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짐러] 파라독스 이솝 우화
파라독스 이솝 우화
로버트 짐러
차례
머리말, 해제, 경고를 겸한 서문
1. 여우와 신 포도
2. 돼지와 사자
3. 늑대다! 하고 소리친 소년
4. 사자와 여우와 사슴
5. 제우스 신과 거미
6. 사자와 생쥐
7. 벌과 벌새
8. 들쥐와 개구리
9. 까마귀와 여우
10. 새장속의 새
11. 사자와 암사슴
12. 거북이와 토끼
13. 캥거루와 새끼
14. 나무꾼과 아내
15. 꼬리를 잃어버린 여우
16. 해와 바람
17. 사자와 승냥이와 여우
18. 귀뚜라미와 개미
19. 심술
20. 늑대와 당나귀
21. 도끼를 잃어버린 나무꾼
22. 외눈박이 사슴
23. 늑대와 어린 양
24. 양치기와 새끼 늑대들
25. 조각가와 아프로디테
26. 병사와 전쟁터의 말
27. 정열적인 비버
28. 왕을 원한 개구리들
29. 참나무와 갈대
30. 경건한 노부부
31. 늑대와 황새
32. 독수리와 궁수
33. 사자와 농부
34. 동물들의 재판관
35. 당나귀와 애완견
36. 농부와 여우
37. 황금을 도둑맞은 구두쇠
38. 양의 가죽을 쓴 늑대
39. 노인과 애인
40. 뼈다귀를 문 개
41. 도시 쥐와 시골 쥐
42. 살모사와 호박벌
43. 병든 농장집 개
44. 개구리와 황새
45. 늑대와 양
46. 여우와 산토끼
47. 농부와 살모사
48. 파수꾼 개와 여우
에필로그
49. 귀여운 도벽광과 풋내기 정신분석가
책 소개, 권유, 변명을 겸한 옮긴이의 말
머리말, 해제, 경고를 겸한 서문
약국에서 약을 한 병 사면 으레 복용자가 지켜야 할 주의사항 이 적힌 종이쪽지가 약병에 붙어
있다. 다음 글도 그것과 꼭 마찬가지로 독자들을 위한 경고의 목적으로 씌웠다.
내가 이 책의 저자 트이로프 교수를 만난 것은 한 3년 전쯤 비엔나에서였다. 그때
휴가중이었던 나는 몇몇 친구들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그를 소개해 준 것이다. 그는
상당한 명망을 얻고 있는 정신분석가로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가장
아낀 제자였다고 한다. 전문가로서 그가 내리는 심오하고 권위있는 진단에 나는 심히 감명을
받았으며, 그의 온화하면서도 기품있는 몸가짐에 홀딱 반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글쓰는 사람이란 사실을 안 트로이프 교수는 비엔나를 떠나기 한 이틀 전쯤에 개인적으로
나를 찾아왔다. 벌써 여러 해 동안이나 그는 심리분석이 거둔 빛나는 성과를 어떻게 하면 일반
대중에게 훨씬 쉽게 알릴 수 있을까를 고민 고민해 왔다고 했다. 그러다가 그는 일종의
영감으로 이솝 우화 를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목적에 맞게 개작하면 어떨까 하는 구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크리스천들이 교리의 전파를 위해서 이솝 우화 를 개작한
일이 있었소. 그는 이렇게 열변을 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갖고 있는 정서적 본능에
관해서 많은 것이 새로 발견된 지금 이 시점에서 그 성과를 반영할 수 있도록 이 이솝 우화 가
다시 씌어지는 것이야 오히려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그는 자기의 계획에는 크나큰 장점이 하나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만약 부모가 자녀들에게 이
새로운 우화를 읽어 주면 자연히 두 세대가 그 교훈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트이로프 교수는 자기의 원고를 미국으로 가져가서 출판사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내 유일한 출판계의 연줄은 수학 관련 출판사뿐이었지만, 그처럼 보람있는 일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게 그저 반가울 따름이었다.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비엔나의 친구들에게서 깜짝 놀랄 만한 편지를 받게 되었다.
트이로프 교수가 거물 사기꾼으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정신분석가가 아닐 뿐더러
이름까지도 가짜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프로이트 를 거꾸로 하면 트이로프 가 된다.
편지에 함께 들어 있던 신문기사 조각을 보니 더욱 가관이었다. 그는 수많은 여자 환자들을
교묘하게 감정적으로 부추겨서 금전적으로 이용했다. 오스트리아 형법에 나와 있는 범죄 조항
거의 전부를 망라하다시피한 무시무시한 기소장에 대한 재판이 후닥닥(이 재판에 언론의
취재는 허용되지 않았다) 종결되고, 트이로프 교수는 3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형량이 이처럼
무거워진 것은 아마도 피해자들 가운데 장관 부인이 한 사람 끼어 있었다는 소문으로 미루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즉시 짧고 정중한 내용을 담은 쪽지와 함께 원고를 트이로프 교수에게 돌려보냈다.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선생의 책이 출판되기를 바라진 않으시겠지요. 그런데 형무소 당국이
원고를 트이로프 교수에게 전달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소내 규정상 재소자에게는 간단한 개인
편지만 반입이 허용된다는 설명이었다.(최근에야 나는 진상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당국자들은 그 원고를 받아 면밀히 조사한 끝에 그것이 매우 공들인 고도의 암호문이며
자기들로서도 거의 해독하기 어려웠지만 트이로프 탈주 계획임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렸덛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원고를 그냥 책상 서랍 속에 처박아 두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상태였다. 그러다가 나느 열여덟 살 된 어떤 아가씨한테서 애절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자기는
트로이프 교수의 유일한 혈육이며, 교수는 감옥에서 막 운명했다, 유산이라고는 그 원고뿐이다,
애원이니 아버지의 책이 출판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힘을 써달라, 그 책에서 얻어지는
자금으로 미국에 와서 유명한 배우가 되고 싶다 등등의 내용이었다. (동봉한 사진을 보니 이
불운한 아가씨는 말할 수 없는 미인이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경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고 몇몇 사계의 권위자들에게
원고를 보내 보았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이 우화들이 어른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대단히
유익한 약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었다. 물론, 과용만 하지 않는다면 하는 단서가 붙어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책의 출판이 무리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여기에 강조해 두지만, 심각한 정서장애가 있거나, 이 책의 사용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불안이나 고민이 호전되지 않을 경우에는 이 책의 복용 을 중단하고 전문가를 찾아가서
상담하시라. 그럴 경우에도, 여러분이 이 책을 돈 주고 산 것은 따스한 마음씨를 가진 한
아름다운 여배우를 재정적으로 후원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유명작가의 책을 샀을 때라도 이만한 보람은 없을 것이다.
로버트 짐러
1. 여우와 신 포도
여우 한 마리가 누이동생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탐스럽고 향긋한 포도 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밭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렇게 먹음직스러운 포도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포도가
어찌나 높이 매달려 있었던지 아무리 황새처럼 모두뜀을 뛰어도 팔이 닿지 않았다.
한참을 뛰락내리락 포도나무와 씨름하던 동생 여우는 이렇게 내뱉었다. 저 포도는 너무
시어서 따 봐야 먹지도 못해. 그냥 집에 가서 엄마한테 점심을 차려 달라는 게 낫겠어.
안 갈래?
묘한 라이벌 의식을 느낀 오빠가 곧바로 대꾸했다. 싫다. 넌 지금 저 포도를 따지 못하는 네
무능을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난 달라. 난 관념론자가 아니니까 기꺼이
현실과 맞서겠어. 저 포도는 분명히 지금까지 먹어 본 어떤 것보다 달콤할 거야. 난 약간이라도
맛을 볼 때까지 단념하지 않아.
그리하여 누이동생은 총총히 그 자리를 떴고, 오빠는 고집스럽게도 포도를 따려고 계속해서
뛰어올랐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갈수록, 그래서 노력이 가망 없어질수록, 그 포도가 최고로
맛있을 것이라는 여우의 믿음은 더욱 확고해져 갔다.
좌절감이 심해져서 이내 발작증세를 일으켰다. 마침내 그 여우는 자기 꼬리를 물어뜯겠다고
뱅글뱅글 돌면서 정신없이 캥캥거리기 시작했다. 여우의 울음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총을
들고 나온 포도밭 주인이 여우의 머리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총알은 오빠 여우의 머리를
날려보냈다.
교훈: 한번 해 봐서 안 되면, 다시 하지 말라.
2. 돼지와 사자
숲속을 덮친 갑작스런 홍수 때문에 겁에 질린 돼지 한 마리가 어떻게든 목숨을 건지려고 물에
떠다니는 커다란 통나무에 올라탔다. 그런데 가슴 철렁할 일이 벌어졌다. 역시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던 사자가 같은 통나무에 올라탄 것이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돼지가 말했다. 존경하는 동물의 왕이시여, 우리가 이 통나무를
나눠타게 된 것도 운명인 모양입니다. 바라옵건데 당신의 식욕이 당신의 이성을 앞서게 해서는
안될 줄로 압니다. 우린 지금 무지무지하게 불안한 밑창을 딛고 있습지요. 까딱 잘못해서
다투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대로 강바닥에 곤두박질하는 겁니다.
정말 현명한 말이다. 너를 잡아먹으려는 짓 같은 건 절대 않기로 하지. 너 죽고 나 죽는 일이
일어나선 안 되니까. 사자의 대답이었다.
사자의 이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안심이 된 돼지가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그래도 혹시 식욕이 발동할지 모르니까 그때마다 방금 한 결심을 자꾸
되새기세요.
그리하여 돼지와 사자는 통나무 위에서 하룻밤을 사이좋게 평화로이 지냈다. 아침이 되자,
사자가 말했다. 참 이상한 꿈도 다 있다! 꿈에 내가 읍내의 어떤 광장을 찾아갔는데 말이야.
사람들이 나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거야, 글세. 그래서 여기저기를 막 싸돌아다녔지.
그러다가 사람들이 유태교당에 안식일 예배를 위해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어. 어쩌다가
나도 거기 그냥 끼어들게 됐어. 기도야 어느 나라 말로 하는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어쩐지 기분은 나쁘지 않았어.
돼지는 속으로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지만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해가 내리쬘수록
사자는 배가 말할 수 없이 고프고 또 고팠지만 돼지 쪽으로는 고개도 안 돌렸다.
다음날 아침에 사자가 말했다. 이건 정말 이상해. 어젯밤 꿈의 연속이었는데, 장소까지
똑같았어. 근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어. 오래된 성당에서 성 금요일의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는군. 그래서 또 거길 갔지. 라틴어였으니까 당연히 한마디도 몰랐지.
근데도 그냥 마냥 즐겁기만 했어. 허, 그것 참.
돼지는 다시 한번 회심의 미소를 마음속으로 지었지만 역시 이번에도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사자는 입장이 그렇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옆 친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았다
안절부절 말이 아니었다. 그날 밤 사자는 잠을 자면서도 계속 으르렁으르렁 고함을 질러댔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사자가 돼지에게 말했다. 이것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말이야. 그제 그끄제 꿈이 어제 또 이어진 거야. 또 그곳이었는데,
이번에는 교회로 들어갔어. 종파는 확실치 않았지만 예배는 우리나라 말로 보더군. 세 번
중에서 이때가 가장 즐거웠지.
돼지는 이 말을 듣자마자 우울해져서 말했다. 이제 헤어져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럼
안녕히.
잠깐! 사자가 소리쳤다. 난 약속을 지켰어. 그래서 너한테 하나도 겁을 안 주었는데 왜 이
이 안전한 통나무를 떠나려고 하지?
돼지의 대답은 이러했다. 사실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종교도 없고 싫어하는 종교도 없다는
것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유태인들은 돼지고기를 안 먹고,
천주교신자들은 금요일엔 고기를 안 먹습니다. 이런 종교들을 버리고 사자님은 언제라도 저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는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하신 겁니다. 그러니 이젠 홍수 쪽이 채우지
못한 식욕보단 낫겠습니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돼지는 통나무를 떠나 강물로 풍덩
뛰어들었다. 남겨진 사자야 재주껏 허기를 채우라 하고.
교훈: 방바닥이 딱딱할수록 꿈은 더 달콤해지는 법이다.
3. 늑대다! 하고 소리친 소년
어렸을 때 어찌어찌 하다가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거의 강박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한
소년이 있었다. 사람들은 소년의 거짓말이 너무 상습적이었기 때문에 무슨일을 맡겨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생각다 못한 동네사람들이 맡긴 임무가 양떼를 지키는 일이었다.
한데 소년은 새로 생긴 이 일이야말로 거짓말 솜씨를 신나게,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가
막힌 기회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꼭 늑대가 양떼를 공격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목청껏
늑대다!늑대! 하고 외쳤다.
동네사람들은 소년의 고함 소리를 듣고 부랴부랴 양떼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늑대는
물론 늑대 그림자도 구경할 수 없었다. 얼굴이 빨개지기는커녕 오히려 동네사람들을 꾸짖는
투로 소년이 말했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렸어요? 혼자서 늑대를 쫓아내다 물려 죽을
뻔했잖아요.
다음날 다시 양치기 소년은 거짓으로 늑대다!늑대! 를 외치고, 사람들은 다시 헐레벌떡 소년을
구하러 달려왔다. 물론 늑대는 안보였다. 어? 이것봐라? 사람들은 그제서야 이 녀석이 옛날
버릇이 또 재발한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햇다. 그러자 소년은 사람들의 의심이 싹 가실 정도로
오히려 당당하게 선언하는 것이었다. 정말 자꾸 이렇게 어슬렁 어슬렁 오시면 나도 이 직업을
그만두겠어요. 날마다 난 혼자서 무시무시한 맹수들과 싸우느라고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하고
있는데, 여러분은 그저 느적느적 소풍오는 식으로 오시니 말입니다. 오시면서 꽃도 꺽고 경치
구경도 하고 그러시는 모양이죠?
소년의 말에 기가 질린 사람들은 다음에는 진짜 신속하게 달려오마고 약속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늑대들이 새까맣게 몰려와서 양떼를 공격했다. 이쪽 저쪽 사방에서 늑대다!늑대!
난리였다. 그동안 은근히 그 거짓말쟁이 소년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던 동네사람들은 다른
양치기들의 고함 소리는 싹 무시하고 오직 그 거짓말쟁이 양치기만을 구하러 바삐 뛰어갔다.
동네사람들의 재빠른 행동 덕분에 그 양치기 소년과 거기 있는 양떼들만은 아무 탈이 없이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곳의 피해는 엄청났다. 어떤 용감한 양치기 하나는 자기 양들을
지키다가 그만 심하게 물려서 중태에 빠지기 까지 했다. 그는 광견병에 걸려 생각조차 하기
끔찍한 죽음을 맞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교훈:순진한 사람만이 미안한 감정을 느낄 여유가 있다.
4. 사자와 여우와 사슴
이젠 늙어서 사냥할 기력조차 없는 사자 한 마리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굴 속에 누워
있었다. 그때 마침 그 여우 한 마리가 그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기진맥진한 사자가 말했다.
이보게 친구, 자네가 정말 소문만큼 영리하다면 이 굴속으로 먹이감을 유인해 와서 내 앞까지
끌고 올 수 있어야겠지? 길 잃은 생쥐나 새 둥지의 알 도둑질 정도로는 안 돼. 전리품은
또같이 나눠 주고 양껏 먹게 해 줄테니, 어때 해 보겠어?
사자의 동지가 되어 손해 볼 건 없겠다 생각한 여우가 말했다. 그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해 보죠. 그리고 나서 여우는 봉을 잡으러 숲속으로 들어갔다.
시냇물에 목을 축이면서 물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은근히 감탄하고 있는 사슴을 본 여우는
마침 적당한 후보를 만났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여우는 사슴에게 말을 건넸다. 굉장한
소식이야. 동물의 왕 사자가 지금 힘이 다 빠져서 오늘 내일 하는데, 너에게 자기 뒤를 이어
왕이 되어 달라는 거야. 나더러 너한테 알려주랬어.
