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게보르크 바하만 동시에
동시에 전3권 중 제1권
잉게보르크 바하만
(작품해설)
비상을 향한 날개짓
(다섯 편의 소설을 통해 본 바하만의 세계)
이 책은 아마도 이 안에 표현된 생각(아니면 최소한 그와 유사한 생각)을 스스로 이미 해본
자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를 가지고 이 책을 읽는 이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 책의 목적은 달성되는 셈이다.
작가로서의 출발기에 잉게보르크 바하만에게 사고와 언어의 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역시 바하만과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 그의 저서
"트락타투스 로기코, 필로조피쿠스"의 서문에서 위와 같이 밝혔다. 이 구절은 작가 바하만의
글을 대하는 독자에게도 해당되는 얘기가 될 것 같다. 그녀의 글은 얼핏 봐서 접근이 어렵다.
연대기적인 스토리도 없고 아기자기한 심리묘사도 없다. 사건의 긴박한 진행을 좇는 데 익숙해
있는 독자나, 센티멘털한 감정의 농축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바하만의 작품에서는 거의 걸러낼
것이 없어 실망할는지 모른다.
그녀의 글에서는 아름답고 다감한 표현이나 친절한 설명을 기대하기 어렵다. 때로는 너무나
일상적으로, 때로는 충동적으로 보이는 주관적 사고의 편린들이 문장의 주류를 이룬다. 이 흐름을
무턱대고 따라가는 독자는 건질 것 없었다고 허망함에 책을 놓게 되기 쉽다. 아니면 끝까지 읽고
난 뒤에야, 그것이 아니었다는 희미한 자각이 들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될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녀의 작품은 애초부터 깨어 있는 인식능력을 가진 독자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작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스스로 이미 해본" 독자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글에서는 하찮아 보이는 단 한 줄의 문장, 단 하나의 점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엄격한 정신을 싣기 위해 각고를 치러 선택된 언어요, 궁극적인 전체를 이루기 위한
불가결의 자재임을 우리는 전제해야 한다.
1953년 서독 마인쯔에서 열린 "47그룹"의 회의에서 23세의 바하만은 최초로 그녀의 시,
"유예된 시간"을 들릴락말락 떨리는 목소리로 낭독했다. 이 주저스러운 등장이 불과 며칠 뒤
"슈피겔"지의 표지인물로 부각되는 비약적인 영광으로 이어졌고, 이렇게 그녀는 전후 황폐한
독일어권 문단에 혜성처럼 떠올라, 시를 읽지 않는 모든 독자들에게까지 사랑과 명성을 얻는
독보적 존재로서 위치를 굳혔다. "유예된 시간""대웅좌의 부름"의 두 편의 시집 이후 바하만의
시어는 침묵하고 만다. 그리고 73년 로마에서 의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17년, 그녀는 두 편의
방송극("여치들""맨하탄의 선신"), 두 편의 단편집("30세""동시에"), 그리고 한 편의
장편("말리나")등 많지 않은 산문으로 일관했다. 결코 다작이 아닌 그녀의 문학활동은 긴 침묵
끝에 발표될 때마다 찬탄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브레멘 시 문학상, 게오르그 뷔히너상,
전쟁맹인협회 방송극상, 오스트리아 국가상 등 수많은 보상이 주어졌다.
우리나라의 독자들에게 바하만의 존재는 아이러닉하게도 그녀의 센세이셔널한 죽음과 함께
알려졌다. "동시에"는 1972년, 작가의 죽음 1년 전에 발표된 최후 작품집이다.
이 책을 소개하기까지 역자는 몇 년을 붙들고 주저하고 있었다. 좀더 아끼고 보류해 두고 싶은
개인적인 애착이 일부 있었고, 그보다는 바하만과 우리의 독자 사이에 다리 역할에 충분한
자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말리나"와 "30세"를 읽은 독자들에게서 역자는 여러 번 이런
소리를 들었다.
"읽을 때는 뭔가 정신없이 빨려들어갔는데 읽고 나니까 잡히는 게 없어요."
"바하만의 작품은 참 어둡던데요."
그러면 역자는 마치 바하만의 대변인이 되어야 할 것 같은 입장이면서도, "그것은 휴식을 위한
책이 아니에요. 밝음을 갈구하는 책이라서 어두운 게 아닐까요"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말았고
웬지 나의 입장도 석연치가 않았다.
얼마나 어렵고 무모한 일인가. 전혀 다른 문화권에 뿌리박은 한 작품을 무턱대고 옮겨놓는
일이란. 이 갭을 조금이라도 좁히겠다는 노력으로 여기 역자의 짧은 식견이 닿는 한 몇 가지
해설을 덧붙이며, 이것이 더 큰 오해를 낳는 길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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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다섯 여자의 이야기
여기 수록된 다섯 편의 작품은 각기 독립된 작품으로 이해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개별적인 작품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는 다섯 작품을 하나의 조망 위에 놓을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서 작가 바하만의 다른 작품과 외연하여 연관된 관점 위에 놓고 보면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다섯 작품에는 공통인수가 있다. 오스트리아, 특히 빈 주변 출신의 오늘의 여자의 이야기이다.
그들을 구심점으로 하여, 그들이 겪는 사랑, 그들이 만나는 남자, 가족관계, 그들이 종사하는
일이 기본적인 소재를 이루며, 과거의 영화가 사라져 간 합스부르크 가의 퇴영적인 빈의 언저리
분위기가 배경을 이룬다. 이렇게 모든 바하만 작품을 싸고도는 몇 가지 갈등적 주제에 포커스를
맞추어 이 책에 실린 작품 전체에 접근하는 방법을 모색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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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문제
다섯 단편의 중심 테마는 사랑이다. 더욱 엄밀히 말하면 "사랑의 부재"위에서의 사랑의 모색
과정이다. 바하만이 지닌 사랑, 그 중에서도 남녀간의 사랑의 기조는, 완전히 격리된 세계 안에
갇힌 절대적인 것, 비사회적이며 폭발적, 아나키즘적, 비이성적 요소이다. 사랑에 대한 작가의
이런 근본이념은, 사랑에 빠진 뉴욕의 여대생 제니퍼를 희생시키는 "맨하탄의 선신"의 판결에서
이미 명료히 드러나 있다. 이러한 사랑은 세상 안에서는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이들은 이 불가능을 추구하여 세상의 질서 밖으로 도피하는 시행착오를
거듭한다.
"동시에"는 제목이 시사해 주듯, 찰나적인 공유의 시간만을 허용하는 사랑을 슬로 비디오
식으로 좇아가며 전개되는 글이다. "복잡해질 사연이 아무것도 없음"을 미리 확인하고, 돌아갈
거점을 배수진으로 하고 출발한 두 남녀의 시한부 사랑은 애초의 틈을 좁혀 기적을 만나지
못한다. 차가 달리는 동안 나드야는 잠시 생각한다.
이 순간 더 이상의 기대를 꺾고 그를 운전대로 밀쳐 버린다면, 그리고 약간만 운전대를 뒤틀어
버린다면, 그녀는 그와 뒤엉켜 엎어질 테고, 단 한 번의 공속을 누리며 후회 없이 그와 함께
추락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세상의 편에 살아남는다. "아무 울림도 없는 두 개의 술잔"의 부딪침처럼 이들
남녀의 동시적인 부딪침은 역시 허망한 시도임이 재확인된다.
모든 "문제들, 문제들"을 도피하여 사는 빈의 처녀 베아트릭스와 35세 된 기혼 남자
에리히와의 만남은 잉제화된 사랑의 단면도이다. 베아트릭스는 망각의 세계로 허상의(거울로
둘러싸인 미장원)로 도피한다. 자기의 "환각 속에서 만들어 낸 오아시스"요, "섬광의 기쁨"이라고
그녀를 찬양하는 에리히는 그녀의 나르시즘적 허상의 세계를 입증해 줄 대상으로서만 존재
가치를 지닌다.
베아트릭스와는 달리 "그녀의 행복한 눈"의 미란다는 사랑 속에 안주하기 위해 장님이다시피
한 시력으로 도피한다. 사랑하는 요제프의 주름살을 "끊임없이 보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그녀는
두려워하며 "선명하게 볼 수 없는 상태에 머물면서 그로 인해 자신의 감정이 손상을 입거나
약화되지 않을 수 있는 편"을 택한다.
"개 짖는 소리"는 남녀간의 사랑을 떠나 근원적인 인간 관계에서의(가장 가깝다고 하는 혈육
관계에서의) 사랑의 부재를 파헤친 작품이다. 요르단 노파와 아들 레오 교수간의 외견상의
효자자모의 관계는 두꺼운 위선의 피각을 쓰고 있다. 젊은 프란쯔스카 요르단이 때묻지 않은
사랑으로 이들 모자간의 사랑의 단애에 가교 역할을 시도하여, 마침내 노파의 일생에 있어서 두
번밖에 없었던 아지랑이 같은 사랑의 기억(키키와 누리)을 되살려낸다. 그러나 마치 "두 전선의
틈바구니"에 낀 것처럼 되어버린 프란찌스카는 갸륵한 뜻을 이루기는 고사하고, 스스로가 이
틈에 빠져 파멸한다. 이 허위의 관계는 노령이 동반하는 망각으로 끝난다. 그것은 해결이 아니라
소멸이다. "개 짖는 소리"는 위선적 관계의 종단, 죽음의 암호이다.
"호수로 가는 세 갈래 길"의 여류사진사 엘리자베트 역시 바하만의 모든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행복한 세속적 결혼을 등지고 사는 여자이다. "그녀가 찾는 남자들이란 번번이 좌초한
인간들"이고, 그들 역시 "발판이나 추천을 위해 그녀를 필요로 하는" 관계를 형성한다. 자주
기만하며 이용하는 관계 위에서 접촉의 빈도가 잦아져 가면서 남자에 대한 그녀의 관심도
비례해서 엷어져 간다. 오늘의 그녀는 무엇 때문에 과거의 자기가 상실을 겪을 때마다
아파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지금, 일과 출세의 장소인 파리를 떠나 트롯타 가문의 본고장
카라반켄으로 이어지는 고향의 호숫가에 서서, 그녀가 자기의 진정한 사랑이었다고 확인하는
대상은 잃은 자요, 방랑아였던 프란쯔 요제프 트롯타이다. 그가 그녀에게 중요한 존재로 부각된
이유는 그녀로 하여금 사물에 대한 인식을 눈뜨게 해준 점이다. 그는 "그녀를 기적에서
소외시키고 그녀에게 운명적 이방인에의 인식을 심어준" 것이다. 안경을 가져다 준 요제프(그의
이름도 트롯타와 같이 요제프이다)에게 품는 미란다의 사랑의 의미가 시력을 찾아준 감사의
마음과 묶여 있듯이, 엘리자베트에게도 사랑의 의미는 인식에의 점화와 연결되어 있다.
이같이 인식과의 장력상태에 있는 사랑의 실체를 포착하는 것, 이것이 바하만이 추구하는
사랑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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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과 지식의 문제
잉게보르크 바하만은 인스부르크, 크라츠, 빈에서 법률학을 공부하려다 중단, 철학을 공부하고
1950년에 "마르틴 하이데거의 실존 철학의 비판적 수용"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의 문학작품은 근본적으로 철학과, 그것도 실존철학 및 빈 중심의 신긍정주의와 결합되어
있고,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카알 구스타프 융 등의 심리철학자와 융화되어 있다고 해석된다.
그녀의 장편 "말리나"에는 여주인공이 엄청난 지식을 흡수한 뒤 한 권의 요리책을 갖지 못함을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파우스트적 탄식은 바하만 작품의 근본 음조를 이룬다. 그녀의
작품의 도처에 머리 들고 있는 지식에 대한 혐오, 회의, 지식인의 절망을 일부 비평가들은
"사회와의 융화의 불능"에서 오는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음조를 타인과의 관계,
외계와의 관계에서의 투쟁이 아닌, 개체인 한 인간의 자아 안에 자리잡고 있는 "지적 요소"와
"감성적 요소"의 갈등으로, 분열로, 지양을 모색하는 이원론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여류통역사 나드야는 완전히 메커니즘화한 자신의 지적 모색의 종착역을 한탄한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전인적으로 빠져들어가야 하는 일이라니까요. 하긴 배전반이라면 간단히
그렇게 조작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동반자인 유능한 FAO 외교관 프랑켈 씨도 세계 역사를 움직이는 일과는 무관하게
축소되어 기계의 부품으로 화한 자기의 맡은 바 일의 한계를 말한다. 이들 둘 이른바 현대의
지성인들은 근본적으로 당면한 문제가 무엇이며 실제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제시해 주는
"홀연한 각성"이 있어야겠다고 고백한다.
잠과 미장원이 생활의 의미의 전부라고 주장하는 한심한 처녀 베아트릭스는 학문의
패러독시컬한 안티테제로 등장하여 그 한계를 조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녀는
도저히 일 같은 건 못하고 말리라는 것을, 더구나 공부 따위는 결코 계속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명백히 알고 있었다. 특히 일을 하는 모든 여자들이야말로 그녀한텐 지겹게 생각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슨 결함을 가졌거나, 숱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거나, 스스로를 남자들한테
착취당하게 하고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 그녀는 결코 스스로를 착취시키지
않으리라.
고 생각한다. 대학 공부를 하고 박사를 취득하고 악착같이 일하는 모범생인 그녀의 사촌
엘리자베트가 마렉이라는 못난 남성에게 걸려들어 갈팡질팡하는 어리석음과 무분별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간파한다.
동화 속의 여주인공처럼 사랑의 온실 속에 안주하려는 미란다는 지식과 인식의 통로인 안경을
회피한다. 확산 렌즈를 통한 교정의 힘을 빌어 들여다보는 세계를 그녀는 지옥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이 동반하는 허구성에 대한 작가의 통찰은 "개 짖는 소리"에서 날카롭게 드러나고 있다.
"학자 집안"에 대한 요르단 노파의 무작정 동경은 애초부터 무지와 허위를 발판으로 하고 있다.
"천재적 의사로서 고난에 찬 형극의 상승길"을 걸어온 레오는 인간적인 내용이 빠진 토대 위에
지식의 성을 쌓는다. 그에게는 결혼도, 사랑도, 은혜도 목적의 수단이다.
레오는 아무튼 책임에 관한 한 상기하기를 싫어했다. 과거의 여인, 어머니까지도 그에겐
채권자들의 공모를 의미했고 스스로나 남들 앞에서 이들을 깎아내림으로써만 이들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그가 획득한 학문의 실체는, 외계와 타인을 향한, 심지어 스스로를 향한, 이기적인
알리바이의 탈을 쓰게 된다. 그는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의 무능력자일 수밖에 없다. 학문이라는
가면을 쓴 에고이즘을 투시하는 존재로 한 마리 개 누리가 그를 보고 짖어댄다.
우연의 힘을 입어 지식인의 테두리에 살며 그 사명감을 역설하는 엘리자베트를 향해 트롯타는
선험적인 지성인의 소리를 들려준다.
모름지기 우린 읽어야 되지. 그렇지만 읽기 전에도 우린 이미 모든 걸 아는 거요. 그런데
당신은 마치 안 읽으면 그걸 알 수 없다는 듯이 샅샅이 읽는구료 깨닫는 것으로
충분치 못해서 말이오!. 나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나쁘다고, 사리를 분별할 능력이 막혔다고, 항상
잃은 자라고 보진 않는다오.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 보고 있소. 안 그러면 인간이란 몇 가지 법령
외에도 기사랑 "가혹한 소재"를 필요로 한다고 믿는 당신의 소견이 무너질 테니까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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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문제
사랑의 부재 위에서의 역설적인 사랑의 추구, 지식의 허구성을 고발하는 가운데 드러내는 역시
역설적인, 지식에의 숙명적 의존이 바하만에서는 언어의 바탕 위에서 일어난다.
새로운 언어는 새로운 보행법을 가져야 하며 이 보행법은 새로운 정신이 깃든 곳에서만
가능합니다.
프랑크푸르트 초대 강의록에서 바하만은 위와 같이 말했다. 언어의 문제는 그녀의 작품의
구조적 요인을 이룬다. 그녀에게서는 언어 안에서 새로운 것이 일어나야 하며 언어야말로
불가변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예술, 빛, 사랑처럼 그녀의 시계에서는 언어가 구세주처럼 어둠에
대치한다. 따라서 그녀의 문학은 사고와 통찰의 걸러냄 없이 받아들여진 언어, 무의견의 언어,
"사기꾼의 언어"("30세"의 물의 언어를 상기할 수 있다)에 맞서서, 진실을 실은 궁극의 언어를
추구하는 길이다.
"동시에"에 복잡하게 드러낸 4개 국어의 병용과, 런던의 호텔에서 쓰던 "저주스런
에스페란토"를 회상하는 엘리자베트의 비판은, 작가가 추구하는 궁극의 언어의 모색 과정의
청사진이다.
"기적"처럼 잡힐 듯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 궁극의 언어는 번번이 바하만 주인공들의 사랑의
출발점이다.
실로 십 년 만에, 다시 이런 운율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니,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이랴!.
더욱이 빈 출신의 인물과 여행을 하는 일이란! 그들 둘 다 바로 같은 도시 출신이며, 서로
비슷한 방식으로 말을 하며 어떤 유의 말은 제쳐놓을 줄 안다는,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이 사내야말로, 그녀에게서 날아가 버린 어떤 향취를, 잃어버린 음조를, 다른 어느 곳에서도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고향이라는 신비스런 색채의 감정을 되돌려줄지 모른다는 느낌이
그녀 자신에게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드야에게나 마찬가지로 엘리자베트에게도 사랑의 가능성을 열어 준 촉매제는 번번이
상대방이 쓰는 같은 방식의 언어이다. (트롯타와의 만남, 그의 죽음 이후 만느에게 연결되는
사랑.)
이에 반하여, 우리 모두가 의식 없이 쓰는 "사기꾼의 언어"에 대하여 작가는 베아트릭스를
통해 역설적으로 고발한다.
베아트릭스는 특히 양심, 허물, 책임, 분별 같은 단어들을 좋아했다. 그럴싸하게 들리면서도
결국 아무 내용도 말해 주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모름지기 사람들은 타인에게 전혀 아무 내용도
말해 주지 않는 단어들을 상호간에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타인들과 어울리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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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의 의식: 오스트리아
바하만 소설의 주인공은 빈을 중심으로 하여 사는, 또는 그곳에서 태어나 떠나 사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이다. 합스부르크 가의 화려한 과거의 후광을 업고 퇴영한 역사적 분위기에
담긴 오스트리아인이라는 의식, 이 실향의 의식을 단순한 민족의식이나 몰락한 귀족의
노스탤지어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1926년, 유고슬라비아와 이탈리아가 접한 지역, 케른텐 주의 클라켄푸르트에서 태어나 1973년
이역 로마에서 외로운 죽음 후 다시 이곳에 와 묻히기까지, 그녀의 생은 근본적으로 유럽의 모든
곳에서 고향을 느끼는 동시에 어느 곳에서도 고향을 느끼지 못하는 실향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생의 시작과 매듭이 된 오스트리아라는 장소는 외계에서 방황하는 작가와 끊임없이
숙명적인 의식의 끈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녀의 세계에 무상과 퇴영의 분위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분위기는 작가 바하만의 세계에서, 역사적, 지역적 차원을 초월하여
근원적인 귀착을 겨누는 멜랑콜리로, 인간의 실존적 무상으로 착색되어 있다. 그녀는 주로 로마,
뮌헨, 베를린, 취리히 같은 오스트리아 외곽의 대도시에서 살면서 오히려 이방인처럼 빈을
방문했다. 오스트리아와 연결된 작가의 콤플렉스는 작품의 여러 주인공을 통해 도처에 반영되어
있다.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프랑켈 씨는,
빈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너무나 많은 것이 단절되어 버린
것이었다. 노스탤지어요? 아니오. 좀 다른 겁니다. 이따금 까닭모를 슬픔을 느낄
뿐이지요라고 말한다.
이 잿빛 빈을, 이 초긴장 상태를 잊어버리는 것, 생각해 봐요. 에리히. 저는 정말 정신 차릴 수
없이 기뻐요.("문제들, 문제들"의 베아트릭스.)
트롯타의 고백을 통해 작가 자신의 입장은 훨씬 명백히 설명되고 있다.
난 이제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못함을, 그리워하는 장소가 아무 데도 없음을 깨달았소.
그렇지만 내게도 심장이라는 게 붙어 있어서 오스트리아에 속했으면, 하고 생각한 적은 있소.
그런데도 모든 게 순간에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오. 심장과 정신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오.
다만 내 안의 무엇인가가 피를 흘리고 있을 뿐이오. 그렇지만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겠소.
"먼 곳으로 탈출하겠다는 기적"을 겨누며 일을 했고, 그 기적이 현실이 되어 "기막히게
근사한" 수많은 도시들을 거친 후 자기에게 형성된 세계가 엘리자베트에게는 이렇게 해석된다.
그녀가 도처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일을 벌이는 원동력은 그녀의 감수성이었다. 그 외국인들
역시 같은 언저리 출신이었고, 그런 까닭으로 해서 그녀의 정신과 감각, 행동도 별수 없이
거대하게 외연된 정신의 영역에 속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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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을 향한 날개짓: 바하만의 문학
바하만과 생전에 친분을 가졌던 이들은 그녀가 지녔던, 감성에서 우러난 자발적 이해성과 가차
없는 정신적 엄격성의 양극성을 지적한다. 이 극단적으로 모순된 두 요소를 지양시키는 것,
이것이 바하만의 문학세계를 관류하는 시도였다.
그녀는 인간세계 안에서의 사랑을 부정한다. 이성의 방향정립의 바로미터인 학문을 회의한다.
그러나 이렇듯 부정적인 암울한 분위기에 침잠된 그녀의 문학의 세계는 결코 니힐리즘으로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정신은 오로지 새로운 고통의 체험을 여과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작가의 주장대로, 그녀의 작품 속의 어두운 모색, 모든 부정적인 화살은, 밝음과 긍정에로의
비상을 위한 통렬한 날개짓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녀의 단 두 권의 시집 제목이 말해주듯,
바하만의 생의 노력은 강박적인 "유예된 시간" 안에서의 "대웅좌의 부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의무이다. 나는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나는 살아야만 하는 게
아니다. 살도록 허용 받고 있다. 진정 나는 살아도 좋은 것이며, 마침내는 그것을 터득해야 한다.
매순간 순간마다, 바로 이 지점에서도. 그리고는 튀어 오르듯, 날개가 돋친 듯 내닫기
시작했다. 아득히 높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조그맣게 보일락말락, 두
팔을 벌린 형상,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이 아니라, 비상이냐 추락이냐의 판가름을 안고 장엄하게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상이.("동시에")
벼랑에 세워진 팔 벌린 그리스도 상에서 추락이 아닌 비상을 보는 것, 이 인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깊은 고뇌와 체험의 굴을 뚫고 나와야 하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초대 강의록에서 바하만은, "대중은 빵처럼 시를 필요로 한다"는 프랑스 기독교
철학가 시몬느 베이유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빵과 같은 시? 빵은 이빨 새에 씹히면서 배고픔의 고통을 되살려 주고 난 뒤에야 그것을
가라앉혀 줍니다. 마찬가지로 시는 인간의 잠을 깨우기 위하여, 날카롭게 깎여진 인식, 쓰디쓴
동경을 실어야 하는 겁니다.
인식에 연마되고 동경에 적셔져, 날카롭고 쓰디쓴 맛이 나는 문학, 이 빵을 씹는 독자는 어두운
고통에 참여한 후에야만 치유의 세계, 밝음과 긍정의 세계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ff
동시에
원, 맙소사! 그녀는 발이 시렸다. 드디어 파에스툼에 닿은 모양이었다. 이 근처에 바로 그 낡은
호텔이 있었는데 알 수 없는 일이네요. 이름이 금방 떠오를 것 같으면서도 혓바닥에서 뱅뱅
돌면서 영 생각나질 않아요. 그녀는 차창문을 돌려 내리고 바짝 시선을 모아 옆이랑 앞쪽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꺾어지는 길을 찾아 더듬었다. credimi, te lo giuro, dico a
destra(내 생각엔 아무래도 오른쪽으로 돌아야 할 것 같에요). 그러니까 여기는 네투노였다. 그가
교차로를 따라 천천히 돌며 헤드라이트를 비추자, 해수욕장과 바를 안내하는 화살표며 즐비한
호텔 간판의 틈바구니에서, 예의 그 간판이 얼른 그녀의 눈에 희미하게 비쳐 들어왔다.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전과는 정말 영 달라졌어요. 이 근처엔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한마디로
빈터였어요. 오륙 년 전만 해도 말예요. 아무래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녀는 차체에 되밀려 돌멩이랑 차바퀴 밑에서 으스러져 사각거리는 모래알 소리를 들으며,
깊숙이 몸을 좌석에 파묻고 앉아 목 언저리를 문지르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자 그가 되돌아와 말했다. 아무것도 없군요. 다른 새 호텔을 찾아야겠습니다. 여기서는 아예
호텔방을 모조리 거둬들인 상태였다. 부겡빌 덩굴과 장미꽃밭 한가운데 있는 사원들을 옆에 둔
이 낡은 호텔들에서는 벌써부터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실망과 동시에 안도를
느꼈다. 사실 저는 아무 데도 상관없어요. 그냥 죽도록 피곤할 따름이에요.
차가 달리는 동안 그들은 거의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고속도로에서는 바람과 차의
속력이 일으키는 매섭게 쌩쌩대는 끊임없는 소음이 두 사람을 별수 없이 침묵케 만들었고, 한
시간 걸려 겨우 찾아낸 살레르노행 큰길로 접어들기 직전에야 이런저런 얘기를 꺼낼 수 있었다.
때로는 불어로, 어떨 때는 영어로, 이탈리아어만은 아직 그가 서툴렀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한테는 서투른 옛노래를 흥얼거릴 기분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독일어 가사로 멜로디를
입밖에 내자 그 역시 기분대로 독일어 가사를 흥얼거렸고, 그녀는 거기에 화음을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실로 십 년 만에, 다시 이런 운율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니,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그녀는 갈수록 지금의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 더욱이 빈 출신의 인물과 여행을 하는 일이란!
그들 둘 다 바로 같은 도시 출신이며, 서로 비슷한 방식으로 말을 하며 어떤 류의 말은 제쳐놓을
줄 안다는,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서로 화제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는지 어떤지는 그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저 힐튼 호텔 옥상 테라스에서 세 번째 위스키 잔을 비웠을 때, 이 남자야말로,
그녀에게서 날아가 버린 어떤 향취를, 잃어버린 음조를, 다른 어느 곳에서도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고향이라는 신비스런 색채의 감정을, 어쩌면 다소 되돌려 줄지 모른다는 느낌이 그녀 자신에게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히찡에서 살았다는 말을 하다가 중단했다. 그러니까 그로서는 말하기 거북한 무엇인가를
히찡에 남겨두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요제프슈타트의 뷕겐부르크 가에서 자라났다.
이어서 그들은 으레 그렇듯 이런저런 저명한 이름들은 주워섬기며 빈 지방을 더듬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더 도움이 될 만한 공통의 지인을 찾아내진 못했다. 요르단 집안이며 알텐뷜 집안
사람들이 어떤 인물인가는, 그녀도 물론 익히 들은 바는 있지만 친히 아는 사이는 아니었고
뢰벤펠트 집안 사람은 전혀 몰랐고 독일 사람들 중에도 아는 이가 없었다. 저는 벌써 오래 전에
떠났거든요. 열아홉 살에 떠났어요. 물론 필요한 경우에야 어쩔 수 없지만, 독일어를 쓰지 않은
지도 오래됐구요. 당연한 얘기지만 그거야 일상적으로 쓰는 것과는 얘기가 다르지요. 로마 회의
때, 처음엔 이탈리아어 때문에 참 혼이 났어요. 애당초 그건 무대공포증 같은 것이었지요.
그렇지만 곧 순조로워졌지요. 물론 증명서를 수두룩이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저 같은 사람이
그렇다니, 당신은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요. 저는 사실, 우리가 다른 경우라면 도저히 알게 되지
못했을 사이니까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생각은 온통 딴 데 가 있으면서 온 힘을
다해야 하는 이 힘든 작업 끝에, 바로 이 테라스에서 우리가 알게 되리라고는 조금도, 꿈에도
전혀 예감 못했어요. 그럼 당신은 FAO(국제식량농업기구)에서 영어와 불어만 쓰시나요? 그는
스페인어는 퍽 능숙히 이해했다. 하지만 이제 로마에 머물려는 마당에서는 유리할 것 같아서
지금 개인교수를 받을까, FAO에서 주재하는 이탈리아어 코스를 밟을까 망설이는 중이었다.
그는 몇 해 동안 루르켈라에 있었고, 2년 동안 아프리카에, 곧 가나에 이어 가봉에 있었고,
물론 훨씬 더 오래 미국에 살았다. 그곳에 이민을 가 있는 몇 해 동안 학교까지 다녔다. 이렇게
그들은 세계의 절반을 더듬었고, 그러다 보니 그들이 각기 어디어디에 가 있었으며, 어디서
통역을 했는지, 그리고 그가 무엇인가를 연구해 왔다는 사실까지 서로 대충 알게 되었다. 그게
무엇일까? 그녀는 속으로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입밖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이어서 그들의 화제는
인도에서 빠져나와, 그녀가 대학을 다녔던 제네바로 되돌아와 제1차 군축회의로 옮아왔다. 저는
이대로가 좋아요. 제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보수도 상당히 좋거든요. 저처럼 독립심이
강한 여자는 집에서라면 도저히 못 견딜 거예요. 이 일은 사실 엄청나게 힘겨운 일이지만 그래도
저는 이 일이 좋아요. 아니, 결혼 같은 건 안 해요. 결코 안 할 거예요.
밤의 도시들이 선회했다. 방콕, 런던, 리오, 칸느, 다시 빼놓을 수 없는 제네바, 그리고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파리. 다만 샌프란시스코만은 실로 그녀로서도 유감이었다. No, never(아니,
아니오). 실은 바로 거기야말로 제가 항상 갈망했던 장소였어요. After all those dreadful
places there(결국 거기도 지겨운 장소일 뿐이에요). 그리고 워싱턴 역시 별수 없이 혐오감을
일으키는 곳이구요. 그 역시 워싱턴을 혐오스럽다고 동의하며 그곳에선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 역시 그곳에선 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맥이 쭉 빠져서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녀가 조그만 소리로 끙끙댔다. Please, would you mind(어떻게 생각하세요), je suid
terriblement fatiguee, mais quand-meme, c`est drole, n`est-cepas, d`etre parti ensemble,
tu trouves pas?(저는 지금 지독히 피곤한데, 그렇지만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가 함께 떠났다는
사실이요. 네?) I was flabbergasted when Mr. Keen asked me, no, of course not, I just
call him Mr. Keen(키인씨가 저한테 청했을 때, 저는 어리둥절했어요, 아, 물론 아니겠지요.
제가 그 사람을 키인 씨라고 부르는 건 다만), 그 사람은 뭘 보든지 수사관처럼 날카롭게
살펴보는 것 같아서예요. 힐튼 호텔의 파티에서도 저를 내내 그런 시선으로 봤어요, but let`s
talk about something more pleasant, I utterly disliked him(아니, 좀더 재미있는 얘기를
해요. 나는 그 사람이 도저히 마음에 안 들어요).
FAO 내부 계층에서 루드비히 프랑켈 씨의 방해물이 되고있는 인물로 원래는 그런 이름이
아닌 키인 씨가, 바티파그리아의 건널목 앞에 이르러, 이들 둘의 공통의 관심의 적으로
등장했지만, 결국 풍성한 화제로 발전되지는 못하고 말았다. 사실 그녀는 그 사람을 딱 한 번
봤을 뿐이고, 프랑켈씨도 이 셔츠 바람의 미국인을 주변에 상관으로 대해 온 지 겨우 석 달밖에
안 된 처지였으니까 말이다. Un casse-pied monolingue, emmerdant(한 나라 말밖에 모르는
지겨운 남자). 하지만 그로서도 별수 없이 인정 않을 수 없듯이, 그밖에는 그 사람도 속없이 남을
돕기 좋아하는 무해무탈한 인간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불만의 뜻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I couldn`t agree more with you, I just disgusted the way he behaved(저는 당신
의견에 찬성할 수가 없어요. 바로 그 사람의 행동거지가 구역질이 나는 걸요), 한창 관록을
자랑할 오십 세의 나이에 몇 가닥 안 되는 머리칼 밑으로 도저히 관대히 봐줄 수 없는 대머리를
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꼴이라니요. 그러면서 그녀는 프랑켈 씨의 숱 많은 검은 머리털을 훑고는
어깨에 팔을 얹는다.
그는 이혼한 몸은 아니었다. 이혼한 것은 아니었지만, 히찡에 있는 프랑켈 부인이라는 여인과
서로 서서히 이혼을 추진중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혼이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판가름
못하고 있었다. 저는 거의 결혼할 뻔했는데, 바로 직전에 헤어져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몇 해
동안 곰곰 생각해 봤지만 그 이유는 여전히 불투명했다.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
자신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파에스툼의 해변에 차를 세우고 그가 새 호텔을
물색해서 교섭하러 간 동안, 혼자 다시 차 안에 남아 기다리게 되자 그녀한텐 온갖 생각이
거슬러 몰려왔다. 사실 그들 사이에 제삼자가 개입한 것도 아니었고 갈등이 틈입해 들어온 적도
없었다. 적어도 그들에겐 그런 일이란 없었다. 하긴 구역질나는 일을 치르는 사람들을, 연극 같은
상상에 몸을 담아 살거나, 단순히 무엇인가 체험을 취하기 위해 온갖 스토리를 저지르는 부류의
사람들을 그녀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역시 그런 일이란 그들 둘한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How abominable(얼마나 혐오스러운 일이람), 얼마나 속물스러운 일이람.
구역질나는 일체의 것을 그녀는 자기 가까이에 허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긴 그것이 그렇게
안 된 것은, 하다 못해 그들이 같이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 그때마다 그녀를 향해 그녀의
이런저런 요소를 자기가 얼마나 좋아하는가를 거듭거듭 확인시켜 주는 그의 말에 귀기울일 수
없었던 그녀 자신이 원인이었다. 실로 그는 그녀를 향해 ma petite cherie(내 작은 사랑)로
시작되는 수많은 작은 이름들을 선사했고, 그녀 또한 그에게 mon grand cherie(내 큰 사랑)로
끝나는 수많은 큰 이름들을 선사했다. 이렇게 그들은 뜨겁게 숙명처럼 뒤얽혀 있었다. 하긴
그녀는 어쩌면 아직까지 그에게 매달려 있는지도, 가장 적절한 표현을 쓴다면, 환상으로 화해버린
한 남자에게 매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 하기야 내내 끝도 없이 서로 매달려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니까, 뒤늦은 아침 나절이나 뒤늦은 오후에 잠자리를 걷고 일어나면, 뒤이어 그는
그녀한텐 도저히 흥미 없는 화제를 떠벌였다. 아니, 서른 살의 나이로 중증 동맥경화를 일으킬 리
만무했을 텐데, 마치 석회질로 화한 사람처럼 자기 평생에서의 서너 가지 중대한 사건이며
때로는 자질구레한 일들은, 그녀로서는 처음 며칠 새에 완전히 외워버린 사건들을 떠들어 대었다.
스스로의 개인 생활을 세상의 법정으로 끌고 가는 여느 인간들처럼, 그녀 역시 재판관 앞에 서서
자기 변호를 하거나 상대를 고소할 경우를 전제한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 이상으로, 곧, 여자가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다는 건 남자한테는 무리한 입장을 요구하는 것이 되겠지만,
남자의 얘기에 귀기울여야 하는 입장 역시, 그것도 대체로 설교가 아니면 해설을 들어야 하는
입장 역시 여자한테는 무리한 기대하는 사실밖에는 밝혀낼 게 없으리라. 온도계며 기압계가 어떤
것이며, 철근 콘크리트는 어떻게 생산되며, 맥주의 제조 과정이며, 로켓 추진력이 무엇이며,
비행기는 왜 날며, 알제리의 어제와 내일의 상황이 어떠한 것이라는 남자의 해설을 지금 이
순간만은 남자를 향해 아무것도 내놓을 게 없을 뿐더러 도저히 주의를 집중시킬 수 없는 상태로
어린애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 생각은 내내 엉뚱한 곳에, 곧, 남자를 향한 몇 시간 전 또는 몇
시간 후의 자신의 감정을 맴돌고 있으면서 듣고 있는 척해야 하는 여자의 입장을 기대하는 건
무리가 아닌가. 그런데 여러 해가 흘러간 지금에서야 뒤늦게, 이미 중요하지 않아져 버린 의문,
점점 퇴색해서 거의 꺼져버린 왜라는 의문의 해답을 그녀는 스스로 안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이
해답은, 그녀가 그것을 불어 아닌 그녀 자신의 언어로 찾은 까닭에 또한 그녀에게 언어를 되돌려
준 남자, 의심할 여지없이 terribly nice(기막히게 좋은) 한 남자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찾아진 것이었다. 그의 친구며 그의 가족 역시 그를 향해 그렇게 부르는 것이 불가능한
터에, 하물며 그녀 자신이야 아직 한 번도 그를 보고 루드비히라고 입에 올려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이 삼사 일 동안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어떻게 배겨날까를 생각해 보았다. 하긴 쉽게
darling이나, caro, mein Lieber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 이윽고 그가 그녀 편의 차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벌써 알아채고 차에서 내렸다. 그러니까 그는 같은 층에 두 개의 방을 찾아낸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가방과 목도리, 숄을 챙겨 꺼냈다. 보이가 미처 오기 전, 그녀는
뒤쪽에서 그를 덥석 서투르게 껴안으며 성급하게 말한다. I`m simply glad we`ve met, you are
terribly nice to me, and I do not even deserve it(우리가 만난 것이 한마디로 기뻐요. 당신은
저한테 기막히게 좋은 분이에요. 저는 뭐라고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지경이에요).
이미 거둬들인 식당 안에서 그들은 맨 마지막 손님으로 미지근한 마지막 수프를 들고 있었다.
이 빵가루 묻힌 생선은 냉동시킨 대구이지요? 그녀는 식욕이 안 나는 듯 끼적끼적 생선을
뒤적거렸다. 이 식당엔 바로 코앞의 지중해에서 잡은 생선도 없나 보죠? 루르켈라에서는 장말
그로선 뭔가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그때가 뭐니 뭐니 해도 인도에서의 그의
황금기였다. 그는 하얀 식탁보 위에다 포크로 캘커타에서 봄베이를 잇는 철도를 그었다. 대충
여기쯤으로 생각하면 돼요. 사실 불도저 한 대가 우리 전 재산이었는데도 바라크까지 우리
손으로 지었었지요. 삼 년 뒤에는 깡그리 못 쓰개 되었지만, 꼭 스물한 차례를 캘커타에서 유럽
사이를 왕복해서 날고 나니까 딱 지겨워졌습니다. 이어서 포도주가 날라져 오자, 그녀가 끈기
있게 설명했다. 우리는 둘씩 한 방에 들어 있어요. 조종사나 부조종사처럼이 아니에요. 그럼요,
당연한 얘기지만 20분 후엔 즉각 교체할 수 있기 위해서예요. 20분이라면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시간일 거예요. 더 이상은 통역을 할 수 없어요. 물론 어떨 땐 30분이나 40분도 해내야 할 때가
많지만요. 그건 정말 참을 수 없는 작업이에요. 오전에는 그럭저럭 잘 돌아가지만 오후가 되면
점점 집중하기가 힘들어져요. 그야말로 광신도처럼 정확하게 경청해야 하는 작업이지요.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전인적으로 빠져들어가야 하는 일이라니까요. 하긴 배전반이라면 간단히
그렇게도 조작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의 머리란, just imagine, t`immagini!(생각해 보세요!)
쉬는 동안 저는 보온병에서 뜨거운 꿀물을 따라 마셔요. 누구든 낮시간을 보내는데는 자기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밤이 되면 저는 손에 신문조차 들고 있을 수가 없어요. 정기적으로
큰 신문을 섭렵해 두는 게 저한텐 퍽 중요하거든요. 언어의 활용법을, 새 표현법을 쫓아가야
하니까요. 전문용어야말로 제가 가장 모르는 거예요. 때로는 미리 완전히 외워두어야 하는
보고서라든가 목록 같은 것도 있어요. 화학이 저는 질색이에요. 농업도 그렇고. 망명자 문제
같은건, UN에서 일할 때, 그런 대로 견딜 만해요. 그렇지만 국제우편조합이나
국제해상보험조합이야말로 저한텐 마지막 악몽이었어요. 다만 두 개의 언어만 쓰는 경우라면
한결 수월할 거예요. 벌써 새벽같이 호흡연습이랑 체조를 하면서 저의 수업은 시작돼요. 한 번은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의사가 자가 훈련을 가르쳐 주었어요. 지금도 그 훈련법을
써먹는데 물론 정식으로야 아니지만 꽤 도움이 돼요. 그땐 정말 저의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결코 좋지 않은 상태를 겪은 적이 없어 보이는 프랑켈 씨는 그녀가 자주, 그때는 도저히 좋은
상태가 아니었어요. 또는, 그때는 상태가 나빴어요라는 구절로 말을 맺는데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기색이었다. Actually, basically(실상, 근본적으로), 마치 그런 것이 존재하기라고
한 듯이, 그토록 완벽하게 이름을 붙이는 일이라니요! 어떤 러시아 여자인데 벌써 중년에 들어선,
저로선 가장 감탄스러운 여자예요. 그 여자는 열세 가지 말을 구사할 수 있어요. She really
dose them(정말 그럴 수 있어요). 한 번은 그 여자가 당황해하면서 고백을 하는데, (저
말이지요,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시간이 가면서 언어 하나를, 러시아어든 이탈리아어든
포기하겠어요. 이 작업은 나를 파괴시킨다니까요. 호텔에 들어가서 위스키를 들면,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상태로 진창 녹초가 되어 서류가방이랑 신문뭉치를 끼고 앉아 있을
따름이지 뭐예요.)라고 말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웃었다. 이것은 리오에서 있었던 에피소드인데,
그 러시아 여자 얘기가 아니라 감사보조역으로 온 러시아 대표 청년하고 벌어진 일이에요. 저의
동료 통역사가 미국 대표를 보고 silly man(어리석은 남자)이라고 통역을 했더니 거기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durak은 stupid(어리석은)라는 이름이라고, 아주 정색으로 고집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두들 쿡쿡 웃음을 터뜨렸지요. 때로는 그런 일도 있어요.
독일어는 벌써 기울고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어쨌든 우리한테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경향을 깨닫기 시작했는지는, 글세 어떻게 생각하게요? 일어서서 걸어가면서 그는
다시 말을 던졌다. 언젠가는 단 하나 유일한 언어만이 있게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녀는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아니, 실제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면서 그녀는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다는 듯이 그에게 몸을 기댔다. 그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Tu dois me mettre
dans les draps tout de suit. Mais oui. Tu seras gentil avec moi? Mais non. Tu vas me
raconter un tout petit rien? Mais bien sur, ca oui(저를 곧장 침대 속에 눕혀주셔야 해요.
물론이지요. 저한테 상냥히 해주시겠지요? 천만에. 아무 얘기나 좀 들려주시겠어요? 물론, 그거야
해 줄 수 있지요).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방을 들여다보고 나직이 물었다. 나드야, 나드야? 그리고 소리 안
나게 문을 닫고 조금 전까지 그녀가 함께 있었던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는 여전히 그녀의
체온과 체취가 남아 있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로마에서 벌써 그녀는 말했었다. 나중에 설명해
드리겠지만, 언젠가 쇼크를 받은 다음부터 벌써 오래 전부터 저는 딴 사람이랑 한 방에, 아니, 한
침대에 도저히 잘 수가 없어요. 이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안도를 느꼈었다. 그 역시 그럴 기분이
전혀 내키지 않았고, 그 자신 너무도 신경이 예민한 데다 독거에 뿌리 깊이 길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호텔에서는, 돌바닥인데도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라스 문이 들들 소리를 내며
덜컹거렸고 모기 한 마리가 방 안에서 윙윙댔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계산을 했다. 이것은 삼 년
이래로 한 번도 그에게 있어본 적 없는, 그의 버릇의 자장 밖으로 벗어나간 일이었다. 생소한
사람이랑 허겁지겁, 아무에게 한마디 전언도 없이 떠나다니. 그는 마음속에 의혹과 썰렁한 기운을
느꼈다. 모기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는 자신의 목덜미를 철썩 때렸지만 빗나가고 말았다.
그녀는 벌써 두 차례나 보았다니까, 내일 사원 구경은 원치 않는 게 바람직한 일이 아니랴. 내일
새벽 곧장 이 관광객의 물결을 떠나, 일체의 것을 떠나 어느 작은 어촌으로 아주 작은 호텔을
찾아가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현금이 모자라면 수표장이 있잖은가. 하긴 이
벽촌에서 아예 수표라는 게 통용되지 않는다면, 어쨌든 어느 때라도 효력이 있는 외교관 번호가
있었다. 그러니까 중요한 문제는 어디까지나 그들 둘 사이에 펼쳐질 관계였다. 그녀와는
복잡해질 사연이 아무것도 없었다. 일주일 뒤면 그녀는 네덜란드로 떠나버린다지 않는가. 그를
당황스럽게 뒤흔드는 유일한 요인은, 일주일 전 그러니까 지난 토요일 로마에서 그녀를 본 순간,
이미 자기로선 망각 속에 빠져들어간 고통스러운 기쁨 같은 것이 자기생 안에 무언가 간단한
힘에 의해 재형성될 것 같았던 느낌이었다. 그렇게 되살아난 고통스러운 기쁨은 며칠 새에 그를
돌변시켜 버렸고, FAO 사람들까지 눈치를 채어 Well, well, okay, okay, you got that?(좋아,
좋아, 그 여자를 낚았어?) 하고 추근거리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는 담배를 비벼 껐다. 오지 않는
잠은 복도를 지나가는 음악소리로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STRANGERS IN THE NIGHT(밤의
여인들). 그러더니 옆의 방문들이 열렸다. 그는 이 노래의 제목이 TENDER IS THE
NIGHT(밤은 부드러워)와 혼동이 되었다. 이 며칠 동안 그는 최대의 생을 걸러내야 한다.
세면대에서 갑자기 꾸르륵 물 내려가는 소리에 그는 다시금 후닥닥 놀랐다. 이번엔 옆방
사람들의 떠들어대는 말소리가 들렸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호텔, 한밤중에 뒤흔들리는 산란한
마음. Io scirocco, sto proprio male(남동풍이여, 나를 파고드는 고통이여). 그것은
캘커타에서였던가, 아니면 어디에서 시작되었던가. 그런데 이제 로마에 온 뒤 이 죄어드는 고통이
점점 심하게 잦아졌다. the board(회의), the staff(간부), 새 기획, tired, I`m tired, I`m fed
up(피곤하다, 피곤하다, 녹초가 되게 피곤해). 그는 별수 없이 어둠을 더듬어 바리움5를 집었다. I
can`t fall asleep anymore without it, it`s ridiculous, it`s a shame, but it was too much
today(나는 이것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다. 가소로운 일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너무 힘든 날이었다). 이 쫓기는 느낌, 은행 문은 벌써 닫혔었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는 그녀와
더불어 도시를 떠나고 싶었다. She is such a sweet and gentle fanciulla, not very young
but looking girlisch as I like it, with these huge eyes, and I won`t have me hoping that
it`s possible to be happy, but I couldn`t help that, I was immediately happy with
her(그녀는 정말 사랑스럽고 멋진 소녀다. 한창 젊은 나이는 아니지만 커다란 눈망울을 한 내
마음에 드는 소녀의 모습이다. 나는 행복이라는 게 가능하다고 내 자신이 기대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녀를 만나자마자 나는 행복해지지 않았는가).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두 번째 사원까지 갔다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세 번째 사원 앞에서
되돌아섰다. 그는 여행 안내서를 펼쳐 들고 아무 생각없이 한 구절을 소리내어 읽더니, 그녀가
흥미를 내보이지 않자 아무런 설명도 붙이지 않았다. 그들은 네투노의 정원 쪽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정원 안에는 빈 등의자가 여럿 놓여 있었다. 그들은 사원이 바라보이는 자리를 찾아
커피를 주문하고 얘기를 나누었다. 금년은 정말 별난 해예요. 그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분명코
남동풍 때문이었다. 야릇하게 짓눌리는 느낌이에요. 어딜 가든지 항상 너무 뜨겁든가, 너무 춥지
않으면 너무 습하게 무더워요. 정말 알 수 없어요. 이런 날씨가 일 년 내내라니까요. Tu es sur
qu`il s`agit des phenomenes meteorologiques?(그게 반드시 기상학적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상하지 않아요? moi non, je crains plutot que se soit quelque chose dans
nousmemes qui ne marche plus(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차라리 우리 자신들 안에 무언가
잘못돼 가는 게 있어 그렇지 않나 걱정되요). 그리스도 그 당시 또는 예전의 그리스가 아니었다.
도대체 맨 처음, 10년 전, 15년 전에 알고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 짧은 시간의 격차며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인생을 관망하고 견디어 나가는 일조차 힘겨운
그로서는 지난 이천 년 사이에 벌어진 역사를 생각하면, 이토록 안이하게 커피를 마시며 그리스
사원을 관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실로 엄청나고 정신이 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come fosse
niente(어째서 아무 데도 무덤이 없을까). 그녀는 후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자기 안에 담긴 사고의 과정에서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캐낼 수 있었을까, 그는
알 길이 없었다. 지난날 그녀가 누구와 이 사원을 바라보았는가 하는 건 물론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는 갑자기 더 구경을 하려 들지 않았을까? 그 자신은 분명코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다른 무엇인가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핵심을 슬쩍
지나쳐서 입을 놀리고 있었다. 그가 지금껏 그녀에 관해 알아낸 것이라고는 어떤 쇼크가
있었다는 것, but who cares(하기야 알 게 무어람), 그리고 그녀의 상태가 자주 좋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로마에서 그가 호텔로 데리러 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한텐 이 출발이 마치 흔한 모험길로
들어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의 소재지로부터 멀리 떨어져가면 갈수록,
그녀는 점점 불안스러움을 가눌 수 없었다. 실은 그녀에게 있어 이 소재지란 다른 이들의
집보다도 더 중요한 장소니까, 그곳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 훨씬 까다로운 까닭이리라. 지금
그녀는 보그나 글래머의 손으로 설계된 커다란 홀이나 바에서, 그 시간에 어울리는 정장을 하고
당당하게 출현하고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신분을 식별시켜 줄 것이라고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빛 바랜 블루진에 찰싹 달라붙는 블라우스를 걸치고 트렁크 하나에 화장가방을
든, 여느 흔한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로선 아마도 아무 길가에서라도 이런 그녀를
주울 수 있었으리라. 그녀는 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자신의 두려움을 눈치채지 않게
하려고, 그 지방에 관한 자신의 지식과 방향 감각이 없으면 곤란하리라는 느낌을 그에게 주려고
짐짓 애를 썼다. 그녀는 도로지도를 뒤적거렸다. 온통 신판이 아닌 케케묵은 것이었다. 도중에
그녀는 주유소에서 해안의 단면이 있는 지도를 한 장 다시 샀다. 그것도 맞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믿으려 들지 않고 지도를 넘겨다보기 위해, 왼손과 왼쪽 눈으로만 운전을 했다.
그렇다고, 사실 그녀야말로 어떤 문지기보다도 어떤 여행사 직원보다도 어떤 기차 시간표 안의
정보보다도 능숙하게 도로지도며 비행시간표를 읽을 줄 안다는 것을 알 턱없는 그를 향해,
그녀로서도 무턱대고 흥분할 수는 없었다. 교통수단의 연결 시간이며 접속에 상관되는 일체의
것은 어쨌든 그녀의 생활이었다. 이제야 그는 그녀가 못마땅하여 뾰루퉁해 있는 걸 깨닫고
장난으로 그녀의 귀를 잡아당겼다. non guardare cosi brutto(), 아이, 제 귀는 저한테
필요한 거예요. Veux-tu me laisser trenquille!(저 좀 가만히 내버려 두세요!) 그녀는
"cheri"라는 말을 꿀꺽 삼켰다. 이 말이야말로 한때 장 피에르에게 속했던 것이 아닌가. 그녀는
두 귀를 문질렀다. 이 두 귀는 다른 때는 리시버를 걸고 자동적인 접속장치의 기능을 하며
언어의 단절이 행해지는 마당이었다. 그녀 자신이야말로 얼마나 묘한 메커니즘인가. 머릿속에 단
한 가닥의 생각도 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언어 속에 잠입해 들어간 채, 그녀는 살고 있었다.
그리고 몽유병 환자마냥 똑같지만 달리 발음되는 구절들을 즉각 뒤따라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machen(만들다)이라는 말로 make, faire, fare, hacer, decat라는 말을 만들 수 있었다.
어떤 단어든 하나의 역할 위에 놓고, machen은 진정한 machen을, faire는 fairef를, fare는
fare를, delat`는 dealt`를 의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섯 번을 입밖에 내두를 수가 있었다.
다만 그녀에게 스스로의 생각만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것은 실로 그녀의 머리를 무용지물로 만들
가능성이 있었다. 이제 그녀는 언제이고 단어의 무더기에 매몰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고 나면, 회의 건물 안의 커다란 방들, 호텔의 라운지들, 바들, 남자들, 그들과 어울리는
뻔한 스케줄들. 그리고 숱한 길고 외로운 밤들, 숱한 너무나 짧고 역시 외로운 밤들. 언제나
중요한 용건들과, 그 용건 사이에 위트를 넣고 다니는 남자들. 그들은 술에 취한 뚱뚱한 기혼의
남자들이거나 아니면 술에 취한 우연히 날씬한 기혼의 남자들이었다. 또는 아주 친절하고 심한
노이로제 증상이 있는 남자들 아니면 아주 친절하고 동성연애 기질이 있는 남자들. 이때 그녀의
머리엔 유난히 제네바가 떠올랐다. 그녀는 제네바에서의 처음 시절에 관해 다시 화제를 꺼냈다.
아무래도 피할 수 없는 도시. 오늘 아침 정원에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느 정도 알 것
같아요. 한 작은 시간의 폭을 들여다보노라면, 또는 큰 시간의 폭을 들여다보노라면, 하긴 실제
이렇다 할 무엇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제네바에서의 시간을 똑 떼어 저한테는 짧은 생의 부분에
해당된다고 보면, 저로서는 큰 시간의 폭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인정 안 할 수 없고, 그럼 벌써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게 돼버려요. 다른 사람들은 어디서 그런 이해력을 취할까요.
제게는 이 이해력이 시간이 갈수록 약해져 간다는 걸 깨달을 뿐이에요. 제 자신, 일을 통해 너무
그것에 밀착해 있거나 또는 일을 떠나 방 속에 처박히게 되면 너무 멀어져 버리거나 둘 중의
하나일 뿐이에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요. 그는 그녀의 두 다리 사이에 한 손을 얹었다. 그녀는
그것을 전혀 의식 안 한 것처럼 곧장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운전에 집중하느라
그녀를 잊고 손을 떼면, 그녀 편에서 그러기를 도발했다. 그는 그녀의 손등을 때렸다. Come on,
you just behave, you don`t want me to drive us into this abyss, I hope(원, 우리가
달려가야 할 이 긴 길을 나더러 운전하지 말기를 바라는가요. 그건 내 희망입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모든 것이 어떻게 뒤바뀌든, 세상이 빠져나갈 길 없이 점점 각박해져 가는
이유가 무엇이든, 이 며칠간의 이들 둘에겐 진정으로 상관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팔리누르로
가는 꺾음길을 찾는 일에만 주의를 기울일 뿐, 그밖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자기와
더불어 세상을 빠져나와 달리고 있는 이 낯선 여인한테 관심을 기울여야 할 뿐이었다. 다만 그를
짜증스럽게 하는 건, 그 자신 젖혀놓고 싶은 일들이 도저히 머릿속에서 몰아내지지 않는
것이었다. 과연 그는 이 얼마 동안, 이 일에서 벗어나길 온 힘을 다해 열망하고 있었다. 이
며칠은 식량과 농업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속한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의
생을 위해 떠오르는 뾰죽한 일이란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자기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 행동하는 다른 이들의 실체를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반쯤 진실이든 반쯤 거짓이든 간에, 동정이 갈 만큼 가소롭거나 미친 듯한 역사를
제가끔 갖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온통 보다 약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상승과 하락 속에만
떠나가 버린 어떤 위치의 보상이, 떠나가 버린 어떤 비약의 보상이 발견될 수 있는 것처럼 한층
높은 자리, 끊임없이 유리한 자리를 추구하며, P3에서 P4까지 탐욕스럽게도 P5까지를
곁눈질하거나, 제자리에 처박혀 있거나 또는 밑을 향해 떨어지는 것이었다. 여기에 기쁨이란
끊임없이 떠나가는 것이었다.
그의 손은 지금 줄곧 그녀의 무릎 위에 살그머니 얹혀 있었다. 지금 이런 상태가 그녀한테는,
마치 한 남자와 수많은 자동차 행렬 틈에 있는 것처럼, 한 자동차 안에 모든 남자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퍽이나 안온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생각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그녀는 지난날이 아닌 현재, 바로 이곳에 와 있는 것이었다. 다른 어느 거리도 아닌 곳에, 지나간
날이 아닌 이 지방에 미스터 루드비히 프랑켈과 함께 빈 대학에서 경영학 공부를 했고, 세계를
절반 누볐고 이 가파른 해안 막다른 벼랑에서는 아무런 특권도 행사할 수 없는, 외교관 지위에다
외교관 번호를 소지한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이었다. 정말, just behave yourself(조심하세요!) 이
순간 더 이상의 기대를 꺾고 그를 운전대로 밀쳐버린다면, 그리고 약간만 운전대를 뒤틀어
버린다면 그녀는 그와 뒤엉켜 엎어질 테고, 단 한 번의 공속을 누리며 후회 없이 그와 함께
추락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보온병에서 몇 모금 물을 마시며 알약을 한 알 삼켰다. 아,
아무것도 아녜요. 저한테 고질인 두통일 뿐이에요. 이 해안은 온통 터무니없는 곳이었다. 이
장소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이 훑어 내려가며 찾아 헤매는 곳은 캠핑 장소였다.
떠들썩한 유흥장이 있고 아주 아래쪽, 차단되지 않은 작은 해변이 연면하였다. 사프리에도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이어서 그녀는 불쑥 비명을 질렀다. 너무 늦었어요. 나무 한 포기 없는
황량하고 편편한 해안에서 호텔이라는 네온이 걸린 콘크리트 건물을 본 기억이 났다. 아무것도
못 찾으면 그리로 돌아가야 될까 봐요. 열시가 되자, 그도 더 이상 헤매기를 단념하기로 했다.
거긴 마라테아일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열시 십분이었다. 별수 없이, 그녀가 어디에서든 항상
의식하고 있는 궁극의 것은, 지금이 몇 시이며, 자기가 있는 데가 어느 장소인가 하는
사실이었다. 저기 아래쪽으로 차를 몰아주세요. Ti supplico, dico a sinistra(저 말예요.
왼쪽으로 말예요). 그는 차를 돌렸고 그녀가 안내를 했다. 지금 가까스로 몸을 가누고 있고
목소리가 균형을 잃진 않았지만 그녀의 안에서는 뭔가 꺼질 듯 사그라 들어가고 있었다. 그가
차를 세우기 전에, 그녀는 오로지 무슨 말이든 하기 위해, 조용히 되뇌었다. 마라테아로군요.
그녀는 차 안에서 기다리지 않고 비실비실 헐떡이며 차에서 내려섰다. 현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디디며 별로 살펴보지도 않은 채 전등 불빛에 눈부셔하며. 그녀는 익숙히 길든 환경의
냄새를 맡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그것은 어촌의 자그마한, 또는 중간층의 호텔 아닌, 전혀 기대
밖의 호텔이었다. 길든 세계로의 안도스러운 귀환. 그녀는 반쯤 감긴 눈으로 그의 뒤를 따르며
어느새 피곤한 기색을 거두고 당당한 자세를 취했다. 곧, 자기야말로 응당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이며, 지금은 비록 빛바랜 바지에 먼지투성이 샌들 차림이지만, 어느 모로 보나 상류 계급의
절도 있는 절차와 음성을 비롯해서 추근거리는 기색 같은 건 완벽하게 찾아볼 수 없는 요소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호화 카테고리에 속해 있을 호텔 라운지 따위를 보고 놀라거나
감탄스러워할 바는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화장가방을 보이한테 맡기고 라운지의
안락의자에 몸을 던지고 앉아 리셉션에서 자기를 향해 오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를
향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던
대로였다. 그러니까 여긴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하품을 하고는 지배인이 건네주는
용지를 내키지 않는 투로 들여다보고 알아볼 수 없는 사인을 끄적였다. 마치 내일까지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이 무슨 무리한 요구인가. 위층의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창가의 침대에 몸을 던졌다. 혼자만의 방을 못 가질 바에야 최소한 창가의 자리에 자야만 곤란을
덜 것 같았다. 당번 보이가 들어섰다.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MUMM은 없었다. POMMERY,
KRUG, UEUVE CLIQUOT는 그가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MOET CHANDON, 그렇지만
DON PERIGNON으로 가져다 주시오. 그것은 있었다. 목욕실에서 그는 샤워를 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다보았다. 그는 그녀를 닦아주고 활기 있게 맛사지를 해주었다. 이어서 그녀가
기다란 목욕수건을 몸에 두르고 탁자 앞에 앉자, 보이가 다시 왔다. 오늘이 그녀의 생일이라는 걸
대체 어떻게 그가 알았을까. 물론 그가 그녀의 여권을 보긴 했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니,
come sono commossa, sono cosi tanto comm ossa(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나는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뛴다). 두 개의 술잔은 아무 울림도 없었다. 그녀는 두 잔을 마셨고, 그는 병의
남은 술을 비웠다. 하긴 그의 시간이 마라테아에서 끝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녀는 침대찻간
안에서, 또는 비행기 안에서 부득이 낯선 사람들이랑 같이 있기를 강요당했을 때처럼, 점점
말똥말똥해져 가는 의식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벌떡 일어나 앉아 귀를 기울였다. 그
역시 아직 잠이 안 들었거나 아니면 아주 조용히 잠들어 있음에 틀림없었다. 목욕실 안에서
그녀는 두터운 목욕수건을 두 장 탕 안에 깔고 드러누워 담배를 피우고 또 피웠다. 그리고 밤이
이슥해서 방으로 되돌아왔다. 그녀의 침대는 그의 것과 반 미터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그녀는
두 침대 사이의 깊은 바닥에 두 발을 잠그고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잠결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그를 향해 말했다. 살그머니요. 다만 살그머니 잡아주세요, 네. 안
그러면 저는 잠이 들 수 없어요.
