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발터]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말아요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말아요
마리 발터
머 리 말
마리 발터는 생애의 대부분을 정신병과 싸워왔고 죄근에 들어서는 같은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그녀는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위한 요양소 운영뿐 아니라 그들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보스턴과 뉴잉글랜드
주에서 지역사회 정신건강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그녀를 찾아오는 환자들의
대부분은 서튼 주립병원의 환자였었거나 현재 환자인 사람들이다. 이 병원은 지금은
57세가 된 마리 여사가 젊은 시절 20여 년 간이나 갇혀 지내던 병원이기도 하다.
내가 마리를 만난 것은 1982년 하버드에서였는데 그때 마리와 나는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 필요한 과정을 밟고 있었다. 마리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었고, 별로 특별히 드러난 것이 없었으나 그녀는 아주 담담하게 자신의 독특한
삶의 여정, 즉 정신병원에서 최고의 지성들만이 모인 이곳까지 오게 된 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처음 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을 때에는 서튼 주립병원과 하버드와의
거리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를 좀더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그런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던 그녀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서튼 주립병원에서 하버드까지가 얼마나 먼
거리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더욱이 유별나게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그녀가
무관심으로 방치된 채 정신병원의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며 그 험난하고 먼 길을
걸어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병원을 나오게 된 것이나 정신건강요원의 도움으로 재생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그저
단순한 기적만은 아니다. 자기 힘으로 재생해보겠다는 굳은 결심과 투지, 환경을
바꾸어보려는 끊임없는 시도,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굳은 의지가
자기 시험이라는 어려운 작업을 하게 했고, 마침내는 완전한 회복을 할 수 있게
했다. 또한 마리가 지녔던 뛰어난 유머 감각도 희망이 없어 보이는 그런 상황에서
뛰쳐나올 수 있는 큰 힘이 되어주었다.
드디어 그녀의 남다른 투지와 끈기는 신앙의 성장을 가져왔고 영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ㅎ으며 자기와 같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게 해준
것이다.
무관심과 학대라는 덫에 걸려 괴로워하던 사람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절망
중에 빛을 받아 다시 태어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감명 깊고 들을수록 더 듣고
싶어진다.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만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그녀의 삶의 역사는
사실 그 외에 또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마리가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함께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왔을
때 나는 몹시 기뻤다. 그 동안의 나의 경력이 이러한 협력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준비가 되어준 것도 사실이다. 나는 근 20년 동안 지역사회 심리학자로서 세계
여러 곳의 커뮤니티 치료팀에서 일하며 다른 문화 안의 치료제도로부터 얻은 통찰을
미국 내의 정신문제와 사회질병에 응용해왔다. 그 결과 나는 건강회복과 치료에는
어떤 특별한 치료 기술보다는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더 많은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우리는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자가치료의 가능성을 너무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마리와 함께 일하면서
치료자는 단지 환자 자신에게 변화하려는 의지를 불러 일으켜 주고 도전을 하도록
이끌어줄 뿐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독자에게, 기묘하고도 복잡한 마리의 생애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려고 한다. 이것은 '선'과 맞선 '악'이라든가
'비극'을 뛰어넘은 '승리'라든가 하는 유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통찰력과 용기의 순간들로 점철된 특이한 체험과 상황들을 기록한
삶의 이야기일 뿐이다.
마리는 비록 병원에 수용되어 있었지만 결코 '정신병자'는 아니었고
그녀는 지금 하버드에서 심리학 강의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병원에 있었다는
꼬리표를 달게 되면 공연히 떳떳지 못하게 웅크리고 숨어 살게 되기가 쉽다. 주위
사람들 역시 그런 사실을 알면 자기들과는 다른 세계 사람으로 생각하여 어느 정도
이상은 관계를 맺지 않으려 한다. 마리는 누구보다도 특이한 체험을 한 사람이다.
비록 그녀는 심한 정신장애를 겪었지만 온전하게 되고 싶다는 희망이나 자기의
인간성을 잃어버린 일이 없다.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굳은 의지가 요구 된다.
그녀가 처음으로 가벼운 긴장형 정신장애로 병원침대에 누워 꼼짝 못하고 있을
때에도 그녀는 <이 이상은 안 돼.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 돼. 내가
나아지려면 여길 나가야 해>라는 말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노력을 끊지 않았다.
오늘날 정신건강 예방과 회복분야에서 크게 존경받고 있는 마리는 자기 자신이
'치료되었다'라고 표현하기를 거부한다. 그러한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건강을 되찾는 과정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완치'되었기 때문에 서튼 주립병원에서 퇴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퇴원 후 1년 동안 나는 감정혼란과 원인 모를 불안에
휩싸인 채 문 곁에 꼼짝 않고 앉아 있곤 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도 사랑과 관심은
요구할 수 없다는 것과, 느낌을 주고받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터득해야만 했습니다>
정신건강 전문가로서 마리의 철학은 아주 단순하다. 마리는 환자 스스로의
'내적 통제'에서 나온 '환자의 자발성'을 강조한다. 그녀의
치료방법은 개방된 환경에서 지도자와 환자와의 최대한의 대화로써 이루어진
가족적인 접근방법으로 사무적인 딱딱한 분위기를 최소한도로 줄인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그녀의 신념은 확고하다. <아무리 그들이 희망이
없어 보이더라도 괜찮습니다. 다만 절대로 그들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모릅니다. 나의 경우에도
병원측에서는 다시 오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그런데 보십시오. 나는 해내고
말았습니다!>
진정 마리의 삶은 풍부한 얘깃거리다. 마리는 다른 이를 돕기 위한 방법으로 이
글을 쓰도록 내게 부탁했다. 그녀는 언제나 '내 사람들'을 위해
일한다고 말한다. <나는 희망도, 집도 없는 이들을 이해합니다. 그 까닭은 나 자신도
버림받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이 글을 시작하기까지는 오랜 망설임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마치 대단한 모범 사례로 비쳐질까 봐 걱정을 했다. <나는
환자들이 '저 사람이 해냈으니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나는 환자가 무엇을 많이 해냈다든가 성취했다든가
하는 것으로 그들의 성공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그들의 삶의 질로써 판가름합니다>
마리와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쓰는 데에 합의했다. 그러나 쉽게 시작할 수가
없었다. 우리에겐 이미 두 개의 원고가 있었다. 하나는 1970년 말경에 마리가 직접
쓴 '초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느 작가와의 공동작업으로 씌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원고들은 그녀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사건들과 감정에 대한 것을
개괄적으로 써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전체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실재하는 인물로서의 마리를 표현하는가와, 그리고 그러한
'전체적인 모습'을 그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랜 동안 마리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면서 '진짜'마리는
그녀의 세세한 체험 안에서 살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는 함께 울고, 긴 한숨을
쉬다가는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에 다시 눈물을 쏟곤 했다. 마리로서도 깊숙이
간직했던 이러한 체험들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과 동기가 뚜렷했기에 마리는 해낼 수 있었다.
우리는 보통 내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마리는 그 때마다 자신이 옛날에
겪었던 그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두려움, 불안, 공포로
뒤덮였던 시절을 이야기 해야 할 때면 지금의 삶마저 고통스러워했고, 기쁨과 흥분이
넘치는 때엔 새로운 삶의 활력에 차 온몸으로 웃곤 했다. 이러한 생생한 체험들을
나의 부족한 필설로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혼자 집에서 작업을 하면서도 나는 줄곧 격렬한 고통,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를
겪고 있는 그녀와 함께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해야 했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솟구칠 때도 수없이 많았지만 결국은 집필을 끝냈다. 나는 완전히 진이
빠졌다. 이젠 이 굴레에서 벗어나도 된다는 해방감마저 느꼈다.
나는 마리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까지 해온 과정을 설명하며 마무리 짓기 위해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자 그녀는 쾌히 응낙했다. 나를 만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딕... 당신 느낌이 어떤지 알아요. 당신까지 그런 체험을 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괜찮아요, 마리... 당신과 함께 이
책을 쓰는 것이 내 책임이니까. 내가 이 일을 맡은 것은 그런 두려움의 시간들을
통해 우리 모두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이 그
두려움 중에 살았던 당사자였고... 나는 그저 당신을 도왔을 뿐인데요 뭘>
사실 빛을 발하는 마리의 생애는 나를 따스하게 해주었고 나를 그 빛 속으로
이끌어들였다. 우리가 초안을 잡으며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 그녀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그래요, 바로 그거예요.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네... 그건 바로 내가 병원에서
나온 사람에게 하는 말과 똑같다구요> 그리고 어떤 때는 병원에서 하던 농담을
하고는 아이들처럼 깔깔댔지만 극적인 죽음을 맞은 동료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마리의 삶의 이야기는 우리가 얘기하는 도중에 생겨났다. 우리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마리의 느낌과 사건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고 새로운 의미를
찾아냈으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겼던 것이다. 마리는 이 이야기 속에 살아 있다.
그녀의 삶의 이야기는 과거의 사건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의 역사는 그저 그가 살아온 삶의 특이한 한 형태 그 이상인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정확하게 진실에 입각해 쓰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우리는 '목소리' 문제에 봉착했다. <누구의 목소리로 이 글을
전개해나갈 것인가? 마리? 어떤 마리의 목소리? 마리의 삶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대상은?> 우리는 이런 문제를 연구한 끝에 한 지헤로운 사람의 모범을 따르기로
했다. 수족(역주:북미 인디언의 일족)의 주술사인 블랙 엘크는 <블랙 엘크가
말하노라>에서 자기의 생애를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 적이 있었다.
나의 친구들이여,
그대들이 원한다면 이제 나의 생애에 관해 말하려 하노라.
그러나 이것이 한 사나이가 나이를 먹은 까닭이 무엇이며
언제 그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렸는가 하는 식의
그저 한낱 내 삶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면 말하지 않겠노라.
그런 것은 누구나가 살아온 것이며 또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룩하고, 기분 좋은 이야기요,
두 발 가진 우리가 네 발 달린 짐승과 바람,
초목들과 함계 나누는 이야기니라.
이 모든 것들은 한 어미의 자녀들이요,
그들의 아버지는 한 신령이니라.
블랙 엘크의 깨달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나는 마리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많은 일화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씌어 졌기에 마리에 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마리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바로 여러분을 위한 이야기가 되기를 바랄 분이다.
리어드 카츠
1
늦은 오후, 나는 내가 입원하고 있는 서튼 주립병원의 개방병동에 있는 작은
부엌에 앉아 다른 환자와 함께 노닥거리며 담베를 피우고 있었다.
<요즘은 어때. 마리?>
<별로야> 나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개방병동은 나에게 공포의 장소였다. 텅 비어 있는 모든 공간은 나를 빨아들이려는
구멍처럼 보이고 그 구멍 속으로 나는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겁이 났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구석에 쭈그리고 있거나 사방이 벅으로 둘러싸여 있는 작은 부엌 같은 곳으로
숨었다. 나는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환자가 언제 나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갑자기 어지러워지고
뱃속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덮쳤다.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왜 그러는지 몰랐다. 아무리 진정하려해도 되질 않았다.
모든 것이 거꾸로 돌다간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뭔지 모르지만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자제하려 해도
할 수가 없는 끔찍한 순간이었다. 내 정신과 육체가 갈갈이 찢겨져 몽땅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너무 어지러워 머리를 움켜쥐었지만 그럴수록 시간이 거꾸로 도는 것
같고, 작은 공간 속에 거꾸로 처박히는 것같은 느낌만 들 뿐이었다.
나는 머리를 잡고 있는 힘을 다해 누르며 내 자신을 타일렀다. <아무 일도 아냐.
나는 온전해... 정신차려야 돼> 그래도 별 소용이 없었다. 불안이 다시 밀려왔다.
의식을 잃을 것만 같은 예감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느낌이 이상해서 나의 다리와 팔을 내려다보니 갑자기 어린아이 팔다리처럼 짧게
보였다.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 팔다리만 아니라 몸 전체가
어린애처럼 작아진 나는 5살짜리 소녀가 돼버린 기분이었다. 병원 앞 정원은 최근에
심은 울긋불긋한 꽃들로 눈부셨다. 정원은 필경 예뻤을 텐데도 그곳이 왠지
공동묘지처럼 보였다. 나는 잔디 위에 주저앉아서 '이제 죽어가고 있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숨이 넘어가길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두려움에 싸인 채 부드러운 잔디밭에 꼼짝도 않고 한동안을 그렇게
누워 있었다.
<마리, 잘 있었어? 괜찮니?> 한 환자가 건성으로 인사를 건네며 잔디밭을
가로질러갔다. 나는 벌떡 일어나 베일러 의사의 사무실로 갔다. 나는 내가 아주 작은
아이라고 느끼고 있었기에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걸으면서
나는 내가 패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리가 아니라 패티다. 사실 나는 다섯
살 때 지금의 엄마 아빠에게 입양되었고 그때부터 마리라고 이름을 바꾼 것이다.
<마리, 오늘은 좀 어때?> 베일러 의사가 기분좋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발을 이리저리 옮기며 어쩔 줄 모르며 서 있기만 했다.
<뭐 내가 도와줄 일이라도 있나?> 의사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당황해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나는 베일러 의사의 책상 위에 있는 펜을 들어 종이
위에다 급해 갈겨썼다. <나는 마리가 아니라 패티예요>
근 20년 전, 정신병원에 있던 나에게 어느 날 불현듯 찾아든 소름끼치는 퇴행현상
때의 이야기다. 30대 중반의 마리라는 한 여자가 5살 먹은 패티라는 여자아이가 된
것이다. 그 외에도 나는 병원에 있을 때나 퇴원했을 때나 갖가지 증상으로 고통을
당했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내가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었음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된다. 나는 아픔과 고통을 통해서 나 자신의 심리를
이해하게 되었고 정신적 강인함을 기르게 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똑같이
고통스럽고 다시 한번 무서운 절망의 늪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지만 그것은 또한 내
갈망을 계속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내가 패티였던 5살 때의 나, 그때의 그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감정, 입양되어
마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때의 그 혼란스러웠던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바로 거기서부터 나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2
진짜 내 인생은 내 나이 5살 때 매사추세츠 주 그로스터에서부터 시작됐다. 엄마
아빠는 나를 입양하자마자 내 이름을 마리라고 바꾸어버렸다. 엄마 아빠와 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나는 동네 아이들한테서 가슴이
철렁내려 앉을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우린 네가 누군지 알어! 어른들이 그러는데
넌 엄마도 없구, 입양된 거래> 별안간 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정신없이 엄마의
친구인 루스 아줌마 집으로 달려갔다.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누가 널 울렸니?> 루스 아줌마가 물었다.
<아이들이요... 아이들이 나보고 입양돼-됐다구 그-그래서> 흐느껴
우느라고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루스 아줌마는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주면서 입양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몰라요. 하지만 굉장히 나쁜 말일 거예요!>
겨우 5살이던 그때였지만 나는 날 사랑해줄 친부모가 없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날 깔보고 미워한다고 느꼈다.
나는 경제 공황이 한창이던 1930년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에서 알콜중독자 어머니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내 이름을 패티라고 지어주었다. 아버지에 관한 것은
아는 것이 없고 어머니는 나를 품에 꼭 껴안고 보스턴의 거리를 걸어다니며 집집마다
문을 두들겨 우유를 구걸해 먹이곤 했다.
어머니는 나 이외에도 두 딸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왜 엄마가 언니와
동생은 그대로 두고 나만 양녀로 보냈는지 모른다. 내가 5살 되던 해에 엄마는 나를
발렌티스 가가 운영하는 보육원에 맡겼다.
내가 보육원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부인이 찾아왔다. 그 부인과 발렌티스
여사는 이상한 말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나는 후에야 그 이상한 말이 이태리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르텔로라는 그 부인은 그후에도 여러 차례 사라라는 조카와
함께 찾아왔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바르텔로 부인이 내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그리고 즉시 나는 그 부인과 함께 매사추세츠 주 글로스터로
가게 되었다.
바르텔로 씨의 집은 두 가구가 사는 연립주택으로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정원은
바다에 접해 있었는데 폭풍우가 몰아칠 때 덮쳐오는 파도를 막기 위해서인지 길고
높은 블록담이 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마치 다른 나라에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인
데다 갑작스런 변화 때문에 얼떨떨하기만 했다. 이런 나를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은 바르텔로 가족들이 나에게 마리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는 것이다. 무슨
까닭으로 패티라는 내 이름을 버려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글로스터의 바르텔로 가정에 적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르텔로 씨는
50세, 그의 부인은 그보다 다섯 살 위였다. 그들이 다섯 살 된 아이를 입양하기에는
사실 나이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그들은 영어를 못했고 나는 이태리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살기 시작하자 바르텔로 씨는 세 가지 규칙을 정해놓고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명령했다. 첫번째 규칙은 사실 지키기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는데
내가 그로스터에 오기 이전의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바르테로 가족은
나를 입양했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듯했다. 나는 처음부터 바르텔로
부부를 나의 엄마 아빠로 받아들이는 것에 이상할 것이 없었고, 사실 지금까지 내가
부모라고 부르는 분도 그분들밖에는 없다.
두번째 규칙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으로 집안에서 생기는 일은 어떤 것이든
다른 사람에게 절대 이야기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내게
슬프고 두려운 일이 생겨도 아무에게도 털어 놓지 못했다. 세번째 규칙은 더욱
지독한 것이었다. 아빠 앞에서는 절대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으므로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일 때에도 나는 아빠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언제나 즐거운
듯이 행동해야만 했다. 나는 그 규칙을 깨뜨린 후에 당하게 될 일이 너무도 무서워서
언제나 내 감정이 겉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꾹꾹 눌러 마음 깊숙이 넣어두어야만
했고, 그때부터 나의 정서생활은 금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의 입양은 친척들에게도 '일급 비밀'이었다. 나는 바르텔로 가의
어느 누구에게도 입양되었다는 것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한순간이라도
잊으면 안 됐다. 나는 사실 '입양'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다만
아이들에게서 죽도록 싫은 놀림을 받으면서 나름대로 입양이란 것은 남들과
'다른' 삶 일 뿐 아니라 아주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굳어졌던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말한 것은 열네
살 되던 해 였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나쁜 사람'이라는 무거운 비밀을
철저히 감추고 있었다.
엄마는 매우 엄격한 분으로 그녀의 자세는 언제나 흐트러짐이 없었고 머리는 뒤로
바짝 빗어넘겨 하나로 묶어 얹은 모양을 한번도 바꾼 일이 없었다. 엄마는, 고상한
여자는 절대 남자나 성에 대해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빅토리아 시대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는 임신을 해보지도 못했고 아이를 기르는 것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 엄마는 내게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내가
다가가려고 하면 오히려 밀쳐내었다. 나는 따뜻하고 편안한 엄마의 무릎에 앉아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도 엄마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다른 애들이 엄마에게 매달려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을 보면서 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을까 하는 의문에 싸여
있어야 했다. 엄마가 나에게 보여주는 사랑이란 수많은 장난감과 예쁜 옷을 사주는
것뿐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한 가지 느낌만이 내안에서 맴돌았다.
이러한 느낌은 특히 사람들과 가까워지게 될 때 깊이 느끼곤 했는데 나는 친해진다는
것은 더럽고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주 먼 훗날 그런 느낌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까지 그런 생각은 계속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날 행복하게 해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나는 언제나 외로웠다.
아빠는 상처한 후 엄마를 만나 재혼한 것이라고 했다. 아빠에겐 이태리에 첫번째
아내에게서 태어난 마르코라는 아들이 있었다. 아빠는 나를 입양하고 나서
그에게만은 이 사실을 알리고 가족이 한데 모여 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마르코는 내가 글로스터에 온 그해에 미국으로 왔다. 그의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다. 마르코가 온 후부터 나의 외로움은 오히려 더욱 커져만 갔다. 마르코와의
나이 차이로 인해 오는 거리감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가 온 것이 내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마르코 외에도 다른 친척이 있긴 했지만 내가 글로스터에 온 이후부터 서로 오가는
것이 뜸해졌다. 엄마에게도 꽤 가깝게 지내던 여자 조카들이 있었지만 내가 바르텔로
가족으로 들어오자 언젠가는 내가 바르텔로가의 재산을 상속받을 것이라는 질투
때문에 그들 역시 발길이 뜸해졌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분개하고 내게 증오의 눈길을 보내는지 알 길이 없었다. 특별히
그들이 엄마와는 무척 다정한 것처럼 보일 땐 더욱 그랬다.
이 시절 나의 유일한 위안처는 책이었다. 나는 책을 읽음으로 고독과 배척의
느낌들을 잊는 법을 찾았다. 나는 아주 빠르게 독서광이 되어갔다. 나는 동화 속의
주인공들이 되었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나의 가족이 되어 주었다. 나는 멋진
왕자가 무서운 위험을 무릅쓰고 찾은 그의 공주를 행복한 나라로 데리고 가는
아름다운 동화의 나라로 점점 빠져들어 갔다.
부모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았던 언어 문제는 오래지 않아 해결 되었다. 1년 만에
나는 이태리 말을 유창하게 하게 되었고 마침내 새로운 내 이름에도 익숙해지게
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이태리계 미국인들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엄마와 아빠는
가톨릭 신자였다. 엄마는 날씨가 좋으나 궂으나 매일 아침 6시 30분 미사에 참여하는
노부인들 그룹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매일처럼 까만 숄을 두르고는 미사에
갔다! 그리고 엄마는 밤마다 자러 가기 전에 난로 곁에 앉아 저녁기도를 바쳤다.
엄마는 나를 주일학교화 미사 참여에 절대로 빠지지 못하게 했고, 십계명을 잘
지켜야 할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대개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나도 종교에 대한
'설교'를 듣는 것이 가장 지겨운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린 생각이긴
했지만 '영적인 힘'은 엄마나 다른 노부인들과 같은 열심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빠는 달랐다. 아빠는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위대한 예언자나
위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또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빠는 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였지만 사실은 유다이즘을 따르고 있었다. 아빠는 이태리에서 태어났고
아주 어렸을 때 양친을 잃었는데, 그의 양육은 가까운 친척이면서 대부였던 사제에게
맡겨졌다. 어느 날 대부는 무슨 큰 잘못이었는지는 모르나 무섭게 야단을 치고는
겨우 9살짜리 어린이에게 성당 바닥을 돌며 혀로 핥으라는 벌을 주었다. 그의 혀와
입술은 보기가 끔찍할 정도로 부어올랐고 그때부터 아버지는 교회를 증오하게
되었다. 물론 대부의 집에서도 나왔다.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일은 배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것이었고, 이런 일을 하면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배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만나 여러 종교를 알게 되면서 그의 반가톨릭적인
자세는 더욱 견고해졌다.
아빠는 나에게 당신의 사상을 심어주려고 애썼다. 함께 식탁에 앉기만 하면 그는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다. 아니구 말구. 가톨릭 교회는 그저 어떻게 하면
돈을 긁어내나 그 생각만 한다구. 그 신부는 바르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라는 말을
늘어 놓곤 했다. 나는 아빠가 무서워서 그저 잠자코 듣기만 했고, 설사 내 생각이
다르다 할지라도 절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속으로 '아빠가 잘못
생각하는 거야. 나는 알아. 아빠가 틀린 거야 '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잠자기 전에 나는 기도하고 성가를 부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행히 아버지는 내가
부르는 노래가 성가인 줄을 몰랐다. 그는 어린시절 이후 한 번도 성당에 간 적이
없어 성가를 알지도 못했고 나는 영어로 성가를 불렀기에 이태리어밖에 모르는
아빠는 노래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아홉 살인 나는 아무도 모르게 깊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기도를 통해서
나의 절박한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어떤 분이 나를 돌보아주고 계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아빠의 반교회적인 태도 때문에 나는 열심한 가톨릭 신자들인 이웃
아이들처럼 교구에서 경영하는 학교가 아닌 공립학교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십대가 되어 교구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것은 엄마가, 소녀 때에는 적어도
교회적인 분위기에서 공부해야만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아빠도 그 이상 반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자신의 배를 가지고 있었고 그 배의 선장이었다. 아빠는 열심히 일하고,
자기가 선주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활력적인 분이셨지만 불 같은 성격은
그의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바르텔로 집안에서 그의 병적인 고집과 지배적인 성격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빠는 마치 배를 조종하듯이 집안 식구들을 휘둘렀고 누구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꽤 오랜 시간을 나는 아빠에 대한 공포와 긴장 속에서 살았다. 그는 한마디로
강력한 율법주의자였다. 어린아이인 나에게 그는 불가항력적인 존재였으므로 나는
무조건 복종했다. '왜?'라고 물어보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한 번도 나를 때린 일은 없었다. 아니 때릴 필요가 없었다. 그의 언제나
딱딱하고 강한 목소리의 명령 하나로 충분했다.
어쩌다 그런 일은 드물었지만 내가 말을 듣지 않았을 때 그는 내가 그 잘못을
깨달을 때까지 지하실에 가 있으라고 했다. 지하실은 아빠가 어망과 배에서 쓰는
온갖 장비들을 두는 곳으로 언제나 음침한 습기가 가득한 기분 나쁜 곳이었다.
지하실 한가운데 서 있노라면 걸어놓은 어망의 그림자가 회색벽에 비쳐 괴물처럼
어른거렸다. 나는 무서움에 사로잡혀 뱃속이 뒤집히는 것같은 통증과 함께 구토증이
밀려오고 그러면 머리 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뒤엉켜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벌벌 떨며 층계 있는 곳으로 다가가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층계
꼭대기에까지 기어올라 갔다. 빛을 보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리고 가만히
기다렸다. 엄마 아빠는 내가 층계참까지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식탁에
앉아 그런 나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마침내 나와도 된다는 말이
들려오면 나는 무서움에 부들부들 떨며 침실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겁에 질려 살았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또는
그냥 잘못할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언제나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러다가 어떤 작은
실수라도 하면 아빠는 불같이 화를 내며 여지없이 나를 지하실이나 벽장 안에 가두고
벌을 주는 것이었다. 나의 잘못이란 것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 보면 잘못이랄 수도
없는 것이었다. 방 청소를 하지 않았다든가, 어쩌다 집에 들어와야 할 시간에 몇
분쯤 늦었다든가 하는 것 같은 하찮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아빠와
엄마에겐 나쁜 행위고 죄였기 때문에 가혹한 벌을 받는 것이 마땅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인가 '잘못'했을 때마다 아빠는 엄마까지 때렸다. 아빠가 나와
엄마에게 소리를 지를 때마다 내 몸은 빳빳이 굳어 버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간절하게 제발 아빠가 날 때리지 않게 해달라고 성모님께 기도했다. 아빠는 정말
예측불허의 존재였다. 나는 그가 언제 바다에서 돌아올지, 또 돌아왔을 때 기분이
좋을지, 화를 낼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언제쯤 올 것이라는 예측'만
할 뿐이었다. 그의 존재는 나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밖의 세상은 너무나 달랐다. 이태리계 미국인끼리 모여 살고 있는 우리
동네는 어촌이었고, 남자들은 대개가 어부들로서 한 집안 식구처럼 친하게 지냈다.
우리 동네엔 아이들이 스무명 남짓했는데 좁은 골목에서 끼리끼리 모여 놀곤 했다.
그때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기 때문에 사실 미국 내의 이태리인에 대한 평은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우리들을 싸잡아서 '파시스트'니
'무솔리니 추종자'들이라고 부르곤 했으니까.
가장 즐겁게 지내는 때는 여름방학이었다. 우리 꼬마들은 부유한 관광객들이 묵는
여관 아래 해변가 바위 있는 곳으로 가서 그이들이 물 속에 던진 동전을 건지기 위해
다이빙을 했다. 우리 꼬마 다이버들은 서로 똘똘 뭉쳐 있었는데 그런 장난을 한 것은
꼭 동전을 갖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재미였고 또 우리가 얼마나 수영을 잘 하는가를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엄마들은 공터에 모여 모닥불을
피워놓고 불가를 돌면서 맘내키는 대로 춤을 추곤 했는데 그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춤이야 어떻든 나이든 부인들이 그렇게 재미있게 노는 것이 보기에
좋았다. 남정네들은 해변가에 놓인 벤치에 앉아 두런두런 고기잡이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만의 시간이 있었다. 주말이 되면 우리는 일요일에 영화를 보러
가기 위해 토요일에 부지런히 숙제를 해치우고 집 앞 계단 청소를 했다. 매주 토요일
오후면 우리들은 우르르 몰려 고해성사를 보러 갔는데, 어쩌다가 누군가 고해소
안에서 조금이라도 오래 있었다 싶으면 그 아인 그때부터 우리의 놀림감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내가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서라면서 나를 집안에 묶어두었다. 나는
외톨이가 되어 언제나 창문을 통해서만 세상을 내다보아야 했다. 집은 감옥과
같았다.
나와 아빠의 사이가 언제나 나빳던 것만은 아니다. 내가 늘 소중하게 생각하는
즐거운 추억들도 있다. 아빠가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온 저녁이면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아빠가 좋아하는 '라 보엠'이나
'라 트라비아타'와 같은 오페라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리고 우리는
낡은 축음기 곁에 앉아 엔리코 카루소 같은 이태리의 유명한 성악가의 노래를 들었고
아빠는 그의 아름답고 힘찬 목소리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곤 했다.
잊지 못할 또 다른 추억은 사촌 레나의 집에서 지냈던 성탄절이다. 사촌 레나의
집안은 대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물론 엄마 아빠는 사촌 레나의 집에 성탄을
지내러 가는 일이 없었다. 나는 그곳에 보내는 것이 그들에게는 대단한 모험이었으나
어떤 생각에서였는지 내가 열세 살이 되던 성탄 때에 이런 행운이 한번 주어졌었다.
내가 마음을 설레며 레나 언니의 집에 도착했을 때 집안은 글자 그대로 축제
분위기로 흘러 넘치고 있었다. 길다란 식탁엔 온갖 종류의 생선요리가 차려져
있었다. 왕새우 구이, 징어 튀김, 문어, 껍질째 구운 커다란 식용조개 등. 그러나
우리는 성탄 자정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전통을 지켰다.
우리들이 성탄 자정미사에서 돌아왔을 때에 레나 언니는 이태리 소시지를 굽고
도넛을 튀겨내고 있었는데 그 맛있는 냄새는 나를 황홀경에 빠뜨리기에 족했다.
한바탕 먹고 나서는 테이블을 치우고 트럼프 판을 벌였다. 우리는 이른 새벽까지
웃고 놀았다.
마르코는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엄마의 조카딸 사라와 결혼했고, 나는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엄마 아빠는 여전히 마을에서 열리는 갖가지 행사나 모임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다. 엄마는 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1년 늦게
학교에 보냈다. 나는 학교에서도 다른 아이들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지겹도록 느껴야
했다. 함께 어울려 웃고 놀 수도 없었다.
학교 공부는 꽤 잘 했지만 친구들과는 사이좋게 지내질 못했다. 우리 동네의
아이들은 내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 소문은 삽시간에 학교 전체에
퍼졌다. 나는 이 소문 앞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싸움쟁이가
되어 버렸고, 툭하면 사납게 화를 내곤 했다. 결국 아이들은 나를 멀리했고 내
외로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내가 친구할 것이라곤 책밖에 없었다. 줄곧 책만 읽었기
ㄸ문에 아이들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졌다. 나는 특히 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위대한 인내와 용기로 역경을 이겨낸 '데이비드
커퍼필드'와 같은 작품이 좋았다. 다행히 엄마 아빠는 나의 독서열을 기뻐하며
내 앞날에 대해 큰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대학에 가서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사춘기가 되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엄마는 정도 이상으로 엄격하게 나를 집에
묶어두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남자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처음에 나는 도대체 왜 사내아이들은 나쁘고 그 아이들을 조심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후에 성과 아기에 대해 알게 된 후 나는 옷 입는 것과 사내애들 앞에서
몸가짐을 조심했다. 엄마의 두려움과 엄격한 교육 덕분으로 나는 병적일 정도로
조심스러운 아이가 되었다. 나는 엄마가 축구경기장엔 남자아이들이 많으니까 절대
가면 안된다고 했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축구구경을 하러 가지
않았다.
사춘기를 보내면서 나는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게 어머니가 있었다는 건 기억하고 있었지만 얼굴 모습은 희미할 뿐이었다. 어쨌든
나를 낳아준 어머닌 인자하고 따스한 마음의 여인이었으면 싶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어머니가 나를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어머니는 살아
계실지도 모르고 언젠가는 나를 찾으실지도 모른다는 실날 같은 희망도 가지고
있었다. 한번은 내가 엄마에게 말대답을 했다고 지하실에 갇히게 된 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 하느님께 제발 내 어머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엄마 아빠와 함께 보낸 사춘기 시절은 감정 대립의 연속이었다.
열네 살이 된 나는 성녀 아녜스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가로등이 켜지기 전에 반드시 집에 들어와야 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새로 이사온 집에 잠깐 인사차 들렀다가 부지런히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거리에 가로등이 켜지는 것이 아닌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온몸이 떨려왔다. 숨이 턱에 닿아 집에 오니 아버지가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리며
창가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밖은 춥고
어두워서 무서웠다. 문쪽으로 다가갔다. <들여보내주세요. 제발 들어가게
해주세요> 하지만 너무 겁에 질려 있어서 말이 입 안에서만 맴돌 뿐 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난 온 힘을 다해 애원했다. <다신 안 그럴게요. 들어가게
해주세요> 여전히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엉엉 울고 싶었지만 아빠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면 안된다! 눈물까지 보이는 날에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아빠의
표정은 여전히 냉엄했고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빠는 갑자기 내 눈 앞에서
브라인드를 내려버렸다.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일까? 쏴 하고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나를
집어삼킬것만 같았다. 어떻게 하나? 점점 무서워졌다. 문을 마구 두드렸다-문 좀
열어주세요. 들어가게 해주세요-그러나 집안은 죽은 듯이 조용했다. 나는 버림받은
것이다. 그것도 아주 철저히. 하는 수 없이 다시 이웃집으로 갔다. 두려움과
혼란으로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기꺼이 빈 방 하나를 내어주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밤새도록 나는 내일 아침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만을
걱정하며 뜬눈으로 새웠다.
이튿날 날이 밝자 나는 곧바로 성아녜스 수녀원의 파울라 수녀를 찾아갔다. 그분은
나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타일렀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사회복지원 미스 윗콤을
만났다. 어느새 그녀가 집에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사회복지회 사무실 한편에
엄마와 아빠가 조용히 앉아 계셨다.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겠지?> 나는 미스 윗콤이 묻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 여자가 지난밤에 일어난 일을 정말 알고 싶어 그러는 걸까?'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다 말해봐. 나는 너를 돕기 위해 여기
있는 거란다>
내 편을 들어줄 것도 같은 미스 윗콤의 말에 조금은 용기가 생겼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이야기하는 것이 되지 않는가... 나, 마리라는 아이는
지금까지 엄마 아빠의 뜻을 거슬러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 적도, 아니 그런
생각조차도 한 적이 없었다. 이제 와서 엄마 아빠와 함께 살면서 내가 느꼈던
슬픔이나 두려움, 온갖 상처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으며,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가서 살고 싶다는 것, 그것만은 말하고 싶었다.
<저는 집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여기 있고 싶지 않다구요> 이 말은 나 자신뿐
아니라 저쪽에 앉아 내 말을 듣고 있던 엄마 아빠에게도 몹시 고통스러운 말이리라.
나는 그들의 눈 속에서 그 아픔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분들의 딸이 아니에요. 나는 입양된 거라구요> 나는 큰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법칙 하나를 위반한 것이다. 방금 나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선
것이다. 나는 그들을 배반한 것이다. 엄마가 울기 시작했다. 아빠는 한 대 얻어맞아
얼이 빠져 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그들이 어린 나에게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주려고 애를 쓴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나의 이런 배은망덕이
수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
고집을 피웠다. 여길 떠나야 한다.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을 떠나고 싶어했고
나를 기다리는 더 좋은 곳으로 가기를 꿈꾸어왔던가? '이번이 기회야. 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 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엄마와
아빠가 정이 뚝 떨어질 말을 내뱉었다. <지금 당장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요!>
<알겠어요> 미스 윗콤이 차분한 목소리고 말했다. <저 역시 마리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인데, 두 분께서도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일단 위기는
넘긴 것 같았다. 엄마 아빠의 계속되는 침묵은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보스턴에 좋은 기술 학교가 있는데 거기에서 마리를 기꺼이 받아줄 겁니다.
마리도 잘 지낼 수 있을 거구요> 하고 미스 윗콤이 계속해서 말했다.
<보스턴... 하지만 보스턴이라면 이곳에서 너무 멀지 않습니까?> 아빠가 말을
가로 챘다. <마리를 위해선 그곳이 다른 어떤곳보다 좋을 겁니다> 그녀가
장담한다는 투로 말했다. 아빠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후 나는 내 전재산이 들어 있는 여행가방 하나를 끌고 엄마와 이웃집
아줌마와 함께 보스턴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3
8월 하순이라 날씨는 찌는 듯이 더웠다. 한 줄기 바람이 얼굴의 땀을 씻어주고
지나갔다. 기분이 그런 대로 괜찮았다. 글로스터 역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밖에 안
되건만 엄마와 아줌마가 어찌나 천천히 걷던지 역에는 영원히 도착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글로스터 역에서 앞으로 내가 살게 될 '성녀 데레사 소녀의
집'이 있는 보스턴까지는 기차로 약 한시간 거리였다. 내가 살게 될 곳은 어떤
곳일까? 그곳에 계신 수녀님들은 친절할까? 모든 것이 궁금했고 기대도 되었다. 집이
우중충하다면 좋아질 수가 없을텐데. 기차에서 내려 우리는 전차를 탔다. 전차가
'성녀 데레사 소녀의 집' 앞에 와 설 때까지도 나는 줄곧 걱정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꿈이 아닐까? 차창 밖으로 보이는 데가 정말 내가 살 곳이란
말인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데레사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 양 옆엔 부유해 보이는 아름다운
저택들이 여러 채 서 있었고, 집 둘레마다엔 잘 손질된 잔디밭과 길 옆으로 키가
크고 우람한 느릅나무들이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좀 떨어진 곳에는 아늑한
분위기의 커다란 연못이 보였다. 한 장의 그림엽서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중에 하나가 내가 살 집이란 말이지?> 운전기사가 <'데레사 집'
앞입니다>라는 안내의 말을 하자 나는 너무 좋아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금부터는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데레사의 집' 내부도 외관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엄마와 엄마 친구는
이태리어로 나직이 얘기를 주고받았다. <아주 좋은 곳인데. 마리도 잘 돌보아줄
거예요> 엄마가 영어를 못했기 때문에 내가 통역을 해야 했고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했다. 나는 부끄럽기도 했고 약간 걱정도 되었다. 집안 어디에선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과연 나는 저 아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소녀들의 책임을 맡고 있다고 소개한 수녀님이 엄마와 엄마 친구에게 차를
대접하면서 간단하게 하루일과를 들려주며 엄마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애를 썼다.
엄마는 금방 떠났다. 나는 엄마를 배웅하며 죄책감을 느꼈다. 엄마는 내가 집에 함께
있어 주기를 바라는데, 나는 엄마가 어떻게 되든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자가
돼버린 것이다.
'데레사의 집'에서 내가 제일 처음 알게 된 사람은 글라라
원장수녀님이었다. 수녀님은 아주 쾌활한 분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을 존경했고
그분과 함께 있고 싶어했다. 그분의 감염력이 큰 미소와 열성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수녀님은 헌신적으로 일을 했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음에
품고 계셨다. 그분은 규율을 철저히 지키는 분이었지만 내게는 그것이 좀 색다르게
보였다. 그분은 엄격하면서도 공정했지만 이상하게 무섭지가 않았다. 엄격한 것은
똑같은데 도대체 왜 아빠와 수녀님은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인지 그저 놀랍고
이상할 뿐이었다. 그분은 모든 소녀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나 역시 그분을 사랑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그분에 대한 추억은 아주 또렷이 남아 있고 나의 힘이
되어주고 있다.
우리는 한 집에 열다섯 명씩 살았다. 이곳에 있는 이들의 대부분이 고아거나 결손
가정 출신들로 대개 같은 또래인 십대의 소녀들이었고, 학교를 졸업하면 그곳에서
나가야 했다. 나는 금방 두 명의 친한 친구가 생겼고 그 외의 다른 아이들과도 사이
좋게 지냈다. 우리들 사이엔 금세 우정이 꽃피었고, 일반 기숙학교 학생들처럼 옷을
입은 채 물싸움을 하는 등의 짓궂은 장난도 많이 했다. 밤이 되면 글라라 수녀님은
각방마다 돌아다니며 잘 자라고 인사하고는 성수를 뿌려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너무 우스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낄낄대고 웃곤 하였다.
하루의 일과는 꽤 여유가 있었다. 매일 아침 6시 30분에 미사에 참여한 후, 아침을
먹고 나면 각자의 침구정리와 목욕탕 청소, 음식 만들기 같은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했다. 우리가 제아무리 청소를 잘 한다 해도 수녀님은 잘 안 된 곳을 귀신같이 찾아
내었다. 부엌 일 중에서 가장 지겨운 일은 감자 껍질을 벗기는 일이었다. 감자를
벗길 때마다 나는 도대체 이놈의 감자를 꼭 먹어야만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다.
날씨가 좋으면 우리는 밖으로 나가 크리켓이나 배드민턴을 했다. 뜰에는 점심을
먹을 수 있도록 야외 식탁이 마련되어 있었다. 넓은 정원에는 조용히 앉아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곳도 있었다. 날이 궂을 때는 맨 위층에 있는 휴게실에서 사진을 보며
음악을 듣거나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거나 바느질을 했다. 학기 중에 휴게실은 또한
우리의 공부방이 되기도 했는데 저녁식사 후 이곳에서 숙제를 하거나 공부를 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와 집을 오가며 지냈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외출이
가능했다. 비록 규율은 매우 엄했지만 '데레사의 집'에서의 생활은 정말
행복했다.
'데레사의 집'에서 나는 성메리 여자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이 학교는
사립학교로 대개 중산층의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다. 나는 성메리 학교가 좋았고,
영어를 가르치는 니키 수녀님과 친해졌다. 니키 수녀님은 자그마한 키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고운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가시지 않는 분이었다. 아빠가 나를
문학을 사랑하게 해주셨다면 니키 수녀님은 나의 문학에 대한 관심을 꽃피우게
해주셨다고 하겠다. 그분의 영향으로 나는 셰익스피어, 셸리, 에밀리 디킨슨의
작품과 접하게 되었다. 수녀님과 나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그분과의 우정은 내가
그 학교를 떠난 후에도 계속되다가 5년 후에 영 소식이 끊어져 버렸다. 그분을 잃은
상실감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학업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아 '데레사의 집' 수녀님들,
특히 글라라 수녀님은 크게 실망하신 것 같았다. 그분은 내가 특별한 재능이
있는데도 그 능력을 재대로 발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글로스터 집 생각은
전연 하지도 않았고 몇몇 친구가 생각나긴 했지만 나는 '데레사의 집'에
있는 것이 더 좋았다. 내가 글로스터에 있을 때 얼마나 불행했던가를 생각하면
꿈에서라도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글라라 수녀님은 내게 장로교 소속
병원에서 시간제 간호사로 근무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자니
고민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아야 했다. 내 첫번째 직장! 맡겨진 일을
해나가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철부지인지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학기를 마칠 즈음 아빠에게서 집에 한 번 다녀갔으면 좋겠다는
소식이 와 며칠 동안 집에서 별 문제 없이 지냈으나 뿌리깊이 박혀 있는 나의
두려움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숨어 있었고 그분들의 태도 역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데레사의 집'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고 있는데 아빠가 말했다.
