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물과 백두산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1998. 8. 15.
"차선배! 몇 분 남았어요?"
지웅이 다급하게 경헌을 찾았다. 눈은 컴퓨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손가락은 워드프로세서 경연대회라도 하는 듯 바쁘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간신히 포지션 스퀘어를 맞춰놓은 경헌이 식은 땀을 닦아내며 지웅에게 마감시간까지의 여유를 가르쳐 주었다.
"8분 남았는데"
"제기...."
지웅의 눈은 더욱 강하게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그냥 보고만 있기에도 날카로운 눈매. 강한 인상이었다. 확실한고 야리야리한 얼굴선이 날카로운 눈매를 더욱 빛나게 했다. 크진 않지만 다부진 체격 또한 야물다. 온 몸의 기를 내뿜는 듯 지웅은 오직 모니터에만 몰두하고 있다.
아직도 엔화는 오르지 않고 있었다. 이러다간 스퀘어는 커녕 숏 포지션으로 마감해야 할 지도 모른다. 자그마치 12억이나 손해를 보는 것이다. 지웅은 이빨을 깨물었다.
"이놈들이 광복절 선물은 도저히 못주겠다는 건가...."
다시 경헌을 찾았다. 4분이 남았다고 했다. 그 대답과 동시에 엔화가 올랐다. 자그마치 5.6포인트나 올라버린 것이다. 순간 지웅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제발..."
'$ / JPY FOR 30PLS'
(달러대 엔화로 3000만 달러 가격을 알려주시오)
드디어 기다리던 소식이 화면에 올라왔다. 지웅은 즉시 응답했다.
`135.30 / 40'
(135.30에 팔거나 135.40에 살 수 있소)
`MINE 30'
(삼천만달러 사겠소)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혹사시켜 시간 내에 엔화를 팔았다. 12억이나 손해볼 것을 역전시켜 23억의 롱포지션으로 만들었다. 딜링룸의 모든 직원들이 환호했다.
"휴우...."
드디어 잔뜩 굳어있던 목을 풀며 지웅이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지웅씨는 정말 대단해. 어떻게 그렇게 이익을 낼 수가 있지? 더군다나 오늘같은 날"
경헌은 간신히 포지션 스퀘어를 맞춘 자신에 비해 23억이나 이익을 남긴 지웅이 부럽기보단 존경스러워보였다. 딜링룸에 들어와 일본 은행을 상대로 한 딜에서는 아직 한 번도 숏 포지션을 내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그 이익이 전체 직원들의 것을 합친 것보다도 두 배는 높았으니 아예 경쟁상대로 치부하지도 않는 것이다.
"어이 지웅씨, 한 건수 했으니까 적선 좀 해야지? 난 오늘도 간신히 스퀘어 맞추는라 몸무게가 3kg 은 빠진거 같다구."
"그래요, 지웅씨. 오늘은 저도 한 잔 사줘요. 요즘은 통 지웅씨 술 못 얻어먹어봤네"
경헌을 비롯해 시니어 딜러 윤희까지 합세해 한 턱 내라고 지웅을 졸라댔다. 165cm 정도의 키에 45kg이 나갈 것 같은 늘씬한 몸매다. 검정색 탱크탑을 입고 있다. 다소 도발적이다. 하지만 싸구려처럼 보이진 않는다. 얼굴 또한 갸름했다. 한국 남자가 이상형으로 뽑는 키와, 몸무게 그리고 얼굴형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은 꽤 예쁘다. 그러나 지웅에게만은 언제나 냉대를 받았다.
실은 지웅 자신이 먼저 제안하고 싶던 차였다. 요즘 들어 사무실 사람들하고 술자리를 가져본 기억이, 꽤 멀다. 달력을 바라보았다.
광복절-
그런 의미도 없진 않았다. 지웅이 1년 365일 중에 가장 싫어하는 날. 어쨌든 오늘은 술이 고프다.
서류를 정리하고 책상 위를 가지런히 정돈했다. 후 -. 또 한숨이 나온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오늘은 좀 무모했다. 액수가 다른 때에 비해 10배 이상 컸던 것이다. 목을 계속 돌려본다.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경헌도, 윤희도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벌써 3년차 한 사무실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람들. 치프딜러 세열은 회의 때문에 일찍 나갔다.
지웅이 컴퓨터 전원스위치를 눌렀다.
"가시죠. 그치만 윤희씨가 걸리는데..."
"또 그러네. 누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윤희가 지웅을 흘기며 말했다.
"그럼 우리 술만 먹깁니다"
지웅이 간절히 말했다. 경헌이 두사람을 번갈아 보며 웃었다.
"윤희씨 또 시도했나봐. 그러지 말고 나한테 붙어보라니까. 나 이래 뵈도 힘 좋은 놈이라구"
경헌이 팔뚝을 치켜세웠다.
"전 유부남은 트럭으로 갖다 줘도 싫다고요"
윤희가 콧방귀를 뀌었다. 지웅이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자 여기서 토닥거리지 말고 나가죠. 술 먹으면서 할 말도 많을 텐데"
"그래 가지. 지웅씨, 오늘은 무조건 3차 이상이야 알지? 꼭지 한 번 돌려 보자고"
경헌은 기분좋게 가방을 챙겼고, 윤희는 환호를 지르며 좋아했다.
"두 분 오늘 저승 갈 준비나 하고 따라오시죠. 안그래도 한 번 대접하고 싶었는데. 때마침 기회가 오네요. 암튼 오늘 전봇대 잡고 울기 전까지는 집에 못들어가는 겁니다"
밖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이었다. 세 사람은 은행 정문앞에서 뻘줌이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쩌지? 비가 상당히 많이 오는데. 우산이라고는 윤희씨 것 밖에는 없으니"
경헌이 윤희의 노란 우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윤희는 우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차선배"
"왜?"
"각오하고 있죠?"
"뭘?"
"혼자 오세요. 저희 먼저 갈게요. 저 앞에 갈비집으로 와요. 가요 지웅씨"
윤희가 급히 우산을 펴고 지웅의 팔을 이끌고 뛰었다. 워낙 순식간이라 지웅이 미처 거부하기도 전에 끌려갔다. 지웅이 윤희의 팔에 끌려가며 경헌을 쳐다보았다. 경헌은 어이가 없는 듯, 혀를 한 번 차고는 가방을 우산삼아 뛰었다.
두 사람은 갈비집에 들어서자마자 몸을 툴툴 털었다. 주인이 건네 준 마른 수건으로 머리와 얼굴을 닦아낸 뒤에야 경헌이 들어왔다. 우산을 쓰고는 왔지만 지웅과 윤희 역시 하반신이 비에 젖어 있었다.
"내 참 드러워서"
경헌이 지웅의 수건을 빼앗아 머리를 털며 말했다. 그러자 윤희가 자신의 수건으로 지웅의 머리를 닦아주었다.
"이러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지웅이 진짜 화가 난 듯, 윤희를 몰아쳤다.
이런 건 싫었다. 윤희가 맘에 들지만, 이런 식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건 싫었다. 누굴 좋아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행동이 싫었다. 그래서 자꾸만 윤희에게 거리를 두었다.
윤희의 얼굴이 순간 움찔해졌다.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던 경헌이 팔을 내저었다.
"아, 괜찮아, 괜찮아. 젊은 사람들 좋아서 그러는건데 뭐. 나두 한때는 지웅씨처럼 쫓아 다니는 사람 많았다고. 그리고 자네 좋아서 그러는데 너무 매몰차게 굴 건 없잖아"
"그죠, 차선배. 어유, 어쩔 땐 꼭 조선사람 같다니까 글세. 아줌마 여기 갈비 3인분하고 소주 주세요"
윤희가 경헌의 말에 그새 힘을 얻어 당당해졌다.
"그런데, 지웅씨는 왜 엔화만 가지고 놀아? 지금이야 달러가 제일 돈 만들기 쉽잖아. 물론 위험부담도 크지만."
숯불위에 지글대며 익고 있는 고기를 뒤집으며 경헌이 물었다. 윤희 역시 그게 궁금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웅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더라구요. 달러가 더 큰 돈 만들 수 있는거야 저도 알지만. 가끔은 그 쪽으로 손을 대보려고도 했는데, 결국엔 일본은행에서 결과를 보고 말더라구요. 앞으론 더 힘들어질거예요. 일본쪽도 몸사리고 있으니까요. 지금 워낙 힘든모양이예요."
"그래도 지웅씬 너무 대단해. 이렇게 10년만 해먹으면 지웅씨 혼자라도 IMF 해결하겠어"
윤희는 마냥 좋은 듯 지웅의 딜링 실력을 치켜새웠다.
"그런데 지웅씨, 오늘은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크게 놀았어? 엔화가 전혀 오를 기미가 보이지도 않았었는데. 마감 5분전까지만 하더라 도 12억이나 손해볼 뻔 했잖아. 우리 모르게 수 쓰고 있는거 아냐? 이거 매일 혼자만 재미보지 말고, 같이 좀 나눠먹자고. 오늘 오전에 그렇게 엔화를 많이 산 이유가 뭐야?"
경헌은 넘쳐 흐르는 소주잔을 쪽 소리가 나게 들이키고 지웅에게 건네 술을 따르며 물었다.
"뭘요, 그냥 예감이 그랬어요. 광복절이잖아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니들이 우리한테 손해줄 수는 없는 날이다' 그런 생각이 들잖아요. 그래서 한 번 밀어부쳐 봤죠"
"아니, 그럼 정확한 자료 하나 없이 감으로 밀어부쳤단 말이야? 이 사람 정말 큰일 낼 사람이네. 마감 전에 엔화가 갑자기 뛰어올랐으니 망정이지 그대로 끝났으면 어쩔려구 그래? 참 통 크다. 통 커."
경헌은 그런 지웅의 배짱이 위험하게 느껴지는지 아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지웅씨 아직 한 번도 숏 낸 적 없잖아요. 전 오늘도 지웅씨가 해낼거 알았다구요. 지웅씨 한 잔 하죠"
윤희는 지웅이 마냥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경헌 역시 그런 지웅의 실력을 믿지만 오늘 일은 하마터면 딜링룸 전체가 징계를 당할수도 있었기 때문에 우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조심하라고. 지웅씨 실력 뛰어난 건 인정하지만, 이 세계에서 감은 가장 위험한 적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일본은행에서도 지웅씨 이름이 돌기 시작했나봐. 그 은행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니까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진 않을거야. 지웅씨도 준비 꽤나 해야 할거야"
게걸스럽게 고기를 뜯던 경헌이 실눈으로 선반 위에 걸린 TV를 쳐다보았다. 지웅과 윤희가 고개를 돌려 역시 TV를 쳐다보았다. 9시 뉴스 자막에는 `패망 53주년 기념일' 이라는 자막과 함께 일본인들의 의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경헌이 뜯던 갈비를 내던지며 말했다.
"미친 자식들, 패망기념일이라니, 도대체 무슨 뜬금없는 소리들 하는 거야?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거야, 뭐야?"
지웅이 한참동안 TV를 바라보다가 자세를 바로잡고 말했다.
"아직도 그 환상에서 깨지 못하고 있는거죠. 군국주의, 황국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지웅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어머 저런게 있었어요?"
윤희가 놀랐다는 듯 말했다. 경헌이 열을 토하며 말했다.
"저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라구. 패망기념일이라니, 다시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말자는 소리 아니겠어? 다음에는 그 날을 거울삼아 꼭 이기자는 소리 아니겠냐구. 내, 저자식들을 그냥"
경헌이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우고는 병을 쾅 하고 내려놓았다. 옆 테이블의 사람들이 힐끗 쳐다보았다. 이미 그들도 방금 전 자막을 보고 한참 열을 내고 있는 터인 것 같았다. TV는 주제를 바꿔 IMF한파로 인한 실직자들의 모습과, 몇 달째 출근을 않고 있는 국회의원들의 동태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서 얘기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누구 염장 지를 일 있나, 왜 뉴스가 다 저모양이야?"
그 앞의 사람이 받아쳤다.
"그러게 말이지. 차라리 작년 이맘때 뉴스는 재미라도 있었잖아. 사창가 나오고, 깡패들 나오고 사실 영화보다 뉴스가 더 재미있었다구, 그런데 요즘은 뉴스만 보면 성질이 나서 도저히 봐줄수가 없다니까. 매일 똑같은 소리, 게다가 오늘은 뭐 좋다고 일본놈들 지랄하는것까지 떠억 하니 내보내는 거야?"
그 테이블 뿐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비슷한 주제로들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지웅이 소주를 한 잔 더 입에 털어넣고 말했다.
"자식들 술맛 정말 안나게 만드네"
"그렇지?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지웅씨만 같으면 일본 잡아먹는 건 시간 문제일텐데, 안그래?"
경헌이 문득 지웅의 롱포지션을 생각해 내고는 자신의 생각이 황당한지 싱겁게 웃었다.
"맞아요, 지웅씨만큼만 일본 돈 챙기는 사람 만명만 있어도...... 우와 23조원이네. 우리 나라 1년 예산의 1/4잖아? 끝내준다. 그쵸 지웅씨?"
윤희가 신나라 하며 말했다. 경헌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지웅씨처럼만 해주는 사람 많으면 얼마나 좋겠어. 그치만 그거야 꿈같은 얘기고, 아무튼 축하해, 지웅씨. 나중엔 윤희씨 말대로 한 23조 해먹어버리라구"
지웅이 쓴웃음을 지었다.
"예, 그래야죠. 이제 그 얘기는 그만 하죠. 기분 좋게 한 잔 사려고 했으니까, 기분좋게 즐겨보자구요. 2차는 어디로 갈까요? 어라, 윤희씨, 또 폭주하네. 나 이럼 무서워서 못마신다니까요"
지웅이 윤희 앞의 소주병을 바라보았다. 벌써 한 병 반이나 비운 상태였다.
"아이, 지웅씨 내 주량은 무제한이라는 거 잘 알잖아요. 2차 가자구요? 우리 춤추러 가요. 괜찮죠? 지웅씨"
세사람은 알딸딸하게 취해 밖으로 나왔다. 밖은 여전히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지웅이 먼저 나가 택시를 잡았다. 경헌과 윤희가 총총걸음으로 뛰어와 택시에 올랐다. 적당한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세 사람 모두 엄청난 폭우에 그리 개의치 않았다.
그 시간 일본은행의 치프딜러 야마모도는 도쿄 시내 로바다야끼에서 중앙은행 시니어딜러 마시이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자네, 그렇게밖에 못하겠나?"
"면목 없습니다.
"아니 마감 다 돼서 그렇게 많은 엔화를 사들인 이유가 뭐야? 5.6포인트가 애들 장난인줄 아나? 왜 마감 다 돼서, 그것도 5.6포인트나 오른 걸 산건가?"
야마모도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차 있었다. 그 앞의 마시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게, 저 행장님이 갑자기 엔화를 채워놓으라고 급하게 전화를 하시는 바람에. 손해인지 알지만. 행장님의 말씀이 계셔서. 수상님의 부탁이라고. 그리고 그 때까지는 엔화가 갑자기 그렇게 오를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아무리 행장이 얘기를 했다 하더라도 환율을 설명하고 막았어야 할 거 아닌가? 자네 은행장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을 하는거야?"
야마모도가 마시이의 말을 끊었다. 분노. 야마모도의 얼굴은 그 외에는 어떤 말도 필요 없을 정도로 험악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명성에 먹칠을 해버렸으니..."
"내 얼굴에 먹칠하고가 중요한게 아니네. 지난 6개월 사이 그 놈한테 당한 돈이 60억엔이야. 미국이나 중국에서 벌어 놓으면 그 놈이 고스란히 가져가고 있다고.
53년 전의 치욕을 갚기 위해 한국인들을 넘어뜨리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자네도 알 것이 아닌가? 이제 조금만 고생하면 한국인들은 우리가 손가락 하나로 움직일 수 있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 그 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손해를 보고 있나. 이대로 나가다가는 한국인들 다시 일어서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무너뜨려야 한다고. 우리 할아버지들이 53년 전 얼마나 처참하게 죽어갔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자네 아직 그 피의 복수를 이해하지 못하나?"
"알고 있습니다. 다시는 그런 실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마시이는 애꿎은 방바닥만 손톱으로 뜯어내고 있었다. 야마모도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차마 똑바로 야마모도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야마모도는 분이 다소 삭은 듯 이야기를 이었다.
"오늘 정오에 와타나베 선생님을 만났네. 지금 치지 않으면 어렵다고 하더군. 한국인들이 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간 10년간 망쳐놓은 것이 하루이틀만에 고쳐질 리야 있겠냐만, 그래도 어딘가 불안하단 말일세. 우리가 얼마나 한국인들을 이기주의로 만들어 놓았나. 그 효과로 나라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는데도 돈 있는 자들은 여전히 흥청망청 하고 있는게 아닌가. 그런데 언론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네. 간부들 약발도 이젠 떨어진 모양이야. 신참 기자들이 들고 일어선 것일세. 적당한 IMF 특별 방송으론 안된다고 생각한거지. 이게 무서운 것일세. 그 자들이 지금은 개인 이기주의로 아직 정신을 못차리고 있지만, 언론이 발벗고 나선다면 상황은 달라지네. 한국인들 뭉치면 우리 일이 몇 배는 힘들어지지. 이제 방송국에서도 우리 프로그램 가져가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하더군. 오히려 우리 꺼 베껴서 한창 잘 나가고 있는 프로그램까지 없앤다는거야. 와타나베 선생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세.
자네는 내가 키운 최고의 딜러네. 그런 자네가 그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다니. 아니 자네 뿐만 아니라 일본 은행 전체가 그 놈 앞에서는 맥을 못추니, 이젠 우리도 가만히 있진 않을걸세. 위험한 싹은 애초에 없애는 게 좋아"
야마모도는 말이 끝나자 마자 단호하게 일어서 나갔다. 마시이는 야마모도가 나간 뒤로도 한참을 방바닥만 쳐다보았다. 바닥에는 손바닥만한 구멍이 생겼다.
"제기..."
마시이의 주먹이 장판 구멍을 내리쳤다. 딜러의 길에 들어선 이후 이런 수모는 처음이다. 머리 속에 띵하니 울린다.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저 방바닥의 구멍이 돌이 아닌 자신에게 치욕을 안긴 자의 얼굴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할머니의 스물 다섯살
심한 갈증에 눈을 떴다. 머리맡의 주전자에는 이미 한방울의 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밤새 알콜 해독작용을 하느라 마셔버린 모양이다. 물을 마시려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 지웅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윤희가 2인용 소파에 쪼그려 자고 있는 것이다. 외투까지 걸친 채, 윤희는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그제서야 윤희가 어젯밤 집까지 따라왔던 게 떠오른다. 어젯밤 일이 생각나는지 지웅은 윤희를 보고 멋적게 웃었다.
윤희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다. 머리가 조금은 흐트러져 있다. 예쁘긴 예쁘다. 청초하다. 새근대며 잠들어 있는 모습이 포근한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누구나 호감을 가질만한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지웅에게 아직은 너무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다.
조각 얼음을 세개 섞은 오렌지 쥬스를 마셨다. 갈증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어쩜 그렇게 일본사람 돈을 잘 따먹을 수 있어요? 딜 기술 좀 가르쳐 줘요. 아니, 그것보단 왜 그렇게 일본을 싫어해요? 싫어하는게 아니면 왜 굳이 일본 은행들 돈만 따먹는거예요? 따지고 보면, 일본 좋아하는 한국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치만 지웅씨는 남들하고는 달라요. 이유 좀 가르쳐줘요. 예?'
그 이유를 듣겠다고 나이트클럽에서부터 경헌은 사람 취급도 안 하고 지웅을 닦달하던 윤희는 집까지 따라오고 만 것이다.
할머니는 참 예쁘셨다. 삼 년 전 돌아가실 때도 얼굴엔 고운 티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런 할머니는 스물 다섯, 아버지를 낳은 지 2년이 지났을 그 당시는 한송이 백옥같았을 것이다. 아버지 손을 잡고 찍은, 할머니가 가진 것 중의 가장 젊었을 때인 서른 두살의 사진만 보더라도 요즘 여자들보다 훨씬 예쁘셨다. 너무 예뻐서, 그게 문제였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대동아 전쟁에 징용 당해 나간지 일주일만에 일본인 간부에게 대들다가 구타로 숨진 그 해 여름, 겨우겨우 아버지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들었던 할머니는 같은 동네에 살던 아낙들에게 팔짱을 걸린 채 일본 지서로 끌려갔다.
그 아낙들은 평소에 할머니의 외모에 심한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할아버지가 징용당해 나가서 숨졌다는 소문이 나자 마을 남정들이 언제부턴지 할머니의 집 담벼락에 기웃기웃대기 시작한 것이다. 할머니는 요상한 소문이라도 날까 두려워 항상 문을 걸어 잠그고 집 밖으로는 한 달에 한 번 밤새워 바느질한 옷감을 식량으로 바꾸러 갈 때만 출입을 했었다. 사람심리가 원래 그런 것인지, 이 놈이 할머니 집을 기웃거리니까 다른 놈도 한 번 기웃거려보고, 혹시 대문이 열려있지 않나 어색하게 밀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모습들이 마을 아낙들의 귀에 들어가고, 그녀들은 자신의 서방들이 과부 집에 얼씬거리는 모습에 눈이 뒤집혀 항상 할머니를 감시하듯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여름, 그 동네에도 위안부를 착출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 때다 싶어 할머니를 시기하던 마을 아낙들은 미리 손을 써, 지서의 일본 순사에게 양귀비 뺨치는 미인을 데려다주는 대신 자신들은 빠지는 거래를 하게 된 것이다.
막무가내로 같은 마을 아낙들에 이끌려 지서로 온 할머니는 소장의 방으로 끌려갔다. 가운데 가름마에 기름을 쳐발라 가지런히 정돈한 머리의 사나이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바지춤을 내리는 것을 보고, 그때서야 할머니는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집에만 틀여박혀 있던 할머니도 소문은 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흐... 듣던대로 절세미인이로군"
소장은 할머니의 미모에 만족한 듯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할머니는 벌벌 떨며 뒷걸음질 쳤다. 소장은 그럴수록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할머니를 벽으로 몰아부쳤다. 할머니는 등이 벽에 닿자 주저앉아버렸다. 소장이 할머니의 어깨를 잡았다. 소장의 손이 어깨에 닿자 할머니는 아버지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요!"
할머니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소장은 여전히 음흉한 눈빛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뭐야?"
"잠시만 집에 다녀오게 해 주세요. 우리 애기 혼자만 있어요"
할머니의 눈에 물기가 가득 고였다.
"그리고 이런 대낮에 말고 저녁에 불러주세요"
할머니는 고개를 돌리고 소장에게 말했다. 할머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소장은 김이 샌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바지춤을 추켜 올렸다.
"저녁에? 그래, 그것도 좋겠지. 자네같은 미인을 이렇게 함부로 대할 수야 없지. 그렇게 하라구. 대신 허튼 짓 하면 자네 아이까지도 무사하지 못할거야"
소장이 할머니의 턱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할머니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항아리 안에 한그릇 담겨있던 흰 쌀을 꺼내 밥과 죽을 해서는,
"이게 에미와 마지막 밥상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하시며 아버지를 배불리 먹이셨다. 소장이 딸려보낸 두명의 순경이 힐끔힐끔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들 역시 할머니의 미모에 저마다 속으로 탐을 내고 있었다. 할머니 역시 그들의 구역질나는 시선을 피해 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충 아버지를 먹이신 후, 할머니는 두 명의 순경의 팔에 이끌린 채, 아버지를 등에 업고 포목점으로 찾아갔다. 포목점 안주인은 할머니의 부르는 소리에 반가운 듯 서둘러 나왔으나 순경에게 팔을 붙들린 모습을 보고는 주춤했다.
"무슨 일인가?"
안주인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물었다.
"우리 용식이 좀......"
할머니는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안주인은 그제서야 사태를 알아챈 듯 할머니에게 다가와 손을 감쌌다.
"그래, 걱정하지 말어. 내 친자식 처럼 데리고 있을테니까. 그나저나 몸이나 성해야 할텐데"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거든 저 혼자라도 빌어먹을 때까지만이라도 맡아주세요"
할머니의 흐느낌이 심해졌다.
"염려하지 말고 자네 몸이나 신경 써. 참 기구하네. 서방 잃은 지 얼마나 됐다고 몸까지 망치게 됐으니......"
안주인은 말을 뱉다가 옆의 순경을 의식했는지 주춤했다. 순경들은 아버지가 포목점 안주인에게 넘겨지자 서둘러 할머니를 끌고 지서로 향했다.
"놔요, 내 순순히 따라갈테니"
할머니는 순경들의 팔을 뿌리치고 걸었다.
마침, 할머니를 일본 지서에 넘긴 그 아낙들이 그 모습을 보았다. 아낙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옆을 지나가던 할머니를 향해
"저것 보라지. 남편 죽이고, 자식새끼 버리고 그 짓 좋아서 일본놈 제발로 찾아가는 거 봐. 저런 화냥년이 우리 서방을 홀릴려고 했다니까 글쎄"
하며 할머니를 헐뜯었다.
아버지를 포목점에 맡기고 눈물을 흘리며 일본 순사를 따라가던 할머니는 그 아낙의 험구에 아마도, 아마도 가슴이 수천 조각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다.
밤이 깊어도 소장의 머리는 낮에 보았던 것처럼 여전히 가지런히 양옆으로 정돈되어 있었다. 낮에는 머리기름 뿐이었던것이 밤이 되자 머리카락 스스로에서 기름이 흘러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나한테 잘만 보이면, 알지? 굳이 전쟁터로 나갈 일도 없고, 필리핀이나 말레이지아같은 곳에 갈 필요도 없다구. 아이구 어찌 이리도 고울꼬? 자, 이리 와보게, 응?"
소장은 기름기 흐르는 머리와 입에서 풍기는 악취, 그리고 그 들개같은 표정으로 할머니를 괴롭혔다. 할머니는 소장이 위에서 그 단정하던 머리를 헝클여가며 거친 들개같은, 정말 개같은 소리를 내고 있을 때, 눈을 질끔 감았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이 차례로 지나갔다. 그리고 그 아낙의 쌍시옷 내뱉으며 할머니를 헐뜯었던 얼굴도.
소장은 기회만 있으면 할머니를 찾았다. 그의 짐승같은 성욕은 수시로 할머니의 몸과 마음을 괴롭혔다. 소장이 지서에 나가있거나 마을로 순찰을 나가야 할머니는 혼자일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리에 누워있던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몇 번이나 은장도를 손에 꼭 쥐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얼굴, 아버지의 얼굴이 자꾸만, 자꾸만 할머니를 가로막았다. 그렇게 할머니가 자리에 누워있던 시간만큼, 베개는 흥건히 젖어있었다.
자신에게 잘만 보이면 굳이 정신대에 보내지 않고, 기회를 봐서 아버지를 데려오마 했던 소장의 약속은 할머니의 참고 참았던 분노와, 자괴감의 폭발로 깨지고 말았다.
자신의 생일이라며 부근 마을 지서의 소장들과, 마을 주요 친일 졸부들을 초청한 소장은 어머니로 하여금 가슴속에 품었던, 몇 번이나 아버지의 얼굴때문에 꺼내지 못했던 은장도의 차고도 푸른 날빛을 보이게 만들었다.
평소 다른 사람들은 접근도 못하도록 했고, 방도 안방을 쓰게 하던 소장은 생일 잔치를 하다 말고 갑자기 할머니를 불렀다.
"내 오늘, 생일이라고 이렇게 찾아와 주신 여러분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평생 한 번 볼까말까 한 진귀한 걸 보여드리겠소"
술이 거나하게 오른 소장은 상 귀퉁이에 어물쩡 서있는 할머니에게 비틀비틀 걸어갔다. 술 한모금을 들이킨 소장은 마지못해 서 있는 할머니의 턱을 치켜 들고
"여러분, 이렇게 아름다운 노리개를 본 적이 있소? 내 이 노리개를 혼자 가지고 노는 게 아까워 오늘 여러분께 구경 한 번 시켜드리겠소. 아 거기 김씨는 이 사람을 아시겠구려"
마침 포목상 주인 김씨도 그자리에 있었다.
소장은 할머니의 주위를 한바퀴 돌더니 허리에 차고 있던 장도(長刀)로 치마를 들춰 올렸다. 그 사이로, 할머니의 버선과, 하얀 다리와, 속옷이 드러났다. 인근 마을의 소장들은 저마다 침을 꿀꺽 삼켰고, 포목상 김씨와 정미소 한씨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손은 어느새 품 안의 은장도로 가 있었다.
`네 놈이 죽던지, 내가 죽던지 오늘은 끝을 보자!'
소장은 칼 끝으로 할머니의 허벅지에서 버선까지 내려오며 더듬었다. 그리고는 저고리를 풀어 내었다. 할머니의 하얀 어깨가 드러났다. 인근 소장들은 눈이 더욱 동그라지며 게걸스럽게 침을 삼켰다.
할머니의 몸은 더욱 떨렸다.
소장의 어깨에 비수가 꽂혔다. 붉은 선혈이 황색 제복을 물들였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침을 꿀꺽 삼키던 인근 소장들은 꿈에서 깨어난 듯 화들짝 놀라 허리춤의 칼을 꺼냈고, 김씨와 한씨는 자신들은 오늘 아무것도 보고 들은 것이 없다는 듯, 재빨리 문을 나와 성급한 걸음으로 돌아갔다.
분노로 차 있던 소장의 얼굴은 마치 성난 들개가 고양이에게 얼굴을 할퀸것처럼 당장이라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소장은 칼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머리를 손잡이로 내리쳤다. 그 분노의 찰나에도 손익의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할머니의 소장 몸팔이는 끝이었다. 그리고 소장의 출세도구로서 헌병대 장교에게 헌납되었다.
헌병대 장교는 소장처럼 들개는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황국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고 있었고, 그 소장처럼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할머니를 찾지는 않았다.
장교는 거의 술이 취할 때에만 할머니를 찾았다. 할머니는 여전히 소장이 몸 위로 올라왔을 때처럼 눈을 질끔 감고 아버지를 떠올리며 참아내고 있었다.
`이 한 몸은 이미 죽은거나 다름없어. 용식이, 용식이만은 살아야 하니까...'
황국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이 상당히 강했던 장교는 할머니가 눈을 질끔 감고, 이빨을 깨물고 있는 모습에 자존심이 상하는지
"이놈의 조센징은 황국 시민 곁에 있는 것이 얼마나 영광인지도 모른다니까"
하며, 있는 말 없는 말로 조선여자를 모두 창녀 취급했다.
소장과는 달리 혼자만의 성교로는 흥미를 갖지 못하는 장교는 할머니의 그런 태도에 벌떡 일어나서는 얼굴에 침을 뱉고 갖은 욕설을 던지고는 물수건으로 자신의 몸을 깨끗이 닦았다. 더러운 조센진의 몸 위에 올라탔다는 자체만으로 수치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소장과 장교에게 짐승과 같은 대우를 받은지 한 달 보름만에 해방이 되었다. 장교는 어느 새 도주했는지 헌병대에는 개미새끼 한마리 남지 않았다.
할머니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포목점으로 가 아버지를 찾았다. 천을 정리하던 김사장은 할머니를 보자 말을 더듬으며 안주인을 부르고 성급히 밖으로 나갔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난 니 에미가 아니다. 난 니 에미가 아니야'
해방의 기쁨과 새역사의 희망으로 모두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그 해 가을. 할머니는 또 한 번하늘이 무너지는 일을 당했다. 소장인지, 장교인지 모르지만, 일본인의 아이를 밴 것이다. 할머니는 넋을 잃고 마루에 앉아 하늘만 바라보았다. 왜 이리 버겁누. 이놈의 인생. 왜 이렇게 힘이 드누....
할머니는 갑자기 마당으로 뛰어내려가더니 주먹만한 돌덩이를 주워 자신의 배를 때렸다.
"죽어라, 이 개놈의 자식아. 죽어 이 개놈들아!"
하얗던 배에 생채기가 나더니 결국은 빨간 피가 몸을 적셨다. 그렇게 할머니는 개들의 자식을 죽였다. 어쩌면 당신 역시 죽고 싶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절박한 순간마다 떠오르는 아버지의 얼굴만 아니었다면.
할머니는 그 후 밤마다 개울가로 나가 돌맹이로 개들의 씨를 받은 음부를 씻어냈다.
`더러운 년, 으이구, 이 더러운 년'
그렇게 할머니의 스물다섯은 무참히 망가져버린 것이다.
할줄도 모르는 콩나물국을 끓인답시고 수선을 떨고 있는데 어느새 윤희가 들어와 뒤에서 지웅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 참, 이러지 좀 말래니까 자꾸 그러네"
지웅이 화들짝 놀라 윤희의 팔을 뿌리쳤다. 이미 그러한 지웅의 태도에 적응이 된 듯 윤희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지웅씨, 물 좀 줄래요?"
윤희도 알콜 해독 수분이 필요한 모양이다. 지웅은 자신이 했던대로 조각 얼음 세개가 담긴 오렌지 쥬스를 내밀었다. 단숨에 쥬스를 마시고 윤희가 말했다.
"임자 있는 몸도 아니면서 정말 왜그러는지 모르겠어. 나 밤에 얼마나 참았는지 몰라요. 덮치고 싶어가지고 말이지. 그랬다가 다시는 못볼까봐 간신히 참긴 했지만"
"윤희씨 혹시......"
윤희가 지웅의 말을 잘랐다.
"아니라구 했잖아요. 헤픈게 아니라 정말 좋아한다는 거라구"
윤희는 바지 앞섬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물었다.
"어쨌든 밥은 줄거죠? 속쓰리네. 나 얼큰한 거 좋아하는 거 알겠지. 다 되면 불러요. 지웅씨 침대에 누워 있을게. 설마 그것까지 막진 않겠죠?"
윤희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고 젖은 밥그릇에 비벼 껐다. 그리곤 탱크탑 아래 펼쳐진 배를 쓰다듬으며 지웅의 침대로 몸을 던졌다.
"아, 냄새 너무 좋아. 직접 맡으면 더 좋을텐데..."
어이가 없는 듯 지웅은 그런 윤희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5분을 그렇게 있었을까, 엎어져 있던 윤희가 늘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렇게 가만히 서있죠? 내 뒷모습이 그렇게 끌려요?"
"내가 이 얘기 했었던가요?"
지웅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희가 벌쩍 뒤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얘기요?"
"초등학교 때 짝궁을 때려 준 일이 있었다는 딱 두 번 있었다는 일"
"언제요?"
"한 번은 짝궁이 내 볼에 강제로 뽀뽀했을 때, 또 한번은 내 바지를 벗겼을 때"
"어머, 굉장히 조숙한 짝궁을 두셨네요. 설마 그게 상처가 되서 절 거부하는 건 아니겠죠? 나 배고파요. 빨리 아침 차려줘요"
윤희가 다시 뒤돌아 누우며 말했다. 지웅은 포기한 듯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쨌든 억지로 아침을 해 먹였다. 게걸스레 아침을 먹은 윤희는 씻는답시고 화장실에서 30분을 버틴 후에야 나왔다. 젖은 머리가 무척이나 상큼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던 윤희가 반신 거울 앞으로 가 앉았다.
"애개 여자 화장품은 하나도 없네. 내 걸 조금 갖다 둬야겠어. 지웅씨 그래도 돼죠?"
윤희가 뒤돌아보며 씽긋 웃었다. 지웅이 마음대로 하라는 듯 대꾸도 않고 벽에 기대 있었다.
게다가 윤희를 집까지 바래다 주어야만 했다.
"아, 이런 날은 데이트라도 해야 하는데, 그쵸?"
"운전하는데 방해 되요. 좀 조용히 좀 해 줄래요?"
"졸리지 말라고 그러는 거예요"
막무가내다. 아무리 지웅이 윽박질러도 윤희는 잠자코 있질 않는다. 일부러 음악을 키워 본다. 그럴수록 윤희의 목소리는 더 커진다.
집에 도착하자 지웅이 인상을 쓰며 엄지손가락을 뒤로 젖혔다.
"내려요"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하고 갈래요?"
"싫어요"
"그럼 동네 한 바퀴만 더 돌고 와요"
"빨리 안 내려요?"
지웅이 소리를 질렀다. 그제서야 윤희는 못이기는 척 가방을 들었다. 윤희가 문을 열다 말고 지웅을 돌아보았다.
"지웅씨, 그거 정말이예요?"
"뭐요?"
여전히 무뚝뚝한 말투.
"강제로 뽀뽀했다고 짝궁 때려준 거"
"아니면"
"아니면?"
윤희가 순간 지웅의 볼에 키스를 하고 부리나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문을 반쯤 열어놓고 약올리듯 말했다.
"설마 다 큰 처녀를 때리진 않겠죠? 그리고 나, 내일부터 가르쳐줘요, 엔화 따먹는거. 지웅씨 할머니 뿐이겠어요? 우리들 할머니들 일이잖아요"
동 지(同志)
지웅은 윤희를 내려 놓고 곧장 여의도로 향했다. 한 여름의 강변은 더위를 피하려 하는 인파와 새들로 가득차 있었다.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지웅은 강이 잘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웠다. 내리지는 않았다.
물끄러미 파란 강을 바라보았다. 이따금씩 강을 박차고 솟아오르는 갈매기들의 모습과, 그 갈매기를 쫓는 아이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한가롭다. 그리고, 여유롭다.
`똑똑'
언제 왔는지 현영이 차 밖에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지웅이 문을 열어주자마자 현영이 튀어들어왔다.
"야, 하필이면 이런 땡볕 아래에서 보자고 그러냐. 시원한 커피숍 놔두고"
현영이 온 몸에 땀을 뒤집어쓰고 죽는 시늉을 했다. 지웅이 에어콘을 강하게 조절했다.
"그러게 임마 살 좀 빼라니까. 뚱뚱하니까 그렇게 더위에 약한거야"
"야, 내가 뚱뚱하면 대한민국에 안 뚱뚱한 사람이 어딨냐? 이래봬도 80키로밖에 안나간다. 그건 그렇고 태림이는?"
지웅이 대꾸 없이 시동을 걸었다.
"어디 가게?"
"덥다며?"
"태림이는?"
"그 쪽으로 가는 거야"
지웅이 차를 광화문으로 몰았다. 현영은 에어콘 바람에도 더운지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한여름의 열기에 차들이 허느적거려 보였다.
"날씨가 왜이리 변덕이냐?"
현영이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지웅이 창문을 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안 그래도 저녁에 또 비 온단다"
"너만 신났네"
"왜?"
"우리 중에 비 좋아하는 놈은 너 하나잖아"
차는 어느새 이순신 장군 옆을 통과하고 있었다.
"태림이 사무실로 가게?"
현영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지웅이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문사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에는 태림 혼자 있었다. 지웅이 문을 박차고 들어갔으나 태림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현영이 말을 던졌다.
"임마, 손님 왔는데 쳐다보지도 않냐?"
태림은 여전히 하고 있던 일에 열중이다. 지웅은 천연스레 냉장고 문을 열어 물기가 송송이 맺힌 병에서 보리차를 따라 마셨다. 현영이 그걸 보더니 지웅의 손에서 가로채 병채로 들이켰다.
"임마, 컵에 따라 마셔라. 지저분한 놈"
"자식,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현영이 무안한 듯 병을 냉장고 안에 집어 넣고 에어콘 앞에 가서 더위를 식혔다.
"어떻게 됐어?"
지웅이 소파에 앉으며 태림에게 물었다.
"다....돼....엤......다!"
태림이 펜을 책상에 내동댕이쳤다.. 현영이 태림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지웅도 일어섰다. 태림이 검은 뿔테 안경을 벗어던지고 말했다.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럴 줄 알았지. 어느 정돈데?"
현영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80% 이상"
"그 정도나?"
지웅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현영도 담배를 꺼냈다. 태림이 말을 이었다.
"미국이 어쩌니 저쩌니 해도 깊은 원인은 역시 일본이더라구. 시작은 일본이 세계 경제를 장악하기 시작한 80년대 후반부터야. 미국 경제를 앞서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계획을 세운거지. 그러니까 10년만에 효과를 보게 된 셈이지"
지웅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게 어디 10년동안 이루어진 일인가? 100여년을 걸쳐서 된 거지"
"자료는 확실한거야?"
현영이 믿고 싶지 않다는 투로 물었다. 태림 역시 자신의 자료를 믿고 싶지 않는 듯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97년 1월부터 본격적인 계락이 착수된 거 같아. 97년 1월 외국 자본가들이 사들인 우리나라 증권이 4천여억원에 이르고 있어. 그리고 바로 2월에 매도한 금액이 3천여억원. 그로 인해 환율은 1달러당 868.70원에서 878.80원으로 절하됐어. 그래서 원하의 평가 절하를 막기 위해 67.6억 달러를 매각했고 선물환을 포함하면 자그마치 90억 달러나 돼. 이 와중에 96년 현재 332억달러에 달했던 외환보유고는 97년 2월에 298억 달러로 자그마치 34억달러가 빠져나간거야. 그 모든 걸 월가에서 주도한 모양인데 그 중에서도 일본인들이 상당한 힘을 발휘한 것 같아"
태림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현영이 태림을 재촉했다.
"그리고, 작년 9월에 미쓰즈카 대장상이 제안한 AMF(asia money fund)가 그 증거지. 일본은 미국의 보호 아래 있는 IMF 대신 아시아 자체적인 통화기금을 만들고자 했었어. 경제력으로 우리를 종속시키려는 속셈이었지. 물론 강경식 부총리도 적극 찬성했었어. 그 때부터 이미 외환 위기는 시작되고있었거든. 그런데 미국이 극구 반대를 하고 나섰더라구. 결국 AMF는 백지화 됐고, 최종적인 일본의 음모나 나타났어. 작년 11월에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회수해 간 자금이......"
지웅과 현영이 뚫어져라 태림을 쳐다봤다. 현영의 침넘기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태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자그마치 70억 달러나 되더라구. 11월 4일에 외채 만기 재연장이 전면적으로 불허되었고, 3일 뒤 엄낙용 차관보가 동경으로 달려가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대장성 차관을 만나 협조를 구했는데 거절당했고...... 미국 핑계를 대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할 뿐이야"
"미국 핑계라니?"
현영이 물었다.
"클린턴이 한국에 외환 협조를 해주지 말라는 편지를 띄웠다고 하더군. 그런데 그 얘기가 너무 쉽게 드러났다는 거지. 편지를 띄웠는지 어땠는지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일본으로선 아주 좋은 구실이 되는셈이야"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지웅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태림이 서류를 들추며 대답했다.
"그게.... 상당히 저조해. 여기 저기 다녀봤는데 5%도 안 돼는 거 같아"
"나머지 20%는 미국이랑 우리나라?"
현영이 말했다. 태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료 상으로는 20%가 미국이야"
"우리 책임이 우선이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야 한다고 그랬잖아. 일본이나 미국은 옆에서 서브 역할만 한 거고"
지웅이 다소 거친 억양으로 말했다. 태림이 계속 말을 이었다.
"진행 정도는 예상 불능이야. 사실은 일본의 경제력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어. 세계 제 1은 사실인데 그 정도가 말이지, 미국을 근소하게 앞서는지 월등히 앞서는지가 파악이 안 돼. 아무튼 10여년동안 일본이 투자한 돈이 어마어마하다는 건 확실해. 아마 우리나라는 몇 번은 더 사고도 남는 돈이었을거야"
"우리 나라가 얼만데?"
현영이 태림의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굉장히 거친 말투였다. 태림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말하자면 그렇단 말이야. 이건 IMF(International Money Fund)가 아니야. JMF(Japan Money Fund)야 JMF"
지웅이 냉정하게 말했다.
"어차피 다들 예상하고 있던 일이잖아.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그러지 말고 더운데 술이나 한 잔 하자"
"그래, 그러자. 덥고, 열받고 도저히 못참겠다. 가자"
현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태림도 답답했는지 선뜻 지웅의 말에 동의했다.
"가자"
태림이 지웅과 현영을 데리고 나갔다. 현영이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툭툭대는 말투로 물었다.
"어디로 갈건데?"
태림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옥상낙원"
지웅, 현영, 태림 세 사람은 신문사 옥상 천막 아래서 차가운 맥주를 마셨다. 파란 천으로 만든 간이 천정은 따가운 햇살을 어느 정도 막아주고 있었다. 세 사람은 벌써 캔맥주를 두 개씩 마셨다. 두 번째 맥주캔을 찌그러뜨리고 현영이 말했다.
"어제 TV 봤지?"
태림 역시 두 번째 맥주캔을 찌그러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어제 기사 내보내면서 얼마나 짜증났는지 몰라. 빌어먹을 놈들, 36년을 실컫 유린해 먹었으면서 패망기념일이라니. 뭐가 패망기념일이라는거야? 징그러운 자식들"
현영이 말을 마치고 세 번째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지웅이 새 캔맥주를 빙글빙글 돌렸다. 어제 경헌과 윤희와 술을 마시며 나눴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지웅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디 36년만 유린했겠냐? 지금도 피해를 당하고 있는데 뭐. 일재 피해에서 벗어나려면 아직도 멀었어. 난 아직도 그놈들의 민족문화...."
"알아, 알아. 지웅이 니 말 골백번도 더 들었지 않냐. 그런데 지금 이 환란 또한 그 놈들 소행이라니, 으유- 이자식들을 그냥"
현영이 그 새 세 번째 캔맥주를 있는 힘껏 찌그러뜨리더니 벽을 향해 집어던졌다. 구겨진 캔은 맥주 파편을 남기고 그늘 안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지웅이 넌 요즘 실적이 어때?"
태림이 물었다.
"어제, 23억 물었다. 마감 5분전까지 사고치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 놈들이 넘어오더라구"
"그래도 넌 꽤 잘 벗겨먹는다"
현영이 지웅의 말에 기분이 돋는 듯 웃으며 말했다. 지웅이 멋적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현영이 넌 언제 AD 딱지 떼냐?"
그 말에 현영의 눈에 힘이 더 들어갔다.
"응, 조금만 기다려라. 가을 개편 돼면 교양국으로 넘어가면서 프로그램 하나 맡을테니까. 기획안을 올리긴 했는데 반반이야. 조금 벅찬 기획이거든. 국장이 맘에 들어할리는 없는데 부장이 나보다 더 밀어주더라고. 잘만 되면 이틀 뒤부터 콘티작업 시작한다"
"무슨 기획?"
태림이 궁금한 듯 물었다. 현영이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아직은 말할 단계가 아니야. 그치만 니들도 놀랄만한 깜짝 놀랄 만한 프로그램이니까 기대해라. 그냥 한 번 뒤집어 놓을테니까"
"너무 크게 터뜨리지 마라. 난 니가 그러면 겁난다. 너 학교다닐 때도 교수 몰래카메라 찍어서 제적 당할 뻔했잖아. 그거 니가 찍었던 게 걸렸으면 그대로 퇴학이다. 난 그 때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하다"
"하기사, 4학년 전체가 나 때문에 F를 받았으니. 그 교수도 웃기지, 실랄하게 비판하는 기획해보래서 했더니 그렇게 노발대발할건 뭐람"
현영의 말에 지웅과 태림이 한바탕 크게 웃었다.
세 사람이 캔맥주 다섯 개씩을 비우자 하늘이 어두워졌다. 현영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야, 지웅이 손님 온다. 그만 일어나자. 2차는 아무래도 소주로 해야겠다. 비님이 오시려는 걸 보니"
지웅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래, 일어나자. 오랜만에 빗소리 들으면서 소주 한 잔 해야 겠는걸"
태림이 기지개를 주욱 펴며 말했다.
"하나님도 슬프긴 슬프신가보다. 요즘 들어 눈물을 너무 자주 흘리시는 거 같아"
지웅 역시 기지개를 폈다.
"그런가봐. 기가 막힌 걸, 우리 세사람 외에 동지가 하나 더 늘었잖아?"
연전연승(連戰連勝)
"자네는 내 목소리도 모르나? 아니 그것보다 나에 대해서 그렇게 모르나? 내가 무슨 이유로 갑자기 그 많은 엔화를 준비하라고 했겠나? 수상님이 엔화가 필요하면 우리 은행에게 부탁하겠나? 사람이 그만한 생각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조금은 화가난다. 마시이 자신은 분명히 행장의 부탁을 듣고 엔화를 샀다. 최선을 다했다. 적어도 그런 딜링이 손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상이 부탁했다는 말을 들었다. 분명히 지금처럼 행장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하지만.......
어제 마감을 몇 분 안 남기고 온 전화는 행장의 전화가 아니었다. 마시이는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안 그래도 어제 야마모도의 얘기를 듣고 의심이 가긴 했었지만 막상 사실로 받아들이자니 일본 최고의 딜러를 노리던 자존심에 금이 갔다.
"죄송합니다. 원인을 철처히 분석하겠습니다"
행장의 노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어디 이게 원인 분석으로 해결될 일인가? 2억엔이면 자네 몇 년치 봉급인줄 알아? 일주일의 여유를 주겠네. 어떤 놈인지 찾아내는 건 물론이고 어제 손해 본 금액까지 채워놓게. 이건 자네가 옷 벗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건 자네가 더 잘 알거야. 나가보게"
마시이의 주먹은 핏줄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마시이는 행장실을 나오는 대로 일본은행으로 달려가 야마모도를 찾았다. 마침 야마모도는 딜링룸에 있었다. 두 사람은 작은 식당으로 갔다.
"으음, 그랬단 말이지. 그래, 뭔가 이상했어. 자네 은행장이나 수상이 정신이 나가지 않는 이상 그 시간에 그렇게 많은 돈을 준비하라고 할 수는 없지"
야마모도는 쓴 신음소리를 내뱉으려 담배를 비벼껐다.
"혹시, 전에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까?"
"그렇다네. 보름 전 우리 은행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지. 소니에서 갑자기 엔화 500만달러치가 필요하다고 했다더군. 그래서 내 밑의 시니어 딜러가 그 한국인에게 500만달러를 샀지. 그런데 거래가 끝나자마자 소니에서 취소를 해버린거야. 수수료만 물고 어물쩡 넘어가긴 했지만. 아무래도 영 냄새가 이상했거든. 그러고 보니 어떤 놈의 장난이 분명하군. 그 한국인이 분명히 장난을 치고 있는거야. 겁 없는 놈..."
야마모도의 목소리에 힘이 잔뜩 실렸다. 무슨 결단이라도 내릴 모양이었다.
"그런데, 선생님. 제가 받은 전화의 목소리는 영락없는 행장님 목소리였습니다. 저희 행장님 억양이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화의 목소리는 그 억양까지 그대로 똑같았단 말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건 일순간의 장난이 아니야. 이 한국인이 아주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군. 이번만으로 끝나진 않을거야. 분명히 그 놈에게 당하는 은행이 있을거라고. 더군다나 행장의 목소리까지 흉내내는 놈이라면 우리를 너무 잘 알고 있을거야. 주위에 의심갈 만한 사람 있는지 찾아보게"
마시이는 식당을 나오자마자 전화국으로 찾아가 그 시간 자신에게 걸려 온 전화의 발신지를 추적했다. 생각했던대로 공중전화였다. 그것도 바로 자신의 은행 내에 위치한 공중전화였다. 놈은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었다. 생각보다 마시이 자신과, 중앙 은행을 잘 알고 있었다. 결코 쉽게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시이는 집으로 돌아가 곰곰히 생각해봤다. 우선 처음부터 차근차근 접근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당시에 딜링룸의 직원은 마감준비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치프딜러가 유일하게 자리에 없었지만, 그의 톤이 높은 목소리는 굵은 허스키의 행장 목소리를 흉내낼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딜링룸의 직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타부서를 의심하기엔 너무 막막했다. 딜링룸 자체를 은행 내의 또 다른 은행으로 여겨 다른 부서와의 접근을 금기시했고, 때문에 자신에게 그렇게 과감한 전화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시이 스스로도 타부서 직원 중 얼굴과 이름이 매치되는 사람이 없어 누구 하나 의심할 수도 없었다. 냉장고에서 차가운 캔맥주를 꺼내 벌컥 들이켰다. 무더운 여름만큼이나 달아오른 몸은 쉽게 식어들 줄 몰랐다.
냉장고에 있던 맥주를 모두 마셔봐도 막상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주일. 일주일이란 시간도 촉박했다. 2억엔이란 돈도 그렇거니와 자신을 그렇게 몰락시킨 놈을 찾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마시이는 이를 악물고 잠이 들었다. 머리속엔 밤새 음흉하게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얼굴없는 한국인과, 땀으로 목욕을 하며 그를 향해 헛손질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교차되었다.
"지웅씨 혹시 호모 아녜요?"
윤희가 지웅의 등 뒤로 와서 몸을 가까이 기대며 물었다. 윤희의 몸에서 풋풋한 향기가 났다. 스물 다섯의 몸에서 나는 자연스러운 향기와 향수가 합해져 코끝을 간지럽혔다. 지웅이 몸을 앞으로 숙여 윤희를 피하며 대답했다.
"호모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그런데 왜, 나처럼 예쁜 여자가 좋다고 그래도 피하죠?"
윤희가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옆에서 딜링을 하고 있던 경헌과 치프딜러 세열이 동시에 황당한 듯 바라보았다.
"예쁜 건 윤희씨 생각이고, 누구라도 윤희씨처럼 징그럽게 나오면 싫다고 할거예요"
지웅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윤희의 얼굴이 벌개졌다. 경헌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껄걸 웃으며 말했다.
"맞어, 맞어. 윤희씨처럼 그렇게 노골적으로 밀어부치면 색 좋아하는 사람이나 좋다고 하지 보통 남자들이 받아들이겠어?"
"뭐예요?"
윤희가 앙칼지게 말하며 두사람을 노려보았다. 세열이 경헌의 말에 어시스트했다.
"윤희씨 자꾸 그렇게 사무실 분위기 풍기문란하게 만들지 말고 일이나 하지 그래. 윤희씨 이번 달 실적도 롱포지션 맞추긴 어려울 것 같은데. 우리 사무실도 감원 소식 있을지도 모른다구"
"어유, 진짜 어딜 가든 유부남들은 도움이 안 된다니까. 아무튼 난 지웅씨가 정말 이해가 안 된다니까, 나같은 킹카를.... 어?"
윤희가 지웅의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말을 멈췄다. 또 일본 은행과의 딜링 중이었다. 윤희는 아예 의자까지 지웅의 옆으로 바싹 당겨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지웅이 거북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딜 좀 가르쳐 달라고 했잖아요. 이건 순전히 일 때문에 밀착하는 거니까 부담갖지 말아요"
윤희가 희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가슴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티셔츠가 앙증맞게 볼록한 가슴을 가려주고 있었다. 지웅이 윤희를 한 번 쳐다보더니 짧은 숨을 내쉬며 모니터를 주시했다.
"이번엔 금액이 작네요?"
윤희가 턱을 팔에 괴고 말했다. 지웅이 자판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냥 보고만 있으면 안될까요?"
"쳇, 그것도 못 물어봐요?"
윤희는 지웅을 슬쩍 흘겨보더니 모니터에 시선을 던졌다. 지웅이 100만달러의 엔화를 사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쉽게 팔질 않았다. 윤희가 다시 궁금한 듯 물었다.
"중앙은행에서 안 팔면 다른 은행에 거래하면 되지, 왜 자꾸 그 쪽만 건드리죠?"
지웅이 인상을 쓰며 윤희를 쳐다보았다. 윤희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움추렸다. 지웅은 중앙은행에 100만달러치의 엔화를 사는 거래를 시도했다. 20여번의 시도 끝에 중앙은행에서 팔겠다는 사인이 왔다.
"어? 샀네? 지웅씨 진짜 끈질기네. 지금 몇 시지? 1시 반이네. 그거 오늘 팔 거예요?"
지웅이 윤희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담배를 물었다.
"지웅씨!"
윤희가 소리를 질렀다. 지웅이 불을 붙이려다 말고 놀란 듯 윤희를 쳐다보았다.
"내가 분명 그랬잖아요. 일 좀 가르쳐 달라고요. 그런데 뭐예요. 사람이 옆에서 물어보는데 대꾸도 않고. 지금 무시하는 거예요?"
지웅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말했다.
"그래요? 그럼 모니터에 엔화 사겠다는 신호 뜨면 불러요. 담배 좀 피우고 올테니. 시다라고 알죠? 전문가가 되기 전에 기술 배우는 사람들 말예요. 잔심부름도 하고. 무슨 말인지 알죠?"
지웅이 빙긋 웃으며 윤희의 어깨를 툭 치고 나갔다. 경헌과 세열은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낄낄대며 웃었다. 윤희는 입을 쭈뼛 내밀고는 무어라 궁싯거리며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지웅에게 100만달러치의 엔화를 판 사람은 다름 아닌 마시이였다. 마시이의 눈에 핏줄이 서 있었다. 마시이는 방금 자신이 엔화를 판 사람이 지웅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토록 집요하게 엔화를 사겠다고 하는 한국인. 바로 며칠 전 자신을 수모로 몰았던 그 한국인이 틀림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웅에게 판 엔화의 순간 시세는 134.20 / 30 이었다. 만약 엔화가 오르면 마시이는 또 한 번 쓴 맛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마시이는 모니터에 올라오는 다른 신호는 모두 무시한 채 오직 엔화의 시세만을 주시했다. 연신 담배에 손이 갔다. 연기가 마시이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사무실 직원들이 그런 마시이의 눈치를 살폈다. 마시이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1시간이 지나자 엔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러당 134엔 했던 엔하가 갑자기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마시이의 관자놀이는 힘줄이 터질 것만 같았다. 손이 떨렸다. 엔화는 자꾸만 올랐다. 3시 30분이 되자 엔화의 시세는 135.60 / 70 까지 올랐다. 마시이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식은 땀이 흐르고, 손은 자꾸 오타를 냈다.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이봐, 마시이. 더 오르기 전에 파는 게 낳을 것 같은데. 오늘 마감 때까지 140까지 오를 것 같다던데"
"시끄러워!"
마시이가 참다 못해 고함을 질렀다. 직원들 모두가 마시이를 쳐다보았다. 마시이가 자판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마시이의 얼굴은 마치 터지기 직전의 폭탄 같았다.
보다 못한 치프딜러가 마시이를 강제로 데리고 나갔고, 동료직원이 급히 엔화를 사기 위해 여기저기 거래를 물색해 보았다. 어느 곳도 팔려고 하지 않았다. 마시이가 치프딜러를 뿌리치고 컴퓨터 앞으로 달려갔다.
"뭐하는 짓이야. 안 돼!"
마시이는 마치 실성한 사람 같았다. 치프딜러가 마시이의 얼굴을 가격했다. 마시이는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지웅씨, 왔어요. 왔어"
지웅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모니터에 중앙은행에서의 거래가 들어왔다. 윤희는 화장실 안까지 지웅을 쫓아갔다. 지웅이 손을 씻다 말고 사무실로 뛰어왔다. 두 시간 반 전에 샀던 엔화를 다시 팔라고 하는 신호였다. 이미 달러당 137엔에 육박해 있었다. 지웅은 미소를 머금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판을 두드렸다.
YOURS 1
(100만달러 팔겠소)
윤희가 뒤늦게 쫓아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벌써 거래가 이루어 진 뒤였다.
"어, 벌써 끝났네. 얼마 이익이지? 5천만원이네? 지웅씨 왜 100만달러밖에 거래 안 했어요? 한 2000만달러 정도 하지. 그럼 10억 아니야. 우와 그건 그렇고 또 먹었어, 또. 실장님 지웅씨 또 먹었어요"
윤희가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세열이 만족한다는 듯 충만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경헌도 한 번 웃어보이고는 열심히 자판을 두드렸다.
"오늘은 내가 이기겠는걸. 조금만 기다리라고. 1억짜리 롱포지션 만들테니까"
지웅이 다이어리를 꺼내 뭔가를 적었다. 윤희가 옆에서 신기한 듯이 물었다.
"지웅씨 어떻게 알았어요? 난 아무리 봐도 감을 못 잡겠다던데. 너무 멋져. 내가 안 좋아할 수가 없다니까. 그런데 너무 금액이 적잖아. 좀 세게 나가도 좋았을텐데"
지웅이 윤희를 타이르듯 말했다.
"미끼가 너무 크면 의심을 해서 안 무는 법이예요"
윤희는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의자를 굴려 자신의 컴퓨터 앞으로 당겼다. 경헌은 얼굴이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곤 히죽히죽이며 궁싯거리고 있었다. 말대로 롱포지션을 낼 모양이었다.
지웅은 기지개를 주욱 폈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편안한 미소가 아닌 만족한 미소였다.
발 악
오전 내내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던 마시이는 딜링을 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니터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모니터 위로 숫자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마시이는 그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냉정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마저 쉽게 가질 수가 없었다. 무슨 수로...
눈을 감아 봤다. 이빨을 깨물어도 보았다.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거친 숨을 내쉬고 말았다.
직원들이 햄버거와 콜라를 사들고 와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도 모니터만 들여다보았다. 햄버거와 콜라를 마시고들 있는지조차 느낄 수 없었다. 사무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조차도.....
뒤에서 어깨를 툭툭 쳤다. 뇌의 명령이 아닌 반사신경에 의해 고개를 돌렸다. 동료 딜러가 전화기를 내밀었다. 야마모도였다.
"지금 향빈관으로 나오게"
커다란 방 안에 야마모도 혼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방금 들여온 듯 김이 모락모락 이는 녹차가 놓여 있었다. 마시이가 쭈뼛하고 서 있자 야마모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앉게"
마시이가 어정쩡하게 앉았다. 야마모도가 녹차에 입을 잠시 대고는 말을 꺼냈다.
"자네.... 어제도 숏포지션으로 마감하지 않았나?"
마시이는 야마모도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야마모도가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마시이. 자네는 황국시민으로서 어느 정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나?"
마시이가 고개를 들어 야마모도를 쳐다보았다. 야마모도의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시이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전 어느 누구보다도 대일 황국시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나라인 일본 국민이라는 사실은 제게 있어 가장 큰 자랑입니다"
"그럼 대일본을 위해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마시이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다.
"목숨..... 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대일본을 위해서라면.... 이 미천한 목숨.....이라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마시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혹시 자네 어제 거래한 은행도 한국은행이 아닌가?"
마시이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이 자리에서만은 차가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야마모도의 얼굴을 쳐다보지조차 못했다. 야마모도가 차 한모금을 더 마시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지웅이란 잘세. 우리가 지금껏 당한 게 다 그자한테서야.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순 없네. 자네 대일본제국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했지?"
".....예"
마시이의 땀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야마모도가 탁자 위에 하얀 봉투를 내놓았다. 하얀색인지도 몰랐다. 그것이 봉투였는지조차 몰랐다. 야마모도가 무언가를 탁자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더는 것만 어렴풋이 지각되었다.
"다음주에 한국으로 가게. 한달간 연수를 받는 이유야. 한국은행이네. 그리고 그 곳에 나지웅이란 자가 있고. 자네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겠지"
마시이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테이블 위의 것을 집었다.
봉투였었지.....
봉투를 열어보았다. 여권과, 한국행 비행기표, 그리고 300만엔짜리 수표가 들어있었다. 야마모도가 말을 이었다.
"나지웅이란 자를 죽여선 안되네. 괜히 한국인들한테 도화선을 제공할 필요는 없어. 자네가, 자네가 대일본제국에 도화선을 만들어주어야 할 걸세. 무슨소린지 알겠지?"
"예. 잘 알겠습니다"
"가보게, 자네라면 할 수 있을게야"
마시이가 일어섰다. 어지러웠다. 밖으로 나왔다. 찌는 햇살이 더욱 어지럽혔다. 숨이 막혔다. 정원으로 가서 수돗물을 틀어 마셨다.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어지러웠다.
하얀 봉투를 내려다 보았다. 손이 부르르 떨렸다. 휘청거리며 향빈관 대문을 나서다가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혔다. 전 총리인 와타나베였다. 마시이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와타나베가 마시이를 힐끗 쳐다보더니 향빈관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몇대의 중형차가 향빈과 앞으로 모였다. 무거운 얼굴들이 하나둘씩 차에서 내려 향빈관 안으로 들어갔다. 마시이가 아는 얼굴들이었다. 일본의 정치, 경제를 주름잡는 거물들이었다.
"미팅합시다"
8시가 되자 세열이 딜링룸 직원들을 불렀다. 지웅과 경헌, 윤희가 미팅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창밖에는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열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다음주 월요일에 중앙은행에서 우리팀으로 연수를 받으러 온다는데? 마시이라고. 아는 사람 있나?"
경헌과 윤희가 동시에 지웅을 바라보았다.
"왜, 날 보죠?"
지웅이 놀라며 물었다. 경헌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일본이면 지웅씨 지역 아니야. 게다가 중앙은행이고. 지웅씨가 거기서 해먹은 돈이 한두푼이야? 거기도 더 이상은 못 버티겠는 모양이지? 연수를 오다니.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세열도 지웅을 쳐다보며 물었다.
"지웅씨 뭐 아는거 없어? 난 이사람 이름만 얼핏 들었지 소스는 하나도 없단 말이야"
윤희도 지웅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웅이 못이기는 척 말했다.
"저도 아는 건 별로 없어요. 저랑 경력이 거의 비슷할 거예요. 그리고, 야마모도가 키우는 사람이라고 하던데요"
"그래? 그럼 야마모도한테 배우면 되지, 왜 우리 은행으로 오는거야?"
세열이 다소 못마땅한 듯 말했다. 경헌이 웃으며 말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잖아요. 더 이상 돈 잃기 싫은 모양이죠. 안그래 지웅씨?"
"그것때문은 아닐거예요. 뭔가 다른 꿍꿍이 속이 있겠죠"
갑자기 윤희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뭐요? 그럼 마시이라는 사람이 테러라도 일으키러 온다는 거예요? 그럼 지웅씨밖에 없잖아. 팀장님 그 사람 못오게 하면 안돼요? 나 아무래도 느낌이 수상해요. 예?"
"나도 기분이 찜찜하긴 해. 하지만 뭐 위에서 하라는 대로 해야지 어쩔 수 있나. 야마모도 파워가 대단하잖아. 이번 연수도 야마모도가 행장님한테 부탁해서 이루어진거라는데"
"아주 이상한 짓 하기만 해봐. 가만 안 놔둘테니"
윤희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경헌이 놀리듯 말했다.
"지웅씬 좋겠어. 저렇게 옆에서 지켜주겠다는 사람도 있고"
지웅이 일어서며 말했다.
"노땡큡니다. 난 윤희씨 저러는 게 더 무섭다니까요"
"뭐예욧?"
윤희가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세열이 말을 이었다.
"자, 자 그만 하고 일들 합시다. 마시이가 오는 건 오는거고, 일은 해야지. 지웅씨가 너무 잘하니까 한 수 배우러 오는 거겠지"
윤희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지웅씬 정말 너무해. 두고 봐라, 내가 그 사람 이상한 짓 하면 옆에서 도와줄테니까"
지웅이 컴퓨터 앞에 앉아 전원스위치를 누르며 말했다.
"좋으실대로"
"그래 자네가 한국은행으로 연수를 가면 돈이 다시 들어온다던가?"
행장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마시이에게 물었다.
"야마모도 선생께서 주선하신 일이라...."
"야마모도에겐 나도 얘기 들었네. 자네 그럼 일본은행으로 가지 왜 이 은행에서 근무하는 건가?"
마시이는 아무 대꾸도 못했다.
"아무튼 한 달이네. 그 시간 안에 돈을 채워놓지 않으면 자넨 파면이라는 것만 알아두게. 뭐 야마모도가 뒤에 있으니 겁날 것도 없겠구만 그래. 나가게"
행장이 거칠에 인터폰은 눌렀다. 비서의 대답사는 소리가 나왔다.
"차 대기 시켜"
마시이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가는데 행장이 말을 던졌다.
"내일부턴 나올 필요 없네. 아무튼 한 달이니 그것만 알고 있게"
마시이가 문을 쾅 닫고 나왔다. 입맛이 썼다. 곧장 딜링룸으로 향했다. 동료들이 마시이의 눈치를 살폈다.
"어?"
마시이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느새 자신의 컴퓨터와 책상을 치워버린 것이다. 치프딜러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행장님이 갑자기 취한 조치라서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었어. 미안하군"
"됐습니다."
마시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대로 사무실문을 박차고 나왔다. 온 몸이 땀으로 뒤덥혔다.
나지웅이란 세글자라 입안에서 맴돌았다. 자신을 이렇게 치욕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은 자.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IMF불감증
이 무렵 한국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국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국회는 날로 실망을 안겨주고 있었다. IMF라는 국가대란을 떠맡고 출범한 새 정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수십년동안 당했던 정치적 원한에 대한 복수에 몰두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부수립이후 50년동안 여당을 차지하던 현 야당은 지난 날의 향수인지, 패배의 불인정인지 모를 여당 헐뜯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중에 가장 답답한 것은 지난해 있었던 대선의 정치자금 논란이었다. 현직 대통령이 대선 때, 20억원을 자금으로 받았다는 혐의는 선거때도 마찬가지였거니와, 이미 업무를 수행한 지 6개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당의 꼬투리 역할을 하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5공, 6공때는 3천억, 4천억씩 읅어먹었어도 임기 당시에는 눈치만 보던 정계가 고작 20억이라는 금액에 그다지도 혈안이 되어 덤벼들고 있는 것이었다. 천오백억 달러 가 넘는 부채를 짊어지고 있는 나라에서, 국민 1인당 외채가 500만원이나 하는 나라에서 참으로 웃지 못할 일인 것이다.
국민이 답답해하는 정치의 모습은 그것 뿐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려는 여당과 야당의 싸움은 도무지 IMF의 관리체제 속에 들어간 나라의 모습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여당은 어떻게 해서든 국회의원을 끌어들여 의석 과반수 이상을 확보하려고 했고, 이에 질세라 야당의 대변인은 여당이 야당의 국회의원을 빼앗아가는 비열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바로 5년전 자신들이 했던 행동에 욕을 하며 들고 일어선 것이다.
물론 그같은 정치인들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부패한 정치를 타파하고 새롭고, 깨끗한 정치를 이루겠다는 의지 또한 갈채를 받을 만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가 그만큼 순수한가에 대해서 대다수의 국민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옛날,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당파싸움을 벌였던 조선시대에도 국란을 당했을 때는 잠시나마 힘을 합했던 것과, 한국보다 먼저 경제대란을 겪었던 영국이나 이탈리아, 멕시코 등이 국란 앞에서는 정쟁(政爭)을 묻어두었던 것을 떠올려볼 때, 이 나라 정치인들은 역사를 모르거나, 세계의 뉴스를 접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인 것만 같았다. 혹은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IMF사태는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국회의원들이 그토록 여유를 부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재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에 불안을 느낄 뿐, 재벌들은 IMF가 터지기 전과 마찬가지로 고위층의 문화와 생활을 향유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내 돈, 내맘대로' 라는 주장을 반박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쓰로 있는 그 돈들 역시 외국에서 빌려 온 돈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재벌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재벌이라고 착각하는 일부 부유한 중산층들은 벌써 IMF가 끝난 것처럼 다시금 사치와 향락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들 말대로라면 역시 IMF는 별 게 아니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은, 어서 빨리 이 지긋지긋한 IMF가 끝나길 절실하게 바라는 사람은, 그 한파를 직접 몸으로 느끼는 실직자와, 부도난 회사의 사장과, 급속히 수입이 줄은 자영업자,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었다.
이미 그들은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냐'라는 속담을 비웃기라도 하듯, 실제로 당장 먹을 것, 잘 곳이 없어 헤매야 했다. 그나마 가족을 데리고 있는 사람은 책임감이라도 남아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그조차 도피하여 홀로 부랑자 생활을 해가며 이 도시, 저 도시를 헤매는 사람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에, 여기저기서 손가락질하는 질시의 눈초리까지 감수해야만 했다.
그런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는 사람, 자기 가족 하나 부양하지 못하는 사람을 손가락질 하는 자들은 그들의 무능력을 힐난했다. 심한 경우 `그래도 싸다' 라는 말도 서슴없이 내뱉곤 했다.
이 무렵의 한국의 최대의 적은 IMF 관리체제라는 숨막히는 현실보다는, 그 책임이 한국인 전체의 것이 아니라, 일부 중, 하류층에게 떠맡기어진 것이었다.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부유층은 부유층대로 실제로 피부에 와닿지 않는 IMF는 이미 그들에겐 다른 나라의 킬링타임용의 이야기거리밖에 안 되었다.
4천 5백만 모두가, 실제로 당장의 생계의 곤란을 느끼는 그들만큼은 아니더라도, IMF라는 고통을 함께 느끼기만 한다면, 이 국란은 더욱 빠른 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나 이 환란은 ...... 그들만의 IMF였다.
라스베가스
휴일의 압구정 거리는 어느때보다 붐볐다. 모처럼 맑게 개인 날씨를 반기는 듯 사람들은 형형색색의 선글라스를 끼고, 시원한 옷차림으로 젊은 거리를 헤메고 다녔다. 연인들은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다녔고, 곳곳에 눈에 띄는 연예인들, 그리고 그 옆에서 숨을 헐떡거리고 쫓아 다니는 카메라맨과 스텝들도 있었다. 모처럼의 청명한 날씨를 놓치기 싫은 듯 그들은 쉴새없이 카메라를 돌려댔다.
윤희는 뭐가 그리 좋은지 마냥 해죽거렸다. 그 옆의 지웅은 떫떠름한 표정으로 윤희에게 이끌려 다녔다.
"지웅씨, 정말 좋죠. 난 오늘도 비오면 어쩌나 얼마나 고민했는지 몰라"
윤희가 지웅의 팔짱을 꼈다. 지웅이 싫은 내색을 하며 팔을 빼려 하자 윤희가 노려보며 말했다.
"약속했잖아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맘대로 해 준다고"
윤희의 생일이었다. 며칠 전부터 졸라온 터라 지웅은 할 수 없이 승낙을 했고 오늘 하루를 윤희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던 것이다. 사실, 오늘 같은 날은 같이 있어 주고도 싶었다.
윤희는 파란 썬그라스를 머리에 꽂고 희희낙낙하며 로데오거리를 누볐다. 그 수많은 젊은이들 중 자신이 가장 중요한 사람 같았다.
두 사람은 정원으로 꾸민 식당에 들어갔다.
"여기 분위기 참 좋죠. 언제 한 번 지웅씨랑 이런 데 오나 했는데, 헤헤 오늘 소원 푸네. 우리 스파게티 먹죠. 난 버섯스파게티 먹을건데. 지웅씨 뭐 먹을래요?"
지웅이 메뉴판을 대충 훑어보더니 같은 것으로 시켰다. 수많은 인파가 붐비는 로데오 거리 뒷편 치고는 어울리지 않게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파라솔 안으로 파고 드는 햇살이 따스하다 못해 졸음을 유발시킬 정도였다.
"지웅씨 오늘 나 뭐해줄거예요?"
윤희가 턱을 팔에 괴고 물었다. 지웅이 무뚝뚝하게 스파게티를 삼키며 말했다.
"뭘 해줘요?"
"생일선물-"
윤희가 앙증맞게 말했다. 지웅이 스파게티를 더욱 게걸스럽게 먹으며 말했다.
"다 커서 무슨 생일선물"
"어어, 또 삐딱하게 나오네. 자꾸 그럴거예요?"
"스파게티나 먹어요. 다 불어터지네"
"지웅씨랑 있으니까 냄새만 맡아도 배부른 거 있죠? 더 드실래요?"
윤희가 자신의 스파게티를 지웅의 접시에 덜었다.
"나 그만 먹을 거예요"
지웅이 포크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윤희가 포크를 다시 지웅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더 먹어요. 지웅씨 음식 정말 맛있게 먹는다. 이것도 부탁이니까 더 먹어요. 예?"
지웅이 억지로 다 먹자 윤희가 이번에는 산딸기차를 시켰다.
"지웅씨 이 차 마셔본 일 있어요? 향기가 참 독특하죠?"
윤희가 잔에 코를 들이대며 말했다. 지웅은 식곤증이 오는지 연신 입을 벌리며 하품을 해댔다.
"졸려요?"
윤희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지웅이 하품을 하다 입을 막으며 말했다.
"예, 조금 피곤하네요"
"그럼 우리 어디 가서 눈 좀 붙일까요? 나도 조금 졸린데..."
"예?"
지웅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잠깐 눈 좀 붙이자구요. 그리고 날 좀 선선해지면 돌아다녀요, 어때요?"
"꿈깨요"
"왜요?"
"나 그랬잖아요. 윤희씨가 무섭다고"
"누가 잡아먹어요?"
"꼭, 잡아먹힐 것만 같아"
"지웅씨 혹시 몸에 무슨 문제 있는거 아녜요? 있을 게 없다던가...."
지웅이 일어서며 말했다.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그만 일어나요. 나갑시다. 생일 선물 사줄게요"
"그래요?"
생일선물이라는 말에 윤희가 환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오후가 되자 사람들은 두 배로 늘어난 것 같았다. 더욱 비좁아진 거리를 두사람은 헤메고 다녔다.
윤희가 악세사리 매장 앞에 멈췄다.
"지웅씨, 잠깐만요"
지웅을 두 평 남짓한 매장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수많은 모형의 악세사리들이 걸려 있었다. 윤희가 한참을 두리번거리더니 고양이 모양의 악세사리를 골랐다. 전자시계와, 휴대폰 줄이었다.
"나, 이거 사줘요"
윤희가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지웅이 윤희를 한심스레 내려보았다. 윤희가 다시 한 번 졸랐다.
"이거 사줘요, 예?"
"나가요"
"왜요?"
윤희가 섬뜩 놀라며 물었다. 지웅은 다짜고짜 매장을 나갔다. 윤희가 부리나케 쫓아나갔다.
"왜 그래요? 화 났어요?"
"화났어요"
"왜요? 내가 무슨 잘못 했어요?"
지웅이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그 시계 얼만 줄 알아요?"
"얼만데요?"
윤희가 빼꼼해져 물었다.
"십이만원이예요"
"그래요? 그렇게나 비싸요? 미안해요 난 그렇게 비싼 줄 몰랐죠"
"비싸서가 아녜요. 그 시계 어디서 온 건 줄 알죠?"
"일본이요"
"윤희씨 시계 없어요?"
윤희는 대답대신 고개를 숙여 자신의 왼쪽 팔목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 캐릭터 상품들 죄다 일본에서 들어온 거예요. 무조건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배격하는게 아니라,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에 굳이 필요도 없는 것들을 살 필요가 없잖아요? 앞으로 일본문화가 개방되는 거 윤희씨도 알고 있죠? 헬로키티? 왜 그게 그렇게 불티나게 팔려야 되는 거죠? 돈 쓸데가 그렇게들 없는 모양이죠?"
지웅이 열변을 토했다. 윤희가 한참을 듣고야 쑥스러운 듯 말했다.
"맞아요. 지웅씨 말이 맞네. 나 참 생각이 짧아. 지웅씨 집에서 잘 때 할머니 얘기 들었으면서. 미안해요. 그렇다고 화는 안낼거죠? 난 단지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하고 다니길래, 얼떨결에 그런거죠. 내가 잘못했어요"
윤희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지웅도 윤희의 그런 얼굴에 더 이상 잔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지웅이 택시를 잡았다. 벌써 오후 5시를 넘기고 있었다.
택시는 두 사람을 신촌에 내려주었다. 신촌의 휴일도 압구정에 못지 않았다. 윤희는 지웅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웅이 잠자코 따라오라는 듯 앞장섰다. 윤희는 지웅을 놓칠세라 팔짱을 꼭 끼고 쫓아다녔다.
"어디 가요?"
윤희가 기대되는 듯 물었다. 해거름에 비친 윤희의 모습이 붉게 물들었다. 지웅이 대답했다.
"술먹으러요. 윤희씨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게, 술이잖아요"
윤희가 맞다는 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또, 있어요"
"뭐요? 안주?"
"아니? 지웅씨"
지웅의 팔짱을 더욱 꼭 쥐었다. 뭉클한 가슴살이 지웅의 팔에 와 닿았다. 지웅이 어색한 듯 윤희를 떼어놓았다.
"더워요"
"치-"
윤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웅의 팔에 매달려 신촌바닥을 누볐다.
라스베가스 안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지웅이 들어가자 바텐더가 반가이 맞았다. 지웅이 윤희와 바에 앉았다.
"어? 오늘은 웬일로 여자랑 같이 왔어? 애인인가봐?"
바텐더가 재떨이를 내밀며 말했다. 윤희가 크게 말했다.
"예, 애인 맞아요"
"잘어울리네요"
"감사합니다"
윤희가 방그레 웃으며 말했다. 지웅이 윤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윤희가 낼름 혀를 내밀었다.
"맥주?"
바텐더가 물었다. 지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텐더가 냉기가 서린 맥주 두 병을 내밀었다. 지웅이 마개를 돌려서 윤희 앞에 놓았다.
"폭주하지 마요, 나 도망갈거니까"
"알았어요. 마셔요, 안그래도 목말랐는데, 자 짠"
두 개의 병이 쨍그랑 하고 부딪혔다. 두 사람 모두 맥주를 벌컥이며 들이켰다.
"캬, 시원하다. 그쵸 지웅씨"
윤희가 신이 나서 말했다. 지웅도 기분이 짜릿한지 웃어보였다.
"어? 왔네?"
늘씬한 글래머의 여자가 주방에서 나오며 지웅을 보고 아는체 했다. 지웅 역시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잘 있었어요?"
"어라? 애인 생겼나보다"
여자가 손을 내밀어 지웅과 악수를 나누었다. 윤희가 경계의 눈초리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지웅과 악수를 나누고는 다시 윤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김유미예요"
윤희가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유미는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다.
"예쁘죠?"
지웅이 웃으며 말했다. 윤희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저 여자 보러 여기 왔죠? 어유 저 얼굴에 생기 돋는 거 봐"
"질투는.... 근데 정말 멋지지 않아요? 이 가게 오너거든요"
"멋지긴 뭐가 멋져. 내가 훨씬 멋지지. 쳇. 아저씨 여기 맥주 한 병 더주세요"
윤희가 약이 올랐는지 맥주를 급하게 들이켰다. 지웅은 개의치 않는 듯 바텐더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유미가 다시 주방에서 나왔다. 지웅이 유미에게 눈치를 보냈다.
"됐어요?"
유미가 장난스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홀 안을 한 바퀴 돌아 손님들에게 무언가를 수근대고는 주방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유미는 벌써 두 병째의 맥주를 비웠다. 지웅이 약올리듯 말했다.
"질투해요?"
"그래요, 아주 질투나 죽겠어. 치, 아저씨 여기 맥주 한 병 더 주세요"
윤희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순간 정전이 됐다. 손님들이 꺄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윤희가 당황했는지 손을 더듬어 지웅을 찾았다. 지웅의 팔이 손에 잡혔다.
"지웅씨, 맞아요?"
"윤희씨"
"왜요?"
"오해하진 마요"
유미가 주방 문을 열고 나왔다. 두 손 위에는 촛불이 켜진 케잌이 들려 있었다. 유미가 조심스레 케잌을 윤희 앞에 내려놓았다. 그 뒤를 따라 바텐더가 와인을 들고 와 두 사람 앞에 한 잔씩 따라주었다.
지웅이 윤희의 귀에 대고 말했다.
"생일 축하해요"
홀 안에서 오로지 윤희의 모습만이 비춰보였다. 스물다섯개의 초에서 환한 불꽃이 피었다. 윤희의 눈에 똘망똘망 눈물이 맺혔다. 바텐더가 음악을 틀었다. 에릭크랩톤의 Wonderful tonight 이었다. 급기야 윤희의 볼에 두줄기 눈물이 흘렀다. 유미가 살짝 말했다.
"뭐해요? 촛불 꺼야지. 우리도 장사해야 되는데 마냥 감격만 하고 있을거예요?"
윤희가 지웅을 돌아보았다. 지웅이 살짝 윙크를 했다. 윤희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촛불을 껐다. 손님들이 함성을 질렀다. 다시 불이 들어왔다. 윤희가 쑥스러운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웅이 잔을 들었다.
"한 잔 해요"
윤희가 지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와락 달려들어 지웅을 끌어안았다. 지웅이 윤희를 떼어내며 말했다.
"오해하지 말라고 했죠"
윤희의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윤희가 울먹이며 말했다.
"나 오늘은 오해해도 좋아요. 아니 오해할래. 너무 행복한 거 있죠? 어, 나 어쩜 좋아. 지웅씬 이제 끝났어. 정말이지, 정말이지 지웅씨 내꺼예요. 알아요? 이제 내 껀 지웅씨밖에 없어요"
"내가 이래서 그냥 술이나 마시려고 했다니까. 화장실 다녀 올테니까 정신좀 차려요"
지웅이 자리를 비우자 유미가 윤희에게 다가왔다.
"지웅이 윤희씨 좋아해서 그러는거니까 확실하게 잡아요. 내가 그랬었거든요. 애인 생기면 꼭 데리고 오라구요. 지웅이 여자랑 여기 온 건 처음이예요. 잘 해봐요. 쟤가 좀 무뚝뚝해서 그렇지 진짜 괜찮은 애예요"
유미가 눈을 찡긋 하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지웅이 바로 돌아와 앉았다.
"정신 좀 차렸어요?"
윤희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웅이 맥주를 들이켰다. 바텐더는 쉴 새 없이 음악을 틀어댔다. 두 사람 모두가 유난히 술이 잘 받는 모양이었다. 끝도 없이 술이 몸 안으로 들어갔다.
화 야(花夜)
두 사람이 라스베가스를 나올 때는 이미 날이 깊이 저물어 있었다. 신촌의 밤거리는 더욱 활기찼다. 여기저기 전단을 돌리는 사람들과 그 전단을 받아가는 사람들, 끼리끼리 모여 다니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윤희는 여전히 지웅의 팔짱을 놓지 않았다. 지웅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나다, 어디냐?"
현영이었다. 지웅이 윤희를 힐끗 쳐다보고는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신촌"
"그래? 잘됐네. 지금 태림이랑 소주 한 잔 하고 있는데, 이리로 와라. 그 때를 아십니까 알지? 얼른 와라 기다리고 있을게"
현영이 일방적으로 말을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웅이 미처 대답할 틈도 없었다. 지웅이 윤희를 보고 물었다.
"윤희씨 괜찮아요?"
윤희가 다소 발그레진 얼굴로 지웅을 바라보았다.
"왜요?"
"늦은 거 아니냐구요"
윤희가 시계를 보고 말했다.
"이제 9시밖에 안됐는데 뭐"
"그래요? 그럼 같이 가요. 내 친구들이 이 근처에서 술마시고 있다네요"
윤희가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죠. 나 거기 안 간다고 하면 집에 가라고 그럴거잖아요"
지웅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 이젠 나에 대해서 완전 뚫었네. 가요, 이 옆이니까"
그 때를 아십니까 앞에 도착해서 지웅이 윤희의 팔을 풀었다. 윤희는 싫은 표정이었지만 지웅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팔을 풀었다.
술집 안은 말 그대로 그때를 아십니까 였다. 벽마다 붙은 포스터는 6-70년대를 연상 시키는 영화 광고물이었고, 음악 또한 한국의 고전이란 고전은 모두 모아 둔 곳이었다. 게다가 나오는 음식 또한 전통 음식이었다. 신기해서 찾은 곳이 이젠 어느새 세 사람의 단골집이 되어 버렸다.
현영과 태림도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간 상태였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발개져 있었다. 현영이 윤희와 들어온 지웅을 보더니 경악스럽게 말했다.
"어, 너 이자식. 뭐야 이거. 지금껏 여자랑 있었단 말이야? 야 이 놈 봐라. 이거 왕 배신인데, 배신"
태림이 현영을 거들었다.
"그러게 말이다. 생전 여자라곤 관심도 없을 것처럼 굴던 녀석이, 허 기가 막혀서 말도 안나온다"
지웅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야, 야. 딜링룸 동료야. 엉뚱한 상상들 하지 마"
윤희가 다소 수줍어 하며 현영과 태림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정윤희예요. 그리고, 지웅씨 애인 맞아요"
지웅이 화들짝 놀라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야, 절대 아니다. 니들 나 알잖아. 내가 여자 알기를 바퀴벌레로 하는 놈 아니냐. 생일이라서 만난거야. 니들 의심하지 마라. 응?"
당황한 지웅의 얼굴이 두 배는 더 발개졌다. 윤희는 마냥 좋은 듯 히죽거리며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태림이 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애인이면 어떻고, 마누라면 어떠냐. 안녕하세요. 저 지웅이 친구 윤태림입니다. 머리는 지웅이보다 조금 더 좋고요, 돈도 조금 더 많구요, 능력도 조금 더 많구요, 그리고 여자관계는 훨씬 깨끗합니다"
태림이 윤희의 잔을 채웠다. 현영도 뒤질세라 입심을 보였다.
"사실, 모르시는 모양인데. 저랑 이놈이랑 사귄지 꽤 돼거든요. 어쩐지 요새 이녀석에 제게 통 냉정하게 굴더라니, 윤희씨 때문이군요. 내가 알기론 지웅인 여자보다 남자를 더 좋아할텐데..."
윤희가 대답했다.
"알아요"
"예? 알아요?"
"예"
"그런데 왜 만나요?"
"전 여자로 안보인데요"
"그럼 남자?"
"아뇨. 전 또다른 지웅씨래요"
"잘들 논다. 아주, 소설을 써라"
지웅이 어이 없는 표정으로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야, 암튼 반갑다. 제수씨도 생기고, 한잔 하죠. 제수씨"
현영이 잔을 들며 말했다. 지웅을 빼고 세 사람이 잔을 비웠다. 태림이 잔을 채우며 말했다.
"지웅아, 현영이가 드디어 프로그램을 하나 맡았단다"
"그래?"
지웅이 테이블에 바싹 다가가 앉았다. 현영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다큐멘터리야. 일단 60분짜리 하나 맡았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다. 조만간 일본에 갈 예정이야?"
"일본은 왜?"
태림이 대신 말을 받았다.
"이 녀석 맡은 프로그램이 `이것이 일본이다' 래. 문화 개방 앞두고 그 쪽 사정을 속속히 파온다나?"
"그래? 축하한다, 야. 한 잔 하자"
어느새 지웅의 얼굴에 웃음이 도졌다. 지웅이 잔을 비우고 말했다.
"야, 거 아주 멋지겠는 걸? `이것이 일본이다' 라.... 문화개방에 즈음해서 기획한거라고?"
"그래 임마. 솔직히 자신은 없는데 하는 데 까지 해 볼 생각이다. 우리 세사람 매일 하던 얘기가 그 얘기 아니냐. 이번에 아주 속속들이 파헤쳐 볼려고"
"그래도 어느 정도껏 해라. 난 니가 야쿠자한테 당할까봐 겁난다"
태림이 웃으며 말했다. 지웅이 한 술 더 떴다.
"야, 야쿠자가 나오면 내가 일지매 몇 명 보내줄 테니까 한 번 해 봐라"
윤희는 물끄러미 지웅을 바라보았다. 그 새 저렇게 웃고 있다니... 조금은, 섭섭했다. 그래도, 저 모습이 지웅의 매력이니까......
11시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얼큰히 취해 있었다. 현영이 비틀거리며 말했다.
"태림이 넌 우리집 가서 자자. 그리고 지웅이 너 이자식 제수씨 꼭 집에 데려다 줘야 한다"
"자식, 잘마셨다. 일본 가기전에 꼭 연락해라. 태림이도 조심해서 들어가고"
"니 걱정이나 해라. 가라. 제수씨 잘가요"
현영과 태림이 어깨동무를 하고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지웅과 윤희도 차로로 나왔다. 밤손님들을 태우기 위한 택시들이 꽤 많았다. 지웅과 윤희가 택시에 올랐다. 지웅이 기사에게 말했다.
"청담동이요"
마시이는 혼자 쓸쓸히 바에 앉아서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벌써 두 병째였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질 않았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이라는 여운을 이길 재간은 없는 모양이었다. 웨이트리스가 가끔씩 말을 건네 보았으나 마시이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붉은 조명 사이로 빨려들어가는 연기가 선명하다 못해 아름다워 보였다.
"여기 있을 줄 알았네"
언제 왔는지 야마모도가 서 있었다. 이상하게 야마모도의 얼굴이 흐려보였다.
눈물-
야마모도가 곁에 앉으며 손수건을 건넸다.
"자네 인생이 끝난 게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게. 대일본제국을 위해서 명예로운 길을 택한 사람은 얼마 없어. 자랑스러워 해야지"
마시이는 아무 말도 없이 거푸 잔을 비웠다. 야마모도가 마시이의 등을 쓰다듬고는 일어섰다. 그리고 작은 천주머니를 내밀었다. 마시이가 물끄러미 천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대일본 제국은 자넬 잊지 않을 걸세"
야마모도가 카페 문을 열고 나갔다. 마시이가 가만히 천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서슬시린 단도가 들어 있었다. 마시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뜨거운 눈물이 동반된 거친 웃음을 자꾸만 터뜨렸다.
"지웅씨, 빨리 일어나요. 집에 다 왔어요"
윤희가 지웅을 흔들어 깨웠다. 지웅이 간신히 눈을 떴다.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윤희가 지웅을 부축했다.
"어?"
지웅이 정신을 차리고 윤희를 보며 짧은 비명을 질렀다.
"왜요?"
윤희가 태연하게 웃었다.
"어떻게 된거예요?"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되요. 보는대로지. 지웅씨 그냥 보낼 수가 있어야지. 걱정 마요. 우리 집에 들렀다가 허락 맡고 나온거니까. 빨리 들어가요"
윤희가 지웅의 팔을 끌고 앞장을 섰다. 지웅이 힘없이 끌려갔다. 오피스텔 문을 열자마자 지웅이 침대에 쓰러졌다. 윤희가 지웅의 신발을 벗겨주며 말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거예요. 나 오늘은 그냥 안 넘어가니까"
지웅은 아무 대꾸도 없이 침대에 엎어졌다. 윤희가 수건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나온 뒤에도 지웅은 그대로였다. 윤희는 수건으로 물기를 털고 냉장고에서 쥬스를 꺼내 마셨다. 담배를 한 개피 물었다. 이미 알콜이 잔뜩 들어 있는 몸이라 담배맛이 독했다. 천천히 침대로 걸어갔다. 지웅의 머리결을 쓰다듬어 보았다. 까만 생머리가 꽤나 반짝였다.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라스베가스에서의 유미의 말이 떠올랐다.
"지웅이 윤희씨 좋아해서 그러는거니까 확실하게 잡아요. 내가 그랬었거든요. 애인 생기면 꼭 데리고 오라구요. 지웅이 여자랑 여기 온 건 처음이거든요. 잘 해봐요. 쟤가 좀 무뚝뚝해서 그렇지 진짜 괜찮은 애예요"
지웅의 양말을 벗겨내고 똑바로 눕혔다. 그리고 거실 불을 끄고 침대 위로 올랐다. 가만히 지웅의 옆으로 가서 누웠다. 술냄새가 달콤하게 배어 나왔다. 팔을 지웅의 가슴 위로 올려 놓았다.
"엄마야!"
지웅이 갑자기 윤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윤희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벗어나려 해 보았다. 지웅의 팔엔 더욱 힘이 들어갔다.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이건 반칙이예요! 웁!"
지웅의 입술이 윤희의 입술을 덥쳤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웅의 혀가 살그머니 윤희의 입으로 밀고 들어왔다. 부드러웠다. 어느새 윤희의 몸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웅의 손이 윤희의 맨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따뜻했다. 점점 몸이 달아 올랐다. 지웅이 입술을 뗐다. 윤희가 만족한 듯 웃으며 말했다.
"능구렁이, 응큼해"
"뭐가?"
지웅이 어둠을 뚫고 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자는 다 바퀴벌레로, 보인다며요?"
"나, 아무래도 변탠거 같아. 바퀴벌레랑 사랑을 나누고 싶으니"
지웅의 입술이 다시 윤희의 입술을 덥쳤다. 한 손으로 윤희의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핑크빛 브래지어가 나타났다. 손을 호크에 가져다 댔다. 아무리 끌러 보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윤희가 살짝 웃더니 손을 뒤로 해서 브래지어를 풀렀다. 탐스러운 가슴이 지웅의 어깨에 와서 닿았다. 지웅이 윤희의 위로 올라갔다. 가슴을 보듬었다.
"술먹고 그러는 거 아니죠?"
윤희가 걱정스레 물었다. 지웅이 나즈막히 말했다.
"하지 말까?"
윤희가 지웅을 와락 끌어안았다. 맨살로 전해오는 체온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이번에는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치마를 걷오올리고 스타킹을 벋겨냈다. 다리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본능인가봐, 헤"
윤희가 멋적은 듯 웃었다.
치마의 지퍼를 내리고 벗어 던졌다. 윤희의 몸을 가리고 있는 것은 한뼘의 팬티밖에 남지 않았다. 지웅의 몸을 비틀어 자신의 옷을 벗었다.
지웅이 아침 햇살에 잠이 깨자마자 침대 시트를 보고 놀랬다. 붉은 선혈이 묻어 있던 것이다. 윤희도 역시 잠에서 깬 듯 몸을 움직였다.
"윤희씨 자꾸 보채길래 경험 있는 줄 알았더니..."
지웅이 미안한 듯 말했다. 윤희가 지웅을 쓰러뜨려 끌어안고 말했다.
"왜요, 실망이예요?"
"아니, 미안해서"
"뭐가요? 지웅씨 어제 술김에 그랬구나. 나 몰라, 책임져요. 어쨌든 나 순결 잃었으니까. 발뺌할 생각은 하지 마요. 울아빠한테도 이르로 현영씨하고 태림씨한테도 이를테니까. 팀장님하고, 차선배한테도 이를거야"
지웅이 가만히 윤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윤희가 더욱 지웅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일어나야죠. 벌써 일곱시가 다 됐는데, 출근 안해요?"
윤희가 눈을 감고 말했다.
"나 오늘은 진짜 맛있는 아침 차려줘요. 속 많이 아퍼. 진짜진짜 시원한 걸루"
탐색전
"지웅씨, 그 연수받을 사람 지금 공항에 도착했다는데, 나가볼거야?"
경헌이 전화를 어깨에 대고 물었다. 지웅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뇨, 택시타고 오라고 하세요, 명분상이겠지만 그래도 연수를 받으러 온 사람한테 헤헤대며 마중 나갈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요, 뭐 굳이 나갈 필요까지 없잖아요?"
윤희가 정색을 하며 지웅을 옹호했다. 경헌이 송화기를 막은 채로 말했다.
"그래도 나가야 되는게 예의 아니야?"
"그렇긴 해. 나가보긴 해야 될 거 같은데. 지웅씨 안 돼겠어?"
세열까지 지웅을 재촉했다.
"그럼 차선배가 나가면 되잖아요? 왜 싫다는 사람을 자꾸 닥달하는 거예요?"