부쩍 의심이 간 사슴이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영악한 놈이니까 모르긴 몰라도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야. 그래 안 그래?
짐짓 분개한 듯 여우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제길, 사자가 어쩔 수 없어서 선택을 한 거지.
사자가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다는 걸 왜 모르나, 그걸 모르면 자네도 마찬가지로 바보야.
하긴 그래. 자기 뿔을 자랑삼아 여우 앞으오 한번 휭 돌리면서 사슴이 말했다. 외모로 보나
지혜로 보나, 널리 존경을 받고 있는 내가 왕이 되는게 하긴 당연하지. 허우대가 벌써 제왕의
풍모잖아. 여우, 자네 말이 맞긴 맞아. 사자도 아마 나를 뽑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을테지, 뭐
그러자 이번에는 여우가 재촉하는 것이었다. 자, 그럼 빨리 서둘러 사자한테 가세. 그래야
사자가 자네를 공식적으로 자기 뒤를 이을 통치자로 지명할 수 있지 않겠나, 가자구.
아무 의심도 남아 있지 않은ㅁ 사슴은 여우의 발뒤꿈치만을 따라갔다. 드디어 사자의 굴에
이르렀다. 사자가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사슴을 덮쳤다. 하지만 노쇠한 사자는 기껏 사슴의 귀만
할퀴고 말았을 뿐이었다. 당연히 사슴은 사자의 손아귀를 빠져나갈수 있었다.
간이 콩알만해진 사슴은 그 길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깊은 숲속으로 도망가 버렸다.
여우는 사자의 무능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자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말을 안 해도
내가 이렇게 무기력해진 걸 한없이 부끄러워하고 있다. 이제 잔소리리는 그만하고 다시 한번
그 사슴 녀석을 내가 잡을 수 있는 데까지 끌고와 줘.
아니, 여길 한번 왔다가 갔는데 다시 또 오겠습니까? 거의 불가능입니다. 여우가 대답했다.
어쨌든 하긴 해 보겠습니다.
사슴의 발자국을 찾아낸 여우는, 단단히 겁을 먹고 덤브 숲에 숨어 있는 이 동물하테
다가갔다. 어디 다른 데로 가는 척하면서 여우가 말했다. 너를 왕으로 만들기 전에 네가
겁쟁이라는게 밝혀져서 정말 다행이야. 지금 곰 한테 사자의 뒤를 이어 왕이 되라고 전하러
가는 길이야.
뭐! 사슴이 펄쩍 뛰었다. 이 사기꾼 같으니! 내가 겁쟁이라고? 그럼 넌 내가 멍청히
잡아먹히길 바랐단 말이야? 말을 함부로 하고 있어.
이 말을 듣고 여우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물론 그런 척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는 말했다.
사자는 그냥 너를 껴안고 숨을 네 귀에다가 불어넣어 왕이 되는 걸 축하해 주려고 했을
뿐이었어. 자기가 겁이 많아서 왕자리를 박차 버리고는 무슨 소리야.
내가 사자의 동작을 오해했구만, 난 또 그런 줄도 모르고. 사슴이 말했다. 하긴 사자가
나한테 해명할 기회도 안 주고 다른 놈을 뽑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명예가 탐이 나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곰이 왕이 되면 벌어질 일이 눈에 선해서 그러는 거야. 곰의 행실을 잘
알잖아.
옳은 말이야. 여우가 말했다. 하지만 나한테는 백 번 얘기해 봐야 소용없어. 난 다만 전령에
불과하고 명령받은 대로 할 뿐아나까.
한번만 더 내가 사자 앞에 갈 수 있게 해 주게. 내가 용서르르 잘 빌어서 사자가 원래
생각대로 나에게 왕자리를 물려주도록 설득할 자신이 있다네. 사슴이 애원했다.
곰한테로 다녀오라는 명령을 거역했다고 사자가 화를 낼텐데... 그렇지만 나도 정의가 이땅에
실현되길 바라는 동물이니까. 여우가 말했다. 좋아. 자넬 다시 데려가지.
그래서 사슴은 신이 나서 다시 사자의 굴로 들어갔다. 그날 밤 사자와 여우는 사슴 뼈다귀를
맛나게 뜯으면서 사슴의 자화자찬을 마음껏 웃어 주었다.
교훈:실수를 반복하라. 밑져야 본전 아닌가?
5.제우스 신과 거미
작은 거미 한 마리가 제우스 신에게 상소를 올렸다. 저의 성적 본능이 발동해서 저의 짝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있습니다. 우리 암컷들은 짝을 짓고 나서 우리를 잡아먹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짝을 짓는 일이 즐겁게 자살을 하는 방법이라면 또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뭐가
좀 다정하고 영원한 이성간의 관계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잖습니까? 그 문제를 좀 생각해 봐
주십시오.
눈 앞에 있는 저 쪼그만 미물이 말하고 있는 용기에 마음이 움직인 이 신은 그 고민을 해결해
주고 싶어졌다. 그것은 특히, 제우스의 아내 헤라 여신이 자기 남편에 대한 경고가 될 수
있겠다 싶어 이런 짓궂은 꾀를 생각해 내 주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다른 동물의 본능을
아무거나 빌려써도 좋다. 제우스는 말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서 고르도록 해라. 그래야 너도
좋고 네 이웃도 좋을테니, 나도 본능만은 사실 아무 때나 내 맘대로 못해.
제우스의 주위를 들은 거미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생물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 보면
좋은 수가 나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거미는 만날 수 있는 모두에게서 조언을
구하였다.
꿀을 빨고 있는 벌을 만난 거미는 벌의 경험담을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벌의 대답은 이러했다.
우리 벌에게 있어서 성이란 왕족과 게으른 몇몇 놈팡이에게만 해당할 뿐이야. 우린 남자들을
죽이고 여왕 자신도 태어나는 자기 여자 형제들을 중이거든.
그러니까 우리한테는 성별을 가진다는 것이 살고 죽는 문제인 것 같아. 무성으로 지내는 게
어때? 나처럼 일에만 신경을 쓰고 싶으면 말이야.
참, 나도, 괜한 시간 낭비를 했어. 같은 곤충한테 물어보다니. 거미는 혼자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성이란 엄청나게 복잡한 것이어서,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능이 있어야 답이 나오는
문제일 거야. 맞아, 맞고말고. 그러니까 두뇌가 있는 동물을 만나야 해. 아무리 작은 두뇌라도
두뇌가 있는 동물을 말이야.
낵가에 이르러 거미는 연어 한 마리를 마나서 그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성은 대단한 것일
수밖에 없어.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 선조들이 그 때문에 목숨을 바쳤겠어? 하지만 내가 직접
폭포를 거슬러 올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가봐야 알 수 있지, 지금 내 경험으로 말해 줄
수 있는 건 없어.
실망한 거미는 다시 길을 가다가 수탉 한 마리를 만났다. 아마도 암탉들은 저희들 좋은 대로
섹스를 하고 있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나는 섹스 때문에 치뤄야 하는 게 많아 나는 내 능력껏
짝을 몇 명이라도 얻어도 되는데, 젊은 녀석이 짝을 하나 얻으려면 나를 때려 눕혀야만 하거든,
그래서 난 항상 내 생명과 아내들을 한꺼번에 잃을까봐 두려움에 싸여 지내야 해.
소득없는 여행에 지친 거미는 다시 제우스 앞으로 돌아왔다. 이런 것 같습니다. 거미는
보고했다. 어디든 성이 있으면 바로 그 옆에 죽음이 있었지요. 먹혀 죽든 맞아 죽든 그건
매한가지니까 그냥 원래 내 본능대로 살겠습니다.
제우스와 작별을 고한 거미는 마음에 드는 짝을 찾아 사랑을 호소하여 그녀를 억도 나서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기 짝의 저녁밥이 되었다.
교훈:성과 정의는 모두 맹목.
6.사자와 생쥐
종족 특유의 자기중심적 성향을 가진 사자 한 마리가 사냥꾼들한테 잡혀서 굵은 밧줄에 꽁꽁
묶였다. 성난 사자의 포효를 듣고서 생쥐 한 마리가 쪼르르 달려왔다.
남을 도울 수 있다는 뿌듯함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낀 생쥐는 자기의 왜소한 몸집도 잠시 잊고
동정심을 한껏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상한 데는 없니?뭐 좀 도움이 될 일이라도...?
가, 임마! 딴 데 가서 물어봐! 사자가 으르렁거렸다. 제길, 가뜩이나 골치아파 죽겠는데
나무조각이나 갉작대는 쬐끄만 녀석까지 나타나 이러니 저러니 하고 있어!
문제가 뭔데? 사자의 무례함에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고 생쥐는 끈덕지게 물었다. 난 남들을
돕는 게 즐거워서 그래.
그냥 바보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눈까지 멀었군나, 넌.
사자가 성이 나 씨근거렸다. 자, 봐. 지금 난 여기 이렇게 꼼짝없이 묵여서 동물원에 끌려갈
때만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야. 거기 가서 난 여생을 울안에 갇힌 몸으로 보내게 될 거라구.
임마, 나같ㅌ은 천하장사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데, 너같은 녀석이 날 도와준다니 내가
얼마나 가소롭겠니?
아, 그정도라면야. 생쥐가 따뜻한 말투로 말했다. 그 정도라면 걱정말라구. 내가 금방 그
밧줄을 쏠아서 끊어 줄테니 두고 봐.
앞니까지 두세 개나 상해 가면서 한참을 고생한 끝에 생쥐는 마침내 튼튼한 밧줄 하나를 다
쏠아 끊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사자는 남아 있는 밧줄을 끊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오, 이보게 친구! 사자는 거의 울려고 했다. 자네가 내 목숨을 구해 주었어. 평생 그 은헤는
잊지 않겠네. 자, 같이 가세. 평생토록 편안히 살게 해 줄테니.
아, 뭘 또. 그런 걸 가지고, 아무 것도 아닌데. 상당히 우아한 어조의 생쥐의 말이었다.
하지만 사자는 간절히 부탁했다. 정 그러면 우리 식구들이 감사의 인사라도 할 수 있게 해
줘. 생쥐가 좋다고 하자 사자는 곧 생쥐를 자기 갈기 중에서 가장 푹신푹신한 곳에 앉혀서
숲속으로 달려갔다.
사자의 가족들은 죽은 줄만 알았던 가장이 다시 살아 돌아온 걸 보고 뛸 듯이 기뻐했다.
서둘러 생쥐를 주빈으로 모시고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아뿔싸,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상한 데서 일이 어긋났다. 발효한 코코넛 쥬스를 홀짝거린 게
화근이었다. 기분이 알딸딸해진 생쥐가 이 손님 저 손님 붙잡고 막 떠벌리고 다닌 것이다. 저
좀 보세요. 당신이 저 얼간이 한는 꼴을 봤더라면! 저 바보가 글세 힘만 셌지 밧줄에 묶이니까
무서워서 벌벌 떨기만 하더라 이 말입니다. 그랫서 내가 풀어줬지요. 그러니까 완전히 죽을
목숨 하나 살려 준 거죠.
이 말을 들은 사자는 미처 앞 뒤 가릴 것도 없이 그 무시무시한 발을 들어 은인을 내리쳤다.
호떡보다도 더 납작해진 불쌍한 생쥐의 시체는 벌판에 던져져 개미들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교훈:그대의 호의를 받아들여 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라.
7. 벌과 벌새
누가 먼저 꽃밭을 찾아냈는가를 놓고 벌새 한 마리와 벌 한 마리가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먼저 찾아낸 쪽이 그 꽃밭 전체의 꿀을 빨 권한을 갖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옥신각신 끝에 분을 이기지 못한 벌이 침을 드러내서 상대를 찌르려 했다.
이 멍청한 벌레야! 벌의 무기를 슬쩍 피하면서 벌새가 말했다. 나를 찌르고 나면 너도 죽게
된다. 죽고 나면 꿀이 다 무슨 소용이냐?
잠시 멈칫하더니 벌이 물었다. 죽어? 죽는 게 뭔데?
벌이 그 말뜻을 정말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는 벌새가 대답해 주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죽는다는 건 네가 다시는 아름다운 경치도 못 보고 꽃향기도 못 맡고 꿀도 못 따고 다른
동료들하고 붕붕 수다도 못 떨게 된다는 뜻이야. 넌 날지도 못하고 기지도 못하고 더듬이를
움직이지도 못해. 다리와 날개와 몸이 바슬바슬 말라서 결국에는 바람에 날려가고 마는 거야.
이걸 몰랐단 말야?
저런, 저런 끔찍해. 얼굴 근육이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놀란 벌이 얼른 벌통으로 날아
돌아갔다. 꽃밭은 그냥 벌새한테 넘겨주고서. 며칠 동안 벌통 한구석에 웅크리고 틀어박힌 채,
벌은 먹지도 않았고 친구들과 얘기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든 죽는 것만 모면할 수 있다면
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생각이 났다. 처음으로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을 때 죽음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아볼걸 그랬다는 생각이 난 것이다. 벌은 그 길로 벌집을 나와 벌새를 찾아 날아갔다. 죽음을
자기에게 가르쳐 준 스승을 만나자 벌이 말했다. 지난번에 만났을 떄 선생님께서 죽음에 대해
알려준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그동안 전 몹시 괴로웠습니다. 그땐 너무 놀라서 더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었지요. 그래서 이렇게 여쭤보는 겁니다만, 그럼 만일 제가 침을 사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래도 죽어야 됩니까?
벌새가 하하 웃으면서 말했다. 넌 대단히 충격을 받은 모양인데, 자기가 영원히 살지는
못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생물은 누구나 그런 충격을 받게 되지.
그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저의 숙명입니까? 벌이 물었다.
그렇다니까! 한참 어리석은 질문에 짜증이 난 벌새가 툭 쏘듯이 말했다. 하지만 네가 어떤
식으로 끔찍하게 죽을지는 미리 알 수 없어. 저녁 공기를 가르고 휘익 나타난 딱새한테 한
입에 꿀꺽될지도 모르고, 커다란 말벌이 너를 마비시켜 놓고 네 몸 속에 알을 낳으면, 알에서
깬 새끼들이 살아있는 너를 야금야금 먹을지도 모르지. 그것뿐인 줄 알아? 운이 나빠서 해충을
잡으려고 뿌리는 살충제를 조금이라도 입에 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그땐 너의 그
원시적이고 조잡한 신경이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 속에서 그냥 끽하고 마는 거지.
제가 파랗게 질리는 모습을 보시려고 지어내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벌이 되받아 말했다.
그렇다면, 어차피 죽을 목숨, 무의미하게 죽느니보다 나와 동족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침이라도 쓰고 죽는 게 낫겠군요.
맞아. 바로 그거야. 벌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벌은 몸을 날려 자기 침을 벌새의 목
정맥에 꽂아넣었다. 그리고 행복하게 죽어갔다.
교훈:수단은 목적을 정당화해야 한다.
8. 들쥐와 개구리
부끄럼을 많이 타는 내성적인 성격의 들쥐가 어쩌다가 외향적인 성격의 개구리와 친교를 맺게
되었다. 개구리는 좀 가학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나쁜 장난으로 친구들을 괴롭히곤 했다.
그런데도 들쥐는 이 개구리와 친한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성격이 트인 개구리는 발이
넓어 모르는 동물이 없고, 어디든 안 가 본 데가 없고, 무슨 일이든 휙휙 활기차게 만들어 놓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 개구리가 이런 제안을 해 왔다. 우리, 우정의 표시로 발 하나씩을 함께 묶어 보면
어떨까? 조금은 센치한 이 제안이 들쥐에겐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로 감격적인 것이어서
당연히 찬성이었다.
서로 발을 꽉 묶고 난 들쥐와 개구리는 밀밭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이때는 별 문제가
없었다. 한데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저녁을 먹고 나서 둘은 산책을 하다가 연못을 하나
지나게 된 것이다. 연못을 보자 개구리는 친구를 달고서 풀쩍 뛰어들었다. 들쥐는 곧장
익사하고 말았다.