<우린 네가 집에 다시 오길 바라고 있는데 다시 와서 함께 살 생각은 없냐?> 나는
아빠의 물음이 과연 단순한 물음인지, 아니면 명령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내가 안다. 그래서 있는 용기를 다 짜내어 그럴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아빠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내 곁에 서 계셨다. 아빤 울고 계셨다. 구태여
숨기려고도 하지 않은 채 아빠가 우시다니! 그것도 내 앞에서.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가엾은 아빠. 마음이 아팠다. 하마터면 마음을 바꿀 뻔했다. 그만큼
그 느낌은 대단히 강한 것이었는데 어떻게 내 결심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는지
나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아무튼 나는 집에 간 지 꼭 2주일 만에 '데레사의
집'으로 돌아왔다.
몇 주일 후 글라라 수녀님이 나를 부르더니 아빠에게서 더 이상 기숙사비를 대주지
않겠다는 소식이 왔다고 알려주면서 집으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내 의견을 물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아빠가 왜 그토록 날 집으로 불러 들이려 하는지 애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엄마 아빠가 내가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일찌감치 포기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2년간 '데레사의 집'에 살면서
내가 글로스터에 간 것은 정말 몇 번밖에 되지 않았는데 엄마는 세 번이나 나를
찾아왔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집을 싫어하는지 엄마 아빠가 충분히
알았으리라고 생각했건만. 이제 막 안정을 찾고 미래를 생각하려 하는데 학교를
그만두라니 정말 어찌해야 될지 막막하기만 했다. 나는 글라라 수녀님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그분께 애원했다. <글로스터에는 가지 않겠어요. 결코 갈 수
없어요>
결국 나는 수녀님의 도움으로 장로교 병원에 정식 직원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생활은 간호사 숙소에서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병원에서의 생활은 길지 못했다.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 직장을 그만두어야 할 정도까지 된 것이다. 갑자기 몸무게가
형편없이 줄고 감기가 끊일 사이가 없어 자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며칠씩
결근을 하게 되자 마침내 병원으로부터 해직 통고를 받았다. 다시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이다. 나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는 이도 없고 뿌리도 없는 아이.
열일곱 살의 아이는 혼자 무엇을 하면 좋을지 속수무책이었다. 병원에서는
사회복지국을 찾아가보라고 했다. 그런 대로 마음이 놓였다.
복지국의 랭카스터 부인을 만났을 때 나는 돈도 직업도 없는 가엾은 신세였다.
나는 그녀가 기적을 일으켜서 당장이라도 행복을 가져다 주길 바랐지만 그녀의
소박한 친절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랭카스터 부인은 나에게 불우한 여성들의
수용시설인 웨스턴 스트리트 홈에서 살 수 있도록 조처해 주었다. 그곳은 그야말로
불행한 아기 엄마들이 셋집을 얻을 때까지 거쳐가는 곳이었다. 건물도 우중충한
벽돌집으로 보스턴의 빈민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휑뎅그렁하고 넓은 방은 회색
페인트로 칠해져 을씨년스럽고 쇠로 된 계단도 그나마 칠이 벗겨져 뻘건 색이
드러났고 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식사는 커다란 식당의 길다란 나무로 만든
식탁에서 함께 했다. 음식은 형편없었고, 나는 영양부족 때문에 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침실에 있는 유일한 가구는 쭉 늘어선 간이침대가 전부였는데 밤에는
여기저기서 울어대는 아기들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지니를 만났다. 열여덟 살이라는 지니는 긴 금발머리에 푸른 눈의
소녀였다. 지니는 일이 잘 안 되어갈 때라도 늘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런
아이였다. 우린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오후 나는 지니와 함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여름날의 햇살이 좋아
마냥 걸으면서 우리는 내내 조잘거렸다. 우리는 둘 다 웨스턴 스트리트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 뉴욕으로 가자는 결정을 내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당시로서는 사춘기의 아이들이, 더구나 여자아이들이
무임승차로 자기가 살던 지역을 벗어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으나,
지니와 나는 날짜를 잡고 그 여행 약속으로 줄곧 들떠 있었다.
오후 6시, 운 좋게도 뉴욕으로 간다는 트럭 운전사를 만나 순조롭게 여행이
시작되었다. 트럭은 밤새도록 달렸고 우리는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불러댔다. 절망감은
사라졌고 다시 자유와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날은 접어두기로 하고 미래에
대해서도 걱정도,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날이 밝았을 때 트럭은 뉴욕의 외곽지대를 달리고 있었다. 몸이 지친 데다 배가
고팠다. 트럭 운전사는 어느 길섶에 차를 세우더니 우리를 내려놓고 떠나버렸다.
우리는 길을 따라 걷다가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어 다시 약 1마일 가량을 더 걸었다.
길이 끝나는 데쯤 와서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맞은편에는 상상할 수
없이 아름답고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넓디넓은 들판은 마치 초록빛 우단을
깔아놓은 듯했다.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곳이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시면 이토록
아름다운 산하를 만들 수가 없으리라. 어찌 감히 하느님이 안 계시다고 할 수가
있을까.
우리는 한동안 홀린 듯이 경치를 바라보다가 다시 큰 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차
한 대가 우리 곁에 미끄러지듯이 와 섰다. 도로 순찰대였다. 우리는 졸지에 당한
일이라 경황이 없어 물어보는 말에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보다 꽤 친절하여 우리를 파출소까지 데려가더니 먹을 것까지 주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경찰은 우리를 무임승차와 부랑죄로 체포하여 지방 경찰서에 넘긴다고
겁을 줬지만 별로 걱정도 되지 않았다. 경찰서는 비교적 작은 편이었고 깨끗한
유치장 세 개가 있었다. 지니와 나는 한방에 수용되어 겁이 좀 덜 났다. 우리는 잠시
쉬거나 농담을 할 때를 빼놓고는 다음날 아침까지 줄기차게 노래를 불렀다. 나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최대한도로 이용하여 순간순간을
잘 넘겼다.
다음날 그들은 우리에게 보스턴행 기차표 두 장을 주고는 풀어주었다. 기차를 타는
건 문제가 없었지만 다시 절망감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틀 전의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 보스턴에 가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걱정이 태산 같았다.
결국 나는 다시 웨스턴 스트리트 홈으로 돌아왔고 절망감은 더 깊어졌다. 머리는
마치 꽉 조이는 끈으로 동여놓은 것 같았고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기운이 없었다. 나는 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서 온갖 극단적인 상상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모든 게 다 쓰잘데없는 짓거리 같았고 나는 이제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들 축에 낄 수도 없을 것 같았고 나는 이제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들 축에 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자신에 대한 소외감이 시간이 갈수록 골이 더
깊어졌다. 의욕도 사라졌고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더구나 내가 슬플
때마다 숨어들 수 있었던 독서마저도 이렇다 할 위안이 되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죽을 작정으로 입고
있던 옷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막상 불이 붙자 어찌나 무섭던지 미친 듯이 불을
꺼버렸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랭카스터 부인은 내가 자살을 시도했었다는 것을 알고 몹시 놀란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사무실로 가서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고 싶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이 무서운 느낌을... 그러나 안면 마비 증세가 일어나 표정도 굳어진 채인
내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마리, 무슨 일이 잘못된 건지 말해봐> 부인이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나는 고개만 푹 숙이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마리, 내 생각엔 병원에 한 번 가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너는 도움이 필요해>
랭카스터 부인의 말뜻을 잘 알아들었지만 그렇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
몸엔 아무 이상이 없다지 않는가? 그러나 랭카스터 부인이 내가 병원에 가야만
한다고 고집했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한 구획 떨어진 곳에 있는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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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카스터 부인과 함께 로링 종합병원에 도착하니 하얀 제복을 단정하게 입은 젊은
간호사가 우리를 진료실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체온과 혈압을 쟀다. 나는
독특한 병원냄새가 배어 있는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거기엔 진찰대와 치료기구를
넣어두는 회색 철제장이 놓여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어떤 의사를 찾고 있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조금 있으려니 키가 큰 사람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코번 의사요> 그가 나를 건너다보며 말했다. 그의 음성은 냉랭했고 무척
사무적이었다. 그는 랭카스터 부인에게 잠깐 나가달라고 했다.
<자, 넌 지금 네가 왜 병원에 왔는지 아니?>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내가 왜 왔는지도 몰랐고, 왜 왔는지
알아내기 위한 생각을 할 기력도 없었다.
<네가 왜 여기 오게 되었는지 알면 말해보라구> 코번 의사의 물음은 명령에
가까웠다. 나는 덫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어찌나 집요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지 나는 그 시선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너는 네가 왜 여기에 왔는지 반드시 알아야 돼>
갑자기 나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일어난 사건들에
압도당한 나는 나의 깊은 슬픔과 우울을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라곤 지금까지 나는 행복이란 걸 모르고 살았고 나를
얽어매고 있는 이 세상은 냉혹하기 짝이 없는 곳이라는 것뿐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떠나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절망감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깊이깊이 잠들어 내가 살아
있는 사실조차도 잊고 싶을 뿐이었다.
코번 의사는 끈질기게 나의 대답을 요구했지만 나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의사는 일어나 방을 나가버렸다. 간호사가 환자복으로 갈아입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몰라 멍청히 서 있는데
랭카스터 부인이 오더니 잘 있으라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는 휠체어에 앉혀졌고
엘리베이터에 태워져 6층에 있는 정신과 병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정신과 병동은 침대가 셋뿐으로 아주 작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곳은
다른 곳으로 옮기기 전에 길어야 10여 일 정도 머무는 곳이었다. 병동에 도착하니 한
간호사가 내 팔을 잡고 병실 가운데에 있는 침대로 데려다 주었다. 방은 밖을
내다보지 못하도록 두꺼운 판자로 막아놓은 창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 침대는 간호사 사무실 맞은편에 있어서 그들이 바쁘게 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침대로 기어올라가 홑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쓰고 누웠다.
어두운 것이 좋았다. 이제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었고, 누구도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 나는 안전한 것이다. 아무도 이 포근하고 따스한 휴식처에서 나를
데려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숨듯이 누워 있는데 간호사가 오더니 안심하라며 위로해주었다. 나는
간호사와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그가 곁에 있어주고 나를 돌보아준다는 것이
기뻤다. 누군가 내 인생의 짐을 함께 져주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안심할 수도 있고 의지할 데가 있는 것이다.
로링 종합병원 정신과 병동에서는 사흘동안 머물렀다. 그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오직 나는 그곳에 있다는 것, 몸이 점점 침대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 같다는 생각 외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이들이 나를 먹여주고
돌보아주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는 일밖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것은 <예, 아니오>와 먹고 싶지 않다는 말뿐이었다.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으므로 아무것도 먹고싶지 않았으나 의사와 간호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에게 음식을 먹이려고 했다. 그들은 나중엔 튜브로 음식물을 투입하겠다는
협박까지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나흘째 되던 날 아침, 구급차가 왔고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나에게 로링
종합병원을 떠나 다른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겁에 질렸다. 그곳엔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냥 내 주위를 겉돌거나 스쳐지나가
버릴 것이다. 나는 이런 불안에 싸인 채 왜 내가 다른 병원으로 가야하는지
모르면서도 한 마디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구급차 안에서도 걱정과 혼란스러움이 더
커질 뿐이었다. 로링 병원의 간호사 하나가 구급차 뒷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위로의
말 한 마디도 없었다. 30분도 채 안 되어 나를 실은 구급차는 메리맥 주립병원 앞에
섰다.
나는 메리맥 같은 정신병원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정신병원에
간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런 곳이 정말 있다는 것조차 생각지 못했었다. 그런데
내가 오게 되다니! 이제부터 내가 있게 될 곳이 어떤 곳인가를 깨닫게 되자 너무
무서워서 온몸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지고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도망가고 싶어도
전신이 마비되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구급차 운전기사와 로링 병원에서 나를
데리고 온 간호사가 나를 입원실로 데리고 갔다. 나는 덫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한 마리 상처입은 동물과 같았다.
간호사가 환자복을 주었다. 체온과 혈압을 재고 있는데 젊은 의사가 들어 왔다.
그가 알아듣기 어려운 악센트로 말을 걸었다. 간호사가 내게 알아듣도록 여러 번
의사의 질문을 설명해 주었으나 나는 무서울 뿐이었다. 그렇지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커다란 덩어리가 목에 걸려 있는 것 같았고 입술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의사는 종이에다 뭐라고 쓰더니 간호사에게 몇 마디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간호사는 잠시 후에 진찰을 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옷은 내가 가져갈게> 간호사가 내 옷을 집어들면서 말했다. <구두와 양말은
그대로 신고 있어. 네 옷은 보관소에서 보관해줄 거야> 간호사는 그렇게 말하며
족히 내 몸의 두 배는 될것 같은 얼룩덜룩한 가운을 둘러주었다
가운을 입자 그둘은 나를 서쪽 병동으로 데리고 갔다. 출입구를 지나니 널찍한
휴게실이 나왔다. 휴게실에는 짙은 초록색 벽을 따라 놓인 길다란 나무의자 외에는
아무 가구도 없었다. 중앙에는 탁구대가 놓여 있었고 창문 바깥쪽으로는 시커먼
쇠창살이 둘러쳐져 있었다. 방안은 지린내와 소독약 냄새 그리고 곰팡내가 뒤섞여
금방이라도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환자들은 말라빠진 몸 위에 병원 가운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멀건히 서 있었다.
내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내가 생각하는 병원이란 곳은 몸이 아플 때 가는 곳이고
나으면 나오는 곳이건만. 간호사들은 풀먹인 하얀 제복에 작은 캡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청결하고 깨끗한 곳에서 친절하게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어떤 것도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인 데다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사무실로 사용되는 것 같은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젊은 간호사 한 명이 책상 앞에
앉아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를 코르코란 부인이라고
소개했다.
<여긴 제1병동이고 나는 이 병동의 수간호사예요.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세요> 코르코란 부인은 잠깐 동안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동안이 몇
십 년이나 되는 느낌이었다. <뭐 필요한 것 없어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나의 몸은 여전히 석고처럼 굳어 있었다. 나는 이 열악한 환경에서 조금 전에 본
환자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생각만 해도 끔찍했고 어쩌다 내가 이 지경까지
됐는가 싶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무엇을 본다는 것도, 만지는 것도 겁이 났다.
<원한다면 휴게실로 가 있으세요. 몇 분만 있으면 저녁식사 시간이니까> 하고
수간호사가 말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사람마냥 나는 방을 나와 휴게실로 갔다.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머리가 부스스한 사십대로 보리는 여자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머리는
며칠이나 빗질을 하지 않았는지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져 있었다. 그 여자는
팬케이크를 들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먹었는지 얼굴은 잼 범벅인 데다 새빨갛게
칠한 립스틱이 번져 입술 근처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입은 옷은 몸의 몇 배가
될 만큼 크고 색깔도 야릇해서 마치 허수아비처럼 보였다. 그 여자가 내 앞에 와
서더니 더러운 맨발로 갑자기 차렷 부동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를 피해 갔다. 그 여자와 말은 커녕 보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에스텔 여사야> 그 여자가 뒤쫓아 오면서 말했다. <나는
너를 도와줄 수 있어. 너는 미치면 안돼. 미치면 안된다구. 암 안되구 말구. 나는 네
의사가 될수도 있어> 에스텔 여사께서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똑같은 말을
끊임없이 지껄여댔다.
<이 여자는 미쳤어! 미친 거야. 나만 빼놓고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은 다 미쳤어.
나는 이 사람들하곤 달라. 나는 미친게 아니라구>
내가 비명을 지르자 에스텔 여사는 어디론가 도망가버리고 간호사 여럿이 뛰어
들어왔다.
나는 엉엉 소리를 내어 울면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되는대로 내뱉었다. <나는
미치지 않았단 말이에요... 나는 정말 미치지 않았다구요. 보면 몰라요, 모르냐구요?
나는 저런 여자들하고는 다르잖아요. 날 내보내줘요. 나는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에요!>
간호사들은 나를 부드럽게 그러나 단단히 붙잡았다. <그래, 너는 괜찮아. 우리도
내가 괜찮다는 걸 알고 있어.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간호사 한 명이 나를 긴
의자로 데려가면서 말했다. 그녀는 한동안 내 옆에 있으면서 나를 다독거려주었다.
얼마가 지나자 조금 진정이 되었다. 간호사가 곁에 있어주는 것이 위안이 되엇고
두려움도 사라졌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점심식사 후에 간호학교
학생들이 줄무늬 제복에 풀먹인 앞치마를 단정히 입고 들어왔다. 그들이 오니
침울하던 방안이 생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탁구를
치자고 했다. 다른 환자들은 상대도 하지 않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그들과 아는
척한다면 나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른 환자와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미친 사람'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러나 나는 병동에서 유일한 십대 소녀였기 때문에 사실 애를 쓰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과 쉽게 구별되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정상적인
대화도 할 수 있었다.
5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메리맥에서 나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지냈다.
식사할 때는 포크와 칼 사용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커다란 숟가락으로 얌전하게
먹었다. 다른 환자들의 괴상야릇하고 정신나간 행동에도 익숙해졌고 바로 옆
침대에서 수다를 떨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 잠도 잘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고약한
밤근무 간호사는 거칠고 천한 말을 마구 내뱉고 환자를 때리고 욕까지 해댔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간호사도 있었다. 다행히 그렇게 친절한 간호사가 있어써
서쪽병동에서 자행되는 잘못이 어느 정도 감춰지기도 했다. 나는 계속해서 그 병원에
있었으면 했다. 내 집처럼 맘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날 직원이 오더니
글로스터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가야만 한다고 했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메리맥에서 누리던 모든 만족도 이젠 끝장이고 다시는 이곳에서와 같은 이해를 받을
수없을 것 같았다.
울어봤댔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튿날 나는 관용차에 실려 서튼 주립
정신병원으로 갔다.
차가 서튼 읍내로 접어들자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어마어마하게 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은 육중하고 장엄했지만 좀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고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첨탑이 있는 것을 보니 중세기 때 세운 건물인 듯싶었다. 갑자기 속이
뒤틀리고 메스꺼워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이 나를 덮쳐왔다. 차가 천천히
병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키가 크고 아름다운 전나무가 길 양옆으로
쭉쭉 뻗어 있었고 풀 냄새가 싱그러웠다. 차가 멈추고 메리맥에서부터 나와 동행한
간호사가 내렸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입원 수속'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는 건물 입구로 갔다. 나는 '바깥 세상'을 뒤로 하고 두려움과
망설임을 안은 채 서튼 주립병원으로 들어갔다. 환자와 직원들은 이 병원을
'성'이라고 불렀다. 그때가 1948년, 내 나이 열일곱 살 때였다.
입원실에 들어가자 직원 한 사람이 오더니 입고 있던 옷과 심지어는 수첩과
반지까지도 보관하겠다면서 가져갔다. 그 다음엔 때가 낀 발꿈치까지 내려오는 흰색
제복을 입은 간호 조무사가 들어왔다. 그는 내 가방을 열어젖뜨리더니 옷들을 끄집어
내어 아무렇게나 묶었다. 그때 내가 기껏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저렇게 하면 옷들이
다 구겨질 텐데, 저 주름들을 어떻게 펴나 하는 것뿐이었다.
<구두는 이틀 후에 되돌려받게 될 거예요. 그 동안은 그냥 지낼 수밖에 없어요>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구두까지 가져가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렇다 저렇다 말할 힘도 없어
그녀가 내준 헝겊 스리퍼를 받아 신었을 뿐이었다. 슬리퍼는 어찌나 큰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벗겨졌다. 잠옷이란 것은 내 치수의 몇 배나 컸고, 가운도 발목까지
내려와 걸을 때마다 밟혀서 넘어질 지경이었다. 나는 마치 거인 나라에 온 난쟁이
같은 꼴이었다. 입원수속을 하면서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모두 빼앗겼다.
심지어 자존심마저 빼앗긴 느낌이었다.
의사가 왔다. 그는 내 침대 옆에 있는 책상에 앉아 종이에다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너 들을 수는 있니?> 의사가 딱딱하게 사무적인 태도로 물었다.
나는 도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지금 몇 월인지 아나?> 의사는 몹시 매몰차고 거만한 사람 같았다. 이 사람은
정말 내가 그런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너무나 자존심이 상해 입을 꼭다물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이 몇년이지?> 그가 또 물었다.
이런 질문을 하는 걸 보니까 정말 내가 미친 건가 하는 한심한 마음이 들었지만
여전히 잠자코 있었다.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으로 내 몸은 다시 굳어 있었다.
마침내 의사는 더 이상 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으레 하듯이 혈압을 재고
가슴에 청진기를 대보았다. 그러고는 이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간단한 설교를
했다. 나는 다 알아듣고 있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고개 한
번 끄떡이지 않았다.
<이 아가씨 B-1으로 데리고 가도록 하세요> 그의 말은 간호 조무사에게는 곧
명령이었다. 나는 의사에게 <B-1이 뭐죠? 나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나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라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나가버렸다.
간호 조무사는 나를 휠체어에 앉히고는 길다란 복도를 지나갔다. 복도를 지나면서
보니 방에는 단정히 정돈된 침대들이 줄지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각 복도의
끝에는 묵직한 고동색 철문이 있어서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문이 닫힐 때마다 나는 점점 '밖의 세상'과 멀어져간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영영 잊혀진 존재가 되어간다는 서글픔을 느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B-1병동은 거의 대부분 노인 환자들을 위한 곳이었고 새로운
입원환자들의 대기소 같은 곳이었다. 병실에는 혼이 나간 듯한 할머니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 일흔 살 할머니가 제일 젊은 축에 든다는데 어떤
이는 잠옷바람으로 어떤 이는 알몸으로 어정이며 병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기절하지 않는 게 기적 같았다.
간호 조무사는 커다란 하얀 욕조가 있는 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새로 들어온
환자는 누구든지 목욕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녀가 욕조에 물을 받으면서
준비됐느냐고 물었다. 나는 몹시 당황했으나 재빨리 가운을 벗고 얼른 욕조로
뛰어들어가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는 그녀가 감겨 주었다. 기분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목욕이 다 끝나고 나는 다시 입원 기록부에 반드시 기록해야 할 몇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해야만 했다. 그 일이 끝나자 간호 조무사는 내게 선포치(유리로 두른
베란다)로 가라고 했다. <담배 좀 피워도 되나요?> 담배를 좋아하는 나는 담배
생각이 나서 마치 착한 어린애처럼 물어보았다.
<담배는 식사 후에 감독관과 함께 있을 때만 피울 수 있어요> 간호 조무사는
나를 긴 복도 중앙 벽감이 있는 곳을 지나 이중문을 통과하여 선포치로 데려가며
대답했다. 선포치는 벽 한 면이 커다란 유리창문으로 되어 있었다. 커튼도 없었고
나무로 만든 긴의자와 딱딱한 의자 몇 개만 놓여 있을 뿐이었다. 어정거리고 있던
50쯤 되어 보이는 여자와 몸을 부딪쳤다. 타일바닥에는 여기저기 오줌이 고여 있어
밟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역한 지린내와 배설물에서 풍기는 냄새가 온 방을
진동했다. 트럭에나 치어버렸다면 이렇게 공포에 사로잡혀 벌벌 떠는 일이 없었을
텐데. 노파들은 한숨을 내쉬며 탄식을 하다가 울다가 했다. 의자에 묶여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알몸이었다. 끔찍했다. 창가로 가서 나는 흐느껴 울었다. 잘 손질된
병원 잔디밭을 내다보며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하니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것으로 내 인생은 끝난 거야. 이제 다시는 바깥 세상에 나갈 수
없겠지' 그리고 마음속으로 엄마 아빠를 그려보며 나 자신에게 물었다.
'어떻게... 정말 어떻게 이렇게까지 된 걸까?' 눈물이 또다시 앞을
가렸다.
점심식사 시간은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음식은 철제 쟁반에 담아주었는데
도구라고는 커다란 숟가락밖에 없었다. 할머니들은 나무로 만든 의자에 앉아서
음식을 먹었는데 입으로 가져가는 것보다 흘리는 것이 더 많았다. 간호사들이
계속 소리를 지르며 야단을 치니 어떤 할머니는 딱하게도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우유만 조금 마시고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라고 할 때만을
기다렸다. 한 시간 후 간호 조무사가 나를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이미 다른 환자 세
명이 와 있었다. 간호 조무사는 우리에게 담배 한 개비씩을 나누어 주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아껴서, 손으로 잡고 있을 수 있는 데까지 피웠다.
<기억하라구... 저녁식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 담배를 피워서는 안 돼> 간호
조무사가 으름장을 놓았다. 과연 그때까지 참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흡연시간이 끝나니 빨간 머리에 키가 크고 사나운 간호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지금 즉시 선포치로 가세요> 그녀의 기세를 보니 다른 말을 했다간 큰일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왜 나와 함께 있던 다른 세 명의 환자에겐 선포치로 가라고
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나는 안 가겠다고 버텼다.
<가, 가지 않겠다고 하면 A-2로 보낼 거야>
나는 A-2가 뭔지 몰랐지만 A-2로 보낸다고 겁을 주는 걸 보면 여기보다 사정이 더
나쁜 곳일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옥에나 가라>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즉시 이말 때문에 혹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겁이 더럭 났다.
빨간 머리 간호사는 나를 한 번 노려보더나 가버렸다. 약 30분 동안 의자에 앉아
처절한 마음으로 내게 내려질 최악의 결과를 기다렸다.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하더니
설사가 시작되었다.
갑자기 한 무리의 간호사들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들은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무서웠다. 그 중 두 명이 내 팔을 잡더니 문 밖으로 끌어내자 다른
사람들은 내 뒤를 바짝 따라왔다. 울고불고 소리를 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나를 질질 끌면서 층계를 올라갔다. 내가 들어가는 곳은 지옥 같은 곳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죽고만 싶었다!
A-2병동은 음산했다. 희끄무레한 불빛이며 빛바랜 노란색 벽이 아주 오래된
창고처럼 보였다. 벽 쪽으로는 침대들이 길게 줄지어 놓여 있고 각 침대에는 노란색
침대 덮게가 덮여 있었다.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한쪽 끝에 작은 책상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배설물의 악취와 지린내가 코를 찔렀고 간호 조무사들은 신경증 환자들이
울고 징징거릴 때마다 고함을 쳐댔다. 환자 두명이 윤내는 기구로 마룻바닥을 닦고
있었다. 병실 오른쪽에는 선포치로 나가는 문이 있었는데 내가 들어갔을 때는 긴
나무의자로 막아놓고 있었다. 문께에 목이 터진 커다란 자루옷 같은 병원옷을 입은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이런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걸 생각하니 뱃속이 다시
뒤틀려왔다. 내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지금 서튼 주립병원 후편 병동에 있는 것이다.
간호 조무사는 나를 선포치로 데리고 갔다. 그들은 긴 쇠줄에다 열쇠를 끼어
허리에다 차고 있었다. 마치 감옥에라도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환자 몇몇이 원을
그리며 선포치를 돌면서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그들은 모두
나이가 비슷해 보였고 대부분 옷을 벗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완전히 정신들이
돌아버렸기 때문에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한구석에 앉아
두려움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는 빠져나갈 희망도
없을 뿐 아니라 B-1으로 다시 가고 싶다고 해도 될 일이 아닌 성싶었다. 그 생각을
하니 더 속이 상했다.
시간이 흘렀다. 나는 선포치에 오후 2시 30분까지 있었다. 그때가 임무
교체시간인지 한 무리의 다른 간호 조무사들이 오더니 의자를 치우고는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식사 시간은 기분전환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 까닭은 식사준비 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식탁 준비를 하고 음식을 나누고
식사가 끝난 다음에는 설거지를 했다. 내가 도와주니 간호 조무사들도 좋아했다.
나는 그런 일들이 귀여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터득했는데 사실 그것은
일석이조격이었다. 왜냐하면 덕분에 여분의 담배를 얻을 수 있었고 적당한 시간에
피울 수 있는 허락도 받았기 때문이다. 단 흡연할 수 있는 장소는 화장실로만
제한되었다. 몇몇 흡연자들이 화장실 한 귀퉁이에 서서 담배를 피울라치면 환자들은
들락거리며 볼일을 보았다. 모든 화장실은 칸막이는 되어 있지만 환자 보호를 위해
앞쪽은 터져 있어 다 들여다보였다. 환자 두 명이 우리가 서 있는 오른쪽 바닥에다
그대로 배설을 했다. 간호 조무사 하나가 뛰어오더니 불같이 화를 내며 어서 걸레를
가져다가 닦으라고 명령했다. 우리는 입에 담배를 물고 오물이 튀지않도록
조심하면서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A-2병동의 험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씩 그곳에 익숙해져가고 있었고
충격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나는 B-1병동으로 가게 해달라고 내내 조르긴 했지만
이틀이 지나고 나니 어느새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때를 되돌아보면 어떻게
그런 환경 속에서 위로해주기를 바라고 돌봄을 받고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는지 어이가
없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내 처지가 서글프게도 생각된다.
A-2병동의 저녁시간은 낮시간보다 좀 나았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오후 5시면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 다음날 새벽 4시 30분 일어날 때까지 코를 골며 자는 것이
보통이었다. 저녁 근무 간호 조무사들은 좀더 친절해서 대화할 수 있는 환자들과
많은 시간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조용한 저녁시간이면 격리실 문에 붙어 있는
조그만 창문으로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지만 내가 감당할 수도 없는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되면 어쩌나 싶어 아예 그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정해진 대로 9시 30분이면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옆 침대와는 간격이 30센티
정도밖에 안 됐기 때문에 양 옆에서 드르렁거리며 코고는 소리를 어떻게 해도 피할
수는 없었다. 고무로 뒤집어 씌운 매트리스는 딱딱하기 짝이 없고 게다가 곰팡이
냄새까지 났다. 밀짚으로 만든 베개도 돌덩이처럼 딱딱했다. 밤 10시, 문이 부서질
정도로 요란하게 닫는 소리가 나고 쩔그덕거리는 열쇠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밤
근무 간호 조무사들이 도착한 것 같았다. 그 소리는 오랜 동안 나를 괴롭혔다.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잠을 자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격리실에 갇힌 환자의
울음소리가 어두운 병동의 고요를 깨뜨렸다. 밤 근무 간호사들은 병실 끝에 놓인
안락의자에서 자고 있었는데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잠시 몸을 뒤척이다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잠이 들었다. 출입구 근처에서 비치는 희미한 불빛을 빼놓고는
병실은 온통 암흑이었다.
A-2병동에서 이틀째 지내던 밤 새벽 2시 30분경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엔 밤새도록 불을 켜놓기 때문에 어두운데서 갑자기 밝은 곳으로 가니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눈을 감고 가만히 섰다가 떠보니 환자 둘이 구석에 서서
몰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성냥 사용이 금지되어 있는데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니
필경 훔친 것이 분명했다. 나도 한 개비 달라고 해서 끼여들었다. 가슴은 두려움으로
점점 더 고동이 높아졌다. 이렇게 하는 것은 명백한 규율 위반이기 때문에 들키기만
하면 어떤 엄한 벌을 받게 될지 몰랐다. 바로 그때 그림자 하나가 문에 비쳤다. 걸린
것이다. 규율을 어겼다는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려왔다. 발이 바닥에 붙은 듯
떨어지질 않았다.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내 팔을 거칠게 잡고는 격리실로 끌고 가
가두어버렸다. 문이 꽝 하고 닫혔다. 나는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된 것이다. 바닥엔
고무덮개로 씌운 매트리스와 담요 한 장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잠옷까지
벗겨 가버려 나는 알몸뚱이였다.
두려움과 슬픔으로 매트리스에 허물어지듯 쓰러져 담요를 뒤집어쓰고는 한없이
울었다. 어둠이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제발 나를 데려가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했다. 빌고 또 빌었다.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그대로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6시 30분,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와 나를 데리고 나갔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정신은
흐릿했다. 아침식사가 시작됐지만 어젯밤의 공포의 그림자가 여전히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저 내가 바라는 것은 제발 B-1병동으로 보내줬으면 하는 것뿐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바람은 이루어졌다. 그날 오후 B -1병동으로 돌려보내진 것이다. 나는
너무 기뻤다. 이제부턴 맘껏 자유를 누릴 수 있겠지.
앞 병동이나 뒷 병동이나 욕지거리를 해대는 사람이나 냉정한 사람이 다 있기
마련이다. B-1병동으로 다시 왔을 때 나는 어떤이가 '좋은' 간호사인지
알아차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오자마자 즉시 간호
조무사에게 가서 식사 준비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나는 잔소리 말고 선포치로
나가라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간호 조무사는 순순히 세탁실에 가서
세탁물이나 분류하라고 했다. 나는 얼른 그러마고 대답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오후
근무조는 손이 모자라서 내 도움을 무척 반겨했다. 세탁물을 다 나누어놓은 후엔
노인 환자들의 식사를 도와주고 부엌 청소를 했다. 그러고는 내 몸무게보다 훨씬
무거워 보이는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그들은 수고했다면서 뜨거운 커피 한 잔과
담배 한개비를 더 주었다. 몇몇 간호사는 아주 친절했고 내가 살아온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글로스터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살던
얘기와 내가 여기에 오게 된 경위를 들려주었다. 그날 밤 이후 나는 잠을 잘 잤다.
힘든 일을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가치있는 것임을 그때 배웠다.
다음날도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지만 한 가지 특기할 사실은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선포치엔 한 번도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B-1병동의 수간호사는
젊은 환자들에겐 무엇인가 생산적인 일을 하도록 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선포치로
내보냈다. 나는 그녀의 마음에 들어 계속 B-1병동에 머물 수 있었다.
서튼 주립병원에서 5일째 되던 날, 나는 펄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분은 나에게
내일 아침 열릴 직원회의에 잠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의사들은 나같이
10일간을 두고 보는 기간에 있는 '분홍색 서류'로 분류된 사람들을
받아들일 것인지 내보낼 것인지를 회의를 통해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마리, 내생각에 너는 내일 퇴원하게 될 것 같구나> 펄 박사의 말은 친절했지만
나는 더럭 겁이 났다. <너는 이 성에 있을 만큼 아픈 것 같지 않으니까>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나가면 집으로 가거라. 너도 글로스터에 있는 집에 가고 싶겠지?>
엄마 아빠는 내가 서튼 주립병원에 있는지도 모를 것이고, 내 나이는 열여덟
살이기 때문에 반드시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펄 박사가 생각하는 집과
글로스터의 집은 엄청난 차이가 있으므로 나는 여기서도 쫓겨나면 어쩌나 하여
또다시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저는 글로스터엔 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보스턴에 있는 랭카스터 부인에게로 가겠어요, 그분이 살 곳을 마련해주실 거예요>
펄 박사가 내 심경을 이해한 것 같아 안심은 됐지만 그것보다 나는 이 성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펄 박사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있는 환자들과 다른 것은 분명했지만 성에는 나를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내가 B-1에서 5일밖에 살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나는 안정감과 인격
존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체험하고 알게 되었던 것이다. 성 안엔 비록 자유도
없고 짓눌리는 듯한 분위기이긴 했지만. 하지만 내가 아무리 이곳에 머물고 싶다고
해도 나가라면 나가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성에선 먹고 싶을 때 먹을 수도 없고, 늦잠을 자고 싶다고 맘대로 늦잠을 잘 수도
없었다. 목욕도 혼자 하면 안 됐고, 화장실도 다른 사람이 보는 데서 일을 봐야
했다. 게다가 좌식변기를 사용하는 호사도 누릴 수 없었다. 그런데도 누가 나보고
원하는대로 해도 된다고 하면 나는 성에 남아 있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성을 떠난다는 것이 두려웠고 앞날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임직원 회의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그것도 염려가
되었다. 아침이 너무나도 빨리 찾아왔다. 오전 8시 정각, 나는 병원 회의실 옆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회의실에 들어가서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겁이
더럭 났고 진저리가 쳐졌다. 조금 있으니 펄 박사가 나와서 나를 회의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방 안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의사들, 직원들, 사회복지원들, 봉사자들,
심리학자들, 간호사들, 간호학생들. 펄 박사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중앙에
놓여 있는 의자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나는 얌전하게 앉았다. 어떤 의사가 나를
소개하고나자 질문이 시작됐다. 나는 지금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가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그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낯이 설었고,
질문도 아주 개인적인 것으로, 대개 내 생각과 느낌에 대한 것이었다. 병동에서는
무엇을 했으며 이곳을 나가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사소한 것들이었으므로 나는
별 어려움 없이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죽고 싶은 생각은 없나?> 어떤 의사가 예상 밖의 질문을 해 왔다. 뜻밖의 질문에
몹시 당황한 나는 겨우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가 과연
<아니요>라고 한 내 말을 들었는지는 의심스러웠다.
나는 마치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해부되는 실험용 동물이나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 짓밟히기 직전의 한 마리의 곤충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의사가
글로스터의 생활에 관해 물어 왔을 때 드디어 내 감정이 폭발해버렸다.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나를 주시하고 있으니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더 추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아랫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마침내 그들이 가도
좋다고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애써 침착하게 방을 나왔다. 결과는 퇴원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1시, 나는 성에서 사귄 새로운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인사를 하면서도 웬지
묘하게 이것이 마지막 작별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5
1948년 가을 열여덟 살 먹은 철부지가 두려움을 안고 주뼜거리며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키 155센티에 몸무게 45킬로그램의 어린 소녀 같은 내 모습에서 내 정서
발달의 정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서튼 주립병원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버스에 앉아 있는 내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다. 빨갛고 노랗게 물든 단풍잎들은
눈이 부셨고 시원하고 향긋한 공기는 내게 새 힘을 솟게 해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병원에 남아 있는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라고 스스로에게 타이르면서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곳을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 섭섭했다. 보스턴에
가본댔자 더 나을 것도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어떤 간호사가 필요할 때 쓰라고 준 5달러와 낡아빠진 옷을 넣은 가방 하나뿐이었다.
기분은 좋았지만 앞날은 캄캄했다. 성으로 다시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스턴에 도착한 것은 이른 오후였다. 이 도시 안에서 수백만명이 서로 뒤엉켜
산다는 것이 이상스럽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무슨 중대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황급히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마치 누가 먼저 그곳에 가는가에 일의
성패가 달려 있는 것처럼 몹시 분주해 보였다. 나는 랭카스터 부인을 만나러 곧장
복지회관으로 발을 옮겼다. 그분을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부인이 나를
로링 종합병원에 데려다주고 간 이후로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갑자기 내가
주립 정신병원인 성에 있다가 나왔다는 사실이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지회관 사무실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그곳에서는 오래된 건물에서 맡을 수 있는
퀴퀴한 냄새가 나서 마치 수업 첫날 낡은 교사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랭카스터 부인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마치 오랫동안 못 만났던 친구를 만난 듯이
반겨주었다. 긴장도 풀어지고 두렵던 느낌도 멀리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 부인은 내게 보스턴 중심가에 방 하나를 구해주었고 집세와 식비도
충분히 마련해주었다.
보스턴의 내 '셋집'이란 것은 실은 3층에 있는 방 한 칸이었다. 그런
대로 괜찮았지만 놓여 있는 집기류는 도대체 어느 것 하나 맘에 드는 것이 없어
시간이 갈수록 방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졌다. 벽지는 꽃무늬로 된 것이었는데
언제 바른 것인지 색이 허옇게 바랜 위에 묻은 때와 얼룩이 애초엔 밝고 화려했을 것
같았던 침대는 스프링이 늘어난 탓인지 누웠다 하면 아예 푹 파묻혀서 일어나려면
요동을 쳐야 했다.
길거리에 나와봐도 나을 건 없었다. 복잡한 거리에서 연방 울려대는 자동차의
경적소리에 귀가 멍멍했다.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외로웠고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스쳐지나갔다. 그들은 바로 손을 뻗치면 닿을 거리에 있지만
마음은 수천 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움츠린 채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갔다. 청바지에 스웨터를 걸친 내 꼴이 '방황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데 한몫을 하겠지만 도무지 옷차림 같은 것에 마음 쓸
기분이 아니었다.
먹는 것도 불안을 없애주진 못했다. 구미가 당기는 것도 없었지만 식당에 가고
싶지도 않았다. 낯선 사람들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결국 집
근처에 있는 간이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기로 작정했다. 대부분 커피 한 잔에 간단한
음식을 주문하여 접시에 코를 박고 먹은 후 얼른 나왔다. 다행히도 종업원 아가씨는
이것저것 귀찮게 물어보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그 무렵
몹시 약하고 지쳐 있었기 때문에 아마 시켜놓은 음식을 먹지도 못하고 나와버리거나
울어 버렸을 것이다.
보스턴에 온 지 나흘째 되던 날 아무래도 떠나야 할 것만 같아 복지회관으로 갔다.
랭카스터 부인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분은 내가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전 항상 무서워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늘 혼자인 것 같고 슬퍼요. 마치 언덕을 굴러내리는 돌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내가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랭카스터 부인은 내 상태를 잘 이해한 것 같았고 그냥
놔두면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지난날의 나의 우울증 때문에 제대로
생활해나갈 수 있겠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만 할 것이라고 걱정스레 말하던 부인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거라고 했고 나도 한동안 망설이다 그러겠노라고
했다. 나는 정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한편으로는 안심하고 있을 수
있는 곳에 가고 싶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싫어
마음속은 갈팡질팡이었다. 내가 가겠다고 하자마자 랭카스터 부인은 즉시 메리맥
주립병원에다 알렸다. 정오에 나는 다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얼마 전에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나온 경험이 있으면서도 또다시 병원에 간다는
생각을 하니 속은 계속 뒤틀려 토할 것만 같았고 가슴은 다시 심하게 요동을 쳤다.
구급요원이 내가 누운 들것을 입원실로 밀어넣었다. 2주일 전의 그 여자 담당자가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내가 이렇게 빨리 다시 올 줄은 짐작도 못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말도 않고 낯익은 환자복과
목욕가운을 재빨리 챙겨주고는 서쪽병동으로 가라고 했다.
서쪽 병동은 여전히 역한 지린내와 소독약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내가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고 그것은 완전한 절망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낯익은 곳에 왔다는 것이 안심이 되었고, 우울함이 곳곳에 스며
있는 병동에서 살아야 된다는 것이 겁이 나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수간호사 코르코란 부인은 다시 보게 되어 반갑다고 하면서 간호 조무사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라고 했다. 식사시간이 지난 때라서 가져온 것이라곤 식어빠진 우유와
토스트 뿐이었다. 나는 우유 한 잔에 토스트 한 조각만 먹었다. 그리고 휴게실로
가서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혹시 에스텔 여사가 있나 해서 둘러 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낯익은 얼굴이 한 사람도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알았던 환자들은 이미 다른 병동으로 옮겨갔다는 것이었다. 서쪽 병동은 새로
입원한 환자들이 잠시 머무는 곳이 된 것이다.
메리맥 주립벼원에 온 지 이틀째 되던 날, 휴게실에 있으려니 실습 나온
간호학생들이 말을 걸었다.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몹시 절망상태였고, 지난 몇
주간 내게 일어났던 일들을 정리해보고, 또 병원에 돌아왔다는 것에 익숙해지는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았다. 그날은 오후 내내 휴게실
한구석에 그렇게 않아 있었다.
