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이슈운지-러브레터
러브레터(Love Letter)
[이와이 슈운지(岩井俊二) 지음]
가슴속에 묻어둔 사랑이 찾아옵니다.
2년 전 하늘로 떠난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세상을 떠난 연인에게 보낸 배달될 리 없는 러브레터.
거기에서 시작되는 기묘한 관계, 추억, 그리고 사랑.
일본 연인들의 심금을 울린 영화 「러브레터」의 원작 장편소설로 첫사랑의 아픔이 아련하게 밀려드는 수채화 같은 사랑 이야기.
■ 이와이 슈운지(岩井俊二) ? ? ? ? ? ? ? ? ? ?
1963년 1월 24일 출생. O형. 물병자리. 미야기현 센다이시 출신. 87년에 요코하마 국립대학을 졸업한 후 음악 비디오와 CA TV에 관련된 일을 시작했다.
91년 본격적으로 드라마의 각본, 연출 활동을 개시. 많은 단편 드라마가 심야 프로그램 추종자들 사이에서 크게 평판을 받았으며 업계내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93년 후지 TV의 황금시간대에 ?if?만약에?의 한편인 ?불꽃놀이-아래에서 보는가? 옆에서 보는가??를 발표하였고 TV 드라마이지만 94년 일본영화감독협회 신인상을 수상했다.
94년 야마구치 토모코, 토요카와 에츠시 출연의 극장 단편 작품인 ?Undo?를 일주일 동안 심야에 상영한다. 거의 선전하지 않았지만 극장이 연일 만석이 되는 등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월간 카도가와에 소설 ?Love Letter?를 연재. 95년 3월에는 극장용 제1작품인 나카야마 미호, 토요카와 에츠시 주연의 ?Love Letter?가 공개되어 3개월간의 롱런을 기록하였고 많은 영화상을 수상했다.
96년 6월에는 차라(chara)와 아사노 타다노부 주연의 ?피크닉?이 공개되었다. ?피크닉?은 96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 포럼 부분에 출품되어 베를린 신문 독자 심사위원상을 수상. 그 해 가을에 의욕적인 장편 작품인 ?스왈로테일?을 발표한다. 엔타운이라는 가상의 도시를 무대로 사람과 돈 그리고 사랑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스케일이 방대한 작품이다.
97년 9월에는 최초로 본격적인 환타지 장편 소설 ?월러스의 인어?를 출판. 『수루인(水樓人)=호모 아쿠아리스』라는 가설을 대담한 해석과 스토리로 집결하여 화제가 되었다. 10월에는 영화에 관한 첫 에세이집 ?트래쉬 바스켓 씨어터?를 발표. 97년에는 「피크닉」으로 98년에는 「4월의 이야기」로 부산국제영화제 최고의 인기 감독이었던 그는 신영상파 감독으로 불리며 현재 소설가와 영화감독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1
후지이 이츠키(藤井樹)가 죽은지 2년이 지났다.
그리고 3월 3일의 두 번째 기일(忌日). 히나마츠리 여자아이의 명절로 매년 3월 3일에 지내는 일본의 전통 풍습. 제단에 일본 옷을 입힌 작은 인형 등을 진열하고 떡이며 감주, 복숭아꽃 등을 차려놓음.
인 그날, 코베에는 드물게 눈이 내렸다. 언덕배기에 있는 공동묘지도 눈 속에 묻히고 검은 상복 위에도 하얀 눈이 얼룩을 만들었다.
히로코(博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색의 하늘에서 끊임없이 내리는 하얀 눈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눈덮힌 산에서 죽은 그가 마지막으로 본 하늘도 이렇게 아름다웠을까.
?그 애가 뿌리는 것 같구나.?
그렇게 말한 것은 이츠키의 어머니인 야스요였다. 원래대로라면 히로코의 시어머니가 되어 있을 사람이었다.
향을 올릴 차례가 되었다.
무덤 앞에서 손을 모으고 새삼스레 그와 마주한 히로코는 이상하게도 평온한 기분으로 있는 자신에게 놀랐다. 세월이라고 하는 게 이런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히로코는 좀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무정한 여자라서 미안해요.)
히로코가 꽂은 향은 잠깐 동안 가느다란 연기를 올렸지만 한 송이의 눈이 그 끝에 닿아 불을 꺼버렸다. 그것이 히로코에게는 그의 장난처럼 여겨졌다.
가슴이 메였다.
향을 올리는 동안 히나마츠리에 쓰인 뜨거운 감주가 돌려졌다. 참가자들도 갑자기 시끌시끌해지더니 찻잔으로 온기를 채우면서 제각기 세상사는 잡다한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그 대부분이 이츠키의 친척들이다. 그리고 이츠키에 관해 충분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이기도 했다. 그의 묘를 앞에 두고 있으면서 그에 대한 화제는 거의 없었다. 워낙 말이 없어 사귀기 힘든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닐 것이다. 아직 젊었는데 말이야. 그들에게는 그 정도밖에 화제가 없는 고인이었다.
?나는 단걸 싫어해. 술 없어? 술!?
?나도 그 쪽이 좋아.?
남자들의 무례한 주문에 이츠키의 아버지인 세이이치(精一)가 맞장구를 치며 야스요를 불렀다.
?야스요! 당신 그것 좀 가져와. 청주 있지??
?지금요? 어차피 나중에 실컷 마실 거잖아요.?
?됐어, 됐어. 공양, 공양!?
언짢은 얼굴을 하고 야스요는 청주를 가지러 뛰어갔다.
이렇게 해서 눈속에서 술자리가 시작되자 청주 한 병으로는 부족해지고 잇달아 날아온 한 되들이 병들이 눈 위에 늘어섰다.
?히로코씨…….?
갑자기 말을 걸어온 쪽은 이츠키의 산악부 후배들이었다. 아까부터 구석 쪽에서 어색한 듯이 모여 있던 것은 히로코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츠키의 동료, 그와 함께 산에 올라 그만 혼자 두고 하산한 중요한 산악 멤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선배님들, 오늘은 자택 근신중이랍니다.?
?모두 아직까지도 죄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아키바(秋葉) 선배는 그 후 한번도 산에 오르지 않았답니다.?
아키바는 이츠키와 가장 친한 친구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등산의 리더이기도 했다. 벼랑에서 떨어진 이츠키를 내버려둘 결심을 한 것도 그였다. 장례식 날, 아키바와 산악 동료들은 이츠키의 친척들로부터 참가를 거부당했다. 그때는 누구나 감정이 격해 있었다.
?산의 규칙은 산 위에서만 통용되는 거야!?
친척 한 사람이 아키바 일행에게 그렇게 호통을 친 것을 히로코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말한 당사자는 과연 기억하고 있을까. 지금 저기서 술잔을 돌리며 떠들고 있는 이들 가운데 있을 텐데.
?모두 와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뇨…….?
후배들은 말끝을 흐리며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한 사람이 넌지시 가르쳐 주었다.
?사실은요, 선배들이 오늘 밤에 몰래 성묘를 올 계획 같아요.?
법요(法要)가 끝난 후에는 음식점에서 술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자 눈속에서 추위를 견디던 사람들이 단번에 인내력을 잃은 듯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 쪽으로 뛰어내려갔다. 히로코도 권유를 받았지만 술자리를 사양했다.
주차장에서 막 차에 시동을 거는데 세이이치가 따라와 창을 두드렸다.
?히로코, 미안하지만 가는 길에 이 사람 우리집까지 좀 태워다줘.?
돌아보니 야스요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어머, 왜 그러세요??
?갑자기 머리 아프다는군.?
세이이치는 문을 열어 야스요를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아야야야야! 그렇게 세게 밀면 아프잖아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제부터 진짜 바빠질 때에. 일생 도움이 안 되는 여자라니까.?
야스요를 야단친 세이이치는 히로코에게 미안한 듯이 웃어 보였다. 그러는 세이이치의 등에 술취한 친척 한 명이 달라붙었다.
?나루오, 벌써 취했나??
아냐, 하고 손을 젓는 남자의 다리는 이미 비틀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차안에 있는 히로코를 발견하자 차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술냄새가 차안에 가득했다.
?오, 히로코양, 이었던가??
?이봐!?
세이이치가 황급히 당황해서 남자를 차에서 떼어냈다. 끌려가면서 남자는 돌아가지도 않는 혀로 노래를 불렀다.
?아가씨, 잘 들~어요, 산 사내에게는 반~하~지 말아요.?
?바보 같은 놈!?
세이이치는 남자의 머리를 때리면서 히로코에게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익숙지 않은 눈길을 천천히 미끄러지면서 히로코의 차는 공동묘지를 뒤로 했다.
?아버님도 고생이시군요.?
?아냐, 고생스런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야.?
차안의 백미러로 야스요를 보자 언제 두통이 있었느냐는 듯 멀쩡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오늘도 이제부터 밤새 떠들고 놀 판이잖아. 그게 즐거운 거야, 결국은. 그렇지만 너무 기쁜 얼굴을 하고 있으면 그것도 꼴 사나우니까 괜히 저렇게 바쁜 척하는 것뿐이지. 모두 다 그래. 공양, 공양이라고 말만 하지 그 핑계로 술을 마시고 싶은 거라구. 그 사람들은.?
?어머니, 머리는??
?응??
?꾀병이에요??
히로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라고??
?아뇨…….?
?뭘? 히로코.?
?모두 여러 가지 꿍꿍이 속이 있구나, 싶어서요.?
?모두? 모두라니??
?아키바씨네요.?
?아키바가 어쨌는데??
?뭔가 꾸미고 있나 봐요.?
?뭘??
그러나 히로코는 그 다음을 모호한 웃음으로 얼버무려 버렸다.
차는 스마(須磨)에 있는 후지이가(藤井家)에 이르렀다. 야스요의 부추김으로 히로코는 같이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어두컴컴했다. 뭔가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한 그런 인상이었다.
거실에는 인형이 놓여 있지 않은 텅 빈 히나단 히나마츠리에 쓰이는 제단.
이 있었다. 칠하지 않은 나무상자가 옆에 쌓여 있어 뚜껑을 열어보니 천황?황후 모양의 인형 한 쌍이 들어 있었다.
차를 날라온 야스요는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꺼내놓기는 했는데 말이야, 오늘 행사 준비도 있고 해서 미처 장식하지 못했어.?
그리고 두 사람은 그때부터 히나 인형 히나마츠리 날 히나 제단에 올려놓는 인형.
을 놓기 시작하였다. 히로코가 알고 있는 히나 인형에 비하면 여기에 있는 것은 겉보기에도 훨씬 크고 디자인도 고풍스러웠다.
?정말 훌륭한 인형이군요.?
?오래 되었지. 증조모 대에 이미 있었다고 하니까.?
야스요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 인형들은 며느리를 들일 때마다 물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역대 며느리들의 생애와 함께 해를 거듭해 왔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의 몇 명인가는 분명 그 묘지에서 그와 함께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히로코는 조그만 빗으로 인형의 머리를 빗겼다.
?한 해에 한 번밖에 바깥에 나오지 못하니까 분명 오래 살 거야, 이 아이들은.?
그렇게 말하며 야스요는 인형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이츠키의 방문을 열었다.
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했던 이츠키의 방은 유화 캠버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히로코는 책꽂이에서 스케치북 한 권을 빼들어 책상 위에 펼쳤다. 어느 페이지고 낯익은 그림이었다. 그리고 어느 그림이고 지나간 날들의 내음이 났다.
히로코는 그림을 그리는 이츠키를 옆에서 보고 있는 것이 좋았다. 지금은 유품이 되어 버린 그것들을 보고 있자 잊고 있던 시간들이 되살아났다. 오트슨지 위를 달리는 연필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았다.
회상 속에 있는 히로코를 야스요의 목소리가 깨웠다.
?얘, 이것 좀 봐라, 이거.?
야스요가 책꽂이에서 발견한 앨범 한 권을 히로코에게 건네 주었다.
?아, 졸업앨범.?
그것은 이츠키의 중학교 졸업앨범이었다.
……오타루 시립 이로나이 중학교.
?오타루에 사셨군요.?
?그래, 오타루. 그 다음에 요코하마. 그리고 하카다, 그리고 고베.?
?좋은 곳에만 사셨군요.?
?살아보면 어디나 똑같지.?
?정들면 고향이라잖아요.?
?그럼, 정들면 고향이지. 오타루는 정말 조용하고 좋은 곳이었어.?
?어디쯤이에요? 오타루의.?
?어디였더라? 그렇지만 이젠 없어. 국도가 되어 버렸거든.?
?그래요. ……아, 있다.?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에 히로코는 중학시절의 그를 발견했다. 학급 단체사진에서 벗어난 곳에 혼자만 원 안에 있는 것이 그였다. 그 풍모는 히로코가 아는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전학을 했단다, 졸업하기 전에.?
?그렇지만 전혀 안 변했네요.?
?그래??
야스요가 앨범을 들여다보았다.
?지금 보니 왠지 불길한 사진 같구나.?
그리고 두 사람은 학급 사진 속의 중학생들 얼굴을 하나하나 짚어갔다. 야스요는 학생복의 소년들을 상대로 그 나이에 이 아이가 귀엽구나, 내 취향이야, 라고 말해서 히로코를 웃겼다.
?첫사랑의 상대도 있겠지.?
야스요는 그렇게 말하면서 여학생들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짚어 나갔다. 그리고 한 여자를 가리켰다.
?어머나, 이 아이, 히로코를 닮지 않았니??
?네??
?혹시 첫사랑의 아이??
?이 친구가요??
?첫사랑의 그림자를 쫓아간다고 하잖아, 남자라는 건.?
?그래요??
?그럼.?
히로코는 앨범에 얼굴을 갖다대고 유심히 보았지만 어디가 닮았는지 알 수 없었다.
히로코는 그 외에도 그의 사진이 없는가 하고 페이지를 넘겼다.
?이츠키씨, 클럽활동은 뭘 했어요??
?육상부.?
히로코는 육상부의 사진을 찾았다.
?있다, 있다.?
그것은 단거리 달리기 사진이었다. 이츠키가 발을 헛디뎌 구르는 순간에 셔터가 눌러졌다. 좀 한심한 사진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이군요.?
사진 아래에 코멘트가 들어 있었다. <후지이의 라스트 런!> 본인에게는 안됐지만 히로코는 우스워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나자 야스요가 일어섰다.
?케이크 먹을래??
?괜찮아요.?
?맛있는 건데.?
?네, 그럼 주세요.?
야스요가 방을 나간 후에도 히로코는 앨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디에 찍혀 있을지 모르는 그를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정성껏 찾았다. 마지막 페이지의 명부조차 놓치지 않았다. 히로코는 그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어갔다.
?후지이 이츠키…… 후지이 이츠키…….?
그리고 손가락 끝이 그 이름을 짚었을 때, 히로코 마음속에서 기묘한 아이디어가 반짝였다.
히로코는 그의 책상에서 펜을 빌려 손바닥에 쓰려고 했지만 퍼뜩 생각을 고쳐 소매를 걷어올리고 하얀 팔 위에 그 주소를 베껴 적었다.
……오타루시 제니바코 2정목 24번지.
케이크와 홍차를 들고 야스요가 들어왔을 때에는 히로코의 하얀 팔은 이미 가디건 아래 감춰져 있었다.
?뭘 꾸미고 있는 거니??
야스요의 목소리에 히로코는 깜짝 놀랐다.
?예??
?아키바 일행. 뭔가 꾸미고 있다며??
?네?…… 아아, 오늘 밤에 야간 습격을 한대요.?
?야간 습격??
?밤에 몰래 성묘를 간대요.?
?오, 그래!?
야스요는 놀라면서도 어딘가 기쁜 듯했다.
?그럼 그 아이도 오늘 밤은 잠을 못 자겠구나.?
그날 밤, 아키바네가 아마 자신들의 계획을 감행하고 있을 무렵 히로코는 이츠키에게 부칠 편지를 썼다. 보낼 곳은 예의 왼쪽 팔에 쓴 주소였다.
만약 야스요가 말한 대로 국도가 되어 있다면 절대 배달될 리가 없다. 어디에도 갈 곳 없는 편지. 어디에도 가지 못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이 세상에 없는 그에게 부친 편지니까.
후지이 이츠키님.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낸답니다.
? ? ? 와타나베 히로코
이것이 편지의 전문이었다. 많이 생각하여 몇 장이고 편지지를 뭉쳐 버린 끝에 쓴 편지가 겨우 이것뿐이라는 것이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웠지만 짧은 것이 깨끗해서 히로코는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분명 그도 마음에 들어할 거야.)
히로코는 그 편지를 밤에 나가 근처 우체통에 넣었다. 그것은 우체통 바닥에 툭 하는 소리를 내며 어이없이 떨어졌다.
이것이 후지이 이츠키의 기일에, 히로코 나름대로의 행사였다.
그쳐 가는 눈은 아직 팔랑팔랑 밤하늘에서 춤추고 있었다.
2
그 이상망측한 편지가 날아온 것은 3월 초의 일이었다. 그날은 초기 감기가 드디어 본격화하여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잰 체온계가 38도 5부를 기록한 날이기도 했다. 직장인 시립 도서관에 전화를 한 나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침대에 파고들어가 다시 잠을 청하여 자고, 늦은 아침 식사 후에는 거실에서 세 번째 잠을 즐겼다. 그 기분 좋은 잠을 방해한 것은 집배원의 고물 오토바이 소리였다.
집배원인 도시미츠(利滿)는 뭐랄까, 여자를 보면 말을 걸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듯한, 뇌수(腦髓)의 밀도가 옅어 보이는 남자다. 그리고 예의 톤이 높은 목소리가 때로 내 신경을 거스르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처럼 몸의 컨디션이 몹시 나쁠 때는 특히 그렇다. 그런데 판단력이 둔해져 있던 그날의 나는 그런 것을 깡그리 잊고 멍청하게도 무방비한 차림새로 문을 열어 버렸다. 무방비한, 이라고 하는 것은 빗질하지 않은 푸석푸석한 머리라든가 얼굴 반을 가리고 있는 큰 마스크라든가, 가디건 아래의 파자마라든가, 뭐 그런 것이다. 그런 차림의 나를 문 저편의 도시미츠는 놀람 반, 기쁨 반의 눈길을 하고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어? 오늘은 있었군!?
샌들을 신던 나의 두 발이 멈췄다.
(아차!)
몽롱한 머리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오늘 쉬는 날??
?…….?
?감기 걸렸나? 마스크를 하고.?
?…….?
?올해 감기는 지독하대.?
나로서는 시침 뚝 떼고 통과하려고 했던 작전이었는데 이대로라면 이 인간은 언제까지고 지껄이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용기를 내서 우편함까지 뛰었다.
?저기, 극장표가 생겼는데 말야, 같이 안 갈래? 토요일쯤.?
도시미츠가 뭔가 소리치고 있었지만 듣지도 않고 나는 우편함에서 우편물을 꺼내자 재빨리 유턴하여 단숨에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아! 이츠키양!?
상관하지 않고 나는 문을 닫았다. 이 짧은 왕복도 지금의 내게는 힘든 운동이었다. 심장의 고동이 심해져 나는 엉겁결에 현관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것도 전부 도시미츠 탓이다. 그 도시미츠가 이번에는 현관벨을 몇 번이고 누르기 시작했다. 나는 분노를 억누르며 인터폰으로 향했다.
?……예, 뭐예요??
?이츠키양! 편지 떨어뜨렸어.?
바깥의 큰소리가 인터폰 소리와 겹쳐서 들렸다. 그 목소리는 칭찬을 받고 싶은 아이처럼 괜히 들떠 있다.
?아, 미안해요. 우편함에 넣어주세요.?
도시미츠의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철책을 여는 둔한 소리가 났다.
(멋대로 들어오지 마란 알이야!)
내 마음의 절규와 상관없이 도시미츠는 집안으로 불법침입한 끝에 현관문을 쾅쾅 두들겼다.
?이츠키양! 편지!…… 편지!?
도시미츠는 몇 번이나 문을 두들기면서 편지! 편지! 하고 외쳤다.
현기증을 느끼면서 나는 한 번 더 샌들을 신고 문을 열었다. 눈앞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도시미츠는 왠일인지 등을 돌려 정원 쪽으로 공손히 절을 하고 있었다. 누구에게 머리를 숙이는가 싶었더니 우리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정원의 장미 뜰에서 그 위엄 있는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을 젓자 덩굴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당신이 큰소리를 질러서 그렇잖아요.?
?미안. ……아, 이것, 떨어뜨렸어.?
도시미츠는 한 통의 편지를 내밀었다. 그리고 큰 입을 벌리고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러브레터??
이런 타입의 조크, 요컨대 아무것도 아닌 모든 사건을 연애 짓이나 성적인 심벌에 대입하는 타입의 조크에 대해 나의 몸은 생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메커니즘으로 되어 있다. 거의 반사적으로 왼손이 편지를 빼앗아 들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른손이 문을 잠그고 있는 식으로 내 몸은 반응하였다. 문 저편에서 도시미츠는 일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채, 큰 입을 떡 벌리고 섰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우편물을 분류하여 자신의 것만 빼고 나머지는 부엌 테이블에 올려놓고 이층에 올라갔다. 내 앞으로 온 편지는 한 통뿐이었다. 즉 도시미츠가 주운 그 한 통이다. 보낸 사람을 보니 전혀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와타나베 히로코.
주소는 고베시로 되어 있다.
……고베의 와타나베 히로코.
고베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아마 내 인생에서 처음 접촉하는 것일 게다. 알고는 있지만 알고만 있을 뿐인 지명이다. 그런 고베의 와타나베. ……와타나베 히로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우선 나는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편지지가 한 장. 그 한 장의 편지지를 본 나는 뭐랄까, 순간 머리 속이 하얗게 되었다고나 할까, 좀 설명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졌다.
후지이 이츠키님.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낸답니다.
? ? ? 와타나베 히로코
이것으로 전부였다.
?……뭐야, 이건??
그것은 의미불명을 넘어 거의 무의미한 영역에 이른 것이었다. 뭔가 생각하려고 해도 머리 속의 하얗고 텅 빈 공간이 그저 흐려지기만 할 뿐이었다. 분명 열이 있는 탓일 게다. 나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버렸다.
?와타나베 히로코, 와타나베 히로코, 와타나베 히로코와타나베히로코와타나베히로코…….?
주문처럼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반추해 보았지만 뇌리에 되살아날 희미한 기억조차도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수수께끼 같은 편지였다. 무엇보다 너무 단순한 것이 이상했다. 내 경우, 트럼프에서도 세븐 브리지는 특기 중의 특기였지만, 도둑잡기는 어쩐 일인지 언제나 패했다. 그런 내 약점의 중심을 파고들어온 듯한 편지라고 하면 조금 알기 쉬울지도 모른다.
밖에서 고물 오토바이의 한심한 소리가 났다. 창을 내다보니 이제야 돌아가는 도시미츠의 모습이 언뜻 담장 너머로 보였다.
이 이상 깨어 있어 봤자 별볼 일 없을 것 같아서 나는 편지를 책상 위에 놓고 다시 침대에 파고들었다.
황혼이 짙어질 무렵 얕은 잠에 들었는데 눈을 뜨니 온 방 안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그래도 침대 속의 편안함에 나는 한동안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 동안에 엄마가 귀가하여 저녁 식사 준비가 시작되었다. 기름이 튀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픈 몸에 기름 요리는 실은데, 하고 생각하는 동안 나는 또 잠속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프라이팬의 기름 소리는 빗소리로 변해 있었다.
빗속에서 나는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다. 중학교의 운동장이다. 달리고 있는 것도 중학시절의 나였다. 흠뻑 젖은 채로 나는 그저 묵묵히 달리고만 있었다. 아아, 이런 짓을 하면 감기 걸리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러나 꿈속의 나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비가 눈으로 바뀌고, 나는 이를 덜덜 떨면서 그래도 계속 달렸다.
