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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G. 워커] 흑설공주 이야기

Casey,Riley 2023. 1. 11.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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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와 남자가 평등한 페미니즘 동화

  흑설공주 이야기


바바라 G. 워커
         차례

  알라딘과 신기한 램프
  흑설공주
  벌거벗은 여왕님
  못난이와 야수
  릴리와 로즈
  막내 인어공주
  신데헬
  개구리 공주
  질과 콩나무
  늑대 여인
  아기 분홍요정 세 자매
  하얀모자 소녀
  바비인형
  퀘스타 공주

    머리말

  전래 동화들은 고대신화, 종교, 정치적 알레고리, 도덕극, 동방에서 흘러온 이야기 
등 여러 곳에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들은 수백년간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변화되면서 젊고 아름다운 '공주님들'을 제외하고는 여성에 대한 존중은 거의 
보여주지 않고 있다. 전래동화에 흔히 등장하는 여성의 역할은 오로지 치장하는 
것에만 치우쳐 있어 미모가 따라주지 않는 여성에겐 덕성도, 행복도, 행운도, 사랑도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독일의 옛날 이야기인 "퍼도키"를 보면, 한 왕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와 결혼하려고 찾아다니는데, 미모가 떨어지는 후보들이 타고 온 
마차들은 번번이 강에 던져진다. 여기에는 단지 이들을 제거하려는 의도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이런 류의 동화들은 어린 여자아이들에겐 '외모가 재산'이며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있다. 이런 동화만을 읽게 된다면 여성에게 못생겼다는 
것은 사형 받아 마땅한 범죄인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우리가 흔히 보아온, 여성을 폄하하는 내용의 
동화들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가운데 "못난이와 야수", "흑설공주", "막내 
인어공주", "알라딘과 신기한 램프", "하얀모자 소녀", "아기 분홍요정 세 자매", 
"질과 콩나무", 그리고 "벌거벗은 여왕님" 등 몇몇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들을 각색했다.
  여기에 수록된 이야기들 중에는 전래 동화의 언어와 형식으로 구성한 창작 
동화들도 있다. 이 이야기들은 익살스러우면서 재미도 있지만 때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런저런 페미니즘의 메시지들이 각 
이야기마다 구현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알라딘과 신기한 램프

  아라비아 고전 동화의 주인공인 알리딘을 여성으로 등장시켜 이야기를 재미있게 
변형시켜 보았다.
  처음에 필자는 '여성 알라딘이 램프의 요정 지니에게 무엇을 요구하도록 하게 
할까?' 고민했으나 결국 그녀 자신의 소망을 이루는 것으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누구누구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라는 식의 전형적인 결말에 자신의 행복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행복까지도 포함시키는 여성론자의 입장을 따른 것이다.
  새 알라딘 이야기의 접근 방법에는 큰 의미가 담겨 있다. 틀에 박힌 동화가 흔히 
그렇듯, 이기주의의 전형적 인물인 주인공들이 추구하는 개인의 부귀영화나 
신분상승, 권력 획득을 여기서는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가 일으킨 
사회적 변화들은 여성론자들이 흔히 논하는, 인간의 소망을 충족시키는 환타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어는 봉건왕국에 강가딘이라는 과부가 있었다. 그녀는 궁전 
뒷골목의 자고 허름한 판자집에서 하나뿐인 딸 알라딘과 단둘이 살았다.
  생계를 위해 강가딘은 밤낮으로 열심히 바느질을 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녀를 '삯바느질 어멈 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때로 강가딘은 멀리 보이는 왕궁의 높다란 성벽을 올려다 보면서 임금에게 바치는 
턱없이 높은 세금에 대해 불평하곤 했다. 나라의 관리들은 전쟁에 쓸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가난한 아낙네와 아이들이 먹을 빵까지 경쟁하듯 빼앗아 임금과 
신하들에게 바쳤다.
  "전쟁이란 지배자들이 그저 재미삼아 하는 게임같은 거란다."
  그녀는 알라딘에게 씁쓸하게 말했다.
  "백성들의 목숨을 대가로 말이야. 그들이 죽거나 상처를 입어야만 게임이 진행될 
수 있단다."
  다른 이웃들과 마찬가지로 강가딘은 세금 징수원들, 그리고 징수원들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아가는 무장 호위병들을 싫어했다. 그들은 걸핏하면 새끼돼지나 암탉을 
집어갔고,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가보까지 빼앗아 갔다. 뿐만 아니라 여자든 
남자든 이들에게 한 번 끌려간 아이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드러내놓고 불만을 터트리지는 못했다. 저항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서 치도곤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기 때문이었다
  "그놈들은 게걸스러운 독수리 때보다 더 무자비한 놈들이야."
  강가딘은 주위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하곤 했다.
  "그자들은 물건을 훔치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심지어 사람을 죽여놓고도 
아랑곳하지 않는 극악 무도한 놈들이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그들의 
끝없는 탐욕을 채워주기 위해 존재할 뿐이란다."
  성장하면서 더욱 예뻐지는 알라딘을 보면서 강가딘은 딸이 군인들의 욕망에 희생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세금 징수원들의 눈을 피해 딸을 숨겼다.
  알라딘은 낙천적인 아가씨였다. 비록 가난했지만 그 안에서 항상 인생을 즐겁게 
살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길거리를 마구 뛰어다니고, 장사꾼들을 곯려 주기도 
하고, 사내아이들과 어울려 공차기놀이도 자주 했다. 그녀는 권위적인 것을 딱 
질색으로 여겨 그러한 태도와 부딪치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좀 얌전하게 옷을 입고 숙녀다운 품위와 우아함을 
갖추라고 간청하곤 했다. 그래야만 부잣집 총각을 만나 그들 모녀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라딘은 자신의 말괄량이같은 
성격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으며, 꾸미지 않은 얼굴에 아무렇게나 자란 머리, 
단정하지 않은 옷차림 때문에 자신의 미모가 가려진다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런 어느 날 거리의 마술사가 강가딘의 집에 찾아와 자신이 강가딘의 죽은 
남편이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동생이라고 주장했고, 그 말에 알라딘의 어머니는 
온갖 정성을 다해 그를 대접했다. 그녀는 마지막 한 병 남은 과실주를 따고, 한 
마리밖에 남지 않은 씨암탉까지 잡아 저녁상을 차렸다.
  밥을 먹으면서 알라딘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본 마술사는 남루한 옷 속에 감춰진 
그녀의 미모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이 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사교계의 여자가 될 수 있도록 책임지고 교육시켜 그녀가 공작이나 왕자 같은 지체 
높은 귀족들과 결혼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장담했다.
  그 말은 들은 강가딘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얘야, 네가 공작 부인이나 왕자비가 될 수 있다니! 이건 신의 축복임에 
틀림없어요. 부디 이 아이가 사교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세상에, 이 아이는 지금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철부지랍니다."
  "하지만 엄마, 난 사교계 따위에 나가고 싶지 않아요."
  알라딘이 거세게 반발했다.
  "얘야,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녀의 어머니는 알라딘을 달랬다.
  "지금의 우리 형편을 생각해봐. 이건 네 인생에서 최고의 기회야. 그것은 네가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끈이 닿을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는 거야.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아. 명심해라. 오직 그것만이 우리를 못살게 구는 몰인정한 인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란다. 그렇게만 된다면 너도 좋은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게다. 그리고 여기 계신 네 삼촌이 너를 교육시켜 주시겠다고 하지 않니? 이건 
다시 오기 힘든 기회란다. 알라딘, 알겠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알라딘이 투덜거렸다. 순전히 어머니의 환심을 사기 위해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는 
그의 태도가 본능적으로 미덥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번 상상해 보렴."
  그녀의 어머니는 당장이라도 부자가 될 것처럼 잔뜩 꿈에 부풀어 말했다.
  "언젠간 우리도 저 왕궁에서 살게 될지 몰라. 그러면 저 발코니 위에서 이곳의 
낡아빠진 우리 판자집을 내려다 보면서 살게 되는 거야. 너는 무척이나 아름답게 
생겼단다, 알라딘. 너 정도의 미모라면 충분히 상류사회 진출에 성공할 수 있을 
거다."
  뾰루퉁해진 알라딘은 머리를 떨군 채 엄지손톱만 물어 뜯었다.
  "오늘밤은 이만 하기로 하지요."
  마법사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 이 아이를 지체 높은 귀부인에게 데리고 가서 견습 생활을 시킬 
작정입니다. 자, 그럼 오늘은 그만 쉬는 게 좋겠습니다."
    마법사는 자신을 위해 서둘러 마련한 강가딘의 침대에서 쉬고, 대신 강가딘은 
방바닥에 멍석을 깔고 잤다. 그녀는 대부분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마법사 역시 
여자들이 자신에게 시중을 들고 몸을 바치는 것을 좋아할 거라고 단정했다. 
당시에는 결혼이나 혈연 관계로 인한 친척인 경우에는 특히 그랬다. 하지만 
마법사는 그날 밤만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알라딘은 자지 않고 앉아 한참동안 화롯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마법사가 자신을 데리고 가기 전에 달아나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난하고 순진한 자기 어머니를 사랑했고, 또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일단 마법사와 같이 가서 상황을 본 뒤 기회를 만들기로 마음을 바꿨다.
  아침이 되자 알라딘은 간단한 소지품을 싼 보따리 한 개만 든 채 마법사와 함께 
집을 떠났다. 그들은 멀리 보이는 산을 향해 걸었다. 주위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바위와 황무지 뿐 귀부인이 살만한 인가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더 가야 되죠, 삼촌?"
  알라딘이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거의 다 왔다."
  그가 믿으라는 듯 말했지만 그녀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내 암석으로 둘러싸인 계곡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마법사는 자신의 
짐꾸러미를 풀어 삽을 꺼내더니 자갈밭을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화강암 돌판에 
달린 쇠고리 하나를 찾아내더니 알라딘에게 명령했다.
  "저 고리를 잡아 당겨라."
  그가 시키는 대로 고리를 잡아 당기자 돌판이 서서히 움직이더니 지하로 이어지는 
돌계단이 드러났다.
  "저 계단을 내려가서 그 밑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야 한다."
  마법사가 다시 그녀에게 명령했다.
  "동굴 안 통로를 지나갈 때 아무것도 만져서는 안 된다. 만약 손끝 하나라도 
닿으면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커다란 동굴 끝에 이르면 벽면 선반에 싸구려 황동 
램프가 하나 놓여 있을 게다. 그 램프를 가져오너라. 명심해야 한다. 다른 것은 
절대로 만지면 안 된다."
  그는 준비한 양초에 불을 붙여 주고는 그녀를 동굴의 문 쪽으로 떠밀었다.
  알라딘은 망설이지 않고 돌계단을 내려갔다. 마치 무슨 모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촛불 하나로도 소복하게 먼지가 앉은 나무상자와 서랍장들로 가득한 황량한 
동굴 안이 다 보였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루바닥에 쌓여있던 먼지들이 
그녀의 발 주위에서 풀썩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돌계단 안쪽으로는 좁다란 통로가 나 있었고, 그 통로는 계속해서 다른 방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방들은 갈수록 더욱 넓었고 방안은 나무상자로 가득했다.
  알라딘은 상자 쪽으로 몸을 숙여 촛불을 비췄다. 그러자 상자 중 하나가 열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으로 그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상자에는 금구슬, 금컵, 금팔찌, 커다란 보석이 달린 반지와 목걸이, 
그리고 온통 값진 보석과 귀금속으로 장식된 갑옷 같은 보물들이 눈이 부실 정도로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동굴의 한쪽 끝 벽면 선반에는 싸구려 황동으로 만든, 
형편없이 낡고 오래된 램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알라딘은 마법사가 왜 다른 값나가는 물건들을 제쳐놓고 그런 보잘 것 없는 물건 
하나만 갖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일을 왜 자기에게 시켰는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은 점점 커지기만 할 뿐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알라딘은 램프를 들고 자신이 들어온 입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입구는 어느새 
화강암 돌판으로 거의 덮여 있어서 약간의 틈이 나 있을 뿐이었다. 그 틈으로 
마법사의 얼굴이 겨우 보였다.
  "시간이 오래 걸렸구나."
  그가 투덜대며 말했다.
  "얘야, 어서 서둘러라. 먼저 그 램프를 나한테 건네다오. 그러면 내가 이 돌을 
치우고 너를 빼내주마."
  "삼촌, 먼저 날 꺼내 주세요. 그러면 램프를 드릴게요."
  알라딘이 미심쩍은 듯 말했다.
  그 말에 화가 난 마법사가 먼저 램프부터 건네달라며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자 
알라딘은 얼른 램프를 뒤로 감추었다. 이 모든 것이 그녀로 하여금 램프 넘겨주는 
것을 더욱 확고하게 거부하도록 만들었다. 마법사는 처음에는 팔을 뻗어 휘젓다가 
나중에는 막대기로 구멍을 휘저으며 그녀를 잡으려고 했다.
  "왜 직접 내려와 보시지요, 삼촌? 이 동굴에 무슨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나요?"
  마법사는 아무리 그녀를 설득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멍청한 계집애 같으니라구! 그래 계속 그래봐라. 네 보물 갖고 그 안에서 혼자 
마음껏 재미보라구. 영원히!"
  그 말과 함께 마법사는 입구를 완전히 막아 버렸다. 육중한 바위가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닫히자 주위는 갑자기 조용해졌고 알라딘은 무덤 같은 적막 속에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
  그녀는 계단 위로 올라가 화강암 돌판을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너무 무거웠다. 
동굴 밖에 있는 마술 고리의 도움 없이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포기하기로 하고 동굴 안에서 한동안 노래도 하고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마법사가 화가 좀 가라앉으면 그녀를 이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꺼내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기척이 없자 알라딘은 조금씩 기운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짜 삼촌이 자신을 죽게 버려두고 가버렸음을 한참만에야 
깨달았다.
  절망스러운 기분에 그녀는 갑자기 울음이 솟구쳐 올라왔다. 알라딘은 램프를 손에 
쥔 채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 때문에 램프의 표면에 쌓인 
얼룩이 조금씩 벗겨졌다. 그녀가 무심코 얼룩진 램프의 표면을 문질러 벗겨내자 
램프가 반질반질해졌다.
  그때였다. 갑자기 램프에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 오르더니 눈앞에 둥글고 커다란 
귀고리를 흔들며, 풍성한 실크 바지를 입고 대머리에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지니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이제야 살겠다!" 램프에서 나온 지니가 소리쳤다. 알라딘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이백년 동안이나 저 램프 속에 웅크리고 있었어. 이젠 누군가 날 발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 자, 꼬마 주인 아씨, 당신은 램프의 노예를 갖게 
되셨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주인님의 소원은 무엇이든지 들어 
드리겠습니다."
  "내 소원은 지금 당장 이 동굴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거야."
  알라딘은 기다렸다는 듯이 서둘러 대답했다.
  "소원을 들어 드리죠. 주인님."
  지니는 그녀를 두 팔로 들어올리더니 신기하게도 두껍고 컴컴한 물질을 통과하여 
화강암판 위에 그녀를 내려 놓았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사방은 어스름하게 
어둠이 깔리고, 바위 사이로는 쌀쌀한 바람이 불어 오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마실 것과 먹을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알라딘이 말했다.
  알라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니가 손가락을 '탁탁' 튀기자 그녀의 발치에 
아름다운 융단이 깔리고 커다란 식탁이 나타나더니 그 위에 여러 가지 과일과 
포도주, 아름다운 장식 무늬가 새겨진 포도주잔, 빵과 치즈, 케이크 등 온갖 음식이 
펼쳐졌다. 알라딘은 덕분에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나서 지니에게 이젠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보물은 어떡하구요, 주인님?" 지니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황금과 보석을 가지고 싶지 않으세요? 주인님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드릴 
텐데요?"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 보물이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알라딘은 심각하게 말했다.
  "난 보물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그것을 절대 만지지 말라는 가짜 
삼촌의 말은 맞는 것 같아."
  "당신은 참 현명한 아가씨로군요. 사실, 저 보물들은 많은 사람들이 피흘린 댓가로 
얻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순간적인 만족 이상은 전혀 주지 못하죠. 
주인님께서 그것에 손을 대셨다면 불구가 되거나 생명이 위태로웠을 겁니다. 맑은 
영혼을 가진 삶이 아니라면 동굴에서 온전히 살아 나오기란 불가능하답니다. 당신의 
동행자가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당신만 들여보낸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지니는 설명을 마치자 손가락을 탁 하고 튕겨서 탁자 위에 남아 있던 그릇과 음식 
찌꺼기를 깨끗하게 치우고는 융단 위에 램프와 함께 알라딘을 태웠다. 알라딘이 
숨을 몰아 쉬자 융단이 땅 위에서 떠오르더니 엄청난 속도로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서 알라딘의 집 앞에 안전하게 내려 주었다. 
  "주인님 집에 다 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진짜 기적을 한두 가지 보여드릴까요? 내 
힘을 제대로 발휘해 본 지 너무 오래 되었거든요. 아주 근사한 방이 오십개 딸린 
하얀 대리석 궁전에 시르카시아 지방의 노예 백명, 경주마가 가득한 마굿간, 그리고 
온통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드레스는 어떻습니까? 진짜로 부유한 귀족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왕자비는 어떻습니까?"
  "난 왕자비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귀족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천박한 
쾌락과 사치를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물건이나 빼앗는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알라딘은 고개를 천천히 흔들며 말했다.
  "나 원, 세상물정을 도통 모르시네. 이것 보세요. 그런 성인군자 같은 생각으로 뭘 
하게요? 전에 내가 모셨던 다른 주인님들은 왕궁이나 노예, 아니면 귀족들이 누리는 
특권 같은 것들을 원했었는데...."
  "난 보다 유용한 것을 원해요. 나는 전쟁을 없애버리고 싶어요. 당신이 이 나라 
전체는 물론 주변국가들에 있는 모든 무기들을 사라지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더 이상 싸운다거나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고 괴롭히지 못하게 될 
거예요."
  지니는 놀란 눈으로 대답했다. 
  "난 그런 일에는 익숙하지 않아요. 이전의 내 주인들은 항상 적을 죽이거나 
그들을 충실한 사냥개처럼 만들어 주길 원했죠. 평화는 내 전공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데...."
  "그래요? 당신에게 그럴 능력이 없다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꼬마 주인님! 이 몸은 램프의 요정 지니란 말입니다. 
난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지니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서 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빨을 갈며 입술에 힘을 주웠다. 
  "자, 다 됐습니다. 주인님의 괴상망측한 다음 명령은 뭐죠?"
  "세금 징수원들을 모두 양으로 변하게 하고 그들의 호위병들은 양치기 개로 
바꿔버려요!"
  지니는 다시 입술에 힘을 주더니 잠시 후 그녀에게 다 됐다고 보고했다.
  "다음은 모든 귀족들의 보석을 빵덩어리로 바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줘요!"
  지니는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명령을 수행했다.
  "이제는 모든 궁전과 모든 판자집을 평범하면서도 안락한 중간 크기의 집으로 
모두 비슷하게 바꿔줘요.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살도록 말이에요!"
  "주인님께서는 이 불쌍한 지니에게 세상을 몽땅 바꾸라고 명령하고 계신 겁니다. 
그건 너무 무지막지한 일이에요."라며 지니가 투덜거렸다.
  "그래, 그만한 능력이 없다면...."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식으로 나를 모욕하지 말아 달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지니가 소리쳤다.
  "난 뭐든지 할 수 있다구요."
  지니는 그 말과 함께 전보다 더 이불에 힘을 주고 굳게 다물었다. 그러자 그의 
눈알이 튀어나오고 헉헉대며 얼굴은 울그락 푸르락해졌다. 알라딘은 자기가 살던 
초라한 판자집이, 자신이 보는 앞에서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과 아담한 담장이 
있는 화사하고 하얀 집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골목길에 늘어선 다른 
판자집들도 비슷한 형태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임금님이 사는 궁전과 높이 
솟은 성벽은 갑자기 줄어들더니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일을 마친 지니는 숨을 헐떡이며 땅바닥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 기운이 없어요." 그가 겨우 말을 이었다.
  "주인님 때문에 마지막 남은 힘까지 모두 써버렸어요. 이제 한동안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주인님, 제겐 더 이상 남아있는 마술이 없어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잘 가."
  지니는 천천히 램프 속으로 자기 몸을 집어 넣었다. 지니가 사라진 뒤 램프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하시는 게 있으시면, 그냥 램프를 문지르기만 하세요...."
  다음날 아침, 나라 안은 대혼란이 일어났다. 임금님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궁전과 
보석들이 사라져 버린 것을 알고 새파랗게 질려 그들의 군사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군사들이 무장할 것이라고는 삼지창과 갈고리와 곡괭이 뿐이었다. 
임금님과 신하들은 혼란을 틈타 백성들이 혁명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겁에 질려 
있었고, 과거에 침략한 적이 있었던 주변 국가들이 연합해서 쳐들어 올까봐 
두려워했지만 주변국 어느 곳에서도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은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차츰 시간이 지나자 군 지휘관들은 할 일어 없어져서 
다른 직장을 찾아나서야만 했다.
  백성들이 새로운 환경에 만족하면서 이들의 분노도 누그러지자 혁명에 대한 
공포도 사라졌다. 평민들은 전직 귀족들에게 이웃으로서 도움의 손길을 나누어 
주었으며 그들에게 밭을 경작하는 법과 분수껏 재산을 관리하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사람들은 서서히 계층도 없고 계급도 없는 새로운 국가에 적응해 갔다.
  알라딘과 그녀의 어머니는 이웃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강가딘은 생계를 위해 
더 이상 밤낮으로 바느질을 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하루 여덟 시간만 
일해도 예전보다 훨씬 편하게 지낼 수 있었고, 자신의 디자인에 철학과 창조성을 
불어넣는 일을 즐길 수도 있게 되었다. 한편 알라딘은 예전에 공작이었던 남자가 
운영하는 목장에서 일했다. 후에 그녀는 목장주의 아들과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그리고 왕국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지니만은 예외였다. 사회 전체를 바꾸어 놓느라고 너무 많은 힘을 써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다른 궁전을 만들 수 없게 되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어린이들의 생일파티에 가서 모자에서 비둘기나 꺼내며 
놀아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끔은 사람들에게 그가 전성기 때 늘 보여주던 신기한 일들을 자랑도 해보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지니는 정년 퇴직 후 램프 속으로 
들어가 그 불빛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혀 주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야만 했다.
  
