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니 메이슨 사랑과 슬픔의 여로
사랑과 슬픔의 여로
코니 메이슨,
프롤로그
1403년 7월, 런던
당당하고 의연하게 서 있던 남자는 검은 두건을 머리에 씌우려는 사형집행관의 손을 단호
히 물리치며 구름처럼 몰려든 구경꾼들을 내려다보았다. 폐위된 리처드 2세를 지지했던 반
역자의 처형을 지켜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들은 저마다 큰소리로 야유를 퍼붓거나 떠들썩하
게 웃어댔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웨일스 지방에서 일어난 역모의 주동자가 당연히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 오래가지 못한 이 역모의 선동자인 오웬 글렌도우어
는 자신이 영국의 황태자라고 주장하며, 1400년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오웬 글렌도우어가 헨리 4세의 왕좌를 찬탈하는 데 실패하자 그와 함께 역모에 가담했던
웨일스 지방의 지지자들은 모두 런던으로 압송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들의 재산과 영지
는 몰수당했고, 그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추방되거나 살해당했다. 웨일스 변경지방의 영주였
던 클레런스 모티머 경은 리차드 4세의 혈족이긴 했지만, 실제 그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
던 것이다. 그러나 이웃 영주인 루딘 그레이 경과 그의 아들 에반 그레이는 모티머 경이 노
섬벌랜드(잉글랜드 북동부의 주) 인들과 함께 오웬 글렌도우어를 왕조에 오르게 하려는 음
모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씌웠다.
두건을 거부하는 사형수의 대범한 행동에 자극을 받은 군중들은 고함을 지르며 대역죄를
범한 지체 높은 백작나리의 마지막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잘 보기 위해 교수대 가까이로 몰
려들었다. 모티머경은 마지막 순간까지 결백을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반역의 증거가 너
무나 명백했고,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헨리 4세는 다시 진상을
조사하는 귀찮은 일은 피하려 했다. 오히려 반역자를 밀고한 에반 그레이의 충성심을 높이
산 국왕은 웨일스 지방에서 가장 부유했던 모티머 가문의 재산 전부를 몰수해 그에게 포상
으로 하사했다.
소란스런 군중 뒤쪽으로 멀찌감치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고깔이 달린 외투를 입은 가난한
농부 차림의 사내와 성긴 모직 옷을 걸친 소년이었다.
"제이미 도련님, 어서 가시죠. 여긴 도련님이 계실 곳이 못 됩니다. 도련님 말씀에 넘어간
제가 바보였어요. 사람들에게 발각되면 큰일납니다."
기껏해야 열 네댓 살쯤으로 보이는 소년이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를 번득이며 사내를 쳐
다보았다.
"난 끝까지 버틸 거야, 게일로드. 아버님도 내가 지켜보기를 바라실 거라구.” 게일로드
는 당혹스러운 듯 신음했다. 그는 어린 소년이 국왕의 잔인한 복수극을 지켜보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국왕은 역모를 꿈꾸는 또 다른 반역자들에게 경고하는 뜻으로 대역죄인
의 처형이 끝나면 시신을 토막내어 성앞에 효시하도록 포고를 내렸다. 그는 그러한 잔인한
처벌로 인해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의 마음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남게 될까 봐 두려웠
다.
사형집행관이 반역자의 목에 밧줄을 걸자 군중들은 고막을 찢을 듯 고함을 질러댔다. 클
래런스 모티머는 전혀 두렵지 않은 듯 침착한 태도로 빽빽하게 모여든 군중들을 찬찬히 굽
어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구경꾼들 가장자리에 엉거주춤 서 있는 초라한 농부와 어린
소년을 향했다. 그는 뭔가 흐뭇한 장면을 목격한 사람처럼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쩌렁쩌
렁 울리는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구경꾼들은 순식간에 숨을 죽였다.
"내가 결백하다는 것은 하늘이 아는 사실이다. 나는 죽어서라도 언젠가 기필코 누명을 벗
고 가문의 명예를 되찾게 되기를 신께 기도 할 것이다.” 사형수의 용기가 가상하다는 듯
구경꾼들이 환호성을 보냈다. 다음 순간 교수대 바닥의 문이 덜컹 열리더니 남자의 몸이
끝없는 영원의 구덩이로 떨어졌다.
멀리서 팽팽하게 늘어진 밧줄이 몇 번 요동을 치다가 움직임을 멈추는 것을 바라본 소년
은 경련을 일으킨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최악의 순간은 그때부터였다. 숨이 완전히
끊어진 죄인의 시신은 곧 조각조각 잘라져 창 끝에 매달린 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
다. 소년의 얼굴색은 끔찍한 잿빛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는 이토록 소름끼치는 광경에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검은 눈동자를 뜨겁게 불태우며 소년은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과 잔
혹한 최후의 모습을 영원히 뇌리에 새기고 있었다.
"제이미 도련님, 이제 그만 가시죠.”
게일로드가 소년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래, 이젠 가지. 신께 맹세코 아버님의 원수를 반드시 갚고야 말겠어. 그레이 경과 그
아들은 오늘 우리 아버님에게 한 짓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거야." 간담이 서늘할 정
도로 단호하고 냉정한 소년의 말투에 게일로드는 금세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토록 어린 나
이에 끔찍한 증오심을 불태우는 소년의 모습을 지켜보기는 평생 처음이었다.
1
1416년, 북웨일스의 크리케의 성
바다 쪽에서 휘몰아쳐 불어온 허연 소금기가 묻어나는 진눈깨비가 묵묵히 해변에서 일하
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들러붙었다. 사람들은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며 절벽 아래의 후미진
포구에 정박한 범선에서 내려진 작은 보트에 실려 있던 나무통들을 뭍으로 옮기고 있었다.
해변에 올려진 나무통들은 곧바로 마차에 실렸고, 여러 대의 마차는 절벽을 오르는 좁고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따라 차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좁은 길은 달빛도 없이 황량한 밤풍
경 속에 섬뜩한 유령처럼 서 있는 허물어진 성채 안으로 이어졌다.
벼랑 꼭대기에서는 검은색 종마를 탄 사내가 말없이 사람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다.
담비 가죽으로 겹겹이 쌓인 외투를 걸친 그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 복
수의 일격을 가할 독수리처럼 무시무시했다. 해변에서 짐을 나르던 남자 하나가 절벽 꼭
대기의 사내를 발견하고는 동료를 쿡 찌르며 절벽 위를 손가락질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
분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배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둠의 영주.'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그는 오래 전 오웬 글렌도우어의 공격을 받아 불타버린 고성을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트
레머독 만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 꼭대기에 새둥지처럼 솟은 두 새의 첨탑과 쓰려져가는 본
채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성의 뒤쪽으로는 산새가 험하고 깊은 스노우도니아 산맥이
버티고 있었다.
밀수의 대가!
끝없는 전쟁과 가뭄으로 인한 혹독한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마을사람들을 살려낸 장본인
은 '어둠의 영주' , 바로 그였다. 그는 사람들 앞에 직접 나서기보다는 게일로드를 통해 대
부분의 일을 지휘했다. 노년에 접어든 게일로드는 '어둠의 영주'가 유일하게 전적으로 신뢰
하는 인물이었다.
해변에 부려졌던 통들이 남김 없이 마차에 실려 좁은 길을 따라 성으로 옮겨지고 나자 검
은 말을 타고 있던 사내는 짙은 안개가 뒤덮인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사람들에게 일당은 나누어주었나, 게일로드?"
제이미 모티머는 고성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살 만한 형태를 간신히 갖춘 본채 한구석의
벽난로 옆에 서 있었다. 불빛을 비스듬히 받고 있는 그의 잘생긴 얼굴이 황동처럼 빛났다.
그의 얼굴에서는 나이를 초월한 강인함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 강직한 성격이 그대로 드
러났다. 단단한 근육질로 뒤덮인 거대하고 위풍당당한 풍채와 전체적으로 선이 굵은 외모의
그는 미묘한 관능미를 풍겼다. 때문에 마을 아가씨들은 모두가 매력적인 그에게 홀딱 반해
있었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지닌 제이미 모티머는 섣불리 접근하기 어려운 남
자였다. 그가 열 다섯 살의 나이로 게일로드와 함께 바닷가의 이 외딴 성채로 숨어들어 지
금껏 살고 있다는 사실은 마을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외부인들에게는 비밀이었다. 성
은 너무나 처참하게 파괴되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으므로, 반란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의
헨리 4세나 현 국왕인 헨리 5세 모두 성의 존재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크
리케스 성은 제이미 모티머의 외가 쪽으로 수백 년간 물려내려온 성이었지만 폐허에 가까
운 고성은 왕에게 전혀 쓸모가 없는 존재였다.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고 모티머 경이 교수형을 당한 이후 게일로드는 소년을 데리고 이곳
으로 숨어들었고, 그후 그들은 간신히 사람이 살 만한 형태를 갖춘 본채에서 살기 시작했다.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제이미는 비바람에 이리저리 쓰러지고 낡은 폐허의 바위와 돌덩이
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헨리 4세와 그레이 부자, 서머셋 경과 그 일당들은 오래 전부터 제이
미 모티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게일로드의 도움으로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
섰고, 해를 거듭할수록 가슴에 사무친 복수의 한을 풀겠다는 욕망은 더해만 갔다. 그는 머지
않아 자신의 아버지인 클레런스 모티머 경을 억울하게 죽게 만든 장본인인 에반 그레이 영
주에게 죄값을 치르게 만들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작위와 재산을 정당하게 찾고야
말겠다고 맹세했다.
"브랜디는 창고에 안전하게 모셔놓았습니다. 일꾼들은 후하게 품삯을 줘서 돌려보냈구요.
하룻밤 일치고는 훌륭했어요. 도련님 재산이 더욱더 불어나겠군요." 게일로드가 불 앞에서
몸을 녹이며 말했다.
물끄러미 불길을 응시하는 제이미의 심각한 표정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때가 됐어. 게일로드, 내 운명을 내 손으로 개척할 때가 됐다구.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십삼 년이 지났어. 그 오랜 세월을 내가 이 허물어진 돌덩이 사이에서 쥐도 새도 모르
게 비천한 삶을 연명하고 있는 동안 원수들은 부당한 사치와 영예를 누리며 살아왔네." "
그래도 도련님의 목숨은 건졌잖습니까. 그레이 가문과 그 일당이 도련님의 존재를 알게 된
것보다는 나아요."
"헨리 4세는 죽었어. 선왕의 후계자인 헨리 5세가 통치한 지도 벌써 오 년이 됐어. 모두
알다시피 젊은 국왕은 나의 목숨 따위에는 관심도 없어." "그렇습니다. 하지만 에반 그레이
와 서머셋 경은 도련님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도련님은 클레
런스 모티머 경의 합법적인 후손이십니다. 도련님이 나타나서 상속권을 주장한다면, 그레이
는 손해볼 것이 많아요. 파리 목숨처럼 함부로 목숨을 버리라고 도련님의 생명을 구해드리
진 않았습니다, 제이미 도련님." 제이미는 보기 드물게 진심이 담신 미소를 지으며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래. 게일로드,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이야. 자네가 꾀를 내지 않았다면 난 성을 빼앗으
러 온 국왕의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했거나 프랑스로 추방되어 낯선 사람들의 손에서 자라야
했겠지."
"모티머 영지의 관리인으로서 전 아버님께 여러 가지 은혜를 입었습니다. 제가 도련님을
지켜드리는 건 당연하죠. 제가 살아 있는 한 어떠한 위험이 따르더라도 최선을 다해 주인님
을 지켜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도련님이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면 용납할 수 없습니다." 게일
로드는 좁은 어깨를 당당하게 펴며 말했다.
"자네는 빼앗긴 권리를 되찾겠다는 내 생각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나?" "그럼요, 지
금껏 모은 재산을 가지고 다른 곳에서 정착하십시오. 예쁜 아내를 맞이하고 멋진 저택을 지
은 뒤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겁니다." "쳇, 난 아내 따위는 필요 없어. 여자들이
란 쓸모 없는 존재야, 항상 골치 아픈 문제들을 일으키지. 육체적인 욕망들을 해소하기 위
해서만 필요할 따름이지. 머리가 텅 빈 속물들이 계속해서 주변에서 얼씬거리는 것은 참
을 수 없네."
"그럼 로위나 아가씨는 뭡니까?"
게일로드는 2층으로 이어지는 문을 향해 눈짓을 하며 물었다.
"로위나 역시 나를 기쁘게 할 수 있을 대까지만 내 곁에 머물 수 있겠지. 자네도 잘 알겠
지만, 로위나한테도 곧 신물이 나겠지."
게일로드는 혀를 끌끌 찼다.
"도련님의 어머님을 기억하지 못하시다니 안타깝군요. 온화하고 아름다운 분으로 아버님
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만일 마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여자에 대한 도련님
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을 텐데요. 아버님이 살아 계셨다면 이미 서머셋 경의 따님과 혼인
도 했을 테죠. 도련님이 열두 살이고 앨리타 서머셋 양이 다섯 살이었을 때, 두 분은 정혼
을 했었습니다. 그땐 양가 가문 모두 두 사람이 정말 잘 어울리는 천생 베필이라고 칭찬이
자자했죠. 양가에서 서명한 정식 정혼서도 있구요."
"그 아가씨는 아마 지금쯤 결혼해서 아이도 여럿 낳았을 거야. 올해로 벌써 스물두 살이
되었을 텐데. 자네도 알다시피 여자들은 보통 열다섯이나 열여섯 살쯤에 결혼을 하잖나. 서
머셋 경이 반역자의 아들에게 딸을 넘겨주려고 지금까지 기다렸을 리가 없지." "그 아가씨
가 아니더라도 결혼할 여자는 많습니다."
"자네는 이 허물어져가는 돌무덤 같은 곳으로 내가 신부를 데려오길 바라나? 그럴 순 없
네, 게일로드. 아직 그럴 때가 아냐. 난 모티머 가문의 영지와 재산을 모두 되찾을 때까지는
결혼하지 않을 거야."
제이미는 허탈하게 웃었다.
게일로드는 제이미의 말을 한참 동안 곱씹어보더니 마침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 이 말씀을 드려도 좋을지 자신은 없지만, 이왕 말을 꺼냈으니 하죠, 뭐. 오늘밤
도련님이 관심을 가질 만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제이미는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소문을 털어놓기 전에는 자네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지 못할 테니, 어서 말해보게." 게일
로드는 자못 초조하다는 듯 입술을 혀로 축이며 말했다.
"앨리타 서머셋 양이 에반 그레이의 아내가 된답니다. 도련님이 십여 년째 소식이 없으니
까 두 분의 약혼이 무효라는 판결이 내려진거죠. 소문으로는 2주일 후에 윈저 성에서 결혼
식을 올린다고 하더군요. 얼마 전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하고 돌아온 국왕이 최근에 둘의
결혼을 승낙했다고 합니다."
"서머셋 경이 기뻐 날뛰겠군. 지금까지 딸을 시집보내지 못했다면 그동안 그 노친네가 딸
의 신랑감을 찾느라 혈안이 되었을 거야. 그 여자가 너무 못생겨서 신랑감이 나타나질 않았
나보지."
제이미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제가 듣기로는 아주 미인이라던데요."
"자넨 소문을 주워듣는 데는 정말 귀신이군."
담담하게 대답하던 제이미의 표정은 차츰 심각하게 변해갔다.
에반 그레이의 결혼 계획을 망쳐줘야겠어, 게일로드." 게일로드는 흠칫 놀랐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도련님?"
"제이미 모티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세상아 알릴 때가 온 거야." 주먹을 불끈 쥐며 몸
을 긴장시키는 그의 눈빛은 지옥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게일로드는 서머셋 경의 딸에게 퍼뜩 안쓰러움을 느꼈다.
"도련님, 그 아가씨는 옛일과 상관없는 분입니다."
"어차피 그 여자도 서머셋 가문이야. 서머셋 경은 에반 그레이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죽
음에 깊이 관련되어 있어. 그자 역시 나한테 상속되어야 할 아버지 재산을 그레이 가문과
나누어 가졌네. 서머셋 가문은 모두가 내 원수야."
제이미의 목소리는 앨리타 서머셋의 불행을 예고하듯 냉혹하고 잔인했다. 그는 갑자기 몸
을 돌려 이글거리는 불꽃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침묵 속에서 탁
탁 불똥을 튀기는 장작불만이 춤을 추고 있었다. 한참 뒤 다시 입을 연 제이미의 목소리는
거칠었고, 표정은 몹시 단호했다.
"우리 두 사람이 입을 농부 옷을 좀 구해오게, 게일로드. 우린 내일 아침 윈저 성으로 떠
날 걸세. 가난한 서민의 모습으로 국왕 앞에 나타나 내 약혼녀를 내놓으라고 주장해봐야지.
손해볼 것도 없지 않은가?"
"자칫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도련님."
게일로드는 방을 나가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는 오랜 세월 제이미 모티머와 함께 살면
서 자신의 주인님이 한번 마음을 먹으면 어떠한 말로도 설득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
고 있었다.
윈저 성
"오, 아가씨, 너무 아름다우세요."
나이든 하녀는 주인 아씨의 머리장식을 어루만지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원뿔 모양의 장식
에 달린 긴 베일은 기품 있는 아씨의 자태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이토록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시부를 만난 걸 보면, 에반 경은 분명 운이 좋은 분이 틀
림없어요."
앨리타 서머셋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거울 속 자시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몸에 꼭 맞는 드레스는 고급스런 진홍색 능라직으로 만들어진 최신 유행의 디자인이었다.
스커트 밑단과 V자로 깊게 팬 목선, 어깨, 소매에 장식된 담비 모피는 무척이나 탐스러웠다.
실크로 감싸인 원뿔 모양의 머리장식에는 황금색 시폰 베일이 늘어져 있었지만, 그녀의 등
뒤로 물결치듯 흘러내린 아름다운 금발머리와 비교하면 그 빛을 잃었다. 아담한 키의 앨리
타 서머셋은 천사 같은 얼굴에 사기 인형처럼 우아하고 매력적인 몸매의 소유자였다. 그녀
의 눈동자는 사파이어보다 더 새파랬고, 입술은 싱그러운 딸기처럼 새빨갰다. 뻬어난 미모뿐
만 아니라 그녀는 부유하고 고귀한 가문 출신의 숙녀답게 오만하고 당당한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결혼을 기다려왔으므로 그녀는 대단한 재산가인 에반 그레이 경의
청혼을 받자마자 주저함 없이 승낙했다. 여자로서 나이를 많이 먹고도 결혼을 하지 못했다
는 것은 당혹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반역자의 아들과의 어리석은 정혼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미 결혼해서 부유한 영주의 아내이자 여러 명의 아이들을 둔 어머니가 되어 있었
을 터였다.
"오, 유모, 에반 경이 우리의 결혼에 만족했으면 좋겠어. 그분은 나보나 나이도 훨씬 많고
세상 경험도 풍부하잖아."
"남편은 아내보다 당연히 나이도 많고 아는 것도 많아야 해요. 게다가 그분은 이제 겨우
마흔세 살인 걸요. 그분이 왜 만족하지 않겠어요? 웨일스에 있는 어마어마한 땅과 재산을
결혼지참금으로 받게 될 텐데요, 모든 남자들이 에반 경을 부러워할 거예요. 나리께서 모티
머 경의 아들과 아가씨의 정혼을 마침내 파기시키셨으니 정말 다행이에요. 모티머 경이 죽
오 난 뒤로 제이미 모티머를 보거나 소식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난 그 남자가
지금 당장 저 문으로 들어온다 해도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지 못할 거야."
앨리타는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아버지를 닮았다면 아주 잘생긴 미남일 거예요. 하지만 아가씨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
으셨겠죠. 부전자전이라고, 그 아들 역시 아버지과 똑같은 반역을 꿈꾸는 미치광이일 거예
요. 아가씨는 에반 경과 결혼하는 게 훨씬 나아요."
"저어... 혹시 결혼 전에 내가 꼭 알아둬야 할 게 있을까?"앨리타는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어머니가 없었으므로 그녀는 결혼 첫날밤에 자신이 치러야 할 일에 대해 유모가 조언해주길
바랬다. 그녀는 첫날밤에 치러야 할 전통적인 '침실의식'이 몹시 두려웠지만, 피할 수 없는
절차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둥그런 유모의 얼굴에 잠시 심각한 빛이 서렸다. 그녀
는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할 때면 남자들이 모두 짐승처럼 변한다는 사실을 앨리타에게 얘기
해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남자들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여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 족속들이었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늙은 유모는 남녀간의
잠자리에서 있을 수 있는 즐거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남자들에겐 늘 성욕을 채워주는 애인이 있게 마련이었다. 결혼한 남자가 정식으로
애인을 두지 않는다면 집안의 하녀들이나 마을 아녀자들을 괴롭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전 결혼해본 경험이 없어서 무슨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아가씨. 소문으로 전
해들은 얘기밖에 해줄 수가 없군요. 아마 신랑 되시는 분께서 아가씨가 해야 할 일과 자신
이 원하는 일을 얘기해주실 거예요. 처음엔 아프겠지만, 일단 아기씨가 생기고 나면 더 이상
아가씨를 괴롭히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하녀들이나 마을 여자들과 재미를 보시
겠죠. 에반 경은 제발 집안에 정부를 들이시지 않기를 제가 기도할께요. 그렇게 되면 아가씨
위신이 말이 아니게 되죠, 하지만 그분이 애인을 집안으로 끌어들이지 말란 법도 없어요. 에
반 경이 다른 여자를 집으로 데려오는 날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가씨도 마음의 준비를 해
두셔야 해요."
"에반 경은 절대 애인을 두지 않을 거야!"
앨리타는 표독스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유모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맞닥뜨렸을 때
어린 아가씨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게 될까 몹시 걱정그러웠다. 유모는 에반 그레이 경의
추잡스런 여자관계에 대한 끝없는 소문을 잘 알고 있었지만, 차마 앨리타에게 그 사실을 얘
기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분간은 그런 일이 없을 거예요, 아가씨. 신혼 재미에 푹 빠져서 순결한 신부의 매력을
맛보게 되면 한동안을 에반 경도 딴 생각을 하지 않으실 거예요." 유모가 달래자 앨리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에반 경이 바람을 피우지 못하도록 만들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를 하며
고집스럽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결혼을 학수고대하고 있있고, 아버지가 선택한 탁월한
신랑감에 감격할 지경이었다. 앨리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한번 더 거울에 비춰본
뒤 문을 향했다.
"난 준비됐어, 유모. 에반 경과 국왕폐하를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겠지." 결혼식은 국왕
의 개인 예배당에서 가족들과 가까운 친지들만 참석한 채 거행될 예정이었다. 31세의 나이
로 아직 미혼인 헨리 5세는 프랑스의 찰스 왕족의 후손으로 인정받기 위해 찰스 4세와의
오랜 전쟁을 이끌다 프랑스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1415년, 천 명에 달하는 영국 국왕이
거느린 뛰어난 군사들이 마침내 프랑스 기사들을 섬멸했고, 헨리 왕은 찰스 왕가의 적손으
로 인정을 받은 뒤 승리를 안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조국의 긴급한 정사를 돌본 뒤 헨리 왕
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 찰스 왕족의 딸인 캐서린 공주와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에반
그레이는 예배당으로 들어오는 앨리타의 모습을 탐욕스런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그녀는 아담하고 우아했다. 에반은 앨리타가 백작의 지위에 어울리는 신붓감이라고 생각했
다. 약간 나이가 든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아직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세월은 많이 남아
있었다. 서머셋 경과 그는 제이미 모티머와 앨리타의 정혼을 파기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온
갖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래야만 그는 부유한 상속녀와 결혼해 자신의 재산을 늘릴 수 있을
것이었다. 반면 에반 그레이가 앨리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
다. 그는 모티머 가문의 재산과 부를 빼앗아 소유한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모티머의 신부를
가로채고 싶었던 것이다. 앨리타는 노란색 실크 안감을 덧댄 초록색 벨벳 재킷을 입은 에반
그레이가 무척 잘 생겼다고 생각하며 수줍은 듯 미소를 지었다. 근육질의 다리선을 그대로
드러낸 타이츠는 양쪽 다리의 색상이 달랐다. 왼쪽은 밝은 노란색 실크였고 오른쪽은 같은
질감의 회색이었다. 부드러운 가죽신과 허리띠는 우아한 예복에 잘 어울렸다. 그의 금발머리
는 당시 유행대로 귀밑까지 바짝 치켜올려 자른 모습이었다. 헨리 5세는 왕위를 상징하는
자주색 톤의 에반 그레이와 비슷한 차림새였다. 결혼식에 참석한 남자들 중에는 몸에 꼭 맞
는 타이츠와 재킷 대신 넉넉한 소맷자락의 풍성한 로브를 걸친 사람도 간혹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실크와 벨벳 등 고급 옷감으로 만들어진 예복을 입고 있었다. 여자들 역시 화려한
머리장식과 눈부신 드레스로 남들보다 돋보이기 위해 한껏 치장을 한 모습이었다. 에반 그
레이는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 왕과 나이든 사제가 기다리고 있는 제단으로 신부를 인도했
다.
"아주 아름답소."
그는 노련한 어투로 앨리타를 칭찬했다. 그러고는 좀저 바짝 다가서서 그녀의 귓가에 속
삭였다.
"하지만 내 생각엔 당신이 예쁜 옷을 모두 벗엇을 때가 더 아름다울 것 같소." 앨리나는
머릿속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첫날밤의 잠자리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정신이 아찔했다.
"저희는 준비되었습니다."
앨리타를 이끌고 제단 앞으로 나아가며 에반이 말했다. 나이 많은 사제가 헨리 왕을 쳐다
보자,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는 헛기침을 하며 혼배성사를 시작했다. 갑자기 예배당
문이 벌컥 열리고 남루한 모직 셔츠에 낡은 타이츠를 입은 농부 차림의 두 사내가 경비경들
을 뚫고 국왕의 개인 예배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국왕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제이미
모티머는 고개를 들고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폐하. 하지만 이 결혼은 합법적인 것이 아닙니다." "너는
대체 누구이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게냐? 지금 결혼식을 거행하고 있다는 것을 모
르겠느냐? 감히 이곳에 어떻게 들어왔단 말이지?" 헨리 왕은 화가 난 듯 고함을 질렀다.
앨리타는 자신의 결혼식에 느닷없이 뛰어든 남자를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평
민이든 귀족이든 그녀는 그토록 인상적인 남자를 본 적은 처음이었다. 위풍당당한 모습의
제이미는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결혼식 하객들을 올려다보았다.
"제대로 예복을 차려입지 못한 저의 불손함을 용서하십시오, 폐하. 하지만 소인은 제 아비
가 죽은 이후로 이렇게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검은 눈빛이 에반 그레이
에게 날아가 꽂히자, 백작은 갑자기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소인의 말씀을 전부 들으시고 나면, 이 결혼이 합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폐하로
인정하실 것입니다."
"이봐, 촌뜨기! 당장 사라지지 못해! 한낱 촌놈 주제에 감히 내 결혼식을 중단시키려 들다
니!"
에반 그레이는 제이미를 험상궂게 노려보며 말했다. 앨리타는 너무나 기가 막혀 아무 말
도 하지 못한 채 야만인을 쳐다보았다. 평생 이보다 더 화가 난 적이 없었다. 감히 어디에서
촌뜨기가 나타나 성스런 결혼식을 방해하다니!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한 남자의 아내가
되길 학수고대해왔는데! 촌뜨기 사내는 호화스런 총천연색 새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느닷없
이 나타난 칙칙한 황갈색 참새처럼 초라해 보였다. 앨리타는 마치 그에게서 거름 냄새라고
맡은 듯 예쁘장한 코를 찡그렸다. 서머셋 경은 육중한 몸을 앞으로 내밀며 에반 그레이를
거들었다.
"당장 꺼져라, 이 무뢰한아!"
그가 경비경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제가 무뢰한이라구요, 서머셋 경? 전 제 혈통이 당신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제이미는 침착하게 위엄을 갖추고 말한 뒤, 왕을 향했다. 어느덧 헨리 5세는 화를 내기보
다 호기심이 동하는 표정이었다.
"소인은 제이미 모티머입니다, 폐하. 플린트의 합법적인 백작이고 서머셋 양의 정식 약혼
자죠."
에반 그레이는 신음소리를 흘렸고, 서머셋 경은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앨리타
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차리며 비틀거렸다. 야만인의 얼굴을 한 이 거인이 어떻게
제이미 모티머란 말인가? 그가 정말로 제이미하면 왜 지금껏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나 약
혼녀를 되찾겠다는 것일까? 그토록 오랫동안 남편감이 나타나길 기다렸는데, 남부럽지 않은
결혼을 해보겠다는 그녀의 꿈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는 것일까? 충격을 가라앉히며 서머셋
경이 소리쳤다.
"말도 안되는 소리! 제이미 머티머는 죽었다. 네가 제이미 모티머라는 사실을 무엇으로 증
명하지?"
"존경하는 백작나리, 송구하옵게도 제가 그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게일로드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넌 누구냐?"
헨리 왕은 점점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는 지루한 전쟁에서 돌아온 뒤로 이
토록 흥미로운 일은 처음이었다.
"소인은 게일로드라 하옵니다. 소인은 모티머 경께서 부당하게 반역죄인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시기 전까지 모티머 영지의 관리인이었습니다. 저의 주인님의 신분을 증명할 서
류는 물론이고, 제이미 모티머 도련님과 앨리타 서머셋 양의 정혼을 입증하는 정혼서의 원
본도 가지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두 분의 정혼은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자는 사기꾼이 분명합니다!"
에반 그레이는 제이미를 무섭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서류 또한 날조된 것이 분명합니다."
서머셋 경은 발끈해서 덧붙였다.
"서류를 보고 싶네."
핸리 왕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게일로드는 넉넉한 갈색 외투안에서 두 개의 두루마리
를 꺼내 왕에게 전달했다.
"오랜 세월 동안 소인은 저희 주인 나리의 신분과 정혼 사실을 증명해줄 서류를 간직해왔
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정의로운 심판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헨리 왕은 낡아빠진 두루마
리를 하나씩 펼쳐 찬찬히 읽어본 뒤 제이미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어디에서 살았는가, 모티머?" "원수들이 소인의 영지와 작위를
소유하며 호위호식하는 동안, 저는 웨일스에서 가난에 허덕이며, 어머님이 남겨주신 허물어
져가는 크리케스 성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 신붓감을 되찾을 때가 되었다고 생
각합니다."
제이미는 당당하게 말했다.
"합법적인 서류일 리가 없습니다.!"
서머셋 경은 두려움에 떨며 소리쳤다. 그는 모티머의 후손이 오래전에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클레런스 모티머가 죽고 난 뒤, 그와 그레이 경 부자는 사람을 풀어 오랫동안 어린
소년의 행방을 수소문해보았지만 어디에서도 흔적을 되찾을 수가 없었다. 그와 그레이가 소
년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이유 역시, 모티머의 후손이 공교로운 시기에 나타나 말썽을
일으킬 소지를 미리 없애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 친히 보셨다시피 모든 것은 진실입니다."
제이미는 다시 한번 강조하며 앨리타를 흘끔 쳐다보았다. 지금껏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제이미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장아장 걸어다니던 고집불통
계집아이였을 때였으므로, 앨리타의 빼어난 미모에 그는 약간 얼이 빠졌다. 갑자기 앨리타는
고개을 들고 제이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녀의 짙푸른 하늘빛 눈동자에는 이글거리는 증
오심이 번득이고 있었다. 그는 버릇없는 여자 하나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냐고 자위하면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일단 그의 아내가 되고 나면 좋든 싫든 그녀는 남편
인 자신에게 복종해야만 할 것이다.
"서류들이 위조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지."
헨리 왕은 의미심장하게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위조서류임에 틀림없습니다, 폐하. 이 사기꾼을 당장 내쫓아버리고 어서 결
혼식을 거행하도록 선처해주십시오."
기회를 놓칠 리 없는 그레이가 재빨리 끼여들었다. 그러나 헨니 국왕은 아직 확신이 서질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진실 여부를 밝히기 위해 제이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국왕은 짧은 통치 기간 동안 막강하게 왕실의 기강을 바로잡아 국민
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 비결은 바로 헨리 왕의 조심스러운 성격과 민첩한 판
단력 때문이었다.
"당시 열여덟 살이던 내 기억이 맞는다면 자네 아버지는 웨일스에서 일어난 반란에 가담
한 혐의로 처형되었고, 그의 재산가 작위는 역모를 사전에 알아낸 그레이 가문에 포상으로
주어진 것으로 아는데."
"저희 아버님은 결백합니다. 아버님은 반란에 가담한 것도, 역모를 눈감아준 적도 없습니
다. 아버님의 부와 지위를 시기한 원수들이 공모하여 거짓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제이미
는 확신에 찬 어조로 설명했다.
"그렇다면 증거라도 있나?"
헨리 왕은 날카롭게 물었다.
"증거는 없습니다, 폐하. 하지만 아버님은 제게 거짓말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체포되기
전 아버님은 제게, 절대로 자신이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리처드 국왕과의 절친
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지켰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모티머 가문은 모두다 대
역죄인이야. 네놈이 감히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우려느냐?" 그레이 경은 격분해서 소리
쳤다.
"그렇소, 백작나리. 당신은 거짓말쟁이에다 도둑놈이야. 당신은 내 상속권을 훔쳐갔고, 이젠
내 약혼녀를 빼앗으려 하고 있소. 하지만 이번엔 당신 뜻대로 되지 않을 거요, 신과 국왕폐
하 앞에 맹세코 앨리타 서머셋은 내 아내가 될 사람이오." 앨리타의 얼굴색은 새하얗게 질
렸다.
"싫어요!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난 무일푼인 가난뱅이에게 시집가지 않겠어요. 아버지와
똑같이 반역자가 될지도 모를 남자의 아내가 될 순 없어요." 서머셋 경은 어색한 몸짓으로
딸의 손을 어루만졌다.
"걱정 마라, 아가. 폐하께서 저놈의 허튼 수작을 헤아려주실 게다." "모티머, 정혼서가 합
법적이라는 또 다른 증거가 없다면 난 이 결혼을 연기할 이유가 없다고 보네."
헨리 왕은 선언했다. 제이미가 항의를 하기 위해 입을 벌리자, 그때까지 뒤편에 얌전히 서
있던 늙은 사제가 앞으로 나서며 먼저 말을 했다
"폐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이 문제를 해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국왕은 어리둥절
한 표정이었지만 노인의 얼굴을 알아본 게일로드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폐하, 라이오넬 신부님이야말로 이 정혼서의 합법성 여부를 판가름할 열쇠를 쥐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제에게 두루마리 서류를 넘겨준 헨리 왕은 노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서류
를 다 읽고 난 신부는 왕의 면전에 두루마리를 펼치며 아래 부분의 서명을 손가락으로 가리
키며 말했다.
"두 사람의 정혼에 증인을 선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폐하. 여길 보십시오, 제 서명입니다.
주님과 교회의 이름으로 이 정혼은 합법적일 뿐만 아니라, 이미 양가의 혼례식이 거행된 것
과 마찬가지로 구속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그레이 경과 앨리타 서머셋 양읜 혼례식은
불가능합니다."
제이미의 잘생긴 얼굴에 피어난 환한 미소는 그의 네모난 턱선을 부드럽게 누그려뜨렸고,
수줍은 소년 같은 인상마저 풍겼다. 에반 그레이가 비수를 던지듯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그
를 노려보지만 않았다면 제이미는 아마 큰소리로 웃어댔을 것이다. 앨리타는 극도로 불쾌감
을 표시하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난 상관하지 않겠어요. 난 절대로 가난뱅이 반역자의 아들과 결혼
하지 않을 거예요."
제이미는 그녀를 쏘아보았다. 앨리타는 영혼을 꿰뚫어볼 듯한 그의 강렬한 눈빛과 심각한
표정에 두려움을 느끼며 심장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그녀는 뭐라고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느낌으로 그에게 이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은 제이미 모
티머와 함께 사는 인생은 가장 괴로운 지옥에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경고하고 있었
다.
"당신은 선택할 권리가 없소, 아가씨."
제이미가 말했가. 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국왕을 향해 돌아섰다.
"폐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앨리타 양을 누구에게 인도해 주시겠습니까?" "폐하,
역적들이 리처드 2세를 복위시키려 안간힘을 쓸 때 저희 그레이 가문은 폐하와 선왕의 뒤를
굳건히 지키드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레이가 말하자 서머셋 경이 거들었다.
"그리고 폐하, 소인은 그레이 경을 사위로 원하옵니다." "폐하, 저는 제이미 모티머와 결
혼할 마음이 없습니다. 저는 그레이 경을 남편으로 맞이하겠습니다."
앨리타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청했다. 그녀는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의 결혼식을 방해한 제
이미의 존재를 얼마나 혐오스럽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려는 듯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에반
그레이는 그녀의 지위에 합당한 부와 명예를 지닌 사람이었다. 앨리타는 무일푼의 가난뱅이
남자와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헨리 왕은 깊이 생각에 잠겨 손가락으로 턱을 두들겼
다. 내심 국왕은 막강한 권력을 지닌 에반 그레이 백작에게 감히 도전한 제이미 모티머의
용기를 가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제이미는 큰 키와 거대한 체구만으로도 대부분의 남자들이
꼼짝하지 못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그의 외모에 기세가 꺾이지 않은 사람이 혹시라도 있다
면, 칠흑 같은 그의 검은 눈동자만 바라봐도 오금이 저릴 것 같았다. 제이미 모티머는 무슨
일이든 자신의 뜻대로 하고야 마는 사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헨리 왕 역시 바보
가 아니었다. 그는 제이미 모티머같은 열정적인 젊은이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었으므로,
그레이 가문과 서머셋 가문의 반감을 사지 않고 이 골치아픈 상황을 헤쳐나갈 방법이 없을
까, 고심하는 중이었다. 결국 진퇴양안의 궁지에서 벗어날 방도를 제시한 사람은 라이오넬
신부였다. 늙은 사제는 교회의 거룩한 권위를 대신해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 이 문제의 결론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저도 게일로드를 잘 기억합니다. 그는
모티머경의 충실한 심복이었습니다. 우리 앞에 서 있는 저 청년이 제이미 모티머가 틀림없
다고 게일로드가 증명하고, 출생증명서 또한 그 사실을 밝히고 있다면 모든 것은 진실임에
틀림없습니다. 더욱이 제가 앨리타 양과 제이미의 정혼을 집전했었으므로 두 사람의 약혼은
합법적으로 유효합니다. 제이미 모티머 스스로 정혼을 파기하고 앨리타 양을 놓아주지 않는
한, 에반 그레이 경과 앨리타 서머셋 양의 결혼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서머셋 경은
너무 화가 나 말문이 막혔지만, 에반 그레이는 이대로 몰러설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저 늙어빠진 멍청이의 횡설수설을 그대로 따르실 생각이십니까. 폐하? 저 늙은이의 기억
이 오락가락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입니다." 깡마른 늙은 사제는 허리를 꼿꼿이
펴며 서릿발 같은 눈초리로 에반 그레이를 노려보았다.
"내 기억력은 당신보다 좋으니 걱정 마시오, 백작. 당신과 달리 나는 모티머 경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사람이 어쩌다 죽게 되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소." "신부님의 의
견을 잘 들었습니다. 결혼에 관한 한, 나는 거룩한 교회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소. 나 역시
앨리타 서머셋과 제이미 모티머의 정혼은 유효하다고 판결을 내리는 바이오." 헨리 왕이
엄숙하게 선언하자 앨리타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럴 수 없습니다, 폐하! 설마 옷에서 소똥 냄새나 풍기는 이 촌뜨기에게 저를 내던지시
는 아니겠죠!"
그녀는 평행 이처럼 굴욕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제이미는 장래의 아내가 될 여자의 거
침없는 말을 들으며 빙그레 미소르 지었다. 이윽고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한 그가 소리쳤
다.
"그만두시오! 아내가 남편 앞에서 그렇게 막돼먹은 행동을 하도록 내버려둘 순 없소." "
오, 이 야만인!"
제이미는 앨리타의 분노에 아랑곳하지 않고 국왕에게 공손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폐하, 소인은 신붓감을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왔고, 또 그 동안 제 신부는 나이가 들어 아
이를 낳을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폐하만 허락하신다면 신부님과 하객
들도 이미 참석한 마당에 이 자리에서 저와 제 약혼녀의 결혼식을 거행하고 싶습니다."
2
"안 돼요! 그럴 순 없어요! 폐하, 제발 부탁이옵니다. 이 남자와 절 강제로 결혼시키지 말
아주세요!"
앨리타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간청했지만, 이미 운명의 칼날을 피할 도리
가 없다는 두려움이 가슴 가득 파고들었다.
"폐하, 신부님 말씀 들으셨잖습니까? 설마 거룩한 교회의 명은 거역하시려는 것은 아니겠
죠?"
제이미는 아무리 국왕이라도 감히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
었다. 하지만 헨리 왕이 두 사람의 결혼을 즉석에서 허락해줄 것인지는 자신이 없었다.
"폐하, 이러시면 안 되옵니다. 이자가 소인의 따을 제대로 부양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
합니다. 땅 한 뙈기 없는 가난뱅이에게 제 소중한 딸을 시집보내 고통을 겪게 하시렵니까?"
야릇하게 반전되어가는 상황에 당황하며 서머셋 경이 왕에게 탄원했다. 에반 그레이는 건방
진 애송이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는 듯 검을 만지작 거렸다.
"소인도 전적으로 서머셋 경의 의견이 동의합니다. 이 반역자의 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정말로 약혼녀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벌써 나타났어야 마땅합니다. 이자가 분명 무슨 꿍꿍이
를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레이가 단호하게 말하자 헨리 왕은 제이미를 쳐다보며 물었다.
"자넨 뭐라고 대답할 텐가?"
"폐하의 선왕께서 살아 계신 동안에는, 선왕께서 혹시 제 부친의 억울한 누명을 빌미로
저를 국외로 추방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때가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저로서는 절대로 조국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제 신부를 부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폐하. 서머셋 양이 엄청난 지참금을 가져
올 테니까요. 저는 합법적인 남편으로서 그 지참금을 제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권리가 있습
니다. 제 아내는 저의 완벽한 보호 아래 부족함 없이 잘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헨리 왕은
슬며시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제이미 뫼머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왕은 슬그머니 앨리타 서머셋을 훔쳐보았다. 국왕 역시 그녀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미모는 전설적이었지만 불같은 성미 또한 유명했다. 여자라면 무조건
주어진 대로 양순하고 순종적으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시대였지만, 그녀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에는 절대로 굴하는 법이 없었다. 앨리타 서머셋은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데 익
숙한 여자였으므로, 그녀에게는 그녀의 기질을 완전히 죽이지 않고 적당히 조종해가며 살
수 있는 현명하고 힘있는 남편감이 필요했다. 발끈하는 그녀의 성질 역시, 얼굴만 예쁘고 매
력없는 미인들과 차별화되는 그녀 특유의 아름다움이었다.
"존엄한 교회를 대변해서 라이오넬 신부가 이미 둘의 관계를 인정했으므로 자네의 바람을
들어주겠네, 제이미 모티머."
에반 그레이가 반박을 하려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지만, 헨리 왕이 한 손을 들
어 그를 저지했다.
"자네 신부가 엄청난 지참금을 가졌다는 자네의 짐작은 맞았네. 자네도 잘 알다시피 정혼
서에 모든 것이 명시되어 있더군. 웨일스에 있는 많은 토지 중에서 자네가 결혼 후에 얻게
될 영지는 크리케스 성에서 가까운 대형 장원과 그 주변의 영토일세. 그곳에 정착하려면 약
간은 수리를 해야 할 거야. 그 주변의 마을 몇 개와 농장들도 포함될 터이고, 자네는 그들에
게 세금을 걷는 책임을 맡아야 하네. 하지만 지금 그레이 경이 소유하고 있는 모티머 가문
의 작위와 재산에 대해서는, 자네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기 전에는 자네에게 되돌려 줄 수
없다네."
"그렇다면 특별히 은혜를 베푸시어 십삼 년 전 저희 아버님에게 내려졌던 판결을 다시 조
사해주십시오, 라이오넬 신부님께 진상을 여쭤보시면 제 주장이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저의 아버님은 주면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분으로, 절대 국왕폐하를 배반할 분
이 아닙니다. 아직 생존에 계신 여러 아버님의 친구분들에게 확인해보시면 진실을 밝혀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헨리 왕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음, 그러지. 신의 가호로 진실이 승리하길 빌어보세, 그건 그렇고 이젠 결혼식을 올려야
겠지. 신부님, 준비되셨습니까?'
"예."
라이오넬 신부의 목소리는 근엄했지만, 눈빛은 장난스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안 됩니다! 저는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그 장원이 어디인지 잘 압니다. 그곳은 토굴이나
다름없는 곳이에요. 사람이 살려면 저택을 수리하는 데 적어도 몇 달이 걸릴 거예요. 그때까
지만이라도 결혼을 연기해주십시오, 폐하!"
앨리타가 다시 한번 간청했다.
"제 아내는 저와 함께 크리케스 성으로 갈 것입니다. 저는 벌써 여러 해 동안 별 불편 없
이 그곳에서 살아왔습니다. 제 아내도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상속권이 회복되어 저
의 선조때 부터 내려온 성을 되찾기 전에는 저는 다른 어떤 저택에서도 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아버님의 명예가 회복되고 제 작위와 재산을 되찾을 때까지 저는 크리케스에 있
는 성에서 살 것입니다. 제 아내도 마찬가지구요."
제이미가 대신 대답했다. 국왕은 눈앞에 서 있는 젊은이에게 점점 더 매료되었다. 비슷한
나이기도 했지만 왕과 제이미는 둘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대담하고 고집스
런 단호함과 의지를 가진 사내였다. 왕은 마지막으로 제이미에게 물어보았다.
"예식에 앞서 결혼식에 어울리는 의복으로 갈아입지 않겠는가?" "싫습니다, 폐하. 의복으
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미천한 의복을 입었을 망정 제가 백작의 아들
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습니다." 사실 제이미는 국왕을 포함하여 예식에 참석한 그 누구
보다 부자였고 고급스런 옷도 많이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국왕이 사재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럼 어서 식을 거행하시지요, 신부님."
제이미는 싱긋 웃었다. 순간 검게 그을은 그의 엄숙한 얼굴이 환하게 빛나며 스물아홉인
그의 나이보다 훨씬 더 어려 보였다.
"잠깐만요! 저는 이 광대극에 참석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러나도록 윤허해주십시오, 폐하."
국왕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에반 그레이가 소리쳤다.
"좋을 대로 하시오."
그레이는 곧 화난 걸음걸이로 예배당을 빠져나갔다. 제이미의 곁을 지나던 그는 잠시 멈
춰서서 그의 귀에만 들리도록 내뱉었다.
"언젠가 톡톡히 복수해줄 테니 기다려라, 모티머."
곧 그는 사라졌고, 제이미는 그의 협박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웃음을 머금었다. 제이미는
앨리타의 팔꿈치를 잡아 제단으로 이끌었다.
"저희는 준비되었숩니다, 폐하."
사제는 속 예식을 거행하기 시작했고, 앨리타는 예기치 못한 사건의 반전에 어리둥절한
채 제이미의 곁에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오늘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 되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지옥보다 끔찍한 악몽으로 변해버렸다. 혼배성사를 집전하며 신
부가 혼인서약을 지키겠느냐고 묻자 앨리타는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제이미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완고하게 반항을 표시하는 그녀의 표정을 눈치챈
제이미가 앨리타의 팔꿈치를 세게 쥐었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고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의 낮은 비명을 대답으로 간주한 신부는 태평스럽게 미사를 계속 집전했다. 이윽고 라
이오넬 신부가 두 사람이 신과 왕앞에서 정식으로 남편과 아내가 되었음을 선언하자, 앨리
타는 눈에 띄게 비틀거렸다. 제이미는 신부를 돌려세운 뒤 엄지와 검지로 앨리타의 얼굴을
들고 바다처럼 깊은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뇌리에 맨 처음 떠오른 생각
은, 자신은 결혼을 꿈도 꾸어보지 않았었는데 어쩌다 아내를 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었
다. 에반 그레이와 서머셋 경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원수의 딸에게까지 분노를 터뜨릴 필요
가 있을까? 앨리타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는 혹시라도 그녀의 미모에 흔들리
지 않기 위해 단단히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그러나 그러한 결심에도 불구하고 제이미는 자
신도 모르게 열정적으로 신부에게 키스하기 시작했고, 국왕은 민망하다는 듯 혀를 찼다. 앨
리타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앨리타는 제이미가 자신에게 키스하려고 한다는 것을 느낀 순간, 이미 충격과 분노에 사
로잡혔다. 그녀는 뒤로 몸을 빼려 했지만 그는 억세게 그녀의 얼굴을 붙든 채 촉촉하고 다
뜻한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그의 입맞춤은 강렬하고 노골적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
가 예상치 못했던 짜릿한 느낌을 전해주었다 .제이미 모티머는 국왕과 혼례식에 참석한 모
든 하객들 앞에서 그녀가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려는 것 같았다. 그의 혀가
그녀의 이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을 때 앨리타는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그녀는 비릿한 피맛
이 느껴질 때까지 불쾌한 침입자를 세게 깨물었다. 제이미는 눈을 크게 뜨고 부리나케 입술
을 뗀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능청스런 표정을 지었다. 앨리타는 통쾌한 심정으로 불쾌
감에 몸을 떨며, 야만스런 남편감에게서 돌아섰다. 그녀의 자그마한 체구에 비하면 그는 거
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아내를 때리려 한다면 그녀는 치명상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그
가 폭력을 휘두른다 해도 그녀를 옹호해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앨리타는 쉽
사히 굴복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명예롭고 소중하게 지켜주었을 고귀한 신랑감
을 물리치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가난뱅이 시골뜨기에게 언제고 무슨 방법으로든 반드시
복수하고야 말겠다고 맹세했다.
국왕이 베푼 결혼피로연에 모여든 사람들은 대부분 침울하고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흥겨
워하는 사람은 제이미와 게일로드, 헨리 왕, 그리고 라이오넬 신부뿐이었다. 서머셋 걍 주변
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둘러서서 그를 위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앨리타는 남편이 된 제
이미와 한 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거나 같은 컵으로 포도주를 마시기를 단호히 거부했다. 피
로욘은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지루하게 이어졌지만, 앨리타는 차라리 그 편이 낫다고 생각
했다. 곧 치르게 될 이 낯선 남자와의 첫날밤을 생각만 해도 그녀는 등줄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신랑이 에반 그레이였다고 해도 첫날밤이 몹시 두려웠을 터인데, 하물며 낯선 훼방
꾼과의 신혼초야는 더욱더 공포스러웠다.
"당신 춥소?"
그녀가 어깨를 부르르 떨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제이미가 물었다. 지까지는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이 서로 얘기할 기회가 없었다. 제이미는 줄곧 신부를 무시한 채 국왕과 대화를 나
누는 데 열중했으므로, 앨리타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 속으로만 화를 삼킬 뿐이었다.
"아뇨, 당신에 대한 내 혐오감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뿐이에요." 앨리타가 매몰차게 대답
하자 제이미는 인상을 찌푸렸다.
"날 두려워할 필요는 없소, 앨리타. 나도 인간이오. 당신이 내게 순종하기만 한다면 우린
서로 잘 지낼 수 있을 거요."
"난 당신을 내 남편으로 인정할 수 없어요."
앨리타는 자신이 위험한 선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바르게 말했다. 새신랑이
주먹을 날린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주먹은 날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곁눈으로 그를 살폈다. 아내가 남편에게 공공연히 반항을 하다니 용감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이라면 폭력으로 무마하려고 들 만한 어리석은 짓이었다.
"일부러 나를 화나게 하려는 거요? 나를 자극해서 내 안에 있는 야만스런 짐승을 우리 밖
으로 끄집어내기보다는 얌전하게 달래는 쪽이 당신한테 이로울 거요." 앨리타의 안색이 하
얗게 질렸다.
"당신이 짐승이란 말인가요?"
이유는 알수 없었지만 그녀는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의 야만스런 표정은 정말로 맹수
와 닮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날 그렇게 부르지."
그의 우울한 미소는 그에게서 부드러운 대접을 기대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
었다. 문득 시선을 돌린 제이미는 문가에 서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저 하녀가 지금 당신을 부르고있는 것 같은데?"
앨리타는 고개를 돌려 문가에서 손짓을 하고있는 유모를 쳐다보았다. 앨리타의 얼굴은 새
빨갛게 달아올랐다가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그녀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들부들 몸을
떨기 시작하자, 제이미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그렇게 두렵소?"
"당신이 두렵냐구요? 아뇨, 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내가 무서워서 그러는게 아
니라면 왜 떨고 있는 거요?" "내가 두려워하는 건 침실의식이에요. 낯선 사람들에게 신부
의 벗은 몸을 보여주는 행위는 야만스런 관습이에요. 내 몸에 흉터나 흠집이 있는지 검사
하려는 탐욕스런 남자들의 노리갯감이 되긴 정말 싫어요."
앨리타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 순간가지도 제이미는 결혼식 이후에 당연하게 이어지는
침실의식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고귀한 가문의 아가씨들과 어울리거나 사귀
어볼 기회가 전혀 없었으므로 그는 침실의식이 신부에게 얼마나 불쾌한 시련인지 알지 못했
다.
"하녀와 함께 방에 올라가 있어요. 나도 곧 뒤따라가겠소." 무표정한 그의 얼굴과 무덤덤
한 목소리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수가 없었다. 앨리타는 떨리는 목소리로
왕에게 인사를 건넨 뒤, 유모를 따라 황급히 사라졌다.
"오늘밤엔 자네가 부럽군, 모티머. 얼마나 있다가 침실의식을 시작할 생각인가? 자네 신부
처럼 완벽한 미모를 갖춘 여인이 몸에 보기 싫은 흉터가 있을 리는 없겠지." 헨리 왕은 앨
리타의 뒷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침실의식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는 남자는 국왕
한 사람뿐이 아니었다. 사내들은 제이미 몰래 앨리타의 몸 구석구석을 상상하며 내기를 걸
고 있었다.
"오늘밤 침실의식은 없습니다, 폐하. 저는 질투심이 많은 남자입니다. 제 아내의 벗은 몸
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제이미는 넌덜머리난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다 재미로 하는 일이 아닌가."
헨리 왕은 실망과 감탄이 뒤섞인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국왕 앞에서 감히 자신의 솔직한
의견을 털어놓을 만큼 용감한, 아니 어리석은 남자는 드물었다. 제이미는 정말로 대담한 사
내였다.
"어쨌든 공식적인 침실의식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 제 바램입니다. 게일로드를 제외하면
여기 계신 누구에게도 제가 옷 벗는 것을 시중들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침실까지 저를
인도하겠다고 자청하는 사람들의 본심은 모두가 단순히 제 아내의 몸을 훔쳐보고 싶은 욕심
으로 가득 차 있을 테니까요."
"자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게. 자네를 따라 신방으로 가는 사람이 없도록 내가 각별히
조처하겠네."
왕은 무척이나 낙담한 어조로 말했다. 곧 그는 시종에게 제이미의 잔을 채우도록 신호를
보냈다.
"어서 마시게, 젊은 친구, 자네가 신혼 첫날밤을 은밀하게 보낼 수 있도록 보호해줄 것이
니, 자낸 내게 빚을 진 셈이네. 첫날밤의 잠자리는 오래 기다릴수록 더 좋을 걸세." 앨리타
의 얼굴은 붉은 장미처럼 상기되었고, 그녀의 몸 역시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가 몸
을 떨며 열에 시달리는 이유는 침실의식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제이미의 말 때문이었다. 앨
리타가 신방을 향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그녀의 아버지가 어두운 그림자 속
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 깜짝 놀랐잖아요."
앨리타가 숨을 몰아쉬며 말하자, 서머셋 경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저놈은 쉽게 달아나지 못할 거다, 얘야. 지금 막 그레이 경과 얘길 나누었는데, 네가 제
이미 모티머에게 오래 시달리지 않도록 빨리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린 이미 결혼
무효 소송을 준비중이다."
"이젠 어떻게 해도 소용없어요. 전 그 남자의 아내예요, 아버지. 그 남자가 오늘밤 남편감
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거라구요. 일단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나면, 전 더이상 다른 남자
에게 아무런 쓸모도 없는 여자에요."
앨리타가 투덜거렸다.
"그렇지 않아. 그레이 경은 여전히 널 받아들여줄 거야. 그러겠다고 나한테 약속을 했어."
"고린내나는 시골뜨기에게 몸을 허락하고 난 다음에도 그레이 경이 나를 받아들여주겠다구
요?"
"그렇단다.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어라. 아직 우리가 진 게 아니야. 우리가 모티머를 제거
하고 나면 너는 어엿하게 부유하고 권력 있는 백작의 아내가 될 테니 걱정 마라." "아씨,
서두르세요. 서방님이 오시기 전에 준비를 해야죠." 유모는 계단 꼭대기에서 다그쳤다.
"이제 가보거라. 최대한 저항을 하면서 그자에게 어쩔 수 없이 허락해야 할 이상은 절대
내주지 말아야 해. 마음의 문을 꼭꼭 닫아걸고 기다려라. 그러면 애비가 곧 서머셋 가문에
어울리는 남편감을 다시 찾아주마."
서머셋 경은 딸의 등을 살짝 밀며 다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앨리타는 아버지의 얼굴을
잠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돌연 몸을 돌려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유모는 침실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옷을 벗으세요, 아씨. 그레이 경은 분명 성미가 급한 신랑이실 거예요." 앨리타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유모는 그녀가 에반 그레이와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
는 것일까?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유모는 계속해서 신방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었다
"그레이 경은 오늘 밤 신방에 들지 않아."
앨리타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친구분들이 그레이 경의 옷을 벗긴 다음에 신방으로 데려와 침실
의식을 시작할 텐데요. 의식이 다 끝나고 나면 그제서야 아씨는 서방님과 단둘이 밤을 보내
게 되는 거예요."
유모는 앨리타를 나무라듯 꼬치꼬치 설명했다.
"사실이라니까, 유모. 오늘밤 그레이 경은 이 방에 오지 않아. 저녁 내내 유모는 어디에
있었어?"
"저야 줄곧 이 방에서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었죠. 뭐가 잘못됐나요?" "그래, 유모. 일이
잘못돼도 단 히 잘못되었어.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구. 제이미 모티머가
예배당에 나타나 결혼식을 중단시켰어." "제이미 모티머가요!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그 젊
은이는 벌써 오래 전에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요, 그럼 오늘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단 말씀이
세요?" "아니, 결혼식은 올렸어. 하지만 내기 기대했던 결혼식은 아니었지. 라이오넬 신부
님이 나와 제이미의 정혼이 합법적이라고 선언했고, 그 말에 따라 국왕폐하는 그레이 경과
내 결혼을 무효화시켰어. 유모도 그 거만한 무뢰한을 봤어야 하는 건데." 앨리타는 씁쓸하
게 말했다.
"누구요? 그레이 경 말씀이세요?"
어리둥절해진 유모가 되물었다.
"아니, 제이미 모티머 말야. 농부들이나 입는 천한 옷을 입은데다가 온몸에서 나는 악취가
말도 아니었어. 그 남자는 무일푼인 가난뱅이에 땅도 없고, 게다가 반역자의 아들이야. 그런
데도 국왕폐하는 나를 그자와 결혼시켰다구."
"라이오넬 신부님이 두 분의 약혼이 유효하다고 선언하셨다면, 폐하도 어쩔 수 없으셨겟
죠."
유모는 비탄에 빠진 앨리타를 어떻게든 위로해보려고 애썼다.
"그 촌뜨기가 오늘밤 당장 결혼하게 해달라고 폐하에게 요청했을 때 난 그 자리에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어."
유모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그럼 아씬 제이미 모티머와 결혼한 거예요?"
"그래, 유모. 아버지와 그레이 경이 극구 만류했는데도 폐하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어. 폐
하는 오히려 그 악당의 편을 드는 것 같더라니까."
"에그머니나, 가엾은 우리 아씨."
품으로 뛰어든 앨리타를 감싸안은 늙은 하녀의 목소리엔 연민이 가득했다. 앨리타는 이처
럼 절망적이로 무기력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과거에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느낌이었다.
"난 절대로 그럴 수 없어, 유모. 그 불한당 같은 촌뜨기에게 몸을 허락할 순 없다구. 목숨
을 잃는 한이 있더라고 싸우고 말 거야."
"자, 자, 아씨, 진정하시고 다른 생각을 해봐요. 어쩌면 서방님이 도착하기 전에 아가씨를
몰래 성밖으로 빼돌릴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아버님이 무슨 조치를 취하셔서 아가씨가 다
시 자유로워질 때까지, 저와 함께 몰래 숨어다니면 돼요." 유모가 앨리타의 등을 다독이며
말하자 앨리타의 푸른 눈동자는 새로운 희망으로 반짝거렸다.
"오, 유모, 좋은 생각이야. 유모라면 믿을 수 있어. 빨리 서두르면 침실의식을 하기 위해
남자들이 잔뜩 취해서 신방으로 몰려오기 전에 멀리 달아날 수 있을 거야 어서 내 옷을 꾸
려줘, 유모. 당장 떠나야 해."
어느 정도 취하기는 했지만 신부와 첫날밤을 치르는 데 어려움은 없을 정도로 술을 마신
제이미는 약간 비틀거리며 일어난 헨리 왕에게 꾸벅 인사를 올렸다.
"폐하의 호위에 감사드립니다만, 제 신부가 안절부절 기다리다 못해 다른 시랑을 찾아가
기 전에 이만 올라가봐야겠습니다."
제이미가 말을 마치자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몇몇 남자들이 그의 뒤를 따라 일
어서자 헨리 왕이 손을 뻗어 그들을 만류했다. 국왕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신방으로 향하는 계단까지 그를 따라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계단에 한
쪽 발을 막 얹으려는 순간 제이미는, 어두운 성벽에 듬성듬성 밝혀진 횃불에 비친 두 개의
그림자가 벽에 바짝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 모두 여자가 분명했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제이미는 움푹 팬 성벽에 몸을 감추고 두 사람의 정체가 드러날 때까지 기다렸다. 두
여자 모두 외투를 걸치고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금방 앨리타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마구간으로 오세요, 아씨."
앞장을 서던 유모는 계단 아래에 이르자 어깨 너머로 속삭였다. 유모는 아직도 피로연장
에서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 하객들을 피해 서둘러 복도를 빠져나갔다. 앨리타가 바짝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 그녀는 뒤를 돌아보거나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앨리타가
더이상 그녀의 뒤를 쫓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유모는 기겁을 했을 것이다. 제이미
는 앨리타의 갸냘픈 허리를 움켜잡으며 한 손으로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은 뒤, 그녀를 번쩍
안아올려 나선형 계단을 올라 신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앨리타를 바닥에 내려놓기전에 옷
속에서 열쇠를 꺼내어 문을 단단히 잠갔다.
"어딜 가는 길이었소? 혹시 당신이 우리의 결혼에 불만을 품고 달아나려는게 아니었나 의
심할 뻔했잖소."
그가 느물느물 빈정거리자 앨리타는 짭짤한 그의 손맛이 뱀 침을 뱉어냈다.
"내가 이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잖아요. 내가 원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그
레이 경이에요. 도대체 당신이 무엇 때문에 지위와 예의범절 면에서 당신을 한없이 깔아뭉
갤 여자를 아내로 원하는 거죠?"
제이미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아니지, 부인. 내 몸 아래에 깔아뭉개질 사람은 바로 당신이지." 그의 말에 앨리타
는 기가 막혔다. 그녀는 혐오스런 표정으로 그의 남루한 옷차림을 바라보며 뒷걸음질을 쳤
다.
"당신한테 구역질이 나요."
제이미의 검은 눈동자가 음험하게 빛났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신부를 다룰 권리가
있었다. 아내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당연한 남편의 의무였다. 그녀를 때릴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신부가 맞을 짓을 했다고 해도 신혼 첫날밤에 그런 불상사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불같은 성미를 가진 여자에게 더 호감이 갔다.
"아씨, 아씨, 안에 계세요?"
문으로 달려가던 앨리타는 갑자기 멈춰섰다. 문이 잠겨 있다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기 때
문이었다.
"하녀에게 별일 없다고 말하시오."
그녀가 침묵을 지키고 서 있자, 그는 거칠고 무자비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서 하라니까!"
"난 괜찮아, 유모."
"왜 돌아오셨어요? 어서 문을 여세요.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 해요." 유모가 걱정스런 목
소리로 말했다.
"이미 너무 늦었소, 유모. 가서 잠이나 자둬요. 오늘밤 아씨는 자네의 시중이 필요 없으니
까."
제이미가 큰소리로 말했다.
"어머나."
문밖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유모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아씨의 뜻입니까?"
"어서 대답하시오."
제이미가 독촉했다.
"그래, 유모. 걱정하지 말아. 난 괜찮아. 가서 잠이나 자." "알겠습니다, 아씨."
마지못해 대꾸하는 유모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이젠 어떻게 하죠?"
앨리타가 초초한 듯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침실의식을 거
행하기 위해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것만 같은 남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모욕적인
의식을 버텨애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제이미는 사악한 악마처럼 씩 웃었다.
"이젠 당신이 날카로운 치아로 날 공격해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슬슬 잠자
리에 들어야겠지."
앨리타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린 그는, 그녀가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금방 알
아차렸다.
"공식적인 침실의식은 없을 거요. 나 혼자서만 당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로 했소." 그
는 입고 있던 남루한 옷을 벗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앨리타는 잠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을 뿐, 다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제이미는 짧은 갈색 외투를 벗어버리고 허리에 감았던
끈을 풀고 있었다. 깃이 없는 긴소매의 셔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성긴 모직 타이츠
에 우스꽝스러운 모양의 나막신을 신은 채 그녀의 앞으로 다가서자 앨리타는 경악하며 돌아
섰다. 그의 어깨는 적어도 그녀의 어깨의 두 배가 넘는 것 같았고, 넓은 가슴엔 검은 털이
무성하게 덮여 있었다. 굵은 목덜미와 단단한 팔의 근육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 강인해 보
였다. 근육질로 뒤덮인 거대한 상체는 날씬한 허리로 이어졌다. 남자가 노골적으로 남성미를
자랑한다는 것은 몹시 상스럽게 여겨졌다.
"당신도 옷을 벗으시오. 아니면 하녀 대신 내가 옷을 벗겨주길 바라오?" 제이미는 속삭
이듯 중얼거리며 손을 뻗었다. 제이미는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사제가 두 사람이 정식으로 남편과 아내가 되었다는 선언을 한 순간부터 그는 도도한 신부
와 보낼 첫날밤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자그마한 몸매에는 온통 교만
한 말괄량이 기질이 넘쳐 보였다. 그는 그녀의 뼛속 깊이 흐르는 아집과 반항기를 송두리
째 뽑아버리고, 그녀를 양순하게 길들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또한 그는 순수하게 법
적인 목적에서라도 잠자리를 치러 두 사람의 결혼을 합법적으로 정당화시킬 필요가 있었
다. 그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앨리타를 이용한 것 이상으로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이 없다고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난 당신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싶지 않아요."
앨리타가 오만하게 말하자 제이미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원하든 말든 상관 없소."
그는 황금빛 베일이 달린 머리장식을 거칠게 벗겨냈다. 그녀의 좁은 어깨 위로 탐스런 은
빛 금발머리가 흘러내려 허리까지 물결치자 제이미는 흠칫 숨을 들이켰다.
"아름답소."
그는 폭포처럼 등줄기로 흘러내린 그녀의 숱 많은 머리칼에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그
녀의 탐스러운 머리채는 물위에 반짝이는 달빛을 연상시켰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
카락을 쓸어내리며. 액체로 변한 은덩이처럼 매끄럽게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감촉에[
황홀감을 느꼈다. 앨리타는 그의 손아귀에서 머리채를 빼내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제이
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섰다.
"날 피해 도망칠 순 없소."
"소릴 지르겠어요."
그는 피식 웃었다.
"어디 마음껏 질러보시지, 왕궁의 벽은 두껍고, 늘 그렇듯 신방을 성안에서 가장 외딴 곳
에 위치하는 법이오."
"난 순순히 굴복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제이미는 악당처럼 씩 웃었다.
"당신을 때려줄까도 생각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기를 바랬소. 당신이 자꾸 나를 자극한다
면 마음을 바꾸어 당신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도 있소. 그렇게 된다면 잠자리만큼이나 즐거
운 일이 될 거요."
앨리타는 도전적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당신의 체격은 나의 두 배예요. 당신의 절반도 안되는 사람을 때려야 성이 풀리겠다면
어서 해보시죠."
앨리타의 허세와 오만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제이미는 그녀의 용기에 감탄스런 생각이 들
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용기가 가상하다고 해서 그들의 결혼을 합법화시켜줄 잠자리를 그냥
넘어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강렬한 검은 눈빛으로 그녀를 꼼짝하지 못하도록 사로잡은 다
음, 그는 앨리타에게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쉽사리 그녀를 잡을 수 있었다. 제이미는 그녀
의 가느다란 허리를 움켜잡고 철벽처럼 단단한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앨리타는 이성
과의 육체적인 접촉이 처음이었으므로 그의 강렬한 반응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진 않소."
제이미는 자신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약간 놀랐다. 여자에게 잔인하
고 야만스럽게 행동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두 사람의 결합 자체를 즐기며
상대방에게 짜릿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상대가 마을 처녀이거나 하녀
이거나, 혹은 로위나이거나 상관 없이 그는 자신과 나누었던 정사를 여자들이 절대 잊지 못
하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는 모든 여자들이 머리가 텅 빈 쓸모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그
렇다고 해서 그들을 혹사시킬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날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면 날 놔줘요. 당신은 나에 비해 너무 거대해요." 앨리타가 간
청했다. 제이미는 앨리타의 말뜻을 알아차리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그녀의 말
뜻을 알아챈 그는 욕정에 사로잡혀 자신의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앨
리타를 노려보았다.
"이 밤이 지나기 전에 당신은 남녀의 육체의 신비에 대해 알게 될거요. 뿐만 아니라 스스
로 그것을 몹시 즐기게 될 거요."
"아뇨,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요."
"글쎄,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난 즐길 거요." 그의 입술이 곧바로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앨리타는 평생 두 번째로 남자의 열정이 전하는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
었다. 첫번째 경험은 혼인서약을 마치고 나자마자 겪어야 했던 갑작스런 입맞춤에서였다. 그
녀는 제이미의 입술이 딱딱하고 고통스러우리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집요한 그의 입맞춤은 뜻밖에도 부드러웠다. 그녀는 두려운 마음으로 잔인한 열정이
폭발하기를 기다렸지만 그의 욕망은 달콤하게 그녀를 설득하려는 듯 조심스러울 따름이었
다. 그녀는 그에게서 쓰디쓴 증오심을 맛보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입술과 혀
를 사로잡은 느낌을 따뜻함과 달콤함이었다. 그때 문득 아버지의 경고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그녀는 몸이 경직되며 다시 거칠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제이미 모티머에게 굴복하
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그녀는 그것이 가능할지 자신이 없었다. 제이미는 앨리타가 몸을 비
틀며 반항하는 것을 느끼자 코웃음을 쳤다.
"그럼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난 진심으로 당신을 부드럽게 대하고 싶었소. 하지만 당신이
그토록 원한다면 당신이 선택한 방식대로 해주겠소."
그는 앨리타의 허리를 번쩍 안아올려 침대 위로 내동댕이쳤다. 자상한 유모의 배려로 인
해 침대에는 이미 이불이 들춰져 있었다. 제이미는 아무런 감정도 싣지 않고 냉담하게 잠자
리를 치르려 했다. 하지만 신혼부부의 첫날밤은 갑작스럽게 뜨거운 의지력의 대결로 돌변했
다. 게다가 그의 가슴속에 잠자고 있던열정이 숨가쁘게 폭발할 듯 깨어나 고통스런 고문처
럼 그르 괴롭혔다. 그는 반항심으로 가득 찬 자신의 시부를 미치도록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복수심 때문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그가 가장 증오하는 상대에게서 신붓감을 빼앗았
다는 뿌듯한 자만심 때문도 아니었다. 그는 앨리타 서머셋이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을 위한
여인으로 운명지어졌기 때문에 그녀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지도......
덫에 걸린 짐승처럼 침대에 누어 앨리타는 제이미의 힘에 압도당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바지와 나막식을 벗어던지자 그녀는 절망
감에 사로잡혀 낮은 비명을 질렀다. 벌거벗은 그의 모습은 방안 전체를 압도하는 것 같았다.
앨리타는 무진 애를 썻지만 그의 다리 사이로 검고 짙게 퍼져 있는 숩 한가운데에 우뚯
솟은 남성에서 시선을 돌리 수가 없었다. 그녀는 완전히 흥분된 남성을 처음 보았다. 완전히
벌거벗은 남자의 나체를 보는 것은 처음이기 마찬가지였다. 공포감으로 인해 눈을 커다랗게
뜨며 그녀는 지금껏 배운 모든 기도문을 마음속으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제이미 모
티머 같은 거인에게 몸을 허락한다면 자신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이미는 거만하게 눈썹을 치켜뜨며 앨리타가 두려워하는 이유를 눈치챘다.
"그만 단념하시지. 절대로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오." 그녀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가로젓었다.
"싫어요. 난 당신을 남편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마지막 탈출을 시도하듯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제이미는 어렵지 않게 그녀를 붙잡아 거대한 몸으로 내
리눌렀다. 그런 다음 그는 일부러 아주 천천히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바닥에 쌓인
옷더미 위로 마지막 속옷이 떨어지자. 그는 몸을 일으키고 자신의 포획물을 내려다보았다.
"맙소사, 당신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워." 그녀의 피부는 순결한 눈꽃처럼 해
맑았고, 끝에 조금만 장밋빛 봉오리가 달려 있는 그녀의 젖감슴은 그의 손에 꼭 들어맞을
크기로 부풀어 있있다. 가드다란 허리는 섬세한 곡선을 그리며 풍만한 엉덩이로 이어졌고,
다리 사이의 봉긋한 언덕 위에는 황금 및 덩굴이 소복하게 덮여 있었다.
"크리케스 성을 떠날 때만 해도 난 내 신붓감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했소.하지만 당신
이 돼치처럼 뚱뚱하고 턱에 덕지덕지 수염이 난 박색이라고 해도 당신을 맞아들였을 거요.
어쨌든 이런 당신의 모습이 훨씬 좋소."
그의 잔인한 고백은, 제이미 모티머가 저주받은 정혼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녀의 아버
지와 에반 그레이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그녀를 원했다는 앨리타의 믿음을 한층 더 굳건하
게 만들어주었다.
"제이미 모티머, 당신은 추잡하고 구역질나는 인간이예요." 그녀가 도도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제이미는 비단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피부를 쓰다듬으며 씩 웃었다.
"보자보자 하니까 반항하는 정도가 도를 넘고 있군.오늘밤이 지나기 전에 당신은 분명 나
르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게 될 테니 두고 보시오."
"웃기지 말이요.!"
3
앨리타는 미친 듯이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지만 제이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성가신
모기라도 피하듯 뒤로 슬쩍 물러났다. 그는 앨리타의 양 손목을 움켜잡아 옆으로 끌어내렸
다.
"그렇게 불손한 태도로 대꾸하다니 당신은 바보스러울 만큼 용감하군. 하지만 나도 당신
을 순종적인 아내로 길들이는 데 재미를 붙일 것 같소." 그녀는 미친 듯이 몸을 뒤챘지만
자신의 몸놀림이 오히려 그의 열정에 붙을 붙이는 격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
미 너무 늦어버렸다. 그는 힘들이지 않고 한 손으로 그녀의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누
른 다음, 다른 손으로 천천히 그녀의 가슴을 움켜잡으며 거친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유두
를 간질였다. 산호빛 봉오리가 단단해지자 그의 입술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유두를 입에 물자 앨리타는 몸이 뻣뻣해지며 낮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그녀는 비명르 지르려 했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어느새 게걸스런 그의 뜨거
운 입술에 가슴을 내밀고 있었다.
그는 거친 신음소리를 흘리며 고개르 들었다. 굶주린 그의 입술이 앨리타의 입술을 찾았
다. 그의 입맞춤은 야만스럽고 잔인했다. 그는 뜨거운 혀를 막무가내로 그녀의 입안제 집어
넣었다. 앨리타는 칭얼거리듯 키스를 거부하려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촉촉히 그의 입술의
온기 속으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 남자는 짐승이야. 앨리타는 자신이 얼마나 겁을 먹었는
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그에게 야만스런 쾌감을 줄 뿐이리라. 그의 혀가 벽처럼 버
티고 있던 그녀의 치아 사이로 무자비하게 넘어 들어오자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그의 육중한 몸이 그녀의 작은 몸을 내리눌렀으므로 앨리타는 숨을 헐떡였다. 그녀는 다
시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그의 입안에서 메아리칠 뿐이었다. 그는 입맞춤을 계
속하며 혀와 입술로 그녀를 점점 더 깊숙한 마법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그와 싸우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떼고 물러나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항복하시지."
"싫어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은 에반 그레이 경인데, 어떻게 당신에게 굴복하겠어
요? 난 끝까지 싸울 거예요."
"당신이 저항한다고 해서 내 목적을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어림없는 생각이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결혼을 합법화할 것이고, 누구도 당신과 당신 재산에 대한 내 권리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만들 거요."
"난 항복하지 않을 거예요!"
앨리타가 고집스럽게 외쳤다. 그러자 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뜨겹게 이글거리는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의 협조 따위는 필요 없소."
제이미는 거무스름한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몸이 경직되었다. 앨리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잘생긴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남성미가 철철 넘쳐흐르느 SRM의
표정은 못비 단호하고 두려워 보였다. 그의 남성이 다리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을 느
끼며 그녀는 온몸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처녀성 앞에서 잠시 멈춘 그에게선 포악한 열정과
뜨거운 열기, 무자비한 단호함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그녀의 처녀성우 뚫고 지나가는, 불처
럼 뜨거운 느낌이 전해졌다.
순식간에 참기 어려운 고통이 찾아왔다. 앨리타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비명을 애써 참느
라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빛이 고통으로 어두워지는 것을 본 제이미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부드럽게 움직임을 계속했다. 그가 좀더 깊숙이. 아주 깊숙이 그녀의 몸안
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앨리타는 온몸이 산산조각나 죽을 것 만 같았다.
그는 몸놀림이 빨라지먀 격렬해졌고, 양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움켜잡은 채 그녀의 입술에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속삭였다. 어는 순간 고통이 쾌감으로 변하는 것을 느끼며 앨리타는
또 다른 종류의 고문을 경험했다. 그녀는 이를 갈며 제이미가 자신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
도록 노력했다. 그녀의 육체는 뜨겁게 타올랐고 막연하게나마 알 것 같은 높다란 정상을 향
해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조금이라도 그에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
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제이미는 자신이 몸 아래에 깔린 앨리타의 몸이 긴장하는 것을 느끼며 차갑게 웃었다. 수
많은 사랑의 행위를 경험한 사람답게 그는 앨리타의 몸이 부드럽게 그를 받아들인 순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몸안에서 통증이 멈추고 쾌감이 시작된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거세게 저항하고 부인하다고 해도, 그는 그녀를 절정의 순간으로 데려갈 수
있으리라. 그 생간만으로도 그는 자제력을 잃을 정도록 흥분되어 그녀의 몸안에서 폭발하려
는 자신을 가까스로 다 잡아야만 했다. 그녀의 몸은 너무나 작고 비좁았으므로 깊은 상처를
내지 않도록 그는 잠시뒤로 물러났다. 앨리타처럼 작은 체구의 여자가 그의 몸을 받아들일
만큼 팽창되려면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제이미가 점점 더 오래 하체를 움직이며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올수록 앨리타의 쾌감은 커
져만 갔다. 그녀는 온몸이 곧 처져버릴 것 같았다. 용기를내어 그의 얼굴을 바라본 그녀는
고통스럽게 숨을 멈추었다. 뭔간에 완전히 몰두한 사람처럼 굳어진 그의 얼굴은 뒤로 젖혀
져 있ㄷ었다. 그러자 그의 목덜미가 우아하게 곡선을 그렸다. 앨리타는 자신이 지금까지 알
았던 그 누구보다도 제이미는 아름답고 두려운 존재라고 생각했다. 한순간 모든 생각이 달
아다며, 그녀의 몸안에서 뭔가가 산산조각나 퍼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황
홀한 감각에 사로잡힌 그녀는 곧 숨이 넘어갈 것마 ㄴ같았다. 그녀는 비명을 참기 위해 속
입술을 깨물었고,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그녀가 느끼는 절정의 순간을 눈치챈 제이미는
자신도 몸을 풀었다. 앨리타는 달콤하고 뜨거운 액체가 그녀의 몸안에 퍼지는 것을 느끼며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제이미 모티머는 그녀에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아갔다. 그것은 그녀가
에반 그레이에게 주려던 것이었다. 그녀는 절대로 제이미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제
이미는 여전히 숨을 기쁘게 몰아쉬며 앨리타에게서 몸을 들어 올려 옆으로 누웠다. 그러고
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죽도록 혐오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생각이 떠오르
자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순간적인 충동에 의해 런던으로 달려와 앨리타 서머셋의 소
유를 주장했고, 이제 잠자리를 통해 결혼은 합법화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그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는 아내를 부양할 책임이 있었다. 에반 그레이가 원하는 여자를
빼앗았다는 만족감은 무척이나 컸지만, 앞으로 그려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
런 생각이 없었다. 사실 그는 아내라는 존재가 필요하지 않았다. 앨리타가 누워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며 제이미는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뺨은 소리 없이 흘린 눈물로 젖어 있
었다. 그는 자신이 안겨주었을 엄청난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고 있는 그녀에게 감동을 받았
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분명 그녀에게도 쾌감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아프게 했다는
후회스런 기분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렸다.
"당신 괜찮소?"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 정도의 말도 건네지 않는다면 너무나 잔인한 남편이라는 생각
이 들었다.
"내가 괜찮아 보이나요? 몹시 아파요."
앨리타는 매몰차게 대꾸했다.
"난 당신에게 쾌감을 주었소."
"그렇지 않아요. 이 야만적인 결합에서 난 조금도 쾌감을 얻지 않았어요. 두번 다시 내 몸
에 손을 대면 당신이 잠든 사이에 죽여버리고 말겠어요." 화를 간신히 참고 있는 제이미의
얼굴이 험상궂게 어두워졌다.
"당신은 내 아내요. 항상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신의 의무지." "난 복종하지 않을 거
예요."
그녀의 대담한 발언에 화가 난 제이미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
아보았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그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아내의 반항적인 기질은 아직 덜 자랐을 때 뿌리뽑아야 했고, 남편에게 대든 잘못에 대
해서는 당연히 벌을 받아야 했으므로 제이미는 그녀를 때릴 듯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순간
긴장한 앨리타는 몸이 굳어졌다. 제이미가 폭력을 휘두른다면 그녀는 심한 상처를 입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를 참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서 때려보시죠. 내일 아침 식사시간에 내가 멍든 얼굴로 나타나면 당신 친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고 보는 것도 즐거울 거예요. 우리 아버지와 국왕폐한 친분이 두터운 사이
예요."
"멍이 들어도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지."
앨리타의 나체를 무자비하게 훑어보며 그가 말했다. 그러나 자그마한 그녀의 몸집을 내려
다보며 제이미는 자신이 아내를 때리진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앨리타가 이성의 한
계를 넘어설 만큼 그의 분노를 자극한다고 해도, 폭력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여자가 기꺼
이 주려 하지 않는 것을 요구하는 것 역시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신혼 첫날밤을 치렀으므
로 두 사람의 결혼은 이제 육체적으로도 맺어졌다. 오늘밤 이후로는 더이상 그녀와 잠자리
를 같이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앨리타가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용감한 모
습에 제이미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가 주먹을 내리고 다시 베개를 베고 눕자,
앨리타는 떨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미가 자신을 때릴지로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
는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잠이나 자요, 앨리타. 오늘밤엔 또다시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오. 아니 앞
으로 영원히 그런 일은 없을 거요. 이제 난 내 의무를 다했소, 우리의 결혼은 합법적인 것이
되었으니, 오늘밤 이후로는 당신의 침대에서 혐오스런 내 존재를 참아내지 않아도 될거요.
크리케스 성에는 내 애인이 살고 있소. 당신은 사랑의 행위에 너무 미숙하고 서툴러서 날
만족시키기 어렵지만 로위나는 다르지."