태양은 비치지 않았다. 해변에는 작은 붉은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할까
의논을 했다. 그는 바다를, 그녀는 용감하게 물 속에 뛰어드는 밀라노 사람들 무리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가 잠수마스크와 고무갈퀴를 들고 돌아오면서, 잠수할 때는 어떻게 조작하며 다시
되돌아올 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설명해 주었다. 흰 페인트칠이 된 철사다리가 걸린 바위 위로
파도가 철썩이는 게 앞쪽으로 보였다. 사다리 밑으로는 가눌 수 없는 힘으로 물살이
밀쳐내어지고 있어서, 파도는 옆쪽 바위 더미를 향해서 우르릉 꽝 부서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와
일련의 신호를 협정하고 자기는 사다리 있는 곳에서 기다리겠노라고 말했다. 어떤 신호는
기다리고 있으라는 것이었고 또 다른 신호는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고, 그리고 또 다른 신호는
다시 계속 나아가라는 뜻이었고, 이어서 빨리, 이젠 돌아오십시오! 였다. 그러자 그녀는 온힘을
다해 맹목적으로 그가 있는 사다리를 향해 헤엄쳐 갔다. 물거품 속에서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놓쳐 버렸다. 아니, 그의 힘을 빌지 않고 그녀 혼자 가볍게 위로 기어올라갔다.
대체로 잘 치러냈지만 한 번 너무 많은 물을 삼켰기 때문에, 그녀는 콜록거리며 침을 뱉고
드러눕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그녀보다 훨씬 오랜 시간, 그리고 자주 헤엄쳐 가 종적을 감추기 때문에 기다림에
시달리게 되자, 그녀는 울화가 치밀어 올라옴을 느끼며 마치 여러 해 동안 알아온 사이이기나 한
것처럼, 머리 속에서 그와 말씨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에게 울화를 털어놓고 싶었다. 지금
굉장히 화가 났단 말예요. 툭하면 증발해 버리시잖아요. 이 근방을 샅샅이 찾고 있는 중이에요.
저도 좀 염두에 두고 쳐다봐 주세요. 당신이 익사해 버리신 줄 알았지 뭐예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정말 너무 아랑곳 안 하시는군요. 도대체 그걸 이해 못하시겠어요? 그녀는
바다를 내려다보고는 다시금 시계를 보았다. 50분이 지나도록 그가 아무 데도 나타나지 않자,
호텔에서는 어떻게 익사자를 처리할까, 곰곰 생각을 모았다. 맨 먼저 관리실로 가서 자기는 그의
부인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야 되리라. 하긴 그거야 어차피 곧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는
누구에게든 전화를 해야 할 것이다. 물론, FAO의 키인 씨에게. 그 사람밖에는 그를 알고 있는
인물을 그녀로서는 아무도 모르니까. pronto, pronto(여보세요, 여보세요). 마라테아에서로마,
어김없이 몹시 상태 나쁜 연결일 것이다. Nadja`s Speaking, you remember, to make it
short, I went with mr. Frankel to Maratea, yes, no, pronto, can you hear me now, a
very small place in Calabria, I said Calabria(여기는 나드야예요. 기억하시겠지요. 간단히
말해서, 프랑켈 씨와 마라테아에 왔는데, 네, 아니요, 아, 여보세요, 이제 들리시나요?
칼라브리아의 작은 지방이에요. 칼라브리아요). 그리고는 아주 간단하게 일이 진행될 것이다.
몹시 당황한 키인 시는 갑자기 젠틀맨이 되어, 미스터 프랑켈이 누구와 함께 칼라브리아로
갔는가에 관해선 역시 침묵을 행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눈물 따윈 흘리지 않으리라. 아,
그건 아니다. 그의 방에서 본 적이 있는 알약을 세 갑절 분량으로 차분히 복용하리라. 그럼
문제의 해결은 로마에서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그녀로선 그건 한마디로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누구든 자기를 차에 태워 로마의 호텔 앞까지 곧장 데려다 주도록, 비용이야 어김없이
그녀 자신이 부담하리라. 그러고 나면 그녀 앞에는 로테르담의 IBM 회의의 날까지 아직 사흘이
남는다. 세상의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는 시간,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 숨어 있을 수 있는
시간, 다시 컨디션을 회복하기 위해 수영장에서 크롤을 치며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녀는 그의 어깨 너머로 손수건을 던지고 그를 문질러 주며 설교를 시작했다. 당신은
어린애보담도 철이 없군요. 이렇게 떨고 계시잖아요. 정말 완전히 얼어붙으셨네요. 그녀가 계속
소리를 치려는데 세찬 물결이 몰아쳐 와, 아까 그가 그녀를 향해 높은 바위 위로 던져 주었던
칼이며 작살, 램프를 당장에 휩쓸어 왔다. 자신의 목소리조차 안 들리게 되자, 그녀는 지금 물에
들어가고 싶다는 시늉을 해보이고, 그의 손에 바싹 매달렸다. 사다리 위에서는 다시 뛰어들
자신이 없었다. 물 가장자리까지 다가가야 돼요. 바싹 내디뎌야 합니다. 그녀는 미끈덕거리는
바위를 발가락으로 매달리며 걸었다. 차라리 무릎으로 걸어서 제일 높이 솟은 파도 속으로
정확히 뛰어드는 게 좋겠군요. 자, 지금이요. 그녀는 약간 뒤늦게 두 개의 파도 사이로
뛰어들어다. 그리고 외쳤다. 어땠어요? 나쁘진 않았습니다! 너무 얕아요. Mais c`etait joli a
voir, tu es (그렇지만 보기 좋았어요. 당신은) 뭐라구요? 뭐라고요? Tu es
(당신은) 그녀는 점심 전에 몇 차례 더 뛰어들었다. 하지만 번번이 제때를 놓치고 뒤늦게
뛰어들었다. 그녀는 배가 아파 오더니, 이어서 머리가 아팠다. 정말이에요. 정말 아픈 걸요. 그는
그럴 리가 없다고 일축했다.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두 손에 감싸쥐고 위무했다.
이윽고 그녀는 배가 고프다는 것을 의식해 내고 두통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방으로 달려
올라갔다.
저녁식사 시간까지 방 안에서의 오후, 그녀가 이 시간을 익히고 있는 동안 그에게 힘겹고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물 속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오후에는 정말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아침에 본 물고기에 관한 얘기를 했다. 그 종류에서는 보기 드문
표본이었다. 지난해 사르디니아에서 같은 종류를 수없이 쏜 일이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이토록
아름다운 Cernia를 본 적이 없었다. 물고기와 나는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지요. 그렇지만 난
그놈의 꾀를 당할 수가 없었어요. 번번이 빗나가는 위치를 쏜 겁니다. 그놈은 목덜미를
적중시켜야 해요. 무작정 쏘아서 한껏 꼬리에나 들어맞게 하는 건 의미없는 짓이지요. 정말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건 스포츠 정신에 어긋나는 겁니다. 최소한 난 결코 그러지를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아, 당신은 한사코 그 물고기만 생각하는군요. 싫어요. 그러는 건 싫어요. 당신이
그걸 죽이는 건 원치 않아요. 하지만 그는 내일 다시 그것을 찾아가겠다고 고집하며, 이런저런
물고기들을 취급하는 방법이며 어디에서 그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가를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돌고래라면 그녀 역시 일찍이 본 적이 있었고 그것들이 대단히 영리하다는 사실도 읽은 적이
있었다. 사실은 그 자신의 부인이었지만, 그것을 입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 돌고래는 다만
그녀의 동반자였다. 아니, 그녀에게 반해 있었다. 그때 그 여자는 상어라도 뒤쫓아오는 듯이
헤엄쳐 갔지요. 그리곤 물가 언덕에 닿자마자 쓰러졌어요. 그 여자는 다시는 바다에를 안 갑니다.
또한 그때 이래로 다시는 헤엄을 칠 줄 모르게 되었지요. 아아, 그녀는 천천히 그의 발치로 몸을
옮겨 혓바닥으로 그의 입 언저리를 건드리며 말했다. ja ljublju tebja, 그것은 희극적인, (그녀는
말을 중단했다.) 그건 비극적인 이야기군요. ljiblji tebja. 단 한 척의 배, 아니면 단 한 방의
포탄이라도, 그것에 쏘아 맞춰진 물고기들한테뿐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물고기들한테까지
끔찍스러운 존재라니까요. 그 진동과 혼란, 정말 끔찍스런 일이에요. 그건 오늘날의 물고기들을
맘놓고 살 수 없게 만드니까요. 그런데 거기 대고 물고기 자신들도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제가 거기 대고 무슨 힘이 될 수 있을까요? 그녀가 물었다. 아무튼 이 끔찍스러운
일들을 발명해 낸 건 제가 아니에요. 저는 좀 다른 것을 발명해 내었어요. 뭐냐구요? 바로
이것을 발명해 내었어요. 그래요. 이것은 당신이 발명해 낸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사납고 격하게
자신의 발명을 위해 투쟁을 벌였다. 말없이, 이 유일한 언어에 맞서서. 엄밀하고 명징한 이
하나의 언어를 향해서.
그는 빈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너무 많은 것이 단절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의 직업으로 거기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노스탤지어요? 아니오. 좀 다른
겁니다. 이따금 까닭모를 슬픔을 느낄 뿐이지요. 그밖에 그는, 어린애들과 스키 타러 가는 걸
즐기기 때문에 휴가는 겨울에만 가졌다. 그때가 되면 부인이 애들을 한 달 동안 그에게 보내주는
것이었다. 이번엔 코르티나에서, 단지 두 주일밖에 휴가를 가지지 못했지만 전에는 늘 세인트
크리스토퍼로 갔었다. 그의 휴가는 애들한테 속해 있었다. 그 애들도 벌써 뭔가 어긋나 간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애들과도 얘기를 해야겠지요. 마냥 길게는 숨길 수
없으니까요. 그녀가 말했다. 언젠가 누가 절더러, 왜 제겐 어린애가 없느냐구 대체 그 이유가
뭐냐구 꼬치꼬치 물었어요. 그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런 건 그렇게 간단히 물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는 대답을 않고 다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같은 땅에서 태어난 사람과 함께
있는 것보다 더 편안한 일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각기, 해도 좋은 말, 해선 안될 말을, 그리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다. 거기엔 내밀의 협약 같은 것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라면 모든 것에 얼마나 귀기울여 들여야 하는가. 게다가 일일이 줄곧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여기가 내겐 한계이다. 여기까지이고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없다. 지금
그녀는 새삼스럽게 장 피에르에 대해 격분을 느꼈다. 그는 무엇이고간에 그녀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과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자기는 그녀 편으로 전혀 접근 않으면서,
오로지 그녀한테만 자기편의 낯선 생으로 들어갈 것을, 주렁주렁 어린애들이 달린 비좁은 집으로
들어갈 것을 강요했다. 그곳에서 그는 하루 종일 비좁은 부엌 안에 있는 그녀를, 물론 밤이 되면
엄청나게 큰 침대 속에 있는 그녀를, 초라한 작은 모습으로 큰 침대 속에 있는 그녀를 보기를
원했다. Un tout petit chat, un petit poulet, une prtite femmelle(작은 고양이, 작은 병아리,
작은 암컷).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녀는 반항을 했고, 훌쩍이고 눈물을 흘렸고 접시를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주먹을 쥐고 그에게 달려들었었다. 그러면 그는 웃어젖히며,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도록 그녀가 연출하는 광경을 태연스럽게 바라다보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무작정
그녀를 구타했다. 그것도 분노를 못 이겨서라기보다, 이따금 그녀를 매질하는 것쯤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pour te calmer un peu(너를 좀 진정시켜 주려는 거야). 그리고
끝내는 그녀도 다시 그에게 매달려 남아 있었던 것이다.
프랑켈 씨가 물었다. 언젠가는 인간에게 단 하나의 언어가 남아 있게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쩜 그런 엉뚱한 데에 생각이 미칠 수 있지요! 그녀는 자꾸만 빠지는 샌들끈을 발꿈치로 다시
치켜올렸다. 하기야 많은 언어가 사려져 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인도에는 당신의 마흔 개의
언어가, 조그만 나라 가봉에만도 당신의 마흔 개의 언어가 그냥 엄연히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어들이란 수백 수천에 달하고 있음에 틀림없어요. 그런데 어느새 그것을 합산하려
드는 사람이 있다니요. 아무튼 당신들은 모든 언어를 뭉뚱그려 헤아리고 있군요. 그녀는 분노를
나타내며 말한다. 아니, 진정이에요. 저는 그런 걸 상상할 수 없어요. 그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요. 그에 반해서 그는 그런 것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그가 불치의
낭만주의자라는 것을 발견해 냈다. 그러면서 그것이 그에게서 받은 첫인상, 곧 성공한 실질적인
남자라는 것보다 한결 마음에 들었다. 언어라는 게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면 저는 한결
안도스럽게 느낄 거예요. 다만 그렇게 되면 제 존재가 무용지물이 되겠지만요. 낭만주의자라니,
아, 어쩜 그렇게 어린애 같을 수가 있지요. 그것이 식량과 농업(food and agriculture)에
해당되는 경우라면, 헬리콥터는 메뚜기 소탕을 위해 생산되어야 할 테고, 아이슬랜드의 어선은
세일론을 위해 제조되어야 하겠군요. 이어서 그가 그녀의 샌들끈을 죄어주려고 몸을 굽힌 동안
그녀가 물었다. 그렇게 되면 뭐라 할말이 있으세요? 고추냉이 달린 소세지님, 아니 비틀대는
악어님? 그만 포기하시겠어요? t`arrendi?(굴복하시는 거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미난다는
듯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사실 그는 고추냉이랑 악어 따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느새 다만,
독일어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Cernia를 생각하고 있었다.
FAO는 최근에 창립된 기구가 아니라, 그 근본이념은 UN보다도 훨씬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서부에 살던 한 남자가, 곧, 더듬어 보면 대략 이들 둘과 고향이 같은 동유럽 출신의
데이비드 루빈이라는 사람이 이런 방안을 생각해 내었다. 그는 한 필 말에 올라타고 신대륙을
달리며, 몇 마일만 떨어져 가도 그곳 주민들은 다른 곳 주민들이 토지를 경작하는 방식조차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딜 가든지 그들은 다른 미신, 다른 지식을 바탕으로 곡식과
참외를, 또한 가축을 취급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루빈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딴판의 지식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언젠가는 온 세계 사람들이 각자의 지식을 교환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엔 그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방안을
가지고 이탈리아의 왕한테까지 오게 되었다. 어떤 일이든 흔히 이렇게 동화처럼 실마리가 잡히는
법이지요. 덕분에 나도 오늘날 로마에 주재하며 과거의 아프리카 부서에 앉아 있게 된 것이지요.
지금 예컨대 멕시코 사람들은 딴 어떤 종자보다 우수한 옥수수를 가지고 그녀는 이미 귀를
기울이지 않고 외쳤다. 아무튼 썩 훌륭한 이야기로군요! 그러자 그는 단호히 말했다. 지금
얘기하는 건 한낱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암 그렇겠지요, 그녀가
말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엉뚱한 모험을 모색하고 어떤 새로운 것을 시작하고, 바로 그러기
위해 당신네 남자들은 세상에 와서 죽는 날까지 지배를 하고 있으니까요. 아, 미안해요. 저도
충분히 이해를 해요. 그렇지만 파리와 제네바, 로마 사이에서 벌어지는 횡설수설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이런 생각밖에 나질 않아요. 꼭 그 사람들이 된 듯이 같이 들고 도와주다 보면 그들은
갈수록 서로 오해를 하고 막다른 곳으로 스스로를 몰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당신네
남자들이란 어이없이 저주받은 도당들이에요. 당신네들은 항상 별 것 아닌 것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지요. 그러고 보면, 이 남자, 뭐라고 했지요? 그 사람 이름이. 이
데이비드라는 사람이라면 내 마음에 들어요. 그밖의 사람들은 도저히 맘에 안 들어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여전히 한 필 말을 올라타고 여기저기를 헤매고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소위 VIP라는 당신네들,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경마장에서 말타기 연습이나 하고 있는
당신네들과는 달라요. 아니, 그 사람은 아니에요. 틀림없어요. 오늘날의 당신네들이야말로 영원히
저주받은 도당들이에요.
그는 그녀의 흥분을 일소에 붙였다. 그녀의 생각이 쉽게 인정해도 좋을 만큼 전적으로 옳다고
여기면서도, 그에겐 무엇보다도 그녀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그토록 열을 올릴 때의 그녀야말로
진정, 그 당시 힐튼에서 가짜 속눈썹을 붙이고 요란스런 숄을 어깨에 걸치고는 키스를 받노라
가볍게 손을 내밀 때의 모습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생각이 앞서 있었다. 이렇게 열중했을 때
그녀의 눈은 위험스럽게 물기를 머금고 한결 커다래졌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아마도, 도를
넘어설 때에야, 스스로를 벗어나 한계를 넘어설 때에야 비로소 생명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다시
로마로 돌아가면, 내가 그곳 사무실에서 뭘 하는지를 보여드리지요. 사실 나는 죽는 날까지 뭘
다스리고 있지 못합니다. 뿐 아니라 하루 종일 서류뭉치를 들고 돌아다니지도 못합니다. 그
서류들은 독자적인 열 속에 끼워져 자동으로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그것들은, 내가 옮기기엔
너무나 무겁거든요. 미스터 유니버스나 아틀라스가 나타나도 그건 못 짊어질 겁니다. 그녀는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아틀라스라니요? 그는 기분이 유쾌해서 포도주를 다시 주문했다. 그럴
몽땅 짊어질 아틀라스 말이지요! Ci sono cascata, vero?(정말 작은 폭포 같지 않아요?) 그녀는
자기 잔을 밀어냈다.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어째서 우리가 이런 시시한 화제를 떠들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일상에 속한 것은 그 어느 것도 싫어요. 잠들기 전에 대개 저는 추리소설이나
읽어요. 그러노라면 낮 동안 내게 벌써 비현실적이었던 것이 완전히 비현실적인 것으로 화하고
말기 때문이지요. 그 중요한 척하는 회의라는 것이 제겐 모조리, 뭐라 할까요, 이른바 연구라는
것의 끝없는 직결처럼 여져져요. 거기선 늘상 벌써 케케묵은 것들, 진저리나는 것들을 놓고 그
원인이 추구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그 길을 우연히 짓밟아 버리는 숱한 사람들, 또는
고의적으로 흔적을 뭉개버리는 사람들, 하나같이 자기만을 납득시키기 위해 사이비 진실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로 인해, 해결로 가는 길은 번번이 막혀버리고 말지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불협화음과 불일치 속에서 끊임없이 해결을 모색하는 시늉을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
찾고 마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당면한 문제가 무엇이며, 따라서 실지로 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가를 제시해 주는, 홀연한 각성 같은 게 있어야 될 것 같아요.
그렇군요. 각성 같은 게 있어야겠지요. 그는 산만하게 대답했다. 과일을 드시겠어요? 그녀의
반응하는 태도, 자기의 희망하는 바를 쏟아놓는 방식 역시 그의 마음에 들었다.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태도, 때로는 불손하게 때로는 겸손하게 비판하는 태도 역시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아니, 한마디로 그녀는 어느 곳이라도 동반할 수 있는 변화무쌍한 인물이었다. 작은 커피점에
가면, 평생 맛없는 커피만 마셔본 사람처럼 반갑게 커피를 들며 허기진 사람처럼 말라빠진
샌드위치를 씹어 삼킬 줄 아는가 하면, 여기 같은 호텔에서는 보이들로 하여금 감히 농담도 건넬
수 없게끔 행동을 취했다. 바에서의 그녀는, 원칙적으로 손가락 하나 까딱 않지만 그 기분을
예측할 수 없는 부류의 여자, 고상한 분위기를 지루해 하면서도 그것을 즐기면서 레몬껍질이 안
들어갔거나 얼음을 너무 많이 넣었거나 적게 넣은 것으로, 또는 제대로 칵테일이 안 된 다이저리
때문에 까다로운 기분이 되는 부류의 여자와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빈에 있는 자기 부인에
대해 그가 막연히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요인의 하나는, 지나치게 큰 핸드백을 들고, 억지로 참는
듯한 모습으로 분에 맞지 않는 털외투를 걸치고, 고개를 똑바로 드는 대신 구부정하니 서툴게
거리를 걸어 다니는 태도였다. 또한 나드야처럼, 손에 담배를 들고 못마땅하다는 듯 주변을
살펴보는 눈짓 하나로, 저, 대체 재떨이가 어디 있지요? 라는 뜻을 나타내는 태도란 그의
아내에겐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 원 맙소사, VAT가 아니에요. DIMPLE이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그 말을 상대방이 얼른 알아듣지 못하면, 나드야는 DIMPLE이고 아닌 것에 비상한
사태의 분기점이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운 표정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차가 달리는 동안
그녀는 어린애처럼 그를 향해 보챘다. 그리고 팔월의 주말 교통 속에 차를 몰아야 하는 장본인이
그가 아닌 그녀 자신인 듯이, 백 킬로미터를 달리고 나면 자동차에서 내려 MOTTA나
PAVESI를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녀 편에서만 발이 시렸다. 그러면서도 숄을 가지러
갈 생각은 떠올리지 않고 다만 맥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저, 당신이, Please, grazie
caro(고마워요). 정말 꽁꽁 얼어붙었어요. 그리고 이윽고 태양이 고개를 내밀면 그녀는, 한가롭게
각성에 대한 생각을 더듬고 있는 그의 발에 고개를 뉘었다. 그의 발은 마치 그녀를 편안히
해주기 위해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 몸을 굽혔고, 두 사람의 얼굴은
서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일그러지도록 포개어졌다. 하지만 그는 역시 그녀가 듣기 원하는 말을
했고, 바로 그녀가 원하는 키스를 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불안하게 사방을 살피는 그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도 우리를 보는 사람은 없어요. 그녀는 되는 대로 그의 발과 다리를
물어뜯었다. 그녀가 그러기를 멈추자 이번엔 그의 편에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아 꼼짝할 수 없을
때까지 땅바닥에 대로 눌렀다. Belva, besriolina(야생 동물이야), 이것이 당신한테 적절한
단어가 아닐까? 그가 물었다. 그녀는 그래요, 하고 유쾌하게 응수했다. 그래요. Well. that`s a
mild way to put it(그것 참 부드러운 표현 방법이군요).
마을은 끝내 그들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 마지막 날 저녁 그가 말했다. 이 마라테아가 대체
어떤 지형인지 알고 싶은 걸요. 이 호텔이야 실상 칼라브리아 지역과는 별로 상관도 없는 것
같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당장 기뻐서 벌떡 일어나 채비를 했다. d`accordi(찬성이에요).
하긴 언제고 한 번 같이 산책을 가자고 그도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껏 그들은 한 발짝도
산책을 나간 적이 없잖은가. Tu m`as promis une promenade(저하고 산책하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녀는 호소를 했다. 산책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들은 서둘러 차를 타고
떠났다. 태양이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긴 했지만, 어느새 이울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양은
벌써 마지막 짙은 광채를 수면 위로 내리쏟기 시작했다. 하긴 이렇게 기우는 태양이 다시 찬란히
떠오르는 건, 이미 그들이 떠나간 뒤가 아닌가, 위로 올라가면 이 해안지대를 관조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린 사실 아무것도 구경한 게 없잖아요. tu te rends compte?(아시겠어요?) 그녀는
해안을 구경하기보다는 잠시 동안 산책을 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ma promenade(나의
산책)이라고 말했잖아요. 이렇게 그들이 점점 높은 곳으로 수없이 커브를 바싹 따라 올라가자,
그녀가 말했다. 대체 마을이 어디 있지요. 저는 언덕 뒤쪽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 위는 아닐
거예요. 어디로 차를 모시는 거지요, 저 바위 쪽으로는 올라가지 마세요. 그녀는 입을 다물고
두발로 몸을 버텨 가누고는, 사라센 사람들과 그들의 유리한 방어위치에 관해, 그리고 좀더
자세히 사라센 사람에 관해 늘어놓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저기 좀 봐요, 저기요!
그녀는 입을 다물고 눈을 가느스름히 모았다. 하늘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들은 점점 구름에
접근하며 꼬불꼬불 구름 속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첫 번째 난간을 보았다. 이어서 두 번째
난간이 그녀의 눈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간청을 하고 싶었다. 다시 세 번째 난간. 이럴 줄을
예측 못했습니다. 참 기막힌 길이로군요. 그러더니 점점 높은 곳을 겨누는 흔들다리가 연이어
나타났다. 그녀는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그 위에 담뱃갑과 라이터. 두 손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담뱃불을 붙일 수도 그에게 청할 수도 없었다. 이제 그녀는 완전히 그의 손에 매달린 존재였다.
숨을 쉬기조차 힘이 들었다. 그녀의 내부의 무엇인가가 정체되기 시작했다. 실어증의 초기증상이
아닐까? 아니면 치명적인 질병이 덮치는 증세일지도? 그러나 자동차는 푸르고 흰 도로표지판 P
앞에 정지했다. 어쩌면 이 차야말로, 이곳 암담한 돌밭 위에 멈춘 처음이자 마지막 자동차일는지
모를 일이었다. C`est fou, c`est completement fou(미칠 노릇이군, 완전히 미칠 노릇이에요).
그녀는 차에서 내려 시선의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의 스웨터를 덮쳐 입고 털 속에 몸을
웅크렸다. 그토록 추웠다. 그들은 황량하고 초라한 몇 채의 집과 수도원을 지나쳤다. 수도원
앞에서 신부 한 사람과 까만 제복의 노파 셋이 서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답례를 하지
않았다.
그는 메마른 풀숲이 뒤덮인 들길로 그녀를 안내했다. 낭떠러지에 면한 바위 꼭대기로 가파르게
이어지는 앞쪽으로 난 길이었다. 샌들을 신은 그녀는 연방 미끄러지며 걸음을 가누려고 애를
썼다.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길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기다란 돌의 의상을 입고 팔을 벌리고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돌의 형상이었다. 지금 그들은 그 형상의 등 쪽으로 다가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 않고 다시 한 번 이 엄청난 석상을 바라보았다. 호텔의 그림엽서에서 본
마라테아의 그리스도가 지금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 짓고는 그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니까 그건, 당신은 그냥 계속해서 가세요,
라는 의미였다. 그녀는 뭐라고 하는 그의 말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떨어뜨린 채 있다가
되돌아섰다. 또다시 미끄러진 그녀는 길가 바윗덩이에 펄썩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그건, 이젠 한
발짝도 더 못 가겠어요, 라는 뜻이었다. 그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거기
주저앉아 어느 관목에서 잎새를 잡아뜯었다. menthe, menta, mentaccia(박하). 그녀는 더없이
나직한 어조로 가까스로 못박아 말했다. 어지러워요. 그녀는 더없이 나직한 어조로 가까스로
못박아 말했다. 그냥 가세요. 저는 안 되겠어요. 기운이 없어요. 어지러워요. 그녀는 머리를
가리켰다. 그러더니 마치 무슨 신통한 약제라도 찾아낸 듯 잎새를 문질러 냄새를 맡았다.
Aide-moi, aide-moi, ou je meurs ou je me jette en bas. Je meurs, je n`en peux plus(저
좀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죽을 것 같에요. 아니면, 저 아래로 몸을 던질 것 같에요. 죽을 것
같아요. 더 견딜 수가 없어요). 그가 멀어져 가자, 그녀는 등 뒤 옆쪽으로 여전히 이 미칠 듯한
형상을, 누구인가 바위 꼭대기에 만들어 놓은 그리스도를 느끼고 있었다. 이것을 허용해 놓은
광인들. 그것도, 조금만 세게 디디거나 조금만 지나치게 움직여도, 그런 찰나, 바다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이 초라한 마을에다가 그것을 허용해 놓은 광인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꼼짝도
안 했다. 그래야만 그들 두 사람과,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이 마을과 사라센의 후예들과 온갖
노고스러운 시대의 벅찬 역사를 송두리째 안고 바위가 추락하는 일이 안 일어날 것 같았다. 나만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는 추락하지 않으리라. 그녀는 울고 싶었다. 그런데도 울 수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울 수 없어졌는가. 대체 얼마나 오래 전부터 온갖 언어와 지역을 헤매고 다녔다 해서
울음을 잊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울음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이상, 다시 한 번
일어서야겠다. 다시 한 번 이 길을 걸어 내려가는 용기를 가다듬어야겠다. 차에 올라타서 같이
떠나자, 그 다음 일은 나도 알 수 없다. 이것이 나의 소멸인 것이다.
그녀는 바위에 미끄러져 두 팔을 뻗고 땅바닥에 누웠다. 이 위협적인 바위 위에 십자를 그리며
누워 있었다. 그녀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 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한 횡포이냐. 사명의
작업이라는 것, 일찍이 언젠가 정해진 교구의 결정이라는 것. 그러니까 이것이 나의 소멸인
것이다. 그가 되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일어서서 똑바로
몸을 가누며 뒤도 안 돌아보고 그와 나란히 되돌아 걸었다. 검은 옷차림의 검은 인물들이 있었던
수도원을 지나 주차장 있는 곳까지 내려갔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그는 상당히
만족스런 기분이었다. 태양이 보랏빛 햇살을 쏟으며 흘러내려 바다에 빨려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에 온 해안 일대의 풍경을 보았거든요. 차에 발동을 걸고 커브를 틀며, 마침 그 생각이
떠올라 그는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흉측한 석상을 여기다 세워놨지요?
그걸 보셨습니까? 차가 다리는 동안 그녀는 얼른 눈을 감고 다시 힘들여 몸을 가누었다.
그런데도 다리들이며, 낭떠러지, 커브들이 느껴졌다. 그것은 도저히 바닥이 느껴지지 않는
심연이었다. 한결 낮은 곳으로 내려와서야 그녀는 고른 숨결을 찾기 시작했다. 산에 오른
것보다도 더 높은 느낌이었어요. 여긴 상당한 고지대로군요. 아니, 바보 같은 아가씨. 여진 해발
육백 미터 밖에 안 돼요. 기껏해야 칠백 미터나 될까. 그러자 그녀가 대꾸했다. 아니, 아니에요.
지금은 보잉제트기를 타고 착륙할 때보다도 더 기분 나쁜 걸요. 우린 곧 착륙하게 되나요?
바 안에 들어서자 그녀는, 마치 응급주사를 필요로 하는 환자처럼, 뭐든지 가져오라고 했다.
다른 때처럼 이것저것 생각해 보지도 않고, 우선 당장 효력을 발할 아무 거라도 가져오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컵을 하나 받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아무 맛도 없었다. 알코올 기운에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자 산만함이 그와 세계와 그녀 사이의 막힌 담을 풀어헤쳐 버렸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며 첫 번째 저녁 담배의 불을 붙였다. 방 안에 들어서서 그의 품에 안기자, 그녀는
다시금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원치 않고 감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의 손 안에서
질식하거나 소멸되어 버릴는지 모른다는 걱정이 머리를 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차라리 그것을
원하는 마음이 되었다. 그의 품안에서 질식되어 소멸해 버리는 것이. 그리하여 그녀 안의 모든
치유불능의 요소가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 차라리 나을 성싶었다. 그녀는 더 이상 버티지 않고
몸을 맡겼다. 그리고 무감각하게 누워 있다가 아무 말없이 돌아누워 금방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짐은 벌써 꾸려져 있었다. 목욕실에서 면도기가
윙윙대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가 나가버린 한참 뒤에야 그녀도 뒤따라 바다로 가는 오솔길을 달려
내려갔다. 아무래도 그의 모습은 안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사다리 앞에 불쑥 떠오르더니
그녀 앞에 커다란 불가사리 한 마리를 내밀었다. 지금껏 살아 있는 불가사리를 구경한 적도
하물며 잡아 본 적도 없는 그녀는 기쁨과 서글픔이 얽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것의 별
모양을 감탄하며 기념물로 들고 갈까 하다가는, 문득 다시 물 속에 던져 넣어 생명을 되돌려
주었다. 바다는 지난 며칠보다 한결 사나웠다. 하지만 실로 그녀는 지금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또한 그가 지금 물 속에 들어가 있다 해도 이미 조금도 조바심이 일지 않았다. 그녀는
건너편 바위 쪽을 가리키는 몸짓을 했다. 그리고는 사이사이로 물결이 사납게 부딪는, 초록과
검정의 대리석 무늬가 밝게 진 바윗덩이들을 향했다. 그리고는 우르릉쾅거리는 파도소리의
한복판에서 겁에 질려 사뭇 울상이 되어 어절 줄 몰라하며, 가파르고 삐죽삐죽한 바윗덩이를
엉금엉금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그들은 둘 다 동시에 시계를 보았다. 아직 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식곤증에 잠겨
아래층 테라스의 등받이 의자에 말없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이 며칠이 지나면
많은 얘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리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역시 다른 누구인가를 생각하고 있을까, 그 생각의 자락 속에 수많은 얼굴들, 육체들, 만신창이가
되고 살해당한 기억들, 이미 말해졌거나 말해지지 않은 사연들을 담고 있는 게 아닐까, 곰곰
생각했다. 그리고 불현듯, 파리를 떠올리며 지금 자기를 보고 있는 인물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데 상상이 미치는 순간, 뜨거운 갈망의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미스터
프랑켈이 그녀한테 시선을 돌렸다. 그녀 역시 꿰뚫어 보듯이 그를 마주 보았다. 저, 지금 무슨
생각을 하세요? 바로 이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계세요? 말씀해 주세요, 네,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아, 별 것 아닙니다. 그는 머뭇거렸다. Cernia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다시는 못
봤거든요. 아무래도 그놈을 잊어버릴 수 없는 걸요. 그러니까 그의 생각은 물고기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진실이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여전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목덜미를 쏘아 맞추고 싶었는데 말이지요? 그녀는 별안간 두통이 덮쳐옴을
느끼며 목 언저리를 잡고 말했다. 여기에요. 여기에 통증이 느껴져요.
마지막 한 시간 동안 그녀는 세 번 몸을 일으켰다. 한 번은 욕장관리인에게, 그러고 나서
화장실에, 마지막으로 탈의실에 가 주저앉아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자기의
행동이 서서히 눈에 뜨이게 되는 것 같아 다시 되돌아와 그의 앞에 주저앉아 그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출발할 때까지 저를 혼자만 내버려두셔도 상관없으시겠지요? 아무 일도 아녜요. 그녀는
말했다. 그냥 좀 힘이 들어요. 용서하세요. 우리 물건은 당신이 들고 올라가 주세요, 네?
그녀는 다시 한 번 바위 기슭으로 갔다. 그리고 이번엔 조심조심 기어오르기를 집어치고, 힘에
닿는 대로,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펄쩍펄쩍 뛰었다. 다시금 거의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눈물은 흘리지 않으리라. 그녀는 점점 앞뒤 가리지 않고 담대해졌다. 자, 어서, 그리고는 멀리 뚝
떨어진 검은 바위를 향해 건너뛰었다. 그녀는 얼이 빠진 듯 매달려 스스로를 향해 뇌었다.
이것은 의무이다. 나는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야만 한다. 그리고는 강요당한 듯 시계를
쳐다본 뒤 늦을세라 뒤돌아섰다. 그녀는 다시 고쳐 말했다. 아니, 내가 뭐라고 하고 있담. 대체
그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이것은 의무가 아니다. 나는 살아야만 하는 게 아니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아니다. 나는 살도록 허용 받고 있다. 진정 나는 살아도 좋은 것이며, 마침내는 그것을
터득해야만 한다. 매순간 순간마다. 바로 이 지점에서도. 그리고는 튀어오르듯, 날개가 돋친 듯
내닫기 시작했다. 살기를 허용 받고 있다는 깨달음을 안고, 한 발짝 뛸 때마다 전에 없던 확신을
가지고. 나는 살아도 좋다. 바로 그것이다. 나는 살도록 허용 받고 있는 것이다. 탈의실 안에는
그녀의 블루진과 블라우스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날쌔게 옷을 갈아입고 호텔로 올라가는 길로
내달았다. 조금도 숨이 차지 않았다. 사뭇 몸의 비중이 증발된 느낌이었다. 이제 나는 사방을
둘러보고 있다. 이것은 엄연한 바다이다. 실은 전체의 바다, 전 해안, 전체의 만이 아니지만.
그녀는 우뚝 멈춰서 몸을 굽혔다. 길가에 무엇인가 떨어져 있었다. 그가 흘리고 갔음에 틀림없는
스웨터였다. 그녀는 스웨터를 집어들고 말할 수 없이 벅찬 가슴으로 스웨터에 얼굴을 묻고
키스를 했다. 그리고 달아오르는 얼굴로 다시 앞을 내다보았다. 이것이 바다이다. 얼마나 기적
같은 정경인가. 그리고 이제 나는 용기를 내어 내 등 뒤, 높은 환상의 언덕들을 올려다볼 엄두를
내고 있다. 가파르기 이를 데 없이 돌출한 마라테아의 바위까지도. 조그맣게 보일락말락, 두 팔을
벌린 형상, 십자가에 못박힌 모습이 아니라, 비상이냐 추락이냐의 판가름을 안고 장엄하게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상이.
호텔 로비에서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아직은 그에게 가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서둘러 방으로 올라갔다. 트렁크는 벌써 사라졌지만, 새 손님을 위한 침대는 아직 정돈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헝클어진 긴 머리에 빗질을 하며 소금기 묻은 꺼칠꺼칠한
머리털에 볼륨을 살렸다. 그러고 나서 옷장이며 서랍을 모조리 열어 젖히고, 빈 담뱃갑이며, 종이
나부랭이, 크리넥스를 휴지통에 던져 넣고 침대 밑을 살폈다. 방을 나서려고 하는데, 그의 침대
옆 전기스탠드 밑 서랍에서 책이 한 권 눈에 띄었다. 그녀는 그것을 핸드백에 집어넣다가 얼른
다시 꺼냈다. 그것은 그의 소유품일 수 없는 물건이었다. I1 Vangelo. 이런 호텔에 비치된
성경책일 뿐이었다. 그녀는 개키지도 않는 침대 위에 주저앉아, 곧잘 미신적으로 자신의 사전류를
펼쳐서 단어 하나를 찾아내어 하루의 좌우명을 사전한테 신탁처럼 물어보던 버릇대로, 이번엔
성경책을 펼쳤다. 이것은 그녀에게 한낱 사전일 뿐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왼손
위를 찍고 다시 눈을 떴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기록되어 있었다. I1 miracolo, come
sempre, e il eisultato della fede e d`una fede audace. 그녀는 책을 제자리에 놓고 문장을
입으로 뇌며 말을 바꾸어 보려고 시도했다.
기적.
기적은 항상
아니, 기적은 신앙의 결과이며 또한
아니, 신앙과 담대한, 아니, 담대한 것보다 더한 것 그것보다 더한 것.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나는 역시 별수 없이 서투르다. 나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다. 여전히 모든 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단어 하나하나의 뜻이며 그것의 활용법까지 알고 있는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역시
나는 이 문장을 다른 언어로는 옮겨놓을 수가 없다. 이 문장의 진정한 근원이 무엇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나는 역시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는 것이다.
바 앞에서 그녀는 멈춰섰다. 그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오는 것을 못 보고, 그녀가
이미 여기에 와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마침 다른 손님들과 바의 소년과 어울려
구석에 놓인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자전거들이, 처음엔 몇 대의 자전거가 화면 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대의 자전거 핸들에 바싹 몸을 굽힌 주자가 비치더니, 이어서
인파가 늘어선 도로변이 나타났다. 아나운서가 극도로 흥분해서 떠들고 있었다. 그는 발음을
잘못하고, 정정을 하고, 다시금 단어를 헛짚었다. 이제 삼 킬로미터가 남아 있다는 얘기인
모양이었다. 아나운서는, 마치 자기 자신이 페달을 밟고 있는 것처럼 이젠 더 이상 견디어 낼 수
없다는 듯이, 심장이 끊어지기라도 할 듯 점점 속도를 더해 떠들어댔다. 이제 그의 혀에서 땀이
흘렀다. 그녀는 이것이 대체 얼마나 걸릴까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앞으로 이 킬로미터. 그리고
최면에 걸린 듯 텔레비전에 시선을 박고 있는 바의 소년한테 상냥하게 물었다. Chi vince?(누가
우승하는 거지요?) 소년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일 킬로미터. 아나운서는 숨을
헐떡이며 그르릉 소리를 냈다. 그리고 중요한 마지막 구절을 끝맺지도 못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주자는 결승테이프를 통과했다. 바로 이 순간 텔레비전이 아우성으로 굉굉
울렸다. 길가의 수많은 인파가 고함을 치기 시작했고, 이 혼란스런 비명은 이윽고 명료한
스타가토의 외침으로 뒤바뀌어 갔다.
아
도르
니
아
도르
니
그녀는 놀라움과 동시에 안도를 느끼며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 스타카토의 외침을 통해,
그녀가 지나쳐 온 모든 도시, 모든 나라의 스타카토 외침이 울려 오고 있었다. 스타카토에 담긴
증오가, 스타카토에 담긴 환성이.
아
도르
니
아
도르
니
그가 몸을 돌리고, 그녀가 이 방 안에 와 있은 지 한참 되었으리라는 짐작에 열없어 하며
쳐다보았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자기 팔에 걸린 그의 스웨터를 가리켰다. 바의 소년이 정신이
깨어나 멍청히 그녀를 보고 더듬거렸다. Commandi, Signora. cosa desidera?(무슨 일이십니까,
부인, 뭘 원하시나요?)
Niente. Grazie. Niente(아니 고마워요. 아무것도 원치 않아요).
하지만 어느새 그의 팔을 잡고 걸음을 옮기다가, 그녀는 몸을 돌렸다. 가장 중요한 것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도르니가 우승하는 것을 목격한 소년을 향해 외쳤다.
Auguri!(행운을 빌어요!) @ff
개 짖는 소리
그 동안에 젊은 요르단 부인이 있었고, 지금 또다시 새 젊은 요르단 부인이 생긴 덕분에, 벌써
30년째 "요르단 할머니"라고 불리는 요르단 노파는 히찡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거처는
헐어빠진 별장, 작은 부엌과 반욕조만 있는 목욕탕이 딸린 단칸방 집이었다. 그녀의 유명한 아들,
레오 교수로부터, 그녀는 다달이 천 실링을 받고 있었다. 지나간 20년 동안 화폐가치가 떨어져
버려서 고정된 이 금액으로는 일주일에 두 번씩 그녀를 "들여다보고" "아주 참을 수 없는 것"만
치워 주고 가는 아그네스 부인한테 지불하는 것조차 힘에 겨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이
금액의 한도 내에서 꾸려나가며, 그 중에서 뜯어서 교수인 아들과, 그의 첫 번째 결혼에서 난
손자를 위해 생일 선물과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하느라 알뜰히 저축을 했다. 이 손자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첫 번째 젊은 아내로부터 어김없이 보내져 와 선물을 받아가곤 했다. 레오는
그런 데 신경을 돌리기엔 너무나 할 일이 많았다. 게다가 유명해지고 난 뒤, 지방에서의 명성이
국제적인 명성으로 확대되고 난 뒤, 더욱더 할 일이 많아졌다. 새로 들어온 젊은 요르단 부인이
이 요르단 노파를 자주 방문하게 되면서부터 변화가 생겼다. 정말 착하고 다감한 젊은 여자라고
노부인도 곧 인정하게 되었고, 그녀는 올 때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프란찌스카, 이러지
말아요. 젊은 사람이 씀씀이가 오죽 많겠어. 아무튼 레오는 정말 너무 좋은 아들이야!
프란찌스카는 올 때마다 무엇이든 들고 왔다. 맛있는 음식과 셰리주, 과자 종류 같은 것을.
그녀는 이 노파가 술을 한 모금씩 마시기를 즐긴다는 것뿐 아니라, "대접할 것"을 마련해 두는
일에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것은 혹시 레오가 들를 수 없었고,
그런 때 그가, 어머니 집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 어머니가 하루 종일 어떻게 돈을 쪼개어 써서
선물 몫으로 돈을 남기는가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내용을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집은 무섭게 청결했다. 하지만 이 집안에는 노파 자신은 깨닫지 못하는
노파의 체취가 배어 풍기고 있었다. 이 냄새야말로 레오 요르단으로 하여금, 자신이 항상 시간이
없고, 여든 다섯이나 된 어머니랑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핑계를 둘째로
제쳐놓고, 얼른 도망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그는 기혼녀랑 관계를 갖고 있을 때에야 종종
유쾌한 기분이었다(프란찌스카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럴 때면 요르단 노파는 잠을 못
이루고, 복잡하고 야릇한 투로 암시의 말을 던지게 마련이었다. 그녀는 아들의 생활을 걱정하며,
레오 요르단이 관계한 부인의 남편들이 위험하게 질투심을 부려 처절하게 나서리라고 조바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드디어 프란찌스카와 재혼을 하고 나자 비로소 노파도 마음을 놓았다.
질투에 눈이 벌건 남편도 배후에 가지고 있지 않은 젊고 발랄한 여자, 고아인 데다 학자 집안의
출신은 아니지만, 학자인 오빠를 가지고 있는 프란찌스카랑 말이다. 학자 집안과 학자들은 비록
노파 지신 그 안에 몸담아 본 적 없이 오로지 얘기로 들어 알 뿐이었지만, 요르단 노파한테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아무튼 그의 아들은 마땅히 학자 집안과 결혼할 권리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것이 두 여자 사이에 가능한 단 한 가지 풍부한 중심 테마였기 때문에, 노파와
프란찌스카는 레오에 관해서 화제를 삼았다. 그러면 프란찌스카는 여러 차례 사진첩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유모차를 타고 있는 레오, 모래사장에 묻힌 레오, 나이별로 찍힌
수없는 레오, 방랑길의 레오, 우표를 붙이는 레오 등등 군대시절에 이르기까지.
노파를 통해 안 레오는, 그녀가 결혼한 레오와는 전혀 별개의 인물이었다. 두 여자가 셰리주를
마시게 되면 노파가 입을 떼었다. 그 애는 아주 복잡한 어린애였어. 참 유별난 녀석이었지.
애당초 그 애가 뭐가 될지는 싹수부터 미리 훤히 내다보였다우.
프란찌스카는 레오가 얼마나 효자이며 생각해 낼 수 있는 한 용의주도하게 어머니를 보살펴
준다고 기쁨에 차서 강조하는 노파의 말을 한동안 듣고는, 뭔가 이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이 들어맞지 않는다는 당혹과 함께 발견해 내었다.(노파는 아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노파가 흔히 성급하게 지나가는 말투로 덧붙이는 이런 말로
시작되는 것이었다.) 하긴 노파는 남편에게 맹목적으로 감탄하는 프란찌스카가 도저히 꿰뚫을 수
없으리라고, 자신이 꽤 재치 있게 술책을 쓴다고 여겼겠지만(그렇지만) 레오한텐 아무 말 말아요.
그 애가 얼마나 신중한 인물인지는 알지 않우. 공연히 어수선하게 걱정할지도 몰라. 내 무릎에
탈이 났다고는 아예 입을 다물어줘요. 이건 정말 대수로운 게 아니야. 그런 데다 대고 이 애가
공연히 어수선한 걱정을 할 거야.
프란찌스카는 실로, 레오가 도대체 어수선하게 흥분하는 일이 없다는 것, 최소한 어머니 때문에
그런 일은 없다는 것, 그래서 그녀가 자초지종을 얘기해도 건성으로 듣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 최초의 자각을 꿀꺽 삼켜버렸다. 무릎에 관한 얘기는 유감스럽게도 이미
그에게 말해버렸지만, 노파한테는 아무 말 않겠노라고 맹세를 했다. 이 일에 관한 한 어차피
레오는 불쾌한 반응을 보여주었고, 이어서 그녀를 달래는 투로, 이런 하찮은 일로 자기가 몸소
히찡으로 달려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변명을 했던 것이다. 어머니한테 가서 이렇게 전해. (그는
급히 몇 가지 약제를 주워 섬겼다.) 이것과 이것을 사고, 가능한 한 활동을 덜 하시라고 말야,
프란찌스카는 두말할 나위 없이 그 약제들을 사가지고 히찡에 와선 누구라고 이름도 대지 않고
남편의 조수한테 몰래 상담을 했더니 이런 처방을 주더라고 주장을 했다. 하지만 간호할
사람조차 없이 이 노파를 어떻게 병상에 놔둬야 할지, 그녀로선 난감했다. 게다가 이 일 때문에
레오한테 뭘 물어볼 용기는 이미 잃어버렸다. 실상 간호원은 돈이 많이 들 것 아닌가. 이렇게
그녀는 두 개의 전선 틈바구니에 끼어든 셈이다. 한편에서 요르단 노파는 그것에 관해 아예
알려고 하질 않았고 다른 한편에선 레오 요르단이, 물론 전혀 다른 근거에서였지만, 아예 귀를
기울이려 들지를 않았다. 무릎의 염증이 계속되는 시기 동안, 그녀는 몇 번인가 남편한테
거짓말을 하고 미장원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는, 서둘러 히찡으로 가서 좁은 집안 청소를 했고
온갖 가능한 물건을 들고 갔다. 그녀는 라디오를 한 대 샀다. 그 뒤에 물론 레오한테 지출이
탄로날까봐 상당히 불안해졌다. 그래서 얼른 가계부를 온통 변경시켜 다시 기록해 넣고는,
저금통장에 있는 그녀 자신의 얼마 안 되는 돈에 손을 대었다. 그것은 비상시에 대비해서, 하긴
그런 경우가 없는 게 바람직하지만 그래도 혹시 닥칠지 모르는 작은 비상시에 대비해서
넣어두기로 작정된 비상금이었다. 그녀의 전 가족이 죽어버린 뒤, 남케른턴에 남겨진 것이라고는,
서서히 더럽혀져 간 그녀의 처녀 몸뚱이 외에 얼마 안 되는 재산이 있었고, 그것을 오빠와
분배해 둔 것이 이 비상금이었다. 그 뒤 그녀는 옆골목에 있는 어느 개업 의사를 불러 얼마 동안
노파를 치료하도록 조처하고는, 역시 비상금에서 지불을 했다. 거기다가 더 중요한 것은, 이
의사한테 그녀 자신과 노파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레오의
명성에 손상을 가져올지 모르고, 레오의 명성이야말로 프란찌스카의 이해에도 관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파의 생각은 훨씬 맹목적으로 자기를 망각한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 하다
못해 자신이 낳은 유명한 아들한테 무릎 한 번 봐달라고 요구할 줄도 모르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지팡이를 쓰긴 했지만 무릎 사건 이후로는 진짜 지팡이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프란찌스카는 노파를 동반해 이따금 시내로 나갔다. 노파를 동반하고 물건을 사기란 상당히 힘이
드는 일이었다. 한 번은 노파가 빗을 하나 사려고 했는데, "그 시절"의 빗은 이미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노파가 설사 아무리 예의 바르게 체면을 차리고 상점 안에 서 있을지라도, 결국은
의심스럽다는 투로 가격을 살피면서 끝내 참지 못하고 이건 도둑놈의 가격이니 어디 딴 데로
가보는 게 좋겠다고 커다랗게 귀엣말을 하는 통에, 어린 여점원의 분노를 돋구고 마는 것이었다.
빗을 사는 문제가 노파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알 바 없는 여점원은 다른 가격으로는 어딜 가도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프란찌스카는 당황해서 어머니랑 타협을 하고,
마음엔 들지만 노파한테 엄청난 거액에 상당하는 빗을 집어들고 얼른 계산을 하고는 말했다.
이건 우리가 드리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예요. 미리 드리는 거예요. 물건값이 지금은 어딜 가도
무섭게 비싸졌는걸요. 노파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참담한 패배를 느꼈다. 아무튼 여전 같으면
2실링밖에 안 할 빗이 60실링 하다니, 이런 도둑놈의 가격이 존재하다니. 그녀로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도저히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효자"를 테마로 하는 이야기가 진력이 나자, 프란찌스카는 노파 자신한테로 자주 화제를
돌렸다. 그녀가 알고 있는거라곤, 레오의 부친이 아주 일찍, 그것도 돌층계에서 경색인지
심장마비로인지 급사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것도 벌써 오랜 옛날의 일임에 틀림없었다. 손꼽아
보면 노파는 벌써 반 세기째 과부의 신세가 아닌가. 처음 몇 년은 외아들을 기르는 일에
골몰하는 세월이었고 그 뒤로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노파의 세월이었다. 노파는 자신의
결혼생활에 관해선 전혀 언급하는 적 없이, 오로지 레오와 관련지어서만 화제를 삼았다. 그가
아버지 없이 얼마나 어려운 시절을 보냈는지를, 그러면서도 레오한테만 사로잡혀서, 프란찌스카
역시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다는 사실과는 도저히 결부를 못시켰다. 어려운 일이란 오로지 자기
아들만 겪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먼 친척뻘 되는 형이 학비를 대주었기
때문에 그는 애당초 그렇게 심한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다. 프란찌스카가 거의 들은
적 없는 요한네스라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에 관해 그녀가 들은 거라곤, 돈독에 빠져 허우적대며
영원히 무위도식하며 사는 인간이라는 둥, 온갖 우스꽝스런 걸 끌어모아 노경을 지낸다는 둥,
어줍잖게 예술에 정신이 팔려서 중국의 칠기를 수집한다는 둥, 결국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있는
기생충이라는 둥, 몇 마디 친척에 관해 던지는 혹평의 소리뿐이었다. 그 사람이 동성연애자라는
것까지 프란찌스카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직업상, 동성연애며 그밖의 제반 현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학술적으로 보는 일에 길들어 있을 레오 같은 사람도, 이 친척형에 관해서는 마치
예술품이며 동성연애며 그밖의 상속받은 돈까지 흡사 자신과 관계라도 되는 듯 죄의식을
드러내며 발언을 해서, 프란찌스카는 퍽이나 이상스럽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화를 내고 감정을 상하고 하기에는 자기의 남편에게 너무나 감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노파의 얘기를 들었다. 어려운 시절에 관해 화제가
이어지고, 레오는 이른바 굉장히 은혜를 소중히 여기는 인물이며, 요한네스가 더 이상 말로 밝힐
수 없는 숱한 개인적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를 상당히 많이 도와주었다는 것이었다. 노파는
주저하는 눈치더니, 어차피 한 정신병 의사의 부인과 마주하는 있는 참이라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말했다. 사실 요한네스라는 사람이 성을 밝히는 사람이라는 건 너도 알 필요가 있어.
프란찌스카는 자제를 하고 웃음을 참았다. 그것은 분명 노파가 몇 년 만에 분기해 보인 최대의
용기였다. 아무튼 프란찌스카 앞에서 그녀는 점점 기탄 없는 태도를 보이며, 요한네스가 당연한
얘기지만 무료로 레오한테서 자주 상담을 받았다고 얘기했다. 그렇지만 요한네스를 보면
아무래도 절망적이야. 어느 환자든 자기 편에서 고칠 의지를 안 가지고 있으면, 레오 같은 의사가
골탕먹게 마련이지 뭐야. 요한네스의 경우엔 예나 지금이나 모든 게 그 모양 그 꼴로
계속되는걸. 프란찌스카는 이 순진한 얘기를 현실 속에다 조심스럽게 옮겨보았다. 그러면서 왜
레오가 자기의 형에 관해 그토록 악의를 가지고 혹평을 하는지 점점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그녀
자신 그 당시엔 자세한 이유를 터득하지 못했지만, 레오는 아무튼 책임에 관한 한 상기하기를
싫어했다. 마찬가지로 자기 어머니랑 그를 거쳐간 과거의 여자들을 상기하기를 싫어했다. 이들은
그에게는 공모된 채권자들을 의미했고, 그 자신 스스로나 남들 앞에서 이들을 깎아내림으로써만
이들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사실 그의 첫 번째 아내에 대해 입에 올리는 그의 말투만 해도
그렇다. 그 여자는 파렴치와 몰이해와 악마의 덩어리였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이 이혼하는
마당에서야 완전히 명백해졌던 것이었다. 귀족인 그 여자의 부친께서는 변호사를 사들여서
아이를 위해 돈의 일부를, 곧 그가 젊은 의사로서 두 번째로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었을 때
아내로부터 받은 돈의 일부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프란찌스카가 듣기엔 끔찍한
거액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 여자한테선, 곧 레오가 늘 냉소적으로 부르는
대로 이 "남작 부인"한테선, 그 이상 기대할 건덕지도 없었다. 실상 그 여자의 집안에서는, 대체
그가 앞으로 어떤 인물이 되리라곤 꿈도 못 꾸고는 그를 보고 벼락부자처럼 취급해 왔던 것이다.
이 "남작 부인"께선 그 뒤로 다시 결혼을 못하고 완전히 칩거하고 있다는 소리를 그는
재미나다는 듯 주석을 붙였다. 자기 말고는, 곧 젊고 어리석고 가난했던 그 당시의 자기 같은
위인 말고는, 또 어떤 녀석이 이 잘난 체하는 여자와 결혼을 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그가 하는
일에 관해서 그 여자는 전혀, 한마디로 깡그리 이해를 못했다. 다만 아들 문제에 관한 한, 그
여자도 꽤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셈이었다. 아들을 정기적으로 보내면서 아버지를 존경하라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물론 그것도, 자기가 얼마나 품위 있는 여자인가를 세상에 과시해
보이려는 의도일 뿐, 다른 이유일 수가 없었다.
한 천재적 의사의 형극의 상승길은 지금의 프란찌스카에겐 이미 하나의 종교였다. 그리고
그이야말로 그 끔찍스런 결혼 생활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말로 다할 수 없는 노고를 치르며 위를
향한 길을 걸어오지 않았느냐, 그녀 스스로를 거듭거듭 채찍질했다. 또한 그의 어머니가 야기하는
경제적 도덕적 부담만도 그에겐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 그 부담을 조금이나마 자신이 덜어줄
수 있지 않은가. 어쩌면 다른 처지에서라면 자기의 자유로운 시간을 노파랑 보내겠다는 생각이
꿈에도 안 떠올랐겠지만, 이 최소한의 부담이, 레오를 생각하는 어떤 특별한 일종의 시주로, 그를
위한 사랑의 증거로 화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가 오로지 일을 위해 전념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레오 역시 그녀한테 너무나 잘해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어머니한테 신경 쓰는
건 지나친 거야. 오다가다 전화나 걸면 족해. 몇 년 전부터 노파는 전화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화를 애용하기보다 무서워했다. 상대방이 하는 소리를 잘못 알아들어 항상 너무 소리를
질러대게되는 데다 전화걸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전화요금이 너무 많이
들어. 그렇지만 이 말은 레오한테하면 안 돼요. 노부인은 프란찌스카의 부추김을 받아, 두 번째
셰리 잔을 앞에 놓고 지나간 시절의 얘기를, 아주 옛날 소시적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
얘기에서 노파는 결코 학자 집안의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녀의 부친은 저지
오스트리아의 어느 조그만 공장에서 장갑과 양말을 짜는 직공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여덟 남매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 뒤, 취직을 하면서부터 그녀에게도 화려했던 시기가 왔다. 곧 어느 그리스
가정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어마어마한 부잣집으로, 그 집엔 어린 사내애가 아나 있었다. 내
생전에 본 가장 예쁜 아이였지. 그리고 난 그 애의 가정교사가 되었어. 가정교사라면 꽤 괜찮은
취직자리였어. 결코 천직이 아니었거든. 게다가 이 그리스 가정의 젊은 안주인은 하인들을
수두룩이 거느리고 있었어. 아, 정말, 그때부터 특별히 나는 운이 좋았어. 그때만 해도 그만큼
좋은 자리를 구하기는 어려웠다우. 어린애는 키키라는 이름이었다. 어쨌든 그 당시 모두가
키키라고 불렀다. 노파가 점점 열을 올려 키키에 관해 얘기를 시작하고, 키키가 한 말이며, 그
꼬마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며, 그들이 같이 어울려 어떻게 산책을 갔는가를 시시콜콜
머리에 떠올리자, 노파의 눈에는 자신의 아들에 관해 얘기할 때조차 보이지 않던 광채가
번득였다. 키키는 한마디로 조금도 버릇없는 데가 없는 작은 천사였다고, 버릇없는 구석은
찾아볼래야 없었다고 그녀는 강조했다. 그러니까 이별이란 너무나 끔찍했음에 틀림없었다.
키키한테는 가정교사 아가씨가 떠난다는 사실을 숨겼고 그녀는 밤새도록 울었다. 몇 해가 지난
뒤 그녀는 그 가정이 어떻게 됐나를 알아보려고 애를 썼다. 들리는 말로는 여행을 떠났다고 했고,
그 뒤엔 그리스로 다시 돌아갔다고도 했다. 이제 노부인은, 벌써 예순이 넘었음에 틀림없을
키키가 어떻게 되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래, 예순이 넘었어. 그녀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 당시 이 그리스 가족들은 첫 번째 장기 여행을 떠났는데, 그녀까지 동반할 수가
없어서 그 집을 떠날 도리밖에 없었다. 그때 이별 선물로 젊은 부인한테서 아주 멋진 선물을
받았었다. 노파는 몸을 일으키더니 보석함을 뒤적였다. 그리고 키키의 어머니가 줬다는 브로치를
보여주었다. 진짜 보석이 박힌 거야. 그렇지만 그 때, 키키가 자기 엄마보다도 나를 더 따른다는
걸 젊은 부인이 알아채고 나서, 나를 떠나게 한 게 아닌가 지금까지도 의심이 들곤해. 이해가
가고도 남는 일이지만 그건 엄청난 타격이었다우, 이일은 도저히 잊어버릴 수가 없어.
