개를 하면 이득을 볼  이들은 있지만 말
이오.  …`…. 
 즉 한국 내에는  김형욱을 누가 죽였는지
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단 얘기요. 모두
가 모르는 거요. 그래서 완벽한 미스터리가 
되어버렸지.  과연 그럴까요? 
 믿음이 안 가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군. 온 세상 누구보다도 반드시  알 수
밖에 없는 한 사람이 있소.  만약 중앙정보
부에서 일을 저질렀다면 말이오.  그게  누
굽니까? 
 중앙정보부의 파리 지부장이오.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내에서라면 목포 직원들이 부산에 가서 
현지 직원들 모르게 일을  저지를 수도 있
겠지만 파리에서는 아니오. 첫째 문화가 다
르고, 둘째 출·입국이  체크되며, 셋째 프
랑스 공안당국의 감시를 벗어나야 하기 때
문이지. 또 공작에  필수적인 현지  지원도 
받을 수 없고.  어쨌든 중앙정보부에서  그 
일을 조종했다면  파리 지부장이  모를 리 
없지 않겠소. 또 그를 배제해야  할 이유도 
없었고, 아니 그의 지시와 도움을  받지 않
고는 해낼 수도 없는 일이었소.  동백림 사
건 때는 현지 공사인 양두원이,  김대중 사
건 때도 역시 현지  공사인 김기완이 가담
을 했으니까.  그렇겠군요. 
 나는 그 당시의 파리 지부장 이상렬이 일
전에 어떤 잡지와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소. 
그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더군.  어째서요?   
이상렬은 20년 가까이 김형욱 암살의 중심 
인물로 의심받아 왔소.  그 사람의  괴로운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더군. 그는  못내 공
개 수사까지 요청했소. 검찰이 나서서 자신
을 수사해 달라고 말이오.
 그만큼 자신은 결백하다는 얘기지.  그랬
나요? 
 사건 직후 이상렬도  신군부에 의해 소환
되어 조사를 받았소.  김재규도 그  부분과 
관련하여 조사를 받았고. 알겠소? 그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신군부 말이
오. 경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
다.
 수사는 간단할  수밖에 없었소.  김형욱이 
실종된 시기에 파리에 갔던 중앙정보부 직
원들이 있는지, 만약 있었다면 그들의 알리
바이를 확인만 하면  되는 일이었소.  이미 
파리 현지에 있던 중앙정보부 직원들의 알
리바이는 프랑스 정보부와 경찰에 의해 철
저히 조사된 뒤였으니까. 프랑스  측에서는 
우리 대사까지도 불러  조사했소.  ‘혐의 
없음’이었습니까? 
 물론이오. 국내외의  수사에서 밝혀진  게 
하나도 없었소. 그러니까 완벽한  미스터리
지. 김재규 재판에서도 김형욱에 대한 얘기
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소. 혐의가  전혀 
없다는 얘기요.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이 
죽였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요. 필립 
최는 피식 웃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의 한  소설가가 《문예춘추》에   오작교 
작전 이라는 제목의 공상소설을  발표했지. 
중앙정보부가 파리에서 김형욱을 납치하여 
대한항공 편으로 서울로 옮긴 후 청와대에
서 박정희가 직접 총을  쏘아 죽였다는 내
용이었소. 
그런데 그것이 국내 언론에 사실처럼 보도
되면서 김형욱을 중앙정보부와  떼어서 생
각할 수 없게 되었던 거요.  아, 그 소문이 
일본의 한 소설가가 쓴 작품에서 비롯되었
습니까?  그렇소. 그 소설가는 김대중 사건
에서 힌트를 얻어 그런 소설을  썼던 거요. 
김형욱 사건이 아직까지  완벽한 미스터리
로 남아 있는 까닭은 중앙정보부가 저지르
지 않은 일을 중앙정보부가 저질렀다고 단
정짓고 출발했기 때문이오. 경훈은 다시 고
개를 끄덕였다. 필립  최가 얘기하는  모든 
정황으로 보아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와 무
관하게 죽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최 선생님은  김형욱이 어떻게 죽었
다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어떤 사람의 죽
음이든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소. 특히 
누가 죽였는가를 판단하려면 그 사람이 살
해당할 이유를 합리적으로 판단해 볼 필요
가 있지. 김형욱의 경우는 두 가지요. 하나
는 박정희를 비난했을 뿐 아니라 회고록을 
출판하겠다고 협박했던 거요.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라스베이거스에
서 비롯되었지. 아까 라스베이거스의  사람
들은 감정을 돈으로  표시한다고 얘기했던 
것 기억하오?  그게 무슨 뜻이죠? 
 김형욱은 봐주고 싶은 채무자가 아니었다
는 뜻이오. 즉  단 1달러의 빚이라도  지옥 
끝까지 추적하고 싶은  채무자였지.  그는 
얼마나 빚을 지고 있었습니까? 
 시저스 팰리스에 1백만 달러,  트로피카나
에 50만 달러, 이것이 겉으로  드러난 금액
이오. 시저스 팰리스에서는 김형욱에게  딴 
돈이 많으니까 어떨지 모르지만,  트로피카
나에서는 그에게 돈이 많다는 소문만 듣고 
첫 거래에서 돈을  빌려줬으니까 억울했을 
거요.
 물론 마케팅 담당자에게 화살이 돌아갔지.  
그렇다면 아까 돈이 김형욱을 죽음으로 이
끌었다는 말씀은? 필립 최는 잠시 말을 멈
추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
는 좌우를 둘러보더니 담담하게 말을 꺼냈
다.
 여기 라스베이거스에는 단돈 3백 달러 때
문에도 사람을 죽이는  힛맨들이 득시글거
리오.  그렇다면 김형욱은 라스베이거스에 
진 빚을 안 갚아서 죽었다는 겁니까? 필립 
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신 거죠? 정황 판단
에 의한`…`….  나는 김형욱의  실종 소식
을 접하고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
소. 
평소에도 그가 살해될지  모른다고 예감했
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예감이  아
닙니까? 
 그렇소. 하지만 이 자리에서 나는 그 예감
을 강변하려는 게 아니오. 아까도 얘기했지
만, 김형욱이 실종되기 전 일주일  간의 행
적을 있었던 그대로 말해 주겠소.  이 변호
사의 머리에서 보다 논리적인 추리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 때문이오.   말씀
해 보십시오. 
마지막 행적
필립 최는 스카치로 목을 축이고는 본론을 
꺼냈다.
 이 사건에서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은 
몇 가지 없소. 아마 이 변호사라면 모든 억
측과 예단을  버리고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을 거요. 객관적 사실을 입력하여 누구라
도 수긍할 수 있는 결론을  내주시오. 마치 
논리 퍼즐처럼 말이오. 경훈은 잠자코 고개
를 끄덕였다.  그렇잖아도  재판정에서처럼 
해보고 싶은 기분이 들던 참이었다.
 우선 잠깐 사건의 배경을 설명해  주리다. 
김형욱은 미국에서 아주 외롭게 지냈소. 그
는 신변의  안전 관계로  불안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따돌리기도 해서  자연스럽게 도
박에 빠져들었지. 도박이란 원래 혼자서 하
는 게임이니까. 그가 즐겼던 게임은 바카라
였소. 
김형욱은 주로   라스베이거스에서 게임을 
했지만 1년에 두세  번쯤은 파리나 스위스
에 가서 하기도 했지. 그는 불과 일주일 사
이에 1백만 달러를 잃은 적이 있을 정도로 
세게 배팅했소. 도박이란  무서운 거요. 그
는 애초에 돈이 많았지만  결국 가진 재산
을 거의 탕진했소. 그래서 김경재에게 회고
록을 대필시키는 한편, 김경재도 모르게 회
고록 출판을 미끼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었던 김재규와 거래를 했지. 그 회고록에는 
박 대통령의  여자 관계를  비롯하여 그가 
한국에서 정보부장을 하면서  알게 되었던 
한국의 어두운 면이 망라되어 있었소. 박정
희에게 치명타를 안길 내용만 골라서 말이
오.  김형욱은 한국에서 그 회고록이  출판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물론 
아니오. 김형욱은 그것을 협박용으로  쓰려
고 했던 거지.  김형욱은 어떤 조건을 제시
했습니까? 
 세 가지 조건이었소. 여권의 연장, 한국에 
있는 재산의 동결 해제, 그리고 150만 달러
의 현금이었지.  김재규는 그가 제시한  조
건을 들어주었습니까? 
 처음의 두 가지는 들어주었고, 현금은  일
단 50만 달러만 주었소.
 회고록의 원본을 완전히 넘겨주면 나머지 
1백만 달러도 마저 주겠다고 했지.  그리고 
김경재의 각서까지 요구했소. 김형욱의  동
의 없이는 회고록을 출판하지 않는다는 내
용으로 말이오. 김재규로서는 안전하게  하
고 싶었던 거지.  김경재는 각서를  써주었
나요?  김형욱의 부탁을 받은 김재규는 미
국의 요원들을 시켜 진저리가 나도록 김경
재의 집에 협박 전화를 해댔소.  결국 김경
재는 각서를 써주었고,  그 각서는  나중에 
김재규의 책상 서랍에서 발견되었지.  김형
욱은 그 50만 달러도  모두 도박으로 날렸
겠군요.  물론이오. 게다가  김형욱은 라스
베이거스에서 거액의 마커를 쓰고 나서 심
한 빚 독촉에 시달렸소. 그래서  그는 회고
록의 완성을 몹시 기다렸지. 나머지  1백만 
달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오.  그  회고록
과 김형욱의  프랑스 여행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김형욱은 회고록이 완성된  직
후 프랑스로 갔소. 김경재를 속이기도 하고 
떼를 쓰기도 해서 원본을 받아가지고 말이
오. 그는 원본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나머지 
1백만 달러를 프랑스에서  받기로 했던 거
요. 이상이 그가 프랑스에 가게  된 배경이
지.  그러니까 김형욱이 파리에 가게 된 배
경에는 김재규, 즉 중앙정보부가  관련되었
군요.  그렇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
이 김형욱의 죽음과  중앙정보부를 관련시
키는 데 전혀  무리가 없지.  결과적으로는 
결정적인 함정이 되지만 말이오.  재미있군
요. 
 이제 파리에서  일어난  객관적 사실들만 
나열해 보겠소. 지금부터 이 변호사의 머리
가 필요하오. 경훈은 미소를 지었다.
 김형욱은 10월 1일  혼자서 파리로  갔소. 
비행기표는 뉴욕 맨해튼의  한 여행사에서 
구입했지. 그는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서 에
어프랑스의 콩코드기를 타고  출발하여 파
리의 샤를르드골 공항에 내렸소.  좌석  등
급은요? 
 좌석은 퍼스트 클래스가 아닌 프레스티지 
클래스였지. 파리에 내린 김형욱은 바로 최
고급인 리츠호텔에 가서 6박을 했소.  그러
고는 10월 7일 오전  10시에 2류급인 웨스
트엔드호텔로 방을 옮겼지.
 그는 웨스트엔드호텔에서 체크인할  때 5
일 간의 방값을  선불했소. 그러면서  파리 
뉴욕 간 비행기표를 보이고는 다음날 떠나
는 비행기의 자리를 예약해 달라고 부탁했
지. 김형욱은 방에서 약  30분 간 머문  뒤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한  키 큰 동양인과 
같이 나타났소. 종업원이  왜 이렇게  일찍 
들어오셨냐고 묻자, 그 키 큰  동양인이 중
요한 서류를 가지러 왔다고 영어로 대답했
지. 그후 김형욱은 11시쯤부터 오후  7시까
지 카지노에서 게임을 한 다음  나갔소. 그
러고는 행방불명이 되었지. 실종이 기정 사
실화된 후  프랑스 경찰은  스위스 경찰에 
김형욱의 소재 확인을 의뢰했고, 스위스 경
찰은 소재 불명이라고 회신해 왔소. 프랑스 
경찰은 다시 전국의 경찰에 김형욱의 소재 
수사를 지시했지. 이것이 확인된 객관적 사
실의 전부요. 어떻소? 이 변호사의 그 천재
적 두뇌로 감을 잡을 수 있소?  그것만 가
지고는 아무런 스토리도 엮어낼 수 없는데
요.
  참, 세 가지  사실이 더  있소. 김형욱은 
10월 3일인지 4일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파
리에서 《조선일보》 신용석  특파원의 부
인으로부터 돈 3천 달러를 빌렸소.  그리고 
10월 5일 점심때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는 
모습이 발견되었지.  또  웨스트엔드호텔에 
남겨진 그의 짐가방에는 오를리 공항의 꼬
리표가 붙어 있었소.  오를리 공항은  유럽 
각지에서 오는 비행기들이  기착하는 곳이
오.  아, 그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들이군요. 
 그리고 또 얘기해  두어야 할 것이  있군. 
개선문 옆의 르그랑쉐르클  카지노의 지배
인은 김형욱이 최소한  3일 이상 카지노에 
왔다고 증언했고, 김형욱은 실종되기  전날
인 6일 밤 리츠호텔에서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다가 호텔 측의  제지를 받기도  했소. 
이게 드러난 모든  행적이오. 이제  새로운 
홈즈의 탄생을  기대해도 되겠소?   경훈은 
턱을 고이며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한참
이나 눈을 감고 있던 그는 서서히 눈을 뜨
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김형욱의 거주지가 뉴저지인 것으로 
보아, 그가 맨해튼에서 표를 구입했다는 것
은 자신의  의지로 파리에  갔다고 생각할 
수 있겠군요. 필립  최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훈의 말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일주일에 1백만 달러도 날리곤 하던 김형
욱이 퍼스트 클래스 대신 프레스티지 클래
스를 이용했다는 것은 당시  그의 경제 사
정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
다.  동감이오. 그 당시는 라스베이거스 사
람들로부터 빚 독촉도 매우 심했을 테니까.  
그런데 리츠호텔의 하루  숙박비는 얼마입
니까? 
 대략 8백 달러 수준이오. 
 그가 6박을 했다면  숙박비만도 거의 5천 
달러군요.  퍼스트 클래스에 못 탈  정도의 
그로서는 만만치 않은  금액이지.  말씀을 
토대로 김형욱의 파리에서의 행적을  보면, 
그는 거의 도박만 하며 보냈습니다. 그렇다
면 그가 애초에 얼마  정도의 돈을 가지고 
갔는가가 중요하겠죠. 퍼스트 클래스엔  못 
탔지만 리츠호텔에 든 것으로 보아 김형욱
은 많지도  적지도 않은  금액을 소지하고 
파리로 간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얼마 
정도라고 생각하오? 
 김형욱의 행적을 보아서는 대략 3만 달러
에서 5만 달러 정도. 그런데 파리에서 그를 
만났다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좀전에  얘
기한 중앙정보부 파리  지부장 이상렬이 5
일 점심때  르그랑쉐르클  카지노의 1층에 
있는 식당에 대사관 직원들과 점심을 먹으
러 갔다가,  누군가로부터 2층에  김형욱이 
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인사하러 올라갔다
고 하오. 전직  부장이니까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지. 이상렬 지부장이 인
사를 하자 김형욱은 한  번 휙 돌아보고는 
가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는 거요. 그래
서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김형
욱이 돌아보지도 않은 채 리츠호텔에 있다
고 대답하기에 그냥 내려왔다고 하지. 그때 
이상렬 지부장은 김형욱의  주머니마다 두
툼한 돈 뭉치가 채워져  있는 걸 보았다고 
하오.  그것은 김형욱이  신용석 특파원의 
부인에게서 3천   달러를 빌린   후겠네요?  
그렇소. 
 이 사건에서  김형욱이  신용석 특파원의 
부인으로부터 3천 달러를 빌렸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보통의 경우가  아니거든
요.  
그렇소. 당시 신용석  특파원은 한국에  가 
있었지. 그러니 김형욱이 웬만큼  어려워서
는 그  부인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얘기할 
수 없었을 거요.  더욱이 3천 달러는  그들 
부부에게 큰돈이었을 테니까.
 경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카치를 한 모
금 마셨다. 처음 머리를 짜낼  때와는 달리 
비교적 여유 있어 보였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돈을 빌리
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자주 보는 사이도 아니고, 더군다나  남편
도 없는 상태에서 부인에게 돈을 빌리기란 
더욱 어렵겠죠. 보통의 경우라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빌
릴 수만 있다면 체면이고 뭐고 버린 채 돈
을 빌려야 할 사람들도 있습니다.  필립 최
는 자못  흥미로운 표정으로  경훈의 입을 
주시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오? 
 바로 도박꾼입니다.  부인도 잡힌다는  게 
도박꾼이죠. 우리는  김형욱이 3천  달러를 
빌렸다는 사실에서 그가  틀림없이 도박을 
했다고 단정할 수 있고, 한 가지를 더 유추
해 낼 수 있습니다.  그게 뭐요? 
 김형욱이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았으리라
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거액의 돈을 말입니
다.  음,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3천 달러를 
가지고 그렇게 딸 수 있는  위인은 아니지. 
필립 최는  경훈의 비상한  머리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5일 점심 무렵  이상렬 지
부장이 카지노에서 김형욱을 봤을 때 그의 
주머니마다 지폐 다발이  채워져 있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얘기는 그전에 겨우 3천 
달러를 특파원의 부인에게서  빌렸다는 사
실과 대비해  볼 때  누군가로부터 거액을 
받았을 거라는 추론을 입증해 주는 셈이었
다.
 그것은 회고록의  원본을  넘기는 대가로 
박 대통령에게서 받은 돈일 겁니다.   그것
밖에는 달리 돈이 생길 길이 없었겠지. 
경훈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박 대통령이나 
김재규, 차지철은 김형욱을 죽이지  않았다
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논리
가 나올 수 있소? 
 중앙정보부가 죽였느니 어쨌느니 하는 설
들은 중앙정보부 측에서 돈을 주겠다고 김
형욱을 유인한 후  죽였다는 것인데,  만약 
그들이 죽이려고 했다면 굳이  돈을 줄 필
요가 없었을 겁니다. 또 그 돈을 미끼로 김
형욱을 유인했을 경우에도 돈은 밖으로 유
출되지 않았을 겁니다. 돈의 유출이란 바로 
김형욱의 신병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뜻
하는데, 중앙정보부가 아무리 바보라도  돈
을 줘놓고 신병까지 자유롭게  해둔 후 다
시 접근하여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웠을 리
는 없으니까요. 경훈은 사건의 핵심을 정확
하게 짚어냈다.
 필립 최는 그렇게 어설픈 몇 가지 행적에 
기초해서 곧바로 사건의  본질을 파헤치는 
경훈이 신비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동감이오. 김형욱이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것과 그가 살해될 이
유도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나는  그 
사실을 깨닫는 데 적잖은 세월이 필요했소.  
추리란 갈래만 바로잡으면 하기 쉽죠. 그러
나 한번 방향을 잘못 잡으면 빙빙 돌 수밖
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웨스트엔드호텔에 
나타난 키  큰 동양인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오? 필립 최는 추리의  가닥이 잡혀간다
고 생각하며 술잔을 입에 갖다  댔다. 그토
록이나 베일에 가려졌던  희대의 미스터리
가 풀릴 것 같은  지금, 한잔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경훈이 생각해 들어가는 방식은 
지극히 논리적이었고,  억측이나  선입견도 
전혀 없었다.
 그 동양인은  김형욱의  원고를 확인하고 
돈을 지불하는 역할을 맡은 밀사였을 겁니
다. 그 사람과 김형욱은 서로를  못 믿었기 
때문에, 안전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했겠죠. 
아마 그래서 돈과 회고록을 쪼개서 교환했
을 겁니다.  아, 정말 그랬을 수도  있겠군. 
나는 지난 20년 간 그런 생각은 해보지 못
했는데`…`….  그 동양인 밀사와 김형욱은 
사전에 합의를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
히 밀사 쪽에서 그런 제안을  했을 겁니다. 
김형욱은 믿지 못할 사람이라는 주의를 단
단히 받고 왔을 테니까요.  틀림없소. 사실 
김형욱은 그 무렵 라스베이거스의 빚에 워
낙 쪼들렸지. 하지만 돈을 구할  방법이 없
었소. 오직 회고록만이 유일한 탈출구였지. 
그래서 그는 김경재를  속여가면서 한편으
로는 김재규와  또 한편으로는  일본의 한 
출판사와 출판 계약을 맺기도 했소. 경훈이 
사정을 짐작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러니컬하군요. 한쪽에는 출판하지  않
겠다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하고, 또 한쪽에
는 출판하겠다는 조건으로 돈을 달라고 했
으니`…`…. 필립 최는 수첩을 꺼내 메모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 계약에 응했던  일본 출판사들의 이
름이 여기 있소. 먼저 고단샤(講談社). 출판
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던  중앙정보부는 이 
고단샤에 상당한 이권을 주어 출판을 포기
시켰지. 그러자 김형욱이 이번에는  일본의 
마도샤(窓社)와 계약을 해버렸던  거요. 그
래서 문고판으로 축약되어 책이 나왔소. 김
형욱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보여주는 대
목이지.  김형욱으로서는 일부 내용만 실어 
박 대통령을  더 다급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죠.  일석이조의 포석이라 할 수  있
겠지. 일부에서는 회고록이 일단  출판되어
서 더 이상 가치가  없기 때문에 김형욱에
게 돈을 줄 필요도  없었다고 생각하는 모
양인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오. 김형욱이 파
리를 방문하기 직전에야 회고록은 모두 완
성됐지. 또한 박정희나 김재규로서는  회고
록이 문제가 아니라 김형욱을 온순하게 잠
재워 두는 것이 더 중요했소.  출판이 화제
가 되고 김형욱이 온  세상에 떠들고 다닐 
일이 무서웠던 거요. 또 일본에서 문고판으
로 나왔던 그 회고록은  별로 팔리지 않았
지만 회고록의 완간과 정식 출판은 여전히 
두려운 무기였소.  그런  사정이 있었다면 
동양인 밀사는 더욱 조심스러웠겠군요.  그
랬을 거요. 
 그런데 제 생각엔 그 밀사와 김형욱이 처
음 만난 곳이 프랑스가 아니라 스위스였을 
것 같습니다.  스위스? 
 김형욱은 처음의 50만  달러도 비밀이 보
장되는 스위스 은행을 통해 받았을 가능성
이 있습니다. 이처럼  그들이 미국이  아닌 
스위스나 프랑스를 이용한 데는 무슨 이유
가 있을 겁니다.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
신 적이 있습니까?  글쎄`…`…. 
 당시 한국 정부는  미국에서 박동선의 로
비 파동 등으로 인해 빚어진 코리아게이트
를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돈을 보냈다가는 괜히 꼬리를  밟힐 수 있
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김형욱과 거래를 할 
수 없었던 거죠. 그러므로 처음의  50만 달
러도 스위스의 은행으로  입금시켜 김형욱
에게 지불했을 겁니다. 
죽음의 그림자
 일리 있는 얘기요.  나 같은 사람들은  근 
20년을 생각하면서도 모두  프랑스만 염두
에 두었지. 파리에서  만났으니까. 그게 왜 
프랑스인지, 왜 오를리 공항의 꼬리표가 붙
어 있었는지에 대해선 진지하게 생각해 보
지 못했소.  증언을 토대로 김형욱의  일정
을 재구성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
정을? 
 네. 
 의미가 있을 것 같군. 
 카지노 지배인은 김형욱이 최소한 3일 이
상 왔다고 증언했는데, 그것을 토대로 하여 
그의 행적을 살펴보겠습니다. 김형욱은  첫
날인 1일 밤엔  자거나 카지노에서 게임을 
했고, 둘째 날인 2일과 3일에도 카지노에서 
게임을 했을 겁니다. 스위스에는 아마  4일 
오전에 갔다가 그날 밤에 돌아와 5일에 다
시 카지노에서 게임을 했을 거구요. 그런데 
6일에는 게임을 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
날 밤 리츠호텔에서 술에  취해 소란을 피
웠다니 말입니다. 7일에는 게임을 했을  겁
니다. 아침에 호텔을 옮긴 후  그날 저녁까
지 게임을 하고는 실종되었으니까요.  그렇
겠군. 
 프랑스 경찰이  스위스  경찰에 김형욱의 
소재 확인을 의뢰한 것으로  보아 그가 스
위스에 갔다 온 것은 틀림없겠죠?  그렇소. 
게다가 오를리 공항의 꼬리표가 확실한 증
거요. 스위스에서 오는 비행기는 전부 오를
리 공항에 내리니까.  이제 경훈의  추리는 
무르익고 있었다.
 7일 오전 김형욱이  웨스트엔드호텔의 방
에 머물다 나가서 키  큰 동양인을 데리고 
들어왔다는 것은 그와 나머지 일을 처리하
려고 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일이 아니고
서는 로비나 커피숍에서 만나고 말지 굳이 
방에까지 데려올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 동양인이란 한국인일 것 같소? 
 아마 그럴 겁니다. 영어로 대답했다는  사
실로 미루어볼 때 그는  프랑스에 살던 사
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면
서 불어를 쓰는  사람이 없듯이,  프랑스에 
살면서 영어를 쓰는 사람은 없지 않겠습니
까. 그는 한국에서 임무를 띠고  간 사람일 
겁니다. 
필립 최는 약간 충격을 받은 듯했다.
 놀랍소, 이 변호사. 모든  것이 너무나 쉽
게 풀리는군. 내가 20년을 두고  생각해 왔
던 것들을 이렇게 순식간에 해결하다니`…
`…. 
그럼 그 동양인이 종업원에게 중요한 서류
를 가지러  왔다고 대답한  것은 회고록을 
말했던 거요?  아마 그의 잠재  의식 속에 
있던 회고록이 그대로 튀어나왔을  겁니다. 
필립 최는 술잔을 들어  경훈의 앞에 내밀
었다.
 이렇게 기분 좋은  밤은 참으로 오랜만이
군. 수수께끼가 풀려간다는 사실보다도  이 
변호사 같은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경외롭기까지 하오. 자, 한잔합시다. 
경훈도 기분 좋게 술잔을 부딪쳤다.
 자, 이제 김형욱 사건을 연구하는  사람들 
모두가 가장 궁금해하는 점을 좀 풀어주시
오. 모두가 그것을 미스터리 중의 미스터리
라고 하지. 경훈은 천천히 술잔을 내려놓으
며 필립 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과연 무
엇이 최대의 미스터리란 말인가.
 도대체 왜 김형욱은 리츠호텔에서 웨스트
엔드호텔로 옮겼을까 하는 점이오. 필립 최
는 위스키의 톡 쏘는 맛을 혀 끝으로 음미
하며 질문을 던졌다.
 최 선생님은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이 없습니까?  글쎄`…`… 그것이 가장 풀
기 어려운 의문점이었소.  그는 왜  호텔을 
옮겼을까? 필립 최의 복잡한  표정을 한참 
들여다보던 경훈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
었다.
 함정입니다. 중앙정보부의 공작론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괜히 
이상하게 보는 함정에 빠질 수  있죠. 공작
론자들은 김형욱이   아마도 리츠호텔에서 
뭔가에 쫓겨서, 혹은  예감이 좋지  않아서 
그랬을 거라고 얘기할지  모릅니다만 거기
에 또 함정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 쉽게 걸려드는  함정이죠. 
결과적으로 김형욱이 실종되었으니까 호텔
을 옮긴 것도 신변의  안전을 고려했기 때
문이라고 쉽게 단정짓게 됩니다. 그러나 신
변의 안전을 도모했다면  원래의 리츠호텔
에 그냥 머무르는 것이 더  나았을 겁니다. 
작은 호텔이 더  위험하니까요.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아마 김형욱이  웨스트엔드호텔에서 체크
인할 때  비행기표를 보이며  뉴욕에 갔다 
온다고 했던 것과 관계가 있겠죠. 웨스트엔
드호텔의 숙박비는 얼마입니까?  1백 달러 
정도요. 
 그는 미국에 갔다  오겠다고 하지 않았습
니까? 짐과 골프 클럽은 놔둔 채로 말입니
다. 그러자면 방이 있어야 할  테고 하루에 
8백 달러나 하는 리츠호텔은 부담스러웠겠
죠.  그렇군. 
 김형욱 사건의  진정한  문제는 사람들이 
그를 매우 특수한 신분의 인간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권력자였던 사람도  오
늘 형무소에 갈 수 있고, 어제까지 재벌 총
수였던 사람도  오늘은 교통비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김형욱,  그는 
파리에 갈 무렵 돈이  절박한 평범한 인간
이었을 뿐입니다. 방에  짐을 두고  뉴욕에 
갔다 오면서 하루에 8백 달러나 하는 비싼 
방 대신 1백 달러 하는  싼 방으로 옮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요.  그럴까? 그
렇다면 나도 그 손쉽고  간단한 이치를 버
려둔 채 수십 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골치
를 썩이며 세월을 보낸  사람 중의 하나란 
말이군. 필립 최는 한동안 곰곰 생각하다가 
고개를 무겁게 흔들었다.
 그런데 왜  김형욱은  돈을 챙겼으면서도 
파리로 다시 돌아오려고 했을까?  음, 그것
은 라스베이거스의 빚과  관련시켜 살펴볼 
부분입니다. 돈에 쪼들리던 김형욱은  거액
을 손에 쥐자 일단 집에 갖다 주어야 한다
고 생각했을 겁니다. 도박꾼의 아내가 얼마
나 고생하는지는 아시죠? 그도  아내와 자
식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살았을 겁
니다. 그래서 급히  미국으로 가  아내에게 
돈을 주고 싶었겠죠. 쓸 데가  너무도 많았
을 겁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
었습니다. 역시  도박이었죠.  그는 이제껏 
잃은 돈으로 인한 괴로운 기억에서 헤어날 
수는 없었던 겁니다. 그 돈을 찾는 길은 역
시 도박뿐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러나 라
스베이거스에는 다시 갈 수 없었습니다. 빚
을 갚아야 했으니까요. 김형욱이  웨스트엔
드호텔로 옮긴 것은 이런  두 가지 욕망을 
다 만족시키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즉  일
단 미국에 가서 아내에게 돈을 준 뒤, 일부
는 도로 가지고 와 게임을 해서 돈을 딴다
는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였죠.  역시  김
형욱이 호텔을  옮긴 것은  값비싼 퍼스트 
클래스를 타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일까?  
그렇습니다. 
 가장 상식적인 추리가  가장 올바른 결론
이란 말이지.  옳은 판단이란 늘 상식에 맞
아야 합니다. 
 음, 솔직히 놀랐소.  파리에서의 김형욱의 
행적에 대해서 이 변호사처럼 완전한 추리
를 해내는 사람은 보지 못했소.  필립 최는 
경훈의 추리를 한동안 찬찬히 곱씹었다. 그
러던 그는 혼돈에 잠겼던  표정을 풀고 이
제까지의 오랜 논리 여행을 마감하려는 듯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뿜었
다. 그는 나직하나마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이 변호사의 추론에 
의거하여 결론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소. 사
실 결론은 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말씀
해 보십시오. 
 김형욱은 큰 실수를 범했소. 워낙  심하게 
빚 독촉에 쫓긴 나머지 라스베이거스의 채
권자들에게 파리에 가서 돈을 받기로 했다
고 말해 버렸던 거요. 라스베이거스의 채권
자들을 과소 평가했던 거지.  라스베이거스
의 채권자들은 사람을 보내 김형욱을 은밀
히 미행했다가 그가 정말  돈을 받는 것을 
보고는 안심했소. 하지만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지. 그 돈은 김형욱이 자신들한테 주
기 전까지는 여전히  김형욱의 것이었으니
까. 그런데 문제가  터졌던 거요. 김형욱은 
돈을 받고  나서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도박을 했던 거지. 라스베이거스의 채
권자들은 도박을 아는지라 덜컥 겁이 났소. 
워낙 배팅이  센 김형욱이  파리에서 돈을 
모두 잃어버릴 가능성이 너무나 높았던 거
요. 라스베이거스의 채권자들은 이미  미국
에서 거덜난  김형욱이 그  돈마저 잃으면 
영원히 빚을 받지 못하리란 생각에 조급해
졌소. 그들은 라스베이거스의 보스에게  상
황을 보고했지.  결론은요? 
 뻔하지. 김형욱이 돈을 전부 잃기 전에 즉
각 덮쳐  돈을 뺏으라는  지령이 떨어졌던 
거요.  라스베이거스 사람들이 파리에서 그
렇게 완벽하게 범행을 저지를 수가 있었을
까요?  그것은 식은죽 먹기요. 라스베이거
스의 뿌리는 이탈리아 마피아들이지.  흑인 
조직들이 라스베이거스에는 아예  발도 못 
붙이는 것을 보시오. 흑인이 출몰하면 라스
베이거스는 끝장이라고 생각한 마피아들이 
라스베이거스로 오는 모든  흑인 조직원들
을 사막에 파묻어버린 거요.  세계적으로도 
라스베이거스는 최고의 마피아들만이 장악
하고 있소. 그리고 파리는 이탈리아 마피아
들의 앞마당이오. 보스가 한번 결정을 내리
면 그후에는 죽음밖에 없소. 김형욱은 돈을 
다 빼앗기고 죽었을  거요. 경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형욱의 파리에서의  행
적은 필립 최의 결론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필립 최는  자신도 도박을  하는 입장이라 
감회가 남다른 모양이었다. 특히  김형욱은 
그가 도박의 길로 들어서는  데 결정적 영
향을 끼친 사람이지 않은가.
 김형욱은 세상의  모든  가치를 돈으로만 
생각하는 미국 사회에서  탈출하고 싶어했
소. 그러나 조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고, 
외롭고 지친 영혼을 도박으로 달랬지. 결국
은 죽음으로써  그 괴로운  삶에 종지부를 
찍고 만 것이오.  최 선생님의 배경 설명이 
없었다면 김형욱 사건을 추리하는 데 오류
를 범할 수밖에 없었겠습니다. 
도박에 얽힌 김형욱의 삶을  모른 채 과거
의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시각으로만 보면 
필연적으로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되니까
요.  가장 중요한 것은 파리에서의  행적에 
대한 논리적 추론인데, 그것을 이 변호사가 
풀어주었으니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거요. 고맙소. 경훈은  자신의 추론을 곰곰 
되새기며 무의식중에 창 밖을  내다보았다. 
사막에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필립 최가 술잔을 들어 부딪쳐왔다. 경훈은 
스트레이트 잔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사막
과 술, 그리고 도박이 있는 이 도시의 밤이 
이제는 낯설지 않게 감겨들었다.
경훈은 건너편 사막으로 천천히 눈길을 옮
기다가 문득  필립 최가  김형욱의 실종을 
쫓는 것이 단순히 아는  사람의 실종에 대
한 의문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느낌이 들었
다. 어쩌면 필립 최는 자신의  앞날에 대해
서 어두운 의구심을 품은  채 김형욱의 실
종을 추적했는지도 모른다.
 최 선생님은 어떠세요?  선생님의 운명은 
어떠리라 생각하십니까? 필립 최는 웃었다.
 나도 언젠가는 이 도박에서 패하고 말 것
이라 생각하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죽
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금방 덮쳐오지. 나는 
느낄 수 있소. 제 명에 죽지 못할  나의 운
명을 말이오. 현명한 사람은 지기  전에 그
만두는 법이오,  케렌스키처럼.   케렌스키 
변호사님처럼이라구요? 
 그렇소. 
 하지만 케렌스키 변호사님은 도박에서 지
지 않았습니까? 필립 최는 고개를 가로 저
었다.
 그렇지 않소. 
 이해할 수 없군요. 그분은 분명히  도박에
서 패했다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케렌
스키가 도박에 심취했던 것은 분명하오. 하
지만 사실상 그는 도박을 이용하여 절묘하
게 자신의 목표를 이루어가고 있었소.   그
분의 목표가 뭐였죠?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그의 투쟁이라고나 할까. 잘 모르겠소.  투
쟁이라구요? 
경훈은 비상한 호기심이 솟았다. 어쩐지 케
렌스키가 도박에 패해서  자살했다는 사실
이 그리 가깝게  다가오지 않던  참이었다. 
게다가 그가   다이어리에 써두었던   ‘성
전’이란 단어가 뚜렷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분의 투쟁이란 도박이 아니었습니까? 
필립 최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프로는 상대의 게임을  보면 어떤 마음으
로 하는지 알 수 있소. 
케렌스키는 아주 거대한 적과 싸움을 하고 
있었을 거요. 그와 같은 강력한  인물도 어
떻게 해볼 수 없는 그런 적 말이오. 경훈은 
필립 최가 케렌스키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필립 최의 행동에  이상한 점이 있었
다. 
경훈이 70만 달러나 되는  엄청난 돈을 내
밀었을 때  필립 최는  세어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니 그전에 그만한 돈을 빌려준다
는 것 자체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째서 케렌스키 변호사님께 그런 큰돈을 
빌려주시게 되었습니까? 필립 최는 손으로 
턱을 한 번 쓰윽 훑어내렸다.
 케렌스키가 보스턴에서 급히 전화를 걸어
와 내게 부탁했소. 한 사나이로부터 무언가
를 받아달라고 했지. 내 돈을  지불하고 말
이오.  그것이 그때 저에게 주셨던 그 목갑
입니까? 
 그렇소. 나는 순간적으로  망설였지만, 케
렌스키의 너무도 다급한 목소리와 평소 그
의 인품을 보아 수락했지. 내게  그 목갑을 
건네준 사나이는 쫓기는 듯했소. 그 사나이
는 물건을 넘기고  돈을 받자마자  떠났지. 
그때 나는 직감적으로 케렌스키가 뭔가 다
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소. 그리고 
그것이 그의 신분에 맞지  않게 위험한 일
이라는 것도. 경훈은 그때 왜 필립 최가 자
리를 피하고 목갑만  자신에게 전달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필립 최는  일단 케
렌스키의 부탁을 들어주긴  했지만 쓸데없
는 일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목갑을 가지고 있는  데서 오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카지노  호스트에게 맡겨두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전달하라고  했던 것이
다.
 최 선생님은 그런  일이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프로로서의 
직감이오. 
 케렌스키 변호사님의 자살에는 정말 간단
치 않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적은 누구일까요?  …`…. 
필립 최도 거기까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경훈은 일단 의문을 묻어두고 잔을 들었다.
 내일 아침 비행기로 떠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밤엔 한잔 마셔야 하지 않
겠소? 
필립 최는 기어코 경훈의 팔을 붙들었다.
 여기에도 한국 노래를  부를 곳이 많으니 
같이 갑시다. 경훈은 필립 최를  따라 밤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목갑의 비밀
다음날 경훈은 라스베이거스를  떠나 보스
턴으로 향했다. 은행의 대여 금고에 보관해 
둔 목갑을 찾아 한국으로  가지고 갈 생각
이었다. 그런데 케렌스키가 왜 자신에게 그 
목갑을 맡기고 자살해 버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청난 돈을 주고 얻은 목갑이라면 
아주 중요한 물건일 텐데  왜 자신에게 맡
겼던 것일까.
보스턴에 도착한 경훈은 바로 은행으로 갔
다. 그는 무심코 대여 금고에서  꺼낸 목갑
을 가방에  넣으려다가 흠칫  놀라 손길을 
거둬들였다. 테이프로 붙인 셀룰로오스  띠
가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
다.
 잠깐, 잠깐 기다려요! 
경훈은 급히 금고문을 닫으려는 은행 직원
을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누가 이 목갑에 손을 댔습니까? 누구에게 
열어주었나요?  그럴 리가요? 
직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목갑을 들
고는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무 문제 없는데요. 
 어,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미소를 머금는 직원을 보며 경훈은 자신이 
너무 과민했다고 생각했다.
 택시를 불러주세요. 
 네. 
경훈은 목갑을 가방에 넣은 다음 도망치듯
이 은행을 나왔다.  누가 뒤에서  지켜보는 
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황급히 올라탔다.
경훈은 택시 운전사에게  공항으로 가자고 
말하고는 차창 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러
나 손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가방 속의 목
갑을 확인했다. 무심코 차창 밖을 바라보던 
경훈은 예전과는 다른 코스로 택시가 가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디로 가는 거요?  공항으로 안 가고`…
`…. 
 네, 물론  공항으로 갑니다.  그런데 오늘 
시내는 행사 때문에  차가 너무  막혀서요. 
외곽 도로로 가는 것이 훨씬  빠릅니다. 운
전사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무슨 소리요, 행사라니? 막혀도  좋으니까 
시내로 갑시다.  운전사는  툴툴거리면서도 
시내로 방향을 바꾸었다. 경훈은 한참 만에 
공항에 도착해서야 자신의  신경이 날카로
워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보스턴을 떠난 비행기가 뉴욕의 공항에 착
륙하자 경훈은 바로 국제선으로  옮겨탔다. 
그는 일찌감치 게이트로 들어가 자리에 앉
아 있다가 탑승 수속이  시작되자 곧장 비
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갑갑하지만 제일 안
전한 방법이었다.
경훈은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야 비로소 마
음이 놓였다. 그는 자신의 직관이  왜 그처
럼 날카롭게 퍼덕거렸는지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경훈은 이내 그 목갑이  자신의 오감을 시
종 강하게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몇 번이나  목갑을 뜯어보고  싶었으나 
참았다. 케렌스키가 죽고  없는 지금, 경훈
이 목갑을  열어본다고 뭐라  그럴 사람은 
없지만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케렌스키가 죽지 않았다면?
경훈은 마침내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케렌스키는 실종을 염두에  두고 자신더러 
이 목갑을 찾아오라고 부탁한 것은 아닐까. 
더욱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찾아와
야 한다고 신신당부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상하게도 목갑을 보면  케렌스키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만
인이 보는 앞에서 장례식까지 치렀지만 경
훈의 의문은 지워지지 않았다.
경훈은 목갑을 가방 깊숙이 밀어넣었다. 틀
림없이 목갑 안에는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 
들어 있겠지만 그 물건을 보는 순간 또 하
나의 복잡한 사건에 말려들 것  같았다. 지
금 추적하고 있는 10·26이  어느 정도 정
리되면 그때 가서 열어보리라 생각했다.
경훈이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은 말끔히 씻겨 내려가지 않았
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경훈은 바로 인남에
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인남은  별일 없
이 잘 있었다.
아직도 긴장하고 있는 경훈의 목소리를 듣
더니 인남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경훈이 아무 일도 없다고  하자 그녀는 이
내 밝은 목소리를 쏟아냈다.
 고생했구나, 여행은 어땠니? 
 꽤 성과가 있었어. 
 잘됐네. 
 넌 어때? 
 너한테 알려줄 게 있어. 
 뭔데? 
 만나자. 만나서 얘기해, 우리. 
 글쎄, 그래도 좋겠지만 궁금한데 먼저  알
려주면 안 돼?  …`…. 
