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하디 외 작은이의 소망이야기
작은이의 소망이야기
토머스 하디 외
어머니와 아들
그 밤색 머리카락은 뒤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는 놀랍고 신비롭게 비쳐 왔다. 새까만
깃털을 단 검은 수달피 모자 밑에, 마치 한 바구니의 골풀처럼 긴 머리를 땋고 사려서 그야
말로 흔히 볼 수 없는 절묘한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누구라도 이렇게 땋고 사리고 해서 손질한 것을 보면, 적어도 한 달이나 일년 쫌 손을 대
지 않으려고 정성을 들인 것으로 알 것이다. 그러나 잠자리에 들 때면 모조리 풀어 버렸으
므로 단지 하루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그것은 정성스럽게 손질한 수고를 무모하게 낭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그녀는 가엾게도 그 머리를 자기 손으로 매일 그렇게 단장하
는 것이다. 하녀도 없었지만, 그보다도 그녀는 자신의 머리모양을 유일한 자랑거리로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귀찮지도 않은 듯이 언제나 정성을 들여 매만졌다.
젊은 부인인 그녀는, 몸에 약간의 장애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바퀴가 달린 의자에 앉아 있
었다. 그 의자는 음악당 앞의 잔디밭에 놓여 있었는데, 거기서 연주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연주회는 교외에 있는 소공원이나 개인 소유 정원의 한구석에서 열리는 따뜻한 어느 유월에
개최되는 연례행사였다.
그것은 지방 단체가 자선 사업을 위해 기금을 모으려는 행사이기도 했다. 이 대도시는 갖
가지로 복잡한 곳이어서 인접한 지역 밖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와 같은 자선 단체나 악대나
소공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지만, 뜻밖에도 시민들은 이와 같은 행사를 잘도 알
아내 매번 청중들이 잔디밭에 가득 차게 되었다.
연주회가 진행되는 동안에 많은 청중들은 의자에 앉아 있는 그 젊은 부인을 눈여겨보았
다. 그녀의 뒷머리는 그녀의 자리가 여느 사람보다 두드러지게 앞으로 나와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많은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교묘하게 땋아 올린 머리와 새하얀 귀, 목덜미, 그리
고 별로 처지지도 않고 혈색이 나쁘지도 않은 곡선이 뒤에 앉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녀의 용
모가 아름다우리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그같은 기대는 얼굴이 드러나면 실망을 느
끼기 마련이었다. 그 여인이 고개를 돌려 슬쩍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뒤에 있던 모든 사람
들이 상상한 것처럼 미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들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늙어 보였
다. 그러나 그 얼굴은 매력을 잃지 않았으며, 병색이 배어 있지도 않았다. 그녀가 곁에 서
있는 열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에게 이야기를 하려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녀의 얼굴
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 소년의 모자와 재킷으로 보아 소년은 꽤 이름 있는 사
립 중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 가까이 서 있는 사람들은 소년이 그녀에게 어머니라고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연주가 끝나고 청중들이 흩어지게 되자, 많은 사람들은 일부러 그녀 곁을 지나서 돌아갔다.
대부분의 청중들에게 호기심을 던져 준 그녀를 똑똑히 보려고 가까이 다가갔던 것이다. 그
녀는 방해를 받지 않고 휠체어를 굴리며 나갈 수 있도록 길이 트일 때까지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시선을 기대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한편 그들
의 호기심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눈을 들어 우수에 깃든, 그러면서도 부드럽고 상
냥한 갈색 눈동자로 자기를 바라보는 몇몇 사람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드디어 그녀는 정원 밖으로 나와 포장된 도로를 지나서 그 학생과 함께 모든 사람의 시야
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몇몇 사람들은 그녀가 이웃 교구에 사는 목사의 후처로
절름발이라는 말을 하였다. 대부분이 그녀를 가리켜 무슨 사연이 있는 여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버지가 그들이 집에 없기 때문에 쓸쓸해 하시지 않았
을까 하고 어머니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요 몇 시간 동안은 즐거워 허셨으니까 쓸쓸해 허시지는 않았을 거다. 그녀가 말했다.
하셨다예요. 허셨다가 아니고요. 사립 중학교 학생은 참을성 없이 꽤나 까다롭게 말트집
을 잡았다. 이젠 그만한 것쯤은 아셔야지요.
어머니는 얼른 말을 고쳤다. 그리고 아들이 말트집 삼아 고쳐준 것에 대해서도 나무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아들의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닦으라고 말하며, 충분히 아들의
무례한 말투에 보복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그러지도 않았다.
입에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것은 감춰둔 과자를 남몰래 먹으려다가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 후 이 가엾은 여인과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 말씨는 그녀의 내력과도 인연이 깊었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가 자기 인생을 이렇게 만
들어 놓은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이었던가 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했다.
런던에서 약 50마일쯤 떨어진 북부 웨스트 석세스 한 구석에 있는 주청 소재지인 올드 블
리컴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목사 사택이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 있었다. 그녀는 그 고장을 속
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아직 아들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녀는 바로 이 케이미드라는
촌락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지금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도 겨우 열아홉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녀시절에 그
곳에서 일어나게 되었던 어떤 일에 기인한다. 이 희비극의 시작은 거룩한 남편의 전처가 죽
음으로 인해 생긴 일이라고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당시 이 목사님 댁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계집아이에 불과했다. 그러던 그녀가 여러 해 동안 그 전처의 자리를 차지
해 왔으며, 지금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봄날 저녁 때의 일이었다.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으나 전처가 죽었을 때, 그녀는 같
은 마을에 살고 있는 양친에게 이 비보를 알리기 위해 해가 질 무렵에 집을 나섰다.
그녀가 앞뒤로 열리는 하얀 색깔의 문을 열고 뜰 안에 들어서서, 저녁 하늘의 밝은 빛을
가로막으며 서쪽에 늘어서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한 남자가 울타리 안에
서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별로 놀라지 않았지만 짖궂게 고함을 쳤다. 오, 샘. 깜짝
놀랐어요.
그는 그녀가 잘 아는 젊은 정원사였다. 그녀는 그에게 집안에서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하여
자세히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주고받던 젊은 두 남녀는 비극이 그들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들과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을 때 생기는 초연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마치
철인이라도 된 듯이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들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목사님 댁에 눌러 있을 거요?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문
제에 관해 생각해 본 일도 없었다. 그럼요, 아마 그렇게 될 거예요. 그녀가 대답했다. 모
든 것이 여느 때나 다름없으리라고 생각해요.
남자는 천천히 양친의 집을 향해 가는 그녀를 따라 발길을 옮겨 놓았다. 이윽고 그의 팔
이 조용히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팔을 밀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다시 허
리로 팔을 가져왔으므로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이봐요, 사랑하는 소피. 그 집에 눌러 있겠다고 결정한 건 아니지요? 나는 앞으로 가정을
갖고 싶어요.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가정을 이루게 될 거예요.
아이, 샘. 왜 그렇게 조급히 서두르세요. 내가 언제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했어요? 공연히
자기 맘대로 남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그러세요?
그렇지만 나라고 다른 사람처럼 프로포즈를 해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어요?
그녀가 집에 도착하자 남자는 그녀에게 작별 인사로 키스를 하려고 몸을 슬쩍 구부렸다.
샘, 안돼. 그럼 못 써요. 그녀는 고함을 치고 입을 손으로 가렸다. 이런 날 밤일수록 보다
경건하게 지내야 해요. 그녀는 키스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를 집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그대로 헤어졌다.
홀아비가 된 목사는 그때 나이가 마흔 살쯤 되었다. 그리고 문벌이 좋은 데다 어린아이도
없었다. 이 지방에는 토착지주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대학 교수의 봉급을 받으며 은둔 생활
을 하고 있었다. 남의 눈길을 피하는 그의 버릇은 날로 심해졌다. 그는 종전보다도 더욱더
사람들의 눈길을 피했다.
외부 세계에서는 개혁의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지만, 그는 이와 전혀 보조를 맞추지
않았다. 아내가 죽었지만 그의 가정은 여러 달 동안 종전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요리사, 가정부, 하인 등은 그저 마음이 내키는 대로 일을 하기도 하고 더러 놀기도 했다.
목사는 그들이 일을 하고 안하는 것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단 한 사람밖에
없는 이 집에, 많은 하인들이 필요 없으리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
되어 식구를 줄이기로 작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잔심부름을 하는 소피가 미리 그에게
떠나야겠다고 입을 열었다.
왜 그러나? 목사가 말했다.
샘 홉슨이 저와 결혼을 하자고 합니다.
그래? 너도 결혼하고 싶니?
아니요. 그렇지만 저도 가정을 가져야 할 테니까요. 그리고 저희 두 사람 중 하나는 나가
야 한다는 말도 들었어요.
며칠이 지난 후에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내보내시지 않는다면 당장 떠나고 싶지는 않습니
다, 나리. 그리고 샘과 말다툼을 했어요.
그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가끔 그녀의 부드러운 태도를 의식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그녀를 눈여겨 본 일은 없었다. 그야말로 고양이 새끼처럼 가냘프고 상냥하게 생긴
계집애였다.
그녀는 그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하던 한 사람의 하녀였다. 만일 소피가 가버린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고민했다. 그러나 소피는 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나간 것이다. 그
리고 모든 것은 다시금 전처럼 조용하게 돌아갔다.
목사 트와이코트 씨가 병이 나자 소피가 식사를 날랐다. 어느 날 그녀는 방에서 나가자마
자 층계에서 쟁반을 든 채 나동그라졌다. 다리를 삐어 일어나지 못했으므로 마을의 외과 의
사를 불러와야 했다. 목사의 병은 나았지만 소피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그 후 다시는 많이 걷거나 오랫동안 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녀의 다리가 웬만큼 낫게 되자 그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걷지도 뛰어다니지도 못하고,
실제로 그렇게 움직일 수도 없으니 이제는 마땅히 떠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앉아서 하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으며, 숙모가 재봉사라는 이야기도 했다. 목사는
그녀가 자기 때문에 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 미안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소피
야. 절름발이거나 아니거나 나는 너를 보낼 수 없다. 절대로 내 곁을 떠나서는 안돼.
그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자
기 볼에 그의 입술이 닿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솔직히 말해서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거의 숭배에 가까운 존경
심을 품고 있었다. 설혹 그가 그녀에게 무례하게 대하더라도, 그녀에게 그토록 거룩하고 위
엄있게 보이는 사람을 감히 거절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 자리에서 목사
의 아내가 되는 것을 허락해 버렸다.
맑게 개인 어느 날 아침, 교회의 창들이 환기를 위해 활짝 열려져 있고, 새들이 지저귀며
훨훨 날아와 지붕 들보에 앉아 있을 때, 조용히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목사와 이웃 교구
의 목사보가 한쪽 문으로 들어오고, 그 뒤를 두 사람의 입회자가 따랐다. 다른 쪽 문으로는
사회자가 들어왔고, 잠시 후에 신랑, 신부가 함께 들어왔다.
트와이코트 씨는 이 결혼으로 말미암아 소피의 온순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사회적
으로 매장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런던의 남부에 있는 어느 교회의 목사
인 그의 친구와 교구의 목사직을 교체하여,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그들 부부는 그리로 떠
나갔다.
그들은 숲과 잡목 덤불과 영지가 딸린 아름다운 시골집을 버리고, 거리에 있는 좁고 누추
한 집에 들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아름다운 종소리를 버리고, 언제나 귀에 거슬리는 단조로
운 종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모두가 그녀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녀가 전에 어떠한 지위에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들과는 멀리 떨어지게 되었으므
로, 외부의 눈총을 훨씬 덜 받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시골 교구에서 참고 살아야 하는 불
편을 벌충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소피는 누구라도 아내로 삼고 싶어할 만큼 매력이 있는 여자였지만, 숙녀로서는 부족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살림을 하거나 예의범절에 있어서는 훌륭한 솜씨를 보여 주었
지만, 교양과 지식면에 있어서는 감각이 무딘 편이었다.
남편은 결혼한 지 14년이 되도록 그녀를 가르치느라고 무척 애를 썼지만, 아직도 기본적
인 용법조차도 혼동하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몇 사람 되지 않는 주위의 친지들 사
이에서도 존경을 받지는 못했다.
그런 그녀가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어느 새 많이 자란 아들이 어머니의 부족
한 점을 알아차릴 뿐만 아니라, 때로는 불만을 터뜨리기까지 하는 점이었다. 그녀는 지금까
지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는 조금도 돈을 아끼지 않았으며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그녀는 이 조그마한 도시에 살면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머리를 아름답게 땋아 내리는
일로 몇 시간씩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새 능금같이 싱싱하던 그녀의 볼은 희미한 분
홍빛으로 바래져 갔다. 다리는 그 후로도 본래의 힘을 되찾지 못해 걷는 것은 되도록 피해
야만 했다.
한편 남편은 살기에 편하고 가정적인 비밀을 보장할 수 있는 런던의 생활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보다 20년이나 손위인데다 요새는 중병까지 들어 시달림을 받고
있는 처지였다. 그래도 오늘은 아내가 아들 렌돌프를 데리고 음악회에 가도 무방할 만큼 그
의 증세는 한결 호전된 듯 보였다.
이튿날 우리는 그녀가 과부의 상복을 입고 나타난 것을 목격했다. 트와이코트 씨는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런던 남쪽에 있는 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만약 그 묘지에 있는 모든 시체
들이 무덤에서 되살아나 꼿꼿이 몸을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그를 알아보거나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소년은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나서 학교로 되돌아갔다. 이렇게 주위 환경이 변해 가는
동안에 소피도 나이를 먹어 외모는 제법 성숙해졌지만, 실제로 그녀는 어린애나 다름이 없
었다. 그녀는 일상생활에 쓸 얼마간의 수입 이외에는 돈을 마음대로 쓸 수도 없었다. 그녀는
세상 물정에 어두워 남에게 속아넘어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모든 재산을 은행에 안
전하게 맡겨 놓았다.
아들은 사립 고등학교의 과정을 마치면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시켜 장차 성직자가 되게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단지 먹고 마시면서 머리를 땋아 내리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일과일
뿐,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방학 때 아들이 돌아오면 맞아들일 수 있도록 집이나 지키고
있으면 되었던 것이다.
남편은 자기가 아내보다 훨씬 먼저 죽으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생전에 교회와 목사관이
있는 거리에 그녀 명의로 별장 양식으로 된 집을 사 두었다. 이 집은 칸막이 벽으로 두 세
대가 살게끔 구분되어 있었으며,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녀의 소유였다.
그녀는 지금 이 집에 살면서 앞에 있는 작은 잔디밭을 내다보기도 하고, 난간 사이로 사
람과 마차들이 끊임없이 오고 가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또 이층 창가에 몸을 내밀고
무성한 나무들과 안개 낀 대기, 단조롭게 늘어서 있는 문들과 큰길을 분주하게 오가는 행인
들의 모습 등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들은 귀족적인 학식과 고전 문법, 그리고 까다로운 성미는 두
루 갖추고 있었지만, 해와 달에게까지 미칠 듯 싶던 소년시절의 동정심은 점점 사그라져 가
고 있었다.
아들은 어렸을 적에 다른 아이들보다 감정이 풍부하고 동정심도 많았다. 또한 그녀는 누
구보다도 아들의 그러한 동정심을 무척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아들은 가
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보다는, 돈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
였다. 아울러 점점 더 그녀에게서 멀리 떠나갔다.
소피가 살고 있는 곳은 상인들과 하급 점원들이 득실거리는 변두리여서, 그녀의 유일한
이야기 상대는 자기 집 두 하인 뿐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뒤로 정성껏 매만지던 머리
손질도 그만 두었으므로, 아들의 눈에는 그런 어머니가 한심스럽게만 보였다. 소피의 가슴
속에서는 아들에 대한 애정이 샘물처럼 솟아났지만, 아들은 그 사랑을 알지도 못했고, 별로
원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녀의 애정은 가슴 깊이 간직된 채 남아 있었다.
그녀의 생활은 감당키 어려울 만큼 쓸쓸했다. 남들처럼 마음대로 산책을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드라이브나 여행 같은 데도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이렇게 하는 일없이 일
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다.
그녀는 지금도 그 교외의 한길을 내다보면서 고향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찍이 자기가 태
어났으며, 설사 들에 나가 노동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었다.
그녀는 때때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밤중이나 이른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조
용한 거리를 내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거기에는 많은 가로등이 무슨 행렬이라도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보초처럼 죽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날마다 새벽 한 시쯤이면 그러한 행렬이
있었다. 그것은 시골 마차들이 코벤트 가든 시장으로 배추를 싣고 지나갈 때였다.
그녀는 그 마차들이 이 고요하고 어두컴컴한 시간에 지나가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었다.