프란찌스카는 생각에 잠겨 브로치를 들여다보았다. 하긴 꽤 값진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보석에 관해선 문외한이었다. 다만 얼핏 느껴오는 예감은, 이 키키라는 아이가
노파한테는 레오보다도 더 소중한 의미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실상 노파는 레오의
어린 시절에 관해선 얘기하기를 곧잘 주저했다. 또는 얘기를 꺼냈다가도, 흠칫 끊어버리고 성급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저 어린애 놀음이었지. 사내애들은 매양 기르기 힘들어요. 그 애가 일부러
그런 적은 없었다우. 그때 그 애는 참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 곤궁에 처해
있었거든, 그렇지만 사실, 어린애가 크고 자기 길을 걸어 유명해지면, 모든 걸 천 갑절로 보상을
받는 거야. 그 애는 원래 나보담은 아버지 쪽을 더 닮았다우.
프란찌스카는 조심스럽게 브로치를 돌려주었다. 그러자 노파는 다시금 후닥닥 놀랐다.
부탁이야, 프란찌스카. 레오한테는 아무 말 말아 줘요. 브로치 얘기 말야. 그 애는 그 얘길 전혀
몰라. 그 애가 화를 낼지도 모르잖아. 그렇지만 나는, 이제 내가 병상에라도 눕게 된다면 그런
일로 그 애한테 부담을 안 주게 이 브로치를 팔 수 있지 않을까, 계획을 가지고 있어.
프란찌스카는 두려운 듯 노부인을 세차게 포옹했다. 그렇게 하셔서는 안 돼요. 이 장식을 팔지
않겠다고 약속하세요. 그렇다고 우리한테 부담이 되는 건 없어요!
집으로 돌아오면서 프란찌스카는 이리저리 우회를 해서 차를 몰았다. 그토록 마음이 산란했다.
자기랑 레오가 손님을 초대하고 여행을 하고 숱한 돈을 지출하는 한편에서, 아무래도 그
부로치를 팔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체 레오한테는 뭐라고 말을 할까, 줄곧
생각을 짜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경고를 해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울린 최초의
나직한 경종이었다. 비록 변덕스럽고 극성스럽긴 해도, 이 노파가 옳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집에 와서는 아무 말도 않고 다만 유쾌한 어조로, 어머니가 아주 편안히 계시더라고만
전했다. 하지만 회의 참석차 런던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녀는, 자동차를 세내어 주고 개인을
상대로 택시를 대절해 주는 어느 차고와 몰래 계약을 맺고 계약금을 불입했다. 어머니께서
혼자서는 멀리 외출하실 수 없기 때문에, 우리한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이제부턴 언제라도
택시를 부르세요. 공짜나 다름없이 싼 거예요. 그런 단지, 오랜 단골 환자가 호의를 베푼 거예요.
그렇지만 이 일에 관해서 특히 레오한텐 말씀하지 마세요. 아시잖아요. 그이는 어머니한테서
감사의 말을 듣는다든가, 그런 걸 좋아 안 해요. 그러니까 뭐든 필요하시면 시내로 타고 나가셔서
자동차를 대기시키면 돼요. 그리고 피나이더 씨한테, 그 젊은이한테 차를 몰도록 맡기세요. 그
사람은 사실 자기 아버지가 레오의 환자라는 걸 몰라요. 그건 의사의 비밀엄수 의무에 속하는
거예요. 아시지요. 지금 그 사람한테서 오는 길이에요. 약속하세요. 레오를 위해서요. 자동차를
타시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 마음이 편해요. 처음 얼마 동안 노파는 이 자동차를 별로 이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프란찌스카는 영국에서 돌아오자 화를 내고 나무랐다. 다리가 온전치 못한
몸으로 노파는 물론 모든 쇼핑을 걸어서 했고, 히찡엔 거의 물건이 없기 때문에, 심지어 한 번은
전차를 타고 시내까지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프란찌스카는 고집 센 어린애를 야단치듯,
다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열을 내어 말했다.
키키에 관한 화제의 시기, 1차대전 전, 결혼 이전의 빈에서의 젊은 가정교사 생활에 관한
화제의 시기도 지나갔다. 그리고 종종 프란찌스카만이 얘기를 했다. 특히 레오와의 여행에서
되돌아오면, 레오가 회의에서 얼마나 훌륭한 강의를 했으며, 그가 지금 그것의 특별 책자를
어머니께 가져다 드리라고 했다고 말했다. 노파는 가까스로 안간힘을 쓰면서 제목을 읽었다.
"과거의 강제수용소 포로 및 망명자들의 경우에서 본 편집 및 우울증 발생의 외인 및 내인의
의미" 프란찌스카는 단언했다. 이건 그이가 지금 하고 있는 훨씬 방대한 작업의 초고일
뿐이에요. 저도 지금부터 일을 도와주고 있어요. 이건 아마 이 분야에선 최초의 가장 중요한
저술이 될 거예요. 막중하게 중요한 거예요.
노파는 이상스럽게 말이 없었다. 그녀는 이 논문의 혁혁한 실적을 이해 못하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자신의 아들이 하는 일이 뭔지 도대체 아무것도 모르는지도 몰랐다. 그러더니 놀라운
발언을 했다. 그 애가 여기 빈에서, 이 일로 너무 많은 적을 만들지 않기나 한다면, 그리고 또
문제가 있지.
프란찌스카는 열을 올렸다. 설사 그렇다 해도 그대로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어요. 그것이
일종의 도전이 될 테니까요. 게다가 레오는 아무도 두려워하질 않아요, 사실 그이한테 있어서 이
일은, 학문상의 중요성을 훨씬 넘어선, 둘도 없는 주요과제이니까요.
암, 그렇겠지. 노파는 얼른 말을 받았다. 그 애도 자기를 방어할 줄은 알아. 그리고 유명해지면
애당초 적이 생기게 마련이지. 난 다만 요한네스를 염두에 둔 거야. 하긴 벌써 케케묵은
얘기지만, 저, 요한네스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일 년 반 동안 강제수용소에 있었다는 걸 알우?
프란찌스카는 적이 놀랐다. 그건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일이 어떻게 결부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노파는 더 이상 말을 계속 않으려는 눈치더니, 잠시 후 덧붙였다. 레오를 위해선,
그 당시 그런 친척을 가졌다는 게 어떤 의미론 위험이었거든. 그런 친척말여, 이해하겠지. 네,
물론이지요. 프란찌스카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꽤나 착잡한 심정이 되어버렸다. 어쩜 이
노파는 이토록 번거로운 방식으로 얘기를 던지고 입을 다물고 하는지. 프란찌스카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으면서도, 레오의 가문에 누구인가 그토록 엄청난 일을 치러냈다는 것, 또한 레오가 빈틈
없이 겸손한 태도로, 그런 내용이며 당시 젊은 의사로서 그가 얼마만큼 위험에 처했던가를,
일언반구도 비치지 않은 점에 대해 문득 차오르는 긍지를 느꼈다. 이날 오후 노파는 더 이상
화제를 이으려 하지 않고,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말했다. 저 소리가 안 들려?
무슨 소리요?
개 짖는 소리 말야. 노파가 말했다. 전에 히찡에 이렇게 많은 개들이 있은 적이 없어. 또 개
짖는 소리가 들렸어. 밤에도 짖어대. 옆집 쉔탈 부인은 지금 푸들을 한 마리 데리고 있어. 그놈은
그래도 별로 안 짖지. 아주 귀여운 놈이야. 거의 매일 장보러 갈 때 부인을 만나요. 우린 그저
인사만 하는 정도야. 그 부인 남편은 학자가 아니지.
프란찌스카는 서둘러 집으로 가느라 시내로 달렸다. 그리고 이번엔 레오한테, 그의 어머니가
별안간 개에 관해 얘기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것이 무슨 미심쩍은 증세는 아닌지,
물어볼 참이었다. 그건 연령과도 관계가 있을 수 있었다. 또한 그녀의 눈에 띈 사건으로는,
노파가 언제인가 아그네스 부인이 가버리고 난 뒤, 식탁 위에 놔두었던 10실링이 없어졌다고
흥분하던 장면이었다. 없어진 10실링, 그것도 분명히 노파 자신의 공상 속에서 분실되었을
10실링으로 인한 흥분은, 아무튼 어떤 증세의 전조라 볼 수 있었다. 사실 가정부로 보면 그것을
들고 갔을 리가 만무했다. 그녀는 꽤 점잖은 계층의 사람들간에 아주 착실한 부인으로 알려져
있고, 도대체 돈이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동정에서 우러난 호의로 이곳에 와주는 처지이기
때문이었다. 또 요르단 노파의 한심한 선물, 다 닳아빠진 장갑이나 그밖의 쓸모없는 물건이
아그네스 부인을 오게 하는 동기일 수는 없었다. 노파나 그 아들한테서는 아예 기대할 게 없다는
것을 그 부인 자신 일찍이 터득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런데 그 부인 편에선 처지를 개선하려고
애쓰는 프란찌스카의 열성스런 뜻을 알 턱이 없었다. 그래서, 프란찌스카는 마치 어린애를 달래듯
노파를 설득했다. 노파의 옹고집과 근거 없는 의심 때문에 귀중한 도움손을 잃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올 때마다 노파가 창가에 앉아 있는 일이 잦아진다는 걸 알아채었다. 그리고
프란찌스카가 왔는데도, 셰리주를 마시거나 과자를 집어먹을 때, 동석하는 일이 없어졌다.
그러니까 개와 관련된 문제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노파의 난청이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프란찌스카는 어째야 할지 난감했다. 무슨 일인가 있었음에 틀림없는데, 노파 자신이
그에게서 일체의 거리를 취하고 있는 한, 레오 역시 언젠가는 어머니에 대해 골몰하는 일에서
손을 떼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침 그때부터 레오와 그녀 사이가 무엇인가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레오가, 그의 앞에선 두려움을 느낄 만큼, 자신을 위축시켜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던 중 겨우 한 번, 옛날의 용기가 불쑥 되살아나 까닭모를 두려움을
극복하고, 저녁 식탁에서 제안을 했다. 대체 어째서 어머니를 우리 집에 안 모시지요. 우리 집은
충분히 넓은데요. 그렇게 되면 우리 로지도 항상 어머니 곁에서 지낼 수 있고, 당신은 조금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텐데요. 그뿐 아니라, 어머니는 조용하시고 별로 필요로 하는 것도
없잖아요. 당신을 방해하실 리도 없고 더구나 저한텐 방해될 게 없구요. 이건 당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예요. 당신이 얼마나 신경 쓸 일이 많은지 알기 때문이에요. 이날 저녁 레오는 기분이
좋은 상태로 무엇인가 몰래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뭘 가지고 즐거워하는
지 알아낼 순 없었지만, 이 기회를 이용했다. 레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다니, 당신은 도대체 상황에 대한 감각이 없군. 이봐, 늙은이들을 살던 데서 옮겨놓으면 안 돼.
그건 다만 그들을 짓눌리게 할 뿐이야. 어머니는 자신의 자유를 필요로 해. 게다가 수십 년을
혼자 살아온 강한 여자야. 내가 아는 만큼, 당신은 어머니를 도저히 모를 거야. 여기 게시면,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만으로도 질려버려 공포로 지레 돌아가실 걸. 뿐만 아니라, 욕설로 가는
일만 해도 우리 중의 누가 욕설을 사용할세라 겁이 나서 몇 시간 동안 조마조마하실 거야. 아니,
프란찌스카, 그런 얼굴은 하지 말아. 나두 당신의 발상이 칭찬할 만하고 감동적이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그랬다간, 당신의 그 희안한 생각으로 곧장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할 거야. 내 말을 곧이
들으라구. 이 일에 관한 한 내가 훨씬 정통하다구.
그렇지만 개하고 상관된 문제는?
프란찌스카는 더듬어대기 시작했다. 이 얘기는 실상 하지 않을 작정이었기 때문에 내뱉은 말을
당장 주워담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의 위구심을 올바로 표현할 재간이 없었다.
뭐라구. 그녀의 남편은 얼굴색을 홱 달리하며 물었다. 어머니가 또 개를 가지고 싶어하시나?
모르겠어요라고 프란찌스카가 대답했다. 왜 어머니가(당신은 설마 어머니가) 개를 한 마리 가지길
원한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지요?
원, 그게 틀림없어. 난 이 유치한 막간극이 얼른 지나가 버린 게 후련할 뿐인데 말야. 사실
어머니는 그 나이에 개를 거느릴 수가 없을 거야. 어머니는 자기 한 몸이나 건사해야 해. 그게
나한텐 더 중요한 거야. 개란 것은 너무 번거로운 동물이야. 그렇다는 걸, 노쇠한 나이에
어머니는 상상을 못해. 어머니께선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라고 프란찌스카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저는 어머니가 개를 가지고 싶어한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전혀 다른 얘기를 하려구
했어요. 그렇지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미안해요. 코냑 한 잔 드실래요. 일을 더 하시겠어요?
제가 타이프를 쳐드릴 게 있나요?
다음번 방문 때 프란찌스카는 노파 자신 분명 알고 있을 내용을, 잔뜩 경계하고 있는
노파에게서 어떻게 탐지해 낼까 실마리를 못 잡고 있었다. 그녀는 빙 돌려 말의 운을 떼어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저, 오늘, 쉔탈 부인네 푸들을 봤어요. 정말 예쁜 놈이던데요. 전 푸들을
참 좋아해요. 아니 동물이라면 애당초 다 좋아요. 제가 시골서 자라서 그런가 봐요. 우리한텐
항상 개가 있었거든요. 제 말은 저의 할아버지랑 마을 사람 모두가요. 물론 고양이도 가지고
있었구요. 어머니도 개나 고양이를 기르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이젠 책 읽는 일도
힘드시니까요. 그러실 땐 지났어요. 아무튼 저는 개 한 마리가 무척 가지고 싶어요. 다만
시내에선 말예요 정말 힘이 들고, 개한테도 못할 짓이거든요. 그렇지만 여기 히찡에서라면 개도
정원을 싸돌아다닐 수 있구, 산책도 따라갈 수 있구.
노파는 흥분해서 말했다. 개라구, 아니, 아냐. 나는 개는 안 기르겠어! 프란찌스카는 자기가
서투른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동시에, 마치 단순히 앵무새나 카나리아를 기르라고
제의한 것처럼, 노파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노파가 이토록 흥분하는 데는
전혀 딴 근거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잠시 후 노파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누리는 참 예쁜
개였다우. 난 그놈하구 참 잘 지냈지. 그게, 어디 생각 좀 해봐야겠어, 그게 5년 전의 일일 거야.
그렇지만 곧 그놈을 남한테 줘버렸어. 수용소였는지, 그런 놈을 팔아넘기는 데인지에다가 말야.
레오가 개를 싫어해. 아니, 내가 무슨 소릴 하고 있지, 그건 전혀 다른 거였다우. 이 개한텐
나로선 해명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어. 이놈이 레오를 못 견디는 거야. 번번이 레오한테
달려들고 레오가 문께로 가고 있는데도 미친 듯이 짖어댔어. 그리고 사뭇 물어뜯을 기세였어.
그래서 레오가 굉장히 화가 났어. 그거야 당연한 얘기지. 이렇게 사납게 구는 개가, 다른 땐 다른
낯선 사람들한텐 도저히 그런 법이 없었다우. 그 뒤에 난 당연히 그놈을 치워버렸지. 아무튼
나도, 레오가 누리한테 짖어댐을 당하고 물어뜯기는 걸 내버려 둘 수 없었거든. 어림없지. 그건
너무한 일이었지. 레오가 나를 찾아올 땐, 편안히 시간을 보내고, 그런 버릇없는 개 따위로
불쾌한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어.
프란찌스카는 이젠 자기를 못 견뎌하며 달려드는 개도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레오가 충분히
드물게 온다는 것, 프란찌스카가 그 일을 떠맡은 뒤로는 더욱이 드물게 온다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그가 여기 왔던 게 언제였던가? 언젠가 한 번 셋이서 봐인 가를 지나 헬레네 계곡까지
드라이브를 하고, 그곳 음식점에서 어머니랑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밖에는 프란찌스카
혼자만 왔었다.
레오한텐 아무 말 말아요. 누리가 그 애를 상당히 기분 상하게 했거든. 그 애는 아주 상처를
잘 입는 타입이야. 알겠지. 난 지금까지도, 그토록 이기적으로 누리를 데리고 있었던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늙은이들이란 그렇게 이기적이라우. 프란찌스카, 너는 아직 도저히 이해를
못할 거야. 아직 너무 젊고 착하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잔뜩 늙어버리면, 그런 이기적인 욕망이
머리를 들게 마련이라우. 그렇지만 그런 데다 자신을 맡겨버리면 안 돼요. 레오가 나를 돌봐주지
않는다면, 내가 어떤 꼴이 되었겠어. 그 애의 아버지는 그렇게 별안간 죽어버리고,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우. 돈도 없었지. 내 남편이란 자는 약간 경솔했어. 아니, 낭비벽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항상 곤란에 시달리고 돈에는 운이 없었어. 그러니까 레오한텐 아무것도 남겨놓은 게 없었다우.
다만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일을 할 수 있었지. 사실 어린놈을 위해서였어. 나는 아직
젊었었거든. 그렇지만 대체 지금은 뭘 할 수 있겠어? 나는 내가 양로원에 가게 될까봐 늘
불안했었다우. 그렇지만 그건 레오가 도저히 용납 안 할 거야. 내가 이 집칸이라도 지니지
않았다면, 양로원엘 가야 했겠지. 그건 한 마리 개 값도 안되는 노릇일 거야. 프란찌스카는
오싹해지는 느낌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자신을 향해 혼잣말을 했다. 그러니까 그거야.
바로 그거였어. 어머니는 그이를 위해 개를 버렸어. 우리 인간이란 대체 뭘까. 그녀는 생각했다.
(도대체 내 남편이란 어떤 인간인가! 그녀는 생각을 파고들 능력이 없었다.) 우리는 얼마나
비열한 존재인가. 그런데도 어머니는 자신을 이기주의자라고 생각하시지 않는가. 정작
우리야말로 온통 그런데 말이다!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른 마이늘(빈의 수퍼마켓
이름, 역주)에서 사들고 온 자질구레한 물건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그리고는 아무 소리도 못 들은
척 행동했다. 아, 내가 왜 이렇게 정신이 없지요. 차랑 커피랑, 연어조각, 러시아샐러드를 사들고
왔네요. 이건 온통 도저히 어울리지가 않는데요. 오늘은 쇼핑을 하면서 아주 정신이 나갔었어요.
레오가 원고를 하나 끝마치지 않고 여행을 떠나서인가 봐요. 그렇지만 그이가 오늘 저녁엔
어머니한테 전화를 할 거예요. 일주일 뒤면 돌아올 거예요.
그 애도 좀 푹 쉬어야 해. 노파가 말했다. 너도 그럴 궁리나 하렴. 너희들은 올해 휴가도 가지
않았잖니. 프란찌스카는 생기 있게 말했다. 참 좋은 생각이네요. 저도 벌써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참이에요. 좀 꾀를 쓸 필요가 있어요. 아무튼 어머니께서 참 좋은 충고를 해주셨어요.
그이는 정말 쉬지 않고 과로를 하거든요. 제가 일단 제동을 걸어야겠어요.
프란찌스카가 몰랐던 건, 그것이 노파 집의 마지막 방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그만 꾀조차 쓸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다른 사건들이, 그것도 태풍같이 세차게 몰아닥쳐서,
그녀는 노파며 다른 일체의 일을 망각해 버린 것이었다.
노파는 두려운 마음에 아들과의 통화에서도, 왜 프란찌스카가 안 오는지 묻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했지만, 아들의 목소리는 유쾌하고 태평스럽게 들렸다. 게다가 한 번은 아들이 직접 찾아와
20분이나 머물다가 갔다. 과자는 건드리지도 않고, 셰리주도 마시지 않고, 프란찌스카에 대한
얘기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다만 자기 자신에 관해서만 잔뜩 떠벌였다. 그것은 노파를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게 했다. 그가 자기 자신에 관해 얘기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이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었고, 자기도 좀 긴장을 풀어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멕시코"라는 말에 노파는 흠칫 놀라며, 거기엔 투석기며 혁명, 야만인과 지진이 판치는
곳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노파의 말을 일소에 붙이며 키스를 하고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과연 그림엽서 두어 장 보냈다. 프란찌스카로부터의 안부가 빠져 있는
미심쩍은 엽서였다. 한편 케른턴으로부터 프란찌스카한테서 전화가 한 번 왔다. 원, 젊은이들이
어쩌자고 이렇게 돈을 부리고 다닌담! 실상 프란찌스카는 그냥 안부만 물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그들은 레오에 관해 말했고, 노파는 엉뚱한 대목에서 거듭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만 너무
돈이 많이 들지 않니, 얘야. 하지만 프란찌스카가 말을 받았다. 네, 제가 그 일을 성공시켰어요.
그이는 이제 마침내 충분한 휴식을 취할 거예요. 저는 오빠한테 올 일이 있었거든요. 여기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래서 레오를 동반할 수 없었어요. 케른텐에서의 집안 일이에요. 집
때문에요. 그 뒤 노파는 또 한 번, 몇 줄 프란지스카의 편지가 담긴 이상스런 봉투를 받았다.
인사말 외에는 그녀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한 장 보내드리고 싶다는 내용뿐이었다. 사진엔
레오가 찍혀 있었다. 짐작컨대 젬버링(빈 남단에 있는 알프스 산의 줄기, 역주)의 설경 속에,
어느 큰 호텔 앞에서 웃는 모습이었다. 노파는 레오한텐 아무 말 않기로 작정했다. 어차피 그는
묻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사진을 보물함 속 브로치 밑에 감추었다.
이제 노파는 책 같은 건 도저히 읽을 수 없고 라디오는 지루했다. 다만 신문만은 요구해서
아그네스 부인이 가져왔다. 몇 시간씩 걸리면서 그녀는 신문에서 부고란을 읽었다. 자기보다
젊은 사람이 죽는 경우, 그것은 항상 그녀 마음에 어떤 만족감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더러 교수도 죽었다. 기껏해야 일흔 살이 되었을 텐데. 쉔탈 부인의 어머니도 암으로
죽었다. 아직 일흔 다섯 미만이었다. 노파는 우유가게에서 뻣뻣하게 조의를 표하고, 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는 집으로 돌아와 창가에 섰다. 흔히 늙은이들이 그렇듯 노파는 잠이 적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개 짖는 소리를 듣고 자주 깨었다. 또 가정부가 올 때마다 흠칫 놀랐다.
프란찌스카가 오지 않는 이후로는 누구든 오는 게 성가시게 느껴졌다. 그리고 노파 스스로도
자신이 변해 간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이제는 이러다가 갑자기 거리에서 쓰러지지나 않을까,
또는 시내에서 뭘 사고 싶은데 몸을 가누지 못하면 어쩌나, 진심으로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꼬박꼬박 젊은 피나이더 씨를 불러 안내를 받아 다녔다. 이렇게 그녀는, 안전을 기하겠다는
근거로 시작된 조그만 안일에 길이 들어 갔다. 시간에 대한 의식은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래서
레오가 갈색으로 그을린 얼굴로 잠깐 들르러 왔을 때도, 그가 멕시코에서 돌아온 건지, 도대체
언제 거기에 가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걸 물어보지 않을 정도로는
현명했다. 그리고는 그가 지금 막 이탈리아 여행에서, 이시야(Ischia)에서 오는 길이라는 말귀를
새겨들었다. 노파는 멍하니 말했다. 좋아, 좋아. 그것 참 잘했다. 이어서 그가 노파에게 무슨
얘기인가 시작을 하는데, 개들이 짖기 시작했다. 여러 마리가 동시에, 아주 가까이서, 그녀는 개
짖는 소리에, 점점 차분해져 가는 놀라움에 밀폐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젠 아들 앞에서도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평생의 두려움이 불현듯 그녀로부터 빠져나가 버린 것이었다.
그가 나가면서, 다음번에는 엘피를 데려 올께요. 어머니도 알고 지내셔야 돼요! 라고 말할 때,
노파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깨닫지를 못했다. 이제 그는 이미 프란찌스카와의 결혼생활을
청산했단 말인가. 대체 언제부터, 그리고 이번이 대체 몇 번째 여자인가. 프란찌스카와는 얼마나
오래 살았고, 그것이 언제였는지를 노파는 이미 기억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만 이렇게 뇌는
것이었다. 데리고 오렴, 좋아.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한순간 노파는, 누리가 다시 이 집에
와서 그를 향해 달려들어 짖어대는 것 같은 확신을 느꼈다. 지금의 개 짖는 소리는 그토록
가까웠다. 그가 제발 빨리 가 버려야 했다. 그녀는 혼자 있고 싶었다. 그리고 조심하느라
습관처럼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그는 어리둥절 물었다. 대체 뭐가 감사하세요? 그러구
보니 어머니께 제 책을 갖고 오는 걸 잊었군요. 비상한 성공이에요. 우송하도록 할께요.
그래 고맙구나, 얘야. 우송하도록 해라. 그렇지만 미안하게도 네 무식한 에미는 이젠 읽을 수도
없고 거의 이해도 못하는구나.
노파는 아들의 포옹을 받았다. 그리고는 어느새 다시 개짖는 소리에 몰려 고립되었다. 개 짖는
고리는 히찡의 모든 정원, 모든 집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야수들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개들이
노파한테 다가오며 그녀를 향해 짖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나처럼 거기 서 있었다.
키키와 그리스인 가정 시절의 꿈은 이미 사라졌다. 마지막 10실링 짜리 지폐가 없어진 날과
레오가 그녀를 속였던 날도 이미 기억에 없었다. 다만 안간힘을 쓰며 물건들을 감추려고 애를
썼다. 그 물건까지, 자기가 죽은 뒤 레오가 아무것도 발견 못하게, 특히 브로치와 사진까지
없애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마땅하게 숨길 자리가 안 떠올랐다. 다만 쓰레기통이 떠올랐지만,
특히 브로치와 사진까지 없애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마땅하게 숨길 자리가 안 떠올랐다. 다만
쓰레기통이 떠올랐지만, 아그네스 부인도 점점 믿을 수가 없었다. 쓰레기통을 이 여자한테
주어버리면, 아무래도 그것을 뒤져보고 브로치를 발견할 것 같은 의심이 갔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아주 퉁명스럽게 이런 말을 했다. 최소한 뼈다귀랑 음식찌꺼기는 개들한테 줘요.
가정부는 어안이 벙벙해서 쳐다보며 물었다. 개들이라뇨? 마땅히 개들한테 줘야 해. 노파는
당당하게 고집했다. 나는 개들이 그걸 갖는 걸 원한단 말야!
수상쩍은 여편네 같으니라구, 도둑질하는 여자, 이 여편네는 아무래도 뼈다귀를 집으로 가져갈
거야.
개들이라고 하잖아, 대체 내 말을 못 알아들어요? 귀가 먹었수? 이상할 것도 없지, 당신
나이엔.
그 뒤 개들의 짖어대는 소리가 낮게 잦아들었다. 그러자 노파는 누군가 개들을 멀리 치웠거나,
몇 마리를 없애버린 거라고 생각했다. 이젠 전처럼 우렁차고 성급한 개 짖는 소리가 다시는
들려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개 짖는 소리가 낮게 잦아들어 갈수록 노파는 점점 옹고집이
되어갔다. 그리고 다만 우렁찬 개짖음 소리가 되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모름지기 기다릴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노파는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명백히 이웃의 개들의 기척이
들려오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짖어댐이 뚝 그쳐버렸다. 으르렁대는 소리도 그쳐버렸다. 다만
이따금, 단 한 마리 개의 우렁차고 거센 개선의 환호성만이 들려왔다. 뒤이어 신음소리, 멀어져
가며 짖어대는 다른 모르는 개의 소리가 배음으로 들려왔다.
누이 프란찌스카 요르단이 세상을 떠나고 거의 이태가 지난 뒤 어느 날, 마르틴라너 박사는
피나이더 상회에서 청구서를 한 통 받았다. 프란찌스카 요르단 부인이 계약금을 내고 신청한
것으로 되어 있는, 정확히 날짜가 기록된 택시요금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생전에 탄 거리는 별로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이 죽은 뒤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상회에 전화를 걸어 이 수수께끼
같은 청구서의 해명을 요구했다. 그들의 해명으로는 사실상 이렇다한 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는
과거의 매제한테 전화를 걸거나, 또는 그 사람을 자기 생전에 만나보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기는 모르는 여자, 도대체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여자가 타고 다닌 비용을 할부로, 자기
돈으로 지불해 버렸다. 그리고 그는 이 피나이더를 이용한 늙은 요르단 부인이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으리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곧 이 상회 측에서는 계산서를 청구하기 전에, 마지막 주행
이후의 몇 달을 아마도 명복을 비는 뜻에서였겠지만, 삭제해 버렸던 것이다.
동시에 전3권 중 제2권
잉게보르크 바하만
그녀의 행복한 눈(게오르그 그로데크를 기억하며)
오른쪽은 2.5, 왼쪽은 3.5로 시작했다고 미란다는 기억한다. 그런데 지금은 조화를 이루어 양쪽
눈이 각기 7.5 디옵트리(렌즈의 굴절도 단위, 역주)이다. 그러니까 근시점이 비정상적이고 가깝고,
원시점 역시 가까운 데서 접하는 것이다. 여행이라도 떠나 사고가 날 경우에 대비해서, 그녀는
일단 안경 처방을 머릿속에 외워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기다가 난시까지 겹쳐서 처방서가
어찌나 복잡한지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이 제2의 데포르마시옹이야말로 그녀를 켕기게 하는
대목이다. 왜 자기의 자오선이 교란되어 일정한 굴절력을 잃어버렸는지,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다. 뿐만 아니라 "난시"라는 표현 역시 그녀의 기분에 탐탁치 않다. 그래서 그녀는
요제프한테 엄숙한 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난시라는 것, 아시겠어요. 그거야말로 장님이
되는 것보다 더 참혹한 일이에요.
하지만 미란다가 자기의 병적인 시신경 조직을 "하늘의 선물"로 느끼는 면도 없지 않다. 이런
표현, 하늘이며 신, 성자와 같은 말로 이루어진 표현을 그녀는 툭하면 잘 쓴다. 실로, 제아무리
유전에서 온 것일지라도, 그녀의 눈은 엄연한 선물인 셈이다.
다른 사람들이 허구한 날 눈에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모조리 주시하며 견디어 내는지, 실로
그녀는 감탄스러운 마음이다. 아니면, 그들은 어차피 세계를 보는 다른 조직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로 인해 그다지 시달리지 않는 것일까? 난시도 근시도 아닌, 정상적인 시력은
사람들을 무신경하게 만드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미란다는 특권을 가지고, 특전을 누리며
사는 것을 더 이상 불평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만일 미란다가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요제프의 누렇게 물든 이빨을 봐야 했다면, 그녀는 그를
덜 사랑할 것이 틀림없다. 사실 그녀도 그의 이빨의 상황을 가까이서 보고 알고 있고, 그래서
"끊임없이 보는 것"에 대한 가능성이야말로 불안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참이다. 피곤할 때마다
그의 눈 가장자리에 잡히는 주름살 이랑의 위협도 필시 그녀한텐 별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어쨌든 그녀는 선명하게 볼 수 없는 상태로 머물면서, 그로 인해 자신의 감정이 손상을 입거나
약화되지 않을 수 있는 편을 만족해 한다. 요제프가 피곤한지 어떤지, 왜 그가 피곤한지, 또는
그가 유쾌하게 웃는지 괴로워하는지, 어차피 그녀는 그 순간마다(사실 다른 유의 파동으로
전달을 받으니까) 직감한다. 다른 이들처럼 예리하게 윤곽 지어진 요제프를 그녀는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 어느 누구도 분석해서 훑어보지 않을 뿐더러, 안경 쓴 시선으로 사람들을
사진 찍으려 들지도 않고 다른 인상들로 규정된 그녀 특유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요제프의 경우는 애초부터 첫눈에 이 일이 성공적이었다. 첫눈에 그녀는 그에게 반해 버린
것이다. 하기야. 그녀의 첫눈이란 오로지 비극적인 오류만을 초래할 것을 아는 안과 의사라면
누구라도 이 사실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리라.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첫눈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무릇 모든 남자들 중에서 요제프야말로, 초기의 스케치들로나 후기의 스케치들,
밝은 색조와 어두운 색조의 스케치들, 그리고 모든 있을 법한 상황 속의 스케치들로써 미란다가
지극히 만족하고 있는 바로 그 인물인 것이다.
황금 안경테를 코 위에 걸치는(확산 렌즈를 통한) 약간의 교정의 힘을 빌면, 미란다는 지옥을
들여다볼 수 있다. 지금껏 이 지옥을 들여다볼 때마다 그녀는 공포로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곤
했다. 그래서 레스토랑에서 식단표를 읽으려고 또는 거리에서 택시를 손짓해 부르려고 안경을 쓸
때면, 우선 조심조심 경계를 하며 주변부터 살핀다. 이렇게 잔뜩 주의를 하지 않으면, 그녀의
시야에는 도저히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광경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기형아나 난쟁이, 또는 팔을
절단한 여자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실제 이런 형상들이야말로, 불행과
엉큼스러움과 저주를 담은 흔해빠진 얼굴들, 비굴함이나 범죄를 그리고 있는 얼굴들, 산더미처럼
흔한, 상상을 불허하는 상판들의 틈바구니에서 유난히도 두드러지게 눈에 띄게 마련인지. 그래서
그들이 발산하는 분위기, 지구 표면에 유출하는 추악함에 못 이겨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고 발 밑의 대지를 잃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시야에 못 들어오도록,
그녀는 후딱 메뉴를 읽고 번개처럼 자가용과 택시를 구별하려고 애쓰고는, 얼른 안경을
벗어버린다. 최소한의 작은 정보로서 그녀는 족한 것이다. 더 이상은 알고 싶지도 않다. (한번은
스스로에게 벌을 가하려고, 하루 종일 안경을 쓰고 빈 시가의 여러 구역을 싸돌아 다녔다. 그런
뒤 그녀는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긴다. 그녀의 힘으론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자기가 보고 있는 범위의 세계를 소화하기에만도 그녀는 온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미란다가 인사를 하지 않았거나 인사를 받지 않은 데 대해 변명을 하면, 일부의 사람들은 아예
곧이 듣지도 않고, 나머지 사람들은 바보 같은 핑계라고 치지도외하거나 별난 형태의 오만이라고
간주해 버린다.
슈타지는 사뭇 원한에 차서 말한다.
그럼 안경을 좀 쓰려므나!
아니, 안 돼, 결코 하고 미란다는 대답한다. 난 안경 같은 건 안 쓰겠어. 너 같으면 쓰겠니?
슈타지가 대꾸한다.
내가? 도대체 내가 왜? 나는 아무튼 착실한 시력을 가진걸.
착실한 시력이라니라고 미란다는 생각한다. 어째서 착실하담? 그리고는 좀 언성을 높여
따진다. 그렇지만 허영으로 안경을 안 쓴다면 좀 알아듣겠니?
슈타지는 대꾸를 안 한다. 그리고 그건 이런 뜻을 내포한다. 미란다는 전설 같은 공상의
영역뿐 아니라 허영심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 게다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항상 남자들과도 전설
같은 행운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 내성적인 요제프의 편으로 보면 그야말로 현명치
못하게 걸려들었다는 것.
요제프에게 미란다는 말한다.
슈타지가 지금은 훨씬 부드러워졌어요. 전엔 그토록 상냥한 적이 없었는데요. 내 생각엔
사랑을 하나봐요. 어쨌든 그애한테 무슨 좋은 일이 생겼음에 틀림없어요. 대체 그게 뭐지요?
이혼일까요? 애기일까요? 이 예긴 아무래도 영문을 모르겠어요.
요제프는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조차 갈피를 못 잡는 듯 산만하다. 하지만 그도
슈타지가 훨씬 수월해졌다고, 사뭇 왕래조차 빈번해졌다고 말한다. 어쩌면 베르티의 의학적
처방이 주효했든가, 또는 미란다와 자기네들 모두가 작용을 했을 수도 있다고. 사실 슈타지는 그
숱한 불행한 일들로 인해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했고 완전히 비뚤어지기까지 했었다고, 그런데
이젠 어린애를 낳는다는 희망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이건 미란다가 처음 듣는 소리다. 그걸
요제프한테서 들은 것이다. 그녀는 당장 슈타지한테 전화를 하고 기뻐해 주리라 생각한다. 그
순간 후딱 춥다는 생각이 든다. 창문이 열려 있나 뒤돌아보았지만 창문은 닫혀 있다. 요제프는
다시 신문을 보고 있다. 미란다는 마주 앉아 지붕을 쳐다본다. 이 골목 안은 왜 이렇게 침침한지.
옛날 전성기에 사형집행장이었던 이 지역에 자리잡은 모든 집들의 내부는 너무 값지고, 너무
침침하다.
미란다는 아라비아 에스프레소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되었다. 그녀는 계산을 하고 나가다가
에스프레소의 유리문에 머리를 꽝 부딪고 이마를 문지른다. 지난번 혹이 아직 채 가라앉지 않은
자리에 다시 혹이 튀어나오게 생겼다. 얼음덩어리가 당장 있어야 할 텐데, 대체 지금 어디서
구한담? 유리문이란 사람들보다도 더 원수 같다. 사실 요제프처럼 자기한테 용의주도하기를 다른
사람들한텐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어느새 그녀는 보도에 서서, 다시 신뢰에 가득 찬
마음으로 미소를 짓는다. 물론 길을 잘못 들 가능성이 있다. 요제프는 먼저 은행에 갔다가
책방에 가든가, 아니면 순서를 거꾸로 하든가 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녀는 그라아벤
거리에 서서 그곳을 걸어가는 뭇 사람들 틈에서 그를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흐릿한 눈을
커다랗게 뜨고 꾸불꾸불한 열에 끼어 선다. 그리고 로텐투름 가로 가는 방향과 파크링으로 가는
방향을 번갈아 바라본다. 때로는 그가 아주 가까이 있다고, 때로는 멀리 보인다고 짐작을 한다.
아, 이제 로텐투름 가 쪽에서 그가 오고 있다. 그녀는 생판 낯선 사람을 보고 기뻐한다. 그
남자는, 요제프가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자 즉석에서 그녀의 뜨거운 관심으로부터 풀려난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기대, 점점 열렬해진다. 그러더니 뒤늦었지만, 이윽고 그녀의 안개 같은
세계 안에 일종의 일출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안개의 장막이 걷힌다. 요제프가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매달려 행복하게 걸음을 계속한다.
미란다가 오로지 어떤 특정한 것만, 곧 요제프만 있기를 원하는 주어진 그대로의 세계야말로,
그녀에겐 뭐니 뭐니 해도 편안한 단 하나의 세계이다. 외국 시장의 라이벌인 빈의 안경점,
죄엔게스와 괴테의 배려로 얻어지는 더 구체적인 세계라면, 그것이 납유리를 통한 것이든, 가벼운
유리나 플라스틱을 통한 것이든, 또는 최신 개발된 콘택트 렌즈를 여과해 보이는 것이든,
미란다는 다시는 그런 세계를 수용하지 않을 참이다. 실상 그녀도 노력을 안 한 바는 아니다.
시도를 해보지만, 곧장 거부반응을 일으켜 두통이 생기며 눈물을 흘리고 어두운 방에 누워 있지
않으면 안 될 사태가 되어버린다. 한 번은 오페라를 가기 전에, 실은 단지 요제프를 놀라게 해줄
셈으로, 이 비싼 독일제 콘택트 렌즈를 뮌헨에서 주문을 해놓고, 계산서 위에 쓰인 선전 문구를
읽어보았다. 눈안에는 항상 좋은 것을 간직할 것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녀는 지시 사항을
기억하며, 안약의 마취 때문에 사뭇 눈이 먼 상태가 되어서는, 검정 수건 위에 몸을 굽히고, 이
작디작은 물건을 눈 안에 집어넣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샤워의 배수구 속으로 튀어 들어갔는지,
타일 위에서 박살이 났는지, 한쪽 콘택트 렌즈를 목욕탕 안에서 잃어버린 채 다시는 찾지 못했고,
다른 한족은 미란다의 눈꺼풀 밑 안구의 위쪽으로 깊이 미끄러져 들어가 버렸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베르티가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속수무책이었다. 베르티의 숙달된 손길에도
불구하고, 그 뒤 또 한 시간 난감함이 계속되었다. 미란다는 언제 어떻게 베르티가 렌즈를
찾아내어 빼버렸는지 기억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는 지금도 이따금 딱 잘라
말하는 것이다. 난 어쨌든 최선을 다했어.
요제프까지도 그녀와 얘기를 하면서, 자기가 장님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장님에 가까운
사람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흔히 자명한 사물도 미란다한텐 자명하지 못하다는 것을,
또한 그녀의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없는 표정을 보일망정, 그녀는 허약한 게 아니라 꽤 독자적이다. 실은 그녀 나름대로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정글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엄밀히 알고 있고, 또한 만사에 대비 태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미란다한테는 수정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실은 그때그때
그녀 안에 펼쳐지는 변동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확대를 하고 축소를 한다. 나무
그늘과 구름을 자기 나름대로 배치하고, 그것이 카알 교회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두
개의 희부연 덩어리 앞에서 감탄을 한다. 그리고 빈 숲에서는 낱낱의 나무들이 아닌 숲덩어리를
보며, 심호흡을 하고 방향을 찾으려 두리번거리는 것이다.
자, 봐요. 비잠베르크예요!
그것은 레오폴드베르크이지만 상관없는 일이다. 요제프는 참을성이 많다. 대체 안경은 또
어쨌지? 아, 참 자동차 안에 잊어버리고 왔어요. 어떻게 저게 바잠베르크가 아닐 수 있지?
미란다는 속으로 생각하며, 레오폴드베르크를 보고 언젠가는 자기의 뜻대로, 자기가 바라는 산이
되기를 기원한다.
상냥스럽고 신뢰에 가득 찬 마음으로, 항상 앙상한 요제프한테 반쯤은 매달려서 길을 가며
그녀는 당장 닥치는 장애물을 넘어선다. "상냥스럽다"는 것은 그 순간에 느끼는 그녀의 감정일
뿐 아니라, 미란다에게 있어선 모든 것이 상냥스럽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부터 사뿐한 걸음걸이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상냥스러움을 행사할 만한 세상 안에서의 그녀의 모든 기능이 상냥스럽다.
미란다가 빈의 전차에 올라타는 경우, 차장과 잘못 표를 낸 노파 사이에 버티고 있는 노골적인
증오도, 떼밀리는 승객들의 미친 듯한 분노의 표정도, 미처 못 내린 승객들의 살기 도사린
시선도, 그녀는 깨닫지 못한 채 AK나 BK 안에서 사람들 틈에 끼여 흔들린다. 그리고는 수없이
실례해요를 연발하며 "출구"에 다다라, 쇼텐링을 때맞춰 알아본 것에, 또한 도움없이 두 개의
계단을 내려선 사실에 만족해 하며, 모름지기 사람들이 굉장히 친절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AK에 타고 있던 다른 승객들은 대학을 향해 멀어져 가며 왜 기분이 한결 좋은지, 호흡이 한결
수월해졌는지를 모른다. 다만 차장한테만은 누구인가 잔돈을 거슬러 가지 않았음이 눈에 뜨인다.
아마도 상인 거래소 앞이나 쇼텐링에서 내린 그 여자의 소행이리라. 멋진 여자. 괜찮은 다리였지.
그는 돈을 슬쩍 집어넣는다.
미란다는 숱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다녀서 다른 이들한테 적선을 한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아슬아슬하게 다른 이들을 스쳐 지나가서 충돌을 면한다. 혹은 그녀도 충돌을 한다. 하지만,
그때엔 순전히 우연한 착오로 저질러진 그녀 편의 과실이다. 하긴 그녀는 자기를 치고 지나지
않는 모든 자동차 운전자들을 위해 미사를 올리게 할 수도 있으리라. 그녀의 집에 불이 나지
않는 매일매일을 위해 성 플로리안에게 촛불을 바칠 수도 있으리라. 불붙은 담배를 놓았다가
찾노라면, 비록 책상에 벌써 불구멍이 난 후이긴 해도 고맙게도 늘 사전에 발견하지 않는가.
미란다의 집 안에 그토록 많은 얼룩이며 불탄 자국, 눌어 붙은 프라이팬, 망가진 냄비들이
있다는 건 슬픈 일이다. 진실로 조금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늘상 그럭저럭 일은 순조롭게
되어간다. 초인종이 울려 미란다가 문을 열 때, 예기찮은 손님이 거기 서 있는 경우라도, 그녀는
항상 운이 좋다. 그것은 후베르트 아저씨이고, 그녀의 옛친구 로베르트이다. 그녀는 후베르트
아저씨며 로베르트, 또는 딴 누구든 목을 얼싸안고 반긴다. 하긴 그것이 지나가는 행상이거나
불청의 침입자일 수도, 깡패 노바크이거나, 여전히 제1구를 소요시키는 예의 여자 살인범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불루트 가의 미란다한테는 항상 절친한 친구들만 찾아온다. 그밖에 미란다가
미처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큰 모임에서, 파티에서 극장이나 음악회에서, 이 비사교적인
미란다라는 여자 주변에서 냉소적인 기분으로 맴돌거나, 알 수 없다는 기분으로 아예 어울리지도
않는다. 그녀는 북허 박사가 자기를 향해 인사를 했는지, 어쩌면 안 했는지, 아예 알지 못한다.
키나 덩치로 보아, 그것은 랑바인 씨였을 수도 있다. 그녀는 단정에 이르질 않는다. 사뭇
알리바이와 수사의 세계 안에서 미란다가 수수께끼를 제기한다. 물론 그녀의 수수께끼 대상은
세계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윤곽이 랑바인 씨이기를
주장하는가? 또는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비밀은 그대로 남는다. 명징함이 주장되어지는
판국에서는 미란다는 뒷걸음질을 친다. 아니, 이런 허영심을 그녀는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배후로, 안쪽으로 비밀의 기운이 서려 있는 곳이라야, 미란다한테 자신을 향한 면의 한 조각
비밀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2미터의 간격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이미 세계는 투시할 수
없는 것으로, 인간은 투시할 수 없는 것으로 화하는 것이다.
음악협회 안에서 그녀의 얼굴은 가장 긴장이 풀려 있는 상태이다. 평화의 오아시스, 제스처를
과시하는 스무 명은 되는 인물들의 시야에 나타나서 미란다 자신은 아무도 못 보는 큰 홀 안,
그녀는 사람들이 제가끔 메모를 하고 평가를 하고, 기록하고 복사하며 서로를 꺼리며 곁눈질하는
이 방 안의 과민한 긴장을 포기해 버리기를 습득했다. 그녀는 꿈을 꾸지 않는다. 다만 충분히
휴식을 취한다. 실상 다른 이들한테의 영혼의 휴식은 미란다한테는 곧 눈의 휴식을 의미한다.
그녀의 장갑이 살그머니 빠져나와 의자 밑으로 떨어진다. 그녀는 다리에 무엇인가 감촉을 느끼며,
실수로 옆의 사람의 다리를 스친 게 아닌가 걱정스러워, 미안해요라고 중얼거린다. 의자의 한쪽
다리가 미란다한테 반한 것이었다. 요제프는 프로그램 책자를 든다. 미란다는 애매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똑바로 하고 있으려고 단단히 애를 쓴다. 랑바인 씨가 아니라 코페츠키 씨인 북허
박사는 모욕당한 기분으로 그녀보다 세 열 뒤에 앉아 이 여자의 변덕의 근거를 더듬어 본다.
한때 자기는 이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하긴 모든 것을.
요제프가 묻는다.
안경 가졌어?
그럼요. 미란다는 말하며 핸드백을 뒤적인다. 그밖에도 장갑도 가지고 온 것 같았는데, 하지만
요제프한텐 아무 말 않는 게 낫겠다. 그런데 안경은, 그것이 요점이다. 그러니까 욕실에든가,
현관에든가, 아니면 다른 외투 속에든가, 또는 미란다는 종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얼른
이렇게 말해버린다.
아니, 저, 없는데요. 그렇지만 어차피 이 음악회에선 아무것도 볼 필요가 없잖아요.
요제프는 입을 다물고, 미란다에 관련된 자신의 주제에 마음이 동해 있다. 내 천진스런 천사.
미란다 편에서 보면 다른 여자들은 결함이라는 게 없다. 항상 면도를 해서 윗입술에도
다리에도 털 한 가닥 없고 털구멍 하나 없이 매끈한 여자들, 여드름도 니코틴이 밴 손가락도
가지지 않은 여자들뿐이다. 아니, 오로지 그녀 혼자만 외롭게, 한때 요제프의 것이었던 면도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의 불완전과 고투를 벌인다. 그러면서 요제프가 너그럽게 흘려봐 주기를 희망하며
거울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미란다도 자아 비평에 길이 들어버린 뒤로는 침실 안의 흐릿한
비더마이어식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를 "참을 만하다고, 괜찮다고" 결코 절망적일 지경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이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살짝 속인다. 하긴 실로 미란다는 스스로를 속일 한
다스의 가능성 사이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유리한 가능성과 불리한 가능성의 틈바구니에서
균형을 위하며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것이다.
미란다는 순조로운 시기엔 세 개의 안경을 가지고 있다. 검정 유리를 박아 넣은 금테의 도수
있는 선글라스와 집에서 쓰는 엷고 투명한 싸구려 안경과, 예비용 안경이다. 이 예비용은 한쪽
유리알이 헐거운 데다 그녀한텐 맞지 않는다고 주장되는 것이다. 하긴 그렇잖아도 종전의
처방으로 소급해 버려야 할 구실이 있다. 이 "예비 안경"으로 보면, 미란다한텐 모든 것이 "그
옆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때로는 세 개의 안경이 한꺼번에 못 쓰게 되거나 사라지거나 분실될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미란다는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모른다. 요제프는 미처 여덟 시가 되기도 전에 프린쯔 오이겐
가에서 달려와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며 미란다를 나무라고, 하녀랑 일꾼들을 의심한다. 하지만
미란다는 다른 어느 누구도 훔쳐간 게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의 책임이라는 걸 알고 있다. 몇
가지 거점이 없이는 계속 살아갈 수도 없으면서,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미란다한테 현실은
이따금씩 작은 보복전을 벌이는 것이다. 그녀는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그녀는 객관적인
대상물들을 향해,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무대를 향해, 복잡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한텐 없을 부분의 시신경을 곤두세워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데서 생긴 그녀의
주름살이 이런 날에는 한층 깊게 패인다. 요제프는 당장에 안경점에 가겠다고 약속한다.
미란다는 안경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녀는 그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며, 느닷없이 세차게 끌어안으며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감정이 된다. 하지만 그건 그가
달려와 도와준 데 대한 고마움뿐 아니라, 자기에게 시력을,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게 시력을
돌려주는 일에 대한 고마움이다. 미란다는 자신에게 무엇이 결해 있는지를 모른다. 그런데도,
아무튼 나를 도와주세요! 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그 여자가 나보다 더
예쁜데라고 생각한다.
미란다가 어떻게 될지 몰라 외출도 못하고 무턱대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주일에, 요제프는
이혼에 관해 담판을 하려고 두 번씩 아나스타지아랑 저녁식사를 하러 간다. 첫 번째 만남 후
슈타지는 곧바로 다음날 전화를 걸지만, 두 번째 만남 이후엔 소식이 없다.
그래, 우린 로마 황제 레스토랑엘 갔었어. 지겹더라. 틀려먹었어. 음식이랑 게다가 참
추었어.
미란다는 대답할 말이 없다. 실상 로마 황제 레스토랑이야말로 요제프랑 최초로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는 이유만으로 그녀한텐 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이다. 그런데, 그곳이 느닷없이
지겹기 짝이 없는 곳이라니. 미란다, 내 말 듣고 있니? 그러니까 이미 말한 대로야. 다음 번엔
에덴바아에서야. 끔찍스러워. 대중들이라니!
분명코 대중에 대한 슈타지의 개념에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람?
미란다는 다시 편안한 마음이 되어 숨을 쉰다. 에덴바아에는 요제프랑 간 적이 없다. 그것만도
아주 가느다란 위안이다. 그녀는 단지 그렇게 구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 자체가 그런 걸까?
슈타지는 반 시간도 더 시시콜콜히 떠들다가 장담을 한다. 어쨌든 너는 하나도 놓친 게 없어.
미란다라면 그렇게 "하나도 놓친 게 없다"는 식으로 말하진 않으리라. 실상 그녀는 요즈음
모든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은 조바심이 난다. 이 주일이 도저히 끝나려 들질 않는다. 그리고
매일같이 요제프한테는 지장이 있는 저녁이 기다린다. 이윽고 안경이 완성되었다. 그는 채 몇
시간 만에 안경점에서 안경을 가져온다. 하지만 일은 어느새 다시 벌어지고 만다. 미란다는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녀는 드러누워 기다리며 요제프가 언제 프린쯔 오이겐 가에 도착할까를
계산하지 않을 수 없다. 드디어 그와 통화를 한다. 새 안경이 하수구에 빠져버렸다고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요. 하수구예요. 꼭 내가 머저리가 된 느낌이에요. 외출을 할 수가 없어요. 아무도 볼 수가
없어요. 이해하시겠지요.
요제프의 목소리가 제4구에서 들려온다.
그것 참 잘됐군. 그렇지만 당신은 안경 없이도 곧잘 외출했잖아.
네, 그렇지만. 미란다는 납득시킬 만한 구실을 떠올리지 못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좀 달라요.
다른 땐 최소한 안경을 핸드백에 넣고 다닌 걸요.
아니야. 그렇지 않았어. 제발, 알아서 해!
우리가 그런 것 때문에 이러려고는, 하고 미란다가 속삭인다. 저, 대체 당신 왜 그런
목소리세요?
내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길래?
달라요. 다르게 들려요.
대답이 없자 그녀는 얼른 말한다.
그렇지만 저 말예요, 저도 같이 가요. 지금 단지 너무 불안해요. 어젠 사뭇, 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거의 기절을 했어요. 정말예요. 참 끔찍해요. 예비 안경도 실험해 봤어요. 모든 것이
"옆으로" 일그러져 보여요. 아시잖아요.
요제프가 침묵을 하면, 그건 이해를 못했다는 얘기다.
유감이지만, 그건 나한텐 안 닿는 논리야.
다르게 들리는 어조로 요제프가 말하며 수화기를 놓는다.
미란다는 죄지은 마음으로 전화기 앞에 앉아 있다. 이젠 요제프한테까지 계기를 준 것일까?
그렇다면 무슨 계기를? 어쩌자고 나한테서 안경이 빠져나가 하수구로 떨어져 버렸을까? 왜
요제프가 존재하고 왜 세계가 존재하는 걸까? 원, 맙소사, 아, 그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대체
그럼 빈에는 다른 음식점은 없단 말인가? 요제프는 그녀를 데리고 굳이 로마 황제 레스토랑으로
가야 한단 말인가? 미란다는 울어야 하는가? 더 깜깜해진 지옥 속에서 살며, 책꽂이를 따라
더듬으며, 얼굴을 책 뒷면에 바짝 갖다대고, 책을 한 권 찾아내야 된단 말인가. "De
l`Amour(사랑)". 가까스로 처음 20페이지를 읽고나자 어지러워진다. 그녀는 책을 얼굴에 덮고 더
깊숙이 안락의자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러다가 의자째로 바닥에 고꾸라진다. 세계가
깜깜해졌다.
그녀 자신 자기의 안경이 우연히 하수구로 떨어진 게 아님을 아는 까닭에, 또한 요제프를 잃게
되리라는 것, 차라리 자진해서 잃겠다는 생각이 있는 까닭에, 그녀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느
날이고, 눈이 멀도록 공포에 질려 확인하게 될 종말을 향해 첫걸음을 연습한다. 요제프와
아나스타지아를 결별하게 몰아붙인 장본인이 그녀라고는, 두 사람 다 깨달아선 안 된다. 슈타지가
안다는 건 어림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참을 만하고, 실제보다 한결 아름다운 이야기를
창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그녀의 마음에 요제프가 조금도 비중을 차지하지 않게끔
만들리라. 그것이 중요하다. 그녀는 이 역할을 스스로에게 익히기 시작한다. 요제프는 참 좋은
해묵은 친구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그리고 그녀는 만족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항상
예감했던 대로이리라. 그녀는, 두 사람이 하는 행위가 실제로 무엇이며, 그들이 계획하고 있는
실체가 무엇인가를,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진전되었으며, 어떤 끝을 겨누고 있는 건가를 알 길이
없다. 미란다는 에른스트에게 전화를 한다. 그리고 이삼 일 뒤, 그는 용기를 내어 그녀와 통화를
한다. 슈타지한테 그녀는 몇 마디 종잡을 수 없는 소리를 하고는 반쯤 고백을 한다.
에른스트랑나 말야, 그렇게 볼 순 없어. 아냐. 대체 누가 그래? 아냐. 정말 그런 건 아니었어.
그게 사실이야. 들어봐. 너한테는 말할 수 있어. 지금의 이런 유의 사건 같은 건 항상
수두룩했어. 너도 알잖니.
그리고 그들이 벌써 꽤 진전된 것처럼 뭐라고 더 중얼거린다. 갈피를 못 잡는 아나스타지아는
미란다가 여전히 에른스트라는 녀석한테 사로잡혀 있다는 걸 알아낸다. 모두가 남의 일을 내
일처럼 안다는 이 빤한 도시 안에서. 이렇게 되리라고는 역시 아무도 짐작을 못한다.
미란다는 에른스트와 현관문 앞에서 만나는 장면에 부딪치게끔 때맞춰 슈타지와 약속을 한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머뭇머뭇 당황하는 에른스트한테 키스를 퍼붓기 시작하며 그런 자세로
들뜬 웃음보를 터뜨리고, 아직도 자기의 현관문 여는 방법을 기억하느냐고 그를 보고 묻는다.
슈타지는 요제프와 현관 앞에서 본 장면을 시시콜콜히 얘기한다. 그녀는 모든 것을 똑똑히
목격한 것이다. 요제프는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현관 앞에서 에른스트라는 녀석의
팔에 안긴 미란다라는 여자에 관해, 아나스타지아랑 어울려 깊은 생각을 펼칠 기분이 아니다.
요제프는 미란다한테는 오로지 자기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아나스타지아한테 아침식사를 만들어 준 뒤 그는 즐거운 마음이 된다. 그것도 별로 나쁘잖은
일이다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아나스타지아야말로 아주 현명하고, 훨씬
예리한 시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는 미란다가 다른 남자들을 필요로 한다는, 에른스트가
결국은 공통의 관심사 때문이라도, 그녀한텐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익숙해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베르티와 함께 있는 그녀를, 또는 하다 못해 그녀가 부르면 늑장 피우는 일없이 언제라도
날아서 온다고 구역질나게 그녀에 관해 떠들 줄밖에 모르는 프리쯔랑 같이 있는 그녀를 본다.
요제프는 미란다에게서 미처 몰랐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한다. 그리고 아나스타지아가 다시 한 번
그 얘기를 시작하니까, 미란다야말로 파괴의 명수라고 사뭇 의기양양하게 확신한다.
가엾기 짝이 없는 프리쯔라는 자는 그때부터 폭음을 한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요제프는 아나스타지아만큼 확신이 없다. 프리쯔는 옛날부터 술꾼이
아니었던가. 그리고는 그는 자신없게 미란다를 변명해 준다. 슈타지는 미란다의 성격을 해부하며,
그녀는 결국 아무런 성격도 가진 게 없다고, 끊임없이 변해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극장에 우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어느새 가련한 몰골로 치맛자락을 걸치고 나타나거나, 몇 주일이고
머리도 다듬지 않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요제프는 말한다.
그건 당신이 모르는 거야. 그건 그 여자가 마침 안경을 찾았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어. 그리고
또 그것을 썼는지 안 썼는지에 달려 있는 거야.
얼간이 같은 여자라고 슈타지는 생각한다. 이 남자는 여전히 이 여자한테 부속되어 있지
않은가. 아니, 얼간이 같은 여자는 사실은 요제프한테 희망을 걸고 있는 내가 아닌지. 그런데
지금 그는 자기가 원하는 바를 모른다. 그는 대체 뭘 안하는 걸까? 하지만 한 가지만은 대낮처럼
명백하다. 이 세련되게 칠칠치 못한 바보 같은(여기서 슈타지는 더 이상 말을 못 찾는다.) 이
여자는 아무튼 자기의 어쩔 줄 몰라하는 상황을 무기로 그를 손아귀에 완전히 넣고 있다는 것
이것만은. 요제프는 그녀를 보호해 주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나를 보호할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그녀는 착실한 시력의 아름다운 푸른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을 오렌지 주스 속으로
떨어뜨린다. 그러면서 평생토록 다시는 안 울겠다고, 최소한 이 한 해 동안은 요제프 때문에
눈물을 안 흘리겠다고 스스로 맹세한다. 극단을 걷는 모든 사람의 대변인인 미란다. 요제프의
성스러운 미란다는, 슈타지에 의해 그을려지고, 토막이 나고, 꼬챙이에 끼워지고, 화형을 당한다.
미란다는 그것에 관해 한마디 들은 바도 없으면서 온 몸으로 그것을 알알이 느낀다. 그녀는 감히
밖에 나갈 엄두를 못 내고, 두 번째 새 안경을 가지고 앉아 있다. 거리에 나서고 싶지 않다.
에른스트가 차를 마시러 온다. 그리고 그들은 잘쯔캄미굿에 갈 계획을 세운다. 또한 베르티가 한
번 살펴보러 온다. 그는 그녀가 비타민결핍증이라고 말한다. 미란다는 신뢰를 담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녀의 생각 역시 그렇다. 그래서 베르티한테, 날 홍당무를 많이 먹겠다고
자진해서 제의한다. 베르티는 긴 처방전을 쓰면서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이건 당신의 눈을 위해서 좋아.