하여간에 쥐란 놈들은 죄다 이렇게 멍청하다니까! 개구리는 이렇게 빈정거리면서 물에 빠져
죽은 친구를 떨쳐 버리려고 발을 묶은 끈을 풀기 시작했다. 그 녀석은 내 계획을 계속
장난으로 생각하더라니까.
개구리가 끈 푸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그만 창공을 빙빙 돌던 매의 시야에 걸려들고
말았다. 자기가 저지른 장난의 희생물 때문에 몸이 부자연스럽던 개구리는 매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덕분에 매는 두 가지 고급 요리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교훈:적은 고통만을 불러들인다.
9. 까마귀와 여우
늙은 까마귀가 한 마리 있었다. 얼굴이 하도 못생겨서 제 짝도 아직 제대로 변변하게 만나지
못한 신세였다. 어느 날, 나뭇가지에 앉아서 훔쳐온 치즈 조각을 먹고 있었다. 마침 지나가던
여우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는 치즈에 눈독을 들였다. 여우는 고개를 쳐들고 까마귀를 불렀다.
넌 얼굴이 너무 못났으니까 그 못난 얼굴을 보충할 뭔가 장점이 있을 거야. 목소리는 어때?
짧게라도 네가 노래를 들려주면, 내가 그 방면에 전문가니까, 사심없이 평가를 해주지.
이건 정말로 참신하고 즐거운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나한테 성악 오디션이라니! 까마귀
노처녀는 그래서 부리를 힘껏 벌리고 노래를 시작하려 했다. 그 통에 치즈가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때를 놓칠세라 여우는 재빨리 치즈를 잡아채서 숲속으로 달아나서는 느긋하게
먹어 치웠다.
이런, 내가 생각이 너무 짧았구나. 까마귀의 탄식이었다.
손님한테 대접부터 하고 노래를 했어야지! 누군들 빈속에 노래를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어?
잘 사과를 하면, 혹시 친절하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줄지도 몰라.
그리하여 까마귀는 정중한 사과의 뜻을 담은 편지를 쓰면서 아울러 편지 말미에 자기가 마련한
음악 파티에 와 줄 수 없겠느냐는 초대의 뜻을 비쳤다. 여우가 초대에 응하자, 까마귀 노처녀는
노래를 부르기 전에 조심스럽게 차린 식사를 대접해서 여우가 양꺽 먹게 해 주었다. 공짜
식사에 기분이 좋아질 대로 좋아진 여우는 신나게 박수를 쳐 대고 앙코르까지 대여섯 번이나
요청했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로 까마귀는 정기적으로 여우를 위한 음악 파티를 열었다. 그런데 그렇게
꾸준히 연습을 게속하다 보니 실제로 목소리가 좋아지고 성량이 풍부해졌을 뿐만 아니라,
성격까지도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균형이 잡히고 당당해졌으며 자신감이 넘치게 된
것이다. 오히려, 나쁘게 이야기하면 자만심까지 언뜻언뜻 비칠 정도였다. 이런 변화가 어느
노총각 까마귀는 생김새야 못생겨도 상관없다는 듯이 노처녀 까마귀에게 구혼을 해 결국
결혼하게 되었다.
교훈:가장 값싼 미덕은 곧이곧대로 말해 주는 것.
10. 새장속의 새
한 소년이 풀밭에서 노래부르고 있던 새 한 마리르 잡아서 집으로 가져와 새장에 집어넣고
창가에 두었다. 새는 낮에는 조용히 있다가, 밤만 되면 노래를 했다. 노랫소리를 듣고 올빼미가
왜 밤에만 노래를 하느냐고 새장속의 새한테 물었다. 그 새의 대답은 이러했다. 저 아이가
나를 잡아다가 새장에 가두게 만든 게 바로 내가 낮에 부른 노랫소리 때문이잖아. 그때 난
중요한 교훈을 얻어 밤에만 노래를 부르는 거야.
참으로 현명한 예방책이군. 잡히기 전이었다면 말이야. 이건 올빼미의 말이었다.
교훈:오늘 슬픔을 아끼라. 내일 슬퍼할 일이 생긴다.
11. 사자와 암사슴
혼자서 먹이감을 잡아서 쓰러뜨리기엔 이제 힘도 부치고 속력도 못 미칠 정도로 나이를 먹은
사자 한 마리가 힘 대신 꾀를 써서 사냥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암사슴
한 마리룰 먹이감을 점찍어 둔 사자는 풀을 뜯고 있던 사슴을 향해 일부러 눈에 띄게
다가갔다.
자기한테 사자가 다가오는 것을 본 사슴이 막 도망갈 차비를 할 때였다. 사자가 소리쳤다.
잠깐, 겁내지 말고 거기 서 봐. 이건 사교상의 방문이야. 난 다만 너를 친구로 만나러 왔을
뿐이야.
좋아. 하지만 더 이상은 다가오지 마. 조심성있는 사슴다운 대답이었다.
그러나 사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초대하기 위해서 온 거야. 오늘 저녁 우리 집으로 너를 불러 식사하고 싶어.
고마운 말씀이긴 하지만 넌 우리하곤 식성이 달라. 너희는 고기를 좋아하지만 우리는 야채를
좋아하니까
그래. 하지만 안심해. 널 주려고 풀 반찬을 이미 준비해 놓았어.
사자가 말했다.
사실 난 오늘 저녁에 딴 동물과 선약이 있어서 가기가 곤란해. 이해해줘. 암사슴의 말이었다.
배가 어찌나 고팠던지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 사자가 다시 말을 받았다. 그래, 그럼, 내장
저녁에 먹지 뭐.
그 말 혹시 내일 저녁에 먹자는 말 아니니? 암사슴의 말이었다.
아, 그래. 용서해줘. 말이 빠져 이가 나간거야. 사자의 구차한 변명이었다.
사슴은 그 자리를 떠나면서 사자에게 말했다. 이거 참 안된 일이지만, 난 창자에 사무치게
느끼고 있어. 혼자서
식사를 해야 가장 편하고 맛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교훈:거짓말도 제대로 하려면 한참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12. 거북이와 토끼
대단히 공격적이고 뻐기기 잘하는 성격을 가진 파격적인 거북이 한 마리가 토끼한테 달리기
경주를 하자고 도전장을 냈다. 토끼는 오로지 거북이의 자만심을 비웃어 주기만 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거북이가 너,경주에 질까 봐서 그러는 거지? 하고 토끼의 자존심까지 건드려 가면서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지자 마침내 토끼도 달리기시합에 동의하고 말았다.
가장 공정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올빼미가 심판으로 선정되고, 구체적인 코스도 결정되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숲속에 있는 작은 동물들이 모두 경기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나왔다.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울리자 토끼는 마치
화살처럼 튀어나갔지만, 거북이는 온 힘을 다해 한 뼘 정도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까마득하게 한참 뒤처진 거북이를 보고 난 토끼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잠시 시원한 그늘
아래서 쉬었다 뛰기로 했다.
그리곤 곧장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숨 잘 자고 나서 눈을 떠 보니 아직도 거북이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토끼는 여유있게 점심식사까지 마칠 수 있었다. 디저트로 맛난 따기까지 한 웅큼 따던
토끼는 아주 예쁜 암토끼를 만나서 한동안 즐거운 정담을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거북이는 조금도 쉬지않고, 어디 한 눈 팔지도 않고 계속해서 타박타박
걸었다. 그날 저녁 늦게, 토끼가 낮에 만난 연인에게 한참 열을 올리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에
거북이는 결승선을 통과했다. 모든 관중 앞에서 올빼미는 거북이를 공식적인 승자로 인정했다.
한 껏 승리감에 도취된 거북이는 모여 있는 동물들한테 토끼 대신 자기를 전령으로 뽑아
달라고 했다. 하지만 동물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너 혹시 어떻게 된거 아니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토끼가 너보다 훨씬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건 너만 빼놓고 다 아는 사실이야.
알겠니?
교훈:할 수 있는 자는 할 필요가 없다.
13.캥거루와 새끼
자기 남편이 한 무리의 사냥꾼들에게 잡혀가 죽은 줄도 모르고 어미 캥거루는 남편이 자신을
버렸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도 지조가 없다니! 상상 속의 배신이 가져온 쓰라린 고통을
안고 어미 캥거루는 자기 아들한테 이렇게
선언했다. 오, 불쌍한 내 새끼야. 네 아비란 작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단다, 가정은
지키려는 굳은 결심도 없고
제 자식에 대한 애정도 없으니 말이다. 더 젊고 매력있는 애인한테 가서 재미를 보고 싶다는데
어떡하니? 자기가
하고 싶은건 해야지 누가 막겠니? 얘야, 우린 그래도 너한테는 내가 있고 나한테는 내가
있으니 걱정마라. 알았지?
그리하여 어미 캥거루는 새끼를 보살피는 데 온몸을 바치다시피 했다. 한동안 다른 어린
캥거루들과 나가서 놀게
내버려 두기도 했지만, 아이가 몇 녀석한테 놀림을 당하는 광경을 우연한 기회에 보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 주머니에서 좀더 기르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이가 제법 나이를 먹고 나서도 어미 캥거루는 아이에게 제 밥을 스스로 찾아 먹으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를
뱃속에 싣고 이 나무 저 나무 이 풀밭 전전하면서 따먹기 좋은 먹이 앞으로 모시고 다녔다.
아이는 그러니까 힘 하나 안 들이고 어미의 주머니 안에서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이제
그 녀석은 자기 팔자에 썩 만족은 느끼게끔
되었고 엄마한테만 푹 빠져 지내다 보니 아무리 나긋나긋한 처녀 캥거루들이 꼬리를 쳐도 본
체 만 체 였다.
그러나 다 자란 커다란 녀석을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 어찌 힘드는 일이
아니겠는가? 급기야 어미
캥거루는 창자가 빠지는 무거운 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어미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혼자서 밥을
먹고 살아갈 능력을 미처 터득하지 못한, 이젠 아이가 아닌 어른 캥거루도 며칠 있다가 그만
굶어죽고 말았다.
교훈:요람과 무덤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
14. 나무꾼과 아내
올림포스 산의 옥좌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던 제우스 신의 눈에 한 나무꾼의 모습이 들어왔다.
엄청난 폭풍이 몰아치는
차가운 겨울밤이었는데 그 나무꾼은 등불 하나를 들고 미친 듯이 숲속을 헤매고 있었다. 잔뜩
호기심이 발동한 제우스 신은 길 가는 나그네로 모습을 바꿔서 지상으로 내려왔다. 나무꾼이
대체 왜 저러나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야 여행을 하다 보니 이런 낯선 곳까지 오게 되었소만, 당신은 이 추운 야밤에 밖에
나와서 지금 뭘 하고 있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겁니까? 그러다 뼛속까지 꽁꽁 얼어붙겠소. 변장한 제우스 신이
나무꾼에게 물었다.
그 바보 천치같은 내 마누라가 여기 어디다가 결혼반지를 잃어버렸지 뭐요,글쎄. 나무꾼의
대답이었다. 그건
순금으로 만든 거요. 그걸 잃어버리고 내가 어떻게 살 수 있겠소? 찾아질 때까지 찾아야만
하는 거요.
하지만 이렇게 비바람 몰아치는 무시무시한 밤중에 혼자 집에 남겨둔 아내가 걱정도 안
되시오? 제우스 신이 이렇게 물었다.
아, 그건 걱정을 안해도 되지요. 우리 집 바로 옆에 양을 치는 목동의 집이 있어서요. 아주
성품이 좋아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내를 보살펴 주기로 했으니까 문제가 없습니다. 나무꾼이 명랑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도 서둘러 집에 가 보는 게 좋을 거요. 제우스 신이 충고를 해 주었다. 내일 아침까지도
여기 그대로 남아있을 하찮은 물건을 찾는 동안에 혹시라도 집에서 훨씬 더 값진 무언가를
잃어 버려도 좋겠소?
나를 아주 경솔한 놈으로 보시는 모양인데 제 말씀을 한 번 들어 보시오. 나무꾼의
대답이었다. 난 말이오, 워낙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나무꾼이라 그 반지만큼 값나갈 물건이 하나도 없소. 도끼라면 혹시
몰라도.
그리하여 제우스 신은 다시 올림포스 산으로 돌아가고 나무꾼도 하던 일을 다시 계속하게
되었다. 훤하게 먼동이 터올 무렵, 나무꾼은 드디어 찾으려던 결홍반지를 찾아서 집으로
가져갔다.
집으로 돌아온 나무꾼은 더없이 행복했다. 소중한 자기 도끼도 제자리에 아무 탈 없이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교훈:사고란 그리 쉽게 일어나는 법이 아니다.
15. 꼬리를 잃어버린 여우
여우 한 마리가 덫에 걸렸다. 덫을 빠져나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끝에 간신히 자유의 몸이
되긴 했지만 너무
기운을 쓰다 보니 그만 꼬리를 싹둑 잘리고 말았다. 그래서 상처가 아물 때까지 혼자서 굴속에
꼼짝도 안 하고 숨어
있었다. 하지만 상처가 다 낫도 나서도밖에 돌아다니고 싶지가 않았다. 동료 여우들 보기가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꼬리가 없는 걸 보면 걔네들이 날 막 놀리고 난리를 치겠지?
여우는 혼잣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다들 꼬리가 있고 나만 없는 한에는 내 여생이 비참할 수
밖에 없어.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그냥 아무도 모르게 숨어 버릴텐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낸 여우는 의기양양하게 동료들 틈으로 다시
돌아갔다.
야, 너 어디 있었니? 그동안 안 보이던데. 친구들은 오래만에 돌아온 그 여우를 보자마자
곧장 이렇게 물어 왔다.
응, 성형수술을 종 하고 왔지. 그 여우는 이렇게 말하면서 잽싸게 몸을 돌려 친구들에게 자기
꼬리가 잘린 모습을 보여 주었다. 돈도 엄첨 많이 들고 아프기도 무지무지하게 아팠지만,
그래도 내가 그 힘든 수술을 끝까지 다 견뎌낸 게 대견스러워.
다른 여우들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상야릇한 수술을 왜 받게 되었느냐고 물어 오자, 그
여우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교활하게 대답했다. 사실 꼬리라는 게 말이야, 아무 쓸모가 없고 한물 가도 한참 한물 간
옛날 유행이야.
완전히 옛날 고리짝 이야기란 말씀이야. 괜히 꼬리가 있으면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기만 하지
뭐야, 그 뿐인 줄 아니? 집 없는 이, 벼룩, 진드기 같은 놈들의 대피소도 된단 말씀이야.
그런 건 다 좋다고 해. 사실 진짜 중요한 건 말이야, 사냥꾼들이나 사냥개들이 너희를 잡으려고
달려들 때가 문제야. 필사적으로 달려야 하는 순간에 꼬리 때문에 속력이 떨어지게 된다
이거야. 그리고 놈들이 딱 잡기 좋은 손잡이를 달고 다니는 격이지. 여러 말 할 것 없고 한
마디로 꼬리는 보기에도 안 좋고, 생명에도 큰 지장이 돼.
논리정연한 설명에 감동된 여우들은 모두 꼬리를 자르는 데 기꺼이 찬성했다. 그런데 딱 한
마리 늙은 여우가 가로막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네가 지금까지 한 말은 저부 사실일
수도 있어. 하지만 말이야. 우리 여자 여우들이 꼬리 없는 우리를 좋아할까?
이 한 마디가 여우들의 결심을 다시 바꾸어 놓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꼬리를 그대로 달고
다니기로 했다.
교훈:성에도 약간의 광고가 필요한다.