제이미가 조롱하듯 말하자 앨리타는 입이 딱 벌어졌다.
"한 집에 애인을 두고 살면서 날 모욕하겠다는 말인가요?" 그녀는 어안이벙벙하고 기가
막혔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혼인서약을 그리 오래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
었다. 하지만 이제 갓 남편이 된 제이미의 애인이 그녀와 같은 집에 살게 되리라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다.
"곧 로위나를 내보낼 수도 있겠지, 그건 전적으로 당신한테 달렸소." 그는 앨리타가 자신
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반응하기를 기다리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매혹적인 여자였다. 앨리타가 순종적인 아내로 봉사하기를 약속했다면 그는 기꺼이
로위나를 내보낼 용의가 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그의 아내였고, 아내는 매사에 남편에
게 복종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앨리타는 뜨겁게 이글거리는 파란 눈동자로 제이미를 노
려보았다.
"로위나와 잘 해봐요. 나만 괴롭히지 않는다면, 당신 침대로 끌어들이는 여자가 열 명이든
스무 명이든 난 상관하지 않겠어요."
"그럼, 그렇게 하지. 하지만 미리 경고하는데, 당신도 애인을 만들 생각이라면 에반 그레
이만은 피하는 게 좋을 거요,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당신은 정숙한 부인으로 지내는 게 좋
겠소. 내 집에 다른 놈팽이를 끌어들일 순 없지."
제이미가 거칠게 내뱉었다. 그러자 앨리타는 발딱 일어나 제이미의 넓은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 구역질나는 짐승 같은 인간! 모든 남자들이 다 당신처럼 발정난 개처럼 군다면 난 애
인 따위 필요 없어! 어디 로위나한테서 사생아를 얻어보시지. 반역자의 가문에는 적손이 없
는 게 당연해!"
그 순간 제이미는 하마터면 여자를 때리는 우를 범할 뻔했다. 그의 몸에 비교하면 반도
안 되는 여자가 그에게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를 입힌 셈이었다. 그녀는 입이 험한 여자였다.
그는 자신이 미처버리기 전에 그녀의 목을 졸라버릴까도 생각했다. 앨리타는 남자의 폭력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여자인 것 같았다. 제이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양 손목을 움
켜잡고 옆으로 밀쳐냈다.
"심각한 부상을 입지 않으려거든 잠이나 자둬요. 곧 크리케스 성으로 여행을 떠나려면 체
력을 아껴두는 게 좋을 거요. 한 겨울이라 몹시 추운 여행이 될 테니." 앨리타는 조심스럽
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빨리 떠나야 하나요?"
"그렇소, 당신 아버지와 그레이 경이 담합해서 강제로 당신을 빼앗으려 들기 전에 떠나야
하오."
앨리타의 얼굴에 희망적인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자 그녀의 생각을 눈치챈 제이미는 잘라
말했다.
"그렇게는 안 될 거요. 난 내 소유물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야." 제이미는 그녀에게 등
을 돌리고 누워 이불을 덮은 다음, 그녀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듯 완전히 그녀를 무시했다.
그의 곁에서 앨리타는 말없이 분노를 삭이며, 신부의 감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제멋대로 구
는 남편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다. 그는 오만하고 거칠고 야만적이었으며 그의 대담함은 상
상을 초월했다. 국왕의 상에 뛰어들어 경비병을 물리치고 예배당까지 쳐들어와 결혼식을
방해하다니, 참으로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의 행동은 왕을 감탄시켰다. 용감
한 남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문제는 그의 성격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이었다. 감히
어떻게 그녀가 반역자의 아들을 남편으로 맞이하리라고 생각했을까? 그녀가 가난뱅이 시골
뜨기를 남편과 주인으로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라 여겼다면, 큰 오산이었다. 애인을 두라면
두라지. 그녀는 두번 다시 그라 잠자리를 강요한다면 목숨을 걸고서라고 싸울 생각이었다.
그런 결론에 이르자 앨리타는 담요를 덮으며, 가능한 한 제이미의 거대한 육체가 전하는
온기에서 떨어져 밤을 보낼 채비를 했다. 그러나 침대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으면서도 그
녀는, 제이미가 전해주었던 부인할 수 없는 쾌감에 대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떻
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맨 처음 그의 몸이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왔을 때의 통증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극렬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죽나보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
간, 고통은 쾌감으로 돌변했고 그녀의 몸은 부드럽게 팽창되며 그를 받아들였다.
제이미가 그녀의 몸안으로 세차게 밀려들어오자 그녀의 몸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하
게 반응을 보였었다. 앨리타는 믿을 수 없는 자신의 행동을 애써 부인하며 몸을 부르르 떨
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부인한다 해도, 타들어갈 것처럼 뜨거웠던 그의 손길과 달콤하
고 촉촉한 그의 입술, 조심스런 그녀의 몸에 반응을 일으켰던 그의 짜릿한 행동들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절대로 그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주기 전까지는 아무리 초라하고 누추한 집이라 할지라도 남편인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앨리타는 낙담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밤새 강풍이
몰아쳐 좁은 창문 틈새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벽난로의 불길이 잦아들자 방안은 견디기 힘
들 만큼 추웠다. 앨리타는 자신도 모르게 제이미의 거대한 육체에서 스며나오는 온기를 찾
아 점점 몸을 움직였다, 그는 부드러운 그녀의 살갗이 닿는 것을 느끼고 팔을 벌려 그녀를
바짝 끌어안았다. 여전히 잠든 채고 앨리타는 흡족한 듯 한숨을 내쉬며 그의 따뜻한 품안으
로 파고들었다. 앨리타의 엉덩이가 자신의 배를 짓누르고, 그녀의 젖가슴이 자신의 손안에
잡혀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은 제이미는 번쩍 눈을 떴다. 처음 그는 앨리타가 깨어 있
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규칙적인 숨소리로 보아 그녀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그의 품
을 파고든 이유가 단순히 방안의 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크게 실망했다. 그녀
의 행동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부푼 그의 아랫도리와는 상관없는 무의식적인 행동
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탐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의 혈관을 흐르는 피가 뜨겁게 달
아오르고 지옥에서 고문을 받는 것처럼 전신이 괴로웠지만, 그는 또다시 그녀와 정사를 나
누지 않기로 했다. 그는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아내와의 잠자리를 지나치게 즐긴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는 합법적인 아내에게 빠져들 시간적 여유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는
앨리타 서머셋이라는 여자 자체를 원한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에반 그레이가
갖지 못한 무엇인가를 손에 넣었다는 쾌감이 그에겐 더 중요했다. 그리고 그가 진정으로 원
하는 것은 아내의 사랑이나 존경이 아니라, 단지 부와 지위였다. 조심스럽게 아내의 풍만한
가슴에서 손을 떼매녀 제이미는 자신의 품안에 잠들어 있는 여자에 대한 생각들을 떨쳐버리
기 위해 서머셋 경과 그레이 부자가 어떤 음모를 꾸며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몰았을
까 생각해내려고 노력했다. 노인이 된 그레이 경은 2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 아들은 여전
히 살아서 복수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자신의 상속권을 박탈해간 원수
들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는 어떠한 방해도 용서할 수 없었다. 복수를 위해서는 그 어떤 여
자도, 자신의 합법적인 부인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방해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맹세하
며, 제이미는 마침내 잠에 빠져들었다. 앨리타는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어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번쩍 뜬 그녀는 제이미 모티머의 수수께끼 같은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침이오, 부인. 잘 잤기를 바라오. 당신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던 중이었소." 그의 검은
눈동자는 뻔뻔스럽게 그녀를 훑어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어깨를 덮고 있
는 마구 헝클어진 은빛 금발머리에 고정되었다. 덮고 있는 담요 위로 봉긋한 가슴이 약간
드러난, 맨 어깨를 살며시 노출시킨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는 자신의 몸안에
서 아우성치며 일어나는 반응을 무시하려 애를 썼다. 앨리타는 눈을 깜박이다, 남편이 어
제 결혼식에 입었던 초라한 갈색 옷을 또다시 입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옷은 없나요?"
그녀가 퉁명스럽게 묻자 제이미는 뻔뻔스럽게 웃었다.
"내 옷차림이 당신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데 미안하오. 하지만 당신도 잘 알다시피 난 부
자가 아니오. 하지만 앞으로는 상황이 달라지겠지. 안 그렇소?" "어쩌면요. 하지만 우리 아
버지나 그레이 경이 날 그렇게 순순히 내놓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럴 리 없어요. 그분들
은 어떻게든 당신의 사악한 계획을 방해할 방법을 찾아낼 거예요."
제이미는 더 활짝 웃었다.
"앨리타, 국법과 교회법에 의해서 당신은 내 사람이 되었소. 헨리 왕이 우리의 결합을 승
인했고 신부님의 축복도 받았소. 이젠 당신에게 마음대로 명령을 내리는 것도, 당신이 내 뜻
을 거역했을 때 벌을 내리는 것도 모두 내 손에 달렸소. 앞으로 당신은 내 성미를 자극하기
보다는 선량한 마음에 호소하는 쪽이 훨씬 이로울 거요." 그녀의 눈빛이 위험스럽게 번득
였다. 앨리타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그녀는 거침없이 당당하기 만한 이 남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그의 화를 자극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
었다. 그의 커다란 주먹에 한방만 맞아도 그녀는 치명상을 입게 되리라.
"어떻게 될지 어디 두고 보기로 하죠."
그녀는 빈정거리듯 상냥하게 말했다. 제이미의 미소가 험상궂게 돌변했다. 그의 이 자그마
한 여자가 어떻게 해서 이토록 쉽사리 자신의 감정을 자극해 미칠 듯한 분노의 감정으로 몰
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침 먹을 시간이오, 부인. 국왕폐하와 신하들이 연회장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요."
"먼저 목욕부터 하고 싶어요."
"음, 그럴 줄 알았소. 목욕물이 곧 도착할 거요."
그의 말이 신호라도 되는 듯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제이미가 문을 열자 대형 놋쇠
욕조를 든 하인과 양손에 더운물이 담긴 양동이를 든 하인들이 차례로 들어왔다. 욕조는 가
리개 뒤에 놓여졌고 앨리타는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운 하인들이 모두 방을 빠져나갈 때까지
침대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둘만 남게 되자 그녀는 제이미 역시 자리를 비켜주길 바라며 그
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라 팔짱을 낀 채 고집스럽게 버티고 서 있자 앨리타가 한숨을 내쉬
며 말했다.
"나는 사생활도 없나요?"
"아, 당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난 십오 분 후에 돌아오겠소." 그는 갑자기 돌아서더니
방을 나갔다. 그가 문밖으로 빠져나간 순간 앨리타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가리개 뒤로 숨
어들었다. 문밖에서 서성이던 제이미는 첨벙거리는 물소리로 앨리타가 욕조 안에 들어갔음
을 알아차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침대 옆에서 잠시 시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앨
리타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침대에 깔려 있던 침대보를 걷어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약속대로 정확히 15분 후면 돌아올 제이미에게 벗은 몸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므로 앨리타는 서둘러서 목욕을 했다. 가리개 너머로 방안을 살펴 아무도 없다는 것
을 확인한 그녀는 재빨리 여행가방 안에서 옷을 찾았다. 그녀와 에반 그레이의 결혼식을 위
해 신방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모피로 끝장식이 달린, 긴소매에 깃이 높은 푸
른색 벨벳 드레스를 골랐다. 제이미는 그녀가 허리에 달린 마지막 리본을 묶을 때쯤 방으로
들어섰다.
"옷 갈아입는 시간을 정확하게 맞추는 여잘 만나다니 나쁘지 않군. 어쩌면 당신한테도 희
망이 보이는 것 같소, 부인."
그가 흡족하다는 듯 말했다. 앨리타는 화를 참으려 했지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목욕을 하면서 그녀는, 아버지가 제이미 모티머를 어떻게 할 계획인지 알 때까지는
입을 다물고 있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분명 그녀가 촌구석까지 쫓겨가 말라죽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제이미가 팔을 내밀었다.
"이만 내려가는 게 좋겠소. 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오. 당신도 나처럼 식욕이 당길 거라
믿는데, 안 그렇소?"
그는 야릇하게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앨리타는 뾰족한 턱을 치켜들
고 쌀쌀맞은 태도로 그의 앞을 지나쳐 문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제이미의 웃
음소리가 텅 빈 복도와 계단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금세 앨리타를 따라잡았다. 제이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팔꿈치에 올려놓았다. 그들은 나란히 나선형 계단을 내려와 시끌
벅적한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이 문가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모든 대화와 웃음소리
가 동시에 멈추었다. 사람들은 서로 쉬쉬하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속으로 움찔하며 앨리
타는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는 에반 그레이 옆에 앉아 있었다. 서머셋 경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그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날카로운 시선엔 이글거리는 증오심이 담겨 있
었다. 앨리타는 아버지의 뜨거운 눈빛에 데일 것만 같았다.
아버지의 분노가 자신을 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가
남편이라고 불러야 하는 남자에 대한 아버지의 두려움과 혐오감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도 마
음 편하지는 않았다.
에반에게 시선을 옮긴 앨리타는 흠칫 놀라 숨을 멈추었다. 증오심으로 가듯 찬 그의 시선
을 제이미뿐만 아니라 그녀 역시 삼켜버릴 듯 무시무시했다. 그의 눈빛은 거칠었고 얼굴색
은 붉으락푸르락 했으므로 잘생긴 그의 얼굴이 거의 추잡하게 보일 정도였다. 앨리타는 자
신이 결혼하고 싶어했던 남자에게서 갑작스런 두려움을 느끼며 몸을 부를 떨었다. 제이미는
그녀의 전율을 눈치채고 그녀에게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두려워할 것 없소, 부인. 저들은 당신을 해치지 못하오."
"저들이 왜 나를 해치겠어요? 저 사람들이 칼로 베어버리고 싶어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
에요."
앨리타는 서슴지 않고 대꾸를 했다.
"그렇겠지. 당신이 진정한 나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 모두 알았기 때문에 저러는
거요."
그는 보아란듯이 시선을 옮겨 연회장을 굽어보고 있는 넓은 발코니 쪽을 쳐다보았다.
어리둥절해진 앨리타는 그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마치 당혹스런 그녀의 신음소리
가 신호라도 되는 양 갑자기 방안의 긴장감이 풀어지더니 웃음소리와 대화가 다시 이어졌
다. 앨리타는 사람들이 음흉하고 외설스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혐오감과 공포감에 휩싸인 채 발코니를 바라보며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분노
를 느꼈다. 발코니 난간에는 그들이 사용했던 피로 얼룩진 침대시트가 자랑스럽게 걸려 있
었다. 그것은 그들의 결혼이 의심할 나위 없이 합법적으로 맺어졌다는 사실을 명백히 증
명하고있었다. 새빨갛게 달아 올랐던 앨리타의 얼굴은 금새 창백해졌다. 그녀는 충격적인
시선으로 제이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한 짓인가요?"
분노와 비난이 담긴 그녀의 눈길을 받으며 제이미는 잠시 동안 마음이 불편해짐을 느꼈
다. 앨리타가 순결한 신부였다는 증거를 사람들에게 내보이기로 결정한 자신의 생각이 너무
지나쳤던가, 잠깐 후회하는 마음도 들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에반 그레이와 서머셋
경에게 복수하기 위해 앨리타를 이용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양심의 가책도 받았다. 그러
나 교수대에 매달려 있던 아버지의 축 늘어진 시신을 떠올리자 모든 망설임은 순식간에 사
라졌다. 아버지가 그레이 부자와 서머셋 경의 더러운 음모에 희생당한 결백한 분이라는 사
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며 그는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제이미는 솔직히 인정하기로 했
다.
"그렇소, 내가 한 짓이오. 당신에게 창피를 주기 위한 게 아니라, 우리의 결혼이 육체적
으로도 정식으로 맺어졌음을 알려서 누구든 우리 결합의 합법성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미
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소. 게다가 저렇게 하는 것이 관습이잖소."
"관습 따위는 무시할 수도 있었잖아요.
앨리타는 이를 악문 채 내뱉었다. 순간 헨리 왕이 두 사람를 처음 발견한 듯 손짓을 했다.
"아, 드디어 신혼부부께서 납시었군. 어서들 오시오, 어서 와서 우리와 함께 아침식사를
합시다."
"우린 국왕의 부름을 받았소, 부인. 못마땅한 표정은 털어버리고 행복한 신부처럼 행동
하도록 노력해봐요."
제이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앞으로 이끌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앨리타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진심을 감춘 채 으르렁거렸다.
"어서 와서 내 옆에 앉으시오."
헨리 왕은 앨리타의 반항기 어린 표정을 눈치채고, 아내를 다루는 제이미의 탁월한 솜
씨를 부러워하며 열광적으로 말했다. 헨리 5세가 처음 젊은 모티머를 만난 것은 바로 어제
였다. 하지만 왕은 초라한 행색으로 왕궁에 나타나 약혼녀를 내놓으라고 호령하던 젊은
이의 용기가 참으로 감탄스럽게 여겨졌다. 또한 젊은이는 자신의 아버지의 결백을 주장하며
클레런스 모티머의 죽음에 대해 조사를 하겠다는 국왕의 약속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헨
리왕은 신임하는 두 신하를 잃게 될지도 모르는 결과를 빚더라도 반드시 진실은 밝혀야겠
다고 생각했고, 만일 잘못이 있었다면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앨리타를 왕의 오른편에 앉도록 한 뒤 제이미는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 시
종이 다가와 두 사람의 잔에 맥주를 따랐고, 두 사람이 함께 먹도록 음식이 가득 담긴 커
다란 쟁반을 내왔다. 제이미가 허기진 듯 열심히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왕은 그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밤에 운동을 많이 하면 아침에 식욕이 좋아지는 법이지."
왕의 말을 들은 그레이 경은 고깃조각을 삼키다 목구멍에 걸릴 뻔했다. 제이미가 대답
대신 싱글벙글 미소지으며 앨리타에게 윙크를 하자, 그레이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앨
리타는 못 들은 체했다. 하지만 그녀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색을 본 식탁에 둘러앉은 남자
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젊은 친구, 내 왕궁에 머물 생각인가, 아니면 크리케스 성으로 돌아갈 생각인가?"
"저를 초청하시는 겁니까, 폐하?"
제이미가 물었다.
앨리타는 조바심을 치며 왕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아버지와 그레이 경이 그녀를 밉살
스런 촌뜨기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켜줄 방법을 찾을 때까지 아버지 곁에 머물고 싶은 마
음이 간절했다.
"그렇다네. 자네가 내 궁정에 머물러준다면 기쁘겠네. 하지만 꼭 그래야 한다는 명령은
아닐세."
"그렇다면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폐하. 폐하께서 제 아버지의 모함사건
을 조사하시는 동안 저는 신부를 데리고 크리케스 성으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제이미는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거 안됐군. 프랑스로 돌아가 왕비를 맞이하기 전까지, 자네 같은 친구와 지내면 무척
즐거울 것 같은데 말야. 자네는 호위병을 데려오지 않은 것 같으니 내가 열두어 명 정
도의 기사들을 호위병으로 붙여주겠네. 다들 믿을 수 있는 기사들이라 자네 집까지 가는
길에 신부를 안전하게 지켜줄 걸세. 자네가 계속해서 부리고 싶다면 기사들의 의견을 물어
보고 계속 데리고 있어도 좋네."
제이미는 깜짝 놀라 눈썹을 들어올렸다.
"폐하의 은혜, 망극하옵니다."
"혼수품과 지참금도 상당한 앨리타 양을 제대로 된 호위병도 없이 시골길을 가도록 내
버려둘 순 없잖은가."
"그렇습니다, 폐하. 감사합니다. 제 신부의 목숨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야죠. 폐
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저희는 서머셋 경이 따님의 지참금을 제게 넘겨주는 대로 떠나고 싶
습니다."
"오늘 당장 처리해주겠네. 그럼 잘 가게, 제이미 모티머. 하지만 내가 프랑스로 떠나기
전에 자네 아버지에 관한 조사 결과를 가지고 자네를 불러 의논할 테니 그리 알게."
제이미는 윈저 성으로 무모하게 쳐들어왔던 자신의 모험의 결말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부유한 신부를 얻었고, 아버지의 거짓 모함에 대한 조사를 하겠
다는 왕의 약속까지도 받아냈다. 앨리타의 재산으로 그의 재산이 엄청나게 불어났을 뿐만
아니라 국왕의 총애까지 한몸에 받게 된 것이다.
왕궁을 떠나면 곧 자신의 운명이 흉악한 남편의 손아귀에 완전히 넘어가게 된다는 것을
깨달은 앨리타는 전전긍긍했다.
"폐하! 저는 남편을 따라 크리케스 성으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궁에 남아 폐하께서 왕
비님을 모셔오시면 왕비마마께 봉사하는 영광을 누리고 싶습니다."
"제 아내의 말엔 신경쓰지 마십시오, 폐하. 가족과 헤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저러는 것뿐
입니다."
제이미는 능글맞게 말했다.
"그게 아니에요! 전 제 인생을 걱정하는 거예요.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저를
부양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래 전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과대망상 때문에 복
수를 하기 위해 저를 이용하려는 속셈이죠. 모티머 경이 반역하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의 아들이라는 작자도 나을 것이 없을 거라구요."
순간 제이미는 앨리타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폐하! 저는 모티머 가문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이 불한당 같은
촌놈에게 앨리타 양을 보내는 것은 진정 잘못된 일입니다."
그레이 경이 벌떡 일어나며 외치자, 헨리 왕은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는 교회의 결정을 따라야 하오. 이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할 단
계가 아니잖소. 경도 보다시피..."
왕은 발코니에 걸려 있는 끔찍한 형상의 침대보를 가리켰다.
"두 사람의 결혼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오. 앨리타 양이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
한 말이오."
왕은 앨리타를 돌아보았다.
"어떻소, 앨리타 양? 저 위에 걸려 있는 증거물을 부인하시겠소?"
앨리타는 모든 사실을 부인하며 결혼은 무효라고 모두를 향해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이미 모티머는 정식으로 그
녀를 소유했고,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쾌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를 끔찍이 혐오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의 품안에서 느꼈던 감정을 어떻게 부인한단 말인가?
"아뇨."
그녀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속삭였다.
"뭐라고 했소, 부인?"
제이미는 떨리는 그녀의 대답을 못 들은 체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앨리타는 고개를 번쩍
들고서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아니라구요."
낭패감이 배어 있는 목소리로 그녀가 되풀이했다.
"나쁜자식! 네놈은 이 대가를 꼭 치르게 될 거다! 앨리타는 내 사람이야. 네놈의 애비가
왕을 배신했을 때 네놈은 이미 약혼녀에 대한 권리를 상실했어."
그레이 경은 제이미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헨리 왕이 제이미의 팔을 잡으며
말리지만 않았다면 그는 벌떡 일어나 단숨에 그레이 경을 때려눕혔을 것이다.
"내 앞에서는 어떠한 폭력도 용서할 수 없네. 그레이 경, 이 두 사람의 결혼은 이미 성
사되었고, 경도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게 좋으리라 생각하오. 그리고 제이미 모티머,
자네는 어서 부인을 데리고 크리케스로 돌아가 서로의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게. 가
능한 한 빨리 아기를 갖는 게 좋을 걸세. 그래야만 이 소란이 빨리 잦아들 거야."
제이미는 에반 그레이나 자신 중에 어느 하나가 세상을 떠나야만 이 소란이 끝날 것이
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국왕의 말에 동의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현명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저희는 내일 새벽에 출발하도록 하죠." "아."
앨리타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평생 느낀 모든 절망감을 한꺼번에 합쳐놓은
것보다 더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4
제이미가 왕과의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사이를 틈타, 앨리타는 살짝 의자에서 일어나
몰래 연회실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제이미와 첫날밤을 보냈던 탑 꼭대기의 신방을 향해 계
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왕과 신하들의 눈앞에 빤히 보이도록 발코니에 걸쳐놓은 침
대보를 더이상 그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감히 자신을 놀림감으로
만들다니, 그녀는 모멸감을 참을 수 없었다. 제이미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점점 더 커져갔다
그는 이미 그녀가 주려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아가지 않았던가?
나선형으로 탑을 돌아 이어지는 계단을 반쯤 올라갔을 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속삭이
는소리를 들었다. 너무나 작은 목소리여서 앨리타는 다시 자신의 이름이 들려왔을 때에도
잘못 들었나 착각할 정도였다. 아버지가 은밀히 할말이 있어서 따라온 것으로 생각하며 그
녀는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그러나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아버지가 아닌 그레이
경이었다.
"앨리타 양, 은밀하게 당신과 할 얘기가 있소."
그레이 경이 부드럽게 말했다. 앨리타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
다렸다. 그녀는 지금 운명적인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다. 잔인무도한 제이미가 그녀가 그
레이
경와 단둘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몰랐다. 그레이 경과 달리 제
이미 모티머는 신사가 아니었다 .에반 그레이가 계단을 올라와 그녀와 나란히 서자, 앨리
타는 좀더 가까이에서 그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여러 번 만난 적
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레이 경의 외모를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앨리타는 그저 그가 숱 많
은 금발머리를 최신 유행으로 바짝 치켜 깎은 잘생긴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
시 유행대로 깨끗하게 면도를 한 그는 뚱뚱하지는 않았지만 단단한 체구였다. 다리에 딱
달라 붙는 회색과 초록색 타이츠는 근육질의 다리를 잘 드러내주었고, 노란색 상의는 약간
불룩한 배를 감추도록 특별히 디자인된 것 같았다. 전에는 그의 배가 나왔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생각에 앨리타는 약간 웃음이 나왔다.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은 그레이 경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인상적이었지만, 그의 하늘색
눈동자는 어딘가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남자와 이렇게 단둘이 있어본 적이 처음
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녀가 제이미 모티머와 결혼한 뒤로 그레이 경이 그녀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기 때문인지 몰랐다. 어쩌면 그의 계산적인 태도 때문일 수도 있
었다.
앨리타는 그레이 경과 제이미 모티머를 비교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러긴 힘들었다.
제이미의 위풍당당한 체격과 비교하면 에반 그레이는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앨리타, 당신이 떠나기 전에 긴히 할말이 있소. 당신이 모티머에게 몸을 허락했든 안
했든 상관없이 난 당신을 원하고 있소."
그레이 경이 살며시 속삭였다. 그 말은 완전한 진심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진실에 가
깝다고는 할 수 있었다 .
"당신 아버지와 나는 이미 당신을 반역자의 손아귀에서 구해낼 계획을 세우고 있소. 당
신이 그자의 아이를 임신하기 전에, 그리고 그자가 당신의 지참금을 모두 탕진하기 전에 처
리할 테니, 재빨리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당신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시오."
"날 구출한다구요? 어떻게요? 어디서요?"
앨리타는 기대감에 가득 차 물었다.
"당신은 자세한 사항을 모르는 것이 좋소. 하지만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오."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그레이는 앨리타의 손을 잡고 가까이 다가섰다.
"당신은 내 사람이 되어야 하오. 난 지금 한때 모티머 가문에 속해 있던 모든 것을 소
유하고 있소. 그리고 이젠 모티머의 신부인 당신을 소유하는 것이 내 궁극적인 목표요."
앨리타는 그의 말뜻을 헤아려보려고 노력하며 눈을 휘둥그렇게떴다. 그의 말은 그녀가
모티머가 소유하고 있는 마지막 재산이기 때문에 그녀를 원한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는
클레런스 모티머가 반역죄를 저지르기 전부터 제이미 모티머와 약혼한 사이였다. 만일 그녀
가그레이 경과 결혼한다면 정말로 모티머 가문의 마지막 재산까지 손에 넣는 결과가 되
리라.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달랬다. 아버지의 말로는 그레이 경이 그
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로 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아주 단순 명백한 이유였다.
"당신은 제이미 모티머를 몰라요."
앨리타는 숨을 죽인 채 말했다
"아니오, 제이미 모티머가 나 에반 그레이를 잘 모르는 거요. 난 그자가 윈저 성에 얼굴을
내밀었던 사실을 평생 후회하도록 만들어주겠소. 나한테는 재산과 권력이 있고, 왕의
총애 또한 받고 있소. 하지만 그 촌놈한테는 한푼도 없소. 겁낼 필요 없소, 앨리타. 당신은
곧 내 사람이 될 거요."
그레이 경은 조롱하듯 말했다.
두 사람의 거리가 몹시 가까웠으므로, 앨리타는 그의 눈빛에서 갑작스런 광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광기의 불꽃이 그녀를 태울 듯 이글거렸으므로 그녀
는 몸을 떨었다.
"저, 전... 그만 가봐야겠어요. 이렇게 얘길 나누다 들키면 곤란해요."
그녀가 겁먹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그레이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감히 내 사람을 빼앗아가다니, 내 기필코 모티머를 죽여버리고 말겠소."
갑자기 그는 팔을 뻗어 앨리타의 허리를 휘감더니 옷감 너머로 그의 단단한 근육이 느
껴질 만큼 바짝 끌어안았다.
"그레이 경, 제발 이러지 마세요."
앨리타는 갑작스런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그레이 경이 이토록 공격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는 늘 완벽한 신사로 행동
해왔던 것이다.
" 내 아내한테서 손을 떼시지."
부드러우면서도 섬뜩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레이 경은 순간적으로 앨리타의
허리에서 손을 땠다. 앨리타는 울퉁불퉁한 돌벽에 바싹 몸을 기댔다. 등에 와닿는 축축한
돌벽의 감촉보다 제이미의 험악한 표정이 더욱더 그녀의 몸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자네 부인에게 작별인사를 하려던 것뿐이었네. 자네도 기억하겠지만 자네가 건방지게
뛰어들어 방해하지만 않았다면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을 사이야."
그레이 경은 능글맞게 변명했다.
"난 당신이 모티머 가문에 속해 있던 모든 것을 훔쳐갔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내 신부를 빼앗는다면 당신의 모든 꿈이 실현되는 셈이 되겠지."
"자네가 자네 애비처럼 반역의 기질이 있는 놈들은 두번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어. 국
왕을 잘 구슬리는 데 성공했는지는 몰라도 난 어림없다. 넌 누가 뭐라도 영원히 무일푼인
반역자의 자식이고 앨리타 양을 아내로 맞을 자격이 없는 놈이야. 명심해라, 모티머. 뒤를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앨리타 양은 너와 오래 지내지 않을 거야."
"내 것은 내가 지키니 걱정 마시오, 그리고 다시 한번 경고하는데 두번 다시 내 아내의
몸에 손대지 마시오. 누구와도 아내를 나누어 가질 마음은 없소."
제이미는 험악하게 대꾸했다. 앨리타는 제이미의 거친 말투에 놀라 입을 벌렸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럴 수는 없
었다. 그녀는 평생 동안 불륜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들으며 남편에게 괴롭힘을 당하느니 차
라리 정숙하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운이 좋으면 그녀의 아버지가 머지 않아 두 사람의 이혼
소송을 성공시켜 끔찍스런 결혼에서 그녀를 구출해줄 것이다.
"두고 보자, 촌뜨기. 결국 누가 승리해서 앨리타 양을 차지하게 되는지 두고 보자구."
그레이 경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비웃었다. 그는 앨리타에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그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마자 제이미는 너무나 화가 난 표정
으로 앨리타를 노려보았다.
"당신에게 분통을 터뜨리기 전에 어서 내 눈앞에서 사라지시오."
"난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앨리타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아무 잘못도 없다구? 하긴 남편 몰래 애인을 은밀하게 만난 것 말고는 아무 짓도 안
했겠지. 하지만 명심하시오. 오늘 에반 그레이와 당신이 무슨 짓을 공모했든 그 일은 절대
성사되지 않을 거요. 어서 사라져버려요, 자제력을 잃고 내가 주먹을 휘두르기 전에."
"감히 그런 짓은 못할 걸요!"
앨리타가 소리쳤다. 그러나 제이미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서자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계단 위로 달아났다. 다행히도 그는 뒤따라오지 않았다. 앨리타는 하루 종일 궁안의
여러부인들과 지내며 조심스럽게 제이미를 피했다. 두 사람은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다시 만났고, 앨리타는 남편과 함께 한 쟁반과 술잔을 사용해야 했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재빨리 신방으로 돌아간 그녀는 제이미가 오기 전에 잠들기를 기도했다. 그녀의 기도는 이
루어졌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 제이미는 머리채를 헝클어뜨린 채 곤히 잠든 미인의 모습을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직 불씨가 남은 벽난로의 불빛을 받아, 담요 아래로 뻗은 그
녀의 날씬한 몸매가 유혹적으로 드러났다. 불빛에 반사된 그녀의 금발머리는 수천 개의 다
이아몬드처럼 반짝거렸다. 한 팔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고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천
사와도 같았다. 제이미는 그녀가 정말 이 세상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녀를 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만지지 않았다. 그는 이미 촉촉한 그녀의 맛을 보
기도 했고 달콤한 육체 깊숙이 침입해 들어가는 짜릿한 반응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분명했다. 그녀의 몸안에 다시 들어간다는 생각만으로도 그의 아랫도리는
뻐근하게 아팠고, 송골송골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하마터면 자제력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그는 오랜 세월 동안 갈고 닦은 육체적인 수양 덕분에 후회할 행동은 하지 않았다.
앨리타는 그를 혐오했다. 그녀는 그를 예의도 모르는 촌놈이하고 비난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인 제이미를 땅 한 뙈기도 없는 가난뱅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옷 입는 방식도 못마땅
하게 여겼다. 그 역시 앨리타에게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육체나 재산, 비
웃음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는 단순히 에반 그레이를 골탕 먹이기 위해 그녀를 손에 넣은
것뿐이었다. 치마를 두른 여자라면 누구든 앨리타만큼 그에게 쾌감을 줄 수 있으리라고 스
스로를 진정시키고 난 뒤에야, 제이미는 옷을 벗고 아내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침대
에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앨리타의 몸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윽고 그가 잠에 빠져든 것은 고통스런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다.
앨리타는 한기 때문에 몸을 떨며 차가운 새벽을 맞이했다. 그녀는 잠이 들어 알지 못했
지만 제이미가 지난밤 그녀의 곁에서 잠을 청했다는 사실은 그의 베개에 남아 있는 자국으
로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누워 있던 침대 한쪽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벌써
여러 시간 전에 일어난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상념의 주인
공이 방으로 들어왔다.
"한 시간 뒤에 떠날 거요, 부인. 그 전에 아침을 들고 싶으면 어서 일어나 준비를 하는 게
좋겠소. 당신 짐들은 빠짐 없이 마차에 실어 놓도록 지시하겠소."
그는 앨리타가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정확하게 한 시간 뒤,
앨리타는 자신의 자그마한 말에 올라 남편을 따라 지독하게 추운 시골길을 여행할 준비를
마쳤다. 폐허나 다름없다는 크리케스 성에 도착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그곳이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다행이 그녀의 지참금이 있
으므로 살림 형편이 나아질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제이미가 결정할 일이었
다.
헨리 왕이 제공한 열두 명의 용병 기사들은 번쩍이는 갑옷에 석궁으로 무장을 한 채 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누구도 감히 제이미와 앨리타의 일행을 공격할
생각을 못 할 만큼 용맹스럽고 무시무시했다. 기사들은 모두가 거대한 군마를 타고 있었고,
사나운 말들은 콧김을 내뿜으며 어서 달리고 싶다는 듯 발굽을 들썩였다. 제이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게일로드는 그녀의 지참금과 혼수품이 들어 있을 것으로 여겨
지는 마차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마차에는 금과 은이 담긴 함 이외에도 각종 피륙과 침대
보, 크고 작은 가구류 등, 신부가 새살림을 꾸밀 때 필요한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제이미가 나타났다. 그녀가 처음 보는 새로운 모습의 제이미 모
티머였다. 찬란하게 빛나는 은빛 갑옷에 보석이 박힌 검을 차고 벨벳에 탐스러운 모피로 안
감을 댄 망토를 걸친 그의 모습은 정말 놀라울 만큼 멋졌고, 게다가 그가 타고 있는 칠흑
처럼 검은 종마는 앨리타가 평생 본 것 중에서 가장 좋은 말 같았다. 그는 아버지와 작별인
사를 나누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그녀가 있는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크리케스 성까지는 지독하게 먼길이니 몸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시오, 부인."
"난 말을 잘 타요. 나 때문에 행렬이 늦어지진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앨리타가 쏘아붙였다.
"그럴지 어디 두고 봅시다."
그가 멀어지자 앨리타는 소리쳤다.
"어디에서 그렇게 훌륭한 옷을 구했죠? 내 생각엔 당신 처지에 비해 너무 과하게 차려
입은 것 같군요. 국왕폐하께서 입던 옷이라도 선물로 내주셨나요?"
제이미는 씩 웃었다.
"당신 지참금 중에 금과 은이 워낙 많아서, 가장 좋은 의복과 순종인 종마를 구입하는
데별 어려움이 없었소."
앨리타는 제이미 모티머가 절대로 남이 입던 옷을 물려입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
으며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거대한 풍채에 딱 어울리는 멋들어진 말을 타고 기품 있게 멀
어져가고 있는 제이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곧 제이미가 기사들에게 출발신호를 보내며
앞장을 섰으므로, 앨리타는 더이상 생각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다음, 그들의 뒤를 따랐다. 행렬의 마지막에서 게일로드가
마차를 몰고 출발했다. 제이미가 일행을 이끌고 달리는 속도는 대단히 빨랐지만 앨리타는
그들을 따라잡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짐을 많이 실은 마차는 뒤처지고 말았다.
제이미는 경호병을 둘로 나누어 여섯 명은 마차를 호위하고 여섯 명은 자신과 앨리타를 호
위하도록 했다. 그날밤 그들 일행은 여행객들의 보금자리인 크레이븐 성에 도착해 하룻밤
묵기로 했는데, 대단히 쌀쌀맞은 대접을 받았다. 모티머 가문의 이름은 아직도 영국 전역
에서 혐오의 대상이었으므로 제이미는 이미 그러한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머셋
가 문은 널리 존경받고 있었으므로 그들 일행을 완전히 물리치지는 못했다. 제이미는 다른
기사들과 함께 연회실에서 눈을 붙이겠다고 했으므로, 앨리타는 혼자서 흡족하고 편안한 잠
자리를 누릴 수 있었다.
다음날도 똑같은 하루의 연속이었고, 그들은 밤마다 각기 다른 숙소에서 잠자리를 마련
했다. 셋째날이 되자 앨리타는 온몸이 쑤시고 아파서 혼자서는 말에서 내리기조차 힘들 정
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제이미에게 속도를 좀 늦춰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윈저성을 떠난 이후로 그는 거의 앨리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제이미가 수
시로자신에게 탐욕스런 시선을 보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불타는 듯한 그의 눈동자
가 자신을 향할 때문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그녀는 몸이 달아올랐기 때문에 앨리타는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는 순간을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플린트의 어느 마을을 지나면서 앨리타는 이제 그들이 웨일스 지방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모티머 영지였던 에반 그레이의 성이 가까운 곳이었다. 한때는 조상
대대로 살았던 제이미의 선조들의 고향이었지만, 지금은 넓은 땅과 성이 가문의 모든 재
산과 함께 에반 그레이에게 속해 있었다. 제이미의 어두운 얼굴을 보며 앨리타는, 모든 것을
그레이에게 빼앗긴 지금도 그가 플린트 영지를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
달았다. 플린트 서쪽의 디 강을 건너 초라하고 외진 시골로 보이는 웨일스 동북부의 클루
이 지방으로 들어섰을 때, 그들에게 뜻밖의 재난이 닥쳐왔다. 그들은 양쪽으로 언덕이 솟아
있는골짜기를 지나고 있었다. 날씨는 지독하게 추웠으므로 앨리나는 두툼한 외투의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온기를 모으려 애를 썼다. 갑작스런 비명소리에 그녀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왼쪽 언덕을 쳐다보니 석궁과 활로 무장한 열댓 명의 무리가 통통한 웨
일스 산 조랑말을 타고 언덕에서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텁수룩하게 수염이 덮인 얼굴에
모피와 가죽옷으로 험상궂게 치장한 그들의 모습은 용감한 남자들도 겁을 집어먹을 만큼 무
시 무시했다.
"웨일스 인이다!"
제이미가 소리치며 말을 뒤로 돌려 앨리타에게 달려왔다.
"꽉 잡아요."
그는 앨리타의 손에서 고삐를 낚아챈 뒤 말에 박차를 가했다. 갑작스런 동작에 말에서
떨어질 뻔했던 앨리타는 안장 앞머리를 힘껏 움켜잡고 매달렸다. 제이미는 곧장 반대편 언
덕으로 향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언덕을 올랐고, 여섯 명의 기사도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왔다.
고약한 웨일스 인들은 목청이 터져라 요란한 소리를 지르고 무기를 휘두르며 그들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힐끗 뒤를 돌아본 앨리타는 기사들이 멈춰서서 방어선
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수적으로는 무척이나 불리했지만, 기사들은 제이미 모티머
와 부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자신들의 임무를 용감하게 수행할 모양이었다. 잠시만 웨일스
인들을대적하고 있으면 마차와 함께 뒤쳐졌던 여섯 명의 기사들이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앨리타는 안장에 바짝 매달린 채 제이미가 이끄는 대로 숲속으로 들어섰다. 웨일스
인 하나가 기사들의 방어선을 뚫고 나오자 제이미는 석궁에 활을 매겨 적을 겨냥했다. 그의
겨냥은 정확했고, 적은 심장에 화살이 박힌 채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제이미와 앨리타는 계
속해서 달렸다. 싸우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자, 제이미는 갑자기 말을 세웠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그는 거칠게 내뱉은 뒤 싸움터를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어딜 가는 거죠?"
앨리타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부하들에게만 싸움을 맡기고 난 뒤로 빠질 것 같소?"
그가 고삐를 끌어당기자 말이 앞발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언덕 아래로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안장에서 미끄러지듯 내린 앨리타는 다리가 후들거려 한동안 말에 몸을 기
대고 있었다. 웨일스 인들이 제이미와 기사들을 해치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된다
면 그녀에겐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계속해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제이미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웨일스 인들에게 그녀를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
지만그 생각도 위안이 되지는 못 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녀는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자신이 턱없이 겁이 많은 어리석은 여자는 아니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녀는 늘 자
부심 넘치고 용감한 앨리타 서머셋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을 달래보아도 두려움은 떨
쳐버릴수가 없었다. 그녀는 언덕에 숨어 먹이감을 노리다 여행객들을 잔인하게 공격해 금
품을 빼앗는 웨일스 인들의 횡포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무릎을 꿇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추위가 뼛속까지 사무쳐 그녀는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온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질 것 같
았다. 이윽고 제이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종마를 타고 있는 그의 모습은 악마처럼 보
였다.
"놈들은 달아났소. 나머지 기사들이 마침 도착해 놈들을 물리치는 것을 도와주었소."
그는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앨리타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자, 그는
이상스럽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 말 들었소, 부인? 놈들은 당신을 해치지 못하오."
앨리타는 멍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부상을 입은 놈 하나를 심문했더니, 우리를 공격하도록 돈을 받았다더군. 하지만 그자는
우두머리가 아니라서 그들을 고용한 사람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했소. 하지만 이름을 알
아낼 필요도 없소. 우릴 공격한 음모를 꾸민 자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앨리타는 눈을 깜박였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맙소사, 왜 이러오? 당신 제정신이오?"
제이미가 소리를 질렀다. 몸이 얼어붙은 앨리타는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녀가 꽁꽁 얼어붙은 땅위에 무릎을 꿇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제이미는 욕
설을 내뱉으며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근처의 통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그는 그녀를 끌어
안고 자신의 외투를 벗어 감싸주었다. 그러자 천천히 그녀의 체온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어죽을 뻔했잖소."
그는 앨리타를 나무랐다.
당신이...주, 죽게 될까 봐...두, 두려웠어요.... 그렇게 되면 난, 난..웨일스 인들의...손에 넘
겨질 테니까."
그녀는 이를 부딫치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나를 그렇게도 못 믿었소?"
"난 당신을 잘 몰라요. 난 당신을 신뢰하지도 않구요."
제이미는 그녀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계속 여행을 헤도 괜찮겠소?"
"그래요, 괜찮아요."
앨리타는 자신이 제이미의 무릎 위에 가장 편안한 자세로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이틀 뒤 그들은 바닷가에 도착했다. 앨리타는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기 전부터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소리와 아련한 짠내를 맡으며 바다가 가까워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제이미는
행렬의 뒤로 돌아와 그녀의 곁에서 말을 몰았다.
"거의 다 왔소. 누추한 내 집을 보고 너무 실망하지 않길 바라오."
그는 입술을 씰그러뜨리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별로 기대하지도 않아요. 비천한 농노처럼 남루한 옷을 입고 나타나긴 했지만, 난 당신이
그만큼 가난하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도대체 당신은 누구죠? 농사꾼인가요? 범죄집단의
우두머리라도 되나요? 그것도 아니면 악마의 자식이거나 신비스런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도
되나요?"
앨리타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렇소, 그 모든 걸 합한 사람이 나요. 시간이 지나면 당신이 나한테 붙인 그 이름들에
대해서 차차 알게 될 거요."
제이미는 비교적 정중하게 대꾸했다. 그는 허허로운 웃음소리를 여운처럼 남긴 채 앞으로
달려갔다.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바위와 돌덩이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폐허 위에 우뚝
솟은 성채가 드러났다. 절벽 꼭대기에 서 있는 성채뒤로는 휘몰아치는 바람에 미세한 물방
울을 튕겨올리는 바다가 보였다. 한눈에도 성의 옛날 모습이 대단한 장관이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앙상한 뼈대처럼 서 있는 돌벽들
과 쓰러져가는 본채 건물뿐이었다. 성은 주변과 완전히 고립된 것처럼 보였다. 싸늘한 전율
이 앨리타의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폐허가 된 성 뒤를 지켜주는 절벽과, 튼튼하게 남아
있는 돌벽돌 때문에 그나마 성이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것 같았다. 제이미는 앨리타가 떨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인상을 찌푸렸다.
"내 집이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아 유감이오. 난 땅 한 뙈기 가진 게 없어서 신
의가호와 자연의 은혜에 의존해 살아가야만 하는 미천한 농부에 불과하오."
그의 빈정거림을 앨리타는 놓치지 않았다.
"정말로 누추하군요."
앨리타는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예전엔 망루였을 법한 돌무더기를
지나가자 흥미롭다는 그의 웃음소리가 따라왔다. 망루의 크기만으로도 성의 찬란했던 과
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전혀 사람이 살 것처럼 보이지 않는 폐허를 둘러보며, 말을
멈추고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생각했다.
"집에 온 걸 환영하오, 부인."
제이미는 퍽이나 즐거운 듯 빈정거렸다. 그들은 성벽 안쪽으로 들어섰다. 뒤를 따라오는
기사들 역시 앨리타만큼이나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았다. 성의 외벽 안으로 들어서자 안
뜰은 생각보다 심각한 형편은 아니었다. 앨리타는 고성의 돌무더기 사이에도 어떤 질서가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말들을 마구간으로 데려가려는 듯 난데없이 어린 소년 둘이 나타나
말고삐를 잡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성벽 뒤편 어딘가에 마구간이 있는 모양이었다. 제이미
는 재빨리 말에서 내려 앨리타를 내려주었다.
"여기에서 기다리시오. 기사들에게 먼저 지시를 내리고 오겠소."
하늘을 향해 솟은 허름한 4층 높이의 본채 건물을 살펴보며 앨리타는 전혀 자신을 환영
하는 듯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초라한 건물의 내부는 과연 어떤 몰골
일지상상하며 그녀는 몸을 떨었다. 아버지가 이 끔찍스런 결혼에서 해방시켜주기 전까지, 그
녀는어쩔 수 없이 이 집에서 살아야 할 형편이었다. 사는 꼴이 누추하다고 얘기했던 제이
미 모티머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초라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네 귀퉁이에 서 있는 탑과
어우러진 성의 모습은 어딘가 당당하고 장엄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아래층의 창문들은 고작 두툼한 벽에 구멍을 내놓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위층의 창문
들은 커다란 열쇠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었고 건물 외곽으로 난 가파른 계단은 곧장 2층
으로 이어졌다. 앨리타는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여러 성을 보아왔지만 이처럼 수백 년도 더
된듯한 고성은 처음이었다. 제이미가 기사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기사들 뒤에
바짝 따라왔던 마차가 덜컹거리며 나무 다리 위를 건너왔다. 제이미는 앨리타가 한데에서
떨고있다는 사실을 잊었는지 우선 반갑게 게일로드를 맞이했다. 갑자기 앨리타는 본채 건
물로 이어지는 계단 꼭대기에서 움직이고 있는 뭔가 강렬한 색상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앨리타는 계단 꼭대기에 서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진
홍색 벨벳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젊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여자는 폭이 넓은 드레스자락 아
래로 요염하게 엉덩이를 흔들며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여자가 가까워지자 앨리타는 정
말로 그녀가 미인이며 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자의 피부는 산 정상에 쌓인 눈처럼
하였고 머리칼은 까마귀 날개처럼 검었다. 하얀 피부색과 검은 머리색의 대조는 현란할 지
경이었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닌 여자는 지나치지 않을 만큼 적당히 풍만한 가슴
과 엉덩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두운 비밀과 폭력적인 본성을 담고있는
듯 신비로운 보라빛이었다. 앨리타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로위나라
는 이름을 가진 제이미의 애인일 것이다. 로위나는 앨리타에 대한 적대감을 그대로 드러
낸 채 그녀를 노려 보았다.
"결국은 제 시간에 도착을 한 모양이군요."
"뭐라구요?"
앨리타가 근엄하게 물었다. 그녀는 되도록 침착하려고 애를 썼지만, 보라빛 눈동자를 지닌
미인의 머리카락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눌러참고 있었다.
"제이미가 제 시간에 윈저 성에 도착해 당신과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면, 당신을 크리
케스 성에 데려오지도 않았겠죠. 안됐군요. 당신은 이곳에서 행복할 수 없어요."
"내가 행복하든 말든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아, 그렇지가 않아요. 제이미가 원하는 여자는 당신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당신도 곧
알게 될 거예요."
"당신을 그렇게도 원한다면 무엇 때문에 제이미가 나를 데리러 런던까지 먼길을 여행했
을까요?"
로위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요."
제이미는 로위나에게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로위나는 앨리타에게 그의 모든 비
밀을 알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제이미가 런던으로 달려가 약혼녀를 데려오겠
다는 계획을 털어놓았을 때, 로위나는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계속해
서 크리케스 성에 머물든 말든 그것은 그녀의 선택에 달렸다는 애매한 말을 들었을 때, 물
론 그녀는 남는 쪽을 택했다. 제이미 모티머와 그녀는 지금껏 서로에게 즐거움을 주는 상
대였고 그녀는 그런 상태에 몹시 만족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이미는 아내가 필요 없다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었다. 하지만 로위나는 앨리타 서머셋이 이토록 아름답고 탐스러운
여자일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앨리타는 분노를 터뜨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어떻게든 제이미를 설득해 그의
애인을 집에서 내보내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제이미의 합법적인 아내로서 그이 애인과
함께 한 집안에서 살아야 하다니, 그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할 마음이 없다고 해도 정실 부인과 정부를 한 지붕 아래 살게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제이미 모티머가 예의범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아, 두 사람이 이미 서로 만났군."
"제이미! 너무 보고 싶었어요."
로위나는 반색을 하며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제이미는 로위나를 밀쳐내려 했지만 그녀의
환영인사가 너무나 열정적이었으므로 불가능했다. 흘끔 앨리타를 돌아본 그는 아내의 파
란눈동자에 스치는 불길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돌처럼 굳어진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제이미가 가까스로 로위나를 밀어냈다.
"내 아내에게 인사하시오, 로위나. 이쪽은 레이디 앨리타요."
그는 다시 앨리타를 향하며 말을 이었다."
"부인, 이쪽은 로위나 하워드 양이오."
앨리타는 무섭게 로위나를 노려보다가 일부러 홱 등을 돌렸다.
"여긴 지독하게 춥군요."
재미있다는 듯 제이미는 눈빛을 빛냈다. 앨리타는 로위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계산이
었다. 그는 그러한 그녀의 태도가 감탄스럽기도 했다.
"용서하시오, 부인. 어서 따듯한 안으로 드시오."
그가 팔을 내밀었다. 앨리타는 그의 호의를 거절하려 했으나, 로이나를 쳐다본 뒤 마음을
바꾸었다. 검은머리의 미인은 표독스럽게 앨리타를 노려보았다. 앨리타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다는 듯 턱을 치켜들고 제이미를 따라 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성의
내부가 어떤 모습일지 짐작도 할 수 없었으므로, 일단 최악의 경우를 상상했다.
계단은 건물 가장자리의 탑 내부에 있는 방과 2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부엌으로 이어
졌다. 2층 한켠에서 우물도 보였다. 제이미에 이끌려 한 층 더 계단을 올라가자 거실과
식당, 크고 작은 방들이 나타났다. 앨리타는 거실의 실내장식에 깜짝 놀랐다. 겉모습은 다
쓰러져가는 것 같았지만 건물 내부는 놀라울 만큼 잘 보존되어 있었다. 거대한 화강암 벽
난로가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고, 폭신해 보이는 소파가 벽에 놓여 있었다. 앨리타는
놀란 표정으로 제이미를 올려다보았다.
"헛간이라도 기대했소?"
그는 앨리타의 놀라는 표정을 예상이라도 한 듯 물었다.
"그래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잖아요, 옷차림으로 봐선 당신이 아주 가난한
사람이라고 짐작하는 게 당연하죠. 날 속이는 게 즐거웠나보군요."
"속인 게 아니오. 우리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모든 재산을 빼앗겼고, 내긴 추억밖에
남겨주신 게 없소."
"하지만..."
그녀는 거실을 장식하고 있는 호화스런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이 모든 물건들을 장만했죠?"
그녀가 가느다란 팔을 뻗으며 거실을 가리켰다. 제이미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때 두 사람을 따라 들어온 로위나가 대신 말했다.
"난 이곳에서 지내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어요. 제이미는 관대한 주인이죠."
앨리타가 폭발할 듯한 시선으로 로위나를 노려보았다.
"그건 당신이 평생 이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내
남편의 관대함에 대해선 더이상 기대하지 말아요. 이제 이 집의 안주인은 나예요."
그녀는 절대로 검은머리의 마녀에게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만일 제이미가
매춘부 애인을 계속해서 집에 두려고 한다하더라도, 집안의 정식 안주인이 누구인지 그녀
에게 똑똑히 알려주어야만 했다.
"내가 없는 동안 부탁대로 마을에서 일손을 구해놓았소?"
"그랬어요. 당신 말대로 보조 요리사 한 명하고 부엌에서 일손을 도울 사람들, 마구간에서
일할 아이들, 그리고 하녀 몇 명을 고용했어요. 그 정도면 충분하겠죠?"
로위나는 무척이나 중요한 얘기를 하듯 설명했다.
"당분간은 그럴 거요. 나중에 앨리타가 게일로드를 시켜서 더 필요한 인원을 고용하면 될
테니까. 일거리를 준다면 마을 사람들이 몹시 반가워할 거요. 요리사에게 가서 앞으로 두
시간 뒤에 식사를 하겠다고 전해요."
말을 마친 그는 앨리타를 향해 돌아섰다.
"따라오시오, 부인. 4층에 있는 당신 침실로 안내하겠소."
남편을 따라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앨리타는 등뒤에 박히는 로위나의 따가운 시
선을 느낄 수 있었다. 4층에 올라간 제이미는 절벽과 해변을 향해 자리를 잡은 커다란
방의
문을 열어 보였다. 그 방에는 내실과 작은 응접실이 딸려 있었다. 바깥쪽의 응접실은 대
부분
휑하니 비어 있었다. 하지만 내실에는 침대와 탁자, 그리고 의자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침실에 있는 벽난로에 지펴진 불길이 양쪽방에 온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침실에 있는 벽난
로에 지펴진 불길이 양쪽방에 온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침실에는 군데군데 작은 카펫이 놓
여있었고 창문에도 추위를 막을 수 있도록 두툼한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침대에는 고급
스런 색상과 디자인의 침대보가 덮여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근사하네요. 여기가 내 방인가요?"
" 그렇소. 모티머 성이나 서머셋 성만큼 웅장하진 못 하겠지만, 이곳이 내가 어렸을 때
부터 살아온 집이오. 난 모티머 성과 영지를 되찾을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을 생각이오.
그럼, 난 이만 내려가서 당신 짐을 올려보내도록 하겠소."
그가 돌아서서 방을 나가려는 순간, 그녀가 말했다.
"잠깐만요."
제이미는 휙 돌아서며 그녀를 향했다.
"내가 뭐 빠뜨린 것이라도 있소?"
"그래요. 로위나 문제예요. 그 여잘 내보내세요."
5
검은 눈썹을 불끈 위로 치켜올린 제이미는 야릇한 미소를 지은 채 앨리타를 쳐다보며
나른하게 물었다.
"지금 내게 명령하는 거요, 부인?"
"그래요."
앨리타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며 중얼거렸다. 제이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의 표
정은 너무나 무시무시했으므로 그녀는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그의
아내로서 그 정도는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그래요. 그 매춘부를 가까이 두고 싶다면 마을 어딘가에 살게 하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내 집에 그 여잘 둘 수는 없어요."
"나는 로위나를 이 집에 살게 하는 게 더 좋소."
사실 그는 로위나가 어디에서 살든 상관이 없었지만, 앨리타에게 그 사실을 말하고 싶
지는 않았다. 제이미 모티머와 강제 결혼을 한 이후 며칠간 앨리타가 보여주었던 놀라운 자
제력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제이미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제이
미의
넓은 가슴을 미친 듯이 두들겼다. 제이미와 왕에게,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데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몹시 화가 난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심한 욕설을
퍼부어댔다.
"다치기 전에 그만두시오, 부인."
제이미는 아내의 가느다란 팔에서 나오는 대단한 힘에 약간 놀라며 소리쳤다. 그는 거의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않았지만 앨리타의 손이 훨씬 더 아플 것 같았다. 아직 서른 살도
안
된 나이였지만, 그는 육체적으로 절정의 시기에 다다라 있었다. 그의 건장한 체구는 빈틈
없이 강철 같은 근육으로 발달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을 때려보았자 다치는 사람은 때리는
앨리타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한 손으로 그녀의 양 손목을 잡았다.
"감히 매춘부를 아내인 나와 한 지붕 아래 두려 하다니 모욕을 참을 수가 없어요!"
앨리타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되자 더욱더 화가 나 소리쳤다. 제이미는 험상궂은
얼굴로 되받아쳤다.
"감히 나를 때리다니 당신은 용감하기도 하군. 여긴 내 집이고, 난 내 마음대로 할 서요.
레이디 로위나는 내 손님으로 이 집에 계속 머물 거요."
"레이디라구요! 흥! 로위나가 레이디면 난 여왕이에요."
은빛 머리채를 사납게 헝클어뜨린 채 분노로 상기된 앨리타의 발그스레한 뺨과 이글거
리는 푸른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제이미는 여왕의 모습을 한 아내를 상상할 수 있었다.
얼마나 찬란한 모습의 여왕일까.
그는 아내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를 바짝 끌어당겼다. 그녀의 따뜻한 입김이 그의 뺨을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녀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머릿속에는 음탕하면
서도
달콤한 생각들이 자리를 잡았다. 제이미는 손을 놓고 보드라운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
쥐며
자신의 몸에 밀착시켰다. 당혹스러워진 앨리타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졌다. 그의 하
체는 이미 단단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녀의 다리 사이를 과감하게 짓누르는 그의 남성을 느
끼며 앨리타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신혼 첫날밤이 생생하게 떠올랐고, 처음엔 아팠지만 제이
미가 그녀의 몸에 일으켰던 놀라운 반응들이 되살아났다. 그의 몸 아래에서 온몸을 비틀며
짜릿한 쾌감을 느꼈던 장면을 떠올리면 그녀는 아직도 몸이 떨려왔다. 제이미를 증오하는
그녀는 일단 첫날밤을 치렀으므로 다시는 그가 자신을 건드리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기
뻤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로위나를 만나기 이전의 일이었다. 신혼 첫날밤에 했던 제이미의
말이 그녀의 가슴에 자꾸만 사무쳐왔다. 그녀는 사랑의 행위에 너무 미숙하고 서툴러서 자
신을 만족시키기 어려울 거라고, 제이미는 너무나 태연하게 말했었다. 앨리타는 그당시를 생
각하며 또다시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제이미는 앨리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
지만, 갑자기 그는 그녀의 몸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에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자제하려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여자를 미치도록 원하는 것은 남자가 나약해진 증
거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마치 갓 동정을 잃은 소년처럼 몸이 달아서 앨리
타를
원하고 있었다. 본래 그의 계획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고, 앨리타를 이용해
음모에 가담한 자들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뿐이었다. 이 조그만 계집에게 마음을 빼앗길 생
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몸 아래에서 뒤채던 아내의 새하얗고 부드러운 살
결과
팽팽한 그녀의 속살을 꿰뚫고 들어가던 황홀한 감각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얼마나 달콤했는지, 그의 남성을 감싸던 그녀의 몸안이 얼마나 촉촉하고 매끄
럽고
팽팽했는지 그는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저항하며 항복하기를
거부했지만, 그는 그녀의 육체 내면에 잠자고 있던 불씨를 피워올리는 성공했다. 결국 그
녀는
정복당하고 말았다. 그건 확실한 정복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육체를 소유하는 데 성
공했을지 몰라도, 그녀의 영혼을 소유한 것은 아니었다. 자존심 강하고 반항기 넘치는 그
녀의
정신력은 굽힐 줄을 몰랐다.
"놔주세요."
앨리타는 숨을 헐떡였다, 제이미와 너무 가깝게 몸을 대고 있으려니 그녀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앨리타의 입술을 찾았다. 그의 혀는 입술선을 따라 움
직이다가 치아를 지나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앨리타는 진저리를 치며 신음했지만 제이
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달콤한 입안을 탐험했다. 그의 포옹은 너무나 강렬해서
앨리타는 숨을 쉴 때마다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갑자기 그는 손으로 그녀의 몸을 훑기 시
작했다. 그가 그녀의 엉덩이를 어루만지다 등허리를 쓰다듬자 앨리타는 자신의 내부에서 뜨
거운 불길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 흥분을 일으키는 것은 그의 손동작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맞대고 있는 몸 사이로 점점 더 부풀어오르는 그의 남성이었다. 제
이미는 그녀를 좀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하체를 그녀의 몸에 문질렀다. 갑작스럽게 몸이 떠
밀리는 것을 느낀 앨리타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침대기둥을 붙잡았다. 제이미는 방금 두 사
람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이 모두 그녀에게 책임이 있다는 듯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
아보며 숨을 헐떡였다.
"대체 당신이란 여잔 어떤 여자지? 이렇게 빨리 내 자제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건 마녀
뿐이오. 난 당신한테 홀린 것 같소. 이런 내 자신이 마음에 들이 않는단 말이오."
앨리타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제이미를 쳐다보았다.
"난 마녀가 아니에요. 당신의 관심을 원한 적도 없구요. 내가 당신한테 바라는 건 로위
나를 내 집에서 내보내라는 것뿐이에요. 나한테 그 정도 주장할 권리는 있겠죠."
"로위나는 내가 보내고 싶을 때 보낼 거요."
제이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는 앨리타와 함께 있으면 자제력을 잃어버리는 자기
자신에게 아직도 화가 나 있었다. 신부에게 넋이 나가 쩔쩔매는 신랑처럼 행동하기엔 그는
너무 할일이 많았다. 앨리타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
"그 매춘부와 이 집에서 함께 지내는 것을 참아야 한다면, 내 눈앞에 얼씬거리지 않도록
최소한의 배려는 해주세요. 그 여자가 내 방에는 절대 얼씬거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
신도 마찬가지구요."
제이미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웃고 있지 않았다.
"결국 첫날밤에 얘기했듯이 난 더이상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 거요. 물론 당신이 로위나를
내보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면 말이오. 굳이 로위나를 내보내야 한다면 난 그녀 대신 당
신을 이용할 수밖에 없소. 그게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로위나를 내보내
겠소."
"아니에요! 당신은 두번 다시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우리 아버지와 그레이 경이 한시
바삐 이 지긋지긋한 결혼에서 나를 해방시켜주길 바래요. 난 반역자의 손자를 낳고 싶지 않
아요. 선천에서 땅 한 뙈기, 동전 한 닢 물려받지 못한 가난뱅이의 자식도 원하지 않구요."
앨리타가 뒷걸음질을 치며 소리쳤다. 폭발하기 직전의 분노를 억누르는 듯 제이미의 표
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누구의 자식을 원하지? 감히 에반 그레이의 자식을 원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그랬다간 당신의 사악한 행동이 결실을 맺기 전에 두 사람 다 죽여버릴 거요. 당
신은 내 아내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요, 당신 아버지도, 에반 그레이도 그 사실을 바
꾸진
못하오."
두 사람은 서로를 강렬하게 노려보았다. 부글부글 끓는 용암처럼 둘 사이의 긴장은 점차
고조되었고, 만일 아주 사소한 일이 벌어진다 해도 금방 폭발할 것만 같았다. 만일 로위
나가
둘 사이에 뛰어들지만 않았다면 그들은 똑같이 자존심을 내세우며 언제까지나 그렇게 서
로를 노려보고 있었을 것이다.
방으로 들어선 로위나는 질투심에 불타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제이미
모티머는 여자에게 홀딱 빠져 넋을 잃은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로위나는
그런 상황이 몹시 언짢았다. 앨리타 서머셋은 그녀가 갖지 못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
었다.
제이미가 윈저 성으로 가서 약혼녀를 데려오겠다고 선언했을 때, 행복했던 로위나의 세
상은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크리케스 성에 남는 쪽을 택했다. 그
녀는
제이미가 아내를 집으로 데려온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
지만 그 생각은 매력적인 앨리타를 직접 만나보기 전의 일이었다. 제이미는 확실히 아내
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눈치가 빠른 로위나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정확
하게 간파했다. 그녀는 그들 부부 사이에 존재하는 증오심이 자신에게 이롭게 작용하기를
기대했다. 앨리타가 호락호락하고 순조적인 신부가 아닐 거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신혼부부
사이의 묘한 끌림을 제이미가 알아채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 또한 확실했다. 이제 제이미를
자신에게 단단히 붙들어 매두기 위해서 그녀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알아야 할 사항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무슨 일이오, 로위나?"
로위나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제이미가 날카롭게 물었다.
"부인의 짐을 어떻게 할까 해서요. 당신 방으로 옮겨놓을까요?"
"아니오, 아내는 다른 방을 쓰는 게 더 편할 거요. 그래야 압박감을 덜 받을 테니."
그는 빈정거리듯 말하며 냉소적인 시선으로 앨리타를 훑어보았다. 후련한 안도감을 느
끼며 로위나는 터져나오려는 회심의 미소를 간신히 참았다. 그녀가 의심한 대로였다. 그
녀는
의기양양해졌다. 제이미가 신부의 미모에 홀딱 반한 것은 사실일지 몰라도 아내와 한
방을
쓸 만큼 넋을 잃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로위나로서는 너무나 다행스런 일이었다. 앨리
타의
불행은 곧 로위나의 행복을 의미했다. 조금 전 앨리타의 몸에 손을 댄 순간에 타올랐던,
분노와도 같은 욕망에서 벗어난 제이미는 깍듯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빈정거리듯 미소를 지
었다.
"그럼 난 이만 물러가겠소, 부인. 저녁식사는 아랫층 식당에 준비시키겠소. 당신을 도와줄
하녀를 한 명 올려보내겠소."
그는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서 로위나의 곁을 지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며 앨리타에게 도전적으로 맞섰다.
"왜 남편과 한 방을 쓰지 않죠? 고귀하신 부인이 그의 마음에 별로 들지 않는 모양이
군요. 하긴 당신처럼 순진하고 미숙한 여자가 제이미처럼 정력이 넘치는 남자한테 어울릴
리가 있나요. 그렇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부인.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내가 그이를 행
복하게 만족시켜줄 테니까요."
"이 방에서 당장 나가요. 내 남편이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하든 난 관심 없어요. 미천한
촌뜨기의 여자 취향이 어떨지는 보나마나 뻔하군요. 난 그와는 격이 다른 사람이에요. 남
편이 매춘부와 잠자리를 같이하겠다면, 난 성가신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고마울 따름
이에요."
앨리타는 이를 악문 채 내뱉었다. 로위나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제이미의 후환이 두렵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앨리타에게 덤벼들었을 것이다. 남편에게 특별한 애정을 받지는 못
할지
몰라도 앨리타는 엄연한 제이미의 아내였다. 어느 누구라도 앨리타를 함부로 대한다면 가
만히 보아넘길 제이미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로위나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로위나는
험악한 말로 앨리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기로 마음먹었다.
"당신 남편은 당신한테 관심이 없어요. 당신도 그 점을 잘 아는 것같아 다행이군요. 난
이만 돌아갈 테니 짐이나 푸시죠. 제이미와 나는 오랫동안 못 만났으니 어서 가서 뜨겁게
회포나 풀어야겠어요."
잔인한 말을 마친 로위나는 앨리타에게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방을 나갔다.
"나쁜계집 같으니라구."
앨리타는 로위나의 등뒤로 문을 소리나게 닫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제이미는 매춘부하
고나 어울리라고 해. 난 곧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에게 돌아갈테니. 제이미는 웨일스 인의
공격이 아버지와 그레이 경의 음모라고 확신했다 그때 제이미의 안전을 걱정하며 숲속에서
떨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기회를 이용해 달아났어야 했다고, 그녀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
랬다면 모든 상황이 달라졌으리라. 문득 또 다른 고민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제이미 모
티머와 헤어지고 싶었지만 그가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아버지와 연락이 닿는다면 그녀는
자신의 자유를 원할 뿐, 한 남자의 죽음으로 인해 평생 양심의 가책을 받고 살아야 하는 일
은 바라지 않는다는 얘길 전하고 싶었다. 앨리타는 딸을 곤경에서 구하기 위해 아버지가 그
토록 절박한 방법을 동원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녀는 아버지가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하
기보다는 차라리 결혼 무효소송을 성사시키길 원했다.
앨리타가 여행가방을 채 풀기도 전에 마을에서 새로 고용된 하녀하나가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고귀한 숙녀의 시중을 들게 되어 송구스럽다고,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하
녀의 이름은 베스였고, 앨리타는 그녀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앨리타의 어머니뻘을 됨직
한 지긋한 나이의 하녀는 둥그런 얼굴에 보기좋게 주름이 패여 인상이 좋았고, 부드러운 갈
색머리엔 희끗희끗한 백발이 뒤섞여 있었다. 베스의 담갈색 눈동자는 따뜻해 보였고, 수줍은
듯 미소를 짓자 눈꼬리에 주름살이 살포시 접혔다. 앨리타는 다소곳한 하녀의 태도에 마음
이 놓였다.
"만나서 반가워요, 베스."
"저녁식사 전에 목욕을 하시겠습니까? 원하신다면 더운물을 올려 보내겠습니다. 주인님
방에 욕조가 있으니 이 방으로 옮겨와 난로 앞에 놓으면 됩니다."
"난 목욕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시간이 충분할까요?"
"그럼요, 서두르면 돼요."
하녀가 밖으로 나가자 앨리타는 침대에 앉아서 목욕물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생각에 잠
겨 그녀는 넓고 검소한 방을 둘러보았다. 지참금의 일부로 살림살이를 좀더 들여놓으면 훨
씬 더 생활이 편해 질 것이다. 한편 제이미는 화를 삭이지 못한 채 같은 층에 있는 자신의
방안에서 서성거렸다. 그동안 원수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며 안심하고 있었을 텐데, 느닷
없이 윈저 성으로 달려가 원수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면 '어둠의 영주’로서 행동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할지도 모
른다. 하지만 에반 그레이가 앨리타마저 자신의 신부로 만들어 그가 소유했던 모든 것을 빼
앗아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성급한 그의 생동으로 인해 얻은 것도 있었다. 그
는 왕의 신임을 얻었고, 아버지에 대한 진상조사를 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물론 그런
다고 해서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실 수는 없겠지만, 그레이 부자가 빼앗아갔던 부와 명예를
되찾을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앨리타 서머셋을 아내로 맞이했다. 앨리타
는 모든 남자들이 탐낼 만한 여자였다. 그가 원한 대로 양순하고 순종적인 아내라기보다는
거추장스런 구석이 많은 여자라는 사실을 그도 인정했다. 게다가 앨리타가 그의 불법적인
밀수사업을 눈치챈다면 여러 사람의 목숨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갑
작스럽게 맞아들인 아내로 인해 그의 인생이 보다 더 흥미로워지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
런데 로위나의 존재가 문제였다. 대체 그는 무슨 생각으로 로위나를 크리케스 성에 붙잡아
두겠다고 말했던 것일까? 돌이켜보니 앨리타가 그의 아이를 낳소 싶지 않다는 말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의 말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그의 마음에 훨씬 더 깊은 상
처를 남겼다. 남자라면 누구든 자신의 후계자를 원하는 것이 당연했고, 그 역시 마찬가지였
다. 언젠가 그의 작위와 재산을 되찾게 되면 반드시 아이를 낳으리라고 그는 맹세했다. 하지
만 그 전까지는 곤란했다. 앨리타가 그 아이의 어머니가 되든 말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생각에 잠겨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는데, 갑자기 방안으로 로위나가 뛰어들어
왔다. 그녀는 다짜고짜 그의 품안에 안겼다.
"제이미! 집에 돌아온 당신을 제대로 환영해줄 시간이 없었어요."
로위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더니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제이미
는 신혼 첫날밤 이후 여자를 멀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다. 로위나의
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어느 겨울날, 잠시 쉴 곳을 찾아
오빠와 함께 성에 도착한 첫날부터 그를 만족시켜주었다. 오누이는 폭설에 길을 잃고 헤매
다, 운이 좋아서 크리케스 성에 도착한 것이었다. 초췌하고 쓰러져가는 성이었지만 그곳엔
따뜻한 벽난로와 음식이 있었고, 제이미 모티머라는 이름의 잘생긴 남자가 살고 있었다. 며
칠 트레버 하워드는 성을 떠났지만, 로위나는 남았다. 그게 벌써 2년 전의 일이었다.
"에헴, 주인님. 제가 방해를 했나요?"
게일로드는 문가에 서 있었다. 열정적인 로위나와 제이미에 대해 잘 아는 그로서는 지금
같은 민망한 순간을 목격하는 것이 그리 당혹스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제이미는 엄
연히 결혼을 한 남자였고, 아내의 코앞에서 애인과 놀아나는 것은 점잖지 못한 일이었다. 게
일로드는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의견을 주인에게 전달했다.
"들어오게, 게일로드. 로위나는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었네."
제이미는 로위나의 집요한 팔을 풀며 말했다.
"제이미, 우리가 며칠만에 만나는지나 알아요? 정말로 보고 싶었다구요. 노친네는 보내버
려요, 나중에 얘기해도 되잖아요."
"아니오, 로위나. 게일로드와 긴히 할 얘기가 있소. 우리는 저녁식사 후에 얼마든지 만나
면 되니까 지금은 나가줘요."
그의 말속엔 은밀한 쾌락의 약속이 담겨 있었지만, 그의 눈빛엔 별다른 감흥이 섞여 있지
않았다. 로위나가 입술을 비쭉거리며 성난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가자, 게일로드는 조용히 문
을 닫으며 준엄하게 젊은 주인을 나무랐다.
"그러시는게 아닙니다, 주인님. 앨리타 아씨 앞에서 애인과 시시덕거리시다니 그게 무슨
꼴불견입니까. 결혼을 결심하시기 전에는 주인님의 분별력을 의심했지만, 이제 아름다운 부
인을 뵙고 나니 주인님이 제정신인지 아닌지 걱정됩니다. 앞으로 주인님이 크리케스 성에서
살아가시는 일이 만만치 않겠어요."
"인생은 내게 한 번도 만만한 적이 없었네, 게일로드, 자네도 알겠지만 난 아내한테 신경
쓸 시간이 없는 사람이야. 내가 앨리타와 결혼한 이유는 단지 에반 그레이에게 빼앗기고 싶
지 않았기 때문이었네. 우리 둘 사이엔 사랑의 감정이 들어올 틈이 없어. 자네도 들었다시피
앨리타는 나를 싫어하네. 그녀는 지금 아버지가 이 결혼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줄 때가지만
여기에서 살 작정이야. 하지만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겠지."
"부인이 이곳에 사시게 되면 위험합니다. 주인님이 밀수업에 손을 대고 있다는 사실을 부
인이 알아차리시면 어떻게 하죠? 부인께서 정말 주인님을 끔찍이 혐오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주인님을 배반할 테고, 그러면 우리는 모두 끝장입니다."
"감히 앨리타가 날 배신하진 않을 걸세! 내 약속하지."
"그럼 로위나 아가씨는요? 지금까지는 그분도 '어둠의 영주'가 누구인지 정체를 모르고
있
지만 혹시라고 알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습니까?"
게일로드의 말에 제이미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불안해하는 사람은 앨리타지, 로위나가 아닐세. 로위나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여자야."
"주인님은 지금 엉뚱한 분을 신뢰하고 있는 겁니다."
"아닐세, 게일로드. 만일 로위나가 우리 비밀을 알게 됐다고 해도 안전할 테니 걱정 말
게."
"부인이 보는 앞에서 계속 로위나와 잠자리를 같이하실 생각입니까?"
게일로드의 말에 제이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내 일이니 자네는 상관 말게. 다른 볼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니었나? 무슨 일이지?"
"앨리타 아씨의 지참금 문제입니다. 금과 은이 들어 있는 궤짝과 가구들을 어떻게 할까
요?"
"금과 은은 지하에 있는 밀실에 잘 보관해두게. 밀수한 물건을 판매한 이득으로 벌어들인
금은보화가 수두룩하게 쌓여 있는데, 굳이 아내의 지참금을 쓸 필요는 없지. 우리 가문의 영
토와 작위를 고스란히 되찾기 전에는 앨리타와의 결혼으로 얻어진 땅도 경작할 마음이 없
네. 집안 살림살이는 어디에다 놓고 싶은지 앨리타에게 물어봐서 원하는 대로 배치하도록
내버려두게. 그 물건들은 어디까지나 아내 재산이니까."
"알겠습니다."
게일로드는 새신부에 대한 제이미의 냉담한 처사가 몹시 못마땅했다. 제이미는 앨리타에
게 조금도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지만, 게일로드는 노인의 직감으로
주인님이 신부에게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젊은 주인은 늘 고집불통이
었다. 제대로 된 남편과 아내 사이로 두 사람이 가까워지려면 기적이 필요할 것이다. 게다가
로위나마저 주변에 얼씬거린다면 문제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게일로드는 비난하는 눈
초리로 제이미를 한번 더 쏘아본 뒤 방을 나갔다. 앨리타가 저녁식사를 위해 홀로 내려갔을
때 제이미는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 로위나 역시 그의 왼편에 앉아 있었다. 앨리타는 제
이미의 오른쪽에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긴 식탁을 훑어보며 그녀는 런던에서부터 그들
을 호위해온 기사들에게 목례를 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새로운 주인의 아름다운 부인
에게 모두 호감을 갖고 있었으므로 정중한 미소로 답했다. 기사들은 로위나가 제이미의 애
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제이미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들은 부인과 애인을
한 식탁에 앉혔다는 사실이 고결한 부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
다.
"좀 늦었소."
제이미는 자신의 음식 쟁반을 앨리타 앞으로 밀어주며 중얼거렸다. 그는 짙은 파란색의
드레스를 입고 반짝이는 머리채를 금빛 베일이 달린 머리장식으로 감싼 앨리타의 모습이 눈
부시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나치게 오랫동안 아내를 바라보자, 로위나는 화가 나서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시선을 분산시키려고 애를 썼다.
"제이미, 런던에 갔던 얘기 좀 해봐요. 국왕폐하를 만나봤어요?"
제이미는 로위나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앨리타를 향해 있었다. 로위나
가 미인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금빛 찬란한 앨리타의 아름다움은
관능적이고 어둠이 느껴지는 로위나의 미모를 확실히 압도하고도 남았다.
"음, 만났소."
"어떻게 생겼어요?"
제이미는 기사들의 석연찮은 표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몰라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앨리타가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거요, 부인. 로위나에게 헨리 왕에 대
해 설명해주지 않겠소?"
앨리타는 놀라운 만큼 맛있는 음식에 열중하고 싶었지만 최선을 다해 남편의 말에 따랐
다.
"헨리 왕은 젊고 아주 잘 생긴 분이에요. 머리는 짙은 검은색이고 요즘 유행하는 모양으
로 짧게 자르셨죠."
그녀는 우아하게 설명을 계속하다, 유행에 한참 뒤떨어진 제이미의 긴 머리를 못마땅한
듯 바라보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타고난 전사라고 칭송하죠. 실제로 그분은 전쟁에서 용감하게 영
국을 지켜냈어요. 곧 프랑스로 돌아가 결혼하실 계획이라더군요."
로위나는 괜한 질문을 했다고 후회했다. 앨리타가 얘기를 하는 동안 제이미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제이미의 온 신경을 끌어당기는 앨리타의 매력에 총 공세를
가하듯, 로위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주변 사람들이 모두 들을 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전 그만 올라가 당신 방에서 기다리고 있겠어요."
제이미가 노골적인 그녀의 말이 전하는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로위나는 넓은 식당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제이미는 그녀가 그토록 대담한 행동을 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 때문에 머뭇거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의 애인이 안달을 내며 기다리게 해선 곤란
하겠죠. 보시다시피 저는 훌롱한 요리사가 준비한 맛있는 음식을 좀더 즐겨야겠어요. 게일로
드가 말동무를 해주실테니 제 염려는 마세요."
앨리타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게일로드는 점잖게 제이미를 흘겨보며 대답했다.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아씨."
"언제 일어나든 그건 내 맘이오. 그리고 너무 일찍 잠자리에 들고싶은 생각도 없소. 천천
히 음식을 들어요. 식사 후에 당신 방까지 내가 인도하겠소."
제이미는 엉거주춤했던 태도를 바꾸어 의자에 깊숙이 걸터앉으며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앨리타는 일부러 느릿느릿 식사를 했다. 그녀의 평생 가장 길었던 식사로 기록될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끝은 있게 마련이었다. 앨리타는 침실로 물러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
를 보냈다. 제이미가 벌떡 일어나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서 그는 계단으로
이끌었다. 두 사람은 팽팽한 침묵 속에서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의 방문 앞에 이르
가 제이미는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내일은 한가할 때 성채를 둘러봐도 좋소, 그리 크지 않은 곳이라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
거요. 원한다면 게일로드나 로위나에게 안내해달라고 부탁하시오."
그는 잠깐 동안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자신의 방을 향해 좁은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갔
다. 앨리타는 그의 몸 구석구석에서 전해지는 힘을 느끼며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
았다. 그가 로위나에게 가고 있다는 사실이 고통스럽게 여겨졌다.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악
마가 깨어난 듯 그녀는 갑자기 소리쳤다.
"안녕히 주무세요, 황홀한 밤이 되길 빌어드리죠."
그런 다음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제이미는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돌아서진 않았다. 앨리타의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로위나는
약속대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벌거벗은 채 그의 침대 한가운데에 요염하게 누워
자신의 매력을 한껏 과시하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제이미."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관능적으로 삐죽거렸다. 제이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로위나
의 대담한 유혹에 아무런 느낌도 일지 않았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그도 영문을 알 수가 없
었다. 보름 전만 해도 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로위나가 기꺼이 제공하려는 쾌락의 세계로
빠져들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하느님 맙소사! 앨리타는 그의 남성을 시들
게 만드는 능력을 지닌 마녀임에 틀림없었다. 로위나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욕망의 세계로
그를 유혹했지만, 그의 하체는 전혀 흥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긴박한 충동도 일지 않았
다. 그는 돌아서서 창가로 걸어가 묵직한 커튼을 들추며 밖을 내다보았다. 달빛도 없는 캄캄
한 밤이었지만, 멀리 바닷가에서 뭔가가 보였다. 그는 로위나에 대한 생각을 순식간에 떨쳐
버리고 성큼성큼 문으로 달려갔다. 로위나는 경악했다.
"제이미! 어딜 가는 거예요!"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소. 오늘밤엔 돌아오지 않을 테니 당신 방으로 돌아가요."
"그 여자한테 가는 거죠! 당신 부인은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거 모르겠어요?"