미란다는 감사에 차서 말한다.
물론이에요. 아시잖아요. 저한테 제일 중요한 건 눈이에요.
다만 요제프만은 그녀도 직시할 수가 없다. 그녀는 항상 오른편으로 왼편으로 또는 딴 데로
그를 스쳐보면서 시선을 허공으로 흘린다. 손을 눈앞에 가리고 싶다. 그녀한텐 홀린 듯이
요제프를 바라보고 싶은 가장 큰 유혹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녀 앞에서
보여주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경우처럼 가슴이나 위장이나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 그녀의 눈을 아프게 한다. 그리고 요제프를 바라보는 일이야말로 그녀한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녀의 눈은 온 아픔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젠
매일처럼 요제프를 덜 보는 일, 요제프에 관한 것을 덜 보는 일을 실행하는 것이다.
미란다는 요제프의 잔에 얼음 조각을 넣어준다. 그리고 요제프는 으레 언제나처럼 무례하다.
그는 그들이 마치 노상 수타지를 화제로 삼았던 것처럼, 슈타지에 관해서만 얘기를 한다. 어떨
때는 근엄하게 아나스타지아라고 말한다. 어디를 가나 요제프 때문에 장해를 받는 미란다는
자기의 매니큐어 칠한 손톱을 바라본다. 매니큐어칠이 된 손톱, 이것은 요제프 시대를 동반했던
것이다. 하지만 요제프가 이젠, 오며가며 후딱 손에 키스나 하고, 매니큐어칠이 된 손톱을 들여다
보고 감탄하는 일도 없어진 이 판국에, 그녀는 어쩌면 이 칠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란다는
벌떡 일어나 창문을 닫는다. 소음에 대해 그녀는 고민해져 있다. 최근에 와서 이 도시 안에는
오로지 소음들, 라디오와 텔레비전, 개 짖는 소리와 작은 용달차 소리뿐이다. 참, 미란다한테
이런 생각이 후딱 떠오른다. 이 판국에 듣는 일까지 지장이 생긴다면! 그건 도저히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괴로운 소음은 한층 강조되어 들릴 테고, 그녀가 듣고 싶은 목소리
쪽만은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게 아닌가.
미란다는 생각에 잠겨 말한다.
내 귀는 모든 것을 감당하기엔 버거워요. 누군가의 목소리를 좋아해야겠어요. 안 그러면
아무것에도 도달할 수가 없겠어요.
하지만 그녀는 오로지 아름다운 사람들만 좋아하기를 표방하지 않는가? 그 어느 누구도
미란다보다 더 많이 아름다운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그녀는 어떤 성질의 것이든 모든 아름다움을 우위에 두기 때문이다. 그녀가 버림을 받는 경우,
요제프가 그녀를 떠나가는 경우엔, 바로 아나스타지아가 보다 아름다워지거나, 유난히
아름다워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란다의 생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부침에 대한 해명이다.
(알겠어요. 베르티? 그 여자가 사실 저보다 아름다웠어요.)
하지만 시종일관 요제프가 화제로 삼고 있는 적은 그녀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어쨌거나 역시 그녀이다.
그건 아무튼 극히 극히 드물다니까, 라고 요제프가 말한다.
아, 그래요? 미란다는 여전히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녀는 그의 말에 점점 덜 귀를
기울인다.
그래, 라고 그는 말한다. 당신하고라면 사실 가능한데 말이야.
그러니까 그는 그것을 목적하고 있다. 그러자 미란다는 몇 주일 만에 처음으로 그를
바라다본다. 아, 그렇다, 그녀는 이 끔찍이도 신성한 거짓말을 진실로 변질시켜 보리라. 도대체
그는 이해하지 못한단 말인가? 우정이라니. 요제프, 그리고 그녀와의 우정이라니?
그래요라고 미란다는 말한다. 그것이 아무튼 그렇게 드문 건 아니에요. 우정이라는 것 말예요.
그런 한편에서, 우직한 또 하나의 내면의 미란다는 어쩔 바를 모른다. 맙소사. 이 남자는 참
멍청이야. 한마디로 너무나 멍청이야. 도대체 이 남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담. 이 상태가
영원토록 지속될 수 있을까. 어쩌자고 내가 좋아하는 단 하나의 남자가 이 모양이란 말인가!
일요일 음악회엔 당연히 같이 가는 거라고 요제프가 지나가는 투로 잘라 말한다. 미란다는
이미 그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질 않는다. 하지만 슈타지가 일요일엔 남편한테 가서 다시 한 번
어린애 문제로 "담판"을 벌여야 하기 때문에 그녀한텐 한 번의 일요일이 남아 있다.
뭐예요. 또다시 마알러 4번인가요? 그녀가 묻는다. 아냐. 6번이라고 말했잖아. 아직도 런던을
기억하고 있어? 네, 하고 미란다가 대답한다. 그녀는 다시 신뢰를 느낀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요제프와 마알러를 들을 것이다. 일요일에 담판을 벌이러 가버린 슈타지는 이 멜로디 중 단 한
소절도 그녀한테서 망쳐버릴 수 없었고, 음악협회 계단에서도 요제프로 하여금 말다툼의
실마리를 만들어 줄 수 없었다.
음악회가 끝난 뒤, 요제프는 같이 미란다한테 와서 마치 이것이 마지막이 아닌 듯이 행동한다.
그는 그녀에게 그 말을 할 수 없다. 몇 주일 뒷면 그녀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녀는 아주 분별
있는 인상이다. 그는 천천히 구두를 신고 넥타이를 찾아, 미란다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멍한
표정으로 넥타이를 매고 바로잡는다. 그리고는 슬리보뷔쯔 한 잔을 따라 창가에 서서 도로
표지판을 내려다 본다. 제1구, 불루트 가, 내 천진한 천사. 한순간 그는 미란다를 품에 안는다.
그는 입술로 그녀의 머리털을 건드리며, "불르타 가"라는 말에 사로잡혀, 다른 아무것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누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가해 오는가?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을 가하는가?
왜 나는 이 행위를 해야 하는가? 그는 미란다한테 키스를 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다만, 끊임없이 처형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이것은 엄연한 처형이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범행이기 때문이다. 무릇 행위란 곧 범행인 것이다. 그의 천사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여전히 요제프에게서 알아낼 궁극의 것이 남아 있다는 듯 의문에 찬
시선을 고수하고 있다. 그녀의 표정은 특사를 내리고 자유를 줌으로써 그를 한층 깊은 파멸로
몰아간다. 요제프는 자기를 그런 표정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사람은 또다시 없다는 것을,
아나스타지아 역시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눈을 감아버린다.
언제 문이 닫혀버렸는지 미란다는 깨닫지 못한다. 그녀는 다만 아래쪽에서 나는 차고 문의 탕
닫히는 소리, 멀리 어느 술집에서 들려오는 떠들석한 소음, 길거리의 취객들, 라디오의
음악소리만을 듣고 있다. 이 소음의 도가니, 빚과 어둠의 도가니 속에서 그녀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다만 그녀는 으깨져라 아파오는 두통 너머로 세계에로의 통로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두통에 못 이겨 뜨고 있기를 고수하던 눈을 감아버린다. 결국 그녀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요제프를 보았던 것이다.
잘츠부르크, 바자르 커피점. 그들은 재회를 한다. 아나스타지아와 요제프가 한 쌍을 이루어
들어선다. 미란다는 슈타지의 너무나 화난, 또는 불행한 모습 때문에 몸을 떨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무슨 일일까? 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항상 요제프한테 마음이 날아가는 미란다는
그가 뭐라고 냉소적인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을 듣는다. 이어서 슈타지는 침울하게 걸음을 계속
떠놓으며 그녀 쪽으로 온다. 요제프가 도망치듯(그녀를 피하는 건 아닌지?) 참사관 페르시
노인에게, 이어서 알텐뷜네 가족과 모든 자기 패거리들한테 인사를 건네는 동안, 미란다는 샌들
신은 다리를 벌떡 일으켜 서투른 걸음걸이로 창백한 슈타지한테 훌쩍 접근한다. 슈타지로부터
뺨에 키스를 받고 난 뒤, 마지못해 끌려가는 의지와 가식을 못 이겨 새빨개진 얼굴로 그녀는
중얼거린다.
너를 만나서 정말 기뻐. 요제프를 만난 것도 물론이고, 그래, 카드 고마웠어. 잘 받았어.
요제프는 그녀를 향해 웃음을 보내며 얼른 손을 내밀고 또 만납시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슈타지가 관대하게 말한다. 그렇지만 요제프, 미란다한테 키스를 해주어야지요.
미란다는 이 말을 전혀 못 들은 척 행동하며, 뒤로 물러서서 아나스타지아를 자기한테
끌어당겨 소곤소곤 귀엣말을 한다. 점점 얼굴이 상기되면서. 저 말야, 이 잘츠부르크에 있으면
뒤죽박죽의 느낌이야. 아니, 아냐, 나쁜 의미가 아냐. 그렇지만 이제 곧장, 에른스트를, 그가
놀라게, 알겠지. 요제프한테도 그렇게 전해줘. 그렇게 해주겠지.
미란다는 서두른다. 그녀의 눈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나스타지아의 모습이 문득
"사랑스럽게" 보인다. 게다가 문득 상기되어 있는 얼굴이다. 하긴 지금 그녀는 다만 열에 들떠
그녀의 감정이 더렵혀진 세계에 굴복 당하고 있는 감정의 상태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녀는
얼굴과 육체에 짙은 홍조를 띠고, 이 뜨거운 치욕을 띠고 호텔 안으로 들어가리라. 그녀의 시야엔
아직 날개문이 보인다. 다만 이 날개문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회전하지 않고, 한쪽 날개가 훨쩍
반동을 일으켜 그녀에게 와 부딪는 걸 깨닫지 못한다. 유리 조각의 우박에 깔려
내동댕이쳐지면서, 입과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로 한층 더 화끈 달아오르며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궁극의 생각은 눈 안에는 항상 좋은 것을 간직할 것. @ff
문제들, 문제들
"그럼 여섯 시예요. 그래요, 에리히. 그게 저한테 좋겠어요. 고층 커피점이요. 혹시나 제가요.
네, 혹시 말예요. 어쨌든 일단 미장원엔 가야 하니까요. 일곱 시예요. 대략 그쯤엔 될 거예요.
만일 제가 제대로... 네, 아 그래요? 비가 오나요? 네. 저두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줄기차게 비가
오네요. 네, 저두요. 저두 기뻐요."
베아트릭스는 전화통에 대고 뭐라고 더 소곤거리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휴우, 하는
기분으로 배를 깔고 돌아누워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안간힘을 쓰며 생기를 내서 통화를
하는 동안 그녀의 시선은, 한 번도 누구를 따라 여행길에 올라본 적 없는 낡은 여행용 자명종에
박혀 있었다. 아무튼 이제 겨우 아홉시 반인 것이 사실이었다. 아주머니 미하일로빅스 집안에서
가장 좋은 것은, 전화기가 두 대 있어서 그 중 하나는 그녀의 방 침대 곁에 놓고 언제라도
통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상대편 대답을 느긋이 기다릴 수 없는 구실이 생기면,
즐겨 콧구멍을 후벼가면서, 또는 좀더 시간이 늦은 때라면 더 신나게 두 다리를 빙빙 돌리거나
몇 가지 약간 더 힘든 운동을 해가면서 말이다. 그러고도 수화기를 놓기만 하면 그녀는 당장
다시 잠이 들었다. 아홉시 남짓한 이른 시간이라도 낭랑한 음성으로 대답하는 일이야 그녀로서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고 나면 마음 좋은 에리히는, 그녀도 자기처럼 벌써 일어났으리라고.
그리고 어쩌면 벌써 외출해 버렸거나 이날 하루를 위한 모든 있을 법한 일의 채비를 하고
있으리라고 상상해 주는 것이었다. 그녀가 번번이 당장 다시 잠들어, 심지어는 달콤한 꿈이라도
계속해서 꿀 것을 염두에 두고 있으리라고는 그 편에선 아마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리라.
물론 그녀가 계속 기대하는 꿈이란 달콤한 꿈의 경우였다. 하지만 그것은 퍽 드문 일이었다.
실상 그녀는 별로 이렇다하게 꿈도 꾸지 않았고 꾸었다 한들 별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녀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잠을 계속 자는 일이었다. 혹시나 누구든 그녀에게 시간을 보내기에
가장 그럴듯한 일이 무엇이며, 그녀의 꿈, 곧 그녀의 인생에서의 소망과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어오고 대답을 기대한다면, 그녀는 필시 잠에 취한 채 열광을 하며 이렇게 말할 것임에
틀림없다. 잠 이상의 것은 없어요! 라고. 하지만 베아트릭스라도 누구에게 실제 그렇게 말하기를
삼가할지 모른다. 실상 그녀 자신도 벌써 얼마 전부터 다른 사람들, 예컨대 미하일로빅스 부인과
에리히, 아니면 하다 못해 사촌 엘리자베트까지, 이를테면 그녀도 이제 드디어 무엇인가 하도록,
이른바 일거리를 가지도록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은근히 종용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녀도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는 그런 대로 약간 절충을 해서, 때에 따라
미래의 계획이나 관심사를 슬쩍 암시하는 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날 아침의 그녀는 당장 잠에 빠져들지 못한 채, 다만 나른하니 행복하게 파묻혀 누워
생각에 잠겼다. 지겨워라. 그녀는 무엇인가 막연히 참을 수 없다고 느꼈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건 아무래도, 약속을 내일이나 모레로 미뤄버리지 않고
오늘 저녁에다 못박아 놓은 일과 연관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에리히와 약속을 한 것은, 오로지
세상에 작은 조공을 바치기 위한 것이었다. 하기야 에리히와의 한 번 약속쯤 물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리라. 아마도 모든 약속이 무의미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베아트릭스가 이 순간
약속을 벌일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최근 다른 아무 약속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금, 무엇이고 시도해 보고자 하는 의욕이 그녀에게 전무하다는 사실에
직결되는 것이었다. 에리히든 다른 누구이든, 에리히든 다른 수많은 사람이든, 그것은 문제가 안
되었다. 그녀는 큰 소리로 끙끙대며 건강한 동물처럼 고통의 신음소리를 냈다. 지겨워라.
에리히한테는 물론 그녀 자신 얼마나 지겨워하고 있나를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또 그 자신 벌써 충분히 지겨움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가 누구인가를
위한 지주나 원동력은 못 된다는 사실에 대해, 기껏해야 에리히 자신이 환각 속에서 만들어 낸
오아시스에 그친다는 사실에 대해, 에리히인들 어쩔 수는 없었다.
그녀는 조심조심 침대에서 일어났다가 무력감에 다시 얼른 쓰러져 버렸다. 우선 무엇부터 해야
할지 다시 한 번 궁리를 모아야 했다. 무기력에 빠진 그녀에게 서서히 되돌아온 의식. 잠시 후
베아트릭스는 가느스름히 시선을 모아 자명종을 넘겨다 보았다. 스스로의 위치 정립을 위해
필요로 하는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짜증스러운 자명종이었다. 도저히 기억이 안 나기
때문에, 그 동안 다시 잠이 들어버렸었는지 그녀로서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처음 15분 후에 완전히 기진해 버렸거나, 아니면 아직도 제정신으로 안 돌아온 상태에서, 거슬러
되돌아갈 것을, 철회해 버릴 것을 줄곧 소리없이 외치고 있는 깊은 자아 속에 빠져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베아트릭스는 스스로에게 아무것도 강요 않기로 작정해 버렸다. 실상 무엇이든
강행하려 할 때 제대로 되어지는 일이란 없기 때문이었다. 한낮 한시 정각, 그녀는 몽롱한
정신으로 옷장 앞에 앉아 서랍을 빼고 문짝을 열어 젖히기 시작했다. 속옷이 있는 서랍을 헤집고
나서 스타킹이 들어 있는 서랍을 뒤졌다. 그리고 마치 무슨 납덩어리라도 들어올리듯, 얇은
팬티스타킹을 발굴해 내어 생각에 잠겨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살금살금 두 손을 그 안에 밀어
넣고 천천히 돌려가며 불에 비추어 보았다. 하지만 이런 짓이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노릇이라는
것쯤 그녀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코가 빠져 줄이 난 자리는 번번이 스타킹을 신고 난 뒤라야
발견되기 때문이었다. 매일처럼, 평생토록, 끊임없이 스타킹을 찾아야 하고, 혹시나 이날은 좋은
속옷이 걸릴지, 낡고 퇴색한 속옷이 걸릴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것, 이 무슨 고통스러운 노고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지겨운 일이었다. 이어서 마침내 미지근한 샤워. 뜨거운 물이 모두가
쓰기엔 도저히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언제 그녀가 일어났다는 걸 집안의 누구도
눈치채지 않도록 미하일로빅스 부인과 지겨운 엘리자베트랑 부딪치지 않도록 하는 일. 그래야
한다는 걸 깨닫고 있으면서도 그건 진정 힘든 부담이었다. 지겹다는 말은, 어떤 일은 너무 깊이
생각하기 싫거나 그렇다고 아주 잊어버리지 않으려 할 때 한결같이 등장하는, 베아트릭스가 가장
애용하는 단어였다. 그녀는 벌써 두 벌의 옷을 꺼내놓고는 여전히 잠옷 바람으로 부엌에서
커피로 속을 데웠다. 그리고 두 벌의 옷을 들고 욕실 거울 앞에 서서 자기한테 옷이 어떻게
어울릴까 가늠해 보았다. 납처럼 거의 내비칠 듯이 투명한 그녀의 얼굴. 이렇게 탐구를 하는
동안 작은 불빛이 거울 속의 작은 불빛과 마주쳤다. 그녀는 자기에게 맞는 것은, 기초적인 의복을
거의 작정하기에 이르렀다.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힘이 들었다. 허구헌 날 무엇 때문에, 심지어 두
번 세 번씩, 검은 블라우스냐 흰무늬 베이지 블라우스냐 하는 힘겨운 결정에 부딪쳐야 한담.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 아직 또 문제가 있어. 비가 내리고 있잖아. 비가 오다니, 당연한
얘기지 뭐야. 그녀는 거의 입밖에 내어 수다를 떨었다. 통화를 할 때까지만 해도, 마치 이 지겨운
날씨를 벌써 목격한 사람처럼 굴 수 있었지 않은가. 모든 결정을 뒤바꿔 버리는 비. 외투를 들고
가는 것도 또 신발도 고려에 넣어야 했다. 하긴 저녁 일곱 시까지는 또 한 번 모든 것이 뒤바뀔
수 있는 노릇이 아닌가! 베아트릭스는 옷가지를 욕탕 가장자리에 던져놓고 얼굴을 다듬기
시작했다. 무엇을 결정할까 더 생각을 더듬기에는 아직 너무 일렀지만, 어떤 경우에든 화장이야
해놓을 수 있지 않은가. 어떤 경우에든 전혀 눈에 안 띄게,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이 많으니까
립스틱만 빼놓고, 그러고 나서 남아 있는 커피를 마저 부어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마시면서
그녀는 한결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커피를 너무 오래 못 마셨던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커피라 해도 역시 그녀를 이 종신의 부담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는 없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
있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듯이, 오늘의 그녀가 한마디로 너무나 젊은 까닭에, 그녀가 짊어지고
있는 이 부담은, 여전히 결판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곧잘 했다. (정말 얼마나 끔찍한 부담이 되시겠어요! 또는)
당신을 이해해요. 온통 모든 일이 당신한테 너무나 부담을 준다는 걸 안다니까요. 저도
알구말구요!
이날은 베아트릭스한테도 이 두 번째 애용어가 맘대로 술술 나오지를 못했다. 이를테면, 손가락
까딱하는 일, 실마리가 될 법한 말이 담긴 한 오라기 생각까지고 꽉꽉 막혔고 정작 자기야말로
부담을 짊어지고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두 개의 브래지어는 너무 꽉 끼고
다른 것들은 너무 헐렁했다. 이런 일이란, 무턱대고 아무렇게나 사들이는 버릇이 있는 그녀한테나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최소한, 쟌느의 덕분으로 생긴, 언제라도 꼭
맞는 얇은 삼각 슬립과 브래지어 안내서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이 프랑스 여자, 진짜
파리쟌느와의 짧으나마 격한 우정을 맺은 뒤 그녀 자신, 파리에 있는 허다한 것들도 별로 배울
것 없다는, 또한 도대체 무엇이고 배운다는 것이 별로 가치 없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것이 그간의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쟌느는 잠깐 머물려고 빈에 왔었지만, 대체
자기가 여기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베아트릭스 역시 빈에서
구경거리가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설명해 줄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한 파리 여자의
왕성한 호기심이 베아트릭스에게 가져다 준 소득이라면, 지금껏 흔한 빈 여자들처럼 속치마를
보고 늘상 콩비네즈(Combinaige)라든가 콩비네죵(Combinaison)이라고 부르던 그녀에게 다시금
운터록크(Unterrock)라는 말을 찾게 하게끔 만든 것이었다. 곧, 콩비네죵이라는 말이 파리와 빈
사이의 불의의 언어상의 불상사로까지 소급해 번져가리라는 것을 터득하고, 불어로 말해야만
훨씬 고상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미하일로빅스 집안의 두 여자처럼, 이런 일들로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밖에도 그녀는 쟌느와 별로 잘 통하지를 않았다.
쟌느의 호기심과 치기가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을 뿐이었다. 그들은 나이가 같았다. 쟌느도 스물
한 살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베아트릭스는 이 쟌느라는 계집애야말로 활동 면에서
극성스런 괴물이며 소동이 벌어지는 판이라면 당장 한꺼번에 알아버리려 든다는 걸 깨달았다.
쟌느는 사내녀석들을 사귀고, 춤을 추러 가고, 오페라로 뛰어가고, 그러고 나서도 프라터(빈
교외의 놀이공원, 역주)나 호이리겐(빈 숲 기슭의 유흥가, 역주)으로 뻗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베아트릭스는 쟌느 더러, 그녀의 파리제 머리통 속이야말로 온갖 잡다한 생각들로 꽉 찬
쓰레기통일 뿐이라고, 결국 누구라도 히피 노릇을 하면서 오페라를 구경하려 들고,
리이젠라트(프라터에 있는 큰 풍차 유람선. 역주)를 타며, 세상을 전복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어쨌든 빈에서 그런 게 어림없다고. 게다가 한술 더 떠 건방지게 자허(Sacher:빈의
유명한 초콜릿 상표. 역주) 커피점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누누이 말했다. 거기에
대고 쟌느는 한 번 와락 화를 내며, 그것도 괴상한 발음으로, 자기야 한낱 drop-out(빗나간
공)이라고 변명을 했었다. 쟌느에겐 가족이 있었다. 변호사인 아버지와 역시 변호사인 어머니.
하긴 이 점이야말로 당연히 어떤 부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아트릭스한테는, 항상 그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잘 모르는 빈 시가를 쟌느와 함께 누비고 다니며 이 마드모아젤께서
그냥 보통 커피로는 만족해 하지 않기 때문에 자허에 앉아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커피값을
치르는 일이야말로 끔찍스러운 부담이었다. 이런 것들이란 그녀가 보기엔 도저히 빈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남자들하고 상관된 이야기였다. 실상
베아트릭스는 알고 있는 사내도 별로 없었고 기분이 내키면 전화나 거는 정도였다. 하지만
쟌느한테 자기가 벌써 서른 다섯이나 된 어느 기혼 남자와 꽤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에리히한테야 쟌느의 존재를 감추지 않았다. 아줌마를 위해서, 또
사촌언니도 일을 하러 가야 되기 때문에, 자기가 나서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변호사인 한
매력적인 프랑스 여대생을 대접해야 한다고, 그런데 이 아가씨는 온갖 가능한 것을 구경하려
드는, 요컨대 아주 교양 있는 처녀라는 정도로 이해를 시켰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하려 할
때에는 천진스럽게 에리히한테 충고를 요청했다. 저, 아시잖아요. 전 정말 잘 몰라요. 그렇지만
당신이 현명한 충고를 해주신다면! 에리히는 알베르티나(고서와 판화가 수집돼 있는 빈의 미술관.
역주)와 예술사미술관을 가보라고 추천했다. 베아트릭스는 속으로, 지겨워, 라고 생각하면서도
감사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런 방면이라면 베아트릭스 자신이, 아무리 그런 걸
신문에서 읽어 알고 있다 해도, 이 쟌느라는 아가씨가 얼마나 직접적이며 실제로 어떤 양상으로
살고 있는지 전혀 알 바 없는 선량한 에리히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AUA(오스트리아 항공)애
고용된 몸으로 사무실과 불행스런 가정 사이나 왔다갔다 하는 에리히 같은 기혼 남자한테는,
그런 방면이야말로 불가사의한 세계였을 수도 있으리라. 베아트릭스가 두 사람을 서로
대면시키지 않으려고 애를 쓴 건 신중함에서라기보다, 바로 이런 이유들이 앞서 있었다. 그런
경우, 이 쟌느라는 아가씨는 어김없이 당장 내용을 캐려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어떤
점으로든 예외를 자처하는 이 파리쟌느는 베아트릭스와 에리히 사이의 관계가 맹탕이라는 사실에
어이없는 쇼크를 받게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빈의 처녀애들은 도대체 아무와도 잠을 자러
가거나 그 비슷한 치기를 벌이지 않는다고 짐작해 버렸을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만 이런 일이란
베아트릭스한테 한마디로 너무 성가셨을 뿐인데 말이다. 여기 반해 에리히는 쟌느가 자기의
사랑하는 아가씨와는 접촉할 대상이 전혀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테고, 쟌느는 에리히를
고지식하고 부르주아 냄새가 난다고 일축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견해는 베아트릭스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뿐이리라.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쟌느와의 장은 일단락 되었다. 이제 쟌느는
두 영국 청년을 "부추겨서" 같이 어울려 로마를 향해 떠나버렸다. 그녀에겐 빈이 별로 재미없는
권태로운 도시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하필이면 자허 커피점만은 근사하다고 일갈했다. 비록
쟌느도 베아트릭스도 그런 걸 걸치진 않지만 속옷이야 결국 속옷일 수밖에 없듯이, 그것도 별수
없이 여느 다른 커피점과 같은 것이 아니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에리히의 부인이 또다시 자살을 기도하는 바람에, 쟌느와 관련된 무거운 부담과 힘겨운 허위는
어차피 중요치 않게 되어버렸다. 쟌느가 떠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이 자살 미수건도
베아트릭스가 에리히와 알게 되고 나서 벌써 세 번째 소동이라서 그녀도 점차 그러려니 하게
되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쟌느의 출발을 생각하면서 건성으로 귀기울여
들어주는 일에 길이 들어 있었다. 아일레스 커피점은 그녀가 퍽 좋아하고 즐겨 앉아 있는 곳이긴
했지만, 그 맨 뒷구석 자리에 에리히와 같이 앉아 있는 일은 역시 힘겨운 일이었다. 에리히가
성급하게 말문을 터뜨리면 그의 결혼생활을 자초지종 또다시 듣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소심하고 착실한 에리히가 결코 이혼 같은 걸 해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익히
알고 느끼면서 말이다. 비록 그녀는 그의 순교자적 기질에 결코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동정적이었다. 번번이 그와 함께 이 궁리 저 궁리를 모았고, 그때마다 구체적인 경우까지 의논의
대상이 되어주었다. 그건, 이혼 같은 데 도시 흥미없는 베아트릭스를 이해할 턱없는 가엾은 인간,
에리히가 천사 같은 베아트릭스의 참을성을 감탄 감탄하는 데 원인이 있었다. 하지만 이 참을성
있고 수월한 어린애와 끊임없이 떠들다보면, 일반적인 둘 사이의 공통의 이해관계가 부각되는 게
아니라, 좀더 안정되게 살고 싶다는, 구기와 얽힌 해결 불능의 문제가 좀 해결되었으면 하는,
그의 절망적인 소망만이 두드러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베아트릭스의 관여란, 관심이 결여된 것은
아니었지만 참으로 유별난 것이었다. 그녀로서는 몇 분 또는 반 시간 동안 어느 드라마의
엑스트라 노릇을 한다는 것이 참 우습게 여겨졌고 때로는 자기가 에리히와 벌써 헤어진다고
가정하는 경우 자기한테 떠오르는 생각의 곧 뭐니 뭐니 해도 에리히와 구기 사이에는 일종의
"막강한 텔레파시"가 작용함에 틀림없다고, 한 번 언젠가는, 우연히 그라츠에서 오는 기차를 세
시간 일찍 탄 적이 있었다. 그것도 어느 회의에 참석했다가 국내 비행선에 대한 자신의 제안이
거부당한 데 화가 난 것이 원인이었다. 그런데 그 덕분에, 세 시간 후라면 이미 구제 불능이었을
구기를 허겁지겁 구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꼭 미친 사람처럼 애를 서서 구급차를 불러
아내를 병원으로 실어 갔었다. 그러고 나서 당장 베아트릭스한테 전화를 했다. 망쳐진 그의
인생에서의 "섬광의 기쁨", "평화의 오아시스"한테 말이다. 그리고는 여전히 떨리는 음성으로,
그러면서도 열렬히, 베아트릭스가 없다면 자기는 도저히 더 살아갈 수 없노라고 그녀의 용기와
침착함과 강인함, 그녀한테 내재한 분별력이 얼마나 감탄스러운지 모르겠다고, 다른 스무 살 짜리
처녀라면 죽었다 깨도 그런 성품을 거느릴 수 없다고 역설을 했다. 이런 격정적인 감탄을
쏟아놓으며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녀한테 다른 남자가 있기를, 곧 자기 곁에서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것을 진정으로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기원했다. 베아트릭스는 자기에게 감탄하거나
자기의 성숙함에 대한 언급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므로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러노라면 웃음이
허용되고 유쾌한 기분이 되살아나는 유리한 시점이 얼른 찾아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잊어버리셨나요. 제가 2월 29일생이라는 걸! 한 번 계산해 보세요. 전 아직 어린애일 뿐이에요.
저는 도저히 어른이 못 될 거예요! 저도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 역시 저한텐 유일한
버팀목이에요! 그녀는 감사에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에리히는, 물론 생각은
여전히 구기한테 머물면서, 자기야말로 분명 베아트릭스한테 중요한 버팀목임에 틀림없다고
자부하게 되는 것이었다. 실상 이 어린애는 어쨌거나 이 세상에서 실제 완전히 외톨이니까.
따라서 결국 자기는 이중의 책임을, 구기에 대한 게다가 베아트릭스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 착각이 결코 그에게 이상스런 느낌이 안 들었다. 그건 베아트릭스가
그로 하여금 그의 존재의 중요성을, 곧 책임을, 거부할 수 없이 믿게끔 모든 면에서 스스럼없이
착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에리히에 대해 분노스러운 감정이 후딱 든 몇 순간 후,
베아트릭스는 혼자 한숨을 내쉬며 이 가엾은 인간에 대해 자기가 솔직히 소망하는 유일한 바는,
구기가 다시 한 번 죽으려고 누워 있을 때, 그가 마침내 한 번 때놓쳐 귀가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기 같은 아내, 더구나 자기 자신 같은 여자야말로 진정 에리히한텐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별수 없이 어리석은 인간이었고, 거듭거듭 불행에 부딪쳐 황망스러워했다.
곧, 빠져나올 길 없는 함정에 빠진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같이 앉아 자기의 시간을
흘려보내며, 자기로선 그를 도울 수 없다는 것만 절감하고 있었다. 하긴 어느 누구라도 도울 수
없으리라.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의 관심을 자기한테 돌리려고 여전히 애를 썼다. 에리히가
그나마 스스로를 그녀한테 책임 있는 존재라고 자부하는 게 훨씬 나았고 그러면 잠시나마 그도
아내 구기로부터 신경을 돌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사실상 구기가 그의 불행에 대단한 몫을
차지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가 진정한 불행 속에 완전히 빠져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좀 더 확대해 보이도록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아주 드문 일이었지만, 그들도 간혹 영화관에 가서 손목을 잡는 경우가 있었다. 이따금, 하긴
다른 아무한테도 할 수 없는 얘기이기 때문에 대화가 우선해야 하는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얘기에서 빠져나와 유별나게 곰살맞게 굴며 살짝 그녀의 귀를 물어뜯거나 그녀의 가슴이며
무릎을 건드리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대화를 나누는 편이, 전화에 대고 소란을 피우며
보고를 하는 편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베아트릭스는 이런 접촉이 성가시다고 느꼈다. 그것을
수용하고 앉았기에는 그녀 자신 한마디로 조로해 버린 탓이었다. 고등학교 졸업기에 그리고 이후
기숙사에서 그런 유의 일은 훨씬 대량으로 지겹도록 벌어졌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공부든
무슨 일이든 배우러 가는 일을 한사코 거부하고 난 이래로, 남자와 깊은 관계를 가져본다는
생각은 도저히 염두에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그 앞에 굴복하고 마는, 이 극히 정상적인
지겨운 일에 대한 그녀의 혐오감은, 그녀가 일종의 반자연적 행위를, 곧 주물적이라고 할
수면이라는 것을 찾아낸 것과 일치했다. 반자연, 과연 그녀는 적어도 이 정상적인 정신병자의
틈바구니에선 괴짜 같은 존재였다. 그야말로 반자연적인 존재였다. 잠 이외의 일체의 것은
그녀에겐 어쨌거나 시간 낭비였다. 이렇게 옷을 주워 입고 벗는 일만 해도, 그녀가 정통한 분야인
잠에, 심지어 옷을 입고 신을 신은 채로도 숙달된 깊은 잠에 곯아떨어져 버리는 일에는 비교를
불허할 만큼 힘에 겨운 일이었다. 호기심의 충동을 받아 일찍이 벌였던 숱한 치기, 그리고 지금은
조숙하게도 충분히 겪었다고 자부하고 있는 모든 일을 뒤로 하고 나서는, 잠이야말로 그녀에겐
가장 충일한 행위가, 그것만을 위해서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행위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극히 몇 번 안 되는 일이었지만, 아주머니 미하일로빅스가 외출을 해버리고, 마렉이라는
사내와의 사건 때문에 자기한테 뭐라고 말을 건넬 의기를 완전히 상실해 버린 엘리자베트가 입을
다물고 있던 즈음, 그녀는 에리히를 슈트로찌 가의 자기 방으로 오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러는
것이야말로 실로 그녀한텐 부담이었다. 게다가 그가 화주를 한잔 마시겠다거나 최소한 커피를
한잔 들겠다는 것까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그들은 나란히 누웠고,
그녀는 다시 그에게 얘기를 시켰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그가 말문이 막히면, 하긴 항상 구기의
그늘에 눌려 있기 때문에 그는 번번이 쭈뼛거리며 얘기를 시도하지만, 그럴 때 그녀는
호들갑스레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녀는 마구 장난을 치고 싶은 막을 길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고,
그러면서도 그보다 한층 거센 저항에 기습을 당했다. 그러면 에리히는 엔젠가처럼 눈꼽만큼도
실망하는 기색 없이, 그녀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다고, 그런 점이야말로 자기가 좋아하는
요소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녀와 접한 그의 참을성이란 분별을 지키자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파국적인 기분에서 떠나 자기도 한 번 웃음보를 터뜨릴 때, 웃으면서 그녀야말로 다름
아닌 드미 비에르즈(demi-vierge. 원래는 도덕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젊은 처녀라는 뜻. 문자
그대로는 반노녀, 즉 미숙한 처녀, 되다 만 여자의 뜻을 동시에 지닐 수 있다. 역주)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 낱말의 뜻을 모르는 베아트릭스는, 쟌느와의 시기에 자주
사용했던 사전을 뒤적여 보고는 이 말을 마음에 들어 했다. 과연 그녀야말로 어쨌거나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랴. 완전한 것이라면 그녀는 한마디로 사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구기는 짐작컨대
히스테릭한 사랑과 정열을 지닌 부류의 여자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런 유의 여자가, 그것도
하필이면 가엾은 에리히 같은 남자를 상대해서 어떻게 그 성품을 터뜨릴까, 가히 알 법한
일이었다.
다만 에리히가 그녀의 장래에 관해 화제를 건드리면 베아트릭스도 불편스런 마음이 되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녀로선 단 한 가지 졸업 시험도 제대로 치른 게 없는 데다가 앞으로도 공부를
계속할 마음은 아예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저
막연히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목하 자기한테 적합한 일거리를 찾는 중이노라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자기 식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에리히는 퍽 권태로워 하면서, 이런 것이 흥미
있느냐는 등 시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녀한테 맞는 일거리가 무엇이 있을까를, 통역사가
될 수업을 받을지, 혹은 양장점이나 책방 또는 화랑에서 일하는 게 어떨지 궁리를 모았다. 그는
그녀가 아무튼 무슨 일거리든 가지고 있어야겠다고 말했다.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그녀와 결혼도
할 수 없는 자기 처지로서는 그 점이 말할 수 없이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아트릭스는,
아무리 초라한 사무실에라도 도대체 자기의 일거리는 없다는 것을(그것을 위해서나마 자기는
아무 조건도 채워줄 수 없으니까) 그리고 어디에고 계획된 시간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어 박는
구제 불능의 인간만이 판치는 터에, 한나절이 되도록 잠을 자게끔 허용하는 직장은 아무 데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때문에 단 1실링의 돈을 벌어들여 독립을 하겠다고 고약한
냄새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여덟 시간을 허송할 만한 허욕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기는 도저히
일 같은 건 못하고 말리라는 것을, 더구나 공부 따위는 결코 계속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명백히 알고 있었다. 특히 일을 하는 모든 여자들이야말로 그녀한텐 지겹게 생각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슨 결함을 가졌거나, 숱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거나, 스스로를 남자들한테 착취당하게
하고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 그녀는 결코 스스로를 착취시키지 않을 것이었다.
설혹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일이라 해도 타자가 앞에 앉거나, 양장점에서 비굴하게, 사모님, 혹시
다른 것이면 되실까요? 이 초록 바탕의 셔츠는 어떠실는지요? 따위의 질문은 결코 안 할
것이었다.
아니에요, 하고 그녀는 선량한 에리히를 심란하게 하지 않으려고 딱 한 번 엄숙히 단언한 적이
있었다. 저는 제 걱정은 별로 안 해요, 대체 무엇 때문에 오지도 않은 앞날을 걱정하지요?
그리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우리가 왜 괜스레 미래 때문에 불안해 하고 있지요? 보세요. 현재
닥친 일만 해도 당신한텐 지독한 부담이에요. 당신이 제 걱정까지 하길 전 바라지 않아요.
차라리 우리 구기 생각이나 해요. 요르단 교수가 뭐라구 그래요? 저한텐 아무것도 숨기지
마세요. 우리 사이에 비밀이라는 게 있을 순 없어요. 그러고 나면 에리히는 다시금 구기와 그에
관련된 권태로운 상담, 새로운 희망과 묵은 걱정거리에 주저앉는 것이었다. 남아메리카로 재혼해
간, 곧, 별세한 미하일로빅스 씨의 누이인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그녀는 X구의 낡은 집에서
떨어지는 약간의 금액을 정기적으로 받고 있었다. 그것은 여전히 똑같은 금액에 머물러
인플레이션을 못 따라가는 일종의 현금 같은 것이라서, 끊임없이 가치를 잃고 있는 너무나 얼마
안 되는 금액인데도, 그녀는 오로지 그것에만 의존하며 아주머니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실상
그녀는 별로 필요로 하는 게 없었고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하일로빅스
부인한테 값과, 두말할 것 없이 공동 부담해야 할 몇 가지 비용을 줘야 한다는 따위의 생각은
꿈도 안 꾸고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두문 불출했다. 아니, 다만 에리히와 만나는 일, 아주
드물게 단 혼자 커피점에 가는 외출이 고작이었다. 어떤 삶에 뛰어들기엔 그녀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먹는 것보다 역시 중요한 유일한 과제가
있다면 그건 미장원과 화장품에 바치는 일이었다.
얼마 전부터 그녀는, 화장품 값이 좀 빠듯해요, 라는 말을 내뱉었다.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한
번 서슴없이 에리히한테서 오백 실링 짜리 지폐 한 장을 수용한 적이 있었다. 그밖에는 생일에도
도통 그에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묘하게도 2월 29일 말고는 아예 생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에리히도 모르는, 실상 그녀와 나누는 시간이 너무나 적기 때문에 알 턱 없는 대목,
하긴 다른 어느 남자라고 터득할 수 없었을 대목, 대체 그녀가 왜 도통 아무것도 원치 않는가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오로지 미장원에 앉아 있는 일만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르네야말로 그녀가 편안함을 느끼는 세상의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사뭇 모든 것을, 심지어 정기적인 식사까지도 포기했다. 그리고는 불면 꺼질 듯이 연약한
자신의 몸매를, 채 46킬로그램도 못 나가는 무게를 즐기는 것이었다. 그녀는 특히 카알 씨와
깃타, 그리고 로지 부인을 좋아했다. 하긴 서툰 꼬마 토니까지도, 에리히나, 몰이해한 걱정
보따리 미하일로빅스 아주머니보다는 마음에 들었다. 르네에 있는 모든 사람이야말로 다른 어떤
인간들보다 자기를 훨씬 잘 이해해 주기 때문에, 그녀는 오로지 로텐투름 가의 이층 분위기
안에서만 푸근함을 느꼈다. 따라서 대학 공부를 하고 박사를 따고 악착같이 일을 하는 모범생인
그녀의 사촌언니 엘리자베트를 본받으라고는 어느 누구도 그녀더러 요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모범생께서는 그토록 박학다식한 몸으로 이제 서른 살이 되어서는, 그 유난스런 독립심과
겸손함과 희망 없는 생존 경쟁에 짓눌려 도저히 아무 데서도 다리 뻗고 잠을 못 이루는가 하면,
더욱이 미장원 같은 데 가는 건 천부당한 일로 알면서, 따라서 과연 서른 살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베아트릭스가 진정으로 회피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엘리자베트였다. 사실상 이
사촌언니는 조용하고 내성적이라 그녀한테 맞대고 성가시게 굴거나 나무라는 말을 한마디도
않는데도 엘리자베트가 곁에 있으면 베아트릭스는 반발을 느꼈다. 만약 그녀가 슈트로찌 가에서
누리는 수면과 평온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지조차 않았다면, 한 번쯤 엘리자베트에게 내가 너를
얼마나 바보로 보고 있는지 맞대 놓고 쏴주었을 것이다. 그건 한마디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녀는 그런 어리석음을 용납할 수 없었다. 적어도 여자의 경우엔 말이다. 에리히의 수다스런
견해며 노파심 역시 어리석다고 여기긴 했지만 그의 경우엔 문제가 좀 다르고 감동적인 구석이
있었다. 남자라면 어리석음을 행사해도, 봐줄 수 있었지만, 여자의 경우는 도저히 아니었다.
그렇게 애당초 예술사 따위의 너무나 엉뚱한 공부에 몸을 바쳐서 충분한 돈도 못 벌어들이고,
골골하니 쇠약한 몰골이 되어 어머니한테 불면의 밤이나 안겨주는 일 같은 건 장만하지 말아야
했다. 뒤러(Durer, Albrecht. 1471--1528, 독일의 화가. 역주)라든가 하는 온갖 화가를
섭렵하고, 플로렌스에 있는 잡동사니를 몽땅 속속들이 안다 한들, 그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베아트릭스는 최소한, 미하일로빅스 집안의 두 여자가 더 이상 할 바를 몰라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 어리석은 여자가 안톤 마렉이라는 자한테 반해 버려서 더 큰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다는 내용을 알아채었다. 베아트릭스 자신이 이 문제에 부딪쳤다면 불과 열네 살 짜리
나이였더라고 넉넉히, 이마렉이라는 자는 자기 자신 외에는 어떤 사람이건 물건이건 일체 아랑곳
않을 자라는 것을, 미하일로빅스 양과 결혼 같은 건 꿈도 안 꾸고 있는 위인이라는 것을 곧,
엄밀히 계산하고 충분히 따져본 후에 이미 골인한 결혼을 돈도 전망도 없는 센티멘털한 여자를
위해 이혼 사태로 몰고 갈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익히 간파했으리라. 그런 데 비하면 에리히는,
그 자신에겐 유감스럽겠지만 베아트릭스한테는 유리하게도, 단순히 빼도박도 못할 악운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이혼을 한, 또는 홀아비가 된 에리히를 위해서라면 그녀는 결코 르네에까지
진출해서 머리를 감고 물을 들이고 매니큐어를 하고 털을 뽑고 하는 과정을 치르며 몇 시간 동안
유쾌하게 골똘한 생각에 잠기고,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 커다란 거울들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짓을 연출하지 않았으리라. 그것은 기껏 너무 작고 높아서 그녀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작은 거울이 하나 목욕탕에 달랑 걸려 있을 뿐인 슈트로찌 가의 집에선 어림없는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네 안에는 모든 벽이 멋진 거울들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사방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삼면경도 몇 개 있었고, 게다가 끝으로 깃타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게끔
손거울까지 갖다 주었다. 요컨대 르네에서는 근본적으로 그녀를 위해 중요한 모든 것을 소중하게
취급하고 있었다. 매주일, 어떨 땐 한 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설레는 가슴으로 기대에 부풀어
이충으로 올라갈 때마다 그녀의 호흡은 달라졌고, 피곤함도 씻은 듯 떨어져 나갔고, 삽시간에
변신한 모습으로 화안하게 웃으며 이 성전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이본느 부인에게 미처
신고를 하기도 전에 그녀는 사방을 되찾았음을, 자신의 진정한 고향에 왔음을 느꼈고, 거울 앞에
서서 비판적으로 뜯어보기도 전에, 자신의 모습이 거울에 나타난 걸 보게 된다는 사실, 온갖
부담을 생각하기를 중단해도 된다는 사실에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나야, 하고 한
베아트릭스가 거울 속의 베아트릭스에게 말하며 신들린 듯이 서로를 응시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여기저기서 카알 시며 깃타, 로지를 부르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모든 단골손님의
원하는 바를 늘 기억하고 있는 마담 이본느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담은
요구사항을 물어보고는, 깃타도 아직 일에 매달려 있는 데다가, 힐데 부인은 정말 유감스럽게도
임신중이라서 한동안 여기에 나올 수가 없노라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참, 유감이지 뭐야, 라고
베아트릭스는 기분이 뒤틀어져서 생각했다. 하필이면 지금 그럴 게 뭐람. 그녀는 속상해 하면서
애매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자기처럼 힐데 부인한테 이 지경으로 길들어 버린 것도, 역시
일종의 무분별이었다. 베아트릭스는 최면에 걸린 듯 어느새 브러쉬를 집어들어 찡그리며
머리칼을 뒤죽박죽 빗으면서 아무렇게나 뇌까렸다. 저를 쳐다보지 마세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처음부터 시작해서 다시 다듬어야겠어요. 이래가지고는 거리에 나설 엄두도 못 내잖아요.
흉측해요, 제 꼴이라니... 카알 씨! 저를 좀 구제해 주세요. 제 꼴을 좀 보세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긴 갈색머리를 훑었다. 말씀 좀 해보세요! 이래 가지곤 얘기가 안 되잖아요, 바로
지난 주에 여기 왔었단 말이에요! 카알 씨는 다른 빗으로 그녀의 머리털을 매만지며, 웬만큼,
어느 정도는 다듬을 수 있노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레알 연구소에서 고안해 낸 강력 CHEV 09
처리법을 당장 받아볼 것을 추천하며,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향유를 풀 코스로 꼭 열 번
반복해서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베아트릭스는 그의 말을 중단시키며 생기 있게 말했다.
좋도록 하세요. 실험조로 한 번만 향유를 써보세요. 그건 좋아요. 그렇지만 완전한 코스를 받는
결정은 안 되겠어요. 아니, 카알 씨, 그러니까 오늘은 아무래도 결정을 못하겠어요. 아직
한나절이 남았는데, 그건 집어치세요, 날씨도 이 모양인데! 그녀의 우산이 양탄자 위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당황스레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깃타가 신경질 섞인
시선으로 젖은 얼룩을 바라보며 달려와, 베아트릭스의 눈엔 미처 안 뜨인 우산꽂이에다 그녀의
우산을 세웠다. 지금 그녀를 골몰시키는 문제는, 당장의 그녀에겐 한마디로 너무 비싼 강력
처리법을 받느냐 안 받느냐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흥얼거리며 르네 안의 방 두 칸을 가로질러, 장밋빛 가운들이 있는 곁방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어느새 잠적을 즐거워하며 곧장 장밋빛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막다른 부인이
들어서는 걸 의식하면서도 옷을 벗었다. 오늘은 좋은 속옷이 걸려든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가리며 장밋빛 르네 가운을 두르고는 원피스와 외투를 못에 걸었다. 밖으로 나와
그녀는 주춤거리며 한참 동안 르네의 이 방 저 방을 휘둘러 다녔다. 갑자기 모두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카알 씨도 깃타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들이 전화를 거는 걸 듣거나, 인사를
받으며 들어서는 새 손님을 구경하는 일도 괜찮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라주모프스키 백작
부인이었다. 어떤 여자일까? 어쨌든 그녀의 상상과는 다른 모습의 여자였다. 이 방 안의 다른
여자들 중에는 그 정체가 궁금한 인물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보편적인 경애하는 "사모님"으로
송두리째 묶여 평가되어도 좋을 여자들뿐이었다. 우선 계산을 하고 쪽지를 찾는 순서에서부터
이름이 들먹여지는 게 불가피했다. 그러고 나면 그들은 어쨌거나 속절없이 요르단이라든가
반츄라라고 불려지게 마련이었다. 한데 요르단이라는 여자를 놓고는 베아트릭스에게도 얼핏 무슨
영감이 떠올랐다. 아무튼 목하 구기를 치료하고 있는 저명한 정신과 의사의 부인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 여자 역시 베아트릭스의 상상과는 딴판으로 퍽이나 소박하면서도 예쁜
모습이었다. 사뭇 그림처럼 예뻤고 너무나 젊었다. 그래서 다른 부인네들, 곧 "여박사님"이라는
타이틀에 정체를 묻고 있거나 박사님 사모님인 여자들, 또는 이본느 마담이 기분에 따라 이름을
붙여 부르는 여자들이, 요르단 부인한텐 아예 말도 건넬 염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이곳의 모든 여자들이 아무리 못 돼도 서른 살은 되었다는 것이, 평균해서 마흔 살
언저리의 연령이라는 것이 베아트릭스한텐 도저히 눈에 뜨이지 않았었다. 이 젊은 요르단 부인은
예외인 셈이었지만, 이 부인 역시 그렇게까지 젊을 턱은 없었다. 그러니까 어쨌든 베아트릭스가
여기서는 터무니없이 어린 나이였다. 빈의 젊은 처녀들은 예외 없이 머리를 자기 손으로 감고
비록 서투른 게 눈에 뜨이지만 손톱도 제 손으로 다듬기 때문이었다. 베아트릭스는 결코 그러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 오후조차 포기한다는 건 그녀를 더 지탱시킬 수 없으리라. 그리 되면
그녀는 끔찍스런 병증을 나타낼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마비 같은 것. 그녀에게서 르네의
세계를 박탈해 버린다면 마비를 일으키고 말지 모를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이 서비스
받기를, 그녀에게 속한 모든 것에로의 현실적인 몰입을 저돌적으로 필요로 했다. 슈트로찌 가에
있는 영원한 임시적인 거처에서는 하다 못해 침대 한 번 챙겨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다만, 하루
종일 이부자리를 헤뜨린 채 뭉뚱그려 놓는 베아트릭스더러, 오다가다 쓸데없이 늘어놓는
아주머니의 잔소리만이 떨어질 뿐이었다. 그곳에서 그녀에게 가능한 것은, 그저 죽을 힘을 다해,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진 옷장을 헤집어 찾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다만 아주 드물게나마
에리히가 방문하는 덕분에 후닥닥 겉핥기 식으로 정돈을 해서 다시금 형식적인 치레가 유지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밖에는 그 어떤 것도 그녀로 하여금 방 안을 정돈하고 청소를 하도록 움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그녀가 거리에서나 르네에서 말쑥한 외관을
갖출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곧, 그곳에 나타나는 부인들이 그렇듯, 마치 전설적인 옛 시대
하녀들이 손질하고 환기하는 당당한 저택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보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그녀의 비밀이었다. 이 혼돈 속에서 몇 개 안 되는 옷가지와 속옷을 흠집을 데 없이
지키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었다. 이 겉치레와 허식을 위해서
그녀는 끙끙 신음을 하면서 기절을 하면서, 세탁을 하고 심지어 다림질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이곳 르네에서는 깃타가 그녀의 머리를 감기며 아주 기분
좋게 문질러 주지 않는가. 그러면 베아트릭스는, 물을 너무 뜨겁게 하지 말아요! 라고 부탁을
했다. 깃타는 그것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미지근한 물로
한참 동안 머리를 감겨주었다. 그러나 깃타가 사라지고 나자, 그녀로선 처음 보는 여자가 들어와,
빗으로 그녀의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베아트릭스는 거울 속으로 낯익은 얼굴이 있나
살펴보았다. 아니, 이건 정말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긴 머리털을 빗질하려 드는 이 얼간이 같은
여자는, 그녀 머리의 빗질은 역시 깃타만이 할 수 있었다. 혹은 카알 씨도 간혹 손수 해줄 때가
있었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먼저 머리부터 말리겠다고 제안을 했다. 제발, 내 말 좀 들어요.
드라이어 밑으로 데려다 주든지 핸드 드라이어를 쓰세요! 왜들 모두, 젖은 머리를 빗어야 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 베아트릭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두통을 느끼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머리칼이 납작하고 축축하니 양 옆으로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이
낯선 두개골을, 흉측하고 너무나 생소한 두개골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맨두개골은 대체 얼마나
지겨울까. 그리고 이어 어느새 생각이 딴 데로 옮겨졌다. 왼쪽 눈등 위의 아이섀도가 약간
흐리게 지워져 버린 걸 깨달았던 것이다. 그녀는 검사를 해보듯이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그제야
드디어 이 신출내기의 작업이 끝났다. 베아트릭스는 화보를 한 권 집어들었다. 언제라도 여기엔
독일 화보가 널려져 있었다. 하지만 보그(Vogue)만은 보기가 힘들었다. 독일 화보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 어디 있담! 슈투트가르트에서의 이중살인. 틀림없이 으스스한 도시이리라. 그
울림부터 이중살인의 냄새가 났다. 독일 내의 성문제. 이건 더더욱 한심했다. 재클린 케네디,
현재의 오나시스 부인은 적시적소에 맞는 수십 개의 가발을 가지고 있다. 이런 거라면 어쨌든
웬만큼 흥미가 있었다. 논쟁의 가치가 있었다. 비록 이 케네디라는 여자가(카알 씨)가 이윽고
그녀 뒤에 와 섰다. 그녀는 얼른 화보를 덮고 물었다. 대체 올겨울 헤어모드는 어떤 거예요?
아뇨. 원칙적으론 그런 데 흥미가 없어요. 딴 여자들이 머리 위에 어떤 탑을 이고 다니든, 나한테
전혀 상관없거든요. 바라건대, 가발 같은 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결국 세상엔 더 중요한 것들이
있잖아요. 예컨대 나한텐, 카알 씨, 당신이 가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흥미거리예요. 나는
예나 이제나 회의적이니까요. 베아트릭스는 무엇보다 가격 때문에 그랬다. 그런데 아무리 한창
젊음은 지났다 해도, 이 케네디라는 여자는 가발을 상당히 인정하는 모양이었다. 카알씨는 사뭇
머리엔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고, 머리칼을 한 가닥 한 가닥씩 대가답게 헤어 롤러에 말기
시작하며, 마치 이렇게 긴 머리 가닥을 마는 작업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수월한 일이라는 듯
동시에 말문을 터뜨렸다. 그렇지만 아가씨께서도 하나쯤 갖춰야 된다고 벌써 여러 번째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정확히 말하면, 두 개를, 두 개의 가발이 꼭 필요하십니다. 겨울 스포츠를
즐기시려는 경우, 그리고 또 하나는 남쪽으로 가시는 경우에! 베아트릭스는 입을 쫑긋했다. 겨울
스포츠 같은 걸 즐기러 가는 건 그녀와 인연이 없기 때문이었다. 첫째로는 그것에 필요한 돈이
없었고 그 다음 이유로는, 비록 겨울 스포츠가 아니더라도 무릇 스포츠란 일정 시간 서 있기를
강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었고, 셋째로는 그녀의 마음에 드는 장소가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알프스 산악회 멤버들을 포함한 잡다한 양식이며, 스키 오두막 따위를 그녀는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었다. 그건 지푸라기 잠자리로의 전전 이상의 상상이 안 되었다. 요들을 부르는 사람과
난방 안 된 방. 카알 씨를 보고 그녀는 야무지게 말했다. 요컨대 여름철로 말할 것 같으면,
어차피 북부 이탈리아로 갈 수 없을 바에야 전 차라리 뵈르터 호숫가에 남아 있겠어요. 당신은
어떨지 모르지만요. 그리고 더 멀리 남쪽 지방까지는 정말 제 실력에 벅차거든요. 카알 씨는
자기가 잘못 기억한 게 아니라면 이 가을이 지나는 동안 벌써 세 번째로, 왜 자기가 이 새로운
가발을 추천하며, 어째서 이번 것은 "방수"제이면서도 일급품인가를 특히 소상히 설명해 주는
지를 말했다. 베아트릭스 역시 그것을 이미 시시콜콜이 들어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젠 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카알 씨가 그녀의 롤러 위로 장밋빛 망을 씌우고 귓등에다 귀가리개를 대고는
드라이어를 끌어내려 스위치를 켜는 동안, 그녀는 건성으로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정말,
까만 스웨터를, 남자 스타일로 V라인으로 커트한 스웨터를 입고, 그 밑에 흰 블라우스를
받쳐입고 싶었다. 그럼, 소녀처럼 보이게 되리라. 그럼 에리히는 이런 드미 비에르즈의 모습을
분명 좋아하리라. 그 부분의 과정은 이미 끝났는데도 그녀는 드라이어를 다시 한 번 치켜올리고,
정색을 하고 물었다. 카알 씨, 깜박 잊었어요. 저어, 이 커얼을 말아야 할지 내내 생각했는데요,
아시잖아요. 내가 결단을 못 내린다는 걸요. 결정을 할 수가 없어요. 카알 씨는 단호하면서도
비위를 건드리지 않도록 말했다.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아니오. 그래도 나한테 충고를 해주셔야지요. 당신 없으면 난 한 발짝도 못 떼놓는다는 걸
아주 잘 아시잖아요. 다만 생각만은 더 해보고 싶어요. 내가 호수로 가든지 바다로 가는 경우,
그런데 나한테 가발이 없는 경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거예요! 당신이 없으면 난 애당초
절름발이라는 걸 아시잖아요, 내가 당신을 싸갖고 끌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난 영국의 여왕이
아닌 걸요.
회색빛이 도는 금발이면 좋을 것 같았다. 불그레한 광택이 도는 플로렌스 사람들의 금발은
아마 너무 늙어 보이게 하리라. 하지만 이런 회색빛 도는 금발이라면, 첫눈에 요란하게 띄지
않고... 거기에 맞추어서 그녀는 메이크업도 바꾸리라 생각했다. 아주 밝은 파운데이션을 발라서,
너도 나도 건강색에 열을 올린다니까 병색을 살짝 감추는 것이었다. 쉽게 건강색이 부여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한텐 가능했다. 얼굴에 가볍게 갈색 기운이 감돌게 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눈에도
정말 매력적으로 보였다. 분홍빛 나는 갈색은 대체로 진짜 같지 않아 보이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힐데 부인이 가르쳐 준 바 있는, 장밋빛 분을 쓰는 요령이 있었다. 그런데 이 부인이 임신을
했다니. 그토록 근사한 화장술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말이다. 오로지 텔레비전과 영화에
관계하는 여자들 말고는 미장원에 화장을 맡기는 여자가 별로 없는 이 빈 바닥은 어쨌거나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도시였다. 아참, 영화 같은 건 그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환상 같은 건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다. 한때, 베아트릭스도 제일 친한 친구 같은 게 존재한다고
믿고 있던 시절, 곧 그녀의 소시적에 잠시 그녀의 제일 친한 친구였던 캇티는 영화에 잔뜩
정신이 팔려 있던 안달뱅이였다. 당연히 캇티도 이제 스물 다섯 살이 되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 보니 영화의 베드신도 결코 터무니없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지겨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캇티는 어느 독일 영화에 출연하겠다는 새로운 희망을 안고 독일로
되돌아갔다. 그러니까 베아트릭스가 이 끝나버린 친구를 통해 들은 로마에 관한 이야기야말로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제 아무리 무신경한 그녀라도 그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었다. 그런
이야기들이 신경을 잡아끄는 것만은 뭐니 뭐니 해도 사실이었다. 그녀 자신도 어쩌면 기분이란
걸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그 어느 것에 대고도 슬퍼하거나 실망하거나
흥분하는 일은 없었다. 에리히는 캇티처럼 폭발하는 것 같은 타입은 두 번 다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유감스럽게도 캇티와 함께 그를 만난 적이 한 번 있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면 이렇게
짝이 맞는 친구란 이미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에리히와 단 둘이 대화를 나누었다. 저 말예요. 인류의 나머지가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 목욕을 하건 말건, LSD를 복용하건 말건, 아무것도 아닌 걸 위해 애쓰고 헛수고를 하거나
또는 맹탕 싸돌아 다니거나, 그런 건 저한텐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저는 이 인류의 나머지
모두가, 네, 나머지라니까요, 그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해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한결같아요.
저 자신을 거기다가 고착시킬 수는 없어요. 저한텐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아시겠어요. 저요? 제가
저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 네, 그러고 보면 당신 말이 지당하게 옳아요. 저는 저 자신을
표현할 수 없어요. 그건 엄연한 오류예요. 저도 알고 있고, 그러니까 당신이 철두철미 옳아요.
그렇지만 제가 저 자신을 표현 못한다는 것, 정말 묘하잖아요, 안 그래요?