오후 7시 30분, 담당 간호사가 내게로 다가왔다. <마리, 손님이 왔어. 어서 의사
사무실로 가봐>
<누군데요?> 나를 찾아올 사람이라곤 없었기 때문이다.
<네 사촌이라던데, 글로스터에서 왔대. 널 만나고 싶어서> 간호사가 신바람이나서
말했다.
놀랍기도 했고 꺼림직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나는 몇 달 동안 가족이라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뭣 때문에 온거야?'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론 이상했다. '그 사람들이 내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나 그사람들 만나고 싶지 않아요> 어쩔까 망설이다가 결단을 내렸다.
<그렇지만 마리, 만나야 돼> 간호사가 말했다. <그들은 먼 데서 널 보고 싶다고
왔는데 만나지 않겠다니, 그러면 못써> 간호사와 나는 된다느니 안 된다느니 한동안
실랑이질을 했다. <그분들을 실망시켜선 안 돼. 괜찮을 거야. 그 사람들은 널
좋아하고 네 가족이잖아> 나는 할 수 없이 그러마고 했다.
간호사가 나를 데리고 의사 사무실로 갔다. 나비떼가 내 뱃속을 퍼덕거리며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식구들이 내가 정신병원에 있는 걸
알게 되다니 수치스러웠다. 나는 의사 사무실에 들어가 기다렸다.
내가 의사의 책상 뒤에 서서 문쪽을 바라보고 있자니 사촌 앤과 로리가 들어왔다.
그들 외에도 다른 여자 두 명이 함께 들어왔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면회에 당황해서 나는 줄곧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나는 그저 어서 오라는 인사로 고개만 가볍게 끄덕인 다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도 어색한 표정들이었기 때문에 거북하기 짝이 없었고, 도대체가 이
부자연스러운 침묵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고 있는데 앤이 로리를 툭
치며 <네가 말해!> 했으나 여전히 침묵이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로리가 앤을 치면서
<네가 말해!>라고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얘길 하려고 저렇게 서로 미루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침묵이 계속되자 이제는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더 참을 수 없어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그때 이런 말이 들려왔다. <마리, 이분이 네
엄마셔!>
현기증이 났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책상을 움켜잡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감각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정신이 들어 조금씩 평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이든 해줬으면 하는 것 같았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져주지를 않았다.
어느새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고 급기야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는데 누군가 위로의 말을 했다. 난생 처음 사촌들이 가깝게 느껴졌고 우리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이 통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뭐라고 얘기하기
시작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울기를 그치고 나는 고개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내 어머니일까 살펴보았다. 키가
크고 푸른 눈을 가진 40대의 여자가 갈색의 긴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따뜻한 사랑을 느끼고 싶었다. 얼마나 기다리던 어머니던가. 그러나
그 순간 내가 그리워한 것은 어머니라는 실체보다는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든 내가 만나고야 말겠다는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도, 더 이상 행복한 희망의 대상도 아니었다. 이제 그 실체가 내 눈앞에 와 있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오기를 얼마난 간절히 기도했으며 나의 삶은 얼마나
무의미했는지를 그분이 알아줬으면 싶었다. 또 얼마난 내게 어머니가 필요하며 내가
얼마나 외로운 삶을 살아왔는지도 말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책상 뒤에 망연히 서 있는데 사촌 앤이 그 옆에 섰던 사람을 가리키며 내 언니
게리라고 해서 나는 또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리도 엄마를 닮아 키가
훤칠하고 마른 편이었다. 그녀의 머리 색깔은 다갈색이었고 파란 눈이 하얀 피부에
아주 예쁘게 잘 어울렸다. 앤은 내게 동생도 있는데 이름은 레니라고 말해주었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내게도 가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긴 세월을
기다렸지만 일이 되려면 이렇게도 빨리 진행될 수도 있다는 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모두 행복했다. 그러나 만남은 너무나도 짧았다. 면회 시간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단둘이서만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좀더 얘기를
나누면서 그분을 가까이 느끼고 싶었고 그대로 보내버리면 영영 못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내게로 돌아섰다. 나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고 만감이 교차되어 머리
속이 뒤범벅이 되었다. 내가 얼마나 애타게 이 순간이 오기를 기다려왔는지, 또
어머니는 분명히 살아 계실 거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가슴은 연방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어머니 역시 나와 비슷했던지 말을 더듬었고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쓰는 것이
역력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락 껴안았다. 짧은 순간에 불과했지만
나는 어머니의 품안에서 정말 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일 나를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떠나갔다.
병실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곧장 침대에 누워버렸다. 혼자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일어난 일이 마음속에 정리되기 전까지는 아무하고도 얘기할 기분이 아니었다.
간호사는 그런 내 심정을 이해했는지 내버려두었다. 나는 그날 저녁의 만남의 의미를
전부 다 파악할 수는 없었다. 한 시간 동안이나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식사가 막 끝났는데 어머니와 언니가 나를 데리러 왔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행복한 것이 어떤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6
레녹스에 있다는 어머니의 집으로 가면서도 내게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흥분과 행복에 취해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차
안에서 어머니는 어떻게 나를 찾게 되었는지 얘기해주었다. 어머니는 나를
입양기관에 맡길 때 앞으로 나를 입양할 사람의 주소와 이름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입양 허락서에 서명을 했다고 했다. 정말 생각할 수 없는 예외적인 조건이었다. 엄마
아빠는 왜 그런 조건을 허락했을까? 그때 어머니는 내가 열여덟 살이 될 때 다시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심을 이행한 것이다. 나는 이제 막
열여덟이 되었으니까. 어머니는 나를 찾으러 엄마 아빠집에 갔었다고 한다. 아빠가
그날 마침 내가 메리맥 병원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에 곧장 나를 만나러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지만
아직 물어볼 때가 아닌 것 같아 그만두었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며 어디에 있는지?
왜 어머니는 언니와 동생과는 함께 살면서 나를 양녀로 주어버렸는지? 그러나
어머니는 이 문제에 대해선 침묵만을 지켰다.
언니 게리는 신바람이 나서 집에는 외할머니가 계시다고 하며 떠들어대었다. 동생
레니도 지슴 우리와 함께 차를 타고 있었다. 나는 그애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굽이치는 긴 검은 머리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와 동생의 얼굴은 너무나
닮았다. 자그마한 체구마저 나와 비슷했다. 닮았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고
나와 그 아이가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차가
빈민구역으로 접어들더니 형평없는 싸구려 아파트 앞에 섰다. 그 집은 엄마 아빠의
지은 지 얼마 안 된, 잘 가꾼 새 집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아파트 형세를 보고
나는 속으로 무척 당황했지만 어머니와 언니, 동생과 함께 살게 된다는 행복에
비하면 집은 그리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겐 지금 집보다 더 소중한
가족이 있고, 이제부턴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이다.
우린 2층으로 올라가 깨끗이 정돈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구들도 낡아빠진
싸구려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지만 집은 안온하고 편안했다. 이제야 진짜 내 집에
온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이곳이 내 마지막 정착지이기를 바랐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곳 레녹스에서 남은 마지막 학기를 끝내고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집안에 들어서자 외할머니가 달려나와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그분은
체구가 컸고 머리는 반백으로 컷을 하고 있었다. 외할머니도 어머니처럼 나를
<패티>라고 불렀고 다른 가족들도 원래 내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었다. 오랫동안
<마리>라고 불려오다 갑자기 <패티>라고 하니 부자연스러웠지만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봐 그대로 있기로 했다.
어머니도 내가 집에 온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고 그분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이제부터는 평범한 가족의 보통 사람들 처럼 살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음날 나는 레녹스 고등학교에 등록하고 교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교실에
들어가 낯선 아이들을 대하니 괜스레 부끄러워 어떻게 처신해야 될지 몰라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뭐가 잘못됐는지 나는 대입 준비반으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내가 들어간 반은 실업반이었다. 당황하기도 했고 화도 났다. 하지만 집안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돌아와서도 엄마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 사흘 동안은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될까 봐 살얼음을 밟는 것처럼
조심스러웠지만 그런 대로 대만족이었다. 그러나 나흘째 되던 날, 상황은
급전환되었다. 나는 그날도 보통때처럼 학교에서 오후 4시 30분에 돌아왔다. 집에
오니 어머니는 창백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고 게리 언니가 그 곁에 서 있었다.
내가 놀라서 다가가니 게리 언니는 얼굴을 돌려버렸다.
<왜 그래요? 뭐가 잘못됐나요? 어머니가 아프셔요?> 나는 게리 언니에게 숨도
쉬지 않고 물어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언니는 계속 나를 피하더니 할 수 없다는 듯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술을 마시면서 무슨 약을 드신 모양이야>
나는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그러나 잠시 흐트러진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알아차렸다. 어머니는 알콜 중독자였던 것이다.
방안이 빙빙 돌고 땅이 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어머니 곁에 서 있는 데도
그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가고 싶은데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가 갑자기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코트를 걸치고는
비틀거리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어머니 쫓아나가는데 게리 언니가 등 뒤에서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엄마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 길거리로 나갔다. 술집으로 가는 것이 뻔했다.
이렇게 옆에서 쫓아가는 내 자신이 몹시 가엾게 느껴졌다.
<엄마, 이러지 말고 집에 가요, 어서요> 나는 어머니의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애원했다. 어머니가 나를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 같아 나는 더 바짝 붙어 잡아다녔다.
<이 손 놓지 못해! 네가 뭔데 이래?> 어머니가 돌아서더니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집에 가지 못하겠어? 입에 가서 네 일이나 하라구>
나는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일까? 어머니가 나한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
이분이 정말 내 어머니일까?
<제발 엄마, 부탁이에요. 집으로 가요> 나는 길가에 서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어머니한테 애걸을 했다.
어머니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비틀거리며 싸구려 술집으로 들어갔다. 안을
들여다보아도 사람들이 하도 많아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한 시간 가량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같은
거리를 오르내리며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이것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집으로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즉시 성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성뿐인
것 같았다. 나는 곧장 정거장으로 가서 7시 20분발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날은 하늬바람이 매섭게 부는 추운 밤이었다. 버스가 어김없이 성이 보이는
낯익은 길로 접어들자 나는 또다시 겁이 났다. 나를 받아줄까? 내가 병원에 있고
싶다고 하면 병원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지난주의 일들, 특히 오늘
일어난 일을 잊기 위해 정신병원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한없이 서글펐고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내 신세가 분노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서둘러 성으로 들어가
곧장 입원수속 사무실로 갔다. 나는 또 벌벌 떨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해요... 도와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이것이 당직 주임에게 내가
말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입원수속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나는
또다시 휠체어에 태워져 긴 복도를 지나갔다. 무거운 쇠문이 뒤쪽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히는 것을 들으면서 야릇한 안도감을 느꼈다.
할머니 환자들이 침대에서 뒤척이며 내는 귀에 익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침실에 들어간 때는 밤 10시가 넘었고 복도에 켜놓은 백열등이 흐릿하게 비추고 있을
뿐 방안은 캄캄했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나자 간호사 사무실 가까이에 있는
침대를 지정받았다. 나는 가만히 침대에 누워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성에 있는 어떤 사람한테도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내 기억 속에서도
지워버리는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약 일년간 성에 머물게 되었다. 나는 대부분을 중간단계 병동인 C-1에서
보냈다. C-1은 개방병동이었는데 그곳에 오는 환자들은 B-1병동에 있다가 좀 나아진
사람들이었고, 회복기 단계의 환자들이라 마음대로 정원을 산책할 자유도 주어졌다.
C-1병동의 수간호사인 미스 해리스는 친절하고 상냥한 20대 중반의 여자였다.
그녀는 언제나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는 인상을 주었지만 친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이미 두 어머니한테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라도 의지하고 싶었다. 미스 해리스가 나보다 겨우 대여섯 살 위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엄마처럼 대해주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언젠가는 내게 간호학교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을 주면서 그 뒤에 이런 말을
써주었다. <마리에게, 기억하세요. 원하는 것이 가치있는 것이라면 싸워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말은 오랫 동안 내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바깥 세상엔 고통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C-1병동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어렵지가 않았다. 성에서는 나에게 많은 편의를 베풀어주었다. 그리고
어머니처럼 나를 아껴주는 간호사들이 있어 나는 정말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또한 C-1병동에는 내 또래 아이들이 여섯 명이나 있어 늘 함께 지냈다. 우리는
친자매들 이상으로 친했다. 함께 바닥청소를 해서 보너스로 담배도 얻어 피우고 돈을
벌기도 했다. C-1병동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미스 해리스는
나를 병실 바로 밑 더러운 세탁물 꾸러미가 쌓여 있는 굴속 같은 곳으로 데려가 함께
담배를 피우며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미스 해리스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근무했기 때문에 C-1병동에서의 내 생활은 그녀와의 우정으로 늘 포근한
느낌이었다. 그녀가 없는 주말은 그렇게 황량하고 외로울 수가 없었다.
어떻게 서튼 병원이 그리 편안할 수 있고 또 실제로 편안한 내 집이 되었는지는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언젠가 규칙을 어겼다고 간호사가 격리실에 밀어넣고는
지붕이 내려앉을 듯이 큰소리를 내며 철문을 닫고는 달그락거리는 열쇠 쇠리를
남기며 떠나가던 그날의 그 적막함과 공허함을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규칙을
어기지만 않으면 잘 해주겠다는 말은 했지만 그 사탕발림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규칙 중에 하나는 침대에 관한 것이었다. 병실엔 침대가 열지어 놓여 있었는데
어찌나 다닥다닥 붙어 있는지 그 사이로 걸어 다닐 수가 없어 몹시 불편했다. 그런데
우리는 노란색의 얇은 침대보를 매트리스 밑에다 단단히 집어넣고 잡아당겨 주름하나
없이 반듯하게 정리해야 했고 딱딱한 베개도 잘 매만져 모양 있게 놓아두어야 했다.
낮에는 허락 없이 절대 침대에 들어가서는 안 됐다. 오전 5시부터 오후 7시 사이에는
허락 없이는 절대 침대에 앉거나 누워서는 안 됐다. 그러나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아침 5시까지는 천지가 개벽이 된다 해도 침대에 들어가 누워 자야 했다. 잠만 잘
온다면야 그 시간이야말로 무엇보다 달콤한 휴식시간이겠지만 잠이 오지 않을 때는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장이 마련되기 전까지 침대는 또한 소지품을 두는 장소이기도 했다. 우리는 모든
소지품을 매트리스 밑에다 두었다. 다른 환자들처럼 나도 뭐든지 끌어모아 모조리
매트리스 밑에다 집어넣었다. 예를 들면 먹을 것, 화장지, 위생대, 잡지나 돈 같은
것들이었다. 이러한 물품들은 그것이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는
법이다. 병동이라는 폐쇄된 환경 안에서는 돈이란 건 그렇게 가치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매일의 하루는 <기상, 기상시간입니다!>로
시작되었고. <식사시간입니다, 여러분, 식사하세요>로 이어져서 <소등시간이에요,
자러 가세요>로 끝났다. 만일 내가 그 명령만을 졸졸 따라 노인환자들을 씻겨주고
먹여주는 것 같은 잡다한 일을 하고, 규칙을 지키고, 세 끼 식사를 받아 먹고 그리고
잠자리에 든다면 나는 아무하고도 말 한 마디 못 해본 채 매일매일을 지내야
했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 있었다. 가기 싫어도 삼시 세 때
구내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가는 일이었다. 그곳엔 뒤쪽 병동 환자들도 식사를 하러
왔는데 '구내식당'은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우중충하고 더럽기
짝이 없는 굴속 같은 곳에 한쪽 편엔 남자환자들이 앉는 식탁과 의자가 놓여 있고 그
맞은편엔 여자 환자들이 앉았다. 매 끼니 때마다 음식을 배급받기 위해 긴 줄은 서야
했다. 내 주위에는 뒷 병동에서 온 가엾고 너저분한 환자들이 손짓발짓을 하며
큰소리로 음담패설을 지껄였고, 그들 뒤에서는 다른 환자들이 어서 앞으로 가라고
등을 밀어댔다. 그러다가는 영락없이 누군가가 괴성을 지르고, 다투고, 몸싸움이
벌어지게 마련이고 그것을 본 건장한 남자 간호 조무사가 말리려고 달려오고, 그
과정에서 누가 거치적거리면 거칠게 땅바닥이나 벽으로 밀어붙여지게 된다. 그때마다
가엾은 몇몇 노파들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서 있던 자리에서 오줌을 싸버리곤 한다.
어쩌다가 동정심이 있는 책임자는 내가 슬쩍 새치기하는 것을 눈감아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간호 조무사는 고함을 쳐대곤 했다. <제자리로 돌아가! 네가 뭐라고 그래?
너도 여기 있는 사람과 다를 것 없어, 순서를 지켜, 아가씨!> 먹어야 했기 때문에
참을성 있게 줄을 서야 한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먹나? 나는 먹는다는 것이
지긋지긋했고 먹자고 오랫동안 줄을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 혐오스러웠다.
병원에서의 우리는 아무리 먹어도 이상하게 포만감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는 반드시
2차를 하고나서야 식당을 나섰는데 적어도 커피를 여섯 일곱 잔을 마셔야 좀 배가
채워진 것 같았다. 나는 악몽 같은 낮 시간을 보내야 하는 굴속 같은 곳을 어쩔 수
없이 '구내식당'이라고 불러야 했지만 어쨌거나 서튼 주립병원은 나에게
편안할 수 있고 또 사실 편안한 곳이었다. 마음이 편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또래 친구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건 신나는
일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밤이나 낮이나 늘 붙어다녔다. 우리는 다른 십대들과
마찬가지로 급격한 신체적, 감정적 변화를 겪고 있었다. 단지 다른 것이라면 번화한
상점가를 돌아다니거나 고등학교 주차장 같은 곳에 옹기종기 앉아서 조잘거리지
못하고 정신병원 안에 있다는 것뿐이었다. 우리 각자는 나름대로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종종 우리들끼리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문제로 고민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서로 떨어져서 자기만의 불안과 두려움 속으로 숨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그룹작업이나 가벼운 노동을
하라고 부르면 혼자만의 감정의 혼란상태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친구를 잡아 일으켜
그 속에서 탈출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우리는 하나였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험한
바다 위에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젠장할, 잠시 동안
잊고 살자'는 식으로 살았다.
우리는 병원규칙을 어기는 걸 재미로 삼았다. 그게 도대체 무슨 빌어먹을 규칙이냐
말이다! 그런 재미라도 없으면 어떻게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겠으며, 세상에서
가장 따분한 곳 중의 하나인 정신병원에서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아직
젊었고, 비록 정신 신경증으로 고통을 받고는 있었지만 다리를 질질 끌며 복도를
오락가락하거나 맥없이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가엾은
'뒷 병동' 사람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활기찬 젊은이요, 인간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른의 표시'인 담배를 피우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병원엔 담배를 피울 수 있는 때와 장소가 정해져 있었고, 그 규칙은 매우 엄격했다.
우리는 항상 어떻게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만을 연구했다.
규칙이라고는 하지만 간호사들에게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 법은 융통성을
발휘할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겐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우리로서는 함부로 규칙을 어길 수는 없었다.
카렌이라는 간호사는 한치의 여유도 없는 경직된 사람이었는데다 그 유세가
대단했다. 그는 한시도 규칙을 어길 틈을 주지 않았고 우리가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만 담배를 피우는지 그렇게 않은지를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다.
우리는 카렌 간호사가 당번일 때에도 정해진 시간 이외에 담배를 피울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얘기해보자는 얘기는 오갔지만, 그걸 말할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하기야 우리가 툭하면 하는 말대로 누가 자진해서 욕먹을 짓을 하고 싶겠는가.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욕먹을 짓을 자청해보기로 했다. 허락이 떨어질 수도 있는
그럴듯한 묘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밤, 간호사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침대가 간호사실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에 살짝 열린 문틈으로 카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약간
취한 것 같았다. 아니 약간이 아니라 꽤 취한 것 같았다.
다음날 나는 두고 보라는 듯이 동료의 어깨를 툭 치면서 눈을 찡끗하고는
카렌에게로 가서 말했다. <어제밤엔 간호사실에서 들리는 소리 때문에 잠들기가 무척
힘들더라구요. 한숨도 못잤어요>
<저런, 안됐구나> 카렌이 대꾸했다. <그래, 어제 좀 시끄러웠을 거야. 베스
있잖아, 너도 베스 간호사 알지? 걔가 어찌나 취했는지. 그애를 진정시키고 입을
다물게 하느라고 정말 혼났어>
<그랬군요. 저도 봤어요. 아시다시피 제 침대가 간호사실 앞에 있잖아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 보았죠. 꽤나 볼 만한 광경이던데요. 그렇지만 카렌도 알고
계실 테죠> 나는 이어서 친절하고 상냥하게 말했다. <나는 어제밤에 본 걸 다
잊을까 생각중인데...>
일부러 말을 맺지 않았다. 그쯤하면 겁을 줄 만큼 준 것 같았다. 카렌은 어거지
미소를 지으면서 침착하게 담배를 꺼내서 내게 건네주더니 라이터를 켜서 담뱃불을
붙여주고 자기도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로서는 대단한 봉사였다. 우리는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그것은 순수한 기쁨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제도를 깨뜨린다는 것은
작은 승리지만 그것이 내 안에 한 조각의 생기를 불어넣어 줄 때 그것은 결코 작은
승리가 아닌 것이다.
병동의 분위기는 간호사들에 의해 좌우되는 일이 많았다. 어떤이는 병동 분위기
전체를 아주 불쾌하게 만들었고 욕설을 퍼붓는 것은 보통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반편이나 바보 취급을 하면서 겨우 맡겨진 일이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몇몇 간호사들은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병동에 웃음을 가져다 주었고,
심지어는 괴상한 짓을 한다든가 다루기 어려운 환자까지도 존중하고 받아들이면서
호의를 베풀었다. 나머지는 그저 직업적인 의무수행 정도였다.
C-1병동에 있는 우리 젊은 여자애들의 삶에 기쁨을 가져다 준 간호사는 마더
이튼이었다. 그분은 나이 많은 부인으로 주로 밤근무를 맡아했다. 마더 이튼은
자녀가 있기 때문인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기 아이처럼 세심하게 마음을
써줬다. 그분은 정말 젊은이들을 사랑했다. 환자들이 그녀에게서 어머니를 느꼈기
때문에 그분을 '마더 이튼'이라고 불렀고, 그 이름은 언제까지나 그분의
대명사처럼 불리워질 것이 틀림없다. 이튼은 우리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고 엄격하면서도 친절했다. 그리고 얼마나 활력에 넘쳤던지! 우리
병동에는 70명이 넘는 환자들이 있었는데 밤 책임자는 그분 혼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였다!
마더 이튼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더 특별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그분은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고 규칙으로 얽어매어 지겹게 만들지도 않았다. 마더 이튼은 우리에게
병동에서 담배를 피워도 좋다고 했다. 이건 병원규칙을 명백한 위반이었지만 그녀는
우리에게 담배를 피우는 시간이야말로 숨을 쉴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잘
알았던 것이다. 저녁이 되면 우리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커피를
마시곤 했다. 그 느긋한 기분이란! 그럴 때마다 나는 잃어버린 내 자신을 되찾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 마더 이튼이 우리와 함께 하는 밤은 정말 행복했다. 우리는 간호부장의
병실 순회가 끝날 때를 기다렸다가 병실에서 떨어진 한 작은 방에 커피포트를
꽂아놓고 마더 이튼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 날은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다. 한
번은 우리 넷이 달려들어 마더 이튼을 침대에 눕힌 다음 구두와 양말을 벗겨 창턱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마더 이튼이 잠이 들면 우리는 구두에다 눈을 잔뜩 넣었다.
그러면 다음날 근무가 끝나고 돌아갈 때면 어쩔 수 없이 마더 이튼은 병원 슬리퍼를
신고 집에 가야 했다. 하지만 그 말은 괜한 소리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그분은 어느
선까지 우리의 어리광을 받아줘야 하는지, 그 도가 넘으면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손금 들여다보듯이 훤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더 이튼은 정말 마음을 다해 우리를 돌보아주었고 우리 역시 그분을 아꼈다.
우린 자진해서 그분의 일을 도왔고 청소와 정리 정돈도 열심히 했다. 그리고 차를
끓여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는데 그분은 그것을 정말 좋아했다. 물론 우리는 그
답례로 담배 한 개비씩을 받았고.
어느 날 밤이었다. 마더 이튼이 책상 곁에 서서 차트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증세가 심한 환자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더니 마더 이튼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너무 놀라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마더 이튼도 너무나
졸지에 당한 일이라 속수무책이었다. 목이 졸린 마더 이튼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그 여자를 마더 이튼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달려들어 몸싸움을 시작했다. 누군가가 비상벨을 울렸고, 잠시 후 간호 조무사들이
뛰어들어와 그 여자를 끌어냈다. 물론 마더 이튼은 그전에도 날 귀여워해 주었지만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그분의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더 커졌다.
마더 이튼은 성의 터줏대감이나 진배 없었다. 그분의 할아버지도 이 병원에서
근무했었고 아버지 역시 병원 농장 책임자였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의 대부분의 주립병원들은 자급자족을
하고 있었다. 마더 이튼은 병원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적어도 자기가
근무하는 시간만이라도 환자들에게 사는 것처럼 살도록 해야 하겠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분은 서튼 주립병원이 마치 자신의 병원이나 되듯이 헌신적으로
일했고 아꼈다. 어쨌든 나는 마더 이튼이 밤시간의 책임자라는 사실이 정말 좋았다.
사춘기를 지나고 있던 우리는, 우리의 한계건 병원측의 한계건 간에 언제나 한계를
시험했다. 우리 그룹 중에 위니라는 애가 있었다. 위니는 약간 저능한 편이었지만
우리와 행동을 함께 했다. 위니는 우리 나머지 사람들과는 다른 식으로 병원조직에
접근했다. 그애는 규칙을 어김으로써 끊임없이 곤란을 당했다. 그애는 자기가 어느
만큼까지 규칙위반을 할 수 있는지 알아내는 것에 특별한 기쁨을 느꼈고 그 위반의
대가인 격리 수용이나 전기충격요법을 기꺼이 당했다.
우리 모두는 위니를 사랑했다. 위니의 당당하고 대범함을 보면 우리도 용기가 절로
솟는 것 같았다. 자랑스러운 위니의 곁에서 우리도 괜히 덩달아 우쭐거렸다. 병원엔
앞뒤가 꼭 막힌 풋내기 정신과 의사가 하나 있었는데, 그의 태도를 보면 우리를 마치
실험실에 있는 표본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회진할 때면 자기가 박식하다는 걸
자랑하면서 따라다니는 간호사에게 이 환자 저 환자의 '진상'에 대해
점잔을 빼며 늘어놓곤 했다. 어떤 날 그가 병실에 나타나자 위니는 침대에 앉아
허공에다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녀가 하는 짓을 보면서 <저 의사 또
당하겠군> 하고 수군거리며 실실 웃었다. 위니가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오, 내
사랑 아델린, 내 엉덩이에다 키스해줘요!> 그 소리는 몇 번이고 되풀이 되었고 점점
더 커졌다. 의사는 못들은 척하려고 애를 썼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출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회진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줄행랑을 칠 수 밖에 없었다. 또 어떤
날은 위니의 증상을 검사해야 하는데 그때도 위니는 <엉덩이에 키스해줘요. 여기요.
내 예쁜 엉덩이에다!>라고 소리지르는 바람에 그는 또다시 '연구할 만한
표본'을 그대로 두고 마치 잊었던 다른 급한 볼일이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병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하루하루가 즐겁기는 했지만 우리 환자들은 모두 행여 뒤쪽 병동으로 보내지면
어쩌나 하고 늘 신경을 쓰며 살았다. 뒤쪽 병동은 무서운 위협이었다. 그곳에서는
환자를 구타하는 건 보통이고 절대 복종으로 따라야 했다. 간호 조무사가 환자를
격리실로 데리고 갈 때라든가, 그들이 보기에 환자가 시건방진 짓을 했다든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을 했다든가 하면 머리채를 잡아끌고 가거나 발길질을 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같은 환자로서 동요가 이렇게 학대나 '시달림'을 받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괴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떤 학대는 너무 일상적으로 행해져서 그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굳어져버린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한심스러우면서도 터무니없이 우습기까지 한 것도 있었다.
하루는 병원 감독이 시찰을 왔다. 그분은 뒤쪽 병동을 둘러보고 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가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식당에 들어가자면 긴 통로를 지나야 했고
그 중간에 문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통로의 높이가 족히 3미터는 되는데
그곳을 지나는 환자들마다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왜 저렇게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가는 거죠?> 그는 좀 이상스러웠는지 옆에 있던
사람에게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우리는 모두 깔깔거리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감히 누가 그
까닭을 발설할 수 있겠는가! 그 사연은 이랬다. 식사시간만 되면 하루도 빠짐없이
-물론 외부인이 방문하는 날은 제외하고- 몸집이 크고 건장한 간호사가 쇠로 만든
커다란 국자를 들고 음식을 타러 들어가는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를 탕탕
때렸다.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이 때리는 이유의 전부였다(여러분이
생각하듯이 그저 톡하고 가볍게 때리는 정도가 아니다). 환자들은 식당에서 절대
얘기를 하면 안 되고 오직 먹기만 해야 했는데 혹시 잊어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머리에 일격을 가함으로 그 규칙을 상기시키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러거나
말거나 뒤쪽 병동의 몇몇 환자들은 여전히 떠들었는데 그럴 때면 국자가 어김없이
머리 위로 날아왔다.
우리 젊은 환자들은 감독이 의아해 하는 것이 너무나 우스워 배꼽을 잡고
깔깔거리며 웃었다(아무도 그 가증할 국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니 영원히 그
의구심은 풀리지 않으리라). 하루 세 끼 얻어먹기 위해 머리를 얻어맞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다니!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젠장할, 그래도 머리를 얻어맞는 건 다른
벌보단 양반이지!>
더 지독한 것은 간호사들이 그저 지겹다는 이유만으로 만성 환자를 미워하고
들볶는다는 것이었다. 정말 용서하기 힘든 지독한 학대를 하는 간호사도 있었다.
캐럴에 대한 예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캐럴은 중증 정신병 환잔데 하루는 캐럴이
병실안에서 용변을 보았다. 그것을 본 간호사가 잡아삼킬 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캐럴에게 그 배설물을 벽에다 바르라고 명령을 하는 것이었다. 캐럴도 화가
나서 둘이서는 한동안 고함을 치며 실랑이를 했으나 상황은 언제나 간호사 편이
유리한지라 캐럴은 자기배설물을 벽에다 바른 다음 다시 물로 닦아내야 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지. 과연 그 간호사는 캐럴에게 그렇게 잔인한 모욕을 가함으로써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었을까?
뒤편 병동으로 쫓겨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밤 11시
이후에 담배를 피웠다는 것 한 가지만으로도 그곳으로 쫓겨날 충분한 이유가 됐기
때문에 나는 늘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모든 간호 조무사들이 마더 이튼 같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우리를 못살게 들들 볶았고, 특히나 우리 같은 젊은 사람들은
상대도 하지 않으려 했는데, 환자들을 인간 쓰레기 정도로 밖에는 생각하고 있지
않는 까닭이었다. 나도 꽤 여러 번 병원규칙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뒤편 병동으로
보내진 적이 있었다. 그곳에 보내질 때마다 나는 언제나 무서워서 벌벌 떨었고,
영원히 여기에 갇혀 있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공포는 더욱 가중되곤 했다.
이러한 두려움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어 그 병동을 생각 할 때마다 그 끔찍했던
나날들이 마치 엊그제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져 온몸에 소름이 돋곤 한다.
어느 날 C-1병동 바닥을 닦고 있는데 아래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또
새로운 환자가 하나 들어와 B-1병동으로 데려가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하던 걸레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간호 조무사가 새 환자의 휠체어를 끌고 우리 병동 쪽으로
지나갔다. 휠체어에 앉은 여자를 힐끔 보니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 여자는
바싹 마른 데다 온몸이 형편없는 것을 보니 대단한 중증 환자 같았다.
<저 사람 네 엄마 아냐?> 어떤 환우가 휠체어를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기절을 할
뻔했다. 나는 다시 한번 그 여자를 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 미친 여자는 바로
내 어머니였다! 후에 그 환우는 나에게 자기는 이미 이 입원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원망을 퍼부어대면서
친구로서 그럴 수가 있느냐면서 나를 괴롭히려는 고의적인 수작이라고 펄펄 뛰며
화를 내었다.
어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그 자리를 떠나 선포치로 가서 주저 앉았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더구나 어머니를 B-1병동이 아니라 뒷병동인 A-2로 보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더 기가 막혔다.
처음 며칠 동안 나는 어머니가 뒤쪽 병동에 입원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른 척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알콜중독자로서 이 성에
왔다는 게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나는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는 것을 참으며
어머니한테 말을 걸었다. 아무리 친절하자 하고 맘을 먹어도 되질 않았다. 어머니와
같은 병동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내겐 너무 괴로운 일이었다. 병원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불가피한 일이었다. 마침내 나는 용기를 내어 엄마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도 그분들은 가끔 안부 전화를 걸어 애가 잘 지내고
있는지 물어 보았고, 보고 싶다는 말까지 했었다. 전화를 했더니 엄마가 받았다.
엄마도 나도 울기부터 했다. 나는 너무 수치스러워서 생모가 성에 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아빠가 전화를 바꿨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집에 가겠다고
하니 아버진 내일 당장 데리러 갈 테니 집에서 보자고 했다. 다음날 엄마가 왔고
나는 퇴원증서에 서명했다. 이번에는 성에서 일년을 살다가 나가는 셈이었다. 떠나기
전에 병원을 둘러보며 아는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아빠는 여전히 내게 두려운 존재었고 나는 그분의 엄격하고 단호한 성격에 다시
익숙해져야만 했다. 그러나 처음 두 달 동안은 큰일 없이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그 동안에도 나는 생모가 성에 입원했다는 것은 물론 그곳에서의 내 생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엄마 아빠는 나의 그런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했으나 캐어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빠가 바다에 나가셨을 때 엄마와 몇 번인가 사소한 언쟁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평온하게 지냈다. 그런데도 뭔가 미진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행복이란 내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내 안에서 찾아 보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어느날 엄마 아빠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내가 받았다. 게리
언니의 전화였다. 직감적으로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났을 것 같았다.
<불이 났었어> 게리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엄마는, 엄마는 상태가 너무
나빠서 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사실 수가 없을 것 같대>
몇 마디 주고받으면서 나는 사고가 나기 바로 얼마 전 어머니가 성에서 퇴원했다는
것을 알았다. 입원해 있다는 병원 주소를 받고는 전화를 끊었다. 정말 어찌해야
좋을지 몰ㄹ다. 더 숨길 수가 없었으므로 엄마 아빠에게 집에 화재가 났었다는 것과
어머니의 상태가 극도로 나쁘다는 얘기를 했다.
<어머니한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잠시 동안 긴장감이 돌았다.
<갈 수 없다!> 아빠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여잔 네 어머니가 아니다. 네 진짜
엄마는 여기 있는 이 사람이야> 아버지 목소리에 노여움이 묻어나왔다.
나는 빨리 떠나지 않으면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도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누가 내 어머니일까? 나는 찢겨진 것이다.
<저에겐 두 분의 어머니가 계세요> 나는 아빠의 노여움이 가라앉기를 바라며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 전 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어머니한테로 가봐야
해요> 비록 화를 내며 떠나왔지만 그곳이 내가 가야 할 곳이고, 더구나 지금 모른
척한다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이다. 아빠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돌더니 주루룩
흘러내렸다. 나는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지만 더 이상 할 말도 없는 것 같아 가방을
싸러 내 방으로 갔다.
게리 언니가 병원 로비에서 들려준 말에 의하면 어머니는 침대 속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잠이 들었는데 그것이 잠옷에 옮겨 붙어 불이 난 것이라고 했다. 몸의
3분의 2를 데어 3도 화상을 입었다는데 이 정도로 끝난 것도 허리를 다쳐 꼼짝
못하고 누워 있던 외할머니가 불이 났다고 소리를 쳐 이웃집 사람들이 뛰어들어와
불을 끌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사람들한테 엄마가 덮고 있는 담요를
얼른 걷어내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들은 할머니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의식을 잃고 있는 어머니 위에다 물 한 양동이를 갖다 쏟아부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의식을 잃은 채 병원 응급실에 누워 있었다. 얼굴까지 불에 데어
새빨갰고, 화상 때문에 시트가 몸에 닿지도 않도록 특별조치를 해놓고 있었다.
엄마는 말을 걸어도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나는 게리 언니에게 내가 어머니를
지키겠으니 가서 쉬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후 20일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장례미사에 참여하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의 분노는 마음속 깊은 곳에 묻혀 그후 오랜 세월동안 표출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무덤을 떠나 성으로 다시
돌아갔다. 나는 '바깥'에 꼭 두달 동안 있은 ㅅ이고, 그때 내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7
병원 직원은 내가 그렇게 빨리 돌아온 것에 대해 화를 냈다. 간호사 두 명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맙소사, 저애가 또 왔네. 재 어쩌자구 저러지?>
쥐구명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엄마를 잃고 나서 갈 데도 없긴 했지만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일어난 일을 얘기하면
동정이야 받을 수 있겠지만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어머니 때문에 그렇게 됐노라고 말한다고 해서 얼마나 병원측의 공감을 얻게 될지
그것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내 어머니가 알콜중독자에다가
무책임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얘기해서 이미 돌아가신 분을 모욕하고 싶지도 않았다.
병원측에선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또 감싸주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대로 잘 살아갈 수 있었고, 오래지 않아 나는 다시 신뢰받는 환자가 되어 병원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언제나 착한 '짓'만 해서 뒤편 병동으로 쫓겨난
적이 없다는 그런 얘긴 아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나는 내가 원할 때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는 것이 몹시 답답하게 여겨지고 갑자기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곁에
있었던 간호사는 모든 병동의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병동 끝에 있는 창문으로 뛰어가 주먹으로
유리창을 깨뜨려버렸다. 손에 예리한 아픔이 느껴졌다. 대여섯 명의 간호사가
총알처럼 뛰어와 나를 꼼짝 못하게 했다. 내가 몸부림을 쳐댔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나는 치료실로 끌려가 우선 찢어진 손을 꿰매고는
A-2병동으로 보내졌다. 아무리 가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앙탈을 부려도
간호사들의 억센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우선 내 옷을 벗기고
격리실에다 집어 넣었다. 몇 분 후에 간호사 세 명이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 한명은
커다란 주사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내가 궁지에 몰린 동물처럼 발광을 하자 그들은
나를 꽉 붙잡아 매트리스에 눕히고는 주사 한 대를 놓고 나가 버렸다. 나는 이틀
동안 뒤편 병동에 있었다.
아마도 내가 목격한 것 가운에 가장 마음이 아프고 슬펐던 경우는 리타라는 젊은
여인에 관한 사건이었으리라. 그녀는 말할 수 없이 어려운 때를 보내고 있었다.
리타에게는 네 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녀는 너무나 그애들을 보고 싶어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아이들이 자기를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하면서 무척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 곁에 앉아 그 환청에서 어서
풀려나기를, 그리고 아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빌었다. 리타는 정말
매력적인 여인으로 아이들과 재결합하는 것만이 그녀의 최대의 소원이다. 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는 것도 바로 그 목적 때문이라고 했다.
병원측은 그런 리타를 이해해주질 않았다. 그녀가 환청을 듣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녀의 상태에 진전이 없는 것은 그녀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리타에겐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병원측은 그녀의 심정은
이해하려고도 않고 단순히 겉으로 나타난 중세만 보고 만성긴장이나 망상형 정신
병자들을 수용하는 열악하지 짝이 없는 뒤쪽 병둥으로 옮겨버렸다.
나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리타를 찾아갔다. 그녀는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보였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 이러면 안 돼. 이건 죽으라는 거나
마찬가지야> 나는 리타를 찾아갈 때마다 눈물을 보이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먹었지만 갈수록 더 폐인이 되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리타의 아름다운 용모에는 고통과 짙은 절망의 그림자가 덮여갔다.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녀 자신도 더 이상 자신에 대해 마음을 쓰지
않는 듯했다. 리타는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었고 나와의 관계도 끊어졌다. 어는샌가
그녀는 뒤편 병동에 있는 다른 환자들처럼 비참한 몰골로 변해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도 가슴이 아파 더 이상 보러 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리타의 고통은 다른 어떤 아픔보다 더 끔찍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그녀는
조금씩 회복이 되었고 마침내 퇴원을 할 수 있었다.
세월이 갈수록 마더 이튼과 C-1병동의 수간호사인 미스 해리스와의 친분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미스 해리스와 나는 더러운 빨래들이 잔뜩 쌓여 있는 통로로 아무도
모르게 살짝 내려가 층계에 앉아 담배를 피우곤 했다. 그녀는 병실에서의 흡연은
허락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신임을 받고 있고 참 인간으로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느꼈다. 미스 해리스가 특히 나에게만 그렇게 대해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어린애였다. 나는
바뀌고 싶은 생각도,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는 정신적으로 큰 이상은 없다는 진단이었지만 계속 치료는 받아야 했다. 그러나
많은 '치료'들은 치료가 아니라 차라리 벌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았다.
간호사들은 그것을 환자들을 혼내는 기회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특히 충격 요법이 더
그랬는데 그것은 차라리 공포였다. 젤리 같은 것을 입힌 여러 가닥의 전극을 내
관자놀이에 고정시켜 놓고 의사가 시커먼 박스에 붙어 있는 자그마한 다추를 누를
때의 그 공포와 긴장의 순간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사실 이 치료는 육체적인 통증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닌데도 전기 충격이 내
무의식 세계를 파고들어 간다는 느낌이 나를 말할 수 없이 긴장하게 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이었다. 이 공포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했다. 마치 나를 물속에 집어
넣어버리거나 새까만 허동으로 던져버리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나는 이 치료를
받아야 할 때마다 반항을 하며 발광을 하다시피 했지만 아무 소용없이
'쇼크실'에 강제로 집어넣어지곤 했다.
오늘날과는 달리 그 당시에는 소디움 펜타톨 요법이 빈번히 행해졌었다. 그 치료
과정 내내 내 몸에 전기를 보내는 단추가 달린 작은 검은 상자를 완전히 의식하면서
누워 있는 나는 마치 수장되기를 기다리는 혼백이 다빠진 사령수처럼 느껴졌다. 나는
모두 열두 차례 충격요법을 받았는데 마지막 치료를 받고 난 다음의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란 아마 경험해보지 않은 이는 모르리라.
성에서는 그 외에도 오늘날에는 여러가지 향전신성 약품이나 신경 안정제들이
생겨서 별로 사용되지 않는 요볍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인슐린 피하주사
요법이 그 가운에 하나였는데 이 주사를 맞고 나면 45Kg인 내 체중에 9Kg이 더
불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팔뚝에 인슐린을 맞고 나면 몇분 안에 나는 반
혼수상태가 되고 깊은 무의식에 빠지게 된다. 의식을 잃게 되는 이러한 치료에 대해
환자들이 갖는 공포를 의사들이 어찌 이해할 수 있으랴. 그 치료가 어떤 것이든 나는
치료를 받을 때는 내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깨어났을 때 내 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흡사 물에 빠진 새앙쥐
형상이곤 했다. 치료는 장장 네 시간 정도 걸렸는데 한 가지 이점은 있었다. 즉
치료를 받고 나면 다른 환자들 보다는 꽤 괜찮은 특별식이 제공된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두 가지 요법은 수료과(역주:환부를 물에 담그거나 적셔서 치료하는 것을
전담하는 과)에서 하는 '더운물' 치료와 '냉습포'
치료였다. 이 치료는 대개 8시부터 시작하여 한 시간 동안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4시에 끝났다. 더운물 치료는 뜨거운 물을 채우고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그
그 위에 두꺼운 마포를 덮어 놓은 욕조 안에 들어가 한쪽 끝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머리만 내놓고 앉아 있으면 됐다. 그때 몸은 마포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밖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앞뒤로 움직이는 머리뿐이어서 묘한 진풍경이긴 하나 이 치료는 몹시
흥분했을 때 평온을 되찾고 진정 시키는데 효과가 있었고 어려울 것도 없었다.