인남은 어쩌면 도청이라도  당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경훈은  바
로 자신이 도청을 조심하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인남은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런데 너 지나치게 사건에 빠져 있는 것 
아니니? 목소리가 아주 급한데. 예전의  그 
침착하고 여유 있던 네가 아니야.  지금 그
런 걸  따질 때가  아니라구. 어서  얘기해 
봐. 인남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단성  있게 
거부했다.
 안 돼. 
 알았어, 만나서 얘기하자. 어디서 볼까? 
경훈의 말에 인남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오늘 말고 내일 만나. 
 그럴래? 내일 어디? 
 청량리역 시계탑 앞. 
 …`…. 
경훈은 인남의 뜬금없는 제안에 뭐라 대꾸
할 말을 잃었다.
 오후 1시, 괜찮아? 
 무슨 소리야? 청량리역이라니? 
 아무 소리 말고 나와. 나와보면 알아. 
경훈은 별수없이 그러마고 대답했다. 
노벰버
다음날 경훈은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편한 
차림으로 느지막이 사무실에 나갔다.  그러
나 책상 앞에 앉자마자 케렌스키의 얼굴이 
떠올랐다. 게다가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온 목갑이 계속  신경에 거슬렸다.  경훈은 
자신이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케렌스키의 
장례식을 생각하니 그의 죽음을 도저히 거
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또 한편 자신의 직
관은 납득할 수 없는  그 자살의 언저리를 
날카롭게 헤집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방문객은 회사의 대표였다.
 이 변호사, 슬슬 몸이 좀 풀렸소? 
 아, 네. 
 우리는 모두 이 변호사가 그 뛰어난 두뇌
로 회사 일에 뛰어들어 쾌도난마의 시원한 
솜씨를 보여줄 날을 기다리고 있소. 대표는 
웃으며 뼈 있는 농담을 했다.
 알겠습니다. 
대표가 나가자 경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
가에 섰다. 이제 회사 일로 복귀해야 할 때
가 다가오고 있었다.
창 밖을 보니, 삼각산이 한창  푸르름을 더
해가는 신록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시
원스레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삼각산 상공
을 솔개 한 마리가 유유히 날고 있었다. 저 
솔개는 삼각산 기슭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똑똑한  것 같
아도 고작 땅 위에서 움직이는 2차원적 동
물일 뿐이다. 제 나라의 대통령이  죽은 이
유나 과정 따위엔 관심도  없이 무슨 역사
를 얘기하고 사회를 얘기할 것인가. 암담했
다.
그러나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사람이란 어
차피 자기  목숨 하나를  이어가기도 힘든 
존재가 아닌가. 누구라 한들 자신의 생업과 
관계없는 일에 단 하루라도 온전히 투자할 
수 있겠는가. 경훈은 그럴수록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느꼈다.
경훈은 선 채로 눈을  감고 차분하게 생각
을 더듬어갔다. 먼저 제럴드 현이 케네디와 
박정희의 암살을 같은 시각으로 보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암살의 배후가 같
다는 얘기인가. 다음으로 케네디  전문가인 
빌은 케네디 암살의 배후에 군산 복합체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박정희 암살의 배
후에도 역시 군산 복합체가 있다는 말인가.
경훈이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전화 벨이 울
렸다. 인남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경훈은 인남과의 약속을  깜빡 잊어버렸던 
것이다.
 미안해. 뭐 좀 생각하느라 잊고 있었어. 
 거봐, 지금 너  무언가에 너무 몰두해  있
어. 당장 나와.  그래, 바로 나갈게. 청량리
역 시계탑이라고 했지?. 왜 하필  청량리역
인가 의아해하며 경훈은 급히 사무실을 나
섰다. 시계탑 앞에서 경쾌한 복장으로 기다
리고 있던 인남은 경훈을  보자 싱긋 웃었
다.
 지금부터 우리는 등산을 가는 거야. 
 무슨 소리야, 등산이라니? 
 그래, 널 위해서도 좋을 테고 나도 한국에 
오니까 심심하거든. 
너는 별로 연락이 없지, 고등학교 친구들은 
시집갔거나 아니면   직장다니느라 바쁘지
`…`…. 내가 너에게 별 도움이 안 되면 다
시 미국으로 돌아갈까 해. 인남의 목소리가 
갑자기 생기를 잃었다. 
경훈은 그제야 인남이 한국으로  온 후 한 
번도 따스하게  대해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속으로는 네 생각 많이 하는데, 연락
을 못했어. 미안해.  
호호, 그러니까 같이  등산을 가겠다는  거
지? 
경훈은 인남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마침 케렌스키에 대해 좀 떨어져서 생각해 
보려던 참이었다. 케렌스키의 목갑을  보자 
그의 자살에 대한 강한  의구심과 함께 자
신에게 마지막으로 남겼던 그의 말이 뇌리
에 생생하게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형제, 이것은 내 일이지만 동시에 이 변
호사의 일이기도 하오.
 언젠가 이 형제라는  단어가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오.
 어디로 가자는 거야? 
 일단 영월로  가자. 거기서는  동서남북이 
다 좋아. 여기서 기차 타고 가면 차창 밖의 
경치도 멋지고, 치악산을 지나 영월로 가는 
길도 아주 쾌적해. 영월에서는 단양으로 둘
러서 소백산 등산을 하면  1박 2일 코스로
는 제격일 거야.  1박 2일이라구? 
 그래, 1박은 해야 돼. 토요일 저녁엔 영월
의 동강 부근에서 민박을 하고,  일요일 새
벽에 일어나 남천계곡에서  소백산 연화봉
까지 올라갔다가 희방사계곡으로 내려오면
서 폭포랑 절 구경도 하면 일정이 맞을 거
야. 그리고 희방사역에서 청량리로 오는 기
차를 타면 되거든. 서울에 도착하면 밤 9시
쯤 될 거구. 그러면 찬  생맥주나 한잔하고 
헤어져. 영월까지의 기차 여행은  쾌적했고 
경치도 좋았다. 기차가 높다란 철교를 통해 
치악산 고개를 지날 때에는  아슬아슬했고, 
원주에서부터는 철로를 따라  졸졸졸 흐르
는 차창 밖의 시냇물이 상쾌함을 더해줬다.
기차는 신림, 두학,  봉양이라는 이름의 시
골역을 차례로 지나 제천역에 도착했다. 제
천은 분지에 자리잡은 도시라 바람이 시원
하고 물이 깨끗했다. 부근에 오염원이 전혀 
없어서인지 마을 사람들의  성격조차도 시
원스러워 보였다.
제천에서 영월까지는 불과 3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라 역전에서 택시를 탔다.
 여기는 강원도 같은 충청도군요. 
경훈의 말에 택시 운전사가 웃었다.
 같은 충북이지만 제천  사람들은 충주 사
람하고는 아주 달라요. 
아마 충주는 평야고 여기는 산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충주 사람들은 얌전한 반면 여
기 사람들은 억세고 의리가  강하다니까요. 
한말 의병도 제천에서 처음 났구만요. 운전
사는 그 지역 토박이라  그런지 경훈이 제
천에 대해 호감을 드러내자  신이 나서 말
이 많아졌다.
 옛날엔 제천 깡패들이 얼마나 무서웠다구
요. 인근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청량리까
지 원정 가서 서울놈들  다 줘패고 내려왔
지 않구선요. 근데 이젠 확 바뀌었어요. 교
육 도시가 돼버렸다니까요. 
 대학교가 있습니까? 
 그렇잖구선요. 대학이   둘이나 생겼지요. 
서울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몇
천 명이나 오니까 이  쪼끄만 도시가 금세 
교육 도시가 돼버리지 않구선요. 사실 공기 
좋고 물 맑은 데 푹 처박혀 한 4년 열심히 
공부하면서 실력 키우기에는  여기만한 데
가 또 있을라구요. 학교도 산에 들어박혀서 
경치가 그만이잖구선요. 동강 어귀의  마을
에 도착해  동강을 따라  내려가는 보트를 
탔다.
 경훈이 너 그러다간  평생 사무실에 묻혀 
폐병쟁이 될걸.  뭐, 폐병쟁이? 
 그래, 가뜩이나 몸도 실팍치 못한 애가. 
 하하하! 
경훈은 유쾌하게 웃으며 인남의 어깨에 손
을 얹었다. 보트는  물살을 가르며  동강의 
비경을 따라 내려갔다. 불어오는  강바람이 
사건을 푸는 데 여념이  없던 경훈의 머리
를 상쾌하게 식혀주었다.
보트는 강을  따라 한참이나  내려간 끝에 
동대리를 지나 향산에  닿았다. 두  사람은 
보트에서 내려 온달산성과  고수동굴을 구
경한 다음 단양 시내로  들어가 호텔에 방
을 잡았다.
 더블 베드로 해드릴까요? 아니면 트윈 베
드? 
 아니, 방 두 개로 해주세요. 
경훈과 인남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나온 소
리에 종업원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늦은 저녁을 먹은  뒤 호수가 내려
다보이는 자리에서 맥주를 마셨다.
 충주댐이 생기면서 원래의 단양은 묻혀버
렸대. 그러니까 신단양은 호수 때문에 새로 
생긴 도시야.  끔찍한 일이군.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모든 것을 바
칠 듯하다가도 일단 헤어지면 언제 그랬느
냐는 듯이 남보다 더 멀어져버리잖아.   …
`….
 난 헤어진다는 게 너무 무서워.  가까웠던 
사람을 잊어야  한다는 건  끔찍한 고통일 
거야. 그런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아무도 
좋아하지 않겠어.  …`…. 
 너 그 사람 만났니? 
 누구? 
 미국에서 널 외롭게 했던 사람 말이야. 
 아니`…`…. 
 그렇게 그리워했잖아. 
 글쎄, 한번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에만 있지 실제로는 만나게 되지 않아. 
아마 이런 게 잊혀진다는 건가  봐. 출렁이
는 호숫가에  비치는 달빛이  물결을 따라 
넘실거렸다. 초여름의 따스한 바람이 두 사
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낭만적인 밤이
었다.
 이런 밤에 어울리지  않는 얘기지만 거두
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겠어. 그 첫 번
째 구절 말이야, 기억나니? 경훈은 웃었다. 
인남은 역시 엉뚱했다. 인남의 매력은 바로 
이런 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훈은 나
직이 소리내어 첫 번째 구절을 읊었다.
이제 노벰버를 스터디하는 것이 대세다. 그
리고 그 일은 내가 해야 한다. 모두가 등을 
돌리고 있다.`
 맞아, 역시 넌 기억력이  좋구나. 내가 생
각해 봤는데 하나는 분명해.  그 하나가 뭐
지? 
 너도 생각해 봤니? 
 응, 그런데 아무것도 안 떠오르던데. 
 그 ‘노벰버’ 말이야, 그게 뭔지가  중요
하지 않겠니?  그렇지. 
 11월이잖아, 노벰버란. 
 그래. 
 그게 해답이야. 
 무슨 소리야? 
 11 말이야, 11이 해답이라구. 
 11이 해답이라니? 
 11기, 육사 11기란 말이야. 
 육사 11기라구? 
 그래, 육군사관학교 11기. 
경훈은 뜻밖의 해석에 깜짝 놀랐다. 그러고
는 인남이 얘기한 11기를  노벰버 대신 집
어넣어 보았다.
 이제 육사 11기를  스터디하는 것이 대세
다. 모두가 등을 돌리고 있다.   이 문장은 
아마 현 선생님이 정신적  장애를 겪기 전
에 쓰신 것 같아. 맨 앞의 ‘이제’라는 말
은 상황의 변화를 뜻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지? 노벰버가 은어인 
것은 확실하지만,  어째서  육군사관학교의 
11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했느냐구?  
현 선생님의  직업과 연결시켜  보면 가장 
자연스런 해석이 아니니? 그분은  주한 미
군의 공작 책임자였어. 게다가 10·26의 비
밀과 관련해서 이  메모를 남기셨구.   어, 
그렇지! 경훈은 인남의 순발력에 놀랐다.
 다음의  ‘스터디’라는  말은   ‘연구한
다’는 개념인데, 문자 그대로 옮기면 육사 
11기를 연구한다는 말로 해석돼. 경훈은 잠
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인남은 자신이 생각
했던 것이상으로 열심이었다.
 ‘대세’라는 단어는  현  선생님 사무실 
안의 분위기를 말하는  것 같아.  왜냐하면 
그것이 그 다음의 ‘내가 해야 한다’라는 
말과 일치하기 때문이지.   ‘모두가 등을 
돌리고 있다’란?  그건 나도 한참 생각했
어. 그런데 그 문장만으로는 상대가 불분명
해. 누구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는단 말이야. 현  선생님 본
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고, 아니면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지.  훌륭해. 
경훈에게는 갑자기 인남의  성실한 태도가 
부각되었다. 자신은 의미도 모르는 채 머릿
속에 접어둔 것을 그녀는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해 오지 않았는가.
 육사 11기를 연구해야  한다는 문장은 아
주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경훈도 동
감이었다.
 그래, 어쩐지 좋은 예감이 드는데. 
 좋은 예감이라니? 
 너의 그 암호  해독이 큰  결과를 가져올 
것 같단 말이야.  호호, 그래. 그러니까  앞
으로 나 무시하지 마. 
 알았어. 하지만 난  한 번도 너를  무시한 
적이 없어. 경훈은 ‘대세’라는 단어에 신
경이 쓰였다. 육사 11기를 연구한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역사 속에서  육사 11
기는 한국의 권력을 장악하고 두 사람이나 
되는 대통령을 배출했다.  제럴드 현이  쓴 
문장은 그 역사적 사실과  어떤 관계가 있
는 것일까, 아니면 지나친 상상일까.
아무리 가볍게 넘기려 해도  어쩔 수 없었
다. 제럴드 현의 그 문장과 두 사람이나 되
는 육사 11기 출신  대통령이 겹쳐져 뇌리
에 떠올랐던 것이다.
 ‘모두가 등을  돌리고  있다’라는 것의 
상대는 제럴드 현이 아닐 거야.  인남은 경
훈의 추측에 얼른 되물었다.
 그럼 누구지? 
경훈은 잠시  말이 없다가  불현듯 생각난 
듯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박 대통령. 
 박 대통령? 
 그래, 모두가 박 대통령에게서 등을  돌린
다는 것으로 해석할 때  여러 가지가 맞아
떨어지잖아.  그러니까 모두가 박 대통령에
게서 등을 돌리니 현  선생님이 육사 11기
를 스터디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니?  그래. 
 그게 무슨 뜻일까? 
 음`…`…. 
경훈이 짧게 신음을 토했다. 만약  이 해석
이 맞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승화가 김재규와 그날 궁
정동에 같이 있었다는  관점에서 10·26이 
12·12를 태동시켰다고 말하지만, 이  해석
은 다른 면에서 10·26과 12·12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왜 갑자기 입을 다물어? 
 이것은 쉽게 결론 내릴 일이  아닌 것 같
아. 만약 제럴드 현이 이런 뜻으로 그 메모
를 남겼다면 대단한 거잖아. 인남은 경훈이 
다시 깊은  생각에 몰입해  들어가려 하자 
서둘러 말을 꺼냈다.
 그 다음 두 문장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는
데 말이야. 경훈은 머릿속으로 제럴드 현의 
메모를 떠올려보았다.
─`하문, 이놈은 왜  나를 슬슬  피하는 걸
까? 나 모르게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
다는 걸 잘 아는  녀석이 왜 그러지?─`제
리, 네가 원하는 것은 모두 해줄게라고? 하
문, 네가, 네가 그럴 수  있는 거야? 그 자
식은 이미 빼돌리고.`
 무슨 뜻이지, 그건? 
경훈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하문’이란 이름이 참 이상해. 
 나도 그렇긴 했어. 
 그건 이름만일까? 아니면 성도 포함된 걸
까? 
 확실치 않아. 
 문장의 뜻은 비교적 간단한 것 같아. 하지
만 처음 문장과 두  번째, 세 번째  문장의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모양이야. 
자세히 보면  볼펜의 진하고  옅은 정도가 
다르거든.  음, 예민한 관찰력이구나.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장은 같은 
맥락이야. 하문이라는 사람이 현  선생님을 
슬슬 피하다가 누군가를 빼돌린 거지. 그러
고는 미안하니까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
고 한 거야.  그래, 하지만 그 이름은 정말 
낯설다. ‘하’가  성일  수도 있고,   ‘하
문’이란 게 성이 빠진  이름일 수도 있고 
말이야. 인남도 역시 하문이란 이름이 익숙
하게 와닿지 않는지 입  속으로 몇 번이나 
반복해 보았다 인남아,  좀더 생각해 보자. 
이런 건 잊어버리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탁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으니까. 경훈은 금
세 깊은  생각에 빠지는  인남을 위로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인남은 경훈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즐거운지 의기양양하게 목소리의  톤을 높
였다.
 맞아, 생각 안  나는 거 억지로  쥐어짜면 
머리만 아파. 편하게 살자. 나처럼  말이야. 
경훈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한턱내. 그거 생각하느라 몸무게가  2킬로
그램쯤은 빠졌으니까.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다리안폭포를 거쳐 
소백산에 올라갔다가 희방사  쪽으로 내려
왔다. 아침부터 강행군을 한 탓인지 희방사
역에서 청량리행 기차를 타자 몸이 피곤했
다. 하지만 두 사람의 얼굴에는 큰 산을 하
나 넘었다는 뿌듯함이 어려 있었다.
인남은 기차에 오르자 곧 잠이  들었다. 경
훈은 인남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녀와 
미국에서 처음 만나던 때로부터 지금 등산
을 오기까지의 과정을  다시금 더듬어보았
다.
제럴드 현이 얘기한 10·26의 비밀은 이제 
하나하나 풀려가는  듯도 했고  아닌 듯도 
했다. 결정적 증거나 증인이 전혀  없는 상
황에서 그 엄청난 사건을  캔다는 것은 결
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도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어려웠다.
다만 이것은 제럴드 현과 그의  메모, 브루
스와 홀리건, 김재규  행동의 미스터리, 그
리고 한국과 미국의 어딘가에서 먼지를 덮
어쓰고 있을 비밀 기록들을 종합하여 판단
을 내릴 수밖에 없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거기에 인남은 또 하나의  큰 숙제를 가지
고 온 것이다. 노벰버, 그것이 의미하는 게 
육사 11기라면 제럴드 현은  왜 육사 11기
를 스터디했던 것일까.
두 여자
청량리역에 내린 후 경훈은 인남의 오피스
텔 부근으로 가서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인남이 말했다.
 늦었는데 그냥 가까운 데서 먹는 게 낫지 
않을까? 
 데려다 주려고. 
 어머, 황송해라.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가다 인남의 오피
스텔 근처에 있는 식당 앞에서  내렸다. 자
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한  다음 인남은 경
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돈이 필요하면 얘기해. 
 마치 무슨  보스가  하수인에게 얘기하듯 
하는구나. 너 돈 생기니까 좋니?  돈이  있
으니까 마음은 한결  편해. 그렇다고  내가 
낭비를 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예전에 왠지 
불안하곤 하던 게 없어졌어. 나도 속물인가 
봐. 이 나이에 벌써 돈타령이라니. 호호. 말
은 그렇게 해도 인남은  돈이 있다는 사실
이 싫지는 않은 모양인지 목소리가 가벼웠
다.
 이것저것 좀 사고 그랬어? 
 아니, 생각만 그렇지 손은 안 나가져. 
 요즘도 맥주 마시니? 
 물론. 위스키는 생각도 안  해. 안 마시던 
거니까 맛이 없어. 맥주는 살찔까  봐 겁나
고 해서 소주를 좀 마시는 편이야. 애들 만
나니까 다 저희들이  사더라. 내가  얼마나 
부잔지도 모르고 말이야. 
호호.  너 돈 있다고 그렇게 자꾸 호호거리
니까 정말 속물 같다. 
 참, 일전에 미국 있을 때 변호사 사무실에 
들렀는데 그 변호사가 나보고 자기하고 만
나재. 사람이 좀  우습달까 솔직하달까. 이
혼하고 혼자 산다는데,  유산 때문에  그런 
건 아니라고 그러면서 뭐  내가 매력이 있
대나 어떻대나.  어떻게 처신하고 다녔기에 
그런 말을 들어? 
경훈은 순간적으로 기분이  상해 비아냥거
렸다.
 물론 문제는 내게도 있지 뭐. 수녀처럼 엄
숙한 표정을 유지하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너 왜 얼굴빛이 그렇게 변하니? 인남은 놀
란 듯한 표정으로 경훈의 반응을 살폈다.
 아냐, 아무것도 아냐. 
 경훈이 넌 내게서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
야. 전에도 그랬는데  이제 나한테  돈까지 
이렇게 많이 생겼으니 꼼짝도 할  수 없어.  
너 자꾸 돈 돈 하는 거 보니까  추하다. 맑
고 밝던 너는 어디로 갔니?  그때가 더 좋
았어? 
 그럼. 
 그럼 이 돈 다 불쌍한 사람들한테 줘버릴 
테니까, 너 나하고 결혼할래?  …`…. 
경훈은 놀랐다. 인남의 장난 같은  말 때문
이 아니었다.
비록 순간적이지만 인남의  얼굴에는 너무
나 진지해서 도저히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표정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제야 경훈
은 잠시 잊고 있던  인남의 성격을 떠올렸
다. 그녀야말로 돈  같은 것에는  좌우되지 
않을 사람이 아닌가.
인남에게는 격을 깨는  어떤 힘이  있었다. 
선민이 주는 신비감이 먼 이상의 바다에서 
서로를 탐험하는 낭만이라면, 인남은  모든 
조건과 격을 깨는 자유로움과 솔직함을 가
지고 있었다.
경훈은 여태껏 인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왔지만, 가끔씩 부딪치는 그녀의 성격은 인
간 관계를 어떤 틀  속에서만 맺어왔던 자
신에게는 솔직히 과분했다. 어떨 때의 인남
은 자신이 정면에서 볼 수 없을 정도의 솔
직함과 순수함으로 압박해 들어왔다.
그럴 때면  경훈은 그런  모습들이 인남의 
열등한 조건, 예를 들어 넉넉지  않은 형편
이나 뒤처졌던 공부 등으로 말미암은 것이
라고 폄하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사람을 
보는 시각이었다. 경훈이 생각하는 한 세상
은 함부로 아무하고나 어울릴  수 없는 곳
이었다.
 따라서 인남을 보는  경훈의 시각에는 한
계가 있었다. 그러나  인남이 보여왔던 것, 
특히 지금 보이고 있는  순수함은 말 그대
로 파격적인 것이다. 격이 허물어진 그곳에
서 경훈은 인남에 비해 너무도 약했다.
 이 인남이가 언제든지 돈을 버리고 널 기
다리고 있다는 걸 잊지 마. 순간 경훈의 입
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격한 말이 튀어나왔
다.
 인남아, 너  함부로 말하지  마. 너한테는 
그 미국 변호사니 셰인이니 하는 작자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돈 좀 생겼다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건 아냐. 기본이 있는 여자라면  미국 같은 
데서 그렇게 함부로 지내지 않을  거야. 나
는 네가 미국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 걱정
돼. 그리고 너희 집에서 왜 너를 그냥 내버
려두는지 모르겠어. 나는`…`….  그만해! 
경훈은 인남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흠칫 놀
랐다. 인남의 눈이 발개져 있었다.
 너 우리  집안에 대해  얘기하려는 거지? 
넌 나를, 그리고 우리 집안을  멸시하는 거
지? 나를 천박한 아이라고 말하고 싶었지? 
인남은 무슨 말인가를 더하려다 말고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눈물  한 방울
이 식탁 위에 툭 떨어졌다.
 아니, 인남아. 그게 아니`…`…. 
그러나 경훈의 말은 인남이 앉았던 빈자리
에 그냥 남고 말았다. 
인남은 아무 말없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
며 나가버렸다.
 …`…. 
경훈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인남이 나가버린 쪽을 한동안 바라보
며 앉아 있었다. 한참 후에 일어선 그의 표
정은 잔뜩 뒤엉켜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경훈은 식당에서의 
자신의 행동을 뉘우쳤다. 전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후회의 
심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선민이나 
스테파니에 비해 무척 뒤떨어지는 여자, 비
록 최근  갑작스럽게 돈이  생겼지만 워낙 
볼 것 없는 형편에 대학도 못 나온 여자가 
왜 자신을 이렇게 흔들어대는지 경훈의 가
치관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경훈은 수화기를 들었다. 신호
가 여러 번 가도 인남은 전화를 받지 않았
다.
다음날 아침 경훈은 서둘러 인남의 오피스
텔에 들렀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불안해진 
경훈은 관리인에게 인남이  심하게 아플지 
모른다고 설득하여 겨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인남은  없었다. 책상 위
에 쓰다 만 편지 한  장이 구겨진 채 놓여 
있었다경훈아, 꼭 해야 할 얘기가  있어 편
지를 쓴다. 이 편지를 부치게  될지 어떨지 
모르지만. 그래, 너는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어.
 일전에 지방에 내려갔던 거 내 마음을 정
리해 보려고 그랬던 거야.
지방에 외가댁이 있어 어릴  때는 자주 갔
었지. 외가댁에서는 큰 과수원이랑  목장을 
하셨는데 지금은 다  남의 손에  넘어갔어. 
외할아버지가 무슨 실수를 하셨대. 그 여파
가 우리 집까지  미쳤지. 아버지도  보증을 
섰다가 잘못 연루되셨나 봐.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신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
에 취해 들어와선 외가댁을 원망하며 엄마
한테 손찌검까지 하셨어.  그런 날들이  꽤 
오래 계속되었지. 엄마가 견디기  힘드셨나 
봐. 나중에는 아예 절로 피신을 하셨어. 아
버지는 더 격분해서 엄마를 찾아내 집으로 
끌고 돌아오시곤 했지.  결국 엄마는  일찍 
돌아가셨어.
나는 그런 속에서 자라면서 겉으론 쾌활하
고 씩씩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곪아갔어. 부
모님을 원망도 하고,  나는 주워온  자식일 
거라고 상상도 하곤 했지. 그러다  차차 내
겐 행복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
게 되었어. 나는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행복한 주부가 될 수 없다고 말이야.
처음에는 발버둥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세상일에 관심없이 살자는 게 내 인생관이 
되어버렸어. 남들에게 절대 상처 주지도 말
고 받지도 말자고.
대학 같은 데를 갈 생각은 아예 없었어. 이 
땅과 인연을 끊고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어
서 미국으로 건너간 거야. 아버지는 다행히 
좋은 분을  만나서 재혼하셨기  때문에 내 
마음도 홀가분했지.
미국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었고, 또 
그런대로 행복하다고 믿고 있었어.  그런데 
너를 만난 거야.  그러면서 안정되었던  내 
마음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지. 너는 좋은 
가문에 뛰어난 수재잖아. 너는 옛날부터 내
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친구였어. 그
리고 아직까지도.
그런데 너는 왜 내게 잘해  준 거니? 그냥 
길거리에서 장사나 하고 소리나 하게 놔두
지 왜 내게 실낱 같은 희망을 주었냐 말이
야.
현 선생님 일로  너와 가까워지는  듯했어. 
정말 난 돈에 초연할  수 있다고 자부하지
만, 솔직히 유산을 받고 가끔  흔들린 적이 
있었어. 이제 너한테  걸맞은 위치에  조금 
다가간 것은 아닐까 해서.
너를 만날 때마다 희망을 조금씩 쌓아갔어. 
셰인이라는 남자 친구는 있지도 않아. 너를 
떠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데 너는  내가 
조심스레 쌓아가던 희망을  한순간에 무너
뜨려버리더구나. 구름 위에 떠 있는 기분이
던 나를  단숨에 길바닥  먼지로 추락시켜 
버리곤 했어.
엄마가 아버지를  피해 숨어  계시던 절에 
가서 며칠 지내며 다시  용기를 얻고 희망
을 가졌지. 엄마처럼 살 수는 없잖아. 그래
도 외국 물씩이나 먹어봤는데.
그래서 현 선생님의 그  수첩에 죽자 사자 
매달렸어. 나도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면서 나름대로 추적도 하고 해
석도 내린 거야. 너한테 이 인남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지. 너한테 인정
받고 싶어서 몸부림쳤어. 이 정도면  네 앞
에 나설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기더구나. 그
래서 너를 불러냈던 거야.
그런데 역시 너와 나는  다른 세계에 속한
다는 사실만 재확인하게 되었어. 이젠 마음
을 비우고 편해질 거야. 네  마음속에 있다
는 그 사람과 잘되기만 바라겠어.
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래. 어차피  여기 
있어 봤자 너한테 도움도  못 주고 신경만 
쓰이게 하잖아`…`….
인남의 오피스텔을 나와  사무실에 출근한 
경훈은 진지하게 인남에 대해 생각했다. 그
러다가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오히려 인남을 
원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비록 자신이 
상정했던 여러 조건에는  어긋나는 여자지
만 그녀는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경훈은 자책감에 휩싸였다. 자신은  인남을 
지식이나 소양, 사회적  위상 면에서  많이 
뒤떨어지는 존재로 여겨왔던  것이 사실이
다. 
고교 시절엔 안중에도 없던 그녀를 미국에
서 만나곤  했던 까닭도  실은 선민에게서 
받은 상처를 잊기 위해서였고, 또 자신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
다.
경훈은 인남의 말과  반대로, 인남이  구름 
위의 신선이고 자신이 길바닥 먼지같이 느
껴졌다. 자신이야말로  속물이었다. 경훈은 
인남이 자기에게서 받았을  상처를 조금이
라도 치유해 주고 싶었다.
경훈은 수화기를 들어 인남의 자동 응답기
에 메시지를 남겼다.
 인남아, 네 말대로 그동안은 나 혼자 제럴
드 현의 미스터리를 쫓아온 것  같다. 그러
나 이젠 네 도움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게 
되었어. 네가 풀어낸  그 노벰버의  비밀도 
실은 놀라웠다. 아마 나라면 평생  못 풀었
을지도 몰라. 인남아, 앞으로 나를 좀 도와
줘. 우리 일을 나눠서 하자. 떠오르는 의문
은 많은데 정작 만나서 도움을 받을 수 있
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어. 만약  권력 내부
에서 그 급박했던 10·26과 12·12의 진상
을 지켜보았고 그후에 신군부의 내부 사정 
및 한미 관계가 얽혀나가는 방향까지 세심
하게 관찰한 사람을  단 한 명만  만날 수 
있어도 많은 도움이 될 텐데. 물론 그간 언
론에 이름이 등장했거나  현대사에 깊숙이 
관련된 사람이라면 많은 정보를 주긴 하겠
지만, 그런 이들은  철저히 자신의  시각만 
고집하기 때문에  우리한텐 별  도움이 안 
돼. 당장 5·18 수사 기록만 봐도  모두 자
기 논리만 내세우고 있잖아. 아마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인물이 꼭 있을  거야. 인남이 
네가 좀 찾아봐  주지 않을래?  나는 관련 
자료를 아무리 뒤져봐도 더  이상은 못 찾
겠어. 이제는 너에게  기대고 싶다. 경훈은 
비로소 자신과 인남이 갈  방향을 찾은 것 
같았다. 같이 어울리고 섞이고 기대면서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세계. 경훈은 이제껏 마
치 심판관 같은 오만함으로 인남을 평가하
고 재단하기만 했다. 인간의 속으로 들어가
지 못하고 하찮은 기득권적 가치만을 내세
우며 살아왔다. 그러나 인남은 경훈이 생각
했던 그  보잘것없는 조건  속에서 생명력 
있는 당당한 인간으로 자라난 것이다. 자신
은 이제껏 사람의 무엇을 보아왔던가.
그러자 곧 선민이 연상되었다. 모든 남자가 
선망하는 조건을 갖춘 여자. 경훈은 선민과 
가까워지면서 한 사람의  여자뿐만 아니라 
그 여자가  살아온 인생도  자신의 것으로 
편입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었
다. 선민에게는 낯설고 당혹스런 자아가 도
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아는  늘 긴장
감을 자아냈으며, 선민은 그 느낌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경훈이 미국에서 보아
온 많은 여자들과 비슷한 의식의 소유자였
고, 그것을 자신 있게 뿌려댔다.
경훈은 수첩에 고이 간직되어 있는 선민의 
전화 번호를 보며  한참 망설였다.  그녀를 
만나 그녀와  자신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하고 싶었다.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
자 신호음이 울렸다. 한참 신호음이 울리다
가 선민의 음성 메시지가 울려나왔다.
 이선민입니다. 지금은 외출 중이니 삐  소
리가 난 후 용건을 말씀해  주세요. 돌아온 
후 전화드리겠습니다. 녹음된 기계음이어도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경
훈은 사회의 저명 인사가  된 여성 동창이
나 동료 변호사 가운데서도 선민처럼 세련
된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상념에 
젖은 경훈은 한동안 전화를  끊지 않고 수
화기를 귀에 댄 채 가만히  있었다. 한참이
나 그러고 있던 경훈은  이윽고 아무런 감
정의 동요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제는 선민을 떠나보낼 수 있었다.
무서운 처방
경훈이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손 형사가 사
무실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왔다.  손 형사
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무력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변호사님, 잘 다녀오셨십니꺼? 
 아, 손 형사님! 어서 오세요. 
 가셨던 일은 잘됐십니꺼? 
 네. 
 죄송합니더. 지는 이제껏 한 일이  아무것
도 없십니더.  보안 유지는 철저히  하셨겠
죠? 
 그렇십니더. 
 그러면 큰일을 하신 겁니다. 
 아입니더. 쥐구멍을 찾을 도리밖엔 없십니
더. 
 일단 리엔지니어링의  사장인 제임스라는 
자에게 혐의점이 있는 것은 우리가 확인했
고, 다만 연결이 쉽지 않았던 것은 한 사람
은 무기상이요, 또 한 사람은  의사라는 점
이었죠. 그러나 두 사람을 맞추어보면 한때 
주한 미군에서 활동했다는  공통점이 있습
니다.  
같은 미군이었는데 와  그리 죽여버렸을까
예? 
 글쎄요, 알아봐야겠죠. 그런데  워낙 제임
스의 범죄가 치밀해서 어떻게  해볼 수 있
는 방법이 없어요. 이 정도면  완전 범죄에 
가깝죠.  전혀 방법이 없겠십니꺼? 
 글쎄요, 의사  신분이었던 숀이  제임스를 
위협할 수 있는 무기가 무엇이었나가 해결
의 열쇠일 겁니다. 혹시`…`….  뭐 말입니
꺼? 경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
었다.
 아니, 일단 숀이 한국에서 근무했던  기간
을 알아보는 게 중요합니다. 경훈은 일전에 
지미에게서 받았던 숀의 신원 확인서를 꺼
내서는 그의 복무 기간을 확인했다.
 음, 제 짐작이 맞을 가능성이 있군요. 
 뭡니꺼? 
 숀은 제럴드 현이  전역하자마자 바로 한
국을 떠났어요.  변호사님, 제럴드 현은 누
굽니꺼? 
 주한 미군에서 일하던 사람이에요. 
다시 경훈의 머리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
었다. 오세희가 했던 얘기였다.
―`그런데 그 의사는 당시 매우 불우한 처
지에 놓여 있었소.  개업을 했다가  환자가 
사망하는 의료 사고가 생겼지.  처방해서는 
안 되는 약을, 그것도 약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환자에게 주었다가  환자가 사망하고 
만 거요. 그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는 복
역 중이었소.
숀은 이번에는 제임스를 협박하려 했다. 경
훈은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숀이 왜 제
임스를 협박하려 했을까. 의사가 남을 협박
할 수 있는 무기는 도대체 무엇일까.
경훈은 신원 확인서상에 있는 숀이 근무했
던 캐나다의 병원에 팩스를  보내 그의 전
공 과와 평소 행동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미를 통해 대사관 명의로 보내
면 될 것이다.
 일단 지금으로서는 숀이 어째서 의사로서 
어울리지 않는 협박이란 행동을 했는지, 그
가 무엇으로 제임스 사장을 협박하려 했는
지를 알아보는 게 급선무입니다.  지가  할 
일은 없십니꺼?  아니, 있어요. 
 지가 할 일이 있다고예? 아, 짐작이  갑니
더. 사장이 취급하는  물품 중에서  야전용 
의료기 등의 거래 관계를 알아보라는 얘기
네예.
 숀이 의사로서 협박을  했다면 당연히 자
신의 전문 지식 범위 안에서 했을 거 아입
니꺼? 손 형사는 오랜만에  우쭐한 표정으
로 말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숀이 근무하
던 시기에 제임스는 다만 군인이었을 뿐이
니까요.  참, 그렇군요.  그렇다면 지가 할 
일이 뭡니꺼? 
손 형사는 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리엔지니어링사가 언제 등록되었는지,  세
무서에 신고된 소득은 연도별로 어떻게 다
른지를 좀 조사해 주시죠.  그거야  어려울 
게 없겠네예. 바로 해오겠십니더. 
 그럼 수고하세요. 
경훈은 제럴드 현이  미8군 사령부에 근무
하던 당시에 제임스와 숀도 같이 근무했다
는 사실에서 세 사람  사이에 뭔가 석연치 
않은 관계가 있음을 느꼈다. 게다가 제럴드 
현이 오세희에게 숀을 추적해 달라고 했던 
것도 심상치 않았다.  경훈은 바로  지미의 
사무실로 내려갔다.
 지미, 마침 있었구나. 
 왜? 또 시킬 일 있어? 
 그래, 좀 부탁해. 
 뭔데? 
경훈은 숀의 신원 확인서를 내밀었다.
 이 병원에 연락을  해서 숀이  어떤 일을 
했는지, 그의 전공 과는 무엇이었는지 알아
봐 줘.  이건 미국이 아닌데.  캐나다 병원
이잖아. 
 그래. 
 하긴 캐나다의 병원이라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 그럼 수고 좀 해줘. 
 근사하게 한턱내면 문제없어. 
 알았다니까. 
 그럼 지급으로 해주지. 대사관 명의로  보
낼 테니까. 
다음날 경훈은 아침 일찍 사무실로 찾아온 
손 형사로부터 사장의  무기상 등록이 5공 
때 이루어진 것을 확인했다. 무기  거래 또
한 5~6공 때 가장 많았다가 한동안 주춤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이르러 접대비  및 
가지급금의 항목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 눈
에 띄었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십니꺼? 
 아닙니다. 직접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고 
참고로 하기 위해 조사했던 겁니다.   거기
서 뭔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있십니꺼?   
자세한 것은 대차대조표를  봐야 알겠지만 
이 회사는  지금 뭔가  거대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군요.  그걸 우째 알 수 있십니
꺼? 최근 몇 년 간  매출 실적은 미미하지
만, 접대비를 비롯한 가지급금 등이 엄청나
게 늘었습니다. 뭔가  대단한 로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지요.  참, 대단합니더. 우째 종
이 한 장만 보고 그런  걸 다 알아냅니꺼? 
손 형사는 연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훈
은 손 형사를 배웅하면서 지미의 사무실에 
들렀다.
 왔어? 
 아니, 지급으로 넣었는데도 안 오네. 살해
된 사실을  적시했고 대사관  명의라 즉각 
답신이 와야 정상인데.  경훈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사무실로 올라온 경훈은 바로 
오세희에게 전화를 했다.
 무슨 일이오? 
 제럴드 현의 주치의였던  로버트 숀 말입
니다, 그 사람이 근무했던 병원에  급히 사
람을 보내서 그가 병원에서  무슨 일을 했
는지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어렵
지 않소, 숀이 근무하던 병원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사립탐정을 곧장 그 병원으로 보
내겠소. 
그런데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요?  이상한 
예감이 듭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기분이 
좋지 않아요. 무슨 일인가가 꼭  일어날 것 
같습니다. 미국 대사관을 통해서  지급으로 
답신을 부탁했는데도 연락이 없어서 오 선
생님께 전화를 드린  겁니다.  잘했소.  내 
즉시 알아보리다. 
오세희로부터는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다. 오세희는 일부러 경훈이 출근
하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정각 10시
에 맞춰 전화를 걸어왔다.
 이 변호사,  엄청난 사실을  알아냈소. 그 
의사 말이오, 제럴드  현을 치료했던 의사. 
오세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네. 
 그 의사의 이름이 로버트 숀이 틀림없소? 
 네, 틀림없습니다. 
 앨런 메모리얼 인스티튜트 병원이 맞소? 
 그렇습니다. 
 몬트리올에 있는 병원이오? 
 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런, 세상에! 
오세희는 잠시 말을 멈췄다. 경훈은 전화선
을 통해 오세희의 비감을 그대로 느꼈다.
 아마 그 병원에서는 영원히 연락이 안 올 
거요.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관 명의로 급
하다고 보낸 일에  팩스 한 장  오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던 참이었다.
 특수한 병원인 모양이군요. 
 그렇소. 세상에는 사람을 치료하는 게  아
니라 죽이는 의사도 있었소.  무슨  말씀이
죠? 
 그 병원은 CIA가 미국 국내법을 피해  캐
나다에서 운영하던  곳이었소.  그곳에서는 
무서운 일들이 자행된 적이 있었소.   어떤 
일들입니까? 
 한두 가지가 아니오. 하지만 아주  간단하
게 설명할 수는 있지, 그 모든 행위의 본질
을.  …`…. 
 그 병원의 의사들은  거기서 인간의 정신
에 대해서 행할 수 있는 모든 실험을 했소.  
치료하다 보면 의사의 실수로 환자가 죽는 
경우도 있겠지요. 또는 의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병도 있구요.  
사람을 전문으로 죽이는, 아니 최소한 죽이
는 연습이라도 하는 의사가  있다면 이 변
호사는 믿을 수 있겠소?  네? 
경훈은 경악했다.
 의학은 이 세상에서  정반대의 두 얼굴로 
존재하고 있었소. 그것도 의술이라고  해야 
할까, 정말 무섭고 잔인하며 살인적으로 쓰
이는 의학적 기술이 있었단 말이오.   무슨 
말씀입니까?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숀이  그 병원의  중요한 멤버였다는 
사실이오.  네? 
 이 변호사가 알아달라고  했던 로버트 숀 
말이오. 
 숀이 그  비인간적인  실험에 가담했다는 
게 확실합니까?  그렇소.
 강일이 형님의 병명을 떠올려보시오. 그리
고 그 조울증이 급성으로 진행되었다는 사
실도.  맙소사! 
 게다가 숀은 그  병원의 원장을 협박했다
가 복역까지 했소.  …`…. 
 내 짐작이 맞다면  강일이 형님은 너무도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신 거요.  비참한  최
후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오 선생님은 숀
이 현 선생님께 어떤  종류의 정신적 타격
을 가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틀림없
소. 숀은 아주 특이한 약을  강일이 형님에
게 복용시켰을 것이오.  감기 등의  가벼운 
증세로 찾아간 형님에게 말이오. 내가 언젠
가 말했듯이 형님은 그전에  한 번도 증상
이 없다가 갑자기 입원하셨던 거요. 거기에 
대해서는 달리 이유를 찾을 수가 없소.