"윤희씨 그만 해요. 제가 다녀오죠 뭐. 은행 얼굴도 있고 하니까. 내키진 않지만"
"그래, 지웅씨가 좀 다녀와. 어? 끊겼잖아"
경헌이 뚜뚜거리는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가며 말했다.
"우리도 일본에 연수 좀 보내야겠어. 이건 뭐 뭘 해도 찬밥신세니. 팀장님 우리도 윤희씨 한 달 정도 일본으로 연수 보내는 게 어때요?"
마시이는 처음부터 자존심이 상했다. 일본에서 왔다고 하면 플랭카드를 들고 나와서, 아니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종이 쪽지에 이름을 쓰고 꽃다발을 들고 나와 마중했던 자들이 택시를 타고 오라니. 경헌이 소리가 안 들리게 송화기를 막고는 있었지만 마시이의 귀에 들어오고 만 것이다. 도저히 나지웅이란 자를 가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괘씸한 놈-"
자신의 의지를 한 번 더 확인시킨 듯 긴 숨을 내뱉은 마시이는 모범택시를 타고 한국은행으로 갔다.
마시이의 수모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무슨 모의가 있었는지 어렵게 찾아간 딜링룸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텔렉스에 주의를 두고 있던 치프딜러 세열이 자신이 딜링룸에 들어온 걸 알아채긴 했으나 두어 번 쳐다보다가는 여전히 텔렉스에 몰두했다. 마시이는 끓어오르는 수치를 참으며 말을 걸었다.
"저- 일본은행에서 온 마시이라고 합니다만"
그제서야 경헌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웃으며 인사했고, 텔렉스에 몰두하던 세열도 마시이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반갑소. 나 이 딜링룸의 치프딜러 한세열이요, 뭐 우리한테 뭐 배워갈 게 있을 지 모르겠지만, 잘 해 봅시다"
세열과 악수를 하던 마시이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차가운 눈초리는 자신의 존재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여전히 모니터에만 열중하고 있는 지웅의 목덜미에 가서 꽂혔다. 경헌이 분위기의 어색함을 눈치채고 애써 지웅을 불렀다.
"이봐, 지웅씨. 여기 일본은행 딜러 오셨는데, 인사 좀 해야지?"
모니터에 열중하던 지웅은 안경 위로 마시이를 흘깃 쳐다본 후 내키지 않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슬렁 걸어와 악수를 청했다. 윤희는 몸을 돌려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나지웅입니다. 뭐 한 달동안 해서 뭘 배울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해봅시다"
지웅이 건방진 말투로 마시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색한 악수였지만 그 짧은 순간의 두 사람 눈사이에서는 실제로 하고 싶은 말이 오갔다.
`너를 잡으러 왔다'
`웃기지 말아라'
"자, 자 이거 분위기 참 어색하구만. 팀장님 오늘 환영회는 해야죠? 앞으로 한 달이나 얼굴을 맞대고 있을 뉴페이스가 오셨는데"
경헌이 두 사람 사이의 냉기를 읽었는지 평소 성격대로 분위기를 띄워보았다. 세열이 대답했다.
"그래야지. 지웅씨, 윤희씨도 괜찮지? 그나저나 마시이씨 숙소부터 해결해야 할텐데. 지웅씨 알아봤어?"
"예, 뭐 굳이 비싼 호텔에서 혼자 잘 필요가 없을 거 같아서 저희 집에서 같이 있을까 하는데요. 어때요, 마시이씨. 괜찮으시죠?"
말로는 괜찮냐고 의사를 물어보는 듯 하지만 여전히 도전적인 태도였다.
"예, 괜찮습니다. 차가운 호텔보다는 사람이 같이 있는 게 낳죠. 덕분에 한국문화도 배우고. 이거 은근히 기대가 되는데요"
마시이는 부글거리는 속을 참고 외려 웃으며 대꾸했다.
"에이, 지웅씨 집 지저분한데 어떻게 거기서 손님을 지내게 하려고 해요? 그러지 말고 호텔로 잡지 그래요?"
윤희가 갑자기 극구 반대를 하고 나섰다. 사람들 모두가 윤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윤희의 얼굴이 갑자기 발개졌다.
"아, 아니. 혼자사는 남자 집이 원래 좀 그렇잖아요. 그래서 그런 거지 별 뜻 없는 거 알죠? 차선배"
윤희가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경헌이 다 알았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혼자 사는 남자 집이 뭐 지저분한가보지? 지웅씨, 그런거야?"
지웅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윤희가 사람들을 억지로 끌며 말했다.
"저 제가 커피 한 잔 살테니까 나가죠, 예?"
다시 한 번 향빈관에 거물들이 모였다. 줄잡아 20여명은 족했다. 야마모도가 오전 11시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1시간동안 사람들이 연이어 들어왔다. 와타나베 전 수상부터 시작해 소니, 파나소닉, 산료 등 전자회사의 사장들과, 혼다, 도요타 등 자동차회사의 사장, 그리고 주요 은행의 행장들, 몇 개 부처의 장관들까지 모두가 하나같이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종업원들은 이미 적응이 되어 있는 듯 신속히 음식을 날랐고, 사람들 또한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자신의 자리인 양 지정된 곳에 앉았다. 사람과 음식이 모두 들어오고서야 전 총리 와타나베가 말을 꺼냈다.
"우려했던대로 한국인들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소. 하지만 아직은 그 진동이 미약하오. 더 일어서기 전에 밟아버려야 한다는 나, 그리고 여러분의 생각을 이젠 실천에 옮겨야겠소. 이젠 세계 언론을 너무 의식하지 마시오. 어차피 언론이야 우리를 마냥 곱게 보아줄 리도 없고, 지금 당장 우리가 금으로서 한국을 치게 되면 물론 욕을 해대겠지만 그것도 길어야 1년이요. 저 한국에 관심을 갖는 나라가 얼마나 되겠소? 잠시 그들에게 헤드라인을 제공해주긴 하겠지만 우리가 얻는 이익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오. 53년 전의 치욕. 지금이 바로 그 치욕을 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요. 합방 36년동안 그렇게 나라를 발전시켰는데 고마워하기는 커녕 해마다 이맘때면, 사죄를 하라느니, 정신대 배상을 하라느니 자꾸 신경을 거슬린단 말이오. 지금 당장 저 한국을 잡아먹어야 하오.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우리 대 일본제국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야 하오. 내년이면 한국인들, 우리에게 돈 몇푼에 월드컵을 양보할 것이오. 그게 얼마나 큰 수모였소? 6년을 준비한 우리가 불과 2년 남짓 준비한 저들과 공동개최라니. 88년 올림픽도 마찬가지이거니와 지금껏 동정표로 세계의 환심을 샀던 한국인들을 무참히 밟아버려야 할 것이오"
와타나베의 양 옆에 좌선했던 거인들의 몸짓이 미세한 떨림을 보였다. 마음속으로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이번엔 결코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금이타조(金以打朝)! 우리의 막강한 경제력으로 너희를 집어 삼키고 말리라'
"노무라 사장, 이번 일은 잘 되고 있소?"
와타나베가 산료의 노무라 사장에게 물었다.
"예, 이번 캐릭터 상품이 조선을 야금야금 좀먹고 있습니다. 특히 `헬로키티' 는 가히 선풍적입니다. 초등학교 여자부터 시작해 대학생까지 `헬로키티' 스티커 한 장만 선물해줘도 입이 헤 벌어지는 실정입니다. 거기다가 `케로케로케로피', `배드바쯔마'루, `마이 멜로디', `포카초' 들도 서서히 중, 고등학생들에게 잠입하고 있습니다"
"수익은 어떻소?"
"예. 여기선 스티커 한 장에 100엔 하는 것이 서울 압구정에서는 300엔에 팔리고 있습니다. 거기다 전자시계, 화장품 가방, 휴대폰 줄까지, 지금 서울 여자들 중 대부분이 `헬로키티' 캐릭터 상품 하나라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지경입니다. 특히 압구정을 비롯해, 강남, 반포 쪽의 매장이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내일 모레 압구정에 정식으로 `산료 코리아'가 오픈합니다. 그렇게 되면 더욱 많은 한국의 돈과 정신을 끌어올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마곳찌 그 이상으로 한국 문화를 잠식해야 하오. 이번기회에 하국인들을 경제속국뿐 아니라 확실하게 문화속국으로 만들어야 하오. 게다가 1년 안에 한국에서 우리의 문화에 대해 개방을 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한국 정부의 탄압으로 우리의 문화를 동경하던 젊은이들은 두손을 들고 환영할 것이오. 가장 극단적인 것이로, 가장 일본적인 것으로 저들의 문화를 침투해야 하오. 영화 뿐만 아니라, 음악, 컴퓨터 게임, 애니매이션까지 우리 문화의 우월성을 보여줄 좋은 기회요. 머지 않아 저 나라의 젊은이들은 국적만 한국이지 실제로는 우리의 문화습성으로 살게 될 것이오. 두 분은 잘 되고 있소?"
와타나베가 소니 사장과 파나소닉 사장에게 물었다.
소니 사장이 먼저 대답했다.
"90년대 초반만큼은 아니지만 꾸준히 저희 제품을 염가에 들여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의 대학생들은 90%가 일본 워크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때 당시 한국에 저희 제품을 침투시킨 것이 드디어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LG나 삼성에서 최신 워크맨을 만들었지만 같은 가격이면 일본제품을 찾는 것이 한국인들입니다. 이제 한국 젊은이들은 일본 거 아니면 안된다라는 인식이 틀에 박혀 있습니다."
파나소닉 사장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저희 회사 제품에다 일본의 톱가수들의 테잎을 넣어서 판매할 생각입니다. 몇 년 전부터 일본 가수에 푹 빠져 있던 한국 젊은이들은 구하기 힘든 일본 테잎이 들어있다는 자체만으로 열광을 할 것입니다. 물론 한국 정부에서 제재를 하겠지만 그 나라에서 처음 워크맨을 생산할 때 시험테잎이 들어있었던 예를 들고, 문체부 장관만 설득하면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겁니다. 그렇게 일본음악에 심취하던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문화개방으로 본격적인 일본 문화를 침투시키면 보다 빠른 시간 내에 그들의 정신을 착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한국인들을 문화 노예로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와타나베가 말없이 야마모도를 쳐다보았다. 야마모도가 절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아침에 한 젊은이를 한국에 보냈습니다. 나지웅이란 자를 파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송구스럽게도 저희 은행쪽에서는 그다지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한국에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자를 조만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장난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거물들이 하나같이 자신이 맡은 상황에 대해 말했다. 모두들 조급해하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 10여년을 기다린 사람들이었다. 반세기 전의 수모를 갚기 위해 10여년을 준비한 사람들이었다.
음식에 손을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음식을 권하는 사람 역시 없었다. 애초부터 음식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모임이었다.
딜링룸의 모든 직원들은 마시이를 해물요리집으로 인도했다.
"여기 해물탕 하나, 대하랑, 쭈꾸미 불고기, 아, 그리고 쟁반 막국수 하나 줘요. 아, 참! 소주도 주고요"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자마자 경헌이 주문을 했다. 지웅과 윤희가 경헌의 주문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세열이 마시이에게 메뉴판을 넘겼다. 아무래도 치프딜러라 그런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전 괜찮아요. 시킨거 같이 먹죠"
마시이가 메뉴판을 한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종업원이 소주와 기본찬을 차려놓고 나가자 세열이 말을 꺼냈다.
"갑자기 연수를 보낸다고 해서 알았다고는 했는데, 너무 급하게 오셔서 마중을 못 나갔네요. 미안해요. 아무튼 다시 한 번 환영해요. 소주 처음 먹어보시죠?"
세열이 마시이의 잔을 가득 채우고는 다른 사람들의 잔도 마저 채웠다. 마시이가 소주병을 받아 세열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아직 한 번도 못 먹어봤어요. 오늘 한 번 제대로 맛을 보죠"
"그래요, 자 다같이 한 잔 들지. 마시이씨를 환영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지웅씨의 무패행진까지 모두를 위하여!"
마시이의 얼굴이 움찔했다.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지웅과의 며칠전 딜링이 떠올랐다. 얼른 소주 한 잔을 비웠다. 그 딜링 생각때문인지 소주 때문인지 얼굴이 금새 달아올랐다.
"처음이라 그런지 대번 표가 나네. 숫처녀 정조 뺏겨도 그 정도는 아니겠다"
경헌이 마시이의 잔을 따르며 농담을 던졌다.
"하여튼 경헌 선배 말하는 건 십중팔구가 음단패설이라니까"
윤희가 경헌에게 못마땅한 눈으로 말했다.
"아뇨, 갑자기 좀 더워서......"
마시이가 손으로 부채질하는 시늉을 내며 얼렁뚱땅 넘겼다.
"뭘, 그것 가지고, 앞으로 더 쓴 맛을 보게 될텐데"
지웅이 차갑게 한 마디 던졌다. 마시이는 어쩔 줄을 몰랐다. 마시이 뿐만 아니라 세열, 경헌, 윤희까지도 지웅의 말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 나 이것 참. 지웅씨 왜 그래? 자 기분 좋게 마시자고. 응? 자 팀장님 다 같이 한 잔 하죠"
경헌이 어색한 분위기를 띄워보았다. 세열이 경헌의 말을 받아들이고 다시금 건배를 제의했다. 그러나 방 안의 분위기는 더 이상 나아지지 않았다. 지웅의 차가운 얼굴과, 점점 붉어오르는 마시이의 얼굴 때문이었다.
나라현
현영이 찾은 곳은 도쿄가 아닌 나라현이었다. 방송국 사람이나 태림, 지웅까지도 현영의 목적지는 도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항에서 현영이 택한 비행기는 나라현 행이었다. 몇 년 전 입사시험을 준비할 때 얼핏 보았던 기사가 불현 듯 뇌리를 스친 것이다.
나라현.
그 안에 일본 고대왕조의 발상지로 알려진 야마토의 타케치군 아스카촌이 있다. 그리고 그 문화 유적속에 한국을 찾을 수 있다. 백제계 도래인인 동한(東漢)족이 전체 인구의 80 - 90 %를 차지하고 있던 곳. 이들은 일본인들에게 이마키(今來)라 불렸다. 그렇다면 그 전에도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인이 있었다는 소리.
갑자기 몇 년전 보았던 기사가 떠올랐다. 분명 프로그램 답사차 일본을 찾은 것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나라현으로 향했다.
그 속에서 한국문화 흔적을 찾아서 무얼 어쩌려고..... 아스카촌을 향하는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일본은 한국의 후예라고 주장이라도 하고 싶은건지. 어쩌면, 힘없는 자의 자기위안일수도.
렌트카안에서 한참이나 지도를 들여다 보던 현영이 천천히 차를 몰았다. 169호선을 따라 올라갔다. 양 옆으로 넓게 펼쳐진 들녘이 현영의 혼잡한 마음을 다소 진정시켜 주었다. 담배를 하나 물었다. 연기가 창문밖으로 빠져 나간다. 마치 영혼이 인간의 육체를 떠나듯.
강을 건너자 사원이 나타났다. 표지판에는 일본어로, 그리고 영어로 오미아시신사라고 씌어 있었다.
사원에 들어서자 마자 커다란 동판이 눈에 띄었다. 현영이 무심코 앞으로 다가갔다. 역시, 일본어와 영어뿐.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읽어내려갔다.
`히노쿠마는 백제에서 도래한 아치노오미(阿智使主) 가 살았던 곳이라 전하는데 오미아시신사는 그를 제신(祭神)으로 섬기고 있다. 히노쿠마사 터는 신사 경내에 있으며 탑, 강당으로 추정되는 건물 터가 남아 있다. [일본서기] 텐무(天武) 천황 수쵸오 원년조에 히노쿠마사라는 절 이름이 나와 있고, 절터에서 7세기 말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탑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는 윗부분이 손실된 상태이긴 하나 13층짜리 석탑이 남아 있고, 현재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휴우 - '
한숨을 내 쉬었다. 무슨 말인제 잘 이해가 되진 않았다. 그러나 역시 백제에서 도래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뭘, 어쩌려구.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지웅과 태림이 떠올랐다. 두 사람이 옆에 있으면 억지로라도 실컫 떠들어댈 수 있었을텐데. 거봐. 일본인들은 우리의 후예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래서, 뭘 어쩌려구"
현영이 답답한 듯 툭하니 말을 내뱉었다.
"허허, 일본이 한국인이 세운 나라라는 말이라도 있긴 바란 모양이구만"
현영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백발의 노인이 웃으며 서 있었다.
"한국에서 왔나 보군. 허, 그것 참. 신기하네. 여간해선 여긴 한국 젊은이들이 찾지 않는 곳이거든.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현영이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이곳에서 살고 계시나보군요. 재일동포신가요?"
노인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냥 시간이 나서 한 번 와봤지. 재일동포? 아니 난 일본인이라고 해야 될거야. 보아하니 이곳은 처음인 것 같은데, 같이 걷지"
노인이 앞장서 걸었다. 현영이 쭈뼛하니 서 있었다.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현영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뛰어가 노인의 뒤에서 걸었다. 노인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일본이 한국사람이 세운 나라면 어쩔 생각인가?"
"예?"
"그런 기대를 가지고 왔던 거 아닌가. 대개 여길 오는 한국사람들은 대개 그런 생각들을 하거든. 그래서 그게 사실이면 뭘 어쩔 생각인지. 자네 말처럼 말이야"
현영은 묵묵히 뒤를 따랐다. 자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기사,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노인의 말처럼,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단지 일본 속의 한국 문화유적을 찾는다는 명목이라니, 생각해보니 툭 웃음이 나왔다. 한국에서도 잘 찾지 않는 문화유적인걸.
"그런데..."
현영이 말을 붙여 보았다. 대답이 없었다. 뜸을 들이고 현영이 물었다.
"한국말은..."
노인이 그제서야 말을 꺼냈다.
"어쩌다가 알게 됐지. 그건 그렇고, 이 탑이 아까 동판에 써 있던 그 13층 석탑일세. 어떤가? 백제의 것하고는 아주 다르지? 이걸 보면 백제의 도래인이 건너왔다고 해도 일본을 세웠다고는 말할 수 없을게야"
어느새 13층 석탑 앞에 와 있었다. 현영이 천천히 탑을 올려보았다. 층이 11개밖에 없었다. 윗부분이 손실되었다는 문구가 떠올랐다. 탑은 정사각형의 돌들이 사각뿔 모양으로 쌓여 있었다. 확실히 교과서에서 보아온 백제의 탑들과는 달라 보였다. 그저 무미건조하게 돌들이 쌓여 있었다. 백제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 한 번 풋 하고 웃었다. 그럼, 그렇지.
노인이 다시 걸음을 걸었다. 현영이 이번엔 더욱 가까이 붙어서 걸었다.
"괞찮으면 나랑 식사나 같이 하지. 숙소가 없으면 내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함께 자도 상관 없고"
노인이 다시 정문 쪽으로 향했다. 애초부터 사원을 둘러볼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그래? 야,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냐?"
지웅이 마시이를 한 번 쳐다본 후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태림이 퇴근 시간에 맞춰 은행 앞으로 찾아온 것이다. 마시이를 두고 태림을 만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웅이 한참동안 통화하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마시이씨, 오늘은 좀 늦게 들어가야 될 거 같은데요. 친구녀석이 와 있어서.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죠"
지웅의 말에 윤희가 더 정색을 하며 달려들었다.
"어머, 태림씨랑, 현영씨 왔어요?"
"두 사람 벌써 그렇고 그런 사이야? 주위 사람들에게 벌써 소개한 모양이네?"
경헌이 서류를 정리하며 짖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선배도, 무슨 그런 끔찍한 농담을. 마시이씨 가죠"
지웅의 표정이 밝았다. 친구가 찾아온다는 건 언제나 가슴설레는 일이었다. 윤희가 그런 지웅의 표정을 읽었다. 그리고 마음까지도. 저렇게 친구가 좋을까......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남들 앞에서 인정하지 않는 지웅이 섭섭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저도 같이 가요"
윤희가 지웅과 마시이의 가운데 끼어들었다. 지웅이 윤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걱정 마요. 나도 태림씨랑 현영씨 보고 싶어서 그러는거니까 신경쓰지 마요"
지웅도 뭐라 말하지 않았다.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시이가 온 후로 윤희의 애교도 뜸한 편이었다.
마시이는 일찍 들어가 쉬고 싶었다. 요 며칠동안처럼 신경이 예민한 적도 없었다. 한 순간도 지웅의 행동을 놓치려 하지 않았었다. 딜링을 할 때마다 온 신경이 지웅의 손가락에, 모니터에 집중되었다. 심지어는 지웅을 미행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얻어진 건 없었다. 반응이 있다면 사무실 사람들이 정말 자신이 지웅의 딜링을 열심히 배우려 하고 있다고 느낄 정도가 되어버린 것이라는 것, 그게 다다. 게다가 지웅까지 처음과는 달리 적대감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지웅과 함께 있어야 했다. 피곤한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생각 뿐.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지웅에게 정보를 대 주는 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어떻게든 알아 내야만 했다. 그래야, 떳떳해질 수 있었다. 일본으로 돌아갈때든, 가지 못할 때든.
태림은 지웅보다 윤희가 더 반가운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윤희와 죽이 맞아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지웅은 그런 모습이 좋았다. 녀석이 인정해 주는구나.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편하게 대할 수 없었다. 지웅이 맥주 세 병을 더 시키고 말을 꺼냈다.
"현영이는 갈 때 말이라도 하고 가지, 그렇게 서두르냐?"
조금은 섭섭한 말투였다. 태림이 새 병을 따며 말했다.
"나도 아침에 전화만 받았다. 답사만 가는거래. 무슨 재미로 혼자 갔는지"
마시이는 처음부터 아무말도 없었다. 태림과 인사하느라고 자신을 밝힌 것 외에는. 오랜만에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피곤이 더욱 심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자꾸 술을 들이킨다. 갈증 때문이었다. 무언가 해결해야만 한다는 무거운 갈증.
지웅이 마시이의 잔을 채웠다.
"속도가 좀 빠른거 아니예요?"
"아, 예. 목이 좀 말라서요"
태림이 윤희와 얘기하다 말고 마시이를 쳐다보았다. 곱지 않은 시선이었다. 마시이 역시 태림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다들 그런 놈들 뿐인가. 한국 사람 모두가 적으로 보였다. 모두가 자신을 적대시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아니면 자신이 그렇게 바라보는건지도.
"마시이씨, 내일 휴일인데 어쩌죠? 서울 안내라도 해드려야 하는데 급히 가 볼 데가 있어서, 저녁즈음에는 시간이 될 거 같은데,"
지웅은 다음 날 약속이 있는 듯 마시이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경헌의 말대로 손님은 손님이니까. 자신만의 일이라면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뭐, 괜찮습니다만, 제가 끼면 안되는 자리인가보죠? 저야 특별히 할 일도 없고, 지웅씨가 어떻게 사는지도 궁금한데, 꼭 피해가 안된다면야 같이 가고 싶은데요"
마시이는 지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 하려는 듯 굳이 같이 있으려고 했다. 지웅이 윤희를 흘깃 쳐다보고는 말했다.
"괜찮으시겠어요? 뭐 마시이씨가 괜찮으면 좋으실대로 하시죠"
윤희가 마시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지웅을. 순간 뭐라고 말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참았다. 그러는 걸 지웅은 더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 현영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미아시신사에서 만났던 노인과 함께였다. 나라현 시내에 있는 호텔이다. 노인이 묵고 있는 곳이었다. 노인은 휴가중이라 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얘기하려 들지 않았다. 현영도 굳이 알고 싶어하진 않았다. 대신 자신이 일본으로 온 이유를 말했다.
"도쿄로 가려고 합니다만..."
현영이 달력을 쳐다보며 말했다. 예정대로라면 동경에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 오전부터 서둘러 답사를 할 예정이었다. 그래서인지 자꾸 달력을 바라보았다. 하루를, 손해본 기분이다.
노인이 자신의 잔을 채웠다.
"이틀 뒤, 나랑 같이 가지. 나도 사무실이 도쿄에 있네. 도쿄에서의 모든 경비는 내가 책임지지"
"아니요, 내일 오전 일찍 갈 생각입니다.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고"
"시간은 나도 없네. 1년만에 갖는 휴가야. 그것도 고작 4일. 내게 투자한 시간만큼 보상할테니까"
"그래도..."
현영은... 싫었다. 자신이 누군지도 밝히지 않는 사람과 무턱대고 같이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인상이 참 좋았다. 적어도 자신을 속일 것 같지 않은, 그래서 지금 호텔 룸에서 술을 같이 마시고 있다. 내일 오전에도 곧장 도쿄로 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확실한 자신은 없었다. 그럴수록 현영은 자꾸만 자신을 다그쳤다. 입사 3년만에 맞는 프로그램, 지웅, 태림과의 약속, 그리고 일본문화의 무분별한 개방때문에.
"한 잔 더줄까?"
노인이 병을 들었다. 현영이 손을 저었다. 얼마든지 마실 수 있었지만 술 때문에 늦잠이라도 자면 안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노인을 두고 먼저 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할 일이 많으니까. 눈을 감았다. 노인이 또 한잔을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뚝뚝한 노인네. 현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헬로키티? 굳바이키티!
다음날 마시이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지웅은 아직 잠이 곤히 들어있었다. 지웅과 한 집에 기거한 후 처음으로 지웅보다 일찍 일어난 것이다. 마시이는 지웅의 다이어리를 몰래 훔쳐보았다. 한국에 온 지 5일만에 지웅에 대해 알아볼 수 있었다. 갈색의 두툼한 다이어리 앞에는 태극기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단추를 열고 겉장을 넘기자 `다시 뛰자'라는 표어가 쓰인, 역시 태극기가 새겨있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마시이는 그 다이어리의 표지만 보고서도 적잖이 숨이 가빠오는 걸 느꼈다. 마시이의 손은 작은 떨림을 동반한 채 한 장, 한 장 다이어리를 넘겼다. 첫 장을 넘기자 몇 겹으로 적은 누런 종이가 툭 떨어졌다. 그 안에는 `지웅이 보아라' 라고 시작하는 편지가 씌어 있었다.
`지웅이 보아라-
오늘따라, 우리 강아지가 왜 그리 보고싶누. 할미가 아마도 갈 때가 됐나보다. 그래, 일본에서 공부하는 데 힘든 건 없지? 우리 지웅이는 똑똑하니까 잘 하겠지.
지웅아, 이 할미가 죽어서 지옥에 가려는지 자꾸 이상한 꿈을 꾸는구나. 네게도 전에 얘기했었지. 할미가 스물 다섯 때 아주 힘들었다구. 요즘에 꿈만 꾸면 그 소장놈과 헌병대 장교놈이 나타나 할미를 괴롭힌단다. 그래서 할미는 그 놈들이 나타날 때마다 칼을 휘둘러 목을 베어버렸지. 자고 일어나면 얼마나 흉칙하던지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더구나.
네게 할미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겠니? 지웅이는 절대 일본놈들에게 당하고 살면 안된다. 우리 집안엔 네 할아버지, 그리고 할미로 족해. 너는 그래선 안된다. 너 뿐만 아니라 네 또래 젊은 애들도 물론이고. 할미때 같은 모욕은 다시는 당하지 말아라. 꿈자리가 사나운 걸 보니 이놈들이 또 몹쓸 짓을 할 모양이다. 할미야 이제 가면 그만이지만 너희들은 그 놈들이 무슨 짓을 해도 이겨내야 해. 그래야 할미가 저승가서도 맘 편히 있을게 아니니.
우리 강아지 얼마나 바쁜지 요즘은 할미 보고싶다는 전화도 없누. 어디에 있던 우리 강아지는 할미의 자식이고 이 나라의 자식이라는 걸 잊지 말아라. 이젠 팔에 힘이 없어 더는 못 쓰겠다.
몸 조심하고, 할미 말 잊지 말아라. 사랑하는 우리 강아지-
사랑하는 할머니가...
마시이는 숨을 죽이고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아직은 미숙한 한글실력이지만 아마도 지웅의 일본에 대한 반발감은 할머니로부터 이어진 것인 듯 싶었다. 마시이는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예상은 했었다. 분명 어떤 계기가 있을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도 막상 접하고 보니 호흡이 가빠온다. 다시 다이어리를 넘겼다. 특별한 내용을 찾지 못한 마시이는 무엇을 계산한 듯한 페이지를 발견했다.
`80만여명의 정신대 피해자들. 거의 매일을 짐승같은 놈들에게 몸을 유린당했으니... 막말로 화대로만 쳐도 (8십만*5만*100) 은 4조원.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그건 말도 아니지. 정신적 피해까지 감안한다면 네 놈들은 국고에 있는 돈을 죄다 가져다 바쳐도 용서할 수 없다'
마시이의 얼굴은 어느새 붉어졌다. 무서운 놈. 그리고 당돌한 놈. 마시이는 아직도 곤히 잠들어있는 지웅을 쳐다보았다.
`없애야 돼, 이 놈을 가만 내버려 두면 안 돼'
마시이는 숨을 고르고 남은 다이어리를 넘겨보았다. 딜링 실적을 기록해 둔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98. 2. 20 - 1억 5천
2. 25 - 4억
2. 28 - 2억 9천
3. 3 - 8억 2천
3. 12 - 3억
3. 16 - 1억 2천
4. 2 - 2억 2천
........
8. 2 - 3억 8천
8. 9 - 2억 4천
8. 15 - 23억
마시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금액들은 분명히 일본을 상대로 한 딜링에서의 롱포지션 실적이었다. 6개월동안 600억원에 가까운 이익을 낸 것이다. 그것도 나지웅이라는 이 한사람이 말이다. 마시이의 호흡이 더욱 가빠진다. 지웅이 잠꼬대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시이는 다이어리를 덥고 냉수를 한 잔 마셨다. 베란다로 가 담배를 물었다. 머리 속이 복잡해왔다. 도저히......, 가만히 내버려 두어선 안될 인물이었다.
현영은 풋 하니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결국엔 노인의 차 옆에 앉아있다. 가지-. 그 한마디에 다른 대꾸도 못하고 이렇게 따라오고 말았다. 물론 아침 일찍 일어났다. 여섯시. 그러나 노인은 그보다 일찍 일어났다. 머리에 물기가 묻은 걸 보니 벌써 씻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현영도 눈을 뜨자마자 씻고 짐을 챙겼다. 그러나, 가지- , 그 한마디에 이렇게 노인의 옆에 앉아있는 것이다. 어디로 가시는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묻는대로 대답하는 양반은 아니었잖은가. 여기도 비가 많이 온다. 지긋지긋한 비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차는 도로변의 식당에서 멈췄다. 식사는 호텔에서 먹어도 되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다. 역시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저 노인이 가는대로, 하는대로 따르는 게 편했다. 그리고 그러고 싶었다.
무척이나 말이 없다. 따분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나이차가 30년은 족히 될 것도 같았다. 그런데 왜 동행을 하고 있는지. 또 한번 풋 하니 웃는다.
식당에 들어가 간단하게 국수를 시켰다.
"아침인데 밥으로 하시는게 좋지 않으세요?"
현영이 말했다. 말해봐야 별 소용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했다. 이번엔 정말 그러고 싶어서였기 때문이다. 노인한테는 밥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웬 걱정. 현영은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국수가 나와서 그냥 국수를 먹었다. 노인이 일어나서 따라 일어섰다. 차에 올라탔다.
"담배 하나 주게"
노인이 말을 꺼냈다. 참 힘들군, 목소리 듣는 것도. 현영은 담배를 주며 그렇게 생각했다. 불을 붙여주었다. 노인이 연기를 내뿜는다. 유달리 연기가 진했다. 폐가 걸러주지 못하나보다. 얼마나 담배를 피워댔으면...
현영이 차에 내려 다시 식당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자신도 담배를 물었다. 맛있다. 식후, 게다가 비까지 내리니 맛있을 수밖에. 노인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더욱 맛있게 피우고 있었다.
지웅은 마시이의 의사를 다시금 확인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예, 제가 피해만 안 드린다면 어디든 따라가고 싶은데요,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길래 그런 딜링을 하는지도 궁금하구요"
마시이는 지웅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다는 얼굴이다.
지웅은 마시이를 데리고 나왔다. 차를 이용하지 않고 걸었다. 마시이가 의아한 듯 지웅을 쳐다보았다.
"아, 예. 다른 차가 필요하거든요. 동네 슈퍼아저씨 차를 쓰기로 했어요."
두 블럭을 지나 오른 쪽으로 돌자 `금일 휴업' 팻말이 붙은 슈퍼 앞에 파란 1톤 트럭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서 있었다.
"타시죠"
어느새 준비한 것인지 열쇠까지 가지고 있었다. 언제 준비했는지. 자신과 거의 같은 시간을 함께 있었는데 언제 열쇠까지 준비했는지, 그 이상으로 모르는 부분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니 초조해졌다. 도대체 자신은 무얼 하고 있었는지.
마시이가 얼떨결에 트럭에 올라탔다. 지웅은 압구정으로 차를 몰았다. 로데오 거리에 차를 대고는 밖을 향해 두리번거렸다.
"누구 만날 사람이라도 있는 모양이죠?"
"아, 예. 윤희씨를 여기서 보기로 했거든요. 아 저기 있네요"
지웅은 크락션을 울렸다. 윤희가 흰 이를 내보이며 손을 흔들고 걸어왔다.
"어, 윤희씨랑 데이트 약속이 있으셨군요. 이런,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어요"
마시이가 멋적은 듯 미안해하며 얘기했다.
"아니예요. 같이 뭐 좀 할 게 있어서 만나는거예요"
`똑똑'
윤희가 어느새 다가와 유리를 두드렸다.
"어디 있는지 알아봤어요?"
지웅이 창문을 내리며 물었다.
"예, 저 쪽 골목을 돌면 있어요"
지웅과 마시이가 차에서 내렸다.
"윤희씨, 배고프죠? 먼저 밥이라도 먹죠, 우린 아침도 안 먹었어요"
지웅이 마시이에게 그렇지 않느냐는 듯 쳐다 보며 윤희에게 물었다. 세 사람은 근처 식당으로 갔다.
일요일 점심시간대라서 그런지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자리에 앉은 지 10분이나 지나서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마시이씨, 식사 대접은 오늘이 처음인 거 같네요. 매일 바빠서 대충 해치우기만 했는데, 뭐가 좋을까, 한정식 어때요? 아직 못 먹어보셨죠?"
지웅이 그동안에 대접이 현찮았던 것이 미안했던지 지웅이 마시이를 보며 말했다.
"예, 그걸로 먹죠, 이곳에 와서 아직 이렇다할 한국음식 먹어본 적이 없는 거 같네요"
"윤희씨, 매장에 한 번 들어가 봤어요?"
지웅이 주문을 하고 윤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예, 손님이 굉장히 많던데요, 아무리 정식으로 오픈했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로 청소년들이 붐빌 줄은 몰랐어요"
"쳇, 정신 없는 녀석들 같으니, 마시이씨"
지웅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마시이를 불렀다.
"예"
"일본에서도 산료 회사의 캐릭터 상품이 인기가 있나요?"
"예, 어린 아이나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죠"
마시이는 잘못하다가 들킨 것처럼 몸을 움쯔리며 대답했다. 혹시 지웅이 눈치를 채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 이 곳에 온 것도 산료의 캐릭터 상품 때문인가? 그렇다면 뭘 어떻게 할 생각일까? 매장 앞에 서서 불매 운동이라도 벌일 것인가?
마시이는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을 했다. 도대체 이 지웅이란 자는 너무나 위험한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아직은 혼자서만 움직이고 있지만 야마모도의 말대로 여론의 힘을 빌기라도 한다면 여간 힘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어때요, 맛있죠?"
윤희가 열심히 음식을 씹다가 마시이를 보며 생색을 냈다. 테이블에는 밥과, 찌게, 김치, 상추, 갈치, 젓갈, 불고기, 무우 생채, 고추조림 등이 푸짐하게 차려 있었다.
"이 많은 음식을 다 먹나요?"
마시이가 반찬이 너무 많다는 듯 물었다. 필요한 찬 외에는 나오지 않는 일본 식당과는 엄청난 차이였다.
윤희가 뭐 어떠냐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지웅이 윤희 대신 마시이의 질문을 받았다.
"이게 한국인의 정이죠, 어딜 가든 손님 대접을 소홀하게 하진 않거든요, 시골의 쓰러진 집에 가면 정작 자신들은 저녁 끼니조차 없어도 손님에게는 따뜻한 쌀밥을 지어주기도 하지요. 옛날에도 길 가는 객이 찾아오면 빈 방을 내 주거나, 빈 방이 없으면 한 방에서 같이 잠을 자기도 하죠. 지금이야 워낙 물질문명에 길들여 있어 그런 모습 보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이렇게 식당에서 보면 그 정이 남아 있음을 느끼죠. 음식 쓰레기가 문제고, 쓸데 없는 허위 의식이고 낭비라는 비아냥도 있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넉넉히 대하는 것만큼 좋은 게 있을까요?"
마시이가 묻는 의도를 잘 안다는 듯이, 이건 결코 잘못된 문화가 아니라는 듯 지웅이 얘기했다. 마시이는 쓴 맛을 삼키며 음식을 들었다.
윤희의 말대로 `산료 코리아' 는 엄청난 인파를 이루었다. 대부분이 중, 고등학생들이었다. 열에 아홉은 여자였고, 그나마 있는 남자들은 애인의 조름에 못이겨 억지로 따라온 듯 했다. 그네들은 대부분 제품에 관심은 없는 듯, 그저 억지로 애인에게 끌려다니며 천장만 바라보곤 했다. 매장 안은 여기가 도대체 한국인지, 일본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일본색이었다. 스티커부터 시작해, 초음파 제거기, 화장품 지갑, 아동용 가방, 전자시계, 핸드폰 줄, 라이타 등 처음부터 청소년을 겨냥해 만든 제품이라는 것을 가늠케 했다. 한 바퀴 둘러보니 매장 안은 중, 고등학생 뿐은 아니었다. ○○대학이라는 영문표기가 새겨진 가방을 메고 있는 사람이 꽤 많았다. 그네들의 가방에는 벌써 언제부터 이 제품을 구입하기 시작했는지 정신사나운 악세사리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지웅은 한숨을 내쉬며 윤희를 바라보았다.
"윤희씨, 아직도 이런 것들이 좋아요? 난 도무지 비싼 돈 남의 나라에 바쳐가며 이런 거 사는 지 이해가 안되는데, 마시이씨, 일본에서도 이 정도로 인기가 있나요?"
지웅이 윤희와 마시이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여필종부라 그러잖아요. 저도 이제 하나도 관심 없어요. 그런데 무슨 제품들이 이렇게 비싸죠? 이런 줄 하나에 6천원이나 하고, 이거 뭐죠? 스티커 사진 위에다 덧붙이는 건가? 이렇게 조그만 접착 플라스틱 하나에 2천원이라니"
윤희가 지난 번 일을 생각난 듯, 멋적게 웃으며 얘기했다.
"참, 큰일이구만. 이렇게 정신 없이들 빠져들고 있으니. 여기 뿐만이 아니예요. 그전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도 그렇고, 주차시키려고 보니까 노점 리어카에도 악세사리를 수북히 쌓아놓고 팔고 있던데. 다다음달에 일본 문화개방까지 하게 되면 이곳 압구정은 일본 하나의 현으로 바뀌어버릴지도 모르겠네요. 아니, 도대체 왜이렇게 사람이 많은거야?"
마시이도 놀란 듯 얘기했다.
"그러게요, 일본에서는 그저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는 정도예요. 이렇게까지 호황은 아닌 거 같은데"
마시이는 그 곳의 분위기에 놀란다는 듯이 얘기했지만, 속에서 일어나는 희열을 감추지 못했다. 매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일본의 노예들 같았다. 경제적 노예들, 정신적 노예들. 마시이는 와타나베의 이야기가 이제야 완전히 이해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무너지고 있구나. 총 하나 안들이대고, 칼 하나 쓰지 않아도, 이렇게 무너지고 있구나. 마시이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지웅이라는 놈 하나가 아무리 날고 기고 해봐야 큰 댐에 한꺼번에 생기는 많은 구멍은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무지한 한국인들. 이런 한국인들은 역시 황국의 노예가 되어야 가장 어울릴 민족이었다.
그런 마시이의 환상은 금방 깨졌다. 지웅이 사람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으로 가더니 그 곳에 있는 진열용 벽걸이를 떼어냈다. 주인이 당장 달려와 무슨 짓이냐고 대들었다. 지웅이 차갑게 한마디 내뱉었다.
"살거예요"
주인은 어안이 벙벙한 듯 지웅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형형색색의 휴대폰 줄이 수십개나 걸려 있던 벽걸이, 핑크빛의 고양이 얼굴이 그려진 수십개의 지갑이 들어있는 바구니, 초등학교시절 큰 문구점에 자랑스러운 듯 걸려있던 동그란 딱지처럼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의 많은 스티커들, 그리고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귀여운 척 불빛을 내뿜는 휴대폰 확인기까지 죄다 집어 계산대에다 올려놓았다.
"얼마예요?"
지웅의 목소리는 반발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주인은 멍하니 지웅을 바라보았다. 주인 뿐만 아니라 매장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지웅을 향해 있었다.
`뭐하는 짓이지?'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개중에는 자신이 사려 했던 물건까지 지웅이 가져갔다며 내놓으라고 악다귀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지웅은 한 팔로 그 열예닐곱의 소녀를 제지하고 다시 주인에게 물었다.
"얼마나구요"
주인은 하나하나 제품을 확인해가며 계산기를 두드렸다. 지웅이 산 것들만으로 하루 장사, 아니 일주일 장사는 다 한 셈이었다. 주인은 내내 침을 집어삼키며 계산기를 두드렸다.
"팔백 이십 육만 칠천 삼백원입니다"
주인은 과연 이 손님이 돈을 지불할 것인가에 다소 의심이 가는 듯 뜸을 들이며 얘기했다. 지웅은 지갑에서 천만원짜리 자기앞수표를 꺼내 뒷면에 이서를 하고 주인 앞으로 내밀었다.
"금액에 맞춰 물건을 더 채워줘요"
지웅이 다시금 차갑게 한마디 내뱉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마시이가 얼어붙은 듯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서 지웅을 쳐다보고 있었다. 윤희 역시 가만히 지웅의 행동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주인은 마치 옛날 아라비아 대상을 만난 듯 황송한 듯 고개를 숙여가며 한아름의 물건을 가지고 와 지웅의 앞에 놓고는
"천만원은 훨씬 넘는데 그냥 드리겠습니다."
하며 자랑스러운 듯 얘기했다.
지웅은 세 차례나 계단을 오르내려 트럭에 물건들을 실었다. 주인은 마지막 스티커 하나까지 챙겨 지웅을 따라 트럭에 물건을 옮기면서 `또 오십쇼'라는 아주 공손한 말까지 남기고 올라갔다.
마시이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 자는 누구인가? 그 많은 돈을 이렇게 쓰다니. 마시이는 지웅이 물건들을 모두 트럭에 옮길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신의 노예들, 황국의 노예들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이 자는 모세인가? 그 옛날 이집트로부터 노예를 해방시켜 이스라엘로 인도한 모세의 후생이란 말인가? 마시이는 눈물을 흘릴 뻔했다. 수모였다. 지웅 자체가 하나의 댐으로 보였다. 수많은 구멍이 나 있는 곧 있으면 쓰러질 댐 앞의 또 하나의 거대한 댐이었다.
사람들은 지웅의 돌발적인 행동에 저마다 수근댔다. 그들의 얘기 속에는 `미친' 이라던가, `정신 나간' 이란 단어가 자주 나왔다.
또다시 아스카촌이다. 차는 산을 양 옆에 끼고 한참을 달렸다. 굴곡이 심한 곳이었다. 길을 닦기 이전에는 차로 가는 것은 엄두도 못낼 정도였다. 그래서 시간도 많이 걸렸다. 국수를 먹고 나서 곧장 달려왔다.
무려 4시간을 달린 후에야 사원이 하나 나타났다. 하타신사였다. 주위엔 인가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아주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하타신사는 굉장히 작았다. 유물도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런데 여기까지 4시간이나 걸려 온 것이다. 현영이 노인을 바라보았다.
"어제 자네와 만났던 곳이 백제의 도래인이 정착했던 곳이라면, 여기가 신라, 가야의 도래인이 정착했던 곳일세. 자네가 여기를 찾은 이유처럼 일본인의 조상 중엔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의 도래인들이 많은 게 사실이네. 그렇다고 해도......"
노인이 검정색 파일을 내밀었다. 신문들과 사진들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그 중의 한 면을 노인이 찾아주었다. 빛이 바랜 신문스크랩. 1984년 1월 13일자 아사히 신문의 기사였다.
`나라현 카시하라시 난잔정. 카구야마 남쪽 기슭 유적군 속의 고분에서 12일, 한국의 남쪽 고대 가야 지역에서만 출토되는 기마인물형토기·딸린굽다리접시모양토기와 쇠못 등 한국 출토물과 같은 유물이 여러 점 발견되었다. 이런한 이형(異形) 토기류는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그 구성으로 보아 가야 지역에서 일본에 건너와 정착한 도래인의 분묘로 여겨진다.
이 고분은 야마토산산줄기의 하나인 카구야마 동쪽 낮은 산등성이에 있다. 부근 일대의 카시하라시 공원묘지(14.7m) 조성 계획에 따른 카시하라시 교육위원회의 사전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이 원형 고분은 지름이 18m, 시기는 5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그밖에 부근에서 9기의 다른 원형 고분도 발견되었다. 표토를 제거한 결과, 고분 윗부분에서 둥근 다리 위에 사각 판상 부분을 붙이고 그 위에 4개의 다리를 놓은 도질토기편(높이 9cm, 최대폭 5cm)과 형광등관에 여러 개의 나팔이 붙어 있는 것 같은 도질토기편(길이 11cm, 높이 8cm)이 출토되었다. 도질토기는 한국 도기로 이 기술을 가진 도래인들이 일본에서 스에키 - 고분시대 후기부터 헤이안시대에 만들어진 토기. 고대 한국 기술로 제작된 것으로 도기에 유약을 바르지 않고 낮은 온도로 구운 소소(素燒) 토기. -를 만들었다고 한다.
발견된 도질토기 중에서 앞의 것은 5세기에 가야에서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기마인물형 토기의 하반부 모습 그대로이고 크기도 같다. 또한 뒤의 것은 부산시 소재 가야시대 복천동 1호분(5세기 전반)에서 출토한 딸린굽다리접시모양토기의 상반부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연락을 받고 조사에 참여한 나라현립 카시하라고고학연구소에서도 가야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다. 출토된 토기들은 모두 제사용인 듯하다'
"그렇다고 해도 그게 전부가 되어서는 안되는 거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생각들이 대부분 그래. 그런 바람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밖에는 안되지. 나라의 힘이 약하니까, 일본인의 조상은 한국인이다라는 것만 내세웠지, 다른 모습은 보이질 않아.
냉정해야돼. 힘에서 밀리면 힘으로 제압해야지. 자네같은 생각으로 이런 곳을 찾는 건 피하는 것밖에는 안돼. 그래, 자네가 문화개방에 대한 조사를 한다고 치지. 이곳에 온 생각으로 조사를 한다면 일본의 저질문화가 개방되면 한국의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식의 내용밖에는 나올 수 없을게야. 약하다고 피하기만 하면 절대 이길 수 없어"
노인의 음성이 부르르 떨렸다. 현영의 몸도 떨렸다.
그랬다. 현영은 왜 지금까지 노인과 동행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무뚝뚝하기만 한 노인네. 그는 한국인이다. 자신의 말로는 일본인이라 했지만, 현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노인은 한국인이었다.
노인이 천천히 걸었다. 이번엔 현영이 멀찍이 뒤떨어져 걸었다. 얼핏 보았기 때문이다. 노인의 눈에서 짜고도, 쓸것만 같은 눈물이 비쳤기 때문이다.
지웅은 천만원의 물건을 실은 트럭을 몰고 올림픽 도로를 타고 김포로 갔다. 한참을 운전해 간 곳은 농사를 짓다가 아파트 부지로 쓸 모양인지 잡초가 무성한 논이 펼쳐진 곳이었다.
"지웅씨, 도대체 지금..."
차에서 내려 담배를 하나 문 지웅에게 마시이가 물었다. 지웅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아, 며칠 전에 꽤 큰 롱포지션을 내서 보너스를 받았거든요"
윤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마시이는 지금 일어난 일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그동안 용케도 속마음을 숨겨왔던 마시이도 이번엔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를 높여가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 많은 돈을 써가며 이 물건들을 산거죠? 그리고 이 곳으로 온 것으로 보니 땅에 묻던지 태울거 같은데..."
마시이는 자신이 옆에 있는데도 일본의 물건을 함부로 대하는 지웅에게 은근한 못마땅함을 나타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괜찮으시겠냐고. 이런 일 할 거 미리 말씀드리기도 뭐하고 해서 아무 말도 않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 돈이요? 그건 아무것도 아니예요. 우리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아마 당신께서 살고 있는 집이라도 팔아서 그 매장을 통째로 사서 그대로 불을 지르셨을거예요"
마시이는 아침에 지웅의 다이어리에서 보았던 편지를 떠올렸다. 그랬다. 지웅의 애국심, 심하게는 일본에 대한 강력한 반발감은 그의 할머니로부터 받은 것이다. 마시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단지 딜링으로 일본을 괴롭히는 자가 아니었다. 정신적으로까지 일본을 괴롭히고 있었다. 저 물건들은 자신의 실수로 빼앗긴 돈으로 산 것들이다. 마시이 자신은 그런 모습을 두 눈뜨고 지켜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지웅의 모습이 너무도 엄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지웅은 삽을 꺼내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한시간여를 구슬땀을 흘려 구덩이를 파고는 그 안에다 압구정 `산료 코리아'에서 사 온 물건들을 던졌다. 아직도 반짝이며 웃고 있는 고양이들이 땅구덩이 속에 던져졌다. 물건들을 모두 구덩이에다 던져 놓은 지웅은 그 위에다 석유를 부었다. 담배를 피웠다. 하늘 위로 잔잔히 흐르는 담배연기의 꼬리가 유난히 길었다. 길게 한 모금 들이킨 후 지웅은 고양이들의 무덤에 담배를 던졌다. 순간 불길이 솟았다. 고양이들은 언제 그렇게 반짝이고 있었냐는 듯, 서로 엉켜 붙어 녹아내리고 있었다.
마시이의 눈은 불처럼 이글거렸다. 지웅을 제거하러 왔다가 되려 자신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웅의 옆에 쓰러져 있는 삽이 보였다.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입술이 터지도록 깨물고는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
자신은 있었다. 일본을 앞설 자신은 있었다.
수십년 전 우리 부모님들은 가난했다. 그래서 돈을 벌었다. 자식들만은 굶기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오직 돈을 벌었다. 그래서 이렇게 빠른 시간에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동기가 너무 간절해서, 그 결과가 선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지웅은 자신이 있었다. 나라의 힘을 키울 수 있다고 믿었다.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힘없는 나라에서 벗어날 자신이 있었다. 물론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태림과, 현영이 있다. 젊은이들이 있다.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데 이골이 난 청년이 있다. 더 이상 당하지만은 않는다.
조금이나마 속이 후련했다. 비록 이 땅에서 교활한 웃음으로 한국의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고양이의 숫자는 아직도 터무니 없이 많지만 머리가 맑아짐을 느꼈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죄스러웠다. 저 일본의 계락으로 한국에 들어 온 고양이들이 이 하늘을, 이 땅을 더럽히고 있었다.
덫
지웅, 윤희, 마시이 세사람은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차 안에서 아무 말도 없었다. 지웅은 산료의 제품들을 태울 때, 하늘 아래 떠오른 할머니의 얼굴이, 마시이는 그런 지웅의 행동으로 인한 분노와 치욕으로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윤희는 두 사람 누구에게도 말을 건넬 분위기가 아니라 눈치만 보고 있었다.
동호대교를 지나고 있을 때 윤희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보려는 듯 말을 걸었다.
"오늘 술 한 잔 하는 게 어때요?"
아무도, 윤희의 말에 신경쓰고 있지 않다. 민망함...... 재차 말을 걸어보았다. 두 사람 모두 무서운 얼굴이다. 어깨가 저절로 움츠려들었다.
잠시 후, 내내 무표정하게 있던 지웅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죠. 마시이씨, 괜찮으세요? 마시이씨에게 미안한 것도 있고 하니까 제가 술 한잔 사죠"
마시이는 대꾸 없이 앞만 응시했다.
지웅이 민망한 듯 마시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런 마시이의 태도에 그리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마시이씨, 술 한잔 안하실래요?"
윤희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윤희의 질문을 듣고도 한참이나 대꾸가 없던 마시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어색한 웃음을 짓고는 응낙을 했다.
지웅은 강남으로 차를 몰았다. 일요일 오후의 강남답게 어디 마땅히 차를 댈 만한 곳이 없었다. 거기다가 외제 승용차가 즐비하게 서 있는 도로에 지웅이 빌려 온 1톤 트럭은 영 구색이 맞지 않았다. 강남역 부근에서 걸어서 10여분이나 되는 곳에 차를 세웠다. 세 사람이 간 곳은 로바다야끼였다. 마시이를 배려한 지웅과 윤희의 제안이었다.
강남의 로바다야끼는 너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서울 하늘 아래 로바다야끼 없는 곳이 어디 있겠냐마는 강남에서의 경우는 거의 블럭마다 하나씩 있었다.
마루 가운데 발을 내려놓는 작은 공간이 있는 로바다야끼에 들어섰다. 자리를 잡기까지의 행동이 익숙하지 못했다. 로바다야끼라니, 지웅에겐 구색이 안맞는 음식점이다. 어쩐지 너무 생소하다. 거부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은, 좀 심했으니까. 무조건 양보한다는 생각이었다.
간단히 초밥과 국수로 식사를 해결 한 후, 모듬회와 정종을 주문했다. 지웅이 마시이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마시이씨, 기분 나쁘셨다면 그만 푸시죠. 어쨌거나 지금은 같은 동룐데 서로 맘 상하면 좋을 거 없잖아요"
마시이는 짧게 대답하고 지웅과 윤희의 잔을 따랐다.
"전 그 `헬로 키티'라고 하는 캐릭터가 그렇게 잘 팔리는 줄 몰랐어요. 아까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보니까 휴대폰에 고양이 그림 안 붙인 사람 없고, 가방에 아까 매장에서 본 듯한 악세사리 안 한 사람 없더라니까요"
윤희는 아직도 그런 상황이 실감이 안 나는 듯 했다.
"그래서 문제죠. 그게 어디 제품이 좋아 비싼 돈 주고 사는거라면 그렇게 탓할 일도 못되지만, 이건 뭐 고양이 그림 하나에 반해 그 돈이 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하나씩 달고 다니잖아요. 알고도 그러는건지, 모르고 그러는건지. 여자들이라 그런 건가요?"
지웅이 윤희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윤희가 스스럼 없이 지웅의 말에 대꾸했다.
"그건 남자들도 마찬가지 아니예요? 양주 같은 거 한 병에 몇 만원씩 하는데도 사 먹잖아요. 그것도 다 비싼 세금 주고 먹는거 아녜요. 가만히 보면 노소를 막론하고 양주라면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잖아요. 그게 그거 아닌가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양주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예요. 그런 캐릭터상품은 하나의 문화라구요. 여자들이 악세사리를 하면 만족감을 느끼죠? 캐릭터 상품 역시 그런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사는건데 왜 하필이면 남의 나라 캐릭터가지고 만족감을 느끼고, 위안을 삼느냐 하는거죠. 더군다나 그 가격들, 아무리 생각해도 정도 이상으로 지나치잖아요"
마시이는 아무 말도 없다. 술만 들이키고 있을 뿐. 잘 들어간다. 그러나 부글부글 끓는 속은 식을 줄 몰랐다.
"참, 지웅씨 다다음달이면 일본 문화개방이 되는 거예요?"
윤희가 오전에 지웅이 했던 말이 떠올랐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지웅이 정종을 비우고 담배를 피워 물며 대답했다.
"예, 그동안 규제해왔던 일본문화개방이 이루어 지는 거죠. 뭐 어떻게 보면 크게 우려할 일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무사안일하게 넘어갈 일은 아닐거예요. 가요, 영화, 게임, 애니매이션 등 한국으로 일본 문화가 밀려드는 거죠. 일본 문화가 들어오는 건 큰 문제가 안 될지 몰라도, 우리가 대책없이 받아들이는 게 심각한거예요. 안그래도 폭력을 미화시키고 자유로운 성생활을 정당화시키는 일본의 문화가 우리 청소년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진 않을거예요. 게다가 한국보다 앞서 있는 일본의 대중문화가......"
얘기를 하던 지웅은 마시이의 얼굴을 보자 그만 해야겠다는 듯,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지금 일본 상황도 많이 악화되었지요? 한국이야 무너질대로 무너졌지만 일본도 꽤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던데요"
마시이는 정종을 한 잔 들이켰다. 시비를 거는 건가? 일본을 걱정할 리가 없지. 숨을 내몰아쉬었다. 더 이상, 당하지많은 않아.
"예, 전만큼 안되는 건 사실이죠. 그래도 저흰 지금껏 해 온 게 있으니까. 흔들릴 정도는 아니예요. 그저 수입이 조금 줄었다 뿐이지요"
마시이가 지금껏 참아온 지웅의 말과 행동을 참을 수 없었던지 노골적으로 일본의 우세함과, 그에 비한 한국의 빈곤을 내뱉었다. 지웅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이내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렇겠죠. 일본이야 세계 제 일의 경제대국이니까. 하지만 저희도 언제까지 이렇게 허우적거리고만 있지는 않을거예요. 우리는 세계 최고의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또, 시작이군. 윤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가 주먹다짐이라도 일어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지웅을 바라보았다. 아직 냉정을 잃진 않아보였다. 마시이는...... 무섭다. 단단히 각오한 얼굴. 무슨 일이라도 낼 성 싶다.
"그렇죠. 하지만 장사도 밑천이 있어야 하는 법이죠. 직장도 사람을 필요로 하는 기업이 있어야 얻는 법이고"
마시이는 지웅의 화를 돋우려는 듯 한국을 무시하는 투의 발언을 계속 했다. 아니, 낮에 당했던 수모의 복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리 너희가 그래봤자 뭘 할 수 있겠냐는 듯이, 그렇게 지웅을, 한국의 젊은이를 깎아 내렸다.
"하지만 좋은 머리를 가진 사람은 적은 돈으로 큰 기업을 만들 수 있지만, 처음부터 돈만 믿고 승부하다간 가진 재산도 한꺼번에 날려버릴 수 있죠"
지웅 역시 지지 않고 마시이의 말을 받았다. 지금껏 그렇게도 냉정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비추지 않던 두 사람이 이번엔 흥분을 넘어서 감정대립의 자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저기, 저 먼저 일어설게요. 갑자기 머리가 너무 아프네요"
윤희는 다시금 분위기가 험해지는 것에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모두 신경쓰는 것 같진 않아보였다. 골치가 아팠다. 이런 자리는 피하는게 상책이라 생각했다. 받지도 않는 인사를 하고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왔다.
윤희가 나가자 지웅이 마시이에게 마치 싸움을 거는 양 다음 술자리를 제안했다. 이런 곳은 참 싫었다. 손님에 대한 예의, 그런 거 챙기기엔 이미 흥분하고 있었다. 마시이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두 사람은 눈 앞에 보이는 조금은 조용해 보이는 주점으로 들어갔다.
이번엔 지웅이 마시이의 동의 없이 소주와 파전을 시켰다. 마시이도 그런 것에 개의치 않다는 듯 주문을 하자마자 지웅에게 화두를 던졌다.
"지웅씨,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한국이 금방이라도 일어설 수 있을 거 같아요? 애꿎은 캐릭터 상품만 태운거 아닐까요? 제가 지웅씨라면 그 돈 가지고 다른 걸 할 거 같은데...."
"아까, 그건 IMF를 이겨내자는 정신적인 각오 같은 건 아니예요.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거죠. 적어도 그렇게 어리석게 외화를 낭비해서는 안됨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까지 길들여져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돈이야 어차피 일본에서 거저 가져온 건데요, 뭐"
마시이가 욱, 하고 뭔가 이야기 하려다 말았다.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참는다. 아직은 참는다. 마시이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했다. 그렇게, 아직은 절제하고 있다.
"아니 산료에서 그 제품에 일본을 찬양하는 문구 하나 집어넣은 게 없는데, 어떻게 정신적으로 길들여진다는 거죠? 지웅씨의 생각이 너무 극단적이지 않나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내심 마시이는 뜨끔했다. 자신들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 경제속국, 문화속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신들의 의도를 지웅이 아무 거리낌없이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근거 없이 떠들어대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위험하다는 생각은 떨칠수가 없었다.
"뭐, 산료에서 인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건 아니죠. 하지만 그런 류의 물건들은 사람들의 생각을 조금씩 갉아먹어버리죠. 아무 것도 아닌 악세사리에 불과하지만 그 결과는 총, 칼 못지 않게 무서운거죠. 작년 다마곳찌에 어린 학생들이 푹 빠져 있을 때, 이 사회는 벌써 한 방을 맞았어요. 자신도 모르게 일본의 문화에 흡수되고 있는 거죠. 아직은 가치판단이 명확하지 않은 어린 학생들에게 그런 인식이 심어진거예요. 거기다가 이번엔 일개 캐릭터 상품에 목숨을 내놓고 달려들고 있잖아요? 경제적인 붕괴보다 더욱 무서운거죠. 어쨌든, 웃으실 줄 모르겠지만 앞으로 1년 안에 `산료 코리아' 는 망할겁니다. 아직은 그렇게 생각없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마시이는 다시금 놀랐다. 자신의 생각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뭔가 알고 있기라도 한건지...... 혼란스러웠다. 정말 뭔가 알고 있는건 아닐까? 설마, 거기까지는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기 싫었다. 그것보다 지웅의 마지막 말이 마시이를 소스라치게 했다. `아직은 그렇게 생각 없는 사람만 있는게 아니니까요-' 지웅 같은 젊은이가 그의 말대로 많다면 그대로 무너질 한국이 아니었다. 어쨌든 지웅의 말은 마시이가 한국에 온 이유를 다시 한 번 곱씹게 만들었다.
"지웅씨는 지나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군요. 마치 한국의 이번 사태가 모두 일본 때문이라는 듯이..."
"그런 건 아니죠. 책임이야 물론 우리 자신에게 있지요. 하지만, 마시이씨는 아직 뭘 모르시는군요. 한국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 있는 배일감정이 벌써 100여년이나 쌓여오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예요"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 우리가 지배하던 땅을 다시 되찾고자 했던 선조들의 당연한 행동이었어요"
"마시이씨는 아직도 일본 교과서거 가르치는 대부분의 한일관계가 진실인 줄 알고 계시나요? 임나일 본부설이 거짓 주장이었다는 것은 학계에서도 이미 인정 한 걸로 아는데? 그리고 내가 말한 배일감정이란 이 땅을 유린한 일본인들의 행위에서가 아니예요. 이 땅의 정신을 파괴시키고, 역사를 왜곡시키는 비인간적인 행위에서 배어 온 거죠"
마시이가 잠시 당황해 하다가 말을 받았다.
"한국은 그래도 일본 덕분에 많은 경제 성장을 이루지 않았나요? 황무지에 공장을 세우고 철로를 깔고 도로를 닦고, 아무 것도 없는 나라에 경제적 기반을 세워줬잖아요"
"그건 힘 센 자가 힘 없는 자를 실컫 두들겨 패 놓고 약을 주고는, 그저 약 준 것만 내세우는 거와 다름없어요"
그렇게 마시이를 몰아세우는 지웅은 속으로 울고 있었다.
이웃나라 일본이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문물을 개방하고 국력을 기르고 있을 때 이나라 조정은 무얼 하고 있었던가? 명성왕후와 흥선대원군의 세력다툼으로 신하들은 당장 자신의 안전부터 도모하기에 급급했었고, 외국의 세력이 밀려들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친일, 친러, 친미, 친청 등 그들에게 빌붙어,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는 뒷전이었고, 일부 개화파라는 사람들은 나라를 팔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 않았던가. 한일합방은 대륙을 향한 일본의 야심때문에 이루어 진 것이지만, 결국은 우리 스스로가 주권을 내 준 셈이다. 적어도 세력다툼으로 국력만 허비하지 않았다면, 그런 위기 앞에서나마 서로 힘을 합했었더라면 그런 민족의 비극은, 슬픈 역사는 없었을것을....
끝없는 독립운동으로 광복의 기쁨을 맞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 나라는 사상의 대립으로 일제치하에서도 한 덩어리였던 것이 두동강이 나고 말았다. 사상이 무엇이길래 같은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는가. 이게 미국을 탓하고, 소련을 탓해야 할 일인가? 왜 우리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단 말인가?
민족상잔의 비극에서 벗어나 피땀 흘려 이룩한 경제발전을 지금 우리는 또 한번 스스로 깎아 먹어 왔지 않은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나라'라는 비아냥 속에서도, 그게 어느 나라 이야기냐는 듯 흥청망청 써대다가 드디어는 금세기 마지막 환란인 경제대란에 빠지고 말았다. 거기에다 그렇게 크나 큰 아픔을 던져 준 일본의 문화 노예가 되어가고 있지 않는가!
마시이는 눈에 핏기를 머금었다. 마치 성난 짐승과 같았다. 이젠,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국은 이제 곧 망할 것이오. 이 나라 사람들은 스스로를 망하게 할 것이오. 두고 보시오. 지웅씨가 아무리 날뛰어봤자요. 당신네들은 곧 우리에게 손을 벌릴 것이오. 그 때도 지금처럼 우리를 욕할 수 있나 두고 봅시다"
마시이는 성난 들소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껏 지켜왔던 예의의 말투도 잊었다.
"과연 그럴까요? 한국이 망할까요?"
지웅이 껄껄 웃고는 말을 이었다. 넌, 이미 졌어. 지웅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니들 나라도 지게 될거야라는 말도.
"한국인의 머리는 세계 최고예요. 지금까지는 수백차례의 외침을 당해와 제대로 나라를 일으킬 겨를이 없었지만, 이제 우리 스스로 만든 이 위기를 통해 더욱 뻗어나갈 거예요. 당신네들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인 힘이란게 영원할거라 생각지 마세요. 지금 한국의 젊은이들이 가만히 있을 거 같아요? 이 나라 젊은이들의 두뇌는 어디에 갔다놔도 인정받을 실력이 있어요. 그런 우리가 당신네 국고에 있는 돈을 그냥 내버려 둘 거 같소? 가져올 거예요. 모조리 가져올 거예요. 당신들이 우리에게 입힌 정신적인 배상을 못하겠다면 정정 당당히 우리가 가져올 거예요. 착각하지 말아요. 이 나라는 정치인이나, 대기업 주주가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예요. 대한민국은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이끌고 나갈 거예요"
두 사람, 몸으로 치고받지 않았지만 혈투였다. 마시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늘 하루 지웅에게 받은 수모란 열두번 각을 떠도 참지 못할 정도였다. 황국의 시민이 일개 쓰러져가는 나라의 젊은이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다니. 지웅을 쓰러뜨려야 한다. 이 나라 젊은이들을 쓰러뜨려야 한다. 그리고 이 나라를 쓰러뜨려야 한다. 한참을 눈을감고 있었다. 이제, 끝났어. 마시이는 무슨 연유인지 싸움의 중지를 제안했다.
"그만 하죠. 어쨌거나 이웃사촌지간인데 서로 협력할 방안을 찾아봐야죠"
마시이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웃으며 지웅의 잔에 술을 따랐다. 무언가 사고를 예감케 하는,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지웅도 더이상은 배일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맘이 편할 리가 없었다. 격분하며 토로한 배일감정보다 이 나라 국력의 미약함이 더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번엔 현영의 권유로 만들어진 술자리였다. 어제와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들끼리 술을 마신다. 하지만 분위기만은 사뭇 달랐다. 편안했다. 이런 기분, 처음인거 같았다. 술까지 몇 잔 들어갔으니, 현영의 얼굴은 술꽃이 피었다.
"선생님"
현영이 다정하게 부르며 잔을 따랐다. 노인은 여전히 말이 적다. 하지만, 어제보단 많은 편이다. 노인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얼굴에 종종 웃음을 보인다.
"선생님, 함자를 여쭤도 될지......"
이틀 사이에 노인에게 뭔가를 묻는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각인되었는지 질문하는 자신이 어색했다. 대답대신 술을 따르는 노인. 현영은 입맛을 다셨다. 또, 바보같이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치만 아무래도 좋았다. 오늘은 취해도 좋을 것 같았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돼. 사실 휴가는 오늘이 끝이야. 아침에 곧바로 출근해야 한다구"
그러면서 노인은 냉장고에서 발렌타인 한 병을 더 꺼냈다. 현영이 얼른 받아 노인의 잔을 채웠다. 노인이 말했다.
"요즘 많이 힘들겠군"
현영이 노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 그 얘기구나. 입맛이 쓰다. IMF가 터지고 힘든 사람이 어디 한두명인가? 사람들끼리 만나면 인사로 하는말. 많이 힘들지? 그 말이 현영은 싫었다. 그런 말을 하게 만드는 사회적 환경이 더욱 싫은거겠지만.
"예"
더 이상의 대답은 필요 없었다. 그 한마디면 족했다. 사실...... 힘들다.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힘들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너무들 힘들어한다. 분위기가 처진다. 그렇다고 그런 말 때문에 어깨까지 움츠릴 건 없잖아? 현영은 큰기침을 하고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노인은 역시 한 수 위다. 마음을 읽었는지 따뜻한 미소로 현영을 위로했다.
"일본이 개입해 있더군요. 이 IMF라는거. 제 친구가 자료를 뽑아봤는데, 일본이 80%의 영향을 미쳤어요. 아니지, 우리 잘못이래요. 또다른 녀석 얘기로는"
술잔에 저절로 손이 갔다. 생각만 해도 괴로운게, 술을 찾게 되는게 IMF다. 오히려 술 소비량이 늘었다는 말, 이유가 있는 거였다.
"용케 알고 있군"
고개를 들어 노인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노인의 얼굴이 진지해져 있다. 알고 있다니? 그렇다면 노인도?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꽤 오랜 전부터 시작된 일이야. 한국을 망하게 하려는 거. 10년은 족히 돼지. 일본도 그것 때문에 손해를 많이 봤어. 굉장한 소모전이야. 이제야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지만"
아-. 태림의 말이 맞았다. 가슴이 뛰었다. 지웅이나, 태림이나, 현영 자신이나 아니길 바랬는데, 맞는 말이라고 방금 노인이 말했다. 이 노인. 갑자기 정체를 알고 싶어진다. 누굴까?
노인이 말을 이었다.
"나도, 바보처럼 얼마 전에야 알았어. 미리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워낙......"
말을 끊고 술을 마셨다. 더 이상 자신을 밝히긴 싫은 모양이었다. 그만, 신경 끊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지금은 문화개방에 대한 답사차 온 것이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지웅과 태림을 만나 지금 있는 일을 얘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마시이는 지웅의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길에 캔맥주 열개와 패스포트 한 병을 샀다. 이미 얼큰히 취해 있는 상태에서 너무 많은 양의 술이었다. 지웅의 오피스텔에 도착하자마자 마시이가 오징어 두마리를 구워왔다. 그리고 캔맥주를 따서 지웅에게 내밀었다.
"마셔요. 아주 시원하네요"
마시이가 조급히 지웅을 재촉했다. 지웅의 캔맥주를 부딪히고는 자기가 먼저 마셨다.
"안 먹어요?"
"아니요, 먹지요"
지웅이 내키지 않는 듯 얼굴을 한 번 찡그리고는 맥주를 들이켰다. 마시이가 몇 번을 재촉한 끝에 지웅이 캔맥주 하나를 비웠다. 그러자 마시이가 또 하나의 캔맥주를 내밀었다.
"아니, 저 괜찮아요. 그만 할게요"
지웅이 손을 내밀며 사양했다. 그러나 마시이는 끝까지 캔맥주를 내밀었다.
"제가 미안해서 그래요. 아직 시간도 충분한데. 이제 열 시밖에 안 됐는데요. 뭘. 지웅씨 생각보다 술이 약하네요?"
마시이의 우격다짐으로 지웅은 캔맥주를 다섯개나 마셨다. 그러자 마시이가 재빨리 냉장고의 얼음을 가져와 언더록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지웅에게 잔을 내밀어 술을 재촉했다. 지웅이 큰숨을 내쉬며 한 잔을 비웠다.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마시이는 그런 지웅을 봐주지 않았다. 또 한잔의 언더록스를 만들어 내밀었다.
언더록스를 세 잔 째 마시자마자 지웅이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마시이는 지웅의 만취를 확인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여름밤의 바람이 제법 시원했다. 휴대폰을 꺼내 야마모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그래, 잘 지내고 있나? 일은..."
"예. 지금 처리하려고 합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죽이지는 말게"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
마시이는 그동안 지웅을 관찰한 결과를 얘기했다. 야마모도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선생님이 뒷처리를 잘 해주셔야 합니다"
"그야 물론이지"
"황국시민으로서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내일 아침 한국은행에서 연락이 갈 겁니다. 선생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차분했다. 이렇게 차분히 말할 수 있는 자신에게 마시이는 내심 놀랐다.
"대일본제국의 명예를 가슴에 간직하게"
"선생님, 꼭 한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만드십시오. 이 나라를 짓밟아 주십시오. 선생님과 그 분들이라면 분명 해내실 줄 믿습니다. 그럼 이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행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재중이었다. 짧은 몇 마디의 말을 남겼다. 아직도 한여름의 무더운 밤이었다. 그러나 마시이에게는 마냥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품안에서 붉은 천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단도를 꺼내들었다. 날카롭다. 보기만 해도 섬찟한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거실로 들어갔다. 형광등 빛으로도 충분히 칼날은 서슬시리다. 후-. 한숨이 나온다. 지웅의 옆으로 가서 누웠다. 동작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렇게 많은 술을 마셨는데 취하지도 않았다. 가슴에 손을 얹어 보았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얼굴이 따뜻하다. 이런, 또 눈물이...... 소매로 한번에 눈물을 훔쳐냈다. 다시 한 번 숨을 들이켰다. 숨소리마저 마구 요동친다.
눈을 감았다. 실패한다면?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실패하면, 또 다른 누군가가 지웅을 해치울 것이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워왔다. 일본은 강한 나라다. 내가 지면 나보다 나은 다른 누군가가 내 대신 이겨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강하다.
이제, 끝내.
마시이는 자신을 타일렀다.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한번에......
있는 힘껏 칼을 내리꽂았다. 아프지... 않다. 고개를 내려다 보았다. 자신의 배 위에 점점 퍼져나가고 있는 것, 피였다. 붉은 피. 일본도 저렇게 퍼져나가리라.
웃었다. 옆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파멸도 모른채 술에 골아떨어진 지웅의 옆모습이 보였다. 단지 희미할 뿐이다. 숨이 빨리 끊어지는구나, 마시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119에 신고를 했다. 다른 말은 안 했다. 지웅의 오피스텔 위치만 알렸다.
입에서도 피가 흐른다. 장이 파열된 모양이다. 그래도... 아프진 않다.
졸립다. 자고 싶은데 숨이 찼다. 이제야 취기가 오는지 졸립다.
너무 졸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숨이 찬데도 의식이 점점 줄어들었다.
살인사건
현영은 뒤척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노인이 짐을 챙기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무슨 일이세요?"
"사고가 생겼어"
노인이 넥타이를 매고 있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테이블 위에 조간 신문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아무래도 신문을 보고 서두르는 것 같았다. 현영의 눈이 신문을 향했다.
헉-.
지웅이다. 지웅의 이름이 실려 있다. 살인사건이라는 제목 아래, 어지러운 사진도 함께. 자세를 바로 잡고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었다.
"무슨 말이야, 이게!"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노인이 의아한 눈빛으로 현영을 쳐다보았다.
"이게...... 말도 안돼. 얘가, 제 친군데...... 무슨 말도 안돼는 소린지....."
더 이상 말이 안 나왔다. 노인이 갑자기 현영에게 달려든다.
"뭐라고?"
정신이 없기는 노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넥타이가 많이 비뚤어져 있었다.
"이 자식이 제 친구라구요"
이성을 잃은 목소리. 그러나 노인의 눈동자 또한 다를 바 없었다.
"자네...."
현영이 노인을 올려다 보았다.
"서두르게, 할 일이 많아지겠어. 일이... 너무 빨리 터졌어"
현영은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곤 부리나케 노인을 쫓아나갔다. 체크아웃을 하는둥 마는둥 하고 허겁지겁 차에 올라탔다. 노인이 급하게 시동을 건다. 불쾌한 음을 내는 자동차. 시동이 안 걸린다. 다시 키를 돌린다. 한참만에 악셀레이터 밟는소리가 들린다. 현영은 옆을 돌아보았다. 저 무뚝뚝한 노인네가, 차가운 노인네가 서두르고 있다. 얼굴엔 미세한 경련까지 동반한 채로. 가만히 보니, 식은 땀도 몇 방울 맺혔다. 그렇다면......
"혹시 지웅이 때문이세요?"
현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노인의 표정이 너무 긴장되어 있었다.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물었다. 이번엔 기필코 노인의 대답을 들어야 했다. 노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 친구라고 했지? 단단히 각오해야 할거야"
차는 더욱 빨리 도로를 미끄러져 나갔다. 새벽동이 틀무렵, 노인과 현영은 도쿄에 들어서고 있었다.
각 조간신문마다 지웅의 마시이 살인사건이 헤드라인을 차지했다. 전날 친구들과 폭주를 해 아직도 술이 덜 깬 상태로 출근한 태림은 풀린 눈빛으로 집은 조간신문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신문에는 지웅이 마시이를 살해하고 옆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헤드라인의 이름을 보고 혹시나 했던 의혹이 사진을 보자 확실해졌다. 지웅이 살인을 저지르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커피를 뽑아들고 책상에 앉아 태림은 신문을 자세히 읽어내려갔다.
"만취에 의한 살인사건이라... 말다툼 도중에 `욱' 하는 감정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태림은 사건의 추측기사를 보고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웅은 그럴 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술자리에서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거니와, 취했을 때면 살며시 잠들어버리는 지웅의 습관 또한 알고 있었다.
담배를 피워 물고 커피를 마시며 골똘히 신문을 들여다보던 태림에게 부장의 호통이 떨어졌다.
"윤기자. 너 정신이 있냐, 없냐? 남들은 새벽에 뛰어가며 그런 기사 쓰고 있는데 넌 아직 눈꼽도 안 떼고 출근이냐? 얘가 뭘 믿고 이래? 너 구조조정이 남의 말인지 아나본데, 한 번 혼나볼래?"
태림이 보고 있던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그 상태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문을 나가며 부장의 화를 돋우는 말을 던졌다.
"그러게, 월급 좀 올려달라니까요. 우리 신문사 월급이 너무 짜요. 이건 뭐 출장비도 달랑 차비하면 남는 게 없으니 어디서 취재원을 구해요?"
부장이 그렇게 껄렁대며 얘기하는 태림에게 두루마리 휴지를 집어 던졌다.
"얌마, 월급은 내가 주냐? 저거 진짜 짤라야지, 도저히 성질나서 일 못하겠다니까"
옆에 있던 다른 기자들이 쿡쿡대며 웃었다. 태림은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던 휴지를 문으로 막아내며 히죽거리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신문을 펴들었다.
"연수 온 딜러와 말다툼을 하다가 살해해? 마시이 아니야. 그런데무슨 말다툼을 했다고 사람까지 죽여? 이거 영 냄새가 구린데? 지웅이 녀석 이거 술에 골아떨어진 거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태림은 화장실로 나오기 바쁘게 사무실 문을 열어 고개만 디밀며 부장에게 취재다녀온다고 하고서는 종로경찰서로 향했다.
"면회는 10시부터 됩니다"
담당 직원이 태림을 막아섰다. 태림은 기자 신분증을 제시하며 취재 차 온거라고 우겼으나 담당 직원은 한사코 출입거부였다.
"사회부 기자 아니요. 형사계도 아닌 사람이 무슨 취재를 한다고 그래요? 있다가 10시 되면 와요. 그 땐 기자 아니라도 면회 시켜줄테니까"
담당직원은 늘상 그렇게 기자들이 신분을 제시하며 우쭐거리고 면회를 요청하는 게 꼴상사나웠던지 일언지하에 태림의 면회를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태림은 근처 해장국집으로 가서 아직 달래주지 못한 뱃속에다 뜨뜻한 순대국을 넣어주었다. 빈 속을 달랬더니 졸음이 쏟아졌다. 아직 30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태림은 옆의 목욕탕으로 갔다. 안락의자에 몸을 맡겼다. 태림은 그대로 잠에 골아떨어졌다.
잠깐 눈을 붙인다며 안락의자에 누웠던 태림은 열한시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이런 제기...."
목욕탕에 가 물 한 번 안 묻히고, 태림은 경찰서로 향했다. 땀을 흘리며 뛰어간 태림은 조금 전 자신을 거부했던 담당 직원에게 이제 시켜줄거냐고 비아냥거리며 물었다.
"안돼요"
"예? 왜 또 안되요?"
지웅은 어이가 없다는 듯, 짜증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하고 있어요"
"예? 나 참. 누구예요?"
담당 직원은 대꾸하기가 영 귀찮다는 듯 태림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은 채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애인인 거 같은데. 말로는 직장 동료라는데 모르겄수다. 저기 나오네. 저 사람한테 직접 물어보슈. 오늘은 면회 안되요. 하루에 한 번 밖에 안되니까. 내일 오슈"
담당 직원은 서류뭉치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림을 제치고 지웅을 면회한 사람은 윤희였다. 윤희는 신분증을 찾아서 경찰서 문을 열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 태림의 눈이 빛나며 윤희를 뒤쫓아갔다.
"윤희씨!"
윤희가 뒤돌아보더니 반가운 듯 다가왔다. 태림이 곧장 밖으로 윤희를 데리고 나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태림이 나오자마자 담배를 물며 물었다. 윤희의 눈에 벌써 물기가 어렸다.
"저도 잘 몰라요. 어제 같이 술을 마신 것 밖에는, 지웅씨도 아무것도 모르겠대요"
"뭐요?"
태림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희가 말을 이었다.
"지웅씨, 그럴 사람 아니라는 건 태림씨도 알잖아요. 일본을 싫어하는 정도가 좀 심하긴 하지만, 그건 우리 나라 사람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잖아요. 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 그게 다래요?"
윤희가 이젠 어깨까지 들썩였다.
"마시이씨가 자꾸 술을 먹자고 해서 억지로 마셨대요. 그리고 취해서 골아 떨어졌는데, 새벽에 자꾸 누가 몸을 흔들어 눈을 떠보니 형사들이었대요"
"도대체, 어떻데 된 거야?"
태림이 화가 나는지 담배꽁초를 있는 힘껏 바닥에 내팽겨쳤다. 윤희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사실은 어제 특별한 일이 있긴 있었거든요"
"특별한 일이라니요?"
태림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윤희는 어제 있었던 일을 태림에게 얘기했다. 태림은 윤희의 얘기를 듣더니, 환희를 느끼는 표정을 지었다.
"녀석이 그랬단 말이예요?"
태림은 지웅의 그런 모습이 상상이 갔다. 대학교때였던가? 벤치에서 함께 책을 읽다가 잠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개 한마리가 `한국사' 책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있는 게 아닌가? 지웅은 당장 개를 잡아서 죽을 만큼 때리더니 `너, 이놈. 넌 분명히 일본의 사주를 받은 개새끼다. 고로 죽어줘야겠다' 그리고는 하숙집으로 가져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부탁을 해 보신탕을 해 먹었었다. 그 땐 그저 더운 여름철 마땅히 몸보신 할 게 없던 하숙생의 처지에서 나온 핑계거리인 줄만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한국사'를 갈기갈기 찢어 놓은 개를 보고 일본의 만행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 땅의 역사를 왜곡시키는 일본의 만행을.
"지웅이가 아무리 일본을 싫어한다고 해도, 사람까지 죽일 리는 없을텐데요. 산료 제품을 불사르며 일본에 대한 증오를 키우긴 했겠지만... 아무리 술김이라고는 하지만. 이상한데요?"
태림은 기자의 날카로운 예감을 발휘하며 지웅의 살인사건의 석연찮음을 지적했다. 윤희 역시 믿을 수 없는 얘기라는 듯, 태림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증거는 너무 명확하고, 지웅 자신이 기억을 못하고 있는 판국에 마냥 무죄를 주장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은행 딜링룸은 아수라장이었다. 경찰에서는 지웅의 물건들을 샅샅히 뒤졌고, 일은 마비상태였다. 행장까지 나와 사건의 전말을 접했고, 딜링룸 직원들은 아닌밤 중에 홍두깨라고 어젯밤의 일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은행의 질책이었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아침 일찍 전화를 걸어온 야마모도는 큰소리를 쳐가며 행장을 비롯해 세열까지 살인범으로 몰아세웠다. 지웅의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은행의 입장에서는 일본은행을 어떻게 무마시키는가가 급선무였다.
"이봐, 경헌씨. 뭐 짐작 가는 거 없어? 지웅씨하고 마시이 사이에 트러블 있었나?"
세열이 무슨 근거라도 찾으려는 듯 경헌을 닦달했다.
"글쎄요. 마시이가 여기 온 지 일주일밖에 안 지났는데 뭐 트러블이 있고말고 할 시간이나 있었나요? 그저 지웅씨 딜링할 때, 뒤에서 구경하는 게 그 사람 하는 일의 전부였는데"
"애초에 마시이를 지웅씨 집에서 지내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지웅씨 술먹어도 실수 안하잖아. 그런 사람이 그렇게 많은 술을 마시고, 사람까지 죽이다니. 나 이거 참"
세열은 사건을 추스리기가 난감한 듯 발만 동동 굴렀다. 조금 있으면 야마모도가 직접 이곳으로 날아올 것이다. 이걸 어찌해야 할 지 몰랐다. 남의 나라 유망한 딜러를 죽여놨으니, 그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정윤희씨는 왜 이렇게 안 와? 구치소에서 데이트라도 하는거야, 뭐야?"
이 때, 윤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 여기 왔어요. 사람 없다고 말을 함부로 하시네요"
윤희는 지웅의 살인사건으로 경황이 없는 줄 알지만 그렇다고 말을 함부로 내뱉은 세열에게 앙칼지게 대꾸했다. 세열이 다소 민망한 듯, 머뭇거리다 지웅의 소식을 물었다.
"자신도 모르겠대요. 마시이씨가 하도 술을 먹여서, 떡이 되도록 취해 잠들었는데 새벽에 일어나 보니 그 상태로 돼 있더래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럼 자기가 사람을 죽인 것도 모를 정도로 취했단 말이야? 나 이거. 야마모도가 오면 뭐라고 설명을 해야되는 거야? `우리 부하직원이 술에 취해 마시이를 죽였소' 하고 얘기해? 세상에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지웅씨 그럴 사람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그걸 누가 몰라서 이래? 하지만 지웅씨가 죽였잖아. 증거도 확실하고, 발뺌할 건덕지도 없다구"
세열은 자기 스스로가 답답한 나머지 윤희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윤희 또한 지웅의 일이 걱정된 나머지 세열의 짜증을 받아들이지만은 않았다.
태림은 밖에서 점심까지 해결한 뒤에 어슬렁거리며 신문사로 들어갔다. 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사무실 문을 열고 빠꼼이 고개를 내민 태림을 잡아먹을 듯 하였다.
"너, 이리와. 어디가서 쏘다니다가 이제 들어와. 니가 부장 해라. 응? 니가 부장 해!"
태림은 특유의 너털웃음으로 부장의 호통에 대꾸한 후 은근히 다가갔다.
"부장님, 오늘 사건 말이예요"
"무슨 사건?"
부장은 퉁명하게 태림의 말을 받았지만 어쩐지 뭔가 기대하는 말투였다.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태림이었지만 가끔 잡아오는 특종때문에 항상 욕은 하지만 어느 정도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일본인 살인 사건 말예요.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피의자가 칼까지 쥐고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는데. 사진도 안 봤냐? 이자식이 괜히 농땡이 친 거 무마시키려고 허튼수작부리네 이거"
"아니라니까요. 그 사건을 저지를 나지웅이란 사람이 제 친군데, 걔 그럴 애가 아니라구요. 그리고, 아무리 취중이라지만 연수받으러 온 친구를 말다툼 조금 했다고 살해할 리가 있겠어요? 오전에 그 친구 면회하고 온 사람을 만나봤는데, 술은 취했지만 그런 기억은 전혀 없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걘 필름 끊기기 전에 잠부터 드는 애예요. 살해당한 마시이라는 사람이 하두 마시자고 해서 술에 취해 골아떨어졌다고 하던데요? 그리고 말다툼한 적도 없대요. 그 전에 술집에서 언성을 높여가며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마시이라는 사람이 화해주라며 술을 사와서 억지로 마셨다고 하더라니까요"
이틀 전 일이 생각났다. 술을 먹어도 차분하기만 했던 지웅이었다. 마시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선명하게 떠오르진 않았다. 그 날 만나서 주의 깊게 보질 않았었다. 보기 싫었던 거겠지만.
긴장은 되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났고, 지웅은 구치소에 수감되었지만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불과 이틀전에 만나지 않았던가?
"시끄러. 니가 판사라면 그걸 곧이 곧대로 듣겠냐? 세살 먹은 어린애도 그런 말은 안 믿겠다.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기사 만들어와. 응? 진짜 짤린 다음에 후회하지 말고"
부장이 태림의 말을 시큰둥하게 받았다. 태림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책상에 앉아 외국 신문을 뒤적였다. 다음 날 지웅에게 직접 가는 것 밖에는 이번 사건을 캐내는 데 좋은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금이타조(金以打朝)
거물들이 다시 모였다. 하나같이 굳은 다짐을 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와타나베가 눈짓을 보내자 야마모도가 일어섰다.
"저는 이 자리에서 황국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자신의 몸을 희생한 마시이의 정신을 새기려 합니다.
그는 일주일 전 우리가 감시하고 있는 나지웅이란 자를 제거하기위해 한국으로 떠났습니다. 오로지 대일제국의 번영을 위해, 우리의 수백년 염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던지고 한국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마시이는 일주일동안 나지웅을 관찰했습니다. 역시 우리들의 생각대로 놈은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단순히 딜링으로 우리에게 경제적인 손실을 입히는 차원을 넘어 우리의 경제적, 문화적으로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어제는 나지웅이 마시이와 함께 서울에 오픈한 `산료 코리아' 에 찾아가 `패전 기념일' 에 중앙은행과의 거래에서 올린 실적으로 받은 보너스 천만원을 몽땅 털어 산료의 제품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는 인근 교외로 나가 땅을 파고 그것들을 죄다 묻고는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 부분에서 산료의 노무라 사장의 얼굴이 움찔했다. 그의 얼굴이 점점 붉어져 올랐다. 야마모도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한국의 젊은이들과는 달리, 우리 일본을 무척이나 싫어하고 있었습니다. 때 지난 정신대 배상문제를 아직도 속에 품고 있었고, 마시이와 술집에서 논쟁을 벌일 때에는 자신들의 좋은 두뇌로 우리를 집어삼키겠다고까지 했습니다. 마시이는 그 말에 참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는 각오했습니다. 나지웅을 없애야겠다고. 옆에서 지켜 본 나지웅은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놈이었습니다. 저는 어젯밤 마시이에게 전화가 왔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죽여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나지웅을 죽임으로 아직까지는 잔잔한 한국인들의 가슴에 도화선을 제공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마시이는 저에게 뒷일을 부탁한다고 얘기했습니다. 한 때, 노예였던 자들이 당당한 황국의 시민의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지웅이란 자를 처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시이가 목숨까지 빼앗겨가며 꿈꾼 금이타조(金以打朝)를 이룩하도록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박수를 쳤다. 한국의 정벌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 마시이에 대한 추모의 박수였다. 대부분의 눈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복수의 눈빛이었다. 엄숙한 분위기에 와타나베가 말을 이었다.
"노무라 사장. `산료 코리아' 는 어떻소?"
노무라가 무겁게 말을 받았다.
"생각했던대로 대성황입니다. 아마 요 며칠간은 압구정에서도 최고의 실적을 올렸을 겁니다. 서울 시내 젊은 여자들의 꾸밈새를 보면 저희 제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여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워너 브라더스사와의 경쟁에선 어떻소?"
"그들의 캐릭터는 아직 의식할 단계가 아닙니다. 미국에서도 문화적 침략을 중요시해서 다른 이권은 양보해도 그것만은 못하겠다는 입장입니다. 아직 한국의 초등학교 남학생들에게는 워너브라더스사에서 만든 캐릭터제품이 우세를 보이고 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 8대2 정도로 저희가 앞서고 있습니다. 조만간 남학생을 겨냥한 캐릭터 상품을 개발해서 내놓아야 겠습니다. 슬램덩크 캐릭터 상품도 생각보다는 힘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와타나베의 고개가 끄덕이더니 아사이 신문사 사장에게 말을 건넸다.
"스케노 사장. 오늘 석간 헤드라인은 정해졌소?"
"예, 말씀하신대로 마시이의 죽음을 헤드라인으로 하려고 합니다. 우리 국민들도 한국의 젊은이에게 살해당한 마시이의 기사를 보면 불끈 들고 일어설 것입니다. 최대한 국민들의 감정을 유발시키도록 기사를 작성하겠습니다."
"그래요, 지금이 바로 기회요. 국민들까지 합세해 우리의 행동에 지지를 보낼 것이오. 외신에도 기사를 퍼뜨리시오. 우리의 금침(金侵)을 되도록 정당화시키도록 하시오. 황국의 젊은이는 목숨을 바쳤소. 이제 우리도 남은 힘을 다해 53년 전의 치욕을 씻어야 할 것이오"
야마모도는 곧바로 한국으로 갔다. 한국은행장을 찾은 야마모도는 거드름을 피우며 행장과 세열을 질책했다.
"도대체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기껏 연수를 보내놨더니 죽여버리다니. 당신네 한국인들은 원래 그렇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저희도 아직 자세한 전말은 모르고 있습니다. 검찰에서 수사를 하고 있으니 곧 원인이 밝혀질겁니다. 아무튼 죄송하게 됐습니다"
행장이 송구스러운 듯 정중히 사과했다. 야마모도는 오히려 더욱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이건, 미안하고를 떠난 문제 아닙니까. 마시이라는 청년은 일본 최고의 딜러가 될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부탁을 드린 게 아닙니까. 그런데 죽여버리다니. 혹시 다른 음모가 있는 건 아닙니까?"
"그럴리가 있습니까. 저희도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사건의 진위여부가 밝혀지는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번엔 세열이 마시이의 말을 받았다.
"아무튼, 어물쩡 넘어갈 생각은 안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일본의 모든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야마모도는 협박조로 행장과 세열을 몰아부쳤다. 행장과 세열은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달리 얘기할 게 없었다. 야마모도는 딜링룸을 둘러 본 후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태림은 정확히 열 시에 종로경찰서를 찾았다. 담당 직원에게 으시대기라도 하듯 열시를 알리는 알람소리를 귀에다 대보이고는 면회실로 들어갔다. 지웅의 야윈 모습이 나타났다. 얼굴은 까칠까칠 했고, 구치소에서는 수염이 더 잘 자라는 모양인지 지저분한 모습이 다소 심했다. 열흘만에 보는 것이지만, 그 동안 마른 것보다는 구치소에서의 하루때문에 야윈 것 같았다.
"잘있었냐?"
구치소에서의 인사치고는 어색한 안부를 태림이 물었다. 지웅은 짐짓 놀란 표정이었다.
"니가 어쩐 일이냐? 여긴 어떻게 알았어?"
"임마, 대한민국 사람들이 죄다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사이비라도 직업은 기자 아니냐. 그래 몸은 괜찮어?"
"응, 하루밖에 안 있었는데 뭐. 그런데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정말로 마시이를 죽였단 말이야?"
"자식, 지가 한 일도 기억을 못하네, 도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기억을 못해? 니가 죽이긴 죽인거야?"
"그걸 모르겠다니까. 난 절대로 그런 기억이 없거든. 맥주를 다 마시고 언더록스 몇 잔에 골아떨어져 잠든 거 밖에 기억이 안 나"
"대책 없는 놈이구만. 이거 본인도 모르고 있는 사실을 누가 해결해줄런지"
태림이 답답하다는 듯 담배를 입에 물었다.
"너 멋있는 짓 했더라?"
"뭐가?"
지웅이 태림의 담배를 뺏어 한모금 피우고는 되물었다.
"산료꺼 잔득 땅바닥에 묻고 태웠다며?"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너 그래도 기자긴 기자인 모양이다. 별 걸 다 아네"
"그래, 일은 어떻게 처리할거야? 변호사는 구했어?"
"은행에서 알아서 해 준다고 하더라. 은행 담당 변호사를 쓸 모양이야"
"아주 남 얘기하듯 하네. 임마 살인을 저지른 건 너야. 정신 차리라구"
"아니야. 기억은 안 나지만, 난 아니야. 분명 무슨 음모가 있을거야. 마시이가 한국에 온 것도 나때문이었을거고. 아직은 심증밖에 없지만..."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냐. 그렇다고 판사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겠어?"
태림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자신있게 말하는 지웅이었지만, 파란 죄수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마냥 안스럽다.
"현영이는?"
지웅이 그와중에서도 현영의 안부를 물었다. 태림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아직 연락은 없어. 아무렴, 너만 못하겠냐? 너 정말 큰 사고쳤다"
"그래? 너도 바라던 거 아니야?"
"자식이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은....."
지웅이 편안하게 미소를 지었다.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바쁘냐?"
뜬금없이 지웅이 태림에게 물었다.
"왜, 안 바쁘면 너 좀 데리고 나가 세상 구경 좀 시켜주리?"
"아니, 우리 은행에 가서 윤희씨한테 내일 아침에 500만달러치의 엔화 좀 사라고 해줘라. 그리고 오후장에 값이 소폭으로 오를테니까 그 때 팔라고 해주고"
"나지웅씨, 여긴 은행이 아니고 구치소야, 막말로 감옥이라고. 그런데 내일 뭘 어쩌라구? 너 충격받은 거 아니야?"
"쓸데 없는 소리 말고 부탁이나 들어줘. 가봐라. 난 잠이 부족해서 가 좀 쉬어야겠다. 인간들이 얼마나 들볶던지"
구치소 안에서의 신고식을 혹하게 당했는지 지웅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알았다. 며칠 있다가 또 올테니까 뭐 생각나는 거 있으면 말해라. 아니 뭐든 좀 생각해봐라. 떠오르는 게 있을 지도 모르니"
태림은 경찰서 문을 나서며 미소를 지었다.
거 봐.
자신의 추측대로 지웅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어디, 하루이틀 사귀어 온 친구였던가? 벌써 10여년이다.
현영의 소식이 궁금하다. 지웅이 이러고 있는데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그의 근질거리는 기자 정신이 발동하고 있었다. 그냥 넘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친구를 위해서도,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도.