    흑설공주
  
  동화를 보면 계모는 주로 사악한 인물로 묘사된다. "백설공주"의 계모는 우선 
백설공주보다 미모가 떨어지는 것에 분노했다는 점, 두 번째는 마법을 쓸 줄 
알았다는 점 때문에 악인으로 묘사된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백설공주의 계모를 
악인으로 몰고 간 두 가지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남성의 성적 반응은 시각적 요소에 따라 상당히 좌우되기 때문에 여성의 미추는 
사실 여자들 보다 남자들에게 더 큰 관심거리였을 것이다. 따라서 한 여성을 미의 
등급을 매긴 잣대의 눈금 어딘가에 놓은 일은 아무래도 남성들의 아이디어인 듯 
싶다. 여성들 스스로는 서로 경쟁하지 않아도 수천 가지 다양한 유형의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여성의 영적 능력의 마지막 보루인 마법은 교회가 마녀사냥을 
선포하면서 그 위상이 추락했다. (그 당시는 기독교 이전 시대 여사제들의 후예인 
산파, 간병인, 약초를 재배하는 여성, 카운셀러, 마법사를 마녀로 취급했다.) 따라서 
왕비가 마법까지 갖고 있다면 정치적 영향력에 영혼의 권위까지 갖춘 셈이므로 
질투심 많은 남성들에게 분명 무시무시한 존재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에서 왕비를 보다 사실에 가까운 인물로 재조명했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피부는 눈처럼 하얗고 머릿결은 칠흑같이 검은 흑설공주가 
살고 있었다. 
  흑설공주의 어머니는 그녀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그녀의 아버지는 부인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명한 마법사와 재혼을 했다. 새 왕비는 젊은 공주의 
아름다움과는 또다른 원숙미를 지닌 여인이었다. 
  사람들은 흑설공주가 매력적인 숙녀로 성장하는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특히 임금의 신하였던 헌터 경은 공주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헌터 경은 왕실 
가문의 사람과의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고 있었으며 더욱이 흑설공주의 
매력적인 미모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그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공주와 결혼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신이 외우고 있는 시 중에서도 가장 형편없는 
시와 함께 왕궁의 정원에서 꺾은 가장 아름다운 꽃을 공주에게 보냈다. 헌터 경이 
보낸 시는 자신의 성공을 갈망하는 내용이 담긴 장문의 시였다. 헌터 경은 왕궁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공주의 댄스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 기회를 엿보며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흑설공주는 어떻게든 그를 피하려고 했다. 헌터 경은 자신이 품위있고  
아주 매너가 좋은 신사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공주는 그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다.
  흑설공주는 그가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는 거대한 몸집에 
피부가 거칠었으며 머리카락은 기름기로 번들거렸다. 또 그가 숨을 쉴 때면 악취가 
풍겼으며 손은 더러웠다. 더구나 그는 말씨가 매우 거칠었다.
  흑설공주는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했다. 그녀는 "만약 아버님께서 나를 헌터 
경 같은 소름끼치는 늙은 두꺼비와 결혼시키려고 한다면 도망가 버리고 말 
거야."라고 하녀에게 단호하게 말하기도 했다.
  헌터 경은 왕비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왕비의 심복이 되길 
간절히 원했다. 그의 열망은 드디어 이루어져서 헌터 경은 왕비의 신하로 
임명되었다. 평소에도 왕비는 그를 관대하게 대해 주었다. 그가 아첨하는 것을 
은근히 즐기던 왕비는 그에 관한 무성한 소문들을 못 들은 척 눈감아 주었다. 
그러자 헌터 경은 왕비의 속내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왕비가 자기 편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어느날 헌터 경은 왕궁의 정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혼자 있는 흑설공주를 
발견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는 모자를 벗어 경쾌하게 인사를 하고는 공주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긴 줄기에 달린 장미꽃을 공주 앞에 내밀었다.
  "사랑스러운 공주님!"
  그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제발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오랫동안 공주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는 공주님을 한 여인으로 사랑합니다. 당신은 나의 사랑이며, 내 마음의 
여인이십니다. 제가 공주님을 보살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결혼이라구요?"
  흑설공주가 놀라서 소리쳤다.
  "난 아직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그리고 나와 결혼할 사람이라면 늙고 
못생긴 사냥꾼은 아녜요. 틀림없이 멋진 왕자님일 거예요. 헌터 경, 당신은 당신 
주제도 모르고 너무 높은 꿈을 갖고 있군요."
  공주의 거절에 놀란 헌터 경은 갑자기 태도가 바뀌어 난폭해지더니 한 손으로는 
공주의 치마자락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공주의 손을 낚아챘다.
  "공주님께서 내게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그가 경망스럽게 소리쳤다.
  "나야말로 귀하신 몸이란 말이오. 당신이 공주건 아니건 분명한 것은 세상물정 
모르는 철없는 숙녀에 불과하다는 것이오. 아마 오늘 좀 더 배워야 할 것 같군."
  그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나고 또 놀란 흑설공주는 있는 힘을 다해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어떻게 감히 이런 짓을.... 당장 물러서요!"
  그러나 헌터 경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공주는 간신히 팔을 비틀어 빼내고는 
손톱으로 헌터 경의 얼굴을 할켜버렸다. 헌터 경의 얼굴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그는 공주를 강제로라도 복종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공주에게 달려들어 바닥에 쓰러뜨리고는 그녀의 옷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흑설공주는 공포에 사로잡혀 소리치며 발버둥쳤다. 그녀는 주먹으로 있는 힘껏 그의 
얼굴을 치고 사타구니를 발로 걷어 찼다. 헌터 경은 고통으로 몸을 웅크린 채 숨을 
헐떡거리면서 나뒹굴었다.
  "다시는 내 근처에 오지 마세요. 알겠어요? 이 흉칙한 괴물같으니라구!"
  그를 향해 침을 내뱉으며 그녀가 외쳤다.
  "당신을 증오하고 경멸하겠어요. 앞으로도 영원히."
  경멸에 찬 말을 남기고 흑설공주는 떠나버렸다. 혼자 남겨진 헌터 경은 자신의 
야심과 함께 모든 것이 철저하게 짓밟힌 느낌이었다. 공주에 대한 헌터 경의 욕망은 
이제 적대감으로 바뀌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모욕의 대가로 그녀가 다치거나 
심지어 죽는 꼴을 보고 싶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복수를 다짐하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어느 날 저녁 헌터 경은 거실에 홀로 있는 왕비를 발견했다. 그녀는 진실을 말해 
주는 요술 거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왕비가 거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는 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가 자기쪽으로 돌아서자 말을 
건넸다.
  "왕비님은 이 나라에서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 거울에게 물어 보셨는지요?"
  왕비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울이 뭐라고 말할지는 난 이미 알고 있소. 흑설공주가 가장 아름답지."
  "화나지 않으십니까?"
  "왜 그래야 하지?"
  "이 나라에서는 당연히 왕비님이 가장 아름다우십니다. 그래서 시기심 많은 
공주가 왕위를 빼앗아 그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왕비가 웃으면서 말했다.
  "사람은 순리대로 살아야 하오. 헌터 경. 이건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라오. 젊은이는 늙은이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있는 법. 그게 자연의 
순리지요. 자식을 둔 어미라면 몸 뼛속에서부터 이를 느끼지. 자연의 순리에 
도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오."
  "하지만 새엄마들은 언제나 전처의 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까?"
  "그건 남자들이 만들어낸 어리석은 전통의 하나에 불과하오. 새엄마가  전처의 
딸들과 잘 지내야 될 이유는 얼마든지 있소. 왜 우리가 불필요한 분쟁에 말려들어야 
하지? 어떤 경우든, 난 흑설공주가 아주 좋소. 공주는 명석하진 않아도 마음씨가 
고운 아가씨지. 그런데 내가 왜 공주를 구박해야 하느냔 말이오."
  "왕비님. 이런 일을 사사롭게 처리하셔서는 안됩니다."
  헌터 경은 왕비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워낙 집착이 강하기 때문에 왕비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왕비의 말이 쓸데없는 소리라고 믿고 있었다.
  "옛날 이야기에 따르면 계모인 왕비가 자기 대신 충직한 심복을 보냅니다. 사냥꾼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전처의 소생을 죽인 뒤 그 심장을 보석함에 넣어 갖고 올 
임무를 맡을 사람 말입니다."
  왕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경은 정말 미쳤군."
  왕비는 낮은 목소리로 위엄을 갖춰 말했다.
  "헌터 경, 그건 지나치게 비정상적인 생각일세. 그런 생각은 빨리 머리 속에서 
지워 버리는 게 좋아."
  그렇게 말은 했지만 왕비는 그가 이미 생각을 굳혔음을 눈치챘고 그의 표정에서 
오싹한 한기를 느낀 왕비는 흑설공주에게 곧 위험이 닥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날 밤 왕비는 자신의 방 창가에 앉아 주문을 외워 까마귀 한 마리를 불러냈다. 
새가 나타나자 그녀는 약초를 태우며 말했다.
  "너는 지금 당장 난쟁이 나라로 날아가 그곳 여왕에게 그 나라의 백성들 중 
날쌔고, 재주가 뛰어난 자들로 일곱 명만 내게 보내달라고 전해라."
  왕비의 말이 끝나자마자 까마귀가 날아갔다.
  사흘 후, 왕비는 가발을 쓰고 매부리코를 붙인 뒤 까만 망토를 입고서 시녀 한 
명만을 데리고는 난쟁이 나라에서 온 일곱 명의 사나이들을 만나기 위해 마을 
어귀에 있는 여인숙으로 갔다. 왕비는 망토자락에서 가죽자루를 꺼내 그들의 대장 
앞에 내놓았다. 자루를 열자 거기에서 사파이어, 루비, 에머랄드, 다이아몬드 등 온갖 
보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를 본 난쟁이들의 눈이 빛났다. 난쟁이들은 무엇보다도 
보석을 유난히 좋아했다.
  "이런, 굉장하군!" 난쟁이 대장이 말했다.
  "왕비님의 부탁은 무엇이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우리끼리 죽이라는 말씀만 
아니라면요."
  "헌터 경을 감시해 주게. 이게 그 사람 얼굴일세."
  왕비가 헌터 경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주며 말했다.
  "그리고 흑설공주도 지켜봐 주게. 하지만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되네. 여기 
공주 얼굴도 있네. 혹시 공주가 성 밖으로 나가면 뒤를 따라가게. 만약 헌터 경이 
공주에게 해를 입히려고 하거든 그자를 체포해 요정나라로 끌고가서 평생을 감옥에 
가둬 두게. 그대들의 여왕이 내게 한 두번 신세진 적이 있으니 그렇게 해 줄 걸세."
  "분부에 따르겠습니다."난쟁이 대장이 맹세했다.
  "그러면 약속한 거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는 성에서 나온 누구의 눈에도 
띄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게."
  왕비는 난쟁이 대장과 악수를 하고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챠밍' 이라는 이름의 젊고 잘 생긴 이웃나라 
왕자가 흑설공주에게 청혼을 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소식을 
듣고 모든 신하들이 기뻐했다. 그러나 헌터 경만은 일체의 행동을 그만두고 
친구들도 피한 채 혼자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친구들은 그가 몸이 야위고 말도 
잘 하지 않고 웃지도 않는다고 수군거렸다. 
  헌터 경의 마음은 오로지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난폭한 
성격이 더욱 난폭한 쪽으로만 나타났다. 모욕을 당했던 그날 이후 흑설공주에게 
말을 건 적은 없지만 그는 항상 공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심지어는 밤에도 몇 
시간이고 공주의 침실 근처 찬장 뒤에 숨어 있을 정도였다. 
  챠밍 왕자가 도착하기로 예정된 하루 전날, 흑설공주는 자신의 애완견과 하녀를 
데리고 숲으로 소풍을 나갔다. 공주의 행태를 엿보고 있던 헌터 경은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몰래 이들을 따라갔다. 그리고는 이들이 숲속의 아늑한 빈터에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덤불에서 뛰쳐나와서는 공주를 낚아챘다. 그는 공주가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을 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주를 마치 병아리처럼 꽁꽁 묶어버렸다. 
공주의 작은 강아지가 그를 보고 팔짝팔짝 뛰며 짖어댔지만 그의 사정없는 발길질에 
날려 나무에 부딪쳐 나동그라졌다. 공주를 시중들던 하녀는 헌터 경이 땅에 얼굴을 
박고 엎어져 있으라고 명령할 때까지 공포에 질려 얼어붙은 듯 서 있기만 했다. 
  "놔요!" 흑설공주가 비명을 질렀다.
  "그만두지 못해요! 당장 성으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말해라, 어서!"
  하지만 하녀는 수동적 태도로 복종하는데 너무 오래 길들여져 있었다. 그녀는 
그저 와들와들 떨면서 엎드려 있었고, 헌터 경은 그런 하녀까지도 꽁꽁 묶어 버렸다.
  그는 몸부림치는 공주를 향해 긴 사냥용 칼을 꺼내들고 다가갔다. 그의 두 눈에서 
광기가 번뜩였다. 죽음의 위기에 처했음을 느낀 공주는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일곱 명의 작은 사내들이 숲속에서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헌터 
경의 칼을 빼앗고는 땅바닥에 엎드리게 했다. 여섯 난쟁이들이 헌터 경의 몸 위에 
올라앉는 사이 남은 한 난쟁이가 공주와 하녀를 풀어 주었다. 이들은 공주와 하녀가 
묶여 있던 밧줄로 헌터 경을 꽁꽁 묶었다. 그런 뒤 난쟁이 대장이 모자를 벗고는 
흑설공주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표했다.
  "다시는 이자가 공주님을 귀찮게 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자를 데리고 
난쟁이 나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자는 남은 여생을 그곳 감옥에 
갇혀 보내게 될 것입니다."
  "참 잘됐네요. 제 목숨을 구해 주셨는데 어떻게 보답해야 하죠?"
  저항하는 헌터 경의 고함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흑설공주가 말했다.
  "저희들은 이미 왕비님께 보상을 받았습니다."
  대장 난쟁이가 말했다. (난쟁이들은 정직한 족속이었다.)
  "공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희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여섯 난쟁이들이 꽁꽁 묶은 헌터 경을 어깨에 짊어지고 (난쟁이들은 비록 키는 
작았지만 힘은 센 족속들이었다.) 대장의 구령에 다라 욕설을 곁들인 자기들만의 
노래에 발맞추어 행진하듯 씩씩하게 걸어갔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하녀는 흩어진 
소풍 도구들을 챙기고 흑설공주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강아지를 품에 안았다. 
강아지는 갈비뼈가 부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공주는 강아지를 조심스럽게 안고 
돌아와 자신의 침대에 누이고는 강아지가 다 나을 때까지 정성스럽게 돌봐 주었다. 
  다음날 예정대로 챠밍 왕자가 도착했다. 그는 정말 이름처럼 매력이 넘치는 
왕자였다. 그와 흑설공주는 서로를 보고 기뻐했다. 이들은 곧 약혼했고, 일년도 
안돼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의 들러리는 왕비였다. 흑설공주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새엄마의 선견지명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후 왕실의 젊은 부부와 늙은 부부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한편, 헌터 경은 
완전히 정신이 나간 채 평생 난쟁이들의 감옥에 갇혀 살며 이따금씩 글을 쓰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는 왕비와 공주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방금 읽은 내용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벌거벗은 여왕님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 씌여진 시대는 여성들이 의류와 직물 
기술에 깊이 관여하던 때였다. 그런데도 동화의 등장 인물들은 하나같이 남성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주요 등장인물을 모두 여성으로 바꾸어 각색해 보았다. 그리고 두 
명의 주인공을 살려 주고 그들을 부자로 만드는 뜻밖의 결말을 만들어 냈다. 여왕은 
원작에 등장하는 임금보다 더 상식적인 인물로 창조되었으며, 어떻게 국민들로부터 
명예와 존경을 얻는가를 잘 보여준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중국의 마지막 여왕이 나라를 통치하던 시절,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영리한 재단사 자매가 있었다. 그들은 늘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값비싼 
비단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자랑하고 다녔다. 그러면서 그 비단은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떠들었다. 
  그들은 그 요술비단은 부도덕한 사람들이나 조금이라도 죄를 지은 사람에겐 
보이지 않으며, 반면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겐 분명하게 보인다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막대한 양의 빈 비단상자들을 감히 비단이 보이지 
않는다고 털어 놓을 수 없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팔았다. 
  요술비단에 대한 소문은 마침내 여왕의 귀에까지 이르렀다. 여왕은 자신의 생일을 
맞아 성대한 축하 행진을 계획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왕은 그 훌륭한 비단으로 
행진할 때 입을 옷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하면 대신들 중 정직한 삶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가려낼 수 있을 거라고 여왕은 생각했다. 여왕은 재단사 
자매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옷을 만들어 주면 큰 부를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여왕의 부름을 받은 동생 재단사는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린 발각되고 말 거야. 우리의 속임수는 이제 끝났어. 우린 처형될 거야. 맙소사! 
언니는 왜 나를 이런 사기행각에 끌어들인 거지?"
  그녀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만 좀 징징대." 언니 재단사가 소리쳤다.
  "내 말 좀 들어봐. 정신만 바짝 차리면 우린 해낼 수 있어. 우리가 여왕의 생일 
축하행진 의상을 만들어 내면 우리의 행운은 영원할 거야. 대담해져야 돼. 그리고 
기억해.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이 그 비단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을 
거야."
  "그렇지만 궁전엔 훌륭하고 현명한 신하들이 가득할 텐데..."
  동생 재단사가 울면서 말했다. 
  "귀족들, 학자들, 예언자들, 의원들, 그리고 많이 배운 사람들 말이야. 우리 비단이 
그 사람들 눈까지 속이진 못할 거야. 확실해."
  그러나 언니 재단사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날 믿어, 그들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위선자들이야. 자, 긴장을 풀어. 우린 성공할 
수 있어. 돈을 받은 후에 이 나라를 떠나면 그만이야. 가능한 한 멀리 도망가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거야."
  재단사 자매는 왕궁을 향해 출발했다. 언니 재단사는 그들이 누리게 될 부유한 
생활 - 좋은 옷과 하인들, 매일 밤 열리는 파티, 최고의 음식과 포도주, 열정적인 
구혼자들 -을 상상해 보라고 하면서 동생을 안심시켰다.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재단사 자매는 여왕 앞으로 안내되었다. 여왕은 곧바로 
요술비단을 꺼내보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재단사 자매는 몇 개의 빈 비단상자를 
보여 주며 큰 몸짓으로 여왕의 발 앞에서 말린 옷감을 펼치는 시늉을 했다.
  "여왕폐하, 이 금빛으로 빛나는 비단을 보십시오." 언니 재단사가 말했다. 
  "이 비단은 구름처럼 가볍지요. 여왕님의 피부에 닿아도 거의 느껴지지 않으실 
겁니다. 그리고 이것 좀 보세요. 여왕님께선 이렇게 황홀한 보라빛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이렇게 섬세한 문양을 말이에요. 마치 요정들이 금빛 거미줄로 짜 놓은 
것 같지 않으신지요?"
  그러자 모든 대신들은 그 비단이 정말 보이는 것처럼 '우와' 하고 탄성을 지르며 
다가왔다. 하지만 속으로는 비단을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수치심과 함께 비단이 안 보인다는 사실이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혹시 자신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죄악이 
있는지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요술비단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기는 여왕도 마찬가지였다. 여왕은 
단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음 속으로 자신의 
부도덕했던 과거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행사했던 무자비한 정책들을 
기억해 냈다.
  여왕은 주위의 대신들과 모든 수행원이 큰 소리로 그 요술비단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걸 보면서 '여기서 죄를 지은 사람은 나뿐이란 말인가?' 하는 행각으로 
몹시 초조했지만 곧이어 '하지만 사람들은 절대로 모를 거야!' 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안했다.
  몇 주 후, 재단사 자매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작업실과 호화로운 숙소를 
배정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날마다 부지런히 바느질을 하는 척 했다. 그들은 또 몇 번씩 몸짓만으로 
여왕에게 가봉한 옷을 입히는 시늉을 하며 마치 태양처럼 빛난다고 칭찬하는가 
하면, 때로는 여신처럼 잘 어울린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내곤 했다. 
그러는 동안 여왕은 벌거벗은 채로 서 있어야만 했다. 대신들은 그러나 여왕의 새 
옷이 눈부시게 아름답다며 유난스레 수선을 떨었다.
  대신들과 여왕이 너무나 감쪽같이 속아넘어가자 동생 재단사도 결국 자신들의 
속임수가 성공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걱정거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행진의 날이 화창하게 밝아오자 동생 재단사는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동생 재단사는 언니의 팔을 붙들고 걱정을 늘어놓았다.
  "우린 해낼 수 없을 거야. 지금 당장 도망가야 해."
  "무슨 소리야, 우리가 성공하지 못 할 거라고? 꼬마야. 날 말리지마. 우린 거의 
성공해 가고 있어. 넌 부자가 되고 싶지 않니?"
  "아니. 하지만 부자가 되지 못해도 괜찮아. 남은 삶이나 보장되었으면 좋겠다구." 
동생 재단사가 말을 이었다.
  "들어봐. 여왕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대낮에 대로를 행진할 거야. 수천 
명의 군중들 앞으로 말이야. 지금까지 여왕에게 그렇게 치욕스런 일은 없었어. 이해 
못하겠어? 군중들 중 누군가는 분명히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 순간 우린 모든 게 끝장이라구. 내 말 이해 못하겠어?"
  "그때쯤이면 우린 돈을 가지고 멀리 도망가 있을 거야. 안 그래? 기다려봐, 다 잘 
될 거야. 죄란 보편적인 거야. 이 왕국에 은밀한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그래, 나도 알아. 내게도 하나 있지."
  동생 재단사가 우울하게 대답했다. 결국 그녀는 간신히 두려움을 억누르고 
여왕에게 축하행진을 위한 새 옷을 입혀 드리기 위해 언니와 함께 여왕의 방으로 
갔다.
  여왕에게 옷을 입히는 시늉을 하는 동안 언니 재단사는 몸짓만으로 조심스럽게 
옷매무새를 고쳐주었다.
  "여왕폐하, 고상하게 세운 깃이 구겨지지 않도록 머리를 높이 드셔야 합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도실 때는 행렬이 한쪽으로 비켜서야 합니다."
  "이렇게?" 여왕이 몸을 돌리며 물었다.
  "네, 여왕폐하, 정확히 맞았어요." 언니 재단사가 대답했다.
  "여왕님께서 우리가 만든 옷을 그렇게 우아하게 입어 주시니 영광입니다."
  "우아함은 나의 천부적 기득권이라고들 하지. 하지만 왕족이라면 늘 그런 
얘기들을 듣는단다." 여왕이 미소를 건네며 말했다.
  드디어 우렁찬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며 행진이 시작되었다. 의전관들과 
기사들, 그리고 많은 대신들이 훌륭한 차림새를 하고 앞장섰고, 그 뒤를 따라 여왕이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기품 있게 햇빛 아래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백성들이 
큰 소리로 존경과 찬사를 보내며 환호했다. 그리고 그 환호의 소리는 놀라움을 
감추려는 그들의 당황함 때문에 점점 더 커졌다.
  여왕이 예정된 길을 거의 다 지나왔을 때였다. 작은 여자아이 하나가 여왕을 
보려고 어머니 치맛자락 뒤에서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때마침 왕궁의 악단은 
잠시 음악을 멈추었고, 그 순간 맑은 아침 공기 사이로 아이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여왕님이 아무 것도 입지 않았어요. 엄마, 여왕님은 벌거벗었다구요!"
  그러자 여왕이 소리가 난 쪽으로 갑자기 머리를 돌리며 가만히 손짓을 했다. 
행진은 곧 멈추었고, 근위병이 아이와 어머니를 붙들어 여왕 앞으로 데려왔다.
  "얘야, 방금 뭐라고 말했지?" 여왕이 물었다.
  "여왕님은 벌거벗었다구요."
  소녀가 대답했다. 소녀의 어머니는 아이의 손을 꽉 쥐고는 두려움에 떨며 몸을 
굽신거렸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여왕폐하.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것입니다. 이 아이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답니다."
  소녀의 어머니가 애원하듯 말했다."
  "아니야. 이 아이는 자기가 한 말의 뜻을 너무도 잘 알고 있네. 참회할 만한 죄를 
짓기엔 이 아이는 너무 어리거든. 근위병, 이들을 놓아 주게. 그리고 그대의 망토를 
내게 주게나."
  소녀의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여왕의 자비에 
감사했다. 그러나 여왕은 그 어머니에겐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여왕은 
행진을 그만 두고 근위병의 망토로 몸을 감싼 채 궁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재단사 자매들이 사슬에 묶인 채 여왕 앞으로 끌려왔다.
  "너희들은 우리 모두를 크게 속였다."
  여왕이 와들와들 떨고 있는 두 자매에게 말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우리 궁전의 모든 사람들, 단 한 명의 어린 아이를 빼고는 우리 
왕국의 모든 사람들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그러니 너희에게 
상금을 주어야 할까, 아니면 대역죄로 처벌해야 할까?"
  "자비로운 여왕님, 저희를 그저 놓아주시기만 하면, 다시는 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저희들은 저희가 지은 죄에 대해 마음 속 깊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여왕 
폐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언니 재단사가 여왕에게 빌었다.
  "넌 할 말이 없느냐?"
  여왕이 이번에는 동생 재단사를 향해 물었다.
  "여왕 폐하, 전 저희의 계획이 성공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저희는 폐하께 죄를 지었습니다. 폐하께서 
판단하시기에 죽어 마땅하다고 여기신다면 뜻대로 하십시오."
  "그렇다. 네 말대로 너희들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 너희들은 이 나라의 
제일가는 대신들과 왕국 전체를 감쪽같이 속였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삶에 대한 유머감각이 없는지도 일깨워 주었다. 그러니 너희들을 용서해주고 특별히 
상금을 내리겠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여왕의 의상담당으로 일할 것이며, 도덕과 
윤리에 관한 특별 고문으로 임명될 것이다. 근위병! 저들을 풀어주어라!"
  목숨을 구한 재단사 자매는 그 후 여왕의 옷을 재단하면서 여왕의 상담자 역할도 
맡았다. 여왕은 그들의 옷 만드는 기술과 함께 바늘처럼 날카로운 지각력을 믿었다. 
다음 해 여왕의 생일이 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 중 가장 훌륭한 진짜 
비단으로 여왕의 의상을 만들어 바쳤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오래도록 여왕의 
신임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았다.
  
    못난이와 야수
  
  "미녀와 야수"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야수의 친절한 성품과 미녀의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 사이에서 모순을 느꼈다. 나는 이 동화가 부분적이지만 '정직'을 
교훈으로 삼고 있는 이야기라고 단정했다. 동화에 등장하는 상인은 정직하지 못한 
성품이 드러날 때까지 대우를 잘 받았다. 그리고 그런 성품이 드러났음에도 어려운 
약속을 지킴으로써 자신을 구제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나는 '상인이 정말 정직할 
수 있을까?' 라는 점에 대한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겉으로 드러나는 정직성의 결여는 모든 변신 이야기의 공통된 주제다. 나는 만일 
여자 주인공의 미모는 좀 떨어져도 개성이 더욱 강했더라면 보다 감명 깊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야수가 잘 생긴 왕자로 변한다는 대목에서는 잘 생긴 
왕자들이 흔히 그렇듯 남을 속이고, 이기적이며,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으로 
바뀌는 게 아닐까 염려스럽기도 했다.
  이 이이야기에서 야수는 코끼리처럼 긴 코와 앞니, 커다란 발이 달린 괴물로 
묘사되어 있다. 야수를 사자처럼 묘사한 월트 디즈니의 작품을 본 후에도 나는 내가 
상상해 온 야수의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
  야수는 야수 모습 그대로 묘사하는 게 보다 정직할 것 같다. 그래야 그의 선한 
성품이 예쁘지도 않고 평범한 처녀와 어울려 더욱 빛날 테니까.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아들 일곱과 딸 일곱을 둔 상인이 있었다. 모두 아주 잘 
생긴 미남 미녀들이었다. 그러나 막내딸만은 곱사등에다 다리가 구부러지고, 
엄지발가락은 툭 튀어나왔으며, 몸은 뚱뚱한데다 곰보에 머릿결도 뻣뻣했다.
  하지만 마음씨만은 워낙 고와서 그녀는 자신의 외모에 불만이 없었으며,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도 모두 인정했다. 비록 못생겼지만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어 언니 오빠들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녀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방패가 되어 주었다.
  상인은 성공한 장사꾼이었다. 그러나 몇 차례 재난이 겹치면서 일년 만에 그는 
거의 모든 재산을 잃어버렸다. 그의 물건을 실어 나르던 두 척의 배는 태풍을 만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고, 홍수로 강물이 넘치는 바람에 세 곳의 창고도 
파손되어 버렸으며, 게다가 화재로 집은 물론 회계장부까지 모두 타버려서 남은 
것이라고는 식구들 옷가지 몇 벌이 고작이었다.
  겨우 목숨을 구한 그의 가족들은 그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재산인, 정원사가 
쓰던 오두막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그리고 상인은 다시 무일푼에서 시작해야만 
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도와 일하면서도 언제나 실의에 빠져 있었다. 먹을 것이 
충분치 못할 때는 더욱 그랬다. 오직 못난이 막내만이 용기를 잃지 않고 명랑하게 
모든 역경과 맞섰다.
  그녀는 언니 오빠들이 슬퍼할 때면 위로해 주고, 그들이 처량맞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에도 웃음을 잃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녀는 언제나 옳은 것에 대해 
말하고 매사를 낙관적으로 보는 법을 알고 있었다.
  상인은 사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길고도 먼 여행을 떠나야만 했다. 어느 겨울 
저녁, 상인은 멀리 떨어진 작은 도시에서 물건을 팔아 번 돈을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상인이 인적이 드문 한적한 길로 들어섰을 때 갑자기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굽이쳐 흐르는 강가를 따라 가파른 절벽 밑을 
지나는데 갑자기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상인의 머리 위로 굴러 떨어졌다. 그 바람에 
짐을 실은 나귀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았다.
  갑작스런 사고에 상인도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고, 게다가 길까지 잃어버렸다. 그는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무섭게 쏟아지는 폭설 속을 몇 신간 동안 혼자 헤매고 
다녔다. 지칠대로 지치고 피곤해진 그는 너무 추워서 얼어죽을 것 같았지만 눈 
속에서라도 그냥 누워 자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되면 다시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계속 걸었다. 얼마를 그렇게 걸었을 때 갑자기 상인의 눈 
앞에 높다란 철대문이 나타났다.
  더 이상 걸을 기력도 없었던 상인은 철대문의 쇠고리를 잡고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런데 그때 문이 저절로 열리더니 그의 앞에 넓고 큰 길이 펼쳐졌다.
  그곳은 눈이 그다지 많이 내린 것 같지 않았다. 상인은 그 길을 따라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커다란 궁전을 향해 걸어갔다. 눈은 어느새 멈추었고 기온도 점점 
따뜻해졌다.
  그가 도착한 궁전의 정원은 여러 가지 초록 식물과 과일 나무, 꽃들이 만발하고 
달콤한 향기가 가득했다. 게다가 부드럽고 따사로운 산들바람이 불어 마치 낙원처럼 
느껴졌다.
  마침 궁전의 청동문은 열려 있었다. 상인은 그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러자 넓은 
홀이 나타났는데 그곳은 크리스탈 샹들리에에 수천 개의 촛불이 켜져 있고 화려하고 
우아한 장식으로 덮여 있었다. 벽난로에서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또 황금 
그릇에는 최고급 요리들이 가득 담겨있고 식탁 위에는 훌륭한 포도주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상인은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일단 식탁에 앉아 기운을 차릴 수 있을 때까지 
실컷 먹었다.
  배불리 먹고 난 상인은 궁전의 다른 방들을 둘러 보았다. 그곳에 있는 온갖 
진귀한 물건들을 보면서 상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인이 보기에 그곳의 
가구들과 그림, 장식품들은 값을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한 것들이었고, 하나하나 
진열해 놓은 솜씨가 보통 섬세한 게 아니었다.
  이 모든 값진 보물들이 아무런 보안장치도 없이 방치되어 있다는 데 상인은 더욱 
놀랐다. 그때까지도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고 궁전은 전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어느 침실에 들어갔다. 커다란 침대에 파란색 우단이 덮혀 있고 연한 
복숭아색 이불이 들어오라고 손짓하듯 젖혀져 있었다. 피곤에 지친 상인은 잠깐 눈 
좀 붙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침대는 너무나 푹신하고 편안해서 
상인은 눕자마자 잠이 들어버렸다. 그가 일어났을 때는 다음날 오후였다.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 보니 벨벳천의 파란색 목욕가운이 침대발치에 그를 
위해서인 듯 준비되어 있었고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는 물소리도 들렸다. 정사각형의 
욕조에는 향기로운 물이 알맞은 온도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 옆에는 향수비누와 
두툼한 수건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디에도 사람은 없었다.
  목욕을 마치고 침실로 다시 들어선 상인은 크리스탈 화병에 꽂힌 싱싱한 꽃과 
함께 고풍스러운 레이스 식탁보 위에 맛있는 음식이 차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신비로운 
서비스가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제공되는 모든 것을 기꺼이 즐겼다.
  식사를 마친 후 그는 이방 저방을 기웃거리며 방안의 보물들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그는 예술품이 진열되어 있는 홀에서 순금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일곱 송이 
장미꽃이 꽂힌 작은 꽃병을 발견했다.
  "이런 물건이 하나만 있어도 다시 부자가 될텐데. 일곱 송이 장미가 내게는 일곱 
딸을 의미할 수도 있지..."
  그는 이 마법의 궁전에서는 모든 게 자기 마음대로였으니 자신이 보물 하나쯤은 
가져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꽃병에서 황금 장미 한 
송이를 뽑아 코트 안자락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천둥처럼 굉장한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무시무시한 괴물이 상인 앞에 나타났다. 키는 2미터가 훨씬 
넘어보였고, 야생의 멧돼지 같은 코에 앞니는 튀어나오고, 움푹 들어간 작은 눈에 
커다란 손과 손톱이 길다란 거대한 동물이었다.
  겁에 질린 상인은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다.
  "용서해 주십쇼, 야수님! 목숨만 살려 주십쇼! 집에는 제가 먹여 살려야 할 
자식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나리의 금을 가져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보십쇼. 
여기 있습니다. 도로 제자리에 돌려 놓겠습니다."
  "물론, 그랬겠지. 하지만 네가 이미 꽃에 손을 댔기 때문에 돌려 놓을 수는 없다. 
도둑질은 내가 베푼 환대에 대한 보답치고는 별로 좋지 않아."
  야수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제가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상인이 여전히 벌벌 떨며 물었다.
  "황금 장미는 네 가족을 위해 가져가도 좋다. 그 대신 너는 네 딸 중 한 명을 
내게 보내야 한다. 내가 마법의 마차를 빌려 줄 테니 그걸 타고 네 집으로 가서 
도착한 후 세 시간 안에 네 딸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나에겐 친구가 필요해. 
명심해라. 세 시간이 지나기 전에 내 마차에 네 딸들 중 하나를 태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네 집으로 내려가 너를 가만 놔두지 않겠다."
  "네, 네, 야수님. 명심하겠습니다. 제 명예를 걸고 약속 드리겠습니다."
  "물론이지. 그래야 사업가답지 않은 이번 행동을 눈감아 줄 것이다."
  야수는 포효하듯 말을 하고는 천둥소리와 함께 다시 번쩍이는 번개 속으로 
사라졌다.
  상인은 출구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은장식으로 치장된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부의 자리에는 온몸을 검정색 천으로 휘감고 가면을 쓴 
이상한 사람이 말고삐를 잡고 있었다.
  상인이 마차에 오르기가 무섭게 마차는 엄청난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에는 창문이 없어서 어디쯤 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마침내 마차가 멈춰 문을 열어보니 어느새 자신의 오두막 앞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달려나와 그를 반겼다. 모두들 그의 말끔한 차림새며 검정외투를 입은 마부, 
근사한 말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아름다운 황금장미를 보고 놀랐다.
  "우린 다시 부자가 된 거야!" 한 아이가 외쳤다.
  "아버지, 돈을 많이 버셨나봐요?" 이번에는 못난이가 물었다.
  "얘들아. 우리가 다시 부자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끔찍하단다."
  밖에서 침묵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는 아이들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모두 들려줬다.
  상인이 이야기를 마치자 못난이가 말했다.
  "누가 가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 없어요. 제가 가겠어요."
  못난이의 말을 들은 형제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반대했다. 못난이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딸들 중 누구도 직접 나서지는 못했다.
  "제가 가야 해요. 여기 있어봐야 전 남편도 얻지 못할 테고 집안에 아무런 보탬도 
될 수 없어요. 이건 제가 우리 집이 다시 부자가 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요."
  항상 가족을 먼저 생각하도록 교육 받아온 그들에게 못난이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야수가 너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지도 몰라. 어쩌면 요리해서 
먹어버릴지도 모르잖니?"
  막내 오빠가 울먹이며 말했다. 여느 아이들처럼 그도 야수에 대해 그렇게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용감하게 맞서야죠. 자, 이제 짐을 싸겠어요."
  말을 마친 못난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짐을 싸는 동안 가족들은 모두 
울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못난이가 야수의 마차에 오르자 주위에 모여 계속 
흐느끼며 그녀를 토닥거려 주기도 하고 이별의 키스를 나누면서 그녀를 위로했다. 
한편으로 상인은 예쁜 딸을 보내지 않았다고 야수가 그를 찾아와 보복을 하지나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궁전으로 가는 도중 내내 훌쩍거리던 못난이는 지금보다 더 못생겨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울음을 그치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마침내 마차가 멈추었고 그녀는 
쭈뼛거리며 육중한 문을 열었다. 그녀가 집을 떠나올 때는 한겨울이었는데 눈 
앞에는 따뜻한 한여름의 푸른 하늘 속에 치솟은 웅장한 궁전과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어딘가 숨어 있던 야수가 나타나 자신을 단숨에 해치울 것 같은 두려운 
마음으로 커다란 청동대문을 들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궁전 안으로 들어가니 
식탁 위에는 그녀를 위한 맛있는 저녁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주위는 쥐새끼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는 식사를 하고 나서 궁전 안을 둘러보았다. 방들은 
어느 것이나 모두 훌륭하고 아름다웠지만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두려움과 긴장으로 지친 그녀는 하얀 비단이 드리워진 침실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초록색 우단 침구가 깔린 상아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 눕자마자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녀가 일어났을 때는 목욕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녀가 입을 아름다운 새 의상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또한 그녀의 아버지 말대로 아침식사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잘 차려져 있었다.
  그녀는 창문을 통해 바깥경치를 내다보다 정원을 거닐기도 하고, 서재에서 책을 
읽기도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언제 무시무시한 야수가 나타날지 
몰라 불안과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한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조금씩 
긴장이 풀린 그녀는 하루하루를 즐겁게 지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나자 야수는 이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먼저 그녀에게서 약간 떨어져 정원에 나타났다. 붉은 벨벳 외투와 두건으로 몸을 
가리고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으로 숲속의 야생동물에게 접근하듯 
조심스럽게 야수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오자 야수는 조용히 말했다.
  "꼬마 아가씨. 드디어 야수를 만났소. 무섭진 않소?"
  "조금..."
  못난이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나도 당신 때문에 약간 놀랐소. 당신은 결코 아름다운 아가씨는 아니오. 안 
그렇소?"
  "전 항상 못생겼다는 말을 들어왔어요. 사실이 그러니까요. 그렇지만 그 때문에 
화를 내진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집안을 보니 미적 감각이 대단하신 것 같긴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보는 이의 눈 속에 있소. 언젠가 그렇게 들은 적이 있지..., 나와 
함께 산책하지 않겠소?"
  야수가 아주 점잖고 신사답다는 것을 알게 된 못난이는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들은 함께 산책을 나갔다. 야수는 그녀에게 희귀식물들을 알려 주기도 하고, 처음 
먹어보는 과일을 맛보여 주기도 했다. 그녀는 그의 무시무시한 얼굴을 마음놓고 
똑바로 쳐다볼 수는 없었지만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유쾌했다.
  해가 질 무렵, 야수는 그녀와 헤어지며 다음날 정원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두건도 외투도 벗고 나타났다. 그녀는 조금씩 야수의 흉칙한 
생김새에 익숙해져 갔다. 야수는 날마다 그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그녀는 어느 
새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그와 만날 시간을 간절히 기다리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식사도 함께 하고 함께 책도 읽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면서 못난이는 점차 야수가 참으로 매력적인 친구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와 충분히 친해진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어쩌다 그렇게 흉칙한 외모를 갖게 
되었는지 물어 보았다.
  "언젠간 그렇게 질문할 줄 알았소."
  야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신도 알아야겠지. 당신은 내가 마법에 걸렸다고 말하기를 기대하고 있겠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동화에서처럼 당신의 사랑으로 진짜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잘 
생긴 왕자가 아니오."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만일 당신아 잘 생긴 
왕자님이 돼버린다면 더 이상 내 친구가 되어 즐겁게 지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저 역시 아름다운 공주님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언제까지나 당신 곁에 
있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어요. 난 처음으로 당신과 나를 위해 내가 미녀였으면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내게도 한때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소. 그녀는 내가 잘 생긴 왕자가 되어 주길 
원했지. 그래서 난 그녀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마법을 써서 그녀에게 환영을 
만들어 주었소. 당신도 내 궁전 주변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일들을 보았겠지만 나는 
유능한 마법사라오. 하지만 언제까지나 마법을 쓸 수는 없었소. 그래서 나는 사실을 
털어놓았지. 그랬더니 떠나버리더군. 내가 야수라는 사실을 알고는 말이오. 그렇소. 
지금 이 모습이 바로 나의 원래 모습이요."
  "야수님. 난 정말 기뻐요."
  못난이가 야수를 껴안으며 외쳤다.
  "우리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난 내가 못생긴 것도 상관없고 당신이 흉칙해도 
상관없어요. 지금까지 난 당신과 함께 있는 것만큼 행복했던 적이 없었어요."
  야수는 자신이 잘 생긴 왕자가 아니어도 좋다는 그녀의 말에 너무나 기뻤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결혼을 약속했다.
  결혼식에 참석한 못난이의 식구들은 푸짐한 선물을 받았다. 못난이의 가족은 이제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궁전에서 가져간 황금 장미를 지혜롭게 
투자해서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이었다.
  궁전은 하객들에게 공개되었고 근사한 축제가 벌어졌다. 못난이와 야수의 
부부애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들은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잘생긴 
사람들이 자기도취 때문에 스스로를 망치는 어리석음에서 그들은 자유로웠기 때문에 
두 사람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릴리와 로즈
  