 삼척동자라도 다 알겠지만 정신 질환이라
는 것은 옆에  있는 사람이 가장  잘 아는 
병이오. 증상이 반복되면서 차츰  쌓이다가 
입원하게 되는 것이란 말이오.  그럼 현 선
생님이 10월 18일에 입원했다가 10월 27일
에 퇴원하신  것은 결국  숀의 솜씨였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당시 나의 후임자는 
강일이 형님과 자주  만났소. 부마사태  등 
국내의 동향이 일촉즉발의 상태라,  형님은 
경찰의 정보를  극히 필요로  하고 계셨고 
경찰은 반대로 미군의 동향에 대한 정보에 
목이 말라 있었지. 나는 후임자를 형님에게 
개인적으로 특별히 소개시켰기  때문에 형
님은 내 후임자를 자주 만나시곤 했소.
 아까도 다시 확인했지만 당시 형님에게는 
전혀 이상한 증상이 없었소. 그래서 형님이 
막상 입원하셨을  때는 내  후임자도 깜짝 
놀랐다고 했소.  그렇다면 그 특이한  약이
란? 
 바로 그 병원에서 만든 약일 것이오. 한번
에 사람의 정신을 날려버리는 가공할 약이
었겠지.  그런 약이 정말 실재할까요?  그
럼, 얼마든지 가능하지.  다만 그 치료법까
지 연구했을지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그럼 
현 선생님은  그 파괴적  약품을 복용하고 
평생 정신 질환을 겪게 되신  걸까요?  아
마 그러셨을 거요. 
 아, 무서운 일이군요. 
오세희의 말이 맞다면, 제럴드 현은 너무도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이다. 경훈은  언젠가 
치명적 환각을 일으키는 버섯에 대한 얘기
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버섯을 조
금만 먹어도 바로 신경  계통에 타격이 온
다고 했다. 아니 그런 종류의  약초들은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연구
하여 사람의 중추신경을 지배하는 것은 불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경훈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일단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하더
라도 그 다음으로 이어지지가 않았다.
이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
유로 숀은 제럴드 현에게  그런 무서운 처
방을 내렸던 것일까.  제럴드 현은  정보와 
공작을 담당하는 주한 미군의 고급 장교가 
아닌가. 게다가 CIA의  업무까지 공동으로 
수행하는 극비 공작원이 아닌가. 그런데 그
러한 제럴드 현에게 숀은  무슨 이유로 즉
각 효력을 발휘하는 정신 질환제를 투여했
던 것인가.
 틀림없이 10·26과 관계가 있을 거요. 
경훈의 심리를 꿰뚫어보기라도 하는 양 오
세희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정보 계통이란  워낙  사정이 복잡하니까 
속단할 수는 없지만 형님이 입원하신 시기
와 관련시켜 볼 때 관계가 있는 것만은 분
명하오. 제럴드 현이  입원한 시기는  10월 
18일이고 퇴원한 시기는 10·26  직후였다. 
그가 몸이 다 나아서  퇴원했을 리는 없겠
지만 어쨌든 그는 10·26이라는 역사적 사
건을 전후하여 입원하고 퇴원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알 수 없지.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숀이 강일이   형님을 해쳤다는  사실이오.   
그렇다면 어째서 현 선생님은 숀을 찾으려
고 하셨을까요?  둘 중 하나겠지. 
 둘이라면? 
 하나는 복수요. 숀을 찾아 자신을 그 지경
으로 만든 데 대한  복수를 하시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소.  또 하나는요? 
 강일이 형님 자신이  끝까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숀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에서 감
사를 표하시려 했을 수도 있소.  하여튼 분
명한 것은 형님은  강제로 10·26으로부터 
격리되셨다는 사실이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의 비밀을 한 꺼풀은 벗긴  것 같군요.  
역사의 비밀이라면? 
 10·26이 김재규의  우발적 범행이었다는 
역사적 결론을 어쩌면 바꿀  수 있을지 모
르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부 구조가 정
리가 안 되니`…`….  배후를  움직이는 거
대한 그림을 보면 짐작이  가는데 그 구체
적인 행위와의 인과 관계를 찾기 힘들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현 선생님의 인생을 
보면 딱 떨어지는데`…`…   안타깝습니다. 
그분은 왜 끝까지 입을  다물고 계셨던 걸
까요?  강일이 형님은 정보원이셨소. 형님
으로서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만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
지. 경훈은 콧날이  시큰해졌다. 제럴드 현
의 비애가 그대로 느껴졌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비밀을 털어놓을 결심을 했다
가는 지워버리고 다시  결심했다가는 지워
버리면서 오랜 세월을 살아왔을 것이다. 더
욱이 노인의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조
울증까지 견뎌내다 보면  무엇이 진실이고   
허상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다
가 그렇게  순간적으로 최후를  마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일단 현 선생님의  급작스런 정신 질환을 
통하여 밑그림은 그려지지만  아직 파헤쳐
야 할 일들이 한둘이 아니군요.  물론이오. 
하지만 형님이 당하셨던 수법이 워낙 교묘
하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으니 결국 알 수 
있는 것이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완전 범죄
손 형사는 경훈이 이미  숀의 내력을 완전
히 파악한 것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다 알아냈십니꺼? 
 다행히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꺼? 
 로버트 숀의 죽음에  대한 추리가 가능하
군요. 
 지는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십니더. 
 숀은 의료 사고  후 정상적인 의사로서의 
생활이 불가능해지자 나름대로  머리를 썼
습니다. 그는 아마 그 병원의  원장을 협박
하다가 형무소에 가게 된 것  같아요. 숀은 
복역 후 힘들게 지내다가 이번에는 한국으
로 와서 주한 미군 시절 같이 근무하던 제
임스를 협박했을 겁니다. 제임스는  한국에
서 돈을 많이 벌었으니까  협박에 굴할 줄 
알았던 거죠. 그러나  제임스 역시  정보와 
공작으로 한평생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는 
일단 숀에게  약간의 돈을  줘서 안심시킨 
다음에 밤늦게 술을 한잔하자고 불렀죠. 숀
은 그 전화가 미국에서 온 것인 줄은 꿈에
도 모르고  기쁜 마음으로  나섰다가 일을 
당하게 된 겁니다.  지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십니더. 그런데 제임스는 당시  숀과 
어떤 관계였십니꺼?   숀은 제임스로부터 
어떤 지령을 받았을 거예요. 현재  제가 추
측하기로는 숀이 제럴드 현이란 사람의 정
신을 파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을 가능성
이 큽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숀이  의사란 
신분으로 제임스를 협박할  거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또 제럴드  현이 전역하자  숀도 
곧 미국으로 가버렸어요. 증거를  남겨두지 
않으려는 치밀한 음모죠.   대단한 추립니
더. 하지만 제임스를 어떻게 할 수 있는 방
법은 여전히 없을  것 같은데예?  그래요, 
말려들 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거래는 가능할 거예요.  거래라꼬예? 
 네. 
 어떻게 합니꺼? 
 일전에 얘기했듯이  지금  제임스는 매우 
큰 거래를 준비하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
예? 
 그는 절대로 그  거래에 실패하면  안 될 
겁니다. 2년 간 모든 경비는 그  거래를 위
해 지출되고 있었어요. 계약한 품목들도 모
두 시험적인 것이거나 컨설팅 같은 것으로, 
큰 거래를 위한 준비에 필요한 거죠.  그렇
십니꺼? 
 그걸로 제임스와 거래를 할 수 있을 겁니
다. 잠깐만요. 경훈은  전화 번호부를 들고 
어딘가를 찾았다. 한동안 대화를 하더니 자
신 있는 표정으로 손 형사에게 말했다.
 호텔이나 항공사에 가면  숀의 음성을 녹
음한 기록이 있을 겁니다.  그런 기 있겠십
니꺼? 
 호텔에는 없다고 해도 미국의 항공사에는 
반드시 있을 겁니다. 
서울 지사에 가면 알 수 있을 거예요. 그의 
목소리를 따오십시오.
  네? 
경훈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손 형사는 이해
가 가기도 하고 안  가기도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이내 
전화를 걸어왔다.
 신기한데예. 호텔에 숀의 음성이 녹음되어 
있십니더. 예약  전화가  녹음되어 있네예.   
그 테이프를 얻어서 제가 얘기하는 곳으로 
가져오세요. 호텔에는 테이프를 곧 갖다 준
다고 하면 될 겁니다. 
경훈은 윗도리를 입고 사무실을 나섰다. 경
훈이 손 형사와 만나기로  한 곳은 음성·
음파 연구실이었다. 경훈의 얘기를 듣자 전
문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국인이 한 사람 있으면 좋겠군요. 
경훈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지미, 내가 하라는 대로 해봐.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발음 때문이야. 가장 정확한 영어  발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서 그런다니까.   오
케이, 얼마든지 해주지. 
경훈은 지미에게 여러 가지 발음을 주문했
다. 지미는 신이 나서 여러  번이나 반복했
다. 연구실 직원은  지미의 발음을  기계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신기한 현상이  벌어졌
다. 지미의 발음이 마치 숀의  발음처럼 바
뀌어 들리는 것이었다.  경훈은 넋을  잃고 
있는 손 형사를 데리고 연구실을 나왔다.
 자, 갑시다. 
 네? 어디루요? 
 리엔지니어링 말입니다. 
손 형사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경훈은 리엔지니어링사에 들어서자 명함을 
내밀었다. 비서는 두 사람을 대기실로 안내
하더니 이내 사장인 제임스가 나왔다. 그는 
풍채가 좋고 눈매가 매서운 오십대 후반의 
사나이였다. 제임스는 손 형사를 흘끗 쳐다
보고는 경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명함 교환
이 끝나자  제임스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변호사께서 우리  회사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주 능숙한 한국어였다.
 먼저 이분을 소개하겠습니다.  강남경찰서 
형사계의 손 형삽니다.
  반갑소. 
제임스는 손 형사에게는 손조차 내밀지 않
았다.
 녹음기가 있으면 좋겠군요. 이 테이프부터 
들어보고 대화를 나누면 모든 게 부드러울 
것 같습니다. 제임스는 말없이 비서를 불러 
녹음기를 가져오게 했다. 경훈은  테이프를 
손 형사에게 주었다.
─`이 변호사, 내가 안  나타나거나 사고를 
당하면 죽은 줄로 아시오.
─`누가 선생님을 해치려 합니까?
─`나는 리엔지니어링의  제임스를 만나러 
왔소.
─`무슨 일로요?
─`나는 제임스에게 돈을  좀 나누어 달라
고 왔소. 그가 한국에서 번 막대한 돈은 사
실 내가 벌어준 거나 다름없으니까.
─`어째서 그렇죠?
─`그는 상부의 명령이라면서 나보고 제럴
드 현에게 특수한 약을 먹이라고 했소.
─`그래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렇소.
─`그후 제럴드 현은 어떻게 됐나요?
─`평생을 정신 장애로 고생하게  됐소. 보
통 사람 같으면 죽었을지도 모르오.
─`그런데 제임스는 어떻게 돈을 벌 수 있
었습니까?
─`한국의 새 권력자들로부터 무기 거래상 
허가를 받았소.
─`그러니까 선생님은  제임스를 협박해서 
돈을 뜯으러 오신 것이군요.
─`그렇소.
─`제임스가 선생님께 돈을 줄까요?
─`돈을 주거나 죽이려 들 테지. 만약 내가 
어떤 이유로든 죽으면 당신이 제임스를 만
나 이 테이프를 근거로 돈을  받으시오. 반
은 당신이 갖고 반은  내 가족에게 보내주
시오.
테이프는 여기까지였다.  그러나  제임스는 
태연자약했다. 경훈은 밑도끝도없는 얘기를 
꺼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그날 밤 
로버트 숀을  호텔에서 나와  길을 건너게 
하느냐였죠. 숀은 한국에 와서 다른 사람과
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즉  제임스 사장님
만이 숀을 밖으로 나오게 하실  수 있었죠. 
사장님은 술이나 한잔하면서  타협점을 찾
자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아니면  여자라든
지 무슨 다른 이유를 붙이셨겠죠.
 바로 호텔 길 건너편 술집에 있는데 숀이 
나올 때쯤 길거리에 있겠다고 전화를 하셨
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은 그 전화를  길 건
너편에서가 아닌 미국에서 하셨던 거죠. 왜
냐하면 누군가 의심을 해서 숀에게 호텔로 
걸려온 전화를 체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미국에서 전화를 한다면 아무도 의
심하지 않겠죠. 숀의  가족이나 친구  등이 
전화를 한 것으로 생각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의 호텔에  전화를 걸어 
사장님의 통화 기록을 확인해 보았죠. 여기 
그 자료가 있습니다. 한 통은 리츠칼튼호텔
의 숀에게, 또 한 통은 휴대폰을 들고 차에
서 기다리고 있던  킬러에게 하셨던  거죠. 
제임스는 눈을   희번덕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이 변호사, 나는 지금 몸이 찌뿌드드해 목
욕을 가려던 참이었소.
 같이 가고 싶으면 지금 나갑시다.  경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러죠. 
손 형사는 엉거주춤 두  사람을 따라 일어
섰다.
목욕탕의 증기실에 들어가서야  손 형사는 
제임스가 혹시  녹음을 당할까  봐 자리를 
옮겼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 변호사, 그것은 천재만이 해낼 수 있는 
대단한 추리였소. 하지만 만약 그랬다 하더
라도 그것은 완전 범죄요. 숀에게  술 마시
지 말고 일찍 자라고 전화를 했으며, 또 휴
대폰으로 걸었더니 잘못된 번호라 몇 마디 
안 하고 금방 끊었으니까 말이오.  그 테이
프는 역사적 자료가 될지 어떨지는 모르지
만 범죄를 입증하는  데 쓸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인정합니다. 그것은  완전 범죄였
습니다. 
손 형사는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경훈의  결론에 따르면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제임스는 살인의 공
동 정범 혹은 살인  교사죄를 범한 사람이
다. 그러나 제임스는 너무나 태연히 경훈과 
선문답을 하고 있지 않은가. 대단한 추리를 
해낸 경훈도 제임스를  체포하라든지 하는 
말 한마디 없이 완전 범죄니 뭐니 하고 있
었다.
손 형사는 제임스가 잠시  나간 사이에 경
훈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변호사님, 지금  이놈아를 발가벗은  채로 
콱 연행해 삐리까요?  아닙니다. 
 아니, 지금 이놈아가 숀을 죽였다고  하지 
않았십니꺼?  그랬죠. 
 그런데 와 연행을 못합니꺼? 
 완전 범죄입니다. 공소 유지를 못해요. 알
다시피 녹음 테이프는 만들어낸 것이니, 제
임스를 직접 차로 친  사람을 붙들어 자백
을 받기 전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아마 자
백을 받아도 안 될 겁니다.
 오히려 잘못하다가는 손 형사님이 징계를 
받거나 파면까지 당할 수 있어요.  손 형사
는 파면이라는 말에 찔끔했다. 이미 제임스
의 힘을 보아온 터였다.
 계좌를 추적해서  그  대금이 누구에게로 
흘러 들어갔는지 알 수 없십니꺼?   그 정
도에 걸려들 사람이 아녜요. 수준이 다릅니
다. 
무엇보다도 제임스는 미국 사람입니다.  범
죄를 저질렀다 해도 수사를 할  수 없어요. 
설혹 어렵게  수사를 한다  하더라도 신병 
처리를 할 수가 없구요.  그럼 어떻게 합니
꺼? 
이때 제임스가 들어왔다.
 손 형사님,  잠깐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
까? 
 아, 네. 
손 형사가 증기실을 나가자 경훈은 수건으
로 땀을 한 번 문지른 후 입을 열었다.
 저는 세상에 완전  범죄가 존재할까에 대
해 궁금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형태의 
완전 범죄를 생각해 보았는데, 가장 완전한 
것은 범죄자의 범행을  확신하면서도 입증
할 방법이 없는 경우였습니다. 아마 지금이 
그러한 경우겠죠.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그래서 저는 거래를 하고자 합니다. 
 무슨 거래요? 
 범죄의 대가는 수사나 기소 혹은 유죄 판
결만이 아니겠죠. 저나 저 밖에 있는 손 형
사가 떠들어대면 사장님은 큰 타격을 받으
실 겁니다. 비단 사업뿐만이 아니라 가족이
나 친구들로부터도 외면당하시고  삶에 엄
청난 변화가 오겠지요. 게다가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으실 겁니다. 결국 사장님은 비참
한 상태로 한국을 떠나셔야  하고 지금 투
자한 엄청난  금액을 한푼도  못 건지시게 
되죠. 뿐만 아니라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살
인자라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실 겁
니다.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
무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명예 훼손으로 고발할 텐
데. 
 그러시면 손해만 봅니다. 테이프가 사장님
의 유죄를  입증하는 데에는  별로 소용이 
없을지 모르지만, 그런 고발 따위를 방어하
는 데에는 정말 효과적이지요. 뿐만 아니라 
언론의 눈과 귀를  불러옵니다. 전  언론이 
달려들어 사장님의 무기  커넥션을 까발릴 
텐데요. 저는 숀에  관한 정당한  자료들을 
공개하고 말입니다. 변호사라는 신분은  충
분한 공신력을 주죠. 사장님은 도저히 이기
실 수 없습니다.  제임스는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수건으로 닦아냈다.
 이 변호사, 당신이 요구하는 게 뭐요? 
 어차피 숀은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파멸시켜 놓고서도 
자신의 그 살인 행위를  가지고 다시 돈을 
뜯으려 했으니 인간이라 볼 수 없죠. 그 당
시 사장님의 행위도 용서할  순 없지만 상
부의 명령이었을 테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숀을 죽인 건 평가하고 싶지도  않구요. 제
가 요구하는 건 숀의  말대로 약간의 돈을 
그의 가족에게 보내주라는 것입니다.  그리
고?  그리고 저에게 두 사람의  얘기를 들
려주십시오. 
 두 사람의 얘기라고? 누굴 말하는 거요? 
 제럴드 현과 홀리건. 
제임스는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에 관한 무슨  얘기를 들려달란 말이
오? 
 전역하기 직전의 상황을 들려주시면 됩니
다. 숀이 왜 제럴드 현에게 약을 쓰게 되었
는지, 특히 10·26 직후 제럴드  현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제임스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좌
우로 흔들었다.
 도대체 그런 옛날 얘기를 들어서 뭘 하겠
다는 거요?  저의 관심사입니다. 
 이미 다 흘러간 얘긴데`…`…. 
 그래도 좋습니다. 
 홀리건에 대해선 무엇을  알고 싶다는 거
요? 
 그가 김재규 정보부장을 담당하면서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생각해  보
겠소. 비밀은 보장하겠죠? 
 물론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곤란하오. 다음에  얘기해 
주리다. 
경훈이 밖으로 나오자 손 형사가 휘둥그레
진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결론이 어떻게 났십니꺼? 
 완전 범죄예요. 범행을 입증할 수는  없습
니다. 
 그라믄 지는 우짜는 기 좋겠십니꺼? 
 앞으로 15년이라는 시간이 있으니까 실력
을 키우세요. 범행을  입증할 확신이  서면 
한번 도전해 보시구요. 완전 범죄에 대해선 
저도 방법이 없으니까요.  15년이라, 15년. 
공소 시효가 그만큼 남아  있다는 얘기 아
입니꺼. 그때까지는 지가 진짜 콜롬보가 돼
야 한다는 뜻이네예.  아마 될 수 있을  겁
니다. 필립 최도  신이 되었으니까요. 경훈
은 무슨 의미인지 몰라  하는 손 형사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사무실로 돌아왔다.  손 
형사는 불만이  잔뜩 밴  얼굴로 길거리에 
마냥 그대로 서 있었다.
힘의 논리
차츰 10·26의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숀을 시켜 제럴드  현을 급성 조
울증에 빠뜨렸다. 그럼으로써 제럴드  현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10·26의 중심
에서 빠져나가 버리게  되었다이것은 무얼 
말하는가. 미국은 10·26을 전후한  상황에
서 아무래도 한국인인 제럴드 현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혹시 제럴드 현이 10·26의 비밀이라고 했
던 것은  미국이 10·26과  어떤 형태로든 
연관을 맺고 있다는 내용이 아닐까. 그러자 
경훈의 뇌리에 김재규의 진술이  떠올랐다. 
그는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경훈은 일전에 만났던 합수부의 전직 수사
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기꺼이 경훈의 사무실까지 와주었다.
 합수부의 수사에서 김재규는 미국이 배후
에 있다고 얘기하지 않았던가요?  네, 그랬
습니다. 사실 10·26이  터지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배후에 미국이 있을 거란 의심을 
했죠. 그러나 미국 측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김재규는  무언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눈치였죠. 나의 감으로는  김재규
가 기다렸던  것은 미국  측의 코멘트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종내 아무것도  없자 
어느 날 김재규는 신문을  받다 “내 뒤에
는 미국이 있다”라고 한마디 절규를 던졌
죠.  그후 조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조사는 중단됐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즉각 위에 보고를 했
죠. 위에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분위기가 느
껴지더군요. 그러나 한나절 후 내려온 지시
는 영원멸구(永遠滅口)였습니다. 즉 영원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
이었죠.
 그후 김재규의 신상에  어떤 일이 생겼을
지 짐작할 수 있겠죠?  결국  김재규는 다
시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나요?  물론입
니다. 
그의 머릿속에  그런 얘기를  다시 하느니 
죽는 게 백번 낫다는  기억을 자리잡게 했
죠.  이상한 일이군요. 김재규가 그런 얘기
를 했다면  수사 기관에서는  그의 진술을 
가만히 따라가면서 정말 미국이 배후에 있
는지 어떤지를  알아내는 게  순리 아닙니
까?  웬만한 일이라면 그런 시도를 했겠죠. 
수사관의 심리란 것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 사건은 모든  수사 과정을 모니
터로 감시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쓸데없는 
질문이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 수사관은 즉
각 교체되었습니다. 개인적 호기심이  있어
도 꾹 묻어두는 수밖에 없었죠.  전직 수사
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김재규의 태도는 어땠습니까? 그 말을 던
져놓고 무언가를 절실히 기다리는 것 같지
는 않던가요?  처음 몇 시간은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였지만 이내 위에서 지침이 내려
와 살이 뒤틀리고 피가 튀는 신문, 아니 고
문이 시작되자 영원히, 그야말로 영원히 입
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재판 과정에서는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때는  이미 
김재규가 자신을 민주  투사로 탈바꿈시킨 
뒤였어요.
 미국의 앞잡이가  아닌  조국의 수호자로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미국을 운운한다 하
더라도 살아날  길이 도저히  없다는 것을 
완전히 깨닫고는 논리를 바꾼 거죠.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직 수사관이  돌아가고 
난 뒤 경훈은 다시  커다란 의문에 부딪혔
다.
왜 합수부는  김재규의 그  중대한 발언을 
정식으로 수사하지 않고  고문으로 깔아뭉
개 버렸을까.
배후에 미국이  있건 없건  수사상 반드시 
밝혀냈어야 할 부분이다.
 당시의 합수부 수사를 전담한 보안사에서
는 진상을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였을 것이
다. 그렇다면 김재규의 입에서 터져나온 엄
청난 발언에  대해 무엇보다도  심도 있게 
조사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보안사에서 
김재규의 입을 봉하는 데만 급급했다는 사
실을 경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경우에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경훈은 인남이 풀어냈던 제럴드 현의 메모
를 되새겼다. 거기서  제럴드 현은  모두가 
박정희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시점에서 자
신은 육사 11기를 연구하겠다고 했다. 그는 
도대체 육사 11기의 무엇을 연구했으며 연
구의 결과는 어디에 있는가.
경훈은 육사 11기를 면밀히 연구하는 것이 
10·26의 또다른 큰 숙제라고 생각했다. 전
두환을 대표로  하는 육사  11기는 그들의 
주장대로 어떻게  하다 보니  대권을 잡게 
되었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어떤 거대한 보
이지 않는  음모에 의해  자신들도 모르게 
대권에 다가갔던가.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10·26이 그 시발점이 되었을 것이다.
경훈은 이것을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합수부가 움직인  방향을 규명
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전두환의 
합수부는 어느 시점에서  대권으로 치달았
던가.
경훈은 먼저 합수부 발표의 요지를 간추려
보았다.
중정부장 김재규는 자신의  무능력이 노출
된데다 차지철의 월권과  대통령의 차지철
에 대한 편애로 심한  불만을 갖고 있었으
며 금명간 있을 중요  보직 인사에서 중정
부장직을 물러날 것을 걱정하던 중, 안가의 
행사에서 대통령이 야당 공작 실패를 나무
라고 차지철이 불손하게 굴자 격분하여 차
지철에게 총을 쏘고  내친김에 대통령까지 
쏘았다.
합수부는 철두철미하게   김재규의 범행을 
우발적이고 개인적인 범행으로 규정했다.
경훈은 범행  직후 작성된  김재규의 자필 
진술서도 다시금 꼼꼼히 읽어보았다.
5. 본인은 거사를 다음과 같이  구상하였습
니다.
가. 본인은 거사를  하여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보안  유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나라가 
역대 이조 때부터 이러한  거사에서 한 번
도 보안 누설로 성공한  예가 없기 때문에 
본인도 그러한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본인 
독단으로 구상하였던 것입니다.
나. 본인이 거사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떠
한 자리를 마련하여 각하를 모시고 한꺼번
에 총격 살해하여야만 주위의 저지를 받지 
않고 거사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
니다.
다. 장소는 본인이 각하를 모시고 연회하는 
중정 안가인 궁정동 연회실을 택하기로 하
였습니다.
라. 시기는 적절한 기회를 보아 거행하기로 
하고 기회가 포착되면 적은 인원으로 순식
간에 살해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 각하와 경호실장을 본인이 직접 동시에 
살해해야 방해자가 없어서  거사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어느 누구  하나도 
살해에 실패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하였습니
다. 그래서 본인의 심복 부하이며 사제간인 
박선호와 박흥주를 거사  인력으로 택하여 
그들은 본인이 무엇이든  지휘하면 목숨을 
바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사에 성공하면 
그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주면 무조건 따라
올 것이라고 판단, 거사에 동참케 하였습니
다.
바. 거사 후 본인은  계엄 선포 후 3일  간 
보안 조치를 주장함으로써 사전 수립된 복
안을 가지고 시행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
다.
합수부의 발표와 김재규의  진술서는 너무 
달랐다. 합수부는 김재규를 충성  경쟁에서 
뒤진 나머지 이성을 잃고 우발적으로 범행
을 저지른 감정적 인물로 몰아붙였지만, 김
재규는 자신의 범행이 철저히 계획된 것이
라고 진술했다. 그런 와중에 김재규는 미국
의 배후를 주장했지만 합수부는 그의 주장
을 고문으로 묻어버렸다.
경훈은 김재규와 미국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좀더 폭넓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
고 판단했다.
경훈이 기록들을 훑느라 지친 몸을 의자에 
기대고 크게 기지  재를 켤 때  전화 벨이 
울렸다. 인남이었다.
 별일 없으면  오늘  저녁이나 같이했으면 
해서`…`…. 경훈은 달력을 봤다.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인남아,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오늘
은 선약이 있어.  누구하고? 
 내가 미국에서 돌아왔다고 오늘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만나기로 했거든. 너도 알 만한 
애들인데 같이 갈래?   아냐, 난 이번에는 
빠질래. 그럼 또 연락하자. 
 그래, 내가 전화할게. 
시간 맞춰 사무실을 나온  경훈은 약속 장
소인 광화문 뒷골목의  복매운탕집을 향해 
걸었다. 한국에 돌아와 처음으로 만나는 고
등학교 친구들이라 그런지  마음이 푸근했
다.
 이 변호사, 이제 영어는 죽이겠다. 
대학에서 영어 강사를 하는 친구가 맥주잔
을 부딪치고 단숨에 잔을 비우더니 부러운 
듯 한마디를 던졌다.
 2년 만에 만난 첫 인사가 그거야? 
역시 고등학교 동창들이라  그런지 오랜만
에 만나도 전혀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
었다. 경훈도 마음을  풀고 술잔을 비웠다. 
동창끼리의 만남이 으레  그렇듯 어느만큼 
취하자 화제는 시사 문제로 옮겨갔다.
 그런데 말이야,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좋
을지 모를 게 하나 있어.  고등학교에서 역
사를 가르치는 친구였다.
 뭔데? 
외무부에 근무하는 친구가 뭐든지 답해 줄 
수 있다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을 받았
다.
 요즘 다시 북한의  핵이니 미사일이니 하
는 문제가 불거지고 있잖아. 만약에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하다니? 
 미국 편을 들어야 하는 거야, 아니면 북한 
편을 들어야 하는 거야?  그야  당연히 미
국 편을 들어야지. 
 그래? 북한은 미국의 공격을 받고 가만있
을까? 
 가만있지는 않겠지. 그러면 누군가가 정치
적 책임을 져야 하잖아. 그럴  경우에 김정
일인데, 그는 앉아서 숙청당하느니 즉각 대
대적으로 군사 반격을 하겠지.  그럼  한반
도에 전쟁이 나지 않겠어? 그렇겠지. 
 그러면 우리는 북한을 상대로 동족상잔의 
아픔을 또다시 겪어야 하구.   어쩔 수 없
지. 
 우리는 그냥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는 어
쩔 수 없는 존재들이야? 미국이 북한을 치
면 우리도 따라서 북한과  전쟁을 해야 하
는 웃기는 민족이냐구? 그래야  한다고 애
들한테 가르쳐도 돼?  북한이 잘못하는 데
야 어쩔 수 없는 것 아냐? 
 북한이 무얼 잘못하는 거지? 
 핵 개발이니 미사일 개발이니 하는 게 문
제잖아. 
 그럼 그 대가로  한반도는 전쟁을 치러야 
돼? 
 할 수 없어. 지금은 미국 뒷다리  꽉 잡고 
있는 게 사는 길이야.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면 같이 전쟁을 해야
지. 한미방위조약이란 게 그런 거 아냐? 미
국이 북한을 치면 우리도  미국을 도와 북
한을 치고, 북한이 우리를 치면  미국이 우
리를 도와 북한을 치고.  경우가 다르잖아. 
우리가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한 건 전쟁
을 막기 위해선데, 미국이 북한을  쳐서 그 
결과로 전쟁이 나면 우린 뭐야? 당장은 미
국의 뒷다리를 잡고 있으면 안전할지 몰라
도 나중에 통일되었을 때  우리가 북한 동
포들에게 뭐라고 말하지?  지금은  통일이 
중요한 게 아냐. 미국이 적당히  북한을 처
리해서 통일의 분위기를 맞춰주면 그때 가
서 본격적으로 통일을 얘기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미국이 통일시켜 줄 것 같아? 
 미국은 결국  동아시아의  평화를 바라는 
거 아냐? 한반도의 불안은  남북간의 대치 
상황 때문이니 한반도가  통일되면 최소한 
전쟁은 없어. 그러니 미국이 통일을 반대할 
이유가 없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다  보니까 미국이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를 알 수 있겠더라구. 
미국은 남북통일을 원치 않아.  미국이  남
북 통일을 왜 싫어한다는 거지? 
이때 중앙  일간지의 국제부  기자로 있는 
윤민기가 끼여들었다.
 미국이 통일을 좋아하지 않는 데는 몇 가
지 이유가 있지. 우선 남북  통일이 중국을 
자극할까 봐 꺼리는  측면이 있어.  한국도 
통일을 하는데 왜 우리는 대만을 흡수하지 
못하나 생각하게 되니까.
 알다시피 미국은 중국이 대만을 흡수하지 
못하도록 별의별 수단을 다  쓰고 있잖아? 
일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일리 있는 
얘기였다.
 다음은? 
역사 교사인  친구가 자기  편을 들어주는 
지원 사격에 고조되어 채근했다.
 다음으로는 통일이 되면 아시아에서의 미
국의 역할이  줄어드니까 그런  게 아니겠
어? 분쟁 지역이 없어지니까  자연히 미군
의 주둔 필요성도 줄어들겠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좀 복잡해. 
 뭐가? 
 미국의 세계 전략하고 맞물리는데, 미국은 
분쟁 지역을 필요로 해. 그것은  미국의 국
방력을 유지하는 일과 관계가 있지. 미국은 
언제나 길들여야 할 말썽꾸러기 국가를 필
요로 해. 그래서 미국은 리비아, 이라크, 북
한 같은 나라들을 테러국으로 규정하는 거
야.
 그러지 않고  세계가  모두 평화로워지면 
미국은 군사력을 유지할  수 없고,  따라서 
원유에 대한 지배력도 못 가지게  되지. 그
러면 달러는 미국의 실제 경제력에 따라서 
춤을 추고, 세계의 기축통화 역할을 못하게 
된단 말이야. 그러니 미국은 아시아의 적당
한 긴장과 한반도의 분단을  내심 몹시 바
라는 거지.  희한하구나. 
 길들이기의 바톤이 리비아에서  이라크로, 
그리고 이제는 북한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야.  어쨌든 좋아.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미국이 북한을 폭격한다면  우리가 미국을 
도와 싸우는 것밖에 다른 대안은  없어. 괜
히 북한 편을 들거나  어쩌거나 하다간 모
든 게 날아갈 수 있다구.  무슨 소리야? 미
국이 남한을 친다는 거야?  그건 아니겠지
만 미국이 일단 폭격하면 북이 남을 칠 거 
아냐? 그럼 싸울 수밖에 더 있냐구?  나는 
죽어도 미국을 도와 북한과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북한이 먼저  남침을 한
다면 죽기 살기로 싸우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절대로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을 
폭격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뿐만이 아냐. 무슨 목적이 있더라도 미국
이 저렇게 북한에 대해  계속 경제 제재를 
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 그 경제 제재
가 결국 북한 주민을 굶겨 죽이는 데 일조
하고 있잖아. 토론은 평행선을 가르고 있었
다. 두 사람의 견해가 모두  일리는 있었지
만, 마침내 일동은 비애를 느끼며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말없이 술만 마셨다. 어느새 경
훈의 옆으로 다가왔는지, 고등학교 때 단짝
이었던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훈아, 너 요즘 어떻게 지내? 
이념적 성향이 강한 잡지의 기자로 일하는 
박상준이었다. 경훈은 잠시 망설였다. 그냥 
건성으로 대답할 수도 있었지만 취한 상태
에서 이 친구에게까지 숨기고 싶지는 않은 
마음도 있어, 요즘 10·26 같은  문제에 약
간 관심이 생겼다고 대답했다. 순간 상준의 
눈초리가 매섭게 경훈의 얼굴을 훑었다.
 그래? 전혀 뜻밖인데. 
 응, 그렇게 됐어. 
술자리에서는 가볍게 지나간  상준이 다음
날 아침 경훈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경훈은 
상준과 점심을 같이하기로 했다.
 놀랐어. 너 같은 부르주아가 10·26을  쫓
는다는 얘기를 듣고. 사실 관심  있다는 얘
기는 결국 쫓는다는 얘기잖아.  하하, 내가 
부르주아야? 그리고  부르주아는 10·26을 
쫓으면 안 돼?  이 땅의 돈 있는 자들이야 
그런 일에 관심이 없잖아?  넌  아직도 꽤
나 이념적이구나. 
 내가 오늘 이렇게 만나자고 한 것은 사실 
너에게 큰 기대를 걸기 때문이야.   기대라
니? 
 넌 천재잖아. 네가 그 일을 조사한다면 흐
지부지 끝나지는 않을 거야. 그래서 말인데 
내가 평소에 의문을 가졌던  얘기를 좀 해
주고 싶어.  뭐지? 
 일전에 내가 10·26 후 증발해 버린 한국
의 핵 개발과 미사일 개발의 도면 및 자료
들을 집중적으로 취재했던 적이 있어. 그것
들은 국방과학연구소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증발돼 버리고  말았지. 이
상한 점은 아무도 그게 어디에  갔는지, 누
가 손을 댔는지 모른다는 거야.  도무지 흔
적을 찾을 수 없어.  도난당한 것은 아니겠
지? 
 절대 아냐.  누가 감히  국방과학연구소에 
들어가 그런 것들을 훔칠 수 있겠어? 얼마
나 경비가 삼엄한데. 만약 도난이라면 내부
의 소행일 수는 있겠다 싶어.  10·26 후의 
어수선하던 시기에 없어진 것 같아. 그래서 
네가 10·26을 추적한다면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할 것 같더군. 거꾸로 이것을 추적하면 
10·26이 보일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런데 
정부에서는 없어진 연구 성과에 대한 수사
를 하지 않았나? 돈도 엄청나게 들인 성과
일 텐데.  수사가 다 뭐야? 모두  쉬쉬하며 
넘어가고 말았지. 누가  감히 그런  얘기를 
꺼낼 수 있었겠어?  왜? 엄청난 국가 기밀
이 없어졌는데 쉬쉬하고 있다는 게 오히려 
비정상이잖아?  어제  술자리에서 애들도 
얘기했지만 미국이 최악의  경우에는 북한
을 폭격하겠다고 하던 이유가  뭔데? 그게 
바로 북한이 미사일과 핵을 개발한다는 이
유 하나 때문이잖아.
 이런 판에 없어진  연구 성과를 수사한다
고?  그렇겠구나. 그런데 왜 내게 그런  얘
기를 하는 거야? 상준은 가지고 온 두툼한 
봉투를 경훈에게 건넸다.
 국방과학연구소에 근무하던  중요한 사람
들의 신상 명세서야. 예전에 취재할  때 만
들어두었어. 이 인물들 중에 핵과 미사일을 
빼돌린 사람이 있을 거야.  지금에 와서 누
가 빼돌렸는지가 큰 의미가 있을까?  물론, 
나도 누가 범인인지를  가리기보다는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핵과 미사일이란 자주 국
방의 양  핵이 자취를  감춰버렸는지 알고 
싶은 거야. 이것을 쫓다 보면  10·26이 훨
씬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너는 10·26에 대해 상당히  연구를 
한 것 같구나. 
 약간은. 우리 일이 오직 그런 걸 파헤치는 
거니까. 하지만 10·26과 12·12에  대해서
는 잘 몰라. 나는 5·18 전문이지. 그럴 것
이다. 10·26과 12·12가 권력의 깊숙한 곳
에서 일어난 사건인  반면 5·18에는 민중
이 있었기에 힘없는 잡지사 기자한테 좀더 
익숙할 것이다.
 너 혹시 내가  아는 내용을  너희 잡지에 
실으려고 이런 정보를 주는 것  아냐?  후
후, 눈치챘구나. 사실 그런 의도도 좀 있지. 
<천재 변호사가 쫓은 10·26>이라, 제목만
으로도 팔릴 기사야.  하지만 나의  진정한 
의도는 그게 아냐.  그럼 뭐야? 
 역사의 진실을 찾고자 하는 거지. 늘 마음
에 두고 있었지만 우리로서는 한계가 있어. 
그런데 미국에서 2년 간 유학하고 온 천재 
변호사가 10·26을 쫓는다, 여기엔  반드시 
뭔가가 있어. 너는  미국에서 뭔가를  알아 
가지고 온 거야. 따라서 너에게  거는 기대
가 커. 경훈은 놀랐다. 평소에 기자의 후각
이란 돼지의 그것과 같다는 말을 들어오던 
터였지만 이렇게 날카로울 줄은 몰랐다. 경
훈은 본능적으로 얼버무렸다.
 마음대로 생각해. 
 너 같은 부르주아가 그런 일에 덤벼들 때
에는 단순히  역사 의식이니  뭐니 때문이 
아닐 거야. 확실한  것을 물고 있는  거지?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너에게는 항상 준
비된 애국심이란 없어. 하지만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누구보다도   나라와 민족이라는 
대의를 쉽게 생각하게 돼. 왜냐하면  너 같
은 부류는 가치관 부재의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존
재 가치에 대한 자존심은  하늘에 닿아 있
거든. 너희는 큰 것이 필요할  때면 애국심
을 꺼내 쓴단 말이야.  마음대로  생각하라
니까. 
백곰 사기극
상준과 헤어져 사무실로 돌아온 경훈은 국
방과학연구소 두뇌들의 신상  명세서를 꼼
꼼히 살펴보았다. 의심하면 한이  없겠지만 
경력만으로는 당장 의심이 가는 사람이 눈
에 띄지 않았다. 국방과학연구소를 거쳐 미
국의 기업이나 연구소로 간 사람들이 당연
히 의심스러웠으나 그것만으로는  어떤 구
체적 혐의를 알아낼 수도  입증할 수도 없
었다.
경훈은 조용히 신상 명세서를 덮었다. 참고 
삼아 머리에 넣어두기는 하겠지만 지금 당
장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
지만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국방과학연구
소를 대폭 정리할 당시의  소장이 육사 11
기라는 사실이었다. 그가 10·26 이후 소장
으로 임명된 것으로 보아 전두환과 동기라
는 사실이 작용한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경훈은  이상한 느낌
이 들어 멈칫했다. 신상 명세서에서 사리에 
맞지 않는 무언가를 보았던 것이다. 경훈은 
덮었던 신상 명세서를 다시 펼쳤다.
이경수, 신군부의 등장과 더불어 일시에 국
방과학연구소에서 쫓겨난 사람들 중 한 명
이다. 경훈의 눈길은 그의 현재 직업란에서 
멎었다.
보험 회사 부회장.
아무리 전공과 직업은  별개라지만 사람의 
과거와 현재  하는 일이  이렇게나 차이가 
날 수는 없었다.  경훈은 이경수의  학력과 
경력을 천천히 훑었다.
과학도로서 출발한 화려한  학력이나 경력
은 말할  것도 없고  연구소에서도 단연코 
최고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다. 매우 중요한 
프로젝트의 팀장으로 일하던  그가 지금은 
보험 회사에서 일한다는 사실은 이해가 되
지 않았다.
경훈은 직감적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
이 들었다. 기밀을 빼돌렸다면 외국으로 나
갔을 텐데, 현재 전혀 엉뚱한  영역에서 활
동하다니 한 번쯤 의심해 볼 만했다.
경훈은 즉각 상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까 네가 준  서류에 이경수라는 사람이 
있던데, 그에 대해 알아?  그럼, 유명한 사
람이지. 
 뭘 하던 사람이야? 
 음, 너는 정말 천재야. 즉각 그 사람을 찾
아내는군. 그를 좀 만나봐.  왜? 
 예전에 백곰 사기극이라는 것이 있었어. 
 백곰 사기극? 그게 뭐지? 
 이경수 박사한테서 직접  듣는 것이 좋을 
거야. 아마 네 머리로는 그  얘기로부터 뭔
가를 이끌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 
백곰이란 건 누구지? 어떤 사람이야? 
경훈은 신문에서   ‘광화문 백곰’이라는 
주식 시장의 큰손에 대해  읽었던 적이 있
어 선뜻 그 사람을 떠올렸다.