한편 '냉습포' 요법은 그리 '즐겁지' 않은 것이었다.
얼음물에 담갔던 시츠로 머리를 제외한 온 전신을 감아버려 흡사 미이라가 된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이 요법은 좀더 증상이 심한 신경증 환자에게 채벌 수단으로
사용됐다. 냉습포에 눕는 첫순간엔 몹시 춥지만 점차 체온으로 따뜻해져 치료가 다
끝나 물러 나올 때쯤에는 머리와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도 훨씬 차분해진다. 그러나
시트에 둘둘 말려 하루종일 꼼짝 못하다는 것은 일종의 고문이기도 하다. 치료 내내
환자들은 비명을 지르고 욕지거리를 해댄다. 나는 내 몸의 답답함보다도 곁에 들리는
고통스럽고 분노에 찬 고함소리를 견디기가 더 어려웠다. 그들의 끔찍한 비명이 내
몸을 파고 들어오고 그 목소리가 머리에 구멍을 뚫는 것 같아 금방이라도 미칠 것만
같았다.
냉습포 요법은 특히 병원에서 통용되는 악폐의 한 형태였다. 잿물비누로 흠뻑
적셔진 습포가 머리에서부터 뒤집어 씌워진다면 그 기분이 어떻겠는가? 나는 이 벌을
수도 없이 많이 받닸다. 그 습포가 씌워지면 곧 숨이 막혀 헐떡거리고 그 지독한
잿물비누 냄새가 더욱 숨통을 조인다. 그리고 갈수록 그나마 냄새나는 공기조차도
점점 줄어들어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 다음은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데 눈을 떠보면 침대에 눕혀져 있곤 했다.
그러나 내가 원하기만 하면 '냉습포' 요법은 피할 수도 있었다. 나는
스물 둘에 접어든 어른이었지만 정서의 성숙도는 겨우 사춘기 나이 정도밖엔 되지
않아 쓸데없이 반항하며 말썽을 피워 이런 악법의 징벌을 자초하곤 한 것이다. 어느
날, 밤근무 간호사와 대판 싸움을 했는데 그 이유는 겨우 10시밖에 안 됐는데 침대에
들어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잘 생각이 없노라고 하면서 계속 의자에 앉아
라디오를 들었다. 이어폰을 끼고 있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방해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책임 간호사를 우습게 여긴다는 분명한 표시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결과는 '냉습포' 찜질이었다.
이 무렵 나에게서 두드러지게 보이던 우울증, 분노를 쉽사리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력, 쉽게 취하는 가식적 행동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나는 이런 것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사실 '가식행위' 같은 것은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되면
퇴원시킬까 봐 아예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병원에서의 삶이 안정되고 편안했기
때문에 내 앞가림도 못할 '바깥' 세상에 나가서 사는 것 같은 위험을
자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에서 계속 살고 싶었기 때문에
병원측에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 느낌을 물어본다든가, 퇴원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권고하며 완치를 위한 치료를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나는 의사들의 그러한 노력들을
무시하거나 거부했다.
엄마의 방문도 끊어짐이 없이 계속되었고, 엄마는 방문할 때마다 집으로 가자고
졸랐다. 그 무렵 엄마는 72세 나이로 여행을 한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질 때였으나
언제나 가방에 샌드위치와 과자 그리고 갖가지 종류의 과일들을 잔뜩 가지고 오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나도 모르게 엄마가 오기를 기다렸고 집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이 미안해지기도 했다. 어느 날은 엄마가 울면서까지 애원하는데
그것을 뿌리치는 것이 너무 어려워 돌아가겠노라고 대답을 해버렸다. 그러자 엄마는
어디서 그렇게 빨리 구했는지 통역해줄 이태리 여자를 데리고 와 의사와 상의를
끝내고는 퇴원수속까지 마쳐버렸다. 나는 30여 분 만에 짐을 꾸려서는 정들었던 성을
떠나 글로스터로 돌아갔다. 겨울이었다.
날씨는 추웠지만 글로스터의 낯익은 좁은 거리에 들어서니 집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 나쁘게 여겨지진 않았다. 집안의 큼직한 창들과 널따란 현관은 여전했고 높은
파도의 물결이 잔디밭을 보호하기 위한 담장 가까이까지 밀려오는 것도 예전과
똑같았다. 나는 겨울 바다의 소금기가 배어있는 비릿한 냄새를 좋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성에서의 생활은 차츰 잊어갔지만 함께 지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지울 수가 없었다.
집안에서의 시간들이 빨리 지나갔다. 나는 엄마를 도와 집 청소도 했고 장보는
것도 내가 도맡아 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진저도 자주 놀러 왔다. 그애와 함께
있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고 언제 우리가 떨어져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진저도 나와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얼마나 슬퍼하는지, 또 얼마나
혼란스러워하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빠가 미시시피로 고기잡이를 가셨는데 아마 겨울이 끝날 때까지 집에 돌아오시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아빠는 2주일마다 한 번씩은 어김없이 전화를 하셨다. 어느 날
오후 나는 엄마와 이웃집 아줌마와 함께 부엌 식탁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괜스레 이상한 예감이 들어 창문을 내다보니 내년에나 온다고 했던 아빠가
오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뛰어나가 아빠를 맞았다. 찬 겨울바람에 아빠의 얼굴은
빨갛게 얼어 있었고 그전보다 여위긴 했어도 아주 건강해 보였다. 아버지는 모자와
코트를 벗어 걸고는 부엌으로 들어오셨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키스를 하려는데
아버지는 갑자기 의자에 미끄러지듯 주저 앉으시더니 머리가 뒤로 젖혀지면서 옆으로
툭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아빠는 눈을 치뜨고 계셨다. <아빠... 아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돌아가신 것이다.
아빠의 이러한 죽음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분은 대단한 건강체였고 성격
또한 무쇠처럼 강인해서 도대체 죽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았고, 하느님마저도
제아무리 좋은 것을 위해서라 하더라도 그분을 데려갈 수 없는 줄로 생각했었다.
갑작스런 상을 당해 넋이 빠져 있는 엄마를 위로하러 오후 내내 조문객들이
드나들었다. 나는 바로 옆집인 진저네 집에 가서 그날 밤을 지내야 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는데 예의 공포감이 나를 엄습했다. 무서웠다! 뱃속이 뒤틀리고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 해볼 수도 없이 온 전신이 떨려오기만 했다. 그것은
죽음에의 공포였다. 하느님께서 아빠를 데려가시듯이 나도 얼마든지 데려가실 수
있지 않은가. 언제 그 끔찍한 죽음이 나를 덮칠지 모르는 것이다.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아 잠을 잔다는 것도 무서웠다. 공포에 휩싸여 뜬눈으로 지새운 그 밤은
유난히도 시간이 더뎠다.
아침이 되니 상태가 훨씬 나아졌다. 밤이 지나간 것이 기뻤다. 나는 얼른 일어나
엄마에게로 갔다. 친척들이 엄마와 함께 있었다. 시신은 집에다 모시기로 합의를
보고 장례 절차도 의논이 다 됐다고 했다. 아빠를 집에다 안치하자는 것은 엄마의
뜻이라고 했다. 나는 엄마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 탐탁지 않았다. 비록 시신을
집에 모시는 것이 관습이라서 엄마가 그리 결정한 것이라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밤낮없이 집에 들락거리게 될 것이고 결국 우리는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한시도 눈을 붙이지 못한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장례를 치를 때가지 나는 그 두려움과 싸우느라고 기진맥진이었다. 나는 내 마음
깊이 묻혀 있는 공포감과 용기있게 맞서보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그것에서 빠져
나오려고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나는 부끄러움 때문에 나의 두려움을 누구에게
털어놓지도 못했다. 나는 그분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금방이라도 나한테 죽음의
신이 덮칠 것이 더 무서워 어쩔 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정을 억누르느라고
힘을 지나치게 써버려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다행히 그 격렬한
공포는 내게서 떠나갔고 다시는 오지 않았다.
최근 정신병 전문협회에서 나온 발표에 의하면 내가 여러 해 동안 고통당했던 그
병명은 급성 공황증이었다.
오빠 마르코와 올케 사라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시시피주에서 왔다. 그들은
그곳에 살고 있었지만 오빠는 아버지의 어선에서 함께 일했다. 유산분배는 할 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몇년 전부터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남겨놓은 것이
얼마되지 않은 까닭이었다. 아빠가 남겨놓은 것이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알자 엄마는
몹시 당황했다. 엄마와 나는 생계문제까지 걱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나에 대한 엄마의 태도변화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전에 엄마는
툭하면 사람들에게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는데
이제는 같이 사는 것 마저도 참기 어려운 것 같았다. 나를 몹시 무거운 짐처럼
느끼는 것 같았다. 엄마에겐 경제적인 뒷받침과 함께 정서적으로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나한테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었으니까. 어쨌든 엄마는 나를
올케 사라와 함께 미시시피로 가서 살도록 조처를 하셨다. 나 역시 낯선 곳에 가서
새로운 생활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했다. 장례를 치른 지
삼 주일 후 나는 더 나은 미래를 바라면서 미시시피주로 날아갔다.
미시시피 주에서의 생활도 역시 어려웠다. 문제로부터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여전히 나를 따라온 것이다. 내 삶을 지배하는 불안과 두려움은 끊임없이
덮쳐와 그것을 떨쳐버리려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헛수고였고 갈수록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의사에게 보여도 가벼운 신경 안정제 따위나 처방해줄 뿐 별 효과도
없었다.
나는 몇 달 동안 오빠 마르코와 사라, 그리고 네 명위 조카들과 함께 살았으나 더
이상 불편을 끼쳐줄 수가 없어 그 집을 나와버렸다. 오빠네 식구와 함께 사는 동안
나는 누가 조금만 신경을 건드려도 성깔을 부리는 고양이처럼 파르르 화를 냈기
때문에 그 집 식구는 나 때문에 늘 긴장을 해아 했고 수시로 변하는 내 기분을
어떻게 맞춰야 좋을지 몰라 늘 전전긍긍하는 것이 내 눈에도 역력하게 보였기 때문에
더 견뎌낼 수가 없었다. 나는 앨라배마 주의 모빌로 가서 일자리를 구해보기로 했다.
앨라배마주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전화번호부를 뒤져 병원의 일자리가 있나 알아보니
마침 종합병원과 관계를 맺고 있는 고아원에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금방 취직을 할
수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신생아를 돌보는 일이었고 숙식은 간호사 기숙사에서
하게 되었다.
고아원에서 약 일년간 근무를 하고 있자니 아는 의사로부터 보수를 더 줄테니
사무직으로 옮길 생각이 있느냐는 제의가 왔다. 직장을 YWCA.로 옮겼다. 나는 새로운
직업이 맘에 들었고 그곳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Y.에서의 생활은
즐겨웠다. 그러나 불안증은 여전히 직장생활에 방해가 되었으므로 글로스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엄마는 내가 돌아오는 것을 원치는 않겠지만 내가
가면 적어도 몇 달 동안만이라도 살게는 해주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왜 그때 성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그때 나의
일념은 오로지 나를 파멸시키는 그 병이 얼른 나았으면 하는 것뿐이었고 글로스터로
가면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무렵 나는 스물
여섯의 성숙한 여인이었지만 내 정서적인 성숙도는 여전히 엄마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8
기차가 글로스터 역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7시경이었다. 살을 에는 듯한 2월의
바람이 활짝 열린 역사의 문으로 사정없이 밀려 들어왔다. 나는 앨라배마 주에서
입던 여름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기 때문에 온뭄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다행히
진저가 택시를 잡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만난 것이 기쁘기만 해서
택시 안에서 그 동안 밀린 얘기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차는 어느 사이엔가 집
앞에 도착했다. 부엌 창문으로 엄마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택시에서 내려서
달려가 문을 두두리며 몇 번이고 엄마를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받는 사람임을 전실히 느꼈다. 엄마만 바라고 이 추운
날 그 먼 길을 왔는데... 내가 아무 데도 갈 데가 없다는 것을 엄마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이처럼 모질게 대할 수가 있을까? 나는 화가 끓어오르는 것을 누르면서 몇
번인가 더 문을 두들겼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발길을 돌렸다.
진저는 벌써 집으로 돌아갔으니 내가 갈 곳은 사촌 언니 레나의 집밖엔 없었다.
겨울바람이 뼛속까지 얼어붙게 했다. 걸어가는 10분 동안이 한 시간이나 되는
느낌이었다. 언니 레나와 가족들은 나를 진심으로 반겨주었다. 뜨거운 국을 마시면서
조금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는 모두들 언짢아 했다. 레나 언니네는 방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사촌 언니인 안나와 함께 자면서 엄마에게 잘 이야기해 줄
것을 부탁했다. 안나 언니는 엄마와 가장 친했기 대문에 누구보다도 엄마를 잘
설득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긴 여행에 몹시 지쳐 있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자러 갔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엄마였다. 나는 안나 언니와 엄마가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엄마가 나를 집으로 데려가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몇 분 후 그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나는 엄마의 짐이 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며 힘써 돕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엄마도 만족하는 것 같았고 방안에 감돌던 긴장도 사라지는 것응 느낄 수
있었다.
그후 나는 2년간 엄마와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았다. 나는 냉동에 제조공장에
취직도 해보았지만 고질적인 불안증 떼문에 기껏해야 3주일 동안 일하고 그만두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엄마의 건강도 급격히 나빠져갔다.
엄마는 건망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급격히 심해져갔고 내가 항상 당신을
속인다고 억지를 부렸다. 예를 들면 돈을 감춰 놓고서는 그걸 어디다 두었는지를
잊어버리고는 내가 그 돈을 훔쳐갔다고 우겨대는 식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돈을 찾게
되어도 미안하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엄마의 금목걸이에 걸어둔
5달러짜리 금화를 잃어버렸다며 집안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찾지 못하자 이웃
사람들에게 내가 그것을 훔쳐갔노라고 소문을 내었다. 나의 분노가 폭발했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되질 않았다. 나는 평정을 잃어버리고는 엄마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금화는 일주일 후에 찾을 수 있었다. 목걸이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금화가
소파 쿠션 밑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엄마와 함께 살면서 특히 어려웠던 것은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엄마는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만나지도, 데려오지도 못하게 했다. 엄마가 유일하게
허락하는 친구는 진저 뿐이었는데 그 까닭은 진저는 데이트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연로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집안살림을 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친구를 사귀고 싶어도
엄마의 그런 태도 때문에 그들은 아예 나를 가까이 하려고 하지도 않고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결혼을 했기 때문에 이미 관심사가 달라져 있었다.
엄마와 함께 사는 데 문제가 많았지만 그렇다고 떠날 용기도 없었다. 나 자신
자립하여 살아갈 수 있는 형편도 못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심각한 불안증 때문에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고 우울증은 더 심해져갔다. 게다가 생활을 꾸려갈 만한
이렇다 할 기술도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보호만 받고 살아왔었다. 아빠는 여자란
나다니며 활동을 해서는 안 되며 집 안에서 살림만 해야 한다고 믿고 또 그렇게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장애는 내 자신도 어떻게 손써 볼 수 없는
두려움증이었다. 성에 있을 때는 사람들이 나를 전혀 제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으로
대해줬고 또 나 역시 그렇게 믿었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해 엄마는 몹시 아프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걸핏하면
의사를 찾아갔지만 의사도 병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추수감사절이 되어
친척이 보내준 칠면조 고기를 맛있게 먹고 났는데 엄마가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구토가 겨우 진정되고 난 후 나는 엄마를 씻겨 잠옷을 입혀드리고 주무시게
했다. 밤이 되자 엄마의 상태가 더욱 나빠져 의사에게 왕진을 부탁했다. 진찰을
해보던 의사가 구급차를 불러 엄마는 한 시간안에 글로스터 종합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엄마는 병원에 14일간 입원해 있었다. 아무에게도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나는
매일매일이 두려움의 연속이었지만 나만 찾는다는 엄마를 매일 방문해야 했다.
엄마는 상태가 조금씩 더 나빠져갔다. 의사는 엄마에게 당뇨증세가 있기 때문에 회복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이윽고 엄마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런 엄마를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고문과도 같았다. 이미 엄마의 얼굴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날 저녁 집에 오면서 웬지 오늘밤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올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녁 내내 전화가 많이 왔지만 대부분 이웃이나 친척들이
엄마의 상태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전화만 받고 나면 화장실로 달려가 토했다.
너무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면서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울부짖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는 상관없이 소리쳐 기도했다. <하느님,
도와주십시오... 무서워요... 도와주십시오...> 하지만 하느님에게선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엄마의 임종은 다가오고 있는데 나는 혼자였다. 나의 마지막 소망은 엄마와
함께 나도 죽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또 울었다.
엄마의 시선은 영안실에 안치되었다가 아빠 옆에 묻혔다. 밤샘을 하는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열이 있는 것 같았다. 그대로 견뎌보려고 했지만 장례식 날에는
열이 더 올라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친척들도 내 상태를 보고는 안 되겠다고
해서 장례식이 거행되는 동안 나는 사촌 언니 안나의 집에 있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되나, 무엇이 날 기다릴까? 이것저것 두서없이 생각하니 머리는 더 터질 것처럼
아팠다. 내 앞날은 그야말로 어두움뿐이었다. 가진 것 맨 주먹 뿐이었다.
정오가 조금 지나서 사촌 언니 안나가 몇몇 친척들과 함께 돌아왔다. 식탁에 앉아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몹시 긴장했다. 안나 언니가 점심을 마련해
오자 사람들은 치즈와 얇게 썬 토마토를 얹은 샌드위치를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나는
전혀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혼자만 우두커니 앉아 있들 수도 없어 억지로 먹는
체했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식탁을 치운 후 커피를 끓이기 위해 스토브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나는 레나 언니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불안증세가
일어났다. 나는 가능한 한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양다리에 경련이 일기
시작해서 우선 그것부터 가라앉혀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 봐도 진정이 되지
않으니 결국 먼저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내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쉰 소리가 났다. <집에 가야겠어요.... 가서 좀 쉴래요>
길거리에 나오자마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빨리 뛰었다. 가는 도중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긴장으로 팽팽해진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길거리에는 차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내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 뛰었기 때문에 숨이 턱에까지 차는 데다 길마저 씰그러져 보여 더 불안했다.
집이 보였다. 이 상태로 집에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심장 뛰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나는 층계를 뛰어올라가 문을 열어젖히고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 위에 쓰러졌다!
눈을 감았다. 머리를 맷돌로 짓누르는 것 같은 강한 통증이 심상치 않았다. 혈관이
파열되는 것이 아닌가 해서 겁이 났다. 나는 진정하려고 애를 쓰면서 거듭거듭 나
자신에게 타일렀다. <모든 게 잘 될거야. 이만한 일에 기가 꺾이면 안 돼... 나는
이 정도에 좌절할 수는 없어> 그리고는 천천히 눈을 뜨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죽음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온 느낌이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데도 벽 한
모서리가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별안간 내 눈앞에 깨끗이 닦은 유리창이 놓여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가
지금 무얼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무엇이든, 어떤 것이든 잡아보려고 했지만 잡히질 않았다. 나는 지금
미쳐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나 자신도 내가 미쳤는지
죽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는데... 너무 무서웠다!
나 자신을 자제해보려고, 살아있으려고 몸부림쳤다. 무서움증이 어느 사이엔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공황증이 멈춘 것이다. 문득 엄마가 복용하던 수면제 생각이
떠올랐다. 절망적인 마음으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머리가 여전히 흔들리고 마루가 발
밑에서 흔들거리며 춤을 췄다. 상비약이 들어 있는 장 맨 꼭대기에 수면제가 들어
있는 병이 있었다. 이걸 먹으면 괜찮겠지. 나는 수면제 한 알을 먹고 침대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곧 잠이 들었지만 긴장과 불안은 잠 속에서까지 나를 따라왔다.
잠을 깨어 방을 둘러보니 이젠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보였다. 물건들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고 방도 기울어져 있지 않았다. 아직 수면제 기운이 남아 있어서인지
머리는 멍했다.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된 것이다. 뱃속은 아직도
메슥거리고 불편했지만 공황증은 사라진 것이다. 아직 날이 새려면 멀었는지
창문으로 달빛이 비치고 있어 가구들을 아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전등을 켜고
시계를 보았다. 놀랄 일이었다. 8시였다. 네 시간이나 잘 수 있었다니.
머리는 여전히 지끈거리며 쑤셨고 몸은 뜨거웠다. 아직 살아있는 걸 보니 몇 시간
전에 겪었던 일들은 정서의 이상이었음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몸에도 이상이 있는 것
같았다. 체온을 재어보니 40도였다. 안정을 되찾긴 했지만 아직도 발작의 여파가
남아 있었다. 나는 정신병에 걸린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얼마 안 있어
또다시 발작이 일어날 것이 아닌가!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친척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고,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도 못하겠지만 분명히 걱정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이 집에서 계속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집을 떠나 가까이
있는 호텔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일어나 옷 몇 가지를 주섬주섬 싸들고 집을
나섰다. 호텔 방에 들어가 담요로 몸을 둘둘 말고 침대에 누웠다. 추워 죽을 것만
같았다. 별짓을 다 해봐도 따뜻해지질 않았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뱃속은
쥐어짜는 것 같이 아팠다. 토하기 시작했다. 양탄자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쓰레기통을
움켜쥐었다. 이런 모습으로 자정이 넘도록 토하고 또 토하는 중에서도 나는 울면서
하느님께 기도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위기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도무지 두려움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은 우리집
주치의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새벽 1시. 그녀를 깨우게 해서 미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내겐 도움이 필요했다. 전화를 했다.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에버트 의사에게 어머니의 죽음과 내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이야기했다. 의사는 글로스터 종합병원으로 오라고 했고 나는 30분 안에 그곳에
도착했다. 간호사가 침대를 마련해 주고 주사 한대를 놓아주었다. 곧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지면서 잠이 들었다.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 기뻤다.
다음날 아침 일어났을 때는 어제의 증상이 가라앉아 살 것만 같았다.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완전히 잃었던 안정감을 되찾은 것이다. 이제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이
세상엔 나를 걱정해줄 사람도, 내게 일어날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줄 사람도 없다.
바르텔로 가의 친척들은 나를 진심으로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성가신' 존재일 뿐이었다. 혹시 오빠 마르코와 올케 사라와 함께
지내고 싶다고 하면 그들은 기꺼이 오라고는 하겠지만 그것 역시 임시 해결책일
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걱정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갈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도 않은 데다 어제와 같은 정서 불안증세가 언제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고, 그런 느낌을 억제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내
앞엔 절망밖에 없었다.
이틀 후에 의사가 나에게 단핵증(역주:혈액 속에 비정상적으로 많은 단세포가
발견되는 병)과 전염성 간염 증상이 있다고 말했다. 기겁을 할 노릇이었다. 정신적인
문제만으로도 힘에 겨운데 육체의 병까지 겹치다니. 의사는 나에게 꼼짝 말고 누워서
쉴 것이며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저 귀등으로 듣고
흘려버렸다. 지금으로서 나한테 가장 시급한 것은 그것보다 올바른 정신상태를
어떻게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의사가 처방해준 진정제를 받아 먹고 나니 좀
편안해진 느낌이 들었다.
올케 사라가 나를 보러 왔기에 의사가 한 말을 그대로 해주었지만 정서불안으로
겪은 일에 대해선 일체 말하지 않았다. 올케는 안정된 직업을 얻을 때까지만이라도
언니 집에 신세를 져도 되겠느냐는 나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어 그렇게 하기로
했다. 나로서는 오빠 집에 얹혀 살고 싶지 않았지만 그 당시로서는 그외의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내 인생을 정리해 보고 싶었지만 생각뿐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글로스터 종합병원을 떠나면서도 나의 마음은 여전히 안정을 잃은 상태였다. 오빠
집에서의 첫날은 그런 대로 무사히 지나갔다. 오후에 쉬고 나니 언니는 저녁으로
닭국을 끓여주었다. 이제 어느 정도 말도 조리있게 했고 육체적인 건강도 좋아진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속은 언제나 좌불안석이었다. 공황증 발작은 다시 들이덮칠
태세를 차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낮은 무사했으나 밤에는 괴로움으로 시달려야 했다. 조용한 집에 누워
있으면 아이들이 색색거리고 자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면 불안의 공포증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고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써야 했다. 나는 글렀어! 눈물이 나왔다. 처음에는 눈물을 찔끔거리는
정도였으나 나중엔 격렬한 흐느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기도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뿐이지 할 수가 없었다. 불현듯 이집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야
한다. 그렇지만 어디로? 보스턴의 로링 종합병원이 떠올랐다. 거기엔 응급실이 있고,
이번에도 나를 받아줄 것이다. 나는 재빨리 옷을 입고 그 위에 겨울 재킷을 걸치고는
조용히 집을 빠져나왔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새벽 12시 30분, 보스턴행 막차가 글로스터 역으로 들어왔다. 기차를 타고 곧장
좌석에 가서 앉았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몸이 위로 솟는 것만 같았다.
움직이는 기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에 나는 좌석 팔걸이를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공포로 온몸이 완전히 경직된 채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승무원이
다가와 차표를 보자고 했다. 나는 불안감을 감치기 위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차표를 보이니 승무원은 체크를 하고는 다음 좌석으로 갔다. 한숨 놓을 수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기차가 여러 번 정차 했었지만 나는 마치 의자에 못이라도
박아 놓은 것처럼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식은 땀에 젖어 축축한 두 손은
손잡이를 하도 세게 거머잡고 있어서 쥐가 날 지경이었다. 아주 경미한 움직임에도
나는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기차에서 뛰어내리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단 한
가지 방법은 꼼짝 않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 보스턴까지는 한시간
거리밖에는 안 되건만 기차는 기어가는 듯했고 정거장 마다 섰다가 떠나는 것이
목적지에는 영원히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다. 드디어 승무원이 <보스턴입니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겨우 안심이 되어 재빠리 플랫폼으로 걸어나왔다.
거리로 나와 손짓을 하여 태시를 불러 타고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로링 종합병원 응급실 입구 앞에 서 있었다. 그때가 새벽 2시경, 강한 서풍이
불어오고 ㅇ었다. 찬 공기에 정신이 번쩍 나는 것 같았고 덕분에 좀더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잠시 그렇게 섰다가 응급실로 들어갔다. 간호사 한 명이 진료실을
가리키며 들어가 기다리라고 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의사를 기다렸다. 의사가 증세를
물어보자 나는 창피한 것도 잊고 제발 나를 불안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린 의사는 키가 큰 중년의 남자였다. 그가 하도 나를 뚫어지게 쳐다봐서 나는
어디에다 시선을 둬야 할지 몰라 쩔쩔매며 눈물을 닦아내고 있으려니, 의사가 문제가
무었이냐고 물어왔다.
<나도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뭐가 잘못 됐는지> 나는 엄마의 죽음 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의 강한 시선에 질려서 내가 겪었던 공포에
대해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린 의사는 내가 어떤 정확한 대답을 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다시 입을 열었다. <글로스터 병원에서 그러는데 나에게
단핵증과 전염성 간염증세가 있대요. 하지만 제가 정말 두려워하고 있는 문제가
있는데... 그전엔 한 번도 이런 증상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것은 갑자기
닥쳐와서... 나는 너무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어졌어요. 그래야 살 것 같아서>
도무지 횡설수설 이치가 닿지 않는 말이었지만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설명했다.
그린 의사는 나를 보고는 있었지만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하기야
내가 내 정신상태에 관해 조금만 더 명백히 묘사할 수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공황증은 나로서는 전혀 새로운 체험이었기 때문에 나
자신이 어떻다고 설명하기가 어려웠고 그린 의사 역시 용기를 북돋워줄 적절한
말들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정신병원에서 생활한 적은 있어도 이런 증상은 처음 있는 일인데다 이건
우울증보다 훨씬 심한 증세인 것 같았다. 서튼 병원에서 심각한 증세를 보이는
수많은 정신병자를 보긴 했어도 내가 그들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병으로 어려움을
당하리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나는 그린 의사에게 내가 절망하고 있고,
허약하고, 불안해 하고 있는 정신병자라는 것을 납득시키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오직 내 몸의 건강 상태만 체크하고는 응급의료
병동에다 입원시켜 버렸다. 그곳에 3일 동안 있으면서 나는 단핵증과 전염성 간염
검사를 받았다. 그런 다음 그린 의사는 나를 퇴원시키려고 했지만 내가 글로스터로
가고 싶어하질 않자 병원 사회복지 요원에게 말하여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요양소에
머물 수 있도록 해주라고 부탁했다. 사회복지 요원은 내가 요양소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를 주의깊게 들었다. 그곳의 분위기는 너무 우중충하고 우울했다. 그녀는
알았다고 하면서 나에게 맞는 적당한 곳을 찾아보겠다고 하더니 이틀 후에 나를
크레스트우드 매널로 데려다 주었다.
나는 크레스트우드로 가는 것이 과연 좋은 건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지만 지금 나의
형편으로는 가겠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곳에 있으면 안전할
것이고 나에겐 이것이 중요했다.
크레스트우드는 보스턴 외곽에 있었고 그 맞은 편에는 아름다운 공원이 있었다.
건물 자체는 개축한 지 얼마 안 된 듯 깨끗하여 우선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요양소에서만 나는 독특한 냄새가 나지 않아 더 좋았다. 간호사가 나를 3인용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 방엔 휠체어를 사용하는 나이 많은 부인 둘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간호사는 그분들에게 나를 소개하더니 마음 편히 있으라는 말을 남긴 채
가버렸다.
방도 밝았고, 가구들도 새것이긴 했지만 크레스트우드는 희망이 없는 곳이었다.
환자들은 나이가 많았고, 나와 같이 방을 쓰는 두 부인도 요양소를 떠나게 될 희망은
거의 없어 보였다. 크레스트우드에는 즐길 것이라곤 없었다. 내 방에는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는 데다 돌아다니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또다시 안절부절 못하고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찾아온 불안증에 대처하기 위해 공원을 오래도록
걸어다녔다.
첫 주일이 가기 전에 크레스트우드를 떠나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방 동료들에게
도망갈 예정이라는 비밀을 털어놨다. 나는 여전히 내 정서문제는 완전히 없어진 게
아니라는 불안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요즘엔 심한 공황증 발작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불안과 우울증세가 심했다. 나간다 해도 글로스터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친척들은 나를 이해하지도 받아주지도 않을 테니 결국 내가 갈 곳은 성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곳을 떠나온 지가 4년이나 되었고, 그동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바깥 세상'에서 살았으니까 그들도 이해해줄 것
같았다. 드디어 어느 날, 나는 가방을 싸들고 방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고 몰래
크레스트우드를 빠져나왔다. 이제 '바깥 세상'을 떠나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하철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ff
9
<저 여자 또 왔잖아,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짐작했던 대로 직원들은 성으로
다시 온 나를 보고 한마디씩 했다. 환자들이 바깥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증세가
악화되어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게 될 때 병원측에서도 실망이 꽤 클 것이며, 비웃을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상한 것이고, 또 각오를 하고 왔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그런
태도나 시선에 아무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B-1병동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내가 밖에서 4년 남짓 살고 들어왔다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다는 것이다. 내가 처음에 입원했던 때부터 그곳에서 일하던 몇몇 간호사들은
마치 옛 친구가 돌아온 것처럼 반갑게 맞아주어서 고향에라도 온 느낌이었다.
그들은 내가 퇴원한 후 B-1병동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고 전해주었다. 즉,
B-1병동은 지금 점점 대단한 숫자로 늘어나는 젊은 환자들을 위한 입원실로 사용되고
있어서 이제는 반벌거숭이 노인들의 배설물 냄새 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라고 했다.
노인들을 위해서는 병동을 따로 만들었다고 했다. 또 벽도 노란색 페인트로 새로
칠하고 가구도 들여놓아 분위기도 훨씬 좋아졌다는 것이다. 젊은 환자들이 있다는
소리가 가장 반가웠다. 새로운 직원들도 많았지만 낯익은 직원들의 얼굴을 보니 정말
반가웠다. 한마디로 집에 온 느낌이었다.
특히 최근에 나를 괴롭혔던 혼란과 불안이 사라진 것 같아 기분이 무척 좋았다. 또
놀란 것은, 끔찍스런 쇼크 요법과 온열 요법, 인슐린 요법이 없어졌다는
사실이었다(사실 나는 지금도 이러한 쇼크 요법에 대해 생각만 해도 온뭄이 떨리고
진땀이 나고 현기증을 느낀다) 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나는 정말
이곳으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다만 입원 수속절차가 달라졌다는 것 때문에 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난번 퇴원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면 좋겠어요> 입원 수속 담당자의
질문은 극히 사무적이고 딱딱했다. 사실 나는 그전에는 물어봐도 아예 대답을 않거나
겨우 예, 아니오 정도로만 대답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세히 애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죽음과 그 때문에 겪어야 했던 끔찍한 느낌들에
대해 말했다. 나는 거듭거듭 내 일생에 그렇게 정신이 혼란스럽고 모든 게 찌그러져
보이고 그저 도망가고만 싶은 생각에 휩싸였던 적은 없었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그 담당자는 내 말을 중단시키지 않고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열심히 듣기는 했지만 내 말을 파악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더럭 겁이
났다. 나는 내 상태가 예전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나는 고아일 뿐 아니라 전번에 입원했을 때와 똑같이 우울증이
심하고, 그리고 지금은 그뿐만 아니라 정신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야말로 다른
때보다 더 도움이 필요하다, 또 강렬한 감정발작이 일단 가라앉기는 했지만 그것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어서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른다. 나는 도움이 필요하며
그렇지만 병원을 나가게 될까 봐 병이 낫는 것도 반갑지 않다는 말을 했다. 담당자는
역시 그녀가 걱정했던 대로 예전의 마리에서 더 나아진 것이 없구나 하는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8년동안 성에 있었다. 처음 6년 동안은 정말 나는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고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긴 했지만 무엇이든 자신있게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내가 한다는 것은 고작해야 반항적인 십대 아이처럼 병원규칙을 어기는
것 같은 따위여서 언제나 말썽으로 끝나곤 했다. 나는 도음이 되는 사람들과
사귀지도 않았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들을 멀리하고 나 자신의 괴로운 생각과
느낌 속으로만 빠져들어가 망상속에서 헤매다가는 다시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피나는
싸음을 하곤 했다.
내가 점점 더 의존적이 되어가고 자신감이 없어져가게 된 것은 병원생활이 너무
편안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이곳은 내가 살던 곳과는 여러 가지로 달랐다.
성은 내 집이었고 직원과 환자들은 내 가족이었다. 나는 병원과 나를 돌봐준
사람들에게 속한 아이였던 것이다. 내 나이는 스물아홉이었지만 성속 정도는 십대
소녀에 불과했다. 내 모습은 지난번 입원했을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옷도
거의 대부분 바지에다 티셔츠를 걸치고 있으니 더 소녀같이 보였으리라. 직원들도
나를 아이 취급했는데 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사랑받는 아이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어떤 때는 의도적으로
어린애처럼 굴었다.
첫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정말이지 돌아오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혼자서
웃었다. 밤당번 간호사가 나에게 미스 웬들이 B-1병동의 수간호사가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이 다 그분을 좋아해> 하고 덧붙였다. 나는 처음
입원했을 때부터 미스 웬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분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나도
정겹게 기억하며 말했다. <그리고 제게도 잘해주셨구요> 나는 베개를 꾹
눌러보았다. 베개는 예전과 똑같이 딱딱했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군> 나는 속으로
웃었다. 나는 미스 웬들의 얼굴을 머리에 떠올렸다. 큰 키에 부드럽고 올리브 빛깔의
피부를 가진 무척 매력적인 여자. 그녀는 언제나 깨끗한 하얀 제복을 입고 있었고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는 언제나 레이스 손수건을 꽂았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갈색머리에는 풀먹인 간호사 캡을 단정히 쓰고 있었다. 내일 아침 미스 웬들을 다시
만난다니 생각만 해도 좋았다. 게다가 그분은 나를 잘 보살펴줄테니 그것보다 더
안심이 되는 일이 어디 있으랴.
<일어나세요, 날이 밝았어요. 아가씨들! 일어나세요. 여긴 별장이 아니에요!>
간호사들이 깨우는 소리에 잠이 깨긴 했지만 전깃불이 하도 부셔 금방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병동에 아침이 찾아온 것이다. 주위를 돌아보았다. 잠이 덜 깬 젊은
여자들이 침대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는
계속해서 방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유심히 보았다.
<마리, 지난밤에 잠을 꽤 잘 자던데, 기분이 어때?> 밤근무 간호사 하나가 일을
마치고 나가면서 나에게 일어나라고 하지 않나 싶어 꾸물대고 있었지만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분이 나빴다. 나는 계속 누군가가 나에게 관심을
보여주기를 기다리긴 했지만 사실 나도 그게 정확하게 누구여야 하고,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지난밤부터 내게 어떤 변화가
생긴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간호사가 흡연시간이라고 큰소리로 알렸다. 지금 선포치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침대 밑에 감추어두었던 담배를 움켜잡고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온몸이 천 근이나 되는 것같이 무거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몇 분이 흘렀다. 안간힘을 다해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발을 바닥에 내려놓고
섰다. 몸을 납덩이로 만들면 이럴까.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선포치로 갔다.
분명히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 같아 간호사에게 말을 하려고 했으나 말마저
나오질 않았다. 나는 고개를 떨군 채 선포치 한구석에 놓여 있는 의자 있는 데로
갔다. 간호사가 담뱃불을 붙여주러 왔을 때 나는 겨우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테이블에 무리지어 앉아 있는 환자들에게로 가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은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나는 묵묵히 담배만 피웠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환자들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을까. 나도 그들과 어울리고 싶었지만 그곳으로 간다는 것이 겁이
났다. 담배를 다 피우고 난 후 나는 다시 지척거리며 침대로 돌아왔다.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침대에 드러누워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덮어쓰고는 울었다. 그날 아침
나는 오랫동안 내 아픈 추억 속에 잠겨 울고 또 울었다.
미스 웬들은 나에게 끊임없이 삶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몇 안 되는 분들 중의
하나였다. 그분은 내가 성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어쩌면 가장 헌신적인 분일지도
모른다. 자신있게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지만 다른 직원들도 환자들에
대한 그분의 진심어린 염려와 돌봄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스
웬들과 함께라면 모든 것을 언제나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분의 성격은
강인하고 신중했기 때문에 함부로 반발하거나 맞서기는 어려웠지만 누구보다도
우리를 진심으로 염려해준 분이었다. 미스 웬들은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하여 오전
동안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기록부에 적었다. 방금 미스 웬들이
맡겨진 일을 끝내고 책상 앞에 앉았다. 나는 그분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인사를
해야겠는데 할 기력도 없고... 몸도 너무 무거워서 움직인다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러나 미스 웬들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훨씬 나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스 웬들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깨닫는데는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분과 깊이 결속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분은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어머니였다. 그분은 나를 믿었다. 다른 사람들은 진작부터 포기하고
있어지만 그분은 내가 좋아지리라는 것을, 내가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아지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나에게 진저리를 치고, 도움마저
거절하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 상태가 점점 절망적으로 치닫는
것을 냉소적인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미스 웬들은 아무리 내가 다 필요없다고
반항하고 내 뜻대로 하겠다고 버텨서 일을 더 어렵게 만들어도 여전히 나를
사랑했다. 나 역시 그분을 신뢰했고 사랑했지만 그분에 대한 나의 사랑은 지극히
유치한 것이었다. 우리의 관계는 그야말로 엎치락뒤치락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항상
나를 위해 내 곁에 있었고 나는 점점 더 그분의 도움과 격려에 의지하게 되었다.
성에서 진정제가 막 사용되기 시작하였을 때 나는 먹지 않겠다고 버티고 그들은
강제로 먹이려는 일대 투쟁이 벌어졌다. 미스 웬들은 이 새로운 진정제와 향정신병
약의 효용을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그분에게 그 약은 정신병을 억제할 수 있는
'신통한' 약이었다. 내가 너무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미스 웬들은 다른
간호사들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내 입에 억지로 약을 털어넣거나 주사를 맞히곤 했다.
미스 웬들은 그 약을 먹으면 내 병은 분명히 낫는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강제로라도 그 약을 먹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 번은 억지로 그 약을 먹은
후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다 싶었는데 별안간 발작이 일어나 나도 모르게 선포치로
달려가 의자들을 마구 집어던졌던 일이 있었다. 간호사들이 즉시 달려와 나를
붙들었다. 나는 빠져들어 갔다. 약과의 전쟁은 게속되었고 결과는 강제로 먹은 다음
영락없이 격리실행이었다.
식사 시간도 전쟁터였다. 나는 툭하면 먹지 않겠다고 버텼다. 자연히 내 체중은
급속히 줄었고 더 이상 쇠약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강제로라도 먹여야 했다. 어떤
날은 내가 하도 먹으려고 하지 않으니 미스 웬들이 와서 떠먹여주었다. 나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억지로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쯤이면 먹을
만큼 먹었다는 생각이 들길래 내 입으로 가져온 숟가락을 탁 하고 밀쳐버렸다.
완두콩으로 만든 푸르죽죽한 국이 그분의 하얀 간호사복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나는 민망해서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괴로웠다. 내가 가장 의지하고 있는 분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상하게 할 수가 있을까. 이렇게 못된 짓을 하다니... 나는 영원히
버림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조금 있으려니 미스 웬들이 간호 조무사 세
명을 데리고 와서 나를 끌고는 층계를 올라가 A-2병동의 입구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뒤편 병동에 가까이 오자 내 몸은 아예 축 늘어져버려 그들은 나를 끌다시피
하여 A-2병동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또다시 성의 뒤쪽 병동에 오게 된 것이다. 나는
미스 웬들에게 제발 다시는 안 그럴 테니 나를 B-1병동으로 가게 해달라고 그분의
옷자락을 잡고 애원했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나는 결국 A-2병동의 담당자에게
인계되었다.
미스 웬들은 나에게 자제력을 배우게 하기 위해 A-2병동으로 보낸 것임을 나도 잘
안다. 그분은 나를 정말 돕고 싶었기에 교육상 그런 벌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A-2병동은 너무나 지독한 곳이었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연옥이 바로 그런 곳이 아닐까 싶다. 가장 잔혹하고 비정한 벌만을 주던 A-2병동은
내 삶을 앗아갔다. 그곳을 채우고 있는 것은 인간다움의 상실, 무기력, 죽음의
분위기뿐이었다.