소요 대 소요
일본 전역이 들끓기 시작했다. 마시이가 그렇게도 원하던 일본감정의 폭발이 터진 것이다. 아사히 신문만이 아니었다. 마이니찌 신문까지 마시이의 죽음을 헤드라인으로 다뤘고 일본의 대다수 국민들은 하나같이 분노했다.
군중은 먼저 한국대사관을 점령했다. 전경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대사관 내로 침투하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돌맹이와 화염병을 투척했다. 동경시장이 시민들을 만류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전경들은 인간바리케이트일 뿐이었다. 시민들이 돌을 던지면 던지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대사관 건물 1, 2층의 유리들은 모두 박살났다.
대사가 급히 청와대로 전화를 걸었다.
"각하, 접니다"
"그래 무슨 일이오?"
"동경 시민들이 소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마시이라는 자의 죽음을 한국의 책임으로 몰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요? 도대체 기사가 어떻게 났길래 그렇소?"
"마시이의 죽음을 한국은행의 사주를 받은 자의 소행이라고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이곳 시민들은 지금 분노에 가득차 있습니다. 빠른 조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알겠소. 내 일단 오부치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보겠소. 삼십분마다 상황보고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는 순간 화염병 하나가 깨어진 창문을 타고 넘어왔다. 사무실이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대사님, 어서 피하십시오"
서과장이 대사를 이끌고 대사관 옥상으로 올랐다. 밖엔 수천명의 인파가 모여 대사관을 향해 욕과, 돌맹이와, 화염병과 그들의 분노를 쏟아붓고 있었다. 도저히 대사관을 빠져 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총리님, 저 김대통령입니다."
대통령이 급히 오부치 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각하.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총리가 책임을 추궁하는 듯한 말투로 마시이의 죽음을 물었다.
"송구스럽습니다. 안그래도, 담당 부처에게 사건을 면밀히 조사하라고 지시해 놨습니다. 이거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그런데 마시이의 죽은 배후에는 한국은행이 개입했다는 소리가 있던데..."
"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검찰총장의 말을 들어보니 나지웅이라는 젊은이와 술을 마시다가 취김에 사건을 저질렀다고 하던데요"
"그 젊은이는 일본의 가장 유능한 외환 딜러였소. 그와의 거래를 두려워한 나머지 미리 처치했다고 하던데요"
"아닐겁니다. 아무튼 빠른 시간내에 사건을 조사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동경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알고 계십니까?"
"무슨 말씀이신지요?"
수상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저희 대사관 주변에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소요를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중재를 시켜주셨으면...."
"아, 그렇습니까? 사람을 통해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나중에 연락을 드리지요. 아, 그리고 각하"
"예, 말씀하시지요"
"이번 사건을 곱게 넘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결단코 진상을 가려 그동안 숨겨왔던 한국인들의 가면을 벗겨드리겠습니다"
총리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총리 역시 동경 내의 한국 대사관 사태를 알고 있었지만 묵인하고 있었다. 총리 뿐만 아니었다. 언론이 먼저 터트린 일본감정의 폭발은 정부와 기업, 학교와 종교단체, 그리고 국민들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들이 알고 있는 마시이의 죽음은 단순한 젊은이들끼리의 술자리에서 생긴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 한국은행이 배후에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정부가 직접 나섰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국민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동안 한국 정부가 책임배상이니, 사과니 하는 말로 자신들의 신경을 거슬린 것에 대한 좋은 반발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좋은 기회였다. 마시이는 충분히 죽은 가치가 있었다. 금이타조(金以打朝)의 사람들은 여론부터 선동했다.
`우리는 언제까지 한국인들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그들에게 손해를 보아선 안된다. 그들이 외치는 지나간 과거에 대한 보상은 말 그대로 이미 과거일 뿐이다. 우리의 가야 할 길을 가야 한다. 보라. 인자의 나라라고 떠들던 저들이 우리의 유망한 젊은이를 아무 이유 없이 살해했지 않은가?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다. 다케시마도, 임나일본부설도 이제는 정당성을 되찾아야 한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동의했다. 아니 먼저 발벗고 나설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이보다 좋은 명분은 없었다. 마시이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 그러기에 한국을 철저히 넘어뜨린다 해도 방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반발할 국민은 없었다.
외신도 일본의 분에 못이기는 행동을 과장되었다고 보도하기는 했으나 대체로 그들을 이해하는 태도였다. 이제는 처참하게, 아주 처참하게 한국을 무너뜨리는 일만 남았다. 금이타조(金以打朝)는 이제 시간문제인 것이다.
대통령은 차분한 목소리로 비서실장을 불렀다.
"어떻게 된 일이오? 도대체 어떤 사건이기에 일본이 저렇게 들고 일어선단 말이오?"
비서실장이 죄송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검찰이 조사를 해보았는데, 마땅한 살해동기가 없었습니다. 술을 마시다 말다툼 끝에 살해를 했다는 추정기사가 있었지만 본인의 말로는 말다툼을 한 일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마시이가 술을 마시자고 재촉해서 받아주다가 먼저 취해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요? 한국은행장은 뭐라고 하오?"
"은행장도 나지웅이란 젊은이가 그랬을리 없다고 했습니다. 마시이는 원래 연수차 이곳으로 온 것이고 나지웅의 딜링을 배우기 위해 그와 숙소를 같이 썼다고 합니다. 은행장이 나지웅을 굉장히 믿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여기 그에 관한 자료만 보더라도 은행장이 그렇게 두둔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비서실장이 은행에서 뽑아 온 자료를 내밀었다. 대통령이 안경을 끼고 자료들을 천천히 훑어봤다. 대부분의 딜링 실적이 일본 은행과의 거래에서 얻은 이익이었다. 그 자체만으로 대통령은 지웅에 대해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그의 실적을 내려읽다가 한 부분에서 멈췄다. 광복절의 이익이 다른 날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친구군. 이 사람 일본을 너무 싫어했던 거 아니요?"
대통령은 지웅이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은 듯 그의 실적을 보고 흥미를 가졌다. 오히려 지웅의 실적이 반가웠다. 비록 지웅이 거둬들인 이익이 많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한 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었다. 수많은 기업들이 이를 악물고 뛰어도 적자에 허덕이는 이 경황에 한 젊은이가 꾸준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을 만나 볼 수 없겠소?"
대통령이 느닷없이 그렇게 말했다. 비서실장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예? 각하. 이 자는 살인범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만나시려고 하십니까?"
그러나 대통령은 여유 있는 웃음을 띠었다.
"괜찮소. 이 자는 별로 위험할 거 같지않소. 그리고 난 한국인이니 죽이진 않을거요"
대통령은 껄껄 웃었다. 오랫만에 맛보는 통쾌함이었다. 비록 지웅이 살인을 저지르고 일본이 그로 인해 들고 있어섰지만, 일본을 상대해 계속 이겨왔던 지웅의 실적이 그의 통쾌함을 숨기지 못했다. 일본에 허덕이며 살아왔던 한많은 100여년. 그 한의 일부를 지웅이라는 젊은이가 풀어준 기분이었다. 지금껏 한국을 일으킨 경제 엮군들이 아니라 미약하기만 한 줄 알았던 한국의 젊은이가 해 낸 작은 성과. 그것 자체가 대통령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법무부 장관을 불러요"
대통령이 조용히, 그리고 힘있게 말했다.
대사관에 모인 동경시민의 소요는 끝이 날 기미가 안 보였다. 처음 3천여명으로 시작된 소요가 시간이 지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대사는 옥상에서 직원들과 구조의 손길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그들을 구해줄 것인가? 일본 열도에서 그들을 구해 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 막막 그 자체였다.
대사관은 이미 건물 자체로서의 형태를 잃어버렸다. 검게 그을린 벽돌과 깨진 유리창, 아직도 타오르고 있는 사무실까지. 애꿎은 대사관이 일본 국민들의 분노를 삭이는 구실을 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는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대통령이 세 차례나 전화를 걸어서야 총리는 소요를 진압해보겠다는 무성의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대답 그 자체 뿐이었다. 총리가 명목상 중재를 하려 해도 그 및의 관료들이 한귀로 흘려버렸고, 총리 또한 그런 태도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서울의 석간신문들은 일본 시민들의 대사관의 포위를 헤드라인으도 다뤘다. `마시이의 죽음에 대한 일본감정의 폭발'
태림은 타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특파원을 통해 들어오는 기사와 사진은 가히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그들의 국민성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구한말 한국을 침략할 당시와의 방법이 너무 비슷했다. 임나일 본부설을 터뜨려 일본국민들에 한국 침략의 당위성을 내새웠던 것이나, 마시이의 죽음을 과대포장해 국민들을 선동하는 것이나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 때 당시에는 무지한 국민을 선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일본 정부의 거짓 노래에 국민들이 덩달아 춤을 추고 있는 판국이었다.
신문을 읽던 태림은 구겨 던져 버리고 일본 대사관으로 달려갔다. 우리 국민들의 반응이 궁금해서였다. 대사관이 가까워질수록 정체가 심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일본 대사관을 포위한 것인가? 태림은 흥분을 하며 차를 몰았다.
생각보다는 적은 숫자였지만, 군중이 대사관 앞에 모여있었다.
`한국 대사관 앞의 일본 시민들은 즉각 해산하라!'
`일본 언론은 사실을 왜곡하지 말라!'
라는 피켓을 든 사람들이 아직은 조용한 소요를 벌이고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다. 동경 내 한국 대사관을 포위한 시민들의 움직임을 뉴스 특보를 통해 접하고 있는 듯 했다. 시위대와 전경들 사이의 마찰은 없었다. 만일 마찰이 생긴다면 그보다 더한 굴욕은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일부 시민 외에 학생들이 깃발을 들고 하나 둘 무리를 지어 모여들었다. 그럴싸한 시위대의 모양이 형성되었을 즈음, 군중 안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일본놈들이 대사관 안으로 침투했다. 저 쪽바리놈들 쳐버리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 군중의 함성소리가 울렸고, 돌맹이와, 화염병이 대사관 안으로 날아들었다. 전경들은 학생시위 때의 진압과는 달리 몸으로만 밀어부치는 시늉을 했다. 순식간에 대사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학생들은 그동안의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시민들이 학생들의 화염병 투척에 고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한차례의 소요가 지났다. 군중 안의 사람들은 다시 이어폰에 귀를 기울였다. 일본의 소요는 그칠 줄을 몰랐다. 대사관을 점령한 시민들은 대사를 찾으러 여기저기 찾아다니고 있었다. 일본 대사관 앞에 모인 군중은 흥분을 삭이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일본 대사관을 부숴버려야 한다고 충동질했다. 학생들의 사수대가 앞으로 나서자 시민들은 환호했다. 불살라라! 불태워 버려라! 다시금 한차례의 소요가 시작되려고 할 때, 한 사람이 급한대로 만들어 놓은 단상에 올랐다. 군중의 눈의 그에게 몰렸다.
"여러분, 이 사람은 일개 고등학교 선생에 불과하오. 하지만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올라왔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 역시 저 대사관 건물이라도 무너뜨리고 싶은마음이 간절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개가 사람을 물어뜯는다고, 사람이 똑같이 개를 물어뜯어서야 되겠습니까? 저들도 우리의 모습을 보고 더이상 함부로 나오지는 않을겁니다. 조금 더 사태를 지켜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화염병을 들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가던 학생들이 주춤했다. 그들에게 환호를 보내던 군중들도 잠잠해졌다. 태림은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자신 역시 한방에 일본 대사관을, 아니 일본을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사람이 개를 물어뜯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한국대사관을 점령한 일본 시민들을 대사를 찾아 건물을 구석구석 뒤졌다. 그러나 어디에도 대사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대사관 안의 모든 집기들을 부쉈다. 머리에 하얀 바탕의 붉은 원이 새겨진 띠를 두른 젊은이들이 태극기 액자를 꺼내 바닥에 내리쳤다. 그리고 갈기갈기 찢었다. 마침내는 불속으로 집어 던졌다.
대사를 찾느라 여기저기 뒤지는 동안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지붕을 가리켰다. 옥상에 있다는 것이다. 대사를 찾던 사람들이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밖에서 잠겨져 있었다. 사람들이 문을 밀쳤다. 열리지 않았다. 안에서 고함을 질러댔다. 대사와 서과장은 식은 땀을 흘렸다. 저들이 문을 열고 나오면 어떻게 될 지 장담할 수 없었다. 밑에서 또 `우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구했는지 대형 사다리차를 가져오고 있었다. 사다리차가 대사관 건물 벽에 바싹 붙어섰다. 사다리가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사다리차 주위로 몰려들었다. 서로가 올라가려고 아우성이었다. 개미들의 행렬처럼 사람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저 쪽 하늘에서 헬리콥터가 날아오고 있었다. 대사는 다리의 힘이 빠짐을 느꼈다.
`이젠 사면초가의 상태이구나'
헬리콥터가 대사관 옥상으로 날아왔다. 대사는 눈을 감았다.
"대사님, 빨리요, 빨리 타세요"
반가움에 눈을 뜨고 헬리콥터를 바라보았다. 헬리콥터 안에서는 분명한 한국말로 어서 타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대사와 서과장은 서둘러 헬리콥터에 올라탔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이 하나둘 옥상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소리를 지르며 헬리콥터 쪽으로 달려갔다. 헬리콥터가 천천히 올랐다. 사람들의 소리가 헬리콥터 소리에 묻혀 팔매질밖에 보이지 않았다.
법무부 장관이 서둘러 청와대에 도착했다. 장관도 이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긴장한 모습이었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그래요, 우리 나라에서 최고의 변호사가 누구요?"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을 보자마자 대뜸 물었다. 장관이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했다. 대통령이 장관의 대답을 재촉했다.
"어떤 사건도 해결할 수 있는 변호사가 있을 것 아니요, 장관 주위에 그런 사람 없어요?"
장관이 한참 후에 말을 꺼냈다.
"제가 가르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세 사람이라면 어떤 재판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요? 이번 사건 당장 그 사람들보고 착수하라고 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지웅이란 자의 무죄를 입증하도록 해요"
"하지만, 각하. 이미 그 사건은 명백한 증거가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무죄를......"
"저 국민들이 보이지도 않소? 이미 몇 개월을 환란속에서 지내고 있는 저 국민들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오? 벌써 많은 꿈도 희망도 버려야 했던 우리 국민들이오. 그래, 이번 사건으로 절망감, 허탈감까지 안겨줄 셈이요?"
"하지만, 각하......"
"다른 말은 필요 없소. 당장 그들을 불러요"
대통령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때 비서실장이 전화기를 건넸다. 오부치 총리였다.
"각하, 접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오부치 총리가 화난 목소리로 김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짓이라니요. 총리님이야말로 그게 무슨 말버릇입니까?"
대통령은 여유있게 전화를 받았다.
"지금 한국사람들이 우리 대사관을 포위하고 있지 않소?"
"아, 그렇습니까?"
"아니, 몰라서 묻는겁니까?"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사람을 시켜 한 번 알아보지요"
대통령은 조금 전 총리가 했던 것처럼 모르는 척했다. 총리는 더더욱 화가 나는지 언성을 높였다.
"일본국민들이야 마시이의 죽음에 대한 분노로 그런 것이지만 한국국민들은 뭘 잘했다고 대사관을 포위한 것입니까? 한국인들이 그렇게 폭군기질이 있는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말씀이 과하십니다. 한국대사관이 일본 국민들에 의해 파괴당하고 있는데 우리 국민들이 그걸 보고 가만히 있으라는겁니까? 그게 한 땅, 한 핏줄로 맺어진 겨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직은 자세한 걸 모르니 경과를 알아 본 후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시이씨의 죽음도 아직 확실한 근거를 못 찾았으니 아직 속단하는 것은 이른 것 같습니다. 그것 역시 전말이 밝혀지면 연락을 드리지요. 아무튼 일본 대사관이 점령을 당했다니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곧 사람을 보내지요"
대통령은 수상이 그러했듯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숨을 크게 한 번 몰아쉬었다.
"실장, 내가 너무 심한 건 아닌가 모르겠소"
"아닙니다. 각하. 국민들이 이미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무조건 저들에게 양보하는 것은 더 큰 화를 부를 것입니다"
"그도, 그렇지..."
대통령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해방 후 53년간이나 잠잠했던 한일간의 앙숙감정이 다시금 고개를 디밀고 있는 것 같았다.
"참, 대사는 어떻게 됐소? 다른 연락이 있었소?"
"안기부 최국장에게 연락이 왔는데 옥상에 갇혔다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헬리콥터를 타고 피했다고 합니다."
"그래요? 다행이군. 그 헬리콥터의 소속이 어디인지 확인해봐요. 대사의 안전부터 알아보도록 하고, 그리고 이제 그만 해산들 하라고 해요. 내 특별부탁이라고"
대통령은 명령이란 말대신 부탁이란 말을 했다. 같은 한 국민의 입장에서 호소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이라고 어찌 일본의 그런 행동을 보고 분노를 느끼지 않을 것인가?
군중들은 대통령의 부탁이라는 말과, 일단은 대사가 피신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천천히 해산했다.
태림 역시 군중들 틈에 섞여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가슴이 후련했다. 비록 한국대사관은 더 많은 피해를 당했겠지만, 이제는 무조건 당하고만은 있을 한국국민이 더이상은 아니었다. 그들이 칼로 공격을 하면 칼로 받아주고, 총으로 공격을 하면 총으로 받아줄 것이다.
사무실로 들어오는 태림의 몸에서 땀냄새와, 화약냄새가 확 풍겼다. 들어오자마자 뭐라 한소리 던지려 하던 부장이 그런 태림의 모습을 보자 나오던 말을 꿀꺽 삼켰다.
"임마, 니가 무슨 애국지사냐? 기자면 기사로서 승부해야지. 뭘 잘났다고, 몸으로 때우려고 들어?"
한눈에 태림이 대사관 앞에 있었다는 걸 눈치챘는지 부장은 그렇게 한마디 내뱉고는 더이상 태림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헬리콥터는 교토의 작은 마을에서 내렸다. 노인의 별장이 있는 곳이었다. 대사와 총무부장이 조심스럽게 헬리콥터에서 내렸다. 한 건장한 사내가 따라 내렸다. 현영이었다.
현영이 대사와 총무부장을 부축하였다. 노인도 별장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현영이 노인에게 성큼 다가갔다.
"수고했어"
노인이 대사에게 공손히 말했다.
"고생 많으셨지요?"
대사는 뜻밖의 도움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현영이 타올을 씌워 대사를 별장으로 인도했다.
별장 안은 을씨년스러웠다. 노인의 말로는 2년만에 찾은 곳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먼지가 쌓여있거나 거미줄이 군데군데 붙어있진 않았다. 관리인이 한 달에 한 번씩 와서 청소를 해 놓는다고 했다. 별장 상태를 보니 관리인이 다녀간지 얼마 되진 않는 것 같았다. 냉장고에도 음식은 넉넉히 있었다.
대사는 별장 안에 쉽게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얼굴엔 아직도 놀란 티가 역력히 남아있다. 서과장의 다리도 조금은 떨리고 있다.
노인이 정중하게, 그리고 편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젠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부담갖지 마시고 당분간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이거,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대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조금은 진정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대사와 서과장이 어정쩡한 자세로 소파에 앉는 걸 확인하고 노인은 밖으로 나왔다. 현영이 천천히 따라나왔다.
"지웅인 어떻게 됐나?"
"예, 지금 수감중이라고 합니다"
현영이 대답이 공손했다. 그리고 현영의 목소리 또한 조금은 긴장되어 있었다.
"자네도 몸조심하게, 그리고 당분간 이곳에 있어야 될거야. 난 더 이상 자리를 비우기 어려워. 더 늦기 전에 처리할 일이 좀 남아 있어. 기다리고 있게, 일이 수습되는 대로 곧 올테니. 나를 알게 된 이상 자네도 무사하긴 힘들거야. 이건...... 전쟁이네."
게이트키퍼(Gate keeper)
박장관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수첩을 뒤졌다. 세사람의 이름이 한 페이지에 들어있는 곳에서 한참이나 시선이 멈췄다. 장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지, 이 녀석들이 다시 돌아올 리가 없지'
박장관이 수첩을 접어 테이블에 툭 던져놓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앞이 까마득했다.
다시 수첩을 펴서 전화번호를 눌렀다. 지방 법원 판사로 재직하고 있는 법대 동기생 최만호였다.
"날세"
"그래, 어쩐 일인가?"
"실은......"
박장관이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최판사가 잠시 기다리더니 먼저 말을 꺼냈다.
"태경이, 수연이, 기정이 녀석들 때문인가?"
"자네....."
박장관이 놀라며 물었다. 최판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늘 저녁 뉴스 기사에 나왔네. 만만치 않은 사건이더군. 각하께서 자네에게 말씀을 하셨구만? 나도 기사를 보니까 그 녀석들이 제일 먼저 떠오르더라구. 자네도 녀석들 때문에 전화한게 아닌가?"
"말 안해도 다 아는군. 나도 각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 녀석들이 쿵 하고 머리속에 떠오르는데, 얼마나 아찔하던지...... 녀석들이 다시 돌아올까?"
"내가 묻고 싶은 말일세, 그녀석들이 다시 돌아올까. 녀석들만 있으면 쉽게 해결될 수도 있으련만...."
태경과, 수연, 기정은 박장관이 대학 강단에 섰을 때 가르치던 제자들이었다. 셋은 언제나 과 수석을 다툴 정도의 라이벌인 동시에 언제나 붙어다니던 절친한 친구였다. 같은 해에, 모두가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고시에 패스했고, 박장관의 주선으로 젊은 나이에 변호사 사무실을 차릴 만큼 주목받고, 유망있던 법도들이었다.
세 사람은 다른 로펌의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들만의 법률사무소를 만들었다. 그 이름은 게이트 키퍼(GATE KEEPER). 문지기라는 뜻이며, 매스미디어에서 사용하는 단어로, 잘못된 것은 미리 막아준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이름이었다. 조금 더 소신있고, 자신있는 변호를 위해서였다.
세 사람은 처음 2년 동안 나름대로 높은 승소율을 기록했다. 그 중에 리더 격인 태경은 열에 아홉은 승소할 정도로 능력있는 변호사였다. 수연과, 기정도 7할 이상의 승소율을 가지고 있었다.
게이트 키퍼는 불과 2년만에 국내 로펌중 세 번째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승소율만은 전국 최고를 차지하고 있었다. 불과 세사람뿐으로 수십명으로 이루어진 로펌보다 높은 기량을 발휘한 것이다.
그런 게이트 키퍼가, 불과 2년만에 국내 세 번째 입지를 차지했던 케이트 키퍼가, 역시 2년만에 문을 닫게 만든 사건이 생겼다.
문민정부가 출범했던 93년 봄.
사회는 첫 문민정부의 출범이라는 기대로 한껏 들떠 있었다. 5, 6공의 군사정권에 피멍들었던 국민들은 이제 민주주의가 오나보다, 하며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살아가고 있었다.
게이트 키퍼 역시 새기분으로 사무실도 단장하며 더 높은 도약을 위한 나래짓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 정부가 공식 출범한 93. 2. 25일. 그날이 바로 게이트 키퍼의 마지막 날이었다.
몇 주 전. 한보에서 임의 퇴출당한 한 간부가 태경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 간부는 자신이 억울하게 퇴출당한 사연을 호소했다. 그리고 한보의 재정이 구멍나 있다는 자료를 태경에게 넘겼다.
태경은 기정, 수연과 회의를 했고 두 말 할것도 없이 그 사건을 파헤치기로 했다. 그리고 간부의 말대로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되었다. 이미 한보의 재정상태는 붕괴 일보직전이었던 것이다.
태경의 의도는 퇴출당한 간부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보다는 한보의 부도를 미리 막아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데 있었다. 그 당시에도 재계 6위라는 한보는 겉보기만 화려했을 뿐 자산비율이 형편없이 낮았었다. 게다가 회장 정태수씨는 외국에 호화 별장을 몇 채나 가지고 있었고 대량의 주식과 부동산도 소유하고 있었다. 물론 어느 재벌치고 그러한 재산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만, 정회장은 회사의 무너져가는 재정에 비해 억지스럽도록 사유재산이 많았다.
한달여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정보를 입수한 태경은 전날 오후 서울지법에 소송을 접수시켰다. 그리고 그 날 오전 역시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한보에 대한 자료를 뽑느라 몹시 분주한 상태였다. 게다가 여의도에 사무실을 차리고 있던 터라 대통령 이·취임식 행사 때문에 밖은 굉장히 떠들석했다.
오전 내내 진행된 행사가 끝나고 나서야 밖은 잠잠해졌다. 세 사람은 간단히 짜장면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전직 한보 간부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시계가 두시를 가리키는 차임벨을 가리키고 있을 때 정확하게 박장관 -그 때 당시에는 차관보였다- 이 들어왔다. 박장관의 얼굴은 가히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태경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자신의 방으로 박장관을 데리고 들어갔다.
비서가 차를 내오고 나서도 한참이나 있다가 박장관이 말을 꺼냈다.
"미안하네"
"무슨 말씀이세요, 교수님?"
태경은 그 때까지도 박장관을 교수라 불렀다. 수연과, 기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장관은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태경이 차분히 박장관의 대답을 기다렸다. 박장관이 차를 마셨다.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손을 떼야겠어"
"예?"
태경은 아직도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어제 소송을 접수시킨게 있더군"
박장관은 태경의 얼굴을 바로 보지 않고 말했다. 태경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전,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어른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네. 초장부터 어른께 찍힐 필요는 없잖아? 없던 걸로 해야겠어"
"교수님...."
태경이 간절하게 박장관을 불렀다. 박장관의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바로 오늘 취임한 대통령의 명령이 아닌가. 박장관도 자세한 내막은 몰랐다. 명령이라 따를 수밖에......
"전 교수님에게 그렇게 안 배웠습니다"
또 한 번, 박장관의 미어지는 가슴. 자신은 분명 그렇게 가르쳤다. 법도들은 정의앞에서는 언제나 당당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 결과가 잘못된 것일지라도 과정에서는 언제나 정의 앞에 떳떳해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자신이 지금 그것을 어기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태경아-"
박장관이 나지막이 태경의 이름을 불렀다. 태경은 아무 대꾸도 없었다.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태경아-. 그래야 니가 산다"
박장관의 목소리가 애절했다. 태경이 박장관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 때였다. 밖에서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렸다.
하얀색 헬멧을 쓴, 검은색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백골단이었다. 기정을 비롯해 사무실 직원들이 막아섰지만 별 수 없었다. 기정의 머리는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수연은 구석에 웅크려 벌벌 떨고 있었다. 백골단이 책상을 부쉈다. 컴퓨터를 집어 던졌다. 서류들을 찾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뭐하는 거야 이새끼들아!"
기정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보았다. 하지만 소란에 묻혀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몸을 던져 백골단 한 명을 쓰러뜨렸다. 그러자 대여섯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기정을 짓밟았다. 곤봉이 가슴을, 어깨를 마구 강타했다.
수연이 몰래 전화기를 들어 112로 전화를 걸었다. 쓸 데 없는 일. 전화는 곧바로 끊겼다. 그놈이 그놈인걸, 누구에게 신고를 한다는 것인가.
백골단 중의 하나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수연에게 다가왔다. 수연이 손에 보이는 것은 죄다 집어던졌다. 무용지물. 오히려 백골단의 화만 돋우어주는 꼴만 되었다. 백골단이 수연의 옷고름을 움켜쥐었다. 수연의 고개가 스르르 떨궈졌다. 기절해 버린 것이다.
태경은 꿈쩍도 않고 앉아 있었다. 박장관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태경아-"
어느새, 박장관의 목소리는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어느새 태경의 두 볼에 눈물으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뜨거웠다. 그러나, 흐느낌도 없었다. 어깨 한 번 들썩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뜨거운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게 법도인의 도리라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너무 굳게 믿어왔었습니다. 역시, 이 나라는 아닌 것도 진실이 될 수 있다는 걸...... 너무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저 역시 떠나겠습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말투였다. 그리고 웅장한 말투였다. 눈물은, 더욱 뜨겁게 자꾸만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여전히 몸은 미세한 떨림조차 동반하지 않았다.
백골단이 태경의 사무실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박장관이 일어나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들 하게"
백골단이 약간 주춤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 중의 우두머리인 자가 앞으로 나왔다.
"죄송합니다"
우두머리가 고갯짓을 하자 세명의 백골단이 태경을 향해 덮쳤다. 한 사람이 워커발로 태경을 걷어 찼다. 그러나 태경은 몸이 잠깐 기우뚱 했을 뿐 여전히 두 주먹을 꼭 쥐고 앉아 있다. 눈물은 더욱 거침없이 흐른다.
"이 새끼가"
우두머리가 곤봉으로 태경의 머리를 내리쳤다. 태경의 뜨거운 눈물에 붉은 피가 섞여 흘렀다. 이번엔, 몸이...... 거꾸러졌다. 눈을 감았다. 주먹도 풀렸다. 그러나, 눈물은 자꾸만 흘러내렸다.
그 후로 태경과 수연, 기정은 한국에서의 변호사 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태경은 캘리포니아의 바닷가에서 살았다. 낚시질도 하고, 소일거리로 배를 타기도 했다. 한국은 한 번도 들르지 않았다. 아직 결혼도 안했다. 아직도 책만은 옆에 끼고 살고 있었다.
수연은 미국의 로스쿨에 들어가서 상당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3년 코스 그대로를 우등생으로 이수했다. 그리고 플로리다주 사법시험에서 두 번째 우수한 성적으로 패스했고, 그 곳에서 개인적으로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기정도 수연과 마찬가지로 로스쿨에 입학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충격때문인지 법에 대해 더 이상의 미련도 없다며 떠나버렸다. 기정이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벌써 5년이 훨씬 지난 일이다. 박장관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언제 떠올려봐도 녀석들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아니, 미안이란 말로서는 자신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은 태경, 수연, 기정에게......죄인이었다.
냉장고에서 소주와 김치를 가져왔다. 자신에겐 두 가지가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뚜껑을 열고 잔을 따라 한 잔 마셨다. 쓰다. 그 맛이 좋다.
전화기를 다시 한 번 들어보았다. 미국 국가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들렸다. 누군가 받았다. 박장관은 곧바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가슴이 요동을 친다. 소주 한 잔을 더 따라 마셨다. 요동치는 가슴은 진정될 줄 몰랐다.
고개를 저었다. 못할 노릇이었다. 무슨 낯짝으로 그 녀석들을 부른단 말인가.
자꾸만 한숨이 나온다. 녀석들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후원자
다음 날 오전 지웅은 검은 양복을 입은 두 사람에게 이끌려 청와대로 들어갔다. 점호도 빼주고, 면도도 시켜주더라니...... 청와대까지 오고 일이 커지긴 커진 모양이다.
지웅의 몸에 조금씬 힘이 들어갔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차분하게 대처할 것이라 다짐했었지만, 막상 청와대로까지 불려가니 긴장이 안 될리 없다.
밑을 바라보았다. 두 손엔 두툼한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이젠, 그 모습에도 적응이 잘 된다. 정말, 죄를 짓긴 지은 건가......
차가 멈췄다. 두 사내가 거칠게 지웅의 팔을 끌었다. 지웅이 허수아비처럼 힘없이 끌려갔다. 윤기가 흐르는 적갈색 문 앞에 또 다른 두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오, 나지웅씨, 반갑소"
김대통령이 지웅을 반가이 맞았다. 지웅은 조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대통령이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말로만 듣던 대통령 집무실이었다. 역대 대통령 사진과 태극기가 벽에 걸려 있었고 그 외에는 특별한 치장이 없는 방이었다.
"그래, 구치소 생활은 할만하오?"
김대통령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예, 견딜만 합니다"
"그래도 어디 바깥 세상보다야 낳겠소"
김대통령은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비서실장을 물리고는 지웅에게 다가앉으며 물었다.
"그래, 왜 마시이라는 사람을 죽였소?"
"송구스럽습니다만, 제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기억이 안난다고 하더니 이젠 죽이지 않았다고 하네요?"
"술에 취해 쓰러진 다음이 기억이 안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설마 사람을 죽여놓고 기억이 안 날리가 있겠습니까?"
"그도, 그렇겠지"
김대통령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스쳐갔다.
"그래, 외환 딜러로 일한다고 하던데 이익은 많이 챙기셨소?"
"금전상으로 벌어들인 것은 우리가 겪고 있는 사태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김대통령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지웅이 조금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금전상으로 벌어들인 것은 말씀드릴 것이 못되나, 그동안 잃었던 자존심은 조금씩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오-"
김대통령의 입에서 짧은 감탄의 비명이 나왔다.
"듣기에 일본을 싫어하는 정도가 굉장히 심하다고 하던데, 그래서 마시이라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오?"
여전히 김대통령의 질문은 지웅의 예정된 답변을 기대하는 투였다.
"무턱대고 일본을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들에게 빼앗겼던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되찾고자 하는 생각이 간절할 뿐입니다"
김대통령의 입에서는 또한번의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지웅의 얼굴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아무리 자기표현이 당당한 그였지만, 국가의 원수 앞에서는 자연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 의자에 앉을 때부터의 변함없는 부동자세에 이젠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맺혔다.
"그래요, 그래. 그래야지. 젊은이들이 그래야지. 나지웅씨"
"예, 각하"
"만약, 당신이 살인범이 아니라고 맹세를 할 때 무엇을 걸겠냐면 어떻게 하시겠소?"
지웅은 그제서야 김대통령의 얼굴을 처음으로 똑바로 바라보았다. 온화한 미소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 생각이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각하를 걸겠습니다"
김대통령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웅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나를 걸고 맹세를 하겠다? 한 나라의 원수를 걸고 맹세를 할 만큼 무죄를 자신할 수 있다 이거요? 이거 참. 큰일이군. 지웅씨가 나를 걸고 맹세를 하겠다니, 나라도 지웅씨가 무죄라는 것을 믿어줘야 하겠군요"
"말씀이 지나쳐서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요. 정말 지웅씨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그런 게 아니겠소? 나는 믿겠소. 그리고 지웅씨의 후원자가 되 주겠소. 부디 무죄를 밝혀내길 바라오"
김대통령이 일어서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지웅이 수직으로 일어나 악수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각하"
"왜그러시오?"
"후원자가 되어 주시겠다니 감사합니다"
"당연한 거 아니겠소. 나를 걸고 맹세를 했는데 내가 안 믿으면 큰일나게요?"
"하지만, 각하. 각하는 이미 제 후원자 중 한 분이셨습니다. 언제나 제가 자신있게 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국민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고, 이번 사건으로 수감될 때에도 걱정이 안 되었던 것 또한 국민들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게 후원자가 있다면 제 마음속의 후원자는 바로 우리 국민입니다"
김대통령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 갓 서른이 된 젊은이에게 자신도 모르게 경외감을 느꼈다. 정녕 국민을 후원자로 삼고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은 대통령 자신이지 않은가?
지웅은 숨도 못 쉬고 집무실을 나왔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고 나왔는지 기억이 안났다. 그저 대통령의 온화한 미소에 끌려 솔직하게 얘기를 하고 나왔다는 것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여기 정윤희씨라고, 어, 안녕하세요?"
태림이 한국은행 딜링룸을 들어서다가 윤희를 알아보고는 반가운 체를 했다. 직원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몰렸다. 윤희는 지웅의 친구라고 직원들에게 얘기를 하고는 지하 커피숍으로 내려갔다.
"어쩐 일이세요?"
윤희는 지웅의 사건에 뭔가 진척이 있었는지를 기대하며 물었다.
"예, 지웅이가 부탁한게 있어서요."
"무슨 부탁인데요?"
이 여자, 지웅의 애인이긴 애인인가보다. 저렇게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걸 보면.
"오전에 엔화를 500만달러치를 사라고 하던데. 그리고 오후에 엔화가 오르면 팔라고 그랬어요. 너무 늦게 온 게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침부터 부장에게 걸려서 잔소리좀 듣느라고... 헤헤"
태림은 쑥스러운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윤희는 아직 태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전해주는 자신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데 듣는 사람은 어련하려구.
"지웅씨한텐 가보셨어요?"
갑자기 윤희가 지웅의 말을 꺼낸다.
"예. 녀석 아직도 술이 덜 깬 거 같더라구요. 윤희씨한테 엔화를 사라는니 어쩌느니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태림이 농담을 한 번 던져보았다.
"아녜요. 지웅씨 분명 뭔가 있으니까 그랬을거예요. 모르세요? 지웅씬 일본은행과의 딜링에서 한 번도 진 적 없어요"
윤희가 정색을 하며 반박했다. 민망함. 지웅에게 푹 빠져있다. 하긴, 태림 자신이 여자라도 지웅이라면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지웅이 없어서 많이 힘들어졌겠네요?"
태림이 담배를 물었다.
"예, 다들 힘들어하는 거 같아요. 그렇다고 새로 사람을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딜러라는 게 어제 입사해서 오늘 일할 수 있는 직업도 아니구. 최소한 3개월은 배워야 하거든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힘들테지. 지웅이 녀석 어딜 가든 중요한 사람이 된다. 없어선 안 될 사람, 행사가 있거나 사업이 있으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사람.
"다 잘 될거예요"
태림이 예의상 위로를 해 본다. 정말 예의상이다. 잘 될거라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바램일 뿐이다. 씁쓸하다. 바램이라는 거,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에 대한 소망이 아닌가. 바램. 그 말이 자연스럽게 기다림이란 말로 바뀔수 있으면...... 그 말 역시 바램이 될 뿐이다.
달리 할 말이 없다. 지웅의 말을 전했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일어서야 할지.
"저, 안 바쁘세요?"
윤희가 조심스레 묻는다. 태림이 풋 웃는다. 자신이 바쁜 걸 염려하는 표정이 아니다. 어서 빨리 지웅이 말한대로 엔화를 사고 싶어 하는 표정이다. 태림이 뻘줌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예, 좀 가볼 곳이 있어요"
태림이 서두르는 척 했다. 영 어색하다. 윤희가 그제서야 환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커피숍을 나선 뒤 태림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찾아갔다. 마시이의 부검 결과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한참이나 걸려 부검결과를 알아볼 수 있었다.
사망원인은 신문에서 보았던 그대로 칼로 배를 찔렸기 때문이다. 다른 외상은 전혀 없었다. 지웅과 마찬가지로 지나친 술을 마셨다. 칼에 묻은 지문은 지웅의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마시이의 것도 있었다.
두 사람의 지문이 동시에 묻어있다. 태림은 그 부분에서 의혹을 품었다. 마시이의 배를 찌른 지웅의 지문이 묻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마시이의 지문은 왜 묻어있는 것일까? 사건 당시 지웅의 손에 칼이 들려있던 것으로 미루어 마시이의 배를 찌르고는 곧바로 뺐을텐데 마시이의 지문이 묻어있었다.
태림은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찌르는 흉내를 내며 손의 모양을 이리저리 바꿔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너무 편협된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그러길 바라니까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당장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지웅에게 유리하게 생각을 하면 끝이 없다. 아전인수라더니.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혀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서두르다 보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
태림은 곧바로 지웅의 담당 변호사를 찾아갔다. 적어도 변호사라는 사람은 뭔가 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저도 역시 그 부분에 관해서는 상당한 의심이 갑니다. 그러나 취중이었기 때문에 배를 찌르고는 놓쳐버릴 수가 있을겁니다. 마시이가 칼을 잡으며 고통에 몸부림쳤고 지웅씨가 다시 그 칼을 뺐다는 가정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 지웅이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만. 그렇다면 그 지문이 더더욱 의심이 가는 부분이 아닐까요?"
"당사자가 스스로 살인을 자백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제게도 그렇게 얘기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입장이구요. 판사가 그 말을 곧이 듣겠습니까?"
변호사는 태림이 지웅에게 우스개소리로 했던 소리를 진지하게 얘기했다. 그 부분이라면 태림도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상태로서는 지웅씨의 당시 상황이 만취상태였다는 것밖에 형량을 줄일 방법이 없습니다. 마시이가 술을 먼저 먹자고 했다지만 그것도 정상참작에는 아무 관계가 없구요"
"그렇겠지요. 아무튼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아직은 확신할 수 없지만 이 사건은 단순히 지웅이 한 사람에 관계된 것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태림은 씁쓸한 기분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작은 기대라도 했었지만 역시 아직은 지웅의 무죄를 증명할 만한 단서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 단서를 찾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변호사라는 사람, 미덥지 못했다.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열과 성의는 보여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도 은행의 담당 고용 변호사라면, 책임감을 가지고 일해야 하는 게 아닐까?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 또한 조급한 마음에 부풀려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꾸만 한 쪽으로 치우쳐 사건을, 상황을 접하고 있다.
윤희는 지웅의 컴퓨터에서 지웅이 했던 그대로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윤희씨, 혹시 지웅씨 제자 된 거 아니야? 뜬금없이 엔화 500만달러는 뭐고 지금 그 자세는 또 뭐야?"
경헌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윤희에게 물었다. 윤희는 들은 체도 않고 모니터만 쳐다보았다.
지웅의 얘기라는 탓에 무턱대고 500만달러치의 엔화를 샀다. 하지만 실제로 오를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단지 지웅이 하라고 했기 때문에 했고, 그렇기에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컴퓨터까지 지웅의 것을 쓰고 있었다.
세열이 지나가다 그런 윤희를 못마땅한 듯 쏘아봤다. 지웅 덕택에 야마모도에게 당한 수모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목 뒤가 뻣뻣해졌다.
세시 즈음 되어서 지웅의 말대로 엔화가 오름세를 보였다. 윤희는 눈을 반짝이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엔화는 계속 오름세를 보였다. 이젠 누군가가 거래를 문의하기만 하면 됐다.
초조하게 시계와 모니터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윤희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지웅이 하던 그대로 거래를 의뢰한는 글씨가 모니터에 올랐다. 윤희는 조심스레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 쪽에서 사겠다고 했다. 역시 일본의 한 은행이었다. 윤희는 짜릿함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구치소 안에서 어떻게 엔화의 변동을 예측할 수 있었을까? 동시에 지웅에 대한 새로운 의구심이 생겼다.
태림에게 전화를 걸었다. 롱포지션을 낸 기쁨에서가 아닌 지웅의 말대로 된 신기함에서였다. 태림 역시 윤희의 말을 듣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무슨 방법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신비한 녀석이었다.
김대통령은 오후업무가 끝나자마자 수상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경의 한국대사관 파괴사건에 대한 수습문제를 추궁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저희더러 한국대사관을 재건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 일본시민들이 저지른 행동을 정부에서 묵인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입니까? 우리 국민들이 이유없이 한국대사관을 파괴했습니까? 한국에서 죽은 마시이에 대한 울분으로 그런 것 아닙니까? 배상은 오히려 한국에서 해야지 우리에게 대사관을 재건하라나요?"
"한 나라의 대사관을 점령해 건물을 파괴시키고 국기를 불사른 건 올바른 행동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마시이의 죽음도 아직 확실한 사유가 나타난 것이 아니잖습니까?"
"아니, 그럼 마시이가 어떻게 죽었든 한국에서는 책임이 없다는 소리입니까? 어떻게 한 나라의 원수로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대통령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곤 이내 조용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한 나라의 원수로서 얘기하겠습니다. 마시이씨의 죽음은 저희로서도 죄송한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그의 죽음을 한국인 모두의 잘못으로 돌리고 그에 대한 책임배상을 요구하신다면, 수상님. 그렇다면 일제치하아래 죽어간 수백만의 우리 동포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상하시겠습니까? 저희가 마시이씨의 죽음에 대한 보상해 드린것 만큼, 그 수백만배로 보상하시겠습니까? 수상님의 말씀대로 한 나라의 원수로서 생각해보십시오"
수상은 잠시 열적어 말문이 막혔다가 당황하며 이야기했다.
"그건 벌써 50년이 훨씬 지난 일입니다. 그에 대한 보상이라면 우리가 53년 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투하를 당한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가 잘못했다고 쳐도 공소시효란 게 있는 법입니다. 50년이나 지난 과거를 자꾸 들먹이신다면, 그럼 임진년의 피해까지도 보상하라고 하실겁니까?"
"지난 과거라고 말씀하시는데, 과거 없이 존재하는 국가가 있습니까? 역사 없이 존재하는 민족이 있습니까? 과거지사의 일이라고 그냥 넘어간다고 끝나는 일입니까? 그리고 역사엔 공소시효란 없는 법입니다. 게다가, 수상님. 저희는 이미 일본을 용서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수상님은 한 젊은이의 죽음으로 한국을 폭군으로 몰고 있지 않습니까? 외람된 말씀이지만, 아직도 수상님은 일제치하의 잔재인 한국민을 우습게 보는 습성을 가지고 계신 게 아닙니까?"
수상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참을 수 없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조금이나마 더 지원받으려 고개를 숙이던 모습이 아니었다. 무엇이 대통령을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좋습니다. 대사관은 재건해 드리지요. 하지만 마시이의 죽음에 대한 책임회피는 생각하지 않으시는 게 좋으실겁니다"
수상은 분을 삭이며 전화를 끊었다. 저 망해가는 나라의 대통령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건지, 아니면 무언가 회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지웅의 살인사건에 대한 기사는 매일 다루어졌다. 신문과, 방송 그리고 일반 국민들까지 그 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추측을 내비쳤다. 처음 표면상으로 드러난 지웅의 마시이 살인사건- 취중의 말다툼 중에 생긴 돌발사고라고 단정지었던- 에서 조금씩 벗어나, 일본의 언론에서 보도하는 기사-한국은행의 배후에서 비롯된, 한국인 전체의 잘못이기도 한 의도된 살인-에 대한 냉정한 관찰을 하게 되었다. 한국은행에서는 일본의 그러한 기사에 대해 전혀 그런 일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국민들 사이에서도 달다쓰다 말이 많아졌다.
지웅의 기사는 국민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다음날 터진 대사관 폭동사건으로 인해 한 사람의 범죄의 차원에서, 나아가 한일관계의 양상을 띠게 되었으므로 자연히 눈과 귀가 쏠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웅의 관한 국민들의 관심이 폭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당장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하는 판국에 그곳에 정신을 쏟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아무리 직장을 구하려 다녀도 하루품도 못 파는 실직자들이 모일 때마다 지웅의 얘기를 했다. 그들에게는 지웅의 사건이 의욕 없는 생활에 유일한 관심거리가 되었다.
어쨌든 언론은, 신문은 매 판마다 한 번 이상씩, 방송은 뉴스마다 한 컷씩 지웅의 사건을 다뤘고, 이제 대한민국 국민들은 수동적이나마 지웅의 사건 처리결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날, 태림은 신문의 칼럼면에 `딜러 살인사건의 의혹'이라는 글을 넣었다.
`3일 전, 우리는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접했다. 한국은행 딜러 나지웅이, 일본 중앙은행의 딜러 마시이를 살해한 사건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건을 그저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살인사건으로만 치부하기엔 왠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먼저, 이 사건에 대한 한,일 두 나라의 언론이 상반적이다. 한국의 기사는 젊은이간의 술자리에서 일어난 말다툼끝에 벌어진 돌발적인 사고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다음날 일본의 언론은,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닌 한국은행이라는 배후가 저지른 예정된 살인이라고 보도했다. 한국은행이 일본의 유망 딜러 마시이에게 추후에 당할 불익을 두려워하여 살인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한국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원인을 일본에서 더욱 상세히 알고 있는지에 먼저 의혹을 가져 본다.
그 두사람의 딜링 실적은 어떠했을까? 일본이 유망한 딜러라고 치켜새운 마시이는 올해 광복절에 한국은행에 23억가량의 손실을 봤다고 했다. 그리고 그 한국은행의 딜러가 바로 나지웅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지웅은 그동안의 딜링 실적에서 한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는 베스트 딜러였다. 그런 딜러를 보유한 한국은행이 한번에 23억이라는 적지 않은 손해를 본 마시이를 두려워해서 죽이려고 들었을까?
또, 한가지, 나지웅이 살인도구로 사용한 칼에 마시이의 지문이 묻어있었다. 상식적으로 사람이 칼로 상대의 배를 찌르면, 바로 뽑아낸다. 그런데 마시이의 지문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면, 지웅이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배를 찌르고 손에서 놓쳤을 수도 있다는 거였다. 그러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식결과에 따르면 칼의 손잡이에 묻은 지웅의 지문은 마시이의 지문을 덮고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 부분에서도 전문가들은 배를 찔린 마시이가 고통에 몸부림 쳤을 것이고, 그 칼을 나지웅이 나중에 뽑았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마시이의 지문을 덮힌 지웅의 지문이 발견된 것은 발견이 됐는데, 왜 지웅의 지문을 덮은 마시이의 지문은 발견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칼을 먼저 쥐고 있었던 사람은 마시이가 아닐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는 아직 결과를 단정할 수 없다고 했으나, 여전히 의혹이 가는 부분이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기업과, 은행 그리고 주식에 투자했던 일본의 자본이 빠져나갈거라는 소문이 있다. 그리고 벌써, 몇 명의 일본 주주들이 입국을 했다. 일본은 벌써 97년 11월 70억 달러의 자금을 회수해 간 적이 있다.
혹시라는 가정을 붙인다는 게 위험한 것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혹시, 마시이의 죽음이 일본의 언론이 떠드는 것처럼 예정된 살인이 아니었을까? 그 과정이야 어쨌든간에 심각한 결과를 몰고 올, 그러한 예정된 살인이 아니었을까?
일본에서는 마시이의 죽음에 대한 배상을 요구할 것이라고 했다. 사건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표면상으로 나타난 현상만으로 이 사건을 판단하는 것은 분명히 위험한 것이다.'
태림은 전날 오후 급하게 지웅을 찾아 그의 생각을 물었고, 그 대답을 듣고는 칼럼을 썼던 것이다. 자신은 기자다. 하지만 지웅의 사건 의혹은 자신만이 알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언론의 사실성을 외면하고, 추측을 내용으로 한 글을 쓴 것이다.
국민들은 태림으로 인해 또 한번 지웅의 사건을 접해야 했다. 그리고, 그 중의 많은 사람들이 그런 태림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갈 증
현영은 교토에 있는 노인의 별장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다. 대사와 서과장 역시 별장 안에 갇혀 있었다. 노인은 벌써 3일째 연락이 없다.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현영이 따뜻한 녹차를 내밀었다. 대사의 얼굴이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불과 3일 사이에 3년은 더 늙어보였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현영 자신도 초췌하긴 매한가지였다.
"견딜만 하네. 그나저나 각하께 연락을 해야 하는데, 이런 곳에서 며칠씩 갇혀 있으니 갑갑하구만"
듣기만 해도 갑갑해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목소리였다. 서과장은 아예 옷을 거의 벗다시피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
대사가 기운없이 물었다. 그건, 현영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대사와 서과장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현영 자신이 먼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요?
별장은 외진 곳에 떨어져 있었다. 주위엔 인가도 하나 없었다. 찾아오는 사람도,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그곳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세명 중 아무도 없었다. 현영도 헬리콥터를 타고 그 곳으로 날아가긴 했지만 정황이 없어 기억도 나질 않는다. 게다가 자기 나라도 아닌 일본에서 아무리 내려다 본들, 어디가 어딘지 알리야 있겠는가. 게다가 나갈래야 나갈 운송수단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작정 노인을 기다리는 일 뿐.
대사 못지 않게 현영도 상당히 지쳐 있었다. 지웅인 어떻게 됐을까...... 지웅에 대한 걱정 때문에 더욱 초조했다. 하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현영이 베란다로 나왔다. 이럴 땐 담배가 최고의 위안이었다. 불을 붙이고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서과장이 현영의 옆으로 다가왔다.
"담배 하나만 줄래요?"
현영이 담배를 내밀었다.
"어? 디스네?"
서과장의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이 돌았다. 담배 한 개비에...... 사람도 참. 현영이 싱겁다는 듯 웃었다. 서과장이 맛있다는 듯, 온갖 표정을 지으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정말 좋긴 좋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환각제를 투입하는 사람들이 저런 표정을 지을 것이다. 적어도 현영의 눈엔 서과장의 모습이 그렇게 보였다.
"참, 꼴이 우습네요"
서과장이 담배를 손으로 털어 끄며 말했다. 어느새 웃음기가 가신 얼굴이다.
"뭐가요?"
현영이 장난스럽지도, 진지하지도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우습잖아요. 그래도 한 나라를 대표해서 와 있는 사람이 이렇게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하고 있으니 말예요. 슬퍼해야 하는 건가?"
서과장의 모습이 조금은 우울해보이기도 했다.
"내가 이런 꼴 보이려고 대사관에 지원한 게 아닌데......"
이젠 제법 목소리까지 침울하다. 현영이 머뭇거리다 위로랍시고 한마디 던졌다.
"조금만 기다려요. 영감님이 오시면 뭔가 길이 생길거예요"
"담배 하나 더 줄래요?"
현영이 하나 남은 돛대를 내밀었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 넉넉하게 가져온다고 가져온 담배가 이젠 두 갑밖에는 남지 않았다. 현영은 그마저 다 떨어지면 노인을 기다리기 더 힘들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하는 분이예요?"
"저요? 방송국에 다녀요. 이제 AD딱지 뗄려고......"
"아니, 그 분 말예요. 현영씨나 저나 대사님이 기다리고 있는 분"
말문이 막힌다. 뭐하는 분이냐고? 사실 아직까지 뭐하는 사람인지조차 모른다. 현영 자신이야 뭐하는 사람이건 믿어도 된다는 신념이 있다. 하지만 그걸 서과장에게까지 납득시킬 자신은 없었다.
"정말 감금일지도 모르지"
서과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들어갔다. 현영이 뭐라고 얘기하려다 그만두었다. 자신이라도 그 상황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같았다.
넓은 들판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대로 달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기다릴 수 있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현영은 아직도 노인을 믿는다.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러보았다. 아무런 대답도 없는 하늘. 막막하다. 자꾸만, 무거운 갈증이 현영의 마음을 뒤덮고 있었다.
윤희는 자리에 앉아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컴퓨터는 켜져 있지만 아직 암호도 입력하지 않은 상태였다. 손에는 하얀 봉투가 조심스레 들려 있다. 봉투 위엔 깔끔하게 `사직서'라는 세 글자가 씌여 있다. 세열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윤희의 행동을 눈치 못 챈 듯, 자신의 일에만 열중이었다.
그러나, 그정도로 무딘 세열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윤희의 행동이 신경에 거슬리고 있다. 컴퓨터만 켰지 윤희는 지금 자판은 만지지도 않는다. 세열 자신도 윤희에게 신경이 쓰여 엉뚱한 자판만 두드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경헌 역시 모르고 있는 바가 아니다. 벌써 담배만 몇 개피를 피우고 있는지 모른다. 가슴이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무슨 말을 꺼내려고 하는건지......
따르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그 작은 전화벨 소리에도 경헌은 움찔 놀랐다. 엉뚱한 상상하고 있는 건 아닌가? 경헌이 자세를 바로잡고 자판 정위치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하지만 두두리진 못하겠다. 윤희의 분위기가 너무 불안하다. 게다가 손에는 아까부터 하얀 봉투가 들려 있지 않은가. 지웅이 없다. 게다가 윤희마저 지웅을 따라간다면...... 둘 가지고선 어렵다. 그래선, 딜링룸 운영이 안된다.
하지만, 윤희도 불쌍하다. 지웅에 대한 윤희의 마음은 누구보다 경헌이 곁에서 지켜봐 왔지 않은가.
억지로라도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각국의 환율이 모니터에 오른다. 하지만 경헌의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윤희씨까지 그러면 어쩌자는 거야?"
세열의 짜증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세열의 책상 앞에는 사직서가 놓여 있었다. 몹쓸 사람...... 경헌에겐 우선 딜링룸 걱정이 먼저 들었다. 또, 한숨이다.
"죄송합니다"
윤희의 얼굴은 아무 표정도 없었다. 세열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들어오지 않을 듯했다.
"경헌씨도 가만히 그렇게 있지만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봐요"
가만히 있는 경헌에게 화풀이다. 경헌이 윤희를 올려다 보고는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자꾸 한숨만 나왔다.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애꿎은 담배만 자꾸 타들어갔다. 세열 역시 뻑뻑 소리를 내며 담배만 피워댔다.
"난 못 받은 걸로 알고 있을테니까, 조금 더 생각해봐요"
세열이 거칠게 서류를 정리하고 나가버렸다. 윤희는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경헌이 보다못해 말을 꺼냈다.
"그래, 윤희씨. 다시 한 번 생각해봐. 여기 생각도 해 줘야지. 벌써 한 사무실에서 3년이나 같이 근무했는데, 이러면 어떻게 해? 내 생각엔 지웅씨도 윤희씨 이런 모습 결코 좋아할 것 같지도 않고......"
여전히 아무 대답도 않았다. 윤희의 시선은 멍하니 사직서에 가 꽂혀있었다. 경헌이 다시 차분하게 타일렀다.
"나도 윤희씨 심정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건 너무 성급해. 윤희씨 스스로를 위해서도 조금 더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윤희씨가 지웅씨 좋아하는......"
경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윤희의 어깨가 들썩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흐느낌도 동반되고 있었다. 경헌으로선 한 번도 볼 수 없던 윤희의 모습이었다.
태림은 지웅을 면회하고 있었다. 지웅의 모습이 점점 야위어갔다. 그런 지웅을 바라보는 태림은 마냥 안타까웠다.
"벌써, 날짜가 잡혀?"
지웅의 재판일자가 잡혔다. 불과 5일밖에 남지 않았다. 지웅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희씨는 자주 오니?"
태림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윤희 얘기를 꺼냈다. 역시 힘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자식, 왜 이렇게 약한 모습이야? 너 그것밖에 안돼?"
보다못한 태림이 짜증을 냈다. 지웅이 한참이나 있다가 입을 열었다.
"현영인 연락 있었니?"
"지금 현영이가 문제야?"
태림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현영에게 연락이 한 번도 안 왔다. 그래도, 설마 무슨 일이 있으려구. 고개를 들어 지웅을 쳐다보았다. 당장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와도 친구를 살릴 놈. 이게 바로 너라는 녀석이지... 태림 자신이 일본에 가 있어도 지웅은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안부를 물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지웅에게 빨려들었고, 힘들어하는 지웅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입장에 더욱 화가 날 뿐이다.
게다가 재판준비도 영 형편없는 모양이었다. 은행에서 대준 고용변호사는 태림의 바라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일찍 재판날자가 잡힌 것 또한 그리 좋은 예감을 갖게 만들진 않았다.
"우리집에 가면 내 책상 서랍에 전화번호가 있을거야. 거기서 아저씨라는 이름을 찾아 전화좀 걸어줄래? 난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너도 너무 자주 오지는 마. 부담돼"
인정머리 없는 녀석. 태림은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라도 찾아오지 않으면 태림 자신이 부담된다. 친구. 그런 사이가 어디 가위바위보 해서 따먹은 건가? 10년지기다. 지웅이 현영을 걱정하듯, 자신을 걱정하듯, 태림 역시 지웅을, 현영을 걱정하고 있다. 태림 자신이 수감되어 있다면 녀석은 아예 구치소 근처에 여관이라도 잡아 뒷바라지를 했을 것이다. 그런 녀석이 부담스럽다고 오지 말라니.
옆에서 서기관이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었다. 갑자기 대화가 끊기자 서기관이 두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태림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기운 차려라. 너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 니 주위사람들 뿐만이 아니야. 전국의 국민들이 널 지켜보고 있단 말이야. 넌 이대로 꺽일 놈이 아니야. 그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아. 넌, 강해"
지웅은 강하다. 적어도 태림이 알고 있기론 그랬다. 녀석보다 강한 녀석은 아직 보지 못했다. 현영이도 지웅만은 인정하지 않는가. 그런 지웅이 위험에 닥쳐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밖에. 달리 태림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태림이 돌아가고 난 후 지웅은 감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머리속에 복잡했다. 윤희가 태림이 거의 격일제로 다녀가지만 자꾸만 기운이 빠진다. 대통령에게 직접 불려가기까지 했고,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다른 희망이 보이진 않았다. 지웅 당사자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하는 사실을 누가 밝혀낸단 말인가?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 그나마 청와대로 다녀온 후에는 독방으로 옮겨왔다. 그렇다고 중죄인들이 수감되는 독방은 아니었다. 방도 넓었고, 침대에 화장실까지 있었다. 지금 누워 있는 곳도 침대 위다. 식사도 사회에서 먹는 것과 비슷했다.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초호화판 감옥생활을 했다고 하더니만, 이런 감옥도 있구나 하고 지웅은 생각했다.
이럴 땐, 가족이 없는 것도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가족이 없다는 게 씁쓸한 적도 있었지만, 이미 적응된지 오래다.
태림에게 말한대로 자꾸 면회를 와주는게 부담스럽다. 지웅이 알고 있기는 태림 역시 무시못할 정도로 바쁘다. 취재하러 나간다는 핑계로 자신에게 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윤희 역시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어제는 은행을 그만두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자신이 빠진 상태에서 윤희까지 나온다면 딜링룸 역시 뇌사상태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자신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을 윤희가 아니었다. 언제나 고맙지만, 언제나 불안하기도 한 윤희였다.
용기...... 지웅은 나지막히 되뇌어본다. 여기서 용기를 가지면 무얼 할 수 있는지. 누가 자신의 누명을 밝혀 줄 수 있는지. 가능성은 희박했다.
닷새 후면 재판을 받는다. TV로만 보아왔던 재판을 지웅 자신이 받는 것이다. 법정에 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결코 좋은 인상이 아니다. 결국... 짧은 형기를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주먹을 불끈 쥐어본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서 끝나고 마는 것인가?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보았다. 오늘도 다른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불면의 밤이 될 것 같았다.
탈 출
금이타조(金以打朝)의 회원들이 모였다. 그들 사업의 진도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스무명 남짓한 사람이 향빈관 별채, 가장 큰 방에 둘러앉았다. 10여년 전부터 일본의 정치와 경제를 이끌어온 사람들.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일본의 정치, 경제를 대표할 만한 사람들.
회의의 진행은 여전히 와타나베의 몫이었다.
"마시이의 죽음 이후 국민들은 배한감정을 가지기 시작했소. 일부 나이든 사람들은 그 옛날 한국을 통치했던 날을 회상하며 그들에게 이런 수모를 받은 것을 분개해 하고 있소. 다시금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오. 국민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 남은 건 우리가 속히 일을 추진하는 것이오. 각자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말씀해 보시오"
"한국에서의 수입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뿐만 아니라 농,수, 축산물은 물론이고 의류와 제화, 컴퓨터 부속 등 일부 한국물건의 수입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리고 그전까지 수입했던 제품들은 창고에서 출고시키지 않고 보관하고 있습니다. 일부 업자들이 반발을 하고 나섰으나 국민들 자체에서 한국 제품을 거부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어,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외무상이 먼저 말을 꺼냈다. 곧이어 일본의 큰손 나까이가 말을 받았다.
"한국에 뿌린 자금에 대해 2차 회수할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을 보내 일을 추진하도록 해놓았습니다. 증권과 은행, 대기업들은 회생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며칠 후 한국 증시는 300포인트가 무너짐은 말할 것도 없고 200포인트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지금 은행의 구조조정으로 인수합병을 하고 있지만, 인수를 하는 은행 자체도 무너질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대기업들에게 투자한 자본을 회수하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자멸할 것입니다. 자산보유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직원을 감소시키다 보면, 지금상태로도 최악인 실업자 상황이 극대화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경제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혼란이 올 것입니다. 그 후에는 한국 스스로 치고 받으며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지난 번 말씀드렸던 캐릭터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나이스 코코'라는 이름을 붙인 이번 캐릭터는 남녀를 불문하고, 한국의 어린 학생들에게 깊숙히 침투할 것입니다. `헬로 키티'가 중, 고등학생, 그리고 대학생까지 잠식한다면, `나이스 코코'는 초등학생들을 유혹할 것입니다. `산료 코리아'에 더 많은 제품을 보냈습니다. 그동안 비싸다는 소리가 잦아 어제부로 가격을 내렸습니다. 그 대신 20% 이상의 판매 신장을 보일 것으로 기대합니다."
산료의 노무라 사장이었다. 와타나베가 흡족하면서도 결의에 찬 미소를 지으며 야마모도에게 물었다.
"야마모도씨. 나지웅의 사건은 어떻게 진전이 되고 있소?"
"예, 최대한으로 법원에 힘을 써보고 있습니다. 예상 외로 사건이 크게 불거져 한국인들의 눈과 귀가 쏠려있기 때문에 함부로 처리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 쪽에서 칼에 묻은 지문으로 의혹을 품은 듯 하지만, 어쨌든 의혹 뿐입니다. 마시이의 죽음이 탄로날 일은 없습니다. 한국의 재판 관례로 보아 최소 10년형은 받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지웅의 인생도 끝이 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지웅이란 자를 파멸시키는 것이 목표가 아니오. 한국을 넘어뜨려야 하는 것이오. 나지웅을 파멸시키는 건 그과정에 불과한 것이오. 그건 그렇고, 그가 수감 된 후 한국과의 거래에서의 손익은 어떻소?"
야마모도가 송구스럽다는 듯 천천히 입을 뗐다.
"실은, 어제도 적지 않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이번에도 중앙은행에서 1억엔 남짓 손해를 보았습니다. 치프딜러를 만나봤더니 어쩔 수 없이 당했다는 것입니다. 은행에서 오후에 급한 현물거래를 할 게 있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은행에 엔화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수습한 것이 1억엔의 손해를 보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도 한국은행이요?"
와타나베의 인상이 갑자리 일그러졌다.
"그렇습니다"
"나지웅이는 구속되었지 않소? 그런데도 손해를 보았단 말이오? 한국은행의 딜링룸의 실체는 나지웅이 아니었단 말이오?"
"그게, 아직은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그래요, 필히 알아보시오. 어떻게 딜링에서만은 자꾸 한국에게 손해를 본단 말이오. 이건 금전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않소. 그들이 그렇게 자랑하던 머리싸움에서 진다면 얼마나 기고만장해지겠소? 그들의 정신까지 이겨야 하오. 그들이 결코 머리가 좋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단 말이오. 다른 쪽에선 항상 앞서가는 데. 야마모도씨. 일본을 대표하는 딜러로서 더욱 정진하시오"
야마모도의 고개가 숙여졌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의 창피가 아니라 와타나베의 말처럼 한국에게 손해를 보는 딜링의 수모때문이었다. 다른 어느나라에도 손해를 보지 않는 딜링이 꼭 한국에게는 가끔씩 큰 낭패를 보고 있었다. 나지웅이라는 자만 없어지면 해결 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자신있는 모습을 보인 것은 컴퓨터 프로그래머 히데야시였다.
"조만간 한국은행의 전산망은 완전 마비가 될 것입니다. 어제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들었습니다. 바이러스명은 역시 금이타조(金以打朝)입니다. 이 바이러스를 처리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은행이 망해버린 다음에야 풀게 될지도 모릅니다. 한국은행의 붕괴는 다른 은행의 연쇄붕괴를 야기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각 방송과 언론사에 바이러스를 침투시켜 한국인들의 눈과 귀를 막아, 어둠속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와타나베가 통쾌하다는 듯 히데야시를 칭찬했다. 그들이 추진하고 있는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소니의 사장은 제품을 모두 회수했다가 이틀만에 가격을 30% 인상해 판매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더욱 많이 판매되었다. 일제가 아니면 안된다는 사고를 가진 한국의 젊은이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림은 지웅의 오피스텔 경비원과의 친분으로 간단히 열쇠를 받아낼 수 있었다. 지웅의 오피스텔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아직도 거실에는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태림의 코를 찌르는 고약한 냄새도 났다. 마시이가 죽었던 자리는 하얀 라커로 선이 그어져 있었다.
지웅의 책상은 이미 누가 뒤진 듯 마구 어지럽혀 있었다. 지웅이 말했던 수첩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태림의 호흡이 가빠왔다. 수첩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책상 뿐만 아니라 집안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역시, 아무데도 없다.
당장 뛰어내려가서 지웅의 사건이 있은 후 찾아 온 사람이 있는지 경비원에게 물었다. 따로 찾아온 사람은 없다고 했다. 모르는 사람이 이 건물에 들어가진 않았냐고 물었다.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지웅의 방으로 다시 올라왔다. 태림 자신도 막상 지웅의 살인사건 현장을 접하긴 처음이었다. 가만히 소파에 앉아보았다.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이 유난히 반가워 보였다. 지웅과 현영, 그리고 태림 자신이 함께 들어있는 사진. 오직 그 사진만이 지웅의 오피스텔에 걸려있었다. 세 사람 모두 학사모를 뒤집어 쓰고 웃고 있다.
그 땐 세상 무서운 것이 없는 줄 알았는데...... 실없이 웃어본다. 지금은, 자신 혼자 뿐이다. 현영에게 연락이 두절된지 벌써 열흘이 다 되어간다. 이 녀석도 걱정이다.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고 다시 한 번 방 안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없다. 몸에선 땀이 흐른다. 목욕탕으로 들어가 냉수를 틀어 세수를 했다. 거울 속의 자신이 보인다. 작아 보인다. 태림 자신이 그렇게 작아 보일 수가 없었다.
정확히 일주일만에 노인의 별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현영은 노인의 차 조수석에 앉아 있다. 그러진 않고 싶지만 자꾸만 거친 숨을 내쉬었다. 마치 물에 빠져 거의 익사할 뻔하다가 구출 되어 나온 사람처럼, 현영은 부레 끝까지 숨을 들이키고 있었다.
조금만 더 늦게 왔어도 폭발할지 몰랐다. 현영이 답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복귀할 날짜가 오늘이었다. 일주일이란 시간. 그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아무런 연락도 없이 별장에서 갇혀 있어야만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서과장이 가끔씩 툭툭 던지는 한마디의 불평, 그리고 회의에 가득찬 말투는 가뜩이나 예민해진 현영의 신경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게다가 대사의 앓는 듯한 소리는......
현영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걱정 많이 하셨죠"
노인이 룸미러를 통해 대사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어딘데......"
역시...... 대사의 억양도 충분히 거칠다. 그리고 불규칙하다. 현영 못지 않게 대사의 인내력도 거의 바닥에 달해 있었다.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어딘데......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 감금을 당해있었어야 한다는 것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한 말투.
서과장은 아직도 식식대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금새라도 터질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노인은 더 이상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미안하지도 않을까? 도대체 지금껏 뭘 하고 이제야 나타난 것일까? 현영이 힐끗힐끗 노인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정말 화가 많이 나 있다, 지금. 하지만, 노인도 편하게 지내다 온 모양은 아니다. 현영만큼, 대사와 서과장만큼, 노인의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노인의 자동차는 교토 공항 주차장에서 멈췄다.
"우선 한국으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게. 난 이틀 뒤쯤 해서 출발할거야. 아직 정리안 된 게 남아있어서"
노인이 한국행 비행기표 석 장을 내밀었다.
"쳇, 너무 하는구만. 한국에 돌아가려고 일주일이나 갇혀 지내야 했단 말야?"
서과장이 참다 못해 노인을 향해 고함을 내지르곤 차에서 내렸다. 대사 역시 묵묵한 얼굴로 따라내렸다.
"저 사람들 저러는 거......"
현영은 대사와 서과장을 변호하려 들었다. 목소리가 다분히 절제되고 있는 톤이었다. 자신도 지금 당장에는 노인에게 화를 내고 싶었다.
"괜찮네. 그나저나 자네가 수고 많았어. 내가 신세 한 번 크게 졌어. 한국에 돌아가는 대로 지웅일 찾아가게. 그리고 내가 돌아간다고 해. 우리 사업은 이제 여기서 끝이라고, 그렇게 전하게"
노인은 현영마저 차에서 내려놓고는 유유히 가버렸다. 끝까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이젠 다시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난 열흘, 무슨 일이 있던건지. 현영은 지금 아무 생각이 없다.
그래, 지금은 지웅이가 급했다. 얼른 한국으로 날아가 지웅을 찾아봐야 하는게 급선무였다. 서과장과 대사는 저 쪽에서 아직도 분을 삭이고 있다. 현영의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전말이 어떻건간에 지금은 전쟁중일지도 모른다. 노인의 말처럼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영은 뛰었다. 비행기 시간은 아직 한시간이나 남아 있었지만 현영은 급했다. 어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미인계
종로의 한 커피숍에 두 남자가 주위를 의식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곰곰이 손익계산을 하고 있는 사람은 지웅의 사건을 맡은 방검사, 그 앞에서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사람은 와타나베의 지시를 받은 일본의 끄나풀, 겐죠였다.
"헤헤, 선생님께서 잘만 해주시면 평생동안 버실 돈 한 번에 만질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겐죠는 열심히 손바닥을 비벼대며 방검사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방검사는 겐죠의 제안에 호감이 가면서도 웬지 상식 이상의 대가에 조금은 망설이고 있는 표정이었다.
"왜 그런 제안을 하신느지 저로서는 납득하기가 좀......"
"별 뜻은 없습니다. 지금 나지웅 사건은 까딱하다간 편협된 판결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죠. 방검사님처럼 법 앞에서 평등하신 분이라면 같은 동족은 생각하기 이전에 인간의 윤리부터 생각하실 거라고 믿어서 그렇습니다. 나지웅 사건은 최하 무기징역 아니 사형을 당해야 마땅합니다. 제 말씀대로만 결과가 나오면 방검사님 섭섭하지 않을 만큼 대가를 드리겠습니다"
"저야, 물론 제 소신을 가지고 일하고 있습니다만......"
방검사는 아직 겐죠가 일본사람인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거액의 대가라는 유혹에 방검사의 마음은 벌써 동요가 일고 있었다.
"실례지만 방검사님은 나지웅의 판결이 어떻게 나올거라고 예상하시는지"
겐죠의 웃음이 점점 음흉해진다. 방검사는 겐죠의 아첨에 이미 검사로서의 냉정함을 벗어버린 상태였다.
"저도 최하 무기징역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사형을 언도하겠죠. 살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이니까요. 에덴동산에서도 가장 먼저 일어난 죄악이 살인이었어요.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건 신과 인간 사이의 일이지만, 카인이 아벨을 죽인 건 인간대 인간 사이의 첫 번째 죄악이 되는거죠"
방검사는 겐죠의 아첨에 이젠 춤까지 추는 꼴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아직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겐죠가 조심스레 봉투를 테이블 위로 올려 놓았다. 방검사는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부렸다. 겐죠가 손으로 봉투를 밀어 방검사의 앞으로 옮겨 놓았다.
"잘 부탁 드립니다. 아무튼 일만 잘 되면...... 흐흐흐"
방검사가 은근슬쩍 봉투를 집어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봉투 안의 금액을 대충은 살펴보았다. 제법 많았다.
"흠, 흠"
방검사는 걱정 말라는 듯 헛기침을 했다.
"검사님 제가 저녁 좀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겐죠가 이번에는 제법 진실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방검사가 시계를 한 번 스쳐보았다.
"저녁이야 제가 사죠, 뭐"
방검사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아주 만족한, 조금은 비열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대통령은 일본의 최국장으로부터 왔다는 정보를 비서실장에게 듣고는 아연실색했다.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마는 것인가? 최국장이 일본의 주요 인물들이 극비하에 잦은 모임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온 것이다.
"그래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자세히는 모르고 있다는 거요?"
대통령이 불안한 기색으로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각하. 요즈음 들어서 일주일에 두 번 꼴로 모이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인물들이 워낙 중요한 사람들이라 친목도모라고 보기엔 의혹이 갑니다. 게다가 마시이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고는 이틀에 한 번 꼴로 모이고 있다고 합니다"
"누가 포함되어 있소?"
"우선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와타나베 전 총리입니다. 스무명의 사람들 리더 또한 와타나베로 보입니다. 그 외에는 대부분이 일본의 경제를 주름잡는 인물들입니다. 소니, 도요타, 혼다, 파나소닉, 산료 등 일본의 대기업 사장단이 모이는가 하면 학계와 종교계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음-"
대통령이 쓰디쓴 신음을 내뱉었다. 계획적인 음모가 들어있었단 말인가? 마시이 한 사람의 죽음, 단지 그것때문에 저들이 그럴 리는 없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된 사건이 아니었을까?
"한국에서의 일본 동향은 어떻게 흐르고 있소?"
"일본의 수출이 금지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자동차는 물론 의류, 제화, 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품목의 수출을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전경련은 지금 대책을 수립하느라 고심하고 있습니다. 이미 생산해 놓은 물건들을 내다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동남아 지역도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 있어 수출 길이 막힌지 벌써 여러 달입니다. 미국과 유럽 쪽도 힘들긴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자금도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의 자금이 약 190억 달러에 달합니다만, 어느정도까지 회수해갈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지금 주가가 300포인트선도 겨우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만약 일본의 자금이......"
"그만해요! 도대체 그 동안 뭘 했기에 나라가 한 나라에 의해 이렇게도 휘청거린단 말이요!"
김대통령이 고개를 돌렸다. 누가 누굴 탓한단 말인가? 이게 단지 전직 대통령이 잘못해서 이루어진 일인가? 자신이 정치에 몸담은지도 벌써 40년이다. 그렇다면 자신에게도 40년의 책임이 있는 법.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책임 추궁은 나라가 안정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아니 책임추궁을 안하면 또 어떤가? 어차피 역사란 언젠가는 정의를 밝혀주는 법이거늘.
머리가 아파온다. 경제환란과 동시에 취임한 IMF 대통령. 적어도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는 IMF도 막을 내려야 하는게 김대통령의 생각이었다. 취임 6개월만에 꽤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 일본에서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 경제환란과도 전연 상관 없는 일이 아니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취해왔던 일본이, 왜?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왜 그런 음모를 꾸미는지, 당장은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가가 더 큰 문제였다. 어쩌면 경제환란 그 이상의 결과가 뒤따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각 처의 장관들을 소집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일본의 숨은 움직임을 모르고 있었다. 딴에는 각자의 임무를 다해 경제사태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당장 발등에 떨어질 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겐죠는 방검사를 논현동의 룸싸롱으로 인도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화려한 조명과, 한눈에도 호스테스로 보이는 여자들을 보고 방검사는 움찔했다. 그러나 겐죠가 팔을 끌어 당기자 못이기는 척 안으로 들어갔다.
마담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겐죠와 마시이가 들어가자 VIP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는 이미 안주들이 차려져 있었다.
"마담은 나가고 아가씨 들여보내. 서희 들여보내는 거 잊지 말고"
겐죠가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은 내가 서비스하고 싶은데? 어디서 이런 킹카를 데리고 오셨지? 현선생님 수준도 꽤 괜찮네요?"
겐죠는 마담에게 `현'으로 통했다. 지웅도 겐죠의 이름을 현명일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쓸데 없는 소리 하고 빨리 나가라니까"
마담이 방검사에게 눈웃음을 던지고 나갔다. 곧이어 아가씨 두 명이 들어왔다. 둘은 들어오자마자 방검사와 겐죠의 옆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미나예요. 잘부탁드려요"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의 아가씨가 겐죠에게 달라붙었다. 겐죠가 히죽거리며 미나를 끌어안았다.
"안녕하세요. 서희라고 합니다"
방검사는 약간 놀랬다. 자신의 옆에 앉은 아가씨는 술집 여자라고 생각하기에는 기품이 있고 너무 차분했기 때문이었다. 옷차림도 제법 수수했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만큼 딱 보기 좋았다. 어딘가 숨겨진 매력이 있을 듯한 여자였다.
방검사는 첫눈에 서희에게 호감을 가졌다. 게다가 겐죠마저 서희가 그 근방 최고의 미인이고 아무한테나 서비스하는 애가 아니라며 서희에 대한 방검사의 호감을 부추겼다.
서희가 술병을 들어 방검사의 잔을 채웠다. 잔을 따르는 태도 또한 여느 술집 여자들과는 달리 우아했다. 물끄러미 서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예쁘다. 달리 그 말밖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미나가 겐죠의 잔과 자신, 그리고 서희의 잔에 차례로 술을 따랐다. 로얄 샬롯이었다.
"방검사님. 한 잔 드시죠. 오늘은 일 생각하지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겐죠가 방검사의 잔을 부딪히고는 먼저 홀짝 잔을 비웠다. 그 옆의 미나도 덩덜아 잔을 비웠다. 방검사가 잔을 비우다 말고 서희를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 잔 밑을 바치고 조용히 술을 마시는 모습이라니. 방검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너희들 이 분 잘 모셔라. 이 분이 어떤 분인줄 알어? 이 분이 임마, 나지웅 살인사건 담당 검사님이라 이거야. 니들 평생 술시중 들어서 이런 분 만날 수 있을 거 같아? 잘들 모셔라. 가문의 영광인줄 알어 인석들아"
겐죠가 어깨를 들썩이며 방검사를 추켜세웠다. 방검사는 그런 겐죠를 말리고 싶었지만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서희 앞에서라면 그런 자랑정도는 괜찮을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지금은 서희에게 주눅이 들어 말도 제대로 못걸고 있는 형편이다.
겐죠가 그런 말을 해서 그런지 서희의 방검사에게 대하는 태도가 금새 변한 것 같았다. 몸도 방검사에게 조금 더 밀착해왔고 술을 따르는 태도도 훨씬 상냥해졌다. 방검사의 얼굴은 희색이 만연했다.
서희가 타올로 몸을 가린 채, 욕실에서 나왔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칼이 불빛에 의해 유난히 반짝거렸다.
방검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검사 생활 3년만에 이런 호강은 처음이었다. 물론 뒷돈을 받은 경우는 몇 번 있었지만, 그렇게 큰 액수와 이렇게 아름다운 미녀를 접한 경우는 없었다.
방검사가 침대에 누운 채 서희를 바라보았다. 서희가 부끄럽다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이리와"
제법, 감정을 넣은 목소리였다. 서희가 천천히 방검사를 향해 걸어왔다. 두 손은 타올을 꼬옥 쥐고 있었다.
방검사가 침대에서 일어나 서희의 정면에 앉았다. 향기가 자꾸만 방검사의 후각을 어지럽혔다. 방검사의 손이 서희의 종아리로 향했다. 미끈했다. 또한 부드럽기도 했다. 어디서, 이런 미인이...... 종아리를 타고 손이 조금씩 올라온다. 몸에 탄력도 좋다. 방검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서희의 몸을 가리고 있는 타올을 벗겨내 버렸다. 서희의 나체가 그대로 방검사의 안면에 펼쳐졌다.
방검사는 서희를 그대로 침대에 쓰러뜨렸다. 방검사가 거칠게 옷을 벗어던졌다. 서희의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다. 그럴수록 방검사의 흥분은 도를 더해갔다. 방검사는 짐승처럼 서희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리곤 거칠게 입술을 덮쳤다. 가만히 혀를 들이밀어 보았다. 서희의 입이 자연스레 열렸다. 이번엔 방검사의 손이 서희의 가슴을 타고 점점 아래로 향했다. 그리곤 서희의 그곳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애인처럼 해주세요"
서희가 가련한 목소리로 말한다. 한 번 즐기고 마는, 그런 만남은 싫다는 표정이었다. 이 여자, 날 정말 좋아하고 있군.
태어나서 이렇게 몸이 달아오르기는 처음이었다. 좋았다. 애인처럼 소중하게, 아주 조심스레 서희를 보듬는다. 그럴수록 서희는 수줍은 산골 처녀처럼 방검사에게 교태를 부린다. 이 여자, 정말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여자였다. 침실에서의 자태가 이렇게 훌륭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 했다.
정사 후, 서희가 방검사에게 등을 보이며 누운채로 말했다.
"이기셨으면 좋겠어요"
"뭘?"
방검사가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지웅 살인사건이요"
방검사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내가 잘되길 바라는군......
방검사가 태연하게 물었다. 방검사의 손이 서희의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
"왜? 그 놈이 서희에게 무슨 몹쓸 짓이라도 했나?"
"예"
방검사의 손이 멈췄다.
"뭔데?"
"절, 망가뜨렸어요. 학교다닐 때 절 유혹해서......"
방검사가 벌떡 일어섰다.
"뭣이 어쩌고 어째?"
방검사는 이미 서희의 수호자였다. 물론 방검사 혼자만의 바람 뿐이지만. 서희가 얼굴을 두 손에 묻고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방검사의 이마에 힘줄이 섰다. 그리곤 서희의 어깨를 다정하게도 껴안았다.
"걱정마, 내가 서희의 원한을 갚아줄게. 걱정하지 마"
방검사가 서희의 몸을 돌려 두 팔로 감쌌다. 서희의 몸이 더욱 깊이 방검사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걱정마, 나만 믿어 서희. 나만 믿으라고"
문 밖, 어둠속에 누군가 음흉하게 웃고 있다. 겐죠였다.
50년 대계(大計)
"야 김현영, 너 도대체 열흘동안 일본에서 뭐하다 온거야?"
국장이 아침부터 고함을 지르고 야단이었다. 현영이 국장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꾸도 없이 서 있었다.
"임마, 입이 있으면 말을 해봐. 니가 도대체 정신이 있는 놈이야? 없는 놈이야?"
국장이 파일로 현영의 머리를 내리쳤다. 사회국 사람들 모두가 놀라며 현영을 쳐다보았다. 현영은 그래도 할 말이 없었다. 국장이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껏 키워주겠다고 프로그램을 맡겨놨더니 초장부터 행방불명에다가 변명조차도 하질 않는 자신을, 현영 자신이라도 가만 내버려두진 않을 것 같았다.
"시말서 써와. 이자식, 잘 한다 잘 한다 했더니 아주 까불고 있어"
국장이 파일을 책상에 내동댕이치고는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정피디가 조용히 다가와 현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떻게 된거야?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학교 선배 정피디는 그래도 현영의 안부부터 묻는다. 그렇다고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말을 한다고 곧이 곧대로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서 있었던 일들은 지웅과 태림에게만 말할것이라고 처음부터 굳게 다짐하고 있던 차였다.
정피디가 현영을 데리고 방송국 내 커피숍으로 데리고 갔다. 아침부터 사람이 많았다. 정피디가 커피 두 잔을 시켰다.
"괜찮아? 얼굴 보니까 살아돌아온 것만해도 다행인거 같은데?"
현영이 싱거운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손이 갔다. 사실 아침에 씻을 때, 거울을 보고 짐짓 놀라긴 했다. 생각보다 얼굴이 많이 야위어 있었다.
"정말 얘기 안 할거야? 지금 일본에서 한국인들 돌아 다니는 것조차도 위험하다고 하던데, 혹시 동경에 소요 일어났을 때 현장에 있던 것 아니야?"
"예? 아니예요"
이번에도 대충 얼버무린다. 친절히 대해주는 정피디긴 하지만 지금은 아무 얘기도 하기 싫다. 그것보다 지금 정피디와 같이 있는것만으로도 상당히 초조하다. 마음은 벌써 지웅에게로 가 있지만, 그래도 방송국에 얼굴에 비춰야겠다는 생각에 출근한 것이었다. 욕을 먹고 안먹고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어쩌지? 처음 맡은 프로가 이렇게 날아가버렸으니. 그래도 현영인 남들보다 1년 앞섰으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고. 내년에 프로그램 맡아도 남들하곤 같은 위치잖아? 기운내 응?"
정피디가 나름대로 현영을 위로했다. 그러나 현영은 그마저 별로 달갑다는 생각이 안든다.
현영이 자꾸만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자 그제서야 정피디는 눈치를 채고 자연스레 일어섰다.
"나 먼저 가볼게, 볼 일 있으면 가봐. 국장님한테도 가서 빌고 응?"
현영은 정피디가 사라지기도 전에 서둘러 커피숍을 빠져나갔다. 그리곤 먼저 태림의 신문사로 찾아갔다. 마침 태림은 자리에 있었다.
"야, 임마. 너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태림이 펄쩍펄쩍 뛰었다.
"어떻게 그렇게 됐다. 그건 그렇고 지웅인 어떻게 됐어?"
현영이 그제서야 숨을 고르며 물었다.
"자식, 걱정은 돼냐? 어딨긴 감방에 있지. 지웅이 자식은 그 와중에서도 니 걱정 하고 있더라. 넌 어디있길래 연락 한 번 없었어?"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우선 지웅이한테나 가보자"
현영이 태림을 찾아온지 5분도 안돼서 서둘렀다. 태림이 시계를 보더니 현영의 팔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일단 밥이라도 먹자. 보아하니 아침도 안 먹은 거 같은데, 일단 속은 채워야지. 지웅이 면회하려면 한 시간 정도 있어야 돼. 바로 이 앞이니까 서두르지 말고, 우선 좀 차분하게 얘기좀 하자. 안그래도 나도 바로 지웅이한테 가려던 참이었어"
일단은 태림을 따라 식당으로 들어갔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그래도 태림을 만나니 조금은 안정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밥이 제대로 넘어갈 리 없었다. 식사를 하면서도 현영은 자꾸 시계만 쳐다보았다.
"자식, 그렇게 먹어서 퍽도 소화되겠다"
현영이 안절부절 못하자 태림이 핀잔을 주었다.
"알았어, 먹자"
현영이 억지로 숟가락을 입에 대 보인다. 그렇다고 초조해 하는 표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다시 숟가락을 내려 놓고 태림에게 묻는다.
"살인, 맞아?"
태림이 풋- 하고 웃는다. 이미 열흘이나 지난 일이다. 그걸 이제와서 살인 맞아? 하고 묻는 현영이 다소 기괴해 보였다.
"난, 아닌 거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나봐"
태림이 가볍게 현영의 말을 받아넘긴다. 현영이 녀석, 지금 굉장히 긴장하고 있다. 먼저 여유를 찾아야 한다.
"밥 안먹어?"
태림이 다시 현영을 다그친다. 현영이 숟가락을 들다 말고 내팽개치고 소리쳤다.
"넌, 지금 밥이 넘어가냐?"
그리고는 무안한 듯, 다시 숟가락을 든다. 태림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현영을 바라본다. 길을 잃고 헤메이는 한 마리 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다고, 상항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는 거, 니가 더 잘 알잖아? 왜 이렇게 조급해?"
사실 조급하기는 태림도 마찬가지다. 지웅의 재판이 불과 4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지웅의 살인은 명백한 사실로 인정되고 있는 분위기가 아닌가? 게다가 지웅의 방엔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있었다.
현영이 녀석은 열흘만에 나타나서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입을 열지도 않는다. 다짜고짜 지웅을 찾아가자고만 보채고 있다. 현영까지도 태림을 벅차게 한다. 하지만, 지금은 차분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다.
"가자"
태림이 시계를 힐끗 쳐다보고는 일어섰다. 현영도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섰다. 현영의 밥그릇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태림의 밥그릇도 줄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침부터 청와대에 다녀온 박장관은 그리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김대통령으로부터 또 한번 꾸지람을 들었기 때문이다.
청와대에서 나온 박장관은 국회의사당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태경과 수연 기정을 찾으러 미국으로 직접 날아가기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은 아무래도 불안했다. 녀석들, 녀석들만 돌아와 준다면 최고의 판결을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전화를 걸어 미리 짐을 챙겨두라고 했다. 비행기표도 이미 예약을 해 두었다. 며칠이 걸리는지 알 수 없는 여정이었다.
차창을 조금 열고 담배를 피웠다. 직접 찾아간다 해도 녀석들이 돌아와 줄거라는 자신은 없었다. 아니 얼굴을 쳐다볼 용기도 아직은 없다.
며칠 전에는 술김에 태경의 전화번호를 눌러보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술김이라도 지난 응어리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헬로우- 하는 상대편의 목소리만 듣고 박장관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목소리가 태경인지 아닌지 확인도 못하고서......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대통령의 성화도 있고, 또한 국민들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 또한 무시 못할 정도로 부담스럽다. 게다가 이번 기회에 지난 날의 잘못을 빌고 싶었다. 사실, 지난 5년동안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제자에게, 열변을 토하며 정의를 가르쳤던 자신의 제자에게 불의를 눈감아주라고 했으니, 아니 먼저 불의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으니......
차는 무척이나 더디게 움직였다. 운전기사도 박장관의 눈치를 살피며 서두르려 애를 쓰지만, 서울의 도로는 박장관의 사정을 봐줄리 없었다.
"너, 이자식"
지웅은 현영을 보자마자 얼싸안았다. 현영도 지웅을 있는 힘껏 껴안았다.
"이 놈 자식, 감방에 있는 놈보다 더 말랐네. 어디서 뭐한거야?"
지웅이 환하게 웃었다. 태림은 뒤에서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녀석, 몇 번이나 면회를 왔건만 이제야 웃는다. 역시 세사람은 함께 있어야 하나보다. 태림도 따라 웃는다. 기분 좋기는 태림도 두 사람 못지 않는다.
현영의 얼굴도 이제야 안도의 빛이 돌았다. 제법 생기까지 되찾은듯한 모습이다.
서기관이 묘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들 좋아하나? 게다가 항상 태림과 윤희만 보다가 새 얼굴이 나타난 게 신기한 듯 세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지웅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 그동안 뭐했는지부터 좀 알자"
제법, 보스같은 모습이다. 현영이 따라 앉았다. 마치 부하인 양. 그러나 모습이 어색하진 않다. 태림도 현영의 옆에 앉았다.
"야, 말도 마라. 별에 별 일이 다 생겨서 말이야"
현영이 그 동안 일본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그제서야 말문을 연 것이다. 지웅과 태림은 현영의 말에 아예 푹 빠져있다.
"그래서 일주일동안이나 갇혀 있었단 말이야?"
"응, 아주 죽는 줄 알았다니까. 게다가 대사님하고 서과장이 얼마나 피곤하게 하던지, 다 큰 아이 데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현영이 신나라 하며 떠들어댔다. 조금은 과장도 곁들여가면서. 역시 친구란 좋은 것인가보다. 이렇게 힘이 나는 걸 보면.
이번엔 태림이 현영의 등을 두드렸다.
"야, 대사님을 구한 게 현영이 너였단 말이야? 이거 믿어지지 않는걸?"
장난스레 말하지만, 믿었다. 현영의 말 그대로를 태림은, 그리고 지웅도 하나 남김없이 믿고 있었다.
현영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한 게 뭐 있냐. 그 노인네가 시켜서 한 것 뿐인데. 그런데 지웅아"
갑자기 현영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지웅이 기분 좋은 얼굴로 현영의 얼굴을 쳐다봤다.
"너, 일본에 아는 사람 있어?"
이번엔 지웅과 태림의 얼굴까지 진지해졌다. 지웅이 뜸을 들이다 말했다.
"왜?"
"그, 노인네 널 아는 사람이야. 사실 나라현에 있다가 아침에 부랴부랴 출발한 것도 니 살인사건이 신문에 나서였다니까. 그 노인 끝까지 자기 정체를 안 밝히더라구. 너 혹시 짐작가는 사람 없어?"
지웅의 얼굴이 차츰 굳어졌다.
"다른 말 한 건 없구?"
"응, 내일 한국으로 온다고 했어. 너와의 사업은 이제 끝이라고 하던데, 니가 아는 사람 맞어?"
지웅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영이 만났던 그 사내는 바로 중앙 은행장 사이또, 한국인 이름 고성재였다.
처음부터 지웅의 일본과의 딜링에서 매번의 승리는 고성재와의 계락에서 시작되었다. 고성재는 각 은행 딜링룸으로 전화를 걸어 루머를 퍼뜨리고, 자신의 위치가 가지는 파워로 지웅의 딜링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지난 번 광복절에 지웅이 큰 실적을 올렸을 때 마시이에게 전화를 걸어 급히 천만달러치 엔화를 준비하라고 했던 사람은 바로 고성재 자신이었던 것이다.
고성재의 아버지는 바로 지웅이 할아버지의 친구였다. 할아버지가 일본군에 징용당해 끌려가기 몇 해 전이었다.
두 사람은 중국집에서 성재의 아버지가 일본으로 떠나는 것에 대한 별주(別酒)를 마시고 있었다.
"이보이 관형"
"왜 그러나"
"자네, 일본에 꼭 가야만 하는 건가?"
"그래야지"
관형이 웅렬의 잔을 채우며 대답했다.
"자신 있겠나?"
"지금 당장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 자식들이 컸을 때, 그 때가 안되면 그 자식들이 컸을 때를 위해서일세. 난 일본으로 가서 내 자식을 분명 그 나라의 주요 인물로 만들어 놓을 걸세. 그리고 그 힘을 길렀을 때 일본을 천천히 무너뜨릴 걸세. 지금 당장이야 가진 것도 별로 없이 일본으로 가지만 우리 아이가 보기 드물게 귀할 상일세. 전에 김영감님도 우리 애가 나라를 구할 상이라고 하더군. 성재 이녀석 잘 키워서 일본의 주요 자리에 앉혀 놓을걸세. 그리고 그 힘이 가장 정점에 올랐을 때, 우리가 당한 한을 그녀석이 조금이나마 풀어줄걸세"
"그래, 믿겠네. 잘 해보게. 자네 그 믿음이면 성재가 잘 하겠지. 내 생각만 해도 속이 후련하네 그려. 자넨 정말 인물일세. 나라를 위해 가족을 버리다니. 내 오늘은 자넬 정말 존경하네"
"이보게 웅렬"
"말해보게"
웅렬이 관형을 만족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자네에게 아들이 생기면 내 뜻을 전해주게. 우리 성재가 일본에서 힘을 키워 자네 아들과 힘을 합하면 무엇을 하던 일이 훨씬 수월해지지 않겠나? 자네에게 아들이 생긴다면 잘 키워 우리의 치욕을 자식들이 풀어주는 모습을 지켜보세. 안 되면 그 아들들이 우리의 한을 풀어주는 모습을 구천에서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흡족한 일인가? 우리는 힘이 없으나 우리 자식들은 힘을 키워야 하지 않겠나?"
"자네, 보기보다 멋있는 사람일세 그려. 암, 좋고말고.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들을 낳을테고, 열심히 키워 자네의 뜻에 동조하겠네. 안 그래도 태어나서부터 일본놈들에게 유린 당하면서도 아무 것도 못하는 이 젊은 나이가 안타깝기만 했는데,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이제야 무언가 해야 할 길을 찾은 거 같네. 함께 해 보세. 몇십년이 걸린다 해도, 몇백년이 걸린다 해도, 지금부터 힘을 키워 언젠가는 저 일본놈들에게 복수할 날이 오겠지. 자네가 내 서른 인생의 새로운 길라잡이를 해주네 그려"
관형과 웅렬은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서로의 뜻을 다시 한 번 다짐했다.
그 후, 웅렬은 뜻을 아들에게 들려 주지도 못한 채 징용당해 나가 구타로 숨졌고, 지웅의 할머니를 통해 아버지에게 전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웅의 아버지 역시 서른을 갓 넘기자마자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와 함께 죽어버렸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들의 뜻이 지웅에게 전해진 것이었다.
지웅의 전공은 컴퓨터공학과였다. 그러나 일본으로 유학을 갔을 때 성재를 만나고는 딜러의 길을 택했다. 이미 성재가 은행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의 직업과 유사한 쪽으로 눈을 돌리다가 딜러를 택한 것이다. 아버지에게 어렸을 때 막연히 들었던 그 얘기가 사실이었고, 그 동반자까지 눈 앞에 힘을 키워 놓은 채로 나타났으니 지웅의 결정은 그리 많은 시간을 잡아먹지는 않았다.