죽 늘어선 마차마다 금방이라도 뒤집혀 떨어질 듯하면서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푸른 양배
추 다발이나, 콩과 완두가 들어있는 광주리들이 수북이 쌓여있고, 눈처럼 하얀 무더미와 흔
들거리는 갖가지 농산물들이 실려 밤일을 하는 늙은 말에 끌려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늙
은 말은 다른 모든 동물들이 잠들어 있는 이 고요한 시간에 왜 이렇게 일을 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녀는 마음이 울적하고 신경이 예민해져 좀처럼 잠들 수 없을 때, 외투를 몸에 걸치고
이러한 광경을 내려다보면서 때로는 안스러운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싱싱한 야
채들이 가로등 맞은편으로 운반되어 올 때, 오랜 시간의 여행으로 땀에 젖은 말들이 온통
번질번질한 모습으로 콧김을 뿜어대는 것을 바라보면 한결 마음이 진정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마차를 몰고 이 거리를 지나가는 농부들의 생활은 낮에 일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 소피에게는 무척 흥미롭고 일종의 매력까지 느껴졌다.
어느 날 아침에 한 남자가 마차로 감자를 싣고 지나가면서 한길에 늘어선 집들의 창문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남자의 모습이 어쩐지
눈에 익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마차는 앞이 누런 갈색이고 구식이라 찾기가 쉬웠다.
그녀는 사흘째 되는 날 밤에 그 마차를 다시 볼 수가 있었다. 그 남자는 그녀가 상상했던
것처럼 전에 케이미드에서 정원사로 있었으며 한때 그녀에게 청혼했던 샘 홉슨이었다.
그녀는 가끔 그를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오막살이 생활이, 오히려 그녀가
지금껏 살아오고 있는 지금의 생활보다 훨씬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그녀는 그를 열렬히 사모한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의 우울한 생활에 그의 출현은 그녀에게
커다란 흥분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대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옳은 것이라
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잠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처럼 채소 장수들은 새벽 한 시나 두 시 경이면 반드시 시내로 들어왔다. 그렇지만 그
들이 언제쯤 돌아가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들의 빈 마차는 흔히 차들이 붐비는 대낮엔 눈
에 잘 띄지 않았지만,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에 빈 마차가 지나가는 것을 언젠가 본 기억이
떠올랐다.
아직 4월이었지만, 그녀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창문을 열고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
고 있었다. 엷은 햇살이 그녀를 내리쬐고 있었다. 바느질감을 들고 앉았지만, 눈은 여전히
거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열 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그녀가 기다리던 빈 마차가 짐을 풀고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샘은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마차를 몰고 있었다.
샘! 그녀가 외쳤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는 그의 얼굴엔 광채가 흘렀다. 그는 어린아이를 불러서 말고삐를 잡
게 하고서 이쪽으로 다가와 창 밑에 섰다.
난 마음대로 움직이질 못해요, 샘! 내려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내가 여기 살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트와이코트 부인! 이 거리 어느 모퉁이에 살고 있다는 건 알았지요.
그는 그 자신이 이 거리에 나타나게 된 사연을 짤막하게 설명하였다. 그는 이미 오래 전
부터 올드블리컴 근처에서 채소를 가꾸던 것을 집어치우고, 지금은 런던 남쪽에서 채소밭을
하는 사람의 지배인으로 있으면서, 한 주일에 두세 번쯤 농산물을 싣고 코벤트 가든으로 가
는 것이 그의 일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호기심 넘치는 질문에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여서, 2년 전에 올드블리
컴 신문에서 옛날 케이미드의 목사가 남부 런던에서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이 지역으로 이사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녀의 주소를 알고자 이 지역을 찾아 헤매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지금의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처럼 같이 놀던 북부 웨스트 석세스의 고향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녀
는 상류층에 속하는 자신이, 샘과 같은 남자와 너무 허물없게 굴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
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뿐이었다.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쏟아지
고,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트와이코트 부인, 아무래도 당신은 행복하지 못한 것 같군요. 샘이 말했다.
예, 물론 행복할 수가 없지요! 남편을 재작년에 잃었는데요.
실은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닙니다. 고향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으세요?
여기가 고향인 걸요. 이 집은 평생 내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나도 그 말 뜻을 알겠어
요... 그녀는 다시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래요, 샘. 고향이... 우리들의 고향이 그립군
요. 난 그곳에서 살고 싶어요. 다시는 그곳에서 떠나지 않고 거기서 죽고 싶어요. 그녀는
또다시 자기의 신분을 떠올렸다. 그렇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감정일 뿐이죠. 아들이 있어요.
몹시 귀엽답니다. 지금은 학교에 가고 없지만요.
학교가 가까이 있습니까? 이 거리에도 학교가 많이 있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 삼류 학교가 아니에요! 영국에서도 제일 좋은 곳에 있지요.
아 참, 잊었습니다. 부인이 오래 전부터 숙녀가 되셨다는 것을!
아니, 나는 숙녀가 아니에요. 그녀는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결코 숙녀는 되지 못할
거예요. 그렇지만 내 아들은 신사예요. 그래서 그 애는 나를... 아, 얼마나 귀찮게 구는지 못
견디겠어요.
이처럼 기묘하게 다시 만나게 된 그들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낮이나
밤이나 창문을 지키고 있다가 그와 몇 마디씩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그녀는 유일한
옛 친구와 함께 거리를 거닐면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하고, 집 앞에 서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몹시 안타깝게 생각했다.
6월 초순 어느 날 밤이었다. 여러 날 만에 그녀는 다시 창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문을
밀고 들어와서 친절하게 입을 열었다. 함께 바람이라도 쏘이는 게 어때요? 오늘 아침에는
짐이 절반밖에 차지 않았어요. 나와 함께 코벤트 가든까지 타고 가시겠어요? 양배추 단 위
에 편안한 자리가 있으니까요. 그 위에 푸대도 펴놓았어요.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에 집에 돌
아올 수 있을 거요.
그녀는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이내 흥분이 되어 급히 옷을 갈아입고 외투와 베일로
몸을 가린 채, 조심스럽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문을 열었을 때 이미 샘은 대문 앞 계단 위
에 와 있었다.
그는 억센 팔로 그녀를 번쩍 들어 조그마한 안마당을 가로질러 마차 위에 올려놓았다. 사
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곧고 평탄한 큰 길 위에, 가로등만이 양쪽에 늘어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각에는 이 도시도 시골처럼 공기가 신선했다. 서쪽 하늘에는 아직도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동쪽에선 동이 트기 시작해 훤한 빛이 비쳐 오고 있었다. 샘은 그녀를 자리 위에 올
려놓고 조심스럽게 마차를 몰았다. 그들은 옛날과 다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샘은 분위기가 너무 가까워지는 것 같으면 자기를 억제하곤 했다.
집에 있으면 너무 적적해요. 이렇게 나서고 나니 마음이 좀 즐거워지는군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트와이코트 부인, 낮에는 이처럼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없답니다. 다음에도 또 나
오시겠죠?
점차 어둠이 걷히고 날이 밝아왔다. 참새가 분주하게 날아다니고, 그들 주위는 점점 집들
이 많아졌다. 그들이 강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환하게 밝았다. 그들은 다리 위에서 세인트
폴 사원 쪽으로부터 아침해가 번쩍이며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강물은 그 쪽을 향해 번쩍
이는 것 같았고, 배는 한 척도 움직이지 않았다.
코벤트 가든 근처에서 그는 그녀를 승용마차에 태웠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
주 보고 작별을 고했다.
그녀는 무사히 집에 되돌아왔다. 그리고 발을 절룩거리며 문 앞으로 다가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열쇠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샘이 나타나 다시금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녀의 두 볼은 붉게 상기되어 매우 아
름답게 보였다.
그녀는 아들 이외의 다른 곳에서, 사는 보람을 찾게 되었다. 그녀는 이런 여행이 자신에게
생기를 되찾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그와 같은 생각을 잊어버리고 더욱 그와 가까워졌다. 샘은 지난 날 그
녀가 자기에게 너무 냉정하게 굴었지만, 그래도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오
랫동안 망설이다가 한가지 계획을 그녀에게 말했다. 그는 런던의 일자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힘으로 채소가게를 운영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때
마침 적당한 가게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럼 그렇게 하시지 그래요, 샘? 그녀가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당신이... 함께 거들어 줄지 몰라서요. 당신이 싫어할 줄... 아니 못하실 줄 압니다.
오랫동안 숙녀 노릇을 하던 당신이, 나 같은 놈의 아내가 될 수 없을 테니 말이요.
나도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군요. 그녀도 그의 말에 당황해 하면서 대꾸했다.
당신이 할 수만 있다면... 그는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가만히 뒷방에 앉아서 가끔 내가
나갈 때 유리창으로 내다만 보아도 됩니다. 물론 물건을 지키기만 하면 되니까 다리가 불편
해도 상관없을 거예요. 소피,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이런 생각을 해도 괜찮겠
지요! 그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샘,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그녀는 그의 손위에 자기 손을 가만히 얹으며 말했다. 나 혼
자 몸이라면 그럴 수 있어요. 기꺼이 받아들이겠어요. 나의 모든 것을 잃더라도 말이에요.
그런 것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하지요.
당신의 너그러운 마음씨에 감사드려요. 샘, 그렇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어요. 내게는 아
들이 있어요.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하지요. 그 애는 정말 내 자식이 아니라 죽은 남편에게
서 맡은 아이라고. 그 애는 인간적인 면에서 나와는 전혀 다르답니다. 제 아버지를 많이 닮
았어요. 그 애는 교육을 많이 받았지만, 나는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거든요. 그 애의 어머니
로서 자격이 많이 부족하죠. 아들과 의논해 보겠어요.
그야 물론이지요. 샘은 그녀가 두려워하는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결정은 당신
이 하는 것 아니겠소? 소피... 트와이코트 부인!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들은 어디까지나
아들이고 당신은 당신이니까요.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샘.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그렇지만
좀 기다려야 해요. 생각할 여유를 주세요.
그 정도의 대답만 들어도 그는 흡족했다. 그는 즐거운 기분으로 헤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렌돌프에게는 감히 말도 꺼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옥스퍼드 대학으로 진
학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녀가 하는 일이 아들의 생애에 별다
른 영향도 끼칠 것 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너그럽게 이해해 줄까? 만약에 아들
이 그녀의 말에 반대한다면 자신은 아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을까?
연중행사로 되어 있는 사립 중학교 간의 크리켓 시합이 로드 운동장에서 열리게 되어 있
었지만, 그녀는 아들에게 그런 말을 한마디도 비추지 않았다.
트와이코트 부인은 어느 때보다도 생기가 있어 보였다. 그리하여 렌돌프와 함께 시합 구
경을 나섰다. 그녀는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다니기도 하였다. 그녀는 구경꾼들 사이로
돌아다니면서 그 문제를 끄집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자 갑자기 마음이 명랑해졌다.
아들은 경기에 열중한 나머지 집안 일 같은 것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이렇게
나란히 거닐면서도 전혀 동떨어진 생각을 하며, 눈부신 7월의 태양 아래서 거닐고 있었다.
소피는 자기 아들처럼 넓고 흰 칼라와 축이 낮은 모자를 쓴 수많은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커다란 사륜 마차가 아무 데나 줄을 지어 늘어서고, 그 밑에는 갖가지 음식 찌꺼기들과
음료수 병들이 흩어져 있고, 유리컵이며, 접시 그리고 은식기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한편 마차 위에는 부모들이 의기양양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처럼 초라한 어머니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만일 렌돌프가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이들 상류층만 염두에 두지 않는
다면, 모든 것이 얼마나 행복할까!
필드에서 배트로 공을 약간 쳤는데도 많은 친척들이 큰 환호성을 올리는 것이었다. 렌돌
프는 운동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구경하기 위해 껑충 뛰어 올랐다. 소피는 진작 마음
속에 준비해 둔 말이 목구멍까지 끌어 오르는 것을 느꼈으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아무
래도 결과가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의 이야기와 렌돌프가 좋아하는 유형 사이에는 커다
란 거리가 있었다.
그녀는 좀더 좋은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어느 날 저녁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교외
의 집에 아들과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드디어 침묵을 깨고 자기는 재혼하게 될지도 모른
다고 말했다. 그것도 가까운 장래에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완전히 독립해서 살아가
게 될 때라는 조건을 달아 아들의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조금도 탓하지 않고 상대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머뭇거렸다. 아들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기왕이면 의부가 신사였으면 해요.
네가 말하는 그런 신사는 아니란다. 하고 그녀가 수줍은 듯이 말했다. 네 아버지를 만
나기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야. 나와 같은 계층의 사람이란다.
그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젊은이의 얼굴은 잠시 굳어지더니 책상
위에 엎드려 크게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 얼굴에 닥치는 대로 키스를 하였다. 그리고 지금
도 어느 측면에서는 어린애이기도 한 아들 등을 두드려 주며, 자기도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
았다.
아들은 다소 마음이 진정되자 자기 방으로 재빨리 돌아가 문을 닫아 걸었다. 어머니는 열
쇠 구멍으로 방 안을 살피며, 밖에서 서성거렸다. 그는 한참 후에야 겨우 대답을 했다. 그는
방 안에서 밖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이게 무슨 창피람! 나는 이제 끝장이야! 촌뜨기 같으
니라고! 농부를! 시골뜨기를! 영국 안의 수많은 신사들 앞에서 나에게 망신을 주려고!
그만 둬라. 내가 잘못 생각했나 보다! 그렇지 않도록 노력하마! 그녀도 비장하게 외쳤다.
렌돌프가 그해 여름 집을 떠나기 전에 샘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는 뜻밖에도 운이 좋아서
예상외로 손쉽게 가게를 사들일 수 있었다고 그녀에게 알려 왔다.
그는 이미 가게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의 가게는 그 도시에서 제일 클 뿐 아니라, 과일
과 채소를 함께 취급하고 있어 앞으로는 그녀와 함께 살아도 될 만한 집이 될 것이라고 설
명하였다. 그는 그녀에게 달려와 만나도 되겠느냐는 의견을 물어왔다. 그녀는 그에게 아직
마지막 대답을 좀 더 기다려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가을을 지루하게 보내고 크리스마스 휴가로 렌돌프가 집에 돌아왔을 때, 또다시
그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러나 젊은 신사는 어머니의 말을 무조건 거절했다. 그리하여 그
문제는 몇 달을 그대로 덮어둔 채 지나갔다.
그 후 그녀는 다시 기회를 보아 자신의 재혼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러나 아들의 반대가
더욱 심하자 그녀는 일단 포기해 버렸다. 그렇지만 자신의 작은 행복을 이루고 싶은 그녀는
기다림에 지쳐, 아들을 타이르기도 하고 애원해 보기도 하면서 여러 해를 보냈다.
샘은 단호한 태도로 자기의 구혼 문제를 매듭지으려고 했다. 마침 대학생인 소피의 아들
이 부활절 휴가로 옥스퍼드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다시 아들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
냈다. 그녀는 아들이 목사로 임명되면 가정을 갖게 될 것이고, 교양없는 말투에 무식한 자신
이 아들의 방해만 될 터이니, 차라리 자기가 재혼하여 멀리 떠나 사는 것이 아들을 위해서
는 좋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들은 이번에도 더욱 화를 낼 뿐 결코 어머니의 뜻에 찬성하지는 않았다. 아들은 어머니
의 취향에 대한 분노와 경멸로 인하여 끝까지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였다. 그리고는 자기 침
실에 마련해 놓은 십자가와 제단 앞에 어머니를 데리고 가서 무릎을 꿇게 하고, 자기의 허
락이 없이는 새뮤얼 홉슨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윽박질렀다. 이렇게 해야만 돌
아가신 아버님에게 면목이 섭니다. 하고 그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가엾은 여인은 맹세를 하였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아들이 성직의 임명을 받고 목회일
이 한창 바쁘게 되면 곧 누그러질 것이라며 한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들은 어머니가 성실한 채소 장수와 목가적인 생활을 함께 해 나가더라도 이 세상에서
손해볼 것이 아무 것도 없을 터이지만, 그가 받은 교육이 그의 인간성을 완전히 박탈해 버
려 그를 아주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녀의 절름거리는 다리는 날이 갈수록 더 기능을 상실하여 자기 집에서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그 집에서 하루하루를 외롭게 보내고 있었다. 나는 왜 샘하고 결
혼하면 안 되는 거지? 왜 그럴까! 그녀는 곁에 아무도 없을 때면 이처럼 푸념하듯이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 후 약 4년이 지나 한 중년 신사가 올드블리컴에서 제일 큰 과일가게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상점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보통 일할 때 입는 옷 대신에 말쑥한 까만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창문엔 일부 덧문이 닫혀져 있었다.