16. 해와 바람
명랑한 자기 성격에 항상 자부심을 갖고 있던 해가 이와 정반대인 음울한 성격에 역시 똑같은
자부심을 갖고 있던 북풍과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해는 자기의 친절하고 따뜻한 성격이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는 원천이라고 자랑했고, 북풍은 또 북풍대로 자기도 폭풍같은
성격 때문에 더욱 큰 존경을 받고 있다고 떠벌렸다.
말다툼의 결판을 낼 요량으로 해가 이렇게 제안했다. 즉 누가 밭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의
겉옷을 벗겨낼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자는 것이었다. 북풍은 이 제안에 동의하고 자기가 먼저 하겠다고 했다. 북풍은 그리
하여 얼음처럼 차갑고
매운 바람은 농부에게 퍼부었다. 하지만 바람을 강하게 보내면 보낼수록 농부는 옷깃을 바짝
끌어당겨 더욱더 꽉 여미는 것이었다.
다음은 해가 할 차례였다. 해는 자기가 가진 가장 따스한 햇살을 농부에게 흠뻑 쏟아부었다.
에이, 날씨 한번 요상하네. 조금 아깐 바람이 그렇게 몹시 몰아치더니 이번엔 또 뜨거운 해가
쨍쨍 내리 쪼이니, 참. 농부는
투덜거리면서 겉옷을 벗어 던졌다. 승리는 당연히 해에게 돌아갔다.
해는 결과에 신이 나서 하하 웃었지만, 북풍은 완전히 승복하지 않았다. 잠깐! 네가 이긴 건
이긴거야. 거기에 대해선 불만이 없어. 하지만 어디 이번엔 누가 저 농부의 옷을 다시 입힐 수
있는가 시합을 해 보자구.
참 치사하구나. 졌으면 깨끗하게 졌다고 할 일이지. 뭘 또 다른 게임은 게임이냐? 하지만
원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 자신감에 넘친 해가 말했다.
해는 더욱 많은 햇살을 농부에게 쏟아부었다. 하지만 농부는 땀을 뻘뻘 흘릭데 되니까 오히려
입고 있던 런닝셔츠까지 벗어부치고 계속 일을 했다.
그러자 바람이 기회는 이때다 싶어 약간 쌀쌀한 돌풍을 날려보냈다. 나 참, 이렇게 변덕스런
봄날씨는 생전 처음이야. 농부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떨리는 몸을 추스리는 동시에
런닝셔츠와 겉옷을 다시 주워 입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바람이 승자가 되었다.
해는 자기가 졌다는 사실에 매우 상심이 되었지만, 아까 자기 성품이 온화하다고 떠벌렸던
것을 떠올리곤 심술을
부릴수도 없었다. 이렇게 자기 감정은 꽉꽉 억누른 것이 결국 다음날 심인성 두드러기를
일으켜 태양의 흑점이라는 큰 얼룩들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교훈:제 성짉과의 싸움에서는 제 성질을 잃는 것이 따르는 것
17. 사자와 승냥이와 여우
두 짐승 사이에 흔히 일어나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사자와 승냥이가 서로 죽고 못사는 막연한
친구가 된 것이다.
사자에게 큰 병이 생기자, 친구인 승냥이가 안절부절 못하게 되었다. 승냥이는 그 길로 서둘러
숲속으로 들어가서 사자가 몹시 심각한 병에 걸렸으니 병문안을 오도록 모든 동물들에게
알렸다. 물론 잊지 말고 성의껏 선물을 가지고 오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숲속의 크고 작은 모든 동물들이 승냥이의 말이 따라 사자를 찾아와 저마다 한 마디씩 빨리
쾌차하라는 인사를 했다 .
그런데 여우란 놈만은 나타나지 않았다. 승냥이는 못마땅했다. 그래서 사자한테 말했다.
아무리 제 놈이 사자 너한테
관심이 없어 네가 어떻게 되는 신경을 안쓴다고 해도 말이야, 네가 누구냐? 동물의 왕 아니니?
명색이 동물의 왕인 너한테 마땅이 얼굴이라도 비쳐야 예의가 아니겠어? 이건 너를 아주 개
취급하는 거라구.
승냥이늬 이처럼 지나친 관심 표명이 사실상 사자 자신에 대한 잠재의식적인 적대감을
은연중에 나타난 것이라는
점을 사자는 물론 간파하지 못했다. 또한 승냥이의 적개심이 여우의 안녕보다 오히려 사자
자신의 마음의 평정을 해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인 줄도 당연히 알 수가 없었다. 여우가
괘씸해진 사자는 승냥이더러 여우를 당장 자기 앞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여우가 도착해서 보니 사태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말했다. 늦게 온 곤 대단히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 저대로 사자님을 위하여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저는 단순히 말로 안됐다고 동정이나 하고 간단한 선물 따위로 경의를 표시하는
그런 놈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저는 사실, 의사란 의사는 죄 찾아다니면서 이리 뒤고
저리 뒤고 백방으로 사자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구체적인 약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지요.해서 승냥이가 저에게 왔을땐 이미 제가 구한 좋은 소식을 가지고 사자님께로 서둘러
오던 참이었습니다.
아이구, 너야말로 내 친구다! 너무나 기뻐 사자의 목소리가 천둥 소리처럼 커졌다. 그럼 어서
빨리 그 처방을 말해
봐라. 병이 나을 수 있다는데 어찌 한순간인들 지체할 수 있겠느냐?
그럼 좋습니다. 말씀 드리지요. 좀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이건 전문의의 처방이니까
절대 틀림이 없습니다. 여우의 대답은 이렇게 이어졌다. 간단합니다. 살아있는 승냥이를
잡아 요리해서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잡수시는 겁니다.
그간의 우정을 봐서라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허겁지겁 손을 가로저으며 뒤로 물러서는
승냥이의 애절한 몸짓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자는 곧장 승냥이를 산 채로 뜨거운 물통에 집어
넣고 팔팔 끓이지 시작했다.
교훈:친구란 아직 행동을 개시하지 않은 적일 뿐.
18. 귀뚜라미와 개미
여름과 가을 동안 야식을 차곡차곡 저축해 두지 않았던 귀뚜라미는 겨울이 닥쳐오자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귀뚜라미는 개미의 집으로 가서 먹을 것을 좀 나누어 달라고 했다.
문은 지키고 있던 경비원 개미는 귀뚜라미를 그냥 돌려보내려고 해싸. 우리처럼 열심히 일을
했으면 지금 이렇게 고프지 않았을 것 아냐. 근데 열심히 일하는 우리를 비웃고 말이야, 세월아
네월아, 시끄럽게 깽깽이나 켜댔으니.
아니, 적선해 주기 싫으면 적선만 안 하면 되지, 왜 남의 음악에 대해서 시끄럽다느니
뭐하다느니 비난하는 거요? 귀뚜라미가 말했다. 당신하테는 그저 한 번 찍 하는 정도로
들리는 소리도 사실은 세 개나 되는 음을 내
바이올린으로 켠 절묘한 연주란 말이오. 그 셋잇단음의 하나하나는 50분의 1초만큼의 길이를
갖고 있고 그 사이사이엔 또 그만큼의 짧은 정지가 있소. 그러니까 난 피아노 음역보다 한
옥타브 위로 연주를 하면서도, 총연주시간을 10분의 1초 동안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연주를 해낸 것이란 말이오.
그렇게 말을 하니까 무슨 음악의 거장처럼 보이긴 하는데 도대체 음악으로 뭘 할수 있다는
거야? 밀알과 보리알을 줍는 데 시간을 쓰는 게 더 낫지. 개미의 대꾸였다.
난 대단한 일을 해 냈소. 난 내 음악으로 독창적인 과학적 측정체계를 완성했소. 귀뚜라미의
설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현재의 온도를 알고 싶으면, 그저 1분
동안에 내가 연주하는 찍 소리의 수를 세어서 4로 나눈 다음, 다시 거기에 40을 더하기만
하면 되지. 자, 봐요. 이게 바로 지금의 화씨 온도 아니겠소!
정밀하긴 정밀하군. 개미가 되받았다. 근데 일기예보가 자네한테 밥을 먹여주나, 떡을
먹여주나?
그렇다면 당신은 뭐 내세울 거라도 있어? 귀뚜라미가 거칠게 말했다. 저만 먹겠다고 광에다
먹을 걸 잔뜩 쌓아 놓은 것 외에 뭐가 있어?
그러자 이번에는 개미가 화를 내며 말했다. 너야말로 오락과 지식만을 찾아 헤매는 어리석은
개인주의자야. 하지만 우린 만물의 영장인 인간과 맞먹는 존재야. 물론 더 우수하다고야
못하지만 말이야. 우린 사람들보다 수가 많아.
그리고 우리의 사회제도는 상당히 복잡해. 역사도 한참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지. 우리가
땅밑에서 농장을 일구고 진딧물로 즙을 짜고 있을 때, 인간들은 동굴속에서 아직 불도 없이
벌벌 떨고 있었어.
본능적으로 사는 거야 누가 못해? 귀뚜라미가 말했다. 당신은 당신네 족속을 너무 높이 평가
하고 있어. 사람과 비교를 하다니. 사람은 생각을 할 수 있다구.
그 점에서도 우린 인간과 동등해. 왜냐하면 자기 종족을 상대로 정기적으로 대규모 전쟁을
벌여서 자기 천적 전체가 죽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자기네 종족을 학살하는 인간들과 견줄
수 있는 것은 우리 개미뿐이기 때문이야.
보라구, 인간들처럼 우리 개미들은 피부색깔만 달라도 가차없이 노예로 삼기도 하지. 인간이
만들어낸 것 가운데서 전쟁과 노예제도 말고 또 더 위대한 창조물이 어디 있겠는가!
가히 논박할 수 없는 이 주장에 말문이 막힌 귀뚜라미는 얼굴을 붉히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얼마 가지 못해서 귀뚜라미가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자, 개미들은 귀뚜라미의 시신을 자기
집으로 질질 끌고 가서 아주 아주 맛있게 먹었다.
교훈:겨울이 왔으니 봄도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19. 심술
이슬람의 왕 술탄의 궁전에 들어선 한 귀족 청년이 우연히 왕비들 중에서 가장 어리고 어여쁜
여인을 보게 되어 자기도 모르게 사랑에 빠졌다. 그는 계획을 세우고 또 세워서 마참내
어렵사리 그 왕비를 만날 기회를 얻었는데, 기쁨도 잠시, 침실을 호위하던 내시에게
발각되었다.
경비병들을 불러오시기 전에 잠깐만요. 이 젊은이는 내시에게 말했다. 이 반지가 마음에 드
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젊은이는 갖고 있던 커다란 루비 반지를 내놓았다.
난 내 직무에 충실할 따름이다. 내시가 우직하게 말했다.
젊은이는 이제 내시의 선한 성품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게 됐다. 대왕님은 필경 저를 팔팔
끓는 물에 처넣으실 겁니다. 젊은 놈이 그런 식으로 죽어야 하다니, 참 허무합니다. 제가 그런
식으로 죽고나면 그 일이 마음에 걸려 괴로워지실지도 모릅니다. 젊은이는 호소했다.
네 잘못인데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내시의 대답에는 아무런 감정도 묻어 있지 않았다.
자기 잘못을 최대한 줄여 보려는 심정에서 젊은이는 계속 매달렸다. 그 여자야 왕한테나
쓸모가 있지, 사실 당신한테야 아무 쓸모가 없지 않소? 왕한테도 아주 가끔씩만 필요하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냥 놔 두면 그대로 버려질 몸을 좀 탐했다고 제가 정말 죽어야 하는 건가요?
이 말을 들은 내시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경비병들을 불렀다. 그리하여 그 젊은이는 왕 앞으로
끌려갔다. 자초지종을 다 들은 왕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 내가 다시 한번
젊어져서 사랑하는 여인에게 목숨까지 바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어찌 마다하리! 용감했던 젊은 날의 기억에 마음이 누그러진 왕은
젊은이를 풀어주도록 했다.
그리고 선물로 그 아내를 주어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멀리 떨어진 자기 영토의 한 부분을
둘이서 함께 다스리게 했다.
하지만 그 내시는 왕의 지나치게 감상적인 관대한 처분에 화가 나서 침실 호위직을 박차고
나와 잡화를 파는 가게를 열었다. 도시의 여인들에게 향수도 팔고 연고도 팔고 화장품도
팔았다. 그리하여 그는 곧 왕만큼 큰 부자가 되었다.
교훈:사촌이 땅이라도 사야 위장병 고칠 생각을 한다.
20. 늑대와 당나귀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던 당나귀가 깜짝 놀랐다. 늑대 한 마리가 자기한테 가까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킨 당나귀는 마치 늑대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이 그냥 풀만 계속 뜯었다.
오히려 도망을 못 치는 양 절름발이 흉내를 냈다.
그러자 늑대는 살금살금 오던 태도를 바꿔서 이제 몸을 숨기지도 않고 노골적으로 당나귀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왔다.
왜 달아나지 않지? 늑대가 물었다. 잡아먹히는 게 무섭지도 않아?
물론 도망가고 싶어. 당나귀가 대답했다. 하지만 발에 큰 가시가 박혀서 가고 싶어도 못 가.
너무 아파서 살짝 디딜 수도 없어. 날 잡아먹기 전에 먼저 가시부터 빼 줘. 그래야 먹어도 네
목에 안 걸릴테니까 말이야.
좋아. 그럼 발을 들어 봐. 늑대가 명령하듯이 말하고 나서 당나귀의 쳐든 발굽에 머리를
가져가서 가시를 보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딱 좋은 위치가 되자 당나귀는 있는 힘을 다해서
늑대의 머리팍을 걷어찼다. 늑대는 그 자리에서 즉사햇다.
교훈:우리 주변엔 이제 착한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
21. 도끼를 잃어버린 나무꾼
강둑에서 나무를 하느라 여념이 없던 어떤 나무꾼이 도끼를 하도 세차게 휘두르다 보니 도끼가
그만 손을 떠나 강물속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하도 가난해서 도끼를 새로 살 형편이 못
되었던 나무꾼은 갑자기 닥쳐온 불행에 넋을 잃고 울기만 할 뿐이었다. 그 도끼는 그야말로
자기 생계를 꾸려나가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헤르메스 신이 강둑에 나타나서 왜 그렇게 서럽게 우느냐고 물었다. 그 소박한 나무꾼의
가엾은 사연을 듣고 감동한 헤르메스 신은 곧장 강물 속에 뛰어들어가서 금도끼를 건져갖고
나왔다. 그리고 말했다. 기뻐하라. 내가 네 도끼를 찾았노라.
아, 아닙니다. 정직한 나무꾼이 대답했다. 그건 금으로 만들어졌지 않습니까? 그 도끼는 내
도끼를 따라오지도 못해요. 그 도끼는 날이 너무 약해서 참나무는 커녕 소나무도 못 베겠네요.
헤르메스는 다시 한번 강물 속으로 다이빙을 해 들어가서 이번에는 은으로 만든 도끼를 들고
나왔다. 자, 여기 있다. 이젠 됐겠지.
헤르메스 신이 자신있게 말했다.
그것도 아닙니다. 나무꾼이 대답했다. 내 도끼는 강철로 만들어져 있어서 끝이 더
날카로워요.
알았다. 헤르메스는 다시 한 번 더 강물로 들어가서 나무꾼의 진짜 도끼를 갖고 나왔다.
네, 그거예요. 맞아요! 기쁨에 넘친 나무꾼은 헤르메스 신의 친절한 마음씀에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나무꾼의 진실한 성품에 기분이 좋아진 헤르메스 신이 말했다.
정직은 반드시 보답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금도끼와 은도끼들을 모두 너에게 주겠다.
기쁨에 넘친 나무꾼은 곧장 집으로 달려가서 아내에게 세 자루의 도끼를 보여 주고
동네사람들에게 헤르메스 신을 만난 행운을 자랑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웃사람들 중의
하나가 자기도 부자가 되어 보려고 강물에다가 갖고 간 도끼를 던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짐짓 울기 시작했다.