  "백설공주"나 "붉은 장미"처럼 흰색과 붉은색을 의미하는 제목의 동화를 우리는 
꽤 알고 있다. 이 동화에서는 모계 중심 사회나 여성이 통치하는 국가의 유익함을 
보여주기 위해 자매 관계를 남편과 아내 관계로 변형시켜 보았다.
  동화에서는 심장이나 영혼을 몸 밖에 두는 악당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은 사람의 
몸에서 분리된 것들, 예를 들어 머리카락이나 침, 피, 손톱 조각 같은 것들이 마법의 
힘에 의해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는 원시적인 믿음에 기초한다.
  여러 원시적인 문화에서는 태반이나 탯줄을 아기의 다른 자아, 즉 아기의 몸밖에 
존재하는 영혼이라든가 피를 가득 담고 있는 생명력으로 여겨 매우 조심스럽게 
다룬다. 또 그것들을 처리할 때도 아기가 해를 당하지 않도록 치밀한 마법의 의식을 
거친다.
  비슷한 이야기로, 동화에 나오는 괴물들은 종종 그들의 몸 밖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파괴하는 마법의 공격을 받는다. 결국 이러한 예들은 실제 존재하는 고대 
민속들이 동화에 삽입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은 것이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한 가난한 소녀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백합처럼 
하얀 피부에 은빛의 머리카락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릴리(lily)라고 불렀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릴리는 숲속 깊은 
곳에서 나무꾼인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릴리는 아버지에게서 나무를 베는 법과 
시장에 내다 파는 법, 나무를 쪼개고 손질하여 묶는 법 등을 배우며 자랐다.
  릴리의 아버지는 호되게 일을 시켰다. 그러나 아버지의 호된 가르침 덕분에 
릴리는 자랄수록 더욱 강해졌다. 어른이 되자 그녀는 온종일 일해도 지치지 않고 
무거운 도끼를 거뜬히 휘둘러 나무를 쪼갤 수 있었으며, 엄청난 장작더미를 등에 
지고 시장까지 운반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아주 솜씨 좋은 목공예가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만큼 나무를 깎고 다듬는 데도 뛰어났다. 
  릴리는 두 가지 문제만 아니면 고되지만 평화로운 자신의 삶에 그런대로 만족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문제는 자신의 아름다운 용모였다. 릴리는 자신의 미모 때문에 
동네의 난폭한 청년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릴리의 나무를 
훔치고, 옷과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넘어뜨리는 등 거칠은 행동이나 유치한 
속임수로 끊임없이 릴리를 괴롭혔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런 행동이 릴리의 관심과 
환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릴리를 점점 화나게 
할 뿐이었다. 한두 번인가는 너무 화가 나서 이성을 잃고 그들과 정면으로 맞서 
대항한 적도 있었다. 많은 숫자가 덤볐지만 그녀는 장작개비를 휘두르며 싸워서 한 
사람은 이빨을 부러뜨리고, 또 한 사람은 코를 깨뜨렸으며, 다른 녀석은 팔을 꺾어 
버렸다. 다른 사내들도 복부를 걷어 차여 내상을 입을 정도였다. 당연히 이 일로 
인해 그들의 악의는 더욱 깊어졌다.
  다른 한 가지 문제는 릴리의 아버지에게 닥친 불행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느 
날 나무를 하던 중 쓰러지는 나무에 오른쪽 팔이 깔려 더 이상 팔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릴리는 나무를 쪼개는 일 외에 힘든 일들을 모두 혼자 
해야만 했다. 좌절감과 고통을 이기지 못한 릴리 아버지는 점점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릴 리가 어렵게 벌어온 몇 푼 안되는 돈을 술을 마시는 데 반 이상 
써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술에 취하기만 하면 화를 냈고, 인사불성이 되거나 미친 
듯이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릴리를 구박하는가 하면, 
릴 리가 자신에게 마술을 건다고 떠들어대기도 했다. 때때로 그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며칠을 집에 들어오지 않기도 했다.
  계속되는 슬픔과 고단한 일상, 그리고 그녀를 괴롭히는 초조함 때문에 그녀의 
아름다움은 점점 빛을 잃어갔다. 릴리는 자신이 불행하다는 생각에 종종 지금의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변했으면 하고 상상했다.
  그런 어느 날, 숲속에서 나무를 하던 그녀는 왕가의 장식을 가득 단 군마 하나가 
시냇가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군마는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릴 리가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냇물을 건너 가까이 가서 보니 기사 한 
명이 말고삐를 잡은 채 물 밑에 쓰러져 있었다. 릴리는 그가 전쟁터에서 상처를 
입고 기운이 빠져 말에서 떨어졌고, 허리까지밖에 안 차는 물깊이에도 자기 갑옷에 
눌려 익사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릴리는 먼저 말을 물 밖으로 끌고나와 둑 위에 묶어 놓은 뒤 이번에는 기사를 
물에서 끌어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다음에는 뭘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그때 
말이 히힝거리며 코로 릴리를 툭툭 쳤다. 릴리는 갑자기 그 말이 자기에게 죽은 
기사를 대신하라고 말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릴리는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릴리는 죽은 기사에게 칼과 옷을 챙긴 뒤 그를 원래 있던 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그런데 기사의 주검이 시냇물을 따라 막 떠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진짜 
행운을 발견했다. 두둑한 지갑이 그의 허리띠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릴리는 자신의 옷을 시냇가에 벗어두고 기사의 갑옷을 입었다. 갑옷은 그럭저럭 
맞는 편이었다. 갑옷이 너무 무거운데다 말을 타는 데 익숙치 않아서 릴리는 말 
옆에 커다란 돌을 놓고서야 올라탈 수가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말 위에 오르자 
릴리는 자신이 전보다 더욱 힘이 세진 것처럼 느껴졌다.
  릴리가 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널 '행운'이라고 부를게."
  릴리는 자신의 무기를 정리했다. 그리고는 크고 무거운 남자용 도끼를 등에 
짊어지고 안장에 앉아 힘차게 외쳤다.
  "가자, 행운아!"
  릴리가 탄 말은 숲 밖을 향해 힘차게 달려나갔다.
  처음에 릴리는 집으로 가서 자신의 행운을 아버지와 나누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알게 되면 고작 술 마시는 데 그 돈을 다 써버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만약 자신이 그 기사를 죽이고 도둑질을 했다는 의심이라도 받게 되면 
교수대로 보내질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릴리는 아버지가 일년은 족히 
먹고 살 만한 돈을 오두막 앞에 던져 놓고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달렸다.
  마을로 가는 길에 릴리는 전에 그녀를 괴롭혔던 청년들과 부닥치게 되었다. 
릴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들이 날 고발할지도 몰라.'
  그러나 그녀는 곧 자신이 갑옷으로 완전히 가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투구가 
그녀의 얼굴을 감춰 주고 있었으므로 릴 리가 먼저 밝히지만 않으면 그들이 릴리의 
정체를 알 리가 없었다. 릴리는 그들 앞으로 대담하게 나아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릴 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모든 청년들이 릴리를 
향해 절을 하며 머리를 조아려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릴리는 투구 속에서 빙그레 
웃으며 그들 중 자기를 가장 못살게 굴었던 한 청년을 칼등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진흙탕 속으로 굴러 떨어진 녀석이 허둥대며 일어나 릴리를 향해 무릎을 꿇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리, 황송합니다요, 나리."
  릴리는 다시 한 번 웃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 난 시골뜨기 릴리가 아니라 존경받는 릴리 경이 된 거야. 비겁한 놈들. 
사람에 따라 얼굴색을 바꾸다니."
  릴리는 끝까지 기사로 변장하여 살기로 작정했다. 
  릴리는 언덕 위에 천막을 치고 그곳에서 머무르며 무기 다루는 법을 연습했다. 
머리를 짧게 잘랐고, 남자 목소리로 말하는 연습을 했으며, 나무로 백합을 조각해 
투구 앞머리를 장식하기도 했다. 그녀는 이제 모험을 찾아 떠날 모든 준비를 
끝냈다고 생각했다.
  길을 떠난 뒤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릴리는 아주 고요한 성에 이르렀다. 그런데 
성을 지키는 기사들도 없었고, 들판에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문밖을 
지나다니는 상인들은 물론 깃발도 날리지 않았으며, 소를 비롯한 다른 동물들도 
없었다.
  생명체라고는 붉은 머리의 예쁜 아가씨 한 명뿐이었는데, 그녀는 성문 옆에 놓인 
철창에 갇혀 서러운 듯 흐느껴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릴 리가 다가가 물었다.
  "오, 기사님. 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몸이에요. 난 로즈 공주예요. 우리 부모님은 
끔찍한 괴물 오거에게 인질로 잡히셨어요. 오거는 내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자 부모님을 성에 감금하고 나도 이 철창 속에 가두어 놓았죠. 그는 소름끼치게 
무섭고 잔인해요. 그와 결혼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릴 거예요. 그는 우리 아버지의 
기사들과 시종들도 모두 죽였어요. 어떤 사람도 그와 싸워서 이기지 못해요. 오거는 
불사신이거든요."
  "어째서죠?"
  "오거는 궁전 뜰에 거대한 마법의 나무를 키우고 있어요. 그 나무 꼭대기에는 
상자가 하나 있는데, 바로 그 상자 속에 오거의 심장이 숨겨져 있죠. 그의 심장이 
거기에 안전하게 있는 한 아무도 그를 해칠 수 없어요."
  "다른 방법은 전혀 없나요?"
  릴리는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못된 놈들이 많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난 릴리 경이오. 그리고 난 나무 다루는 법을 잘 알아요. 혹시 성으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는 없습니까?"
  로즈 공주는 성의 북쪽 벽에 지하감옥으로 연결된, 낡은 하수구가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어렸을 때 거기에서 놀곤 했어요. 이렇게 갇히기 전까지도요. 하지만 당신같이 
고귀한 기사님이 그런 보잘 것 없는 길로 성에 들어가시진 않겠죠. 그건 기사 
신분으로 수치스러운 일일 테니까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수치스러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릴리는 어두워질 때까지 성의 북쪽 벽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행운'을 매어 놓고 
갑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칼과 도끼만 가지고 폐쇄된 낡은 하수구로 기어 들어가 
궁전 뜰로 나왔다. 거기엔 거대하고 시커먼 마법의 나무가 밤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었다. 릴리는 나무를 향해 힘껏 도끼질을 시작했다. 얼마가 지나자 마침내 나무가 
비틀거리더니 엄청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오거가 양손에 횃불을 들고 으르렁거리며 성 밖으로 
나왔다. 공주의 말처럼 오거의 모습은 끔찍했다. 덩치는 보통사람의 두 배나 되고, 
이마 한복판에는 외눈이 박혀 있었으며, 입 밖으로 송곳니가 길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릴리를 보자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릴리는 솜씨 좋게 
그를 피하며 쓰러진 나무 꼭대기 쪽으로 잽싸게 몸을 움직였다. 릴리는 나뭇가지 
사이에 끼여 있는 상자를 찾아내서는 그것을 도끼로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상자가 
깨지며 거칠게 뛰고 있는 오거의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바로 그 순간 릴리는 
재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단도를 그 심장에 꽂았다. 릴리를 막 붙잡으려던 오거가 
얼굴을 땅에 처박고 쓰러졌다.
  릴리는 죽은 괴물의 허리띠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로즈 공주를 철창에서 꺼내 
주었다. 로즈 공주는 감금에서 풀려나자 릴리를 껴안고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당신은 나의 훌륭한 기사님이에요. 용감한 릴리 경."
  로즈 공주가 기쁨에 넘친 목소리로 외쳤다.
  "성으로 들어가요. 우리 부모님께서도 당신을 좋아하실 거예요. 당신을 위한 큰 
파티도 열어 주실 거구요."
  감옥에서 풀려난 왕과 왕비는 딸과 다시 만나게 되자 매우 기뻐했다. 왕은 곧 
오거의 시체와 그의 나무를 멀리 치우게 한 후 성대한 연회를 준비했다. 오거에게 
신하들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필요한 시종들은 이웃나라의 사람들을 고용했다. 
모두들 오랫동안 오거에게 억압당해 왔기 때문에 오거를 제거한 축하 연회 준비에 
사람들은 너나없이 나섰고, 그로 인해 한동안 조용하던 성은 다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왕과 왕비는 릴리에게 연회를 위한 새 벨벳 망토를 선물했다. 그리고 로즈 공주는 
그 망토에 손수 황금백합의 수를 놓았다. 왕은 연회석상에서 일어나 "아직 턱수염도 
나지 않은 젊은이가..." 라는 말을 시작으로 릴리를 왕국에서 가장 용감한 기사라고 
칭찬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면서 왕가의 전통에 따라 릴리에게 왕국의 절반을 주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겠노라고 선언했다.
  그 말에 너무 놀란 릴리는 먹고 있던 거위 고기가 그만 목에 걸리는 바람에 
포도주를 거푸 마셔댔다.
  "나의 멋진 기사님은 그만한 품위를 갖추고 있죠."
  로즈 공주가 릴리에게 부드럽게 입맞춤하며 말했다.
  뜻밖의 일을 당한 릴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릴리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왕에게 정중하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는 로즈 공주에게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소."
  두 사람만 있게 되자 릴리는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과 가짜 기사로 위장하게 된 
그간의 경위를 밝혔다. 로즈 공주는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더니 갑자기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웃고 또 웃었다. 그러자 전염이라도 된 듯 릴리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제껏 내가 들은 이야기들 중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예요."
  로즈는 너무 웃어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을 이었다.
  "그 모든 훌륭한 전사들이 나무꾼 아가씨를 이기지 못하다니... 릴리, 어쨌든 난 
당신을 사랑해요. 우리 결혼해요.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능력있는 통치자가 필요해요. 우리가 바로 그 왕과 왕비가 되는 거예요. 난 당신의 
비밀을 지킬 수 있어요. 당신도 비밀을 지켜요."
  "난 사람들을 영원히 속일 자신이 없어요."
  릴리가 망설이며 대답했다.
  "말도 안돼요! 당신은 모험가잖아요. 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그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거예요. 자, 불안해 하지 말아요. 우린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두고 
보세요."
  릴리는 결국 공주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녀는 로즈 공주와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리고는 그 나라에 정착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매우 행복해 보인다고들 말했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겨질 때면 그들은 어김없이 크게 웃어댔기 때문이었다.
  릴리와 로즈가 나라를 다스리자 백성들은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했다. 
릴리 왕은 종종 그의 훌륭한 말 '행운'을 타고 다니며 백성들을 만나 그들의 
문제점을 듣고 시정했으며, 로즈 왕비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등 선한 
업적을 많이 쌓아 백성들로부터 크게 칭송받았다.
  가끔 릴리와 로즈의 성적 취향이 이상하다며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이야기도 
들렸다. 사람들은 왕비가 따로 애인들을 두었다거나 릴리 왕이 역사에 기록된 다른 
왕들처럼 남자 애인을 두었다고 수군댔다. 하지만 릴리 왕은 동성애를 즐기던 다른 
왕들과 달랐다. 릴리 왕은 오히려 그런 경향이 없는 남자들만 골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애인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왕의 성적 취향에 대한 뒷말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건 일반 백성들에겐 수수께끼였다.
  릴리와 로즈는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뒤를 
이을 두 아이를 기르며 행복하게 살았다.
  한편, 깊은 숲속에 있는 늙고 병든 나무꾼의 집 앞에는 누가 갖다 놓는지 모를 
작은 돈지갑이 한 달에 한 번씩 놓여졌다. 그러나 나무꾼은 그 돈으로 술만 
마시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막내 인어공주
  
  예나 지금이나 독자들은 한결같이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사랑해 왔고, 현재 
그녀는 에드워드 에릭슨이 만들어 준 모습 그대로 코펜하겐 부두의 바위 위에 앉아 
있다. 그런데 어렸을 때 나는 그녀가 겪은 고통 때문에 그녀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단지 사랑 때문에 그녀가 자신을 희생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한다. 여자는 가치있는 사랑을 위해 고통을 
인내해야만 한다는 사고방식은 단지 근육덩어리 남자들의 생각일 뿐이다. 
인어공주가 사랑한 왕자는 무엇을 견디어냈는가. 그는 단지 자유를 택했을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막내 인어공주" 에서는 좀 더 자상하고 동정심이 많은 왕자를 
등장시켜 그녀의 고통을 덜어 주게 했다. 그리고 그녀를 치료하는 마법사 
스콜레피오는 고대 의학의 신인 그리스의 아스킬레피오와 로마의 
애스큘라피우스신을 모델로 삼았다. 또 에스투리아 공주는 다른 동화 속의 공주와는 
달리 평민과 결혼하기 위해서 도망치게 했다.
  사람들은 동화 속 공주에 대해 뿌리깊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의 
공주는 온실 속의 꽃처럼 삶을 누리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그런 
공주들과는 다르다.
  