하지만 오늘 에리히한테 큰 소리로 좀 다른 말을 하고 싶었다. 저는 이따금 정말로 바보가
돼버려요, 라고. 그리고 이 말도, 그가 구기와 자기 사이에 얽힌 문제들을 끄집어내기 전에 얼른
던져버리리라. 얘기가 나온 김에 말이지만 에리히는 최근 아주 우스꽝스런 소리를,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에 관한 소리를 했다. 그리고 근본 문제는 해결될 수 없으며, 따라서 어쨌거나 자기는
굴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자기 행동에 분명한 타당성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끝까지 규명해 보고 자기 자신을, 곧 보편적인 자기의 상황과 또 구기와의 상황,
이어서 베아트릭스와 얽힌 상황을 분석해 보겠다는 광적인 열에 여전히 붙들려 있다고 말했다.
그와 동시에 상황들을 분석하기보다는 발전해 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해결은 저절로 오게 마련이라고 주장했다. 어김없는 모순덩어리의 인간. 하기야 그 모든 것이,
이를테면 모든 구체적 상황이 개별적이거나 얽혀서이거나 그녀한텐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그녀 편의 시고의 오류일는지 모를 일이었다. 에리히는 그녀한테 있을 법한
모든 사고의 오류를 일깨워 주었다. 베아트릭스는 그 온갖 상황이라는 게 너무나 단조로운
까닭에 심한 반발을 느꼈다. 그래서 멍하니 어쩔 줄 몰라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이런 말을
하는 때가 자주 있었다. 제가 또 무슨 사고의 오류를 범했나요? 그리고 그녀가 어떤 것에
대해서든 스스로의 허물을 느끼면, 그는 더없이 선량하고 곰살궂은 인간으로 화하는 것이었다.
하긴 그것도 그의 편에서 상상해 낸 허물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는 다른 이의 허물을 용서해
주는 일이야말로 그의 기분을 아주 좋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적어도 한
주일에 한 가지 허물은 만들리라고 베아트릭스는 생각했다. 카알 씨의 경우 지금껏 그래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어떻게 된 건지 롤러 하나가 정말 불편하게 죄었다. 터무니없고 하찮은 모든
것에 대해 에리히한테 용서를 청하리라. 부탁이에요, 에리히. 저를 용서해 주어야 해요, 지난번엔
너무나 부주의했어요. 아니, 사실이에요. 저 자신이 나중에 느낀 걸요. 그건 저도 인정해요.
에리히, 제가 너무 신경과민이었나 봐요. 그리구 당신이 아주 신경이 곤두섰던 날, 저는 너무
무분별하게 굴었댔어요. 정말 무분별했어요. 저 자신을 고쳐야겠어요. 에리히, 정말이에요. 저는
당신한테는 솔직해야 되겠어요. 안 그러면 저한텐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당신의 신뢰를 잃는 것,
그거야말로 제겐 가장 참혹한 일일 거예요.
베아트릭스는 거의 손질이 끝나 락카칠의 단계를 기다리고 있는 발톱을 바라보았다. 예뻤다.
그녀한텐 별난 것이라곤 아마 아무것도 없었지만, 발만은 스스로에게도 매혹적이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어떤 남자도 이런 그녀의 발 모습을 볼 수 없다니, 한편으로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에리히까지도 슈트로찌 가에 왔을 때, 그를 매혹시켜 줄 요량으로 스타킹을 벗었는데도, 그녀의
발 따윈 아예 거들떠볼 염도 하지 않았었다. 하긴 그녀 혼자서 그 사실을 아는 것으로도 족했다.
아름다운 발이란 드물었고, 특히 로지 부인은 칭송의 노래까지 부를 수 있지 않은가. 오늘은 로지
부인도 노래는 부르지 않고 대야를 가지고 사라지더니 매니큐어용 도구를 몽땅 들고 돌아왔다.
베아트릭스는 뒤쪽을 보고 외쳤다. 카알 씨. 대체 오늘은 얼마나 오래 이 고역을 치러야 하지요?
뭐라구요? 아직도 10분이라니, 이건 엄연히 잔인한 행위지 뭐예요. 당신이 10분이라면 결국
20분을 뜻하잖아요.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머리를 자르진 않겠어요. 그렇게 당신을 편하게
해주느니, 차라리 고역을 치르는 편을 택하겠어요.
그녀는 로지 부인한테 젖은 왼손을 내밀고 오른손을 물 속에 담갔다. 하지만 곧 다시 화보를
집어들었다. 열 다섯 살 적인가, 누구인지 그녀의 로울컬러 스웨터에 반한 적이 있었다.
초록빛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로울컬러 스웨터를 입기엔 자기의 목이 너무 짧다는 걸
몰랐었다. 그러고도 수많은 해가 지나면서 배워도 배워도 다할 수 없는 그 모든 것이라니!
로울컬러 스웨터는 다시 입지 않을 것, 그것은 그대로 고정되었다.
요트 크리스티나호. 그리스는 섬을 향해 항해하다. 갑판 위의 아리. 그때의 그 누구인가는 바로
아리와 닮은 모습이었다. 훨씬 젊었다는 뿐. 그밖에도 아프리카에 관한 참혹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녀는 섬을 향해 요트를 조종해 가는 편을 택하고 싶었다. 갑판 위에 서서 머리털을
바람에 날리며. 다만 아무 손님도 없이 완전히 잉여적 존재일 뿐인 아리 같은 남자도 없이, 단
혼자 서서. 원, 맙소사. 그녀는 소리쳤다. 토니, 다시 너무 뜨거워졌어요. 2번이라고 말했잖아요,
이건 2번일 리가 없어요. 3번일 거예요!
에리히 역시 끊임없이 과로하고 녹초가 되었다. 신규 감원인가에 대해 항의를 할 엄두를
내긴커녕, 밀려난 야콥이라는 사람 몫까지 몽땅 도맡은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부담이 더
첨가되었다는 정도뿐. "감원"이라는 내용을 잘 상상할 수 없는 베아트릭스였지만, 그것은 역시
에리히다운 일로 보였다. 그리고 그럴 정도의 권리는 충분히 가진 에리히가 이 AUA에서
취급하는 숱한 여행용 비행기표 한번 공짜로 슬쩍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 역시 그다운 일이었다.
그녀로서도 이해가 가고 남는, 간부들에 대해 자신이 지닌 불평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분명코
자기네들끼리는 여기저기 여행을 할 이 간부들한테 스스로를 맞추고 있었다. 오늘은 그를 보고
비행기표를 좀 고려해 보라고, 완전히 장난조로 한번 제의를 해보리라. 그건 당신한텐 아주 쉬운
일이잖아요. 그럼 우린 마침내 같이 있을 수 있을 텐데요. 멀리 떠나 카라치나 봄베이 같은
데서요. 최소한 이스탄불로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말하리라. 아니면 카나리아 군도로 가는 게 더
근사할지. 당신하고 저, 단 둘이, 이 카나리아 섬의 눈부신 해변에서 태양을 받으면서. 에리히,
그것도 가능한 일이잖아요! 바라건대 이 멋진 지역으로 가는 비행기가 아침부터, 또는 한낮에
떠나지 말았으면. 분명코 저녁 비행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행기 안에서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을지 그것은 심히 의심스러웠다. 아득히 먼 태양의 나라에 관해 짤막하게 언급해 보는 것도
해롭지 않으리라. 그럼 에리히는 분기해서 그녀와 떠날 수 있는 무슨 영감을 떠올릴지 모를
일이었다. 이 잿빛 빈을, 이 초긴장 상태를 잊어버리는 것, 생각해 봐요, 에리히. 저는 정말
정신차릴 수 없이 기뻐요! 그러고 나서 비행기는 타지 않으리라. 이렇게 찬양 받는 지역의
세계가 그녀한테 참을 수 없이 거북스럽게 생각된 것이었다. 게다가 에리히 역시, 한 번의 쾌락을
위해 자기의 상관한테서 두 장의 비행기표를 탈취하는 일을 성사시킬지 그건 거의 비관적이었다.
그렇지만 한번쯤 쾌락을 생각해 보는 계기, 그것이야말로 그에겐 아주 괜찮은 시간일 것이었다.
드라이어 스위치는 아마 2번에 켜져 있긴 한 모양이었지만 오늘은 마치 3번만큼 뜨겁게
느껴졌다. 그녀는 소리쳤다. 부탁이에요, 토니. 1번에다 틀어줘요. 견딜 수가 없어요. 2번으로는
더 지탱할 수가 없어요.
이런저런 과정이 제대로 끝마쳐지면 에리히와의 약속 전에 영화관에 갈 수 있었다. 물론 비를
맞으며 케른턴 가를 끝까지 걸어내려갔다가 다시 고층 커피점으로 되돌아온다는 건 엄청난
고역이었다. 그런데 택시는 너무 비쌌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속절없이 커피점에서
한 시간 반 동안 에리히를 기다려야 할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가 엮는 드라마에서 새로운 장면이
등장할 가능성은 있었다. 구기 같은 여자를 부인으로 가진다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닐 테니까.
그녀도 구기를, 가까이서라면 사양하겠지만, 한번쯤 멀리서 꼭 보고 싶었다. 그 여자는 어쨌거나
끝내 자살에 이르진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무래도 삶에 대한 훨씬 큰 공포를, 한마디로
끔찍한 공포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베아트릭스는 이곳 르네에서 나가면 커피점에다 에리히한테
간단히 몇 줄 쪽지를 남겨놓고, 곧장 슈트로찌 가로 가리라 생각했다. 그럼 거기서 상쾌한
머리털로 드러누울 수 있을 것이다. 머리털이야말로 그녀한테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었다.
그밖에는, 발을 빼놓고는 별로 대단한 게 없었다. 집에 가서 편안히 행복하게 누워서 머리털을
풀어헤치고 발을 감상하리라. 영화관에 가면, 아무리 그 모든 것이 지어낸 이야기로 배치된
것이라 해도, 결국 어김없이 빈번한 살인과 간혹 전쟁 장면의 조마조마한 화면이 돌아갈 것이다.
영 동떨어진 현실에서 사는 그녀한테는 그것은 너무나 신경을 소모시키는 일이었다. 그녀의 현실
속에서 기껏해야 문제되는 것이 구기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만 빌어온 형식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에 앞서 사무실에서 속절없이 들볶임을 당하고 있는 인간, 스스로도 그 약점을
깨닫고 있는 의지박약의 인간 에리히가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나서서 그의 상관에게 일찌감치
소견을 말해 주고, 이 주책없는 구기라는 여자한테는 적어도 한 번은 정신을 차리게끔, 알약이랑
면도날을 한 보따리 일찌감치 손수 건네주어야 했는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분첩을 꺼내 이빨을 들여다보았다. 쪽 고르지는 않았지만 괜찮은
이빨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치과에 가야 했다. 그것도 시급하게. 그리고 이젠 마침내 근본적인
소제도 받아야 했다. 이번 주일은 말고 다음 주일에. 끔찍스런 부담. 그녀는 반반이나마 결정을
내린 사실이 기뻤다.
나는 처녀다운 여자이다. 아니면 오히려 여자스런 처녀일까? 그녀는 꾸벅꾸벅 졸면서, 이 두
가지 표현 사이에 위태스러운 차이가 있을까, 곰곰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오늘은 에리히한테
너무 간단히 생각하지 않도록 아주 딴 소리를 해야겠다. 이 말은 한 번은 할 필요가 있었다. 저
말예요, 저는 여자예요, 라고 선언하리라. 이것이야말로 엄연히 중요한, 그가 이해 못하고 있는
문제의 요점이기 때문이었다. 뭐니 뭐니해도 결국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은. 드미 비에르즈란 꽤
근사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로 하여금 그녀 자신을 그토록 문제없는 존재로 보는 즐거움을 계속
누리게 할 수는 없었다. 저는 여자예요. 이것은 분명 그에게 문제가 되리라. 최소한 아주 작은
가시를 그의 내부에 남겨주리라. 하지만 스스로 이 문제를 계속 생각하자니 너무나 복잡했다.
그녀는 헤어드라이어의 왱왱거리는 소리에 그냥 짓눌려 사뭇 정신없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젠
손톱 손질도 끝나고 락카칠도 끝마쳤다. 그녀는 로지 부인이 어느새 자기 연장을 챙겨서 일어선
것조차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로지 부인에게 드라이어를 꺼달라고 간청을 했다. 20분은
분명 되었을 것이다. 카알 씨를 위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역의 20분이었다.
그녀는 힐데 부인 대리를 맡은 처음 보는 뚱뚱보 아가씨랑 구석방으로 들어가 딱딱하고 좁다란
침대에 드러누웠다. 사실 벌써부터 믿을 수 없다는 느낌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리고 이 "대리"의
단 한 번의 손놀림을 느끼고 나자 대번에 우울해졌다. 일이 틀어져 돌아가기라는 예감이
명백했다. 얼굴을 닦아내고 마사지를 하는 과정에서야 물론 별일이 벌어질게 없으니까 그 원인을
꼬집어 규명할 순 없었지만, 이 여자의 손이 문제였다. 그러니까 두 개의 무디고 못난 손의 감촉,
그 손이 건드려질 때의 느낌은 그녀에게도 있었다. 크리넥스로 그녀의 얼굴을 두루 뭉개는 이
느릿느릿하고 얼띤 동작이란! 베아트릭스는 최소한, 뒤쪽에서 자기를 굽어보는 이 뻘겋게 심줄이
선 물컹한 얼굴이나마 안 보려고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 이 여자는 어느새 핀셋으로 그녀의
눈썹을 두루 뽑고 있었다. 역시 느림보의 얼띤 동작으로. 아프지 않게 하려면 번개처럼 날렵하게
해치워야 하는 일을 말이다. (그만 둬 주세요. 안 되겠어요. 그만 집어치우세요!) 베아트릭스는
큰 소리를 지를 용기를 못 내고 있었다. 르네에서는 그런 일을 연출해 본 적이 한번도 없잖은가.
이런 고문이라니. 그러면서 그녀는 어떻게 이 여자한테 모욕당한 기분을 주지 않고 또는
우스꽝스럽게 롤러를 머리에 얹은 채 뛰쳐나가는 일 없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이야말로 엄연한 상황이었다! 카알 씨한테라면 쉽사리 이해시킬 수 있을 법한데,
그는 이 방으로는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여긴 그의 관할 구역이 아니었다. 도대체 아무도,
깃타까지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데다가 그녀는 이 고문실 안에서 무턱대고 울부짖고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이 신출내기 얼간이가 뽑기를 계속하는 동안 그녀는 가까스로
몇 시나 됐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엎친 데 덮친 식으로, 영화관에 가기에도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커얼 롤러가 짓누르고 있었다. 이 여자는 머리 밑에 베개를 괴어주는 일조차 생각
못하잖는가. 순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신출내기였다. 결코, 한 초보자의 첫번째 실험도구로 자신을
희생하러 르네에 온 것은 아니잖는가. 영원히 미용사가 될 수 없는 초보자, 그 점은 손길에서도
느껴졌다. 베아트릭스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화장을 하게 되면 대체 이것을
어떻게 견딘담. 화장할 때에는 완전히 긴장이 풀어져 있어야 하는데. 힐데 부인이 손질할 때면,
그녀는 늘 나른하게 풀어졌었다. 곧장 풀어져서 졸음이 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저히 이 눈물이
진정되지 않는 것이었다. 눈화장을 할 때면, 그야말로 비극적 파국이 되리라. 이 얼간이는 그런
소리조차 안 하고 있었지만, 눈물이란 사실 단 한 방울이라도 메이크업을 불가능하게 하는
충분한 지장이었다. 절망에 빠져 베아트릭스가 말했다. 부탁이에요. 물 한 컵만 주세요. 속이
메스꺼워요. 물 좀 갖다 주세요. 여자는 깜짝 놀라 작업을 멈추고 나갔다. 베아트릭스는 얼른
일어나 앉아 부들부들 떨면서 거울을 찾았다.
자기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꿈도 못 꾸고 있을 에리히를 만나자고 하필이면 이런
날을 고르다니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이람. 어쩌면 그에게 한시바삐, 오늘 안으로라도,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아니 만나서는 안 된다고 말해 버리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현명한 일이리라.
이를테면, 아주머니한테 모든 이야기를 고백해 버렸다고, 그러니까 고루한 생각을 가진
아주머니께선 기혼 남자와의 이런 관계를 파렴치하다고 했다고, 그리고 물론 자기는
아주머니한테 매달려 있는 신세이기 때문에 아주머니의 노발대발 앞에서 죽을 지경으로
놀랐다고... 아니, 그것도 안 될 말이었다. 하지만 구기를 이유로 내세우고 그것 때문에 도저히
편치 않은 그녀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들 수도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특히 양심, 허물, 책임,
분별 같은 단어들을 좋아했다. 이런 말들은 그럴사하게 들리면서도 결국 아무 내용도 말해 주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모름지기 사람들은 타인에게 전혀 아무 내용도 말해 주지 않는 단어들을
상호간에 사용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타인들과 어울리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양심"이란 에리히한테는 신빙성 있게 주효할 것이다. 에리히 같은 남자야말로, 이런 아무짝에도
내용 없는 단어들의 봉사를 받으며 이 단어들의 기능을 가능케 하는 전형적인 인물인 것이다.
그는 오로지 이 단어들을 동반해야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런 비밀스런
단어들과 베아트릭스의 감추어진 생각을 붙들고 있는 한, 에리히는 나락 속으로 떨어지리라.
아니면 적어도 완전히 방향감각을 잃으리라. 하나의 방향을 정립하는 것, 이것이 그에겐
필요했다. 이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줄곧 거울을 보면서 처음엔 뒤통수에서 몇 개의 롤러를, 그리고는 앞쪽 이마 양편에서
두 개를 더 풀었다. 이어서 빳빳한 고수머리가 뺨 위로 흘러내리자, 완전히 벗어 내렸을 때보다
딴판의 얼굴이 된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바로 나는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었다!
가늘고 인형 같은 모습, 인공으로 만든 것 같은 두 줄기 고수머리, 온통 코르크 마개 따개 같은
고수머리가, 완전히 표정 없는 마스크 같은 얼굴을 테두르고 있는 지금과 같은 모습. 그녀는
황홀경에 빠져 롤러를 하나씩 차례대로 풀어헤쳤다. 카알 씨가 나중에 뭐라 하든 상관없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술을 축이고 뭐라고 혼잣말을 소곤거렸다. 지금의 그녀는
실재하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동화 같고 신비스러웠다.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누가 이렇듯
열려진 순간의 비밀을,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으랴? 나는 사랑에 빠져 있다. 나는
본격적으로 나 자신에 반해 있다. 나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베아트릭스는 이 얼간이 같은
여자가 컵이랑 물을 제발 늦게 발견하기를 기원했다. 지금이야말로 그녀가 최초로 사랑에 빠져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터져나오는 웃음과 눈물에 못 이겨, 웃음과 눈물 사이에서
표현을 찾을 길 없을 지경으로 이토록 강렬한 감정이 인간 내면에 엄연히 실재하는 것이었다. 이
감정이야말로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영화에서처럼, 소설처럼, 그녀 안에선 지진이 일었다. 그리고
그녀로선 그밖의 다른 말을 알 수 없는 까닭에, 그건 분명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그녀는 끓어오르는 격정의 소용돌이를 얼른 진정시켰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곧 방문이 열릴
기세였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것이 다시 지겨워지고 바깥에서의 생활이 처참하게 계속될
것이다. 스타킹이 찢어지는 생활, 슈트로찌 가에서처럼 통풍 안 된 낡은 집들이 있는 생활, 옷이
더러워지는 생활, 미장원에 가고 그 일을 즐기려 들면 비가 내리는 생활, 머리털이 어느새 금방
지방질이 되어버리는 생활이. 그녀에게 흠잡을 데 없이 장밋빛 손과 발이 주어진 몇 순간, 그녀가
격한 감동의 여운 속에 잠겨 있는 짧디짧은 완벽한 순간, 이 순간은 어느덧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금 그녀는 소모를 당할 것이다. 생활에 의해, 에리히에 의해. 이 고뇌에 찬 바보 역시
그녀가 얼마나 값비싼 존재인가를, 그에게 약간의 용기를 주어 어떤 경우에든 다시 일어서게
하려고 무의미하게도 그녀가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출하는가를 전혀 알 바 없이 그녀를
소모시키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에서 그녀 자신은 그와 함께 있는 가운데, 그와 함께 있음으로
해서 망쳐져 가고 소멸되어 가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거듭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서. 지금과 같은 몇 순간을 에리히는 전혀 인식하지 못할 뿐더러 이런 유의 비약과 황홀경을
결코 체험한 적도 없으리라. 그는 걱정을 하고 걱정을 퍼뜨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난센스라니 한 번 눈을 뜨고 자기에게 얼마나 소중한 보물이
선사되었는가를, 그녀한테 특별한 점이 무엇이며 얼마나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이 귀한 것인가를
그는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한낱 "작은 애인"이나 "사랑스런 꼬마"가 아닌, 사고의
오류를 범하든 안 범하든 간에, 외롭고 이해 받지 못하는 엄연한 예술품이라는 것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다행스럽게도 이해 받지 못하는 예술품이라는 것을. 언젠가 박학한 사촌언니한테 들은
바에 의하면 한 그림에서 특수한 점이란, 그것이 이해될 수 없는 요소라고 했다. 이해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으며 숱한 의미들도 결국 아무런 의미를 내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리석은 사람들이 간혹 지껄여 대는 소리가 온통 어리석기만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신출내기가 물컵을 들고 들어오고 그녀는 물을 마셨다. 그리고는 다시 시무룩이 드러누웠다.
이 여자도 롤러를 풀면 안 되는 거라는 둥, 카알 씨가 별로 안 좋아할 거라는 둥 하는 신통찮은
소리밖에 안 했기 때문이었다. 베아트릭스는 아무 대꾸도 안 했다. 뭐라 해야 할지 묘안이 안
떠올랐다. 그녀는 다만 힐데 부인이 어떤 사람이며, 다른 때 힐데 부인이 자기의 메이크업을
어떻게 해주었는가를 우물우물 설명하며, 그리고도 잘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여자는 다시
그녀한테 몸을 굽히고 아이라인을 그리기 시작하더니 얼른 다시 지워 문질렀다. 하긴 그럴 줄
진작 알았다. 이어서 다른 쪽 눈을 시작했다. 이쪽 눈이 껌벅거렸다. 하지만 그건 베아트릭스가
그러려고 해서가 아니라 서투른 얼간이 탓이었다. 얼간이는 다시 시작했다. 이번엔 베아트릭스도
껌벅이지 않았다. 이 얼간이한테 발뺌할 구실을 만들어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흘러간 뒤, 아이라인이 그려지고 아이섀도가 발라졌다. 베아트릭스는
딱 한 번 이 말만 했다. 얌전하게 해주어요. 살짝 표가 안 나게요. 전 여배우가 아니거든요.
신출내기는 묵묵 부답이었다. 하지만 이 침묵이 적이 미심쩍었다. 그리고는 있는 인내심을
다하여 이렇게 미심쩍게 두루 문질러 지우고 거듭거듭 수정하는 일을 참아냈지만, 결국
베아트릭스 편에서도 이 여자의 화를 돋구고 말았다. 이윽고 해방이었다. 그녀는 침울하게 입을
다물고 일어섰다. 아뇨, 거울 같은 건 안 보겠어요. 얼른 카알 씨한테 가서 머리 빗질이나
하겠어요. 이 작은 방 안에 도사린 적의,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베아트릭스는 도망을 쳤다.
르네에 오면 이 시간 동안 곧잘 수다를 떨게 되던 기분이며 상냥스러움은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맨 앞쪽 방에 주저앉아 카알 씨를 기다렸다.
벌써 문을 닫을 때가 되어서 방 안을 치우기 시작했기 때문에 카알 씨가 서둘러 달려오고
드라이어를 붙들어 달라고 토니를 부르고 할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눈을 들어 아주 나무라는
투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즉각 자기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카알 씨는 다만
풀어버린 롤러에 대해서만 화를 냈다. 이 시점이야말로 울화통의 절정이었다. 아니, 아직
거기까지만 해도 절정일 수는 없었다. 그에게 뭐라고 미처 대꾸도 하기 전에, 부득이 거울을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내뱉었다. 카알 씨, 할말이 없어요. 이 메이크업 좀 보세요. 내
몰골이 어떤지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내 꼴을 당신 눈으로도 보시잖아요!
카알 씨는 벌써 솔질을 시작했다. 그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척, 머리털을 한 가닥씩 빗으며
드라이어를 댔다. 이 대목이야말로 그녀한텐 참혹한 환멸이었다. 그녀의 신비스러운 얼굴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아가씨, (그는 다행히도 사모님이라고 부르질
않았다. 그랬다간 그녀의 신경줄을 터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가씨께서 힐데 부인한테 퍽
길이 들었다는 건 알고 있습지요. 그렇지만 지금의 새 메이크업도 별로 나쁘진 않아 보이는데요.
베아트릭스는 스스로를 자제시키며,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의
그녀의 꼴이 끔찍스럽다고, 그녀의 눈화장이야말로 비극적인 파국이라고 말해 줄 수 있지 않은가.
그녀 자신도 장님이 아닌 바에야, 너무나 굵게, 너무나 시커멓게, 울퉁불퉁 그어진 선을 보고
있는데 말이다. 그건 그야말로 비극이었다. 카알 씨는 화제를 바꾸어 이렇게 말했다. 바깥엔
유감스럽게도 억수같이 비가 퍼붓는군요. 그런데 손님께선 번번이 비오는 날만 오시는군요.
베아트릭스는 여전히 대꾸를 안 했다. 그녀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에리히를 만날 수 없었다. 가능한 한 에리히와 같은 시각에 고층 커피점에
들어서는 걸 피해야만 했다. 다만 린데 레스토랑으로 달려가 화장실로 올라가서 이놈의 물감을
씻어내 버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하지만 물을 가지고는 안 되지 않는가. 그녀는 얼른 그곳에
있는 귀에 대는 솜뭉치를 집어들고 앞에 놓인 커다란 크림통을 보았다. 통 위에는 리브 온 오버
나잇(leave on over night. 잠자는 동안 바른 채 두시오)이라고 씌어 있었지만, 이놈의 멍청한
영어를 그녀가 알 턱이 없었다. 고개를 똑바로 하고 있으라는 카알의 부탁을 들으며, 그녀는
난감한 기분으로 솜뭉치랑 크림으로 눈등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 흉칙한 그림을 없애야만
했다. 꼭 창녀 같은 꼴이 아닌가. 에리히는 자기가 정신이 돌아버렸다고 생각하리라. 하지만 이
크림은 클린싱용이 아니었다. 카알 씨가 기겁을 해서 뭐라고 했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안 하며
눈등을 지우고 문질러 댔다. 그러다가는 드디어 한계에 다다라 울음보를 터뜨리고 누를 줄
모르고 흐느껴 울었다. 속눈썹을 그린 시커먼 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시커먼 눈물
줄기를 뺨 위로 줄줄 흘리며 소리쳤다. 내버려 두세요. 얼른 내 코트나 갖다 주세요.
하지만 코트뿐 아니라 원피스까지 탈의실에 있기 때문에 뒷방으로 달려가 르네 가운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원피스랑 코트를 걸쳤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흐느꼈다. 지금의 상태로는 마담
이본느랑 계산을 하고 팁을 줄 수도 없었다. 카알이 그녀를 뒤쫓아와 "숙녀용"으로는 들어오질
못하고 밖에서 기다리며 외쳤다. 아가씨, 그러지 마십시오. 대체 뭣 때문에, 난 아가씨를
도저히.
베아트릭스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외쳤다. 다음번에 계산할께요. 너무 늦었거든요! 그리고
그녀는 밖으로 뛰쳐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카알 씨가 그녀를 앞질렀다. 우산을
잊어버리고 나온 것이었다. 밖에선 억수같이 비가 퍼붓고 있는데 말이다. 그가 뭐라고 말을
계속하려 했지만, 베아트릭스는 우산만을 뺏어 들고 펴지도 않은 채, 어느새 문 밖으로 나가서
얼굴에 빗줄기를 맞으며 말했다. 여기 당신네들한테서 오후 내내 앉아서 시간을 보냈어요.
오후를 몽땅 잃어버린 거예요. 그렇지만 내 모든 시간을 잃어버릴 수는 없어요! 그를 향해
오후를 몽땅 정면으로 내동댕이치고 나자, 그녀의 머리가 홈빡 젖고 머리 모양도 흐트러졌다.
그런데도 카알 씨의 손수건을 단호히 물리쳐 버렸다.
대체 이해가 안 가세요? 내 하루가 몽땅 사라졌어요! 그녀는 길을 건넜다. 린데 레스토랑의
화장실 로비에서, 그녀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울었다. 에리히가 머리에 떠올랐다.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을 에리히. 하지만 오늘은 소용없었다. 혹시나 구기가 자살을 해버려서 그가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면 좋을 텐데. 갑자기 그녀는 구기가 꼭 자살해 버렸을 것 같은 확신을
느끼며 울음을 뚝 그치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비극적 파국이었다.
화장실을 지키는 노파한테 그녀는 말했다. 이건 비극적 파국이에요. 모든 것이 가버렸어요.
사람들이 온통 그렇게 엉터리일 수가 없어요. 노파는 그녀의 팔을 잡으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그렇지만, 원, 이런 어린애라니! 베아트릭스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차분히 말했다. 저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다만 모두가 엉터리일 뿐이에요. 당장 이 미끈덕거리는 물건을 얼굴에서 닦아내
버려야겠어요.
그래, 남자들이 문제야, 노파가 마음이 뒤흔들린 듯 이해를 나누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베아트릭스는 한순간 무슨 소리인지를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도 동화를 믿고 있는 이
노파 때문에 다시 한번 울음을 터뜨렸다. 한 노파가 그 나름의 믿음 속에 머물도록 그녀는
호의를 베풀고 싶었다.
그래요, 남자들이 문제예요!
동시에 전3권 중 제3권
잉게보르크 바하만
호수로 가는 세 갈래 길
지방 중앙시 클라겐푸르트 측량국과 공동 작업으로 여행 안내국에서 편찬된 1968년도판
크로이쯔베르크 지역의 도보 여행 안내도를 보면, 열 갈래의 길이 기재되어 있다. 이 길 중에서
세 개의 길이 호수로 통한다. 페언베크 1번, 7번, 8번도로이다. 저자는 이 지도를 믿는 까닭에 이
이야기의 발단은 지지학에 근거함을 밝힌다.
그녀는 항상 1번 플랫폼에서 떠났고 2번 플랫폼에 도착했다. 마르타이 씨는 벌서 몇 해째 이
일에 익숙해져 있을 터인데도 게시판의 도착 시간이 맞는 건지 자기가 아는 정보가 옳은 것인지
자신이 없어 하며, 마치 단 두 개의 플랫폼밖에 없는 이 역에서 그녀와 엇갈리기라도 할세라,
초조하고 흥분해서 2번 플랫폼에서 서성거렸다. 누군가 벌써 그녀한테 두 개의 트렁크를
내려주고 있었고, 그녀는 그 낯선 이에게 산만하게 과장스러운 투로 감사의 말을 건넸다. 이제
포옹의 의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마르타이 씨를 향해 몸을 굽히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섬뜩 놀라운 느낌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가 더욱 작아진
느낌이었다. 줄어든 건 아닌데도 아무튼 작아진 모습이었고 게다가 그의 시선은 어린애처럼
서툴게 어쩔 줄 몰라 했다. 섬뜩 스쳐간 느낌이란 그가 부쩍 늙었다는 느낌이었다. 사실
마르타이 씨는 줄곧 늙어왔다. 그런데도 해마다 플랫폼에서 아버지를 볼 때마다 변함없는 정도의
늙은 모습을 대해온 엘리자베트로서는 도저히 깨닫지 못했던 점이었다. 그리고 해마다 짐꾼을 안
부르고 여행에 분명 지쳤을 그녀한테는 아무것도 못 들게 하며 손수 짐을 들고 가는 마르타이
씨에 대해 그녀는 번번이 화를 내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가 정작 더 늙어보였기 때문에 여느
때처럼 짐 하나를 놓고 잡아 끌며 승강이를 벌이기를 집어치고, 짐짓 그에게 짐을 둘 다 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여전히 변함 없이 건강하고 정정하며, 트렁크 두 개 드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도록 하고 싶었다. 택시에 오르자, 그녀는 다시 스스럼
없는 기분이 되어 언제나처럼 웃으며 떠들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간간이 반호프 가에
들어선 두어 개 신축 건물의 앞면에 눈을 주고, 노이엔 광장에 있는 비룡을 익숙하게 알아보았다.
비룡 역시 작아져 보였다. 이어서 시립극장이 보이고 라데쯔키 가로 접어들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모든 것이 그녀가 정들었던 라우벤베크 근처, 집 근처에 와 있음을 약속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뇨, 여행에 관해선, 왜 빈을 거쳐 비행기를 타고 오지 않았는지는 오늘은
도대체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아요. 지나간 며칠간의 무서운 공포에 관해서는요. 중요한 건 그녀가
마침내 여기에 도착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여러 날을 기다리게 한 끝에. 그리고 만약
이번에도 그녀가 연기를 했다면 그는 무턱대고 비행장에 나가 기다릴 참이었다. 아무리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녀가 그토록 수차 직접 전보를 쳤다 해도 말이다.
그녀가 택시값을 치르고 나서 같이 정원을 지나가게 되자, 마르타이 씨는 당장 앞 정원의 새
종자를 보여주려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나중에 보겠어요,
내일이요, 네! 집 안에 들어가 그들은 일단 거실에 앉았다. 그녀한텐 커피 한 잔과 담배 한 대가
시급했다. 그리고 나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와 딸은 아버지가
따스하게 얹어 놓았던 커피를 마셨다. 향내가 나가버린 미지근한 커피였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영국의 홍차만을 마시던 그녀한테는 그래도 반가웠다. 그들은 같이 몇 마디 젊은이들을, 곧
로베르트와 리쯔를 비난했다. 이어서 마르타이 씨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왜 로베르트와 리쯔가
클라겐푸르트로 오질 않고 하필 마로코로 갔는지 난 이해가 안 간다. 결국 클라겐푸르트로 오는
게 더 건강에도 좋고 경제적이었을 텐데. 뿐만 아니라 이제껏 가족이라는 걸 가져 본 적 없는
고아인 리쯔도, 여기가 담박에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았겠니? 엘리자베트는 자신 없는 투로
로베르트를 변명했다. 실상은 설명할 것도 별로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하필이면 지금,
모험욕의 봇물을 막은 채, 라우벤베크에 와 앉아 있는 자기 동생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게다가 리쯔 역시, 하필이면 지금, 아직 어린애처럼 세상의 무엇이라고 보겠다는 갈망에 불타고
있었다. 실상 두 젊은이 모두 그럭저럭 어느새 일 년이 차도록 런던에 처박혀 살고 있었다는 게
원인이었다. 두 사람은 각기 허구한 날 녹초가 되어 장거리 지하철을 타고 직장에 귀가했고, 결혼
따위는 미처 언급되지도 않던 한참 전부터, 일요일이 되면 해묵은 부부처럼 로베르트의 독신자
아파트에 박혀 시간을 보내온 터였던 것이다.
엘리자베트는 이 까다로운 화제를 피해 벌떡 일어나며 이젠 짐을 좀 풀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좀 참고 계세요, 라고 말하는 그녀의 아버지만
알아보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과연 짐을 흐뜨려 놓고는 이층의 목욕탕과 옛날의 자기 방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벌써 이 서성거림만으로도 집안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생동했다. 이제 "자식"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지금 집안을 서성대는 인물이 이미 아이가 아닌, 스스로 손님과 여주인의
얼치기처럼 느끼고 있는 어른이라 해도 그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엘리자베트는 긴 시간 자리를
떠 있지 않으려고 샤워만 하고 가운을 입었다. 그리고 이층의 책 더미 사이에 앉아, 우선 오늘
저녁에 꼭 치러야 할 일을 생각해 냈다. 매년 그렇듯이 이번에도 초라하고 소박한 것이 되어버린,
아버지한테 드릴 작은 선물이었다. 사실 마르타이 씨는 아무것도, 진정 아무것도 필요로 하는 게
없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자식들을 곤란케 만들었다. 그것은 그가 한사코 내세우는 주장에
그칠 뿐 아니라, 사실이 과연 그랬다. 그에겐 던힐 파이프나 금라이터, 비싼 시가며 넥타이, 고급
상점의 고급 물건을 선사할 수가 없었다. 또한 실용품은, 전지 가위로부터 부삽에 이르기까지,
노인이 필요한 가재도구까지 일체 가지고 있고 아끼며 도 받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것도 선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술을 안 마셨다. 담배도 안 피웠다. 양복이며 비단 머플러, 캐시미어 스웨터,
세안수 따위는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나간 세월 동안 온갖 종류의 남자들한테
어울림직한 선물을 고르는 일에 풍부한 안목을 쌓은 엘리자베트까지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뾰죽한 묘안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그의 성품은 괴벽이 아니라
천성이었고, 아마 마지막 날까지도 그는 이 천성을 버리지 못하리라. 다만 "마지막 날"이라는
표현이 오늘의 엘리자베트에겐 방해스러웠다. 그녀는 얼른 이 말을 머릿속에서 털어 버리고
사진뭉치를 꺼냈다. 낡은 서류표지를 버리지 않았던 덕분에, 그것들은 다행히 전혀 구겨지지 않은
채였다. 아버지한테 내려가기 전 그녀는 사진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런던에서 그녀의 눈으로
봐서 아마추어 솜씨인 것과 전문가 솜씨다운 것을 대충 분류해 놓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사진이야말로 그녀의 사진 저술이나 보도 사진류보다 아버지한텐 훨씬 흥미로울 것들이었다.
초라한 동기 사무실과 결혼식 후 간단히 식사가 거행된 호텔로 가기 전에 찍혀진 결혼식 사진들,
관례에 따라 피할 수 없이 찍혀진 사진들, 부모와 조부모의 그것들처럼 곧 고풍을 풍길
사진들이었다. 항상 맨 가운데 찍힌 리쯔와 로베르트, 리쯔에게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굽히고
있는 로베르트, 그를 향해 미소를 주고 있는 리쯔, 리쯔 옆에 서 있는 엘리자베트, 사뭇
남동생만큼 큰 귀에 마른 모습, 젊고 섬세한 리쯔보다도 더 마른 모습. 한순간 그녀한테는, 비록
그녀 자신 마치 로베르트의 친구마냥 껑충하니 남자처럼 동생 곁에 웃음을 짓고 서 있긴 해도,
조금만 눈을 돌려 조합해 본다면 오히려 로베르트와 그녀 자신을 부부로 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다시 퍼뜩 떠올랐다. 어느 사진에는 실수로 호텔 수위가 찍혀 들어왔고, 다른 사진에서는
두 사람의 다른 인물, 곧 리쯔의 먼 친척 아주머니랑 로베르트의 친구의 작달막한 애인이 곁들여
서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사진을 정리해서, 로베르트와 리쁘만이 찍힌 유일한 사진을 맨 위에
얹고는, 손을 꼽아보기 시작했다. 미처 올겨울이 가기 전에 그녀는 쉰 살이 될 것이다.
로베르트는 그녀보다 열세 살 연하였고, 리쯔는 서른 살 아래였다. 이 계산은 불변의 것이었다.
다만 사진을 보면 착각을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리쯔 곁에 서 있는 그녀는, 리쯔만 한 딸을 둘
수도 있었을 여자라고는 도저히 보여지지 않았고, 30대 후반의 여자처럼 미소를 지으며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나이에 관해 지금껏 얘기를 나눈 적이 없고,
로베르트보다 젊은 필립까지도, 자기가 불과 두세 살 연상의 여인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었고, 과연 그럴 만했다. 하지만 오늘의 그녀의 계산은 틀림이 없었다. 쉰 빼기 스물
둘이 스물 여덟이었다. 필립은 한 단 전에 스물 여덟 살이 된 것이었다. 22년의 격차. 그러니까
그녀는 역시 그의 어머니일 수도 있으리라. 비록 지금껏 그런 생각이 도저히 떠오른 적도 없었고,
지금 역시 생가만 해도 생소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지만, 어쨌든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다만 계산은 어김없었다.
유월인데도 이 외딴 집은 퍽 추웠다. 어린 시절의 찌는 듯한 더위의 위협 같은 건 아예 다가올
염도 하지 않는 날씨였다. 이 여름밤을 위해 그 사이에 아버지는 스팀을 켜놓았다. 그녀는
아버지한테로 내려가면서 사진 위에서 미소짓고 있는 얼굴들에서 무언가를 캐내려고 애를 썼다.
런던에선 무엇인가를 놓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진눈깨비며 사방을 내리덮는 으스스한, 습하고
찬 초여름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
무엇의 단서를 추적하는 형사처럼 다시 한번 사진을 검토해 보아도, 그것이 증거물이 될 수는
없었다. 어떤 일의 근본에, 또는 어떤 일에서든 스스로나 타인에, 순식간에 도달하는 그녀의
능력, 그녀의 예감이 이번 경우엔 어디로 가버렸는지? 그것은 로베르트와 그녀 자신이
관련되었거나 또는 로베르트와 리쯔가 관련되었거나, 두 가지 문제 중의 하나였다. 또 한사람의
마르타이 부인이 생겼다고 런던에서 사람들이 웃으며 말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소멸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리쯔가 어린애를 원할 테니까. 하지만 로베르트는 아마 거의 어린애를
원치 않으리라. 그녀와 너무나 닮은 로베르트는 정말 원하지 않을 것이다. 엘리자베트는 이
문제를 놓고 열심히 생각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로베르트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분명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의 직감은 애초부터 그녀의 직감보다 월등 우세했다. 그녀가 엄밀히 알고
있는 거라곤, 왜 마르타이 같은 집안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이미 잉여적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베르트와 그녀는 낯선 땅으로 탈출해서, 중요한 나라
출신의 권력 있는 활동가들처럼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로베르트는 리쯔를 통해 한결
탄탄하게 이국땅에 자리잡게 될 것이었다. 그녀가 도처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일을 벌이는
원동력은 그녀의 감수성이었다. 그 외국인들 역시 같은 언저리 출신이었고, 그런 까닭으로 해서
그녀의 정신과 감각, 행동도 별수 없이 거대하게 외연된 정신의 영역에 속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 나라에서 여권을 발급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에겐 정식 여권도 없었다. 다만 우연히도 남매가
국적이라는 걸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엘리자베트는 당시 미국에서 무진 애를 쓴 끝에 복잡한
탄원과 수속을 거쳐 미국 여자로 변신할 수 있었는데, 그건 단지 미국 남자와 결혼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혼 후에는 서류 위에 기재된 사항 따위도 한층 별볼일 없이 되어버렸다. 이미 그녀는
활동 허가증을 소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항상 숱한 친구와 사이비 친구들의 보호를 받아왔고,
어느 나라를 가든 별일이 벌어질 리가 없었다. 워싱턴에는 주요 인물 재크라는 자가 있었고, 또
유력한 리차드라는 인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트가 극도로 위급한 처지에 인간관계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동시에 상대방을 위하는 길이기도 했다. 그녀가 찾는 남자들이란
번번이 좌초한 인간들이었고, 그들 역시 발판으로, 추천을 위해 그녀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필립과의 관계 역시 당연히 이런 유였다.
그녀가 앞에다 사진을 펼쳐놓자, 아버지는, 누구인가 파리에서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다고
말했다. 필립임에 틀림없었다. 뭔가 필요하든가 우연히 몇 마디 다정한 말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 나면 다시 전화를 걸어오리라. 아버지는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선물이 고맙다고 말했다.
그녀가 우연히 런던의 어느 고서점에서 발견한 책으로 옛날 사진들이 실린 "사라예보로 가는
길"이었다. 그는 꽤 흥미가 끌리는 듯 말없이 책장을 넘겼다. 사진을 보고는 별로 말이 없었다.
로베르트가 아주 좋아 보이는구나라는 말만 여러 번 강조했다. 리쯔는 실문이 사진보다 더
예쁘구나. 하지만 자신의 딸이 얼마나 젊은 모습인지는 그도 깨닫지 못했다. 사실 그는 달리는
딸을 몰랐고, 오늘의 엘리자베트처럼 나이를 헤아려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의
자식이었고, 자식들이란 언제이고 젊어 보이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마르타이 씨에겐 다만, 너 참
좋아 보이는구나라든가, 네가 참 안 좋아 보이는구나라는 관찰만이 가능했다. 그것은 이 말을
듣는 자식의 건강과 관련된 얘기였다. 마르타이 씨는 말했다. 이게 그놈이 결혼한 때로구나. 이제
난 마음을 놓았다. 엘리자베트는 로베르트가 자기는 결코 어떤 일이 있어도 결혼 같은 않겠다고
단언할 때마다 마르타이 씨가 얼마나 화를 냈는가를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런 아버지가 정작
엘리자베트 자신의 독신 상태에 관해선 전혀 불안해 하는 일이 없다는 점이 이상스러웠다. 실상,
그것도 이혼 얼마 전에야 비로소 사실을 밝힌 그 미국인과의 자기의 짧은 결혼생활을 아버지는
아주 잊어버렸거나, 또는 결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모른다. 미국놈들이란(그의 의견에
따르면) 사실 결혼과 이혼을 떡먹듯이 하니까, 엘리자베트가 그토록 금방 다시 홀몸이 된 것은
이상스러울 것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혼 때보다 훨씬 소상하게 쓴 이혼을 알리는 편지에서
그녀는, 자기는 잘 있다는 것, 휴즈를 탓할 근거는 전혀 없다는 것, 이 길이 두 사람을 위해
좋으리라는 것, 모든 일이 아주 우호적인 상태에서 극히 공평하게 진행된다는 것, 일장의 연극에
관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 아무튼 다시 파리로 되돌아가겠다는 것 등을 보고했다. 그러고 보면,
이 휴즈라는 자는 마르타이 씨한테 나타난 적조차 없었다. 마르타이 씨는 그 당시 자기로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에 대해, 또한 엘리자베트의 어설픈 짓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켰다.
엘리자베트만 괴로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서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녀의 편지는 솔직히
낙관적인 각도에서 읽혀졌고 마르타이 씨는 이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나는 내 자식들을 알고
있어. 중요한 건, 이혼을 떡먹듯하는 미국 녀석이 내 딸을 불행하게 만들어 버리지 않은
사실이다. 클라겐푸르트의 거리에서 딸의 결혼을 축하해 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퉁명스럽게
응수했고, 한 번은 엘리자베트가 이혼을 하고도 한참 뒤, 그가 냉소적으로 "여감독관"이라고
불렀던 하우저 부인이 엉큼스럽게 질문을 던지는 걸 알아채고는 공손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자식들 일에 결코 개입하지 않는다는 내 원칙을 제쳐놓고라도, 미국식의 결혼은 우리한텐 통용될
수가 없지요. 내 딸은 굉장히 바빠요. 지금은 아프리카에 있습니다. 아들놈은 나중에 화학공부를
하려는 모양이지요. 나로선 더 이상 할말이 없군요. 아시겠습니까.
그 이후론 이 지역의 어느 누구도 감히 마르타이 씨한테 그의 딸의 사생활을 물어오지 않았고,
세월과 함께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이웃에 퍼뜨리는
원흉이었던 심술쟁이 여감독관 하우저 부인도 오래 전에 세상을 떴다. 마르타이 씨는 눈을 들어
주변을 돌아다 보는 일이 극히 드물었고, 어쩌다 누구든 인사를 해오면 흠칫 놀라면서 공손히
답례를 했다.
사진만으로는 충분한 전달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엘리자베트는 열심히 설명을 하려고 애를
썼다. 사실 아버지는 외아들의 결혼식을 보겠다고, 한마디 말도 알아들을 수 없고 리쯔한테조차
말 한마디 건넬 수 없는 낯선 땅, 런던을 향해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비행기에 오르기를 한사코
사양했던 것이다.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못했던 런던에서의 며칠을 이제 그녀는 매력을 갖춰
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문은 어느새 술술 터져나왔다. 도착한 날 저녁부터
히트로우에서(파리의 오를리처럼 런던의 비행장은 히트로우라는 이름이에요.) 하필이면 일이
묘하게 뒤틀어져 버렸거든요. 로베르트랑 제가 약속을 잘못 했던 거예요. 제가끔 엉뚱한
장소에서 기다렸지 뭐예요. 히트로우는 정말 꽤 큰 비행장이에요. 클라겐푸르트 비행장보다 약간
더 클 거예요. 그래서 결국 전 혼자 호텔로 갔는데, 택시요금이 갑절 이상이나 물었어요. 그
얘기를 듣더니 로베르트가 배를 움켜잡고 웃겠지요. 세계일주를 한두 번도 아니게 한 제가
하필이면 영국 택시 운전사한테 속아넘어가다니, 언어도단이었지 뭐예요. 촌뜨기 미국사람이나
아프리카 사람이래도 결코 그 지경으로 속임수를 당할 수가 없었을 텐데 말예요. 뒤늦게 우린
느긋이 어울려 앉아, 혼사에 관해서 구체적인 의논을 하고, 음식값이 얼마 들고, 뭘 더 사야
할지, 뭘 더 처리해야 할지 계산을 했어요. 리쯔는 바느질을 하고 있었어요. 리쯔에 관해선
이렇다 하게 보고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녀는 근본적으로 지금의 계제에 설명에 오를 타입이
아니었다. 그녀에게선 "경쾌한 런던(Swinging London)"이라든가, 요컨대 오늘의 스무 살 짜리
젊은 애들한테 기대할 만한 요소를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디를 방랑한 적도
없이 오로지 로베르트와 같이 있는 기쁨만을 알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 이전의 그녀의 시간엔 일
년 내내 독방이 너무 비싸서 다른 처녀애랑 합숙하던 방 한 칸과 직장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날
저녁 리쯔는 마로코 해변에서 걸칠 비치 가운을 꿰맸다. 그 다음에 그들은 클라겐푸르트로
전화를 걸기로 정하고 "운명의 발걸음"을 내딛는 절차가 모두 순조롭다고, 엘리자베트가
로베르트의 결혼 입회인이 되는 일도 별 어려움 없이 승인 받았으며, 도대체 어수선을 필 것이
전혀 없이 극히 간단하게 진행된다고 마르타이 씨에게 보고했다. 그러면서 로베르트와
엘리자베트는 번갈아 수화기를 빼앗으며 자기네들이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하고는
마지막으로 리쯔의 손에 수화기를 떠맡겼다. 리쯔는 어쩔 줄 몰라하며 수화기에 대고
더듬거렸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안녕히 계십시오. 그것이 그녀가 독일어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말이었다. 그녀에겐 또 하나 "멍청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적시에 로베르트를 향해 안타할
수 있도록 엘리자베트가 가르쳐 준 말이었다. 로베르트한테서 그녀는 툭하면 "맹꽁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것은 그녀한텐 끝내 어떤 수수께끼처럼 다정한 여운을 품은 단어일 뿐이었다. 그들은
제가끔 맥주를, 흑맥주 지니어스를 한 잔씩 마셨다. 엘리자베트는 한 쌍의 젊은이를 보며 생각에
잠겨 즐거워했다. 얼마나 신통하게 로베르트는 이토록 어울리는 선택을 해낼 수 있었단 말인가?
맥주를 마시고 나면 잠이 잘 오거든요. 그 다음 이틀 동안 리쯔랑 같이 헤로즈(Harrods)를
비롯한 몇 군데 백화점에 쇼핑을 갔어요. 리쯔는 사무실에선 자기가 결혼한다는 소리를 전혀
내비치지 않았으니까 이제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질 거라고, 자기는 그냥 휴가 신청을 했을
뿐이라고 들떠서 말하겠지요. 백화점에 들어가서 리쯔는, 그냥 리스트에 적힌 것만 고집하면서
제가 뭘 사주려 해도 여러 차례 막무가내면서도, 온갖 상품을 보고 어린애처럼 황홀해 하겠지요.
그때 제 상태가 가누기 힘들어지기 시작했어요. 이 대목에서 그녀는 문득 얘기를 끊고 말했다.
아버지, 잘 시간이에요. 아버지 눈도 벌써 감기는데요. 내일 아침엔 당장 숲에 가겠어요.
엘리자베트는 잠이 들기 전에 또 한번 의식이 말똥말똥해 졌다. 그래서 살금살금 부엌으로
내려가 아침 상을 차렸다. 마르타이 씨로 하여금 그 옛날처럼 다시금 색다른 아침을 맞게 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여전히 런던에, 미로 같은 상점가 속을 헤매고 있었다. 아무리
둥근 빵과 뜨거운 밀크커피가 있고, 추억의 앨범으로 구성된 단란한 가정의 분위기 속에 잠겨
있어도 그것에 쉽게 융화될 수가 없는 곳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며, 수만
수십만 종의 상품을 스쳐 지나가면서 왜 그토록 가누기 힘든 상태가 되어버렸을까. 커피점에서
장사진에 끼어 홍차랑 베이컨과 달걀을 기다리면서 그녀는 사뭇 졸도 직전이 이르렀고, 다행히도
리쯔가 나란히 붙은 좌석 두 개를 발견했었다. 끔찍스런 노파들 틈바구니였다. 노파들은 과자랑
샌드위치를 한 접시 가득 앞에 놓고 도저히 맛대가리 없는 것들을 게눈 감추듯 삼켜 치우며,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장소인 듯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 노파들 가운데에는
엘리자베트만큼 나이 먹은 여자들도 꽤 있었지만, 다른 양상으로 늙었고, 볼품 없이 우스꽝스런
차림이었다. 엘리자베트는 달걀은 건드리지도 않은 채 백지장처럼 질려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리쯔가 곰살궂게 말해 온 것이었다. 당신은 완전히 녹초가 되신 걸 저도 느끼겠어요. 얼른 푹
쉬고 싶으시겠죠. 당장 호텔로 모셔다 드릴께요. 엘리자베트는 단지 이렇게 대꾸했다. 그래,
미안해요. 아무래도 더 이상은 못 버티겠어요. 어떤 일을 내일로 미뤄도 될까를 궁리하며
걸어가는 길에 리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해하겠어요. 런던은 파리나 뉴욕이 아니거든요.
게다가 당신이 평소에 얼마나 괴로워하시는지 우린 알아요. 여기까지 오시는 것만도 엄청난
희생을 치르신 걸 거예요. 그렇긴 해도, 만약 안 오셨으면 로베르트가 여간 섭섭하지 않았을
거예요, 저두 그렇구요. 그리고 당신한테 꼭 말씀 드리고 싶어요. 로베르트가 저를 모든 그이의
결단은 당신한테 의존하고 있다는 걸 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을요. 저는 당신이 좋아요.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녜요. 정말 저는 당신을 좋아해요.
엘리자베트는 그녀를 후딱 껴안고 감사했다. 리쯔가 그녀의 마음에 드는지를 로베르트가 알고
싶어했음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드러내 놓고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리쯔가 마음에 든다고
이해할 만큼은 언질을 주었다. 이제 그녀는 시누이(Schwagerin. Schwiegerin이라고도 쓰임.
Schwiegermutter는 시어머니 Schwiegervater는 시아버지를 칭함. 역주)를 얻게 된 것이었다.
이 말은 독일어로는 퍽 끔찍스럽게 들리는 것이었다. 진정 그녀는 "시스터 인 로우(Sister in
law)"를, 법을 통한 여동생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파리에 관한 화제에서 그녀는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리쯔와 로베르트는 주말을
이용해서 파리에 한 번 온 적이 있었고, 파리를 "기막히게 근사한(Super)" 도시라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엘리자베트는 미소를 머금고 리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그녀 자신의
파리는 "기막히게 근사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실로 그녀에게도 언젠가는 최초의 파리가
있었다. 비록 그렇게 드러내 놓고 입밖에 내진 않았지만 25년 전만 해도, 이 도시가 그녀의
다양한 생과 그토록 숱한 인간들을 망쳐 버릴 힘을 미처 갖기 전만 해도, 그녀에게는 역시
파리는 황홀한 장소였다는 사실을 부지중에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엘리자베트에겐
아픔을 주지 않는 장소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랑스런 작은 여인은 감탄을 아끼지 않는
몇 개의 도시를 자기 앞에 가지고 있으며 그 도시들을 아름다움과 매혹의 장소로 열광하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곧장 언덕길을 따라 호수로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건 아무래도 무리한 코스일
듯싶었다. 하지만 발트뷔르쯔나 최소한 칼바리엔베르크까지는 오를 수 있으리라.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걸어보는 일이 실로 몇 주일 만인가. 마르타이 씨까지도 엘리자베트가 집에 오면 "마음껏
뛴다"는 것을, 시내를 곧장 집 뒤 숲속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전에 그들은 자주
어울려 산책을 나갔고 아직도 두 번째 산책은 아버지를 동반했지만, 오전의 산책은 혼자서 했다.
마르타이 씨의 말대로 실상 그녀는 사뭇 뜀박질을 했고 이 템포에 아버지는 도저히 보조를 맞출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밤 동안 엘리자베트는 안절부절 못했다. 여전히 런던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 동안 자기한테
얼마나 일이 뒤틀어져 돌아갔는가는 아버지한테 말할 수가 없었다. 로베르트에게도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특히 두 젊은이가 떠나고 났을 때는 완전히 분별을 잃고 로베르트를 잃어버린 느낌에
사로잡혔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그녀 자신도 비행기를 타려 했을 때 해당 비행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좌석이 오래전부터 예약되어 버렸기 때문에 호텔 여행사에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속수무책이라는 것이었다. 칠월, 한창 철인데다 관광 비행기의 절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속절없이 열흘 동안 그 호텔에 주저앉아 대부분의 시간을 방구석 침대에 뒹굴며 책을
읽고 홍차와 샌드위치를 배달시켰다. 옆방에선 끊임없이 남자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번은 그 방에서 웬 파키스탄 남자가 나오는 걸 보았고, 또 한번은 밤중에 그녀의 방문에
노크 소리가 나는 것 같아 조심조심 무슨 일인가 내다보다가 그것이 바로 옆방을 찾아 온
파키스탄 남자 두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더니 계속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에서는 하는 일도 없이 뚱한 표정으로 스페인 여자들이 빈둥거렸고, 방 담당보이들은
검둥이들이거나 인도와 필리핀 출신이었다. 단 한 번 그 중에 늙수그레한 영국 사람도 끼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호텔 손님까지도 한결같이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커다란
엘리베이터 속에서 그녀는 백일점으로서 뚱하니 말 없는 무리 틈에 끼여 있었다. 마블 아치와
하이드 파크 근처인 그곳은 정말 괴상한 지역이었다. 다른 이들과 같이 여행을 갔을 때, 정작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는, 그녀도 전혀 가슴 죄는 느낌 없이 고삐에서 놓여난 말처럼 홀가분하게
혼자 떨어져 멀리 싸돌아다닐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지역에서는 불가능했다. 모든 것이
시들했다. 모든 것이 깡그리 시들했고 뭔가 들어맞질 않았다. 손님들과 고용인들은 몇 개 안
되는 단어에 국한된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고, 그 이상의 단어를 사용하면 의사가 전달되지
않았다. 그것은 실제 통용되는 살아 있는 언어가 아닌, 일종의 에스페란토였다. 아마도 이
세계어의 창시자는, 자기가 구상했던 언어가 비록 전혀 다른 방식이긴 해도 어쨌든 간에
성취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리라. 신문이나 담배를 사거나, 비행기에 관해 문의를 할
때마다, 그녀도 어느새 자신의 영어를 잊어버리고 이 저주스러운 에스페란토를 사용했다. 한번은
이 근처를 빈둥대고 있는 남자들이 어떤 종류의 남자들인지, 그 중에 문제가 될 만한 남자가
있는지를 구경할 셈으로 바로 가 앉았다. 하지만 어느새 바가 닫혀버렸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닫혀져 버렸다. 그래서 기껏해야 졸렬한 회의 장소로나 어울릴 눈부신 조명의 옆방에 앉는
일만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몇 방울 위스키나 맥주를 한잔 마실 수는 있었지만 다음번 난관은
또다시 지불하는 문제였다. 그 며칠 새에 어떤 동전이 얼마짜리인지를 배울 기분이 도저히
아니었던 엘리자베트는 돈지갑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며, 필요하신 만큼 집으세요! 라고 말했다.
한때 그녀의 마음에 들었던 모든 것, 지난날의 런던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 대도시를 풍미하는 대도시 캐리커처는 그녀의 기분을 뒤집어 놓았다. 물밀 듯하는 인파에
밀리면서, 방성대가를 사양 않는 교파의 떼거리와 부딪칠 때마다 그녀는 옥스퍼드 가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한번은 얼른 웨스트민스터 다리 쪽으로 가자고 재촉해서, 한참 동안 다리 위에
한가히 서 있다가는 그나마 구태의연함을 그대로 간직한 템즈 강변의 건너편을 거닐어 보았지만,
그래도 역시 어딘가 달라져 버렸다. 그녀는 런던을 아예 안 보는 편을 택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로지 피곤하고, 그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했다. 숲속으로
호수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전보를 쳤었다. 그녀가 들든 기분과는 동떨어진
상태에서 무위롭게 그곳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만이라도 알아주었으면 싶었다. 에스페란토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인 "I`m sorry"와 "I don`t know"를 수없이 뇐 끝에, 가까스로
프랑크푸르트까지일망정 비행기편을 얻을 수 있었고 그녀는 어찌나 기쁜지 한 시간이나 일찍
히토로우로 가서,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가 연발하는 바람에 몇 시간을 기다렸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기다리지는 않았지만, 비행기표를 빈행으로 변경 기재하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빈에 닿자 그녀는 곧장 남부역으로 갔고, 그곳 역시 너무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역
선교실 수녀한테 가서 누울 자리를 청했다. 플랫폼에서 쓰러질세라 조마조마하다가 녹초가 된
몸을 응급 침대에 누이며 냉수를 한 잔 마셨다. 아니오, 좌석표는 없어요. 런던서 오는 길이에요.
모든 일이 뒤죽박죽 되어버렸어요. 이 모든 발전이라니 도저히 반갑잖은 선물이에요.