얼마 후에 나는 A-2병동을 떠나 B-2병동으로 가게 되었다. B-2병동은 B-1병동의
바로 위층에 있는, 공식적으로 뒤쪽 병동에 속한 곳은 아니었지만 B-1병동보다는
확실히 좋지 않았다. 그곳에는 주로 만성 정신질환자들이 있었고, 규율도
B-1병동보다 훨씬 더 엄격했다. 나는 B-2병동에서 거의 1년 가까이 살았다. 그 당시
미스 웬들과 환자 담당의사는 내 증세가 표면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고
보고 미스 웬들이 더 가까이에서 돌보아줄 수 있는 B-1병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듯했다. B-1병동으로 돌아가게 된 즈음에 나에게 또 다른 증세가 보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텅빈 머리 속에서
누군가 자꾸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목소리도 크고 째지는듯한 불쾌한
음성이었다. 그건 바로 '엄마'의 목소리였다. 엄마는 거듭거듭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죽어, 마리!... 죽어, 마리!... 죽어, 마리!> 나는 보통으로
벽감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이 목소리를 듣곤 했는데, 내 안에는 엄마
말대로 죽어야 한다는 의식이 서서히 깊어지고 있었다. 다만 자살을 해야 되는 건지,
아니면 더 다른 방법이 있는지 판단이 안 설 뿐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여러 시간
동안이 끔찍한 갈등을 겪으며 꼼작도 않고 앉아 있곤 하였다.
그 무렵, 새로운 여의사가 왔다. 베일러라고 부르는 그녀는 키가 크고 오랫동안 이
분야에 헌신해온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보수적이고 목소리는 딱딱했으나
환자들에게 친절했고 다른 직원들에게서도 존경을 받았다. 그러므로 환자들은 한
시간 이상 문 곁에 서서 회진 오는 베일러 의사를 기다렸다가 베일러 의사가
도착하면 쏜살같이 달려가 자기를 먼저 봐주고, 도와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래도
그녀는 조금도 귀찮아하는 빛 없이 그들의 말을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가 병상을
돌 때 한 무리의 환자들이 계속 그의 곁을 따라다니며 중얼거려도 베일러 의사는
다른 직원들이 하는 것처럼 짜증을 내거나 벌을 주지 않았다. 그 의사는 오는 날부터
나에게도 관심을 가져주었고 그 관심은 갈수록 커져 누구보다 많은 애정을 가지고
돌보아주었다.
나는 아직 아무에게도 엄마 목소리의 환청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미스 웬들은
환청증세를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의자에 앉아 있을 때면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지고, 입을 달싹거리며 뭐라고 중얼거리며 저항하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곤
하다가 허공을 응시하며 내 안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것과 얘기를 나누곤 했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의 환청을 누구에게든지 얘기해서 내가 엄마의 명령에 저항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고 싶었고 그 말을 무시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나는 자살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 위협에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미스 웬들에게 말하면
도와는 주겠지만 그렇게 되면 엄마가 어떤 벌을 줄지 몰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신뢰하는 간호사 월프슨 부인도 있었으나 그렇게도 못했다. 그녀 역시 눈치를
채고 몇 차례 접근을 해왔지만 그땐 내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는 계속 엄마의
목소리에 홀려 꼭두새벽부터 자러 갈때까지 줄곧 꼼짝않고 앉아만 있었다. 어느날
저녁 월프슨 부인도 근무를 마치고 간 뒤 사무실이 조용해지자 나는 용기를 내어
미스 웬들에게 다가갔다.
<미스 웬들, 이상해요... 정말 이상해요. 나는 무슨 소리를 듣는데 굉장히 기분이
나빠요... 아주 나쁜 거예요. 엄마가 나를 보고 계속해서 죽으래요. 엄만 내가 죽길
바래요. 나는 죽고 싶지 않은데... 그러니 나는 어떻게 하죠? 엄만 나를 보고
죽으라고 하는데... 엄만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예요>
나는 이 어려운 얘기를 두서없이 떠들어놓고는 불안과 긴장된 마음으로 맥없이
앉아 있었다. 환청을 듣는다는 것은 곧 내가 돌았다는 충분한 증명이 되는 것이고
이제 회복할 가망성도 희박하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미스 웬들은 조용히 나를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우선 나를 안심시킨 다음 베일러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내게 새로운 처방을
지시했다. 미스 웬들에게 마음을 터 놓고 이야기를 하고 나니 기분이 훨씬
가벼워졌다. 미스 웬들과 베일러 의사가 내 상태를 잘 알고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엄마의 음성이 안 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미스 웬들
옆에 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있으면 됐다. 그렇게 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되었고
마침내 엄마의 음성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성에서의 내 삶이 몹시 뒤죽박죽이고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나 자신의 삶을
살펴보고 평가하는 능력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그것이 때로는 매우 미약하고
흐릿하다고 하더라도, 내가 환청을 들을 때 나는 내 병세가 얼마나 악화되었고
얼마나 공포에 떨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게 되면 내 자신이 그렇게
불안해 했다는 것이, 그런 '미친 짓'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고 모르고 있을 때보다 더 괴롭곤 했다.
그러나 그 긴 세월이 모두 고통만으로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재미있었던 때도
있었는데 B-1병동에 있는 내 또래의 많은 환자들과 어울려 지내면서는 즐거웠다.
우리는 그룹을 만들어 서로서로의 불안감을 덜어주기 위해 많은 이야기를 나눔으로
서로의 건강한 면을 볼 수도 있었다. 저녁이 되면 우리는 낡은 피아노 곁에 앉아
누군가가 하는 반주에 맞추어 목청껏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이렇게 하면서 나는 다른
사람과 가까워졌고 받아들여짐을 느꼈고 어느 한 그룹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휴식시간에는 누구보다도 유쾌하게 웃고 즐기며 지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치료방법이었고, 내가 우울증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켜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성의 자원 봉사자인 베티 모리슨도 우리 그룹의 일원이었다. 그녀가 우리 병동에
오게 된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베티는 언제나 병실 분위기를 밝고 명랑하게
해주었다. 베티는 올 때마다 우리가 좋아하는 맛있는 것들을 사왔다. 어떤 때는
얼마나 많이 가져왔는지 휠체어에 실어 나르기도 했고 들것에다 실어 날라야 할
정도였다!
베티는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람이었다. 우리는 각별한 사이가
되었고 그와의 대화는 내 생애에 중요한 것이 되어주었다. 베티 주위에 있으면 나도
정상인처럼 느껴졌다. 베티는 자주 우리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어느날, 나는
다른 환자와 함께 그녀의 집에 놀러가 앉아 있는데 마침 그녀의 열세 살쯤 먹은
아들이 들어왔다. 정말 잘생긴 아이였다. 우리는 언제 성숙한 정상인이 될 수
있을까! 그 아인 우리가 빨리 어른스러워지는 데 일조를 한 셈이었다! 베티는 언제나
나를 위해 내 곁에 머물러주는 아름다운 친구였다.
베일러 의사와도 친하게 되었다. 그분은 병원 구내에 있는 자기 집에 나를
초대하곤 했는데 어느덧 나는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손님이 되었고, 어떤 때는
가족들과 식사를 함께 하기도 하고 내 상태가 호전되었을 때는 그분의 손자를
돌봐주기도 했다. 아기를 본다는 것은 아무한테나 맡길 수 없는 특별한 일이었는데,
나같은 사람한테 그 일을 맡긴다는 것은 보통의 신뢰가 아니었다. 베일러 의사는 또
정기적으로 우리에게 집안 청소를 시켰다. 사실 그분의 집에서 하루를 지낼 수 있는
것은 나에겐 정말 중요한 것이었다. 병동이라는 틀 속에서 벗어나 내게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좋은 환경 속에서 있게 되는 것인데 그분의 집엔 멋지고 우아한
가구들이 있었고 창문마다 화초들이 놓여 있었다.
그날도 나는 베일러 의사의 집을 청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게다가 친구 로즈와
함께 가도 좋다는 것이어서 그야말로 신이 났다.
로즈와 나는 삼십대 초반으로 나이가 비슷했다. 그녀의 키는 5피트로 작은
편이었지만 얼굴은 정말 예뻤다. 우리 둘은 멍청한 직원들에 의해
'미쳤다'는 딱지가 붙었던 경력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그 사건으로
함께 괴로워하고 고통당하고 서로의 삶을 나누게 되어 더욱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편안하고 명랑한 기분으로 베일러의사의 집으로 갔다. 신나는 휴일인
셈이다! 집에 도착하자 우리는 먼저 침대 시트를 빼서 그것부터 세탁을 하자고 했다.
그 집의 세탁기는 구식이어서 싱크대에 있는 수도꼭지에 호스를 끼워서 물을
받아넣어야 했다.
로즈는 근면하게 일하는 형이 아니었다. 그녀로서는 약간은 무거운 '휴식과
기분풀이'를 위해 온 셈이었다. 베일러 의사의 집 거실에 있는 푹신한 소파는
정말 멋졌다. 로즈는 예의 그 커다란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부엌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마리, 세탁기 작동해놔. 빨래가 다 되면 널기만 하면 되니까. 그때까지
나는 여기서 좀 쉴래>
나는 수도전에 호스를 끼우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마리, 이리 좀 와봐> 로즈가 거실에서 불렀다. <여기와서 이 소파에 좀
앉아보라구>
들어가 보니 로즈는 안락의자에 몸을 쭉 뻗치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백만장자들이나 타는 호화여객선의 여행객같이 보였다. 나도 담배에 불을 붙여 다른
의자에 가 앉았다. 우리는 마주보며 만면에 미소를 짓다가 ... 깔깔대며 웃고 또
웃었다. 오늘 하루는 온통 우리의 것이었다. 먹고 싶은 때 먹고,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피우고 뭐든지 우리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쉬지 않고
얘기를 했고 부자들만이 갖는 특권을 누렸다.
별안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베일러 의사가 점심식사하러 집에 온댔어. 그런데 올
때가 된 것 같아> 하면서 시계를 보았다. 12시 15분 전이었다. 베일러 의사가 왔을
때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지 싶어 우리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어디선가 작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처음엔
별것 아니겠지 싶었는데 아차 싶었다. 이럴 수가! ... 정신없이 달려가보니 부엌은
한강이었다. 급히 세탁기와 연결된 호스의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나마 부엌이 물에
잠길 뻔한 것을 면했다는 데서 놀람이 웃음으로 바뀌었다. 이젠 어째도 일을 해야
한다.
<로즈, 우리 계획이 바뀌어버렸구나> 나는 겨우 웃음을 그치면서 말했다. <자,
일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15분 동안 우리는 정신없이 물을 퍼내고
바닥을 닦아냈다. 걸레질을 몇 번이고 해서 바닥에 물이 마른 때는 12시 1분
전이었다. 베일러 의사는 정확하게 12시에 도착했다.
<이렇게 부엌 청소를 깨끗이 했어!> 베일러 의사는 우리가 한 일이 자랑스럽고
기쁘다는 듯이 말했다. <수고했다. 하지만 바닥까지 닦지 않아도 됐는데 그랬구나!>
로즈와 나는 눈짓을 해가며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삼켰다. 우리는 느닷없이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버린 채 베일러 의사의 칭찬을 들어야 했다.
<이번이 너랑 일한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로즈가 병동으로 돌아오면서 심각하게
말했다. <너는 내가 일을 할 것 같이 보이니? 일하면 몸만 지칠 뿐이라구!>
10
B-1병동에서도 내 감정의 기복은 여전했다. 상태가 좋을 때에는 감독을 받지
않고서도 마음대로 병원 정원을 나다닐 수 있는 개방병동인 C-1로 옮겨가 있기도
했다. 그곳에 머물 때에 개방 병동의 책임 간호사가 내 행동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어
몹시 긴장되기도 했는데 개방병동에서 내 병이 더 악화되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 아빠에게 입양되기 전인 5살 때의 패티로 돌아가는 퇴행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패티가 되고 싶지 않았다. 패티는 5살짜리여서 잘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도 무서워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 원의와는 무관하게 나는
패티가 되어갔다. 나는 자그마한 계집아이가 되어 겁을 잔득 먹은 채 힘겹게 걸어
베일러 의사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는 작은 계집아이일 뿐이었다. 지금 나에게는
따뜻이 돌보아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마리... 마리... 너 괜찮니?> 베일러 의사는 몹시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것은 처음 보았다. 그녀는 내가 메모지에 적은
글을 읽었다. <나는 마리가 아니고 패티예요>
베일러 의사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간단한 질문들을 던졌다. 나는 대답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마리, 아무래도 널 B-1병동으로 보내야 되겠다. 그 편이 너한테 더 좋을 것
같구나>
나는 반대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든 나에게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고 또 말할 힘도
없었다. 그녀가 나를 B-1병동으로 데리고 갈 때 나는 마치 작은 계집아이가 누군가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섯 살짜리 패티가 되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패티이기도
하고 또 내가 패티 노릇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내 병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나는 내가 퇴행현상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베일러 의사는 B-1병동의 폐쇄적인 환경이 내 퇴행현상에는 오히려 낫다고
생각했고 그 동안 중지했던 약물 요법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내 상태의 심각함을
강조하면서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다시 간호사실 바로 옆에 있는 침대를
사용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침대에 누워 있으니 나는 더 아득한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갓난아기가 된 것이다. 나는 새우처럼 몸을 오그리고 머리를
배 있는 데가지 깊숙이 숙였다. 그리고 애처롭게 울다가 내 소리에 내가 깜짝
놀랐다. 그것은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였다. 나는 엄지 손가락을 입에 물고 몸을
앞뒤로 뒤척이며 누군가가 나를 달래주기를 기다렸다.
<누가 이렇게 우는 거야?> 간호사 하나가 불평을 터트렸다. <여긴 아기방이
아녜요!>
나는 그 간호사 말이 야속했고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는 있지만 나 자신도 어쩔수 없는 것인데 뻔히 다 알면서 야단만 치는
것이 화가 났다. 오후 근무 간호사가 오니 기분이 나아졌다. 나는 그녀를 신뢰하고
있었고 그녀가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되었다. 그 간호사는 내게 약을 주라고 지시했고
얼마 후엔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는 약효가 떨어질 때까지 침대 속에 있다가 일어나서 선포치로 나가 의자에
앉았다. 방이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무슨 거대한 영화를 보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휘감더니 내 팔을 공중으로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그 힘은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어떻게 항거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 힘은 내
팔을 자기 마음대로 끌고 다녔다. 마침내 팔을 놓아주어 손을 들여다보니 손가락이
뱀가죽처럼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정말 미친 거다> 나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흐느껴 울었다. 절망과 좌절을 안고 침대로 돌아갔다.
패티가 될 때마다 나는 몹시 두려웠다. 내가 패티일 때 내 몸도 정상이 아니었다.
마리는 마치 꽉 조이는 끈으로 졸라맨 것 같고 온몸이 무겁고 걸을 때도 정신이
멍했다. 퇴행증상이 가라앉자 내 병은 더 끔찍한 형태로 진전되어 갔다. 병원측에선
계속 치료하고 있는데도 병은 더욱 진전될 뿐이었다. 환각과 환청 증세도 계속
되었고,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끌려다니며 흐느적대고 있었다.
밤은 곧 공포였다. 편안한 잠을 잔다는 것은 먼 옛날 이야기였다. 어두움은 방
전체가 벽과 천장을 가로질러 그림자를 드리우는 게슴츠레한 불빛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처럼 으스스해 보이는 수양버들 나무가 서 있는
어느 안개가 자욱한 늪지에 누워 있었다. 괴물에게 쫓겨 도와달라고 비명을 지르면서
기를 쓰고 달아났다. 간호사들까지도 시뻘건 색깔의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그들은
지구에 쳐들어온 악마였다. 나는 드디어 지옥에 빠진 것이다! 나이 서른 둘에 지옥에
오다니.
가끔 내 뭄은 돌처럼 굳어 무감각해지기도 했는데 그것은 내가 죽어가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만 죽은 것이 아니라 병실 안에 열 지어 있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환자들도 모두 시체로 보였다. 나도 왜 그들을 시체라고 생각했는지,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나 하여튼 나는 그들이 시체처럼 보였다. 내가 누워 있는
침대는 그 긴 열에서 제일 첫번째의 침대였다. 그런데 방에 아무도 없는 나 혼자
누워 있으면 나는 곧 죽어버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절대로 누워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나는 완전히 탈진되었다. 정말 지쳤기 때문에 그저 쉬고만 싶었으나 침대로 갈
수가 없었다. 나는 간호사에게 가서 도와달라고 청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 병세는 점점 심해져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하루 온종일 혼자서 웅크리고 앉아
있을 때가 많아졌다.
<침대에... 저 침대에 죽은 사람들이 있어요> 간신히 입을 떼어 말을 했지만
간호사는 듣지 못했고 내가 살고 싶어 필사의 힘을 다해 자기한테 왔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왜 거기 그렇게 서 있는 거예요?> 간호사가 냅다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나는
기겁을 했다. <침대로 가세요, 침대로, 어서요>
나는 그녀의 명령대로 가려고 했지만 도무지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그녀에게도 돌아서서 <무서워요... 저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에요... 나는 침대로 갈 수 없어요>라고 말하고는 훌쩍거리면서 울었다.
그러나 간호사의 반응은 매몰찼다. <이것 보세요, 미치고 싶으면 혼자만 미쳐요.
다른 사람까지 미치게 하지 말고 얼른 침대에 가서 눕지 못하겠어요?>
별 도리가 없었다. 침대로 가서 천천히 드러누웠다. 그러나 밤새도록 나는 잠 한숨
못자면서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 이상스럽다는 생각만 했다.
ㅈ움에 대한 공포는 밤마다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나는 지금 도망갈 수도 없는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며칠 후 플로렌스가 찾아왔다. 그녀는 아래층 개방 병동에 있을 때 사귄
친구였는데 내가 폐쇄 병동인 B-1로 옮겨온 후에도 계속 그곳에 남아 있었다.
플로렌스는 삼십대 중반으로 똑똑한 여자였다. 그녀가 병원에 오게 된 것은 고통에서
구해주려고 자기 아이 둘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또한 죽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는데 이유는 그래아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현관에 있는
의자에 앉아, 아니면 병원주위를 산책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정말 마음이 통하는 친구였다.
그런 플로렌스가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꼼짝도 않고 누워서 죽음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는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어때, 마리?> 그녀가 물었다. <네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소리를 듣고 왔어>
<그래, 나는 무척 아파. 나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다른 사람을 괴롭혀
미안하지만 내 힘으론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더 괴롭단다>
<괜찮아, 마리?> 플로렌스가 계속해서 물었다. <널 폐쇄병동에 보냈다는 얘긴
들었어. 너 정말 안 좋아 보인다. 내가 뭐도와 줄 것 없니?>
마음은 간절했지만 나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 플로렌스 나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어쨌든 고마워. 아무 문제도 없어>
<너 정말이야?>
<그럼, 플로렌스, 괜찮다니까. 아무것도 잘못된 없고... 그냥 조금 우울할 뿐이야.
너도 알다시피 그정도면 문제 없는 것 아니니?>
<그렇다면, 하지만 내 도움이 필요하다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그렇게 할게. 고마워, 와줘서>
<내일 또 올게>
<플로렌스, 고맙긴 하지만, 귀찮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짓눌리는 고통과 불안 속에서도 기지를 발휘해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다니 내가 좀
나아서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으나 기분이 좀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플로렌스에게 네가 천국에 가려던 꿈은 이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는 것은 말해주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속으로 말했다. <플로렌스, 너는 죽으면 천국에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이런 말을 너한테 하고 싶진 않지만 너는 이미 죽은 거고 지금
지옥에 있는 거야. 이병동이 지옥인걸. 너는 죽은 거야, 플로렌스. 여기 있는
우리들처럼 말야. 단지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지> 나는 플로렌스가 자기가 죽는
것도 모르고 남의 걱정이나 하고 있는 걸 보고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질 뻔했다.
B-1병동에 있었던 2년 동안은 거의 침대 속에서 보냈다. 직원들은 내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픈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침대 속에 숨어서 머리
꼭대기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마치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처럼 잔뜩 웅크리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환청이 들려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미스 웬들과 나와 친숙한 다른 간호사들은 나를 편히 쉬도록 그대로 놔두었다.
어떤 때는 내 몸에 서서히 불이 붙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아프지는 않았지만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번은 나와 별로 친하지 않은 간호사가 벌로 절대 침대에서
일어나면 안된다고 하면서 움직임에 대한 나의 공포증에 대해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들이 비웃고 창피를 줄 때면 움직이면 안된다는 것 때문에 혹은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괴물이 또 쫓아올 것 같은 내 두려움은 더욱 심해졌다.
나는 대부분 침대 속에서 지내야 했으면서도 이따금씩 병실 안을 돌아다니거나
라운지에 가는 모험을 감행해보기도 했다. 병실엔 침대밖에 없었지만 라운지엔
텔레비전도 있었고 또 다른 환우들과 사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라운지에
간다는 것은 일종의 고문이었다.
라운지에 다가가면 바닥이 솟아오르고 가까이 갈수록 그 경사가 심해졌다. 입구
맞은편에 있는 창문들은 바닥 쪽으로 내려앉았고 유리창은 물을 뿌려놓은 것처럼
흐릿하고 어른어른했다. 바닥이 밑에서 춤을 추었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라운지에 있는 가구들을 의지하여 필사적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서 내가 늘
애용하는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갔다. 마침내 의자에 손이 닿을 만한 거리까지 왔을 때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맥없이 주저앉았다. 기진맥진하긴 했지만 이제 됐다는
안도감에서 담배를 피우고, 텔레비전도 보면서 다른 환자들도 바라보곤 하였다.
그렇다고 해도 뭘 정말로 보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을 다 이해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영상들이 막연히 어떤 즐거움을 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침대 있는 데로 가기 위해선 끔찍한 모험을 또 한 번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또다시 두려움에 떨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치 내 의지를
시험하는 것 같은 경사진 바닥, 그 끔찍한 곳을 통과하여야만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불안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어 갔다. 침대를 나왔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가끔 친절한 간호사가 당직일 때는 상대적으로 내 기분도 좋았고 라운지도 훨씬
마음에 드는 곳이 되곤 했다. 내가 그 힘든 라운지로 가는 것은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텔레비전도 보고 싶고, 사람도 보고 싶고, 담배도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기 때문에 두려움을 무릅쓰고 가는 것이었다. 친절한 간호사들은, 특히
미스 웬들 같은 이는 내가 하루빨리 침대에서 일어나도록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마리, 일어나면 훨씬 나을 거야. 조금이라도 걸을 수만 있다면 곧 그걸 느낄 수
있게 될 텐데> 그들의 도움에 응답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마음뿐이었고
어쩌다 한 번씩만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사실 나 자신도 라운지의 매끄러운 바닥을 걸을 때 왜 발끝으로 걸어가는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바닥의 감각을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발끝으로 걸어야 더 잘 균형을 잡을 수 있고 넘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라는
것뿐이었다.
어떤 때는 침대에서 뛰쳐나와 비명을 지르며 병실을 달려나가기도 했다. 창문에서
뒤어내려서라도 나를 억누르는 두려움에서 살고 싶다는 몸부림이었다. 죽음의
두려움이 쫓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그렇게 몸부림치게
했다. 나는 가끔 내가 지를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비명이라도 질러야 내가 숨 쉴 수 있고 살아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명은 필사적인 나의 호흡이기도 했다.
홀로 달려갈 때에도 나는 보통 발끝을 세우고 두 팔은 허공에 쭉 뻗고 달렸는데
그렇게 밖에는 달리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곧바른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팔 처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힘이 팔을 앞으로
잡아끌었기 때문에 달리 어떻게 한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었다. 더 빨리, 더 빨리.
내가 달릴 수 있을 때까지 달렸다.
내가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달리고 있노라면 <저기 우리집 명물 마리가
뛰어가신다. 하나 둘, 하나 둘... 우주의 총알이 나가시니 길을 비켜라!> 신나게
놀리는 간호사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이었다.
홀에 내려왔을 때도 똑같은 소리를 들었다. <저들은 정말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는 걸까?... 나도 발끝으로 달리고 싶지도 않고 손을 올리고 뛰고
싶지도 않단 말야... 누군 뭐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나 보지... 그걸
모르다니. 저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모를 거야. 손을 뻗치고
발끝으로 달리는 게 얼마나 힘든데... 정말 말할 수 없이 힘든 건데>
나는 간호사들의 그런 행동이 그만큼 나와 격의없이 지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놀리는 것에 대해 별로 화를 내지 않았다. 한편으로 그런
놀림은 달릴 때 느끼는 괴로움을 잊게 했다. 우리는 때로 깔깔대며 웃기도 했는데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발끝으로 병동 안을 뛰어가는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간호사들은 내 속마음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명물'이라는 내 존재가 얼마나 가엾은 존재인지, 손을
뻗치고 달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내가 영영 '명물'이
되어버리면 어쩌나 하고 가슴을 졸이고 있다는 걸 그들은 짐작조차 못했다. 왜
그들은 내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꼼짝 않고 침대에
누워 있는 것보다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는 것이 낫다는 것을 왜 그들은 모르는 걸까?
나는 그들의 놀림에 상관 않고, 몸을 빨리 움직일수록 내 무기력과 병이 사라진다고
믿고 있었기에 열심히 뛰었다. 간호사들은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나는 누구하고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시간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몰랐고 설혹 몇
달이 지나간다 해도 그건 내 관심 밖의 일이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두려웠다.
그것이 아주 하찮은 놀람이라고 해도 내 전존재를 엄습하여 좀처럼 떠날 줄을
몰랐다. 병실은 온통 조화 냄새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이었고 부엌 근처에 가면 가스
냄새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나는 내 세계를 지배하는 괴물과 함께 살고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볼라치면 사악한 악한 악마처럼 생긴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머리카락이 전깃줄 가닥처럼 될 것 같아 머리도 빗을 수가 없었고 입술도
사람의 것이라기 보다는 부풀어 오른 시뻘건 살덩어리 같았다. 이러던 나는 어떤 날
갑자기 얼음 괴물이 되어버렸다. 내 몸이 얼기 시작하더니 나는 금세 차가운
얼음덩어리로 변했다. 걷잡을 수 없이 온몸이 떨려오고, 내 송곳니는 비수처럼
날카로운 짐승의 송곳니로 변했다.
그 끔찍했던 두 해. 나는 정말이지 여러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은 가능한 한 항상 내 옆에 붙어 있었다.
그들은 나를 감시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식의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나는 여러
차례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를 했다. 한 번은 죽기를 바라면서 몸으로 창문을
들이받은 적도 있다. 정말... 난는 감시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환자들 중에 몇몇 친구들은 거의 매일 내가 누워 있는 곳으로 찾아와 함께 담배를
피우거나 그냥 잠시 앉아 친구를 해주기도 했다. 그때도 별로 말을 하지 않았으나
그런 때도 그들은 가만히 곁에 앉아 있다가 갔다. 나는 아무 표현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를 찾아주는 것이 정말 기뻤다. 어쩌면 그들의 그런 우정 때문에 내가 병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마음으로는 그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으면서도 나만의 세계로 잠적해버리곤 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벽을 허물 수가
었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간호사가 음식을 가져와서 먹겠느냐고 묻다가 내가
고개를 흔들자 그녀는 음식 그릇 위에 내 이름을 쓰고는 간호사용 냉장고에다
집어넣었다. 음식을 삼키기가 어렵긴 했지만 밤이 되면 냉장고에서 그 음식을 꺼내
반쯤 먹고는 집어넣는 일도 있었다.
어떤 때는 친구 로즈와 같은 침실을 쓰게도 해주었다. 로즈가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주로 로즈 혼자
말을 했지만 그는 나를 웃기기까지 했다. 어느날 내 상태가 조금 나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환청과 환각 증세는 여전했지만 그날은 좀 덜한 듯했다. 로즈는 내
곁에 앉아 사람들에 대한 인물 비평을 하는가 하면 음식 투정에다, 담배를 너무 적게
준다는 등 끊임없이 지껄여댔다. 그러다가 목소리가 약간 심각해졌다. <젠장, 마리,
너 정말 어려운 때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로즈의 이 말이 기뻤다. 진정으로 나를 이해해주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내가 느끼고 있는 두려운 감정에 대해 이야기 했다.
<너도 알다시피 말야, 로즈> 나는 오랫동안 혼자서 끙끙 앓던 것을 털어놓았다.
<어떤 때는 말야, 정말 기분이 나빠. 어떤 방에 들어가면 조화 냄새가 나. 아니 그
방 뿐만 아니라 어디서든지 그 냄새가 나는 거야>
<그게 정말이니?> 진심으로 관심을 보이면서 로즈가 말했다. <정말 그런 냄새가
나?>
<그럼, 정말이고 말고>
<그래? 그럼 너는 내가 무슨 냄새를 맡는 줄 아니?>
<너도 무슨 냄새를 맡는다구?>
<그럼, 난 소똥 냄새야>
나는 로즈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제발, 로즈. 날 놀리지 마>
<놀리다니, 정말이야. 나한텐 소똥 냄새가 난다구>
<로즈, 너 술 마셨지? 너, 술 취한 거니 아니면 날 놀리려고 그런는거니?>
<놀리는 게 아냐> 그녀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진짜 똥냄새에 둘러싸여
지낸다구>
<지금도 냄새가 나니?>
<그럼, 지금도 나구말구>
<로즈, 나한텐 조화 냄새밖엔 안 나는데. 그런데 말야, 나에겐 또 다른 것도 있어.
나는 가끔 바람이 날 휩싸는 것처럼 느껴. 그러면 나는 그때부터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거야>
내 말이 끝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창문이 휙 열리더니 바람이 방안으로
불어들어와 방문이 쾅 하고 닫히는 것이 아닌가.
<왔다, 왔다> 로즈가 소리를 치면서 방에서 뛰어나가 곧장 간호사실로 달려갔다.
나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은 지금까지 쌓여 있던 고통스러운 침묵을 다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로즈는 당직 간호사에게 내 공상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 내가 말하자마자 그 바람이 진짜 불어왔다는 것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호사는 <로즈, 즉시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마리랑 떼어놓겠어요>라며
엄숙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간호사는 무시무시한 체험에서 빠져나오려는 우리의
눈물겨운 노력 따위를 알리가 없었다.
로즈와 나는 서로 다른 냄새를 맡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고 사로잡고 있는 것,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됨을 똑같이 느꼈다. 우리는 정서적인 문제의
증상들을 나누면서 소리내어 웃기도 하면서 깊은 동지애까지 느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우리가 '미친 두 아이'에 불과하겠지만 우리는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우리를 아주 기쁘게 했다!
그러나 공포는 떠나주지 않았다. 더 빈번히 끈질기게 나를 쫓아다니는 공포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어느 날 밤, 나는 중앙 병실과는 떨어진
일인용 방 침대 위에서 무섭고 기진한 상태로 쪼그리고 앉아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또 한번 더 공포가 밀려오면 나는 죽을 것만 같았다. 밤당직 간호사인
윌리엄스 부인이 나를 부축하여 격리실로 데리고 갔다. 내가 부인의 치마에 매달리며
제발 날 혼자 내버려두지 말아달라고 애걸하자 부인은 밤새도록 내 곁에 있어
주었다. 격리실 창문이 밝아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윌리엄스
부인의 도움으로 나는 살아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B-1병동에서 머무는 2년은 내게 있어 가장 힘든 때였다. 나는 그 시기에 논쟁의
여지가 다분한 치료를 받은 것이다. 나는 베일러 의사와 미스 웬들의 추천으로
당시로서는 새로운 향정신병 치료제였던 스텔라진을 투여받았다. 그 약의 일일
최대 주사량은 40밀리그램이었는데, 나는 투여기간이 끝날 때쯤 해서는 하루에
2,500밀리그램을 맞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미스 웬들과 베일러 의사는 진심으로
나를 도우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나를 정신분열증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당시 권위
있는 의학지에 발표된 새로운 논문을 과신하여, 스텔라진 다량 투여가 나의 회복을
가져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약의 독성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다른 이들은 심하게 받대했다.
어쨌든 나는 실험대에 올랐다. 나는 그리 건상한 체질이 못 되었으므로 우려했던
증상은 빨리 드러나기 시작했다. 급격한 식욕부진으로 인한 심각한 체중 감소와
환각과 환청증세는 그 도를 더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매일 한 움큼의 알약과,
엉덩이에 주사 두 대를 맞는 바람에 내 양쪽 엉덩이는 가죽처럼 굳어버려 주사를
놓으려면 있는 힘을 다해 찔러야 했다.
새로운 투약계획으로 인한 악순환은 계속되었다. 나의 공포감의 발작을 막기 위해
매일 더 많은 양의 약이 투여되었고, 그렇게 되면 그 약의 후유증으로 인한 나의
고통은 전보다 더 심해지는 것이었다.
그 약을 먹고 난 다음의 느낌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나는 그 약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매번 약을 먹고 주사를 맞을 때마다 겁에 질려서 비명을
질렀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 다음에는 구토증이 시작되어
정신없이 토했다.
마침내 미스 웬들과 베일러 의사는 이 투약계획을 중단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내
상태가 최악으로 치닫자 그들의 확신도 흔들렸던 것이다. 나의 체중은
39킬로그램으로 줄었고, 완전히 탈진 샹태였다. 어느 날 밤엔 약의 독기가 간을
침범해서 생명까지 위험했으나 다행히 빨리 손을 써 그나마 살아날 수 있었다. 그
다음날로 투약은 중지되었다.
그때 나는 나를 치료하고 있는 의사의 얼굴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해괴망칙한
괴물같이 보여 더욱 큰 고통을 겪었는데, 그것도 대량의 스텔라진 투약 결과였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증상을 포함하여 그것이 내 병에 얼마나 더 나쁜 영향을
미쳤는지 아직도 정확히 모르고 있다. 약물 과다투여로 나의 공황증이 더욱 악화된
것은 물론이요 그 약을 나에게 투여한 것부터가 명백히 잘못된 것이었다. 그것만
아니라 정신분열이라는 진단 자체가 오진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나의 증상은
내성 우울증과 공황증 발작이라는 병명이었다.
스텔라진 투약이 중단되었으나 나의 상태는 전혀 호전의 기색이 없었다. 미스
웬들의 지시로 모든 간호사들이 힘을 썼으나 나는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몇몇
무신경한 간호사들은 그런 지시를 아예 무시해버렸다. <먹고 싶으면 다른 환자들처럼
일어나서 먹도록 해요!> 어떤 간호사는 경멸하듯이 말했다. 나는 그런 무신경한
간호사가 당직일 때는 아예 꼼짝도 않고 침대에 누워 이물을 머리 꼭대기까지 쓰고
자는 척했다. 나는 2년 내내 이러한 상태로 공포에 시달리면서 지내야 했는데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는지 신기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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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내 모습이라니...>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거울엔 마른 마뭇가지 위에 젖은 빨래를 널어 놓은 형체의 전연 낯선 모습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좀 나아진 것이 그 모양이었다. 나는 그 동안 내내 침대에
누워서 간호사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그러다가 오늘은 용기를 내어
오랜만에 아주 천천히, 그러나 여전히 발끝으로 걸어 샤워장이 있는 곳까지 갔다가
우연히 거울 옆을 지나게 된 것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내 체중은 여전히 39킬로그램이었고
식욕부진도 여전한 상태였으므로 이런 모습이 당연한 것인데도 나는 다시 실망에
떨어졌다. 다음날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내 흉칙한 모습을 보지 않을 테고 나 또한 모든 것이 괴물처럼 일그러져 보이는 것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나는 어느 순간 일어나 앉아
있었다. 미스 웬들이 홀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끔찍하게 일그러뜨린 채
사나운 짐승처럼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내게 새로운 깨달음이 왔다. '그러니까
나는 나아야만 돼. 나를 붙잡고 있는 이 세계에서 어서 빠져나와야 하는 거야'
그러자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공포와 싸웠다.
나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이 생각들은 너무나도 빨리 스쳐 지나갔고
나는 다시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힘이 나를 다시 일으켜 앉혔으므로
일어나 앉아 방을 둘러보았다. 몸이 오실오실 추워왔다. 붉은 그림자가 방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나는 이 방이 싫어. 그렇지만 내 힘으로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도 없다. 사람들은 죽어야 지옥에 간다고들 하지만 여기가 바로 지옥인
것이다. 나는 여길 빠져나가야만 한다. 하지만 나갈 수 있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기도했다. <사랑하는 하느님, 저를 이곳에서 나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나는 2년 만에 처음으로 생각다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간호사들이
늘상 말하는 미친 사람들의 끔직한 <다른 세상>에 빠져 처우적거리고 있는 것이고,
지금 그곳을 빠져나오려고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문득 어느 간호사가
해준 충고가 생각났다. <네가 조금만 운동을 할 수 있어도 훨씬 좋아질텐데..>
모든 것이 조금 더 분명해졌다. '나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하고
자문해보았다. 대답은 즉시 왔다. '나의 상태는 아주 나쁘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이 길에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된다. 선택이 있을 수 없다. 나는 이 병과
싸워야만 한다. 이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작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뭄을 조금씩 움직여
보는 거야... 손으로 무엇을 하게만 된다면 나는 진짜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낮에 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내가 우선 해야 할
일은 무엇을 만져보는 거야. 그러면 내가 진짜 세상에로 돌아갈 수 있는지 어떤지 알
수 있게 되겠지' 나는 계속해서 계획을 되뇌었고 결심은 굳어졌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고 내 자신도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래서 다시 나 자신에게 다짐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진짜 영영 미쳐버리게 될거야. 그리고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절대 할 수
없어!'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선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야 했다. 그때까지 나는 내 손을
맘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손으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고 전혀 내
것 같지가 않았다. '이 손으로 어떻게 무엇을 만질 수 있담?' 다시 겁이
났다. '아무튼 해보는 거야'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비명을 지르지 않고 잤다. 정말 드문 일이었다.
미스 웬들은 아침 근무었다. 그녀는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걸어도 좋다고 했지만
다른 간호사들은 나의 발끝 걸음을 불안하게 여겨 침대에서 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나의 발끝 걸음은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나를 끌고 가려는 것을
막으려는 나의 최대의 방어인데 그들은 알지 못했다.
미스 웬들은 나를 격려해주고 도와 주었다. 나는 어젯밤의 생각을 상기하면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노인 환자들의 침실로 들어갔다. 환자들은 모두 아침식사를
하러 갔으므로 비어 있는 침실에서 간호 조무사 한 명이 침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침대로 다가가서 매트리스로 손을 뻗다가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볼썽사납고 낯설었다. 전혀 감각이 없어서 도저히 움직여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내 계획... 그 계획을 상기하자 해야 한다는 힘이 용솟음쳤다. 내 안에 있는 어떤
것들이 손가락들과 연결을 시도하여 손가락들은 어설프게 움직였다. 그것은 갇혀
있던 경직된 것을 깨고 나오기 위해 있는 힘을 다 쏟아부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으나 나는 드디어 침대를 잡았다. 정말 기뻤다! <아, 나는 손가락을 쓸 수
있다. 이 손가락으로 일을 할 수 있다구> 나는 시트와 담요의 주름을 펴고 정성을
다해 그 위에 침대 덮개를 덮었다.
만족할 만한 것은 못됐지만 나로서는 하려고 하고 움직였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이 내 새로운 계획 시도의 첫걸음이었다. 이틀 전만 해도 이러한 변화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내가 악화일로에 빠져 있을 때에 담당자들은 나를 움직여보려고 온갖
시도를 다 해보았으나 뚜렷한 진정이 없었으므로 포기해 버렸고 이것이 내게는
새로운 공포를 안겨주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내 스스로 어떤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룐 시작한 이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고, 더 이상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러나 나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이 병이
완전히 낫느냐 안 낫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분발하기로 했다. 지난 시간에 대한 두려움은 어려운 고비를 넘기는 데 힘이 되었다.
나는 마치 나를 죽이려고 하는 괴물과 맞서 싸우는 전사와도 같은 태세였다. 어러한
나의 자세를 전연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강도가 예전보다 한결 강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인간다운 존중을 받고 싶었다. 직원들이 나를 비롯한 환자들을 한
마리의 짐승을 다루듯이 끌고 가 격리실에 감금시키거나 살덩이 하나를 수술대 위에
올려놓듯이 전기 충격치료대로 밀어넣거나 하는 것이 견딜 수 없었고, 그것보다 더한
것은 공포로 인한 일련의 발작이나 그것을 이겨내려는 나의 싸움을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태도였다.
내가 아직 젊었을 때 직원들은 나를 그냥 덜 자란 어린애 정도로 생각했다.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삶과 투쟁하고 있는 한 인간으로
존중받고 싶었다. 나이를 먹고, 또 치료를 위한 약이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빼앗아 가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나는 나에게 남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최저의 존엄성이나마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런 치료법이 내게 해가 되는 줄 알고 있어도 <싫어요>라고 거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항상 싸울 수도 없었고 게다가 무엇을 해보기엔 나는 너무 약하고
두려워 그냥 하라는 대로 했을 뿐만 아니라 너무 쉽게 , 너무 빨리 포기하곤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희망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한 고비를 넘기자 내가 구덩이의 맨 밑바닥에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도 순탄한
일도 아니었다. 나는 나 스스로 엉금엉금 기어나와야 했고 거기엔 또한 끊임없는
좌절이 뒤따랐다. 그것은 정말 느리고 고통스럽도록 더딘 작업이었으며 순간순간이
건강을 되찾기 위한 내 결심을 시험 당하는 때였지만, 나의 결심은 시련이
다가올수록 더욱 견고해져 갔다.
나는 지금까지도 어떻게 해서 내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또 언제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꽤 오랫동안 여전히 사람들의 얼굴은 괴물처럼 보였고 바닥도 경사져 보여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안감힘을 서야 했으며, 불안이 구비구비 웅크리고 숨어 있다가
느닷없이 달려들어 숨도 쉬지 못하게 만들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진짜 세상과
접촉을 하게 되면 이러한 증상들은 차차 없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공포가
찾아들 때마다 무시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 증상들은 참으로 집요하게 나를
공격했다. 그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처럼 내 안에서 뭉기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공격 횟수가 서서히 줄어들고 있으면서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자라고 있었다.
그것은 더 크고 더 밝은 희망이었다. 내가 나으리라는 희망, 내 인생에 대한 희망,
바깥 세상을 기대하는 희망. 이 희망들은 나의 결심을 북돋워주었고 열매를 자라게
해주었다. 이제 내 인생을 파멸로 몰고 가던 공포와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생기게 된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침대 속으로 숨지 않았다.