제이미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는 마침 계단을 올
라오던 게일로드와 아래층에서 맞닥뜨렸다.
"주인님도 배를 보셨군요."
게일로드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그래, 일 주일이나 빨리 왔군, 사람들을 부르게. 어서 신호를 보내고 해변에서 만나야지.
곧 바닷물이 빠질 텐데 해변에 너무 가까이 접근해 오래 있으면 배가 위험해지네."
앨리타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신혼 첫날밤에 경험했던 은밀하고 짜
릿한 행위를 즐기고 있을 제이미와 로위나의 영상으로 가득했다. 자정이 넘도록 잠들이 못
한 그녀는 마침네 침대에서 일어나 베스가 마련해놓은 맥주를 마셨다. 그녀가 혹시라도 목
이 마를 경우를 대비해 사려 깊은 하녀가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벽난로에서 이글거리는 호
박빛 불길이 없엏다면 방안은 동굴처럼 어두웠을 것이다. 천천히 맥주를 마시며 앨리타는
멀리 해변에서 기이한 소음이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호기심이 동한 그는 창가로 다가갔다.
두툼한 커튼을 젖히고 그녀는 세찬 바람에 파도가 몰아치는 해변을 내려다보았다 불빛이 보
였다. 해변을 점점이 수놓을 무수한 불빛이 절벽 아래의 좁은 모래사장을 어지럽게 움직이
고 있었다. 멀리 해안에는 흐려졌다 밝아졌다를 거듭하는 배의 불빛이 보였다. 높은 파도 때
문에 등불이 일렁이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발이 꽁꽁 얼어붙어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밖을
내다보고 서 있었다. 그녀가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슬리퍼를 찾아 신고 돌아왔
을 때, 불빛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해변은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가 허깨비
를 본 것일까? 이렇게 늦은 시간에 해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아무리 궁리해보아
도 뾰족한 답이 나오질 않았으므로, 그녀는 침대로 돌아와 신비로운 현상에 대해 곰곰이 각
했다. 그녀는 새벽녘이 가까워서야 비로소 잠에 빠져들었다.
제이미는 하늘빛이 보라색으로 물들며 날이 밝기 시작할 무렵 성으로 돌아왔다. 밀수품은
건물 지하실에 있는 밀실에 안전하게 저장되었고, 곧 주변의 상인들에게 분배될 예정이었다.
간밤 내내 힘겨운 노동을 한 탓에 그는 단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
다. 다음날 아침 앨리타가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 제이미는 아직도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로
위나는 혼자서 넓은 식탁을 독차지 한채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으
며 앨리타는 그녀를 무시하려 애를 썼다.
"안녕히 주무셨나요, 부인. 제이미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겠지만 걱정 마세요. 가엾은 그
이는 아주 피곤한 밤을 보냈기 때문에 아직도 자고 있어요."
로위나는 명랑하게 말을 건넸다. 그녀는 밤새 제이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하
지 못했지만, 앨리타에게는 자신과 제이미가 정열적인 밤을 함께 보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당신 남편은 아주 멋진 사람이죠. 힘도 좋고 도대체가 지칠 줄을 몰라요, 하긴 당신도 이
미 알고 있는 사실이겠죠."
로위나는 꿈을 꾸듯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지칠 줄 모르는 남자라면서 당신은 이른 아침에 여기서 뭘 하는 거죠,
로위나?"
로위나는 앨리타를 흘겨보았다.
"난 집안 일을 지휘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에요. 하인들에게 각자의 일거리를 분배해줘야
해요,"
로위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보통 성의 살림살이를 돌보는 책임은 안주인에게 있는 거예요. 매춘부 주제에 집안 일을
지휘하겠다니 말도 안 되는군요."
앨리타가 도도하게 대꾸하자 로위나는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난 매춘부가 아니에요! 제이미에게 있어 내 존재는 그 이상이죠. 하인들을 고용할 사람은
나니까 지시도 내가 하겠어요."
앨리타는 고집스럽게 턱을 들어올렸다.
"로위나 하워드, 당신은 이 성안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군요. 당
신이 해야 할 일은 내 남편의 침대에서밖에 없어요. 그것으로 만족하길 바래요."
로위나는 마치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무섭게 앨리타를 노려보았다.
"지금 한 말, 반드시 후회할 때가 있을 거예요."
로위나는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식당을 빠져나갔고, 뒤에 남은 앨리타 역시 분노에 사로
잡혀 있었다. 결국 그녀의 남편과 로위나는 밤새도록 사랑놀음을 즐긴 것이다. 불한당 같은
남편이 오늘 하루 종일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더라고 놀라울 것은 없으리라. 아내인 자신을
대신해서 로위나가 잠자리의 의무를 이행해준다면 그녀는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제이미가 매일매일 밤새도록 애인과 정사를 즐긴다고 해도 그녀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가슴이 아팠다. 분노와 수치심이 뒤범벅된 고통이었다. 거대한 악마의 발톱
이 할퀴고 지나간 듯 그녀의 자존심은 깊은 상처를 입었고, 그녀는 고통스런 수치심에 휩싸
였다. 앨리타는 자신의 마음에 일렁이기 시작한 또 다른 감정을 고집스럽게 무시했다.
6
2주일 후 앨리타는 또다시 바닷가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와
제이미는 단둘이 있는 시간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그 일에 대해 그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들은 저녁식사 때마다 얼굴을 마주했다 .대부분이 로위나도 함께였는데, 그녀는 앨리타의
속이 뒤집힐 정도로 제이미에게 아양을 떨었다. 앨리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배웠던
대로 조금씩 조금씩 집안 일의 주도권을 잡아갔다. 하인들이 로위나 대신 안주인을 찾아와
명령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앨리타에게 대단한 즐거움이었다. 그녀가 별 어려움 없
이 집안 일의 주도권을 잡게 된 데는 게일로드의 도움이 컸다. 그가 하인들에게 앨리타가
주인님의 합법적인 아내이며 성의 안주인임을 확실하게 주입시켰기 때문이었다.
앨리타는 모든 하인들이 제이미를 영주님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사실 제
이미는 작위와 재산을 몰수당한 가난뱅이 농사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하인들은 그를
신처럼 떠받들며 아직도 그를 영주로 칭하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공손한 태도로 주인을
대했다. 앨리타가 크리케스 성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다시 한밤중에 해변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일어난 것을 감지한 그녀는 베스에게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다음날 아침,
하녀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앨리타가 스스럼없이 물었다.
"아래 마을에 산 지 얼마나 되었어요, 베스?"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답니다, 아씨."
베스는 자신에 대한 앨리타의 관심이 기쁜듯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럼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빠짐 없이 다 알겠네요."
앨리타는 순진한 척 말을 이었다.
"오, 그럼요. 이 베스 리랜드가 모르는 일은 아마 없을 거예요."
"결혼은 했어요?"
"네, 데피드라는 착한 남자와 결혼해서 사는 지 벌써 이십 년이에요. 아들만 셋을 두었는
데 모두 장성해서 결혼했고, 손주들도 일곱이나 된답니다."
"남편과 아드님들은 어떤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죠? 마을은 지나면서 보니까 다들 풍적
하게 사는 것 같던데."
순간 베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럭저럭 먹고사는 거죠."
"그럼 다른 마을 사람들은요? 바다에 나가 일을 하나요?"
"바다라니요? 아, 예, 그래요 대부분 바다에 나가 일을 해서 먹고 산답니다."
"밤에 물고기를 잡는 일이 잦은가요?"
베스는 앨리타의 끊임없는 질문에 당황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아뇨, 그런 일은 별로 없어요."
"밤늦게 절벽 아래 해안에 가끔 나타나는 불빛들이 고깃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
요. 베스도 본 적 있어요?"
"해변에 나타나는 불빛이라구요?"
베스는 머리를 굴린다거나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앨리타의 질문에
허를 찔린 베스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해변에 불빛이 보일 때는 어둠의 영주님이....."
베스는 갑자기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아씨. 제가 방정맞게 떠벌리는 얘기엔 신경쓰지 마세요. 남편은 늘 제가 너무 말이
많다고 그러죠."
"아니에요, 베스. 흥미로운 얘긴데요, 뭐. 어둠의 영주라니, 그게 누구죠?"
"아무도 아니에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들은 옛날 얘기의 주인공일
뿐이죠."
베스는 갑자기 바쁜 척 일에 몰두했고, 더 이상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앨리타는 베스
한테 더이상 정보를 캐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녀는
반드시 해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진실을 알아내기고 마음억었다.
그날 저녁 로위나는 늦도록 식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없는 틈을 타 앨리타는 제이
미에게 승마를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모처럼 만에 화창하고 상쾌한 날씨가 계속되었으므
로 승마하기엔 그만이었다. 제이미는 한참동안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가.
"호위병을 두 명 데려간다면 그렇게 해도 좋소. 말을 타고 싶은 전날에 게일로드에게 얘
기하면 말을 준비해줄 거요."
"호위병을 두 명이라 대동하라구요! 이렇게 외딴 곳이 뭐가 그리 위험하다고 그러죠?"
앨리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위험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오, 앨리타."
제이미는 부드럽게 말했다. 솔직히 그는 그녀와 함께 있을 때마다 평생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에 굴복할 것 같은 위험을 느낀다고, 그는 마음속으로 뒤뇄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신 아버지나 그레이가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내 집에 찾아올 걱정은 없을 테
니, 승마 정도는 안전할 거요. 그레이 경은 한적한 시골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 궁정에서 지
내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대단히 관대하시군요. 안전하다면서 왜 호위병을 데려가야 하죠? 내가 알아야 하난 다른
위험들이 존재하는 건 아닌가요?"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요?"
제이미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만, 속으로는 뜨끔했다. 앨리타가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일까?"
"늦은밤 해변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에 대해서 눈치챈 사람이 설마 저 하나뿐은 아니
겠죠?"
그는 갑자기 자세를 고쳐앉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한 일이라니? 당신 상상력이 지나친 것 같소. 아마 어부들이 밤낚시를 하는 소리를
들었을 게요."
제이미는 자신의 억지스런 설명에 앨리타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저자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녀는 완전히 납득하지 못했다는 듯 대꾸했다. 갑자기 로위라가 식당으로 들어왔으므로
얘기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궁금증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앨리타는 비밀을 알
아내고야 말겠다고 결심하며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제이미 역시 앨리타에게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방을 배정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속앓이를 했다. 그녀에겐 산을 향해 창문이
난 작고 안전한 방을 주었어야 옳았다. 하지만 그녀의 잠귀가 그토록 밝은 줄을 그가 어떻
게 알았겠는가.
'어둠의 영주'에게는 지난 한 달이 무척이나 바쁘고 정신없는 시간이었다. 밀수품을 가득
실은 배가 두 번이나 다녀갔고, 그의 밀실은 진기한 물건들로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그는 곧
물건을 실어보낼 예정이었지만, 앨리타가 그의 행동을 눈치챌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멀리 해
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아차렸다면, 성 앞에 마차를 대기시켜놓고 짐을 부리는 남자들의
거동을 그녀가 놓칠리가 없었다. 오래된 돌벽들은 방음이 시원찮았으므로, 바닥에 긁히는 술
통이나 상자의 소리만 들어도 앨리타는 의심을 할 것이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생각하
면 생각할수록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앨리타를 자신의 불법적인 행위에 연루시킬 수는 없
었다. 그렇다고 비밀을 들켜 그의 목숨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 전체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없었다.
"오늘밤엔 별로 말이 없네요, 제이미."
로위나는 제이미에게 바짝 다가가며 말했다. 달아오른 그녀의 열기가 그에게 전해져왔다.
제이미는 아내를 데려온 뒤로 줄곧 로위나와 잠자리를 피해왔다. 로위나는 그 사실이 어리
둥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하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제이미가 앨리타와 잠
자리를 함께하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녀로서는 그가 금욕생활을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정력적이고 지칠 줄 모르는 관능적인 연인으로서
의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이미는 앨리타에 대한 생각에 골몰한 채, 무심한 시
선으로 로위나를 바라보았다. 문득 로위나가 아직도 자신의 성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언젠부턴가 그녀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이 않았다. 로위나
는 키도 너무 크고 가슴도 너무 풍만했으며, 그녀의 관능미는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날이
갈수록 그는 조금도 그녀에게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젠 정말로 로위나를 내보내야 할
때라고 생각했지만, 동정심이 발동했다. 로위나의 오빠가 웨일스 어딘가에 있는 남작의 호위
병이 되기로 결심하고 떠난버린 뒤, 그녀는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고 애원했었다. 제이미는
게일로드를 시켜 로위나의 오빠의 행방을 알아본 다음, 그녀를 오빠에게 돌려보내기로 결정
을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는 밀수품을 성에서 반출
하는 동안 앨리타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따돌려야만 했다. 갑자기 거의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며 그가 미소를 지었다. 힘이 좀 들기는 하겠지만 문제는 해결할 수 있으리라.
이틀 뒤, 새벽에 눈을 뜬 앨리타는 창밖을 바라보며 오늘 날씨는 무척 화창하리라 생각했
다. 곧 그녀는 승마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호위병은 데려가지 않을 심산이었다. 제이
미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그녀는 어린애처럼 순순히 남편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생각이
었다. 그녀는 황급히 초록색 승마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부엌에 들려 먹을 것을 약간 챙겨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성을 빠져나갔다. 다행히 게일로드와 제이미는 성안에 없었으므로
앨리타는 로위나가 일어나 귀찮을 질문을 해대기 전에 일찍 서둘렀던 것이다. 안뜰은 텅 바
어 있었다. 기사들은 모두 제이미와 함께 어디론가 가버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곧장 마구간
으로 가서 소년에게 자신의 말에 안장을 준비시켰다. 잠시 후 그녀는 행복한 마음으로 사과
를 아삭아삭 깨물며 말을 타고 성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우선 마을을 둘러본 다음, 봄기운이
완연한 시골길을 달릴 작정이었다. 비옥한 검은 대지를 뚫고 새싹들이 파릇파릇 돋아나기
시작했고, 나뭇가지에도 물이 오르고 있었다. 마을의 상점들과 외곽의 오두막들은 비교적 손
질이 잘된 상태였고, 지붕을 덮은 이엉과 벽에 바른 진흙도 모두 새것이었다. 앨리타는 집
앞을 쓸고 있는 아녀자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상점들을 방문했다. 최근에 전쟁이 휩쓸고 지
나간 시골의 형편치고는 놀라울 만큼 다양하고 품질이 좋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비
록 제이미가 정식 영주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영주의 부인으로서 가는 곳마다 따뜻한 환영
을 받으며 시원한 음료수를 제공받았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 그녀는 마을을 떠나 활
짝 트인 벌판으로 말을 몰았다. 그녀는 졸졸 흐르는 개울가에 말을 멈추고 평평한 바위에
앉아 챙겨온 빵과 치즈를 먹었다.
배불리 아침을 먹고 난 앨리타는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위에서 일어나 말고삐를 잡았
다. 그때 갑자기 요란한 말발굽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눈부신 햇살에 눈을
찡그리며 그녀는 미친 듯 빨리 달려오는 종마와 그 위에 탄 사람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달아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노한 제이미가 따라온 것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호위병을 데려가야 한다는 그의 명령을 고의로 어겼으니 몹시 화
를 낼지도 몰랐다. 그러나 말이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말을 탄 사람이 제이미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제이미가 무척 아끼는 검정색 종마도 아니었고, 말에 탄 남자는 그녀의
남편이 몹시 싫어하는 현란한 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앨리타! 혹시나 당신을 만날까 하는 생각에 지난 두 주일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이곳을
서성거렸소."
그녀는 남자의 목소리를 금방 알아차렸다.
"그레아 경! 당신은 런던에 있는 줄 알았는데요."
앨리타는 멍한 표정으로 눈앞에 멈춰선 에반 그레이를 올려다보았다.
"아니오, 당신을 따라와 나도 줄곤 웨일스에 있었소. 극왕폐하의 명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
만, 내가 웨일스로 온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당신 때문이오, 앨리타."
그레이 경의 시선을 그녀를 꿰뚫을 듯 강렬했다. 앨리타는 마치 굶주린 사람처럼 쳐다보
는 그의 눈빛에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국왕폐하께서 무슨 일로 당신을 웨일스에 보내셨죠?"
앨리타는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밀수업자들 때문이오. 하지만 당신은 걱정할 필요 없소, 국왕폐하의 국고가 바닥날 지경
이어서, 이 지역의 세금 징수 책임자인 내가 밀수업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나서게 된 거요."
"밀수업자라구요!"
앨리타는 소리쳤다. 갑자기 그녀의 머릿속에서 뭔가 앞뒤가 맞아 떨어지는 듯한 어떤 생
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끔찍한 일이군요, 무슨 증거라도 있나요?"
"아니오, 단지 심증만 있을 뿐이오. 밀수업자의 이름이란 것도 너무 터무니없소. 하지만
불쾌한 일임에는 틀림없소."
그는 말에서 내려 앨리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당신 아버님과 난 당신 걱정을 많이 했소. 그 야만인이 당신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
소?"
"전 잘 있어요, 정말이에요. 그런데 저희 아버님은요? 건강하신가요?"
"물론이오. 당신 아버님은 결혼 무효소송을 하기 위해 런던에 남으셨소. 난 아직도 당신을
원하고 있소, 앨리타."
그의 노골적인 시선이 탐욕스럽게 그녀의 얼굴과 몸매를 훑어내렸다.
"이 길로 나와 함께 돌아갑시다.당신을 그레이 성으로 대려가고 싶소. 요새처럼 튼튼한 성
인데다 경비병도 충분해서, 감히 모티머가 당신을 찾으로 오지 못할 거요. 당신이 일단 내
집에 안전하게 머물게 되면, 그자와 담판을 짓겠소. 그러면 그자는 기다렸다는 듯 결혼 무효
소송에 응할 거요. 모티머는 자만심이 지나치게 강한 녀석이라 당신이 일단 내 손안에 들어
왔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다시는 당신을 원하지 않을 거요."
앨리타는 경악했다. 그녀가 없어지고 나면 제이미도 오히려 기뻐할 테고 그녀를 되찾기
위해 결투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 경의 제안은
부도덕한 짓이었다. 로위나가 아내의 의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데 제이미가 무엇 때문에 그
녀를 되찾으려 하겠는가? 게다가 그는 에반 그레이에게 도전할 만큼 병력도 충분하지 못했
다.
"내가 없어져도 제이미는 날 그리워하지 않을 거예요."
앨리타는 상처받은 듯한 느낌을 애써 숨기며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래서 유감이라는 말처럼 들리네요. 설마 그 불한당 같은 자식이 좋아졌다는 뜻은 아니
겠지요?"
그레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좋아졌다구요? 절대 그런 일은 없어요.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자신의 이
익을 위한 수단으로 나를 원하는 것뿐이에요. 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줄 남자를 원해
요."
앨리타를 바짝 끌어당기는 그레이의 눈동자가 음험하게 빛났다.
"사랑하오, 앨리타. 난 당신을 언제나 사랑했소. 당신한테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가난뱅
이 녀석이 아니라 당신을 제대로 보호하고 부드럽게 감싸줄 수 있는, 나이 많고 현명한 남
자가 필요하오. 국왕이 당신을 제이미 모티머에게 내주다니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거요. 하
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소."
그레이는 자신의 말을 강조하려는 듯 그녀를 거칠게 끌어안고 입술을 눌렀다. 그녀를 부
드럽게 감싸주겠다던 그의 약속과는 상반되는 행동이었다. 그의 입술은 딱딱했고, 비수처럼
날카로운 혀가 어느틈엔가 그녀의 입안으로 뚫고들어왔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양손으로 앨
리타의 엉덩이를 움켜잡고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의 난폭한 입맞춤은 앨리타에게 충격이었
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에반 그레이 경에 대해 제대로 알았던가, 하는 회의마저 들었다.
그녀는 그의 애무의 손길이 혐오스러워 신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녀의 반항을 자신의 매
력에 대한 호응으로 잘못 받아들인 그레이는 입맞춤의 강도를 높였다. 그레이는 앨리타의
부드러운 입술을 탐하며, 이제 자신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와 앨리타는 이 길로 그의 성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었다. 그녀를 곁에 두고
쾌락을 즐긴다면, 모티머 가문에 소속되었던 모든 것을 마침내 빼앗게 된다는 생각에 그는
몹시 흡족해졌다. 그에겐 모티머 가문을 철저하게 증오할 이유하 있었다. 일단 앨리타의 아
버지가 앨리타와 모티머의 결혼을 무효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나면, 그는 앨리타와 결혼해
그녀의 재산을 모두 소유할 것이다. 그녀에게 신물이 나거나 출산으로 인해 그녀의 외모가
시들해지면, 그는 자식들을 돌보도록 앨리타를 외딴 시골에 살게 한 다음 자신은 런던에서
젊고 싱싱한 정부들과 놀아나면 그만이었다.
이제 그만 입맞춤을 멈추고 그녀를 말에 태워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문득 고개를 들
었다. 순간 그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검은 말을 타고 앨리타의 뒤편에 서 있는 제이미의 모
습을 발견했다. 황급히 앨리타의 엉덩이에서 손을 뗀 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갑
자기 포옹에서 풀려난 앨리타는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는
찰나, 앞으로 다가온 제이미는 그녀를 번쩍 안아올려 자신의 말에 태웠다. 앨리타는 갈비뼈
를 으스러뜨릴 듯 죄어오는 제이미의 팔을 느끼며 절망감에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제이
미가 근처에 있었는지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그의 짙은 눈썹이 일자로 굳어지면서 턱과 입
주변의 근육이 씰룩거렸다.
"당신이 애인을 만나러 나올 생각이라는 걸 알았다면 성에 가두었을 거요, 부인."
앨리타는 고개을 돌려 그를 쏘아보며 대꾸했다.
"애인 같은건 없어요."
"과연 그럴까? 사실을 알아보려면 내가 좀더 늦게 나타날 걸 그랬군. 어쨌거나 그레이 경
은 분명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상태이고, 내가 방해하지 않았다면 맨 땅바닥에서라도 당신
을 범했을 거요."
"감히 그런 더러운 말을 입에 올리다니!"
앨리타는 그를 때리려는 듯 손을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치고 싶으면 어디 한번 쳐보시지.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미리 생각해보는 게 좋
을 거요."
그의 경고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물러난다는 것은 앨리타답지 않
은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손이 스르르 아래로 떨어졌지만
앨리타는 살기 등등한 시선으로 계속해서 남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제이미는 그레이 경에게 눈길을 돌렸다.
"웨일스엔 무슨 일이오, 그레이 경? 당신은 시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줄 아는데."
"난 국왕의 명령을 수행중이다. 혹시 이 근처에서 벌어지는 밀수업에 대해서 알고 있나?"
어느 틈에 자제력을 되찾은 그레이가 대꾸했다. 그러자 제이미는 건조한 웃음소리를 냈다.
"밀수라니? 난 밀수업자들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소, 하지만 있지도 않은 밀수업자들을
소탕한다는 빌미로 런던을 떠나온 건 훌륭한 핑계겠지. 지금 당신이 서 있는 땅은 내 땅이
오, 별로 가치는 없을지 모르지만 성과 근처의 땅은 내가 물려받은 어머님의 유산이지, 당신
이 나한테서 빼앗지 못한 유일한 재산이란 말이오. 잘 들으시오, 에반 그레이 경. 두번 다시
내 아내 앞에 얼쩡거리는 걸 목격하면 당신을 죽여버리겠소."
"네 녀석 따위는 앨리타 양에세 어울리지 않아!"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치며 소리쳤다. 제이미 모티머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그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지금껏 이토록 냉혹하고 무자비한 눈동자를 지닌 사람을
만난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그레이는 뒤를 받쳐줄 호위병이 없이는 제이미에게 도전할 용
기가 없었다.
"앨리타 양이 원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 결국은 내가 그녀를 소유하게 될 거야, 모티머.
곧 그녀가 내 침대에서 간절이 날 기다리게 될 거라구."
그레이는 제이미의 반응을 지켜보지도 않고 황급히 말에 올라 달아났다.
"겁쟁이! 당신의 애인은 당당히 나와 맞서 싸울 용기가 없는 모양이오."
앨리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레이 경의 노골적인 말에 그녀는 대단히 충격을 받았
다. 그녀는 지금껏 자신이 믿어왔던 것처럼 에반 그레이가 신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
기 시작했다. 왜 그는 제이미와 당당히 맞서지 않았을까? 제이미의 말처럼 그가 정말로 겁
쟁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신중하기 때문일까? 이유야 어쨌든 앨리타는 그레이 경이 꼬
리를 내리고 달아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화가 난 제이미를 그녀 혼자서 감당하도록
내버려두고서 말이다. 제이미의 일그러진 표정을 힐끗 돌아본 앨리타는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당신이 한 행동은 너무 지나쳤소 앨리타. 이런 짓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따끔
한 맛을 보여줘야겠소."
제이미는 얼어붙은 듯한 시선을 그녀에게 돌리며 말했다. 그는 그녀의 허리에 감았던 팔
을 풀고 무례하게 그녀를 바닥으로 밀어버렸다 바닥에 쓰러진 그녀가 일어서기 전에 재빨리
말에서 내린 그는 그녀의 배위에 한 발을 올려놓고 짓눌렀다. 제이미가 잔인한 남자라는 것
은 알았지만, 앨리타는 그가 정말로 자신을 해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무슨 짓이에요?"
그가 허리띠에서 채찍을 풀어 자신의 손바닥에 대고 내리치자, 공포감이 그녀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감히 날 때릴 순 없어요!"
앨리타는 용감하게 맞섰다.
"이성보다는 용기가 앞서는 여자로군, 또다시 애인이나 만나러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소. 우연히 마을을 지나치다 당신이 혼자서 돌아다니고 있다는 얘길 듣지 못
했다면 당신이 내 원수와 함께 공모해서 날 배신할 계획을 세우는지 꿈에도 몰랐겠지."
제이미는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바보예요, 제이미 모티머!"
앨리타는 배위에 올려진 제이미의 발을 들어돌리려 애쓰며 악을 썼다. 그러자 그는 발에
좀더 힘을 주었다. 앨리타는 숨을 쉬기가 힘들어 헐떡였다. 이제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죽일
생각인 것 같았다.
누가 그를 막을 수 있겠는가?
"당신과의 결혼을 혐오하긴 했지만 절대로 당신을 배신한 적은 없어요."
"계속 지껄여보시지. 내가 왜 당신을 못 믿는지 아오?"
"왜냐하면 당신은 진실이 눈앞에 있어도 알지 못하는 멍청이이기 때문이죠."
"더 이상은 참아줄 수 없어."
제이미는 마지막으로 경고하듯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위협적이어서 앨리타
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갑자기 그가 발을 치웠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거칠게 돌려 눕혔다. 그의 허벅지를 때리는 채찍소리를 들으며 앨리타는 마음의 준비를 하
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제이미는 그녀가 옷을 입은 채 맞는 것을 만족할 수 없는지 그녀
의 외투를 벗긴 뒤 뒷덜미의 옷섶을 움켜잡고 단숨에 찢어버렸다. 앨리타는 차가운 공기가
맨살에 닿는 것을 느끼며 신음했다. 제이미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내를 정말로 때려줄 생
각이었다. 심하게 상처를 입을 정도는 아니더라도 남편의 뜻을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
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드랍고 새하얀 그녀의 등을 보는 순간 그는 자신
도 모르게 낮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앨리타를 때리겠다는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메마른
땅에 엎드린 앨리타는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공기에 노출된 그녀의 맨
살에 소름이 돋았다. 제이미는 몸을 경직시킨 채 가만히 채찍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바라
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앨리타는 등을 내보인 자신의 모습이 제이미
에게 어떤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제이미가 평생 여자를 때려본 적인 없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 리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구제 받을 수 없을 만큼 남편을 화나게 만들
었고, 곧 그에 대한 처벌을 받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실제로는 순간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몇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라 채찍질을 하지 않자 앨리타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 보았다. 허공으로 높이 들려져 있었으리라고 생각했던 승마
용 채찍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제이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
었고, 앨리타는 그녀의 강렬한 시선에 온몸이 타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채찍보다도 자신
을 삼켜버릴 듯 섬뜩한 그의 눈빛이 더 두려워 숨을 몰아쉬었다.
"일어나시오!"
제이미는 그녀가 일어설 수 있도록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그녀가 느릿느릿 움
직이자 그가 손을 뻗어 일으켜 세웠다. 다음 순간 돌담 같은 그의 가슴에 안긴 그녀는 움직
이거나 숨을 쉴 수도, 그리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제이미의 손이 닿은 순간 앨리타
는 몸을 경직시키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난폭하게 내려왔다. 그의 입맞
춤은 일부러 그녀의 입술에 상처를 내려는 듯 거칠고 무자비했다. 제이미는 그들이 처음 맞
닥뜨린 순간부터 갈망해왔던 것을 야만스럽게 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혼인서약을 사실혼
으로 맺어주었던 단 한번의 잠자리는 매력적인 아내에 대한 그의 성욕을 오히려 자극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앨리타가 자신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일부러 멀찌감
치 떨어져서 지내왔던 것이다. 그는 로위나를 곁에 두면 그의 욕망이 만족될 줄로 생각했지
만, 이상하게도 그는 더 이상 애인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제이미의 집요한 공격을 받은 앨리타의 입술이 무기력하게 벌어졌다. 관자놀이에서 혈관
이 터질 듯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형벌과도 같은 지독한 입맞춤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몸부림친다 해고 제이미의 엄청난 힘을 감당할 수는 없었
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미끄러져 내려오더니 부풀어오른 자신의 남성을 온몸으로 느끼
도록 그녀의 엉덩이를 짓눌렀다. 곧이어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으로 올라갔다. 그는 손바닥
으로 그녀의 가슴을 감싸쥐며 두툼한 엄지손가락으로 유혹하듯 유두를 간질였다. 입술을 떼
며 앨리타는 흐느끼듯 소리쳤다.
"안 돼요, 여기선 싫어요! 동물처럼 땅바닥에서 이러긴 싫다구요!"
열정의 도가니 속에서 그는 간신히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낮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왜 안 된다는 거지? 그레이 경과는 기꺼이 땅바닥에서 사랑을 나누려 했잖소."
"그런 게 아니에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앨리타는 간절히 애원했다. 애절한 그녀의 간청에 제이미는 마음이 움직인 듯했다. 그러나
그의 포옹에서 완전히 벗어날 줄 알았던 앨리타는 여전히 그의 품안에서 외투에 포근히 감
싸여 말 위로 올려졌다 제이미는 그녀의 뒤에 올라타기 전에 앨리타의 조랑말 고삐를 붙잡
았다. 그가 종마의 배를 힘껏 걷어차자 두 사람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
나 제이미는 성을 향해 돌아가지 않고 말머리를 숲이 우거진 언덕 쪽으로 몰았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앨리타는 긴장하며 물었다. 혹시 그녀를 숲속으로 끌고 가 죽여버릴 생각은 아닐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곳으로 가는 거요."
제이미는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자주 보이는 냉소적인 웃음이 아니라 진정한 미소
였다. 앨리타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날 때리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어요."
앨리타는 경고하듯 말했다. 그녀는 제이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가 퉁명스럽거
나 고약하게 굴지 않으면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난 당신을 때릴 생각이 없소. 우리 둘이 할 수 있는, 좀더 즐거운 일이 얼마든지 있잖
소."
"이젠 나에 대한 분노가 풀렸나요?"
호기심이 이는 듯 앨리타가 물었다.
"분노라고 했소?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분노라고 설명하기는 좀 어렵군."
앨리타는 갑작스런 한기를 느꼈다. 곧 그들은 숲속으로 들어섰고 추위는 한층 더 심해졌
다. 제이미는 어디로 가는지 행선지를 확실히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앨리타는 울퉁불퉁한
숲길을 달리는 동안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장을 꽉 움켜쥐었다. 고문과도 같은 십여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말은 작은 공터에 멈춰섰다. 숲이 잘려나간 작은 공터 한가운
데에는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제이미는 말에서 뛰어내려 앨리타에게 손을 뻗었다.
"어서 내리시오. 이젠 당신의 방종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를 시간이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말에서 내리며 단단한 근육질의 몸매를 온몸으로 느꼈다. 한참 동
안 숲을 달려왔지만 그의 하체는 아직도 거대하게 부풀어 미친 듯이 박동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떠밀며 그는 문 쪽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은 채
방안으로 들어선 앨리타는 아기자기하게 놓여져 있는 가구와 모피로 만들어진 침대로 편안
하게 꾸며진 방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벽난로에는 장작불마저 휘황하게 타오르고 있었
다. 그녀는 휙 돌아서 그를 노려보았다.
"여긴 누구의 오두막이죠?"
"내 집이오. 당신의 방문을 위해 준비해둔 거요."
"내 방문을 위해서라뇨?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제이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에 덮여 있던 외투를 벗겨 옆으로 던졌다. 그는 밀수
품을 실어 나르는 마차소리를 앨리타가 듣지 못하도록 할 방법을 찾다가, 어머니가 돌아가
시기 전에 일종의 은신처럼 삼았던 이 오두막을 떠올렸던 것이다. 하루나 이틀 밤이면 물건
들을 실어내는 데 충분했으므로, 그동안 성에서 멀지 않은 이 오두막에 앨리타를 데려다놓
으면 되겠다는 묘안이 퍼뜩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마을에서 일손을 구해 오두막을 떠올렸
던 것이다. 하루나 이틀 밤이면 물건들을 실어내는 데 충분했으므로, 그동안 성에서 멀지 않
은 이 오두막에 앨리타를 데려다놓으면 되겠다는 묘안이 퍼뜩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마을
에서 일손을 구해 오두막을 꺠끗이 청소하도록 시킨 다음, 앨리타가 지내는 동안 먹을 음식
까지 마련해두도록 했다. 그는 앨리타가 지내는 동안 먹을 음식까지 마련해두도록 했다. 그
는 앨리타가 몸부림을 치며 반항을 하더라도 완력을 이용해 이곳으로 끌고 올 생각이었다.
물건을 실어나를 마차들이 오늘밤 자정에 성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앨리타
에게 근처에 사는 남작을 만나러 가자고 핑계를 댈 생각이었다. 그들이 만나러 갈 남작 따
위는 없었고, 제이미는 단지 밀수품들이 안전하게 운반될 떄까지 앨리타를 그곳에 붙잡아둘
속셈이었다. 그런데 마을을 지나다가 앨리타가 혼자서 말을 타고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
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몹시 화가 났다. 하지만 곧 그의 분노는 두려움으로 변했다. 만일
누군가가 그녀를 해치면 어쩌나? 그는 아내에게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둔 자
신의 부주의함을 영원히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뭘 이해 못하겠다는 거요? 상황은 아주 단순하오. 당신의 사랑스런 남편이 당신과 단둘
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한단 말이오."
처음 그의 계획은 게일로드가 앨리타와 함께 지내도록 할 예정이었다. 앨리타는 그의 말
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말아요. 사실대로 말해줘요. 날 왜 여기로 데려왔죠? 나만큼이나 당신도 날 원하
지 않는다는 것 잘 알아요."
"당신 생각은 틀렸소. 이제 곧 내가 당신을 얼마나 원하는지 직접 보여주겠소."
앨리타를 이곳으로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을 떄, 제이미의 마음 속엔 그녀와 사랑을 나눌
의도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품안에 안은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는 그녀를 원했던
것이다. 솔직히 그는 항상 그녀를 원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소
유하고야 말 것이다. 그녀가 그레이에게 기꺼이 몸을 허락하려 했다면, 그가 오랜 전부터 미
칠 듯 시달려왔던 자신의 욕망을 풀러버리는 데 그녀의 육체를 이용한다 해도 별다른 양심
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 같았다. 두려움에 눈을 커다랗게 뜨며 앨리타는 문 쪽으로 달아
났다. 제이미는 휘날리는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채를 낚아채 쉽사리 그녀를 붙잡았다. 그의
몸에 세차게 부딪친 앨리타의 눈에 눈물이 글썽했다.
"야만인! 무뢰한! 이 악마!"
앨리타는 소리를 질러댔다.
"그렇소, 그 모든 것 합한 사람이 바로 나요."
그는 한 팔로 그녀를 덥석 안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올리며 무자비한 입맞춤을
시작했다. 한참 뒤 그녀의 입술을 놓아준 그는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내가 당신을 소유하는 동안, 당신이 다른 남자를 머릿속에 떠올린다는 것은 참을 수 없
소. 에반 그레이는 잊어버려요. 이 세상엔 오직 당신의 남편인 내가 있을 뿐이오. 당신을 가
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당신의 남편인 내가 있을 뿐이오. 당신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 한 사람이면 족하오."
"당신이 내 마음까지 움직일 수는 없어요!"
앨리타는 지지 않고 대들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으스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앨리타는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그를 자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후회해
도 이미 때는 늦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관심 있는 건 당신 육체 뿐이오."
그녀는 뒷걸음질을 쳤다.
"약속했잖아요! 당신은 명예도 모르는 사람인가요? 로위나 한 사람으로 충분하지 않아
요?"
"내 명예는 에반 그레이에게 유린 당해 지금 우리 아버지와 함께 무덤에 누워 있소. 자존
심 외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의 말을 믿다니 그건 당신 잘못이오. 자존심도 명예도 우
리 아버지의 억울한 목숨을 구하진 못 했소. 자, 당신마저 날 모욕할 생각은 말라요. 난 내
가 원하는 걸 가질 생각이오."
"어떻게 해야 당신 마음을 바꿀 수 있죠?"
앨리타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건 불가능하오, 부인. 어서 옷을 벗어요. 갑자기 훤한 대낮에 당신의 벗은 몸을 보고
싶어졌소."
7
제이미의 잔인한 태도와 노골적인 언사에 아연실색한 앨리타는, 옷이 찢어져 등이 드러났
다는 사실을 잊은 채 그에게서 들을 돌렸다. 그녀는 맨살에 그의 거친 손길이 닿자 소스라
치게 놀랐다. 그의 손끝이 닿은 부분에 뜨겁게 불꽃이 이는 듯했다. 그가 매끄러운 그녀의
금발을 들어올리고 부드러운 목덜미에 입술을 대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그
녀에게 전해졌다. "옷 벗는 것 도와주길 바라오? 그렇다면 그렇게 해줄 수도 있소."
그녀의 목덜미에 뜨거운 입김을 쏟으며 그가 속삭였다. "싫어요, 그럴 순 없어요!"
"그럴 수 있소. 당신은 내 아내요. 당신이 그레이 경에게 주려 했던 걸 내가 차지하는 것
뿐이오." "난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어요."
앨리타는 제이미가 그레이 경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에게 형벌을 가할까 두
려웠다. "정말이오, 부인?" 다시 그의 입술이 그녀의 살갗에 닿자 그녀는 온몸이 달아오르
는 느낌이었다. 앨리타는 그의 포옹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당신은 날 부당하게 비난하고 있어요."
갑자기 그가 그녀를 돌려세우더니 몸을 밀착시키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맞춤은 앨리타가 몸부림을 멈출 때까지 깊고 부드럽게 이어졌다. 그녀가 더이상 저항을
하지 않자 그는 그제야 약간 몸을 떼며 천천히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드레
스가 흘러내려 가슴이 드러나자, 꾹 다문 그의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사람
의 몸은 여전히 가깝게 밀착되어 있었다. 부르르 떠는 그의 남성이 그녀의 부드러운 배에
닿는 순간, 분노도 형벌도 아닌 강렬하고 짜릿한 감정이 그의 뇌리를 사로잡았다. 제이미는
자신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강력한 감점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손쉽게 그녀의 드레스와 속옷을 벗긴 뒤 오랫동안 굶주린 사람처럼 그녀를 세
게 끌어안았다. 힘참 포옹에 그녀는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가 다시 그녀
에게 키스했을 때, 앨리타는 미묘하게 달라진 그의 입맞춤에 드디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
다. 그녀의 입술을 부드러워졌고, 그의 혀가 침입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녀의 몸
은 그의 몸에 맞추어 조각한 듯 밀착되었고, 그녀는 더이상 그의 노골적인 애무의 손깃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가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녀는 그의 아내가 되었던 첫날밤의 고통스런 희열을 떠올렸다. 그녀는 제이미와 싸우려 들
었지만 그는 그녀를 해치기는 커녕 쾌감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쾌감을 다시 맛보
고 싶어졌다.
제이미는 열병을 앓듯 온몸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그는 뼛속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는 앨리타를 원하는 만큼 절실하게 여자를 갈망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아내임에도 불
구사고, 그는 첫사랑에 넋이 빠져 손발을 떨고 있는 애송이처럼 굴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애써 피하려던 감정이었다. 앨리타가 야만스런 시골뜨기와의 강제 결혼을 혐오하고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면, 그는 가슴이 쓰라렸다. 그녀가 원하는 신랑감은 에반 그레이였다. 그녀가
그를 원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아내였고, 그는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제이미는 너무나 강렬한 원시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성급하게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
을 어루만졌다. 그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고 간질이는 애무를 계속하자 그녀의 유두
가 단단하게 일어섰다. 그녀는 뱃속을 찌르는 듯한 갑작스런 굶주림과도 같은 욕망에 시달
리며 몸을 떨었다. 그는 이미 그녀의 열정을 일깨운 적이 있었고, 그녀의 육체는 그것을 잊
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몸깊숙한 곳에서 피어오르는 고통의 근원을 즉각 눈치채고 절망 감
에 신음했다. 그녀의 신음소리에 제이미의 몸속 어딘가에 불이 붙는 듯, 그는 무릎을 꿇으며
그녀의 가슴과 배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입술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자 앨리타는 끔찍
한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은밀한 비밀의 계곡에 너무 가까워져 있었다. 그녀는 그가 하
려는 행동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제이미, 안 돼요!"
그녀가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제이미는 그녀의 손목을 등뒤로
돌려 잡은 다음, 황홀한 입맞춤을 계속했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 삼각형을 이룬 금빛 숲에
도달한 그는 잠깐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곧 그의 혀가 그녀의 허벅
지 사이의 달콤하고 뜨거운 계곡으로 찾아들었다. 그의 혀가 조심스럽게 움직이자 앨리타는
외마디 탄성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그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제이미는 무자비하게 달콤
한 고문을 계속했고, 앨리타는 마침내 달콤하면서도 고통스런 쾌감에 비명을 질렀다. 순간
그의 자제력은 산산조각났다. 제이미는 그녀를 번쩍 안아올려 탐스러운 모피로 만들어진 침
대로 데려갔다. 푹신한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은 그는 너무나 흥분되어 바지를 벗을 겨를도
없이 타이츠를 찢은 뒤 단숨에 그녀의 몸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악마에게 사로잡힌 남자
처럼 격렬하고 광포한 몸놀림이었다.
"오, 앨리타. 나도 내 자신을 어쩔 수가 없고. 난 당신에게 홀려버렸소. 이런 일이 벌어지
길 원하지는 않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소. 일이 끝나면 날 미워해도 좋소. 하지만 지금은 당
신을 뜨겁게 사랑하도록 해주오."
제이미는 몸은 팽팽하게 죄어오는 아내의 몸을 느끼며 숨을 헐떡였다. 앨리타는 그를 막
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그녀의 몸안으로 들어온 순간, 뜨겁고 매끄러운 살갗과 살갗이 만나는
에로틱하고 관능적인 느낌에 그녀는 제이미 모티머를 싫어했던 모든 이유를 잊어버리고 말
았다. 그의 강한 몸이 계속해서 그녀의 몸안으로 밀려들어오자 그녀의 육체가 자신도 모르
게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비난하던 두 사람에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여겨졌지만, 사랑의 마법은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단단하게 솟아 오른 유두를 촉촉하게 적시자 앨리타는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제이미, 제발!"
"아, 내가 그 말을 얼마나 듣고 싶어했는지 당신은 모를 거요."
곧 그는 그녀의 몸안으로 다시 한번 세차게 밀고 들어가며 그녀를 절정의 순간으로 이끌
었다. 앨리타는 그의 이름을 수없이 외쳤다. 멍해진 상태에서 그녀는 제이미의 비명소리를
들었고, 뜨거운 액체가 몸안에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 역시 그녀와 함께 멋진 절정의 순간
을 맛본 것이었다. 기진맥진해진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를 껴안은 채 그대로 누워 있었다.
마침내 몸을 일으킨 그녀가 몸을 피했다. 그녀는 그토록 노골적이고 난폭한 정사에서 어떻
게 그처럼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글거리는 분노의 감정을
어떻게 그리 쉽사리 잊을 수 있었을까? 제이미는 그녀를 그다지 부드럽게 다루지는 않았으
므로, 그녀의 육체는 아직도 뻐근하고 아팠다. 그녀는 쉽사리 잊을 수 있었을까? 제이미는
그녀를 그다지 부드럽게 다루지는 않았으므로, 그녀의 육체는 아직도 뻐근하고 아팠다. 그녀
는 쉽사리 육체적인 욕망에 굴복해 기꺼이 관능의 환희에 빠져든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후회하고 있소?"
제이미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는 모든 감정이 빤히 드러나는 그녀의 표정을 지켜보며 그
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그를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상대로 생각했고, 격렬한 두 사람의 정사에서 쾌감을 느꼈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
기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그녀의 몸에 다리를 걸치고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며 물었다.
"당신이 윈저 성에 나타나던 날부터 모든 것이 후회스러워요."
그녀의 목소리는 씁쓸했다. 볼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황급히 벗은 몸
을 가리려고 했다.
"아니오, 가릴 필요 없소."
그는 그녀의 손에서 모피 이불을 빼앗았다.
"나도 이처럼 빨리 끝내버리는 정사는 좋아하지 않소. 난 천천히 당신의 육체를 즐기고
싶었소. 하지만 분노인지, 허기인지 모를 감정이 나를 산 채로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어 어
쩔 수가 없었소. 당신을 소유해야만 내 속에 숨쉬고 있는 악마를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았소.
그 악마를 만족시킨다면 아마 내 남은 인생이 편안해질 거요. 적어도 오늘 하루 동안은 말
이오."
"다시는 모욕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요."
제이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분노로 가득한 그녀의 파란 눈동자와 도도하게 치켜든 턱,
그리고 볼에 피어오른 홍조를 감상했다. 예술품으로 치면 그녀는 정말 최고의 걸작품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그의 거친 입맞춤으로 빨갛게 부풀어 있었고, 그녀의 온몸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의 어깨 위로 마구 헝클어진 금발머리를 바라보며 그는 또다시 사랑을 나누고
싶은 절박한 충동을 느꼈다.
"내가 당신과 한 행동은 모욕감과는 상관없는 일이오, 부인."
그의 목소리는 그녀의 살갗을 어루만지는 따스한 숨결처럼 부드러웠다. 문득 앨리타는 단
호하고 대담한 외모와 굽힐 줄 모르는 자만심을 지닌 이 남자한테서 뭔가 고결하고 찬란한
광채가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만일 그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 강제로 그녀와의 결혼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에겐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상황에서라면 그녀 역시
매사에 확신에 넘치고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기필코 진실을 밝히겠다는 끈기와 인내
심을 지닌 이 남자에게 매료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 첫날밤 그녀의 몸을 무자비하게 유
린한 뒤, 다음날 혈흔으로 얼룩진 침대보를 사람들에게 보여준 행동은 영원히 용서할 수 없
을 만큼 잔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녀가 원하니 않던 감정들을 느끼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수치스런 행동을 서슴치 않고 하도록 자극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오?"
제이미는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 물었다. 그의 시선이 빠르게 오르내리고 있는 그녀의
가슴으로 내려갔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오른쪽 젖가슴을 살짝 건드렸다. 앨리타는 마치
불에라도 덴 사람처럼 펄쩍 뛰었다.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는 싱그럽게 피어나는 장미 봉오리처럼 손가락 끝에 닿자마자 단단하게 일어서는 그녀
의 유두에 매료된 듯 다른쪽 가슴으로 손을 옮겼다.
"내일이나 모래쯤 돌아갈 거요."
제이미는 무심히 대꾸했다.
"싫어요, 잔인무도한 촌뜨기에게 또다시 이용당하진 않겠어요! 매춘부 애인을 아내와 한
집에 살게 하면서, 부인의 명예를 엉망으로 만드는 남자한테는 더이상 아무것도 바랄 게 없
어요."
순간 제이미의 얼굴이 굳어졌다.
"난 당신의 명예를 실추시킨 적이 없소."
"거짓말 말아요! 대체 왜 내가 그레이 경과 결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죠? 당신은 정말
로 혐오스러워요."
앨리타는 그가 옷을 벗기 시작하는 모습을 참담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찢어진 타이츠를
벗어던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그의 거대한 남성으로 쏠렸
다. 완전히 벌거벗은 채 그녀를 굽어보며 서 있는 제이미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으므로
그녀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는 앨리타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매력적인 여자요. 어서 다리를 열어 당신의 남편은 맞아요."
앨리타는 경악했다.
"당신의 야만스러움에 치가 떨려요! 난 매춘부가 아니라 당신의 아내라구요."
심각한 표정으로 그는 그녀의 몸에 올라타더니 흥분된 자신의 남성을 느끼세 만들었다.
그러나 앨리타는 또다시 그에게 영혼을 팔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만일 그가 그녀에게 조금
이라고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달랐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제이미에게 있어 자신이 볼모
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성적인 욕구가 다양한 남자였다.
그러나, 그가 불한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그의 키스 속에서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제이미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
다. 그는 앨리타가 자신에게 경멸감 이외에는 아무런 느낌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
서도, 그녀의 몸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강렬한 매력은 그를 유혹해 완전히 무방
비상태에 빠뜨렸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분노를 모두 불사르며 그녀의 달콤한 육체를 탐할때
까지는 절대로 만족할 줄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분노를 삭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의
사랑스런 아내가 그의 몸 아래에서 달콤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 후회는 나중에 해
도 늦지 않으리라.
"그렇소, 당신은 내 아내요. 그 사실을 앞으로도 영원히 잊지 말길바라오."
굶주린 듯 그의 입술은 그녀를 찾았고, 집요한 그의 혀가 그녀의 입안으로 깊숙이. 점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자 앨리타의 육체는 더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은
제이미의 소유인 것처럼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스를 계속하는 동안 그녀
의 육체는 관능적으로 움직이며 그의 몸을 자극했고, 그의 뜨거운 손과 입술과 혀끝이 닿는
곳마다 황홀한 반응을 일으켰다. 제이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앨리타가 흥분했다는 사실
은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 그처럼 극도로 흥분하지는 못 했더라도 자신이 그녀에게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확실했다. 그는 두 사람의 몸 사이에서 퍼덕이고 있는 자신의 남성이 폭발
직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앨리타가 강요된 흥분 이상의 감흥을 느끼
길 바랬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이름과 그를 원한다는 말을 속삭여 주길 바랬다. 그는 그녀
의 영혼을 원했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무릎을 들어올려 두 다리가 만나는 민감한
부분을 슬며시 문질렀다. 앨리타는 신음소리를 내며, 양 허벅지고 빠져나가려는 그의 무릎을
붙잡고 몸을 밀착시켰다.
"당신은 나를 원해. 내 무릎에 올라와요."
제이미는 계속해서 그녀의 여성에 무릎을 문지르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싫어요!"
그녀는 그의 무릎이 전하는 짜릿한 감각에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면서도 그가 제공하는 쾌
락을 부인하려 애썼다. 그녀는 또다시 그의 욕정의 희생물이 되지는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
으며 자기 자신과 싸웠다. 그녀는 온힘을 다해 그의 단단한 가슴을 밀치며 빠져나가려고 애
썼다. 그녀의 저항하는 몸짓은 그를 더욱더 자극했을 뿐이었고, 그녀의 입으로 그를 원한다
는 말을 듣고야 말겠다는 제이미의 결심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어서 말해요, 앨리타, 말하라니까."
그의 목소리는 욕망으로 거칠어져 있었다.
"싫어요!"
갑자기 그가 무릎을 떼고 손으로 그녀의 봉긋한 불두덩을 덮었다. 조심스럽게 그는 손가
락 하나를 계곡 안으로 집어넣은 뒤,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욕망이 시작되는 부드러운 봉
오리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앨리타는 비명을 질렀다.
"나쁜인간!"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그게 다요?"
그는 한 개의 손가락을 더 그녀의 몸안으로 미끄러뜨려 과감한 움직임을 시작했고, 그는
고개를 숙여 이로 그녀의 유두를 간질였다. 앨리타의 자제력은 한계에 도달했다.
"당신은 원해요, 제이미! 제발, 더 이상 참지 못하겠어요!"
그녀와 마찬가지로 지독한 고문을 참고 있었던 그는 즉시 손을 치우고 그녀의 몸안으로
깊숙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쾌감 속에서 앨리타는 자신이 속 터져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열정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는, 미친 듯이
빨라진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변해가는 그녀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는 그녀의 몸안에서 환
희가 터져오르는 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몸이 팽팽하게 경직되며 그녀의 얼
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고, 부드러운 입술에서는 야성적인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그는
절정에 이른 격정의 파도에 휘말려 천국으로 날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이틀낮 이틀밤을 오두막에서 지냈다. 매일밤 제이미는 결렬하게 앨리타와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낮이 되면 그는 앨리타의 매력에 사로잡혀 희생물이 된 자신을 저주했다.
앨리타는 제이미와의 잠자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아니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자진해
서 참여하기 시작한 자기 자신에 대해 몹시 화가 나고 절망스러웠다. 사랑을 나누지 않는
동안에는 둘다 별로 말이 없었지만, 그가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마나 앨리타는 온몸이
떨리는 느낌을 받았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의 검은 눈동자는 그녀의 다리를 후들거
리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손을 대기만 하면 그녀는 항복하
고 말았다. 그러면 제이미는 그녀를 모피 침상으로 데려가 천천히 옷을 벗긴 뒤, 미친 듯이
사랑을 나누었다. 앨리타는 흡족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제이미의 품에 안겨 있다가, 문득 밤
마다 해변에서 벌어지는 수상한 일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그녀의 느닷없는 질문에 제이미
는 완전히 허를 찔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둠의 영주가 누구예요, 제이미?"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몸이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이름을 도대체 어디에서 들었소?"
"어디에서 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가 누구죠? 뭐하는 사람이죠?"
"전해 내려오는 옛날이야기일 뿐이오. 잊어버려요."
"그레이 경은 밀수업자들을 색출중이라고 했어요. 당신도 이 근처에 정말로 밀수업자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오. 난 밀수업자들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소. 만일 있다고 해도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소."
그의 목소리는 몹시 천연덕스러웠고, 그는 교묘하게 화제를 바꾸었다.
"성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 같소. 내일 떠나도록 합니다."
잠깐 동안 앨리타는 그가 일부러 대답을 꺼려하는 것은 아닌지 그의 얼굴을 살폈다.
"나는 왜 이곳으로 데려왔죠?"
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우리 어머니가 무척 마음에 들어했던 장소를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소."
그의 말투엔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이 느껴졌지만, 앨리타는 얼마만큼이 진실인
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좀더 알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소."
"내가 과연 당신에 대해 완전히 알게 되는 날이 올까요?"
"아마 그건 힘들 거요. 당신 말대로 내가 무일푼인 가난뱅이 촌놈이라고 생각하는 한, 당
신은 아마 절대로 날 이해하지 못할 거요. 나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요."
"당신한테는 크리케스 성이 있잖아요."
그는 거칠게 웃었다.
"그렇소, 비록 쓰러져가는 돌무덤에 불과하기 하지만."
"언제든 원한다면 내 소유지의 영지에서 살면 돼요. 이젠 당신 땅이니까요. 한 곳은 우리
가 편안하게 살 수 있을 만한 대저택이 딸려 있기도 해요."
"언젠가는 그럴 날이 올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오. 국왕이 억울한 반역
음모의 진상을 파헤쳐 상속권과 재산을 내게 돌려줄 때까진 곤란하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지도 몰라요."
앨리타는 부드럽게 그를 일깨워주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약속 하나를 해주겠소, 앨리타. 국왕이 우리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을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의 혼인서약으로부터 당신을 자유롭게 놓아주겠소. 에반 그레이
가 그때도 당신을 원한다면 둘이 새출발을 해도 좋소."
앨리타는 흠칫 놀랐다.
"정말로 날 놓아줄 건가요?"
제이미는 짙은 눈빛으로 뚫어져라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게 당신의 뜻이라면 그럴 거요."
두 사람은 깨닫지 못했지만 그들은 폭발할 듯한 열정 속에 파묻혀 오붓하게 지내는 동안
서로 어떤 이해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제이미는 밀수품 운반작업을 앨리타에게 숨기기
위해 그녀를 오두막으로 데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천사 같은 겉모습 아래에
존재하고 있는 뜨거운 열정을 지닌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성미는 아연질색 할
정도로 고약했지만, 그녀의 열정 또한 대단했다. 그는 앨리타가 치열한 증오와 사랑의 감정
을 동시에 지닌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앨리타는 제이미에 대해서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가 사납지만 온화하고, 거칠면서도 부드러울 수 있는 남자라는 사실
과, 잘못을 용납하지 않은 고집을 지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커다란
몸속에는 진실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으로 똘똘 뭉친 자존심이 숨쉬고 있었다.
그들은 다음날 아침 오두막을 떠났다. 그들이 성 안뜰로 들어서자 로위나가 계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제이미에게 달려들었다.
"당신이 부인을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다는 얘기는 게일로드한테 들었어요. 하지만 어디로
갔는지는 말해주지 않더군요."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는 앨리타를 힐책하듯 쏘아보고 있었다. 계단 꼭대기에서 게일로드
가 나타나 그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온 그가 제이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미는 밀수품이 성공적으로 운반되었고 대가로 받은 금은보화가 밀실에 안전하게 보관되
어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로위나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알았다는 듯 고갯짓
을 보냈다.
"게일로드의 말대로 앨리타와 나는 이틀 동안 특별한 곳을 방문하고 돌아왔소."
로위나의 입꼬리가 축 처졌다.
"나는 한 번도 특별한 장소에 데려간 적이 없었잖아요."
"그랬지."
제이미는 불편한 듯 그녀를 옆을 떠밀려 말했다. 그는 곧바로 앨리타에게 다가와 말에서
내려주었다. 그는 즉시 게일로드를 시켜 로위나의 오빠를 찾아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정
말로 그녀에게 신물이 나 있었다. 로위나를 계속해서 데리고 있으면서 앨리타에게 모욕을
줄 필요는 없었다. 그의 아내는 그를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촌놈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는
실제 그토록 냉혹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두막에서 돌아오며 제이미는 앨리타의 유혹적인 매
력에 더 이상 휘말리지 않도록 자제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 앞에만 서면 힘없이
무너지고 마는 그의 감정을 혹시하고 앨리타가 눈치채게 된다면 강력한 마력으로 그를 조종
하려 들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손쉽게 그의 신임을 얻어 비밀을 알아낸 뒤, 그와 마을사
람들을 배신할 우려가 있었다.
건물 안에 들어선 앨리타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가려 했다. 순간 제이미는 그녀의 팔을
잡아세웠다.
"당신 방을 다른 곳으로 옮겼소. 내 방과 좀더 가까운 곳이오. 당신 짐은 이미 옮겨져 있
을 거요."
그녀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제이미 가 일부러 그
녀를 해변에서 멀리 떨러진 방으로 옮겼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반항해도 소용없는
일일 터이므로 앨리타는 남편을 따라 조용히 새로 배정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안에 들
어서자 그녀는 의아한 듯 금빛 눈썹을 들어올리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새로운
방을 성안에서 가장 작은 방 가운데 하나였다. 고작 하나밖에 없는 창으로는 안뜰이 내다보
였다. 다행히 멀리 보이는 산의 풍경은 멋졌지만, 달리 만족스런 것은 거의 없었다.
"당신이 산을 바라보는 걸 더 좋아할 거라 생각했소."
"난 바다가 더 좋아요."
"난 당신이 여기에서 지냈으면 좋겠소, 앨리타."
제이미가 부드럽게 말했다. 앨리타는 진실을 알아내려는 듯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한
겹 베일이 덮인 듯한 그의 얼굴에선 제이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었
다. 하지만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는 뜨거운 불길에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 불길은
녀의 가슴과 엉덩이를 태우며 다리 사이의 은밀한 부분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제이미가 그
런 강렬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볼 때면,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촌뜨기사
내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온몸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숲속의 외딴 오두막에서 보낸
이틀 동안, 냉소적이고 차갑기만 하던 남자가 그 어떤 여자라도 사로잡을 만한 부드러운 연
인으로 돌변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그 어떤 여자라도 사랑에 빠질 만한 남자였다.
제이미는 앨리타가 새 방에 대해 실망한 것을 눈치챘지만 모르는 체했다.
"방은 당신의 물건들에 맞춰 편안하게 지내도록 꾸며졌소. 차차 당신도 마음에 들 거요. 이
젠 게일로드와 사업상 의논할 게 있어서 그만 나가보겠소."
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는 말했다.
"잠깐만요. 저.... 오두막에 데려가줘서 고마워요."
뜻하지 않은 그녀의 말에 제이미는 무릎이 꺾일 정도로 놀랐다.
"천만에 말씀이오."
그는 매우 빠른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앨리타와 단둘이 조금만 더 오래 있게 되면 그
녀를 끌어안고 열렬하게 입을 맞춘 뒤 곧장 침대로 가고야 말 것 같았다.
조그맣고 오만한 여자 하나가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그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만한 영향력을
가지게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자신의 생명을 언제까지 부지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마당에 아내를 맞이한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피나는 노력 끝에 엄청난 부를 이루
기는 했지만, 그는 물려받은 재산이나 작위도 없는 남자였다. 영국 전체에서 그의 이름은 아
직도 혐오의 대상이었다. 비록 국왕이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음모의 진상을 조사해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그의 상속권을 되찾을 희망은 실낱 같았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명예와 재
산을 되찾는 데 모든 정력과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때, 엉뚱하게도 그는 앨리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앨리타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은 에반 그레이가 원하는 것을 하나라도 빼앗아야만 한다
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조그만 여자는 그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
의 마음속에 파고들어왔던 것이다. 제이미는 앨리타가 자신에게 전혀 애정이나 관심이 없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돈도 명예도 없는 무식한 시골뜨기로 생각했다. 그가 왕
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과 맞먹을만큼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전혀 의심
도 하지 못했다. 그의 입으로 솔직히 털어놓지 않는다면 그녀는 그의 비밀을 결코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제이미는 탐욕스런 여자들을 많이 만나보았고, 부와 재산에 눈이 먼 그들에게 넌덜머리가
났다. 앨리타 역시 그런 여자들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아버지의 비참한
최후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도, 앨리타를 마주하면 나타나는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반응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수많은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이 마당에 미모의 아내에
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앨리타에게 그의 마음과 영혼을 빼앗기
는 것은 결코 그가 누려서는 안 되는 사치였다. 앨리타는 기회만 있으면 그를 배신할 사람
이라는 것을 그는 직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혼란스런 생각들을 물리치려 애쓰며 제이미는 게일로드를 만나러 나갔다. 그는 밀수품 운반
이 별 사건 없이 잘 진행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게일로드에게 직접 자
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이 직접 지켜보지 않은 상태에서 거사가 이루어진 것
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편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앨리타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했다. 제이미가 방을 나가자마
자 그녀는 그가 자신의 방을 강제로 옮긴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넓고 편안했던 방에서 초
라하고 작은 방으로 옮겨진 이유는 그의 변명처럼 그녀를 가까이 두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제이미는 그녀가 해변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을 관찰하지 못하도록 골방에 가둔 것이었
다. 지금 있는 방에서는 거의 밖이 내다보이지 않았고, 당연히 해변에서 벌어지는 괴상한 일
들을 염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제 제이미가 그녀에게 숨기고 싶어하는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그녀는 어두운 밤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겠
다고 다시 한번 굳게 결심했다. 그녀의 의심이 맞는다면 국왕폐하와 그레이 경이 대단히 흥
미로워할 것이 분명했다.
며칠이 지나는 동안 앨리타를 좀더 가까이 두고 싶어서 방을 옮겼다는 제이미의 말이 거짓
말이라는 사실은 점점 더 확실해졌다. 그들이 오두막에서 돌아온 이후, 그는 단 한번도 그녀
와 사랑을 나누려 하지 않았다. 매일 밤 앨리타는 어둠 속에서 외롭게 몸을 떨며 제이미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두 사람이 마주칠 때
면 그는 무척이나 정중했고, 그녀가 성에 점점 안주하는 것 같아 기뻐하는 듯했다. 하지만
오두막에서 보여주었던 다정한 표정이나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는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로위나 대문이었다.
제이미는 로위나와 잠자리를 같이하기 때문에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이미의 태도를 살펴보면 로위나에 대해서도 아내를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관심한 것
같았다.
로위나는 크리케스 성에서 보낸 인생의 황금기가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았다.
게일로드는 제이미가 부탁한 대로 그녀의 오빠를 찾기 시작했다고 그녀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녀의 오빠의 행방을 알게 되면 그녀는 곧 오빠에게 보내질 것이다. 아니면 오빠가 그녀를
데리러 이곳으로 올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머무는 한, 그녀는 온갖 지혜를 짜내 제이미가
자신을 떠나보내지 못하도록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이미 제이미와 앨리타의 사이
를 이간질하는 데 쾌감을 느꼈고, 둘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감정의 골을 만들어 제이미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로위나는 제이미가 앨리타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잇
다는 사실을 알고 흡족햇다. 일단 그의 침대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면, 절대로 잊지 못할
황홀한 밤을 만들어 그가 그녀를 돌려보낼 수 없게 만들 생각이었다.
로위나는 즉각 자신의 계획을 행동에 옮겼다. 그녀는 앨리타가 자신의 주변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앨리타의 방을 찾아갔다. 그녀는 빈틈없는 계획을 세웠으므
로 안달이 나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앨리타는 제이미의 셔츠를 수선하는 데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로위나가 들어오는 소
리를 듣지 못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로위나가 눈앞에 버티고 서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긴 당신이 올 곳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요."
앨리타는 냉랭하게 말했다.
"서로 얘기를 나눈 적이 없어서 한 번쯤은 대화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중요하게 할 얘기라도 있나요?"
로위나의 사악한 미소에 앨리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네, 그래요. 나 아기를 가진 것 같아요."
셔츠가 스르륵 발밑으로 떨어졌지만, 앨리타는 주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제, 제이미의 아이인가요?"
"그럼 누구의 아이겠어요?"
"제이미도 알고 있나요?"
"아뇨, 아직. 당신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친절하기도 하군요.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죠?"
로위나의 눈동자가 원한을 품은 듯 이글거렸다.
"이곳을 떠나주세요. 당신 남편을 내게 돌려줘요. 만일 그이가 당신을 진정으로 원했다면 나
한테 아이를 갖게 하진 않았을 거예요."
앨리타는 뜨거운 흐느낌 같은 것이 목구멍으로 치밀어올랐다. 제이미가 그녀에게 어떻게 이
런 짓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당신의 놀라운 소식에 별로 감격하지 못하는 걸, 당신이 양해해줘요. 하지만 남편의
애인이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은 별로 흐뭇한 소식이 못 되는군요."
앨리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갑자기 그녀는 벌떡 일어나 최대한 위엄을 갖추고 로위나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너무나 가슴이 아파, 임신 소식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로위
나를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제이미는 저녁식사 때 앨리타가 보이지 않자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는 그날밤
에 하선할 밀수 브랜디에 대해 게일로드와 은밀하게 의논을 하면서 그녀에 대한 생각들을
지워버렸다. 앨리타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재빠른 눈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그는
편안하게 게일로드와 사업 얘길 나눌 수 있었다. 로위나 역시 나름대로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한참 뒤 식탁에서 일어선 그는 밤이 어두워질 때까지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
여볼 요량으로 곧장 방으로 올라갔다. 자정이 지나면 절벽 아래의 좁은 해변에서 마을 사람
들이 '어둠의 영주'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널찍한 침대에 홀로 누운 앨리타의 머릿속엔 온통 로위나가 아기를 가졌다는 생각뿐이었다.
몇 시간 전 그녀는 방문 앞을 지나가는 제이미의 발자국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아무리 애를
써도 로위나가 제이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는 절망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이 그녀의 온몸과 가슴을 난도질하는 듯 고통스러웠다. 제이미의 아
이를 가져야 할 사람은 로위나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남편을 싫어한다
고 해도 다른 여자가 그의 아이를 낳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앨리타는 마음 깊은 곳에
서 제이미에 대한 생각이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일 그녀가 제이미를 그토록 증오하고 있다면, 다른 여자가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는 지독하게 참담한 분노에 마음이 갈가리 찢겨 도무지 잠을 이
룰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기 시작한 보다 강력한 감정
을 솔직히 인정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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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상황을 합리화하려 애를 써보아도 앨리타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었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창문 틈으로 아련한 바닷내음이 스며들었다. 거의 암흑에 가까운 어둠 사이
로 얄팍한 그믐달이 흐릿한 빛을 발하고 있엇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그녀는 마침내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도무지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무심하게 창
가로 걸어가 뜰을 내려다보았다. 마음이 혼란스러웠으므로 그녀는 마구간 근처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낮은 담벼락 아래에서 길다란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칠흑처럼 검은 종마를 이끌고 나타
났다.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어두운 건물 그림자에 가려진 그의 모습은 마치 환영처럼 보였
다. 그의 뒤에선 거대한 종마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주억거리며 걷고 있었다. 남자가 돌아
서서 신경이 곤두선 말을 쓰다듬었다. 어두운 그의 얼굴에서 긴 머리칼이 출렁이고 있었다.
앨리타는 곧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요즘 같은 시대에 머리를 길게 기른 남자는 드물었
다.그는 제이미였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애써 부인하려 들었지만, 그녀는 남자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부터 그가
제이미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남편의 큰 키와 근육질의 몸매를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
겠는가.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뜰을 지나가는 순간 앨리타는 결심했다. 늦은밤 해변에서
벌어지는 수상쩍은 일들을 알아내려면 자신이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짙은 색의 외투
를 재빨리 걸치고 신발을 신은 뒤 그녀는 방을 빠져나갔다. 다행히도 계단에는 아직도 횃불
이 밝혀져 있었으므로 그녀는 재빨리 아래층으로 향했다.
2층에 도착한 앨리타는 뒤뜰로 곧장 이어지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녀는 늘 건물 바깥으로
나 있는 계단을 이용했지만, 반대편 건물 안쪽에도 물품창고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전에는 한번도 그 계단을 이용할 일이 없었다. 그녀는 날이 밝는 대로 그쪽
계단을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계단 꼭대기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뜰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마당에 내려선 그녀는 말에 오른 제이미
가 바다로 이어지는 절벽을 향해 움직이는 뒷모습을 언뜻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해변으
로 이어지는 꼬불꼬불한 오솔길이 시작되는 지점을 향해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제
이미가 절벽 가장자리에서 말을 세웠으므로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또 한 남자가 그
의 곁에 서 있었다. 제이미가 등잔불을 높이 치켜들고 좌우로 흔들었다.
앨리타는 들키지 않도록 나뭇가지 뒤에 엎드려, 여러 번 등불을 흔드는 제이미의 모습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가 일행에게 등불을 건네주었다. 두 남자는 동시에 해변
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오솔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앨리타는 잠시 동안 기다렸다가 절벽
끝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눈앞의
광경에 그녀는 넋을 잃고 말았다.
해안에 정박한 배에서 제이미가 보낸 신호에 답을 보내고 있었다. 앨리타는 희미한 배의 형
체만 볼 수 있을 뿐 정확한 모양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밀물이었으므로 배는 해변까지 아주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곧이어 마법처럼 수십 개의 횃불이 해변에 나타났고, 금방 배에서 보
트가 내려졌다. 순식간에 해변에 도착한 보트에는 둥그런 나무통들이 가득 실려 있었고, 해
변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배가 채 뭍에 닿기도 전에 통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또
다른 보트가 나타났고, 잠시 후 보트 한 대가 더 모습을 드러냈다. 보트가 다녀갈 때마다 모
래사장에는 더 많은 나무통들이 쌓여만 갔다.
앨리타는 추위에 몸을 떨면서도 눈앞의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늘이 짙은 보라색
으로 물들어갈 때쯤 제이미가 배에서 내린 남자에게 큰소리로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곧 보트들이 떠나갔다. 앨리타가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의아해하고 있을 때, 갑자
기 등뒤에서 삐걱거리는 마차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두 대의 마차가 절벽 끝으로 나타나
가파른 길을 내려가기 시작할 때까지 쥐죽은 듯 바닥에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마차가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고 완전히 지나가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마차가 해변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통을 마차에 싣느라고 분주했다. 희미한 새벽 하늘 아래
로 그녀는 보다 확실히 사람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해변에 있던 남자들은 모두가 나
무통을 져 날랐고, 제이미도 그들을 돕고 있었다. 먼저 짐이 가득 실린 마차 한 대가 힘겨운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앨리타는 이제 들킬 위험이 있었으므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남자들이 짐을 부리기 전에 집안으로 몸을 숨겨야 들키지 않고 방으로
올라갈 수 있으리라. 짐이 가득 실린 마차는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밀수업자
들보다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밀수업자! 그녀는 밀수업자라는 그 말부터 겁이 났다. 밀수는 국가에서 금하는 일이었고, 목
숨을 내놓아야만 하는 중죄에 해당되었다. 그토록 위험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니, 제이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인간일까? 전쟁이 끝난 뒤라 국왕이 그 어느 때보다 세금을
걷는 데 민감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제이미가 세금을 포탈했다는 사실을 국왕이
알게 된다면 그와 마을 사람들은 곤경에 빠지게 될 것이었다. 앨리타는 제이미가 교수대에
서 인생을 마감하기 전에 뭔가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
는 가엾은 마을 사람들을 구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첫 번째 마차가 도착하기 십 분 전쯤에 집안에 도착했다. 그녀는 2층 창문으로, 나무
통을 마차에서 내려 집안으로 굴려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말을 탄 제이미
의 모습이 나타나자 그녀는 황급히 계단을 뛰어올라가 자신의 방으로 숨어들었다. 제이미의
비밀을 알아낸 앨리타는 끊임없이 방안을 오가며 안절부절 못했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그것도 아주 빠른 시일 안에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제이미의 불법적인 행위를 국왕에게 알리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비겁한 행동이긴 하겠지만,
모든 사실을 모르는 척 눈감고 있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녀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그렇
다면....? 제이미에게 자신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불법적인 범죄행위를 즉
각 중단하도록 부탁할 수도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그녀는 제이
미가 교수형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모르는 척하고 넘어갈 수도
없었으므로 그녀는 모든 사실을 터놓고 제이미에게 얘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의 결정
을 내리고 나자 그녀는 마침내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위험천만인 밀수를 포기하도록 제이
미를 설득하려면 머리가 맑아지도록 잠도 푹 자둬야만 했다.
제이미는 앨리타가 잠자리에 들 무렵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오
늘밤의 작업은 무척이나 고됐지만 이윤은 엄청났다. 밀수선의 선장은 앞으로 2주일 후에 또
한 차례 브랜디를 실어오겠다고 약속했고, 마을 사람들은 신이 났다.
국왕이 그들을 추적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으므로 제이미는 당분간 밀수를 자제할 생각이
었다. 하지만 풍부한 물량을 공급받을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를 거절하기는 너무 아까웠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표결에 붙였고, 그들은 마지막으로 한탕 크게 한 뒤 당분간은
농사 일에 전념하기로 결정했다. 잠들기 전 그의 마지막 생각은 앨리타에 대한 것이었다. 그
의 비밀스런 행동들을 그녀가 얼마만큼 눈치채고 있을까. 그는 그녀를 믿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다음날 아침 늦게 앨리타가 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잠시 후 살금살금
방에 들어온 베스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앨리타는 씁
쓸하게 생각했다. 그녀의 남편과 아들들 역시 밤새 밀수품을 나르는 데 한몫 거들었을 것이
다. 베스처럼 착한 아내라면 밤새도록 자지 않고 그들을 기다렸으리라. 앨리타는 범죄자의
최후가 어떤지 아느냐고 호통을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베스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먼저 제이미를 만나 얼마나 위험한 놀음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해줄
생각이었다.
앨리타가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 식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곧장 부엌으로 가서 아침식사
를 준비시키던 그녀는 제이미가 기사들과 함께 외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좋은 기
회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계획했다.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마친 그녀는 요새
처럼 이어진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 1층의 물품창고로 향했다. 그녀는 지난밤 보았던 밀수품
들이 잔뜩 쌓여 있기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창고 안에는 집안 살림에 필요한
밀가루 포대와 맥주통 몇 개, 각종 식료품들이 보관되어 있을 뿐, 배에서 내려진 밀수품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앨리타는 몹시 놀랐다. 그녀는 어젯밤 분명 집안으로 술통을 나르는 사람들을 보았던 것이
다. 그렇다면 그녀가 허깨비를 본 것일까? 절대 그럴 리는 없었다. 그러자 집안 어딘가에 밀
실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밀수품을 공공연하게 보관한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숨겨진 밀실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녀는 건물 벽들을 찬
찬히 살펴보았지만 밀실로 이어질 법한 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순간 그녀의 시선은 바닥으
로 향했다. 혹시 지하로 이어지는 비밀의 문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룻바닥에서 수상
쩍은 부분을 발견한 그녀는 무릎을 꿇고 두툼한 나무판자를 조사했다. 제이미는 엉덩이를
허공으로 치켜들고 열심히 바닥을 쓰다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했다.
"뭘 찾고 있소?"
"어머, 당신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죠?"
앨리타는 깜짝 놀라 바닥에 주저앉으며 눈을 깜박였다.
"여긴 내 집이오, 잊었소?"
그녀는 치마에 묻은 먼지를 털며 일어섰다.
"저어.... 식료품들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그게 내 의무니까요."
그녀는 도도하게 턱을 치며들며 눈을 내리깔았다.
"언제부터 당신의 의무에 대해 그렇게 민감해졌소? 당신이 소홀히하고 있는 의무가 어디 한
두 가지가 아닐 텐데."
제이미가 빈정거리자 앨리타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아내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한 사람은
바로 제이미라고 생각했다.
"바닥에서 대체 어떤 종류의 식료품을 찾고 있었소?"
제이미는 다그치듯 물었다.
뜻하지 않게 제이미와 마주치긴 했지만 앨리타는 그의 범법행위에 대해서 얘기하기엔 지금
보다 더 적절한 기회가 없으리라고 결론지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뒤 곧 말을 꺼냈다.
"난 당산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제이미의 짙은 눈썹이 불쑥 위로 올라갔다.
"비밀이라니, 무슨 얘기요?"
"아닌 척해도 소용없어요, 제이미. 어젯밤 당신을 봤어요. 난 해변까지 당신을 따라갔었죠.
당신과 마을 남자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요. 세상에, 그러다 모두 교수대에 매달릴지도
몰라요!"
제이미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표정이 험상궂게 변했다.
"해변가지 나를 미행했단 말이오?"
"그래요, 당신과 검은 말의 뒤를 밟았어요. 사람들이 당신을 왜 어둠의 영주라고 부르는지
이제 알겠어요. 해안에 정박했던 배와 밀수품으로 가득한 보트들도 다 봤어요."
"해변까지 나를 미행했다구?"
목소리를 높이며 제이미가 되풀이해 물었다. 앨리타는 그가 그토록 끔찍한 표정을 짓고 있
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의 기세는 너무나 무시무시했으므로 그녀는 비척비척 뒤로 물러
났다.
"일부러 나를 정탐하다니 아주 겁나는 여자로군. 벌써 당국에 신고했소?"
제이미가 으르렁거리자 앨리타는 벌컥 화가 낫다.
"난 그런 짓은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누군가 당신을 배반하면 당신 꼴이 어떻게 될지 눈에
선해요. 당신과 마을 사람들의 행동은 잘못된 짓이에요. 국법은 밀수를 엄하게 금지하고 있
어요. 당신과 당신 친구들은 국왕이 정당하게 벌어들이는 세금을 포탈하고 있다구요."
"세금을 많이 거둬야 더 신나게 외국과 전쟁을 벌일 수 있으니까? 헨리 왕은 국내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오. 우리 아버지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우리 가족을 옹호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때문에 난 작위와 재산을 모두 빼앗겼소. 아니, 난 목숨마저 위태로
운 상황이었소. 게일로드가 아니었다면 난 벌써 죽었을 거요."
제이미는 내뱉듯 말했다.
"누가 무엇 때문에 어린아이를 해치려 들겠어요?"
앨리타가 반문했다.
"당신 아버지와 에반 그레이에게 물어보시오. 하지만 그건 오래전 일이오. 지금 중요한 문제
는 당신이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당신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소. 내가 앞으
로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하지?"
"그게, 그게 무슨 뜻이죠?"
"이제 당신도 비밀에 대해 알고 있소. 내 목숨은 물론이고 모든 마을 사람들의 생명이 달린
문제란 말이오."
앨리타는 현명하지 못하게 자신을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경악햇다.
제이미는 무섭게 그녀를 노려보았고, 앨리타는 문득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남편은 자신의
아내를 마음대로 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부인을 때리거나 영원히 가두거나, 심지어 죽이
는 일까지도 말이다. 공포감으로 가득한 파란눈을 부릅뜨며 그녀는 안절부절못한 채 목덜미
를 어루만졌다.
"나, 난 단지 당신에게 경고를 해주고 싶었어요, 그뿐이에요.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난 절대
로 당신을 배신하지 않아요."
"정말 그럴까?"
제이미는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진심이에요, 제이미. 난 당신이 불법적인 행위를 즉각 그만두도록 설득하고 싶었어요."
"만일 내가 거부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할 테요?"
"그, 그렇다면 할 수 없죠."
앨리타는 한 걸음 더 물러서며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제이미는 그녀를 따라왔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겠소?"
냉혹한 그의 목소리에 앨리타는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한기를 느꼈다.
"난 당신이 어둠의 영주라는 사실이나, 당신과 마을 사람들이 밀수에 관계하고 있다는 말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정체를 모르나요?"
"마을 사람들은 전부 다 내 정체를 알고 있소. 하지만 난 그들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오. 어둠
의 영주라는 이름은 왕의 부하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것뿐이오. 하지만 이
제 당신이 내 비밀을 알아버렸으니 난 더 이상 안전하지 않겠지. 만일 이 사실이 외부에 알
려지게 된다면 많은 목숨이 희생될 거요. 그러니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하지?"
제이미와 엘리타는 서로의 얘기에 열중해 있었으므로, 계단을 반쯤 내려와 그림자에 몸을
숨긴 사람의 형체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텅 빈 집안에 혼자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로위나는 다들 어디에 갔는지 사람들을 찾아다니던 중이엇다. 식품창고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호기심이 동한 그녀가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제이미와 앨리타의 목소리라는
것을 안 순간,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얘기를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엿들었다. 제이미와 마을 사람들 전부를 범죄자로 고발할 수 있
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모두를 파멸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정보를 어떻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해야
좋을지 곰곰이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했다.
강렬한 그의 시선을 받고 있는 앨리타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이번에는 분명히
그가 그녀를 가만두지 않으리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재빨리 계단을 올라가는 그녀의 긴 머리채가 뒤로 휘날렸다.
"거기 서시오!"
그녀는 계속해서 달렸다. 그녀는 심장이 터지기 직전가지, 그리고 다리가 후들거릴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렷다. 2층에 올라간 그녀는 깜짝 놀라는 하인들을 지나쳐 3층으로 향했고, 식당
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가까스로 4층에 있는 자신의 방에 도달했다. 숨이 가빠 거
의 쓰러질 지경이었지만 앨리타는 문을 열며 안도감에 흐느꼈다. 그녀는 안으로 뛰어들어
자물쇠를 잠그기 위해 돌아섰다. 문을 채 닫기도 전에 제이미가 문틈으로 한 손을 집어넣자
그녀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그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앨리타는 뒤로 튕겨져나갔다.
그가 방안으로 들어와 부츠 신은 발로 소리나게 문을 닫아버리자 앨리타는 절망감에 눈만
깜박거렸다.
"나한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오, 부인?"
제이미가 허리를 굽혀 그녀를 일으켜세웠다.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날 해치면 우리 아버지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올 거예요."
제이미는 인상을 찌푸렸다.
"난 당신을 해칠 생각이 없소. 당신에게 경고를 해주고 싶을 뿐이오. 날 배신하면 당신은 무
시무시한 결과를 겪게 되리란 걸 명심하시오."
"혀, 협박하는 건가요?"
"그렇소. 내 말 새겨들어요. 배신에 대한 형벌은 당신이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잔혹할 테
니, 그리 아시오."