 백곰, 그건 사람의 별명이 아니고  미사일 
이름이야.  미사일이라구? 
 그래, 한국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미사일이
지. 
 그런데 그것이 사기극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이야?  음, 거기엔 사연이  있어. 그러니 
이경수 박사를 만나봐. 그 사람이  그 백곰 
개발 팀장이었어. 한국 과학 기술계의 천재
였지. 상준은 대답 대신 경훈더러 이경수를 
만나보라고 재차 권했다. 경훈은 바로 전화
를 걸었다. 이경수는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경훈의 변호사라는 신분 때문에 잠깐 시간
을 내주는 기색이었다.
경훈은 이경수의 사무실로  가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국방과학연구소의  백곰미사일 
팀장에서 보험 회사의  부회장으로 옮겨앉
은 그의 신분이 아무래도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다.
 반갑소, 이 변호사. 내가 이경수요. 
 이경훈입니다. 
경훈은 이경수의 인상이 어딘지 보험 회사
의 중역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백곰미사일 개발 팀을 맡으셨다고요? 
 그렇소. 
이경수는 잔잔하나 처연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어딘지 이상한 느낌이 드는군요. 한  나라
의 중추적인  무기 개발을  맡으셨던 분이 
보험 회사에서 일하신다는  사실이 말입니
다.  
그래요? 
이경수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공허함이 그 웃음  속에 짙게 묻어나
고 있었다.
 틀림없이 어떤 사정이 있을 것  같은데요, 
우선 그 점을 좀 설명해  주시죠. 이경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러
자 처음의 잔잔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와는 
백팔십도 달리 비분강개했다.
 세상에 이런 놈의 나라가 있소? 내가,  아
니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내쫓긴  8백 명 넘
는 사람들이 이게 무슨 꼴이오! 보험  회사
라니? 나는 다시는 과학이니  기술이니 하
는 분야에는 그림자도  내비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소. 그래, 기술 중의 기술인 미사
일 개발을 책임지고 성공으로 이끌었던 내
가 보험 회사에  있다는 게  말이나 되오? 
한국 최고의 두뇌들이 이런  일을 하는 게 
국가적으로 얼마나 비극이오! 이 보험 회사 
일, 아무나 할 수 있소. 그러나 백곰미사일 
개발, 그 당시 미사일 개발에  성공한 나라
가 세계에 몇 군데 없었소. 그걸 우리가 해
냈는데, 그 고생해 가며 성공해서는  다 같
이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조국의 앞날을 
축복했는데`…`… 이게 무슨 꼴이오?  경훈
은 뜻밖이었다. 만나기 전에는 기밀을 빼돌
렸기 때문에  전공 분야를  떠났을 것으로 
의심했는데 전혀 딴판이었다.
 이게 모두 10·26이  빚은 왜곡된 한국의 
현실이라고나 할까,  그 망할 놈의  10·26 
말이오.  …`….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장거리 유도
탄을 개발하라는 지상 명령을 받았소. 대통
령은 우선 유도탄,  그 다음은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수 있는 로켓  개발을 염두에 두
고 있었지. 유도탄은 대전 기계창에서 극비
리에 만들어졌소. 우리는 그야말로  최선을 
다했소. 완전 백지 상태였지만 그 유도탄으
로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과학 기술,  국방 
기술, 나아가서는 진정한 정치 외교적 독립
을 이룰 수 있다는  긍지로 집에도 들어가
지 않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지.
  미국이 눈치를 채지 못했나요? 
 최대한으로 보안을 유지했지만 종내는 그
들이 눈치를 채고 말았소. 하지만  박 대통
령이 필사적으로 막았지. 우리는 거기서 그
분의 무서운 집념을 봤소. 박  대통령은 거
기서 꺾이면 앞으로 아무것도 못한다고 생
각했던 거요. 측근에게 “나도 각오를 해야
겠어”라고 얘기했던 것도 그  무렵이라지.  
결국 개발은 성공했습니까? 
 그렇소. 4년 만인 1978년 9월 26일  박 대
통령을 모시고 주한미군 사령관 등이 지켜
보는 가운데 우리는 통쾌한 성공을 거두었
소. 
그 미사일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추
진제·탄두·유도 조정 장치를  가진 것으
로, 원 모델이었던 나이키  허큘리스보다도 
훨씬 나았소. 우리 개발 팀은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렸지. 이제 미국 미사일  안 사고 
오히려 우리 것을 수출할  수도 있다는 기
대에 가슴이 부풀었소.  그런데 백곰을  사
기극으로 밀어붙였다는 것은  무슨 얘깁니
까?  10·26이 결국 백곰을 사장시킨 거요. 
미사일로부터 시작해서 우주  항공 분야까
지의 창창한  꿈을 가졌던  우리는 10·26 
후 이상한 소문을 들었소. 백곰은 사기극이
라는 거였지.  그 소문은 어디서 나온 겁니
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그 진원지였소. 
 이상하군요. 보안사령관이라면 그 당시 대
통령이 가장 중점을 둔  무기 개발에 극도
로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텐
데 발사 실험 당시에는 몰랐습니까?  전두
환처럼 잘 알던 사람도 없었을  거요. 우리
는 개발을 검토하던 때부터  발사 실험 때
까지 한 번도 보안사  요원의 감시를 벗어
난 적이 없었으니까.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에 임명되자마자 대전  기계창으로 내려왔
소. 나는 하루 종일 그를  안내하면서 어떤 
부분이 어떻게 국산화됐는지  일일이 설명
했다오. 그는 감탄하면서 앞으로도 종종 내
려와서 배우겠다 하고  올라갔는데 10·26
이 나자 태도를 백팔십도 바꾼 거요.  어떻
게 말입니까? 
 전두환은 틈만 나면  한국형 유도탄은 엉
터리다, 미국 것에다 페인트칠만 했다는 등
의 얘기를 했소. 그러고는 곧  유도탄 개발
팀을 해체시키고   국방과학연구소의 직원 
839명을 하루아침에  해고시켜 버린  거요. 
그것은 한국군 발전사에 큰  획을 긋는 일
이었소. 그후 우리 무기를 우리가 개발한다
는 구호조차 없어지고 말았지. 앞으로 우리
는 무기에 관한 한 만년 미국에 종속될 수
밖에 없소. 프랑스보다 더 발전시킬  수 있
는 여건이 있었는데도  말이오.  전두환은 
왜 그렇게 표변했을까요? 
 미스터리지. 하지만 그것이 10·26과 연관
되어 있다는 건 어린아이라도 알 거요.  어
떻게 연관을 지을 수 있을까요? 
 뻔하지 않소. 정통성 없는 정권을 잡고 나
니 미국과의 관계를 확고히  해야 할 필요
성을 느꼈던 것이고, 그러자니 미국이 해달
라는 대로 다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백곰 개발 팀을  해체시키고 그 비
밀을 넘겨주기 위해서  백곰미사일을 사기
라고 했다는 말씀인가요?  확신하오. 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이 그동안 개발했던 핵무
기에 관한  정보도 모두  미국으로 넘어가 
버리지 않았소.
  백곰미사일의 개발 자료는  그대로 있습
니까? 
 그것도 모두 없어져버렸소. 이미 8백여 명
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과학자를 한번에 숙
청할 때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 아니오? 
지금 나이키 허큘리스가 인천 상공에서 폭
발하고 또 엄청난 돈을  들여 차세대 미사
일을 미국에서 사온다고 하는데, 우리는 제
대로만 됐으면 이미 오래  전에 거의 최고
의 완벽한 국산  미사일망을 가졌을  거요. 
뿐만 아니라 우리 위성도 띄웠을  테고. 이
경수는 분이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미국이  하라는 대로 
굽실굽실하기만 해서는 우주  항공 분야의 
산업 개발이란 어림도 없소.  아리안위성을 
쏘아올리는 인도를 보시오. 그 당시 우리와 
비교도 안 되던 수준 아니었소? 또 중국인
들은 어땠고? 그러나 지금은 보시오.  엄청
난 돈을 줘가면서 중국인들에게 우리 위성
을 쏘아올려 달라고 부탁하고 있잖소. 배짱
과 자존심을 다 내던진  우리에게 무슨 미
래가 있겠소? 보험 회사 부회장, 물론 나로
서는 편하고 돈도 많이 버는  자리요. 그런
데 내가 이러고 있어서  되겠소? 세계적으
로 이름을 날리고 20년도  더 전에 나이키 
허큘리스보다 나은 미사일을  개발한 내가 
이러고 있어서 되겠냔 말이오. 이러고도 어
떻게 이 나라에 과학  기술의 미래가 있겠
소! 
이경수 박사와 헤어져 돌아오는 경훈의 뇌
리에서는 백곰 사기극은  10·26과 연관된 
미스터리라는 이 박사의 말이 떠나지 않았
다.
신군부, 참 맹랑한 존재들이다. 군인으로서 
정권을 잡았다면 최소한 국방과 군사에 대
해서는 백년대계를 확보했어야 한다.  그러
나 핵이니  미사일이니 하는  국가 기밀을 
몽땅 넘긴 일, 율곡이니 뭐니  무기 구매를 
극도로 교활하게 이용하여 축재한 일, 그리
고 재판에서 추징 명령을  받고도 돈을 감
춘 채 검찰과 숨바꼭질을 하는 꼴 모두 한
심하기 짝이 없다. 정녕 이런  자들이 조국
을 다스려왔단 말인가.
그러나 다음  순간 경훈은  분노를 누르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전두환은 어느 시점에서 미국과 이
런 거래를 주고받았을까. 이 박사가 생각하
는 대로 일단 정권을 잡고 나서 미국과 거
래를 했던 걸까, 아니면 그보다  전에 이미 
어떤 밀약이 존재했던  걸까경훈의 뇌리에
는 다시  합수부의 수사  발표와 김재규의 
진술서 사이의 머나먼  거리가 아로새겨졌
다.
경훈은 사무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상
준의 잡지사로 찾아갔다 이경수 박사를 만
나고 나니  핵과 미사일이  10·26과 관련 
있을 거라던 너의 말이  더욱 선명하게 떠
오르더군. 그런데 전두환과 미국이  거래한 
시기는 언제쯤이라고 생각해?  글쎄, 그게 
그렇게 중요해? 
 물론, 대단히 중요하지. 
 어째서? 
 시기가 언제냐에 따라 10·26, 나아가서는 
12·12의 성격이 크게 달라져. 만약 전두환
이 정권을 잡고 나서  거래를 했다면 이경
수 박사의  말대로 정통성이  없는 정권을 
인정받기 위해서 그랬겠지. 
그러나 거래 시기가 정권을 잡기 전이었다
면 상황은 그리 간단치가 않아.   음, 그럴 
수 있겠군. 네 말을 듣고 보니 전두환은 정
권을 잡기  전에 미국과  거래를 했겠다는 
생각이 들어. 적어도 5·18 이전에는  틀림
없이 어떤 종류의  교감을 나누었을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일전에 나는  12·12를  그토록 싫어하던 
미국이 하루아침에 태도를 싹 바꾸고 신군
부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게 된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봤어.  레이건은 대통령  취임 
후 최초로 만날 외국의 지도자로 전두환을 
선택했고, 그것은 한국민들에게 미국이  전
두환을 지지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생각
되었잖아.  그것은 신군부가 김대중을 사형
시키지 않고 미국으로 보낸다는 조건을 제
시했기 때문이 아냐? 언론은  모두 그렇게 
분석했잖아?  그 이유도 있을 거야.
 그러나 미국이 김대중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토록이나 비난해 오던 신군부에 대
한 태도를 싹 바꿨을까? 그것은 어떻게 생
각하면 미국이 전통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협박에 대한 굴복이 되는데 말이야.  네 생
각은 어때?  글쎄. 
 절대 아냐. 진상은 이랬던  거야. 이미 광
주 진압 때 한국군  이동을 승인했을 때부
터 미국은 신군부를  지지했던 거지.  알겠
어?  그런가? 그런데 그 진실은  뭐야? 미
국이 정말 이동을 승인한 거야? 위컴 사령
관이 자신의 휘하에 있던 한국군을 광주에 
투입하겠다는 신군부의   요청을 승낙했던 
거냐구?  그래. 
 믿을 수 없어. 언론에서는 그것이  학생들
의 주장에 불과한 거라고 다루었잖아.   그
런 민감한 문제를 국내의  어떤 언론이 정
면으로 건드리겠어? 물론 거기에는 미국의 
언론 공작 탓도 있지만.  
어쨌든 네가 하고 싶어하는 얘기가 뭐야? 
 미국이든 신군부든 입이  열 개라도 부정
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  그게  뭔
데? 
 충정 작전에 대한 기록이야. 
 충정 작전이라면 광주  진압 작전을 말하
는 거 아닌가?  그렇지. 
그 작전 기록의 5월 22일자에 보면 ‘한미
간 협의 사항`:`24일까지  대기’라는 대목
이 있거든. 무수한  변명을 해대지만  그것 
하나로 모든 사실은  명백한 거야.  상준의 
음성은 단호했다. 하지만 신중한 성품인 경
훈은 상준에게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 하나만으로 단정짓기에는 마
음이 놓이지 않는데`…`….  그  다음은 모
두 거짓말이야.  그들이 인정하려  하겠어? 
릴리 대사라는 자는  《동아일보》와의 인
터뷰에서 이렇게 발뺌했지. “20사단은  한
국이 연합사의 작전 통제권 밖으로 빼갔습
니다. 광주에 투입됐을 때는 연합사의 작전 
통제권 밖이었습니다”라고. 그런데 80년 5
월 22일  미국방성 대변인은  이미 이렇게 
발표했어.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은  그의 
작전 지휘권 아래 있는  일부 한국군을 군
중 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라고 
말이야. 그럼 둘  중에 하나는  거짓말인데 
어떤 게 거짓말이겠어? 또  5·18 당시 대
사였던 글라이스틴의 증언도 있어.  “20사
단 이동 승인은 위컴과 내가  검토했고, 내
가 그렇게 하시오 했다. 나는  부대의 이동 
전에 이것을 워싱턴에 보고했다”는.  이제 
명백히 알겠어?  그런데  왜 그런  것들이 
확실히 부각되지 않았을까? 왜  미국과 광
주가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들이 
미궁 속에 묻혀 있느냔 말이야.  미국 대사
의 거짓말은 크게  부각되고, 실제  사실은 
학생들의 주장쯤으로 비쳐지는 거지?   미
국이 세계적으로 수행한 공작들은 모두 언
론의 비호를 받아. CIA의  언론 공작이 개
입돼 있는 거지. 언론이 미국의  입장을 옹
호하느라 정신없는 경우도 있어. CIA의 가
장 중요한 공작 중 하나가 바로 언론 공작
이거든. 요즘 같은 IMF 체제하에서도 언론
이 미국의 전술적 입장은  철저히 베일 속
에 숨겨둔 채 클린턴을  비롯한 미국의 영
웅들이 한국을 위해 애쓰는 모습만 부각시
키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
지. 지난번에 클린턴 대통령이나 고어 부통
령이 내한해서  우리 정부에  재벌 해체를 
강요할 때도 봐. 그들이 관련  미국 업계의 
로비를 하는  건데도 마치  한국의 미래를 
위해 애쓰는 듯한 모습만 비추잖아. 국민은 
뭐가 뭔지 모르고 그냥 사는 거야. 그냥 말
이야. 상준의 시각은 냉정하고도  날카로웠
다. 위컴 사령관은 12·12 때는  자신의 통
제 아래 있던 병력이  서울로 진입한 것에 
대해서 불같이 분노했지만, 5·18 때는  한
국 정부의 요청에 동의해  병력의 광주 투
입을 허용했다. 12·12 와 5·18 사이의 어
느 순간 신군부와 미국은  거래를 했던 것
이다. 거래의 조건은 물론 핵과  미사일 개
발의 성과를 미국에 넘기는 대가로 미국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었다.
박정희와 카터
집으로 돌아온 경훈은 다시  한 번 10·26
부터 12·12, 그리고 5·18에 관한  기록들
을 샅샅이 검토했다. 그는 진짜  중요한 정
보는 의외의 곳에서 실체를 드러내는 법임
을 잘 알고 있었다. 모두가 아는 정보는 이
미 조작될 대로  조작됐을 가능성이  컸다. 
꼼꼼히 자료를  검토하던 경훈의  눈이 한 
구절 위에서 딱 멎었다.
허화평은 이미 10·26이 발생했을 때 저에
게 5·16을 잘 연구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
습니다. 그는 이미  그때 대권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보안사의 정보처장으로 근무하던 한용원이 
5·18 수사 당시  검찰에서 진술했던 내용
이다.
한용원의 이 진술 조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허화평에게서 어떤 분위기가 감지되었길래 
한용원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경훈이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전화 벨
이 울렸다. 인남이었다.
 애들하고 잘 만났어? 
 그래. 그런데 뜻밖의 성과가 있었어. 
경훈은 상준과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면 내가  전화하기를 잘했네.  결과는 
어떨지 모르지만.  무슨 얘기야? 
 일전에 내 전화에다  네가 메시지 남겼잖
아? 좀 도와달라구. 경훈은 그때 인남의 마
음을 풀어주기 위해 같이  제럴드 현의 미
스터리를 풀자고  했던 것이  생각나 소리 
없이 웃었다.
 이 사람을 한번 만나볼래? 
 누군데? 
 그때 네가 말하길, 어느 편도 아니면서 그 
역사의 와중에서 많은 것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그래. 
 그런 사람을 찾았어. 
 정말? 기자나 뭐 그런  사람이면 아무 소
용없어. 
 기자가 아냐. 나도 옛날 자료를  웬만큼은 
섭렵해서 이젠  네가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안다구.  경훈은 약간  머쓱해졌
다.
 박 대통령 때  국방부 전략기획국장을 지
낸 사람이야. 그후  안기부 차장을 지냈고. 
그 사람은 《조선일보》와 가진 짧은 인터
뷰에서 박  대통령 시해의  배후에 미국이 
있을 거라고 얘기했어.  뭐라고! 그게 정말
이야? 
 그래, 그 정도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으로
서는 참으로 주장하기  어려운 얘기라,  그 
사람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뒤져봤어. 경훈
은 인남에게 감탄했다. 자신도 웬만한 자료
는 모두 샅샅이 뒤졌건만 인남처럼 대발견
을 하지는 못했다.
 알아봤더니 그 사람 완전히 미국통이더라
구. 10·26 바로 다음날에 미국  대사가 맨 
먼저 만난 한국인이었어. 당시 육군 소장이
었는데 말이야. 나중에 전두환이  레이건과 
가진 한미 정상 회담도  당시 공사로 있던 
그 사람이 앨런 특보와 함께 애를 써서 성
사시킨 거였어.  어떤 근거에서 그런  말을 
했을까? 
 그건 나도 몰라. 필요하다면 만나봐. 
경훈은 반드시 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
다.
 그런데 좀 특이한 사람이야. 
 왜? 
 장성 출신에 전직 안기부 차장인 그가 상
당히 진보적인 잡지에 기고를 했거든. 북한
이 미사일을 개발해도 쌀은 보내야 한다는 
내용이었어. 옳든 그르든 용기가 없으면 주
장하기 어려운 글 아니겠어?  경훈은 고개
를 끄덕였다. 전략기획국장과 안기부  차장
을 지낸 그의 경력으로 보아서는 기대하기 
힘든 전향적인 내용이었다.
마침 그 전직  전략기획국장이 기고했다는 
잡지사가 상준이 일하는 회사였다.  경훈은 
상준의 도움을 받아 그를 만날 수 있었다.
10·26 당시   국방부 전략기획국장이었던 
그는 자주 국방의 큰  갈래인 율곡 계획을 
입안하고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히 대통령
의 오른팔이라 할 만했다. 그  전직 국장과 
잠깐 얘기를  나눠보던 경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전직 국장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걱정을 안고 사는 사람이었다.
 나는 전략기획국장을  거쳐  안기부 해외 
담당 차장을 지냈소.  그후에는 일본의  한 
대학에서 연구교수로 오래 있었지.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내 나름대로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소. 나는 여러  가지 정
황으로 봐서  박 대통령  시해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요. 무엇보다
도 미국은 박 대통령의  자주 국방론을 싫
어했소. 경훈은 새삼  제럴드 현을  떠올렸
다. 제럴드 현은 모두가 밖에서  볼 수밖에 
없었던 일을 안에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
었다. 다만 정작  10·26 당일에는  병원에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10·26은 그를 
피해간 꼴이 되었지만.
 게다가 카터가  세계에서  가장 미워했던 
지도자가 바로 박 대통령이었다는 점도 무
시할 수 없을 거요.  하지만 카터는 독실한 
교인으로서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요.  관점의 차이지. 
밑에 있는  사람들이 박  대통령의 독재로 
수많은 시민들이 죽고 있다고 보고하면, 많
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소.  그렇군
요. 
 하나 문제는 밑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것
을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고 일을 저지른
다는 것이오. 대통령을  편하게 해주는  거
지. 그러니 일단 정책을 수행하는  자들 사
이에 의견이 일치하면 카터보다 백배 독실
한 교인이  대통령일지라도 막을  수 없는 
거요.  그런데 카터와 박 대통령은 왜 그렇
게 사이가  벌어졌습니까? 카터는   사람이 
솔직하고 남을 증오할 것처럼 보이진 않던
데요.  문제는 카터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
려 있었던 것이 아니오. 박  대통령은 당시 
자주 국방이라는 이름 아래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었고 미국은 갖은 방법으로 그
것을 저지하려 들었소. 그렇다 하더라도 당
시 김포공항에서 벌어진 일은 너무나 기가 
막힌 일이었지. 대통령을 수행하면서  그때
처럼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소. 그  일 이후 
박 대통령은 눈을 감을  때까지 미국을 증
오했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들어보시오. 
전직 국장은 애써 일그러진 표정을 누그러
뜨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소?
─`네, 각하. 죄송합니다.
외무부 의전국장이나   청와대 의전비서나 
몸둘 바를 몰라 했다. 벌써  30분이나 전부
터 공항에 와서 카터가  탄 비행기를 기다
리고 있는 박 대통령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괜찮소.
박 대통령은 점잖게 말하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공항에 나와 있던 관료들은 
끝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일국의 대
통령을 30분이나 기다리게 하는 것은 이유
야 어찌됐든  외교 관례상  심각한 결례가 
아닐 수 없었다. 의전이란 분  단위가 아니
라 초 단위로 국가  원수의 동작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지금 비행기는 어디에 있소?
5분쯤 후에 눈을  뜬 박  대통령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비행기는  지금 청주 
상공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대구 상공을 지난다고 
하지 않았소?─`그렇습니다. 어떻게  된 일
인지 비행기가 너무 느리게 날고 있습니다.
─`음`…`….
박 대통령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의전국장
은 대통령의 심기가 무척 불편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미국 공군 1호기는 웬일
인지 거북이 걸음처럼 느린 속도로 날아오
고 있었다. 
─`놈들이 나를`…`….
─`…`….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미국이 고의로 박 대통령을 기다리게 한다
는 것을. 카터 일행은 좁은  공항의 대기실
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박정희를 생각하며 
높은 하늘에서 고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고도 30분이  더 지난  후 의전국장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박  대통령 앞에서 차
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각하, 죄송스런 말씀입니다만`…`….
─`무슨 일이오?
─`카터 대통령은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의전실로 오시지 않고  곧바로 헬리콥터를 
타고 동두천의 미군 기지로 가실 예정이랍
니다.
─`음`…`….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각하.
─`그래서 나에게 비행기가 내리는 데까지 
걸어오라는 뜻이오?─`그렇습니다, 각하.
옆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던 차지철 경호실
장이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의전국장을 
노려보며 분에 못 이겨 입을 열었다.
─`각하, 청와대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아
무리 미국이라도  이런 모욕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 대한 도발입
니다─`아니야. 내가 나가지.
─`각하, 지금  빨리 나가셔야  헬리콥터를 
타기 전에`…`….
─`알았소.
박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전사상 
유례없는 일이었지만 대통령은  개의치 않
았다. 어차피 카터를 개인적 친분으로 만나
는 것은 아니었다. 국민을 대표한 대통령이
라는 신분으로 나온 자리였다. 대통령은 분
노를 억누르고 묵묵히  걸었다. 밤  공기가 
싸늘했다. 
─`각하, 죄송하지만 걸음을 좀  빨리 하셔
야`…`…, 비행기가 착륙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걸음을 빨리 했다.  기왕 나온 
바에야 카터의 헬리콥터가 떠나기 전에 도
착해야만 했다. 미공군 1호기를 향하여  거
의 뛰다시피 발걸음을  옮겨놓는 대통령의 
뒤로 고위 관료들이 얼굴에 땀이 맺히도록 
분주히 따라갔다. 한밤의 기묘한  행렬이었
다. 
잠시 후 착륙한 비행기에서 갑자기 인파가 
쏟아져나왔다. 짐가방을 어깨에 멘 수백 명
의 기자들이 박 대통령  일행을 향하여 무
질서하게 달려나왔던 것이다. 
그들은 한국의 대통령을  알아보지도 못했
다. 박 대통령은  의연한 태도를  보이려고 
했으나 기자들에 의해 이리저리  밀쳐졌다. 
대통령을 수행하던 경호원들도  뜻밖의 사
태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외교 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 대
통령은 간신히  수행비서 한  사람의 팔을 
붙잡고 수백 명의 기자들을  헤치며 두 번
째로 도착한 미공군 1호기로 다가갔다.  박 
대통령의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강렬한 서치라이트를 받으며  트랩을 내려
온 카터는 초라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한국의 대통령이라는 말을 듣고 무
심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박  대통령이 
손을 맞잡고 포즈를 취하려 했지만 카터는 
바로 손을 빼고는 옆에  대기하고 있던 주
한 미군의 헬리콥터에 올랐다. 
기자들을 헤치고 가까스로 도착한 우리 측 
수행원들은 카터가 헬리콥터에  오르는 모
습과 그 헬리콥터를 향해  분노 어린 시선
을 던지고 있는 박  대통령을 보았을 뿐이
다. 한국 외교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었
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치욕스러웠겠군요.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지. 
전직 국장은 치밀어오르는 것을 애써 누르
는 기색이었다.
 문제는 다음날 터졌소. 박 대통령은  정상 
회담이 시작되자마자 카터가  거부한 의제
였던 철군 문제를 40분이나 거론했소. 마치 
카터를 가르치려는 듯한 태도로 말이오. 카
터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나가버렸소.  사람들은  카터가 
그렇게 화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고들 했소.  
그렇다면 부하들이 카터의 승낙을 받지 않
고도 박 대통령을 제거하려 했을 법하군요.  
어느 국가 원수도 직접  그런 일에 개입하
지는 않소. 그런 것은 항상  정보나 공작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몫이지. 무엇보다도  의
심이 가는  것은 10·26  직전 갑작스럽게 
펼쳐진 미국의 유화 정책이오. 
모든 것이 거꾸로 갔거든.  무슨  말씀입니
까? 
 모든 것이 상식에 어긋났단 말이오.  그해 
10월 4일 김영삼 총재가 정치 공작에 의해 
국회에서 제명되자 미국은  즉각 글라이스
틴 대사를 소환했소. 불만과 항의의 표시였
지. 외교 관례상  그렇게 소환하면, 양국간 
불편한 관계가 해소되거나  양해가 이루어
져야 다시  부임시키는 것은  이 변호사도 
알 거요. 하지만 글라이스틴은  부마사태가 
터진 10월 16일 돌연 귀임했소.   이례적이
군요. 
 그뿐만이 아니오. 글라이스틴은  돌아오자
마자 여야 할 것 없이 한국의 거물들을 만
나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소. 그러면서 한
국의 방위에 대한 미국의  공약 준수를 역
설했지.  친미 분위기를 형성했다는 말씀이
군요. 
 그렇소. 더욱 심한 것은 부마사태 기간 중 
열린 한미 안보 회의에서 브라운 국방장관
은 이제까지 줄곧 거절해 오던 한국 측 요
구 사항을 모두 들어주었소. 가령  무기 판
매 최혜국 보장이라든지 F-`16기  36대 도
입이라든지`…`…. 그때까지 카터 행정부가 
모든 것을 인권 문제와 연결시키던 태도를 
백팔십도 바꿨단 말이오. 그것도 최악의 인
권 상황에서.  음, 그것은 아마도`…`…. 
 김재규에게 임무를  완수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고 나는 생각하오. 내가  국방부
에 있어 봐서 알지만 당시는 중앙정보부가 
국내외의 모든 일을  관장할 때였소.  대미 
관계도 모두 중앙정보부의 책임이었지.  경
훈은 김재규를 담당했던 브루스의 말이 생
각났다. 
CIA의 터너 국장이 소원을 말하라고  하자 
김재규는 주한 미군  철수 중단이라  했고, 
터너는 그 소원을 들어줌으로써 박 대통령
으로 하여금 김재규를  절대적으로 신임하
게 했다지 않은가. 그렇다면 미국이 그때까
지의 정책 기조를 완전히 거스르면서 갑자
기 유화 정책을 편  것은 김재규의 임무와 
관련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
다.
 모든 것이 거꾸로 가고 있을  때 미국 측
이 기다리던 순간이 차츰 다가오고 있었던 
거요. 경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커미션
 그런데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어떤 분은 케네디와 
박 대통령의 죽음이 같은 이유에서 비롯되
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렇다면 배후도  같
다고 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는  배후에 
뭐가 있다고 했소? 
 군산 복합체라고 했습니다. 
 음`…`…. 
 그러나 박 대통령은  자주 국방이라는 이
념을 실현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는 한
편 미국으로부터도 엄청난  무기를 사들이
지 않았습니까?  그렇소. 
 그런데 왜 그분은  군산 복합체가 배후에 
있다고 얘기했을까요?  이 변호사는  자주 
국방과 군산 복합체의 관계를 이런 각도에
서 생각해 본  적은 없소?  자주 국방으로 
인해 무기 거래 규모가 일시적으로 커지긴 
하지만, 일단 핵을 개발하면 재래식 무기의 
구매도 취사선택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핵도 그렇고  재래식 무기도  그렇고 군산 
복합체가 운용하는 시스템에  어긋나는 거
요. 그러니 그들이 자주 국방을 반길 리 있
었겠소?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기 구매와 관련해서는 의문점이 
있습니다.  그게 뭐요? 왜 우리 나라는  정
작 필요한 무기는 못  사고 미국이 강요하
는 무기만 사는 겁니까? 심지어는 단종 직
전의 무기를  사서 엄청난  손해까지 보고 
말입니다.  무기는 매우  예민한 부분이오. 
우리 나라는  원하는 무기를  마음대로 살 
수 없소. 미국의 지침을 따라야  하지.  그
런 불평등한 관계가 어디  있습니까? 마음
대로 사면 어떻게 되죠?  이 변호사,  미국 
정부나 정치인은 군산 복합체를 매우 두려
워하고 있소. 그들의  도움 없이는  출세를 
생각도 못하기 때문이오. 군산 복합체는 재
고를 처분해서  얻는 이익으로  새 무기를 
개발해 내지. 미국의 군사력은 이런 메커니
즘 위에서 유지되는 거요. 그러니  우리 나
라는 영원히 재고를 치울 운명일  뿐, 그들
이 개발한 신무기를 살 수 있는 입장은 아
니오.  우리 입장이 딱하군요. 
 박 대통령은 이런  불평등을 참지 못했던 
거요. 그래서 핵무기  개발을 서둘렀지. 핵
무기를 개발하면 경제적 부담도 덜고 효율
적으로 국방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
요. 지금 같은 국가 경쟁  시대에는 경제적
인 국방이 더욱더 절실하오. 하지만 미국은 
우리에게 IMF 자금으로 무기를 사라고 강
요하고 있소. 자기네가 꿔준 돈으로 무기를 
사라는 거지. 실업자가 넘쳐나는 이 현실에
서, 일본도 중국도 아닌 동족을  겨눌 무기
를 말이오.  그 군사비를 산업 자금으로 돌
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려면 
우리 나라가 미국의 입김에서 벗어나야 하
오. 미국이 시키는  대로 따라만  하다가는 
언제나 멍청한 소비자밖에  못 되지.  아마 
한반도 역사상  가장 많이  허비한 부분이 
군사비일 거요. 율곡에 40조가  들어갔지만 
그중에 지금 쓸 만한 무기가 얼마나 되오? 
엄청나게 많은 돈이 커미션으로  들어가고, 
그 커미션 조금 더  먹겠다고 엉터리 무기
만 잔뜩 들여다 놓고  못쓰게 되니 부품값
은 부품값대로  계속 먹히고`…`…  이러니 
어떻게 경제가 안 망하겠소.  무기 구매 얘
기만 나오면  정말 가슴이  답답해져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거래의 속내는  어떻게 
된 겁니까?  무기 거래의 경우  보통 국제 
관례상 공급자가 구입자에게 5퍼센트 정도
의 커미션을 주오. 하지만 인기가  없는 무
기는 커미션이 더 높아지지. 게다가 특수하
게 검토해야 할 무기는 컨설턴트 비용이라
고 해서 10퍼센트가 더 붙소.  최고 20퍼센
트까지의 커미션이 붙는  거지. 이  커미션 
비용 중  반은 국내로  들어오지만 나머지 
반은 들어오지조차 않소.  5·6공 시절  그 
반은 최종 결정권자의 몫이었소.  최종  결
정권자라면?  물론 대통령이지. 
 그럼 대통령의 몫은 어떻게 처리됩니까? 
 국내에 들어온 돈  중에서도 상당액이 대
통령에게 전달되고, 외국에서는 아예  대통
령의 해외 구좌로 입금되어 버리지.   대통
령으로서는 가장 깔끔한 방식이었겠군요. 
 이르다 뿐이오. 차세대 전투기 기종  변경 
문제는 이런 추악한 커넥션이 완전히 드러
난 결정판이었소.  모두가  F-18을 결정한 
상황에서 맥도널 더글라슨지  제너럴 다이
내믹슨지 하여튼 F-16을 생산하는  회사가 
노태우를 집중적으로 공략했소. 그 결과 차
세대 기종이 돌연 바뀌어버렸소.  조종사들
도 평가 분석단도 모두 F-18이  좋다고 했
는데 말이오. 노태우는 해외에서 엄청난 돈
을 받았지. 우리 민족의 현실이  참 서글프
지 않소? 그 다음 대통령들도 이런저런 이
유로 돈도 못 찾고  오히려 정치적 협력이
니 뭐니 하고 있으니`…`…. 대통령도 이런 
식으로 돈을 빼먹었는데 밑에 있는 자들은 
오죽했겠소? 공급자에게  무기 대금을   더 
비싸게 청구해 달라는 경우까지 왕왕 있었
지. 분통이 터질 일이오. 커미션을 더 챙기
려고 쓸모없는 별 희한한  무기들을 이 나
라 저 나라에서 앞다투어 들여오기도 했고. 
나는 이런 꼴들이 보기  싫어 일본으로 가
버렸지.  아니 그렇다고  일본으로 가시면 
어떡합니까?  끝까지  투쟁을  하셨어야죠.   
그것은 권력 게임이오.  힘센 자가  이기는 
거지.  공군의   입장을 대변하여   끝까지 
F-18을 주장하던 공군 참모총장이  보안사
에 붙들려가  수모를 당하고  결국 옷까지 
벗었던 것을 기억하오?  그렇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어땠습니까? 
 일화를 하나 들려주리다. 언젠가 내가  직
접 무기 거래상을 데리고 청와대에 들어간 
적이 있소. 
일행은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서자 깜짝 놀
랐다. 몇 년 만의  더위니 뭐니 부산을  떨 
때였는데, 박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부지런히 닦으며 부채질을 하고 있었
다. 박 대통령은 일행을 맞은 후 국제적 로
비스트인 외국인이 연신 손등으로 땀을 훔
치는 것을 보자 그제야  비서를 불러 에어
컨을 켜도록 지시했다. 로비스트는  준비해 
온 수표를 꺼냈다.
─`각하, 본사에서는 각하의 결정을 진심으
로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좀더  준비했으면 
좋았겠지만 국제 관행에  따라 가져왔습니
다.
 받아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박 대통령은 수표를 쓰윽 훑어보았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로비스트의 얼굴에  만족스
러운 미소가 스쳤다. 그는 박  대통령이 자
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해올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좀더 인간미 있는  대통령이라면 
어깨를 두드리고는 포옹을 해올 것이다. 이
제껏 커미션 봉투를 손에  든 후진국의 모
든 지도자들이 그랬듯이`…`…그러나 박 대
통령은 한참이나 수표의  액면가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굳은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일행은 지나치게 오래 걸린다
고 생각했다.
이윽고 박  대통령은 일행  쪽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일행은 당황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재빨
리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
다. 안절부절못하는 일행에게 대통령의  무
심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집어넣으시오. 대통령인 내가  국민들이 
죽도록 일해서 모은 이  돈을 어떻게 받을 
수 있겠소? 나라를 지키자고 한  푼 두 푼 
아낀 돈인데 말이오. 수표는 집어넣으시오. 
대신 이 돈만큼 무기를 더 주시오.
일행은 감동했다. 이런 일은 무기 거래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기 거래 대금이라면 모두가 눈이 벌개져
서 달려들었지만   박정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일행은  이 옹골찬  모습의 
지도자를 보면서 한국의  미래는 보장받을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내 그렇잖아도 무기  때문에 골치를 썩
고 있소. 여기 나와 있는 주한 미군 장성들 
중에도 군산업체 하수인 노릇을 하는 작자
들이 있질 않나, 큰 거 팔아먹을 때는 국방
장관이란 자가 노상  날아오질 않나`…`…. 
정작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주지도  않고, 
심지어는 자기네 나라에서  단종된 것까지 
팔아먹지만 안 산다고 할  수도 없으니 우
리 민족이 참으로 가련하오. 더욱이 커미션
이다 뭐다 해서 엽전이니 양코배기니 잔뜩 
붙어서 뜯어먹으니, 이래 가지고 우리 조국
에 미래가 있겠소? 당신은  사람이 정직해 
보이는데, 본국에 돌아가면 이 커미션 대신 
무기를 더 달라고 하시오. 이익금까지 빼면 
액면가보다는 더 많은 액수의 무기가 돌아
올 수 있을 거요.
─`각하, 저는 진심으로  감격했습니다. 최
선을 다하겠습니다.
그후 무기 공급자는 그  커미션 액수의 두 
배에 해당하는 무기를 보내주었다.
 박 대통령은 그런 분이었소. 
 한여름에 집무실에  에어컨도  안 켰으니 
오죽했겠습니까? 전직 국장은 일화를 얘기
하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풀리는 모양이었
다. 
역사적 격동기에 권부의 내부를  볼 수 있
는 위치에 있었던 전직 전략기획국장 역시 
10·26의 원인으로 자주 국방을  거론했다. 
미국의 눈으로 보면 박정희의 자주 국방은 
김재규의 말마따나 ‘위험한 행동’이었다. 
경훈은 한국 중앙정보부장의  시각이 미국
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김재규가 합수부에서 진술한  자주 국방이
란 결국 핵 개발에 다름아니었다. 박정희의 
자주 국방이 핵  개발을 뜻한다면,  김재규
가, “자주 국방으로 말미암아 미국과의 관
계가 나빠지고 안보를  저해하게 되었다”
고 진술한 것도 의미가 뚜렷해졌다. 그것은 
박정희의 민족주의가 미국과  정면으로 충
돌했음을 뜻하며, 미국의 입장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박정희의 도전에 대해 결말을 내
야 했던 것이다. 
김재규의 진술은 미국의  진술이나 마찬가
지였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김재규는 미
국의 사상과 시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미 
박정희를 제거해야 할 미국의 필요 조건은 
완벽했다.
그러나 경훈은 쉽사리 단정할 수는 없었다. 
미국이 김재규의 배후에 있었다  하더라도, 
혹은 박정희를  제거해야 할  미국의 필요 
조건이 완벽했다 하더라도  구체적 행위에 
대한 확신이 없는 한  어떤 것도 단정지어
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시해가  어떻게 이루어졌
는가를 알아내야 한다. 
일단 김재규가 미국의 조종을  받아 박 대
통령을 시해했다면 그후  김재규와 미국의 
관계가 중요할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
다. 그러나 이 작업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당장 떠오르는 의문은 미국이 김재규
를 밀었다면 어째서 김재규가 거사에 실패
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가 하는 점이
다. 
그것은 미국의 관련성을  직접적으로 부인
하는 거대한 현상이다. 
그 현상의  내부로 들어가서  진상을 캐지 
못하는 한, ‘미국이 배후에 있었다’는 충
분 조건은 완벽하게 묻혀버리고 말 것이다.
이처럼 진상을 캐는 일에는 절대로 증거가 
나타날 리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결정적 
증인이 나타날 리도  없었다. 박  대통령과 
그렇게 가까웠던 제럴드  현마저도 죽음의 
순간이 임박해서야 전화를, 그것도 고작 인
남에게 했을  정도니 다른  사람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알려져 있는 10·26의 진상이
란 너무도 허술하고 유치했다. 그러다 보니 
죽은 김재규만  모든 몰상식과  모순을 한 
몸에 덮어쓰고 희대의 얼간이가 되어 있는 
것이다.
경훈은 모순으로 점철된 10·26에 대한 결
론을 그냥 덮어둘 수 없었다.  그것은 한민
족의 수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자신이 
10·26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단순히 감추
어진 현대사를 들춰내는 정도의 일이 아니
었다. 부끄러운 민족사를 가다듬고  치유하
는 일인 동시에 재발을  막는 일이기도 했
다. 
인질
경훈은 사무실로 돌아와 바로 인남에게 전
화를 걸었다. 인남의 대발견을 칭찬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남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경훈이 점심을 먹고 돌아오자 비서
는 전화가 두 통 걸려 왔었다고 전했다.
 여자던가요? 
 아니, 남자였습니다. 
 누구라던가요? 
 밝히지 않았습니다. 
 메시지 남겨둔 것도 없구요? 
 네. 다시 건다고만 했습니다. 
경훈은 불안해졌다. 이렇게 이름을  밝히지 
않는 전화는 거의 없었다.
경훈이 자리에 앉아 생각을 가다듬으며 인
남에게 다시 전화를 걸려고  할 때 인터폰
이 울렸다.
 변호사님, 아까 전화했던 분입니다. 
 돌려줘요. 
잠시 후에 걸걸한 음성이 수화기에서 흘러
나왔다.
 이 변호사, 당신의 애인은 우리가  데리고 
있소. 미인에다가 몸매도 잘 빠졌더군.  뭐
요? 애인이라니? 
 그렇소. 지금 미칠 것  같소. 돈이고 뭐고 
다 떠나서 이 여자를  그저 행복하게 해주
고 싶소. 나뿐만 아니라 내  부하들도 모두 
동감이오.  당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
요? 