정거장에서 장례식 행렬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행렬은 그의 상점 앞을 지나 케이미
드 마을을 향해 시가지를 빠져나갔다. 남자의 두 눈엔 눈물이 글썽이고, 영구차가 지나가자
모자를 손으로 벗어 들었다. 그리고 영구차에서는 앞섶이 높은 조끼를 입고 말끔히 면도를
한 젊은 목사가, 먹구름처럼 험악한 눈초리로 거기 서 있는 상점 주인을 쏘아보고 있었다.
토머스 하디(1840-1928): 영국의 소설가이며 시인. 도싯 주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나 중
등교육을 받고 건축사무소에 들어갔으나 후에 문필 활동을 했다. 고향인 웨스트 석세스 지
방을 무대로 한 소설로 유명한데, 그는 작품 속에서 당시 영국 사회의 인습과 편협한 종교
인의 태도를 비판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귀향 , 주드 , 테스 등이 있다.
고향
그 농장은 서머셋셔 산의 움푹 들어간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옛 석조건물 주위에는 창
고며 닭장, 화장실 등이 빙 둘러 서 있었다. 문 위에는 그 집을 세운 날짜가 그 시대의 우아
한 글씨체로 1673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 집은 낡고 퇴색하여 주위를 에워싼 나무들과 얼
른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풍경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흔히 지주들의 저택 주변에
어울릴 만한 높은 느릅나무들이 한길에서 아담한 뜰 안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이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 집만큼이나 감각이 둔하고 끈기있고 또한 소박했다.
그들에게 오직 한 가지 자랑거리는 그 집을 지은 후로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거쳐 대대로
끊기지 않고, 그 집에서 태어나 그 집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삼백 년 동안이나 그 집
주변의 땅을 일구며 살아왔다.
조지 메도우즈는 이제 오십 고개를 넘어선 사람으로 아내는 두 살 아래였다. 두 부부는
한창 때 키가 늘씬하고 멋이 있었다. 그리고 2남 3녀의 자녀들도 건장하고 잘생겨, 신사 숙
녀가 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들은 자기 고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일찍이 그렇게 하나로 뭉친 가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명랑하고 부지런하고 또
친절했다. 그들의 생활은 가장을 중심으로 협조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베토벤의 교향곡처럼
생활에 커다란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행복했으며, 또 그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
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집 가장은 조지 메도우즈가 아니라, 그의 어머니라고 말했다. 그녀는
아들보다 훨씬 남자다웠다. 일흔의 할머니로 키가 크고 몸집이 꼿꼿하며 회색머리에는 위엄
이 있었다. 얼굴에는 주름이 많이 잡혀 있었으나 눈은 밝고 날카로웠다. 그 집과 농장에서는
이 할머니의 말이 법률처럼 권위가 있었다. 할머니는 유머가 있고, 엄하면서도 자비로웠다.
식구들은 그 할머니의 농담에 곧잘 즐거워하였고, 또 그것을 남들에게 옮기기도 했다. 할머
니는 훌륭한 여류 실업가이기도 하여, 이 할머니를 능가하려면 이른 새벽에 일어나야만 했
다. 할머니는 개성이 뚜렷하고 남다른 친절과 비웃기를 잘 하는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
다.
어느 날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조지 부인이 나를 불러 세우고 수선을 떠는 것이었다.
오늘 누가 여기에 오는지 아세요? 하고 그녀는 물으며 말을 계속했다. 조지 메도우즈 아
저씨가 오신대요. 왜 중국에 가 있던 분 아시잖아요.
아니 그분이 여태 살아 계셨나요?
그러게 말예요, 모두들 돌아가신 줄만 알았는데...
나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 이야기는 옛날의 민요와 같은 맛을 풍겨 재
미가 있었다. 조지 메도우즈 아저씨와 그의 동생 톰은 둘 다 모두 현재의 메도우즈 할머니
가 오십여 년 전 처녀시절에, 그녀에게 청혼을 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톰과 결혼하게 되자,
그는 해외로 떠나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중국의 어느 해변가에 살고 있다고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그는 이십
년 전까지는 가족에게 간혹 선물을 보내오곤 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소식이 뚝 끊어져 버렸
다. 톰 메도우즈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과부가 된 메도우즈 부인은 그에게 편지로 이 사실
을 알렸으나 답장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그들은 포츠머스에 있는 어느 선원 숙소의 관리인에게서 한 통의 편지
를 받고 깜짝 놀랐다. 그는 지난 십 년 동안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아 절름발이가 되어 구호
를 받아 왔는데, 이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느끼자 자기가 태어난 고향집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장조카 앨버트 메도우즈가 포드 자동차로 그를 데리
러 포츠머스로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그날 오후에 집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것이
다.
글쎄 생각 좀 해 보세요. 이곳을 오십 년이나 떠나 계셨으니, 바로 쉰 한 번째 생일이 돌
아오는 제 남편도 그 분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다잖아요?
메도우즈 부인은 뭐라세요? 하고 내가 물었다.
그 분의 성격을 잘 아시잖아요. 그냥 빙그레 웃기만 하세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떠나
실 때는 늘씬한 청년이었지, 그렇지만 동생만큼은 침착하지 못했어. 하시지 않겠어요. 그 분
이 조지의 아버지를 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대요.
조지 부인은 나더러 자기 집에 들러 그를 만나 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런던 이외에는
별로 집에서 멀리 나가본 적이 없는 시골 여인의 단순한 생각으로, 내가 중국에 가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서로 통하는 데가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나는 물론
그녀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내가 갔을 때는 온 집안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바닥이 돌로 되어 있는
식당에 앉아 있었는데, 메도우즈 부인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벽난로 옆에 놓인 의자에 반
듯이 앉아 있고, 아들과 며느리는 자기 자녀들과 함께 테이블 곁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메
도우즈 부인만이 좋은 비단 옷을 입고 이들과는 떨어져 앉아 있는 것이 민망스럽게 보였다.
그리고 난로 반대쪽에는 한 영감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몸집이 하도 메말라 마치
헐거운 헌 옷처럼 가죽만이 뼈대 위에 덮여 있는 것 같았다. 얼굴은 누렇게 떠 주름살이 우
글쭈글하고, 이는 다 빠져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와 악수를 했다. 메도우즈 씨, 고향에 돌아오셨으니 얼마나 기쁘십니까! 하고 내
가 말했다.
나는 이래뵈도 선장일세. 그가 내 말을 정정하며 말했다.
여기까지 걸어 오셨어요. 그의 조카 앨버트가 나에게 말했다. 마을 어귀까지 와서 차를
세우라고 하시더니 걷겠다고 하시잖아요.
나는 지난 2년 동안을 병석에 누워 있었네. 차에 탈 때도 사람들이 들어다 태워 주었지,
다시는 땅을 밟고 걷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네. 그러나 낯익은 느릅나무를 보니 아버님께서
그것을 아끼던 생각이 나더군 그래. 그러자 나는 걸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었네. 그래서
내가 스물다섯 살 때 걸어나간 바로 그 길을 이제 다시 걸어서 돌아온 거야.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에요. 하고 메도우즈 부인이 핀잔을 주었다.
아니야, 그건 나에게 힘을 주었소. 나는 과거 십 년 전보다 더욱 강해진 것 같소. 에밀리,
나는 아마도 당신보다 더 오래 살게 될 거요.
너무 자신하지 마세요. 메도우즈 부인이 대답했다.
과거 한 세대 동안에 메도우즈 부인을 직접 이름으로 부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영감이 부인을 너무 허물없이 대하는 것 같아서 저으기 놀랐다. 부인은 눈 언저리에 날
카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영감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에게 말할 때 맹숭맹숭한 잇몸을 드
러내고 곧잘 웃었다. 나는 그 두 노인이 반세기 동안이나 서로 얼굴을 대하지 못했다는 사
실과, 그렇게 먼 옛날에 그녀가 자기를 사랑한 그를 버리고 그의 동생을 택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들이 당시의 감정과 또 주고받은 말을 지금도 기억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또한 메도우즈 씨가 그 할머니 때문에 대대로 이어 내려온 조상의
가문을 버리고 시작한 오랫동안의 유랑생활을, 후회하는 것은 아닌지 알고 싶었다.
메도우즈 선장님, 그 동안에 결혼하신 적이 있으세요? 하고 내가 물었다.
난 결혼 안 했다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여자들에 대
해서는 잘 알고 있으니까.
입버릇처럼 뇌까리던 말을 또 하시는군요. 메도우즈 부인이 쏘아붙였다. 깜둥이 여편네
를 여럿 거느렸다고 해도 놀랄 것 없어요.
에밀리! 중국 여자는 깜둥이가 아니오. 그것도 몰라? 그들은 황인종이란 말이요.
오라! 그래서 당신도 누런빛을 띠고 있군요. 난 그런 줄 모르고 혹시 황달병이라도 걸리
지 않았나 했었지.
에밀리! 나는 당신 이외에는 아무하고도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대로 실
천한 것 뿐이오! 그는 조금도 비통해 하거나 분개하는 기색이 없이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이십 마일을 걷겠다고 말했어. 그리고 그것을 실천했소. 그의 말
에는 만족감까지 띠고 있었다.
그렇다면 안심이군요.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중국에 대하여 그 노인과 이야기했다.
중국의 항구라면 주머니 속보다 더 잘 알고 있네. 어디에 배를 대면 좋을지 환하네. 내가
겪은 이야기를 다 하자면 반년은 걸릴 걸세.
그래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한 가지 이행치 못한 것이 있어요. 메도우즈 부인이 비
꼬는 말투이기는 하지만, 눈 언저리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돈을 벌지 못했다는 말이에요.
나는 돈을 모아두는 사람이 아니오. 돈을 벌어서 쓰자는 것이 내 생활신조였으니까. 나는
이 세상을 다시 산다고 하더라도 이 생활신조를 버리지 않을 거요. 아마 이렇게 말할 사람
은 별로 없을 테지.
그럼요. 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감탄과 존경을 금치 못하는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가 다 빠진 절름발이
노인으로 땡전 한푼 없었지만, 삶을 즐기며 평생을 멋있게 살아온 분이었다. 내가 그의 곁을
떠날 때, 그는 내일 또 오라고 말했다. 중국에 대한 이야기라면 무엇이든지 들려주겠다는 것
이었다.
이튿날 그 영감님이 정말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지 확인해 보려고 느릅나무가 죽 늘어선 한
길을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정원에서 메도우즈 부인이 꽃을 꺾고 있었다. 내가 인사를 했
더니 그녀는 흰 꽃을 한아름 안은 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창문에 커튼이 드리워진
것을 보고 의아스러웠다. 메도우즈 부인은 방 안에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는 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빨리 땅에 묻혀야 어둠 속에서 실컷 살텐데... 그녀는 언제나 이렇
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다.
메도우즈 선장님은 안녕하세요? 하고 내가 물었다.
그 양반은 언제나 방정맞게 걸어다녔거든.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글쎄, 오늘 아침에 리지가 차를 갖고 가 보았더니 돌아가셨더라지 뭐야.
그래요?
자다가 그냥 간 거야. 그 방에 갖다 놓으려고 이 꽃을 꺾고 있는 거지. 아무튼 자기 집에
서 세상을 떠났으니 다행이야. 우리 메도우즈 집안에서는 그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왔으
니까.
그들은 조지 메도우즈 영감을 잠자리에 들게 하느라고 무척 애를 썼다고 했다. 그는 가족
들에게 그 동안에 겪은 이야기를 밤늦도록 들려주었다. 그는 자기의 옛집에 돌아온 것에 무
척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는 부축을 받지 않고 집 안에 들어온 것을 자랑스러워했으며, 앞으
로 이십 년은 더 살겠다고 장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용케도 제자리에 와서 끝을
맺었던 것이다. 메도우즈 부인은 가슴에 안은 흰 꽃의 향기를 맡으며 말했다.
나는 톰 메도우즈와 결혼하고 조지가 고향을 떠난 후로, 나와 맞는 사람과 결혼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
모옴(1874-1965): 영국의 소설가이며 극작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자라면서 의학
공부를 했으나, 1897년에 첫 소설 램버스 라이자 를 써서 주목을 끌었다. 날카로운 필체와
기지로 인간의 심리를 묘사한 그의 소설은 여러 나라 말로 절찬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소설
에 인간의 굴레 , 달과 6펜스 , 면도날 , 희곡으로 훌륭한 사람들 , 눈호스 등이 있다.
환상을 좇는 여인
웨스트 석세스 지방의 유명한 해수욕장인 소렌트시에서 윌리엄 마치밀은 셋집을 찾아 헤
매다가 마침내 계약을 하고 나서 아내를 데리러 호텔로 돌아왔다.
아내는 마침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고 방에 없었다. 군인처럼 생긴 급사
가 그들이 간 방향을 가리켜 주는 대로 마치밀은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원, 멀리도 왔군! 아이 숨차. 마치밀은 아내 곁에 다가서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
었다. 그녀는 걸음을 옮기면서 책을 읽고 있었다. 세 아이들은 유모와 함께 훨씬 앞서 가고
있었다.
마치밀 부인은 책을 읽으며 명상에 잠겼다가 갑자기 놀랐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도 돌아
오지 않으셔서, 쓸쓸한 호텔에 남아 있기가 지겨웠어요. 그렇지만 이렇게 우리를 찾으셨다니
미안해요, 윌!
나도 집을 구하느라 어지간히 골탕을 먹었다오. 공기 좋고 시원한 방이라고 해서 가보면
이건 굴 속같이 답답하고 누추하니 말이오. 마침 하나 정해 놓았는데 당신 마음에 드는지
가보지 않겠소? 방도 별로 없는 데다가 그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없습디다. 다른 방들은 모
두 사람이 들었더군.
그들 부부는 아이들과 유모가 산책을 하도록 그대로 내버려두고, 그들만 집을 보러 돌아
왔다. 그들 부부는 나이도 젊고 생김새도 서로 비슷하였으며, 그 밖의 여러 조건도 잘 갖추
어져 있었지만 성격만은 전혀 달랐다. 그렇지만 자주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남편은 우둔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매우 무심한 편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아주 활
달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다른 것은 그들의 취미와 기호가 아주 미묘하고 이질적인 특색
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밀은 아내의 취미나 습성을 다소 유치하고 쑥스럽다고 생각했다. 한편 그녀는 그녀대
로 남편의 취미를 물질 위주로 천박하다고 여겨 왔던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북부지방의 번
화한 도시에서 총포 제조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온통 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반면 그의 아내는 우아하고도 고색이 창연한 어휘를 즐겨 쓰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매우
민감하고 섬세한 여인이었으므로, 총포를 제조하는 남편 사업이 생명을 살상하는 목적을 지
닌 물건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남편의 직업에 대해 불만이었다. 그녀는 오
직 그들 무기 중에서 어떤 것은 인간들에게 위협이 되는 무서운 해충이나 동물을 퇴치하는
데 쓰이고 있다고 자위함으로써, 겨우 마음의 평온을 누리게 되었다.
그녀는 결혼하기 전에는 그와 같은 직업이 남편으로 맞아들이기에 합당치 않다는 생각을
해 본 일이 없었다. 어떤 일을 해서든지 살아나가야 한다는 필요성과, 모든 선량한 어머니들
이 가르치고 있는 부덕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윌리엄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럭저럭
신혼생활을 보냈기에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다. 그녀는 뒤늦게야 마치 어두운 곳에서
발이 무엇엔가 걸려 비틀거리는 사람처럼, 총포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의혹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희귀한 것인지, 흔한 것인지, 금이 들어있는지, 은이나 납이 들어있는지, 또한
그것이 쓸모가 있는 것인지의 여부도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나름대로 어떤 막연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 남편이 우
둔하고 품위가 모자라는 것을 가엾게 생각하게 되었고, 그를 남편으로 맞게된 자신도 측은
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윌리엄이 알더라도 별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을 공
상으로, 그녀의 섬세하고 미묘한 정서를 발산하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으며 살아왔다.
그녀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우아했으며, 체격은 날씬하고 동작은 매우 경쾌하고
민첩했다. 그녀의 까만 눈은 신비롭게 광채를 발했으며, 그녀와 같은 영혼의 소유자들이 지
니고 있는 특징을 두드러지게 갖고 있었다. 그와 같은 눈동자는 그녀의 남자 친구들이나 심
지어 어떤 때는 그녀 자신에게도 상심의 원인이 되기가 일쑤였다.