  옛날 아주 옛날, 자매들 사이에서 가장 어리고 작아 막내로 불리는 인어공주가 
있었다. 그녀는 작은 체구에 귀여웠으며, 어부들이 던지는 그물도 빠져나갈 만큼 
빠르고 민첩했다. 그녀는 날카롭고 작은 산호조각으로 그물을 찢어 돌고래나 거북이, 
물고기 등을 그물에서 풀어 주기도 했다. 어부들은 이런 그녀의 행동에 온갖 저주와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무어라고 하든 꼬리를 한 번 탁 치고는 
유유히 사라져 버리곤 했다.
  막내 인어공주는 바다의 왕인 아버지의 산호성에서 살고 있었다. 공주의 아버지는 
왕비가 포경선의 작살에 맞아 죽은 뒤 몇 년 째 홀아비로 지내고 있었다. 왕비가 
죽고나자 그는 지상의 모든 인간과 그들이 탄 배를 멀리했다. 
  그는 딸들이 어부들을 향해 노래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물 밖의 바위에 앉아 
머리를 빗는 일도 못하게 했으며, 절대로 뱃길 근처에서 놀면 안 된다고 명령했다.
  그런데도 막내 인어공주는 종종 아버지의 명령을 무시한 채 지상의 어부들에게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다. 희미하게나마 그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보이도록 배 가까이 
헤엄쳐 가기도 했고, 달도 없는 어두운 밤이면 작지만 감미로운 목소리를 파도 
사이로 흘려보내기도 했다. 닻의 끈을 자르고 해초로 키를 엉키게 하는 장난을 
즐겨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수영을 하는 선원의 바로 밑까지 다가가 겁도 없이 
그의 짧은 바지를 확 잡아당기기도 했다.
  그녀는 또 돌고래나 바다표범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언제든 그녀와 
함께 재주넘기와 술래잡기 등을 하며 놀아줬다. 바다의 왕은 그런 그녀를 
경망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친구들에 대해서도 '그깟 짐승들'이라고 코웃음을 
치며 못마땅해 했다. 어떤 때는 나중에 그녀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어가 될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아버지가 막내 인어공주를 바로 잡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반면, 
그녀의 언니들은 진주꿰기나 산호를 조각하는 유용한 기술에 그녀의 관심을 
돌려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만히 않아서 해야 하는 일에는 금방 싫증을 
냈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밤, 파도타기를 즐기던 막내 인어공주는 난파된 배 한 
척을 발견했다. 돛대가 부러지고 돛이 찢어진 그 배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해 바다 
위를 힘없이 표류하고 있었다. 뱃전을 때리며 솟구치는 파도로 배는 거의 침몰할 
지경이었다. 배 위의 선원들은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소용없어 보였다.
  막내 인어공주는 배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배는 점점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때 파도 속에서 무언가 떠오르며 그녀에게 부딪혔다. 몸을 
돌려 바라보니 젊은 남자였다. 그는 의식을 잃었는지 다시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두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재빨리 그를 잡았다. 그는 
지금까지 그녀가 보아왔던 누구보다도 잘 생긴 남자였다.
  그녀는 그가 물에 가라앉지 않도록 애쓰면서 끔찍하게 무거운 그의 몸을 끌고 
가까운 해안가를 향해 헤엄쳐 갔다. 그녀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를 해안에 올려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너무 지쳐서 쓰러지듯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녀는 
천천히 집을 향해 헤엄쳐 갔다. 수영을 너무 오래 한 탓인지 꼬리가 쿡쿡 쑤셔왔고, 
자꾸만 그 젊은이의 얼굴이 떠올라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녀는 어렴풋하게 자신이 
그를 사랑하게 되리라고 짐작했다. 
  몇 주 후, 막내 인어공주는 그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는 화려하게 치장한 배의 
뱃머리에 서 있었는데, 배 위에는 왕가의 표식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는 건강하게 
살아있었다. 게다가 전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막내 인어공주는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그녀는 왕자의 이름을 듣기 위해 그가 
탄 배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의 이름이 아쿠암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녀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아쿠암 왕자와 함께 살 수 없다면 자신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막내 인어공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그녀의 아버지는 매우 분노해서 고함을 
질렀다.
  "멍청한 것. 육지에 사는 것들은 사귀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공주야, 네가 만약 멸치만큼만 머리가 좋아도, 인어들은 땅 위에서 
걸어다니는 족속과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게다. 넌 남은 여생을 마치 
조가비처럼 메마른 땅 위에 배를 깔고 다니며 살고 싶진 않겠지?"
  "저도 발을 가질 수 있을 겨예요. 바다 마녀는 인어를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던데요?"
  "그런 헛소문을 믿다니! 공주야, 이제 그런 유치한 것들은 잊어버리고 철 좀 
들어라. 바다 마녀는 위험한 존재야. 절대로 허락 할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의 충고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즉시 바다의 가장 
깊은 곳에 살고 있다는 바다 마녀를 만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는 한 쌍의 
전등고기를 고용해 길을 밝히게 하고 아무도 모르게 심해로 헤엄쳐 내려갔다. 수압 
때문에 갈수록 귀가 윙윙거렸다. 인어공주가 가까스로 도착했을 때 바다 마녀는 
해저 화산에서 나오는 뜨거운 가스를 이용해 큰 솥에 저녁을 짓고 있었다.
  바다 마녀는 몸집이 거대하고 주름살도 많았으며, 푸르스름한 피부에 날카로운 
왕관을 쓰고 있었다.
  "무슨 일로 날 찾아왔지?"
  마녀가 사뭇 위협적인 긴 이빨을 딱딱거리며 물었다.
  "땅 위의 사람들처럼 나도 두 다리를 갖고 싶어요."
  막내 인어공주가 기어들어 가는 듯한 소리로 대답했다.
  인어공주는 마녀의 모습에 겁이 났다. 게다가 인간의 살을 먹었다던 바다 
마녀들과 바다뱀의 이야기까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 옛날 네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이모뻘 되는 이가 내게 와서 너랑 
똑같은 것을 요구했었지. 그녀는 땅 위의 어떤 남자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집착해 
있었어,. 그의 모든 것에 대해서 말이야. 그래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다고 내가 
그렇게도 충고했는데... 결국은 내가 옳았었지. 그런데 넌 이유가 뭐지?"
  "...."
  "알겠다. 너도 똑같이 그 바보 같은 생각 때문에 여기를 찾아 온 게로구나. 넌 
지금 네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있지? 난 땅 위의 그 걸어 다니는 것들이 무슨 
매력이 있는지 정말 모르겠어. 그런데도 넌 그들처럼 되길 원한다구? 물론 난 네가 
절름발이 오리가 되고 싶다면 그렇게 해줄 수 있고, 돼지가 되고 싶다면 돼지로 
만들어 줄 수도 있어. 뭐든지 말이야. 그런데 아주 큰 문제가 있어."
  "그게 뭔데요?"
  "넌 고통을 겪어야만 해. 네가 새로 얻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넌 칼 위를 걷는 
듯한 고통을 겪게 될 거야."
  "상관없어요. 난 아쿠암의 왕비가 되고 싶어요. 그와 결혼만 하면 비단 커튼이 
처진 황금가마를 타고 다닐 텐데요, 뭘."
  "좋아."
  마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건 분명히 네가 선택한 거야. 동굴 안으로 들어오렴."
  막내 인어공주는 며칠 동안 계속해서 마법 수술을 받았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수술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냈고, 빛나던 꼬리 대신 하얀 두 
다리를 얻었다. 하지만 그 우아한 다리는 너무나 약해서 바위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참기 힘든 고통이 뒤따랐다.
  "이제, 너의 아가미를 없애고 인간들처럼 숨을 쉬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해변가에서 해야만 한다. 그리고 넌 이제 멀리 헤엄칠 수 없으므로 내 상어가 널 
태워다 줄 게다."
  막내 인어공주는 약간 긴장했다. 다른 인어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상어를 
무서워했다. 길들여졌다고는 해도 믿을 수 없었다. 마녀의 상어 아놀드는 새하얗고, 
사포같이 꺼칠꺼칠한 피부에 무시무시한 서른 다섯 개의 이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아놀드의 등지느러미 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모든 상어들이 그렇듯 아놀드가 정신없이 몸을 흔들어 댔다.
  "이 상어가 제대로 일을 해낼까요?"
  인어공주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이지."
  마녀가 쏘아붙이듯이 대꾸했다.
  "넌 상어가 피에 미쳐 날뛰지 않게만 하면 돼. 그렇게 됐을 때는 나고 상어의 
행동을 책임질 수 없어. 네 눈이 상어의 눈보다 훨씬 좋으니까 물 속에서 피구름이 
보이면 재빨리 기수를 틀거라. 그리고 해변에 도착하면 이 알약 두 개를 먹은 후 
편안히 누워 있거라. 그러면 넌 잠시 후 잠이 들 거고, 네가 깨어났을 땐, 넌 땅위의 
인간들과 똑같아질 게다. 유감스럽게도 말이야."
  마녀는 말을 마치고 아놀드의 꼬리를 걷어찼다. 그러자 상어가 재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들은 수십 마일을 헤엄쳐 갔다, 가끔 아놀드가 작은 물고기들을 쫓아 
딴 길로 새려고 했지만 그래도 운이 좋았는지 피구름은 만나지 않았다.
  그녀는 해안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어를 보내고는 파도 사이를 헤쳐 
해안가로 걸어갔다. 그러나 칼로 베는 듯한 다리의 통증 때문에 그녀의 걸음걸이는 
너무나 엉거주춤했다. 그녀는 불구가 된 심정이었다.
  지치고 긴장한데다 다리의 통증까지 겹쳐 고통스러웠지만 공주는 야자수 밑에 
누워 마녀가 준 알약을 먹었다. 약기운 때문인지 그녀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
  시간이 지나 잠에서 깨어보니 마녀의 말대로 그녀는 코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불쾌하게 끈적였으며 소금기가 느껴졌다.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몸의 습기가 말라있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왕자가 살고 있다는 성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걸을 때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길 옆에 앉아 쉬어야만 했다. 그녀가 
길 옆에서 쉬고 있을 때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마차에는 뚱뚱한 사내 혼자 타고 
있었다.
  "마을까지 저를 좀 태워 주시겠어요? 다리를 다쳐서 잘 걸을 수가 없어요."
  막내 인어공주가 말했다.
  사내가 마차를 멈추더니 그녀를 한참 동안이나 훑어봤다.
  "댁은 지금 발보다 더 큰 문제가 있는 걸, 작은 아가씨."
  그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아가씨는 대낮에도 이렇게 발가벗고 길거리를 다니시나? 순진하신 건가, 아님 
뭐요?"
  "난 옷이 없어요. 하지만 난 곧 왕비가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난 당신보다 훨씬 
더 잘 차려입을 수 있어요. 난 아쿠암 왕자의 성으로 가고 있는 중이에요. 데려다 줄 
거죠?"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바보이거나 미친것 같지만 어쨌든 올라오쇼. 갈 길이 멀어요, 아가씨, 흐흐."
  마차에 오른 그녀는 사내 옆에 앉았다. 그러자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쓰다듬으며 음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태워 줬으니 어떻게 보상을 할거요, 아가씨?"
  "지금은 돈이 없어요. 후에 왕비가 되면 그때 갚겠어요."
  그녀가 몸을 비틀며 말했다.
  "하지만 난 지금 보수를 받고 싶은데."
  그가 능글맞게 웃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야. 단지 저기 수레 뒤쪽으로 가서 누운 다음 
다리만 벌려 주면 돼. 그것 뿐이야."
  "싫어요."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그녀가 말했다.
  "난 왕자의 신부가 될 몸이에요. 그리고 당신 같은 건달은 관심없어. 내려줘요!"
  "오, 그래?"
  사내가 그녀를 더욱 세게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이치를 생각해봐.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지.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지?"
  "이렇게!"
  그녀는 마차 틈새에서 채찍을 꺼내 손잡이로 그의 배를 찔렀다. 비록 그녀의 
다리는 약했지만, 팔과 어깨는 오랫동안 물 속에서 살아온 덕에 잘 단련되어 있었고 
힘도 좋았다. 사내가 마차 밖으로 고꾸라졌다. 그녀는 재빨리 채찍을 바로 잡고 말을 
쳤다. 그러자 말이 펄쩍 뛰어오르며 속력을 내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펄펄 뛰는 사내를 남겨두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져 갔다.
  인어공주는 자신의 벗은 몸이 지상의 남자들을 흥분시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마차를 세우고 넓은 나뭇잎들을 주워 이리저리 엮어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그리고는 침착하게 말을 몰아 마을로 들어갔다.
  성에 도착한 그녀는 보초에게 말을 걸었다.
  "난 여기 왕자님을 뵈러 왔어요."
  그녀를 본 보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름을 여쭈어봐도 될까요, 아가씨?"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그가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왕자님을 구해 준 이가 왔다고만 전해 주세요."
  그녀의 기이한 옷차림과 당당한 모습에 당황한 그 보초가 다른 보초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잘 모르겠는데 아마 요정인 것 같아. 지금 당장 왕자님께 가서 말씀드려!"
  인어공주는 보초가 뛰어가는 것을 보며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시종이 '대기실까지 인도하라'는 왕자의 전갈을 들고 나타났다. 그녀가 
시종을 따라 들어가자 왕자는 루비가 박힌 왕좌 위에서 삶은 새우를 먹고는 
금이쑤시개로 이를 후비고 있었다. 왕자는 그녀를 거만하게 쳐다봤다.
  "네가 나를 구했다니, 그게 무슨 이야기지?"
  왕자가 물었다.
  "보름도 훨씬 전에 당신은 조난을 당했었죠. 그때 내가 정신을 잃어버린 당신을 
해변까지 데려다 주었어요."
  아쿠암 왕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내 배가 가라앉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모두들 수마일이나 떨어진 해변까지 
내가 밀려 온 것은 기적이라고 했지. 하지만 난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그런데 너처럼 허약해 보이는 소녀가 그렇게 멀리까지 수영을 했다고? 어떻게?"
  "난 수영은 누구보다 잘 해요."
  인어공주가 대답했다.
  그녀는 폭풍 치던 밤에 일어났던 일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배의 상태와 심지어는 
그때 왕자가 입고 있던 옷차림까지 정확하게. 그러자 왕자는 그때 정말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는 것을 믿었다.
  "확실해,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내 생명의 은인이군요."
  왕자가 말투를 고치며 말했다. 
  "당신은 천사이거나 물의 정령이거나 그도 아니면 강력한 힘을 가진 요정이 
틀림없군요.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해보시오. 소원이 뭔지."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그녀가 주저없이 말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왕자의 입이 떡 벌어지더니 입으로 가져가던 새우를 툭하고 
떨어뜨렸다.
  "하,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난 에스투리아의 공주와 약혼한 사이에요. 게다가 
3주 후에 결혼하기로 돼 있어요.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안 될까요? 무엇이든지...."
  "다른 건 싫어요."
  왕자는 식은 땀을 흘렸다. 강력한 힘을 가진 요정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여기서 며칠 묵도록 해요."
  왕자가 제안했다.
  "무슨 방법이 있겠죠. 그동안 나의 궁전에서 마음껏 즐기십시오. 좀 쉰 뒤 당신이 
기운을 되찾으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죠."
  그녀는 매우 호화스러운 방으로 인도되었다. 부드러운 양탄자가 발의 고통을 덜어 
주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사각 침대가 놓여 있었고, 옷장은 아름답고 화려한 
드레스로 가득했다. 하녀가 목욕을 시켜주고, 그녀의 머리를 정돈해 줬으며, 집사가 
과일이 가득 담긴 쟁반과 기이하고 맛있는 여러 가지 음식을 가지고 왔다. 식사 후 
그녀는 잠깐 눈을 붙였다. 한숨 자고 일어나자 몸이 훨씬 가뿐했다. 비록 발의 
고통은 끊이지 않았지만....
  잠시 후 하인 한 명이 그녀를 저녁식사에 초대한다는 왕자의 전갈을 들고 
찾아왔다. 그녀는 왕자의 개인 식당으로 인도되었다. 음식이 차려지는 동안 그녀는 
아쿠암 왕자와 함께 악사들의 음악과 무용수들의 춤을 감상했다. 왕자는 에스투리아 
공주와의 결혼식 이야기를 꺼내며 좀 더 강한 나라와의 정치적 동맹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비록 한번도 에스투리아 공주를 만나본 일은 없지만 그녀가 
똑똑하고 정이 가는 여자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왕가의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자기 마음대로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요."
  "상관없어요. 내가 당신을 구했기 때문에 당신은 나와 결혼해야만 해요."
  왕자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는 대답을 얼버무리며 그녀의 관심을 저녁식사 
쪽으로 돌리려고 애썼다. 식사가 끝난 뒤 왕자는 벽난로 옆에서 그녀에게 체스 두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가 침실로 돌아가 잠이 들자 왕자는 걸음을 재촉하여 왕궁 맞은 편에 
살고있는 어머니를 찾아갔다. 왕비는 모두들 마녀라고 생각할 정도로 현명한 
여자였다. 아쿠암은 왕비에게 그녀 문제를 털어 놓았다. 그러자 왕비는 곧바로 
해결책을 제시했다.
  "네 말대로 그녀가 그렇게 단호하게 나온다면, 차라리 가짜 결혼식을 올려 그녀가 
네 왕비가 되었다고 믿게 하렴. 그리고 3주 후엔 그녀에게 여행을 간다고 말하고 
에스투리아로 가서 진짜 결혼식을 올리거라. 그 다음에는 두 신부를 위한 시간을 
따로따로 잡는 거야, 좀 더 확실한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그 확실한 해결책 때문에 잘못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왕자가 말했다.
  "그 소녀, 아니 요정이거나 다른 무엇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아가씨에게 
호감이 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비록 그녀가 제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걱정 말아라, 아들아. 이런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되기 마련이란다."
  다음날 왕자는 조촐하게 거짓 결혼식을 올려 막내 인어공주가 자신의 왕비가 된 
것처럼 속였다. 신부의 아픈 발이 왕자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지만 그들은 행복했다. 
왕자는 일주일도 안돼서 자신이 그녀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잘 알지도 못하는 에스투리아 공주와의 정략 결혼이 점점 싫어졌다.
  하지만 왕자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되자 여행을 가기 위한 
거짓말을 만들어 냈다. 그는 몇 번이나 사랑스런 왕비와 눈물 젖은 키스를 나누며 
영원한 애정을 다짐했다. 인어공주는 열렬히 그리고 맹목적으로 왕자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왕자를 절대적으로 믿었다.
  에스투리아의 수도에 도착한 왕자는 그 나라 왕과 왕비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환영하는 그들의 태도는 어딘가 어색해 보였고, 공주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환영식이 끝나자 왕자는 용기를 내 공주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갑자기 왕과 왕비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왕이 말을 더듬으며 공주가 
없어졌다고 고백했다. 왕자는 곧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왕의 요청에 따라 공주를 
찾을 때까지 며칠 더 묵기로 했다.
  다음날 밤, 왕자는 유리창을 두들기는 다급한 소리에 잠이 깼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 쪽을 바라봤다. 창문엔 사람 한 명이 밧줄에 매달려 있었다.
  "누구요?"
  아쿠암이 물었다.
  "쉿! 난 에스투리아 공주예요, 절 좀 도와 주세요."
  그는 얼른 손을 뻗어 그녀를 방으로 잡아끌었다. 그녀는 작고 깡말랐으며, 
주근깨가 돋은 뺨엔 사마귀가 나 있었고, 집시처럼 까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기름기 많은 곱슬머리에 약간 찌푸린 얼굴을 한 그녀에게 왕자는 조금의 매력도 
느낄 수 없었다.
  "당신이 정말 이 나라의 공주예요?"
  그녀는 대답 대신 그에게 손을 뻗어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반지를 보여 주며 
말했다.
  "당신께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당신은 정말 기품있어 보이는군요. 하지만 난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할 수도 없어요. 난 아버지가 절대로 결혼을 
허락하시지 않을 평범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밤 난 그와 함께 
도망갈 예정이에요. 난 더 이상 공주로 남고 싶지 않아요. 다만 당신이 내 행동에 
대해 화내지 말고 조용히 돌아가시고, 우리 부모님과 전쟁 따위는 일으키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리러 온 거예요. 그렇게 해 주실 거죠?"
  왕자는 그녀의 경솔한 행동보다 자신이 왕궁에 남겨두고 온 신부 생각이 먼저 
났다. 그는 공주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마세요, 공주님.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아요. 내가 
당신의 부모와 잘 해결해 보죠. 그와 행복하게 살길 바라겠어요. 그런데 상대방은 
대체 누구입니까?"
  "대마법사이자 치료사인 스클레피오랍니다. 언젠가 당신이 그를 만나게 된다면 
당신도 기뻐할 거예요. 당신의 이해와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군요, 아쿠암 왕자님."
  그녀는 왕자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는 창가로 다가가 밧줄을 잡았다. 그녀가 
밧줄을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지붕 위에서 누군가 그 밧줄을 끌어올렸고 (왕자는 
아마 스클레피오일 거라고 생각했다.), 공주는 곧 사라져 버렸다.
  다음날 왕자는 자신의 왕궁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는 에스투리아 왕과 
왕비에게 자신은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왕국에서 보낸 시간이 정말 
즐거웠다고 인사를 했다. 그는 또 두 나라가 영원히 친선을 유지할 것을 제안하고 
공주가 돌아온다면 자신도 기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공주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막내 인어공주는 기쁜 얼굴로 왕자를 맞이했다. 그녀는 궁중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다시 한 번 결혼식을 올리자는 왕자의 제안을 듣고 더욱 기뻐했다.
  한편, 왕자가 없는 동안 막내 인어공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 왕비는 
그녀에게 더 큰 호감을 보였다. 왕비는 그렇게 사랑스러운 소녀에게 왕자를 제대로 
보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때문에 왕자가 결혼식을 다시 거행한다고 말했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그녀는 역대 어느 결혼식보다도 화려한 결혼식을 위해 
온갖 지혜를 동원했다. 자신이 직접 인어공주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 주었으며,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그녀를 포옹하고 키스를 했다.
  인어공주 역시 시어머니의 애정을 따뜻하게 받아들였다. 그 후 두 여성은 매우 
가까워졌으며, 인어공주는 친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의 상처를 시어머니와의 
따뜻한 관계를 통해 치료받을 수 있었다. 
  왕위에 오른 아쿠암 왕자는 자신의 어머니와 왕비가 된 인어공주의 도움을 받으며 
나라를 통치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인어공주도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그러나 
발의 고통이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수많은 의사들이 치료를 시도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병을 고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명한 치료사인 스클레피오가 아내와 함께 아쿠암의 왕궁을 
방문했다. 아쿠암 왕과 치료사의 아내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서로 비밀스런 
눈짓을 교환하며 미소를 보냈다.
  왕비의 발을 살펴 본 스클레피오가 말했다.
  "이건 병이 아니고 마법이죠. 제가 고칠 수 있을 겁니다."
  스클레피오는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발의 
고통이 사라졌다. 그는 또 인어공주의 발 마사지와 수영 등 운동을 통해 발의 힘을 
기를 수 있는 처방을 내렸다. 그의 처방대로 하며 몇 달이 지나자 그녀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걸었던 사람처럼 잘 걷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달리기도 거뜬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쿠암 왕은 치료사와 그의 아내에게 왕비를 치료해 준 공로로 거대한 땅과 작은 
성 하나를 상으로 내렸다. 그 후 그들 두 커플은 매우 가깝게 지내며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사이가 됐다.
  몇 년이 지나 인어공주는 왕위를 이을 딸 하나를 낳았다. 그런데 그녀의 발가락 
사이에는 물갈퀴가 달려 있었다. 그러자 모든 예언자들이 앞을 다투어 이 전례없는 
탄생이 장래 바다의 지배자가 될 징조라고 말했다.
  어린 공주는 강하고 지혜로웠으며, 또한 아름답게 자라났다. 그리고 그녀는 
예언자들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려서부터 세상에서 가장 수영을 잘 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신데헬
  
  이 이야기는 중세시대의 교회와 국가(Ecclesia and Nobilita)를 풍자하고, 또한 
북유럽의 토착신앙인 여신 헬(hell: 현대 영어로는 지옥을 뜻하지만 원래 죽은 자의 
세계를 나타내는 말로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죽음의 여신을 뜻한다)에 대한 
숭배의식에 담긴 종교, 정치를 보여준다.
  독일에 있는 "신데렐라"의 원본을 보면, 정령이 신데렐라에게 주는 선물은 
어머니의 무덤에서 자란 신성한 나무임을 알 수 있다. 어머니의 무덤은 과거에 
여신을 섬겼던 신성한 장소를 의미할 것이다. 또한 이 이야기는 도시로 대표되는 
중세 교회의 정치적 힘과 시골에서 여신에게 드렸던 제사가 지닌 영적인 힘, 이 두 
세력간의 불편한 관계를 다루고 있다.
  이 여신은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한 가지는 본래의 지하세계, 즉 명부를 지배하던 
지하여신을 의미하며, 다른 한 가지는 중세 교회가 지배하던 시절에 그 숭배의식이 
은밀하게 지하로 내려가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신데헬이 자신의 월경혈을 마법으로 사용한 것은, 오래 전부터 마녀들이 마술을 
부릴 때 그 방법을 사용한다고 굳게 믿어왔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이전의 시대에는 
여자의 월경혈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동시에 혈연의 기초라고 믿었다. 또한 
그것은 영적인 힘과 만나는 데 필수적인 매개체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서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자의 월경혈을 두려워했고, 그 피가 남성 신에게 도전할 수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미신적 관습이 굳어져 여자의 월경혈을 특별히 금기시했다.
  고대 그리스의 데메트르 여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엘레우시스 의식(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비밀종교의식. 지모신 데메트르는 지하세계의 신하데스 
플루토에게 유괴 당한 딸 페르세포네를 찾으러 엘레우시스에 갔다가 엘레우시스 
왕가와 친하게 되었고 아들을 받아달라는 여왕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데메테르는 이 
소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도록 만들어 주려다가 여왕이 두려워 한 
까닭에 실패하자 왕가에 자기 신분을 밝히고 은둔할 수 있도록 신전을 지을 것을 
명령한다. 이 의식에는 바다에서 거행하는 목욕의식, 3일 동안의 금식, 여전히 
비밀로 남아있는 본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입문의식을 마치면 입문자들은 내세에 몇 
가지 복을 약속받았다)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구두 속 제왕의 홀은 신성한 결혼의 
상징이었다. 오늘날의 여러 가지 신발 숭배 의식에서도 그러한 상징이 잠재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지하세계 여신은 명예롭게 죽은 자들의 여왕이었으며, 
동시에 어머니가 되기 전까지의 여성을 지배하고 보호해주는 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여신은 지상에 자신을 섬기는 많은 여사제들을 두었다. 그 여사제들은 세상에 
도덕적 체계를 세웠고, 사람들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선행을 
기록했다. 여사제들은 또 싸움을 중재하거나 병든 자들에게 약을 처방해 주고 
아기들을 태어나게 하는 등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일했다. 그 외에도 여사제들은 
수없이 많은 물질적, 사회적 봉사를 실천함으로써 세상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었다. 
사람들 역시 여신과 여사제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여신이 다스리는 세계에서 
영혼으로 살고 있다고 믿은 자신들의 조상을 숭배했다.
  그 후 검으로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남사제들이 세상에 나타났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남신을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목숨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아직까지도 여사제들이 활짝 트인 들판과 숲에서, 
또는 가정에서 경배의식을 계속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은 여신을 섬기던 
신전을 폐쇄했다.
  그들 여사제 가운데 한 명이 부자 청년과 결혼하여 아름다운 딸을 낳았다. 그들은 
딸의 이름을 지하세계 여신들의 이름 중 하나인 헬(Helle)이라고 지었다. 헬이란 
여신이 죽은 사람들을 받아들인 뒤 그들을 다시 아기로 환생시키는 작업을 하는, 
지하 깊은 곳에 숨겨진 방을 뜻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헬은 매우 신성한(holiness, 
혹은 hellness) 이름이었다.
  여사제였던 헬의 어머니는 그 이름이 딸의 삶을 축복해 줄 것을 소망했지만 
불행하게도 그녀의 믿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헬이 어릴 때 죽고 말았다.
  그 후 헬의 아버지는 크리스티아나라는 거만하고 탐욕스러운 여자와 재혼했다. 
그녀는 노빌리타와 에클레시아라는 다 자란 두 명의 딸을 데리고 왔다.
  헬의 새엄마와 언니들은 그녀를 하녀 부리듯 했다. 헬에게 강제로 누더기 옷을 
입히고 온갖 집안 일을 시켰으며,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소한 일들까지 
헬에게 시중들게 했다. 그러나 사업관계로 먼 곳으로 자주 출장을 가야 했던 헬의 
아버지는 집안 일을 둘러 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늘 사업에만 열중했다. 새 
가족들의 욕심을 채워주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노빌리타가 하는 일이라고는 최고급 비단과 공단, 그리고 담비 가죽으로 된 옷을 
차려 입고, 온종일 거드름을 피우며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채찍과 단도로 
위협하면서 헬에게 복종하도록 강요했다. 에클레시아는 경건하고 겸손한 척했지만 
그녀 역시 언니 못지 않게 치장하기를 좋아했고 영악했다. 새디스트적인 면이 있는 
그녀는 헬의 '죄'를 운운하면서 노빌리타의 악질적인 행동을 은근히 즐겼다.
  헬이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해가자 질투 많은 새언니들은 그녀를 더욱 못살게 
굴었다. 그녀들은 헬의 얼굴과 머리카락에 숯덩어리나 재를 묻혀 그녀가 조금이라도 
아름다워 보이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신데헬'이라고 불렀다.(신데헬은 
'재를 뒤집어 쓴 헬' 이라는 뜻이다.)
  에클레시아는 종종 헬에게 말했다.
  "네 빛은 꺼졌어. 네 엄마는 마녀였고, 네 여신은 죽었어. 넌 재투성이 하녀에 
불과할 뿐이야."
  혼자있는 날이면 신데헬은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가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하소연하곤 했다. 그 무덤가에는 우아한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는데, 
바람결에 나뭇가지가 바스락거릴 때마다 그녀는 엄마의 영혼이 자신을 위로하는 
거라고 상상했다.
  당시에는 매년 할로우 이브(Hallow Eve:제성절 전야) 행사가 여전히 왕실의 
무도회를 통해 기념되고 있었다. 할로우 이브는 여러 여신 가운데 한 명이 
조상들에게 영예를 베푸는 추수절 축제였다.
  그 해의 무도회는 어느 때보다 성대하고 특별하게 행해졌다. 잘 생긴 젊은 왕자 
포퓰로(Populo:백성이라는 뜻의 people을 연상시킨다)가 그날 밤에 모인 아가씨들 중 
한 사람을 할로우 이브의 여왕으로 뽑아 왕관을 씌워 주고, 그녀를 자신의 신부로 
맞을 것이라고 공표했기 때문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모든 아가씨들이 무도회 초청장을 애타게 기다렸다. 신데헬의 
새언니들도 의전관이 초청장을 전해 주었을 때 몹시 즐거워했다. 두 사람은 
무도회에 입고 갈 의상을 고민하며 치장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신데헬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뭘 입어야 되지?"
  "너?" 노빌리타가 외쳤다.
  "넌 평상시처럼 입고 집에나 처박혀 있어. 석탄재나 치우면서 말이야. 넌 무도회에 
못 가."
  "하지만 초청장은 이 집의 모든 숙녀들에게 보내진 건데요."
  신데헬이 항의하듯 대꾸했다.
  "넌 숙녀가 아냐. 넌 하녀라고."
  "나도 언니들과 마찬가지로 숙녀예요."
  신데헬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두 언니들이 그녀에게 달려들더니 마구 때리고, 
꼬집고, 머리채를 잡아당기다가 마침내 그녀를 방 밖으로 밀어내 버렸다.
  "가서 일이나 해. 이 마녀 새끼야!"
  에클레시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넌 무도회에 못 가. 앞으로도 영원히."
  축제일이 다가오자 새엄마와 두 언니는 신데헬에게 그들이 입고 갈 무도회 의상을 
수선하라고 했다. 신데헬은 다락방에서 바느질을 하며 눈물로 실을 자주 적셔야 
했다.
  언니들은 상대방의 옷이 조금이라도 더 예쁘다고 느껴지면 신데헬을 못살게 
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질투하며 자기가 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온갖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할로우 이브의 여왕으로 뽑혀 포퓰로 왕자와 결혼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노빌리타는 자신이 여왕으로서 타고난 자질과 
품위를 지녔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될 것이라고 우겼고, 에클레시아는 자신만이 모든 
선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장본인이므로, 만일 왕자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드디어 무도회날. 헬의 새엄마와 새언니들은 탑 모양의 마차를 타고 무도회장으로 
출발했다. 홀로 남겨진 신데헬은 한없는 슬픔에 잠겨 엄마가 살아 계셨을 때 가르쳐 
준대로, 호박의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양초를 꽂아 추수절의 보름달을 상징하는 
주홍빛 장식물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엄마에게 선물하기 위해 엄마의 
무덤으로 갔다. 신데헬은 버드나무 아래 앉아 서럽게 울며 어머니의 영혼에게 
괴로운 심정을 털어 놓았다.
  잠시 후, 신데헬은 나무가 그녀에게 말하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헬, 나의 딸아. 울지 말아라. 너도 무도회에 갈 수 있단다. 넌 지금 월경중이기 
때문에 마법을 쓸 수 있어. 그러나 꼭 유념할 것이 한 가지 있다. 요정의 선물은 
자정이 되면 마법의 힘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신데헬은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에 온 정신을 집중시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새 눈물도 다 말라 있었다.
  "제성절 호박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거라. 집에 도착하면 먼저 양초의 불을 끄고는 
거미줄 두 가닥과 이슬 두 방울, 숯덩어리, 정원의 지렁이, 덫에 걸린 쥐, 딱정벌레 
여섯 마리를 가져다 호박 속에 집어 넣어라. 그리고는 그것들 위에 너의 월경혈을 
뿌리도록 해라. 그런 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지켜보거라."
  신데헬은 나무정령이 시킨대로 행동에 옮겼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호박이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놀랍게도 바퀴가 생기고, 문과 창문이 달린 빛나는 
황금마차가 되었다. 거미줄은 아름다운 무도회 가운으로 변했는데, 은회색 실크 
망토에는 핏방울이 응결되어 만들어진 루비들이 망토 전체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슬방울들은 루비장식이 달린 아름다운 수정구두로 변했고, 숯덩이는 흑진주 
목걸이로 변했으며, 지렁이는 루비로 된 눈을 가진 뱀모양의 황금팔찌로 변했다. 또 
양초는 호두 크기만한 루비가 박힌 호화로운 황금관으로 변했고, 쥐들은 마부로 
변해 진홍색의 화려한 벨벳 쟈켓을 입고 호화로운 가발을 쓰고 있었다. 여섯 마리의 
딱정벌레들은 여섯 마리의 흑마로 변했는데, 말들은 석류석과 홍옥장식이 달린 
사슴가죽과 금제 마구로 장식되어 있었다. 말과 마차는 너무도 훌륭하게 잘 
어울렸다.
  신데헬은 매우 기뻤다. 그녀는 서둘러 누더기를 벗고 깨끗이 씻은 뒤 요정이 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마차에 탔다. 그러자 마부들이 친절하게 그녀를 궁전까지 
데려다 주었다. 신데헬이 무도장에 들어서자 장내는 크게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포퓰로 왕자는 씩씩하게 신데헬을 맞이하여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다. 그날 
왕자는 신데헬에게 너무나 매혹된 나머지 저녁 내내 다른 아가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가 춤을 추지 않을 때면 그녀 옆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이 손수 음료를 가져다 주기도 했다. 왕자는 신데헬에게 이름을 밝혀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는 차마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처지와 똑같은 의미를 가진 
신데헬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많은 숙녀들과 마찬가지로 노빌리타와 에클레시아도 왕자의 관심을 독점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낯선 아가씨의 갑작스런 출현에 몹시 화가 났다. 포퓰로 왕자가 
신데헬을 제성절 전야의 여왕으로 선택했다고 발표하는 동안, 헬의 새 언니들은 
분한 마음에 이를 갈면서도 그저 바라봐야만 했다.
  예비 결혼의식이 시작될 때 신데헬은 그녀의 수정구두를 잠시 벗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두 사람의 결합의 상징으로 그녀의 구두 속에 왕자의 홀을 집어 넣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의식이 막 거행되는 순간,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신데헬은 갑자기 요정의 선물은 자정에 그 효력을 상실한다고 했던 어머니의 경고가 
생각났다.
  신데헬은 왕자의 손에 구두를 남겨둔 채 무도회장을 서둘러 빠져나갔다. 그녀가 
마차에 도착했을 때 마차는 이미 호박으로 변하고 있었다. 마부는 쥐로 변해 재빨리 
달아났고, 말들은 검은 딱정벌레로 줄어들더니 종종걸음을 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녀가 입고 있던 실크 가운도 그녀의 몸에 핏방울 자국만 남겨둔 채 거미줄로 
변하여 사라졌다. 팔찌는 지렁이로 변하여 땅으로 떨어졌고, 흑진주 목걸이도 다시 
숯으로 변해버렸다. 신데헬의 한쪽 발에 남아 있던 수정 구두마저도 물방울이 되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재빨리 숲으로 도망친 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작은 숲길을 따라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새언니들이 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신데헬은 누더기 
차림으로 불가에 앉아 있었다.
  언니들은 왕자를 사로잡은 채 사라져버린 의문의 낯선 아가씨에 대해서 끝없이 
떠들어댔다.
  "글세, 생각해봐. 왕자에게는 이제 아름다운 신부대신 작은 구두만 있을 뿐이야. 
신부를 찾을 수 없을 테니 그 결혼은 분명히 무효라구."
  노빌리타가 말했다.
  신데헬의 새언니들은 왕자의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왕자가 가지고 있는 한 쪽의 
수정구두는, 왕자의 홀이 지니고 있는 마법의 힘 때문에 요정의 마법이 풀리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왕자는 왕국의 모든 아가씨들에게 구두를 신어보게 하라고 
공표했다. 그는 자신이 홀의 의식에 따라 이미 결혼을 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구두의 주인을 찾아서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자는 아가씨들에게 구두를 신겨 보기 위해 혼기가 찬 아가씨가 있는 모든 집을 
매일 방문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 구두에 꼭 맞는 작고 아름다운 발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왕자 일행이 신데헬의 집에 도착했다. 새엄마와 새언니들은 왕자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기 위해 다과를 내오고 온갖 값진 물건들을 늘어놓고 자랑하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 노빌리타는 가족 중 유명한 인물들의 초상화가 담긴 앨범을 
가져와 내밀었고, 에클레시아는 자신의 선행과 지식에 대해 허풍을 늘어놓았다. 
그녀들은 왕자에게 자기들의 박식함과 교양, 그리고 예술감각 등을 과장해 드러내며 
왕자를 감명시켜보려고 온갖 애를 썼다.
  하지만 왕자는 특별한 감동을 받지 못했다. 왕자가 보기엔 두 사람은 며칠 동안 
만난 수많은 아가씨들의 평균적인 수준보다 나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자는 그들의 발 앞에 구두를 내놓았다. 노빌리타와 에클레시아는 발을 밀어넣고 
뒤틀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두 사람의 발은 신발에 맞지 않았다.
  그녀들이 계속 애를 쓰는 동안 포퓰로 왕자는 난로가에 앉아 있는 신데헬을 
발견했다. 비록 먼지로 덮여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녀를 본 왕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전율을 느꼈다.
  "저 아가씬 누구요?" 왕자가 물었다.
  "그 아인 하녀예요." 노빌리타가 대답했다.
  "게으르고 더러운 계집종입니다." 에클레시아도 한마디 거들었다.
  "잠깐! 저 아가씨의 발은 아주 작아 보이는데, 그녀도 구두를 신어보게 하지."
  "안됩니다, 전하." 새엄마가 소리쳤다.
  "저 애는 시골뜨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아인 여기 이 두 사랑스런 
아가씨들처럼 왕자님과 어울릴 수는 없죠."
  헬의 두 언니는 억지로 애교있는 미소를 지었다.
  "저 아가씨에게도 신어보게 하라." 왕자가 명령했다.
  신데헬은 평소에는 그녀에게 금지되었던 팔걸이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포퓰로 
왕자가 손수 그녀의 발에 구두를 신겨 보았다. 구두는 정확히 맞았다.
  "이 아가씨가 바로 나의 신부로군."
  재와 얼룩에 가려진 그녀의 진짜 얼굴을 알아본 왕자가 기쁜 표정으로 외쳤다. 그 
말을 들은 신데헬은 입맞춤으로 응답했고 그 때문에 왕자의 얼굴 역시 더러워졌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더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즐겁게 웃었다.
  며칠 후, 왕자와 신데헬의 진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왕비가 된 신데헬은 자기 
어머니의 무덤에 신전과 사원을 세우고는 그 무덤가의 버드나무를 '신령한 나무'라 
명명했다.
  신데헬은 큰언니 노빌리타를 왕궁에서 가장 부유한 공작부인의 비서겸 동료로 
지내게 했다. 그 공작부인 역시 노빌리타처럼 왕국의 여섯 주에서 가장 거칠고, 
버릇없고, 퉁명스럽고, 다루기 힘들고, 거짓말을 잘 하는 교양없는 여인이었다. 
노빌리타는 공작부인을 보며 자신의 지난날을 깊이 반성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잘난 체하는 태도를 버리고 진실한 사람이 되었다.
  또 둘째 언니 에클레시아에게는 아픈 사람들을 돕게 함으로써 경건한 체하는 
그녀의 생활방식을 실제로 행하게 했다. 그러자 에클레시아는 그러한 삶 속에서 
즐거움을 얻게 되었고, 성녀라고 불릴 정도로 신실한 사람으로 변했다. 하지만 
새엄마 크리스티아나는 어떤 것에도 끝내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 속에 살다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리고 포퓰로 왕과 헬 왕비는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
  