 이 봉곳한 젖가슴에 가느다란 허리,  알맞
게 들러붙은 궁둥이하며 시원하고 보기 좋
은 허벅지, 황홀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종
아리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이렇게  훌륭한 
처녀를 애인으로 두었소?  …`…. 
 앞으로 두 시간 안에 미국에서 가지고 온 
그 목갑을 건네주시오.
 만약에 누구에게 알리거나  하면 이 여자
는 끝장이오. 알겠소?  …`…. 
 흠, 그렇다면 맛을  보여주지. 얘들아,  이 
여자의 옷을 벗겨라.  
잠깐! 멈추시오. 가겠소. 
경훈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얘들아, 멈춰라. 바로 오신댄다. 
 그렇지만 하나는 약속하시오. 
 뭐요? 
 내가 갈 때까지  그녀의 옷자락 하나라도 
건드리면 안 되오.  후후, 그건  염려 마시
오. 그 목갑만 주면 당신의  애인을 온전하
게 보내주지.  그녀와 직접 통화하게  해주
시오. 
 그거야 좋도록 하시오. 
사나이는 바로 수화기를 넘겼다.
 경훈아! 미안해. 조심했어야 되는데`…`…. 
인남의 긴장된 목소리였다.
 괜찮니? 
 응. 그런데 이 사람들이 가지고 오라는 것
이 뭐야?  목갑. 
 무슨 목갑? 
그때 사나이가 수화기를 가로챘다.
 시끄러운 일이 생기면  이 여자에게 생애 
최대의 모욕을 안겨줄 거요. 알겠소?  알았
소.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시오. 
경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인남이 다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조바심 쳤다.  그는 전화
를 끊은 뒤  은행으로 향했다.  케렌스키가 
원망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중요한 목갑을 자신에게 보관시킨 것일까.
이제 경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
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목갑을 넘기
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목갑
이 문제가 아니라 인남이 걱정이었다. 저들
이 목갑을 받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
우 경훈으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시간을 전혀 주지 않는  것이나 말하는 것
으로 봐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경찰에 연락했다가는 정말  인남에게 큰일
이 날 것만 같았다. 현재로서는  저들을 믿
어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경훈이 은행에서 목갑을 찾아 도대체 무엇
이 들어 있는지 확인해  보려는 순간 휴대
폰이 울렸다.
 가짜 목갑을 주거나  하면 비극이 생긴다
는 것을 명심하시오.  그런 염려는 하지 마
시오. 
 좋소, 그러면 그 목갑을 가지고 덕수궁 정
문 앞으로 오시오.  내 친구는? 
 일단 목갑을 검토하고 돌려주겠소. 
 안 되오. 목갑과 바로 교환해야 하오. 
 그건 안 돼. 당신이 가짜를 줄지도 모르니
까. 
 나는 절대 그런 속임수를 쓰지 않소.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일할 뿐이오.  당
신은 따라올 수밖에 없고. 싫다면 그만두시
오.  아니, 좋소.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소?  
30분 정도. 
 알았소. 같은 장소에서  기다리겠소. 하지
만 통화는 계속하게 해줘야 하오.  그건 염
려 마시오. 
경훈은 밀어붙이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
웠다. 그러나 상대는 한치의 틈도  주지 않
고 경훈의 약점을 압박해 왔다.  경훈은 인
남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상상만 해
도 견딜 수 없었다. 그렇지만  최악의 경우
가 발생할 수 있었다. 상대가  목갑을 차지
하고도 인남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거나 폭
행할 수도 있지 않은가. 여기에  생각이 미
치자 경훈은 목갑을 열어보는 것도 잊어버
리고 정신없이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미스터 강을 보내주세요! 
경훈은 사무실  직원인 미스터  강을 만나 
목갑을 건네주며 부탁했다. 미스터 강은 누
군가에게 자신을 이 변호사라고 밝히며 불
안한 표정을  지은 채  목갑을 전해주라는 
얘기를 듣고 어리둥절해했다.
경훈은 미스터 강을 잘 지켜볼 수 있는 위
치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미스터  강 앞으
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선글라스를 낀 사나
이는 미스터 강의 옆에  서서 한동안 두리
번거리다가 그에게 이 변호사냐고 묻는 모
양이었다. 미스터 강은  경훈이 시킨  대로 
불안한 표정을 지은 채 목갑을 사나이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사람을 빨리  돌려보
내라는 한마디도 잊지 않았다. 사나이는 아
무 말없이  목갑을 받자마자  바로 지하철 
입구로 내려갔다.
경훈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나이를 뒤쫓
았다. 사나이는 부지런히 지하도를  건너서 
플라자호텔 앞의  입구로 나간  다음 다시 
북창동 골목길로 갔다. 옛 시경  후문 앞에 
다다르자 그는 흘끗 뒤를 쳐다봤다. 다행히 
몇 사람의  행인이 있어  경훈은 사나이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다.
사나이는 몇 번 힐끔거리더니 옆 골목으로 
들어섰다. 경훈도 재빨리 그를 뒤쫓아 골목
으로 접어들었다. 경훈은 계속 사나이의 뒤
를 쫓다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사나이의 
걸음걸이가 달라져 있었다. 이제까지의  조
급하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경훈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전에 골목에서 스칠 
듯 지나친 자동차가 의심스러웠다.
과연 사나이는 태평로 큰길로 나가더니 다
시 플라자호텔 쪽으로 갔다. 경훈은 사나이
를 불러세웠다.
 잠깐 서시오. 
사나이는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 목갑을 어떻게 했소? 
 목갑이라뇨? 
 시치미 떼지 마시오. 경찰에 가야 말을 하
겠소? 당신  도대체 누구요?   심부름센터 
직원인데요. 
 심부름센터? 그런데 그 목갑은? 
 아, 손님이  부탁한 상자  말이군요. 그건 
손님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덕수궁  앞에서 
어떤 변호사로부터   받아서는 북창동에서 
손님에게 전해주었는데 무슨  일로 그러세
요?  북창동에서 누구에게?   손님에게요.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거기서 만나
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런데 왜 뒤를  그렇
게 힐끔힐끔 돌아다보며 걸었소?   손님이 
혹시 폭력배들이 따라올지도  모르니까 조
심하라고 했어요. 뭔가 이상하면 바로 휴대
폰으로 전화하라고 해서`…`….  전화 번호
는? 
 여기 있습니다. 
경훈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후후, 이 변호사. 참으로 부지런히 걷더군. 
 내 친구는 어디 있소? 
 걱정 마시오. 목갑이 진짜인가만 확인하면 
바로 돌려보낼 테니. 
 언제요? 
 얼마 안 걸릴 거요. 기다리시오. 
 왜 그렇게 시간이 걸리지? 당신이 확인하
는 것이 아니오?  그런 건 묻지 마시오. 
 그동안 친구와 계속  통화를 하게 해주시
오. 
 그거야 문제없지.  하지만 쓸데없는  일을 
하진 마시오.  번호를  추적한다거나 하는.   
염려 마시오. 
인남이 전화에 나왔으나 이런 상황에서 별
로 할말은 없었다. 그저 그녀의  안전을 확
인해 볼 뿐이었다.
 약속대로 그들에게 목갑을 넘겨줬어. 별일 
없지? 
 아직은. 
 조금만 기다려. 잘될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경훈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전화가 끊겨버렸기 때문이다. 처
음엔 혹시 휴대폰이라 그랬나 했지만 자신
이 그 점을 염려하여 한자리에 계속 서 있
었으므로 저쪽에서 끊어버린  것이 분명했
다. 경훈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
화기에서는 건조한 녹음만  반복되어 나올 
뿐이었다.
 지금은 고객이 전원을 끈 상태입니다. 
경훈의 가슴에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아무리 급했다고 하나 자신이 너무 경솔했
다. 어쨌거나 목갑을 가지고 끝까지 흥정했
어야 하는데 이젠 목갑을 줘버렸으니 방법
이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휴대폰이 울리지 않자 경
훈은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인남이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5
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 30분이 가까워
지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늦었지만 이
제라도 경찰에 신고해서 전화 번호를 추적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경훈은  손 
형사를 불렀다.
손 형사가 살벌한 기세로 심부름센터 직원
을 닦달했으나 그는 실제로  아는 게 없었
다.
 죄라면 수고료 좀 많이 받은 것밖에 없습
니다. 
손 형사는 자세히 조사하려고 그를 경찰서
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손 형사가 그를 조
사해서 납치범들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지
는 않았다.
경훈은 후회와 절망을 이기지  못한 채 집
으로 돌아왔다. 땅거미가 깔리고 어둠이 깊
어지도록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납치범
을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납치범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지 않았던가. 경훈은  손 형사에게도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으나 역시 아무런 성과
가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이제는 밤도 깊어가고 있었다. 경훈은 휴대
폰을 앞에 놓은 채 벌써 몇 시간이나 꼼짝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혹시  전화가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이  목갑
의 내용을  확인하는 데  예상외로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다는 털끝 같은 희망이 경
훈으로 하여금 가까스로 견디게 하고 있었
다.
거실의 괘종시계가 9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무겁게 토해냈다. 이제  희망이 없었다. 그
들이 인남을 어떻게 했을까.  상상하기조차 
싫은 광경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경훈은 도저히 집 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
었다. 답답한 나머지 속이 메슥거리고 진땀
이 흘렀다. 경훈은  무작정 일어섰다. 어디
론가 나가야만 할 것 같아 옷을 입었다. 마
치 인생의 모든 것을 잃은 패배자 같은 심
정으로 현관을 나섰다. 이때였다.
 삘리리리. 
휴대폰 벨 소리였다.  경훈은 얼른  플립을 
열었다.
 경훈아, 나야. 
 아니, 인남아! 
경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틀림없이  인남
의 목소리였다. 경훈은 숨이 넘어갈  듯 서
둘러 물었다.
 지금 어디니? 괜찮아? 다친 데는 없니? 
 응, 괜찮아. 여기 시내야, 시청 부근. 
 기다려, 바로 갈게. 
디스켓의 비밀
인남은 경훈을  보자 애써  웃으려 했지만 
눈에 이슬이 맺혔다.
경훈은 인남의 손을 꼭  쥐고 근처의 커피
숍으로 데려갔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그런데  놈들이 
너를 왜 이렇게 늦게야 풀어줬지?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갑자기 상황이  바뀐 것 같
았어.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는 나를  풀어줬어. 
목갑도 돌려주면서 말이야.  뭐라구? 목갑
을 돌려줬다구? 
인남은 가방에서 목갑을 꺼내 경훈의 앞에 
놓았다.
 그래, 나도 이해할 수  없었어. 매우 중요
한 물건 같았는데 말이야. 그들은 누군가에
게 목갑을 전해주고 나서야 나를 풀어주려
고 했어. 그런데 목갑을 받을  사람과 연락
이 되지 않았는지, 아니면 다른  사정이 생
겼는지 한참 기다리더니 결국  한 통의 전
화를 받고는 나를 풀어줬어.  그들이  누구
인지 짐작 가는 바는 없니?   누군가의 하
수인 같았어. 하지만 그들을 지시하는 자는 
누구인지 모르겠어.  왜 이 목갑을  돌려주
었을까? 
경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밥은 먹었니? 
 생각 없어. 
 그럼 우리 집으로 가자. 
경훈은 불안해서 인남을 혼자  놔둘 수 없
었다. 
집으로 돌아온 경훈은 인남을 쉬게 하고는 
곰곰이 생각했다.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목
갑과 함께 인남을 풀어주었다면 갑자기 상
황이 바뀌었다는 얘기다. 도대체 왜 목갑을 
도로 돌려주었을까.
경훈은 목갑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테이프
는 뜯기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한참 생각하던 경훈은 목갑의 테이프를 뜯
었다. 내용물을 보지 않고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목갑을 열자 디스켓  하나가 나
왔다. 경훈은 극도의 궁금증을 누르며 디스
켓을 노트북에 집어넣었다.
화면에 암호를 입력하라는 메시지가  떴다. 
경훈은 아차했다. 이런 중요한  디스켓이라
면 당연히 암호를 알아야 열 수 있을 것이
다. 
경훈은 케렌스키와 관련된  생일이니 전화 
번호니 하는 것들을 쳐보았지만 소용이 없
었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경훈은 
문득 케렌스키가 예전에 말했던 게 떠올랐
다. 
─`언젠가 이 형제라는  단어가 필요할 때
가 있을 것이오.
형제? 왜 그는 ‘형제’라는  단어를 말했
을까.
어떤 영감에 사로잡힌 경훈은 재빨리 형제
라는 단어를 입력했다. 
그러자 수록 내용의 리스트가 화면에 나타
났다. 리스트에는 약 20여 개의  제목이 있
었다. 
경훈은 리스트의 맨  앞에 있는 <걸프전> 
파일을 열어보았다.
<걸프전>
2차대전이 끝나고 미국이 유일의 초강대국
으로 떠오르자 세계 각국은 미국의 달러를 
보유하고 싶어했다. 특히  일본 등이  대량 
수출로 달러를 긁어모으자  미국의 금본위
제는 심각한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유출되
는 달러만큼의 금을 보유해야 하는데 미국
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닉슨은 금
본위제를 포기했다.
그 대신 미국은 달러가  종이 조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치밀하게 연구했다.  그 결
과 석유 대금의 결제는  반드시 달러로 이
루어져야 한다는 조건을 만들어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산유국을 장악해야  했다. 
미국은 이  산유국 장악의  초석으로 먼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방을 대신  맡기로 하
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후 중동  지역의 산
유국 정치와 군사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순
조롭게 석유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해 나갔
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
슬람 근본주의자들이나 아랍 민족주의자들, 
즉 조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애국 아랍인들
이 자국에 의한 자국  석유의 처리를 주장
하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개입했다. 석유의 자국 소유를 주장하는 자
들을 일부 회유하거나 협박했으며,  극단적
인 경우 없애버렸다.
그중 리비아의 카다피나  이라크의 후세인
이 가장 문제가 되었다. 
그들은 이미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기 때
문에 납치나 암살이 용이하지 않았다. 특히 
후세인이 문제였다.
우리는 이란·이라크전쟁 때  후세인과 급
속히 가까워졌다. 그때는 이란의 이슬람 혁
명 수출을  막아야 했기  때문에 이라크를 
엄청나게 지원해 주던 시기였다.
그 전쟁이 끝나자 이번에는  힘을 키운 이
라크가 석유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고 나
왔다. 우리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 문제를 
놓고 외교적으로 티격태격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아랍의 여론이 어디로 뭉쳐질지 몰
랐기 때문이다. 방법은 이라크와 아랍의 다
른 산유국을 떼어놓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우리는 아주  좋은 기회를 포
착했다. 평소 이라크는 쿠웨이트에게  석유
를 도둑맞는다고 불평해 왔다. 이라크는 쿠
웨이트가 국경을 넘어와 특수 굴착기로 자
기네 지하의 석유를 끌어간다는 사실을 알
아챘다. 이라크는 약 360억 달러를  손해봤
다며 그 대가로  2백억 달러를 쿠웨이트가 
지불해야 된다고 주장하던 참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우리 직원
들은 외교적·군사적으로 이라크와 접촉했
다. 이에 고무된  이라크는 곧  쿠웨이트를 
응징하고 싶다는 의견을 표명했고,  우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텍사스에서는 기름을  도둑질하는 놈들을 
모두 죽여버렸소. 그  대답이 나가고  나서 
이라크는 3일  만에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걸프
전에 개입했고, 그 결과 석유에  대한 지배
권을 반영구적으로 굳혔다.
아랍의 많은 산유국들과 더욱 굳건한 관계
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라크의 위협을 증
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다른 아랍
국들은 우리에게 더욱더 의존해 올 것이다. 
그리고 달러의 높은 가치는 지속될 것이다.
<아시아의 외환 위기>
지난 70년대와 80년대에  아시아와의 무역 
전쟁에서 미국은 참혹할 정도로  패배했다. 
무역 흑자로  넘쳐나는 일본의  자본이 온 
미국을 휩쓸고 다녔다. 록펠러빌딩은  물론 
미국의 상징인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까지 
일본에 매각되고,  심지어는  할리우드까지 
일본의 자본에 먹히는 실정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무역 전쟁으로는 도저히 값싼 노동
력을 기초로 한 아시아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80년대의 엔고 조작
이 일본의 체질만 굳혀주었을 뿐이라는 사
실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우리는 일본의 이자율이 거의 제로에 가깝
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5퍼센트가 넘는 프라임 레이트로 일본인들
이 보유한 달러를 얼마든지  끌어올 수 있
으니, 이제까지의 전략을 완전히 바꾸는 것
이다. 우선 강력한 달러를 기초로  무역 전
쟁에서 금융 전쟁으로 간다.
 그런 다음 아시아의 가치 있는 기업을 헐
값으로 인수하면 결과적으로  아시아의 강
병들을 우리의 용병으로 만들 수 있다.
90년대 초  우리는 미국을  움직이는 숨은 
실력자들을 한데 모았다.
 그들도 모두 이대로는 안 된다는 데 공감
했다. 그 결과 강력한 달러를  만들기 위해
서는 일단 주식 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묵
시적 합의를 도출했다. 우리는 청사진을 보
여주었다.
그들은 합의한 대로 주식  시장에 계속 불
을 질러댔고 주식은 지난 8년  간 열 배가 
뛰었다. 넘쳐나는 달러를 쥔  헤지펀드들은 
아시아의 환투기장으로  몰려갔다.  결과는 
계획한 대로였고 우리는 아시아의 가치 있
는 기업들을 헐값에 인수했다.
고맙게도 학자들은 이 모든 현상을 ‘시장
의 원리’로 설명해  준다. 그렇다, 세상은 
시장의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 일단 우리가 
큰 틀을 짜주기만 하면.
그 밖에 <케네디>·<리비아>·<이란>·
<피노체트>·<이탈리아>·<인도네시아> 
등 그 파일들은 모두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은 CIA의 공작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경
훈은 놀라움에  가득 차  파일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다가  한 파일의  제목 위에서 
눈길을 멈추었다.
<김대중>
우리는 바하마 회의에서  김대중을 지원하
기로 결정했다. 야당에 의한 첫  번째 정권 
교체라, 이 민주 투사는 수십 년 간 뭉쳐온 
보수층과 재벌들의 반발을  이겨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때 우리 정부와  자본이 그
의 힘이 되어준다.
김대중은 미국을  뒤에 업은  채 과감하고 
자신 있게 정책을 펴나갈 것이다.  차츰 우
리는 자금을 풀어주며 한국을 IMF 우등생
으로 칭찬하기 시작한다. 한국 국민들은 국
가 부도 위기를 극복해  가는 그에게 신뢰
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김대중은 
그전의 대통령들과 달리 숫자 감각이 뛰어
나다. 그도 처음에는  정권의 안정을  위해 
미국에 매달리겠지만 차츰 자신의 힘을 낼 
것이다. 김대중은 한반도를 안정시키고  국
민을 잘살게 하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
고 있는 전문 정치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 머리가 비상하다. 이런 그의  최종 목표
가 무엇인지는 명약관화하다.
김대중은 지금 미국,  일본, 중국을 돌면서 
한반도의 경제와 안정을 위한 외교에 골몰
하고 있지만 그의 최종  목표는 남북 정상 
회담이다. 그는 한반도가 군축이라는  목표
를 달성하지 못하는 한  선진국 대열에 올
라서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는 민주 회복에 이바지한 자신의 경력으
로 르윈스키 스캔들로 얼룩진 클린턴의 부
족한 점을 채워주면서,  햇볕 정책에  관한 
강력한 공조를 이끌어냈다.
김대중은 필사적으로 남북 정상 회담을 추
진할 것이며 그 최종 목표는  군축이다. 그
는 김정일에게 북이 군축하는 금액을 산업 
생산에 투자한다면 남이  군축하는 비용을 
북한에 지원하거나   투자하겠다고 제안할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통일의  첫걸음을 
의미한다.
박정희의 핵 개발 못지않게 김대중의 군축
은 우리에게 위협이 다.
 이미 김대중은 IMF를 구실로 140억 달러
에 달하는  대미 무기  계약을 연장하거나 
실질적으로 취소해 버렸다.
한반도의 군축, 그리고  통일. 이것은 아시
아에 선풍을 일으키고 마침내는 우리 군수 
산업을 도산시킬 것이다. 군수 산업의 도산
이란 곧 우리 군사력의  붕괴를 뜻하는 것
이 아닌가. 우리는 새로운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칼 007기 사건>
우리는 이 사건이 터졌을 때 소련 극동 지
역 방공사령관과 현지 지휘관, 그리고 조종
사 간의 대화록을 신속하게 입수했다. 소련 
측에서는 당시   지속적으로 우리   공군의 
RC-135정찰기를 쫓고 있었으며, 그날도 우
리 정찰기는 소련 영공을  따라 정찰 비행
을 했다.
 소련은 매우 신경이  곤두서 있던 참이었
다.
우리는 소련 측 대화록을 분석한  결과, 자
신들이 격추시키려 하는  비행기가 정찰기
인 줄 알고 있었고 사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그것을 백악관에 
보고했다.
그런데 당시  유럽에 우리의  전략 미사일 
퍼싱`2를 배치하는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
하고 있던 소련을 세계  여론을 빌려 악의 
제국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우리는 
이후 침묵했다. 물론 그 당시  미공군의 레
이더가 칼 007이  소련 영공으로 흘러가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던 사실에 대
해서도 굳게 입을  다물었다. 사실  공군은 
그 비행기가 어떻게 되나  보고 싶었던 것
이다.
1993년 유엔에서 그 당시 소련이 정찰기인 
줄 오인하고 정당하게 요격을 했다는 판정
이 나왔지만, 그때는 이미 우리가  얻을 것
은 다 얻은 후였다.
경훈은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케네디 전
문가 빌의 얘기가 떠올랐다.
―`케네디의 죽음은  미국의 역사에,  아니 
세계 역사에 하나의  뚜렷한 획을  그었소. 
진정한 세계 평화를 위한 미국의 리더십은 
땅에 묻혀버렸소. 그후 국내적으로는  돈과 
힘의 추악한 결탁이, 국외적으로는  미국의 
국가 이기주의가 있었을 뿐이오.
미국의 전횡이 뚜렷하게 다가왔다. 이쯤 되
면 한국에  앉아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칼 007기  사건만 보더
라도 한반도의 국민들은 그동안 얼마나 소
련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태도에 치를 떨
었던가. 그러나 그 실상은 정반대였으니 역
사는 왜곡될 대로 왜곡된 셈이었다.
경훈은 디스켓을 보자  케렌스키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어떻게 이런 극비 중의  극비 문서를 모았
으며 자신에게 주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케렌스키는 과연 자살했을까.
처음에는 한 인간의 부탁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부담스러웠지만, 디스켓을 
보고 난 지금은 케렌스키가  하던 일이 몹
시 궁금해졌다. 경훈은 눈을 감은  채 케렌
스키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케렌스키의  부인에게서 받
았던 이상한 인상을 떠올렸다. 부인이 여행 
가방을 챙기고 있어 경훈은 위로한다고 서
해안의 샌프란시스코나 시애틀  같은 데가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얼굴을 붉히지 않았던가. 마치 남몰
래 부끄러운 일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왜 그랬을까.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는 것
일까, 아니면 다른 남자하고 은밀히 여행을 
떠나려다가 양심에 걸려서 그랬던  것일까. 
그러나 경훈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케렌
스키 부인은 그럴 여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아무렇지도 않은 말에 그녀는  왜 그런 반
응을 보였을까. 이때 문득 경훈의  기억 깊
숙이 있던 케렌스키의 유언이 두꺼운 껍질
을 뚫고 그의 의식으로 떠올랐다.
점점 숨이 막혀온다. 이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사랑하는 아내여, 이제 한 줄기  빛조차 스
러지고 나면 알바트로스의 날개에 올라 안
개 깔린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동안 안녕.
이상한 유언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유
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만약 유언이  아니라면? 경훈은  두 눈을 
번쩍 떴다. 만약  유언이 아니라면  그것은 
부인에게 남기는 어떤 암호가 아닐까. 부인
은 자신이 샌프란시스코나  시애틀로 가는 
것이 어떠냐고 했을 때 얼굴을 붉혔었다.
경훈은 수화기를 들어  샌프란시스코의 교
환을 불렀다.
 바닷가에 ‘안개 깔린 천국’이란 호텔이 
있습니까?  기다리세요. 
잠시 후에  나온 교환은  건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러면 시애틀에 있는지  좀 알아봐 주세
요. 
이번에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네, 있습니다. 대드릴까요? 
 아니,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는 경훈의 가슴속에서 분노와 더
불어 의구심이 치솟았다. 그렇다. 케렌스키
는 역시 살아 있었던 것이다. 
경훈은 필립 최의 말을 떠올렸다.  필립 최
는 케렌스키가 매우 힘든  적을 상대로 전
쟁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케렌스키는 
자살하던 날 집에  ‘성전’이라는 단어를 
써두고 나갔다. 그렇다면 이 디스켓은 케렌
스키가 수행하던 성전과 모종의 관계가 있
음에 틀림없었다. 경훈은 디스켓을 다시 목
갑에 넣어 깊숙한 곳에 보관했다.
하문의 정체
다음날 아침 인남은 경훈의 집에서 잤다는 
사실이 부끄러운지 서둘러  자신의 오피스
텔로 돌아가려 했다.
 인남아, 무슨 급한 볼일이 있는 것이 아니
면 당분간 여기서 같이 지내는  게 낫겠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이제 나도 회사 일
을 해야 하니까.  아냐, 우리 집으로  갈래. 
여기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잖아.  그리고 
나도 미국으로 돌아가야지. 현 선생님이 부
탁하셨던 일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면 
말이야.  그러면 며칠 간만이라도 어디  호
텔 같은 데서  묵도록 해.  아직은 위험해. 
인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따가 호텔에서 전화할게. 
 그래. 
경훈의 집에서 나온 인남은 오피스텔에 들
러 간단한  짐을 싸가지고는  바로 호텔에 
방을 잡았다. 인남은 한국에 와서 경훈에게 
별로 도움도  되지 못하고  납치까지 당해 
부담만 주었다는 사실에 하루 종일 기분이 
가라앉았다. 경훈에게 전화할 기분도  나지 
않을 정도로 침체되어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인남은 마음을 다잡았
다. 이럴수록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한 
의욕이 솟구쳤다. 인남은 최소한 제럴드 현
이 남긴 메모의 의미는  자신이 풀고 싶었
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테이블 
앞에 앉았다.
─`하문, 이놈은 왜  나를 슬슬  피하는 걸
까? 나 모르게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
다는 걸 잘  아는 녀석이 왜  그러지? (79. 
10. 11)─`제리, 네가 원하는 것은  모두 해
줄게라고? 하문, 네가, 네가  그럴 수 있는 
거야? 그 자식은  이미 빼돌리고.  (79. 10. 
27)인남은 이것을 읽고 또  읽었다. 뭔가가 
잡힐 듯 말 듯했지만  아무것도 확신할 수
는 없었다. 문장은  두서가 없었고  제럴드 
현이 한때의 자기 감정을  적어둔 것에 불
과했다. 그러나 인남에게는 이 짧은 문장들
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특히 ‘하문’
이라는 이름이 크게 부각되었다. 
인남은 ‘노벰버’를 자신이 해독한 데 대
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닌게아니라 
경훈은 그것이 육사 11기를 의미한다는 사
실을 알게 되자 10·26으로 비롯된 일련의 
역사에 대한 포괄적 해석을 할 수 있었다. 
인남은 기필코 이 문장들도 해독하여 경훈
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문장의 핵심적 주어인 ‘하문’의 뜻
을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의 이름임에는 
틀림없지만 어딘지 낯설었다. 경훈도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하문이란  이름을 수배했
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인남은 찬찬히 머리를 굴렸다. 이름을 찾는 
데는 전화 번호부가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
었다. 인남은 옷을 차려입고 광화문에 있는 
한국통신 본사로 갔다. 전국 각  지방의 전
화 번호부가 모두 전시된 그곳에서 인남은 
하문이라는 이름을 찾고 또 찾았다. 
그렇게 찾은 이름을 다  적어서 호텔로 다
시 돌아온 인남은 일일이  전화를 걸어 확
인했다. 그러나 전화를 하면서도 자신은 없
었다. 
하문이란 이름은 성이 생략된 이름일 수도 
있으므로. 역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
다. 
인남은 지친 상태에서 경훈에게 전화를 걸
었다. 경훈은 인남이 호텔을 잡았다는 말을 
듣고 안심했다.
 경훈아, 적어도 현 선생님의 메모  정도는 
내가 풀어야 할 텐데`…`…. 그러나 경훈은 
인남이 하루 종일 그 이름을 찾아헤맸다는 
말을 듣자 염려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잊어버려. 안 떠오르는 건 잊고 지내다 보
면 어느 순간 갑자기  생각나는 경우가 있
으니까. 인남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텔레
비전을 켰다. 잠시 쉬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볼 참이었다. 공허한 마음으로 무심코 텔레
비전을 보던 그녀는 한 외국인 코미디언이 
등장하자 어딘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인
남은 텔레비전을 보다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 
코미디언의 한국식 이름이  자막으로 나오
는 순간, 인남은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
다.
 아, 그래! 그럴 수도 있잖아! 
다음날 아침 인남은 경훈의 사무실로 찾아
갔다.
 웬일이야, 이렇게 일찍? 
 ‘하문’이란 이름 말이야, 그거 혹시  외
국인 이름을 우리말로 쓴 게  아닐까?  외
국인 이름이라구? 
 그래, 문장상으로 보면 현 선생님과  매우 
친한 사이 같던데, 그렇다면 같이 근무하던 
동료가 아닐까?  그럴듯한데. 
 무엇보다 문맥이  맞잖아. ‘하문’은  현 
선생님을 제리라는 애칭으로 불렀잖아.  음
`…`…. 
 그리고 현  선생님은  그를 ‘하문’이라 
부르고. ‘하문’이란 어쩌면 현  선생님이 
지어준 외국인의 애칭 같은  것이 아닐까?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네가 또  대발견을 했을지도 모르
겠구나. 그런데  어떻게 확인한담?  참, 오 
선생님께 물어보면 아실지 몰라. 경훈은 바
로 오세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 선생님과 같이 근무한 이들 중에 우리
말로 고치면  ‘하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습니까?  글쎄, 너무 
갑작스럽게 물으니 잘 떠오르지 않는데`…
`….  그러시겠죠. 사실 그런  사람이 없는
지도 모르구요. 단순한  가정이니까요.  하
문, 하문이라, 왠지 귀에 익은  것 같긴 한
데`…`….  나중에라도 떠오르면 연락해 주
십시오. 
 그럽시다. 하문이라,  하문, 하맨,  하우문, 
하우스맨?  네, 뭐라구요? 하우스맨? 
 하우스맨, 그게 비슷한가? 
 하우스맨이란 이름이 있었습니까? 
 그럼, 그 사람을 모른단 말이오? 
 저는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저런, 내가 얘기를 안 해준 모양이군. 
 누구죠? 
 강일이 형님하고 같이 일하던 사람이오. 
경훈의 귀가 번쩍 뜨였다.
 직함은요? 
 주한 미군 고문관실 실장이지. 캡틴. 
 아! 
 뭔가 풀렸소? 
 틀림없습니다.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우
스맨이 현 선생님이 말씀하던  사람입니다. 
경훈은 순간 맨 처음  제럴드 현이 자신에
게 전화를 걸었을 때 했던 말 중에 ‘하우
스’가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 알 수 없
던 ‘하우스’란 말도 역시 하우스맨을 지
칭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우스맨은  매
우 중요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10·26에 깊게 연관되어 있는 사람
일 것이다.
 현 선생님하고는 친했던  모양이죠? 제리
라는 애칭으로 부른 걸 보면.   그럼, 아주 
친했지. 
 맞아요. 바로 그  사람입니다. 현  선생님, 
즉 제럴드 현을 제리라고 불렀어요.  그 사
람은 언제부터 거기서 근무했습니까?   원
래는 형님이 먼저 그  자리에 계셨고 하우
스맨이 나중에 합류했지. 하우스맨은  장군
까지 진급했소. 아무래도 형님은  한국계라
는 제약이 있었지.  업무에서는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나요? 
 명콤비라고나 할까. 
제럴드 현은 ‘하문’을 자기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하는 녀석이라고 했고, 그것은 아마
도 두 사람의 친밀도를 나타낸 것이리라.
 주한 미군 고문관실은 CIA와는 어떻게 다
른가요? 
 주한 미군은 특성상 고문관실에서  CIA의 
많은 공작 업무를 수행했소. 하우스맨의 위
치는 CIA 한국 지부장에 못지않았지. 북한 
및 중국·소련과의 대치 상황에 있던 한국
의 현실에서 미군이라는 조직은 그 무엇보
다도 강했고, 하우스맨이나 강일이  형님처
럼 20년  넘게 근무한  터줏대감들은 잠시 
왔다 가는 CIA  한국 지부장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소. 대사관에  있는 
CIA 직원들이 주로 정보의 수집과  분석에 
몰두했다면, 미군 고문관실은 조작이나  공
작 같은 업무에서 힘을 발휘했지.  정보 기
관 간의 위상은 회의를 할  때 보면 잘 알 
수 있소. 주로 하우스맨이 지부장을 부대로 
부르는 편이었지. 물론 거기에는  보안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보안상의 이유라면요? 
 8군에는 구리로 만든 방이 있소. 무엇으로
도 감청을 할 수  없는 곳이지. 이  밖에도 
고문관실은 한국의 모든  정보를 장악하기 
때문에 가히 주한 미군의  핵이라고 할 수 
있소. 주한 미군이 얻는 모든  정보는 일단 
고문관실로 취합되어 본국으로 들어가니까 
그들의 힘을 알 만하지.  하우스맨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는 얼마 전에 죽었소. 
 그렇군요.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수시로 
전화드리겠습니다. 경훈은 전화를 끊은  다
음, 외우고 있던 두 문장을 종이에 옮겨 쓰
고는 몇 번이나 읽었다.
 뭐래, 하우스맨이래? 
 그래, 하우스맨. 우리말로 옮기면 정말 하
문이라고 할 만하다. 
박인남, 너 정말  대단한데. 중요한 순간에 
늘 뭔가를 해내는구나.
 인남은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하우스맨이 누구지? 
 주한 미군 고문관실 실장, 즉 책임자였대. 
 어머, 그렇다면`…`…. 
 그래, 어떤 형태로든 미국이 김재규의  뒤
에 있었던 것은 확실한 사실  같아. 더군다
나 제럴드 현의 두 번째 문장은 10·26 바
로 다음날 씌어진 거야. 그렇다면 하우스맨
이 빼돌렸다는   그 친구는   어쩌면`…`….  
이때 인터폰이 울렸다.
 변호사님, 전화 왔습니다. 
 알았어요. 돌려줘요. 
 여보세요? 
 이 변호사, 나 제임스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에 했던 그 이야기 말이오, 빨리 끝내버
리고 싶어 전화했소.  
그럼 지금 만나죠. 
 롯데호텔 사우나가 어떻소? 
 좋습니다. 
경훈은 인남을 배웅하고는 바로 약속 장소
로 갔다.
최후
제임스는 사우나에  먼저 와서  땀을 흠뻑 
흘리고 있었다. 경훈은 끝내 증기실 안에서 
얘기하겠다고 고집하는 제임스를  보며 아
직도 조직원으로서의 본능이  강하다는 것
을 알았다. 제임스는 벌거벗은  상태에서만 
입을 열었다.
 이 변호사가 얘기한 것을 깊이 생각해 보
았소. 나에게는 재직 중 알았던  사실에 대
해 보안을 유지할 책임이 있긴  하지만, 이
미 20년이나 지난 일이고  내가 아는 부분
이 사건의 본질을 다  드러내는 것도 아니
니 얘기하기로 결정했소. 제임스는 일단 방
패막이부터 했다.
 만약 추호라도 거짓말로 넘기시려는 부분
이 있으면 우리의 신사  협정은 깨지는 겁
니다.  걱정 마시오. 나는 이  변호사가 그
런 엄청난 추리를  했을 때 이미  속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소. 나는 신에게 맹
세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오. 대
신 이 변호사도 다시는  형사를 데리고 온
다든지 하지 마시오.   좋습니다. 하우스맨
은 왜 제럴드 현을  그 일에서 떼놓으려고 
했습니까?  하우스맨은 또 어떻게  알아냈
소? 사실 문제는 제리에게 있었소. 그는 나
이에 어울리지 않게, 아니 직업에 어울리지 
않게 낭만적인 사람이었지. 일단 그는 한국
의 대통령과 너무 가까웠소. 그리고  그 딸
을 사랑했소. 어떨 때 그는  노골적으로 김
종필이라든지 유력자에게 자신이 박근혜를 
사랑한다고 밝히기도 했소. 이것은  우리에
게 큰 득이 되는  한편 큰 장애도  되었소.  
대통령에게 반대하는 공작을 할 때 말이죠. 
 그렇소. 우리는 박 대통령의 반독재에  대
항하는 공작을 해야 할  필요성을 많이 느
꼈소.  솔직히 그 궁극적인 이유가  한국에 
민주화를 가져오기  위한 것은   아니었죠?  
…`…. 
 하여간 계속하시죠. 
 상부에서는 제리를 미리 본국으로 송환해
야만 했소. 상황이 임박해서 보내면 의심을 
살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제리 본인에
게 말이오. 제리는 정보원으로 타고난 사람
이었소. 그래서 우리는 고민했던 거요.  그
런데 제럴드 현이 그것을 눈치챘죠?  그야 
당연하지. 당시 미국의 정보 계통에서는 박 
대통령을 제거해야만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갖고 있었소. 그의 핵 개발은  세계 질서에 
대한 미국의 구상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것이었으니까.  핵무기보다는 미국의 국익 
우선주의가 오히려 세계 평화에 해가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런 것은 워싱턴에서 알아
서 하는 거고, 나는 명령받은  대로 하기만 
하면 되었소.  …`…. 
 하우스맨은 제리에게  굳게 약속을  했소. 
무슨 변화라도 생기면  반드시 알려주겠다
고. 제리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면 청와대로 
직접 들어가 박 대통령과 담판을 짓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그랬군요. 
 하지만 상황이란 갑자기  바뀌는 법 아니
오. 우리는 청와대의 정밀 도청에서 이상한 
것을 알아챘소.  뭐죠? 
 박 대통령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
로 핵 개발에 가까이 가 있는 듯했소.   그
래서요? 
 박 대통령과 협상을 하거나 할 상황이 아
니라는 인식이 팽배했고, 그때부터  제리는 
우리에게 짐이 된 거요.  그래서  숀이라는 
의사가 손을 쓴 것이군요. 
 그렇소. 
 제럴드 현의 수첩을 보면 그는 박 대통령
의 서거 다음날 하우스맨을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때 두 사람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습니까?  10월 27일 아침 제리가 눈
에 핏발이 선 채  하우스맨의 사무실로 뛰
어들어왔소. 
제럴드 현은 환자복 위에  외투만 걸친 차
림으로 하우스맨의 사무실로 뛰어들어왔다. 
문을 걷어차고 들어온 그를  보는 순간 하
우스맨의 안색이 확 변했다. 
─`제리!
─`누구야? 누가 죽였어?
제럴드 현은 하우스맨의 멱살을 잡고는 거
세게 밀어붙였다.
─`JK(재규).
그리고 하우스맨은 제럴드 현의 눈치를 살
폈다.
─`홀리건, 홀리건 그 새끼 어디 있어?
─`한국에 없어.
─`어디 갔어?
─`본국으로 들어갔어.
─`이 개새끼, 너 나에게 약속했잖아. 나에
게 알려주기로 했잖아.
 이 새끼야, 너  무슨 일이 있으면  나에게 
기회를 준댔잖아. 나에게 청와대로  들어가 
자주 국방만 포기하게 하라고 했잖아. 자주 
국방만 포기하면 미국은 언제나 박 대통령
의 뒤에 있을  거라고 얘기하랬잖아. 하문, 
너, 나하고 둘도  없는 친구라면서, 형제보
다 더 가까운 친구라면서 이럴 수 있어. 내
가 그의 목숨만  살려달라고 했잖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를  죽이지는 말아달라고 
그랬잖아. 그까짓 미사일, 핵, 내가 다 포기
시키겠다고.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고 
또 빌었잖아. 그래도  그 사람,  한 나라의 
대통령이야, 대통령. 우리 나라 대통령이라
구! 나라 한번 만들어보겠다고 자기 집사람
까지 희생시켜 가면서 일해 왔어.  부정 축
재도 안 했잖아. 너 나한테  그렇게 다짐해 
놓고 이럴 수 있어? 마지막 기회는 주기로 
했잖아. 그런데 네가,  네가 이럴 수  있어! 
이럴 수 있냐구!제럴드 현은 하우스맨의 멱
살을 잡고 흔들었다. 직원들이 말리려 했으
나 하우스맨이 손을 내저었다. 
제럴드 현은 하우스맨을  거세게 밀치고는 
사무실을 닥치는 대로 부수기 시작했다. 책
상을 들어엎고 유리란 유리는 모두 깨부수
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미안해, 제리. 진정해.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해줄게.
─`이 개새끼야, 사람을 죽여놓고  이제 와
서 무얼 해준다는 거야? 뭐라고, 원하는 것
을 다 해주겠다고? 그럼 그를 살려내, 그를 
살려내란 말이야!제럴드 현은 급기야  통곡
하며 쓰러졌다. 하우스맨은 제럴드 현의 이
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
무리 정보와 공작으로 한평생을 보내온 그
였지만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더
군다나 이 공작 때문에 평생을 조울증으로 
고생하게 될 동료이자 친구인 제럴드 현의 
모습을 보니 쓰라림이 더했다. 
이제 하우스맨이  불행한 이  친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연금을 한푼이라도 
더 탈 수 있게 해주는  것뿐이었다. 쓰러진 
제럴드 현을 껴안은  하우스맨의 눈에서도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역시 경훈이 생각했던 대로였다. 제럴드 현
은 자신을  배제하고 이루어진  박 대통령 
시해 공작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전역해 
버린 것이다.
증기실 안에서 제임스의 얘기를 듣기는 너
무 힘들었다. 땀이  머리 끝까지  차오르고 
숨이 막히는 가운데 그와  무슨 논쟁을 한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경훈은 참지 못하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찬물에 몸을 담그면서 제럴드 현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세계는 미국의  시각만이 존
재하는 기형의 혹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강력한 자본주의의 힘은 미국의 대중 문화
를 전세계에 퍼뜨렸는데, 그것은  기본적으
로 권력과 폭력에 대해  손을 들어버린 가
치 포기적 문화였다.  그러다 보니  대중은 
미국의 폭력에 대해 분노할  줄 모르게 되
었고, 미국은 세계의  구조를 결정짓는  데 
있어 절대자적 존재로 군림하게 되었다.