관형은 일본으로 건너가자마자 귀화를 했다. 그리곤 정말 일본에 충성을 다할 것처럼 힘 있는 자들의 하수인이 되었다.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들 앞에서 기었으며, 그들이 던지는 음식을 주워먹었다. 그렇게 관형은 일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자신만은 항상 그렇게 일본인의 종노릇을 했으나 성재만큼은 처음부터가 일본의 엘리트코스로 교육을 시켰다.
그런 관형의 뜻에 성재는 너무 잘따라 주었다. 성적도 뛰어났고 외모 또한 준수해 친구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그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아버지의 뜻을 들은 후, 그 순간부터 성재는 드디어 그렇게 비굴하게 살던 아버지의 크나큰 뜻을 알았고, 자신도 그 때부터 아버지 이상으로 열심히 살았다. 동경대학 경제학과를 수석으로 졸업 한 성재는 그 후 중앙은행에 몸을 바쳐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지웅과 성재는 일본을 조금씩 무너뜨려왔다. 그 정도가 아주 미세하다 할지라도 그들 아버지,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구나. 그럼 그 고성재씨나, 너나 역사의 희생물이네. 야, 갑자기 니가 사람으로 안 보인다"
현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현영의 말대로 지웅은 역사의 희생자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운명이 정해졌던, 역사의 희생자.
"그럼, 며칠 전에 니가 윤희씨한테 말해주라고 한 것도 자 짜여진 각본에 의해서였다 이거지?"
이번엔 태림이 심문하듯 지웅에게 물었다.
"그럼, 임마. 내가 무슨 초능력을 가진 것도 아닌데 환율이 오르고, 내리고를 어떻게 알아맞추냐? 그저, 성재아저씨가 일본인들 몰래 조작해서 그런거지"
지웅이 어색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난, 정말 니가 무슨 초능력이나 가진 줄만 알았다. 이거 완전히 사기꾼 아니야?"
"그런 사기는 백번을 쳐도 괜찮어"
"하기사, 듣고 보니 기분은 좋다. 50년 대계(大計)라. 멋진걸?"
서기가 한참이나 대화 내용을 기록하다가 이야기가 멈추자 세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도 꽤나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서기는 적었던 내용을 부욱 찢어버렸다. 혹시라도 그 내용이 새어나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곤 세 사람을 내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또한, 세 사람의 대화를 기록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넌 좀 괜찮아?"
현영이 그제서야 지웅의 안부를 묻는 게 미안한 듯, 두 손을 감싸 쥐었다.
지웅이 대답대신 웃는다. 이젠, 괜찮다. 그래도 우리 세 사람이 모이니까 절로 힘이 솟는다. 그렇다고 그걸 일일이 말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냥 이렇게 한 번 웃어주면 그만인거다.
그 웃음에 그동안 가지고 있던 현영의 걱정도 싹 날아가버렸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 자식 4일 후면 첫 공판이야"
태림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태림이 걱정하는 것 보다도 더욱 자신의 안녕에 대해 무딘 지웅에게 다소 불만이 있는 것이다.
"그래, 괜찮을거야. 난 너 믿는다. 그래도 되는 거지?"
그래도 현영은 지웅을 위로한다.
"아참, 그리고 지웅아"
태림이 갑자기 어제 지웅의 오피스텔에 찾아갔던걸 떠올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니 방에 수첩이 없더라"
"그래?"
지웅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태림이 더욱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첩이 없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 니 방을 누가 뒤졌단 말이야"
"뭐?"
지웅과 현영이 동시에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현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태림이 어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지웅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너, 짐작 가는데 없어?"
태림이 걱정스레 물었다. 지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때 서기관이 다시 들어왔다. 시간이 다 된 것이다. 태림과 현영이 몇 번이나 졸라봤지만 그것까지 봐줄 순 없는 모양이었다.
재회
박장관은 평소보다 두배나 걸려 집까지 도착했다. 시계는 벌써 열한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박장관은 한걸음에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여보, 나왔어"
아무 대답이 없다. 안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부엌에도 뒷뜰에도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여보, 나왔다니까"
박장관이 언성을 높여보았다. 여전히 아무 대꾸도 없다. 박장관의 입에서 짧은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2층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부인의 목소리. 다른 사람이 와 있는 것 같았다.
부인이 혼자 내려왔다. 박장관이 부인을 보자마자 고함을 질렀다.
"뭐하고 있는거야? 짐은 어딨어?"
"짐 안 챙겼어요"
부인이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박장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뭐야?"
"갈 필요 없어요"
부인이 박장관에가 다가가 나근나근하게 말했다. 그리곤 눈빛으로 박장관의 뒤를 가리켰다. 박장관이 뒤를 돌아보았다.
잘못 보았을까? 아니, 단지 닮은 사람인가? 박장관은 눈을 비벼 보았다. 시간이 지나긴 했어도, 그 얼굴, 그 모습 그대로였다. 태경이었다. 박장관이 다시 한 번 눈을 비벼본다. 갑자기 태경이 흐릿해 보인다. 그새.... 눈물이 났다.
"태경아...."
박장관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재 좀 보고 싶다길래......"
부인이 흡족해하며 말했다. 태경이 천천히 박장관 앞으로 걸어나왔다. 박장관은 자리에서 움직이질 못했다.
"교수님"
태경이 박장관을 와락 끌어안았다. 박장관의 목이 미어진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눈물만 대신 흐른다. 누군가 또 보인다. 이 쪽으로 오진 않고 가만히 서 있다. 웃고 있는 것 같다. 수연과, 기정이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박장관이 울음소리가 너무 서럽다. 5년의 응어리가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씻기지 못할 줄 알았던 응어리가 박장관의 눈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부인이 서재로 차를 내왔다. 박장관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세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건강하시죠?"
태경이 말했다. 이젠 제법 중년 티가 났다. 수연과 기정도 마냥 젊기만 했던 모습에서 벗어나 의젓하기까지 했다.
"그래 그동안 어떻게들 지냈니?"
박장관은 아버지가 돌아온 자식을 대하듯 따뜻하게 물었다.
태경은 처음 캘리포니아에 가서 2년 동안은 아무런 움직임 없이 낚시를 하며 보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엔 동양의 젊은이에게 그리 호감을 보이지 않았으나 태경의 활발함과 성실함에 차츰 호의를 베풀게 되었다. 태경이 마을에 적응을 하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려 지내던 무렵, 인근 마을에 잦은 도난 사고가 발생했다.
불과 천여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이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꼴로 도난 사고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태경은 그런 사건을 앉아서 관망하고만 있을 위인은 못됐다. 벌써 여남은 집이 도난사고를 당했을 때 현영은 인근마을로 찾아가 보았다. 그리곤 바로 이틀 전 도난사고를 당했던 사람을 만나 상황을 접했다.
태경은 그 사건은 분명 그 전부터 마을에 살고 있었던 사람의 소행이라는 가설을 쉽게 세울 수 있었다. 왜냐하면 도난을 당했던 집들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대부분이 자식들을 인근 도시로 전학을 보낸 집이었다.
태경은 먼저 7년동안 마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선생을 주목했다. 그러나 이내 다른 용의자를 찾아야 했다. 집에 칩입한 흔적이 철두철미했고, 설마 이런 곳으로 들어올 줄은 몰랐다고 할 정도로 집의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학생들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랬더니 생각보다 쉽게 범인을 찾을 수 있었다. 범인은 전학간 학생들과도 굉장히 친하게 진했던 심슨이라는 아이였다. 친구들 모두가 도시로 전학을 가는데 자신만 시골 학교에 남아 있는 것에 앙숙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태경은 심슨과 친한 제퍼슨이라는 아이와 함께 심슨의 집을 찾았다. 정문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평소 심슨과 제퍼슨이 이용한 비밀 통로 같은 것이 있을거라 생각이 들어 그 쪽으로 유인해 보았다. 태경의 생각대로 제퍼슨이 따라 간 길은 심슨의 방 뒷편으로 통하는 좁은 길이었고, 도난당했던 물건들은 심슨의 방 뒷마당에 묻혀 있었다.
사람들은 그 일로 태경을 추켜세웠다. 그리고 그 중에 한 사람이 태경에세 사립탐정을 제의했다. 별다른 수입거리가 없던 태경은 흥미도 있을 것 같아 흔쾌히 승낙했다.
수연은 플로리다주의 개인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주립 로펌으로부터 끈질긴 유혹을 받았지만 한사코 거부했었다. 태경과 기정이 아니면 같이 일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연의 승소율은 그곳에서도 눈이 부셨다. 작은 민사소송에서는 여지없는 승소를 기록했고, 로펌과의 대결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통쾌한 재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수연은 지금 한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플로리다의 한국 이주민과 만나 3년 전 결혼을 했고 1년만에 아들을 낳았다. 재미동포 1.5세대인 남편은 언제나 수연을 편안하게 대해 주었다. 수연이 재판 준비를 하고 있을 때면, 항상 집안 분위기를 조용하게 유지 시켜 주었으며 승소했을 땐, 누구보다 기뻐하며 수연보다 더욱 좋아해 주었다. 수연이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도 남편의 따뜻한 배려가 없었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기정은 로스쿨에서 나온 후 배낭을 메고 한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처음엔 단단히 마음먹고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횡단했다.
5대호 연안부터 로스엔젤리스, 그리고 태경이 머물고 있던 캘리포니아로 내려가서 수연이 있는 플로리다까지, 미국을 두 번이나 횡단했다.
미국 여행을 마친 기정은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와 버렸다. 미국 여행을 하면서 수없이 되뇌었던 것처럼, 한국땅도 다 돌아보지 못하고서 미국땅을 찾아다닌다는 꼴이 별로 좋아보이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기정은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곤 곧바로 전국일주를 시작했다. 출발점은 한라산이었다. 백두대간을 목표로 기정은 한라산을 걸쳐 지리산, 소백산, 설악산까지 등반을 했다. 휴전선에 막혀 더 이상 오르지 못하는 곳은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게끔 표시를 해 두었다. 혹시라도 통일이 된다면 그 지점부터 다시 백두대간을 완주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은 동해로 향했다. 고성의 말무리반도로부터 시작해, 강릉, 속초, 동해 등 바닷가를 따라 밑으로 내려왔고, 포항, 울산, 부산을 지나 다시 마산, 진주, 여수, 목포등 남도를 거쳐 군산, 대천, 인천까지 전국의 바닷가를 여행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기정은 다시 내륙지방으로 눈을 돌려, 춘천, 원주, 제천, 단양을 지나 충주, 문경, 안동, 화개, 전주, 공주, 이천을 두루 거쳐 전국 방방곡곡 안 돌아다닌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다시 외국으로 나가 일본, 유럽, 남미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다녔다.
세 사람이 다시 모일 수 있었던 것도 기정이 마침 지웅의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국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토순례단의 일원으로 남해에서부터 임진각까지 오르던 기정은 갑자기 터진 지웅의 살인사건을 접하고 순례단에서 철수, 서울로 올라가 상황을 지켜보았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기정은 그대로 캘리포니아로 내달려 태경을 찾은 것이다. 그리곤 설득에, 설득을 했다. 그러나 이미 한국에 회의를 가진 태경이었다. 아무리 기정이 설득을 한다고 쉽게 동의하진 않았다.
"나라가, 어렵다. 니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이야. 게다가 이번 사건은 국민의 눈과 귀가 쏠려 있어. 내가 보기에도 말 그대로 단순한 살인사건은 아니야. 이번 사건, 일본이 원하는대로 이루어지면, 우리나라 또 한번 무너진다. 게다가, 정권도 바뀌었다. 가자. 태경아"
결국은 태경의 사무실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플로리다로 날아가 수연을 달랬고, 5년만에 다시 뭉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태경이 시계를 보며 일어섰다.
"교수님이 저희를 나지웅 담당 변호사로 접수시키는 걸 맡아주세요. 저희들은 조사할 게 좀 많을 거 같아서 이만 일어서봐야겠어요. 밀린 얘기는 다음에 하죠"
수연과 기정도 따라 일어섰다.
박장관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태경이 한다면 그렇게 내버려두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나지웅이 무죄라는 걸 밝히는 걸 기대하진 않았다. 하지만 최선의 결과가 나오리라는 확신은 가질 수가 있었다.
애련(愛戀)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지웅은 다소 못마땅한 표정으로 윤희를 바라보았다. 은행을 그만 두는 것만은 절대 안된다고 못을 박았는데, 기어코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것이다. 윤희가 손톱 끝을 매만지고 있었다.
"난, 회사는 더 이상 안나갈거예요. 지웅씨 이러고 있는데 회사에서 내가 뭘 하겠어요?"
지웅이 대꾸 없이 윤희를 쳐다보았다.
"알아요. 지웅씨도 없는데 나마저 그만 두면 운영이 어렵다는 것쯤은 알아요. 하지만 나한테는 회사도, 국가도 지웅씨만큼 중요하진 못해요"
지웅은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한숨만 푹푹 내쉰다. 매정한 사람.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지웅이 너무 서운하다. 윤희의 볼에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다. 요즘 들어 너무 자주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 집에서도 혼자 있다가 지웅의 생각만 하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게다가 회사라도 나가면, 지웅의 자리, 지웅의 빈자리가 자꾸만 윤희의 눈물샘을 터뜨렸다.
"몸은 좀 괜찮아요?"
윤희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지웅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밥은 잘 챙겨 먹지요? 잠도 잘 자구?"
지웅의 윤희의 손을 감싸쥐었다. 윤희의 눈물샘이 다시 터지려고 한다.
"난, 괜찮아요. 신경쓰지 말고 윤희씨 몸이나 잘 챙겨요"
조금은 부드러워진 말투였다.
사실, 그런 윤희가 너무 고맙다. 잘해주지도 않는 자신에게 이렇게 정성을 다해 뒷바라지를 해주는 윤희가 너무 고맙다. 그리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 때문에 거리를 두었다. 젊은 남녀가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행동하는 게 싫어서, 혹시라도 자신이 그렇게 될까봐, 윤희가 그렇게 할까봐 애초부터 거리를 두고 절제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윤희가 지금 그런 모습을 보인다. 사랑 때문에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있다. 적어도 지웅이 바라는 사랑은 이게 아니다.
"저, 더 이상은 회사 못나가요. 팀장님하고 차선배한테도 매몰차게 나와버렸는데 어떻게 다시 돌아가요. 지웅씬 지금 내가 얼마나 힘든줄 모르죠? 아니, 미안해요. 지웅씨 앞에서 힘들다고 말하다니, 미안해요 지웅씨. 기분 안 상했죠?"
지웅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착한 여자. 보기와는 너무 다르다. 이런 여자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봐야 들어갈 것 같지가 않다. 깍지를 껴서 뒷머리를 기댔다. 이렇게 보니 다른 때보다 훨씬 예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당장 내일 모레면 재판이다. 재판......
"윤희씨, 내말 잘 들어요"
윤희가 물끄러미 지웅을 올려본다.
"윤희씨가 은행에 있어야, 내가 돌아갈 곳이 생겨요. 윤희씨마저 은행에 없는데 내가 무슨 의미로 다시 돌아가겠어요? 그러니까, 힘들어도 참고 은행에 나가요. 난, 금방 나갈거예요. 윤희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금방 나갈거예요. 나, 믿죠?"
윤희의 얼굴이 환해진다. 눈물을 가득 머금고 흑흑대고 울면서, 웃는다. 그리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예쁘다.
윤희가 큰기침을 한 번 내뱉고는 어깨를 죽 폈다. 그리곤 소매를 쓱쓱 문질러 눈물자욱을 지웠다.
"나, 생각보다 여려요. 지웅씨 보기엔 어떨지 모르지만 내가 얼마나 여린지 지웅씬 모를거예요. 그치만, 이젠 강해질게요. 지웅씨 건강한 모습으로 나올때까지 강하게 기다리고 있을게요. 지웅씨도 나 믿어요. 그럴거죠?"
윤희가 애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희의 팔이 지웅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였다. 웅웅대는 소리로 윤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웅씨...... 사랑해요"
태림은 처음 듣는 목소리의 전화를 받고 고개를 갸웃하며 신문사 로비로 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음성이었다. 상대는 지웅의 일때문이라고 해서 자신을 불러냈다. 사람이 꽤 많았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렸으나 자신에게 전화한 사람이 누군지 쉽게 찾지 못했다.
"윤태림씨?"
누군가 뒤에서 태림의 이름을 불렀다. 태림이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태경이었다.
"안녕하세요. 황태경이라고 합니다. 잠깐 얘기좀 나누죠"
태경은 다소 무례하게 태림을 이끌고 근처 커피숍으로 갔다.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한 후에야 태림이 말을 꺼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태경이 대답대신 수첩을 하나 내밀었다. 태림이 조심스레 수첩을 들춰보았다. 태림의 손이 떨렸다. 지웅의 수첩이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태경이 넉살 좋게 웃었다. 태림의 시선이 순간 방어의 빛을 띈다.
"정식으로 인사나 하죠. 황태경입니다. 나지웅씨 변호를 맡게 됐죠. 그리고, 이 수첩. 사실 태림씨가 나지웅씨 오피스텔을 찾아왔을 때 전 거기 있었어요. 사건에 필요한 자료를 찾아볼까 미리 들렸었던거죠. 갑자기 태림씨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뒷베란다에 숨어있었죠. 암튼 미안하게 됐습니다"
태림의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다. 태림이 알고 있기론 지웅의 변호사는 은행의 고용변호사였다. 태경이 태림의 의심에 찬 눈초리를 읽고 다시 한 번 호탕하게 웃는다.
"하하, 너무 그렇게 보지 마세요, 사실 오늘부로 변호를 맡게 되었으니까요. 여기...."
태경이 변호사 자격증을 내밀었다. 이미 7년 전의 사진이라 현재의 모습과 달라보이기도 했지만, 맞는 것 같았다. 태림이 다시 자격증을 태경 앞으로 밀었다.
"수첩을 보니까 예상 외로 사람 이름이 얼마 없더라구요. 태림씨 말고, 김현영, 고성재, 정윤희, 차경헌, 한세열. 이 사람들 말고는 별로 중요치 않은 것 같고. 사실, 방금 나지웅씨 면회를 갔는데 누가 벌써 하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태림씨한테 왔죠. 지웅씨 친구 맞죠? 오피스텔에서 봤어요. 벽에 걸린 사진을 보며 웃더군요"
태림의 입이 벌어진 채 다물줄을 몰랐다. 지금껏 기자라는 신분으로 제법 샤프하다는 소릴 듣고 지냈는데 태경을 만나고 나니 사뭇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튼 태경에 대한 반감은 조금씩 사라졌다. 지웅을 구해줄 사람이라지 않은가.
아이스티 두 잔이 나오자 태경이 본격적으로 질문을 시작했다.
"나지웅씨 굉장히 특별한 사람 같은데, 평소 일본을 싫어하는 정도가 어땠어요?"
태림이 말을 할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스트로우를 통해 아이스티를 한 모금 빨아마셨다. 목이 좀 탔다. 태경은 서두르지 않고 태림의 대답을 기다렸다. 태림이 숨을 깊이 들이쉬고 말을 꺼냈다.
"심했다고는 생각 안해요. 나도 그렇고, 현영이도 그정도는 되니까. 한국사람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감정, 그정도 수준일거예요. 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실적이 워낙 유별나서 그렇게 보이는 거죠"
자기도 모르게 감춘다. 어떻게든 지웅에게 손해보는 발언은 하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다. 태경이 한 번 웃고는 대충 넘어가준다.
"그래요, 하기사 저도 일본은 별로 안좋아하거든요. 죽은 마시이라는 사람 본 적 있나요?"
태림은 속이 뜨끔했다. 알고서 물어보는 건지. 대답하기 난처한 것들만 묻고 있다.
"예.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만났죠. 별 일 없었어요. 지웅이 만나려고 찾아갔다가 같이 본거죠. 인사만 나눴고 얘기도 없었구요. 그저 조용히 술만 마신 기억밖에는...."
태경이 자신의 수첩에다 태림의 말을 열심히 적는다. 그리곤 또 묻는다.
"그래요, 혹시 고성재씨라는 사람이 누군지 아나요? 수첩 중간엔 아저씨라는 이름으로 전화번호가 적혀있더라구요. 그런데 마지막에 보니 고성재라는 이름이 씌어 있더라구요. 전화번호는 없고. 수첩을 읽어보니까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었어요. 나지웅씨하고는 개인적인 친분이 짙은 것 같은데, 아는 것 좀 없어요? 보아하니 일본에 있는 것 같은데......"
태림이 수첩을 뒤져 확인하려다 말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성재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태경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고성재라는 사람...... 이 사람이 궁금하다. 안그래도 기정이 성재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저녁이 되면 알 수 있겠지...... 수연은 현영을 만나고 있을 것이다.
태경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진다.
"지웅씨 전공이 컴퓨터공학과던데...... 어떻게 딜러의 길을 걷게 됐죠? 그 부분에 대해선 태림씨가 잘 알 것 같은데"
태림이 다시 방어의식을 갖는다. 오늘부로 지웅의 변호를 맡게 됐다는 사람치고는 질문이 날카롭다.
"글쎄요. 전 그 때 군대에 있었어요. 제가 좀 늦게 군대를 갔거든요"
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간신히 둘러대긴 했지만, 태림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사실, 태림은 그 당시 군대에 있긴 했다. 그냥 아는 그대로 얘기할까 망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까진 변호사라는 사람, 그렇게 신임할 수 없다.
태경은 그 후로도 수없이 질문을 해댔다. 그리고 태림은 그 때마다 쩔쩔매며 대답을 했다. 하지만 말하는 것보단 숨기는 것이 많았다. 그나마 얘기한 것도 지웅을 구해줄 사람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래, 박장관 말대로 그 사람들을 믿어도 돼는거요?"
김대통령이 힘없이 말했다.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이 더욱 진해보였다.
"예. 각하. 제가 알기론 그녀석들이 한국 최고의 실력자들입니다"
박장관은 태경과 수연, 기정 세 사람이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던 사연을 얘기했다. 김대통령은 진지하게 민장관의 얘기를 들었다.
"그래요?"
김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면 작아졌달고나 할까. 지웅의 사건도 김대통령에겐 중요했지만, 일본의 동태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느라 그렇게 적극적이진 못했다.
김대통령의 얼굴이 환해질 줄 알았던 민장관은 다소 민망해졌다.
"각하......"
박장관이 정겹게 김대통령을 불러보았다. 김대통령이 천천히 박장관을 바라보았다. 수심에 잠겨 있는 얼굴이다.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요. 분명히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텐데, 아직도 실체를 드러내고 있지 않단 말이요. 그래서 더 두렵소"
"이미,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습니까? 수출을 금지시키고, 자금을 회수해가고, 마시이의 죽음이 좋은 구실을 제공해 준 게 아닙니까? 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아니아니...."
김대통령이 고개를 흔든다.
"그게 다일수도 있겠지. 하지만 왜 그러는지가 두렵단 말이오. 지금 현재 겉으로 드러나는 일본의 경제상황도 좋아보이지만은 않아요. 그래서 자국을 보호하느라 그런거라면 차라리 속이 편하겠소. 하지만 난 그 이상의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을까가 두렵단 말이오. 이게 다라면 얼마나 좋겠소. 다른 방안을 찾아보면 될테니 말이오. 하지만 이게 시작이라면, 혹은 일본의 의도가 단지 자국의 경제보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땐 어떻게 하느냐 이말이오"
김대통령의 입술이 바짝 말라있다. 애처로웠다.
"힘내십시오. 각하. 다들, 하는 데까지 해보고 있는 형편입니다. 갑자기 불과 몇 년 사이에 불어닥친 한파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기는 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각하, 힘내십시오"
김대통령의 손이 박장관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맙소"
김대통령의 음성이 왠지 어색하게 들렸다. 박장관에 대한 고마움도 김대통령의 근심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박장관이 집무실을 나오는 동안에도 김대통령의 얼굴은 아무런 동요가 없다. 근심을 가득 머금은 채, 한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박장관의 눈에 그런 김대통령이 조금은 외로워 보였다.
귀천(歸天)
금이타조(金以打朝)의 하수인이 갑자기 행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더러운, 조센진!"
하수인은 구두발로 행장의 가슴을 후렸다. 행장이 급히 인터폰을 눌렀다. 그러나 묵묵부답이었다.
"당신, 누군데 여기서 행패야?"
행장은 정신을 수습하고 하수인을 노려보며 소리질렀다. 하수인은 간교한 웃음으로 행장을 쳐다보았다.
"조센진의 피로 여태까지 대황국시민을 잘도 속였겠다. 니놈을 당장 요절을 내도 내 분이 삭을지 의문이다"
하수인은 행장을 이끌고 나갔다. 어떻게 된 것인지 행장이 하수인에게 끌려가는 동안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시이가 죽은 후 금이타조(金以打朝)의 회원들은 은행 안의 주요 인물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이 처음 의심을 하기 시작한 사람은 행장이다. 그런 와중에 또 한번의 1억엔 가량의 손해를 보게 되자 그들은 행장의 신상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과거 한국에서 넘어와 귀화한 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야 만 것이다.
그 후로 행장의 행동은 당연히 제약을 받았다. 행장 스스로가 느낄 정도로 수상한 사람들이 자꾸만 주위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어디를 가든지 주위에는 눈에 걸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엄청난 힘으로 행장을 억압하고 있었다. 현영과 대사를 별장에 두고도 일주일이나 걸려 되돌아간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행장은 눈이 가리고 손이 뒤로 꽁꽁 묶인채 자동차 트렁크에 갇혔다. 행장을 실은 자동차가 움직였다. 행장의 이마에 식은땀이 났다. 이대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 이대로 다시 일본인들에게 짓밟혀야만 하는 것인가?
아버지 생각이 났다.
절대로, 일본인들에게 밉보여선 안된다. 그들과 친해져야 한다. 너와 그들은 하나라는 생각을 갖게끔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언젠간 그들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래야, 내가 저승에서도 눈을 감는다.
일본인 간부에게 굽실거리며 밥을 얻어오기도 하셨다. 일본인의 발에 채여가며 돈을 벌어오기도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 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그럴수록 아버지의 눈은 독한 빛을 발했다. 성재 자신이 보기에도 소름끼칠 정도의 독한 눈빛을.
그래서, 성재도 이를 악물었다. 자신만은 아버지처럼 일본인에게 굽실거리지 않을거라고 다짐했다. 일본인에게 수모를 당하며 돈을 벌진 않을거라고 다짐했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아버지가 당했던 것처럼, 일본인들을 굽신거리게 만들고 자신의 발로 걷어차버릴 것이라고 다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그 날은 성재가 은행 입사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아버지를 뒤로 하고 시험을 보기 위해 대문을 나서던 성재는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되돌아왔다. 차마, 아버지의 임종을 눈앞에 두고 시험을 볼 순 없었다.
다시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다행히 아버지의 숨은 아직 끊기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의 눈동자가 성재를 바라보았다. 아직, 예의 그 눈빛은 살아있었다.
"가라"
"못가요, 아버지"
"가라고 했잖아"
"싫어요. 시험은 내년에 보면 되요"
"네 이놈. 살아서도 아비 말을 안 듣는데, 죽은 후엔 아비 말을 져버릴 셈이냐? 어서 못가?"
성재는 그런 아버지를 등지고 돌아서야만 했다. 천천히 집을 나섰다. 성재가 다시 대문을 나서자마자 곡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순간 몸을 되돌렸다. 그러나 다시 대문 안으로 발길을 옮기지 않았다. 죽으면서도 애원하시는 아버지의 염원을 물리칠 수 없었다. 뛰었다. 죽어라 뛰었다. 그래서 시험을 보고, 은행원이 되었다. 아버지의 임종을 뒤로한 채 은행원이 된 것이다.
오늘 오후 비행기로 지웅을 찾아가려 했었다. 모든 걸 정리하고 한국으로 날아가려 했었다. 은행의 자금도 1조엔이나 빼돌려놨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자동차 트렁크 안. 이곳에 있는 이상은 모든게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차는 자꾸만 덜컹거렸다. 어딘가 교외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몸이 괴롭다. 머리도, 가슴도 자꾸만 어딘가에 부딪혔다.
갑자기 성재의 몸이 기울었다. 차가 멈춘 모양이었다. 트렁크 열리는 소리가 나고 성재의 몸이 허공에 떴다가 땅으로 곤두박질했다. 누군가가 성재의 목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곤 사정없이 끌고갔다. 커다란 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에서 누군가 밀었다. 발을 헛디뎠다. 계단이었다. 다행이 뒤에서 잡고 있어 구르진 않았다. 차라리 여기서 굴러버리면 더욱 속이 편할 것을...... 더 큰 수모를 당하지 않고 깨끗이 사라져 버릴 것을......
기정은 도쿄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지웅의 수첩에서 적어온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자동응답기만이 전화를 대신 받는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도 전화를 걸었으나, 역시 성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기정은 일본 여행을 할 때 익혀두었던 전화번호와 지역의 관계를 추리해내서 근방으로 찾아가 보았다. 도쿄의 한중심가였다.
그 곳에서 전화번호만 가지고 성재가 있는 곳의 위치를 파악하기는 차라리 모래밭에서 바늘찾기나 마찬가지였다. 너무 성급히 달려온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이틀밖에 없다. 적어도 변호할 만한 단서는 찾아야 하지 않는가. 국수집에 들러 간단히 허기를 때우고 기정은 다시 시내로 나왔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혹시..... 사무실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전화번호의 끝자리보다 숫자 하나를 적게 해서 전화를 걸어보았다. 친절한 목소리의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혹시, 고성재씨 계십니까?"
기정이 서툰 일본말로 물었다.
"행장님 지금 자리에 안계십니다. 실례지만 어디십니까?"
행장? 기정은 잠시 머뭇거렸다. 지웅이 딜링에서 큰 실적을 올린 이유를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다. 기정은 잠시 후에 다시 전화를 걸겠다고 하고는 근방의 호텔을 찾았다. 오늘 내로 서울로 돌아가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한 후, 방으로 들어와 기정은 다시 조금 전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성재는 부재중이었다. 기정은 이번엔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 전화번호를 남겼다. 그리곤 침대에 드러누웠다. 가슴이 설렌다. 오랜만의 사건이라 그런지, 의욕이 철철 넘친다. 게다가 꼭 승소하고 싶은 사건이다. 이런 사건을 맡을 때, 그리고 이길 때 변호사는 보람을 갖는게 아닐까? 기정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조센진. 네 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수치를 당한 줄 알아?"
결국, 야마모도였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대하고 보니 성재의 마음은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찼다.
야마모도는 벌써 수많은 몰매를 맞아 의식을 거의 잃은 성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성재의 몸이 잠깐 부르르 떨더니 이내 축 쳐졌다. 성재의 몸은 온통 피로 물들었다.
"우리의 실수요. 그가 한국인이라는 걸 모르고 그렇게 중요한 자리까지 오르는 것을 보고만 있었던 우리의 실수요. 허나, 실수는 이번 뿐. 한국인들이 다시는 그런 꿈도 못 꿀 정도로 이번에 확실히 밟아버릴 것이오"
뒤에서 팔짱을 끼고 성재를 노려보고 있던 와타나베가 입을 열었다. 야마모도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아직도 씩씩 성을 냈다. 야마모도가 양동이의 물을 성재에게 끼얹었다. 성재가 이미 부을대로 부어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분하다"
성재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무엇이 어째? 이 조센진 봐라"
"이제 네 놈들을 무너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멈추다니"
야마모도가 성재의 뺨을 후렸다. 성재의 입에서 피가 묻은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성재가 야마모도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직, 좋아하지 마라. 너희들의 음모는 이제 밝혀질 것이다. 한국을 깔보지 마라. 니 놈들에게 그렇게 쉽게 먹힐 우리들이 아니다. 내가 기껏, 딜링으로 네놈들 손해주는 걸로 만족할 줄 알았느냐? 우리를 우습게 보지 말아라. 네 놈들이 지금은 그깟 돈 믿고 까불지만 언젠가 무너질 것이다. 두고 보자. 으- 정말, 분하다"
야마모도의 화가 머리 끝까지 뻗쳤다. 각목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성재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찔했다. 눈앞이 하얗게 펼쳐졌다. 지웅아-. 지웅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러나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진 않는다. 지웅아, 아저씨야-. 다시 한 번 불러본다. 저기서 지웅이 다가오는 것 같다. 그러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손을 내밀었다. 어느새 지웅은 없다. 순간, 어려서부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성재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아버지-. 아버지 역시 아무 대답이 없다. 자신이 보인다. 조금씩, 일본인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 많은 일본인들이 자신을 칭찬하고 있다. 그런 자신은 뒤돌아서서 주먹을 쥐고 있다. 현영이 대통령을 모시고 자신을 찾아왔다. 선생님. 고생하셨어요. 이젠 아무 걱정 없어요. 대한민국은 이제 강해요. 절대로 남에게 고개숙이며 살지 않아요. 웃었다. 대통령이 자신을 끌어안는다. 수고했소, 그리고 고맙소. 이번엔 눈물이 흐른다. 눈앞이 점점 어두워진다. 발버둥을 쳐본다. 누가 붙잡고 있는 느낌이다. 어둡다. 이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 서
기정은 시끄러운 TV 소리에 잠이 깼다. 잠깐 TV를 보다가 잠든 것이었다. 기지개를 주욱 펴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오후 여섯시를 지나고 있었다. 서둘러 성재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다. 이번엔 여자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프론트에 연락해 자신을 찾는 전화가 없었는지 물었다. 없다고 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한 잔 따라마셨다. TV는 여전히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기정은 침대에 걸터앉아 TV를 쳐다봤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이라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하는 순간 기정의 눈이 번쩍였다. 자막에 한문으로 `사이또 - 韓國人 高成財 변사채로 발견'이라고 씌어있기 때문이었다. 기정은 TV가까이로 다가갔다. 비록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순 없지만 간간이 섞여나오는 한문자막을 읽기 위해서였다.
기사가 끝나고 다른 화면이 나오자 기정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건,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야...... 서둘러 옷을 챙겨입었다. 오후에 은행으로 전화를 걸어 자신의 위치를 남긴 것이 마음에 걸렸다. 방을 뛰쳐나왔다. 엘리베이터는 6층을 지나 7층, 8층으로 오르고 있었다. 자신이 있는 곳은 5층. 뛰었다. 비상구를 통해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프론트에 체크아웃을 하기 위해 다가갔다. 벌써 이마엔 땀이 송송 맺혀있다.
"벌써 가시게요?"
직원이 체크아웃을 하는 척 자꾸만 시간을 끈다. 기정은 열쇠를 내던지다시피하고 곧장 호텔 정문을 박차고 나갔다. 검정색 양복을 입슨 사람 예닐곱이 동시에 정문으로 들어오고 있다. 순간 기정의 호흡이 멈췄다.
사내들이 기정을 쏘아보았다.
"하지메마시데"
기정이 살살 웃으며 말을 하고는 그 속을 비집고 나왔다. 기정 자신은 사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내들이 프론트로 다가가자 직원이 기정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모습이 보였다. 기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사내들이 다시 호텔에서 뛰어나왔다. 태어나 그렇게 열심히 뛰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기정은 죽어라 뛰었다.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사내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골목 모퉁이를 돌자 택시가 한 대 서 있었다. 볼것도 없이 택시에 올라탔다.
"공항, 공항!"
기정이 급하게 외쳤다. 택시 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기정의 등 위로 식은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412번, 면회"
간수가 지웅의 번호를 불렀다. 순간 지웅의 몸이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412번.
지웅의 죄수번호. 이젠 그번호가 꽤 익숙하다. 감옥에 수감된 후 거의 매일 면회를 왔다. 누굴까. 현영이 아니면 태림이겠지. 하지만, 생각해보니 지금은 늦은 저녁이다. 게다가 오전엔 윤희도 다녀갔다. 지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면회실로 향했다.
지웅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처음보는 얼굴. 지웅의 발걸음이 순간 멎었다.
태경이 일어나 반가이 지웅을 맞았다.
"안녕하세요. 황태경입니다"
황태경? 처음 듣는 이름이다. 지웅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이전 지웅씨 사건을 맡게 됐습니다. 협조 좀 부탁드릴게요. 주위의 시선이 워낙 부담스러워 가지구요"
태경은 점잔은 말투로 엄살을 부렸다. 지웅이 납득이 안된다는 표정으로 태경을 바라보았다.
"법무부 장관님이 부탁을 하셔가지구요. 어쨌든 시간이 없으니까 서둘러야겠어요"
태경은 지웅을 보고 나서도 다소 벅차다는 느낌을 가졌다. 태림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쉽게 가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지웅씨가 딜링을 할 때의 실적이 충분한 살인동기를 가질 만한 근거를 제공하는데, 그부분에 대해서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죠?"
태경이 가져온 자료를 대략 훑어보며 물었다. 지웅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제가 좀 심했다면 심했죠. 일본이.... 싫어요"
그 이상의 답변은 없었다. 태경은 지웅이 혹시나 다른 얘기를 꺼낼까 싶어 가만히 기다려본다. 그러나 다른 말은 없다.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그런 말은...... 불리할 뿐이다. 법정에서 그런 말을 했다간 5년도 10년으로 늘어날 판이다.
지웅이란 사람, 보기보단 완고한 면이 있다. 절대로 남 앞에서 굽실거릴 사람이 아니다. 힘들어지겠군. 지웅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사람 꽤 맘에 든다. 당당하다. 지조가 있다. 게다가 잠깐 비친 미소엔 어기지 못할 자신감이 배어 있다. 어떻게든 이기게 해주고 싶다.
"그래요. 그리고 일가친척이라곤 아무도 없는 것 같던데. 정말 그래요?"
"예"
다시 한 번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보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족이라는 말을 꺼내본 적이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지만, 개의치 않는다. 신경쓰면, 그만큼 쓸쓸해지기 마련.
태경의 표정이 사뭇 신중하다. 지웅에겐 그런 모습이 조금이나마 미덥게도 느껴졌다.
"지금, 지웅씨 입장이 너무 불리해요. 은행 고용변호사로부터 대충 듣긴 했는데 지웅씨를 옹호할 단서가 없더군요. 게다가 그동안의 지웅씨 행적도 그렇고"
지웅이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어쩔 수 있냐는 의미였다.
"그런데...."
태경의 눈초리가 빛났다. 품안에서 붉은 천주머니를 꺼냈다. 마시이가 자신의 배를 가른 단도가 들어있던 붉은 천주머니.
"본 적 있어요?"
지웅이 처음보는 물건이라는 듯 고개를 젓는다.
"지웅씨 오피스텔 정원에서 주웠어요. 이 글씨, 무슨 글잔지 알아요?"
태경이 천주머니 중앙에 검은 색으로 강렬하게 씌인 글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진하고, 굵게 `혼(魂)' 이라는 글자가 일본식 약자로 씌어 있었다.
"일본식 약자군요. 이게 제 오피스텔 아래뜰에 떨어져 있었다구요?"
"예, 제 생각은 마시이라는 사람이 이 주머니에 칼을 보관하고 있었을 거 같아요"
"글쎄요. 전 처음 보는 물건인데"
이 사람 여전히 태연자약하다. 어쩌면 이 주머니가 자신의 무죄를 밝혀줄 수도 있다는 걸 알텐데, 철저히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 자존심이 여간 강한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는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전히 맘에 든다.
"그래요, 어쨌든 지문 감식을 해보면 알겠죠. 내일 국과수에 맡길거니까......"
태경도 서두를 것 없다는 듯, 주머니를 다시 품안에 집어넣는다.
"좋은 친구를 두었더군요. 절대로 지웅씨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 않으려 들더라니까요. 아까 윤태림씨를 만났어요. 부럽기까지......"
그 때였다. 누군가 면회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기정이었다. 온 몸에 땀을 뒤집어 쓰고 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기정아"
태경이 재빨리 일어나 기정을 부축했다. 기정의 호흡이 가쁘다. 태경이 천천히 기정을 의자에 앉혔다. 기정이 손을 가슴에 얹고 숨을 가다듬었다.
"무슨 일이야?"
기정의 호흡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태경이 물었다. 기정이 두려운 표정으로 말했다.
"죽었어"
"무슨 소리야?"
"죽었어, 고성재 그 사람. 오늘 죽었어"
"뭐?"
태경이 순간 지웅의 표정을 훔쳤다. 가슴이 내려앉은 모습. 총에라도 한 방 맞은 표정이다. 멍하니 얼굴이 움직이지 않는다.
"고성재라는 사람. 무슨 은행장이었어. 자리에 없길래 내가 있는 호텔 번호를 남겼어. 오후 늦게 TV를 보는데......."
기정이 저녁에 있었던 일을 남김없이 얘기했다. 태경이 쓰디쓴 표정을 지었다. 다시 한번 지웅을 흘깃 쳐다보았다.
"괜찮아요?"
태경이 뭐라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러나 들리지 않는다. 아저씨-. 방금 들어온 사람이 그랬다. 아저씨가 돌아가셨다고. 머리가 띵 하니 울린다. 뭐라고? 아저씨가 돌아가셨다고? 아저씨가 돌아가셨다고?
왜? 왜, 벌써! 분명히 자신과 약속했지 않은가? 웃기 전에는 그만두지 않겠다고. 아저씨의 아버지와,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승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때까지 그만두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않은가? 그런데, 왜 벌써......!
지웅의 고개가 떨궈진다. 어깨도 따라 밑으로 축 쳐진다. 망연자실. 적어도 태경과 기정의 눈에 지웅은 그렇게 보인다.
목 안이 부르르 떨린다. 더불어 온 몸이 부르르 떨린다. 이빨을 깨물었다.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아 입술을 깨물어 본다.
울지 않는다. 좌절하지도 않는다. 알고 있다. 아저씨가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 뭘 바라고 계셨는지. 눈물은 나중에 흘려도 충분하다. 죽을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고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슬픔의 눈물이든, 기쁨의 눈물이든 그 때 흘려도 충분하다.
하지만, 지금은 감정이 절제되지 않는다. 투명한 빛이 지웅의 머리를 지그재그로 훑고 지나간다. 그리곤 눈앞을 하얗게 물들인다.
태경과 기정은 가만히 지웅의 눈치를 살폈다. 둘 다, 지금은 쉽게 말을 꺼낼 수 없는 상황이란 걸 알고있었다. 그냥 그렇게 지켜봐 주었다. 마음속 깊이 오열하고 있는 지웅을 그렇게 지켜봐 주고 있었다.
협공(挾攻)
해양상을 만나고 나오는 야마모도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드리워졌다. 당초 금이타조의 회원이 아니었던 해양상 히노쿠마가 야마모도를 불렀을 땐 별 생각없이 찾아갔었다. 와타나베에게 얘기를 들었다는 그 말만 없었어도 히노쿠마의 말을 무시했을 지도 모른다. 이제 야마모도는 금이타조의 행동대장으로서 일본 정계의 지원을 한몸에 받는 입장이 된 것이다. 다시 한 번 히노쿠마와의 대화를 떠올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발할 뿐이다. 점점 한국이 일본의 손아귀에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와타나베 선생으로부터 얘기 많이 들었소. 일본을 위해 가장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라고요"
히노쿠마는 처음부터 야마모도에게 공손하게 대했다.
"과찬이십니다. 누구나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듣던대로, 호인이십니다"
야마모도는 히노쿠마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잘룩한 키에, 졸린듯한 눈매, 게다가 볼품없이 튀어나온 배가 처음부터 만만한 생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야마모도가 다소 건방진 말투로 물었다. 제 아무리 해양상이라도 현재의 자신에겐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금이타조라 하셨지요?"
이자도, 한국을 멸망시키는데 가담하고 싶어하는군. 야마모도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예. 대일본제국의 막강한 경제력으로 한국을 집어삼키고자 합니다. 해양상께서는 그부분에 대해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계신지......"
여전히 히노쿠마를 업신여기는 듯한 태도. 하지만 히노쿠마도 야마모도의 태도에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저희들이 준비하고 있는 게 작은 도움이나마 될까 해서요.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기껏해야 뭘 할 수 있으려고. 야마모도는 내키지 않았지만 웃으며 대답했다. 실세인 와타나베가 연결한 사람이 아닌가.
"말씀해 보세요. 뭔가 좋은 계획이라도 가지고 계신 것 같은데"
히노쿠마가 뜸을 들이고 입을 열었다.
"다케시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오?"
갑자기 다케시마라니...... 해양자위대라도 출전시켜 다케시마를 탈취하려는 것인가? 사실, 야마모도는 이때까지도 히노쿠마를 만나고 있는 것이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케시마 부근의 어획량이 풍부하다는 건 잘 아실테죠?"
야마모도가 자세를 고쳐잡고 히노쿠마를 쳐다보았다.
"다케시마설의 본질적 의도는 그 부근의 풍부한 어획량을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한국이 다케시마수비대를 파견해 지키고 있는 까닭도 풍부한 어획량 때문이고요. 사실 그 좁은 섬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케시마 부근은 황금 어장입니다"
히노쿠마가 잠시 말을 멈췄다. 야마모도는 더욱 적극적으로 히노쿠마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다케시마 못지않게 현해탄 역시 황금어장입니다. 한국의 동해안 부분 역시 모두가 황금어장이구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야마모도는 히노쿠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회유책을 쓰는 겁니다. 지금 한국에 뿌려놓은 자금을 회수하고 계시죠? 게다가 수출을 금지시키고 있고. 그 규모를 조금만 완화시키십시오"
무슨 뜬금 없는 소리란 말인가? 야마모도는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 조건으로 한일 어업협정을 체결하는 겁니다. 배타적 경제수역을 지정해 더 이상 한국의 어선이 일본해협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거죠. 그리고 한국 어선의 저자망과 통발, 쌍끌이 어업을 차단하는 겁니다"
그 말, 사실 야마모도의 가슴에 그리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순간 히노쿠마의 말이 야마모도를 그대로 주저앉혔다.
"먼저, 한국의 해안을 빼앗는 겁니다. 그리고, 금이타조 회원들의 뜻대로 조금씩, 한국을 집어 삼키는 거죠"
야마모도가 히노쿠마를 쳐다보았다. 웃고 있다. 여태껏 몰랐는데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음흉한 면이 있다. 야마모도가 그 모습을 보고 따라 웃는다.
"가능합니까?"
"물론입니다. 자금회수를 중단시키고, 수출 금지를 완화시켜주면 한국은 얼씨구나 하며 달려들 것입니다. 게다가 한국의 해양수산부장관은 충청북도 출신입니다. 바다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해양수산부장관을 맡고 있는 것이죠. 이처럼 좋은 기회는 없습니다. 저들은 바다의 중요성을 모릅니다. 고기가 항상 그물에 걸려들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저들에게 얼마나 경제적 타격을 주겠습니까?"
"고기를 못 잡는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은 불과 6년 전에 저자망이라는 어구를 개발했고, 어선도 대부분 그것으로 바꿨습니다. 어선의 수명이 30년이라고 할 때, 시작하자마자 사장되어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게다가 관련업체의 연쇄부도 또한 눈에 선한 일입니다. 중소 수리조선업체, 그물제조업체, 고기상자 제조업체, 어선에 기름과 부식을 공급하는 업체 등이 문을 닫는 현상을 초래할 것입니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여 있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한 면을, 그것도 가장 풍부한 자원이 쌓여 있는 바다를 탈취하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에겐 IMF보다 더 무서운 게 한일 어업협정이 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수개월이 지나봐야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겠죠"
야마모도는 감탄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사람, 스무명의 내노라 하는 인물들에 못지 않는다. 오히려 더 무섭기까지 하다.
"사실, 1965년에 한일 어업협정이 체결되기 이전 이승만라인시절, 한국 연안에서 어업을 하다가 나포된 우리 어선이 400여척에 이릅니다. 선원들은 부산에서 2-3 개월씩 억류되기까지 했었습니다. 저 역시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절치부심 30여년을 준비해 왔습니다. 저에게 한일어업협정은 한국 침탈 동시에 복수이기도 합니다"
야마모도는 더 이상 히노쿠마에게 우월감을 가질 수 없었다. 와타나베가 왜 히노쿠마를 만나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흐흐흐. 자꾸 웃음이 나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야마모도는 부풀어오르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53년 전의 복수. 그리고 또다른 30년 전의 복수. 그리고 침략.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수 있는 것인가? 오히려 겁이 나기도 하다.
야마모도가 집에 도착해보니 겐죠가 기다리고 있었다. 웃음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징그러운 사내. 하지만 겐죠만큼 편하고 미덥게 부려먹을 수 있는 사람도 드물다. 돈. 오로지 돈만 넉넉히 챙겨주면 어떤 일이든 마다 않고 해준다. 게다가 한국말도 제법 한다. 한국에 있으면 누가 봐도 한국사람으로 알아 본다.
겐죠도 죽은 마시이의 반만큼이라도 대일본제국을 위할 마음이 있다면 일하기가 한결 수월할텐데...... 하지만 야마모도는 그런 욕심까진 가지지 않는다. 겐죠라는 사람. 돈만 챙겨주면 일본을 위해 투신자살이라도 할지도 모르는 위인이다. 돈만 챙겨주면 애국심 이상으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야마모도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겐죠가 기다렸다는 듯, 예의 그 웃음을 짓는다.
"선생께서 예전에 말씀하셨던 물건을 손에 넣었습니다"
겐죠가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냈다. 겉에는 태극기 스티커가 붙어 있는, 마시이가 지웅에 대한 분노를 키웠던 바로 그 다이어리.
야마모도는 마시이에게 얘기를 들었었다. 그 다이어리 안에 나지웅이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가진 이유가 들어 있었다고. 나지웅이란 자를 당장이라도 죽여보리고 싶을 정도로 불쾌한 내용이 들어 있다고. 그 다이어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겐죠를 시킨 것이다. 이미 나지웅의 담당 검사는 손에 넣었다. 이젠 결정적인 증거까지 손에 넣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마모도는 다이어리에 붙어 있는 태극기를 떼어버리려 했다. 겐죠가 만류하지 않았으면 다이어리를 찢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마시이가 죽은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신경에 거슬렸다. 한국 말은 잘 모르지만, 저 다이어리 안에 무슨 내용이 씌어져 있는지 읽을 수는 없지만, 겉만 봐도 역겹다. 태극기라니. 당장에라도 부엌에서 칼을 가져와 갈기갈기 찢어보리고 싶었다.
겐죠가 다이어리를 소중히 챙겨서 가방에 집어 넣고는 거래를 시작했다.
"이거 구하느라고 힘 좀 들었습니다. 게다가 방검사 그자식 왜그리 돈을 밝히던지 일단 선생님이 주신 돈은 모두 그치한테 넘겼습니다. 제 수고비까지도요. 이번엔 좀 신경 좀 써주셔야 겠습니다"
야마모도가 방에 들어가서 500만엔짜리 수표를 가지고 나왔다. 겐죠의 입에 함박웃음이 폈다.
"내일 모레면 재판이 시작됩니다. 선생님 원하시는 대로 나지웅이란 녀석, 교도소 빠져나오기가 쉽진 않을 겁니다. 아무튼 재판이 끝나면 찾아뵙겠습니다"
겐죠가 마지막 흥정을 남기고 야마모도의 집을 나섰다. 야마모도는 소파에 앉아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자신의 자존심이나 국가의 대의명분이나,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자리를 잡게 된다. 마시이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수치를 안긴 녀셕. 끝난다. 나지웅이나, 한국이나 머지 않아 막을 내릴 것이다.
재야(在野)
현영은 급기야 연예국으로 강등당했다. 열흘동안의 행방불명에 대한 대가였다. 연예국으로의 차출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현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퇴출 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나마 현영이 함께 일하게 된 프로듀서는 방송 경격 17년차의 베테랑 노PD였다. 그동안 줄곧 주말프로그램을 맡아 타 방송국에게 시청률 선두를 빼앗기지 않을 정도로 실력있는 프로듀서였다. 그 밑의 스탭진들도 그와 벌써 10여년을 함께 발맞추온 실력가들이었다.
오전 회의시간에 처음으로 현영은 팀에 합류했다. 생각보단 친절하게 자신을 맞아주는 것 같았다. 교양국에서 있었던 일을 모르는 건지, 알면서 모르는 척 해주는 건지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현영씨도 들어오고 했으니까 더 잘 해 보자구. 어쨌든 이참에 코너를 좀 바꿔야겠어. 새로 시작한지 3개월밖에 안 됐는데 벌써부터 식상하다는 말이 나오면 안되지. 다들, 내일까지 아이디어 제출해보라구. 그만"
노PD가 부드러운 어조로 회의를 끝냈다. 사람들이 서둘러 하나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현영도 수첩을 챙겨서 일어서려고 할 때 노PD가 다가와 현영의 등을 두드렸다.
"현영씨, 능력 있다는 얘기는 입사때부터 들어서 알고 있어. 같이 한 번 일해보고 싶었는데 아주 잘됐군. 머리 한 번 쥐어짜봐요. 참신한걸로"
현영이 감사의 표시로 공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연예국. 자시의 적성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보기로 했다. 불과 1년 전만 했더라고 차라리 방송국을 그만 두었으면 그만 뒀지 연예국으로는 절대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시청자들의 눈을 속이며 억지 웃음을 자아내는 모습이 현영의 눈에는 못마땅하게 비췄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새로운 아이템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남을 괴롭혀가며 웃음을 주던 오락프로에서 탈피해 남을 도와주는 모습으로, 어려운 일을 대신 해주는 모습으로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그리고 마음까지도 즐겁게 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 또한 IMF의 영향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현영은 그 부분에 희망을 걸었다. 어쩌면, 요즘같이 상막한 시대엔 그런 프로그램이 더욱 필요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방검사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종로의 커피숍에 들어섰다. 이틀 전 겐죠를 만났던 바로 그 커피숍. 그리고 같은 자리에 겐죠가 앉아있었다.
"무슨 일이요?"
방검사의 음성이 초조한 빛을 띄었다. 아무래도 겐죠에게 은밀히 제공받은 돈과 술자리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게다가 겐죠, 이사람 웃는 모양이 마치 흡혈귀같다. 어쨌든 한 번 손을 잡았기 때문에 다른 소리를 할 수는 없는 법. 마음은 불편하지만 조심조심하며 겐죠를 만나러 나왔다.
"잘 되고 계시죠?"
겐죠는 초장부터 방검사의 앞으로 봉투를 내민다. 이런 류의 사람들한테는 다른 것 볼 것 없이 돈으로 밀어부치면 넘어오게 되어 있다. 방검사는 머뭇거림도 없이 봉투를 자신의 품안으로 집어 넣는다.
"예, 걱정 마세요"
방검사도 겐죠 앞에서 음흉하게 웃어보인다. 까짓거 자신은 어차피 재판에만 신경쓰면 그만이다. 게다가 이사람은 지웅과도 죽은 마시이와도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 아닌가? 재판 결과가 나지웅쪽으로 기울어도 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서희가 방검사님을 무척이나 보고싶어합니다"
서희...... 그렇지, 서희가 있다. 서희를 위해서라도 이 재판은 이겨야 한다. 승소한 자신을 향해 자랑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서희를 떠올려보았다. 투지가 생긴다.
"그래요?"
방검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이미 벌겋게 상기된 표정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겐죠가 한 술 더 떴다.
"서희가 이젠 술집에 나가기 싫다고 하더군요. 방검사님을 만난 후로 애가 딴사람이 된 거 같더라니까요. 방검사님만 받아주시면 결혼하고 싶다고까지 하던걸요?"
허허! 방검사의 얼굴이 어쩔줄 몰라한다. 결혼이라니. 내가, 매력이 있긴 하지. 게다가 능력도 출중하고.
방검사는 계속 어색한 웃음만 터뜨린다. 더욱 벌개진 얼굴.
겐죠의 얼굴에 만족한 표정이 역력하다. 멍청한 조센진-
"방검사님"
이번엔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방검사가 낼름 받아 봉투 안을 확인한다. 돈이 아니어서인가?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이다. 겐죠가 몸을 방검사쪽으로 기울였다.
"그 안에 나지웅을 제거시킬만한 단서가 들어있습니다"
겐죠도, 방검사도 음흉하게 웃는다. 동상이몽. 그러나 서로의 목적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는다. 겐죠는 겐죠 나름대로 지웅의 파멸을, 방검사는 자신의 품에 안기는 서희를, 오직 자신의 목적에만 집중할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방검사가 겐죠의 계락에 놀아나고 있다는것이라고나 할까.
방검사가 봉투 안의 물건을 꺼내려고 하자 겐죠가 만류했다.
"천천히 보십시오. 부디 이기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서희한테도 안부를 전하지요"
겐죠가 다시 한 번 서희에 대해 못을 박는다. 이제 방검사는 어떻게든 이기려고 할 것이다. 게다가 중요한 단서까지 넘겼다. 최소한 무기징역, 겐죠의 뇌리를 스치는 단어였다.
"전, 그렇게 못합니다"
현영이 노PD를 노려보고 있다. 노PD 역시 현영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쏘아본다.
"뭘, 못하겠다는 거야?"
현영의 눈에 불이 일었다.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인줄은 몰랐다.
현영은 오후가 되자 노PD와 함께 위성TV를 시청했다. 현영은 노PD가 자료라도 얻으려고 하는가보다 하며 곁에서 함께 지켜보았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색이었다. 그리고 죄다가 오락프로그램이었다. 현영은 차츰 의구심을 가졌다.
일본 프로 베끼기가 이슈화 된 것은 이미 한두해의 일이 아니었다. 한국의 잘나가는 오락프로들은 죄다가 일본 방송을 베낀 것이었다. 아이디어를 따 온 것뿐이라는 변명도 해 봤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구성 자체를 베낀 프로그램도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잦은 보도프로그램이 나가고 방송국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불과 몇 달전에도 현영은 그러한 기사를 다룬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막상 연예국에 와보니 아예 모든 정보를 일본 프로그램에서 구하고 있다. 이건, 아니었다. 자신이 알기론 그건 PD로서의 자세가 아니었다.
지금 노PD와 싸우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다. 두어시간을 시청하던 노PD는 기타노 다케시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더니 메모지에 열심히 따라 적었다. 현영이 고개 너머로 보니 프로그램 중 나오는 대사, 옷차림, 무대장치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까지는 그저 참고만 하려고 하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온 노PD의 말은 현영의 욱하는 성질을 터뜨리고 말았다.
"현영씨, 이번주 무대 이렇게 가고, 꽁트는 말좀 바꿔가지고 가라고 해. 코디한테 옷도 준비시키고"
노PD는 종이뭉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현영의 면상에 내밀었다. 현영이 종이를 받지 않자 고개를 돌려보았다. 현영의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로 노PD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그표정은"
"취소하십시오"
단호했다.
"뭘 취소해 임마!"
노PD도 갑작스런 현영의 반항에 부아가 치밀었다. 현영이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취소하십시오!"
더욱 분노에 찬 목소리. 주먹이 부르르 떨고 있다. 노PD도 그냥 물러서진 않았다.
"뭘 취소해 이자식아! 방송 하루이틀 해먹는 것도 아니고 별 희한한 놈을 다 보겠네. 얌마. 너 혼자 방송해라. 너 혼자 방송해. 건방진 자식, 물에 빠진 놈 구해줬더니 아예 어른을 가르치려고 들어?"
"IMF입니다"
현영은 충분히 자신을 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IMF가 뭘 어쨌다고"
"이미, 일본에게 충분히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노PD는 현영의 말에 어이없는 듯 빤히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
"한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의 우유값이 없어서 도둑질을 하는 세상입니다. 또다시 해외로 아이를 입양시키고 있습니다. 실직에, 가족 부양의 어려움에 목숨을 끊는 가장이 있습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동질감을 가지십시오. 적어도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있는겁니까? 단지 무능해서, 운이 없어서 그랬을 뿐입니까? 36년을 유린당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육체와 정신이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PD라는 소릴 듣는 분이 고작 한다는게 남의것 베끼는 게 전부입니까? 국민을 아픔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나라의 오락을 따오는 게 PD라는 직업입니까? 차라리 일본인에게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가락을 핥으십시오"
"이자식이!"
노PD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뭉치가 현영의 머리를 내리치고는 바닥으로 흩어졌다.
"지랄하지마 이자식아. 프로그램만 재밌으면 됐지 뭐가 불만이야? 표절, 표절 하지만 그런 놈들도 베낀거 보면서 다같이 즐거워하긴 마찬가지야. 누가 누굴 욕해? 뭐 발가락을 핥아? 도대체 일본이 뭘 얼마나 잘못했길래 그따위로 말하는 거야? 너같이 말하는 놈들, 지 주제파악도 못하고 나불거리는데, 웃기지들 말라......웁!"
노PD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바닥을 뒹굴었다. 현영의 주먹이 말보다 먼저 나온 것이었다. 노PD는 고통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신음소리를 내며 좌우로 뒹굴었다. 얼굴을 가린 손마디 사이로 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현영은 묵묵히 연예국 사무실을 나왔다. 필요 없다. 저런 부류의 사람들하고 인연을 끊는 것쯤 팔꿈치에 붙은 파리를 쫓아버렸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직업......? 아직 젊다. 뭔들 못할까? 저렇게 구린 사람하고 일하기에 현영은 아직 피가 뜨겁다. 그리고...... 지웅이 있다. 성재아저씨가 있다. 자신의 인생이란 애초부터 갖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현영 자신은 그에 비하면 복에 겨운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까짓거, 아직은 세상에 비유를 맞춰갈만큼 교활하지 못하다. 몇 년 잘 참았나 싶더니 그놈의 성미, 머리보다 주먹이 먼저 반응이 오니. 주먹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꽤 쓸만하군. 그 걸레같은 주둥아리를 한방에 보내버렸으니.
후련했다. 아쉬움도, 미련도 없었다. 저 하늘이 아직까진 자신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출정전야(出廷前夜)
태경과 기정, 수연이 내일 있을 지웅의 첫 공판을 앞두고 마무리 회의를 하고 있다. 고작 3일을 준비해서 전 국민이 주시하고 있는 법정에 서는 것이다.
밤 11시. 이미 꽤 늦은 시간이지만 세사람의 눈동자는 맑게 빛나고 있었다. 급한김에 남산의 타워호텔을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한적하고 주위에 신경 쓸 일이 별로 없어 작업을 하기엔 딱 좋았다.
태경이 턱을 깍지낀 손 위에 얹고 말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함정수사였다 이거지?"
"그래. 난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어. 고성재의 죽음이나 나지웅의 살인사건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야. 뒤에는 커다란 음모가 숨어있어. 최소한 국가라는 형체로 말이야"
기정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수연도 기정의 의견을 거들었다.
"나도 오늘 아침에 일본 위성TV로 고성재씨 기사 봤어. 그 모습, 분명 장시간동안 구타를 당해 숨진 모습이야. 게다가 일본에서는 거의 수사가 진행되지 않는 모양이야. 아무리 한국인이라는 게 밝혀졌지만 외견상이라도 그렇게 처리할 수 없는 문제야. 기정이 주장이 맞아. 이건 함정수사야. 올가미라구"
"일단은 나지웅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 없다는 거잖아. 그럼 올가미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지?"
기정이 말했다.
"일단은 나지웅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걸 밝혀내야돼. 그리고 만약 정말 나지웅이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 때 가서 올가미라는 걸 밝혀야 하는 거구"
올가미론.
올가미론이란 함정수사에 의해 범의(犯意)가 유발되어 범죄를 저지른 자의 죄책을 부정하는 논거로서 미국에서 전개되어왔다. 본래 범죄를 방지해야 할 국가가 올가미를 설치해서 범죄의 의도가 없던 자가 범행을 저지르도록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자국 안에서 마약사범을 단속할 때 씌이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번엔 대국(對國) 올가미를 씌우고 있다. 아무래도 태경은 그런 의혹을 뿌리칠 수가 없다. 지웅이 살인을 저질렀건, 저지르지 않았건 간에 분명 함정에 빠진 것만은 충분히 확신할 수 있었다.
"저쪽 동향은 어때?"
태경이 방검사를 의식하며 물었다. 수연이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자신감에 차있는 건 확실한 것 같아. 저쪽도 중요한 단서가 있는 모양인데, 영 감을 못잡겠어. 방검사란 사람. 평소엔 우유부단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래. 승소율도 형편 없고. 그래서 방검사를 담당 검사로 내정했다는 소문도 있어. 그런데 다른때와는 달리 굉장한 자신감에 차있어"
"방검사가 유능하든 무능하든 우린 일단은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야돼. 주머니는 어떻게 됐어? 내일 오전까진 가능한거야?"
"잘은 몰라. 최대한 빨리 해달라고 부탁은 해 놓았는데, 시간 내에 결과가 나올지는 확실치 않아"
기정이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는 듯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태경과 수연이 동시에 기정을 쳐다보았다.
"수연이 너, 사건 보관물 확인해 봤니?"
"아니?"
"그럼 내일 아침에 바로 가서 확인해봐. 칼이 있었을 거 아니야. 그 주머니에 혼(魂)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잖아. 그렇다면 칼에도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을거야. 그렇다면 처음부터 칼의 주인공은 지웅이 아니라는 걸 밝혀낼 수도 있잖아?"
태경이 기정의 말을 듣고는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렇게 쉽지만은 않아. 일단은 주머니에서 마시이의 지문이 발견되야해. 그래야 아구가 맞지"
"어쨌든 내일이 돼야 확실한 단서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잖아. 바로 내일이 재판인데. 기정이가 조금만 일찍 서둘렀더라면 좋았을텐데"
수연은 준비기간이 짧은 것에 대해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그렇다고 기정을 탓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기정 역시 사건이 터지자마자 태경에게 날아온 것 또한 수연은 잘 알고 있었다.
태경이 몸이라도 풀 겸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쪽으로 걸어갔다. 기정이 옆으로 다가왔다. 태경이 담배를 내밀었다. 그리곤 자신도 입에 물었다. 창문을 열고 불을 붙였다. 연기를 길게 내뿜어보았다. 연기는 어둠속으로 곧장 사라졌다.
초가을의 밤공기. 얼마만에 맡아보는 서울의 밤하늘인지 모른다. 상쾌하다. 캘리포니아에서 맛보던 밤하늘과는 사뭇 다르다. 역시 이곳이 좋다. 시각적으로는 캘리포니아의 별들이, 은하수가 더욱 찬란했지만 지금처럼 포근하진 못했다. 이런 것도 같잖은 애국심이랄까? 태경은 피식 웃는다.
"좋지?"
기정이 태경의 마음을 읽었는지 여유롭게 묻는다. 태경 역시 여유롭게 답했다.
"그래, 좋다"
"세계 여러나라 다녀봤지만 그래도 여기가 제일 좋더라"
초가을 소슬바람이 태경과 지웅의 뺨을 훑고 지나간다. 태경의 눈이 반쯤 감긴다. 바람이 좋다.
그런 태경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한참이나 지나서 기정이 묻는다.
"자신 있어?"
태경이 여전히 반쯤 감긴 눈으로 고개를 잘래잘래 흔든다.
"그런 녀석이 그렇게 여유를 부려?"
"져도 좋고, 이겨도 좋아"
"무슨 소리야?"
"이런 승부 해보는 것 자체가 맘에 들어. 나지웅이란 친구 멋진 사람이야. 불쌍하기도 하고"
태경은 오전에 지웅을 면회하고 자초지종을 들은 것이다.
기정이 가만히 태경의 얼굴을 바라본다. 아직은 태경의 여유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
"언젠가 너한테 이런 말을 했었지?"
기정은 가만히 태경의 다음 얘기를 기다린다.
"정말 중요한 재판을 치루면서, 법정에서 죽고싶다고"
"그거야, 학생때 일이잖아"
"바로, 지금 그 기분이야"
"싱거운 놈"
녀석, 그런 녀석이 어떻게 5년이나 죽어지냈을까.
"난, 솔직히 두렵다"
"뭐가?"
"얘기했잖아, 일본에서 죽을 뻔 했다구. 어제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한다. 재판이 끝나도 사건은 계속 이어질거야"
침묵.
기정도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사실, 자신도 설레이긴 마찬가지다. 5년만의 법정 출두.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내일이면 재판이다. 태경의 말처럼 재판,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 속 어딘가에서 투지가 솟는다. 어떤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는다. 기정 자신도 태경과 마찬가지로 법과 함께 살아온 몸이 아니던가.
"와서 라면들 먹어라"
수연이 어느새 밤참을 준비한 모양이다. 초가을의 유희는 이쯤에서 덮어둬야겠다고 두사람 모두 생각했다. 태경과 기정은 서로를 힐끗 쳐다보더니 뒤질새라 라면 앞으로 뛰어갔다. 10년 전, 시험공부를 하면서 함께 했던 라면. 여전히 세사람의 간식으론 최고의 메뉴를 차지했다.
"소주는 없어?"
기정이 수연의 눈치를 보며 묻는다. 학창시절의 습관이 쉽게 잊혀지진 않는 모양이다. 수연이 손을 뒤로하더니 진로 한 병을 꺼내들었다.
"짜잔-"
"역시, 우리 챙기는 건 수연이밖에 없다니까"
기정의 얼굴이 싱글벙글이다. 태경도 입맛을 다셨다.
그리곤 종이컵에 한잔씩 소주를 따랐다. 세 개의 종이컵에 딱 찼다.
"이거 한잔씩만 먹기다. 진짜 술은 내일 누나가 살테니까"
수연이 태경과 기정에게 일러둔다. 딱 한잔이라고 시작해서 시험을 망친게 어디 한두번이라야지.
"그래, 진짜 술은 내일 마시고, 오랜만에 한 잔 마시자. 단, 정말 이거 딱 한잔만이다"
태경이 다시 강조했다. 하기사 더 마실래야 마실 상황도 아니다.
짧고, 굵게. 다들 한모금에 소주를 털어 넣었다. 짜릿한 모습들. 게다가 태경과 수연에게는 5년여만의 소주가 아닌가.
"이래서 안 먹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아쉬운 모양이다. 기정이 입맛을 다져본다. 한 잔만 먹고 마는 건 어쩌면 고통일 수도 있었다. 모두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렇다고 어느것 하나 흐트러지진 않았다. 내일이 있다. 누구라 말할 것 없이 세사람 모두에게 너무도 중요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지법
"그래서 국장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나와버렸단 말이야?"
태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현영을 쳐다보았다. 현영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도 참, 대책 없는 놈이라니까"
현영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조금 더 참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태림의 짧은 한숨에 묻어나온다.
"임마, 누군들 그러고 싶어서 그랬냐? 이놈의 자식이 대가리보다 먼저 반응을 보이는데"
현영이 쑥스럽다는 듯 자신의 주먹을 매만진다. 태림을 만나고 보니 성급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태림이나 지웅이 곁에 있었더라면 충분히 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아직도 속은 후련한 상태다.
"시간 참 안가네. 아직 30분이나 남았어?"
태림이 시계를 쳐다보고 말했다.
서울지법, 제 2 법정. 30분 후면 지웅의 살인사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된다. 이번 재판은 국민들의 요구로 인해 공개재판이 이루어진다. 법정 뒷편에는 각 방송국에서 나온 카메라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고, 그 위를 수십개의 조명들이 실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나운서들은 이번 재판의 의의, 과정등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으며 그 뒤에는 전투경찰들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대비태세를 취하고 있다. 객석엔 신원회보에 합격한 청중들이 재판이 시작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윤희는 법정 밖에서 한참이나 서성이고 있었다. 아직은 자신이 안섰다. 지웅이 재판받는 모습을 차마 지켜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법원에 도착한지는 벌써 두시간이나 지났지만 아직 법정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다. 문틈 사이로 현영과 태림이 보인다. 그렇다 해도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재판이 잘못되기라도 해서, 지웅이 사형이라도 언도받는다면......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생각은 안하는게 좋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재간이 없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법정 안으로 들어간다. 이젠 객석의 자리엔 빈틈이 거의 없다. 더 늦기 전에 들어가야 할텐데. 하지만 아직도 발이 맘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윤희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저 쪽에서 세열과 경헌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차마, 세열과 경헌의 얼굴도 쳐다볼 순 없다. 무슨 낯으로. 세열과 경헌이 법정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 윤희는 천천히 밖을 향해 걸었다. 못 보겠다. 도저히 가슴이 떨려서 들어갈 수 없다. 그저 나중에 태림이나 현영에게 전해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숙이고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윤희의 팔을 붙잡는다.
"그냥 가면 어떡해요?"
태림이다.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윤희를 보고 쫓아온 것이다.
"아뇨, 지켜볼 자신이 없어요. 그냥, 갈래요"
윤희가 태림의 팔을 뿌리쳤다.
"윤희씨가 지웅이한텐 힘이예요. 옆에서 지켜봐주는 것만으로도 지웅이한테 용기를 줄 수 있어요. 같이 가요"
태림이라는 사람. 윤희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지웅에게 힘이 된다는 그 말에 어찌 거부할 수 있는가. 다시, 발걸음을 되돌렸다.
"어? 왔어요? 난 윤희씨가 제일 먼저 와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 늦었네요? 우린 지금 영화보는 기분으로 와 있어요. 정의가 불의에 대항해서 극적으로 승리하는 영화 있잖아요. 재미 있을거예요. 한국영화, 대부분이 권선징악이잖아요? 우린 지금 그걸 보기 위해 여기 있구요"
현영도 윤희를 반가이 맞아준다. 게다가 윤희의 얼어있는 표정을 보고는 긴장을 풀어주기까지 한다. 지웅의 친구들. 이래서 지웅의 친구들이다.
반대쪽엔 세열과 경헌이 앉아있다. 윤희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어준다. 윤희는 고개조차 제대로 끄덕이지 못했다.
앞쪽의 문이 열렸다. 서기관을 선두로 방검사와 태경, 기정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포승을 당한 채 지웅이 걸어들어오고 있다. 윤희는 고개를 홱 돌렸다. 역시, 오지 말걸 그랬다. 지웅의 저런 모습을 차마 볼 순 없다. 정말 자신이 지웅에게 힘이 되기는 하는 건지.
"자식, 긴장하고 있군"
태림이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웅의 얼굴이 평소와는 달리 산만해보였기 때문이다.
"너라면 오줌이라도 갈겼을거야"
현영이 팔짱을 낀 채 지웅을 응시한 채 말한다. 태림이 현영을 바라본다. 현영 역시 긴장을 달래려 태림에게 농담을 던진 티가 농후하다. 현영의 숨이 고르지 않다.
재판관들이 들어왔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부터 피고 나지웅의 살인사건에 대한 재판을 시작합니다"
서기관이 재판의 시작을 알렸다.
"본 사건은 1998년 8월 23일 피고 나지웅의 오피스텔에서......"
태림의 주먹이 저도 모르게 쥐어진다. 그리고 어느새 그 속에 땀이 찼다. 현영의 얼굴도 경직되어 있다. 윤희는 아예 고개를 숙이고 있다.
"검사측 심문하시오"
방검사가 천천히 일어나 지웅의 앞으로 다가왔다.
"나지웅씨"
지웅이 고개를 들어 방검사를 빤히 쳐다본다.
"대답하세요. 이건 법정 모독에 해당될 수도 있어요. 나지웅씨"
방검사가 지웅을 윽박지른다. 지웅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예"
"나지웅씨는 8월 23일에 마시이와, 같은 동료 정윤희를 만났죠?"
"예"
"만나서 뭘 했나요?"
"산료코리아에 갔습니다"
"무슨 일 때문이었죠?"
지웅이 방검사를 쏘아보았다. 방검사가 다시 지웅을 윽박지른다.
"무슨 일 때문이었냐고 물었잖아요"
"물건을 사러 갔습니다"
지웅의 말소리엔 흐트러짐이 하나 없다. 아직은 차분하다.
"무슨 물건을 사러 갔죠?"
"일본에서 들어온 캐릭터상품을 사러 갔습니다"
"샀습니까?"
"예"
"얼마나 샀습니까?"
잠시 머뭇거린다.
"천만원어치입니다"
객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만원이요. 무슨 돈으로 샀죠?"
"보너스를 받았습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그 물건들은 어떻게 처리했죠?"
"태웠습니다"
"태워요?"
"예"
"왜그랬죠?"
태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손안엔 땀이 가득하다.
"무슨 의미로 묻는거죠?"
지웅이 반문했다. 태경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몇 번이나 당부를 했었다. 제발 검사가 묻는대로 대답만 하라고. 지웅의 성격상 고분고분히 검사의 말을 받아줄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너무 이르다.
"내가 저럴 줄 알았어"
태림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현영은 지웅이 그러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멋져"
"뭐가 멋져, 지 무덤 지가 파는데"
"저게 지웅이야. 묻는대로 고지곧대로 대답하는 건 지웅이가 아냐"
현영이 생긋 웃는다. 태림이 짧은 한숨을 내쉰다. 하기사, 저게 지웅이지.
방검사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지웅이 다시 반문했다.
"무슨 의미로 묻는 거냐고 물었잖아요!"
할 말을 잃었다. 이런 피고도 있었나. 방검사의 얼굴이 화끈거린다.
"피고는 묻는 말에만 대답하시오"
재판관이 지웅을 제지했다. 방검사가 다시 물었다.
"천만원이나 되는 물건을 왜 태웠죠?"
"검사님의 동생, 우리들의 동생들이 노예가 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 많은 없었습니다"
굉장히 도전적이다. 말투 또한 냉소적이다. 생각보다 벅찬 상대다. 변호사와 대립하기도 전에 피고와의 심문에서 방검사는 벌써 피로를 느낀다. 객석이 또 다시 웅성거린다.
"지나치게 일본을 싫어해서 그랬던 게 아니구요?"
"일본을 좋아하진 않습니다"
"반일감정에 그런 거요 아니요.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시오"
"......예"
방검사가 기다렸다는 듯 돌아섰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보시다시피 피고 나지웅은 한국과 일본이 서로 우호적으로 지내고 있는 요즘 시대에 지나친 반일감정을 가진 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일본인을 죽인다는 건 도살장에 소를 잡는정도의 기분이면 충분할겁니다"
방검사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피고측 변호하세요"
태경이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피고는 사건 당일, 마시이와 술을 마셨지요?"
지웅이 천천히 태경을 바라보았다. 태경이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예"
"얼마나 마셨죠?"
"많이 마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도 얼큰히 취한 상태였으니까요"
"집앞에서 마시이가 술을 더 사가지고 들어갔다고 했죠?"
"예"
"왜, 그랬을까요?"
"화해주라고 했습니다"
"화해주라... 그렇다면 집으로 돌아오기 전 이미 마시이와 다툼을 벌였던가요?"
"예"
"무슨 다툼이었죠?"
"그저, 나라에 대해 말했습니다. 한국은 다시 일어설거라고 했습니다"
"자존심 싸움이었군요?"
"예"
"집으로 돌아와 술을 더 마셨나요?"
"예"
"이미 취해있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마시이가 자꾸 권유하는 바람에, 캔맥주를 마시고 언더록스를 마시다가 쓰러졌습니다"
"의의 있습니다. 재판관님. 지금 나지웅은 근거 없이 얘기하고 있습니다"
방검사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인정합니다. 피고는 사실에 입각해서 얘기하세요"
"사실입니다"
태림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못말리는 녀석. 현영은 뭐가 좋은지 큰소리로 웃는다. 서기관이 현영에게 경고를 준다. 한 번만 더 웃으면 퇴장시킨다고 한다.
"피고는 한 번만 더 대들면 법정 모독죄를 적용시키겠소"
재판관의 얼굴이 과히 좋지 못하다. 태경이 지웅을 향해 고개를 잘래잘래 흔든다. 지금은, 아니다. 사람이 항상 곧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다. 지웅과 태림을 뺀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긴장하고 있다. 저, 피고. 피고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숨을 죽인 채 지켜보고 있다.
법정모독죄라...... 지웅은 가만히 입안으로 그 말을 뇌어본다. 자신도 물론 그렇게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성재가 죽었다. 그 마당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뒤로 한채 검사가 묻는 그대로 얘기한다는 건 참지 못할 일이었다. 가슴 한 쪽에서는 분명 말리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머리가 어떻게 항상 가슴을 이길 수가 있단 말인가.
또, 무죄가 입증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뭘 할 수 있을 것인가? 성재가 죽었다. 성재가 죽었단 말이다. 그 와중에 무죄가, 자유가 더 이상 자신에게 무얼 의미한단 말인가. 지금은 아무리 냉정하려 해도 끓어오르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 때로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 지웅이 바로 그렇다.
태경은 어쩔 수 없이 자리로 물러갔다. 다시 방검사.
"피고는 평소 죽은 마시이에게 친절히 대했습니까?"
"이도, 저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대답이 어디있습니까? 예, 아니오로만 대답해요!"
방검사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친다. 태경이 지웅의 변호를 하는 동안 청중에서 서희를 발견한 것이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서희는 웃으며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이기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왔구나. 게다가 지웅까지 재판관의 미움을 사고 있다. 방검사는 재판 중이라는 것도 잊었는지 서희에게 눈을 찡긋하며 신호를 보냈다. 이긴다. 서희 역시 한 번 더 방검사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서 살기를 띤 웃음을 머금은 겐죠. 방검사는 미처 겐죠까지 보진 못했다.
"죽은 마시이에게 친절하게 대하진 않았죠?"
"예"
"처음부터 그랬나요?"
"예"
"일본인이라서 그랬겠죠?"
"예"
"그동안의 반일감정이 마시이 한사람에게 집중될 수도 있었겠네요?"
"예"
태경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지웅은 지금 방검사의 말을 듣고 대답하는게 아니다. 반항이 아니면 자포자기였다.
"재판관님, 휴정을 제의합니다"
재판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좋습니다. 오늘은 이만 휴정하겠습니다. 다음 재판은 9월 25일 10시에 속행하겠습니다"
장송곡(葬送曲)
"잘 잤어요?"
다음날 아침 태경은 곧바로 지웅을 찾아갔다. 어제의 재판은 모두가 지웅의 반대편이었다. 검사측은 물론이고 태경도 변론다운 변론 한 번 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웅 자신마저도 상황을 불리하게 몰았다.
태경은 어제 있었던 재판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말을 안해도 이미 충분히 알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태경이 그에 대한 말을 꺼내면 오히려 불쾌감만 줄 뿐이었다.
"미안하네요"
태경이 다소 놀라며 지웅을 바라본다. 지웅의 입에서 먼저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태경이 편안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웅씨"
말없이 태경을 바라본다.
"난, 지웅씨한테 별로 말을 안하는 거예요. 그 전에 피고를 변호할 때는 이래라 저래라 말을 많이 했거든요. 불안했어요. 사람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죠. 법정에 가선 말을 이렇게 해야 한다. 표정은 그렇게 짓지 말아라. 재판이 끝나면 왜 그랬냐, 그렇게 해서 퍽도 무죄 판결 받겠다. 또 잘한 사람한테는 이건 잘했고, 그 부분은 미처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말을 했죠. 하지만 지웅씨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요. 그래서 지웅씨한테는 말을 안해요. 지웅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아는 사람이거든요"
사실, 이런 말도 필요 없다. 지웅이란 사람, 이런 것조차 벌써 알고도 남을 사람이다. 하지만 태경은 굳이 말을 꺼냈다. 자극이 필요하다.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자극. 다른 사람한테 받는 자극이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 채찍질할 수 있는 자극.
"그런 말도 엄청 부담스러운걸요?"
웃는다. 역시 알고 있다. 지웅이란 사람, 말 안해도 뭘 해야할지 아는 사람이다. 태경의 마음이 놓인다. 그 말은 알았다는 소리로 받아들여도 충분하다.
이길 수 있다. 어제 수연은 주머니와 칼에 새겨있는 글씨가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주머니의 지문 역시 마시이의 것과 동일하다. 하지만 두 번째 재판은 아직 일주일이나 더 남아있다. 그 동안 은 지웅이 안정을 찾아야 한다. 잘못하면 괘씸죄를 받을 수도 있다. 한 번만 더 법정에서 그런 발언을 했다간 소매치기로도 사형을 받기 쉽상이다.
"말 안해도 알죠?"
태경이 재차 확인한다. 지웅이 웃어보인다.
"나같은 생각, 또 누가누가 하고 있는 줄도 알죠?"
가만히, 생각해본다. 자신의 그런 모습에 안타까워 하는 사람. 현영과 태림은 물론이고 윤희를 비롯한 딜링룸 사람들, 그리고, 하늘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성재아저씨. 얼핏 이 사람들이 생각난다. 하지만 이 사람들만 가지고 이 냉철한 변호사가 그런 말을 꺼냈을리가 없다. 또, 또?
국민-. 국민을 말하는 것인가? 생각해보니 어제 재판을 받을 때 수많은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전국의 국민들이 보고 있었다는 소리다. 물론, 지웅 자신의 승리를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변호사의 말,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내 모습, 내 재판에 대해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얘기할 것이다.
나지웅이란 사람 정말 살인을 저질렀을까? 아니야, 일본에서 조작한 것일지도 몰라. 대사관에서 소요를 벌이는 것 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우리나라를 몰아대고 있잖아.
사형을 당하면 어쩌지? 일본이 원하는 대로 되는 거지. 한국사람의 손으로 한국사람을 죽이다. 일본사람들로서는 그것보다 통쾌한 일이 또 있을까?
그 치 너무 건방져. 어떻게 법정에서 그런 태도를 보일 수가 있어? 내가 재판관이면 당장 사형을 내렸을거야. 왜? 얼마나 멋지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다! 사람이 지조가 있잖아. 검사가 쩔쩔매는 모습 못봤어?
그런데, 이겼으면 좋겠다. 그러게 말이야. 난 죽어도 일본 좋아하는 꼴 못 봐.
아차. 내가 그랬지? 감히 대통령에게 내가 그랬지? 내 후원자는 국민이라고. 항상 그렇게 믿어오긴 했었지. 그런데 정작 의지해야 할 순간에 난 혼자였었군. 아니, 일부러 피하고 있었어.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입안으로 가만히 곱씹어본다. 이렇게 약한 모습은 내가 아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거다. 학창시절 누명을 써서 청소를 시켰을 때, 억울함은 뒤로 하고 조금씩 깨끗해지는 교실을 보고 만족했었다. 면제를 받은 군대를 지원해 들어가서도 그랬다. 어차피 28개월을 그곳에서 지내야 했다. 하기 싫어도, 힘들어도 어차피 해야만 할 일들이었다. 각개전투 중 포복을 할 때도, 유격을 받으며 헬기레펠이 매달릴 때도 그랬다. 즐기는 거다. 피할 수 없으면 먼저 나서서 즐기는 거다.
지금 이곳은 감옥이다. 죄를 짓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감옥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들과 같은 처지로 간수의 통제를 받으며, 정해진 시간에 잠들어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노역을 해야 한다. 안할 수는 없는 일들. 자신은 누명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그 누명을 벗어버리고 더 큰 나래짓을 하리라. 그러기 위해선 즐겨야 한다. 간수의 통제를, 노역을, 재판을 즐겨야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조금씩, 가슴에서 피가 솟는 기분이다. 밝디 밝은 무언가가 저 쪽에서 파도를 치며 다가오고 있는 기분이다.
조금은 창피하다. 지웅이 태경의 눈을 지긋이 바라본다. 미안하다. 그 표정을 태경이 놓칠 리 없다.
"고성재씨 일은 너무 심려치 말아요. 난 지웅씨가 고성재씨 몫까지 충분히 해내고도 남을 거라고 믿으니까. 태림씨하고 현영씨가 그 분 옷입혀드리고, 맛있는 음식 챙겨서 하늘로 보내드리고 있을거예요. 나도 그 쪽으로 가봐야겠는데요? 아무 상관은 없지만, 왠지 빚을 진 느낌이 자꾸 드네요"
"하늘이 우는 거냐, 성재 아저씨가 우는거냐?"
현영이 끙끙 소리를 내며 묘지를 파고 있다. 아침부터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다. 태림과 기정도 옆에서 땀을 흘리며 돕고 있다. 일본 대사와 서과장도 소식을 듣고 성재를 보내기 위해 찾아왔다.
묘 안에 관을 집어 넣고 흙을 덮었다. 그리고 그럴듯하게 무덤 모양을 만들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그 위에 잔디를 덮는다. 비는 잠시 주춤한다. 잔디가 흙에 뿌리내릴 때까지 비는 잠잠할 것이다.
돗자리를 펴고 제삿상을 차렸다. 사과 세 개에 북어포 한 마리 그리고 소주 몇 병이 다다.
"남자가 준비해서 그런지 참 볼품없네"
현영이 멋적은 듯 한마디 내뱉고는 돗자리에 엎드려 절을 한다. 옆에서 대사가 빈 잔에 소주를 따라준다. 현영이 소주를 무덤 주위에 뿌렸다.
"잘 가세요. 준비는 못 했지만 맛은 있을 겁니다. 아저씨 생전에 이렇게 많은 한국사람하고 술 드셔본 적 있으세요? 없으시죠? 많이 드세요. 그리고 지웅이는요. 바쁘대요. 너무 바빠서 올 수가 없대요. 대신 다음에 시간 날 때마다 아저씨 찾아올 거예요. 그러니 너무 섭섭해하지 마세요. 저도 아저씨랑 인연이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요"
현영이 고개를 숙인 채 일어서지 않는다. 모두들 그대로 서 있다. 불쌍한 노인네. 비도 현영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감추진 못한다.
현영이 물러나고 서과장이 절을 했다. 아무 말도 없다. 입이 열이라도 할 말이 없다. 가시는 길이라도 평안하시길, 저 세상에서라도 당신의 인생을 사시길......
태림도 기정도 절을 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 하지만 그 어느때보다 숙연하다. 세상엔 이렇게 살다 죽어간 사람도 있다.
마지막으로 대사가 성재의 무덤 앞에 엎드렸다.
"덕분에 이렇게 구차한 목숨도 살아 있소. 세상이란 그런 것인가 보외다. 살아야 하는 사람은 죽고 죽어야 하는 사람이 살아 날뛰는, 그런게 세상인가보오. 멀리서 지켜봐주우. 임자 소망대로 되는 날까지 지켜봐주우"
"에라, 이거 가지곤 양도 안차겠다. 아저씨. 나랑 한 잔 더합시다. 태림이 너 아니? 이 아저씨가 술이 그렇게 세다. 그만 자자 하면서 냉장고에서 술을 한 병 더 꺼내는 분이라니까. 고작 소주 몇 잔으로 양이 차겠어?"
현영이 소주를 한 잔 따라 마셨다. 그리곤 다시 한 잔을 따라 성재의 무덤에 뿌린다. 또 한 잔을 마시고, 또 한 잔을 뿌린다. 또 한 잔을 마시고, 또 한잔을......
태림이 현영의 팔을 잡았다. 현영이 애원하듯 태림을 바라보았다.
"아직 멀었어. 아저씨가 술이 얼마나 센지 니가 몰라서 그래. 그리고 나 지금 지웅이것까지 마셔줘야 한다구. 아저씨 섭섭해하시는 거 안보이니? 지웅이 보러 한국에 오신거라구. 그래서 저렇게 섭섭해하시잖아. 아저씨. 한 잔 더 받으세요. 이건 제가 따르는 게 아니라 지웅이가 따르는 겁니다"
현영이 다시 한 잔의 소주를 무덤에 뿌렸다. 그리곤 또 잔을 채웠다. 태림이 잔을 뺏었다.
"그건 지웅이 잔이라니까"
절규한다. 현영의 표정이 애절하다.
"나도 좀 끼워주면 되잖아"
태림이 잔을 입에 털어넣었다.
"한변호사님도 오시죠. 대사님도, 서과장님도요"
기정은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빗속에서의 담배는 유난히도 잘 타들어간다. 대사와 서과장은 어느새 무덤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아직도 분명히 기억난다. 검정색 옷을 입었던 사내들. 몸서리가 쳐진다. 성재도 분명 그들 일당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적어도 지웅의 무죄 판결은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 없는 재판은 계속 되리라는 생각이 기정을 괴롭게 했다. 어쨌든 이 재판은 끝을 봐야 한다. 그 끝이 어디든, 어떤 결과를 보든 해결을 해야한다. 일본,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했던 그 일본이 떠오른다. 기정이 끌끌 웃는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랬던가?
확증(確證)
모처럼 딜링룸이 살아 있다. 윤희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세열은 책상 앞에 꼿꼿이 서 있는 윤희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용서해 줄거예요, 말거예요"
윤희가 당돌하게 말했다. 세열은 윤희의 말을 못 들은 척, 있지도 않은 서류를 찾고 있다.
"팀장님!"
윤희의 목소리가 당차다. 세열은 윤희에게 복수라도 하듯 살살 비꼬아댔다.
"글세, 윤희씨 나가고 여기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벌써 면접까지 봤거든.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서 아침 일찍 나와서 청소도 했잖아요"
어쩐지 사무실이 깔끔하다. 그래서 더욱 살아보인다. 경헌은 기분이 좋아 뒤에서 히죽히죽 웃고 있다.
"경헌씨는 어깨 안쑤셔? 난 요 며칠 고생을 좀 했더니 어깨가 쑤셔가지고 말이야"
"으이씨. 알았어요"
윤희가 성큼성큼 세열의 뒤로 돌아가 어깨를 주물렀다.
"이제 됐어요?"
"글세,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영 효과가 없네"
"이래도 안돼요?"
윤희가 세열의 어깨를 마구 꼬집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세열이 못이기는 척 윤희를 받아들인다. 윤희가 경헌의 앞으로 걸어왔다.
"차선배도 좀 해드릴까요?"
윤희가 우드득 소리를 내며 주먹을 만진다.
"아, 아니. 난 괜찮아. 그보다는 윤희씨 컴퓨터나 좀 주무르라고. 안 만진지 오래 돼서 저놈부터 손봐야 할거야"
안스럽다. 적어도 경헌의 눈에는 윤희가 안스러워 보인다. 며칠 전 사무실을 떠났을 때의 눈물. 그 눈물이 벌써 마를 리가 없다. 지웅이 원했을 것이다. 팀장과 자신을 생각해서 지웅이 달래고 달랬을 것이다. 지웅의 재판 때도 분명히 보았다. 윤희의 쳐진 어깨. 누구보다 걱정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웅의 부탁을 지키기 위해 저렇게 활기찬 척 행동하고 있다. 그럴수록 경헌에게 윤희는 더욱 안스러워 보였다.
"음, 오랜만이군"
윤희는 손가락에 힘을 줘서 컴퓨터를 켰다. 언제나와 같은 부팅 소리. `시스템을 시작합니다'. 그래 시작해보자. 당분간 시스템 종료는 없다. 지웅이 다시 돌아올 그 때까지.
하지만 여전히 윤희의 옆자리는 허전하다. 저 의자. 혼자 있는 모습은 너무 어색하다. 저 위에 지웅이 앉아 있어야 구색이 딱 맞는다.
세열이 한다발이나 되는 서류를 윤희의 책상에 집어던진다.
"처음이라는 생각으로 하라구. 윤희씨 없는 동안 시세가 얼마나 변했는지 몰라"
"그래야 될거야. 윤희씨 이젠 안봐준다구. 그리고 지웅씨 보고 싶으면 이 젊은 오빠한테 얘기해. 나 아직 쌩쌩해"
또, 경헌이 팔뚝을 내보인다. 윤희가 샐룩 혀를 내민다.
언제나 고마운 사람들. 그리고 언제나 미안한 사람들......
야마모도의 가슴은 마구 설레이고 있다. 10여년을 준비한 금침(金侵). 드디어 와타나베를 비롯한 금이타조 회원들이 하나가 되기로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이익보단 국익을 먼저 생각한다. 금이타조 회원들끼리는 죽어도 배신을 하지 않는다. 일본 정치와 경제를 주름잡는 사람들이 진실로 하나로 모인 것이다. 한국을 무너뜨릴 때까지 이들은 이제 자신의 이름은 없다. 금이타조. 오직 한국을 무너뜨리는 일만이 그들의 운명.
와타나베가 먼저 날카로운 칼로 손가락을 째서 그릇에 피를 받았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씩 자신의 피를 조금씩 조금씩 모아갔다. 어느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엄숙하다. 마지막으로 야마모도가 앞으로 나가 칼로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쨌다. 붉은 피가 흘렀다. 스무명의 피가 섞였다.
이번엔 와타나베가 그 핏물을 마셨다. 다음 사람이, 다음 사람이 자신들의 핏물을 마셨다. 야마모도의 앞에서 그릇은 멈췄다. 달다. 피가 이렇게 단 줄은 몰랐다.
모든 계획은 수립되었다. 이제 조금씩, 아주 조금씩 한국을 무너뜨리는 일만 남아있다. 게다가 막바지에 나온 히노쿠마의 계략이 야마모두를 더욱 들뜨게 했다. 금이타조 회원 모두를 들뜨게 했다.
막부시대를 부활시킬 순 없다. 사무라이를 다시 불러올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이들처럼 강한 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끓는 피를 가질 수 있을까?
야마모도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반세기 전의 꿈을 다시 펼친다. 일본의 태양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먼저 사라져 줘야 할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자신은 그렇게 믿고 있다. 일단은 한국이 목표다. 하지만 언젠간 세계를 지배할 날도 오리라. 모두가 한 번도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야마모도는 다들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한국은 독안에 든 쥐가 아닌가.
"히노쿠마 선생의 의견을 수렴하기로 했소. 먼저 한국의 바다를 빼앗고, 그들의 논과 밭, 산과 들을 빼앗는 것이오. 그리고 히데야시 선생의 바이러스가 완성되었다고 하오. 한국은행의 전산망은 완전 마비가 되는 것이지. 나까이 선생은 자금회수에 가속을 붙이시오.
오늘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피를 나눴소. 어느 누구보다 뜨거운 피를 말이오"
회원들이 웃는다. 입가엔 붉은 피를 묻힌 채, 음흉하게들 웃고 있다. 어찌 웃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선조들의 숙원인 저 한반도. 한반도를 집어 삼키는 것이다. 2천여년을 이어온 염원을 드디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웃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태경은 지웅의 살인사건을 다뤘던 기사를 보고 있었다. 당시의 기사를 보니 희극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를 한 대 물었다. 그리고 조금 더 편한 자세를 잡았다.
"만취에 의한 살인사건이라......"
태경이 담배재를 떨기 위해 재떨이를 찾았다. 그러나, 없었다. 또 수연이 치운 모양이다. 재떨이가 있어도 재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담배를 피우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예 재떨이를 치운 모양이다.
태경은 다시 신문을 들여다 보았다. 칼라로 된 사진이 지웅과 마시이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그려놓고 있었다. 마시이의 배는 칼로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는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지웅은 고주망태가 되어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다.
어떻게 기자가 이렇게 일찍 사건 현장에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지, 그것부터가 아이러니하다. 아무리 많은 사건을 접해도 이런 사진은 처음이다. 애초에 어딘지 어색한 사건이었다. 어지러운 방안. 찌그러진 맥주캔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리고 양주와 유리잔. 잔은 엎어져 있다. 게다가 휴대폰은 내동댕이 쳐져 있다. 참 잘 찍은 사진이다. 그것밖에는 할 말이 없다.