남편은 키가 훤칠하고 얼굴이 길며 갈색 수염에 사색적인 눈을 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언제나 아내에게 친절하고 관대했다. 그의 말투는 무미 건조했으며, 지금같이 험악한 시대에
그와 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 것을 매우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 부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셋집 앞에 다다랐다. 그 집은 바다에 면한 테라스가
있었고, 바람과 조수를 막는 상록수가 울창한 조그마한 정원이 앞에 있었으며, 현관까지는
돌층계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그 집은 같은 모양으로 죽 늘어선 여러 집들 중에 하나였으므로 번호가 붙어 있었지만,
다른 집들보다 약간 컸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은 그 집을 가리켜 뉴퍼레이드13호 라고 불렀
다. 그러나 그 집 여주인은 반드시 코버그 하우스 라는 별명을 붙여서 다른 집과 구별하려
고 하였다.
지금은 밝은 햇살이 내리쬐어 상쾌한 모습의 집이지만, 겨울이 되면 모래 포대를 쌓아 올
려놓았다. 그리고 비바람을 막기 위해 열쇠 구멍까지 틀어막아야 했다. 비바람에 페인트칠이
거의 벗겨져, 애벌칠과 마디 장식이 드러나 보였다.
신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집주인은 그들을 맞아들여 방을 보여 주었다. 그녀의
남편은 고급 관리였는데 갑작스런 죽음으로 미망인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생활이 어려워
지게 되었다는 사정을 말하고 나서, 조심스런 표정으로 그 집이 살기에 아주 편하다는 설명
을 덧붙였다.
마치밀 부인은 위치와 집은 마음에 들지만, 규모가 너무 작아서 방을 모두 쓰지 않으면
사는 동안에 불편이 많겠다고 했다. 집주인은 실망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첫눈에 정직
한 분들 같아서 꼭 자기 집에 세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방
두 개는 어느 독신 남자가 장기계약을 맺고 있었다. 여름 휴가철의 비싼 방세를 치르지는
않지만 일 년 내내 방을 빌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재미있고 선량한 젊은이로 조금도
성가시게 구는 일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비싼 세를 받더라도 한 달 동안 빌려주기 위해 그
를 내보내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녀의 말을 듣고 다른 집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사무원에게 다른 집에 대해 더 물어보려고 생각했다. 그들이 호텔로 돌아와 차를 마시려고
하는데 집주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집에 묵고 있는 젊은이가 3, 4주 정도 자기 방을
내어 주어도 상관없으니, 세를 들려는 손님을 놓치지 말라는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이
다.
매우 친절하신 분이군요. 그렇지만 그분에게 그런 불편을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아요. 마
치밀 부인이 대답했다.
천만에요. 불편을 끼쳐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건 사실이에요. 집주인은 비위 좋게 말했
다. 그분은 말씀이에요. 여느 젊은이와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하고 고독
을 좋아하며 우울한 분이지요. 휴가철인 지금보다는 남서풍이 문 앞으로 몰려들고 바다가
이곳 퍼레이드를 씻어내리며 이 일대에 사람의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가장 여기에
머물러 있고 싶어합니다. 실은 기분 전환을 위해 곧 맞은편 언덕의 어느 별장으로 가서 계
시겠답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들에게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마치밀 일가는 이튿날 그 집을 얻어 짐을 옮겼다. 그 집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마치밀 씨는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고, 마치밀 부인은 아이들을 모래사
장으로 놀러 보낸 다음 두루 집안을 살피고 나서 양복장 문에 달린 거울의 반사력을 시험해
보는 등 모든 것을 깔끔하게 정돈했다.
그녀는 젊은 독신 남자가 빌리고 있었다는 뒤쪽 거실의 가구가 어느 방 것보다 더욱 마음
에 들었다. 보기 드문 책이라기보다는, 흔해빠진 너절한 책들을 방 구석에 보관하는 식으로
책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아마도 이 방에 들어 있던 젊은 남자는 휴가철에 들어오는
손님들은 그런 책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주인은
마치밀 부인이 못마땅해하면 적당히 변명을 하려고 문 앞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었다.
이 방을 제 방으로 써야겠어요. 마치밀 부인이 말했다. 여기 책들이 있군요. 그런데 방
을 내 주고 가신 분은 책이 퍽 많은 모양이네요. 제가 더러 읽어도 상관없겠죠, 후퍼 부인?
아무렴요, 괜찮고 말고요. 책이 많답니다. 그분은 문학 방면에 좀 이름이 있는 분이니까
요. 시인이랍니다. 정말 시인이에요. 그리고 자기 수입도 꽤 있죠. 부자는 아니지만 시를 쓸
만한 돈은 있는 모양이에요.
시인이요? 오오! 그런 줄은 전혀 몰랐군요.
마치밀 부인은 책 한 권을 펼쳐 들고 첫 장에 있는 책 주인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어머나! 그녀는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말을 계속했다. 로버트 트리워, 이분 이름은 잘
알고 있어요. 물론 그의 시도 알고 있지요. 우리가 빌린 방이 바로 그분 방이고, 우리가 그
분을 이 댁에서 쫓아낸 셈이군요.
잠시 후에 엘라 마치밀은 혼자 앉아서 놀랍고 흥미로운 마음으로 로버트 트리워를 생각하
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최근 경험과 심경이 더욱 그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돋우게 했
다. 그녀는 노력형인 어느 문인의 외동딸로서, 지난 일 년 동안 직접 시를 쓰고 있었다. 그
녀는 못 견딜 정도로 고통스러운 그녀 자신의 정서를 쏟을 수 있는 마음의 통로를 마련해
보기 위하여 몹시 애를 썼다. 그녀는 판에 박힌 듯한 살림살이와 평범한 남편에게 아기만
낳아 주는 그런 생활을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므로, 마음은 항상 우울하고 권태를 느끼
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맑고 빛나던 지난날의 정서는 점점 침체되고 무디어지는
것 같았다.
가명으로 무명 잡지에 그녀의 시들을 수없이 발표했으며, 두 차례는 상당히 이름있는 잡
지에 발표된 일도 있었다. 특히 그 잡지에 두 번째 게재되었을 당시에는 그녀의 시가 특별
히 작은 활자로 아래쪽에 실리고, 그 위에는 바로 로버트 트리워가 같은 주제로 쓴 두세 편
의 시가 실린 일이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의 시는 일간 신문에 보도된 어떤 비극적인 사건에 감명을 받아 동시에 떠오
르는 시상을 활용하여 지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편집자는 이 두 사람 시의 주제와 내용의
탁월성으로 함께 게재할 생각이 들었다는 설명을 실어 놓았다.
이같은 일이 있은 후로 존 아이비 라는 필명을 가진 엘라는, 로버트 트리워의 이름으로
실린 작품이라면 어떤 시를 막론하고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로버트 트리워가 남
성이라는데 대하여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으며, 여성으로 처신하려는 생각도 해본 일이 없었
다.
마치밀 부인은 그녀가 남성으로 행세하는 것에 일종의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자
기의 시적인 영감이 정력적인 장사꾼의 아내, 즉 평범한 총포 제조업자와의 사이에서 태어
난 세 아이의 어머니에게서 우러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분
명히 알고 있었다.
트리워씨의 시는 기교에 능하다기보다는 정열이 넘쳐흘렀으며, 세련되었다기보다는 풍요
하다는 면에서 최근의 다른 시인들의 작품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상징주의
자도 아니고 퇴폐주의자도 아니었다. 인생에 최선의 개연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악의
개연성도 있음을 관망할 줄 아는 성격을 비관주의라고 이름 짓는다면, 그도 아마 이에 속한
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용과는 거리가 먼 형식과 운율에 대하여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그는, 감정이 예술적인
형식을 능가할 때는 간혹 운율이 엉성한 엘리자베스 시대의 시처럼 14행 시를 짓는 오류를
범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비평가들은 누구라도 이같은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
다고 그에게 솔직히 지적해 주는 것이었다.
엘라 마치밀은 가당치도 않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이 경쟁자의 작품을 수없이 읽어보고 운
율을 살펴보았지만, 미약한 그녀 자신의 시에 비하면 언제나 활기가 넘쳤으므로, 그녀는 그
때마다 슬픔에 잠겼다. 간혹 그의 경향을 모방해 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그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실망에 빠지곤 했다.
이와 같은 심경으로 몇 달을 보내고 있었는데, 출판 목록에 트리워의 시편들을 모아서 한
권의 시집을 낸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그 후에 실제로 시집이 나오게 되었으며 호평을
받기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시집이 꽤 팔리어 출판 비용을 치르기에 충분한 자금이 마련되
기도 했었다.
트리워의 성장에 자극을 받아 존 아이비는 자기 자신도 지금까지 많이 발표하지는 못했지
만, 세상에 공표된 몇 편의 원고와 빛을 보지 못한 작품을 주워 모으고, 게다가 새로 지은
시들도 보태어 한 권의 시집을 만들어 보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그녀의 뜻은 이루어졌지만, 그로 말미암은 막대한 출판 비용으로 큰 손해를 보았다. 몇몇
비평지가 그녀의 빈약한 시집을 소개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논평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리하여 그 시집은 겨우 두 주일 동안 서점에 깔렸을 뿐이었다.
실의에 빠졌던 그녀는 세번째 아이를 낳게 되면서 다른 취미를 찾기로 했다. 그녀에게 이
러한 가정적인 변화가 없었던들 시집 출판으로 인한 실패로 막대한 정신적 타격을 받지 않
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남편은 병원 치료비와 출판 경비까지 지불하고 그것으로 모든 일을 끝맺었던 것이다. 그
러나 그 당시 명성은 떨치지 못했지만 엉터리 시인 취급은 받지 않았다. 그런 엘라는 최근
에 옛 시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다시 향수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때마침
우연하게도 그녀는 로버트 트리워의 방에 있게 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새삼 놀라움과 흥
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의자에서 일어나 흥미로운 동지의 방 안을 두루 살폈다. 다
른 책들 틈에 그의 시집도 끼어 있었다. 그녀도 그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마치
그녀를 소리내어 부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또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다른 용건으로
여주인인 후퍼 부인을 불러다가 그 젊은 시인에 대한 일들을 물어보았다.
글쎄요, 한 번 만나 보시면 반드시 흥미를 갖게 될 겁니다. 그렇지만 너무 수줍음을 타서
만나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인은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이 그녀에게 이 방의 주인이었던 젊은 시인에 대한 여
러 가지 호기심을 풀어 주었다.
여기서 산 지 오래 되었냐구요? 예, 근 2년 가까이 되었지요. 여기서 묵지 않을 때도 아
마 이 지방의 부드러운 공기가 언제든지 돌아오도록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모양이에
요. 그분은 대부분의 시간을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며 보내고, 별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알고 보면 매우 선량하고 친절하신 분이어서 누구든지 그를 사귀기만 하
면 가까이 지내려고 한답니다. 마음씨 고운 사람이란 별로 흔한 게 아니니까요.
어머, 그분은 마음씨도 곱고 선량하다구요?
그렇구 말구요. 내가 말만 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준답니다. 가끔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요. 건강을 위해 기분전환을 하시면 어떨까요! 하고 말하면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실
그렇다면서 그분은 하루나 이틀 후에는 파리나 노르웨이 또는 그 밖의 지방으로 여행을 다
녀오기도 하지요. 그리고 돌아올 때면 훨씬 생기가 넘치고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때로는 이상한 경우도 있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늦은
밤 한 편의 시를 끝마치고 그것을 외우며 방 안을 거닐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루바닥이 삐
그덕거려서 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만... 그래도 그분과는 매우 사이가
좋답니다.
이것은 그 유명한 시인에 대하여 얘기를 주고받게 된 시초에 지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
런 얘기를 하다가 후퍼 부인은 엘라가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침대
머리맡에 둘러친 커튼 뒤의 벽지에다 연필로 조그맣게 갈겨 쓴 글씨였다.
어디 좀 보여 주세요. 마치밀 부인은 허리를 굽혀 아름다운 얼굴을 벽 가까이 갖다 대
면서 진한 호기심이 일어나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것은 바로 그분이 쓴 시의 초고예요.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시상을 적은 거지요.
하고 후퍼 부인은 그 내막을 잘 알고 있는 듯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대체로 이런 초고
는 지워 버리지만 아직은 읽을 수 있어요. 그분이 밤중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머리에 어떤
시상이 떠오르면 아침에 잊어 버릴까봐 그 종이에 적어 두는 거예요. 여기 씌어진 것 중에
서 일부는 잡지에 발표된 것을 내 눈으로 보았으니까요. 어떤 것은 새로 쓴 거예요. 이 종이
위에 쓴 것은 전에는 보지 못한 거예요. 바로 며칠 전에 써둔 모양이에요.
아, 그래요!
엘라 마치밀은 까닭없이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불현듯 이런 정보를 자기에게 제공해 준
집주인이 이제는 그만 나가 주었으면 싶었다. 그녀는 그 종이 쪽지에 적힌 글을 혼자서 읽
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문학적인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
운 개인적인 흥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는 굉장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감으로 혼자 읽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엘라의 남편은 배멀미가 심한 아내를 함께 데리고 가느니 차라리 혼자서 뱃놀이를
가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엘라를 집에 둔 채 떠난 여행에서
는 풍랑이 대단했다. 그는 단체여행을 떠나는 기선에 몸을 싣고 이처럼 혼자 떠나는 것을
조금도 싫어하지 않았다. 그 배에서는 달밤에 남녀가 쌍쌍이 춤을 추는 장면도 눈에 띄었다.
그가 아내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은 바에 의하면 일행들 중에는 별의별 사람이 많아서 그런
데에 아내를 데리고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업이 잘되어 신이 난 제조업자가 그의 체류지를 떠나 이렇게 바닷바람을 쏘이며 기분을
전환하고 있는 동안에, 엘라의 생활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무척 단조로웠다. 날마다 일정한
시간에 해수욕을 하고 바닷가를 산책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녀는 시에 대한 충동이
다시 일어나, 마음 속에서 솟아오르는 정열에 휩싸여 자기 주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
는지조차 거의 알지 못했다.
그녀는 최근에 나온 트리워의 시집을 줄줄 외울 정도로 애독하고, 자기도 그 시편들과 겨
눌 만한 시를 써 보려고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했던 것이다. 이러한 처
지에서 감히 가까이 접근할 수 없는 그녀의 스승에게서 느끼는 자석같은 애정이, 지적이고
추상적인 면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풍겨왔으므로, 그녀는 좀체로 자기 마음을 종잡을 수 없
었다.
그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의 일상생활의 분위기 속에 젖어 있었으며, 그러한 주위 환
경이 그녀에게 더욱 그의 존재를 의식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녀를 움직이는 것은 자기 감정을 어떻게 해서든지 형상화해 보려는 본능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손에 잡히는 물건이 금방 그녀에게 어떤 뚜렷한 인상을 가져다주지 못하
는 데 대한 안타까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평범한 삶을 즐기는 남편과는 이미 우정 이상의 감정이 없었던 그녀는, 정열적인 자신에
게는 우연히 알게 된 이 기회가 더욱 고상해 보였다.
어느 날 아이들이 벽장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다가 신이 나서 어떤 옷을 꺼냈는데, 후퍼
부인은 그것이 바로 트리워씨의 것이라고 말하며 다시 벽장 못에 걸어둔 일이 있었다. 그러
자 어떤 환상에 사로잡힌 엘라는, 그날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에 주위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벽장문을 열어 젖힌 다음, 거기 걸려있는 옷 중에서 모자가 달린 방수복을
꺼내 입어보았다.
엘리야의 외투야!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것이 나한테 어떤 영감을 주어 그와 시를
견주도록 해줄까? 그는 빛나는 천재니까!
그녀가 이런 생각에 잠길 때면 언제나 눈망울이 젖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모
습을 거울에 비춰 보는 것이었다. 그의 심장이 이 외투 속에서 고동치는 듯했으며, 그의 두
뇌가 이 모자 밑에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것은 그녀로서는 도저히 미치
지 못하는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 같았다. 그와 비교해 볼 때 그녀는 자신의 미약함을 느끼
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러한 자의식이 그녀를 몹시 가슴 아프게 하였다. 옷을 채 벗기도 전
에 문이 열리더니 남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거 무슨 꼴이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옷을 벗었다. 이 벽장 속에 걸려 있더군요. 하고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장난 삼아 입어본 거예요. 이런 장난이라도 해야지 심심해서 죽겠어요.
당신이 늘 집에 계시지 않으니까요.
늘 집에 없다고? 그야...
그녀는 그날 저녁에 집주인과 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시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어온 집주인은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무척 좋아했다.
트리워씨에게 꽤 흥미를 갖고 계신 모양이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방금 전갈이 왔는
데 내일 오후에 들러서 이 방에서 자기가 필요한 책을 좀 찾아가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도
괜찮겠지요!
아, 그럼요!