    개구리 공주
  
  어렸을 때 나는 개구리를 무척 좋아했다. 개구리는 언제나 생기가 넘치면서 
잡기도 쉬운 편이었고 가지고 놀기도 좋았다. 다른 동물과는 달리 사람을 물지 
않는다는 것도 내가 개구리를 좋아하는 이유중 하나였다.
  개구리는 아주 작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동물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을 
지니고 있다. 또 물고기처럼 수중 호흡하는 올챙이 시기를 거치는 그들만의 독특한 
인생 주기는 언제 보아도 신기했다.
  개구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개구리 왕자"를 읽었을 때 여주인공이 개구리와 
입맞추는 걸 질색을 하며 싫어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이 된 후에 나는 개구리가 위대한 여신 비너스와 헤카테의 토템에 바치는 
신성한 제물로 널리 이용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기독교 시대가 들어서면서 
개구리는 마녀와 친한 동물로 빈번히 등장하게 된다.
  내가 개구리를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여기는 이유는 암캐구리가 대개 수컷보다 
크고 힘도 세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구리는 가끔 자신의 성을 바꾸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숲속 깊은 곳의 어느 연못가에 초록빛 눈을 가진 예쁜 
암캐구리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생기가 넘쳐났다. 그녀는 햇살이 따사로이 
내리쬐는 숲속을 쉴새없이 즐겁게 뛰어다녔고, 잠자리나 나비를 쫓아 시냇가에서 
헤엄을 치기도 하고, 백합꽃이 피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날부턴가 그녀의 연못으로 한 왕자가 낚시대를 들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왕자는 언제나 한적한 호숫가 언덕 위에서 무심히 낚시대를 드리운 채 
골치 아픈 나랏일들을 잊으려는 듯 휴식을 취하곤 했다.
  왕자의 낚시 솜씨는 그다지 훌륭하지 못해서 가끔 한두 마리의 물고기를 잡을 뿐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한 때가 더 많았지만 수확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잠시동안만이라도 자연과 어울려 혼자 있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적인 듯 했다.
  왕자는 항상 많은 신하와 하인과 함께 왔다. 그러나 왕자는 늘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혼자 낚시대를 드리우고는 돌아갈 때까지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날, 초록빛 개구리는 왕자가 낚시대를 잡고 호숫가의 나무에 기대어 
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나직히 코까지 골고 있었다 졸고 있는 왕자의 
모습은 측은해 보였지만 개구리는 왕자가 아주 잘 생겼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개구리의 머릿속은 온통 왕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찼다. 자신이 
사는 연못을 아주 좋아하는 듯한 이 우아한 옷차림의 인간에 대한 개구리의 애정은 
더욱 깊어만 갔다. 이제 왕자가 호수를 방문할 때면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왕자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그분은 왕자님이고 나는 
볼품없는 개구리일 뿐이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왕자에게 다가가고픈 개구리의 열망은 날이 갈수록 더욱 깊어졌다. 그런데 다른 
개구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개구리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떠올리자 개구리가 인간으로 변신하는 것이 그렇게 드문 일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요정이 도와주기만 한다면 된다고 믿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요정이라도 몇 마일은 가야 만날 수 
있었다. 그곳은 습기라고는 전혀 없는 아주 건조한 지역이었다. 그만한 거리를 
다녀오려면 탈수증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것은 개구리에게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나 왕자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깊었으므로 그녀는 요정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녀는 피부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수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비오는 날 아침을 
택해 요정이 사는 집을 향해 팔딱팔딱 뛰며 연못을 출발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비는 점심 때가 되기도 전에 그쳤고 숲속의 습기는 점차 마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뛰는 것을 멈추고 약간의 수분이라도 얻기 위해 축축한 이끼에 
자신의 몸을 비벼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조금씩 탈수증의 끔찍한 
증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녀는 가던 길을 재촉하며 양서류 어머니 
여신에게 고통을 덜어줄 웅덩이나 샘물, 그렇지 않으면 작은 개울, 그 어떤 곳이라도 
찾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그녀는 점점 힘이 빠졌다. 결국 이젠 정말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에야 그녀는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았다. 물이 가득 찬 물통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말을 타고 지나가던 여행자가 떨어뜨린 것으로 보이는 물통은 코르크 
마개로 닫혀져 있었지만 그 안에선 생수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이제는 살았구나. 저 코르크 마개를 벗겨낼 방법만 찾는다면 말야..."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물통 뚜껑을 벗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의 연약한 
물갈퀴로는 뚜껑을 제대로 잡을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이빨도 없는 입으로 
물어뜯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시 절망에 빠진 그녀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건조한 허공을 올려보다가 단풍나무가지에 걸터앉은 까마귀 한 마리를 발견했다.
  "마음 착한 까마귀야, 제발 날 좀 도와다오. 난 지금 물이 몹시 필요하단다. 이 통 
안에 물이 있기는 하지만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걸 열 수가 없구나. 너의 그 
날카로운 부리로 이 코르크 마개를 뽑아 줄 수 없겠니?"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네가 죽으면 내 아이들에게 줄 훌륭한 양식거리가 하나 더 
생기는데 말이야. 난 네가 살아 있는 것보다 죽어 있는 걸 보고 싶구나."
  그녀는 이제 거의 절망에 빠졌다. 그런데 조금 더 높은 가지에 부엉이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부엉마님, 제발 절 좀 도와주세요. 마님의 굽은 부리와 발톱으로 이 물통 좀 
열어주세요."
  그녀가 애절하게 간청했다. 그러나 부엉이도 깃털을 손짓하는 시늉을 하며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비아냥거렸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죽겠구나. 내 사랑스러운 먹이야."
  "새들은 모두 먹을 것만 밝히는구나." 개구리는 혼자 중얼거렸다.
  "안되겠어, 초식동물을 찾아봐야지."
  그러자 그녀의 기원에 응답이라도 하듯 얼룩무늬 뿔이 달린 사슴이 그녀 뒤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고결하신 사슴님!" 그녀는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제발 저를 좀 도와 주세요. 당신의 힘센 뿔로 이 물통의 마개를 뽑아 주실 수 
없나요?"
  "좋아요."
  사슴은 발굽으로 물통을 붙잡고 코르크 마개를 입으로 물어 뽑았다. 순간 물이 
왈칵 쏟아지면서 작은 웅덩이가 생겼다.
  개구리는 재빨리 웅덩이에 풍덩 뛰어들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자비로우신 사슴님! 제 생명을 구해주셨습니다."
  "별것도 아닌데 뭘." 사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제가 왕비가 되면 사슴사냥을 영원히 금지하는 법을 만들겠어요. 약속합니다."
  사슴은 빙긋이 미소만 지었다.
  "그래, 내 머리에 둥근 뿔이 돋아 산양이 될 때쯤이면 그렇게 되겠지. 행운을 
빌어요, 왕비님."
  사슴은 뿔을 치켜 세우며 사라져 버렸다.
  기운을 되찾은 개구리는 요정의 집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요정의 집은 조개 
껍질과 수정과 오색영롱한 깃털로 장식되어 있었다 요정은 깨끗한 빗물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를 감고 있는 중이었다.
  개구리는 목욕통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요정에게 자신의 문제를 하나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넌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마른 풀잎으로 만든 수건으로 머리를 말아 올리며 요정이 대답했다.
  "난 너무 늙었어. 그리고 이미 은퇴했는걸. 이젠 요정들과 함께 추는 춤도 추지 
않고, 달빛 환영도 만들지 않는단다. 물론 마술 변신도 하지 않지. 그러니 내 
여동생인 산의 요정 마야에게 가보는 게 어떻겠니?"
  "전 산은 오를 수가 없어요."
  개구리가 슬픔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살아서 여기까지 온 것도 천만 다행인 걸요. 요정님이 절 도와 주실 수 없다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나아요. 왕자님과 결혼할 수 없다면 전 절대 행복해 질 
수 없으니까요."
  "그래, 아무도 널 비난할 수는 없을 거다. 넌 분명히 꿈이 큰 아가씨니까. 
말해봐라. 만일 내가 옛날 도구들을 한 번 더 꺼내서 아직도 내게 요술능력이 남아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넌 내게 어떻게 보답하겠느냐?"
  "제 힘이 닿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요정님께 해 드리겠습니다."
  "좋아. 그럼 네가 왕자비가 되었을 때, 아니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를 찾아 저기 돌제단 위에 갖다 바치겠다고 약속하거라. 아무리 늙은 
요정이라도 보석에 대한 애정은 버릴 수 없거든."
  "약속하겠습니다."
  개구리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런데 넌 개구리가 인간으로 변신하는 마법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무언지 
알고 있느냐?"
  "아뇨. 그게 뭔데요?"
  "키스를 받아야 한다. 입술에다가 말이야. 그것도 개구리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으로 변신할 수 없다. 그리고 네가 다시 연못으로 돌아가면 그 
마법은 풀리게 된다."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할 일이구요."
  개구리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저 신이 나서 재촉했다.
  "어서 마법을 보여 주세요."
  요정은 오랫동안 쓰지 않아 먼지가 뿌옇게 쌓인 마법책을 꺼내 여기저기를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또 여러 가지 마법가루와 증류수를 모아 섞으며 
주문을 외우고는 그녀가 마법의 묘약을 개구리의 온몸에 뿌렸다.
  "이게 다예요? 아무런 차이도 못 느끼겠는데요."
  "물론 그렇겠지. 입맞춤을 받기 전까지는 아무런 변화도 없을 거야."
  "어떻게 해서든 왕자님이 내게 키스하도록 해보겠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요정님과의 약속은 꼭 지키겠습니다."
  요정은 개구리가 돌아가는 동안 피부의 습기를 보존할 수 있는 마법도 
걸어주었다.
  자신의 호수로 돌아온 개구리는 왕자가 낚시대를 들고 나타났을 때 대담하게 왕자 
옆으로 바싹 다가갔다.
  "오, 다시 왔구나, 개구리야." 왕자가 반갑게 말했다.
  "미끼가 되어주러 왔나 보구나?"
  그 말에 깜짝 놀란 개구리가 움찔하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왕자는 개구리가 
자기 말을 알아듣는 것이 신기해서 소리내어 웃으며 다시 말했다.
  "무서워 하지마, 꼬마야. 이렇게 영리한 생물을 미끼로 죽게 할 수는 없지."
  왕자는 나지막히 콧노래를 부르며 낚시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개구리는 조심스럽게 팔딱팔딱 뛰면서 조금씩 왕자에게 다가갔다. 개구리는 한 
번만 더 뛰면 왕자의 무릎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갔다. 그러자 왕자가 
개구리를 내려다보았다. 개구리는 보석처럼 빛나는 두 눈으로 왕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넌 참 용감한 개구리구나. 널 한 번 만져봐도 될까?"
  왕자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개구리는 왕자가 자신의 머리를 만져 볼 수 있도록 허락했다. 떨리기는 했지만 
가만히 있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아무리 왕자가 매력적으로 보인다 해도 
개구리에게 인간이란 존재는 경계해야 하는 적이었기 때문이다.
  왕자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다소 안심이 된 개구리는 왕자에게 자신의 등을 
만져볼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리고는 감히 왕자의 허벅지 위로 뛰어 올랐다. 왕자는 
다시 한 번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야생 개구리를 길들인 것 같구나. 이 세상에 이런 명령을 할 수 있는 
통치자는 아마 없을 거다."
  그 후 왕자가 연못에 올 때마다 개구리는 왕자의 무릎 위로 뛰어 올라 낚시를 
하는 왕자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곤 했다. 왕자도 점차 개구리가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만날 때마다 그들은 연못가에 나란히 앉아 왕자는 이따금씩 입질하는 물고기를 
낚고, 개구리는 날아드는 파리를 잡아먹곤 했다. 개구리는 자신의 변신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하지만 왕자가 자신에게 입맞추게 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나른한 여름날 오후였다. 낚시를 하던 왕자가 연못가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낚시대가 손에서 떨어지며 왕자의 상반신이 스르르 옆으로 기울어지더니 
얼굴 한쪽이 땅바닥의 이끼 낀 바위 위에 닿았다. 개구리는 이따금씩 왕자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재빨리 이끼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삐죽하게 
튀어나온 자신의 입술을 왕자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아주 가까이 갖다댔다. 그 
순간 왕자의 입술이 움직였고 마침내 입맞춤이 이루어졌다.
  개구리는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은 몸통이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마치 고무풍선처럼 크게 부풀어 오르더니 점점 커지는 것이었다. 코가 점점 
커지면서 입은 점점 작아졌고, 앞다리가 길어지고 피부가 꺼칠해지면서 
건조해지더니 드디어 아름다운 초록 가운을 걸친 인간을 변했다.
  그녀의 온몸은 따뜻해졌다. 그녀의 잇몸에서는 이빨이 돋아나고, 머리에는 
부드러운 금발이 돋아났다. 눈깜짝할 순간에 개구리는 매력적인 여자로 완벽하게 
변한 것이었다. 단 하나 그녀의 반짝이는 커다란 초록빛 두 눈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왕자가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잠에서 깨어난 왕자는 
그녀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아름다운 아가씨, 누구시죠? 어디서 오셨죠? 숲속의 요정인가요?"
  "제 이름은 라나예요."
  개구리 처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대답했다.
  "전 요정이 아니에요. 전 그냥 왕자님의 말벗이 되려고 왔습니다."
  왕자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낚시하던 것도 잊어버린 채 처음 만난 
라나와 반나절 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녀는 자연에 대해 
많은 것들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특히 숲에 사는 동물들이나 새, 곤충, 
심지어 그보다 더 작아 인간의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생물들은 물론, 왕국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어부들한테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물고기의 습관, 해초, 가재, 
달팽이, 물벼룩, 잠자리, 모기, 애벌레 등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왕자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물거미가 어떻게 수영을 배우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왕자는 너무도 신기해서 라나에게 자신의 왕궁으로 함께 가서 머물고 싶을 때까지 
자신의 손님이 되어 달라고 정중하게 초대했다. 물론 라나도 기꺼이 수락했다.
  왕자를 따라 나선 개구리 처녀는 왕자가 사는 웅장한 성과 복잡한 예절에 
위압감을 느꼈다. 임금은 나이 많은 홀아비로 기력이 날로 약해져서 왕자가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왕자는 처리해야 할 국사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따라온 아리따운 손님과 몇 날 며칠을 같이 지냈다.
  왕자는 곧 라나를 너무나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그녀와 
함께 있고 싶어했다. 이렇게 되자 왕자는 그녀에게 청혼을 했고 라나 역시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왕자의 결정은 왕실에 한바탕 소란을 몰고 왔다. 늙은 임금과 대신들은 
그녀가 가진 것도 없는 무산계급인 데다가 조상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궁중예절도 
전혀 모른다며 라나와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들은 왕자가 별볼일 없는 무일푼의 
낯선 여자에게 최면이 걸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온갖 묘책을 다 짜내어 라나가 
왕자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왕자는 이들의 충고를 무시해 버렸다. 그는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왕자는 라나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기뻐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주위의 반대도 쉽게 가라앉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왕자비가 된 라나는 행복했다. 하지만 궁중의 예의범절을 몰라 궁중행사 때마다 
자신이 저지르는 실수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포크 하나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고, 방문한 귀족들의 작위도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그들이 길고 
지루한 연설을 하는 동안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하는가 하면 귀족 가문의 
숙녀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궁중의 춤도 출줄 몰랐고, 국가적 차원의 환영식이나 외교 행사를 치를 때 
몇 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서 있어야 하는 것에 질색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아침저녁으로 시녀들이 옷을 입히고 벗기며, 머리를 매만지고, 숨도 못 쉬게 꽉 
조이는 코르셋에 자신의 몸을 쑤셔 넣도록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에도 익숙해 질 수 
없었다. 뻣뻣한 소매에 한껏 부풀린 치마, 묵직하게 금실로 수를 놓고 보석까지 
주렁주렁 달린 옷의 무게에 짓눌려 지내는 것도 싫었다.
  그녀는 긴장을 풀기 위해 몇 시간이고 자주 욕조 속에 누워 과거의 생활을 
회상하곤 했다. 그러다가 가끔은 몰래 혼자서 정원으로 빠져나가 꼭 죄는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풀밭 위를 팔딱팔딱 뛰어 다니며 에너지를 발산시키기도 했다. 그녀는 
물론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궁중에서 아무도 
모르게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궁중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더욱 심각한 일은 왕자비가 이따금 파리를 
잡아 먹는 것을 조정대신들이 본 것이었다. 파리가 가까이 다가오면 그녀는 
본능적으로 번개처럼 빠르게 낚아채서는 자신의 입 속으로 쏙 집어넣곤 했던 
것이었다. 그녀의 이런 습관들에 대한 소문은 소위 '부엌사건'으로 불리며 걷잡을 수 
없이 부풀려져 삽시간에 궁전 곳곳에 퍼지기 시작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라나가 수석주방장과 정찬 메뉴를 의논하고 있을 때 
바퀴벌레 한 마리가 바닥을 기어가고 있었다. 순간 그녀가 섬광처럼 빠른 속도로 
바퀴벌레를 잡아 낼름 삼켜버린 것이다. 그 후 그녀의 시녀들조차도 그녀를 
혐오스럽게 대했다.
  자신을 외면하는 분위기로부터 그녀가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낮에 숲 
속으로 나들이를 다녀오는 것뿐이었다. 예전에 왕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시종들을 남겨두고 혼자서 숲속 깊은 고생 들어가곤 했다. 
  라나가 국정업무에 끼어들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그녀가 왕자의 영토 
전역에서 사슴사냥을 못하게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자 왕자는 오로지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로 인해 숲에 사는 많은 소작인들은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을 잃었다. 백성들 사이에 원성이 일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한 번은 왕관의 다이아몬드가 없어지는 사건이 터졌다. 그 나라에서는 왕실 
소유의 다이아몬드가 무척 많아 국가 통화량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그 다이아몬드 중에서도 제일 큰 것을 도난 
당한 것이었다.
  모두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라나의 짓이라는 것을 눈치챘고 왕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그녀에게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걸이? 머리핀? 반지를 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거울 텐데?"
  "세팅할 계획은 전혀 없어요." 라나가 대답했다.
  "그러면 왜 보물함에 도로 갖다 놓지 않소? 왕관 다이아몬드를 당신 보물함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게 놔두는 것은 안전하지 않소."
  "전 보물함이 없어요."
  "그러면 다이아몬드는 어디에 있단 말이오?"
  "다이아몬드는 제게 없어요."
  "아니! 그러면 그것을 잃어버리기라도 했단 말이요?"
  왕자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언성을 높였다.
  "그것은 중요한 빚을 갚는 데 썼어요. 제 명예가 걸린 문제예요. 그러니 제발 더 
이상 묻지 말아주세요."
  그러나 이 정도로는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했다. 왕자와 임금, 그리고 모든 
대신들은 아이아몬드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그녀를 계속 괴롭혔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왕자는 그녀에게 간청했다.
  "라나, 당신은 절도죄로 감옥에 갈지도 모르오.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상황인지도 모르겠소. 왕관에 박힌 보석 가운데 어느 것 하나를 훔쳐도 그것은 
대단한 반역죄에 해당하오. 모르겠소? 당신은 처형당할 수도 있소. 그렇게 되면 
나로서도 당신을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된단 말이오."
  그러나 그녀는 계속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대신들은 그녀를 즉시 투옥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섰다. 그렇지만 왕자는 그녀가 
임신중임을 고려해서 가택연금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맞섰다. 그러면서 아이가 
태어난 후에 정식 재판을 해도 늦지 않다고 설득했다. 
  "우리는 지금 다음 대의 왕위계승자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거요. 그 애의 어미가 
아무리 큰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투옥만은 신중히 고려해야 마땅한 줄 아오."
  왕자의 설득대로 다행히 라나는 왕실 안에 있는 자신의 처소에 연금되었다.
  그 후로도 왕자는 라나를 찾아와 다이아몬드를 어떻게 했는지 솔직하게 말하고 
목숨이라도 건지라고 눈물로 애원했다. 왕자를 사랑했으므로 그가 슬퍼하는 것이 
괴롭기는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들은 그녀가 아이를 
낳는 즉시 그녀를 재심문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상심이 컸지만 왕자로서도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누구라도 어길 수 없는 법이었다. 
  그런데 라나가 아이를 낳자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태어난 아이는 보기에도 
끔찍한 기형아였기 때문이었다. 아가미가 달린 큰 머리통에, 다리 대신 넓적하고 
펑퍼짐한 꼬리가 달려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물 밖에 나온 
고기처럼 발작을 하며 숨을 헐떡거리더니 이내 죽고 말았다.
  왕자는 이중으로 상심에 쌓였다. 자신의 계승자가 스스로 살아갈 힘도 없는, 
사람이 아닌 괴물로 밝혀진 데다가 사랑하는 라나가 죄인의 몸이 되어 공개처형을 
당할 운명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슬픔으로 거의 넋을 잃어버린 듯 왕자는 라나 옆에 앉아 울기만 했다. 그를 
위로하려는 그녀의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죽는 날까지 당신과 함께 살고 싶었소. 하지만 이제 우리는 영원히 헤어져야 할 
것 같구려. 생각조차 하기 싫지만 이건 분명한 현실이오."
  라나는 앞으로 궁중에서 살아야 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고는 더 이상 그런 
생활을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했지만 
그의 생활방식에는 적응할 수 없었다. 물론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실패였다.
  "그래요. 우리는 헤어져야 할 것 같군요. 서로 사랑하지만 함께 지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나봐요. 마지막으로 제 부탁 하나만 들어 주시겠어요?"
  "무엇이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연못으로 절 한 번만 데려가 주세요."
  "당신은 아직 가택연금 상태라는 걸 잊었단 말이오?"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제 마지막 부탁이에요. 제발!"
  왕자는 그녀의 마지막 부탁까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이를 승낙했다. 그리고는 
밤을 틈타 둘이 똑같이 검은 망토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말을 타고 비밀임무를 
수행중이라며 호위병들을 따돌리고 성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왕자와 라나는 쉬지 않고 말을 달렸고 새벽에야 비로소 연못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숨을 헐떡거리며 말에서 내렸다. 말에서 내린 라나가 왕자에게 부드러운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이제 저를 잠시만 혼자 있게 해주세요."
  왕자는 그녀가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기꺼이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왕자는 그녀의 머리결을 어루만지며 오랫동안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본 후 
말을 끌고 숲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왕자가 얼마인가를 걸어갔을 때 갑자기 뒤에서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놀라 왕자가 급히 연못으로 돌아와서 보니 물 위에는 아직도 파문을 
그리며 기포가 올라오고 있었다. 연못가에는 라나의 옷만 가지런히 놓여있을 뿐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절망에 빠진 왕자는 황급히 자신의 외투를 벗어던지고는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숨이 차오를 때까지 연못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왕자는 그녀를 찾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백합꽃잎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초록빛 작은 개구리를 그는 보지 못했다. 
  왕자는 자신이 처한 곤욕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그녀가 자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생각은 더욱더 확고해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왕자의 슬픔도 
차츰 가라앉았고 몇 년 후 왕자는 재혼을 했다. 새 왕자비는 우아하고 교육도 잘 
받은 부유한 나라의 공주로, 누가 보아도 왕비로서 손색없는 자질을 겸비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 후 왕자는 새로 얻은 왕자비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개구리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왕자가 나랏일과 식구들에게 정신을 쏟느라 낚시에 대한 취미를 잃게 
돼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왕자를 만나지 못했지만 숲속 호숫가에서의 삶은 
행복했다.
  