제럴드 현은  누구보다도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분노했으나 고작 하우스
맨의 책상을 뒤엎고 전역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공작을 위해 동료들에 의해 제거되
어야 했던  자신의 슬픈  운명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그것은 20년 전  제럴드 현의 운명만
이 아니었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지금이지
만 한국민 중 그  누구도 미국의 전횡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한국의 정책이  미국의 영향을 
받아야 하고, 정치인들은 미국을  추종한다
는 것을 보여야만 하며, 경제  역시 미국이 
원하고 조종하는 방향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5천 년  역사를 자랑
한다는 한국의 문화 역시  미국의 대중 문
화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는 현실이고 보
면, 한국민으로 살고  있다는 것은  미국의 
변방 혹은 아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
에 다름아니었다.
 미안하오. 이제 라운지에서 얘기합시다. 
제임스가 숨을 허덕이는  경훈에게 다가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경훈은  가운을 
걸치고 라운지로 나가는  제임스의 뒷모습
을 보며  숀에게 제럴드  현을 제거하라고 
명령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경훈은 그를 따
라나섰다.
 찬 음료수라도 한잔합시다. 
경훈은 콜라를 시켰다. 뜨거운 열기를 쐬면
서 얼마나 버텼던지  목이 탔다.  종업원이 
콜라를 날라오자 제임스는 담배에 불을 붙
였다 한 대 피우겠소? 
제임스는 경훈에게 담배를  건네주고는 성
냥을 켜서 불까지 붙여주었다. 그런 제임스
의 모습은  한국에서 오랜  공작원 생활을 
해서 그런지 거의 한국인처럼 익숙해 보였
다. 경훈은 담배를 피우기 전에  찬 콜라를 
쭈욱 들이켰다.
 제럴드 현은 자신의  조울증이 공작에 의
해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물
론이오. 상상조차 못하고 살아가고 있을 거
요. 
 그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십니까? 
 괴로운 일이오. 하지만 모든 공작은  상부
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소. 하부 구조에서 
일일이 그  윤리적 가치를  따진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소.  그후 제럴드 현으로부터
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나요?  아마 하우스
맨하고는 계속 연락을  했을 거요.  그들은 
친했으니까.  박 대통령의 죽음이 두  사람
을 갈라놓지는 않았습니까?  제럴드  현은 
곧 힘든 투병 생활에 들어갔소. 아마 박 대
통령을 생각하고 어쩌고 할 여유가 없었을 
거요.  음, 그랬군요. 
죽음의 약
경훈은 호텔을 나왔다. 하지만 발걸음을 어
디로 옮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껏 느
끼지 못했던 미국이라는  그림자가 사방에
서 옥죄어왔다. 자신이 지금까지 의미를 두
어왔던 그 어떤 가치도 더 이상 진실과 부
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의식 자체가 무
너지는 것 같았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배후, 그리고 온갖 수단
으로 사람의 목줄을 조이는 CIA와 그 하수
인들이 온 거리에 꽉 들어차 있는 것 같았
다. 
정치,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통일이든 외
교든 한국이 독자적으로  해나간다는 것이 
너무도 허황되게 느껴졌다. 신문의  지면을 
메우는 그  많은 뉴스들도  결국은 공작의 
하나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갑갑해졌다. 
모두가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지만 사실 
그 자유란 것은 어느 곳에도 없는 것이 아
닐까. 한 나라의 운명이 그  나라의 자율에 
의하지 않고 강대국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
린다면 그 나라에서 숨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가련한가. 
그런 점에서 모든 나라의  모든 나라에 대
한 투쟁을  의미하는 경제  전쟁이란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겨우 존재할  수 있
을 정도의 숨통만 트여주고  그 이상 올라
오면 쳐버리는 식으로 세계 경제가 진행되
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국  세계 경제
란 자유 경제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노
예 경제인 셈이다. 
자본주의는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제는 한 사회
만의 계층  불화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국가 간의 자본 지배가  무서운 속도로 치
닫고 있는 것이다. 
경훈은 자꾸 가슴이 답답하게 차올랐다. 목
이 막힐 것처럼 갑갑하다가 가슴에서 뜨거
운 것이 불끈 치솟아올랐다. 이  세상의 어
떤 불의라도 응징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
감이 아랫배에서부터  끓어올랐다.  주위를 
지나치는 모든 비겁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
와 더불어 그들의 나약함을  한 주먹에 날
려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경훈은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로 뛰어들고 
싶어졌다. 부딪쳐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자동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끼이이익! 
귀청을 찢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욕설이 
날아들었다.
 야! 이 개새끼야! 자살하려면 한강에 가서 
뒈져. 이 새끼야, 누구 신세 조지려고 환장
했냐! 경훈은 미친 듯이 욕설을 퍼붓는  운
전사에게 히죽 웃음을 남기고 다시 보도로 
돌아와서 걸었다. 아련한 의식 밑바닥 어디
에선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
었으나 이내 밑도끝도없는  용기가 다시금 
솟아났다. 
경훈은 주위의 건물을 올려다봤다.  20층이 
넘는 건물들이 좌우에  솟아 있었다.  그는 
아무 건물이고 무조건  뛰어들어서는 엘리
베이터를 탔다.
 흐흐흐흐. 
한 사나이가 경훈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
을 보고는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모습을 
감추었다. 
엘리베이터를 탄 경훈은 이 빌딩 꼭대기에
서 뛰어내려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 자
신감이 솟아났다.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사
람들에게 이 나라를 움직이는 미국의 음모
를 알려야 한다는 생각만이 심장에서 퍼덕
거리고 있었다.
맨 꼭대기층에서 내린 경훈은 허겁지겁 뛰
어가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혔다. 얼
굴을 스치는 바람이 시원했다. 경훈은 잠시 
정신을 차렸다. 알지 못할 열정에  의해 자
신이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뜨
거운 그 무엇인가로 가슴이 미어졌다. 
경훈은 비틀거리며 옥상  가장자리로 걸어
갔다. 가슴 높이의 벽을 손으로  잡고 버티
며 다리를 걸어 벽 위에  올라섰다. 거리가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고 그  거리에는 많
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경훈은 가슴
을 풀어헤치면서 외쳤다.
 가엾은 한국인들이여!  여러분들의 텅  빈 
가슴속에는 미국의 음모와  공작만이 들어
차 있소. 5천 년을 이어온 우리의  인간 중
심 문화는 어디로 가고, 폭력과  범죄가 난
무하는 미국의 저질 물질  문화가 꽉 들어
차 있단 말이오. 이제 나는  여기에서 뛰어
내리겠소. 
그리하여 우리 한국인들의  위대함을 알려
줄 것이오. 나는 여기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소. 우리 한국인들은 여기에서  뛰어내려
도 죽지 않는단 말이오! 경훈은 기합을  넣
으면서 바닥을 향해 점프했다. 그러고는 정
신을 잃었다.
 경훈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경훈은 희미한 의식 속에서 인남의 목소리
를 들었다. 그리고 아득한 기억을 더듬으면
서 차츰 깨어났다. 머리가 빠개지는  듯 아
팠다 괜찮아? 
 으응. 
 너 왜 그랬어? 
 으음, 내가 어떻게 한 거니?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경훈은 머리를 흔
들며 기억을 더듬으려 애썼다.
 이 변호사, 다행이오. 
아득한 옛날의 기억 속에서 살아나오는 듯
한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은 목소리인지 한
참이나 생각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마치 전
생의 기억처럼 희미하게  머릿속을 춤추고 
다녔다. 
경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마치 
기적과도 같은 일이 생겼다. 어렴풋이 다가
오던 얼굴의 윤곽이 한순간 너무도 뚜렷하
게 경훈의 눈에 들어와 박혔다.
케렌스키, 그 얼굴은 분명 케렌스키였다.
 아! 케렌스키 변호사님! 
 이 변호사, 큰일날 뻔했소. 
 케렌스키 변호사님이  맞군요. 제가  죽은 
겁니까, 아니면 변호사님이 살아 계신 겁니
까?  나는 이렇게 살아 있소. 미안하오. 
경훈은 뻐근한 머리를 흔들며 상체를 일으
켰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마치  열병을 앓은 
것 같은 기억이 나긴 하는데`…`….  이 변
호사는 고층 빌딩의 옥상으로 올라가 뛰어
내리려 했소.  네? 제가 고층 빌딩에서  뛰
어내리려 했다구요?  그렇소. 다행히 우리 
측의 방어 기제가 작동해서 살았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음,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 변
호사는 내 직원들의 눈에 띄었소. 직원들은 
이 변호사가 길거리로 뛰어드는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위험을 감지했지. 그래서  즉각 
나에게 연락을 해왔소.
 나는 이 변호사가  제임스를 만났다는 보
고를 듣고는 고함을  질렀지. 내  직원들이 
이 변호사를 쫓아 빌딩 꼭대기로 뛰어올라 
갔을 때 이 변호사는  막 뛰어내리려던 참
이었소. 직원들은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이 변호사를  뒤에서 가까스로  붙잡을 수 
있었지.  
세상에! 제가 그렇게 정신나간 짓을 했습니
까? 
 틀림없는 사실이오. 여기 있는 인남  씨에
게도 내가 급히 연락을 했지.  이 아가씨도 
무척 놀랐소. 경훈은 인남에게 눈길을 돌리
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해할 수 없어. 나의 잠재 의식  어느 곳
에 그런 위험성이 내재해 있었는지.   경훈
아,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래. 
 무슨 말이야? 
경훈의 눈길이 케렌스키의 얼굴에 박혔다.
 그렇소. 그것은 이 변호사의 잘못이  아니
오. 
 그렇다면? 누군가 나를  떠밀었다는 말씀
인가요? 
 제럴드 현, 제럴드  현을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거요.  네?  그가 갑자기 조울증에 빠
져 입원했던 사실을 기억하오?   물론입니
다. 
 이 변호사도 같은 방법으로 당한 거요. 그 
옥상에서 뛰어내려도 전혀 다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겠지.  물론 자동차  앞에 
뛰어들어도 괜찮을 것  같고, 또  그전에는 
감정이 고조되고 이성적 사고 대신에 욱하
는 기분이 치밀어올랐을  거요.  그랬습니
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이유가  있다는 말
씀인가요?  그자에게 당했던 거지. 
 그자라뇨? 
 이 변호사가 만났던 사람 말이오.  그자는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오.  그자라면 
제임스 말인가요? 
 그렇소. 그런데 이 변호사는 대관절  무슨 
일로 그를 만나게 되었소? 경훈은 손 형사
가 숀의 일로 제임스를  추적하게 된 경위
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케렌스
키에게 설명했다.
 그랬군, 제임스는 자신의 범죄가 탄로나자 
이 변호사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던  거군. 
그런 악랄한 약을 사용해서.  그런  살인이 
정말로 가능한가요? 
 물론, 제임스에게는 가능한  일이오. 그는 
일반인과는 다르오.  
그러면 처음에 제임스가  사우나에서 얘기
를 하자고 했던 것도 계산된 행동이었을까
요?  틀림없소. 이 변호사를 방심시키기 위
한 작전이었겠지. 경훈은 기억을 더듬었다. 
제임스가 땀을 흠뻑 흘리게  한 후 콜라를 
주문하고 자신도 따라서  주문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가 친절하게  담뱃불을 붙여주었
던 것도.
 놀랍군요. 사우나에서 땀을 흘리게 한  후 
콜라를 마시게 하고 담뱃불을 붙여주는 척
하며 순간적으로 콜라에 약을 타넣다니`…
`….
 정말 치가 떨리도록 무서운 자로군요.  하
지만 이 변호사에게는 결과적으로 득이 되
었을 거요.  어째서요? 
 제임스가 이 변호사가  알고 싶어하던 진
실을 털어놓았을 테니까.
  어차피 제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까 말이죠? 
 그렇소. 그는 이 변호사가 틀림없이  죽을 
걸로 계산했겠지.  새삼 변호사님이 고마워
지는군요. 
 나에게 고마워할 일은 아니오. 결국  모두
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일이니 한곳으로 
모이는군.  무슨 뜻입니까?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필연일 수밖에 
없는 결과란 말이오. 
이미 이 변호사가 제럴드  현의 인적 사항
을 알아달라고  했을 때부터  우리는 같은 
인물을 쫓고 있었던 모양이오.  우리가  같
은 인물을 추적하고 있었다구요? 
 그렇소. 이  변호사가 쫓던  홀리건, 내가 
쫓던 카를로스, 그리고  지금의 제임스, 그
들은 모두 한 사람이오.  네? 그게  정말입
니까? 제임스가 바로 홀리건이라구요?  그
렇소. 그들은 모두 동일인이오. 
 그렇다면 케렌스키  변호사님은 누구십니
까? 에이펙스로펌의  대표라는 신분   외에 
또다른 무엇이 있나요?  아니, 나는 틀림없
는 에이펙스로펌의 대표 케렌스키요.  이해
할 수 없군요. 그 위험한 목갑을 제게 주신 
것이나 죽었다고  저를  속이신 것이나`…
`….  미안하오. 이 변호사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이 변호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
소. 경훈은 고개를 저었다. 뭐가 뭔지 도무
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팬암
케렌스키는 혼란에 빠진 경훈에게 말했다.
 맨 처음 이 변호사가 나에게 부탁한 문건
이 있잖았소? 연금을 받던  누군가의 신원
을 알아달라고.  네, 그랬죠. 
 세상일이란 참 묘하지. 그 하찮은  문건이 
내가 지난 10년 세월을  쫓던 비밀의 열쇠
를 제공했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문건이 그림자를 상대로  한 나의 전쟁
에 확실한 목표물을 알려주었소.  케렌스키
는 점점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군요. 그 문건을 보셨습니까? 
제럴드 현에 대한 무언가를  알게 되신 겁
니까?  아니오, 절대로 나는 그 문건의  내
용을 보지 않았소. 워싱턴에서 봉인된 채로 
온 문건을 그대로 이 변호사에게 넘겨주었
을 뿐이오.  그런데 어째서 그 문건에 의해
서 변화가 생겼다고 하십니까?  이 변호사, 
이것을 보시오. 
케렌스키는 가방에서 낡은 신문을 꺼내 경
훈에게 넘겨주었다. 워싱턴 지역에서  발간
되는 한 신문인데,  살인 사건이  보도되어 
있었다.
 이 살인 사건 말씀입니까? 
 그렇소. 이  셔우드라는 젊은이,  내가 그 
일을 시켰던 사람이오. 
 그 일이라면? 
 이 변호사가 부탁했던 문건 말이오. 
 네? 
 그 문건을 이 친구가 빼왔소. 
 그렇다면 그가`…`…? 
 그렇소. 셔우드는 그 문건 때문에 죽었소. 
 아니, 그럴 수가? 그까짓 문건 하나  빼낸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이 변호사가 제럴드 현이 어떤 
사람인지 사전에 내게 말했다면 나도 신중
히 생각했을 것이오.  경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가 큰 실수를 저지른 셈이군요.  하지만 
저도 그 서류를 보기  전까지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럴드 
현의 신원이 셔우드라는 사람의 죽음과 관
계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제럴드 
현이 보통 사람 같으면  그렇게 했을 리가 
없지 않겠소? 경훈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
다. 제럴드 현이 보통 사람은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이렇게까지 무서운  감시를 받
고 있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누가 왜 셔우드를 죽였을까요? 
 셔우드가 죽었다는 정보를  접했을 때 나
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소.  CIA와 나는 늘 
극적으로 대립하고 있었지만 그런 문건 하
나 때문에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니었지. 
그래서 나는 의문을 품고 그  사람, 제럴드 
현에 대해 조사했소. 그러나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소.  그렇다면 CIA도 
셔우드를 죽일 이유가  없지. 때문에  나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소. 왜  셔우드가 죽
어야 했을까를 연구하는  데 말이오.  나는 
내 생각의 어떤 부분이 잘못됐을까를 찬찬
히 검토했소. 그러다가 경솔하게 속단을 내
린 사실을 집어냈소. 역시 케렌스키는 천재
답게 논리적으로 사고했다.
 제럴드 현이 나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속
단을 해버렸던 것이오. 
나는 의심을 품었소.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들이 왜 나의 정보원을 죽였을까. 
그래서 나는 거꾸로 생각하기 시작했지. 제
럴드 현이란 사람은 나와 관련이  있다, 그
런데 내가 그 관련의  인과 관계를 모른다
는 가정에서   출발한 거요.  제럴드  현은 
CIA의 임무를 수행하는  주한 미군이었소. 
나는 CIA와  오랜 기간  전쟁을 벌여왔고. 
나는 그 점에 주목했소. 그래서  내가 지난 
10년 간 추적하던 카를로스가 제럴드 현과 
무슨 관계가 있지 않나, 혹시  한국에서 무
슨 공작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
게 됐지. 나는 다시 정밀  조사를 했소. 경
훈은 점점 케렌스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케렌스키가 해온 일은 결코 보통 사람으로
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럴드 현이 근무하던  주한 미군을 샅샅
이 훑었지. 그랬더니 세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었소. 한 사람은 제럴드 현, 그는 군인이
지만 아주 오랜  기간 CIA의 각종  공작에 
관여해 왔소.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로버트 
숀, 그는 의사지만 CIA의  특별 실험 프로
젝트에 관련된 사람이오. 마지막 한 사람이 
바로 카를로스, 한국에 올 때  그는 홀리건
이라는 이름을 썼소. 세 사람이  모두 10·
26 직후 한국을 떠났지. 두  사람은 발령이 
났고 제럴드 현은 치료차였지만 모두 급히 
한국을 떠났소. 나는 그들이 10·26과 관련
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소. 그리고  특히 카
를로스, 그자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있다
는 생각이 들었소. 이 정도  일은 그자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오.  그런데 그 디스켓은 
어떻게 된 겁니까? 
 나는 CIA 깊숙이 숨겨놓은 나의 정보원에
게 이제까지  취합한 비밀을  모두 가지고 
나오도록 지시했소. 왜냐하면 내가  제럴드 
현의 신원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그들에
게 큰 위기감을 주었기에  나도 신변에 위
험을 느껴  잠시 잠적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오. 그래서 그 디스켓을 필
립 최에게 보냈던 거요.  원래는 제가 당해
야 했던 일이군요. 
 아니오, 이 변호사는 안전하오. CIA는  내
가 필요에 의해 제럴드  현의 신원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토
록 중요한 디스켓을 왜 저에게 보관시켰습
니까?  그 점은 미안하오. 
그것은 하나의 트릭이었소. 이 변호사가 그 
디스켓이 든 목갑을 한국으로 가지고 가면 
그들이 결국 탈취할 것으로 생각했소. 그렇
게 되면 그들의 조직을 파악할 수 있고 카
를로스란 자의  정체도 알  수 있을  테니.  
성과가 있었나요? 
 그렇소. 제임스가 카를로스란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 하수인들은 제임스의 지시를  받
고 있었소.  제임스,  아니 카를로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팬암 공작 전체를 지휘하고 나의 증
인을 살해한 자요. 이 변호사는  아마도 그
자가 박 대통령 시해의  배후에 있다고 생
각하겠지?  어떻게 그것을 아십니까? 
 나는 이 변호사가 필립 최를 이용해 홀리
건의 이름을 얻어내는 것을 보며 감탄했소. 
후후, 사실 라스베이거스야말로 정보가  살
아 꿈틀거리는 곳이지.  모든 정보는  결국 
돈으로 이어지니까.  그런데 그들은 왜  목
갑을 돌려보냈을까요? 
 카를로스라는 자는  보통이 아니오.  그는 
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 같
소. 뭔가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끼고는 아
예 목갑을 인수하지도 않았소. 함정인 것을 
간파한 거지.  그렇게  된 거군요.  그런데 
저는 그 목갑을 열고  디스켓의 내용을 다 
보고 말았습니다.  괜찮소. 어차피 이 변호
사가 볼 거라고 생각했소. 또  이 변호사를 
위해서도 그 디스켓을 봐두는  게 좋을 거
라 생각했고.  놀라운 비밀이더군요. 
 엄청난 돈을 들여 얻어낸 것들이오. 
 그런데 케렌스키 변호사님은 왜 CIA와 대
립을 하게 됐습니까? 그리고  지금 말씀하
신 팬암 공작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케렌
스키는 담배를 꺼내물었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는  그의 표정에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나는 중요하고도 어려운  한 사건을 맡았
소. 10년 전에 말이오. 
모두가 꺼리던  사건이지만 나는  해낼 수 
있다고 믿었소. 아니 정의를 위해 해결해야
만 한다고 생각했소.   무슨 사건이었습니
까?  여객기 폭파  사건이었소. 바로 팬암 
103기 말이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 당시 이 변호사는 한
국에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미국에서는 아주 유명한  사건이오. 
그 사고로 결국 팬암은  문을 닫고 말았으
니까. 나는 당시 팬암 측 사고 조사 위원장
을 맡았소. 우리 위원회에서는 사고가 폭발
물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것은 
FI나 국제민항기구의  결론과도  일치했소.  
그럼 변호사로서의 역할은 잘한 것 아닙니
까? 
 그렇소. 하지만 위원장으로서의 나의 역할
은 팬암을 그 사고로부터 법률적으로 보호
하는 것이었소. 문제의 핵심은 누가 폭발물
을 비행기에 장치했는가와  누구에게 팬암
의 안전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는가 하
는 것이었소. 범인이 누구냐에 따라, 또 어
느 측의  책임이냐에 따라  배상의 주체나 
금액이 천지 차가 나니까.  그러나  변호사
로서 범인까지 잡아낼 수는  없는 것 아닙
니까?  물론 그것은 수사 당국에서  할 일
이지. 그러나 수사  당국에서는 오랜  기간 
수사를 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소. 유족들
은 당연히 팬암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 
나는 팬암의 사고 조사 위원장으로서 범인
을 찾는 일에 부심했소. 일면으로는 소송에
도 관여하면서 말이오. 그러니 그  일은 비
단 팬암의 일뿐만 아니라 우리 에이펙스의 
일이 되어버렸던 거요. 경훈은 고개를 끄덕
였다. 팬암으로서는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꼬투리라도 
찾아내야 했을 테고, 사립탐정 팀과는 별도
로 변호사 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에이펙스는 팬암의 대리  전사였다는 얘기
다.
 런던과 프랑크푸르트에 출장을 간 것만도 
자그마치 30회가 넘었소. 처음에는  시리아
를 의심했지. 그러던 어느 날  미국 정부는 
갑자기 폭발의 배후로 리비아를  지목했소. 
리비아가 국제 테러 분자들을 사주하여 일
을 저질렀다는 거지. 시리아는  걸프전에서 
미국 측에 도움을  주었으니까 제외시켰던 
거요. 우리는 다급하게 정부에 판단 근거를 
요구했소. 폭발 직후부터 누군가 언론에 그
런 풍문을  흘리긴 했지만  우리가 추궁할 
때마다 정부에서는 아무런 판단 근거도 제
시하지 못했지. 그러다가 정부는  리비아를 
폭발의 배후로 기정 사실화시켰던 거요. 우
리의 거센  추궁에도 정부는  어떤 자료도 
제시하지 않았소. 정보원을 보호해야  한다
는 핑계였지. 
결국 팬암은 유족과의 소송에 지고 막대한 
배상액을 마련하기 위해 주식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소. 리비아를 상대로 어떻게 소송
을 제기할 수 있겠소? 나는 참으로 착잡했
소.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고  싶었지만 
어떤 꼬투리도 찾을 수 없었지.  그러면 미
국 정부가 리비아를 지목한 것에는 뚜렷한 
근거가 없었습니까?  미국 정부는  납득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소. 그럼에도 불
구하고 미국은 리비아에 폭격을  감행했지. 
그러고는 자신들이 지목한  용의자들을 내
놓으라고 몰아쳤소. 만만한 게 리비아 같은 
나라니까.
  그래도 아무런  근거 없이  미국 정부가 
그런 일을 했을 리  있습니까? 케렌스키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무겁게 입을 뗐다.
 당시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하나의 강렬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소.   어
떤 의문입니까? 
 리비아인들을 용의자로 몰아붙이는 데 결
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사실이 있었소. 
그 비행기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
거든.  어떤 사람들이었죠? 
 그 당시 베이루트에 억류돼 있던 미국 인
질들을 구출할 임무를 띤 CIA 요원인 찰스 
맥키 소령과 부하 4명이었지. 그런데 그 요
원들은 이란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소. 당
시 미국은 이란에 대한  금수 조치를 취하
고 전세계에 미국의 정책을 따르도록 종용
하고 있었지. 자유  세계는 물론  심지어는 
소련조차도 미국과의 무역  관계상 이란에 
무기를 공급하는 일을 꺼릴 수밖에 없었소. 
그런데 그  요원들은 이란에  엄청난 양의 
미국제 무기가 반입되는 것을 보고 말았던 
거요. 루트를 조사해 보니까 거기에는 CIA
가 개입하고 있었소. 한층 더  기가 막혔던 
것은 시리아의 테러범인  몬저 알카사르가 
CIA의 후원과 보호 아래 프랑크푸르트로부
터 뉴욕으로 헤로인을 반입하여 막대한 돈
을 벌고 있다는 사실이었소. 그들은 거기서 
중동 사태의 본질을 깨달았던 거요. 그래서 
즉각 맡았던  공작 임무를  중단하고 귀환 
결정을 내렸소. 꼭두각시춤을 출 수는 없다
고 판단, 미국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폭로
하려고 했던 거지. 
CIA는 수차례에  걸쳐 그들을  만류했지만 
소용이 없었소. 문제는 그들이 바로  그 팬
암기를 탔다는 사실이오.  그렇다면?  그렇
소. 나는  CIA가 요원들을  제거하기 위해 
그 비행기를 폭파했다는 가정을 했소.   그
것은 너무 지나친 비약이  아닙니까? 물증
도 하나 없는데.  바로 그게 문제요. CIA가 
수행하는 공작에는 물증이 전혀 없소. 나는 
당시 승객 명단과 이란에서의 그들의 교신 
내용 등을 조사하면서 뚜렷한 심증을 가졌
지만 결국 소송을 제기하지는 못했던 거요.  
모든 것은 베일 속에서 이루어졌군요. 
 하지만 나는 그 사건을 포기할 수 없었소. 
너무나 뚜렷한   심증이 있었거든.  그래서 
CIA의 심층부를 파고들었지. 나는 지난 10
년 간 소송도 직접 맡지 않았소. 전력을 다
해서 그 사건만 파헤쳤지.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아주 중요한 사실
을 알아냈소. 경훈은 눈을 빛내며  귀를 기
울였다. 케렌스키는 경훈의 눈을 깊이 들여
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1989년 12월 20일 문제의 그 비행기가 떠
나던 날,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독일 정보국 
직원이 자신의 CIA 파트너를 긴급히  찾아 
교신했던 내용을 내가 입수하게 되었던 거
요.  무슨 내용이었는데요? 
 그날 독일  정보국 직원은  팬암 103기로 
들어가는 몬저 알카사르의 가방 크기가 여
느 때와 다른 것을 발견했소. 그 직원은 마
약이 담긴 그 가방을  세관 직원들이 손대
지 못하도록 항상 감시를  하고 있었던 거
요. 그 직원은 자신의  CIA 파트너에게 급
히 연락을 했지. 가방이 평소와  전혀 다른
데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파트너는 “걱정 마시오, 중지할  수 없
소. 그냥 내버려두시오”라고 응답했소. 독
일 정보국 직원은 시간도  있으니 짐을 빼
놓고 당신이 와서 보는  게 어떠냐고 물었
지. 하지만 그 파트너는 모든 것을 다 안다
는 듯이 그냥 실으라고만 대답할 뿐이었소. 
나는 그 가방이 터졌을  거라는 강한 심증
을 갖고 있소.  세상에! 
 나는 뒤늦게나마 소송을 제기하려고 무던
히 애를 썼소. 그러나 모든  방법을 봉쇄당
했지. 그 독일  정보원도 매수했지만, 그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소. 왜  돌변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미국이 지목한 리비아
의 용의자들은  결국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소.
 그들은 막후 거래에 의해 하지 않은 것도 
했다고 허위 자백할 수도 있소.  그것이 미
국의 힘이오. 나는 진정 힘있는 자들에게는 
진실을 가지고도 패할 수밖에 없었지.   그
러나 그것은 불가항력의  일이 아니었습니
까? 
 불가항력? 그래, 불가항력이었소. 나는 도
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마의 성 앞에서 
무릎을 꿇었소. 감당할 수 없는  절망과 허
무의 나락으로 빠져들었소. 그때부터  이미 
변호사로서의 내 삶은 구겨지기  시작했소. 
나는 그 무서운 권력을 두려워하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거요.  그런 인생에  회의를 
느끼던 중 나는 중대한 결심을  했소. 영원
히 도피하고  살아서는 일개  벌레의 삶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들과 싸우기로  결
심했던 거요.  그 누구도 하지 못할 결심을 
하셨군요. 
 이미 감시를 당하고 있던 나는 도박을 하
면서 그들의 눈길을  피하고, 엄청난  돈을 
동원해 그들의 범죄 행각을 수집했소. 경훈
은 고개를 끄덕였다.  디스켓에 있는  정보 
하나하나가 모두 대단한 것들이었다.  예사 
노력으로는 정보를 얻기는커녕  죽음을 당
하고 말았을 것이다.
 제임스는 지금 무기 거래상인데 아직 CIA
와 관계하고 있을까요?  그자는 평범한 무
기 거래상이 아니오. 제임스의 현재 상태가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
명한 사실은 어떤 음모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오.  제임스를  직접 만나보셨습니까?   
아니오. 하지만 그는 틀림없이 현재 한국에
서 진행되고  있는 어떤  음모와 관련되어 
있소.  한국에서 진행되는 음모라뇨?  미안
하오. 아직은 얘기할 수가 없소. 
경훈은 잠시 눈을  감았다. 미궁이었다. 케
렌스키는 정작 중요한 것은 알려주지 않았
다. 
경훈은 이제 여기서 케렌스키를 그냥 보내
면 그 한국에서의 음모에  대해 알 기회가 
다시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음
모는 결코 예삿일이 아닐 것  같았다. 아마 
케렌스키가 한국에  와 있는  이유도 바로 
그 음모 때문이리라. 더욱이 이미 10·26에 
가담했던 제임스, 즉 ‘홀리건’이 다시 음
모의 한가운데  있다면 분명  심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케렌스키의 태도로 보
아 결코 얘기할 것 같지 않았다. 이때 인남
이 케렌스키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며 입을 
열었다.
 케렌스키 변호사님은 너무하시는군요.  경
훈 씨는 변호사님으로부터  디스켓을 부탁
받던 순간부터 위험에  노출되었지만 이제
껏 이유도 모르는 채  단지 부탁을 들어드
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위험을  감수했어요. 
저도 이유도 모르고서  괴한들에게 납치되
어 목숨을 잃을 뻔했구요. 그러나  지금 케
렌스키 변호사님은 모든  것을 숨기려고만 
하시는군요. 이것은  우리를  이용하려고만 
하지 인격적으로 대하시지  않는다는 명백
한 증겁니다. 이게 변호사님의 방식인가요? 
케렌스키는 인남의 눈빛을 피해 시선을 돌
리더니 한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점은 두 사람에게 정말 미안하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모든 것을 
말씀해 주세요. 죽음을 가장하면서  한국에 
와 계신 이유에서부터  제임스를 감시하셨
던 이유까지 말이에요. 그러나  케렌스키의 
표정은 완고했다. 순간 경훈의 머리에 케렌
스키의 디스켓이 떠올랐다. 케렌스키와  관
련된 모든 일은 그 디스켓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케렌스키가 여기 와 있는 
것도 디스켓과 관계가 있지 않겠는가. 
경훈은 머릿속으로 디스켓의  내용을 하나
하나 검색했다.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말씀하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케렌스키의 표정이  변했
다. 경훈이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워
낙 천재적인 그의 두뇌를  무시할 수도 없
었다.
 지금 한국에서 진행되는 음모는 대통령과 
관계가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케렌스키 변호사님은 제임스를 감
시하며 무언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음
`…`…. 
 지금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협조
입니다. 저도 케렌스키 변호사님께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을 털어놓고  정보를 
교환해야 합니다. 케렌스키의 표정이  여러 
갈래로 변했다.
 좋소, 얘기하리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더
라도 비밀은 지켜야 하오.  물론이에요. 
인남이 먼저 대답했다.
김대중 파일
 이 변호사의 짐작이 맞았소. 디스켓에  있
던 <김대중> 파일을 기억하오?  물론입니
다. 
 그 파일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과 관계
가 있소. 
 그게 뭐죠? 도대체 한국의 대통령과 관계 
있는 음모라는 게  뭡니까?  지금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의 강경파들에게  큰 방해가 
되고 있소.  그럴 리가? 김 대통령은  철저
히 친미적 성향을 보여왔는데.  그렇소. 이 
변호사는 김  대통령이 당선  직후 미국의 
의회에서 연설한 것을  기억할 거요.  의장 
이하 모든 의원들이 진심으로 손뼉을 쳤소. 
모두가 그를 곱게 보았고 미국인들이 한국
에 대한 호감을 갖도록 하는 데 그보다 적
합한 사람은 없었소.   그런데요?  그런데 
사실 김  대통령은 미국이  가장 경계하는 
인물이오. 한국의 대통령으로 앉히기에  그
보다 더 불편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제
야 깨닫게 된 거요.  왜 그렇죠?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후 ‘민족’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그가 움직이는 방향은 
지극히 민족적이오. 그는 자꾸 이유를 붙여 
미국으로부터의 무기 구매를 연기해  왔소. 
그러면서 중국과 일본을  부추겨 아시아적 
집단 체제를 구상하고 있지. 그  집단 체제
에 김 대통령은 북한을  끌고 들어가려 하
고 있소.  그러면 오히려 동아시아의  평화
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경제도 더 활기
차게 돌아갈 테구요.   음, 그것은  미국이 
바라는 바가 아니오. 북한이 그  집단 체제
에 들어가면 남북 관계가 안정되고, 한반도
에 통일의 분위기가 형성될 거요. 동아시아 
전체에 협력과 합동의 거대한 흐름이 생기
는 거지. 그러면 중국이 대만을  흡수할 가
능성이 커지고, 동아시아가 미국의  거대한 
상대로 부상한단 말이오.  한국과 중국, 일
본이 힘을 합한다고  생각해 보시오.  현재 
한반도는 미국이 동아시아의  힘을 흐트러
뜨리고 제어하는 데 필요한 보루인 셈이오. 
경훈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케렌스키의  분
석은 탁월했다. 언론에 늘 떠오르는 평화니 
협력이니 하는 미사여구와는 달리 매우 현
실적인 분석이었다. 미국이 한반도를  그렇
게 이용하는 한 이 땅의 백성들은 뭐가 뭔
지도 모르고 그냥 휘둘릴  수밖에 없지 않
은가.
 김 대통령이 북한을  끌어내려 해도 북한
이 전면 개방할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습니
까?  이제까지는 그랬소. 그러나 북한의 상
황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소. 상황을 변화시
키는 요인은 내부적으로는 식량이지만,  외
부적으로는 김 대통령 때문이오. 그는 확실
하고 독자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소.   미국 
측에서 볼 때 김  대통령이 그리는 그림에 
문제가 있습니까?  물론, 엄청난 문제가 있
소. 지난 50년 간 북한에 개방을 권유한 지
도자는 등소평과 강택민, 그리고 김대중 대
통령이오. 그중에서도 김 대통령이  그리는 
그림이 가장 무섭소.  무섭다니요? 
 미국의 매파들과 군부, 정보국, 군산 복합
체들에게 말이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 정
상 회담이라는 미끼를 꾸준히 북한에 던지
고 있소. 그리고 북한이 미끼를  물 가능성
은 그 어느 때보다 높소.  
김정일이 과연 응할까요? 
 그렇소. 김 대통령은 다른 사람이 아닌 김
정일을 유혹하고 있는 거요. 이제 김정일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소. 어쨌거나 김정일
은 기본적으로 한 나라의 지도자요. 단순한 
군인이 아니란 말이오. 엄청난 모험이긴 하
지만 김정일은 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하고, 김 대통령은 그 틈새를 노리고 있소. 
그만큼 남북  정상 회담의  실현 가능성이 
높단 말이오. 물론  그 회담에서는  군축이 
화두가 될 수밖에 없소. 이  변호사도 군축
이 얼마나 위험한 화두인지 알 것 아니오?  
아이러니컬하군요. 
이 세상 어느 나라가  군축이란 단어를 싫
어할 것인가. 그러나 군축을 위해 동분서주
하던 케네디의  피살은 이  단어의 또다른 
얼굴을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 아닌가. 경훈
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왜 미국이  이미 제네바에서 약속했
던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풀지 않는지 
의심하고 있었소. 북한이 핵 개발이나 미사
일 수출 등으로 나갈  수밖에 없도록 상황
을 만들어간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 미국
은 국제 사회에 북한이  약속을 안 지키는 
나라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사실은  미국부
터 먼저 경제 제재를  풀겠다는 제네바 회
담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니오? 어쨌
든 김대중 대통령은 모든 악조건을 무릅쓰
고 남북 정상 회담을 진행할  테고, 군축이 
거론되면 김 대통령도 케네디나 박정희 같
은 입장에 처할 수  있소. 경훈은 목갑  속 
디스켓에 들어 있던  <김대중> 파일의 내
용을 떠올렸다. 그 마지막에 씌어  있던 구
절은 “우리는 새로운 방법을 마련해야 한
다”가 아니었던가.
 그러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음모란 김대
중 대통령의 노선을  무력화시키는 것인가
요?  아직 확실히는 알 수 없소, 그들이 무
슨 방법을 쓸지.  하지만 나는  카를로스가 
개입할 거라는 강한 심증을 갖고 있소.  어
째서요? 제임스로  행세하는 지금의   그는 
무기 거래상 아닙니까?  카를로스는  한국
에서 무기 거래에 관여하면서 엄청난 돈을 
벌었소. 물론 미국과 한국에 두터운 인맥도 
쌓았고. 하지만 지금 그자는 일생일대의 위
기를 맞고 있소. 카를로스는 한국에 수송기
와 정찰기, 그리고  차세대 미사일을  팔기 
위해서 막대한 자금을  들여 로비를  했소. 
엄청난 이익이 떨어지는 일이오. 그자는 이
번 일을 끝으로 사업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돌아가려 했소.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계약금
을 받기 직전에 한국  정부는 군비 지출을 
동결해 버린 거요. IMF 핑계를  대고 있지
만 사실 그 본질은  김대중 대통령의 군축 
정책 때문이오. 카를로스는 끝까지 일이 안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가만히 있지 
않는다면? 
 나의 정보원은 카를로스가 한국에 있다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당했소. 이  변호사도 
카를로스가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지 알잖
소?  그렇다면`…`…? 
케렌스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미국의 군산 복합체에서는 김대중 대통령
의 노선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소. 이미 예
전에 그들의 불만이 극대화되었을 때 케네
디가 죽었지. 경훈은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하다 케렌스키에게 물었다.
 만약 카를로스가  뭔가를  하고자 한다면 
먼저 케렌스키 변호사님의  정보망에 포착
되겠군요?  그럴지도 모르오. 나는 그자의 
범죄 사실을 필요로 하오. 무슨  말인지 알
겠소? 나의 증인을 무참히 살해해 버린 그
자, 팬암의 재판을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만
들어버렸던 그자가 이번  공작에 연루되어 
있다는 단서가 필요하단 말이오.
 즉 나는 카를로스가  음험한 CIA의  공작 
전문가라는 사실을   선량한 배심원들에게 
내보여야 하오. 이것이  내 필생의 과제요. 
경훈 형제,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하오. 그리
고 더 이상 미국이 범죄 조직 같은  CIA에 
놀아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되오. 미국이 패
권주의로 치달으면 인류의  역사는 정의를 
상실하게 되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을 옳은 방향으로  굴러가도록 만드는 
것이오. 
그것이 곧 나의 ‘성전’이오. 그리고 지금 
군축으로 치닫는 한국의 대통령은 그 어느 
때보다 위험에 처해 있소.  카를로스는  본
래 어떤 자입니까? 
 전설적인 존재였소. 그래서 팬암 사건에도 
관여하게 된 거고. 그자는 인텔리지만 실제
로는 정부 전복이나 쿠데타, 암살  등의 전
문가요. 그자는 비상한 머리로 현지에서 모
든 공작을 지휘하고는  유령같이 사라져버
리지. 그런데 나는 팬암 사건 후 잠적해 버
렸던 카를로스가 최근에 다시 움직이고 있
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오. 바로  여기 
서울에서 말이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그
자가 제임스라는 이름으로 10년 간이나 여
기서 무기  거래를 해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소.  그런데 과연 그자가 다시금  한국
의 대통령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그
게 나의 고민이오.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국제적으로 유명한 인물이오. 함부로  어떻
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지. 그럼에도 불
구하고 카를로스는 한국에 와 있소. 그자는 
무기 구매를 성사시키기 위해 한반도에 긴
장을 조성하려 들 거요. 또 지금 은밀히 추
진되고 있는  남북 정상  회담을 방해하려 
할 텐데 어떤 방법을  쓸지는 알 수  없소. 
지금으로서는 그저 감시만 하고 있을 뿐이
오. 혹시 좋은 방법이 떠오르면  내게 알려
주시오.
 이 변호사는 천재잖소?  어떻게 연락드리
면 됩니까? 
케렌스키는 휴대폰 번호를 일러주었다.
 자, 그러면 다음에 봅시다. 
케렌스키는 경훈을 구해준 게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는 웃으면서 경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병실을 나갔다.
음모
다음날 아침 병실에서 잠을  깬 경훈은 아
무런 장애도 느껴지지 않아 안심했다. 혈압
도 감정지수도 모두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
다.
인남은 퇴원한 경훈과 같이 집으로 와서는 
차를 끓였다. 그동안  경훈은 소파에  앉아 
처음 제럴드 현의 전화를  받고 나서 지금
까지 겪은 일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
했다. 
다행히 오세희와 케렌스키를  만나 세상에 
묻혀 있던 사실들을 어느 정도 찾아내기는 
했지만 새로  직면한 문제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미국이 김재규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
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미국이 김재규를 시켜  박정희를 살해했다
면 무엇보다 그 뒤가 연결되지  않았다. 미
국이 배후에 있었다면 김재규는 실패할 리
가 없었을 것이다. 설사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토록 어설프게, 아니 우스꽝스럽게  실패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훈은 10·26의 진정한 비밀은 바로 10·
26 후 김재규와 미국의  관계에 있다는 확
신이 들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만난  브루
스에 의하면 미국이 최고급 정보를 제공하
는 등의 방법으로  김재규를 조종해  왔고, 
김재규의 소원이었던 주한 미군 철수 중단
이라는 엄청난 문제도 해결해 주었다. 