눈 깜빡할 사이에 헤르메스 신이 그 앞에 나타났다. 저는 아내와 새끼들을 벌어먹이는 유일한
도구를 잃어버렸습니다. 도끼가 저기 빠지고 말았어요. 제발 자비심을 베푸시어 제 도끼를
되찾아 주세요. 거짓말쟁이가 호소했다.
헤르메스 신은 아차 싶었다. 예전에 그 나무꾼의 도끼를 찾아준 일 말이다. 그게 선례가 되어서
온 그리스 장안의 조심성없는 나무꾼들이 모두 자기한테 달려오면 그땐 아무 일도 못하고
밤낮으로 도끼를 찾아주느라고 정신을 못 차릴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헤르메스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느니라. 행색을 보아하니
꾀죄죄한게 강물 속에 들어가서 도끼나 찾으면서 깨끗하게 목욕을 한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법하다.
교훈: 정직은 다만 기회를 저버리는 것일 따름이다.
22. 외눈박이 사슴
사냥꾼의 화살에 맞아서 생긴 상처 때문에 한 눈이 멀게 된 사슴 한 마리가 있었다. 이 사슴은
생각했다. 바닷가에 가서 풀을 뜯어 먹어야지. 못 쓰게 된 눈을 바다 쪽에 고정시켜 놓으면
나머지 성한 한쪽 눈으로 숲을 잘 경계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리하여 사슴은 바닷가로
가서 풀을 뜯었다. 물론 수풀 쪽만을 경계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배 위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낚시꾼들이 사슴을 발견하고서 바닷가로 배를 몰아오는 게
아닌가! 그들은 보이지 않는 눈 쪽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아무 어려움 없이 사슴을 생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낚시꾼들은 그날 밤 청어구이 대신에 사슴 바비큐 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교훈: 도망치는 자는 언젠가는 붙잡힌다.
23. 늑대와 어린 양
굶주린 늑대 한 마리가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어린 양을 만났다. 바로 잡아먹자니
어쩐지 양심이 찔리는 느낌이 든 늑대는 어린 양을 잡아먹는 데 대해서 무언가 그럴듯한
명분을 꾸며내려고 했다.
그래서 늑대는 어린 것이 맑은 시냇물을 진흙탕으로 만들고 있다고 나무랐다. 그렇게 더러운
물을 자기가 어떻게 먹을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어린 양은 자신의 결백을 좀 발칙하다
싶게 당당히 주장했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지금 시냇물의 하류 쪽에 있고요, 물은 늑대
아저씨가 있는 쪽에서 제 쪽으로 흐르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저씨 쪽은 물이 꺠끗하잖아요!
그건 그렇다 치고, 넌 임마, 돌아가신 분께 너무 무례했어. 작녕에 사냥꾼의 총에 맞아서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넌 우리 아버지를 비웃었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얼른 도망을 쳐도 모자랄텐데 어린 양은 바보처럼 논쟁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아저씬, 계산도 못하시나 봐. 그때는 제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시절이에요.
마치 화가 났다는 듯한 어린 양의 항변이었다.
너는 다른 양들과 함께 공동 풀밭을 뜯고 있어. 그러니까 우리가 가장 존중에 마지않는
사유재산권 제도를 전복하려는 공산주의자란 말이야. 이젠 진짜로 화가 난 늑대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반공연맹 회원이에요. 저도 크면 거기 가입할 거라구요. 어린 양이
자랑스럽게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렸다.
난 이제 더 이상은 자기만 잘났다는 위선자를 용납할 수 없어. 너같이 잘난 척하는 녀석들만
없다면 이 세상이 훨씬 살기 좋아진다, 임마. 늑대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어린 양을 덮쳐서
뼈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 치웠다.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소화불량 같은 것은 없었다.
교훈: 이유나 구실은 자신을 속이기 위해 남에게 하는 말이다.
24. 양치기와 새끼 늑대들
울퉁불퉁한 바위산에서 한 양치기가 어미를 잃은 새끼 늑대들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잘만 가르치면 이 새끼 늑대들이 자기 양떼를 지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그 새끼 늑대들을
기르기로 했다.
그는 그 새끼 늑대들을 잘 먹여주고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자기 명령에 잘 복종하도록
열심히 훈련을 시켰다. 그 녀석들이 양들을 놀라게 했을 때는 매를 때려주고, 그렇지 않고
얌전하게 굴었을 때는 맛있는 먹이를 던져주었다. 그렇게 여러 달 힘들여 노력한 끝에
양치기는 자신의 끈기있는 훈련이 드디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양떼를 새끼 늑대들한테 맡겨두고 읍내로 가서 사람들에게 자기의 신종 양치기
개들 을 사지 않겠느냐고 했다. 여기에 관심을 보인 마을사람들 몇과 함께 돌아와 보니, 어라?
글쎄 이 놈들이 자기가 없는 틈을 타 양들을 모조리 잡아먹어 버린 게 아닌가!
교훈: 말을 물가에 끌어다 놓기만 해 보라. 물을 안 먹긴 왜 안 먹어?
25. 조각가와 아프로디테
한 조각가가 여인상을 만들었는데 어찌나 조각을 아름답게 했던지 자기가 깎은 그 여인상과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하루종일 식음을 전폐하고 그 조각 앞에 앉아서 밤이나
낮이나 고뇌와 열정에 휩싸인 눈으로 그 여인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나서 죽는 우리네 인간
여인에게는 결코 다시 만족을 느끼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 조각가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빌었다. 그 대리석 조각 여인을 살아 움직이는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말이다.
절망적인 사랑을 호소하는 그 조각가의 애틋한 마음에 감동한 감상적인 여신 아프로디테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어 여인상에다가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완전히 황홀감의 절정에서
조각가는 아프로디테에게 한없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또 드렸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자기가 여인상에다가 구현한 아름다움을 어떻게 아무 탈이 없이
고스란히 본래 모습 그대로 지키느냐가 말할수 없이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잣신의 우상에게 말했다. 넌 밖에 나가지 말고 집안에만 있어야 해. 아슴푸레하게 창백한 네
뺨에 봄햇볕에 그을리면 안 되잖아. 그리고 또 있어. 내가 너한테 준 섬세한 피부가 저녁
바람에 거칠어질지도 몰라.
이러고도 안심이 안 되었던지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했다. 됐어, 그만 먹어. 그
불쌍한 여인이 뭘 좀 입에라도 가져가는 날에는 그렇게 해서 못 먹게 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돼지야? 내가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게 돼지란 말인가, 천하의 미인이 아니고? 살이 찌면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하니? 완전무결한 균형, 조화, 비례가 모두 깨지고 마는 거야. 내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그 절묘한 우아함이 물거품이 된단 말이야.
물론 그는 자기가 창조해낸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한 일이라면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여인이 아무 일도 못하게 했다. 감자 껍질도 못 벗기게 했고, 설거지도
못하게 했고, 마룻바닥에 걸레질도 못하게 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집안일은 전부 자기가
도맡아서 한 것이다.
이런 처지에 놓이다 보니 그 여인은 서서히 자기 주인과 같이 사는 것이 지루해 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기도를 드렸다. 조각가가 사랑하는 건
제가 아니라 자기가 만든 작품이에요. 그러니 다시 예전의 조각상으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아프로디테 여신이시여! 아프로디테는 현명하게도 이 기도를 받아들여 양쪽
모두가 만족을 느끼게 해 주었다.
교훈:사랑에 정을 대고 쪼기보다는 대리석에 칼을 대고 새기기가 쉽다.
26. 병사와 전쟁터의 말
속력과 힘이 월등해서 주인을 전쟁터에 수없이 태워다 주면서도 상처 하나 입지 않게 지켜주던
명마가 있었다. 그 주인 병사는 당연히 자기 말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말을 보살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말한테 포식을 할 정도의 보리와 물을 먼저
갖다주지 않으며 그때까지 자기도 전혀 음식에 입을 대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매일같이 털을
잘 손질해 주었고, 상처라도 나면 잊지 않고 정성껏 고약을 발라 주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주인은 말을 밭에다 내몰아 일을 시켰다. 말은 쟁기도 끌고, 무거운 바윗덩이들도 나르고,
힘들게 마차도 끌어야 했다. 그렇게 일을 힘들게 하는데도 먹이는 왕겨와 밀짚뿐이었다.
그러던 중에 전쟁이 다시 터졌다. 그 주인은 무장을 다 갖춘 다음에 자기 말에 다시 한 번
올라탔다. 그런데 평소에 잘 먹지도 못하고 일만 죽어라 하다 탈진한 말은 제대로 달릴 수가
없었다. 한 발 한 발 옮길 때 마다 여기서도 절뚝 거리고 저기서도 절뚝 거리고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병사가 말을 꾸짖자 말은 이렇거 말했다. 내가 전쟁터의 명마로 멋지고 힘차게
달리길 바랐다면, 왜 나를 농장의 당나귀처럼 취급하셨나요?
교훈:아내에게 바치는 정성을 아내가 모르게 하라.
27.정열적인 비버
열정적이고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이빨도 썩 튼튼한 비버 한 마리가 결혼을 했다. 새로
맞아들인 각시를 위해서 비버는 최대한 신경을 써서 장모와 잘 지내려 하는데, 장모는 그 지역
사회 전체를 통틀어 가장 성질이 나쁘기로 소문난 비버였다. 사위의 성심성의를 따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장모 비버는 전혀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기회만 있으면 사위
비버를 남을 앞에서 비난하기 일쑤였고, 뿐만 아니라 사위의 소소한 실수까지 남김없이 딸에게
일러바치는 것이었다. 엄마의 고자질만 아니라면 딸이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그런
시시콜콜한 잘못까지 말이다. 혹시라도 딸과 사위가 다투기라도 하면 그때맏다 장모는
기다렸다는 듯이 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건달한테 아까운 청춘을 고스란히 바치지 말고 어서
따른 데로 떠나자고 딸을 꼬드기곤 했다.
하루는 남편 비버가 독한 감기에 걸려서 꼼짝도 못하고 집에 누워 있게 되었다. 아내 비버는
아파서 누워 있는 남편을 두고 집을 떠나기가 썩 내키지 않았지만, 댐의 긴급 복구공사에
동원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집을 나서면서 마음이 놓이지 않는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한테 집에 좀 들러서 당신을 간호해 달라고 할테니 아무 걱정 말고 몸조리나 잘 하세요.
이 말을 들은 남편 비버는 제발 혼자서 견디게 해 달라고 아내에게 사정을 했다. 하지만
아내는 말했다. 당신이 우리 엄마에 대해서 왜 그렇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엄마가 사실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데 그러세요? 그러니 차라리 잘됐잖아요.
이번 기회에 싹 풀어버리고 한 번 잘 지내보세요. 그리하여 아내 비버는 자기 엄마한테
사위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장모는 딸네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우선 욕부터 해 대는 것이었다. 저런 놈팡이 보게나, 지
여편네는 지금 젊은이들과 함께 댐 복구공사에 불려나가 땀을 흘리고 있는 판에 여기 이렇게
편안히 누워 있다니! 하지만 사위의 체온을 재 보고 나서는 태도가 달라졌다. 아이구, 이런.
자네 정말로 아프구먼. 거기 가만히 있게. 내가 향나무 즙으로 가슴을 문질러 줄테니, 그럼
아마 울혈증세가 좀 가라앉을 거야. 어려워할 것 없네, 내가 누군가? 자네 장모아닌가, 장모.
그래서 비버는 장모가 향나무 즙으로 자기 가슴을 마사지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비버는 차차 치료를 위한 손길이 유혹의 손길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소리쳐 사람을 부르자니 이미 늦기도 했고 또 너무 창피한 사건인지라
비버는 장모의 유혹에 그만 굴복하고 말았다. 비버의 독감은 열흘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물론
그 열흘 동안 그 곁에서 장모도 사위를 보살폈다.
병이 완쾌되고 나자, 사위와 장모 사이가 이만저만 좋아진 게 아니었다. 아내는 갑자기 그렇게
호전되 영문을 모르면서도, 아, 물론 장인도 마찬가지였지낭, 어쩐지 둘 사이가 너무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제 되었다. 그래서 가끔 남편이 자기 엄마와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았으면 하게 되었다.
교훈:장모를 미워하라. 두 가정이 행복해진다.
28. 왕을 원한 개구리들
아주 살기좋은 연못에 살면서도 개구리들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는데, 그것은 아버지로
느낄 만한 존재가 없기 때문이었다. 개구리들은 대표단을 제우스 신에게 보내 자기들이 왕을
얻을 수 있게 해달라고 탄원했다.
개구리들을 밉지 않게 생각한 제우스 신은 커다란 통나무 하나를 연못에 떨어뜨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 통나무가 이제부터 너희들의 통치자이다. 저 통나무를 존경하라. 그러면 너희는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니라. 처음에는 개구리들도 굉장히 기뻤다. 그 통나무가 햇빛을 쪼일 수
있는 훌륭한 장소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많은 애벌레들과 딱정벌레들, 그리고
지렁이들이 통나무 주변에 몰려들었기 때문에 한동안은 개구리들의 먹이까지 풍성하게
늘어났다.
그러나 그 통나무가 전혀 움직이지도 않고 말도 한마디 하지 않으니까 젊은 개구리들은 슬슬
통나무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개구리들은 자기네들이 죄를 저질렀는데도 벌을 받지 않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고, 이 때문에 통나무가 오히려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한 번 대표단을 구성해서 제우스 신에게 보내 자기들의 불만을
털어놓았다. 자기의 조치에 대한 개구리들의 불평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제우스 신은 이들에
대한 응징으로 커다란 물뱀 한 마리를 연못으로 보냈다.
먹성이 엄청나게 좋은 그 물뱀은 닥치는 대로 개구리를 잡아 삼시 세끼를 완전히 개구리
식사로만 때우며 살았다. 그리하여 개구리들은 얼마 안 있어서 물뱀한테 깡그리 소탕되었지만,
모두들 행복하게 잘 죽었더란다.
교훈:개구리가 인간보다 똑똑할 수 있겠는가.
29. 참나무와 갈대
참나무 한 그루가 자기의 강인함을 자랑하면서 옆에 있는 갈대를 은근히 비웃었다. 갈대는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그냥 고개를 숙이고 굽신댄다는 것이었다. 참나무가 엄청나게 강직한
자기의 몸통과 무지하게 깊이 박혀 있는 뿌리를 한참 자랑하고 있는데, 갑자기 난폭한
돌개바람이 불어왔다. 힘이 센 참나무는 이 폭풍에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그만 땅에
쓰러지고 뿌리도 뽑혀서 갈가리 찢기고 말았다.
참나무는 쓰러졌는데 자기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갈대들이 자랑스럽데 서로
떠벌리고 있을 때였다. 아이들이 쓰러진 참나무 주위로 몰려와서 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재미삼아 옆에 있던 갈대들을 한 웅큼씩 잡아뜯어서는 이리 저리 함부로 내팽겨쳤다. 뽑혀
버려진 갈대들은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말라 죽고 말았다.
교훈:오늘날, 그나마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곤 사회보장제도 뿐이다.
30. 경건한 노부부
한 노부부가 서로를 무척이나 사랑하며 또 만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하다는 얘기를 익히 들은 바
있는 헤르메스 신은 남루한 여행자로 변장해서 그 노부부의 오두막에 나타났다. 할아버지는
채석장에서 일을 나가고 없었기 때문에 할머니가 손님을 맞이했다. 할먼니는 어서 오시라고
인사와 함께 곧 물 한 대야를 떠다 주어 손님이 발을 씻고 기운을 되차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양식이라곤 사실 두 부부가 먹을 것밖에 없었지만, 할머니는 마지막 남은 한 주전자의 우유와
한 조각의 빵을 낯선 여행자 앞에 즐거운 마음으로 내놓았다. 헤르메스 신이 아주 탐욕스럽게
먹어치웠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뭐라고 싫은 소리를 하긴커녕 오히려 더 대접할 것이 변변히
없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정도였다.