눈을 뜨자 땀으로 전신이 젖어 있었다. 그리고 창밖은 정말로 눈이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열시가 넘었고 무정하게도 저녁 식사는 끝나 있었다.
?몰랐어. 위에 있었니.?
퉁퉁 부은 내게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그날 내가 감기로 쉰 것조차 몰랐던 모양이었다.
나는 혼자 식탁에 앉았다. 메인 요리는 생선튀김이었다. 꿈에 비를 내리게 했던 장본인은 접시 위에서 완전히 식어 맛이 없어 보였다.
?뭔가 죽 같은 건 없어??
?네가 만들어 먹으렴.?
?…… 그럼, 됐어.?
그렇게 말하면 엄마가 할 수 없이 어떻게 해주리라는 것을 교활한 딸은 잘 알고 있다. 엄마는 귀찮은 얼굴을 하면서 냄비를 가스렌지 위에 올리고 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상한 편지? 불행의 편지??
?그런 것 같진 않은데.?
막 만들어진 죽을 먹으면서 나는 예의 편지 이야기를 꺼냈다.
?고베의 와타나베. 엄만 혹시 기억나??
?와타나베??
?와타나베 히로코.?
?기억은 못하지만 어디선가 만나 아는 사람이겠지. 네가 잊어 버렸을 뿐일 거야.?
?그런 일 없다니까. 절대 몰라. 와타나베 히로코.?
?…….?
?이상해 그것, 절대로 그죠, 이상하죠, 할아버지.?
나는 옆방의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응, 이상하다.?
듣지 않는 듯하면서도 듣고 있는 것이 할아버지다. 화제에 참가하게 되자 할아버지는 텔레비전 리모콘을 한쪽 손에 들고 느릿느릿 다가왔다.
이것이 후지이가의 풀 멤버이다. 좀 부족한 가족 구성이지만 숨막히지 않아서 딱 좋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뭐라고 씌였던데?? 하고, 엄마가 물었다.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낸답니다, 라고.?
?그리고??
?그것뿐.?
?뭐니, 그거.?
?보고 싶어? 가져올까??
그러나 엄마는 그런 것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이었다. 의자에서 막 일어나려던 내게 엄마가 말했다.
?다 먹었으면 약 먹어라.?
이것으로 편지에 대한 화제는 끝이다. 나는 다시 앉아서 약국에서 산 감기약 병을 열었다.
?병원에 가지 않았니??
?병원에 갈 정도는 아냐.?
?그런 건 감기 초기 때밖에 안 들어.?
나는 모르는 척하고 알약을 업에 던져 넣는다.
?그럼, 내일은 출근할 수 있겠네.?
?음, 그건 좀…….?
?출근 못할 것 같으면 병원에나 가.?
?……병원에 가느니 차라리 가혹한 노동을 택하겠어, 난.?
?무슨 소리 하는 거냐. 하루종일 멍청히 앉아 있기만 하는 주제에.?
엄마가 도서관 일을 그런 식으로 우습게 보고 있다고 생각하자 화가 난다. 그러나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에 변명을 할 수는 없다. 아까부터 리모콘을 들고 우뚝 서 있던 할아버지가 이야기에 끼여들었다.
?이츠키, 편지를 보여줘 봐.?
그런데 내 쪽은 완전히 그럴 의욕을 잃고 난 후였다.
?편지? 뭐하게요.?
?…….?
할아버지는 입을 우물거리면서 거실로 돌아갔다.
낮동안 엄청나게 잠을 잔 그날 밤은 좀 고통스러웠다. 전혀 잠이 올 기미가 없어 나는 침대 안에서 이리저리 뒤척거리기만 하였다. 그런 장난을 할 생각이 떠올랐던 것도 잠들지 못하고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는 나름대로 발군의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여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참으면서 나는 침대에서 나와 책상으로 향했다.
와타나베 히로코님.
저는 잘 지냅니다.
하지만 조금 감기 기운이 있습니다.
? ? ? 후지이 이츠키
정말 장난이었다.
나쁜 마음은 없었다. 아니, 역시 조금은 있었을까.
다음 날 아침 감기는 아직 회복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출근 쪽을 택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병원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예의 편지는 역앞 우체통에 넣었다.
?에취!?
별나게 큰 재채기가 터질 때마다 관내의 관람자들이 나를 훔쳐보았다. 그날의 나는 하루종일 맹렬한 재채기가 열에 휩싸여 주위에 민폐를 끼치고 있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보다 못한 동료 아야코(綾子)가 관장에게 말을 해준 덕분에 오후는 서고(書庫) 정리로 돌려졌다.
?뒤에서 자고 있어.?
아야코는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서고는 서적의 품질관리상 항상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맞추고 있지만 낡은 책들만 모아놓은 그 장소는 역시 조금 곰팡내가 나고 뭔가 보이지 않는 먼지들이 날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정신적인 것인지도 모르지만 일단 그렇게 생각하자 대책 없이 재치기가 끊이지 않고 나왔다. 아야코의 배려가 원수가 되어 버렸지만 손님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면하게 되었으니 그녀의 본의는 달성되었을지도 모른다.
사고 정리 전문인 하루미(春美)가 재치기가 심해서 일이 되지 않는 나의 턱 아래를 가리켰다.
?왜 마스크를 안 하니??
?응??
?그것.?
손으로 더듬자 어느 틈엔가 벗겨놓았던 마스크가 만져졌다.
?여기 책들은 코를 자극하니까 조심해.?
서고 정리 전문인 하루미는 여기서는 ?터줏대감?으로 불리고 있다. 여자임에도 답지 않게 ?터줏대감?이라는 별명이 붙여질 만큼 그녀는 시립 도서관 제일의 기인이었다. 그것은 나도 이해할 수 있지만 넘버 투가 나라는 소문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나의 어디가 기인인가 물으면 어딘지 모르겠지만 어딘가가 기인 같다는 것이다.
?뭐, ?터줏대감?의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말이야.?
그것은 그럴 것이다. 본인한테는 미안하지만 ?터줏대감?과 같은 취급을 당할 수는 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이 인간들 도대체가 무책임하다고.?
?터줏대감?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책을 정리하는 손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누구??
?이 책을 쓴 인간들.?
?뭐??
?여기에 있는 책 말이야!?
좀 강한 어조로 ?터줏대감?은 온 서고의 책을 가리켰다.
?그렇잖아? 이 인간들 자기가 멋대로 써놓고 나중에 두고두고 정리할 우리들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 아냐. 봐, 이 양을, 이 엄청난 양을, 누가 읽니??
그리고 ?터줏대감?은 서가의 책 가운데서 한 권을 빼내더니 내 무릎 위에 던졌다. 『핵폐기물에 미래는 있는가?』라는 제목의 책이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핵폐기물 처리 문제를 논하기 전에 자기 책 뒤처리나 제대로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안 드니??
?그래? ……콜록, 콜록…….?
나는 기침을 하면서 책을 돌려주었다. ?터줏대감?은 그것을 받아들자 안의 한 페이지를 쫙 찢었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터줏대감?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것을 뭉치더니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콜록콜록! 뭐 한 거니, 지금??
그러자 ?터줏대감?은 보라는 듯이 일부러 책을 찢기 시작했다. 서가에 책을 꽂는 작업과 함께 각각의 페이지 한 장을 찢더니 뭉쳐서는 주머니에 찔러 넣는 작업을 반복했다.
?제법 괜찮은 스트레스 해소법이야, 이거.?
?콜록.?
?해보지 않을래??
?콜록콜록…… 무슨 짓을, 콜록, 하는 거야.?
?재밌어.?
?터줏대감?은 좀 잔혹한 미소까지 띄우고 있다.
기침을 하면서 나는 또 그 편지에 대해서 떠올렸다. 솔직히 말하면 우편함에 넣고 난 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그런 짓을 해서 대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만큼의 불안이었다. 일단 그 생각이 머리를 쳐들자 이미 눈앞의 ?터줏대감?의 기이한 행동보다도 내 자기이 저지른 장난의 말로가 더 심각해졌다.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
책을 계속 찢는 ?터줏대감?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소심한 나는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를 하고 있었다.
3
히로코가 그를 만난 것은 전문대 시절이었다. 그는 고베시내의 미대에 다니고 있었으며 유채화를 전공하는 산악부였다. 전문대생인 히로코가 먼저 사회인이 되었고, 그는 후에 고등학교 미술교사가 되었다.
동경출신인 히로코에 있어서 고베에서 대부분의 생활은 그였다. 그와 함께 보낸 날들, 언제나 함께였던 날들, 때로는 혼자 집을 보던 날들, 그래도 그만 생각하였던 날들, 그리고 또 그가 있는 날들, 시간이 멈춰 버리면 좋겠다고조차 생각했던 날들, 그리고 영원히 그가 없는 날들.
그를 산에서 잃고 고베에 머물 이유가 없어진 후에도 히로코는 동경에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돌아오라고 부모님의 권유에 대해서도 이리저리 얼버무리면서 독신 생활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아직 이곳에 있다, 그런 실감에 스스로 깜짝 놀라는 일이 때때로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회사와 맨션을 그저 왕복할 뿐인 매일이었다.
그것은 두 번째 기일로부터 4일째가 되는 토요일 저녁 무렵이었다.
귀가한 히로코가 우편함을 열자 쓸데없는 DM과 팜플렛에 섞여 작은 사각 봉투가 들어 있었다. 뒤에는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없었다. 봉투를 열자 안에 한 장의 편지지가 들어 있었다. 네 번 접은 그 편지지를 편 히로코는 순간, 그것을 자신이 쓴 그 편지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기일날 밤에 쓴 그 편지이다. 어딘가에 갔다가 반송된 것일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내 알았다. 순간의 착각. 그리고 동시에 히로코는 심장이 멈출 것 같아졌다.
와타나베 히로코님.
저도 잘 지냅니다.
하지만 조금 감기 기운이 있습니다.
? ? ? 후지이 이츠키
편지는 그에게서 온 답장이었다. 그러나 설마 그럴 리는 없었다. 누군가의 장난일까? 그 편지를 누군가 읽은 것일까? 어째서 그것이 도착한 걸까? 히로코는 한동안 가슴의 고동을 억누르지 못한 채 그 짧은 편지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었다.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해도, 이것이 그 편지의 답장인 것은 틀림없었다. 그것 자체가 히로코에게는 기적처럼 생각되었다. 어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우연에도 히로코는 그의 숨결을 느꼈다.
(역시 이것은 그의 편지야.)
히로코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한 번 더 편지를 읽어보았다.
히로코는 갑자기 그 편지를 아키바에게 보이고 싶어졌다. 금방 귀가하였을 뿐인 히로코는 다시 코트를 걸쳐 입고 아키바에게 갔다.
아키바는 제임스산 가까이의 유리 공방에서 일하고 있었다. 히로코가 방문했을 때 동료들은 이미 돌아간 후로 아카바 외에는 조수 스즈미(鈴美)만 있었다. 아키바는 마츠다 세이코(松田聖子)의 ?푸른 산호초?(1980년 7월에 발표된 마츠다 세이코의 데뷔 히트곡 ; 옮긴이)를 흥얼거리면서 세공용의 긴 파이프를 돌리고 있었다.
?엇갈릴 뻔했구나, 히로코. 나도 곧 돌아갈 참이었는데.?
히로코의 갑작스런 방문에 놀라면서 아키바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후 아무리 기다려도 그의 작업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아키바는 유리작가라고 자칭하고 있었지만, 평소에는 도매상에 넘겨줄 글라스나 화병을 만드는데 쫓겨 자기 작품을 만들 시간은 거의 거의 없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앞으로 열 개만 하면 돼.?
끝에 물엿 모양의 유리가 붙은 긴 파이프를 돌리면서 아키바는 히로코에게 말했다.
?괜찮아. 천천히 만들어.?
히로코는 금방 만들어 놓은 컵들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무런 모양도 없는 흔한 컵이다.
?여전히 형편없는 것들만 만들고 있지.?
아키바는 일하는 손을 쉬지 않고 말했다.
?학생시절이 좋았지. 좋아하는 작품을 맘대로 만들 수 있고 말이야.?
학생시절에는 학생시절대로 과제에 쫓겨 프로가 되지 않으면 정말 좋아하는 작품 같은 건 만들 수 없어, 하고 투덜거렸던 것을 히로코는 기억하고 있었다.
?선생님, 먼저 갈게요.?
스즈미는 어느 틈엔가 귀가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오!?
?히로코씨, 그럼.?
?조심해 가요.?
스즈미가 없어지자 아키바가 돌아보며 웃는 얼굴로 사인을 보냈다.
?뭐야??
히로코는 시침을 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두 사람만의 신호이다.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응??
?그런 얼굴인데.?
?그래??
히로코는 그것을 얼버무리듯이 아키바의 등뒤를 돌아 방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성묘 다녀왔어.?
?한밤중에??
?어? 어떻게??
?후배들에게 들었어.?
?……그랬군.?
?어땠어??
?성묘??
?응.?
?그런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하니? 좋았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구.?
?그렇구나. 그렇네.?
아키바는 또 한동안 작업을 계속했지만 뭔가 마음에 걸리는지 뒤돌아 히로코를 보았다.
???
히로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키바는 히죽히죽 웃고 있다.
?왜??
?그건 내가 묻고 싶어. 무슨 일 있었지??
?어째서??
?그러니까 그런 얼굴하고 있지.?
?그래??
아키바는 빙그레 웃으면서 끄떡였다.
작업이 일단락되었을 즈음에야 히로코는 예의 편지를 아키바에게 보였다.
?그에게 편지를 썼더랬어. 그랬더니 답장이 왔어.?
그렇게 말해봤자 아키바가 이해할 리 없었다.
?무슨 소리야??
히로코는 아키바에게 처음부터 자세히 설명했다. 그의 집에서 본 졸업앨범의 이야기, 거기서 발견한 옛날 주소, 그에게 쓴 편지, 그
리고 이 답장.
?이상하지??
?그렇지만 이런 분명 누군가의 장난이야.?
?아마 그렇겠지.?
?멍청한 놈. 이렇게 할 일 없는 놈도 있구나.?
?그러나 좀 기뻤어.?
히로코는 정말 기쁜 것 같다. 그러나 아키바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이상한 편지를 썼어? 히로코.?
?응??
?역시 그건가??
???
?잊지 못하는 건가? 그 녀석을.?
?아키바씨는 벌써 잊어버렸어??
?그런 게 아냐. 이봐, 우리 관계는 도대체 뭐야??
?……으음…….?
?응, 히로코!?
아키바는 일부러 심각한 얼굴을 하고 히로코에게 다가왔다. 히로코는 엉겁결에 작은 비명을 질렀다.
?캬악!?
?캬악이 아냐.?
?캬악, 캬악!?
?난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그런 말해도 난 잘 몰라.?
쑥스럽게 웃는 히로코의 입술에 돌연 아키바의 입술이 덮쳐왔다. 히로코는 망설이면서도 이윽고 그것에 응했다.
그가 떠난 2년 동안에 두 사람은 어느 틈엔가 이런 거리까지 접근해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이나 키스를 거듭하면서 히로코는 어딘가 자기가 자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가마의 붉은 불꽃이 보였다. 뺨의 열기는 저것 탓인가, 하고 히로코는 멍하니 생각했다.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한 것은 조수인 스즈미였다. 잊고 간 게 있어서 찾으러 온 스즈미는 뜻밖의 현장을 만나자 입구에서 우뚝 멈춰 서 버렸다.
?아…… 뭐야, 너. 무슨 일이야??
아키바도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었다.
?아, 깜빡 잊고 간 게 있어서 찾으러 왔어요…….?
그러나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하고 있다.
?뭘 잊었는데??
?아뇨…… 괜찮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스즈미는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역시. 들켜 버렸군.?
?어떡하지.?
?할 수 없지, 뭐. 이것으로 기정 사실이 성립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래??
?큰일났다. 스즈미씨에게 소문내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시시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다가 아키바가 말했다.
?그 녀석에게…… 후지이에게 부탁하고 왔어. 성묘 갔을 때.?
아키바의 눈은 진지했다.
?결혼하게 해달라구. 너와.?
히로코는 할 말을 잊었다.
?이제 적당히 그 녀석을 자유롭게 해줘도 되지 않니??
?…….?
?너도 자유로워져야지.?
?…….?
히로코는 편지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후지이 이츠키님.
감기는 좀 어떻습니까?
무리하지 말고 빨리 나으시기 바랍니다.
? ? ? 와타나베 히로코
히로코는 이런 편지를 써서 또 그 주소로 보내 보았다. 안에는 감기약을 동봉하였다. 상대도 분명 여기에는 놀랄 거야. 히로코는 내심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몇 일 후, 답장이 왔다.
와타나베 히로코님.
감기약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대단히 실례입니다만, 당신은 어떤 와타나베씨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부디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 ? ? 후지이 이츠키
후지이 이츠키가 된 이 가짜는 정말 어이없게도 이쪽에 자기소개를 요구하고 있다.
?어떡하지??
하고 말하면서도 히로코는 내심 괜히 기뻤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펜팔친구가 생겨 버렸다. 어쨌든 천국에 있는 그가 붙여준 사람이다. 분명 좋은 사람일 게 틀림없다. 히로코는 이 기묘한 만남을 그와 신에게 감사했다.
그런데 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옛날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미지의 펜팔 친구인 상대가 실은 노인이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을 히로코는 떠올렸다. 그리고 이 편지 주인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할아버지인 경우, 할머니인 경우, 보통 샐러리맨인 경우. 어쩌면 초등학생일지도 몰라. ?당신은 어떤 와타나베씨입니까??라고 시침떼면서 자신은 완전히 후지이 이츠키가 되어 있는 뻔뻔함은 이 게임을 즐기고 있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을 좋아하는 나이라면 학생일지도 모른다. 의외로 초로의 대학교수라면 멋있겠어, 하고 히로코는 멋대로 공상놀이에 빠져 버렸다.
편지를 다시 아키바에게 보이러 갔다.
?감기약 같은 걸 보냈다구? 히로코, 아주 괜찮은 센스인걸.?
그렇게 말하고 아키바는 큰 소리로 웃으며 히로코에게 편지를 건넸다. 아키바의 흥미는 거기까지였다.
?뭐라고 답장을 쓰면 좋을까??
?뭐, 답장? 히로코 또 쓸 생각이야??
?응.?
?뭐가 재미있니? 둘 다 한가한 사람들이군.?
아키바의 지혜를 빌어 세 번째의 편지가 완성되었다, 라기보다 이것은 아키바가 쓴 편지이다.
후지이 이츠키님.
당신은 나를 잊어버렸나요?
너무해요! 실례잖아요!
기억날 때까지 가르쳐 주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조금만 힌트.
아직 독신입니다.
? ? 와타나베 히로코
히로코는 그 문면을 읽고 얼굴을 찡그렸다.
?이런 건 못 보내.?
?상관없어. 이 녀석도 완전히 후지이인 척하잖아. 후지이 노릇을 하는 녀석에겐 이런 편지가 딱 좋아.?
그렇다 해도 이런 경박한 편지는 보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 히로코의 머리 속에 이 편지를 보고 흥이 깨져 있을 초로의 대학교수 모습이 떠올랐다. 히로코는 우선 봉투에 넣어두었다가 나중에 몰래 다시 썼다. 무의식중에 초로의 대학교수를 의식한 나머지 좀 고풍스런 편지가 되어 버렸다.
후지이 이츠키님.
감기는 나으셨습니까?
오늘 집에 가는 언덕길에서 벚꽃 봉우리가 부풀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긴 벌써 봄이 오려 한답니다.
? ? ? 와타나베 히로코
여기서부터가 진짜 펜팔이 될지도 모르겠어. 히로코는 기대에 가슴이 벅찼다. 순수하게 가슴이 설레이는 느낌을 히로코는 오랜만에 맛보았다.
그런데 그 쪽에서의 답장은 히로코가 예상했던 내용이 아니었다.
와타나베 히로코님.
정말로 모릅니다.
무엇보다 고베란 곳엔 간 적도 없으며, 친척도 아는 사람도 살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나를 알고 있습니까?
? ? ? 후지이 이츠키
?뭔가 좀 진지한 편지인걸.?
편지를 읽은 아키바가 말했다.
?그렇지.?
?어떻게 된 거지? 이거.?
?그런데 진짜면 어떡하지??
?진짜란 건 어떤 진짜란 거야??
그렇게 물으니 히로코는 대답이 궁했다. 확실히 진짜인 경우, 어떤 진짜를 생각할 수 있을까 히로코에게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키바는 한 번 더 편지를 읽어보았다. 그리고 어떤 사실을 발견한 듯 말했다.
?이 녀석 여자군.?
?응??
?봐, 여기.?
그렇게 말하며 아키바는 편지의 한 줄을 가리켰다. ?당신은 정말로 나(아타시)를 알고 있습니까??라는 문장이다.
??아타시(일본어에서 ?나?의 여성어 ; 옮긴이)?래.?
?……정말이네.?
?그렇지 않으면 후지이를 여자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이츠키란 이름, 여자에게도 있지.?
?응.?
?뭔가 복잡해졌군.?
?응.?
?뭐하는 인간이지??
아키바는 편지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 뭔가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빠졌다. 히로코도 함께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런 실마리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아키바가 묘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이 편지, 어째서 이 여자에게로 갔지??
?응??
?생각해 보면 희한한 일이지 않니??
?…… 무슨 말이야??
?이쪽의 편지가 제대로 배달됐으니까 이렇게 답장이 오는 거지??
?응.?
?그런데 분명 그 주소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했지.?
?응. 국도로 바뀌었다고 했어…….?
?이 여자 국도에 살고 있다는 거야??
?설마.?
?그렇지??
?……응.?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된 거지??
그런데 아키바가 느닷없이 엉뚱한 곳에서부터 추리를 시작했다.
?그러나 만약에 이 여자가 국도 한복판에 살고 있다고 치자.?
?응??
?만약에 말이야. 중앙분리대 한복판에 오두막집을 짓고 산다고 치자구.?
?예를 들어서??
?그래. 실제로는 있을 수 없지만 이를테면 생각해 보고.?
?응.?
?집배원이 그 주소로 편지를 가지고 갔어. 하지만 분명 집배원은 그 편지를 이 여자에게 전해 주지 못할 거야.?
?그렇네.?
?어째서??
?응??
?어째서??
?국도에 멋대로 살 수 없으니까.?
?아냐, 그건 그러니까 예를 든 이야기잖아.?
???
히로코는 아키바의 이야기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국도는 없었던 걸로 해.?
?국도는 없는 거야? 이거 수수께끼??
?뭐든 좋아. 수수께끼라도 좋아. 그곳에 집배원이 왔다고 치자. 그랬다면 편지는 배달될까??
?응. 그렇다면 배달되겠지.?
?…….?
?배달되지 않으려나??
?어느 쪽이야??
?그럼, 배달되지 않아.?
?정말??
?아, 역시 배달돼.?
?풋, 배달되지 않아.?
?어? 어째서??
아키바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모르겠어??
?응. ……모르겠어.?
?배달될 리 없잖아. 이름이 틀린걸. 아무리 주소가 맞아도 이름이 다른 집에 편지는 배달되지 않아.?
?……그래??
?그야 그렇지. 그 주소까지 갔다고 해도 문패가 다르다면 집배원은 우편함에 넣지 않아.?
?그렇구나.?
?그곳이 국도여도 마찬가지야.?
?어? 어째서??
?집이 어디에 있건 이름이 다른 한, 이 여자에게 편지가 배달될 일은 영원히 없을 거야.?
???
?뭐 어쨌건 반송하든지 어쩌든지 하는 게 당연한 결말이겠지.?