엘리자베트는 수녀한테 백 실링을 주며 일을 맡겼다. 수녀는 좌석표를 얻도록 차장하고 담판을
해보겠노라고 약속하며 차장 몫의 팁이 조금만 남으면 확실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엘리자베트는
안도를 느꼈다. 다시금 정든 어조. 그럼요, 그건 문제가 아니에요. 그리고 기차가 남부역을
빠져나올 때, 그녀는 차장을 위해 짐짓 졸려워 견디기 힘든 척 연극을 했다. 사실 그녀는 곧
기분을 회복했고 모든 악몽이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었다. 몇 시간 뒤면 정든 역들에 기차가
서고 곧 집에 도착한다는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조반을 놓치고 늦잠을 잤다. 마르타이 씨는 벌써 정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급히 커피를 한 사발 마시고 유쾌하게 소리쳤다. 곧 돌아올께요. 첫날부터
무리해서 돌아다니진 않겠어요! 그녀는 2번 도로를 택하려다가 "조망탑이"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1번 도로로 돌아와 연못이 있는 쪽으로 걸었다. 도시에 인접한 그곳에 연못이 있었다.
그래서 산책 나온 다른 사람들이며 떠들썩한 어린애들 때문에 약간 실망스러웠다. 내일은 호수
쪽으로 긴 산책코스를 택하리라. 수영복도 들고 가서 나중엔 수영도 하리라.
아버지랑 함께 그녀는 간단한 식사를 했다. 아버지는 엘리자베트가 집에서 "간단한 식사"로
만족하는 점이 늘상 이상스러웠다. 그의 상상 안에 있는 딸의 생은 호화판 점심, 저녁식사와
샴페인, 상어알로 채워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얘기에는 으레 그런 으리으리한 레스토랑과
흥미롭고 저명한 인사들만이 등장하는 까닭에 그로선 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이 진실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얘깃거리에 적합치 않는 다른 사실들,
샴페인이나 저명인사가 등장치 않고 힘겹고 어지러운 일상 속에서 동료들과 음모만이 다반사인
사실들은 삭제해 버렸다. 일과 약속된 기한, 지나친 커피와 억지로 씹어 삼키는 샌드위치, 회의,
채 풀어놓기도 전에 다시 챙겨야 하는 트렁크, 온갖 종류의 짜증스러운 일들, 이런 사실들은
라우벤베크에서 한가한 나날을 보내며, 이따금씩 자식들이 보내오는 편지와 전보, 낯선 나라에서
부쳐주는 안부 적힌 그림엽서, 마침 궁금한 참에 걸어주는 전화 등을 통한 격동의 체험이 고작인
마르타이 씨한테는 상상을 불허하는 세계였다. 엘리자베트는 뭐니 뭐니 해도 이곳 집에서
아버지랑 드는 식사가 훨씬 맛이 있다고, 파리의 중국 요리집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몇 조각
소시지와 치즈 약간이 훨씬 마음에 든다고 열심히 강조해서 설명했다. 아직 중국 요리라는 것을
먹어본 적이 없고 중국이라면 어디까지나 생소하기만 한 마르타이 씨는 알 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녀와 정원을 거닐며,
딸을 위해 벗나무 열매랑 검은 구스베리 첫물을 땄다. 일 년 내내 제대로 음식다운 음식을 먹지
못한 딸을 위해서는 몸소 가꾼 정원의 과일이 장터에 나온 수입한 과일들보다 아무래도 건강에
좋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며칠 새에 딸의 회복된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번의 딸은 정말 안
좋아 보이기 때문이었다. 영국 사람의 차 마시는 버릇에 관해 그는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건 순전한 독임에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아프거나 감기가 들면 차도 몸에 좋은 경우가
있지. 그렇지만 하루 종일이라니! 결혼과 더불어 그의 생활에도 질서라는 게 자리할 테니까,
로베르트는 훨씬 절도가 있음을 믿어도 좋았다. 하지만 엘리자베트는 건강 관리엔 낙제였다.
딸의 성공한 생에 대해 긍지를 느끼는 그의 마음에는 늘, 절도를 잃은 딸의 생활에 대한 우려가
섞여 있었다.
오후에 그들과 같이 1번 도로 훼엔베크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하지만 그녀보다 숲의 지리에
밝은 마르타이 씨는 번호가 매겨진 길을 버리고 그녀가 모르는 길로 우회해서 되돌아 왔다.
너무나 오래 걸리는 길이라 그녀는 상당히 피로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늘상 그러듯이, 장래에
관한 얘기를 했다. 장래 문제란 마르타이 씨한테는 자식들을 위해 모든 일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를 고려하는 문제였고 이번에도 집에 관해 엘리자베트의 뜻에 변함이 없는가를 타진했다.
그녀의 뜻엔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로베르트가 집을 상속받게 될 것이었다. 마르타이 씨는
여러 차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네가 전부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한번 보자. 이게 무슨 나무냐?
몇 살이나 먹은 나무지? 나무의 나이는 어떻게 알지? 엘리자베트는 이 질문은 익숙히 알고
있었지만 번번이 대답은 틀렸다. 일찍부터 자연은 그녀의 흥미 밖의 지루한 것이어서 물푸레나무
하나도 알아보질 못했다. 학교 어린이들을 위해 중요한 나무들에다 독일어와 라틴어로 나무
명칭이며 종자의 유래, 특성 같은 것을 기록한 팻말을 붙여놓은 학습용 삼림구역을 지나면서도
그녀는 후딱 팻말을 읽어치우고는 얼른 서둘러 가고 싶어했다. 그러고는 온갖 상념에
사로잡혔다. 그나마 그녀의 흥미를 가장 끄는 것은 교차로며 갈림길이며 시간표지, 이를테면 1번
도로와 4번 도로의 교차로에서 찔훼에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나 등, 길의 가능성을 선택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자신의 걸음으로는 표지된 시간만큼 걸려 본 적이 없는 그녀는 오로지
시간에만, 실제로 자기 걸음으로 얼마나 걸리는가에만 신경을 쏟았다. 얼마나 오래 걸어왔는지,
얼마나 멀리 떨어져 나왔는지, 앞으로 무엇을 더할 수 있는지를 어림하노라, 사뭇 십 분마다
시계를 들여다보는 그녀는, 시계 없이는 숲으로 갈 수도 없었으리라.
이날 저녁 그녀는 일찍 자기 방으로 가서 곧장 잠이 들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 긴 시간 동안
안간힘 쓰며 가누어 왔던 초긴장의 상태가 마음놓고 풀릴 계제를 찾은 것이었다. 그래서 아침엔
일착으로 일어날 수 있었고, 아침상을 차려놓은 뒤 아버지한테 몇 줄 쪽지를 남기고는, 켈러 가를
지나 1번 도로가 두번째로 시작되는 보다 먼 길을 향했다. 도중에 부딪치는 인적은 없었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어린애들과 개를 이끌고 도시 변두리나 맴도는 게 고작이었고 긴 산책의
수고를 택하지 않고 한결같이 자동차를 이용해서 호수를 향했다. 그건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어린애였을 적에 그들은 부모랑 함께 항상 이 길을 걸어서 갔었다. 전차 같은 걸 탄다는 생각은
마르타이 씨 부부한테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었다. 잘해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거나 비가 올
때에 전차를 이용하는 것이 한껏이었고, 아무튼 호수로 향하는 길을 걸어서였다. 그뿐 아니라
널찍한 시립 해수욕장을 피하고는 항상 조그만 마리아 로레토 해변까지 진출했었다. 비록 어린
소녀 적에는 그토록 긴 시간을 소요하는 이 산책이 귀찮고 쓸데없는 짓처럼 번거롭게 느껴져서
마다하기가 일수였고 이제야 겨우 즐겨 찾는 곳이 되었지만, 이 호수와 로레토는 엘리자베트와는
떼놓을 수 없이 묶여져 버렸다. 지금의 그녀도 산책도, 그 모든 "기막히게 근사한" 도시들을
거친 후, 이곳의 숲이 세상에 둘도 없는 장소로 달라 보이게 된 이후에야 생긴 버릇이었다.
이곳에서야말로 뭔가 써먹을 요소를 찾아내려고 그녀를 쫓는 사람도 없고, 전보며 온갖 종류의
무리한 요구로 그녀를 추적하는 일 없는, 세상의 단 한 군데 조용한 지점이었다.
흐린 날씨였다. 그녀는 낡은 레인 코트를 팔에 걸치고, 여행을 떠날 때마다 늘 클라겐푸르트에
남겨놓는 낡은 구두를 신었다. 그렇지만 로베르트나 아버지의 양말을 껴 신는 걸 잊어버려서
얇은 스타킹 때문에 신발 속에서 툭하면 미끄러졌다. 그래서 종종걸음으로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숲의 지리에는 밝지 못해서 번번이 다시 여행지도를 펼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녀는 향수라는 걸 몰랐고, 그녀를 집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결코 향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석연히 설명할 길 없이 그녀는 아버지 때문에 돌아오곤 하는 것이었고 이
돌아옴은 그녀에게나 로베르트에게나 그저 자명한 동작이었다.
빈으로 가서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녀는 초조와 불안에 시달리며 멀리 떠나고 싶은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의 기적을, 곧 먼 곳으로 탈출하겠다는 기적을 겨누며 일을 했고, 그
덕분에 꽤나 유명하게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처음엔 앞으로 무엇이 되어야 할지 그녀의
소질 자체가 불투명했다. 그래도 오로지 혼자 힘으로 어느 편집실에서, 곧 종전 후 우후죽순처럼
창간되었다가 곧 폐간되어간 그 숱한 화보 중의 한 편집실에서 전화교환수 겸 타이피스트로
일자리를 얻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자신이 쓰는 일엔 이렇다 할 재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짤막한 기사도 쓰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 모두 그 모양인 판국이라 그녀의
무재주도 누구의 눈에 띄지 않았고, 그에 반해 그녀의 눈부신 열의만은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꽤 재능이 있다고 보여지게 되었고, 그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과 알게 되었고, 사진사를 동반하고
동분서주하며 어떤 스토리나 사진 주제를 찾아 고심하였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사귀며
인기를 모았다. 그녀는 정식으로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이따금은 좌초한 기분이
되어 아무래도 대학엘 가야 할까보다고 궁리도 해보았지만 역시 그것은 너무 때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기적에 대한 그녀의 믿음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눈부신 속도로 모든 것을
이해했고, 따라서 지성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비록 그녀가 가진 잡다한 지식이라는 것이 다름
아니라 현재 시류를 타고 있고 실제로 그녀 주변의 몇 사람 친구가 좀 알고 있는 것을 가로챈,
극히 겉핥기 식의 것이긴 했어도 말이다. 그 뒤 그녀는 우연히 어느 사진사랑 최초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도중에 사진사가 병이 나버린 사태가 발생했다. 그래서 별수 없이 중대한
스토리의 구색을 위해 몸소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그 기술 역시 날쌔게 습득했다. 그때 우연히도
그녀 인생의 전환점이 찍혀진 것이었다. 그녀의 사진술이 그녀의 기사보다 월등하다고 판명된
때문이었다. 그런 판국에 그녀 스스로도, 이 사진이라는 걸 가지고 자기가 앞날을 구축해
가리라고는, 그것도 정상에 이를 정도로 올라가리라고는 알 턱도 없었고 예감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당시에 이미 명성을 얻고 있다가 어느 날 홀연히 명성을 잃게 된 독일의
사진작가, 빌리 프렉커가 빈으로 와서 잠시 그녀를 데리고 일을 하다가, 파리까지 동반해 가 계속
몇 가지 조력을 해준 계기로 인해, 비로소 그녀한테 결정적인 에포크가 그어졌다. 그 후 파리에서
그녀는 그를 통해 수십 년래 세계적 명성을 모으고 있는 독보적 사진작가 뒤발리에를 알게
되었고, 뒤발리에가 익살로 붙여준 별명대로 꼬마 "티롤 아가씨"는 이 대가의 마음에 들게 된
것이었다. 전혀 배경도 없고 빈의 아마추어적 편집실 출신인 엘리자베트는 얼마 안 가 연로한
대가와 함께 조수며 제자 겸 비서로 여행을 동반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없어서는 안 될 동료로
승격했다. 빈에서 꿈꿨던 어린애 같은 꿈은 이미 꿈이 아닌 현실로 옮겨졌고 이 현실을 그녀는
애초부터 극복해 냈다. 뒤발리에는 누구보다도 방약무인한 작가이어서 그녀 역시 사정없이
이용했다. 그렇긴 해도 그녀는 뒤발리에와 함께 페르시아, 인도, 중국으로 날았고, 프랑스로
되돌아와 그가 다음 번 책을 완성하면, 그때마다 그를 통해 각종 명사들을 알게 되었다. 마르타이
씨가 "신과 세계"라고 부르는 바, 피카소와 샤갈, 스트라빈스키와 줄리앙 헉슬리, 헤밍웨이며
처칠까지도, 그녀한테는 사진을 찍어주는 관계일 뿐 아니라 같이 어울려 식사를 하러 가거나
전화까지 걸어오는 지인의 명단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소심하고 어쩌면 인색하다고 할
뒤발리에가 그녀한테도 허용해 준 처음 몇 번의 연회석 참여 후, 그녀는 곧 스무 벌의 싸구려
옷가지보다는 비싼 옷 세 벌을 갖추는 것이 훨씬 낫다는 점을 터득했다. 그것은
발렌치아가라든가 또는 다른 유명한 재단사가 얼마 안 가 그녀를 좋아하여 그녀의 특성을
눈여겨보고 강조해 준 점이기도 했다. 그래서 신들린 듯 일에 몰두하며 끊임없이 향상하겠다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긴 했지만, 그녀 나름의 스타일이, 어느 독일 친구가 칭해 준 대로 "멋진"
스타일이 그녀의 몸에 배게 되었다. 그녀의 옷차림이며 행동이 점점 자신한테 꼭 맞게 어울리는
개성으로 발전되어 간 것이다. 빈의 처녀 시절엔 이렇다 할 인기를 모을 수 없었던 바짝 마른
키다리처녀 마르타이로부터 파리인들은 하나의 "타입"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뒤늦게야
아름다움과 관심의 적이 된 타입. 그런 의미에서 귀염만 받았을 뿐 남자들한테는 중성으로
취급되었던 빈의 날들은 그녀로선 운 나쁜 시절이었다. 벌써 스물 세 살이 넘어서 여전히 저명한
남자들의 귀여운 애인으로 분방하게 돌아다니면서도 그 남자들의 부인이나 애인들한테 한 가닥
질투도 유발시키지 못하는 자신을 깨닫자, 그녀는 이 곤혹스런 상황에 종지부를 찍자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래서 의사로서 출세의 문에 들어선 레오 요르단과, 의사는 아니지만 수많은
여자들의 화제에 오르내리는 하리 골드만 사이에서 한동안 방황하다가, 결국 더 마음에 드는
골드만 편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감정 없이 내려진 냉랭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두세 달 뒤
그녀는 분별없는 화제를 통해서, 여배우 X가 그의 애인 Y에게 말한 것을 Y가 엘리자베트의
팬인 Z에게 옮겼는데, 엘리자베트야말로 매력적인 여자이긴 하지만 완전한 불감증이라고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걸 듣고 흥분할 것은 못 되었지만 그녀는 어리둥절한 느낌으로 그 얘기를
분석해 보게 되었다. 어쩌면 그건 맞는 소리일 듯싶었다. 골드만이 그런 수다를 떠들고
다녔을리는 없다손 쳐도, 그녀가 언제이고 한번 관계했던 A든 B든 그럴 가능성이야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이 남자야말로 그녀가 자기네들을 찾을 때는, 전혀 심적인 동요나 황홀경
따위와는 먼 거리에서, 노련한 외과 의사라면, 또는 그녀의 경우에선 노련한 남자라면, 그런
사소한 일쯤 쉽게 처리하리라는 신뢰의 마음으로 맹장이라도 떼기 위해 수술실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는 것을 알 턱이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 뒤 그녀는 털끝만큼의 가식도 없이 이
남자들을, 곧 골드만을 비롯한 다른 남자들을, 중립적인 호의와 친절로 대했다. 그녀는 결코
결혼이며 기존의 인간관계를 파괴하거나 감정과 요구를 가지고 매달리는 유의 처녀가 아니었다.
전날 오후나 밤에 일어난 일은 이튿날 낮의 그녀한텐 씻은 듯 존재치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파리에서 트롯타를 알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180도 변모했다. 자신의 빈 시대와
그곳에서의 처신을 스스로도 이해 못할 지경으로 변해 버렸다. 어느 남자에게 호의를 베풀겠다는
생각에서 감정도 없이 아무 침대에나 누웠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것이 호의였다고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은 스스로를, 이제 그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벌써 한순간에 그녀는 프란즈 요제프
트롯타의 마음을 사고 싶어했고, 한 여자가 되어 초조해 하고 마음 졸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를 차지하고 붙잡기 위해 모든 것을 내걸기 시작했고, 그런가 하면 어느새 그것도
집어치우곤 했다. 스스로가 갑자기 관심 밖의 인간으로 자각되었고, 5분 동안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되는가 싶으면 5분 뒤엔 불리하게 해석되는 그의 아이러닉한 행동의 의미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마당에, 어떻게 이 유별나고 오만한 남자의 관심을 살 수 있을지 실로
난감했다. 그녀와 트롯타가 서로를 모색하며 도망치는 처음 며칠로써 그녀의 처녀 시절은
마침표를 찍었고 처절한 사랑이 열렸다. 그리고 훗날 그녀가 그런 상황에 처할 때마다 지금 겪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아무리 생각했다손 쳐도 20년도 더 지난 오늘 이 훼엔베크 1번
길에서 회상해 보는 트롯타는 역시 그녀의 진정한 사랑이었다. 오해와 갈등, 어긋나는 말씨름과
못미더움으로 채워진 도저히 포착할 수 없으며 동시에 힘에 겨운 사랑이었지만 말이다. 최소한
그는 통례를 초월한 의미에서 그녀의 윤곽을 지어 주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녀를 여자로
만들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그런 점은 그 시점에서, 다른 어느 남자를 통해서라도 가능했을
테니까) 그의 혈통으로 인해 그녀로 하여금 여러 사물에 대한 인식에 눈뜨게 했다는 점에서였다.
진정한 의미의 잃은 자이며 방랑아인 그는, 방약무인으로 자신의 인생을 놓고 세상을 기대하는
모험욕에 찼던 그녀를, 한 방랑하는 여인으로 변신시킨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그녀를 천천히 파멸과 더불어 이끌어 내렸고, 그녀를 기적에서 소외시키고, 그녀에게
운명적 이방인에의 인식을 심어준 것이었다.
그것은 그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었다. 하지만 게다가 좀 다른 문제가 있었다. 실상
누구든 마침 가장 중요한 것을 어디에서 찾고 있느냐는 것이 항상 문제였다. 그 당시
엘리자베트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넘어설 수 없는" 전설적인 혈통 출신인 트롯타의 말귀를
건성으로 흘려들었고, 또한 그의 부친에 관해 그를 통해 안 것이라고는 부친 역시 시대를 이해
못한 채 끝내, 나 한 사람의 트롯타라는 이름의 존재는 이제 과연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라는 의문을 남겼다는 사실뿐이었다.
오직 "신이여 보호하소서"만 알며 다시금 카푸친 교의 소굴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이 된
무리들, 그러면서도 합스부르크 왕조를 몰락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했던 과거 한때를
가졌던 무리 중의 한 사람, 트롯타라는 존재를 위해서 세계가 또다시 몰락해 간 1938년 당시의
일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뒤발리에의 죽음 후 어느 유수한 프랑스 화보로 일자리를
옮긴 엘리자베트에게 트롯타가, 그녀의 일 자체에 대한 불안의 씨를 심어주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녀를 서서히 중독시키며 그녀로 하여금 직업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게끔 강요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유달리 친숙한 사이는 아니라도 항상 주변에 숱한 친구를 갖고 있는
그녀이니까, 그 중 한 동료가 부다페스트의 시가전에서 사진을 찍던 중 카메라를 든 채 손에
피를 흘리며 살해되어 간 사건이 있어 어쩔 줄 몰라 울며 그에게로 달려간 적이 있었다. 그때
트롯타는 그녀를 그냥 울도록 내버려 둔 채 집요하게 침묵을 지켰다. 그 뒤 그녀와 편집진, 특히
보다 성실한 프랑스 제국은 알제리아에서 세 사람의 사진사와 통신원 한 사람 그리고 스웨즈에서
두 신문기자를 잃었다. 그때 트롯타는 말했다. 다른 이들의 아침 식탁용으로 당신네들이
찍어주는 전쟁이라는 정체는 보다시피 당신네들을 조금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거요. 나도
모르겠소. 다만 난 당신네 친구들을 위해 뒤늦은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릴 수 없을 뿐이오. 남들의
죽음을 소재로 몇 점 좋은 사진을 고국에 보내겠다고 불 속에 뛰어드는 자는, 자기 나라의
스포츠 같은 허영에서 죽을 수도 있는 거요. 그건 대수로울 게 없소. 직업상 모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말이오! 엘리자베트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당시 그녀가 몸담아
하는 일체의 행동이야말로 유일한 정의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름지기 사람들은
저쪽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정확히 알아야 하며, "자극을 받아 깨어 있게끔" 실태가 담긴 사진을
봐야만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트롯타는 다만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래야 되는 거요?
그들이 그것을 원한단 말이오? 깨어 있는 자란 다만 당신네들 없이도 그것에 대한 표상을 가질
수 있는 자들뿐이오. 나한테 전쟁에 대한 표상을 주기 위해, 당신은 나한테 폐허가 된 마을이며
시체를 사진 찍어 보내줘야만 하겠소? 또 나한테 굶주림이란 걸 알려주기 위해 인도의 어린애들
사진을? 대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월권이오. 그런 건 알바 없는 작자들이, 심미주의자의
입장에서 아니면 오로지 구토를 느끼며 당신네들이 성공한 사진 시리즈를 뒤적거리는 것이오.
그건 아마도 사진의 질 여하에 달렸다고 말할 게요. 당신도 질의 중요성에 관해 곧잘 떠들지
않았소. 그렇다면, 그토록 우수한 질의 사진을 찍는 당신이 왜 아무 데도 파견 안 되는 거요.
그는 약간 우롱조로 물었다. 엘리자베트는 당혹을 느끼면서도 우선은 야무지게 열심히 토론을
벌였다. 하지만 생전 처음 그녀의 발 밑의 받침대가 타인에 의해 떨어져 나간 느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내 뜻이 진심이라는 것을 끝내 당신께
보여드리기 위해서라도, 이젠 저도 가겠어요. 단연코 확신을 갖고요. 저를 알제리아로 파견해
달라고 앙드레한테 청하겠어요. 그는 내가 가는 건 줄곧 반대해 왔어요. 그렇지만 남자들한테
해당되는 것이 왜 저의 경우만 예외로 제쳐져야 하는지 납득할 수가 없어요. 다른 모든 분야에선
이미 아무 데도 그렇지 않잖아요. 벌써 오래 전부터요!
그 당시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은 트롯타에겐 특별한 것이었다. 그는 곧 잃게 될 대상을
사랑하듯 절망과 초조로, 조바심의 감정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 조바심은 다른 때
같으면 정작 그를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에도 늘 자리잡아 왔던 감정이었다. 그는 엘리자베트
더러 가지 말라고 간청했다. 가지 말아요. 엘리자베트. 절대 가지 말아요. 그것은 안 될 말이오.
당신이 왜 그러는지를 나도 알고 있소. 그렇지만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오. 당신네들이
그런다 한들 그것은 전쟁을 끝나게 만들 순 없는 거요. 결과만 다를 뿐이오. 당신네들이 하는
짓은 소용없는 짓이오. 나는 이 모사품을, 아아니 이토록 엄청나게 비현실로 전도된 현실을
담담히 바라볼 수 있는 인간들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소. 그들은 죽어간 자들을 결코 올바른
마음가짐의 자극제로 바라보진 않는다오. 언젠가 수단에서의 일이었소. 거기서 내 눈에 띄는
것이라곤 도처에 있는 팻말뿐이었소. 한결같이 백인들을 겨눈 경고였소. 수치감을 모르는 자는
백인들뿐이니까 말이오. "인간(human beings)"을 촬영하는 것을 엄벌로 금지한다는 경고였소.
나일강이며 다른 모든 건 잊어버렸지만, 이 금지 경고만은 난 잊지 못하고 있소. 엘리자베트는
그녀를 비롯한 동료들이 총뿌리 앞에 선, 모든 위험에 처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알제리아인들을 국경 너머 안전한 나라로, 특히 이탈리아로 구출해 내기 위해서, 일하고 토론을
벌이며 활약하는 내용의 중대성을 열을 내어 역설하긴 했지만, 실상 그때부터 그녀는 부지중에
자신의 열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했다. 항상 머릿속은 시사로 꽉 채운 채, 트롯타처럼 정의와
불의의 까다로운 체계 같은 것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그녀였다. 이런 그녀의 마음속에,
어쩌면 자신의 일에는 어떤 파렴치한 요소가 담겨 있을지 모른다는, 또한 트롯타가 옳진 않지만
그래도 어떤 관점에서는 옳을지 모른다는 회의가 자리잡게 된 것이었다. 사실 창에서 추락하는
장면이며, 기차 사고며, 울부짖는 어머니, 혐오스런 슬럼의 사진들이, 도처의 전쟁터에서 보내져
오는 사진들과 무슨 판이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토록 많은 사진사들이 그것을 실제 찍지
않는다면, 마치 재치 있는 사진 위조자가 오리지널을 위조해 낼 수 있듯이 전혀 실패의 위험
부담 없이 오로지 잘 위조하겠다는 착상만으로, 정확히 재치 있게 그것들을 생산해 낼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발표된 사진 시리즈에는 위조 작품이 거의 없었지만, 엘리자베트는 이제 종종
그것들을, 특히 폭사 당하기 직전에 찍은 젊은 페드리찌의 최근 작품들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페드리찌는 알제리아 사람 몇과 또 한 사람 프랑스인과 함께 폭사 당했는데, 신문에서는
오직 페드리찌만 알고 몇 가지 후문을 달아 그를 영웅으로 만들면서 다른 이들을 들러리로
애도했었다. 트롯타는 거듭 되풀이해서 그녀와 그녀의 철석 같은 미숙한 신념을 냉소했다.
모름지기 우린 읽어야 되지. 그렇지만 읽기 전에도 우린 이미 모든 걸 아는 거요. 그런데 당신은
마치 안 읽으면 그걸 알 수 없다는 듯이 고문에 대한 기사를 샅샅이 읽는구료. 모두가 온통 그게
그거인 거요. 당신은 그걸 읽으면서, 그것이 진실이며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그런 비행은 끝장이
나야 한다고 깨닫겠지. 게다가 어쩌면 고문의 양상을 만인에게 보여 주기 위해 사진을 찍고
싶어질 거요. 깨닫는 것만으로 충분치 못해서 말이오! 엘리자베트는 마침 감동에 사로잡혀 읽고
있던 책을 그를 향해 집어던졌다. 하지만 책은 그의 머리에 맞지 않고 빗나가 어깨 너머 옆으로
떨어졌다. 트롯타는 그녀를 팔에 안고 뒤흔들었다. 당신은 온통 잘못 이해하고 있소. 아, 당신이
그렇게 올바른 이해를 못하면 안 돼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다만, 다른 이들이 고통 당하는 것을
인간에게 굳이 보여준다는 건 무리한 요구라는 것이오. 그런 비열하고 파렴치한 짓이오. 당연한
얘기지만 실제는 그것과 다르니까 말이오. 그러니까 그렇게 한다한들 기껏, 사람들한테 마시던
커피를 잠깐 중단시키고, 아, 이렇게 끔찍할 수가! 라고 중얼거리게 만드는 정도에 그치는 거요.
또한 어떤 이들한테는 선거에서 다른 정당에 표를 던질 가능성도 주겠지. 그렇지만 그네들은 안
그래도 어차피 그만큼의 행동은 할 거요. 아니, 이봐요, 나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나쁘다고,
사리를 분별한 능력이 막혔다고, 항상 잃은 자라고 보진 않는다오.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 보고
있소. 안 그러면 인간이란 몇 가지 법령 외에도 기사랑 당신의 빌리 말대로 "가혹한 소재"를
필요로 한다고 믿는 당신의 소견이 무너질 테니까 말이오.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말해 두겠어요. 그 사람은 나의 빌리가 아녜요.
그리고 인간들은 이제 본성으로 되돌아가야 할 때가 온 거예요. 그걸 위해 저는 보잘것없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어요.
아, 지금까지도 그렇게 되지 못한 인간들한테 대체 무슨 본성을 되돌려 준단 말이오. 지난 몇
세기 동안 인간을 본성으로 되돌아가게 하겠다고 안 한 짓이 무엇이란 말이오. 그렇다면 당신을
본성으로 되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겠소!
아무튼 저는 모든, 모든 프랑스인들에게 감탄해요. 그네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더불어... 제가
하려 하는 말은 알제리아에서는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게 없다는 거예요.. 트롯타가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는 기절할 정도로 울분에 차서 말을 더듬거렸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내가 프랑스
사람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요. 내가 보기엔 그들한텐 감탄할 건덕지가 아무것도 없소. 당신,
어린애 같구료. 나도 당장에라도 가겠소. 당신이 감탄해 마지않는, 빌어먹을 프랑스 사람들이랑
같이 기꺼이 더러워진 손을 씻으러 가겠소. 그렇지만 그런 일로 감탄 같은 건 결코 받고 싶지
않소. 자유라는 것은, 그것이 설사 온다 해도, 하루도 지속되지 않는 것이오. 그것은 잘못 이해된
것이오.
당신은 프랑스 사람이 아니잖아요. 엘리자베트는 지쳐서 말했다. 당신은 그네들의 극적인
역사를 이해 못해요. 도저히 이해 못해요.
그렇소. 난 이해 못하오. 아예 이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누가 나한테 그걸 이해하라고
요구할 수 있겠소. 내 한 몸이 태어났고, 내가 원치도 않는 유산을 또 한번 상속하도록 허용되어
있는 걸로 나한텐 충분하오.
당신은 이 시대에 살고 있질 않군요. 그녀는 분개해서 말했다. 이 시대에서 길을 잃고 방황할
뿐, 그 안에 몸담아 살고 있지 않은 사람과는 저는 삶을 같이할 수도, 얘기를 나눌 수도 없어요.
난 도대체 살고 있질 않소. 난 그것이 뭔지를 영 모르고 있소. 산다는 것 말이오. 삶이라는 걸
당신한테서 모색해 보긴 하지만, 당신이 나한테 그걸 줄 수 있으리라곤 상상할 수가 없소. 당신은
다만, 두어 해 뒤엔 왜 그런 게 필요했는가를 아예 알지도 못하게 될 것들 때문에 쫓기며
동분서주하는 것으로 삶을 누리고 있는 듯이 보이고 있을 뿐인 거요.
알제리아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엘리자베트와 트롯타는 헤어졌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일상사로 되돌아가 버린 한편에서, 엘리자베트는 가슴 졸이며 어느새 자유의 뒤 끝에
다가오는 변화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의기소침해서 새로운 알제리아로부터
되돌아왔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모두에게 상당히 흥미로웠다고 말했고, 조심스럽게 한계를
지키며 온갖 긍정적인 내용의 글을 썼다. 그리고 원고를 가지러 오기 전에, 자신이 쓴 사진기사를
몇 시간이 걸려 훑어보았다. 스스로 명백히 느낄 만큼 자기 기만 쪽으로 첫발을 내디딘
텍스트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트롯타를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어느 날 주소도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호텔방을 바꿔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한참 뒤, 그녀는 우연히 프랑스 이름이지만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벨기에에 살고 있는 어떤 인물이 쓴 "고문에 대하여"라는 에세이를 읽게
되었고, 그제야 트롯타가 뜻했던 것이 무엇이었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곧 그의 글 안에서는,
그녀를 비롯한 모든 신문기자들이 구현할 수 없었던 것이, 또한 순식간에 발행되어 나온
도큐먼트 속의 증언의 주인공인 살아 있는 희생자들의 입으로도 설명될 수 없었던 내용이,
명백히 살아 표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 남자한테 편지를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슨
소리를 써야 할지, 왜 자기가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글쓴이는 이
가공할 사실의 표현을 꿰뚫기 위해서 수많은 세월을 바쳤음에 틀림없었고, 별로 읽을 사람도
많지 않을 이 몇 페이지를 이해하려면 스쳐지나 가며 전율이라 할 소지와는 다른 유의 능력이
요구되었다. 이 글은 정신이 파괴되어 가는 과정에서 정신 안에 벌어진 상황을, 곧 어떤 방식으로
한 인간이 변질되어 가고 소멸된 채 연명하는가를 포착하려고 시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끝내 편지를 쓰지 못했다. 다만 그녀한테 떨어진 몇 가지 일거리를 기피했다. 앙드레가
한번은 놀라는 투로 물었다. 겁이 나시오, 엘리자베트? 그러자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뇨, 그렇지만 안 되겠어요. 그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구요. 언젠간 지나가겠지만,
지금은 회의에 차 있어요. 요즈음엔 아무래도 부끄러워요. 어느새 또 손에 전화를 든 앙드레는
그녀의 부끄러움에 관해서 더 알아듣지 못하고, 통화가 끝난 후 화제의 실마리를 잃고 말했다.
아무래도 긴장을 좀 푸는 게 좋겠군요. 당신이 우연히도 내 의견을 들을 생각이면 말이지요.
그렇지만 이 문제는 당장 잊어버려요. 공연한 망상 같은 건 하지 말고. 사실, 용기를 내봤자
허세에서나 억지로 담을 모아 행동하는 우리 남자 동료 보담 당신이 훨씬 용감한 여자 아닙니까.
그거야 당연한 임시적 증상일 테지요. 내가 좀 심하게 당신을 부려먹었나 보지요. 알다시피 난
원래 악당이라 내 힘껏 당신네들을 철저히 이용하고 있지요. 그 점은 나도 알고 있지요.
그렇지만 내가 그런 놈이 아니라면 우리 유수한 화보가 어떤 꼴이 되었겠습니까.
고맙군요, 악당님. 엘리자베트는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이 악당이라는 건 옛날부터 잘 알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저도 사실 당신 같은 악당을 위해 억지로 일하는 건 아니거든요. 다만 지금,
하필이면 지금 해이해져도 좋은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한번 휴식을 취해 보고 결과를 보고
할께요!
엘리자베트는 훼엔베크를 버리고 옆으로 꺾어져 찔훼에 쪽으로 걸었다. 그곳엔 더 걸을 수
없이 지쳐 쉴 자리를 찾는 산보객을 위한 벤치들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한때 지폴리에의
연장이었을 카라반켄 너머 저 아래쪽에 몽롱하게 누워 있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이 지폴리에는
트롯타 가문을 배출시킨 지역으로 언젠가 거구의 유쾌한 슬로베니아 친구가 트롯타를 찾아왔던
사실에 비춰보면, 그곳엔 아직도 그들의 후예가 몇 남아 있음에 틀림없었다. 프란쯔 요제프는
그녀에게 그 남자는 자기의 사촌형인데, 그의 부친은 아직도 사뭇 농토박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트롯타가 이 사촌형에 대해, 비록 어떤 심정의 뒤흔들림 같은 것을 안 내보이려고 냉소적인
자세를 다잡곤 했을 망정, 유난히 다정하게 대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번은 그녀가
대수롭잖은 투로 말했다. 전 아무래도 그 분을, 아주 젊었을 때, 빈에서 만났던 것 같에요. 아마
착각일는지도 모르죠. 그 사람은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꽉 막힐 정도로, 저를 줄곧
뚫어지게 쳐다보겠지요. 그 사람 혹시 좀 융통성이 없는 것 아녜요? 아니오. 트롯타가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소. 다만 기가 찰 지경으로 건강한 거요. 그 친구 저 벽촌 고향에서, 어떻게
그토록 흔들림 없이 건강한 자세를 지킬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오. 내 신경으로는
당신을 그 친구처럼 쳐다볼 수가 없소. 난 내 지신도 못 바라본다오. 그래서 며칠씩 면도도
안하는 것이라오. 거울 속의 나를 보노라면, 내가 나를 쏘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오.
집으로 오는 길에 그녀는 그 생각을 털어 버렸다. 좋은 날씨가 못 되어 수영하는 일도
뒤틀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내일은 날씨가 맑아지겠지. 그녀는 뜻대로 일이 되지 않아 산책을
중단해 버린 까닭에 약간 실망한 기분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마르타이 씨는 항상 아주 일찍
저녁을 들기 때문에, 그녀는 그 전에 후딱 아인지드러(Einsiedler:여기선 주막의 이름.
은둔자라는 뜻. 역주)에 가서 맥주를 사오겠다고, 맥주 한잔쯤은 아버지도 예외로 용인해
주셔야겠다고 농담조로 청했다. 마르타이 씨는 자식들한테 뭘 금하는 적이 한번도 없으면서,
자식들이 그가 무엇이든 금하고 있고 그것의 허락을 받겠다는 듯이 굴면, 그것을 들어주기를
즐겨했다. 그녀는 서둘러 나가 타이히 가를 지났다. 그리고 아인지들러 주막에 들어서기 전에
멈칫거리며 섰다. 타이히 가의 첫집인지 마지막 집인지, 앞에 낡아빠진 폭스바겐이 한 대 서
있었고 그 앞에 웬 젊은 여자가 놀라 그녀를 마주 보며 인사를 했다. 엘리자베트는 우뚝 멈춰
서서 당황스레 답례를 하고 악수를 교환했다. 분명 그녀가 알고 있는 여자이긴 한데, 대체 어디에
살고 있는 여자인지 생각이 안 떠올랐다. 여자는 당황해 하며 말했다. 저, 지금까지, 바로 지금,
후싸 아저씨 집에 있어요. 네, 고마워요. 아주머니랑 아저씨는 별고 없어요. 전 다만 지금...
엘리자베트는 저 후싸의 질녀인 이 소녀가 누구인지 이제 문득 기억해 냈다. 두말할 것 없이
빈에서 두세 번 만난 적 있는 엘리자베트 미하일로빅스였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지금 이곳으로
휴가를 와 있는 것이었다. 이 일로 번거로운 일이 벌어지지나 말았으면, 그녀는 지금 누구를
만나고 빈의 아는 얼굴에 관해 떠들어 댈 기분이 아니었다. 두 여자는, 참 뜻밖의 만남이었으며,
유감스럽게도 이번 여름의 날씨가 별로 쾌청하지 못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엘리자베트는
자동차 뒤에 웬 청년이 서서 짐칸 안에 뭘 집어넣고 잠그고 있는 기척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
청년은 뚝 떨어져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었지만, 마하일로빅스 양은 그 젊은 친구를 소개해 줄
염을 하지 않았다. 좀 무식한 인상에다가 산지기 같은 차림의 젊은 녀석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친절하게 말했다. 기분 나면 언제 우리 집으로 전화나 걸어 주세요. 그분들이 나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아주머니랑 아저씨께 안부 전해 주시고요. 아버지요, 네, 고마워요. 안녕하세요.
미하일로빅스 양이 점점 더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얼른 작별을 했다. 실례하겠어요. 난
얼른 뭘 좀 살 게 있어서요. 그럼 휴가 잘 지내세요! 그녀는 화난 기분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제발 전화 같은 건 걸지 말았으면. 그리고 주막으로 들어서기 전에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뒤돌아
보았다. 두 젊은이는 사뭇 고철감인 낡은 자동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맥주를 들고
나왔을 때, 그들이 탄 차는 막 그녀 앞을 지나고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하려다가 얼른 그만두었다. 다른 엘리자베트가 짐짓 앞을 보는 시늉을 하며 아예 그녀를 못 본
척했기 때문이었다. 저녁 식탁에서 그녀는, 후타 집안이 무얼 하느냐고 아버지한테 물었다.
마르타이 씨는 그들이 뭘 하는지 전혀 모르지만 아주 착실한 사람들임엔 틀림없다고 냉랭하게
말했다. 엘리자베트는 그이들이 빈 조카를 만났는데 아주 좋은 아이인 것 같다고, 빈의 친구
집에서 알게 된 것 같다고 담담하게 간단한 설명을 했다. 그 애가 왜 여기서 농삿군 녀석이랑
돌아다니는지 알 수 없어요. 빈에선 전혀 다른 인상이었거든요. 지적인 처녀였어요. 이 두 개의
요소를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그녀 자신도 그렇지만, 물론 이곳에서는
도시에서처럼, 숲에 어울리는 차림이라는 게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튼 엘리자베트 미하일로빅스
양은 실로 초라하고 가련한 차림이었다. 물론 그녀의 가문이라는 게 가난한 집안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몇 가닥 사회와 연줄을 가지고 있을 텐데 말이다. 마르타이 씨가 통 흥미를
내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말을 맺었다. 그 애가 전화를 걸건 말건 전혀 흥미 없어요. 어쨌든
제가 집에 없다고만 말씀해 주세요. 잠이 들기 전에 그녀는 또 한 사람의 엘리자베트를 만난
일이 웬지 큰 충격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등기소에서 엘리자베트 앤 캐더린이라는 리쯔의 이름이
불려졌을 때, 그렇게 리쯔의 처녀 적 성까지 완전히 불렸을 때, 그때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혼란을 느꼈었다. 그녀가 과거엔 몰랐었고, 새로운 마르타이 부인이 된 리쯔에게 앞으로 아무런
역할도 못할 이름이기 때문에, 엘리자베트로선 당장 잊어버려도 좋을 리쯔의 처녀 적 성이었다.
반쯤 잠에 취했다가 소스라쳐 일어났다. 그녀는 몇 해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그렇게
말똥말똥 눈을 뜬 채 누워 그녀는 모든 것에 다시 귀기울였다. 집에 와 있으면서도 그녀는 역시
파리에 가 있었다.
좀 봐요. 당신의 빌리를! 엘리자베트는 발칵 화를 내며 대꾸했다. 그 사람은 나의 빌리가
아니라는데두요. 그 말 좀 집어치세요. 트롯타는 유유하게 말을 이었다. 예컨대 이 빌리라는
작자는 영어로 말할 때 내 눈엔 한 인간처럼 보이오. 그가 오케이라고 말하면 자연스럽게 들리는
거요. 그렇지만 그자들이 독일어로는 말 않는 게 좋겠다는 얘기요. 그 점만은 내 비위에
거슬리오. 그자들은 언젠지도 모르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독일어 자체에 대한 감정을 상실해
버린 거요. 이 빌리처럼 무죄가 입증된 젊은 세대들도 하나같이 예외가 아니오. 내가 공연히
증오한다고 생각해선 안 되오. 그건 좀더 복잡한 얘기요. 나야 비록 겁쟁이라 독일 여자 하나
건드릴 주변이 못 되지만, 그네들의 입을 어찌 막겠소.
당신은 복잡해지고 싶어하시니까요! (그녀가 스스로나 남에게 어떠한 민족적 차별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원칙 때문에 그 말을 할 뿐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소. 난 전혀 복잡하지 않아요. 다만 내 앞에 허다한 복잡한 일들이 벌어지는 걸 봤을
뿐이오. 당신은 내가 그자들을 증오한다고 여기겠지만, 난 다만 아무도 좋아 안 할 뿐이오. 내가
프랑스인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오? 그건 도저히 내 꿈 밖의 일이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다만
독일인들을 온통 갈기갈기 분해해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처벌하고 분단이라는 걸 시켜 놓고,
그리고 또다시 손에다 총대를 쥐어주어 각기 양방에 붙어 착실한 동맹국으로 만들어 놓은 순서가
틀려 먹었다는 것이오.
그러니까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셨겠어요? 엘리자베트는 대들 듯 말했다. 좀더 멋진 묘안이
떠올랐을 거라는 얘기인가요? 그렇소. 트롯타는 오만하게 말했다. 나 같으면 얄타에서든
어디서든, 그들한테 다시는 독일어를 못 쓰도록 단호한 결정을 내렸을 거요. 그 이상 조처는 필요
없소. 그걸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이오. 영어든 러시아어든 배우게 만들어서 그들과도
의사 소통의 길을 열어 놨을 거란 말이오.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당신은 한마디로 바보요, 환상주의자예요. 하지만 트롯타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다만 이 환상적인 작은 의견이 성과를 가져올 수만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오.
당신의 빌리, 아니 미안하오. 이 빌리라는 자는 영어를 쓰면 공감을 불러일으키오. 그가 해브 어
나이스 타임, 타알링(have a nice time, darling)이라고 말할 땐, 최소한 곤혹스럽진 않소.
심지어 아주 정상적으로 들리는 거요. 그렇지만(용기를 내시오, 아가씨, 그래야 하오. 신속 정확히
움직이시오. 정각 여덟 시.) 이 모든 참을 수 없는 독일어의 수다를 듣노라면 난 나도 모르는
새에 어느 복화술사의 소리를 듣는 것 같은 느낌에 빠지오. 그들은 도대체 언어라는 걸 갖고
있지 않소. 그래서 온통 모든 의미를 변조시켜 버리는 것이오. 콤 말 뤼버!(Komme mal ruber!
이리 좀 와라!) 왜 항상 mal이라는 것을 붙여 써야 하오? 알 수 없는 일이오. 당신은 그 모든 걸
더 잘 알 테고, 그건 그네들이 수천 년을 지나며 익혀온 통용어에서 유래된 거라고 말할 것이오.
그렇지만 난 그들에게 통용어라는 게 있다고 믿질 않소.
프란쯔 요제프 오이겐 트롯타 씨, 세계는 과연 당신 같은 위대한 정치적 천재를 놓친 셈이군요.
엘리자베트는 단호한 투로 말했다. 그럴는지도 모르오. 트롯타는 말했다. 그렇지만 나한테 문제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소. 게다가 당신은 이 빌리라는 작자가 그냥 늘 분방하게
싸돌아다니며 거드름을 피울 뿐, 실제로는 하는 일이 없다는 걸 근본적으로 못 깨닫고 있소.
당신이 그 친구 몫을 하니까 말이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군요. 엘리자베트는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도 애당초 아무것도 하는 게
없잖아요.
난 아무 일도 하는 게 없소. 그렇지만 그건 좀 다른 문제요. 나는 쉬지 않고 만사를 몰아대며
특히 스스로를 몰아대는 독일인들처럼 위선적인 코미디는 못하오.
난 하이델베르크에 머문 적이 있었소. 그건 어디라도 좋소. 아무튼 몇 군데 독일 도시에
머물렀소. 채 스물이 될까말까 할 때 벌써 이긴 자가 되어서, 하필이면 타고난 잃은 자인 나,
트롯타 가문의 놈이 말이오, 아무튼 난 갑자기 이긴 자였소. 그렇게 이긴 자로서 이놈의 프랑스
군복을 입고 싸돌아 다니게 되었던 거요. 그건 정말 지금 생각해도 웃기는 일이었소. 달리는
못할 일이오. 아무튼 재미있었던 것은 다른 프랑스 사람들, 그들뿐 아니라 모두가 어떻게
독일인을 통째로 악마처럼 취급했느냐 하는 것이오. 너무나 당연히 탁월하기 짝이 없는
살인자들로 말이오. 사실 그들은 다만 완전히 얼빠지고 우직했을 뿐이오. 진정으로 우직한
사람들이었소. 그들을, 그 천치 같은 사람들을 취급하는 덴 끊임없이 중단을 하지 않을 수
없었소. 내가 통역 노릇을 했던 조회와 심문 과정에서 한번은 우리네 동족이 두 명, 차례가 되어
들어왔었소.
엘리자베트는 알 수 없다는 투로 그의 말을 끊었다. "우리네"라니요?
트롯타는 성급하게 말했다. 물론 오스트리아인 말이오. 그들이야말로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잔인의 쾌감과 비열함을 상판에 그리고 있는 인물들이었소. 그들의 대답 역시 그랬소.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지만, 그 둘은 내 생전에 두번 다시 나타날 수 없었던 악마의 모습이었소.
그자들한텐 명령이라는 것까지 반가운 구실이 될 수 있었을 거요. 독일인들한텐 명령은
어디까지나 명령일 뿐이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수백만 인류의 살인자로 낙인찍히게끔 멍청해
있었던 거요. 그런 판에 소위 "프랑스적 논리"를 지닌 우리 프랑스인들은, 그것이 존재치도 않은
마당에서 악마적 요소를 찾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거요. 이 논리에 맞추기 위해 그들은 이
두 사람의 오스트리아 범죄자를 회송해 버렸소. 그들이 모든 오페라의 주인공들과 더불어
희생물이 되어버린 바로 오페라의 나라 출신으로서 악의 없이 보인다는 이유에서였소.
희생물이라는 얘기, 난 그것을 그네들한테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았소. 왜, 어떻게, 그것은 정말
말하기 복잡한 얘기였소. 어떤 식으로 어떤 역사를 치르며 이 절단된 국가가 희생물이
되어버렸나 하는 얘기 말이오. 복잡한 것을 눈앞에 보았고,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나 자신은
복잡하지 않게 주저앉아 버린 것이오.
아침이 되어 뉴스를 듣기 전에 엘리자베트와 마르타이 씨는 각기 신문을 한 장씩 나눠 들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과연 어떤 기사들이 씌어지는지 엘리자베트는 문득 호기심이
났다. 그래서 아마추어적인 기사와 서투른 문화면을 조금도 업신여기는 느낌 없이 사뭇 감동을
느끼며 읽었다. 지방 기사들이 무엇보다 그녀를 끌었다. 로젠탈의 교회 헌당식과 그곳에 참석한
저명인사에 관해 기록된 내용은 본의 아니게 코믹한 느낌을 주게 되어버렸지만, 아무튼 그녀의
기분에 썩 맞았고 이곳에서는 국제적이라고 치부되는 "국제목재전시회" 개막 기사도 꽤 흥미롭고
몇 가닥 사명감의 톤까지 풍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도 사명감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것이 세상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항상 트롯타의
전유물이었다가 뒤늦게 그녀에게까지 옮아온 냉소적인 느낌으로, 이곳 벽촌에 박혀 있는
사람들이 왜곡된 기사를 받아 읽든 말든 과연 그것이 문제가 될까, 그리고 설사 그들이 이
마을의 외곽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해 덜 곡해된 표상을 갖는다 한들 과연 그것이 그들에게
변화를 갖다줄 수 있을까 자문해 보았다. 아무래도 그럴 수는 없으리라. 벌써 빈에서만 해도
그곳 시민들한텐 특히 믿을 수 없고 음치스런 무대였다. 의회에서 무슨 소식이 새어나오고
장관이 무슨 성명을 발표한다 한들 어차피 현존이라고 이름하는 얽히고 설킨 시간에 묶여 불신에
굳어진 그들을 더 큰 불신으로 몰아넣을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특히 신나게 취급되는 기사는,
악천후며 폭염과는 상관없는 곳에 앉아서 비행기도 타지 않은 채, 악천후의 재난이며 비행기
추락사고, 사망자를 낸 이탈리아의 폭염이었다. 그리고 비록 비교를 전혀 불허하는 사정이긴 할
망정, 여기 멀리 앉아서도 그녀는 제3의 세계에 열을 올리고 있는 파리의 숱한 잡지들을 상기할
수 있었다. 그들은 위성도시나 교외에서 파리시 사이를 시계추처럼 왕복하며 점점 피곤을
쌓아가는 시민들에게, 그것도 대부분 남아메리카나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사건 때문이기보다는 물론 그 거대한 범죄 사건에 비하면 보잘것없이 뵈는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빈곤과 결핍, 과로와 우울 때문에 지쳐 있는 파리 시민들에게 직접 닿는 문제보다 훨씬 소상하게
볼리비아의 문제에 대고 할말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하다 못해 뭘 알겠다고 물을 때마다 파리
안에 만연되는 악의적인 냉담한 요소를, 그로 인해 아직은 안 그런 자들까지 점점 그런 악의와
냉담에 물들어 간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을, 심지어 필립까지도
그토록 위축시키고 공허한 형식의 의상 속에 근근히 유지시키게 만든 이런 제반 요소는, 더
나아가 많은 젊은이들 가운데 인류애라는 것을 폭발시키게끔 발전되었지만, 실상 그것도 바로
옆집의 문턱에까지도 못 미치는, 눈물을 흘리거나 쓰러질 듯 길거리를 스쳐가는
옆사람한테까지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났지만 뒤늦게야
수화기를 들었다. 그건 필립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그녀가 지금 막 걱정스럽게 자기 생각을 한
것을 파리에서 알기나 한 듯이. 그는 자기 안에 저장된 열기와 젊음, 저돌적인 성격과 위세를
몽땅 1968년 노동절에 탕진해 버리고 나서 자조에 병들고 울분에 못이겨 절망을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힘이 되어 준 이후로 그나마 병세가 덜 깊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그녀는 훼엔베크 1번 도로에서 다시 벤치가 있는 찔훼에로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얼마 동안
주저앉아 호수를 얼핏 바라보다가, 카라반켄 쪽으로, 더 멀리 크라인, 솔로보니엔, 크로아티엔,
보스니엔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로지 이름과 몇 마디 말귀와 생각하는 바와 억양 외에는
트롯타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지금, 그녀는 이미 존재치도 않는 세계를 거슬러 더듬고
있었다. 아무런 선물도 마른 꽃가지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얼굴조차 이미 상상할 수 없었다.
사실 그녀가 그를 더욱 깊이 이해해 갈수록, 실재했던 그의 모습은 점점 소멸되어 가는 것이었다.
혼의 소리가 저 아래 남쪽에서 들려왔다. 아무것도 취하지 마시오. 당신의 이름을 간직하시오.
나를, 아니,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지 마시오. 그건 부질없는 짓이오.
아, 그 감사의 송가, 대체 당신이 감사하지 않는 인물이 어디 있소? 빌리는 당신을 파리로
데려왔다는 이유로, 뒤발리에는 당신한테 같이 일할 기회를 베풀었다는 이유로, 빈에 있는 두
친구는 당신을 고용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앙드레는 당신을 좋게 본다는 이유로. 당신을 발견해
낸 사람은 끝도 없는 거요. 그런 걸로 당신이 고마워 어쩔 줄 몰라하며 여전히 멍청하게 굴다니.
그건 어느 지점에서 끝나는 일이오. 아무라도 어차피 언젠가 누구를 돕게 마련이오. 그러니까
이미 비현실이 되어버린 일로, 아예 오래 전부터 존재치도 않는 부채감에 마냥 매달려선 안 되오.
당신은 혼자 힘으로 당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소.
트롯타가 빌리 프렉커에 관한 한 옳게 보았다는 것을 그 자신은 다시는 알 기회가 없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몇 달이 지난 뒤에야 그녀는 빌리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도움을 꾀한 적이
있었다. 그녀에게 호의를 베푸는 뜻에서 사람들이 여러 차례 그를 도와준 일도 여의치 않게
되어버리고, 결국 젊었을 적 독일 사진작가로서의 희망이 파탄에 이르고 나자, 그는 줄창 술만
마시면서, 완전히 만취가 되어 몇 친구들 앞에서 그녀를 대놓고 모욕했다. 친구들은 모두 그녀
못지 않게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놀라워하며 귀를 기울여 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누구나 생각하듯이, 그녀는 위치를 지키고 있는데 자기 자신은 몰락해
버린 데 대한 분수를 잃은 질투와 발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엘리자베트에겐 두 사람 사이에
개재했던 진실의 몇 시간이 된 셈이었다. 다만 그녀는 무엇 때문에 자신이 그의 증오를 샀는지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줄 몰라하며 트롯타를 머리에 떠올리고 몇 시간을 더 버티며
예의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일어서서 그 자리를 떠났고, 생전 처음 수면제를 몇 알 먹었다.
증오를 느끼며 잠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빌리는 아무 변명도 없이 한번 자기를 위해
조속히 무슨 일을 처리해 달라고 짤막한 편지를 써왔다. 마침 수중에 원본을 갖고 있던 그녀는
사진실에서 하루 종일 원판을 뒤져 찾았다. 그리고 일언반구도 없이 그것을 부쳐버렸다. 그 즈음,
이토록 과격하고 매정하게 끝장나진 않았지만, 이 비슷한 괴상한 방식으로 몇몇 우호관계가
결단이 나버렸다. 부수적으로 서먹서먹하게 악의를 남기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것이
어떻게 되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언젠가, 어느 누구라도 무슨 일이든 결코 타인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양자간에 조금이라도 끈끈한 감사의 마음이 있을 수 없다고, 그녀 역시
엔젠가는 깨닫는 점이 있게 되리라고 말해 준 트롯타 요제프가 이젠 이 점에 대해 그녀한테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해 주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처음엔 그녀도 그 점을 깨닫지 못하고
뉴욕의 초청을 고려해 보다가 앙드레한테 사의를 표명했다. 앙드레는 그녀의 행운을 빌며 전보
한 통만 쳐주면 언제라도 다시 받아주겠다고 말했다. 그 뒤 그녀는 퍽 홀가분한 마음으로
뉴욕에서 일했다. 숱한 적의로 허물어져 버린 그녀의 첫 파리와 작별을 고했기 때문이었다.
뉴욕에서 그녀는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전보다 더 분방하게 돌아다녔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역시 탁월한 인물인 휴즈를 알게 된 것이었다. 그는 아무리 실망을 겪고 의기가
꺾여도, 과연 자기가 배운 바 건축 이론에 따른 시도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러도, 좌초를 모르며
광적으로 일에 달려드는 타입이었다. 그는 아무런 주문도 못 받았지만 그래도 내부 건축에는
다행히 꽤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도 그의 희망에다 자신의 마음을 합해 걸며 그와 더불어
수많은 아는 얼굴 중의 몇을 모았다. 첫 주문을 받은 날, 그는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동성연애자랑 결혼하겠다는 생각 따윈 한번도 품어본 적 없는 그녀가 어쩌자고 순간적으로
승낙을 해버렸는지. 아무튼 그는 임시로 일단 그녀의 집에서 살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각기 자신의 삶을 살면서 상대를 방해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고, 꽤 순조로우리라고 행복에
들떠서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우정이라는 것이 결혼을 위해서는 사랑보다 더 굳건한 바탕일 것
같았다. 그녀는 휴즈가 이젠 그야말로 확고부동한 관계라고 단언해 준 보이(boy)도 알게 되었다.
그러더니 삼 주일 뒤에 다른 보이가 나타났다. 그렇게 그녀는 휴즈의 끊임없는 파트너 교제와,
때로는 그런 사건이 겹치기 때문에 생기는 병발증에도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휴즈가 뒤죽박죽된
감정과 약속을 감당 못할 때면 그녀가 나서서 사건을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돈도
빠듯했다. 때로는 그녀가 퍽 많은 돈을 벌었지만, 한편 어느새 휴즈가 한푼도 못 벌어들이는
데다가 한번은 브룩클린 출신의 젊은 녀석에 뒤이어 리오 출신의 녀석이 퍽 사치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꽤 아득한 조그만 가정의 테두리를 가지고 있었고 엘리자베트는
그걸 사랑했다. 휴즈와 그녀는 피차를 항상 잘 이해했다. 심지어 셋이서(넷인 적은 한번도 없이
척 자주 셋이었지만) 같이 지낼 때에도, 모든 보이들이 그녀한테 각별히 깍듯했기 때문에 잘
어울릴 수 있었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실제로 상냥하고 싹싹한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따금 엘리자베트는, 휴즈가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부추겼다는 의심이 들었다. 곧, 새로
나타난 보이한테 엘리자베트가 자기 부인이라는 이유에서, 그녀를 존경할 뿐 아니라 정도
이상으로 경탄을 보내라고 강력히 요구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것은 곧, 그 자신이 그녀에게
감탄하고 있고, 곧 잘 타산적이거나 그를 업신여기거나 괴롭히는 자기의 보이들한테서 스스로는
충족할 수 없는 존경심을 그녀한테서 보상받고 싶은 심리였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인 엘리자베트한테 한 점 그늘도 지어져선 안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녀에게 보내는 존경심이 휴즈에겐 줄곧 피해 당하며 아파온 자신의
자존심의 대충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뉴욕을 떠나 파리로 돌아온 지 한참 뒤, 어느 날 밤의 일은 하루도 그녀의 기억에서
떠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생각 속에 불러올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그 밤을 잊지 못했다.
그것의 책임은 전적으로, 그녀한테 전화를 걸고 인사차였는지 뉴스를 갖고 왔는지 부탁을 하러
왔는지 아무튼 만나게 된 빈 특파원 탓이었다. 그 청년을 애당초 왜 만났는지는 기억 속에
없었지만, 아마도 우연히 그렇게 전화로 얘기를 하고는 불르바르 생 제르맹에 있는 어느 카페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빈의 몇몇 사람을
자기도 안다는 이유로, 또한 뮈일호퍼인지 뮈일바우어인지 하는 그 청년이 마침 신문기자
신분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초대하고자 했었을 뿐, 빈 청년 자신 역시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때 그가 불쑥 물은 것이었다. 트롯타 백작을 알고 계셨어요? 엘리자베트는 성가시다는 투로
대꾸했다. 트롯타 백작이란 인물은 존재한 적이 없어요. 만일 귀족 칭호를 받게 되었던 저
전설적인 트롯타 가문을 뜻하시는 거라면, 벌써 오래 전에, 1914년에 멸족이 되었잖아요. 물론
방계 혈통이 잔재하지만 귀족은 아니에요. 그 중 몇 사람이 저 아래 유고슬라비아에 산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여기 파리에 한 사람 있구요. 빈 청년은 한순간 탐색하듯이 그녀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러니까 파리에 있다는 건 틀림없군요. 그렇다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엘리자베트는
낯선 사람이랑 프란쯔 요제프에 대해 들먹이고 싶지 않은 데다가 트롯타 백작 운운하는 잡담이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에 점점 안절부절 못했다. 그래서 보이를 불렀다. 그 청년한테서
빠져나오기 전에 계산 때문에 서투르게 옥신각신하는 동안, 빈 청년이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파리에 있던 트롯타임에 틀림없어요. 몇 달 전에 그 사람이 빈에서 권총
자살한 사실을 아시는지요. 정말 굉장한 센세이션이었지요. 유족도 나타나지 않는 데다가 작은
여관방에 그 사람이 남겨놓은 거라고 도대체 여권밖에 없었거든요. 그 뒤 사람들은 추측을
했지요. (제가 조사를 해봤습니다.) 그 사람은 영웅 솔페리노의 고종 사촌뻘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솔페리노에 관해 기록을 좀 뒤져봤지만 별로 이렇다 할 게 없더군요.