앨리타는 만일 배신을 한다면 제이미가 자신을 정말로 죽여버릴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
으므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제이미는 앨리타에게 겁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에반 그레이에
게 돌아가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여자였다. 비록 자신의 남편을 배신하는 일일이라
도 그녀는 서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만일 그가 체포되어 처형이라도 당한다면 그녀는 자
유롭게 자신이 선택한 남자와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의 목숨뿐만 아니라 고귀한 생명이 너무 많이 연루된 일이었다. 마
을 사람들은 전부가 다 한두 번씩은 밀수에 가담했다. 선량한 주민들이 체포되어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
"난 아직 당신의 부인이에요. 그만한 존경은 받을 권리가 있다구요!"
앨리타는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존경이라구! 존경심은 어느 한쪽에서만 생겨나는 게 아니라 쌍방간에 오가는 감정이오. 당
신은 날 무식한 농사꾼에 반역자의 아들이라고 조롱한 것이 대체 몇 번이었는지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조차 없단 말이오."
앨리타의 분노가 폭발했다. 너무 경솔하게 구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가 없었다.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오히려 그녀를 비난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에반
그레이와 그녀의 행복한 결혼식에 나타나 방해만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제이미 모티머라는
인간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제이미를 다른 방향에서 공격하기로 마음먹
었다.
"자신의 아내보다 매춘부를 더 존중하는 남자를 어떻게 존경할 수가 있죠? 로위나를 내보내
라고 부탁했지만 당신은 뻔뻔스럽게 내 부탁을 거절했어요. 당신의 사생아가 태어날 때 내
가 옆에서 시중이라도 들어주길 바라나요?"
제이미는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난 사생아가 없소."
"로위나가 아이를 낳으면 사생아를 갖게 될 거예요."
"거짓말 마시오!"
"거짓말이 아니에요! 로위나는 당신의 사생아를 배고 있어요. 그 여자가 직접 내게 그렇게
얘기했다구요."
"하느님 맙소사, 그렇다면 로위나가 거짓말을 하는 거요. 그녀는 아직까지 쇠꼬챙이처럼 날
씬하고, 난 우리가 결혼한 이후로 그녀에게 손도 대지 않았소."
앨리타는 경악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에요."
"난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소."
제이미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잡은 채 강한 어조로 말했다. 새까만 그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날아와 꽂혔다. 순간 앨리타는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사실에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앨리타는 그의 몸에서 팽창되고 있는 힘을 느끼며 움찔했다.
"난 로위나가 한 얘길 전했을 뿐이에요. 이젠 놔줘요, 아프다구요."
제이미는 앨리타를 놓아줄 마음이 없었다. 그는 아름다운 아내에 대한 미칠 듯한 열정이 되
살아날까 두려웠으므로, 오두막에서 돌아온 이후 한번도 그녀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 그
는 자신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거대한 욕정의 화신이 깨어나지 않도록 일부러 그녀와 거리
를 두고 지냈던 것이다. 로위나는 계속해서 그를 유혹했지만, 그는 아무런 감흥 없이 로위나
와 잠자리를 같이하기보다 차라리 지옥같은 외로움을 견디는 쪽을 택했다. 앨리타에게 느끼
는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영혼과 전재산을 담보로 잡히는 모험을 하
기보다는 그녀를 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양심과 혹독한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가 앨리타를 원한다는 것은 하늘
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달콤함을 맛보고 싶어서 온몸이 불타올랐지만, 자신이 욕망에
항복하는 것을 그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특히 그가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을지도 모를 기회가 눈앞에 있는 지금, 여자에게 빠져드는 것은 곤란했다. 그는 앨
리타가 자신의 목적을 위한 인질에 불과하다고 스스로에게 되뇄다. 여자 하나 때문에 약해
질 수는 없었다. 마음이 약해지면 여러 해 동안 준비하고 계획한 일들이 수포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불행히도 제이미의 육체는 그의 마음과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보드랍고 따뜻한 앨리타
의 살갗을 손가락 끝으로 느끼는 순간, 철석 같이 다잡아먹었던 그의 결심은 눈녹듯 풀렸다.
그녀를 놓아주는 대신 그는 신음소리를 내며 그녀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스르르
아래로 미끄러지더니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단단해진 자신의 사타구니로 밀착시켰다.
공포스런 신음소리가 조그맣게 앨리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굵은 밧줄이 엉겨 있는 듯한 그의 단단한 근육질에서 전해지는 열
기와 힘의 파장에 휩싸였다. 그는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곧 그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격렬
하고 집요한 입맞춤이었다. 그는 단숨에 그녀의 입술을 점령하고 혀끝으로 무자비하게 그녀
의 입술을 벌렸다. 그에게 완전히 항복하지 않고 그녀를 지탱해주는 힘은 오직 자존심뿐이
었다. 그러나 앨리타는 자존심마저도 제이미의 열정적인 공격에서 그녀를 구해주지 못하리
란 것을 곧 깨달았다. 민망하게도 그의 뜨거운 입맞춤은 그녀의 영혼을 파고들어 온몸을 녹
이고 있었다.
제이미는 앨리타의 몸이 부드럽게 변해 그의 몸에 밀착되자 기뻤다. 그는 고개를 들고 미소
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그의 입술에서 자유로워진 앨리타는 자꾸만 그녀의
의지를 배반하려는 육체와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그의 손길은 그녀의 이성을 황폐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뒤로 물러서며 그를 노려보던 그녀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나쁜 인간!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죠?"
"나도 모르겠소. 혹시 당신이 마녀가 아닐까? 다른 여자는 눈에 차지도 않고, 오로지 당신만
을 원하는 내 자신이 나도 이상하고 불편하오. 조금만 솔직해진다면 당신도 똑같은 방식으
로 나를 원한다고 인정할 수 있을 거요. 당신의 육체는 내 손길을 고대하며 뜨겁게 불타고
있소. 당신의 입술이 내 입맞춤을 갈망하고 있지 않소? 내 몸이 당신의 부드러운 살속으로
들어가는 상상만 해도 당신의 몬이 젖어들지 않소?"
그의 노골적인 표현에 앨리타의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당혹스럽게도 그녀의 다
리 사이에서 시작된 뜨거운 불길이 비수처럼 그녀의 등줄기와 복부를 찔러댔다. 그가 양손
으로 그녀의 보드라운 가슴을 움켜잡았을 때, 앨리타는 자신의 유두가 빳빳하게 일어섰다는
사실을 그가 눈치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그의 엄지손가락이
쉽사리 그녀의 유두를 찾아 고통스런 관능의 세계로 안내하듯 어루만졌다. 숨막히는 듯한
그녀의 신음소리에 그는 점점 더 대담해졌고, 입술을 움직여 옷 위로 그녀의 유두를 물었다.
단단하게 일어선 유두 위로 거친 옷감의 감촉이 느껴지자 앨리타의 입술에서 또다시 신음소
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상체를 그에게 바짝 밀착시켰다.
"오, 앨리타."
제이미는 그녀를 번쩍 안아 침대로 데려가며 중얼거렸다.
"당신의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깊숙하게 당신의 몸안으로 들어가고 싶소."
그는 능숙하게 그녀의 옷을 벗겼다. 앨리타는 그의 동작을 멈추게 하려는 듯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미약한 저항에 꿈적도 하지 않았고 그녀의 손을 옆으로 밀
친 뒤, 그녀의 몸에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언제 보아도 놀랍소."
그가 미친 듯이 맥박이 뛰고 있는 그녀의 목덜미에 대고 경건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난....., 제발 그만둬요. 당신의 입술이 내 몸에 닿으면 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업어요."
"생각하려 들지 말고 그저 느껴봐요. 난 당신이 내가 하는 모든 행위를 온몸으로 느끼기를
바라오."
"당신은 나쁜 사람이에요."
앨리타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속삭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을 찾으며 동시에
그의 단단한 몸을 다리로 휘감았다.
"맞소."
그는 악당처럼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잠시 몸을 일으켜 옷을 벗어버린 뒤 말을 타듯 그녀의 몸에 걸터앉았다. 그는 머리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애무했다.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감미롭고 짜릿한 입맞춤을 경험했다고
느꼈을 때쯤, 그의 입술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녀의 목덜미를 거쳐 관능적으로 움
직이던 그의 입술은 그녀의 어깨와 쇄골을 지나 젖가슴에 도달했다. 그는 앨리타가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될 때까지 양쪽 가슴을 입술과 혀끝으로 간질였다. 제이미가 갑자기 그녀의 몸
을 돌려눕혔으므로 앨리타는 놀라움에 비명을 질렀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곧게 뻗은 그녀
의 척추를 따라 미끄러졌다.
"당신 피부는 벨벳처럼 부드럽소."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의 엉덩이에 입을 맞추며 손으로 그녀의 다
리 사이의 은밀한 계곡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앨리타는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당신의 몸은 온통 분홍빛과 흰색과 금색뿐이오."
갑자기 그는 다시 그녀를 돌려눕히더니 무릎으로 그녀의 다리를 넓게 벌리고 그 사이에 자
리를 잡았다. 앨리타가 시선을 들자 제이미는 도무지 읽기 어려운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발뒤꿈치에 기대고 앉아 그녀의 온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마침내 그녀의 여성을 찾아내자 그의 입술에 천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당신은 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소."
제이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어 그녀의 다리 사이에 모아진 촉촉한 물기를 직접 느끼도
록 했다. 곧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남성에 올려놓았다.
"나도 당신만큼 준비가 되었소."
앨리타는 그토록 거대하고 단단한 물건이 비단처럼 매끄러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손은 본능적으로 그의 남성을 움켜잡았다. 그녀는 위험한 실험을 하
듯, 차츰차츰 대담하게 그의 몸을 어루만졌다.
제이미는 거의 침대에서 튕겨져나갈 듯 펄쩍 뛰었다.
"오 맙소사, 당신은 날 미치게 만들고 있소, 앨리타."
문득 그는 무릎을 꿇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더니 입술과 혀로 그녀의 여성을 장악
했다.
"제이미, 안 돼요!"
그녀가 외치자 그는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었다.
"안 될 것 없소, 내 사랑. 난 당신의 아름다운 살갗을 하나도 빠짐없이 맛보고 싶소."
그런 다음 그는 다시 그녀의 엉덩이를 그러잡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시킨 뒤 관능적인
향연을 다시 시작했다.
앨리타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문이었다. 제이미가 남녀 사이에서 가능한 가장 친밀한 사랑
의 행위로 그녀를 고문하는 동안, 앨리타의 몸은 뜨겁게 타올랐다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기
를 되풀이하며 전율했다. 그녀는 수치스런 방법으로 부당하게 자신의 몸을 유린하는 그의 G
행동에 화를 내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그만둘까 봐 두려웠다. 만일 지금 그가 황홀한
애무를 멈춘다면 그녀는 당장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토록
완전히 무기력해질 만큼 다른 인간에게 사로잡혀본 적이 없었다. 그의 혀가 무자비하게 그
녀의 몸안을 넘나들었다. 금빛 숲속에 감추어져 있던 작은 쾌락의 정점을 찾아낸 그의 입술
이 감미롭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앨리타의 고통스런 환희의 비명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
녀는 갑작스런 폭발을 느끼듯 절정의 순간에 도달했다. 폭발하는 별들처럼 강렬한 불빛에
의해 어둠이 산산조각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아직도 참기 어려운 환희의 순간에 온몸을 떨고 있는 동안 제이미가 그녀의 몸안으
로 들어가 황홀한 느낌을 보다 강렬하게 자극했다. 비명을 지르며 앨리타는 그의 어깨를 잡
고 그의 몸에 맞추어 몸을 뒤로 구부렸다. 그러자 그가 깊숙하게 그녀의 몸안으로 들어왔다.
너무나 깊숙해서 그녀는 다시 한번 짜릿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번에 그녀는 영혼이 육체와
분리될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지는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 그녀는 제이미가 외치는 소리를
막연하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의 몸이 굳어지더니 뜨거운 액체가 그녀의 몸속에서 퍼
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뒤로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아니면 짧은 순간이 흐른 것일까, 앨리타는 제이미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에 눈을 떴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단한 신비를 풀려는 사람처럼 검은 눈동
자를 가늘게 뜨고 있었다.
"내게 왜 이러는 거죠? 당신이 나보다 더 강하고 경험도 많다는걸 잘 알잖아요? 당신이 당
신 뜻대로 내 몸을 마구 이용한다고 해도 난 반항할 수가 없어요."
"모르겠소."
부드럽게 대꾸하는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당신을 만지기만 하면 난 분별력을 잃고 마오. 나도 당신처럼 이런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알아주오."
그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해석해보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심장의 박동소리가
너무 크기 때문인지, 그는 자신의 양심이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제이미, 제발 부탁이니 내 말 잘 들으세요. 당신은 즉시 그 위험한 놀음을 그만둬야 해요.
당신이 수천 파운드에 달하는 세금을 포탈하고 있다는 사실은 조만간 그레이 경에게 발각되
고 말 거라구요."
"당신이 그자에게 고자질하겠다는 거요?"
낮은 그의 목소리는 험악했으며 눈빛은 그녀를 비난하듯 어둡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앨리타가 발끈해서 부인했다.
"내가요? 절대 아니에요. 난 그저 당신이 위험한 범법행위를 단념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싶
을 뿐이에요. 나는 당신이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럼 잊어버려요, 앨리타. 어젯밤에 당신이 본 것을 모두 잊어버리시오. 만일 당신이 나를
배신하면 무서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거라는 내 경고는 진심이오. 하지만 안전을 기하는 의
미에서 당신은 곧 짐을 챙겨서 내 방으로 옮겨야겠소. 밤낮으로 당신을 감시할 수 있도록
당신을 가까이 둬야겠소."
"로위나는 어쩌구요?"
앨리타는 도전적인 태도로 물었다.
"로위나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소. 거짓말을 꾸며낸 것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만나 담판을
짓겠소. 하지만 앞으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상관없소. 사람을 구하는
대로 오빠에게 돌려 보낼 생각이니까."
"정말이에요?"
앨리타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렇소, 정말이오. 한 남자에겐 여자는 하나면 충분하오."
제이미가 대꾸했다. 곧이어 그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반짝이더니 그녀에게 몸을 기댔다.
"자, 얘긴 그만하면 됐소. 난 지금 당신의 달콤한 살갗을 또 한번 맛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혀 견딜 수가 없소."
제이미는 그녀의 허리를 잡으며 반듯하게 누워 그녀를 자신의 몸 위에 올려놓았다. 말에 걸
터앉듯 그의 하체에 올라앉은 앨리타는 거대한 그의 남성이 다리 사이로 솟구치자 눈을 동
그랗게 떴다.
"당신의 탐욕스런 열정은 정말 끝이 없군요."
앨리타는 그의 손길에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속삭였다.
"당신에 대해서라면 그렇소. 날 당신 몸안으로 받아들여주오. 당신의 달콤한 열기에 또 한번
감싸이고 싶소."
그의 낮고 관능적인 목소리에 유혹을 받은 앨리타는 반항할 수가 없었다. 곧추 일어선 그의
남성을 움켜잡고 몸을 들어올린 그녀는 곧 그의 몸을 받아들였다. 그의 매끄러운 남성이 그
녀의 몸속으로 깊숙하게 들어오자 앨리타는 몸안이 충만해지는 느낌에 비명을 질렀다. 제이
미는 그녀의 엉덩이를 붙잡고 강렬하게 하체를 움직여, 끌어당겼다가 물러나는 동작을 반복
하며 그녀를 광기의 경계선까지 이끌었다. 그러자 그녀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
었다. 그러나 격렬한 절정의 순간은 순식간에 끝이 났고, 그녀는 그의 거대한 몸이 팽팽하게
자신을 죄는 것을 느끼며 그의 몸위로 쓰러졌다. 창문으로는 햇살이 쏟아져들어오고 있었지
만, 그녀는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제이미는 잠들지 않았다. 살며시 앨리타를 자신의 몸으로 내려놓은 뒤 이불을 덮어주고 그
는 침대에서 빠져나왓다. 그는 가슴속에서 요동치고 잇는 강렬한 감정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옷을 입다 말고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분별력을 송두리째 앗아갈 만
큼 그를 완전히 사로 잡앗다. 그는 진정으로 아내를 원한 적이 없엇다. 그러나 이제 앨리타
가 없다면 그의 인생을 대단히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리는 셈이엇다. 고집불통에다 싸움꾼이
고 반항기가 있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그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꼈다.
제이미는 헝클어진 은발 머리채가 후광처럼 예쁜 얼굴을 감싸고 있는 모습의 그녀를 내려
다 보며 참으로 천진난만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비록 체구는 작앗지만 그녀의 몸매는 완벽
했고, 그의 손에 꼭 맞는 크기의 가슴을 가지고 잇었다.
그녀가 자신을 미워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씁쓸한 생각에 잠겼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거실에서 베스를 만난 그는 앨리타의 짐을 자신의
방으로 옮기라고 했다. 마침 거실에 들어오던 로위나는 베스에게 지시를 내리는 제이미의
얘기를 듣고, 분노로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베스가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제이미를 마주했
다.
"쌀쌀맞은 계집과 드디어 잠자리를 같이하겟다 이거군요. 결혼을 해도 우리 관계는 이상이
없다고 약속했었잖아요! 당신은 에반 그레이를 괴롭히기 위해서 앨리타와 결혼할 뿐이라고
말햇어요. 내가 있는데도 굳이 아내가 필요하다는 당신 말을 이해하긴 힘들엇지만. 그래도
난 당신을 믿엇어요. 그런데 당신을 지난 몇 달 동안 계속해서 날 패해왔죠. 앨리타가 당신
에게 마법이라도 걸던가요? 그 계집이 마법으로 당신을 거세시키기라도 했냐구요?"
로위나는 씨근덕거리며 외쳤다.
"말도 안 되는 마법 얘기 따위는 집어 치워요. 다른 사람들 듣는 데 신을 모독하는 그런
불경스런 말은 삼가는 게 좋을 거요. 당신도 잘 기억하겠지만 난 당신한테 아무런 약속도
한적이 없소. 떠나든 말든, 그건 당신 좋을 대로 하라고 했을뿐이오. 이곳에 남기로 결정한
건 당신이었소."
"그런 당신의 침대에서 날 대신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당신을
저 멋대가리 없는 귀족 여자를 성에 데려온이후로 계속해서 날 냉담하게 대했어요."
제이미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내 아내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당신을 그녀의 발뒤꿈치도 못따라가오. 일부러 내
아내에게 거짓말을 햇더군. 당장 그런 짓 그만두는 게 좋을거요."
순간 로위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짓말이라뇨? 제이미, 난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요."
그의 눈이 험상궃게 가늘어졌다.
"로위나, 어서 사실대로 말해요. 정말 내아이를 가졌소? 확인하는 건 쉬운 일이오. 마을에
서 산파를 데려오면 당신의 주장이 맞는지 거짓인지 금세 확인할수 있소. 내 아내에게 일부
러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판켱되면 당신 인생을 고달프게 될 거요. 그러니 지금 진실을 밝
히시오. 그러면 당신이 내 집에 머물렀던 세월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도 남을 만큼 금화를
챙겨서 안전하게 호위병을 딸려 당신을 오빠에게 보내주겠소."
"날 보내다구요?"
"그렇소. 결혼한 뒤에도 당신을 이 집에 머물게 한 건 내 잘못이었소. 앨리타느 내 아내고,
여긴 그녀의 집이오."
"당신이 아이를 배고 있는 여자라고 해도 멀리 보낼 건가요?"
"그럴 순 없겠지. 정말로 내 아이를 가졌소? 대답하기 전에 잘 생각하는게 좋을 거요."
로위나는 절망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심하게 할퀴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가 다른 여자를 침대에 끌어들여 재미를 보는 동안 자신을 비참하게 버
려두었던 사실에 대해서, 그리고 아내보다 그녀가 훨씬 못하다는 얘기를 털어놓았다는 점에
대해서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녀는 제이미의 아이를 임신중이라고 거
짓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수는 없엇다. 그녀는 과거에 이미 제이미가 화를 내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여전히 제이미를 원하는 것은 사실이었고, 앞으
로도 늘 그를 원하겠지만, 지금 임신 사실에 대해 거짓말을 하면 혹독한 처벌을 받게 될 것
이었다. 그러면 앞으로 아이를 영영 못 낳게 될지도 몰랐다.
"아뇨, 당신의 아이를 임신하지 않았어요."
"그럴 줄 알았소. 하지만 당신 입으로 솔직히 인정하길 바란 거요. 난 사생아를 원하지 않
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생아를 낳고 싶은 생각은 없소. 만일 당신이 계속해서 거짓말을 했다
면, 난 당신을 지금 입고 있는 옷가지만 달랑 딸려서 내쫓았을 거요."
로위나는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실수를 모면했는지 깨달으며 침을 삼켰다.
"날 보내지 말아요, 제이미. 당신 곁에서 지내게 해줘요. 어쩌면 언젠가 당신이 날 필요로
할지도 모르잖아요."
로위나는 애교스럽게 간청했다.
"아니오, 로위나.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하는 날은 오지 않
을거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당신이 긴 여행을 하는 동안 딸려보낼 호위병이 마땅
하질 않소. 그러니 당신고 함께 보낼 사람을 구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머물러야
겠소. 언젠가 될지는 몰라도 당신이 내 집을 떠나게 될 때는 섭섭하지 않게 보내주겠소. 그
동안은 내 아내를 괴롭히지 마시오."
로위나의 분노가 폭발했다.
"내가 돈 따위에 관심이 있는 줄 알아요? 아니에요, 제이미. 내가 원하는건 당신이라구요!
날 보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하는게 좋을 거예요."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험악하게 이글거렸다. 그의 인생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사실을 로
위나가 알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으므로, 제이미는 협박이 담긴 그녀의 말을 그
냥 무심히 흘려들었다.
"때가 오면 당신을 어쩔 수 없이 내 집을 떠나게 될 거요."
제이미는 씩씩거리며 화를 내고 있는 로위나를 남겨둔 채, 휙 몸을 돌려 거실을 나갔다. 그
순간 로위나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제이미를 증오했다. 그것은 앨리타에 대한 증오심보
다 더 컸다. 순간 그녀의 뇌리에 묘책이 떠오르자 그녀는 사악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거실을 빠져나왔다. 그날 오후, 말을 타고 성을 빠져나가는 로위나를
본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앨리타는 비참했다. 그녀는 매일밤 제이미와 나란히 누워 그의 몸에 전해지는 온기를 느껴
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혐오스러웠다. 그녀가 손을 뻗기만 하면 그가 즉각 반을을 보이리
라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잇었다. 매일밤 그가 침실에 들어오면 그녀는 자는 척했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벽난로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그가 옷을 벗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두 사람이 하나가 되던 순간에 그녀의 손끝에 느껴지던 그이 살갗이 얼마나 따뜻하고 활기
넘쳤는지를 떠올렸다. 참나무처럼 튼튼한 그이 허벅지와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으로 뒤덮인
그의 가슴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오늘밤 역시 다른 날들과 다르지 않았다. 평상시처럼 느지막하게 침실로 들어온 그는 꺼져
가는 장작불빛 아래에서 옷을 벗었다. 잠든척 숨을 고르며 그녀는 또다시 그를 관찰했다. 앨
리타는 그이 남성이 무성한 숲에 감추어져 있을 다리 사이를 바라보다 흠칫 놀랐다. 잠들어
있는 그의 남성은 정말 거대했다. 그녀의 가슴은 터질 듯 빨리 뛰었다. 그의 모습은 예술품
처럼 보였다.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문득 깨달은 앨리타는 얼른 그이 얼굴로 시선을 옯
겼다. 강인하고 대담한 그의 표정에선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고귀함과 자부심이 느껴졌
다. 그녀의 눈길이 그의 두툼한 입술에 고정되었다. 촉촉하고 따뜻한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몸
이 불러일으켰던 놀라운 희열과 짜릿한 감각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의 손을 보았다. 커다란
손으로 그는 그녀의 몸과 마음을 전율하게 만들었었다.
"당신 마음에 드는 부분이라도 있소, 부인?"
"앗."
앨리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이미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줄 알
았던 그녀는 온몸이 빨갛게 물들었다. 너무 어두워서 제이미가 그녀를 잘 볼 수 없다는 것
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난 당신을 보고 있지 안았어요."
"그랬소?"
"어둠 속에서 뭘 어떻게 본다고 그러죠?"
"빛이 없어도 난 당신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있소. 당신 눈길이 머무
는 곳마다 불길이 일어나니까."
"잘난 체하지 말아요."
앨리타가 일부러 등을 보이고 누우며 투덜거리자, 제이미는 껄껄웃으며 침대에 누웠다.
"날 원하오, 앨리타? 날 얼마든지 환영이오, 욕망을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니오. 때론 몹시
증오하는 상대에게도 욕망을 느낄 수가 있지."
"난 당신에게 아무런 욕망도 느끼지 않아요. 당신이 나를 대하는 방법에 모욕감을 느낄 뿐
이에요. 난 우리가 각방을 썼으면 좋겠어요. 당신과 한 침대를 쓰는 게 너무 불편해요."
"하지만 난 당신을 믿지 못하오. 어서 잠이나 자둬요."
그는 씁쓸하게 한숨을 내 쉬었다.
"당신이 싫다면 강제로 탐하진 않겠소. 당신이 진심으로 바라지 않는 한 당신과 사랑을 나
누는 일을 없을 거요."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거예요."
앨리타가 새침하게 대꾸 했다.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런 날이 훨씬 더 빨리 오리라고 믿고 있소."
그의 목소리에 함축된 자만심이 앨리타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주 자신만만
했다. 그는 아주 자신만만했다. 그는 그녀가 곧 자신에게 사랑을 해 달라고 구걸하리란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그녀의 자존심을 훔쳐가버렸다. 이제 그는 그녀의 영혼마저 원
하고 있느 것일까?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앨리타는 로위나가 그녀를 슬슬 피하는 것 같았으므로 다
행이라도 여겼다. 제이미가 로위나와 얘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곧 로위나를 내보내겠다던 제
이미의 말대로 앨리타는 그날이 어서 오기를 학수 고대했다. 그녀는 제이미가 로위나와 잠
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다는 사싱을 이제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다. 매일밤 침대에서 남편인
제이미의 온기를 가까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앨리타는 로위나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고있었다. 앨리타를 못살게 굴기 위해 로위나가 거짓말을 했다고 제이미가 전해주
었던 것이다.
제이미는 자신이 약속한 대로 다시는 앨리타와 사랑을 나누려 들지 않았다. 앨리타 역시
절댈로 그런 욕망을 내비치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따뜻한 그의 애무의 손길과 뜨거운 입김
을 온몸으로 갈망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런 사건 없이 2주일이 지났을 무렵, 앨리타는 제이미가 또다시 밀수업에 손을 대려 한
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뭔가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종일 집을 비우는
때가 많았고, 한밤중까지 침실로 돌아오지 않는 적도 있었다. 몇 시간씩 게일로드와 은밀하
게 의논을 하기도 했다. 앨리타는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곧 이유를 깨달았다.
지난번 브랜디를 들여온 뒤 2주일 후에 또 다른 하선 건이 있다는 그의 얘기가 떠올랐기 때
문이었다. 날짜를 계산해 본 그녀는 밀수된 브랜디가 이제 곧 도착하리라는 것을 알수 있었
다. 그녀느 덜컥 겁이 났다. 뭔가 일이 잘못된다면 어쩌지? 제이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
면 어떻게 한다 말인가?
지난 며칠간 앨리타는 호위병을 한 명 대리고 승마를 하려 다녓다. 제이미의 불법적인 밀
수업에 대해서 조용히 생각해보고 싶었으므로, 그녀는 오늘도 말을 타러 나가야 겟다고 마
음먹었다. 날씨도 몹시 화창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싱그러운 바람과 햇살이 내리쬐는 속에
서 훨씬 더 생각이 잘 떠올랐다. 제이미는 외출을 할 때도 늘 기사 두 명은 성에 남겨 놓았
으므로, 두 기사중에 한 사람이 그녀를 에스코트해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앨리타는 황급히
뜰로 내려갔다. 그녀는 운이 좋았다. 나이젤 기사가 선뜻 나서면 호위를 자청했다. 제이미
일행과 함께 윈저 성에서 웨일스까지 여행했던 나이젤 기사와 나머지 열한명의 기사들은 기
꺼이 크리케스 성에 남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들은 제이미 모티머를 한 남자로서 좋아하
고 존경했다. 또한 제이미가 그들에게 임금을 넉넉하게 주었으므로 그들은 성에 머무는 데
아무런 불만이 없엇다.
웨일스 지방의 초여름 풍경은 대단해 아름다웠고, 앨리타는 호위병과 함께 멀리까지 말을
달렸다. 이윽고 나이제 기사가 어두워지기전에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앨리타는
마지못해 그이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나이젤 기사가 말머리를 돌리는 순간, 부주의한 말이
좁은 구멍에 발을 헛디뎌 균형을 잃고 말았다. 말이 앞발을 들고 버둥거리자 나이젤 기사는
땅에 떨어졌다. 미친 듯이 뒷발질을 하던 말은 말굽으로 나이젤 기사의 머리를 걷어 찼고,
그는 죽은 둣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앨리타는 조랑말에서 내려 기사의 정신을 뒤찾게 하
느라 갖은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기사의 체중이 너무 무거워 그를 말안장에 들어 올
리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는 의식을 되찾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으므로 앨리타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황급히 말에 올라타 성을 향해 말머리를 돌리던 그녀는 동쪽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녀는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사람들이 나이젤
기사를 도와줄 수 있을 텐데, 지금 달아나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엇다. 그녀는 사람들이 가까
이 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낯선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혹시 잘못된 판
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막 말을 돌리려던 그녀는 열댓 명의 중무장한 병사를 이끌고 온
사람이 바로 그레이 경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앨리타, 무슨 일이오?"
그는 손을 흔들면 쓰러져 있는 나이젤 기사와 앨리타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제 호위병인데 말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쳤어요. 도움이 필요해요. 저 혼자의 힘으로는 저
사람을 성으로 데려갈 수 없어요."
"내 부하들이 저 친구를 말에 올려주면 당신이 발고삐를 잡고 성으로 데려갈 수 있을 거
요. 물론 당신이 성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그러지 않아도 되구요. 당신 걱정을 많이했
소, 앨리타."
혹시 앨리타가 폭행을 당하지나 않았는지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던 그는, 그녀에게서 아무
런 흔적이 보이지 않자 몹시 실망한 표정이었다.
"난 돌아가야 해요. 제이미가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아직도 웨일스에 계시다니 놀랍군요.
국왕폐화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폐하는 몹시 심기가 불편하시오. 밀수는 계속되고 있는데 우리는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
단서조차 찾지 못했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어둠의 영주라는 이름뿐이오. 혹시 그자에 대
해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없소?"
그는 교활하게 묻자 앨리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일 뿐이에요.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아요. 정말이에요."
"글쎄요. 당신은 지금 당신이 하는 말보다 훨씬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소. 어쨌든
그 어둠의 영주라는 자에게 계속해서 행운이 따르지는 않을 거요."
그레이 경의 심상치 않은 장담과 음험한 눈빛에 앨리타는 덜컥겁이 났다. 그는 뭔가를 알
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갑자기 돌아섰고, 그레이의 부하 두 명이 나이젤 기사를 안장에 올
려놓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조심하세요!"
나이젤 기사가 안장에서 미끄러지려하자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몸을 움직이니 어느 정도 정신이 드는지 나이젤 기사가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앨리
타가 낯선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발견한 그는 힘을 내어 칼을 뽑으려했다. 그러
나 그는 아직 그럴만한 기력이 없었다.
"전 괜찮아요. 나이젤 기사. 위험하지 않아요. 기분은 어떠세요? 말을 탈 수 있겠어요?"
앨리타가 안심시키자 그는 여전히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지만 안장에 앉은 자세를 바로했
다.
"물론입니다, 부인.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왕궁에서 이미 그레이 경을 만난 적이 있는 나이젤 기사는 즉시 그를 알아보며 앨리타의
안전을 염려했다. 그레이 경이 하는 말을 들으니 그의 의심은 더욱더 커졌다.
"당신이 모티머에게 돌아가는게 난 마음에 들지 않소, 앨리타. 내가 당신을 보호해주겠소."
"난 돌아가야 해요. 그레이 경. 아버님께 곧 다시 만나뵙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전해주세
요."
나이젤 기사는 잔뜩 긴장했다. 제이미는 그레이 경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사실을 이미 기사
들에게 경고했고, 크리케스 영지 안에서 그를 보게 되면 내쫓아버리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나이젤 기사는 지금 심하게 상처를 입었고, 그리고 그는 혼자였다. 가능한 한 빨리 앨리타를
호위해 성으로 돌아가는 것 말고는 달리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럼 이만 작별인사를 해야겠소. 하지만 우린 곧 다시 만날 테니 염려 마시오. 당신 아버
님이 거사가 머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주셨소. 그리고 당신이 전해준 정보에 깊은 감사를
드리오. 폐하께서 몹시 기뻐하실 중요한 소식이었소."
앨리타는 엉뚱한 그레이 경의 말에 어리둥절해 잠시 동안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없이 말을 재촉했고, 술에 취한 사람처럼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나이젤 기사가 그녀
의 뒤를 따랐다.
앨리타는 그녀가 그레이 경과 만났다는 사실을 제이미가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희망은 없어 보였다. 제이미는 저녁식탁에 앉자마자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심문하듯
물었다.
"오늘 오후에 승마는 즐거웠소?"
앨리타는 그가 정작 알고 싶어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흘켜보았다.
"나이젤 기사는 좀 어때요?"
"머리가 좀 아프다는 것 외에는 멀쩡하오. 그레이 경과 만난 것에 대해서 나한테 달리 할
말이 없소?"
"특별히 할 얘긴 없어요."
"당신과 나, 두 사람 모두를 위해서 당신이 진실을 얘기해주면 좋겠소. 나이젤 기사는 오늘
오후에 들은 얘기 때문에 몹시 걱정을 하는 모양이던데. 당신은 정말로 내게 할말이 없소?"
"없어요."
앨리타는 진지하게 되풀이했다.
그날밤 제이미는 침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었던 앨리타는 뭔가 크게 일이 잘못
되었다는 생각에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밀수된 브랜디가 실린 배가 도착할 때가 되
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제이미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이미 해변에 내려가 있는지 궁
금했다. 제이미의 방에서는 해변을 내려다볼 수 있었으므로,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는 두툼한 커튼을 들추고 절벽 아래를 살폈다. 좁은 모
래사장에는 수십개의 횟불이 반짝이고 있었다. 달도 없는 칠흑처럼 어두운 밤은 제이미가
관연하고 있는 종류의 일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뭔가 잘못된 것을 분명하다는
사실을 앨리타는 육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힌 앨리타는 뭔가 위험한 상황이라는 느낌을 도무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제이미에게 뭔가 보이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한시라도 빨리 알려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에 그녀는 문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좀더 신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
각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지만, 온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곤경에 빠뜨릴 수는 없다며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더구나 제이미의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 그녀가 아무리 부인하다 해도 앨리타느 제이미가
다치거나 체포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젊은 나이에 생명을 잃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사
람이었다.
문에 가까이 간 그녀의 입에서 저주라는 말이 새어나왔다. 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다.
"제기랄! 제이미 모티머!"
다시 창가로 달려가면 앨리타는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로 부들
부들 떨렸다.
"당신의 잘못된 불신 때문에 당신 목숨이 위험하다구요! 가엾은 마을 사람들의 생명은 어
쩌란 말이에요!"
그녀는 제이미가 도대체 언제 문을 잠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잠자리에 들고나서
바로 였던 것 같았다.
벼랑 아래를 자세히 살펴보니, 바다 쪽에서 밀려드는 짙은 안개가 해변에서 움직이는 불빛
과 희미한 형체를 휘감고 있었다. 안개 때문에 볼 수는 없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해안에
배가 정박해 있으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문득 해변으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오솔길
쪽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가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너무 많아서 셀 수조차
없는 그림자들이 하나같이 말을 타고 가파른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고 있었다. 가장 끔찍
한 악몽이 현실로 되살아난 것 같았다.
그녀는 해변까지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입을 크게 버리고 비명
을 질렀다. 방안에 갇힌 채로 앨리타는 에반 그레이와 그 부하들이 제이미와 마을 사람들을
밀수 혐으로 체포하는 동안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오솔길의 방향이 달
라져 그녀는 더이상 군인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다시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해변에 도착한 그들이 기습을 시작하고 나서였다. 안개 때문에 자세히 전투 상황을 볼
수는 없엇지만, 비명과 치열한 전투의 소음이 들려왔다.
그녀는 얼어붙은 사람처럼 창밖을 내다보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비명소리에 그녀의 절
망감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동쪽 하늘에 희미하게 여명이 밝아오고 나서야 앨리타는 해변
의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해안에 정박했던 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그레이의 부
하들만이 이리저리 널린 나무통들 사이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모래사장에는 시신도 한두 구
쓰러져 있는 것 같았지만 나머지 밀수업자들은 안개 속으로 스며든 듯 모습을 감추었다. 제
이미와 그의 검은 말은 흔적도 없었다. 그녀는 창문에서 돌아서 재빨리 옷을 입고 제이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만일 그가 돌아온다면 말이다.
그녀가 드디어 문밖에서 인기척을 느낀 것은 늦은 아침이었다. 앨리타는 문으로 달려가 소
리쳤다.
"제이미, 당신이에요?"
"아닙니다, 마님. 베스예요."
"혹시 열쇠 가지고 있나요, 베스? 문 좀 열어줘요."
"열쇠는 문에 꽂혀 있는데요."
"맙소사, 그럼 어서 문을 열어요! 그이는 집으로 돌아왔나요?"
문이 열리고 베스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울고 있었던 듯 그녀의 눈가는 빨갛게 짓물러 있
었고, 눈동자에 물기가 가득했다.
"무슨 일이죠, 베스? 어떻게 된 거예요?"
베스는 눈가를 훔치며 말없이 방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한테 말해도 돼요, 베스. 나도 어둠의 영주와 마을 사람들이 깜깜한 밤에 해변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어요."
"알고 계세요?"
베스가 깜짝 놀라 되묻자 앨리타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죠?"
"누군가 세금 관리인에게 고자질을 했나봐요. 절벽 위까지 동굴로 이어지는 비밀통로가 없
었다면 모두가 죽거나 잡혀갔을 거예요. 하지만 어둠의 영주님은 현명한 분이셔서, 매번 어
느 통로를 이용해 절벽으로 올라올지 조심스럽게 결정을 내리시죠. 누군가 병사들이 절벽으
로 내려오는 것을 미리 발견하지 못했으면 아주 위험할 뻔했대요. 제 남편이 심하게 다쳤답
니다, 마님. 하지만 신의 가호로 제 아들은 무사히 돌아왔어요."
"네 명이 사살되었고 부상자느 셀 수도 없소."
어느 틈에 열린 문으로 들어온 제이미가 말했다. 그가 베스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만 나가봐요, 베스. 집에 가서 남편이나 잘 돌보시오."
그의 얼굴은 돌로 깎은 조각상처럼 냉혹하게 변해 있었고, 앨리타에게 험상궃은 눈길을 보
내는 그의 목소리는 비난으로 가득했다.
베스가 나가자 제이미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뒤 무섭게 찡그린 얼굴로 앨리타를 돌아보
았다.
"대체 왜 그랬소? 이 불모의 땅덩이에서 근근히 가족들은 부양하며 살아가는 가엾은 백성
들의 생명을 무참하게 없애버릴 만큼 나를 증오하고 있는 거요?"
앨리타의 파란 눈동자가 커다래졌다가, 금방 분노로 이글거렸다.
"내가 당신을 배신 했다고 비난하는 건가요?"
"모든 사실이 말해주고 있소. 당신은 에반 그레이와 단둘이 뭔가 얘기를 나누었소. 나이젤
기사는 한동안 정신을 잃었고, 그가 깨어 났을 때 당신은 그레이와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소. 당신은 다음 번 밀수선이 그레이와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소. 당신은 다
음 번 밀수선이 언제 오는지 알고 있었고, 그자에게 그 정보를 건 네줄 시간은 충분했소. 그
걸 미리 예상하지 못한 내가 바보지. 그자에게 내 이름도 얘기해주었소? 왕의 부하들이 나
를 잡으로 곧 들이 닥치겠지?"
"당신은 바보예요, 제이미 모티머!"
앨리타가 발끈 화를 내며 소리쳤다.
"부인할 수 있으면 어서 해보시오."
그의 목소리는 희망을 품듯 조금 밝아졌지만, 앨리타가 기세 등등하게 노려보며 아무런 변
명도 하지 않자 그는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물론 이번 일은 앨리타의 짓이 아니었다.
아니라면 그녀가 맹렬하게 반박했을 것이다.
앨리타는 반항기 어린 동작으로 고개를 똑바로 쳐들었다. 그녀는 제이미에게 비굴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결백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반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
가.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믿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그녀가 밀고했다고 여기며 비
난하고 있었다.
"난 부인도, 인정도 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이미 제멋데로 판단을 내렸으니까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그건 당신 마음이에요. 난 늘 당신이 연민 따위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제 그 사실이 증명되었군요. 이번 일은 자업자득이에요, 제이미 모티머. 밀수업을 그만두
라는 내 경고를 명심했어야죠."
그녀는 홱 돌아서 그를 등지고 섰다. 그러자 제이미는 끔찍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는 앨
리타의 좁은 어깨를 움켜잡아 돌려세운 뒤 미친 듯이 흔들어 댔다.
"당신은 지금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소. 당신 때문에 선량한 주민이 넷이나 죽었고, 수많
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소, 안개만 아니었다면 우린 모두 잡혀갔을 거요. 하지만 다해히도
다른 길로 빠져나올 수 있었소. 당신 때문에 고급 브랜디를 전부 잃고 말았단 말이오."
그녀를 흔드는 그의 손길은 대단히 거칠었으므로 앨리타는 이를 부딪치며 눈조차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어, 어서, 나, 날 주, 죽여요!"
앨리타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 소리쳤다.
"아직도 내게 반항하는 거요?"
제이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 것을 느끼며 악을 썼다. 그러나 그는 무자비한 손놀림을
멈추고 그녀를 똑바로 세웠다.
앨리타는 숨을 몰아쉬며 용감하게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은 날 부당하게 비난하는 한, 난 계속해서 당신에게 방항할거예요."
"대체 왜 그랬소?"
"마음대로 생각하라니까요!"
앨리타가 되받아쳤다.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질 것 같은 느낌과 싸우고 있었다.
"에반 그레이 때문이겠지. 당신이 그 나쁜자식과 결혼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
이니까. 내가 죽여주면 좋겠군."
그의 말에 갑자기 앨리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니에요!"
"날 배신하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거라고 이미 경고했을 텐데."
그는 마치 연약한 뼈를 단숨에 부숴버릴 수 있는 비둘기라도 사로잡은 것처럼, 커다란 손
으로 그녀를 꼼짝도 하지 못하게 붙잡았다.
"당신 원하는 대로 해보시죠. 어쨌든 난 당신의 자비 따위를 구걸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둬요. 날 해치고 나면 내가 당신을 배신했는지, 아니면 결백한지 절대로 알아
내지 못할 거예요."
순간 제이미의 화가 폭발했다.
"날 이토록 화나게 만들 수 있는 건 마녀뿐이오. 어쩌면 로위나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당신은 화형을 시켜 없애버려야 하는 진짜 마녀인지도 몰라. 하지만 걱정 마시오. 내
가 때려서라도 당신의 머릿속에서 사악한 마녀의 영혼을 없애줄 테니까."
제이미의 행동은 순식간에 이루어졌으므로 앨리타는 드레스의 뒷여밈이 발끝까지 찢겨져나
가는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곧바로 그녀를 번쩍 안아올리더니 침대로 내던졌다. 침대
위에 엎어진 그녀는 어깨 너머로 제이미를 돌아보았다. 제이미의 잔혹한 시선이 그녀의 등
과 엉덩이와 다리에 꽂혀 있었다. 그는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허리띠에서 승마용 채찍
을 풀더니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쳤다.
그가 채찍을 높이 들어올리자 앨리타는 첫 번째 일격이 떨어지기를 준비하며 눈을 감았다.
허공을 가르는 채찍의 날카로운 울림이 들리고 그의 팔이 움직이는 소리가 느껴졌다. 채찍
이 부딪치는 소리가 귀를 찢을 듯한 천둥소리처럼 들려왔지만, 그녀는 치명적인 일격이 자
신에게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채찍은 그녀가 엎드려 있는 바로 옆
을 강타했고, 그녀의 부드러운 살갗 대신 침대보가 길게 찢겨져 있었다.
곧이어 제이미의 울먹이는 신음소리와 채찍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일어나려고 몸을 들었지만 그의 몸이 그녀를 덮쳤다.
"오,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그는 간절한 목소리로 기도하고 있었다.
"당신이 저지른 짓이 어떻든지간에 난 당신에게 고통을 줄 수가 없소. 당신의 아름다운 피
부를 다치게 하느니 차라리 당신을 방에 가두어두는 편이 낫겠소."
그는 약간 몸을 들어올려 그녀를 돌려눕힌 다음 그녀의 눈을 깊숙하게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누구지? 왜 난 당신에게 고통을 준다는 생각조차 참을 수가 없는 걸까?"
"난 당신의 아내예요."
앨리타는 부드럽게 대꾸했다.
그는 마치 광을 낸 보석처럼 눈빛을 반짝이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렇치."
그의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애무했다. 그의 입술이 감칠나게 조금씩 조금
씩 그녀에게 내려왔다.
그는 앨리타에게 마땅히 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마음은 그녀에게 고통을 주
기를 거부했다. 그는 그녀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적인 욕구에 무릎을 꿇어선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는 앨리타가 조그맣고 우아한 요정처럼 성안을 돌아다니는 낮
동안에도 그녀를 원했다. 그녀에게 얼마나 달콤하고 싱그러운 향기가 나는지 생각할 때마다,
그녀의 몸안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짜릿한 희열과 쾌감을 느낄 수 있는지 떠올릴 때마다, 그
는 그녀를 원했다. 단순히 그녀를 생각하기만 해도 그는 온몸이 불타올랐다. 남자들이 미치
도록 빠져드는 고급 브랜디처럼, 그녀를 한번 맛보고 나자 그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그녀를
갖고 싶어졌다.
앨리타는 제이미가 곧 입을 맞추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숨을 멈추었다. 두 사람의
분노와 둘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오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의 키스를 원했다. 그러
나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닿았을 때, 그녀는 키스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의 단단한
가슴을 양손으로 밀어냈다. 그의 집요한 혀가 그녀의 입술을 헤집고들어와 난폭하게 하게
움직이자 그녀의 목구멍에서 거부의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싫어요, 이런 식으로는 싫어요."
그녀가 애원했다. 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입맞춤이 아니라 부드럽고 감미로운 키스를 원했
던 것이다.
"아니, 당신은 내 것이오. 당신이 거부해도 난 당신을 가질 거요. 그러니 어서 항복해요."
"그럴 순 없어요!"
앨리타는 그의 몸 아래에서 몸을 뒤틀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의 목소리는 욕망으로 거칠어
져 있었다.
"내 맘이오."
그는 재빨리 누더기가 된 그녀의 드레스를 완전히 벗긴 다음 내던졌다. 곧 그의 손이 그녀
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고,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부드럽게 애무하면 유두를 단단하게 만들
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떠나 목덜미를 거쳐 가슴계곡에서 잠시 머물더니 단단해
진 유두를 차례로 입안에 넣고 간질였다. 그의 손이 두 사람의 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오
더니 그녀의 허벅지 사이의 매끄러운 살속을 어루만졌다. 앨리타는 자신의 패배를 솔직히
인정하면 쾌감의 비명을 질렀다.
이 남자는, 거만하고 강제적인 그녀의 남편은 언제나 그녀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
고 있었다. 이유가 뭘까? 그녀는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녀가 원하던 남편은 에반 그레이
가 아니었던가? 제이미의 손길만 닿으면 그녀의 몸이 환희의 소리를 내며 혈관에서 피가 뜨
겁게 용솟음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녀는 그를 미워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고압적인 태
도로 그녀를 정복하려 드는 이 남자를 증오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
지 않았다. 그가 약혼녀를 되찾겠다고 주장했던 이유는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제이미의 입술과 혀가 그의 손가락을 대신해서 또 다른 환희의 절정으로 이끌자 앨리타는
더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또다
시 그녀에게 달콤한 고문을 시작하기 위해 제이미는 벌거벗은 채 넓게 벌린 그녀의 다리 사
이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다시 애무를 시작하자 앨리타는 자신이 그와 싸울 의지를 상실한 게 언제부터였는가
돌이켜보았다. 그들의 행복에 사랑이 필요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잡았던 증오심이 사랑으로 바뀐 것은 대체 언제부터였단 말인가?
CONNIE 'MASON'
10
제이미의 입맞춤에 정신이 혼미해진 앨리타는 생각의 꼬리를 놓쳐버렸다. 갑자기 그녀의 허
벅지 사이의 계곡이 벌어지자 그녀의 입에서 날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몸안으로 과감하게 밀고들어오자 그녀는 몸안에 열기가 솟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은밀하게 그녀의 몸속을 애무했다. 그러다 갑자기 손가락을 뺐
다. 앨리타는 항의하듯 신음했다.
"계속해주길 바라오?"
유혹하듯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앨리타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는 왜 그녀를 고문하려는
것일까? 거부해야만 한다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아뇨, 절대로 싫어요!"
그러자 그의 손가락이 다시 그녀를 찾았다. 부드럽게 벌어진 그녀의 꽃봉오리를 좀더 피우
려는 듯 그의 손가락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어서 말하시오, 앨리타. 당신이 원하는 걸 말하기 전에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겠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으므로 앨리타는 그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강렬하게 부인했다. 그
가 고개를 숙여 단단하게 일어선 그녀의 유두를 이로 간질이자, 그녀는 거의 미쳐버릴 지경
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이미는 정확하게 언제 달콤한 고문을 그쳤다가 새롭게 시작해야 하
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거대한 남성이 그녀의 허벅지에 닿는 것이 느껴졌을 때, 앨리타
는 미칠 듯한 욕구를 느꼈지만 차마 부끄러워서 말로 옮길 수가 없었다.
"제이미, 제발."
"제발 어쩌란 말이오, 앨리타? 어서 말을 하라니까, 그러면 기꺼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소."
"나쁜 사람! 당신을 원해요!"
"어디에?"
제이미가 되물었다.
"내 몸안에요! 당신이 내 안에 들어오길 원해요!"
앨리타는 비명을 질렀다.
앨리타는 제이미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의 몸을 훑어내리는 것을 느끼자 갑자기 온몸의 관능
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가 그녀 위로 눕자 껄끄러운 체모로 뒤덮인 그의 가슴과 다
리가 그녀의 살갗에 닿았다. 열정으로 가득한 그의 불타는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그녀의 피
부에 불길이 일엇다. 그의 무거운 체중이 푹신한 침대 속으로 그녀를 내리눌렀다. 그의 거대
한 몸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다리 사이가 벌어지는 것을 느끼던 앨리타는 제이미가 그
녀의 다리를 어깨에 걸치자 온몸이 두 조각으로 갈라질 듯한 쾌감에 몸을 떨었다. 눈을 감
았던 그녀는 그의 거대한 몸이 깊숙하게 안으로 밀고 들어오자, 다시 눈을 번쩍 떴다. 갑자
기 그녀는 그의 남성이 너무나 거대해서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기가 힘들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그의 엉덩이가 맹렬하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가 뒤로 후퇴하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좀더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평생 이토록 심오한 환희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앨리타의 몸은 그를 팽팽하게 죄며 받아들이고 있었다.
"맙소사, 당신은 너무나 뜨겁고 CHACHA하오. 지금과 같은 천국을 두 번 다시 느낄 수 있
다면 난 당장 죽어도 좋을 것 같소."
그의 하체가 보다 빠르고 강렬하게 움직였다. 그러자 앨리타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몸 아래
에서 전율했다. 그의 몸안에서 일던 폭풍이 최고조에 달하며 낯선 황홀경이 찾아들었다. 순
간 격렬한 전율이 그를 사로잡았다.
앨리타는 뜨거운 열정의 결정체가 자신의 몸안을 적시는 것을 느끼며 암흑의 나락으로 빠져
들었다. 그녀는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제이미는 옷을 모두 입은 채
야릇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노의 눈빛일까? 앨리타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
녀를 향한 그의 분노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위험을 경고하려 했었지
만 문이 잠겨 있어서 해변까지 달려갈 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가 그레이 경에게 고
자질했다고 믿고 있을까? 그 때문에 그녀를 혐오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당연히 그녀를
혐오하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더이상 그녀는 그의 곁에서 살아가기가 힘들 것이었다. 만일
그가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사랑을 나누려 한다면 그를 용서할 수 있겠지
만, 그가 그녀를 원하는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육체적인 욕망 때문이었다.
그것은 절대로 사랑이 아니었다. 그의 인생에서 그녀를 어떤 목적이나 수단으로 이용할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의도는 언제부턴가 그녀의 마음에 싹트기 시작한 부드러운
감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제이미의 아버지인 클레런스 모티머의 억울한 죽
음에 대한 복수 계획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그의 곁에서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앨리타의 사랑스런 얼굴을 살펴보고 있는 제이미의 눈동자가 가늘어졌
다. 어쩌다가 한 여자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는지, 그는 스스로 생각해도 의아스러
웠다. 그가 그토록 열심히 감추려 했던 마음의 약점을 앨리타가 언제 어떻게 알아낸 것일
까? 자신을 죽도록 미워하는 여자와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앨리타의
달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온몸으로 빨아들이며,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스스
로 대답했다.
앨리타는 다른 여자와 달랐다. 그녀는 그의 아내이고 그의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앨리타가 다른 어느 적보다도 강한 마음의 적
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그녀는 여전히 그를 혐오하고 있었다. 진퇴양난의 궁지에서 그를
구해줄 해결책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앨리타는 제이미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는 그
녀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를 때려서 처벌할 마음도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녀를 어떻게 할 셈인가? 두 사람의 시선은 오랫동안 서로 얽힌 채 고정되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어느 누구도, 두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을 수 있는 사랑의 고백 따위
는 하지 않았다. 제이미가 먼저 눈길을 돌렸다.
"당신은 어떤 이유로도 이 집을 나갈 수 없소."
그는 조금 전 그의 마음속에 피어올랐던 부드러운 사랑의 감정이 조금도 실려 있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까지요?"
"내가 별다른 명령을 내릴 때까지."
"내가 거절한다면 어떻게 되죠?"
"그럼 방안에 가두어놓겠소."
"뜰에는 나가도 되나요?"
"안 되오., 집안에만 있으시오."
"내가 죄인이라도 되나요?"
"당신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소. 하지만 이제부터 당신에겐 늘 감시의 눈길이 따라붙을 테
니 그렇게 아시오. 그레이에게 어둠의 영주가 누구인지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게 당신의 가장
큰 실수요."
"내가 그걸 밝히지 않았는지 어떻게 알죠?"
"만일 그 사실까지 고자질했다면 지금쯤 그레이 경이 날 체포하러 왔겠지. 왜 그랬소, 앨
리타? 왜 내가 어둠의 영주라는 사실을 그자에게 밝히지 않은 거요?"
앨리타는 그의 유도심문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전에 했던 말을 고집스럽게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난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고, 더이상 할말은 없었다. 제이미는 자신의 생각만으로 결론
을 내린 것뿐이었다. 그녀의 침묵에 화가 난 제이미는 빨리 방을 나가지 않으면 후회할 행
동을 저지르고 말 것만 같았다. 그는 이미 요부의 유혹에 넘어가 일을 그르쳤는데, 또다시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다시는 당신과 이 방을 쓰지 않을 테니 편안하게 쉬시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난
우리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고 원수들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잊게 되오. 내게 있
어 우리 가문을 배신한 놈들에게 정의의 이름으로 보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일은 없소. 아
무리 당신이라 해도 마찬가지요, 앨리타."
그는 휙 돌아서서 성난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그 뒤로 며칠 동안 앨리타는 거의 방을 나
가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그녀는 음탕한 여자처럼 제이미와 사랑
을 나누었던 자신이 수치스럽고 당혹스러웠다. 그녀는 그에게 어서 자신을 가져달라고 애원
했던 자신의 모습과, 환희에 찬 비명소리를 내질렀던 사실을 모두 기억했다. 그리고 그가 얼
마나 능숙하게 그녀를 절정의 순간으로 이끌었는지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를 몹시
도 사랑하고 있었다. 상황은 도저히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앨리타
는 제이미와 함께 살아가는 것은 자존심을 저버리고 영혼을 파는 짓이나 마찬가지라는 생
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제이미의 곁을 떠나기로 마음먹었고, 런던의 아버지에게 돌아가겠
다는 비밀스런 계획을 세웠다. 아버지는 부와 권력도 있고, 지위가 높은 친구들이 많았으므
로 제이미로부터 그녀를 지켜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제이미가 그녀의 행동 반경을 제한했
으므로 달아날 기회를 포착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두 번이나 몰래 집을 빠져나가 말을 타
고 달아나려 했지만, 매번 발각되어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한 번은 뜰을 빠져나가기
전에 나이젤 기사에게 발각되었고, 한 번은 제이미에게 직접 들켜버렸다. 또다시 그녀가 말
을 타고 성을 빠져나가는 장면을 목격한 제이미의 얼굴은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마지막 세
번째 시도에서 그녀는 성벽을 빠져나가기까지 성공했지만, 득달같이 뒤쫓아온 제이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집안을 벗어나지 말라고 경고했잖소. 처음 두 번은 그냥 경고로 넘어갔지만 이젠 더이상
그냥 보아넘길 수가 없소, 방안에 갇히게 된 건 순전히 당신이 선택한 일이오. 대체 어딜 가
려는 거지? 에반 그레이에게 어둠의 영주의 정체를 알려주기 위해 그렇게 급히 가려던 참이
었소? 그자와 잠자리를 같이하기로 결심이라도 했소? 쳇, 잊어버리시오, 앨리타. 당신은 내
사람이고, 난 내 물건을 누구와도 나누어 갖지 않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날 이곳에 가두어 둘 순 없어요, 제미이 모티머. 내가 집안에서 죄인
처럼 갇혀 지낸다는 소식을 폐하께서 들으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앨리타는 씨근덕거리며 대들었고, 그녀는 묘한 미소를 흘렸다.
"왕께서도 밀수업자들을 색출하면 대단히 기뻐하실 거예요."
제이미가 빈정거리듯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내 비밀을 노출시킬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소, 앨리타. 그럴 기회는 이제 더 이상 없을
거요."
앨리타는 벌써 일 주일째 방에 갇혀 지냈다. 그동안 그녀가 만난 사람은 음식을 날라다주
는 게일로드와 방안을 청소하러 오는 베스, 그 두 사람뿐이었다. 그나마 베스가 방안을 청소
할 때는 앨리타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게일로드가 문밖에서 보초를 섰다 게일로드는 앨리타
를 방안에 가두는 문제에 반대했으므로 제이미에게 심하게 항의를 했다. 그러나 제이
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 교수형당하는 꼴을 보고 싶나?"
제이미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
"아닙니다, 부인은 우릴 배신할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나? 하지만 이미 앨리타는 우릴 배신했네. 그레이와 그 부하들이 우리 동
료들을 넷이나 해쳤던 밤을 벌써 잊었나?"
"앨리타 아씨에게 주인님의 정체를 그레이 경에게 발설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
하실 겁니까?"
"여자들이 하는 짓이야 도무지 알 수 없는 게 아닌가. 내 이름을 왜 밝히지 않았는지는
설명할 실이 없네."
"한 가지 이유가 있긴 합니다. 어쩌면 부인께서 주인님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죠."
게일로드가 눈치 빠르게 말하자, 제이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껄껄 웃었다.
"앨리타는 날 싫어하네."
"그리고 주인님도 부인에게 관심이 없구요. 제 말이 맞습니까?"
제이미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듯 말없이 게일로드를 쳐다보았다.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
"아직도 로위나와 잠자리를 같이하십니까?"
"아닐세! 그 여자한테는 아무런 욕망도 느낄 수가 없네."
"주인님이 앨리타 아씨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부인도 아십니까?"
제이미는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의 감정이 그토록 겉으로 드러나보인단 말인
가?
"정신나간 소리하지 말게, 게일로드. 난 앨리타를 사랑하지 않아. 내겐 시시껄렁한 감정놀
음 따위에 허비할 시간이 없다는 거, 자네도 잘 알잖아. 내 마음은 온통 그레이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리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네."
"주인님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나 그렇게 둘러대십시오. 주인님이 시키시니까 부인을 감시
하기는 하지만, 전 그 일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주인님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세요. 끝으
로는 태연한 척하시지만, 앨리타 아씨에 대한 주인님의 마음이 그렇게 무심하지 않다는걸
알게 되실 겁니다. 부인께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으세요, 그러면 부인도 놀라운 반응을 보이
실지 모르죠, 그건 정말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로위나는 사건이 돌아가는 상황에 희희낙락했다. 제이미는 더이상 앨리타와 한 방을 쓰지
않았고, 앨리타는 방에 갇혀 지냈다. 아무도 확실히 알지는 못 했지만, 로위나는 지난번 밀
수 사건에 대해 그레이 경에게 귀띔한 사람이 바로 앨리타인 것 같다는 얘기를 베스에게서
전해들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화가 풀린 로위나는 제이미가 무사히 탈출했다는 사실이 기
뻤고, 그를 배신한 사실에 대해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어쨌든 그녀는 '어둠의 영주’의
정체를 밝히지는 않았다. 제이미의 비밀을 완전히 노출시켜버릴까 하는 충동도 없지는 않았
지만, 그녀는 그레이 경에서 곧 밀수업자들의 배가 도착한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이라고만
전했던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결정적인 비밀은 지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서슴지 않고 그 비밀을 이용할 터였다. 한편 앨리타는 점점 더 절
박해졌다. 죄인처럼 방에 갇혀 지내며 그녀는 제이미가 영원히 그녀를 방에 가두고 피를 말
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달아날 기회는 영영 없는 것일까? 그러나 기회는 전
혀 뜻하지 않는 곳에서 찾아왔다. 어느 날 로위나는 앨리타의 문밖에서 그녀를 조롱해두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 로위나가 앨리타를 부르자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
려오지 않았다. 앨리타는 한참 동안 신중하게 궁리 한 끝에 마음을 바꾸고, 로위나가 하는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어쩌면 그녀를 잘 설득해 달아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내 처지를 비웃어주려고 왔나요, 로위나?"
앨리타는 밖에서도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죠. 당신이 방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난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돌아다닐 수가 있
거든요. 하지만 너무 걱정 말아요. 당신 남편은 내가 잘 돌보고 있으니까요. 소문을 들으니
제이미가 당신한테 아주 많이 화가 났다더군요.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그러죠?"
로위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물었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제이미가 원한다면 내 남편은 당신이 가져요."
"난 당신의 허락 따위는 필요 없어요."
돌아서려는 로위나의 발자국소리를 듣자 앨리타는 퍼뜩 묘안이 떠올랐다.
"로위나, 잠깐 기다려요! 당, 당신한테 제안할 게 있어요."
"제안이라구요? 어떤 제안이죠?"
흥미가 발동한 로위나는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내가 성에서 달아나는 것을 도와준다면 제이미는 당신 차지가 될거예요. 당신도 그걸 바
라지 않나요?"
"그럼 좋죠. 하지만 그럴 순 없어요. 제이미가 사실을 알면 화가나서 날 죽여버리고 말 거
예요."
로위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당신이 날 도왔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릴 필요는 없어요. 결백한 척하면 그이도 당신을
믿을 거예요. 당신이 나한테 조금도 애정이 없다는 걸 그이도 잘 아니까요."
"그럼 되겠군요. 내가 어떻게 하면 되죠?"
로위나는 갑자기 관심을 보이며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우선 게일로드한테서 열쇠를 훔쳐내 나를 이 방에서 나가게 해줘요. 그런 다음에는 내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말을 타고 도망칠 수 있도록 기사들의 주의를 흐트러뜨리면 돼요.
그럴 수 있겠어요?"
"남자들 주의를 흐뜨러뜨리는 건 아주 쉬운 일이죠. 다들 나한테 넋이 빠져 있으니까
말이에요. 이미 몇 번 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도 있죠."
"어련하겠어."
앨리타는 나지막하게 속삭이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도와줄 거예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돌아올 이유가 없는 걸요. 제이미는 아내를 원하지 않아요."
앨리타는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하겠어요. 게일로드한테서 열쇠를 훔쳐내는 대로 이리로 오죠, 그러니 준비하고 있
어요. 난 이미 그 노친네가 열쇠를 어디에 숨겨두는지 알고 있어요."
앨리타의 입술에서 떨리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단순히 원수의 손에 넘겨주기 싫다는 이유
로 자신을 붙잡고 있는 남자를 떠나는 일이 왜 이토록 가슴이 아픈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
다. 제이미가 그녀의 육체에 빠져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눈곱만큼의
애정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앨리타는 그런 상황을 견디며 더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속에 새록새록 샘솟고 있는 제이미를 향한 사랑을
무시하는 일이 가장 힘겨웠다. 그날 아침 늦게 제이미가 앨리타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며
칠만에 그를 만났으므로, 그녀는 그의 모습을 들이마실 듯 한껏 감상했다. 확실히 제이미 모
티머와 견줄 수 있는 남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제이미는 금방 날아가버릴 연약한 새처
럼 가만히 서 있는 앨리타의 모습을 본 순간, 그녀의 방을 찾은 건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하지만 그는 좁은 방에 갇혀 지내는 그녀가 궁굼했다. 육체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
어 보인다는 얘기를 게일로드에게 전해듣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앨리타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오후에 플린트로 떠날 예정이었으므로 떠나기 전에
앨리타를 보고 싶었다. 플린트로 가는 목적은 에반 그레이가 그와 교묘한 게임을 벌이고 있
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그레이가 그의 정체를 안다면 왜 그를 체포하지
않고 있을까? 앨리타가 그레이에게 밀수업자들에 대한 얘기를 전하면서 가장 중요한 정보를
빠뜨렸다는 사실은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혹시 겉보기와 달리 그녀가 정말로 그에게 어떤
애정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긴 웬일이죠? 날 이 감옥에서 풀어주려고 온 건가요?"
앨리타는 먼저 시비조로 말했다.
"안부 인사를 하러 왔을 뿐이오. 아직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는군."
제이미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좁은 방에 가두어놓고 어떻게 되기를 바라죠? 날 영원히 가두어 놓을 계획인가요?"
제이미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다. 앨리타는 그가 좋은 마음을 먹었다가도 금방 돌아서
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이 정도면 난 당신에게 아주 관대하게 대했다고 생각하오, 대부분의 남편들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처벌을 가했을 거요. 남편을 배신하는 것은 중대한 죄에 해당하오."
"내가 당신을 배신했다고 어떻게 확신하죠? 당신이 하는 짓은 법에 위배되는 행동이에요.
누구든 대가를 바라고 당신을 배신할 수 있다구요."
제이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앨리타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 가운데에
는 아무도 배신의 위험을 감수할 사람이 없었다. 자신이 연루된 일을 고자질하는 것은 자신
의 발들을 도끼로 찍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사들을 모두 신임했고, 그들은 대부분
밀수업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게일로드는 하늘이 두쪽 나도 신임할 수 있는 사람
이었다. 생각 끝에 그는 앨리타의 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기는 했다.
"당신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확실하오. 하지만 내가 온 것은 그 때문이 아니오. 하루나 이
틀쯤 집을 비울 생각이오. 기사들의 절반은 나를 따르고, 나머지 반은 성을 지키게 될 거
요."
순간 앨리타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어딜 가는 거죠? 무슨 위험한 일이라도 생겼나요?"
"플린트에 가는 것뿐이오."
제이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의 두툼한 입술에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렵소? 아니면 내가 돌아올까 봐 걱정하는 거요? 위험한 일인
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소. 문제를 일으키러 가는 게 아니라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기 위
해 가는 것뿐이니까. 난 크리케스 성을 떠난 적이 드물기 때문에 제이미 모티머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을 거의 없소. 아마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거요."
앨리타는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잘 다녀오세요."
"뭐라구! 작별 키스도 해주지 않는 거요?"
그녀는 양손을 허리에 짚으며 돌아섰다.
"키스라구요? 난 싫어요."
제이미와 키스를 나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수치심과 모욕감
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술이 닿기만 하면 그녀는 그에게 항복해버리고 말 것이다. 그가 조금
이라도 그녀에게 애정을 품고 있다면 그녀는 상처받은 영혼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는 한 마디도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지 않았다. 제이미는 앨리타를 만나러 온 자신
의 실수를 곧 인정했다. 그녀를 눈으로 보지 않을 때는 다행히도 감정의 끈을 단단히 묶어
둘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 걸음이면 닿을 가까운 거리에 서 있지 그의 자제심은 무
너지고 말았다. 그의 남성은 이미 부풀 대로 부풀어 있었고 다리마저 후들거렸다. 그의 뱃속
에서 시작된 익숙한 통증은 이미 그의 다리 사이로 번져가고 있었다. 그는 앨리타를 품에
안고 그녀가 열렬하게 반응을 보일 때까지 정열적으로 입을 맞춘 뒤 촉촉하게 젖은 그녀의
뜨거운 몸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
의 표정을 읽은 앨리타는 공포스런 비명을 질렀다.
"내게 손대지 말아요!"
그녀는 제이미의 몸에서 전해지는 열기와 아득한 남자 냄새를 맡으며, 그의 손이 닿는 순
간 항복하고 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앨리타의 긴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거칠게 끌
어당겼다. 그의 키스는 난폭했다. 몹시 굶주린 듯한 그의 임맞춤은 격렬하고 집요했다. 그녀
의 무릎이 꺾였다. 그는 우아한 동작으로 그녀를 안아올리더니 침대로 데려갔다.
"나도 이런 내 자신을 어쩔 수가 없소."
제이미는 잠시 신음하듯 중얼거리다가, 두 사람의 못을 벗겼다.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린
앨리타는 벌거벗은 채로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이미는 이미 방을 나가
고 없었다. 그는 두 시간 동안 격렬한 정사를 벌인 뒤, 몸과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은 그녀
를 남겨둔 채 떠나갔다. 떠나면서 그가 한 말은 그녀의 뇌리속에 뚜렷이 각인되었다.
"앨리타, 당신을 생각할 때면 내 마음과 머리는 고통스런 전쟁을 시작하오. 당신이 날 사
랑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행복하게 변할까? 사람들은 사랑과 미움이 얇은 경
계선으로 구분되어 있다고들 하지. 당신의 마음은 어느 쪽에 머물고 있소?"
그녀가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자,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말하지 말아요, 내 사랑. 난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소."
바보 같은 사람. 앨리타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육체가 얼마나 당신을 원하는지 느
끼지 못하나요? 내가 얼마나 따뜻한 마음으로 당신을 감싸는지 모른단 말인가요?
그녀의 마음속에서 사랑과 미움 사이의 얇은 경계선은 무너져버린 지 이미 오래였지만,
그는 너무 아둔해서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감정은 무엇이
죠? 내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왜 말하지 못하는 거예요? 왜 날 믿지 못하죠? 앨리타는
제이미의 거리감이 잠자리에서 말고는 도무지 가까워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고심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두 사람은 지독하게 고집이 셌다. 둘다 분별력보다는 자존심이
강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제이미의 결심은 그 어떤 것보다, 심지어 사랑
보다도 우선이었다.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앨리타는 갑자기 문을 긁는 소리를
들었다.
"앨리타, 나예요, 로위나예요. 열쇠를 가져왔어요."
로위나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물쇠를 열더니 조용한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침
대에 누워 있는 앨리타와, 제이미가 던져둔 채로 바닥에 쌓여 있는 그녀의 옷가지를 발견하
고 분노에 휩싸였다.
"대낮에 침대에 누워 뭐하고 있는 거죠?"
앨리타는 로위나에게 사실을 털어놓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로위나가 사실
을 알게 되면 너무 화가 나 그녀를 도와주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로위나는 눈치가
빠른 여자였으므로 금방 상황을 알아차렸다.
"방안이 온통 정사의 향기로 가득하군요."
그녀는 앨리타를 노려보며 말했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앨리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제이미가 당신을 피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무슨 짓을 해서 그이를 유혹했죠?"
"내가 원한 건 아니었어요. 난 곧 이곳을 떠난 테니 신경쓰지 말아요. 모든 준비는 다 되
었나요?"
"그래요. 제이미가 집을 비우는 바람에 일이 쉬워졌어요. 기사들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중이고, 당신이 타고 갈 말도 마구간에 준비되어 있어요. 당신이 무사히 성벽을 빠져나갈 때
까지, 난 뜰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을 따돌린 거예요. 어디로 갈지는 결정했
나요?"
로위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런던에 계신 아버지에게 갈 거예요."
"어서 옷이나 입어요. 게일로드가 눈치채기 전에 열쇠를 가져다놔야 해요. 보초들은 내가
잘 해결할 테닌 걱정 말아요. 이제 다시는 우리가 만날 일이 없을 테니 이만 작별인사를 해
야겠군요. 남편 걱정은 하지 말아요. 제이미는 내가 아주 잘 보살피고 있을 거예요."
앨리타는 로위나가 방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그녀는 침대 밑에서 미리 준비해두었던 작은 여행가방을 꺼냈다. 옷과 소지품이 든 가방을
들고 그녀는 곧 방을 빠져나오 어두운 복도를 살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3층으로 내려간 그녀는 거실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그림자 속에 몸을 감춘 체 들키지 않고 내려갈 수가 있었다. 안뜰로 이어지는 외곽 계단을
내려가며 그녀는 또다시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로위나는 기적처럼 보초병들을 유인
했고, 뜰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곧 마구간에 도착했다. 앨리타는 자신의 말고삐를 잡고
조용히 뜰을 빠져나가 성벽을 지나쳤다. 일단 성을 나온 그녀는 재빨리 말에 올라 미친 듯
이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로위나가 성을 빠져나와 에반 그레이의 성으로 말을 달렸다는
사실을 앨리타는 알지 못했다. 에반 그레이는 한때 모티머 가문에 속해 있던 웅장한 저택의
호화로운 식당에서 한껏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길다란 식탁에는 그의 호위병들이 둘러앉아
게걸스럽게 술과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레이는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 따위에는 관
심이 없다는 듯, 맥주가 담긴 금빛 술잔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어떻게 밀수업자들
이 그의 습격을 피했을까? 그는 그때 일만 생각하면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안개가 걷
히고 나자 겨우 네 명의 밀수업자들이 브랜디 통들과 함께 모래사장에 남아 있었다. 놈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으므로 그는 '어둠의 영주’의 정체에 대해서 아무것도 캐낼 수가 없었다.
심증이 가는 곳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로위나를 좀더 다르쳐서 정보를 알아내지 못
한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한낱 시골 처녀에 불과하다며 국왕에게 유리한 정
보를 우연히 엿들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레이는 그녀가 좀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로위나가 제이미 모티머의 정부였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부터, 더욱더
자신의 추측이 옳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제이미 모티머가 어둠의 영주일 가능
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무엇 때문에 그의 정부가 제이미 모티
머를 배반했을까?
문가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리가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는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 여자가 식당으로 뛰어들자 깜짝 놀랐다. 두 명의 기사가 여자의 뒤를 바짝 뒤
쫓고 있었다.
"백작나리,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주 급한 일이에요."
기사들이 그녀를 붙들자 로위나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레이는 로위나에게 가까이 오
도록 손짓을 했다.
"들여보내게. 혼자 왔소? 숙녀분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호위해줄 사람도 없이 다니는 것
은 위험할 텐데."
"네, 혼자서 먼길을 달려왔습니다."
그녀의 흐트러진 모습은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바람
에 흐트러져 엉망이었고 옷차림도 추례했다. 그녀의 얼굴과 목에는 거뭇거뭇한 진흙 같은
것도 묻어 있었다. 그녀는 곧 쓰러질 것처럼 피곤해 보였다.
"앉으시오, 로위나. 음식과 마실것으로 어서 기운부터 차리는 게 좋겠소."
그레이는 자신의 음식 접시를 그녀에게 밀어주며 말했다.
"아닙니다, 나리. 시간이 없어요. 날아가는 새를 잡으려면 재빠르게 행동하셔야 합니다."
"날아가는 새라니? 밀수업자들을 말하는 거요? 근처에서 놈들이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얘길 들었소? 어서 얘기해보시오."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앨리타 양입니다. 제이미의 곁을 떠나 지금 런던으로 향하고
있어요. 오늘은 벌써 어두워졌으니 앨리타 양도 그리 멀리 가진 못했을 거예요. 숲속 어딘가
에서 밤을 지새우면 날이 밝기를 기다리지 않는다면 아마 길을 잃고 헤매고 있겠죠?"
로위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앨리타 양이 남편의 곁을 떠났단 말이오?"
그레이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네, 더이상 남편을 견딜 수가 없었는지 런던에 있다는 아버지에게 돌아가겠답니다. 제이
미가 끼여들지만 않았다면 나리께서 앨리타 양과 결혼했으리라는 사실을 저도 알고 있기 때
문에, 이 소식을 들으면 기뻐하실 것 같아 이렇게 달려왔어요."
"런던까지는 무척 먼길인데... 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단 말인가?
왜 내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그 촌놈이 순순히 그녀를 보내주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가없군. 앨리타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그놈을 단칼에 죽여버리고 말겠다."
그레이는 생각에 잠겨 혼잣말을 했다.
"제이미는 지금 성에 없어서 부인이 떠났는지 모르고 있어요. 제이미가 어디에 갔는지는
모르지만, 하루나 이틀 뒤에 돌아온다는 얘기만 들었죠."
"앨리타가 갑작스럽게 떠나주었으니 아가씨가 몹시 행복하겠구려. 당신이 처음 얘기했던
대로 그저 단순한 마을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도 알게 되었소. 아가씨는 제이미 모티머
의 애인이더군."
로위나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 그렇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 당신에 대해서 내가 알아보지 않았을 것 같소? 내
부하들이 아주 철저하게 조사를 했소. 당신은 아직도 크리케스 성이라는 돌무덤에서 살고
있다더군. 계속해서 그곳에 지냈다면 여전히 모티머에게 봉사를 하고 있다고 믿어도 되겠
소?"
로위나는 현명하게 침묵을 지키며, 그레이 경의 질문에 대해 부인도 인정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밀수업자들에 대해서는 더 정보가 없소? 놈들이 그렇게 교묘하게 빠져나가다니 유감이었
소. 어둠의 영주가 누구인지 정체를 알려주면 사례는 두둑이 하겠소."
"아뇨, 전 어둠의 영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어쨌든 소문을 들으니 잠잠해질 때까
지 밀수업자들이 활동을 중단하기로 했다더군요."
"우린 놈들을 잡고 말 거요. 내 손에 잡히기만 하면 놈들은 모두 교수대에 매달리고 말겠
지"
그레이는 협박하듯 다짐을 했다.
"앨리타 양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대뜸 로위나가 물었다. 지금 그녀는 밀수업자들에 대한 얘길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앨리타가 두번 다시 제이미에게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는 일뿐이었다.
에반 그레이처럼 권력과 지위를 갖춘 남자라면 앨리타가 또다시 제이미와 만나지 못하도록
해줄 수 있으리라.
"곧 뒤따라 갈 생각이오."
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부하들에게 집결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로위나, 당신은 편안히 휴식을 취하고 있어요. 곧 당신이 머물 방을 준비시키겠소. 오늘
밤 당신의 수고에 대해서는 내일 아침 돌아가기 전에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소."
11
앨리타는 어둠 때문에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없을 때까지 말을 달렸다. 쫓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확실해지자 그녀는 나지막한 관목 숲으로 들어가 안장을
내리고 푹신한 풀밭에 외투를 간 다음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다행히 밤공기는 그다지 차지
않았지만 앨리타는 빨리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한시바삐 디 강을 건너야 서머셋 가문이 존
경을 받는 잉글랜드 지방으로 들어갈 수 있을 터이고, 그곳에서라면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잠
자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혹시 사람들이 그녀가 동행이나 호위병도 없이 홀로
여행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감히 백작의 딸에게 그 이유를 물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눈을 감았고,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에반 그레이는 미친 듯이 앨리타를 찾아 헤맸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그녀가 눈앞
에서 스쳐 지나더라도 분간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지못해 성으로 돌아갔다. 그
는 앨리타가 그리 멀리가지는 못 했으리라고 확신했으므로 다음날 새벽 날이 밝자마자 가사
들을 이끌고 런던을 향해 쏜살같이 말을 몰았다. 그는 앨리타가 밤을 보냔 관목 숲 근처에
서 그녀를 따라잡았다.
일어나자마자 서둘러 길을 떠난 앨리타는 갑자기 뒤를 쫓는 말과 기수들을 발견하고 공포
감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없어진 사실을 제이미가 벌써 알아차리고 쫓아온 것일가? 그녀는
뒤에서 들려오는 외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재촉해 재빨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조랑말은 에반 그레이와 기사들이 탄 힘 좋은 군마와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에반
그레이는 쉽사리 그녀의 고삐를 낚아채더니 갑자기 말을 세웠다. 여행을 방해한 사람이 성
난 제이미가 아니라 그레이 경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앨리타는 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
가 사라진 것을 제이미가 알게 되면 얼마나 화를 낼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앨리타, 집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금 뭐하고 있는 거요? 호위병 하나도 딸
려보내지 않고 길을 떠나보낼 만큼 남편이 당신에게 이토록 무관심한 거요?"
우연히 앨리타와 맞닥뜨린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그레이는 태연한 척
물었다. 앨리타가 남편의 곁을 떠났다는, 제이미의 애인이 했던 말 때문은 아니었다.
"저, 전 런던의 아버님께 가는 길이에요, 제가 런던에 가로 싶어한다는 것을 제이미가 알
았더라면 당연히 호위병을 딸려보냈겠지만, 제가 좀 갑작스럽게 여행을 결심했거든요."
앨리타는 목언저리가 불그스레하게 물들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레이
경이 알아차렸을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이었다.
"제이미는 일 때문에 집을 비웠어요. 전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여행을 떠났구요."
"여행이요, 달아나는거요? 드디어 무식한 시골뜨기 남편에 대해 분별력을 되찾은 모양이
요, 지난번 만났을 때 보니, 당신은 그 반역자의 아들에게 빠져 있는 것 같았소. 안 그랬다
면 난 국왕의 분노를 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군대를 일으켜 당신을 강제로 되찾아 왔을거
요. 어쨌든 다행스럽게도 당신 아버지게서 사법부의 고위직 사람과 이혼절차를 거의 마무리
지으셨다고 하오. 난 아직도 당신을 원하오, 앨리타. 제이미 모티머가 당신과 잠자리를 같이
했든 말든 상관없소."
그는 갑자기 앨리타의 말고삐를 잡아당겨 자신이 온 방향으로 말머리를 틀었다.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죠?"
"그레이 성으로 가는 거요. 내 집은 천연 요새나 다름없소. 모티머의 빈약한 병력으로는
감히 공격할 생각도 하지 못할 거요."
" 싫어요, 그레이 경. 전 당신과 함께 가지 않겠어요. 전 아버님께 가고 싶어요."
"좋은 싫든 당신은 나와 함께 가여 하오, 앨리타. 이혼 수속을 밟는 동안 내가 당신을 안
전하게 보호하고 있다면 당신 아버지도 내게 감사할 거요. 일단 당신이 그 불한당 같은 자
식과의 결혼에서 자유로워지고 나며, 나와 결혼시키려는 게 당신 아버지의 생각이오. 어울리
지도 않게 백작의 딸과 결혼을 하겠다는 고약한 심보를 지닌 나쁜 자식한테서 무사히 구출
된 걸 감사하게 여기시오."
그레이 경은 감히 거역할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듯이 험악한 말투로 얘기했다. 그는 그녀
에게서 원하는 게 무었인지 똑똑히 알려주려는 것처럼 은근한 눈초리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앨리타는 불쑥 치솟는 혐오감을 가까스로 눌러참았다. 갑자기 에반 그레이는 그녀가 한때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모습과 전혀 달라 보였다.
"그래도 전 아버님께 가는 게 좋겠어요. 제발 고삐를 놓아주세요."
앨리타가 말하자 그레이는 악마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순 없소. 이제 당신은 내 것이오. 한때 모티머 가문에 속해있던 것들은 모두가 내
소유가 되었소. 모티머가 당신을 되찾겠다고 나타난다면 죽여버리고 말겠소. 그자는 절대로
당신을 데려가지 못하오."