?그러나 잘못해서 우편함에 넣을 버릴 수도 있잖아??
?확실히 그건 있을 수 있어.?
?그렇지??
?그러나 그런 실수를 집배원이 두세 번씩이나 하겠어??
?……그런가.?
?그렇다면…….?
?……??
?어쩌면 이 여자 정말로 이런 이름인지도 몰라.?
?뭐??
?요컨대 이 여자가 진짜로 후지이 이츠키라는 거야.?
그러나 히로코는 그런 이야기는 믿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분명 아키바는 자신의 논리에 억지로 맞추고 있을 뿐이라고 히로코는 생각했다.
?…… 그러나 그것은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완벽해.?
?그래.?
?그러나 적어도 후지이라는 이름이 아니라면 편지는 배달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지??
?응.?
히로코는 이제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 머리 속을 정리해 보았다.
야스요의 증언이 옳다면 그 주소는 국도가 되어 이미 없어져 버렸다. 그런데 그곳에 제대로 편지가 배달되어 이렇게 답장까지 온다. 그것이 누군가의 장난이라 하더라도 그 누군가라는 것은 아키바의 이론에 따르면 후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예전에 후지이가(家)가 살았던 장소에 같은 후지이라는 이름의 인간이 산다고 하는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그것도 국도 위에.
?요컨대 그것은 간단히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 아니니??
?그래. 그러나 제대로 편지가 왔다갔다하는 것 역시 사실이잖아.?
?…… 그러게.?
히로코가 말했다.
?역시 그가 쓴 거야.?
아키바는 반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히로코를 보았다.
?히로코…….?
?그러면 이치가 맞잖아.?
?그런 건 이치라고 하지 않아.?
?그러나 꿈은 있어.?
?뭐, 꿈은 있겠지만.?
?그래.?
?그게 아니라 히로코!?
아키바는 좀 화가 나 있었다. 히로코는 뭔가 마음 상하는 말을 했는가 하고 몸을 움츠렸다.
?됐어, 됐어, 됐어! 히로코는 그렇게 생각하면 돼. 나는 나대로 일의 진상을 밝히는데 전력을 다할 거니까.?
그리고 아키바는 귀중한 증거물이라고 하며 히로코에게서 편지를 몰수했다.
4
난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가.
후지이 이츠키님.
감기는 좀 어떻습니까?
무리하지 말고 빨리 나으시기 바랍니다.
? ? ? 와타나베 히로코
이것이 와타나베 히로코에게서 온 두 번째 편지였다. 봉투에는 정중하게 과립으로 된 감기약까지 동봉되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낸 약을 좋다고 먹을 인간이 있을까. 나는 그것을 쓰레기통에 일단 처분했다. 그리고 난 후 다시 편지를 검토하였다.
그 쪽은 아무래도 나를 아는 듯하다. 편지를 봐서는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문맥이다. 역시 내 쪽이 잊고 있는 것일까?
와타나베 히로코님.
감기약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대단히 실례입니다만, 당신은 어떤 와타나베씨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부디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 ? ? 후지이 이츠키
나는 이렇게만 써서 어쨌든 보내 보았다. 그런데 몇 일 후 그녀의 답장은 내 이야기 따위는 하나도 듣고 있지 않았다.
후지이 이츠키님.
감기는 나으셨습니까?
오늘 집에 가는 언덕길에서 벚꽃 봉오리가 부풀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긴 벌써 봄이 오려 한답니다.
? ? ? 와타나베 히로코
기분이 언짢았다.
벚꽃이니 봄이니 하는 말을 꺼내는 것은 슬슬 위험해지는 증거이다. 도서관의 몇 대인가 전의 관장이 어느 날 벚꽃을 보면서 ?이제 곧 코스모스의 계절이구나? 하고 말하더니 그 후 괜스레 앓기 시작하다 결국 입원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취직하기 훨씬 전의 이야기다. 그것보다 더 옛날, 엄마가 학생시절이었을 때, 동급생 한 명이 도시락 안에 벚꽃 잎만 가득 넣어왔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밥 대신에 꽃잎을 맛있게 먹던 그 동급생은 병원에서 나온 인물이었다는 이야기다. 벚꽃은 왕왕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다.
영문도 모르는 편지, 감기약, 게다가 벚꽃과 봄기운. 재료는 이미 전부 갖추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이것을 ?터줏대감?에게 이야기해 보았다.
과연 ?터줏대감?은 신음을 하며, 카지이 모토지로(梶井基次郞)를 인용하였다.
?카지이 모토지로의 단편에 벚꽃나무 아래에는 죽은 사람이 묻혀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있었어, 있었어.?
?또 야스오(安吾)의 『벚꽃나무숲』.?
?『벚꽃나무숲』. 그것도 광기였지.?
?역시 특이해, 그 여자.?
?역시??
?응, 정말 특이해.?
?어떻게 해야 할까??
?음, 어쨌든 계속 거절할 것.?
?어떻게??
?글쎄, 그러나 그냥 놔두면 계속 편지를 쓸 거야.?
?응? 계속이라니??
?영원히 말이야, 죽을 때까지.?
?말도 안돼, 그만해.?
?그런 인간은 제한이라고 하는 것을 모르니까 말이야.?
?농담하지마.?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하하하.?
갑자기 ?터줏대감?이 웃기 시작하여서 무엇이 우스운가 돌아보니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서가에 책을 꽂고 있다.
특이하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이 ?터줏대감?도 상당히 위험한 레벨에 이르러 있다. 그러나 그런 ?터줏대감?이 인정한 정도이고 보니 예의 그 편지도 드디어 심각한 느낌이 들어 나는 우울해졌다.
나는 신에게 기도하는 심정으로 답장을 썼다.
와타나베 히로코님.
정말 모릅니다.
무엇보다 고베란 곳에 간 적도 없으며, 친척도 아는 사람도 살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나를 알고 있습니까?
? ? ? 후지이 이츠키
그녀의 다음 편지는 이러했다.
후지이 이츠키님.
당신은 누구입니까?
? ? 와타나베 히로코
나는 전율했다.
이 사람은 드디어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 버린 걸까? 나는 한 번 더 ?터줏대감?에게 매달렸다. 그녀에게 묻는다는 게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비슷한 사람끼리 잘 알 거라는 생각이 앞섰다. 나는 ?터줏대감?에게 지금까지의 편지를 전부 보여주며 의견을 물었다.
?터줏대감?은 편지를 보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하였다.
?이 여자, 다중인격자네.?
?뭐? 다중인격이라니? 빌리 밀리건??
?그래. 빌리 밀리건. 봐, 여기.?
그렇게 말하며 ?터줏대감?이 내민 것은 마지막의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쓰인 편지였다.
?이것만 필적이 달라.?
?어? 뭐라구??
나는 편지를 비교해 보았다. 확실히 ?터줏대감?이 말한 대로 그 한 장만 필적이 다른 것과 달랐다. 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으로 반문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쓰지 않았을까??
?뭐야, 그건. 그럼 이 편지는 단순범이 아니라는 거야? 몇 명인가가 공모해서 이것을 쓰고 있다는 거야??
?…… 모르긴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의미 있는 전개군. 너, 뭔가 중대한 사건에 휘말린 거 아냐??
?응? 무슨 말이야??
?뭔가 기밀이 될 만한 정보를 우연히 입수하였다던가.?
?무슨 소리야.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잖아.?
?그럼, 역시 다중인격자야, 이 여자는.?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지. 달리 선택법은 없는 거야??
?있다면 스스로 생각해. 나는 무조건 다중인격설을 지지하겠어. 애초에 네 편지가 방아쇠가 된 거야.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고 처음에 말을 꺼낸 것은 네 편지지? 그래서 이 여자, 영문을 알 수 없게 된 거야. 원래는 이 여자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그저 안다고 믿고 있었을 뿐이야. 그런데 네 편지를 받고 돌연 현실을 직면하게 된 거지. 서로 전혀 모르는 타인이라는 사실 말이야. 궁지에 몰린 그녀는 그래서 한 번 더 현실도피를 꾀할 필요가 생겼어. 그것이 요컨대 다른 인격이 되어 버리는 거야. 즉 너를 모르는 또 한 사람의 자신이 되어 버리는 거지.?
이 ?터줏대감?의 가설을 어디까지 믿어야 좋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라기보다 이 ?터줏대감?의 뇌 상태를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 몰라 나는 우선 스스로 선택법을 찾기로 했다.
그런데 그럴 틈도 없이 또 다음 편지가 날아왔다. 그것은 다 나아가던 감기가 다시 심해져서 체온계가 37도 5부를 왔다갔다하던 날이었다.
후지이 이츠키님.
당신이 정말 후지이 이츠키라면,
뭔가 증거를 보여주세요.
주민등록증이나 보험증 사본이라도 상관없습니다.
? ? ? 와타나베 히로코
열 탓도 있었을 것이다. 내 감정은 분노의 방향으로 달렸다. 그만 적당히 하시지, 하는 감정이었다. 어째서 이런 정체 모르는 인간에게 주민등록증이나 보험증 등을 제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대체 어떤 이유에선지 나는 자신의 운전면허증을 확대복사하고 있었다. 도서관의 복사기를 사용하는 현장을 아야코가 보았다. 뭐하는 거니? 하고 이상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보면 알잖아. 면허증 복사하고 있어.?
?지명수배 사진 같다.?
복사된 얼굴 사진을 보고 아야코가 음침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버려둬.?
말할 것도 없이 복사기에서 나온 A3 사이즈의 거대한 면허증은 어디로 보나 기분 나쁜 분위기였다. 아야코는 열이라도 있는 거 아냐? 하고 말하며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어머나, 정말 뜨거워!?
그러나 내게는 아야코의 목소리는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이제 편지 그만 보내세요.
그럼 안녕.
? ? ? 후지이 이츠키
확대복사에 이런 편지를 덧붙여 나는 근처 우체통에 넣었다. 그런데 편지를 우체통에 넣은 순간, 나는 후회스런 마음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이상한 사람일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나는 일부러 내 신원을 가르쳐 준 것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우체통에 손을 넣어 보았지만, 편지에 손이 닿을 리가 없었다.
?바보.?
그런 나를 ?터줏대감?이 비웃었다.
?신원은 이미 옛날에 그 쪽에 알려져 있는 거야. 그러니까 편지가 오지.?
듣고 보니 그랬다. 오늘은 머리의 회로가 끊겨 있는 것 같다. 정신차려, 하고 자신의 머리를 두세 번 콩콩 쥐어박았더니 현기증이 나서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잃었으므로 거기서부터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아지 않는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나는 동료의 차로 우선 병원까지 옮겨졌지만, 그곳이 병원이라는 것을 알자 완강하게 거부하며 차에서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료들은 할 수 없이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집에 도착하여 체온을 재자 40도를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깊은 잠속을 헤맸다.
*
그 봉투는 언제나 보다 조금 무거웠다.
히로코는 봉투를 뜯었다. 뭐가 들어 있나 했더니 A3 사이즈에 확대된 운전면허증이었다.
?그 봐, 역시 내 추리가 적중했지? 후지이 이츠키는 정말 있었던 거야.?
사본을 본 아키바는 혼자서 몹시 기뻐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
?작전대성공이야.?
?뭐??
?실은 나도 몰래 편지 썼어. 너 누구야? 정말 후지이 이츠키라면 증거를 보여라, 이렇게 말이야.?
히로코는 절규했다.
?아냐, 괜찮아. 편지는 제대로 표준어로 썼어. 히로코 글씨를 그대로 흉내내어 썼으니까 걱정하지마.?
?…….?
?그러나 설마 이렇게 명쾌한 해답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
?그런데 히로코, 우리 둘이 오타루에 가보지 않을래??
?뭐??
?사실은 말야, 마침 오타루에 갈 일이 생겼어, 오타루는 유리로 꽤 유명한 곳이거든, 친구가 있는데 그 녀석들이 전람회를 한다고 안내장을 보냈어. 귀찮아서 거절할까 어쩔까 망설이고 있지만 생각해 보니 이 녀석의 정체를 파헤칠 절호의 찬스 같아서. 이것도 하늘이 준 기회라는 생각도 들고.?
?…….?
?어떻게 할래? 적의 정체를 파헤칠 절호의 찬스인데.?
?적이 아냐!?
갑자기 히로코는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뭐??
?게임이 아냐!?
거기까지 말하고 히로코는 눈물에 목이 메였다.
?히로코.?
?…… 너무해.?
?…….?
?그렇지만 이제 이걸로 끝이야. 이제 그만해.?
그리고 히로코는 동봉한 편지를 아키바에게 보여주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이젠 편지 그만 보내세요.
그럼 안녕.
? ? ? 후지이 이츠키
아키바는 그제서야 자신이 너무 지나쳤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버스가 떠난 후.
히로코는 확대복사의 얼굴사진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몹시 화가 났군요. 미안해요.?
?…….?
?그 감기약, 먹었을까??
?…….?
?이제 감기 나았을까??
?미안.?
?됐어.?
?내가 잘못했어.?
?됐다니까.?
사본 위에 한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히로코는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닦았다. 닦는 동안 또 눈물이 자꾸자꾸 사본 위로 떨어져 히로코는 그것을 하나하나 닦았다.
?그의 편지였어. 그가 써준 거야.?
이 말에 아키바의 안색이 바뀌었다.
?이런 빌어먹을 편지가 온 게 탈이야.?
아키바는 편지를 뭉쳐 던져 버렸다. 히로코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아키바를 보았다. 그리고 편지를 주워 무릎 위에 놓고 다시 폈다.
?후지이일 리가 없잖아! 그 녀석이 편지 따위 쓸 리가 없어!?
히로코는 놀라서 아키바를 보았다.
아키바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에 견디고 있었다.
아키바가 말했다.
?미안. ……미안.?
그리고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아키바는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참아야 했던 것이다. 자신이 참지 않으면 이내 깨져 버리는 관계라는 것을 아키바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응, 히로코. 오타루에 가보지 않을래??
?응??
?오타루에 가서 이 사람을 만나보지 않을래??
?…….?
?여기까지 왔으니 본인을 만나보지 않을래??
?…….?
?그 녀석과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잖아. 만나보지 않을래??
?…….?
?만약 폐를 끼쳐서 미안하다고 생각한다면 사과하면 되잖아. 나도 함께 사과할 테니까.?
?…….?
?어때??
히로코는 코를 훌쩍거리면서 편지를 접었다. 그리고 이윽고 입을 열었다.
?끝은 싫어.?
?뭐??
?이제 끝은 싫어.?
?……그렇지.?
?…….?
?오타루에 가볼 거지??
히로코는 가만히 끄덕였다.
5
고비는 넘겼지만 몸은 여전히 좋아지지 않았다. 후들거리면서 서고 정리를 돕는 내게 ?터줏대감?은 다짜고짜 이것저것 일을 명령했다. 감기도 너무 오래 끌면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법이다.
?감기 같은 건 땀만 푹 흘리면 낫는 거야. 너무 자신을 과보호하면 언제까지고 낫지 않아.?
?이까짓 감기 안 나아도 상관없어.?
무거운 책들을 안으면서 나는 이미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난 그렇게 생각해. 감기도 그렇지만 결국 사회인의 경우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 아닐까??
?너도 스트레스가 쌓아니??
얼핏 보니 ?터줏대감?은 또 책을 뜯고 있다.
?스트레스에는 이게 최고야.?
?그런 짓 하다가 너 언젠가 벌받는다.?
?아야!?
말이 끝나자마자 ?터줏대감?이 소리를 질렀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이 바닥에 우루루 쏟아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터줏대감?은 손을 누르며 아파했다.
?봐, 말한 대로지!?
그런데 ?터줏대감?은 손을 누른 채 움직이를 못했다.
?괜찮아??
?너무 아파…….?
그렇게 말하며 ?터줏대감?은 자신의 손을 보고 아연했다. 손이 잘려 나간 끝에서 선혈이 낭자한 것이 아닌가.
?아악!?
?터줏대감?이 절규했다. 바닥을 보니 아까 그녀가 떨어뜨린 책이 떨어진 손목을 마구 갉아먹고 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문도 모르는 채 그 자리에 바싹 얼어붙어 있었다. ?터줏대감?은 죽는다고 울부짖고 있다. 뭔가가 아주 가까이서 움직이는 기척이 나서 나는 깜짝 놀라 내 손을 보았다. 그러자 아까부터 안고 있던 책 가운데 제일 위의 녀석이 입을 벌리고 내 손목을 물으려 하고 있다. 두 개로 벌린 입속은 날카로운 이가 무수하게 돋아나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황급히 책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몸이 결박되기라도 한 듯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책은 뱀처럼 잽싸게 나의 팔에 덤벼들었다.
?아아아아악!?
물론 이것은 꿈이다. 잠을 깬 나는 땀에 푹 젖어 있었다. 꿈이란 걸 알고 일단 나는 떨어져 있어야 할 손목을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서관에서 옮겨져 와서 지금까지 나는 혼수에 가까운 잠을 잤던 모양이었다. 반나절 정도가 지났는가 싶었더니 하루 반이나 지나 있었다.
비명을 듣고 엄마가 왔다.
?덕분에 불면증이 나은 것 같아.?
이 철없는 소리에 엄마도 질려서 내 이마를 찰싹 때렸다.
?뭐 하는 거야, 환자한테.?
?환자라면 제발 부탁이니까 병원에 좀 가다오.?
?장자크 루소가 말했어. 병을 무서워하며 발버둥치는 것이 인간의 나쁜 점이라고.?
?……아직 열이 식지 않았나 보구나.?
엄마는 아까 때린 나의 이마 위에 젖은 타월을 올려놓고 방을 나갔다.
?잠깐만…….?
타월에서 흐르는 물이 목덜미까지 내려왔지만 그것을 어떻게 할 여력이 내게는 없었다.
?잠깐만…… 물방울이…… 엄마!?
다음 날 저녁 무렵, 아야코와 미도리가 병문안을 왔다. 두 사람은 환자는 무시하고 수다에 열중하는 동안 들고 온 케이크를 자기네들끼리 다 먹어치웠다. 평소라면 미친 듯이 달려들었을 바닐라 에센스의 향이 오늘은 이상하게 역겨웠다. 녹차로 목을 축이던 아야코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그러고 보니 ?터줏대감?이 안부 전해 달랬어.?
?응, 그래.?
?그 애, 오늘 서고에서 다쳤다.?
?손목??
?그걸 어떻게 아니??
이것도 꿈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지만 뭔지 잘 모르겠다.
??터줏대감?은 역시 이상해. 오늘도 이츠키의 병문안 가는데 뭘 가지고 갈까 의논했더니 그 애 뭐가 좋다고 했을 것 같니??
?뭐??
?맞춰봐.?
?……몰라.?
?살무사주. 그것도 진짜 한 마리가 통째로 절여져 있는 것으로.?
전신에 소름이 돋아서 나는 침대에서 펄쩍 뛰었다.
?진짜 이상해, 그 애.?
?그래, 이상해.?
아야코와 미도리는 이상해 이상해 하며 서로 끄덕이고 있었다.
?……저……뭐가 이상하다고 했지??
그렇게 말하며 돌아보니 두 사람의 모습은 이미 없었다. 케이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일단 꿈은 아닌 것 같다. 어느 틈엔가 잠들어 버려서 살짝 돌아간 것일 게다. 방에 어둠이 스며들어 있다. 물을 마시려고 베갯머리를 보니 주전자와 약병과 함께 편지가 한 통 놓여 있다. 이미 완전히 낯익은 그 봉투는 와타나베 히로코에게서 온 것이다.
나는 편지를 읽었다.
후지이 이츠키님.
편지 고맙습니다.
다음 달 오타루에 갑니다.
시간 있습니까?
몇 년 만인가요. 이츠키씨를 만나는 것이. 정말 기대됩니다.
머리 모양은 달라졌을까요?
갈 날이 가까워지면 전화하겠습니다.
? ? ? 와타나베 히로코
?히로코가 온다.?
기쁜 마음에 나는 그녀에게 답장을 쓴다.
와타나베 히로코님.
정말 오랜만이군요.
어느 정도 이곳에 있을 수 있나요?
만약 괜찮으시다면 우리집에 머물다가 가세요. 쌓이고 쌓인 이야기로,
하루 이틀 밤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요.
거기까지 썼을 때 잠이 깼다. 이미 한밤중이었다. 땀에 푹 젖어 있다. 대체 어디서부터가 꿈인가.
그것도 잘 알 수 없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그리고 볼 일을 본 후, 또 계단을 올라가려 하는데 엄마가 얼굴을 내밀었다.
?괜찮니??
?응. 지금, 좋아. 최종 라운드.?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렇게 땀을 흘리고 있으면서. 파자마 갈아입어라.?
?응.?
나는 후들거리며 계단을 올라 방에 돌아왔다. 그리고 서랍장에서 새 파자마를 꺼내 소매를 끼우려고 했지만 깜깜한 어둠 속에서 소매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를 끼운 채 스탠드 불을 켰다. 그리고 목을 빼고 소매를 찾고 있는데 책상 위에 묘한 것이 있었다.
한 홉짜리 병의 살무사주였다. 안에는 아주 큰 살무사가 한 마리 들어 있었다.
거기서 나는 또 눈을 떴다.
그런 꿈과 현실의 경계를 떠돌다가 아침을 맞았다. 거실 테이블에 앉아 죽을 앞에 두고도 뭔가 아직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침부터 힘찬 목소리가 현관에서 들려왔다.
?아베카스 고모부??
?그래. 함께 맨션을 보러 가기로 했어.?
?아, 좋겠다. 나도 가고 싶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환자인 주제에.?
?방 보는 정도는 괜찮아.?
엄마는 나를 무시하고 일단 방을 나갔지만 이내 되돌아와서,
?금방 준비할 수 있니??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아베카스씨는 죽은 아버지의 여동생 남편으로 부동산 사무소를 운영한다. 옛날부터 이사 이야기가 나올 때면 반드시 찾아오는 인물이다. 이사 이야기가 없었다면 그들의 결혼도 있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만남의 계기가 된 것도 이 집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아베카스씨는 우리집 이사에 적극적이다. 인연을 맺어준 집을 부술 생각이냐고 할아버지는 나무라지만, 기왕 부술 거라면 자기 손으로, 하는 것이 아베카스의 변명이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이 사위를 싫어한다.
현관에서 나온 세 사람을 정원에서 나무 손질을 하던 할아버지가 못마땅한 듯이 노려보았다. 이 배신자! 내심 그렇게 생각할 게 틀림없다.
?장인 어른께서는 아직도 반대이십니까??
차를 달리면서 아베카스 고모부가 말했다.
?아침부터 흙을 파시다니. 뭔가 씨까지 뿌리시네요. 역시 오래 사신 집이어서 미련이 많은가 봐요.?
?아베카스 고모부님, 악덕 부동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대사인데요, 그것.?
엄마가 되돌아보며 눈을 흘겼다.
?또 봐라, 이츠키. 누가 악덕 부동산이라는 거냐??
그리고는 아베카스씨를 보며 덧붙였다.
?노인의 옛날 향수를 맞춰주기만 할 수도 없잖아요. 앞으로 5년이면 천장이 무너질 거라고 말한 것은 아베카스씨잖아요.?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지금도 솔직히 말하면 잘 살고 계신 것도 신기하다구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아, 아니, 말하자면 그렇단 말이지요…… 허허허허.?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좁은 차안에 가득해졌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형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어떻게든 대책을 세웠을 텐데 말입니다. 지은 지 60년쯤 됐지요, 그 집? 옛날 건물들은 너무 탄탄하게 지어서요. 손을 보기보단 다시 짓는 쪽이 싸지요.?
그 이야기는 벌써 백 번은 더 들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이 차, 히터가 너무 심하다. 게다가 나는 집에서 가져온 담요에 둘둘 쌓여 있는데 말이다.