엘리자베트는 그때까지만도 떨지 않고 몸을 가누며 성급히 내뱉었다. 터무니없는 얘기예요. 그
사람 할아버지는 반란을 일으킨 폭도이지, 솔페리노의 후예처럼 충성스런 신하가 아니에요.
하지만 어쩌자고 이 중뿔난 인간한테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어 그녀는
일어섰고, 허겁지겁 택시를 손짓해 부르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부탁이에요. 택시를
잡아주세요. 중요한 약속이 있어요.
그날 밤 그녀는 바또 이브르(Bateau Ivre:파리 몽파르나스의 술집. 역주)에 초대를 받았었다.
잠자리에 누워 그녀의 단 하나였던 위대한 사랑과 그 빈 청년이 전해 준 소식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청년이야 자신이 던져준 소식의 엄청난 밀도를 도저히 헤아릴 길 없으리라. 그때
그녀는 울지 않았다. 다만 일어설 수도 없이 기운이 없었다. 하다 못해 뭘 마시러 컵 하나 들고
올 기력도 없었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성과 이름자를 완전히 붙여 불러 보았다. 프란쯔 요제프
오이겐. 그의 부친이, 완전히 무력해진 능력, 현실적으로 남아 있는 능력을 잊기 위해, 모든 것을
부여해 넣어 지은 이름이었다. 친구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모리스와 장 마리. 그녀는
안되겠노라고, 죽을 지경으로 지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 친구는 아랑곳없이 유쾌하게
웃어젖히며 수화기를 번갈아 들며 떠들어 대더니 곧 들르겠다고 말하고, 엘리자베트가 뭐라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전에 수화기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정성스럽게 생전 처음 그 옷을 꺼내
입었다. 누구한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추도를 위해서였다. 오랫동안 서랍 속에 박혀 있던
구겨진 낡은 털옷. 그녀는 지친 동작으로 옷의 구김을 더듬어 폈다. 그러면서 이 옷을 살 때 단
한 번 트롯타가 동반했었다는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는 옷가게 앞에서 시간이 걸리는 것을 못
참아 성급하게 서성대고 있었고, 생전 그런 법 없는 그녀는 자기 사이즈의 첫번째 옷을 후딱
사들고 나왔던 것이었다. 이제 이 옷은 트롯타의 옷, 유해의 옷, 그녀의 상복이 되었다. 그 옷을
입고 그녀는 벌써 네 사람이 앉아 있는 자동차로 내려갔다. 새침한 표정으로 앞좌석에 다시 앉는
소녀랑 인사를 시켜 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러더니 아무도 이름조차 말해 주지 않는
운전석의 남자가 후딱 고개를 돌려 꽤 한참 동안 재미있다는 투로 그녀를 바라보고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이로군요? 뒷좌석에 그녀와 함께 스페어 의자에 꼭 끼여 붙어 앉은 친구들이 쉴 줄
모르고 떠벌였다. 모리스가 말했다. 주의해요, 엘리자베트. 저 작자는 위험해. 장 마리가 말했다.
조심해야 돼. 저 친구에 관해선 경고를 안 할 수가 없어. 안 떨어지는 여자가 없거든. 그녀는
대꾸도 않고 식탁에 앉아서까지 침묵을 고수했다. 그리고 첫잔을 마신 후에야 겨우 별것 아닌
일에 관해 모리스와 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낯선 사내가 매력적인 아가씨를 위해
탈의실에서 뭘 가지고 와야 할 일로 몸을 일으키더니 마주 앉은 그녀에게도 몸을 굽히고 뭘
원하는 게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지갑에서 동전을 하나 꺼내 주고 상냥하게 말했다. 이걸
뮤직박스에 넣어주세요! 아뇨, 특별한 희망곡은 없어요. 애당초 희망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 단추나 눌러주시면 돼요. 그가 되돌아와 그녀에게 흥미를 느낀다는 듯 다시 한번 과장하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을 때, 그녀가 신청한 판이 레코드 플레이어에 떨어져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샹송도 히트곡도 아니었다. 애타게 숨넘어가는 소리도 신음하는 소리도 아닌, 처음
듣는 음악이었다. 하지만 그 뒤 일 년 동안 줄곧 그녀는 그 음악을 퍽 자주 들었다. 그때부터
도처에서 애청된 곡으로 그녀로선 알 수 없는 고대 음악을 침울하게 재즈로 편곡한 것이었다.
그녀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마비된 듯 깊이 자신 속에 빠져들어 음악에만 귀를 기울이며, 다만,
리듬에 맞춰 어깨를 흔들거리는 소녀의 동작을, 그것도 그 낯선 사내만을 의식에 두고 그러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식사를 중단했다. 장송의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먹는
일이란 불가능했다. 그리고도 얼마 동안 더 예의를 지키느라 앉아 있다가 마침내 모리스한테
얼른 집에 가야겠다고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하며, 다른 사람들한테는 방해가 안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부터 사샤(Sascha)로 자리를 옮길지 어디 딴 데로 갈지
왁자지껄 의논이 분분하느라 아무도 그녀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거나하게 취해서
근처에서 끈질기게 말싸움을 하는 다른 이들을 기다리며, 낯선 사내랑 단 둘이 기진맥진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한마디 말도 안 했다. 이윽고 남자가 오른편을 좀 살펴봐야겠다고 입을
떼자, 그녀가 말했다. 아뇨, 먼저 저를 택시 있는 데로 데려다 주세요. 지금 저는 사샤로 갈
기분이 아니라니까요!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어떻게 되어 그녀가 다른 이들과 휩쓸려 그곳으로
가게 됐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샴페인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그녀도 일어서서 마음에 별로
내키지도 않는 그 낯선 사내랑 춤을 추었다. 그리고 잠깐 음악이 쉬는 동안 그녀는 그 사내를
한번 찬찬히 뜯어보며 말했다. 당신은 프랑스인이 아니군요. 아무튼 진짜 프랑스인이 아니군요.
아닙니다. 사이비 프랑스인이지요. 그는 반갑다는 듯이 말했다. 갈리찌엔, 쯤로토그로트
출신이지요. 게다가 그 장소는 이미 아예 존재치도 않게 되었지요. 그 사실은 제가 들은 바가
없는데요. 엘리자베트는 고의적으로 말했다. 없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 어떻게 그 사실을 입밖에
낼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네요. 그 다음에 그녀는 더 이상 지루하게 빈둥거리지 않고 진정 춤에
빠져보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마침내, 일찍이 춤이라는 걸 결코 즐겨본 적 없는 그녀인데도 춤
속에 휩쓸려들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엔 다른 사람들이 지루해져서 밖으로 나왔다. 그는 일단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 주고는 문 앞에서 힘주어 말했다. 나중에 곧 돌아오겠습니다. 이
떼거리들을 떼어버려야겠어요.
그녀는 정도를 넘어 과음을 한 탓에 두통을 느끼며, 기다리는 새에 벌써 잠이 들 것 같은
생각이면서도, 목욕탕으로 가 이를 닦고 정신을 가누려고 애를 썼다. 그때 벌써 초인종이 울렸다.
벌써 새벽 세시라 교통이 끊어졌기 때문에 힘들리라 생각했던 그녀의 짐작보다 앞질러 그가
돌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문을 열었고 그가 소리 안 나게 문을 닫았다. 그가 먼저 자신을
안았는지, 그녀 편에서 그에게 순간적으로 매달렸는지는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침이
오기까지 그녀는 생전 처음 겪는 황홀경에 잠긴 채, 지쳐서 그러면서도 도저히 지치지 않고 속절
없이 그에게 매달렸고, 오로지 그를 다시 받아들이기 위해 그를 밀쳐냈다. 그것으로써 트롯타를
죽인 까닭에 눈물이 흘러나오는지, 또는 소생시킨 까닭에 눈물이 나오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또한 그녀 자신 트롯타를 부르고 있는 건지, 또는 어느새 죽은 자 아닌 살아 있는 자인 바로 이
남자를 부르고 있는 건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끝이면서 동시에 시작에 닿은 채
잠이 들었다. 사실 훗날에도 그녀가 여러 형태의 바리에이션을 가지고 이 밤을 기억할 때면 늘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 그녀의 온 마음을 다한 위대한 사랑의, 진정한 첫사랑의 시작이었다는
느낌이었다. 하긴 때로는 그녀의 두번째 위대한 사랑이었다고, 또한 아직도 휴즈를 기억하는
순간이 잦았기 때문에, 세번째 위대한 사랑이었다고 말하는 적도 있었다. 그에게 이끌려 간
자신의 심적 근거에 대해, 그 후 그들 사이에 다시는 재현되지 못한 그 황홀경의 원인에 대해,
그녀는 만느에게는 끝내 입을 올려본 적이 없었다. 며칠 안 가 그의 존재는 그녀가 반해 버린 한
남자로 고정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만을 위해 이름과 얼굴이 존재하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한 남자일 뿐이었다. 그 역시 이태 동안에 역사를, 그녀와 더불어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그
역사는 그녀로 하여금 그와 더불어 삶을, 그와 더불어 앞날까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으리만큼 서서히 형성되어 갔었다. 그러던 그가 돌연히 떠났을 때, 그녀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느낌, 잔인한 모욕감에 대해서보다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닥친 돌연성에 충격을
입었었다. 이 헤어짐으로 그녀는 트롯타의 죽음 때보다도 더욱 큰 아픔을 치렀다. 하루 종일
전화통 앞에 앉아 전화를 기다리면서도 만느를 찾지 않았고 이 떠남의 이유를 캘 엄두도 못
내었다. 거기엔 아예 이유라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들 양쪽을 알고 있는 몇
친구들도 피했다. 제삼자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기다림의 무위한
며칠을 보내고 누구하고든 간에 얘기를 해야겠다는 절박감에 밀려, 전부터 알고 있던 의사를
찾아 빈으로 갔다. 빈에서 그녀는 모든 친구를 피해 어느 조그만 호텔에 앉아 이 의사의
치료만을 오붓이 받았다. 그는 한때 미미한 조수였지만 지금은 이름도 났고 많은 환자를 가진
의사였다. 그녀는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많은 내용의 말을 쏟아놓진 못했지만 그가 던지는
질문에는 구체적인 표현으로 답변을 했다. 참을성 있고 섬세하게 물어오는 유머를 지닌
질문이었다. 그는 그녀한테 두 차례나 최면 분석을 시도했다. 하지만 효력이 없었고 다만
엘리자베트 쪽에선 상당히 흥미를 느꼈다. 그러던 며칠 후 그가 말했다. 당신처럼 많이 알고
있는 환자는 처음 봤습니다. 당신의 문제는, 그것을 굳이 문제라고 규정짓는다면 바로 당신
개인의 어쩔 수 없는 구성 요소인 겁니다. 그는 그녀의 명석함을 치하했고, 그 뒤 얼마간 그들은
그녀와는 관계없는 일을 화제 삼아 사뭇 우호적인 공감을 느끼며 담화를 계속했다. "명석하다"는
진단서를 들고 그녀는 희망적인 기분으로 다시 파리로 되돌아왔다. 실상 그녀에게 닥쳤던 일이란
누구에게나 불가피하게 벌어지는 일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다음날, 불과 하루도
못 가서 그녀는 다시, 문득 절망에 몸을 떨며 알 수 없는 불안의 상황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녀 자신 공속했다고 여겼던 한 인간이 자신을 헌신짝처럼 내던졌다는 사실, 그리고 보다 더
무겁고 큰 상실을 겪은 그녀 자신 이같이 단순한 상실을 극복 못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
아무것도 투시할 수 없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절단된 고통을 느끼며 도대체 갈피를 못
찾은 채, 속절없이 전화통 앞에 앉아 있는 며칠이 다시 흘러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녀는 다시 일을 시작했고, 그 전에 관계하던 사람과 일의 틈에 얼굴을
내보이게 되었다.
그를 받아들이지 마시오.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마시오. 유령의 음성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때로 그녀는 아주 원시적인 생각으로, 예컨대 만느도 늙어갈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녀 편에서도
늙은 만느로는 만족치 못하게 될 것이며, 그러니 돌연한 종말이 서서히 오는 감정의
이울음보다는 낫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는 몇 사내들이랑, 로저와 또
다른 장 피에르와 장과 루끄와 어울려 다니며 자신을 달랬다. 이렇게, 몇 남자들이랑 잠도 잤고,
줄곧 몇 시간씩 그들의 문제와 곤란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로저의 문제는 A라는 이름의 연상의
여인한테 책임을 가지고 있고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판에, 한편으로 지금 사생아인 딸을 가진
보다 젊은 B를 알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두 여자를 계속해서 자신의 망설임 속에 묶어 놓을
수도 없고, 스스로 결단을 내릴 수도 없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곳으로 도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도피라는 것은 엘리자베트를 겨누고 한 말임이 거의 분명했기 때문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충고를 했다. 그녀 자신 도피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프리카 여행에서
되돌아왔을 때 느닷없이 그가 전화를 걸고 말했다. 웃지 말아요! 나를 이해할는지 모르겠지만
어제, 바로 어제 결혼을 했소. 젊은 B랑, 딸이 있는 B랑 말이오. 딸이 결정표를 준 것이었소.
그리고 그날 바로 그녀는 그가 초대한 칵테일에 참여해서 로저의 B와 어린 딸을 알게 되었다.
로저는 수많은 사람과 악수를 한 후, 환하게 웃음 지으며 그녀한테 다가와 옆으로 끌더니 내일
곧 전화를 걸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음날, 그 다음날도 그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러
해 전처럼 다시금 며칠 동안 전화통 앞에 앉아 절망을 헤매며 해명을 모색했고, 자기에게 호의를
품었던 사람이 불과 몇 달 뒤 밑도 끝도 없이 전화를 걸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게
여겨지는 이유로, 예기찮게 또 한번 맘놓고 흐느껴 울었다. 다만 그녀에게 분명해진 것은 A도
B도 서로를 배겨내지 못하는 한낱 여자라는 것, 따라서 A를 이해하고 B도 이해하는 제삼의
여자도 별수 없이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만느에 대한 생각은 점점 뜸해져 갔다. 그리고 그가 홀연히 사라진 이유를 더 이상 캐지 않게
된 이후, 그녀는 우연히 언젠가 던진 그의 말을 생각해 냈다. 당신 같은 종류의 여자랑 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어. 그건 아무래도 전적으로 모리스 탓이야. 그 녀석이 구역질 날 정도로 당신의
지성에 열광했거든. 지적인 여자는 나한텐 여자가 아니야. 그때 당신이 그 레스토랑에서 말도
없이 건방지게 앉아 있는 게 불쾌할 뿐이었단 말야.
그날 저녁이 얼마나 엄청난 오해를 바탕에 깔고 이뤄진 것이었는가를, 또한 그녀 자신 입은
붙어 있었지만 오만한 건 아니었다는 점을 엘리자베트는 말하지 않았다. 트롯타와의 이별과
그와의 만남을 통한 그녀의 소생과 쯤로토그로트라는 말이 서로 어떻게 맞물려 있었는가를
만느는 끝내 모르고 만채였다.
다시금 빗방울이 간간이 떨어지는데도, 그녀는 이번에는 찔훼에를 곧장 넘어 훼엔베크를 걸어
호수로 가는 내리막길로 줄달음쳤다. 하지만 숲속에서 빠져나오니까 길은 초원 속에 묻혀 자취를
잃고 있었다. 게다가 아무런 표지판도 없었다. 그녀는 왼편으로 갔다. 오른편으로 왔다. 하다가
결국 그냥 곧장 갈 수 있는지 볼 양으로 한참 앞쪽으로 발을 떼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걸음을
멈췄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디뎠다가는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초원의 맨 끝에 서서 전에 없이 벼랑처럼 그녀의 앞길을 갑자기 막는 게 무엇인가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물론, 산이 갑자기 깎아지는 게 아니라, 준설기로 깎여졌다는 것이 당장 눈에
띄었다. 축축한 신선한 흙이 아직도 눈에 띄었고, 발 밑으로는 어마어마한 넓은 공사장이 누워
있었다. 장거리 여행은 이제 할 수 없는 마르타이 씨가 이곳에 아마 언젠가는 새 자동차 길이
생겨날 것이라고 지나가는 투로 못마땅하게 말한 것이 생각났다. 이곳의 전형적이 굼벵이
속도로는 틀림없이 아직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녀는 벼랑 근처를
서성대며 내리막길을 찾았지만, 그녀가 발을 붙이고 미끄러져 내려가려는 지점에는 버틸
것이라곤 전혀 없었다. 하다 못해 덤불가지, 나무 한 그루도 없었고, 흙은 풀포기 하나 없이
푸석푸석했다. 곧장 백 미터 너머로 굴러 떨어질 뻔한 상황이었다. 그제야 그녀는 공사장을
알아보았다. 일이 진행되는 기척은 전혀 없이, 다만 까마득히 커다랗게 소리를 쳐도 안 들릴 먼
곳에 일꾼 두 명이 경사진 풀밭을 힘 주어 딛고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러니 여기에서 내려가는
길이 어딘지, 어떻게 호수를 갈 수 있는지를 소리질러 물을 형편도 못 되었다. 그녀는 벼랑에
주저앉아 생각을 짜내다가 의기소침해져서 훼엔베크 쪽으로 되돌아와 봤지만 거의 밟힌 자국
없는 이 도로의 끝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곳 1번 도로로는 갈 수가 없었고 내일 7번
도로나 8번 도로로 다시 한번 시도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숲에서 호수로 가는 내리막길 하나는
최소한 남겨놨을 테니까. 그녀는 돌아오며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문득 바라보았다.
약하지만 쏘는 듯한 햇살이었다. 이른 오후 짧은 낮잠에서 일어난 마르타이 씨가 어딜 그렇게
오래 있다 오느냐고 걱정스럽게 물었을 때, 그녀는 훼엔베크로 해서는 호수 쪽으로 내려갈 수
없더라고, 거기엔 도로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데 경고표지 하나 세울 궁리를 안 했더라고 얘기를
했다. 정말 위험 천만이에요. 아무 생각 없이, 내리막길이 있을 거라고 여기면서 앞으로만 내닫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에요. 마르타이 씨가 말했다. 그것 역시 괘씸하기 짝이 없는 전형적인 처사의
하나다. 무사히 온 게 정말 다행이구나. 물론 네가 너무 멀리 나간 점도 있어. 난 네가 너무 오래
시간이 걸리는 것부터 걱정스러웠다. 온 지 며칠 안 되어서 너무 긴 산보였지 뭐냐. 아무튼 다른
길로 해서 갈 가능성은 물론 있을 거다. 그리고 그들은 정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옛날 얘기를
했다. 특히 마르타이 씨가 가장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시절에 관해서 또 간간이 재미있다는 투로
마로코로 떠난 신혼여행에 관해서 화제를 삼았다. 마르타이 씨는 부인과 결혼 후 로젠탈을 질러
로이블파쓰 너머 블레드까지 산책한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건 여행은 아닐지라도 참 아름다운
산책이었다. 엘리자베트는 다시 로베르트의 계획과 로베르트의 미래로 생각을 옮겼고, 간간이
지겨운 느낌으로 자신의 계획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이라곤 안개같이 몽롱한
의문표 뿐이었다. 로베르트와 리쯔는 미래라는 걸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건 오로지
젊음뿐, 미래는 없었다. 엘리자베트는 지금껏 그녀의 미래라는 걸 받은 적이 없었고, 그녀의
양친도 아무런 미래를 보상받은 것이 없었다. 항상 모든 젊은이들에게 약속된 미래라는 것은
전혀 실재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잔트뷔르트 같은 식당으로 아버지를 초대할 엄두를
못 내었고, 심지어 파리로 모셔가 구경시켜 드리겠다는 소망도 버렸다. 결혼식에 불참하겠다는
통고 후, 아버지가 다시는 외출을 하거나 여행을 안 하리라는 것을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칠순에 사라예보로 갔던 단신 여행이 아버지의 마지막 여행이었던 것이다.
마르타이 씨가 말했다. 왜 아직도 로베르트랑 리쯔한테서 그림엽서가 안 오는지 모르겠구나.
엘리자베트가 안심을 시켰다. 그 젊은 애들은 당장은 편지 쓸 경황이 없을 거예요. 우편도 늘상
오래 걸리구요. 우편마차 시대 이래로 애당초 우편이 그렇게 오래 걸릴 턱은 없었다. 더구나
초속비행기며 점점 고속의 기차가 생겨나는 판에 말이다. 걱정하실 필요가 하나도 없어요.
크리스마스 때까지 어차피 카드가 올 테니까요. 충분히 상상이 안 가는 채로 로베르트의 미래에
관해 입으로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엘리자베트의 머리엔 참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만느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에게 언젠가 웃으면서 한 말을 기억했다. 나한텐 모든 게 거꾸로
돌아가요. 말하자면 맨 먼저 한 어린애를 사랑했고 훨씬 뒤늦게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됐거든요.
여자의 경우 남자에 앞서 어린애를 사랑한다는 건, 그 여자가 완전히 정상이라고 기대 할 수
없는 거겠지요. 엘리자베트는 확신이 서지 않아 한번쯤 아버지와 그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까마득한 옛날, 자기가 로베르트 때문에 아주 괴상하게 행동을 하고 엄마한테
언어도단으로 군 것을 아직도 아버지가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낮잠 뒤에 이 시각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커피를 즐기고 있던 마르타이 씨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아니다. 그건 모를
소리야. 난 영문을 모르겠구나. 어머니와 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이냐? 엘리자베트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엄마와 제가 서로 미워했다는 걸 모르시는군요. 물론 로베르트
때문예요. 그만한 나이의 처녀애한테 들려줘야 할 소리를 모조리 수차 해주었는데도, 열 여섯 살
짜리 딸이 갑자기 악을 쓰며 로베르트가 도대체 엄마의 아들이긴 하냐고, 그 애는 자기의, 곧 저
자신의 아들일 수도 있는 거라고 따지고 들었으니 엄마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때
엄마는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던 게 틀림없어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 따귀를 갈기셨거든요.
물론 그래서 전 더 기승을 부렸지요. 저는 한 가지는 분명하다고, 도저히 딴 어린애는 견딜 수
없을 테니까 앞으로 결코 어린애 따윈 안 갖겠다고, 어떤 애라도 로베르트처럼 둘도 없이 예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엄마는 그때 심신으로 끔찍스런 상태였음에 틀림없어요. 실제로
우리는 이 한 어린애를 놓고 싸웠던 거니까요. 어떤 식으로 엄마가 둘이 되어버렸는지 당연히
꿈도 꿀 수 없었던 로베르트 역시 엄마를 절망으로 몰아갔어요. 그 애는 제가 옆에 있어야만
잠이 들었으니까요. 아시지요. 그때가 바로 그 애가 첫 병을 앓고 난 뒤였어요.
마르타이 씨는 화를 내진 않았지만 언짢은 기색이었다. 그는 말했다. 넌 또 분별없이 과장을
하는구나. 엄마는 아주 공평하게 너희 둘 다 똑같이 좋아하셨다.
엘리자베트는 열을 내었다. 그런 점을 말하는 게 아녜요. 제 얘긴 다만, 제가 그 애를 엄마한텐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엄마 자신 아주 잘 인식하고 계셨다는 거예요. 모순투성이로 변덕을
부리면서도, 제가 그때의 첫번째 약속, 로베르트가 이미 세상에 있는 이상 다시는 어린애를 안
갖겠다던 유치한 약속을 이행했다는 게 이상하잖아요. 그리고 한참 뒤에 또 한번 무슨 일이
있었어요. 엄마가 왜 저한테 그 얘기를 해줬는지는 모르겠어요. 언젠가 제가 빈에서 집으로 간
적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엄마랑 아버지는 제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 턱이 없었지요. 그런데
밤중에 엄마는 로베르트가 깜깜한 층계에 나와 울부짖는 것을 보셨대요. 그리고 울음을 그치고
엄마가 다시 침대로 데려다 눕히니까 그 애가 말하더래요. 확실해. 그 여자가 오고 있어. 그
여자가 오는 꿈을 꾼걸, "그 여자"란 물론 저를 두고 한 말예요. 오늘날까지도 저는 가끔
생각해요. 로베르트야말로 밤중에 일어나서 저 때문에 기뻐하고 울며 제가 오고 있다는 걸
알아준 유일한 인간이라는 것을요.
마르타이 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이해가 안 가는구나. 대체
우리가 몰랐던 걸 로베르트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니. 하긴 너희 둘은, 이를테면 로베르트도,
항상 풍부한 환상을 가지고 있지. 그건 너희 어머니나 나한테서 받은 건 분명 아니다. 난 다만
로베르트가, 참 그 녀석도 개구쟁이였지, 그 애가 나한테 한 말을 기억한다. 그 애는 네가
결혼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거였어. 당당한 남동생께서 그걸 허용 안 하겠다는 거였다. 물론 난
그 애한테 내 뜻을 말했지. 미안하다. 공연히 네 결혼 얘길 꺼내서 네 마음을 아프게 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던 엘리자베트는, 크게 마음놓이는 느낌으로 웃으며
아버지를 위로했다. 저는 조금도 마음이 안 아파요. 제 결혼은 정말 코믹한 거였어요. 제 일생의
두 번 다시없는 코미디였을 거예요. 그렇지만 아버지가 휴즈를 못마땅해 했다는 점은 저도 알고
있어요.
7번 도로가 갑자기 끝나면서 고속도로로 떨어지는 가풀막에서 엘리자베트는 드러누웠다.
그러고 나서 얼굴을 내민 쏘는 듯한 햇살 때문에 한숨을 내쉬며 윗도리며 구두 양말까지
벗어버렸다. 이렇게 갈증이 날 수 없었다. 호수 물이라도 들이켜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호수로는 간단히 내려갈 도리가 없으니 생각만으로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다른 모든 것을 극복했듯이 호수를 극복했다. 삼각형의 땅덩어리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너머에 살고 싶었다. 아직도 농부와 사냥꾼이 있는 국경에 인접한 두메에 살고 싶었다. 그리고
부지중에, 그녀 역시, 나의 동포들이여! 라는 말로 운을 떼리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라면
그들을 죽음으로 보내진 않았으리라. 이런 분단을 초래하진 않았으리라. 아무튼 그들은 서로
어울려 살아오지 않았는가. 물론 항상 오해와 미움과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일 망정, 실로
인간에게 이성의 지배를 받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정색을 하고 설명해 주던
아버지를 재미있는 기분으로 상기했다. 그 당시엔 온통 철저히 이성을 잃고 비정상이었는데도
실로 모두가 그 상황을 이해했었다는 것이었다. 그들 자체가 도통 비정상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혁명가들까지도, 추악하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무의미한 대제국의 흔적이 일단
없어지고 나니까 완전히 놀라 아연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소멸되어 가는 이 병중에
감염되지 않으리라. 다만 한 가지, 마땅히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그녀의 도덕이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도덕은 바로 여기에서 근거한 것이며, 파리에서 유래한 것도 아니고 뉴욕과는
전혀 상관없을 뿐더러 빈과도 거의 무관했다. 하긴 그녀는 2년이나 3년마다 일주일 가량, 항상
환한 얼굴로, 항상 다른 동반자를 대동하고, 어떨 땐 두 사람을 동반하고 빈으로 갔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동반한 인물에 관해서는, 그녀의 방문을 뜨겁게 환영하는 빈의 친구들이나
마찬가지로 별로 안다 할 게 없었다. 빈의 가십의 정글 한복판에서 하필이면 분별 있는 아티
알텐뷜이 두 번 다시 없을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사람들이 마르타이 양한테 어거지로 부당한
처사를 하고 있다고, 그 여자만큼 단 한 인간과 살기에 알맞게 태어난 여자가 없다고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를 정신나간 것으로 봤기 때문에 곧 그도 그 생각을
집어쳤다. 그 역시 엘리자베트에 대한 자기의 관념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규명할 수 가
없었다. 그의 부인은, 자기의 남편이 지난날 물론 결혼 전에 몇 살 연상인 마르타이 양과 모종의
관련을 가졌던 모양이라고 문제를 아주 간단히 해석해 버렸다. 그리고는 마음 밑바닥으로는
자기가 남편을 획득한 사실에 의기양양해서 아주 다정한 시선으로 아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철저히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해 놓고도 엘리자베트의 방문에 관해 수많은 사람들과 수다를
떨었다. 비밀에 관한 그녀의 주장은 그것이 신문에 나면, 아마도 사람들이 흘려봤을 테니까 더 잘
비밀이 지켜진다는 논지였다. 마르타이 여사를 안다는 것은 앙뜨와네뜨한테는 커다란
소득이었다. 마르타이처럼 항상 저명인사와 교류를 하며, 그것도 직업상으로뿐 아니라, 화가며
영화배우, 정치가 호트실트 같은 동떨어진 존재와 거침없이 어울려 피크닉을 가거나 저녁식사를
하는 인물이 알텐뷜 집안 언저리에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빈 사람들처럼
연극배우에 대해선 열광적인 찬사를 보내고 있고, 하다 못해 파니 골드만까지 진심에서 즐겨
초대하는 앙뜨와네뜨였지만, 물론 그녀가 경멸해 마지않는 진짜 영화배우는 실제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린애처럼 흥미를 보이며, 할리우드의 파티가 어떠했으며 리즈
테일러의 실물이 어떤 모습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엘리자베트는 실로 약간 놀라운
기분이었다. 앙뜨와네뜨 같은 사람들은 응당, 사생활이 화보에나 나는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겠다고 사교계에 한 발짝인들 들여놓을 위인들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었다. 영화배우며
사진모델이 귀족사회와 결혼하는 사례가 아무리 번번이 성공했을지라도, 알텐뷜 집안 사람들은
사진모델 옆에 얼굴을 내놓기보다는 차라리 도로 청소하는 편을 택하리라는 걸, 그 여자들은
아무래도 상상할 수 없으리라. 모나코의 왕비 같은 인물에 대해 앙뜨와네뜨는 말했다. 난 그
여자가 왕비 노릇을 잘못했다곤 말하지 않아. 그렇지만 영화배우야 어디까지나 영화배우지! 파니
골드만에 대해서만은 그녀도 결코 그 비슷한 소리로 규정짓지 않으리라. 이피게니에 역의 파니는
정말 여왕다웠어.
얘기가 나온 김에 엘리자베트가 파리와 뉴욕 사이의 그녀의 생에 관해 얘기를 하면, 하기야
그녀 자신의 생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을 안 하니까, 그녀가 목격했던 사건을 중심으로 화제가
돌아가게 되면, 빈의 친구나 우연히 끼여 듣는 사람들은 자기네들도 한순간 전혀 딴판의
매혹적인 화려한 세계에 참여하는 기분에 얼마든지 젖을 수 있었다. 그만큼 엘리자베트는 재치
있는 화술을 가졌다. 하지만 그녀의 집, 아버지한테서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추락해 버리는 것이었다. 마르타이 씨가 도대체 그런 데 흥미를 느끼지 않는 데도 이유가
있었지만, 그녀 자신 그 모든 일을 실제로 겪었으면서도 역시 겪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이야기 가운데에는 뭔가 불투명하고 공허한 구석이 있었다. 그 중 가장
불투명한 점은, 그 모든 것을 그녀가 같이 보아 오긴 했지만 바로 곁의 그녀 자신의 생은
이질적으로 흘러왔다는 것, 매일같이 극장에 가 앉아 대상계에 마취 당해 버린 관객의 경우처럼
그녀의 피부 바깥에서 흘러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녀를 진정으로 흥분시켰던 문제에 관해선
한마디도 입밖에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얘깃거리가 못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우스꽝스럽게도 "황금사자"라는 타이틀의 표창이 수여되었던 그녀의 마지막 기사 중의 어떤
내용에 관해 얘기할 건덕지가 무엇이었단 말인가. 그 기사란 단지, 다른 많은 기사나 마찬가지로
낙태의 문제, 수많은 여자들이 열을 내어 고발하며 파문을 그리는 예의 불쾌한 스토리와
관계되는 것일 따름이었다. 이번에 그녀는 법조항의 전선에서 싸우게 되어 많은 의사며 법률가를
찾을 일이 있었다. 온통 저마다의 의견을 가진 전문가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엘리자베트의 눈에는,
떠들어 대는 여자들 못지 않게 무엇을 주장하기에 확신이 서 있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더욱
그것이 아주 중요한 테마라는 것을 그녀도 깨닫고 있었지만 결과는 해결과는 상관없이, 다만
그녀 혼자 책상에 앉아서라도 넉넉히 생각해 낼 수 있을 법한 문구만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었다. 이젠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됐으면서도 엘리자베트는 그것을 근거로 전율할 사진과
기사가 실린 보고서를 작성해 내었고, 그런 한편에서는 그 모든 것이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
당사자인 여자들과 의사들과도 상관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세련되고 섬세한
산부인과 의사랑 담화를 할 때에는, 느닷없이 이유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벌떡 일어나 당신의
잘난 지식이며 조심스러운 공식 따윈 아무 짝에도 쓸 수 없겠노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것이, 이 모든 여자들과, 자기네 생에 관해 한마디 진실도 말할 수 없는 그녀들의 무능과,
그녀들의 남자와, 그녀들의 당면한 곤란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이 의사한테
느닷없이 묻고 싶었다. 누군들 나한테 물어본 적이 있나요. 누군들 자기 생각을 갖고 삶에 맞선
자한테 진실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나요. 그래놓고도 당신네들은 모든 문제에 대해 이런 정신
빠진 이해심을 갖고,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만들어 놨나요. 사람들한테서 말이라는
행위를 제거함으로써 따라서 체험과 사고까지를 제거함으로써 그들을 죽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도대체 도저히 안 든단 말인가요.
물론 그녀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고, 예의 바르게 감사를 하고, 구역질 나는 이른바 탁월한
보고를 제출했던 것이다. 그 보고서는 그것으로 표창을 받은 즉시 쓰레기통에 처박혀 벌써
잊혀졌다.
40대 이후의 그녀는 점점 지루해졌다. 두번째 장 피에르는 언젠가 한 빈 여자랑 살았던 얘기를
했다. 믿을 수 없이 명예욕이 강한 동시통역사였다. 그러면서 참 다행스럽게도 직업 때문에
남자를 버리지 않을 여자가 엘리자베트 말고도 또 있다는 것, 자기가 보기에는 끊임없이 바보
같은 녀석들한테 채인다는 점에서 두 여자는 참 비슷한 상황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 이래로 자기가 병신이 되어버려서 심지어 엘리자베트 곁에서까지 결혼에 대한
강박에 목졸리는 느낌이라며, 그건 둘 다를 위해 유감이라고 말했다.
클로드 마르샹과 그녀는 가장 잘 어울린 셈이었다. 단순하고 위태롭지만 직선적으로 시니컬한
인간으로서 암흑가로부터 스스럼 없이 파리의 영화관에 끼어들어 엉큼한 장사를 벌이고 있는
그는, 엄청난 정력가라서 그 정력이 때때로 전염되듯 그녀에게도 옮아왔다. 뼛속 깊이까지 철저히
타락한 그를 보면, 온통 소심하게 착실하고 신경쇠약의 남자들만 상대해 오며 슬픔을 겪은
엘리자베트로서는 사뭇 자유로운 느낌이 들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녀가 이 하잘것없는
갱단 패거리와 어울릴 수 있는지 이해를 못했지만, 그녀는 아예 그런 데는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이들 둘이 자주 만나기를 집어칠 때쯤은 다른 이들도 어느새 이 남자 앞에서 설설 기게 되었다.
그가 그 새에 동시녹음 회사를 두 업체나 사들여 당장 영화제작자를 차례로 쓰러뜨린 까닭에,
그들도 이미 그를 갱단 패거리로는 취급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는 아직도 가끔 엘리자베트와
식사를 하러 가고, 그가 "한판 털던" 옛 시절을 회상하며 축배를 들었다.
남자들과의 문제에서 그녀의 접촉의 빈도는 그녀의 무관심의 증대와 상관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훗날까지도 그녀가 재미스런 마음으로 황무지의 시대와 목마름의 노정이라고 이름
붙였던 시절은, 오로지 지나간 날에만 존재했던 것이었다. 그 시절까지만 해도 상실을 겪을
때마다 번번이 눈물을 흘리면서 고집스럽게 혼자 주저앉아 있었고, 그러면서도 그것말고는 달리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긍을 갖고 다시 일을 계속했었다. 지난날 자기가 뭣 때문에 그토록
슬펐었는지, 이제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안정되고 균형이 잡혀 있었다. 다만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벌써 충분히 오래 지속되어 온 필립과의 관계를 언제 막음하는가. 언제
그 기회를 잡는가 하는 것뿐이었다. 사실 무작정 파리로 돌아가 필립더러 그의 파자마랑
면도기랑 책들을 가지고 꺼지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쉽사리는 안 될 일이었다.
그를 위해 해줘야 할 일이 몇 가지 남아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 난 당신이 필요치 않아.
당신도, 어느 딴 누구도. 그건 당신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오로지 나한테 속한 문제야. 그걸
당신한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아!.) 이런 말들은 생각 속에서야 쉽지만 파리에 가서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입밖에 낼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또 이렇게도 쉽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내 동생이
결혼을 했어. 그러니까 우리 사이는 끝난 거야. 당신이 이해를 해주었으면 좋겠어. 다만 한 가지
희망만은 그녀도 털어놓고 싶지 않았고, 털어놓아서도 안 되었다. 실상 근 30년이 지나도록 단
한 사람의 남자도 못 만난 이 마당에,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만 존재의 의미를 가진 남자,
그녀에게 불가결의 남자, 그녀가 기대하는 바 신비를 가져오는 강한 남자, 유별난 자이며 잃은
자이며 나약한 자이거나 또는 이렇듯 그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가 아닌, 진정한 한 남자를
단 한 사람도 못 만난 이 마당에, 어차피 남자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새로운 남자가
없는 한에서는, 그냥 잠시 친절하고 마찰 없이 어울리기야 얼마든지 가능한 노릇이었다. 거기서
더 이상은 걸러져 나올 게 없었다. 무릇 남자와 여자는 간격을 취하고 피차 상관 안 하며
지내다가 끝내 혼란과 헛갈림, 모든 관계의 불일치 속에서 서로를 터득하는 게 상책인 것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다른 무엇이 다가올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건 다음에야 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강하고 신비하며 진정한 크기를 갖고 있으리라. 각자가 다시 서로 앞에 몸을 던져 굴복할
수 있는 무엇을.
저녁 뉴스가 끝나고 전화벨이 울릴 때 엘리자베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뭐라고 하는
마르타이 씨를 무시하고, 아래층 전화통으로 곧장 달려갔다. 이런 전화질이라니, 요새 젊은
애들은 순전한 병적 수작이란 얘기가 틀림없었다. 몇 시간 동안 통화가 안 되어 안절부절
못했었다는 필립의 말에 이어 두서없는 말이 오고갔다. 오늘은 특히 그녀가 아쉬웠다는 필립의
말. 오늘 아침에 결정됐는데 뤼크의 조수로 일할 겁니다. 그 사람 벌써 새 영화 준비 작업을
착수했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엘리자베트는 참 잘됐다고, 그거야말로 오랜만에 듣는 최대
희소식이라고 거듭거듭 축하하며, 이제 그녀가 돌아가면 같이 어떻게 축배를 올릴까를 말했다.
그와 동시에 미심쩍어 했는데도 역시 그 일이 잘 맞아떨어졌다는 것, 필립은 자기 생각보다 훨씬
낙천적 성품이라서 이제 와서 그 일로 그녀한테 구차스레 감사 운운하기를 벌써 잊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필립이 아예 그런 감사 따위의 생각에 못 미치도록 열을 내며. 다만 왜
그에게도 "나의 상치(mon chou)"라든가 "나의 병아리(mon poulet)"라는 말 말고 좀더 근사한
말이 안 떠오르냐고 물었다. 벌써 오래 전부터 그녀의 신경에 걸리는 말들. 클로드, 장 피에르,
장 마리, 모리스, 두번째 장 피에르, 그들한테 그녀의 존재는 항상 셰리(cherie)와 몽 슈(mon
chou)였다. 약간 심통이 담긴 음성으로 "그렇습니다, 몽 슈"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이어서 그녀는
유쾌하게 휴가에 대해 말을 꺼냈다. 얼마나 좋은지 몰라. 내일은 수영을 하러 갈 거야. 그러자
자기 몫의 뉴스는 이미 털어놔 버린 필립이 말했다. 이제 살 좀 찌십시오. 최근에 당신이
어떻게나 말랐는지 걱정입니다. 그래도 그곳 시골에서는 분명히 좀 식사를 잘하시겠지요. 그리고
두 사람 다 말했다. 그럼 곧 만날 때까지, 되도록 빨리 만날 때까지!
하지만 필립의 말마따나 이곳 시골에서 그녀와 아버지는 고기 조각 몇 좀과 샐러드, 과일을
씹고, 우유와 산성 우유를, 물론 젖소에서 직접 짠 게 아닌 시골 낙농장에서 온 우유를 마시는 게
고작이었다. 시골다운 것이라곤 여기도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은 지방 중앙시의 교외였다. 이
중앙시는 동시에 행정중심지기도 해서 국제 철도망과 항로에 연결된 기차와 비행기가 하나씩
있어, 그것을 타고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런던까지 갈 수 있었다. 이 항로가 있는 근거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케른턴과 영국 사이엔 이렇다 할 관계가 있을 턱이 없으니 말이다. 오히려 남동행의
비행기가 요긴할 법한데 어찌된 건지 이 비행기도 이상스레 늘상 만원이었다. 케른턴으로 오는
승객은 독일 사람뿐인 걸 보면, 영국 사람들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내리고 독일인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탑승하는 모양이었다. 이 비행기 노선을 이용하는 로베르트는 늘
클라겐푸르트까지 곧장 타고 오는 유일한 승객이었다. 엘리자베트한테는 모든 연결이 불편하게
되어 있었다. 빈이나 밀라노 심지어는 베니스를 경유해야 했고, 그리고 나서도 집으로 오기까지
기차 안에다 꼬박 몇 시간을 바쳐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마르타이 씨한테 말하기를, 이해해
주세요. 싫은 게 아니라, 다만 힘이 드는 거예요. 그렇잖아도 노상 여행하는 신세라서, 전 여행이
싫어요. 저한텐 베니스도 다른 사람들의 베니스가 아녜요. 기차 왕복의 고통스러운 표석일
뿐이에요. 밀라노도 비극적인 곳이지요. 빈은 아예 말할 것도 없구요. 빈에서부턴 시영 급행열차
속에서 또 몇 시간, 제가 알아듣는 얘기를, 제 귀에 너무나 속속들이 들어오는 수다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다카르와 파리 사이를 왕복하는 게 저한텐 훨씬 편해요. 아무리 잘못된 표현,
기만된 표현, 속된 표현을 써도, 그 수다의 낱말 하나하나를 뿌리 속까진 못 알아들으니까요.
하기야 마르타이 씨처럼, 최소한 로베르트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또 어디 있을까. 몇 시간 동안
오스트리아의 기차 속에서 그렇게 얼굴 뜨거운 상황에 안 빠지기 위해서, 차라리 밀랍을
귓구멍에 틀어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마르타이 씨는 그녀의 말을 완전히 공감하진 못하면서도 수긍을 했다. 그래서 난 여행을 않는
거다. 난 이제 아무와도 떠들고 싶질 않아. 그녀처럼 아버지도 사투리 말씨를 사랑했다. 그래서
적절한 순간마다 말귀에 일부러 박아 쓰며, 언제라도 자기의 기분, 표정, 성품에 어울리게 훌륭한
전통적 독일어 발음을 했다. 또한 열을 내어 주워섬기며 신문에서 몇 구절 읽어 들려주기를
즐겼다. 이를테면 이런 주석을 붙이면서. 대체 이런 표현을 어떻게 다시 찾아냈지?
"Verunsicherung" 같은 말 말이다! 내 말 듣고 있니? 아무튼 마르타이 씨는 엘리자베트와
로베르트가 그처럼 많은 외국어를 구사한다는 걸 퍽 자랑스럽게 여겼다. 너희들이 누구한테서
그런 소질을 받았는지 알 수 없구나. 슬라브식 딱딱한 독일어나 하던 어머니 유산은 분명 아니고
나한테서도 아니지. 나야 말이라는 걸 배운 적이 없으니까. 슬로베니아 말조차 말이다.
엘리자베트는 로베르트의 어학 재능이 대단한 게 못된다는 것, 직업 때문에 두 가지 언어를
배우게끔 강요당했을 뿐이라는 내용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오히려 빈에서 장작 독일어로 뭘 쓸
때엔 이렇다 할 재능을 보여주지 못했던 엘리자베트 편이 어학엔 소질이 있는 셈이었다. 다만
이상한 것은 그녀는 불어와 영어를 쓸 수 있으면서도 트롯타처럼 두 언어를 구사하는 경지에는
아무래도 도달하지 못했다. 그녀의 언어는 결코 완벽한 게 못 되었고 다만 로베르트보다 약간 더
재치와 적응력, 듣는 재간이 좋았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한결 신중했다. 곧 그녀는, 어떤
특정한 영어를 하려고 애쓴 적이 없이 영국이나 미국 친구들의 특성을 흉내내려 들지 않고,
중립적 언어에 머물기 때문이었다. 트롯타는 언젠가 그녀가 결코 자기처럼 불어에 능통할 희망은
없다고 불평하면서, 그렇지만 자기도 그녀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진 않는다고 말했다. 그 편이
훨씬 좋아. 당신은 나처럼 이렇게 해체된 상황 속에 결코 빠져들지 않을 거요. 언어 역시 나를
해체시켜 버렸단 말이오. 처음엔 그도 그녀가 자신 없어 하는 대목에서 몇 번인가 교정을
해주더니 어느 날 그 정도로, 그가 완곡하게 표현한 대로, 그녀의 "생업"을 위해선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역시 도와주는 이가 있었고 그곳에선 훨씬 수월하게 익숙해졌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문어체의 언어를 통용하는 데 길들어 있는 덕분에 그녀라고
프랑스에서처럼 유난스런 예외가 아니었다. 트롯타는 타향 출신처럼 독일어를 했고, 오히려
불어는 프랑스 사람과 진배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점에 전혀 개의치 않았고, 바로 오래 떠나 산
사람처럼 할망정 두세 가지 슬라브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점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한번
그가 그녀한테 말한 적이 있었다. 난 이제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못함을, 그리워하는 장소가
아무 데도 없음을 깨달았소. 그렇지만 내게도 심장이라는 게 붙어 있어서 오스트리아에 속했으면,
하고 생각한 적은 있소. 그런데도 모든 게 순간에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오. 심장과 정신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오. 다만 내 안의 무엇인가가 피를 흘리고 있을 뿐이오. 그렇지만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겠소.
엘리자베트는 지금 아버지랑 얘기를 하면서, 아무리 부정을 할망정 트롯타 역시 결국,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 아버지나 다름없이 엄연한 오스트리아 사람이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아버지는
마치 "그런 척" 하는 것을, 마치 이 정신이라는 것을 아직도 언급해도 가능한 듯이 구는 일체의
것을 불신하면서 완고하게 고집했다. 역사의 한 오류가 영원히 교정되지 못하고 만 것이야.
역사의 단절은 1938년에 돌연히 닥친 게 아니라 훨씬 과거로 소급해서부터 금 간 틈이 있었고,
그 이후에 온 일체의 사태는 해묵은 틈서리의 결과일 뿐이야. 또 나 자신도 갈피를 못 잡고
살았던 나의 세계는 1914년에 결정적으로 소멸되어 버린 거야. 관리라는 게 이미 없어져 버린
시대에 내가 어떻게 돼서 빠져들어 살아왔는지, 이 상황을 난 도무지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지나간 시대를 예리하게 비판하며 마치 자신이 그것을 범하기라도 한 듯 낱낱의 오류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꼬집어 냈다. 아버지가 노경에 접어들면서부터 엘리자베트는 점점 열심히
아버지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 이전에야 사실 그런 문제들이 별로 흥미거리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오로지 미래만이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본질로는 결코 사회주의자가 못
되면서도 별수 없이 늘 "붉은 쪽"을 택해 왔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불평을 토로했다. 얼른 이놈의 역사가 서둘러 흘러야지! 그래야 이놈의 위선이
끝장나겠지. 난 이렇게 뒤죽박죽된 지난날을 회상하는 게 딱 싫다. 내 기억에 있는 건 실제로는
영 딴판의 것이었다니까. 오늘날에 와선 아무하고도 상관없는 것이다. 로베르트가 두번째 학기에
대학에서 돌아와 신바람이 나서 공산주의 편을 택했다고 전했을 때만 해도 아버지는 다만 미소를
머금었을 뿐, 이렇게 말했다. 걔 같은 철부지가 공산당을 택하다니, 그건 아무래도 넓은 세상의
개인 사상을 잔뜩 주워섬긴 엘리자베트 네 책임이다. 안 그러냐? 세상도 한때는 진실로 크고 좀
더 앞으로 진전된 때가 있었지. 그렇지만 그 얘긴 설명 안 하겠다. 그냥 그렇게만 앞으로 나가라.
그걸로 틀린 건 없다.
엘리자베트는 그때 꽤 당황해서 울분을 터뜨리며 외쳤다. 전 다만 제가 생각하는 점을 말하고
설명해 줬을 뿐, 지금껏 누구한테도 조언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어요. 어째서 하필 제가 그
철부지한테 영향을 줬겠어요. 그 애도 자기가 하는 짓을 스스로 알 거예요. 아버지는 항상
우리가 스스로 생각을 감당하기를, 젊다는 구실로 핑계를 대지 말기를 원하셨어요. 미숙한 짓이란
어떤 젊은이한테라도 있을 수 없다고 말예요. 열두 살, 열세 살 어린애 적에 이해 못한 건
나중에라도 결코 다시 이해될 수 없는 거라구요. 아버지의 그런 견해에 책임이 있지 제 탓은
아니에요.
마르타이 씨는 묘하게 딸과 아들의 사랑을 한꺼번에 받았다. 그것은 그가 자식들의 사랑을
사겠다고 무슨 행동거지나 말을 전혀 하지 않는 데 원인이 있다 할 수 있었다. 그는 자기가 무슨
희생을 한다거나 하는 소리를 자식들 앞에서 털끝만치도 내색하지 않았다. 자식들을 위해 그가
한 일은 수두룩했지만, 어떻게 해서 라우벤베크의 집을 계약했고 수십 년에 걸쳐 부금을
지불했는지 하는 따위는 한마디도 언급하는 일이 없었고, 그런 일로, 또는 재혼을 안 한 일로,
감사 같은 걸 아예 기대하지 않았다. 그가 재혼을 안 한 이유는 엘리자베트와 로베르트에게
계모의 존재를 무리하게 요구하기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과연 그 점은 그가 옳게
행동한 것이었다. 두 자식 다 아버지 가까이 웬 여자가 존재한다는 걸 느낀다면, 마르타이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그들이 예측 못하게 닥친 비정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 뻔했다.
언젠가 아직도 고등학교 학생인 로베르트를 파리로 오라고 했을 때, 뒤늦게야 엘리자베트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근본적으로 말야, 너한테도 그게 좀 분명해졌는지 모르겠구나. 우린
아버지를 완전히 독점하고 있는 거야. 아버지는 참 훌륭한 남자야. 그런데도 우린 참 무정하게
아버지한테 감사를 한 적도 없잖니. 아버지가 결혼하신다는 걸 상상해 봐. (그건 아마 아버지한텐
충분히 주어진 권리였을 거야.) 우리가 어떻게 처신했을까, 아버지랑 딴 여자한테 어떻게
맞섰을까를. 지금에 와선 그걸 이해할 것 같지만, 거리낌 없이 용납할는진 아직도 난 모르겠어.
지금 생각이 나는데, 그때 너의 선생님이었던 용케라고 하던 예쁜 여자를 아버지는 싫어하지
않는 기색이셨어. 그 여자는 분명히 아버지를 좋아했구. 그때 사실 그 여자가, 일은 아버지한테가
아니라 나한테 전적으로 달린 거라고 하면서 청혼을 했었거든. 참 좋은 여자였는데, 그 여자라면
같이 어울려 잘 살았을 법도 한데. 그렇지만 우리가 용케 부인이랑 라우벤베크에 어울린 장면을
너라면 상상하겠니? 난 잘 안 된다. 그러면서 우린 아버지를 완전히 외롭게 내버려 두고 있어.
너도 곧 결국 집으로 돌아갈 텐데 집은 어떻게 할 참이니, 로베르트? 언젠가는 네가 그 집을
처분해 버리겠지. 아버지가 이번에도 나랑 그 점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집은 네 것으로 하자는 데
의견의 일치를 봤어. 그렇지만, 내가 나이가 들면, 방 하나의 권리를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 희망은 늙어서 너한테 부담을 끼치고 싶진 않은 거다. 아무튼 나도 내 집을 갖게 될
거다. 언젠가는 때가 되면 결혼도 하겠지. 그렇지만 네가 결혼하고 나면 문제는 좀 힘들어. 네
부인되는 여자가 날 싫어할 수도 있고, 내편에서 그 여자가 탐탁찮을 수도 있잖니. 그럼 아버지가
우리한테 한 일이 온통 헛수고가 되는 거지 뭐냐.
후딱 엘리자베트는 말하기 힘든 대목의 끝을 맺었다. 아버지께 그 점을 열 번쯤 곱씹어 생각해
보시라고 말했어. 그럼 최소한 아버지한테 생각하실 거리라도 있잖니. 네 불량한 라틴어
성적에서 시작해서 내 방문에 이르기까지.
그때 처음으로 그녀는 로베르트와 테르트르 광장에 앉아, 그가 미처 이해 못하는 사물에 관해
설명을 해주었고, 그를 짓누르고 있는 초기의 학교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특히 다른 애들이
떠들어 대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로베르트는 자기가 아직껏 경험도 없는 숙맥이라는
걸 다른 애들한테 숨기기 위해 자기도 여자라면 잔뜩 알고 있는 듯이 굴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그녀는 몇 가지 도움이 될 법한 말을 들려주며, 딴 애들도 결국 공연한 허풍일 거라는
그의 추측이 옳다고 북돋아 주었다. 그 애들도 정작 여자들이랑 이미 무슨 경험이 있었다면, 그걸
굳이 화제로 들춰낼리는 없으리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로베르트가 갓난애 적 그 애를
위해 기저귀를 빨며 그 애 때문에 잠을 설치는 일이 무엇보다 소중했던 그 옛날처럼, 자신의
존재가 쓸모 있음을 느꼈다. 그때 로베르트는 밤마다 곧잘 깨어 마르타이 부인 대신 번번이
엘리자베트를 찾아 울어댔던 것이다. 이어서, 아버지에 관해(생각할 거리를 가지시도록) 떠든
사실이 터무니없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느새 로베르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이제 그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도 없잖은가. 제발 로베르트가 사춘기의 고민과 학교 생활의
고민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 말을 흘려들었다면 싶었다. 네가 화학에선 첫째면서 라틴어를
싫어한다면 그럼,--그녀는 교훈조의 설교를 늘어놓진 않았지만, 그날 테르트르 광장 위로 내리는
부드러운 밤에 에워싸인 채, 로베르트가 지금까지의 생애에 최초로 맛보는 삶의 항진제가 될
법한 화제와 열 여섯 짜리 소년이 여자애랑 잔 경험이 없다는 건 결코 수치가 아니며 그 모든
얘긴 어리석은 허풍일 뿐이라고 로베르트를 안심시키는 따뜻한 화제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도대체 그것을 굳이 경험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유경험자라고 할 수 있고 솔직한 엘리자베트
편이 아마 훨씬 그 점에서 선배였겠지만, 어쨌든 그녀 자신이 학교 안에서 대단한 관심의 적이
되고 있는 "여자들"의 하나는 못 되잖는가. 동시에 그녀는 뜨겁게 애틋함을 느끼며 아버지를
생각했고, 이제 다시는 당사자보다 자기가 더 아픔을 느낄 사람에 관해 무슨 말이고 입밖에 안
내리라 마음먹었다. 그날 밤, 그녀는 일생 최초의 몽정에 몽롱히 취해서 그녀의 얼굴과 머리칼을
더듬기 시작하는 로베르트를 침대 밖으로 밀쳐 던졌다. 이제 이것은 결정적으로 끝나야 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제 와서 시작되어선 안 될 일이기 때문이었다.
연못으로 짧은 오후 산책을 하면서 엘리자베트는, 8번 도로를 거쳐서도 결국 공사장까지밖에
못 가겠더라는 얘기를 했다. 마르타이 씨는 별로 놀랄 거리도 못 된다고, 이 공사장의 설계자들이
도대체 돌대가리같이 뭘 할 수 있을지 자기는 늘 비관스런 느낌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렇긴
해도 1번 도로를 넘어 멀리까지, 술집 예롤릿츄를 지나서 가면 내리막이, 호수로 가는 내리막이
있을 거다. 그것도 안 된다면, 만원버스랑 관광객과 부딪치는 위험한 시간을 피해, 내가 모처럼
새벽같이 너랑 한번 호수로 버스를 타고 가마. 호숫가를 점령하고 있는 자동차며 인파, 왁자한
소음이 없어질 9월 중순이 되어야 비로소 나도 어쩌다가 이긴 해도, 수영을 하러 가지만 말이다.
여기 라우벤베크가 그녀한텐 그토록 조용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아버지는 이해할 턱이 없었다.
사실 이곳에는 파리의 그녀의 집 안에 보다 더 요란한 소음이 퍼져 있을 때가 많았다. 물론 그
소음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개가 한 마리 짖고, 자동차가 모퉁이를 돌고 10분 뒤에 다시 한
대가 지나가고 그런 정도였지만 이 단속적인 소음들이 실은 대도시에 꽉 찬 지속적 소음보다
요란하게 퍼지는 감이 있었다. 마르타이 씨는 분별 없이 몰아가는 차 소리를 참지 못했다. 한
번은 웬 사람이 하루 종일 정원 문 앞에 차를 세워놓은 적이 있었고, 밤이 되니까 한 술 더 떠
두 대씩이나 이 근처에 주차하고는 차 문 소리를 꽝꽝 내며 닫는가 하면 시끌벅쩍 떠들어
젖혔다. 그것도 자정이 다 되어서 말이다. 그때 마르타이 씨의 인내심이 폭발을 해버려 창밖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는 그놈들이 당장에 조용해졌으며, 그 사고는 아무 잡음 없이 지금껏
다시는 반복된 적이 없다고 흐뭇해 하며 설명했다. 이웃의 어린애들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또렷이 들려왔고, 그보다 더 또렷한 것은 창문을
내다보며 아이들을 향해 외치는 젊은 부인의 날카로운 음성이었다.--얘애! 아가야! 얘얘!
아가야!
그래도 이곳은 조용함에 틀림없었다. 이 정적은 소리없는 집 안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엘리자베트가 젊었던 시절 한때 삶으로 꽉 차 있던 이 일대에는, 지금 어린애들이 달린 젊은
부부들이 세들어 있었고 노인들은 불과 몇 안 되었다. 마르타이 씨는 착 가라앉아 말했다.
기억하니, 슈타이어마르크 출신의 요나스 부인, 왜 지금은 유명해졌다는 조카를 가진 부인
말이다. 그 조카가 라디오에서까지 화제가 된다는, 온통 알아먹을 수 없는 소리를 쓰는
시인이라든가, 나야 비판을 않겠다만, 아무튼 그 부인이 지난 겨울에 돌아가셨다. 부크 부인의
자식들은 캐나다로 갔지. 에드문트는,--생각 좀 해보자. 그 애가 로베르트보다 좀 위든가. 그
애는 미국으로 건너갔어. 아리기 씨는 한 달 전에 세상을 떴구. 기억하니, 그 사람 한때 켈라그에
있었지.
엘리자베트는 이러한 사망의 소식에 익숙해 있었다. 해마다 새 소식을 들었고, 화제를 돌려
옛날의 "이웃 어린애들"에 관해 물었다. 헬가는 스코틀랜드로 결혼해 갔지. 그래, 스코틀랜드
사람한테. 리제는 그라츠로 갔는데, 벌써 두번째 이혼을 했어. 지금은 그라츠에서 피아노 교수를
하고 있다더라. 욜란다는 여름이 되면 종종 빈에서 다니러 오는데, 나보곤 인사도 않는다. 그
애가 날 모르는 척하는데, 아무튼 나라고 그 계집애한테 인사를 하겠니. 고아원 건물 앞의
식료품상은 아직도 옛날과 똑같은 이름이지만 주인은 외부에서 온 사람들로 바뀌어, 지금
슈퍼마켓으로 개조할 참이었다. 이 단어를 정확히 발음할 수 없는 마르타이 씨는 비웃음을 담아
뭐라고 더듬거리며 엘리자베트한테 설명을 늘어놨다. 슈퍼뭐라든가 하는 거 있잖니.
철사바구니를 하나 들고 좁은 가게 안을 빙 돌아 계산대에서 돈을 내고, 다섯 사람씩이나 그
안에 빈둥거리며 아무것도 안 하면서 들어오는 사람마다 반색을 하고, 그러는 곳 말이다. 다음날
엘리자베트는 이 가게의 변모를 구경할 참으로 쇼핑을 하러 갔다가, 그녀로선 생판 낯선
사람들한테 당장 신분을 들키고 말았다. 여사께서 여기 시골에 다니러 오셨군요. 미니, 여사를
도와드려라. 아직 혼자서는 찾으실 수 없을 거다. 도저히 안 돼. 정말 뜻밖의 일입니다.
춘부장께서도 퍽 기뻐하시겠지요. 춘부장께서는 참 훌륭하신 분이지요. 언제 봐도 그렇게
정정하시고 새벽같이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시지요! 엘리자베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했다.
모두가 그녀를 도와, 정말 구석에 박혀 있어서 좀처럼 눈에 안 띄는 우유병을 찾아주었고,
계속해서 그랬다. 애당초 그녀가 필요한 건 모두 남이 찾아주었기 때문에, 바구니 따윈 모셔두고
써먹지 않아도 될 뻔했다. 주인 비클러 씨는 신중하게 유난히 천천히 계산을 하면서,
엘리자베트가 파리에 살고 있느냐고 슬쩍 물었다. 네, 파리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내년이면
나도 아내랑 파리로 갈 겁니다. 금년엔 막 시즌이 열릴 때 카나리아 군도의 테네리파에
갔었지요.