그럼, 만나보실 의향만 있으시다면 트리워씨를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남모르는 즐거움에 마음을 설레이면서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들었
다.
이튿날 아침에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엘라! 난 당신이 한 말을 곰곰히 생각해 봤소. 내
가 무심했던 것 같군. 오늘은 마침 바람도 없고 바다가 조용할 테니 당신과 함께 요트나 타
러 가고 싶소.
엘라는 남편의 제안에 몹시 당황하고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는 남편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그녀는 준비를 갖추었다. 그렇지만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그녀는 생각에 잠겨 우두커니 서있곤 했다. 그녀는 분명히 그 시인에 대
해 연정을 느끼게 되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못 가겠어. 떠날 수 없
어! 가지 말아야지. 하고 그녀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남편에게 뱃놀이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러자 남편은 이유도
물어보지 않고 무관심하게 나가 버렸다.
그날은 아이들이 모두 해변에 나가고 집에 없었으므로 집안은 온종일 조용했다. 담 너머
로 바라보이는 바다의 부드럽고 끊임없는 파도 소리에 맞춰, 햇빛을 담뿍 받고 있는 덧문이
흔들렸다. 해수욕철에만 머물러온 외국 악단 그린 사일리지언의 연주가, 마을 주민 대부분과
산책하는 사람들을 코버그 하우스 근처에서 모조리 끌어가 버렸다. 이윽고 문에서 노크 소
리가 들려왔다.
마치밀 부인은 하녀의 대답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발소리도 나지 않았으므로 몸이 달았
다. 지금 자기가 앉아 있는 방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벨을 눌렀다. 문간에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아닙니다. 부인... 그분은 이미 가 버렸어요. 제가 나가 보았습니다. 하녀는 이렇게 대답
했다. 곧 후퍼 부인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실망인 걸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트리워씨는
결국 안 오신답니다!
그런데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 같더군요!
아니에요, 그건 어떤 분이 집을 잘못 알고 방을 빌리러 온 겁니다. 실은 깜빡 잊었어요.
트리워씨가 점심때가 되기 전에 쪽지를 보내왔어요. 책이 필요없게 되어 오지 않겠으니 자
기 차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씌어 있더군요.
엘라는 크게 실망했다. 얼마 동안 갈라진 삶 이란 그의 슬픈 시편조차도 읽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바람이 불고 가슴은 조여들었다. 그리고 눈에는 눈물마저 고이게되었다. 아이
들이 양말을 적셔 가지고 엄마 앞에 달려와서 즐겁게 놀던 이야기를 조잘댔지만, 그녀의 귀
에는 한 마디도 들려오지 않았다.
후퍼 부인, 여기 사시는 분의 사진같은 것 혹시 가지신 게 없어요? 그녀는 까닭없이 그
의 이름을 대는 것이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있다마다요, 부인의 침실 난로 선반 위에 있는 사진틀에 있지요.
아니에요, 거기에는 대공비의 사진이 있을 뿐이에요.
그러면 그분사진은 그 안에 있을 거예요. 사진틀 주인은 바로 그분이랍니다. 제가 일부러
사진을 사왔지요. 그분이 가시면서 제게 부탁했답니다. 제발 이 방에 드는 분에게 제 사진
이 눈에 띄지 않게 가려 주세요. 전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게 싫을 뿐 아니라, 그들도 내가
쳐다보는 것을 원치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그분 사진 앞에다 대공, 대공비 사진을 끼웠답
니다. 사진들도 없었지만 황족사진이 어느 개인 사진보다는 장식으로 더 어울릴 게 아니겠
어요. 아마 그분이 아시더라도 상관없을 겁니다. 그분께서는 이 방에 드는 분이 이렇게 아름
다운 귀부인인 줄 미처 몰랐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아마 숨을 생각을 하지 않았겠죠.
그분은 잘 생기셨어요?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미남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
죠.
나도 그렇게 보게 될까요? 그녀가 재차 물었다.
부인께선 그렇게 말하실 겁니다. 어떤 분은 잘 생겼다기보다 매우 날카로운 인상을 준다
고도 하지요. 커다란 눈은 생각에 잠긴 듯하지만 어떤 때는 마치 전깃불이 비치듯이 눈에서
광채가 난답니다.
나이가 얼마나 되었지요?
아마 부인보다는 몇 살 손위일 겁니다. 서른한둘쯤 된 것 같더군요.
엘라는 서른 살을 넘긴 나이였다. 그렇지만 남들 보기엔 그보다 젊어 보였다. 그녀는 때때
로 미숙한 면도 있었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여인으로 첫사랑보다 늦사랑이 더 강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한 나이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적어도 허영심이 많은 여자
라면, 창문에 등을 돌리거나 덧창문을 반쯤 내리지 않고서는 자기를 찾아 온 남자 방문객을
맞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따분한 인생 여정에 접어들 것이다. 그녀는 후퍼 부인이 한 말을
되새겨 보고 다시는 나이에 대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때 전보가 한 장 날아들었다. 남편
에게서 온 것이었다. 남편은 친구들과 함께 요트로 해협을 따라 퍼드머스까지 달려왔으며
다음날까지는 돌아갈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가벼운 식사를 마치고 나서 바닷가에서 아이들과 함께 해가 질 때까지 빈둥거리
며, 무슨 감격적인 일이라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아직도 숨겨져 있는 사진을 생각
했다. 남편이 그날 밤에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자 이 젊은 여인은 섬세한 공상의 사치를 즐
기기 위해 2층으로 뛰어올라가 그 사진을 꺼내 보려다가 참았다. 그녀는 환한 오후의 햇살
보다, 혼자 있는 곳에서 적막함과 엄숙한 바다와 별들이 빚어내는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즐기기 위해 이 흥분을 보류해 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이들을 잠자리에 들게 했다. 그리고 아직 10시도 되지 않았는데 바로 침실로 들
어갔다. 그리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책상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걸터앉아서 트리워
의 가장 달콤한 시를 몇 편 읽기로 했다. 그 다음에 사진틀을 불 앞으로 들고 와서 뒤를 열
고 가장 멋진 것을 꺼내어 눈 앞에 쳐들었다.
그것은 매우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텁수룩한 검은 수염을 기르고 깊숙이 눌러 쓴 모자가
앞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아까 집주인이 말하던 커다란 검은 눈에는 무한한 슬픔이 서려 있
었다. 그리고 눈은 잘생긴 눈썹 밑에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거기 나타나 있
는 미래에 대해 조금도 기뻐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엘라는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그토록 잔인하게 몇 번이나
내 빛을 잃게 한 것이 당신이에요.
그녀는 오랫동안 그 사진을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두 눈에 눈물을 글
썽이며 입으로 딱딱한 마분지를 잘근잘근 씹는 것이었다. 그리고 발작적으로 명랑하게 웃고
는 눈물을 닦아냈다.
남편과 세 아이를 거느린 여인이 이렇게 낯모르는 남자에게 마음이 끌린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짓인가 하고 그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니다. 그는 모르는 남자가 아닌 것이
다. 그녀는 그의 감정과 생각을 자기 자신의 그것으로 알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과 감정은 분명히 그녀의 남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그녀의 생각이나 감정
과 꼭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가족을 부양해야 할 가장으로 생각한다면 그녀로서는 오히
려 남편을 다행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사실 그이만이 나와 가장 가까운 거야. 비록 한 번도 만나보진 못했지만 윌보다는 그이
가 훨씬 나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어.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침대 곁에 있는 테이블 위에 그의 책과 사진을 놓고서 베개에 몸을 기대고는 때때
로 로버트 트리워의 시를 읽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며 잘 되었다고 생각되는 시편
들을 표시해 두었다가 다시 읽곤 했다.
시집을 치우고 그의 사진을 시트 위에 세워 놓고는, 누워서 바라보며 그를 감상하기도 했
다. 거의 지워진 베갯머리 윗벽에 연필로 쓰여진 글씨들을 촛불을 들고 살펴보기도 하였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어구며 연수 그리고 운율이며 시의 첫 구절이나
중간 구절이 적혀 있는가 하면, 머리에 떠오른 생각들도 적혀 있었다. 이것들이 마치 셸리의
단편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것은 비록 매우 짧은 몇 마디였지만, 어찌나 강렬하고
달콤하던지 가슴을 너무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그의 입김이 그를 둘러싸고 있던 벽에서, 지금은 오히려 그녀를 둘
러싸듯이 생각되었고, 마치 그녀의 볼을 어루만지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수없이 이렇게 손을 들었을 것이다. 손에 연필을 들고 이처럼 비스듬히 적어 놓은
것을 보면 아마도 팔을 이렇게 뻗고 쓴 게 틀림없을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보다 더 진실한 모습/영원을 기르고
이와 같이 적혀 있는 시인의 시에는 틀림없이 비평의 찬서리를 염려하지 않는 어둠의 정
적 속에서 떠오른 시상의 발로였을 것이다.
아마 이것들은 달빛이나 등불 아래서 희미하게 먼동이 터 오르는 새벽녘에 쓴 것이지, 환
히 밝은 대낮에 쓴 글은 아닐 것이다. 도망치려는 시상을 붙잡았을 때 그의 팔이 놓여 있던
곳에, 지금은 자기의 머리가 얹혀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에게는 맑은 하늘과도 같은 그의 넋
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그의 가슴 속 깊이 내려앉아 그 속삭임을 들으며 잠들어 있는 것이
다.
그녀가 이와 같이 꿈속에서 보내고 있을 때 층계를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
이 바로 바깥 복도에까지 왔던 것이다.
엘라, 어디 있어요?
그녀는 자기 처사가 남편에게 들켜서는 안되겠다는 본능적인 생각에서 그 사진을 베개 밑
에 슬쩍 감추었다.
그러자 남편은 저녁을 배불리 먹은 사람답게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이거 실례했소. 머리가 아파요? 내가 방해를 했나 보군. 하고 윌리엄 마치밀이 말했다.
아녜요. 머리가 아픈 게 아녜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웬일로 이렇게 일찍 돌아오셨어
요?
더 있다 올 수도 있었지만, 또 하루를 허비하고 싶지 않았어. 내일은 다른 데로 가야겠
소.
식당으로 내려갈까요?
아니, 나도 이젠 피곤하군. 저녁은 잘 먹었소. 난 바로 자는 게 좋겠어. 내일 아침에는 될
수 있으면 여섯 시에 일어나야겠는데, 내가 그렇게 일찍 일어나도 당신에게 방해가 되지 않
겠소? 당신이 깨기 훨씬 전에 일어나야 할 텐데.
그는 이렇게 말을 마치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그의 동작을 주시하면서 그
사진을 가만히 더 안으로 밀어 넣어 보이지 않게 하였다.
정말 몸이 불편한 것 아니오? 그는 이렇게 물으면서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아녜요. 단지 기분이 좀 언짢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괜찮지만. 그는 몸을 굽혀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오늘 밤 당신하고 같이 지
내고 싶소.
이튿날 아침 마치밀은 6시에 눈을 떴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하품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머리 밑의 딱딱한 이건 대체 뭘까?
그는 아내가 자고 있는 줄 알고 베개 밑을 뒤져서 무엇인가를 꺼내었다.
그녀는 반쯤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그것이 트리워 씨의 사진임을 알게 되었다.
원 세상에! 남편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뭔데 그러세요? 아내가 물었다.
오오, 당신도 잠이 깨었소? 하하하!
왜 그렇게 웃으세요?
웬 놈팽이의 사진이야. 우리 집주인의 친굴 테지. 그런데 이 사진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까? 자리를 펼 때 선반을 건드려서 위에서 떨어졌나보군!
어제 내가 본 사진인데, 그때 들어간 모양이군요.
오오, 그럼 이 작자가 당신의 친구요? 맙소사!
엘라는 자기가 사모하는 남자에 대한 남편의 조소를 견디며 잠자코 듣고만 있을 수 없었
다. 똑똑한 사람이에요.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귀에도 쑥스러울 정도로
들렸지만, 저절로 입 밖에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유망한 시인이에요.
나는 아직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지만 우리가 들기 전에 이 방 두 개를 쓰고 있었나봐요.
그걸 어떻게 아나,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다면서?
후퍼 부인이 그 사진을 저한테 보여 주면서 말했어요.
아, 그래? 난 그만 가야겠군. 오늘은 일찍 돌아오게 될 거요. 함께 가지 못해 미안하오.
아이들이 물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그날 마치밀 부인은 후퍼 부인에게 트리워 씨가 언제 올 것 같으냐고 물어보았다.
다음 주에 돌아와서 손님들이 떠날 때까지 이 근처에 있는 친구 집에서 계실 거예요. 아
무튼 오시는 건 틀림없어요.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마치밀은 오후에 일찌감치 돌아왔다. 그는 자기가 없는 동안에 보내 온 편지들을 뜯어보
고 갑자기 가족들과 함께 당초의 계획보다 일주일 앞당겨서, 그러니까 사흘 후에 떠나야겠
다고 말했다.
일주일쯤 더 머물러 있어도 되잖아요? 그녀가 남편에게 애원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전 여기가 좋아요.
그렇지만 난 싫은 걸. 이젠 지루하기도 하고.
그럼 나하고 아이들은 남겨 두고 혼자 가세요.
엘라, 당신도 고집이 어지간하구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한단 말이오? 그럼 또 당신을 데
리러 와야 하지 않겠소. 그러지 말고 함께 돌아갑시다. 얼마 후에 노스 웨일즈나 프라이턴에
가서 지냅시다. 아직도 사흘은 더 남아 있으니까.
그녀는 자기와 맞서는 남편의 말주변에 대해서는 절망적인 찬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
다.
이제 완전히 매혹되어 버린 남자를 만나보지 못하는 것이 그녀의 운명인 듯이 보였다. 그
러나 그녀는 끝까지 그를 만나보기로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그녀는 트리워가 맞은편 섬의
번화가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머물러 있다는 소식을 집주인으로부터 전해들은 다음
날 오후에, 근처의 부두에서 배를 타고 그리로 건너가 보았다.
그것은 얼마나 허황된 여행이었던가! 그녀는 그 집 위치를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그
집인 듯 싶어 길가는 사람들보고 저 집에 시인이 살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저마다
모른다는 것이었다. 설사 그가 그곳에 산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방문할 수 있겠는가?
물론 세상에는 그런 일을 얼마든지 해치울 만한 배짱이 있는 여자도 있겠지만, 그녀에게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불쑥 찾아가면 그는 미친 여자라고 생각할 것이 아닌가? 또한 이쪽에
서 그더러 찾아와 달라고 청할 수도 있겠으나, 그녀에게는 그럴 만한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바닷가의 언덕을 서성거리다 가족들이 기다리
지 않도록 저녁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뜻밖에도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원하면 나중에 자기가 데리러 오지 않는다는 조건
을 걸고, 이번 주 마지막 날까지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 머물러 있어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
는 체류기간이 연장되어 무척 기뻤으나 그런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이튿날 아침에 마치밀은 혼자서 떠났다.
그런데 트리워는 그 주가 다 지나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토요일 아침에 그녀는 그렇게 정열을 불태우던 고장을 남아있던 가족들과 같이 떠났다.
쓸쓸하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기차의 뜨거운 좌석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이고, 뜨거운 햇살
이 비쳐왔다. 끝없이 뻗은 길에 전선이 지저분하게 줄을 지어 그녀의 길동무가 될 뿐이었다.
창 밖의 짙푸른 수평선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 그녀가 머물던 시인의 집도 사라
져 버렸다. 너무나도 마음이 우울해 책을 읽으려고 하였지만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이었다.
마치밀씨의 사업은 날로 번창해 갔다. 그리하여 그의 가족은 커다란 새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 집은 그가 사업을 하는 중부 도시에서 2, 3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대지도
상당히 넓었다.
교외의 생활이 으레 그렇듯이 어떤 계절에는 몹시 쓸쓸하였다. 그리하여 엘라가 그곳에서
서정적이고 비탄에 사로잡힌 시를 쓰기에는 최적의 장소가 되었다.
그녀는 집에 돌아오자 곧 애독하고 있는 최신 잡지에 트리워씨의 시가 실려 있는 것을 발
견하였다. 그것은 그녀가 소렌트시로 피서를 가기 직전에 쓴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벽
에 연필로 적어 놓았던 그 구절이 들어 있었다. 후퍼 부인이 벽에 적어 놓은 것이 최근의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었다.
엘라는 견딜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혀 발작적으로 펜을 들어 동료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도 같은 길을 걸으면서 피나는 노력을 하였지만 헛수고로 그친 데 비해, 당신은 영혼을
움직이는 시상과 운율을 잘 표현한 데 대해 경의를 표한다는, 존 아이비라는 이름으로 축하
의 편지를 띄웠다.