단순하고도 조심스럽게 나는 우선 무엇인가를 만져봄으로, 그저 손을 대봄으로써
생명을 느끼도록 해보았다. 내 뭄 안에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실패를 하면 어떤가? 이제는 일을 바꾸어보기로 했다. 나는 간호사 책상에서
트럼프 한 벌을 가져와 침대 위에 앉아 한장씩 집어들고 만지면서 그 트럼프를
느껴보려고 했다. 그런 다음 트럼프를 손에 맞들고 섞는 일이 가능해졌고 손가락에
트럼프의 매끄러운 표면과 뾰족한 모서리가 느껴졌다. 이것은 나의 성공의
시작이었고, 아직 미미한 것이었지만 스스로 해냈다는 것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다음 목표는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먹는 일이었다. 나는 부엌의 냉장고 있는 데로
걸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려는데 갑자기 바닥이 기울어져 보여 몸이 균형을 잃었으나
겨우 냉장고에 기대섰다가 증세가 가라앉자 냉장고 문을 열고 우유를 꺼내 온 정신을
모아 컵에다 따랐다. 몇 방울만 흘렸을 뿐 완전한 성공이었다. 우유 맛은 끔찍했으나
억지로라도 마셔야 한다고 나를 다그쳤다. 우유 한 잔 마시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이라니! 시간이 감에 따라 다른 음식도 먹기 시작해봤다. 음식은 구토증을 느끼게
할 뿐이었지만 억지로 집어넣었다. 이건 먹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형벌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타일렀다. <그래도 먹어야 해. 회복하려년 먹어야 돼>
나는 매일매일 노인들 침실에 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비록 넘어지지않기 위해
한 손으로는 침대를 붙잡고 해야 했지만 침대 하나를 정리할 수 있었다. <오늘 침대
하나를 정리할 수 있다면, 다음엔 여러 개를 할 수 있을 거야> 과연 얼마 후 침대
여러 개를 정리할 수 있게 되자 일을 바꾸기로 했다. 크고 무거운 걸레를 들고
느릿느릿 부엌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나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일하는 것을
그냥 바라보고만 있거나 일을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는 주었지만 그 일 한 단계
한 단계가 현실 세상과 접촉하려는, 회복하려는 나의 처절한 노력임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사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내 힘으로 낫고 싶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매우 중요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내 힘으로 낫고 싶었다.
어느 날, 침대에 누워 쉬면서 나는 늘 하듯이 근무하는 간호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간호사들도 보통 사람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나와 다른 환자들을 돌보아주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진짜' 삶은
병원 바깥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간호사들은 근무가 끝나면 가족이 있는 가정으로
돌아간다. 간호사들이 성에서 일하는 것은 바깥 세상에서의 그들의 개인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때문이고, 그들의 삶이 따로 있는 그들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라는 고통스런 깨달음이기도 했다. 그러자 나도 바깥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졌고, 그곳에 내가 살 곳을 마련해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그
욕망은 나는 아직 정상인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천천히 하고 싶어하는 자신을 채찍질
해가면서 다음 단계를 밟아나가게 했다.
나는 아직 B-1병동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제는 이 병동에서 나가도 될 것 같았다.
회복을 위한 계획을 실천에 옮겨온 지나간 3개월은 내게 아주 유익한 기간이었다.
또한 나의 새로운 치료 계획은 정신적으로도 나를 안정시켜준 것 같았다. 나는 훨씬
자신감이 강해졌고 지난날 나를 괴롭혔던 공포증도 이젠 사라졌다. 아직도 보이지
않는 힘이 여전히 나를 끌고 다니고 있어 불안정하게 발끝으로 걷고 환각증세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아주 경미해졌고 이젠 직원들의 얼굴도 정상으로 보였다.
나는 위험이 따르더라도 B-1병동을 나가 병원 뜰을 걷고 싶었다. 그것은 베일러
의사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내 상태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말이 자유스럽지
못한 상태이고 베일러 의사한테 다가간다는 것이 쉽지 않게 여겨졌다. 게다가 베일러
의사와의 중간 역할을 해주던 미스 웬들이 밤근무로 옮겼기 때문에 그녀에게 부탁할
수도 없었다. 직원들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자기의 환자들이 그저 조용하게
있어 주기만을 바라고 있으므로 내가 밖에 나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면 비웃거나
오히려 회복을 위한 나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을지도 몰랐다.
나는 좋은 때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어느 날 오후 베일러 의사가 병실에
들어왔을 때 나는 망설임도 없이 그분 앞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베일러 선생님... 저... 얘기 좀 하고 싶은데요> 내 목소리가
작았는데도 그녀는 무척 놀란 듯했다! 그러나 얼굴에 미소가 있는 걸 보니 나의
진보를 기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병실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회의실로 갔다. 그리고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목소리를 들으니
정말 좋구나, 마리. 자, 이리 와 앉아라>
<베일러 선생님, 저는 병이 낫고 싶어요. 꼭 나으려고 해요... 그래서 노력하고
있어요>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 그 동안 내가 해온 일과 성공했던 것들, 치료 계획에
대해 자세히 말했다. <그래서 지금은 병원 마당을 걸어보고 싶고 C-1병동으로 옮기고
싶은 겁니다. 다음 단계를 밟고 싶은 거지요> 내가 들어도 내 목소리가 몹시
어설프게 들렸다. '어쩌면 베일러 의사는 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나는 아직도 발끝으로 몹시 불안하게 걷고 있지 않은가. 내 자가 치료에 대해서도
너무 빨리 입을 연 것은 아닐까?' 후회가 일어났다.
그런데 베일러 의사가 허락을 한 것이다! 나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나에 대한
그녀의 신뢰감과 우정이 지금까지 내 지탱이 되어왔지만 내 새로운 치료 계획에도
그녀가 협조해주려 하니 효과는 더욱 눈에 드러날 것이다!
베일러 의사가 병실을 나간 한 시간 후 나는 병원 마당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다시
불안이 엄습했다. 그러나 이번엔 내 주위의 번쩍번쩍하는 색깔이나 사람 때문이
아니라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었다. 걷는 것이 아직도 위태롭고 불안정했기
때문에 나는 벽에 몸을 의지하면서 본관 문을 향하여 걸어갔다. 모든 사람이
실패하기를 바라며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본관 문은 굉장히 무거워서
있는 힘을 다해 열어야 했다. 마당과 연결된 층계는 유난히 가파른 데다 눈까지 쌓여
있어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났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갈 때 시간은 정지된 것 같고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드디어 마당! 나는 마침내 해낸 것이다! 나는 천천히 길을 따라 눈 덮인
잔디밭으로 내려갔다. 부드러운 눈은 매혹적이었다. 눈을 조금 집어 얼굴에
대어보았다. 깨끗하고 기분이 좋았다. 자꾸만 자꾸만 아래로 내려갔다. 눈을 집어
하늘에, 내 머리에 어깨에 뿌렸다. 나는 어둡고 음산한 곳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작은 소녀였다. 하얗게 빛나는 눈 속에서 마음껏 뛰어다니며 웃고 또 웃었다.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나는 다른 건물에 있는 구내매점으로 가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매점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올라가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으나 문 앞에서 잠시 숨을 돌린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탁자가 몇 개 있었는데 한 자리만 빼 놓고는 다 차 있었다.
그 테이블에도 이미 세 사람의 환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아직 다른 사람들과 사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나는 커피 한 잔을 사들고 빈 자리로 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아무와도 말하지 않을 거야... 그래, 하지만... 하지만 그냥 저
사람들과 함께 앉아만 있어도 내 건강은 아주 좋아질 테니까 그냥 앉아만
있어보자구' 나는 용기를 내서 세 사람이 앉아 있는 탁자에 가서 앉았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 끼여들지는 않았지만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합석했다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자기 극복이었기에 나는 무척 기뻤다.
간호사들이 늘 이야기하던, 환자들이 혼자 숨어 있으려고 하기 시작하면 이미
정신병이 시작된 표시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의사나 간호사들은 그런
환자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게 하거나 일을 시켜 바쁘게 만들어준다. 그들은
혼자만 있고 싶어하는 나를 억지로 끌어내어 사람들 사이에 끼워넣었다. 그러나 내겐
그 방법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말도 않고 혼자서 오두마니 앉아 있었으니까.
커피를 마시고 나서 밖으로 다시 나온 나는 성당으로 향했다. 지난 세월 동안
성당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만 남아 있지만 지금은 가장 가고 싶은 곳이다. 나는
카톨릭 신자이면서도 고통당하던 지난 2년간은 거의 기도도 하지 않았다.
누구도 내 기도생활에 힘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마음을 써준 적도 없었다. 병원의
원목 신부님까지도 내게 냉정했다. 언젠가 영성체를 하고 싶어 신부님께 고백성사를
청했으나 그분은 타이르시는 어조로 <억지로 미사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 네게
사죄경도 해줄 수 없으니까> 나는 그 신부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분은
아마 나를 대단한 중증 환자로 보았음에 틀림없다. 나는 그때 매주일 미사참여를
하고 싶었어도 머리를 들 수 조차 없었고 공포가 엄습하면 꼼짝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성당으로 가고 있다. 하느님만이 나를
낫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성당엔 아무도 없었다. 정겨운
촛불 냄새가 났다. 나는 성당 좌석을 의지하면서 제단을 향하여 통로를 걸어갔다.
제대 뒤에 커다란 십자가가 있었다. 그 십자가를 향해 꿇어앉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고 마침내는 온몸으로 흐느껴 울면서 간절히 기도드렸다.
<하느님, 저는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내 병이 빨리 낫게 해달라고 빌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하고 있는 노력이 실패로 끝나지 않게 해달라고 말씀드렸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주님, 제가 이 병원에 20년 가까이 머물면서 이렇게 제 건강을 위해 싸워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잘 되지 않을까 봐 두렵습니다> 회복의 길은 쉽지 않은
법이다. 나는 쉽게 회복하게 해달라고 청하지도 않았다.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저의 이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해달라는
것뿐입니다. 주님, 이 성을 떠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느님, 다시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은 제 마음을 당신은 아십니다>
고요함이 나를 감쌌다. 점점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제가 이 병원을 떠나도록
해주신다면 저는 제가 겪었던 쓰디쓴 체험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
지옥과도 같았던 상황을 항상 기억하고... 내가 겪었던 고통들을 다른 이들을 위해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그때 오늘의 내가 되도록 이끌어준 중대한 서약을
했다. <그리고 제가 이곳을 나가게 되면, 당신을 위한 봉사에 저의 온 삶을
바치겠습니다. 병원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돕는데 헌신할 것입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해보겠습니다. 저는 이 병원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제 친구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약속을 하고 나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주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성당에 그리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한 15분쯤
지난 것 같은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오고 몸의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나는 미스 웬들에게도 내 계획을 말했다. 그녀도 기꺼이 협력해주겠다고
했다. 내 계획의 세부적인 면과 내가 시도하고 있는 야심적인 목표를 알고 있는 이는
미스 웬들과 베일러 의사뿐이었다.
B-1병동에 머물고 있는 동안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병동에 필요한 잡다한 일을
하고 바같 뜰을 산책하면서 지냈다. 그런 다음 다시 베일러 의사를 만나 폐쇄병동인
B-1을 떠나 C-1병동으로 옮겨가고 싶다고 했다. 그전엔 안전한 폐쇄병동을 떠난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두려워했지만 이젠 내가 자진해서 개방병동의 자유로움을 찾고
있는 것이다. '바깥 세상'으로 한발 내딛기 위한 몸짓이었다. 베일러
의사는 약속대로 나를 C-1병동으로 옮겨주었다. 내가 개방병등으로 옮기게 되자
B-1병동 직원들은 놀라거나 비웃고 화를 내기까지 했다. 내가 눈에 띄게 나아졌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개방병동으로 갈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나으려는 내 노력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또 내 치료 계획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방병동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의 내 상태는 그렇게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아간다는 자신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던 공포에서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이번에는 별일 없이 개방병동 C-1에서 계속 살 수 있었다. 나는 내 계획대로
병동의 자질구레한 일을 하면서 다른 환자들과 사귀기 시작했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치료 방법이었다. 이젠 병동에서 하는 일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앞으로 성 밖에 나가게 되면 내 손으로 생계를 해결하며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그런 준비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문제에 관해 베일러 의사와
의논을 하였다. 나는 그녀의 의견을 따라 병원 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사회 복귀
워크숍 프로그램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사회복귀 프로그램은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는데 처음 몇 주일은 몇
시간만 나가다가 나중엔 전 프로그램에 참석하였다. 꼬박 여덟 시간의 강의와 작업이
뒤따랐으므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병실 밖에 있어야 한다는 것도
그랬지만 하루 여덟 시간을 버티려면 몸도 건강해야 했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정신을 집중하며 일하다가도 이따금씩 무의식 속에 숨어 있던 불안감이 금방이라도
나를 덮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더럭 겁이 나기도 했다. 내가 처음 하게 된 일은
구두끈을 꿰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구두끈을 잡아당기는데 가죽에 쓸려 손가락에서
피가 났으나 꾹참고 계속하니 괜찮아졌다.
사회복귀 워크숍의 상담자인 셰일라는 어느 날 내 계획에 관해 물어왔다. 나는
그녀에게 분명히 말했다. <저 혼자 해결해보려고 합니다. 앞으로 혼자 살아야 하니까
혼자서 해결해나가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냉정한 대답에 셰일라는 불쾌해 하는 듯했지만 나의 의도를 이해해주려는
상냥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셰일라는 지혜로운 여자였다. 그녀는 나를 사회복귀
워크숍부서에서 일하는 직원인 것처럼 대해주면서 필요할 때에는 충고도 해주었다.
그녀는 자기에게 맡겨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그 필요에 응해주려고
애를 썼다. 내게도 역시 그런 식의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 내 계획대로 하기 위해서는
이런 도움도 벗어나야 함을 느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을 바꾸고 싶어요> 나는 그녀에게 내 결심과 책임을 강조하며
말했다. <그전에 나는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도움에만 의존했었기 때문에 실패했는데
이번에는 꼭 성공하고 싶어요> 셰일라는 순순히 내 의견을 따라주었다.
사회복귀 워크숍을 하면서도 여전히 문제는 있었다. 나의 공황증이나 환각증세의
횟수나 강도가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그 증세는 여전히 내 안에 잠복해 있어서 언제든
다시 튀어나올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증상이 이따금씩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내 속 어디엔가 웅크리고 있는 불안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언제나 단단히 조이고 있어야 했다. 때로는 강하게 그런 증세가 나타날 것
같으면 아예 작업실을 떠나곤 했으므로 덕분에 나의 출석표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앞으로의 내 인생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될 두 여인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테리와 에드나는 둘 다 이십대 초반으로 아주 활동적이고 부지런한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병원 밖에 살면서 출퇴근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나에겐 인상적이었다.
그녀들은 하루의 일을 끝내고는 자신들을 기다려주는 집으로 돌아가고, 또 일정한
급료까지 받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과 금세 친구가 되었고 그들은 내게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가르쳐주었다.
나는 다시는 그전과 같은 소극적인 삶을 살지 않겠다고 약속한 나의 기도를
떠올렸다. 나는 정말 값진 것을 이 친구들에게서 배웠다.
테리와 에드나는 결석하는 일도 없었다.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더라도 조퇴하는
일도 없는 그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완벽하게 해냈으므로 나도 그렇게 해보려고
기를 썼다. 간혹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일 앞에서도 끝까지 해내는
버릇을 들였다. 너무 피곤해서 일하러 가기도 싫고, 병동을 떠나기가 두려웠던 때도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나는 차츰차츰 내 일에 대한 감각을 익히게 되었고 마침내
신용할 만한 기술자가 되었다.
에드나와 테리는 내 인생에 특별한 사람,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사회복귀
작업장의 책임자인 셰일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차츰 그녀를 더 좋아하게 되었고
조언도 받아들였다. 그녀의 도움이 내 노력을 방해하거나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협조를 유용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감도
생겼다. 얼마 후 나는 세 사람의 집을 방문하게 되면서 여자가 얼마나 따뜻한 마음을
지닐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지 또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좀더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여자는 그저
집안살림이나 하고 아이나 기르는 존재쯤으로 알고 있었는데다 그 동안 병원에만
있었기 때문에 그런 훌륭한 예를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매일 매일 하루 8시간 동안 작업장에서 지냈다. C-1병동을 내 집처럼
여기면서 자유롭게 지냈고 나의 건강도 훨씬 나아졌다. 오후 근무 수간호사 로빈
슈타인은 개방적 성격을 가진 멋진 여자였다. 그녀는 병원 구내에 있는 이동
주택에서 남편과 세 아이들과 함께 살았는데 가끔 식사 때에나 휴일이면 나를
초대해주었다. 방문 때마다 그 가족들은 나를 마음으로부터 맞아주었고 나는
그때마다 명절에 집에 다니러 온 가족 중에 하나인 것 처럼 느꼈다. 그것은
글로스터의 사촌 언니 레나의 집에서 가족잔치에서 느꼈던 그런 기쁨이었다.
몇 달 후에 나는 작업장 사무실로 옮겨가 사무를 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성에서 환자로 있었던 베카를 알게 되었다. 베카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아무
문제 없이 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게 되면서부터 개인적인 생각과 미래의
희망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베카는 나의 회복 계획의 또 다른 단계의
하나인 언젠가 대학에 가려고 한다는 것을 말해준 첫번째 사람이 되었다. 베카는
내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런
일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사실 내가 그런 계획을
말하면 우습게 생각하고 무시해버리면 어쩌나 하고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주말, 나는 베카의 집에서 그 주말을 지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베카에겐
세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나는 그 아이들과도 금세 허물없이 지내게 되었다. 베카는
나에게 성을 나와서 내가 자리잡을 때까지 자기네와 함께 살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은근히 바라보고는 있었지만 너무나 뜻밖의 제의였기에 기쁘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는데 '아냐, 너무 일러... 실패할 거야' 하는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러나 성밖에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흥분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생각지 않고 그러마고 대답해버렸다.
얼마나 이렇게 되기를 꿈꾸어왔던가.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베일러 의사도
적극적으로 나를 밀어주었다. 이 기회가 나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베일러 의사는 내가 베카와 함께 사는 동안 계속 작업장에서 일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조언까지 해주었다.
이틀 후, 나는 가방을 싸들고 성을 떠나 베카의 집으로 옮겨왔다. 나는 그때까지도
불안증으로 고통을 받고는 있었지만 한 번 부딪쳐보겠다는 마음과 희망을 한 아름
안고 떠나왔다. 이제부터 실제 세상과 더 많이 접해보는 것이다. 바로 이날을 위해
나는 지금까지 분투 노력한 것이 아닌가. 그전에도 병원에 있다가 세상으로 나간
적이 있었지만 이번은 그때와는 달랐다. 이제 내 인생은 내 앞에 넓게 뻗어 있으니,
그 계획을 진척시켜 다음 단계로 옮아가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내겐
친구들, 정말 가까운 친구들이 있어 나를 밀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작업장에서 조를 만났다. 그는 늘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어 그를 대할 때
아주 마음이 편했다. 1미터 80센티의 키에 어깨가 딱 벌어진 그의 옆에서면 나는
마치 거대한 탑 옆에 서 있는 느낌이었지만 그는 내가 작다는 느낌을 받지 않게
해주었다.그는 검은 곱슬머리에 따뜻한 푸른 눈을 가진 잘생긴 남자였다. 처음에
나는 조가 환자인지 직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리 문제될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옆에 있으면 괜스레 당황해서 해야 할 일도 잊어버리고,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쩔쩔 매곤 했지만 그가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조도 환자였었다고 한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신경쇠약에 걸려
성에 입원하여 있다가 몇 해전에 퇴원했다고 했다. 퇴원한 후 보스턴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작업장의 경리를 맡아본다고 했다. 조는 자신감에 넘쳐
보이면서도 유순했고 특히 옷차림이 단정했다. 그는 보통 깨끗한 바지에 스포츠
재킷, 그리고 재킷과 잘 어울리는 셔츠에 타이를 매고 있었다. 조는 대인관계가
원만한 데다가 열성적으로 일하고 친절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나는
그가 사무실로 들어올 때마다 그를 바라보았으나 눈이 마주치게 되면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리곤 했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여전히 나에게 머물러 있는 것을 느끼면
그렇게 당황해 할 수가 없었다.
에드나는 조 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은 나를 슬슬 놀렸다. <마리, 조와
어떤 사이야? 둘 사이가 아주 뜨거워 보이던데!> 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 혼자만 숨기고 있는 감정을 들켜버렸다는 것을 아는 순간 당황하기도 했고 겁이
났으나 그것은 괴물이 쫓아오는 것 같은 병적인 공포와는 전연 다른 기분 좋은
긴장이었다.
나는 조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했다.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남자와 데이트를 한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필요 이상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조에게 무관심하기란 어려웠다. 우리는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고 하루에도 수없이 서로의 곁을 지나쳐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계속
그런 식으로 지낸다는 것은 여려운 일이었다. 그가 곁에 가까이 있으면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앞에 있기만 하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어쩌면 그
사람은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그를 좋아하는 것만
아니라 점점 더 그에게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베카에게 조에 대한 내 감정을 말했다. <나는 조를 좋아해. 그렇지만
너무 친밀한 사이가 될까봐 걱정이 돼> 내 말을 들은 베카가 그냥 싱긋이 웃을
뿐이었으므로 나는 다시 한 번 정말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베카는 그제야
내 말의 진의를 파악한 것 같았다. <그러면 말야 마리, 이번 추수감사절에 그 사람을
저녁식사에 초대하면 어떨까?!> <그래, 그러자!> 나는 결단을 내려 대답했다. <이런
생각이 어디로 좇아 왔는고?> 우리는 농담을 하면서 여러 시간 동안 내게서 새로
발견한 자신감을 부추기면서 어떤 식으로 초대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을 세웠다.
다음날 아침, 나는 벼랑에 서 있는 것처럼 아득한 기분이었다. 막상 조를
추수감사절 저녁식사에 초대하기로 해놓았으나 입을 떼자니 몹시 쑥스럽고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이 되자 다른 사람들은 다 점심식사를 하러 나가고
사무실에는 나와 조만이 남게 되었다. <자, 기회는 지금이다!> 나는 대단한 결의나
하듯이 나 자신에게 다짐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그에게로 자동
조정장치가 된 인형처럼 똑바로 걸어갔다. 어찌나 긴장을 하고 있었던지 쿵쾅거리며
뛰는 내 심장소리가 그에게까지 들릴것만 같았다. 내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러겠습니다. 꼭
가겠습니다!> 그가 한 말이 정말일까? 이렇게 쉽게 초대를 받아들이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날 오후는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기분이 들떠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추수감사절 식사 초대는 잘한 생각이었다. 조는 스톤힐에서 혼자 살면서 매일
성으로 통근하고 있었다. 그는 수년 전에 이혼을 하여 그의 두 아이는 이혼한 부인과
함께 다른 주에서 살고 있고,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긴 하지만 그들도 다른 주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조는 이같은 축일에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성탄 휴가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베카의 병이 재발되어 다시 성에 가 있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 나는 그동안 그녀의 세 아이들을 돌보아주어야 했는데 나로서는
대단히 큰일이었다. 그러나 잘해냈다. 그녀가 집에 다시 돌아온 다음 나는 내 계획의
또 다른 중요한 단계를 밟을 결심을 했다. 그동안 나는 작업장에서 1년 동안 기술을
배워왔으므로 이제 어느 정도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힘도 생긴 것 같아 환전히 성을
떠나 혼자서 살 셋집을 찾아보고 싶은 것이었다. 나는 테리의 도움으로 서튼 근처에
방 셋짜리 셋집을 찾을 수 있었고, 베일러 의사는 1년 동안의 유예 기간을 마련해
주고 필료할 때 찾아올 수 있게 해주었다.
이번은 지난날 기관에서 마련해준 것 같은 우중충한 여관방 같은 그런 집이
아니었다. 집안은 내가 일부러 커튼을 치지 않는 이상 늘 밝았고, 전에는 외로워서
가기 싫어하던 그리고 가려고해도 갈 수 없었던 '실제 세상'이었으나
이제는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같이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이 지역사회에 복귀하려 할 때 그런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것은 대단한 힘이었다. 요즈음은 병원에서 퇴원하여 지역 사회에 합류하는 것이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사람이 사회로 돌아온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오랫동안 병원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사회에서 부딪히게 되는 작고 큰 문제나
어려움들 앞에서 쩔쩔매고 있으면 친구들은 지체없이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 대단히
큰일들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세들어 살고 있는 집의 가구 문제, 아니면 옷을
사야 한다거나 혹은 취직 원서를 쓰는 일이라도 도움을 청하기만 하면 그들은 곧
달려와 주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내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에서, 서튼
주립병원 근처에서 나만큼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사는 사람도 드물 정도의 완벽한
상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것은 서튼 주립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들이
우정의 표시로 시트, 타월, 접시 등 모든 필요한 것들을 다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엔 낯선 이웃들 가운데 산다는 것이 몹시 외로웠다. 이곳은 친척들이
사는 곳과도 멀었고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 있는 것 같은 가게들도 없었다. 다행히
거리 끝에 간이 식당이 있어서 이웃 사람들이 내가 그 동네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항상 그곳에 갔다. 나는 같은 구역에 사는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었는데
다행히 얼마 후엔 그렇게 될 수 있었다.
이사를 했다는 흥분이 가시자 쉽게 피곤을 느꼈고, 모든 것이 순조로운데도
이따금씩 불안증이 엄습하곤 했다. 그렇지만 그 병이 다시 내 인생을 망쳐놓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내 감정을 지배해 나갔다. 그런데 내 건강이 상당히 나빠진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핀곤하다 못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쳤고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이었다. 걱정은 됐지만 의사에게 보일 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마땅한 주치의를 찾을 때까지는 그대로 지내보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갔다. 너무나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피곤한 것도 잊을 지경이었다.
그 무렵 나는 사회복귀 워크숍을 떠나 서튼에 있는 헌트 기념병원 자재과에서
살균용품을 담당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일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정신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돕는 삶을 살겠노라고 한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일 자리라도 있었기 때문에
성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므로 고맙기도 했다. 밖에 나와 살고 있긴
했지만 나는 성을 그리워 했고 그곳에 있는 친구들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미스
웬들과 베일러 의사 그리고 오랜 동안 사귀었던 친구들을 생각할 때면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상하게 아픈 추억보다 좋은 추억이 떠올라 향수에 잠기곤 했다. 성은
영원히 잊지 못할 고향인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생황에서 오는 기쁨이 더 컸다. 어느 날 나는 창가에 앉아 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마당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듯한 커다란
떡갈나무의 무성한 잎사귀에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나무 그늘에서 눈부신
햇빛이 비치고 있는 곳으로 쏜살같이 튀어나와 즐겁게 소리지르며 뛰어다녔다. 마당
가득 생명이 넘실거렸고 그 생명이 나에게도 전해져 오고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던 참으로 아름다운 날이었다.
일이 끝나면 나는 가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나는 '내집'에서
이태리 음식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대접하는 것이 가장 기뻤다. 우리는 한껏 웃고
즐겼다. 전에는 멀게만 느꼈던 실제 세상이 점점 편안해져갔다. 성에서 내가 겪었던
일들, 병동과 작업실에서 있었던 얘기를 나는 테리와 에드나와 로빈에게 들려주면
그들은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나에게 그들과 같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정말 무엇보다 고마운 일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아마 평범한
대화조차 제대로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아예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생각도 용기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씩 더 그들은 현재 일어나는 사건에로 대화의 폭을 넓혀
나를 이끌어 들였다. 그렇게 하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화의 폭이
넓어져, 어떤 날은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정치문제에 열을 올리며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테리와 에드나 그리고 로빈은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조와
함께 하는 시간은 그들과 함께 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조는 거의 매일
저녁식사를 하러 ㅎ고 우리는 주로 각자의 생각과 장래의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어느 날에는 우리의 대화가 조와 마리가 함께 살게 될 그 미래에 대한
것까지 진전되고 있었다.
조가 나에게 데이트를 신청해서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그날 나는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데이트를 어떻게 하는
건지 거기에 대해선 정말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을
때 나는 놀라며 뿌리치고 말았다. 사실은 얼마나 그가 내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감싸안아 주기를 바랐던가... 하지만 그때까지도 남자와 스치기만 해도 죄가
된다라는 엄마 아빠의 엄격한 교육이 내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조는 다시 한번 부드럽게 내 손을 잡았다. 내가 다시 놀라며 그의 손을 뿌리치자
그는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마리...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돼. 나는 나쁜 사람이 아냐>
조는 나를 진정으로 위해주었다. 가정생활에 경험이 많은 그는 경험이 부족한 내가
저지르는 실수도 잘 감싸주었다. 그는 강요하거나 지배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자기를 신뢰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다른 사람한테서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을 그에게서 느꼈다. 조에 대한 나의 사랑은 점점 깊어만 갔다.
결혼이란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나는 그때까지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조 발터의 아내가 되어 살 것을 생각하고
있었고, 조와 나는 우리의 결혼을 기정 사실처럼 받아들이면서 계획을 세웠다.
헌트 병원에서의 내 일은 임시직이었는데 정식 직원이 되려면, 또 앞으로의 나의
계획을 위해서도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드나와 조의 격려에
힘입어 나느 노스 쇼어 커뮤니티 단과대학 야간부에, 지신이 없으니 아예
기초과정부터 밟기로 하고 기초 영작문부터 청강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걸어서 10분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교수가 첫번째 과제물을 되돌려주던 날 밤, 나는 아주 천천히
걸어서 왔다. 시간을 보니 30분이나 걸렸다! 나는 점수를 볼 용기가 없어서 시간을
끌다가 할 수 없이 노트를 폈다. 그런데 오, 세상에 'A'였다. 나는 너무
좋아서 집안을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A야, A! 내 머린 아직 녹슬지
않았다구>
나는 노스 쇼어 커뮤니티 대학의 교수이며 유니테리언 파 목사인 빌을 만났다.
그는 내가 학사 학위를 받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자 정규학생으로 등록하라는
것이었다. 그의 부인 린다가 날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린다는 유아교육
상담가로서 성에서 퇴원한 환자들과 함께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데 나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성에 입원해 있던 사람이 대학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테니 호기심에서 일것 같아 나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성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는데 그녀의 제의를 받아들이게 되면 곤란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린다는 결코 그런 뜻이 아니라 아주 순수한 지향에서이니
만나는 것이 좋겠다>는 빌의 충고를 받아 우리의 만남은 이루어졌고, 우리는 뜻이
잘맞아 함께 일을 하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정규학생이 되기 위해 가장 큰 걸림돌은 돈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빈털터리였다.
린다와 나는 재정원조를 청하기 위해 매사추세츠 주 사회북귀 위원회를 함께
방문했다. 나를 만난 정신과 의사가 나의 과거 정신병력을 물었다. 내가 서튼
주립병원에서 살았던 햇수를 말하자 불같이 화를 냈다. <뭣때문에 여기 온거요?
그래, 그런 병력을 가지고 우리 돈으로 대학을 가겠다니 당신 제정신이오?> 그는
마치 나를 죄인 보듯 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내가 정신과 의사를 만나는
동안 린다는 사회 복지원과 면담을 했는데 그녀 역시 나 같은 정신병역을 가진
사람을 데리고 와 위원회에 재정원조 신청을 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맞았다고 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모년서 우리는 내내 울었다. 사람들의 몰인정, 매몰찬 태도가
슬프면서 한편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집 근처에 왔을 때 새로운 결심을 했다.
<위원회 따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 대학을 꼭 끝내고야 말 거야>
다음날 밤 수업을 마친 후 지도 교수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내 절망적이었던
과거에 대해, 이루어진 것은 없지만 내가 얼마나 변화하고 싶은지, 얼마나 내 결심을
실현시키고 싶은지에 대해 한시간 이상을 그에게 이야기 했다. 다행히도 그는 대학
경리도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의 사무실을 나오기 전에 재정 보조 신청서를 써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근로학생 학비보조금을 받게 되었고 노스 쇼어의
정규 학생이 되었다.
로빈의 남편이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42세라는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로빈은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겪었고 나도 그녀와 똑같이 마음이 아팠다. 내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렇게 깊이 함께 느끼고 염려한다는 것은 또 다른 새로운 면의 발견이었다.
다른 사람들한테서 도움만 받던 내가 이제는 로빈을 돕는 것이다. 힘자라는 데까지
마음을 써주고 돕느라고 도왔는데도 여전히 미진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울었다. 로빈의 남편의 죽음만 아니라
내가 성에 있을 때 겪었던 온갖 아픔들, 로빈이 병에서 회복되기 위해 애쓰던 일들이
생각나 우리는 더 섧게 울었다. 얼마 후 로빈은 세 아들과 함께 가족들 가까이에서
살기 위해 텍사스로 떠났다. 누군가를 떠나 보내면서 그토록 마음이 아파보기는
처음이었다.
서튼 주립 정신병원을 떠나 셋집으로 이사온 지 1년 후에 검진을 받으러 가서
공식적인 퇴원을 했다. 그때가 1966년... 내 나이 37세였다. 내가 처음 병원 신세를
지기 시작한 때부터 거의 20년 만의 일이었다. 나는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 기도했다. 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치겠으니 저의 계획을
인도하시고 도와주십사 하고.
13
내가 노스 쇼어 커뮤니티 단과대학 정규학생으로 등록하기 전 여름, 소변에 다시
피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성에 있을 때도 가끔 이런 증상이 있었지만 의사들은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약 한 알을 먹으면 그것으로 괜찮아지곤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헌트병원의 내 상관한테 증상을 말하니
그녀는 즉시 나를 소변검사실로 보냈다. 결과는 수술을 해아 한다는 것이어서 즉시
수술대 위로 옮겨졌다. 수술실에서 회복실로 돌아오니 테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뒤이어 외과 의사 코스타스가 들어왔다. 우리 둘은 이미 결과를 눈치채고 있었다.
<기분이 어때요, 마리?> 나는 코스타스 의사의 물음이 전혀 귀에 들오오지
않았다. 결과는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나는 병명을 들어야 했다. <수술 결과는...>
나는 그의 말을 가로 막ㅎ다. <악성 종양이죠?>
<그렇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것도 악성이에요... 당신과는 오랜 동안 같이
일해왔으니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혼자 있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코스타스 의사가 나가자 테리도 금방
돌아갔다. 내가 암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불공평했다. 이제 겨우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는데 죽어야 하다니. '나는 지금까지 엄청난 투쟁을
해오다가 이제야 겨우 사람다운 삶을 사리기 시작했는데... 암이라니'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고... 화가 났다. 정신병이 다시 도지는 것 같아 정신을
차렸다. 매일, 정말 매일매일이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이렇다 할 진전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하느님께 울부짖었다. <저는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까닭에 제게 이런 시련을 또 주시는 겁니까?... 정말 죽어야
합니까?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응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음을
다해 기도했고...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상관 없다고!
몸부림을 치며 흐느껴 울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암으로 죽어간다는 두려움이.
그 두려움은 시간이 갈수록 증폭되어 갔고 감정은 혼돈의 늪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나는 지금까지 두려움에 끊임없이 쫓기며 살았고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도
살아 남았다. 성에 있을 때에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겪었었지만 이번에는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 암이라는 병으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한가지 중대한 결심을
했다. '좋아, 내가 이 병으로 죽는다고 해도 인생의 실패자로서가 아니라
온전한 인간으로서 죽는 거야. 얼마나 살 수 있는가는 상관없어. 멈춰서도 안 되고
뒷걸음질쳐서도 안 돼. 지금까지 해온 것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그래선 안돼.
하느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나는 노스 쇼어 학교도 계속하고 조에 대한 사랑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다시
한번 엄청난 나의 현실을 주시해 보았다. 나는 암에 걸렸고 의사는 내게 얼마나 살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내가 방광암이라는 현실에 지고 만다면 대학 공부에도 필경 지장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포기하면 안 된다! 나는 친구들, 특히 조의 격려에 힘을 얻어
첫학기 중에 수술을 받아 암세포를 떼어내었다. 수술 후 삼 주일이 지난 다음 집으로
돌아와 약 한 달간 밀린 학과 공부에 매달렸다.
노스 쇼어 커뮤니티 대학에서의 첫해는 굉장히 흥분된 것이었고 해아 할
일투성이였다. 나는 강의를 듣는 것 외에도 연구 보조원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조, 에드나, 그리고 린다와 함께 지냈다. 그리고 이렇게 꽉 찬 일정 중에서도 시간을
내어 석달에 한 번씩 헌트 병원에 가서 방광경 검사를 받았다. 검사를 받을 땐 간이
오그라들 정도로 무서웠다. 검사원이 검사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검사대에
누워 긴장을 풀려고 애를 썼다. 검사를 하는 동안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아무리
딴 생각을 하려고 해도 되지 않았다. 검사가 끝나면 완전히 초죽음이 되곤 했다.
결과는 다행히 음성이었다. 나는 하느님께 마음을 다해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다시
주신 생명이니 더 열심히 살겠다고 결심을 하며 병원 문을 나섰다.
성에서 내가 그토록 동경하던 '실제 세상', 곧 사회에서 사는 법을
터득하려는 나의 노력은 쉽지 않았다. 아주 작은 일 앞에서도 성에 의존하려는
생각이 일어나곤 하여 이것을 끊는다는 것은 내게 있어 마치 탯줄을 끊어버리는
것과도 같았다. 서튼 주립 병원의 직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또 의사와도 계속
만나면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떨쳐 버리기가
어려웠다. 마침내 나는 치료를 핑계로 의사를 찾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어떤
상담자는 내가 상담을 그만둔다는 것은 치료의 실패라고 주장하면서 강력히 반대를
했기 때문에 더 어려움이 컸다. 그렇지만 치료를 그만둔다는 것은 그만큼 병이 나아
자립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표시이며 또 반드시 넘어야 할 단계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많은 임상의들이 환자들을 위해서라기보다 자신들의
만족을 위해. 그리고 환자들의 자립 가능성 여부에 대한 판단 부족으로 무작정
환자들을 붙잡고 있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튼 주립병원 조직으로 나를 끌어들이려는 유혹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내가
마침내 유니테리언 교회 근처에 있는 서튼 주립병원 지부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자
어떤 이들은 정신병 전력을 가졌던 사람들을 멸시하는 속물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했지만 나는 이런 것들을 다 무시하기로 했다. 나는 서튼 주립병원 지부가
싫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에드나, 테리 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친구들은 나보다 열 살이나 어렸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많았다. 에드나와 테리는 파티에도 자주 갔다. 비록 내가
그런 곳에 가서 함께 어울리진 않는다 해도 내 집에서 그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외출
준비를 도와주는 것이 기뻤다. 나는 그들에게서 즐겁게 사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내 자신의 행복한 인생을 준비할 수가 있었다. 우리 셋은 주말 여행이나
영화, 아니면 산책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그
방면으로는 전혀 문외한인 내가 사교술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학습장이었다.
씁쓸한 면도 있었다. 내 주머니 사정은 언제나 쪼들리는 상황이라 무슨 일이
생겨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성탄 때가 되면 더 괴로웠는데
나도 선물을 하기 했지만 내가 사람들에게서 받은 것에 비하면 내 것은 부끄러울
정도로 약소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고밥게 받았다는
것을 알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재정적인 안정도 커다란 꿈이었다.
아직도 내 안에는 성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성은 내가 거의
20년 동안 살았던 집이 아닌가! 혼자 집에 있을 때면 그곳에서의 즐거운 추억과
친구들이 생각나곤 했다. 당장이라도 뛰어가서 다시 그들과 함께 살고 싶었다.
병원곁을 지날 때마다 나는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만일 내가 노스 쇼어 커뮤니티
대학을 다니고 있지 않았다면 다시 가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대학은 성에서 멀어질 수 있는 방향으로 나를 끌어갔고 모든 것을 좀더
현실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성을 잃었다는 상실감은 아이에게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던 노스 쇼어에 대한 호기심으로 상쇄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수많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학생들은 거의 다 나보다 적어도 열 살이나 열다섯 살
정도는 어렸지만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은 정말 즐거웠다. 나는 최고의 학생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다른 학생들과의 관계 맺음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새로운 학급 친구에게 질문을 하고 그들의 대답을 경청하고 그들의
문제와 성공에 관심을 갖고 도와주었다. 그리고 웃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녀석들은
내 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끄집어내준 것이다. 첫학기가 반쯤 지나자 나는 벌써
학생들 중에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교내 식당에 가면 누구든 함께 앉아
식사를 하고 얘기할 상대가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면 그들도 나에게
다가왓다.
학생들은 모두가 열여덟 살은 아니었다. 나는 로이스 펄러와 인사를 나누고는 즉시
친해졌는데 그녀도 나처럼 삼십대 중반이었고 내가 정신건강을 되찾은 후에 첫번으로
사귄 친구인 셈이다. 에드나, 테리, 린다 그리고 조는 말할 것도 없이 내 삶에
지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들과의 우정은 내가 서튼 주립병원에
마리 바르텔로라는 정신병자로 있었던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로이스와
나 마리 바르텔로는 대학생으로 사귄 친구인 것이다. 나는 그녀의 눈안에서 보게
되는 의지를 사랑했다. 우리는 함께 일하고, 서로 도우며 숙제를 했고, 각자의
논문을 읽고 평도 해주었다.
노스 쇼어는 자그마한 지방 대학이어서 학생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고 소중하게
대해주는 좋은 분뒤기였다. 교수들은 자기 학생들을 진심으로 보살펴주었고 또
학생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바로 이런 분위기야말로 내가 바라던 것이었다.
차츰 학과에 자신도 붙어갔는데 특히 심리학이 흥미가 있었다. 그 과목을 배우면서
내 병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되었다. 나는 심리학교수에게 수없이 많은 질문을 했고
그는 내 질문에 친절히 답해 주었다.
내가 병원에 머문 20년 동안 세상은 참 많이도 변해 있었다. 올해가 1968년인데
내가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 존과 로보트 케네디,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되었고 세상은
폭동과 시위로 들끓고 있었다. 처음엔 이런 역사적인 사건이 내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지만 지금은 나도 세계 시민의 한 사람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 대해 듣고 보면서 놀라기도 하고 흥미도 갖게 되었다. 대학 생활에도
변화가 있었다. 대학생들은 예전에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단정한 주름치마에
블라우스 차림이 아니라 진에 티셔츠를 입었고 머리는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으며
가릴 것 없이 자유롭게 자기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여학생들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피임약을 사용하며 남자 친구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고 우울증에 걸린 젊은이는
거침없이 바리움을 복용했다. 나는 이러한 현실을 보았을 때 대경실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내 모습이 나이보다 적어도 열 살 정도는 젊게 보였기 때문에 나를 자기네
세대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수다를 떨며 그들과 함께 있는 것도 좋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내 나이만큼 어른스러워지기 위해 노력했다. 학교에서는 동급생들과
허물없이 지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내 나이에 걸맞는 인격으로 성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때로 학생들의 충격적인 행위를 봐도 성급히 판단하지 않으려고는 했지만 함부로
진정제를 복용하는 것을 볼 때 정말 걱정스러웠다. 많은 젊은이들이, 두 다리가 성한
사람이 필요도 없는 목발을 짚고 다니는 것처럼 필요하지도 않은 진정제를 마구
사용하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나 역시 아직도 약을 복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정신병'이라고 부르는 삶을 위협하는 불안증 치료도 평상시 누구나
느끼는 불안감 때문에는 절대 진정제를 복용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최근에는 굉장히 바쁜데다 기분도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과거의 문제는 기적이
일어나 주질 않았다. 나는 가끔 노스 쇼어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빌을 찾아갔다.
그는 나를 적극적으로 격려해주는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나는 빌에게 요즘에 재발한
불안증에 대해 얘기했다. 평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수업도중에 불안증세가
일어나기 때문에 여차하면 나가려고 나는 아예 문 가까운 곳에 앉곤 했다. 언제,
어떻게 정서의 혼란이 들이닥칠지 몰랐고, 그렇게 되면 교실에 있는 학생들 모두가
내 흉한 모습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증세가 너무 심해 어떻게 할 수 없을
때는 아예 학교를 가지 않았다. 빌은 아주 좋은 조언을 해주었다. 예를 들면 절박한
불안감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친구를 생각한다든가 그동안 내가 이루어 놓은 일들을
떠올린다든가 하는 방법을 사용해 보라고 권했다. 그동안 나는 계속하고 있는 방광경
검사 때문에 몸이 약해진 데다 검사받기 두 주일 전부터 긴장이 되어 울고
의기소침해 있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큰일만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며
살았고, 그런 때는 강의도 듣는 둥 마는 둥 대충 시간만 보냈다.