그 다음부터 김재규는 미국 사람에 다름아
니었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미국은  브루스
보다 직위가 높은 홀리건이라는 자로 하여
금 김재규를 전담하게 했다. 홀리건의 임무
는 미군 철수 중단이라는  빚을 진 김재규
로부터 그 빚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김재규 전담자, 그는 이전의 브루스와는 비
교도 안 되게 깊이  있는 얘기를 김재규와 
나누었을 것이다.  세상의  아무도 모르는, 
단지 두 사람만의 비밀을 나누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경훈은  갑자기 탁자를 
내리쳤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어머, 너 왜 그래? 
차를 끓여오던 인남은 경훈답지 않은 행동
에 놀랐다.
 제임스, 아니 홀리건이라는 자 말이야. 
 그래. 
 그자가 열쇠야. 그자가 속임수를 썼을  가
능성이 있어.  홀리건? 무슨 속임수? 
 아니, 홀리건이 아니지. 미국, 미국이 엄청
난 속임수를 썼을 가능성이 있어. 맞아, 그
러면 수수께끼가 풀려. 이것은 분명 속임수
야.  속임수라니, 도대체 무슨 말이야? 
 그래야 김재규가 남산으로  가지 않고 용
산으로 간 이유도 설명이 되는  거야. 홀리
건의 속임수, 아니 미국의 작전이었어.  무
슨 말인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좀 찬찬
히 설명해 봐.  이미 미국이 김재규의 소원
이었던 주한 미군 철수 중단을 들어주었을 
때부터 그의 운명은 결정된 거야.  아니 그
전에 브루스가 김재규에게  영어를 가르칠 
때부터 그의 운명은 결정된 거라고 봐야지. 
미국의 선택이었으니까.  그런데? 
 미국은 어떤  형태로  김재규를 써먹을지 
연구했어. 
 그랬겠지. 
 미국이 궁극적으로 바라던 바는 박정희의 
제거였어.  그건 확실하지. 
 그런데 미국은 하나의  고민을 갖고 있었
단 말이야.  무슨 고민?  당시의 동서 냉전 
체제하에서 박정희의 죽음이 몰고 올 엄청
난 공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지.  당연
히 염려했겠지. 
 그래서 미국이 딜레마에 빠졌던 거야. 
 나도 거기까지는 이해가 돼. 
인남은 경훈의 논리를 따라잡는 데 문제가 
없는지 여유 있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미국은 마침내 그 문제를 해결해 냈어. 
 어떻게? 
 김재규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오래 전부
터 박정희를 암살하려고 준비해 왔대. 심지
어는 군단장 시절 박정희가 자신의 부대를 
방문했을 때 그를 체포해서 억류하고 독재
를 끝장내도록 담판지으려 했고,  태극기에 
주머니를 만들어 권총을 숨겨놓기도  했대.  
나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 
 그런 진술은 나중에 김재규가 더 이상 기
대할 것이  없다고 체념했을  때부터 나온 
자기 포장 같은 것이었어.  그럼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다는 얘기야? 
 물론이야.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실을 얻어낼 수 있어.  뭔데? 
 김재규는 여러 가지  형태로 박정희를 처
치할 생각을 해왔다는 거지.  …`…. 
 실제 일어난 것은 궁정동의 10·26이지만 
김재규는 사전에 다양한 형태의 거사를 생
각했단 말이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김재규는 모든 거사 형태의 장단점을 비교
하고 분석했단 얘기지.
  그래서? 
 그러고는 실제 일어났던  방식을 택한 거
야. 
 그게 제일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지. 
 아니, 이것은 매우 이상한 형태의 거사야. 
보안사령관을 거쳐 중앙정보부장으로 있던 
김재규는 평소에  어떻게 하면  거사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연구했고, 도상 훈련도 
수없이 해두었거든.  그런데? 
 그러나 김재규는  평소  훈련했던 방식을 
택하지 않았어. 자신의 방식을 택하지 않았
단 말이지. 사람들은 그가 그런  방식을 택
하지 않은 것을 두고  바보니 얼간이니 하
고 얘기하지만, 그것은  다른 각도로도  볼 
수 있어.  어떻게? 
인남은 입에 침이 말랐다. 
 김재규는 다른  방법을 받아들였던  거야. 
그래서 전화 한 통화면 될 그 “김정호 시
작해”를 하지 않았던 거지.  “김정호  시
작해”가 뭐야? 
 평소 훈련해  두었던  중앙정보부의 작전 
명령이야.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경훈은 문득 뭔가
가 떠오른 듯 찻잔을 든 채로 동작을 멈추
었다. 한참 동안 꼼짝 않고  있는 경훈에게 
인남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경훈아, 왜 그래? 
그래도 한참을 더 말없이  있던 경훈이 갑
자기 고함을 질렀다.
 그래, 바로 그거야!  연결이 돼,  그것까지
도! 
 뭐가? 
 노벰버. 
 노벰버, 육사 11기? 
 그래. 네가 생각해 냈지, 육사 11기라고. 
 10·26과 육사 11기가  관련이 있다는 얘
기니? 
 그것뿐만이 아냐. 더 있어. 
 뭐가? 
 이럴 게 아니지. 
경훈은 벌떡 일어나더니 책상 앞으로 가서 
잔뜩 쌓여  있는 자료를  헤치며 무언가를 
찾아서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갑자기 왜 그래? 
 기나긴 시나리오였어. 10·26부터  12·12
를 거쳐  5·18까지  이어지는 미스터리는 
결국 한 뿌리에서 나온  거야.  어떻게 알 
수 있지? 
 바로 그 노벰버가 열쇠였어. 육사  11기의 
스터디. 5·18은 결국 육사 11기들의  권력 
장악으로 가는 과정이었잖아.  그러나 그렇
게 확신할 수 있을까? 
 확신? 
 그래, 나는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물론 
내가 마음이   약해서 그렇겠지만,  아무리 
CIA라 해도 과연 한 나라의 대통령을 그렇
게 마음대로 거세할 수 있을까 싶어.  제럴
드 현이 죽음의 순간에  얘기했던 것을 믿
을 수 없단 말이야?  물론 믿어. 하지만 동
시에 의심스럽기도 해. 미국이 정말 김재규
를 사주했을까? 과연 그런  일이 가능했을
까? 우리가 현 선생님의 말에 너무 경도되
어 일방적인 시각으로 10·26을 보아온 것
은 아닐까 하는 의심 말이야.  경훈은 갑자
기 자신이  없어진 인남의  목소리를 듣자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소리야!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도 
자신이 없다니!  물론 나도 미국이 드골을 
암살하려고 했다든지 칠레의  아옌데를 암
살하고 일어난 피노체트  쿠데타의 배후에 
있었다든지 하는 얘기는 들었어. 그러나 과
연 그랬는지는 확신할 수 없어.  그러나 그
런 일들은 증거를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
잖아.  그래, 그건 나도 알아.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나도 누구보
다 잘 알지. 너나 되니까 이 정도까지 내막
을 캐온 거야. 하지만 나는 믿기가 어려워. 
그와 비슷한 일이 한 번이라도  있었고, 그 
증거가 있다면 믿을  수 있겠지만  말이야. 
인남은 잠시 멈추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을 해보았어. 그동안 내가 한 일이 너
무 없더라. 모든 걸 경훈이 너 혼자  다 해
왔잖아. 그래서 말인데  나 내일  미국으로 
갈 거야.  미국으로? 
 그래. 현 선생님은 언젠가 내게  “미국은 
그래도 괜찮은 나라야, 잘했든 못했든 정부
가 한 일은 모두  기록으로 남기거든” 하
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 나는  확실한 결론
을 내리기 전에 미국에  가서 정부 문서보
관소를 뒤져보고 싶어.  현 선생님이  괜히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서보관소에 간다고 무슨  자료를 얻기는 
힘들겠지만 인남에게는 필요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 문서를 뒤지다 
보면 비록 한국이 아니더라도 미국이 세계 
각국에서 자행한 검은 음모의 일단에 대해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또  그녀로서는 
최근의 납치 사건으로 뒤숭숭한 마음을 풀
고 싶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미국은 인남
이 젊은 시절을 살아온 친근한 공간이었다.
 그렇게 해. 
다음날 경훈은 인남을 공항까지 바래다 주
었다.
 성과가 있으면 연락할게. 
인남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막상 인남이  미국으로 가고  나자 경훈은 
허전했다.  
경훈은 이제  10·26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결론이 나온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
다. 다만 케렌스키가  얘기한 카를로스, 즉 
제임스의 또다른 음모에 대비해야 했다. 
경훈은 자동차를 운전하며  공항에서 시내
로 돌아오는  내내 한반도의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 남과 북의  권력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누가 생
각해도 한반도가 군축으로 가야 한다는 것
은 자명한 일이다. 자본과 기술이  달려 경
제적으로 불안한 남한이나  식량 부족으로 
주민 탈출 사태가 속출하는 북한이나 엄청
난 돈을 빈 독에 물  붓듯 하는 현실이 너
무도 개탄스러웠다. 더군다나 그  무기들이 
동포를 겨누고 있음에야. 
경훈은 남북  정상 회담이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졌으면 싶었다. 남북간의 신뢰  회복
에 정상 회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
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을  폭격하겠다고까
지 하는 미국이 한국  정부의 햇볕 정책을 
언제까지 곱게만 보고 있을 리는 없다.
경훈은 제임스를 떠올리자 불안해졌다.  제
임스를 저지할 힘을 갖고 있는 케렌스키는 
결코 개입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경
훈은 자신에게 제임스를 저지할 힘이 있는
가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
다도 그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함정
케렌스키는 제임스가 김대중  대통령을 직
접 노릴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사실 
이 나라의 대통령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청와대에 들어가 끝이 좋지 못했다. 대통령
들의 삶이 그렇게 굴곡져  왔다는 것은 바
로 이 나라의 운명이 그만큼 휘둘려왔다는 
얘기다. 
경훈은 지금의 대통령도 그런 점에서는 예
외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북한을 이끌어
내어 한반도의 항구적 안전을 도모하고, 민
족의 숙원인 통일의 초석을 깔겠다는 김대
중 대통령. 그러나 그의 정책은  미국의 대
북 정책 및 동아시아  정책에 정면으로 배
치되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추구하는 햇볕 정책도 사
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것이 아닌가. 미국
이 북한을 쳐야겠다고 결심하는 그 순간부
터 그의  햇볕 정책은  누구보다도 국내의 
친미 인사들에 의해  도륙나고 말  것이다. 
여론은 빗발치고 사태 악화의 모든 책임을 
대통령 혼자서 짊어져야 할 것이다. 
미국의 노선을 벗어나면  불안해지는 수많
은 국민을 보듬어안은 채 까탈스럽기 짝이 
없는 북한을 끌어내려는 김대중 대통령. 그 
역시 케네디가 겪고 박정희가 겪었던 비운
의 암살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에 
경훈은 불안해졌다.
경훈은 상준을 만나 은근히 자신의 생각을 
비쳐보았다. 그러자 상준은 실소를 흘렸다.
 우습잖아. 대통령을 어떻게 한다고?  제임
스인가 뭔가 하는 사람  말이야, 전직 CIA
라면 당장 미국이 거론될  것이 뻔한데 설
마 그런 짓을 하겠어?  그건 그래.  하지만 
누구도 생각지  못하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방법이  있
으면 그런 짓을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영
원히 드러나지 않을 방법이란  게 있겠어?  
그건 알 수 없지. 
무심코 대답하는 경훈의  뇌리에 케네디의 
죽음이 떠올랐다.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방
법이란 실상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
다. 
다시 경훈은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는 
믿을 만한 선배를 찾아갔다.
 뭐? 케네디가 CIA 손에 죽었다구? 
 네. 하지만 CIA는 다만  앞잡이였을 뿐이
죠. 
 그렇다면 그 배후는? 
 군산 복합체. 
 군산 복합체라`…`…. 
 아무튼 케네디는  군축 때문에  죽었어요. 
박 대통령 역시 핵무기  개발로 인해 죽었
고. 배후에 미국이 있었어요.  글쎄, 박  대
통령 죽음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얘기는 
김재규 자신이 했던 얘기니까 어떨지 모르
지.  박 대통령은 국방에 관한 시각이 미국
과 크게 엇갈렸고 그것이 죽음의 원인이었
죠. 그리고 지금 그때와 같은  상황이 또다
시 한반도에서   조성되고 있단  말이에요.   
같은 상황이라구? 
 김 대통령은 군축을  달성하기 위해 남북 
정상 회담을 모색하고 있어요. 하지만 미국
에는 남북  정상 회담과  군축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죠. 대통령의 정책은 미국의 노선
과 엇갈릴 수 있어요. 이승만, 박정희 모두 
그럴 때 위험했어요.  하하, 자네 신경과민
인 것 같군. 
 어째서요? 
 지금은 상황이 달라. 박정희 대통령은  독
재의 화신이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
의 화신이야. 국정  운영에도 아무런  흠이 
없어. 
그리고 노구를  이끌고 경제  위기 극복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국민들이 다 지켜보
고 있지. 어떤 쿠데타든 국민들에  의해 거
부당해. 미국? 미국도 김 대통령을  어떻게 
할 수는 없어. 아마 인격과  능력만으로 세
계 3대 지도자를 꼽으라면 김 대통령도 들
어갈 거야.  선배, 그러나 지금  상황이 매
우 급박해요. 북한은  결코 미사일  개발의 
성과를 포기하려 들지 않을 거예요. 미국의 
강경파들은 이미 북한을 어떤 형태로든 응
징하려 하고 있고, 김 대통령의  햇볕 정책
이 자신들의 한반도 정책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그러나  비서관
은 경훈의 말에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경
훈은 답답했지만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
는 일이 아니었다. 
답답해하는 것은 경훈만이 아니었다. 손 형
사 역시 가끔 찾아와  경훈에게 갑갑한 심
정을 털어놓곤 했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있십니꺼? 범죄를 저
지른 사실은 분명한데 증거가 없어 잡아넣
질 못하다뇨.  좀 기다려봅시다. 
 지야 힘이 없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변호
사님은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십니꺼? 경훈
은 손 형사에게 일전에  죽을 뻔했던 일을 
얘기했다. 그러자 손 형사는 주먹으로 테이
블을 내리치며 울분을 토했다.
 정말 쥑이뿔고 싶은 놈이구만. 
 그자는 무슨 일을 하든 흔적을 남기지 않
아요. 지금으로선 어떻게 할 수도 없고 `…
`…. 
다음날 손  형사는 다부진  결심을 머금은 
얼굴을 하고 다시 찾아왔다.
 변호사님, 두고 보십시오. 그놈이 그런 수
법을 썼다면 지한테도 다 생각이 있십니더.  
아니, 함부로 움직이면 큰일납니다. 
 알고 있십니더.  하지만 지는  대한민국의 
형사가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고
야 말겠십니더. 그놈이  증거 없이  사람을 
죽이는 데 이골이 난  작자라면 지도 똑같
이 해줄 수 있십니더.  아니, 손 형사님, 그
러면 안 돼요.  그자에게 섣불리  손대서는 
안 돼요.
 경훈은 손 형사가  제임스를 건드려 큰일
을 그르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제임스의 목숨이 아니
에요. 그자의 배후를  알아야 합니다. 그자
는 지금 엄청난 일을 획책하고  있어요. 그
것이 뭔지를 알아내야  합니다.  세상에는 
CIA나 인공 위성만  있는 게 아니란  것을 
보여줄 깁니더.  대한민국의  형사도 있고, 
전자 장치 못지않은 기술자의 손도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줄  깁니더. 두고  보십시
오. 손 형사는  상처투성이의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의미심장한 얘기를  남기고 돌아
갔다. 손 형사는  마음껏 불법을  저지르는 
외국인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한국적 현
실에 대해 순수한 인간적 분노를 터뜨렸던 
것이다. 
경훈은 한편으로는 불안하면서도  또 한편
으로는 기대도 되었다. 
그리고 손 형사가가 남긴  전자 장치 못지
않은 기술자의 손이라는 게 무얼 말하는지 
궁금했다.
손 형사가 나가고 나자 바로 전화 벨이 울
렸다. 인남이었다.
 지금 비행기를 탈 거야. 서울에는 내일 오
후 늦게 도착해.  몇 시 비행기야? 내가 공
항에 나갈게. 
 바쁠 텐데, 괜찮아. 
 아냐, 내가 나갈게. 그런데 목소리가 아주 
밝구나.  미국에 오기를 너무 잘했어. 가서 
깜짝 놀랄 얘기를 해줄게.  뭔데?  가서 들
려줄게. 
제임스는 미국에서 갓 도착한  한 통의 전
문을 앞에 놓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있었다.
 때르르릉 때르르릉 때르르릉`…`…. 
전화 벨이  한참 울리도록  제임스는 무슨 
생각엔가 잠겨  있었고 이내  그의 눈빛은 
살기를 띠었다. 그는 벨이 열 번도 더 넘게 
울렸을 때에야 비로소 전화를 받았다.
 제임스입니다. 
 그 일은 어떻게 되었소? 
 본국 통상본부의 라인을  통해 깊숙이 찔
러보았는데 노골적으로 거절당했습니다. 무
기 구입은 좀 기다려달라는 완곡한 대답으
로 일관했다는   것입니다.  핑계는  역시 
IMF겠지. 
 그렇습니다. 
 그는 사업가 출신이오. 셈에 밝지. 이제까
지의 대통령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오.  그
는 한국이 그런 엄청난 군비를 써가면서는 
도저히 세계 경제를 따라잡지 못한다고 생
각하오. 서두르시오. 지금  사태가 매우 급
박하오. 식량 정책에 실패했다는 비난이 김
정일에게 쏟아지고 있소.  그가 돌연  남북 
정상 회담에 응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소. 
그들이 만나 전격적으로  군축에 합의하면 
모든 게 엉클어지는 거요. 앞으로 3일 이내
에 썰매를 출발시키시오.  알겠습니다. 
제임스는 전화를 끊자 즉시 승용차를 대기
시켜서는 어디론가 출발했다.
 니 진짜로 자신 있나? 
 형님, 걱정일랑 붙들어  매노라 카니까예. 
지가 별명이 안창따기 아입니꺼, 안창따기!  
그래, 그놈이 정말 서류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더나?  우리는 한 번 척 보면 안
다 아입니꺼. 벌써 열흘이나 지켜봤는데 전
부 안주머니라예. 가방 안 들고  다니는 놈
이 안주머니가 불룩하면 틀림없어예.  그라
고 그놈 눈깔 돌아가는 거  보이소. 안주머
니에 먼가 엄청난 거 갖고 다니는 기 분명
합니더.
  잘못되면 니나 내나 다 형무소행이다. 
 글마가 그렇게나 무서운 놈입니꺼? 
 그래, 나 같은  형사 따윈 안중에도  없는 
놈이지. 
 염려 마이소. 어떤 놈이래두 지가  개발한 
수법에 걸리면 국물도 없십니더.  니만  믿
는다. 고맙다. 
 원참, 형님도. 그라믄 지가 부끄럽지예. 근
데 글마는 와  하루에 두 번씩  꼭 평택엘 
갔다 오는 깁니꺼?  이유는 내도 모린다. 
 밀수라도 하는 놈 아입니꺼? 
 밀수할 놈은 아이고`…`…. 
안창따기는 손 형사에게 언젠가 꼭 은혜를 
갚고 싶어하던 참이었다. 수년 전  특별 단
속에서 붙들려 빼도 박도 못하던 안창까기
를 고향 선배인 손  형사가 동료 형사에게 
사촌동생이라고 사정하여 빼준  적이 있었
다. 그후로 다시는 손 형사  앞에 나타나지 
않기로 맹세했는데, 뜻밖에도 손 형사가 자
신을 찾아온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
은 자신에게 손 형사가  일을 부탁해 왔다
는 사실이다 저쭈 온다. 잘해. 
제임스는 빌딩 앞에서  승용차를 내려서는 
현관으로 걸어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기다리던  안창따기는 문이  열리자 몇 
사람과 같이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를 탔
다. 제임스는 엘리베이터에 타자 8층을  눌
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려는 순간 한 사나
이가 급하게 외치며  뛰어왔다. 손  형사였
다. 한 아가씨가 얼른 버튼을  눌러 엘리베
이터의 문을 열어주었다.
 아, 고맙십니더. 
손 형사는 엘리베이터에 타자 주위를 두리
번거리다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어, 이놈, 이거 여기 있었구나. 야 이 새끼
야! 이 살인범놈아! 손  형사의 고함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이거 왜 이래! 
제임스는 멱살을 잡으려는 손 형사를 피하
면서 황급히 고함을 질렀다.
 너 이 새끼, 이 변호사에게 무슨  짓을 했
어? 
손 형사는 막무가내로 제임스의 멱살을 잡
아채면서 고함을 질렀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  형사가 제임스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자 엘리베이터가 심하게 흔들렸다.
 이거 엘리베이터 안에서 왜 이러시오.  위
험하잖아요. 한 승객이 두 사람  사이로 나
서며 말렸다.
 이놈 이거 살인범입니다. 죽일 놈이란  말
이오. 
 뭐? 이거 못 놔! 이 자식, 너는 모가지야. 
 나가서 얘기해요. 엘리베이터가  흔들리잖
아요. 
다시 여자 승객 한 사람이 겁에 질린 목소
리로 말했다.
 이거 좀 말려줘요! 이 미친 사람을 좀  붙
들고, 멱살 좀 풀어줘요!  제임스의 요청에 
따라 안창따기는 아주 여유  있게 그의 안
주머니를 자신의 특기인  안창따기 수법으
로 뜯어냈다. 그러고는 6층에서 다른  승객
들과 같이 내렸다. 10여 년이 넘는 그의 작
업 역사를 볼 때 이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
다.
 너, 내가 정식으로 영장 가지고 올 테니까 
도망가지 말고 기다려! 손 형사는 인터폰을 
받고 달려온 경비원들에게  신분증을 내밀
고는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러나 엘리베이
터를 타고 밑으로 내려와서는 급히 안창따
기와 약속해 둔 장소로 택시를  타고 갔다. 
그리고 안창따기로부터 봉투  하나를 전해
받고는 그 길로 경훈을 찾아갔다.
 정말입니까? 이게 그자의  주머니에서 빼
온 것입니까?  틀림없습니다. 
봉투는 아주 두텁게 밀봉되어 있었다. 경훈
은 자못 기대감이 서린  손길로 봉투를 뜯
었다. 봉투 안에는 종이한 장이 있었고, 거
기에는 다섯 사람의 이름만 씌어 있었다.
이재억
지영호
유수하
임창순
민봉규
 허, 참, 아니 이게 뭡니꺼? 
 …`…. 
 그렇게나 어렵사리  빼왔는데  고작 이름 
다섯 개라니예.  …`…. 
 꼬박 열흘 동안  하루에 두  번씩 평택에 
내려가기에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나 했
는데 아무것도 없으니 힘빠지네예.  이  이
름들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
닐까요?  고작 이름 몇 개에  의미가 있으
면 얼마나 있겠십니꺼? 이  이름들이 누구
의 이름이든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구요? 
경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 형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손 형사의  얼굴은 실
망감으로 일그러졌다.
 이제 서에 들어가면  어떤 곤욕을 치를지 
모르겠십니더. 경훈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나가는 손 형사를  위로할 특별한 말
이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리며  그냥 앉아 
있었다. 종이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무슨 비밀 글씨가 보이거나  하는 것도 아
니었다. 
인명 사전을  찾아보아도 다섯  개의 이름 
중 어느 하나도 나와 있지 않았다. 
경훈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신문사와 잡
지사 등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
았지만 아무도 그 이름들을  알고 있지 않
았다.
 경훈은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 형사는 퇴근 시간 직전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앉아 있다가 아무  일 없이 끝나
자 날아갈 듯 가벼운  마음으로 경찰서 정
문을 나섰다. 그는 근처의 공중  전화를 들
어 안창따기를 불렀다. 노고에 보답하는 의
미에서 술이라도 한잔 사주고 싶었다. 
저녁을 겸해 시작한 술자리가  몇 차를 거
치는 동안  두 사람은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했다. 그래도 선배라,  손 형사는 안창따
기를 먼저 택시에 태워보내고 자신은 길거
리에 서서 다음의 빈 택시를  기다렸다. 그
때 검은색 자가용 한  대가 다가오더니 운
전석에 앉아 있는 젊은이가 창문을 내리며 
말했다.
 아저씨, 쌍문동으로 가는데 같은 방향이면 
1만 원만 내고 타세요. 택시 요금도  안 되
는 돈이에요.  기름값에나  좀 보태려구요.   
그으래, 가자. 내도 쌍문동에 산다. 
손 형사가 조수석에 올라타자 뒤에서 뭔가 
다가와 이내  가느다란 철사로  그의 목을 
조였다. 다음 순간부터 손 형사는  피가 끓
고 살이 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자동
차는 어느 야산에 멎었다.
 어느 놈한테 전해줬어? 
손 형사는 인간이 참 간사하다고 생각했다. 
거의 세 시간이나 계속된 무자비한 고문을 
온몸으로 맞받아 이제 살아날 가망이 없다
는 것을 알면서도 떨고  있는 자신을 느꼈
던 것이다.
 이 새끼, 진짜 독종이구나. 야, 너는 이 보
기 싫은 귀때기부터  잘라내 버리고,  너는 
야구 빠따로 이 새끼 허리를 30대 갈겨. 손 
형사는 이미 부러진 두 다리와 두 팔을 힘
들게 움직이며 귀를 감싸려는 자신에 대해 
웃음이 나왔다. 웃음은  이내 비명과  섞여 
입을 틀어막은 천조각 사이로 기괴한 소리
를 흘려냈다. 
한쪽 귀에서  금속의 싸늘한  감촉과 함께 
끈적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리자  손 형사는 
두려움에 젖은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고
개를 끄덕였다. 입에서 천조각이  빠져나가
자 손형사는 쓰러진 채  숨을 거칠게 몰아
쉬었다.
 누구야? 빨리 말해! 
 이, 이, 경훈`…`… 이경훈 변호사. 
 또? 
손 형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진작 말했으면 아무 고통 없이 편하게 죽
여주잖냐, 이 미련퉁아! 야, 이 새끼 구덩이 
파고 묻어버려. 사나이는  쓰러져 있는  손 
형사의 무감각해진 얼굴을  쳐다보며 휴대
폰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형님, 이 짭새 새끼가 그 서류를 이경훈이
라는 변호사놈한테 줬답니다. 
에버레디 계획
다음날 오후, 손 형사를 위로하려고 경찰서
에 전화를 걸었던 경훈은  그의 결근 소식
을 들었다.
 지각은 했지만 결근은  안 하던 사람입니
다. 어젯밤에 집에도 안 들어왔다는데 무슨 
일인지`…`…. 경훈은 반장에게  손 형사가 
출근하면 전화를 해달라고 부탁한 뒤 조용
히 수화기를 내려놨다.
제임스,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경훈은 마음
이 편치 않았다. 시계를 보았다. 인남을 마
중 나가야 할 시각이었다.
경훈은 공항에 나가서 다시 한 번 손 형사
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소식이 없었다.
인남이 탄 비행기는 정시에 도착했다. 밝은 
얼굴로 나온 인남은 경훈의 초조한 표정을 
보자 놀랐다.
 위험해. 손 형사님이  실종됐어. 제임스로
부터 서류를 탈취했는데 어제 저녁부터 소
식이 없어.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지금 우리도 위험해.  도대체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케렌스키 
변호사님께 물어봐. 도움도 청하고. 
 그래, 그게 좋겠구나. 
경훈은 케렌스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케렌
스키는 즉각 약속 장소로 나왔다.  손 형사
의 소식을 들은 케렌스키는 미간을 좁혔다.
 다섯 사람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고 했소? 
 그렇습니다. 
 이 변호사가 모르는 사람들이오? 
 네,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일까? 
 무기 거래에 관련된 사람들일지도 모르죠. 
케렌스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제임스는 움직임이 없습니까? 
 전혀. 밀착 감시하고 있는데 왠지 통 움직
임이 없소.  이상한 일이군요. 
 그러게 말이오. 
 하여튼 무슨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바로 
연락을 주십시오.  알았소. 그런데 이 변호
사도 집으로  들어가면 위험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손 형사님의 신병이 확인될 
때까지는 호텔에서 머무를 예정입니다.  그
게 좋겠소. 호텔을  정하면 내게  알려주시
오. 
인남과 같이  시내의 호텔에  숙소를 정한 
경훈은 다섯 사람의 이름이 적힌 종이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인남은  샤워를 
마치고는 과일을 들고 경훈의 방으로 건너
왔다.
 너 신경이 극도로 곤두서 있구나. 
 틀림없이 무슨 일인가가 진행되고 있는데, 
손 형사님은 왜 이렇게 소식이 없을까? 무
심코 과일을  집어 한입  베어먹던 경훈은 
아무 맛도  못 느끼겠는지  과일을 치우고 
다시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기자 친구도, 청와대 선배도 아무 염려 말
랬다면서?  그런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라. 
제임스가 가만있는   것이 오히려  불안해.   
아무리 대단한 자라 하더라도 감히 대통령
을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 설마?   그자는 
개인적으로도 이번의 무기  거래에 운명을 
걸고 있다고 했어. 그리고 김  대통령의 군
축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모험이야. 그들은 
케네디조차 죽이는  자들이잖아.  그들에게 
행동을 해야 할 이유는 충분해.  다만 어떤 
방법을 쓰는가가 문제지.  …`…. 
경훈은 제임스가 하루에 두  번씩 꼬박 10
일 동안이나  평택에 다녔다는  손 형사의 
말을 떠올렸다. 평택과 그 이름들이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택에 뭐가 있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아니? 
 누구에게 물어본다? 
 캐나다의 오 선생님은 아시지 않을까? 
 그래, 맞았어. 이젠 너도 제법이구나. 
인남의 말마따나 이런 걸 묻기에는 오세희
가 적격이었다. 경훈은 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택? 거기에 506이 있지. 
 506이라뇨? 
 특수 부대요. 감청  전문이지. 한반도에서 
오가는 모든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부대
요. 멀리 만주까지도 감청할 수  있소.  대
단한 부대군요. 
 무슨 일 있소?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거기 분위기는 어떻소?  이쪽에는 미국과 
북한의 충돌을  점치는  시각도 있는데`…
`….  글쎄요, 특별한 변화는  보이지 않습
니다. 
정말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는 일이 있을까
요?  방심할 수는 없소.
 워낙 공격적인  자들이니까. 이  변호사는 
지난 94년 미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소?  잘 모릅니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꿈에도 모르는 
채 전면전이 터질 뻔했소.  네? 
 미국은 그때 실제로 전쟁을 계획했소.  당
시 미국은 걸프전의 승리로 말미암아 호전
적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지. 북한의  핵 개
발 의혹은 군산 복합체에게는 최고의 기회
였소. 그들은 CIA를 내세워 폭격의 꼬투리
를 잡으려 했지. 이  변호사, 그 당시  CIA 
국장이 의회에서 북한은 이미  열 개 이상
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고 증언했던 것 
기억나오?  네, 기억납니다. 
 미국은 그런 나라요. 국방성은 1차로  1만 
명의 미군을 증파하는 계획을 세웠소. 처음 
미군은 영변 일대를 폭격하고 일시에 북한
의 공군력을 궤멸시키려 했지. 그러면 북한
의 지상군이  대거 남으로  공격해 오리라 
예상했소. 그랬을 경우  미군이 약 8만  정
도, 한국군이 약 30만 정도  희생될 것으로 
판단했지. 민간인은 수백만 이상이  사망하
고 한국  경제는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는 
거요. 그들은 이처럼 전면전을  불사하고라
도 북한의 핵 개발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
했소.  실제로 그 당시 북한이 핵무기를 보
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
론이오. 그러니까 더  무섭지. 있지도 않은 
핵무기를 없앤다고 전면전을  계획하는 미
국의 시스템이 더 위험하다는 얘기요. 일반
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군
산 복합체·국방성·CIA 등이 앞장서 일을 
저지르고, 군산 복합체는 걸프와 비교가 안 
되는 대규모 전쟁에서 다시 엄청난 이익을 
챙기는 거요. 미국이 추구하는 세계 정책의 
본질은 군사력이고, 군산 복합체는 절대 망
해서는 안 되오. 따라서 지구상의 어딘가에
서는 위기나 전쟁이  상존해야 하는  거요. 
하지만 절대 핵무기 개발은 안  되지. 미국
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거든.  알겠습니다. 
미국의 군사력 유지를 위해 한반도는 끊임
없이 위기에 시달리고 무기를 사주지만, 정
작 국방을 강화하고 값싼 안전을 보장하는 
핵무기는 안 된다는 의미군요.  문제는  한
반도의 어느 누구의 의사와도 상관없이 미
국이 그렇게 대담한 전쟁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이오. 미국의 필요에  의해 남한은, 아
니 한반도는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는 운
명을 맞을 수도 있소. 더욱 비참한 것은 미
국의 폭격에 의해 남북한이 아수라장의 전
쟁판을 벌여야 한다는 거요.  뭐라 말이 안 
나오는 현실이군요.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면  나도 가족들과 
서울로 들어가겠소.  네? 여기로요? 
 그렇소. 나도 나라와 고난을 함께하고  싶
소. 한반도에는 이 땅을 지키려고  하는 사
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소. 아무리 초
강대국이지만 그런 식으로  함부로 약소국
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항의하겠소.  오 선생님, 고맙습니다. 
경훈은 전화를 끊으며 온몸에서 전율을 느
꼈다. 그는 평소에도 오세희와 대화를 하다 
보면 무뎌진 민족애와  조국애가 새삼스럽
게 싹트는 것을 느끼곤 했다.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아냐. 
경훈의 뇌리에 불현듯  인남이 하버드대학
교 케임브리지 광장에서 어깨에 북을 비스
듬하게 메고  판소리 공연을  하던 광경이 
떠올랐다. 이어 인남이  땀을 닦으며  하던 
소리가 귀에서 되살아났다.
─`우리 것만 없는 거야.  에이, 내가 못나
설 건 뭐야 싶었지. 그래서  아예 판소리를 
배워버렸어. 내가 본래 노래에는 소질이 있
잖아.
경훈은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인남을 바라
보았다.
 왜 그러니? 
 우리 나라가 존속하는  것은 오 선생님이
나 너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야. 나는 참
으로 부끄럽다.  놀리는 거니? 
 아니, 진심이야. 
 그럼 이제 내 얘기 좀 해도 돼? 
경훈은 그제야 인남이 미국에서 성과가 있
었다고 얘기했던 것을 떠올렸다.
 참, 그 얘기 좀 들어보자. 내가 손 형사님
의 실종으로 너무 정신이 없었구나. 인남은 
손에 들고 있던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증거야. 
 증거라니? 
 내가 얘기하던 증거 말이야. 
 뭐라고! 그런 증거가 있어? 
경훈은 깜짝 놀랐다. 인남이 얘기하던 증거
라면 ‘10·26과 비슷한 일’에 대한 증거
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 내가  찾았어. 그것도  외국이 아닌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이야.  믿을 수  없
어. 인남이 네가 그걸 찾아냈다니? 
 이 땅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주한 미군이 
한국의 대통령을 거세하려 했던 기도가 있
었어.  증거, 네 말대로 단순한  말이 아닌 
증거가 필요해. 그걸 대봐.  그래, 에버레디 
계획이란 게 있었어. 
나는 미국의 문서보관소에서  그것을 찾아
냈지.  에버레디?  에버레디, 그건 항상 준
비가 돼 있다는 뜻이지. 그  말은 결과적으
로 주한 미군은 언제나  쿠데타 준비를 하
고 있다는 뜻이 돼버렸어.  뭐? 
 그것은 주한 미군이  이승만 대통령을 축
출하고 미국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을 사
람을 지도자로 앉힌다는  계획이었단 말이
야.  그게, 그게 정말이야? 그런 계획이 정
말 있었어? 
 그럼,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작전도 다양해. 미군이 직접 하는  걸로 계
획을 세웠다가 한국군을  이용해 실행하는 
방법도 검토하고. 어떤 경우든  한국군이나 
한국 정치인을 표면에 내세웠지. 그런 사실
이 서류로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어.  믿을 수가 없어. 그런  게 어
떻게 존재할 수 있지?  비밀 해제가 된 지 
얼마 안 됐어. 어디 이것만 그렇겠니? 나는 
이걸 보면서 10·26이니 12·12니 5·18이
니 하는 것들도 미국의 어느 문서보관소에
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
각했어. 경훈은 인남의 손에서 편지 봉투를 
빼앗듯이 낚아채서는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눈길이 제목을  스치는 순간  경훈은 아연 
긴장했다.
<1급 비밀>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
1. CX50901 3항에  언급된 세부  계획들을 
세웠는데 그것은 일련의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계획은 8군과 협조 아래 
마련됐으며 무초 대사와 사전에 협의한 것
입니다.
2. 모든 계획이 완벽히 준비되기 전에 언커
크, 대사관, 유엔군  사령관이 합동으로 이 
대통령에게 모종의 요구를 해야 할지는 아
직 검토되지 않고 있습니다.
3. 유엔 사령부가 어떤 조치를  취하더라도 
한국 정부의 상징은 보존되어야 합니다. 설
령 군사력을 통한 장악이 필요한 경우에도 
유엔 사령부 이름으로 행해진 조치는 보조 
차원으로 알려져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군
만의 단독 수행은 적절치 않습니다. 왜냐하
면 그럴 경우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
기 때문입니다. 내전까지는 안 간다 하더라
도 작전에 나선 한국  군인들이 꺼려해 한
국군의 반발을 살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유엔군에 장악된 다수의 한국군 부대를 동
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4. 나는 나의 임무 수행에 위협을  줄 대혼
란이 도래할 경우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5. 나는 이 임무를 유엔군 보안대에 맡겨서
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경우 계획
이 조기에  노출되어 이  대통령에게 외국 
간섭에 저항할 시간을 줄 것입니다.
6. 개입이 실행될 때에 대비하여 나는 다음
과 같은 세부 계획을 세워두고 있습니다.
. 이 대통령을 부산 밖 어디론가 유인해 내
기 위해 서울이나 또다른  장소로 그를 유
인한다.
. 예정 시간에 유엔군 총사령관이 부산으로 
간다. 이승만의 독재  정치에 핵심  역할을 
한 주요 한국군  장교 5~10명을  체포한다. 
주요 한국군  시설과 유엔  사령부 시설을 
방호하고 한국군 참모총장을  통해서 계엄
권을 인수한다.
c. 취해진 군사 행동에 대해 이 대통령에게 
통보한다. 그에게 계엄령 해제를 선포할 것
임을 서명받는다. 그리고 국회, 신문사,  방
송국에 대한 자유를 보장받는다.
d. 이 대통령이 만일에 이런 것들을 반대한
다면 그는 외부와 차단된  곳에 감금될 것
이다.
(중략)
경훈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이미 오래 전에 10·26을  예비한 그
림이 그려져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경훈
은 특히 제3항에 유의했다. 미국이  주동을 
하더라도 한국 정부의 상징은 반드시 살려
야 한다는 구절이었다. 이것은 미국이 전세
계에서 행하는 모든 테러와 쿠데타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대단하구나, 어떻게 이런 걸 다 구했니? 
 또 있어. 
경훈은 마치  늘 특종을  터뜨리는 유능한 
기자를 주시하듯이 기대감으로  들떠 인남
의 입가에 눈길을 모았다.
인남은 테이블 위에 있는 펜을 들었다.
No    government     employee    could 
participate in atte
mpts to  kill  foreign leader.   (Executive 
order 11
905)
경훈의 눈이 인남의 펜에서 흘러나오는 잉
크의 궤적을 뒤쫓았다.
 미국 정부의 어떤 공무원도 다른 나라 지
도자의 암살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뭐지?  미국 대통령의 특별 명령이야. 
 무슨 의미지? 
 공작을 금지하는  거야. 레이건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이런 해괴한  특별 명령을 내렸
어. 이걸 보니까 불현듯 이상한  기분이 들
었어. 
 어째서? 
 보다시피 미국 정부는  타국 지도자의 암
살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거잖아?  그건 
당연한 얘기 아닌가? 이런 것을 굳이 선포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래, 전혀 선포할 
필요가 없지. 그런데도 선포했다면 왜 그랬
겠어?  그전에는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반
증?  맞아. 하지만 이 특별 명령은 이미 76
년에 포드 대통령에  의해서 선포되었다는 
게 수수께끼야.  그게 무슨 얘기야? 
 미국 정부는 이처럼  부끄러운 명령을 똑
같은 내용으로 두 번이나 선포했거든. 이미 
포드가 선포했던  것을 레이건이  다시 한 
거지.
 그렇다면 그사이에 무언가 있었다는 얘기 
아닐까? 즉 포드에서 카터를  거쳐 레이건
으로 정권이  바뀌는 사이에  미국 정부가 
타국 지도자의 암살에 관여한 적이 있었다
거나`…`…. 경훈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보
았던 한 문장에서 의외로  막강한 힘을 느
꼈다.
 그렇구나, 그럴 가능성이 충분해. 
 두 개의 명령  사이에 일어났던 전세계의 
지도자 암살에 관한  조사를 해보았어.  단 
한 사람뿐이었어.  누구지? 
경훈은 떠오르는 예감을 누르며 물었다.
 누구였겠어? 
경훈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인남은 잘라 말했다.
 박정희. 
 그게 정말이야? 
 그래, 오직 박 대통령만이 그 기간에 죽음
을 당한 외국의  원수였어. 경훈은  시대를 
꼽아보았다. 1976년 포드에 의해 이 명령이 
선포됐고 1981년에 레이건에 의해 다시 선
포됐다면 그사이의 미국  대통령으로는 카
터가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1979년, 바
로 그 카터의 시대에 죽음을 당했다. 
 인남아, 이것은 매우 유력한 정황 증거야. 
 그래. 레이건은 취임하자마자 자신의 정견
을 미국의 국정에  반영하고 싶었을  거야. 
물론 그로서는 카터의 도덕 정치의 배후를 
공격하고 꼬집음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자 했을 테고, 그것을  상징적으
로 나타낸 것이 바로 이 공작 금지 명령이
지.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정희 시해
의 배후는 엉뚱한 곳에서  그 꼬리를 드러
낸 것이다.
이제 추리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10·26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그  거대한 날개를 서
서히 접고 있었다. 김재규는 군이  자기 편
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진  채 일을 저질렀
고, 김재규에게 그런 환상을 심어주었던 미
국은 일단 박 대통령이  제거되자 그를 버
렸다. 남산을 지나쳐 주한 미군이  있는 용
산으로 가버린 그날 밤의 거사는 순진하고 
정열적이었던 이 사나이에게  결국 죽음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경훈은 김재규가 불쌍하기도  하고 가상하
기도 했다. 모두가 김재규를 비웃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유신의 폭압이  언제까지 이어
질지 몰랐던 게 당시의 현실이었다. 끝까지 
군인이었고, 군인으로 살고 싶어했던  김재
규. 그러나 그의  순진한 성품으로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미국의 공작 팀을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경훈은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이었던 김정호
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기로 약속했다. 경훈
의 마음속에  있는 김재규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이 자연히   김정호에게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거대한 배후
경훈은 호프집에서 만난  김정호에게 인남
을 소개했다.