며칠 후에 회답이 왔지만 그것은 그녀의 기대에 몹시 어긋난 것이었다. 그는 겸손하고 짤
막한 문장을 통해 자기는 아이비씨의 시를 잘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 전도가 매우 촉망되는
시를 그 이름으로 발표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이비씨와 편지로 사귀
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한다면서, 앞으로 그 이름으로 써내는 시에 큰 기대와 관심을 갖고 보
겠다는 사연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편지는 겉으로는 남자의 편지 같았지만, 다소 여리고 소심한 데가 있는 것은 사실
이었다. 그러므로 트리워씨는 아랫사람을 대하듯이 답장을 보내왔다. 그렇지만 그게 무슨 상
관이란 말인가? 그는 분명히 답장을 보내오지 않았는가! 이것은 그녀가 머물고 있던 바로
그 방에 돌아가서 그의 손으로 직접 써 보낸 편지인 것이다.
그들의 편지 왕래는 두 달 남짓 계속되었다. 엘라 마치밀은 가끔 자기가 쓴 시구 가운데
서 가장 잘 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을 골라서 적어 보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받아보기는
하였지만 자세히 읽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시를 회신에 적어 보내는 일
도 전혀 없었다. 엘라는 트리워가 자기를 동성으로 알고 이렇게 행동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훨씬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그같은 편지 왕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녀는 몹시 안타까운 나머지 그가
자기를 한 번 보기만 하면 사태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넌지시 비추었다. 기회가 있었다
면 그녀는 주저치 않고 자기가 여자라는 것을 상대방에게 밝혀서 사태를 일변시켰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 지방과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신문의 편집인인 남편 친구가, 어느 날 저녁에 그들 내
외와 식사를 같이 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그 시인에게 미치자, 그는 화가인 자기의 아우가
트리워씨의 친구라는 말을 하며, 그 사람은 지금 웨일스에 함께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엘라는 이 편집인의 아우라는 사람도 좀 알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에 그녀는 편지를 써서
화가에게 돌아가는 길에 자기 집에 들러서 며칠 동안 묵어가라는 내용으로 초대를 했다. 친
구인 트리워씨도 자기가 사귀고 싶어하는 사람이므로 가능하다면 함께 와 달라고 요청했다.
며칠 후에 답장이 왔다. 자기와 트리워는 남부 지방으로 가는 길에 그녀의 초청에 응하겠
다고 말하고, 이 초대를 매우 고맙고 기쁘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문하는 날짜는
다음 주 수요일이라고 덧붙였다.
엘라는 자못 생기가 넘쳐흘렀다. 자기가 계획한 일이 성사된 것이다. 그녀가 사모하면서도
아직까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남자가 오게 되는 것이다.
보라, 그는 우리 집 담 너머에 서 있다. 그는 창을 바라본다. 창살 사이로 그 모습을 나타
낸다. 하고 그녀는 열광적으로 읊어 내려갔다. 그리고 겨울은 가고 비가 그쳤다. 이 땅에도
꽃이 만발하여 새들이 찾아와 노래할 때가 되었다. 이 땅 위에 거북이의 숨쉬는 소리가 들
려온다.
이젠 그가 묵고 식사하는 데 대한 여러 가지 배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는 들뜬
마음으로 모든 준비를 마치고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그날이 오기를 고대했다.
오후 5시쯤 초인종 소리와 함께 편집인의 동생 목소리가 현관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여류
시인이므로, 아니 그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엘라는 값진 옷감으로 고대 그리
스의 카이톤이라는 속옷과 비슷한 그 당시에 유행하던 드레스를 만들어 입었다. 지나치게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스타일이 그 당시의 예술적인 기질을 가진 여인이나 낭만적인 여인들
이 많이 애용하는 풍이었다. 엘라가 지난번 런던에 갔을 때 본드가에 있는 의상실에서 지은
것이었다.
그녀는 들어오는 손님의 뒤를 넘겨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대체 로버트 트리워는 어디 있단 말인가?
아, 정말 미안합니다. 화가는 인사를 나눈 다음에 이렇게 말을 계속했다. 트리워라는
친구는 정말 묘한 사람입니다. 마치밀 부인, 처음에는 오겠다고 하더니 또다시 못 오겠다고
하는군요. 배낭을 메고 먼지를 뒤집어쓰며 수 마일을 걸어왔더니만,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겠
다는군요.
그분, 그분은 오시지 않나요?
네, 안 옵니다. 자기 대신 제게 사과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그녀는 아랫입술이 몹시 떨려 제대로 말도 못했다. 그녀는 실망과 낭패감 속에서 어디로
도망이라도 쳐서 눈이 붓도록 울고 싶었다.
지금 막 저 건너 큰길에서 헤어졌습니다.
뭐요? 그렇다면 우리 집 문 앞을 지나갔단 말씀이군요!
네, 우리가 문 앞까지 왔을 때, 정말 훌륭한 문이더군요. 제가 보아온 현대식 철문 중에
서 가장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거기까지 와서 걸음을 멈추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
친구는 작별을 하며 돌아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지요. 사실 지금 저도 기분이 다소 우울해
서 어떤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이 다시 없는 호인이고 매우 다정한 친구입니다
만, 가끔 안정을 잃고 침통해 할 때가 있지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요. 그
사람의 시는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로 너무 에로틱하고 정열적인 면이 있지요. 그는 어제 발
간된 모 잡지에서 무지막지한 혹평을 받았답니다. 정거장에서 우연히 그것을 읽게 되었지요.
아마 부인도 읽으셨겠지요?
아녜요.
읽지 않기를 잘 하셨습니다. 생각할 가치도 없는 글이죠. 그 잡지를 읽는 독자 중에 옹졸
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쓴 글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는 그 글을 읽
고 나자 완전히 마음의 평정을 잃었습니다. 그에게 충격을 준 것은 중상모략입니다. 공정한
비판은 받아 마땅하지만, 공연한 중상모략과 거짓말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거였어요. 트
리워의 약점은 바로 그런 데 있답니다. 그는 혼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사교계나 재계의
잡음 속에서 살아왔다면 아무렇지 않을 말에도 마음에 큰 상처를 받지요. 그래서 이곳에 오
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어요. 밖에서 보기에도 모두 최신식 건물인데다, 이거 실례가 될지 모
르겠습니다만 돈냄새가 너무 풍긴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이곳에 오셨더라면 동지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셨을 텐데! 혹시 그 주소로
띄운 편지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못 들으셨어요?
예, 그 말은 들었습니다. 존 아이비라고요. 아마 그때 그곳에 와 있던 부인의 일가일 거
라고 말하더군요.
그분께서 아이비에 대한 아무런 논평도 없으셨어요?
예, 아이비라는 사람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없는 것 같더군요.
로버트 트리워는 그녀의 집이나 시나 그것을 쓴 사람에게 전혀 흥미를 갖지 않았다는 것
이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물러나기가 바쁘게 아이들에게 달려가서 그들에게 마구 키스를
퍼부으며 상한 감정을 씻어 버리려고 애를 썼지만, 아이들마저 그녀의 남편처럼 평범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었으므로 소름이 끼치도록 혐오감만 느꼈다.
우둔하고 순진한 그 화가는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은 자기가 아니고 트리워 뿐이라는 것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이 방문을 매우 즐겁게 생각했으며 엘라
의 남편과 어울려 다니기를 매우 좋아했다. 엘라의 남편도 그를 매우 좋아했다. 그리하여 그
근처를 모조리 구경시켜 주었지만 그들 모두는 엘라의 상한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화가가 떠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어느 날 아침에, 그녀는 2층에 홀로 앉아서 방금 배
달된 런던 신문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하였다.
시인의 자살 - 장래가 촉망되는 서정시인 중에 한 사람으로 최근 여러 해 동안 널리 알
려진 로버트 트리워씨가, 지난 토요일 밤에 소렌트시에 있는 그의 숙소에서 권총으로 관자
놀이를 쏴 자살을 했다. 트리워씨는 독자들도 기억하리라고 생각되는 새로운 시집을 최근에
발표하여 지금보다 훨씬 광범위한 독자들의 주목을 끌었었다. 미지의 여성에게 드리는 서정
시 라는 제목으로 엮은 이 시집은, 대체로 정열적인 내용으로서 그것이 끼치는 비상한 감정
의 폭에 대해 이미 본지에서는 칭송을 아끼지 않았지만, 이 시집이 모 지의 신랄한 비평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확실한 증거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문제의 잡지가 그의 책
상 위에 놓여 있었으며, 그와 같은 비평이 지상에 실린 이후로 그가 매우 침울했다는 사실
로 미루어 보아, 그 글이 비극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수사 결과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었으며, 멀리 있는 친구에게 남긴 다음과 같은 편지 내
용도 실려 있었다.
친애하는 벗에게... 이 편지가 미처 자네 손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이미 내 주위의 것을
보고 듣고 알게 되는 괴로움을 면하고 있을 걸세. 나는 나의 이같은 처사가 건전하고 논리
적이라는 것을 장담할 수 있지만, 구태여 자네에게 구구한 설명을 늘어놓아 자네를 번거롭
게 만들고 싶지는 않네. 만약 하느님께서 내게 어머니나 누이 그 밖에 날 몹시 아껴주는 여
성을 보내 주셨더라면, 나는 내 생명을 더 연장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네. 그러
나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오랫동안 그런 여인을 동경해 왔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고, 손에
잡히지 않은 여인은 내 마지막 시집의 영감으로 군림했다네. 세상에서는 구구한 말들이 떠
돌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환상의 여인에 불과했으며, 현실적인 여인을 가리킨 건 아니
었네. 그녀는 끝내 나타나 주지 않았으며 만날 수 없었다네. 나는 어느 여인이든 실제로 나
를 학대하거나 사랑하여 그것이 내 죽음과 관련이 되었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이 점을
분명히 밝혀 두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했네. 하숙집 여주인에게 폐를 끼치게 되어 미안하
다고 말해주게. 그렇지만 내가 그 방에 있었다는 것은 아마 곧 잊어버리게 될 걸세. 모든 비
용을 치를 만한 돈은 은행에 예금되어 있네. - R. 트리워
엘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이 기사에 잠시 동안 멍청하니 앉아 있다가 옆방으로 달려가서
침대에 얼굴을 묻고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슬픔은 그녀를 수천 조각으로 부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 시간 이상이나 숨막힐 듯한 슬픔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이렇게 중얼거렸다.
오, 만약 그가 나를 알기만 하였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내가 그를 만나기만 했다면, 그
리하여 그의 뜨거운 이마에 내 손을 얹고 키스를 하고 내가 그를 얼마나 사모하는가를 알려
주었다면, 그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치나 비방도 달게 받아들이고 그를 위하여 모든 걸 바
칠 수 있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아마 그 귀중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안
돼, 그건 용납될 수 없는 일이야. 신의 무서운 질투로 행복은 그와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
던 거야!
모든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영영 만날 가망이 없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영원히
현실로 되돌아올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있을 법도 하겠지만 영원히 사라진/시간/삭막한 인생에/남녀의 가슴이 간직하고 있는/시
간
마치 아직도 그녀의 환상 속에서 그 시간은 거의 보이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소렌트
시에 있는 그의 숙소 여주인에게 제3자의입장에서 편지를 띄웠다. 그녀는 후퍼 부인에게, 신
문에서 그 시인의 죽음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며, 후퍼 부인도 알다시피 코버그 하우스에 머
물고 있는 동안에 트리워 씨에게 커다란 흥미를 갖고 있던 관계로, 그의 관 뚜껑을 덮기 전
에 그의 머리카락을 조금만 얻어서 보내주면, 그것을 영원한 기념으로 삼겠다고 했다. 그리
고 사진틀에 있던 사진도 함께 보내 주었으면 고맙겠다고 매우 상냥한 어조로 부탁한 다음
에, 1파운드의 우편어음을 동봉했다.
회신 우편으로 요청한 물건이 든 편지가 왔다. 엘라는 사진을 받아들자 눈물을 흘리며, 그
것을 비밀 서랍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흰 리본으로 매어 고이 품속에 간직하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끔씩 꺼내어 입을 맞추었다.
대체 그게 뭐요? 한 번은 그녀가 그와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남편이 보고 신문에서
눈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뭘 보고 우는 거요? 머리카락을? 대체 누구의 머리칼이오?
죽었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누가?
당신이 당장 밝히라고 하지 않는다면 지금 대답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 속에
는 침통한 빛이 서려 있었다.
아, 그래!
대답하지 않아 불쾌하세요? 내가 언젠가는 알려 드릴게요.
아무 상관도 없다니까.
그는 분명한 곡조도 없는 휘파람을 불면서 사라져 버렸다. 그렇지만 그는 공장으로 나가
자 다시 그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도 소렌트시에서 자신들이 묵고 있던 집에서 최근에
자살극이 벌어진 기사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의 손에 그의 시집이 들려 있는 것을 보
았으며, 그들이 소렌트시에서 그 집에 방을 빌렸을 때 집주인으로부터 트리워에 대한 이야
기를 단편적으로 들은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외쳤다. 물론
그 녀석일 거야! 대체 그 녀석을 무슨 재주로 알게 되었담. 여자란 정말로 교활한 동물이란
말이야!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일상 업무를 처리해 나갔다. 반면 집에 있는 엘라는 비
장한 결심을 하고 있었다. 후퍼 부인은 머리카락과 사진을 보내면서 그의 장례식 날짜를 기
별해 주었다. 시간이 가면서 이 정많은 여자는 그가 어디에 묻히는지도 알고 싶었다.
그녀는 남편이나 그밖의 어떠한 사람도 그녀의 괴팍한 성격을 어떻게 생각하건 전혀 개의
치 않게 되었다. 그녀는 오늘 오후에 외출해서 내일 아침에나 돌아오겠다는 간단한 쪽지만
책상 위에 남겨 두고, 안팎 하인들에게 같은 말을 당부하고 나서 걸어서 집을 나섰다.
마치밀씨는 오후에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모든 하인들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모는 그를 조용한 방으로 안내하며 지난 며칠 동안 부인의 태도로 보아 부인은 너무나 큰
슬픔에 잠겨 있었으므로, 혹시 투신자살이라도 하러 나선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근심스럽
게 말했다. 마치밀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내가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집안 사람들에게 행방은 밝히지 않았지만, 자기를 기다리느라고 밤을 새우지는 말라
고 당부하고 나서 집을 나섰다. 그는 정거장으로 달려가 소렌트행 차표를 샀다.
그는 급행을 타고 나섰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위가 컴컴했다. 그는 아내가 자
기보다 먼저 떠났다면 완행열차밖에 없으므로 그녀가 자기보다 그다지 빨리 도착하지는 못
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렌트시는 휴가철이 아니었으므로 길거리는 몹시 쓸쓸하고 관광마차도 요금이 저렴했다.
그는 묘지로 가는 길을 물어 곧 그곳에 다다랐다. 문이 잠겨 있었다. 묘지 관리인이 경내에
아무도 없다고 말하면서도 문을 열어주었다.
시간은 별로 늦지 않았으나 주위는 캄캄했다. 그는 관리인의 설명을 들은 대로 그날 매장
한 두 무덤이 있는 구획으로 길을 따라 꾸불꾸불 더듬어 올라갔다. 그는 풀뿌리에 발끝을
채이기도 하고, 말뚝에 걸리기도 하면서 가끔 몸을 구부리고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나 두
루 살폈다.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걸음을 옮겨 길이 난 지점에 이르자, 새로 묻은 무
덤 곁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도 발소리를 듣고 땅에서 벌떡 일어섰다.
엘라!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그는 격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집에서 뛰쳐나오다니,
나는 그런 일은 상상도 못했소! 그렇다고 내가 이 가엾은 남자를 질투하자는 게 아니오. 그
러나 결혼을 해 아이를 셋씩이나 낳고, 머지 않아 넷째를 낳게 될 당신같은 여인이, 죽은 옛
애인에게 정신을 빼앗긴다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요! 당신은 지금 갇혀 있다는 것을 알
고 있소? 아마 밤새도록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요.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 그와 당신이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기를 바라오.
그런 모욕적인 말씀은 입에 담지 마세요, 윌.
난 이같은 꼴은 다시는 당하지 않을 거요. 듣고 있소? 앞으로 명심하기 바라오!
알겠어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는 그녀의 팔을 끼고 묘지 밖으로 나갔다. 그렇지만 그날 밤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초라한 모습을 남의 눈에 띄게 하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그는 아내를 정거장 근처에
있는 허술한 카페로 데리고 갔다. 그리하여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곳에서 떠났다.
말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결혼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불협화음의 일종이라는 생각에서 그
들은 한 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고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오가 되어서야 집에 도착
하였다.