역시 이 부부에 대한 좋은 평판은 사실과 다르지 않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헤르메스 신은
자신의 신령스런 본모습을 드러냈다. 할머니가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헤르메스는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일부러 너희에게 상을 내리려고 여기 왔노라. 황금이 갖고 싶으냐? 아니면 너희
농토를 아테네 제일 가는 옥토로 만들어 주련?
그러나 할머니는 한 참을 생각한 뒤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싫습니다. 재산이야 지금까지
부족한 줄 모르고 지내 왔는데요, 뭐. 단 하나 소망이 있다면, 제가 우리 영감보다 먼저
죽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영감 없이 산다는 건 견딜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너를 다시 젊고 아름다움 소녀로 만들어 주는 건 어떻겠느냐? 헤르메스 신이
물었다.
싫습니다. 영감보다 오래 살지 않도록만 해 주십시오. 할머니의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그리 되도록 해 주겠노라. 말을 마치면서 헤르메스는 자취를 감추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헤르메스 신의 방문을 받았다는 말을 할아버지에게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자기가 없어지면 할아버지가 어떻게 살아갈까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자기를 황천으로 가면 꼭 재혼을 하라고 할아버지에게 자꾸자꾸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항상 입버릇 처럼 대답했다. 임자가 아직 통나무처럼 단단한데 뭘 그런
얘길 하고 그러나? 그런 얘기는 더 있다가 해도 돼. 아무튼 난 너무 늙어서 생판 낯선 여자를
집에 들여놓고는 견딜 자신이 없어. 더구나 나같은 늙은이를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어?
자상한 남편과 아담한 농장을 가질 수 있다면 여자한테야 그만이지요. 영감은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해요. 밥도 때 맞춰 해 줘야죠.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시원한 샘물을 길어다가 목도
축이고 손도 씻을 수 있게 해 줘야죠. 그걸 다 누가 하나요? 여자가 해 줘야죠. 할머니의
말이었다.
이런 식으로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잔소리를 해 대면서 하도 달달 볶는 바람에 마침내
할아버지는 재혼을 한다고 마지못해 동의하고 말았다. 막상 그러고 나니까 할머니한테는 또
다른 새로운 고민이 생겨났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가서 말했다.
유언장을 작성하기 전까지는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 읍내에
가서 서기를 좀 불러오세요. 유언장을 만들게 말이에요.
유언장이라니! 할아버지가 펄쩍 뛰면서 말했다. 필경 할머니가 실성한 것이라고 짐작했다.
임자, 당신이 뭐가 있어서 물려주고 말고 한단 말이오? 기껏해야 주전자 몇 개와 프라이팬
몇 개인데. 하지만 할머니가 하도 완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할아버지도 하는 수 없이 서기를
부르러 갔다.
서기와 단 둘만 남게 된 할머니가 하나씩 일러주었다. 모든 게 사랑하는 남편 몫이라고
쓰세요. 이기적인 친척들 몫은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우리 저 착한 양반이 재혼을 하고 나면,
그의 아내에게 내 소중한 모든 걸 주겠어요. 페키니아제 은 머리핀, 거북이 껍질로 만든
머리빗 세트, 유리 노리개, 금반지 일체를 주겠어요.
서기가 집을 나서기가 무섭게 헤르메스 신이 할머니 앞에 나타났다. 왜 거짓 유언을 했지?
화가 난 목소리로 헤르메스 신이 다그쳤다. 너처럼 가난한 농부의 아내가 가진 게 뭐가
있어서 그런 말을 했지? 가지지도 않은 것을 할아버지의 후처에게 주겠다고 유언장에 쓰다니.
그리 쓸 수밖에 더 있겠어요? 가련한 할머니가 되물었다. 지조없는 영감은 약속까지 했으니
재혼을 하겠지요. 하지만이제 이렇게 떡 하니 유언장을 만들어 놨으니, 새 마누라는 진짜로
자기한테 넘어올 값진 보물들이 있는 줄만 알테고, 날이면 날마다 그 보물들을 내놓으라고
영감을 쪼아 대면서 잠시도 못살게 굴죠. 잘하면 한 달도 안 가 영감이 황천으로 올테로 우린
다시 합칠 수 있겠죠.
교훈:사랑과 다이아몬드는 더러운 흙에 섞여서 나온다.
31. 늑대와 황새
생전 났시라곤 단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늑대 한 마리가 그날은 용케도 강에서 통통하고
물 좋은 연어 한 마리를 잡았다. 그냥 먹고 싶은 욕심만 앞서서 늑대는 생선을 먹을 때 꼭
지켜야 할 주의사항도 잊은 채 연어를 한 입에 꿀꺽 삼키다가 그만 커다란 가시가 목에 걸리고
말았다.
너무 아파서, 늑대는 숨을 한 번 쉴 때마다 꼭 그게 마지막 숨이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여기 저기 살려 달라고 도움을 청하러 뛰어다녔다. 하지만 아무 동물도 늑대의 고통을
덜어 주려 하지 않았다. 도와만 주면 꼭 사례하겠노라고 다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황새 한 마리가 이 절망적인 짐승에게 동정심을 느껴 도와 주겠다고 했다.
황새는 자기의 길고 좁다란 부리를 늑대의 목구멍 깊숙히, 연어 가시가 닿을 때까지 뜰이밀어
그것을 뽑아내 주었다. 늑대가 다시 평안하게 숨을 쉴 수 있게 되자, 황새는 약속된 사례를
요구했다. 난 자네가 통이 큰 동물이라고 믿고 있다네. 황새의 말은 이어졌다. 정말이지
정교한 수술이었어. 힘도 들었고, 외과수술 전문의로서 이만큼 완벽한 수술은, 뭐, 도저히
기대할 수가 없지.
그러자 늑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 친구야, 자넨 그 무시무시한 늑대 아가리 사이에서
머리를 온전하게 빼내고도 더 보답이 필요한가? 그것으로 충분한 보답이 되었으리라고
보는데.
애시당초에 늑대가 약속 같은 걸 지키리라고 믿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황새는 그 말을
듣자마자 두 말 없이 후딱 자리를 차고 날아갔다. 늑대는 황새를 잘도 등쳐먹었다고 혼자
낄낄거리면서 좋아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죽기 일보직전에 간신히 탈출하고 보니 갑자기 옛날 어렸을 적 기억이
일깨워지는 것이었다. 자기와, 자기 형제들을 사냥개들의 추격에서 구해주고 자신은 죽어야만
했던 엄마에 대한 그 가슴 아픈 기억 말이다. 늑대의 잠재의식은 황새에게서 일반적인
모성애의 전형을 보았고, 그것이 자기 엄마의 얼굴과 겹쳐보인 것이다.
그러자 늑대는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이런 죄의식은 우울증 노이로제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늑대의 노이로제 증상들 가운데 하나는 목구멍의 혹심한 통증이었다. 음식 조각은 고사하고
물도 한 모금 삼킬 수가 없었다. 이 고통이 오히려 늑대에게 죄값을 치렀다는 잠재의식적인
만족감을 주긴 했지만, 며칠 후 늑대는 굶주림으로, 죽어도 맞이하기 싫은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교훈:자신에게만은 정직하라. 그래야 이 세상 누구라도 속일 수 있다.
32. 독수리와 궁수
사냥이라는 주제에 공통의 관심을 갖고 있던 독수리와 궁수는 금새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되었다. 독수리는 수시로 궁수를 위해 사냥감을 발견해 주고, 궁수는 자기의 전리품을 친구에게
듬뿍 나누어 주곤 했다.
어느 날 궁수는 새로운 스타일의 활을 하나 만들어가지고 왔는데, 여태까지 제작한 활
가운데서 가장 멋진 것이었다. 게다가 아주 훌륭한 화살까지 스무 개나 딸려 있었다. 그는 자기
수제품을 자랑하려고 서둘러 독수리한테 달려갔다. 독수리가 궁수의 새 무기에 감탄을
연발하고 있을 때, 궁수가 무심코 한 맏디 던졌다. 아, 이 화살에 어울릴 멋진 깃털만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말을 듣고 독수리는 자기 날개에서 깃털을 한 줌 뽑아서 화살촉에 꽂으라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인가 후에 창공을 쳐다보던 궁수의 시야에 빙빙 크게 원을 그리면서 날고
있는 독수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갑자기 그 모습이 이 세상에선 다시 못 볼 기막힌 표적으로
보였다. 궁수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화살을 쏘아 보내고 말았다. 화살은 순식간에 하늘을
가르고 날아가서 독수리의 가슴에 푹 박혔다. 독수리는 땅으로 곤두박질해 죽었고, 경솔한
궁수는 너무나 슬퍼 어쩔 줄을 몰랐다.
교훈:자기가 자기한테 입히는 상처야말로 치명적인 것.
33. 사자와 농부
정서불안 인 한 사자는 자기가 농부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자는
농부한테 가서 딸을 달라고 했다.
사자를 사위로 둔다는 게 농부에게 반가운 일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섣불리 이 무지막지한
야수의 성질을 건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농부는 약삭빠르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의 그 크고 날카로운 이빨을 보면 딸아이가 기겁을 할걸세. 나도, 솔직히 말하면 그게 좀
신경에 거슬린다네. 그러니까 정식으로 구혼을 하기 전에 우선 내 충고를 받아들여서 그
이빨부터 좀 뽑을 수 없겠나?
남은 평생을 제가 비록 옥수수죽만 머고 살아야 한다고 해도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랑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닌 사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하여 사자는 자기 이빨을 다
뽑고 나서 다시 농부한테 나타났다.
사실 난 개인적인 인신공격은 좋아하지 않네만, 다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일세. 자네 그
발톱도 말이야, 너무 살벌하게 생겼어. 그런게 있어서야 어디 꽃같은 처녀 가슴에 낭만적이
기분이 일어날 수 있겠나? 농부의 말이었다.
발톱이 없으면 좀 이상할 텐데... 사자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다가 이윽고 결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뭐, 그렇게 해서 일만 잘 된다면 까짓것 몽땅 뽑아 버리죠.
그래서 사자는 발톱도 다 뽑아 버렸다. 그러고 나서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자, 농부를 찾아갔다.
하지만 타고난 무기를 전부 상실한 사자의 본 모습을 본 농부는 곤봉으로 사자를 두드려 패서
문밖으로 쫓아내 버렸다.
밀림으로 다시 돌아온 사자는 다른 사자들의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한 몰골이었다. 심지어
생쥐까지도 그를 만만하게 보고 조롱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사자는 절벽에서 악어들이
우글거리는 강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교훈:공짜 충고는 공짯값을 한다.
34. 동물들의 재판관
날이면 날마다 벌어지는 생존경쟁에 시달이던 밀림의 모든 동물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자신들의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해 줄 재판관을 선출하기로 했다. 그러자 막상 모여서 자기들
중에서 적임자 한 명을 뽑으려고 하니, 쉽지가 않았다.
처음에 그들은 코끼리에게 재판관이 되어 달라고 했다. 아주 지혜롭다고 온 밀림 안에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코끼리는 사양하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난 마음이
너무 여려서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지른 악질 동물이더라도 제대로 벌을 내릴 수가 없을 것
같아.
다음으로 동물들은 사자에게 부탁했다. 사자의 그 단호함과 막강한 힘에는 아무도 꼼짝 못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자도 변명을 하며 거절했다. 난 사실 머리가 모자라서 나
자신의 일도 뭐가 옳고 그른지 분ㄴ별을 못해. 하물며 남의 일을 어떻게...
그리하여 동물들은 공부를 많이 한 부엉이 한테 부탁을 했다. 그러나 부엉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난 매사를 너무 많이 깊게만 생각하다 보니 남이 보기엔 지극히 간단한 문제라도
내 식대로 잘 해결하려면 한 삼사 년은 족히 걸려.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고, 생각할수록
꼬이니 말이야.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이때다 싶은 승냥이가 좌중 앞으로 쓱 나서며 말했다. 나야말로
여러분들이 바라는 재판관의 적격자요. 난 마음이 너무 여리지도 않고, 힘만 무식하게 세지도
않고, 너무 깊게 생각하지도 않소. 물론 난 돌봐야 할 가족도 많고 가난해요. 그러나
공공복지를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나의 열망은 내 일신의 이익을 구하려는 마음보다 훨씬
강렬합니다. 특별히 다른 의견이 없다면, 내가 그 직무를 맡아보겠습니다.
다른 후보자가 없었으므로 모여 있던 동물들은 승냥이를 자신들의 재판관으로 삼기로 했다.
물론 상당수의 동물들은 승냥이의 재판관 자질을 의심했다. 유감스럽게도, 승냥이는 일단 그
자리를 맡고 나서는, 동물들이 갖고 오는 소송사건들은 전혀 거들떠뽀지도 않고, 그저 직책에
어울린다 싶은 명예만을 챙기기에 바빴다. 그리하여 다시 동물들은 중지를 모아 더욱
열성적으로 작무에 임할 재판고나을 찾아 보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자격이 있다 싶은
동물들은 하나같이 사양하는 것이었다. 딱 하나 남의 일에 끼어들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원숭이만이 그 자리를 승냥이 대신 맡겠다고 나섰다. 동물들도 설마
승냥이보다야 더 못하겠느냐는 생깍에서 원숭이를 재판관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원숭이의 판결은 어찌나 짓궂었던지 사태는 금세 승냥이 때보다 더 나빠졌다. 그러자
동물들은 원숭이를 퇴임시키고 다시 승냥이를 그 자리에 앉혔다. 이후로 동물들은 이런 식으로,
원숭이에게 못 견디면 승냥이를, 승냥이에게 못 견디면 원숭이를, 못살겠다 싶은 마음이
새로워질 때마다 번갈아 재판관 자리에 앉혔다.
교훈:민주주의란 참 복잡하다.
35. 당나귀와 애완견
한 장돌뱅이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기 아내한테 주려고 작은 애완견 한
마리를 사 가지고 왔다. 이 안주인은 남편의 선물을 기쁘게 받아서 항사 이 강아지를 자기
무릎 위에 앉혀 데리고 놀며서 맛난것들로 배를 채워 주었다.
강아지를 끔찍이 위해 주는 것을 지켜보고 당나귀는 은근히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그래서
아무도 없으면 혼자서 중얼거리곤 했다. 난 지금까지 단 한번도 불평을 터뜨리지 않고 주인의
그 무거운 짐을 싣고 다녔다. 그러나 고작 돌아오는 것이라곤 마구간의 더러운 지푸라기
잠자리에 양에 차지도 않는 여물뿐이다. 그렇다. 여기서는 정직한 노동보다 애교나 떠는 게 더
대접받는 것이다.
그래서 당나귀는 집안으로 들어가서는 안주인의 무릎위로 휙 뛰어올라 히히힝 하고 멱따는
소리로 어리관을 부렸다. 안주인은 안됐게도 너무 놀라 제 정신을 잃었을 분만 아니라, 멍을
가라앉히자면 몇 주일이 걸릴지 모르는 심한 타박상까지 입었다.
당나귀는 맛난 것 대신에 무지막지한 몽둥이 세례만 죽도록 받았다.
교훈:애완견이란 애완견이란 애완견이다.
36. 농부와 여우
평생 공처가로 지내 온 한 농부가 그동안 자기 집 닭장에 두고두고 피해를 입혀 온 여우를
덫으로 잡았다. 이, 교활한 녀석. 넌 빨리 죽이기도 아까운 놈이야. 그동안 내가 너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말이야. 그 녀석한테 어떤 벌을 주어야 속이 시원할까를 한참 생각한 농부는
헝겊에다가 석유를 흠뻑 적셔서 여우의 꼬리에 단단히 잡아맨 다음 거기다가 불을 놓았다.
그러고 나서 농부는 여우의 절망적인 원맨쇼를 즐기기 위해 여우를 풀어놓았다.