"당신이 날 원하는 이육 바로 그 때문인가요? 모티머 가문에 속해 있던 것들을 빼았는 일
이 왜 그렇게 중요하죠?"
앨리타가 침착한 어조로 묻자 그레이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애길 하자면 길어지오. 하지만 지루한 얘기로 당신을 괴롭힐 생각은 없소. 킆레런스 모티
머는 반역자임에 틀림없고 죽어 마땅했소."
"제이미 얘기론 그렇지 않던 걸요. 제 마음은 바뀌었어요, 그레이경. 난 더이상 당신과 결
혼할 마음이 없어요."
앨리타가 반박했다. 그러자 그레이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큰소리로 웃어댔다.
"정말 우습군. 당신이 뭘 원하든 그건 상관없소. 당신 아버지와 나는 이미 서로 합의를 했
소. 이혼만 하게 된다면 모티머는 당신의 지참금을 되돌려줘야 할 테고, 그 재산은 내 것이
되는 거요."
"첫 번째 결혼은 어쩔 수 없이 강제로 했지만, 두 번째 결혼까지 강제로 하진 안겠어요."
앨리타는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제이미가 당신을 길들이는 데 실패한 모양이오, 앨리타. 그자의 실수를 내가 고쳐보도록
기꺼이 노력하겠소. 어쩌면 당신이 이혼을 하기 전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제
이미 모티머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잘 알겠소, 앨리타?"
"아뇨, 무슨 말이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당신은 내가 예전에 알던 사람이 아니에요. 어쩌
면 제이미의 말이 전부 옳은지도 몰라요. 어쩌면 그이의 아버님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반
역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죠."
그레이 경의 얼굴에 어두운 분노의 그림자가 재빠르게 스쳐갔다. 그의 모든 태도는 잔혹
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것은 예전에 앨리타가 한번도 본 적이 없던 에반 그레이의 모습이었
다.
"내 말 잘 들으시오. 당신의 좁은 소견 따위는 당신 머릿속에나 담아둬요. 매사에 내 말에
순종하기만 한다면 난 아주 관대한 남편이 될 거요.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침대에서
날 만족시켜주는 것과 내 아이들을 낳아주는 것뿐이오. 당신의 의견이나 비판 따위는 듣고
싶지도 않소."
앨리타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그레이 경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앨리타의 말 역시 뒤
를 따랐으므로, 그녀는 떨어지지 않도록 말의 갈기를 움켜잡아야만 했다. 호위병들에게 둘러
싸인 채 그레이 성을 향해 엄청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동안 앨리타는 그레이와 더이상 얘기
를 나눌 수가 없었다.
그레이 성은 에반 그레이의 말대로 철통같은 요새처럼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크리케
tm성처럼 오래되어 보이지도 않았고, 외부에서 함부로 접근하기 어렵도록 성벽이 깊은 못
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반원형의 성벽 가운데는 돌로 지어진 망루가 높이 서 있었고, 그 아
래로 들어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도개교가 그들이 성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내려져 있었
다. 성은 앨리타가 지금껏 보았던 그 어느 성보다 웅장했다. 성벽 안으로 들어서자 예배당과
풍성한 이엉을 얹은 헛간과 마구간, 돼지우리, 대장간, 정교한 모양의 굴뚝이 달린 부엌, 아
담한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이 보였다. 뜰 한가운데는 우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내 성을 본 소감이 어떻소?"
그레이는 자랑스럽다는 듯 주변을 가리키며 물었다.
"당신 성이라구요?"
앨리타는 오만하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그렇소, 내 성이오. 모티머 가문에 속해 있던 모든 것들은 이제 내 것이오. 성과 농노들,
당신 눈앞에 보이는 저 넓은 토지, 수십 년간 전해내려온 가문의 모든 부와 재산이 모두 내
것이란 말이오. 그리고 이제 당신도내 사람이오. 곧 이 모든 것들이 당신 것이 될 거요, 앨
리타."
"난 싫어요. 이곳에서 당신과 함께 지내고 싶지도 않구요. 이건 옳지 못해요. 난 결혼한
여자예요."
앨리타는 날카롭게 말했다. 그러자 그레이는 말에서 내리더니 거친 손길로 앨리타를 안장
에서 끌어내려 와락 껴안았다.
"머지 않아 당신은 결혼에서 자유로워질 거요. 그러니 나한테 빨리 익숙해지는 게 좋아."
그는 그녀에 대한 소유권을 자랑하듯 대담하게 그녀의 등과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앨리타
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그레이는 껄걸 웃으며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
다.
" 당신에 대한 내 욕망은 한번도 식은 적이 없소. 내가 얼마나 당신을 원하는지 느낄 수
있겠소."
그의 단단한 남성이 배를 눌러오자 앨리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레이 경, 제발 날 놔주세요. 당신 부하들이 보고 있잖아요. 우리가 정말로 결혼할 사이
라면, 부하들 앞에서는 날 존중해줘야죠."
앨리타는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켰다. 그녀는 절대로 그레이 경과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대로 순순히 따르겠다는 인상을 심어주어야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적어도 이 곳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거나 아버지에게 전갈을 보내기 전까지는 그레
이 경에게 협조해야만 하는 것이다. 설마 아버지가 정말 그레이 경과 모종의 합의를 한 것
은 아니겠지? 왜 제이미의 곁을 떠났던가 후회스런 마음이 일었다. 에반 그레이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나자 그녀는 절대로 이 남자와 결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에반 그레이의
아내가 되느니 평생 제이미의 낡은 성게 갇혀 지내는 편이 더 나았다. 제이미의 곁에 남아
있었다면 차차 시간이 흐르며 그의 신뢰감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 어쩌면 그는 절대로 그녀
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앨리타는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레이는 손을 치우며 앨리타한테서 한 걸음 물러섰다.
"당신 말이 맞아. 우리 결혼에 지저분한 소문이 따라 다니는 것은 나도 싫소. 당신을 소유
하고 싶은 내 욕망은 우리가 결혼할 때가지 미뤄두기로 하지."
그는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덧붙였다.
"우리가 단둘이 있을 대는 제외하고 말이오."
그런 다음 그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자, 안으로 들어갑시다. 당신 방을 보여주겠소. 성에서 젤일 좋은 방이오. 당신 마음에 들
었으면 좋겠군."
겉에서 보았듯이 성안은 타원형이었다. 벽마다 고급스런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고, 바닥
에 깔린 카펫은 푹식하고 아늑했다. 대형 응접실은 서머셋 성만큼이나 장엄해 보였고 어쩌
면 국왕의 윈저 성에도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살아 움직일 듯한 대형 그림들과 고상하고
진귀한 커튼으로 장식된 거대한 방들을 지나치며, 앨리타는 비단 능라직으로 짠 값비싼 옷
을 입은 제이미가 방 한가운데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에반 그레이를
따라 원형 계단을 올라가며 앨리타는 제이미야말로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여기가 당신 방이오."
에반 그레이가 두 개의 커다란 방이 연결된 침실 문을 열며 말했다. 첫 번째 방은 푹신한
의자들과 실을 잣는 물레로 장식된 개인 거실이었다. 안쪽 침실을 들여다본 앨리타의 입에
서 감탄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발목까지 빠져드는 듯한 푹신한 카펫과 방안을 장식한
새틴으로 만들어진 커튼은 모두가 부드러운 파스텔 색조였다. 누가 뭐래도 그 방은 안주인
을 위해 꾸며진 방이었다.
"너, 너무 근사해요."
앨리타는 더 이상 표현할 말이 없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당신 마음에 든다니 기쁘오, 앨리타. 언젠가 나도 저 침대에 당신과 함께 눕게 되겠지.
당신의 이혼 수속이 곧 마무리되리란 것을 알지 못했다면, 난 아마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는
잠자리를 미리 준비했을 거요."
앨리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그럴 수 없을
걸요! 화가 난 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오해한 그레이는 탐욕스럽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를 끌
어안았다.
"당신도 나와의 잠자리를 기대하는 것 같군. 모티머가 당신이 몰랐던 것들을 많이 가르쳐
주었소? 밤마다 몸을 비틀며 환희의 비명을 지르게 만들던가?"
그레이의 포옹은 좀더 과격해졌다.
"그자가 당신의 처녀성을 빼앗았다는 생각만 하면 속이 쓰리지만, 혹시 누가 알겠소? 그
자가 나를 위해 호의를 베풀었는지도 모르지. 얼마나 많은 걸 경험했소, 앨리타? 남자의 손
길이 닿기를 간절히 원하며, 당신 몸 안에 남자의 몸을 받아들이고 싶은 욕망이 어떤 것인
지, 그자가 가르쳐주던가?"
그래요! 제이미의 몸을 받아들이고 싶은 욕망이 뭔지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아니야! 절대
로 아니라구! 앨리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에반 그레이는 늑대처럼 그녀를 훑어보다 고개를 숙여 굶주린 듯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의 입술은 단단하고 집요했지만 앨리타는 달갑지 않은 그의 입맞춤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
부림을 쳤다. 그녀는 에반 그레이를 원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온몸으로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제이미를 떠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실수였다. 제이미의 키스는 그녀의
온몸에 짜릿한 욕망의 전율을 전해주었지만, 그레이 경의 입맞춤은 혐오감 그 자체였다. 지
금 당장 크리케스 성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녀는 이 세상에서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는 제이미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들은 채 돌아갈 것이다.
갑자기 애반 그레이는 그녀를 밀쳐냈다.
"날 기쁘게 하려면 앞으로는 좀더 협조적이어야 할 거요."
그의 목소리에서 위협이 느껴지는 것은 그녀의 착각일까?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는 앨리
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체취와 감촉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이 싫었다.
"전 당신을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레이 경. 전 남편에게 돌아가고 싶어요.
그게 안 된다면 런던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겠어요."
"당신은 이혼 수속을 끝마칠 때까지 내 보호 아래 이곳에 머물러야만 하오. 불행히도 난
밀수업자들에 관해서 국왕께 긴히 보고할 일이 있소."
새로운 희망에 앨리타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를 함께 데려갈 건가요?"
"아니오, 당신은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며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하오. 내 경호원인 길리언
기사가 내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거요. 내가 없는 동안 당신은 이 방을 떠날 수 없소. 언제
나 경비병이 문밖에서 당신을 지킬 거요. 하지만 당신 남편이 철통같은 성벽을 뚫고 당신ㅇ
르 구출하러 오리란 희망은 버리시오. 런던에는 소수의 기사들만 데려가고 나머지 병력은
대부분 내 성과,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인 당신을 지키도록 이곳에 남겨둘 생각이오."
그는 또다시 탐욕스런 눈빛으로 앨리타를 쳐다보았다.
"런던에서 돌아오면 당신의 무식한 남편이 잠자리에서 당신을 얼마나 잘 가르쳤는지 확인
해보겠소. 그때까지는 내가 그립더라도 좀 참으시오."
에반 그레이는 돌아서서 방을 빠져나갔다. 앨리타는 그의 뒷모습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에
반 그레이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아버지에게 조금도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였다. 사실
그녀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그녀와 에반 그레이의 결혼에 호의적이었다. 그녀는 얼마간 기다
렸다가 거실로 나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였다. 그려는 지금이라면 방심한 틈을 타 아무도
모르게 달아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커다란 덩치의 경비병이 그녀를 가로막고
섰다.
"뭐 필요한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는 공손하게 물었다.
나, 난 이곳을 떠나고 싶어요."
앨리타는 위엄을 갖추어 말했다.
"저는 그레이 경께서 런던에서 돌아오실 때까지 부인을 이 방안에 잘 모시라는 명령을 받
았습니다. 하녀가 곧 시중을 들어드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은 어서 방으로 돌아가 계십
시오."
그녀는 분노로 얼굴을 붉히며 휙 돌아서 방으로 돌아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감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소리 없이 분노를 삭였다. 감히 그레이 경이 나를 납치해
함부로 가두다니. 그녀는 한시바삐 이곳을 탈출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녀는 두 개의 창문을 살펴본 후 절망했다. 창문은 모두 침입자에 대비해 단단하게 창살
이 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 방에서 빠져나가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도개교와 성을
둘러싼 깊은 못을 어떻게 건너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제이미, 내가 대체 무슨 짓을 벌
인 거죠? 그녀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반문했다.
제이미는 몹시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플린트 지역을 돌아보며 그는 원하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근방에서 출몰한다는 밀수업자들에 대한
소문을 수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국왕이 부당하게 높은 세금을 징수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
로, 그 세금을 포탈하는 그들의 불법행위에 대해서 오히려 지지하는 쪽이었다. 웨일스 인들
은 잉글랜드 인을 무조건 혐오했고, 쓸데없이 외국에서 벌이는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
하기 위해 국민을 쥐어짜는 헨리 5세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밀수업자들에 대해 대대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어둠의 영주'를 영웅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았으므로, 그의 정체를 몹시 궁금해하며 그의
대담한 모험을 극구 칭찬했다.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으므로 제이미
는 흡족했다.
그레이 경의 호위병이 자신의 친척이라는 한 남자는 그레이 경이 어둠의 영주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고 제이미에게 말해주었다. 그와 한참 얘기를 나눈 제이미는 더이상 플린
트에서 알아볼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앨리타를 만날 마음
에 들떠 있었다. 그녀는 밤낮으로 그를 괴롭히는 어떤 기대 같은 것을 그의 내면에 심어놓
은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리고 제이미는 왜 그녀가 그를 배신했으면서도, 어둠의 영주의 정체에 대해서는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는지 몹시 궁금했다.
제이미는 성에 들어선 순간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건물 앞에서 그를
맞이하는 게일로드의 주름진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어. 무슨 일이지, 게일로드?"
게일로드는 제이미가 몹시 화를 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충격을 완화시킬
방법이 없으므로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렇습니다, 주인님. 부인에 관한 일입니다."
제이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앨리타에게? 앨리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어서 말해보게, 어서 사실대로 말하란
말야!"
게일로드의 어깨가 축 쳐졌다.
"솔직히 전 앨리타 아씨께 무슨 일이 생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주인님이 떠나신 다음날
아침에 식사를 가져갔는데,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더욱더 이상한 일은 문도 잠겨 있고, 하나
뿐인 열쇠도 제가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사라졌다구? 맙소사,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야? 그렇다면 누가 내보낸 게 틀림없잖
아?"
"정말로 전 모르는 일입니다. 성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것도 알아
내지 못했어요. 제가 알기론 아씨의 방 열쇠는 제 방 안전한 곳에 숨겨져 있었고, 절대로 누
구한테도 내준 적이 없습니다. 같은 날 아침 아씨의 말도 마구간에서 사라졌습니다."
"남아 있던 기사들은 뭘 하고 있었지? 앨리타를 찾아보았나?"
"그럼요, 곧바로 뒤를 쫓았지만 흔적도 찾지 못했어요. 저는 아씨가 아버님이 계신 런던으
로 가셨으리라고 짐작했지만, 런던으로 가는 길을 아무리 뒤져도 아씨를 찾지 못했습니다.
여행객들 중에서도 부인을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답니다.
"그녀가 없어진 지 얼마나 되었지?"
제이미가 다그쳐 물었다.
"오늘이 사흘째입니다."
"맙소사, 지금쯤이면 앨리타가 죽었거나 사나운 웨일스 놈들에게 납치를 당했을지도 모르
겠군! 왜 그랬을까, 게일로드? 도대체 왜 앨리타가 날 떠났을까?"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한 그의 목소리는 듣고 있기만 해도 민망할 정도로 처연했다.
"그 대답은 주인님이 마음속으로 잘 찾아보시죠."
게일로드는 그를 비난하듯 충고했다.
"난 앨리타 아씨가 어딜 갔는지 알아요."
로위나의 새초롬한 목소리에 제이미와 게일로드는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모두 대화에
열중해 있었으므로 로위나가 접근하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이미가 가면처럼 굳어진 얼굴로 로위나를 돌아보았다.
"이번 일에 대해 무얼 알고 있지, 로위나?"
"아, 아무것도 아니네요."
순간 로위나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언을 했다고 깨달으며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으므로 말을 이었다.
"가끔씩 잠긴 문 너머로 앨리타와 얘길 나눈 적이 있어요. 그녀는, 그녀는 갇혀 지내기가
죽기보다 싫다며 그레이 경한테 달아나고 싶다는 말을 내게 털어놓았어요."
"앨리타가 무었 때문에 당신에게 그런 얘길 털어놓는다는 말이오? 당신이 내 아내를 미워
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지 않소."
제이미는 코웃음을 쳤다.
"우린 같은 여자예요, 제이미. 여자들끼린 쉽게 속마음을 털어놓게 마련이죠."
"그래서 앨리타가 에반 그레이에게 가로 싶다는 말을 했단 말인가?"
제이미는 날카롭게 반문했다.
"오, 그럼요, 부인은 그레이 경에게 가기를 몹시 원했어요."
"그래서 그자에게 갈 수 있도록 당신이 앨리타를 방에서 탈출시켰군."
"아니,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겠어요. 그녀가 어떻게 달아났는지는
몰라요. 당신의 호위병들에게 물어보지 그래요? 그들은 당신 부인을 몹시 존경했잖아요. 어
쩌면 그들 중에서 누군가가 부인을 풀어줬는지도 모르죠. 그에 상응하는 황홀한 대가를 받
았다면 말이에요."
로위나는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야릇한 암시를 보냈다.
"거짓말! 어서 사실대로 말해! 당신이 앨리타를 물어줬지, 안 그래?"
제이미는 로위나의 팔을 움켜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그녀는 딱딱이를 부딪치는 소리를 냈
다.
"아니에요, 제이미! 난 아니에요!"
"맞아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군."
그는 허리띠에서 채찍을 푼 다음 손바닥에 내리치며 일부러 협박을 하는 시늉을 했다.
로위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제이미가 정말로 그녀를 때릴까? 앨리타의
말에 넘어가 그녀를 풀어주다니 정말로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제이미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으리라는 것은 로위나도 알고 있었지만, 앨리타를 눈앞에서 없애버릴 수 있다
는 생각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그녀는 분별력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제이미가 허공으로 채
찍을 높이 들어올리자 로위나는 공포에 휩싸였다.
"제이미, 때리지 말아요! 그래요, 내가 부인의 방문을 열어줬어요. 하지만 그녀가 먼저 나
한테 풀어달라고 간청했다구요. 부인이 그레이 경에게 가고 싶어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
예요. 지금이라도 그곳에 가보면 그의 침대에서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부인은 당신을
싫어했어요, 한시라도 빨리 그레이 경에게 가고 싶어했다구요!"
"나쁜계집 같으니라구!"
제이미는 로위나를 세게 밀어젖히며 소리쳤다. 그녀는 비틀거리다 탁자에 부딪혀 넘어졌
다. 그는 발딱 일어서는 그녀를 혐오스런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진실을 알게 되니까 가슴이 아픈가요? 부인이 당신보다 그레이 경을 더 좋아했다는 건
당신도 잘 알고 있었을 텐데요?"
로위나는 앙심을 품은 듯 물었다.
"더 심하게 다치기 전에 내 눈앞에서 꺼져, 로위나."
"지금 당신에겐 내가 필요해요, 제이미. 날 보내지 말아요."
그녀는 살금살금 다가와 아주 도발적인 태도로 그에게 몸을 기대며 속삭였다.
"내 손길에 당신의 육체가 얼마나 힘차게 반응했는지 벌써 잊어버렸어요? 당신만 허락한
다면 난 얼마든지 당신의 머릿속에서 앨리타를 지워버릴 수 있어요."
"어서 꺼지라니까!"
제이미는 그녀의 손길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물리치며 외쳤다. 그러자 로위나는 입술을 세
게 깨물었다.
"설마 진심으로 그러는 건 아니겠죠, 제이미."
제이미의 입술이 기늘어졌고, 끔찍한 지옥을 연상시키듯 그의 눈동자가 새까맣게 변했다.
"진심이오, 로위나. 앞으로 한 시간 안에 가방을 꾸려서 성을 떠나시오. 당신이 더이상 내
집에 있는 걸 참을 수 없어."
"날 내보내겠다는 건가요? 아무도 없는 세상에 홀로 나가란 말이죠? 작은 가방 하나만 달
랑 들로서?"
"원래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지만, 당신이 날 그렇게 인색하게 만들었소, 로위나. 어딜 가
면 당신의 오빠를 만날 수 있을지, 게일로드가 얘기해줄 거요. 그리고 거기까지 가는 데 충
분한 여비도 준비해줄 것이고. 그 이상은 나한테 바라지 마시오."
충격에서 분노로 변해가는 로위나의 얼굴이 꿈틀거리는 가면처럼 일그러졌다.
"떠나라면 떠나겠어요, 하자만 이렇게 우리 관계를 끝낼 수는 없어요."
이렇게 화를 낸다고 해서 제이미를 되찾을 수 없다고 갑자기 판단한 그녀는 작전을 바꾸
기로 했다. 그녀는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당신과 달리 이성적인 여자예요. 당신이 마음을 바꿀 수 있도록 일 주일의 여유를 주
겠어요. 난 당신의 불같은 성미가 어떤지 잘 알아요. 화가 가라앉고 나면 당신은 날 떠나보
내는 것이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닫겠죠. 마을에 내려오면 날 만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마나
일 주일이 지나고 나면 날 만날 수 없다는 걸 명심하세요."
그녀는 불길한 어조로 덧붙였다.
"내게 인색하게 군 걸 나중에 크게 후회할 날이 있을 거예요."
그녀는 홱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아주 무시무시한 적을 만드신 것 같군요."
처음부터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본 게일로드가 걱정스레 말했다.
"로위나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날 해치지 못해. 벌써 오래 전에 보냈어야 하는 건데,
저 여자의 안부를 지나치게 걱정했던 것 같아. 저 여잔 얼마든지 스스로를 돌볼 수 있을 거
야. 오빠가 잘 알아서 하겠지. 어쨌거나 난 저 여자한테서 손떼겠네. 한 시간 안에 떠날 수
있도록 자네가 살펴보게."
"그러죠."
게일로드는 정말로 로위나를 완전히 쫓아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듯 자신 없는 목소리
로 대꾸했다.
"그런데 앨리타 아씨는 어쩌죠? 정말로 부인께서 그레이 경에게 가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네. 로위나가 말했듯이 아내는 언제나 신발에 똥이나 묻히고 다니는 농사꾼보다는
부유한 그레이 경을 더 좋아했어."
제이미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주인님은 농사꾼이 아니십니다. 주인님의 혈통은 부인고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을 만
큼 고귀해요. 주인님은 훌륭한 가문 출신이십니다. 선조들 중에는 왕을 탄생시킨 분도 계시
다구요."
"내 아내에게 그렇게 말해보게나."
제이미는 스스로를 비웃듯 말했다.
"그레이 경이 부인을 차지하도록 내버려두실 겁니까?"
"그럴 순 없어!"
제이미는 소리를 질렀다. 그의 표정은 몹시 사나웠으므로 게일로 드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앨리타는 내 여자야. 그녀는 태어난 순간부터 내 사람으로 운명지어졌고, 앞으로도 내 사
람으로 남을 거야. 에반 그레이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갔지. 내 아내마저 빼앗도록
내버려둘 순 없어."
"그레이 성을 공격할 만큼 우리에겐 병력이 없잖습니까."
"그레이 성이 아니라 모티머 성일세. 그리고 요새로 직접 쳐들어 갈 생각이 아니네. 그 성
은 절대로 외부에서 침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내가
그 성벽 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을 자네는 벌써 잊었나?"
"제가 어떻게 잊었겠습니까."
"그럼 성 밑으로 거미줄처럼 복잡한 비밀통로들이 있다는 것도 기억하겠군. 어렸을 때 나
는 그 어두운 통로에서 곧잘 놀곤 했지."
"맙소사, 주인님, 그런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나이를 먹어서 정신이 없어진 모양이에
요."
"하지만 난 잊지 않았네, 친구. 난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그 터널을 구석구석 기억하
고 있어. 여기 크리케스 성에서 자라는 동안에도 난 내 선조들이 지켜온 성을 똑똑하게 기
억하기 위해 계속해서 집안 곳곳을 머리에 그려보는 게임을 즐겼네. 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난 기억을 더듬어 성안에 있는 비밀통로의 모든 입구와 출구를 하나하나 그려보았지.
지금도 모티머 성의 구석구석은 내가 그곳에서 살 때와 마찬가지로 선명하게 내 머릿속에
새겨져 있네."
게일로드는 놀라움과 감탄 어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늘 제이미가 대단한 사
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젊은 주인은 지금껏 여러 번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사실을 증명
해 보였지만, 또다시 그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성벽은 어떻게 지나시려구요? 주인님에게 선뜻 다리를 내려주진 않을텐데요."
제이미는 빙그레 웃었다.
"간단해. 터널 중에 하나는 성밖 언덕 근처의 작은 동굴로 연결되어 있거든. 자네도 기억
할지 모르겠지만 그 동굴 입구는 잡목으로 잘 가려져 있어서 그곳을 잘 아는 사람만 입구르
찾을 수가 있지. 비밀통로들은 성이 완전히 포위되었을 때를 대비해 탈출하기 위한 비상구
로 만들어진 걸세.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 성안으로 숨어 들어갈 생각이야."
잠시 생각에 잠겼던 게일로드가 입을 열었다.
"그럼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만일 통로들이 그 오랜 세월 동안 막혀버리지 않았고, 또
앨리타 아씨가 선선히 주인님을 따라나선다면 말이죠."
제이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동의를 하든 말든 나 아내를 데려오고 말 거야. 앨리타가 그레이를 더 좋아할는
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녀는 내 아내란 말일세."
앨리타가 단숨에 에반 그레이의 품으로 달아났다는 로위나의 말을 떠올리며 그는 끔찍한
고통과 분노를 맛보았다.
그는 애초에 사랑에 빠질 마음이 없었다. 하지마나 그의 육제는 그이 이성과 상관없이 움
직였고, 그가 미처 깨닫기도 저에 앨리타는 그를 완전히 사로잡아버렸던 것이다. 그에게 이
제 더이상 탈출구는 없었다. 놀랍도록 달콤한 그녀의 열정을 일단 맛보았으므로 다른 어떤
여자도 그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혹시 모르니까 재갈과 밧줄도 준비하십시오. 만일 부인이 비명을 지른다면 그레이와 경
비병들이 주인님의 목을 매달아버릴 거예요."
게일로드가 경고했다.
"걱정 말게, 게일로드. 놈들에게 붙잡힐 생각은 없으니까. 자네는 로위나가 내 말대로 성
을 떠나는지나 살펴보게. 내 계획을 그 여자가 모르는 것이 좋겠어."
"제가 직접 로위나를 마을로 데려가겠습니다. 기사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함께 데
려가실 겁니까?"
"아니, 혼자 갈거야. 내 계획이 그레이의 귀에 절대 들어가지 못하도록 아무에게도 발설하
지 말게. 이젠 모티머 성으로 떠날 준비를 해야겠으니 그만 나가주게. 정말 오랜만에 집에
돌아가게 되는군, 게일로드."
앨리타는 하녀가 준 잠옷을 갈아입은 뒤 곧 그녀를 내보냈다. 그녀가 잠옷으로 갈아입은
이유는 단지 하녀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달아날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경비병이 아직도 그녀의 침실 밖에서 버티고 서서 보초를 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녀가 나갈 때 곁눈질로 살펴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날 보초를 섰던 기사보다
훨씬 험상궂어 보였다. 그녀는 달아날 방법을 찾을 때까지 에반 그레이가 런던에서 예상보
다 오래 머물게 되기를 기도했다. 그녀가 감금생활에서 벗어나자마자 또 다른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에반 그레이가 돌아오기를 두려워하
며 지내기보다 제이미의 방에 갇혀 있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만 같은
심정이었다.
지금쯤 제이미는 성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녀가 사라진 사실을 알고 그가 화를 냈을까?
제이미는 그녀를 그리워할까? 그녀를 찾아 헤매지는 않았을까? 혹시 그녀가 없어졌다는 사
실에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로위나가 그를 즐겁게 해주고 있을까? 로위나와
제이미가 함께 있는 장면을 떠올리는 일이 이토록 가슴 아플 줄 그녀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
다. 하지만 제이미를 고스란히 로위나에게 넘겨준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으므로
스스로를 탓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제이미 모티머 같은 남자를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
다니,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밤이 깊어 자신의 손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둠이 짙어지자 앨리타는 바깥방으로
살금살금 걸어나갔다. 그녀는 경비병이 잠들기를 기도하며 자지 않고 깨어 있었다. 어두운
복도에 드문드문 켜진 횃불이 돌벽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경비병이 눈에 들어오지 않자 그녀는 날아갈 듯 기뻤다. 복도로 살그머니 나간 그녀는 재
빨리 달아날 준비를 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때 갑자기 거대한 그림자가 어두운
구석에서 마술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필요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하녀를 불러드리죠."
"오, 깜짝 놀랐잖아요."
앨리타는 한밤중에 밖으로 나온 자긴의 행동을 어떻게 변명해야 하나 재빨리 머리를 회전
시키며 숨을 몰아쉬었다.
"잠이 오질 않아서 따뜻한 우유라도 한 잔 마시면 도움이 되겠다 생각했어요. 하지만 굳
이 힐더를 깨워야 한다면 그만두겠어요."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경비병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앨리타는 갑자기 자신이 잠옷바람이라는 사실을 깨
달았다. 목까지 단추를 단단히 잠그기는 했지만, 얇은 옷감 아래로 불빛에 비친 그녀의 몸매
는 그림처럼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돌아서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녀의 뺨은 빨갛게 달아오랐고, 가
슴이 마구 뛰고 있었다. 에반 그레이도 없는 집안에서 그녀의 안전은 오로지 기사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녀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오늘밤에도 탈출은 불가능했으므로 앨리타는 마지못해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
았지만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때 작은 소리가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것은 돌과
돌이 긁히는 듯한 미세한 소리였다. 그녀는 눈을 번쩍 뜨고 어둠을 응시했지만 아무것도 보
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 감각은 생생하게 살아나 움직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
녀는 누군가 그녀의 방에 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소리를 내기도 전에 누군가
의 손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앨리타는 두려움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낮고 쉰 목소리를 들었을 때,k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한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소리지르지 마시오. 안 그러면 불쾌한 수단을 동원해야 할지도 모르겠소."
12
충격에 넋이 앨리타는 소리를 지르고 싶어 지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제이미
가 그녀의 방에 들어올 수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공기로
변해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마법사가 아닌 이상 말이다. 창문에 굵은 창살이 박
혀 있고, 경비병은 그녀의 방문을 지키며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그녀는 벌써 사
흘째 달아날 방도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지 않았던가.
앨리타의 입을 막았던 손을 약간 떼며 제이미는 거칠게 속삭였다.
"당신고 당신 애인의 목숨이 아깝다면 소릴 지르지 않는 게 현명할 거요."
"걱정 말아요, 제이미. 소리지르지 않겠어요."
앨리타는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방안이 칠흑처럼 어둡지만 않았다면 앨리타는 제이미
의 눈동자가 불신으로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었으리라.
"어서 갑시다. 소리내지 말고 움직여요."
드다 재촉했다. 그러자 앨리타는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벗어놓앗던 옷을 더듬어 찾았다.
"맙소사, 지금 뭘 찾고 있는거요?"
제이미는 신경질적으로 꾸짖었다.
"옷이오."
앨리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대답했다.
"잊어버려요, 시간이 없소. 필요한 옷은 내가 나중에 모두 사주겠소."
제이미는 그녀의 팔을 낚아채며 앞으로 끌어당겼다.
"어디로 데겨가려는 거죠? 어떻게 여길 들어왔어요? 당신은 마법사라도 되나요?"
"궁금한 건 나중에 말해주겟소.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다는 말은 행여라도 하지 마시오., 강
제로라도 당신을 끌고갈 테디. 에반 그레이가 당신과 잠자리를 같이했다고 해도 당신은 여
전히 내 아내요, 앨리타. 난 절대로 그자에게 당신을 내주지 않겠소. 만일 오늘밤 당신 침대
에서 그자를 발견했다면 단숨에 그놈을 죽여버렸을 거요."
"난 그 사람과......."
그녀를 끌어당기던 제이미가 시커먼 벽 앞에 갑자기 멈춰서는 바람에 앨리타는 그의 몸에
부딪혔다. 그러자 그녀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앨리타는 소스라치게 놀라 또다시 말꼬리를 흐리며 제이미가 벽한구석을 조심스럽게 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조금 전에 들었던 것처럼 돌이 긁히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의 입에서는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살작 벌어진 벽 뒤로 숨겨진 통로가 드러나자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오, 이렇게 해서......"
"조용히 하라니까!"
제이미는 그녀를 나무라며 손을 잡아끌었다. 비밀통로 입구의 한쪽 벽에는 그가 남겨두었
던 횃불이 타고 있었으므로, 앨리타는 괴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듯 끝없이 펼쳐진 터널을
볼 수 있었다. 제이미는 횃불을 손에 들기 전에, 열려 있던 벽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이런 걸 어떻게 알았......?"
"난 이 성에서 십오 년을 살았소."
그녀가 질문을 끝내기도 전에 제이미는 말했다.
"난 이곳 지리를 내 손바닥처럼 알고 있소. 우리 아버님께서 내가 걸음마를 떼자마자 이
곳 비밀 터널들을 보여주셨소. 난 종종 여기서 적들의 치열한 공격에 포위당한 기사가 된
것처럼 성을 탈출하는 놀이를 하곤 했지. 이 통로는 소리가 잘 전달되지만, 당신 애인에게
구해달라고 소리칠 생각은 말아요. 그레이의 침실 밑을 지난 다음, 못 아래쪽으로 터널을 빠
져나가야 안전할 거요."
"소리치지 않을 테니......"
"거짓말할 생각은 말아요."
제이미는 앨리타를 이끌고 미로처럼 얽힌 비밀 터널을 따라 걸어가며 엄하게 경고했다.
앨리타는 복잡한 미로에서 그가 어떻게 그토록 정확하게 길을 찾아가는지 정말 놀라울 따름
이었다. 발등으로 뭔가 털이 부숭부숭한 동물이 지나가자 그녀는 낮게 비명을 질렀다. 제이
미는 조용히 하라는 듯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고, 앨리타는 가까스로 침착하려 애를 썼다.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더이상 걸어가릴 거부하며 제자리에 멈춰섰다.
"여긴 못 아래쪽이라 습지일 뿐이오. 이 터널은 못 아래를 통과하게 되어 있소. 조심해요,
벽에서 물이 새어나와 못을 다 지날 때까지는 바닥이 미끄러울 거요."
제이미는 조바심을 내며 설명했다.
앨리타는 맨살에 와닿는 찐득찐득한 이끼와 차가운 진흙의 감촉을 느끼며 미끄럽다는 정
도의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는 지점에선가 그녀는 실내화를 잃어버렸다. 제
이미는 기우뚱 넘어지려는 그녀를 부축해, 그녀의 손에 횃볼을 넘겨주고 번쩍 안아올렸다.
그때까지 앨리타는 뼛속까지 스미는 한기에 몸을 떨고 있었으므로 그의 거대한 몸에서 전
해오는 온기가 몹시 반가웠다. 제이미는 그녀에게 몹시 화가 난 듯 행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탓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제이미의 곁을 떠났지만, 더욱더 견디기 힘든 구렁텅이로 뛰어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어가며 구불거리는 비밀통로를 계속해서 걸어갔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나타나질 않자 앨리타는 서서히 제이미가 길을 잃었나보다고 생가하기 시작했
다. 축축한 습지를 지나고 나자 앨리타는 그만 제이미가 자신을 내려놓을 것이라고 짐작했
지만, 그는 마치 그녈르 떼어놓기가 싫다는 듯 계속해서 그녀를 안고 걸었다.
제이미는 정말로 앨리타를 내려놓기가 싫었다. 다시 그녀를 찾은 지금, 그는 절대로 어리
도론 그녀를 보내고 tolv지 않았다. 그의 품안에 있는 그녀는 너무나 따뜻하고 부드럽고 감
촉이 좋았다. 지금 그녀를 잃는다면 수년 전 아버지를 잃었던 것과 같은 비극을 겪는 고통
을 맛보게 되리라.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달아났다는 생각을 떠올리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에반 그fp이에게 앨리타를 내줄 수가 없었다. 앨리
타가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원하고 있었
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녀를 원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녀를 사랑하리라.
빌어먹을 여자 같으니라구!
지옥 같은 고통을 내게 안겨주며 인내심을 시험하다니. 내 마음을 송두리째 헤집어놓고서,
다른 남자에게로 달아나다니. 감히 그녀를 사랑하게 만들어놓다니......
앨리타는 제이미가 그녀를 안고 터널을 빠져나가는 동안, 산 손으로는 횃불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목에 매달렸다. 마침내 그들이 좁은 통로를 빠져나와 사람이 가까스로 설
수 있을 정도 높이의 넓은 공간에 도착했을 때에도 날이 밝으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은 것
같았다. 제이미가 그녀를 내려놓았다.
"동굴 입구까지는 당신 혼자 기어 나가야 하오. 반대쪽에서 날 기다려요. 횃불을 끄자마자
나도 따라나가겠소. 불빛은 사람들 눈에 띄기 쉽상이오. 아침까지는 사람들이 당신이 없어진
걸 모르는 게 좋아. 그때쯤은 우리도 거의 집에 도착해 있을 테니까."
제이미는 그녀를 작은 원형 통로 쪽으로 밀었다. 앨리타는 바닥에 엎드려 무릎과 팔꿈치
로 기어서 좁은 통로를 빠져나갔다. 그녀는 신선하고 깨끗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ㅣ
며 제이미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곧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입구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동
굴 입구에 돌과 나뭇가지를 쌓아 감쪽같이 가렸다.
일을 마친 제이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더니 가까운 숲으로 데려갔다.
그이 검은 말이 주인을 반기듯 콧소리를 냈다. 제이미는 앨리타를 안장에 태운 뒤 자신도
말에 올랐다. 그이 따뜻한 가슴이 그녀의 등에 느껴진 순가. 그는 곧 크리케스 성을 향해 말
으 몰았다.
앨리타는 제이미의 든든한 품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제이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지금은 푹 자둬요, 앨리타. 성에 돌아가면 서로 얘기할 게 많을테니.:
그들은 밤새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자 앨리타가 얼마나 얇게 옷을
입었는지 알아차린 제이미는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녀의 뱃속에서 허기
를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들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지금 멈춰서서 머뭇거리는 건 너무 위험하니 조금만 참아요. 지금쯤이면 당신 애인이 당
신이 사라진 걸 알고 기사들을 풀어 당신을 찾도록 명령했을 거요. 일단 크리케스 성에 도
착하면 그자도 감히 국왕의 분노를 사면서까지 우릴 공격하진 않을거요."
앨리타는 분통을 터뜨렸다.
"어떻게 감히 그레이 경을 내 애인이라고 부를 수가 있죠! 내가 가고 싶어서 그에게 간
게 아니에요! 당연히 그 사람을 내 침대에 들이지도 앟았구요!"
"그랬소? 하긴 당신이 침대에 혼자 있기에 조금 놀라긴 했소."
그는 무뚝뚝한 그의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그레이 경은 지금 성에 있지도 않아요. 그는 성에 데려다놓자마자 런던으로 떠났어요. 밀
수업자들에 대한 보고를 받기 위해 국왕 폐하가 그를 부른 모양이에요."
제이미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듯 빤히 쳐다보았다.
"그자에게 내가 어둠의 영주라는 말을 했소? 곧 왕의 세금 관리인들이 날 잡으러 들이닥
칠 것에 대비해야 하오?"
"왜 날 못 믿는 거죠?"
"그러는 당신은 왜 그레이한테로 도망을 쳤소?"
제이미는 소리쳤다.
"그런 게 아니에요.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죠?"
제이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제는 로위나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자신이 없었다. 바로
그때 성이 보이기 시작했고, 완전 무장을 한 기사들이 그들을 맞이하러 나왔으므로 두 사람
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사실 무장한 기사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았으므로 앨리타는 그들이
모두 어디에서 왔는지 의아했다.
"괜찮으십니까, 제이미 영주님?"
가일즈 기사는 앨리타에게 비난하느 듯한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그렇다네, 가일즈 기사. 보다시피 내 아내를 되찾았지. 자네는 내 명령대로 일을 처리했
나?"
"예. 영주님께서 시키신 대로 사람들을 모집했습니다. 곧 좀더 많은 병력이 도착할 겁니
다. 부유한 웨일스 귀족이 개인 사병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널리 퍼뜨려놓은 상태입니다."
"부유하다구요.?"
앨리타는 제이미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아직도 몰랐소, 부인? 밀수는 수입이 좋은 사업이오. 난 당신의 지참금 따위는 전혀 필요
하지도 않소. 그 돈에는 한 푼도 손대지 않았소. 그 돈은 당신 재산이니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부유하다고 했나요? 그런데 왜 당신은 땅 한 뙈기도 없는 무일푼인 가난뱅이처럼 행동했
죠?"
앨리타는 화를 내며 되물었다. 그러자 제이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땐 그게 편리할 것 같았고. 가난뱅이와 농사꾼이라는 말은 내가 한 게 아니라 당신이
표현한 거요. 게다가 내 땅은 엉뚱한 자에겍 빼앗긴 상태이고, 내겐 정말로 땅이 없소."
앨리타는 제이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그의 혈통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귀하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수시로 그를 모욕했었다. 그녀는 불법행위
로 벌어들인 그의 재산이 아버지의 재산과 맞먹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남루한 옷차림과 허름한 살림살이가 눈에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그가 부자라는 것
을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성벽을 지나 안뜰로 들어서자 안에는 더 많은 병사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에서
내린 제이미는 그녀를 안아서 내려주었다.
"방으로 먼저 들어가시오. 나는 부하들과 할 얘기가 있소. 게일로드가 먹을 것과 목욕물을
준비해줄 거요."
"또다시 방에 갇혀 지내진 않겠어요."
"또다시 그레이에게 달아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소?"
"난 그레이 경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난 그 사람이 싫어요."
제이미의 눈썹이 불끈 위로 치켜올랐다.
"정말이오? 그런데 난 왜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을까? 어서 들어가요, 앨리타. 성안에서는
어디든 마음대로 다녀도 좋소. 당신을 방에 가두어놓으면 또다시 누군가를 꼬드겨 달아나겠
재. 아주 쉽게 로위나를 설득해 방에서 풀어주도록 만들었더군."
앨리타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로위나가 날 풀어주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내가 자백하게 만들었소. 그랬더니 당신이 그레이에게 달아났다는 말을 털어놓더군."
"그래서 당신이 무턱대고 최악의 상황을 믿어버린 것이로군요. 내가 없는 동안 로위나가
당신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나요?"
앨리타가 씁씁한 어조로 말하자 제이미의 검은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 여잔 내보냈소. 로위나는 더이상 당신을 괴롭히지 못할 거요."
"그 여잘, 그 여잘...... 내보냈다구요?"
앨라티는 몹시 놀랐다. 이제 제이미를 독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이제 그녀가 할 일은 그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일뿐이었다.
"그 얘긴 나중에 합시다. 아주 한참 뒤에, 내 화가 누그러진 다음에 말이오. 지금 얘길 시
작하면 나는 내 화를 자제할 수 없을 것만 같소. 하지만 미리 경고해두는데, 당신한테서 솔
직한 설명을 듣기를 기대하겠소."
앨리타는 그를 한참 응시하다가 말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식삭를 하고 목욕을 끝내
자, 그녀는 너무나 피곤했으므로 침대에 쓰럴져 깊이 잠들었다. 두 시간 뒤 제이미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는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참
동안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다른 여자들을 전부 마다하고 그녀만을 특별하게 생
각하는 이유가 무었인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밝은 후광처럼 얼굴을 감싸고 있는 굽실굽실하게 늘어진 긴 은빛 금발머리 때문에, 그녀
는 천진난만한 천사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천사라 아니라 피가 뜨거운 정열적인 여인
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부드럽고 여성스러웠소, 피부는 분홍색 크림빛이었다. 그녀의 육체는
신이 특별히 재능을 발휘해 빚어놓은 것만 같았다. 자그마하면서도 농염하고 풍요로운 그녀
의 몸매는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그느 그녀에게서 손을 떼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곤하게 잠
든 그녀를 깨우기는 싫었으므로 제이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앨리타는 피곤이 모두 풀린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나 남편의 분노를 마주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오후 내내 낮잠을 잔 모양이었다. 그녀는 제일 예쁜 드레스를 골라
입었다. 그녕의 풍만한 가슴이 강조되어 보이도록 목성이 많이 팬 상아빛 실크 드레스였다.
머리장식은 하지 않기로 하고, 그녀는 머리칼리 은빛 폭포처럼 빛날 때까지 계속해서 머
미를 빗었다. 그러나 그녀의 세심한 준비는 모두 헛된 것에 불과했다. 제이미가 저녁 식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번이 아닌 기사들과 함께 충직한 게일로드만이 식탁
에 앉아 그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씨께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믿고 싶습니다. 저희들 모두 걱정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게일로드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투로 말했다.
"제이미도 포함해서 말인가요?"
앨리타는 농담하듯 물었다.
"그럼요, 제이미 도련님이 제일 많이 걱정하셨어요."
제일 화를 많이 냈겠죠. 앨리타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무 화가 나서 아직까지 분이 안 풀
려, 나를 마주하기조차 꺼려할 만큼 말이에요. 그이는 왜 언제나 내 사랑을 무너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일까?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하긴, 그레이
경에게 돌아가기 위해 달아났다고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앨리타는 재빨리 저녁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낮잠을 오래 잤으므로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그녀는 촛불을 켜고, 베스가 잠자리를 준비하기 위해 방에 들어왔을 때까
지 줄곧 흔들리는 불꽃을 지켜보았다.
"남편 건강은 좀 어때요? 상처가 다 나으셨길 빌어요."
베스가 잠옷으로갈아입혀주는 동안 앨리타가 말했다.
"제 남편은 다 회복되었답니다."
베스는 안절부절못하며 대꾸했다. 그녀는 밀수업자들을 밀고한 사람이 바로 앨리타였다는
소문을 들었으므로, 자신이 행여 실수를 해서 또다시 마을 사람들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지
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당혹스러워하는 베스의 태도를 재빨리 간파한 앨리타는 그녀의 두려움을 없애주려고 입을
열었다.
"난 마을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았어요. 베스. 나는 절대 그런 끔찍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니
에요. 만일 그랬다면 내 남편을 배반하는 일이 되겠죠. 내가 그토록 비열한 짓을 할 사람이
라고 생각해요?"
앨리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베스는 말했다.
"아뇨, 아씨 저는 로위나가 퍼뜨린 그 소문을 믿고 싶지 않았어요. 저뿐만 아니라, 아씨께
서 그런 짓을 하실 분이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아요. 하지만 제이미 영주님게서 아씨를
방에 가두셨을 땐, 다들 아씨께서 처벌을 받는 것이라고 여겼어요. 로위나가 사악한 소문을
퍼뜨렸죠. 하지만 아씨께서 결백하다고 맹세하신다면 전 아씨를 믿겠어요."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 있어요, 베스."
"무슨 일을 맹세를 한다는 거죠, 부인?"
앨리타와 베스는 둘다 소스라치게 놀라 제이미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느새 방에 들어오 문
설주에 넓은 어깨를 기대고 서 있었다.
"그만 물러가요, 베스. 남편과 단둘이 할 얘기가 있어요."
앨리타는 베스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제이미에게 달아나서 미안하다는 것과 그
레이 경의 성에 갇혀 지낼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
람은 오직 그뿐이라는 사실을 한시바삐 털어놓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났다.
베스는 앨리타에게 안쓰럽다는 시선을 던진 뒤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제이미는 문가에서 비켜나 조용히 문을 닫았다. 앨리타는 순결한 하
얀색 잠옷을 입고, 나비처럼 연약해 보이는 모습으로 침대 발치에 서 있었다.
"저녁 내내 일부러 날 피한 건가요?"
그녀는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겠소."
제이미는 정면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인정했다. 두 사람은 아주 가까이 서 있었다. 앨리타
가 속삭이는 숨결이 그이 뺌을 부드럽게 간질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갑자기 거대한 거
인의 손이 그의 가슴을 움켜지며 숨통을 막은 것처럼, 제이미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
었다. 그는 앨리타를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는 자신이 결코 이성을 차릴 수 없
으리라는 가실을 깨달으며 마지못해 뒤로 물러났다. 그는 앨리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나 많았고, 정말 자세히 그녀의 설명을 듣고 싶었다.
갑자기 앨리타는 돌아서더니 침대 끝에 걸터 앉았다. 그녀는 제이미가 궁금해하는 것이
무었인지 알았으므로 먼저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을 떠날 때 그레이 경에게 가려던 생각은 없었어요."
"그럼 어딜 가려 했소?"
"아버님이 계신 런던으로요."
그는 그녀의 말을 전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랬지?"
"죄인처럼 방안에 갇혀 지내는 게 행복하겠어요? 당신은 나와 사랑을 나누면서도 내겐 조
금도 마음을 쏟지 않았어요. 그러고 나선 내가 당신을 배반했다고 비난했죠. 당신은 나보다
로위나를 더 좋아했어요. 난 그걸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요."
"내가 당신보다 로위나는 더 좋아했다니? 아니, 절대 그렇지 않소! 우리가 결혼한 뒤로는
로위나에겍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하늘에 두고 맹세할 수 있소."
앨리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이미는 전에도 로위나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는 말
을 했었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었다. 하지만 하늘에 두고 맹세한다는 말은 의미가
달랐다. 명예를 아는 남자라면 진심이 아닌 일로 하늘까지 들먹이며 맹세할 수 없는 법이었
다. 그녀는 자신이 제이미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을 때조차도 그가 명예를 지키는 남자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
"이젠 당신이 고백할 차례요. 당신은 나보다 에반 그레이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공공연
하게 내비쳤지.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그이 침대로 달려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강렬했고, 그의 표정은 사뭇 긴장되어 있었다.
그의 강렬한 시선을 받은 앨리타가 그를 노려보자, 둘 사이의 긴장감은 마치 화살을 매긴
활시위처럼 팽팽해졌다.
"난 그레이 경에게 달아나지도, 그와 한 침대를 쓰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하늘에 맹세코
말할 수 있어요. 난 런던으로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가 중간에 방해를 했어요. 그레이는 마
치 내가 크리케스 성을 떠난 시기를 정확하게 알았던 사람처럼 길목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
어요."
그의 눈빛은 그녀의 말을 믿고 싶어하면서도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는 안타까움을 담고
있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소.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난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당신을 되찾아
왔을 거요. 난 절대로 당신을 보낼 수 없소, 앨리타."
"난 더이상 당신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앨리타는 쉰 목소리로 고백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소?"
어리둥절해진 그의 목소릴가 기이하게 갈라졌다. 그러자 앨리타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그, 그렇게 갑작스러운 변화는 아니에요,"
그녀의 턱을 손가락으로 잡으며 제이미가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그의 눈동자
는 거짓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무자비하고 강렬했다.
"지금 무슨 얘길 하려는 거요, 앨리타? 갑자기 내 매력에 압도당하기라도 했다는 말이오?
가난한 농사꾼인 나한테? 나한테서 더이상 퀴퀴한 말똥냄새를 못 느끼겠다는 뜻이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빈정거리듯 말했다.
"난 벌써 오래 전부터 당신을 비천한 농사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정말 바
보처럼 어리석어요."
그녀는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말했다.
"바보처럼 어리석다구! 할말이 그게 다요?"
그의 고함소리는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거칠었지만, 앨리타는 그 정도에 기가 죽을 정
도로 마음이 약한 여자가 아니었다. 턱을 바들바득 떨면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도 기죽
지 않았다.
"아뇨, 더 있어요."
그의 표정은 폭풍 전야처럼 일그러졋다.
"어서 계속해보시지."
"당신은 내가 아는 그 어떤 남자보다도 용감해요. 때론 당신의 거만함이 참을 수 없을 때
도 있지만, 당신은 늘 주변에서 따르는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대했어요. 당신은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정직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에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잘생겼구요."
제이미는 그녀가 헛소리라도 하고 있다는 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보처럼 어리석다니?"
"그렇기도 해요. 자신의 아내가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눈치채지 못한다면 바보가 분명
하죠. 또 그만큼 어릭석으니까 아내를 못 믿는 것이구요."
제이미의 심장은 몸밖으로 튀어나올 듯 요란하게 고동쳤다. 그는 앨리타의 말을 믿고 싶
었다. 그의 온 마음과 영혼으로 그녀를 믿고 싶었다. 그러나...... 에반 그레이와 그녀의 관계
에 대해 진실을 숨기기 위해 그녀가, 그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읊조리는 것에
불과하다면 어쩌겠는가?"
"나도 당신을 믿고 싶소."
그는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의 몸에서 전해지는 열기가 그에게 불길을 일으킬 만큼 가까
운 거리였다. 마치 그는 그녀를 만지면 연기로 변해 사라질까 두렵다는 듯 조심스럽게 손으
뻗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너무나 간절하게 그녀를 원했기 때문에 그녀가 그런 고뱍을 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제이미"
그녀는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다음 순간 그녀는 그의 품안에 꼭 안겨 있었다. 그녀의 심
장이 뛰고 있는 소리가 마치 자신의 것처럼 들릴 정도로 제이미는 그녀를 세차게 껴안았다.
"오, 맙소사, 앨리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내가 당신을 원하는만큼 절실하게 당신을
원하지 않을거요."
"그럼 날 가지세요, 제이미. 난 당신 것이에요."
그녀의 얼굴을 훑던 그의 시선은 그녀의 눈길에 머물렀다. 오랫동안 미뤄왔던 기대감이
더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슴이 저릴 듯 부드러운 그의 시선을 바라보며 앨
리타는 복잡한 수수께기 같은 남편의 또 다른 매력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쨋든
그는 그녀의 마음과 영혼의 문을 활짝 열었고, 이제 그녀는 결코 예전의 그녀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로 내려왔고,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 위에서 춤을 추었다. 그는
굶주린 듯 그녀의 입술을 덮기 전에 먼저 눈빛으로 그녀에게 키스했다 발뒤꿈치를 들어오린
그녀는 입을 벌리고 뜨거운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그는 그녀의 몸을 부숴뜨릴 듯 껴안으며
그녀의 입술과 턱과 목덜미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잠옷 단추를 풀고 그녀의 가슴을 찾는 그의 손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뜨거운
입술로 새하얗게 솟은 젖무덤을 불태울 듯 간질였소, 혀로 민감하게 부불어오른 유두를 애
무했다. 앨리타는 경이로운 감각에 비명을 질렀다. 그는 실크처럼 매끄러운 그녀의 배를 거
처 그녀의 보드라운 엉덩이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가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침대로 가려
하자, 앨리타는 그를 막았다.
"아뇨, 아직은 안 돼요."
그녀는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나도 당신을 만지고 싶어요."
자신이 한 뻔뻔스러운 말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제이미는 수줍
은 듯 미소를 지었다.
"마음대로 해요, 내 사랑. 하지만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소."
"날 이렇게 만든 사람은 당신이니까 참아야 해요."
앨리타는 놀리듯 말하며 그의 셔츠 아래를 잡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제이미는 팔을 들
어올려 그녀가 자신의 옷을 벗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자, 이젠 어쩌지?"
그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에 난 매끄러운 체모를 어루만지
다. 넓은 어깨와 등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그의 근육이 꿈틀꿈틀 긴장
하며 일어섰고, 그의 입술에서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앨리타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다
시 속삭였다.
"이젠 당신을 맛보고 싶어요."
그녀가 그의 작은 젖꼭지를 입술로 물며 뜨거운 혀끝으로 무자비하게 간질이자 제이미는
폭발할 듯 신음소리를 흘렸다. 제이미는 뒤로 몸을 빼려 했지만 앨리타는 그의 엉덩이를 잡
고 계속해서 유혹적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녀가 그의 바지끈을 조심스레 풀어 엉덩이까지
내려뜨리자, 단단하게 부푼 그의 남성이 드러났다. 그의 몸은 너무나 아름다워, 보는 것만으
로도 앨리타는 온몸이 흥분되었다. 그녀는 아주 짧은 순간 동안 그의 눈동자를 그윽한 눈빛
으로 들여다보다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그의 배에 촉촉한 보슬비처럼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제이미는 거친 숨을 헉 들
이쉬며 그녀를 일으켜세우려 했지만, 앨리타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밀쳐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그의 남성을 가만히 움켜쥐자 그는 격렬하게 반응했다. 그녀의 입술이 그으이
몸에 닿는 손간, 그는 고통으로 가득 찬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맙소사, 민망한 일을 당하기 전에 그만둬요, 앨리타."
그는 거칠게 그녀를 밀어내더니 재빨리 부츠와 바지를 벗었다. 그녀를 향해 다시 돌아선
그의 눈빛은 마치 악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고, 그것을 본 앨리타의 호흡은 한층 빨라졌다.
"자, 이제 당신 차례요, 내 사랑."
그는 재빨리 그녀의 잠옷을 벗겼다. 곧 두 사람은 똑같이 벌거벗은 몸으로 마주섰다. 숨가
쁜 그의 호흡은 그녀의 육체가 그를 얼마나 기쁘게 만드는지 잘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을
휘감는 그의 팔에 안긴 앨리타는 깨끗하고 남성다운 그의 체취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는 순간, 그녀는 곧바로 천국으로 날아갔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
고 그녀의 부드러운 엉덩이를 양손으로 움켜잡은 채 뜨거운 혀로 그녀의 몸 사이를 헤집었
다.
그녀는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허공에 붕 뜨는 듯한 기분으로 정신을 잃을지
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제이미는 어느새 그녀를 안고 침대로 다가가고 있었다. 침대에 누
운 두 사람의 팔다리가 순식간에 얽혀버렸다. 곧 그는 조금 전에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달
콤한 고문을 그녀에게 복수하듯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은 그녀의 가슴과 배, 그리고 허벅지 안쪽의 민감한 살갗으로 불을 지피듯 움직
였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몸안으로 들어가자 꿀처럼 달콤한 물기가 그의 손길을 반기며
가장 은밀한 공간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ㅟ며 애원했다.
"제이미, 제발, 지금이에요."
그러나 그의 나른한 미소는 아직 고문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앨리타가 어
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쌓아올린 베개 위
에 머리를 기대고 누우며 그녀의 다리를 벌려 자신에게 걸터앉게 한 다음, 그는 깊숙하게
그녀의 몸안으로 들어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황홀한 느낌에 앨리타는 비명을 질렀다.
"이게 마음에 드오, 내 사랑?"
그는 엉덩이를 움직이면 동시에 그녀를 아래로 잡아당겨 더욱더 깊숙하게 그녀 안에 자리
를 잡았다. 앨리타는 커다란 신음소리와 함게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는 격렬하게 하제를 움직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환희의 절
정이 찾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몸을 계속해서 움직이며 상체를 일으켜 그녀의 유두를 입
으로 물자 앨리타 역시 절정의 순간이 시작되는 것을 느꼈다. 거친 비명소리와 함께 제이미
는 그녀를 세차게 끌어안으며 그녀의 몸안 깊숙한 곳에 뜨거운 액체를 내뿜었다. 따뜻한 액
체가 하체를 적시는 감미로운 느낌에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앨리타는 여전히 제이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아직도 그
녀의 몸안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그녀는 그의 하체에 걸터앉은 채 그대로 있었다.
"이렇게 믿을 수 없을 만큼 황홀한 경험은 처음이오."
제이미는 그녀의 입술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 막 경험한 순간들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
그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전혀 생각도 해보지 못했었소. 내가 사......"
그는 갑자기 말을 중단한 채 앨리타를 빤히 쳐다보았다. 만일 내가 지금 그녀에게 사랑한
다고 말했다면, 그녀는 날 비웃었을까? 그녀는 에반 그레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그
에게 애정을 품고 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게 관연 짐심일까? 지금 그녀에게 사랑을 고
백한다면 그녀는 진심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을 받아들여 줄까?
앨리타의 눈이 커다래졌다. 지금 막 제이미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았다. 그
런데 왜 무었 때문에 말을 멈추었을까?
"계속하세요, 제이미. 뭘 생각도 해보지 못했었다는 말이죠?"
그녀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자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킨 제이미가 내뱉었다.
"금방 사랑을 나누고 나서도 또 이렇게 절박하게 여자를 원하게 될 줄 생각도 해보지 못
했었다는 얘기요."
그녀는 몸안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의 남성을 느끼고 시험삼아 엉덩이를 약간 움
직여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섣부른 행동이었다. 제이미는 갑자기 그녀를 침대에 눕힌 다음,
그녀의 허벅지를 넓게 벌렸다.
"이번에는 느리고 부드럽게 할 거요."
정말 그의 말대로였다. 그는 고통스러울 만큼 부드럽게 그녀를 사랑했다. 제이미는 자신의
사랑의 사랑의 행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깨달았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을 무의식
적으로 내밭지 않도록 스스로를 몹시 자제했다. 만일 조심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버지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던 에반 그레이와 그 일당들에게 했던 복수의 맹세를 앨리타로 인해 모
두 잊고 말 것 같았다. 그녀는 결혼이라는 행복의 나락으로 그를 떨어뜨렸고, 그곳에 안주하
며 후손을 낳고 살고 싶은 절실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언젠가는 그럴 날이 오겠지만, 아직
은 때가 아니었다. 정의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기 전에는 아직 곤란했다.
앨리타는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제이미가 일부러 무심하게 구는 것이 아
니라면, 그는 정말로 그녀에게 아무런 마음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남자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어쩌면 모든 남자들은 사랑을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여자를 부드
럽게 대하는 것이 가능한지도 모른다. 제이미는 상처받은 듯한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연
민에 사로잡혔다.
"당신을 몹시 안낀다는 것만은 알아주오. 내게 더이상을 바라진 말아요. 지금은 안 되오.
내 일생의 목표가 눈앞에 와 있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란 말이오. 내가 당신을 원한다는
건 확실하오, 앨리타. 당신은 내게 속한 사람이오. 당산은 언제나 내 사람이었소. 아무런 문
제도 없던 그때로 돌아가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졌을지 꿈꿔볼 수는 없을까?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까요, 제이미?"
그는 앨리타의 표정을 살폈다.
"당신이 말해봐요. 에반 그레이를 잊을 수 있겠소? 당신을 믿고 내 목숨을 맡겨도 좋을
까? 당신은 내 목숨을 손아귀에 쥐고 있소. 만일 당신이 어둠의 영주인 나를 배반한다면 내
목숨은 끝장이오."
"제이미, 걱정 말아요. 난 당신 거예요. 난 당신을 절대 배신하지 않아요."
그는 그녈르 다시 부드러운 침대에 눕히며 자신의 몸으로 그녈르 덮었다. 만일 제이미가
그녀에게 더 많은 것을 원했다고 해도, 그녀는 실망하지 않았으리라.
13
한편, 런던에서는 시커먼 먹구름이 일고 있었다. 아련하게 피어나기 시작한 앨리타의 행복
을 산산이 부숴버리려는 어둠의 세력이 서머셋 경을 중심으로 커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앨
리타와 제이미가 나른한 행복에 한껏 취해 있는 사이, 그레이 경과 서머셋 경은 런던에 있
는 서머셋 가문의 타운하우스에 모여 그들의 운명을 갈라놓을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내 손으로 직접 판관에게 뇌물을 전하는 수모를 감수해야 했단 말이네. 아무튼 참고 견
뎠더니 그 덕을 보게 되더군. 드디어 대법원에서 내 편을 들어주었네. 앨리타와 모티어의 약
혼이 무효라는 판결이 내려졌고, 둘의 결혼은 이제 무효가 되었지. 이제 내 딸을 자유롭게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낼 수 있게 되었단 말이세."
시무룩ㅎ게 말을 꺼냈던 서머셋 경은 의기양양하게 말을 맺었다.
"일이 너무 늦어진다 싶어 걱정했는데, 아무튼 잘됐군요 전 앨리타 양이 모티머와 너무
오래 같이 지낸 것 같아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근거로 둘의 약혼이 무효라는 판
결리 내려졌습니까?
서머셋 경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모티머가 너무 오래 약혼녀에게 소홀했기 때문에 우리 가문에서 당연히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었다는 것을 판관에게 강력하게 주장했고, 그게 정당한 판단이었다는 것이 받아들여
진 걸세. 자네와 앨리타의 약혼을 증명하는 서류도 이미 만들어두었네. 자네가 서명만 한다
면, 난 곧 웨일스로 가서 딸아이를 데려올 생각일세."
서머셋 경이 황급히 서류를 내밀자 그레이는 간략하게 내용을 훑어본 다음 책상에 앉아
펜이 잉크를 묻혀 서명을 했다. 서머셋 경은 서명이 끝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
람 모두 모티머 경의 죽음에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었으므로, 서머셋 경은 그레에가 자신을
배신하지 못하도록 한시라도 빨리 그를 합법적인 사위로 맞아들여야만 안심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앨리타는 거실의 길다란 창문가에 서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제이미의 뒷모습을 지
켜보았다. 상체를 벗은 그이 몸은 땀으로 반들거렸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햇빛에 그을린 단
단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몸에 딱 달라붙는 바지는 그의 강인한 허벅지와 날씬한 다리를 그
대로 드러내주고 있었다. 앨리타는 그의 단단하고 거대한 몸이 자신의 부드러운 육체를 소
유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이었다. 거의 그녀의 두 배에 가까운 제이
미의 거대한 몸은 한번도 그녀를 다치게 한 적은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그가 보여준 부드
러운 태도는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랑을 어느정도는 드러내주고 있었다. 그녀는
만족스렁루 정도로 완전한 위한을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그녀의 공허한 마음
을 채워 주었던 것이다.
전날밤, 그녀를 최고의 절정의 순간으로 이끌기 위해 그가 보여준 놀라운 끈기와 참을성
을 떠올리자 앨리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치 거실에
들어온 베스가 말을 걸자 그녀는 기절할 듯 놀랐다.
"정말 보기 드물게 멋진 남자예요, 그렇죠?"
"오, 베스, 깜짝 놀랐잖아요!."
앨리타는 계면쩍은 태도로 자신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녀는 다시 창문으로 시
선을 돌렸다.
"맞아요, 베스. 온 세상을 다 뒤져도 제이미 같은 남자는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아씨께선 처음에 이곳에 오셨을 때 제이미 영주님을 몹시 싫어하셨던 걸로 기억하는
데......"
앨리타는 생각에 잠긴 듯 침묵을 지키다 조용히 대꾸했다.
"그랬었죠, 그땐 그이가 예의범절도 모르는 짐승만도 못한 무식한 농사꾼이라고 생각했어
요. 요즘 난 그이가 대체 나한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어요. 난 바보가 아니에
요, 베스. 제이미가 나와 결혼한 목적은 그레이 경에게 나를 넘겨주기 싫었기 때문이란 걸
알아요."
"처음엔 그랬겠죠, 아씨. 하지만 제 생각엔 제이미 영주님이 아씨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
씬 더 아씨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베스가 눈치 빠르게 대답하지 앨리타의 표정은 환하게 밝아졌다.
"베스 얘기가 맞다면 좋겠어요."
베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는새 그녀의 시선은 성 가까이로 몰려오고 있는 말
탄 사람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왜 그래요, 베스?"
당황한 베스의 태도를 눈치챈 앨리타가 물었다.
"군대가 몰려오네요, 아씨."
이젝 막 북족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낸 기마병들을 가리키며 베스가 말했다.
앨리타는 경악했다. 적어도 백 명은 넘어 보이는 대부대였다.
"제이미에게 어서 알려야겠어요!"
앨리타는 소리를 지르며 방을 달려나갔다. 그러나 그녀가 안뜰에 도착했을 때쯤 제이미는
이미 다가오는 기마군대를 발견하고 부하들에게 군장을 갖추도록 명령을 내린 뒤였다. 그러
나 소용없는 일인 것 같았다. 허물어진 성벽으로는 수적으로 상대가 안 되는 군대를 물리칠
방법이 없었다.
앨리타는 마침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제이미와 계단 꼭대기에서 마주쳤다.
"제이미, 저들은 굴까요? 그레이 경인가요? 설마 국왕폐하의 명령을 어기고 우릴 공격하
진 않겠죠?"
앨리타는 두려움에 떨며 소리쳤다.
"그걸 누가 알겠소?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방문객을 맞기 전에 나도 무장으 해야겠소.
내가 저들을 상대하는 동안 당신은 반드시 집안에 있어야 하오."
제이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이미는 성큼성큼 몇 걸음에 계단을 뛰어올라갔고, 앨리타는 그와 보조를 맞추느라 안간
힘을 써야 했다. 방안에 들어간 그녀는 제이미가 갑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고, 칼과 tr궁으로
무장하는 것을 거들었다. 무쇠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은 기사를 군마에 올려놓으려면 최소한
여섯 사람이 필요했던 시대는 벌써 옛날이야기였다. 얇은 금속망사로 만들어진 갑옷은 쇳덩
이로 만들어진 갑옷만큼이나 튼튼하고 안전했다. 갑옷을 갖춰입은 그는 앨리타는 끌어안고
강렬랗게 입을 맞춘 다음, 재빨리 밖으로 나깟다. 앨리타는 적이 누군지도 모른 채 비겁하게
집안에만 숨어 있기는 싫었으므로, 살짝 그의 뒤를 따라나갔다. 제이미는 그녀가 뒤를 따르
고 있다는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그가 안뜰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갔을 때쯤엔 기마병들이 들고 서 있는 깃발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앨리타는 서머셋 가문을 상징하는 장미와 사자 문양을 알
아본 순간, 낮게 비명을 질렀다. 제이미와 아버지가 싸우도록 내버려둘 순 없었다. 둘 중 한
사람은 죽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하들은 전투대열로 배치시키는 제이미를 보며 그녀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제이미, 안돼요! 저분은 우리 아버지세요. 아버질 죽이지 말아요!"
정신 없이 계단을 내려간 앨리타는 깜짝 놀라 머뭇거리고 있는 제이미의 곁을 순식간에
지나쳐 서머셋 겨이 이끄는 군대 속으로 뛰어들었다.
"앨리타! 돌아와!"
그러나 앨리타는 제이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해서 달려가 아버지의 말 앞에 멈춰섰
다. 거대한 군마가 앞발을 들며 앨리타를 발로 차버리기라도 할 듯 버둥거리자 제이미는 안
타까운 마음에 숨을 멈추었다. 다행이 서머세 경이 노련하게 말을 달랬다. 앨리타는 자신의
목숨이 위채롭다는 것을 알면서까지 달려갈 만큼,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그토록 간
절했던 것일까? 혹시 앨리타는 어서 아버지가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 자신을 런던으로 데려
가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 오랜 관계인 우정은 아니었지만, 제이미는 자신
에 대한 헨리 왕의 호감 때문에라도 앨리타를 빼앗아가려는 그레이와 서머셋의 음모를 국왕
이 막아주리라고 기대했었다. 어쩌면 왕은 개인문제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신하들을 제대로
다스릴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분노한 서머셋 경은 경직된 표정으로 황급히 말에서 내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죽으려고 작정이라도 한 게야? 장래의 신붓감이 애비의 말굽
에 짓밟혀 죽었다면, 그레이 경이 뭐라고 하겠느냔 마리다."
그는 딸의날씬한 몸매를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몸은 괜찮은 게냐?"
앨리타는 아버지가 얼마나 엄격한 사람인지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대꾸했다.
"네, 아버지. 아주 건강해여. 여기 대체 웬일이세요? 단순히 절르 보기 위해 방문하셨다면
무었 때문에 군대를이끌로 오셨죠?"
"저 빌어먹을 반역자의 아들과 네 불행한 결합을 끝장내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재산
과 노력을 탕진했는데, 감사 인사가 고작 그거냐?"
"모티머 경이 반역자라는 사실을 아버진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어쩌면 뭔가 오해가
있었는지도 모르잖아요."
앨리타는 아버지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피며 말했다.
"네가 감히 날 지금 의심하고 있는 게냐?"
서머셋 경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 모티머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
는 앨리타의 의심ㅇ르 한층 더 굳혀주듯, 딸을 때리기 위해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자신의
딸마저 그의 결백을 의심하게 내버려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제이미 모티머가 왕의 마음에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만으로도 족했다. 다행히 헨리 왕은 다른 정사에 너무 바빠, 오래 전
웨일스 지방에서 일어났던일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손끝 하나라도 대면 당신을 죽여버리겠소."
어느새 다가온 제이미는 서머셋 경의 팔을 세게 움켜잡으며 무자비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가 서머셋 경의 팔을 놓자 노인은 힘 없이 팔을 내렸다.
"앨리타는 내 아내요. 당신은 그녀에게 더이상 아무런 권리도 없소. 하늘에 맹세코, 당신
이 두 번 다시 앨리타에게 손대지 못하도록 만들겠소."
서머셋 경은 앨리타에 대한 소유욕을 드러내보이는 제이미의 난데없는 행동에 놀란 듯,
제이미와 앨리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함부로 하늘을 들먹이지 말게, 모티머. 이젠 다 소용 없는 짓이야."
서머셋 경은 비웃었다. 그는 외투 안엣 서류를 꺼내더니, 제이미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내 딸과 네놈의 결혼은 무효로 판정났고, 난 앨리타를 그레이 경과 결혼시키기로 했다.
우리 가문의 비옥한 토양에 네 씨앗이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게 천만 다행이야. 하긴 모
치머의 혈통은 한번도 튼튼한 적이 없었지. 하지만 그레이 경이라면 앨리타를 금방 임신하
도록 만들 테니 두고 보게나."
서머셋 경이 빈정걸며 야비하게 웃어대자, 앨리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아버지,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국왕폐하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그런 서류에
는 분명 국왕의 서명이 필요할 뗀데요."
"물론 이 서류는 공식적인 서명을 받은 거다. 예비 신부와 프랑스 여행 준비로 정신이 팔
린 왕의 눈을 피하는 것은 아주 쉬웠지. 네가 원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애비가 가능한 한
서둘러 일을 진행시켰다. 네가 얼마 전 이 불한당 같은 남편한테서 도망쳤을 때, 고맙게도
그레이 경의 보호를 받았었다는 얘기는 전해들어 알고 있다."
서머셋 경은 조롱하는 듯한 표정으로 제이미를 노려보았다.
제이미의 마음속에선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앨리타는 아버지가 도착할 때까
지 시간을 벌기 위해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하며,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
의 곁을 떠났을 때 그레이 경을 찾아갔던 것이 아니라는 그녀의 말은 결국 거짓말이었단 말
이가? 그렇다면 무었 때문에 앨리타는 그토록 그에게 열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거의 그녀를
믿기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앨리타는 제이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아니에요, 제이미. 그렇지 않아요! 한땐느 우리의 결혼을 끝내고 싶어했던 게 사실일지
모르겠지만......"
서머셋 경은 준엄한 얼굴로 딸을 노려보며 호형했다.
"이젠 다 끝난 일이야. 런던으로 가는 동안 필요한 옷만 간단하게 챙기거라. 나머지는 네
지참금과 함께 나중에 모티머가 보내주면 돼. 우린 곧 떠날거다."
"안 돼요!"
"제이미는 어디에도 가지 않소."
제미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감히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자네 꽁르 한 번 보게, 모티머, 자네 부하들은 수적으로도 막강한 내 군대와 상대도 되지
않아. 자네가 정 싸우겠다면 아까운 목숨만 잃게 될 뿐, 어차피 결과는 내 뜻대로 될 수 밖
에 없네. 내가 공격 신호를 보내 피비린내를 일으켜야 좋겠나, 아니면 순순히 내 딸을 나와
함께 보내주겠나?"
제이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졌다. 그이 부하들은 엄청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용감하
게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앨리타처럼 가증스런 여자를 구하기 위해 죽
게 만든다는 것이 파연 합당한 일일까?
앨리타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제이미의 눈빛을 읽으며, 그가 죽
음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제이미의 병사들이 아버지가 이끌고 온 거대한 군대
를 물리칠 수 있는 가능성은 도저히 없었다. 그녀는 제이미와 아버지가 서로 싸우다 어처구
니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둘 중 어느 한 사람이 죽게 된다 해도 그녀에게
는 정말 비극적인 일이었다.
서머셋 경은 앨리타가 자신 Eoas에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원치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그 점을 이용했다.
"내 딸고 단둘이 얘기를 나누고 싶네."
그가 냉정하게 위엄을 갖추며 말하자. 제이미는 도전적인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허락할 수 없소."
"제이미, 제발 그렇게 하도록 해줘요. 나, 나 역시 아버지와 단둘이 얘길 하고 싶어요."
앨리타는 어떻게든 이 위험한 상황을 바꿔버려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제이미에게 애원했
다.
제이미는 그녀의 안색을 살피듯 빤히 쳐다보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멀어져갔다. 신
경질적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그 걸음걸이는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잘 드러내주고 있었
다. 서머셋 경은 앨리타의 팔을 잡고, 자신의 호위병들이 대화를 듣지 못하도록 멀리 그녈르
끌고갔다. 그녀를 난폭하게 돌려세운 아버지의 얼굴엔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고, 분노로 입
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계집 같으니라구! 지금 넌 매를 맞아야 제정신을 차리겠구나.
하지만 네 버릇을 고치는 일은 그레이 경에게 넘겨야겠지. 잘하면 넌 그 사람에게 아버지를
공손하게 대하는 예절까지도 배우 수 있을 게다. 난 네게 자유를 안겨주기 위해 온갖 노력
과 힘을 아끼지 않았어. 그런데 넌 전혀 그런 걸 바란 적이 없다는 듯 행동하다니, 이게 어
찌된 일이냐? 저 나쁜자식이 널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머리끝까지 호가 난 서머셋 경은 눈을 가늘게 뜨고 딸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상황이 바뀌었어요, 아버지. 제이미는 제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요."
"맙소사, 저 무뢰한에게 푹 빠졌구나!"
서머셋 경은 벌컥 고함을 질렀다.
"제, 제 생각엔 제이미와 그의 아버지 일은 아무래도 잘못된 오해인 것 같아요. 전 떠날
수 없어요, 아니 떠나지 않겠어요.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떠나지 않을 거예요."
앨리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넥 저놈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하지만 그레이 경이 네 헛된 망
상을 곧 없애줄 거다.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만, 그레이 경은 네가 모티머에게 이용당
할 대로 이용당한 지금에도 널 원하고 있다. 그리고 애비는 그레이 경을 원수로 만들 처지
가 아니야. 우린 이 일을 같이 시작했으니 같이 끝내야 해."
"같이 시작했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호기심이 동한 앨리타가 묻자 서머셋 경은 인상을 찌푸렸다.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순순히 이곳을 떠나겠느냐, 아니면 내가 부하들을 시켜 모티
머를 파멸시키고 이 돌무더기를 더욱더 처참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난 한다면
한다. 우리의 병력은 모티머의 두 배나 많아. 사정을 봐주진 않을 거다, 앨리타. 내가 부하들
에게 명령을 내리면, 살아남을 자는 아무도 없어. 그게 네가 원하는 거냐? 대답하기 전에 잘
생각해봐라."
앨리타는 그리 오래 생각해볼 것도 없었다. 그녀는 제이미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상황은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더구나 그녀의 아버지의 칼에 제
이미가 목숨을 읽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가겠어요. 하지만 그레이 경과는 절대로 절대 결혼하지 않겠어요."
앨리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는 안 된다, 앨리타.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에 난 이미 그레이 경과 널 겨혼시키기
로약속했다. 네가 결혼을 마다하면, 아까 설명한 대로 모티머는 끝장이야."
앨리타는 좁은 어깨를 무겁게 늘어뜨렷다. 견디기 힘들 만큼 버거운 책임감이 그녀를 짓
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했고, 그녀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
다.
"알겠어요, 아버지 뜻대로 따르죠."
서머셋 경은 섬뜻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어서 저 녀석에게 가서 그렇게 전해라."
천천히 돌아서 제이미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납덩이를 매단 듯 무
거웠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바짝 뒤쫓고 있어Teik. 그녀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
지만, 도무지 목소리가 입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서머셋 경은 못마땅하다는 듯 콧소리를
내며 그녀를 다그쳤다.
"어서 말해라, 방금 내게 했던 얘기를 그대로 이자에게 전하란 말이다."
앨리타는 혀끝으로 말라붙은 입술을 축였다. 제이미는 단순한 그 동작에 홀린 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가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
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난......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고 싶어요."
"이유도 얘기해야지, 앨리타."
서머셋 경은 무자비하게 다그쳤다.
제이미는 천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가 대답하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앨리타가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자 서머셋 경은 말없이 고개를 RM넉였다. 그러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아
버지가 원하는 대로 설명을 계속했다.
제발 나 미워하지 말아요, 제이미. 아버지가 강요한 대로 말하면서 앨리타는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런던을 떠나오기 전에...... 나, 난 아버지께 이혼 수속을 밟아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리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구요."
"기왕이면 너와 그레이 경이 결혼할 거라는 사실도 알려줘야지."
서머셋 경은 잔인한 만족감을 느껴보려는 듯 덧붙였다. 그는 제이미 모티머가 완전히 파
멸하는 모습을 볼 때까지는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만일 제이미가 제 아버지의
역모 사건을 밝혀내기 위해 끝까지 물고늘어진다면, 모티머 가문의 부를 나누어 가졌던 자
신과 그레이 경, 그리고 벌로우 경에겐 RMaWlr한 잰나이 닥칠 게 분명했다.
"아버지, 전......"
서머셋 경은 명령조로 말했다. 팔을 잡고 있던 아버지가 그녀의 팔을 세게 비틀었으므로
앨리타는 갑작스런 아픔에 흠칫 놀랐다.
"그래요, 난 그레이 경과 결혼할 거예요! 처음부터 난 그렇게 되기를 원했어요. 난 한번도
당신과의 결혼을 원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 당신은 목숨을 걸고 날 위해 싸울 필요가 전혀
없어요."
제이미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녀의 가냘픈 몸매를 훑어내렸다.
"듣고 보니 당신 말대로 정말 싸울 이유가 없군. 엉뚱하게도 반대로 생각했던 내 어리석
음을 용서하시오. 처음부터 당신은 날 신발에 문은 흙만도 못하게 생각했다는 걸 잘 알고
있소. 그럼 잘 가시오, 부인. 그레이 경과 아주 행복하게 잘 살길 빌겠소."
오, 하느님 맙소사, 어떻게 그녀를 떠나보낼 수 있단 말인가? 제이미의 머리속에서 한 목
소리가 부르짖었다. 둘이 함께 보냈던 몇 달 동안의 달콤과 추억이 그녀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단 말인가? 서로 한몸이 되어 지냈던 경이로운 밤들을 앨리타는 그토록 쉽사리 잊어버
렸는지 몰라도, 그의 가슴속엔 도무지 지워지지 않을 흔적으로 강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제이미!"
그녀가 손을 뻗었지만, 그는 이미 돌아서버린 뒤였다. 서머셋 경은 딸의 어깨를 낚아채더
니 건물 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어서 여행에 필요한 짐이나 챙겨오너라."
서머셋 경은 으르렁거렸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계단을 올라가는 앨리타를 제이
미는 쳐다보지 않았다, 그년느 아버지가 제이미에게 한 말을 듣지 못했다.
"내 딸은 자네를 끔찍이도 싫어하네, 모티머. 자네가 이 쓰러져가는 돌무덤에 묻혀 세상을
하직한다면, 우리 앨리타는 평생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앨리타는 하염없이 흐느끼며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제이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파멸당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베스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안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 아씨, 저도 다 들었어요. 어떻게 하시려구요?"
"난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야 해요, 베스."
앨리타는 울먹이며 대꾸했다.
"그러시면 안 돼요! 아씨는 영주님을 사랑하시잖아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 아버지는 제이미를 죽일 거예요. 아버진 능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에요. 우리 아버지는 대단한 부자이고 막강한 군대도 갖고 있어요. 제이미의 병
력으로는 상대도 되지 않을 거예요."
"아까 뜰에서 아씨께선 하신 말씀이 혹시 진심이면 어쩌나 무척 걱정했어요. 아씨는 스스
로 남편을 떠나실 분이 아니라는 거, 저는 잘 알고 있어요. 가지 마세요, 아씨. 제이미 영주
님께서 지켜주실 거예요."
"아니예요, 베스. 난 내 남편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수 없어요. 베스도 우리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걸 들었을 거예요. 이혼 절차는 끝났고, 난 이제 더이상 제미미의 아내가 아니에
요. 그러니 이제 그만 눈물으 거두고, 짐을 챙기는 거나 도와줘요."