휴대폰?
태경이 사진을 더욱 가까이 살펴보았다. 사진의 윗 부분에 반쯤 잘려서 찍힌 것은 분명히 휴대폰이다. 그렇다면 사건 직전 통화를 했다는 소리다. 그래, 어쩌면 저 휴대폰이 사건을 확실하게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
"또, 또. 넌 온 세상이 재떨이로 보이니? 아무곳에나 재를 떨게? 하여튼 내가......"
수연이 방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소리를 지른다. 태경의 옆에는 담배모양의 재가 떨어져 있었다. 태경이 밑을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사진을 본 채로 수연을 불렀다.
"사건 보관물 중에 휴대폰 있었니?"
수연이 태경의 옆에 떨어져 있는 재를 치웠다.
"응. 있었어. 모토로라거. 그건 왜?"
태경이 대답 대신 신문을 내밀었다.
"아침에 읽었어"
수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곤 외투를 벗었다.
"사진 말이야"
"사진?"
수연이 신문을 받아들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사진 윗부분의 검은 것이 휴대폰같았다. 수연이 외투를 다시 집어 들었다.
"내가 무슨 복으로 쉬니? 이만하면 좀 쉴 수 있겠다 했더니만"
"확인해봐. 통화근거가 나와 있을거야"
"알았어. 나지웅은 어때?"
태경이 고개를 돌려 수연을 바라보았다. 수연 역시 지웅의 마음가짐이 염려되는 것 같았다. 지웅이 엄지손가락을 펴 보였다.
"그래? 그럼 너만 잘하면 되겠네?"
수연이 넉살좋게 웃는다. 그리곤 서둘러 방을 나섰다. 서른 여섯의 나이처럼 보이지 않는다. 학교 다닐 때, 거의 1등을 도맡아 했던 녀석. 가뭄에 콩나듯 태경과 기정이 한 번씩 1등 자리를 빼앗았었다. 그것도 수연이 감기에 걸려 시험을 망쳤을 때와, 아버지가 돌아가셔 시험을 안 봤을 때, 딱 두 번. 저렇게 열심히 하니 뭘 한들 1등을 못할까.
태경은 다시 사진을 보며 골똘이 생각에 잠긴다. 저 휴대폰이 생각보다 재판을 일찍 끝낼 지도 모른다. 이미 마시이의 지문이 묻은 천주머니로도 충분히 승산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휴대폰이 단서의 역할만 해 준다면 2심에서 끝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태경은 담배를 찾았다. 그러나 분명히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던 담배가 없다. 재를 치우는 척 하며 수연이 가지고 가버린 모양이었다.
세기말, 한일전쟁
전쟁은 시작되었다. 아니, 침략이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은행의 전산망이 오전 10시를 기해 완전히 마비되었다. 은행을 찾은 고객들의 항의는 물론이고, 타은행과 주식, 기업과의 거래또한 먹통이었다. 한국은행 전체의 전화기가 봄날 논두렁의 개구리마냥 울어댔다.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딜링룸도 마찬가지였다. 오전 장이 열자마자 거래를 시작하던 딜링룸은 10시가 되자마자 화면이 꺼졌다. 그리고는 모니터에 이상한 그림이 올라왔다.
한국과 일본의 지도모양의 그림이 좌우에 배치되었다. 그리고는 그 땅 위로 각각 한 사람이 생겼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의 머리는 뇌가 들여다 보였다. 그리고 그 크기 또한 컸다.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음 돈다발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는 돈다발로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스피커에서는 퍽, 퍽 소리가 났다. 그렇게 돈다발로 머리를 내리치는 동안 한국의 지형이 조금씩 없어졌다. 한 대에 제주도가 사라지더니, 전라도와 경상도가, 충청도가, 강원도와 경기도가, 서울이, 그리고는 북한까지 차츰차츰 없어지는 것이었다. 한국이 완전히 사라지자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이 돈을 하늘로 뿌리며 하하 웃었다. 그리고는 페이드 아웃됐다. 그리고는 또 화면이 밝아지더니 한국과 일본이 생기고 사람이 생겼다.
그러한 그림이 딜링룸의 모든 컴퓨터 뿐만 아니라 한국은행 전체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딜링룸의 직원들은 참을 수 없는 그림이 계속 화면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분개했다.
"이 새끼들. 죽으려고 환장했나, 뭐야 이게!"
평소에 성격 부드럽기로 소문난 경헌이 욕설을 퍼붓는다.
"이것들이 아주 노골적으로 나오는구만. 전쟁이라도 하겠다는거야 뭐야?"
세열의 목소리도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윤희 역시 어처구니가 없는 듯 멍하니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패망기념일이니 지랄이니 할 때부터 알아 봤다구"
"무슨 소리야?"
"광복절날 말이예요. 지웅씨 롱포지션 내서 한 턱 낸다고 같이 술을 마셨거든요. 그런데 뉴스에서 그런 게 나오잖아요. 일본에서 패망기념일 행사를 했다구요. 내가 그랬잖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망할 놈들"
경헌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눈이고 얼굴이고 온통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우리 은행이야?"
세열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복수겠죠. 지웅씨가 일본은행 상대로 낸 이익이 어디 한두푼이예요? 그래서 우리가 타겟이 된 거겠죠. 게다가 마시이가 죽은 것도 있고. 내가 보기엔 저 바이러스 분명 우리 딜링룸을 노리고 만든 것 같아요"
경헌의 목소리가 울먹거린다. 바이러스로 인해 업무가 마비되어서가 아니다. 지웅에 대한 복수로 딜링룸이 표적이 되어서도 아니다. 저, 일본이라는 나라.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 나라를 괴롭히려고 하는 것인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군들 저 그림을 보고 분노하지 않을 것인가?
참다 못한 경헌이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나 전원 스위치를 눌러도 컴퓨터가 꺼지지 않았다. 아예 플러그를 뽑아버렸다. 그러자 컴퓨터 안에서 한국을 돈다발로 사정없이 내리치던 사람이 일본말로 `화났니?' 하며 히죽히죽 웃으며 사라졌다.
"개새끼들!"
경헌이 울분을 토했다. 윤희와 세열 역시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지웅은 윤희의 말을 듣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드디어, 드디어 이 놈들이 일을 벌렸구나!
"지웅씨, 어쩌죠? 지금 딜링룸 뿐만 아니라 우리 은행 전체가 마비되었단 말이예요"
윤희는 여전히 울먹거렸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컴퓨터를 보면서, 돈다발에 맞아 조금씩 없어지는 한국을 보면서 무작정 지웅을 면회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눈앞이 캄캄했다.
"서두르지 말아요. 이럴 때 일수록 침착해야 되요"
지웅은 윤희를 타이르며 생각에 잠겼다.
돈다발에 맞아 조금씩 사라지는 한국. 그 화면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상상만으로도 치를 떨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물론 예상하고 있는 일이었다. 일본이 어떤 나라인데. 성재로부터도 얘기가 있었다. 일본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어쩌면 자신들의 뜻을 펼치기 전에 일본이 일을 도모할지도 모른다고.
지금 당장은 자신이 구치소 안에 있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태경의 말로는 다음 재판에선 무죄를 입증할 수 있을거라고 했다. 하지만 아직 이틀이나 남아 있다. 이틀동안 은행이 마비되면 그 피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럴수록 지웅은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싸우고 싶다. 저 일본과는 항상 싸우고 싶다. 딜링을 할 때도 항상 싸운다는 기분이었다. 성재가 얘기하는 대로 따라간 것 뿐이지만 자신은 항상 싸우고 있었다. 할머니를 무참히 밟았던 일본이다. 이 땅 전체를 유린했던 일본이다. 게다가 성재아저씨마저 죽였다. 성재아저씨마저 죽인 일본이다.
이제야 비로소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죄를 입증받아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일본을 상대로 주먹다짐이라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실상, 밖으로 나가면 자신 역시 울분을 삭이며 모니터에 떠오르는 바이러스를 쳐다보고만 있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그래도 나가고 싶다. 싸우고 싶다. 어차피 자신이나, 성재아저씨나 그러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운명이랄 수밖에.
영웅도 아니다. 초인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 하나쯤은 개인적인 삶을 버려도 좋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법. 자신 같은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곤 생각이 들지 않는다. 30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더 이상 무슨 생각이 필요하겠는가?
"잘 알았어요. 일단은 돌아가요. 그리고, 너무 서두르지 말아요. 차분하게 해결하도록 노력해봐요"
지웅은 윤희를 보내고 구치소 구석에 박혀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 무엇일까? 그 자들이 노리는 게 무엇일까? 금침(金侵). 윤희가 얘기한 바이러스는 금침의 암시란 말인가? 아니면, 전면전?
오늘따라 황태경이라는 변호사가 상당히 기다려진다. 재판이 기다려진다.
한반도 전체가 들끓었다. 특보를 통해 터져나오는 일본 자금의 회수, 그에 따른 주식 붕괴, 소니 사장의 계락으로 인한 원유 차단, 그리고 한국 은행 모니터에 나타나는 참지 못 할 그림까지, 그동안 당장의 현실에 급급해 묵묵히 잠자고 있던 한국인의 감정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군데군데에서는 입에 담기조차 싫은 경제대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한보와, 기아의 책임자를 즉각 처리하라는 구호가 터졌다. 그리고, 무능력한 정부를 비판하는 소요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일본의 또 한번에 도발에 치를 떨고 있었다. 일제 치하를 경험한 나이 든 사람들은 그 옛날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르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민들은 특별방송의 인터뷰에서 입에 담기조차 꺼림찍한 말을 일본을 향해 내뱉었고, 방송국은 편집 없이 그대로 내보내고 있었다.
국민들의 감정을 가장 자극시켰던 건, 일본의 자금 회수와, 원유 차단에도 있었지만, 한국은행의 바이러스 사건이었다. TV모니터를 통해 비쳐진 바이러스 화면은 한국의 TV 수상기를 몇 대나 박살냈는지 모른다. 국민들은 여의도 광장과, 광화문 사거리에 모여들었다.
`잔인무도한 일본은, 즉각 비인간적인 행동을 중단하라! 정부는 빨리 해결방법을 제시하라!'
이미 그들의 분노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한반도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대통령은 `대국민 특별 담화'를 준비했다.
수십대의 내, 외신 기자들이 모였고, 수십대의 카메라가 대통령을 향해 있었다.
대통령은 비장에 찬 각오로 말을 꺼냈다.
"먼저, 나라 경제를 이 모양으로 만든 정부의 책임을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갑자기 몰아닥친 일본의 경제침략에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국민 여러분, 일본은 아마도 훨씬 전부터, 계획적으로 오늘과 같은 사건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일본인 딜러 마시이의 죽음에 대한 복수라고 외치고 있지만, 그건 누가 들어도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그건 이제 국민여러분이 더욱 잘 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얼마 전 한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바로 마시이를 죽였다는 나지웅이라는 젊은이입니다. 그는 한국은행의 딜러입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일본은행과의 거래에서 손해를 본 적이 없는 친구입니다. 그 젊은이는 마시이를 죽이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만약 마시이를 정말 죽이지 않았다면, 무엇을 걸겠느냐? 그랬더니 이 젊은이는 저를 걸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이 젊은이는 분명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을 거라는 걸 믿고 싶었습니다. 제가 그 젊은이에게 말했습니다. 자네가 날 걸었으니 나라도 무죄를 믿어줘야겠다고. 그리고 후원자가 되어 주겠노라고.
그 젊은이는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각하, 후원자가 되어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그러나 각하는 이미 저의 후원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제 후원자는 바로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챙피했는지 모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자가 얼마나 국민들을 믿고 일을 해왔는지 깊은 반성을 했습니다.
이제 사태는 더 이상 악화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 순간 저는 여러분께 약속을 하겠습니다. 바로 여러분을 후원자로 믿고 이 사태를 이겨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 부탁을 하겠습니다. 지난 번 대사관 사건때도 마찬가지로 저 또한 그 자리에서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대통령이란 위치가 얼마나 한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같은 피를 가진 민족입니다. 이제는 하나로 뭉쳐야 할 때입니다. 일본이 당장 우리의 피를 말리려 든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의 술책에 말려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해 낼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고급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머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자원입니다. 이 자원을 계기로 이 어려움을 이겨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함께 뛰어야 하겠습니다. 어지러워진 이 경제 뿐만 아니라, 일본에게 처참히 빼앗긴 자존심까지 찾아와야 하겠습니다. 이를 할 수 있는 것은 정부도, 대기업도 아닌 바로 국민 여러분 자신입니다. 아직은 이대로 무너질 한국이 아닙니다. 국민 여러분이 지난 1년동안 허리띠를 졸라매며 노력해온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뭉쳐봅시다.
이 사태를 일으킨 것도 우리 자신이요, 해결해야 할 사람도 우리 자신이라는 신념으로 이겨냅시다.
우리 스스로, 한국 국민을 든든한 후원자로 믿고 다시 한 번 일어섭시다"
TV를 통해, 라디오를 통해, 신문을 통해 광화문의 사인보드를 통해 대통령의 말이 국민의 눈으로, 귀로 전해졌다. 국민들의 마음 한 구석에 새로운 각오가 싹트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일단 소요를 중지했다. 그리고 각자의 일터로 돌아갔다. 물론 그들, 스스로의 의지를 확인하고서이다.
승전보
지웅은 설레였다. 조금만 지나면 출감할 수 있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지웅은 태경을 믿었다. 어제 태경이 분명히 말했지 않은가? 내일은 밖에서 소주나 한 잔 하자고. 그 냉철한 변호사, 함부로 입을 놀릴 사람이 아니다.
자신은 지금 피고석에 앉아 있다. 어쩐지 오늘따라 이 자리가 어색하다. 엉덩이가 근질거린다. 자유? 그런 것 때문은 아니다. 자유니, 권리니 하는 말 지웅은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했다. 자유를 누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권리를 행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지껄인다고 생각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이렇게도 엉덩이가 근질거리나?
역시 일본이다. 일본이라는 말처럼 지웅을 자극시키는 것도 없다.
고개를 돌려 청중을 둘러보았다. 저기, 태림과 현영이 있다. 자신을 보더니 손을 흔든다. 답례로 고개를 한 번 끄덕여보였다. 그 뒤쪽엔 윤희와 경헌, 세열이 앉아 있다. 다들 긴장하고 있다. 윤희는 아예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하고 있다. 고마운 여자. 그 뒤로 수많은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고 있다. 저 카메라를 통해 수많은 국민이 자신을 보고 있을테지. 즐겁다.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인 것만 같다. 우쭐해진다. 어서 빨리 재판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멋진 피날레를 위해.
역시, 일본이다. 일본이 이렇게 지웅을 자극시키고 있다. 어서 한 판 붙고만 싶다.
태경은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미더운 사람. 저 사람이 오늘 날 내보내 줄 것이다. 언제 시간을 내서 술 한잔 제대로 대접해야지.
아까부터 발을 흔들고 있다. 경거망동이라니. 아무런 긴장도 안되나보다. 너무 들떠있다. 지웅 자신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이러면 안되지 하며 고개를 흔들어 본다. 기침을 한 번 해 본다. 자세를 바로잡아 본다. 그래도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재판관이 들어왔다. 저 양반, 지난 번에 기분 좀 상했을 거다. 오늘은, 얌전하게 착한 피고처럼 보여야 할 터다.
"지금부터 피고 나지웅에 대한 2차 공판을 시작합니다. 검사측 심문하세요"
방검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판관님. 증인을 신청합니다"
"좋습니다"
한 남자가 청중에서 걸어 나와 증인석에 앉았다. 겐죠가 고액의 돈을 주고 섭외한 사람이다.
증인이라니? 태경과 지웅이 동시에 놀라 증인석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지웅에겐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방검사가 천천히 증인에게 다가가 질문을 했다.
"증인은 어디서 뭘 하는 분이죠?"
"청계천에서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증인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주로 무얼 팔죠?"
"칼이나, 연장을 판매합니다"
"그럼 단도도 취급하겠네요?"
"예"
"이 단도를 알고 있나요?"
방검사가 마시이의 칼을 증인에게 내보였다.
"예"
"피고가 이 칼을 구입했나요?"
"예"
"재판관님 이 칼은 나지웅이 마시이의 배를 찔렀던 바로 그 칼입니다. 이상입니다"
방검사가 자신있게 말했다. 자신이 있을 수밖에. 오늘도 서희가 와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피고측 증인에게 심문할 거 있나요?"
재판관이 물었다. 태경이 얼떨결에 일어섰다. 청계천이라니. 지웅이 구입했다니,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다. 결국 승부는 이렇게 싱겁게 끝나는군. 저치, 일본에게 넘어갔군. 놀아났어. 방검사라는 작자, 자기 무덤을 파고 말았어.
"증인은 청계천에서 잡화점을 운영한다고요?"
"예"
증인이 태경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이미 겐죠에게 수차례나 교육을 받은 후였다.
"증인은 위증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 있겠죠?"
"의의 있습니다. 지금 변호사는 증인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방검사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재판관이 방검사의 말을 인정했다.
"좋습니다. 아무튼 증인이 방금 했던 말들은 모두가 진실이겠죠?"
"예"
"저 칼만 팔았습니까?"
"예"
"칼집도 있었겠군요?"
"예. 나무로 된 것입니다"
증인의 목소리가 다소 떨렸다.
"이상입니다"
태경은 아직 승부를 내지 않는다. 이렇게 끝나면 너무 싱겁다. 상대가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뒤엎어 버리는 게 재판의 묘미라면 묘미가 아닌가.
지웅은 태경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증인이라는 사람 생전 처음 볼뿐더러 저, 칼 무슨 칼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마시이의 배를 찌른 칼이라니. 일본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고 있던 것인가? 어찌된 영문인지 변호사는 더욱 자신 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직은 승산이 있겠지. 믿어보는 수밖에.
방검사가 다시 일어섰다.
"재판관님. 피고는 상식 이상으로 반일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 한일 관계가 호전되는 상황에 어긋나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나 일본에 대한 복수심을 키워왔으며 이번 마시이 살인사건이 행동으로 표출된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피고 나지웅이 얼마나 위험한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여기 증거가 있습니다.
`80만여명의 정신대 피해자들. 거의 매일을 짐승같은 놈들에게 몸을 유린당했으니... 막말로 화대로만 쳐도 (8십만*5만*100) 은 4조원.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그건 말도 아니지. 정신적 피해까지 감안한다면 네 놈들은 국고에 있는 돈을 죄다 가져다 바쳐도 용서할 수 없다'
피고는 이처럼 평소에도 지나친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 증거물을 제출합니다"
방검사가 지웅의 다이어리를 서기관에게 제출했다. 이겼다. 이런 상황이라면 나지웅은 최소 무기징역이다. 현명일과의 약속을 지켰다. 서희와의 약속을 지켰다. 방검사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미칠 지경이다.
지웅은 적잖이 놀랬다. 어떻게, 저 다이어리가 방검사의 손에 넘어갔을까? 그렇다고 끝났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검사의 말대로 저 다이어리에는 지웅 자신이 얼마나 일본을 싫어하는지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그걸 가지고 자신을 몰아부칠 수 있겠는가? 태경에게도 아직 꺼내지 않은 무기가 있을 터. 지웅은 지금 그걸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태경이 일어섰다. 지웅의 손에 땀이 밴다. 태림도, 현영도 태경을 주시하고 있다. 갑자기 재판이 지웅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그리고 청중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리석게도 나라를 사랑하는 한 젊은이에게 엉뚱한 돌팔매질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피고는 사건 당일 거액의 돈으로 일본에서 들여온 캐릭터 상품을 구입했고, 교외로 나가 모두 불살랐습니다. 검사님의 말대로 조금은 지나친 행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저 피고에게 손가락질 할 자격을 가지고 있을까요? 피고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얘기할 만큼 우린 조금이라도 나라를 사랑하고 있었을까요?"
"변호인은 재판과 상관없는 얘기는 자제하시오"
태경이 공손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만약에 이 사건이 일본의 계략이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당했다, 그러고 말 것입니까? 한일합방때처럼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 그 사실을 인지하겠습니까?
본 변호사는 이 사건의 증거물로 두 가지를 제출하겠습니다. 하나는 이 천주머니입니다. 재판관님 사건 증거물인 칼을 잠시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태경이 단도를 집었다.
"보시다시피, 이 주머니는 칼을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 이렇게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증거물로 제출합니다"
태경이 단도와 천주머니를 동시에 제출했다. 재판관이 두 가지를 유심히 살펴본다.
"저 천주머니는 마시이의 지문이 덮여 있었습니다. 여기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발급된 확인서를 함께 제출합니다"
객석이 웅성거렸다. 지웅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이젠, 확실하게 이길 것 같다.
태경이 다시 말을 이었다.
"증인에게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허락합니다"
증인이 다시 불려나왔다.
"증인?"
"예"
위압적인 말투. 증인의 말꼬리가 흐려진다.
"이, 칼. 분명히 피고가 증인의 잡화점에서 샀다고 했죠?"
증인이 대꾸를 못한다. 태경이 증인에게 씨익 웃어보인다. 더욱 위압적이다.
"조금 전 증인이 그랬죠?"
증인이 대꾸를 못하고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 칼의 칼집은 나무로 되어있다고 했죠?"
역시, 대꾸를 못하고 고개만 끄덕인다.
"그럼 이 주머니는 판매한 적이 없겠네요?"
"예"
증인이 모기만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럼 이 칼도 판매하지 않았겠군요. 혹시 다른 사람을 착각하고 나오신거 아니예요?"
증인이 때를 만났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 마, 맞아요. 그런 거 같아요. 가만히 보니까 저 사람 처음 보는 거 같아요"
지웅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 변호사, 잔인하다. 증인을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궁지로 몰고 있다.
"재판관님. 증인을 위증 죄로 고소합니다"
태경이 단호하게 말하곤 증인에게서 멀어졌다.
"나, 난 시킨대로 했을 뿐이예요. 저기 저 사람이......"
증인이 객석을 가리켰다. 그러나 겐죠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대기하고 있던 전경이 증인을 끌고 나갔다. 방검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도 증인의 말이 맞는 줄만 알았다. 증인의 말대로 지웅이 청계천에서 저 칼을 구입한 줄만 알았다. 어지럽다. 현명일이란 사람. 어쩐지 처음부터 냄새가 구렸다. 그저 돈만 챙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가슴이 무너진다. 서희마저 명일을 따라나갔다. 태경이 증인심문을 하는 동안 똑똑히 보았다. 자신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빠져나가는 서희. 저 아름다운 서희가 자신에게 원망스런 눈빛을 던졌다. 다시는 못 볼거라는 듯, 매몰차게 나가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젠 안전마저 위협당할 지도 모른다. 명일이라는 사람, 자신에게 누명이라도 씌운다면 빼도 박도 못한다. 이 재판이 끝나면 자신의 검사 생활은 다시는 없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저 변호사,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두려다.
"재판관님, 잠시 녹음기를 좀 사용하겠습니다"
재판관이 허락하자 태경이 소형 녹음기를 틀었다. 일본말이 나온다. 죽은 마시이의 통화내용이었다.
-접니다.
-그래, 잘 지내고 있나? 일은...
-예. 지금 처리하려고 합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죽이지는 말게.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
-나지웅이란 자 굉장히 위험한 놈입니다.
-무슨 소린가?
-일개 딜러가 아닙니다. 지독한 반일주의자입니다. 마치 독립투사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그래서 자네가 그곳에 있는 게 아닌가?
-선생님이 뒷처리를 잘 해주셔야 합니다.
-그야 물론이지.
-황국시민으로서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내일 아침 한국은행에서 연락이 갈 겁니다. 선생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대일본제국의 명예를 가슴에 간직하게.
-선생님, 꼭 한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만드십시오. 이 나라를 짓밟아 주십시오. 선생님과 그 분들이라면 분명 해내실 줄 믿습니다. 그럼 이만...
법정은 침묵 속에 빠졌다. 아무도 감히 말을 열지 못했다. 재판관도, 방검사도 그리고 객석의 청중들도 아연실색 할 말을 잃었다. 모두의 어깨가 부르르 떨린다.
지웅은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다 드러났다. 저들의 음모. 그럼, 그렇지. 달라질 건 없다. 전투의식만이 더욱 늘어날 뿐.
"이 녹음테잎을 증거물로 제출합니다"
태경이 침묵을 깼다. 여전히 다른 모두는 침묵을 지킨다. 누군가가 분노한다면 그 여파를 서로가 감당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서로들 참고 있다.
방검사가 자리에 털석 주저앉았다. 도대체 지금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누워서 침을 뱉고 있던 게 아닌가? 어리석은 놈. 창피하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다더니,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보다.
끝났다. 재판은 이제 끝났다. 올가미에서 풀려난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다. 지웅은 가만히 숨을 쉬어 보았다. 비로소, 시작이다.
아침 햇살은 참 맑다. 이 가을의 햇살이란 죽어 있던 물체까지도 다시 부활시킬만큼 생명력이 넘친다. 지웅은 있는대로 가을의 하늘을 마신다. 넉넉하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디뎌본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새롭다.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여유다. 턱을 한 번 쓰다듬어 본다. 어느 새 수염도 많이 자라있다. 까칠까칠한 것을 넘어서 제법 부드럽기까지 하다. 담배. 큭큭. 이 햇살에, 한가치 담배라...... 눈을 감아 본다. 연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 눈을 뜨고 바라보기엔 담배 연기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제법 어지럽다. 이 또한 얼마만에 맛보는 담배던가. 처음 담배를 배울 땐 이 어지러운 기분에 피웠지. 속이 메스껍고, 다리는 제 멋대로 휘청거리고 하늘은 핑글핑글 돌고, 또 돌고. 아- 나 죽을 것 같아.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면서, 이것만 피우곤 말아야지. 그러면서 어지간히도 피워댔었지.
두 팔을 벌려본다. 햇살이, 공기가 더욱 강하게 자신에게 빨려들어오는 것 같다. 그리고...... 갑자기 물컹거리는 무언가가 강하게도 자신의 얼굴을 때린다.
"야, 축하한다"
"자식이 폼은. 얼어죽을"
태림과 현영이 지웅의 얼굴에 두부를 한 웅큼 문질렀다. 지웅이 웃으며 얼굴에 묻은 두부를 떼어먹는다. 녀석들, 여유 좀 부리려고 했더니만...... 하기사 내 주제에 여유는 무슨.
"고맙다"
지웅이 해맑게 웃는다. 아침 햇살보다 좋은 녀석들.
"고생 많이 했죠?"
윤희가 조용히 다가왔다. 지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야, 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가서 밥부터 먹자. 이녀석 목에 낀 때좀 벗겨줘야지"
현영이 유난히 호들갑을 떤다.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태림이 아니다.
"목에만 꼈겠냐? 온 몸이 때 범벅이겠지. 어유, 냄새난다"
즐겁다. 현영도, 태림도 너무들 즐거워한다. 이대로 녀석들과 계속함께였으면.
윤희가 쭈뼛해하고 있다. 하지만 감히 앞으로 나서질 못했다. 지웅에겐 태림과 현영이 있다. 적어도 자신보단 지웅에겐 중요한 사람들일테니까. 아직은 이대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자유는 좋다. 몸이 편해 좋고, 마음이 편해 좋다. 하지만 녀석들이 아니었으면 자유도 아무 쓸모가 없는 사치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윤희, 그녀 역시도 지웅에게 자유를 반갑게 여기게 만드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전국의 손꼽히는 해커들이 한국은행으로 모였다. 치욕의 바이러스를 퇴치할 백신을 만들어보기 위해서이다. 서울대 컴퓨터 공학과 해커 모임부터 시작해 각 대학교 해커들과, 네티즌에서도 내노라 하는 실력자들까지 한국은행 중앙 전산실에 모였다.
전산실장이 직접 화면을 보여주었다. 전산실에 모인 사람 모두가 분노를 느낌과 동시에 막막함을 느꼈다. 처음 대하는 바이러스였다. 해커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있는 실력을 발휘해 백신을 만들어 보았다. 그러나 어떤 백신도 금이타조(金以打朝) 바이러스를 퇴치하지 못했다. 백신으로 치료를 하려고 하면, 돈다발로 한국인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치던 일본인이 `아이고 나죽네, 아이고 나죽네' 하며 비웃었다. 해커들은 저마다 아연실색했다. 컴퓨터 화면 안의, 돈다발로 머리를 맞고 있는 한국인이 바로 자신들인 것 같아 치를 떨었다.
보다못한 전산실장이 컴퓨터를 껐다. 해커들을 갈망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실장의 눈길을 외면했다. 그리고는 저마다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지웅 역시 딜링룸에서 그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금이타조...... 결국은 돈으로 한국을 제압한다는 소리군. 지웅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심각하지?"
세열의 손엔 또 담배가 들려있다. 사흘동안 얼마나 많은 담배를 피워댔는지 모른다. 입에서 찐내가 날 정도다.
심각한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휴일도 아닌데 은행은 아무도 없었다. 밖의 화창한 가을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은행 안은 을씨년스럽기 그지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았다. 자동문은 아예 철폐되었다. 무엇보다도 어느 사무실이건 직원들이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두 손을 놓은 채 멍한 표정으로......
화가 난다. 그런 그림을 보고 화가 안 날수가 없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자유를 만나자마자 너무 큰 벽에 부딪혔다. 큰 벽. 그렇다고 낙심하진 않는다. 애초에 밖으로 나와서 당장 무언가를 해결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렇게 팔짱을 끼고 당하기만 할 수도 있다는 걸 이미 각오한 터다. 단지 화가 날 뿐이다. 가만히 삭힌다. 언젠가 모이고 모여 화산처럼 폭발할 때까지, 참고...... 기다린다.
현영과 태림은 다른 컴퓨터에 앉아서 이것저것 만져보고 있다. 하지만 두사람 모두 애꿎은 컴퓨터만 탓하고 있을 뿐이다. 현영의 입에서는 아까부터 갖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내, 이새끼들 당장 쫓아가서 총으로 갈겨버릴까보다, 그냥"
태림은 가만히 고개를 젖혀본다. 벌써부터 지긋지긋해진다. 이 싸움. 도대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싸움. 지웅의 무죄가 밝혀지면 끝날 줄 알았더니, 웬걸 이제 시작이었다. 지웅의 표정을 보니 이미 충분한 각오가 되어 있는 듯하다. 서두르지 않고 있다. 조급해하지도 않는다. 냉정한 녀석. 그런 면에서 자신과 현영은 역시 지웅에게 한 수 아래였다.
지웅이 컴퓨터를 껐다. 그리곤 마지막 그림까지, 지웅을, 한국을 놀려대며 사라지는 마지막 그림까지 충분히 가슴에 새겨두었다. 지금은 당해준다. 하지만 절대 잊지 않는다.
"나가자"
현영과 태림을 불렀다. 두 사람 역시 컴퓨터를 끄고 일어섰다.
"가 볼 곳이 좀 있어서요. 다시 올게요. 그리고, 딜링은 당분간 좀 쉴게요"
지웅이 세열과 경헌의 대답도 듣지 않고 딜링룸을 나갔다. 윤희도 그대로 남겨둔 채, 무거운 걸을으로 딜링룸을 빠져나갔다.
이렇게 맑은 하늘을 땅 속에서 봐야만 하는 것인가? 지웅은 가만히 성재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 고국 땅에서 묻히신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며칠 새 잔디가 조금씩 뿌리를 내렸다.
태림과 현영은 다소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지웅의 얼굴이 생각했던 것처럼 침울하지 않았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 묘를 찾아왔다는 듯, 태연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절을 하고, 묵념을 하고, 술을 따랐다. 그럴수록 더욱 부담스럽긴 하다. 목메어 울어야, 무덤을 붙잡고 뒹굴어야 할 줄만 알았다. 하지만 너무 차분하다. 그만큼 속으론 얼마나 참고 있는지, 태림이나 현영이나 이미 알고 있었다. 녀석,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다.
현영이 가지고 온 소주를 땄다. 그리곤 일회용 컵에 가득 부었다.
"일단은 아저씨부터 한 잔 드리고"
다시 한 잔을 따른다.
"한 잔 해라. 아마 꿀맛일거다"
지웅이 한 번에 털어넣었다. 정말 꿀맛이다. 아저씨가 곁에 있는 것 같아 포근하다. 그래서 더 맛있다. 아니, 맛있어야 한다. 지금은 그래야 한다. 아직은 잘 참고 있지 않은가.
이번엔 태림을 따라 주었다. 태림은 아무말도 없이 받아 마셨다. 조금 쓰긴 하지만 맛있다. 오랜만이다. 세사람만의 술자리. 오늘도 맨정신으로 돌아가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서 기분이 더욱 좋다. 아직은 그런 친구들이, 태림에겐 재산이다.
그리고 현영이 따라 마신다. 잔은 일부러 한 개만 준비했다. 이런 분위기는 한 잔으로 돌리는 술맛이 더욱 좋은 법이다. 그리고 더욱 빨리 취하는 법이다. 오늘은 빨리 취해야 한다. 그래야지, 맨정신으론 세사람만의 세상을 만들기가 수월치 않다. 요즘 얼마나 긴장을 하며 살았는지. 크- 달다.
주거니 받거니, 잔은 역시 잘 돈다. 오징어 한 마리도 낭비지. 벌써 소주 두 병을 비웠건만 오징어는 다리 몇 쪽만 잘려나갔을 뿐이다.
"걔들, 아직 기억나니?"
지웅이 뜬금 없이 물었다.
"누구?"
태림이 가만히 지웅을 쳐다보았다.
"혹시 걔들 얘기하는 거야?"
현영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묻는다.
"그래, 걔들"
지웅이 태연스레 대답했다. 그제서야 태림이 눈치챈 듯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내리쳤다.
"그래, 걔들이라면 할 수도 있겠다"
대단한 녀석. 지금껏 그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나온지 불과 다섯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불과 다섯시간.
"기억나니?"
지웅이 태림을 보고 물었다. 태림이 기분좋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걔들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어? 우리도 걔들한테 일말의 빚이 있는 셈이잖아"
"그렇고 말고. 야, 정말 술맛 도는데? 맞어, 맞어. 걔들이라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현영의 얼굴이 가장 먼저 붉어졌다. 급해서 그런지 혀도 조금은 꼬였다. 낮술은 참 싫다. 낮술은 세상을 너무 화려하게 꾸며 놓는다. 햇살도 몇 배는 강하게 쪼아대고, 땅기운도 강하게 올라온다. 낮술은 너무 빨리 취하게 만든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조금 있으면 지웅도 태림도 자신처럼 얼큰하게 취할 것이므로.
"시작해봐야지?"
지웅이 태림과 현영을 번갈아보았다.
"뭐? 백신 만드는 거?"
지웅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얌마, 뭐긴. 복수지 복수"
현영이 태림에게 핀잔을 준다. 그리곤 그렇지 않냐는 듯 지웅을 바라본다.
"그래, 복수...... 그리고 반격"
지웅이 자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껄껄껄. 현영이 통쾌한 듯 웃는다. 복수라, 반격이라. 생각만 해도 통쾌하다. 녀석, 분명히 무슨 생각이 있을 것이다. 현영이 웃음을 그칠 줄 모른다. 태림도 얼떨결에 따라 웃는다.
부딪혀 보는 거다. 까짓거, 부숴지고, 가루가 된다 해도 한 번 붙어보는 거다. 생각보다 우린 강할 지도 모른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어 뜯는 법. 지금 우린 궁지에 몰린 쥐라고 생각해도 좋다. 일본이 고양이라면 통쾌하게 물어 뜯어주면 그만. 다시는 넘볼 수 없게 힘을 보여주면 된다.
못할 건 무언가? 돈 많은 일본이면 화수분이라도 가지고 있겠는가? 제기, 화수분이 있다면 부숴버리면 그만이지.
현영도, 태림도 여전히 웃음을 그칠 줄 모른다. 복수라고 했다. 그리고 반격이라고 했다. 그럼 하는 거다. 복수도 하고, 반격도 하는 거다. 멋지게 해버리는 거다.
두이타일(頭以打日)
현영은 남산 타워호텔 커피숍에서 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지 않게 기정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것이다. 현영은 호텔 신문란에서 조간을 한 장 뽑아와서 천천히 읽고 있었다. 말이 아니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주가는 300포인트를 겨우 유지하고 있다. 아직, 정부 관료는 서로를 헐뜯고 싸움을 멈출 줄 모른다. 싸울 상대가 그렇게 없는지, 힘을 합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를 못죽여 안달이다. 외환 보유고는 여전히 바닥을 헤멘다. 외채 상환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디 그것 뿐인가? IMF가 낳은 비극이랄까. 보험금을 타기 위해 자식의 손가락을 자른 아버지도 나타났다. 혀를 찼다. 참, 재미있는 시대라는 생각 뿐.
현영은 읽던 신문을 테이블 위로 내던졌다. 커피도 이미 동이났다. 따분함을 달래려 담배를 피워본다. 아무리 따분해도 줄담배는 별로 안좋다. 목이 아프다. 사람 구경을 할래도 사람이 얼마 보이지 않는다. 미칠 지경이군. 이렇게 사람을 기다리는 건 못 참겠다. 몸이 근질거려서 체질에 안 맞는다. 의자에 앉은 채로 맨손체조도 해 본다. 아-. 그럴수록 더욱 힘들다. 이 양반 사람 불러놓고 왜 이리 늦는거야?
현영이 기지개를 주욱 펴는 순간 기정이 나타났다.
"언제 오셨어요?"
기정이 친절하게 웃는다. 현영이 꽁하니 대꾸를 안한다.
"일찍 오셨나봐요?"
현영의 표정을 보고는 기정이 웃는다.
"한 시간 반 정도 됐어요"
토라진 목소리. 덩치에 안 맞게 다소 귀엽다. 기정이 뾰루퉁해 있는 현영을 보고 껄껄대며 웃는다. 현영의 얼굴이 더욱 험해졌다.
"약속시간 아직 30분이나 남았어요"
현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시계를 쳐다보았다. 12시 30분을 지나고 있다. 11시에 만나기로 하지 않았었나? 수첩을 뒤져보았다. 앗, 1시였군. 현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백수의 비애로다. 얼굴이 붉어졌다.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시간이 남아돌다 보니 1시를 11시로 착각하고 1시간 반이나 씩씩대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사태를 무엇으로 수습해야 한단 말인가.
"요즘 한가하죠?"
게다가, 이 변호사 양반 정곡을 찌르고 나온다. 한가하다. 한가해서 미칠 지경이다. 그나마 태림이라도 연락을 해야 바깥 구경을 할 판이다.
"부탁이 좀 있어요"
기정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현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표정을 보니 제법 심각했다. 그리고 단호한 빛도 띠고 있다.
"우리, 일본에 가 볼래요?"
뜬금없이 무슨 소린지. 현영은 기정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기정이 현영의 대답을 기다리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슨 소리죠?"
"일본에 가자구요"
"글세요. 전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네요"
"일본에 가자구요"
기정이 이번엔 천천히 띄엄띄엄 말했다.
"아니, 저 직장도 구해야 하고, 아시는 지 모르겠지만 사실 제가 지난 번에 방송국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거 알고 있죠?"
기정이 현영의 말을 잘랐다. 현영의 눈이 힘이 들어간다. 무슨 말인지 한참을 생각하고 있다. 그건가?
"지웅씨 살인사건 말예요. 재판이 끝났다고 사건이 끝난 건 아니잖아요. 알고 있죠?"
그거다.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 마시이의 음모는 밝혀졌지만 일본의 계락은 아직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했다. 마시이에게 사주한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다. 그렇지. 아직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현영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어쩌면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제안을 하는지. 한변호사. 보기보단 상당히 날카로운 구석이 있군. 현영이 우쭐해져 입이 함박만하게 웃는다.
"위험할 거예요.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상황이 올 지도 모르구요"
기정이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현영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가 이내 풀어졌다. 세상엔 10원 한 장을 잃어도 아까운 일이 있고,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일이 있다. 지금이 바로 후자의 경우다. 설마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이 생길까 싶지만, 아직은 목숨에 연연할만큼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사람 잘 보셨네요"
현영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를 따라 기정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그러나 어딘가 단단히 각오가 밴 듯한 미소. 현영도 기정도 두려워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그 두려움을 즐기고 있다.
태림이 수용과 호준을 데리고 급하게 딜링룸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이마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탓이다.
"왔구나!"
지웅이 밝은 미소를 띠며 세 사람을 맞았다. 세열과 경헌 윤희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모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잘 있었어?"
수용이 먼저 지웅에게 손을 내밀었다. 호준 역시 지웅에게 여유있는 웃음을 던지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고맙다. 태림이한테 얘기는 들었지?"
지웅이 태림에게 확인하듯 눈빛을 던지며 물었다. 태림이 지웅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준다.
"그럼 임마. 이게 태림이가 얘기해야 알 일이야? 우리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인데"
"그래, 니들이라면 분명히 풀어낼 수 있을거다. 니들이 좀 좋은 머리를 가졌어?"
지웅이 수용과 호준을 추켜세운다. 추켜세워도 좋을 녀석들이다. 지웅은 아직 이만한 천재들은 본 적이 없다. 수용과 호준이 그만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우리도 뉴스 봤다. 다시는 컴퓨터 안 만지려고 했는데 뉴스 보니까 참을 수가 있어야지. 게다가 이 바이러스, 너랑 아무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니구. 이번만은 니 말대로 나라를 위해 한 번 해보는거야"
호준이 지웅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웅이 두 사람의 손을 잡았다. 고맙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 녀석들이라면 충분히 해내고도 남을 것이다. 가히 천재라 불러도 좋을 녀석들.
그 시절, 지웅이 대학 3학년 때 학원에서는 등록금 투쟁이 한창이었다. 다른 물가에 비해 터무니 없이 높은 비율로 오르는 등록금에 대한 반발로 학교는 수업거부를 통해 재단에 항의를 하였다. 매학기 등록금이 10%씩 오른 그 때의 분위기는 반미, 조국통일, 노동자해방을 부르짖던 운동권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았다.
남들에 비해 컴퓨터를 잘 다뤘던 수용과 호준 역시 그 대열에 동참했었다. 둘은 등록금 투쟁이 한창이던 그 해 여름, 보름 가까이 컴퓨터와 씨름을 해 그 학교 학생 전원이 등록금을 낸 걸로 컴퓨터를 조작했다. 학교 컴퓨터는 물론 은행과의 라인까지 조작해 은행에서조차도 확인이 안 되었고, 나중에 등록금 영수증을 가지고 온 사람만 등록을 인정해 준다는 학교의 방침에 대비해, 스캐너를 통해 전교생의 등록금 영수증까지 조작해 놓았었다. 모든 학생이 승리의 기쁨에 취해있을 때 두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형사들에 의해 연행을 당해야만 했다. 등록금을 냈던 학생중의 몇이 그들의 행각을 재단에 밀고해 탄로가 나고 만 것이다. 둘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도받았다. 그리고 그 형이 풀리고 사회의 품으로 돌아온 후 두사람은 각자 작은 회사에 몸을 담고 있었다. 지웅의 부탁으로 태림은 기자라는 신분의 메리트를 이용해 두 사람을 당장 수소문해 은행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수용과 호준은 묵묵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가히 놀라운 실력의 소유자가 만든 바이러스였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가져온 백신 프로그램을 넣고 컴퓨터를 부팅시켜 보았다. 그랬더니 모니터 안의 기분나쁜 일본인이 가소롭다는 웃음을 지으며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나 죽네' 하고는 수용과 호준을 놀려대고 있었다.
수용과 호준은 각오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들의 노트북을 켜고는 다른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은 이미 다른 사람의 방해는 사절한다는 듯 단호해 보였다. 어쩌면 그들은 은행의 프로그램을 복귀시켜 업무를 정상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당위성보다 바이러스 자체를 이길 수 있는 백신을 만드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수용과 호준은 벌써 일본인의 놀림을 몇 차례나 당했다. 그리고도 그들은 여전히 컴퓨터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호준의 손에서는 작은 경련까지 일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탓인지 팔에 힘이 너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지웅을 비롯해, 태림과 윤희 그리고 경헌까지 그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들 역시 어깨가 쑤셨다. 두 사람의 작업을 처음부터 목에 잔뜩 힘을 주고 지켜보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작업을 시작한 지 여덟시간 째, 마침내 한국인을 비웃던 일본인의 웃음이 멎었다. 모니터의 그림이 조금 깨져버린 것이다. 수용과 호준은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호준이 입을 열었다.
"이 바이러스의 이름은..."
호준이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의 눈이 호준의 입에 모아졌다. 호준이 머뭇거리자 수용이 대신 얘기했다.
"이 바이러스의 이름은 금이타조(金以打朝)야. 이 그림들은 놀랍게도 점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굉장히 작은 글씨들로 이루어져 있어. 대단한 실력임에 틀림없어. 이 바이러스를 만든 사람, 분명 히데야시일거야. 우리가 대학 2학년 때 일본으로 연수가서 만난 사람인데 일본 최고의 컴퓨터 프로그래머거든. 이 사람, 우리나라에 대한 배타감정이 아주 심했지"
사람들의 입에서 짧은 감탄의 비명이 흘렀다. 그랬군. 금이타조. 역시 그들의 계락은 금침이었다. 지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벌써 새벽 3시를 향해 있었다. 윤희는 피곤한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태림과 세열, 경헌 역시 눈이 충혈되어 수용과 호준의 작업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웅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수용과 호준의 뒤에서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지루하던 작업을 계속하던 수용과 호준의 손놀림이 갑자기 빨라졌다. 점점 지쳐가던 그들의 모습에 힘이 실려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경헌이 몰려오던 잠을 깨고는 두 사람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 하다가 지웅에게 제지당했다. 두 사람의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그들의 눈빛 역시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유레카!"
호준이 함성을 질렀다. 사람들이 기대감에 싸여 서로의 손을 잡았다. 의자에서 졸고 있던 윤희가 번쩍 눈을 뜨더니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드디어 해낸 분위기였다.
호준이 조심스레 디스켓을 컴퓨터에 넣고 부팅을 시켰다. 컴퓨터 돌아가는 소리가 힘차게 느껴졌다. 더 이상 돈다발을 들고 한국인을 내리치던 일본인도, 그에게 머리를 맞아가며 조금씩 사라지던 한국인도 나타나지 않았다.
딜링룸이 환호성에 휩싸였다. 수용과 호준의 하이파이브.
태림이 기지개를 주욱 폈다. 어지간히도 긴장하고 있었나보다. 어깨에서 우드득 소리가 들릴 정도다. 지웅 역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러면서도 흥분은 하지 않는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고 있다.
"역시, 해 낼 줄 알았다"
지웅이 수용과 호준의 손을 잡았다. 일단 한 고비는 넘긴 듯 하다. 하지만 아직 기뻐하긴 이르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지만 긴장은 다소 풀린 듯 하다. 몸이 가볍다.
"이거 특종인걸? 아이고 이거 조판 시간 넘어갔네. 호외라도 뿌려야겠어"
태림이 특종을 잡았다고 수선을 떨며 좋아했다. 그럴 수밖에. 지웅이 녀석, 너무 절제하고 있어 기쁜 티를 안 내고 있다. 자신이라도 흥분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수용과 호준 둘 다 너무 수고하지 않았는가? 적어도 이럴 땐 좋아해주는 척이라도 하는게 예의다. 하지만, 사실 기분도 좋다. 조금 과장하고 있을 뿐이지.
경헌 역시 긴장이 풀렸는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운다.
"아유, 난 저거 풀다가 굶어 죽는 줄만 알았지. 두 분 시장하시죠? 어디로 가실까요? 제가 잘 아는 해장국집이 있는데, 오늘 스페셜로 대접해드리죠"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다. 세열도 수용과 호준에게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호준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엄청난 힘이 실려있다.
"왜?"
이제야 여유를 되찾은 듯 호준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이 백신 이름이 뭐지?"
"글쎄, 지어야지"
"이걸로 정하면 어떨까?"
"뭐?"
"두이타일(頭以打日)"
호준이 수용을 바라보며 웃었다. 수용이 호준을 대신해 지웅의 질문을 받았다.
"너 우리 프로그램 읽었구나"
"무슨 소리야?"
지웅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까 얘기했잖아. 그 그림이 작은 점이 아닌 굉장히 미세한 글씨로 되어 있었다고"
"그럼?"
지웅이 눈치를 챘는지 두사람을 번갈아가며 물었다.
"그래. 우리도 프로그램을 가장 미세한 글씨로 만들었다. 두이타일(頭以打日)이지. 이제 알겠니?"
지웅의 가슴이 북받쳐 오른다. 허무맹랑한 말이 아니다. 두이타일. 벌써 이렇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의 눈이 글썽거렸다. 저들이 아무리 막대한 경제력으로 우리를 몰아세워도 이겨낼 수 있다. 우리들의 뛰어난 머리로 저들을 물리치고 말 것이다. 아니 우리의 머리로서 일본을 지배하는 날이 올 것이다.
어느덧, 서울의 어둠을 밝히는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미친 한국인
일본의 언론은 두 가지 사건으로 들썩했다. 같은 날, 헤드라인에 실린 두 사건은 `미친 한국인'이라는 제목아래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헤드라인을 차지했고, 사회면 두 페이지를 몽땅 차지한 그 기사는 대략 이랬다.
`에이즈에 걸린 한국, 그래서 미친 한국인'
어제 희귀한 사건의 범인이 검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한국인 최명섭은 다름아닌 에이즈 환자였다. 에이즈 환자인 최는 일본의 수많은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 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부류도 상당히 다양했다. 일본의 주요 정치, 경제인들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방송국 PD, 인기 여가수, 영화배우는 물론 운동선수, 게다가 매춘부들에게까지 그의 병죄(炳罪)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검찰에서는 그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관련자들을 직접 찾아 심문해 보았으나, 아직까지 확실하게 대답을 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검찰은 국립병원의 에이즈 양성 반응을 보인 환자들 중, 최를 아는 사람을 수소문 해 보았다. 그 환자들 중에는 놀랍게도 열 두명이나 최와 관계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에는 자녀를 둔 사람도 네 명이나 있어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최는 3년 전 일본으로 밀입국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에이즈 감염은 어디서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그의 말을 빌자면 일부러 감염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일합방 당시 한국인들이 당했던 위안부의 복수를 하려고 했다고 한다. 너무도 무서운 음모가 아닐 수 없다.
꽤나 준수한 외모를 가진 그는 일본의 여성들을 기회가 닿는 대로 접했다. 일본말 또한 유창한 그는 유명한 자본가로 둔갑하여 일본여성을 꼬드겨 그같이 잔인한 범죄를 저질러 왔다고 한다.
당사자들은 개인의 명예와, 가정파탄의 우려때문에 최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있으나, 검찰은 그가 진술한 사람들 모두를 취조하여 그의 범죄에 가중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일본의 매춘부들이 최와 상당히 많은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이다. 별다른 노력 없이 매춘부와 관계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매춘부에 저지른 범죄 빈도는 다른 일반인들에 비해 몇 배나 높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문제는 그와 관계를 가진 매춘부들이 또다른 일본 남성들에게 몸을 팔았을 경우이다.
보통 하루 평균 4-5명의 남성과 관계를 가진다고 가정했을 때, 최가 퍼뜨린 에이즈균은 지금, 동경시내의 어느정도를 차지하고 있을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이다.
당국은 최의 검거와 동시에 사창가를 덮쳐 매춘부의 윤락행위를 금지시켰다. 또한, 최와 관계를 가졌던 여성들이나, 매춘부를 찾았던 남성들은 빠른 시간내에 국립병원으로 가서 에이즈 검사를 받아보라고 당부했다.
최의 감량은 최소 사형이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최명섭은 분명히 미친 한국인이다. 그는 스스로 에이즈에 감염되어 일본 여성들을 감염시켰고, 더불어 일본 남성들에게 전염시키려고 하였다. 실로 무서운 생각이다. 한일합방 당시의 위안부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최명섭뿐만 아니라 한국인 전체가 미쳐있다. 미치지 않았으면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일이다. 실로, 우리 일본인들의 철저한 대비와 확실한 대응이 필요한 때이다.
그 옆의 기사는 또 다른 미친 한국인을 다루고 있었다.
`망국의 허세, 미친 한국인'
인간은 가장 절박한 상황에 이르면 이성보다 감정에 치우치게 된다. 바로 한국인이 지금 그런 상황이 아닌가 싶다. 어제 오후, 그런 한국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
어제 오후 동경 시내에는 무려 20여만장의 불온문서가 하늘에서 뿌려졌다. 헬리콥터를 통해 뿌린 이 불온문서의 내용은 어처구니 없는 내용이었다. 그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 한국의 후예임이 틀림 없다. 그 옛날, 기마민족이 이동해 한반도에 뿌리를 내렸고, 이민족과, 때로는 같은 민족끼리 사투를 벌이면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흘러들었다. 고도의 철기문화를 갖고 있던 진한의 경우에는 철을 얻는 데 쓸 땔감을 얻기 위해 바다를 건너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으로 건너간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고구려에 밀린 부여족과, 멸망한 가야인(이들은 분명 일본에 의해 멸망한 것이 아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권력투쟁에서 밀린자, 그리고 나당(羅唐)이 멸망케 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었다. 또한 백제가 멸망했을 때에는 20만명 이상이 유민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이렇게 일본으로 넘어간 이들은 원주민들을 물리치고 그 곳에서 자리를 잡아나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선조는 다름아닌 한국인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일본은 조상의 나라를 치려고 한다. 벌써 50여년 전 그 잘못의 댓가를 치루고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각성하라, 일본인이여! 조상의 나라에 함부로 날뛰지 말지어다!
(신동아 98년 7월호 인용)
그는 불온문서를 헬리콥터를 통해 동경시내에 뿌리는 동안 서둘러 출동한 동경방위사령부를 통해 현장범으로 체포되었다. 일본이 4-5세기경 한반도의 남쪽을 지배한 것은 세계가 모두 인정하는 사실인데 그는 다른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부인하고, 망국의 허세를 부리고 있던 것이다.
그런 한국인들에게 동정이 가는 면도 있긴 하지만, 그들의 허세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억지주장뿐이다. 도대체 한국인들은 무엇을 바라고 우리에게 이런 추태를 부리는 것일까?
마시이의 사건 때문에 잔뜩 예민해 있던 동경 시민들은 그 불온문서를 보며 이를 갈았다. 은혜에 대한 보답이 고작 이런 억지주장이라니, 동경시민들은 더이상 한국을 동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한국인들은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억지를 쓰며, 자신들의 망국을 부인하려 하고 있다. 불쌍한 한국인.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동정을 받을 자격도 없는, 미친 한국인이다.
기정과 현영은 도쿄호텔 객실에서 조간 신문을 보며 씨익 웃었다. 물론 도덕적으로 보면 만인의 비탄을 받아야 할 사건이지만, 그들의 범죄에 현영은 자신도 모르게 환호하고 있었다. 자신 역시 에이즈에 걸렸다면 최명섭과 같은 행동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가 막히죠?"
현영이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지? 정말 미치긴 미친 것 같은데?"
기정이 말을 놓는다. 현영과 기정은 일본으로 날아오면서 의형제를 맺었다. 적어도 목숨을 내걸고 하는 모험의 동반자다. 의형제라는 말이 그리 거창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사실, 의형제라는 거 무협소설에나 나오는 것인 줄 알았는데, 맺고 보니 많은 위안이 되었다. 기정이 현영보다 다섯 살 위다. 당연히 형이 될 수밖에.
"아깝다, 아까워. 최명섭이라는 사람 붙잡히지만 않았어도 일본 씨를 말려버릴 수도 있었는데"
현영이 주먹을 손바닥에 부딪혔다.
"좋은 것만은 아냐"
기정이 설레설레 고개를 흔든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내 힘이 약하다는 걸 인정하는 거밖에 안 돼. 지나친 합리화라고도 할 수 있지"
현영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기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영국이 미국에게 자신들의 후예라고 하는 거 봤어?"
현영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거봐. 미국이 아무리 강대국이라고 해도, 영국은 그런 말 한마디 꺼내지 안잖아. 영국사람들은 미국에게 피해의식이란게 거의 없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기 때문이거든"
"하지만 사실이예요. 일본은 한국의 후예라고요"
현영이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기정에게 대들었다. 사실, 아직도 인정하기 싫다. 성재가 떠오른다. 그도 분명히 말했다. 그래서 뭘 어쩔거냐고. 힘이 약하면 기를 생각을 해야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건 계속 당하고 살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성재도 분명히 말했었다. 현영도 분명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가슴은 머리를 이기지 못하고 있다.
기정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일본은 한국의 후예다라는 말은 `한민족은 일본민족에 대해 결코 뒤떨어지는 민족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합리화시키는 과정에서 나오는 거야. 즉, 민족 열등감으로부터의 탈피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거지"
"그런 게 어디있어요!"
"인정할 건 인정하자. 그래야 우리가 강해져. 어린 아이가 자기보다 힘 센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았어. 그래서 엄마한테 쪼르르 달려가 저 애가 가만히 있는 날 때렸어, 하고 일러바친다고 해. 그 아이는 엄마한테 얻어터졌다는 걸 말하면서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위안을 얻겠지. 그게 다야. 그리고 또 얻어터지게 되고. 그건 아니야. 얻어맞았으면 다음에 만났을 땐 한 대라도 때려보고 맞을 수 있어야 해. 그래야 힘 센 아이가 함부로 못 건드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안다. 말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것만은 인정하지 못하겠는 걸 어쩌란 말인가? 물론 생각 한 편에서는 지나간 과거에 얽매여 현실을 감정적으로만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하지만 지금은 총칼만 드리대지 않았지 전쟁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냉정하게만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기분은 꽤 좋다. 가슴이 후련해진다. 기정의 말대로 일본의 열등감에 빠져 있던건지도 모른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럴수록 자괴감에 빠질 것만 같았다.
벨 소리가 수십번을 울렸다. 그래도 지웅과 수용, 호준은 몸도 꿈쩍하지 않는다. 해는 벌써 중천. 호준은 제법 코까지 드르렁 골고 있다. 전화기는 불빛까지 발산하며 요란하게도 울린다.
이번엔 지웅의 휴대폰이 울어댄다. 어지간히도 급한 전화인가보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전화벨이 울릴때야 지웅이 손을 더듬어 클립을 연다.
"여보세요"
말을 하는 듯, 마는 듯.
"나지웅씨, 나 행장입니다"
"아, 예"
지웅이 몸을 일으켰다. 천근, 만근이다. 새벽에 시장기를 달래려 해장국을 먹다가 마신 소주 때문에 쉽게 잠을 깨지 못했다.
"정말 고마워요. 지금 당장 은행으로 나와요. 내 지웅씨와, 친구분들한테 한 턱 안내면 여기 앉아있을 염치가 없을 것 같네요. 기다리고 있을테니 어서 오세요"
존대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은행을 살려놨으니 제 아무리 행장이라도 공손하게 나올 수밖에. 지웅이 수용과 호준을 흔들어 깨웠다. 역시 쉽게 일어나진 못한다. 몸을 적당히 혹사했어야지, 어깨며 팔이 아직도 쑤신다.
억지로 일어나 대충 씻고는 은행으로 갔다. 딜링룸에는 벌써 축하파티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경헌과 윤희, 그리고 세열까지 딜링룸 직원들과 행장을 비롯한 은행의 간부들이 모두 모여 자리가 비좁아 터질 지경이었다. 세 사람이 딜링룸 문을 열고 들어서자 경헌이 샴페인을 터뜨렸다.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새벽까지 얼굴이 푸석했던 윤희는 말끔한 얼굴로 웃고 있었고 행장을 비롯한 간부들의 얼굴 역시 며칠만에 보는 밝은 모습이었다.
행장이 지웅과 수용, 호준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감사를 표시했다. 그리고 두툼한 봉투가 들어있는 보너스를 건넸다.
"정말 고마워요. 여러분들 아니었으면 우리 은행은 문을 닫고 말았을 거예요. 대통령 각하께서도 여러분의 노고를 치하하셨습니다. 지웅씨, 정말 수고 많았어요"
감격. 행장의 억양이 아직도 들떠있다. 딜링룸 안의 모든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용과 호준은 조금 어색한 표정이었지만,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웅이 담배를 피우러 휴게실로 나갔다. 출감한지 사흘밖에 안 됐지만 벌써 몇 달은 지난 것 같은 느낌이다. 정신이 없던 탓도 있었지만, 제법 힘든 싸움이다. 긴장의 연속. 아직 자신이 직접 실행한 것은 없지만 조금은 벅차다. 이번 일도 수용과 호준이 없었으면 처음부터 좌절의 늪으로 곤두박질했을지도 모르는 터. 모든 걸 자신이 해결한다는 생각같은 건 없지만 언제나 해결사가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보다 버겁다. 담배연기도 그걸 아는지 무겁게 가라앉는다.
윤희가 곁으로 다가왔다. 얼마만인가 둘만의 시간. 가슴이 설레인다. 윤희의 볼이 상기되었다.
님.
언뜻 님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애인도, 연인도 아니다. 님. 그것으로 족하다. 지웅이 앞에 서있다. 윤희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다. 뒷짐을 지고 발을 굴러본다. 고개도 숙인채. 수줍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줬으면......
"오랜만이군"
실로 오랜만이다. 둘만의 시간. 윤희가 생긋 웃는다. 한 걸음 더, 지웅에게 다가갔다.
"잘 참았지요?"
어린 아이 같다. 착한 일을 하고 엄마에게 칭찬 듣기를 바라는 어린 아이의 얼굴. 윤희는 지웅의 칭찬이 듣고 싶다. 얼마나 힘들게 참아왔는데......
지웅이 고개를 끄덕인다. 대견하다는 듯. 자신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참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다. 고맙다. 살며시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 향기. 다른 모든 여자들에게도 이런 향기가 날까? 아니다. 이건 윤희의 향기다. 언제나 풋풋하다. 향기가 이렇게 풋풋하고 싱그러울 수도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지웅의 가슴새로 윤희의 여린 숨소리가 전해진다.
"같이 있어줄거죠?"
윤희가 애절한 목소리로 묻는다.
"때가 되면"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윤희에게 몰두할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여유...... 물론 사랑을 여유로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윤희에게 신경 쓸 만큼 마음이 넉넉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같이 있어주고 싶다. 아니 자신이 오히려 윤희와 함께 있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하지만.....
가슴이 내려앉았다. 차라리 말을 꺼내지 말 걸 그랬다. 물론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지금 지웅의 심리가 어떤지 잘 알고 있다. 지금 함께 있어주겠다는 대답을 바란다면 그건 사치다. 알면서도 막상 지웅의 차가운 대답을 듣고 나니, 가슴이 무너진다. 이 사람, 언제까지 자신의 가슴을 이렇게 사정없이 무너뜨릴는지. 하지만 지금은 그래도 행복하다. 적어도 예전처럼 자신을 홀대하진 않는다. 그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할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럼 그걸로도 충분히 족하다.
`두이타일(頭以打日)'을 헤드라인으로 다룬 태림의 기사는 한국인 전체에게 활력소를 제공하였다. 가뜩이나 일본의 계략으로 원유가 끊기고, 수출의 길이 막혀 주저앉기 일보 직전의 국민들은 수용과 호준의 백신에 한껏 고무되었다. `두뇌로 일본을 깨뜨린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야, 날나리, 어쩌다 한 건 했다고 우쭐대지 마. 자식이 소 뒷걸을치다가 쥐꼬리 밟은 거 가지고 까불기는, 그러다가 큰 코 다쳐. 오후에 일 없지? 나랑 죽을 때까지 마셔보자. 오늘 딴 데 가면 넌 모가지 이거다"
부장은 손으로 목을 치는 흉내를 내며 태림에게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누구보다 좋아하고 있었다. 태림 역시 털털한 성격으로 맞부딪쳤다.
"아, 이거 부장님, 괜히 열등감 느끼니까 그러는 거 아녜요? 암튼 오늘은 비워두죠. 부장님 수준이 곱창전골에다 소주겠지만 그래도 간만에 한 턱 내신다니 감사히 접수하죠"
"니 수준에 소주와 곱창이면 훌륭하지 더 이상 뭘 바래?"
"그런다고 하죠"
태림은 적당히 둘러대고 자리에 가서 앉았다. 얼굴엔 연신 웃음이 그칠 줄 모른다. 특종을 잡은 까닭도 있지만 일본의 조간 신문때문이기도 했다. 미친 한국인이라니. 태림 역시 현영이 아침에 읽었던 기사를 접했다. 때로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큰 용기를 주는 법이다. 상식 이하의 행동, 도를 지나친 사상이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위안이 될 수도 용기를 줄 수도 있다. 대한 민국 사람 어느 누가 그 두 사람에게 삿대질을 할 것인가? 실컫 웃는다. 재미 있다. 그리고 통쾌하기도 하다. 창피, 인륜? 더 이상 무너질 것이 없는 사람들에겐 그마저 사치일 뿐. 메말라 있었던 가슴에 활력소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일본 신문을 보니 현영이 생각이 떠올랐다. 녀석, 급기야는 일본으로 떠나고 말았다. 언제 돌아올 지 모른다는 말을 남긴 채, 제법 영웅인 척 지웅과 자신에게 작별을 고하고 떠났다. 사실 언제 돌아올 지 모른다. 당장 오늘 밤비행기로 날아와 술먹자고 자신을 불러낼 지도 모르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확률 없는 모험이다. 아무튼 당분간은 마음을 편히 놓을 수가 없다. 가끔은 피해갈 줄 아는 게 사람의 지혜. 하지만 현영이 녀석은 그걸 비겁이라 여긴다. 나무가 앞을 가로막고 있을 땐 옆으로 돌아가도 될 걸, 굳이 잘라버리려 드는 사람이 바로 현영이다. 노심초사. 이젠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다.
부장이 아까부터 태림을 조르고 있다. 아직 해가 지려면 한참 남았지만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태림이 신문을 접어 안주머니에 챙겼다. 이런 기사는 지웅도 봐야 하기 때문이다.
Y2K
"한 잔 받아라"
지웅이 수용과 호준에게 잔을 따랐다. 행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은 간단한 식사를 얻어먹은 뒤 따로 나와버렸다. 그런 다분이 혁식적이고 딱딱한 자리는 영 질색이다. 차라리 이렇게 조촐한 주점에서 술을 마시는게 지웅 자신에겐 어울린다. 그리고 편하다. 수용과 호준도 은행에서와는 달리 마음이 놓인 표정이다.
세상이 참 희한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용과 호준 두 녀석과는 같은과였지만 같이 어울린 적이 거의 없었던 사이다. 이 녀석들과 술을 마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이렇게 술을 마시고 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무슨 끈이 이어진건지. 애국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 그렇게 생각하기엔 너무 추상적이다. 아무튼 어색하진 않아서 다행이다.
수용과 호준이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다는 듯 어깨를 주욱 늘어뜨렸다. 벽걸이 TV에서는 자신들이 밤을 새워 이루어 놓은 행적을 신나게 얘기하고 있었다.
수용이 멀뚱히 TV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 대단하더라"
지웅이 잔을 비우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가?"
"뭐긴 임마, 니 행동이 한국인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걸? 우리만 해도 봐라. 다시는 컴퓨터에는 손 안대려고 했거든. 너도 알잖냐. 그 시절 그 압박속에 3년이나 젊음을 잃어버린거. 다시는 어떤 일도 안하려고 했거든. 감옥 안에서 얼마나 다짐하고, 또 다짐했겠냐? 그런데 니 기사 접하고, 대통령이 니 얘기하고 그런 거 보니까, 부끄럽기까지 하더라구. 막말로 태림이가 와서 하도 간절하게 부탁을 해서 못이기는 척 오기는 했지만, 호준이나 나나 먼저 나서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게 다 너때문이 아니겠냐. 아직은 우리의 젊음이 남았다는 걸 느끼게 해 줘 고맙다. 한 잔 받아라"
수용이 어른에게 술을 따르든 깍듯하게 지웅의 잔을 채웠다. 호준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호준이 잔을 들이키고 말을 이었다.
"우린 컴퓨터만 만질 줄 알았지 다른 건 완전 깡통아니냐. 마침 수용이랑 나랑 프로그램을 하나 개발하려고. Y2K 해결책을 마련해야 하거든. 1년밖에 안 남았잖아"
"Y2K?"
지웅이 물었다. 조금은 생소한 단어다. 수감되어 있을 때 간수가 Y2K, Y2K 하는 걸 들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아직 자세히는 모른다.
"YEAR 2000 PROBLEM 의 약자야. 2000년 1월 1일이 되면 컴퓨터가 날짜 인식을 못해서 혼란이 일어나게 되지. 우리가 상상하는 것들 이상이야. 너희 은행 전산이 완전 마비된 거 봤잖아. 이번엔 컴퓨터만 장애를 일으켜 엘리베이터, 자동문 같이 사소한 것만 작동을 안 했지만 Y2K를 해결하지 못하면 아예 꼼짝도 못해. 우선은 전기가 들어오질 않아. 그 뿐인가? 통신, 운송수단도 완전 마비야. 원시시대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사실 지금 컴퓨터의 통제를 받지 않은 것이 없잖아"
지웅은 잠자코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아직은 쉽게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일단은,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괜히 하는 얘기는 아닐 터. 잔을 한 잔 마셨다. 이 녀석들, 바이러스를 퇴치하고 그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사고를 치려는 모양이다. 벌써부터 잔뜩 기대가 된다. 지웅은 가만히 호준의 눈을 주시했다.
"전문가들은 이 시장이 수천억대에 이를 거라고 하고 있어. 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그 이상이야. 지금 많은 정보통신업체에서 Y2K 해결방안을 개발하고 있고, 해결 했다는 곳도 있지만 거의가 미봉책일 뿐이야. 근본적인 해결방안은 아직 나오지 않았어. 2000년이 오기 전에 개발한다는 보장도 없고. 그래서 우리가 해볼까 해"
수용이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우리가 예상하기는 적어도 100조원 이상 가는 시장이야.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시장이지. 100조원이면 우리 나라 1년 예산보다 많은 돈이야. 달러로 계산하면 750억달러. 우리나라가 갚아야 할 돈의 반이지. 어때 이만하면 뛰어들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잠깐만. 750억달러라고 했지? 분명히 그랬다. 750억달러라고. 그 소리였구나. 그래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했구나. 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일까?
"우리가 아무리 개발을 해도 대기업이 알면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을 거야. 너도 알 거 아니야. 중소기업이 아무리 좋은 거 개발해도 쥐도 새도 모르게 빼앗아 가버리는거. 우린 그게 두려워. 그래서 너한테 제의하는 거야. 너라면 우리가 개발한 프로그램으로 벌어들인 돈, 쓸데 없이 쓰진 않을 거 같거든. 우린 다른 욕심 없어. 단지 평생 연구할 만한 자금만 있으면 그만이야.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자신은?"
호준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렇지. 일본 최고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만든 바이러스를 불과 하루만에 퇴치한 천재들 아닌가?
750억 달러라 한다. 한국 외채의 반을 줄일 수 있는 금액이라 한다. 수용과 호준의 말대로 그만한 돈을 벌어들인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시도 자체만으로 충분히 신나는 일이다. 지금 상황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심정. 하지만 수용과 호준의 말대로라면 동앗줄이다. 굵고, 황금으로 된 튼튼한 동앗줄이다. 지웅이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아까 받은 거다. 솔직히 내가 한 건 하나도 없는데 보너스 받을 이유가 없잖어. 니들 경비에 보태 써라. 돈이란 건 필요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어야 제대로 가치를 발휘하는 거야"
호준이 주저없이 봉투를 받아들였다. 그 역시 자신감이 넘친다는 소리.
"알았다. 니가 준 돈 그 몇천배, 몇만배 이상으로 외국놈들 돈 좀 벌어보자"
"그건 그렇고......"
지웅이 슬쩍 화두를 던져보았다. 수용과 호준이 지웅의 말을 기다렸다.
"그 바이러스를 깼으면 그 이상의 바이러스도 개발할 수도 있겠네?"
"그럴 수도 있지"
"그럼 부탁 하나 해도 될까?"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호준이 눈치를 챘다.
그렇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지금껏 우린 마냥 당하고만 살았다. 임진왜란도, 한일합방도 당하기만 했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제대로 한 번 대들어보지도 못했다. 반격이란 말을 꺼낼만한 조짐도 없었다. 성인군자의 나라? 나라의 힘이 없고서는 성인이고 군자고 필요없는 법이다. 동방예의지국? 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다. 총칼에 쓰러지고, 누나와 자식들이 위안부로 끌려가는데 예의가 다 무엇이고, 선비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도 일본의 계략에 당하고 있는 꼴이다. 당장 지웅 자신이 살인누명을 썼다. IMF가 왔다. 그리고 막강한 경제력으로 한국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이런데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가? 일본이 쑤셔놓으면 그걸 수습하는 게 한민족이란 말인가? 누가 그랬는가? 용서가 최고의 미덕이라고. 이제 한일관계는 우호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그래서 맞은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란 말인가?
"다시는 우습게 볼 수 없도록 혼 좀 내주자"
"똑같은 놈이 되자는 거야?"
수용이 다소 회의적으로 말했다.
"더욱 심해도 좋아. 적어도 일본이 원하는대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것보다는 더럽고 치사해지는 게 낳아"
"동감이다. 지웅이 말이 옳아. 아무리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수많은 외침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텨왔다고 자랑스러워 한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생각일 뿐이야. 외국에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르칠 때는 약소국이란 말, 그 외에는 달리 설명할 말이 없는 거라고. 미국을 봐. 그들이 원주민을 제압하고 나라를 세웠던 것이나, 링컨이 흑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우리가 배운 역사관으로 볼 때, 과연 훌륭한 일들일까? 아니야, 단지 지금의 미국이 강하기 때문에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거야"
"그래서 복수를 하자고?"
여전히 회의적인 말투다. 지웅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복수를 하자는 게 아니야. 이번엔 선제공격을 하는 거야. 너희들이 깨뜨린 바이러스는 생각하지 말고, 선제공격을 한다는 생각으로 하는 거야. 우리가 먼저 침공을 하는 거지"
"좋아. 그 해결책도 Y2K 안에 있다"
호준이 자신있게 말했다.
"밀레니엄버그를 일본의 컴퓨터 안에 침투시키게?"
수용의 목소리가 한풀 꺽였다. 호준이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한다"
지웅이 잔을 들었다. 호준도 수용도 지웅의 잔을 부딪혔다.
이미 어젯밤부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번만은 그대로 당하고 있어선 안된다. 일본의 뜻대로 호락호락 당하지만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이미 일본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그 정도 바이러스 단 하루만에 해결하는 최고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있다. 어쨌든 바이러스란 만드는 것보다 해결하는 것이 어려운 법. 놈들, 아마 고생좀 하게 될거다.
세 병째의 소주가 나오자 태림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다.
"빨리도 온다"
태림이 지웅의 옆에 털석 주저 앉았다. 온 몸이 땀으로 뒤범벅이다. 입에서는 술냄새가 진동을 한다. 술을 앞에 두고도 냄새가 느껴지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마셔댄 모양이다.
"응, 우리 부장이 특종 잡았다고 한 턱 낸다는거. 아유, 곱창전골 10인분에다 소주 여덟병이 뭐니? 그거 억지로 맞춰주다가 니 전화 받고 곧바로 오는거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네. 니들 기사 봤냐? 어때, 잘 썼지?"
태림의 혀가 조금 꼬였다. 태림은 소중하게 모셔온 듯한 신문을 세 사람 앞으로 펴 보이며 의기양양했다.
"고맙다. 니들덕택에 가슴이 얼마나 후련한지 모른다. 특종을 내서가 아냐. 가슴에 응어리 진 무언가가 어느정도 쓸려 내려간 것 같은 기분이라니까. 우리 부장도 그러더라. 신문 판매수보다 니들이 해낸 그 내용이 너무 맘에 든다고. 기자로서 이렇게 속이 후련한 기사 평생에 한 번 써보기 힘든거거든. 정말 고맙다"
태림이 연신 웃으며 수용과 호준을 추켜새운다.
"얘들, 더 무시무시한 짓 꾸미고 있던걸? 아무래도 얘들 미친 거 같다"
지웅이 수용과 호준을 바라본다. 수용과 호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쳐? 미친 한국인? 하하! 니들도 그 그사 봤니?"
태림이 파일을 뒤지더니 돌돌말린 신문을 꺼내 세 사람 앞에 펴 보였다. `미친 한국인'이라는 헤드라인이었다. 세 사람은 순간 심각해지더니 기사를 읽고는 시원하게 웃었다.
"그래, 미친 한국인. 수용이랑, 호준이 얘들도 이 신문에 이름 실릴줄 모르겠다. 한 번에 나라를 일으킨, 단시간에 일본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힌 한국인. 도저히 정상인의 머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무서운, 그렇게 미친 한국인"
미치고 싶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미쳐보고 싶다. 미쳐서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미쳐버리고 싶었다.
시련
주식은 급기야 200포인트마저 무너져 버렸다. 바둥거리며 어떻게든 올라보려하던 주가 또한 일본인의 의도대롤 열심히 곤두박질했다. 주식시장은 매일같이 초상집 분위기였다. 고객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 주식시장을 찾는 사람은 가지고 있던 주식을 매도하는 사람들 뿐이었다.
기업과 은행 역시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일본의 거대자본이 물밀듯 빠져나가는 바람에 대규모 은행들 역시 자본금의 부족으로 쩔쩔 매고 있었다. 한국은행 역시 바이러스를 퇴치하고 다시금 업무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은행 전체가 힘이 있어 보였지만 불과 며칠만에 다른 은행과 마찬가지로 자본금에 허덕이게 되었다. 금리는 25%까지 올랐고, 그 비싼 이자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조금이라도 대출을 받으려 은행을 식당 드나들듯 하였다.
기업은 하나 둘 외국자본가들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OB맥주가 3천 500억에 외국 기업에 넘어갔다. 게다가 진로마저 미국의 쿠어스에 1조원에 매각되었다. 다른 것들은 둘째치고 국민의 정서를 달래는 주조 기업들이 하나 둘 지분을 팔아치우고 있는 것이다. 담배인삼공사도 외국에 매각될거라는 소문도 무성하게 들리고 있었다.
더 이상의 진전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보이는 것은 끝없는 추락뿐이었다. 날개도 한 번 펼쳐보지 못한 비참한 추락이었다.
서울시내 자동차의 평균 속도는 근 10년간 최초로 50km를 넘어섰다. 원유가 수입되지 않아서이다. 산업시설은 1/3이나 마비되었다.
IMF의 요구로 각 기업은 구조조정을 실시해야 했다. 5대 그룹은 물론 각 중소기업까지 구조조정이라는 칼날 아래 수많은 사람들을 실업이라는 굴레 속으로 밀어 넣어야 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고 있을 리가 없다. 구조조정에 의해 퇴출당하고 실직당한 사람들, 또한 퇴출 위기에 몰린 사람들은 연일 파업을 벌였다. 생존권을 보장해달라. 대책없는 구조조정을 즉각 철수하라. 메아리 없는 외침이었다.
청와대에서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조성, 날마다 경제 동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날, 며칠 들리는 소식이라곤 차라리 듣지 않는게 낳을 뻔했다는 생각이 드는 말 뿐이었다.
대통령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절박한 상황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쩌다가 상황이 여기까지 왔는지, 저 일본의 영향력이 이정도였는지, 그동안 우리는 무얼하고 있었는지, 대통령이라는 자신의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한달여만해도 180만명에 달하던 실업자는 불과 2주 사이에 250만명으로 늘어났다. 한국의 성인 중의 1/10이 실업자가 된 것이다. 길거리에 나앉는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주인없는 아파트 또한 수천호가 생겼다.
사회는 어떻게 허리띠를 졸라매려고 했다. TV는 오전 6시에서 10시, 오후 5시 30분에서 11시로 방영시간을 단축했다. 기업들 역시 전력사용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에어컨은 전시물로 변했고, 출퇴근 시간도 10시와 5시로 조정되었다. 광화문의 사인보드 또한 먹통이었다.
가장 비참한 현실은 식생활의 변화였다. 그래도 그 전까지는 먹는 것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이제는 필요한 음식 외에는 만들지도 않았고, 집들이니, 축하연이니 하는 문화도 자취를 감추었다. 군것질 또한 자제하였고, 외식은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자연히 도시의 밤은 적막했고, 서울은 그렇게 무너져만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서울의 겉모습과 달리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아직은 넉넉하기만 한 고소득층이었다. 그런 사회현실에서, 가진 자는 더욱 벌어들일 수 밖에 없는 법. 대부분의 서울이 어둠에 잠겨있었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마치 다른 나라에 사는 것처럼, 혹은 다른 연방자치국에 사는 것처럼 여전히 먹고, 마시고, 그렇게 흥청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서울 하늘 아래 다른 나라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은 일부 청소년들이었다. 나라의 경제가 망국 직전까지 몰렸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일본의 문화에 흠뻑 취해있었다. `헬로키티'의 인기는 사그러들 줄 몰랐으며, 압구정의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일본의 잡지와, 의상, 음악을 보며 즐거워했다.
저 하늘 아래 대한민국은 패망의 그림자가 너무 짙게만 드리워져 있었다.
현영과 기정은 며칠 째 성재의 집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수상해 보이는 사내들이 정기적으로 그 곳을 지나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정은 지난 번 호텔 사건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검은 양복의 사내들. 지금 성재의 집앞을 지나다니는 자들도 검은 양복을 입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섣불리 성재의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힘들겠는데요?"
현영이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저치들 분명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
"우리들일지도 모르겠군요"
현영이 성재의 집을 주시한 채로 말했다. 기정이 현영을 쳐다보았다. 아직 겁이 없어보인다. 그대로 성재의 집으로 쳐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다. 정말 그런 생각이라면 무조건 말리고 싶다.
"싸움 좀 해?"
"그럭 저럭요"
"몇 명까지 붙어봤는데"
"한 명 이상 붙어본 적 없어요"
"그게 그럭저럭이야?"
"그래도 져 본 일은 없어요"
사실 싸움을 안하고 살았다. 가끔씩 주먹이 말을 안들어서 그렇지 어떤 게 이기는 거라는 것 쯤은 알고 있다. 참다 못해, 주먹을 내지르는 거, 그건 먼저 패배를 인정하는 행동이다. 지금껏 그렇게 알고 있다. 웬만하면 주먹같은 건 쓰지 않는다. 지난 번에 노PD를 때려눕혔을 때처럼 주먹이 먼저 반응을 할 때를 제외하곤 말이다.
"이대론 안되겠는데, 다른 방법을 찾아보던지 해야지"
"없어요"
"없다니?"
"오늘 밤에 들어가요"
"밤에도 돌아다니잖아"
"밤에 한 놈 처치하는 건 일도 아니예요"
"한 놈이 아니야"
"걱정 마요. 내가 알아서 할테니"
여전히 겁을 모른다. 현영의 나이도 서른이다. 서른의 나이에 저런 배짱을 갖고 있다. 든든하긴 하지만 그래도 불안하다. 만류해 보고 싶지만 이미 현영의 표정은 잔뜩 각오하고 있는 터. 말려서 될 일이 아니다. 기정 역시 조금씩 마음의 각오를 모아가는 수밖에.
"일단 밥이나 먹고 밤에 다시 오자"
"싫어요"
"그럼 여기서 밤 될 때까지 기다릴거야?"
현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필요가 있어?"
"필요가 있죠. 타겟을 정해야죠"
어차피 일대일로는 어려운 싸움이란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게다가 까딱하다간 일대일이 아닌 몇 명이 한꺼번에 덤벼들 수도 있다.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계속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약한 녀석이 있을 것이다. 지금 그런 녀석을 찾고 있다. 다행히 사내들은 한사람씩만 집앞을 서성이고 있다. 쳇. 기가 막히다. 하라는 PD 때려치우고 조직 똘마니 같은 짓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게 더욱 재미있는 것 같다. 애초에 조직에 들어갔으면 지금쯤 중간보스라도 하고 있을텐데......
"정말 안 가?"
이번엔 대꾸도 없다.
하는 수 없다. 밤이 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기정은 온 몸을 풀어보았다. 하지만 그의 나이 벌써 서른 다섯. 주먹으로 치고 받고 하기엔 다소 버거운 나이다. 하지만 현영의 폼을 보아 하니 오늘 밤 본의 아니게 주먹을 써야 할 것만 같다.
지웅은 하루종일 Y2K에 대한 자료를 훑어보고 있었다. 수용과 호준의 말대로 정말 상품가치가 있는 것인지, 해결하지 못하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우선은 자신부터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Y2K, 밀레니엄버그. 수용과 호준의 말대로 아직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단지 일부 정보통신회사에서 대응책을 만들었을 뿐, 근본적인 방안은 나오지 않은 실정이었다. 각 기업에서도 자사 내의 컴퓨터는 Y2K를 해결했다고 하지만 착각일 뿐이다. 수만개의 프로그램 중 단 한 줄의 코드에 문제가 발생해도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번질 수 있다는 얘기다.
또한 모든 프로그램을 Y2K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방심해서도 안된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대방의 프로그램이 회사 전산시스템으로 끼어들어 프로그램을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군. 호준이 말이 떠오른다. 그 해결책도 Y2K에 있다는 말. 해결되지 않은 프로그램,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일본의 컴퓨터에 침투시키는 방법. 상대가 인터페이스에서도 문제 소지여부를 판단할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프로그램. 바이러스가 아니라 프로그램이다. 한 국가를 침몰시키는 프로그램. 그걸 수용과, 호준이 만들어낼 것이다.
물론 일본도 몇 년 전부터 Y2K 해결방안을 간구하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Y2K 해결을 위해 수많은 자금을 풀어놓은 상태다. 우리 보다 일찍 시작했다. 어쩌면 인터페이스에서 먼저 걸릴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웅의 얼굴엔 회심의 미소가 떠오른다. 가능하다. 일본 최고의 프로그래머를 꺾은 천재들이다. 그 보다 강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기다리고만 있으면 된다.
다시 책장을 넘겨보았다.
현재 우리나라는 아직 컴퓨터 안의 밀레니엄버그만 찾아내려 하고 있을 뿐, 자동화설비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상태다. 수많은 공장이 2000년을 기해 작동을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수용과 호준이 말한대로 당장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 수 있고, 운송, 통신수단이 마비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일단 사람이 움직이질 못한다. 병원도, 경찰서도, 군대도 학교도 대혼란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Y2K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1년 남았다. 1년.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수용과 호준이 완벽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에도, 지웅 자신이 그 프로그램을 기다리는 데에도 1년이면 딱 족했다.
생각보다 많은 업체가 Y2K 해결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한국IBM, 한국유니시스, 한국HP, 한국썬마이크로, 캡제미나이 등 주로 외국업체들이 한국에 지사를 차려 각 기업의 Y2K를 해결해 주려 하고 있었다. 그래선 안 된다. 외국 업체로 인해 Y2K를 해결한다면 꼬투리를 잡히는 꼴이 되고 만다. 문제가 생겼을 때 또 어떤 프리미엄을 요구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더더욱 수용과 호준의 계획이 필요하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큰 뜻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이다. 게다가 분명 말했지 않은가? 수용, 호준 두 사람의 연구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지웅에게 맡긴다고.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사실 그로 인해 IMF를 해결하고픈 욕심은 없다. 단지 그 돈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라의 사태가 심각하다.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조급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하지만 적어도 가지고 있는 힘은 다해야 한다.
협정(協定)
홍순영 외교통상장관은 기분이 잔뜩 상해 있었다. 가즈오 주한 일본 대사가 느닷없이 찾아와 아무 말도 없이 싱글싱글 웃고만 있는 까닭이다. 홍장관도 먼저 말을 꺼내진 않았다. 할 말이 있어 찾아 왔으면 입을 열겠지. 그리고, 먼저 말을 꺼낼 기분도 아니다. 가즈오 대사의 태도가 너무 건방지다.
홍장관의 사무실을 주욱 둘러보던 가즈오 대사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곤 더욱 기분 나쁜 웃음으로 홍장관을 쳐다보았다.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결코 좋은 소식은 아니라는 표정이다.
"무슨 일입니까?"
대답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말투. 사실 대꾸조차 하기 싫다.
"아무래도 한일 관계가 이대로 가다가는 되돌릴 수 없는 사태까지 이를 것 같아서요"
속이 다 들여다 보인다. 또 무슨 계락을 꾸미고 있는 건지. 홍장관은 적잖이 긴장하고 있다. 살인사건을 조작했다. 자금을 회수해갔다. 원유를 차단했다. 한국은행에 바이러스를 침투시켰다. 이번엔 또, 무슨 계략일지.
"그럼요. 한일 관계가 이렇게 흘러가면 안되죠"
홍장관이 억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서 홍장관님께 선물을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참기 힘들다. 이 대사라는 사람, 얼굴만 봐도 역겹다. 게다가 입냅새까지 심하게 난다. 마주보고 싶지 않을 정도다.
"무슨......"
홍장관이 반쯤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요즘 많이 힘드시지 않습니까?"
홍장관이 숨을 한 번 내리쉰다. 가즈오 대사가 말을 이었다.
"저희 수상님이나, 총리님 모두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나라끼리 사이가 멀어져서야 되나요. 지난 번 살인사건은 일부 극단주의자가 벌인 해프닝이구요......"
해프닝이란다. 해프닝. 주먹으로 저 주둥아리를 한 대 갈겨주고 싶다.
"원유가 공급되지 않은 것도 사실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전산 착오로 인해 전달이 잘못 된 것이라더군요"
가즈오 대사는 아직도 말을 꺼내지 않고 있다. 슬슬 홍장관의 부아를 건드리고만 있다.
"하실 말씀이란게......"
홍장관의 말투가 퉁명스러워졌다. 더 이상은 가즈오 대사의 비아냥거림을 들어주고 있을만큼 성격이 넉넉하지 못하다.
"아, 예. 다름이 아니고 저희들이 잘못한 걸 인정하고 모든 걸 중단하려고 합니다만......"
홍장관이 가즈오 대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거짓말이오, 하고 써 있는 얼굴.
"자금 회수를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한국 경제도 살아야지요. 원유 공급도 원활하게 해 드리고, 일본으로 수출하는 것도 완화시켜 드리겠습니다"
굉장한 선심이라도 쓰는 척 가즈오 대사가 거들먹거린다. 아직 실제로 하고 싶은 말은 안 했을 것이다. 홍장관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 말을 듣기가 솔직히 두렵다.
"그래주시면야 저희로서는 감사할 따름이지요"
"감사는요. 당연히 그렇게 되야 할 일인데 서로 약간의 오해가 있었을 뿐인걸요"
가즈오 대사가 껄껄대며 웃었다.
"이제 정말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을텐데요"
홍장관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가즈오 대사가 들켰다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대신 부탁을 좀 들어주셨으면 하고요"
"무슨......"
홍장관이 침을 꿀꺽 삼켰다.
"내년 1월부로 한일 어업협정이 만료되는 거 알고 계시는지요?"
드디어 본론이 나온다. 홍장관은 잠자코 가즈오 대사의 말을 듣고 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기회에 한일어업협정을 새로 체결 했으면 하고요. 65년도에 체결한 협정을 지금까지 유효화 한다는 건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가즈오 대사가 웃는다. 비열한 웃음.
다소 이해가 안되는 요구다. 어업협정이라니. 다른 이의가 없는 한 어업협정은 자동으로 연장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일본에서 이의를 달고 나온다.
"여기 협정안을 준비해 왔습니다. 부디 잘 검토해보시길......"
항복권고문이다. 너희들은 이미 당할대로 당했다. 이젠 항복하라. 홍장관의 눈엔 협정안이 그렇게만 보였다. 홍장관이 천천히 가즈오 대사가 가져온 협정안을 읽어보았다.
모든 것이 불리한 조건이었다. 우선 일본은 배타적 경제수역 내에서의 조업을 금지시키는 것을 기본 조건으로 하고 있다. 자국의 200해리 이상으로 들어와 조업을 할 때에는 최소한 24시간 전에 보고를 하라고 한다. 그러나 보고 절차가 상당히 까다롭게 되어 있다. 먼저 어민이 시, 도청에, 시, 도청은 해양수산부에, 해양수산부는 주일 한국대사관에, 그리고 한국대사관은 일본수산청에 보고를 해야하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언제 어떻게 변하는지 예측할 수 없는 게 바다의 날씨다. 그런데 이 많은 과정을 언제 거쳐 조업을 나간단 말인가? 차라리 금지를 시키는 편이 낳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그런 절차를 거쳐 일본 근해에서 조업을 한다고 해도 입어 척수도 상당수 감소시켰다.
그 뿐이 아니다. 조업실적을 선적지 무선국에 보고해야 하며 조업개시 및 종료시의 위도, 경도를 기재해야 하고, 오징어 채낚기의 경우 점등과 소등시간까지 기록해야 한다고 씌어 있다. 모든 걸 통제한다는 소리다. 결국은 일본 자국 내 한국 어선의 출입을 봉쇄한다는 소리.
홍장관의 표정이 점점 굳어온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손익계산을 해보고 있다. 어느 것이 더욱 유리한가. 아직은 아무 판단도 내릴 수 없다.
가장 큰 문제는 독도 근해와 제주도 남북 대륙붕의 중간수역 설정이다. 독도 근해를 중간수역으로 설정하려 한다. 결국 독도에 대한 욕망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이라면 자신도 인정할 수 없다. 독도 근해가 황금어장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근 50여년 동안 독도문제는 한일 자존심 싸움이었다. 이건 완전히 독도를 침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독도 근해를 중간수역으로 인정할 경우, 다케시마설이 다시 튀어나올 지도 모르는 일이다. 홍장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배어 나온다. 더 이상 협정안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숨이 콱콱 막힐 지경이었다.
홍장관이 협정안을 내려놓자 가즈오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그리고, 대중문화 개방에 대해서도 말인데, 이젠 문을 활짝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홍장관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미 개방을 했지 않습니까?"
"그거야 일부 극히 제한된 부분이지요. 해외 수상작에 한해서 개방을 한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대중문화가 영화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음악, 애니매이션, 방송 등 얼마나 많습니까? 더욱 많은 문화교류를 통해 서로의 나라를 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번에 개방한 일본 대중문화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끈질긴 일본의 요구에 못이겨 개방을 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젠 전면개방을 요구하고 나서고 있다. 음악을, 애니매이션을, 방송을 개방하라고 한다. 이미 모든 자금을 회수한 상태다. 게다가 바다를 빼앗고, 정신을 빼앗으려 들고 있다. 안된다, 라고 해도 결국은 협정을 강요하고, 개방을 강요하고 말 것이 아닌가? 홍장관은 일체의 대답을 회피했다. 각하께 여쭤보겠습니다. 이 한마디 말 밖에는......
김대통령의 양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어업협정이라니.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린가? 해양수산부 김장관도 청와대 집무실로 와 있었다. 홍장관이 다소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충 협정안을 훑어보기는 했습니다.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김장관이 천천히 옆에서 협정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사실, 그다지 심각한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 대신 자금회수를 중단하고, 원유 차단과 수출 억제를 완화한다지 않는가? 이 정도면 가히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은 금융권 출신이다. 해양수산부 장관직을 맡고는 있지만 바다냄새가 뭔지도 잘 모른다. 유일하게 바다가 없는 충북 출신이 아닌가? 자민련이라는 이유로 해양수산부 장관을 맡은 것일 뿐.
"김장관은 어떻게 생각해요?"
김대통령이 묻는다.
"저들의 요구대로 들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자금이 빠져나간다면 회생 불능입니다. 다른 외국 자본들도 자꾸만 떨어지는 한국의 주가를 보면서 투자할 마음이 사라질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겨울입니다. 당장 난방장치를 준비해야 합니다. 게다가 기업에서 생산된 물건들 또한 창고에 가득 쌓여 있습니다. 내수로 해결하기에도 문제가 많고 다른 나라로 수출의 길이 막혀있는 실정입니다. 어업협정을 체결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란 말이오"
김대통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김장관의 말처럼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이 더욱 무서운 것이다. 게다가 선심을 쓰는 척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자금회수, 원유차단, 수출금지를 중단하는 것보다 더욱 두려운 것이다. 동해...... 동해를 내 놓으라는 것인가?
"제 생각도 지금 당장으로선 저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홍장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는 것이 급한 일이다.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면 우선 몇 달 동안은 숨통을 틀 수 있다. 김장관이 홍장관을 바라보며 안도의 표정을 짓는다. 외무부 장관까지 자신과 같은 얘기를 했다. 최소한 기본은 한 셈이 된다. 동상이몽(同床異夢). 김장관은 여전히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선 지난 3년간 일본 근해에서 어획한 우리 어선의 자료를 뽑아 봐요. 무조건 일본이 원하는 대로만 해줄 순 없는 노릇이고.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봐요. 가즈오 주한 일본대사에게는 나중에 결과를 통보한다고 전하도록 해요"
어떻게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 없단 말인가? 그다지도 한국의 상황이 어렵단 말인가? 일단은 홍장관이나 김장관의 의견을 수렴해 볼 필요가 있다. 최악의 상황이라는 건 대통령 자신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터. 하지만 일본이 원하는 대로 어업협정을 체결했을 때, 그 피해가 얼마인지는 아직 모른다. 상상치도 못했던 결과가 일어날수도 있다. 아직은 어느 것이든 판단할 때가 아니다. 김대통령은 조금 더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더 이상 무너질래야 무너질 것도 없는 상태였다. 그럴수록 멀리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때였다.
침투(浸透)
상황은 더 없이 좋았다. 하늘엔 별도, 달도 없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다. 검정색 양복의 사내들만이 어둠을 더욱 어울리게 만든다. 가장 약해보이는 사내도 이미 골라놨다. 그래봐야 단지 다른 사내들에 비해 말랐다는 이유다. 그래도 현영보다는 덩치다.
현영이 가죽장갑을 낀 손을 툭툭 두드린다. 숨을 가지런히 고른다. 긴장이 안 될리 없다. 한 번에 끝내야 한다. 한 번에 사내를 쓰러뜨리고 담을 넘어 성재의 집 안으로 침투해야 한다. 단서라곤 성재의 집밖에는 없다. 워낙이나 집과 은행밖에 모르고 살았다.
"헛수고로 끝나면 어쩌지?"
기정 역시 몹시 긴장하고 있다. 아까부터 숨이 꽤 불규칙하다. 위험을 무릅쓰고 성재의 집에 침투해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까, 미리 걱정부터 하고 있다. 사실, 겁이 난다. 이럴 거 무슨 배짱으로 일본으로 건너왔는지. 생각보다 영웅짓거리는 힘들다.
드디어, 현영이 찍어 놨던 사내가 나타났다. 현영이 기정이 옷깃을 잡아당겼다. 기정의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뭐해요?"
현영이 소곤소곤 얘기했다. 급해 죽겠다는 표정이다.
"자, 잠깐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기정이 다시 숨을 고른다. 제기, 자기 숨소리도 마음대로 고르지 못하겠다. 손도, 어깨도 부들부들 떨린다. 침을 꿀꺽 삼켜보았다. 현영의 표정조차 무섭다. 법정에 섰을 땐 세상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보이는 게 없다. 사내들이 한둘이어야지.