?저, 좀 더운데요.?
그렇게 말하고 담요를 벗으려 하자 조수석의 엄마가 돌아보며 노려보았다.
?푹 뒤집어 쓰고 있어.?
평소라면 그런 명령 들을 생각도 않았겠지만, 맨션 견학을 위해서는 얌전하게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베카스 고모부가 끼여들었다.
?이츠키, 감기를 무시해서는 안돼. 마리모 전기 알고 있지??
?마루쇼 건너편에요??
?그래그래, 거기 주인도 우리집 단골인데 요전에 감기를 앓았었지. 평소에 감기 한번 걸리지도 않는 사람이어서 이건 귀신의 장난이라고 모두들 말했었는데 말이야. 의외로 그런 사람이 감기에 걸리니까 무섭더라구. 갑자기 심해져서 입원했는데…… 폐렴이었어.?
?죽었나요??
?설마. 폐렴 정도로 죽지야 않지. 1개월 정도 입원했다가 퇴원했어.?
?우리 아버지는 그걸로 돌아가셨잖아요.?
?어? 형님이? 그랬던가??
엄마가 차가운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벌써 잊었어요??
?설마요. 잊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죽은 인간의 일 따위야 모두들 잊어버리게 되어 있죠.?
?아주머니…….?
궁지에 몰린 아베카스 고모부가 왠지 우스워서 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 직전에 엄마가 한마디 덧붙인 탓에 이상한 곳에서 웃음을 터뜨린 꼴이 되었다.
?아버지를 감기로 잃었으면서 전혀 질리지도 않는 딸도 있지요.?
?푸후후.?
엄마가 돌아보며,
?뭐가 우스워??
설명할 레벨도 아니었으므로 나는 잠자코 있었다.
?허허허허.?
경련을 일으키는 쥐 같은 웃음소리가 그 사이를 메웠다.
맨션 견학을 간다고 하였으며넛 먼저 도착한 곳은 시내에 있는 적십자 병원이었다. 엄마에게 당한 것이다.
?눈치채지 못하는 네가 바보지, 뭐.?
밉살스런 대사를 남기고 엄마는 아베카스씨와 맨션 투어에 나섰다.
병원이란 곳에 대체 몇 년 만인가. 그것은 정확하지 않지만 이 적십자 병원에 발을 들이민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이후 처음이다.
잊을 리가 없다. 아버지가 숨을 거둔 곳이 이 병원인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엄마에 의해 타의로 오게 되긴 하였지만 이렇게 서 있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타가 공히 인정하는 병원공포증이 생긴 무대가 바로 이곳인 것이다. 그런데 엄마에게는 그런 감성이 일체 결여되어 있어서 축농증 치료 정도를 하면서도 예사로 이곳을 이용하였다. 그런데 주제에 드라마에서 사람이 병사하는 신이 나오기만 해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텔레비전을 꺼버리는 일면도 있다. 그런 감성은 내게는 없다.
아버지의 돌연한 죽음은 당시의 내게 뚜렷한 슬픔을 주지는 않았다. 울었던 기억조차 없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직면한 나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생각하는 동안 모든 것이 끝나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 다음에는 뭔가 무겁고 어둡고 몹시 처량한 인상만이 남았다.
병원의 독특한 냄새가 그 무렵의 기억을 자극하여 나는 완전히 무겁고 어둡고 처량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대합실의 서가에는 만화책이 그때처럼 나란히 꽂혀 있다. 나는 그 가운데서 한 권을 빼서 의자에 앉았다.
전광게시판의 마지막에 점등해 있는 내 접수번호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 동안에 다섯 권의 만화책을 독파하였다. 이제 만화책에도 질려, ?주간신조?로 바꾸었지만 별로 읽을 생각도 없어 건성으로 페이지만 넘기는 동안 어느 틈엔가 살풋 잠이 들어 버렸다.
잠깐 사이에 꾼 그 꿈속에서 중학시절의 나와 엄마와 할아버지가 있었다. 나는 길 가운데 얼어붙은 커다란 물웅덩이를 발견하자 마치 스케이트를 타듯 그 위를 기세좋게 미끄러져 나갔다.
?위험해!?
뒤에서 엄마가 소리치고 있다.
그것은 꿈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실제로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죽은 날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의 광경이었다. 나는 반쯤 꿈을 꾸면서 그것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후지이씨!?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후지이 이츠키씨!?
?예.?
아직 확실히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내 머리 속에서 누군가가 함께, 예! 하고 대답을 했다.
(어? 지금의……)
이상하게 생각한 나의 뇌리에는 한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교복을 입은 그 소년은 맑은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
오타루는 북쪽의 작은 항구마을이었다. 길가에는 낡은 건물이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는 아키바가 말했듯이 유리공예점이 몇 개인가 나란히 있다.
아키바는 히로코를 지인의 유리공방으로 안내했다. 자신의 공방에 비하면 크고 깨끗한 내부장식을 아키바는 이렇게 둘러댔다.
?여기는 관광객을 의식하기 때문이야.?
확실히 이곳에는 관광객용의 통로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아키바가 지인이라고 하는 인물은 호쾌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거한이었다. 이런 사람이 유리세공같이 섬세한 일을 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히로코는 생각했다.
?요시다(吉田)씨야.?
?잘 부탁합니다.?
요시다는 히로코에게 그 털북숭이의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잡아보니 까칠까칠한 게 아키바의 손 감촉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분명 이것이 유리 직인의 손인 것이다. 요시다가 아키바에게 물었다.
?아키바의 애인인가??
?후지이의 옛 피앙새야.?
?어? ……아, 그래.?
요시다는 좀 놀라고 있었다.
?그를, 아세요??
?같은 대학이야.? 아키바가 말했다.
?좁은 학교였으니까요. 모두 동료 같은 사이지요.?
?……그렇군요.?
?그것보다 요시다, 전람회란 건 어디서 하는 거지??
?아하하하! 전람회라고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처음에는 겸손해서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 겸손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1층 매장에 안내되었다. 어디가 전람회인가 했더니 사방 한 평도 안되는 스페이스에 크고 작은 꽃병이 10개 정도 놓여져 있는 그것이 전부였다. 확실히 [오타루의 신예작가 5인전]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이거야??
?하하하하!?
?고베에서 일부러 불러놓고 겨우 이거 뿐이야. 요시다 이 새끼, 완전히 사기꾼이잖아.?
?하하하하!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면 오지 않았을 거 아냐. 자, 밤에는 맛있는 술을 사줄 테니가 용서해.?
그렇게 말하며 요시다는 아키바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날은 요사다와 그의 동료들과 행동을 함께 하며 밤에는 그 지방의 선술집에서 술자리를 가졌다. 나오는 것은 유리 이야기뿐이어서 히로코는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후지이 이츠키? 아아, 알지.?
히로코는 무심결에 귀가 번쩍 뜨였다. 화제가 어느 틈에 그쪽으로 쏠렸던 것이다.
?뭐? 정말??
아키바가 흥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초등학교 때 동급생이었어. 같이 잘 놀았었지.?
그렇게 말한 것은 요시다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인 오오토모(大友)였다.
?정말 좁은 동네야, 여기는.?
요시다도 새삼스레 감탄하였다.
?그 녀석의 집이 어느 쪽이었죠??
아키바가 물었다.
?예??
?제니바코라는 곳 있죠? 그 쪽입니까??
?제니바코 아닌데요. 그 녀석은 오타모이라는 곳이었어요.?
?오타모이??
그 낯선 지명의 장소가 그의 옛날집 주소란 말인가? 두 사람은 오오토모씨에게 부탁하여 다음 날 그 장소에 따라 가보았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오오토모가 소리를 질렀다.
?아, 그렇구나. 5호선에 깔렸구나.?
눈앞에는 국도 5호선이 달리고 있었다. 야스요가 말한 대로였다. 세 사람은 그래도 그의 집이 있었던 주변을 더듬었다.
?아마 이쪽이었을 텐데.?
주변풍경과 대조하면서 오오토모가 가리킨 지점은 역시 길 한복판이었다.
오가는 차들은 길 한복판에 서서 지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세 사람을 이상한 듯이 바라보면서 지나갔다.
?오두막집도 없네.?
아키바가 히로코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오오토모에게,
?그 녀석과 같은 후지이란 이름의 사람 혹시 아세요??
?후지이?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오오토모씨도 이로나이 중학교입니까??
?아뇨, 학군(學群)이 달라요. 나는 나가바시 중학교.?
?그렇습니까.?
어쨌든 야스요의 증언이 옳았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 주소는 역시 그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키바가 돌아보자 히로코는 물끄러미 발밑을 내려다보고 있다.
히로코는 시선을 떨군 채 쓴웃음을 지었다.
?나…….?
???
?최초의 편지, 여기로 보냈구나.?
히로코는 노면을 가리켰다.
6
두 사람은 오오토모에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택시를 탔다. 목적지는 그 편지의 집이다.
?제니바코 2정목 24번지라는 곳으로 부탁합니다.?
아키바가 운전사에게 말했다.
?손님들 오사카에서 오셨습니까??
?아뇨, 고베입니다.?
?그렇군요. 오사카와 고베는 말씨가 다릅니까.?
?글쎄요.?
아키바가 운전사와 세상사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히로코는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고베와 조금 닮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언덕이 많은 탓일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히로코는 내심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그 여자를 만난다고 하지만 마음의 준비가 아직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기.?
?응??
?만나서 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야, 뭐라고 하면 좋을까??
아키바는 아주 태평이다. 그럭저럭 눈 깜짝할 사이에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다.
?이 부근입니까?? 하고 운전사가 물었다.
?예? 이 부근인가요?? 하고 아키바가 되묻는다.
두 사람은 그쯤에서 택시를 내렸다. 그 주변은 인가가 적어서 가장 가까운 집부터 돌아보려고 하고 들른 첫번째 집이 바로 그 집이었다. 틀림없이 문패에 후지이라고 씌어 있다. 북해도 식의 낡고 귀여운 양식집이었다.
?정말 있구나.?
?어떡하지.?
히로코는 드디어 동요를 억누를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여행자야. 여행자는 수치심은 버려 버리라고 하잖아.?
그렇게 말하며 아키바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정원에서 노인 한 사람이 나왔다. 아키바는 머리를 깊숙이 숙여 노인에게 인사했다. 히로코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지만 그 장소에서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저, 여기, 후지이 이츠키씨 댁입니까??
?그렇습니다만.?
?저, 이츠키씨 계십니까??
?없습니다만.?
?아, 그렇습니까.?
?친구입니까??
?아뇨, 저…… 뭐 그런 셈입니다만.?
?곧 돌아올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어디 가셨는지요??
갑자기 노인의 표정이 바뀌었다.
?글쎄요. 내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요. 이 집의 인간들은.?
?……아, 그렇습니까.?
?멋대로 저희 좋은 데로 가면 돼. 나는 계속 여기 있을 거니까.?
?예??
노인에게는 이미 아키바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대로 정원으로 가려는 것을 아키바가 붙들었다.
?저!?
???
노인이 돌아보았다.
?줄곧 이곳에서 사셨습니까??
?그렇소.?
?언제부터…….?
?오래 전부터요.?
?10년 이상 전입니까??
?훨씬 훨씬 전이요. 소화(昭和) 초부터요.?
?그렇게 전부터!?
?어째서요??
?아뇨, 훌륭한 저택이어서.?
?자네 누구야??
?예??
노인은 갑자기 경계심을 드러냈다.
?부동산에서 왔어??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아베카스의 동료인가??
?아베카스? 뭡니까, 그것은??
?……아닌가??
?…….?
노인은 무서운 얼굴로 한동안 아키바를 노려보았지만, 곧 뭐라고 중얼중얼하면서 정원 쪽으로 사라져 갔다. 아키바는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뭐야, 저 영감쟁이는.?
그렇게 말하며 아키바는 히로코에게로 되돌아왔다.
?후지이 이츠키라고 하는 여자 역시 진짜로 있는 것 같아.?
?들었어.?
?그랬니. 본인이 곧 돌아온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래? 저기서 기다릴까??
그러나 히로코는 아직 만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 이유도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문옆에서 본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히로코는 그 동안에 편지를 썼다.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만약 그 편지를 다 쓸 때까지 오지 않으면 그것을 우편함에 넣고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후지이 이츠키님.
당신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사과를 드리기 위해 오타루에 왔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당신 집앞에서 쓰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후지이 이츠키는 어쩐지 당신이 아니었던 것 같군요.
오늘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모든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는 후지이 이츠키는 남자입니다. 그리고 옛날 나의 연인이었던 사람입니다.
최근, 우연히 그의 옛날 주소를 보고,
배달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 쓴 편지가 그 최초의 편지였습니다.
그는 2년 전…….
히로코는 잠깐 펜을 멈추고 지금 쓴 ?그는 2년 전?이라는 부분에 선을 몇 번이나 그어서 지워 버렸다. 지운 글 뒤에 히로코는 편지를 계속했다.
그는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저 지금도 때때로 생각이 날 뿐입니다.
어딘가서 잘 지내고 있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으로 쓴 편지였습니다.
사실은 아무 데도 배달되지 않아도 상관없었습니다.
그것이 설마 동성동명인 당신에게로 배달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폐를 끼쳐서 정말 미안합니다.
절대 나쁜 마음은 없었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편지로만 알게 된 관계였습니다.
편지만으로 인사드리고 갑니다.
? ? ? 와타나베 히로코
얼굴을 들자 아키바가 들여다보고 있었다.
히로코는 쑥스러운 듯이 감추면서 편지지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본인이 돌아올 기미는 없었다.
?갈까??
히로코가 말했다.
?기다리지 않을래??
?응.?
그렇게 말하고 히로코는 편지를 우편함에 넣었다. 그때 멀리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집배원이었다. 집배원은 빙그레 웃으면서 다가왔다.
히로코는 까닭도 없이 인사했다.
?자, 우편물!?
?아…….?
집배원은 히로코에게 우편물을 직접 건넸다. 그리고 아키바를 수상하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그리고 오토바이에 오르더니 뭔가 생각난 듯이, 앗 하고 외치며 돌아보았다.
?저기!?
집배원은 히로코를 향해 말을 걸었다.
?예??
?……아냐, 다음에 말하지, 뭐.?
그렇게 말하고 집배원은 떠났다.
?누군가 하고 착각했나??
아키바가 말했다.
?글쎄…….?
?하여간 이상해. 오타루 사람들은.?
돌아오는 길에 택시가 한 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누군가 손님을 태우고 있었다.
?작은 마을이니까 금방 번화가가 나올 거야.?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계속해서 걷기 시작했다.
?저기 말이야.?
아키바가 말했다.
?아까 쓴 편지…….?
?응??
?……왜 거짓말을 썼어??
?응??
?그 녀석이 죽은 것.?
?…….?
?쓰지 않았잖아.?
?…….?
?어째서??
?어째서일까. ……어수선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어수선한 이야기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뒤에서 클랙슨이 울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돌아보니 택시가 서 있었다. 낯익은 얼굴의 운전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가는 길에 태워주었던 택시였다.
?어, 이거 운이 좋은걸.?
두 사람은 택시를 탔다. 운전사도 그 우연이 기쁜지 웃으며,
?저 언덕길에서 손님들이 손을 들었지요? 지금 손님 내려놓고 서둘러 유턴해서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랬군요. 고맙습니다.?
?어디까지??
?예? 아, 어떡할까.?
히로코는 문득 차안의 백미러를 통해 운전사의 시선을 느꼈다.
???
히로코와 시선이 마주치자 운전사는 쑥스러워하면서 말했다.
?아, 손님이 방금 내린 여자손님과 많이 닮아서요.?
?예? 나요??
아키바가 시침을 떼며 말했다.
?아뇨, 옆의 아가씨.?
?아가씨요??
?정말 닮았어요. 자매는 아닙니까??
?아뇨, 설마. 오타루는 처음인데요.?
?아, 그런가요.?
그렇게 말하면서 운전사는 백미러로 히로코를 몇 번이나 보았다. 히로코는 쑥스러워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 히로코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 잠깐 멈춰주세요.?
택시는 어느 학교 앞에서 멈췄다.
?왜 그래.?
?이 중학교…….?
두 사람은 그곳에서 택시를 내렸다.
교문에는 오타루시 이로나이 중학교라고 씌어 있었다. 그의 앨범에서 본 중학교가 거기에 있었다.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쯤 봄방학인가??
?그렇겠다.?
두 사람은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오는 학교였지만 교사의 구조는 어디나 비슷비슷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제각기 기억의 지도를 빌려 학교 안을 걸어다녔다.
?들키면 혼날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두 사람은 교사 안으로 잠입했다. 직원실에는 누군가 있는 기척이다. 두 사람은 그 옆을 발꿈치를 들고 가만가만 통과했다. 히로코는 그의 교실을 향했다. 앨범에 있었던 것은 확실히 3학년 2반이었다.
3층 안쪽에서 두 번째에 그 교실은 있었다.
두 사람은 교실에 들어가 보았다.
?여기서 공부했었구나.?
?공부? 어차피 교과서에 낙서나 하고 있었을걸.?
?그럴지도 몰라.?
그렇게 대답하였지만 히로코는 어딘가 붕 떠있는 듯이 보였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히로코를 감싸고 있었다.
?그의 자리는 어디였을까??
그렇게 말하면서 히로코가 앉은 것은 교실의 창가 자리였다.
?이쯤일까??
히로코는 교실을 빙 둘러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내가 모르는 장소야.?
히로코는 말했다.
?이런 장소가 분명 많이 있을 거야.?
?그래.?
아키바는 한가운데 의자에 앉았다.
?그 같은 이름의 여자, 그 녀석의 동급생이기도 했겠지.?
?뭐??
?좁은 동네잖아. 그런 우연도 없다고 할 수 없지.?
?……그렇구나.?
?!?
아키바가 갑자기 손을 쳤다.
?그래! 아, 분명히 그럴 거야.?
?뭐??
?아, 이것으로 모든 수수께끼는 해결이야.?
?뭐야.?
?모르겠어??
?……아직 수수께끼 풀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히로코가 멍청하니까 내가 생각해 주는 거잖아.?
?어머. 내가 멍청하다구??
?멍청하지. 그 멍청함이 이 사건의 열쇠였어.?
?어떤??
?앨범이야.?
?앨범??
?앨범 안에서 발견했지? 그 주소.?
?응.?
?그 여자의 주소가 거기 씌어 있었지??
?…….?
?그것은 그 여자가 그 녀석과 같은 졸업생이라는 것이 되잖아??
?…….?
?분명 같은 이름이었으니까 히로코가 무심히 베껴 쓰게 된 거잖아??
만약 두 사람이 같은 졸업생이었다면 그 앨범에 그녀의 주소도 실려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을 그의 주소라고 착각할 가능성은 확실히 있었다.
?그래??
?틀림없어.?
?그럼, 모두 내 착각이라는 말??
히로코는 좀 쑥스러웠다.
?그렇게 되는군.?
아키바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칠판 앞으로 가서 자그마하게 낙서를 하였다. 우산을 그리고 그 아래 두 개의 후지이 이츠키 이름을 썼다.
?그러나 같은 학교에 같은 이름이 있다니.?
?그것도 남자와 여자가.?
?신기한 일이지만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니구나.?
?그래.?
?혹시 그 여자, 후지이의 첫사랑이지 않았을까??
?뭐??
순간 히로코는 뭔가를 떠올리려 했다. 히로코는 기억을 더듬으려 했지만 느닷없는 방해꾼의 등장에 그럴 때가 아니었다.
?뭐야? 당신들.?
입구에 숙직 교사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황급히 반대 문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복도를 달려 계단을 뛰어내려가 교사를 벗어났다.
운동장을 달리면서 아키바가 말했다.
?오타루 촌동네에서 뭐 하고 있는 거냐, 우리??
교문을 나오자 아까의 택시 아저씨가 빙그레 웃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
병원에서 돌아온 나는 우편함 안에서 내 앞으로 온 편지를 발견하였다. 그 편지에는 소인도 우표도 없고, 봉투에는 풀칠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뒤에는 제대로 와타나베 히로코의 이름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안을 보았다.
후지이 이츠키님.
당신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사과를 드리기 위해 오타루에 왔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당신의 집앞에서 쓰고 있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심장이 쇼크를 받은 나머지 찌부러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무심결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상한 사람의 인기척은 아무 데도 없었다.
?이츠키.?
할아버지가 정원에서 불렀다.
?친구들이 왔었어.?
?어떤??
?남자와…….?
?남자??
?아니, 또 여자도 함께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떤 여자??
?잘 보지 못했어.?
?…….?
그 여자가 와타나베 히로코인가? 남자는 공범자? 역시 복수범설이 옳았던 건가?
?아까까지 밖에서 기다렸는데 말야. 지쳐서 돌아가 버렸나??
나는 2층의 내 방에 올라가 편지의 나머지를 읽었다.
내가 아는 후지이 이츠키는 어쩐지 당신이 아니었던 것 같군요.
오늘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모든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는 후지이 이츠키는 남자입니다. 그리고 옛날 나의 연인이었던 사람입니다.
최근, 우연히 그의 옛날 주소를 보고,
배달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 쓴 편지가 그 최초의 편지였습니다.
읽는 동안에 나는 이 몇 주간, 요컨대 최초의 편지가 온 뒤부터 지금가지 한껏 팽배해 있던 긴장감이 서서히 완화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폐를 끼쳐서 정말 미안합니다.
절대 나쁜 마음은 없었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편지로만 알게 된 관계였습니다.
편지만으로 인사드리고 갑니다.
? ? ? 와타나베 히로코
(뭐야. 그런 거였구나.)
결국 나의 환자설도 ?터줏대감?의 다중인격설도 쓸데없는 과대망상으로 끝나 버린 듯하다.
그건 그렇다치고 그녀가 나와 착각한 동성동명의 후지이 이츠키라는 인간은 대체 누구인가. 그런 의문이 머리를 든 순간, 어떤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까 병원의 대합실에서 갑자기 떠올랐던 그 소년의 얼굴이었다. 그는 나의 중학시절 동창생으로 내가 아는 유일한 동성동명의 인물이었다. 동성동명의 그것도 남자. 히로코의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최근, 우연히 그의 옛날 주소를 보고,
배달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 쓴 편지가 그 최초의 편지였습니다.
나는 이 문장에 주목했다. 내 기억에 의하면 그는 아마 중3때 어딘가로 전학을 갔다.
?그 녀석인가??
그러나 확증은 아무 데도 없다. 나는 편지를 편지꽂이에 꽂았다. 이 단 기간에 온 그녀의 편지는 전부 6통. 거기에는 또 한 사람의 후지이 이츠키라고 하는 인물에 대한 와타나베 히로코의 마음의 깊이가 있었다.
물론 필적이 다른 두 통의 편지가 아키바라고 하는 인물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나는 알 리로 없었지만,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와타나베 히로코도, 다른 한 사람의 동성동명인 그도,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이런 관계도 없는 것에 휩싸여, 덕분에 감기까지 앓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뭔가 어리석기 짝이 없었지만 이상하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3학년 2반에 남겨진 낙서는 봄방학이 끝날 때까지 칠판에 남아 있었다.
7
체크아웃을 마치고 호텔을 나온 히로코와 아키바를, 요시다가 기다리고 있었다. 치토세(千歲) 공항까지 차로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트렁크에 짐을 싣는 동안 히로코는 보도에서 마지막 오타루의 공기를 맡고 있었다. 문득 사거리 한 귀퉁이의 우체통이 눈에 들어왔다. 최근 몇 주간의 펜팔 영향으로 그런 것에 시선이 멈추었는지도 모른다. 통근 도중의 한 여자가 자전거를 멈추고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다.