앨리타가 다시 뜰로 내려갔을 때, 제이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안장이
edhffuwls 그녀의 말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고, 서머셋 경은 그녀가 나타나자마자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말에 태웠다. 앨리타는 마지막으로 제이미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더 보자
그의 부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앨리타의 말도 일행과 함께 끌려갔다. 그녀는
슬픔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한번 더 뒤를 돌아다보았다.
제이미는 거실 창가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사라져가는 침입자들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
다. 그의 눈동자는 지금껏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끔찍한 공허함으로 황량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사방을 에워싼 기사들에 가려져 앨리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
속해서 그녈르 바라보고 있었다.
"아씨는 떠나고 싶어하지 않으셨어요, 영주님."
베스가 등뒤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제이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표정이 차
갑게 굳어졌다.
"자네는 그녀의 얘길 듣지 못해서 그래, 베스. 아내한테 버림받아 충격을 받았다고 해서,
날 위로할 생각을 말게. 떠나는 건 아내의 선택이었어. 만일 그녀가 이곳에 남기로 결정했다
면, 난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내를 지켰을 거야."
"맞아요, 아씨가 두려워하신 게 바로 그거예요. 아씨는 행여 영주님이 목숨을 잃게 되실까
걱정하신 거예요. 영주님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버님과 함께 떠나는 것뿐이었어요. 아
씨는 영주님을 사랑해요. 게다가 아씨는 더이상 영주님의 부인이 아니잖아요."
베스는 부드럽게 나이 어린 주인을 달랬다. 분노한 제이미는 가면처럼 굳어진 얼굴로 베
스를 향해 돌아섰다.
"비록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앨리타는 내 아내이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늘 내 아내
일 거야."
난 아직도 마음 깊이 그녀를 사랑한다구! 그의 마음속에서는 그렇게 외쳤지만,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아니야, 베스. 오해하지 말아. 앨리타는 언제나 에반 그레이르 남편으로 원했어. 이젠 자
신이 원하는 걸 손에 넣은 셈이겠지. 내 앞에서 두 번 다시는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말게."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다음날, 로위나는 크리케스 성으로 돌아왔다. 제이미의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떠났다는 소
문은 그녀가 묵고 있는 마을까지 들려왔고, 그녀는 제이미의 인생에 다시 동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지체없이 짐을 꾸렸던 것이다. 그녀는 거실 벽난로 앞에
멍하니 앉아있는 제이미를 발견했다. 그는 이미 차갑게 식은 잿더미를 얼빠진 사람처럼 응
시하고 있었다. 로위나는 재빨리 그의 곁으로 다가가 의자 옆에 다정하게 무릎을 꿇었다.
"제이미, 나 여기 있어요. 난 절대로 신의도 모르는 그 발칙한 계집처럼 당신을 떠나지 않
을 거예요. 당신을 배신한 그 여자를 잊을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겠어요. 우린 금세 다시 옛
날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두고 보세요."
제이미는 로위나가 기대했던 것처럼 그녀를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대뜸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날 내버려둬요, 로위나. 난 지금 당신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상대할 기분이 아니오."
"날 보내지 말아요, 내 사랑. 내가 외로운 밤을 달래주면서 당신의 아픔을 치유해주겠어
요."
그는 삐딱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곳에 머물든 말든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난 상관하지 않겠소."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차갑게 식어버린 벽난로를 응시했다. 일단 성에 남아도 좋다는 허
락을 받았으므로, 로위나는 지금 당장 성급하게 더 이상의 행운을 재촉하지는 않기로 마음
먹었다. 시간이 지나면 제이미는 당연히 그녀의 품에 기대올 것이고, 그를 설득해 그녀를 아
내로 맞이하게 만드는 일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하루하루는 천천히 흘러갔다. 그러나 제이미가 도통 잠자리를 같이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로위나는 슬슬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로위나가 성에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듯 행동했다. 그는 지독하게 술을 마셔댔다. 거의 매일 저녁 그는 한 손에 사기로 만들
어진 맥주잔을 들고 식탁에 엎드려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기사들은 그의 건강을 염려했고,
게일로드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주인의 곁을 지켰다. 제이미가 이처럼 가엾은 몰골로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노인은 어떻게든 머리를 짜내어 제이미를 의기소
침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때 앨리타와 에반 그레이가 곧 결혼식을 올린
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게일로드는 제이미가 현실을 아주 외면해버릴까 봐 걱정스러웠다.
사실 제이미는 거의 인생을 포기한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는 분노와 배신감을 도저히 견
딜 수가 없었으므로 술에 빠져 있었고, 그런 상태로 그는 일주일을 보냈다. 게일로드는 제이
미가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다시 밀수업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오랜 거래업자가 전한
얘기로는 고급 브랜디와 값비싼 프랑스 산 레이스를 잔뜩 실은 배가 프랑스를 막 출항했으
며, 그들이 관심만 있다면 곧 물건을 공급하겠다는 소식이었다. 다행히도 제이미는 게일로드
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거사의 계획이 잡혔고, 마을 사람들에게 소식이 전해졌다. 다음날 제
이미느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기사들과 함께 오랜 시간 동안 체력을 단련했다. 하지만 그는
기사들을 자신의 불법적인 밀수행위에 가담시키지는 않았다.
몇 달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어둠의 영주가 다시 나타나 위험한 모험을 시작했다는 소문
은 재빠르게 퍼져나갔다. 제이미는 누구에겐가 복수를 하듯 점점 더 대담하게 일을 진행시
켰다. 다른 사람들이 꺼려하는 일도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그에겐 너무 무모하다거나 불가능
한 일이 없어 보였다. 웨일스 해안에 또다시 밀수업자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런
던에까지 퍼지자 국왕은 그레이 경을 돕도록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군대가 해변에 나타
날 때마다 밀수업자들은 이미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리고 없었다. 왕의 부하들을 골탕먹이
기 위해 '어둠의 영주'는 계속해서 밀수선과 접선하는 장소를 바꾸었고, 밀수 감시단들은 매
번 어느 해안을 수색해야 좋을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앨리타는 런던에 있는 아버지의 집에서 감옥살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에반
그레이를 제외하면 그녀는 방문객을 만나는 일도 엄격하게 제한을 받았다.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런던을 떠난 국왕은, 그녀와 그레이 경이 결혼식을 올리고 난 후에야 돌아올 예
정이었다. 앨리타는 헨리 왕이 아버지와 그레이 경의 불손한 계획을 알았다면 미연에 막아
주었으리라고 생각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국왕을 비롯한 왕족들은 모두 왕비를 맞기 위
해 곧 프랑스로 떠날 예정이었고, 때문에 국정은 이미 가신들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그녀의 운명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제이미와 황홀한 열정을 맛본 뒤에, 에반
그레이와 결혼하는 것은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누가 뭐라도 그녀의 영혼에 불을 붙일 수 있는 남자는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앨리타가 런던으로 돌아온 지 2주일이 지난 어느 날, 그레이 경이 그녀를 방문했ㄷ.ㅏ 그
녀가 그레이 경을 만나길 거부하자 아버지는 딸을서재로 부른 다음, 두 사람이 은밀하게 ㅇ
길 나눌 수 있도록 눈치 빠르게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레이 경의 경직된 미소를 보며 앨리타는, 그의 성에서 그녀가 신비롭게 사라져버린 사
실에 대해 그가 아직도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제는 그렇게 쉽게 내게서 도망치지 못할 거요. 일단 나와 결혼을 하게 되면 항상 나한
테 복종해야만 하오. 안 그러면 불쾌한 일을 당할 각오를 해야만 할거요. 당신의 비천한 애
인이 어떻게 해서 당신을 내 성에서 빼내 도망쳤는지 궁금하군."
"우린 창문으로 날아서 도망쳤어요. 그레이 경, 난 당신과 결혼할 마음이 추호도 없어요.
난 내 남편에게 돌아갈 거예요."
앨리타가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그러자 그레이의 화가 폭발했다.
"창문으로 날아갔다구! 어떻게 달아났는지 비밀로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마음 속에 간직
해둬요. 난 상관하지 않겠소. 하지만 결혼문제에 대해서는 당신 아버지한테 똑똑히 들었을텐
데? 당신은 더 이상 무일푼인 가난뱅이 녀석의 아내가 아니오. 모티머 가문에 속해 있던 모
든 것이 내 것이 되었듯, 이제 당신도 내 것이란 말이오."
"난 당신이 왜 그토록 제이미를 미워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무슨 이유로 그이의 가
문을 혐오하는 거죠?"
"당신은 아주 눈치가 빠르군. 언젠가는 내가 왜 그토록 모티머 가문을 증오하는지 당신에
게 얘기해줄 날이 올거요."
그는 악마처럼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모티머 경은 반역자가 아니었어요, 그렇죠?"
그레이의 표정은 더욱더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만하면 됐소! 모티머 가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도 않소. 난 우리의 결혼
문제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서 들른 거요. 앨리타. 오늘부터 딱 한 달 후에 결혼하는 것이 좋
겠소."
"싫어요!"
"소용없소. 국왕의 명령이니 난 웨일스로 돌아가겠지만, 우리 결혼식 일정에 맞추어서 돌
아오겠소."
"웨일스에 간다구요?"
"그렇소. 이번에는 어둠의 영주도 내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할 거요. 소문에 듣자하니 그
나쁜자식이 다시 나타나 밀수에 손을 댄 모양이오. 하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내 손에 잡히게
될 거요."
앨리타는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지금 같은 시기에 밀수에 손을 대다니,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제이미는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그레이 경이 또다시 어둠의 영주를 잡겠다
고 나섰다면, 자칫 부주의하면 제이미는 교수대에 매달리게 될 게 분명했다.
그레이는 앨리타의 사랑스런 얼굴에 스치는 감정들을 읽어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모
티머가 소유했던 아름다운 그녀의 육체가 자신의 몸 아래에 깔려 있다는 생각만 해도, 그는
짜릿한 쾌감에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그녀의 벌거벗은 몸을 생각하지만 해도 그의
몸은 욕망으로 달아올라 단단해졌다. 그는 결혼식이 몹시 기다려졌다. 갑자기 그는 굳이 결
혼식날까지 기다리지 않더라도 그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순간
그는 앨리타를 움켜잡고 세게 끌어안았다. 앨리타는 온힘을 다해 그를 떠밀려 저항했다.
"나와 싸울 생각은 마시오, 앨리타. 난 웨일스로 떠나기 전에 당신을 소유하고야 말겠소.
우린 벌써 부부나 다름없는 사이요. 당신을 빼앗아갔던 그 개자식을 누렸던 황홀한 사치를
내가 미리 좀 맛본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소?"
그의 입술이 거칠게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을 덮쳤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뚫고 매끄
러운 속살을 헤집었을 때, 앨리타는 거의 헛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그의 탐욕스런 손길이
그녀의 보디스를 찢고 가슴으로 파고드는 순간, 그녀는 혐오감과 욕지기가 전신으로 퍼져나
가는 것을 느끼며 격렬하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소릴 질러 아버지를 부르겠어요."
앨리타는 고통스런 그의 애무의 손길을 밀쳐내며 소리쳤다.
"어서 질러보시오. 당신 아버지가 나타나 당신을 구해줄 거라고 생각하오? 당신 아버지와
난 이미 당신을 고분고분하게 길들일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했고, 난 그 기쁨을 지금 당장
맛볼 생각이오."
그레이는 씨근덕거리며 말했다.
자기 자신밖에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앨리타는 그레이의 성가신 손길
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몸부림을 쳤다. 욕망과 분노로 자극을 받은 그의 완력은 도무지
그녀가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그녀를 바닥에 쓰러뜨린 그는 바지끈을 풀기
시작했다. 순간 앨리타는 무릅을 들어올려 그의 사타구니를 힘껏 걷어찼다. 그녀의 일격은
명중했고, 즉각 그레이는 몸을 구부리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앨리타는 그를 잠시 노려보다 서재를 빠져나갔다. 가까스로 숨을 몰아
쉬며, 고통에 가득 찬 얼굴로 그레이가 소리를 질렀다.
"나쁜계집 같으니라구! 결혼하고 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거다! 널 굴복시킬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그 중에 네가 마음에 들어할 일은 아마 하나도 없을 걸!"
두려움에 사로잡힌 앨리타는 미친 듯이 복도를 달려가, 깜짝 놀란 아버지를 무시하고 계
속해서 계단을 올라 자신의 방으로 안전하게 피신했다. 문을 잠그고 난 그녀는 침대에 쓰러
져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어떻게 이런 치욕스런 결혼에 동의를 했단 말인가? 그러나 그녀
가 아무리 반대를 했더라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레이 경이 자신의 인생을 생지옥
으로 만들어버릴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 사실을 불보듯 뻔히 알면서도 결혼식을 중단시
킬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 참으로 절망스러웠다.
그레이와의 끔찍한 결혼에 대해 생각하자 앨리타는 뱃속이 뒤틀거렸고, 곧 욕지기가 목구
멍을 타고 올라왔다. 침대 아래로 손을 넣어 간이변기를 꺼낸 그녀는 내용물을 토해내기 시
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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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위나는 점점 절박해졌다. 그녀가 성으로 돌아온 지 벌써 여러주일이 지났지만, 제이미는
계속해서 그녀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었다. 로위나는 그가 또다시 밀수업에 관여하기 시작했
다는 것을 알았고, 캄캄한 밤중에 그가 조용히 성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지켜보
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녀는 우연히 제이미와 게일로드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두 사람은 뜰 한구석에 서서 나직하게 얘길 나누고 있었는데, 로위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
자마자 허물어진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다.
"배는 늦어도 내일밤 안으로 출항해야 한답니다, 주인님. 이번에도 주인님께서 직접 신호
를 보내실 생각이세요? 아무래도 이번에는 요행을 바라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밀
수를 감시하는 병사의 숫자가 배로 늘었고, 듣자하니 그레이 경도 밀수업자들을 엄단하기
위해 웨일스로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소문으로는 그레이 경이 어둠의 영주의 목을 단단히
노리고 있답니다."
"빌어먹을 자식, 에반 그레이 그놈은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해. 내 아내가 배신하지 않는다
면 그놈은 절대로 나를 잡지 못해. 앨리타가 떠나고 없으니우린 두려워할 게 없네."
"주인님은 아씨를 잘못 판단하고 계세요. 아씨는 배신자가 아닙니다. 전 그분의 결백을 믿
어요."
게일로드는 진심으로 말했다.
"이젠 뭐래도 상관없네, 게일로드. 내 인생에 약간 변화를 가져왔던 시기는 짧게 끝나버렸
어. 이제부턴 난 다시 위험과 모험을 즐기며 오직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살아갈 생
각이야. 내일밤 거사를 끝내고 나면 런던으로 가서 국왕폐하나 만나볼까 하는데, 자네 생각
은 어때?"
"그럼 계획대로 오늘밤부터 준비를 해야겠군요? 마을 사람들에게 절벽과 모래사장이 만나
는노스 비치에 집결하도록 전하겠습니다. 런던으로 가는 문제는...... 글쎄요. 주인님의 진짜
의도가 국왕폐하를 만나뵙는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군요. 혹시 앨리타 아씨를 만나실 요
량이라면, 유감스럽게도 실망만 하게 되실 겁니다. 아씨의 결혼식은 이제 겨우 한 달 남았어
요."
"걱정 말게, 게일로드. 런던에 가려는 이유는 왕을 만나뵈려는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제이미는 자신의 눈빛에 담긴 공허함을 숨기지 ㅁ소했다. 그들은 곧
그 자리를 떠났고, 혼자 남은 로위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날밤 제이미는 자신을 반겨줄 앨리타가 없는 텅 빈 침대로 돌아가는 것이 싫었으므로,
오랫동안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로위나가 보란 듯이 그의 호위병들과 시시덕거리며 지
나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며, 도대체 왜 자신이 더이상 그녀에게 정욕을 풀어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의아하게 생각했다. 지금 그에게 여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하늘도 알고 있었다. 겨우
몇 달 전만 해도 그는 로위나에게 몹시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농염한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에게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앨리타 같은 여자를 사랑
한 뒤에, 어떻게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할 수 있단 말인가? 앨리타는 마녀가 요술을 부리듯
다른 여자를 거들떠보지 못하도록 그를 변화시켰다. 그와 함께 나누었던 그 모든 황홀한 추
억을 뒤로하고,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떠나갈 수 있었을까?
상체를 숙여 팔에 머리를 기댄 체 제이미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격렬한 관능의 세계로
빠져들 때까지 열정을 불태우며 서로의 몸을 탐하던 앨리타와 함께 보냈던 아름다운 밤들을
회상했다. 그때도 그는 그녀를 원했고, 지금도 변함없이 그는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눈곱만큼도 애정을 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그녀를 원했다. 그녀가
그를 매몰차게 배신했다는 사실마저도 그녀를 간절히 원하는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리지 못
했다.
그는 앨리타를 미워하고 싶었다. 그는 그녀를 미워하려고 무진 애를 써보았지만, 그의 가
슴은 그러기를 거부했다.
로위나는 거실 안을 오가며 제이미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기사들
과 놀아나는 것처럼 요란스럽게 굴어도 제이미는 그녀의 존재에 대해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남자는 제이미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기사들 중에
서 유난히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와 여러 번 정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오늘밤은 그러
지 않으리라고 그녀는 결심했다. 그래, 오늘밤엔 침대에서 제이미를 기다렸다가 나긋나긋한
몸매로 그의 육체를 유혹해보는거야. 그녀는 황급히 거실을 빠져나가 곧장 제이미의 침실로
올라갔다. 재빨리 옷을 벗은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이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제이미는 많이 취한 듯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앨리타로 인한 상실감을 지
워버리기 위해 계속해서 맥주를 들이켰다. 하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침실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이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어두운 침실로 들어간 그는 옷을 아무렇
게나 벗어던지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뼛속까지 피곤과 취기가 오른 그는 이불을 허리까지
올려 덮은 채 눈을 감았다. 고통스런 그의 육체는 부드러운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제이미는 자신의 살갗을 간질이는 유혹의 손길이 사람의 것임을
깨달았다. 잠에 취한 그가 헛된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눈을 번쩍 뜬 그는 그제야
따뜻하고 조그만 손 하나가 자신의 등과 엉덩이를 어루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손은 점점 더 대담하게 움직였고, 마침내 그의 허벅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온 손은 그
의 남성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곤혹감에 신음소리를 흘렸다.
로위나는 자신의 은밀한 손길에 제이미의 남성이 순간적으로 불끈 솟아오르자 회심의 미
소를 지었다. 여전히 술기운과 잠에 취해 있는 그의 입에서, 그의 가슴에 새겨진 유일한 이
름 하나가 흘러나왔다.
"앨리타."
갑자기 돌아누우며 그는 그녀의 벗은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살결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단단해진 그녀의 유두의 가슴에 와닿는 짜릿한 감촉에 그는 다
시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간 그는 촉촉해진 그녀의 몸을 확인하고
난 뒤, 그녀의 몸위로 올라갔다. 그는 한시바삐 그녀의 몸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에 온몸
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로위나는 제이미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지금 그가 안고 있는 여자가
앨리타가 아니라는 사실을 똑똑하게 알려주고 싶었으므로 인상을 찡그렸다.
"제이미, 나예요, 로위나. 어서 날 뜨겁게 사랑해줘요."
순간 제이미는 눈을 번쩍 떴다. 너무 어두워서 로위나의 모습을 똑똑하게 볼 수는 없었지
만,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차렸다.
"제기랄, 로위나, 내 침대에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요?"
"당신에게 내가 필요해요, 제이미. 당신은 앨리타가 떠나버린 뒤로 한번도 여자를 안아보
지 못했어요. 내가 당신의 고통을 치유해주겠어요. 우리가 얼마나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었었
는지 잊었어요?"
로위나는 그의 입술에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그녀의 손이 두 사람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와 그녀가 열망하는 대상을 찾았다. 어느새 시
들어버린 그의 남성을 발견한 그녀는 흠칫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절박해진 그녀는 그의 몸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녀의 촉촉한 입술이 그의 몸을 감싸자 제이미는 낮은 비명을
질렀다. 제이미의 비명이 쾌락의 느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로위나가 알았다면
몹시 충격을 받았으리라. 로위나는 에전에도 그에게 이처럼 은밀한 사랑의 행위를 자주 해
주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느낄 뿐이었다. 제이미가 자신을 거칠게
밀쳐내자 로위나는 자신의 행동을 그가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당신을 원해다면, 당신이 오기 전에 내가 먼저 당신을 불렀을 거요, 로위나."
제이미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당신이 몇 주일째 술독에 빠져 지내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쉽게 시들어버리진 않았을 거
예요. 당신이 이러는 모습은 정말 처음이에요, 제이미. 모든 게 다, 당신이 결혼했던 그 매정
한 계집애 탓이라구요. 그 곚비을 쫓아버린 걸 당신은 행운으로 알아야 해요."
그녀는 다시 그의 남성을 움켜쥐었다.
"난 당신이 날 원하게 만들 수 있어요."
그러자 제이미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발로 밀어 침대에서 떨어뜨렸다.
"그만해, 로위나. 당신과 나 사이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어. 당신을 전혀 원하지 않으면서
당신을 다시 내 집에 받아들여주다니,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오. 제발 내 인생에서
사라져줘! 뜨거운 정사를 나눌 다른 남자를 찾아보란 말이오! 내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당
신이 이미 떠나고 없길 기대하겠소."
"제이미, 설마 진심이 아니겠죠."
로위나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오해를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제이미가 앨리타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가 자신을 기꺼이 받아들여주리라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그것
은 그녀의 착각이었다.
"물론 진심이오, 로위나."
로위나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주섬주섬 옷을 집어들었다. 옷더미를 가슴에 껴안은 채
그녀는 매서운 눈초리로 제이미를 노려보았다.
"오늘 일,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예요, 제이미. 전에도 이미 경고했지만 이번에는
정말이에요."
그녀는 벗은 몸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씨근덕거리며 방을 나갔다. 그녀는 다음날 아침 일
찍 그리케스 성을 떠났다. 소용돌이치듯 짙게 드리워진 새벽 안개를 헤치고 언덕을 향해 달
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게일로드만이 조용히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에반 그레이는 자신의 성안에서 성난 걸음걸이로 넓은 거실을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있었
다. 의심이 가는 해변마다 병사들을 배치시키고 감시를 했지만, '어둠의 영주'는 그때마다 교
묘하게 접선 장소를 옮겼다. 그자의 대담함은 도무지 끝이 없었다. 그는 어둠의 영주라는 밀
수업자를 체포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으므로, 신부를 데리러 런던으로 향해야 하는 시기임
에도 불구하고 아직 웨일스에 남아있었다. 앨리타는 지난번 만났을 때 그에게 심한 부상을
입혔다. 그는 그녀의 용서할 수 없는 발칙한 행동을 단단히 매로 다스리겠다고 다짐하고 있
었다. 몇 달 전 제이미 모티머가 그들의 인생에 끼여들지만 않았다면, 앨리타는 이미 그의
아내가 되어 첫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터였다.
갑자기 집사가 나타나자 그의 우울한 생각은 중단되었다.
"영주님, 반드시 영주님을 직접 뵙겠다는 젊은 아가씨가 와 계십니다."
그레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하녀는 지금도 포화상태라고 전하게."
"난 하녀가 아니에요."
기다리는 것이 짜증이 난 로위나가 직접 문가에 나타나 말했다. 그녀의 모습을 본 그레이
의 눈썹이 불끈 치켜올라갔다.
"아, 로위나, 어서 들어오시오. 이번에는 무슨 소식을 가져왔소?"
로위나는 집사가 나가길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제게 보상금을 두둑이 주셔야 할 아주 중요한 소식이에요."
그녀는 교활하게 말했다. 제이미를 배신한 후의 보복이 두려웠으므로 로위나는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날 수 있도록 넉넉한 자금이 필요했다.
"전에는 보상금 얘기 따위는 하지 않더니만, 이제 와서 뜬금없이 무슨 얘긴가."
그레이 경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둠의 영주의 정체와, 오늘밤 어디에 가면 그를 잡을 수 있는지 중요
한 정보를 가져왔거든요. 그 정도 정보라면 보상금을 요구하는 게 부당하지는 않을 텐데요."
"어둠의 영주의 정체를 당신이 알고 있단 말이오?"
그레이 경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런 정보라면 그는 얼마라도 기꺼이 지불할 의사가
있었다. 그는 능글맞게 다시 말을 이었다.
"아주 후한 보상을 해줄 테니 걱정 말아요."
로위나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후하다고 하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거죠?"
"돈맛을 톡톡히 아는 여자로군."
"저 같은 처지의 여자라면 그렇게라도 살아아재, 별 수 있나요."
그레이 경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기다리시오."
로위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계단으로 올라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십 분쯤 지났을
까, 그레이 경이 한 손에 헝겁으로 된 작은 가방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로위나는 손에 쥐어
진 가방의 무게를 가늠해보곤 안을 들여다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만하면 만족하겠소?"
로위나는 진심으로 흡족해하며 고갤르 끄덕였다.
"정말 관대한 분이시군요."
"그럼 어서 이름을 대시오, 로위나. 어둠의 영주를 체포하고 나면 내 명예에 또 하나의 훈
장을 더하는 셈이 되겠지."
로위나는 갑작스런 죄책감 때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한때 그토록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남
자를 배신해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그녀는 곧 냉담하게 자신을 물리치던 제이미의 태도를
떠올리고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더 이상 그녀가 제이미 모티머에세 신의를 지킬 필요는 조
금도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목구멍이 타는 것 같아 가까스로 입술을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그건 바로 제이미예요. 제이미 모티머가 어둠의 영주랍니다."
실술궂은 미소가 그레이 경의 얼굴을 흉측하게 일그러뜨렸다.
"모티머라구! 그 교활한 개자식이 바로 범인이었군! 그런 줄 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단서를 잡지 못했었지. 당신은 언제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나?"
그레이 경의 험악한 태도에 겁을 먹은 로위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
라고 판단했다.
"바로 어제 알았어요. 제이미와 게일로드가 오늘밤 도착하는 배에 관해서 얘기하는 것을
엿들었어요."
그레이 경은 날카롭게 되물었다.
"성에서 오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절벽이 끝나고 숲과 모래사장이 시작되는 작은 만이
있는데, 바로 그곳이에요.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노스비치라고 부르죠. 그들은 밀수품을 마
차에 실어 성으로 가져올 거래요. 제가 엿들은 내용은 그게 다예요."
"그거면 충분하오."
그레이 경은 대뜸 의심스런 눈빛으로 로위나를 바라보며 다그치듯 물었다.
"호기심에서 묻는 건데, 왜 애인을 배신하기로 마음을 먹었지?"
로위나의 미소 띤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그 거만한 나쁜자식이 날 버렸어요. 창백한 얼굴의 그 계집과 결혼한 뒤로 그는 전혀 다
른 사람으로 변했죠."
그레이 경은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혹시 앨리타 양을 두고 하는 말이오?"
"그래요. 그 여자가 백작님과 약혼한 상태이긴 하지만, 제이미는 아직도 그 계집한테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이는 날 침대에서 쫓아냈어요. 복수하겠다고 미리 경고를 했지
만, 그이는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죠."
"앙심을 품은 여자는 역시 무섭다니까."
낮게 중얼거리던 그레이 경은 다시 소리를 높여 말했다.
"어쨋든 다 잘된 일이오. 난 당신에게 큰 빚을 졌소, 아가씨. 혹시라도 당신 마음에 위안
이 될지 몰라 말해두는데, 앨리타는 곧 내 아내가 되어 모티머의 손아귀에서 영원히 벗어나
게 될 테니 더 이상 걱정 마시오."
그믐밤이었으므로 달은 뜨지 않았다. 제이미가 거사를 치르기에는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날이었다. 낮게 깔린 구름이 바다 쪽에서 밀려들었고, 해변에는 희뿌연 안개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시계가 자정을 알릴 무렵, 제이미는 길다란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게일
로드는 거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도 준비를 마쳤습니다."
노인은 말했다.
게일로드를 바라보며 제이미는, 구부정한 몸에 검은 외투를 걸친 그의 모습이 지금처럼
늙고 연약해 보인 적이 없다는 새삼스런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이런 위험한 일에 가담하기
엔 게일로드의 나이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왠지 모르게 오늘밤엔 게일
로드를 집에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이미는 노인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
싸며 말했다.
"이번엔 빠지게, 친구. 오늘밤엔 집에서 기다렸다가 마차가 도착하면 물건을 정리하라구.
기사들도 이젠 우리 일을 눈치챈 것 같지만, 그들까지 우리의 불법적인 일에 참여시켜야 좋
을지 모르겠어. 혹시라도 그들이 깨어나면, 밀수품을 밀실에 잘 숨길 때까지 집안에서 꼼짝
도 하지 못하도록 자네가 잘 지휘를 하란 말일세."
"그럴 순 없습니다, 주인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주인님과 동행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절차를 바꾸면 불길한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내 말대로 하게, 게일로드."
제이미는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는 게일로드가 반박을 하기 전에 황급히 돌아서서 멀어져갔다.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자신에게는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노인의 생명을 위태
롭게 만드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어둠의 영주'가 도착했을 때 밀수업에 관계하는 마을 사람들은 이미 노스 비치에 모두 모
여 있었다. 그들은 멀리 정박해 있는 배에 그가 신호를 보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등불을
밝혀 배에 신호를 보내고 나자, 사람들은 조바심을 치며 물건을 실은 첫 번째 보트가 도착
하기를 기다렸다. 제이미는 말에 걸터앉아 잔뜩 경계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겉으로는 평상
시와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였지만, 그의 육감은 자꾸만 위험을 예고하고 있었다.
첫 번째 보트가 도착해 짐을 부렸고, 또 다른 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신속하게
움직이며 모래사장에 술통과 나무상자를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보트가 짐을 부린 뒤,
제이미는 황급히 선장에게 돈을 지불하고 밀수선을 떠나보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
지만 밀수품을 안전하게 성안의 밀실에 숨겨놓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
다. 그때 멀리서 삐걱이는 마차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근심을 떨쳐버리려고 애썼다.
여러 대의 마차가 덜컹거리며 모래사장으로 다가오자, 제이미는 물건이 쌓인 곳으로 말을
몰고오는 마부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불길한 예감이 갑자기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뭔가 일이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이미는 말에서 내려 등불을 높
이 치켜들고, 다가오는 첫 번째 마차를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어딘가 초조해하는 것 같
던 마부가 갑자기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든 순간, 제이미는 사태를 알아차렸다.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비수처럼 고요한 밤공기를 갈랐다.
"함정이다! 어서 달아나!"
위험한 순간에는 즉각 명령에 따라 우선 도망을 치라는 제이미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마을 사람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달아났다. 곧이어 마차 짐칸 안에서 무장을 한 수십 명의
군인들이 칼을 뽑으며 뛰어내렸다. 해변을 감싸고 있는 숲속에서 더 많은 병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며, 제이미는 황급히 자신의 말을 향해 달려갔다. 자신의 퇴로는 거의 막혀 있었지
만,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달아난 것을 눈치챈 그는 그나마 다행으로 여겼다. 그가 아슬아
슬하게 결정적인 순간에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대피시킨 모양이었다.
자신의 말이 서 있는 곳을 발견하고 밀수 단속반인 병사들에게 잡히기 전에 서둘러 달아
나던 제이미는 에반 그레이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레이는 완전히 무장한 여섯 명의 기사
의 호위를 받으며 칼을 위험스럽게 뽑아든 채 버티고 서 있었다.
"네놈의 위험한 장난은 이제 끝났다, 모티머. 아니지, 어둠의 영주라고 불러줘야 할까?"
그레이 경이 비아냥거렸다.]
"그런 것 같군."
제이미가 전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침착하게 대답하자, 그레이는 그의 태도에 더욱더
화가 치밀어올랐다.
"네놈의 정체를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할 테지만, 어느 아름다운 숙녀분이 알려주었
다는 것만 알아둬라."
그레이는 일부러 그녀의 이름을 숨겼지만, 제이미는 그가 앨리타를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숙녀분에게 내 안부나 전해주시지."
제이미는 경멸스런 어조로 냉담하게 대꾸했다.
"오, 그러고 말고. 네가 마침내 극악모두한 행위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는 사실
을 그녀가 알게 되면 무척 기뻐할 거다. 또한 국왕폐하는 막대한 세금 손실을 막아준 내 노
고를 치하하겠지. 범법자로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하다니, 반역자의 아들에게 딱 어울리는 최
후로구나.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더니, 아들놈도 제 아버지와 똑같은 방법으로 죽어가도록
운명이 정해진 모양이야."
"나쁜자식!"
제이미는 그레이를 향해 돌진하며 소리쳤다. 만일 그의 손아귀에 그레이의 목덜미가 잡히
기만 한다면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절대로 놓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이미는
그레이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두 녀석이 한꺼번에 앞으로 나서며 그를 공격했고, 그
들은 동시에 칼자루로 제이미의 머리를 악랄하게 내리쳤다. 제이미는 축축한 모래사장에 육
중한 몸을 쓰러뜨리며, 정신을 잃는 순간까지 앨리타를 저주했다.
앨리타의 결혼날짜는 무서운 속도로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런던의 타운하우스에서 한 발
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엄명을 받은 그녀는 끔찍하게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겁탈하려 했던 그레이 경을 혼내준 뒤로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자, 몹시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딸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몹시 진노한 아버지의 꾸지람을 고스란
히 견뎌내야만 했다. 그녀가 한 짓을 전해들은 아버지는 다짜고짜 그녀에게 손찌검을 했고,
덕분에 꼬박 일 주일 동안 그녀의 얼굴에는 검푸른 멍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레이 경이 결
혼도 하기 전에 그녀를 겁탈하려 했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충격을 받은 듯 했다. 하지만 딸
을 때렸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버지는 사과하지 않았다.
"네가 순결한 처녀였을 때와는 달라. 모티머와 잠자리를 같이했을 땐 그토롤 난리법석을
피우지 않았잖느냐."
아버지의 반응은 냉담했다. 서머셋 경은 딸에게 일어난 일이 수치스럽다는 듯, 앨리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조차 꺼려했다.
어느새 결혼식은 겨우 일주일 뒤로 다가왔고, 도무지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든
앨리타는 망연자실했다. 얼마 전까지 그녀는 왜 자신이 지금까지 제이미의 아이를 임신하지
않았을까, 여러번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녀의 몸속에는 확실히 제이미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그녀는 두 달째 생리를 하지 않았고,
예전보다 가슴이 크게 부풀어올랐다. 거의 매일 아침 그녀는 욕지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
고, 그때마다 가까스로 실내용 변기에 위를 비워냈다.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몹시 화를 내리라는 걸 알고 있었
다. 그렇다면 그레이 경의 반응은 대체 어떨지 궁금했다. 혹시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약혼을
파기하려 들지는 않을까? 그녀는 잠시 동안 희망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신중하게 생각해본
결과, 그럴 리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그녀를 원하는 데는 단순히 여자로서 자신을 원
하는 남자의 청혼 이상의 음모가 내재되어 있었다. 에반 그레이가 모티머 가문을 혐오하는
이유 역시, 재산에 대한 단순한 탐욕 이외에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눈치
챌 수 있었다. 뭔가 어두운 비밀이 과거의 역사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것은 에반 그레이만
이 알고 있을 비밀이었다.
결혼식을 이틀 앞둔 날, 서머셋 경이 앨리타를 응접실로 불렀다.
"무슨 일이죠, 아버지? 그레이 경이 결혼식에 대해 마음이라도 바꾸었나요?"
앨리타가 희망이 담긴 목소리로 묻자, 아버지는 화난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레이 경은 승리의 영광을 안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어둠의 영주가 체포되어 화
이트홀의 지하감옥에서 처형을 기다리고 있어."
앨리타의 얼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어둠의 영주라구요? 정말이에요, 아버지?"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그렇다. 너한테는 그자의 이름을 굳이 밝힐 필요도 없겠지. 너도 잘 아는 인물일 테니 말
이다. 넌 언제부터 제이미 모티머가 어둠의 영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냐?"
"저, 전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이는 잘 있나요?"
온 세상이 그의 비밀을 안다고 해도, 그녀는 절대로 제이미를 배신할 수 없었다.
"감옥에 갇혀 잘 지내고 있겠지. 그것도 왕이 런던으로 돌아와 사형을 명령할 때까지 뿐
이겠지만. 어쨌든 에반 그레이가 나라를 위해 눈부신 업적을 세웠구나. 너도 장래의 남편감
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제가 사랑하는 남자가 처형을 기다리며 감옥에 갇혀 있는데, 그를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구요? 그럴 순 없어요, 아버지. 제이미가 법을 어겼는지는 몰라도, 그이는 그보다 더 심한
일들을 수없이 겪었어요. 전 그레이 경과 결혼할 수 없어요. 저를 사랑하신다면, 제발 말도
안 되는 이 촌극 따위를 제게 강요하지 말아주세요. 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요. 전 제이
미의 아내예요."
서머셋 경은 코웃음을 쳤다.
"사랑이라구? 네가 사랑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 네 어머니와 결혼할 때에도 난 네 어
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 어머니가 아이를 낳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린 서로
잘 지냈다. 네 남동생이 네 엄마와 함께 저 세상으로 간 건 참 안타까운 일이었지."
"아버진 왜 재혼하지 않으셨죠?"
문득 호기심이 발동한 앨리타가 물었다. 수없이 많은 정부와 애인을 두었던 아버지가 왜
정식으로 새아내를 맞이해 후계자를 만들지 않았는지, 그녀는 의아스러웠다.
잠시 머뭇거리던 서머셋 경은 결심한 듯 앨리타에게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모티머의 아들이 사라져버리고, 다들 그가 죽었다는 결론을 내렸을 때, 그레이 경과 난
계약을 맺었다. 너를 그레이 경에게 시집보내면, 사위로서 내 후계자가 되어주기로 말이다.
앨리타, 이번 일에는 날 방해할 생각 말아라. 지금까지 난 아주 관대한 애비였어. 이 애비는
단지 네가 순종적으로 내 뜻에 따라주기를 바랄 뿐이다."
"저도 착실한 딸이었어요, 아버지. 하지만 이번 일만은 아버지의 뜻에 따를 수가 없어요.
전 제이미를 사랑해요."
서머셋 경의 분노는 극에 치달았다.
"어떻게 그런 불한당 같은 놈을 사랑할 수가 있지? 국왕이 너와 모티머의 결혼을 선언했
을 때, 너는 내게 당장 이혼하게 해달라고 애걸했었어. 그자가 어떻게 했기에 네 마음을 사
로잡은 게냐?"
앨리타는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니, 됐다. 대답은 이미 알고 있어. 보아하니 그놈은 여자를 유혹하는 데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 같더구나. 너를 관능적으로 길들여 수치심도 모르는 요부로 만들었기 때문
이겠지. 잘 들어라, 앨리타. 너는 그 엉뚱한 열정을 잘 참아두었다가, 그레이 경을 위해서 써
먹어야 한다."
"싫어요, 아버지. 전 그레이 경과 결혼할 수 없어요."
앨리타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다. 결혼식 준비를 마무리짓기 위해 에반이 곧 도착할 거야. 너를
부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아버지의 말이 신호라도 되는 듯, 그때 마침 에반 그레이가 거실로 들어섰다. 그의 걸음걸
이는 당당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멀리서도 그가 어둠의 영주를 체포한 일로 자만심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서머셋 경과 인사를 나누기 전에 앨리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장래의 장인이 되실 분과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에반 그레이는 앨리타를 향해
돌아섰다.
"오늘따라 유난히 눈부시게 아름답소, 앨리타. 난 우리가 결혼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
소."
위협적인 악의가 내포되어 있는 그의 목소리에 앨리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에반 그레
이는 그녀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던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그 복수의 날을 고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앨리타는 떨리는 숨을 들이쉬며 대꾸했다.
"결혼식은 없을 거예요, 그레이 경."
그녀는 그레이가 폭력을 휘두를 지도 모른다는 예상했지만, 그는 지긋이 미소를 짓고 있
을 뿐이었다.
"당신에게 겸손과 복종의 미덕을 가르칠 수 있으려면 아직도 이틀이나 남았다니, 무척 안
타깝군."
"당신과 아버님이 계속해서 제 뜻을 무시하시니, 하는 수 없이 제가 왜 당신의 부인이 될
수 없는지 이유를 밝혀야 겠군요."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불쑥 내뱉었다.
"전 제이미의 아이를 가졌어요."
백지장으로 새햐얗게 질렸던 그레이의 얼굴은 천천히 푸르스름한 붉은빛으로 변해갔다.
"나쁜계집! 그 보드라운 뱃속에 모티머의 씨앗을 품고 있다고 해서 내가 마음을 바꿀 줄
알았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그놈이 당신에게 먼저 씨앗을 뿌렸는지는 몰라도 당신한테서
합법적인 후계자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뿌닝라구. 지금 당신 뱃속에 들어있는 사생
아는 아마 끝까지 살아남아서 세상의 밝은 빛을 보기 힘들 거야. 혹시라도 자궁 안에서 붙
어서 살아남는다 해도, 내가 태어나자마자 그놈의 숨통을 끊어놓을 테다."
"안돼요! 아무리 당신이 잔인하다 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앨리타는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그녀는 두려움으로 인해 커다래진 눈으로 서머셋 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제발 저를 이 곤경에서 구해주세요."
서머셋 경은 내심 놀라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와 그레이가 과거에 비겁한 행동을 함께 저
질렀던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아무런 죄도 없는 갓난아이를 살해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할 필요까지야 없지 않겠나, 그레이 경. 아이가 끝까지 살아남
아 태어나게 된다면, 누구에게든 맡겨 키우면 되겠지."
서머셋 경이 맞섰다.
"제 아내 일은 제가 결정하겠습니다. 이번 일에 우린 함께 연루돼 있다는 걸 벌써 잊으셨
습니까?"
그레이는 냉랭한 어조로 교활하게 말했다.
서머셋은 그의 목소리에서 경고의 의미를 순간적으로 알아차렸다. 그와 그레이는 과거의
음모에 깊숙이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이제와서 그의 분노를 산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서머셋은 금세 그레이의 말에 말려들었다.
"자네 뜻대로 하게. 이제 앨리타는 자네 안사람이니, 그 애에 관한 일이라면 어디까지나
자네가 좋을 대로 해야겠지. 하지만 딸에가 다치면 가장 가슴아파할 사람은 나라는 걸 잊지
말게."
"따님을 걱정하시는 어르신의 배려에 가슴이 찡해지는군요. 전 앨리타와 결혼하기 위해
오랜 세월을 기다려왔습니다. 제가 원하는 순종적인 아내로 길들이기 위해 내가 얼마나 완
력을 써야 하는지는 어디까지나 앨리타 자신에 달린 문제죠."
그레이의 목소리는 몹시 냉담했다.
"당신에 내 아이를 해치기 전에 내가 당신을 죽여버리고 말겠어요. 난 아이를 반드시 지
킬 거예요. 내 아인 건강한 모습으로 태어날거고, 그러면 난 아이에게 아버지가 누구인지 꼭
알려줄 거예요."
앨리타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그레이는 야비하게 웃어댔다.
"그렇다면 지옥에서나 서로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되겠군. 제이미 모티머는 이미 무덤을 향
해 한 발 내디뎠고,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니 말이오."
"제이미를 만나고 싶어요."
"그렇게는 안 되오. 우리는 계획대로 이틀 후에 결혼식을 올릴 것이고, 식이 끝나자마자
당신은 아버지와 함께 웨일스에 있는 서머셋 성으로 떠나시오. 아이를 나을 때까지 그곳에
서 지내야 하오. 다른 놈의 씨앗을 품고 있는 당신과 잠자리를 같이 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군. 당신이 사생아를 떼버리기 전까진 난 당신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소."
앨리타의 가슴 속에는 갑작스런 기쁨이 밀려왔다. 일단은 시간을 번 셈이었다. 일곱 달 동
안이라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혹시 그녀가 아버
지의 성에서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몰랐고, 제이미가 감옥을 탈출해 교수형을 면할 수 있을지
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국왕폐하가 사형을 중단시킬지도.... 불가항력적으로 여겨졌던
희망이 어느새 그녀의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그녀의 믿음
이 확고하기만 하다면 이제 무슨 일이든 가능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앨리타의 간절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에반 그레이와의 결혼을 중단시키지는 못했
다. 예식을 거행할 사제와 아버지, 서머셋 가문의 오래된 가정부와 집사만이 증인으로 참석
한 채, 그녀는 런던에 있는 아버지의 타운하우스에서 간략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교회 법정
에서 앨리타와 모티머의 이혼이 합법적으로 결정되기는 했지만, 그레이 경은 둘의 결혼식에
쓸데없는 이목이 집중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왕이 런던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모든 일이 끝나버린 상태일 것이고, 그것은 이미 돌이킬수 없는 과거가 되어 있을
것이었다.
결혼서약에 답을 하는 차례가 되자 앨리타는 고집스럽게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
다. 순간 그녀는 자신의 침묵에 화가 난 그레이 경이 폭력을 휘두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마지못해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고, 사제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
리의 그녀의 대답에 재차 되묻기까지 했다. 놀라울 만큼 짧은 시간 동안 두 사람의 결혼선
언문이 낭독되었고, 앨리타는 기뻐한다기보다 몹시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그레이의 짧고도
잔인한 입맞춤을 받았다.
예식이 끝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시간, 앨리타는 웨일스에 있는 아버지의 외딴 성
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 앉아 있었다. 그레이는 서머셋 경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전했다.
"아내를 잘 보호해주십시오. 뱃속의 사생아에게 뭔가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기면, 그 즉시
연락을 주시구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내가 아기를 낳기 전까지 전 런던에서 지
내겠습니다. 제가 웨이릇로 돌아갔을 땐, 아내의 첫 결혼을 연상시키는 잔재가 전혀 남아 있
지 않도록 만사를 잘 처리해놓으시길 빕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죠."
"잘 알아들었네."
서머셋 경이 대답했다.
"자세한 건 어르신께 맡기겠습니다."
그는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앨리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날 즐겁게 할 수 있을지 잘 생각해두시오. 우리가 마침내 결합하게 되는 날
엔, 당신이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완벽한 아내로 변신해 있길 기대하겠소. 일곱 달 동안 머
리를 잘 굴려봐요."
퀴퀴한 냄새가 나는 진탕에서 뒹굴며 제이미는 작은 감방의 어둠 속에서 사물을 분간하기
위해 여러 번 눈을 끔벅였지만, 실오라기만큼의 빛도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리엔 피
가 말라붙어 있었고, 타박상을 입은 온몸이 욱신거렸다. 얼마나 이곳에 있었을까? 처음 이곳
으로 끌려왔던 날의 기억이 그의 뇌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웨일스에서 런던으로 끌려
오던 여행의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독하게 두들겨맞은 뒤, 재갈을 물리고 손발을 결
박당한 채 마차의 짐칸에 내던져졌다. 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악몽의 연속이었다. 에반 그
레이의 명령으로 매일같이 계속되던 매질과 치욕스런 통증 이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아무것
도 없었다. 음식과 물은 그가 교수형을 당할 때까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만큼
만, 그것도 불규칙하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가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앨리타가 잔인하게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일이었다.
지하감옥의 숨막힐 듯한 침묵에 익숙해 있던 제이미는 동굴처럼 어두운 통로를 울리며 다
가오는 발자국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 소리는 아득한 환청처럼 들려왔다. 하루에 한 번뿐
인 그날의 식사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으므로, 그는 그 발자국소리의 정체를 예측할 수가 없
었다. 혹시 재판도 없이 처형을 당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감방의 문이 벌컥 열렸고, 제이미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환한 불빛에 눈을 제대로 뜰 수
가 없었다.
"여긴 똥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하지만 이렇게 지독하고 고약한 냄새가 네놈에게는 잘 어
울리지."
그레이는 콧등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제이미는 에반 그레이의 목소리를 금방 알아차리고 참을 수 없는 증오심에 몸을 떨었다.
그는 힘이 남아 있다면 당장 목숨을 잃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놈의 숨통을 끊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꼴이 아주 고소한가보군?"
"그래, 드디어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아주 뿌듯하다. 하지만 내가 온 이유
는 그 때문이 아니야. 내가 지금 막 결혼식 피로연을 마치고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네놈이
기뻐할 것 같아서 이렇게 친히 방문을 했지. 앨리타와 난 오늘 결혼식을 올렸다. 이 기쁜 소
식을 내가 직접 네놈에게 전하고 싶었어. 너도 짐작했겠지만 우리 부부의 잠자리는 식을 올
리기 훨씬 전부터 황홀하게 시작되었지. 내 아내에게 뜨거운 열정을 가르쳐준 네놈에게 내
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던가? 앨리타는 정말 뜨거운 여자야. 도무지 지칠 줄을 모르거든....
제이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그레이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주먹을 날리기도 전에
간수들의 몽둥이에 두들겨맞은 그는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15
에반 그레이는 자신이 앨리타와 결혼한 사실에 대해 헨리 왕이 어느 정도는 언짢아하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국왕이 불같이 진노하자 어쩔 줄을 몰랐다.
"뭐가 어쨌다구? 왜 내게 진작에 이 일을 알리지 않았소?"
교회 법정에서 앨리타와 제이미 모티머의 결혼을 무효로 판정했다는 사실을 그레이가 설
명하자, 헨리 왕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폐하께서는 곧 다가울 결혼식과 프랑스로의 여행 준비로 몹시 바쁘시기에 이런 사소한
일로 불편을 끼쳐드리기가 송구스러워 직접 대법원의 처리에 맡겼던 것입니다. 모티머가 너
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나타나 앨리타와의 약혼 사실을 주장했고, 모든 사람들이 모티머
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므로, 딸을 다른 남자에게 정혼시킨 서머셋 경의 처사는 옳았
다는 것이 법원의 판결이었습니다. 그 판결에 따라 앨리타 양은 곧바로 저와 약혼했고, 저희
두 사람은 일 주일 전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레이 경은 아첨하는 듯한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그러자 헨리 왕은 그레이를
날카롭게 흘겨보았다.
"내 왕국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모두 중요하오. 당연히
나한테 보고를 했어야 옳았소. 그건 그렇고, 제이미 모티머가 어둠의 영주라는 이름의 밀수
업자라는 말이 정말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폐하. 지금 그 도둑놈은 폐하의 처분을 기다리며 지하감옥에 갇혀 있습니
다."
그레이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경이 직접 처형을 명하지 않은 것이 놀라울 지경이군."
헨리 왕은 심기가 불쾌한 듯 빈정거렸다. 그레이는 국왕의 호된 반박에 어쩔 줄을 몰라하
며 얼굴이 벌게졌다.
"폐하, 절 오해하지 마십시오. 전 오로지 폐하를 위해 일했을 따름입니다. 폐하께서도 그
밀수꾼 놈을 체포한 사실을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요."
"물론 기쁘오. 수출입에 대한 세금이 이제 제대로 내 국고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안심해도
되겠지. 지금 우리는 세금이 절실히 필요한 실정이오."
"그럼 지금 당장 그자를 사형시키라는 명령서를 작성하도록 서기를 부를까요?"
"아니, 먼저 그자와 얘기를 좀 나눠보고 싶소. 난 그 청년이 경과 앨리타 양의 결혼식을
중단시키며 예배당으로 뛰어들었던 날, 솔직히 대단한 감명을 받았소.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의 무죄를 입증해달라는 그의 부탁을 들었을 때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도 사실이오."
헨리 왕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제이미 모티머는 미친 녀석이옵니다. 그런 자의 허튼 수작을 곧이곧대로 믿으시면 안 됩
니다, 폐하."
그레이 경은 바싹 몸이 달았다. 모티머 경의 반역재판과 처형과정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자신의 부정이 발각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몹시 두려웠다. 제이미 모티머가
갑자기 나타나 아버지의 결백을 주장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모티머의 반역 혐의와 법원
의 판결 내용에 의심을 품은 적이 없었다.
"경의 말처럼 모티머가 정말로 미쳤는지 난 아직 잘 판단이 서질 않소."
헨리 왕은 여전히 생각에 잠긴 채 대꾸했다. 그러자 그레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뭐라고 했소? 오, 아무것도 아니오. 경과 앨리타 양의 결혼에 대해서 잠깐 얘기나 해봅시
다. 앨리타 양도 두 사람의 결혼에 동의한거요?"
그레이는 국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누구보다도 서머셋 경이 몹시 기뻐했습니다. 그분은 딸에게 최고의 신랑감을 선택해주고
싶어하셨죠."
헨리 왕은 그레이가 뭔가 얼버무리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아직 프랑스로 항해를 떠나려면 여러 주일이 남아 있으므로, 그는
그 전에 모든 사건을 세밀하게 조사하리라 마음먹었다.
"부인은 지금 어디에 있소, 그레이 경?"
"아버님과 함께 지금 웨일스에 있습니다. 아내가 복잡한 런던을 별로 좋아하질 않아서요."
그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며,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신혼부부가 떨어져 지내다니 좀 이상하군, 안 그렇소?"
"런던에서 여러 가지 일을 마무리짓는 대로, 저도 빨리 아내에게 돌아가고 싶습니다, 폐
하. 그러므로 놈의 처형을 빨리 진행시켜주시기를 간청하옵니다. 어둠의 영주는 오랫동안 저
희 귀족들의 목에 걸린 가시였습니다."
"음, 알겠소."
헨리 왕은 매끄러운 턱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는 처형 명령을 내리기 전에 생각할 것
이 많았다. 그리고 그는 일단 개인적으로 제이미 모티머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레이는 국왕과의 대화 내용에 전혀 만족하지 못한 채 접견실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헨리 왕은 모티머에게 지나치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지체없이 처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는 남은 평생을 제이미 모티머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 것만 같았다. 그
의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겠다는 모티머의 주장뿐 아니라, 그가 잔인한 방법으로 앨리타를
빼앗았다는 사실이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찢기고 얻어맞은 상처는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제이미는 여전히 끔찍하게 더럽고 불
결한 감방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간신히 공급되는 물은 마시기에도 부족할 정도였다. 음식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고, 그것은 도저히 인간이 먹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
이라도 기운을 차리기 위해 맹물이나 다름없는 보리죽을 억지로 삼켰다. 그는 싱싱한 쇠고
기와 야채가 듬뿍 든 스튜를 먹고 싶었지만, 지금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음식 찌꺼기로 만
든 구정물에 불과했다.
제이미는 에반 그레이가 감옥으로 찾아왔던 날, 곤봉에 맞아 아직도 심하게 부어 욱신거
리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축축한 지하감옥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는 동안 그의 분노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의 분노의 감정은 거의 대부분이 앨리타를 향한 것이었다. 그를 좋아한다
고 믿게 만든 뒤, 가차없이 잔인무도하게 남편을 배신한 아내를 그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앨리타가 천부적인 거짓말쟁이이거나, 아니면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일 거라고
생각했다.
팔다리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제이미는 비좁고 숨막히는 공간 안에서도 여러 시간
동안 운동하는 습관을 들였다. 상상의 검으로 허공을 가르는 연습을 하고 있을 때, 그는 통
로를 따라 울려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소리는 그의 감방 앞에서 멈추었다. 그는
지난번 방문객인 그레이에게 고통을 당했던 결과를 떠올리며 몸을 긴장시켰다. 그레이 경이
또다시 그를 고문하기 위해 찾아온 것일까? 다행히 이번에는 그도 스스로를 좀더 잘 방어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이 회복된 상태였다.
오랜 세월 동안 낡고 녹이 슨 경첩이 움직이더니, 육중한 철문이 삐걱이며 열렸다. 갑작스
런 불빛에 어느 정도 시력을 되찾자, 제이미는 눈앞에 서 있는 헨리 왕을 발견하고 깜짝 놀
랐다.
"폐하."
그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일어나게, 모티머."
모티머의 참단한 몰골에 충격을 받은 헨리 왕은 근엄하게 명령했다. 그레이 경의 잔혹한
성향을 익히 알고 있었다면, 사실 이 정도는 그도 예상하고 있어야 했다.
제이미는 약간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꼴이 말이 아니군.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톡톡히 죄를 뉘우쳤으리라 믿네. 밀수는
왕실과 조국을 저버리는 끔직한 범법행위에 해당되고, 그에 대한 처벌은 가장 잔혹한 것일
세."
"물론 폐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제이미는 대꾸했다. 곧이어 그는 피멍이 들고 부풀어오른 입술로 악동처럼 싱긋 웃었다.
"하지만 상당한 돈벌이가 되는 사업이기도 하죠."
그의 당돌한 말에 헨리 왕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겠지. 자네가 밀수해서 팔아먹은 브랜디와 진기한 물건들에 매겨져야 할 세금을 일
년 동안 모으면, 내가 프랑스에 또 한 번 다녀올 비용을 충당하고도 남을 게야. 그 돈으로
국왕의 신부에게 걸맞은 귀한 선물을 마련할 수도 있었겠지. 캐서린은 왕의 딸답게 최고의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네. 하지만 지금 우리 영국은 엄청난 빚더미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어.
다 자네 같은 범법자들 때문이지. 그레이경은 자네의 목을 매달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나도 그런 그를 탓할 수가 없는 입장이라네."
"에반 그레이는 저의 모든 것을 훔쳐간 사기꾼입니다. 이제는 심지어 제 아내까지도 빼앗
아갔습니다. 저만 죽고 나면, 그자가 숨기고 있는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날까 걱정하기 않아
도 되겠죠. 그자의 죄를 파헤칠 수 있는 모티머의 후손은 더 이상 없어질 테니까요. 감히 여
쭤보겠습니다면, 저의 아버님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조사를 해보셨습니까?"
"그레이 경의 주장대로 즉각 자네를 처형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는 대신, 내가 직접 여길
찾아온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그 때문이라네. 진상을 조사해본 결과, 자네 아버지에 대한
고발 내용에 오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발견되었네. 판관이 뇌물을 받았다는 증
거도 포착되었네."
제이미는 참으로 오랜만에 믿어지지 않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럼 저희 아버님이 결백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말씀입니까?"
"아닐세. 하지만 몇 가지 부정이 발견된 이상 좀더 조사를 해봐야겠지."
제이미는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진실이 채 밝혀지기도 전에 그는 죽게 될 운명이었다.
"폐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살 날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밀수업에 손대기 전에 진작 그런 생각을 했어야지. 그레이 경과 서머셋 경이 기필고 자
네 머리를 매달아야겠다고 벼르고 있으니, 자네의 매력적인 인생도 이제 끝장인 것 같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헨리 왕의 어투에서는 제이미의 처형 명령을 내리기 꺼려하고 있다
는 인상이 짙게 풍겼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진심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처음 만난 순
간부터 뭔가 통하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뭔가 방법이 있다면.... 제이미는 갑작스럽게 엉
뚱한 생각이 떠올라 흠칫 몸을 경직시켰다. 만일 헨리 왕이 그가 생각하는 만큼 재물에 대
한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왕이 얘기했던 것처럼 영국이 재정적으로 무척 궁핍한
상태라면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꼭 그럴 필요는 없겠죠. 폐하, 저와 거래를 하지시 않겠습니까? 서로에게 모두 이익이 되
는 거래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헨리 왕은 무척 솔깃해졌다. 물론 호기심이 동하기도 했다.
"거래라니? 자네한테 뭔가 내세울 게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내 기꺼이 들어보지. 난 국
가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에든 관심이 있다네."
제이미는 헨리 왕의 뒤에 버티고 있는 근위병들을 힐끗 쳐다보며, 왕과 단둘이 은밀하게
얘길 하고 싶다는 뜻을 표했다. 헨리 왕은 눈치 빠르게 근위병들을 감방 밖으로 내보냈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제이미는 낮은 목소리로 얘기할 수 있도록 왕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나 오래도록 씻지 못한 그의 몸에서 나는 악취를 겯디기 힘들어진 왕이 코를 찡그리며
손을 내저었다.
"더이상 가까이 오지 말게, 모티머. 냄새가 정말 고약하군. 이만하면 충분히 들을 수 있으
니, 어서 얘기해보게."
제이미는 처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폐하께 불쾌감을 안겨드리고 싶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교수대에 매달리고 싶
은 마음도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거래란, 금화와 은화로 소유하고 있는 저의 막대한
재물과 제 목숨을 맞바꾸자는 것입니다."
순간 헨리 왕의 눈동자가 탐욕스럽게 반짝였다.
"금화와 은화라구? 처음 자네를 만났을 때, 난 자네가 고달픈 시골쥐만큼이나 가난한 처
지인 줄 알았는데."
"제가 일부러 폐하께 그렇게 보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부유한 사람으로 나타났다면,
폐하께서 의심을 품으셨겠죠. 밀수업은 정말로 수입이 두둑한 사업입니다. 이제 모든 걸 폐
하께 바치겠습니다. 대신에 저를 풀어주시고, 제 아버지의 결백이 증명될 때까지 조사를 계
속하겠다는 약속을 해주십시오. 아버님은 정말로 정직한 분이셨기에, 절대 반역행위를 하셨
을 리가 없습니다."
헨리 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자네와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걸 알면 그레이 경과 서머셋 경이 길길이 날뛰겠지.
이제라도 자네의 성성 샅샅이 뒤져 내가 직접 재물을 찾아낼 수도 있네."
제이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서는 절대 찾지 못하실 것입니다. 재물이 숨겨진 곳을 아는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
다."
게일로드 역시 그 장소를 알고 있으므로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왕에게 그런 사실까
지 알릴 필요는 없었다.
"막대한 재물이라고 했나?"
헨리 왕은 뜻하지 않게 엄청난 재물을 손에 넣게 될 생각에 현혹되어 재차 물었다.
"수천 파운드에 이르는 은화과 금덩이가 있습니다. 그 돈으로 장래의 신부에게 사드릴 수
있는 물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앞으로 치르게 될지도 모를 전쟁 자금으로 쓰셔도 되겠구
요."
"내가 자네의 거래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앞으로 다시는 절대 밀수에 손대지 않겠
다고 반드시 맹세해야 하네. 자네는 웨일스로 돌아가, 내가 부르러 사람을 보낼 때까지 꼼짝
말고 기다리게. 자네 아버지에 대한 조사는 계속하겠지만, 진실이 완전히 드러나고 부정에
가담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밝혀지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발설해서는
안 되네."
"그럼 제 아내는 어떻게 하죠?"
제이미는 자신을 철저하게 배신한 여자에 대해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여전히 신경이 쓰
이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앨리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성적인 머리로 아무리 꾸
짖어보아도 그의 마음은 막무가내였다.
"서머셋 경이 자네 결혼을 무효로 만들기 전에 자네 아버지에 대한 음모 사실을 알아내지
못해 유감이네. 최근에는 내 자신의 결혼 준비와 프랑스로 떠날 채비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
지. 이혼수속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진작 알았다면 내가 중단시킬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
레이 경과 앨리타가 이미 결혼식을 올렸으니,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네. 자네
가 제의한 거래에 대한 내 조건은 이 정도일세."
제이미는 두 번 다시 생각해 보고 말것도 없이 왕의 제안을 수락했다. 일단 지옥 같은 지
하감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스스로의 힘으로도 앨리타를 되찾을 수는 있으리라. 그레이
경과의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앨리타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앨리타를 그의 성
으로 데려가게 되면 그를 배신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그의 마음에 떠오르
는 처벌의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심하게 매질을 하거나, 좁은 방에 가두거나, 그것도 아니
면 .... 그녀가 자비를 구할 때까지 끝없이 그녀와 정사를 나누는 방법도 있었다. 자극적인
생각에 그의 온몸의 감각이 꿈틀거렸다.
"폐하의 조건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이미는 공손하게 말했다.
"그럼 날 따르게. 웨일스로 떠나기 전에 깨끗한 의복과 목욕물을 준비시켜주지. 약속한 재
물이 정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 근위병들이 자네를 호위할 걸세. 자네가 말한 재물들
이 안전하게 내 소유에 들어올 때까지는 거래가 완전히 끝난게 아니야. 만일 근위대장이 자
네의 말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면, 자넨 곧바로 끌려와 처형을 당하게 될 걸
세."
"폐하께서는 아주 흡족하실 겁니다. 다시 한번 폐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이미는 확신에 찬 말투로 대꾸했다. 물른 그의 전재산을 잃게 되겠짐나, 그의 목숨을 되
찾는 것으로 충분했다. 언젠가, 머지않아 반드시 에반 그레이와 서머셋 경에게 빼앗겼던 모
든 것을 되찾고야 말리라고, 그는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다음날 런던을 떠나기 전, 제이미는 헨리 왕으로부터 앨리타가 런던에 없다는 사실을 전
해들었다. 그녀는 웨일스에 있는 아버지의 성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제이미의 심장이 고통스럽게 털썩 내려앉았다. 서머셋 성은 크리케스 성만큼이나 오래된 외
딴 곳에 위치한 성이었고, 그의 성에서 오십 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더 이상 그
녀가 자신의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앨리타와 그토록 가까이에서 지내야 하다니,
그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형벌처럼 느껴졌다.
헨리 왕은 클렌런스 모티머에 대한 반역혐의를 재조사하는 동안, 에반 그레이가 런던을
떠나지 못하도록 조처했다는 사실 또한 제이미에게 알려주었다. 모티머 경을 반역죄로 고발
한 주요 인물이 에반 그레이와 서머셋 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에
반 그레이가 얼마나 조바심을 칠까 생각하니 제이미의 마음은 한결 누그러졌다.
크리케스 성으로의 여행은 순조로웠다. 제이미는 천천히 건강을 회복하는 중이었고, 왕이
하사한 의복을 입으니 짐승의 처지에서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왕이 지시한
대로 제이미는 근위병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다. 하루하루 성에 가까워질수록 제이미는 곧
자시닝 완전한 가난뱅이 신세가 되리라는 생각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제 와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성에 도착할 날이 하루 정도 남았을 때, 그들 일행은 그날따라 일찍 야영장소를 정했다.
순간 제이미는 그들의 위치가 서머셋 성과 아주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앨리
타가 살고 있는 곳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절박한 욕망이 통증처럼 그의 몸속을 꿰뚫었다.
그는 앨리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의 달콤한 목소리를 들으며 .... 그녀와 사랑
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녀가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이 불가
능한 처지였다. 왕의 근위병들을 따돌릴 만한 구실을 마련하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지난 이틀 동안 신선한 고기를 구경도 하지 못했으므로, 제이미가 저녁거리로 짐승을 사
냥해오겠다고 하자, 근위병들은 쉽게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러나 근위대장은 경험
이 풍부한 군인이었고 눈치가 빨랐으므로, 제이미를 험악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신선한 고기야 얼마든지 환영이지만, 당신을 믿어도 되겠소?"
"전 이 숲을 잘 압니다, 대장님. 절대 달아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죠. 제가 무엇 때문에 도
망을 치겠습니까? 이미 국왕폐하께 약속을 드렸고, 신의를 저버림으로써 모티머 가문의 명
예에 먹칠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냥을 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저녁식사 시간에 맞추
어 신선한 고기를 마련해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부하를 한 명 딸려보내겠소."
"아닙니다, 저 혼자서도 충분해요. 여러 명이 몰려다니면 오히려 사냥에 방해만 됩니다."
근위대장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그렇긴 하겠지. 어쨌든 어두워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가 곧장 뒤를 쫓을 테니
그리 아시오."
근위대장의 단호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제이미는 뛸 듯이 기뻐하며 말에 올랐다.
밤마다 끊임없이 통곡을 했으므로 앨리타는 더 이상 흘릴 눈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매일
매일 그녀는 마음을 졸이며 제이미가 처형을 당했다는 소식이 날아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지금껏 아버지의 외딴 성에는 그의 죽음을 알리는 심부름꾼이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혹시
제이미가 벌써 죽은 것을 아닐까? 설마,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녀는 스스로를 위로
했다. 만일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녀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녀가 그를 배신했다고 믿고있는 제이미가 그녀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을까, 앨리타는 생
각했다.
그녀는 그에게 아기를 임신한 사실을 전하고 싶었고, 자신이 곧 아버지가 된다는 소식을
듣는 그의 얼굴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이는 행복해할까? 혹시 아이의 엄마인 그녀를 증오하
기 때문에 아이마저 싫어하지는 않을까?
서머셋 성에서 지내고 있는 앨리타에게 있어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집안에 갇혀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제이미가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서머셋 경도 더
이상 딸을 가둬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딸이 계속해서 승마를 한다
면 그레이 경이 원한 대로 유산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서머셋 경은 무고한 갓난아기
를 살해한다는 생각이 아무래도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앨리타가 자연유산을 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그는 딸이 출산을 하게 되면 갓난아기를 죽이지는 못하리라
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일같이 앨리타는 자신의 말에 안장을 준비시키고 혼자서 승마를 나갔다. 그녀는 아기에
게 해가 될까 봐 오랫동안 말을 타지는 않았지만, 거의 하루종일을 외딴 숲속에서 지내며
제이미와 나누었던 아름다운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러는 동안에는 제이미에게 닥친 죽음에
대한 불행한 생각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녀는 정열과 모험으로 가득 찼던 그의 삶과, 비록
잠깐이었지만 그들이 부부로서 행복하고 평화롭게 보냈던 나날들만을 기억했다. 에반 그레
이의 아내로 살아야 하는 미래에 대해서도 그녀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에반 그레
이와 결혼했다는 사실에만 몰두해 있는다면, 절망 때문에 삶을 포기하게 될 것만 같았다.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승마 준비를 하는 것은 이제 그녀의 습관이 되어 있었다. 외투 주
머니에 과일과 치즈, 빵 따위를 가득 채운 뒤, 그녀는 아침잠이 많은 편인 아버지가 깨어나
기 전에 서둘러 성을 떠났다. 뱃속의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는 천천히 말을 몰았고, 곧
울창한 숲을 두 갈래로 가르며 흐르는 작은 개울가에 도착했다. 그곳은 숲속에서 그녀가 가
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개울 옆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앨리타는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들도 곧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잎을 떨구리라는 생각을 했다. 임신 4개월째에 접어들었지만 앨리타는 사람
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아직도 날씬했다. 가슴이 더 커지고 허리둘레도 약간 늘어나긴
했지만, 그녀는 출산 시기가 가까워올 때까지도 보기 싫을 만큼 살이 붙거나 체형이 변할
위험은 없는 것 같았다.
아침 안개가 아직 가시지 않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앨리타는 비감에 젖어 제이미가 갇혀
있을 캄캄한 감옥을 떠올렸다.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남자를 탈출시킬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평생 스스로가 이토록 무기력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어느덧 태양이 중천에
떠올라 이글거리기 시작하자, 앨리타는 준비해온 음식을 점심을 먹었다. 별로 허기가 느껴지
진 않았지만 건강한 아기를 출산하기 위해서는 규칙적으로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고 생각했
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태어날 아기의 운명에 대해서는 감히 생각해볼 엄두도 내지 않았다.
과거의 잘못은 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딸을 사랑했고 새로 태어날 손주를 에반 그레이의
손에 희생하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앨리타는 혹시
아기와 헤어지게 되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녀는 평생을 에반 그레이의 아내로 살아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안전하게 출산
을 하고 나서 아기와 자신을 돌볼 능력이 생기자마자 어디로든 달아날 생각이었다. 너무나
많은 생각에 골몰하느라 앨리타는 곧 지쳐버렸다. 그녀는 외투로 단단히 몸을 감싸며 스르
르 잠이 들었다. 해가 천천히 서쪽으로 기우는 것도 모른 채 그녀는 곤하게 단잠을 자고 있
었다. 가을과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예고하듯, 매일매일 해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서머셋 성에 가까이 다가가던 제이미는 문득 사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신선한 고기를 가
지고 돌아가겠다고 행콕 대장과 약속을 했으므로, 그는 성을 나중에 둘러보기로 하고 지체
없이 사슴을 쫓기 시작했다. 날렵하게 뛰어가든 짐승이 한가롭게 흐르는 개울가에 멈춰서자,
그는 재빨리 석궁에 화살을 매겨 목표를 겨냥했다. 날아간 화살은 사슴을 명중했고, 연약한
짐승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제이미는 재빨리 말에 올라 쓰러진 사슴을 향해 말을 몰았다. 갑작스런 소란에 놀란 앨리
타는 일어나 앉으며 눈을 깜박였다. 1미터쯤 떨어진 곳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슴을
발견한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 잠시 후 나무 사이를 뚫고 들이닥치는 말과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앨리타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말을 피하기 위해 벌떡 일어났다.
제이미는 사슴이 쓰러져 있는 곳에 거의 가까이 다가가기 전까지는 앨리타를 보지 못했
다. 누군가 눈앞에서 벌떡 일어나자, 그는 말을 멈추기 위해 가엾은 말의 주둥이가 찢어질
만큼 세차게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이 뒷발로 일어서며 가까스로 멈추고 나서야, 그는 눈 앞
에 있는 사람이 앨리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를 본 순간 그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기뻤
지만, 기쁜 마음은 서서히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바뀌어갔다.
앨리타는 유령이라도 만난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제이미가 화이트홀의
지하감옥에 갇혀 있거나 이미 죽었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인하고 늠름한 모습
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그를 마주하려니 그녀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는 그녀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낸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서서히 그녀를 중심으로 땅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제이미는 욕설을 내뱉으며 황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그녀가 바닥에 쓰러지기 전에
붙잡았다.
처넌히 눈을 뜬 앨리타는 혐오감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제이미의
찡그린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제이미."
그녀는 가느다란 한숨처럼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길에 마음이 약해질까 두려워진 제이미는 흠칫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
를 뒤로 젖혔다.
"내가 살아 있는 걸 보고 실망했소?"
그가 불쾌한 듯 묻자 앨리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실망이라뇨?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 걸요. 대체 어떻게 탈출했어요?"
"내가 어떻게 해서 당신 남편이 그토록 원하는 정의의 심판의 칼날을 벗어났는지는 중요
하지 않소. 혼자 있는 당신을 맞닥뜨린 건 운명인 모양이오. 끔찍스런 감옥에서 썩어가는 동
안 난, 운이 좋아 살아난다면 당신을 어떻게 처벌할지 수많은 방법들을 생각했었지."
창백한 얼굴의 앨리타는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부인하는 그녀의 말에 제이미는 험상궂게 얼굴을 찡그렸다.
"당신은 날 배신했어."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앨리타의 어깨를 잡고 미친 듯이 흔들어 댔다.
"아니예요, 제이미. 난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이라구? 쳇,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에반 그레이겠지. 그자가 나보다 훌륭하던가?
그자도 당신의 쾌락에 떨며 비명을 지르도록 만들 수 있더냐구?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
런 짓을 했지? 내가 죽어주길 바랄 만큼 그렇게 날 미워했었나?"
앨리타는 제이미의 잔인한 증오심을 견딜 수 없었으므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난, 난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요. 말했잖아요, 난 당신을 사랑한다구요. 난 당신을 배반하
지 않았어요."
제이미는 절망감으로 고개를 떨군 앨리타의 금발머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몹시 충격
을 받은 것 같았다. 그녀가 한 짓이야 어떻듯 그는 여전히 앨리타를 원하고 있었다. 그는 당
장 그녀를 말에 태우고 그레이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왕의 군대가 그를 바짝 추격해오리라는 사실만 아니라면 그는 일을 저질렀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낡은 성으로 데려간다면 그레이가 군대
를 이끌고 찾아와 어렵지 않게 성을 포위할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반역자가 아니라는 결정
적인 증거를 찾아내 모티머 가문의 명예를 되찾지 않는 한, 그가 앨리타와 함께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었다.
"날 믿어야 해요, 제이미. 난 절대로 당신을 배반하지 않았어요. 맹세할 수 있어요."
그가 계속해서 야릇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앨리타가 애원했다.
그는 그녀를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이나 밀수에 가담했던 마을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를 배신했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맹세를 한다고 해도 난 당신을 믿지 못하오. 드디어 당신은 당신이 그토록 원했던
것처럼 그레이와 결혼하게 되었군."
"난 그레이를 원하지 않아요!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에요, 제이미."
앨리타가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 모두가 거짓말이야!"
그녀의 말에 너무도 화가 난 제이미는 감옥에서 잔인하게 매질을 당하는 동안 상상했던
대로 그녀를 때리기 위해 손을 치켜들었다. 앨리타는 그가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더라도
그의 손길을 피할 만한 힘이 없었어므로,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본능젹으로 그녀는 뱃속의
아이만이라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눈을 감고 양팔로 배를 감싸안았다. 제이미가 그토록 그
녀를 증오하고 있다면,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고백하기도 두려웠다.
수도자처럼 엄숙하면서도 창백한 앨리타의 얼굴을 본 제이미의 분노는 순식간에 수그러들
었다. 그는 평생 한번도 여자를 때린 적이 없었다. 아무리 앨리타가 맞을 만한 행동을 했다
고 해도 그녀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절망스런 신음소리를 흘리며 그의 손이 무기
력하게 앨리타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그는 세차게 그녀를 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앨리타
는 너무나 작고 부드럽고 상처받기 쉬운 보물처럼 느껴졌고, 그녀를 다치게 하기보다는 보
호하고 싶은 본능을 일으켰다. 그는 마치 굶주린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을 덮치며, 절박한 몸
짓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럽고 거친 그의 입맞춤에 앨리타의 뱃속이 소용돌이쳤다.
분을 풀기라도 하듯 시작된 그의 키스는 앨리타의 부드러운 입술을 아프게 짓눌렀고, 그
의 혀는 비수처럼 그녀의 입술 사이로 파고 들었다. 벌을 주든 잔혹한 그의 입맞춤에 앨리
타는 낮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순간 그의 키스는 부드럽게 변해갔다. 잔인하기보다는 뭔가
절박하고 간절한 입맞춤을 바뀐 것이었다. 그의 거친 신음소리는 제이미 역시 rmsuh아의
입맞춤으로 몹시 흥분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그가 그녀를 땅바닥에 눕혔을 때, 앨리타는
작은 소리로 저항의 비명을 질렀다. 그녀 역시 제이미를 절실하게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녀는 그가 자신에 대한 분노에서 사로잡힌 상태에서 사랑을 나눌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안 돼요, 제이미, 여기서 이런 식으로는 싫어요."
갑자기 제이미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니, 난 이곳에서 지금 당장 당신을 가질 거요. 당신은 아직도 내 아내요. 나한테는 우
리 결혼이 여전히 합법적이고 구속력이 있소. 그레이가 당신의 달콤한 육체를 맛보았다 해
도 난 상관없소. 당신을 처음 가진 사람은 나니까. 당신이 그레이와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사
실조차 잊게 만들어주겠소. 당신은 쾌락의 절정에 다다랐을 때, 언제나 나의 이름을 부르게
될 거요. 당신이 앞으로 영원히 오늘을 기억하도록 만들어주겠소. 날 잊지 말아요, 앨리타.
언젠가 난 당신을 반드시 다시 내 사람으로 만들고야 말겠소. 내가 왜 아직도 당신을 원하
는지는 어떤 논리로도 설명하기 어렵지만, 난 당신을 원하고 있오, 내 사랑."
"제이미, 에반과는 절대로 ...."
그가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막았으므로 에반 그레이와 절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얘기하려던 그녀의 말은 입안에서 맴돌고 말았다. 숨막히는 그의 입맞춤에 앨리타는
옷을 벗기는 그의 손길조차 거부하지 못했다. 뜨거워진 그녀의 육체에 서늘한 공기가 와닿
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그녀는 제이미가 자신의 옷을 전부 벗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앨리타. 거짓말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소."
제이미는 그녀의 입술에 대고 속삭였다.
그는 아주 잠깐 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분홍빛 유두로 얼굴을 미끄러뜨렸다. 손을
그녀의 배와 허벅지로 움직이며 그는 그녀의 유두를 깁숙하게 빨아들였다.
"체중이 좀 불었군. 아니, 어쩌면 전보다 더 여성스러워졌는지도 모르겠소."
제이미는 상아빛 젖가슴을 손으로 움켜쥐며 속삭였다. 그는 풍만해진 그녀의 엉덩이를 쓰
다듬었다.
"그래, 당신은 분명히 훨씬 더 여성스러워졌소."
앨리타가 그의 말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는 동안, 제이미는 재빨리 옷을 벗어던지
고 그녀의 몸위로 올라왔다. 그는 유혹적으로 솟아오른 그녀의 유두를 다시 물었다. 그는 한
껏 부풀어오른 그녀의 젖꼭지를 굶주린 듯 빨다가, 그녀의 배와 허벅지로 뜨거운 입술을 천
천히 움직였다. 앨리타는 촉촉한 그의 혀끝이 허벅지에서 다시 위로 올라오자, 본능적으로
보다 깊은 곳으로 다가오도록 유도했다.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뜨겁고
촉촉한 입술을 그녀의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그의 혀가 다리 사이의 금빛 숲을 헤치고 안
으로 밀려들어와 욕망이 시작되는 부드러운 핑크빛 봉오리를 어루만지자, 그녀는 견디지 못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를 밀어내는 대신 앨리타는 그의 탐스럽고 진한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묻으며 좀더
그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지금 그가 멈춘다면 그녀는 곧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절
정의 순간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제이미는 그녀의 몸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고,
혀끝으로 그녀를 탐하며 동시에 무자비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앨리타의 몸이 뻣뻣하게 굳
어지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온몸이 산산조각으로 터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이미는 그녀의 몸위로 올라가며, 넋이 빠진 듯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에 떠오른 환희
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레이도 당신에게 이런 기쁨을 안겨주었소?"
그가 야만스럽게 그녀의 몸을 뚫고 들어가며 달콤한 고문을 시작하자, 그녀의 대답은 흐
트러진 신음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팽창되어 그를 완벽하게 받아들이고 있
음을 깨달으며, 강렬한 희열을 맛보았다. 그녀의 팔이 저절로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녀는
매끄러운 그의 등과 어깨, 그리고 탄력 있는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는 그의 엉덩이를 끊임없
이 어루만졌다.
조금 전에 격렬한 절정의 환희를 맛보고 난 뒤에 또다시 맹렬한 반응을 보이는 자신의 육
체에 놀라며 앨리타는 제이미의 몸 동작에 맞춰 자신의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갑자
기 자세를 바꾸며 그녀를 그의 몸위로 올려보내자, 그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는
그녀의 다리를 벌려 말을 타듯 자신 위에 걸터앉도록 했다. 미묘한 동작으로 그는 좀더 깊
숙이 그녀의 몸안으로 들어왔다.
"말을 타듯 날 타봐, 앨리타."
그는 자신을 자제하느라 숨을 헐떡이며 속삭였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그의 열정에 휩싸인 앨리타는 자신의 욕망 또한 거침없이 타오르는 것
을 느꼈다. 그가 고개를 들어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는 가슴을 입에 물자, 그녀는 더할 나
위 없이 황홀한 관능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앨리타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끝없이
격정적으로 밀려오는 엄청난 관능의 쾌락에 몸을 맡겼다.
제이미는 온몸이 산산조각날 듯한 쾌감에 사로잡혀 그녀와 함께 축복처럼 찬란한 쾌락의
천국으로 날아갔다.
16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만남과 격렬한 정사에 당황한 제이미는 앨리타를 밀어내고 비틀
비틀 몸을 일으켰다. 그가 화난 동작으로 거칠게 옷을 입기 시작하자 앨리타는 어리둥절했
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찾아 입기 시작했다. 그녀가 옷을 모두
입고 나서 제이미를 힐끗 바라보니, 그는 무섭게 인상을 찡그린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죠?"
그녀가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날 배신한 것 이외에 또 무슨 잘못을 했느냐는 뜻이오?"
그의 말에 앨리타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당신은 또 한번 아름다운 얼굴과 매혹적인 육체로 마녀처럼 날 유혹해 멍청이로 만들었
소."
"난 마녀가 아니에요."
"마녀가 아니면 요부겠지. 하지만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요. 당신의 마법을 그레이 경에게
도 시험해보았나?"
"제이미, 제발 이러지 말아요, 당신은 날 믿어야 해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난 절대로
당신을 배신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레이 경과 결혼한 것은 내 뜻이 아니었어요. 당신은 아
직 모르지만, 내겐 그레이 경과 함께 살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제발 날 데려가
줘요, 부탁이에요."
앨리타의 말에 제이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에 어린 두려움
과 애원은 너무나 진심처럼 여겨져, 그는 하마터면 그녀의 말을 믿어버릴 뻔했다. 그러나 그
는 그녀를 믿을 수 없었다.
"언젠가 당신은 다시 내 차지가 될 거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오. 난 아직 헨리 왕이 딸려
보낸 왕실 근위병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포로나 마찬가지요."
"포로라뇨? 어떻게 그런 일이? 당신을 감시한다는 근위병들은 대체 어디에 있죠?"