"싫음 마요. 나 혼자 갈테니"
현영이 정말 혼자라도 갈 듯이 발을 뗐다. 이번엔 기정이 현영의 옷깃을 잡았다.
"아, 알았어. 가자구"
현영이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기정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않고 있다. 현영이 참다 못해 다시 돌아왔다. 가뜩이나 자신도 긴장되어 있는데 옆에서 자꾸 약한 모습을 보이니까 더욱 짜증이 났다.
"이빨 꽉 물어요"
현영이 기정의 오른 쪽 뺨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기정이 어이없다는 듯 현영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야?"
갑자기 부아가 팍 올라온다.
"아파요? 죽을 것 처럼 아프냐구요. 견딜만 하잖아요. 기껏해야 저놈들한테 맞아도 그정도밖에 안되요"
기정이 가만히 얼굴을 만져보았다. 아프다. 하지만 참을만 했다. 생각보단 맞을만하다. 맞아 본 놈이 싸움도 잘 한다고 자꾸만 두들겨 맞는 것만 생각하다 보니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다. 게다가 현영에게 한 대 맞으니 몸이 열적어 오른다.
"가자"
기정이 앞장을 섰다. 현영이 풋 하고 웃었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였다. 사내는 어슬렁어슬렁 성재의 집앞을 왔다갔다하고 있다. 현영과 기정은 서로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앞쪽에 있는 사람이 말을 걸고 사내의 뒤 쪽에 있는 사람이 가격하기로 했다.
사내가 현영을 향해 걷고 있었다. 기정의 온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현영과 사내의 거리가 점점 좁혀진다. 현영은 자연스럽게 천천히 앞을 향해 걷는다. 기정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저 지금 몇 시나 됐죠?"
현영이 사내에게 자연스레 물었다. 사내는 현영을 무시하고 계속 길을 가려 했다. 현영이 길을 가로막았다.
"제가 급한 약속이 있는데 시간을 몰라서 말이죠"
어쨌든 사내가 걸음을 멈췄다. 기정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이다. 사내의 뒤통수를 갈겨라. 기정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다. 쳐라. 쳐.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주먹이 말을 듣지 않는다. 도망가고 싶었다. 그런데 발마저 움직이지 않는다. 오줌이라도 갈길 판이다.
현영이 기정을 쳐다보았다. 빨리. 그러나 기정은 이미 꽁꽁 얼어있다.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주먹만 움켜쥐고 있는 기정이 보였다. 오히려 사내의 주먹이 기정을 쳤다.
그 때, 현영이 사내의 목덜미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한 번에 쓰러지지 않는다. 사내가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주먹이 인중을 향한다. 사내의 코가 내려앉았다. 그러나 쓰러지진 않는다. 어깨를 잡아 무릎으로 다시 한 번 얼굴을 걷어찼다. 사내가 허리를 숙였다. 팔꿈치로 등을 찍었다. 아예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사정없이 몰아부친다.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현영이 사내를 마구 밟아댔다. 얼굴에 피가 흥건히 묻어있다. 드디어 사내를 기절시켰다.
"서둘러요"
기정을 불렀다. 웬 걸. 저 쪽에서 웅크리고 있다. 벌써 얼굴이 퍼렇게 부어 있다.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다. 아프다. 현영에게 맞았던 것 몇 배 이상으로 아프다. 불이 나는 줄 알았다. 주먹이 얼굴을 강타하는 순간 온천지가 하얗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말이다.
"그러게 왜 그렇게 부들부들 서 있고만 있어요?"
현영이 담을 타 넘어서 문을 열었다. 그리곤 쓰러져 있는 사내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성재의 집은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사람의 집 치고는 쓸데 없이 크다는 느낌을 받았다. 현영은 집 안에서도 최대한 발소리를 죽였다. 적어도 밖에서 인기척이라도 나면 즉시 반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정도 정신을 차리고 집 안을 살폈다.
거실은 소파 외에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역시 옷장과 침대 외에 아무 것도 없는 방이다. 현영이 방을 나가려 하자 기정이 옷깃을 잡았다.
"이리와봐"
기정이 옷장을 열어 손을 이리 저리 쑤셔보았다. 헛짚었다. 옷도 얼마 없다. 찾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너무 깨끗하다.
"시간 없어요. 저 녀석들 언제 집으로 쳐들어 올지도 몰라요. 서둘러요"
현영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기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영에게는 보이지도 않았다.
다시 거실로 나와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옆의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서재였다. 현영의 가슴이 조금씩 요동을 친다. 어스름하게 컴퓨터가 보였다. 기정이 창가로 다가가 보았다. 아직 다른 사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커텐을 쳤다. 모니터의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갈까 싶었기 때문이다. 현영이 컴퓨터를 켰다. 갑자기 불빛을 보자 눈이 부셨다. 잠시 손으로 눈을 가렸다. 모니터에는 암호를 입력하라는 명령어가 나와있다. 암호라......
현영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입력해 보았다. 맞을 리가 없다. `한국'이라고, `지웅'이라고 입력해보았다. 역시 아니다. 숫자들을 하나하나 나열해 보았다. 가장 기본적인 숫자부터 지웅의 생일까지 아는 번호란 번호, 그럴싸한 번호란 번호는 죄다 입력해보았다. 어느새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이번에는 기정이 현영을 밀쳐내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성재와 연결시킬 수 있는 숫자나 단어를 쥐어짜내 입력시켜보았다. 기정이라고 다를 리 없다. 너무 난감하다.
암호 하나에 이렇게 시간을 끌 여유가 없다. 밖에서 무슨 소란이 언제 벌어질지 모른다.
이젠 손가락이 가는 대로 입력을 시켜본다. 운이 좋으면 되겠지. 그러나 그런 운이라는 거 열두번을 죽어도 따르기 힘든 것이다. 기정은 서재 안을 둘러보았다. 혹시 서재 안의 물건 중에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눈은 이미 어둠에 완전히 적응하고 있었다. 책장을 바라보았다. 그 중에 가장 큰 책 표지에 나와있는 숫자를 입력해본다. 달력이 있다. 달력의 동그라미가 그어져 있는 숫자를 입력해본다. 그 옆의 숫자라도, 그 옆의 숫자라도...... 제기, 안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은 사정없이 요동을 한다. 사내들이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나타날 것만 같다. 창문을 뛰어 넘어 올 것만 같다. 시계. 테이블 위에 시계가 있다. 지금 시각이 6시 30분. 630을 눌러보았다. 풀렸다. 하늘이 도와주고 있나보다. 현영이 두 주먹을 불끈 쥔다. 기정이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바탕화면에 나타난 프로그램엔 모두 들어가 보았다. 쉴 새 없이 마우스를 클릭해봐도 별다른 자료가 없다. 낭패다. 이렇게 되면 서둘러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현영이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11시 10분을 지나고 있다. 가만. 현영이 테이블 위의 시계를 집었다. 아직도 6시 30분이다. 그럼 처음부터 이 시계는 비밀번호를 가리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현영이 시계를 뜯어보았다. 겉보기에만 시계였다. 그 안에는 한 장의 디스켓이 들어있었다.
현영이 디스켓을 드라이브에 넣었다. 그리곤 클릭을 했다. 역시, 자료가 나온다. 세 개의 프로그램이 있다. 첫 번째 프로그램을 클릭했다. 인터넷 프로그램이다. 현영과 기정의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넷 접속을 시도했다. 프로그램은 스위스은행에 연결되었다. 자동으로 프로그램이 올라왔다. 계좌 이체 프로그램이었다. 마지막으로 계좌번호와 받는 사람 이름이 올라왔다. 현영의 짧은 비명을 지르다가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보내는 사람 중앙은행. 받는 사람 나지웅이다. 성재의 통장 잔액을 살펴보았다. 10억달러가 들어 있었다. 엄청난 금액이다. 현영이 기정을 바라보았다. 기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영이 실행 클릭을 눌렀다. 통장의 돈이 조금씩 지웅의 계좌로 들어가고 있다. 온 몸이 부르르 떨린다. 기정이 창가로 다가가 밖을 쳐다보았다. 아직 사내들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뒤에서 현영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기정이 모니터 앞으로 달려갔다. 실행이 취소되었다.
중앙은행은 오전부터 재정 감사를 하고 있었다. 죽은 성재가 혹시라도 은행 자금을 도용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사관들은 장부부터 시작해 모든 자료들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현황은 없었다.
야마모도는 딜링실을 검열하고 있었다. 최근 6개월동안의 딜링 실적을 살펴보았다. 여름동안의 실적은 하루하루가 숏포지션이었다. 그리곤 9월 들어 조금씩 사정이 좋아졌다. 이 모든게 죽은 성재의 계략 때문이다. 야마모도는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그 놈 때문에 손해본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분명히 딜링 말고도 다른 방법으로 자금을 도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모든 자료를 훑어보고 마지막으로 전산상으로 나와 있는 자금 실태를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은행의 잔액이 마구 떨어지고 있었다. 전산원이 자판을 두드려보았다. 스위스 은행으로 은행의 자금이 몽땅 빠져나가고 있었다.
"정지시켜!"
야마모도가 고함을 질렀다. 실행 비율은 점점 높아가고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실행 완료가 될 지경이다.
"정지시키라니까!"
거의 모든 돈이 빠져나갔을 때 거래가 취소되었다. 야마모도가 휴대폰을 꺼냈다.
"뭐하고 있는 거야? 당장 집을 뒤져. 쥐새끼가 있을거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들의 행위를 들킨 것 같았다.
"가자"
기정이 현영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현영이 기정을 뿌리치고 다음 프로그램을 클릭했다. 일본인 명단이었다. 타이틀은 금이타조. 회원들의 명단이었다.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분명 있었다. 현영의 머리가 쭈뼛 선다. 금이타조라...... 두려움이 느껴진다. 이들의 욕망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밖에서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기정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예닐곱의 사람들이 집앞에 모여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담을 넘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가자. 들어왔어"
기정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현영이 디스켓을 빼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서재를 나와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갈 곳이 없다. 보이는 것이라곤 커다란 창문 뿐. 현영이 끄응 소리를 내며 창문을 열었다. 밖은 아무 것도 없다.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건 까마득한 어둠.
"뛰어요!"
현영이 기정을 떠밀었다. 기정이 벽을 잡으며 버텼다. 무섭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높이가 얼마인지 밑엔 뭐가 있는지 모른다.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는다. 차라리 사내들과 붙어보는 게 낳을 것 같았다.
"뛰라니까요!"
현영이 악을 질렀다. 못하겠다. 죽어도 못하겠다.
사내들이 고함을 질렀다. 3층으로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현영이 기정을 들었다. 기정이 필사적으로 버텼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구요!"
사내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발소리도, 기정의 가슴을 때리는 것처럼 가까워졌다.
기정이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곤 뛰어내렸다. 길다. 체공시간이 너무 길다. 어서 아무 곳이라도 부딪혔으면. 늦어질수록 크게 다친다. 어서 아무 곳이나 부딪혔으면. 다리가, 땅에 닿았다. 곧바로 현영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다. 잔디밭이다. 도망가고 싶다. 기정은 있는 힘을 다해 일어섰다. 그러나 그대로 고꾸라졌다.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았다. 누군가 자신을 들쳐 업었다. 현영이다.
"괜찮아?"
말은 나온다. 아직 죽진 않은 모양이다.
"누가 누구더러 괜찮냐고 물어요?"
현영이 죽어라 뛰었다.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른다. 무조건 뛰고 보는 것이다. 자신의 다리도 멀쩡한 건 아니다. 부러지진 않았지만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럽다.
문득, 디스켓 생각이 났다. 떨어지는 순간, 주머니에서 빠지지 않았을까? 현영은 멈춰 서서 주머니를 뒤졌다. 없다. 다시 성재의 집으로 향했다.
"뭐하는거야?"
기정이 고함을 지른다. 들리지 않는다. 디스켓. 그게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일본의 음모를 밝힐 수 있다. 다리의 힘이 점점 풀린다.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영아!"
기정이 울먹거린다. 현영의 귀엔 들리지 않는다. 디스켓. 현영의 머리 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성재의 디스켓이었다. 자신이 떨어졌던 자리를 뒤져보았다. 어둡다. 자신이 떨어졌던 곳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저 뛰었던 거리만큼만 돌아왔을 뿐. 기정을 땅에 떨어뜨리고 무릎을 꿇어 손으로 땅을 더듬어본다. 손에 걸리는 것이라곤 축축한 잔디, 그리고 비가 오듯 떨어지는 자신의 땀방울 뿐이다. 찾아야 한다. 죽는 한이 있어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눈물이 나려고 한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디스켓은 왜 보이지 않는건가? 무섭다. 어서 도망을 가고 싶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손이 자꾸만 땅을 뒤진다.
"사람들이 나타났어!"
기정이 소리쳤다. 현영이 다시 기정을 들쳐업었다. 무겁다. 그러나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점점 사내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현영은 뛰었다. 이대로 가다가 잡히면 죽는다. 이미 자신의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는지.
얼마나 뛰었는지 모른다.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현영이 자리에 쓰러졌다. 여전히 어두운 하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빙빙 돈다. 어둠이 빙빙 돌고 있다. 숨이 차다. 아직은 안전하지 못하다. 더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이젠 현영의 발도 자신의 것이 아니다. 목이 탔다. 눈이 감긴다. 기정의 거친 숨소리만이 현영의 귓가를 맴돌고 있다.
여민동락(與民同樂)
"각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김대통령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실장, 내 재산이 얼마나 되지요?"
"예, 각하. 동산, 부동산을 합쳐 약 12억원 정도 됩니다만"
비서실장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래요.... 거기서 10억만 떼서 국가에 헌납하시오"
"예? 각하. 하지만..."
김대통령이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해요. 나야 더 이상 살아봤자 얼마나 살겠소. 최저 생활비만 남기면 되요. 10억을 헌납해봤자 무슨 힘이 되겠냐만, 내 아무리 생각해도 속이 편하질 않소. 일국의 대통령이 국민들은 저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데 필요 이상으로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어요. 고어(古語)에도 군주는 백성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을지언정 고통을 함께 나누라고 했어요. 헌납하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각하"
비서실장이 조용히 고개를 조아리며 집무실을 나갔다. 아무도 없다. 김대통령은 소파에 목을 기댔다. 저절로 피로가 엄습했다. 취임 직후 한 번도 마음을 편히 놓은 적이 없다. 물론 그런 여유를 바라고 취임한 것은 아니다. 이미 8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마지막 남는 힘이라도 바칠 각오는 단단히 하고 있는 터. 40여년을 기다려왔다.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몸을 바칠 수 있는 기회. 사형의 위기도 피했다. 군사독재의 횡포로 수년간 옥생활도 해봤다. 그렇게 기다려서 오른 자리다. 생각보다 버겁다. 밖에서는 일본이, 안에서는 정당끼리의 싸움이 더더욱 대통령의 자리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여민동락이라......"
김대통령은 가만히 중얼거려보았다. 맹자님 말씀. 지금 김대통령의 책상에는 맹자가 놓여있다. 감옥에 있을 때 와신상담, 수많은 책을 읽었다. 그 중에 가장 감명을 받았던 책.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 가져야 할 군주의 덕목. 나라가 흥하기 위해선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김대통령은 지금 다시 맹자를 펼쳐 들었다.
여민동락(與民同樂).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하라. 그것이 바로 군자의 도리다. 한 나라의 우두머리로서의 도리다. 그래서 취임 직후부터 국민들과 가까워지려 노력했다. 정부는 정부, 국민은 국민이라는 지난 정권과는 다르고 싶었다. 모든 것을 국민과 함께 하고 싶었다. 같이 웃고 같이 기뻐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과 함께 즐길것이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고통을 함께 하는 것. 그것이라도 해야 했다. 배가 고파 참지 못해 자살을 하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든 대통령 자신은 그들보다는 나은 형편이다. 재산을 전부 국가에 헌납한다 해도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 더 이상 무슨 욕심이 필요하단 말인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물론 재벌들이 사유재산을 헌납한다면 한결 상황이 나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자진해서가 아니면 엉뚱한 소리만 듣게 될 뿐. 그저 김대통령 자신이라도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현영은 꼬박 이틀동안 잠들어 있었다. 눈을 떠보니 호텔 방이었다. 온 몸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몸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멀쩡했다. 발을 들어보았다. 들리지 않는다. 상체를 살짝 들어보았다. 통증이 왔다. 다행이 발도 아무 이상 없다. 떨어뜨리듯 상체를 침대에 뉘였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살아있다. 아직은 살아있다.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쉽게 나오지 않는다. 끄응 하는 신음소리만 나왔다. 몸에 힘을 주고 큰기침을 했다. 아주 작게 기침소리가 나온다. 그마저도 힘들다.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일어났어?"
기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살아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았다. 기정의 다리에 기부스가 되어 있다. 부러진 것 같았다. 다시 자신의 발을 쳐다보았다. 혹시, 부러져서 움직이지 않는거 아닌가? 더럭 겁이난다. 이번엔 상체를 더욱 일으켜보았다. 더는 힘들어서 못하겠다.
"어떻게 된거죠?"
분명 말은 했지만 입안에서만 맴돌고 있다. 현영이 다시 한 번 기정을 불러보았다. 귀가 먹었나, 들은 척도 않는다. 너무 힘이 든다. 다시 고개를 바로 뉘였다. 그제서야 기정이 말을 걸었다.
"넌 어떻게 그렇게 잠만 잘 수가 있냐? 정말 너 죽은줄 알았다"
기정은 이미 여유를 찾은 모양이다. 말투에 제법 생기가 돌았다. 말을 하려 해도 나오질 않으니 현영은 미칠 노릇이었다. 게다가 기정은 자신에게 와보지도 않는다. 섭섭하기도 하다. 적어도 자신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가만히 일정하게 숨을 골랐다. 그리곤 온 몸의 힘을 모았다. 한 번에, 한 번에 말을 해야 한다. 하나, 둘....
"이리좀 와봐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모기만한 소리가 나오긴 했다. 현영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스운 꼴이다.
"아- 자식, 좀 더 자던가 하지. 임마 내 다리 안보여? 두 개 다야, 두 개 다!"
기정이 목발을 집고 일어섰다. 정말 다리 두 쪽이 기부스한 상태였다. 웃어보았다. 그 역시 목에서 걸린다. 웃고 싶은데 웃음이 나오질 않으니 배가 아팠다.
기정이 뒤뚱뒤뚱 현영에게 걸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상체를 부축해 일으켜 주었다. 어지럽다. 그대로 뒤로 넘어갈 것 같다.
기정이 벨보이를 통해 스프를 시켜주었다. 현영이 한 입, 한 입 기정이 떠먹여 주는 스프를 깔끔하게 헤치웠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아, 아. 말도 나온다.
"어떻게 된거예요?"
"어떻게 되긴. 죽다가 살아났지. 너 기절해 버리고 내가 뭘 할 수가 있겠냐? 그냥 거기서 죽는구나 했지. 그런데 다행히 택시가 한 대 지나가잖아. 처음엔 승용찬줄 알았어. 그래서 놈들이 나타난 줄 알았지.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보다시피 두 다리 기부스 시키고 곧바로 이리로 온 거야"
"병원에 가서 뭐라고 그랬는데요?"
3층에서 뛰어내렸다면 다리가 성할 리 없다. 놈들도 그걸 알고 인근의 병원을 수색할 지도 모른다.
"적당히 둘러댔어. 등산하다가 굴러 떨어졌다고 했지. 그리고 걱정마. 여긴 교토야. 병원에서 나와 택시타고 여기까지 왔다"
다행이다. 두 다리가 부러진 상황에서 기정은 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제 기운 좀 나?"
"왜요, 한 번 더 가게요?"
현영이 농담을 던져본다.
"이젠, 안 가. 너나 가"
기정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 몸서리가 쳐 진다. 앞으론 검정색 양복을 입은 사람만 봐도 경기를 일으킬 것 같다. 벌써 두 번이나 목숨이 위태위태 했다.
"이름이 뭐였죠?"
현영이 기정을 애타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성재의 디스켓을 열어보았을 때 나타났던 금이타조의 명단. 그 중에 두 사람의 이름이 가장 크게 입력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머리를 두드려 보았다. 떠오를 리가 없다.
"누구 말이야?"
"금이타조. 가장 진하게 있던 이름 말예요"
"와타나베, 그리고 야마모도. 나머진 몰라"
현영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기정이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 그런 면에선 기정이 자신보다 한 수 위였다.
"누굴까요? 와타나베, 야마모도라면......"
난감하다. 이름만 가지고는 추리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기정이 그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보장도 없다.
"글세다. 일본의 극우파 정도 되겠지"
"와타나베...... 전 일본 총리"
현영이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
"일본 총리? 설마 일본 총리를 했던 사람이 그런 짓을 꾸몄을려구. 무슨 구국 집단에서 그랬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생각해 보니 현영의 말도 영 빗나간 말은 아닌 것 같다. 전 일본 총리. 그라면 사람들을 끌어모으기도 쉽다. 게다가 그런 집단의 두목으로도 적합하다.
"일단은 와타나베라는 사람부터 찾아봐야겠는데요. 아무래도 전 총리라면 다른 사람보단 찾기가 쉽겠죠"
찾다니? 아직도 힘이 남았단 말인가? 기정은 더럭 겁부터 났다. 와타나베라는 사람. 두목이다. 성재의 집에 잠입했을 때보다 더욱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연하다는 듯이 현영은 혼자서 또 계산하고 있다. 언제, 어떻게 와타나베를 추적할 것인가?
"일단, 몸이나 좀 성하고 보자. 적어도 한 달은 있어야 기브스 푸를 거 아니야? 그 동안 저 지도나 한 번 조사해 보자고"
기정은 물끄러미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 보았다. 그나마 다리라도 부러지지 않았으면 또 한번 죽을 판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자신이 끌고 왔다. 그런데 먼저 꼬랑지를 내릴 순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려 해도 자신의 감정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벌써 몇 번이나 겪었지 않은가? 자신의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을 말이다.
세밑
김대통령의 자산 국가 헌납이라는 청와대 대변인의 얘기는 다음날 아침 각종 신문과 방송의 헤드라인을 차지했다. 국민들은 그같은 대통령의 행적을 칭찬했다. 몸소 고통을 나누는 대통령의 따뜻한 마음이 국민들에게 감동을 준 것이다.
그같은 대통령의 행동에 각 정계관료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모든 장관들과 국회의원들 역시 최저생계비를 제외한 돈을 국가에 헌납했다. 야당의 총재를 비롯한 모든 정치인들이 대통령의 그같은 뜻에 동참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국회조차 열지 않던 것과 비교해 엄청난 발전이었다.
정치인들 뿐만이 아니었다. 자산 보유 수준이라면 경제인들이 훨씬 높았고, 그들은 자발적인 동기와 주위의 눈초리에 거대한 자금을 국가에 헌납했다. 현대, 삼성, LG, 대우, SK등 대기업을 비롯해 각 기업들의 회장단은 기업의 자산은 일체 건드리지 않고 사유재산만을 내 놓은 것이다.
불과 하루만에 천억원에 가까운 동산과 부동산이 모였다. 국민들은 불과 몇백명의 주머니에서 그렇게 많은 돈이 나온 것에 대해 그다지 의심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저, 명목상은 어떨지 몰라도, 자신들의 아픔을 같이 나누는 정치, 경제인들의 모습이 마냥 반갑기만 했다.
대통령은 그렇게 모인 돈은 전부를 실직자와, 생계유지가 곤란한 사람들을 위해 쓰라고 명령했다. 마음은 마음으로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같은 대통령의 행동에 우려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직자라고 하더라도 열심히 일하다가 직장을 잃은 사람 뿐만 아니라 베짱이처럼 게을러서 아예 직장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은 사람 또한 부지기수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돈이 제대로 쓰여질지를 의심하기도 했다. 몇 달 전 금모으기 운동으로 모인 금의 일부가 개인의 영리로 쓰였다는 의혹이 아직까지도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거품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빠지고 있었다. 언론에서는 벌써 경제대란이 터진 후 거품경제가 사라졌다고 보도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지나쳤던 거품은 이제야 비로소 빠지고 있었다.
일부 무지한 재벌들의 해외 관광이 사라지고 있었다. 골프 관광이니, 건강식품 관광이니 해서 한국의 눈초리를 피해 외국에서 자신만의 안락을 즐기던 사람들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또한, 흥청망청 써대고 다니던 재벌 사모님들의 쇼핑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백화점의 로얄석이라는 명분으로 상상할 수 없을 가격에 판매되고 있던 외국에서 들어온 초고가의 제품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경제대란을 국민 모두가 직접 느끼게 된 것이다. 일부 재벌들이 가졌던 `나와는 별개의 일' 이라는 사고가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고통이 조금씩 나누어지고 있었다.
서비스업의 인테리어도 간단해지고 화려한 장식은 피하는 분위기였다. 양주가 주를 이루던 고급 카페가 문을 닫았고, 술은 취하려고 먹는다던 술꾼들의 태도 또한 적당히 마시는 추세가 되었다.
신용카드의 사용량은 현저히 떨어졌다. 한 달 전보다 무려 40%가 떨어진 것이다. 실제로 자신의 월급보다 신용카드 미결제금액이 항상 더 많던 샐러리맨들이 플라스틱의 유혹을 가감히 거부한 것이다. 덕분에 수많은 카드회사들이 정리되었다.
그런 거대한 산을 넘기 위해 국민들은 기초부터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국민 스스로가 자신의 거품을 빼기 시작한 것이다. 결코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는 생각으로 국민들은 처음처럼 새로 시작하고 있었다. 국민들은 믿었다. 그 옛날,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던 것처럼, 단시간 내에 경제를 가장 성공적으로 일으켰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이겨내리라 믿었다.
국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지금까지 풍족하게 지내왔던 습관이었다. 배불리 먹고, 좋은 옷을 입다가 헐벗고, 굶주림을 당하는 것은 적응하기 힘든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우려들도 국민들의 절실함 앞에서는 기우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게 국민들은 다시 일어서는 한국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
지웅은 윤희의 어깨를 감쌌다. 창 밖에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다. 벌써 이 해도 다 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세밑의 밤은 언제나 화려했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아니었다. 벌써 크리스마스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지만 어쩐지 캐롤송 듣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돈도, 마음도 세밑을 즐기기엔 넉넉치 못했다. IMF 관리체제로 들어간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조금씩 사정이 나아지고 있긴 했지만 아직은 조금씩일 뿐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하얀 눈이 반가웠다. 요즈음은 눈이라도 내려야 세밑이라는 것이 상기되곤 한다.
"아직도 그대로예요?"
윤희가 유리창에 비친 지웅과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며 물었다. 지웅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역시 유리창에 비쳤다.
"아직, 사람 안 구했어요. 팀장님이나 차선배, 지웅씨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고 저도......"
윤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말, 분명히 지웅은 싫어할 걸 알고 있다. 때가 되면 다른 연인들처럼 평범하게 데이트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믿고 있다.
지웅은 바이러스를 퇴치하고 나서 바로 은행을 그만두었다. 더 이상 은행에 나갈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성재가 없다. 그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개인 실력으로 딜링을 해서 많은 돈을 벌어들일 자신도 없었거니와, 더 이상은 딜링에서 일본을 상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집에서 공부만 했다. 역사를, 문화를. 어떻게 해야 일본을 이길 수 있을지, 대한민국을 부강하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쉽게 찾질 못했다. 뚜렷하게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나라의 힘을 키우는 것은 굉장히 쉬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 자신의 직업에 걸맞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책임을, 노동자는 노동자의 책임을 다하면 나라가 어지러울 까닭이 없다. 선생은 가르치는 사람이고, 학생은 배우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가르치는 사람이고 누가 배우는 사람인지 구분이 안간다. 변호사나 검사는 법을 제대로 집행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법조인들에게 법은 출세의 수단으로밖에 통하지 않는다. 정치인은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는 사람이다. 지웅의 눈에 그러한 사람은 얼마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려 해도 맘대로 되지 않았다. 다섯 손가락으로 꼽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찾기 힘들다. 우스개소리로 가수 또한 가수가 아니다. 지금의가수가 어디 가수인가? 막말로 광대일 뿐이지. 자신의 직업에 떳떳할 만한 사람이 없다. 그런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상(理想)일 뿐이다. 나라를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이란 것. 생각처럼 쉬운 것이었으면 벌써부터 침략같은 건 받지도 않았을 터. 아무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모른다.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때가 되면 할 일도 생기기 마련. 지금은 그저 공부만 하고 싶을 뿐이다.
윤희가 지웅의 품을 빠져나가 주방으로 갔다. 찌개가 끓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씩은 꼭 찾아와 자신의 건강을 챙겨준다. 그전처럼 응석을 부리거나 애교를 떠는 모습도 보기 힘들다. 하지만 언제나 밝은 표정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을 편안하게 대해준다. 고마운 여자. 그러고 보니 자신도 참 무신경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어달을 집에서만 봤지 밖에서 만난 일은...... 없는 것 같다. 떠올려 보려 해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투정 한 번 안부리고 있다.
"지웅씨, 이리 와요. 식사 다 됐어요"
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다. 지웅이 식탁에 앉았다. 이 순간만은 참 좋다. 이렇게 윤희와 식탁에 단둘이 앉아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결혼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기도 했다.
"음, 맛있는데? 음식 솜씨가 점점 좋아져. 시집가도 돼겠는데?"
"그럴까요? 나 지금이라도 당장 짐 싸가지고 일루 와버릴까?"
그래. 그렇게 말하고도 싶다. 윤희라는 여자 지내면 지낼수록 사랑스럽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아직은 아니다.
윤희는 입에 헤 벌어져 다물어질 줄 몰랐다. 자신이 차려 준 음식이 맛있다는 그 한마디에, 이렇게 가슴이 설레이고 뿌듯할 수가 없다. 그 동안 집에서 수도 없는 시행착오를 겪었다. 엄마에게 욕도 많이 먹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지웅이 맛있게 먹고 있지 않은가?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시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윤희가 대신 받는다. 지웅에게 전화가 오는 건 기껏해야 현영, 태림 수용, 호준 정도였다. 이젠 윤희도 지웅에겐 굉장히 가까운 사람이다.
"나지웅씨 댁 아닙니까?"
공손한 사내의 목소리. 처음 듣는 음성이었다. 윤희가 지웅에게 수화기를 건넸다.
"여보세요"
"나지웅씨십니까?"
"그런데요"
"안녕하세요. 저 오동훈이라고 합니다. 괜찮으시면 좀 만나 뵙고 싶은데요"
"무슨 일이시죠?"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은데......"
"지금이요?"
"예, 지금이라도 괜찮으시면 잠시 말씀드릴 게 좀 있습니다"
지웅이 전화를 끊었다. 시계를 바라보았다.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밤이 꽤 길다. 지웅이 외투를 챙겼다. 말투를 보아선 위험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부탁이라도 하려는 듯한 공손한 말투. 지웅은 일단 나가보기로 했다. 게다가 오랜만에 윤희와 술도 한 잔 하고 싶었다.
"가지"
"벌써요?"
윤희가 아쉬운 듯 물었다.
"술 한잔 사줄게"
윤희의 얼굴이 금새 밝아졌다. 지웅과 술자리를 가져본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그러고 보니 술을 먹은 지도 꽤 오래 됐다. 지웅과 지난 여름 라스베가스에서 먹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동안 술을 먹고말고 할 틈도 없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겨울바람은 포근했다. 그나마 날씨라도 도와줘야지, 한파라도 몰아친다면 이미 얼어붙은 사람들의 가슴은 더욱 메말라 질 판이었다.
지웅은 약속장소인 강남으로 차를 몰았다. 타워레코드 쪽으로 뒷편으로 가니 뉴스앤뉴스라는 커피숍이 있었다. 지웅이 커피숍으로 들어가자 한 남자가 다가왔다. 지웅과 윤희가 자리에 앉자마자 동훈이 말을 꺼냈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나오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실 말씀이란게?"
지웅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오늘은 윤희를 위해 서비스를 하려고 마음먹고 나온 터.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오랜 시간을 할애하고 싶진 않았다. 윤희는 어깨를 움츠린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지웅의 옆에 이렇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자신이 지웅의 애인이라는 걸 과시하고도 싶었다.
"저, 부탁을 드릴까 합니다"
동훈이 서류봉투에서 두툼한 종이뭉치를 꺼내 지웅에게 내밀었다. 지웅이 동훈을 쳐다보았다.
"서명안입니다. 2000명에게 받았습니다. 나지웅씨가 한청련 의장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한청련(韓靑聯)
지웅은 아무 대꾸도 없이 서명안을 쳐다보았다. 여러 사람들의 이름과 싸인, 혹은 지장이 찍혀 있었다.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린지. 윤희 역시 서명안과 동훈의 얼굴을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었다.
"저는 무슨 소린지 잘......"
지웅이 가만히 명단을 동훈의 앞으로 밀어넣었다. 처음보는 사람들이 대뜸 자신에게 한청련 의장을 맡아달란다. 한청련이 뭐하는 곳인지 금시초문, 들어본 일도 없다. 동훈이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지웅씨 말고도 이렇게 많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얘기했습니다. 한국의 청년을 이끌어갈 사람, 대부분이 나지웅씨를 추천했습니다"
과격 국익단체가 아닐까? 지웅은 섣불리 동훈의 말을 수긍하지 않았다. 나라 사랑도 좋지만 이렇게 무턱대고 요구하는 걸 얼씨구 하며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청련이라니요? 한국 청년 연합을 의미하는 거예요?"
"예. 지금까지는 대학생들이 한총련(한국총대학생연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해 왔지만, 이젠 유명무실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저희가 그들과 같은 노선을 걷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는 이제 나라를 위해서 일할 사람들은 단지 대학생들 뿐이 아닌 대한민국의 청년 모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노동해방을 부르짖는 것과도 거리가 멉니다. 민주주의를 이룩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나라를 사랑할 줄 아는 젊은이가 되자는 것입니다. 소요를 벌이는 것도, 투쟁을 벌이는 것도 아닙니다. 나라가 잘 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고 슬퍼할 줄 아는 젊은이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 꼭대기에 나지웅씨가 계셔주었으면 합니다"
한청련이라...... 어감이 좋다. 이름만으론 얼핏 투쟁이나 사상을 위해 싸우는 집단처럼 들릴수도 있다. 하지만 청년이라는 말이 좋았다. 한국 청년 연합.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한총련과는 다르다고 한다. 청년,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그랬다.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나라를 사랑할 줄 알게하자고 그랬다. 하지만 자신이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 또한 이상을 쫓아 헤메이는 모습으로 끝나고 말지도 모른다. 말은 좋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말처럼 쉽게 돌아간 적이 있던가?
"그런데 하필이면 왜 저죠?"
동훈이 스크랩한 신문을 한 장 내밀었다. 지웅이 천천히 기사를 읽었다. 자신에 대한 내용이었다. 자신의 내력에 대해 다룬 기사. 태림이 쓴 것이었다. 녀석, 말도 안하고.
"이거 거의가 픽션이예요. 믿지 마세요"
지웅이 정중히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동훈은 절대 물러나지 않을 표정이었다.
"안그래도 윤태림 기자를 만나봤습니다. 그리고 나지웅씨에 대해서도 말을 들었구요. 저희들 입장도 얘기했고 적극 추천해 주시던걸요. 명단에 보면 윤태림 기자 이름도 들어있습니다"
동훈이 명단을 뒤져 태림의 이름을 찾아주었다. 정말 있었다. 그 필체, 그 싸인으로. 엉뚱한 녀석.
지웅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오동훈이란 사람. 나이는 얼마 안되보였다. 기껏해야 스물 대여섯정도. 그런데 생각하는 씀씀이가 보통이 아니다. 외모 또한 괜찮다. 강직하면서도 머리가 좋아보인다. 겉으로 보기만 해서는 동훈이 한청련 의장을 해도 크게 모자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뜨거운 가슴만큼 냉정한 머리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충분히 판단해 보고 자신에게 찾아온 것일까? 성급히 판단을 내릴 때가 아니다.
윤희를 바라보았다. 얼굴엔 초조한 빛이 역력하다. 시계를 보았다. 벌써 9시 30분을 넘어서고 있다. 오랜만의 데이트다. 윤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하지만 동훈이 꺼낸 얘기도 무시하고 넘어갈 만한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저 아집이 강해요. 실제로 능력도 부족하구요. 어떨 땐 극단적이기까지 하고"
지웅이 자신의 단점을 설명했다. 그럼 거의 승낙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한청련 의장으로 받아들이겠느냐 하는 것이다.
"아집이 강하다는 건 카리스마가 강하다는 것이고, 한청련 의장 능력으로 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극단적이라 해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방향이겠죠. 그럼 승낙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말도 잘한다. 동훈이란 청년. 하지만 그렇게 쉽게 결정할 만한 문제가 아니다. 일단은 접어 둔다. 다음에 보자는 수밖에. 자신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며칠 후에 연락 주세요. 저도 생각 좀 해야죠. 애들 깜보 먹는 것도 아니고.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그만"
지웅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서야 윤희의 얼굴이 환해진다. 동훈도 지웅을 쉽게 보내진 않았다.
"사무실하고, 함께 일할 친구들은 준비해 놓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한국의 젊은이들이 최소한 나라를 한 번 쯤은 생각하게 만드는 게 한청련의 목적입니다. 물론 함께 무언가를 해나간다면 더욱 좋겠죠. 시간 많이 뺏어서 죄송합니다"
만만치 않은 친구. 지웅은 동훈과 악수를 하고 헤여졌다. 밤 공기는 제법 차가워졌다. 윤희가 애타는 표정으로 지웅을 바라보았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다.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한다.
지웅도 시간을 의식해 눈에 보이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어쨌든 오늘의 원래 목표는 윤희와의 데이트. 한청련 문제는 집으로 돌아가 곰곰이 생각해봐야 했다.
태림은 신문사로 출근하지 않고 지웅의 집으로 찾아갔다.
"웬일이야? 아침부터"
"보고싶어서 왔다"
태림이 넉살좋게 웃는다, 아침부터. 기분은 좋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보니 새롭기도 했다.
"밥은 먹었냐?"
"밥도 얻어먹을 겸"
"자식, 먹자. 안그래도 아침 먹으려고 했던 참이다"
어제 윤희가 해 놓고 간 반찬이 그대로 아침 식탁에 올라왔다. 태림이 눈치를 채고 넌지시 지웅을 떠본다.
"아예, 결혼해라. 너 처녀총각이 결혼도 안하고 자꾸 한 집에서 붙어있으면 남들이 욕한다"
"밥 먹어"
반찬을 한 접 먹어본다.
"음. 음식 솜씨도 괜찮은데? 야, 벌써부터 결혼 준비 하고있는 거 아니야?"
"먹지마"
지웅이 태림의 밥그릇을 빼앗았다.
"알았어. 그냥 먹자"
"왜 왔어?"
지웅이 젓가락질을 하다 말고 태림을 빤히 쳐다봤다. 보고싶어서 찾아올 정도로 두 사람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다. 이렇게 일찍 온 걸 보면 필히 무슨 사연이 있을 터.
"보고싶고, 밥도 얻어먹을 겸"
딴청이다.
"그럼 얼굴 봤으니까, 밥 다먹으면 가"
그런 장난에는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게 최고다.
"현영이한테 연락 왔었어"
태림이 그제서야 말을 꺼낸다. 지웅이 수저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어디래?"
"어디긴 일본이지. 자세히는 말 안하더라. 성재 아저씨 집에 들어갔었대"
가만히 듣고만 있다.
"가서 디스켓을 발견해서 클릭을 해봤더니 너한테 10억달러를 보내는 프로그램이랑, 금이타조 명단이 들어있더래"
"10억달러?"
"모르는 일이야?"
고개를 끄덕인다.
"너한테 돈을 송금하다가 갑자기 프로그램이 취소됐대. 그래서 도망쳐 나왔다더라. 죽을 뻔했대. 정말 죽을 뻔 했나봐. 현영이 그런 말 잘 안쓰잖아"
지웅의 표정이 자뭇 심각해진다. 죽을 뻔하는 위기를 맞으면서까지 현영을 일본에 있게 하고 싶진 않았다.
"연락처 몰라?"
"없대"
"대책 없는 자식"
화도 난다. 남 생각은 안하는 놈. 제 걱정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녀석은 신경도 안 쓸 것이다. 그런 면에선 세 사람 모두가 마찬가지다. 자신은 아무래도 좋다. 단지 친구만 잘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산다. 그래서 서로에게 걱정을 자주 안겨준다.
"와타나베하고 야마모도. 이름 들어본 적 있어?"
"금이타조?"
이번엔 태림이 고개를 끄덕인다.
야마모도.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인물이다. 마시이가 한국으로 온 것도 모두 야마모도의 계락에서였을 것이다. 성재도 자신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야마모도란 사람. 단지 딜러만은 아니라고. 일본의 위험한 극우파라고. 와타나베는...... 잘 모르겠다. 혹시......
"와타나베는 전 일본 총리라고 가정하고 있대. 야마모도는 도저히 누군지 추측이 안간다더라"
그랬군. 지웅 자신도 전 일본 총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영의 생각이 얼추 맞을 것도 같다.
"위험할텐데"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포기하락고 해도 끝까지 말을 안 들어. 뭔가 알아내야 한국으로 돌아올 거래. 이젠 현영이 얼굴을 직접 볼 때까진 좌불안석이야"
태림의 말이 맞다. 현영인 한 번 한다면 되든 안되든 끝까지 밀고 나간다. 하지만 이번 일은 너무 위험하다. 극우파다. 지웅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유망한 딜러의 목숨까지도 쉽게 버린 사람이다. 태림의 말대로 당분간은 현영 때문에 마음을 졸이며 살아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너"
지웅이 태림을 쏘아본다. 태림이 죄를 짓다 걸린 표정으로 지웅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그런 기사는 뭐하러 쓴거야? 그리고 오동훈이란 사람한테 쓸 데 없는 얘기는 뭐고, 서명은 뭐야?"
태림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웃는다.
"어, 찾아 왔었구나? 뭐긴 임마. 그 사람한테 얘기 들었으면 그대로지. 나도 니가 한청련을 맡았으면 좋겠다. 딜링도 안하고, 지금쯤이면 니가 움직일 때도 된 거 같고. 허락했어?"
움직일 때라. 그랬다. 자신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찾아오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한청련 의장이라는 거 아직은 쉽게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의장을 하라는데 대답이고 뭐고가 어딨어?"
"자식, 잘 생각해봐. 내가 생각해도 그 자린 너 때문에 만들어진 거야. 그리고 오동훈이란 사람 신원조회도 해 봤어. 멀쩡해. 한양대학교 학생이야. 운동권도 아니고. 다른 건 없는 거 같더라. 단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다른 젊은이들보다 절실하다면 절실하다는 거밖에"
태림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당연히 한청련 의장은 지웅이 해야 한다는 듯.
"그 사람 왜 2000명에게 서명을 받았는지 얘기하디?"
"아니. 2000명이고 20000만명이고 난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우습긴. 그 사람 나한테 찾아와서 그러더라. 적어도 2000년이 되면 어깨 좀 피고 살고 싶다고. 그래서 내년 한 해 열심히 해서 당당해지고 싶다고, 이 나라를 생각할 때 가슴이 절로 펴지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그러더라구. 그 정도면 훌륭한 가슴을 가진 젊은이 아니야?"
오동훈. 제법 멀리 볼 줄도 아는 사람이다. 지금 당장 뭘 하자는 게 아니라 좀 더 낳은 내일을 위해 오늘 열심히 살아가려는 자세. 맘에 든다. 이미 절반은 허락하고 있던 터. 나머지 절반은 태림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사실은 태림이 자신을 제대로 설득해 주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금씩 마음을 굳혀가고 있다.
"내가 한청련 의장직을 맡아서 뭘 할 수 있겠어. 그리고 활동준비가 제대로 갖쳐지지도 않은 것 같던데"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좀 치사하다고 느낀다. 이미 마음이 기울고 있으면서도 괜히 한 번 튕기는 기분도 든다.
"자식. 튕기기는. 니 얼굴에 난 한청련 의장이오, 하고 써있다"
들켰다. 표정까지 숨기긴 힘들지.
지웅이 껄껄 웃는다.
"그래도 조금 불안한 건 있잖아. 요즘 시국이 그렇잖아. 무슨 연합이다 하면 눈에 쌍심지 켜고 달려들고"
"그거야, 니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는 문제고. 더 이상 말 마라. 난 현영이가 보내온 자료나 해석해 봐야겠어"
처음부터 태림은 지웅이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도 서명에 포함한 것이다. 뒤에서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준다는 기분으로.
가슴이 설렌다. 불과 두어달을 칩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두어달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 없었다. 싸우고 싶다, 감옥에서 가졌던 그 기분이 더 이상 사그러들기 전에 움직이고 싶었다. 무엇이든 하고 싶던 차였다. 그리고 지금, 그 기분이 다시금 가슴속에서 꿈틀거린다. 단지 일본을 상대로 하는 싸움이 아니다. 자신과의 싸움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일본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닌, 자신을, 나라를 강하게 하는 싸움이다. 우선은 동훈의 말을 기본 모토로 삼는다. 이 나라 젊은이들이 나라를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게끔 만드는 일. 어쩌면 그것이 가장 큰 일이 될 지도 모른다.
대신 지웅 자신은 일본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절대로 그럴 순 없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일본에 대한 감정은 씻길 수 없는 것이었다.
몸도, 마음도 근질근질하다. 동훈에게 연락이 오려면 며칠 기다려야 했다.
항복
김대통령은 고민에 빠졌다. 김장관이 제출한 보고에 따르면 어업협정에 따른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장 어획고가 30% 이상 감소한다. 연간 수천억원을 손해보는 것이다. 한국 어선의 일본수역 안에서의 조업실적은 연 평균 21만톤에 이르렀으나 어업협정을 체결하면 15만톤으로 6만톤 가까이 줄어들게 된다. 일본수역에 입어할 수 있는 어선의 수도 감소해야만 했다. 그렇게 되면 어선에 관련된 제조회사들도 그만큼의 타격을 받는다. 고등어나 오징어는 `기존실적은 토대로 3년간 양국이 동등한 수준을 유지한다'는 일본측의 주장을 받아들였을 때 어획량이 반으로 줄어들고, 명태의 경우 2000년부터는 아예 조업을 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일본은 저자망과 통발 어선의 입어 척수를 감소하는 것도 주장하고 있다. 불과 5-6년 전에 바꾼 어선이 쓸모가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당장에 그것만 해도 수백억원.
독도. 독도가 불안하다. 일본에서는 독도라는 지명을 언급하지 않고 단지 경도와 위도로서만 중간수역을 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이 제시한 위치는 독도를 둘러쌓고 있는 부분. 눈 뜨고 코베이는 꼴이다. 야당이나 시민단체의 거센 반발이 일어날 것이 뻔하다. 그들을 어떻게 무마시킨단 말인가?
"그래서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지금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란 말이오?"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길 바랬다. 그러나 김장관은 너무 쉽게 김대통령의 기대를 져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야당에서 벌써부터 대규모 반발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현재로선 이 길 뿐입니다. 더 이상 자금이 빠져나가면 대기업까지 무너지게 됩니다"
알고 있다. 김대통령이라고 모르고 있겠는가? 하지만 다른 대답을 기대했을 뿐이다. 김대통령도 알고 있는 그런 대답 말고 적어도 아무 대책 없이 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는 기분이 드는 대답을 원했을 뿐이다.
"어제도 가즈오 일본 대사가 찾아왔었습니다. 서둘러 답변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럴수록 자금회수를 중단하는 것만 늦어질 뿐이라고......"
홍장관이 눈치를 보며 말한다. 그런 말을 해야만 하는 자신이 못마땅할 뿐이다.
고종. 갑자기 고종이 떠오른다.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조선의 마지막 실권자. 힘 한 번 못써보고 나라를 빼앗긴 불쌍한 임금. 지금 자신의 모습이 마치 고종처럼만 느껴졌다. 왜, 싫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하는 것인가? 항복인가? 일본에게 항복하고 마는가?
"각하......"
김장관이 대통령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게 하도록 해요. 지금은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는 수밖에. 하지만 다들 알고 있어야 할거요. 지금은 잠시 한 발 물러나 주는 것이라는 걸. 언젠가 저들이 뒷걸음을 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걸. 명심해요. 국치(國恥)예요, 국치. 이번 한 번 뿐이오. 앞으로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자존심을 뺏기는 일은 이번 한 번 뿐이란 말이오"
김대통령의 음성이 떨린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은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던가? 하지만 이번 한 번 뿐이다. 다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있어선 안된다. 자신이나, 자신의 자손들이나 더 이상 고개를 숙인 채 살아서는 안된다.
"나가봐요"
조금은 흥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으로서 냉정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은 대통령이기 이전에 한 나라의 국민이었다. 일본에게 수모를 당하는 한민족의 백성이었다.
지웅은 동훈을 만나기 전에 태림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태림은 지웅을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자마자 사무실 건너편 커피숍으로 달려왔다.
"어쩐 일이야? 드디어 움직이기로 한거야?"
반갑다. 지웅을 밖에서 만나는 게 얼마만인지 모른다. 사실, 그동안 지웅의 외출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가슴을 훑고 지나가주기를 바랬다. 아직은 젊은 자신의 열정을 꺼내주길 바랬다. 드디어, 지웅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무슨 말을 꺼낼 것인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문화개방 말이야. 지금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고 있어?"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태림은 일본 대중문화 1차 개방때부터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기자라는 신분이 지나칠 수 없게 했고, 지웅이 언젠간 문화개방을 거드릴 거라는 생각이 그렇게 했다.
"아직은 미미해. 지금은 영화만 개방한 상태잖아. 그것도 해외영화제 입상작에 한해서만. 아직은 우려할 단계가 아니야. 다케시 감독의 하나비가 제법 관객을 동원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봤자야. 처음이라는 호기심, 매체의 홍보 때문에 찾은거지. 하나비 덕택에 일본 영화는 일단 한국에 발 붙이기 힘들거야. 생각보다 반응이 덤덤해. 그저 그런 영화. 잘 되긴 했지만 와- 하면서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야. 영화는 우리가 이겨"
"영화로 끝나는 건 아닐 거 아니야"
"그렇지. 이제부터가 문제야. 언제 2차개방을 할 줄 몰라. 영화는 길을 트는 역할만 했을 뿐이지. 음악, 방송, 애니매이션, 게임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거지. 그렇게 되면 일대 혼란이 야기될거야. 진짜 무기는 그것들이니까. 아마 지금 일본에서는 한국을 향해 조준하고 있을거야. 어디로 쏴야 할 것인가, 얼만큼의 무기를 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아주 오래 전부터 한국시장을 염두해 오고 있었을 테니까"
지웅이 염려하고 있던 것이 바로 그 문제였다. 몇 달 전 개방한 영화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앞으로 본격적인 문화침투가 시작될 것이다. 어느정도의 화력인지는 지웅도 알지 못한다.
"영화로 인해 한국인들을 방심하게 만든다 이거겠군. 어차피 일본이 영화로 한국대중문화를 침투할 생각은 없었을 거 아니야. 연막작전일 수도 있겠군"
태림이 지웅을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 부분만은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듣고보니 틀린 말도 아니다. 한국 측에서 영화만 개방을 허락했을 때, 가만히 수긍할 일본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웅의 말대로 연막작전일지도 모른다.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대규모 상륙작전을 벌이려고 하는 건지도. 마치 한가로운 일요일 새벽의 6.25처럼.
지웅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창 밖에는 사람들이 어깨를 움츠린 채 지나다니고있었다.
"개방 안하면 뭐해. 이미 일본 문화에 실컫 물들어 있는데"
사실, 벌써부터 청소년들은 일본 문화를 접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일본문화개방이라는 건 하등의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오래 전부터 이미 충분히 접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일본 문화에 빠져드는 청소년을 무조건 탓만 할 건 만은 아니잖아"
태림이 지웅의 말을 받았다.
"무슨 소리야?"
지웅이 태림의 설명을 기다리는 듯 빤히 쳐다보았다.
"일본 문화가 이 땅에 들어오더라도 우리 청소년한테 잠입하지 못할 정도의 힘이 필요해. 청소년이 우리 것을 자연스레 찾기에는 아직 힘이 모자라잖아. 서태지만 해도 그렇고. 작년에 서태지가 컴백한 건 두 가지 이유야. 하나는 IMF로 시들해진 대중문화에 활력소를 불어넣자는 의도지. 작년부터 지금까지 음반 판매 100만장 넘어가는 가수 봤어? 서태지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극비리에 컴백한거지. 비록, 100만장은 돌파하지 못했지만 그 때 당시의 음반 매장 분위기는 장난이 아니었잖아. 음반을 사려고 기다리는 사람들 줄이 100미터가 넘을 정도였으니까. 그 두번째가 문화적인 면이지. 일본문화가 개방되었을 때 청소년의 눈과, 귀를 끌어모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가수는 서태지밖에 없었거든. 서태지 데뷔했을 때, 한창 일본가수에 빠져 있던 청소년들 대부분이 우리가요로 눈을 돌렸잖아. 그걸 노린거지. 조금이라도 우리 가요에 애착할 수 있는 구심점. 그게 서태지가 컴백한 또하나의 이유야. 서태지 컴백했을 때가 일본문화 개방을 앞둔지 3개월 전이었잖아. 어쨌든 지금에야 개방하게 되었지만 물론 대중들은 모르고 있지. 윗분들이 지시한 것이거든. 간만에 아주 좋은 일했지? 비록 결과야 기대했던 것 만큼은 아니었지만"
"청소년이 우리 가요에 더욱 심취하도록 만들기 위해 서태지가 컴백했다고?"
조금은 놀랐다. 정부에서도 그렇게까지 신경쓰고 있었다니. 믿기지 않지만 반갑긴 했다. 그런 일도 있었구나.
"그래, 아무리 괜찮은 일본문화가 들어와도, 걱정할 필요조차 없는, 그런 구심점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거지. 서태도 죽어도 컴백 안한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정치인들의 부탁을 거절할 순 없었던 모양이야. 자신에게도 생각이 있었겠지. 어쨌든 이 시대 최고의 가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잖아"
"일종의 영웅만들기라고 할 수 있겠군"
"바로 그거지. 스타시스템이야. 우리 역사에는 그런 영웅이 부족하다는 거야. 미국을 봐도 그렇잖아. 링컨 대통령 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그가 왜 영웅이 되어야만 하는거지? 미국의 남북전쟁은 인종 전쟁이야. 그 전쟁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하는거고. 그러나 미국인들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을 영웅으로 만들어버린거야. 백인의 우월함을 과대포장한거지. 어쨌든 링컨은 미국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도 위인으로 알려지고 있잖아. 바로 미국인들의 영웅만들기야. 마이클 조던이나, 타이거우즈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야. 물론 그들의 실력이 뛰어난 건 사실이야. 하지만 미국인들은 그들 역시 실력 이상의 영웅으로 만들어 놓았잖아? 우리도 그런 영웅을 만들어야해. 박찬호나, 박세리를 봐도 그래. 그 둘은 우리가 만든 스타가 아니라, 미국 언론에서 만든 스타야. 우리도 우리 스스로를 보고 즐기고, 감동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지. 일본이야 지금은 한 방 먹었지만 문화라는 건 그리 쉽게 무너지는 게 아니거든. 어차피 일본에 대한 문화개방을 이루어질테고, 그 때가 되면 지금처럼 안일한 자세로는 그들의 문화를 못 막아. 그들의 문화를 외고집으로 막는게 아니라, 우리의 문화를 발전시켜야 해. 그 방법이 사람이 되었던, 유행이 되었던 대중의 눈과, 귀를 집중시킬 무언가가 필요한거야"
태림이 목이 마른 듯 차를 마셨다. 이미 밋밋하게 식어있었다.
역시 태림을 찾은 보람이 있었다. 정보은행. 녀석에게는 언제나 꼼꼼하고 치밀한 구석이 있다. 언제 무얼 물어봐도 실망하지 않는 대답을 해 준다.
대중의 눈과 귀를 집중시킬 무엇. 그걸 찾는 일이 급했다. 태림의 말대로 아무리 발달한 일본의 대중문화가 들어와도 흔들리지 않을 버팀목이 될 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프랑스인들처럼 미국영화가 처음 들어왔을 때 자국의 언어로 대사가 나오지 않는다고 의자를 집어 던지며 극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처럼 극단적인 애국심을 기대할 수 없다면 강한 기둥이 있어야 한다.
지웅은 곧장 동훈을 만나러 갔다. 한청련 의장. 그런 직책은 의미가 없다. 자신이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공간이 마련되었다는 자체가 중요했다.
걸음이 빨라진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추위를 느끼고 있진 않았다. 무언가가 자꾸만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쳇바퀴
생각보다 동훈이 준비한 사무실은 그럴 듯 했다. 컴퓨터도 두 대나 있고 책상도 다섯 개다. 사람도 세 명이나 있었다. 지웅이 사무실을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오셨군요"
동훈이 환히 웃으며 지웅을 맞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치 귀한 손님이 오신 것처럼 긴장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아직 실감이 안나네요"
지웅이 멋적은 듯 웃어보인다. 처음보는 사람들에, 처음 발을 디딘 사무실. 그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실천해 나가야 했다. 아무리 쉽게 적응을 한다해도 당분간은 어색할 수밖에. 어쨌든 지웅은 자신감에 넘치는 표정은 잃지 않았다. 무작정 나라를 위하는 집단이라고 마냥 좋을 수는 없는 법. 리더의 자리에 앉으려면 그만한 실력도 발휘해야 한다. 지웅은 그 또한 만만치 않으리라 생각했다.
동훈이 한 사람씩 지웅에게 소개 시켰다.
"안녕하세요. 배광수입니다"
먼저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지웅에게 인사를 한다. 깡마른 체격에 얼굴은 허여멀건하다. 그러나 눈빛만은 송골매를 연상시킬 정도로 날카롭다. 그리고 매섭다. 그 옆의 사내가 다가와 인사를 한다.
"김윤섭입니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독기가 서려보인다. 다소 인상이 험상궂다. 사무실의 사람들 중에 가장 부리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굉장히 강직해보인다. 배신이라는 말만 들어도 당장에 요절을 낼 것만 같다.
"서영민이예요"
키가 작은 아가씨. 똑똑해 보인다. 조그만 안경에 검은 뿔테 안경이 다소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조금만 심한 말을 하면 금새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나 그 중에선 가장 당찬 모습이었다.
"광수씨하고 윤섭씨는 학생이구요, 영민씨는 졸업생이예요. 나이들은 전부 20대 중반이구요. 일단은 이 세사람이 함께 일할 의사를 비쳤어요. 그리고 다들 충분한 능력들은 가지고 있구요. 나머지는 라인을 통해 움직일 거예요. 라인이라고 하니까 좀 그렇죠? 하지만 결코 해코지 당할 일은 없을 거예요"
중간 리더. 지웅의 눈에 동훈은 그렇게 비췄다. 모든 걸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 사람들을 챙겨주고 그들에게 귀를 열어놓고 있는 사람. 모사(謀士)라는 생각도 든다. 보면 볼수록 듬직하다.
우선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그리고 나서야 지웅이 말을 꺼냈다.
"글세요. 제가 지금 제자리에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죽을 힘을 다해 일해봅시다. 사실,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아직도 잘 몰라요. 여러분이 도와줘야 할 거예요"
"걱정 마십쇼. 죽으라면 죽을테니까. 난 아예 한청련을 극우파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니까요.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그러는 것보단 아예 확실하게 밀어부치는 거 말예요"
윤섭. 역시 거칠다. 동훈의 양 미간이 일그러진다.
"그래요, 윤섭씨 말대로 한 번 확실하게 밀어부쳐보죠. 대신 애국이라는 명목 아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줘선 안되요. 우리 생각이 아무리 옳다고 판단되도 다른 사람들에겐 불의의 피해를 줄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래요. 전 그게 제일 싫더라구요. 한총련도 구국이라는 명목아래 투쟁을 하고, 시위를 한다지만 시민들은 학생들과 전경들 사이의 싸움이 벌어지면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한지 모른다구요. 노동자들도 파업을 하는 건 좋지만 적어도 국민들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죠. 2년 전에 지하철 파업 때도 그렇고. 시민의 발을 담보로 하는 행위는 공무원의 자질을 다시 평가해봐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니까요. 물론 그 사람들 입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요"
똑 부러지는 소리. 영민은 흘러내리는 안경을 손가락으로 제자리에 옮긴다.
"그래요. 우린 모든 사람들이 지지하는 가운데 뭘 하든지 하는 걸로 합시다"
우리. 우리라고 해야 얼마나 될까? 지금 당장 자신들이 사업을 벌인다면 지지해 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직은 그런 면에서 상당히 조심스럽다.
"동훈씨, 생각하고 있는 사업계획 없어요?"
지웅이 묻는다. 동훈이라면 애초에 한청련을 만들기 전에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제일 먼저 하고 싶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지웅은 벌써부터 그걸 묻고 싶었다.
"많죠. 어디 한둘이겠어요? 일제시대처럼 국채보상운동이라도 하고 싶고, 수입제품 불매운동이라도 하고 싶죠. 그것 뿐이겠어요? 역사 되찾기 운동이라든가, 화형식 같은 거 있죠.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기분나쁜 것, 양심에 거리낌을 받는 물건들 눈 딱 감고 태워버리는 거예요. 무조건 외국거라서가 아니라, 그런 거 있잖아요. 쓰고 있고, 입고는 있지만 웬지 찜찜한 거"
"게다가 테러라도 한 번 하면 좋겠지"
윤섭이 또 한 번 과격한 성격을 드러낸다. 표정을 봐선 장난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번엔 다들 윤섭을 쏘아본다.
"그렇지만 다들 너무 추상적이죠? 현실하곤 거리가 멀어요"
동훈이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추상적인 거 한 번 해 볼까요? 현실로 옮겨보는 거예요"
사실, 동훈의 말대로 모든게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굳이 못 할 건 또 무언가? 화형식. 지웅은 그 말이 참 맘에 들었다. 이미 자신은 혼자서 화형식을 치뤘던 경험도 있잖은가? 아직도 학생들의 가방에, 휴대폰에 달려서 웃고 있는 고양이들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진다. 너무 극단적인 생각인 것 같아 자중하려고도 해봤지만 그 때 뿐이다.
문화개방이다. 조금 있으면 대형침투가 이루어진다. 안 그래도 태림을 만나고 사무실로 달려오면서 그런 생각도 했었다. 어떤 방법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일본에게 위협을 줄 수 있을까? 동훈의 말을 듣고 보니 한 번 해볼만 하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엔 이런 청년이 있다. 아무리 일본의 문화가 들어와도 흔들리지 않는 청년이 있다. 그걸 한 번 보여주고 싶다. 또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볼 필요성도 있다. 자각을 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먼저 느껴야 한다.
"어때요? 동훈씨 말대로 화형식을 거행하는 거"
"거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윤섭이 맘에 든다는 듯 크게 웃는다.
"하지만 시작부터 국수주의란 말을 들을 필요가 있을까요? 너무 극단적인 생각인 것 같은데 광신적인 종교 집단도 아니고"
찬물을 끼얹는다. 광수는 흐트럼 없는 자세로 반대 의견을 말했다.
"한 번쯤은 그래도 될 것 같은데. 광수씨 말대로 극단적이고 국수주의 적인 발상인 거 알아요. 하지만 우리가 국수주의란 말을 쓰기 이전에 그만한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적이 있던가요? 아무리 지금 우리가 국수주의적으로 행동을 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해도 현재까지 잃어온 우리 자존심의 일말이라도 찾아올 수 있을까요? 광수씨 생각 충분히 이해해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그렇게 생각할 거라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우린 지금껏, 역사를 문화를 너무 내팽개치고 살았어요. 처음부터 그런 인식을 심어주는 게 부담스럽긴 하지만, 평가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이루어지겠죠. 지금은 당장의 사람들 시선을 생각하는 것 보단 오랜 시간 지키지 못한 우리 자존심에 경각심을 심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네요"
천천히, 또박또박. 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광수는 그런 표정이다. 윤섭은 감탄의 표정까지 짓는다. 수연도 지웅의 말에 만족한 것 같다.
동훈은 흡족한 나머지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판단이, 다른 젊은이들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 나지웅이란 사람, 확실히 한청련을 이끌고 갈만한 사람이다. 한국의 청년을 대표할 만한 사람이다.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도 그렇지만 사람을 다루는 것 또한 일품이다. 한동안 자신은 지웅의 그림자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재의 별장에서 기거한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아직 기정의 다리가 낫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동안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중고 승용차를 구입해 수시로 도쿄를 다녀왔다. 와타나베의 근황을 추적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와타나베는 집 밖으로 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단지 사람들이 가끔씩 그의 집으로 찾아들 뿐이었다. 그렇다고 또 다시 집으로 잠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성재의 집처럼 검정 양복의 사내들이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와타나베가 금이타조의 두목이라는 확증도 없다.
기정의 한 쪽 다리는 아직도 기부스 상태였다. 심하게 부러진 까닭이었다. 그래도 이젠 제법 걸어다니긴 한다.
"그래도 어떻게 여긴 용케 안 찾아오네?"
기정이 책을 읽다 말고 기지개를 폈다. 성재의 집을 지키고 있던 것과는 달리, 별장은 아무런 조짐이 없다. 그들도 여기만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며칠 동안은 내내 불안했다. 검정 양복의 사내. 갑자기 그들이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밤에 자다가도 몇 번이나 깬지 모른다.
"한국에 안가고 싶어?"
기정이 마치 형처럼 묻는다.
"한국에 가고 싶어요?"
"너 말이야. 가족도 안보고 싶어?"
"엉뚱한 소리 말아요"
보고 싶기야 이루 말할 수 없다. 자신과 똑같은 아버지, 그 아버지에 한평생 주눅들어 살아오신 어머니. 다 보고 싶다. 게다가 지웅이, 태림이. 보고 싶다는 말을 꺼내면 밑도 끝도 없을 정도로 생각나는 녀석들. 그러나 그런 것들 단단히 버리기로 마음 먹은 터. 관광삼아 건너온 일본땅이 아니다. 괜히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면서도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태림에게도 분명히 얘기했다. 뭔가 알아내지 않으면 결코 돌아가지 않는다. 그건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적어도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남들이야 뭐라 하든, 자신에겐 떳떳하고 싶었다.
"적적하다"
"형이야 말로 한국에 가고싶나보군요?"
"나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데 이골이 난 사람이다. 반겨줄 처자식도 없는데 무슨 생각이 나겠어?"
"퍽두 자랑이유. 그 나이 되도록 결혼도 못하구"
"안 한거야"
"안한거나, 못한거나"
"너 나한테 불만있냐?"
"불만 없어요"
"그런데 왜 말끝마다 시비조야?"
"그놈의 다리한테 물어보슈"
기정이 자신의 다리를 쳐다보았다. 현영이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걸걸한 성격에 자신의 다리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다.
"조금만 기다려, 너때문이라도 금방 풀어야겠다"
"풀으나마나 한 다리"
괜히 기정에게 짜증을 낸다. 아무런 진전이 없는 상황이 현영을 그렇게 몰아부치는 것 같았다. 와타나베의 동향을 감시하는 것도 싫증이 난다. 그러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차라리 성재의 집에서처럼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침투하는 것이 자신에겐 어울린다. 괜한 심통만 느는 것 같다.
"아직도 겁나요?"
현영이 걱정스레 묻는다.
"겁나"
"제기, 기부스 푸는 거 괜히 기다리고 있었네"
"안 풀면 되겠네"
싱거운 농담만 오고간다. 그렇게 말이라도 해야지. 서로가 많이 지쳐있다. 하지만 자꾸만 축축 쳐진다.
"그게 도대체 뭐였을까요?"
"또, 그 소리야?"
"궁금하지도 않아요?"
현영이 다시 짜증을 낸다. 성재의 세 번째 프로그램. 그걸 보지 못한게 한이 된다. 성재의 집에서 뛰어내렸을 때 자신의 주머니에서 떨어뜨린 디스켓. 지금껏 그 생각이 머리속에서 도무지 떠나질 않는다. 성재의 집을 다시 찾아갔었다. 그러나 여전히 검정 양복의 사내들이 지키고 있었다. 자신이 도망쳐 왔던 뒷문 쪽으로 다가가 보기도 했다. 그러나 사내들은 그럴 틈마저 주지 않았다. 이번엔 아예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건 잊어. 집착할수록 조바심만 더해질 뿐이야"
기정이 아무리 타일러도 소용이 없다. 도대체가 아무런 진전이 없다. 단서라도 되는 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게 지금 현영의 심정. 그럴수록 아무리 뛰어다녀봐도 거기서 그만이다. 아무런 진전이 없다. 다람쥐마냥 쳇바퀴만 돌고 도는 기분이다.
화형식(火刑式)
지웅은 동훈의 추진력에 감탄할 뿐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여의도 광장에는 2만여명의 사람이 모였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모이고 있다. 청년들 뿐이 아니었다. 어린 아이에서 나이든 어른들까지 여의도 광장에 모여들고 있었다.
동훈은 과감하게 신문 광고를 냈다. `자존심 찾기 운동' 이란 제목으로 오늘 행사를 위한 광고를 낸 것이다. 경비는 어디서 구했는지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의 사비를 털었는지도 모른다. 부모님을 졸라서 마련했는지도. 또한 PC통신을 이용했다. 모든 통신회사의 게시판에 광고를 한 것이다. 또한 호외까지 만들어 돌리고 다녔다. 불과 1주일이라는 준비기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일몬문화를 모조리 가지고 나왔다. 중, 고등학생들부터 버리기 시작한 산료의 캐릭터상품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양이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 산료의 캐릭터 상품을 한국의 젊은이들이 샀다는 것에 스스로 놀랬다. 수많은 캐릭터 상품이 산처럼 쌓였다. 모두가 부끄러워했다. 비싸디 비싼 악세사리를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즐기고 있었고,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에 자성했다.
산료의 캐릭터 상품 다음으로 나온 것은 불법으로 구입한 일본의 잡지와 음반, 만화책 비디오테잎, 일본 게임 CD 등이었다. 그것들 역시 작은 산을 이루었다. 십여년동안 한국의 청소년들을 유혹한 일본의 문화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개중의 사람들은 소니와, 파나소닉 등의 워크맨을 들고 나오기도 하였고, 일본어로 난잡하게 쓰인 티셔츠를 버리기도 하였다.
여의도 광장의 한 가운데에 일본문화의 산이 생겼다. 사람들은 엄숙히 그 산을 쳐다보았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무언의 반성. 그 정도의 일본문화를 향유하는 동안 과연 우리의 문화는 얼마나 지켰고, 얼마나 찾았던가.
여의도 광장 옆에 대기하고 있던 다섯 대의 쓰레기차가 조금씩 산을 허물어뜨렸다. 한 대, 한 대 일본의 문화를 담아내고 있었다. 다섯대의 쓰레기차를 꽉꽉 채우고야 일본의 문화는 여의도 광장에서의 종적을 감추었다.
"한 말씀 하시죠"
동훈이 지웅을 향해 웃어준다. 긴장을 풀어 보라는 소리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은 처음이다. 상상 외로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일본문화를 버렸다. 애초에 그럴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일본문화가 주를 이루었다. 시국이 시국인만큼 국민들의 가슴에도 반일감정이 싹튼 모양이었다. 하기사 아마 적어도 몇 백년 내에는 사라지기 힘들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가슴에 쌓인 감정은 깊다. 그리고 짙다.
천천히 단사에 올라섰다. 숨을 고르고 군중을 둘러보았다. 많다. 이젠 3만여명은 되어 보였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 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의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모와 조상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 말은 일제시대 민족문화 말살정책의 교육 지침입니다. 70여년 전 일본인들은 폭력으로는 우리 민족을 굴복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해 이땅의 정신, 문화, 역사를 조작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들이 일제시대에 저지른 민족문화 말살정책이라는 것의 효과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얘기합니다. `한국사람은 이래서 안돼, 왜 한국사람 원래 그러잖아' 그렇게 우리 스스로를 깎아 내려왔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한국사람이 아닙니까? 이 모든 것이 일본인들이 저지른 만행에서 우러난 것이 아닙니까?
아직도 우리는 모자랍니다. 국산이면 무조건 안 되고, 일제니, 미제면 무언가 달라도 다를거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자세한 비교를 해 보았기에 국산은 무조건 안 된다는 겁니까? 물론 우리의 산업은 저들에 비해 수십년이나 늦게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 특유의 지혜와 노력으로 세계 어느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기술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우리는 외제가 더 좋은 줄만 알고 비싼 세금 붙여가며 들여온 제품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중, 고등학교 때 배운 역사가 과연 전부일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겐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훌륭하고 인간적인 조상이 많았을 것입니다. 저 일본인들이 우리의 서적을 불사르고, 역사를 왜곡시키지만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욱 우리의 조상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이 70년전의 저들의 만행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나라의 경제가 어려운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이 땅의 정신, 문화, 그리고 역사입니다. 이것들을 잃는다는 것은 민족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말을 국수주의(國粹主義)라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껏, 우리는 아무리 강한 국수주의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과, 문화, 역사를 내버려두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버린 일본의 문화를 돈으로 환산하면 엄청난 액수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우리가 되찾은 자존심은 지금껏 잃어 온 것에 비하면 실로 적은 양입니다.
한국의 청년에게 호소합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껏 우리는 너무 자만에 빠져 있었고, 모든 책임은 나 아닌 타인의 것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기성세대는 이땅의 젊은이는 너무 나약하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청년들은 강해져야 합니다.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자신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몸에는 눈, 코, 입, 귀, 팔, 다리 등 각각의 역할을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모든 구조가 눈의 역할을 하려 하고, 입의 역할을 하려 한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위치에 불만을 가진다면 이 사회는 기형아처럼 이상하게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끄는 사람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이 있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으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나라 각자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상적인 사람처럼 정상적인 나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이 편하려고만 하면 한없이 힘들어질 것이고, 고생하려고 마음먹으면 한없이 편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경제상황이라도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경제인은 경제인대로 그리고 우리 청년은 청년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IMF는 모래성처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낮출 줄 알아야겠습니다. 남에게 대우받고 싶고, 이기고 싶으면 먼저 나를 낮춰야 합니다. 지금껏 알량한 자만감에 빠져 살아왔던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나서 주먹으로 치는 것은 스스로가 패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 발자욱 뒤로 물러설 줄 알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성세대와의 거리를 좁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른들의 얘기라면 무조건 삐딱하게 듣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들의 지금껏 살아오며 느낀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온고지신(溫故之新)이란 말이 있습니다. 옛 것에서 새것을 추구한다는 말입니다. 옛 것이라는 것에 우리는 지금껏 혀를 내두르며 외면해왔습니다. 구식이다 유치하다, 우리도 다 아는거다, 갖가지 변명거리를 만들어 옛 것을 경시해왔습니다. 그러나 옛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옛 것이라는 것은 조선시대나 고려시대, 어느 한 시대를 특징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고(思考)를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이어 온 지혜의 축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20여년 살아온 짧은 인생으로 감히 옛 것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기성세대에게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이 가진 지혜를, 경험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IMF의 주범은 정치인이나, 한보, 기아 사태를 일으킨 당사자 들이나 공룡식 사업으로 거품을 만들어 놓은 대기업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험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욕할 줄만 알고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로 IMF의 가장 큰 주범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청년이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가 당장은 힘들어도 우리의 후손을 위해,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세계최고의 지능과, 추진력, 그리고 기성세대가 산업을 일으켰던 노력까지 합한다면 우뚝 일어설 것입니다. 우리의 돈으로 우리 산업을 가동시키고, 우리 문화를 우리가 향유할 그 날을 기다리며, 열심히 뛰는 한국의 청년이 됩시다"
여의도 광장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천천히 박수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지웅이 단상을 내려와 쑥스럽다는 듯 동훈을 보며 혀를 내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의장님입니다"
동훈은 지웅의 연설에 누구보다 공감했다는 듯 연신 생글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내려왔는지 아직 정신이 얼얼하다. 다소 흥분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얼굴을 만져보았다. 조금은 상기되어 있다.
한청련은 이렇게 대중의 가슴에, 국민의 심장에 파고들었다. 강요하지도 않았다. 절대원칙이라고 고집하지도 않았다. `자존심 찾기 운동' 이라고 했다. 버리고 싶은 문화는 버리자고 했다. 그리고 우리의 낡은 정신을 버리자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다.
500만의 청년이 있다. 그리고 5000만의 국민이 있다. 그들의 가슴에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 한 번 쯤은 나라라는 단어를, 국가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쓰레기차는 열을 지어 쓰레기매립장으로 향했다. 매립장에 도착한 일본문화는 소각장으로 옮겨졌다. 수많은 카메라의 플래쉬가 터졌다. 방송국은 현장을 중계하고 있었고, 신문은 다음 날 조간의 헤드라인으로 다룰 것이다.
고양이가, 일본잡지의 노란머리의 표지모델들이, 각종 테잎이, 수많은 일본의 문화들이 타들어갔다. 이 땅을 유린하고 있던 일본인들의 정신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기묘국치(己卯國恥)
홍장관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가즈오 대사의 얼굴을 또 한번 마주봐야 했다. 일본의 요구대로 어업협정 체결 비준안을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홍장관은 벌써 세정로청사 조약체결실에서 20분이나 가즈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예정시간인 2시까지는 10분이 남아 있었다.
야당의 반발을 예상해 비준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어민들이 올린 실태자료를 보았으면서 모르는 척 했다. 지금 국회의원회관 앞에서는 야당과 광복회, 독도사랑보존협회등 시민 및 어민단체들이 `한-일 어업협정 비준 무효화 및 재협상 촉구대회'를 열고 있다. 게다가 오전에 야당의 대변인은 `오늘은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경술국치에 이은 또 한번의 국치일'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의 얼굴을 쳐다 볼 자신이 없었다. 평생 지금처럼 자신이 원망스러웠던 때가 있었을까?
시간은 무척이나 더디게 흐르고 있다. 빨리 가즈오 대사가 나타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비준을 교환하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렸으면 좋겠다.
어업협정을 기분 좋게 찬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하나같이 주권을 내주는 행위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홍장관의 브리핑을 듣고는 대부분 고개를 돌렸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아직은 양심이 남아 있어 그런 비준안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들 했다. 그러나 동의해버렸다. 시국이 그러한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독도에 대해서만은 재협상을 요구해야 한다는 소리가 강했다. 이번 협정은 독도에 대한 선전포고라는 말도 무던히 나돌았다. 그러나 가즈오 대사는 단호하게 홍장관의 말을 묵살했다.
- 우린 독도에 대해 언급한 적 없습니다
물론 없다. 협정안은 독도라는 말도, 다케시마라는 말도 없다. 단지 좌표상으로만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눈가리고 아웅이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당해야 한다.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5분이나 남아 있다.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것만 같았다.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야마모도는 일본 해자대 군함 위에서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5분만 있으면 오키군도에서 저 한국의 어선들을 몰아낼 수 있다. 이렇게 통쾌할 수가 없다. 바다바람이 자신을 위해 불어오는 것만 같았다. 히노쿠마는 옆에서 무표정하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희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단지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있을 뿐.
자꾸만 시계에 손이 간다. 2시가 되면 싸이렌이 울릴테지만 그래도 자꾸만 확인하고 싶어진다. 갑자기 시계가 멎어버리는 건 아닌지. 초조하다.
와타나베는 선실에서 한국 어선의 추방을 기다리고 있다. 와타나베 역시 벅찬 가슴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다. 야마모도와 마찬가지로 연신 시선이 시계로 가 닿는다.
야마모도의 눈 앞에는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어업을 하고 있는 한국의 어선들이 펼쳐져 있다. 생각같아서는 싸이렌이 울리자마자 저 어선들을 격침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일단은 추방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하지만 명령을 거부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시, 야마모도는 무력을 사용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내심 한, 두척의 어선은 자신의 명령을 무시하길 바랬다. 이미 해자대 군함에 포탄은 장진 되어 있었다.
시계를 바라보았다. 1분도 채 남지 않았다. 점점 호흡이 빨라졌다. 저 바다는 이제 일본의 것이 된다. 와타나베가 선실 밖으로 나왔다. 그 역시 흥분하긴 마찬가지. 조금 더 가까이서 느끼고 싶었다. 한국 어선의 추방. 가슴이 뭉클거린다.
히노쿠마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다. 35년을 준비해온 사람치고는 너무 냉정하다. 저 건너편 바다에서 자신이 한국에 나포되었었다. 그래서 두 달여만에 풀려났었다. 그리고 와신상담 오늘을 준비해 왔다. 그런데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다. 이게 전부는 아니라는 양.
길게, 아주 길게 싸이렌 소리가 울린다. 반대편에 있던 해자대 군함에서도 싸이렌이 울린다. 한국의 동해를 일본이 차지하는 신호. 야마모도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할 지경이다. 스피커를 통해 어선의 철수를 명령했다. 나가라, 어서 한국으로 꺼져버려라. 어떤 일이 벌어질 줄 모른다. 하하, 나가지 않아도 좋다. 무력을 사용할 기회를 줘도 그리 나쁘진 않지. 야마모도는 입이 귀에 걸릴 듯 찢어지게 웃는다.
어선들이 뱃머리를 돌렸다. 그리곤 천천히 한국을 향해 움직였다. 1999. 1. 22일 오후 2시. 일본 근해에서 조업을 하던 한국어선 336척은 항변 한 마디 못하고 한국으로 철수해야 했다. 수십년 동안 어업하던 일터를 잃어버린 것이다.
바로 그 시간 가즈오 일본 대사가 조약체결실에 얼굴을 내밀었다. 홍장관은 이미 인내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가즈오 대사는 천천히 홍장관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그 동안 잘 지내셨구요?"
홍장관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다. 이완용이 옥새를 넘길 땐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래도 이완용 자신은 새시대를 연다는 신념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홍장관 자신은 수치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저 가즈오 대사, 분명 자신의 염장을 충분히 지른 뒤에야 비준을 교환할 것이다. 숨을 한 번 골라보았다. 자존심 마저 빼앗긴 터에 마지막까지 당할 수만은 없다. 차분하고 냉정해야 한다. 절대로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한 번 더 지는 것이다.
잠자코 가즈오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비준이고 뭐고 주먹으로 한 대 갈겨버리고 싶다. 그러나 그런 생각조차도 없애야 한다. 자신은 지금 일본에게 치욕을 당하는 입장이 아니다. 당당해야 한다.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자신은 한 나라의 사신. 어떤 일이 있어도 비굴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그런 모습은 이미 역사에서 수차례나 되풀이 되어 왔었다.
"지금쯤 한국 어선들이 철수하고 있겠군요"
"무슨 말씀이시죠? 비준은 내일부터 발효하는 것이 아닙니까?"
역시 초장부터 비위를 건드린다. 하지만 홍장관도 충분히 각오하고 있는 터.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다만 속은 지금 썩고 있다.
"제가 드린 협정안을 자세히 읽어보지 않으셨나보군요. 비준을 교환한 시간부터 효력을 발행한다고 적혀 있었는데. 그리고 철수요청에 불응할 경우 어떠한 사태가 발생해도 책임지지 않는다고 그랬던 거 같은데요. 모르십니까?"
제기, 지금 협정안을 꺼내 읽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협정안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분명히 밤 12시부포 효력이 발행한다고 씌어있었던 것 같다. 그나저나 일본 근해에서 어업을 하던 어민들이 걱정이다. 가즈오의 말대로 철수에 불응할 시 일본이 어떤 태도로 나올지 모른다. 게다가 아직 연락을 못 받은 한국 어선이 있을 수도 있고, 연락을 받아도 고집을 부려 철수요청에 불응하는 어선도 있을 것이다. 홍장관의 등에 땀이 한 줄기 흐른다. 제발, 일본의 철수 요구에 순순히 응해주기를......
"그리고 문화에 대해서 말씀인데......"
가즈오가 특유의 입냅새를 풍긴다.
"2차 개방을 서둘러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 드린지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요. 그리고 며칠 전 아주 불쾌한 사건이 있었더군요. 여의도 광장에서 한청련이라는 집단이 저희나라의 상품들을 죄다 불살랐다고 하는데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저희는 양보할 만큼 했다고 보는데 한국에서는 아직도 불만이 있는 모양이지요? 다시 한 번 그런 일이 생기면 저희도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고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제법, 협박까지 해 댄다. 가즈오도 그 부분에서는 감정이 상한 모양이다. 아니 일본 전체의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홍장관도 그 기사를 보았다. `자존심 찾기 운동'. 그 역시 나지웅이었다. 대통령이 옹호하는 사람, 살인 누명을 썼다가 풀려난 사람. 그가 또 한번 숨통을 틔워준다. 그러다가 무슨 봉변이라도 당할까 싶다.
"아시다시피, 저희 나라는 민주국가입니다. 민주국가에서 그런 행사를 막을 순 없는 것이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하는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미처 그렇게까지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가즈오의 말을 듣고 보니 한청련의 행동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이것으로 그동안 가즈오 대사에게 당했던 수모는 한 판 되돌려준 셈. 그래봤자 조족지혈에 불과하지만.
"음. 마치 한국 정부에서 조종한 것 같군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다시 한 번 그런 사건이 일어나면 저희도 가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장관님께서도 한국의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실텐데요?"
약점을 집고 나온다. 몸둘 바를 몰라 시선을 어디에 줘야 할 지 모르겠다.
"협정안에 다른 불만은 없겠죠? 그럼 이 시간 이후로 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유효기간은 3년. 그리고 다른 이의가 없을 경우 자동 연장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가즈오 대사가 비준안을 홍장관에게 내밀었다. 유효기간 3년. 그리고 이의를 달아 협정 파기를 통보했을 때 실행기간 6개월. 적어도 3년 6개월동안 동해를 일본에 넘겨야 할 판이다. 그 동안 힘을 키울 수밖에. 협정을 파기한다고 해도 저 쪽이 반발하지 못할 정도로 국력을 키울 수밖에.
홍장관이 비준안을 내밀었다. 이로서 경술국치에 이은 또 한번의 국치일을 맞게 되었다. 우리 손으로 우리의 영해권을 넘겨주었다. 이완용이 옥새를 넘겼던 것처럼.
"앞으로 한일 관계가 항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길 바랍니다. 가장 가까운 나라가 서로 등을 돌려서야 되겠습니까? IMF도 원할하게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2차 문화개방도 조속한 시일 안에 해결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저희는 한국과 교류하기를 원합니다"
90여년 전 한일합방 때도 저런 권모술수로 이 땅을 유린했으리라. 홍장관은 아무 대꾸도 없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라.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위기를 극복해 3년 6개월 후에는 감히 일본이 우습게 볼 수 없도록 이나라의 힘을 키워야 한다. 전쟁 이후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러한 추진력이라면 세계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젠 어업협정이라는 위기를 발판으로 다시 한 번의 도약을 꿈꾸는 수밖에 없다.
충분히 모멸감을 느끼고 있다. 분노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른다. 언젠간 톡톡히 갚아주고 말 것이다. 이 빚, 그리고 세기 전에 당했던 빚까지 한꺼번에 갚아주고 말 것이다.
분노(忿怒)
"그냥 이렇게 지켜만 보고 있을 겁니까?"
윤섭은 지웅의 앞에서 꼼짝 않고 서 있다. 벌써 한 시간은 족히 지난 것 같다. 지웅이 아무리 만류해도 통 듣지를 않는다. 동훈과 광수라 완력으로 제지시키려 해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지웅도 윤섭 못지않게 분노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협정을 체결할 수 있는건지. 아무리 나라의 꼴이 말이 아니라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협정이었다. 기껏 일본에 대한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화형식까지 집행했었다. 그러나 지금 일본에게 몸뚱아리까지 내주고 말았다. 기운이 빠진다. 자꾸만 고개가 설레설레 저어진다.
윤섭은 오전 내내 시위를 하자고 야단이다. 벌써 독도사랑보존협회는 며칠째 시위를 벌이고 있다. 뿐만 아니다. 각종 시민단체에서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래서 윤섭은 한청련도 시위에 가담하자고 지웅을 졸라대고 있다. 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냐는 것이다. 하지만 지웅은 윤섭의 말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시위를 해서 해결할 것 같았으면 벌써 재협상을 요구했거나 전면 파기를 감행했을 거예요. 어차피 3년동안은 당해야 하는 노릇이고. 다른 방법을 찾아봐요. 한 대 맞았으면 때릴 생각을 해야지, 왜 때리냐고 억지를 부려봤자 해결되는 건 없어요"
"아예 나라를 팔아먹으라지!"
윤섭이 고함을 지르고는 사무실 문을 쿵 하니 닫고 나가버렸다. 윤섭의 말대로 나라를 팔아먹는 것과 뭐가 다를 것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무작정 협정을 파기하라는 시위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성급하게 덤벼들어서도 안 된다. 냄비같은 한국사람 성질이라는 속어도 그래서 나온 말이다. 당장에 해결될 일 같으면 누군들 달려들고 싶지 않겠는가?
"저, 독도문제만큼은 가만히 내버려둬선 알 될 것 같은데요? 협정안에 독도란 말은 없지만 중간수역으로 확정된 좌표상엔 분명히 독도가 포함되어 있어요. 그 소린 독도에 대한 야망을 다시 한 번 나타내는 것이겠죠. 독도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아서 분쟁 논지는 피해갔지만 중간수역이라는 것은 국제적으로 분쟁지역임을 인정받는 것이거든요"
동훈이 조심스레 지웅의 표정을 살핀다. 지웅에게도 그만한 생각쯤은 있을 터. 자신이 괜히 나서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영민도 동훈의 의견을 찬성하고 나섰다.
"그래요. 이번 협정, 단지 일본에서 경제적 이익만 노린거라곤 볼 수 없어요. 동훈씨 말대로 독도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못하는 걸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구요. 일본은 외국에서 아직도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어요. 아마 몇 년 후면 다케시마설이 다시 불거져 나올지도 몰라요. 그 문제만은 독자적인 노선을 걷더라도 그냥 지나쳐선 안될 것 같은데요?"
물론이다. 지웅이라고 어찌 그런 생각을 안하고 있겠는가? 다만 그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시위는 다른 단체에서도 충분히 하고 있다. 뭔가 획기적이고 참신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누구나가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설만큼의 확실한 방법을.
현영은 적잖이 흥분하고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와타나베, 일본 전 총리인 와타나베가 자신이 쫓고 있는 금이타조의 우두머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현영은 새벽부터 와타나베의 집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와타나베가 외출하는 것을 미행할 수 있었다. 한 사내가 와타나베의 집을 찾아왔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후에 사내와 와타나베가 동시에 밖으로 나왔다. 현영은 조심스레 두 사람을 미행했다. 와타나베는 오전 11시경 도쿄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곤 후쿠오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후쿠오카. 현영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와타나베가 후쿠오카로 향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렇지, 오늘은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되는 날이다. 만약 와타나베가 금이타조의 우두머리라면 분명히 바다로 나갈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어선들을 추방시킬 것이다. 현영은 후쿠오카행 다음 비행기를 탔다. 그리곤 후쿠오카에 도착해 곧바로 후쿠오카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큰 항구에서 와타나베를 찾기는 사막에서 바늘찾는 격이었다.
항구를 돌아다니며 와타나베를 기다려 보았다. 분명히 와타나베는 배를 타고 돌아오리라. 여기저기 두리번 거리며 돌아다니던 현영은 커다란 부두에서 검정 양복의 사내들을 발견했다.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으나 최대한 자연스레 행동했다. 저들이 자신의 얼굴은 모를 것이다. 괜히 어색한 행동을 했다간 사내들의 의심을 살 뿐이었다.
현영은 부두가 훤히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검정 사내들을 주시했다. 그들은 무전기를 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식당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3시. 그렇다면 한국시간으로 오후 2시다. 어업협정이 체결되고 있을 것이다. 현영 자신이 한국에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쫓아가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싶지만, 여기는 일본. 게다가 항상 위험에 쫓기고 있는 실정이다.
식당 종업원이 눈치를 주자 현영은 옆의 식당으로 옮겼다. 오히려 사내들의 움직임이 더욱 선명하게 들어왔다. 먹지도 않을 국수를 한 그릇 시키는 순간 군함 한 척이 부두로 들어오고 있었다. 현영의 눈이 일본 국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세계로 뻗어나가겠다는 국기. 붉은 원에 붉은 선들. 군함이 부두에 정착하자 사람들이 수행원의 도움으로 배에서 내렸다. 와타나베. 역시 그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아마 야마모도임에 틀림이 없다. 두 이름의 정체를 드디어 알아낸 것이다. 현영은 와타나베와 야마모도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검정 양복의 사내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식당에 앉아 있었다. 그리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서야 후쿠오카항을 빠져나왔다. 숨이 가빠온다. 그대로 교토로 달려갔다. 이제 본격적으로 금이타조 회원들의 음모를 밝혀낼 수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야마모도가 공손히 와타나베에게 인사치레를 한다. 후쿠오카에서 와타나베의 집까지 배웅을 한 것이다. 이미 밖은 상당히 어두워져 있었다. 와타나베의 얼굴은 근엄했다. 그러나 흡족한 표정을 감출 수는 없었다.
"축하는 무슨. 히노쿠마 선생이 고생을 해서 그런거지. 아무튼 자네도 수고 많이 했어. 앞으로가 더 중요해. 한국에서 어떤 요구를 들고 나올지 몰라. 자네가 외무상과 잘 의논해 보게"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금침(金針)으로 한국의 경제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젠 영해권을 뺏었다. 앞으로는 한국의 국토다. 주권이다. 그걸 위해 지금껏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뛰어왔지 않은가?
"나지웅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없애고 싶었다. 성재도 죽었고 해서 이젠 잠잠히 지내겠지 했는데 다시 야마모도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한국 청년 연합이라니. 이름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려고 한다. 야마모도에겐 도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국의 모든 정계관료들이 일본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나지웅, 그 놈만은 여전히 반항하고 있다. 일본의 상품을 불사른 것이라니. 또 어떤 짓을 벌일지 모른다. 더욱 날뛰고 설치기 전에 제거해야 했다.
아직 성재의 집에 침입했던 놈들도 아직 찾지 못했다. 분명 단순한 절도범은 아니었을 것이다. 절도범이라면 3층에서 뛰어내릴 만큼 무모하지 않다. 게다가 중앙은행의 자금을 몽땅 갈취하려 했었다. 쥐새끼 같은 놈들, 어쩌면 나지웅과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놈들도 찾아내야 한다.
보여줘야 한다. 대일본에게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생생하게 보여줘야 한다. 다시는 대들 생각도 못하도록 철저하게 놈들의 가슴에 각인시켜줘야 한다.
"자네가 알아서 하게"
와타나베가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없애도 좋다. 승낙의 소리. 야마모도의 입가엔 비열한 웃음이 번진다.
"알겠습니다. 쥐도새도 모르게 놈을 없애버리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어떤가? 자네가 보기엔 한국이 얼마나 버틸 것 같은가?"
"숨통을 조금 틔워주긴 했습니다. 그 대가로 협정을 체결한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젠 더욱 조여들 것입니다. 제 생각은 몇 년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국측에 2차 대중문화 개방도 강요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한국이 일본에 종속되었을 때 어색하지 않도록 미리 문화를 실컫 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야마모도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멋진 계락이다. 몸만 종속해서는 안된다. 정신도 함께 종속시켜야 한다. 그래야 저 한반도가 일본의 품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북한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소?"
야마모도의 얼굴에 당혹한 빛이 스치고 지나간다.
북한. 북한에 대해서는 고려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 한반도는 남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북한도 있다. 그렇다면 두 개의 나라를 한꺼번에 공략해야 한다는 소리. 한일어업협정이 당장 북한에 큰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개방의 문을 닫기는 북한이 훨씬 심각하지 않은가?
"그렇게 심각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남한이 피해를 입으면 가장 좋아할 곳이 북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적당한 경제적 지원만 약속한다면 그리 큰 반발은 없을 것입니다"
"작년의 대포동 미사일 사건을 잊었소?"
잊을 리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두 대의 미사일. 북한에서는 오발이라고 하고 있지만 분명 일본을 염두한 시험 발사였다. 일본 역시 북한의 우발적 행동에 적잖이 불안해 하고 있는 터. 이번 어업협정으로 북한의 심기를 건드려서 이익볼 건 없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반발의 조짐이 보인다. 단지 한국만 염두할 문제가 아니었다. 반일감정이라면 북한도 한국 못지않게 펄펄 뛴다. 제기, 적이 하나 더 있었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괜찮다. 남북이 하나로 힘을 모을 리는 없었다. 남한을 치고, 그 다음엔 북한을 치면 그만일 뿐. 오히려 금침이라면 북한 쪽이 훨씬 수월할 것이다.
"북한쪽에 경제지원을 시도해 봐야겠습니다. 10억달러 정도 지원해준다고 하면 북한에서도 잠자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마모도의 뇌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한국도, 북한도 아닌 나지웅이었다. 마시이가 죽어가면서까지 제거하려고 했던 놈. 항상 자신의 신경을 긁어대는 놈. 한국을 종속시키더라도 나지웅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야마모도는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향빈관(香賓館)
별장으로 돌아오니 기정이 걷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기부스를 풀은 모양이었다. 처음엔 제대로 걷는 것 같더니 현영이 들어오자 걸음걸이가 어색해졌다.
현영이 기정의 다리를 툭 찼다.
"야, 아직 다 낳은 거 아니야. 바로 차면 어떡해?"
기정이 엄살을 부렸다.
"내가 보기엔 더욱 튼튼해 진 거 같은데요?"
현영이 다시 한 번 기정의 다리를 건드리려고 했다. 그러자 기정이 도망쳤다.
"거봐요. 말짱하네. 그동안 거의 안움직였으니까 열심히 운동 좀 해야 할 거예요. 이젠 업어주는 일 없을테니까 알아서 해요"
현영이 으름장을 놓았다. 그동안 기정의 다리만 낫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서 아무리 뛰어다녀도 한계가 있었다. 아무래도 둘이 같이 움직이는 게 훨씬 낳았다. 이젠 와타나베가 금이타조의 두목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게다가 야마모도의 얼굴까지 익혀두었다. 그 두사람만 줄기차게 쫓아다녀도 뭔가 이득이 있을 것 같다.
기정은 자신의 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조금 더 있다가 풀러도 될 것 같은데. 이젠 다리도 나았으니 빼도박도 못하고 현영을 따라다녀야 할 판이다. 사서 고생이다. 애초에 성재의 디스켓을 발견했을 때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었다. 그 정도면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현영은 막무가내였다. 금이타조라는 집단이 있고, 그 명단이 있다. 그런데 그냥 가버린다는 건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뭔가 밝혀내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기정의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한 번 더 움직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내일부턴 다시 움직일거니까 각오 단단히 해요"
"내일부터라니?"
"알아냈어요. 와타나베라는 사람. 그리고 야마모도라는 사람"
"정말이야?"