어쩌면 동성동명의 후지이 이츠키도 저 우체통에 저렇게 편지를 넣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그 여자의 얼굴을 본 히로코는 숨을 삼켰다.
닮았다는 말로는 끝나지 않는다. 그 여자는 마치 히로코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녀는 이쪽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볼일이 끝나자 자전거를 타고, 그리고 이쪽을 항해 달려왔다. 얼른 히로코는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렸다. 자전거가 히로코의 바로 옆을 지나갔다. 히로코는 뒤돌아 그 모습을 쫓았다. 그리고 엉겁결에 말을 걸었다.
?후지이씨!?
그것은 직감이었다. 집배원의 착각도, 택시 운전사의 말도 그 직감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 여자는 목소리에 반응하여 자전거를 세웠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틀림없었다. 히로코는 그녀가 후지이 이츠키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숨을 죽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 여자는 결국 혼잡 속의 히로코를 발견하지 못한 채 다시 페달에 발을 올리고 떠나 버렸다. 자전거가 보이지 않게 되어도 히로코의 동요는 진정되지 않았다.
?히로코??
아키바가 히로코의 어깨를 두드렸다.
?왜 그래??
히로코는 돌아보며, 아무것도 아냐, 하고 미소를 띄우려 했지만 굳어진 얼굴은 잘 웃어지지 않았다.
치토세 공항까지의 차안에서도 비행기 속에서도 히로코는 줄곧 붕 떠 있었다. 자전거의 여자가 히로코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히로코.?
?앗??
돌아보니 아키바가 수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히로코를 보고 있었다.
?아…… 응, 뭐??
?뭘 멍청하게 있냐구.?
?응? 으으응.?
?어, 저것 봐. 지도와 같은 모양이야.?
아키바가 창밖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하북반도의 특징적인 해안선이 또렷하게 보였다.
몇 일 후, 히로코는 우편함 속에서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히로코가 호텔 앞에서 목격한 그 편지였다.
와타나베 히로코님.
아무런 사정도 알지 못하고 좀 심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그 대신 한 가지 반가운 정보를 알려 드릴게요.
실은 제가 중학교 때, 우리 반에 동성동명의 남자아이가 한 명 있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후지이 이츠키라는 것은 그 아이가 아닐까요?
동성동명의 남자와 여자란 흔한 일이 아니죠.
그렇게 생각하면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어떻습니까.
내게 짚이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덕분에 감기도 많이 나았습니다.
당신도 부디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 ? ? 후지이 이츠키
*
와타나베 히로코 앞으로 사과편지를 써보낸 후 1주일이 지났다. 나의 감기도 제법 쾌조를 보이고 있어, 도서관에서도 겨우 접수대에 설 수 있게 되었다.
히로코가 우리집 앞에서 썼다고 하는 그 편지는 ?터줏대감?에게만 보였다. 나로서는 아주 드라마틱한 내용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어쩐지 ?터줏대감?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뭐야, 빌리 밀리건이 아니잖아. 시시해.?
그것이 ?터줏대감?의 감상이었다.
집에서는 이사 이야기가 착착 진행되어 갔다. 아베카스 고모부의 공으로 드디어 적당한 맨션을 발견한 것이다. 이번에 보러 갈 때는 나도 같이 갈 수 있었다.
오타루 역 바로 옆의 햇빛이 잘 드는 집이었다. 지금의 집보다는 훨씬 좁았지만 낡은 집을 팔아 버리고, 세금을 치르고 남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고 보니 더 넓은 것은 바랄 수도 없었다.
?뭐, 세 사람 살기에는 적당한 크기야.?하고 엄마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지금의 집은 셋이 살기엔 너무 넓죠??하고 아베카스 고모부가 거들었다.
?그렇죠, 뭐. 방이 세 개나 놀고 있으니까요.?
?그죠??
?하숙생이라도 받을까??
?아주머니, 그런 생각을 하면 또 이사 시기를 놓치게 돼요.?
?아, 그렇구나.?
아베카스씨는 결정을 짓게 하느라 필사적이었다.
?또 막판에 가서 취소하면 더 이상 참을 수 없죠, 그죠??
내가 아베카스씨의 심중을 대변해 주었다. 아베카스씨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쨌든 결론은 빨리…… 제법 인기 있는 물건이거든요.?
?결론은 나왔어요.?
그렇게 말하며 엄마는 얼굴을 찡그렸다.
?다음은 할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하는가 뿐이에요.?
확실히 그것이 문제였다.
집에 돌아오자 할아버지를 상대로 엄마의 강경한 설득이 시작되었다.
?어쨌든 몇 년 안에 헐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아시잖아요, 아버님. 어차피 그럴 거라면 지금 손을 봐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할아버지는 엄마의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일어나 그대로 방을 나가려고 했다. 과연 그 행동이 거슬렸는 듯, 엄마는 할아버지의 등뒤에 큰소리를 퍼부었다.
?결정해 버릴 거니까요.?
할아버지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나는 반대다.?
?그럼, 좀 앉으세요.?
?…….?
?앉아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다 알고 있어.?
?알고 있지 않아요.?
?알고 있어. 내가 반대해 봤자 아무 상관없다는 거지??
?……그래요.?
?그럼 이사를 해버리면 되잖아.?
그렇게 말하고 할아버지는 방을 나갔다. 할아버지가 결국 꺾였다. 그러나 너무나도 어이없이 무너져 나는 좀 허탈한 기분이었다.
?늙어빠진 영감쟁이.?
엄마가 불쾌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 내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할아버지가 이사를 하라고 했니??
흥분해 있던 엄마는 중요한 부분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것으로 우리집의 이사 건은 결정되었다. 입주일은 내달 중순으로 잡았다.
?조금씩 짐을 정리해 둬라.?
엄마의 지령은 특히 다락방 서재를 가리키고 있었다. 예전에는 아버지의 서고였던 그 다락방은 내가 내 책을 놓게 된 후부터 점점 엉망이 되어 지금은 발 디딜 데도 없어졌다. 일요일, 모처럼 큰마음 먹은 나는 다락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15분 정도 손을 움직이는데 점점 귀찮아졌다. 서가 정리라면 직업상 문제없이 해치우고 있으면서 우리집 서가라고 하니 갑자기 게으름뱅이가 되어 버리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한 권의 책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중학시절의 졸업앨범이었다.
나는 앨범을 손에 들고, 생각해 보니 졸업 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그 페이지를 펴보았다. 안은 예상 외로 보존상태가 좋아 넘기는데 신선한 소리가 났다. 덤으로 새책 특유의 샤프한 냄새조차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3학년 2반의 단체사진을 찾았다. 예전 동급생들의 순진한 얼굴들이 모여 있다.
?모두 이렇게 젊어져서.?
젊어진 것이 아니다. 이쪽이 나이를 먹은 것이다.
그 또 한 사람의 후지이 이츠키는 단체사진에서 떨어져 원 속에 혼자 멀거니 있었다. 이 중학생 소년이 그 후 와타나베 히로코와 사귀었다가 헤어졌나 생각하자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사진 속에 들어 있는 모습이 천진난만해 보여 웃음이 나왔다.
결국 정리하기를 포기한 나는 앨범만 안고 다락방을 나왔다.
*
히로코는 그의 집을 방문했다. 목적은 그 졸업앨범이었다. 모든 발단이 그 앨범이고 모든 수수께끼의 답이 그 안에 감춰져 있었다.
야스요는 아침 일찍 느닷없이 나타난 히로코에게도 놀랐지만, 오자마자 졸업앨범을 보여 달라고 하자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시키는 대로 야스요가 가져온 앨범을 받아들자 히로코는 현관에 걸터앉았다.
?히로코, 들어와.?
?……예.?
앨범에 열중해 있던 히로코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다.
?우선 안에 들어가자.?
?예.?
그렇게 말하면서 히로코는 구두를 벗기만 할 뿐 여전히 상반신은 앨범에 빨려든 채이다. 야스요는 질렸다는 얼굴로 말했다.
?히로코는 침착해 보이면서도 어지간히 성질이 급하구나.?
?예??
?부탁이니 들어가자, 제발.?
야스요는 히로코를 겨우 거실까지 데려갔다. 거기서도 히로코는 앨범에서 눈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히로코는 먼저 제일 뒤의 주소록을 확인했다. 그것은 아키바가 예언한 대로였다. 히로코가 베껴 쓴 주소의 후지이 이츠키는 3학년 2반의 여자 리스트 안에 있었다. 남자란에는 어디를 찾아도 그의 이름이 없다. 결국 주소록에 실려 있던 후지이 이츠키라는 이름은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 히로코가 그것을 그와 착각한 것이 무리도 아니다.
?뭘 찾니? 그렇게 진지하게.?
야스요가 차를 가져오면서 말했다.
?그의 이름…….?
?뭐??
?실려 있지 않아요.?
?그래??
?여기…… 3학년 2반이었죠??
야스요는 앨범을 들여다보았다.
?졸업 전에 이사를 했기 때문일 거야. 실려 있지 않니??
분명 그런 것일 게다. 어쨌든 이것으로 수수께끼는 하나 풀렸다. 그 펜팔도, 오타루 행도 모두 이 사소한 착각에서 시작한 것이다.
히로코는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3학년 2반 학생들을 재회했다. 히나마츠리 이후의 재회였다. 단체사진 아래에는 사진의 순서에 맞춰 각각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혼자 원 속에 붕 떠있는 그의 이름은 모두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후지이 이츠키.
같은 이름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작은 활자가 가늘게 늘어선 학생들의 이름 속에서 히로코는 다른 하나의 후지이 이츠키를 찾았다. 이름은 금방 발견되었다. 히로코는 그것을 가지고 사진 속에서 본인을 찾아냈다.
그 아이와는 초대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일 날에 야스요가 장난으로 히로코와 닮았다고 지적했던 여자아이였다.
참다 못한 야스요가 이제 슬슬 가르쳐 줘도 되지 않느냐고 히로코를 졸랐다. 그런데 히로코는 오히려 이렇게 되물었다.
?저…… 그의 동급생 중에 같은 이름의 사람이 있었나요??
?응??
야스요는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이내 생각이 난 듯, 아-, 하고 소리를 길게 뺐다.
?그러고 보니 있었어. 아-, 있었어. 있었다. 생각났어.?
?기억하세요??
?한번 우리 아이와 착각한 적이 있어서 말이야.?
야스요는 히로코한테 앨범을 받아들어 스스로 화제의 인물을 찾기 시작했다. 야스요는 우스운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 애 교통사고가 났었어. 왜 오른쪽 다리가 좀 불편했잖아.?
?예.?
?그때의 후유증이었어. 언제였더라. 등교중에 트럭에 치였지. 다행히 다리만 다쳤지만 그때 학교 선생님들이 다른 한 애와 착각해서 그 쪽 집에 전화를 한 거야. 금방 착각이란 걸 알고 우리집에도 전화를 했지만 병원에 가보니 그 쪽 집사람들이 모두 와서, 이런 일도 있군요, 하고 한바탕 웃었지. 그 애가 전치 1개월의 중상으로 누워 있는 옆에서 말이야. 그건 정말 우스웠어.?
?그 아이, 어떤 아이였어요??
?글쎄, 본인을 본 적이 있었나.?
?이 아이예요.?
히로코는 문제의 여자사진을 야스요에게 보여주었다.
?기억나지 않아.?
?닮았어요? 이 사진.?
?응??
?저를요.?
?히로코를??
야스요는 사진과 히로코를 비교해 보았다.
?닮았나??
?닮았다고 하셨잖아요, 어머니가.?
?내가??
?그러셨어요.?
?언제??
?요전에요.?
?그랬나??
야스요는 한 번 더 사진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닮았나.?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요전에.?
?그래??
?……첫사랑의 사람이라고.?
?이 아이를??
?그럴지도 모른다고.?
?…….?
히로코가 무엇에 그렇게 연연해하는지 야스요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닮았다고 하는 것에 뭔가가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야스요는 시험해 보았다.
?정말 잘 보니 확실히 닮았구나.?
히로코의 얼굴에 동요의 빛이 지나가는 것을 야스요는 놓치지 않았다.
?닮으면 어떻게 되는데??
?예??
?이 아이와 네가 닮으면 뭐가 달라지냐구.?
?아뇨, 별로.?
?거짓말.?
?정말이에요.?
히로코는 뭔가를 열심히 감추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감추는 법이 서툰 아이야, 하고 야스요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순수함이 히로코의 귀여운 점이었다. 야스요는 그런 그녀에게 모성 본능을 느꼈다. 역시 이 아이, 내 며느리로 삼고 싶었어 하고 야스요는 생각했다.
?히로코!?
야스요는 장난으로 히로코의 볼을 꼬집었다.
?얼굴에 거짓말이라고 씌어 있어.?
어린 딸에게 하는 말투였다.
?닮으면 어떻게 되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야스요가 놀랄 차례였다. 히로코의 입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두 눈 가득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이었다.
?닮아서라면…… 용서할 수 없어요.?
히로코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그것이 나를 선택한 이유였다면, 어머니, 전 어떡하면 좋아요.?
어떡하냐고 물었댔자 야스요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 어떡하니.?
야스요도 머뭇거렸다.
?내게 첫눈에 반했다고 했어요, 그 사람.?
?그래. 그렇게 말했었어.?
?하지만 첫눈에 반한 것은 반했어도, 확실하게 그 이유가 있잖아요.?
?…….?
?속았어요. 전.?
?히로코.?
?예.?
?중학생한테 질투하는 거니??
?…… 그래요. 이상한가요??
?이상해.?
?이상하군요.?
야스요는 2년이 지난 지금도 아들의 일로 눈물을 흘리는 히로코에게 감동했다.
?그러나 그 아이도 행복할 거야. 히로코가 질투를 해서.?
?그런 말씀하시면 또 울잖아요.?
겨우 그쳐 가던 히로코의 눈에 또 눈물이 흘러 넘쳤다.
?…… 역시 간단히는 잊을 수 없는 거네요.?
히로코는 눈물을 닦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 틈에 전염되었는지 이번에는 야스요 쪽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히로코는 앨범을 야스요에게 물려받았다. 늦은 출근이 되어 버린 히로코는 꽤 비어 있는 전철을 타면서 새삼스레 앨범을 펼쳤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습니까??
예전에 들었던 그 말이 히로코의 머리 속에서 아까부터 몇 번이고 되풀이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히로코에게 말을 걸었을 때의 대사였다.
히로코가 아직 전문대생이었던 시절의 일이다. 친구인 오노(小野)에게 미대생 애인이 있었다. 히로코는 어느 날 오노에게 이끌려 미대 전람회를 보러 갔다. 접수를 맡고 있던 오노의 애인은 당장은 자리를 비울 수 없지만 곧 뒤따라 가겠노라고 해서 두 사람은 먼저 전시실에 들어갔다.
전람회 같은 곳과는 인연이 없는 히로코는 뭐가 뭔지 모르는 채 오노에게 바짝 붙어 전시실을 돌아보았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데리고 온 오노까지 그런 말을 했었다. 그리고 뭐가 뭔지 모르는 동안에 출구까지 와 버렸다. 오노의 애인이 올 때까지 두 사람은 출구에 설치된 공예품 매점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곳에는 유리로 된 병이며 탬블러며 액세서리가 있었다. 그녀들은 차라리 이쪽이 흥미로웠다. 가게의 남자는 능숙한 장사솜씨로 두 사람에게 물건을 팔았다.
?두 개 사면 20% 할인, 세 개 사면 30% 할인이지만 언니들 귀여우니까 반값에 드릴게요.?
남자는 그런 말로 두 사람을 웃기다 결국 각각에게 세 개씩 팔아넘기는데 성공했다. 유리를 종이로 싸면서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모두 내 작품입니다. 소중히 사용해 주십시오.?
그가 아키바였다. 왠지 좋은 사람 같아. 그것이 아키바에 대한 히로코의 첫인상이었다.
그때 큰 캠버스를 안은 남자가 오노의 옆을 지나 출구에서 안으로 들어왔다.
?어이! 후지이!?
아키바가 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돌아본 남자는 아무렇게나 수염이 자라 있고 눈도 충혈되어 철야를 한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이제 다 됐어??
?응.?
?이제 갤러리 끝이야.?
남자는 언짢은 듯 캠퍼스를 고쳐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상한 사람. 그것이 후지이 이츠키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뒤늦게 오노의 애인이 와서 아키바를 놀라게 했다.
?어. 선배의 손님들입니까??
?아키바, 너 벌써 손댄 건 아니지??
?설마요. 물건은 좀 팔아먹었습니다만.?
그날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좀 지나서 오노를 통하여 아키바로부터 어프로치가 있었다. 혼자서 만나는 것이 무서웠던 히로코는 오노를 동석시켰다. 아키바도 겁이 났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친구를 한 사람 데리고 왔다. 이츠키였다.
?기억나요? 그때 늦게 그림 들고 들어왔던 놈인데.?
아키바의 설명을 듣고서야 그때의 그 수염과 눈앞의 청년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히로코는 도저히 연결이 되지 않았다. 마구 자란 수염의 흔적도 없는 그날의 아츠키에게는 묘한 투명감이 있었다. 이츠키는 시종 말이 없었다.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목이 마른 지 아이스커피를 몇 잔이나 시켜 마셨다. 그리고 몇 번이나 화장실에 갔다. 어딘지 안절부절못하다가 때때로 시선이 마주치면 황급히 눈을 돌리곤 했다.
역시 이상한 사람이다. 히로코는 생각했다.
그가 몇 번째의 화장실에 갔을 때, 오노가 아키바에게 넌지시 물었다.
?뭐죠? 저 사람. 뭔가 화가 난 것 같아.?
?긴장해서 그래요. 여자한테 면역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고 아키바는 굳은 표정으로 웃었다. 긴장해 있다면 아키바도 마찬가지였다. 아키바는 아키바대로 히로코가 목표인 주제에 아까부터 오노하고만 떠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 여자 어지간히 수다스럽구나, 하고 초조해 하였다.
돌아온 이츠키는 역시 말이 없이 또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그리고 한참 지나 이번에는 오노가 화장실에 갔다.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오노가 없어진 자리는 잠깐 동안 조용해졌다. 아키바에게 있어서는 히로코에게 직접 이야기를 걸 수 있는 찬스였다. 여기서 대화를 히로코에게 연결시켜 놓지 않으면 저 수다쟁이 오노를 상대로 줄곧 떠들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야기를 꺼내기가 힘들어 아키바는 담배에 불을 붙이거나 하며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그리고 겨우 말문을 열려고 했을 때, 이츠키가 느닷없이 끼여들었다.
?저!?
좀 상기된 목소리였다.
?와타나베씨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습니까??
?첫눈에 반하는 거요? 글쎄요, 어떨까요??
?저와 사귀어 주십시오.?
히로코도 아키바도 엉겹결에 절규했다. 이츠키도 그 말뿐으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상한 침묵이 세 사람 사이에 퍼졌다. 참다 못한 아키바는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무심코 이렇게 말해 버렸다.
?이 녀석 말입니다, 제법 괜찮은 놈입니다.?
아키바는 잠깐 동안의 사랑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어 버렸다.
그러는 동안 오노가 돌아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오노는 잽싸게 화제를 뿌렸지만 세 사람의 반은은 왠지 어색했다.
그 후 히로코는 이츠키와 사귀게 되었다. 거기에는 아키바의 헌신적인 응원도 있었다. 한 번 포기한 아키바는 이상할 정도로 두 사람을 축복해 주었다. 2주간 생각한 끝에 히로코는 이츠키에게 대답을 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것이 히로코의 대답이었다. 참으로 기묘한 시작이었지만, 지금 그것은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서 히로코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그 말 뒤에 누군가 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던가. 그것이 그와 동성동명의 여자였던가. 그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천국에 가지고 간 비밀을, 히로코는 지금 발견한 것인지도 몰랐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아직 어딘가서 들려왔다.
?……믿었는데.?
히로코는 무릎 위의 앨범을 덮었다.
사진의 여자아이가 그의 첫사랑이었을까, 어땠을까?
히로코는 조금 더 편지를 쓸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8
후지이 이츠키님.
안녕하세요?
당신이 말한 후지이 이츠키와 제가 아는 후지이 이츠키는 동일인물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 편지의 주소를 저는 그의 졸업앨범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아마 그것과 같은 앨범이 당신의 집에도 있겠지요.
지금은 서가 속에서 잠자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제일 뒤 페이지에 있는 명부 속에서 그의 주소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곳에 설마 동성동명의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은 저의 경솔한 착각 탓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앨범을 확인했다. 확실히 제일 뒤에 주소록이 붙어 있었다. 그곳에는 물론 나의 이름과 주소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상한 이야기다. 이 작은 한 줄이 공교롭게 고베에 있는 여자의 눈에 띈 우연도 이상했고, 덕분에 그런 기묘한 펜팔이 성립된 것도 이상했다.
편지는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폐를 끼쳐놓고 부탁을 드리는 것도 뻔뻔스러운 일입니다만, 만약 그에 관해 뭔가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가르쳐 주지 않으시겠어요?
아무리 시시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공부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운동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성격은 좋았는지 나빴는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이런 무례한 부탁을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바보 같은 편지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귀찮으시다면 잊어주세요.
…… 그러나 만약 그럴 마음이 드신다면 답장을 주십시오.
꼭 기대하지는 않고 기다리겠습니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해놓고, 단단히 기대하고 있는 주제에.?
이것은 뭔가 써주지 않으면 그녀의 마음도 개운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책상에 앉은 나는 참으로 곤란해졌다. 생각해 보니 난 그 녀석에게 전혀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기보다 그 녀석 때문에 나는 중학시절 그 자체에 좋은 인상을 가질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망설이면서도 우선 나는 펜을 들기로 했다.
와타나베 히로코님.
그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고 있어요.
동성동명의 사람이란 게 그리 몇 명씩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와의 추억은 그 대부분이 이름에 관련된 것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충 짐작하시겠지만, 그것은 절대 좋은 추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ㅇㄴ 기억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지요.
이를테면 입학식 날부터 그 비참함은 시작되었습니다.
첫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출석을 불렀을 때, 나와 그는 후지이 이츠키라고 불려 거의 동시에 대답을 해버린 것입니다. 다음 순간, 온 반아이들의 시선과 동요가 두 사람에게 집중되어 그 부끄러움이란 것은…….
나로서도 설마 동성동명의 남학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고, 이건 1년간 쭉 놀림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꿈과 희망에 가득찬 중학생활이 단숨에 암울해져서 차라리 전학이라도 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기분이었죠. 그러나 그런 이유로 전학을 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예감만이 훌륭하게 적중하여 동성동명이라고 하는 것만으로 주위로부터 부당한 차별을 받는 어두운 중학시절이,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이 우연히 당번이라도 되는 날은 아침부터 우울의 극치였어요.
칠판의 우측 구석에 나란히 있는 같은 이름에 하트 모양을 그린 낙서를 하지 않나, 각각의 이름 아래에 ♂라든가 ♀를 표시하지 않나, 수업시간에 사용할 프린트를 안고 둘이서 복도를 걸어오거나, 방과후 교실에서 학급일지를 쓰거나 할라치면 갑자기 등뒤에서 ?후지이 이츠키!?하고 불러 엉겁결에 동시에 돌아보는 것을 재미있어 하는 등, 하루종일 심술과 장난의 바겐세일이라도 하듯 난리였지요.
평소에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지만 항상 일정하게 비슷한 사건들은 있었습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날들을 견디면서 이것도 1년만 참으면 되겠지 생각하고 있었더니, 웬걸 2학년이 되어도 같은 반이 되는 게 아닙니까.
새로운 반에서 우리는 신선한 기분으로 처음부터 다시 놀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3학년이 되어서도 어찌된 이유에선지 역시 같은 반이 되어 버렸습니다. 2년간이라면 몰라도 3년씩이나 되다니, 좀 우연이라고 생각하기 힘들겠지요?