이러한 나에게 조 발터는 무한한 힘을 제공하는 원천이었다. 그의 존재는 내가
이렇게 힘겨운 노력을 계속할 필요가 있는 것임을 알려주는 용기의 근원지이기도
했다. 내가 무엇을 하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는 항상 내 뒤에서 나를 격려해
주고 나의 끝없는 가능성에 확신감을 심어주려고 애를 썼다. 1969년 12월 19일 내
생일에 그가 드디어 내게 청혼을 했다. 나는 1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에 팔을 둘러 껴안아줄 때 나는 이 세상에서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이런 느낌이 일생동안 계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과거에 정신병자였던
우리둘의 결합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다음해 2월 13일, 빌의 집 거실에서 조와 나는 종파를 초월한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유니테리언 교회 목사인 빌이, 나의 들러리는 린다가, 조의 들러리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데이비드클라인이 서 주었다. 조는 유다교인이었고 나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예식은 우리 모두를 위해 아주 만족하게 진행되었다. 빌은 결혼 예식
때의 성서구절을 예언서에서 발췌하여 읽었다. 다만 내가 결혼 예식에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테리가 퇴근 후에 내 머리 손질을
해준다고 왔는데 내가 너무 긴장을 하고 있어서 우선 그것부터 진정기키느라고
커피를 마시며 두 시간 동안이나 꾸물대고 있었던 탓이었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그때 조는 내가 제 시간에 오지 않자 혹시나 내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하고 내심으로 무척 걱정을 했었다고 했다. 예식은 그럴 수 없이 아름다웠다.
나는 키가 큰 신사가 죽을 때까지 사랑에 충실하겠노라고 서약하던 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조와의 결혼생활을 하면서 나는 내가 그렇게도 바라던 어른이 될 수 있었다. 마리
발터! 이 새로운 이름은 새로운 내 자신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너무나도 큰 의미를
주는 것이었다. 나는 조가 정서적으로 불안한 여자를 아내로 두지 않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를 돌보면서 또 그의 보호와 사랑을 받으면서 나는 서서히 내가 항상
바라고 기도해 오던 그런 여인으로 변화되어 갔다. 조의 첫번째 결혼에서 얻은
10대의 두 아이들, 버나드 대학 1학년생 제리와 하버힐 고등학교 재학 중인 브루스는
우리 생활에 활기를 주었다. 아이들은 처음에 거북해 했지만 얼마 안 되어 우리 넷은
서로서로를 아껴주는 사이가 되었다. 예민하고 사랑스런 아이들인 제리와 브루스는
우리에게 자주 놀러와서 이태리식 저녁식사를 하는 것을 좋아했고 자기들의 생활에
기꺼이 우리를 맞아들였다. 이제는 조가 아이들과 편안하게 지내고 또 아버지와
아들로서 서로 애정을 나누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기쁘고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이웃과의 관계 역시 소중했다. 케이와 루이스 터를로, 그리고 그들의 두 살 반짜리
로리. 로리는 우리 다섯명을 묘하게 묶어주는 끈이었다. 로리에게 조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친한 친구였다. 그래서 로리는 자기 동물 인형에게 <조 보니>라는
이름까지 지어줄 정도였다. 조 역시 로리를 하늘이 내려준 공주님이라고 불렀다.
주일 아침이면 조는 로리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프랜들리 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었다. 조와 로리가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얘기에 열중하는 동안 케이와 루이스는
밀린 잠을 자고 나는 조간 신문을 읽었다. 조는 로리가 마치 어른이기나 한 것처럼
그 아이가 무슨 얘기를 하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고 사링이 넘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쩌다 조가 로리의 사랑의 표현을 알아차리지
못할라치면 그 아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게끔 했다. 알파벳을 배우자마자 로리는
종이에 커다란 글씨로 <조 아저씨 사랑해요, 로리>라고 쓰고는 봉투에 넣어 조에게
주었다. 그러면 그는 무슨 대단히 중요한 편지이기나 한 것처럼 조심스레 봉투를
열고는 큰소리로 읽었는데 그러는 동안 로리는 존경심이 넘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멋진데> 조는 마지막 글자를 읽고 나서는 그의 작은 숭배자의
머리에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나도 널 사랑한다. 로리>
조는 내가 매일처럼 그에게 사랑의 글을 쓰지 않아도 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고 있었다. 나는 학교로, 조는 직장으로 가야 하므로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은
만큼 함께 있게 되는 때는 우리는 무엇이든 함께 했다. 내가 잠깐 케이네 집에 들러
커피 한잔을 하고 앉아 있는데 그녀는 시계를 보더니 <자, 10분만기다려봐, 누가 올
테니까> 10분이 지나니 두말 할 것도 없이 조가 들어왔다. 그가 나를 그리워하듯이
나도 그를 한시도 잊지 못했다. 나는 그이가 동네 가게로 신문을 사러 갈 때도
쫓아 갔다. 나도 왜그런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이 셰상의 어떤 것보다 좋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사이에도 의견이
다를 때도 있고 다툴 때도 있지만 그러나 '첫사랑'의 그 느낌은 언제나
우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찌는 듯한 여름에 차를 타고 가면서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른다든지, 유행가를 냅다 부른다든지, 하다 못해 애국가를 불러도 우리는 그것이
그렇게 재미있었다. 들판으로 놀러 가도, 집 근처의 간이 식당인 테드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셔도 우리는 함께만 있으면 그것으로 행복했다.
조와 함께 나는 가장 어려운 일 한가지를 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때까지 마르코
오빠 가족을 만나지 않고 있었다. 서튼에서 마지막 6년 동안 나는 오빠 부부도
조카들도 일체 만나지 않았었다. 나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에 분노와 원망 같은
감정은 벌써 없어졌는데도 다시 그들과 예전과 같은 관계를 맺고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무렵 사촌이 커피숍을 개점하면서 조와 나를 초대했다.
그 자리엔 마르코 오빠네도 올 것이 뻔했으므로 어떻게 얼굴을 대하나 싶어 나는
한동안 갈까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 나에게 조는 가야 한다고 하면서
절대 곤란한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만일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자기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나는 그의 말을 믿고
이것저것 생각지 않고 개점식에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나와 조의 어깨를 감싸안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돌려보니 오빠였다.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좋구나> 오빠는 굵직한 목소리로
예의 그 독특한 이태리식 악센트가 섞인 영어로 말했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조를
보더니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이가 내 동생이네> 뜻밖이었다. 지금까지
마르코 오빠는 나를 누이동생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잠시후 마르코는
우리를 사라에게로 데려가 함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행복에 겨운
시간들이었다. 정말 조는 내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자랑스러웠다. 내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이가 내 남편인 것에 대해서도.
이제 내 마음에는 증오도 섭섭함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날 밤부터 마르코 오빠와 나는 무척 친해졌다. 만날수록 오빠가 더 좋아졌다.
나는 오빠와 올케 언니가 그들의 경제적인 불운을 벗어나기 위해, 그 고통과 설움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나도 내가 겪었던
어려움들을 그들에게 말해 주었다. 이제 모든 오해들이 풀렸고 우린 오누이로서의
특별한 애정을 품게 되었다.
캐서린 아줌마와의 재결합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캐서린 아줌마와는 견고한
가족적 유대를 맺고 있었고 나에겐 엄마보다 더 엄마처럼 느껴졌던 분이었다.
아줌마의 연세는 아흔 하나였는데 조와는 마치 헤어졌던 가까운 친척을 만난 것처럼
금세 친해졌다. 시간이 있을 때에 우리는 글로스터로 가서 캐서린 아줌마를 모시고
드라이브를 하거나 아줌마가 우리를 위해 손수 준비한 파스타 요리를 맛있게 먹거나
했다. 어느 일요일 날, 캐서린 아줌마는 우리를 보고 당신의 '귀염둥이'
여동생한테 데려다 달라고 했다. 캐서린 아줌마의 '귀염둥이' 여동생의
나이는 90세였다! 두 분의 만남은 정말 볼 만했다. 두 노인은 보자마자 얼싸안고는
이태리말로 끊임없이, 그야말로 1초도 쉴새없이 얘기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이런
분들과 한가족이 된 것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몇 주일 후 캐서린 아줌마는 갑자기 쓰러지더니 일어나질 못했다. 석 달 후 어느
일요일 조와 내가 아줌마가 입원하고 있는 병원으로 찾아갔던 날, 조가 침대 머리에
앉아 손을 잡고 있는 사이에 아줌마는 운명하고 말았다. 우리의 가슴은 미어질 듯이
아팠다. 조는 우리 가족의 여왕이 돌아가신 것이라고 했다. 내가 누구보다도
의지하고 있던 분이 돌아가신 것이다.
<하지만 마리에겐 친척이 필요없잖아. 여기 마리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말야> 조의 말은 아픈 내 마음을 위로해 주었고, 다시 한번 행복한 현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어두운 면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두움은
점점 더 커졌다. 내가 방광에서 악성 종양을 제거하고 1년 반이 지나 다시 방광경
정기 검진을 받아보니 종양 세포가 자가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코스타스 의사는
방광을 부분적으로 제거하는 대수술을 한 후 요도이식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
두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한 달 정도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내 건강의 심각성은
제쳐두고서라도 한 달 동안 수업을 못 하게 된다는 것이 더 걱정이었다. 아무튼
수술은 해야 되겠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조와 떨어져 있어야 하고 학교를 가지
못한다는 것이 나에겐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노스 쇼어의 교수들은 내 처지를 잘 이해해 주어서 내가 병원에서도 할 수 있도록
과제를 주었고 학기도 늦출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조는 나에 대해 마음을 놓지
못하고 내 건강를 걱정했다. 수술 중에 그리고 첫번 회복단게에 들어서자 그는 내가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내가 조금씩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이 되자 이번에는 조가 그 동안의 긴장과 피로가 겹쳐서인지 서튼 주립병원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나는 거의 초죽음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 주고 그저 속수무책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헤어져 있어야 될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더 한심한 것은
그가 전면적인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조를 찾아갔다. 한마디로 너무나 끔찍했다! 저사람이 조라니, 생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넋이 반쯤 나간 것같은 멍한 얼굴에 그 초췌한 몰골은 사람꼴이
아니었다. 그에게 다가가 정신차리라고 울면서 흔들어대도 그는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로 웅얼거릴 뿐이었다. 나도 아직 수술 회복단계이긴 하지만 그대로 놔두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이를 집으로 데려가야만 하고 힘닿는 데까지 돌봐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우리는 힘을 합해서 서로의 회복을 위한 걸음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는 조를 성에다 맡기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내 병은 아직도 완치되지 않았다. 수술은 끝났지만 코발트 치료를 20차례나 받아야
했다. X-레이 치료 자체는 구토와 설사만 할 뿐 아프지는 않았다. 그러나 겁이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마어마한 기계들이 상하좌우에 붙어 있어 어느 각도에서건
찍을 수 있는 치료대 위에 혼자 누우면 그 분위기에 질려서 꼼짝도 못하면서 밖에서
스위치를 누르는 의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발작이 일어날 것 같은 것을
억제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성에서 전기 충격 치료를 받기 위해 전극을
관자놀이에 붙인 다음 의사가 단추를 누르기만을 기다리던 옛날의 그 죽을 것 같이
두렵던 그 느낌이 그대로 몰려왔다. 치료를 받고 나면 내 몸은 땀으로 목욕을 한
것처럼 되었다. 누군가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무섭냐고 물어 본다면 아마도 대답을
못하겠지만 하여간 코발트 치료실에 들어가면 항상 그랬다.
나는 전과목 강의를 다 듣고 싶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술후 몸도
약해진 데다 방사선 치료도 해야 했기 때문에 여러 과목을 포기해야 했고 결국
졸업이 늦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코스타스 박사는 공부를 계속하라고 권유하면서
우리는 이 싸움에 이길 수 있다고 격려해 주었다. 그후 몇 차례의 방광경 검사를
통해 재발의 위험이 없다는 판명이 나왔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돌보아 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코스타스 의사는 빙그레
웃으며 내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나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분께서 나를
고쳐주라고 선생님을 보내신 거예요!>
코발트 치료가 다 끝난 후에도 나는 다른 곳으로 돌려놓았던 요도를 다시 방광에
연결시키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조는 다행히 그동안 건강이 회복되어 나를
간호해 주었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나는 석달에 한 번씩 방광경 정기 검진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검사로 완치되었음이 판명되었다.
대수술을 하고 난 2년 후인 1973년, 나는 노스 쇼어 커뮤니티 단과대학을
졸업했다. 원래 2년에 마쳤어야 하는 것을 4년 동안이나 다닌 셈이었지만 그건 아무
상관없었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건강치 않은 내가 그나마 해냈다는 것만
해도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조는 내가 해낸 것에 대해 나보다도 더 자랑스러워
했다. 조와 테리, 에드나 그리고 린다와 빌이 보고 있는 가운데 나는 졸업장을
받았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해냈던 다른 어떤 것보다 이 한장의 종이가
더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문학사 학위를 따기 위해 살렘 주립대학에 편입했다! 나는 처음부터 철저히
공부에 매달렸다. 더 이상 건강 걱정을 하지 않기로 하고 온 힘을 다해 학업에만
열중했다. 특별히 흥미있는 과목은 심리학 과목중에 하나인
'성격이론'이었다. 매번 시간이 끝나면 나와 관심을 가진 급우들이
교수와 함께 둘러앉아 그날 들은 강의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살렘 주립대학에서는 더 많은 공부와 연구가 요구되었고 학생들도 노스 쇼어보다
훨씬 성숙한 모습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아는 것 이상으로 알고 있었고 경험하고
있었다! 어느날 오후 나는 교내 커피숍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 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갑자기 무언가 타는 냄새가 났다. '불이
났다!' 하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바짝 긴장이 되었다. 필시 밖에 어디에선가
불이 붙어 타고 있기 때문에 커피숍의 열린 문으로 냄새가 들어오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즉시 경비원과 함께 연기 냄새가 나는 그 자리로 갔더니 그 사람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잠시 후 그는 조금 난처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위험하군요... 그렇지만 나는 저 학생들에게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살렘 주립대학에 다닌지 두 해 째 되던 때, 나는 성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그 지방에서 일하는 정신건강 종사자들을 위한 회의가 그곳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나도 연사로 초대받았기 때문이었다. 말할 수 없이 떨렸고 긴장했다. 한 번도 그렇게
많은 청중 앞에서 강연을 해본 일도 없거니와 더구나 정신건강 전문가들 앞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강의준비로 그 전날 밤을 꼬박 새웠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뭘
얘기해야 하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걱정이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강연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생각다 못해 나는 체험을
통해 알게 된 것, 나의 병과 그 회복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는게 제일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의 계단을 오르면서 다시 마음이 약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해야 돼> 나는
자신을 타일렀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어떻게 내 병을 극복했는가 하는 것을
얘기하러 온 거야... 그런데 이까짓 계단도 못 오르다니!> 나는 내 차례가 될
때까지는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드디어 누군가가 나를 회의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내가 마지막 연사였다. 내가 어떻게 말을 맺었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끝내고 나니
청중들이 모두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앞으로 나오더니 나를 둘러싸고는 저마다 나에게 축하한다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어떤 이는 울기까지 했다. 나는 몸둘 바를 몰라 쩔쩔맸다. 나는 한낱
보잘것 없는 여자일 뿐인데...
대단한 소요가 일어났다. 사진사들이 사진을 찍어대고 기자들은 질문을
퍼부어댔다. 나도 모르는, 새로 온 병원장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강연을 하러
와 주셔서 대단히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미스 웬들이 다가왔다. 우리는 그저 껴안고
울기만 했다. 다른 직원들도 와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로즈도 왔다! 비록 이가 몽땅 빠지긴 했어도 그녀는 분명 로즈였다. 우리는
껴안고는 한바탕 웃었다. 나는 그녀에게 아직도 똥냄새가 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나는 이제 전문가인 것이다. 내가 로즈에게 윙크를 하자 로즈도 눈을
찡끗했다. 똥냄새는 우리 둘만의 비밀인 것이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한 노부인이 일어서서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끼여 인사를 주고받던 나는 그분에게로 다가갔다.
<내게 아픈 딸이 하나 있는데...> 노부인은 말했다. <그 애를 도와줄 수 있겠수?
어느 날 댁과 얘기 좀 하고 싶구려>
나는 그분의 손을 잡고는 <물론이죠... 만나뵙도록 하죠> 나는 그분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받아 적었다.
나는 너무 흥분했던 탓인지 탈진이 되어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가만히
회의실을 나와 사회사업과로 들어갔다. 병원의 구조에 대해서는 훤했으므로
그곳에서는 조용히 쉴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조용히 앉아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이가 성에 오자 우리는
회의 참석자들과 함께 구내시갇에 들어가 식사를 했다. 사람들이 내 얘기를 더 듣고
싶어 너도나도 내 옆에 앉고 싶어 했다.
그날 나는 내가 겪었던 체험들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 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신문에 실린 내 강연의 요지를 읽으면서 앞으로 닥칠
일이 걱정이 되었다. 그날 밤 나는 내가 겪은 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그리고 절대 내 자신의 영광을 찾지 않도록 겸손을 줍시사고
기도했다.
교수님 한 분의 도움으로 나는 살렘 주립대학에서 실습 과정을 갖게 되었다. 그
일환으로 나는 서튼 주립병원에서 만성 정신질환자와 일 대 일 작업을 하게 되었다.
다시 성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지만 이것은 신중하게
관리되는 조직 안에서 하는 실습의 과정이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고 내가 환자로서
있던 병동에 들어갔다.
병동의 모든 것들, 벽, 격리실, 선포치, 내가 늘 숨던 구석진 곳 등이 모두 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마치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그들과 나 사이를 갈라 놓은
것 같은 어떤 거리감을 느꼈다. 병동에서 일하는 동안 다행스럽게도 나는 내가
겪었던 일들에 대해서 기억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환자들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빴기 때문이었다. 밤에 집에 돌아오변 나는 내가 성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대해 크나큰 감사를 드렸고, 내가 그곳에 살았던 아득히 먼
옛날에 잠깐 스쳤던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학교생활은 내가 기대했던 이상으로 잘되어 나갔지만 어려움도 많았다. 조는 나의
살렘 주립대학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었지만 그의 건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막연히 울적하다고만 하더니 나중엔 가슴이 아프다고 하기
시작했다. 나는 겁이 나 급히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검사 결과는 아무 이상도
없다는 것이었고 얼마가 지나자 상태가 조금 나아진 듯도 했다.
1976년 가을 살렘에서의 마지막 해, 조는 정맥염으로 입원을 해야 했다. 퇴원
후에도 그의 병은 깊어만 갔고,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을 만큼 병세가
악화되어 갔다. 어느 날 나는 그의 곁에 누워 그를 꼭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좋아질거예요. 여보! 나는 당신이 꼭 나으리라고 믿어요>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다짐했다. <마리, 너는 이 순간을 잊으면 안돼... 언제까지나>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겨도 상관하지 말아요> 그는 내게 거듭거듭 말했다. <나는
당신이 살렘 대학을 졸업했으면 좋겠어. 나는 당신이 정말 자랑스러워. 내가 어디에
있건 말야> 그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이를 위해서 웃어
보이면서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이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했다. 즉 나는 물론
문학사 학위를 받을 것이며 목적을 이룰 것이라고.
성탄 기간 동안 조는 혼돈 상태에 빠져 자제력을 잃게 되어 하는 수 없이 그를
개인 정신병원인 볼드페이트에 입원시켰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 되었다. 성탄이 지난 지 3일째 되던 날, 열이 오르기 시작해 그를 급히
하버힐 병원으로 옮겼다. 그후 며칠 동안 그는 섬망상태에 빠져 있으면서도 열도
내릴 줄을 몰랐다. 여느 때보다도 병세가 더 나빠진 듯해 그날 밤은 늦도록 그이
곁에 머물러 있었다. 사랑하는 조가 지금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그를 깨우려고 계속해서 그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갑자기 눈을 뜨더니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 마리...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당신을 정말 사랑하오> 그날 밤, 병원을 나서며 나는 너무
무서워서 미스 웬들에게 전화를 걸어 나와 함께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미스 웬들은
한 시간 후에 우리집에 도착하였다. 그날 밤 그녀는 나에게 조의 죽음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섯달 그믐 조의 병세가 호전된 듯했다. 열이 그런 대로 내렸고 얼굴빛이 그전보다
밝았다. 병원을 나와 새로운 해를 함께 맞이 하기 위해 나는 미스 웬들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스 웬들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곧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조의 특별담당 간호사는 그의 상태가 약간 좋아졌다고 했다. 새해를 알리는 제야의
종소리가 울릴 때 우리는 포도주 잔을 높이 들어 내 남편 조의 회복을 위해 다른
어떤 때보다도 더 큰 희망을 담아 건배했다.
그날 밤 미스 웬들이 자고 가라고 붙들어서 기쁘게 그러마고 하고는 자기 전에
다시 한 번 병원에 전화를 해보고 이내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한참을 자다가 갑자기
잠이 깨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아직 밝으려면 멀었는지 밖은 조용하고
캄캄했다. 나는 침실에서 나와 거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았었다. 한 15분이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하버힐 병원의 간호사였다. 조가 5시에 운명했다는
것이다. 나는 울면서 어제 밤만 해도 상태가 괜찮다고 말한 것이 누군데, 또 그
정도면 간밤을 무사히 지낼 수도 있었는데 그럴 수가 있는 거냐며 간호사에게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간호사가 다시 한번 내 남편이 죽었다는 말을 전하자 나는
수화기를 팽개치듯 놓고 큰소리로 미스 웬들을 불렀다. 내 남편 조가 죽었다. 나는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넋이 나간 멍한 상태로 내 남편을 묻는 것을 지켜보았다. 장례식엔 6년 6개월 전에
우리 결혼식의 주례를 서주었던 빌과 나의 친지들, 친구들, 그리고 9살짜리 로리가
참석했다. 그 아이는 그의 가슴에 사랑의 편지를 써서 놓았다. 나는 내가 사랑했던
유일한 남자에게 조용히 마지막 인사를 했다.
조가 세상을 떠난 지 일주일 후, 살렘에서의 마지막 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집세를 내고 또 먹고 살기 위해 하루종일 일해야 했다.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바삐
돌아가 무엇을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저 단 한 가지 생각이라면 오직 조를
위해서라도 학교를 졸업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어떤 날들은 고통과 슬픔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와서 침대에 누워 통곡을
하다가 잠이 들곤 했다. 슬픔과 상실감으로 몸도 의지도 점점 약해져갔다. 다시 한번
불안증이 덮칠 것 같아 정말 두려웠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살아날 수 있을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이른 저녁, 나는 침대에 누워 조를 그리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가 빙빙 돌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퇴행현상과 정신분열이
시작되는 표시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돼, 마리!> 나는 자신에게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안 돼... 나한테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돼.
무서워하지 마! 불안감은 물러갈 거야. 제발... 제발... 겁내지 말라구> 불안이
스며들 때마다 나는 자신을 안심시켰다. 한 시간 이상 나 자신을 다독거리며
혼잣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해서 기괴한 현상이 물러갔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다시
살아난 것이다.
살렘 주립대학에서 마지막 한 달은 기억에 남을 일들로 가득차 있었다. 캠퍼스에
갈 때마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아껴주는가 하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동급생 하나는 내게 마지막 수업에 대한 기념으로 국화꽃을 한 아름 안겨
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았고 마치 조가 내 곁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1976년 6월 6일, 졸업식날은 정말 화창했다. 테리, 에드나, 미스 웬들, 사촌들
그리고 로빈이 멀리 텍사스에서부터 날아와 주었다. 학사모의 술은 왼쪽으로 가게
돌려 쓰자 심리학과 학생들이 달려와 악수를 하며 축하해 주었다.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그곳에 서서 축하객들과 사랑하는 친구와 친척들과 눈인사를 하며 나는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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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튼 주립병원의 사회복지 요원으로 하루종일 일하면서도 나는 밤낮으로 조를
그리워하며 지냈다. 사례연구가 끝나거나, 일을 마치고 차를 몰고 집으로 올 때에
불쑥불쑥 슬픔이 나를 엄습하곤 했다. 노엽기도 했다. 어떻게 그처럼 홀연히
나에게서 떠날 수 있는 건지. 적개심마저도 일었다. <내가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나를 이처럼 버리고 갈 수 있단 말이에요?> 잠 못 이루는 밤, 그를
향해 투정을 할라치면 마치 그가 구름처럼 나에게로 내려오는 것만 같았다.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했다고 이런 어려움을 겪게 하느냐구요?> 점점 더 화가 났다.
하지만 좀더 현실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없이 산다는 것이
그렇게 힘들기만 한 것인가? 무엇보다도 나는 일이 있지 않은가? 왜 나는
아직까지도 그를 필요로 하는가? 이러한 분노는 혼자 된 여자가 가질 수 있는
당연한 감정이라고 생각하니 분노는 사그라졌지만 자책감은 여전히 남아서 내 가슴을
찢어놓았다. <좀더 잘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를 죽게 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닐까?
그이가 아프다는 걸 왜 좀더 일찍 몰랐을까? 그러면 좀더 빨리 치료를 받아 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세월이 갈수록 나의 아픔은 조금씩 아물어 갔고 우리의 너무도 짧았던 결혼생활의
의미를 좀더 분명히 깨닫기 시작했다. 경험이 많고 독립심이 강한 사람이었던 남편은
나를 사랑했고 자신감을 심어 주었으며 또한 이웃을 사랑했다. 그는 내가 성숙한
여인이 되도록 도와 주었다. 어떻게 내가 이런 선물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소중한 내 남편을 잃었다는 상실감을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잊기로
했다. 내가 경험한 다른 잃음과는 또 달리 조의 죽음은 나의 한쪽을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우리 둘은 더없이 가까웠고 감히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시간이 약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겐 일이 있었다. 매주일 '내
사람들'을 도와야 할 그리고 정신건강을 위한 어떤 건설적인 일을 해야 할
새로운 기회가 마련되었다. 환자에 대해 조사한 후 나는 환자 보조금의 지불 문제에
관한 한 전문가가 되었고 그것을 위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이것은 각 환자의 자립을 위해 우리가 힘써왔던 것이며 이제 비로소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디딘 셈이었다.
내가 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은 정신건강 후속 프로그램으로서 일주일에 두
번씩 최근에 퇴원한 환자들이 살고 있는 곳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병원에서 나가
'바깥 세상'에 적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내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변화에서 오는 그들의 정신적인 충격을
덜어주기 위해 힘썼다.
서튼 주립병원의 사회복지 요원으로서 활동하면서 그 외의 시간은 성에서 일했다.
내가 너무 환자들을 싸고 도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여간 나는 언제나 내 힘이 자라는 만큼 그들의 대변자로서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일
했다. 나는 나 자신을 과거의 정신 질환자가 아니라 늘 전문가라는 것을 내세웠다.
근무시간이 되어 병실로 들어가면, 간호사들은 내게 열쇠 꾸러미를 내어 주었는데
나는 마치 늘 그래왔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 열쇠들을 받아들었다. 하기야 나한텐
그 열쇠들이 별로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내가 환자로 있을 때는 옷걸이로도
문이란 문은 다 열 수 있었으니까!
성에서의 일은 보람도 있었지만 어렵기도 했다. 내 생각이나 일이 언제나 내 의향
그대로 되어지지는 않았다.
첫 근무 날, 해리엇이라는 환자 하나가 나에게로 왔다. 내가 환자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함께 앉았다.
<아, 마리... 나는 당신을 기억해요. 그래요, 기억하고말고요...> 해리엇은
이렇게 말하며 내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 보았다. <당신은 오랫 동안 저 첫번째
침대를 사용했지요... 그런데 이렇게 당신을 만나다니. 어떻게 그렇게 나을 수
있었죠? 어떻게 나갈 수 있었냐구요?>
<아, 해리엇. 이렇게 당신을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나도 이렇게 올 수 있어서
기쁘답니다. 저는 여기서 일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당신도 아다시피 회복되려면
정말 어려움이 많아요...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우선 해리엇이 낫고 싶다는 결심부터
해야 돼요>
해리엇은 아무 말도 않고는 일어서더니 나가버렸다. 어쩌면 그녀는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거나... 아니면 낫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성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내 과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으나 다만 교대 근무
간호사들이 얘기해달라고 어찌나 조르던지 그들에게만 들려주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특히 환자들의 느낌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나는 환자들이 느끼게 되는 좋거나
불쾌한 작은 일들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예를 들면 어떤 환자가 간호사들이 담배를
피우러 아니면 점심식사를 하러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그래서
그것을 본 환자가 사무실 문 밖에서 기웃거리는 것을 보고 간호사가 저쪽으로
가지 못하겠느냐고 소리를 지른다면, 그 환자는 몹시 불쾌할 뿐만 아니라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병이 더
깊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또한 극도의 고통을 당하는 환자의 체험을 얘기해
주면서 비록 그들에게 빈번히 발작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들의 고통만큼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부탁했다.
마침내, 한 간호사가 이런 질문을 했다. <당신은 모든 환자들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런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들이 나을 수 있도록 협조해 주고,
자기들의 걸음걸이에 맞게 걸어가도록 옆에서 마음 을 써주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좀더 나은 삶을 살아가도록 적극적으로 밀어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눈에 띄게 나아졌다고 해서 성급하게 무엇을 이루도록 강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는 내가 터득한 것과 경험한 것을 나눌 수 있어서 기뻤다. 적어도 질문을 한 그
간호사 하나만이라도 귀담아들었을 테니까.
정신건강 분야에 연관된 내 일의 영역도 넓어져 직장 밖에서의 활동에도 눈을 돌려
참여하기 시작했다. 긴급이동 구조대의 한 분야인 전화상담 자원봉사요원으로
들어갔다. 이 일은 24시간 동안 근무로 자살하려는 사람이나 위기에 닥친
절신병력자로부터 오는 전화를 받는 것이었다. 또한 나는 지방 정신건강 위원회에
가입하여 가능한 대로 강연 요청을 받아들여 정신건강을 위한 모임에 들어가 내
경험뿐 아니라 정신건강 프로그램에 대한 미래의 나의 바람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렇게 여러가지 일에 바빠 돌아가면서도 나는 여전히 외로웠다. 에드나와의
우정관계는 점점 깊어갔다. 그녀와 사귄 지 8년이 지났지만 에드나는 언제나 내게
특별한 사람이었다. 조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녀와의 우정은 내게 더욱 소중해졌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강한 종교적
심성,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항상
종교에 관한 것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에드나와 함께 오랜동안 하느님께서는
나를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내 믿음에 관해 이야기하곤 했다. 얼마전에 신앙을 다시
찾은 에드나도 나와 똑같이 하느님께 온존히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늘 무거운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편안히 쉬면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다. 화창한 날이면 우리는 점심시간에 만나서
연못가에 앉아 물오리와 새들을 바라보며 샌드의치를 먹기도 했다. 그때 에드나는
문득 물오리를 가리키며 저렇게 물 위를 떠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했다. 나는 창공을 날고 있는, 구름을 뚫고 오르는 새가 몹시 부럽다고 했다.
주말이면 에드나는 언제나 신나는 계획을 내 놓았다. 예를 들면 뉴포트의 대저택이
있는 데로 드라이브를 가자든가 아니면 뉴햄프셔에 있는 화이트 마운틴으로 여행을
가자든가 하는 등이었다. 우리는 서로서로 장래에 대한 꿈을 털어놓았다. 에드나는
회계학 학사 학위를 받아 공인 회계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녀는 노스 쇼어의
야간부에서 그 과정을 밟고 있다. 내 꿈은 정신적으로 병든 이들을 위한 새로운 교양
프로그램을 계획하는 일이었다. 에드나는 나보다 먼저 조를 알고 있었고 그를
존경했었기에 우리는 그를 생각나게 하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다.
조가 세상을 떠난 지 몇 달 후에 나는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는데 그때
에드나가 도와줘 큰 의지가 되었다. 이사를 하게 된 까닭은 그 집에 있으면 모든
것 하나하나가 조를 생각나게 해서 계속 그곳에서 살게 되면 도저히 슬픔과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는데다 집세까지 올라 도저히 내 형편으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사한 곳은 시골이긴 했지만 집도 제법 크고 집세도 쌌다.
벽난로도 있고 멋진 시골 경치도 내다보이는 아름다운 집이었다. 환경이 변하자
기분도 훨씬 나아졌다. 사실 활기를 되찾게 되면 무엇보다도 먼저 친구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파티를 열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집 전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동안 내가 신세를 진 사람, 나를 도와준 모든 사람들을
초대했다. 백 명 이상이 왔다. 신바람이 났다! 빠듯한 예산으로 연 파티라서 사실
차린 것은 조촐했다. 빌은 혹시 자기가 앞으로 주차장에서 일할 수 있겠는가
시험해 보겠다며 차를 빼고 들이는 일을 도맡아 해주었다. 나를 도와주었던 분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그리고 부족한 대로 고맙다는 내 마음의
표시를 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도 기뻤다. 나는 커다란 케이크를 주문하고 그위에다
다음과 같은 말을 적어 넣었다.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파티에 와 준 모든
이들을 찾아다니면서 나는 거듭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이 파티는 그분들을 위한
파티였으니까.
그날 밤 나는 무척이나 울었다.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던 일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롭고 기뻐서였다. 손님들이 다 가고 난 다음 몇몇이 남아 계속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에는 엘리사벳이라는 친구도 있었는데 그녀는 심령 요법사
같은 일을 하기로 작정한 사람으로 그것은 이를테면 과거의 삶을 돌아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 같은 것이었다. 엘리사벳은 직접 보여주겠다며 성에
학생 간호사로 있었던 도티를 끌어들여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도티를 전생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새벽 1시경이 되었을 때 그녀는
사도 시대로 들어가 있었는지 우리에게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마르코가 보인다고
말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도티의 남편한테서 아직도 자기 아내가 오지 않으니
어찌된 일이냐고 전화가 왔다.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한담? <아, 지금 도티는요
마르코 성인을 만나느라고 바빠요>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도티의 남편은 한
번도 심령의 심자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인 데다 진보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궁여지책으로 도티가 지금 목욕 중이기 때문에 전화를 받을 수 없노라고
얼버무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약 한 시간 후, 그가 또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
도티는 에집트에 있었고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갈 찰나였다. <미안해요, 도티가
아직도 목욕을 하고 있어서, 어쩌지요?> 나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으며
말했다. 거의 새벽 3시까지 도티의 과거에로의 여행은 계속되었고 그동안 그의
남편한테서 여러 차례 전화가 왔었다. 그는 자기 아내가 그처럼 오랫동안 목욕을
한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긴 했지만 도티는 지금 에집트와 예루살렘을
다니느라고 바빠서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도티는
3시간 이상 목욕탕에 있을 수밖에.
에드나는 조가 죽기 얼마 전 유방에 악성 종양이 생겨 제거해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에드나도 나처럼 완치되었고, 암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해가 지나자 다른 종양이 생겨 두번째 수술을 해야 했다. 나는 수술 후의
경과가 여간 걱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에드나는 낙심하지 않았고 자기는 이
병과 싸워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 달 후 암은 뼛속으로까지 펴져 그녀는 한순간
한순간을 극심한 고통과 싸워야만 했다. 그토록 아픈데도 에드나는 병에 굴복하지
않았다. 몸이 갈갈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때문에 의자에 매달려 있어야 할
지경인데도 에드나는 강의를 계속 들었다. 그녀는 절대로 병자에게 베푸는 친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와 같은 고집은 죽음이 임박한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다만
그녀가 병과의 투쟁이 막바지에 이른 것을 인정하고 살렘병원에 재입원해야 했을
때에야 겨우 나와 병원의 신경정신과 상담원에게만 의지했을 뿐이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그녀를 굳셈과 평화로움으로 가득 차게 했고 아름다운 죽음의 순간을
맞이 하게 했다. 병고와 싸우며 살다가 믿음 안에 죽어가는 그녀의 용기있는 모습은
내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조가 떠난지 3년 후에 다시 맞은 에드나의 죽음은 나에게 또 하나의 커다란 상처를
남겨놓았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내 분신 하나가 죽은 것이다. 그녀의 용기가
얼마나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었는가를 새삼스레 깨달으면서 나는 그녀의 죽음을
적극적인 자세로 받아들여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각오로 일에 임할 각오를
했다. 그때부터 에드나와 조에 대한 추억은 내게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조를 위해 기도할 때 그녀를 빼놓고 기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에드나가 세상을 떠난 바로 그 해, 나는 사랑하는 사람 하나를 또 잃어야 ㅎ다.
오빠 마르코가 죽은 것이다. 조가 세상을 떠난 뒤 마르코 오빠와 나는 아주
친해졌었다. 그는 아주 작지만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나에 대한 애정을 표시해
주었다. 오빠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 역시 나와 똑같은 식으로 교욱을 받았고
아버지의 냉혹한 지배의 희생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나는
오빠를 용서하게 되었고 그를 더 사랑하고 아끼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오누이
관계를 통해 그 동안의 내 성숙도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어렸을 때의
가족생활에 대해 좀더 객관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내 일에 만족하면서도 나는 내 인생에 중요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조의 죽음에 대한 고통에 이어 에드나와 마르코를 잃고 나니 내 체중은
현저히 줄었다. 혹시 이곳을 떠나 멀리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 다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도 사회 복지요원으로 받는 봉급만으로는
점점 더 살기가 어려워져갔다. 좀더 봉급을 올려 받으려면 석사 학위를 받아야
하는데 현재 내가 받는 월급으로 학비를 충당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오랜
생각 끝에 친구 로빈이 살고 있는 텍사스의 코퍼스크리스티로 이사를 결행했다.
거기서 뿌리를 내리려기보다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우선 그렇게 하는 것이
나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로빈의 사랑에 찬 격려에 힘입어 계속해서 직장을 알아보러 다녔지만 날이
갈수록 텍사스로 오는 것이 아니었다라는 후회가 되고 내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의심이 생겼다. 로빈과 십대인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생활한 지 육 개월이 지난
후에야 겨우 적당한 셋집도 찾을 수 있었고, 멕시코계 미국인 청년들의 위한
상담원이라는 직업도 얻을 수 있었다.
상담역은 비록 내 전문은 아니라고 해도 도전해볼 만한 분야였고 주급에서
얼만큼씩 저축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친구도 사귈 수 있었다.
일년 후, 나는 정신건강에 대해 좀더 깊이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환자의 정신적, 정서적인 모든 면을 다루고 싶었고,
사목상담학 석사 학위를 받아서 정신병원에서 원목으로 일하고 싶었다.
세세하게 가능성이 있는 여러 대학을 다 조사한 다음 나는 샌안토니오에 있는
신학대학에 원서를 내고 신학대학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코퍼스크리스티에 있는 한
은행에서 대부를 받아 직장을 그만두고 기숙사에서 살면서 2년간 공부할 계획으로
나는 샌안토니오로 갔다. 학교에 도착한 것은 금요일이어서 우선은 짐정리를 하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주말은 기숙사에서 보냈다. 정말 이렇게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에 등록을 하러 갔더니 직원이 등록을 해줄 수 없다며 <학장을
만나보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당신 추천서가 방금 도착은 했는데> 학장은 좀 곤란하다는 투로 입을 떼었다.
<내용은 좋아요. 아주 열심히 일도 하셨고... 하지만 우리 대학에선
정신질환자였던 사람을 학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나는 도대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금방 말한 것을 좀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청했다. <돌아가셔야 되겠습니다. 우리 학칙엔 당신과 같은 배경을
가진 학생은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기가 막혔다. 하지만 다시 한번 고려해주십사고 간청하면서 나는 성에서의 일,
나의 결혼, 학업, 직업, 정신건강을 위한 일 등을 이야기했다. <저는 정신질환자가
아닙니다. 그건 과거의 일이에요>
내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그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당신이 얼마나 큰 일을
해내셨는가를 알겠습니다만... 이것은 우리학교 방침이라 안 됩니다> 그는 거듭
말했다. <당신이 해내신 것은 훌륭합니다만, 우리의 학칙은 바뀔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며칠이나 더 머물 수 있겠습니까?>
<하루입니다>
그게 전부였다! 직업도, 셋집도 버리고 이제 내 수중엔 돈도 한 푼도 없는데. 나는
정말 겁이 났다. 그리고 화가 나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병자였다는 이유
때문에 들어가지 못한 곳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건만. 그런데 교회가 지금 나를
거부하는 것이다. 더구나 합당한 이유도 없이! 도대체 이 사람들은 뭘 겁내는
것일까. 내가 수업 도중에 미친 짓을 할까봐?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하니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나는 코퍼스크리스티로 가는 고속도로에 들어서 있었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이 무자비한 차별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가르침은 옳지만 몇몇 선생들이 제 길을 잃고 있을
뿐이니까.
로빈은 어차피 혼자 있어야 하니 다시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로빈이 얼마나
나를 믿고 있고, 얼마나 내가 잘 되기를 바라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한다는 것이 나 자신에게 보다 오히려 그녀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방 한 칸을 빌려 조용히 앉아 어떻게 해야 될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먼젓번 직장에
다시 일자리를 부탁하고 얼마 동안은 그대로 코퍼스크리스티에 머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아보니 내가 내가 일하던 자리엔 이미 다른 사람이 채용되어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울었다. 하느님께 인도해 달라고 애걸하며 기도했다.
해결책이 즉시 생각났다. 다시 매사추세츠 주로 돌아가는 것이다.
로빈과 코퍼스크리스티에서 사귄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3일 후,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차를 몰아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빌과
린다의 집에 도착했다. 그들은 나를 따뜻한 포옹으로 맞아주었다. 나는 사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아무런 계획도 없었지만 어쨌든 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하느님께서 분명히 도와주실 테니까.
돌아온 지 일주일도 안되어 다시 한번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는 직장을 얻게
되었다. 나는 내 전문분야인, 정신적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길 바랐지만
새로운 일도 매력이 있었다. 소위 문제 청소년들을 위한 일이었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은 직원들 숙소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하기야 그렇게 하는 것은 새로운
직업에 빨리 몰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도 같았고 아직 집도 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 된 일인 것도 같았다.
내가 살 숙소를 살펴보면서 나는 아주 편해지고 기쁨이 솟구침을 느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정신없이 빨리 바뀔 수가 있을까! 방은 제일 구석 안쪽에 있었다.
정사각형의 방은 어둠침침한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데다 유리창은 짙은 갈색으로
칠해놓아 전혀 밖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방에 있는 유일한 가구란 것은 바닥에 놓인
매트리스 뿐이었다. 그 분위기는 내가 싫도록 보아온 병원의 방을 기억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는 방을 사람 사는 곳처럼 만들기 시작했다. 상자를 옷장으로 이용하기로 하고
창문에 칠해 놓은 페인트를 벗겨냈다. 일상적인 직무에 잘 적응하는 데 정신을 쏟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선 적어도 쉬고 잠자는 방만이라도 안온하고 정돈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나마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은 그 방 밖에 없는데. 근무
첫날부터 나는 아이들의 사나운 말과 거친 행동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태도와 문제에 적응해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웬지 나는 점점 더 나의 무능과
무력함을 느꼈다. 다행히 그일을 시작한 지 6개월 후에 나는 새로운 직장을 얻게
되었다. 북동 가정협회가 운영하는 주거 프로그램 책임자 자리였는데 이곳은 개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말하자면 정신 건강을 위한 다목적 편의기관이었다. 이제 비로소
나는 정신병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한 내 전공분야에서 일하게 되었고, 내가
그처럼이나 꿈꾸어왔던 계획을 실현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15
폴은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북동
가정협회가 시작한 병원에서 퇴원한 성인정신병자들을 위한 주거 프로그램은 이를
테면 사회복귀를 위한 중간단계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치료와 예방을 위해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프로그램을 위해
직감에만 의존하면서 '좋은' 환자들을 뽑았다. 즉 우리 집에 올 사람은
밖에서 살려는 각오와 회복하려는 의향이 있는 환자여야 했다. 우리 프로그램은 꽤
잘 되어갔다. 그리고 선의의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눈속임을 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성의 뒤편 병동에서 장기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우리 주거 프로그램에 위탁하고 싶다는 추천이 온 것이다. 나는
임직원 중의 하나인 바르바라 톰슨에게 혹시 폴을 아느냐고 물었다.