"그럼 거짓말해요? 눈 좀 붙여요. 이젠 방바닥에서 뒹굴거릴 틈도 없을테니까"
현영이 단호하게 말하고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오늘은 일찍 잠들고 싶었다.
오늘도 야마모도가 와타나베의 집으로 찾아왔다. 현영은 와타나베의 집 어귀에 차를 세워놓고 두 사람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면 야마모도 혼자라도 어디로 가는지 미행할 생각이었다.
기정도 와타나베의 집 대문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역시 혼자보단 둘이 있는게 든든하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현영에겐 큰 힘이 된다.
"다리 좀 괜찮아요?"
현영이 또 기정의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아, 그러지 말라니까"
기정이 정색을 하며 현영의 손을 막았다. 안그래도 자꾸 다리에 신경이 쓰였다. 언제 또 도망칠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 때 다리가 말을 들어줄 지 걱정이었다. 아침에 한 번 뛰어봤지만 아직은 무거웠다.
"준비해요"
현영이 기어를 내렸다. 야마모도가 문을 열고 나온 것이다. 그 뒤를 와타나베도 따라나왔다. 두 사람을 실은 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 뒤로 거리를 두고 현영이 쫓았다.
기다린 보람이 있다. 저 두사람을 쫓다 보면 뭔가가 드러날 것이다. 현영의 어깨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기정도 조금은 긴장하고 있었다.
와타나베와 야마모도는 커다란 요정 앞에서 내렸다. `향빈관'이라고 씌어 있었다. 현영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실수하지 말아요"
"무슨 소리야?"
"들어가서 절대로 어색하게 행동하지 말라구요. 괜히 의심살 짓 안하는게 좋아요. 보아하니 저집이 놈들의 아지트 같아요. 조금만 수상한 짓을 하면 놈들의 귀에 들어갈 거예요"
현영이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조금은 시간차이를 두고 들어가야 했다. 기정도 담배를 한 대 물었다. 그 몇 분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해야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어쨌든 지금은 가장 자연스럽게 향빈관 안으로 들아가야 한다.
담배를 끄고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기정이 옷소매를 붙잡았다.
"왜 그래요?"
또 겁을 먹은 모양인지. 현영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저길 봐"
기정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정면을 가리켰다. 한 대의 차가 향빈관 앞에 와서 멈췄다. 그리고 한 중년의 사내가 차에서 내려 향빈관 안으로 들어갔다. 금이타조 회원 같았다.
"일행이 아닐까?"
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 같았다. 그렇다면 오늘 향빈관으로 금이타조의 회원들이 모인다는 소리다. 점점 몸이 달아오른다. 드디어 금이타조 회원들을 직접 보게 되었다.
현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긴장이 된다. 기정 역시 초조한지 담배를 한 대 더 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향빈관으로 들어가는 주기가 빨라졌다. 현영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11시 50분. 아마 12시에 모이기로 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20분 정도는 더 있다가 들어가야 했다. 벌써 향빈관 안으로 들어간 사람을 헤아려봐도 열다섯은 된다. 거의 다 모였다는 소리.
향빈관 별채에는 항상 그렇듯, 금이타조 회원들의 자리였다. 12시가 되자 회원들 모두가 모였다. 꽤 오랜만이다. 밖에선 모두가 주위 사람들을 다스리는 금이타조 회원들은 이 자리에만 모이면 모두가 충신으로 변했다. 경제인도, 정치인도 아니다. 단지 일본의 흥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일 뿐.
"수고들 많이 하고 있소.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이제 한국의 동해는 우리의 영해가 된 것이나 다름 없소. 이젠 다케시마도 확실히 우리의 영토로 만들어야 하오. 그리고 울릉도, 한반도까지 일본의 영토로 만들어야 하오"
야마모도가 와타나베의 말을 받았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해보려고 합니다. 이미 한국인들은 자멸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저들이 회생할 수 있는 길은 우리와 공동주최하기로 한 월드컵 뿐입니다. 지금이라도 한국에게 월드컵 개최권을 빼앗는다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번 서울올림픽도 얼마나 억울하게 한국에 개최권을 넘겼습니까? 6년을 준비했는데 고작 1-2년을 준비한 한국에게 올림픽을 넘겼습니다. 그 때문에 한국은 빠른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공동개최는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FIFA를 설득하는 것은 물론 한국이 월드컵을 개최할 능력이 안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야 합니다"
야마모도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월드컵. 월드컵 개최권만 빼앗는다면 보다 쉽게 한국을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개발도상국의 동정표 때문에 빼앗겼던 서울올림픽. 그로 인해 한국은 두 배나 빠른 속도로 경제를 발전시켰다. 이번 월드컵이 한국에겐 더없이 좋은 기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공동개최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 2002년은 일본월드컵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자금을 한 번 더 회수해야 겠군요. 월드컵 경기장 지원으로 빌려준 10억달러를 말입니다"
큰손 나까이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지난 해 한국에 월드컵 경기장 건설 지원 자금으로 10억달러를 빌려준 일이 있다. 그 자금을 도로 내놓으라고 한다면 한국은 아마 스스로 월드컵을 포기하려 들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은 세계 경제 공황이다. 한국을 지원해 줄 나라는 없을 것이다. IMF또한 한국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대장상 말대로 해요. 한국은 경기장 건설에 투자할 자금이 없을 거요. 그 대신 이건 나까이 선생 스스로가 판단해서 처리하는 걸로 하시오. 자금회수를 중단으로 어업협정을 체결했으니 나까이 선생이 잘 생각해서 자금을 회수하도록 해요"
"아무튼 나까이 선생께서 수고 좀 하셔야겠습니다. 한국사람들......"
야마모도가 말을 하다 말고 문을 열었다. 밖에서 욱신거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현영과 기정은 출입문부터 건장한 사내에게 제지를 당했다.
"예약이 되어 있지 않으면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배고파서 밥 먹으러 왔는데 무슨 예약이야? 이거 손님에게 이렇게 행패를 부려도 되는 거야? 여기도 장사 다 했구만. 내가 누구줄 알고 이러는거야?"
현영이 사내를 밀치며 안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정은 그 틈을 노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건물 한 채가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현영이 사내와 말다툼을 벌이는 순간 그 건물의 문이 열리고 야마모도가 내다보았다.
"신분증 좀 보여주십시오"
"신분증? 형님 이 자식이 신분증 좀 보여달랍니다. 어떡할까요?"
현영이 엉뚱한 소리로 시간을 끌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긴 애초에 글렀다. 그렇다면 시간이라도 끌어 향빈관 안을 살펴보아야 했다.
"이봐. 예약을 해야 한다잖아. 나중에 다시 오자구. 밥 먹을 곳이 어디 여기 한 군데 뿐인가? 가지"
기정이 억지로 현영을 만류하는 척 끌고 나왔다.
"너 이자식, 형님이 가자니까 가는 줄 알어. 감히 누구한테 신분증을 보여달라 마라야!"
사내의 인상이 점점 험상궂어졌다. 그러자 현영이 못이기는 척 향빈관을 빠져나갔다.
"무슨 일인가?"
"건달들인가 봅니다. 식사를 하러 왔다가 낭패를 보고는 그냥 가는군요"
야마모도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현영과 기정은 향빈관을 빠져나오자마자 차를 타고 향빈관에서 멀어졌다. 자신들을 막았던 사내가 쫓아올 것만 같았다. 기정이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정말 못할 짓이다"
현영이 핏 웃는다. 이제 금이타조와 그 아지트를 알아냈다. 향빈관. 그들의 아지트 역시 만만치 않은 곳이다. 하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이타조의 음모. 일본의 음모가 조만간 밝혀질 것만 같았다.
위협(威脅)
"참 내, 북한도 어업협정을 반대하는구만 도대체 우리 정부는 뭐하고 있는거야?"
윤섭이 신문을 읽다 말고 내던졌다.
"무슨 내용인데 그래?"
광수가 신문을 다시 집어 읽어보았다. 북한의 외무성 대변인이 한일어업협정의 반대 주장을 내새운 것이다. 광수가 소리내어 기사를 읽었다.
"침략적이고 매국적인 범죄문서로서 협정은 무효다. 새로운 어업협정은 내용과 성격 모두 침략적이고 매국적인 범죄문서이며 조선의자주권과 영토를 침략하는 것이다. 이번 어업협정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이 완전히 무효라는 것을 내외에 엄숙히 천명한다. 이 협정은 조선의 한 영토인 독도의 자주권에 대한 우리의 요구를 묵살했으며 일본의 해상지배권의 정당화라는 측면에서 일본의 이익만을 일방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일본 당국자들은 남한 당국자를 선동해서 백주 대낮에 독립적이지도 못하고 원칙도 없는 파렴치한 침략협정에 서명하게 했다. 그것은 그들의 우리나라에 대한 재침 야망실현에 얼마나 열을 올리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캬, 이거 살벌하구만"
광수가 신문을 다시 윤섭의 앞으로 던졌다. 윤섭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무슨 무협소설 읽냐? 뭘 그렇게 재미있어해?"
"재미있잖아. 북한이 우리 편을 들어주는 것 같기도 하고"
지웅이 그 신문을 다시 집어 천천히 읽어보았다. 광수의 말대로 제법 살벌하기도 했다. 하지만 구구절절이 맞는 말 같았다. 단지 북한이 낸 성명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것 뿐만이 아닌 한국정부를 비난하는 의도도 다분히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어때요? 열받지 않아요?"
지웅이 신문을 다 읽기를 기다렸다가 윤섭이 묻는다.
"열받지. 북한도 저렇게 발발 뛰는데 우린 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잖아"
"그쵸? 아예 이번참에 북한이 일본에 미사일 백개 정도 떨어뜨렸으면 좋겠어"
과격하다. 윤섭은 아직도 식식거리고 있었다.
"말조심해. 아무리 시대가 좋아졌다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야"
동훈이 가만히 보고 있다가 윤섭을 나무랐다.
"제기, 그만한 말도 못해? 오죽 울화통이 치미면 그러냐구?"
"윤섭이 그러다가 정말 폭탄테러라도 하는 거 아니야?"
광수가 동훈의 편을 든다.
"감옥에만 안 집어넣으면 할 수도 있지"
"참도 안 집어넣겠다"
"그만들 해. 그래봤자 화만 더 나지 뭐 이득되는 거 있어?"
동훈이 윤섭과 광수를 말렸다. 윤섭이나 광수나 더 이상 티격태격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봤자 동훈의 말대로 짜증만 더 날 뿐이다.
지웅은 일찌감치 사무실을 나왔다. 윤섭과 광수의 말을 듣고 있으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목적이 실장 어떻건 간에 북한은 어업협정을 완전 반대하고 나섰다. 제기, 우리 정부가 그랬어봐라. 잔치를 열고 춤을 추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었다.
지웅은 수용과 호준을 찾아갔다. 둘 다 연구에 푹 빠져있었다. 지웅이 문을 열고 들어가도 수용이나 호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지웅이 수용의 옆으로 가서 어깨를 툭 치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어, 왔어?"
"잘들 돼가?"
지웅이 간식으로 사 온 음식을 내려놓았다.
"그럼 잘 돼야지"
호준의 목소리, 자신감에 넘친다.
"어느정도나 진척됐는데?"
"한 10%?"
"고작?"
벌써 2월을 넘겼다. 조금 있으면 3월이다. 그런데 겨우 10%라니 생각보다 진행속도가 느린 것 같았다. 그런데 수용이나 호준의 얼굴은 아무 걱정이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고작. 하지만 걱정하지마. 올해 안엔 만들 수 있을거야. 이제 툴(TOOL)을 개발했다. 자동으로 연도를 찾아내는 프로그램이야. 아직 연도를 수정까진 못하고 있어. 일단은 이걸 해결해 보려고 한다"
"안 그러면 웬만큼 코볼언어를 다룬다 하는 전산인력들이 달라붙어서 프로그램 코드를 하나하나 점검해야 하거든"
수용이 호준의 말을 받는다. 지웅에겐 여전히 생소한 단어들이다. 녀석들의 표정으로 봐선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다른 문제점 같은 건 없어?"
자신이 뭔가 도움을 주고 싶었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직접적인 도움은 못 주지만 필요한 건 해주고 싶었다. 일본을 공격할 첨병들이었다. IMF에 도움을 줄 청년들이다. 그런데 여태 고작 두 번 밖에는 찾아오지 못했다.
"니가 도와줄 수 있을 지 모르겠는데, 할 수 있다면 각 기업들한테 Y2K에 대응할 준비좀 하고 있으라고 해라. 가끔씩 기업들 컴퓨터에 침입해 봤는데 영 허술해. Y2K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너무 부족해. 기껏해야 시스템 공급업체가 만들어놓은 미완의 프로그램만 깔아놓고. 아니면 전산시스템만 새로 구축해 놓고 그게 다인 양 안심하고 있더라니까. 그러다가 내년 되면 Y2K한테 잡아 먹힌다. 지금은 아무 문제 없다고 팔짱 끼고 수수방관하고 있지? 당장 내년 1월 1일만 되봐. 기업을 닫게 될 지도 모른다구. 정부에서도 아예 법으로 제정을 해야되는데......"
"그럴수록 너희들이 힘을 써야지"
지웅이 수용과 호준을 다독거린다. 수용의 말처럼 한국사람, 당장 문제가 닥쳐야 들여다보는 습성이 있다. 미리미리 준비하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 당장 어업협정만 해도 그렇다. 일본은 적어도 10년 이상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린 `지금은 아무 문제 없으니' 라는 생각에 당하고 만 것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그래서 수용과 호준이 프로그램을 꼭 만들어야 한다. 안그러면 수용의 말대로 기업이 문을 닫을 형국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다른 건 잘 돼?"
일본의 전산망을 마비시킬 프로그램. 사실 지웅은 그게 더 궁금했다.
"걱정마. Y2K를 해결하는 과정에 다 포함되어 있다고 했잖아"
그래, 그저 수용과 호준을 믿는 수밖에 없다. 자꾸 그렇게 재촉해봤자 도움이 될 건 없었다.
"어쩐 일로 술이 다 고프셔?"
지웅은 태림을 찾았다. 오랜만에 술을 마시고 싶었다. 윤희를 찾아갈까 하다가 태림을 찾은 것이다. 태림과 술자리를 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실은, 할 얘기도 많았다.
"그러게. 어떻게 오늘은 술이 고프네?"
편하다. 하루종일 조급한 면도 없지 않았다. 답답하기도 했다. 그런데 태림과 이렇게 마주앉아 있으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아무래도 오늘은 술이 취할 정도로 마셔야 할 것 같다.
"할만해?"
한청련 의장? 지웅이 풋 하니 웃는다. 할만하고 할 것도 없다. 사실 하는 것도 없다. 자존심 찾기 운동 이후 거의 움직임이 없다. 현재로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사업이다. 다른 사업을 구상하기도 하지만 생각처럼 쉽게 떠오르질 않는다.
"넌, 죽을 각오 해. 너 땜에 피곤해서 못살겠어"
"자식, 엄살은. 그래도 할만하긴 한가보다. 얼굴이 좋아보이네"
종업원이 술을 가져왔다. 태림이 잔을 따르자마자 지웅이 들이켰다. 쓰다.
"왜이래? 무슨 일있어?"
태림이 다시 지웅의 잔을 채웠다.
"일은 무슨 일. 술고파서 왔다니까"
그냥 이렇게 술만 마시고 싶다. 아직은 다른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지난 번, 자존심 찾기 운동 말이야. 아직도 그런 행사 없냐고 문의하는 사람이 많던데?"
태림이 말을 걸어본다. 서먹서먹해서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겠다 싶어서 나온 말이 지난 번 행사 얘기다. 그래봤자 몇 사람에게 연락이 왔을 뿐이다. 괜히 말을 꺼냈나 싶기도 했다.
"현영이 연락 없었어?"
"아참, 왔었어. 어제 저녁에 왔는데 깜빡 잊고 얘기 안했다"
"뭐래?"
"와타나베랑 야마모도라는 사람 찾았대. 일본 전 총리 와타나베 있지? 그 사람이 금이타조 두목이더라구. 야마모도라는 사람은 얼굴만 알았지, 뭐하는 사람인지 모른대. 벌써 위험을 한 번 넘겼더라구. 자식이 지가 무슨 영웅이라고 도통 올 생각을 안하던데?"
태림이 현영에게 들었던 얘기를 지웅에게 했다.
"제법인데? 나도 따라가서 현영이 도와줄까?"
사실, 한청련 의장이라는 직책. 생각보다 따분했다. 당장 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매일 탁상공론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많았다. `자존심 찾기운동'이 현재로선 처음이자 마지막 사업이다. 이렇게 쉽게 지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적어도 뭔가 해낼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태림의 얘기를 듣고 보니 차라리 현영이가 정말 큰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서라, 아서. 현영이 자식, 지금 무대포로 덤벼들고 있어.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날까봐 조마조마하다니까"
"그냥 술이나 먹자"
지웅이 태림의 잔을 부딪혔다.
"왜 그리 급하게 먹어?"
"그냥 먹자니까. 대신 정신은 말짱해야돼"
태림이 잔을 비우자 지웅이 다시 채웠다.
"잘 들어. 지금 내 뒤에 누군가가 우릴 지켜보고 있을거야. 쳐다보지마"
지웅이 자연스럽게 얘기했다. 마치 어제 봤던 드라마 얘기를 하듯이 웃으며 말했다. 태림의 얼굴이 금새 굳어진다.
"갑자기 그렇게 표정이 변하면 어떡해?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행동하라니까"
지웅이 껄껄 웃었다. 태림은 지웅의 뒤를 쳐다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어떻게 된거야?"
"아까 사무실을 나와서부터 계속 미행당하고 있었어. 수용이랑 호준이를 만나러 갈 때도 뒤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고"
그래도 설마 했었다. 그저 방향이 같은 사람들이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그 사내들 급기야는 이 곳 술집까지 따라오고 말았다. 여태껏 흘낏흘낏 출입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 화장실 다녀올게. 조심해"
태림이 화장실을 가는 척 하며 지웅의 뒤에 앉아있는 두 명의 사내를 훔쳐보았다. 술을 시키기는 했지만 마시진 않고 있었다. 서로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작은 목소리였다. 태림이 신발 끈을 묶는 척 잠시 허리를 숙였다. 일본말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곧바로 나왔다. 그리곤 태연하게 자리로 돌아왔다.
"니 말이 맞어. 저 사람들 일본인이야. 조심해. 그만 일어나자"
"가만 있어. 모르는 것 처럼 해야해"
그런 말을 하면서 지웅은 웃는다. 그러나 신경은 온통 뒤로 가 있다.
"오늘은 어느 호텔에 가서 잘까?"
태림이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했다. 들으라는 소리다.
"신라호텔 어때?"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하지마, 눈치채"
지웅이 모기만한 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일단 따돌리기만 하면 되니까"
표정과 일치하지 않는 대화. 어색하다.
태림이 소주를 슬쩍 바닥에다 쏟았다. 그리곤 종업원을 불러 소주 한병을 더 시켰다. 종업원이 소주를 가져오자 태림이 만원짜리 두 장을 내밀었다.
"여기 계산이요. 잔돈은 필요없어요"
종업원이 돌아가자 태림이 말했다.
"너, 먼저 나가. 오바이트라도 하는 척 뛰쳐 나가. 그리고 바로 튀어. 나머진 내가 처리할게"
"괜찮겠어?"
"걱정마. 저치들 따돌리는 거 정도야 일도 아니니까"
"조심해"
갑자기 지웅이 오바이트가 쏠리는 척 밖으로 뛰쳐나갔다. 태림은 멀쩡하게 앉아 있었다. 사내들이 일어났다. 태림이 급히 일어나 사내의 길목을 막았다. 사내가 태림을 밀어제꼈다. 밖으로 나가보았다. 지웅은 보이지 않았다.
태림은 그 틈을 타서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 걸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내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지하철 역으로 들어갔다. 패스를 사서 승강장으로 들어갔다. 사내들이 패스를 살 줄 몰라 출입구를 넘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열차가.... 늦게 온다. 이미 전광판에는 열차가 전역을 출발했다고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 열차가 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아직 사내들은 지하로 내려오지 않았다. 벨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린다. 열차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가슴이 마구 뛴다. 사내들의 모습이 보인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속보(速步)로 태림에게 다가온다. 열차가 정거를 하고 있다. 사내들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진다. 열차가 멈췄다. 태림이 열차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들 또한 옆 칸의 열차에 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출입문이 닫힌다. 순간 태림이 발을 내밀었다. 문이 닫히다가 다시 열린다. 태림이 밖으로 내렸다. 출입문이 닫혔다. 열차가 움직인다. 사내들도 열차와 함께 조금씩 태림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짧은 숨을 내쉬었다. 위험하다. 지웅이 제대로 갔는지 걱정이 된다. 다시 지하철 역을 빠져나갔다. 택시를 잡아 탔다. 예감이 안 좋다.
테 러
윤희는 지웅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있을 줄 알고 연락도 안 해보고 왔다. 그냥 가자니 발이 떨어지지 않아 이렇게 추위에 떨며 기다리고 있다. 지웅에게 오피스텔 열쇠를 받긴 했지만 집에 두고 왔다.
1시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이젠 다리도 저리다. 게다가 도저히 추워서 못 있을 것 같았다. 늦겨울 추위가 꽤 매서웠다. 어쩔 수 없이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갔다.
"엄마야!"
윤희는 계단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거한의 사내의 어깨에 부딪힌 것이다. 사내는 윤희를 힐끗 쳐다보더니 무시하고 올라가 버린다. 짜증이 절로 난다. 만나려는 지웅은 못 보고 엉뚱한 사람에게 부딪혀 다치기나 하고. 손으로 엉덩이를 탁탁 털어냈다. 전화라도 해볼걸. 후회해도 소용없다. 빨리 집에 가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
"딩동"
윤희의 발걸음이 멎었다. 벨소리. 지웅의 방인 것 같았다.
"딩동, 딩동"
분명히 지웅의 방이다. 벨이 조급하게 울린다. 윤희가 다시 지웅의 방쪽으로 돌아섰다. 발소리를 죽였다. 고개를 빠꼼히 내밀었다. 거한의 사내가 지웅의 방 앞에서 거칠게 벨을 누르고 있었다. 윤희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았다. 사내의 소매에서 뭔가가 번쩍였다. 칼이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갑자기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몸이 떨린 적은 없었다. 저 사람. 지웅을 해치러 왔다. 온 몸이 꽁꽁 얼은 듯한 기분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려 밑으로 내려갔다. 갑자기. 사내가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윤희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사내와 부딪혀서 심하게 다친 것처럼 보여야 했다. 아니면 사내의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보기만 해도 끔찍한 인상이다.
사내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앗! 1층 현관에서 관리원과 얘기를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지웅이다. 윤희는 갑자기 다리를 쥐었다.
"아-. 아저씨"
사내가 돌아다본다. 역시, 무시하고 지나간다. 윤희가 사내의 옷깃을 잡았다.
"아저씨. 나 못 걸을 것 같은데 좀 도와주면 안돼요?"
애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안에 요염한 모습도 집어넣었다. 어떻게든 사내의 시선을 끌어야 한다. 사내가 귀찮다는 듯이 윤희를 쳐다본다. 윤희가 사내의 다리를 붙잡는다. 조금은 애무하듯이.
사내가 잠시 망설였다. 지웅은 아직 관리원과 얘기를 하고 있다. 윤희가 부축해달라는 듯이 팔을 내밀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도발적인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내가 팔을 내밀어 윤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일으켰다. 윤희가 떠밀리듯 사내의 품에 가서 안긴다. 그리고 팔을 사내의 목에 감았다. 지웅이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3층이다. 지웅이 계단을 돌 때 윤희는 사내의 목 두의 팔을 내저어 위험 신호를 보낼 생각이었다.
"어머 아저씨, 정말 잘생겼다"
윤희가 사내의 귀를 간지럽혔다. 갑자기 사내의 손이 윤희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그리고 천천히 엉덩이를 쓰다듬는다. 윤희가 자신도 모르게 사내의 손을 뿌리친다. 사내의 표정이 변하는 것 같다. 지웅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윤희는 자신의 몸을 사내에게 바짝 밀착시켰다. 건물 안에 지웅의 발소리가 진동을 하는 것 같다. 윤희가 다시 사내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웅이 계단을 돌고 있다. 윤희가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지웅은 밑을 바라보며 걷고 있다. 발소리가 너무 크다. 사내가 뒤를 돌아다보려 했다. 윤희가 사내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사내도 그 순간만큼은 움직이지 않았다. 윤희는 연신 손을 내젓고 있었다.
불과 대여섯걸음 앞에서 지웅이 고개를 들었다. 어떤 경우 없는 사람들이야?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여자의 손이 자신에게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윤희다. 지웅은 그대로 뛰어내려갔다. 사내가 윤희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윤희가 다시 사내를 끌어안았다. 사내가 윤희를 밀어제꼈다. 윤희가 벽에 가서 부딪혔다.
지웅은 곧바로 뛰어나갔다. 차에 오를 틈도 없었다. 무조건 뛰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사내가 자신을 찾고 있다. 아직 사내가 자신의 얼굴을 모를 지도 모른다. 자연스러운 척 걸음을 걷는다. 그러나 사내는 자신을 향해 뛰어온다. 이런, 인근에 사람이라곤 자신밖에 없다.
지웅은 사정없이 뛰었다. 사내의 손엔 칼까지 들려있다. 오늘 같은 날엔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다. 언덕을 뛰어내려가는데 태림이 올라오고 있었다. 태림을 부를 새도 없다. 아는 척이라도 했다간 태림마저 위험할 수도 있다. 태림이 지웅을 쳐다보았다. 그 뒤의 사내도. 지웅이 눈빛으로 사내를 가리켰다. 태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웅이 태림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리고 사내가 태림의 옆을 지나다가 갑자기 허공에 붕 떴다. 태림이 사내의 다리를 걸었다. 사내는 내리막길을 한참이나 굴렀다. 지웅이 다시 돌아왔다.
"뛰어. 한 둘이 아니야"
태림까지 같이 뛰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사내는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윤희는 관리사무실 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지웅을 보자마자 와락 달려들어 품에 안겼다. 그리곤 눈물을 터뜨렸다.
"무서웠어요"
지웅이 윤희의 등을 쓰다듬었다.
고마워......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할 여유도 없다. 곧바로 차에 올랐다. 태림도, 윤희도 차에 올랐다. 급하게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어디가게?"
태림의 목소리도 흥분되어 있다. 지웅의 눈이 붉에 충혈되어 있다.
"수용이랑 호준이가 위험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신호도, 차선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른발은 아예 브레이크는 대지도 않는다. 태림이 옆에서 진정하라고 고함을 지른다. 윤희까지 가끔씩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그런 것들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겉으로 봐선 수용과 호준의 연구실은 멀쩡했다. 지웅은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은 조용하다. 놈들이 벌써 들이닥치지 않았기만을 바랄 수밖에.
"누군 거 같애?"
태림이 지웅을 쫓아오며 묻는다. 아무 대꾸도 없다. 지웅의 눈, 무섭다. 마치 성난 야수를 보는 듯 했다. 조금은, 살기까지 느껴진다.
호준과 수용의 연구실 문앞에 섰다. 지웅이 문을 두드려보았다. 아무 대꾸도 없다. 제발, 안에서 무슨 소리라도 있었으면. 태림은 발을 굴렀다. 수용과 호준이 외출했을 리가 없다. 반응이 없다는 건, 놈들이 다녀갔다는 소리. 지웅이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린다. 여전히, 반응이 없다. 보다못한 태림이 문을 잡고 주먹으로 쾅쾅 두드린다. 지웅이 태림을 밀어냈다. 그리고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스르르 움직였다. 지웅이 문을 열었다. 작은 문틈 사이로 박살나 있는 컴퓨터가 태림의 시야에 들어왔다. 태림의 고개가 떨궈졌다. 수용과 호준의 안부도 걱정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지웅의 분노가 더욱 두렵다. 지웅이 문을 활짝 열었다.
"이, 개새끼들아-!"
지웅의 외침이 건물 곳곳에 가서 닿는다. 포효하고 있다. 마치 맹수가 슬픔을, 분노를 외치듯이.
수용이, 호준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다. 컴퓨터가, 디스켓들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다. 바닥엔 붉은 피가 굳어있다. 수용과 호준의 것이리라.
태림이 달려가 수용과 호준을 흔들었다. 머리와 몸이 따로 움직인다.
"수용아, 호준아"
태림이 목놓아 불러본다. 대답없는 외침. 애타는 표정으로 지웅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좋으니? 지웅은 아직도 연구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다. 가만히 문턱에 서서 사무실을 바라보고 있다. 수용과 호준을 바라보고 있다. 분노가 몸의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보다못한 태림이 인공호흡을 해 본다. 수용의 고개를 젖히고 자신의 입을 수용의 입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숨을 잔뜩 마시고는 내뱉는다. 움직여라. 제발 좀 움직여라. 아무런 요동이 없다. 이번엔 가슴을 압박해 본다. 애꿎은 머리만 바닥에 퉁퉁 튀긴다. 태림의 손이 붉에 물들었다. 수용의 배가 칼에 찔려 있었다.
"뭐야, 이 개새끼들!"
이번엔 태림이 울부짖는다. 눈물이 나온다. 서러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자포자기. 태림이 망연자실, 고개를 떨궜다. 잔인한 놈들. 어떻게 이렇게까지......
지웅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곤 수용의 앞에 꿇어앉았다.
"미안하다. 할 말이 없다"
몸이 부르르 떨린다.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고 있다. 서러움이, 분노가 복받쳐 오른다. 하지만 아직도 참는다. 성재가 죽었을 때도 참았다. 지금도 참는다. 다짐하고 다짐했다. 눈물은 마지막에 흘리리라. 지금은 마지막이 아니다. 이빨을 깨물었다. 얼굴이 경색되었다. 수용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용서해다오. 지웅의 손이 수용의 겁에 질린 눈을 감겨주었다.
"으-"
태림이 황급히 돌아보았다. 호준의 몸이 실낱처럼 움직였다. 호준의 코에 귀를 대보았다. 호흡이 느껴졌다. 호준을 들쳐업었다. 아직은 의식이 남아 있었다.
지웅은 수용을 들쳐업었다. 무겁다. 무슨 한이 이렇게 많길래 무거운걸까.
시간은 너무 더디게 흘렀다. 지웅과 태림, 윤희는 병원 대기실에서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 호준이라도 살아있길 바랬다. 수용에게 지은 죄를 대신해서라도 빌고 싶었다.
의사가 장갑을 벗으며 응급실에서 나왔다. 지웅이 천천히 다가갔다.
"어떻게 됐습니까?"
의사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지금 곧바로 수술을 시작할겁니다. 확신은 못 드려요. 복부를 칼에 찔린데다가 등에도 30센티 찢어졌어요. 다른 환자는 전기충격을 줘봤지만......"
의사가 서둘러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응급실에서 호준을 실은 이동침대가 나왔다. 지웅이 달려갔다. 그러나 의사와 간호사들이 저지했다. 호준이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 `수술중' 이라는 간판에 불이 켜졌다.
도피(逃避)
지웅과 태림은 병원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 수술은 새벽 3시경에 끝났지만 마취가 깨지 않은 상태였다. 호준은 지금 회복실에 누워있다.
수술은 다행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다행이 장이 파열되지 않았다. 등은 무려 120바늘이나 꿰멨다. 지웅과 태림 누구도 먼저 일어서려 하지 않았다. 윤희는 은행으로 출근했다.
간호원이 보다 못해 다가와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오라고 했다. 깨어나려면 아직 대여섯 시간 이상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가서 아침이라도 먹고 오자. 이러단 우리가 먼저 쓰러지겠다"
태림이 지웅에게 권유했다. 벌써 아침 9시를 지나고 있었다. 지웅이 태림의 말에 따랐다. 일단 큰 고비는 넘겼다. 호준이 깨어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병원 근처 식당에서 해장국을 시켰다. 그러나 입안이 까끌까끌해서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태림이 몇 숟갈 뜨다 말고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할래?"
"뭘?"
"계속 여기 있을 순 없잖아. 어디 잠깐 피해 있다가 오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가만히 지웅의 눈치를 살폈다. 좋은 소리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생각 좀 해보고"
태림이 의외라는 듯 지웅을 쳐다봤다. 그럼 잠시 도피할 수도 있다는 소리다.
지웅이 수저를 놓았다. 물을 한 컵 마셨다.
태림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자신은 지금 위험에 처해 있다. 언제 어디서 죽음의 칼날이 드리울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살고 싶은 생각보다는 복수를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제발 일본의 무도함에 복수의 칼날을 꽂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위험하다. 아직은 자신에게 그만함 힘이 없다. 기다릴 수 있다. 기다려야 한다. 힘을 기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감정을 주체 못해 물불 안가리고 달려들다간 비참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다. 이미 생사에 관심은 없다. 단지 때를 기다리기 위해 몸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 뿐. 언제, 어떻게 복수를 한다는 자신은 없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진 않는다. 그럴만큼 분노가 약하진 않았다.
"넌 어떡할거야?"
자신도 자신이지만 태림도 안심할 순 없다. 이미 태림의 얼굴도 알고 있을 터. 수용과 호준이 당했다. 태림이라고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다. 게다가 윤희마저도......
"걱정마. 난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거야. 안 돼면 가스총이라도 가지고 다니지 뭐. 보디가드라도 하나 채용하던가"
어떻게든 지웅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자신이야 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위험이 생기면 그 때가서 임기응변으로 처리할 생각이다. 여차하면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발령을 내달랄 수도 있다.
"조금 더 생각해보고. 아직은 뭐라고 말할 때가 아니야"
지웅이 먼저 일어섰다. 밥을 먹고 말고 할 정신이 없었다.
"형 깡패유? 대뜸 찾아와서 하는 말이 기껏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놓으라니. 이럴 땐 술이라도 한 잔 사면서......"
현영이 재철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이럴 땐, 주먹이 먼저야"
재철이 웃으며 지는 척 해준다.
현영의 후배이자 태림의 후배이다. 태림과는 다른 신문사에 근무하고 있다. 입사를 하자마자 도쿄 특파원으로 발령이 난지 벌써 2년. 이젠 일본의 웬만한 정보는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저러나 좀 알고 합시다. 도대체 무슨 일이예요?"
재철이 조금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적어도 현영이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제법 큰 사고를 친다는 소리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재철도 현영의 괴팍한 성격은 이미 알고 있는 터다. 현영은 그냥 넘기려다 혹시나 싶어 재철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 혹시 향빈관이라고 알어?"
"향빈관이요?"
"그래, 도쿄 변두리에 있는 곳이야. 꽤 거물들만 출입하는 것 같던데, 몰라?"
"아-, 형이 어떻게 향빈관을 알아요? 거기 웬만한 명함은 디밀지도 못해요. 적어도 일개 회사 사장이나, 정치좀 하는 사람들. 그리고 야쿠자들이나 드나들까? 일반사람들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들어가기 힘들죠. 끈이 연결된 곳이거든요. 아마도 일본 극우파정도는 되겠죠"
현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철의 말을 듣고 보니 금이타조와 향빈관, 두가지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극우파라...... 일본인의 국수주의도 다른 여느나라에 못지 않게 심하다. 두려울 정도다. 제국주의, 황국주의 또한 극우파가 없었다면 고개를 내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엔 사무라이와 닌자들이 있다. 금이타조라는 것이 1-2년동안에 준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신분증도 제대로 만들어줘야겠어"
"무슨 소리예요? 거기 들어가려구요?"
현영이 대답없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영웅이라도 되는 양. 사실 그렇게라도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막막하게 이어지는 이 끈질긴 싸움에서 쉽게 포기할 것도 같았다.
"그럼 술 한잔 사야지. 맨 입으로는 안돼죠"
"대낮에 술은 무슨 술이야. 나중에 마셔"
"에이, 우리 사이에 밤이면 어떻고, 낮이면 어때요? 나 소주 못 먹어서 입안이 헐은 거 알아요? 봐요 봐"
재철이 현영의 안면에 입을 벌리고 들이댄다.
결국은 재철과 술집을 찾았다. 손님이 아무도 없는 술집. 이 시간에 손님이 있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캬- 난 언제쯤 소주 한 번 질리도록 먹어보나. 여긴 비싸서 소주 마시려면 큰 각오를 해야 한다니까요. 그럴 땐 그냥 짐싸가지구 한국으로 돌아가버릴까 생각한게 한,두번이 아니예요"
재철이 짜릿한 표정을 짓는다. 정말 많이 참아온 것 같았다. 현영은 재철의 표정만 봐도 소주를 벌써 한 잔 마신 기분이 들었다. 재철의 잔을 따랐다. 바로 마셔버린다.
"쳇, 소주에 과일이라. 이게 무슨 양주도 아니고. 잔은 또 이게 뭐야? 다 좋은데 술집 분위기가 영 아니라니까요? 두꺼비 그림에 지글지글대는 꼼장어나 국물이 있어야 먹을 맛이 나지"
그래도 마냥 기분 좋은 표정이다.
"확실하게 준비해야돼. 장난하는 거 아니니까"
현영은 내심 초조했다. 거물급들이나 출입할 것 같은 분위기는 이미 향빈관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느끼고 있다. 그러나 재철의 말을 듣고 보니 가짜 신분증을 만드는 것도 여간 조심해서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알았어요. 걱정 마요. 그리고, 무슨 고사 지내요? 잔만 따라놓고 왜 안마셔요?"
재철이 현영의 잔을 부딪혔다. 현영이 못이기는 척 한 잔 마셨다. 쓰고, 달다. 소주가 언제부터 이렇게 달게도 느껴졌는지. 생각해보니 자신도 소주를 마신지 몇 달이 지났다. 기정과 함께 있으면서 술 한 잔 안 마셨다. 아무리 긴급한 상황이지만 그동안 너무 여유없이 지내온 것 같기도 하다.
"조심해요. 그렇게 만만히 볼 게 아니예요"
재철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눈치를 챈 모양이다.
"일본 분위기는 어때? 일본에 있으면서 그런 건 도통 모르겠다"
"형이 생각하는 그대로예요.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니까요. 사실 한국사람들 여기서 쉽게 돌아다니지 못해요. 왠만해선 한국말 잘 안쓰죠. 사람들 시선이......"
"왜, 당장 주먹이라도 날아올 거 같아?"
"그럼 차라리 낳게요? 붙어 싸우면 그만인데. 이건 완전히 개 쳐다보듯 한다니까요? 내, 참 드러워서. 여기 주인이 한국인이니까 온 거지 다른 데 가서 소주 먹는 건 생각도 못해요. 하기사, 요즘은 소주도 메뉴판에서 지워진 곳 많더라"
재철이 한탄하듯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 정도야?"
"그것 뿐이면 다행이게요? 요즘은 정보도 잘 안줘요. 다른 외국통신사에게는 희희낙낙거리면서 별에 별 소스를 주면서 우리한테는 이미 알고 찾아간 일도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뚝 떼는거 있죠?"
많이 서러운 모양이었다. 마치 현영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가슴에 응어리졌던 것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젠 제법 술맛이 쓰다. 현영은 더 이상 재철의 잔을 받지 않았다. 이 기분에 술을 마시면 사고라도 칠 것 같았다. 아직은 술에 취할 때가 아니다. 술은 나중에 한국에 가서 마시면 된다.
현영은 실수라도 하기 전에 일어섰다. 재철도 더 이상 술을 재촉하지 않았다. 사실, 술이 먹고 싶어서 온 것 같진 않았다. 그동안의 넋두리를 풀 곳이 없어서인 것 같았다. 답답한 속을 내비칠 곳이 없어서인 것 같았다.
호준이 눈을 떴다. 태림이 말을 꺼내려 하자 지웅이 말렸다. 호준이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다.
호준이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 눈을 떴다. 무슨 말인가 꺼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지웅이 호준의 손을 잡았다.
"수용이는?"
호준이 힙겹게 입을 열었다. 태림은 호준의 시선을 외면했다. 지웅이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호준의 눈이 다시 감겼다. 작은 신음소리가 흘렀다.
"몸은 괜찮아?"
지웅이 간절하게 묻는다. 괜찮기를, 제발 자신의 짐이 덜어지기를 바랬다. 호준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 자신이 어제 수용과 호준을 찾아가지만 않았어도 무사했을 것이다. 한국은행에 바이러스가 침투했을 때 녀석들을 부르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하며 행복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수용이 죽었다. 그리고 호준은 중환자실에 누워있다. 자신은 분명 호준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눈으로 보기에도 괜찮지 않은 걸 알면서도 괜찮냐고 물었다. 호준만은 제발 괜찮아지길 원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죽은 수용을 대할 면목조차 없을 것 같았다.
"괜찮아. 버틸만해"
역시, 괜찮은 목소리도 아니다. 태림의 가슴이 미어진다.
"날, 용서해라"
더 이상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용서. 그 말이 지금 호준에게 필요한 단어인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는다. 단짝을 잃었다. 지웅 자신이었다면, 호준으로 인해 태림이나 현영이 죽기라도 했다면 당장 칼을 들고 덤벼들지도 몰랐다. 용서해라. 그 말조차도 용서받지 못할 말이다.
호준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곤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연구실은?"
"박살났어. 신경쓰지마. 우선 니 몸부터 회복해야지"
대답하는 것조차 힘들다. 미안하고 죄스럽다.
"나, 괜찮다니까. 그리고 연구 아직 끝나지 않았어"
호준의 말이 더더욱 지웅의 가슴을 찢는다. 차라리, 욕을 했으면 좋겠다. 너 때문에 수용이 죽었다고,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고. 그렇게 욕이라도 실컷 해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니가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연구실 엉망이 됐어. 자료들도 다 날아갔고. 그만......잊어"
"아니. 자료는 아직 남아 있어"
호준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괜찮아. 그깟 연구같은 거 이젠 잊어버려"
"그러면 나, 나중에 죽어서 수용이 얼굴 못 봐"
호준이 웃는다. 두 갈래 눈물을 흘리면서 지웅을 향해 웃고 있다.
"그리고, 나 사망한 걸로 해줄 수 있니? 언제 또 테러를 당할 지 모르잖아. 그리고, 솔직히 수용이 없는 곳에서 버틸 자신이 없어. 죽은 걸로 해줘. 나 혼자만의 이름가지고 살아갈 용기가 안 나. 차라리 나도 죽었다고 생각할래. 그래야 마음이 편해"
지웅이 호준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또 한 번의 빚을 졌다. 성재에게, 수용에게, 그리고 호준에게. 지웅의 어깨는 점점 무거워진다. 버텨야 한다. 이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버텨야 한다.
차마 호준의 얼굴을 계속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병실을 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발걸음이 천근 만근이다. 담배를 한 대 물었다. 태림이 따라 올라왔다. 그리곤 지웅의 어깨를 감쌌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있고 싶었다. 그대로 슬픔을 달래고만 싶었다.
가이드라인
현영은 적잖이 놀랬다. 와타나베 전 일본 총리의 집에 오부치 현 총리가 들어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총리대 총리라. 전권과 실권과의 만남이다. 단순한 인사차 방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보기엔 일본의 정국이 너무 어수선하다.
"이상한데?"
기정도 의심쩍은 표정으로 와타나베의 집 대문을 빤히 노려보고 있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건지......
"무슨 일일까요?"
"글세, 안좋은 일이겠지"
"대답 좀 성의있게 합시다. 누군 안좋은 일인 줄 몰라서 물어요?"
요즘 들어 기정의 말투는 현영의 신경을 자주 거슬린다. 기정도 다분히 지쳐 있었다. 생각 없이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더불어 현영도 지쳐있긴 마찬가지. 평소같으면 그런 얘기 웃으면서 받아주고 다독거리기도 하겠지만, 지금은 눈살부터 찌푸려진다.
"짜증 낼 때가 아니야. 생각 좀 해봐"
"무슨 생각이요?"
"처음이야. 오부치 총리가 와타나베의 집을 찾은 거"
그랬다. 그 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와타나베의 집을 드나들었다. 오부치가 찾아 온 것은 이번이 처음. 아무래도 맘에 걸린다. 전 총리와 현 총리와의 만남.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지......
"오랜만이군"
와타나베의 목소리가 그리 반가운 것 같진 않다. 1년 남짓한 오부치의 행적이 조금은 못마땅했다. 그동안 왜 과감하게 한국을 공격하지 못했냐는 질시의 눈빛을 띄었다.
"건강하셨습니까?"
일단은 예의부터 차린다. 전관에 대한 예의 정도는 갖춰야 할 터. 하지만 그 안에 거만함이 묻어 나온다. 오부치 자신 정도나 되니까 이 정도 대우를 해 주는 거라는 듯이. 두 사람의 만남, 시작부터 살얼음판이다.
"무슨 일로 찾아왔지? 여기 올 만큼 한가하진 않을텐데"
"잘 아시는군요. 한가해서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럼 내게 선물이라도 주려고 왔나?"
"그런 셈이죠"
오부치 총리가 도도한 웃음을 짓는다. 와타나베와의 자리가 편하진 않다. 전관. 그에 대한 비교도 이미 수차례 당한 터. 하지만 이번만은 그와 타협을 하러 왔다. 와타나베의 금이타조의 힘이 필요하다면 필요하기도 한 상황이다.
"선배님의 활동이 대단하시더군요. 한국을 코너로 몰아부치시고, 그런 면에선 전 도저히 선배님을 쫓아갈 순 없을 겁니다"
와타나베가 오부치를 빤히 쳐다보았다. 칭찬인지 악담인지 구분이 안갔다.
"무슨 말을 하러 온 건가?"
"아까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선물을 드리러 왔다구요"
오부치가 쉽게 말을 꺼내지 않는다. 이번만큼은 자신이 위에 있다는 생각이다.
"선물은 다음에 받기로 하지. 안 그래도 나가보려던 참이었어"
와타나베가 오부치를 두고 일어서려 했다.
"선배님!"
굉장히 위압접인 말투다. 와타나베는 일어서다 말고 주춤했다. 그러자 오부치가 웃어보인다. 건방지다.
"선배님이 마련해 놓으신 가이드라인을 수정하려 합니다"
"가이드라인이라니?"
와타나베는 오부치의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가이드 라인. 와타나베가 97년 9월 미국과 일본 양국의 방위협력을 위해 마련한 법안이었다. 그 때 당시에는 극동 지역에서 군사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 일본이 미국에 물자를 공급하는 수준이었다. 세계 열강들의 군사력에 뒤쳐져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극동지역의 맹주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 미국을 붙잡고 늘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오부치가 가이드라인을 수정한다고 말했다. 수정이라니. 지역을 늘린다는 소린가?
"선배님이 경제력으로 한국을 무력화시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좀 도와드리고자 합니다"
"무슨 소린지 자세히 얘기해보게"
와타나베는 안달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이미 한국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부치가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한다. 어떤 속셈인지 아직은 파악을 할 수 없다.
"극동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 고작 물자를 지원해주는 걸로 만족할 순 없는 것 아닙니까? 직접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어야지요. 미국을 한 번 삶아볼까 합니다. 그래서 선배님을 찾아왔습니다"
"미국이 그렇게 쉽게 넘어가줄 것 같은가? 2년 전에도 자그마치 20억달러를 헌납하다시피 했네.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200억달러를 들여서라도 할 건 해야죠"
"그렇다면 자네 말대로 하면 그만이지 날 찾아온 이유는 뭔가?"
협상을 하자는 소리다. 서로가 앙숙이지만 이번만큼은 힘을 합치자고 한다. 어차피 서로가 같은 결과를 원하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한발자국씩 양보할 수도 있다. 오부치는 지금 그 문제를 상의하러 와타나베를 찾아 온 것이다.
"선배님이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돕다니?"
"우선 자금을 좀 대주셨으면 합니다. 선배님 휘하에 있는 회장단들이 힘을 좀 써주면 웬만한 자금은 끌어들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30억달러만 부탁드립니다. 저도 한 20억달러를 끌어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결국은 돈으로 해결한다는 소리 아닌가? 경제력으로 군사력까지 보완한다. 그게 일본이 가진 최고의 무기다. 오부치도 와타나베에 못지 않게 금력(金力)을 안다. 물질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라는 것 이럴때야 비로소 그 뜻이 분명해진다.
"목적은?"
"선배님이 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진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와타나베가 미묘한 웃음을 짓는다. 설마 오부치와 협력을 하게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군사력이라...... 와타나베도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일본의 막강한 경제력이면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오부치의 말을 듣고 보니 호랑이가 날개를 다는 격이다.
"한가지 더 있습니다"
"뭔가?"
"전쟁을 일으켜주십시오"
"전쟁이라니?"
"가이드라인은 남한까지만 포함되어 있습니다. 북한은 칠 수 없게 되어 있더군요"
그랬다. 와타나베가 가이드라인을 책정할 때 북한은 제외시킨 상태였다. 그것만은 미국을 설득할 수 없었다. 미국 역시 북한을 극동방위지역에 포함시키지 않았었다. 단지 북한의 도발만을 억제한다는 소리였다.
"북한은 무엇 때문에 건드리려고 하나?"
"어업협정 이후 북에서 자꾸만 신경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인정할 수 없는 행위니, 한반도에 대한 재침의도니 하면서 자꾸만 엉뚱한 성명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북한을 얼르기만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괜히 그럴 필요는 없네. 안그래도 북에 10억달러를 지원하려고 하던 참이었어. 그 정도면 북한도 더 이상 떠들진 않을걸세"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가이드라인은 남한만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경우도 북을 침공할 순 없는 것이죠. 하지만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다면......"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다면...... 와타나베의 얼굴에 환희의 표정이 인다. 남한만이 아니라 북한까지 칠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어부지리가 아닌가? 그랬다. 한국에는 일본 뿐이 아니라 북한이라는 적도 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더니,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친다. 그리고 저들끼리 싸우다 지쳐 있을 때 일본이 친다. 그리고 한반도를 통째로 집어삼킨다.
와타나베가 통쾌하게 웃는다. 하하하. 오부치 때문에 웃을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와타나베의 웃음이 그칠 줄을 모른다.
"어쩌시겠습니까?"
오부치가 와타나베의 대답을 재촉했다.
"그래, 30억달러에 한국 전쟁을 유발시켜달라 이거지?"
"예. 30억달러는 서둘러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미국과의 가이드라인을 체결한 후에 천천히 도모해 주십시오. 저희도 군사력을 늘릴 시간이 필요합니다"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좋아해?"
불안하다. 와타나베의 웃음소리가 현영의 귀에까지 들렸다. 저 웃음소리. 굉장히 만족한 톤이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웃음소리. 영 거슬린다.
"좋은 계획이라도 세운 모양인데?"
"둘이서요?"
"그렇지. 전직과 현직이 힘을 합한 모양이야. 어째 기분이 찜찜하다"
"제기,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현영이 화김에 주먹으로 핸들을 내치쳤다. 엉뚱한 크락션만 울렸다.
"언제쯤 나온대?"
"뭐요?"
"신분증"
"그러게요. 이 자식 뭐하는데 이렇게 꾸물거리는지 모르겠네. 캭 달려가서 두들겨패줄 수도 없고"
"서둘러야 돼"
"서두르면 뭐해요? 이자식이 신분증을 가져와야지. 연락도 잘 안돼고, 아- 정말 미치겠다"
"돈이 다떨어졌다."
현영이 갑자기 기정을 쳐다보았다. 돈이 다떨어지다니? 그러보 보니 일본으로 건너온지 벌써 넉 달 가까이 된다. 그 동안 돈도 무지하게 써댔다. 기동력을 살린다고 자동차까지 뽑았으니.
그렇다고 한국으로 연락해 돈을 부치라고 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태어나서 남에게 손을 벌린적이 없다. 차라리 없으면 없는대로 사는게 편했다.
돈이 다 떨어졌다. 서둘러야 한다. 놈들이 빨리 좀 움직여줘야 한다. 신분증도 빨리 만들어져야 한다. 되는 일이 없다. 현영의 주먹이 다시 핸들을 내리쳤다. 애꿎은 크락션만 계속 울어대고 있다.
바다 위 IMF
짜디 짠 바닷바람이 얼굴을 핥고 지나간다. 벌써 이곳, 울진으로 도피한지도 열흘이 지났다. 아직까지는 잠잠하다. 여기까지 쫓아오진 않은 모양이다.
열흘동안 두문불출 방 안에만 숨어 있었다. 학생 때 여행을 하다가 안면을 가졌던 심노인. 그 노인을 믿고 무작정 내려왔다.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머물러 있겠다고만 말했다. 노인도 그러라고 했다. 다른 말은 묻지 않았다. 지웅의 얼굴만 보고도 충분히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열흘만에 처음 맞는 바닷바람이다. 너무 갑갑한 나머지 오늘은 백사장으로 나가보았다.
한가롭다. 지웅 자신에게는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사람이 없다. 보이는 것이라곤 수평선을 툭툭 치고 지나는 갈매기 뿐. 그동안 굉장히 많은 생각을 했다. 처음 성재를 만나고 나서부터 지금 이 곳에 머무르고 있는 순간까지 되짚어 보았다. 굉장히 빠듯한 나날이었다. 이렇게 지난 날을 생각해본 적도 거의 없던 것 같다.
벌써 서른 한 살의 나이다. 그런 나이 치고는 해 놓은 것이 없다. 단지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일본과 싸운다는 하나만으로 만족해하며 살아왔다. 이제 그 싸움의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는 느낌이다. 비록 지금은 피신해 있지만 이 싸움, 그리 오래 지속될 것 같진 않다. 그러기엔 일본이나 지웅 자신이나 상대에게 너무 돌출되어 버렸다. 이긴다는 보장은 없다. 자신은 개인의 몸.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다. 아무래도 결과는 패배로 흐를 것 같다. 그래도 싸움은 그치지 않는다. 져도 그만이다. 후회하지 않을만큼만 싸우면 된다.
문득, 서울에 두고 온 사람들 생각이 났다. 태림과 윤희, 그리고 한청련 사람들. 일본에 있는 현영까지.
지웅이 이 곳에 있는 걸 아는 사람은 태림 뿐이다. 윤희에게는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하루가 멀다하고 달려올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놈들에게 미행당할 것임이 틀림없다. 한청련 사람들에겐 연락하고 뭐하고 할 틈이 없었다. 호준이 깨어난 후 곧바로 울진으로 내려와 버린 탓이다.
걱정이 된다. 윤희는 지금쯤 안달이 나 있을 것이다.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고 있을 것이다. 미안하다. 떠난다는 말이라도 해 줄걸 그랬나 싶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곱게 떠나보내줄 윤희가 아니다. 안전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처사였다.
한청련 사무실도 어수선하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잠적이다. 동훈을 비롯한 사람들은 태림의 연락처도 모르는 실정이다. 동훈이 알아서 꾸려가고는 있겠지만 그 쪽도 미안하긴 하다. 적어도 책임자가 아닌가?
현영은...... 차라리 현영에 대한 걱정은 덜 된다. 어쩌면 현영이 일본에 있는 게 안전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현영이 서울에 있었더라면 자신 못지 않게 일본인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 자신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애태우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만 이렇게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위험하다. 조금 더 기다려보는 수밖에.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헛생각만 든다. 지웅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아침에 심노인이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적적하면 부두로 나와.
적적하다, 지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자꾸만 상념에 젖게 만든다. 차라리 부두로 나가 허드렛일이라도 하면 괜찮아질 것도 같았다.
방파제를 타고 길을 죽 걷다 보니 부두가 나왔다. 심노인을 찾아보았다. 사람들과 그물을 수선하고 있었다. 지웅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심노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분위기가 제법 좋아보이진 않았다.
"왔어?"
심노인은 그물코를 놓고 일어섰다. 사람들도 심노인을 따라 그물을 한 곳으로 밀어넣었다.
"도와드릴 거라도 있을까 해서요"
"도와줄 만한거라도 있을까? 마침 잘 왔어. 안 그래도 소주나 한 잔 하려던 참이야"
심노인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굳어있다. 왜 그러세요, 하고 물어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들이 일그러져 있다.
"어이, 최씨. 가 술 좀 받아와"
심노인이 담배를 물었다. 하나로. 디스 같은 담배는 노인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하나로처럼 길다란 담배를 피워야 심노인의 수심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정도로 심노인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 어려있다.
최씨라는 사람이 댓병으로 술을 받아오자 사람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으레 그렇다는 듯이 사람들은 자연스레 자리를 만들고, 생선을 한 마리 건져와 회를 떴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대접이 하나씩 돌아간다.
"받어"
심노인이 지웅의 잔을 따랐다. 술은 한참이나 채워졌다. 대접을 채우려니 그럴 수밖에.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봤어도 이런 잔은 처음이다. 보기만 해도 부담스럽다.
사람들은 서로들 잔을 따라준다. 한 사람은 열심히 초장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 옆의 사람은 또 하나의 대접에 수북이 회를 담아놓았다.
심노인이 잔을 들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잔을 들었다. 그러는 동안 말 한마디가 없다. 무슨 초상집 술자리에 온 것 같다. 아니 그보다 더하다. 초상집 술자리라면 한탄하는 소리라도 있지, 이건 술 가지고 화풀이를 하는 사람들인지 험악한 인상들을 하고 술만 마시고들 있다. 지웅이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 말을 꺼내주길 기다리는 표정들이다. 그리고 최씨라는 사람이 땅을 향해 한숨을 내뱄고는 입을 열었다.
"작년 이맘때는 게를 쌓아둘 곳이 없었는데......"
슬프다. 저렇게 구릿빛으로 붉게 물든 얼굴에서도 이렇게 슬프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니, 지웅은 최씨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글서글한 눈망울이 금새라도 터질 것 같다.
"염병, 그 소린 또 지껄이고 있어!"
심노인이 최씨를 나무란다. 그 전에도 자주 그런 말을 꺼냈던 모양이다. 오늘은 지웅이라는 새얼굴이 있다. 그래서 최씨 자신도 모르게 나왔을 것이다. 우린, 이렇게 힘들어...... 그렇게 말함으로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고 싶었을 것이다.
"어쩔 수 있어요? 이렇게 얘기라도 해야 견디겠는걸. 벌써 3주를 배를 안 타고 있다구요. 3주를. 허구한 날 그물 손질이나 하면 뭐해요? 배를 타야지"
"니미, 배를 타면 어딜 가게? 갈 곳이나 있어야 배를 탈 게 아니야? 관광이라도 할 거야? 배타고 구경 다닐 거냐구?"
"그럼 어부가 배 안타면 뭐하러 어부해? 바다로 나가서 뭐라도 건져야 될 거 아니야?"
"기름은 누가 거저 줘? 배는 공돈으로 몰아?"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의 한탄이 터져나온다. 매일 이렇게 이어지는 술판이리라. 같은 사람에 같은 얘기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화만 나는 술자리.
지웅은 아직도 대접을 가만히 쥐고만 있다. 이 잔을 마셔버리면 저 사람들과 같이 기분이 울적해질 것만 같다.
"도둑놈 같은 새끼. 남의 밥줄 끊어 먹고 그만 두기만 하면 다야? 내 한 번 보기만 해봐, 한 방에 그냥!"
김장관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해양수산부 김장관은 어업협정에 책임을 느낀다며 사임하고 말았다. 김장관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어업협정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어민들의 반발이 심각했다. 밥줄이 끊겨버렸다. 수만명이 바다를 등져야 하는 실태다.
"저 통발들을 갖다가 확 불질러버릴까보다"
수천개의 통발이 바닥어 널부러져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어구들이 산적해 있었다. 바다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배가 꽤 많다. 처음엔 단지 부두라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출항을 하지 않은 것이다. 어쩐지 대낮 치고는 사람들이 많았다. 배와 함께 이 사람들도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IMF보다 더 무서운게 이 어업협정이야. 썩을 놈들. 어민이 무슨 죄가 있다고 두 번 씩이나 죽이는지"
두 번 죽인다. 그랬다. IMF 관리체계로 들어가면서 국민들은 고통을 당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 그 고통이 벌써 1년 반을 이어오고 있다. 구조조정이다, 빅딜이다 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쫓겨났다. 그리고 지금 어민들은 또 한 번 치명타를 맞았다. IMF 관리체계에 들어갔을 때는 그래도 낳았다. 고기를 잡을 수는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예 그런 기회조차 박탈당한 상태다.
벌써 세 순배 정도의 술이 돈 것 같다. 적지 않은 양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리를 끝낼 생각을 안 했다. 그 대로 술에 취해 쓰러질 때까지 마실 모양이다. 정신이 멀쩡하면 자꾸만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의 끝엔 언제나 슬픔과, 분노와 절망이 따른다. 그래서 다들 술을 마시고 있다. 자신이 술에 취해 생각하고 있는지 조차 생각하지 않기 위해 하염없이 술을 마셔대고 있었다.
오다케
"그럴싸 한데?"
현영은 재철이 만들어 온 신분증을 만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오다케'. 총리부 산하 방위청 과장. 자신의 사진까지 들어있으니 그럴 듯하게 보인다. 정말 일본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도 느낀다. 기정도 신분증을 만들었다. 우라베. 역시 같은 기관 차장이다.
"수고했다. 다음에 소주 한 잔 사지. 한국에서......"
"한국에서 사든, 일본에서 사든, 꼭 사기나 해요"
"누가 떼먹는다든?"
"떼먹는게 아니라, 무사하란 소리예요. 살아남아서 사란 말예요"
"이자식이 재수없게......"
현영이 주먹으로 재철을 쥐어박는다.
아닌게 아니라 사실 무척이나 위험한 모험이다. 향빈관. 그 안으로 어떻게 들어갈 순 있어도 신분이 발각되기라도 하면 살아서 나오기는 힘들다.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이미 향빈관 안으로 들어가 봤다. 벌써부터 만만한 곳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던 터.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재철의 말도 무리는 아니다.
기정은 아까부터 가만히 신분증을 쳐다보고 있다.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수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지금까지 잘 버텨왔다.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했다. 마치 전쟁터로 나가는 기분이다. 향빈관. 그 문은 어쩌면 정말 전쟁터로 나가는 출구일지도 모른다. 큰기침을 해 본다. 조금씩 마음을 다져두고 있다.
"맘에 들어요?"
현영이 신분증을 가리키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짖는다. 현영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벌써부터 긴장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거 가지고 어디 가서 등좀 쳐먹어도 되겠는데?"
기정이 우스개소리를 해 본다. 여유를 가지고 있다는 듯이. 그러나 어색하다. 이미 목소리가 잔뜩 긴장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문제 없겠지?"
현영이 다시 한 번 재철에게 확인했다.
"걱정 마요. 다들 실존인물 들이니까. 그 사람들이 형하고 같은 시간에 향빈관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돼요. 그런데 뭘 하려고 그렇게 목숨까지 걸어요?"
재철은 여전히 현영의 일을 위험하게 보고 있다. 그럴 수밖에. 재철은 현영보다 현 시국을 제대로 짚어보고 있다. 현영이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향빈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위험한 곳이다. 그 말이면 족하다.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잠입할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다. 그래서 되도록 포기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말려봤자 말을 들을 현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신분증을 만들어 줬을 뿐이다. 안 그러면 그나마 신분증도 없이 향빈관으로 쳐들어갈 지도 모르는 현영이다.
"자꾸 재수 없는 소리 할래?"
"걱정 되니까 그렇죠"
"걱정마. 죽음도 난 피해간다"
여전히 그렇게 자신을 달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 초조함을 극복할 수 있었다.
"가자"
기정이 먼저 일어섰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는 터.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자신감을 잃게 될지 모른다. 현영이 따라 일어섰다.
동훈은 하루 종일 윤섭을 달래느라 진을 빼고 있다. 오전에 일본에서 가이드라인 협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제 한반도는 미국의 지휘권과 동시에 일본의 무력행사권에 짓눌리게 되었다. 윤섭은 아침부터 다시 한 번 대사관을 점령하자고 야단이다.
"니가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말을 하고 있지만 동훈 역시 가이드라인 체결안에 몹시 신경이 거슬리는 상태다. 지들 마음대로다. 어업협정에 가이드라인까지. 다음 번엔 뭔가? 한반도를 침략이라도 한다는 것인가?
"극단적이긴 뭐가 극단적이야? 쉽게 생각해보라구, 쉽게. 이게 어디 그냥 지나칠 일이야? 한반도를 꿀꺽 집어 삼키겠다는 소리 아니야. 이걸 보고 참고 있으라니, 도대체 한국인들은 죄다 핫바리야 뭐야?"
"너무 그렇게 흥분하지마. 어차피 힘 없는 나라의 현실이니까"
광수가 냉정하게 윤섭을 나무란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윤섭이 아니다.
"제기, 나라가 힘이 없으면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어야 되는거야? 항상 그러니까 일본이 우리나라를 우습게 보는거라구. 어업협정을 체결해도 멍하니 앉아 있고, 그런데 뭐가 겁나겠어? 가이드라인으로 한반도에 대한 무력사용권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겠다는 소리 아니야. 나중에 일본이 쳐들어오면 그 때 가서도 그럴래? 전쟁을 일으킨게 아니라, 잠시 지나는 길일거야. 하면서 멍하니 앉아 있을거냐구?"
"그럼 지금 뭘 어쩌자는 거야?"
광수의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 나온다. 윤섭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시위를 하든, 폭동을 일으키든 뭔가 터뜨리고 싶기만 했다.
"어쩌긴, 작년처럼 일본 대사관으로 찾아가서 시위라도 하자구. 이건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잖아. 한반도가 지들 놀이터야? 누구 맘대로 무력행사권을 가지고 말고야?"
"의장도 지금 없잖아"
"연락도 없이 사라진 놈이 의장은 무슨 얼어죽을 의장이야?"
"말조심해!"
동훈마저 언성을 높였다. 아무리 화가 나는 건 좋지만 지웅에 대한 악담은 참을 수 없었다. 동훈 자신도 연락없이 잠적해버린 지웅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자신은 지웅을 제대로 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 없이 한청련을 등질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 필경 무슨 연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웅은 엄연한 한청련 의장이다. 한 집단의 우두머리란 말이다. 그런데 그 우두머리를 깔아뭉개면 집단은 더 이상 존재가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지웅은 의장으로서의 위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내가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일본한테 당하려고 한청련에 들어왔는지 알아? 나라를 위해보겠다고 들어왔다구. 더 이상 한국이란 나라가 열강한테 놀아나는 꼴이 참을 수 없어서 들어왔다구. 그런데 이게 뭐야? 일본이 우리나라한테 꼼짝마라 하고 있는데도 가만히 구경이나 하고 있잖아. 한청련이 뭔데? 한국 청년 연합이 뭐냐구? 다 집어 치우라그래. 니들이 안하면 나 혼자라도 해볼 테니까. 비겁한 자식들"
윤섭이 사무실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버렸다. 동훈이 만류하러 쫓아갔지만 막무가내였다. 이미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후-"
답답하다. 어떤 게 옳은 건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광수도 영민도 답답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애꿎은 볼펜만 쥐어 뜯고 있다. 지웅이 필요하다. 뭘 하려고 해도 지웅이 없으면 명분을 가질 수 없다. 지금 당장 동훈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지웅을 기다리는 일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혹시 전화라도 올까봐, 사무실 문을 열고 나타날까봐 한시도 사무실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오고야 말았다. 지웅은 반가움과 원망 섞인 표정으로 윤희를 바라보았다. 태림이 녀석, 그렇게 당부를 했건만 윤희에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하기사 녀석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보진 않았지만 윤희가 얼마나 태림을 졸라댔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너무해요"
윤희는 지웅을 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매정한 사람. 아무리 도피를 해도 자신에게 얘기정도는 해줄 줄 알았다. 적어도 지웅에게 그만한 사람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에 언제나 기분이 좋았었다. 한청련 의장직 때문에 동훈을 만나러 갈 때고 자신과 동행했다. 그 때 얼마나 가슴이 뿌듯했었는데. 지웅을 만나게 되면 욕부터 해주고 싶었다. 그러는 게 아니라고, 적어도 자신을 생각하면 그렇게 매정하게 떠나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지웅의 얼굴을 보니 덜컥 눈물샘이 근질거린다. 얼마나 보고싶었는지 모른다.
"미안해. 잘 지냈어?"
그 한마디에 끝이다. 윤희는 지웅의 말한마디에 그동안의 걱정과 원망을 한꺼번에 바다로 날려버렸다. 자신도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이 남자 때문에 가슴앓이를 할 때 도무지 이해를 못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이렇게 심한 열병을 앓으면서까지.
"몸은 괜찮아요?"
"좋아. 별 일 없지?"
"없어요. 지웅씨가 서울에 없다는 것 빼고는"
그새, 얼굴에 웃음이 인다. 지웅의 팔짱을 끼고 백사장을 걷고 있다. 지웅의 도피 덕택에 처음으로 바닷가를 거닐고 있다. 님과, 함께.
"혹시 여기 내려올 때 수상한 사람들 없었어?"
그런 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아무래도 불안하다. 분명히 윤희를 줄곧 미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없었어요"
윤희가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알고 있었다. 자신이 미행당하고 있다고도 생각했었다. 보고 싶어도 참으려 했다. 하지만 자신에겐 그럴 재간이 없었다. 울진까지 내려오면서 몇 번이나 주위를 살폈는지 모른다. 혹시나 지웅에게 위험을 안겨다주는 건 아닐까. 하지만 지웅의 그 말이 너무 서운하다.
"그만 올라가는 게 좋을 거 같아"
하마터면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윤희는 이해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지웅을 쳐다보았다. 이제 만난지 불과 30분밖에 안됐다. 그런데 지금 올라가라니, 이 사람 너무 매정하다. 몇날 며칠을 눈물고 지샜는지 모른다. 베개를 얼마나 적셨는지 모른다. 참고, 또 참다가 너무 보고싶어서 내려왔다. 그런데 만난지 30분만에 그런 자신에게 올라가라고 한다.
"너무해요"
윤희가 울먹인다. 그것도 지금 열심히 참고 있는 중이다. 지금 눈물이라도 흘리면 자신이 너무 초라해질 것만 같다. 그래서 최대한 참고 있는 중이다.
"금방 올라갈거야. 아직 위험에서 벗어나지 않았어. 나도, 윤희도 안전해질 때까지 기다려. 날 믿어. 지금은 서운하게 보내지만 다음부턴 함께 있을거야"
지웅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기다렸던 말인지 모른다. 함께 있을거야.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도 윤희의 가슴은 여전히 미어진 그대로다. 그만큼, 화가 많이 나 있다.
지웅이 윤희의 입을 맞췄다. 달콤하게. 하지만 윤희에겐 아무 느낌이 없다.
"다음부턴 아무 남자 입 맞추지 마. 필요하면 언제든지 줄 수 있으니까"
지웅이 웃으며 윤희를 달래보았다. 윤희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갈게요. 조심해요"
천천히 뒤돌아 걸었다. 이제야 그 말을 절실히 이해하고 있다.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 정말 이렇게도 가슴이 찢어질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웅이 달려와 자신을 붙들 줄 알았다. 그러나 점점 지웅의 체취는 멀어진다. 야속한 사람. 자신이 너무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이별이란 단어를 머리속에 떠올려보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이별, 그런 말을 꺼낼 사이도 아닌데...... 자신을 위로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차라리 편했다. 아직 시작도 안 한 사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혹시 이별을 생각하게 되더라도 자연스럽게 대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손님
"긴장하지 마요, 절대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현영이 오히려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향빈관이라는 간판이 오늘따라 살벌하게 느껴졌다. 기정을 돌아보았다. 이상하리만큼 차분해보였다.
"무슨 생각해요?"
"법정에 나가던 생각"
"어땠는데요?"
"좋았지"
"얼마나요?"
"너 그 기분 알아?"
"무슨 기분이요?"
"내가 정의라고 생각하고 덤벼들었던 일이, 불의라고 생각했던 것을 이겼을 때"
"몰라요"
"세상이 내 것 같아"
"그래요?"
기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지금 왜 그런 생각을 해요?"
"법정에 들어가기 전에 항상 그런 생각을 했어"
"무슨 생각이요?"
"아직까지 불의가 정의를 이긴 적은 없었다는 생각"
"말이 돼요? 정의가 땅에 떨어진 지가 언젠데"
"그 때 뿐이야. 언제나 정의가 승리하게 돼있어"
"지금도 그런 생각이예요?"
"그럴지도 몰라"
"우리가 정의고, 일본이 불의예요?"
"그래야 실패해도 후회가 없어. 정의를 위해 싸운다는 거, 그것처럼 짜릿한 건 없어"
"실패는 왜 해요?"
"들어가자"
기정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현영이 따라 내렸다. 잘 될 것 같다. 기정의 표정. 실패할 것 같은 얼굴이 아니다. 굉장히 차분하다. 현영 자신이나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향빈관을 들어가자 지난 번과 다른 사내가 앞을 가로막았다.
"예약하고 왔소. 우라베하고 오다케"
사내가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예약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들여보내진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기정이 침착하게 주머니에서 우라베라고 씌어있는 신분증을 내밀었다. 현영도 오다케의 신분증을 내밀었다.
사내가 두 개의 신분증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현영은 되도록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사내가 신분증과 얼굴을 대조했다. 그리고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여기 처음 오시는 분들이라서요.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현영과 기정을 안내했다. 현영이 흘낏 별채를 바라보았다. 불이 꺼져 있었다.
작고 아담한 방으로 들어갔다. 주문하기도 전에 음식이 나왔다.
"난 이런 거 딱 질색인데"
"말조심해. 한국말 쓰지마. 일본말만 해"
기정이 현영의 귀에 대고 소곤댔다. 현영이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시중을 드는 여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초장부터 실수를 했다.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자가 나가고 다른 여자 두명이 들어왔다. 뭐야 이거 요정이야? 하는 표정으로 현영이 두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들은 아무 말도 없이 현영과 기정의 옆에 와서 앉았다. 현영이나 기정이나 미처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여자가 들어올 줄이야.
"한 잔 받지"
기정이 자연스럽게 현영에게 술을 따랐다. 마치 자신이 정말 일본 방위청 차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현영도 어색하지 않게 잔을 받았다.
그러나, 할 말이 없다. 여자들이 옆에 앉아있는데 무슨 말을 하는가? 쉽게 나가라고 할 수도 없다.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은 애초에 하지 않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그런데 여자들을 옆에 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일단은 술을 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잔을 비우자마자 여자가 옆에서 다시 채웠다. 부담스럽다. 위장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현영은 여자가 있는 술집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기모노를 입고 있는 일본여자. 어색해서 미칠 노릇이다.
억지로 술 한병을 비웠다. 그동안 서로 말도 없다. 그저 여자들이 술을 따르면 가만히 있다가 홀짝홀짝 마시기만 했다.
"더 드시겠어요?"
기정의 옆에 앉았던 여자가 공손하게 물었다. 현영이 재빨리 그러라고 했다. 그 옆의 여자는 어떻게든 잠깐 내보낼 생각이었다.
여자가 병을 들고 나갔다.
"말씀 나누세요"
갑자기 현영의 옆에 앉아있던 여자가 밖으로 나갔다.
"눈치챈 거 아닐까요?"
"그러게, 왜 나갔을까?"
"너무 말을 안하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니예요?"
"글세, 그럴지도 몰라"
"조금 있다가 할게요"
"조심해서 해. 방금 나간 여자가 아무래도 불안하다"
"설마 큰일이야 생기겠어요?"
여자가 술을 가지고 들어왔다. 현영의 옆에 앉아있던 여자도 따라 들어왔다. 현영이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다. 술을 한 잔씩 더 마시자 기정이 현영에게 눈치를 보냈다. 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현영이 급하다는 듯 방을 빠져나왔다. 밖은 아무도 없었다. 별채는 여전히 불이 꺼져 있다.
천천히 별채로 다가갔다.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을 해대는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은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다행히 별채는 열려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별채 안은 희미한 달빛만이 비추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금이타조의 회원들이 한국을 칠 음모를 세웠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쭈뼛 섰다. 벽에서 금이타조 회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주머니에서 도청기를 꺼냈다. 남아있던 돈을 모두 털어서 산 것이다. 이젠 무일푼이다. 여기 술값마저 계산하면 앞으로는 재철의 신세를 져야 한다.
이렇게 긴장할 줄은 몰랐다. 손이 부르르 떨린다.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자꾸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테이블 밑으로 손을 넣어보았다. 도청기를 설치하기에 딱 안성맞춤이다. 서둘러야 했다. 자리를 오래 비우면 의심을 사기 쉽상이다. 그런데 도청기가 잘 붙지 않는다. 손에 땀이 너무 많이 났다. 바지에 손을 문지르고 다시 도청기를 설치해보았다.
현영은 소리를 지를 뻔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진 않는다. 결국, 이렇게 실패하고 마는 것인가? 눈앞이 깜깜했다.
"역시 한국사람이셨군요"
현영의 옆에 앉아있던 여자다. 지금, 한국말로 얘기했다. 현영은 지금 자신 앞에 귀신이라도 나타나 있는 것만 같았다.
"다, 당신 누구요?"
"그런 거 물을 시간이 없으실 텐데요?"
현영이 다시 도청기를 설치했다. 손이 마구 떨린다. 얼굴에서도 마구 땀이 흐른다. 간신히 도청기를 설치했다. 현영이 테이블 밑에서 몸을 뺐다.
"한국사람이예요?"
현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서두르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굉장히 차분하다. 현영이 서둘러 별채를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또, 문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정말 끝장이다.
갑자기 현영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여자가 현영을 잡아 끌어 뒤로 넘어졌다. 그리곤 자신의 상의를 풀어헤쳤다. 졸지에 현영이 여자를 겁탈하는 꼴이 됐다. 방문이 열리고 무거운 그림자가 현영의 등을 가렸다. 방 안의 불이 켜졌다.
"뭐하는 짓이야?"
사내가 들어와 고함을 질렀다. 현영이 정말 여자를 겁탈하다가 들킨 것처럼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합니다"
사내가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손님으로서 도리는 지키십시오"
"예, 예"
현영은 곧바로 기정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말도 않고 곧바로 외투를 챙겼다. 기정이 눈치챈 듯 서둘러 일어섰다.
"어떻게 됐어?"
"몰라요, 우선 나가요"
기정이 계산을 하고 나오자 현영이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별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방금 전 사내가 보였다. 그리고 여자도 있었다. 현영과 눈이 마주쳤다. 여자가 모르는 척 외면했다. 사내가 여자에게 뭐라고 욕을 해대는 것 같았다. 향빈관 문을 나오자마자 차를 몰았다. 온 몸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
"어떻게 됐어, 성공했어?"
"몰라요"
"모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몰라요, 나중에 얘기해요"
현영은 지금 아무 생각도 없다. 그저 향빈관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마음 뿐이었다.
도청(盜聽)
벌써 이틀이 지났지만 아무런 조짐이 없다. 현영은 하루 종일 헤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도청기에서 들리는 소리를 감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혹시 들킨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여자가 자꾸 맘에 걸린다. 자신을 구해준 여자. 그 여자가 아니었으면 재철의 말대로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름도 모른다. 한국사람인지조차 확신할 수도 없다. 그런 여자가 자신을 구해주었다.
한편, 그 여자가 모든 걸 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한 번 향빈관을 찾아갈까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건 정말 목숨을 내거는 모험이 될 수 있다.
"아직도 소식 없어?"
기정이 잠에서 깨어났다.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감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게요, 아무 반응이 없어요"
"그거 건전지가 얼마나 가는 거지?"
건전지라...... 생각해보니 그런 문제도 있었다. 언제까지나 도청기가 제 기능을 발휘한다는 보장이 없다. 건전지 수명이 다되면 그걸로 끝이다. 그 땐 짐싸서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지금 있는 곳도 재철의 숙소. 이젠 식사도 재철에게 의지해야 하는 판이다. 돈이 몽땅 떨어졌다.
게다가 도청기가 테이블 밑에 안전히 붙어있다는 보장도 없다. 청소라도 하다가 들킬 수도 있다. 워낙 어두운 상태에서 설치를 했다. 어떤 위치였는지 기억도 잘 안난다.
"이거 주파수나 맞는지 모르겠어요?"
현영이 엉뚱한 라디오 주파수를 탓한다. 이틀이 마치 두 달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주파수가 맞다는 건 누구보다도 현영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직접 조절한 주파수가 아닌가?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아직 안 모여서 그렇겠지."
"잠깐만요"
현영이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무슨 소리가 나는 모양이었다.
- 저예요. 오후 4시에 도쿄시청 앞에서 뵈요.
그 여자다. 그 여자가 도청기를 통해 현영에게 말을 건네왔다.
"뭐야?"
기정이 궁금하다는 듯 기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여자요. 향빈관에서 내 옆에 앉아있던 여자"
"그 여자야?"
"예, 4시에 도쿄시청으로 나오래요"
"왜?"
"몰라요"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
"글세요"
현영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정에게 헤드폰을 넘기고 집을 나섰다. 무슨 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어쨌든 다행이다. 다시 만나고 싶었던 참에 직접 나타나주다니.
현영은 도쿄 시청 앞에 차를 대고 여자를 기다렸다. 시계를 봤다. 아직 10분 정도 남았다. 이젠 제법 도쿄시내는 훤히 꿰뚫었다. 차에 기름이 부족하다는 등이 켜졌다. 이런, 이젠 정말 정말 파산이다. 자동차는 그만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똑똑.
여자가 나타났다. 현영이 차문을 열어주자 여자가 급하게 탔다. 가방도 하나 들고 있었다. 현영이 빤히 쳐다보자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도망나왔어요. 불문율을 깬 셈이거든요. 손님들과의 밀애는 금지되어 있었는데"
"미안해요"
할 말이 없다. 미안하단 말밖에. 지금이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인지조차 구분이 안 간다. 지금 보니 꽤 예쁘장하게 생겼다. 화장을 안해서 그런지 지난 번에 봤을 때보다 어려보인다. 한 스물 서너살 정도 됐을까?
"안 가요?"
"어디로 가죠?"
"공항에 좀 데려다 주세요"
"왜요?"
"한국에 돌아가야죠"
현영이 차를 몰았다. 이 여자,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다. 공항으로 향하면서 현영이 물었다.
"한국에서 살았어요?"
"예"
"그런데......"
차마 직접 물어보기가 민망하다. 현영이 말을 하려다 말았다.
"직업소개소 있잖아요. 거기서 알선해주는 대로 왔죠. 설마 그런 곳으로 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한 2년 됐을거예요. 그 동안 돈도 모을만큼 모았고, 그리고 더 있으면 아무래도 맞아죽을 거 같아서요"
여자가 생긋 웃는다. 아무리 봐도 그런 것 같지 않다.
이제야 대충 짐작이 간다. 직업소개소라...... 아직도 그런 행위가 벌어지고 있었나? 몇 년 전에 한창 떠들석하기도 했다. 직업알선해준다는 명목으로 일본으로 팔아넘겨지는 여자들이 많다는 소리. 지금 그런 여자가 옆에 앉아 있다. 괜히 현영의 표정이 무안해진다.
"괜히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그래도 생명의 은인인데"
현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여자가 현영의 생각을 읽어버린 것이다.
어느새 차는 공항에 거의 도착했다. 아직, 여자는 할 말을 안했을 것이다. 단지 공항에 데려다 달라는 이유로 자신을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뭔가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걸 물어볼 수가 없다. 마치 자신이 죄인같았다.
자동차를 주차장에 세웠다. 그리고 여자가 내리길 기다렸다.
"그 사람들 도청하려고 한 거죠? 와타나베를 비롯한 사람들"
현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내일 오후 1시에 모일거예요. 그리고 도청기는 제가 따로 설치했으니까 염려하지 마요. 나중에 서울에 오면 빚 갚아요. 그리고, 좀 조심좀 해요. 댁에 얼굴 보자마자 우린 뭐 하러 왔소, 하고 써 있더라구요. 그리고 아무리 일본말 써도 한국사람인거 티 니요"
그 말을 남기고 여자는 가버렸다. 현영은 여자를 배웅하지도 못했다.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 여자 믿어도 됄까?"
기정은 현영의 말을 듣고 헤드폰을 머리에 꽂고 있으면서도 여자를 의심했다. 여자의 말대로라면 금이타조 회원들이 모이기까지,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있었다. 그런데도 가슴이 조바조바하다.
"믿어요. 적어도 형이나 나같은 부류의 사람들보단 나은 사람이니까"
정말 그랬다. 그 여자는 오히려 자신보다 나았다. 처음 자신을 구해줄 때부터 도쿄시청에서 만나 공항으로 데려다주기까지 현영은 여자에게 주눅이 들어있었다. 비굴함이 없다. 놀라우리만큼 차분하고, 냉정했다. 그 여자라면 향빈관에 도청기를 설치하는 일 같은 건 우습게 해치워버릴 것 같았다.
"제기, 너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거기다 나까진 왜 집어넣어?"
"말이 그렇단 소리우. 거 자꾸 말 시킬거예요? 그렇게 귀가 좋아요? 말 하면서도 다 들을 수 있을정도로?"
기정이 입을 샐쭉 내밀고는 다시 고개를 웅크렸다. 아직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이거 나한테 넘기지 그래요?"
오늘은 재철까지 함께 있다. 현영이 쫓고 있는 금이타조라는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궁금했다. 기자다. 현영을 도와주고 있다. 게다가, 적어도 한국인이라는 이유가 있다. 이런 중요한 일을 두고 차마 출근할 수 없었다.
"까불지마. 이게 3류기자 출세하라고 하는 일인지 알어? 그리고 너 조용히 해. 사람 신경 건들지 말고"
정말, 신경이 예민하다. 오늘을 위해서 그동안 힘들게도 참아왔다. 성재의 디스켓에 나와 있던 금이타조라는 이름. 그것만 없었어도 벌써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인내력이 한계에 달해있었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있던 적도 있다. 자신에게 그런 상황은 차라리 지옥이다 다름없었다. 가끔은 기정이 힘들게 했다. 지친 표정으로 짜증나는 표정으로 현영을 갈증나게 만들었다. 물론 함께 있으면 힘이 된다. 하지만 가끔씩 던지는 회의적인 말투는 안그래도 힘들게 버티는 현영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지웅이 보고 싶었고, 태림이 보고 싶었다. 당장 짐 싸들고 한국으로 날아가버릴까 생각했던 게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참았다. 보탬이 되고 싶었다. 애초부터 자신의 삶이란 없었던 지웅에게, 그리고 죽어가면서까지 나라를 위했던 성재에게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었다. 또한, 자신 역시 한국인이다. 그동안 애국자로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태어난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 그냥 넘길 순 없었다. 나라를 위해서도 뭔가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지금 일본에서의 말로에 서 있다. 그래서 신경이 너무 예민했다. 너무 많은 걸 소모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도 이젠 너무 지쳐있었다.
그동안의 여정이 허무한 결과를 낳을지도 몰랐다. 금이타조란 건, 현영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어쨌든 최선을 다했다. 그랬으면 그만이다.
"왔다, 왔어"
기정이 현영과 재철에게 손짓했다.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온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금이타조 회원인지, 방을 정리하러 온 종업원인지 아직은 구분이 안 섰다. 하지만 이제 금이타조가 모인다는 확실한 생각은 갖게 되었다.
현영이 보다못해 라디오에서 헤드폰을 빼버렸다.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볼륨을 아무리 크게 올려놔도 소리는 작게 들렸다. 그리고 잡음도 일었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아무리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라도 요점을 찾아낼 수 있을만큼 현영은 집중하고 있다.
"긴장되는 걸?"
기정이 두 손을 비볐다. 도박을 할 때 베팅하기 전의 손놀림처럼. 제법 긴장이 된다. 그리고 기대도 된다. 생각처럼 쉬운 모험이 아니었다. 이렇게 어려운 싸움이 될 줄은 몰랐다. 많은 걸 잃었다. 시간도, 여유도, 자산도 모두 탕진한 상태다. 이제 무일푼이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큰 판에 도박을 한 셈 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의 역경을 한 방에 날려줄만한 카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직 금이타조 회원이 들어오진 않은 것 같다. 사뿐한 발소리만 들릴 듯 말 듯 했다. 방석을 깔아두고 있는 모양이다. 조금씩 심장이 움직이고 있다.
"아, 참. 거 미치겠네"
재철이 너무 긴장한 탓에 소변을 보고 왔다. 벌써 한 시간 사이에 두 번째다. 긴장이 안될리 없다.
다시 한 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종업원이 나간 모양이다.
현영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12시 20분. 고작 그것밖에 안 지났다. 적어도 1시 가까이는 될 줄 알았다. 이럴 땐 시계같은 건 안 보는게 좋다. 그래봤자 시간만 더디게 갈 뿐이다. 하지만 현영에겐 생각뿐이다. 재철을 쳐다보려 고개를 돌리는 사이에도 흘낏 시계를 훔쳐보게 된다. 시계는 움직이지 않는다. 고장이라도 났을까 의심이 갈 정도다.
담배를 물었다. 담배를 피우는 몇 분간의 시간은 금방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몇 모금 못 빨고 재떨이에 비벼껐다. 담배를 피울 수 없을만큼 긴장하고 있다. 담배연기가 심장을 마구 휘젓는 느낌이 들어서 들이마실 수도 없다.
"젠장, 모르고 있었으면 그냥 차분히 기다렸을 거 아니야?"
기정이 괜한 불평을 했다. 사실, 알면서 기다리려니 더욱 미칠 지경이다.
문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방에 들어온 것 같았다. 한 명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또 한명이 앉는 소리가 났다. 세 사람은 동시에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 자세 그대로 시체가 되어버린 양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드러난 음모
- 오부치 총리와 손을 잡으신 겁니까?
- 아직은 속단하기 이르네. 서로가 이용한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 하지만 결국엔 같은 목적이 아닙니까?
- 달라. 오부치는 단호하지 못해. 그렇게는 한국을 전멸시킬 수 없어. 단지 찔러보기나 할 뿐이지.
- 그래도 이번 계략은 괜찮은 것 같은데요?
- 괜찮아. 아주 훌륭하지.
소리가 끊긴다.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자주 여닫긴다.
- 다 모인 것 같습니다.
- 오늘은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의 힘이 좀 필요한 일입니다.
- 30억달러를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까?
- 그렇습니다. 다들 서둘러 주셔야겠습니다. 우선은 국고에 있는 돈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인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 한국의 월드컵 경기장 건설 지원자금을 회수했습니다. 어찌나 안 내놓으려 하는지. 돈이 없긴 없는 모양입니다. 하여튼 한국은 2002년까지 월드컵 경기장을 짓긴 힘들 것입니다.
- 월드컵을 열지도 못할 나라가 경기장은 무슨 경기장입니까?
사람들의 웃음소리.
- 블래터 회장은 만나봤소?
- 예, 조만간 한국의 월드컵 준비상황을 점검한다고 했습니다.
- 돈은?
- 안받으려고 했습니다. 괜히 의심을 살 것 같아서 그만 뒀습니다.
- 그래요. 이번엔 한국이 월드컵을 개최하지 못하게 하는 것 보다 더 큰 일이 있소. 한반도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오. 북한은 지금 어떻게 나오고 있소?
- 자금을 지원했더니 잠잠해졌습니다. 어차피 그들이야 제보다 젯밥에 관심이 있으니까요.
- 전쟁을 일으켜야 하오. 그렇다면 북한을 선동하는 수밖에 없소. 자금은 더욱 지원해주도록 해요. 그리고 남한을 침략하는 명분을 만들어봐요.
- 거짓정보를 계속 흘려보는 겁니다. 남한이 먼저 침략할 기미가 보인다던가, 코소보 다음으로 미국에서 노리고 있는 곳이 북한이라든가, 정보를 흘리는 겁니다.
- 북한이 넘어가겠소?
- 자금도 더 지원해주는 게 어떻습니까? 어떻게든 일본과 북한은 우호관계라는 걸 인식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북한이 의심하지 못하게 해놓고 남한을 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표면상일지는 모르지만 북한은 이번 어업협정으로 남한에 대해서도 심한 유감을 나타냈습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죄다 이용해 보는 것입니다.
- 하지만 금강산 관광이다 뭐다 해서 남북한이 교류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 아닙니다. 단지 돈을 벌어보겠다는 수작입니다. 북에서는 남한과의 교류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단지 남한인들의 돈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남한 사람들 경제가 휘청거려 당장이라도 넘어질 판에 수백만원이나 들여 금강산 관광을 하고 있습니다. 남한 사람들 당장에 통일이라도 될 것처럼 설치고들 있지만 어림 없습니다. 이번 기회에 남한에 대한 북한의 감정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 좋아요. 아무튼 가장 좋은 방법을 찾도록 해봐요.
- 나지웅은 어떻게 됐습니까?
- 사람을 풀었습니다. 미꾸라지 같은 놈이 어딘가로 잠적해버렸어요. 애인을 미행해서 어느 지역에 있는지 알아놓긴 했습니다. 아직 찾진 못한 것 같습니다.
- 애인을 잡아서 협박이라도 해보지 그러십니까?
- 연락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애인이라는 여자도 놈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 하다가 윤태림이라는 기자에게 알아낸 모양입니다. 그 기자도 여차하면 제거할 생각입니다
- 그 놈은 꼭 없애고 말거요. 걱정 말아요
- 한국에 고삐를 너무 풀어준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외국신용도도 상향조정되고 주가도 많이 회복된 것 같습니다. 그 부분에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만
- 다 거품이요. 신경 쓸 거 없어요. 신용도가 상향조정되는 건 IMF의 말을 잘 들어서 당근 하나 물은 거밖에 안되요. 외환보유고가 늘었다는 말, 자국의 국민을 속이는 일이오. 수입을 안하니 당연히 외환보유고가 늘 수밖에. 그 말에 속고 있는 한국인들도 참 어리석지. 그래서 우리 대일본제국이 한반도를 다스려줘야 하는 명분이 더욱 뚜렷해지는게 아니겠소? 무지한 한국인들을 보살펴줘야 하지 않겠냔 말이오
더 큰 웃음소리.
아직도 세 사람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다.
현영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다. 이럴수가. 차라리 듣지 말 걸 그랬다. 이렇게 허탈할 수가 없다.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무서운 놈들. 단지 그런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그것 참"
기정도 기가 막힌 듯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껏 한국이란 나라가 그래왔다. 저렇게 일본의 계략에 멋모르고 당해오고만 있었던 것이다. 몸서리가 쳐진다. 한국이 뭐 잘못한게 있나?, 그런 생각까지 해본다. 도대체 무슨 까닭에 한국을 집어삼키지 못해 안달이 났을까?
"난 여태 일본에 있으면서 뭐한거야?"
재철의 어깨도 축 쳐져 있다. 세 사람 모두 화가 나기 이전에 힘이 죽 빠졌다.
"개새끼들"
기정이 가만히 중얼거린다. 결국 이런 것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파헤친 일본의 음모란 결국 한국파멸이었다. 뭔가 하나 부숴버렸으면 좋겠다. 현영이나 재철이 이해해주기만 한다면 주먹으로 얼굴을 한 방 날려버리고 싶기까지 했다.
"그래도 한 건 했네요"
현영이 비아냥거렸다. 자신을 향한, 한국을 향한 비아냥이다. 그동안 도대체 무얼 하며 살아왔단 말인가? 일본은 저렇게 무서울 정도로 음모를 꾸미고 있는 동안 한국은 무슨 대비를 하고 있단 말인가? 오히려 한국인보다 더욱 냉철하게 한국을 판단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수치스럽다. 일본이 저런 음모를 꾸미도록, 지금껏 나라를 이모양, 이 꼴로 살아온 것이 수치스럽다.
갑자기 현영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렇지. 지웅이 위험하다. 그리고 태림이 위험하다. 이렇게 멍하니 일본의 만행에 대해 개탄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왜그래?"
기정이 돌발스러운 현영의 행동에 묻는다.
"지웅이가 위험해요. 태림이도요"
"그렇다고 지금 당장 떠난다는 소리야?"
"안 갈려면 마요. 난 죽어도 지금 가야겠으니까. 그리고 너 돈 있는 거 내놔. 한국가서 붙여줄테니까"
비행기 표값도 없는 상태다. 어쩔 수 없이 재철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제기, 비행기가 없으면 헤엄을 쳐서라도 한국으로 건너가야 한다.
"빨리!"
현영이 재철을 윽박지른다.
"기다려요 가서 금방 찾아올게요"
"뭐해요? 짐 안챙기고!"
기정에게까지 언성을 높였다.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지웅과 태림에 대한 걱정 뿐이다. 지금껏 일본에 있던 것이 다행이라면 정말 다행이다. 아직 자신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무슨 짐이 이렇게 많은거야? 처음 일본으로 건너왔을 때보다 짐이 상당히 늘었다. 그만큼 오래 있었다는 소리.
짐을 챙기다 말고 집어 던진다. 쓸 데 없는 것들은 다 집어 치웠다. 그러다가 아예 가방을 통째로 집어던진다. 짐은 필요없다. 지금 그런 걸 챙길 때가 아니다. 몸만 가도 된다. 시계를 바라보았다. 제기, 갑자기 시간은 왜 이다지도 빨리 흘러가는 것이란 말인가?
기정도 옆에서 짐을 챙기고 있다. 현영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어쨌든 일본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이젠 지긋지긋하다. 다시는 일본을 쳐다보지도 않을 것 같다. 이 쪽을 향해선 정말 오줌도 안 눌 것만 같다.
재철이 헐레벌떡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여기요"
돈을 내민다. 얼마인지 세어보지도 않았다.
"금방 갚을게. 간다"
현영은 낚아채듯 돈을 받아가지고 뛰어나갔다. 기정도 서둘러 현영을 쫓았다.
절규(絶叫)
"제길헐, 배도 못 타는데 무슨 일자리를 구한다그래? 일자리는"
심노인이 부두에세 돌아오자마자 투덜겨렸다. 부인이 부엌에서 광주리를 들고 나왔다.
"무슨 소리예요?"
"바닷바람이라곤 한 번도 안 맞아본 것 처럼 생긴 녀석들이 글세 배를 탄다고 왔잖아? 누구 염장지르는 것도 아니고"
"IMF라서 그런가보죠. 얼마나 일자리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내려왔을까"
"일자리가 없어도 여기만큼 없으려구?"
심노인은 괜히 부인에게 화풀이다.
지웅은 마당에서 가만히 두 노부부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괜히, 불안해진다. 어제 윤희가 다녀갔다. 안그래도 수상한 사람들이 나타나진 않았는지 동네를 두바퀴나 돌아다녔다. 고개를 휘저었다. 과민반응이겠지. 부인의 말처럼 IMF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러 내려왔는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마음이 심란하다. 오늘은 심노인에게 술이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다. 그동안 신세만 졌지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마을 슈퍼마켓으로 가서 2홉들이 소주 세 병을 사왔다. 댓병으로 사려다가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2홉들이로 샀다. 안주는 필요 없다. 심노인의 집에 걸려 있는 것들이 안주라면 죄다 안주다.
"뭐하러 이런 짓을 해?"
심노인은 내심 반가우면서도 지웅을 탓한다.
"아저씨한테 인생 공부 좀 하려구요"
할 수만 있다면, 심노인을 위로하고 싶었다.