여러 달이 지나갔다. 두 사람은 아무도 감히 이 일에 대하여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
러나 엘라는 곧잘 슬픔에 잠기고 불안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리고 슬픔으로 말미암
아 몸은 날로 수척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에겐 네 번째 해산의 괴로움을 겪어야할 날이
점점 다가왔다. 그렇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이겨낼 것 같지 않아요. 어느 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원 그런 철없는 소리가 어디 있소? 지금까지 잘 견뎌 왔는데 이번이라고 무슨 일이 있을
라구?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죽으리라는 걸 거의 확신하고 있어요. 엘라와 프
랭크 그리고 타이니만 아니라면 차라리 그것도 괜찮겠어요.
나는 어떡허구?
당신이야 곧바로 새로운 여자를 구하겠지요. 그녀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마땅히 그렇게 할 권리가 있지 않아요? 나는 그것을 인정하니까요.
엘라, 당신은 아직도 그... 시 짓는 친군가 하는 사람을 못 잊는 게 아니요?
그녀는 남편의 그 같은 말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이번에는 영영
일어나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거듭 말했다. 뭔가가 그것을 암시하고 있어요.
이같은 생각은 흔히 그렇듯이 매우 상서롭지 못한 일의 시초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6
주가 지난 5월 어느 날 맥도 없고 핏기도 없는 그녀는 숨을 한 번 몰아 쉰 다음 더는 계속
할 힘도 없이 한 생명을 낳았다. 그 대신에 건강하고 활기찼던 그녀는 점점 쇠약해져 갔다.
그녀는 임종하기 전 마치밀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윌, 당신도 아시겠지만 우리가 소렌트
시에 갔을 때 일어난 일을 숨김없이 고백하고 싶었어요. 아마 내가 무엇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떻게 감히 당신을, 남편인 당신을 그렇게 잊어버릴 수 있었는지 나도 도무지
알 수 없어요. 그런데 나는 일종의 병에 걸려 있었던 거예요. 당신은 나에게 친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으며, 당신은 나의 지적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게
되었지요. 그렇지만 그 사람은 나와 공감할 뿐 아니라 아니 훨씬 더 나를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아마 나는 좀더 나는 제대로 이해해 주는 사람을 원하고 있었나봐요.
그녀는 기진맥진하여 그 이상 말을 계속하지 못하고 몇 시간 후에 갑자기 허탈상태에 빠
지더니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하여 시인에 대한 감정을 더 이상 남편에게 말하지
못했다.
윌리엄 마치밀은 지난 날 일에 대해서 질투로 말미암아 마음이 산란해지지는 않았다. 그
리고 이미 죽어 버린, 다시는 자기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칠 힘이 없게 된 남자에 대한 애정
고백을, 아내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죽은 지 여러 해가 지난 후, 재혼할 여인을 집안에 맞아들이기 전에 정리
할 것들을 뒤적이고 있다가 우연히 봉투 속에 든 한 줌의 머리털과 전처의 필적으로 죽은
시인의 사진 뒤에 날짜가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소렌트시에서 지내고
있을 때의 날짜였다.
마치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그 머리칼과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신
의 탄생으로 인해 어머니의 죽음을 초래하게 된 어린 사내아이는 지금 아장아장 걸어다니면
서 한참 수선을 부렸다. 그는 아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테이블 위에 사진을 세워 놓은 다
음, 머리털을 아이의 머리털과 견주면서 아이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사진과 비교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자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엘라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남자와 비슷한 모습
을 발견했다.
그 시인의 꿈을 꾸는 듯한 독특한 표정이 마치 어떤 고정된 관념처럼 어린아이 얼굴에 깃
들어 있었으며, 머리카락도 그와 꼭 같았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까? 하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놈하고 하숙집에서
놀아난 게 사실이군! 어디 봐, 날짜가 8월 두번째 주라. 5월 세번째 주고... 그렇군... 그래. 이
자식아! 저리가, 넌 내 자식이 아니야.
토머스 하디(1840-1928): 영국의 소설가이며 시인. 도싯 주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나 중
등교육을 받고 건축사무소에 들어갔으나 후에 문필 활동을 했다. 고향인 웨스트 석세스 지
방을 무대로 한 소설을 즐겨 썼는데, 그는 작품 속에서 당시 영국 사회의 인습과 편협한 종
교인의 태도를 공격하고 폭로했다. 주요 작품으로 귀향 , 주드 , 테스 등이 있다.
작은이의 소망이야기
토머스 하디 외
없었던 이야기
화창한 6월 어느 날, 그러나 그 날이 화창했던 것은 열씨 온도계(빙점과 비등점 사이를
80도로 나눈 온도계)로 28도였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그 화창한 6월 어느 날은 어디나 할
것 없이 더웠다. 바로 얼마 전에 벤 건초 무더기가 있는 정원 속의 풀밭은 더더욱 더웠다.
왜냐하면 그 곳은 벚나무 숲이 무성해서 바람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온 세상이 거의
잠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양껏 먹고 점심 식사 후에 낮잠을 즐겼으며, 새들은 입을 다물어 버렸고, 많은
벌레들까지도 더위에서 몸을 피하고 있었다. 가축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큰 가축들이
나 작은 가축들이나 모두 처마 밑에 숨어 버렸던 것이다.
개는 스스로 헛간 밑에 구덩이를 파고 드러누웠다. 그리고 눈을 반쯤 감고 거의 반 아르
쉰(제정 러시아의 길이 단위로 1아르쉰은 0.711미터)이나 되는 장밋빛 혀를 내밀며 숨을 헐
떡이고 있었다. 그 개는 때때로 치명적인 더위에서 오는 권태 때문에 심한 하품을 했다. 그
리고 그때마다 낑낑하는 가냘픈 비명까지 질러대는 것이었다. 돼지들은 이미 열세 마리나
되는 새끼 돼지들을 데리고 강가로 가서 시꺼먼 진흙탕 속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래서 진흙
속에서는 심한 콧바람을 불어대는 두 개의 구멍이 뚫린 돼지의 코 끝과, 진흙을 흠뻑 뒤집
어 쓴 길다란 돼지의 둥글고 축 늘어진 귀가 보일 뿐이었다. 다만 암탉만은 더위에 아랑곳
하지 않고 부엌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면한 마른 땅을 발로 허적거리면서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들은 그곳에 한 톨의 낱알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
나 그것이 수탉에게는 틀림없이 언짢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이따금씩 바보 같은 표정을 지
으며 있는 소리를 다 내서, 이게 무슨 추태람! 하고 소리를 질렀으니 말이다.
하여튼 우리는 무더운 풀밭을 떠났다. 그러나 그 풀밭에는 잠들지 않은 주인네들이 한 패
가 앉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늙은 밤색 말은 마부인 안톤의 채찍이 자기 옆구리에 날아들까 두려워하면서 건
초 무더기를 헤치고 있었고, 어떤 나비의 애벌레도 역시 앉아 있지는 않았다. 차라리 엎드려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벚나무 밑에는 몸집은 작지만 매우 진지한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달팽이, 쇠똥구리, 도마뱀, 그리고 앞에서 말한 애벌레 따위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귀뚜라미가 달려왔다. 옆에는 늙은 밤색 말이 암흑색 털을 내민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말을 엿듣고 서 있었다. 그리고 말 등에는 파리 두 마리가 앉아 있었다.
모임은 점잖았다. 그러나 상당히 활기띤 언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각자가 자신의 의
견과 개성이 강했기 때문에 아무도 다른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나의 생각으로는, 하고 쇠똥구리가 말했다. 견실한 동물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자손
을 생각해야 합니다. 생활이란 다음 세대를 위한 노동입니다. 자연에 의해 부과된 의무를 스
스로 수행하는 자는 확고한 지반 위에 서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
고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는 책임을 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보십시오. 누가 나보다 더
노동을 하고 있습니까? 누가 그런 무거운 단자를, 나와 닮은 새로운 쇠똥구리가 자라날 수
있도록 내가 두엄으로 그토록 잘 만들어낸 단자를,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굴리고 있습니까?
그리고 새로운 쇠똥구리가 이 세상에 나타날 때에 그렇다. 나는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
을 모두 해 버렸다 고 양심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자가 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동
이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여보게, 이 친구야. 자네는 노동과 함께 꺼져 버리게! 하고 바로 쇠똥구리가 말하고 있을
때에, 더위를 무릅쓰고 무시무시하게 큰 마른 줄기 한 조각을 끌고 온 개미가 말했다. 그는
잠깐 멈추고 뒷다리 넷으로 앉아 앞다리 둘로 땀에 흠뻑 젖은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그래, 나도 일을 하고 있어. 그것도 자네보다 좀 더하는 편이지. 그러나 자네는 자신을
위해서 일하고 있지 않나, 혹은 자기 자손을 위해서라고 말해도 마찬가지야. 모두가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아... 자네가 발로 통나무를 굴려보았다면 그때에는 나처럼 될 걸세. 무엇이 이
더위 속에서까지 힘이 빠져 녹초가 되도록 나에게 일을 시키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해도 고
맙다는 말을 하는 자는 아무도 없어. 우리는 불행한 일개미야. 밤낮 일만 하는데 대체 무엇
을 가지고 우리의 생활이 아름답다는 말인가? 내 팔자야...
여보세요. 쇠똥구리님, 당신은 너무나 붙임성이 없으시고 그리고 개미님, 당신은 지나치
게 생활을 우울하게 보시네요. 하고 귀뚜라미가 대꾸했다. 아니예요, 쇠똥구리님. 나는 역시
칙칙 소리를 내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것이 좋아요.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양심의 가
책 따위는 받지 않아요! 그리고 또 당신은 도마뱀 아주머니가 내놓은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도 언급하지 않으셨어요. 그 분은 세계란 무엇인가? 하고 물으셨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자신
의 두엄 단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셨어요. 이건 실례라고도 할 수 있지요. 세계는 세계니까
요.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매우 좋은 거라고 봐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우리를 위한 이런 풀
도 있고, 태양도 있고, 또 산도 바람도 있으니 말이에요. 그리고 그건 매우 큰 거예요! 당신
들이 여기서 이런 나무 사이에 살고 있으면 세계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어요. 나는 들판에 있을 때는 때때로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높이 뛰어 오르곤 해요. 정
말이에요. 굉장한 높이까지 올라가요. 그리고 그 높은 곳에서 보고 나는 세계가 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정말이야. 하고 잠자코 듣고 있던 밤색 말이 거들었다. 그러나 너희들은 모두 내가 평생
보아온 것의 1백분의 1도 볼 수 없어. 베르스타(1베르스타는 1.077킬로미터)가 무언지 너희
는 모르니 가엾은 일이야... 여기서 1베르스타만 가면 루빠레프카라는 마을이 있어. 나는 매
일 통을 지고 물을 가지러 간다. 그러나 거기서는 절대로 나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단다. 그
런데 다른 방향에는 예피모프카와 키슬랴코프카가 있어. 그 마을에는 종이 있는 교회가 있
지, 그리고 그 다음에는 스바토 트로이츠코예가 있고, 또 그 다음은 바고야 블렌스크가 있단
다. 바고야 블렌스크에서는 늘 나에게 건초를 주지. 그러나 그곳 건초는 질이 좋지는 않단
다. 그런가 하면 니콜라예프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여기서 8베르스타나 떨어진 거리야.
거기서는 매우 좋은 건초와 귀리를 주지. 그렇지만 나는 그곳으로 가는 일만은 좋아하지 않
아.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주인이 마부에게 우리를 몰아치라고 명령하기 때문에 마부가
채찍으로 우리를 아프게 때린단다. 그리고 또 있어. 알렉산드로프카 벨로제르카헤스손, 그곳
역시 먼 거린데... 그렇지만 어찌 너희가 이것을 모두 알 수 있겠는가 말이다! 말하자면 이
것이 세계라는 것이야.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야. 말하자면 단지 중요한 부분이지.
그렇게 말하고 밤색 말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의 아랫입술은 아직 뭔가 중얼거리는
듯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노령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열일곱 살이었다.
말에 있어서 그것은 사람의 일흔 살과 마찬가지였다.
저는 당신의 지혜로운 말의 뜻은 모릅니다. 그래요,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말에 따르지
도 않겠습니다. 하고 달팽이가 말했다. 저에게는 우엉이 있지요.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합니
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벌써 나흘이나 기어다니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우엉은 아직 없어지
지 않았거든요. 이 우엉 저쪽에는 또 다른 우엉이 있지요. 그리고 그 우엉에도 틀림없이 또
다른 달팽이가 앉아 있을 거예요. 그것이면 그만이지요. 그러니 어디로든 뛸 필요가 전혀 없
어요. 그것은 단지 시시한 일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쌓여 있는 잎사귀를 먹으면 됩니다. 만
일 기어가기가 싫지 않았다면, 저는 벌써 이야기하는 당신들에게서 멀리 떠나가 버렸을 거
예요. 당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골치가 아플 뿐이지, 아무 소용도 없어요.
아니 실례합니다만, 도대체 왜 그러시지요? 하고 귀뚜라미가 물었다.
무한이라든가, 그 외의 특별한 좋은 제목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매우 유쾌한 일입니다.
물론 자신의 배를 채울 것만 걱정하는 현실적인 성격도 있기는 합니다. 당신이라든가, 혹은
거기 있는 매우 예쁜 애벌레처럼 말이지요...
아아, 아니예요. 저의 이야기는 그만두세요. 제발, 그만 두세요. 저를 건드리지 마세요! 하
고 애벌레는 슬픈 듯이 외쳤다. 저는 그것을 미래의 생활을 위해서라고 이해하고 있어요.
단지 미래의 생활을 위해서.
그래, 어떤 미래의 생활을 위해서란 말인가? 하고 밤색 말이 물었다.
당신은 모르겠죠. 제가 죽어서 여러 가지 색깔의 날개를 가진 나비가 된다는 걸?
밤색 말이나 도마뱀, 그리고 달팽이는 그것을 몰랐다. 그러나 곤충들은 얼마간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모두 잠시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래의 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도 분
별있는 말을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확고한 신념에는 존경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하고 마침내 귀뚜라미가 딱딱거리는 소
리로 말했다. 누구든지 또 뭔가 말하고 싶은 분은 없습니까? 아마 당신들은 원하시겠지
요? 하고 그는 파리들 쪽을 돌아다보았다. 그러자 그들 중에서 나이먹은 파리가 대답했다.
저희들은 불편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희들은 지금 막 방에서 나오는 참입니다. 주부
가 방금 끓여낸 잼을 그릇에 담아서 늘어놓았기 때문에 저희들은 지붕 밑으로 몰래 들어가
실컷 먹었습니다. 저희들은 만족하고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잼 속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
러나 어떻게 합니까? 그분은 이 세상에서 이미 충분히 살았지요. 그러니 저희들은 만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고 도마뱀이 말했다. 저는 여러분의 말씀이 모두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만 반면에...
그러나 도마뱀은 그 반면에 어쨌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무엇인지 그녀의
꼬리가 꾸욱 땅에 눌린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잠이 깬 마부 안톤이 밤색 말을 데리러 온 것이었다. 그는 갑자기 그의 큰 장화를
신고 모임에 뛰어들어 그것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파리들만은 잼 투성이가 되어 죽은 자신
들의 어머니를 핥아먹기 위해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도마뱀은 잘라진 꼬리를 가지고 도
망쳤다. 안톤은 밤색 말의 이마털을 붙잡아 그를 정원에서 끌고 갔다. 통을 얹어 물을 길어
오려는 것이었다. 그는 끌고 가면서, 자, 가자. 이 꼬랑지야! 하고 말했다. 이 말에 대해서
밤색 말은 단지 속삭임으로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도마뱀은 꼬리없이 혼자 남았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꼬리는 자랐다. 그러나 그
것은 언제까지나 끝이 뭉툭하고 거무튀튀한 채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어째서 꼬리를 상했
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도마뱀은 겸손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저는 자신의 신념을 말
하려고 결심했기 때문에 꼬리가 끊겼습니다.
그녀의 말도 또한 옳았다.
보세볼로드 가르신(1855-1888): 러시아의 소설가. 그는 인간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태도와,
인간 사회에 불행을 가져오는 악에 대한 뼈저린 감정을 예술의 기조로 작품을 썼다. 작품으
로는 상봉 , 겁쟁이 , 병사와 장교 , 병사 이바노프의 회상 등이 있다.
살아있는 주검
그날 아침에 내가 눈을 뜨자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어
있었고, 주위는 솟아오른 아침 햇살이 어젯밤에 내린 비로 축축한 대지를 비치고 있어, 이중
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마차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작은 과수원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과수원은 이제
황폐한 마당이 되었지만, 그 둘레는 축축하여 숲이 무성하고 좋은 향기로 싸여 있었다.