그런데 이 놈의 여우가 추수 직전의 잘 익은 자기 밀밭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불은
삽시간에 번져, 농부는 여름 내내 땀흘려 지은 농사가 바로 코앞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하는
장면을 보아야 했다. 농부는 너무나 상심했다. 이 가슴의 상처는 몇 년이 지나도 아물 줄을
몰랐는데, 그것은 특히 그 모든 일이 당신 탓이라고 잊을 만하면 잔소리를 해 대는 마누라
때문이었다.
교훈: 멍청한 사람들 사이에선 잔인함이 재치로 통한다.
37. 황금을 도둑맞은 구두쇠
옛날 옛적 아테네에 한 구두쇠가 있었는데, 그는 자기가 벌어들인 것은 모두 금으로 바꾸었다.
그리고는 금을 모두 녹여서 덩이덩이로 만든 다음에 도둑들의 눈을 속이려고 금덩이들
겉에다가 돌색깔을 칠했다. 그는 이 돌덩이 아닌 금덩이를 금고에 넣어서 자기만 아는 비밀
장소에 파묻어 두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금고를 혼자 파 보고 자신이 이룩한 재물에
웃음짓곤 했다.
황금을 사기만 하고 절대 쓰지 않는다는 구두쇠의 소문을 들은 한 도둑이 세밀한 관찰 끝에
보물이 숨겨진 곳을 알아냈다. 도둑은 금고를 파내서 품에 안고 얼씨구나 하며 도망을 쳤다.
자기가 비장해 둔 보물을 도둑맞은 것을 안 구두쇠는 입고 있던 옷을 마구 찢으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비탄, 고통, 회한이 가득찬 울음바다 바로 그것이었다. 그의 울음소리는 바람을
타고 올림포스 산에까지 올라갔다. 그래서 제우스 신도 그 사나이의 비탄에 대해서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다. 제우스 신은 가축 장수로 변장해서 그 구두쇠 앞에 나타났다.
황금이 얼마나 있으면 부인과 아이들을 먹여살릴 수 있겠습니까? 제우스 신이 물었다.
도둑맞은 황금 대신에 그만한 다른 황금을 갖다 주려는 의도였다.
나는 아내도 없고 아이들도 없소이다. 난 결혼생활을 할 여유가 없어요. 그 구두쇠가
대답했다.
그럼 그 금을 당신 자신을 위해서 쓰셨소?
쓰다뇨. 오직 모아 두기만 했죠.
내 생각에 그 도둑을 잡거나 당신의 금덩이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소.
제우스 신이 말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슬퍼할 필요는 없겠군요. 그냥 모아 두기만 할
요량이라면 돌멩이를 모아 놓아도 상관없지 않겠소? 또 돌멩이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
말이오. 어디 한번 돌멩이들을 애지중지해 보시지 그러오. 설마 돌멩이들이 난 황금이 아니다
하고 말하겠소?
이 충고에 구두쇠는 별 멍청한 소리를 다 듣겠다며 욕지거리를 퍼부어 제우스 신을
쫓아내고는, 사라져 버린 자기의 보물에 다시 애통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 금덩이
하나와 너무나 똑같은 돌멩이를 발견하게 되어 그것을 주워다가 자기 금고 속에 넣어 두었다.
그 후로 그는 금덩이와 닮은 돌멩이만 보이면 모아들여 수집품을 늘려 갔다.
황금 대신 돌멩이를 모아 놓고 혼자서 흐뭇해하던 구두쇠는 차차 광물학과 지질학, 기타 관련
학문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윽고 그는 고생물학자가 되었다. 학문에 이렇게 사로잡히는 것은
가벼운 정도의 강박증이어서 먼젓번의 그런 광기보다 훨씬 사회적 질투심을 덜 불러일으켰다.
그는 수많은 이웃들한테서 호감을 샀으며, 소문을 듣고 소크라테스까지 화석과 수석에 대한
그의 강의를 들으려고 찾아올 정도였다.
교훈: 상징은 돈을 주고 살 수 있지만, 지위는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
38. 양의 가죽을 쓴 늑대
엉뚱하고 괴상한 옷을 입는 데서 상당한 쾌감을 느끼는 복장도착 성향이 있는 어린 늑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양가죽을 보게 되었다. 늑대는 냉큼 그것을 집어 입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모한테 새 옷을 입으니 얼마나 멋지냐며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
보였다.
어서 벗어 던지지 못해! 어디서 그따위 바보같은 물건을 주워 온 거야? 아버지 늑대가
으르렁 거렸다.
얘야, 너한테는 안 어울려. 오히려 멍청해 보인단다. 어머니 늑대는 좀 부드럽게 타일렀다.
양가죽을 벗기 싫었던 어린 늑대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아빠한테는 이 옷이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양치기와 양치기개들 한테는 친근하게 보일 거야. 이 옷으로 변장을 하면 놈들을
가볍게 속여넘기고 양들 사이에 슬쩍 끼어들어갈 수도 있어. 우린 아무 때나 양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는 거라구.
야아! 아주 똑똑한데! 아버지 늑대가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네 머리도 멋으로 달려 있었던 게 아니었두나, 녀석두.
이 아이는 머지않아 우리 동네에서 가장 훌륭한 늑대가 될 거예요, 여보. 어머니 늑대가
자랑스럽게 남편에게 말했다.
그리하여 그 어린 늑대는 양의 가면을 쓰고 가까운 목장으로 가서 양들과 어울렸다. 양치기는
단순히 길을 잃었던 양 한 마리가 다시 집을 찾아왔나 보다 생각할 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 늑대는 혼자서 나름대로 생각을 해 보았다. 아마 저 놈들이 틀림없이 날 의심할
거야. 그러니 당분간은 진짜 양처럼 보이도록 행실을 조심해야지. 그래서 그 늑대는 다른
양들처럼 풀도 뜯어 먹고, 어린 양들과 유치한 놀이도 같이 해 주고, 밤에는 다른 양들과 한데
엉겨 잠을 잤다.
그런 식으로 며칠이 지나고 나자, 그 늑대는 풀이 고기보다 더 맛있고 양이 보기보단 훨씬
지혜롭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머니와 아버지가 펄펄 뛰면서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늑대는 여생을 양들과 함께
보냈다.
교훈:확실한 변장이 최상의 방어
39. 노인과 애인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한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자기의 조강지처한테는 별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노인은 젊은 여인을 애인으로 삼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노인의
아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감의 검은 머리카락을 부지런히 잡아 뽑았다. 그래야 거울을
보다 보면 자기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벌일 나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한편 또 젊은 애인 쪽은 가만 있었느야 하면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노인을 연인으로
삼고 있다고 남들이 쑤군대는 게 부끄러워 노인의 흰 머리칼을 뽑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순식간에, 노인은 두 여자의 악착같은 제초 작업 덕분에 대머리가 되고 말았다.
교훈:대머리에는 치료약이 없다.
40. 뼈다귀를 문 개
개 한 마리가 입에 뼈다귀를 하나 물고 다리를 막 건너다가 다리 아래 수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게 되었다. 뼈다귀 하나에 만족하지 못한 그 개는 탐욕스럽게도 물속의 개가 물고
있는 뼈다귀도 마저 갖고 싶어졌다. 개는 강물을 향하여 사납게 짖었다. 그러면 그 놈이 겁을
집어먹고 뼈다귀를 버리고 갈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바람에 자기가 물고 있던 뼈다귀만
물에 빠져 사라지고 말았다.
개는 자기의 행동이 물에 그대로 복사되는 것을 보고,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바로 자기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금방 사로잡힌 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야, 내가 이 정도로 잘 생겼을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었네! 저 깨끗하고 총명한
눈 좀 봐. 그리고 저건! 뼈대있는 집안의 자손이란 게 저 고상하게 생긴 앞이마에서 딱
드러나잖아? 그럼, 그럼. 저 강인한 턱 좀 봐. 저건 바로 내 다부진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 주는
거야.!
자기의 장점들을 아주 자세하게 연구해 볼 심산으로 그 개는 몸을 자꾸만 숙이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교훈:경의를 품기 전에 회의를 품으라.
41. 도시 쥐와 서울 쥐
시골 쥐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쥐는 자기 집안에서 덩치가 가장 작았으며, 유아기의 애정
결핍에서 비롯된 열등의식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공격적인 성격을 키워 왔다. 이 시골 쥐가
어느 날 도시에 사는 사촌 쥐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저녁식사를 대접하면서, 시골 쥐는 상당히
호전적으로 말문을 열었다. 변변찮은 음식이니 네 입맛에 안 맞을 줄 안다구, 알아. 하지만
말이야, 보리 이삭이랑 옥수수가 나한테는 맞아. 낟알이 좀 거칠어야 이빨에도 좋고, 맛은
없어도 영양가가 있으니까.
아, 좋지. 좋구말구. 도시 쥐가 동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이야. 시골 쥐가 자기 주장을 계속해서 펴 나갔다.
여긴 바깥공기가 또 그만이지. 공장 매연과 자동차 배기 가스에 전혀 오염되지 않은 신선하고
건강한 공기란 말이야. 물론 전원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도 정산 건강에 아주 좋고,
아무리 좋은 신경안정제도 못 따라오지, 못 따라와!
그래, 네 얘기가 백 번 옳아. 도시 쥐가 말했다. 시골의 목가적 분위기는 정말로 정서적인
안정감과 마음의 평정을 선사해 주지. 사실은 나도 이번에 복잡한 도시를 떠나려고 해. 이렇게
너네 집을 찾아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야.
뭐라구? 시골 쥐가 깜짝 놀라 말했다. 난 도시 구경을 직접 한 번 해 보려고 했는데.
그렇담 나하고 가서 며칠 지내 보지 그래. 도시 쥐가 이렇게 제안했다. 하지만 미리 얘기해
둘 것이 있어. 대도시라는 게 그냥 한번 구경하지엔 좋은 곳인지 몰라도 살기엔 좋은 곳이
아니야. 너도 아마 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 거야.
그래서 시골 쥐는 사촌을 따라 도시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집은 한 지붕 두 가족식
아옥으로 부유한 상류층 가족과 함께 쓰고 있었다. 이번에는 주인으로 입장이 바뀐 도시 쥐가
저녁식사를 차려 놓았는데, 시원한 바다 가재봐 새우도 있고 훈제 연어도 있고 칠면조 고기도
있고 일곱 가지 빵도 있고, 그야말로 정신을 못 차릴 만큼 호화찬란한 상이었다. 게다가
디저트로 먹으라고 내놓은 메뉴도 다양해서 프렌치 파이와 샤베트와 아이스크림이 있는가 하면
박하 사탕과 아몬드 과자도 준비되어 있었다.
야, 이거 완전히 파티잖아, 파티! 시골 쥐의 목소리는 거의 감탄에 가까웠다. 이걸 다 먹어?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오는데 그래!
아니, 파티는 무슨. 도시 쥐가 대답했다. 우린 매일 이렇게 먹어. 뭐 손님이 왔다고 해서
특별히 차린 것은 없어. 사실 좀 섭섭한 건 주인집이 오늘은 샴페인을 준비하지 않은거야. 하는
수 없지,뭐. 그냥 와인 없이 식사를 하지,응?
이런 생활을 포기하고 정말 촌 구석으로 가겠다고? 시골 쥐가 못 믿겠다는 듯이 물었다.
좋은 점만 있는 게 아니거든. 이제 너도 수시로 보게 되겠지만... 도시 쥐가 어쩐자 침통하게
말랬다. 바로 그때였다. 디룩디룩한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고, 도시 쥐는 순간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도망쳐! 어서!
자기 구멍으로 숨을 헐떡거리면서 돌아온 도시 쥐가 사촌한테 말했다. 자, 봤지? 인제 내 말이
무슨 소린지 알겠지? 고양이가 저렁게 아무 때고 순찰을 도니 밥인들 어디 느긋하게 즐기면서
먹을 수 있겠어? 게다가 우리 주인집은 북경산 발바리까지 한 마리 길러. 이 놈이 짖는 소리만
들어도 알 만한데 물었다 하면 아마 요절을 낼 거라구.
이 박하 사탕 안 먹을래? 시골 쥐가 명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까 도망올 때 한 줌 집어 왔지.
무시무시한 학살자도 한 명 있다구. 도시 쥐가 덧붙였다. 그 자는 항상 아무도 안 다니는
호젓한 곳에다가 덫이나 독약을 놔 둬. 그러니까 순간 순간 여기에 안 걸리도록 긴장해야 하는
거지. 조심해야 해.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는데 아주 맛있어 보이는 이탈리안 피자 조각이
있다든지 하면 잘 생각해서 먹어야 해. 잘못하면 목숨과 바꾸게 되는 수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러니 한 번 생각해 봐. 으으,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야 한다는 게 얼마라 끔찍한
일인지.
나 원, 그럼 이렇게 가만 있지 말고 밖으로 뛰어나가서 고양이 놈의 눈에다가 그냥 침을 한번
탁 뱉고 후딱 여기로 뛰어들어 오자구. 저 거만한 고양이 녀석이 분해서 팔팔 뛰는 꼴을
상상해 봐.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잖아? 시골 쥐의 말이었다.
안돼, 그러지 마! 사촌이 소리쳤다. 그 녀석은 절대로 그런 모욕을 잊지 않을 거야. 제발
여기 그냥 얌전히 앉아있어. 기다리다 지치면 다른 데로 갈 테니까.
난 이렇게 생각해. 고양이 약을 올리고 개도 당황하게 만들고 집주인도 골탕을 먹이는 거야.
그 생각을 하면서 식사를 하면 한 층 묘미가 더할 거라구. 시골 쥐가 즐거워 하며 말했다.
그래서 도시 쥐와 시골 쥐는 서로 집을 바꾸었고, 그 이후로 각자 새로운 환경에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
교훈:선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경쟁의 보람은 경쟁 그 자체에 있다.
42. 살모사와 호박벌
환경에 잘 적응하고 정서적으로도 무척 안정된 살모사 한 마리가 있었다. 그래서 성격도
낙천적이고 항상 생활을 즐기면서 사는 편이었다. 어느 날 그 살모사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공격적인 호박벌과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그 사악한 곤충은 이번 기회에 뱀에게 단단히
버릇을 가르쳐 주어야겠다고 작정을 하고 뱀의 대가리 뒤쪽에 꽉 달라붙어 가차없이 자기의
침을 상대에게 쏘아댔다. 살모사는 미친 듯이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무자비한 호박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절망적인 상태에서 살모사는 자신과 그 불청객을 함께 이끌고 교통량이 많은 길로 나갔다.
그리고 그냥 차도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자 곧 자동차 한 대가 달려오더니 뱀과 인정 사정
없는 적을 한꺼번에 깔아뭉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교훈:영리한 기생충은 미리 숙주의 몸을 떠난다.
43. 병든 농장집 개
농장을 지키는 개가 아주 심한 천식에 걸렸다. 무지무지하게 아프기도 아팠지만 주인한테
알리면 늙고 쓸모없는 놈이라고 죽임을 당할까 봐서 아무 말도 못하고 혼자서만 끙끙 앓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 개는 자연 치료법과 생약 처방의 제 일인자로 명망이 높은
부엉이한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아, 그래, 나도 언젠가 들쥐를 너무 많이 잡아 먹었을 때 너하고 똑같은 병에 걸렸었어.
부엉이가 말했다. 그리니까 한 한두 주일 동안만 쥐를 먹지 말아 봐. 그럼 아마 곧 완쾌될
거야.
하지만 난 쥐를 안 먹는데. 개가 대답했다. 내 임무는 닥치는 대로 쥐를 죽이는 거야. 하지만
구미에 당기지 않아서 쥐는 안 먹거든.
그럼 그래서 그런 거야. 부엉이가 말했다. 넌 하루에 적어도 세 마리는 먹어야 돼. 먹을 때
주의할 점은 말이야. 반드시 통째로 삼켜야 하는 거야. 털, 꼬리, 머리 할 것 없이 말이야. 난
항상 그런 식으로 섭생을 해서 최상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잖아.