"인생 공부는 얼어죽을"
술은 지웅이 사왔지만 병은 심노인이 땄다. 이번엔 제대로 된 소주잔이다. 사실, 처음에 소주를 살 때부터 그게 좀 두렵기도 했다. 또, 대접에 술을 따르면 어쩌나. 지난 번 부두에서 사람들과 술을마실 때도 대접 한 잔에 취해버렸었다.
"죄송해요,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폐만 끼치는 거 같고"
"빈 방 쓰겠다.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더 얹으면 되겠다. 폐는 무슨 폐? 그런 말 하지 마라. 누가 들으면 인심 고약한 늙은이라고 손가락질 할라"
"그래두요"
지웅의 손이 자주 움직인다. 역시 심노인에게 소주잔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지웅이 따르는 대로 받아 마시기에 바쁘다. 심노인에겐 길다란 하나로 담배와 커다란 대접술이 어울린다. 얼굴에 그렇게 씌어있다. 어설픈 술과 담배론 내 고민을 달래주진 못해, 라고.
소주 세 병이란 애초부터 부족한 양이었다. 술병을 땄나 싶더니 어느새 두 병을 더 사왔다. 심노인은 이제야 만족한 빛을 띤다.
"힘드시죠?"
주제 넘는 말인 줄 알면서도 지웅은 넌지시 물어본다. 심노인이 웃는다. 그걸 묻는 진의가 뭔지 오히려 되묻는 듯이.
"대한민국에 안 힘든 사람 있나?"
슬그머니 지웅의 대답을 회피한다. 말이 나오면 끝이 없어질 것 같은 모양이다. 억지로 참는 것 같다.
"조금만 참으세요. 곧 좋은 날이 올 거예요"
술이 된 모양이다. 좋은 날이라니. 어떤 날이 좋은 날인가? 그런 개념도 확실히 규정되어 있지 않으면서 좋은 날이 올거라고 했다.
"이런 늙은이한테 좋은 날은 무슨. 묻힐 땅이나 변변히 있으면 다행이지"
"에이, 무슨 말씀하세요. 아직도 정정하신데요. 그리고 설마 아저씨가 지내실 땅덩어리 하나 없겠어요?"
"그런 말 마라. 우리 한텐 바다가 땅이나 마찬가지야. 산소 같은 건 없어도 그만이라고. 마음 편하게 묻힐 바다만 있으면 되는 거야. 그런데, 바다가 없어"
심노인이 고개를 흔든다. 실의에 빠진 모습이다. 역시, 괜히 말을 꺼낸 것 같다. 심노인에게 위로는 주지 못 할 망정 절망을 더욱 부추겼을 뿐이다. 주제 넘은 짓이었다.
"걱정 마세요. 곧 되찾을 거예요. 지금 젊은이들도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진 않아요. 어디선가들 바다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구요. 그러니까 염려 놓으세요"
점점, 건방을 떤다. 그런 말이 심노인에게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마을 한다. 술김에 말이 절제가 안 된다.
"너는 모른다. 나라를 잃은 기분이야. 나라를 잃은 기분이라고"
"에이, 설마 그렇기까지야 하려구요. 아저씨가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셔거 그래요. 저희들이 잘 할게요. 조금만 있으면......"
지웅이 말을 멈췄다. 심노인의 얼굴이 살기를 띠었다. 지웅이 몸을 움찔했다. 무슨 말 실수라도 했나? 가만히 노인을 바라보았다. 심노인의 얼굴에 땀이 흐른다. 아니, 술에 취해서 잘 못 보았다. 가만히 보니, 그건 땀이 아닌 눈물이었다. 단지 노인의 검붉은 얼굴 때문에 땀으로 보였을 뿐이다.
"네 놈들이 나라를 알기나 해? 나라라는 게 뭔지나 알어? 건방진 자식들. 네깟 녀석들이 나라를 잃어 본 기분을 알 것 같아? 니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몰라. 논을 메고, 밭을 갈아도 흥이 안나고 부모님을 산소에 모셔도 죽을 죄를 지은 것처럼 죄송한 기분이고, 아기가 태어나도 기쁘긴커녕 당장 낫으로 쳐 죽이고 싶은 기분이 어떤 건지나 알어? 복에 겨운 놈들. 거리를 마음대로 활보하고 다니고, 땅에서 나는 작물을 마음대로 거두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니들이 알기나 해? 내가 번 돈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복인지 니들이 알기나 하냐고? 내겐 바다가 삶의 터전이다. 바다가 곧 나라야. 그런데 네 놈이 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주절거려?"
어리석었다. 처음부터 주제 넘게 노인을 위로하려 한 것 자체가 건방에 빠진 생각이었다. 적어도 진심으로 노인을 위로하려고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진심이 아닌 오만이었다. 노인의 아픔이 뭔지조차 제대로 몰랐다. 왜 그렇게 노인의 주름이 점점 깊어가는지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감히 노인을 위로하려 했다. 어떤 말로도 용서가 안 되는 짓이다.
죄송합니다, 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죄송했다. 고개를 숙였다. 노인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노인이 혼자 술을 따라마시고 있다. 지웅의 말에 노인의 썩는 속은 더욱 술이 필요했으리라.
"가, 자라"
노인이 술병을 물리고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새우처럼. 몸을 옆으로 구부려 눕는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착각 속에 살아왔다. 애국이라는 거, 그동안 너무 안이하게 생각해 왔다. 적어도 자신의 생각이 그릇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올바른 방향으로 걸어왔다고 생각했다. 어리석은 놈.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어리석은 놈이다. 나라가 뭔지도 모르고 애국, 애국 지껄여 왔다. 뭘 지켜야 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나라를 지키지고 떠들어 댔다. 후후. 웃음이 나온다. 누군가 앞에 있으면, 주먹으로 자신의 주둥아리를 힘껏 내리쳐달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새벽이 되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노인에 대한 죄의식에 저절로 잠이 달아났다. 해는 제법 일찍 돋았다. 마당이라도 쓸어 놓으려 했다. 그것조차 짧은 생각이었다. 벌써, 마당은 깨끗하게 갈려있었다. 할 것이 없나 찾아보았다. 없다. 노부부의 부지런함은 도저히 쫓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고놈 참, 맘에 드네. 그런 놈들이 있어야 사는 맛이 나지"
노인이 방에서 기분 좋게 방에서 나왔다. 열린 방문 사이로 TV가 보였다. 지웅이 흘낏 쳐다보았다. 누군가 사람을 인질로 잡고 있는 화면이었다. 지웅이 달려가 가까이서 TV를 바라보았다. 기어이, 일을 내고 말았다. 인질을 잡고 있는 사람. 분명히 윤섭이었다. 화면 밑부분의 자막이 인질로 잡혀 있는 사람을 가르쳐 주고 있다. 가즈오 일본 대사였다.
아예, 신발을 벗고 안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러자마자 다른 내용의 기사가 나왔다. 채널을 바꿔 보았다. 윤섭의 기사를 막 다루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이다. 윤섭은 가즈오 대사의 자택에서 잠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즈오 대사가 나타나자마자 납치해 인근 건물로 데리고 갔다. 곧바로 경찰과 군부대가 출동했다. 윤섭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윤섭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외쳤다.
"어업협정은 무효다. 일본은 즉시 어업협정을 철회하라. 또한 가이드라인을 철폐하라. 이 나라는 어느 강대국의 놀이터가 아니다. 누구 맘대로 이 땅에서 무력권을 행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냔 말이냐?"
윤섭의 인질극은 오래지 않아 끝이 났다. 건물 옥상으로 올라 온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지웅은 방으로 돌아왔다. 윤섭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리고 동정이 된다.
동훈에게, 광수에게 영민에게 호소했을 것이다. 가이드라인이 체결되고 나서 분명히 무슨 조치를 내리자고 졸라댔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윤섭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혼자 쓸쓸한 인질극을 버렸을 것이다.
윤섭의 표정은 시위도 협박도 아닌 절규에 가까웠다. 제발, 같이 동참해 달라고, 일본의 계락에 더 이상 놀아나지 말자고 울부짖는 것 같았다. 지금쯤 자신이 갇혔던 철장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동훈을 광수를 영민을, 지웅 자신을. 그리고 수많은 대한민국 청년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왜,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는 것인지, 혼자서 분을 삭이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윤섭의 행동이 정당하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평가기준이 무엇이란 말인가? 무슨 까닭으로 윤섭을 욕하고, 손가락질하고 차가운 철장 안에 갇히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 만든, 윤섭이 절규하도록 나라 꼴을 그대로 두고 내버려 온 우리 모두가 철장에 갇혀야 하는 건 아닐까?
이제 울진에서의 도피생활도 끝내야 할 것 같았다. 그 동안 힘을 키운 것도 없었다. 단지 생각 뿐이었다. 어쩌면 윤섭처럼 인질극을 벌이는 것 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의 말처럼 내 나라, 내 땅을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 있을 때, 더욱 단단히 다지고 굳건하게 쌓아나가야 할 것 같았다.
청년. 그들에게 호소하고 싶었다. 우리마저 이 나라를 저버린다면 누가 이 땅을 지키겠는가를. 우리가 먼저 일어서 힘을 키운다면 누가 감히 이 땅을 넘볼 생각을 하겠는가를.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의 청년이라도 용기를 가진다면, 힘을 키우려고 한다면 그만큼 보람된 일도 없을 것 같았다. 미련하게도 도미노 효과를 믿어본다. 한 사람이 용기를 얻고, 그리고 또 그 옆의 사람이, 또 옆의 사람이 힘을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듯 소수의 청년들이라도 먼저 느끼고 일어나 온 국민에게 그 뜻을 전했으면 좋겠다. 막연한 기대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기대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이제 그만 올라가자. 더 이상 죽음에 대한 미련을 버리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했다.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늘을 맏기자. 적어도 이 땅의 하늘은 일본보다는 한국의 편이리라. 이 땅을 지키려는 사람의 편이리라.
복귀(復歸)
짐이라고 챙길 것도 없었다. 애초에 서울에서 도피해올 때 몸만 가지고 왔었다. 심노인은 내심 섭섭한 모양이었다. 지난 밤 자신이 화를 내서 지웅이 떠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젠 괜찮아? 안 위험해?"
알고 있었다. 고기 잡는 노인이라고 세상 돌아가는 일을 모르고만 있을까? 한청련 의장. 적어도 그런 신분을 가진 사람이 자신을 찾아와 며칠 묵겠다고 하는 건 신변이 위험하다는 소리.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던 터. 단지 내색을 안 했을 뿐이다.
"위험해도요. 아저씨 묻힐 곳은 찾아드려야지요"
이번엔, 진심이다. 마음뿐일지 모르지만 제대로 된 의미에서 꺼낸 말이었다. 허황된 애국심이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아니다. 화김에 해 본 말이야. 너무 신경 쓸 거 없어. 니 몸이나 조심해라"
마지막까지 지웅에게 부담을 주기 싫은 모양이다.
심노인이 억지로 꾸겨 넣어주는 노잣돈을 받고야 집을 나섰다. 얼마 있지 않은 바닷가지만 적어도 몇 년 동안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부들의 회한이 느껴지는 곳.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던 곳. 지금은 이곳을 떠난다. 하지만 언제고 다시 찾아오고 싶었다. 행복과 만족의 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일부러 해거름을 택해 집을 나섰다. 밤 중에 도착하고 싶었다. 밝은 서울을 찾아가기엔 웬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말도 없이 떠나왔다. 자신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조용히 도착하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걸 지우고 새로운 아침을 맞고 싶었다.
집 앞의 수퍼에서 하나로 담배를 샀다. 심노인도 항상 이 가게에 있는 하나로 담배를 샀으리라. 포장을 뜯어 한 개피 물었다. 불을 붙였다. 한참을 피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고작 디스 길이의 담배길이가 남아 있다. 아직 심노인의 한을 쫓으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개피의 담배조차 다 피우지 못하고 껐다.
부두를 돌아 시내 버스를 기다렸다. 이제 저 부두도 마지막이다.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다시 하나로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려고 하다가 담배를 입에서 문 채로 떨어뜨렸다. 두 명의 사내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제기, 놈들이다. 옷차림은 평범했지만 지웅은 느낄 수 있었다. 멀리서 보기만 했는데도 살기가 풍겼다.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곤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지웅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곤 몸을 돌려 뛰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지웅을 향해 쫓아오고 있었다. 이젠 주위의 시선조차 의식하지 않았다. 방금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버스가 천천히 멈추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만 더 일찍 왔었더라면. 그런 생각을 할 처지가 아니다. 무조건 뛰었다. 놈들도 필사적으로 쫓아온다.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이젠 이 동네의 길도 제법 파악하고 있었다. 이 길로 들어가면 놈들을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놈들 역시 이미 길을 간파하고 있었다. 아마도 며칠 동안 이 곳을 샅샅이 뒤졌던 모양이다. 양 쪽 끝에서 놈들이 지웅을 압박해온다. 이젠 끝인가? 제기, 어차피 죽을 거면 싸워보는 거다. 놈들이 아무리 전문 킬러라도 싸우다 보면 길이 생길지도 모른다.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지 않는가?
외투를 벗어던졌다. 벌써 온 몸이 땀으로 뒤덮였다. 놈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럴수록 지웅의 몸은 더욱 경직되어 간다. 상대는 둘이나 된다. 한 쪽에만 신경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간 바로 등 뒤에서 칼이 날아올 판이다.
주머니를 뒤졌다. 혹시 무기로 쓸만한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없다. 손에는 방금 산 하나로 담배만 잡힌다. 놈들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진다. 지웅이 흙을 한 줌 집어 오른쪽의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안면에 뿌렸다. 허탕이다. 그런 졸렬한 수법에 당할 놈들이 아니다.
놈이 발을 휘둘렀다. 피했다. 한 번 피하고 보니 용기가 생긴다. 제법 싸움을 하는 척 폼을 잡아봤다. 놈들이 약간 움찔하긴 한다. 그래봤자 찰나일 뿐. 거리는 점점 좁혀진다.
주먹을 내질렀다. 놈이 여유있게 피했다. 동시에 낭심을 발로 걷어찼다. 성공했다. 적어도 급소를 맞았으니 당장은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놈이 몸을 구부리고 있는 틈을 타 있는 힘껏 주먹으로 안면을 가격했다. 한 쪽으로 나뒹굴었다. 그와 동시에 지웅의 등에 통증이 왔다. 반대쪽에 있던 사내가 팔꿈치로 등을 찍은 것이다. 지웅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주먹이 날아왔다. 입에서 살이 찢어져 나갔다. 아직 정신은 말짱하다. 하지만 통증이 심하다. 자세를 바로 잡았다. 한 놈은 아직 낭심을 잡고 있다. 놈이 전광석화처럼 주먹을 날렸다. 지웅의 턱이 뒤로 젖혀진다. 그리고 주먹이 복부를 강타했다. 저절로 몸이 숙여졌다. 온 몸의 힘이 주욱 빠졌다. 놈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인다. 벌써 눈이 퉁퉁 부어올랐다.
여기서 끝나는 건가? 결국은 이렇게 비참하게 쓰러지고 마는 건가? 아직은 때가 아니다. 제대로 힘 한 번 쓰지 못했다. 할 일이 많다.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갚아야 할 빚이 많다. 이대론 성재아저씨를 볼 면목이 없다. 수용에게도 호준에게도.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날려보았다. 그러나 주먹이 안면에 닿기 전에 놈의 발이 먼저 지웅의 얼굴을 걷어찼다. 그대로 넘어졌다. 일어설 기운도 없다. 이젠 정말 끝이다.
놈이 품안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징그럽게 웃는다. 칼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곤 갑자기 뒤를 돌아보더니 고개가 퇬 하니 젖혀진다. 그리곤 각목 하나가 놈의 머리를 내리쳤다. 누구?
현영이다! 그리고 그 옆에 태림이 서 있다. 현영은 그대로 사정없이 각목으로 놈들을 내리쳤다. 태림도 쉴 새 없이 각목을 휘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현영이 달려와 지웅을 부축했다.
"괜찮아?"
지웅이 현영의 도움을 받아 일어섰다. 다리가 풀렸다. 현영이 지웅을 들쳐업었다. 태림이 뒤에서 부축했다.
아직은 정신이 말짱했다. 그런데 자꾸 눈이 감긴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지웅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태림은 수건으로 지웅의 이마를 닦아주고 있었다. 아직 지웅은 깨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계속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악몽이라도 꾸는 모양이었다.
벌써 새벽이다. 지웅을 업고 그대로 시내 여관으로 데리고 왔다. 밤을 꼴딱 샜다.
"그나마 다행이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날 뻔했어"
태림이 안도의 숨을 내쉰다. 현영이 자신을 찾아와 지웅에게 끌고오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현영은 그리 좋은 표정이 아니다. 아직 놈들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 뿐이 아니다. 서울에도 우글우글 댄다. 이젠 자신까지 놈들의 표적이 되었을 터. 주머니 안의 도청테잎을 만져본다. 이걸 터뜨리면 안전해질 수 있으려나.
"많이 말랐다"
태림은 이제서야 현영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말 굉장히 수척해져 있었다. 그동안의 고생이 어땠는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게 얼마만인가? 지웅과 현영 그리고 태림 자신. 이렇게 세 명이 함께 있는 게 얼마만인지 모른다. 비록 지웅이 의식을 잃은 상태고, 현영의 모습이 예전같진 않더라도 굉장히 안심이 된다.
지웅의 눈이 조금씩 움직였다. 눈을 뜨려고 하는 것 같았다. 뜬 것도 같다. 하지만 눈주위가 퉁퉁 부어 있어 구분이 가지 않는다.
"정신 좀 들어?"
태림이 지웅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나 살아 있는 거 맞어?"
"그래. 엄살 떨지 말고 빨리 일어나"
현영이 발로 지웅을 툭 찼다.
살아 있다. 숨이 쉬어 진다. 방금 현영이 자신의 발을 툭 찼을 때 감각이 살아 있었다. 죽음을 초연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살아있고 보니 그렇게 감사할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다. 간사하기도 하지만 본능을 이겨낼 정도로 지웅은 초인이 아니다.
태림과 현영의 숨결이 느껴진다.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 없다. 꿈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쫓아오고 있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젠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현영과 태림이 있지 않은가?
지웅이 몸을 일으켰다. 태림이 부축해 주었다. 흐릿하지만 녀석들의 모습이 보인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웃자마자 얼굴에 통증이 온다.
"잘 지냈어?"
"자식, 니 걱정이나 해라. 누가 누구한테 잘 지냈냐 마냐야?"
"내가 뭘 어쨌기에"
"이게 사람 얼굴이냐?"
현영이 벽에 걸린 거울을 떼어 내 지웅에게 들이밀었다. 누구야? 그게 자신의 모습이라곤 믿기지 않는다. 우스꽝스럽다. 그런 모습을 보고 화가 나기는커녕 우스워 보이다니. 녀석들이 역시 지웅에겐 무엇보다도 큰 힘이다. 위안이다.
"어떻게 된 거야?"
아직은 얼떨떨하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현영과 태림이 나타날 수 있었는지. 게다가 아직도 현영이 일본에 있을 줄 알았다.
"이 녀석이 어제 갑자기 나타나더니만 너 있는 곳을 대라잖아. 니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부랴부랴 내려왔지. 버스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니가 도망치는 모습이 보이더라. 그렇게 된거야. 그건 그렇고 너 정말 지웅이 위험한 거 어떻게 알았어?"
"넌 임마, 친구가 위험한 것도 모르냐? 텔레파시도 안 와?"
현영이 딴청을 부린다. 아직 도청테잎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서울에 올라가 같이 들어보려 했다. 조금은 녀석들을 놀래주고 싶은 마음도 있다.
"움직일 수 있어?"
현영이 묻는다. 지웅의 상태가 걱정이 되긴 하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어서 도청테잎을 터뜨려야 한다. 우선은 그래야 놈들도 함부로 날뛰지 못한다.
지웅이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온 몸이 쑤시긴 하지만 자리에 누워있는 것보단 낳았다.
"조금 더 누워있어. 아직 첫 차 타려면 시간 좀 더 있어야 돼"
태림이 지웅을 말린다. 그렇다고 말을 들을 지웅이 아니다.
"가자. 그 동안 당할 만큼 당했어. 이젠 매운 맛좀 보여줘야지"
"무슨 수로?"
그런 맛을 보여주고 싶은 건 태림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무슨 수로 현영이 저렇게 자신있어 하는지 아직은 알지 이해하지 못한다. 녀석, 무슨 대어를 낚아왔길래 저렇게 자신만만한지.
걸을만 했다. 그리고 움직일만도 했다. 몸은 조금 불편하지만 마음만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제 2 패망일
한반도가 들끓었다. 아니 지구촌이 들끓었다. 현영이 도청해 온 테잎이 드디어 만방에 알려졌다.
UN은 일본의 사과문을 요구했다. 군축을 내세우고 있던 세계 동향에 찬물을 끼얹은 일본의 만행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미국은 자신들에게 피해가 끼칠까 두려워 부랴부랴 가이드라인을 철폐시켰다. 북한도 일본의 계략에 분노했다. 자신들이 핵미사일을 발사하면 그 첫 번째 대상은 일본이라는 엄포를 놓았다.
일본은 더 이상 어느 나라의 우호국이 아니었다. 현영의 도청 테잎으로 금이타조(金以打朝)의 회원들의 만행이 전 세계로 전해지자 그동안 일본의 경제력에 눈치를 보던 약소국가들은 그동안 쌓여왔던 감정을 폭발시켜 수교를 끊는다는 등, 일본인들의 예민해진 심기를 건드렸다. 중국, EC 등 일본과 어깨를 겨루던 나라들 또한, 모처럼만에 잡은 약점을 놓치지 않고 자국의 이익을 챙겼다.
일본 내의 분위기는 완전 초상집이었다. 국민들의 감정을 선동했던 마시이의 죽음이 조작된 것이었다는 사실에 기가 한 풀 꺾였던 국민들은 그들을 이끌어나가는 정치, 경제의 관료들이 전 세계의 표적이 되어 난도질당하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더 이상 국민들은 믿고 싶은 사실조차 없었다. 모두가 명백히 드러난 이상, 우길 힘도, 마지막 희망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부치 총리는 대국민연설문을 통해 일본국민의 애국심과 땅에 떨어질대로 떨어진 정부의 신뢰를 회복하려 했다.
"황국시민에게 고합니다. 우리는 금이타조(金以打朝)의 회원들이 전 세계의 언론으로부터 심한 매질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째서 우리가 이런 치욕을 가만히 앉아 당해야 합니까? 그들은 선조들의 뜻을 이어받아 한반도를 다시 차지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4-5세기경 우리의 조상이 지배했던 한반도, 그 땅을 우리가 다시 되찾으려 했을 뿐입니다. 그런 저들에게 누가 손가락질하고, 욕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전 세계는 다시한 번 우리를 분노케 하고 말았습니다. 54년 한국을 동정하는 일부 우월주의 국가들의 횡포로 이 땅에 원폭의 피해를 당했던 것처럼, 저 쓰러져가는 나라를 동정하는 국가들이 다시금 우리를 괴롭힌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큰 힘을 길러야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의 땅을 다시 찾고, 다시는 어느 누구도 우리의 나갈 길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더욱 큰 힘을 길러야 합니다.
황국시민에게 약속합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설 것이며, 다시는 누구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할 정도의 초강대국이 될 것입니다"
일본의 국민들은 정부가 원하는 것처럼 똘똘 뭉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금이타조 회원처럼 타도 한국을 외치는 군국주의자들은 아니었다.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글로벌 시대에 이미 적응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국 정부의 비인간적 처사에 대해 다른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일본정부는 국민들의 애국심 결여를 한탄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애국심은 정부가 생각한대로 바닥난것이 아니었다. 단지 정부의 말을 더이상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대한 정부를 믿고 따르다가 두 번이나 주저앉은 국민은 더 이상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안 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까 깨진다고 했던가? 일본은 그동안 꾸준히 준비했던 월드컵마저 포기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 세계의 언론이 일본을 헐뜯자 FIFA 회장인 제프 블래터가 월드컵 조사단을 이끌고 찾아 온 것이다. 블래터는 일본 월드컵 위원장을 만나 충격의 말을 던지고 떠났다.
"이미, 세계는 일본의 월드컵 개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소. 지난 번 한일 월드컵 개최 투표는 공동개최라는 최후의 수단으로 일본에게도 개최권을 주었지만, 이미 당신네들의 금력(金力)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소. 추락한 이미지를 어떻게든 회복하시오. 올해 안에 일본의 월드컵 개최 자격 박탈에 대한 투표가 있을 것이오. 이제는 아무리 많은 돈을 풀어도 안 된다는 걸 명심하시오. 당신들 스스로 진정한 반성의 모습을 보일 때, 월드컵을 치룰 수 있을 것이오. 잊지 마시오. 월드컵은 전세계의 축제요. 그 축제에 불청객은 참가시키지 않을지도 모르오"
일본정부는 어디부터 시작해야할지 막막했다. 이미 뒤돌아선 국민의 마음부터 돌려놓아야 할는지, 수백조나 손해본 경제적 문제를 처리해야 할는지, 혹은 아직은 피부에 와 닿지는 않지만 북한의 도발가능성에 대비해야 할는지. 게다가 8년을 공들여 온 월드컵까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었다.
"벌써 세 명이 빠져나갔습니다. 더 이상 금이타조를 이어가긴 힘들 것 같습니다"
야마모도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와타나베 역시 실의에 빠진 모습이다. 설마,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조금만 있으면 한반도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을 자는 아무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쥐새끼 같은 놈의 도청. 그로 인해 하루아침에 일본의 명성은 몰락하고 말았다. 분노와 허무가 함께 들이닥쳤다. 처음에는 와타나베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무너져버릴 것만 같았다.
"아직 끝난 건 아니야. 자네도 잘 알고 있잖나?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우린 원폭을 투하당한 이후에도 이렇게 강해졌네. 이깟 시련 쯤은 우습게 이겨낼 수 있어"
"그렇습니다. 시간이 조금 늦어질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한반도가 금새 일어선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이미 많은 의욕을 상실했다. 세 명의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하나하나가 중요한 사람들이다. 남은 사람은 열일곱. 그들 사이에서도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와타나베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지금은 이빨을 깨물고 있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선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야마모도 역시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만 같았다.
"미국이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 오부치가 처신을 제대로 못해서 그래"
다른 어떤 나라보다 일본에 등을 돌린 곳은 미국이었다. 그렇지 않고선 그들 역시 세계의 손가락질을 피할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국을 붙잡고 늘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간 질시의 눈초리가 더욱 강해질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미국의 외교력에 아직까진 미치지 못했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와신상담. 지금의 수모는 잘 기억해두게.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아야 해. 길어야 몇 개월이야. 아니 한 달만 지나도 언론은 잠잠해지네. 잠시 쉰다고 생각해. 대신 더욱 확실한 계략을 세워야겠지. 그 뿐이야"
그렇다. 지금 이 수모, 무덤까지 가져갈 정도로 치욕스럽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대로 갚아주리라. 철저하게 후회하게 만들어주리라.
아직, 일본은 강하다. 그런 외교적 질시 따위로 흔들릴 것 같았으면 금이타조 같은 건 애초부터 만들지 않았을 것어다. 다시 시작하는 것도 아니다. 잠시 멈출 뿐이다. 그 동안 해 놓은 것도 많다. 한국이 회생한 것도 아니다.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두 번째다. 두 번씩이나 전 세계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이젠 일본의 적은 단지 한국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은 단지 진입로일 뿐이다. 일본에게 침을 뱉은 모든 나라들, 그들에게도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주리라. 야마모도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절대, 이대로 물러서진 않을 것이다.
봉기(蜂起)
사람을 미안하게 만든다. 먼저 고개 숙여 찾아가도 용서가 안되는 판에 동훈은 광수와 영민을 데리고 지웅을 찾아왔다.
아직 한 번도 사무실을 찾지 않았다. 얼굴 문제도 있었고 신변을 정리하는 일도 남아 있었다. 그 동안 윤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현영과 태림만 종종 만났을 뿐이다.
"그 동안 충전은 잘 하셨어요?"
동훈이 편안한 웃음으로 묻는다. 미안하다는 말 같은 건 안해도 된다는 듯이. 그리고 못 하겠다는 말 조차 꺼낼 수 없는 웃음이다.
"도청 테잎이 터질 때 분명히 알 수 있었어요. 의장님이 다시 돌아왔다는 거. 그래서 이렇게 찾아와 봤습니다. 잘 온 거 같네요"
"잘 지냈어요? 미안해요. 본의 아니게......"
사실 미안하다. 그러고 보니 윤섭이 없다. 지금쯤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표정이 친절히 웃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대단한 각오가 배어 나온다. 이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듯이.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윤섭이가 안부 전해달래요. 자기는 하나도 힘 안 들다고. 오히려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기분이래요. 감옥 안에서도 그리 심하게 대하진 않는 거 같아요"
이래저래 더 이상은 한청련을 떠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이젠 테러의 위험도 없어졌다.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도 없었다. 조금이나마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일만 남았다. 물론 쉽진 않은 일이겠지만, 웬지 이 사람들을 보고 있으려니, 잘 될 것 같다. 다들 그런 표정이다. 논에 난 수확물을 거두러 가려는 듯한. 그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다. 아니 그렇게 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표정들이다.
"여기 있지 말고 어디 가서 소주라도 한 잔 할래요? 아무래도 반성주라도 사야 할 거 같은데"
"그러죠. 대신 한 잔 가지고는 안 될 거 같은데요? 광수하고 영민이가 그 동안 많이 벼르고 있었거든요"
동훈이 광수와 영민을 돌아보았다. 둘 다 그렇다는 듯 가만히 웃어보인다.
지웅은 사람들과 함께 근처 아구탕집으로 들어갔다. 아직은 약간 서먹서먹한 기운이 남아 있다. 우선 술을 마시면서 그동안의 전황을 들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앙금이 남아 있다면 그것 또한 풀어버리고 싶었다. 아직은 죄인이 아닌가?
"그 동안 어땠어요?"
지웅이 잔을 채웠다. 아직 기본찬도 깔리지 않았는데 동훈이 한 잔 들이켰다. 광수와 영민도 따라 마신다. 지웅도 안 마실 수가 없다. 다시 잔을 채웠다. 그제서야 동훈이 말을 꺼냈다.
"사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윤섭이가 그런 꼴을 당했을 때도 의장님 생각이 절실하더라구요. 돌아오실 줄 알았어요. 적어도 제가 알기론 대한민국의 청년을 버릴 분이 아니거든요"
자신이 뭐 대단하다고. 단지 미안한 생각뿐이다. 이미 마음도 굳힌 터다. 할 수 있는 만큼 해 볼거라고. 지킬 수 있을 때 지켜보겠다고. 이 땅을, 정신을. 그래서 지금 이 사람들에게 사과의, 약속의 술을 사고 있다.
"별 일은 없었죠? 윤섭씨 일 빼고는"
하긴, 윤섭의 인질사건이면 충분히 큰 일이고도 남는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고 있다. 아직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다.
"한 달동안 뇌사상태라면 그게 좀 문제였죠"
광수가 대답했다. 철저한 성격에 그동안의 공백이 맘에 안들었다면 아마 광수가 제일 심했을 것이다. 지웅은 광수의 그런 대답도 많이 양해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이젠 정말 한청련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해 봅시다. 저도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볼게요"
동훈이 잔을 비웠다. 다행이다. 아직 속단하기에 이른 감도 있지만 지웅의 복귀가 동훈에겐 너무 큰 힘이 된다. 그리고 방금 지웅이 분명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그럼 됐다. 그 동안 힘들었던 것들은 이미 머리에서 지워진 상태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이제 어쩌죠? 그동안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멋지게 해내야 할텐데요"
영민이 묻는다. 영민도 지웅의 복귀가 반가운 모양이다. 똘망똘망한 눈빛이 마구 빛난다.
"일단, 일본의 만행이 전 세계적으로 드러났으니 당분간은 한국에 대한 모의는 없을 거예요. 이제 우리 스스로의 힘을 키울 때라고 생각해요. 청년이 움직여야죠. 그렇다고 당장 무슨 큰 일을 하는 건 바라진 않아요. 그저 다들 열심히 살 수 있도록 용기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일본이 넘볼 수 없도록 우리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거죠. 얼마간 잠잠하겠지만 언제 또 한국을 넘볼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정도로 포기할 일본이었으면 10년을 걸쳐 준비한 한국 침략은 시작도 안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이라도 청년이 움직여야 한다. 강하게 자신을 다져가야 한다. 그걸, 하고 싶다. 대한의 청년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그렇게 나라의 힘을 키워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좋아요. 의장님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야 저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죠. 한 번 해 보죠. 지킬 수 있을 때 지켜야죠. 까짓거 한국사람이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모두들 최선을 다하면 그깟 일본이고 미국이고 겁나는 나라가 있겠어요? 해 보죠. 우리도 강한 나라를 한 번 만들어 보는 거라구요"
동훈이 조금은 흥분한 것 같았다. 그동안의 마음고생까지 털어버리려니 그럴 수밖에. 광수도 영민도 그런 동훈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다.
갑자기 윤섭이 떠오른다. 허전하기도 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윤섭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친 김에 일본을 칠 수 있도록 힘을 키우자고. 더 이상 미국의 군사통제권을 받지 말고 다른 나라의 방위를 책임질 수 있도록 나라의 힘을 키우자고. 한국도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고. 반만년 역사에서 지겹게 보아 온 외침을 더 이상은 되풀이하지 말자고. 그 대신 한반도도 다른 나라를 쳐 보자고. 그럴 수 있을만큼 나라의 힘을 키워보자고. 그렇게 흥분하며 말했을 것이다.
술은 적당한 선에서 그쳤다. 당장 내일부터 사무실에 출근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다시 뛰는 한청련이 되야 했다. 말뿐이 아닌 대한의 청년에게 다가갈 수 있는 진정한 한청련이 되어야만 했다.
한청련 사람들과 헤어진 지웅은 태림을 찾아갔다. 이미 밤이 꽤 깊었지만 오늘은 꼭 호준을 찾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태림은 지웅의 전화를 받고 5분도 되지 않아 나왔다.
"너무 늦은 거 아닐까?"
"괜찮아. 호준인 지금 밤, 낮 구분없이 살아. 오히려 지금이 괜찮을 거야. 낮에 가면 자고 있을지도 몰라"
태림은 천천히 차를 몰았다. 벌써 10시가 넘었지만 도로는 막혀 있었다. 지웅이 창문을 내렸다. 5월 하순이지만 벌써 날씨는 여름이나 마찬가지다. 담배를 물었다. 아직도 담배를 피울 때면 가끔씩 심노인의 하나로 담배가 생각난다. 길다란 담배. 그만큼 깊은 심노인의 고뇌. 그 모습이 쉽게 잊혀지질 않는다.
"내일부터 나가기로 했다"
"어딜?"
"한청련"
"그래?"
태림이 반가운 듯 지웅을 돌아보았다. 지우의 담배 피우는 모습이 차분하다. 이젠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지웅이 자신의 옆에 있다. 그리고 현영도 서울에 있다. 언제라도 보고 싶으면 찾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이 필요하면 지웅이 찾아올 수 있다. 거의 1년만이다. 이렇게 다들 제자리를 찾았다. 이제야 마음이 편안하다.
"잘 할 수 있을까?"
"잘 됐으면 좋겠어?"
잘 됐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미 결과에 연연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최선을 다해보는 거다. 정 안 돼면 한 사람, 한 사람 만나가며 설득이라도 할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청년들을 움직이게 하고 싶다.
"아직 멀었어?"
벌써 1시간이나 운전을 하고 있지만 아직 호준이 있는 곳에 다다른 것 같진 않다. 차는 외곽 도로를 빠지고 있다. 서울에 없다는 소린가? 아직 한 번도 호준을 만나지 못했다. 오늘은 기필코 만나보고 싶었다.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이미 잊은지 오래다. 단지 호준이 열심히 살고 있길 바랄 뿐이다. 그래야 지웅의 마음이 편하다. 이미 호준은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주민등록 번호도 없다. 호준의 부탁대로 사망신고를 냈다. 사정을 얘기하자 병원에서도 허락해 주었다. 그런 호준이 살아가는 낙은 단 한가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뿐이다. 지웅은 호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었다.
차는 구리로 빠졌다. 그리고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을 지나자마자 멈췄다. 태림이 앞장섰다.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허름한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그 건물 지하에 연구실이 있었다. 문이 잠겨져 있었다.
"없는 거 아니야?"
태림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문을 두 번 두드렸다. 그리고 다시 세 번을 두드렸다. 암호인 모양이다. 지난 번 사건으로 호준도 충격이 컸으리라.
문이 열리고 호준이 고개를 내밀었다. 처음엔 조심하는 표정이더니 태림을 보고는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그 뒤의 지웅을 발견하더니 입이 함박 벌어진다.
"왔어?"
지웅이 다가가 호준의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표정이 밝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몸은 괜찮아?"
태림에게 얘기는 들었지만 호준에게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응. 아무렇지도 않아. 이제 돌아온 거야?"
아무래도 태림이 소식책 역할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호준이 지웅을 향해 말을 하면서도 흘낏흘낏 태림을 쳐다보았다.
"잘 돼?"
프로그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호준이 하고 싶은 일이 잘 되길 바랄 뿐이다.
"응. 바이러스는 거의 완성된 단계야. 연도 인식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어. 만약에 오늘 날짜가 5월 25일라고 해. 이 프로그램을 투입시키면 다음 날 날짜는 5월 24일이 되어버리지. 아직 실험을 안 해 봤어. 그리고 또 은행에서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거야. 그림을 그대로 바꿔서 일본 열도가 조금씩 없어지는 바이러스지. 백신이 나오려면 한참 있어야 할 걸?"
굉장히 뿌듯한 표정이다. 그러나 이내 멋적은 표정을 짓는다.
"Y2K는 언제 해결할 지 모르겠어. 그건 수용이가 없으면 힘들어. 코볼에 관해서는 수용이 따를 사람이 없거든. 언젠가 해결하긴 하겠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
"괜찮아. 성공 못해도 돼. 이미 넌 할만큼 했어. 그 정도면 충분해"
지웅이 호준을 위로했다.
"아니야. 이미 난 죽은 목숨이야. 그런데 왜 숨을 쉬고 있는지 알어? 그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야. 다른 건 없어.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국가에 보탬이 됐으면 좋겠어. 그리고 수용의 한도 풀어주고 싶고"
호준의 목이 메인다. 그리고 이내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직 수용에게서 벗어나려면 멀었다. 적어도 지웅에겐 그렇게 보였다. 아마 호준이 눈을 감는 날까지 수용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진 못할 것 같았다.
"이젠 안전한거지?"
호준이 조심스레 묻는다. 그 동안 지웅만큼이나 호준도 불안에 떨고 있었다. 호준 역시 죽음의 문턱에 다녀왔지 않은가?
지웅이 고개를 끄덕여준다. 이 녀석만 보면 마음이 심란해 진다. 너무 미안해서 몸둘 바를 모르게 된다.
"걱정 마. 앞으론 별 일 없을거야"
그 말밖에는 못 하겠다. 더 좋은 말을 해주고 싶은데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직은 호준 앞에만 서 있어도 죄스러웠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아침부터 한청련 사무실은 활기에 차 있다. 5월 하순의 생그러움처럼 설레임을 잔뜩 머금은 분위기다. 다들 이제야 뭔가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 있다. 지웅도 아침 일찍 사무실로 나갔다. 동훈도 광수도 영민도 새벽이다 싶을 정도로 일찍 출근했다.
함께 청소를 마친 후 사발면으로 간단히 아침을 떼운 후 한 달 반만에 회의를 했다. 윤섭이 빠져 있긴 하지만 다들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동훈씨, 라인을 통하면 몇 명 정도까지 연락이 되죠?"
"한 2만명 정도 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모릅니다. 그 동안 연락을 한 적이 없어서요"
"적어도 만 명 이상은 가능할 거예요. 아직 제 3 라인까진 문제 없어요. 그리고 더욱 많은 사람이 동참할 수도 있을 겁니다. 요즘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어요. IMF도 있었고, 어업 협정, 도청테잎 사건이 터지면서 나라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젊은이가 확실하게 늘었어요"
광수가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명단을 들춰보였다.
"대부분 직업들은 어떻게 되죠?"
"거의 학생이구요. 직장인도, 무직인도 있어요"
학생. 그들이 정말 힘을 내야 한다. 지금이야 당장 경제적인 책임을지지 않기 때문에 한청련이라는 운동에 가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졸업을 하게 되고 직장에 취직하게 되면, 혹은 직장을 구하지 못해 실의에 빠져 있으면 그들에게 한청련은 어느 먼 나라처럼 환상이 되어버릴 우려가 있었다. 나라도 좋지만 일단은 먹고 사는 게 급하기 때문이다.
지웅은 운동권이 실패하는 이유를 옆에서 지켜봐 왔었다. NL이니 PD니 하는 운동권 모임은 대게 개인적인 수명이 고작 2년 남짓밖에는 되지 않는다. 아무리 열렬한 투사처럼 보여도 군대를 다녀 온 남학생들, 3, 4학년이 된 여학생들은 투쟁보다는 취직 걱정에 먼저 신경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진정한 운동이 될 수 없다는 게 지웅의 생각이다. 결국 뜨거운 혈기를 잠시 발산한 정도밖에는 안 되는 일이다.
지웅은 그런 일시적인 충동을 사양하고 싶었다. 한청련은 집회를 열거나 소요를 벌이지 않는다. 단지 그들에게 다가갈 뿐이다. 호소할 뿐이다. 적어도 내 안에 나라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다. 한청련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다시 한 번 곱씹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가입이고 탈퇴고 하는 건 애초부터 없다. 모든 한국 청년. 500만 청년이 주인이다. 그들이 정말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 이 땅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지웅의 할 일이다. 한청련의 할 일이다.
"일단, 그들 모두가 일을 하게 만듭시다. 학생이면 공부를 직장인이면 근무를, 무직인이라도 자아를 발달시킬 수 있는 무언가를 하게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강해집니다. 청년들이 움직여야 해요. 어깨를 움츠리지 말고 각자의 나래를 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할 일은 그거예요"
다소 추상적이다. 하지만 동훈의 입가엔 웃음이 번진다. 지웅의 말대로 그렇게 되야 나라가 강해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요?"
영민이 묻는다. 사실 그 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거, 조금은 막막하긴 하다.
"먼저 우리 스스로 최선을 다해야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청련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청년들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해요. 물론 버거운 일이라는 거 알아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구요. 하지만 우리가 먼저 최선을 다해봅시다. 한 두달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예요. 적어도 10년 20년을 목표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죠. 끓는 냄비 밑바닥 같은 한국인. 전 그 말이 무척이나 싫어요. 뭐든 한 번에 해결하려는 욕심은 그만 버려야죠"
다들 말문을 열지 못한다. 10년, 20년을 준비한다 해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하지 않는가? 지웅의 말에 선뜻 수긍이 안 가는 표정들이다.
"대한민국의 청년에게 다가간다 해도 그들의 눈과 귀를 끌어 모을 뭔가가 있어야 하진 않을까요?"
광수가 묻는다. 현실론자. 다소 이상주의적인 지웅의 말에 쉽게 공감을 할 순 없는 모양이다.
"매스미디어를 이용할 생각이예요. 한청련을 홍보하기엔 그게 가장 낳을 것 같아요"
지금껏 인터뷰 요청도 심심치 않게 들어오고 있었다. 기자들이 수많은 사건의 주인공인 지웅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었다. 그럴 때마다 지웅은 정중히 거절해 왔었다. 그러나 이번엔 매스미디어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괜히 광대가 되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거절했었지만, 지금은 매스미디어의 힘을 빌리고자 한다.
"음, 가능할 것도 같은데요?"
영민의 눈이 반짝인다. 아직 한청련은 크게 홍보되지 않았지만, 지웅이라면 그 정도의 힘은 있다. 언론을 몰고다닐 만한 매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선 TV와 라디오, 신문을 통해 한청련을 알리는 걸로 해요. 그리고 청년들에게 보다 신뢰있는 모습으로 다가가는 거죠"
정말 그러긴 싫었다. 지웅은 언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미디어도 좋아하지 않는다. 아직 한국의 언론은 TV 드라마 수준이다. 진실을 왜면하고 사실에만 치우치거나, 정부의 눈치를 보며 박쥐 기사를 써대기만 하는 언론을 그리 신뢰할 수 없었다. 게다가 미디어는 말 할 필요도 없을 정도.
하지만 그 힘이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스타를 만들고 대통령을 만드는 게 바로 언론이다. 그래서 그 힘을 빌리기로 했다.
해는 이제서야 창문을 비추고 있었다. 다들, 너무 일찍 출근한 탓이다. 바쁠 것 같은 하루다.
직장을 구하기가 그리 쉽진 않다. 벌써 현영의 나이 서른 하나. 새로 직장을 구한다는 게 생각처럼 만만한 일은 아니다. IMF 영향도 무시 못한다. 벌써 실직자가 200만을 넘어섰다. 당장 대졸자들도 취업을 못하는 판국에 서른 줄을 넘긴 현영이 직장을 구한다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다. 장사를 해 보자니 그것도 어렵다. 술장사를 하자니 자신이 다 먹어버릴 것 같고, 먹는 장사를 하자니 구미가 당기질 않는다. 옷가게니 신발가게니 하는 건 더더욱 질색이다.
방송국엔 다신 들어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터다. 똥이 더러우면, 피하면 그만이다. 그래도 그 습관이 남아 있어 다른 직장이 제시하는 조건에 쉽게 만족은 가지 않는다. 적어도 월급은 많았었다. 어느 정도 우월감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었다. 아직, 자신의 몸에서 똥냄새가 가시지 않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결국엔 태림을 찾았다. 가장 만만한 녀석. 그만큼 편안한 녀석이 바로 태림이다.
"자식, 그러게 좋은 직장은 왜 때려치워?"
현영이 직장을 구하러 다니는 모습이 안스럽다. 걸걸한 현영의 성격에 다른 사람보단 더욱 힘들거라는 생각이 든다.
"시끄러. 술이나 따라봐"
"너 얼른 직장 구해라. 도대체 너 때문에 월급 받기가 겁나"
그렇게 말은 하지만 언제나 환영이다. 현영이, 지웅이 찾아와 술을 사라면 집을 팔아서도 살 수 있다. 아직은 싱글이다. 그리고 현영을, 지웅을 끔찍이도 좋아하고 있다.
"요즘은 날이 더워서 그런지 소주도 못 마시겠다. 너 때문에 일부러 소주를 마셔주긴 하지만 말이야. 다음 달부턴 맥주로 하자. 어때. 좋아?"
넉살도 좋다. 그래서 현영에겐 술을 사도 부담스럽지 않다. 때로는 술을 사는 것도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다. 지나칠 정도로 미안해 하면 술을 사는 사람이 더욱 부담스러워지기 마련. 어쨌든 기분은 좋다. 이렇게 같이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이다. 게다가 현영이란 녀석, 절대로 얻어먹고 입씻을 놈이 아니다. 분명히 취직을 하면 첫 월급을 몽땅 들고 태림을 찾아올 지도 모른다. 가자, 오늘 한 방 쏘마. 사실은 그렇게 될까봐 그게 조금 부담스럽긴 하다.
"CATV라도 들어가 보는 게 어때? 공중파 타다가 왔다고 하면 바로 연출 맡길 거 아니야. 보수도 그렇게 짜진 않다는 거 같던데?"
"시끄러 임마. 누가 너한테 직장 구해달라고 왔어? 술 먹어주러 왔지? 마셔"
오랜만의 한량 신세다. 너무 오래면 문제겠지만 지금은 이런 생활이 그리 나쁘진 않다. 일본에 있을 때, 이런 모습을 자주 떠올리곤 했었다. 근심걱정 없이 한가로이 소주를 홀짝이는 모습. 지금 그러고 있다. 취직이야 때가 되면 할 수 있을 거고. 취직에 신경 쓸만큼 세심하지 못하다. 그게 자신의 최고 단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 면에선 태림의 반만 따라갔어도 인생이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정 할 일 없으면 가서 지웅이라도 도와주던가"
현영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부담이 될 거야. 처음이야 뭐 서로가 좋겠지. 하지만 나같은 놈하고 같이 일하려면 지웅이 힘들어져. 그 때 되면 서로가 부담스러워지기 마련이다. 난 친구랑 돈 관계, 직장관계 같은 거 갖고 싶지 않다"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저 이렇게 현영의 잔을 받아주는 수밖에. 저, 세상 근심이라곤 없어보이는 녀석이 일본에선 어떻게 버텨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대견하다는 말 밖에는 안 나온다. 뭐라고 잔소리 안 해도 알아서 할 녀석이다. 하긴 지금껏 10여년을 봐 왔지 않은가?
한가롭다. 이런 한가로운 분위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결코 오래 가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여기서 멈춰있진 않을 테니까. 어쨌든 기회가 있을 때 우정이라는 술에 듬뿍 취해보고 싶었다. 현영도 지웅도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수만은 없다. 영원한 우정? 그건 소설책에나 나오는 말이다. 상황이 바뀌고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멀어지기 마련이다. 그 거리에 익숙해질만 하면 또 다시 멀어지는 것. 그게 우정이고 인생이 아닌가? 지금은 이대로이고 싶다. 할 수 있을 때 흠뻑 취하고 싶은 생각 뿐이다.
결국 이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다시는 지웅을 안 만나려고 다짐했었다. 울진에 다녀온 후, 수많은 밤을 눈물로 지샜다. 이럴 순 없는 거라고, 아무리 지웅의 상황이 급박해도 자신에게 이럴 순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얼굴은 흥건이 젖어버린다. 서러웠다. 그리고 슬펐다.
은행도 나가지 않았다. 딜링룸 자체부터 시작해, 컴퓨터, 책상, 의자 필기구까지 모두가 지웅을 생각나게 하는 것들이었다. 잊으려면 확실히 잊어야 했다. 그리고 생각보단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남들처럼 연예편지 한 장 받아보지 못했다. 선물다운 선물 한 번 없었다. 흔하디 흔하다는 꽃도 다른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집에만 있으면 쉽게 잊혀질 것 같았다. 적어도 윤희의 방엔 지웅의 흔적이 없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정도였다.
그렇게 다짐했었다. 지웅이라는 남자, 자신과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다. 사랑하고 헤어지는 일, 누구나 하는 일이다. 단지 자신만 겪는 일은 아니다. 살아가면서 한 번쯤 지나는 관문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더욱 성숙해질 수도 있을거라 믿었다.
그런데 자신은 지금 지웅의 앞에 있다. 다소곳하게 선이라도 보러 나온 양 얌전하게도 앉아있다. 지웅이 다른 말을 했던 것도 아니다. 단지 전화로 집앞 커피숍이라는 말만 했을 뿐. 그런데 그 말만 듣고 부리나케 뛰어나와 버렸다.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게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 쯤 아무렇지 않았다. 지웅이 지금 앞에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는 생각 뿐이다.
"예뻐진 거 같아"
그 말에도 얼굴이 붉어진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기보다는 행복하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욱 한심스러워보인다.
"이젠 안전해요?"
"그래서 이렇게 윤희 앞에 있잖아"
차마 웃음까진 보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면 자신은 죽을 때까지 이 남자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히죽히죽 웃음이 나온다. 너무 좋다. 그 동안의 슬픔이야 지금 지웅을 만나는 기쁨을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 뿐.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가만히 머리 속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본다. 이런 게 사랑인 듯 싶다.
왜 왔어요? 그러면서 튕겨 볼 생각도 있었다.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한 번 쯤은 그러려고 마음 먹었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웃음만 계속 흐른다.
"은행은 안 나가고 있어?"
"예"
지웅은 담배를 하나 물었다. 그런 것들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윤희가 은행에 나가지 않는 것, 방 안에 처박혀 밖으로 나다니지 않는 것. 모두가 자신 때문이다. 이 여자가 뭘 하든 자신은 가만히 지키고 바라봐 주는 게 지금 할 일인 것 같다.
"앞으로......"
"잘 할게요. 제가 너무 소심하게 굴었죠? 지웅씨 힘든 거 다 알면서. 너무 조급했었어요. 하지만 이제 지웅씨가 옆에 있으니까 힘든 거 하나도 없을 거예요. 그렇죠?"
앞으로 시간을 많이 못 낼거야. 그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윤희가 지웅의 말을 잘랐다. 그렇다고 윤희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진 않았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희가 수줍게 웃는다.
이젠 한청련에 전념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게 정상이다. 태림도 현영도. 호준이나 한청련 사람들, 그리고 윤희까지도 그리 걱정할 일은 없다. 현영이 직장을 못 구한 게 염려라면 염려랄까. 나머진 원활하다. 그렇다고 나태해질 순 없다. 지금이 더욱 열심히 움직여야 할 때다. 유비무환이라고 했다. 지금이야 말로 자신이, 청년이 열심히 움직여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나라사랑
한청련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지웅의 의도대로 매스미디어의 힘을 빌린 한청련은 이제 전국민의 머리 속에 자리잡았다. 방송에서는 한청련, 아니 그것보다는 지웅을 다룬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신문과 라디오는 호소문을 내보냈다.
정부에서는 실직자를 줄이기 위해 48만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대학을 졸업 못하고 전전긍긍했던 수많은 고학력 미취업자들이 한 시름 덜게 되었다.
단지 그것 뿐은 아니다. 청년들은 더 이상 주저앉지 않았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더 좋은 실력을 기르고 있었다. 당장의 상황에 급급하지 않고 멀리 내다보며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각각의 아이디어로 승부한 것이다. 그 효과는 당장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더욱 힘차게 정진했다.
더 이상 한국의 청년들은 기성세대가 우려하는 힘없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그동안 누려왔던 대학생 우월주의에서 탈피했다. 대신 학생이라 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입이 쑥 들어갈 정도로 힘있는 모습을 보였다. 잘 해서가 아니다. 뭐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신념을 보였기 때문이다.
고졸자나 미학력자들도 피해의식에서 벗어났다. 대학생들보다 몇 년 일찍 사회로 진출한 노하우를 살렸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전문적인 기술을, 능력을 키워나가고자 열심히들 노력했다. 학생들과의 경쟁이 아닌,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싶어했다.
당장 눈에 띄지는 않는 현상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는 누구나 느끼고 있었다. 모두가 한 번 해보려는 의지를 불태웠다. 이대로 쓰러질 수 없다는 각오를 되새겼다.
지웅의 희망대로 청년들이 웅크렸던 가슴을 활짝 편 것이다. 한청련의 활동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그럴만큼 한총련이 눈이 부신 활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지웅이 원했던 것처럼, 청년들은 이미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2년에 걸친 IMF 관리체제, 그로 인한 아버지의, 어머니의 한맺인 눈물, 끝없이 이어지는 일본의 만행, 여기저기 피멍이 든 우리 국민들의 가슴. 충분히 보아왔다.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보아 온 것이다.
이젠 알고들 있다. 뭐가 옳은 길이고 그른 길인가를, 왜 우리의 힘이 약하고 항상 주위 열강들의 입김에 흔들려 왔는지를. 그리고 이젠 더 이상 그런 모습을 갖고 싶지 않았다. 훨훨 털어버리고 싶었다. 당장에 뭔가를 이뤄내겠다는 조급한 마음도 갖지 않았다. 그래서 실패한 많은 경우를 지금껏 신물이 나도록 접해 왔지 않은가? 그래서, 그래서 조금씩 힘을 키우고 있었다.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는, 바위섬처럼 파도와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짜증내던 젊은이들이 아니었다. 지금껏 충분히 겪은 수모. 그 수모를 다시는 겪지 않고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새로운 도약을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새 천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지금 당장의 성과를 바라지 않았다. 10년이고, 20년이고 언젠가 정말 자신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 할 그날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다음 주는 다들 일주일 정도 시간 비워놔"
오랜만의 만남. 벌써 얼굴들이 많이 그을려 있었다. 벌써 7월. 여름 햇살이 지웅과 태림, 현영의 얼굴에 잔뜩 흔적을 남겨 놓았다.
"왜? 여행이라도 가려고?"
"그래"
지웅은 새로운 캔을 하나 따서 마셨다. 거의 1년만에 태림의 신문사 옥상낙원으로 올라들 왔다. 시원해질대로 시원해진 캔맥주를 한보따리 들고 말이다. 이젠 없을 줄 알았던 천막은 아직도 든든하게 햇빛을 막아주고 있었다. 1년만의 정취. 작년과는 또다른 기분이다. 작년에는 짜증과 걱정과 한탄이 섞인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지금은 기쁨과 만족, 그리고 희망이 섞인 맥주를 마시고 있다.
"어딜 가게 일주일이나 걸려?"
태림에겐 조금 부담이 된다. 아무리 취재라고 해도 사나흘을 넘기긴 힘든 일이다. 게다가 현영도 이제 입사한지 일주일째. 두 사람 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내기는 어려워보였다.
"나보고 회사 그만 두라는 소리구만"
"그러고 보니 힘들겠네"
지웅도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태림은 어떻게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현영이 문제다. 어쩔 수 없이 현영은 빠져야 할 것 같다.
"도대체 어딜 가려고 그러는데?"
일단은 알고 봐야겠다는 듯 현영은 지웅을 캐묻는다. 지웅이 한 번 빼본다. 그러나 이내 실토하고 만다. 현영의 표정이 너무 절실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엄마아빠가 자신을 떼어 놓고 놀러갈 때의 서운하고 간절한 표정.
"이 좁은 땅덩어리에 아직도 나뉘어 있는 곳이 있잖아"
그제서야 태림이 눈치를 챘다. 현영은 아직도 모르겠다는 듯 지웅을 보챘다.
"그게 어디냐고?"
"부산에서, 그리고 광주에서 떠나는 거야. 지역감정 해소 국토순례. 일주일 코스로 걷는다. 목적지는 화개장터"
한반도가 가장 먼저 풀어야 할 숙제 중의 하나는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것이다. 지웅은 그 동안 한청련 활동을 하면서 청년들 사이에서도 지역감정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랬다. 그리고 실망했다. 적어도 청년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왔었다. 그러나 전라도와 경상도라는 커다란 벽은 지웅이 생각했던 것 보다 단단하고 완고했다. 그들이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도 간단했다. 자신들의 아버지가, 어머니가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게다가 이 나라 정치인들은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어려서부터 줄곧 보아왔다. 우리끼리는 뭉쳐야 한다고. 그 소리는 뭔가? 저 쪽하고는 별개라는 소리가 아닌가? 땅덩어리가 얼마나 크길래 나라를 몇쪽으로 갈라놓으려 했단 말인가?
그래서 지웅은 한청련의 두 번째 행사로 국토횡단을 준비했다. 부산에서 출발한 사람들과 광주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중간지점인 화개장터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지역감정이 해소될 리 없겠지만, 그 행사에 참가하는 사람이라도, 혹은 그 행사를 지켜보는 사람이라도 지역감정을 떨쳐버리길 바랬다. 지금은 안 될지라도 그 자식들은 지역감정이라는 말을 모르고 살기를 바랬다. 적어도 교과서에 지역감정이라는 말이 사라지길 바랬다.
"자식이 일주일만에 회사를 때려치우게 만드네"
현영이 두 번째 캔을 땄다. 까짓거 회사는 안 나가면 그만이다. 이런 멋진 행사에 참가하지 않고선 평생을 후회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가지마라"
태림이 현영을 말렸다. 힘들게 얻은 직장이다. 현영이 몇 번이나 자존심을 꺽어가며 얻은 직장이다. 그런데 그런 직장을 때려치우려고 한다. 그래봤자 말을 들을 현영이 아니라는 거 잘 안다. 그래도 조금은 말리고 싶은 기분이 든다.
"얘가 또 이상한 소리 하네. 임마, 그런 자리에 내가 안 끼면 누가 끼냐? 안그러냐 지웅아?"
지웅이 웃어보인다. 하긴 그런 자리에 현영이 빠진다는 건 너무 섭섭한 일이다. 나라를 위한답시고 목숨까지 잃을 뻔 했던 현영이다. 그런데 나라사랑의 의미를 새기자고 하는 행사에 빠져서야 되겠는가? 지웅은 현영을 순례단에 포함시키고 싶었다. 물론 직장이 염려가 되긴 한다. 하지만 이 행사를 알게 된 이상 현영은 직장에 있더라도 행사 생각으로 아무 일도 못할 것이다.
"같이 가자. 한 사람이라도 더 참가했으면 좋겠어. 지역감정이라는 거 몇 년 내로 해결될 만한 게 아니야. 어떤 사람들은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거라고 주장하더라구. 게다가 최근들어 수십년동안 정권에 의해 양쪽 지역이 난도질 당했잖아. 그래서 한 번 해보고 싶다. 우리라도 정치인들에게, 어른들에게 호소해 본다는 기분으로"
"그래, 하자.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그런 행사라면 일주일이라도 휴가낼 수 있다. 신문사에서도 별 소리 안할거야. 가서 밀착취재를 해 온다고 하면 허락할거야"
태림도 점점 몸이 달아올랐다. 기사는 둘째치고라도 정말 직접 참여해보고 싶은 행사다. 지역감정이라. 지웅이 거기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다. 기꺼이 동참하고 싶다. 우리끼리 힘을 모아도 열강에 맞서긴 버거운 상태다. 그러나 서로가 등을 돌리고 있으면 더욱 힘들어지는 건 뻔한 일이다. 무조건이다. 이번 행사는 무조건 참석해야 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술이 참 맛있다. 이렇게 시원하고 짜릿한 술을 마셔본지도 꽤 오래된 것 같았다. 나라가 점점 좋은 모양으로 변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비온 뒤의 땅이 더욱 단단해진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이 민족, 너무 많은 비를 맞았다. 땅이 마르기도 전에 세찬 비바람에 온 몸이 젖었다. 마음이 젖었다. 이젠 단단히 굳어지길 바래본다. 더 이상 비를 맞지 않아도 충분히 단단하게 다져보고 싶다.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되기
지웅은 행사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동훈과 광수, 영민도 빠진 것이 없나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한청련 집행부에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 그 동안 자진해서 찾아온 사람이 여섯이나 됐다. 이젠 사무실이 제법 비좁을 지경이다. 지웅까지 총 열 명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우선 부산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을 1진, 목포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을 2진으로 나눴다.
지웅은 부산에서 1진과 함께 출발할 계획이다. 그리고 이틀을 함께 걸은 후, 목포에서 출발한 2진과 사흘째 되는 날 광주에서 만날 계획이다. 2진과도 이틀을 동참한 후 자신은 화개장으로 먼저 가서 대원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마지막 일주일 되는 날, 동서가 화합하는 어울마당을 치를 생각이었다.
삼천여명의 사람들이 동참하길 원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서울을 비롯한 중부권만 아니라 전라도, 경상도 사람들 모두가 모여들었다. 심지어는 제주도 사람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지역감정 해소라는 염원을 가지고 동서횡단을 준비하고 있었다.
동훈은 1진에서, 광수와 영민은 2진에서 행군하기로 했다. 새로운 여섯 명의 사람들도 세명씩 나누기로 했다. 동훈과 광수가 각 대장을 맡는다. 천오백명의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통솔이 원활해야 한다.
이동차량은 두 대. 응급차량과 식사차량을 동시에 소화해야 한다. 차량이나 식사들 모두 자원봉사를 받았다. 그 두가지 뿐이다. 더욱 많은 후원을 해주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거절했다. 그 정도면 족했다. 차량들은 지금 현지에서 대기 중이다.
태림과 현영은 벌써 부산과 목포로 내려가 있었다. 본부와는 별개인 일개 대원으로 참가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지웅이 아니었더라도 충분히 참가하고 싶은 행사다. 자신들도 몸소 지역감정 해소라는 소망을 이루는 데 보탬이 되고 싶었다.
"다들 준비 됐어요?"
마지막으로 준비상황을 확인했다. 사무실밖에는 두 대의 승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짐을 챙겨서 나가려고 하는데 동훈이 머뭇거렸다.
"잠깐만 좀 기다려 줄래요? 아직 준비 안 된 게 있어서"
사람들이 짐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동훈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세 시를 지나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나타나지 않는다.
"무슨 일이예요?"
지웅이 묻는다. 자신이 알기론 모든 준비는 다 이루어진 상태였다.
"저, 그게"
동훈이 말을 못하고 머뭇거린다.
"누구 올 사람이라도 있어요?"
"왔어요. 왔다구요"
동훈이 펄쩍 뛰며 문으로 뛰어갔다. 광수와 영민도 환호성을 질렀다. 윤섭이었다. 지웅도 윤섭에게 달려갔다.
"어떻게 된거예요?"
동훈이 지웅의 질문을 대신 받았다.
"집행유예로 풀려났어요. 일본의 만행이 확인되기도 했고, 살인 동기는 애초부터 없었으니까요.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것 보다 이렇게 만나는 게 더 반가울 거 같아서요"
"아무튼 정말 잘 됐어요. 반가워요. 그동안 고생 많았죠?"
지웅이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윤섭이 힘차게 지웅의 손을 잡았다.
"제기, 이런 거 있으면 나한테도 연락을 해 줘야 할 거 아니예요. 누군 뭐 지역감정이 계속 남아있길 바라나?"
윤섭이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지웅이 윤섭의 등을 두드렸다. 이제야 꽉 찬 느낌이다. 그동안 꽤 허전했다. 윤섭을 이렇게 만나고 나니 그 어느때보다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이제야 다들 짐을 들고 사무실을 내려갔다. 그리곤 두 대의 승합차에 올라탔다. 한 쪽은 동훈이 한 쪽은 광수가 운전을 한다. 지웅은 동훈의 옆자리에 앉았다. 윤섭도 1진에서 행군하기로 했다. 서로가 엄지 손가락을 내 보였다. 두 대의 차가 동시에 부산으로, 목포로 움직였다.
서서히,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지웅은 광안리에 모인 천오백명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잔뜩 기대를 하고 있는 표정들이다. 저 사람들의 소망이 제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쯤 목포에 있는 사람들의 소원도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저 태양처럼 그들의 소원도 하나일 터. 비록 보는 위치는 달라도 같은 태양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이제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도 저 태양처럼 같은 나라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는 곳은 달라도 우린 같은 한국인이다.
30개로 나뉜 각 조 조장들이 사람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반도와 태극무늬가 새겨진 머리띠와 `하나되기' 라는 마크가 새겨 있는, 두 사람이 손을 마주잡고 함께 걷는 그림이 담긴 배지를 나누어 주었다. 모두가 들뜬 마음으로 머리띠를, 배지를 달았다. 이 곳 부산에서 출발하는 1진은 대부분이 전라도 사람들이었다. 2진은 역시 경상도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지웅이 출발하기 전에 단상에 올랐다.
"먼저 이렇게 어려운 여정에 동참할 용기를 내 주신 삼천여 대원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대한민국은 굉장히 좁은 땅을 가졌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땅은 수십년 동안 지역감정이라는 큰 벽에 가려져 그나마도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제 여기 모인 여러분의 염원대로, 그리고 지금 목포에서 출발하는 사람들, 또한 이 자리에 직접 참가하진 못했지만 멀리서 마음으로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내딛으려 합니다. 저기, 저 태양을 보십시오. 저 태양은 분명히 하나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도 하나입니다. 저 태양을 바라보는 곳이 다르듯, 살고 있는 곳이 다르다고 해서 태양이, 대한민국이 두 개 일수는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힘든 날이 이어질 것입니다. 다들 무사히 화개장에 도착하길 바랍니다. 많은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함께 걸으며, 땀을 흘리며 느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화개장에서 만날 그 날까지 서로 손을 잡아줍시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모두가 낙오 없이 어울마당을 치뤄봅시다"
천오백명의 환호성이 광안리 해변을 가득 메웠다. 모두가 들뜬 표정이었다. 굉장히 힘든 행군이 될 것이다. 날씨도 도와줘야 일주일 안에 화개장에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쯤이야 웃으면서 이겨낼 표정들이다. 그것보다 더욱 절실한 것이 저들에겐, 대한민국 국민에겐 지역감정 해소인지도 몰랐다.
기수를 선두로 해서 천오백의 사람들이 광안리를 빠져나갔다. 길고 긴 꼬리를 물고 있는 행군이었다. 지웅은 기수 바로 뒤에서 걷고 있었다. 어서 화개장에 도착하고 싶었다. 그래서 목포에서 출발한 사람들과 만나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지역감정을 허물어버리고 싶었다.
행군은 무사히 진행되고 있었다. 부산을 출발한 1진은 창원을 거쳐 마산을 지났다. 그리고 지웅은 광주로 향했다. 2진 그룹 역시 큰 사고 없이 행군을 이어오고 있었다. 광수와 영민을 만나보았다. 진행에 별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지웅은 2진 그룹과 함께 화순을 거쳐 순천으로 향했다. 이미 언론을 통해 동서횡단 소식을 들은 주민들은 젖은 물수건 등을 준비해서 대원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1진도 진주를 지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런 여정이면 목적한 날에 화개장에서 축제를 벌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웅은 영민과 함께 화개장으로 향했다. 1진에서 행군을 하던 한청련 집행부 사람도 먼저 빠져나왔다. 여남은 사람들은 대원을 맞을 준비를 했다. 화개장은 축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장터 사람들은 서로가 돼지를 잡겠다며, 떡을 내놓겠다며 아웅다웅 했다.
출발 일주일 째. 지웅은 아침부터 대원들 맞을 준비를 했다. 주민들도 함께 어우러져 장터를 깨끗하게 치워놓았다. 축제를 위해 쓰일 몇 마리의 돼지들이 한 쪽에 묶여 있었고 `하나가 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라고 쓰인 프랜카드가 동쪽과 서쪽에 하나씩 붙어 있었다.
방송국과 신문사에서도 동서횡단을 취재하기 위해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그 동안 이동카메라도 1진, 2진과 동행해 왔었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 축제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벌써부터 아웃라인을 그려보고 있었다.
지웅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30여분 남았다. 대원들이 도착하기로 한 시간은 여섯시. 마음이 설레여 온다. 동서화합을 꿈꾸는 자들이 지금 이곳으로 모이고 있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동쪽에서 북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곧이어 서쪽에서도 북소리가 울린다. 왔다. 드디어 대원들이 도착했다. 양쪽에서 함성이 울린다. 그리고 그 함성은 점점 가까워졌다. 두 개의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되기'. 화개장터에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모인 사람들이 하나로 뭉치고 있었다. 서로가 처음 보는 사이들이다. 그런데도 만나자마자 얼싸안고 원을 그리며 빙빙 돈다. 여기저기 원이 만들어졌다. 그 동안의 피로도 이미 싹 잊은 듯 싶었다. 다들 입가엔 웃음꽃이 피었다. 주민들이 준비한 사물놀이패가 흥을 돋워주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서로들 춤을 춘다. 화개장을 어울마당으로 만들고 있다.
동훈을 비롯한 한청련 집행부 사람들이 지웅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다들 얼굴이 까맣게 탔다. 건강해 보인다. 너무나 고마웠다. 무사히 화개장까지 와 주었다. 모두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가슴이 벅차다.
"수고들 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모두가 한소리로 외쳤다. 정말 모두들 수고했다. 생각같아서는 한청련 사람들 모두를 한 번씩 안아주고 싶었다. 아니, 삼천명 모두를 한 번씩 안아주고 싶었다. 그 정도로 고맙다.
동훈이 눈치를 주자 지웅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냥 그대로 놔두고 싶었다. 사람들이 흥에 가득 차 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가 너무들 행복한 표정이었다.
지웅이 단상에 오르자 사람들이 자연스레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기쁜 표정으로 지웅을 바라보았다.
"수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우선 힘찬 함성을 한 번 질러보는 게 어떴습니까?"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함성을 질렀다. 메아리가 몇 번이고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지웅도 조금은 흥분한 상태다. 도저히 저런 모습을 보고 차분하게 있을 순 없었다.
"여러 말을 안 해도 여러분들이 걸어오면서 많은 것을 느꼈을 줄로 믿습니다. 너무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열정 버리지 말고 우리들의 동생에게, 자손들에게 물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머지 않아 대한민국은 진정한 하나의 민족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자, 이제 그동안의 피로를 확 떨쳐버리세요. 어울마당을 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떠나갈 듯한 환호성. 사람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싸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춘다. 모두가 그들을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화개장터에 모인 사람들, 그리고 TV화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축제를 벌이고 있는 저 삼천명의 청년을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 더할까?"
어느새 현영이 지웅을 찾아왔다. 현영의 얼굴도 많이 그을었다. 무척 보기 좋았다.
"수고했어"
지웅이 밝게 웃으며 현영을 끌어안았다. 오늘만큼은 정말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자식이 못 본 사이에 호모가 됐나, 왜 끌어안고 난리야?"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만 있다.
"잘 있었나 친구들!"
태림 역시 얼굴이 검게 그을었다. 흰 이만 더욱 빛나보였다.
"잘 있었지 친구!"
현영이 태림과 하이파이브를 나눈다. 나이 서른이 넘은 녀석들도 지금만큼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모양이다.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아보인다. 그런 흥분은 적어도 평생 가시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자. 가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어보자"
지웅이 현영과 태림을 잡아 끌었다.
"좋지. 대신 다음엔 백두산이랑 한라산에서 동시에 출발하는 거다. 그래서 판문점에서 만나는 거야. 그리고 판문점을 허물어버리는 거야. 맘에 들어?"
횡단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현영도 지웅의 말마따나 지역감정이란 거 무엇보다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횡단 도중 얼핏 떠오른 생각. 동서화합 후 납북화합까지 이룰 수 있다면 지금보다 몇 배로 보람찬 순례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맘에 들다마다. 현영이 니 말대로 다음엔 남북종단을 한 번 해보자. 우리가 더 늙기 전에 분명히 기회가 올거야. 그 때 다시 한 번 해보는 거다. 세 사람, 지금처럼 모이는 거야"
모두가 어울마당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곤 사람들의 속에 묻혀 춤을 추었다. 원을 돌았다. 지역감정이 없어지길 바라며, 현영의 말대로 남북에서 출발해 판문점을 헐어버릴 그날을 바라며......
1999. 8. 15.
"고맙다"
지웅이 호준을 껴안았다. 도저히 그러지 않고선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혼자 외롭게도 싸워왔다. 그리고 지금 일본을 무너뜨릴 바이러스를 완성해 냈다.
"이게 나쁜 짓은 아니겠지?"
호준이 조심스레 지웅의 얼굴을 바라본다. 아무래도 바이러스를 치무시키는 게 조금은 떳떳하지 못하다는 자책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수용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리고 호준 자신도 당할 뻔했다. 게다가 한국을 집어삼키려던 일본이었다. 그런 나라에 바이러스를 침투시키는 건 죄가 아니다. 응징이라고 해 두고 싶었다. 한국을 깔본 죄에 대한 대가라고 할 수 있었다.
"걱정마. 이보다 더한 짓을 해도 너한테 손가락질 할 사람 아무도 없어"
누가 감히 호준에게 손가락질 할 수 있겠는가? 손가락질을 하기는커녕 기립박수라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일본의 만행을 수없이 당해왔으면서 한 번이라도 반발해 본 적이 있었던가? 없다. 가만히 당해오기만 했었다. 그런데 지금 호준이 일본에 대한 응징을 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누군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호준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상이라도 내려줬으면 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직도 호준을 보고 있노라면 지웅의 마음은 찹찹해진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호준이 수용의 죽음 이후 굉장히 작아져 있었다. 언제나 어깨가 움츠려져 있었고 말 소리 또한 조용조용했다. 적어도 호준에 대한 지웅의 빚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야 갚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Y2K는 안 될 거 같다. 나 혼자만의 실력으론 부족해"
"됐어. 이 정도만 해도 너무 훌륭하다. 더 이상 욕심부리지 마. 이것만 해도 넌 한국 최고야"
호준의 어깨를 다독였다.
"한 번에 두 가지 바이러스를 모두 침투시킬게. 그래야 내 속이 좀 풀릴 거 같다"
지웅이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호준의 속이 풀리긴 바랬다. 그리고 지웅 자신의 속도 풀렸으면 좋겠다. 어쨌든 일본의 전산망이 마비된다면 그들도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 꼴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었다.
"나가자. 애들하고 술이나 한 잔 하게"
호준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아직 할 게 남아있어. 더 강력한 바이러스를 만들어야지. 저 바이러스를 해결하더라도 한국을 넘볼 수 없도록 혼쭐을 내 줄거야. 또 한 번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하면 곧바로 바이러스를 침투시켜 버릴거야. 북핵이 바로 그런거잖아? 미국이나 일본이 북한을 함부로 다루지 못하는 게 그거 아니겠어? 핵을 보유하고 있을까봐. 그래서 그 핵을 자신의 나라에 빵 쏴버릴까봐. 나도 그러고 싶어. 일본을 무너뜨릴 바이러스를 만들어 놓을거야. 벌이 말이지. 사람들이 벌을 무서워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침을 가지고 있어서 벌을 무서워 한다고"
지웅이 가만히 호준을 쳐다보았다. 저렇게 움츠린 어깨의 사내가 자신의 가슴을 마구 두들겨 놓고 있다. 다시는 한국을 넘볼 수 없도록 만든다고 했다. 사람들이 벌을 두려워 하듯, 일본이 한국을 두려워할 무기를 만든다고 했다.
"이 바이러스, 공개적으로 침투시킬 수 있을까?"
"그래. 그러자"
이번엔 한국이 선공을 한다. 몰래 침투시키는 것도 아니고 선전포고를 한 후 바이러스를 침투시킬 것이다. 물론 정부에서는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지웅은 한청련 사람들과 의논해 볼 생각이다. 그래서 되도록 한청련의 이름을 걸고 바이러스를 침투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이 무릎을 꿇도록 만들고 싶었다. 극우파라는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염원일 수도 있었다. 선제공격. 지웅은 모험을 준비하려 했다.
"좋죠. 그거야 무조건 찬성이지"
역시 윤섭은 지웅의 말에 팔을 걷어붙이고 동의를 했다.
"하지만 한청련이 해체할 지도 모르는데요?"
동훈이 조금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지웅도 그게 걱정이 되서 이렇게 의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정말 완벽한 바이러스라면......"
광수가 말을 꺼냈다. 그리고 영민이 받았다.
"반만년의 복수 앞에선 한청련 해체 쯤은 각오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요?"
단호한 표정이다. 모두가 긴장하고 있다. 한청련의 이름을 걸고 일본의 전산망을 마비시키는 바이러스를 침투시킨다. 너무 위험한 모험이다. 하지만 영민의 말처럼 수천년을 이어온 민족의 자존심이다. 그 동안 당해왔던 수모와 치욕의 응징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의 표정을 살폈다. 다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청련이 없어지더라도 청년은 살아있다. 그리고 그 청년들은 이미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한 번 쯤은 일본을 공격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았다. 어쩌면 저 하늘나라에서 수많은 영혼들이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억울하게, 비참하게 최후를 맞은 우리의 조상들이......
"좋아요. 한청련의 이름을 걸고 공개적으로 침투시킵니다"
1999. 8. 15.
일본의 전산망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정부의 중앙 시스템을 비롯한 은행과 각 기업들 그리고 산업시설들을 통제하는 모든 전산망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한국은행의 전산망이 완전 마비되었듯이 이번엔 일본 열도 전체가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모니터는 일본 열도가 조금씩 침몰하는 그림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었다. 그리고 그림 위에는 `한청련의 이름으로' 라고 씌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두 손을 놓고 있어야 했다. 일을 할 수 없었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망연자실 전 일본 국민이 넋을 잃은 모습이었다.
오부치 총리는 부랴부랴 김대통령을 찾아왔다. 이미 전화를 몇 번이나 해봤지만 김대통령이 미리 차단한 상태였다.
김대통령 역시 벌써 지웅을 만난 후였다. 지웅은 김대통령을 찾아가 이미 모종의 허락을 받은 상태였다. 김대통령은 지웅의 말을 못 들은 것으로 해 주었다. 그리고 지웅이 집무실을 나갈 때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각하. 제발 부탁입니다. 저희 전산망을 원래대로 회복시켜 주십시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모든 전산망이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학교도 병원도 은행도 직장도 모두가 손을 놓고 있습니다. 벌써 몇 명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분명히 그 바이러스에 나와 있습니다. 한청련의 이름이라고 그랬습니다. 한국 청년들이라고 그랬습니다. 각하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부치 총리가 애절한 표정으로 김대통령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선뜻 대꾸를 하지 않았다.
"각하. 정말 이러실 수 있는 겁니까? 다른 나라들의 눈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한국이 이런 짓을 하고도 외교를 계속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건 대학살입니다. 세계평화에 역행하는 행위란 말입니다"
언제부터. 일본이 언제부터 세계 평화를 걱정하고 있었는지. 김대통령이 껄껄 웃었다.
"물론 전 세계인이 한국에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그들보다도 우리 청년들이 더 두렵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더욱 무섭단 말입니다. 일본을 용서한다면 국민들이 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나라의 대통령입니다. 그렇다고 저 혼자의 힘으로 이나라를 좌지우지 한다고 생각지는 마십시오. 이 나라는 제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것입니다. 저는 단지 이 나라 주인들의 분노를 살까 그게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김대통령 역시 이나라의 국민이었다. 그리고 이나라의 주인이었다. 임기 직후부터 일본의 만행을 생생하게 접해 왔다. 그리고 그로 인해 국민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봐 왔다. 물론 모든 나라가 지금 한국의 행동에 대해 손을 들어주지 않을 지도 모른다. 자신 역시 조금만 냉정해지면 당장이라도 일본의 전산망을 회복시키라고 명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이 강하다는 것을 철저히 느끼고 난 후라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힘을 깨닫게 해 준 후라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하. 지난 어업협정을 모두 취소하겠습니다. 다시는 다케시마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각하"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돌아가 계십시오. 국민들에게 물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김대통령은 오부치 총리를 뒤로 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오부치 총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한시가 급했다. 늦으면 늦어질수록 사상자가 더욱 늘어날 뿐이다. 엄청난 경제적 손실이 오게 되는 것이었다.
결국 다음 날 정오를 기해 바이러스는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어업협정 완전 파기와 독도는 한국 영토라는 오부치 총리의 선언문이 있은 후였다.
물론 이 날도 54주년 패망 기념일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 해에 다시 패망 1주년 기념일을 가져야 할 것이었다. 이번만은 한국에게 일본이 패하고 말았다.
세계의 언론은 한국을 탓하고 넘어지지만은 않았다. 이미 그들은 도청 테잎으로 인해 일본의 만행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한국의 응징에 대해 옳다 그르다 말을 삼갔다.
한청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없었다. 모두가 한청련을 묵인했다. 묵묵히 한청련의 행동에 만족하고 있었다.
지웅은 동훈에게 한청련 의장직을 넘겼다. 몇 달 동안의 행적으로 드러났지만 자신은 한청련 의장직을 맡고 있기엔 극단적인 모습을 자주 보였다. 의장이라는 직분으로 있기보단 평생 늙지 않는 청년으로 한줌의 보탬이 되고 싶었다.
"저희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건 의장님이 더욱 잘 알고 계실텐데요?"
동훈의 표정이 애절하다. 사임이라니. 말도 안 된다. 그림자가 되고 싶을 정도로 존경하고 인정하는 한청련 의장 나지웅이다. 그러나 그가 이제 한청련 의장이라는 직함을 버리려고 한다. 보통사람 나지웅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
"염병, 모처럼 든든한 사람 믿고 일 좀 해보려 했더니만. 에이"
윤섭 역시 서운함을 금치 못한다.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에도 지웅을 원망한 적이 없었다. 그정도로 지웅을 믿었었다. 광수와 영민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나보단 동훈씨가 더 잘할거예요"
할 말이 없다. 여기서 어떤 말을 해도 구차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떠나고 싶었다. 그게 자신이나 한청련에게 편할 것 같았다.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은 터. 어떤 일이 생겨도 마음을 돌리긴 어렵다. 그렇다면 서로가 웃으며 헤어지는 게 최선의 방법. 그러나 막상 부딪히고 나니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아직 우리 중에, 아니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의장님만큼 한청련을 이끌어나갈 사람은 없어요. 한국의 청년을 대표할만한 사람은 없다구요"
"아, 자식. 그만 보내드려 임마. 싫다는 사람 뭐하러 붙잡으려고 그래? 의장은 사람 아니야? 의장도 의장 나름대로의 삶이 있어야 될 거 아니야. 적어도 한 번쯤은 자신을 위해 살아볼 기회를 줘야지"
그말 한마디면 끝이다. 지웅도 자신을 위해 한 번쯤은 살아봐야 하지 않냐는 윤섭의 말에 다들 할말을 잃었다. 물론 다들 알고는 있었다. 자신의 삶이라고는 애초부터 없었던 사람. 그에게 그런 기회를 주는 건 어쩌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가요. 갈 때 가더라도 소주나 한 잔 합시다. 그만 두는 건 맘대로 할 줄 몰라도 가는 건 내 허락받고 가요. 그럴거죠?"
윤섭이 지웅의 팔을 끌었다. 지웅이 웃으며 윤섭을 따랐다. 고마운 사람. 동훈도 기운을 내서 힘차게 말한다.
"그래, 가자. 뭐 완전히 떠나기야 하겠니? 필요할 땐 언제고 도와주실거야. 그쵸 의장님?"
아직은 의장님이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언제나 의장이라 부르고 싶다. 적어도 동훈에게 지웅은 언제나 의장이다. 한청련 의장이다.
모두가 슬픈 듯 기뻐하며 술을 마셨다. 추억을 회상하는 듯 미래를 확신하며 술을 마셨다. 어떤 말도 가슴에 와닿지 않고 그냥 흘려버릴 수도 없는, 그런 밤이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이야, 이게 누구야. 팀장님 여기 누가 온 줄 알아요?"
지웅이 빠꼼히 딜링룸 문을 열고 들어가자 경헌이 놀라며 큰소리로 반겼다. 세열 역시 지웅의 모습에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어째, 이제 제자리로 돌아온거야?"
세열 역시 반가운 듯 미소를 띠며 물었다.
"예, 저 아직 자리 하나 있을까 하구요. 실업자라서 당장 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지웅은 엄살을 부리며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
"아, 당연하지. 지웅씨 자리 저기 그대로 있잖아. 컴퓨터도 의자도 지웅씨 쓰던 서류들까지 그대로 두었다고. 거봐요, 내 뭐랬어요. 언젠간 돌아올거라고 했지"
경헌이 세열을 향해 입술을 삐죽 내밀다가 다시 지웅에게 물었다.
"그래, 이제 완전히 돌아온거지?"
경헌이 한참동안 지웅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지웅이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야말로 환호성을 지르며 다시 한 번 지웅을 반겼다.
"다시 시작해보자고. 한국은행 딜링룸의 파워를 보여줘야지"
세열이 지웅의 등을 두드렸다.
"죄송해요"
지웅이 그동안 자리를 비운것에 대한 사과를 했다. 그러나 모두들 손을 내저었다. 오히려 돌아와준 것이 고마울 따름이라며 지웅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저, 그리고"
지웅이 뒤를 돌아보았다. 윤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야, 이거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뜨겠는 걸?"
경헌의 입이 아예 귀에 걸렸다. 윤희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왔다.
"아 참. 유부남 둘이 있으니까 사무실 분위기가 영 아니네요. 하여튼 안된다니까. 청소 좀 하고 살아요, 청소 좀"
윤희가 팔을 걷어붙이고 사무실을 정리했다. 경헌이나 세열 모두가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이젠 된 거다. 다시는 지웅이나 윤희 두 사람 다 사무실을 나갈 일이 없을 것이다.
지웅의 환영식은 정말 축제 분위기였다. 은행 앞 생맥주집에서 모인 그들은 어떻게들 알고 왔는지, 행장을 비롯해 고위 간부와 옆 사무실 직원들까지 지웅과 윤희의 복귀를 축하하는 사람들을 수차례나 만나고서야 자신들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웅씨 정말 너무했어. 그 동안 둘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야, 이건 네 사람이 같이 근무해도 스퀘어 유지할까 말까였는데 둘이서 하는 동안 적자도 꽤 많이 났다고"
다시 딜링룸으로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막상 지웅 자신도 직업을 택하려니 마땅한 것이 없었다. 뻔뻔스러운 줄 알면서 다시 딜링룸을 찾았다. 윤희 역시 지웅이 설득해 데리고 왔다. 적어도 딜링룸에 진 빚도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니 많지도 않은 나이에 여기저기 빚도 많이 지고 산 것 같다.
"앞으론 힘들거예요. 제 실력으로 딜링을 해야 하니까. 그 땐 오히려 경헌 선배한테 많은 도움 청할거예요. 부탁 좀 드릴게요"
"그럼, 그럼. 폐일언하고 앞으로 멋지게 승부를 걸어보자고. 팀장님. 그렇죠?"
"대신 다음 주에 아시아 딜러모임에 두 사람 다 참석하도록 해요. 그래서 새로운 얼굴들도 익히고, 혹시 신혼여행 갈 일 있으면 나한테 먼저 말하고. 신혼여행은 홍콩이나 미국으로 한 달 연수를 보내줄 테니까"
"그래주시면 좋죠"
윤희가 세열의 말에 대꾸했다. 이제야 윤희도 예전의 생기발랄함이 느껴진다. 지웅을 쳐다보곤 방긋 웃는다.
"좀 이른 거 아니야?"
현영은 서운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지웅이 한청련 의장을 맡아주길 바랬다. 태림도 마찬가지로 지웅의 탈퇴소식에 내심 못마땅한 표정이다.
"나라는 놈이 한청련 의장직을 맡는다는 거 자체가 이른 일이었어. 아직은 많이 모자라"
"니가 모자라면 우리는 가서 콱 죽어버릴까?"
현영이 퉁명스레 내뱉는다.
"나중에 또 기회가 오겠지. 그 때가 되면 이렇게 조급하게 움직이지 않고 충분히 여유있는 승부를 하고 싶어. 그래서 물러나고 싶고"
조금은 피곤하다. 그래서 탈퇴한 이유도 없지 않다. 그렇다고 나라를 잊은 건 아니다. 언제나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지웅의 가슴 가장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단지 아직도,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라를 위해 뭔가를 하기에는 부족하다. 충분히 뒤를 돌아본 후에 그만한 실력이 되었을 때 당당히 나서고 싶었다.
어느 정도 시국이 수습되긴 했다. 다른 모든 청년들이 자신의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마찬가지. 지웅 역시 자신의 힘을 더욱 키우고 싶었다.
"에라, 난 모르겠다"
현영이 두 손을 들어보였다. 섭섭하긴 하지만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진 않았다. 그대로 끝은 아닐테니까. 녀석 언젠간 더욱 화려한 모습으로 일어설 것이다. 그거 하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은 있어?"
태림이 조심스레 묻는다.
"뭐가?"
"딜링 말이야. 너 사이비 딜러였잖아"
지웅이 풋 하고 웃는다. 사이비 딜러. 정말 그랬다. 그래서 더더욱 한청련을 탈퇴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기도 할 겸. 속임수로 승부하는 게 아닌 정당한 능력으로 승부하는. 적어도 이젠 그런 실력을 가져야 한다. 지웅 자신이나, 대한민국이나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맞붙든 정당하게 이길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기회다.
"걱정마. 그 정도 자신은 있으니까 다시 딜러의 길로 들어서는 거야. 그리고 나도 먹고는 살아야지"
"하기사, 우리들도 이젠 먹고 살 일을 무시할 수 없는 나이다. 에고 내신세야"
현영이 하소연을 한다. 하나되기 행사에 참가하면서 직장을 내팽겨쳤다. 그리고 최근에 다시 직장을 구했다. 자신의 말처럼 이젠 앞 뒤 안가리고 덤벼들 나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은 말자. 청년이 나이가 어려서 청년이냐? 푸른 마음을 가져야 청년이지"
지웅의 말에 현영과 태림 모두 생각에 잠긴다. 청년. 언제까지 그 말이 친숙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푸른 마음이라. 그 말을 듣고보니 기분은 좋다. 푸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청년일 수 있다. 그정도는 어렵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들이 들었다. 세 사람 모두가 언제나 청년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행 대강당에는 아시아 각국에서 찾아온 딜러들로 꽉 찼다. 매년 열리는 아시아 딜러 모임이 한국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지웅은 윤희와 함께 각국에서 모여든 딜러들과 안면을 트고 있었다. 홍콩에서 온 딜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한 사나이가 지웅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지웅씨죠?"
지웅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반갑다는 듯 거친 손을 내밀었다. 야마모도였다.
"굉장히 유능한 딜러라는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친해졌으면 좋겠네요"
야마모도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지웅에게 관심이 많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유능하기는요. 아직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제야 좀 제대로 배워보려고 하는걸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지웅은 친절히 인사하고는 다른 은행에서 온 딜러들을 만나러 다녔다.
아시아 딜러 협회 회장의 연설이 끝나고 파티가 열렸다. 각국에서 온 딜러들은 저마다 마련한 연회복으로 갈아입고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윤희는 화사한 이브닝 드레스를 하고 있었다. 지웅 역시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생각보다 쉽진 않다. 다시 처음부터 뭔가를 시작하려 한다는 거 절대 만만해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좋은 기회라고 하지 않는가? 적어도 그 말이라면 살아오며 수십번은 느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이런 건 처음이죠?"
지웅이 고개를 끄덕인다.
"난 두 번짼데. 그러고 보니까 이젠 지웅씨한테 딜링 안질 거 같은데요?"
그럴 것이다. 이젠 윤희가 자신을 가르쳐야 할 지도 모른다.
"잠깐만"
"왜요?"
"손좀 씻고 오려고"
지웅이 사람들 틈을 비집고 파티장을 나갔다. 그리고 한 사내가 바로 쫓아나갔다.
아무래도 미련이 남는다. 막상 이렇게 딜러모임에 참가 하고 나니 찹찹한 기분도 든다. 지웅은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담배를 물었다.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꽤나 어색해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딜링을 끊은지 벌써 1년이 넘었다.
연회장으로 오려고 하는데도 동훈에게 전화가 왔었다. 거의 매일이다싶을 정도로 안부전화를 한다. 다음 주에는 이런 행사를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번 사건은 어떻게 흘러갈 거 같으냐 하며 지웅을 졸라댄다. 그럴때마다 지웅은 동훈 스스로의 판단이 가장 옳을거라고 말했다.
그만 두긴 했지만 아직까지 한청련에서 벗어나진 못하고 있는 셈이다. 고문이라고 해 두면 될까? 지웅도 그다지 나쁘게 생각하진 않았다. 솔직히, 한청련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은 아직 남아있다. 그러나 당장의 충동으로 제자리걸음을 할까봐, 그게 두려웠다.
담배를 재떨이에 버리고 얼굴을 씻었다. 지난 추억들에 너무 묻혀있는 것도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힘을 기를 때. 그 생각뿐이다. 딜러로서 정당하게 승부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더욱 낳은 실력을 키웠을 때. 그 때에 다시 한 번 도전하리라 마음을 먹어본다.
윤희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지웅이 나간지 10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윤희가 비명을 질렀다. 이제야 생각났다. 조금 전 지웅과 인사를 나누던 사람, 분명히 야마모도였다. 1년 전 지웅이 수감되었을 때 찾아왔던 야마모도가 틀림없었다. 주위를 둘러 야마모도를 찾아보았다. 보이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린다.
"탕- 탕-"
두 발의 총소리가 들려왔다. 파티장은 금새 혼란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함께 온 딜러들을 찾으러 뛰어다녔다. 무전을 듣고 달려온 경찰관들은 총소리가 난 곳이 어딘지 여기저기 찾아다녔다.
윤희는 움직일 수 없었다. 불안감이 극도로 스치고 지나갔다. 비어있는 지웅의 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지웅이 나갔던 문을 쳐다보았다. 설마, 설마 했다. 그리고 천천히 사람들이 웅성대며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입술을 꼭 깨물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갑자기 발걸음이 멈춰진다. 화약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비좁은 틈 사이로 누군가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인다. 용기가 나질 않는다. 도저히 확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주먹을 꽉 쥐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꺄악-"
윤희는 그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화장실 안에는 지웅과 야마모도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경찰은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경찰 중의 하나가 지웅과 야마모도의 맥박을 짚어보았다. 그리곤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야마모도는 이번 아시아 딜러 모임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일본을 망하게 만든, 그들을 무참히 짓밟아놓은 지웅을 처치하기에 딱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야마모도는 화장실로 들어간 지웅을 바라보며 마시이가 떠올랐다. 지웅을 제거하기 위해 한국으로 간다고 했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이지 말라고 했던 자신의 말도 떠올랐다.
그 때, 제거했어야 할 것을, 죽였어야 할것을.
야마모도가 천천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마침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라도 지웅을 없애야 했다. 한국인의 영웅을 없애야 했다. 야마모도는 숨을 들이마셨다. 손을 씻고 있던 지웅은 아무런 낌새를 채지 못했다. 그저 야마모도가 화장실로 들어섰을 때, 고갯짓으로 아는체를 했을 뿐이었다.
야마모도가 지웅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제 된 것이다. 진정한 일본의 원수를 제거한 것이다. 마시이가 떠올랐다. 마시이도, 그랬을테지. 자신의 배를 칼로 찌르면서 그렇게 생각했을 테지. 이제 가장 큰 걸림돌을 제거했다고. 야마모도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을 제거했다고. 이제 와타나베든 누구든 자신보도 낳은 누군가가 한국에게 당한 수모를 갚아주리라고. 마시이가 죽어갔을 때과 같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에 역시 방아쇠를 당겼다.
여의도 광장에서부터 시작한 지웅의 상여는 광화문까지 이어졌다. 여의도 광장에서 만여명으로 시작된 지웅의 죽음을 애도하는 상객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수록 많아져, 광화문에 도착할 때 즈음에는 30여만명에 이르렀다.
태림은 지웅의 영정을 들고 앞장섰다. 그 뒤를 현영, 호준, 윤희, 경헌, 세열, 동훈, 윤섭, 광수, 영민 등 같이 뜻을 펼쳤던 사람들이 따랐다. 대통령 역시 지웅의 죽음을 애도하는 말을 전했고, 국립묘지에 지웅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한국의 청년들은 슬퍼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웅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웅은 영웅도, 위대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저 이 나라의 청년이었을 뿐이었다. 푸른 마음을 잃지 않았던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는 청년으로서 할 일을 다 했을 뿐이다. 그런 청년의 죽음에 그다지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누군가의 입에서 나지막히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옆의, 또 그 옆의 사람들이 따라 불렀고, 30만의 입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소리내지 않았다. 애국가의 의미를 나라사랑의 의미를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제 한국의 청년들은 무엇을 해야 하며, 어디로 가야할 지를 알고 있었다. 우리 스스로를 지킬 것이고, 우리가 우리를 낮추지 않을 것이며, 비굴하게 고개숙이지 않을 것이며, 떳떳할 수 있도록 힘을 키울 것이다. 대한의 건아가 될 것이다.
비록, 지웅은 죽었으나 청년의 가슴에, 국민의 가슴 한 구석에 그의 뜻은 영원토록 새겨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