메모첩과 그림엽서를 사려고 문방구점에 갔을 때 엘리자베트는 첫눈에 주인 여자를 못
알아보았다. 커다란 흉터투성이의 볼품 없는 얼굴. 얼마 후 그들은 악수를 교환했다. 일찍이
그들은 같은 클래스에 있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소녀 적에 다른 몇몇 애들이랑, 이
문방구점과 관련된 스캔들에 얽혀 들어갔던 아이였다. 그 당시 열 다섯 짜리 소녀들이 몇 명
어울려 이 문방구점이 거느리던 미성년 소굴에 몰려 몰려갔었던 스캔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가 여기 이 여자와--엘리자베트는 이름이 안 떠올랐다.--린데인지 게르린데와 결혼을 한
모양이었다. 여자는 뚱뚱한 몸집으로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삼 년 전에 남편은 죽었어.
쉬운 세월은 아니었지. 남편은 사실 내 아버지뻘이나 되는 나이였거든. 지금은 그저, 그때 가장
멋진 남자라고 동네에 소문난 사람한테 시집간 걸로 내가 몇 명 다른 애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던 거나 감사해야겠지. 여자는 끙끙거렸다. 산다는 건, 정말 일장 소설이라니까, 그것도 결코
아름답지 못한. 넌 어떠니? 넌 그런 구질구질한 것 없이 살았기를 바래. 아무튼 겉봐선 그때나
다름없구나. 말라깽이 장대라고 우리가 맨날 부르던 일 생각나니? 엘리자베트는 빙긋이 웃고는
다시 오마고 약속했다. 하지만 분명코 다시 안 가리라. 그녀는 우울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 때 그녀는 장보러 가서 있었던 화제를 재미있기 얘기하려고 꺼내다가 문득 말을 끊고
문방구점 여주인의 얘기를 생략했다. 아버지가 눕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녀는 그냥 이렇게
말했다. 좀 늦지만 잠깐 나가겠어요. 커피 시간에 저를 기다리진 마세요!
그녀는, 다시 한번 세 갈래 길 중의 하나를 시도해 봐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훼엔베크를 걸었다. 그리고는 곧 옆갈래 길로 굽어들어 북쪽으로 난 팔켄베르크 성으로 가는
10번 도로를 향했다. 이 길은 갈수록 좁아지는 데다 침침하고 눅진거렸다. 최소한 호수로 가는
방향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지금은 분명 호텔이나 여관으로 둔갑했음직한 팔켄베르크 성
앞에는 독일 자동차가 여러 대 주차하고 있었지만, 성채에 어울리지 않게 놓인 정원 안의
알록달록한 테이블에는 사람의 그림자라곤 전혀 없었다. 손님들은 잠을 자고 있거나 호수로 나간
모양이었다. 그녀는 테이블 하나에 자리를 잡고 담배를 피우며 20실링이 수중에 있는 걸
확인했다. 누가 오면 이 테이블을 차지한 걸 정당화하기 위해 커피나 차를 주문해야 할 테니까
말이다. 가장 최대의 오류는 아무래도 뉴욕에서의 삶을 그토록 섣불리 포기해 버린 일인 것
같았다. 휴즈와 결혼하던 당시만 해도 이미, 자신이 토롯타를 사랑한다고는, 그가 자신에게
적합한 남자였다고는 그녀의 염두에 없었다. 그리고 아닐 오후 숲의 전망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당시의 자기한테 유감스럽게도 뭔가 온통 어긋나 돌아갔었다는 생각을 굳혔다. 편지 한 통을
보고 그토록 섣불리 이혼에 동의해 버리는 잘못을 저질렀다니. 즉각 그의 뒤를 쫓아 떠났어야
했다. 진창 같은 자기의 생활 속으로 그녀를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다는 둥, 줄줄이 황망스런
자책의 내용이 담긴 그의 편지는, 짐작컨대 진정 이혼을 원하는 마음으로 씌어진 게 아니었다. 그
안엔 이런 소리도 씌어 있었다. "당신한테 그걸 설명하는 건 내 힘에 벅차오. 당신은 좀더 가치
있는 인물이오. 동화 속의 왕자를 만나 나 같은 건 잊기를 바라오." 하지만 이혼을 하자는
청이 담긴 죄책의 편지 구절은 지금 잘 기억할 수도 없었고, 다만 그토록 서로 잘 어울려 살아온
처지에 도대체 무엇이 그의 힘에 겨웠는지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갔다. 그에 반해 그녀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뉴욕에서나 심지어 훗날까지도 그가 보낸 첫 편지의 첫 구절 "내 마음의
무관의 여왕이여!(Uncrowned Queen of my heart!)"라는 구절 덕으로 그녀 자신 줄곧
살아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이 편지의 첫 구절을, 장본인 휴즈보다 더 오래 두고 사랑했다.
웬 이탈리아 청년과 함께 멕시코로 도피행각을 벌여서 그녀를 삼 주일 동안 죽을 지경으로
심려에 빠뜨렸던 당시, 휴즈는 또다시 미망에 빠져버렸거나, 뭔가를 곡해했음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두말할 것 없이 자기도 그의 소망을 존중하지만 그녀가 보기엔 도대체 잘못이라는 게
없는데 왜 그가 혼자서만 잘못을 짊어지겠다는 건지 인정할 수 없으며, 항시 그녀를 믿어주기를,
그녀는 아무 때나 기다리겠노라는 내용의 장중한 편지를 써보냈다. 하지만 그녀의 편지 역시
그의 것 못지 않게 횡설수설이어선지 다만 짤막한 회답이 오고 말았다. 기다리지 마시오. 난
혼자 힘으로 이 위기를 뚫고 나가야겠소. 다만 한 가지 큰 부탁은 나를 용서해 달라는 것이오.
두번째 큰 부탁으로 이혼에 동의해 주길 바라는 거요. 내가 동떨어진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항상 당신 생각과 근본적으로 이혼의 원인이 되는 생각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지노는 상당히
괴로워하고 있소. 딱 한 번 봤을 뿐인 이 지노라는 자가 휴즈와 그녀의 문제 때문에 무엇을
그토록 괴로워하는지는 역시 영원히 수수께끼가 되고 말았고, 이번에도 역시 휴즈 편에서 신비와
감상으로 그 인물을 휩싸버린 셈이었다. 그녀로선 이 신비와 감상을 포착해 낼 수가 없었다.
결국 감상적 인물은 휴즈 자신이었고 지노와는 거리가 멀었다. 휴즈하고라면 만사가
순조로웠으리라. 오늘까지도 엘리자베트를 행복하게 하는 기억은 오로지 휴즈에의 회상에서만
가능했다. 휴즈야말로 진정 그녀에게 너그럽고 착한 남편이 아니었던가. 한번은 그가 주문을
받아 계약금으로 백 달러를 받은 적이 있었다. 자신이 벌어들인 이 최초의 소중한 달러로 그는,
화병이며 항아리를 총동원해도 모자라 대야며 목욕통에까지 띄워 놓을 정도로 터무니없이 많은
꽃을, 게다가 어마어마한 크기의 비싼 향수를 사들고 왔다. 그때 엘리자베트는 어처구니없어
했었다. 그것도 기쁨에 벅차서가 아니라, 지불 못한 전화계산서가 아주 촉박하던 참이라서였다.
하지만 결국 레지가 나타나질 않아 독일제 커피를 한 잔 절약한 채 몸을 일으켜 이젠 성이 아닌
성채에 작별을 고하며 시선을 보내고 있는 지금, 그녀의 눈앞에는 웃음과 울음 사이에서 한아름
꽃을 들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꽃에 묻혀 쓰러질 정도로 뭇 남성들이 보낸 꽃다발을
안은 영화 속의 프리마돈나처럼. 그녀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바보야. 오, 휴즈,
당신 정말 돌았군요!" 지금은 물론 지불한 전화계산서 같은 건 엘리자베트의 기억에 남아 있을
턱이 없었고, 지불하기 어려웠던 계산서만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또한 꽃다발과 던져진 돌,
휴즈의 소득없는 행위,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겐 휴즈의 존재로 화해, 그녀 안에서 후광을 업고
살아 있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는--멕시코라든가, 오늘날의 유행인 장소에서, 그 당시의
유행처럼 "프론티어" 정신이 시작되는 장소에서--비좁은 집안이 온통 꽃으로 뒤덮였던 그
시간을, 밴디트가 당신한테 맞는 유일한 향수야라고 환한 얼굴로 말했던 시간 따위를 알 바
없을지 모르리라. 그리고 남아메리카나 또는 여전히 뉴욕에서, 그녀는 역시 알 바 없는 어떤
곤혹스러웠던 일, 그녀의 기억엔 없는 어떤 아름다웠던 일, 아름다웠던 순간을 상기하고 있을지
모르리라.
5번 도로로 통하는 갈래길 앞에 그녀는 주저앉았다. 물론 비록 플라텐뷔르트까지만 여기서부터
프라이엔투른 성을 지나 내려갈 수도 있었고, 당연히 그것도 한 가지 해결 방법이었다. 그럼
도시의 언저리에 속하는 그곳에서부터 물가의 산책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아니었다. 그러자면 별수 없이 큰 길로 나서야 하는데, 이런 행색으로
사람들 틈에 나설 수가 없으니까, 빌라허 가만은 피해야 했다. 아니, 물론 그럴 수도 있었고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다만 너무 일찍 닥친 5번과 6번 도로의 갈림길 어구가 기분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내리막길로 내려가다가는 곧 풀밭에 섰다. 좀더 살펴봐야만 했다. 여기선
호수조차 안 보였다. 평지로는 분명 전진할 길이 있으리라. 하지만 들판을 가로질러서는 갈 수가
없었다. 몇 번 방황하며 길을 찾던 끝에 그녀는 되돌아와서 훼엔베크를 지나 집으로 향했다.
전화 때문에 마르타이 씨는 한동안 반발을 했다. 그는 라우벤베크에 전화가 오는 걸 참지
못하고 자식들이 주고 받는 전화며, 독일어는 할 줄 모르면서 엘리자베트를 찾는 남자들의
전화가 가소롭다는 듯 묵살했다. 그리고는 그때마다 말했다. 몇 번이나 걸어 댔는지 적어둬라.
로베르트가 계산서를 지불할 건데 말이다. 처음엔 엘리자베트도 딸인 자기로써 아버지쯤 쉽게
설득하리라 여기고 전화를 용인하게끔 아버지 마음을 움직이려고 꽤 애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꾀를 써서 뜻을 달성한 건 로베르트였다. 로베르트는 자기도 물론 계산서를
지불하는 동시에, 자기에게 거는 전화까지 엘리자베트 역시 부담하도록 만들었다. 정작 전화 따윈
원치 않는다는 핑계로 마르타이 씨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자식들의 지불을 묵인하며, 아버지로서
문제 없이 자식들을 위해 그쯤 부담할 수도 있겠지만, 너희들도 조금은 실상을 알고 상징적인
보상을 해보라는 투였다. 한나절 모처럼 휴식을 취하려 하거나 정원에 있을 때, 또는 뉴스를
들으려는 참에 전화벨이 요란히 울려 방해를 하는 바람에 마르타이 씨는 이놈의 기계를 도시
못마땅해 했었다, 게다가 늘상 하필이면 이런 곤란한 시간에 자식들은 외국에서 전화를 걸어오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오로지 화만 내며 번번이 짤막한 대꾸로 그쳤다. 편지를 쓰렴.
편지를 보내라. 벌써 삼 주일째 소식이 없잖니. 이제 뉴스를 들을 시간이다.
나중에서야 그도 로베르트가 안정된 것을 기뻐하면서 자식들의 전화에 생기를 얻었다. 다만
언젠가 엘리자베트가 뉴욕에서 전화를 걸었을 때만은 깜짝 놀랐다. 딸이 중병에라도 걸린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만 호적등본을 하나 마련해 주실 수 있는지, 자기 수중엔 서류
같은 게, 하다 못해 출생신고서 한 통 없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한참 만에야 그는 경솔한 딸이
완전히 분별을 잃어버린 모양이라고 확신해 버렸다. 기껏 결혼을 하겠다고 전화까지 걸다니.
편지 한 장이면 족할 텐데.
다음날 아침엔 비가 내렸다. 엘리자베트와 마르타이 씨는 아침 식탁에 같이 앉았다. 신문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떼었다. 알 수 없네요, 올 여름은 여름이 아니에요. 마르타이
씨는 케른턴의 여름을 변명하며 말했다. 오늘이라도 우리 해수욕을 하러 갈 수 있을 거다. 비가
오니까 사람들도 많이 못 올 테고. 그리고 나서 로레토까지 갈 수 있을 거다. 너한테야 비 같은
건 문제가 안 되잖니. 두 사람 다 사람들하고 부딪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버스를
타고 떠나 성 가이스트 광장에서 호수행 버스로 갈아탔다.
그것은 오름판에까지 조롱조롱 매달린 아이들과 긴 나무의자에 앉은 어른들을 싣고 가던 그
옛날의 지붕없는 여름 전차가 아니었다. 클라겐푸르트의 여름 전차보다 더 멋진 차가 세상
어디에 또 있었을까. 그런데 지금은 어디서나 흔히 보는 보통 모양의 버스편 뿐이었다. 그들은
걸어서 로레토까지 갔다. 그들이 수영을 하러 온 유일한 첫손님이었다.
겉옷 밑에 미리 수영복을 껴입고 온 엘리자베트는 옷을 벗어 발판 위로 던졌고, 마르타이 씨는
탈의실 안에서 번거롭게 수영복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꽤나 차가운 물 속에서 20분
동안 헤엄을 쳤다. 아버지도 그녀도 집으로 돌아갈 기분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상쾌했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몸에 열을 내기 위해 사납게 크롤을 쳤다. 아무래도 그녀가 요즘 와서 부쩍
앙상해진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시 한번 헤엄을 시도했고, 아버지도 또 한 번
헤엄을 쳐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호수 속에 부표처럼 구르는 웬 나무둥치 있는 데서 만났다.
아빠, 사랑해요(Daddy, I love you). 그녀가 아버지를 향해 소리쳤다. 아버지가 마주 외쳤다.
뭐라고 했니? 그녀가 외쳤다. 아무것도 아녜요. 추워요.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널따란 캠핑터를 지났다. 마르타이 씨는 사람들이 그것도 자진해서
빽빽이 붐비는 틈서리에 몰려 들어가 박히다니, 참 샘통이라는 투로 몇 마디 꼬집는 주석을
붙였다. 옛날에야 수영하러 가길 언제라도 좋아했지만, 이런 꼬락서니 때문에, 혼자서라면 결코
여길 안 왔을 거다. 가을 전의 호숫가는 결코 올 데가 못 돼. 온통 독일놈들뿐이잖니. 마르타이
씨는 생각에 잠겼다.--도대체가 여긴 독일인들뿐 아닌가. 이제 마침내 그자들이 뜻을 채운 거다.
우리를 사들인 셈이다. 이런 사태가 올 걸 번연히 알고 있었을, 우리네 정치를 한답시는 자들은
이 독일놈들한테 빗장을 질러놓지도 않고 뭘 한담. 이제 와서 그는 케른턴이 독일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던 자신의 젊은 날을 다시금 알알이 체험하는 게 틀림없었다. 실제적으로 농부들
대부분이 농토를 그놈들에게 팔아넘겼지. 새 땅 주인들은 어느새 손님 아닌 주인처럼 행세하고
있고. 한창 철 때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구경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게다가
식단표엔 오스트리아 사람은 알아먹지도 못할 터무니없는 표현만 씌어 있고.
"Topfenkuchen(케이크)" 대신 "Kasesesahnekuchen(치즈크림케이크)"라고 적혀 있잖겠니.
그걸 보고 로나허에서 박차고 일어나온 뒤론 다시는 그놈의 주막에 발을 안 들여놨다. 마르타이
씨는 분개해서 말했다. 그런 데다 우리네 사람들은 개처럼 순종하면서 그것이 외화획득과
관광유치를 위해 유리하다고 믿는 거다. 그렇지만 그건 관광유치와는 하등 상관없이, 사뭇 점령에
해당되는 거다. 엘리자베트도 수년래에 라인루트 지역의 절반이 케른턴으로 몰려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부자들은 오질 않았다. 그들은 가난한 땅으로 가는 데 몸을 사리리라. 하지만
"붉은 쪽"을 택한 아버지의 말인 즉 이러했다. 이 무식한 떼거지들이 커다란 자동차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면서 이 땅을 망쳐버리는 거다. 그건 아무리 해도 나로선 못 참겠다. 아침 아홉
시부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가면서 맥주를 마셔대고 연방 자동차를 씻어대고는
"페네디히(베니스)"로 미친 듯 줄달음치는 이 떼거지들의 소음이 어디를 가나 판을 친다.
엘리자베트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가 더 이상 흥분하는 게 못마땅했다. 이 호수도 옛날
우리의 것이었던 호수가 아니야. 물맛도 다르고 출렁거림도 다르다. 이 호수는 비가 내리는 30분
동안이나 우리의 것이었어. 마르타이 씨는 시내 쪽으로 가는 동안에도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지금은 독일놈들이 모든 걸 가져가 버렸어. 그 꼴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그놈들은 패전을
했다지만 외양으로만 그런 거다. 지금 그들은 진짜로 오스트리아를 정복하고 있어. 이번엔
오스트리아를 돈으로 사들일 수 있는 거야. 그건 더 고약한 거다. 방황하고 패망한 나라보다
돈으로 사들일 수 있는 나라가 나는 더 참을 수 없다. 우린 스스로를 팔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녀한텐 한낱 전설처럼 존재하는 군주국의 지방지사 트롯타가 어쩌자고 문득 머리에
떠올랐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아버지와 그 사람이 참 서로 닮았어라는
생각을 했다. 반 세기도 더 흘러간 후에 침잠해 간 딴 세계 출신의 한 인간과 닮은 인간이 다시
존재하다니. 어쩌면 그런 이유로 그녀의 생각은 최근 부쩍 오랜 세월 거의 잊고 있었던 프란쯔
요제프 트롯타에 자주 머물게 되었는지 몰랐다. 독일인에 관해 발언을 할 때면 트롯타 역시
근본적으로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의견이었다. 아무래도 내 언어라는 건 깡그리 못 쓰게
되어버렸소. 프랑스 군대랑 독일에 주둔했을 때부터 난 언어가 없는 상태의 의미를 알게 된
거요. 나를 에워싸고 있는 자들은 모조리 독일어를 한답시고 자처하는 인간들이었소. 프랑스
친구들까지 여전히 그렇다고 믿고 있었소. 다른 많은 건 안 믿으면서 하필이면 그자들이
변함없이 독일어를 쓰고 있다는 관념만은 믿었던 거요.
성 가이스트 광장엔 기다리는 연결버스가 없었다.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신문 좀 사올께요! 한
신문의 일면 작은 타이틀의 기사에서 그녀도 알고 있는 한 친구가 써렌토의 바위에서
추락사했다는 걸 발견하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 이탈리아 경찰은, 그것이 사고인지 자살인지
피살인지 추정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신문도 다른 어느 신문이나 마찬가지로 표제를 온통
대서특필하고 있어서 처음엔 무심코 눈이 간 기사였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버스가 온다고
산장 앞에 서서 손짓하는 아버지한테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보통 땐 구독 신청한 한 가지 신문만
읽는 아버지한테 신문 두 종류를 넘겨주고,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잔잔히 읽어가기 시작했다.
백만장자 별장을 무대로 한 치정극. "무대로 한"이란 표현은 좋았다. 별로 흥미는 없었지만 다음
신문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등장했다. 백만장자 사냥막사에서의 피비린내 살인. 그녀는 별로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 순간 버스가 와 그들은 올라탔다. 달리는 동안
엘리자베트는 열심히 기사를 읽었다. 그녀도 상당한 몫의 기자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이
장황스런 기사의 실마리를 처음엔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다. 지방 신문의 본질을, 자기네들한테
익숙치 않은 것, 잘 모르는 환경을 기술하면서 드러내는 애교스러운 능력의 한계를 안다면,
당연히 이 번거로운 문장을 투시해 낼 환상이나 사명감이 요구되었다. 엘리자베트는 한 번
훑어본 뒤 입을 떼었다. 버스는 시립극장을 지나고 있었다. 베르톨트 라파쯔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랑 웬 슬로베니아 산지기를 총으로 쏴 죽이고 나서 자기도 자살했대요. 참 알 수 없는
일이잖아요! 마르타이 씨는 자기가 들고 있는 신문에 정신이 팔려서 다만 라파쯔라니?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야라고 할 뿐 반응이 없었다. 엘리자베트는 이상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이. 아버지!
그 사람은 제일 부자는 못 되더라도, 오스트리아의 삼대 갑부엔 들어가는 사람이잖아요. 이곳에도
그 사람의 수렵장이 몇 군데 있어요. 기사 내용만으로는 완전히 요령부득이었다. 예순 두 살의
공학사인 베르톨트 라파쯔가 추측컨대 질투에 못 이겨서 자기의 서른 세 살 된 아내 엘리자베트
라파쯔 박사를 총살하면서, 그에 앞서 아슬로라나 하는 아내의 정부를 쐈는데, 여자가 남자를
막느라 달려들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백만장자의 별장 관리를 하는 라드밀라인지 하는
여자가 신고해서 아이젠카펠의 헌병대가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엘리자베트는 이번엔 아버지가
들고 있는 신문을 뺏었다. 한결같이 서투르고 지루한 기사들이라니, 신경질 나기 딱 알맞았다.
파리나 뉴욕에서라면 가두 신문의 아무리 초년병 기자라도 이런 기사쯤 쉽게 소화할 수
있었으리라. 이곳의 기자들은 그런 덴 서툴렀다. 치정극이라니, 짚단 쌓인 헛간과 주머니칼이
연상되는 소리가 아닌가. 결국 주인공 남자는 베르톨트 라파쯔인데, 어느 신문은 심지어 한술 더
뜨느라 애를 썼다. "공학사 베르톨트 라파쯔의 부친은 전쟁 요로로 쓰인 가일탈 철도를 개발한
공로로 귀족의 칭호를 받게 된 신분 높은 라파쯔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엘리자베트의
머리에 얼핏 떠오른 생각은, 목재 전시회에 관해선 그토록 충실하게 보도를 할 줄 아는 이
가엾은 초년병 기자들이 유감스럽게도, 현장에서 헌병이 포착한 단서가 무엇인지, 종전 직전에
카알 황제께선 자기 눈에 띈 모든 사람한테 닥치는 대로 귀족 칭호를 하사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베르톨트 라파쯔의 귀족 칭호쯤 별로 대단한 게 못 된다는 것, 그리고 베르톨트
라파쯔가 공학사이건, 아버지가 라파쯔 귀족이건 역시 사건의 핵심 밖의 문제라는 데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보다는 사냥막사는 별장이 아니라, 좀 다른 것이라는 것,
다만 부수적으로만도 클라겐푸르트의 수렵과 목재 공장의 3분의 1이 아직도 라파쯔의 소유라는
사실이 중요하게 알려져야 할 문제였다. 엘리자베트가 아버지한테서 뺏은 네번째 신문에도 결국
피비린내 나는 살인과 치정극이 크게 취급되었지만, 그녀는 곧 더 읽기를 집어치고 신문을
내렸다. 라파쯔의 세번째 부인은 "엘리자베트 라파쯔, 처녀 적 성은 미하일로빅스"라고 씌어
있었다. 그녀는 타이히 가에서의 잠깐의 묘한 해후를 상기하며 생각에 잠겼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하기야 그럴 가능성도 있지. 그 연약하고 내성적인 꼬마 아가씨 미하일로빅스가 라파쯔의
세번째 부인이 수도. 그렇다면 이 모든 게 대체 어떻게 되어 돌아가는 거지? 그 여자가 설마 돈
많은 남자를 노릴 위인은 못 되는데. 그녀의 머리에 떠오른 슬로베니아 청년은 과연 여기에
언급된 산지기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두 인물 사이에 결국 아무것도 개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순간적으로 알아채었었다. 미하일로빅스 양을 그렇게 그토록 당황시킨 데는 생판
다른 무엇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숨이 넘어갈 듯 아버지한테 말했다. 이 여자는
엘리자베트 미하일로빅스예요. 이 남자가 그 애하고 결혼한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우리의 잘난 헌병대에선 그곳에서 벌어진 진상을 결코 못 알아낼 거예요. 그자들의 좁아터진
머릿속에서 두들겨 맞출 수 있는 건 온통 맞지 않는 얘기니까요. 도대체 맞는 게 없어요. 말씀
좀 해보세요!
엘리자베트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지 영문을 모르는 마르타이 씨는 그냥 이런 소리만 했다.
가엾은 인간들이라니! 요새 와서 늙은 영감들이 이 지경으로 숱한 젊은 계집이랑 놀아나다니,
그런 게 바로 될 리가 없다.
아이 참, 그녀는 갑갑해 하며 말했다. 아무튼 그건 아녜요. 치정극보다 더 복잡한 사연이
있어요. 이 요지경 같은 촌극이 무슨 통속인지, 이 라파쯔라는 남자의 정체가 뭔지를 알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남자를 본 사람이 별로 없거든요. 빈에서도 없어요. 그런 인물들은 사람들
앞에 안 나타나니까요.
마르타이 씨는 아무튼 알 수 없다는 투였다. 사실 그가 생각해 온 주요 인물이란 아예 다른
유의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보통 때 신문에 등장하는 인물들, 특히 국회의원이며 시장,
지방지사들이 그에게는, 또한 대부분 시골 사람에게는, "저 꼭대기"의 인사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공공사회에서의 주요 인사를 아예 집안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라파쯔와 같은 위인이 있다니. 그건
계급사회에 대한 마르타이 씨의 상상에 빗나가는 얘기였다. 설령 라파쯔라는 위인이
엘리자베트의 의견처럼 과연 유명한 인사라 해도, 그가 사진이 찍히거나 라디오에 발언하길
거절한다는 건, 암만해도 석연찮은 일이었다. 내 생각엔 네가 그 남자를 과대평가하는 것 같다.
마르타이 씨는 단호히 말했다. 그 사람에 관해선 들어본 적이 없어.
저도 그러리라 생각해요. 엘리자베트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 사람이 사람을 둘이나
죽이고 자살을 안 했다면 애당초 그 존재가 여기 알려지지도 않았을 거예요. 최소한 여기
클라겐푸르트에서는 말예요. 가정관리인과 다른 고용인들의 첫 진술에서도 별로 밝혀진 게
없었다. 그 진술은 침묵이나 은폐를 고집한 경우보다 차라리 더 해석을 요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라파쯔가 자기 생활 둘레에다 얼마만한 장막을 쳐놨는지, 그 점으로 해서 그들 중 누구도
나중에까지 입을 벌리지 않으리라는 것이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과연 라파쯔와 같은
위인들은 고용인을 엄선하기 때문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오로지 슬로베니아 사람, 곧 몇 사람의
유고슬라비아인이었다는 사실이 엘리자베트의 눈에도 띄었다. 그것은 그가 죽은 뒤까지도
호기심쟁이들을 막는 넓은 방벽을 의미했다.
원래 두 주일 머물 예정을 했었지만 첫 주일이 지나니까 엘리자베트는 심히 안정을 잃고,
시간이 갈수록 신경이 예민해졌다. 너 정말 훨씬 좋아져 보이는구나, 하고 장담을 하는 아버지
앞에서 줄곧 태연한 척하기가 피곤했다. 이 불안은 호수로부터, 숲속으로의 긴 방황에서부터 오는
것이었다. 호수로 이제 다시는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데도, 그날 그녀는 안 될 걸 미리
알면서 주막집 예롤릿츄를 지나는 내림길을 다시 한번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로 지쳐서 집으로 돌아와 녹초가 된 시늉을 했다. 이어서 저녁 식탁에 아버지를 혼자 남겨둔
채 자기 방으로 들어가 그리고도 자정이 될 때까지 로베르트의 케케묵은 탐정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잠이 든 걸 확신하자 소리를 죽여 장거리 전화를 돌려 파리를 신청했다. 몇 분
안 지나 통화가 되었다. 그녀는 안도를 느끼며 필립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는 조그만 소리로,
일 때문에 아주 촉박하니 빨리 돌아와야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쳐달라고 부탁했다. 이튿날 아침
파리로부터 전보가 왔다. 엘리자베트는 짐짓 화가 난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지금, 이제
겨우 회복을 하려는 참인데.
한순간 그녀는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버지가 실망할 것이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딸이
자기를 이처럼 빨리 또 떠나고 싶어한다는--아버지가 믿는 대로 불가피하게 떠나게 됐다는--데
대해 아버지가 전혀 슬프거나 우울한 기색을 안 드러내는 걸 보고 안심을 했다. 그래서 그들은
당장 버스를 타고 시내 여행사로 갔다. 아니, 차표 마련은 아버지가 떠 맡았다. 아버지는
빈까지의 차비를 딸이 지불하는 걸 참지 못했다. 이렇게 실제액을 초과하는 지출로 아버지는
딸에게 요구하는 딸 몫의 전화요금과 늘상 상쇄하려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또다시,
엘리자베트의 눈엔 아무 데서도 안 띄는, 미치광이 같은 교통난을 비방했다. 출발 전날 저녁을
그들은 묵묵히 같이 지내며, 다시 저녁 뉴스를 듣고, 구독 신청한 신문을 번갈아 가며 읽었다. 이
신문도 전혀 구체적인 새로운 내용 없이 백만장자 사냥막사의 무대 "위와 주변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치정극을 보도하고 있었다. 마로코로부터는 여전히 카드 한 장 안 날아왔다.
그들은 몇 마디 얘기를 주고받거나, 생각에 잠겨 침묵을 지켰다. 이번엔 마르타이 씨가 그녀더러
일찍 자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 안에 혼자 있게 되자 그녀는 다소곳이 누울 기분이 아니어서
짐을 챙겨 가방을 꾸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노크를 하고 들어섰을 때 그녀는 은근히 놀랐다.
아버지는 그녀가 아직도 잠이 안 든 데 대해선 아무 말 없이, 선뜻 봉투를 하나 내밀고는 딸의
뺨에 키스를 하고 말했다. 잊어버릴까봐 그런 거다. 여비로 약간 보태 쓰라는 것뿐이야. 빈에서
네가 곤란을 겪지 않게 말이다.
엘리자베트는 아무 말도 못했다. 이번에도, 자식인 그녀가 떠나는 길에 곤란을 겪지 않게 할 천
실링이 들어 있으리라. 그녀는 늘 하는 대로, 정말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아버지에게 미소를
선사하기 위해, 아버지가 그녀한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하기 위해서 다음날
아침 그녀는 아버지랑 역으로 갔다. 마르타이 씨가 또다시 번거롭게 기차가 1번 플랫폼에서 과연
정해진 시간에 떠난다는 걸 확인하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는 대신, 아버지를
앞서가게 하고는 간이 판매대에서 신문과 잡지, 담배를 사들고 플랫폼 쪽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원칙적으로 일찍 가서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의 마르타이 씨는 잔뜩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반 시간이나 남아 있어서, 그들은 짐 옆에 서서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곧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하고는 빈에선 혹시 비행장에서 친구들한테, 마르타이
씨가 모르는 어떤 친구들한테 전화를 걸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녀한테 파리행 야간
비행기가 낮 비행기보다 훨씬 좋다고, 비행기에서 뭘 내다볼 흥미 같은 건 도통 없다고 강조했다.
이윽고 기차가 왔다. 그녀는 아버지를 얼싸안고 나서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창가에 섰다. 과연
아버지는 작아져 있었다. 다만 이곳에서만은. 집에 있는 시간, 그녀와 더불어 숲길을 걷는 시간이
아닌 때면, 아버지는 다시 어린애 같은 시선, 외롭게 버림받은 노인의 노쇠한 시선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엘리자베트는 이미 시간이 없는데도, 다시 한번 내려 아버지한테 무슨 말이고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무슨 말을? 대체 무슨 말을? 설마 아니겠지만,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심한 두려움이 휩싸왔다. 그녀는 소리를 질러댔다. 아마
아버지는 알아듣지 못했으리라. 곧 편지 쓸께요. 모든 것, 고마워요. 편지 쓸께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번엔 기차가 보통 때보다 더 빨리 달려나갔으면 싶었다.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절망하지 않은 희한한 여인처럼, 아버지의 딸, 자식, 로베르트의 누이, 떠나가는, 줄곧
끝없이 떠나가는 나그네처럼.
빈의 비행장에서 그녀는 기계적으로 서식 용지를 채워 쓰고 짐을 맡긴 뒤에, 마침 아무도 서
있지 않은 여권 검문소를 곧장 지나갔다. 그리고 레스토랑으로 올라갈까 망설이다가 커피숍으로
가기로 작정했다. 플라스틱 테이블이 놓인 썰렁하니 커다란 커피숍 안엔 피곤한 표정의 승객들이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빈 커피가 아닌 커피의 첫잔을 마신 뒤 그녀는 주소첩을
뒤적거렸다. 알텐뷜 집에, 아니면 골드만 집에 전화를 걸까. 아니 두 집안 다 뭔가 맞지 않는 게
있었다. 미묘한 구석이 있었다. 혹시 요르단 집안이나 마르틴이나 알렉스는... 아니, 도대체가
무의미한 짓이었다. 7월말에 시내에 죽치고 있을 위인이 아무도 없을 게 뻔했다.
한 남자가 벌써 두번째인지 세번째 그녀의 테이블 곁을 지나갔다가 다시 다가왔다. 그리고는
무심코 몸을 돌린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서툴게 예의를 차려 물었다. 실례합니다. 엘리자베트
마르타이 씨가 아니신지요? 그녀가 대답도 않고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실례합니다. 당신은 저를 기억 못하실 테지요.
사내는 그녀와 동년배의 남자였지만 보통 땐 이 연륜의 모든 남자들이 자기보다 늙어 보이는
엘리자베트인데도, 이 남자는 더 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귀에 익은 딱딱한 독일어를
쓰고 있었다. 다만 그의 독일어의 어떤 점이 귀에 익게 느껴지는지, 이 남자가 어떻게 자기를
알고 있는지, 과연 그녀도 알고 있는 남자인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짓을 했고 그가 테이블에 앉았다. 그 순간 이 남자가 트롯타 사촌, 브랑코라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후딱 들었다. 유고슬라비아에 남아 있는 잔족의 한 사람, 농부이든가 행상의 아들 아니면
손자, 아니면 그들은 지금은 존재치도 않는 저지폴레 출신의 마로니브라터들이었던가?
브랑코라는 이 남자가 그곳에 살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주춤주춤 물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류블랴나에 살고 있었다. 그도 커피를 주문했다. 그러자 그녀는 대체 이
남자랑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촌의 죽음에 관해서야 그도 벌써 옛날에 전부
알았을 테니까. 그것도 참 까마득한 옛날 얘기였다. 그녀는 건성으로 그의 말에 귀기울이며, 그가
거듭 애를 쓰며 류블랴나에 관해 뭐라고 하는 소리를, 지금은 비자를 받게 되어 모스크바로 가는
중이노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녀가 어리둥절해서 쳐다볼 지경으로, 이어서 남자가 서슴없이 빠른
어조로 말했다. 참 오랜 세월 기다렸습니다. 무척 긴 세월이었죠. 그렇지만 당신은 항상 그토록
많은 사람들 틈에 계시더군요. 당신은 항상 일에 쫓기는 데다 당신 주변은 늘 많은 사람이
휩싸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그녀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렇게 사람들이 많았던가요?
그도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덧붙였다. 일 년 전에 결혼했지요. 네, 저 남쪽에서요. 그리고
아들놈이 아나 있습니다. 두 달 됐지요. 그녀는 찻잔 받침에 담배를 놓고 진심으로 말했다. 정말
축하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뭔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어 그를 좀더 찬찬히 뜯어보았다. 벌써
정수리에 몇 가닥 흰 머리털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그렇게 늦게, 저, 그렇게 늦게야
결혼하셨어요? 그건 참 예사로운 질문이었고 아닌게 아니라 그렇게 들렸다. 그렇습니다. 그는
말하더니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항상 그토록 많은 사람들 틈에 계시더군요. 한 번
당신은 빈에서 본 적이 있고 그 뒤 사촌이랑 파리에서 만났습니다. 당신도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만, 그렇지만 그 뒤론 당신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지요. 저랑 프란쯔 요제프에 관해 좀
아시는지 모르겠군요. 우린 단순한 친척에 그친 게 아니었습니다. 그 이상의 뭔가가 있었어요.
다만 저는 아무것도 더 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린 고향에 주저앉아 버린 겁니다.
엘리자베트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그 편이 더 나았을 거예요. 아무튼 당신은 아직
고향이라는 말을 쓰시는군요. 그렇다면 그런 게 아직 있는 거로군요. 남자가 말했다. 프란쯔
요제프는 파리에서도, 그 뒤 결국 빈에서도 고향을 못 찾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항상 역설만
내뱉길 잘했지요. 자기는 치외법권자라는 소리를 제일 자주 했습니다. 당신께선 슬퍼해선 안
됩니다. 결국 그를 도울 수는 없었던 거니까요. 그는 일어섰다. 그가 탈 비행기가 불려진
것이었다. 그는 머뭇거리며 확성기를 통해 나오는 음성을 들었다. 의심할 나위없이 그것은
모스크바로 가는 승객을 부르는 소리였다. 그는 그녀가 손을 내밀기를 기다리지 않고 성큼
걸어가며 조그만 소리로 얼른 말했다. 신의 가호가 있으시길 빕니다.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쉽사리 "또 만납시다"라는 작별을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산만하게 주저앉아
있다가 뒤늦게야 접시에서 재가 되어 벌겋게 달아오른 담배꽁초가 플라스틱 테이블에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공중 앞의 좌석에서 이 담배불을 달리 어떻게 꺼야 할지 갈피를 못
잡다가 엉겁결에 손가락을 데었다. 그가 말한 그녀 주변의 사람들이란 어떤 의미였는지, 왜
그렇게 그 말을 반복해 뇌었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그녀의 머릿속은 퍽 산란스러웠다. 다른
비행기가 또다시 세 나라 언어로 불리어졌다. 이어서 역시 확성기를 통해 나오는 다른 음성을
듣고 그녀는 흠칫 놀랐다. 그것은 탑승객을 소집하는 고지가 아니라, 모스크바행 비행기가
기술상의 장애로 두 시간 연발될 예정이라고 승객에게 양해를 구하는 정중하고 단조로운 알림이
아닌가. 그가 되돌아왔을 때, 그녀는 발자국 소리가 미처 들리기도 전에 어느새 그의
접근을 등뒤에 느끼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에게로 몸을 돌렸고 그들은 그렇게 마주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이어서 점점 세차게 그녀의 가늘고 기다란 두 손을 자기의 억센 손
안에 움켜쥐었다. 두 사람 모두 간간이 미소를 짓기 시작했고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왜 모스크바로 가는지 그곳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묻지 않았고, 그 역시
그녀가 아직 파리에 살고 있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잃었는지를 묻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 푸른 섬광이 번득였고, 웃음이 거두어질 때면 눈빛이
어두워졌다. 고맙게도 그는 이번엔 그녀가 항상 그렇게 많은 사람들 틈에 있었다는 소리를 다시
꺼내지 않았고, 그녀 역시 자기 생에 있었던 수많은 인간들, 비행장과 이 황량한 커피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씻은 듯 잊고 있었다. 다만 시간만은 빨리, 전보다 훨씬 빨리 흘러갔다. 그녀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며 동시에, 이토록 건장한 남자까지도 창백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 이
초긴장, 이 전인적인 귀의의 상태에서 그 역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 가슴에
느껴져 왔다. 그 순간 파리행 비행이 알려졌다. 그녀는 사뭇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풀려나듯,
살그머니 그의 손에서 자신의 두 손을 빼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정확히 머릿속에 새겨들은
사람처럼 그녀가 가야 할 유리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귓속에는 그것을 안간힘하며 기억하는
것만이 더없이 중요한 일처럼, 오로지 출구번호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헤어져야 할 유리문까지
느릿느릿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가 지금 무슨 얘기를 꺼내려는 게 아닌가 그녀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냥 우뚝 서서 조그만 메모첩과 볼펜을 꺼내 메모지를 찢어내더니 선 채로
그 위에 무언가를 써넣어 접었다. 그녀는 여전히 종말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여
그를 뚫어질 듯이 응시했다. 제발 류블랴나나 모스크바의 주소를 적은 게 아니기를. 하지만 그는
좀 전의 고통이나 창백함을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차분하게 그녀를 마주 보며, 접은 쪽지를
그녀의 외투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그녀는 몸을 돌려 자동문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비행기 안에서는 쪽지를 읽지 않았다. 하지만 오를리 공항에 닿아 콘베이어벨트 앞에서
짐을 기다리며 외투주머니에 손수건을 찾다가 이 조그만 종이쪽지까지 끄집어 내게 되어 펴서
읽어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항상 사랑해 왔습니다.
그녀는 손수건까지 손에 쥔 채 대체 왜 그걸 찾았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아, 참, 바람이
불어와서 막 재채기가 날 뻔했지. 하지만 그녀는 얼른 쪽지랑 손수건을 외투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필립이 다가오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필립은 먼저
그녀의 트렁크를 번쩍 들어 수레차에 싣더니, 엘리자베트를 끌어당겨 오래오래 격렬하게 키스를
했다. 스쳐 가는 뭇 사람들 틈에서 마치 단 둘이만 있는 것처럼. 게다가 그의 혓바닥이 꼭
질식할 듯이 너무나 깊숙이 그녀의 입 속을 파고들어서, 그녀는 밀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헐떡이며 말했다. 원, 정말, 그럴 필요가 없었잖아. 내가 온다는 이유만으로 오를리까지 오다니!
필립은 트렁크가 실린 수레차를 출구 쪽으로 굴렸다. 그녀는 옆에 붙어 걸어가면서 되풀이해
말했다. 도대체 이해할 수 가 없어. 어쩌자고 오를리까지 달려왔어. 어차피 우린 나중에 시내에서
만날... 필립은 택시를 찾다가 쉽게 한 대를 잡았다.
택시 안에서 그는 다시 한번 탐욕스럽게 키스를 했다. 그녀는 더 이상 밀어내질 않았다.
이어서 그는 열을 올리며 말을 시작했다. 이제 얘기 좀 해봐요. 무슨 일이 있었나. 왜 전보를
치라고 했어요. 걱정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단 말예요! 그녀는 똑바로 앉아 얼떨떨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아주 간단한 얘기야, 끔찍스럽게 지루했어. 어쨌든 시골에서 지루해진다는 건 쉽게
내다볼 수 있는 일 아냐. 단지 그랬기 때문에 당신한테 전보를 부탁한 거야.
하지만 필립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렇게 어리석다니, 천만의 말씀이었다. 그는 그녀를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더니 주장했다. 아무튼 무슨 일인가 있었어요. 내 앞에서 연극은
말아요.
그녀는 대꾸를 않고 창밖을 내다보며, 마침 자동차 행렬과 네온 불이 비치는 밤거리 풍경에
짐짓 흥미를 내보였다. 필립이 말했다. 당신의 행동거지로 벌써 모든 걸 느꼈어요.
역시 대답이 없자, 필립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채고 이번엔 하다 못해 영화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마침 그것에 관해 얘기하고 싶은 욕망이 없지 않았는데다, 결국 그렇게 함으로써
엘리자베트의 기분 하나로 자신의 기분까지 망쳐버리지 않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새
뉴스거리를 시시콜콜히 보고하고 나더니, 붉은 신호등 앞에서 또 한 번 뇌었다. 역시 무슨 일인가
있었어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큰 소리로 말했다. 아, 원, 필립. 무슨 일이란 일어날 수가 거의 없는 거야.
그렇다면 그건 오히려 당신한테 한 보따리가 벌어졌잖아. 그 점을 난 정말정말 기쁘게 생각해.
다만--그녀는 한순간 말을 끊었다--진정한 일이란 거의 일어나지 못하든가, 너무 뒤늦게
일어나는 거야.
웬 티롤 친구한테 사랑에 빠진 건 아니에요? 필립이 물었다. 이젠 최소한 그녀의 입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구역질나는 느낌으로, 언젠가 전에 티롤 여자가 아닌 어느
"티롤 계집애"에 관해 그녀 앞에서 넋두리를 늘어놓던 장 피에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툭하면 즐겁다는 듯 오만하게, 얘는 내 재주꾼 귀염둥이 티롤 아가씨야! 라는 말을
던지던 뒤발리에를 서글픈 생각으로 생각했다. 필립을 향해 그녀는 말했다. 아냐. 전혀 아니야.
유감스럽게도, 몽 셰리, 티롤 친구한테 반하다니 당치도 않아. 그리고는 다시 그와의 일상적인
호흡을 찾기 위해 예사롭게 덧붙였다. 다만 당신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떻게
만나자마자. 아무래도 이제부턴 당장 엄청난 일이 나를 기다리겠지. 알잖아, 그게 어떤 건지.
그렇게 실망한 얼굴을 하지 말아. 제발 그러지 말아!
필립은 다정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마 셰리, 아무튼 너무 걱정스러웠을 뿐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수다스럽게 전화를 했지요. 당신이 없는, 당신의 충고가 없는 매일 밤이 처참하게
느껴졌어요. 지난 며칠처럼 당신이 아쉬웠던 적은 일찍이 없었어요. (엘리자베트는 여유롭게
생각했다. 또다시 이자는 잔뜩 과장을 하는군. 내가 전에 없이 아쉬웠다는 게 지금이 처음이
아니잖은가.) 그런 만큼 당신한테 거짓말을 하는 건 비열하다는 느낌입니다. 아무래도 내가
어처구니없이 바보짓을 한 것 같애요. 지금 당장 털어놔야겠어요. 전화로는 그 얘길 꺼낼 수가
없더군요. 당신이 고향에서 신나게 시골 생활을 즐기고 있을 게 느껴져 와서요. 루우 문제
말입니다.
이제 정말 다시 파리로 돌아와 있는 느낌을 느끼며, 벌써 낯익은 거리, 그녀의 집을 향하는
확실한 길을 알아보며 엘리자베트는 건성으로 동정을 나타내며 말했다. 그 애가 어디가
잘못됐어? 아프거나 무슨 곤란한 문제가 생겼어?
아뇨. 그건 아닙니다. 필립이 말했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에요. 그 계집애가 도저히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그런 처녀애들은 처음엔 마치 소시민적 사고방식을 초월한 듯이 자유분방하고
현대적으로 행동을 해놓고는 나중에는 별수 없이 결혼을 원하면서, 무슨 19세기 졸작
희극에서처럼 아버지한테 고자질을 하는 겁니다. 늙은 마르샹, 용서하십시오. 클로드 말이죠.
그자가 딸의 정조의 비호자라도 되는 듯이 저한테 달려왔어요. 당신도 그 사람을 알지요. 저보다
더 잘 알 겁니다. (한순간 엘리자베트와 필립은 공모자처럼 마주 보았다. 얼떨결에 한순간 동안
이 마르샹이라는 이름을 두고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할지 그들 각자가 깨닫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건, 무릇 남자들이란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자기 딸 문제하고 결부되면
속절없이 고리타분한 자세로 되돌아간다는 거예요! 엘리자베트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루우가 어떻게 됐다는 얘기야? 필립은 간단히 내뱉었다. 임신을 했어요. 어쨌건 마르샹이 저를
잔뜩 미워하고 있지요. 저 물론 이 냄새나는 자본주의자 앞에서 바보처럼 마주 설 기분이
아니라서, 난 책임 같은 걸 회피할 생각은 없다고 말해 줬어요. 어쨌거나 내가 아무리 가진 것이
없더라도.
"책임"이라는 단어는 엘리자베트가 필립에게서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녀는 자기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이 희미한 택시 안에서 필립이 알아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그녀는 말했다.
셰리, 그렇게 큰 책임에선 간단히 빠져나올 수 없어. 말야, 난 물론 설교를 늘어놓을 생각은
아니야. 다만 당신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난 이 모든 걸 미리부터
예견하고 있었어. 우리 때문인 걸 당신도 알잖아. 우리가 같이 지낸 시간은 참 아름다운
시간이었어, 최소한 나한테는. 그리고 그 점에 대해 당신한테 무한히 감사해. 그렇지만 어떤
책임의 방해물이 되어 있다는 건, 몽 슈, 그건 나도 전혀 생각 못했던 일이야.
그러니까 그는 출구를 앞에 두고 있었다. 그것도 그가 정작 정면으로 증오했던 세계로의
진출과 묶여진 출구를. 격양되었던 그의 오월이 지난 후 한참 뒤까지도, 우울증과 술과, 갈수록
무의미해져 가는 토론과, 이미 체제며 자본주의며 군국주의를 겨누는 게 아니라 어느새
군소잔당으로 흩어져 가 서로를 물고 뜯게 된 옛날 그의 동료들을 향한 분노의 폭발로부터
엘리자베트가 그를 끌어낸 시기까지만 해도 그가 증오해 마지않던 세계였다.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항상 재간이 있었고, 번번이 적절한 좌초자와 부딪쳤다. 필립은 언젠가 5월
혁명이 끝난 뒤 뭔가 불어볼 게 있어서 그녀를 찾아왔었다. 그는 상당히 오만하게 굴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엘리자베트의 존재란 한낱 구역질나는 호화계층의 일원, 곧바로 자본가까지는 못
되더라도 자본가의 창녀 정도밖에 안 될 따름이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그의 태도는 변해
갔다. 방문 횟수가 점점 잦아졌고 몇 시간씩 같이 떠들었고 젊은애들을 떼거지로 몰고 왔다.
무진장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소모하며 그녀를 사뭇 일하러도 갈 수 없게 만들던 떼거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녀를 놓고 약간 심각해지기 시작했고 스스로도 이상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그와 같이 자다니, 그건 그녀한테는 당치 않은 얘기였다. 아마도 그녀에게 비싼 옷을
사줄 능력 있는 마르샹 같은 자하고나 가능할 법한 얘기였다. 하지만 그 뒤 그는 그녀에게 옷을
사주는 남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어쩌면 지금껏 그런 남자는 하나도 없었을지 모른다는 것을,
그녀가 돈을 벌고는 있지만 바로 돈 때문에 일을 한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스스로가 사랑에 빠졌다고 또는 하여간에 그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자처하게 되었고
그녀에게 그런 말을 고백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여러 차례 웃음보를 터뜨리며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녀도 맞서기를 포기하고 그들은 어울려 살아오게 된 것이었다.
지금, 빌어먹게도 오래 걸리는 이 택시 안에서 그는 줄곧 걱정스럽게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핼쑥해 보이는 건 아니었다. 겨울철에까지 더운 나라를 싸돌아 달리는 덕분에 실상
그녀는 거의 늘 갈색으로 그을려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는 것도 그의 목에
매달리는 것도 그를 향해 허물이 있다고 질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애매했다. 루우와의 이 며칠간에 벌어진 어이없는 사태를 진정 필요를 느끼고 털어놓은 이
판국에, 그녀의 반응은 다만 무감정하고 냉랭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도 루우라는 계집애랑 간단히
결혼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터에 한마디 충고가 얼마나 아쉬우랴. 하지만 드라마의 한
장면을 대비하고 있는 그의 앞에서 그녀는 그냥 미소만 띠고 있었다. 나이 많은 여인을 상대하는
데는 어떤 사태에든 대비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사실 소르본느 전투 시절 적 동료 중
남아 있는 마지막 친구에게 상의를 한 바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자기 때문에 파탄에 이르는 것을,
혹시나 루우 때문에 자살이라도 하는 것을 그는 진심으로 원치 않았다. 자기는 어쨌든 간에
클로드 마르샹 같은 혹은 그녀가 지금껏 상관해 온 인물들의 한 부류는 아니잖은가. 그는 적어도
자기가 그녀를 상당히 자주 기만했으며 이용했다는 것을 자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가엾은 엘리자베트는 완전히 변해 버린 이 상황을 아직도 인식 못한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집에 도착한 뒤, 아니면 내일이나 모레 그녀의 파탄이 오리라. 그 점을 그는 확실히 예견했다.
물론 그녀는 상당히 훌륭한 자제력과 몸가짐을 갖고 있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는 그녀와
어울릴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돈 문제는, 하고 필립이 입을 떼었다. 물론 지금 그걸 말할 계제는
못 되지만, 제가 얼마나 당신한테 빚을 지고 있고, 또 그 점에 감사하는 마음인지를, 당신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제 생각에 이제 곧, 영화가.
뭐라구? 엘리자베트는 멍청하니 물었다. 참 난센스 같은 소리야. 당신이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모르겠어. 난 굶어 죽을 지경도 아니고, 오히려 지난 몇 달 동안 꽤 많은 수입이 있었어. 아니,
돈이라니, 들어봐, 그런 걱정은 말아. 난 지금껏 참, 거듭거듭 운이 좋았어. 도대체 우리 사이에
돈이 무슨 역할을 하겠어? 정말 당신은 이해 못하겠어.
필립은 절망스럽게 생각에 잠겼다. 아, 이제 그녀도 그 점을 인식하겠지. 이제 곧 파탄이
닥치겠지. 마르샹은 실상 꽤 돈이 많았는데도 엘리자베트는 오로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온 게
아닌가.
그들은 차에서 내렸다. 엘리자베트는 계산을 하고 선뜻 필립에게 트렁크를 들어올려 달라고
맡겼다. 트렁크를 들기를 좋아한 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오늘은 그러기엔 정말로 기운이
없었다. 엘리자베트는 화제의 실마리를 완전히 잃어 버렸기 때문에 방 안에서의 상황이 과연
곤혹스러웠다. 물론 자기의 천사 같은 딸을 위해 다른 배우자를 상상해 왔을 마르샹과 당신이
혹시 화해가 안 되는 경우에는--필립은 성급히 그녀의 말을 끼어들었다. 루우는 천사가 아니라는
걸 당신 역시 그 사람만큼 모르는군요. 게다가 그 애는 분방해요. 난 분방한 여자를 아내로 갖고
싶지 않아요. 무엇보다 그 애도 일단 건강해지고, 그 애가 묻혀 살고 있는 떼거리들에게서
벗어나야 해요. 엘리자베트는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이 결혼한다는 건 아무튼 결정된 사실이야.
그건 내 발상은 아니었어.
필립은 우울하게 방 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가 그토록 자주 식사를 하고 물론 설치며
왔다갔다 하던 방이었다.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용서해. 우편물을 뜯어봐야겠어. 그리고 그녀는
허겁지겁 편지 몇 통을 찢어 열었다. 필립은 처음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더니 옆에 와
앉아 손등에 키스를 하고 물었다. 화나셨나요, 슬퍼하고 있나요?
그녀는 의아롭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화난 것 같애? 슬퍼 보여? 지독히 피곤한 건
확실해. 그렇지만 런던에서의 결혼식이며, 오스트리아에서 지낸 지루한 날들이며 그 비슷한
일들을 겪은 뒤엔 그거야 당연한 거지.
그녀는 점점 많은 편지며 인쇄물을 밀어붙이고 전보만 가려냈다. 처음 전보는 완전히
요령부득의 것이었다. 그것은 "marde(빌어먹을)"로 시작해서 다정한 얘기들로 끝나 있고
앙드레의 사인이 있었다. 하지만 앙드레는 구체적 내용없는 전보를 보내는 법이 없었다. 두번째
전보는 관심 밖의 것이었고, 세번째 것은 장장 세 페이지나 되는 것으로 역시 앙드레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리고 보면 이 전보가 먼저 부쳐진 모양이었다. 스톱과 스톱과 스톱 사이에 켐프와
ulcer, 곧 위궤양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사실 켐프가 오랫동안 번거로운 위장병을 앓고 있다는 건
누구에게나 소문난 얘기였다. 그런데 그 사실을 전보까지 쳐서 그녀에게 굳이 알릴 필요가
없잖은가. 하지만 또 한번 스톱 뒤에 켐프가 수술을 받게 되어 떠날 수가 없다는 사실을 해독해
냈다. 그리고 전보의 후반부를 다시 한번 읽고 난 뒤 마침내 앙드레가 켐프 대신 그녀더러
사이공으로 떠날 것을 부탁하는 내용임이 선명해졌다. 그것은 그녀가 지금껏 받아본 가장 긴
전보였다. 하긴 주요한 기사 게재와 상관되는 마당에서 편집국에서 전보 비용 따위는 꺼릴 리
없었다.
엘리자베트가 턱없이 한참 걸려 전보를 탐독하더니 책상 위에 놓고 나선, 그리고도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니까, 이 방 안에서 흐르는 한순간 순간을 점점 처참하게 느끼고 있던
필립이 무슨 중요한 소식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안도의 표정을 짓고 그를 바라보며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그래, 중요한 것 같애. 부엌에 가서 마실 것 두 잔이랑 얼음을 가져다 주면
고맙겠어. 아닌게 아니라 모든 가능한 것을 위해 우리 축배라도 올려야 되지 않겠어. 이렇게
많은 변화를 위해서! 필립이 그토록 신중한 모습을, 차라리 위축된 모습을 그녀는 처음 보았다.
이미 젊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이태 전의 성급하고 불손하며 자의식에 차 있던 좌초한
항거자가 아니라 흔하디 흔한 보통 젊은이, 이제 그녀가 마침내 울분을 터뜨릴세라 몸을 사리고
있는 불안정한 애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약간 슬픈 느낌이 들었다. 필립은 잔을 테이블 위에
놓고 예사롭게 술을 따랐다. 그리고 그들은 마주 미소를 보내며 같이 잔을 들었다.
좋은 일을 위해선가요, 아니면 최소한 나쁘진 않은 건가요? 필립이 물었다. 그녀가 말했다.
좋거나 나쁘다는 건 여기에 적절한 말이 아니야. 그렇지만 아무튼 당신이랑 다시 한번 잔을 들고
싶어. 필립은 그녀가 절망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오늘밤은 그녀 곁에 머물러야겠기에 오늘
중으로는 루우한테 전화를 걸 기회가 없으리라는 생각에 잠겨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오늘 어떠한 사태에도 마음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엘리자베트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나가는 투로 그에게 전보를 내밀고 말했다. 읽어봐. 내용이 뭔지
당신이 아는 게 나을 거야. 그는 몇 모금 잔을 들이켜면서 역시 연거푸 두 번 읽어보더니 한참
입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잔을 테이블에 놓고 말했다. 앙드레가 돌았군. 당신이 가다니, 생각할
여지도 없어요. 내가 그걸 금하겠어요.
그녀는 끝없이 의아스러운 느낌으로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대체 그것이 아직도 자기와 무슨
상관이람. 지금 자기가 그렇게 큰 책임을 지고 있다지만 그거야 루우에 해당되는 것이지 나에
해당되는 건 아니잖은가. 하지만 그 모든 말을 입밖에 낼 수는 없었다. 다만 너무 피곤했다.
그래서 그냥 참을성 있게 말했다. 당신한테 약속할 수 있는 건 오늘은 앙드레한테 전화를 안
걸겠다는 거야. 내일 새벽까지는 그 사람을 속타게 내버려 두겠어. 그 다음엔 난 떠날 거야. 난
내가 떠날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어. 결단을 내릴 필요도 없어. 벌써 확신하고 있으니까. 그럼
이제 가보지 그래, 응?
그녀는 그에게 키스를 않고 키스를 허락하지도 않고 피하고는, 문 앞에서야 살짝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한순간 그를 두 팔로 안았다. 필립은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며 격분해서 말했다.
당신은 가면 안 됩니다. 결코, 그래선 안 돼요!
하지만 그의 말은 트롯타의 말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의 음성은 거의 20년 동안 그녀의
귓가를 울려온 트롯타의 음성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더욱더 자신의 소리를, 이번엔 그녀를
향해 반대의 말을 하지 않는 트롯타의 전혀 다른 음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필립은 화가 나
공격적인 얼굴로 여전히 문께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그녀는 다시 한번 한순간
사랑을 느꼈다. 그는 사뭇 소리를 질렀다. 그 녀석이 아주 돌았군요. 어떻게 여자를 그런 데로
보낼 수 있겠어요. 남자 몇쯤 그 친구도 예비로 갖고 있을 텐데. 악당이에요.
그녀는 할 수 없이 미소를 짓고 그를 문 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내일 전화를 걸겠다고
약속했다.
전에는 한 오라기 연민도 필립에 대해 느끼지 못했던 엘리자베트에게 엄청난 연민의 정이
덮쳐왔다. 옷을 벗으며 화장을 지울 기력도 없이 지친 상태로, 그녀는 이렇게 둘 사이에 일이
모두 잘 막음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지금 안전한 것이다. 다만, 오월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녀는 자기의 잔을 마저 비우고 침대에 누웠다. 첫번째 꿈을 꾸고 잠에서 후닥닥 깬 걸 보면
곧장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전화 쪽으로 손을 뻗치고 중얼거렸다. 여보세요! 앙드레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얼른 수화기를 다시 내려놓고 잠들기 전, 어느새 꿈속에 빠지면서 베개 밑에
밀어넣었던 구겨진 작은 쪽지만을 더듬어 손에 쥐었다. 그리고 머리와 심장을 감싸쥐었다. 이
엄청난 피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여전히
생각을 더듬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내겐 더 이상 무엇이 일어날 수
없다. 무엇인가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역시 내겐 아무것도 일어나선 안 된다.
저자 소개
잉게보르크 바하만 1926년 오스트리아의 클라겐푸르트에서 출생. 인스부르트, 그라츠,
빈대학에서 수업하였으며 철학과 함께 법률, 음악 등을 공부함. 1950년 "마르틴 하이데거의 실존
철학과 비판적 수용"이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수여받고 53년 시집 "유예된 시간"으로
47그룹상 등을 수상. 56년 둘째 시집인 "대웅좌의 부름"를 발표하였으며 계속하여 장편소설
"말리나"와 단편집 "30세"외 다수의 방송극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작가 생활을 하였으나, 마지막
작품집인 "동시에"를 발표한 다음해인 73년 가을 로마에서 영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