    질과 콩나무
  
  원작 "잭과 콩나무"를 각색해 남자 대신 여주인공을 등장시키고, 그녀를 잭과는 
반대방향으로 보내는 것으로 꾸며 보았다. 여기에서 여주인공은 잭이 올라갔던 
하늘을 향해서가 아니라 지하, 즉 지구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은 한때 삶과 영감, 진실, 죽음 그리고 재생의 진정한 근원지라고들 했다. 융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의 어둠 속으로 내려가는 영적 여행이 흔히 자궁으로의 
귀환으로 상징되며, 이것을 신비한 각성에 대하 우선적 요인으로 말하고 있다. 
지구의 자궁이란 전통적으로 난쟁이들의 영역인 지하세계를 뜻하며, 난쟁이들은 
바위, 보석, 광물들을 무척 좋아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잭과 콩나무"에서 잭은 고대 이집트 다산의 신이며 죽은 왕들의 화신인 
오시리스처럼 천국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거인(질투심 많은 아버지를 상징한다)을 
만나고 대담하게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훔쳐 온다. 이집트신화 속의 창공의 여신 
하토르가 거의 어머니인 태양이라는 점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새로운 이야기에서 주인공 질은 어둠 속으로 내려가 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한다. 그리고 흰색, 빨강색, 검정색의 콩색깔은 각각 세 명의 여신 즉 
처녀, 어머니 그리고 노파의 전통적인 색을 의미한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어느 가난한 과부가 질이라는 딸과 함께 작은 오두막에 
살고 있었다. 질은 마음씨가 곱고 명랑했지만 약간은 산만한 소녀였다. 그들은 몹시 
가난했기 때문에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에게 먹을 
것마저도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그들의 유일한 재산인 
젖소에게서 짠 약간의 우유뿐이었다.
  질의 어머니가 말했다.
  "이제는 우유만 먹고 살아야 하는구나. 하지만 그나마도 충분하지 못하니... 할 수 
없구나. 내일은 네가 저 놈을 시장에 끌고 가서 되도록이면 비싼 값에 팔아 식량을 
사오거라."
  다음날 아침 질은 소를 끌고 길을 떠났다. 시장으로 가는 길에 질은 늙은 노파를 
만났다. 노파는 신기한 것을 보여주겠다며 질을 잡아 끌더니 자기의 움켜쥔 손을 
폈다. 노파의 손에는 흰색과 빨강색, 검정색 콩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그건 겨우 콩이잖아요." 질이 말했다.
  "하지만 얘야, 이건 보통 콩이 아니라 요술콩이야. 이것들은 네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을 지녔단다. 이 콩보다 값진 것은 세상에 별로 없어."
  요술콩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 질은 그 요술콩을 꼭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저에겐 이 소밖에는 없어요. 그렇지만 이 소를 그 요술콩과 바꾸겠어요."
  "좋아."
  노파는 질의 손에 콩을 쥐어 주고는 소를 끌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즐거운 기분으로 신나게 춤을 추며 집으로 돌아온 질은 소와 바꾼 요술콩들을 
자랑스럽게 어머니에게 보여 주었다.
  "세상에...맙소사."
  그녀의 어머니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건 겨우 콩 세 알뿐이잖니. 한입거리도 안되겠구나. 빵, 소금, 고기, 감자, 치즈, 
꿀은 어디 있니? 내가 사오라고 한 것들 말이야."
  그제서야 잘못을 깨달은 듯 질이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녀 할머니가 날 속였나봐요, 엄마."
  "괜찮아, 울지마라.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너무 순진해서 다른 사람을 의심할 줄 
몰라 그런건데 뭘. 어른이 되면 다 알게 될 거다. 오늘 저녁은 굶은 채 그냥 
자야겠지만 내일은 좋은 일이 생기겠지."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가시자 질은 난로 옆에 앉아 한참동안이나 콩 세 알을 
살펴보며 생각했다.
  "음식으로 남겨 둘 가치도 없어. 차라리 땅에 심는 게 낫겠어."
  그녀는 정원으로 나가 콩을 땅에 심었다. 그리고는 슬픈 마음을 달래며 간신히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질은 어머니에게 콩을 정원에 심었다고 말했다.
  "하룻밤 새에 우뚝 자라버리는 거대한 콩나무가 나오는 옛날 이야기가 있단다. 
우리집에도 그런 기적이 일어났는지 나가보자꾸나."
  그들 모녀가 정원으로 나가보니 정말로 콩나무가 밤새 자라 벌써 흰콩, 빨간콩, 
까만콩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하지만 키가 여느 콩나무와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질과 그녀의 어머니는 기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콩요리를 해먹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질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콩나무 주위로 폭이 삼 피트 가량 되는 깊은 
구멍이 하나 있었다. 질이 어두운 구멍 속을 들여다 보니 콩나무 뿌리가 구멍을 
따라 아래로 뻗어 있었다. 뿌리에는 사다리처럼 튀어나온 마디가 있어서 밟고 
아래로 내려갈 수도 있을 듯 했다.
  "엄마, 보세요." 질이 소리쳤다.
  "요술콩이 땅 속에 사다리를 만들어 놨어요."
  질은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내려가 구멍이 나 있는 곳을 보고 싶었다.
  "아마 보물이 있을지도 몰라." 질이 신이 나서 말했다.
  "지하세계에는 보물이 많다고 들었어요. 그 할머니는 아마 좋은 마녀일거예요."
  질의 어머니는 어두운 구멍을 보고 약간 놀랐다. 그녀는 딸에게 아주 조심하도록 
이르고 만일 이상한 느낌이 들면 즉시 올라와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는 
뭔가 발견하면 비취 볼 수 있도록 양초를 하나 주었다. 
  질은 아래쪽으로 계속해서 내려갔다. 구멍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작아지더니 
발 아래쪽은 별빛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주위는 곧 칠흙 같은 어둠에 
둘러싸였다. 내려가는 동안에는 양초를 들고 있을 수가 없었으므로 어둠속에서 
그녀는 사다리를 더듬어가며 내려갔지만 콩뿌리는 영원히 계속 뻗어 있는 것 
같았다.
  몇 시간 정도를 내려가니 비로소 발이 땅에 닿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콩나무에서 내려와 촛불을 켰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바위로 만든 방이었는데 
그녀가 내려올 때까지 이어졌던 구멍은 그 방에서 끝나 있었다. 그녀는 촛불을 높이 
들고 어두운 통로로 들어갔다. 
  얼마쯤 갔을 때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그녀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두 
개의 긴 광선을 뿜으면서 그 빛은 그녀 쪽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빛은 대략 삼 
피트 정도 키가 되는 두 개의 눈동자에서 발산되는 것이었다. 
  질은 무서운 생각이 되었다. 
  "햇빛처럼 빛을 내는 눈동자를 가진 무시무시한 동물이 틀림없어. 분명히 날 
잡아먹으려고 오고 있는 거야."
  그녀는 콩나무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너무 무서워서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데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자기 앞으로 다가온 
물체를 쳐다보니 그것은 짐승이 아니고 난쟁이였다. 난쟁이의 두 눈이 광부들이 
쓰는 램프처럼 환하게 빛을 발하며 주위를 밝혀 주고 있었다. 
  "이게 뭐야?" 난쟁이가 놀란 듯 외쳤다. "하늘 요정이 날 만나러 내려왔구나!"
  "아니에요. 난 요정이 아니에요. 전 그저 여자 인간일 뿐이에요. 침입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절 해치지 말아주세요.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도로 올라가겠어요."
  그러자 난쟁이가 '킬킬' 거리며 웃었다.
  "우리 난쟁이들은 인간을 해치지 않아. 장난이라면 또 몰라도 죽이는 짓 따위는 
안해. 인간들이나 저희들끼리 죽이고 죽는 거야. 그건 그렇고 여기까지 왔으니 이 
지하세계를 구경해보고 싶지 않니?"
  "예!"
  여전히 두렵긴 했지만 질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난쟁이는 아주 못생겼고, 게다가 거칠고 쉰 듯한 목소리는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을 더욱 볼품없이 보이게 했다. 그녀는 낯선 사람은 일단 의심해야 한다던 
어머니의 말씀이 문득 생각났다. 난쟁이가 통로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눈에서 
뿜어나오는 광선으로 길을 비추면서 앞서가고 질은 그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갔다.
  그들은 어두컴컴한 샛길을 몇 번이나 지났다. 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두 번, 
질은 지나온 길을 기억해 두었다. 그렇게 얼마를 가자 통로는 두 개의 방향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통로의 오른쪽 방향에서는 노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쟁이는 질을 데리고 그 불빛을 따라 거대한 동굴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절벽의 
암반을 따라 곧바로 걸어갔다. 아래쪽 동굴에서는 용광로 속에서 불꽃이 튀는 것이 
마치 거대한 대장간 같아 보였는데 그곳에서 난쟁이들은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여긴 우리 난쟁이들이 일하는 곳이야. 우린 여기서 하늘 요정들을 위해 일하고 
있어." 난쟁이가 말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난쟁이들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기술자들이지. 하늘 
요정들도 보물 만드는 솜씨가 좋지만, 그것은 낮이 되면 눈녹듯 사라져 버리는 
환영에 불과해. 그들에게는 자기들만의 진짜 왕관, 목걸이, 마법이 지팡이, 황금 
주전자 같은 걸 만들 기술이 없어. 그래서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지. 요정들의 
진짜 보물은 공중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땅에서 나오는 거야. 좋은 것은 모두 땅 속 
깊은 곳에서 나온다구."
  난쟁이는 약간 화가 난 듯 흥분한 목소리여서 질은 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당신 말이 옳은 것 같아요."
  난쟁이는 다른 동굴로 그녀를 데려갔다. 동굴 벽은 온갖 종류의 수정이 들어 있는 
작은 주머니들로 가득했고 그것들은 천정에서 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여기는 수정 재배실이야. 이 수정들은 다 자란 것들이라 더 이상 출생액으로 
목욕을 시켜 주지 않아도 되지만 저 열기 때문에 오래 있을 수 없을 . 거야. 여긴 
건조하지만 숙성한 광석의 정령들이 가득하지."
  그런데 난쟁이는 수정에 대한 설명을 하다말고 갑자기 큰 목소리로 수정 하나에게 
말을 걸었다.
  "기분은 어때, 원석?"
  질은 깜짝 놀랐다. 난쟁이의 질문에 산딸기처럼 빨간 수정이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제 이름은 정삼각형이에요, 난쟁이님. 그런데 먼지 때문에 줄무늬 내는 데 방해가 
되고 있어요. 절 좀 씻어주시겠어요?"
  그러자 난쟁이가 몸을 숙여 그 수정을 소매로 닦아주었다. 
  그 놀라운 광경에 질은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수정과 이야기할 수도 있어요?"
  "물론이지. 말을 해 주면 더 잘 자라지. 너는 식물에게 잘 크라고 말해주지 않니?"
  "가끔은요. 하지만 풀들이 대답하는 일은 없어요."
  "보석들은 꽃이나 다름없어. 꽃과 다른 게 있다면 한두 주 사는 게 아니라 영원히 
산다는 거지. 이 수정들은 산보다 나이가 많지. 말을 배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 
이 보석들은 자기 말을 알아듣는 이에게 말을 걸지. 난쟁이 같은 존재들 말이야."
  "저도 수정과 얘기할 수 있을까요?" 질이 물었다.
  "한번 해봐."
  질은 한 번도 돌에게 말을 걸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약간 긴장되었다. 그녀는 
수정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모두 참 아름답구나."
  "누구예요, 난쟁이님?"
  초록색의 사파이어가 약간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덩치가 큰 여자네요. 저 여자는 함유물이 너무 많은가봐요. 몸도 좀 엉성하고 
부서지기 쉬울 것 같아요."
  "무슨 자격으로 네가 함유물에 대해 말하는 거지?"
  근처에 있던 남색 옥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그리 완벽하진 못하잖아. 네 초록빛은 너무 노래, 내 파란 빛이야 훨씬 
근사하지만."
  "잠자코 있어. 남색 옥."
  분홍색을 띤 녹색 주석이 말을 가로챘다.
  "잘난 체 하기에는 너희들은 너무 흔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너희들보다 훨씬 
귀하고 비싸단 말이야."
  "굉장히 우쭐대고 있군요." 질이 난쟁이에게 속삭였다.
  난쟁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돈을 많이 쏟아부어야 하는 것들은 모두 우쭐대기 마련이야. 어쩔 수 없지. 
그것은 지상이나 이 지하세계나 마찬가지야. 주는 대로 받는 법이지. 게다가 이들은 
이 우주의 다른 어떤 것들 보다 유지비가 훨씬 많이 들 거야. 그리고. 그리고 
무엇보다 보석은 영원하거든. 이들의 아름다움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 그러니 
우쭐댈만하지 않겠어?"
  "그 여자 데리고 다른 데로 가주세요, 난쟁이님." 노란 수정이 툴툴거렸다.
  "우리는 저렇게 생명도 짧고 광채도 없는 인간들과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저 
여자의 무식한 비판도 듣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오래 살았다면, 좀더 지혜로워야지."
  약간 화가 난 질이 보석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 모두 그 쓸 데 없는 험담과 질투, 무례함을 버려야 해. 어머니 대지처럼 
강하고 과묵하며 현명하고 참을성도 있어야 해. 너희들의 아름다움에는 관대하고 
너그러운 영혼이 어울리는 거야."
  "그래, 이 아가씨 말이 옳을지도 몰라."
  연한 장미빛을 내는 수정이 힘없이 말했다. 작고 납작한 루비도 동의했다. 
보석들은 질과 난쟁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네들끼리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런 일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어요. 신기해요. 보석이 말을 하다니,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지금 바깥 세상에 나가 있는 보석들도 말은 못하지만 들을 순 있지. 그들은 다음 
세대를 지배할 종족에게 가르쳐 줄 역사를 모으고 있어. 그 종족의 기본 구조는 
실리콘이기 때문에 너희들 인간보다 훨씬 세고 단단할 거야. 우리 난쟁이들은 
그러한 종족을 창조하기 위해 연구중이야. 우리가 그들의 신이 될 거야."
  "그러면 인간들은 어떻게 되죠?"
  "물론 인간들은 다 죽겠지. 몇몇 인간들은 스스로 자초한 인류의 대학살을 
어떻게든 모면하겠지만 그들도 기아와 질병으로 멸망하고 말 거야. 너희들 인간이란 
족속은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이 행성에서 지도적 위치를 장악할 만큼 
훌륭하지는 못해."
  "틀렸어요!" 질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당신은 땅 속에서 햇빛도, 풀밭도, 나무도 전혀 보지 못하고 사는데 어떻게 땅 
위의 인간에 대해 그렇게 잘 안다는 거죠?"
  "우리는 지상의 구조를 잘 알고 있어." 난쟁이가 엄숙하게 말했다.
  "너희 인간들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우린 땅을 사랑해. 그게 바로 우리가 미래의 
신이 되는 이유지."
  "당신도 저 수정들 만큼이나 거만하군요."
  미래에 대한 난쟁이의 예견은 질에게 무서운 생각이 들게 했다. 화가 난 질은 
갑자기 경련이라도 일으키듯 난쟁이를 있는 힘껏 밀어버렸다. 난쟁이는 뒤로 넘어진 
채 꼼짝도 못하고 꿈틀거리기만 했다. 그와 동시에 질은 바위에서 빨간 수정원석을 
낚아채서는 재빨리 뛰었다. 수정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면서 다른 
난쟁이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난쟁이들은 질을 따라 잡기에는 너무 느렸다. 질은 자신이 왔던 길을 
기억해내며 샛길 입구를 찾아 필사적으로 뛰었다. 마침내 돌아가는 길을 찾아낸 
질은 콩나무 구멍 밑둥에 이르자 수정원석을 주머니에 넣고 오르기 시작했다. 
  질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에도 수정은 계속해서 찢어질 듯한 작은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도둑이야! 도둑이야!"
  하지만 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발 아래서 난쟁이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정신없이 위로 올라갔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숨이 멎을 것처럼 
가빠졌다. 잡고 있던 콩나무를 놓칠뻔 했을 때는 간이 콩알만해지는 듯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공포의 순간이 지나고 그녀는 구멍의 꼭대기에 이르렀다. 밖으로 
기어나온 질은 어머니 발 앞에 쓰러지며 숨가쁜 소리로 외쳤다.
  "엄마, 빨리요, 콩나무를 잘라야 해요."
  "하지만 얘야, 우리가 먹을 것이라고는 이 콩밖에 없는데..."
  질을 일으켜 세우며 어머니가 반대를 했다.
  "엄마, 절 믿으세요. 저 마술뿌리 구멍을 막지 않으면 우리 목숨이 위험해요. 지금 
당장요!"
  그 말에 질의 어머니는 즉시 도끼를 집어 들고 콩나무를 찍어 쓰러뜨렸다. 그러자 
뿌리가 뻗었던 구멍이 닫히는가 싶더니 금방 단단한 땅으로 변해버렸다. 질은 
주머니에서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수정원석을 꺼내 어머니에게 보여드렸다. 
  질의 어머니는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보석은 본 적이 없구나. 계란만한 보석이 열두 개씩이나...여왕님 
왕관에 잘 어울리겠구나."
  "이게 바로 우리에겐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셈이에요." 질이 말했다.
  질과 어머니는 이웃에서 여비를 빌려 수정원석을 여왕의 성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며칠간의 협상을 거친 뒤 여왕의 보석 세공사에게 시중의 절반 가격을 
받고 팔았다.
  집에 돌아온 두 모녀는 헛간이 딸린, 보다 널찍한 오두막을 구해 소 몇 마리를 
샀다. 그 후 모녀의 살림은 날로 번창했고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한편, 수정원석에서 깎아낸 보석은 다시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듣기만 할 수 
있었다.
  
    늑대 여인
  
  늑대를 숭배하는 행위는 유럽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당시 일부 부족들이 늑대를 신성한 토템으로 경배했던 행위는 지금도 인간의 
성에 남아 있다. (역주 : 요즘도 영국인들의 이름에서 '울프'라는 성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늑대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늑대 춤을 추는 의식들 통해 자기 
자신들을 동물의 영혼으로 변형시키고자 시도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 리케이우스가 늑대의 형상을 취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중세에 들어 기독교문화권의 권력자들이 늑대 숭배를 악마 숭배로 
치부하면서 늑대혐오주의(늑대인간 사상)에 관한 미신을 낳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동화에 등장하는 늑대를 악의 상징으로 보게 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는 실제 늑대를 관찰한 결과가 아니고 사나운 개에 대한 
이미지로, 아마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무섭게 생긴 개에 대해 어린시절에 
품었던 막연한 공포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강아지를 좋아했던 나는 동화책에 나오는 늑대가 아무리 크고 악한 
존재로 등장해도 전혀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 늑대처럼 매력적인 동물을 
사악하게 만들었을까? 변신의 마술을 통해 늑대의 예리한 후각과 청각, 힘, 그리고 
민첩성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옛날 늑대 부족 사람들은 우리가 혐오하게 
된 늑대의 특징들을 오히려 좋아했을 것이다. 당시의 인간사회 곳곳에서 늑대의 
동물적 특징을 부러워했음이 발견되고 있어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어느 가난한 홀아비가 온통 돌맹이 뿐인 작은 농장의 
허름한 오두막에서 루파라는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농장은 비옥하지 못했고 
거둬들이는 것도 많지 않아서 두 사람이 먹을 끼니도 충분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영양공급원이 있다면 그것은 이들이 기르고 있는 소 한 
마리뿐이었다. 소는 두 사람에게 우유와 버터, 치즈를 제공했다. 
  가난한 이 홀아비에게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딸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딸 루파는 마음씨가 고운데다 총명해서 그는 딸을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어느날 이들 부녀에게 뜻밖의 불행이 닥쳐왔다. 소가 시름시름 
앓더니 그만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겨우겨우 끼니를 이어가던 이 
홀아비에겐 새로 소를 살 돈은 고사하고 달걀을 낳아 줄 암탉 한 마리 살 여유조차 
없었다. 우유도 버터도 치즈도 다 떨어져 더 이상 먹을 것이 없게 된 홀아비와 
루파는 얼마 동안 죽은 소의 고기를 먹고 지냈다. 하지만 고기마저 다 떨어지고 
나자 이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파종할 씨앗뿐이었다.
  돌아가신 루파의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서 주변에 소문이 자자해했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아름다운 수직 벽걸이를 몇 점 유품으로 남겼다. 먹을 것이 
떨어지자 홀아비는 어쩔 수 없이 아내의 유품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딸을 부른 
뒤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네 엄마를 잊지 않기 위해 이것들을 영원히 간직해두려고 했는데...이제는 
이것마저 내다 팔 수밖에 없게 되었구나. 내일 나는 파종을 해야하니까 너는 이것을 
시장에 가져가서 가능한 한 좋은 값에 팔아 오너라."
  다음날 아침 일찍 루파는 수직 벽걸이들을 둘둘 말이 겨드랑이에 끼고 집을 
나섰다. 시장은 읍내에 있었고 몇 마일을 걸어야 하는 먼 길이었다. 그녀는 시장을 
향해 부지런히 종종걸음을 쳤다. 그런데 도중에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소나기가 무섭게 퍼붓기 시작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인지라 미처 피할 
곳을 찾지 못한 채 빗속을 헤매다가 루파의 온몸은 그만 비에 흠뻑 젖고 말았다.
  드디어 하늘이 맑게 개자 루파는 아직도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벽걸이를 
말리기 위해 벽걸이를 펼쳤다. 그러나 펼쳐진 벽걸이를 본 순간 루파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비에 젖은 벽걸이는 색이 번져 온통 얼룩 투성이가 돼버린 게 아닌가. 
루파의 어머니는 좋은 염료를 쓸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에 그림이 모두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허탈감과 절망감에 루파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벽걸이를 망쳤으니 
시장에 내다 팔 수도 없게 되었지만 무엇보다 어머니가 손수 만드신 물건을 자기 
잘못으로 망쳐버렸다는 생각이 그녀를 더욱 슬프게 했다. 이 사실을 알면 그녀의 
아버지 역시 너무나 슬퍼하실 것이 분명했다.
  한참을 울고 난 루파는 그래도 시장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아쉬운 대로 천이라도 
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였다. 그것도 안 되면 집에 가져갈 동전 몇 개나 
빵조각이라도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장으로 가기 위해 루파가 울창한 숲속을 지나갈 즈음, 멀지 않은 곳에서 
신음소리처럼 들리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그녀 자신의 
슬픔을 대신 표현하고 있는 듯 했다. 루파는 두려운 마음을 억누르고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길을 옮겼다.
  얼마쯤 가다보니 노란 눈을 가진 커다란 잿빛 늑대 한 마리가 보였다. 늑대는 
오른쪽 앞다리가 덫에 걸려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저런, 불쌍한 늑대, 내가 도와줄까?" 루파가 말했다.
  "제발 이 덫에서 날 꺼내 주세요," 루파의 말에 늑대가 애원하듯 대답했다.
  "집에 아이들이 있어요. 내가 없으면 그 애들은 죽고 말 거예요."
  루파는 단단한 막대를 하나 집어 덫의 고리를 열어 젖힌 뒤 늑대의 다리를 꺼내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속치마 천을 뜯어 늑대의 상처난 다리를 동여매 주었다.
  "아가씨에게 어떻게 고맙다고 해야할지...제가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요?"
  루파가 상처를 치료해 주는 동안 참을성 있게 버티고 서 있던 늑대가 말했다.
  "고맙지만 내 처지는 너무도 불행해서 아무도 날 도와 줄 수 없답니다."
  루파는 소의 죽음부터 시작해서 비 때문에 엉망이 되어버린 수직 벽걸이 
이야기까지 자신의 처지를 늑대에게 모두 들려 주었다.
  "시장에 가던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모두 잘 될 거예요. 걱정 말고 집으로 
가세요."
  이 말을 남기고 늑대는 붕대로 감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루파는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신비한 늑대라면 
믿어도 좋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수직 벽걸이를 땅에 묻어버렸다. 엉망이 된 
벽걸이를 차마 아버지에게 보여드릴 수는 없었다.
  빈 손으로 집에 돌아온 루파는 수직 벽걸이를 팔았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만나 모두 빼앗겨 버렸다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다. 하루 종일 쉬지도 
못하고 일을 한 아버지와 루파는 몹시 배가 고팠다. 하지만 먹을 것이라곤 풀뿌리 
몇 개와 씨앗 몇 알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쥐고 
잠자리에 든 두 사람은 간신히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들 부녀는 꿈에서인 
듯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아침이 되었지만 너무 피곤해 일어날 수가 없었던 루파는 무엇엔가 놀란 아버지의 
외침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여기 좀 봐라! 여기 문 앞에..."
  아버지는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떨리는 목소리로 문 앞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방금 잡은 것 같은 사슴 고기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사슴 고기는 마치 물어뜯어 온 
듯 가장자리가 너덜거렸다. 두 부녀는 횡재를 한 기분으로 즉시 사슴고기 몇 점을 
구워 오랜만에 근사한 아침식사를 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왕의 근위병들이 들이닥쳤다. 근위대장은 칼자루로 문을 쾅쾅 
치며 호령했다. 
  "대문을 열어라. 어명이다. 이 못된 밀렵꾼들아!"
  영문을 모르는 두 부녀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루파의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밀렵꾼이라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 그저 가난한 농사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네가 감히 왕궁의 숲에 사는 왕의 사슴을 밀렵해 왔겠다."
  근위대장이 큰소리로 호령했다.
  "부인해도 소용없다. 우리가 이 핏자국을 따라 네 집 문 앞까지 곧장 
따라왔으니까."
  오두막 안으로 들어온 근위대들은 벽난로 옆에 걸려 있던 사슴 고기를 쉽게 
찾아냈다. 근위대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이들을 당장 체포하라!"
  루파와 아버지가 아무리 항변해도 소용이 없었다. 두 사람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왕이 사는 성으로 끌러가 재판을 받아야만 
했다.
  감옥에서 비참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취조를 받기 위해 
임금과 왕비 앞으로 끌려가 무릎을 꿇었다. 왕의 주위에는 신하들이 둘러 서있었고, 
왕비가 앉은 옆자리 요람에는 쌍둥이 아기 왕자들이 있었다. 금테가 둘러진 검정 
벨벳옷을 입은 거대한 몸집의 관리가 범죄자들의 고소문을 낭독하고 증거를 
제시하고 있었다.
  자기 차례가 되자 루파의 아버지는 임금에게 무죄를 호소했다. 사슴 고기는 
누군가가 밤 사이에 놓고 간 것이라고 몇 번이나 간곡하게 설명했지만 왕은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계속 얘기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음을 깨달은 
루파의 아버지는 절망스러운 기분이 되어 얼굴까지 붉어졌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왕비만은 그 사건에 흥미가 있는 듯 루파와 아버지를 주의깊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바람에 루파의 눈과 왕비의 눈이 마주쳤다. 왕비의 눈은 노란빛의 광채를 띄면서 
무언지 모를 비범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폐하, 이 두 사람에게 아무 처벌도 내리지 마옵소서."
  왕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들을 제 하인으로 삼겠습니다."
  "하지만 왕비, 밀렵은 사형감이라는 걸 모르시오?"
  그러나 왕비는 아무도 감히 반대할 수 없도록 강력한 어조로 다시 말하고는 
근위병들에게 그들을 자신의 궁으로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루파와 아버지가 왕비의 궁으로 옮겨져 감시를 받으며 기다리고 있을 때 왕비가 
혼자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왕비는 두 사람의 포승을 풀어 주도록 명령을 하고는 
근위병들을 물러가게 했다. 루파와 아버지는 땅에 엎드려 왕비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것에 대해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했다.
  "내가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오. 나는 그저 양심에 따라 빚을 갚은 것뿐이오. 내가 
보답한다고 한 것이 여러분을 난처하게 만들어서 그 피해를 보상했을 뿐이란 
말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루파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러면 이것은 알아보겠소?"
  왕비가 오른 쪽 소매를 걷어 올리자 붕대가 감겨 있는 팔이 드러났다. 붕대에는 
아직도 피가 약간 배어있었다. 그런데 붕대를 찬찬히 보니 그것은 며칠 전 늑대의 
상처를 치료해주느라 루파가 자신의 속치마에서 뜯어낸 천이었다. 루파는 너무 
놀랐다.
  "그럼, 왕비님이 그 늑대..."
  "쉿! 이 사실은 절대 비밀로 해야 합니다." 왕비가 엄하게 말했다.
  "루파, 그대는 이제부터 내 시중을 들도록 하고 그대의 아버지는 왕실 정원사가 
될 것이오. 보수도 넉넉히 줄 것이며 먹을 것도 충분할 것이오. 이젠 더 이상 
가난하게 살지 않아도 되오."
  왕비의 말에 루파와 그녀의 아버지는 기쁨의 눈물을 글썽이며 왕비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날부터 이들 부녀는 성 안에 있는 저택에서 살게 되었으므로 그들의 
가난한 오두막에 다시는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루파는 여러 해 동안 왕비 곁에서 
성실하게 일했고, 아버지 역시 성의 정원을 정성들여 가꾼 공을 인정받아 후에 수석 
토지관리인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훗날 루파는 예전에 땅에 묻어버렸던 어머니의 수직 벽걸이를 찾아내 싸구려 
염료를 씻어내고 왕실 최고의 대가들에게 복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결과 그것은 
그 유명한 루파인 테피스트리(역주:Lupine Tapestry, Lupine은 원래 늑대를 뜻하는 
라틴어 Lupus에서 파생된 형용사다.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 루파의 이름도 아마 이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세월이 지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수직 벽걸이를 보물로 귀히 여겨 지금은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람들은 가끔 그믐 날 밤이면 루파와 그녀의 아버지가 이상한 모습으로 변하여 
늑대들과 숲속을 뛰어다닌다고 수군거렸다. 물론 그들을 이끄는 한 마리의 늑대와 
함께였는데 그 늑대는 노란 눈빛에 오른쪽 앞다리에 흉터가 있다는 것이다.
  