여기에는 실은 선생님들이 재미있어서 일부러 했다고 하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뭐, 확증은 없지만 그런 소문이 공공연히 떠돌아다녔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런 이야기, 옆에서 듣고 있는 사람은 재미있겠지요.
그러나 당시의 우리들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그 녀석의 부모가 이혼을 해서 엄마 성을 따라 개명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던 적도 있었죠. 그렇지 않으면 성이 다른 집에 양자로 가버리기나 하라고 생각하던가.
생각해 보면 성격이 나쁜 중학생이었군요, 나는.
요컨대 언제나 그런 식이었으므로 서로 괜히 피하게 되어 대화를 나눈 적도 별로 없어요.
기대에 미치지 못한 편지여서 미안합니다.
다시 읽어보아도 뭔가 히로코의 욕구를 채운 편지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군요.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진실입니다. 그럼.
? ? ? 후지이 이츠키
후지이 이츠키님.
나의 무례한 부탁에 그렇게 정중한 답장을 주셔서 감격하였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그 사람 때문에 아주 고통스러운 중학시절을 보내셨군요.
이것은 좀 의외였습니다.
나는 더 로맨틱한 추억이 감춰져 있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만, 현실이라는 것은 그렇게 달콤한 것만은 아니군요.
그러나 그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당신과 같은 기분이었을까요?
어쩌면 자신과 같은 이름의 여자아이에게 운명적인 뭔가를 느끼진 않았을까요?
두 사람 사이에 그런 추억은 없었습니까?
만약 기억하고 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 ? ? 와타나베 히로코
와타나베 히로코님.
그런 추억 같은 건 없었습니다.
앞서 보낸 편지가 어중간한 내용이었던 것을 사과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중학시절은 그렇게 사랑이니 뭐니 하는 것이 존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살벌한 것이었습니다.
나와 그의 관계는, 예를 든다면 아우슈비츠 안의 아담과 이브라고 할까요? 되풀이되는 놀림과 고문 때문에 살아 있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어요.
물론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그것은 서로가 같은 반이 되지 않았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만약 그것이 운명적이라고 한다면 그 운명을 원망은 해도 감사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학급위원 선거 때의 그 사건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립니다.
그것은 아마 2학년 2학기였을 것입니다.
처음에 학급위원을 정하는 투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표 때, 누가 썼는지 한 장에만 이런 것이 섞여 있었습니다.
[후지이 이츠키 ♡ 후지이 이츠키]
개표담당은 이나바였던가. 아, 이나바다. 이나바 코우키.
이나바가 그것을 일부러 소리내어 읽어주었습니다.
?에-, 후지이 이츠키, 하트, 후지이 이츠키.?
그것을 또 서기 아이가 칠판에 일부러 하트까지 그려 넣으면서 쓰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박수갈채에 환호를 보내며 동참. 그러나 여기까지는 차라리 좋았습니다.
이 정도의 일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으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학급위원 선거가 끝나자 이어서 각 전문위원의 선거가 있었습니다. 방송위원이니, 하는 그런 것. 그 처음이 도서위원이었습니다.
뭔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죠.
투표용지가 나눠지는 동안 모두 이상하게 히죽거리며 여기저기서 작은 소리로 ?하트, 하트.?라고 하는 말이 들렸습니다.
결과는 이미 아셨겠지요? 거의 전원 일치로 나와 그가 되었습니다.
이름을 읽을 때마다 환성이 오르고 개표가 끝난 순간은 마치 월드컵 스타디움을 방불케하는 소란이었습니다.
나는 완전히 자포자기의 기분이 되어, 이렇게 된 바에야 울어버리자고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 학교 안에서는 우는 자가 승리라고 하는 불문율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울면 울게 한쪽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정해져 있잖아요. 그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그러해서 남자는 울보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이었지만, 여자아이는 어쨌든 울어서 이기자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옛날부터 우는 것은 비겁하다고 믿고 있어서 자랑은 아니지만 유치원 시절 이후 한번도 울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괜찮다. 이럴 때야말로 여자는 우는 거라고 나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지만 평소의 트레이닝도 없이 갑자기 울 수가 없었습니다. 책상 아래서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며 눈물을 짜려고 했지만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앞자리에 앉은 남학생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어! 얘 운다!? 하고 떠들어 대는 게 아닙니까.
그것은…… 쿠마가야(熊谷). 땅딸보에 원숭이같은 생긴 녀석.
그건 정말 화가 났습니다. 난 아직 울지 않았으니까요.
그 한마디로 벌써 울 마음도 가셨습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이 녀석을 한방 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나보다 먼저 그 애가 손을 댔습니다.
쿠마가야의 의자를 걷어차자 녀석은 바닥 위에 벌러덩 뒤집어졌죠.
그리고 그 애는 ?까불지들 마? 하는 대사를 내뱉으며 교실에서 나가 버렸습니다.
이미 교실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개표담당의 이나바가 능청스레 이렇게 말하더군요.
?사랑의 승리였습니다~. 박수~~.?
그것이 그 애에게 들렸던 것입니다.
돌연 대단한 기세로 되돌아왔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굉장한 난투가 벌어져 있었습니다.
이나바도 처음엔 농담이라고 말하며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그러는 동안 머리에 피가 올랐는지 나는 넣지 않았어! 나는 넣지 않았어! 하고 영문모를 말을 외치더니, 서로 차고 때리는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결국에 그 애는 말타듯이 올라타 이나바의 목을 졸랐습니다. 어쩌면 순간의 살의는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애는 전혀 적당히라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다른 아이들도 당황해서 말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그 애를 눌러 겨우 싸움은 진정되었지요.
그래서 이나바 녀석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거품을 뿜으며 기절해 버렸어요. 인간이 정신을 잃는다는 걸, 난 그때 처음으로 보지 않았을까요.
마침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싸움은 겨우 끝이 났지만 이 사건은 학급에 나쁜 흔적을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 우리에 대한 놀림이나 장난은 거의 없어졌지만 그 대신 어딘지 소외당한 듯한 느낌이 줄곧 남게 되었어요.
결국 그때의 투표는 무효가 되지 않아 우리는 나란히 도서위원을 하게 되었지만 그는 클럽활동이 바쁘다는 핑계로 거의 얼굴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끔 와도 내가 하는 일 방해만 하였지 전혀 의욕이 없는 것 같더군요.
3학년이 되어 반아이들이 바뀌어 이름을 가지고 다시 놀리는 풍습이 부활되었을 때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납니다.
3학년 정도가 되니 모두 조금씩은 어른이 되어가는지 그리 심한 것은 없었지만 말입니다.
쓰다보니 뭔가 길게 늘어놓게 되었습니다만, 하여간 이런 관계를 넘지 않는 두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이 기대하고 있는 첫사랑이 만약 있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나보다는 서로 이름이 다른 급우 쪽이 그럴 확률이 높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쨌건 그것도 없었으니까요.
…… 당신은 그의 어떤 점에 이끌렸습니까?
? ? ? 후지이 이츠키
후지이 이츠키님.
그는 언제나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눈동자는 언제나 투명해서 지금까지 만난 누구보다도 아름다웠습니다.
곰보도 보조개로 보이는 이치일까요.
그러나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분명 그것이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등산과 그림을 좋아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지 산에 오르고 있던지 둘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도 분명 어딘가의 산에 올라 있던지, 그림을 그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의 편지 속에서 여러 가지 것을 추리합니다.
예를 들면 당신의 편지 속에서,
?도서관에 와도 방해만 할 뿐.?
이라고 씌어 있으면, 그였다면 어떤 식으로 일을 방해했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분명 이상한 짓을 했을 거야, 책에 이상한 낙서라도 하진 않았을까, 하고 맘대로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무엇이든 좋으니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여러 가지 추리하는 즐거움이 있으니까요.
부디 부탁드립니다.
? ? ? 와타나베 히로코
와타나베 히로코님.
당신의 부탁이 내게는 오히려 어렵습니다.
사소한 일이라고 하시지만 사소한 일 따위를 기억할 리 없지 않습니까?
졸업한 지 벌써 십년이 지났으니까요. 이미 기억이고 뭐고 남아 있을 리 없지요.
단지 ?장난?이라는 말로 생각난 게 있어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쓰겠습니다.
3학년 때였던가요.
나는 사실 억지로 하게 된 도서위원 일이 아주 마음에 들어서 3학년 때는 스스로 도서위원에 입후보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손을 들자 그 아이도 손을 들었습니다.
입후보는 우리 두 사람뿐. 물론 예상대로 반아이들의 차가운 공격은 있었지요. 그러나 그것보다 화가 난 것은 그 아이가 입후보한 것입니다.
그 아이는 도서위원이 되어봤자 하나도 일을 하지 않잖아요. 그 아이도 그것을 노린 겁니다. 2학년 때 완전히 맛을 본 거겠죠.
아니다 다를까, 그 아이는 조금도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클럽활동이 바쁘다고 하며 거의 얼굴도 비치지 않았으며 어쩌다 와도 책정리하는 것조차 거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반납된 책을 책장에 돌려놓는 것도 도서위원의 일이거든요. 그리고 대출이 바쁠 때는 혼자서 거기까지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 녀석은 가끔씩 오는 주제에 그마저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는가 하면 뭔가 묘한 장난을 하고 있어요.
그 아이는 도서실에 오념 반드시 몇 권인가 책을 빌려갑니다. 그것도 어떤 책인가 하면, 그렇지…… 예를 들면 아오키 콘요의 전기라든가, 말라르메의 시집이라든가, 와이에스의 화집이라든가, 그런 것. 요컨대 절대로 아무도 빌려가지 않을 것 같은 책.
어느 날 내가 이런 걸 읽니? 하고 묻자 그 녀석은 읽을 리가 업지, 하고 말하는 겁니다. 그럼 왜 빌려가는가 싶었더니 그는 단지 아무도 빌려가지 않은 책의 아직 하얀 백지로 되어 있는 카드에 자기의 이름을 써넣는 것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장난이 뭐가 재미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본인은 아무도 빌려가지 않는 책이 불쌍하다고 말했습니다만…….
그 아이가 그런 장난을 했던 것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서카드에 낙서를 했던 기억은 없습니다만, 어쩌면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낙서란 말에 생각났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기말고사 때.
내가 가장 잘하는 영어였는데 웬걸 27점.
이 27이란 숫자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것이 내 필체가 아닌 겁니다. 그러면서 이름은 제대로 후지이 이츠키라고 씌어 있으니 이것은 녀석의 답안지라는 것이 확실하잖아요?
그런데 그 녀석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답안지를 엎어놓고 낙서나 하고 있는 겁니다.
내 생각이 틀림없다면 그것은 내 답안지입니다.
?멋대로 남의 답안지에 낙서하지마!?하고 정말 목까지 그 말이 치밀어 올라왔지만 수업중이었으므로 할 수 없이 쉬는 시간까지 기다렸지요.
하지만 기껏 쉬는 시간이 되어도 나는 말을 걸 수가 없었어요.
그 무렵은 모두에게 놀림받는데 공포증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 앞에서 그 녀석에게 편하게 말을 걸 수 없었던 겁니다.
?내 답안지 돌려줘!?
그 한마디를 못 건넨 그날 하루는 너무나 길었습니다.
말을 꺼낼 기회를 발견하지 못한 채 승부는 방과후로 돌려지고 결국에는 교사 뒤에 자전거를 세워두는 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태까지 벌어졌지요.
그 무렵 자전거 두는 곳은 연인들의 메카였습니다.
항상 몇 명인가의 여학생들이 좋아하는 선배 남학생을 몰래 숨어 기다리거나, 그곳에서 고백을 하거나 편지를 전하거나 했던 것입니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그런 모습들을 한심하게 생각했던 쪽입니다. 평소에는 무시하고 지나쳤지만, 그날은 그럴 때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도 일의 중대함을 의식하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멍하니 서 있었지만, 지나가는 학생들이 모두 흘끔흘끔 나를 보며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고 한참 생각한 나는 겨우 그 이유를 깨달았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에는 기절할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저 답안지를 돌려 받으려고 그곳에 있었을 뿐이지만, 남이 보기엔 남학생을 쫓아다니는 여학생들과 분간이 가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아냐! 나는 달라!
나는 마음속으로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은 전혀 그렇게 봐주지 않는 것입니다.
?쟤 2반의 후지이야.?
하고 자기네들끼리 속삭이는 소리까지 들려오자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건 정말 힘들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포기하고 집에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그때 바로 옆에 있던 여자아이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보니 그 아이는 옆반의 오이카와(及川)였습니다.
말을 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만, 자주 남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아이, 중학생인 주제에 묘하게 색기를 뿌리는 아이. 있잖아요? 그런 아이(당신이 그런 아이였다면 미안합니다).
오이카와는 내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도 누구 기다리니?? 하고.
기다린다고 하면 분명 기다리는 것이어서, 무심히 끄덕거리자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안 오지?? 하고.
할 수 없이 또 끄덕거리자, 그녀.
?…… 우리 서로 힘들구나.?
그러면서 휴우 하고 한숨까지 쉬는 겁니다. 나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한동안 둘이 그곳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습니다.
?남자는 교활해.?
?응??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 뭐라고도 대답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그리고 나서 그녀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중학생인 주제에 어른의 높이를 넘겨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뭔가 엄청난 것을 본 것 같아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나는 우선 손수건을 빌려주었습니다. 하교하는 학생들이 한층 더 이쪽을 말똥말똥 보며 갔습니다. 나는 친구도 아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위로하는 척하며 주위의 시선을 물리쳤습니다.
한참 울고 나더니 그녀는 코를 훌쩍거리면서,
?그렇지만 여자 쪽이 훨씬 교활하지.?
…… 어쩌면 나는 아직 그녀의 높이에 이르지 못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건 어찌 되었건 그녀는 내게 손수건을 돌려주면서,
?먼저 갈게. 잘해봐.? 하고 가버렸습니다.
나는 또 혼자.
그러나 나의 고뇌 따위는 오이카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할 수 없이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클럽 활동을 마친 그 녀석이 나타났을 무렵에는 거의 모두 하교하여서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얘, 잠깐만.?
어둠 속에서 그렇게 말을 걸자 그 아이는 꽤 놀랐습니다. 나도 분명 앙칼진 소리로 불렀다고 생각합니다. 이 녀석이 자기 답안인 줄 몰랐던 탓에 소중한 하루를 이렇게 망쳐 버렸으니까요.
솔직히 목이라도 졸라주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뭐야. 너였니. 놀래키지마.?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만 말했습니다.
?오늘 시험 답안지, 바뀌지 않았니??
?뭐??
?이게 네 거잖아.?
그렇게 말하며 답안을 내밀었지만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녀석은 자전거 페달을 돌려 라이트를 켜서 그것으로 보려고 했지만 돌리면서 보는 것은 좀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게 순조롭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내가 페달을 돌려주었지요.
그 녀석은 한참동안 자신의 답안과 내 답안을 비교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 겁니다.
?뭐 하는 거니? 보면 금방 알잖아!?
그런데 그 녀석, 잠깐만 기다리라고 해놓고 역시 좀처럼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점점 손이 저려와서 대체 뭐 하는 거야, 하고 생각했더니 그 녀석 불쑥 내뱉는 말이,
?broken이었구나, breaked가 아니구나.?라니.
요컨대 그 녀석은 답을 맞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을 수 없겠지요.
거기까지 쓴 나는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다락방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중학시절의 교과서며, 노트 등이 들어 있는 상자를 열어 안을 뒤졌다. 그리고 바인더에 파일되어 있는 프린트 다발 속에서 문제의 답안지를 발견하였다.
틀림없이 영어답안으로 뒤에는 그가 나의 것인지 모르고 그린 낙서가 남아 있었다. 그 낙서가 예상 외로 깨끗한 데생인 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 그러고 보니 히로코의 편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말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히로코에게 있어서는 귀중한 보물일지도 모른다. 보내주면 기뻐하겠지.
그 그림은 당시 유행하였던 미야자키 미치코의 바지를 벗는 CM을 그린 것이었다.
?뭐 하니??
깜짝 놀라 돌아보자 할아버지가 들여다바고 있었다.
?왜요??
?이사갈 준비 하냐??
?아녜요.?
?그래.?
할아버지는 그래도 뭔가 말을 하고 싶은지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왜요.?
?이츠키, 너도 이사 가는데 찬성이냐??
?예??
?찬성이냐??
?찬성도 반대도 아녜요. 하지만 이렇게 낡았잖아요.?
?찬성이냐??
?…….?
할아버지는 뭔가 투덜투덜 혼잣말을 남기고 갔다. 나는 조금 소름이 끼쳤다. 드디어 올 것이 왔는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 하자 엄마는 무서운 소리를 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인간만 아니라면 이 집에 버리고 갈 텐데 말이다.?
?무슨 말이야, 그건??
?사실은 할아버지에겐 그게 행복해.?
엄마와 할아버지 사이에는 때때로 잴 수 없는 단절이 보인다. 아버지가 없는 지금, 두 사람은 전혀 타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서는 그다지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어른들의 이야기니까. 중학시절부터 그렇게 결정하고, 그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는 방에 돌아와 편지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예의 미야자키 미치코 그림이 있는 답안용지와 함께 봉투를 넣었다.
그 문제의 답안을 발견하였으므로 보내드립니다. 뒷면의 낙서는 그의 작품입니다.
? ? ? 후지이 이츠키
9
히로코는 미야자키 미치코의 그림을 그의 유품 스케치북 사이에 끼웠다.
히로코는 편지를 읽으면서 이상한 느낌을 가졌다. 애초에 히로코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후지이 이츠키라는 두 사람의 관계였다. 동성동명이라고 하는 드문 관계 속에서 짧은 중학 3년간에 그가 그녀를 어떻게 느꼈을까? 그것이 히로코의 초점이었다.
그러나 자꾸자꾸 오는 편지를 읽으면서 히로코는 그런 딱딱한 기분이 점차 녹아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보낸 중학시절의 기록을 읽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만은 밝히고 싶었다. 그 수수께끼는 분명 그가 자신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가 이야기하지 않았던 자신에의 메시지일 수도 있다고 히로코는 생각했다.
후지이 이츠키님.
답안지 고맙습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런데 그의 첫사랑의 상대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짚이는 데는 없습니까?
? ? ? 와타나베 히로코
와타나베 히로코님.
그 정도까지 그의 개인적인 일에 관한 자료는 내게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래봬도 꽤 인기 있었기 때문에 분명 누군가 상대는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 기억하고 있습니까? 오이카와.
그 어른의 높이를 넘보던 여자아이. 그 아이가 한 번은 내게 와서 이런 것을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기, 후지이 말야, 누구하고 사귀는 사람 있니??
나는 물론 그런 걸 알게 뭐니,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것보다 화가 난 것이 어째서 그런 것을 내게 물으러 왔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오이카와가 하는 말.
?니네 둘이 사이가 좋아 보이니까 그렇지.?하는 겁니다.
이미 이런 종류의 놀림은 질리도록 들었을 때였지만, 왠지 오이카와가 그런 말을 하니 말투가 색기를 띈 탓도 있어 괜히 묘하게 들렸습니다.
내가 벌컥 화를 내자 그 아이는,
?사랑을 느끼지 않니? 그 애한테??
어째서 이 아이는 입에 담기도 힘든 말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가,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같은 이름이라는 게 얼마나 멋지니? 좀 운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이것은 당신이 편지에도 있었지요. 어쩌면 당신과 오이카와는 어딘가 발상이 비슷한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괜찮아요. 성격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는 것만은 제가 보증해 드리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녀는 끝내 이런 말까지 하였습니다.
?뭣하다면 내가 사랑의 큐핏이 되어줄 수도 있어.?
?거절하겠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얼른 그녀로부터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 2, 3일이 지나 내게로 또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정말 사귀고 있지 않구나.?
?그래서 그렇게 했잖니.? 하고 내가 말하자.
?그에게 직접 물었어.?
이 천하의 바보 같은 계집애 때문에 나는 하마터면 살인범이 될 뻔했습니다. 만약 거기 어디에 조각칼이라도 있었다면 틀림없이 찔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본론은 거기서부터였습니다.
?그러나 난 정말로 너를 위해 사랑의 큐핏이 되어주려고 생각했었어. 그러니까 이번에는 네가 나의 큐핏이 되어줄 차례이지 않니??
처음에는 말하려고 하는 뜻을 잘 몰랐지만 요컨대 그 녀석과의 사이를 이어달라는 이야기.
웃기지마, 나는 정중하게 거절하고 또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는데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나란 애는 말이야, 무슨 짓을 할지 잘 모르는 여자지.?
강인한 협박에 진 나는 본의 아니게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도서실에 나타난 그 녀석을 서가 뒤로 데려가서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그 녀석은 여전히 기분 나쁜 듯한 얼굴로 아, 그래, 하는 한마디. 그래서 나는 얼른 그 아이를 그 자리에 기다리게 해놓고 오이카와를 데리고 왔지요.
그리고 그 다음은 둘이 알아서 하라고 하고 나는 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일분도 지나지 않아서 서가 뒤에서 그 녀석이 나와서 그래도 휙 교실을 나갔습니다. 그 대신에 오이카와가 좀처럼 나오지 않아서 들여다보러 갔더니 그녀는 서가에 기대어 몹시 우울한 얼굴을 하고 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이런 일의 되풀이구나.? 하고 힘없이 중얼거렸습니다.
뭐 언뜻 보기에 교섭은 결렬된 것 같더군요.
그녀가 돌아간 후 그 아이가 되돌아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기에 궁금해서 물어보았어요.
?찼니?? 하고.
그랬더니 그 녀석 갑자기 몹시 무서운 얼굴을 하고 말했어요.
?이제 그런 짓 하지마!?라구요.
첫사랑의 상대가 오이카와가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오이카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인생을 잘못 밟아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남의 일이면서도 걱정이 됩니다.
추신 : 당신이 알고 있는 그에 관해서도 가끔은 이야기해 주십시오.
? ? ? 후지이 이츠키
후지이 이츠키님.
내가 알고 있는 그는, 말이 없고 무표정하고 사람과의 교제가 서툴고, 그것은 분명 당신이 알고 있던 시절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좋은 점 또한 더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말로 분명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는 오른 다리가 좀 불편하였는데, 아마 중학교 때 당한 교통사고 탓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까?
만약 알고 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 ? ? 와타나베 히로코
와타나베 히로코님.
그러고 보니 그 녀석 3학년 초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건에 관해서는 실은 나도 무관하지 않으니까요.
어느 날 아침, 그 아이은 자전거로 통학중에 트럭과 부딪쳐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담임인 하마구치(浜口) 선생님이 황급히 병원으로 가셔서 그날 아침 조회는 학년주임 선생님이 대신 왔습니다.
그래서 후지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하마구치 선생님이 병원으로 가셨다던가, 병원에서의 연락에 의하면 후지이는 생명에는 별 이상없다고 하는 사정을 설명하는 동안 선생님과 나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때 학년주임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입이 떡 벌어진 채 정지동작으로 있다가, 후지이, 너 어째서 여기 있는 거냐? 하시는 거예요.
아-아, 또구나, 했습니다.
아무래도 학교는 나와 그 녀석을 착각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또 한바탕 소란. 학년주임도 뛰어나가서 결국 아침조회는 없어졌고, 그보다 병원 쪽에서는 잘못 연락을 받고 달려온 우리 부모님과 늦게 온 그 쪽 부모들이 맞부닥치고, 담임인 하마구치 선생님 외에 학년주임에다, 교장과 교도주임도 달려와서 대소란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시 가장 놀란 것은 상처를 입은 본인이었지 않았을까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그 아이에게 듣지 못했나요?