<폴 말이죠> 하고 그녀가 대꾸했다. <별로 시원치 않은 아이예요.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걸요. 하지만 그 아인 난폭하진 않아요... 그래서인지 그 아이가
좋아요!>
이것이 내가 그녀에게서 들은 폴에 대한 정보의 전부였다. 바르바라가 그앨
좋아한다고 했겠다. 이튿날 나는 폴을 만나러 병원으로 갔다.
폴을 보니 그의 상태가 어떤지 즉시 알 수 있었다. 그는 뒤편 병동의 전형적인
환자였다. 덩치가 크고 둔한 정말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 폴이었다. 셔츠에
있는 단추는 붙어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바지는 너무 커서 흘러내리기 때문에
걸을 때는 허리춤을 붙잡고 걸어다녔다.
폴은 나무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네가 폴 허지스니?>
그는 나를 올려다보더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 폴> 하고 나는 명랑하게 인사했다. <너는 아마 날 모를거야. 나는 마리
발터란다... 그렇지만 그냥 마리라고 불러도 돼. 나는 여기에 있는 간호사들과는
다르니까 발터 부인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어>
폴에게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네 친구야, 내가 여기 온 것은 너를 데리고 가기 위해서야... 가둬놓는 것이
아니라>
나는 도대체 그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쩐지 알 수가 없었지만 계속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여기에 오랫동안 있었지... 그런데도 대부분 사람들은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봐>
<너 혹시 우리집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니? 그건 말야, 이
지역에서 시작한 새로운 정착 프로그램이란다> 병원에 있는 많은 환자들이 우리
프로그램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어쩌면 폴도 그 얘기를 주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폴이 머리를 끄떡였다.
<좋아, 어떤 사람들이 그러는데 네가 우리 프로그램에 들어오면 좋을 거라고 했어.
우린 너에게 진짜 너희집에 있는 것처럼 해줄 거야. 우리와 같이 가지 않겠니?...
함께 가서 새 집에서 살지 않을래? 너희 집처럼 생각하게 될거야>
폴은 나를 쳐다보더니 <네>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너에게만 말하는 건데, 폴>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그에게 몸을 숙여 말했다.
<착하게 있어야 해. 병원에서 말썽 부려 일을 망쳐놓으면 안 된다. 이번 주말에 너를
데리러 올테니까. 잊어버리지 말아. 얌전하게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건 네가
우리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너를 병원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온갖 방법을 다
쓸 거란 말야. 너도 잘 알겠지만 사람들은 어떤 때 우리한테 무엇이 좋은지 또 언제
우리를 도와줘야 될지도 모른단다>
<우, 우, 우- 으> 폴은 낑낑거리며 알아들었다는 표현을 했다. 폴이 말귀를
알아듣는다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폴은 말을 하지 못하므로 이 애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고 고개를 끄떡이긴 하지만 과연 몇 마디나 알아 듣고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겐 적어도 장기환자들에게서 발견되는 멍청한 표정은
없었다. 다만 나와 이야기를 하고는 있었지만 마치 생의 모든 것을 잃은 것같이,
뒤편 병동에 모든 것을 두고 온 사람처럼 보이긴 했다.
폴을 데리고 나가는 데는 많은 반대가 있었다. <왜 폴을 데리고 가려고 하죠?>
수간호사가 따지고 들었다. <그앤 한 주일도 못 돼서 돌아올 거예요. 그앤 어떻게
해볼 희망이 없는 애니까 아예 가능한 환자를 데리고 가세요>
비록 폴이 무심한 침묵의 안개 속에 싸여 있긴 하지만 우린 그애가 해내리라고
믿었다. 주말에 의사는 폴의 퇴원서에 서명을 해주었고 우리는 반대하던 간호사가
없는 틈을 타서 그애를 재빨리 데리고 나왔다.
폴이 우리 집에 왔을 때의 모습이란 정말 볼만했다! 한 손으론 여전히 바지춤을
붙잡고 있었고 다른 편 손은 셔츠 한 장이 들어 있는 종이 봉투를 들고 있었다.
여분의 셔츠 한장과 종이 봉투 하나가 그의 전재산이었다!
우리는 예산을 약간 조작하여 돈을 빼내어 폴의 옷 몇 가지와 생활 필수품
몇가지를 샀다. 혹시 폴이 질려버릴까봐 우리는 상점가로 가지 않고 남성용품을 파는
가게로 가서 사주었다.
다음날 출근을 하니 밤근무였던 상담원이 나에게 다가왔다.
<마리, 내 생각에 폴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도움을 바라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애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어제 식사를 하는데 보니까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먹더라구요. 손으로 말이에요. 아무리 가르쳐줘도
그때뿐이고...>
<그래요?> 나는 별로 놀라지 않고, 그러나 상담원의 어려움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보이면서 <내가 한번 볼게요>라고 말했다.
나는 폴을 불렀다. 그는 여전히 바지를 움켜잡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나는
기분이 어떤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역시 묵묵부답. 그러나 나는 그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말했다.
<폴, 우리 상담원이 그러는데 너 어제 저녁을 먹을 때에 손으로 먹었다고
하더구나. 폴, 있잖아, 우린 널 좋아해... 우리 모두는 널 무척 좋아하고 있어! 모든
사람이 네가 여기에 온 걸 좋아하고 있다구. 그렇지만 네가 스푼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밥을 먹으면 함께 식사하기가 곤란할 것 같구나. 만일 네가 계속해서 손으로
식사를 하겠다고 하면 부엌에서 혼자 먹을 수밖에 없어... 그렇지만 너는 그러고
싶지 않으리라고 생각해. 자, 지금 우리 함께 식당에 가서 제대로 밥을 먹자꾸나...
너는 잘 해 낼 수 있을 거야. 나는 안다구>
모두 식탁에 앉았다. 나, 다른 직원 한 사람, 폴 그리고 다른 거주 환자 5명이
함께 앉았다. 폴이 어떻게 할지는 미지수였다.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연 예측
불가능이었다. 내가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아니면 폴이 아직 우리
프로그램에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물론 지켜보지는 않았지만 그쪽으로 자연스레 시선을 주며 폴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보았다. 폴이 포크를 집어들고 먹기 시작했다. 그는 낑낑거리며 으깬
감자를 달라고 했다. 정말 놀랄 일이었다. 여러분은 누군가가 낑낑거리며 으깬
감자가 담긴 접시를 달라고 할 때 놀라지 않겠는가?
폴은 우리한테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는 '문제 덩어리'가
아니라 많은 고통을 당한 사람, 많은 상처를 받은 아이였다. 그 아이는 삶의 평화와
위안을 찾고 있었다. 폴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소위 '이상한 짓'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간단히
'미쳤다'는 딱지를 그에게 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설 자리를
찾기 위해 앴는 폴의 노력과 그의 인간성과 유를 보도록 해야지 단순히 그의 행동을
보고 '미쳤다'라는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된다.
폴은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가 우리 주거 프로그램에 오자 곧 다른
환자들처럼 낮 치료 프로그램에 나가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난 후 낮 프로그램 진행
담당자가 불만을 터뜨렸다.
<폴이 사람들을 때립니다. 그애는 낮 치료를 받을 수 없을 것 같군요>
<맙소사, 우습군요. 나는 이곳에 사는 사람 중에 그애한테 맞았다는 얘길 들은
적이 없는데>
<어쨌든 그앤 사람들을 툭툭 칩니다> 하고 그가 덧붙였다.
무슨 얘긴지 알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폴을 만났다. <이것봐, 폴, 내가 낮 치료
프로그램 선생님하고 얘기를 했는데 그 사람들은 네가 사람들을 때린다고 언짢아
하더구나. 그렇지만 내가 생각할 때는 그이들이 너를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아. 나는 알아. 너는 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때리는 것이
아니구. 그렇지? 너는 사람들하고 이야기하고 싶은거야>
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바로 그렇다는 것을 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낮 반에 있는 사람들은 바본가 보구나. 네가 인사하려고 그런다는 것을 모르니
말야. 그러니까 사람들을 대하는 네 방법을 바꾸면 어떻겠니? 네 방법대로만 하면
그이들이 좀 신경질적이 되니까 말야. 그들도 이해할 거야,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사람들을 건드리는 것은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다>
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다음부터 그애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사실 그 아이는 사람들을 절대로 진짜
'때린' 적은 없었다. 폴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없었다. 그
아이는 사람 곁에 다가가 갑자기 탁 칠 뿐이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때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저 친하고 싶다는 그의 몸짓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낮 프로그램 센터의 담당자들은 폴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
아이는 의사 소통에 경험이 없다는 것을 이해해주면서 원하는 거싱 무엇인가를 알고
좀더 효과적으로 폴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도록 마음을 써주었다.
그러나 정신건강 분야에서는 융통성이 없는 관료적 처리방식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이 때로는 환자들의 숨통을 막아버리기도 했다.
어느 날 낮 프로그램 센터의 다른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폴을 이틀간 보내지 마십시오>
<폴을요?> 나는 몹시 불쾌했다. 방금 들은 말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었다. 믿고
싶지도, 믿을 수도 없었다.
<폴이 당신네 센터에 일년이나 다녔고, 그애가 다른 사람들을 건드린다던 때
이후론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왜 무슨 이유로 이틀 동안이나 오지 말라고 하는
거죠?>
<폴은 피클을 훔쳤습니다>라는 말이 전화 저쪽 끝에서 울려왔다.
<걔가 어쨌다구요? 농담하시는 거겠죠!> 나는 내가 지금 정신건강 전문가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질 않았다.
<아닙니다>
<피클을 훔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당신은 피클을 훔쳤다고 뒤집어 씌우고
한 사람을 프로그램에서 쫓아내려고 하는군요. 미친 짓이에요!>
<글쎄요, 며칠 전 제가 폴에게 센터에 있는 냉장고 청소를 시킨 일이 있습니다>
하고 담당자는 전문가 답게 진지하게 말했다. <마침 냉장고엔 피클 한 개가 남아
있는 피클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폴은 거기 있는 피클을 꺼내 먹고 병을
버렸더군요> 담당자는 말을 멈췄다가 다시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우리
센터에서는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냉장고에서 마음대로 음식물을 꺼내 먹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보세요> 나는 화가 나는 것을 잠시 진정시키면서 말했다. 상황이 너무
우스꽝스러웠다. <그곳에 있는 여러분 모두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군요. 폴을 이틀
동안 보내지 말라구요? 좋습니다. 보내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짓입니다. 당신은 어쩌는지 모르지만 나는 냉장고를 청소할 때 병에 음식이
찔끔찔끔 남아 있으면 절대 그걸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남은 것을 먹어버리고 빈
병은 내다 버리지요. 내가 폴이었더라고 남은 피클은 먹고 병을 버렸을 거예요.
폴이랑 똑같이 말이에요! 잘 모르겠지만 당신들도 분명 그랬으리라 생각해요... 폴은
정상이라고 믿습니다... 그가 한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니까요!>
폴이 집에 돌아왔다. 나는 기관의 체면을 존중하기 위해 이틀동안 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가 정학받았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선 마음을 쓰지 말자.
이틀간 그냥 마음놓고 쉬는 거야. 더 이상 이문제에 대해서 말하지도 말자...
정학시킨 것은 정말 엉터리없는 처사니까. 너는 냉장고 청소를 아주 잘한 거야!>
폴은 모든 것을 잘해나갔다. 그는 우리집에서 반자립원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폴은
자기 일은 자기가 처리할 줄 아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었다. 혼자 빨래도 하고,
사람들과 함께 음식도 만들고, 폴이 병원에서 나온 것은 기적도 아니었고
'완전 회복'이 되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폴은 자기의 곤경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었고, 우리가 그렇듯이 적응해가면서 얻는 작은
성공들을 기뻐하는 사람이었다!
폴과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각자의 어려움은 달랐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똑같았다. 북동 가정협회에서 계속 일하면서 나는 폴과 같은 사람들을 위한 퇴원후속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정신건강 계통에 대한 관심이 더 깊어져 나름대로 이론도
정립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간 기존체제 안에서 환자로서 살면서 그 체제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정신건강전문가로서 예전과 똑같은
체제 안에서 일하면서 그러한 문제들이 더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정신 건강을 위한 직업의 목적이 과연 사람들을 위한 것인지 단지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자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이 분야의 종사자들이 과연
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대해, 그들의 고유한 상태에 대해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일까? 소위 멋대로 '절망적'이라고 딱지를 붙여놓은 사람들을
어느 정도 희망을 가지고 대하며, 그들을 돌보기 위해 위험부담을 안고서까지 그
일에 봉사하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다. 오랜 동안
정신병원이라는 구조 속에서 만성우울병 환자로 잊혀진 존재가 되어 있었던 폴을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만나고 진심으로 돌보아줄 수 있었던 것이다. 폴의 경우는
그저 단순한 성공사례가 아니라 '전문 치료를 경멸하는 성공'사례인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일이 모든 이의 이해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공동체에
기초를 둔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또 이웃 사람들의 후원을 받기 위해 여러
모임들을 조직했었다. 서튼 읍 사람들과 만남을 가졌을 때였다. 어떤 사람 하나가
일어서더니 자기네 구역에 중간 단계 시설인 사회 복귀원이 들어서도 괜찮은지의
가부를 '토의'에 붙였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토론은 도전적인
결말을 향해 전개 되었다. 재산 소유권의 존중이라는 그럴듯한 구실을
합리화시키면서 정신병에 대한 편견과 고질적인 두려움을 감추고는
'무죄한' 주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둥 환자들이
'익숙했던' 병원생활에서 나오면 오히려 '불편'할 것이라는
둥 여러가지 이유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거 프로그램을 반대했다.
나는 일어서서 마이크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그런 모임의 관례대로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부드럽고 분명하게 그러나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여러분이
겁내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저도 한때는 서튼 주립병원의 환자였습니다. 저를
보십시오. 여러분이 배척하는 사람은 저와 같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두려워합니다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일 뿐 입니다>
나는 계속해서 내가 성에서 살았던 이야기에서부터 '미친 사람'들이
사는 곳, 언제나 '눈의 가시'라고 생각되는 성에서 나와 이 마을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용서치 않는 사람들, 적의마저 품고 있는
'이웃'들에게 마음을 열려고 노력하면서 정신 질환자들도 사람이며,
사랑이 필요하고 사랑을 주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역설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마을 사람들의 이해와 그리고 사회복귀를 위한 우리의 일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것뿐이었다. 내 말을 듣고 난 많은 사람들이 집을 짓는 데 보태쓰라고
나름대로 성금을 가지고 찾아왔다.
정신건강을 위해 일하고 환자를 돌보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북동 가정협회와 그 회장으로 있는 바칼 박사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 협회에 고용된 것은 조직에 대한 문제 특히 퇴원 환자의 후속 조치와 새로운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것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개발한 것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공동협력 프로그램이다.
협회에서 나는 아주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으로 같은 방을 쓰는 동료요 후엔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된 바르바라 톰슨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내가 바르바라를 처음 만난
것은 서튼 주립병원에서 사회사업가로 일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녀도 나처럼
임원이었다. 일년 내내 같이 일하면서도 나는 바르바라가 마더 이튼의 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성이 톰슨이었기 때문에 전혀 짐작을 못하기도 했지만
그때에는 나는 내 장래만을 생각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마더 이튼과의 관계를
거론할 기회도 없었다.
우리는 성에서 퇴원한 환자들을 위한 주거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일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도 나처럼 아주 최근에 혼자가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온
힘을 프로그램 개발에만 쏟았다.
우리는 YMCA 2층에다 다른 곳과는 다른 주거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모든
환자들에게 독방을 주었고 공동 부엌과 거실을 꾸미고, Y회원이 되게 했다.
프로그램에는 각 환자에 대한 평가와 지속적인 상담시간도 포함시켰다. 그리고
메사추세츠주에 대대적인 광고를 하여 이런 종류의 시설을 증설케 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워크숍도 개최했다. 함께 일을 해나가면서 해가 갈수록 바르바라와 나의
우정은 깊어져 갔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전문인으로서 깊이 있게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나로서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우리의 서로간의
존경과 사랑은 좋은 지도자로서 프로그램을 위한 협력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프로그램은 성공을 거두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사회 복궈원생들과 함께 살기 위해 늘 식량이 부족했다. 내 연봉으로는 겨우 집세와
자동차 기름과 보험료를 내는 정도였고 학비를 낸다는 것은 꿈도 못 꿀 형편이었다.
내 재정문제의 위기는 자동차세를 내리는 통지서를 받은 그날 닥쳐왔다. 은행잔고엔
남아 있는 돈이 한푼도 없었다! 끔찍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재난을 넘길 수가
있을까?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아 하느님께 도와달라는
기도를 했다.
몇 분 후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나는 시청에 전화를 걸어서 내 형편에 대해 설명을
했다. 담당자는 내 청원을 받아들여 분할 납부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거기에 용기를
얻어 나는 오랫동안 미루어왔던 나의 진학문제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팜플렛을
꺼냈다. 제대로 일하기 위해서는 물론 경제적으로 개선되기 위해서도 대학원을 가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용은 접어두기로 하고 여러 대학에 원서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돈은 마련될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겼다.
원서가 오자 나는 그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하버드 대학의 것이었다. 그곳 교육
대학원에 개설된 상담 심리학 과정인 커뮤니티 정신건강 프로그램은 내가 가장
배우고 싶은 것이었다. 명문 대학에 지원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밀어두고
우선 원서작성을 끝냈다. 원서작성이 끝난 날 저녁에 빙고 게임을 해서 400불을
벌었다. 나는 정말 신이 났다! 몇 주일간 쓸 잡비를 얻었다는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내게 전언을 보내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분명
모든 것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1981년 4월, 믿기지 않는 소식이 날아왔다. 하버드에서 나를 받아주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원래 신청했던 심리학 프로그램은 물론 교육대학원엔 그것 외에도
일년간의 경영계획과 사회정책에 대한 코스가 있다는 것도 알려왔다. 그러나 나는
심리학 코스를 택했다. 내가 무슨 수로 13,000달러라는 등록금과 그외에도 대학에서
소용되는 비용을 낼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일단은 어떻게든 학교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등록금 문제는 하느님 손에 맡기기로 했다. 학교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에 내
은행 잔고에 있던 돈은 78달러가 전부였다. 필요한 돈을 구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수단을 다 동원했다. 나는 바칼 박사에게도 새로운 제안을 했다. 내가 이
협회에서 계속해서 일하겠다고 하면 내 연봉의 사분의 일쯤을 가불해줄 수
있겠느냐고. 그 돈도 내가 필요로 하는 액수에는 부족한 것이었지만 하버드에 내야
할 우선 급한 액수는 충당될 수 있었다. 그가 기꺼이 승낙했다.
케임브리지에 살면서 보낸 하버드에서의 일년은 내 생애에 있어 특이한 경험의
때였다. 기숙사에는 인도,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미국 전역에서 온 학생들이
있었다. 나는 내가 각국에서 온 이렇게 우수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랍고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곧 알게 된 것이지만 모든 사람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어느 교수가 <당신의 왼쪽
사람을 보십시오. 이번엔 오른쪽 사람을 보십시오. 이제 학기가 끝날 때쯤이면
당신 혼자만 남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교수는 그저 농담일 뿐이라고
했지만 나로서는 패배의 귀신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학생들이
'그 농담'에 까르르 웃어대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웃기는 했지만
기분은 완전히 잡쳤다. 과연 내가 하버드를 마칠 수 있을까? 좀체로 자신감이 들지
않았다.
예쁘고 작은 가게들과 피가 끓는 젊은이들로 둘러싸인 케임브리지는 언제나 활력이
넘쳐 흘렀고 내가 한 번도 속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였다. 학업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읽어내야 할 과제물들이 끝도 없었고 또 써내야 할 리포트가 언제나
넘쳤다. 그렇게 고된 공부를 해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해는 정말이지
하버드에다 나의 희망과 온 정력을 쏟아 넣은 한 해였다고 할 수 있으리라. 종일
일을 하면서도 전시간 출석하여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대단한 노력을
요구하였지만 하버드에서의 공부는 어떤 일보다도 더 힘들었다.
북동 가정협회의 직원들은 내 편의에 따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모든 편리를
봐주었다. 나의 사정을 안 동급생들도 나의 편리한 시간대에 맞춰 시간표를
짜주었다. 학업이 시작된지 꼭 한 달이 지난 때였는데 그들은 나를 학교의 비공식
상담자로 공표하고는 내 방문 앞에다 <정신건강 상담-5센트>라고 써붙여 놓았다.
이것은 내 능력을 살리는 동시에 재정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이
역할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의기소침해 있고 두려움에 가득 찬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중에는 병원에 입원시켜야 할 여학생도 있었다. 이런 것을 체험하면서
나는 어느 누구도 파멸을 가져오는 정신 질환에서 자동적으로 제외되는 사람은
없다는 나의 신념을 굳히게 되었다. 그들이 지성인이든 아니든 그것은 아무
상관없었다. 내가 병원에 보낸 그 여학생만 해도 겉으로 보면 무엇하나 문제될 것이
없어 보였다. 그 여학생은 똑똑했고 집도 부유한 데다 아주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러나 그 여학생은 심각한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어느 날 밤에는 전혀 만날
일이 없겠지만 그 여학생과 폴은 똑같은 고통을 당하는 동반자였다.
하버드의 교수들은 모두가 훌륭했지만 특히 그 중의 한 분은 나의 제한성을
뛰어넘어 보겠다는 결심을 하는 데 큰 힘이 되어주었다. 총명하면서도 겸손한 그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점점 그분을 스승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한 가르침과 모범에 대한 보답으로 나는 최선을 다해, 아니 최선의
최선을 다해 그분의 과목을 파고들었다.
또 하버드에 다니는 동안, 나는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소수의 몇몇 친구들에게만
나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과거에 정신질환자였다는 것이 알려지는 것이
창피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남한테 알리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사람들한테 내 과거를
드러내게 되면 저 사람은 정신병자였다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대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교수님 시간에, 나의
과거에 대해 그리고 고통을 어떻게 국복하게 되었는지 그 괴로운 과정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 그 후로 나는 그 시간이 훨씬 편안하게 느껴졌고, 그
교수님을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그 강의를 듣는 다른 학생들도 이러쿵저렇쿵
개인적인 비판을 삼갔고 오로지 배운다는 마음으로만 임했다. 나는 두 학기를
연장하여 나의 정신 병동의 입원의 의미와 결과에 대한 리포트를 써냈다. 내 인생의
한 시절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그렇게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덕분에 몇가지 중요한 통찰을 얻을수 있었다. 교수님의 독려로 내가
논문에 인용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회학자에게 내 논문의 복사본 한 벌을 보냈다.
그리고 평가를 받았다! 그것은 나로서는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다.
교육 대학원의 동요들이 나를 졸업생 대표로 뽑았다. 나는 놀라울 뿐이었다.
그리고 졸업식날 마더 데레사 수녀가 하버드에서 명예학위를 받을 것이며 강연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너무 기뻐서 눈물까지 흘렸다. 그분의 사업에 크게 감명을
받고 있었는데... 그분을 뵐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단순하지만 사람의 마음 깊은
데를 움직여 놓는 그분의 학위수여식 연설을 들으면서 나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졸업식 날, 로빈이 코퍼스크리스티에서 다시 한번 와주었고 다른 옛친구들도 많이
와주어 나와 함께 기뻐해 주었다. 그날 나는 모든이의 관심의 초점이 되었고 얼마나
사랑을 받는 나인가 하는 것을 절감하면서도 그럴수록 조가 있었으면 나보다 더 좋아
했을텐데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내가 하버드에 갈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못 했겠지만 조는 분명히 알고 있었으리라. 텔레비젼 카메라가 졸업식 내내
나의 움직임을 카메라에 담았다. 몇몇 군데서 인터뷰 신청도 들어왔다. 한 군데서는
괴롭고, 예리한 질문에 대답해야 했고... 근 20년 동안 어떻게 정신병자로 있었으며,
정신병원에서 갇혀 지내던 기간 등에 대해 이야기해야 했다. 매스컴에 나의 과거에
대해 말하면서 나는 고통에 대해 강조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서튼
주립병원에서의 나의 체험을 듣고 내가 '미쳤다'라고 성급하게 결론
내리는 것도 싫었다. 그러나 어떻든 나의 이야기를 듣고 커뮤니티 정신건강
프로그램의 향상에 도움만 된다면 나는 나 자신이 어떤 정신적인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거듭 인터뷰를 하다 보니 완전히 편안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편안한 마음으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버드를 졸업하고 난 후 나는 계속 북동 가정협회에서 정신질환자의 입원과 감금,
주거치료 센터와 일반상담 센터의 프로그램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일했다. 그리고 많은
일반인과 전문인들 모임에 가서 내가 하는 일과 내 삶의 체험에 대한 강연을 했다.
짐작하건대 사회 봉사 분야에서는 메사추세츠 주에 내 이름이 꽤나 알려진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내가 1983년도의 놀라운 여성상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었다.
터져 나오는 갈채소리는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강당
단상으로 올라가 존 챈슬러, 시실리 타이슨, 리그랜트, 주디 콜린스와 같은 명사들
사이에 섰다. 그리고 놀라운 여성상을 받았다. NBC의 앵커우먼인 캐런 잰킨스가
나의 약력을 큰소리로 소개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작고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며 그러한 나이기에 더욱 감사로운 마음으로 서 있었다.
앵커우먼이 내가 인생의 온갖 위험과 역경을 용기있게 이겨냈기 때문이라는 수상
이유를 또박또박 읽었다.
그날, 상패를 손에 받아쥐는 순간 나의 모든 고난은 아주 작아져 멀리 가버린
느낌이 들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내 마음속에 흘러 넘치는 생각들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도 이 상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
이 상은 많은 이들에게, 특히 내가 봉사하고 있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말했다. 또 이 영예가
나 혼자만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오히려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
배척받고 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여러분 모두가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알고 받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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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부인, 당신은 신경증 정신병 환자를 퇴원시켜 지역 공동체에 살게 해야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오히려 당사자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요?> 정신건강을 위한
회의가 막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맨 앞 줄에 앉았던 부인이 물었다. 수없이
들어오던 질문이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 부인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질문자의 대부분은 친지 가운데 누군가 아픈 사람이 있는데 준비가 잘
안 된 채 사회로 돌아온 탓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일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환자를 퇴원시키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환자와 그를 받아들이는
지역사회 모두가 준비를 갖추어야 하며 그래야 효과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신경증
정신병환자는 절대 밖에 나와서는 회복할 수 없다는 식의 고정관념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우리는 그들 모두에게 병이 나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나는 내가 겪었던 절망적인 시절의 예를 들었다.
다음 질문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앙고백이라고 해도 될만한 것이었다. 키가
작고 뚱뚱한 여자가 일어섰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예전에 정신병 환자였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런 직감은 환자들과 함께 살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이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발터 부인의 말이 옳다는 것입니다> 하고 뚱뚱한 여자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분의 말이 맞아요. 저를 보십시오. 저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병원 사람들은 나에게 절대 나갈 수 없다고 했지만. 저는
지금 여기 있고... 저분도 저기에 있지 않아요. 저분이 말한 것은 옳습니다> 그녀는
어색하게 일어나서 어눌하게 말하고 않았지만 그 발언은 완벽했다.
그녀가 말하는 동안 청중들은 모두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가 앉자 모두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청중들은 마음으로부터 그 말을 들었던 것이다.
놀라운 여성상을 받고 난 후, 나는 강연에 초대되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러나
공적인 인물로서 산다는 것이 나에겐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질환자를 자기들과 똑같은 인간으로 보려는 준비태세가 되어 있지 않은 탓에
그들을 정신병원 같은 시설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런 사람들은 내 의견에
대해서 적대적이고 금방이라도 덥벼들 듯이 날카로운 질문을 퍼부었다. 또한 매번
내 자신의 병과 회복과정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과거의 슬픔과 고통을 다시 건드려야
하는 개인적이 괴로움의 대가도 치러햐 하는 것이 싫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내 일생을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바치겠다고 하느님과 서약을 했고, 그
서약은 지금까지도 지켜져오고 있지 않은가. 내 생명은 하나의 봉헌물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일을 할 수 있다면 나의 과거의 고통이나 현재의
불편함은 오히려 보람이 되리라. 또한 내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보다
더 확실하고 자신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공적인 인물이 되자 내 인생의 또 다른 놀라움을 가져오는 일이 생겼다. 리
그랜트가 내게 다가오더니 마를로 토머스가 내 역을 맡기로 하고 텔레비젼 영화 한
편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말은 좀 차이는 있겠지만 진짜 헐리우드식이었다. 이런
것은 영화계의 스타에겐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에게 생길 일은 아니었다.
첫 흥분이 가라앉자 나는 몹시 망설였다. 매스컴에 대한 먼젓번 체험들, 특히
신문들이 나에 관해 그저 피상적으로만 다루고 마는 것을 보고 나는 완전히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수많은 기자들과 면담자들은 내 이야기를 흥비 위주로 다루어
끽해야 병동에 대한 이야기나 내 삶의 비극적인 면만을 강조하고 게다가 툭하면
도드라진 볼드체로 <지린내가 온 사방에 진동하다>라는 식의 제목을 뽑는 기사를
볼 때마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이제는
면담자가 어떤 쪽으로 이야기를 몰고 가려 하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유도 질문'을 알아차리게 되면 나는
그에게 내 인생 역사에는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부분들이 많지만 과장해서 다루지
않기를 바란다고 못을 박아놓곤 했다.
그러나 리 그랜트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리고 마를로 토머스를 만나고 나니
허락해도 좋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들은 특이한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나는
수천 수 만의 사람들, 어쩌면 내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영화를 통해서라고
알게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들을 믿고 내 이야기를 영화화하는 데 동의했다.
<누구의 아이도 아닙니다>가 영화의 제목이었다. 소름이 끼쳤다. 장면 장면이 바뀔
때마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영화는 너무 사실적이어서 마치 나의 과거가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아 두렵기조차 했다. 이것은 지금 나와 한집에 살고 있는
바르바라톰슨 같은 사람의 후원과 이해로 이루어졌따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마음은 마를로에게로 갔다. 그녀는 마리 발터 역을 맡으면서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느꼈던 것 같았다. 마치 나와 여정을 함께 하고 잇는 것처럼 나는 그녀가 몹시
가깝게 여겨졌고 오늘날까지도 그녀는 나의 좋은 친구로 남아 있다.
<누구의 아이도 아닙니다>는 크리스토퍼 상을 받게 되었고, 라를로는 에미상을,
리 그랜트는 감독협회상을 받는 최초의 여 감독이 되었다. 영화는 나를 좀더
자신있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어두웠던 내 인생의 한 부분에 대해 긍지를 갖게
해주었다. 나는 내 생애에 관한 이야기가 오락물이 되기를 절대 바라지 않는다.
<누구의 아이도 아닙니다>는 CBS의 일요일 밤 특집으로 방영되었고, 그것을 본 많은
사람들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구의 아이도 아닙니다>가 방영되고 난 다음부터 정신건강분야에서의 내 직업은
강연 쪽으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다.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된 사람들로부터
강연을 해 달라는 초대를 수도 없이 받았다. 북동 가정협회를 떠나면서부터 강연이
나의 수입원이 되었다. 강연이 나의 유일한 수입원이고 내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오랜동안 겪어온 어려움과의 악전고투에 대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한 새로운 역할에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은 있었다.
강연이 끝난 다음이면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마치 내가 별난 사람이기라도 한
듯이 만져본다든가 아니면 그냥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신비로운 기운이라도 입을 수
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을 볼 때면 나는 정말 난감했다. 나는 단지 많은 고통을
겪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고 비록 나와는 같지 않더라도 우리 주위에는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많은데, 도대체 이렇게 뭇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돕는 길은 자기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애썼다. 그리고 언제나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했다. 나는 나의
고통에 가득찬 생애도 하느님의 섭리로 인도된 것이며, 그 고통을 건설적이고
적극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게 한 것도 바로 신앙이었음을 믿는다.
사람들은 비단 정신병에 관한 것만 아니라 갖가지 것에 나의 조언을 구했다. 대중
앞에서의 강연은 나 자신을 시험하게 되는 기회도 되었다. 그러다가 때로는 자만하는
우행을 저지르기도 했고 사람들이 나를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것을 보고는 마치
굉장한 전문가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럴 때야말로 기도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강단에 올라갈 때마다 겸손을 주십사고 기도했다. 나는 다른
이들을 위해 내 삶의 역사를 들려주려는 것이지 내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매 강연 때마다 나는 정직하게,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말하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사실 나로서는 기본적으로는 같은 이야기를
여러 차례 하는 것이었지만 듣는 이들에게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이러다가 내가 그저 기계적으로 입만 놀리는 연설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커져 나는 진실되게 내 이야기를 나누게 해달라는 기도를 쉴새없이
했다.
강연을 한다는 새로운 내 직업의 또 다른 한 가지 어려움은 이 일로 인하여 받는
사례금에 대한 웬지 꺼림칙한 느낌이었다. 내가 돈을 필요로 한다는 것에는 아무런
의문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이 일을 하는가에도. 이 일을
하려면 많은 여행을 해야 하고, 한 강연이 끝나고 나면 몸을 가누기가 어려울 만큼
탈진이 되었다. 그러나 때때로 나는 내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희망의
메세지를 전하는데 과연 돈을 받아야 하는 건가? 희망을 팔 수 있는 건가?'
대답은 분명했지만 문제는 영영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나에게서 나의 고통의
세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희망의 메세지를 선물로
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주는 강연비를 그들이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 주는 선물로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런 정신으로 내 생활비로 적당한 몫을
떼어놓은 다음에 정신건강 프로그램의 발전을 위한 비영리 단체인 발터 협회를 위한
자금과 여러가지 자선기금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어쨌든 묘하게도 지금 나는 공인이 되었으며, 내 생애의 역사는 공적인 자산이
되었기에 이제는 조금씩 더 내 개인 삶에 마음을 쏟기로 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될 수 있는 대로 보통사람 마리 발터로 돌아오려고 했다. 나는
의식적으로 지난날을 생각하지 않고 과거에 대한 이야기도 거의 하지 않았다.
나는 또한 현시대의 정치문제에 대해, 특히 제3, 제4 세계 사람들의 참상과 그들이
부르짖는 인권과 정의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의 개인 생활에 활기를
줌으로써 대중 앞에서의 나의 강연 역시 풍부하게 되고 알찬 것이 되었다. 이렇게 내
개인생활에 내실을 기해감으로써 무엇보다도 중요한 나를 이끌어 가는 요소는
영적생활이라는 것을 재삼 인식하게 되었다.
공인이 되다보니 그 동안 만날 수 없었던 사람과의 재회도 가질 수 있었다. 열여섯
살짜리 마리 바르텔로의 문학에 대한 사랑에 빛을 주었던 니키 수녀를 기억하시는지?
내 첫번째 진지한 친구. 내가 '성녀 테레사의 집'을 떠나게 되던 날부터
지난 40여 년간 나는 매일 그분을 위해 기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분의 나이를
생각할 때 나는 그분은 필시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니키
수녀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나는 즉시 메릴랜드로 날아가 니키 수녀님을
껴안았다. 그분은 지금 노인이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작고 따스하고 마음이
너그러웠다. 4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고 밀리고 밀렸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내 이름이 공적으로 알려지게 되자 내게 소중했던 사람들과의 재회가 많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최근에는 내가 엄마 아빠와 같이 살 때 그곳에서 같이 지내던
코흘리개 친구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이 모임을 우리가 살던 옛 거리의
이름을 따서 비치 코트회라고 불렀다. 얼마나 감격적이었는지! 우리의 모임은 몇 년
전 내가 박사학위를 받았들 때 축하한다고 글로스터에서 감사만찬을 가진 때
결성되었다. 많은 배꼽 친구들이-물론 지금은 모두 성인들이 되었지만-와서 자리를
같이 했다. <우리 옛 친구들끼리 모임을 하나 만듭시다>라고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말해 왔다. 그리고 모임이 결성되었고 그 결합은 활기에 차 있었다. 우리는
'좋았던 옛날'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를테면 부두로 수영하러
갔던 일, 보트가 들어오면 동전을 주으러 물 속에 뛰어들던 일, 7월 4일 바닷가에서
열렸던 축제 등의 것들이었다. 나는 차츰 글로스터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이 정말
좋았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용서하려는 마음이 더 깊어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어려움과 상처로 가득 차 있고
또 비록 그릇되고 이지러진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부모님은 그들 식으로 사랑을
주려고 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비치 코트 회의 재회를 통해 내가 어렸을 때 언제나
함께 놀고 싶어했던, 그러나 친구에 대해서 엄격한 제재를 가했던 엄마 때문에
이루어질 수는 없었던 그 아이를(지금은 부인이지만) 만났다. 우리는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네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리> 그녀는 마음이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놀고 싶었어...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는 사실 지금까지 왜 함께 놀 수가 없었는지 알 수가 없어> 나는 그에게
용서를 청하면서 동네 친구를 사귀는데 대한 엄격한 엄마의 태도 때문이었다고
설명해주었다. 모임이 끝날 때 그 부인은 그곳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아름다운 말을 했다. <고맙다, 마리. 우리와 함께 놀지 않던 네가 ...이제는 우리를
한데 불러모아 주었구나> 그녀도 울고 그리고 나도 울었다.
내가 겪어낸 투약실험 계획, 막대한 양의 스텔라진을 투여받았다는 이야기는 듣는
사람마다 모두 경악을 했다. 그들은 나에게 강압적으로 실시했던 프로그램의
악랄함에 대해 어쩌면 그럴 수 있느냐고 분노했다. 약을 받아 먹으면서도 나 역시
몹시 분노했었고 얼마 후 나는 성을 나올 수 있었다. 병원 체제나, 그런 것을 내게
실험한 미스 웬들과 베일러 의사를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지만 나는 언제나 그 이면을
보도록 했다. 즉 미스 웬들과 베일러 의사는 내게 도움이 되어주려는 것뿐이었음을
믿고 있는 것이다. 퇴원을 한 후 여러 해를 지내면서 나의 분노도 어느 정도
가라앉게 되었고 마음속에서부터 두 분 모두를 용서하게 되었다.
베일러 의사도 이젠 연로하시고 우리는 간단한 편지로나마 관계를 계속하고 있다.
한편 미스 웬들과는 지속적인 교류를 갖고 있다. 아직 한 번도 투약 프로그램에
대해선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미스 웬들은 지금까지도 나를 '보살펴
주고' 있다. 전화로라도 일이 잘 되어가는지를 묻고 잘 먹어야 된다고,
몸조심하라고 누누이 말씀해주신다. 어느날 나는 그분을 찾아가 언제나처럼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눴다.
그분은 나를 바라보며 어조를 바꾸더니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그 약이 네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었고... 그래서 베일러 의사와 나는 그 끔찍한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는 나의 침묵의 응답을 받아들였다. <나는
벌써 당신을 용서했는걸요>
나는 자주 엄마 아빠의 친척인 내 가족으로부터도 전화를 받았다. 그들 중에는
내가 글로스터에서 자랄 때 나를 거부하고 거칠게 대하던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공공 의료서식을 어떻게 써야 되는지,
아니면 오랜 동안의 병고로 고통을 당해 위로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을
돕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에 대한 실망, 어린 시절 나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미움 등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됨을 느꼈다.
나는 또한 내가 당한 수많은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나에게 <당신은 정신병원에서 잃은 수많은 세월이 아깝게 생각되지 않는가?>, <성에
있으면서 당신이 당해야만 했던 불필요한 고통에 대해 화가 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교회에서 내 인생의 비극적인면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겠다고 맹세한 이후 나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 그리고
내가 겪었던 모든 고통은 좀더 가치있는 목적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굳게 믿었고
그것은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돕는 데 힘이 되어 주었다.
성에서 살았던 많은 세월은 결코 '잃어버린' 세월도
'허비한' 세월도 아니었다. 그 시간들은 오늘을 위한 준비와 배움의
시간들이엇다. 그 시간들은 절망으로 가득한 황량한 세상에서 희망을 싹틔우는
귀중한 나날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준비에는 용기가 필요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않고 준비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어려움들 딛고 일어난 용감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곤란을
극복한 것은 용기가 아니었다. 용기란 위험한 상황에 의도적으로 자신을 투신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고통을 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성에 들어간 것도, 그
상황에 말려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그곳에서 다시 한 번 내 고통의 깊이를
알게되었고 그래서 나 자신과 싸우는 것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회복의 길을 택한 것은 당신이 아니냐고 말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하나님께서 내게 영감을 주셨기에 택한 것일 뿐이다.
내 인생은 아직 만개하지 않았다.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직도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나는 결코
두려움이라는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 환각과 환청을 듣고 공포에 떠는
사람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이방인으로서
정신병원에 살고 있다. 또한 나는 정신병원을 떠나고 싶어 몸부림치는 이들, 준비가
안된 채 현실 세상에 들어와 자기들을 반기지 않는 사람들 틈새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은 우리의 도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들이야말로 '내 사람'인 것이다. 나도 과거에 그들 중에 하나였고,
앞으로도 그들과 함께 할 것이며 그들 중의 하나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언젠가 그들 자신이 말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고 싶고 희망이 없는 곳에 희망을
심어 주고 싶다. 우리는 사람에 대해 결코 포기하면 안된다. 절망적인 경우란 없다.
우리가 그들을 격려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사랑으로
대해 준다면 그들은 분명 어떤 반응을 보내올 것이다.
지금 나는 현대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절망적인
상황이 나라와 국민들을 침범하고 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할 근본적인
필요성을 부인하는 모든 사람, 그들이 제3세계와 제4세계에 존재하든 제1세계와
제2세계 안에서 호화생활을 하든 우리는 그 부를 과감히 나눌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줘야 한다. 우리가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 힘을 포기해야 한다. 즉 다른
사람에게 힘을 기르도록 해 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을 포기함으로
그들이 자신의 힘을 갖출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마더 데레사는 내 삶에 영감을 주었다. 그 분이 희망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나도 내 삶을 희망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바치고 싶다.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길어내듯이 나도 하느님 뜻의 종이 되고싶다. 최근에
나는 나의 영성생활이 깊어지고 있고 내적 힘이 증가하고 있음을 느낀다. 나의
이 작은 이야기는 다만 내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뜻의 표현일 뿐이다. 내가 귀하게
여기는 구약성서의 구절을 이즈음 들어서 더욱 내 마음에 깊이깊이 새기게 된다.
<하느님, 부서진 이 내 마음으로 당신께 제단을 쌓으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