    아기 분홍요정 세 자매
  
  동화 "아기돼지 삼 형제"는 본래 아기자기한 이야기다. 그래서 이 글에서도 
아기자기한 맛을 그대로 살렸다. 그리고 정원 깊숙한 곳에 요정들이 산다는 부분은 
유명한 일화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코난도일 경을 곯려 주려고 책에서 요정 
그림을 오려 그의 정원 깊숙한 곳 덤불 위에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다는 일화인데, 
코난도일 경은 사진 속 요정들이 진짜 자연의 정령들이라고 믿고 신이 나서 글을 
썼다고 한다.
  또 분홍색이 언제부터 여성적인 색상으로 인식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필자는 각기 흰색과 빨간색으로 상징되는 동정녀와 성모마리아의 결합과 
깊은 관계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들어 일부 남성들이 대담하게 
분홍색을 즐겨 입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어느 여왕의 정원에 아기요정 세 자매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그들이 아주 작다는 
것과 정원의 꽃들 사이로 옮겨 다니기 쉽도록 날개가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작아서 사람들의 눈에는 거의 띄지 않았다. 요정들이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것을 본 사람들도 그들이 나방이나 나비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셀과 펄 그리고 캔디라는 이름을 가진 이 요정들은 머리카락이 분홍색이었기 
때문에 아기 분홍요정 세 자매라고도 불리워졌다. 그들이 하는 일은 여왕의 정원에 
있는 꽃을 분홍색으로 물들이는 것이었다. 셀은 장미빛 분홍색, 산호색, 검붉은 
커피색, 그리고 살색 계통을 칠하는 담당이었고, 펄이 맡은 일은 흰색에 가까울 
정도의 아주 섬세한 색조로 칠하는 것이었으며, 막내 캔디는 산딸기처럼 강렬한 
분홍색을 칠했다.
  이들 세 자매는 분홍색이 어느 꽃들에게나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여왕의 수석 정원사인 플로리안 울프는 이들과 생각이 
달랐다. 그는 분홍색은 '여성적인 색상'이라며 아주 질색을 했다. 자기에게 급여를 
주는 여왕 이외의 모든 여성적인 것을 그는 싫어했다. 그러나 그는 꽃에 빨강, 노랑, 
파랑, 보라 계통의 색을 칠하는 요정에겐 별 말이 없었다. 여왕이 자신의 정원에서 
여러 가지 꽃들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화지만 그는 분홍색 계통을 칠하는 
요정들은 늘 못살게 굴었다.
  어느 날, 아기 분홍요정 세 자매가 장미꽃 사이로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을 본 
플로리안이 화를 버럭내며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 세 마리! 내 말 잘 들어. 너희가 물들인 꽃은 모두 꺾어버리겠다. 내가 
하양, 빨강, 노랑색만 칠하라고 명령했지! 지금 당장 다른 색깔로 바꾸든지 아니면 
여기서 썩 꺼져버려!"
  "당신은 우리를 날려버리지 못해요!"
  캔디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당당하게 대들었다.
  "우린 이 정원에서 삼백년도 넘게 살았어요. 이곳은 우리 고향이고 집이란 
말이예요. 당신이 기저귀를 차고 있을 때도 우리는 꽃을 분홍색으로 물들이는 일을 
했어요. 당신이 뭔데 그런 소리를 하세요?"
  "난 여왕폐하께서 이 정원의 관리 책임자로 임명하신 몸이야!"
  플로리안 울프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앞으로 이 정원은 내 뜻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가꾸어질 것이다. 너희들이 
뭐라고 하든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거야."
  그는 요정들을 세차게 밀치고 꽃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분홍색 계통의 장미를 
뿌리 채 뽑아내더니 꽃잎을 발로 짓이겼다.
  아기요정 세 자매는 그의 행동에 커다란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은 
기지를 발휘해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장미덤불 속에서 가시를 뽑아 
들고는 그의 얼굴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돌진했다. 그리고는 그가 한 요정을 
밀쳐내면 다른 요정이 달려드는 방법으로 번갈아가며 공격을 가했다.
  마침내 플로리안이 여기저기 긁힌 상처에서 피를 흘리며 슬슬 뒷걸음질쳤다. 그는 
안전지대인 온실 문 앞에 이르자 분통이 터지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며 펄펄 뛰었다.
  "너희들 모두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 이 정원에서 나가!"
  그가 소리쳤다.
  "만약 그때까지 너희들 중 한 놈이라도 남아있거나 분홍장미 한 송이라도 눈에 
띄는 날에는 너희들의 날개를 뽑아 돼지 먹이로 던져 버리겠다."
  그 말에 요정들이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무지무지 사나운 놈인 것 같아." 펄이 속삭였다.
  "꽃들이 어떻게 저 작자를 참아내는지 모르겠어." 셀이 말했다.
  "우린 아무 데도 다닐 수 없을 거야."
  캔디도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겠어."
  요정들은 머리를 맞대고 지금까지 벌어진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회의를 했다.
  "요정의 여왕님이나 정원의 주인이신 여왕님께 도움을 청하는 게 좋지 않을까?" 
셀이 먼저 말했다.
  "그건 둘 다 안돼." 캔디가 반대했다.
  "우리 문제니까 우리 힘으로 해결해야 돼. 먼저 우리들 숙소부터 옮기는 게 
좋겠어. 그 자는 우리가 어디다 그물 침대를 걸어놓고 사는지 잘 알고 있거든. 
그러니까 장소를 옮겨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줄 집을 새로 짓자."
  "좋은 생각이야." 펄이 기쁜 듯 손뼉을 치며 외쳤다.
  "난 항상 집을 지어보는 게 꿈이었거든."
  "자, 그러면 모두 흩어져서 각자 새로운 집을 짓도록 하자." 셀이 제안했다.
  "그리고 나서 밤에 큰 참나무 옆에서 만나는 거야."
  "그리고 또, 정원에 있는 꽃들을 모두 분홍색으로 칠해버리자. 그자에게 본때를 
보여주자구." 캔디가 말했다.
  요정들은 자신들이 벌일 짓궂은 장난을 생각하며 서로 키득거렸다. 잠시 후 
그들은 각자 새 집을 짓기 위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펄은 꾀꼬리를 
찾아갔다./ 꾀꼬리의 기와집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펄은 
꾀꼬리에게 집을 짓는 방법에 대해 이것저것 자문을 구했다. 요정의 부탁이 흡족한 
듯 꾀꼬리는 한껏 의기양양해져서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최고의 건축자재라면 역시 지푸라기지. 그리고 여왕님의 마굿간에 가면 그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펄은 즉시 마굿간으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연한 분홍빛 꽃이 맺힌 커다란 
산딸기나무 가지 아래쪽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펄은 마굿간에 살고 있는 
플로리안의 애완용 쥐 레이서가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쥐들은 원래 남의 사생활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었다. 레이서 역시 자기 주인과 
분홍 요정들 사이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쥐들은 얼마든지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레이서는 모습을 숨기고 펄을 몰래 따라가 그녀가 지푸라기로 
무엇을 하는지를 지켜보았다.
  펄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지푸라기를 엮어 집을 완성시키고는 뿌듯한 마음으로 
자신의 집을 쳐다보았다. 그 집은 지금까지 그녀가 본 어떤 집보다 아름답게 보였다. 
그녀는 이제 마지막 한 가지만 덧붙이면 집이 완성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몹시 들떠 
있었다. 그것은 집을 온통 분홍빛으로 칠하는 것이었다.
  한편 셀은 친구 비버에게 건축 자재를 구하러 갔다.
  "건축자재라면 나뭇가지가 최고야. 나뭇가지로 지은 집은 다른 부스러기들이 
사이사이에 끼어 방수처리도 훌륭하게 된다구."
  셀은 친구의 말대로 나뭇가지를 이용해 분홍장미 덩굴 속에다 집을 지었다. 장미 
덩굴 속이라면 가시들이 자신을 보호해 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온통 분홍색으로 집을 칠했다. 분홍색은 집 위에 핀 장미와도 잘 어울렸다.
  한편, 캔디는 진흙 말벌을 찾아가 상담을 했다. 항상 진흙으로 집을 짓는 말벌들은 
집짓는 법을 친절하게 가르쳐 줬다.
  "진흙으로 구운 벽돌만이 진짜 훌륭한 건축재료지. 진흙이 굳으면 아무리 폭우가 
쏟아져도 무너지지 않거든. 주의할 것은 반드시 벽돌이 서로 엇갈리게 담을 쌓아야 
한다는 거야."
  캔디는 작은 손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해 말벌들의 집 옆에다 자신의 
집을 완성시켰다. 그곳은 플로리안 울프가 눈부신 분홍꽃이 싫다며 잘라낸 진달래 
덤불 밑단이었다.
  각자의 집을 완성한 세 요정들은 한밤중에 만나서 서로의 집을 방문했다. 
분홍칠을 한 펄의 지푸라기 집과 나뭇가지로 지은 셀의 집은 캔디의 집보다 더 
근사해 보였다. 캔디는 약간 의기소침해졌다. 자기 집만 분홍색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벽돌을 쌓아 올리는 일이 너무 힘들고 시간도 많이 걸렸기 
때문에 치장을 할 시간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렇긴 해도 그녀의 집은 다른 집보다 
훨씬 튼튼해 보였다.
  "이제 진짜 일을 하러 가자." 펄이 말했다.
  아기 분홍요정 세 자매는 꽃을 색칠하는 다른 요정들을 찾아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그들도 이미 이야기를 들어서 대강은 알고 있다며 도와 
주겠다고 약속했다.
  세 요정은 다른 요정들의 도움을 받아 해가 뜨기 전에 정원에 있는 모든 꽃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분홍색으로 칠했다. 심지어는 풀잎까지도 분홍색 이파리로 
만들어버렸다.
  아침에 플로리안 울프가 일어났을 때는 그의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이미 
분홍색이었다. 그것을 본 플로리안의 얼굴은 그 어떤 분홍색 꽃보다 더 붉어지더니 
참을 수 없다는 듯 문을 박차고 나갔다. 문을 얼마나 세게 닫았는지 문고리가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저 쪼그만 분홍 버러지들을 없애 버리고야 말겠어."
  그는 씩씩거리며 요정들이 살았던 동굴을 향해 달려갔다. 그때 정원 주위를 
거닐며 산책을 하던 여왕이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그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자 
이렇게 말했다.
  "오, 플로리안, 굉장한 아이디어야. 정원을 온통 분홍색으로 바꾸어 놓을 생각을 
하다니... 재미있군. 안 그런가?"
  "예. 폐하."
  "마음에 들어, 플로리안. 당분간 이대로 두게."
  "예. 폐하."
  "다음 달에는 자주색으로 바꿀 수도 있겠지? 왕실의 색으로 말이야."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폐하."
  "좋아, 플로리안. 물러가도 좋아."
  하지만 플로리안은 여왕의 말이 끝났는데도 계속 무릎을 꿇고 앉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느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쨌든 이 버르장머리없는 요정들을 없애버리고야 말겠어. 감히 내 명령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맛을 보여 주겠어."
  그러나 그가 요정들의 동굴로 달려갔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레이서가 그와 문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지푸라기를 엮는 시늉을 했다. 
처음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던 플로리안 울프는 한참 후에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가자." 플로리안이 명령했다.
  레이서를 따라가는 동안 그는 동물의 기호언어를 이해한 자신에 대해 뿌듯함을 
느꼈다. 레이서는 그를 짚단으로 만든 펄의 집으로 안내했다. 빛나는 분홍빛이 
산딸기나무 사이로 영롱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리 나와, 이 구역질 나는 꼬맹이 분홍 앵무새야. 위대한 울프님께서 네가 돼지 
먹이가 될 때가 됐다는 말씀을 하려고 오셨다."
  "당신은 날 밖으로 나오게 할 수 없을 걸." 펄이 도전적으로 외쳤다.
  "이건 내 집이란 말이야."
  "오, 그래? 그러면 내가 그 엉성한 집을 어떻게 날려 보내는지 잘 보거라."
  플로리안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더니 집을 향해 세게 내뱉었다. 그러자 
지푸라기들이 하나 둘씩 펄럭이며 떨어져 나가더니 금세 벽에 구멍이 생겼다. 펄은 
겁에 질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이윽고 지붕까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자 
펄은 너무 놀라 꼼짝도 못하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플로리안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펄은 있는 힘을 다해 셀의 집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레이서가 재빠르게 그녀 뒤를 
쫓아가 장미 덤불 속에 있는 나뭇가지로 만든 집을 찾아냈다.
  그는 펄이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두 요정이 단단한 
막대기로 입구를 막는 소리도 들었다. 레이서는 곧바로 플로리안에게 달려가 요정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었다.
  레이서를 따라 나뭇가지 집 앞에 선 플로리안이 다시 소리쳤다.
  "나와, 이 요정들아! 너희들을 돼지고기로 만들어 주겠다! 내 발로 이 작고 
지저분한 잡동사니 같은 집을 산산조각내 버릴 테다!"
  "어디 한번 해보시지, 위대한 울프님!" 셀이 자신있게 대구했다.
  플로리안은 자신의 말대로 집을 짓밟을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시돋힌 
장미 줄기들이 빽빽히 자라있어서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바람으로 너희 집을 한 번에 날려버리겠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눈이 튀어나오고 두 뺨이 시클라멘처럼 분홍빛이 될 
때까지 바람을 세게 불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집이 산산조각나버리고 겁에 질려 
서로 꼭 부둥켜안고 있는 두 요정의 모습이 드러났다.
  "빨리 캔디네 집으로 가자."
  셀의 말에 따라 재빨리 날아오른 두 요정은 자신들을 낚아채려는 플로리안의 
손아귀에서 겨우 벗어났다. 그러나 이번에도 레이서가 이들의 뒤를 쫓아가 캔디네 
집 위치를 알아내고는 플로리안 울프에게 알려 주었다.
  플로리안이 캔디의 벽돌집에 도착하자 진흙 말벌들이 붕붕거리며 그 집 주위를 
에워쌌다. 플로리안은 요정의 집을 향해 쉽게 손을 뻗지 못했다. 그에겐 진흙 말벌 
침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만성적 골칫거리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진흙 말벌들에게 짐짓 대범하게 보이려고 애썼다. 그리고는 
자신만만하게 세 요정들을 협박하며 항복하라고 다그쳤다.
  "우리가 미쳤니? 위대한 울프야." 캔디가 외쳤다.
  "너는 절대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강요할 수 없어. 여긴 우리의 정원이야. 네 
것이 아니란 말이야. 너는 요정들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이 멍청아."
  플로리안은 요정의 말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너희들을 몽땅 내 손으로 잡아버리겠어! 아무리 말벌들이 막고 있어도 내가 숨 
한 번만 크게 내쉬면 너희 집은 날아가버리고 말 게야."
  그는 다시 숨을 하나 가득 들이키고는 허리케인 만큼이나 강한 바람을 내뱉었다. 
말벌들이 바람에 날려 그들의 진흙 담장에 부딪쳤다. 그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자신이 말벌들을 점점 화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플로리안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침내 참다 못한 말벌들이 서로 공격신호를 보냈다.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세찬 바람을 피해 날아간 말벌들은 그의 팔, 손, 다리, 어깨, 몸통, 목 등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삽시간에 그는 독기를 품고 붕붕대는 말벌들에게 휩싸이게 되었고, 그가 
질러대던 분노의 고함은 어느 새 비명으로 변해버렸다.
  플로리안 울프는 몸부림을 치며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몇 마리가 그의 손에 
잡혀 죽었지만 벌들은 포기하지 않고 대항했다. 이윽고 그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작은 혹덩어리 같았다.
  말벌들은 그제서야 공격을 멈추었다. 그들은 아기요정 세 자매가 벽돌집에서 나와 
고맙다며 손을 흔들자 날개를 퍼덕여 인사에 답을 하고는 각자 자기들 집으로 
돌아갔다.
  플로리안 울프는 간신히 정원 중앙의 그늘 의자까지 몸을 끌고 갔다. 벌에 쏘인 
그의 몸은 소시지처럼 퉁퉁 불어 온통 분홍색이었다. 그는 여왕의 주치의한테 
치료를 받고서야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그는 한 번만 더 말벌의 침에 쏘이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의사의 충고 때문에 정원사 일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할 수 
없이 자신의 견습생이던 청년에게 정원사 자리를 물려 줬다. 그리고 그 후로는 씨앗 
카탈로그를 만드는 회사에서 실내 근무만 했다.
  새 정원사는 요정들과 어울리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부임하고부터 왕궁 정원의 꽃밭은 전보다 더 알록달록한 꽃들로 만발했다. 물론 
분홍색 꽃들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그 후 아기 분홍요정 세 자매는 캔디의 집을 분홍색으로 칠하고 그 집에서 함께 
살았다. 정원사가 바뀌고부터 일이 훨씬 많아져 날마다 바쁘게 생활했지만 그들은 
항상 즐겁고 행복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분홍색이 꽃들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믿고 있었다.
  
    하얀모자 소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삼대의 여성 즉 처녀, 어머니, 할머니는 삼위일체의 전통적 
색상인 흰색, 빨강색, 검정색으로 대변된다. 따라서 모자 쓴 소녀는 처녀이므로 
그녀의 색은 흰색이고, 우리에게 익숙한 동화속 주인공 빨간모자 소녀의 딸로 
불리게 된다.
  오늘날 지구의 자연환경에 대한 의식이 바뀌고 있으므로 사냥꾼에 대해서도 
새로운 평가가 내려져야 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자연 파괴와 착취자로서 남성은 
영웅이 아니라 악한으로 등장하며, 늑대는 자연정신 자체를 의미하게 된다.
  늑대는 사람을 잡아 먹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늑대가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옛날 이야기는 또 하나의 유언비어에 불과하다. 그런 이야기들은 아마 
전원생활에 미칠 수 있는 만일의 경우 때문에 아이들로 하여금 숲의 개들을 
두려워하고 싫어하게 하려고 누군가가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하얀모자'라고 불리는 소녀가 큰 숲 언저리 오두막에서 
'빨간모자'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하얀모자는 어디를 가든지 소녀가 항상 
눈처럼 하얀 모자를 쓰고 다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한편,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숲 속 깊은 곳에 사는 '하얀모자'의 할머니는 항상 
검은 옷만 입고 살았다. 할머니 댁으로 가려면 꼬불꼬불한 숲길을 지나 한참이나 더 
가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집을 자주 방문했다. 할머니는 병을 고쳐주고, 마을 
아낙들이 아기를 낳는 일도 도와주었으며, 사랑과 행운, 풍년, 맑은 날씨 등을 부를 
수 있는 권위있는 마녀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나무의 정령들이나 
야생 동물들과도 얘기를 나눴다. 그래서 할머니의 오두막 주위는 숲속에서 상처를 
입고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동물들로 가득했다.
  어느날 하얀모자의 어머니가 바구니에 꿀과 치즈, 마른 콩, 그밖에 여러 가지 
음식을 담아 소녀에게 주며 할머니께 갖다 드리라고 했다. 하얀모자는 할머니 
댁에서 며칠을 지냈다. 오두막에는 새와 여러 동물들이 있어서 함께 놀 수도 있었고, 
집안 가득 약초의 향내가 풍기는 등 항상 뭔가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다. 할머니는 
하얀모자에게 식물과 돌, 별, 바람, 물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숲의 
생물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소녀는 숲속의 동물 가운데 수줍음을 잘 타는 늑대를 특히 좋아했다. 오랫동안 
늑대들을 관찰했기 때문에 늑대들의 습관도 잘 알고 있었다. 소녀는 늑대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난폭한 동물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영리하고 충직한 
성품을 지닌 개로, 자기 종족이나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 한 온순하게 군다는 것을 
알았다.
  하얀모자의 할머니는 병든 늑대를 고쳐 주기도 하고, 사냥꾼들이 놓은 덫 때문에 
생긴 상처를 치료해 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늑대들은 할머니를 신뢰하는 듯했다. 
이따금 할머니를 만나러 오는 늑대도 있었다.
  할머니는 늑대 무리 속에서 바르게 처신하는 법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할머니는 하얀모자에게 늑대에 대해 이것저것 말해 주며, 적절히 
처신만 하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깨우쳐 주셨다. 할머니의 가르침 덕에 
하얀모자는 늑대들이 숲속에서 소름끼치는 소리로 울부짖어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싱그러운 햇살이 이슬방울을 반짝이게 하는 어느 아침, 하얀모자 소녀는 바구니를 
들고 새들의 노래에 맞춰 휘파람을 불며 심부름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숲속으로 
한참을 걷다가 시냇가에 앉아 목을 축이고 있을 때 사냥꾼 두 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커다란 늑대 시체를 막대기에 매달아 들쳐매고 있었다.
  늑대의 젖꼭지를 본 순간 소녀는 어딘가에 새끼들이 고아로 남겨졌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덫에 걸렸었는지 늑대의 왼쪽 뒷다리는 관절까지 짓이겨져 있었다. 
소녀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어이, 꼬마야!"
  사냥꾼중의 한 명이 그녀를 부르며 말했다.
  "봐라. 우리가 널 위해 잡은 거다. 무서운 늑대야."
  "난 무섭지 않아요." 하얀모자가 대답했다.
  "아저씨들은 끔찍한 일을 저지른 거예요. 어미 짐승을 고통 속에 죽게 했잖아요. 
새끼들에게 돌아가려다 저렇게 다리가 짓이겨졌어요."
  그러자 나이든 사냥꾼이 갑자기 화를 냈다.
  "넌 참 고약한 입을 가졌구나, 꼬마야. 아무래도 너에게 어른을 공경하는 법을 
가르쳐 줘야겠구나."
  다른 사냥꾼도 낄낄거리면서 얼빠진 얼굴을 하고는 소녀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봐, 윌, 다 컸지? 다 컸으니 그것도 할 수 있을 거야. 어이, 윌, 어때?"
  그가 음흉하게 말했다.
  하얀모자는 어린 여자아이들을 겁탈하려는 나쁜 사람들도 있다는 어머니의 경고가 
생각났다. 하얀모자는 벌떡 일어나서 단단한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봐. 지금 뭘 하려는 거야?" 윌이라는 사냥꾼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처럼 크고 힘센 어른과 싸우겠다는 건 아니겠지? 두들겨 맞고, 그 예쁜 
하얀모자도 먼지로 더럽혀질텐데. 어른을 공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이야. 여기 이 
늑대 꼴이 되고 싶지는 않겠지, 꼬마야."
  "나를 잡아 다리를 절단내겠다는 거예요?" 하얀모자가 말했다.
  그녀는 두 다리를 벌려 발에 힘을 주고는 막대기를 들어 금장이라도 내리칠 
준비를 했다. 그녀는 자신이 위험에 처했으며, 그들과 싸우면 자신이 질 게 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너무도 화가 나서 두려움도 잊어버렸다.
  소녀의 말에 얼빠진 표정의 사냥꾼이 또 낄낄댔다.
  "가서 저 애를 잡아, 윌." 그가 킁킁거리며 말했다.
  "날 건드리면 우리 할머니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하얀모자도 질세라 협박하듯 말했다.
  "우리 할머니는 '위대한 숲의 마녀'니까 주문을 걸면 아저씨들 발이 뒤집어지고 
귀가 떨어져 나갈 거예요."
  "그 할망구 얘기는 나도 들었지."
  윌이 히죽대며 말했다.
  "그녀는 악마라서 늑대로도 변할 수 있다더군. 만일 저 늑대가 네 할머니라면 네 
몸에는 악마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게다. 윌, 저 애를 잡아, 잡으라구."
  얼빠진 표정의 사냥꾼이 재촉했다. 윌은 잠시 멈칫하다가 경멸에 찬 몸짓으로 
돌아섰다.
  "저 꼬마와는 싸울 가치도 없어. 다 잊어버리고 나머지 덫이나 살펴보러 가자, 
롤로."
  "에이, 이봐, 이봐, 윌." 롤로가 애걸했다.
  "다 큰 애야. 이봐, 한 번 해보자구."
  "안 된다고 그랬지, 롤로."
  윌이라는 사냥꾼이 막고 나섰다. 결국 두 사냥꾼은 하얀모자를 놔두고 돌아서서 
가버렸다. 그녀는 바구니를 들고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오두막에 도착한 하얀모자는 할머니께 늑대를 잡은 두 사냥꾼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나도 그놈들을 안다. 아주 비열한 놈들이지. 놈들을 혼내 줄 방법을 알고 있지만 
내일까지 기다리자. 지금은 더 늦기 전에 어미 잃은 늑대새끼들부터 찾아봐야겠다."
  하얀모자와 할머니는 밖으로 나가 늑대 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세 번째 
굴에서 어미를 기다리며 울부짖고 있는 네 마리의 늑대새끼들을 발견했다. 
하얀모자가 두 마리를 외투에 싸자 할머니도 두 마리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늑대새끼들을 오두막으로 데려온 할머니는 가죽 젖꼭지가 달린 작은 젖병에 
따뜻한 염소젖을 담아 그들에게 먹였다. 다행히도 새끼들은 우유를 잘 소화시키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내 난로 밑 상자 속에서 만족스럽게 잠이 들었다.
  날이 밝자 할머니는 다리가 부러진 새끼사슴, 날개가 부러진 매, 덫에 걸려 발톱 
세 개가 뽑혀나간 너구리를 보살폈다. 그러나 새끼 늑대들에게 반해버린 하얀모자는 
다른 동물들은 아예 둘러보지도 않았다.
  동물들을 둘러본 할머니와 하얀모자는 연장을 가지고 사냥꾼들의 덫을 찾아 
나섰다. 할머니는 덫 하나하나를 조심스레 뽑아낸 뒤 용수철과 쇠붙이를 
산산조각냈다. 그리고 부수지 않은 덫 하나를 집으로 가져와 대문 앞에 숨겨두고는 
하얀모자에게 말했다.
  "이제 뭐가 잡히는지 잘 봐라. 자기들 덫이 어떻게 됐는지 알면 놈들은 분명히 
이리로 올 게다."
  할머니의 예상대로 다음날 아침 일찍 사냥꾼 두 명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찾아왔다.
  "이리 나와, 이 마귀할망구야." 윌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우리 덫을 부숴놓은 게 누군지 다 알고 왔다. 당장 나오지 못해!"
  "나를 데려가려거든 네 놈들이 직접 와서 데려가거라." 할머니가 맞받아 소리쳤다.
  할머니는 몸에 침대보를 칭칭 감고는,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거대한 늑대 가면을 
머리에 썼다. 가면 속의 큰 이빨들 사이에는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시뻘건 혀가 
길게 달려 있었다.
  윌은 금방이라도 총을 쏠 듯이 방아쇠를 쥐고는 문을 밀었다. 롤로도 뒤를 
따라왔다. 그런데 윌이 문을 걷어차려고 발을 든 순간 땅을 딛고 있던 다른쪽 발이 
풀숲 밑에서 튀어나온 덫에 걸렸다. 그는 힘없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총이 불을 
뿜으며 단풍나무 잔가지 몇 개를 날려버리고는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그 순간 늑대가면을 쓴 할머니가 한 손에 도끼를 들고는 문을 젖히고 나갔다. 
윌은 덫에 걸린 채 발버둥치며 비명을 질렀다. 롤로도 더듬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네 놈들을 잡아먹겠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할머니는 윌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 순간 
롤로는 악마라도 만난 듯이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쳤고, 그 후 다시는 숲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사냥꾼의 몸뚱이를 알맞은 크기로 토막내 늑대들의 
먹이로 숲속에 뿌려놓았다.
  하얀모자는 다음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할머니 집에서 어떻게 지냈느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늑대한테 먹이를 주고 왔어요."
  
    바비인형
  
  불가사의한 몸매를 자랑하는 바비인형은 그 인기가 여전히 대단하다. 바비인형은 
소녀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영원히 불만스러워 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비는 20세기가 만들어낸, 이룰 수 없는 환상이다. 다른 시대 여성들의 자아 역시 
마찬가지다. 18인치의 잘록한 허리에 풍성한 드레스, 두툼한 패드를 집어넣어 한껏 
강조하던 엉덩이, 중국의 전족 풍습, 그리고 이와 유사한 서구의 하이힐, 낭만파 
화가들의 풍만한 누드화(실제로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은 영양실조로 고생했다) 
등에 의해 조롱 당해 왔다. 심지어 중세 시대의 성모 마리아상도 인간의 몸을 한 
어떤 여성도 영원히 얻을 수 없는 동정녀 어머니 상으로 나타난다.
  우리 시대에도 식욕부진이나 거식증 같은 식사 장애의 희생물이 되어가는 사춘기 
소녀들이 적지 않다. 이는 그들 자신이 바비인형보다 못하다며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이 원인이기도 하다.
  동시에 바비는 옷장은 꽉 찼으나 머리는 텅 빈, 아름답지만 심성이 곱지 않은 
여성의 상징이 되어 왔으며, 이와 비슷하게 군인 인형 죠는, 무엇보다 평화가 
요구되는 세상임에도, 군사적 공격야욕을 멈출 줄 모르는 남성상을 상징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인형들은 우리 문명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이 보여진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어느 장난감 가게에 밤만 되면 살아나는 인형들이 있었다. 
그 인형들은 어둠이 깔리면 포장 상자를 열고 나와 한바탕 밤의 향연을 벌이고는 
새벽 첫 여명이 비칠 때 다시 상자 속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오래 전, 
미키마우스라는 이름의 한 천재인형이 가르쳐 준 것이었다. 가끔 이 가게에 인형을 
사러온 아이들은 상자가 약간 닳은 것을 알아차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런 
것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기저귀에 쉬를 해 놓고 울기만 하며 너무나도 심심해 하는 아기 인형을 빼고 이 
장난감 가게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형은 바비였다. 그녀는 인간의 나이로 치면 스무 
살 정도의 어른처럼 보였으며, 그녀가 입고 있는 의상 역시 스무 살 정도 된 인간의 
차림이었다.
  바비는 패션모델, 인기가수, 우주비행사, 치어리더, 간호사, 해변의 미녀, 공주, 
쇼걸, 예술가, 발레리나, 영화배우, 꿈 속의 연인, 가장행렬의 여왕, 체조선수, 
미인대회의 최고 여왕이었고 국적도 최소한 열 일곱 개는 됐다. 그녀는 또 장난감 
가게에서 사회적 신분도 제일 높았다. 바비에겐 그 어떤 인형보다 옷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바비는 상점에 오는 인간들을 애,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경멸했다. 자신의 완벽한 
몸매를 따라올 인간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인간들의 허리는 
너무 굵고, 가슴은 너무 작거나 처져 있었으며, 게다가 엉덩이는 괴물처럼 큼직했다.
  바비는 인간들이 아무리 갈망해도 결코 이룰 수 없는 몸매를 마음껏 과시하곤 
했다. 예상했던 대로 인간들은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기 시작했고, 바비는 혹시 
세련되지 못한 소녀에게 팔려 자신이 여왕으로 있는 상점에서 나가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 했다.
  바비에겐 자신과 몸매가 아주 흡사한 여자친구 몇몇과 켄달이라는 이름의 남자 
파트너도 있었는데, 그는 인간과 좀 더 비슷한 사립고등학생 차림이었다. 켄달의 
임무는 인형들이 살아 움직이는 밤이 되어 바비가 여러 가지 역할과 임무를 수행할 
때 그녀를 보좌하는 것이었다. 바비를 보좌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는 언제나 턱시도나 수영복, 민족의상 또는 무대의상만 입었다. 그는 자기를 갖기 
위해 열심히 돈을 저축하고 절약하는 인간들을 경멸했다. 바비와 마찬가지로 켄달도 
거드름 피우기를 좋아하는 인형이었다.
  그런 어느 날 밤, 바비는 진열대에서 죠라는 새로운 남자 인형을 보게 되었다. 
죠일병은 여자 인형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군복, 헬멧, 
총, 수류탄, 대전차 폭탄, 그리고 그밖의 온갖 전투용품들뿐이었다. 그는 적을 죽이고 
폭파하는 것을 좋아했다. 가장행렬이나 파티, 패션쇼, 그밖에 바비인형이나 켄달이 
집착하는 문명의 잡동사니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그는 늘 
저속한 남자들이나 속해있는 전시상황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바비는 자신이 점점 죠일병에게 매료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가 죠에게 
반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단 하나, 그가 바비의 매력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항상 남자 인형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던 바비에게 죠일병의 무관심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녀는 죠일병의 그러한 태도가 자신의 매력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가 켄달에게 말했듯이 그에게는 귀여운 면도 있었다. 그러나 
켄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너보다 키도 작아. 몸집은 집채 만한데 말이야." 켄달이 비웃듯이 말했다.
  "게다가 그는 우리와 다른 부류야. 아마 춤도 못 출걸. 네가 원숭이처럼 생긴 그 
놈과 데이트하는 것을 보면 네 친구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어?"
  "원숭이라니 좀 심했다." 바비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섹시하잖아. 아마 그와 함께 있으면 아제까지 해보지 못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장담하는데, 넌 그런 일들을 좋아하지 않을 거야." 
켄달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켄달은 바비가 자기 아닌 다른 남자에게 그렇게 진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질투심이 치솟았다.
  "죠일병은 무례한 하층계급인 데다 멍청한 군인일 분이야. 배운 게 있어야지. 
정말이야. 날 믿어."
  "그럼, 난 널 정말 믿어, 켄달."
  그녀가 속눈썹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속눈썹은 진짜 나일론이어서 
그녀의 매력 가운데서도 최고였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 경험을 넓혀가는 거야, 안 
그래?"
  "오직 삶의 폭을 넓히고 싶은 거라면 그렇지."
  켄달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바비의 말을 가로챘다. 그러나 이들의 이런 
언쟁은 자주있는 일이 아니었다. 바비는 언제나 켄달의 말을 일방적으로 
무시해버리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바비는 켄달의 반대를 무시하고 죠일병과 사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영원한 안내자인 "인기를 얻는 법"이라는 잡지에 실린 칼럼대로 그가 
좋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관심을 갖는 척 했다. 원자폭탄이나, 권총, 살상용 소총, 
보급품(그는 '아모' 또는 '동그랑땡' 이라고 불렀다), 폭발장치, 지뢰밭, 엄호사격, 
공중엄호, 개인참호, 그리고 수륙 양용차 등에 대해 몇 시간씩이나 늘어놓는 그의 
장광설도 열심히 들어 주었다. 그녀에겐 이 모든 게 끔찍하게 따분했지만, 유명한 
전투나 명성 높은 장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짝이는 죠의 눈동자를 지켜보는 게 
좋았다. 더욱이 그가 그토록 매료되어 있는 일들을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이국적이고 비범하게 보이게 했다. 
  바비는 점차 경박해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오로지 죠일병을 유혹하려는 
생각뿐이었다. 이제 그녀에게 죠일병을 만나기 전에 살았던 방식은 뒷전이었다. 
쇼핑이란 말은 꺼내지도 않았으며, 수영장 파티나 데이트, 패션쇼, 친구들과의 
나들이 따위에도 흥미를 잃었다. 화장이나 머리 손질하는 것을 잊을 때도 있었다. 
  바비는 화술도 점차 예전 같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디자이너가 만든 청바지나 
최근에 유행하는 아이섀도 색상, 예를 들어 '타히티의 살구' 등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 대신 그녀는 공격이나 탱크, 핵무기 등에 대해 말했다. 
그녀의 옷맵시는 점점 초라해졌고, 옷을 자주 빨아입지도 않았다. 
  그녀의 친구들은 이제 그녀를 따분하게 생각했다. 켄달만이 예전의 바비를 
그리워할 뿐이었다.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미찌와 데이트를 했다. 바비에게 질투심을 
불러일으켜 예전의 그녀로 돌아오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죠일병은 바비가 보이는 열렬한 관심을 즐기는 것 같았다. 바비가 어떤 얘기를 할 
때 게슴츠레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거나, 옆구리를 긁적거리지 않으면 눈이 보이지 
않게 모자를 눌러 쓰고 졸기도 했다.
  바비는 그가 자신의 이야기에 조금도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것 같아 몹시 
속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두 눈이 초점을 잃었거나 아예 두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도 혼자 중얼거리면서 좀 더 재미있게 이야기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죠일병으로부터 적들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 아무리 새로운 
이야기를 생각해내려 해도 그녀 역시 적에 대한 생각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어느날이었다.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 한 편의 시를 지은 바비는 '적들에 
대항하여'라고 제목을 붙인 뒤, 승리감에 젖어 죠에게 달려가 그것을 읽어 주었다.
  