그 아이는 다리가 부러진 정도였긴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이 아마 육상경기대회 일개월 전이었을 겁니다. 그는 육상부 선수였어요. 물론 시합에 맞추어 회복할 수 없었지요. 꽤 기대주였던지 모두들 유감스러워했습니다.
육상경기대회는 오타루와 삿포로의 중학교들이 모여 열리는 제법 큰 이벤트였습니다. 평소 학교 운동장에서도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았던 육상부 유일의 화려한 무대였다고나 할까요?
우리들도 응원하러 갔습니다.
백 미터 경주의 경기가 시작되고 예선의 몇 회째였을까. 선수들이 일렬로 나란히 스타트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제일 가장 자리의 선수 옆에 그 아이가 있었어요.
물론 그 아이가 서 있는 것은 트랙 밖이었고 선도 그어지지 않은 곳이었지만 다른 선수처럼 클라우칭 스타트 포즈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왜 엎드려서 엉덩이를 치켜들고 있는 스타일의 포즈.
(…… 설마)
그렇게 생각한 다음 순간 피스톨이 울리고 동시에 그 아이도 뛰기 시작했어요. 다른 선수와 함께. 터무니없는 이야기죠. 뼈가 부러진 지 겨우 한 달밖에 안되었는데.
모두 웃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는 일어서더니 손까지 흔들며 관중에게 어필하면서 퇴장하려고 했지만, 시합에 나온 선수측의 야유와 항의가 얼마나 거센지 깡통이 날아오고, 신발이 날아오고 하여튼 온통 난리법석. 정말 소란을 불러일으키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아요. 선수들이 주행방해니까 다시 해야 한다고 클레임을 걸어왔기 때문에 심판 선생님들과 여러 사람들이 나와서 경기장은 일순 전투 분위기조차 자아냈습니다. 결국 시합은 클레임이 받아들여져 재출발. 그 녀석은 선생님들께 실컷 야단맞은 끝에 어딘가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녀석의 중학교 마지막 경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육상부도 그만두고(잘린 것인지도 모릅니다만), 한가해졌는지 그 녀석도 자주 도서실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은 여전히 도와주지 않고 혼자 창가에서 운동장을 내다보며 폐인처럼 지냈습니다.
그러나 폐인이 되어도 예의 이상한 장난은 계속했습니다. 백지의 카드에 이름을 쓰는 짓 말입니다.
그가 육상에 몰두해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 장난에 몰두했던 그의 진의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 ? ? 후지이 이츠키
공방 뒤의 사무실에서 히로코는 아키바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작은 들창으로 직인들의 모습에 섞여 바쁜 듯이 일하는 아키바의 모습이 보였다. 저 모습이라면 아직 좀더 시간이 걸릴 듯하다.
찌그러진 나무 의자에 앉으면서 히로코는 망설이고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스즈미가 차를 가지고 왔다.
?선생님 곧 끝나실 겁니다.?
?고마워요.?
히로코는 손안에 있던 것을 슬쩍 감추었다.
스즈미는 히로코 옆에 앉았다.
?히로코씨, 괜찮습니다.?
?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스즈미는 빙그레 웃었다. 히로코 역시 웃는 얼굴로 되받았다.
?저, 아키바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스즈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히로코씨가 라이벌이구나, 싶어서 포기했습니다. 전 히로코씨도 좋아하니까요.?
?…….?
?선생님은요, 히로코씨가 전의 분과 사귀던 무렵부터 히로코씨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줄곧 짝사랑하신 것 같아요. 알고 계셨어요??
히로코는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부디 선생님을 행복하게 해 주세요.?
?…… 글쎄.?
?아, 선생님이 히로코씨를 행복하게 해드려야 하는 거군요. 선생님께 그렇게 말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스즈미는 일어섰다.
?오늘은 데이트예요??
?네??
?선생님, 아침부터 화려한 넥타이를 하고 계시길래요.?
그렇게 말하며 스즈미는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히로코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히로코의 손에는 이츠키의 편지가 들려 있었다. 히로코는 한 번 더 그것을 보았다.
스즈미가 아키바를 생각하고, 아키바가 히로코를 생각하고, 히로코가 후지이 이츠키를 생각하고, 후지이 이츠키는 옛날 동성동명의 여자를 생각하고, 그리고 그 여자는 지금, 동성동명의 그 남자아이를 생각하고 있다.
생각한다는 것은 행복한 것.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혼자만 불행한 기분으로 있는 자신이 몹시 초라한 인간 같은 생각이 들어 비참했다.
복도에서 <푸른 산호초>가 들려왔다. 어쩐지 아키바가 일을 끝낸 것 같다. 히로코는 편지를 가방속 깊이 넣었다.
?그 후 어때? 편지 왔어??
?응. 지금도 가끔.?
?그렇군. 완전히 펜팔친구가 되었구나.?
차안의 대화는 아까부터 일방적으로 아키바가 떠들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무슨 말을 해도 히로코의 반응이 둔했다.
?왠지 요즘 히로코 힘이 없어 보인다.?
?…….?
?무슨 일 있니??
히로코는 모호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말이야.?
?응??
?한번 그 산에 가보지 않을래??
?…….?
?그 녀석에게 인사하고 오자.?
?…….?
?응??
?…….?
대답도 하지 않는 히로코에게 아키바는 시종 웃는 얼굴이었다.
*
몇 일 후 그녀에게 소포가 왔다. 그 안에는 카메라와 필름이 조심스럽게 싸여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의 편지지 대신 작은 카드가 들어 있었다. 그곳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그가 달렸던 운동장의 사진을 찍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 ? ? 와타나베 히로코
토요일 오후, 나는 히로코가 보낸 카메라에 필름을 넣고 이로나이 중학교에 갔다.
교문을 들어서는 것은 졸업 이후 처음이었다. 반가움보다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카메라 같은 걸 가지고 잠입하다니, 어딘가 스파이 같다.
확실히 나는 히로코에게 일을 의뢰받은 스파이였다. 아니, 히로코에게 교묘하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인기척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지금은 봄방학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들어간 나는 작은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어떤 사진을 원하는 걸까, 하고 생각하면서 앵글을 맞췄지만 평평한 운동장에서 어디를 어떻게 찍어도 똑같아서, 이내 찍을 거리가 없어져 버렸다. 할 수 없이 그 녀석이 된 생각으로 트랙을 뛰면서 셔터를 누르기도 했다. 그래도 필름은 아직 줄지 않아 나는 나머지로 교정의 포플러 나무들을 찍고, 철봉을 찍고, 화단을 찍고, 수도꼭지를 찍고, 교사를 찍었다. 거기까지 하니 이번엔 욕심이 생겨서 나는 교사 안으로 몰래 들어갔다. 예전에 자유롭게 오갔던 복도를 이렇게 도둑 같은 기분으로 걷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직원실에는 누군가 있는지 주르륵 차를 마시는 소리가 복도까지 울렸다. 나는 숨을 삼키고 그 앞을 몰래 통과하여 그대로 복도 모퉁이를 돌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드는데 교사가 눈앞에 서 있었다.
?외부인입니까??
나는 대답에 궁해 어떡하지 생각하면서 꾸물거리고 있는데 그 교사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 걸음걸이와 얼굴이 어딘가 낯익다.
?하마구치 선생님.?
나는 엉겁결에 소리를 질렀지만 상대는 금방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지 멀뚱멀뚱 이쪽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저, 3학년 2반의…….?
?아!?
?후지이입니다.?
?후지이!?
?네, 그렇습니다. 기억하세요??
?3학년 2반, 후지이 이츠키. 출석번호가…….?
거거까지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교사의 고집인지, 하마구치 선생님은 애써 기억하려 하고 있다. 그러다 손가락을 꼽으면서 중얼중얼 뭔가 낯익은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것은 3학년 때의 출석이었다. 남학생이 끝나자 하마구치 선생님은 여학생의 출석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토?엔도?오타?카미자키?스즈키?도야?테라나이?나카지마?노구치?하시모토?후지이?후나바시…….?
그리고 지나간 손가락을 한 개 되돌리며,
?24번.?
듣고 나서야 생각나지만 확실히 24번이었다.
?대단하세요! 선생님, 어떻게??
나는 얼떨결에 박수를 쳤다.
?어쩐 일이냐? 오늘은??
?아뇨. 그냥 산책겸.?
?산책겸 올 곳은 아닌 것 같은데??
?저 친구에게 학교 사진을 부탁받아서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학교사진? 뭐에 쓰게??
?…… 글쎄요, 거기까지는.?
그것도 사실이었다. 선생님도 그 이상은 알려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선생님은 우연히 오늘은 도서실에 용무가 있어서 출근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너도 도서위원이었지.?
정말 무엇이든 다 기억하시는 분이구나.
?실은 아직 그래요.?
?뭐? 도서위원.?
?시립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거든요.?
?아, 그렇구나!?
?네, 무슨 인연이 있나봐요.?
?그럼 이곳에서의 일도 쓸데없지는 않았구나.?
?좋아했었어요. 도서위원 일.?
?그랬구나. 어딘지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우리는 도서실에 이르렀다.
?잠깐 보고 갈래??
?아! 오늘은 서가 정리일인가요??
?그래.?
?저도 했었어요, 봄방학 때.?
?도서위원의 연중행사였지.?
?모두 모여라!?
선생님의 호령으로 학생들이 모였다.
?너희들의 선배인 후지이다.?
갑작스럽게 소개받아 두근거리면서 나는 모두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학생들도 느닷없이 모르는 사람을 소개받아 당황했는지 수줍어하면서 얼굴을 마주보며 소곤소곤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쩐지 모습들이 이상했다. 낮은 소리 속에 내 이름이 섞여 있다. 무엇을 서로 속삭이고 있는가 싶었더니 한 학생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후지이 이츠키씨??
나는 놀랐다. 학생들은 쿡쿡 웃고 있다.
?너희들 알고 있니??
나 대신 선생이 질문하였다.
?예? 정말로??
하고 말한 것은 아까 내 이름을 맞춘 학생이다. 돌연 학생들은 웅성거렸다. 저마다 거짓말! 이니 정말! 이니 하며 법석이었다. 나는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한동안 소란이 끝난 후 학생들은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선배님, 우리들 사이에서는 전설적 인물이시랍니다.?
?그건 말도 안돼.?
?있다!?
학생 한 명이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뒷표지를 펼치더니 안의 카드를 빼내어 내게 보여주었다.
?보세요, 이것.?
나는 카드를 보고 놀랐다. 그것은 그가 장난으로 후지이 이츠키라고 쓴 그 백지카드였다. 설마 남아 있다니.
학생들이 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함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우리들 사이에서 후지이 이츠키 찾기 게임이란 게 유행하고 있어서요.?
?그래요.?
?처음에 누가 발견했었지??
?쿠보타(久保田) 아니니??
?아, 그래. 쿠보타, 쿠보타.?
?이런 카드가 몇 장이나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 그러나 처음에는 붐이 되지 않았는데 뭔가 확실히 더 있을 거라는 걸 알게 되어서.?
?그러는 동안 몇 권 더 찾게 되었어요.?
?누가 제일 많이 찾나 경쟁이 붙었어요.?
?후지이 이츠키 게임이란 이름, 누가 붙였더라??
?누구였지??
?그래서요, 표까지 만들었어요.?
?이거요, 이거.?
학생들은 그 표까지 보여주었다.
?현재 제가 일등이에요.?
?마에카와(前川)가 그 뒤를 쫓고 있어요.?
?일단 남녀 대항을 하고 있어요.?
?그럼, 아직도 많이 남았니??
?모르겠어요. 모르니까 재미있구요.?
?그래요.?
?그래요.?
나는 좀 감동하고 있었다. 뭐라고 표현할지 설명하기 어렵지만 콧등이 시큰해졌다. 별 것 아닌 도서카드인긴 하지만 그 아이가 쓴 이름이 10년이나 이곳에 그대로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 기적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설마 본인을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래요.?
?그래요.?
모두들 어쩐지 내가 쓴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아냐. 이것, 내가 아냐.?
모두 일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시선이 일제히 내게 집중해 있었으므로 얼떨결에 변명을 하는 꼴이 되었다.
?도서위원 중에 다른 애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애가 장난으로 그랬어.?
모두 감탄하면서 끄덕였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수수께끼였던 후지이 이츠키 카드의 기원이 밝혀지고 있는 셈이다. 모두 다음 설명을 숨을 죽이며 기다리고 있다.
?…… 그것뿐이야.?
모두 그럴 리가 없다는 얼굴을 하였다. 그 중에 한 명의 여학생이 말했다.
?다른 사람이 선배님의 이름을 썼어요??
?응??
아무래도 아이들은 카드의 이름을 나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같은 이름이니까 무리도 아니다.
?그 사람, 남학생이에요??
?응? ……그래.?
?그 사람 선배님을 어지간히도 좋아했군요.?
?응??
?그러니까 이렇게 많이 선배님의 이름을 써놓았지요.?
또 학생들은 술렁거렸다. 모두 와와 떠드는 거야 자기 마음이지만 그 속에 ?사랑 이야기였잖아?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흘려 버릴 수 없었다.
?그런 게 아냐. 그런 게 아니고!?
그러나 이미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후지이…….?
선생님이 내 어깨를 찔렀다.
?예??
?얼굴이 빨개졌어.?
나는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뜨거워져 있는 것을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본 학생들은 더욱 들떠서 이미 사태는 수습불능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로 나는 내 모교에 사랑의 전설을 남겨 버렸다. 아마 대대로 전해지겠지. 뭐, 그것도 괜찮은걸.
나는 ?사랑의 카드?를 기념으로 두 장 받아서 도서실을 뒤로 했다. 한 장은 와타나베 히로코에게 보내주기 위해서였지만, 왠지 모르게 내 것으로도 한 장 갖고 싶어진 것이다.
카드와 사진을 동봉하여 나는 와타나베 히로코에게 편지를 보냈다. 학교에서의 해프닝도 자세히 써주었다.
며칠 후 답장이 왔다.
그것은 짧았지만 의미심장한 글이었다.
후지이 이츠키님.
사진과 카드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그의 이름이었을까요?
? ? ? 와타나베 히로코
10
조난 소식을 들은 히로코는 당장 현지로 향했다. 신간선에서 도중에 로컬선으로 갈아타고 그곳에서부터가 한참 멀었다. 두 량밖에 없는 디젤선의 완행열차는 이쪽의 다급한 마음과는 반대로 여유롭게 시골 구석구석을 히로코에게 보이면서 달렸다. 건널목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리기 시작하여 그칠 때까지의 시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길게 느껴지고, 큰짐을 안고 올라타는 행상 아주머니들이 마치 달팽이처럼 보였다. 늦게 온 승객을 위해 일부러 일시정지까지 할 때마다 히로코는 몇 번이나 초조함에 한숨을 쉬었다.
시골 시간. 그것은 갑자기 찾아온 히로코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시들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보기도 하고, 구름을 움직여 보기도 하고, 얼어붙은 강바닥의 작은 돌을 굴려 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역에 도착했을 때부터는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그 동네의 소방단 트럭에 타서 산밑까지 가자 긴급하게 세워진 가설 텐트 주위는 큰소리를 지르는 사람들로 웅성거렸다. 그리고 눈앞에는 산정에 구름을 뒤집어 쓴 거대한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텐트 속에는 먼저 도착한 그의 부모가 있었다. 두 사람 다 초조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텐트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등산대의 가족들은 모두 초췌한 얼굴로 불안한 듯이 산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착한 지 20분.
헬리곱터가 하산했다. 굉음과 함께 눈앞의 설원에 착륙하는 헬리곱터는 마치 영화 속 장면 같았다. 숨을 죽이면서 히로코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에서 구급대가 내려오고 들것이 하나둘씩 날라져 왔다. 가족들이 차례차례 들것 주변에 모여들었다.
?괜찮습니다! 모두 건강합니다!?
대장 같은 사람이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가장 마지막은 아키바였다. 그는 구급대원에게 어깨를 빌리면서 자력으로 걷고 있었다. 히로코는 아키바에게 뛰어갔다.
?아키바씨!?
아키바는 히로코의 얼굴을 보자마자 돌연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마치 미아가 된 꼬마가 엄마를 재회한 순간 같은 광경이었다. 어른이 이런 식으로 울 수 있는가 생각할 정도로 정말 아이처럼 소리내어 아키바는 흐느꼈다. 그리고 울면서 아키바는 이렇게 외쳤다.
?용서해줘, 히로코! 용서해줘!?
절벽 틈에 끼여 버린 그를 아키바 일행이 그냥 두고 내려왔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그러나 그리고 나서도 일행은 3일간 산속을 헤맸으므로 발견이 그렇게 빨랐던 것은 아니었다. 구급대 대장은 살아 있었던 것이 신기할 정도라고 하며, 조난시 아키바의리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기적의 생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히로코는 아키바와 함께 그 두 량 편성의 로컬선을 타고 있었다.
?앞으로 한 역만 더 가면 돼.?
아키바의 말에 히로코는 놀랐다. 그렇게 길게 생각되었던 노정이 오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온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히로코는 마음속이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하여 안정이 되지 않았다.
*
벌써 4월이 지났는데 그날 아침은 몹시 추웠다.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공기다. 목이 묘한 느낌으로 뜨거웠다. 또 감기를 앓을지도 모른다.
오후가 되어도 몸이 좋아지지 않아 오후에는 일찍 조퇴하기로 했다.
?나, 병원에 좀 들렀다가 갈 테니까 잘 부탁해.?
그렇게 말하자 아야코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보았다.
?이츠키가 스스로 병원에 간다고 하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러했다. 그러나 왠지 오늘은 병원에 대해 별 저항이 없었다. 아야코는 오히려 걱정했다.
?괜찮니??
?응.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갔다 올게.?
아야코는 줄곧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이상한 느낌이 든다. 그때는 확실히 대단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을 들었다.
?약 먹고 목욕하지 말고, 푹 쉬어요. 약은 3일 분 줄게요.?
나는 자신의 흉부 엑스레이 사진을 멍청히 보고 있었다. 가슴 언저리에 거뭇한 그림자가 나와 있는 것은 뭘까?
?선생님, 이것은??
?아아, 좀 거뭇한 그림자가 나와 있네요. 폐가 약간 염증기를 일으키고 있어요.?
?폐렴이에요??
?하하하. 시험삼아 이 병원 주위를 한바퀴 전력 질주하고 오세요.?
?예? 달리라구요??
?그러면 오늘 밤에는 훌륭한 폐렴환자가 되어 입원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선생님은 한가롭게 웃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잡으려고 큰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불렀다. 하마구치 선생님이었다.
?어, 후지이. 자주 만나는구나.?
?어머나, 안녕하세요.?
그리고 어쩌다 한참 함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후 아이들은 그 게임에 더 열을 올리게 되어서 뭔가 붐 같은 것이 되어 버렸어.?
?어머나.?
?너도 재미있는 선물을 남긴 게 되었구나.?
?죄송합니다.?
?그래, 누구였지? 그걸 한 게??
?예??
?네 이름을 쓴 사람.?
그렇게 말하고 선생님은 의미 있는 눈을 하였다. 선생님도 그 첫사랑 설을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아녜요. 그건 제가 아니에요.?
?응??
?제 이름이 아니에요.?
?…… 뭐라고??
?기억나지 않으세요? 왜, 또 한 사람의 후지이 이츠키요.?
?…….?
?있었잖아요? 동성동명의.?
?아아.?
?그 녀석의 장난이었어요.?
?…….?
?기억하세요??
?그래. 남자 후지이 이츠키??
?그래요!?
?출석번호 9번.?
?우와, 대단해요!?
?…….?
?지금, 완전히 순식간에 기억해 내셨어요.?
?그 아이는 특별해.?
???
?죽었잖아. 2년 전에.?
?…….?
?설산(雪山)에서 조난 당해서.?
?…….?
?물랐니? 뉴스에서도 한참 다뤘었는데.?
그 후 선생님과 어디서 어떻게 헤어졌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택시 안에서 심하게 기침을 하고 있었다.
?…… 괜찮습니까??
창밖을 보니 확실히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상점가 거리를 막 지나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어서 쇼핑객이 넘치고 있는 거리를 택시는 천천히 통과하였다.
아버지가 죽은 그날, 나와 엄마와 할아버지 세 사람은 걸어서 이 길을 돌아왔다. 그때는 설날 연휴 때여서 상가들도 문이 닫혀 있어 개미 한 마리 없었다.
거리 한복판에서 나는 큰 물웅덩이를 발견했다. 그런 계절의 물웅덩이는 물론 바닥의 바닥까지 얼어붙어 있다. 나는 스케이트를 타듯 단번에 그 위를 활주했다.
엄마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바보! 넘어져!?
그러나 나는 넘어지지 않고 그 위를 활주했다.
정말 큰 물웅덩이였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잘 미끄러졌다. 멈출 때까지의 시간이 묘하게 길어서 그 감각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물웅덩이의 끝에서 멈춘 나의 발밑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나는 구부리고 앉아 그것을 확인했다. 엄마도 할아버지도 다가와서 모두 들여다보았다.
엄마가 말했다.
?…… 잠자리??
확실히 그것은 잠자리였다. 얼음 속에 갇혀 있는 잠자리였다. 이상하게 날개도 꼬리도 쫙 편 채 얼어 있었다.
?예쁘다.?
엄마가 말했다.
갑작스런 급부레이크가 나를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택시는 길 한복판에서 휙 돌았다. 차밖에서는 장바구니를 든 주부들이 놀라서 아우성을 쳤다. 화난 얼굴의 아주머니들이 안을 들여다 보아서 나는 엉겁결에 시선을 떨구었다.
방향을 바꾼 택시는 달아나듯이 상점가 안을 통과하였다.
?이야, 잊고 있었군. 그곳엔 커다란 물웅덩이가 있었던 것을. 겨울에는 얼어서 아주 위험하지요.?
나는 기침을 하면서 끄덕였다.
?비인가?…… 진눈깨비인가??
운전사는 와이퍼를 움직였다.
진눈깨비가 앞유리에 하얀 궤적을 남겼다.
?벌써 4월인데, 눈이라도 내릴 건가??
하늘은 어느 틈엔가 무거운 구름으로 덮이고 있었다.
*
역에서 내린 히로코는 코트깃에 고개를 묻으며 조그맣게 떨고 있었다. 아키바는 짐을 들고 앞장서 걸었다.
?추워??
히로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드디어 왔구나. 인연 있는 산에.?
그렇게 말하고 아키바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조금만 가면 아는 사람이 있어. 카지(梶)라는 사람인데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지진, 천둥, 불(일본어로 불을 카지라고 하며 카지라는 이름과 발음이 같음 ; 옮긴이), 아버지잖아. 그래서 모두들 불아범(불과 아버지를 합친 말로 일종의 애칭임 ; 옮긴이)이라고 불러. 오늘 밤은 그 카지 아저씨네서 머물고, 내일 아침 일찍 산으로 출발이야.?
?…….?
?좋은 사람이야, 불아범. 히로코도 금방 마음에 들 거야. 오늘 밤은 냄비요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린다고 했어.?
아키바는 불아범, 불아범을 연호하며 히로코를 웃기려 했지만 히로코의 반응은 밋밋했다.
시골길을 한참 가다가 아키바가 문득 멈춰 서서 먼 곳을 가리켰다.
?아, 봐, 저 곳…… 저 산의 꼭대기가 보이지??
히로코는 그러나 발밑을 내려다본 채 고개를 들려고 하지 않았다. 아키바는 그것을 눈치챘지만 특별히 무슨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돌아보니 히로코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있었다.
?왜 그래??
?…….?
?…… 히로코.?
?…….?
?무슨 일이야, 다리라도 아프니??
아키바는 되돌아가서 히로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왜 그래? 이렇게 떨면서.?
?…….?
?추워??
?…….?
?히로코.?
?안되겠어.?
?뭐??
?역시 안되겠어.?
?…….?