"설마 내가 그 지옥 구덩이에서 아무런 조건도 없이 달아났으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
지? 그렇소, 난 헨리 왕에게 거래를 제안했소. 내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밀수로 모은 내 전
재산을 내놓기로 한거요."
"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부자였나요?"
앨리타는 대단한 재산가라는 제이미의 말을 한번도 제대로 믿어본 적이 없었다.
"당신은 상상도 못 할 정도요. 하지만 이젠 다 옛말이 되었지. 헨리 왕에게 내 재산을 넘
겨주고 나면, 내겐 동전 한 푼도 남지 않을 거요."
"그래도 난 상관없어요, 제이미. 지금 당신이 날 반드시 데려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요."
앨리타는 자신의 몸속에사 자라고 있는 아기에 대한 얘기를 한다면, 그가 아버지가 된다
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제이미의 반응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야 어떻든지간에 난 당신을 데려갈 수 없소. 내가 당신을 어디로 데리고 갈 수 있겠
소. 돈이 없으면 당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병사들을 고용할 수도 없소. 그레이나 당신 아버지
가 공격해온다면 내 성은 힘없이 무너지고 말거요. 게다가.... "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멈추었다.
"이런 시기에 당신을 데리고 도망친다면 왕의 분노를 살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내 아
버지의 누명을 벗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영원히 놓치게 될 수도 있소."
앨리타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제이미의 인생에선 늘 아버지에 대한 복수
가 우선이었고, 그의 마음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이미의 인생에서 그녀를 위한 자리는
전혀 없었고, 태어날 아이를 위한 부분은 더욱더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지금 그에게 자
신이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으리라는 서글픈 결
론을 내렸다. 그녀는 제이미가 어떻게 되든, 기필코 에반 그레이에게서 도망쳐 홀로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겠다고 맹세했다.
"그럴 듯한 변명이군요! 우리가 만난 이후로 당신이 한 모든 행동은 당신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어요. 당신이 그토록 어리석게 복수에만 눈이 먼 사람이라면, 난 더 이상 당신에게 아
무런 기대도 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매몰차게 내뱉었다. 그녀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돌아섰다.
"행콕 대장이 날 찾으러 부하들을 보내기 전에 돌아가야 하오, 앨리타. 난 어두워지기 전
에 신선한 고기를 구해오겠다고 약속했소."
"나도 아버지가 찾으시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목숨을 건졌
다니, 정말 .... 기뻐요."
그녀는 자신의 말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제이미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앨리타, 기다려요!"
그는 그녀의 팔을 붙잡아 돌려세웠다.
"그 이유란 게 뭐요?"
"뭐라구요?"
"내가 당신을 꼭 데려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고 했잖소."
"아무것도 아니예요, 제이미. 잊어버리세요. 얘길 들어도 당신은 관심 없을 거예요."
앨리타는 허세를 부리듯 명랑하게 말했다. 사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몹시 슬퍼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녀에게 전혀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 그가 아기에게는 관심이 있겠는가?
"만일 헨리 왕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당신을 보호할 방법이 있다면, 난 당장 당신
을 데리고 떠났을 거요. 내 말 믿어줘요, 내 사랑. 당신은 내 사람이오, 앨리타. 난 내 것을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오. 국왕의 조사가 좀더 빨리 진행되었다면, 지금쯤 난 당신 아버
지나 그레이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겠지. 아무튼 진실은 곧 밝혀질 것이고, 내 작
위와 재산도 곧 되찾을 수 있을 거요."
"그땐 너무 늦어요."
입술을 깨물며 앨리타는 고개를 외면했다.
그녀의 말에 혼란스러워진 제이미는 점점 더 걱정이 되었다. 그는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소, 앨리타. 그레이가 두 번 다시 당신에게 손대지 못하도록 만들 방법을 반드
시 생각해내겠소. 지금 나 무일푼인 가난뱅이지만, 무기력하진 않소. 당신을 향한 불타는 욕
망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을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담금질하고 있소."
순간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달콤하고 잔인한 입맞춤을 했다. 그는 갑자기 포옹을 풀더니
돌아서서 안장에 죽은 사슴을 올려놓은 다음, 말없이 말에 올라타고 멀어져갔다.
앨리타를 뒤에 남겨두고 떠난다는 것은 몹시도 고통스런 일이었다. 그녀를 미워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이미는 자신이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를 말에 태워 함께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달아난다고 해도 숨을 곳도 없겠지만, 왕의 군대가 몇 시간 안에 그를 찾
아낼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는 또 다시 지하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
면 이번에는 정말로 목숨을 내놓아야만 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게 분명했다.
왕의 명령에 따라 철저한 조사를 끝낼 때까지 그레이가 런던을 떠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제이미는 알고 있었다. 한동안 에반 그레이는 아내인 앨리타를 찾아 웨일스로 올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제이미에겐 앨리타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얼마간 생각할 여유가 주
어지는 셈이었다.
근위벼읃로가 함께 허물어진 성벽을 지나며 제이미는 자신이 떠나있는 동안 크리케스 성
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차마 돌아보기도 민망할 지경이로군. 이렇게 초라한 폐허에 국왕 폐하께서 기대하시는
재물이 있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
행콕 대장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성안을 둘러보았다.
제이미는 건물 지하의 밀실에 감추어져 있는 금궤를 발견했을 때, 행콕의 얼굴빛이 어떻
게 변할지 보고 싶은 마음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제이미의 기사들은 안뜰에 모여 그를 맞이했다. 게일로드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맨 앞에
서 있었다.
"오 맙소사, 주인님! 주인님께서 지하감옥에 갇혀 처형을 기다리고 있단 소식을 들었습니
다!"
노인은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그랬었지. 국왕폐하가 자비를 베푸시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런 처지겠지."
제이미는 엄숙하게 대답했다. 게일로드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듯 멍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주인님을 올라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국왕폐하께서 무슨 이유로 피붙이도 아닌 주인님께 자비를
베풀셨을까요?"
"얘기하자면 길다네, 게일로드. 나중에 설명해주지. 여기 나와 함께 온 이분들은 .... "
그는 왕의 근위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곧바로 런던을 돌아가야 하니까, 충분한 음식과 마실 것을 준비해주게."
"곧 돌아가신다구요?"
게일로드느 행콕대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렇소. 이곳에서 볼일만 끝나면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소."
행콕 대장은 열심히 격투연습을 하고 있던 제이미의 호위병들의 숫자를 걱정스레 가늠해
보며, 제이미를 향해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냈다. 왕의 근위병들은 제이미의 호위병들과 비교
하면 수적으로 엄청난 열세였고, 제이미가 명령을 내리기만 한다면 그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이미 모티머의 명예가 달린 문제였다. 그는 약속대로 재산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게일로드와 수많은 호위병들을 해산시킨 뒤, 제이미는 행콕 대장과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창고로 향했다. 밀가루와 소금에 절인 생선이 담긴 여러개의 통들을 치
우고 난 뒤, 그는 바닥에 달려 있는 쇠고리를 가리켰다. 군인 둘이 앞으로 나서 바닥에 난
문을 들어올린 뒤, 어둠속을 살폈다.
"횃불을 가져오게."
행콕이 재빠르게 명령했다. 횃불이 대령되자, 그는 제이미의 전 재산이 감추어져 있는 지
하 밀실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부하 둘이 대장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작은 나무상자들
이 신속하게 들어올려지는 동안, 제이미는 묵묵히 체념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왕에
게 전재산을 빼앗기는 것쯤은 그의 목숨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금화가 든 열 개의 상자가 모두 창고로 올려지자, 행콕과 그의 부하들은 사다리를 올라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내용물을 살피기 시작했다. 제이미는 당혹스러운 듯 이맛살을 찌푸리
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사실 밀실에 보관된 돈궤는 스무 개가 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행콕 대장은 흡족해하는 듯했다. 그러자 제이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금
과 은이 실린 상자들은 곧 런던에서부터 끌고왔던 마차에 실렸고, 보초가 삼엄한 경계를 하
고 있었다. 나머지 근위병들은 게일로드가 준비한 넉넉한 만찬을 즐기기 위해 식당으로 들
어갔다.
제이미의 휘하에 많은 병력이 있다는 사실을 수상하게 여긴 행콕 대장은 식사를 마치자마
자 곧바로 런던을 향해 출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제이미가 비록 국왕에게 부당하게 모은
전재산을 헌납하겠다고 맹세를 했다고는 하지만, 밤에 제이미가 부하들과 함께 그들을 공격
할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행콕은 돌무덤처럼 스산한 폐허를 한시바삐
떠나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 잘 달련된 제이미
의 부하들은 싸움을 벌이지 못해 몸이 근질근질한 상태로 보였다. 제이미 모티머와 싸움을
벌이느니보다는 차라리 야만스런 웨일스 산적들을 상대하는 편이 훨씬 더 쉬울 것 같았다.
제이미는 행콕과 부하들이 숲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게일로드에게 자신
의 방으로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게 되자 제이미가 물었다.
"도대체 밀실에 감추어져 있던 나머지 돈은 어떻게 했나?"
"주인님께서 눈치채셨나 궁금해하던 참이었습니다.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국왕폐하께
전재산을 헌납하기로 약속하셨나요?"
게일로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네. 다행히도 왕은 내가 모은 재산이 지금 보낸 것의 두 배가 넘는다는 사실을 모
르고 있네. 어찌된 일인가?"
"주인님께서 투옥되어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 절박해졌죠. 주인님을 어
떻게 하면 구해낼 수 있을까, 며칠동안 머리를 짜냈습니다. 기사들은 명령만 내리면 기꺼이
런던으로 쳐들어가겠지만, 그건 그리 현명한 일 같지가 않더군요. 주인님을 구해내려면 무작
정 완력을 쓰기보다는 교묘하게 머리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런던
에 있는 필요한 인물들을 모두 매수할 작정으로, 주인님 재산의 절반 정도를 쓰기로 결심했
죠. 헨리 왕의 왕실 근위병들은 낮은 임금에 허덕이고 있었으므로, 뇌물이라도 생기는 일이
있다면 모두들 얼씨구나 달려들 거라고 짐작했거든요. 그걸 이용해 주인님을 빼내려구요. 시
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내일 당장 돈궤들을 싣고 병사들을 반만 데리고서
떠날 계획이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주인님께서 도착하시기 전
에 돈궤는 이미 마차에 실어두었죠."
"맙소사, 게일로드, 엄청난 재산이 자신들의 코앞에 놓여 있었는데, 근위병들은 그것도 모
르고 떠나갔다는 말인가?"
"그런 셈이죠."
"또 자네에게 신세를 졌군, 친구. 아니, 자네는 친구 이상일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네. 자네는 내가 다시 플린트의 백작
이 될 날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시킨 사람이니, 내 친아버지나 다름이 없네. 우리가 꿈꿔왔던
그날이 멀지 않았다네, 게일로드."
게일로드는 반색을 했다.
"헨리 왕이 뭔가를 알아냈나요?"
"아버지를 파멸시키려는 과거의 음모를 완전히 파헤칠 날이 곧 다가올 걸세. 우리가 믿었
던 것처럼 아버지는 작위와 재산을 빼앗으려는 놈들에 의해 누명을 쓰셨던 거야."
"곧이라뇨? 그날이 얼마나 남았다는 말씀이죠?"
게일로드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는 클레런스 모티머의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 더 있
었지만, 아직은 제이미에게 털어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제이미도 곧 알아야만 하는 날이
서서히 가까워오고 있었다.
"당시 사건을 조사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아직 알아내지는 못 했지만, 국왕이 곧 알아내겠
다고 약속을 했다네. 물론 우린 이미 그 거짓 음모 뒤에 누가 버티고 있는지 알고 있지. 하
지만 폐하는 확실한 증거를 찾을 때까지, 내게 크리케스로 돌아가 입을 다물고 기다리라고
했네.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뜻이지. 때가 되면 나를 부르러 사람을 보내기로 약속했어."
"신의 가호로군요."
게일로드는 경건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 앨리타 아씨느 어떻게 되셨나요? 런던에서 혹시 만나보셨습니까?"
순간 제이미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앨리타는 에반 그레이의 아내가 되었네. 내가 풀려나기 전에 이미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어."
게일로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럼 주인님과 아씨는 이제 끝장이로군요."
"그렇지 않아!"
제이미가 강하게 부인하자 게일로드는 깜짝 노랐다.
"난 기필코 그 사람을 되찾을 걸세, 게일로드. 그녀는 지금 아버지와 함께 서머셋 성에 있
네. 이곳에서 오십 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레이는 결혼
식을 마치자마자 그녀를 멀리 떠나보냈다네. 나, 난 그 사람을 만나보았네. 앨리타는 지금
잘 지내고 있어."
게일로드는 어안이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맙소사, 주인님,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었죠?"
제이미의 뻔뻔한 미소는 그가 말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설명하자면 길다네. 바로 어제 앨리타와 긴 얘길 나누었지."
그는 게일로드에게 그녀와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몸
과 마음은 어느새 외딴 숲속에서 그녀와 함께 나누었던 열정적인 해후의 짜릿한 순간들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 아씨께서 주인님의 신변에 일어난 불상사에 대해 결백하다는 말씀은 하시지 않던가
요? 저는 앨리타 아씨가 결코 배신을 할 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앨리타에 대한 자네의 생각을 알았으니, 더 이상 주제넘은 소리는 그만두게. 앨리타가 아
니라면 달리 누가 날 배신하겠나, 어서 말을 해보게."
게일로드는 신중하게 턱을 쓸어내렸다.
"혹시 로위나일지도 모르죠."
"맙소사, 로위나가 어둠의 영주의 정체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나."
"아주 교활한 여자입니다. 앙심을 품은 여자에게 양심 따위가 무슨 문제가 되겠어요. 그
여자라면 서슴없이 주인님을 배반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성에서 쫓아보내던 날 아침에 떠
나는 그 여자의 모습을 보셨나요?"
제이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저 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한 것 같더군요. 그처럼 시기심이 많은
여자라면 능히 그런 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거라고, 전 생각합니다."
"자네 말을 들으니, 생각할 게 많아지는군. 우선 돈궤들을 안전한 장소로 옮겨놓은 뒤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세."
이제는 물러가야 할 때라고 깨달으며 게일로드는 주인의 방을 나왔다. 그는 제이미의 마
음속에 앨리타가 결백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씨앗을 심어놓았다고 생각하자 흐뭇해졌다.
적어도 그는 그랬기를 바랬다.
제이미는 계속해서 넓은 방안을 서성거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했다.
게일로드의 말이 옳다면? 내가 앨리타를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닐까? 정말로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만일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는 앨리타를 부당하게 몰아붙인 뒤 끔찍한 상황에 무자
비하게 버려놓은 셈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함께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녀의 바람을 무시한 채 무정하게 떠나왔다. 그 당시에는 그레이와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그
녀를 보호할 방법이 전혀 없다고 느꼈으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신중하다고 판단했었다. 그
녀가 에반 그레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말로 믿었더라도 그녀를 두고 떠나왔을까?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반드시 진실을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확고해졌다. 그는
그레이가 서머셋 성에 나타나 그녀를 데려가기 전에 다시 앨리타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
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그레이처럼 파렴치한 인간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참
을 수가 없었다. 그 나쁜놈은 그녀가 그의 아이를 잉태할 때까지 계속해서 그녀의 육체를
괴롭힐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막연하기만 하던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선명한 계획이 떠올
랐다. 제이미는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어제 앨리타를 두고 떠나온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기는 했지만,
어제 그녀를 남겨두고 떠나올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때
그녀와 함께 해안으로 도망쳤어야 옳았다.. 그곳에서라면 아일랜드로 떠나는 배에 오를 수
있었으리라. 그는 앨리타를 구출해낼 군대를 동원할 수 있도록 재산을 지켜준 게일로드에게
다시 한번 감사했다. 헨리 왕과의 약속은 될 대로 되라지. 마음을 정한 그는 게일로드에게
자신의 결심을 전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바로 다음날 아침, 그는 서머셋 성을 공격하기 위
해 필요한 용병을 모집하기 위해 사방에 사람들을 풀었다. 또한 그는 아일랜드로 그들을 실
어다줄 배를 구해놓도록 게일로드에게 지시했다.
제이미와 숲속에서 맞닥뜨렸던 날, 앨리타는 초췌한 모습을 너무 늦게 집으로 돌아왔으므
로 그녀의 아버지는 다시는 승마를 하지 못하도록 그녀에게 명령했다. 그는 낮잠을 지나치
게 잤다는 딸의 변명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고, 더 이상 그녀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앨리타는 아프다는 구실로 그 다음날부터 꼬박 이틀간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머셋 경은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막연한 느낌을 받았지만, 무슨 일인지 알 수
가 없었다.
며칠 뒤, 서머셋 경에게는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나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레이 경이
사람을 보내 편지를 전해왔던 것이다. 그의 편지에는 제이미의 목숨을 날려버리려든 그들의
계획을 국왕이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돈에 눈이 먼 왕이 그를 풀어주기까지 했다는 내용의
좋지 못한 소식들이 실려 있었다. 서머셋 경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 앨리타가 거실로 들어
섰다. 아버지의 입에서 욕설이 새어나오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직감적으로 그녀는 편
지에 제이미의 석방 소식이 실려 있음을 알아차리고, 아버지가 그 소식을 자신에게 전해줄
때까지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그녀는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하느님 맙소사, 그자는 정말 신출귀몰한 녀석이야! 파렴치한 범죄자를 석방시키다니, 국
왕이 어떻게 그토록 어리석은 일을 저지를 수가 있단 말이지? 그자가 지은 죄를 생각하면,
그자를 교수대에 매달거나 단두대에서 머리를 잘라야 마땅한데 말이다."
"지금 누굴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버지?"
앨리타는 짐짓 모른 체하며 물었다.
"모티머지 누구긴 누구냐! 그뿐만이 아니야. 헨리 왕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그자의 아
버지에 대한 반역죄의 판결을 재조사하도록 특별명령을 내렸단다. 이건 미친 짓이야! 그레
이 경한테는 런던을 떠나지 못하도록 명령이 내려졌어."
"어쩌면 클레런스 모티머가 정말로 결백한지도 모르잖아요?"
서머셋 경의 얼굴은 새빨갛게 변했다가 다시 검푸르게 변했다. 그는 극도로 분노해 있었
다.
"세상에 네가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나 아느냐? 그 특별조사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짐작이나 하느냔 말이다. 모든 불길은 바로 우리에게 쏟아질 거야."
앨리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아버지가 무고한 사람을 거짓으로 밀고했다는 사실
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서서히 그런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클레런스 모티머 경이 반역죄인으로 몰려 처형되었던 일과, 아버지와 그레이
경이 연루되어 있다는 말씀이세요?"
서머셋 경은 그녀를 향해 준엄한 시선을 보냈다.
"넌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 일이 있었을 때 넌 고작 어린 아이에 불과했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네 남편이 곧 너를 데리러 올 일은 없을 게다. 나 역시 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감금생활이나 다름없이 이곳에서 지내야만 해."
그는 마침내 임신한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딸의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동안은 네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의심했지만, 이제는 네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게 눈
에 보이는구나. 너와 아기의 안전을 위해서도 성안에서 지내는 편이 좋을 거야."
"정말로 제가 다시는 승마를 할 수 없다는 말씀이세요?"
"그렇다. 모티머가 풀려났다니 언제 그자가 이곳에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야."
그는 며칠 전 딸이 유난히 늦게 돌아왔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앨리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어쩌면 혹시 그 불한당 녀석과 네가 이미 만났는지도 모르지."
"제이미는 제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을 사람이에요, 아버지. 그 사람이 저를 만나러
이곳에 올지도 모른다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 낭비하실 필요는 없어요."
앨리타는 얼마 지나기도 전에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는 사실
을 짐작도 하지 못했다.
2주일 동안, 제이미의 휘하에 들어오겠다며 크리케스 성을 찾은 병사들은 엄청난 숫자로
불어났다. 그들은 대부분 돈이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용병들이었지만, 제이미에 대한 단순
한 충성심으로 자원한 마을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새로운 병력들이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그의 휘하에 있던 기사들과 부하들은 투석기와 성을 포위해 함락시키는 데 필요한 사다리
따위의 전투에 필요한 기구들을 만들었다. 마을 주민들도 갑옷과 무기를 정비하는 일을 도
왔다. 그들의 공격 목표가 서머셋 성이라는 사실을 밝힌 뒤,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주저하
는 사람들은 곧 짐을 꾸려 보내버렸다. 남은 병사들은 철저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많은
병력을 휘하에 거느리게 되었으므로, 제이미는 앞으로 두 주일만 더 있으면 모든 준비가 끝
나리라고 판단했다.
얼음처럼 차갑고 축축한 습기가 그의 몸을 감쌌다. 하늘이 잿빛으로 물든 우울한 날씨의
9월초 어느 날 , 제이미는 드디어 말을 타고 맨 앞에서 군대를 이끌었다. 바다에서 휘몰아치
는 차가운 안개 때문에 주변의 풍경들은 더욱더 섬뜩해 보였다. 서머셋 성을 향해 천천히
군대를 지휘해나가며 제이미는 별로 날씨가 좋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무거운 무기들을 짊
어지거나 마차에 실은 채, 많은 병력을 이끌고 가기엔 50킬로미터라는 거리는 상당히 먼 편
이었다. 그러나 제이미는 늦어도 밤까지는 성 외곽에 도착해 야영기지를 만들 수 있으리라
고 생각했다. 만일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서머셋 경이 앨리타를 선뜻 내주지 않는다
면, 그는 거침없이 성을 포위해 함락시킬 심산이었다.
해가 질 무렵에 비마저 뿌리기 시작했다. 굵은 빗줄기는 아니었지만 미세하게 내리는 가
랑비의 습기만으로도 모두들 비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예상대로 제이미의 군대는 해가 지
자마자 곧 성에 도착했다. 성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불을 피워 적에게 쓸데없는 경계
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을 둘러싸고 있는 숲속에 임시 막사를 만들었다. 제
이미는 앨리타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어리석음을 어떻게 그녀에게 사과해야
할지 고민하셔 밤새도록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진심으로 사과를 한 뒤에 그는 그녀와
사랑을 나누리라. 에반 그레이가 그녀를 소유했었다는 사실을 영원히 잊어버릴 수 있도록
완벽하게 그녀를 사랑해주리라.
다음날 아침,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고 있는 무쇠로 만들어진 성문을 바라보며 당당
한 모습으로 서 있는 제이미를 향해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날씨는 마치 약
속이라도 한 듯 화창했다. 동쪽 하늘에서 찬란하게 떠오른 태양도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
는 듯 했다. 제이미는 모든 것을 길조로 받아들이며, 성곽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경비병들에
게 잘 보이도록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군대는 명령만 떨어지면 성을 공격하도록 만반의 준
비를 갖춘 채, 숲속에 잠복해 있었다. 당황한 듯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무장을 하고 있는 병
사들을 올라뎌보던 그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서머셋 경, 어서 모습을 드러내시오!"
제이미는 성문 너머로 소리쳤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서머셋 경이 튼튼한 갑옷을 입고 여러 가지 무기를 들고서 성루 위
에 모습을 나타냈다.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모티머!"
"꼭 물어봐야 알겠소? 난 아내를 데리러 왔소. 앨리타만 보내주면 우린 얌전히 물러가겠
소. 만일 섣불리 반항한다면 엄청난 피를 보게 될 거요."
"앨리타는 더 이상 네 아내가 아니다."
서머셋 경은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앨리타에게 누굴 남편으로 원하는지 직접 물어보시오."
제이미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대꾸했다.
"내 딸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그앤 그레이 경과 합법적으로 결혼한 사이고, 영원히 그
레이의 아내로 살아갈 거야."
서머셋 경은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켜보았다. 그는 제이미 모티머와 쓸데없이 긴 전투를
벌일 마음은 없었다. 성이 완전히 포위당하더라도 얼마간 버틸 자신은 있었지만, 그는 자신
보다 젊고 영리한 적과 오래 대치할 만한 끈기와 정력이 부족했다.
과거에 그는 모티머 경의 엄청난 재산을 나누어 갖자는 에반 그레이와 그 아버지의 말에
솔긱해져서, 클레런스 모티머를 모합하여 반역죄인으로 만들려는 그레이 부자의 계획에 즉
각 동참했었다. 그 당시 왕이었던 헨리 4세는 웨일스 지방에서 일어났던 반란세력에 몹시
과민해져 있었으므로, 부실한 증거를 그대로 받아들여 간단한 재판을 마친 뒤 모티머에게
교수형을 명령했었다. 서머셋 경은 그레이 부자가 모티머 가문을 파멸시키려 했던 진짜 이
유를 모티머가 처형된 다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린 제이미 모티머를 찾아내지 못하
자 에반 그레이의 부친과 서머셋 경은 앨리타와 에반을 약혼시키기로 타협을 맺었다. 그레
야만 서머셋 경이 어두운 과거의 진실을 비밀에 붙이고 계속해서 협조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이미 모티머가 가장 중요한 시기에 나타나 그들의 계획을 방해하지만 않았다면 모든 일
은 순조롭게 풀려나갔을 터였다. 모티머의 재산 가운데 서머셋 경에게 주어진 몫은 마침 그
가 절실하게 자금을 필요하던 때에 주어졌고, 그느 외딴 웨일스 땅에서 빈곤하게 사는 대신
런던에서 풍요를 누리며 빈둥빈둥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졌다가 어디
에선가 불쑥 뛰쳐나와 분란을 일으키는 애송이 하나 때문에, 이제 와서 그가 누리던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머리속에 기발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던 서머셋 경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어서 군대를 철수시켜라. 앨리타를 데리고 나와, 현재 그 애가 그레이 경의 아내로서 얼
마나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직접 들려주마. 아마 진실을 듣게 되면 네놈도 많이 놀랄
거다."
제이미가 성벽 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앨리타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당
장이라도 달려나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제이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때까지 집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녀는 듣지 않아도 이
미 그가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그 생각만 해도
그녀는 가슴이 터질 듯 기뻤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녀는 진작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가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제이미는
아직도 그녀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황홀한 행복감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제이미와 아버지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서머셋 경이
다시 성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뛰어나가 아버지를 맞았다.
"제이미가 원하는 게 뭐죠, 아버지?"
그녀는 기대감에 부풀어 물었다.
"굳이 그걸 물어봐야 알겠느냐? 저 거만한 불한당 놈은 네가 그레이 경보다 제놈을 좋아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서머셋 경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글머요, 사실인 걸요. 아버지, 제발 저를 제이미에게 보내주세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아버지 사이에 피를 보게 되는 것을 바라진 않아요."
앨리타는 감동 어린 목소리로 애원했다.
"에반이 여기 있었다면 모티머의 가소로운 군대쯤은 벌레처럼 가차없이 밟아주었을 거다.
지금 네가 모티머와 함께 간다 해도 달아날 곳은 없어. 에반이 기필코 널 찾아낼 거야."
"그래도 전 운에 맡겨보겠어요."
앨리타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안 된다, 얘야, 허락할 수 없어. 너는 이제 내가 시키느 대로만 모티머에게 말해야 한다."
"그럴 수는 없어요."
"그래야 해. 안 그러면 제일 실력 있는 기사를 시켜서 성문 앞에 서 있는 그놈을 쏘아버
리고 말겠다."
앨리타는 절망적을 흠칫 숨을 들이마셨다.
"설마 그러시진 않겠죠! 아버지의 명예는 어디로 갔죠?"
"명예 따위를 운운하기엔 내가 잃게 될 것이 너무 많다. 내 말대로 하겠느냐?"
앨리타는 절박한 아버지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너무나 가슴이
아파 할말을 잃은 그녀는, 아버지의 사악한 음모를 저지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설
마 제이미가 아버지의 음모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겠지? 어쩌면 그에게 신호를 보내 단순
히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
했다.
제이미는 날 사랑해, 틀림없어. 그이는 분명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내가 강제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거야. 그녀는 확신을 가지고 생각했다.
그녀는 좀더 머리를 짜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절박하게 흘러갔다.
"자, 어쩔 셈이냐?"
서머셋 경이 조바심을 치며 물었다.
"아버지 말씀대로 하겠어요."
앨리타는 제이미의 목숨을 위태롭게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마지못해 대답했다.
서머셋 경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느닷없이 명령했다.
"옷을 벗어라."
"뭐라구요?"
"옷을 벗으란 말이다. 네가 임신한 사실을 똑똑히 보여줘야게싿. 다른 여자들과 달리 넌
아직 배가 별로 나오지 않았어. 네가 에반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는 것을 모티머에게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줘야겠다."
"아버지! 제가 제이미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그래, 하지만 모티머는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지. 성질이 급한 녀석이니 네가 말하는 대로
믿어버릴 거다. 자, 이젠 옷을 벗거라."
"아버지의 부하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속옷바람으로 걸어나갈 수는 없어요."
앨리타는 놀라울 만큼 용기있게 말했다.
"지금 당장 병사들에게 모티머를 죽이도록 지시할 수도 있다. 바로 지금 이 시간에도 그
들은 내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성루 위에 숨어 있단 말이다."
서머셋 경은 무섭게 협박했다. 그러자 앨리타는 금방 창백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면 안돼요, 아버지. 아버지가 시키시는 대로 하겠어요."
그녀가 겉옷을 벗는 동안 서머셋 경은 그녀가 해야 할 말을 읊조렸다.
"제이미는 그 말을 믿지 않을 거예요."
앨리타는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떨었다. 내심 그녀는 제이미가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
을까 봐 몹시 두려웠다.
"네가 충분히 납득을 시킨다면, 그놈은 분명 믿을 게다."
그녀가 겉옷을 모두 벗어버리자, 서머셋 경은 속옷 위로 약간 불룩 솟아오른 딸의 배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는 딸의 손목을 움켜잡은 채 제이미가 기다리고 있는 곳에서 가장 가
까운 성벽 위로 그녀를 끌고 갔다.
제이미는 서머셋 경이 속옷 차림의 앨리타를 끌고나오는 모습을 보며 충격과 분노에 사로
잡혔다. 대체 저 노친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는 너무나 화가 나서 자신의
군대에 공격 명령을 내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고 있어야 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서머셋 경? 무엇 때문에 딸을 속옷 차림으로 부하들 앞에 내보이는
거요? 그레이 경보다 나를 더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에 딸을 벌주려는 겁니까?"
그느 해쓱한 앨리타의 얼굴을 살피며 고함일 절렀다. 그러자 서머셋 경은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내 딸을 자세히 봐라, 모티머. 그리고 네 눈앞에 뭐가 보이는지 말해봐라."
제이미의 시선은 몸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앨리타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당신의 잔인함에 두려워 떨고 있는 한 여자가 보이오. 어서 앨리타를 내놓으시오."
"자세히 보라니까."
서머셋 경이 앨리타를 앞으로 밀어내며 소리쳤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속옷으로 가려졌던
그녀의 불룩한 배가 드러나면서, 그녀가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연해졌다.
햇볕에 그을린 제이미의 거무스름한 얼굴은 일순간 잿빛으로 변했고, 그의 목구멍에서 숨
막힐 듯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앨리타가 임신을 하다니!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
렸다. 그녀가 내 아이를 가졌단 말인가?
"이젠 왜 앨리타가 합법적인 남편과 지내기를 원하는지 이해하겠느냐? 네놈은 내 딸과 여
러 달 동안 함께 지내면서도 아이를 임신시키지 못했지만, 에반 그레이는 결혼 첫날밤 자신
의 씨앗을 내 딸의 몸속에 심어놓았다."
서머셋 경은 추한 미소를 지으며 서슴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어서 빨리 그녀가 아버지의 말을 부인하길 침묵으로 호소하며, 제이미는 충격 어린 눈빛
으로 앨리타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시선을 내리깐 채 그의 무언의 바람을 거부하고 있
었다. 앨리타의 침묵에 못마땅해진 서머셋 경이 그녀를 잔인하게 몰아붙였다.
"네 뱃속의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서 저 멍청한 불한당 놈에게 말해주거라, 얘야."
"에, 에반의 아이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낮고 작아서 제이미는 바짝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크게 말해. 저자에게 어서 돌아가 다시는 괴롭히지 말라고 하란 말이다."
서머셋 경은 다그치듯 명령했다.
제이미는 마침내 고개를 든 앨리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
주쳤을 때, 그는 그녀의 눈빛에서 고통과 연민, 그리고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깊고 심오한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치 그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입술은 잿빛이었고, 얼굴색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거의 알아보기 힘들 만큼
미묘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너무나 미세한 움직임이었으므로 제이미는 자신이 착각
했다고 생각했다.
앨리타는 제이미를 향해 진실을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경고를 보내는 듯한 아버지의 눈빛을 보며, 그녀는 아버지가 요구한
대답을 되풀이했다.
"사실이에요, 제이미. 난 에반의 아이를 가졌어요. 그러니 당신이 아버지의 성을 공격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숲속에서 우리가 만났던 날, 왜 진작 그 얘기를 하지 않았소?"
제이미는 분노로 가득 찬 질문을 던졌다.
서머셋 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앨리타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두 사람이 만났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던 것이다.
앨리타는 제이미에게 뭔가 특별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말을 찾기 위해 무진 애를 썼
다.
"모든 것은 내 뜻에 반대되는 일이기 때문이었어요."
제이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지금 수수께끼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머
리는 너무나 복잡했고, 지금 당장 그녀의 말뜻을 헤아리기엔 충격이 너무 컸다.
"어쩌면 당신의 그 알량한 뜻이라는 게 날 만천하에 바보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겠지."
"아니에요, 제이미, 난 ..... "
그러나 제이미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매몰차게 뒤돌아선 그는 말에 올라타
고 손쌀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17
제이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크리케스 성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마
자 그는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열두 명의 기사를 제외한, 이번 공격을 위해 소집했던 모든
병사들은 대가를 지불한 뒤 전부 해산시켜버렸다. 그런 다음 그는 곧장 브랜디를 통째로 가
져오도록 지시했다. 그는 방문을 잠그고 틀어박혀 미친 듯이 술을 마셔대기 시작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황폐해진 제이미는
며칠동안 골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 가끔씩 게일로
드가 강제로 음식을 들여보내기는 했지만, 그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앨리타에 관해
서 묻는 게일로드의 질문에,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결국 게일로드는 가일즈 기사로부터 사
연을 듣게 되었다.
자괴감과 자기 연민의 수렁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제이미는 자신을 방안에 가두지 않으
면 당장이라도 런던으로 달려가 살인을 저지르고 말 것 같은 충동에 시달렸다. 일 주일 내
내 술에 절어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지만 그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자까문 앨리타를 향해
치달았다. 사랑한다는 달콤한 거짓말로 그를 현혹시키던 그녀의 가증스런 모습이 계속해서
그의 뇌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사랑이라구! 그건 정말 웃기는 말이지! 그르 사랑한다고 주장하며 함께 데려가 달라고 애
원하던 때에도 이미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기를 배고 있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여자일까? 그러나 문제는 그가 그런 여부와 돌이킬 수 없이 깊은 사랑에 빠져 있다
는 사실이었다.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는 아버지의 결백을 밝혀내야 한다는 의무도 저버린
채, 앨리타와 아일랜드로 도망칠 생각까지 품었었다.
제이미의 끔찍한 상태가 일주일이 넘도록 계속되자, 게일로드는 아들처럼 아끼는 주인의
처참한 꼬락서니를 더 이상 그냥 보아넘길 수가 없었다. 그는 그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제이
미는 침대 위에 완전히 널브러져 누워 있었따. 게일로드는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있는 제이
미의 나약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곧 남은 술을 모두 치워 버리고 목욕물과 음식을 준
비시켰다. 하인들이 그의 명령을 따르는 동안, 게일로드는 가장 힘을 내서 버텨야 할 시기에
나약하게 굴고 있다고 제이미를 나무라며 길게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바보같은 짓입니까? 주인님은 정말 바보예요."
게일로드는 신선한 공기와 햇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창문을 가리고 있던 두툼한 커튼을
걷으며 준엄하게 꾸짖었다.
"방안에 알코올과 방탕의 냄새가 가득합니다. 어서 기운을 차리십시오, 주인님. 밖에 방문
객이 기다리고 있어요."
"보내버리게. 난 지금 누굴 만날 기분이 아니야. 제기랄, 게일로드, 난 술이 필요해."
제이미는 꼬부라진 혀로 어눌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침대 머리맡 탁자에서 술병을 집어들
다가, 술병이 빈 것을 알고는 게일로드를 험상궂게 노려보며 주전자를 집어던졌다. 방을 가
로질러 날아간 사기 주전자가 반대편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그의 머릿속도 그와 똑
같은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술을 갖다달란 말야!"
"안 됩니다, 주인님. 그만하면 충분히 드셨어요. 국왕폐하께서 보내신 사신이 도착했습니
다. 우선 손님을 식당에서 식사를 하도록 조처했으니, 그동안 주인님도 정신을 차리고 손님
을 맞을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게일로드는 침착하고도 확고한 어조로 대꾸했다.
"국왕이 뭐라던 난 관심없네."
잠시 후 하인이 음식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제이미는 힐끗 음식을 돌아보더니 곧바로 헛
구역질을 했다.
"일어나세요, 주인님. 어서 일어나시라니까요. 여자 하나 때문에 이토록 슬퍼하시다니, 주
인님답지 않습니다. 거짓말 몇 마디에 속아 술이나 퍼마시며 절망하는 나약한 분으로 제가
주인님을 키웠던가요?"
게일로드는 심하게 다그쳤다.
"거짓말이라구? 쳇, 자네가 뭘 안다고 그러나?"
"저도 알 만큼안 압니다. 그리고 전 그 얘길 하나도 믿지 않아요."
핏발이 선 눈을 억지로 부릅뜨며 제이미는 게일로드를 노려보았다.
"자넨 앨리타를 못봐서 그래, 게일로드. 그녀는 정말로 아이를 가졌네. 나도 그 아이가 내
아이이길 믿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앨리타 입으로 똑똑히 그레이의 아이라고 하는 말을
내가 직접 들었단 말일세."
"그리고 주인님은 바보처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셨구요. 전 주인님께서 그렇게 잘 속
아넘어가는 분인 줄 정말 몰랐습니다. 하지만 전에는 한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는 분이
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가기도 해요. 어쨌든, 일어나십시오! 왕의 사신을 만나기 전에 준비할
일이 많아요."
게일로드는 마침내 제이미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옷을 모두 입은 채로 누워 있든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자 균형을 잡지 못하고 심하게 몸을 흔들었다.
게일로드는 얼룩덜룩해진 제이미의 셔츠를 쳐다보며 혀를 끌끌찼다.
"일주일 넘게 옷도 안 갈아입으셨지요. 우선 음식을 좀 드시고, 그 다음에 목욕을 하셔야
합니다."
"배고프지 않네."
그러나 제이미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와 그의 퉁명스런 말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은 게일로드가 귀찮게만 여겨졌다. 그러나 게일로드는 쉽게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노인은 처음엔 강짜를 부리다가 결국엔 협박까지 동원하이 제이미
에게 음식을 먹이고야 말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제이미는 속이 비어있을 때보다 훨씬 편
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시 않을 수 없었따. 그러나 머리는 여전히 지끈지끈 아팠다.
이윽고 욕조에서 빠져나온 제이미는 거의 인간의 형상을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술
기운 때문에 아직도 떨리고 있는 손으로는 면도가 불가능했으므로, 그는 게일로드에게 면도
와 머리손질을 맡겼다. 무성해진 그의 긴 머리를 노인은 솜씨좋게 적당히 잘라주었다. 마침
내 왕의 사신을 맞이할 준비를 끝낸 제이미는 실로 일 주일 만에 처음으로 사람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게일로드는 성급하게 방을 나서려는 그를 붙잡아 세웠다. 노인의 얼굴은 진지했고
그의 말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주인님, 서머셋 성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
해보십시오. 매사는 언제나 곁에서 보이는 것처럼 돌아가지 않습니다. 어쩌면 앨리타 아씨도
주인님처럼 희생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라요. 아버지와 그레이 경이 위협하는 대로 따를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여자분이잖습니까. 그들이 뭔가 음모를 꾸미고 아씨에게 그런 거짓말
을 시켰다면, 달리 무슨 방법이 있었겠어요?"
자네느 오랜 세월동안 내 정신적 스승이자 양심의 척도였지만, 이번엔 자네가 틀렸네, 친
구. 자네 역시 앨리타에게 홀린 게 틀림없어 늘 그 여자편을 드는 걸 보면, 어쩌면 나보다
더 홀렸을지도 모르지."
"무작정 앨리타 아씨를 좋아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제가 가장 걱정하는 분은
바로 주인님입니다. 지금까지 긴 세월동안 도련님을 가르치고 인도해왔지만 아직까지 그릇
된 길로 빠지게 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기 전에 진
실을 찾아보는 법입니다. 성급한 판단은 인생을 파멸시킬 수 있어요."
게일로드는 말을 마치고 나서 방을 나갔다.
제이미는 게일로드의 의미심장한 말을 곱씹으며 잠시 동안 머뭇거리고 있었다. 내가 현명
한 사람이란 말인가? 아니면 아까 비난한 것처럼 바보란 말인가? 도대체 어느 쪽이야? 스
스로에게 반문해본 그는 고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게일로드의 현명한 충고를 따
르기로 결심했다. 자괴감에 빠져 술을 퍼마셔대기보다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앨리타의 수수
께끼 같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충분히 생각해보았어야 옳았다.
서머셋 경이 앨리타를 협박하여 그런 말을 하도록 시켰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
다. 그렇다면 앨리타는 정말로 그의 아기를 가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의 뜻에 반대되
기 때문에 애매모호한 그녀의 말은 어쩌면 그녀가 그의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숲속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녀는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면서, 그가 자신을
데려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어쩌면 그녀가 그의 아이를 임
신하고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다 너무 무뎌서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급한 성미를 저주하며 제이미는 마침내 왕의 사신을 만나기 위해 방을 나섰다.
왕이 보낸 서한은 아주 간단했다. 지체없이 윈저 성으로 오라는 것 말고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편지를 가져온 사신은 왕을 친히 모시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헨리 왕이 그를
소환한 이유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게일로드와 제이미는 왕의 소환 명령이 클레런
스 모티머의 처형에 대한 조사 결과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으므로 의미
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곧 런던으로 떠나야겠네."
제이미는 한시바삐 헨리 왕을 만나고 싶었다. 그는 정의가 실현되기까지 그날을 위해 십
년이 넘는 긴 세월을 기다려왔다.
"혼자 가실 생각이십니까?"
게일로드가 물었다.
"기사들을 절반만 데리고 가겠네. 나머지는 이곳에 남아 자네와 함께 성을 지켜야지. 내가
다시 돌아올 때는 당당하게 플린트 백작, 제이미 모티머 경이 되어 아버님의 모든 재산을
되찾아오겠네."
"모든 것이 신의 은총입니다. 에반 그레이와 서머셋 경을 비롯해 선친의 억울한 죽음에
가담했던 공범자들이 모두 정당하게 처벌을 받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게일로드는 경건하게 말했다.
"어쩌면 이번에 그토록 비겁한 짓을 한 배후 인물이 누구였는지, 마침내 밝혀지게 되겠지.
나는 재물에 대한 탐욕만으로는 인간으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없다고 생각하네. 서머셋이나
그레이는 둘다 가난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작위까지 가지고 있었어. 그 당시엔 그레이의 선
친이 영지도 좁고 보잘것없는 남작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레이 부자는 그런대로 풍족한 생활
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들었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 아버님에 대해 거짓 정보를 흘
렸을 때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거지."
제이미는 신중하게 자신의 생각들을 토로했다.
게일로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노인은 갈등을 겪고 있었다. 제이
미의 선친에 관한 얘기를 지금 털어놓을 것인가, 아니면 언젠가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
릴 것인가, 그는 몹시 망설였다. 그는 때를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다.
"그럼 전 모티머 성으로 이사할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크리케스 성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
려니 감회가 새롭군요."
"그러게. 이제 모티머 성은 다시 우리의 소유가 될 거야. 그리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앨리
타가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가 정말 누구인지에 대해 자네가 진실을 알아놓길 기대하겠네."
제이미는 엄청난 속도로 윈저 성을 향해 말을 달렸다. 청명하고 시원한 가을날이 계속되
었으므로 밤잡으로 쉬지않고 말을 달릴 수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윈저 성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에, 그는 자기 자신은 물론 말과 부하들에게 조금도 쉴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가 도착
했을 때, 왕궁에는 머지 않아 거행될 프랑스의 캐서린 공주와 왕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한
화려한 연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제이미는 미리 왕에게 도착했다는 전갈을 보내지 않
고 무작정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넓은 홀에는 온 나라 안의 중요한 인물들과 귀족들이 모두
참석한 듯했다. 화려한 중앙 좌석에 앉은 헨리 왕은 지체 높은 귀족들과 왕족에 둘러싸여
있었다. 식탁에는 진기한 음식들로 가득했고, 연회장 한가운데가 여흥을 위해 까끗하게 치워
져 있는 것을 보니, 파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오늘밤엔 국왕과 은밀하게 얘길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기는 글렀다고 생각하며, 제이미
는 어두운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그는 한 나라의 국왕과 한자리에
있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흥청망청 주연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왕궁에서 벌어지는 오락과 여흥은 지루하게만 느껴졌으므로, 제이미는 지나가
는 시종에게 궁안의 빈방으로 안내해달라고 얘기할 참이었다. 바로 그때 그는 에반 그레이
를 발견했다.
매력적인 어느 숙녀에게 머리를 가까이 대고 시시덕거리고 있는 그레이의 행동은 전혀 결
혼한 사람다워 보이지 않았다. 제이미는 그의 뻔뻔스런 모습을 보나자마 참을 수 없는 분노
에 사로잡혔다. 앨리타와 비교하면 드넓은 연회장에 있는 모든 여자들은 그 빛을 잃었다. 여
자는 그레이를 향해 교묘하게 미소를 짓더니 살며시 연회장을 빠져나갔고,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는 호색한은 잠깐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여자를 따라갔다. 제이미는 나선형 계
단을 올라가는 그레이의 모습을 바라보자 구역질이 났다. 그늘에 몸을 숨기고 그가 그레이
를 따라 나서려는 순간, 헨리 왕이 그를 발견하고 가까이 오도록 손짓을 했다.
"모티머, 어서 오게."
헨리 왕은 반갑게 그를 맞았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레이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제이미는 마지못해 왕 앞으로 다가섰다.
"폐하께서 보내신 서신을 받고 가능한 한 빨리 달려왔습니다."
왕 바로 옆에 그를 위해 의자가 마련되었으므로, 제이미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날아오기라도 한 것 같군. 유감스럽게도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게. 보다시피
난 지금 축하연에 참석중일세. 보름 후면 난 신부를 데리러 프랑스로 떠날 예정이네. 하지만
그 전에 이 문제를 매듭짓고 싶네."
제이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도 인내심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이 문제
는 제가 열다섯 살때부터 가슴에 품어왔던 원한입니다. 물론 어려운 조사를 시작해주신 폐
하의 은혜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렇다면 몇 시간 더 기다린다고 해서 해될 것은 없겠지. 내일 나와 함께 아침식사를 같
이 하세. 그동안 밝혀낸 사실들을 모두 얘기해주겠네."
헨리 왕은 연회장 중앙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희들의 여흥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적어도 저희 아버님의 결백이 증명되었는가 하는 것만이라도 알려주실 수 없습니까?"
그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시련을 겪어왔으므로, 지금 당장 왕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듣
지 않고는 한순간도 더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헨리 왕은 제이미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자네 아버지의 명예는 회복되었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자네 선친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사악한 음모를 꾸몄던 귀족들이 철퇴를 맞아야겠지. 그 얘긴 내일 다시 길게 하기로
하지."
승리의 맛이 이토록 달콤한 줄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감사의 마음에 눈빛을 빛
내며 제이미가 말했다.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폐하? 생각할 것이 너무도 많은데다, 웨일스에서 쉬지 않고
달려왔더니 몹시 피곤합니다."
"그럼 어서 가서 쉬게나. 시종들에게 빈방으로 안내해달라고 부탁하게."
헨리 왕은 스스럼없이 허락했다.
시종이 안내해준 작은 방에 짐을 풀고 나자, 제이미는 조바심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곧 사악한 음모가 폭로되리라는 사실도 모른 채, 에반 그레이가 왕궁 어디에선가 여
자와 놀아나고 있다는 생긱이 온통 그의 머리속을 가득 메웠다. 그는 모티머 가문에서 훔쳐
간 작위와 재산을 모조리 빼앗기게 되리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듣는 그레이의 표정을 지
켜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왕은 모함에 연루된 귀족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제이
미는 비겁한 음모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나이든 그레이 경은 이미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제는 가장 많이 음모의 대가를 취했던 에반 그레이가 모든 책임
을 뒤집어써야 해싿. 헨리 4세는 모티머 가문의 어마어마한 재산과 작위를 모조리 에반 그
리이에게 보상으로 하사했다.
제이미는 방에서 나와 텅 빈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종을 찾았다.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고,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일단 요기를 하고 나면, 그의 부하들이 제대로 음식
과 잠자리를 제공받았는지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문득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에서 흘러나온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그의 관심을 끌었다. 그냥 스쳐 지나가던 그는 무심코 방안은 들여다
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긴 소파에 반라로 누워있는 여자의 몸 위에 엎드려 있는 에반
그레이를 발견했다. 그의 발걸음은 자연히 멈추었다.
부인과의 잠자리에 대해 물어보는 여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그레이의 느물거리는 태
도에 제이미의 성질이 폭발하고 말았다.
"내 아내는 당신을 따라오려면 아직도 멀었소. 본인은 무척이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
같지만, 유치한 몸놀림은 가소로울 지경이지. 자, 재미없는 내 아내 얘긴 그만 합시다. 당신
의 뜨거운 몸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내 사타구니가 근질근질하단 말이오."
그레이는 능글맞게 얘기하며 여자의 치마를 허리까지 들어올렸다.
그레이가 자신의 남성을 여자의 몸안으로 깊숙이 밀어넣자 여자는 기쁨에 찬 신음소리를
흘렸다. 그 순간 제이미가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 무서운 표정으로 들
이닥친 제이미를 발견한 그레이는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네놈이 지금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게냐?"
"난 국왕의 명령으로 이곳에 왔다, 그레이. 네놈이 살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곧 네
비리가 만천하에 폭로되고, 부정한 방법으로 손에 넣은 모든 재산은 전부 몰수당하게 될 거
다."
그레이는 아연실색했다.
"난 네가 무슨 소릴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갑자기 여자가 벌떡 일어나 제이미를 무섭게 노려보며 방을 빠져 나갔다. 그레이는 여자
를 따라나가려는 듯 몸을 움직였다.
"이건 우리 둘 사이의 문제이니 여자는 보내라, 그레이."
"난 너와 할 얘기가 없다, 모티머."
"할 얘기가 있을 텐데. 앨리타가 네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느닷없는 제이미의 질문에 그레이는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는 제이미를 향해 돌아서며 교
활하게 웃었다.
"질투를 하는군! 네가 이 소란을 피우는 게 모두 그 때문이냐, 모티머?"
"질투심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얘기하고 있는 건 앨리타 문제야. 그녀가 정말로 네
아이를 가졌단 말이냐?"
"앨리타를 만났나?"
그레이는 앨리타의 임신 사실을 제이미가 모르고 있기를 바랬지만, 이미 그가 알아버렸으
므로 그 사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기로 했다.
"그렇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제이미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렇다면 직접 보았으니 알겠군."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일이 아냐. 앨리타가 네 아이를 가졌는지 네 입으로 말해라. 난
본인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야겠다."
제이미는 그레이가 일부러 그를 자극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신중하게 말했
다.
그레이는 얇은 입술로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아, 혹시 그 아이가 네놈의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네 의구심에 대한
내 답변을 들으려면 아마 오래 기다려야 할거다. 어쨋든 내 아내에게 그토록 자릿한 잠자리
에서의 기교들을 가르쳐주어서 정말로 고맙게 생각한다, 모티머.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그
녀의 정력 때문에 내가 좀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앨리타는 밤마다 날 아주 기쁘게 해주
고 있지. 그렇게 차가워 보이는 미모 속에 정열적인 요부가 숨어 있을 줄 과연 누가 알았겠
나?"
제이미는 가까스로 부여잡고 있던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그레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 개자식! 국왕폐하는 지금 네가 우리 아버지를 거짓 모함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야 말
았따. 파렴치한 거짓말로 네가 얻은 모든 부와 지위는 곧 다시 내 손안에 들어올 거야. 넌
이제 끝장이다, 그레이."
그레이는 바닥에 넘어져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제이미의 무시무시한 주먹질 사이로 간간
이 주먹을 휘둘렀지만, 그는 이미 체격 조건에서도 제이미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지나가던
두 명의 기사가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뛰어들어와 싸움을 말리지만 않았다면, 그레이는
피투성이의 고깃덩어리로 변했을 터였다. 불규칙하게 숨을 몰아쉬며 엉망진창이 된 얼굴에
서 피를 닦아내던 그레이는 독기를 품은 시선으로 제이미를 노려보다 황급히 달아났다. 제
이미는 벌떡 일어나 그를 뒤쫏으려 했지만, 그레이는 이미 어두운 복도로 사라지고 없었다.
밤사이에 그들 사이에 일어났던 사고 소식을 들으면 헨리 왕이 얼마나 화를 낼지 뻔했으
므로, 제이미는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레이가 아무리 그를 자극했어도 그는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 또다시 에반 그레이와 마주칠 가능성은 도저히 없었어므로, 제이미는 방으
로 돌아갔다. 그는 그레이가 했던 말과 앨리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있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그는 그레이의 말을
모두 지어낸 얘기로 믿기로 마음먹었다.
헨리 왕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나서 입술을 훔치며, 비난의 기색의 역력한 어투로
말했다.
"아주 분주한 밤을 보냈더군, 모티머."
제이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왕의 처소에 막 들어온 참이었다. 헨
리 왕은 매일 아침 상당한 분량의 식사를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제이미는 왕이 불쾌해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므로 말없이 헨리 왕의 찡그린 얼굴
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폐하. 하지만 그레이 경이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저를 몰고갔기
때문입니다."
헨리 왕이 한숨을 푹 내쉬자 제이미는 초조해졌다.
"앉게. 마치 복수의 화신처럼 자네가 그렇게 떡 버티고 서 있으면 어디 소화가 되겠나."
그는 한 조각 남은 간 파이를 입안에 넣고 신중하게 맛을 음미하듯 씹은 다음 삼키고 나
서, 포크를 내려놓고 접시를 물렸다.
"그렇게 자네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에반 그레이는 오래 전부터 제 목숨을 노린 자입니다. 더 이상 제 마음을 졸이지 말아주
십시오, 폐하. 저희 아버님에 대해서 어떤 사실을 알아내셨습니까? 저희 아버님의 결백이 증
명된 겁니까?"
"그렇다네, 자네가 의심한 대로였어. 클레런스 모티머에 대한 음해 음모의 배후에는 그레
이 경 부자 말고도 두 사람이 더 있네. 자네도 알다시피 에반 그레이의 부친은 몇 년 전에
죽었네. 또 한사람인 발로우 경은 종적을 감추었는데, 내 부하들이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그
를 찾아냈다네. 중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다행히 임종 직전에 자네 아버지에 대한 음모
의 배후에 그레이 경 부자와 서머셋 경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했지. 그들은 작당을 해서
자네 아버지에게 반역의 누명을 씌운 다음, 토지와 재산을 나누어 가진 걸세."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레이 경이나 서머셋 경은 저희 아버지를 미워할 하등
의 이유가 없습니다."
"부하들의 조사 내용에 따르면 음모를 선동한 사람은 그레이 부자라는 것이 확실한데, 자
네 아버지에게 특별한 원한이 있었거나 까닭없이 증오했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것 같네. 나머
지 사람들은 상당한 재산을 나누어 받기로 하면서 그레이 부자에게 동조를 한 걸세. 발로우
경은 자신의 노력에 비해서 거의 대가를 받지 못했다고 여겼고, 서머셋과 그레이에게 사기
를 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법 많은 얘기를 털어놓았지. 우리 아버지께서 하사한 모티
머의 작위와 재산을 받은 뒤, 에반 그레이가 재물에 눈이 어두워 모든 부를 혼자서만 독차
지하려고 했던 것이겠지. 자네도 잘 알겠지만 영국은 늘 돈이 부족하잖나."
"발로우 경은 그럼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서머셋 경도 에반 그레이와 앨리타를 혼인시키기로 계약을 맺은 다음에야 비로소 재산의
일부분을 받았다더군. 발로우 경은 쓸모도 없는 토지만 약간 받은 모양일세."
어안이벙벙해진 제이미는 치묵을 지키며 헨리 왕을 응시했다. 그레이가 모티머 가문을 증
오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짐작했지만, 그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따.
"그 일이 벌어졌을 땐 혼란한 시기였네. 내 아버님께선 웨일스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군
때문에 몹시 골머리를 썩고 계셨어. 궁정에서도 존경받고 있는 세 사람이 동시에 모티머 경
이 반란군의 우두머리라고 진언했으니, 왕으로선 자네 아버지를 처형할 수 밖에 없었을 걸
세. 재판 기록을 보니 증거도 완전히 엉망이더군. 하지만 선왕께서는 시끄러운 사건을 빨리
종결짓고 싶어하셨고, 간단한 재판을 거친 뒤 법에 따라 자네 아버지를 처형시킨 것이지. 자
네에겐 미안하네만, 내 아버지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네. 그 당시엔 하루빨리 반란을 진압시
키고 우두머리들을 처형하는 것이 국왕의 의무였어."
가슴 아픈 옛 기억을 떠올린다는 일이 제이미로서는 몹시 고통스러웠다.
"동감입니다. 저도 선왕께는 아무런 유감이 없습니다. 그레이 부자와 서머셋, 발로우는 탐
욕에 눈이 어두워, 그리고 뭔가 특별한 이유 때문에 거짓 증언을 한 것이로군요. 에반 그레
이를 죽이기 전에, 전 그자가 왜 저희 아버님의 목숨을 빼앗지 못해 그렇게 안달이었는지
반드시 알아낼 생각입니다."
"그건 안 되네. 물론 정의는 밝혀질 거야. 하지만 자네가 직접 나서선 곤란해. 이미 그레
이 경을 체포하도록 명령을 내렸네. 내가 직적 그자를 심문할 작정이야. 너무 오래 전에 일
어난 일이라 진상을 다시 조사하기엔 증거가 충분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미리 염두에 두
게. 지금 자네에게 자신 있게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오늘 당장 잃어버렸던 작위와 재산을 되
찾게 되리라는 사실일세. 하지만 우리 아버님께 헌납되었든 현금은 돌려줄 수가 없는 형편
이네. 그동안 수많은 전쟁과 내전을 치르는 데 모두 사용하고 없기 때문일세. 하지만 그레이
와 서머셋이 지난 십여 년간 모아온 재산은 당연히 자네의 것이 될걸세."
"폐하께서 그레이 경을 심문하실 때, 저도 곁에 있겠습니다."
제이미는 국왕에게 요구했다. 가능하다면 그는 앨리타의 임신 사실에 관해서도 그자로부
터 진실을 알아내고 싶었다.
"알겠네, 그레이를 심문할 때 자네를 부르도록 명령을 해놓겠네. 자, 그럼 그레이 경이 체
포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린 연회장으로 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네의 행운을 알리도록
하세. 머지 않아 온 영국에 자네가 작위를 되찾았다는 사실이 알려질 걸세. 이제부터 자네는
플린트 백작, 제이미 모티머 경으로 알려지게 될 거야. 온 나라의 귀족들은 지금 모두 윈저
성에 모여 있으니 아주 다행이군. 자네에 관한 소식이 금방 온 나라 안에 퍼질 게 아닌가."
제이미의 뜻하지 않은 행운에 관한 소식은, 바로 전날까지 플린트 백작이었던 에반 그레
이 경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져 날개 돋친 듯 번져나갔다. 대부
분의 사람들은 제이미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레이 경처럼 하늘을 찌를 듯한 권
세를 누렸던 귀족이 파멸당한 이유에 대해 확실이 알 때까지 신중하게 버티는 사람들도 간
혹 있었다. 에반 그레이에게 모티머 가문의 영예로운 작위가 하사되었던 끔찍한 반란사건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잊고 있었다.
헨리 왕이 친분이 두터운 남작 한 사람에게 제이미를 소개하고 있을 때, 긴급하게 폐하에
게 드릴 말씀이 있다며 기사 하나가 다가왔다. 헨리 왕은 곧 조용한 곳으로 가면서 보고를
받았다. 기사가 그레이에 관한 소식을 가져왔음을 안 제이미는 왕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기사의 보고를 들으며 제이미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전율을 느꼈다.
"폐하, 그레이 경이 사라졌습니다. 왕궁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젯밤 이후로 그자를 본 사람
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레이 경으로 보이는 자가 어젯밤 미친 듯이 성에서 달아나는 것을
마구간지기가 얼핏 보았다는 사실만 알아냈을 뿐입니다."
"맙소사! 그자의 음모가 드러났다는 사실을 제가 실언하는 바람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모두 저의 실수입니다. 혹시 그자가 어느 쪽으로 달아났는지 마구간지기가 기억하던가?"
"너무 어두웠고 늦은 시각이었기 때문에, 마구간지기는 막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답니다.
한 사람이 오가는 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겠죠."
헨리 왕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는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이다. 그는 보름 후면 무슨 일이 있어도 프랑스로 떠나야 했고, 그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짓
고 싶어했다. 헨리 5세는 자비로운 왕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어기는 자
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잔인한 사람이었다.
"즉각 경비대에 알려라. 내 짐작으로는 그자가 런던으로 달아났을 것 같구나."
왕은 재빨리 명령을 내렸다.
기사는 꾸벅 인사를 한 뒤, 왕의 명령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달려나갔다.
헨리 왕은 제이미와 단둘이 남게 되자 조용히 말했다.
"너무 걱정 말게, 모티머. 달아나긴 했지만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걸세. 그 악당을 찾
아낼 때까지 런던을 샅샅이 뒤지게 하겠네."
제이미는 가능한 한 빨리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헨리 왕은 그레이가 런던으로 달아났다
고 생각했지만, 제이미는 그렇다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런던의 복잡한 지하세계로 달아나면
쉽게 몸을 숨길 수 있겠지만, 제이미의 짐작으로는 에반 그레이가 다른 나라로 달아나고 있
을 것 같았다. 물론 그는 아내를 두고 떠나지 않으리라. 그레이가 웨일스의 서머셋 성으로
향했으리라 확신한 제이미는 그에 맞는 계획을 세웠다.
제이미가 선조 때부터 물려내려온 자신의 고향집을 되찾기 위해 웨일스로 떠나겠다는 뜻
을 밝히자, 헨리 왕은 그에게 축복을 빌어주며 제이미의 작위와 재산이 복위되었다는 공식
서류를 준비해주었다.
"에반 그레이 문제를 나한테 일임하고 떠나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네. 자네는 그레이를 상
대하기엔 성미가 너무 급해. 그자를 잡으면 교활한 사람한테서도쉽사리 진실을 알아내는
전문가를 고용해서 심문을 할 테니, 걱정 말게."
헨리 왕은 제이미가 웨일스로 가는 진짜 이유를 알리 없었으므로, 태평하게 말했다.
"전 그레이가 국외로 도망칠까 봐 걱정스럽습니다."
제이미의 가장 큰 걱정은 그레이가 영국을 탈출해 다시는 그를 찾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
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헨리왕도 그 가능성을 헤아리길 바랬다.
"나도 그런 의심을 하고 있었기에, 그런 기미가 보이면 당장 그레이의탈출을 저지하도록
조치를 취해두었다네. 영국의 모든 주요 항구에 엄중하게 감시를 명령해놓았으니, 그레이가
나타나기만 하면 즉시 윈저 성으로 압송될 걸세."
제이미는 그제야 흡족해졌다. 그레이가 영국의 주요항구를 통해 국외로 탈출할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왕의 부하들이 그를 체포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제이미에겐 큰 위
안이 되었다. 그동안 그는 서머셋 성으로 달려가 혹시 그레이가 엉뚱한 곳을 탈출구로 택했
을 경우에 대비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는 앨리타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떠
나가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앨리타는 에반 그레이의 아기를 가졌다는 자신의 말을 제이미가 그대로 믿었다는 사실에
비참해하며,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 초췌해져갔다. 지난 몇 주간
그녀의 배는 상당한 속도로 불러왔으므로, 이제 그녀의 임신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근에는 에반 그레이한테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외딴 곳에 떨어져 있는 서머
셋 성에는 런던이나 윈저 정에서 들려오는 소문이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
과 완전히 격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앨리타는 그래도 상관없다는 심정이었다.
제이미는 그녀를 미워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딸보다 자기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이 있었으
며, 그녀는 지금 끔찍하게도 싫은 그레이라는 남자와 결혼한 상태였다.
오, 제이미, 난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난 당신에게 진실을
전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어요. 내가 강요에 의해 거짓 자백을 했다는 걸, 왜 모르죠? 하지
만 상관없어요, 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우리의 아이를 지킬 거예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
도 에반 그레이가 날 데려가기 전에 도망칠 거예오. 난 당신을 사랑해요, 제이미 모티머. 절
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진 않겠어요. 비탄에 잠긴 앨리타는 생각했다.
다음날 에반 그레이는 서머셋 성에 도착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성문에 들어서자마자
입구에 쇠창살을 내려뜨리도록 명령했다. 그와 서머셋 경이 잠깐 동안 얘길 나누고 난 뒤,
성안의 모든 기사와 병사들에게는 완전무장을 하고 경계태세를 갖추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호기심에 사로잡힌 앨리타는 그레이 경이 왜 갑자기 서머셋 성에 나타났는지, 왜 호위병
도 없이 혼자서 달려왔는지 직접 알아보기 위해 오랜만에 방을 나섰다. 위험한 시골길을 혼
자 달려온 것도, 나팔을 울리는 요란한 환영식도 없이 나타난 것도 모두 그레이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거실에 들어선 앨리타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지금까지 그레이 경이 그토록 초췌하고 헝클어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전
혀 식사를 하거나 쉬지도 못하고 단숨에 말을 달려온 것 같았다. 원래는 우아하고 화려했을
그의 의복은 진흙과 먼지로 뒤덮여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얼굴을 사납게 찡그렸고, 마치 미
친 사람처럼 이리저리 불안하게 눈동자는 굴리고 있었다. 앨리타가 거실에 들어섰을 때, 그
와 아버지는 크게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앨리타를 발견한 두 사람은 갑자기 대화를 중단
했다.
"왜 그러시죠?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뭔가 중대한 사태가 발생했음을 눈치채며 그녀가 물었다.
그레이는 핏발이 선 눈으로 불록하게 솟아오른 그녀의 배를 혐오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았
다.
"그 개자식이 우리의 비밀을 알아냈소. 다음엔 국왕을 시켜 우릴 체포하려 들겠지."
"그레이 경, 그만하게!"
서머셋 경이 만류했다. 그는 앨리타가 두 사람의 추악한 거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
다는 사실을 그레이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딸과 사위인 그레이 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숨기려 해도 이젠 소용없습니다. 오래 전 모티머 경을 파멸시키려던 우리의 음모가 온
세상에 알려졌단 말입니다."
"도대체 왜 지금에 와서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그 일이 있은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무엇 때문에 모티머의 자식이 나타나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는 거지? 모두들 애비
가 처형되고 나서 어린 자식도 죽었다고 생각했잖나."
서머셋 경은 넋두리를 하듯 중얼거렸다.
앨리타는 그제서야 에반과 아버지가 누구 얘기를 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어떻게 된 일인
지,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국 두 사람은 제이미의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워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 분명했다.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르셨어요, 아버지? 모티머 경의 재산이 그토록 탐나던가요?"
"넌 이해 못한다. 그건 그레이 경과 애비 사이의 계약이었어."
앨리타는 눈에서 불길을 내뿜으며 그레이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정말 양심도 없는 인간이군요. 무고한 사람을 죽게 만들다니 파렴치하고 비열한
인간이에요. 당신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로 영원히 지옥에서 썩게 될 거예요."
"나쁜계집! 넌 매춘부나 다름없어! 네년이 모티머에게 다리를 벌려주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도록 꼴 보기 싫은 그 배를 내 눈앞에서 치워버려!"
절박한 심정에 처한 그레이는 거의 이성을 잃고 있었고, 제정신을 잃을 위험한 순간에 놓
여 있었따.
"제이미와 비교하면 당신은 절반도 따라오지 못해요!"
마치 치명적인 독을 품은 독사라도 마주한 듯 한참동안 무섭게 앨리타를 노려보던 그레이
는 광분하고 말았다. 그는 갑자기 팔을 들어올려 앨리타의 얼굴을 사정없이 갈겼다. 그녀는
멀찌감치로 나가떨어졌다.
엄청난 충격에 얼이 빠진 앨리타는 비틀비틀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레이가 위협적으
로 다시 그녀에게 다가오자, 앨리타는 뱃속의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며 배를 감
싸안았다. 그레이가 두 번재 일격을 가하려 한 순간, 서머셋 경은 두 사람 사이에 버티고 섰
다.
"폭력을 쓸 필요는 없네."
서머셋은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딸을 매로 다스리는 것과, 사위가 딸
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더욱이 앨리타는 임신을 한 몸이지 않은
가. 서머셋 경은 탐욕스러웠고 한편으로 잔인한 구석도 있었지만, 그의 딸은 언제나 부모에
게 순종적이었고 존중을 받아 마땅한 여자였다. 그녀는 그레이의 잔인한 대우를 받을 이유
가 조금도 없었다.
"잊으셨습니까? 앨리타는 제 아내이고, 아내를 어떻게 다룰지는 제 마음에 달렸습니다."
그레이는 이를 드러내며 야비하게 비웃었다.
"내 집에 있을 때는 아닐세. 자신의 아내를 잔인하게 다루는 것은 겁쟁이나 하는 짓이야."
앨리타를 가까이에 두고 지내는 동안, 서머셋 경은 앨리타의 뱃속에 든 아기의 아버지가
누구든 그 아기는 자신의 외손자구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어느새 그는 손주가 건강하게
태어나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아기에겐 서머셋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앨리타는 그에
게 후손을 안겨줄 수 있는 유일한 혈육이었다. 그레이 경이 어떤 명령을 내리든 그는 앨리
타의 아기가 다치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앨리타 역시 보호해야 했다.
"당신은 너무 마음이 약해. 왕이 울리 찾아내면 우린 둘다 과거의 범죄사실을 자백해야만
할 거요. 이미 어렸을 때 죽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애송이가 나타나 우릴 파멸시키리라고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소?"
거칠게 내뱉는 그레이의 눈동자에 사나운 빛이 다시 번득였다.
"그때 자네와 손을 잡는게 아니었어. 아내를 잃고 난 마음이 몸시 혼란스러웠지. 재물에
눈이 어두어졌던 거야. 하지만 자네는 모티머 가문을 파멸시킴으로써 얻은 것이 훨씬 더 많
았어."
서머셋 경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랬소. 복수를 한 거지. 제이미 모티머가 물려받은 모든 명예와 재산은 원래 내 것이었
으나까!"
그레이는 험악한 목소리로 악다구니를 썼다.
앨리타는 호기심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듬직한 덩지에 가려져 보호를 받으며 앨
리타가 고개를 내밀고 물었따.
"그게 무슨 뜻이죠?"
그레이는 뚫어질 듯 강렬한 시선으로 앨리타를 노려보았다.
"너 같은 계집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그는 다시 서머셋 경을 바라보았다.
"왕의 군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소. 모티머의 말에 따르면, 우
리의 음모는 발각되었소. 그 길로 달아아느라고 헨리 왕이 날 어떻게 할 생각인지 알아볼
여유가 없었소."
"제이미가 윈저 성에 있단 말인가요? 그가 무슨 말을 했죠?"
앨리타는 불쑥 기운이 솟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그러자 그레이는 포악하게 웃음을 터뜨
렸다.
"당신이 가진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알고 싶어하더군. 자신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환
상을 갖고 있는 것 같았어."
"하지만 이 아인 정말로 제이미의 아이예요! 그래서 당신은 뭐라고 했나요?"
앨리타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다그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그자가 평생 동안 진실을 모른 채 궁금하게 여기며 살도록 내버
려두자구. 재밌잖아."
"이젠 어쩔 셈인가? 나도 왕의 군대에 체포당해 런던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싶은 마
음은 없네."
서머셋 경은 걱정스럽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미 살길을 다 생각해두었으니 걱정 마시오. 여기 오기 전에 마을에 들러, 앞으로 이틀
뒤 노스비치에서 우릴 태워갈 배를 마련해 두고 왔소. 위험할 테니 그레이 성에 다녀올 순
없지만, 배를 타고 이 나라를 떠나기 전에 서머셋 성에 있는 귀중품을 챙길 시간은 충분할
거요."
"어디로 갈 생각이죠?"
영국 땅을 떠날 마음이 추호도 없었으므로, 앨리타는 불쑥 물었다.
"프랑스로 갈 거다. 이 땅에 남아 왕의 심판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건 네 아버지도
마찬가지일 거야."
"난 절대 당신과 함께 가지 않겠어요."
앨리타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넌 내 아내야. 넌 내가 가는 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어."
"난 내 아이를 웨일스에서 낳고 싶어요. 아버지, 제발 절 데려가지 말아주세요."
그녀는 아버지에게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구나, 얘야. 아내는 무조건 남편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게야.
혹시 그레이 경이 너를 거칠게 다룰까 봐 걱정을 하는 것이라면, 염려 마라. 내가 곁에 있을
테니, 네 남편이 폭력을 휘두르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거야."
"두 사람 모두 빨리 짐을 꾸리는 게 좋겠소. 런던에서 이곳까지 앨리타를 호위해왔던 내
기사들은 대부분 충성심이 뛰어나니까, 그들에게 우릴 바닷가까지 회위하도록 지시를 내리
겠소."
그레이가 말했다.
"헨리 왕의 군대가 우리를 잡으러 오기 전에, 어서 떠나게 되길 빌겠네."
서머셋 경은 걱정스런 목소리로 속삭였다.
18
제이미는 에반 그레이보다하루 느젝 서머셋 성에 도착했다. 그는 크리케스 성에 잠시 들
러, 윈저 성에서 있었던 모든 사실을 게일로드에게 간단히 설명했다.
"주인님을 앞으로 플린트 백작님으로 부르게 되어 저도 무척 기쁩니다. 아, 정말 오래 기
다리셨습니다. 하지만 노력한 보람이 있군요. 곧 모티머 성을 되찾으로 떠나실 생각이십니
까?"
"아닐세. 그레이가 앨리타를 데리고 국외로 탈출할까 걱정이야. 내 짐작이 맞다면 그자는
지금 서머셋 성에 있을 걸세. 그렇다면 앨리타가 몹시 위험해. 그자는 나한테서 앨리타를 빼
앗아가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잘 알고 있지. 혹시 그녀가 내 아이를 가졌다면 더 더
욱 큰일이잖아."
"아, 드디어 주인님께서 제 말씀을 이해하셨군요. 전 그럼 어떻게 할까요?"
게일로드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
"내 대신 모티머 성을 되찾아주게. 귀중품을 챙겨서 어서 떠나게. 언제쯤 자네와 합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앨리타도 나와 함께 갈 걸세."
그의 말에 게일로드는 깜짝 놀라소리쳤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열두 명의 기사들만 남겨놓고 용병들을 모두 해산시키셨잖아요. 서머
셋 성처럼 철통같은 요새를 공격하려면 그정도 병력으로는 절대 부족합니다. 지금 당장 다
른 병력을 일으킬 시간도 없구요."
"기사들만 데려가면 될 걸세.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용감하고 훌륭한
군인들이네."
"그래도 부족한 건 사실입니다."
일그러졌던 게일로드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그럼 마을 사람들을 데려가십시오.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낄 사람이 아무도 없
을 거예요. 마을에 곧 전갈을 보내겠습니다."
몇 시간 뒤, 제이미는 농부들과 기사들로 이루어진 엉성한 군대를 이끌고 맨 앞에서 말을
출발시켰다. 기사들은 전부 말을 타고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튼튼하게 생긴 곤봉
이나 곡괭이로 무장하거나 석궁을 짊어진 채 걸어갔다. 밤새도록 진군한 그들은 새벽이 될
무렵 서머셋 성을 둘러싼 숲속에 잠복할 수 있었다.
제이미는 무쇠로 만들어진 성문을 사이에 두고 앨리타와 헤어져야 했던 지난번의 해후를
떠올렸다. 그때 그는 그레이의 아기를 가졌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지체없이 돌아가버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절대로 전처럼 그렇게 쉽게 포기하거나, 분노 때문에 이성을 잃지는 않으
리라. 더 이상 누구도 앨리타를 그에게서 빼앗아갈 순 없으리라.
성벽을 유심히 관찰하던 제이미는 보초를 서는 병사들의 숫자가 전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
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서머셋 경이 누군가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제이
미의 짐작이 맞다면, 에반 그레이 역시 성안에 있었다. 화살이 날아올 거리를 충분히 계산한
뒤, 제이미는 숲에서나가 안전한 지점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부하들은 숲속에 잠복시켜둔
채였다. 성루에 있던 보초병들이 즉각 그를 발견하고 경계 나팔을 불었다. 서머셋과 그레이
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제이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즉시 기사 한 사
람에게 신호를 보냈다. 기사는 밤낮으로 말을 달려 그레이가 서머셋 성에 있다는 사실을 윈
저 성의 국왕에게 전하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레이는 성문으로 다가왔고, 서머셋도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앨리타는 어디에 있나? 혹시 그녀를 해치지는 않았나?"
제이미가 고함을 쳤다.
"내 딸은 잘 있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
서머셋 경이 소리쳤다.
"당신들은 둘다 내 아버지에 대한 음해 혐의로 국왕폐하의 심문을 받아야 한다. 어서 항
복하는 게 좋을 거다."
"웃기지 마라! 왕의 군대가 우릴 체포하러 도착하기 전에 이미 우린 영국 땅을 떠나고 없
을 거다."
그레이가 소리를 질렀다.
"난 혼자가 아니다, 그레이. 국왕의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네놈들이 꼼짝하지 못하도록 포
위할 수 있는 병력을 이끌고 왔다.
"거짓말 마라."
제이미의 말에 그레이는 시큰둥하게 코웃음을 쳤다.
제이미는 숲속에 숨어 있던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멀리서 보면 조잡한 무기르 들고
갑옷도 입지 못한 농부들도 완전 무장을 갖춘 기사들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으리라는 것이
제이미의 짐작이었다. 다행히 서머셋과 그레이는 제이미가 기대했던 대로 속아넘어갔다. 두
사람은 격렬한 전투를 벌이지 않고 성을 빠져나가는 것은 쉽지 않을거라는 사실을 즉각 알
아차렸다. 그러나 순간 그레이는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는 교활한 술수를 생각해냈
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성안으로 들어갔다.
제이미가 군대를 이끌고 성문 밖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앨리타도 미리 마음의 준비
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따라 그녀는 늦잠을 잤고, 그레이가 칼을 휘두르며 방으로 뛰어
들었을 때는 겨우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은 뒤였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나한테 원하는 게 뭐죠?"
앨리타는 화들짝 놀라 돌아서며 그레이를 쏘아보았다.
"나와 함께 나가시지."
그의 퉁명스런 말투에 앨리타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레이는 다짜고짜 그
녀의 손목을 붙잡고 문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러자 그녀는 드디어 그가 정신이 이상해졌다
보다고 걱정스럽게 생각했다.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가보면 알아."
그의 눈빛은 광기로 이글거렸고, 그의 태도는 몹시 다급해 보였다.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기 위해 앙탈을 부렸지만 그레이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는 노릇
이었다. 그가 성루 꼭대기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앨리타는 정말로 두려움에 사
로잡혔다. 성벽 난간에서 그녀를 던져버릴 심산일까? 아버지는 어디에 계실까?
앨리타를 끌고 가파른 나선형의 돌계단을 올라가며 그레이는 그녀에게 조금도 쉴 틈을 주
지 않았다. 마침내 반원형으로 돌출된 성벽까지 올라갔을 때, 앨리타는 가쁜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세찬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이 휘날렸고, 식은땀에
젖은 그녀의 온몸에 오한이 덮쳐왔다. 성벽을 순찰하던 경비병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는 그들
을 보고 깜짝 놀란 듯 했다. 하지만 그레이는 거칠게 그들을 쫓아보냈다.
"날 왜 이곳으로 데려왔죠? 무슨 짓을 할 생각이에요?"
추위로 치아가 딱딱 부딪혔으므로, 앨리타는 간신히 입술을 움직여 말을 내뱉었다.
"저 아랠 내려다봐. 뭐가 보이나?"
그레이는 그녀를 위험스럽게 난간가까이 끌고가며 말했다.
두렵기도 했지만 호기심이 동한 앨리타는 난간에 난 구멍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에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다 성문에서 조금 떨어진 숲 가장자리에 서있는 제이
미의 모습을 발견했다.
"제이미!"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나온 그의 이름이 바람을 타고 제이미의 귓가에 전달되었다. 맨 처
음 제이미는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머리 위로 날아가는 새가 지저귀는 소
리로 착각했다. 그러나 그는 육감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그녀를 발견한 순간, 그는
온몸의 혈관이 얼어붙는 듯했다.
"앨리타!"
"앨리타의 목숨과 뱃속의 아이의 생명을 귀하게 여긴다면 당장 병사들과 함께 물러가라!
네가 저항하면 둘은 죽는다. 내 말 명심하라, 모티머. 난 절박한 처지에 몰린 사람이야. 왕에
게 잡히기 전에 이 나라를 떠나기 위해서는 못 할 게 없다. 내 명령을 안 들으면, 곧 네놈은
앨리타의 몸이 저 아래 바위에 부딪쳐 산산조각나 피투성이가 되는 꼴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레이가 미친 듯이 고함을 질러댔다.
"하느님 맙소사. 네놈이 썩어빠진 인간인 줄은 진작부터 알았지만 이토록 악독한 놈인 줄
은 정말 몰랐다. 임신한 여자의 생명을 위협하다니 정말 비열한 놈이구나."
"괜한 협박이 아니야. 내가 조금만 힘을 주면 앨리타를 바닥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뱃속
의 아기는 내 자식도 아니니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짧은 순간 동안이지만, 제이미는 그레이의 말뜻을 헤아리고 황홀한 순간에 젖어들었다. 앨
리타는 결국 그의 아이를 가졌던 것이었다. 그 사실을 듣고 난 제이미는 앨리타를 구해야겠
다는 결심이 더욱더 확고해졌다.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나?"
제이미는 앨리타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새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
을 보며 몹시 걱정스러웠다. 멀리서도 그녀가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 그녀가 얼음처럼 매서운 바람과 극심한 추위에 얼마나 떨고 있을지 그는 상상할 수 있었
다.
갑자기 제이미는 그레이의 등뒤에서 움직이는 사람의 그림자를 포착하고 무기력하게 쳐다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성벽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눈치챈 서머셋 경이 딸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것이었다. 이미 때가 너무 늦었는지는 몰랐지만 그는 자신이 딸을 사랑하고 있
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앨리타와 뱃속의 아이가 위험에 처하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광
기에 허덕이고 있는 듯한 에반 그레이가 서머셋 성에 나타난 이후, 그는 미친 사람과 운명
을 같이하기보다 왕의 자비를 구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앨리타는 그레이보다 훨씬 먼저 아버지의 움직임을 눈치챘다. 그레이는 제이미를 자극하
느라 정신이 팔려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구하러 오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앨리타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녀는 조금도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었지만, 결국
아버지의 마음 깊은 곳에는 딸에 대한 사랑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그레이는 자신의 등뒤에서 누군가가 앨리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황급하게 돌아선 그는 서머셋을 발견하고 약간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앨리타를 놓아주게."
서머셋 경이 거칠게 명령하자, 그레이는 빙그레 웃었다.
"걱정마시오, 모티머는 앨리타나 뱃속의 아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요."
"놓아주라고 말했네. 쓸데없이 내 딸을 괴롭히는 건 미친 짓이야. 과거에 내가 비열한 짓
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난 지금껏 한번도 여자의 치마폭 뒤에 숨어본 적은 없다네. 더
구나 뱃속에 아이까지 임신한 여잘 이용할 마음은 없네."
"제길, 모티머는 세상의 밝은 빛을 볼 자격이 없는 놈이오. 모티머 집안 전체가 저주받아
마땅하단 말이오."
서머셋 경이 앨리타를 그레이의 손에서 구해내기 위해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섰다.
"더이상 가까이 오지 마시오. 안 그러면 딸이 위험하오."