  
  적들에 대항하여
  
  
  사람들은 그대에게 미워하라 말한다.
  저 악마들을 쳐부수라고.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그들은 말한다.
  '오, 잠깐만-우리가 실수했어.
  저 악마들은 자네 친구들이야.'
  시를 읽고 난 바비는 자리에 앉아 겸손하게 그가 칭찬해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죠는 말 한 마디 않고 그녀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가 너무 오랫동안 말이 없자 그녀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에 안 들어?" 그녀가 물었다.
  "적들에 대해 말하고 있잖아. 봐, 운율하며, 모두 다."
  "이게 무슨 말라빠진 뼈다귀 같은 소리야?" 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얼빠진 날라리야, 그 말도 안 되는 시 나부랭이 갖고 꺼져버려."
  자신의 첫 문학적 영감이 뜻하지 않게 그런 식으로 무시당하자 바비는 화가 났다. 
하지만 그녀는 분노를 삼키며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녀는 "인기 얻는 
법"에서 남자 친구의 마음을 '열어보라'고 충고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그가 개인적인 
인생의 목표라 불렀던 것에 대해 물었다.
  "네 인생의 목표는 뭐니?"
  "내 뭐?"
  "있잖아-뭐가 되고 싶냐고, 네 궁극적인 포부 말이야."
  "네가 존경하는 인물이 될 수 있다면 넌 누가 되고 싶니?"
  "영웅, 아마 그럴걸."
  "넌 내 영웅이 되고 싶진 않니?"
  자신의 나일론 속눈썹을 선정적으로 깜박이며 바비가 물었다. 그러자 죠가 
비웃으며 대답했다.
  "넌 훈장 하나도 줄 수 없어. 넌 하찮은 인형일 뿐이야."
  "어떻게 그런 말을!"
  그녀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뺨을 갈겼다. 그러자 죠가 그녀를 포장상자 옆으로 집어 던지며 말했다.
  "잘 들어, 이 계집애야. 이제부터는 날 귀찮게 하지마. 난 네 빈 대가리에서 
나오는 수다에 진절머리가 나. 너 같이 어리석은 여자는 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어."
  그는 자신의 말을 강조하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넌 정말 역겨워." 바비가 외쳤다.
  "넌 날 전혀 좋아하지도 않았어."
  "넌 그런대로 괜찮아. 적어도 네가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말이야. 그런데 넌 말이 
많아. 게다가 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
  그녀의 말에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가 말했다.
  "난 가겠어, 이 정신병자 같으니라구!"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그녀가 소리쳤다.
  "어쩌다 내가 널 근사한 남자로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했지? 넌 양쪽 귀 사이에 
플라스틱 폭탄밖에는 없는 심술궂은 돼지야!"
  그 순간 죠가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따귀를 때렸다. 바비와 죠의 관계가 
완전히 끝나는 순간이었다.
  엉엉 울면서 그곳을 뛰쳐나온 후로 바비는 다시는 죠의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군사 문제에 대해서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녀는 자신과 
진정으로 깊이 있는 철학을 나눌 수 있는 파트너는 켄달이라고 선언하면서 그에게로 
돌아갔다.
  켄달 역시 이 말을 듣고 무척 좋아했다.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철학이 
무엇인지, 그게 깊이가 있는지 어떤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그러던 어느 날 바비가 켄달에게 물었다.
  "켄달. 넌 애국자니?"
  "물론이지. 안 그렇겠어?"
  "애국적이면서 개인적인 네 인생의 목표는 뭐니?"
  "애국심이 많은 남자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 있지. 많은 친구를 사귀고, 파티도 
하고, 수영장이 있는 집과 콘도도 하나 사고, 와이드 스크린 TV에 벽에 꽉차는 
오디오, 그리고 BMW, 포셰, 페라리가 들어갈 수 있는 차고 말이야."
  "그 정도면 알겠어." 바비가 말했다.
  "넌 영웅이 되고 싶지는 않니?"
  "아니."
  "왜?"
  "영웅들이란 파멸을 자초하는 운명을 가진 남자들이야."
  얼마 후, 죠일병은 진짜 화염에서 진짜로 부상을 입는 전투를 좋아하는 소년에게 
팔렸다. 그 소년은 죠일병의 한쪽 팔을 뜯어버리고 얼음 송곳으로 그의 몸뚱이를 
마구 쑤셔대는가 하면 장난감 폭탄을 그의 몸 속에 넣고는 폭죽을 터뜨려 그를 
끔찍한 모습으로 태워 버렸다. 지울 수 없는 흉터와 불구의 몸뚱아리로 죠는 강제 
퇴역당한 셈이었다.
  바비와 켄달은 어린 소녀에게 팔렸다. 소녀는 이들을 사랑하고 잘 보살펴 
주었으며, 새 옷도 많이 사 주었다. 그래서 두 인형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퀘스타 공주
  
  "선한 남자는 찾기 힘들다."
  이것이 "퀘스타(quest):퀘스트는 대중예술, 특히 만화영화 제목으로 애용되는 
단어다. 퀘스타라는 이름은 추구, 추적, 탐구, 원정 등을 뜻하는 퀘스트에서 온 말로, 
역자는 '찾아다니다'라는 뜻으로 옮겼다. 옛날 중세 기사들이 모험을(대개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 썼다는 성배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가 전설, 민담, 민요 그리고 더 
나아가 중세 로망스 문학의 주요 줄거리가 되면서 퀘스트는 외부의 사물이 아닌 
자신, 곧 자아탐구의 주제로 발전하게 된다. 이 작품 퀘스타 공주는 일련의 모험과 
시련을 통해 아버지나 남편의 종속물이 아닌 독립체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찾는 
추구(quest)의 여정에 오른다는 이야기다." 공주가 내린 결론이다. 그녀의 실망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아버지로부터 시작됐다. 그 이후 '자신은 오직 자기 스스로 
돌봐야 한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게 되고 마지막 메시지는 페미니즘적 신념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아내로서의 내조와 헌신적인 역할이 당신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그 역할에 
휘말리지 말라."
  어느 가부장적 사회에서나 남자들에게는 '자신을 먼저 돌봐야 한다'는 원칙이 
암묵적으로 당연하게 따라다녔지만 여자들에게는 의식적으로 이 원칙이 수정된 후 
적용되었다.
  대모 요정이 퀘스타에게 선물한 별 모양의 조개껍질은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들의 탄생과 재생, 그리고 인생의 관문으로 통하는 기본적 세계관을 의미하고 
있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퀘스타라는 어린 공주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퀘스타가 겨우 
열 살이 넘었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셨다. 왕비가 병이 들자 왕은 
온나라를 뒤져 용하다는 사람을 다 불러들여 최선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왕비가 죽자 왕은 왕비의 병을 고치려고 모여든 현명한 여인(역자주:wisewoman, 
직역하면 현명한 여인, 지혜로운 여인이지만 중세 시대에는 마녀, 여자 점술가를 
의미했고, 산파나 조산원을 뜻하기도 한다)들을 모두 성 밖으로 추방시켜 버렸다. 그 
후 왕은 퀘스타 공주까지 외면한 채 오로지 자기 자신과 왕국의 영광에만 집착했다. 
그는 이웃 왕국과 전쟁을 벌여 더욱 많은 영토를 차지하고 경쟁자들을 처단하는 등 
왕비가 죽은 지 일년도 채 안되어 잔인한 폭군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퀘스타 
공주는 더 이상 아버지를 만나 볼 수도 없었다. 예전의 다정했던 아버지 모습을 
떠올리면 너무도 슬펐지만 아버지는 점점 미쳐가는 것만 같았다.
  신하와 하인들 역시 퀘스타 공주는 안중에도 없었다. 왕의 심기가 불편해지면 
끔찍한 벌이 내려지기 일쑤여서 그들은 오로지 왕의 비위를 맞추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퀘스타는 이미 공주가 아니었다. 그녀를 돌보아주던 하녀들은 모두 해고되었고, 
눈부시게 아름답던 드레스는 이젠 너덜거리는 거렁뱅이 옷이 되어버렸다. 왕은 
공주가 즐겨 타곤 하던 백마마저 빼앗아 자신이 총애하는 어느 장군에게 
주어버렸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자신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을 위해 식사 시중을 
들도록 강요했다. 불쌍한 퀘스타 공주는 이제 가정부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퀘스타 공주를 더욱 불행하게 하는 것은 불한당들처럼 무례한 기사들의 
행동이었다. 그들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치마자락을 들추는가 하면 온갖 
천박한 농담으로 그녀를 괴롭혔다. 그 가운데 가장 역겨운 남자는 왕의 
호위대장으로, 그는 그녀가 곧 자신만의 노리개감이 되리라고 떠벌리고 다니면서 
추근거렸다.
  퀘스타 공주는 주방의 허드렛일을 마치고 어쩌다 시간이 생기면 성을 빠져 나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숲으로 가곤 했다. 그곳은 요정들이 나타난다고 전해오는 
장소로, 잔가지들이 커튼의 레이스처럼 드리워진 버드나무가 빼곡하게 둘러싸인 
이끼 낀 구릉이었다. 구릉 한복판에는 커다란 나무가 우뚝 서 있었고, 농부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 어떤 부족이 신성시했고 신비한 힘을 부여 받았다고 하는 돌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마법의 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햇볕에 
따뜻하게 달궈진 돌에 기대어 앉아있으면 자신을 든든히 지탱해 주고 편안함을 즐길 
수 있어서 이 돌을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숲 속의 돌에 기대어 쉬고 있던 퀘스타 공주는 희망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자신의 처지가 새삼스레 측은하게 여겨져 하염없이 울었다.
  그러자 잠시 후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눈물을 닦고 
소리나는 곳을 고개를 돌려보니 하늘하늘한 은빛 가운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왜 울고 있지요?"
  "너무 슬퍼서요.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폭군이 되어 나를 가장 비천한 
하인처럼 취급하세요. 기사들은 나를 희롱하고, 아마 아버지는 곧 제일 난폭하고 
천박한 기사에게 나를 줘버리고 말 거예요. 전쟁터에서의 살육에 대한 보상으로 
말이에요."
  "그렇다면 달아나야겠군요."
  여인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퀘스타에게는 두려운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제가 거처할 곳이라고는 성뿐인 걸요."
  퀘스타 공주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내게는 달리 갈 데가 없어요. 돈도 재산도 없구요. 방랑자처럼 여기저기 방황하다 
결국은 굶어 죽고 말 거예요."
  "두려워 할 것 없어요. 당신은 이 세상에서 당신에게 맞는 장소를 발견하기 전에 
세 가지 시련을 거쳐야 할 운명이랍니다. 현재의 시련이 그 첫 번째예요. 이제 
당신이 움직일 때가 됐어요."
  여인은 은빛 옷자락에서 어린아이 주먹만한 물건 하나를 꺼내 퀘스타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것은 둥글고 윤이 나는 별 모양의 조개였다. 조개의 앞부분은 마치 작은 
치아를 훤히 드러내며 싱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당신을 보호해 줄 거예요. 바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당신이 갈 길을 
안내해 줄 겁니다."
  여인의 말대로 퀘스타가 조개껍질을 귀에 갖다 대자 멀리 바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러면 바닷가로 가야하나요?"
  퀘스타 공주가 물었다. 그러나 여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공주의 이마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는 모습이 점점 흐릿해지면서 햇빛에 
빨려들어가듯 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확실해.'
  퀘스타 공주는 혼자 중얼거렸다.
  '요정나라 여왕님이 나를 도와 주시는 거야. 그래서 직접 나타나신 거야. 어떻게 
내가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어?'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퀘스타 공주는 그나마 몇 벌 안되는 남루한 
옷가지들을 싸고 부엌에서 음식과 칼을 가져온 다음, 누군지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외투를 훔쳐 입고 아무도 모르게 성밖으로 빠져나갔다. 
  보름달이 그녀의 길을 밝혀 주었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그리고는 숲속 
깊은 곳에 이르러서야 천천히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녀는 밤새도록 바닷가 쪽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그녀는 너른 들판에 쌓아놓은 
건초더미 위에 누워 눈을 붙였다.
  며칠 밤을 그녀는 똑같은 방법으로 계속해서 여행을 했다. 낮에는 지나가는 
행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숨어지냈고, 저녁에는 마을의 불켜진 집을 피해다녔다. 
그녀의 발은 온통 물집이 잡히고 피가 맺혀 점점 거칠어졌다. 음식이 다 떨어지자 
그녀는 과수원이나 양계장을 지날 때면 과일과 달걀을 훔치고, 농장지기가 졸고 
있으면 그 틈을 타 다른 저장 식품들도 훔쳐 먹었다.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된 고독한 
유랑 생활을 통해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배우고 지혜도 얻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은 너무나 외로웠고, 또 마음 한 구석은 누군가에게 들켜 분노한 아버지에게로 
다시 끌려가게 될 것 같은 두려움에 떨곤 했다.
  외롭고 두려운 시간들 속에서 어느덧 바닷가에 다다르자 그녀는 조개껍질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여기...여기...여기예요."
  그녀는 조개껍질이 하는 말을 들으며 바닷가에 서 있는 어선에 기대어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놀라 눈을 떴다. 
조심스럽게 올려다 보니 어깨에 밧줄 타래를 짊어지고 손엔 닻을 든 곱슬머리의 잘 
생긴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당신은 지금 내 배 위에서 잠을 자고 있소. 난 지금 고기를 잡으러 가야 하오. 
자려거든 집에 가서 자요."
  "난 집이 없어요."
  퀘스타는 대답할 기운조차 없었다. 
  "어디서 왔소?"
  "저기, 내륙지방 어디쯤인데... 잘 모르겠어요."
  "아는 게 하나도 없군. 좋아, 어쩌면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물 손질은 잘 
하오? 그물을 손질해야 하는데, 모든 일을 내가 직접 할 수는 없단 말이야."
  젊은 어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예, 줄을 꿰매고 엮는 건 할 수 있어요."
  "좋아, 그럼 솜씨좀 보자구."
  그는 배에서 큼직한 그물을 꺼내서는 모래 위에 펼쳐 놓았다.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물 손질이 잘 되어 있으면 내가 잡은 생선으로 근사한 
저녁식사를 주지."
  젊은 어부는 퀘스타에게 여기저기 끊어진 그물을 손질하게 놔두고는 수평선을 
향해 노를 저으며 사라져 갔다. 오랜 여행에 지쳐 있었지만 그녀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하루 종일 정성을 다해 일했다. 오후 늦게 그녀는 손가락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고 서서히 배고픔과 갈증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부는 작은 그물에 물고기를 가득 잡아 돌아왔다. 그는 퀘스타의 그물 손질 
솜씨에 흡족해 하면서 고기를 더 많이 잡을 수 있는 큰 그물이 있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약속한 대로 그녀를 모래 언덕 위에 있는 자신의 작은 오두막으로 
데려가 싱싱한 생선과 호밀 빵, 사과 푸딩이 있는 근사한 저녁 식사를 요리해 
주었다. 오랫동안 끼니를 굶은 퀘스타는 차려진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그러자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어부가 물었다.
  "요사이 별로 먹지 못했나보군."
  "네."
  퀘스타는 마지막 남은 푸딩을 입에 물고 대답했다.
  "집이 없다면 여기서 나와 함께 지내도 좋소. 나는 당신에게 음식과 거처를 
제공할 테니 당신은 집안 일과 그물 손질도 하고 또 내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해놓을 
수 있겠소?"
  그가 그녀를 보고 개구쟁이처럼 싱글거리며 말했다. 그의 양쪽 뺨에 보조개가 
생기고 두 눈은 매혹적으로 반짝거렸다.
  "당신은 못생기지는 않았어, 안그래?"
  그가 웃음을 머금은 채 다시 말했다. 퀘스타는 어쩐지 그에게 마음이 끌렸다.
  "당신도 못생기지는 않았어요. 아마 오래 머물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
  젊은 어부와 함께 살게 된 퀘스타는 곧 자신이 이 남자를 사랑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들은 어느새 서로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한 부부가 되었다. 
퀘스타는 자신이 성 안에 머물러 있었다면 결코 이 어부의 오두막에서처럼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퀘스타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예년에 없던 가을 폭풍이 거세게 
불어닥쳐 어장을 망쳐놓았기 때문이었다. 어부가 바다에 나가 있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지만 생선 몇 마리 정도 잡아 오는 게 고작이었다. 먹을 물고기도 점점 
적어지고 팔 것도 점점 적어졌다. 그러나 세금 징수원은 늘 하던 대로 뇌물을 
달라고 정기적으로 찾아왔고, 흉년이라고 해서 전보다 덜 가져가는 법은 없었다. 
퀘스타와 어부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살림살이마저 내다 팔기 시작했다. 
오두막은 점점 더 초라해져갔다.
  '내가 탐욕스런 아버지 대신 왕위에 있다면 가난한 백성들에게 더 많은 자비를 
베풀텐데.....'
  이제 젊은 어부는 그녀를 보고 더 이상 웃지도 않았고,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에게선 모든 즐거움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는 열심히 일했지만 빚은 점점 
늘어 갔다. 보다 못한 그녀가 어부 일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해 보라고 권유하자 
그는 펄쩍 뛰며 화를 내더니 급기야는 그녀의 뺨을 '찰싹'소리가 나게 때렸다. 그의 
아버지처럼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처럼 자신 역시 과거에도 어부였고 앞으로도 
어부일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더욱 난폭해지고 침울해져 갔다. 그녀를 때리는 일도 
잦아졌다. 그녀가 자신의 일에 저주를 내렸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운이 나빠진 건 
순전히 그녀 때문이라고 몰아세웠다.
  "말도 안돼요." 그녀는 거세게 항의했다.
  "당신이 곤경에 처한 건 억압적인 왕과 정부 때문이라는 것을 왜 모르세요?"
  하지만 뇌물을 받으러 온 군인들에게는 감히 큰소리 한번 치지 못하는 그는 그럴 
때마다 불쌍한 그녀에게 더욱 화를 냈다. 그녀의 삶은 다시 공포로 휩싸이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바다에서 돌아온 어부가 자신을 때리는 일이 없도록 고기가 많이 
잡히기만을 바라는 노예 신세가 돼버리고 말았다.
  어부가 바다에 나가고 없을 때면 가끔 그녀는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부는 모래 
언덕을 걸으면서 눈물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러다 안개 자욱한 어느날 아침 
해변가에서 그녀는 은빛 나래옷을 걸친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왜 울고 있나요?" 여인이 물었다.
  "아, 난 전보다 더욱 비참해졌어요. 지금 나는 예의라고는 전혀 없는 남자의 노예 
신세랍니다. 그이는 삶이 자신을 좌절시킬 때마다 날 학대해요. 내 신세가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당신은 다시 달아나야 하겠군요."
  "이 겨울에 길에서 살 수는 없어요. 얼어죽지 않으면 굶어 죽을 거예요."
  "당신의 운명을 믿으세요. 당신의 조개껍질에 귀를 기울이세요. 지금이 당신의 두 
번째 시련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여인은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퀘스타는 오두막으로 
돌아와 조개껍질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조개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남쪽...남쪽...남쪽으로..."
  그녀는 어부가 자신을 가로막을까봐 그가 바다에 나간 틈을 타 옷가지와 칼, 
비상식량, 비상금 그리고 좋은 장화 한 켤레를 챙겨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다행히 날씨가 춥지 않아 빈 헛간이나 가축의 우리, 목동의 오두막 등에서 쉴 곳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떠돌던 그녀는 커다란 배들이 정박해 있는 어는 항구에 도착했다. 
그곳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강기슭에 있는 
여인숙으로 갔다. 그곳에는 따뜻하게 불이 지펴진 화로와 맛있는 음식 냄새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유혹했다.
  여인숙 주인이 그녀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거지는 못 들어와!"
  "난 거지가 아니에요. 돈도 있어요."
  그녀가 동전 몇 개를 내보이자 주인남자는 툴툴거리며 빵 한 조각과 알맞게 
데워진 걸쭉한 수프 한 대접을 내놓았다. 그것은 그녀가 이제까지 먹어본 것 중에서 
가장 맛있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그녀는 여인숙 주인에게 혹시 일꾼을 구하는 
곳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일을 하고 싶다고? 우리집에 여자 하인이 필요하긴 한데, 일당은 동전 한닢, 
숙소제공, 뜨거운 수프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어. 하지만 힘든 일도 겁내지 말아야 
하는데."
  주인남자가 그녀의 행색을 살피며 말을 꺼냈다. 퀘스타는 아무리 힘든 일도 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고는 여인숙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앞치마와 
빗자루 그리고 처마 밑의 작은 다락방이 침실로 주어졌다. 그 해 겨울 내내 그녀는 
손님 시중을 들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방 청소를 했다. 뿐만 아니라 걸레질이며 
빨래, 설거지, 요리 거들기, 잔심부름 등이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는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냈다. 한때나마 고왔던 그녀의 손은 동상으로 트고 거칠어졌다.
  매일 밤 일이 끝나면 그녀는 온몸이 파김치가 되어 좁다란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독립했다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남자들이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기한테 시집오면 팔자를 고칠 수 있다고 
은근히 추파를 던질 때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번번히 거절당했다. 그녀는 
혼자 있고 싶었다.
  향긋한 꽃내음이 살랑대는 어느 봄날 저녁, 그녀가 호감을 가질만한 젊은 남자가 
여인숙에 나타났다. 그는 음악가였다. 그는 기타를 연주하며 손님들에게 달콤하고 
애절한 발라드풍의 노래를 들려줬다.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몇 마일 밖에서도 
손님들이 찾아 왔다. 여인숙 주인은 장사가 잘 되자 음악가에게 계속 머물면서 
연주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음악가도 주인 남자의 청을 받아들였고 그는 퀘스타 
공주가 묵고 있는 침실 바로 아래층에 머물게 되었다. 밤이면 가끔씩 연습을 하는 
음악가의 노래소리가 그녀의 침실에까지 조용히 들려 왔다.
  그녀는 음악가가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점잖고 편안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그의 매력에 조금씩 마음이 끌렸다. 그녀는 이렇듯 
부드러운 남자라면 이전의 어부처럼 난폭한 짐승으로 돌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날부터인가 그녀는 차츰 음악가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옷도 깨끗이 세탁해 주고 신발을 닦아 주거나 양말을 기워 주고, 맛있는 음식을 
몰래 갖다 주기도 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고 확신했고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음악가가 떠나겠다는 결정을 하자 그녀도 음악가를 따라 나섰다. 
두 사람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들은 새처럼 자유롭게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돌아다니며 돈을 벌었다. 낮에는 결혼식장이나 생일파티장, 마을단위의 의식, 
축제 등 어느 곳에서든 함께 공연을 하고, 밤에는 여인숙이나 농가, 마을 공회당 
등에서 묵었다.
  음악가를 통해 한동안 그녀의 생활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음악가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노래와 술로 시간을 보내고 그의 팬들에게 황당한 얘기만 늘어놓고 
있어도, 그래서 그녀 혼자 모든 노동을 감당하게 되었어도 그녀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무위도식하는 생활은 점차 짜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성질이 고약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너무 게을렀고, 술에 취해 있을 
때가 많아서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자 주변에서는 그가 
신뢰할 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사람들은 이제 그의 연주를 
예전만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퀘스타는 더욱 더 열심히 일했다. 손수 옷을 만들기도 하고, 가계부도 
정리하고, 사람들도 모았다. 그가 너무 취해서 연주를 할 수 없을 때는 일일이 
찾아가 그를 대신해서 사과를 했다. 때로는 그녀 혼자서 모든 쇼를 진행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음악가 만큼 실력을 갖춘 가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관객들은 언제나 실망을 하고 돌아갔다. 게다가 사람들이 음악 따위에 돈을 쓰는 
것을 낭비라고 여기게 되어 그들의 수입은 점점 줄어 들었다. 더욱이 왕이 
전쟁준비를 위해 세금을 더 많이 걷어갔기 때문에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퀘스타는 어떻게든 음악가가 술을 멀리하고 일을 하게 하려고 노력도 하고 격려도 
해보았으나 허사였다. 그는 그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술집으로 향할 뿐이었다. 그는 두 사람이 번 돈의 대부분을 술값으로 탕진했다. 
그녀는 갈수록 걱정이 많아졌다. 그녀는 이제 곧 어머니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된다는 책임감도 게으른 음악가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들이 태어날 때에도 언제나처럼 그는 취해 있었고, 그 후로도 그는 거의 매일 
취해 있었다. 그는 아이와 잘 놀아주고 자장가도 잘 불러 주었지만 부모로서의 
책임감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 더구나 퀘스타가 아이를 키우느라 더 이상 음악가의 
일을 돌봐 줄 수 없게 되자 그들의 청중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래도 음악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매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허송세월만 보냈다. 
그녀는 그의 나태함에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호된 질책도 해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토닥거려 주고는 
달콤한 사랑의 말을 속삭이다가 곯아 떨어지곤 했다.
  결국 그들은 음악가를 더 이상 환영하지 않는 어느 마을 어귀에 천막을 치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와 아이를 내버려둔 채 계속 술집에 드나들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아이를 들쳐업고 추운 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도 
하고,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쉬지 않고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어느날, 그녀는 설움에 겨워 포대기에 싼 아이를 안고 길가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의 눈 앞에 은빛 가운을 걸친 
여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왜 울고 있지요?" 여인이 물었다.
  "전 동전 한푼 없는 거지가 됐어요. 그이는 점잖고 다정했어요. 하지만 이 
아이만큼이나 무책임해요.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을 떠나야 하겠군요."
  "하지만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알거지 신세로 어떻게 아이를 보살피죠?"
  그녀가 절망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적어도 지금 사는 곳에는 머리를 가려 줄 지붕이라도 있어요. 비록 천막이기는 
하지만."
  "당신은 이제 세 번째 시련을 거친 겁니다. 이제 당신을 자신이 공주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백성들에 대해 충분히 배웠고 백성들이 
얼마나 전쟁과 수탈에 시달리고 있는지 잘 알았을 겁니다. 그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는 대신 이제 그들이 진실로 들어야 할 것들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여인은 이 말을 남기고 금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퀘스타 공주는 천막으로 돌아와 별 모양의 조개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러자 
조개가 그녀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말해...말해...말해야 돼..."
  조개의 속삭임을 들은 그녀는 다시 얼마 안되는 짐을 꾸려 이웃도시로 길을 
떠났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동안 익힌 음악과 노래로 군중들을 모았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이며 국가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힘주어 말했다. 군중들은 그녀의 연설에 환호했다.
  얼마 후 나무꾼 차림의 키가 크고 풍채도 좋은 한 남자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는 
왕을 쓰러뜨리는 데 목숨을 바칠 장정들을 모아 군사를 일으킬 채비를 모두 
갖추었지만 왕위를 물려 받을 합법적인 후계자가 없다며, 그녀에게 자신의 부대 
우두머리가 되어 민중혁명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제안했다.
  퀘스타는 그 남자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녀는 전국에서 모인 다양한 계층의 
시민부대를 이끌며 평화와 평등을 위한 민중정부 수립에 대한 비젼을 제시했다. 
그녀는 왕실의 상징인 파랑색을 배경으로 한 개의 황금빛 별조개가 그려진 국기를 
만들었다. 소문은 조용히 퍼져나갔고 깃발 아래 모이는 민중은 점점 더 늘어났다.
  그즈음 왕은 병이 들어 앓아 눕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국사를 맡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왕의 밑에 있던 난폭한 기사들은 서로 왕위를 물려받으려고 
나라 일은 도외시한 채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이기 일쑤였다. 나라는 날이 갈수록 
더욱 부패하고 악화되었다. 그럴수록 농민들을 비롯한 백성들은 자신과 가족들의 
삶을 보장 받기 위해 퀘스타의 부대에 속속들이 합세했다.
  시민군들이 마침내 준비를 마치고 왕의 성으로 행진하고 있을 때 궁전에서는 왕의 
임종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다. 성 안에 있던 기사들은 지평선 양쪽 끝까지 가득 
메운 엄청난 수의 시민군을 보고 혼비백산했다. 기사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저지른 
잔혹한 약탈행위에 대한 시민군들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비밀문을 통해 성을 
빠져나가 도망쳤다. 간혹 시민군들에 대항해 싸운 기사들도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승리를 거둔 퀘스타 공주는 성으로 들어가 임종 직전의 아버지와 
마주했다. 그녀를 알아본 왕은 그녀가 오래 전에 집을 나갔던 이 나라의 후계자라고 
선언했다. 퀘스타 공주는 왕에게 자신의 어린 아들을 보여 주었다. 늙은 왕은 그 
아이가 그녀의 뒤를 이어 통치할 것이라는 생각에 다소 안심이 되었다.
  퀘스타 공주는 두 번의 왕위 즉위식을 했는데 한 번은 성안에서 열린 화려한 
대관식이었고, 또 한 번은 예전의 숲 속에서 야생화로 만든 화관을 쓰고 거행했다.
  왕위에 오른 퀘스타는 그녀가 약속했던 모든 개혁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겼다. 
그녀는 호전적인 기사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그들의 땅과 성을 몰수한 대신 그들이 
정직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제공했다. 그녀는 또한 여자와 아이들을 때리는 
남자들을 교육시키는 학교를 세웠다. 그리하여 왕실 친위부대로 하여금 죄인들을 
모두 잡아들여서 이들의 습관이 변화할 때까지 의무적으로 그 학교에 다니도록 
했으며, 그래도 순응하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엄중한 처벌을 가해 
의식을 개혁시켰다.
  퀘스타 여왕은 백성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여러 해 동안 백성들을 
잘 통치했고 젊은 왕자도 훌륭하게 교육시켰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을 얻지 않았고 
그 후로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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