?뭐 하는 거야? 이런 게 좋을 리가 없잖아.?
?…….?
?좋을 리가 없어.?
?히로코.?
?그 사람이 화낼 거야.?
?그럴 리 없다니까!?
?돌아가자.?
?히로코.?
?부탁이야. 돌아가자.?
?무엇 때문에 온 거야. 모두 떨쳐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부탁이야.?
?떨쳐 버리지 않으면 안돼! 히로코!?
?…….?
?히로코!?
아키바는 히로코의 팔을 잡고 강제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히로코의 발은 뿌리라도 내린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 히로코.?
?…… 부탁이야.?
?뭐??
?부탁이야…… 돌아가게 해줘.?
주위에는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
집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누워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무엇을 할 마음도 들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할 힘이 없었다.
열이 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베갯머리에 있던 체온계를 겨드랑이 아래 끼고 체온을 쟀다.
부엌에서는 엄마가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불쑥 다가온 나를 보고,
?접시 좀 날라줄래?? 하며 태평스레 말하고 있다. 나는 체온계를 엄마에게 보였다.
?뭐야? 열을 쟀니? 몇 도였어??
엄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체온계를 보았다.
?이거 고장난 것 같아.?
나는 말했다. 동시에 엄마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엄마는 돌아보더니 내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츠키!?
그렇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까지는 기억하지만 다음 기억은 도저히 확실하지 않다. 때때로 엄마와 할아버지가 소리치는 것을 들은 기억은 난다.
…… 어딘가서 눈이 내린 듯한 느낌도 든다.
11
눈앞에서 갑자기 쓰러진 나를 엄마가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거실에 있던 할아버지를 큰소리로 불렀다.
?아버님! 아버님!?
그 심상찮은 목소리에 놀란 할아버지가 부엌으로 뛰어왔다.
?구급차요!?
엄마가 소리쳤다.
?119에 전화해요!?
?무슨 일이야??
?하여간 전화해요!?
?…… 아…….?
할아버지는 거실로 되돌아가자 황급히 119에 전화를 넣었다.
?여보세요, 저, 급한 환자인데요.?
그런데 구급차는 지금부터 가도 한 시간은 걸린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야 걸릴 리 없잖소??
할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전화에서 뭐라고 했는지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면서 커튼을 열었다.
창밖은 대설이 내리퍼붓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핏기가 가셨다.
부엌에서는 엄마가 얼음을 깨어 얼음베개를 만들고 있었다. 그곳으로 할아버지가 되돌아왔다.
?구급차는??
?기다릴 수 없어.?
그렇게 말하고 할아버지는 바닥에 뒹굴고 있던 나를 안아 일으켰다.
?네? 구급차 부르지 않았어요??
할아버지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깐만요, 어떻게 하려고 해요??
?담요 가져와!?
?어떻게 하려구요??
할아버지는 나를 짊어지자 그대로 부엌을 나갔다. 엄마가 그 뒤를 쫓아가 할아버지를 막았다.
?설마 택시??
?택시가 잡히기만 하면 15분 만에 병원에 갈 수 있어.?
?택시는 안돼요! 잡히지 않아요!?
?안된다면 걸어가겠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하시는 거예요. 그건 안돼요. 구급차 불러요!?
?한 시간 걸린단다.?
?예? 어째서??
?밖을 봐!?
엄마는 밖을 보았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밖을 보았을 때와 똑같이 안색이 바뀌며 절규했다.
?담요 가져와! 담요!?
할아버지가 노해서 소리쳤다. 그런데 엄마는 망연히 창밖을 보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할 수 없이 나를 데리고 현관을 향했다. 엄마는 제정신ㅇ로 돌아오자 급히 119에 전화를 다시 걸었다.
그곳으로 할아버지가 되돌아왔다.
?예, 얼음으로 식히는 것은 하고 있습니다.?
엄마는 전화로 응급처치 방법을 이것저것 듣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어디다 전화하는 거야!?
엄마는 수화기를 막으며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잠깐만요, 아버님! 이츠키 내려요. 따듯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데요.?
그리고 또 전화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예, 예.?
?이봐!?
?그러니까 아버님! 이츠키를 그곳에 눕히라고 했잖아요! 따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데요.?
?응급처치는 아까 다 들었다!?
?그러면 내려놓고 그렇게 하세요!?
?내려놓는다 해도 구급차가 오는 건 아니잖아!?
?온다고 하잖아요. 한 시간 뒤에.?
?그런 걸 어떻게 기다려.?
?기다리는 편이 좋아요. 그 쪽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리고 전화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한 시간 만에 오지요, 꼭 오지요??
할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이츠키를 업고 거실을 나갔다. 그것을 본 엄마는 수화기를 놓고 뒤를 쫓았다.
현관에서 할아버지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아버님. 정신차리세요. 이츠키 내려놔요.?
?됐으니까 담요 가져와!?
?택시는 안돼요.?
?…….?
할아버지 귀에는 이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엄마는 갑자기 까닭 모를 공포에 휩싸였다. 그리고 엉겁결에 소리쳤다.
?이 아이까지 죽일 생각이세요!??
할아버지는 놀라서 돌아보았다.
엄마는 억지로 나를 할아버지의 등에서 떼어놓았다.
할아버지는 나의 몸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엄마가 그것보다 먼저 감싸안은 채 마루 구석으로 달아났다.
할아버지는 현관 입구에 멈춰 선 채 엄마를 노려보았다.
엄마는 나를 껴안으면서 말했다.
?그 사람 때 어떻게 했어요? 아버님! 생각해 봐요!?
?…….?
?119구조대가 하는 말 듣지 않고 멋대로 택시 잡으러 가서 결국 못 잡았지요??
?…….?
?그래서 아버님, 그 사람 업고 병원까지 걸어갔죠? 기억하세요??
?…….?
?그래서 응급처치가 늦어서…… 그래서 죽었잖아요! 그 사람!?
?…….?
?또 같은 짓을 되풀이하실 건가요! 이츠키까지 죽일 생각이세요??
?…… 밖에는 대설이 오고 있어.?
?이럴 때는 전문가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안돼요. 네, 알겠어요??
?이제부터 점점 심해질 거야.?
?의사선생님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이 가장 안전해요. 이럴 때는!?
?그래서 늦어지면 어떻게 할래??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생각이 가장 위험한 거예요! 어째서 모르죠??
?의사가 날씨까지 봐준다더냐??
?아버님! 나는 보낼 수 없어요.?
?이번에는 괜찮아.?
?안돼요!?
?괜찮아.?
?아버님!?
?자, 이츠키를 이리 줘.?
할아버지는 신발을 신은 채 마루로 올라왔다.
?아버님! 안돼요!?
할아버지는 상관하지 않고 엄마에게서 떼어내려 하였다. 엄마는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소리쳤다.
?정신차리세요, 제발!?
?정신차리는 건 네 쪽이야!?
?아버님!?
그때 할아버지는 갑자기 잡고 있던 손을 떼더니 크게 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 그때.?
???
?…… 병원까지 걸어서 몇 분 걸렸냐??
?…… 걸렸어요. 걸렸잖아요! 그때도!?
?몇 분이지??
?…… 네??
?모르냐??
?한 시간…… 한 시간은 걸렸어요.?
?걸리지 않았어.?
?한 시간 이상 걸렸어요.?
?40분이야.?
?…….?
?그때는 40분이었어.?
?더 걸렸어요.?
?아냐. 걸리지 않았어.?
?…….?
?정확하게 말해 줄까? 집을 나가 병원 현관에 도착할 때까지 38분 걸렸어.?
?…….?
?그래도 늦었단다. 어쨌든 이미 늦었던 거야.?
?…….?
?지금 나가면 구급차가 여기에 도착하기 전에 병원에 도착할 수 있어.?
?그러나 이런 눈속을 걸어가는 건 무리예요.?
?걷지 않아.?
?예??
?뛸 거야.?
?…… 그런.?
?난 눈속에서 자랐어. 이런 눈 따위 문제도 아냐.?
?…….?
엄마는 혼란스러워 잘 판단할 수 없었다.
?어떡할래??
?이츠키는 네 딸이다. 네가 정해라.?
?…… 담요 가지고 오겠어요.?
그렇게 말하고 엄마는 할아버지에게 나를 넘겼다. 그리고 담요를 가져왔다. 할아버지는 그것으로 나를 둘둘 말았다. 그 동안에 엄마
가 코트를 가지고 왔다. 할아버지는 그것을 걸치자 나를 업은 채 대설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정말 달렸다. 엄마는 쫓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돌진하는 가운데 할아버지의 스피드는 점점 떨어졌다. 이번에는 엄마가 몇 번이나 멈춰 서서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헉헉 어깨로 숨을 쉬면서 다리까지 휘청거렸다. 여기까지 와서야 엄마는 두 사람 다 중대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
?엉??
?그렇지만 그때는 10년 전이었어요.?
?그게 어쨌다는 거냐??
?올해 일흔다섯이죠??
?일흔여섯이다.?
엄마는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 목숨과 바꾸더라도 40분 내에 도착할 테니까. 가자!?
그렇게 말하고 할아버지는 다시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이제 신에게 기도할 수밖에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병원에 도착한 것은 집을 나온 지 42분 후였다. 나는 그대로 응급실로 실려갔다.
수간호사가 엄마에게 말했다.
?아까 구급차에서 전화가 왔었어요. 이 눈으로 아직 댁에도 도착하지 못했대요. 환자는 벌써 이쪽에 도착하였습니다, 고 하였더니 몹시 놀라더군요. 제니바코에서 오셨다구요? 이런 폭설 속에 어떻게 오셨나요??
?걸어서…… 라고 할까, 달려서.?
?달려서요? 딸을 업고? 대단하세요!?
수간호사는 몹시 감탄했다.
?역시 모성은 강하군요!?
엄마는 솔직하게 정정을 하였다.
?아뇨. 할아버지가…….?
?…… 정말이에요.?
그 호걸인 할아버지는 호흡곤란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손녀와 나란히 응급실 침대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
도시에서 살고 있으면 밤의 어둠을 진짜로 느끼는 일이 적지만, 산에서의 밤은 그야말로 암흑 그 자체이다. 아키바와 히로코는 그 속을 계속 걸었다. 멀리 빛과 함께 집 한 채가 보였다.
?저거야.?
아키바가 그렇게 말한 것이 카지 아저씨의 집이었다. 상당히 멀어 보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걸어보니 훨씬 더 멀었다. 이윽고 도착한 그 집은 등산객들이 이용하는 록 하우스였다.
현관에 서서도 히로코는 아직 망설이고 있었다.
?오늘 하룻밤만 여기서 머물자. 알았지.?
아키바가 다정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무문을 두들겼다.
안에서 나온 카지 아저씨를 보고 히로코는 입가가 풀렸다.
?늦었구나, 시게루(茂).?
?오랜만입니다, 잘 있었어요??
두 사람은 반가운 듯이 서로 어깨를 껴안았다. 그리고 아키바는 히로코를 소개했다.
?와타나베 히로코씨입니다.?
카지 아저씨는 히로코에게 악수를 청했다. 히로코는 그것에 응했지만 입술이 떨리며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고 있었다. 초대면이 상대를 보고 웃는 실례를 범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카지 아저씨의 머리털이 곤두서 있어 영판 불아범의 모습이였기 때문에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카지 아저씨는 털털한 산사나이여서 아키바가 말한 대로 히로코도 이내 친해졌다. 카지 아저씨 특제의 산나물 찌개도 맛이 있었다.
한참 이야기가 무르익었나 싶자 어느 틈엔가 화제는 그의 이야기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 아까운 일이야. 좋은 녀석일수록 빨리 죽는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카지 아저씨는 국물을 후루룩 마셨다.
?히로코, 이 사람, 전에 본 적 없어??
?응??
그러나 기억이 없었다.
?미안, 전혀…….?
?이렇게 임팩트한 얼굴인데??
?바보 같은 놈. 임팩트가 있는 것은 이 머리뿐이야.?
카지 아저씨는 자신의 머리털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히로코에게 말했다.
?그때는 등산모자를 쓰고 있었으니까요.?
그때, 라고 해도 역시 기억에 없었다. 곤란해하는 히로코에게 아키바가 설명해 주었다.
?카지 아저씨도 그때 동료였어. 그 조난 때.?
?아아.?
히로코는 겨우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때는 머리도…….?
?예. 털이 좀 있었지요.?
?하하하하.?
아키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아저씨는 훌륭해. 그 조난이 있은 이후, 여기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계셔.?
?어머나.?
?아뇨, 조난한 덕분에 이 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상세히 알게 되었거든요. 그렇지만 저 산을 오르는 놈들에게 그곳은 위험하다, 오늘은 날씨가 안 좋으니까 가지 마라, 하고 잔소리를 하니까 별로 좋아하지들 않아요.?
?훌륭해요, 아저씨는. 난 도망가 버렸잖아요, 산에서.?
?또 오르고 싶은가??
?그야…… 그러나 무리죠.?
?어째서??
?이제…… 무서워요.?
?…….?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애써 다시 흥을 돋구려 하지 않고, 두 사람 다 조용히 술을 마시며 추억들에 잠겨 있었다.
히로코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 두 사람의 머리 속에는 분명 조난 당했을 때의 일이 밀려들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것은 히로코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기억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다 몹시 온화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히로코는 본 기억이 났다.
술에 취한 탓인지 아직 카지 아저씨가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라는 것을 히로코는 알았다.
?뭐예요? 모두의 테마곡인가요? 그것??
하고 히로코가 물었다.
?예??
카지 아저씨가 조금 놀란 얼굴을 하였다.
?이 노래, 그 녀석이 마지막에 불렀던 노래죠. 골짜기에 떨어져서 말입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요. 이 노래만 들렸죠.?
히로코는 말을 잃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아키바를 보았다.
?어째서 하필이면 인생 마지막 순간에 마츠다 세이코였을까. 그 녀석 마츠다 세이코를 제일 싫어했는데.?
아키바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상한 녀석이었어.?
?그렇지.?
또 침묵이 세 사람을 감쌌다. 세 사람 사이에는 그가 있었다. 각각의 뇌리를 그와의 추억이 순례하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히로코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나, 프로포즈를 받지 못했어요. 그 사람에게. 밖으로 불러내더군요, 손에는 반지 케이스까지 꼭 쥐고서.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둘이서 두 시간 정도를 묵묵히 벤치에 앉아 야경만 바라보았죠. 그러다가요, 왠지 그가 가엾어져서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말했어요. 결혼해 달라구요.?
?히로코가??
아키바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그래. 그랬더니 그 사람…….?
?뭐라고 했는데??
?단 한마디, 좋아, 라고.?
?하하하하하.?
카지 아저씨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히로코에게는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카지 아저씨는 그런 히로코의 얼굴을 보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미안, 미안.?
?그렇지만 그 녀석, 여자 앞에서는 정말 수줍음을 많이 탔었어.?
아키바가 말했다. 그것은 히로코가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그러나 그것도 모두 좋은 추억이야.?
?그래.?
?좋은 추억을 잔뜩 받았어.?
?그래.?
?그런데 아직도 뭘 더 갖고 싶어서.?
?…….?
?편지까지 쓰고.?
?…….?
?죽은 후에까지 쫓아가서 귀찮게 투정을 부리고.?
?…….?
?이기적인 여자야, 난.?
그리고 히로코는 익숙지 않은 술을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새기 전에 아키바는 히로코를 깨웠다.
?히로코, 곧 일출이야. 잠깐 보지 않을래??
히로코는 코트를 걸쳐 입고 아키바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히로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앞에 장엄한 산이 우뚝 솟아 있다.
아키바가 말했다.
?저 산이야.?
히로코는 무심결에 시선을 피했다.
?잘 봐둬. 후지이가 저기에 있으니까.?
히로코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거대한 산이 히로코의 시계를 가득 채웠다.
히로코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아키바가 갑자기 산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후지이, 너 아직 마츠다 세이코 노래 부르고 있니? 그 쪽은 춥지 않아??
메아리가 들려왔다. 아키바는 또 외쳤다.
?후지이! 히로코는 내가 책임질게.?
메아리가 그것을 되풀이했다. 그래서 아키바는 멋대로 지금의 질문에 대한 답을 외쳤다.
?좋아!?
메아리가 그것을 또 따라했다. 아키바는 히로코에게 미소지었다.
?좋다고 하는데, 저 녀석.?
?…… 말도 안돼, 아키바.?
?하하. 히로코도 뭔가 소리쳐 봐.?
그 말을 듣고 히로코는 뭔가 소리치려고 했지만 옆에서 보고 있는 것이 쑥스러워서 설원 중턱까지 뛰어갔다. 그리고 누구도 거리낄 것 없이 큰소리로 외쳤다.
?잘?지?내?고?있?나?요! 저?는?잘?지?고?있?어?요! 잘?지?내?고?있?나?요? 저?는?잘?지?내?고?있?어?요! 잘?지?내?고?있?나?요! 저?는?잘?지?고?있?어?요!?
그러다 눈물에 목이 메여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히로코는 울었다. 정말 아이처럼 소리내어 히로코는 흐느꼈다.
카지 아저씨가 눈을 비비면서 창을 열었다.
?무슨 소란이야, 이른 아침부터.?
?방해하지 말아요. 지금 아주 중요한 시간이니까.?
12
와타나베 히로코님.
아버지는 감기가 악화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가 중학교 3학년 설날이었지요.
설날에 장례식이니 뭐니 하느라고 온 집안은 난리통이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자 이번에는 엄마가 과로로 누워 버려 덕분에 나는 3학년 2학기가 시작된 후에도 한동안 학교에 갈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의 일이었어요. 내가 외출해서 돌아오는데 현관에 누가 서 있는 겁니다.
누군가 하고 봤더니 그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도 나를 보고 놀라는 게 아닙니까.
뭐 하니 하고 물었더니 그 녀석, 너야말로 뭐 하고 있는 거냐 하더군요.
그리고 서로 동시에 학교는? 하고 질문해 놓고 어색한 침묵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녀석이 무슨 용건으로 왔나 했더니 도서실에서 빌린 책을 반납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3권인가 4권인가. 중학교 도서실에 놓아두어도 아무도 건드릴 것 같지 않은 책이었지만 그것은 어찌 되었건 왜 그걸 내가 반납해야 하냐고 따졌어요. 그랬더니 그 녀석, 자기가 못하니까 부탁하는 거라고 하더군요. 왜? 하고 물어도 이유는 말하지 않았아요.
하여간 부탁한다고 강제로 책만 맡겨놓고 그 녀석은 돌아갔습니다. 그 진상을 알게 된 것은 1주일 늦게 학교에 간 아침의 일이었습니다.
교실에 들어서니 그 녀석의 책상 위에 꽃병이 놓여 있었어요.
심장이 멈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남학생들의 장난이었더군요.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그 녀석 갑자기 전학을 가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책을 반납할 수 없었구나, 하고 나는 끄덕거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했다고 생각합니까?
?이런 장난하지마!?하고 말하며 그 녀석 책상 위의 꽃병을 때려 부셔 버렸습니다.
순간 온 교실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는지 나도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 뭔가에 화가 나 있었겠지요. 무엇에 화가 났는지 좀처럼 떠올릴 수 없지만 어쩌면 그때, 자신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나는 혼자 도서실로 갔어요.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라고 하면 좀 거창합니까. 어쨌든 약속한 책은 제대로 도서실에 돌려 놓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에피소드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도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 ? ? 후지이 이츠키
할아버지와 나는 나란히 퇴원했다.
엄마와 아베카스 고모부가 퇴원 축하 선물로 뭐가 좋을까 물어서 나와 할아버지는 정들은 그 집을 달라고 졸랐다. 아베카스 고모부는 그 맨션은 어떻게 하느냐고 머리를 감싸안았지만, 엄마는 흔쾌히 허락했다.
?이렇게 된 바에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게 먼저인가, 그 집이 무너지는 게 먼저인가 지켜볼 수밖에 없겠구나?라고 엄마는 말했지만 십중팔구 집 무너지는 게 먼저일 것이다.
할아버지는 퇴원한 지 얼마되지 않았으면서 오늘도 건강하게 정원에서 흙을 파고 있다.
나는 아직 그렇게까지 힘이 없어서 툇마루에 앉아 편지를 읽고 있었다. 그것은 히로코에게서 온 마지막 편지였다. 큰 봉투에는 내가 그녀 앞으로 쓴 전부의 편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후지이 이츠키님.
이 추억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분명 당신을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이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정말 고마웠습니다. 또 편지를 쓰겠습니다.
…… 또 언젠가.
? ? ? 와타나베 히로코
편지지를 넘기니 추신이 붙어 있었다.
추신, 당신도 역시 그를 좋아했었지요?
?그렇지 않다니까.?
나는 편지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뭐라구??
할아버지가 착각하고 돌아보았다.
?중학교 때 같은 이름의 급우가 있었어요. 그것도 남자애.?
?…… 그래서??
?그것뿐이에요.?
?첫사랑의 상대냐??
?그런 게 아녜요. 그저 있었다는 말이지.?
?흐음.?
할아버지는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차례예요.?
?이츠키, 저걸 봐.?
할아버지는 정원에 심어놓은 한 그루의 나무를 가리키며,
?저 나무를 심었을 때 저 녀석에게 이름을 붙였단다. 무슨 이름인지 아니??
?몰라요.?
?이츠키라고 한다. 너와 같은 이름.?
?거짓말.?
?네가 태어났을 때 저 나무를 심었단다. 그래서 둘이 같은 이름을 붙여주었지. 너와 저 나무 둘에게 말이야.?
?…… 와.?
?몰랐지??
?몰랐어요.?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이런 일은 남몰래 하는 게 의미가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고 있다.
?정말이에요? 지금 만든 이야기 아녜요??
?글쎄, 남 모르게 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거라니가.?
그것에 관해서 결국 진상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하루카(遙香)와 아야(彩)와 게이코(惠子)는 이로나이 중학교의 도서위원들이다.
최근 유행했던 놀이 ?후지이 이츠키 찾기 게임?이라는 것이 있었다.
어느 날, 남학생인 쿠보타가 우연히 도서실에 있는 카드를 발견했다. 도서카드에는 단 한 사람, 후지이 이츠키라고 하는 이름이 쓰여 있는 카드였다. 그것은 그 책이 후지이 이츠키 단 한 사람밖에 빌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책이 몇 권이나 나왔다. 카드에 후지이 이츠키의 서명밖에 없는 책 말이다. 쿠보타는 그것을 찾는데 열중했다. 그러는 동안 그것이 다른 도서위원들 사이에도 알려져 어느 틈엔가 모두 다투어 찾게 되었다.
그것이 ?후지이 이츠키 찾기 게임?이다.
어느 날, 또 한 장 새로운 카드를 발견하였다. 발견자인 스즈키 하루카는 이 카드만은 원래 가지고 있어야 할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동료들과 함께 그 집을 향했다. 우리집 말이다.
갑자기 나타난 손님에 나는 놀랐다.
학생들은 쑥스러운 듯이 머뭇거리더니 그 중 하루카가,
?좋은 것을 발견하여서요.?
그렇게 말하고 한 권의 책을 내 눈앞에 내밀었다. 그것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가 두고 간 그 책이었다.
멍해 있는 나에게 학생들은 뒤예요, 뒤의 카드, 하고 들떠서 재촉했다. 시키는 대로 나는 뒤의 카드를 보았다. 그곳에는 후지이 이츠키의 서명이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아직 뒤예요, 뒤요, 하였다.
영문을 모르는 채 나는 별 생각 없이 그 카드를 뒤집었다.
나는 말을 잃었다.
그것은 중학시절 나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들이 흥미진진하게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
나는 태연함을 가장하면서 그것을 주머니에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에이프런 원피스에는 공교롭게 아무 데도 주머니가 붙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