 제 파트너입니다. 10·26의 엄청난 비밀을 
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친구죠.  그래
요? 
 이 친구 덕분에 저는 10·26 최대의 의문
점이었던 김재규 부장의  용산행을 이해하
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남산을 지나쳐  용
산으로 간 데는 김 부장 나름의 확고한 이
유가 있었다는 얘기요?  그렇습니다. 인간
은 본능적으로 그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자
기의 본거지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김 부장을 얼간이라고 하지만 그
에게는 확고한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계획이오? 
경훈은 김정호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얘기
를 계속했다.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어정쩡하게 불러
놓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오, 그 계획이란 것은?  먼저 
미국의 딜레마부터 얘기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딜레마라니?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고 싶었지
만 그의 죽음이 몰고 올 엄청난 공백을 생
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힘의  공백을 
틈타 소련, 중국, 북한이 준동할 것을 염려
치 않을 수 없었지요.  그래서? 
 이미 김재규는 미국과  깊은 얘기를 나누
는 단계에 있었습니다. 
주한 미군  철수 중단이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선물을 준 미국과 못할 얘기가 없
는 단계에 이르렀던 거죠.  그랬겠지. 
 많은 사람들이 막연히  미국의 배후 작용
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말지만, 김재규
가 택한 거사의 방식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미국의 적극적인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김재규의 거사는 미국이  바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 
 김재규는 어떤 한국인과도  그 일을 의논
할 수 없었습니다. 노출 즉시 죽음 혹은 그 
이상의 것이 닥칠 테니까요.  그랬을 거요. 
 그러나 사람이 그런  일을 아무와도 의논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특히 김재규처럼 
뜨거운 사람은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당
시 브루스  대신에 김재규를  전담하러 온 
홀리건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마
인드 컨트롤 전문가였죠. 아마 CIA의 터너 
국장은 홀리건을 보내며  김재규에게 이렇
게 얘기했을 겁니다. 
“아주 특별한  사람을 보내니  모든 것을 
그와 의논하시오. 미국은 당신이 무엇을 하
더라도 뒤에 있을  것이오. 박정희는  절대 
자의로 물러나지는 않을 거요. 이제 한국의 
미래는 없소. 이 불행한 나라 한국, 학생이 
한 해에도 수백, 수천 명씩  희생되는 나라 
한국, 이 나라를 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소, 
당신밖에는. 김 부장,  당신이 무엇을 하더
라도 미국은 당신의 뒤에 있소.  무엇을 하
더라도 말이오. 우리는  당신의 뜻에  따라 
미군 철수도 중단하지 않았소?  미국이 당
신을 받치고 있소.  홀리건은 바로  나라고 
생각하시오. 모든  것을  그와 의논하시오. 
모든 것을 말이오.”  음`…`….
 김재규는 홀리건과  거사에  대한 모의를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모의가 아니라도  최소한 상의는 했
을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오? 추론
의 근거는? 
김정호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반문이 아니
었다. 자신도 동의하지만 경훈이 그렇게 생
각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었
다.
 거사가 미국이  바라는  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이죠. 미국은 김재규의 거사를 통해 바
라던 대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습니다.  
두 마리 토끼라면? 
 박정희 대통령도 제거했고 안보상의 공백
도 없었죠.  안보상의 공백이 없었다는  것
은 무슨 뜻이오? 
 충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근 20년을 집권해  온 박 대통령이 
제거됐다면 한국에서는 엄청난 소용돌이가 
생겨나는 것이 정상이었겠죠. 국론의 분열, 
충돌은 불을 보듯 뻔했구요. 그러나 실제로
는 아무 충돌도 없었습니다. 군과  군의 충
돌, 군과 중앙정보부의  충돌, 심지어 경호
실과 중앙정보부의 충돌조차도 없었습니다. 
결국 힘은 가장 깊은 곳, 정치적 혼란을 최
소화할 수 있는 곳으로 흘러  들어갔죠. 즉 
군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요?  …`…. 
 김재규의 선택입니다. 아니,  미국의 선택
입니다. 
 그러나 이상하지  않소? 김  부장은 의당 
정보부로 가고  싶어하지 않았겠소?   모든 
주도권이 군부로 넘어가는  육본으로 가고 
싶었을 리가 없잖소?  바로 그것이 홀리건
의 역할입니다. 홀리건은 김재규를  설득했
습니다. 아니 설득이 아니라 유혹했을 겁니
다. 믿어라, 이 홀리건을 믿어라, 아니 터너 
국장을 믿어라, 아니  미국을 믿어라, 아니 
유신의 심장을 쏠 당신  자신의 영웅적 행
위를 믿어라.
 미국과 한국 국민이  당신의 뒤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고는 또 이렇게 얘기했겠죠. 
당신의 거사가 진정 한국을  위한 것이 되
려면 내부의 충돌을  야기해서는 안  된다, 
군과 중앙정보부와 경호실 중 어느 쪽이든 
충돌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진정한 애국이
다, 그런 순수한 애국은 당신만이 할 수 있
는 것이라고.  김 부장이 그냥 있었을 리는 
없지 않소?   “나의 목숨은?   나의 거취
는?” 하고 물었을 것 아니오.  그것은  미
국이 책임진다고 했겠죠. 
 그러나 그것은 너무  미흡하지 않았겠소? 
직접 방아쇠를 당기는 당사자에게는.  그랬
겠죠. 하지만 거기에는 만족할 만한 대답이 
있습니다. 이것은 10·26의 또 하나의 의문
에 대한 해답도 됩니다.  10·26의 또 하나
의 의문이라면? 
 어째서 김재규는 정승화를 그렇게 어정쩡
하게 불러두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정쩡
하게라, 그거 참 그럴듯한 표현이오. 김 부
장은 육군 참모총장을 부른  것도 안 부른 
것도 아닌 형태로 불러두었으니까.  그렇습
니다. 홀리건은 이렇게 대답했겠죠. “부장
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한국군은  주한 미
군이 꽉 잡고 있습니다. 비단 작전권뿐만이 
아니라 중요한 인물의 인사권도 사실상 미
군에게 있습니다. 고위 장성 중  누가 감히 
미군과 맞선다는 말입니까. 일단  유사시에 
군은 우리가 책임질 겁니다. 부장님은 아무
도 못하는 그 일,  부장님만 하실 수  있는 
그 일에만 신경을 쓰시면 됩니다.
 군은 우리가  책임집니다. 군은  부장님이 
제시하시는 노선을 따라갈 겁니다.  우리는 
그 부분을 이미 확실하게  해두었습니다.”  
김 부장이 그 말을 그냥 따랐을까? 
 따랐을 겁니다. 김재규는 거사 직후  육군 
본부에 가서 줄곧 계엄 선포를 주장했습니
다. 이것은 ‘군은  내 편’이라는  확고한 
신념에 기인한 주장입니다. 또한 안보의 공
백이라는, 미국이 주입한 개념이 그의 머리
에 꽉 차 있었다는 얘기도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와 정승화 사이에 거사에 대한 
아무런 언질도 없었습니다.
 만약 언질을  했다면  누군가가 김재규와 
정승화 사이의 가교가 되었다는  얘기인데, 
한국인 중에는 그런 역할을  할 사람이 없
습니다. 김재규가 어떤 한국인에게도  거사
에 대해 의논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가 이
미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김재규
는 군을 자기 편으로  생각하고 그 중요한 
거사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정보부장과  군
을 확실하게 이어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자, 
그것은 바로 미국입니다. 홀리건의  마인드 
컨트롤은 이런 방향으로  김재규를 유도했
던 것입니다.  그랬을까?  나는 늘 김재규 
부장이 왜  정 총장을  그렇게 어정쩡하게 
불러놓았던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는
데, 이 변호사의 설명이 거기에  대해서 확
실한 해답은 되지만  말이야`…`…. 김정호
는 머리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수십 년을 
굳혀온 자신의 신념이 조용히 스러지는 기
분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의문이 있소. 
 무엇입니까? 
 그렇게 미국이 김  부장과 군을 이었다면 
어째서 김 부장 혼자서  죽음을 당해야 했
던 거요? 12·12 때문이오? 그렇다 하더라
도 미국은 김 부장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혹시 누군가  얘기하듯이 김  부장은 아직 
죽지 않고 어딘가에서 이름을 바꾸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얼토당토않은  얘기입
니다.  김재규는  분명히   사형당했습니다.  
그렇다면 뭔가 잘못된 것  아니오? 미국이 
밀었던 김  부장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은 
것은? 미국이 김 부장을 살릴 정도의 힘은 
있지 않소?  다  끝난 상태에서  김재규의 
목숨을 살려주느냐 않느냐는 것은 이미 중
심 사항이 아니었죠. 문제를 간단하게 끌고 
가자면 미국으로서는 김재규라는 사람,  이
미 소임을 다한 그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더 편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박 대통령 사
후 경호실이나 중앙정보부가 없어져주어야 
군으로 힘을 한데 모을 수 있고, 또 그것이 
신속하게 안정을 찾는 최선의 길이었을 테
니까요.  충돌 없이 말이지. 
 그렇습니다. 김재규는  심문을 받는  도중 
수사관에게 몇 번에 걸쳐서 미국에서 연락
이 없었느냐고 물었답니다. 하지만 헛된 메
아리일 뿐이었죠. 이미 미국에서는 그에 대
한 처리 방안이  잡혀 있었으니  말입니다. 
김정호는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말이 없
었다. 
그는 거푸 맥주 두  잔을 들이켜고는 미간
을 좁히며 확인하듯 다시 물어왔다.
 음, 미국이 군을 책임진다고 김 부장을 설
득하고는 실제  박 대통령을  살해하자 김 
부장을 버렸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김정호는 한참 동안이나  무언가를 생각하
며 간간이 술잔을 기울였다.
 왜 미국은 김  부장을 미더워하지 않았을
까? 
 미국은 박 대통령이  죽으면 그를 따르던 
친위장교들의 반발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고 예상했겠죠. 김재규를  사주할 때도  그 
점을 심사숙고했을 겁니다. 그들의  반발을 
한 몸에 받는 김재규를  앞장세워 안보 공
백을 막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죠.  그렇
군. 어리석은 사람. 그런 걸 모르고 미국놈
들을 그리 철저히 믿다니.  어차피  김재규
는 한계가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미국이 두
려워했던 것은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처리
하고 나서 미국과의 관련을 무기로 국정을 
장악하려고 시도하는 경우였죠. 그럴  경우 
미국은 김재규에게 휘둘려 끝간데 없이 끌
려가야 하니까요. 미국으로서는 결코  원치 
않는 결과입니다. 따라서 미국은 이중 플레
이를 했던 것입니다.  이중 플레이라? 
 그렇습니다, 이중 플레이. 
 누구와 이중 플레이를 했단 말이오? 
 노벰버, 바로 육사 11기입니다. 미국은 권
력의 성향으로  보나 군부의  편제로 보나 
육사 11기가  박정희 이후를  맡을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해 있다고 이미 판단을 끝낸 
뒤였습니다. 따라서 김재규에게는 박정희를 
살해하는 임무만을 수행토록 하고 그 뒤는 
육사 11기가 정리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
럼 육사 11기가 일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
라는 얘기요? 정승화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뭉친 자들의 세력이 자연스럽게 확장된 것
이 아니오?  이제껏 모두가 그렇게 생각해 
왔지만 10·26의 전모를 보면 그렇지 않습
니다. 우선 미국의 정보·공작 팀이 끊임없
이 육사 11기를 스터디해 온  것, 12·12를 
묵인한 것, 그리고 5·18 때 한국군의 광주 
투입을 허용한 것으로 보아서는 그들은 이
미 긴 구도를 짰던  것 같습니다.  미국은 
육사 11기에게서 무엇을 바랐을까? 
 무엇보다도 박 대통령과는 다르게 되어주
기를 바랐겠죠. 핵무기니 미사일이니  하는 
것들은 다 넘겨주고,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나 하고, 미국이  사라는 무기나  넙죽넙죽 
잘 사주고, 자주 국방이니 뭐니  하는 것은 
생각도 하지 말기를  말입니다.  절묘하군. 
김 부장의 대통령 시해는 한편으로는 미국
의 뜻을 실현하고, 또 한편으로는 신군부의 
집권을 위해 철저히  위장되고 이용되었구
먼.  하지만 이제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최소한 김 부장을  희대
의 얼간이로 보는  시각만이라도 없어졌으
면 좋겠소. 
그래도 독재와 유신을  무너뜨린 장본인인
데 말이야`…`…. 경훈은  김정호를 호프집
에 남겨둔 채 악수를 나누고  나왔다. 김정
호는 10·26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506부대
손 형사는 시체로 발견됐다. 등산객이 발견
한 손 형사의 시체는 참혹했다.
복수, 경훈은 입 속으로 이 단어를 몇 번이
나 반복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각해 보
는 말이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복수의 방
법을 생각하던  경훈은 결국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것은 한  개인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경훈은 손 형사가 가지고 온 다섯 명의 이
름들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손 형사를 죽음
으로까지 이끈 그 이름의 주인공들을 알아
내는 것이 바로  복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백방으로  알아봐도 그중  한 명도 
밝혀낼 수 없었다.
 분위기를 한번 바꿔보자. 탁 트인  바다라
도 보면 뭔가  떠오를지 모르잖아.  인남은 
경훈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두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영동고속도로로 빠져나가 
대관령을 넘었다. 경포대,  낙산을 지나 바
닷가를 끼고 설악산 방향으로 달리다가 인
남이 물었다.
 설악산으로 갈까? 
 아니, 그냥 더 가보자. 바다가 시원한데. 
 뭐 좀 생각날 것 같아? 
 글쎄, 열쇠는 그  평택의 506부대에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나도  그 생각 중이었
어. 제임스가 그 부대에 하루에  두 번씩은 
꼭 다닌다는 거나, 그 이름들이  평택에 갔
다 오던 제임스의  안주머니에서 나왔다는 
거나 506과의 관련은 확실한 것 같은데`…
`….  노동계든 어디든 다 뒤져봐도  그 이
름들은 나오질 않아. 전화번호부로도 다 확
인했지만 다섯 명의 이름들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도 없고. 제임스도 평택에 갔다 오는 
일말고는 꼼짝 않고 있으니  동태를 통 알 
수 없어. 자동차가 속초, 간성, 화진포를 지
나자 눈앞에 통일전망대의  표지판이 나타
났다.
 이제 더 이상은 못 가. 
 통일전망대에 한번 올라가 보자. 
 그래. 
두 사람은  자동차에서 내려  안내 버스를 
타고 통일전망대에 올랐다. 망원경으로  북
녘 산하를 바라보던 인남이  갑자기 두 눈
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런데 경훈아, 제임스만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소용없지 않을까?  무슨 말이야? 
 제임스가 시선을 끌어모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
야. 우리가 그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 
뒤에서 딴 음모를 꾸미는  게 아닐까 하는
`…`….  …`…. 
 제임스의 전력도 그렇고  현재 어느 정도
는 정체가 드러났잖아. 
그렇다면 미국이 무슨 일을  한다 해도 그 
사람을 통해서는 안 할 것 같은데.  글쎄. 
인남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럴 가능성이 충
분했다.
 그 사람들 목표는 결국 남북 정상 회담을 
못하게 하는 거잖아.  
그렇지. 
 그런데 굳이  김  대통령에게 테러까지야 
할까? 그러면 세계 언론의 시선을 확 끌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 다음은 몰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경훈은 인남의 얼굴을 한동안 뚫어지게 쳐
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필시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
원해서 남북 정상 회담을 좌절시키려 하겠
지. 그러나 그런 방법들이 통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테러밖에 없을 거야. 하지만  네 말
대로 굳이  김 대통령이  아니라도 가능한 
일일 수도 있지.  무슨 말이니? 
 남북 정상 회담에는 김 대통령이 아닌 또 
하나의 정상이 있잖아.
  또 하나의 정상이라니? …`…`북한! 
인남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그래, 그럴 가능성도 있어. 
순간 경훈은 머리가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아, 어쩌면 그 이름들이란`…`…. 
 경훈아, 뭔데? 
 잠깐만. 좀더 생각해 보고. 그래,  네가 맞
았어. 정상 회담을 무산시키려면 북한을 건
드리는 방법이 있어. 개연성이라는  측면에
서는 그게 훨씬 가능성이  높아.  그럼 그 
이름들이 뭔데?  확인해 봐야겠지만  짐작
이 가는 데가 있어. 네 말에서 힌트를 얻었
어. 제임스가 감청 부대를 드나들고 있다면 
이것은 서울을 감청하는 것만이 아닐 가능
성이 높아. 북한을 감청할 가능성도 있지. 
 그럼 그것이  북한  사람들의 이름이라는 
거야? 
 그래, 일은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을지도 
몰라. 
 북한에서 무슨 일이라도  꾸미고 있는 걸
까? 
 내 짐작대로라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냐. 
 왜? 그 이름의 주인공들이 누군데? 
경훈은 뭔가 말하려다 말고 멈추었다.
 아냐, 확인해 보고. 어서 서울로 돌아가자. 
서울로 돌아온 경훈은 케렌스키를 만났다.
 그 명단이 무엇인지 짐작이 갑니다.  그들
은 여기 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북한 사람들이란 말이오? 
 그럴 겁니다. 
 어떤 사람들이지? 
 대략 짐작은 가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
습니다. 다만 케렌스키 변호사님이  여기서 
제임스를 지키고 계셔도 그자의 범죄 행위
를 포착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자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주는 역할만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케렌스
키는 한동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이 변호사, 그  명단을 지금 즉시  나에게 
주시오. 
 어떻게 하시려구요? 
 그것을 바로  의회와  언론에 팩시밀리로 
보내겠소. 추가 내용은 없이 일단 팩시밀리
의 접수 시간만 남게 하는 거요. 만약에 그 
이름들로 말미암아 무슨  문제가 발생한다
면 그 접수 시간이 매우  중요해지지. 그들
이 사전에 무슨 공작인가를 했다는 증거가 
되니까.
 케렌스키는 경훈과 마찬가지로 그 이름들
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대다수의 선량한 미국  국민과 정부 담당
자들에게 이제 더 이상 미국이 CIA와 같은 
공작 집단에 이끌려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겠소. 그동안 이 변호사가  10·26의 
배후를 캐러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케네디의 죽음도 밝혀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 
정부의 예산으로 활동하는  공무원들이 암
살, 테러, 쿠데타, 언론 조작 등에 관여한다
는 것은 미국의 수치요. 나는  이런 것들이 
없어지도록 노력하겠소. 그리하여 한국인들
에게 진정한 미국인들의  우정을 심어주고 
싶소. 케렌스키와 경훈은 굳게 손을 맞잡았
다. 
누가 뭐라 해도 미국은 역시 초강대국이고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다. 아무리 우리가 미
국을 욕하고 증오해도, 문제가 생기면 역시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마지막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미국이다.  그리고 
그 미국을  끌어가는 힘은  케렌스키 같은 
사람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케렌스키 변호사님, 고맙습니다.  이제 다
시는 미국의 공무원이 타국 원수를 암살해
서는 안 된다는 이상한 특별 명령 같은 것
은 필요 없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러면 한국과  미국은 그  각별한 인연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될 겁니다.  저는 진정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경훈은  케렌스키
에게 다섯  사람의 이름을  적어주고 나서 
다시 한 번 악수를 했다.
다음날 경훈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
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바로 제임스
였던 것이다. 
 후후, 놀라지 마시오. 당신네 회사에 일을 
하나 맡겼소. 당신네 정부가 차세대 미사일
의 구매  의향서를 인도한  상황에서 마구 
해약을 하고  있으니 소송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오. 이제 이 변호사는 나의 일을 위
해 뛰어야 할 거요. 나는 당신에게 이 사건
을 맡기고 싶다고 얘기했거든. 물론 마음에 
안 들 거요. 그러나 할  수밖에 없지. 그게 
당신들의 한계요. 모두들 입으로는  미국을 
욕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미국을  위해 뛰는 
거요.  대담하군. 여기까지 불쑥 들어와 궤
변을 늘어놓다니.  증거, 문제는 증거가 없
다는 데 있소. 증거가 없을 때 사람은 대담
해지는 법이오. 10·26도 김재규가 입을 다
물었으니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니오? 이제
는 다 역사 속에 묻혀진  이야기가 되었소. 
어쨌거나 한국은 박정희의  죽음으로 말미
암아 독재로부터 헤어나지  않았소.  나는 
당신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소.  당신은 살
인에 관여한 것이 그렇게나 즐겁소?  나는 
나의 조국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이상한 것은 오히려  한국인들이
오. 한국인들은 어떤 이념으로  살아가는지 
모르지만, 당신들처럼 자신의 조국을  업신
여기고 창피하게 생각하는  국민들도 없을 
거요.  우리는 맹목적인 애국심보다는 세계 
평화와 인간 존중의 이념을  갖고 살고 있
소.  푸하하하! 그래, 한국인들은 대단한 사
람들이오. 그런 면에서는 세르비아니  크로
아티아니 하는 가난한  동유럽의 나라들이 
부끄러워하겠군. 그들은 타민족에게 고난받
는 자기 민족이 안타까워  모든 걸 버리고 
동포를 구하기 위한 전쟁을 마다않으니 말
이오. 그래서 한국은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
면 미국  편에서 앞장서서  북한과 전쟁을 
하겠다고 나서는 거요?  그것은 북한이 나
가는 방향이   잘못되었기에 그런  것이오.   
방향이 잘못되었다?  웃기는 얘기요.  국제 
정치에는 잘잘못이 없소. 강대국의  논리가 
그냥 그대로 통하는 거지. 북한이  핵을 개
발하고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 그리도 잘
못된 일이오? 북한이 그런  것들을 개발하
면 남한보다 군사력에 있어 결정적 우위에 
설 것 같소? 천만의 말씀이오. 북한이 핵을 
개발하면 남한도 같이 개발하면  될 것 아
니오? 남북간에 전쟁이 난다면  핵이 있으
나 없으나 결과는 비슷할 거요.  북핵은 남
북한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 미국은 북한
이 장거리 미사일에 핵을 장착하면 본토가 
위협당할 수 있기에 한반도의 초토화를 무
릅쓰고라도 북폭을 감행하려는 거요.  게다
가 일본과 한국이 북한  핵과 미사일을 기
화로 마찬가지의  무장을 할까  봐 겁내는 
거지. 그렇게 되면 미국의 군사력을 바탕으
로 한 패권주의는  끝장이 나기  때문이오. 
이제 알겠소?  …`…. 
제임스는 이런 정보쯤은 우습다는 듯이 개
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이런 미국의 전쟁에  남한은 기꺼이 미국
의 전위대가 되려 하오. 
그런 한국인들이 그렇게 자랑스럽소? 미국
의 뒷다리를 잡고 민족을 부정하는 사람들
이 훌륭하오?  그게 인간  중심이오? 분단 
50년 만의 쾌거라는 금강산 방문을, 북한이 
그 자금으로 남침 준비를 한다면서 스스로 
무산시키려는 민족이  그렇게나 훌륭하오? 
제임스의 비아냥거림은 점점 도를 더했다.
 간첩선 한두 척만 내려오면 모든 대북 유
화책을 취소하라고 아우성치는  언론과 국
민이 바로 당신네 아니오?  미국 쪽에서든 
북한 쪽에서든 조금만  장난치면 당신네들
의 햇볕 정책이란 그냥  무너지고 마는 거
요. 분단 50년 만에 처음으로 나온 민족 화
해 정책이란 게 말이오. 이  변호사는 그런 
조국이 자랑스럽소? 내 보기에  한국의 배
운 사람들은 조국에 봉사하는 것을 부끄러
워하는 것 같던데. 내 말이 틀렸소? 조국이
니 애국이니 하면 비난받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오. 겉멋 든 한국인들은 머리를 
저기 프랑스 파리쯤에서 빌려오는 것 같소. 
그것도 엉터리로  말이오. 프랑스?  그들의 
애국심은 아마  한국인들의 두  배는 넘을 
거요. 세계의 강국은 모두 애국심과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철철 넘치고 있소.  이 변호
사, 내가 CIA를 위해  일한 것이 그렇게도 
부끄러운 일이오? 나는 자부심이 있소.  조
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유지하는  데 큰 역
할을 했다는 자부심 말이오.  당신의  맹목
적 애국심이 약소국에 해가 되었으니 하는 
말 아니오?  그럼 당신들도 애국심으로 나
라를 지키면 되잖소? 내가  보기에 미국은 
한국이 없어도 외눈 하나 깜박 안 할 거요. 
하지만 한국은  미국이 없으면  하루도 못 
버티고 쓰러질 나라지. 그런데도 할말이 있
소?  어쨌거나 당신은 살인자요! 
 살인?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살인
은 김재규가 한 거요. 
광주사태? 그것 역시 한국의  정치 군인들
이 저지른 거요. 우리는 독재로부터 한국민
을 구출하고 광주의 소요를 신속히 해소하
도록 하여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남한을 보
호했소. 우리가 당신네 오합지졸의  형편없
는 나라를 구해주는 세계 평화의 주춧돌이
란 말이오.  그런 궤변은 그만  늘어놓으시
오. 어쨌거나 당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소. 게다가  당신은 지금도  무슨 
공작인가를 꾸미고 있소.  증거, 증거가 없
지 않소. 당신네 대통령의 햇볕  정책은 한
반도에 불안을 가져오고 있소. 당신이 입수
한 명단의 그 다섯 사람은 남북 정상 회담
에 부정적 시각을 가진 한국인들일 뿐이지. 
그들은 다양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오. 심
지어는 노동운동가도 있소.   나는 그들을 
찾아내고 말 거요.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당신은  똑똑하니
까. 당신이 그들을  찾아내면 나도  패배를 
인정하고 한국을 떠나겠소.  미국에 돌아가
면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거요. 그
가 당신을 법정에 세울 테지.   후후후. 케
렌스키를 말하는군. 그가 당신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모양이지?  …`…. 
 얼빠진 작자요. CIA의 범죄를 조사한다나 
어쩐다나, 보장된 영화를 버리고 고난의 가
시밭길을 헤치는 자지. 누구의 노력으로 일
등 국민으로 사는지도 모르고 말이오. 군사
력과 CIA를 빼면 이 아시아의  일벌레들과 
어떻게 경쟁할  수 있다고  그리 나대는지
`…`… 딱한  친구요.  그러나  케렌스키는 
당신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훌륭한 미국인
이오. 그는 틀림없이 자신의 손으로 당신의 
인생을 끝장내고 말 거요. 제임스는 차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5천 년의 하늘
경훈은 호텔을 나와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
무하는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급히 만나야 합니다. 
 이 변호사,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전화로 얘기할 순 없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럼 점심이나 같이하지. 
 안 됩니다. 지금 즉시 만나야 합니다. 
비서관은 경훈의 비장한 목소리에 놀라 바
로 만나기로 했다.  경훈은 광화문  부근의 
커피숍에서 선배를 만났다.
 이 이름들을 확인해 보세요. 
 뭐하는 사람들이지? 
 모릅니다. 하지만 추측은 해봤어요. 
 말해 봐. 
 이들은 북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북한 사람들일 경우에는 엄청난 문
제가 있습니다.  무슨 소리야? 
 하여튼 확인해 보세요. 시간이 없으니  신
속하게 해야 합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경훈은 미국의 북한 폭격 가능성을 
보도하는 전광판을 보았다. 그러나  하루를 
꼬빡 기다려도 선배로부터는  아무런 연락
이 없었다. 경훈은 초조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 시간이 없어서 알아보질 못했어. 그런
데 그게 정말 신빙성이 있는 거야?  선배! 
누군 시간이 남아나서  이러는 줄  아세요! 
경훈은 화가 치밀어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얻은  정보야? 내 입
장도 있잖아. 밑도끝도없이 북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하면서 던져주면 어떻게 해. 이런 
식으로는 알아보기 어려워.   선배, 그들은 
전문가예요. 선배가 지레짐작해서 되니  안 
되니 평가할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어
려우면 관둬요!  미안해. 
경훈은 수화기를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놨
다. 마침 사무실로 찾아와 있던  인남이 불
안한 눈초리로 말했다.
 너 이러는 거 처음 본다. 
경훈은 다시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어떻게 하란 말이야? 우리더러 도대체 어
떻게 하란 말이냐구? 미국이  북한을 치면 
미국을 따라  북한에 총부리를  대란 말이
야? 북한은 우리 형제 아냐?  5천 년 민족
이고 뭐고는 이제 없는 거야?  이 나라 사
람들에게 해답을 줘야 할 게 아냐? 한미방
위조약이 있으니 미국이 북한을 치면 자동
적으로 미국 편에서 싸워야 하는 거야? 북
한이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이유 하나로 말
이야? 미국은 미사일 없어? 우리는 미사일 
개발하면 안 돼? 미국이  파는 미사일이나 
달라는 대로 주고 사와야 하는 거냐구? 북
한이 핵을 개발하면 삼천리 강토가 초토화
되는 전쟁을 치러야 하는 거야? 미국이 하
자는 대로?  경훈아, 그만해. 무섭다. 
인남은 경훈의 눈이 벌겋게 달아오르다 못
해 살기를 띠는 것을 보았다.
 왜 5천 년을 한 핏줄로 살아온 역사를 무
시하는 거지?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 폭격
은 미국의 방법일  뿐이야. 우리는  거기에 
동조할 수 없어. 한반도에 전쟁을 불러오는 
미국의 북한 공격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
다구! 경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가자! 
 어딜? 
 술을 안 마시고는 못 견디겠어. 오늘 인남
이 너, 나하고  미치도록 마셔보자. 경훈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 비서가 깜짝  놀라 들
고 있던 수화기를 떨어뜨렸다. 인남도 경훈
의 그런 모습은 처음 보는 터라 불안한 마
음으로 뒤를 쫓았다. 
경훈이 회사에서 나와 눈에  띄는 대로 아
무 술집이나 찾아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두 사나이가 있었다. 그들은 경훈의 모습을 
지켜보다 휴대폰을 꺼내  누구에겐가 보고
했다.
경훈은 소주를 거푸  다섯 잔이나  마셨다. 
인남이 말리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금방 
술기가 오른 경훈이 처연한 얼굴로 하소연
하듯 힘없는 목소리로 얘기를 늘어놨다.
 부끄럽다, 인남아. 나는 언젠가 나도 모르
는 새에 반(半)미국인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 그러나 그때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온
전한 미국인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지. 알겠
니? 인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경훈
만이 아니었다. 자신은 더하면 더했지 못했
을 리가 없었다.
 또 언젠가는 미국이 그 강력한 힘으로 너
저분한 북한을 싹 쓸어버렸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어. 얼마  전까지도 북한과  미국이 
대립한다면 나는 미국이 이겼으면 하고 바
랐지. 쥐꼬리만한 양심이  걸릴 때면  나는 
미국이 북한 정권만  무너뜨리면 한반도에
는 밝은 내일이 열릴  것이라고 자기 합리
화를 하곤 했어.  나도 그랬어. 
 그런데 인남아,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거니? 
왜 이렇게 괴롭냔 말이야. 경훈이  다시 거
친 손길로 술잔을 비울  때 인남은 소스라
치게 놀랐다. 검은 양복을 입은  두 사나이
가 경훈을 응시하면서 다가왔기 때문이다.
 제임스. 
인남의 입에서 제임스라는  이름이 튀어나
왔다. 경훈 역시  취중에도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야, 너희들은? 
 아, 미안합니다. 놀라셨습니까? 
인남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사나이들이 너
무도 공손했던 것이다.
 이 변호사님, 고위 정보 책임자가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급히 청와대로 들어가셔야겠
습니다.  누구요? 당신들은? 
사나이들은 신분증을 내보였다. 국가정보원
의 직원들이었다.
 가시죠. 
경훈과 인남은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에 올
랐다. 인남은 혹시  대통령을 만나게  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경훈이 술에 취한 사
실이 못내 불안했다.
자동차가 청와대 입구에  도착하자 경훈의 
선배인 비서관이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다
가 안내를 해주었다. 안내하는 동안 선배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자, 이리로. 
비서관은 경훈과 인남을 정중하게  대했다. 
경훈과 인남은 회의실이 아닌 대통령 집무
실로 안내되자 당황했다. 국가정보원  직원
이 대통령도 나올 것이라고 얘기했을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막상 대통령을 만나게 된
다고 생각하자 잔뜩 긴장이 되었다. 인남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비서들이  대기하
고 있다가 집무실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오시오, 이 변호사. 
대통령은 몇 사람과 함께  앉아 있다가 경
훈을 반갑게 맞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이 변호사는 아주 탁월한  국제변호
사라면서요?  과찬이십니다. 
 옆에 있는 숙녀는 누굽니까? 
 박인남, 저의 파트너입니다. 
 편히들 앉으세요. 자, 내가 이분들을 소개
하겠소. 우선 비서실장, 그리고 국가정보원
장, 여기는 국방장관,  그리고 담당 비서관
이오.  이 변호사는 이 이름들이 북한 사람
들의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명단은  어디서 
얻은 겁니까? 담당 비서관이  낭비할 시간
이 없다는 듯 바로 질문을 던져왔다.
 먼저 그 이름의  주인공들이 북한 사람들
이 맞는지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국방장관
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각료들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국가정보원장
이 넉넉한 얼굴을 약간 찌푸리며 대답했다.
 모두가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오. 
 요직이라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이 변호사, 우리는 `…`…. 
담당 비서관이 뭐라고 얘기하려 하자 국가
정보원장이 손을 내저었다.
 모두가 평양에서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
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오. 이  변호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겠죠?  역시  그랬군
요. 
인남은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역시 경훈의 
추리는 비상했다.
 자, 이제 말해 줄 수 있겠지요? 
국가정보원장이 차분한 어조로  경훈을 재
촉했다.
 저는 그 사람들의  명단을 한 미국인으로
부터 빼냈습니다.  뭐라구요? 
모두들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미국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담당 비서관이 재빨리 물었다. 
 전직 CIA 요원입니다. 아니  어쩌면 현직
인지도 모릅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지금 
무기상을 하고 있는 그가 김재규의 배후에
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입
니다.  그가 이 명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
실에 대해  이 변호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는 미국의 군산 복합체의 이
익을 위해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북 
정상 회담이 군축으로 이어지는 것을 극도
로 싫어합니다. 또 우리 정부의  햇볕 정책
도 혐오하고 있습니다. 북한과 충돌이 있을 
경우 그간 햇볕 정책으로 형성된 그나마의 
남북 화해 분위기가 자신들의 패권적 국제 
질서 유지에 방해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처음에 그들이 우리  측에 테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들의  목표는 
북한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북한을  군사
적으로 압박하는 동시에  북한에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
다.  이 명단이 그 미국인으로부터 나온 것
이 확실합니까?  틀림없습니다. 
경훈은 이제까지 있었던 일을 소상히 설명
했다.
이제껏 묵묵히 듣고만 있던 대통령이 그제
야 입을 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오. 미국뿐  아
니라 일본, 중국,  러시아, 그 어느  나라도 
우리의 통일을 원치  않소. 일본은  이웃이 
강대국이 되어 좋을 것이 없고,  중국은 한
반도가 통일되면 바로 조선족에게 큰 영향
을 미쳐  만주 지역에서  한민족 공동체가 
형성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소. 러시아도 역
시 동시베리아에 고려인 바람이 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통일이 되지 
않는 한 한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생각하
오. 우리는 이 어려운 현실을  떨치고 일어
나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
북 정상 회담이 필수적이오. 그리고 남북간 
군사 대결을 종식해야 하오. 당연히 군축을 
해야지요. 한민족의 에너지가 이렇듯  서로
를 향해 파괴적으로 쓰여서는 안  되오. 그 
힘은 세계와의 경제 전쟁에 돌려져야 하오. 
물론 이런 정책이 미국과  충돌할 수도 있
소. 그러나  우리에게는  당위성이 있어요. 
경훈은 민족의 미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철학이 담긴 대통령의 목소리를 듣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한 줄기 뜨거운 기운이 치
밀어올랐다.
 대통령님,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우리
의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대외 공작
을 추적하다 보니 대통령님의 대북 정책은 
앞으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
되었습니다. 남한의  보수  기득권층, 북한 
강경파와 군부의 반대  공작까지 고려하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잠
수함 세 척만 내려와도  모든 것이 물거품
이 되고 마는 어려운  상황에 봉착해 있습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화해는 반드
시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은 중단  없는 노
력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대
통령님의 대북 정책은 확실한 물줄기를 형
성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끌고  가지 
못하고 끌려다닌다면 우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박약아 신세가  되고, 결
국에는 비참한 미래를 맞고야 말 것입니다. 
대통령님, 한반도 5천 년의 역사는  대통령
님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경훈의 말에 귀기울이고 있던 대통령은 국
가정보원장에게 지시했다.
 국가정보원장, 북한에 이 이름들을 통보해 
주시오. 우리 정보  전문가들도 이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던  참 아닙니
까? 군부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이 가장 
큰 자들이라면서요.  네, 그렇습니다. 
대통령은 자상하나 뚜렷한 신념이 담긴 눈
길로 경훈과 인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상 회담은 해야만 하
오. 민족이 사는 길은 북한을  시장 경제로 
이끌어내는 것이오. 그들에게 돈 버는 법을 
가르치고, 주민들로 하여금 탄탄한  경제에
서 오는 가정의 행복을 맛보게  해야 하오. 
그것만이 한반도의 안전을  보장하고 민족
의 미래를 보전하는 유일한 방법이오. 누구
의 어떤 방해를 받더라도  햇볕 정책은 무
너져서는 안 되오. 우리는 인내로 견뎌야하
오. 무엇보다 애정과  시간이 쌓여야  하는 
일이거든요. 그리고 이  모든 화해  정책은 
굳건한 국방력이 뒷받침될 때만  가능하오. 
강병 강군을 육성하되 무기 구입은 효율적
으로 알뜰하게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집행
되어야 하오. 내가  미국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을 우리 국방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
는 것은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욱 안전하고 폭넓게  이끌어내기 위해서
요. 물론 엄청난  비용 절감  효과도 있소. 
경제를 고려하지 않은 국방만의 국방은 뇌 
없는 공룡이 될 수 있지요.   네, 알겠습니
다. 
각료와 비서들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
나 경훈은 대통령의 설명에서 뭔가 아쉬운 
것을 느꼈다. 가장 중요한 현안이  빠져 있
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물으면 대통
령이 난감해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경훈이 
입술을 달싹거릴 때 인남이 끼여들었다.
 대통령님, 지금 우리 사회는 완전히  양분
되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세계를  움직이
는 강대국을 따르느냐, 아니면 5천 년을 이
어온 우리의 역사와 민족을 지키느냐의 기
로에 서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을 주
십시오.  무슨 말이오? 
 만약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우리는 어
떻게 해야 합니까? 인남의 이 말에 좌중의 
분위기는 갑자기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각
료와 비서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질문
을 하려 했던 경훈조차도  막상 인남의 물
음이 터져나오자 긴장했다.
 아, 그런 문제는`…`…. 
담당 비서관이 황급히 인남의 질문을 막으
려 하자 대통령이  손을 내저어  만류했다. 
그러고도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비서실장. 
 네, 대통령님. 
 미국의 대통령에게 전화를 연결시켜요. 
 지금 말입니까? 
 그렇소. 
 대통령님,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걸어요. 
비서실장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핫라인의 
단축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전화는 미국 
대통령과 연결이 되었다. 대통령은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부드러운 음성으로 통화를 
시작했다.
 각하, 먼저 저는  그간 외환 위기를  겪은 
우리 나라를  위해 미국이  보여준 애정과 
도움에 한국 국민을 대표하여 깊이 감사드
립니다. 우리는 이 도움을 절대로  잊지 않
을 것이고 언젠가 귀국에 문제가 발생한다
면 마찬가지로 도움을 아끼지 않을 것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위기를 그토록 신속
히 극복한  귀국의 국민들과  각하께 저는 
감탄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국민은 
가일층 분발하여  곧 실업  문제도 극복할 
것입니다.  틀림없이 잘될  것으로 믿습니
다. 
다음 순간 대통령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각하, 우리는 북한의 핵 개발이  사실이라
면 귀국과 같이 그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북한의  핵 개발
에 대한 유일한 대처  방법이 미군이 북한
을 폭격하고, 따라서 한반도에 전쟁을 초래
하는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5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거
치는 동안 단일 민족으로 살아왔습니다. 그
동안 수많은 고난을 겪었고, 또  그 고난을 
극복해 왔습니다. 우리는 이번의 핵 위기도 
충분히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직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습
니다. 북한이 미국이  설정한 너무도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것을  공개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북한도  외부적으로는 
하나의 독립국입니다. 우리는 한 독립된 국
가의 존엄성을 해칠 수  있는 강대국의 강
제적 명령은 그 자체가 폭력이라고 생각합
니다. 지금 한반도는  미국의 북한  공격설 
등으로 사회가 어수선하며, 경제는  불안정
합니다. 이것은 귀국의  문제 해결  방식이 
지나치게 고압적이고 독선적이기 때문입니
다. 한반도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  미국이 
북한을 폭격할지, 그 결과로 언제 한반도가 
전면전에 돌입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
은 북한에 대한 폭력일  뿐 아니라 남한에 
살고 있는 자유 시민 모두에 대한 인권 유
린인 동시에 세계사에 대한 폭압입니다. 인
류는 힘보다는 상호 이해와 협력으로 살아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국가와  국가는 
자국의 이익이 아닌 상호 존중의 정신으로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북한의 핵
이 정말 문제가 있다면 유엔에 모여 다 같
이 회의를 하고 세계  모든 나라가 동의하
는 방식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런 방식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유엔의 결론
에 따를 것입니다. 이것이 지구를  한 식구
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는 
올바른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
은 우리의  동의 없이  미국이 일방적으로 
북한을 공격했을  때 절대로  미국의 편에 
서서 핏줄간의 전쟁을 치르지는 않을 것입
니다. 각하, 안녕히 계십시오. 대통령은  상
기된 얼굴로 수화기를 내려놨다. 경훈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옆
을 보니 인남의 얼굴에  눈물이 맺혀 있었
다. 두 사람은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왔다. 
이렇게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면, 이제
껏 일방적이기만 했던 미국과의 관계도 조
금씩 서로를 존중하는 대등한 관계로 발전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경훈은  기대감에 가
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한민족의  통일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다. 
경훈은 인남의  손을 잡고  청와대 정문을 
걸어나오면서 하늘을 우러러봤다. 5천 년을 
이어온 파란 하늘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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