그래서 개는 부엉이의 충고에 따라 그렇게 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그 처방은 너무 역겨웠다. 할
수 없이 개는 날쌔고 활력이 넘치고 이름난 나이많은 다람쥐를 찾아가서 참신한 의견을 듣기로
했다.
그런 운동을 안 해서 그래. 다람쥐가 말했다. 눈에 보이는 가장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하루종일 이 가지 저 가지를 뛰어다녀봐. 그럼 아마 단 번에 좋아질 거야.
하지만 난 아직 작은 나무도 타 본 적이 없어. 개가 풀이 죽은 모습으로 대답했다.
건강이 제일이라고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운동을 시작하는게 좋아. 말을 마치자마자
다람쥐는 자기의 충고를 직접 시범이라도 해 보려는 듯이 훌쩍 나무위로 뛰어올랐다.
개는 키 작은 나무에라도 올라가 보려고 진지하게 노력을 해 보았다. 그러나 허리만 삐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개는 좀 더 나은 조언을 들으려고 현명한 수탉을 찾아갔다. 나는 한때
급성 후두염이란 것에 걸려서 고생한 적이 있어. 너의 그 천식하고 무척 비슷한 거였지.
수탉이 말했다. 언제 그 병이 생겼느냐 하면, 나하고 같이 자는 암탉들 가운데 우리 엄마도
끼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수치를 느끼게 된 때부터였어.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생리학적으로
천식을 일종의 울음이라고 볼 수도 있는 거야.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에서 느끼는 죄의식이
표출되는 울음 말이야. 유일한 치료법은 엄마와의 그런 관계를 끊는 것뿐이야.
우리 엄마는 벌써 여러 해 전에 돌아가셨어. 개가 슬픈 어조로 대답했다. 나한테 맞는
처방이 빨리 구해지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하늘나라에 가서 엄마와 관계를 이어야 할
판이라구.
절망에 빠진 개는 이제 마지막으로 주인을 찾아가서 수의사를 불러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은 현관에 흔들의자를 놓고 떡 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저녁식사를 본격적으로 들기 전에
양유 치즈와 올리브로 가볍게 간식을 들면서 농장에서 고용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개의 부탁을 들은 주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수의사라구! 이 놈이 정신이
있나, 없나! 내가 네 병명을 말해 주지. 바로 살찐 게으름뱅이 병이다. 넌 먹기는 죽어라 먹고
일은 죽어라 안 해. 내가 이제부터 너를 위해 다이어트도 시켜 주고 일감도 듬뿍 찾아 주마.
일 주일 동안 음식 한 조각 입에 안 대고 격렬한 노동만 하다가 그 개는 아주 평온한 마음이
되어 죽었다.
교훈:무릇 자기와 같은 병을 가진 의사를 찾아가라.
44. 개구리와 황소
어미 개구리 한 마리와 새끼 개구리들이 초원을 가로기르다가 우연히 황소 한 마리를 만나게
되었다. 엄청나게 큰 황소의 풍채를 본 아이 개구리들이 굉장히 흥분해서 저마다 한 마디씩
떠들어 댔다. 그 중에서 가장 어린 개구리가 소란스러움을 가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엄마도 마음만 먹으면 저 황소만큼 커질 수 있어! 단지 엄마는 개구리다운 사이즈가 좋아서
저만한 크기로 있는 거라구.
이 말은 곧 형제들 사이에 엄청난 반항을 불러 일으켰다. 몇 명은 엄마의 능력에
회의식적이었고, 다른 몇 명은 엄마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가고 믿었다. 한참 옥신각신 끝에
처음에 말을 꺼냈던 그 꼬마가 엄마한테 이 맹꽁이같은 논쟁을 진정시켜 달라고 졸라 댔다.
엄마 개구리는 자신에 대한 철없는 믿음에 감격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 응, 우리
개구리한테는 배를 부풀리는 일 정도야, 그저 뱃속에 공기만 끌어들이면 되니까, 누워서 파리
먹기지. 근데 저렇게 큰 모양은 아직 내가 해 본 적이 없어, 그래도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한번 해 볼테니 너희들은 내 배가 적당한 크기가 되면 됐다고 이야기나 해 줘.
그리하여 엄마 개구리는 양껏 공기를 들이마셔서 배를 부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개굴개굴 소리를 내면서 박수를 쳐댔다. 들숨만 너무 들이켰던 개구리는 그만 배가
터지고 말았다. 엄마의 배가 터지면서, 아이들이 풍었던 엄마의 이미지도 함께 터져 날아갔다.
교훈:신발이 너무 커서 안 맞으면 다른 걸 신어 보라.
45. 늑대와 양
어렸을 때 형제들 사이의 경쟁에 너무 심하게 시달렸던 늑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어느 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생포하게 되었다. 늑대는 이 포로를 그 자리에서 쓱싹 해치우지 않고
우서 고통을 주어 만족을 얻으려 했다.
그래서 늑대는 당장 죽일 것처럼 양을 덮쳤지만, 양의 보드라운 솜털만 깨물었을 뿐이다.
그리고는 늑대는 나무그늘에 느긋하게 주저앉아서 양한테 야한 이야기를 하든지 외설스런
노래를 부르든지 해서 여하튼 자기 기분을 즐겁게 해 주도록 짐짓 무섭게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양은 그런 이야기나 노래를 몰랐기 때문에 늑대도 하는 수 없이 다른 방도를
강구해야 했다. 늑대는 피리 하나를 만들더니 양다러 춤을 추라면서 그것을 불기 시작했다.
피리 소리를 듣고 양치기가 개들을 이끌고 달려와 상황을 알아차리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늑대를 잡아 죽이고 말았다.
하지만 양은 전혀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누가 당신더러 남의 일에 끼어들라고 했나요?
처음엔 좀 거친 그의 매너 때문에 무섭고 놀랐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저 늑대가 얼마나
좋아했다고요. 당신만 아니었다면 우린 곧 좋은 사이가 되었을 거란 말예요. 한창 분위기가
무리익어 가는데 당신이 다 망쳐놓은 거라구요.
양은 목동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교훈:모든 가학성 음란 중 환자에게 일종의 피학성 기대 심리가 잠재되어있다.
46. 여우와 산토끼
야심만만한 여우 가족이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교외의 고급 주택지구로 막 이사해 왔다.
하지만 여우 가족은 이 정도 사회적 신분 상승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그 지역사회에세
특권층만 들어갈 수 있는 컨트리 클럽의 회원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여우네 식구들은 짐짓
가장 따뜻하고 우호적인 제스처를 이웃들한테 보였다. 물론 동네사람들로부터 환심을 사기
위한 치밀한 전략이었지만 여하튼 끊임없이 선심 공세를 베풀었다.
아버지 여우는 일부러 자기 시간을 써 가면서 이웃들을 만나고 다녔는데, 여기 가서는 골프
실력 향상법을 친절히 가르쳐 주는가 하면 저기 가서는 필드의 잔디를 잘 기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곤 했다. 어머니 여우는 밤 시간의 절반 가까이 뚝 떼어서 집집마다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디저트 요리 만드는 법이라든가 애들 과자 굽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한껏 명랑한 분위기를 연출해서 원하는 주부들 모두에게 기막히게 맛있는 케이크 만드는
비결을 몽땅 털어놓았다. 대학에 다니는 아들 여우는 같은 과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서 이웃
소녀들과 미팅을 시켜 주었으며, 딸은 무보수로 동네사람들의 아기를 보아 주었다.
그렇지만 동네의 컨트리 클럽 임원들이 모여서 회원 가입 심사를 해 본 결과, 위원들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했다. 여우 씨 가족들은 너무 아는 체를 합니다. 이쪽에서 이런
말이 나오자 저쪽에선 또 이런 말이 나왔다. 그리고 항상 너무 잘난 체를 하지요.
확실히 그들은 생색만 내려는 속물들입니다. 의장이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그러자 한 위원이 이렇게 말했다. 훨씬 예의바른 가족이 있습니다. 토끼 씨 가족인데 바로
얼마전에 근처로 이사를 왔어요. 제가 그 집 남자를 만나 봤는데 저한테 자기네 장미에 대해서
조언을 해달라고 했어요. 좀 소심하긴 해도 점잖은 동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아내도 그 집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더군요. 다른 위원이 옆에서 덧붙였다. 뭐 별로
어려운 요리도 아닌데 그녀는 제 아내에게 비빔밥 만들는 법을 물어 왔다는 겁니다. 너무 뭘
모른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때가 묻지 않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리 클럽에 가입시키는게 그 집 식구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겠군요. 의장의 결론이었다.
사실, 나도 그 집 아이들이 내 딸아이한테 남자 친구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걸
보았지요.
그리하여 첫 번째 가족은 거부되었고, 두 번째 가족은 컨트리 클럽의 전폭적인 환영을
받았다.
교훈:열등감이 순응의 어머니인데, 그 아버지도 형질이 좋지는 못하다.
47. 농부와 살모사
한창 추운 겨울, 눈보라가 몰아치던 어느 날 한 농부가 길을 걷다가 살모사 한 마리를
발견했다. 살모사는 추위로 몸이 얼어서 뻣뻣하게 몸이 굳어져 다 죽게 된 형평이었다.
측은한 느낌이 든 농부는 양털 코트의 단추를 풀고 그 뱀을 집어 올려서 가슴에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농부가 집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그동안 몸이 따뜻해져서 생기를 되찾은 뱀은 자기의
독이빨로 농부의 가슴을 물었다. 물린 상처가 치명적이라고 생각한 농부가 이렇게 부르짖었다.
아이구, 올림포스의 신들이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자비를 베푼 대가가 이런 것이란
말입니까? 세상을 참 더럽게도 다스리시는군요!
수술의 신 아폴로가 이 독살스런 비난의 외침을 듣고 곧장 농부 앞으로 나타났다. 비열한
뱀한테 온정을 베푼 일을 후회할 것은 없다. 설마 친절 때문에 네가 죽도록 내버려 두겠느냐,
네 상처를 치료해 주고 독을 중화시켜 주마.
감사합니다.. 죽었다 살아난 농부가 대답했다. 불평을 하려 한 건 아니었습니다. 제 죽음은
결국 제 자신이 불러들인 것입니다.
과연 남자답구나. 아폴로가 농부에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보자. 착한 일을 하려는 충동
때문에 고통을 당해서야 되겠느냐!
크나큰 배려에 대해선 절로 머리가 숙여지지만 말입니다. 농부가 자기 주장을 폈다. 여러분
신께서는 진정 인간과 인간의 운명 사이에 개입한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원칙적으로, 신들이 인간사를 놓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잘못된 일 같습니다.
아폴로는 신이 자신의 호의를 받아들이도록 농부를 설득하느라고 진땀을 빼는 동안, 농부는
죽고 말았다.
교훈:자기 자신을 돕지 못하는 사람을 당신이 도와 줄 수는 없다. 근데, 자기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당신이 귀찮게 할 필요가 있을까?
48. 파수꾼 개와 여우
숲속에서 우연히 만난 파수꾼 개와 여우가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이 자기네의 일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 떄, 개는 평소에 느끼는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난
기껏해야 식탁밑에 떨어진 밥 찌꺼지밖에 못 먹어. 양반 많이 질은 형편 없지. 넌, 너 먹고
싶은 걸 너 좋을 때 먹을 수 있어서 좋겠다. 탐나는 산딸기나 머루가 있으면 그냥 팔만 뻗치면
되잖아. 아침 식사로 알아 먹고 싶으면 새 둥지에서 슬쩍 꺼내고 말이야. 고기는 또 어떻고?
언제든 즉석에서 잡아서 죽이니까 틀림없이 신선하고 맛이 있을 거야.
그건 그래. 여우가 말했다. 사실, 난 정말 다른 동물은 나랑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걸
지금까진 몰랐어. 근데, 너 목에 빙 ㄷ로려맨 그 이상한 띠는 뭐니? 거긴 털까지 착
붙어버렸어.
응, 그건 일종의 옷깃 같은 건데, 우리 주인이 돌려매 줬어. 개가 대답했다. 주인이 그렇게
한 건, 내가 매일 밤 집에 꼭 붙어 있도록, 그래서 집을 잘 지키도록 하자는 거지.
그럼, 밤에 집에 얌전히 붙어 있을까 아니면 밖에 나가서 모험을 해볼까를 스스로 결정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니? 여우가 정말 뜻밖이라는 듯이 물었다.
그래. 마치 무언가를 선언하듯이 개가 말했다. 주인은 모든 일에서 나를 완전히 통제하고
싶어해. 심지어 배우자를 고르는 일까지도 그래. 내 취향이나 희망 사항은 전혀 고려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일방적으로 결정해 버리지 뭐야.
야, 그럼 무지 행복하겠다. 여우가 갑자기 소리쳤다. 그런 성가시고 골치아픈 결정들을
누군가 대신 해 주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편하겠다, 편하겠어. 나는 해마다 내 짝을 혼자서
고르는데 한번도 제대로 고른 적이 없었어. 얘, 그럼 나하고 서로 위치를 바꿔 보는 게
어떻겠니?
사물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 개는 집으로 돌아와 자기 팔자에 만족하며
살았다.
교훈: 정확히 딱 틀에 맞추려면 반드시 어딘가 찌그러지고 만다.
에필로그
지금까지의 우화들을 읽고도 감성상에 문제들이 말끔이 해소되지 않아서 당신이 마침내
정신분석의 도움을 받으려 할 경우에 대비해, 우화가 하나 더 준비되어 있다.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인데, 이번만은 <<이솝우화>>에서 줄거리를 빌려 온 것이 아니고
트이로프 교수가 당신에 대한 특별한 안내로서 직접 쓴 것이다.
49. 귀여운 도벽광과 정신분석가
한 젊은 여자가 충동적으로 남의 물건을 슬쩍하는 도벽 증세를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강박적 충동이 정신적인 만족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많은 값진 액세서리들을 그렇게
훔쳐서 얻을 수 있는 데다가, 또 그것들을 돈주고 살 만한 처지도 아니었기 때문이어서 더욱
그랬다. 그러다가, 항상 간신히 빠져나오긴 했지만, 몇 번씩이나 체포될 뻔한 위기를 겪고 나니
그녀는 자기 자신의 억제할 수 없는 충동에 스스로 겁을 집어먹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정신분석가를 찾아가게 되었는데, 마침 그 의사는 젊고 경험이 없는 신참이었다.
환자가 젊고 어여쁜 여인인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모처럼 일거리를 만나 잘 해내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의사는 그녀의 치유 가능성에 무척 열을 냈다. 클렙토마니아, 즉 병적
도벽은 비교적 간단한 강박 증세죠. 그건 성적인 에너지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발산하는 것을
뭔가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우리가 그 방해 요소를 알아내기만 하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당신의 행동을 가볍게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저는 한 차례
진료할 때마다 35달러씩을 받고 있습니다.
이 젊은 여자는 당장부터 그에게 치료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자기 형편이 허락치
않아서 그런 어마어마한 치료비는 물 수 없다는 말을 해야 했다. 이에 대해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치료받기 싫다는 아가씨의 반발 심리가 지금 치료비에 대한 반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가씨의 경우는 바로 이래서 더욱 심각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윽고 이
아리따운 환자는 치료와 치료비 모두에 동의했다.
아주 여러 차례에 걸쳐, 그녀가 꾸는 꿈, 유년기의 기억, 억압된 성적이 욕망 등에 대한
토론으로 계속된 유쾌한 치료상담을 한 끝에, 그녀의 증세는 사라졌다. 자기가 시행한 요법의
성공적인 결과에 아주 기뻐하며 의사는 그녀에게 치료가 끝났음을 알리고, 치료비를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전에는 제가 치료비를 낼 수 있었어요. 그땐 훔친
물건들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를 치료하시면서 선생님은 치료비가 나올 돈줄까지 말려
버리셨잖아요? 혹시 다른 방법으로 갚아 드릴 순 없을까요?
교훈: 사람의 성격이란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증상을 가진 불치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