서머셋 경은 조심스럽게 앨리타를 지켜보며 그레이를 다그쳤다.
"자네는 마음이 병들었네, 그레이. 그 옛날 자네가 왜 모티머의 아버지에게 반역 누명을
씌우기로 작정했는지, 제이미 모티머도 그 이유를 알고있나? 아버지가 처형되고 나서도 자
네가 어린 아들을 찾아내 죽이려 했던 이유를 알고 있느냔 말일세. 자네과 그가 이복형제라
는 것을 그도 알고 있나? 아니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 이 세상에 나 혼자
뿐인가?"
앨리타는 충격적인 사실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벌렸다. 아버지가 제정신으로 하시는
말씀일까? 제이미와 에반 그 이가 이복형제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놈과 내가 배 다른 형제란 건 사실이지만, 그 나쁜 자식이 내 혈육이라는 건 인정할
수가 없소. 그자의 애비는 우리 어머니가 겨우 열세 살이었을 때 어머니를 겁탈했소. 어머니
는 혼자 승마를 하다가 우연히 클레런스 모티머와 마주쳤던 거요. 하녀도 없이 몰래 빠져나
갔기 때문에 그자는 우리 어머니를 그냥 이름 없는 시골처녀로 생각하고 무자비하게 겁탈을
했소. 클레런스 모티머는 젊었을 때부터 거만한 몹쓸 자식이었던 거지. 어머니는 그의 이름
조차 알지 못했고, 너무나 두려워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소. 그 당시 어머니는
곧 고든 그레이와 결환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그레이 성을 방문중이었소. 내가 태어났을
때, 고든은 아무런 의심 없이 날 아들로 받아들였지."
그레이느 자신의 어머니가 임종할 때 털어놓은 그의 출생 비밀에 관한 얘기를 다시 늘어
놓으며 마치 스스로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서머셋 경은 그가 진실을 털어놓은 유일한 사
람이었다. 고든 그레이 조차 진실을 알지 못했다. 당시에도 나이가 많았던 그레이 경은 헨리
4세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므로, 클레런스 모티머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에반의 말을 의심
없이 믿어버렸다.
마침내 충격에서 벗어난 앨리타가 입을 열었다.
"당신 말을 믿지 못하겠어요. 당신은 조금도 제이미와 닮지 않았어요."
그레이는 악의에찬 시선을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연하겠지. 우리 어머니는 여러 해가 흐른 뒤에야 자신을 강간한 자의 이름을 알게 되
었소. 어머니는 끔찍한 비밀을 임종의 순간까지 가슴에 품고 있다가 내게만 털어놓은 거요.
난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반드시 클레런스 모티머가 어머님에게 저질렀던 만행의 대가를 치
르게 만들겠다고 맹세했지. 모티머가 명예를 지킬 줄 아는 인간이었다면 우리 어머니와 결
혼했을 것이고, 난 그의 후계자가 되어 그의 모든 재산을 정당하게 물려받았을 것이오. 어쨌
거나 난 내 방식대로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을 손에 넣었지. 내가 당신을 원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오. 당신은 모티머 가문과의 마지막 연결고리였고, 모티머 가문에 속한 마지
막 소유물이었지. 제이미 모티머가 느닷없이 나타나 당신을 빼앗아갔을 때, 난 그자를 죽이
고 싶었소."
앨리타는 머리속이 혼란스러웠다. 에반 그레이의 말이 사실일까? 아니면 그는 망상에 시
달려 헛소리를 하는 것일까? 그가 정말 완전히 미쳐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의 이야기
에선 믿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진실이 느껴졌다. 앨리타는 모티머 가문에 대해 에반 그레이
가 품고 있던 철저한 증오심의 진짜 이유를 제이미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자네의 분노를 내 딸에게 풀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내가 앨리타를 방으로 데려
다주겠네. 바람도 차가운데 이 꼭대기에서 딸애가 얼마나 춥겠나."
서머셋 경은 그레이의 생부에 관한 긴 얘기를 침착하게 듣고 나서 조용히 말했다. 그는
불그스레한 얼굴에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섰다.
그레이는 앨리타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적대감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럴 순 없소. 우리가 무사히 이 나라를 도망치는 문제는 이제 앨리타를 어떻게 이용하
느냐에 달렸소. 모티머는 여잘 살리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거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네."
서머셋 경은 나직하게 말했다.
그레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서머셋 경은 앨리타의 다른 팔을 붙들었다. 앨리타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밀고당기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레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절박해진 그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칼로 노인
의 몸을 그었다. 끔찍한 비명소리와 함께 서머셋 경이 성벽 위에 쓰러졌다.
앨리타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그레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아버지에게 달려
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그레이는 그녀의 허리를 안고 점점 더 멀어져갔다. 앨리타는
그의 잔인한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갑자기 그레이의
거친 속삭임을 들은 그녀는 저항을 멈추었다.
"뱃속의 아기의 생명을 살리고 시 다면, 당장 얌전하게 구는게 좋을 거야."
멀리 성벽 아래에서 제이미는 아득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토록 절망스럽고 무기력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레이가 서머셋 경의 몸을 칼로 베었을
때, 제이미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엔 앨리타의 차례인가? 앨리타
가 그레이한테서 벗어나기 위해 어설프게 발버둥을 치는 모습을 보며, 제이미는 날개라도
달려 그녀에게 날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그녀가 몸부림을 멈추었고, 제
이미는 잔뜩 긴장한 채 그레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레이는 성벽 귀에서 그를 똑바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내 앞길을 방해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똑똑히 보았나, 모티머? 난 살인도 마다하
지 않는 사람이야."
제이미는 싸늘한 분노를 느꼈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나?"
"군대를 이끌고 당장 돌아가라. 내가 성벽에서 지켜보고 있겠다. 네가 앞장을 서서 병사들
을 이끌고돌아가지 않으면, 앨리타는 무사하지 못할 거다. 난 갈 데까지 간 사람이야, 모티
머. 무의미한 협박은 하지 않는다."
그는 앨리타를 난간으로 좀더 가까이 끌고왔다. 성벽 난간에는 경비병들이 적의 동정을
살피고 화살을 쏠 수 있도록 군데군데 넓은 구멍이 뚫려 있었따. 제이미는 흠칫 숨을 들이
마셨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앨리타를 지금 제정신이 아닌 그레이 녀석이 난간 너머로 던
져버릴까 봐 몹시 두려웠다.
"네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 하지만 만일 앨리타를 해친다면, 네놈이 숨을 곳은 이 세상 어
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내가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 네놈을 죽여버리고 말 테다."
곧바로 숲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긴 제이미는 가일즈 기사를 옆으로 불렀다. 기사가 민첩
하게 다가와 그의 명령을 기다렸다.
"어서 나와 갑옷과 투구를 바꿔 입세. 그런 다음 자네는 내 말을 타고 병사들을 지휘해
떠나게. 저들 눈에 띄지 않도록 언덕 너머까지 간 다음엔 그곳에서 다음 지시사항을 기다리
게."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그레이가 원하는 대로 내가 떠나는 것처럼 보여줘야 해. 난 숲에 숨어서 그자의 다음 움
직임을 가다리겠네. 자네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사람을 하나 남겨두게. 자네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를 보내겠네."
황급히 옷을 바꾸어 입은 다음, 제이미는 가일즈 기사의 차림새를 유심히 살폈다.
"그럴 듯 하네. 놈들은 속아넘어갈 거야. 어서 가게, 하지만 그레이가 우리의 속임수를 알
아차리지 못하도록 얼굴은 보여주지 말아야 하네."
무성한 덤불 속에 완전히 몸을 숨긴 채, 제이미는 자신의 갑옷을 입은 가일즈 기사가 명
령대로 병사들을 이끌고 후퇴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병사들은 길게 한 줄로 늘어서서 천
천히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연락병으로 남은 기사 하나와 함께 제이미는 성의 동정을 살피
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다리고 있었다.
성벽 꼭대기에서 그레이의 잔인한 손아귀에 잡힌 채, 앨리타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아버
지는 이미 돌아가신 것 같았고,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제이미는 그녀를 에반 그레이
에게 버려둔 채 떠나갔다. 그녀가 제이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두 번이나 거짓말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이미 역시 그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떠났다는 것을 알
았다. 하지만 그녀는 분노와 슬픔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 나쁜자식이 당신의 생명은 귀히 여기는 모양이군. 보시오, 그 자가 엉성한 군대를 이
끌고 앞장서서 떠나고 있소."
그레이는 앨리타를 끌고 계단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로 꼼짝도 하지 않
고 쓰러져 있는 서머셋 경의 옆을 지나치자 앨리타가 간청했다.
"아버지를 돌보게 해줘요. 빨리 도와드려야 해요."
"너무 늦었소. 상처는 치명적이었소."
전혀 후회하는 빛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그가 대꾸했다.
"까마귀들이 시신을 파먹도록 그냥 내버려두고 갈 순 없어요."
앨리타는 공포감에 소리를 질렀다. 막다른 지경까지 몰린 그녀는 히스테리의 상태를 일으
키기 바로 직전이었다.
그레이는 이성을 읽고 광란에 빠진 여자를 다루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밤
성을 떠나 프랑스로 향하는 배에 오르려면 앨리타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는 앨리타를 옆으
로 밀치며 으르렁거렸다.
"그럼 아버지에게 가보시오. 만일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사람을 시켜 방으로 데려가 상처
를 치료하도록 하지. 내 예상대로 이미 숨이 끊어졌다면, 뜰에 묻어주겠소."
갑자기 풀려난 앨리타는 아버지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순간 그녀는 그레이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심장을 가로지른 깊은 상처는 치명적이었고, 아버지는 이미 숨을 거둔
것 같았다. 앨리타는 더 이상 끔찍한 통증을 겪지 않아도 되었으리라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꿇어앉은 채로 그레이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 살인자! 당신은 달아나지 못해요! 제이미가 당신을 체포할 것이고, 곧 왕의 심판을 받
게 될 거라구요!"
"당신과 함께 있는 한 모터머는 내게 손도 대지 못해. 왕은 프랑스로 떠날 테니 신경쓸
것도 없지. 어서 갑시다. 우릴 태워다줄 배에 오르기 전에 아직 할 일이 많소."
그는 앨리타의 손을 잡고 강제로 일으켰다.
"싫어요! 이런 식으로 아버지를 두고 떠날 순 없어요."
"뒤에 남은 자들이 알아서 처리할 거라니까. 벌써 해가 저물고 있어. 떠나기 전에 할 일이
많다구."
그레이는 점점 인내심을 잃고 있었다. 앨리타가 계속해서 버티고 있자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는 앨리타를 침실에 던져넣고 문을 잠갔다.
"자정에 데리러 오겠소."
그레이는 자정이 될 때까지 성안에 있는 모든 귀중품들을 챙겨 두 대의 마차에 나누어 실
었다. 그동안 그는 서머셋 경의 시신을 뜰에 묻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서머셋 경의 호
위병들이 문제를 일으킬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하지믄 그는 자신의 호위병들이 수적으로 훨
씬 우세하고 더 용맹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안심했다. 어차피 그와 서머셋의 호위병들은
돈을 받고 일하는 용병이었으므로, 이미 세상을 떠난 주인에게 그토록 열렬한 충성심을 품
고 있을 리도 없을 것이었다. 권력은 늘 승리자를 따르는 법이었고, 지금은 그레이가 명백한
승리자였다.
앨리타는 침실에서 창 너머로 아버지의 시신이 묻히는 광경을 지켜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있어 완벽한 부모의 역할도 해내지 못했으며 딸보다는
자기 자신의 행복을 더 챙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아버지였고, 앨리타는 아버
지인 그를 사랑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어린 딸을 각별하게 보살폈던 젊은 아
버지의 다정한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는 진심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했다. 부녀 사이의
애정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아버지가 에반 그레이와 손을 잡으면서부터였다. 탐욕에 눈이 어
두워진 아버지는 결백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그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앨리
타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시계가 가정을 울리자마자 그레이가 그녀의 방을 찾았다. 그녀는 가장 따뜻한 옷을 골라
겹겹이 껴입은 채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는 제이미가 문을 부
수고 들어와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망상이었던 모양이
었다. 뱃속의 아이만 아니라면 그녀는 자신이 죽게 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레이는 그녀의 작은 여행가방을 들고 황급히 그녀를 끌어내 뜰로 내려갔다. 아버지의
귀중한 재산을 모두 실은 두 대의 마차를 엄중하게 호위하고 있는 수많은 기사들을 본 앨리
타는 기가 막혔다. 아버지는 금화와 보물 따위를 상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는데, 에반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마차에 오르기를 머뭇거리자 그레이는 그녀를
안아 의자에 앉힌 뒤, 자신도 곧 뒤따라 마차에 올랐다.
경비병들이 들고 있는 횃불과 달빛의 도움을 받아 그들은 천천히 성문을 빠져나가 밤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방향으로 보아 앨리타는 그들이 곧장 해변으로 향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제이미가 아주 가까운 숲속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녀는 그토록
쉽게 절망감에 빠지진 않았으리라.
기다리다 지친 제이미가 거의 포기하려는 심정으로 갈팡질팡 하던 순간, 성문이 열리고
수많은 기사들의 철통같은 호위를 받으며 두 대의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그가 숨
어 있는 곳에서 아주 가까운 길로 지나쳤으므로, 제이미는 수심으로 가득한 앨리타의 얼굴
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환한 달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몹시 창백해 보였다. 하지만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
다. 그러나 자신의 계획을 그녀에게 알릴 방법은 없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
고 생각하고 있을까? 단호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레이가 그녀의 곁에서 마차를몰고 있었
다. 제 손으로 직접 서머셋 경을 살해하는 그레이의 모습을 지켜보았으므로, 제이미는 그가
왕의 분노를 피해 달아나기 위해서라면 정말로 무슨 짓이든 저지르고야 말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사들과 마차가 북쪽 해변을 향하자 제이미는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레이가 그
쪽 방향을 선택했다면 가는 곳은 뻔했다. 그곳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수심이 깊은 만
이 있었다. 그가 어둠의 영주로서 활동할 당시, 왕의 군대를 따돌리기 위해 끊임없이 밀수선
과의 접촉지점을 바꾸었을 때, 여러 번 그곳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그레이의 목표지점을 확
신한 그는 옆에서 졸고 있던 연락병을 깨웠다.
가르스 기사는 제이미가 손을 대자마자 곧 깨어났다.
"바람처럼 말을 달려, 사람들에게 노스비치로 가도록 전하시오. 마을 사람들이 장소를 잘
알고 있으니 그곳으로 안내해줄 거요. 거기에서 만납시다."
그르스 기사는 곧 출발했다. 제이미는 자신의 검정색 종마가 아니라는 것을 사위워하며
가일즈 기사가 두고 간 말에 올라타고 충분한 거리를 둔 채 그레이의 뒤를 따랐다. 그는 두
시간 동안 줄곧 마차의 뒤를 밟았다. 그러다 그는 앨리타에게 긴급한 위험은 없으리라고 판
단하고 숲속으로 말을 돌렸다. 운이 좋으면, 짐마차 때문에 속도가 느린 그레이의 일행보다
훨씬 먼저 해안에 도착해 부하들과 함께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도착했을 때 제이미의 군대는 정말로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일즈 기사가 앞으로
나서며 반갑게 그를 맞았다.
"이젠 어떻게 할까요?"
"우선 기다리세. 놈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숲속에 몸을 숨기고 잠복해 있는 거지. 내가 신
호를 보내면 숲속에서 뛰쳐나와 그레이의 탈출을 저지해야 하네. 하지만 내 아내가 다치지
않도록 모두에게 각별히 주의를 시키게. 그녀는 내 아이를 가졌네. 두 사람 모두 내겐 몹시
소중하다네."
바다에서 잿빛 해무가 피어오르고, 수평선이 진한 보라색에서 엷은 자줏빛으로 변해가자,
제이미는 멀지 않은 곳에 정박해 있는 배의 형체를 알아보았다. 조바심이 나 미칠 지경이던
그느 그레이의 기사들이 먼저 모래사장 저쪽에 모습을 드러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 두 대의 마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앨리타는 몹시 지친 듯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
고 앉아 있엇다.
제이미는 그레이의 기사들과 마차가 모래사장으로 오나전히 들어올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
렸다. 그들이 한군데에 집결하자, 어느새 범선에서 내려진 세 대의 작은 보트가 해안에 도착
했다. 사람과 짐을 실어 나를 보트였다.
에반 그레이가 앨리타를 마차에서 안아 내리자마자, 제이미는 공격신호를 보냈다.
19
그레이가 자신을 마차에서 끌어내리려 하자 앨리타는 거칠게 몸부림을 쳤다. 그녀는 에반
그레이와 함께 배에 오르고 나면 다시는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영원히 제이미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아기를 낳을 때까지 목숨을 부지
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바로 그때, 뱃속의 아기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뱃속에서 꿈틀거렸
다. 앨리타는 새롭게 기운을 내어 맹렬히 저항했다.
"나와 싸울 생각은 하지 말아. 방항하면 당신만 다칠 뿐이오."
그레이는 앨리타를 세게 잡당겨 보트 쪽으로 끌고가며 소리쳤다.
앨리타는 대답도 하지 않고 부드러운 모래 속에 발을 묻으며, 에반 그레이의 강력한 손아
귀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자신이 몸부림쳐봤자 절대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
며 낙담한 채 흐느끼던 앨리타는 갑자기 모래사장 뒤편의 숲속에서 튀어나오는 사람들을 바
라보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대부분은 곡괭이와 삼지창 등 조악한 농기구들이 대부분이었
지만 그들은 무기를 휘두르며 기사들에게 달려들었고, 그레이의 기사들은 훨씬 좋은 무기를
갖추었으면서도 갑작스런 습격에 맥을 못추고 쓰러졌다.
그레이의 입에서 지독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분명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제이미가 군대를
이끌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그자가 어떻게 알고 이곳에 잠복을 했을까? 어떻게 그
보다 먼저 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명령대로 모티머가 서머셋 성을 뜬 이후에
도 보초를 세워 성밖을 감시했었다.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모티머의 오합지졸 군대가
이토록 맹렬한 공격을 감행해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다행히 그는 모티머가 꼼짝하지 못할
약점을 알고 있었고, 그 대상은 그의 손안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앨리타였다. 그는 새
삼 힘을 내어 앨리타의 팔을 낚아채 파도에 흔들리고 있는 보트로 끌고갔다.
그가 바닷가에 거의 도달했을 무렵 그레이는 두 대의 보트가 서둘러 노를 저으며 떠나가
느 것을 보고 경악했다. 선원들은 자신들과 상관없는 싸움에 휘말려들고 싶지 않은 모양이
었다. 그러나 세 번째 보트는 약간 동작이 굼떴고 미처 본선을 향해 떠나기 전에 그레이에
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앨리타를 배안에 던져넣듯 태운 뒤 자신도 황급히 올라타고 나서,
선원에게 어서 노를 저으라고 명령했다. 한시바삐 소란스러운 싸움터에서 벗어나길 바랬던
선원은 말없이 그의 명령에 따랐다.
제이미는 앨리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기 위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적을 하나하나
물리쳤다. 마을 주민들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며 교묘하게 그레이의 기사들을 무찌르고 있
었다. 더욱이 제이미의 호위병들은 모두가 대단히 용감하고 전투기술도 뛰어났다. 하지만 그
레이의 부하들은 이미 제이미의 갑작스런 공격에 밀리고 있었다. 싸움이 시작되고 나서 금
방 앨리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제이미는 미친 듯이 어두운 해안을 살폈다. 달빛과
그레이의 부하들이 들고 있던 횃불만이 그의 시야를 밝혀주었으므로 앨리타를 찾기가 어려
웠다.
마침내 그녀를 발견한 제이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맹렬하게 반항하고 있었
지만, 파도에 흔들리고 있는 보트에 그녀를 태우려고 애를 쓰는 그레이의 완력을 저지하기
에는 힘이 부족했다. 제이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그레이의 기사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앨리
타의 이름을 외치며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앨리타는 제이미의 외침을 듣고 엉거주춤 일어나려 다리를 움
직였다. 어느덧 보트는 맹렬하게 속도를 내며 깊은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제이미는 물가
에 서서 무거운 갑옷을 벗어던지고 앨리타와 그레이의 뒤를 따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
나 본능적으로 낌새를 알아챈 그레이는 앨리타의 가슴에 칼끝을 겨누었다.
"더이상 다가오지 마라, 모티머! 바닷물에 한 발자국만 들어서면 앨리타는 물고기밥이 될
거다."
그레이는 멀지 않은 곳에서 있는 제이미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제이미는 증오와 분노심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개자식! 만일 앨리타와 내 아이를 해친다면 난 지구 끝까지 널 찾아가 복수하고 말겠다."
그레이는 선원들이 노를 저을 때마다 제이미와의 간격이 점점 더 벌어지자 제이미를 바라
보며 야비하게 웃어댔다. 곧 보트는 멀리 어둠 속에서 프랑스로 떠나기 위해 그를 기다리고
있는 배에 도착할 것이었다. 앨리타 역시 그 사실을 눈치채고 갑자기 그레이의 칼끝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갑작스런 몸놀림에 작은 보트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레이는 그녀를
붙들기 위해 앨리타에게 손을 뻗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갈등 속에서 제이미는 점점 작아져가는 앨리타의 창백한 얼굴
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갑작스럽게 뒤로 달아나 보트가 위태롭게 흔들리자, 제이
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악독한 계집!"
그레이는 보트가 흔들리는 것을 막는 동시에 앨리타를 붙들기 위해 애를 쓰며 악을 썼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오! 나 수영할 줄 모른단 말이오."
선원 하나가 보트 난간을 붙들며 긴박한 어조로 소리쳤다.
"나도 못 해!"
앨리타와 그레이가 몸싸움을 벌이는 동안 작은 보트가 미친 듯이 요동을 치자, 함께 타고
있던 동료 선원이 외쳤다.
갑자기 보트는 오른쪽으로 기울었고 어느 틈엔가 파도에 휩쓸려 뒤집히고 말았다. 그러자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공포에 휩싸인 두 선원은 살아보겠다
는 노력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바위처럼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바닷물에 젖은 드레스와 페
티코트의 무게 때문에 몸을 움직이기가 몹시 힘들었지만 앨리타는 간신히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민 채 떠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놀았던 적이 많았다. 지난 몇 년
동안은 한번도 수영할 기회가 없었지만, 해변에서 사람들이 구조대를 보낼 때까지 체력이
버텨준다면 물위에 떠 있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갑자기 그녀의 옆으로 그레이의 머리가 떠올랐다. 물위에 떠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
의 눈동자가 사납게 번득였다. 앨리타를 발견한 그의 표정이 증오심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달아나려고 팔을 재빨리 움직였지만 그는 이미 절박해진 손길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붙들
었다.
"혼자 죽진 않겠다. 내가 널 가질 수 없다면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어."
그는 숨을 몰아쉬면서 거칠게 내뱉었다.
"수영 못해요?"
앨리타는 기운을 차려 물었다.
"그래."
마지막 말과 함께 그는 수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앨리타는 길게 마지막으로 숨을
들이마신 뒤, 자신의 머리채를 꽉 움켜쥔 그레이를 따라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아래로, 아래로 빠져들었다. 바닷물은 지독하게 차가웠고 새까만 암흑이
었다. 앨리타는 어두운 지옥의 구덩이 속으로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격렬하게 몸
부림을 치며 그레이의 손에서 머리카락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는 죽어가면서도 그
녀의 생명줄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호흡이 가빠 폐가 터질 듯 했다. 앨리타는 자신
이 죽게 되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제이미의 아기를 낳지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을 깨
닫자 숨을 쉬지 못하는 고통보다 더한 통증이 그녀의 가슴을 후벼팠다. 암흑과 절망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서서히 받아들이며,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에게 조용히 작별인사를 고했다. 그리고 끝없이 공허한 차가운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면서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보트가 뒤집어지고 앨리타가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한 순간, 얼어붙었던 제이
미의 몸이 다시 살아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허리띠를 풀고 칼과 무기를
집어던졌다. 갑옷과 투구도 곧 벗어던졌다. 그는 단숨에 차가운 바닷속으로 뛰어들었고, 힘
차게 팔을 내저으며 파도에 휩쓸려 다니고 있는 뒤집어진 보트로 다가갔다. 지금은 앨리타
이외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죽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그는 그녀가 필요했
고, 너무나 절실히 그녀를 살아하고 있었다.
보트에 도달한 제이미는 거품이 이는 어두운 바다 위를 미친 듯이 살폈다. 아무것도 보이
지 않았다. 앨리타뿐만 아니라 그레이와 두 명의 선원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아무런 죄도
없는 앨리타에게 가해진 운명의 채찍이 너무 가혹하다고 마음속으로 소리치며, 심호흡을 한
뒤 바닷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해류 때문에 앨리타가 배에서 너무 많이 떠내려가지 않았
기를 빌 뿐이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 어두운 바닷속을 헤매며 그는 칠흑같은 암흑의 세
계를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폐가 터질 듯했으므로 그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하늘은 검은색에서 잿빛으로 변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는 혹시 앨리타가 물위로 떠오르지 않았는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다시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잠수했다. 이번에는 좀더 깊이 물속으로 들어
갔고 울퉁불퉁한 바위 바닥에 거의 닿았다고 생각했을 무렵, 그는 해초처럼 떠 있는 앨리타
의 금발머리를 발견했다. 제이미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황큽하게 앨리타의 허리를 안고,
수면으로 함께 올라가려고 했다. 바로 그때 그는 앨리타 옆에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쥔 그레
이가 함께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더 이상 숨을 참고 있을 수가 없었고, 조
금만 더 지체했다간 앨리타를 안고 수영을 할 기력을 모두 잃고 말 것만 같았다.
제이미는 온몸의 기력을 쥐어짜며 앨리타와 그레이를 데리고 조금씩 조금씩 열심히 헤엄
을 쳤다. 수면에 떠오르자마자 그는 달갑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숨을 고른 뒤 그는 다시 앨
리타에게 관심을 돌렸다. 그녀는 죽은 사람처럼 얼굴빛이 창백했고 거의 호흡을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미친 듯이 그녀의 몸을 살폈지만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는 징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옆으로 그레이의 머리가 솟아올랐다. 그는 아직도 앨리타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있었다. 그레이의 사악한 심보를 저주하며 제이미는 앨리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
다. 그러나 그레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생멸줄이라도 되는 듯 꼭 붙잡고 있었다. 제이미는
가능한 한 빨리 앨리타를 해안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그의 손아귀에서 머
리카락을 빼냈다. 너무 늦기 전에 그녀의 폐에 찬 물을 빼내야만 했다. 마침내 그레이의 주
먹에서 앨리타의 머리카락을 뽑아낸 제이미는 낮게 승리의 신음소리를 흘렸다. 제이미는 곧
앨리타를 이끌고 모래사장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캑캑거리는 기침소리와 함께 살아는 그레이가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앨리타의 치
맛자락을 붙잡았다.
"모티머, 날 두고 가지 마라. 살려줘, 난 수영을 못해."
그레이가 미친 듯이 앨리타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으므로 제이미까지 물속에 잠길 뻔했
다.
제이미는 애원하는 그레이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두 사람 모두를 살릴 수는 없는 상황이
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앨리타는 그의 사랑이고, 그의 생명이었다. 제이미는 앨리타를
한시바삐 육지로 데려가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레이가 잡고 있는 치맛자락을 찢어버
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공포로 입을 크게 벌린 채 그를 노려보던 그
레이는 허공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리다 천천히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제이미는 힘차게 헤엄을 쳤다. 너무나 절박한 심정이 그에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힘을 주
었다. 해변에 닿기도 전에 가일즈 기사가 다가와 앨리타를 받아 안았고, 다른 기사가 제이미
를 돕기 위해 달려왔따.
"부인은 돌아가셨습니다."
가일즈 기사는 앨리타를 부드럽게 모래사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
제이미는 잔인한 운명의 장난을 부인하듯 무섭게 소리쳤다. 그는 가일즈 기사를 밀치고
애리타 곁에 무릎을 꿇으며 그녀를 엎드려 눕혔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에 걸터앉아 그녀의
등을 누르며 바닷물을 토해내게 하려고 했다. 잠시 후 그는 그녀를 다시 돌려눕히고 그녀의
심장에 귀를 대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절박해진 제이미는 생명력을 불어넣으려는 듯 그녀
의 입술에 입을 대고 공기를 주입시켰다. 효과가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그는 사랑하는 여
자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작정이었다.
"소용없습니다, 영주님."
제이미의 모습을 지켜보던 가일즈 기사가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제이미는 그렇게 하루종일이라도 그녀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볼 생각이었으므로, 기사의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앨리타는 죽을 수 없었다. 앨리타와 그녀의 뱃속에 든 아기만큼
그에게 소중한 의미를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하늘은 이제 흐린 회색으로 변했고, 동쪽 하늘에 희미한 태양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누
군가 담요를 가져와 앨리타에게 덮어주었다. 제이미는 여전히 그녀를 살리기 위해 온갖 방
법을 다 동원하고 있었다. 그 역시 지독하게 추웟지만 앨리타의 목숨이 위태로운 마당에 자
신의 편안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며 담요마저 거부했다. 그는 아무것도 상관이 없었다. 가
일즈 기사의 냉혹한 말도, 젖은 옷이 추위 때문에 뻣뻣하게 얼어 그의 피부를 후벼파고 있
어도 상관이 없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새파랗게 질린 입술과 차갑게 식은 육체의 앨
리타 뿐이었다. 그는 새빨갛고 부드럽던 그녀의 입술과 따뜻했던 그녀의 육체를 고통스럽게
떠올렸다.
피로에 지쳐 허덕이면서도 제이미는 앨리타를 죽게 만든 잔인한 운명에 대해 인정하지 않
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마침내 자신의 사랑이 떠나갔다는 사실을 처
절하게 인정하며 털썩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차갑게 늘어진 그녀의 몸을 가슴
에 꼭 끌어안고 통곡했다.
그때 갑자기 그녀는 바닷물을 토해냈고, 캑캑거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질식할 듯 가
쁜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곧 고르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제이미는 뺨위로 흘러내리는 기쁨
의 눈물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 행복했으므로 자신의 부하들과 친구들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길 겨를이 없었다. 그의 가슴 깊이 간직되
어 있던 단단한 껍데기에 둘러싸인 진실한 감정을 내보이는 일은 그의 평생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
이 조금도 당황스럽지 않았다.
앨리타는 계속해서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그제서야 제이미는 가일즈 기사에게 전투결
과에 대해 물었다.
"어떻게 되었나? 우리편 사상자는 많은가?"
가일즈 기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레이 경의 부하들은 쉽게 진압되었습니다. 주인이 그들을 버리고 달아나자 계속해서
전투를 할 의욕마저 잃은 것 같더군요. 저들을 어떻게 할까요?"
"죄수들을 모티머 성으로 데려가게. 그리고 나와 아내를 호위할 기사들만 서너 명 남겨놓
게. 앨리타를 가능한 한 빨리 편안한 곳으로 옮겨야겠네."
"앨리타 아씨와 아기가 건강하게 회복되길 빌겠습니다."
지금 그녀는 숨을 쉬고 있었지만, 겨우 몇 분 전만 해도 가일즈 기사는 그녀를 죽었다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앨리타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자 제이미는 그녀를 안고 가까운 마차로 데
려가 조심스럽게 뉘었다. 그런 다음 그는 앨리타의 곁에 누워, 마차가 흔들리는 충격에서 그
녀를 보호하기 위해 꼭 끌어안았다. 그녀는 치아가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제이미는 그녀가 오한으로 몹시 앓게 될까 두려웠다. 조금 전까지 그는 그녀를
영원히 잃을 뻔했기 때문에, 또다시 병마로 인해 그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견딜
수가 없었다.
모티머 성까지는 긴 여정이었다. 행렬은 근처의 성에 잠깐 들러 마른 담요를 빌린 뒤 곧
바로 여행을 계속했다. 앨리타는 계속해서 의식불명상태였다. 제이미는 다방면이 지식이 많
은 게일로드가 그녀를 구해낼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앨리타가 아기
를 유산한 징후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의미한 햇빛이 비쳐 어느 정도 한기가 가시
자 제이미는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 햇빛은 그와 앨리타의 장미빛 미래에 대한 하늘의 계
시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몇 시간 뒤 앨리타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감각이 무뎌
진 그녀는 시야가 맑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의 머리속에 떠오른 마
지막 기억은 에반 그레이에게 잡혀 얼음처럼 차갑고 칠흑처럼 어두운 바닷속으로 가라앉던
기억이었다. 죽음이 눈앞에서 그녀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걸까? 그녀가 죽음의 손길을 뿌리치고 살아났을 가능성은 없었다. 시선을 들어
올리나 하늘이 보였다. 태양도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
난 자꾸만 계속해서 눈을 깜박였다.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제이미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
다. 아니, 그의 눈빛엔 뭔가 좀더 절실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는 그
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그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언제나 그의 눈빛에 사랑
이 깃들어 있던 것은 아닐까?
앨리타가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자 제이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녀가 한
참 동안 침묵을 지키자, 그는 혹시 앨리타가 충격으로 기억을 상실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에 두려워졌다. 그녀가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것일까?
"앨리타. 당신을 잃어버리는 줄 알았소."
한숨처럼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제이미는 그녀를 꼭 안았다.
그녀는 입술을 열었지만 말이 입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엄청나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바
닷물 때문에 목구멍 전체가 뻣뻣하고 아팠다. 그녀는 가슴 깊이 느끼는 감정을 표정으로 전
하며 그의 눈빛을 응시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우선 푹 쉬어요, 내 사랑. 곧 모티머 성에 도착할 거요. 이제 그 누
구도 다시는 당신을 해치지 못할 거요."
갑자기 그레이경이 자신을 익사시키려 했던 잔인한 기억이 떠오르자 앨리타는 공포감으로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가 다시 입을 벌리자 간신히 속삭임이 새어나왔다.
"그레이는요?"
제이미는 그녀의 말뜻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더이상 두려워할 것 없소. 에반 그레이는 이제 당신을 해치지 못할 거요. 그자는 물속에
빠져 죽었소."
앨리타는 눈에 띄게 창백해지며 그의 품안에서 축 늘어졌다. 제이미가 다시 그녀에게 말
을 걸었을 때, 이미 그녀는 눈을 감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제이미의 증조부에 의해 건립된 모티머 성은 웨일스 지방에서 가장 근대적인 양식으로 지
어진 성이었다. 중심 도시인 플린트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
므로, 그 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모티머 경과 그의 어린 아들에 대해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
리고 그들은 모티머 가문에 대해 호감을 품고 있었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도개교를 지나 두
툼한 나무 성문 앞에 멈춰서자, 게일로드가 달려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게일로드는 제이미가 앨리타를 안고 마차에서 뛰어내리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이미의 품안에 축 늘어져 있는 앨리타를 발견한 노인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앨리타 아씨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다행히 좀 지쳐 있는 정도라면 좋겠지만, 아직 잘 모르겠네."
제이미는 성 안으로 앨리타를 데려가며 말했다. 게일로드는 황급히 걸음을 옮기며 영주의
침실로 그를 안내했다.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은 제이미는 그녀의 호흡을 불규칙한 것을 발
견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주인님? 두 분 다 끔찍하게 젖었군요."
게일로드가 걱정스레 물었다.
"에반 그레이는 내 짐작대로 서머셋 성에 있었네. 그자에게 왕의 재판을 받아야 할 운명
이라는 것을 전하고 앨리타를 내놓으라고 했더니, 그자는 앨리타를 인질로 삼았네. 내가 즉
기 군대를 데리고 돌아가지 않으면 앨리타르 성벽에서 떨어뜨리겠다고 위협했지."
게일로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서 앨리타 아씨를 그레이의 손에 남겨두고 떠나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서머셋 경이 자신의 외동딸인 앨리타를 그냥 내버려두
지 않길 바랬지."
"그러던가요?"
"노력은 했지만 불행히도 서머셋 경은 그레이의 칼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네. 난 부하들을
보낸 뒤 숲속에 남아 성을 감시했지. 그레이는 자정이 지나자마자 값진 물건들을 모조리 마
차에 싣고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을 나섰네. 앨리타도 그와 함께였지. 난 그레이가 노스
비치에서 배를 타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즉각 사람을 시켜 부하들을 그곳으로 집결시켰네.
그레이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숲 속에서 완벽하게 잠복중이었지. 짧았지만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그 사이 그레이가 앨리타를 작은 보트에 태우는 데 성공했네. 내가 따라가려
하자 그레이는 앨리타를 죽이겠다고 위협했어. 곧이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내가 미처 알
아채기도 전에 보트가 뒤집혔네. 어둠 때문에 앨리타를 찾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 끝까지
복수심에 탄 그레이는 앨리타를 데리고 물 속으로 가라앉았네. 다시는 볼 수 없으리란 절망
감에 사로잡힌 순간, 하늘이 도왔는지 그녀를 찾아냈네. 잠깐동안 의식이 돌아오기는 했지
만, 앨리타는 그 뒤로 지금까지 저런 상태로 의식을 잃고 있다네."
"그레이는 어떻게 되었나요?"
게일로드가 날카롭게 물었다.
"죽었네. 속시원하게 끝장난 셈이지. 그자는 수영을 못 하는 것 같더군. 지금 내 걱정은
앨리타뿐일세."
"잠깐 의식이 돌아왔다고 하셨나요?"
제이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도 하시구요?"
"음, 단 한 마디였지만."
"정신은 똑바른 것 같던가요?"
"그렇다네. 하지만 너무나 잠깐 동안 깨어 있었고, 말도 한 마디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판단하기가 어렵네. 앨리타와 뱃속의 아기가 몹시 걱정이야."
게일로드는 앨리타의 이마에 쭈글쭈글한 손을 얹었다. 그녀의 이마는 몹시 차가웠다.
"이젠 신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맥박이 힘차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괜
찮을 것도 같군요. 하녀를 올려보내겠습니다. 어서 아씨의 젖은 옷을 벗기고 몸을 따뜨샇게
해드려야 해요. 당장 뜨거운 수프를 준비시켜 올려보내죠."
"앨리타는 내가 돌볼 테니, 자네는 수프나 준비시키게."
제이미는 이미 그녀의 드레스를 풀기 시작하여 말했다. 게일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갔다.
앨리타의 축 늘어진 몸을 들어올려 재빨리 뻣뻣하게 젖은 옷을 벗기고 난 제이미는 침대
발치에 놓여 있던 모피 이불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는 잠깐 동안 부풀어 오른 그녀의 배
에 손을 대고, 아직도 건강하게 어머니의 뱃속에서 쉬고 있는 아기의 생명력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런 다음 그는 앨리타의 곁에 앉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던 모든 이유를 흐뭇하게
떠올렸다.
잠시 후 게일로드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를 들고 들어왔고, 제이미는 조심스
럽게 앨리타의 입속에 따뜻한 국물을 흘려넣었다. 아직도 눈을 뜨지는 못 했지만 앨리타는
얌전히 뜨거운 액체를 삼켰다. 그녀의 의식상태는 생각보다 많이 회복되었다는 의미였다. 그
는 수프 그릇을 치우고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앨리타, 당신은 이제 안전하오. 눈을 떠봐요."
앨리타는 아름다운 꿈속에서 빠져나오기가 싫었으므로 인상을 찡그렸다. 꿈속에는 제이미
와 그들의 아이가 있었다. 아버지를 닮아 머리카락이 짙고 아주 잘생긴 사내아이였다. 제이
미는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건강한 아기르 낳아주어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는지 다정
하게 고백하고 있었다.
"앨리타, 내 말 들리오?"
"물론 들려요."
앨리타는 자신이 소리내어 말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수니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을 뜨고 날 봐요, 내 사랑."
제이미는 왜 자신을 보라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눈을 뜨라는 거지? 그녀는 꿈의 세계
속에서 무척 행복했고, 꿈속에서는 그녀와 아기를 해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왜 날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거야? 그러나 제이미는 계속해서 고집을 피웠으므로 앨리타는 마침내 눈을
뜨고 말았다. 맨 처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고 있는 제이미의
얼굴이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전혀 낯선 주변 환경을 알아차렸다. 에반 그레이가 그녀를 모
티머 성에 납치해 왔을 때에도 그녀는 이곳 영주의 침실에 들어올 기회가 없었으므로, 처음
보는 방이었다.
"여기가 어디죠?"
"당신의 새집이오. 당신을 모티머 성으로 데려왔소. 우리의 아이는 우리 선조들로부터 내
려온 이 집에서 태어나게 될 거요."
그들의 아이라는 말에 앨리타는 지금껏 회피하고 싶었던 모든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며 배
를 어루만졌다. 여전히 풍만하게 솟아있는 아랫배를 어루만진 그녀는 너무나 깊은 안도감에
사로잡혀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제이미는 그녀의 두려움을 눈치채며 위로했다.
"우리 아기는 건강하오."
물론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말이 사실인지 자신이 없었고, 내일 당장이라도 위
험해질 수 있겠지만 그는 간절히 아이의 건강을 기도했다. 앨리타는 또 한번 그녀의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증명해 보였다.
무기력과 피로 속에서도 앨리타는 행복감에 젖어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물속에서 날 어떻게 찾았어요? 그레이가 날 익사시키려 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은 수영
을 못 해요, 당신도 알았어요?"
"신이 날 도왔소. 그리고 그레이는 .... "
"죽었겠죠.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최후예요."
앨리타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제이미는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그녀를 바
라보았다.
"헨리 왕이 그자의 모든 음모를 알아냈소. 그레이는 거짓 증거로 우리 아버님을 음해한
처벌을 받게 될 운명이었지."
"알아요."
"미안하지만 당신 아버지도 우리 아버지에 대한 음모에 가담하셨소."
창백한 앨리타의 얼굴에 고통스런 표정이 스쳐갔다..
"이젠 늦었어요. 아버지가 성벽에서 날 놓아주라고 요구하자 그레이가 아버지를 죽였어요.
난 아버지의 시신이 뜰에 묻히는 걸 지켜봤어요.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요, 제이미.
단순히 탐욕에 눈이 어두웠던 거죠. 마지막엔 아버지도 당신 가족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해
참회하고 계셨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당신의 첫 외손주를 몹시 기다리기도 하셨구요."
그녀의 뺨위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이미는 그녀를 위로해주려고 다정하게 끌어
안았다. 그는 서머셋 경이 앨리타의 말처럼 죄의식을 느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
나 어쨌든 그는 앨리타의 아버지였으므로 아버지에 대한 딸의 사랑을 부인할 마음은 없었
다.
"알고 있소, 나도 전부 보았소. 이젠 다 끝난 일이오. 국왕은 그레이가 나한테서 훔쳐갔던
모든 것을 되돌려주었소. 당신이 다시 건강해지면 우린 다시 결혼식을 올릴 거요. 그러면 누
구도 우리 아이를 사생아라고 손가락질하지 못할 거요. 내가 당신에게 안겨주었던 모든 불
행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오. 아직도 내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내 입으로 고백하겠
소. 난 당신을 사랑하오. 당신이 내 인생으로 들어온 이후, 다른 여자는 내게 모두 무의미해
졌소. 로위나가 한 얘기는 잊어버려요. 우리가 결혼한 뒤로 난 그 여자와 절대로 잠자리를
같이한 적이 없소."
"나 역시 절대 당신은 배반하지 않았어요. 당신을 너무도 사랑해요, 제이미."
갑자기 제이미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날 배신한 사람이 로위나라는 사실을 진작에 깨달았어야 했소. 아마도 그 여자와 그레이
는 오래 전부터 함께 음모를 꾸몄던 것 같소. 그레이 부자가 대체 왜 우리 아버지를 모함했
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군. 단순한 재물욕 이상의 이유가 있었다
는 사실을 난 언제나 느끼고 있었소. 만일 내 짐작이 옳았다고 해도, 그레이와 당신 아버지
가 모두 세상을 떠났고, 그 이유도 함께 땅에 묻혀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오."
앨리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따. 에반 그레이는 그녀가 영원
히 제이미를 만나지 못하게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진실을 털어놓았었다. 그러나 그 사
실을 제이미에게 알려야 하는 것일까? 제이미가 에반 그레이와 이복형제라는 사실을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왜 그러오? 왜 갑자기 조용해졌소? 당신 얼굴색이 너무 창백하오. 어디 아픈거요? 아기
때문이오?"
"아뇨, 뭐, 뭘 좀 생각하는 것뿐이예요."
앨리타는 죄책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녀는 제이미에게 진실을 털어놓아야 좋을지 확신
이 없었으므로 우선 게일로드와 얘길 나누어보기로 결심했다. 노인은 모티머 가족의 모든
비밀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가 일부러 제이미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았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그녀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아기는 괜찮아요. 보세요, 이렇게 힘차게 발로 걷어차는 걸요?"
앨리타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배로 가져갔다. 아이는 그녀의 뱃속에서 생존의 의지를
강하게 내보이며 기운차게 뛰놀고 있었다. 그녀는 경이로움에서 점차 환희로 바뀌어가는 제
이미의 표정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타고난 투사가 되려나보오."
제이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여자아기일지도 몰라요."
"그래도 상관없소."
앨리타의 눈동자가 다시 몽롱한 빛을 띠자 제이미는 자신이 지나치게 그녀를 피곤하게 만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아직도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나중으로 미
루기로 했다. 그는 모피이불을 그녀의 턱밑까지 끌어올려주며 잠을 청하도록 했다. 그는 그
녀가 잠들 때까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몇 시간 뒤 앨리타가 깨어났을 때, 날은 어두워져 있었고 제이미 대신 게일로드가 그녀의
침상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가 몸을 뒤채며 방안을 둘러보자 노인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도 눈 좀 붙이시도록 제가 쫓아냈스빈다. 며칠 동안 통 제대로 못 주무셨거든요.
아씨께서 깨어나시면 즉시 불러드리기로 약속하고서야 간신히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
"게일로드가 곁에 있어줘서 반가워요. 당신의 조언이 필요하거든요."
앨리타는 부드럽게 말했다.
"제 조언이라구요? 무슨 일이신데, 저 같은 노인의 도움이 필요하시죠?"
"제이미에 관한 일이에요. 그레이 경한테서 불쾌한 얘길 들었는데, 제이미에게 얘길 전해
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방안에는 벽난로의 불빛밖엔 없었지만 앨리타는 게일로드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지
는 것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무슨 얘길 들으셨는지 먼저 말씀해보시지요."
"언제부터 모티머 가족과 함께 지냈죠, 게일로드?"
"제가 아주 젊었을 때부터입니다. 전 클레런스 경이 제이미 도련님의 어머니와 결혼하기
전부터 모티어 성의 관리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린 제이미 도련님을 데리고 성에서 쫓겨
날 때까지 줄곧 성의 살림을 맡아했죠."
게일로드는 앨리타의 입에서 무슨 얘기가 나올지 알고 있었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자 두려움이 앞섰
다.
"그럼 가족들에 관한 일이라면 전부 다 알고 있었겠네요."
앨리타가 묻자 게일로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 제가 모르는 비밀은 없습니다."
앨리타는 노인에게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꼭 해야만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굳혔다. 그토록 중요한 사실을 당사자인 제
이미가 모르고 있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럼 에반 그레이와 제이미가 이복형제 사이라는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그녀는 차라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게일로드의 좁은
어깨가 순간적으로 축 쳐졌다. 그의 전신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예, 막연하게 의심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이미는 전혀 모르고 있잖아요? 왜 그이에게 얘기하지 않았죠?"
"돌아가신 모티머 경께서도 확실히 잘 모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 딱 한 번 그레이 부인을 만났고, 서로 별다른 얘길 나누시지도 않았습니다. 여러 해 전
에 단순한 시골처녀로 생각했던 여인이 사실은 귀족의 딸이었고, 그레이 경의 부인이 되었
다는 사실을 알고 모티머 경은 무척 충격을 받으셨죠. 그때는 성년기에 이제 막 접어든 젊
은이셨고, 순간적인 충동을 참지 못했던 것입니다. 모티머 경은 자신의 무분별한 행동이 어
떤 결과를 낳았는지 알았다면, 오래 전에 바로잡으셨을 분입니다. 그분은 과거 자신의 행동
이 수치스럽다는 말을 제개 털어놓으시며, 제이미 도련님에게는 절대로 그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씨께서도 사실을 알고 계시니 제 어깨에 놓
여 있던 무거운 짐이 덜어지는 것 같습니다. 주인님께 말씀드리는 문제는 아씨의 판단에 맡
기겠습니다."
20
제이미는 앨리타의 방문을 열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게일로드가 앨리타의 침상을 지
키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던 그는 노인이 보이지 않자 벌컥 화가 났다. 게일로드는 그가 몇
시간 눈을 붙이는 동안 반드시 앨리타의 곁을 지키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가 자신의 말을
거역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앨리타가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며 간신히
게일로드를 설득해 방으로 돌려보냈다는 사실을 제이미가 알 리 없었다.
앨리타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게일로드가 방을 나가기 전
에 침대 머리맡에 촛불을 켜두었으므로, 앨리타는 일렁이는 불빛 속으로 제이미의 거구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강인한 그의 포옹과 감미로운 입맞춤, 그의 뜨거운 열정을 떠올리며 그녀
는 숨을 멈추었다. 그녀는 간절하게 그를 그리워하며, 그를 원하고 있었다. 에반 그레이와
결혼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여겼었다. 그녀가 미치지 않고 제정신을 지킬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뱃속에 제이미의 아기를 배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
기가 태어나면 정말로 그레이가 아기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몹시 두려웠다.
제이미는 성큼성큼 방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바지를 걸친 뒤
달려왔으므로 상체는 벗은 상태였다. 날이 새려면 아직 여러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그는 야
릇한 절박함에 이끌려 앨리타를 보러 온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고,
그녀가 안전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앨리타에게 많
은 것을 베풀어줄 수 있게 된 지금, 그리고 그녀를 미친 듯이 사랑하고 절실히 그녀를 원하
게 된 지금, 그녀를 잃게 된다면 오랜 세월 그가 쌓아왔던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 것이었다.
침대 곁에 선 제이미는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모든 얘기를 앨리타에게 털어놓고 싶은 충
동을 느꼈지만, 너무나 큰 고통을 겪은 그녀를 다시 힘들게 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고 자
책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얘기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앨리타가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다음에 말이다.
앨리타는 제이미가 다가오는모습을 보자, 그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넓은 가슴과 어깨를 드러낸 채, 튼튼한 근육질의 다리를 얇은 타이츠로 감싼 그의 모습은
고대의 전사처럼 우람하고 아름다웠다. 너무나 남성답고 너무나 장엄한 그의 모습에 앨리타
는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가 떠날까 두려워진 앨리타는 속삭이듯 그의 이름을 불
렀다.
제이미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그녀의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나온
자신의 이름은 지금껏 들어본 말들 중에서 가장 달콤하고 감미로운 속삭임이었다.
"왜 자지 않고 있었소?"
그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거뭇거뭇 빳빳하게 수염이 자라난 그의 턱을
어루만졌다.
"이곳에 온 이후로 줄곧 잠만 잤는 걸요. 이젠 피곤하지 않아요. 내 옆에 누우세요."
제이미는 망설였다. 앨리타를 절실하게 원하면서 그녀의 곁에 그저 누워만 있는다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앨리타는 제이미가 침대에 함께 눕기를 머뭇거리는 사실을 눈치채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
았다. 그는 아직도 나를 배신자로 오해하고 있는 걸까? 에반 그레이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
고 의심하기 때문에 다시 내게 손을 대기 꺼려하는 것일까? 그가 부드럽게 사랑한다고 고백
했던 말은 열병에 시달리던 꿈속에서의 망상이었을까?
"당신과 사랑을 나누지 않고 그냥 곁에 누워 있기만 할 자신이 없소. 당신의 건강을 해치
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소."
제이미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앨리타는 그가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변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발 이리 가까이 와요."
그녀가 떨리느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무나 많은 일을 겪은 지금, 또다시 제이미를 잃어버
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그의 가슴에
입술을 댔다. 요란한 그의 심장박동을 입술로 느끼며 그녀는 조금 안심했다.
제이미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항복의 신음소리를 흘리며 그녀의 옆에 누웠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자신을 자제하는 법을 연습했지만, 그러한 자제력도 앨리타와 함께 있을
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날 안아줘요, 제이미. 너무 무서웠어요. 그레이 경이 우리의 아기를 해칠까 봐 몹시 두려
웠어요. 하지만 그자가 우리의 아기를 해치려 했다면 내 손으로 그를 죽여버렸을 거예요."
"그 나쁜자식이 당신을 많이 괴롭혔소?"
제이미는 이를 악물며 물었다. 솔직히 그는 모든 사실을 알기가 두려웠지만, 그는 에반 그
레이가 앨리타와 잠자리를 같이하면서 그녀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아뇨. 에반 그레이는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아버지와 함께 날 서머셋 성으로 보냈어요. 내
가 당신의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나와 잠자리를 함께 한다는 생각조차 견디기 힘들었나봐
요."
제이미는 팔꿈치에 기대어 상체를 일으키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잘못 들은 것일
까? 앨리타는 지금 그레이와 전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는 얘길 하고 있는 것일까?
"당신이 원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레이가 당신과 잤다고 해도 상관없
소."
"내 말 못 들었어요? 나와 에반 그레이는 한번도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어요. 난 예식
이 끝나자마자 웨일스로 떠났어요."
제이미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레이는 지하감옥으로 날 찾아와서 당신과 얼마나 황홀하게 잠자리를 나누었는
지, 당신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반응했는지 얘기하며 날 조롱했소."
"그가 거짓말을 한 거예요. 이 세상에서 내게 정열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남자뿐이에요. 바로 당신이죠."
그는 몹시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앨리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내겐 상관없는 일이지만, 당신이 그자의 혐오스런 손길을 견뎌내지 않아도 되었다니 기
쁘오. 이제 모든 걸 잊어버리기로 합시다. 이제 우리 앞엔 평화롭게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가
야 할 밝은 미래가 펼쳐져 있소."
"어둠의 영주는 어쩌구요?"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어둠의 영주는 내가 헨리 왕에게 밀수를 영원히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한 순간 이 세상에
서 사라졌소. 마을 사람들은 오랜 세월 밀수를 한 대가로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고, 가난에
서 완전히 벗어났소.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진 않지만, 다시 그때로 되돌아가진 않겠소.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여기 모티머 성에 모두 갖추어져 있소. 한 가지 유감스러운 사실이 있다
면, 그레이의 철저한 증오심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는 것뿐이
오. 오랫동안 그레이 가문과 모티머 가문은 조화롭게 공존했었소. 하지만 에반 그레이의 어
머니가 세상을 뜨고 나서 상황이 바뀌었지. 그 사실만 알아냈으면 좋았을 텐데 .... "
앨리타는 제이미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려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망설이고 있었다. 굳이 가슴 아픈 과거르 들춰낼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제이미가 그녀의 턱을 들고 입을 맞추었으므로 기회는 사라져버렸다. 맨 처음에는 부드럽게,
그러나 점차 격렬하게 그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열정을 자제하고 있었
다. 그러나 앨리타는 지금 그가 욕망을 자제하길 원치 않았으므로 열렬하게 키스에 반응했
다.
그녀는 입술을 벌리고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제이미는 신음소리를 내며 그녀의 열렬한
입맞춤에 기꺼이 응했다. 그의 이성은 이래선 안 된다고 꾸짖었지만, 그의 손은 어느새 앨리
타의 잠옷 속을 헤집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훨씬 더 풍만해져 있었고 허리에도 분명 살
집이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앨리타가 지금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 적이 없었다. 그의
손이 성급하게 움직이며 그녀의 잠옷 앞섶을 풀어헤쳤다. 상아처럼 뽀얀 빛깔의 젓무덤이
그의 시야에 드러났다. 그는 고개를 숙여 새틴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목덜미와 가슴에 입을
맞추다가 단단하게 일어선 유두를 혀끝으로 간질였다. 앨리타의 입술에서 숨가쁜 신음이 흘
러나왔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깨달은 제이미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억눌린 열정으로 형형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앨리타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
는 이 순간은 너무나 오래 기다려왔던 것이다.
"오, 제이미, 제발."
그녀는 칭얼거리듯 속삭이며 그의 머리를 다시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계속하면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소. 당신을 사랑한 지 너무 오래되었소."
제이미는 거칠게 내뱉었다.
"멈출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아기가 .... "
"아기는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지금까지 무사하다면 이제 아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안전
해요. 날 살아해줘요, 제이미. 당신의 온 마음과 영혼으로 날 사랑해주세요."
"지금 그보다 더 반가운 말은 없을 거요."
제이미가 중얼거렸다. 그는 곧 그녀의 잠옷을 벗겼고. 그녀의 매끄러운 피부와 완벽에 가
까운 날씬한 다리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당신은 너무나 아름답소. 이 세상에서 나보다 행복한 남자는 없을 거요."
"나 역시 이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여자예요."
앨리타는 그의 바지끈을 잡아당기며 한숨을 쉬었다. 제이미가 곧 바지를 벗어던졌다.
"당신은 모든 것이 완벽하오. 난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소. 기억나오? 당신은
나더러 신발에 더러운 흙이나 묻히고 다니는 가난뱅이라고 비난했지."
그녀는 제이미의 뜨거운 시선이 온몸으로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그땐 당신도 참을 수 없이 거만한 남자였다는 걸 인정해야 해요. 하지만 그건 내가 당신
과 사랑에 빠지기 전의 일이에요."
"알고 있소."
제이미는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천천히 그녀의 가슴으로 내려뜨렸다. 그의 뜨거운 혀가
아직은 잘록한 그녀의 허리로 내려가자 앨리타는 기쁨의 한숨을 흘렸다. 그녀의 보드라운
살갗에 와닿는 그의 거친 뺨의 감촉은 그녀의 전신에 놀라운 쾌감을 전달했다. 그의 입술이
드디어 그녀의 배위에 도달했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를 벌리고 그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
다. 그는 그녀의 배꼽 주위를 혀끝으로 간질이다 다리 사이의 촉촉한 비밀 계곡으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그러자 앨리타는 몸을 경직시키며 소리를 질렀다.
"제이미, 더 이상 못 참겠어요!"
"당신에게 쾌감을 주면 내 마음도 행복해지오."
그는 촉촉하고 따뜻한 그녀의 살갗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그는 여전히 지금 앨리타와
사랑을 나누어도 괜찮은 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쾌락을 무시한다면, 그
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힘을 빼고, 내가 당신에게 주는 느낌에만 집중해봐요."
그의 입술이 벨벳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다리 사이로 다시 다가오자 앨리타는 대답대신 낮
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의 혀가 불꽃으로 만들어진 비수처럼 뜨겁게 그녀의 몸안으로 밀려
들어 쾌감을 전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술에 몸을 가까이 가져가며, 그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달콤하고 강렬한 환희가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는 고개를 들고
열정으로 달아오른 앨리타의 아름다운 얼굴을 지켜보며, 그녀의 몸안으로 들어가 열정이 만
족할 때까지 긴 여행을 마쳤을 때와 똑같은 기쁨을 맛보았다. 그가 그녀의 옆에 다시 눕자
앨리타는 놀란 눈으로 그르 바라보았다.
"제이미, 당신은 내 안에 들어오지도 .... "
"아니오, 내 사랑. 난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시작한 일을 끝내지 않으면 날 더 다치게 만드는 거예요. 아기 때문에 멈추는 거라면 걱
정하지 말아요. 아기는 안전할 거예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평평한 배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의 손길에 그의
육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용기를 얻은 그녀는 천천히 손을 아래로 움직여 여전히 부풀
어 있는 그의 남성을 어루만졌다. 제이미의 남성을 손가락으로 움켜잡은 앨리타는 그의 놀
라운 자제력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녀는 그에게도 자신이 지금 막 경험한 기쁨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의 남성을 위아래로 쓰다듬자 제이미는 고토에 찬 신음소리를
흘렸다. 그의 반응에 자극을 받은 앨리타는 지금까지 여러 번 상상은 해보았지만 한번도 실
행에 옮기지 못했던 사랑의 행위를 시작했다.
그녀는 팔꿈치에 상체를 기대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벨벳처럼 부드러움 그의 남성에 입을
맞추었다.
"오, 맙소사, 앨리타!"
그녀가 그를 입안으로 받아들이자 제이미는 거의 침대에서 뛰쳐나갈 듯 전율했다. 고문과
도 같은 시간이 잠깐 흐른 뒤, 그는 마침내 그녀의 어깨를 잡고 침대에 뉘었다. 흑요석처럼
빛나는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괜찮겠소?"
"그럼요. 제이미, 난 당신을 원해요."
그녀의 몸위에선 그녀를 편안하게 사랑해줄 수 없다고 판단한 제이미는 앨리타를 옆으로
돌려눕힌 뒤,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다리를 들어요, 내 사랑."
앨리타는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제이미를 전적으로 신뢰했으므로 시키는 대로 한쪽 다리를
들었다.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오며 그가 그녀의 다리 하나를 자신의 엉덩이
에 올려 놓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의 거대한 남성이 몸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을 느끼
며 앨리타는 이를 악물었다. 제이미는 그녀가 통증을 느끼는 것으로 생각하고 얼어붙었다.
"그만두는 것이 좋겠소?"
"아니에요! 멈추지 말아요! 어서, 어서 날 사랑해줘요, 제이미!"
"영원히라도 그러겠소."
그는 그녀의 몸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며 속삭였다. 소중한 여인을 가슴에 안고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동안 제이미의 몸과 마음은 온통 그녀에게 쏠려 있었으므로, 대화는 불가능
했다.
그년 자기 자신보다 앨리타에게 더 먼저 또 한번의 기쁨을 주고 싶었으므로, 천첞, 몸을
움직였다. 앨리타는 그에게 몸을 기대며 그의 몸놀림에 빠르게 응답했다. 그녀는 마법과도
같은 제이미의 사랑에 점점 더 깊숙이 빠져들며 숨을헐떡였다. 그의 손이 허벅지 사이의 금
빛 숲으로 찾아들자 앨리타는 숨을 멈추고 다음 동작을 기다렸다. 곧 그는 그녀의 속살을
헤집고 작은 돌기를 어루만졌다. 그의 감미로운 손놀림에 그녀는 정신을 잃을 만큼 흥분했
다.
이제 두 사람은 격렬한 열정에 휩싸여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나 열정은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뜨거운 사랑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앨리타는 전신에 휘몰아치는 희열로 인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계소갷서
제이미의 이름을 외쳐댔다. 그녀는 제이미가 마지막으로 몸을 경직시키며 그녀의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을 뿜었다는 사실을 막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절정의 순간을 알리는 고함
을 질렀다.
앨리타는 흡족하게 미소를 지으며 잠이 들었다. 제이미는 지친 몸으로 그녀를 껴안았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난 그는 앨리타가 장난스럽게 그의 가슴에 짧은 키스를 퍼붓고 있자 충
격을 받았다. 그녀의 혀가 체모 속에 감추어져 있던 그의 유두를 찾아내자, 제이미는 순식간
에 몸이 단단해졌다. 그는 포범처럼 날래게 그녀를 눕힌 다음,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
녀의 몸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몇 시간이 흐른 뒤, 게일로드가 방문을 열었을 때 두 연인은 서로를 다저아게 끌어
안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희미한 겨울 햇빛이 창문으로 쏟아져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제이미는 눈을 떴다. 순간적으
로 앨리타와 나누었던 열정적인 밤을 떠올린 그는 옆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여인을 내
려다보았다. 그녀는 천진난만한 아기처럼 그에게 몸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제이미는 이
토록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한 적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다시 그녀와 사랑
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이미 지난밤 두 번이나 격렬한 사랑을 나누었다는 사실
을 떠올리며 충동을 자제했다. 앨리타는 아직 몸이 쇠약한 상태였다. 그는 욕망을 절제하지
못한 자신을 나무라며 얼굴을 찌푸렸다.
앨리타는 그의 거대한 몸집에서 전하는 온기를 찾아 몸을 비비며 뒤척거렸다. 그의 입술
에서 새어나온 좌절감의 신음소리가 앨리타의 잠을 깨웠다. 그녀는 눈을 뜨고 제이미를 올
려다보며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표정으로 날 보지 말아요. 충동을 자제하지 못하는 애송이 소년처럼 내 자신을 부
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소."
"난 상관없어요."
"난 상관 있소. 당신과 아기에게 해가 될 일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내 말은 진심이오.
당신처럼 배가 부른 여자와 하룻밤 동안 두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으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그저 당신을 좀 안아보기만 하겠소."
앨리타는 행복하게 한숨을 쉬었다.
"난 우리의 아기 아버지가 에반 그레이라고 당신이 의심할까 봐 몹시 두려웠어요. 그 사
람은 당신이 그렇게 믿기를 바랬죠."
그녀의 말에 제이미는 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그자의 말을 믿었던 게 사실이오. 게일로드가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주기 전까지
는 말이오. 당신이 절대 날 배신할 리가 없다고 계속해서 주장한 사람도 바로 게일로드였소.
그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았더니, 로위나가 나와 사악한 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
닫게 되었지. 언젠가 그 몹쓸 여자를 찾아내 진실을 밝혀내고야 말겠소."
"로위나는 질투를 했던 거예요. 당신을 차지하지 못하리란걸 알게 되자, 복수심에 불탔겠
죠. 당신이 나를 성안에 가두었을 때, 기꺼이 내가 달아나도록 도와주었던 것도 바로 그 때
문이었을 거예요."
제이미는 얼굴을 붉혔다.
"날 용서해주겠소? 내가 당신을 오해했소. 난 당신이 날 미워한다고 생각했고, 어둠의 영
주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면 곧장 날 배신할 것으로 믿었소."
"난 당신을 사랑했어요, 제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당신을 사랑했죠. 난 절대로 당신을 해
칠 수가 없었어요. 에반 그레이의 실체를 알기 이전부터, 난 그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어
요."
"나와 결혼해주겠소?"
제이미가 너무나 진지하게 물었으므로, 앨리타는 오히려 걱정스러웠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마음오로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언제든 좋아요."
"헨리 왕은 지금 런던에서 프랑스로 떠날 준비를 하고 계시오. 당신이 여행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되는 대로 곧장 런던으로 가서, 국왕과 모든 귀족들의 축복을 받으며 플린트의 백
작인 나와 내가 선택한 신부인 당신과의 결혼식을 거행하도록 합시다. 국왕에게 곧 도착하
겠다는전갈을 보내겠소. 그때까지 우리 아기가 기다려줄 수 있을까?"
"그럼요, 아직 시간은 충분해요."
갑자기 제이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쩌면 국왕이 아버님의 모함 사건에 대해 좀더 많은 사실을 알아냈을지도 모르겠소. 뭔
가 미진하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소. 지금이라도 그레이가 살아나 내 궁금증을 풀
어주었으면 좋겠소. 그레이 부자가 왜 모티머 가문을 파멸시키려했는지, 그 이유는 영원한
미궁에 빠지고 말았소."
진실을 갈구하는 그의 엄숙하고 진지한 태도에, 앨리타의 마음이 움직였다. 제이미가 그토
록 궁금해하는 해답을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계속해서 비밀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게일
로드는 나름대로의 이유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지만, 제이미는 진실
을 알 자격이 있었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기를 바라며 앨리타는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당신이 원하는 대답을 난 알고 있어요."
그녀가 무슨 얘길 하는지 영문을 알지 못한 제이미는 그녀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았
다.
"내가 원하는 대답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그레이 경이 왜 모티머 가문을 증오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어요. 자신의 아버지와 우
리 아버지를 끌어들여, 에반 그레이가 왜 당신 아버님을 모함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는
말이에요."
"맙소사, 앨리타! 그걸 알면서도 지금껏 내게 감춰왔다는 거요?"
그는 앨리타를 붙들고 일어나 앉았다. 앨리타는 그의 강렬한 시선에 두려움을 느끼며 황
급히 설명했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서머셋 성에서 성벽에 끌려 올라갔을 때 에반 그레이가
모든 것을 얘기해주었죠. 나, 난 지금까지 당신에게 사실을 털어놓아야 좋을지 망설이고 있
었어요. 그 당시 일에 관계했던 사람은 이제 아무도 살아 있지 않고, 당신도 잃었던 모든 것
을 되찾았으니까요."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사실에 대한 보상은 될 수 없소. 게일로
드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까지 살아남아 내 상속권을 되찾지도 못했을 거요. 어서 당신이 아
는 사실을 털어놓아요, 앨리타."
"난 당신이 아버님을 몹시 사랑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혹시 아버님에게 당신이
실망하게 될까 봐 당신에게 곧장 사실을 털어놓기가 꺼려졌던 거예요."
"도대체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요? 난 우리 아버님을 잘 알고 있어요. 그 분은 절
대로 불명예스러운 일을 하실 분이 아니오. 그레이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면 그건 거짓말이
오. 어서 말해요, 앨리타. 그 나쁜자식이 대체 무슨 얘길 했소?"
그는 앨리타의 팔을 지나치게 세게 잡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아파요."
그러자 그는 곧 뉘우치는 표정으로 팔을 놓아주었다.
"날 용서해요, 내 사랑. 잔인하게 굴 생각은 아니었소. 당신 얘길 먼저 듣고 나서 그레이
가 진실을 얘기했는지 아닌지, 내 스스로 판단하겠소."
"당신 아버님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 얼마나 알죠?"
"게일로드가 얘기해준 것들뿐이오. 아버님은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린 내
기억으로는 당시의 모습밖에 기억하지 못하오. 아버님은 블레이클리 경의 사사를 받아 기사
의 작위를 받으셨다고 들었소. 젊은 시절은 대부분 잉글랜드에서 보내셨고, 웨일스에는 잠깐
씩 들른 정도였다고 하오. 아버님이 열다섯 살 때, 그리고 어머님이 다섯 살 때, 두 분은 정
혼을 했고, 아버님이 스물여섯 살 때 결혼식을 올렸소. 어머님이 열여섯 살 때의 일이오. 결
혼한 뒤로 두 분은 모티머 성에 가정을 꾸리셨고, 곧 내가 태어났소."
"모티머 가문과 그레이 가문은 늘 사이가 좋았나요?"
"이웃이기 때문에 자주 접촉은 했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였던 적은 없소. 하지만 이상스럽
게도, 에반 그레이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두 집안 사이가 예전 같지 않아졌소. 무
엇 때문에 그런 사실을 묻는 거요, 앨리타? 우리 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모함사건과 무슨 상
관이 있소?"
앨리타는 제이미가 점점 조바심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제이미, 조금 만 더 기다려요. 난 최선을 다해 제대로 진실을 설명할 방법을 찾고 있는
거예요. 에반 그레이의 어머니를 잘 아나요?"
"희미하게 기억할 뿐이오. 남편이나 아들과 함께 여행을 하는 적이 아주 드문 분이었소.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쉽게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것 같았소. 에반 그레
이를 낳은 다음에는 여러 번 유산을 했기 때문에 건강이 아주 나빴소. 우리는 그분을 가족
과 함께 여러 번 모티머 성으로 초대했지만, 그레이 부인이 함께 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
소. 딱 한 번인가 온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와 그분 사이가 몹시 불편한 것 같았소. 그 이후
로 다시는 오지 않았지."
"이제 얘기 할 테니 들어보세요."
앨리타는 적절한 단어를 떠올리며 부드럽게 설명을 시작했다.
"어느 날 잘생긴 젊은이가 들판으로 승마를 나갔어요. 젊은이는 그곳에서 우연히 사랑스
러운 어린 소녀와 마주쳤죠. 그녀는 하녀 몰래 빠져나온 귀족의 딸이었지만, 젊은이는 그녀
를 그냥 시골소녀로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겁탈하고 말았어요. 그 당시 젊은이는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기운이 넘쳐나는 어린 청년이었다는 걸 이해해야 해요. 소녀는 그
젊은이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너무나 수치스러웠으므로 그날 있었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
지 않았어요. 곧이어 그녀는 약혼했던 남자와 예정대로 결혼을 했고 아들을 낳았어요."
그녀가 얘기를 계속하는 동안 제이미의 얼굴은 그럴 리가 없다는 회의적인 표정에서 절대
로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바뀌어갔다.
"아니오, 우리 아버님은 절대 그런 일을 저지르실 분이 아니오! 그분은 명예로운 분이셨
소. 에반 그레이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지어낸 거요."
"에반 그레이는 당신과 이복형제라고 했어요. 어머니가 임종의 자리에서 그런 고백을 하
기 전까지는 그 사람도, 그의 아버지도 전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해요. 그리고 그
레이의 어머니도 당시 자신을 겁탈했던 청년의 이름을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구요.
그땐 이미 두 사람 각기 결혼한 상태였고, 그제서야 진실을 밝힐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겠
죠."
비록 제이미는 에반 그레이와 이복형제 사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얘기를
듣고 나자 지난 과거의 사실들이 모두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맙소사! 그러고 보니 모든 실마리가 풀리는군. 하지만 에반 그레이를 친자식이라고 철석
같이 믿지 않았다면 그레이 경이 그를 후계자를 삼았을 리가 없소. 그레이 경이 낳은 사생
아가 여럿이었지만, 그는 그들을 전혀 돌보지 않았소."
"어머니의 임종 자리에서 고백을 들은 사람은 에반 그레이 혼자뿐이었어요. 아마 그 아버
지는 사실을 몰랐을 거예요. 진실을 밝혀도 이로울 것이 없으니 에반 그레이가 아버지에게
일부러 진실을 숨겼겠죠."
제이미는 이제 정말로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나이든 그레이 경은 무엇 때문에 결백한 우리 아버지를 모함했을까?"
"에반 그레이의 얘기를 따르면, 그레이 경은 아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클레런스 모티
머를 정말로 반역자라고 생각했대요. 에반 그레이가 사실을 털어놓고 동조를 구한 유일한
사람은 우리 아버지 뿐이었어요. 아버지와 발로우 경은 모티머 가문의 재산을 나누어 받기
로 하고 음모에 가담했던 거죠."
"그밖에 또 무슨 얘기를 들었소?"
제이미가 다그쳐 물었다.
"그게 다예요. 내가 아는 얘기를 전부 다 털어놓았어요."
앨리타는 게일로드 역시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숨겼다.
제이미는 방금 들은 얘기를 도저히 납득하기가 어려웠지만, 에반 그레이가 앨리타에게 거
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제이미, 신경쓰지 말아요. 젊은 시절 실수로 저질렀던 일 때문에, 아버님에 대해 실망해
선 안 돼요. 과거는 잊어버리세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우리 앞엔 함께 살아가야 할 미래가
펼쳐져 있다구요."
앨리타는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었으므로 다정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제이미는 고통스런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사
람이었다. 지옥처럼 끔찍하게 여겨졌던 결혼이 어떻게 해서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
을까? 처음엔 서로에 대한 신뢰감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는 단 한번도 앨리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앨리타가 자신에게 몹시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
을 계속해서 부인하던 시절에도 그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가 오래 전부터 그를 사랑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뜻밖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처음보다 더 악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
다. 앨리타는 그와 결혼한 순간부터 그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끊임없이 강조했었다.
제이미가 너무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자 앨리타는 더럭 겁이 났다.
"제이미, 내 말 들었어요? 사랑한다구요."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던 제이미의 입술에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고, 어둡던 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한때 어둠의 영주라고 불리던 잘생긴 남자의 환한 얼굴을 바라보며, 앨리
타는 황홀한 설레임에 숨을 멈추었다. 지금 마을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를
'빛의 영주'라고 불러야 하리라.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반만이라도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 난 행복하게 죽어갈 수
있소."
갑자기 앨리타의 뱃속의 아기가 발길질을 하며 미래의 부모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순간 제이미는 깜짝 놀란 것 같았지만 곧 웃음을 터뜨리며 앨리타의 배에 손을 갖다댔다.
제이미는 웃음소리에 감동을 받은 그녀는 멍해졌다. 그가 소리내어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과연 우리 아들이오."
"딸일지도 몰라요."
"그렇겠지. 딸인지 아들인지 몰라도 우리에게 경고를 보내는군. 부모의 몸 사이에서 짓눌
리기 싫다고 반항을 하는 것 같소. 이젠 당신이 쉴 수 있도록 나가봐야겠소."
그는 그녀의 코에 입믈 맞춘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난 별로 쉬고 싶지 않아요."
쉰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그를 유혹했다. 앨리타는 그의 팔을 잡고 다시 침대에 주저앉혔
다.
"앨리타, 내 생각엔 .... "
제이미는 지난밤 자신이 분명 그녀를 힘들게 했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부드럽게 말했
다. 그는 절대로 그녀와 아이의 건강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걱정 말아요, 제이미.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당신이 내게 키스해 주길 바랄 뿐이에요. 그
리고 나선 일 보러 나가도 좋아요. 난 침대에서 하루종일 빈둥거리고 있겠어요."
"그렇게 예쁘게 부탁하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을 하겠소?"
제이미는 장난스럽게 얘기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에 일렁
이던 불길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두 사람이 입술이 닿은 순간 그는 자신이 졌다는 것을 깨
달았다.
그는 달콤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고개를 들고 투덜거렸다.
"당신은 마녀야. 항복이오. 당신 마음대로 해도 좋소."
"앞으로도 그 말 잊지 마세요. 난 늘 당신이 내게 항복하길 바랄거예요."
앨리타는 그를 껴안고 누우며 새침하게 말했다.
"당신이 늘 항복하길 바라는 건 나도 마찬가지요."
제이미는 단번에 몸을 움직여 그녀와 한몸이 되며 숨가쁘게 속삭였다.
에필로그
그것은 앨리타가 늘 꿈꿔왔던 결혼식 그 자체였다. 흰 담비 모피로 끝단이 장식된 화려한
사파이어빛 드레스에는 모티머 가문에 가보로 내려오던 진기한 보석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
다. 앨리타는 자신이 멋진 왕자 옆에 선 공주처럼 느껴졌다. 원뿔 모양의 머리장식에 달린
긴 베일은 그녀의 탐스러운 금발머리를 감싸며 허리까지 늘어져 있었다.
언젠가 초라한 농부의 옷을 입고 올렸던 짧은 결혼식과 달리, 제이미는 자신의 지위를 온
몸으로 말해주는 듯한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최신 유행에 따라 그는 화려한 공작
처럼 선명한 초록색과 보라색, 노란색으로 옷을 맞추어 입었다. 벨벳으로 만들어진 보라색
재킷은 우아했고, 초록색과 노란색 타이츠는 근육질의 다리를 한층 돋보이게 감싸주었다. 신
발엔 커다란 은장식이 매달려 있고, 허리띠에는 찬란한 보석이 박힌 검이 꽂혀 있었다.
화려한 예식을 위해 특별히 장식된 국왕의 예배당에는 온 나라의 귀족들이 거의 한 사람
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신부를 인도해줄 아버지가 없었어므로 헨리 왕이 만면에 웃음을 머
금은 채, 친히 앨리타를 제단으로 이끌었다. 주교는 곧 두 사람의 혼배성사를 집전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고, 식이 끝나자마자 국왕은 신혼부부를 위해 성대한
축하연을 베풀어줄 예정이었다.
신부의 배가 불룩하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여긴 사람들도 있겠지만, 감히 그 사실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하객들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신부와, 아내를 자랑스럽
게 여기고 있음이 분명한 늠름한 신랑, 그리고 ㄴ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의
표정에 더 관심을 가졌다.
웨일스의 외딴 해변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받은 뒤, 헨리 왕은 앨리타와 제이미가 런던에
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화려한 결혼식을 준비시켰다. 지금
그는 신랑 신부의 옆에 서서 제이미와 앨리타가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는 주교의 선언을
들으며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헨리 왕은 제이미 모티머가 앨리타와 그레이 경의 결혼
식날 느닷없이 예배당에 뛰어들었던 순간부터 그에게 호감을 품었던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
고 생 하며 몹시 흐뭇해했다. 모티머가 '어둠의 영주'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배신감에 사
로잡히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역경을 딛고 우정을 발전시켰고, 헨리 왕은 그가 다시는 밀수
업에 손대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며 자신이 한 일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예식이 끝나자마자 하객들이 피로연이 벌어질 대연회장으로 몰려가자, 헨리 왕이 제이미
를 은밀하게 불러세웠다. 이번 주가 지나면 프랑스로 떠나야 했으므로, 왕은 떠나기 전에 제
이미와 상의할 일이 있었다.
"평생 잊지 못할 멋진 결혼식이었습니다. 폐하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별 것 아닐세, 모티머 경. 자네 신부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었네. 며칠 전에 어둠의 영주의 정체가 어떻게 탄로나 그레이에게 체포당하게 되
었는지, 나름대로 짐작이 간다고 자네가 얘기했던 것 기억하나?"
"절 배신한 사람은 당시에 믿었던 것처럼 앨리타가 아니라 로위나 하워드라는 여자였으리
라는 얘기 말씀이십니까? 그럼요, 기억하고 말구요."
그는 로위나를 생각하기만 해도 화가 났다. 그는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국왕에게 모든 얘
기를 털어놓았었다.
"흥미롭게도 로위나의 오빠인 가이 기사는 날 호위해 프랑스로 떠날 근위대에 속해 있다
네. 최근에 그 친구를 근위대에 받아들였지. 가이 기사는 우리가 영국을 떠나기 전에 여동생
에게 남편감을 정해 달라고 내게 각별히 부탁을 했네. 그 아가씨는 오빠로서도 어쩔 수 ㅇ
벗는 골칫덩어리인 모양이야. 혹시 무슨 좋은 생각 없나?"
왕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제이미는 깜짝 놀라 눈썹을 치켜올렸다.
"로위나가 런던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것 같네."
그러자 제이미는 갑자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남편감이라구요?"
갑자기 제이미는 스코틀랜드의 국경지방을 책임지고 있는 괄괄한 성격의 백작이 눈에 들
어왔다. 얼마 전에 소개를 받은 그 사내는 자신이 살고 있는 땅만큼이나 성격이 거칠고 제
멋대로인 것 같았다. 컬린 맥도우너 경은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났던 작은 반란을 잠재운 뒤,
헨리 왕의 명령을 받고 런던에 온 지 몇 주일 되지 않은 터였다. 불타는 듯한 새빨간색의
머리칼과 수염을 자랑스레 기르고 있는 맥도우너 경은 뛰어난 전사이긴 했지만, 성격이 거
칠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예절이라고는 전혀 없는 폭군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런던에 도착한 뒤 몇 번 그와 얘길 나눈 적이 있었으므로, 제이미는 로위나처럼 사
악한 요부를 길들이는 데는 그가 완벽한 신랑감이라고 생각했다. 맥도우너 같은 남자와 결
혼하는 것만으로 그녀에겐 충분한 형벌이 되리라고 생각하며, 제이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
다.
헨리 왕은 제이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며 맞장구를 치든 웃었다.
"마침 맥도우너 경도 재미있는 일을 찾고 있었네. 만일 저 친구만 동의한다면 빨리 일을
추진하고 싶군. 내일 내 방에서 비밀스럽게 결혼식을 올려주는 건 어렵지 않을 걸세. 자넬
초대하지 않더라도 용서하게."
"뭘 용서하라는 말씀이세요?"
그때 마침 앨리타가 제이미와 헨리 왕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두 사람이 유난히 흐뭇한 표
정을 짓고 있는 이유가 무얼까 궁금하게 여기며 앨리타는 남편과 국왕을 번갈아 쳐다보았
다.
"아무것도 아니오, 부인. 당신과 나 사이엔 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으니, 다른 문제를 신경
쓸 겨를이 없소. 내가 우리 둘만의 은밀한 계획을 세워놓았소. 아무튼 오늘은 우리의 신혼
첫날밤이잖소."
제이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러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가 장난스럽게
눈빛을 빛내자, 헨리 왕이 제이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꾸민 음모에 대해 부인에게도 설명해주게. 부인도 찬성할 것으로 확신하네."
헨리 왕은 악동처럼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하죠. 훨씬 나중에 말입니다. 이제 그만 물러날까요, 부인?"
제이미는 앨리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신방을 향해 그녀를 이끌었다.
앨리타는 몹시 얼굴을 붉혔다.
"좋아요. 하지만 경고하겠는데, 폐하께서 말씀하신 음모가 무엇인지 나도 반드시 알아야겠
어요."
"나도 경고하겠소, 부인. 얘길 들으려면 좀더 참고 기다려야 할 거요. 당신은 그 얘길 듣
기 전에 아직 할 일이 많소."
제이미가 갑자기 그녀를 안고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하자, 앨리타는 깜짝 놀라 낮게 비
명을 질렀다. 잠시 후 그녀는 헨리 왕의 음모에 관한 얘기 따위는 모두 잊은 채, 완벽한 만
족감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