맑은 하늘 아래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다는 것이 얼마나 상쾌한 일긴가. 푸른 하늘에
는 종달새가 지저귀고, 방울같이 맑은 소리는 은구슬처럼 떨어져 내려왔다. 종달새는 아마도
그 날개에 이슬을 싣고 지나갔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랫소리마저 이슬에 젖은 듯이 느껴
졌다. 나는 모자를 벗고 신선한 공기를 가슴 속 깊숙이 들이마셨다.
나지막한 비탈길 위로 나무 덩굴이 우거진 곳에 벌집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수풀이 마치
두꺼운 벽처럼 우거져 있고, 그 사이에 오솔길이 뱀처럼 꼬불꼬불 뚫려져 있었다. 그 위로는
검푸른 삼나무가 뾰족한 막대기처럼 무성하게 줄기를 뻗고 있었다.
나는 이 오솔길을 따라 꼬불꼬불 돌아서 벌집 앞으로 다가갔다. 그 곁에는 가느다란 나뭇
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지은 헛간이 있었다. 그것은 겨울 한 철에 벌집을 간수해 두는 곳이
었다. 나는 반쯤 열려있는 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속은 어둡고 고요했으며, 매우
건조했다. 그리고 박하와 향유 냄새가 진동했다. 한 구석에는 네 발이 달린 침대가 놓여 있
고, 그 위에 이불로 덮어씌운 무언가 조그만 것이 있었다.
내가 그곳에서 돌아 나오려고 했을 때, 말소리가 들려왔다.
서방님, 서방님! 표도르 베트로비치!
그것은 힘이 없고 연약한 목쉰 듯한 목소리였다. 마치 갈대가 흔들리며 내는 소리와도 같
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표도르 베트로비치! 어서 들어오세요. 같은 음성이
되풀이되었다. 그것은 구석에 놓여 있는 침대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나는 그 곁으로 다가갔다. 나는 너무나 놀라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뚝 서고 말았다. 내
앞에는 살아있는 한 사람이 가로 누워 있었다.
오랜 세월 버려진 누런색 머리칼에 얼굴은 마르고 초췌하여 흡사 성상 같았다. 코는 날카
로워 마치 주머니칼같이 뾰죽하고, 입술은 어디 붙어 있는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다만 눈
과 이만이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수건 밑으로 몇 오라기의 머리칼이 이마 위에 흩어져
있었다. 이불이 겹쳐진 턱 밑에는 구릿빛 작은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얼굴은 상당히 아름다워 보였다. 그렇지만 반면에 그 얼
굴에는 까닭 모를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녀의 싸늘한 볼 위에 떠오른 고통스러운
미소를 보자, 한층 더 처참하게 생각되었다.
저를 모르시겠어요, 서방님?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나 그 입술은 전혀 움직이
지 않았다. 그러실 수밖에 없을 테지요. 어떻게 저를 아시겠어요? 저를 루케리아예요. 혹시
생각이 나시는지요. 서방님 어머님이신 스타이스코 마님 댁에서 발레를 가르쳤죠... 기억이
나시나요? 합창을 할 때면 지휘를 하기도 했던 나를?
루케리아! 나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르짖었다. 당신이었구려!
네, 서방님. 제가 바로 그 루케리아랍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멍한 눈을 내게로 돌리고 움직이지도 못하
는, 우중충한 그녀의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을까? 이 미이라같
은 여자가 가장 아름답던 여인, 그 날씬하고 포동포동한 윤기가 흐르던, 그리고 미소를 지으
며 노래부르던 여인이라니!
그 당시 모든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이던 루케리아에 대해서는 열여섯 살의 소년이던 나
까지도 은근히 연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루케리아! 대체 어찌된 일이요? 이윽고 나는 입을 열었다.
네, 아주 끔찍한 일을 당했지요. 괜찮으시다면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그 통 위에 앉으세
요. 가까이 오셔서, 그러지 않으면 제 말이 들리지 않을 거예요. 이젠 말도 제대로 못하겠어
요. 하지만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기쁘네요. 그런데 서방님은 어떻게 알렉세예프같은 곳엘
다 오셨지요? 루케리아는 힘없고 조용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말했다.
포수 엘모라이가 이끌고 왔어요. 그렇지만 그보다도 내가 듣고 싶은 것은...
제 신상에 관한 말이죠? 네, 물론 말씀드리지요. 꽤 오래 전이지요. 아마 육, 칠 년도 더
됐을 거예요. 저는 바실리 포리야코프와 깊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생각나세요? 왜 그 아름
다운 곱슬머리의 근사한 남자 말예요. 서방님 어머님 심부름을 맡아 하던 남자죠. 마침 그
때 서방님은 모스크바로 공부하러 가시고 시골에 계시지 않았지요. 바실리와 저는 서로 몹
시 사랑했어요. 저는 잠시도 그를 잊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봄날 새벽이었어요. 날
이 밝을 무렵 일찍 잠이 깬 저는 어쩐 일인지 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더군요. 뜰에서는 꾀
꼬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지요. 저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 소리를 들으려고
층계로 나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꾀꼬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쉬지 않고 노래를 불
렀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누군가가 저를 부르는 듯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은 루케리아 하
고 다정하게 부르는 바실리의 목소리 같았어요. 저는 주위를 둘러봤어요. 그런데 아마 저는
잠이 덜 깼던 모양이에요. 그만 발을 헛디뎌 층계 위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어요.
그러나 저는 별로 크게 다치지 않은 걸로 생각했죠. 곧 일어나서 제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
으니까요. 하기야 몸 안의 어딘가가 아픈 것 같긴 했지만... 숨을 좀 돌려야겠어요... 잠깐만...
정말 미안해요, 서방님!
루케리아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나는 그녀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즐거운
듯이 거의 한숨도 쉬지 않고 신음 소리도 내지 않으며, 투덜거리지도 않고 동정을 구하는
빛도 없이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는. 루케리아는 말을 계속했다. 제 몸이 차츰 여위고 아프기 시작했
어요. 피부색은 검어지고 걸음조차 옮기기 어려웠어요. 그 일이 있은 뒤로는 두 다리를 쓸
수가 없고, 일어설 수도 없게 되어 누워 있기만 했지요. 그러자 식욕이 점차 없어지고 병세
는 더욱 악화되었지요. 서방님 어머님께서는 저를 진찰 받게 해주시고, 입원까지 시켜주셨지
요. 그러나 병세는 조금도 차도가 없었어요. 의사들은 모두 제 병이 무슨 병인지 몰랐어요.
의사는 여러 가지 치료를 해 주었어요. 인두를 불에 달구어 척추를 지지기도 하고, 얼음으로
온 몸을 싸늘하게 식히기도 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어요. 결국에는 몸이 아주 비틀리고
말았지 뭐예요. 그래서 의사는 치료를 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고, 불구자를 언제
가지나 댁에 둘 수도 없고 해서 이곳으로 보내신 거지요. 여기에는 친척도 있으니까요. 보시
는 바와 같이 제가 이런 곳에서 이러고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루케리아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 해, 이런 곳에 누워 있다니!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뒷말이 미처
떠오르지 않아 이렇게 말했다. 그럼 바실리 포리야코프는 어떻게 됐지요?
그것은 매우 바보같은 질문이었다. 그녀는 잠깐 먼 산을 바라보았다.
포리야코프가 어떻게 됐느냐구요? 그이는 저를 동정해 주었어요. 그렇지만 다른 여자와
결혼했지요. 그린노오에 태생의 처녀하구요. 그린노오에를 아시죠? 여기서 과히 멀지 않아
요. 그 여자의 이름은 아그라페나예요. 그이는 저를 몹시 사랑해 주었어요. 그렇지만 젊었으
므로 혼자 살 수 없었던 거죠. 그리고 제 자신이 이 꼴이 되어 가지고 그이의 상대가 될 수
있겠어요? 그이와 결혼한 색시도 사람이 좋고 귀엽게 생긴 처녀였어요. 지금은 아이까지 낳
았어요. 그이도 이 근처에 살고 있으며, 가까운 곳에서 서기 일을 하고 있지요. 서방님의 어
머님이 신원보증을 서 주시고 그곳으로 보내 주셨으니까요. 일을 제법 잘하고 있나봐요.
그럼 당신은 줄곧 이곳에 누워만 있었단 말인가요?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벌써 칠 년이나 돼요. 여름에는 이 헛간에 누워 있지만, 날씨가 추워지면 욕실 쪽으
로 옮겨 달라고 해서 거기 누워 있지요.
보살펴 주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염려해 주는 사람 말이에요.
네, 그러믄요. 어디나 친절한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죠. 저는 완전히 버림받은 것은 아니
에요. 그리고 저는 보기보다는 남에게 수고를 덜 끼치고 지낼 수 있거든요. 음식도 여느 사
람과 같이 먹을뿐더러 물도 이 병에 들어 있답니다. 이 병에는 언제나 깨끗한 물이 담겨 있
고 병까지 손이 닿기도 해요, 한 팔을 아직 쓸 수 있거든요. 그리고 이곳에는 고아 소녀가
있는데 가끔 와서는 제 시중을 들어주지요. 정말 착한 아이에요. 방금 다녀갔는데 혹시 못
보셨나요? 정말 귀엽고 예쁜 소녀지요. 그 소녀가 가끔 꽃 같은 걸 갖다 주지요. 옛날에는
정원에 꽃이 무척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 포기도 없다면서요. 하지만 들에 핀 들꽃도
좋아합니다. 정원의 꽃들보다 더 좋은 향기가 나는 것들이 있어요. 들백합 같은 것들은 정말
향기가 좋아요.
루케리아, 당신은 지루하다거나 처량한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저는 속이고 싶지는 않아요. 처음에는 못 견딜 것 같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습관이 되어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되었어요. 이젠 아무렇지
도 않아요. 세상엔 저보다 더 불행한 분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죠?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엔 비바람을 피할 지붕조차 없는 사람도 있고, 또 눈이 먼 사람
도, 귀먼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래도 저는 모든 것을 분명히 볼 수 있고, 무슨 소리나 들을
수 있거든요. 땅 속에서 두더지가 굴을 파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어요. 그리고 어떤 냄새
라도 맡을 수 있지요. 밭에 호밀꽃이나 마당의 보리수꽃이 피면 누구보다도 먼저 제가 맡지
요. 바람이 꽃향기를 실어다 주거든요.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는 사람은 저보다도 훨씬 고
통을 당하고 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몸이 성한 사람은 누구나 죄에 물들기가 쉽지만, 저
는 죄와는 이제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되었어요. 조금 전에도 알렉세이 신부님이 성찬식을
베풀러 오셔서, 당신은 참회를 할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있으니 죄를 지을 까닭도 없을 테
니까요. 하고 저에게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마음 속으로 짓는 죄는 어떻
게 하지요? 그러자 신부님이 웃으시며 대답하셨어요. 글쎄... 대단한 죄는 아니겠지요. 그건
사실이에요. 저는 마음 속으로도 큰 죄는 짓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루케리아는 말을 계속했
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는 무슨 일이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으며, 또한 그
런 일들이 떠오르지 않도록 주의해 왔으니까요. 그러노라면 시간은 훨씬 더 빠르게 지나가
게 마련이지요.
나는 그야말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루케리아, 당신은 늘 혼자 있으면서 어떻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는 거
요? 언제나 잠만 잘 수도 없을 텐데.
아녜요. 서방님! 늘 잠만 잘 정도로 편하진 않아요. 못 견딜 정도로 아픈 건 아니지만, 오
른쪽 몸이 속속들이 쑤시기 때문에 마음대로 잠을 잘 수도 없어요. 이렇게 늘 혼자 누워 있
지만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요. 저는 다만 제가 살아서 숨을 쉰다는 것 외에는 아무 일에
도 신경이 쓰이지 않아요. 저는 눈을 떠보기도 하고 귀를 기울여보기도 하지요. 꿀벌이 날아
다니며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하고, 비둘기가 지붕 위에 내려앉아 구구거리는 소리
가 들리기도 해요. 암탉은 병아리를 이끌고 빵 부스러기를 주워먹으러 와요. 그리고 참새며
나비들이 날아오기도 하고, 어쨌든 여간 재미나지 않아요. 작년에는 제비가 저 구석에 둥지
를 만들고 새끼를 여러 마리 깠어요. 정말 재미있더군요. 한 놈이 먹이를 물고 돌아와서는
새끼에게 먹이를 주지요. 그리고는 다시 나간답니다. 그러면 또 다른 놈이 곧 돌아오지요.
그런데 이 놈이 둥지로 들어가지 않고 지나쳐 버리는 수가 있어요. 그럴라치면 새끼들은 조
그만 주둥이를 내밀고 짹짹 울지요... 저는 그 제비가 이듬해에도 와 주기를 고대했지만, 들
리는 말에 의하면 어떤 포수가 총으로 쏘았다나 봐요. 그런 새를 잡아 무얼 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더군요. 제비는 딱정벌레만큼도 소용이 없는 건데... 어쨌든 사냥이란 잔인한
짓 같아요.
나는 제비를 쏘지는 않았어요.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그런데 한 번은! 루케리아는 말을 계속했다.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느닷없이
토끼 한 마리가 뛰어들어오지 않겠어요. 산토끼 말예요. 아마 사냥개한테라도 쫓긴 모양이에
요. 문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와서는 오랫동안 제 옆에 몸을 숨기고 있었어요. 연신 코를 벌
름거리고 수염을 비쭉거리면서요... 그러면서 저를 쳐다보질 않겠어요? 아마 제가 무섭지 않
았던가봐요. 한참 있다가 살금살금 일어서더니 뛰어 나갔어요. 그때의 모습을 어떻게 말씀드
리면 좋을까요. 참으로 귀여운 토끼였습니다.
루케리아는 우습지 않느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를 즐겁게 해 주려고 미소
를 지었다. 그녀는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겨울이 되면 아무래도 몸이 더 나빠지는 것 같아요. 늘 어두컴컴하거든요. 촛불을 켜는
것도 그렇고 또 켠들 모슨 소용이 있겠어요? 책을 읽을 때나 필요하지요. 전 본래 독서를
좋아했지요. 그렇지만 무엇을 읽으면 좋을까요? 읽을 거라곤 아무 것도 없으니 말예요. 그리
고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손으로 들 수가 있어야죠. 알렉세이 신부님께서 위안이 될
거라면서 달력을 가져왔지만, 다시 생각하시곤 소용이 없을 거라면서 도로 가져가셨어요. 그
러나 어두운 속에서도 귀를 기울이면 언제나 무슨 소리든 들려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라든
가 또는 쥐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라든가. 아무 것도 생각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은 바로 이
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이지요. 그리고 저는 쉬지 않고 기도를 드리고 있지요. 루케리아는 잠
시 숨을 돌린 다음 말을 계속했다. 사실 저는 무어라고 기도를 드려야 좋을지 잘 알진 못
해요. 하지만 하나님을 괴롭혀 드릴 필요가 어디 있겠어요? 새삼스럽게 무엇을 바라겠어요?
하나님은 제게 필요한 것을 더 잘 알고 계셔요. 하나님은 제게 십자가를 주신 거지요.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저는 임종의 기도, 마리아의 찬미, 고뇌하는 자들의 소망을
되풀이해 외우고는 다시 조용히 드러눕지요. 아무 생각도 않고 또 하는 일도 없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거죠.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침묵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좁은 통 위에 꼼짝도 않고 앉
아 있었다. 내 앞에 누워 있는 이 무참한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나에게 전해져 왔다. 나는
무엇인가 마비된 것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루케리아! 하고 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을 마을에 있는 가장 좋은 병원에 입원시키
고 싶은데... 어때요? 아직 치료하면 나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이대로 혼자 버려둘 수는 없
구요.
루케리아의 미간이 약간 움직였다.
아녜요. 제발 병원 소린 하지 마세요. 그녀는 오히려 못마땅하다는 듯이 나직한 목소리
로 대답했다. 제 일에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런 곳에 가면 오히려 괴로움만 더 당할 뿐
이에요! 이젠 고칠 수 없어요. 언젠가도 어떤 의사가 저를 진찰해 보겠다는 걸 완강히 거절
했지만, 그는 듣지 않고 저를 이리저리 뒤척이면서 손발을 두들겨보기도 하고 잡아당겨보기
도 하면서 제게 말하더군요. 나는 학자이므로 학문을 위해 이런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당
신은 불평을 하시면 안 됩니다. 나는 여러 가지 학문상의 공로로 상도 받았고, 당신같은 사
람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의사는 여기저기 두드려보고 나서 제 병명을 말해 주었어
요. 무언가 꽤 긴 이름이었어요. 그리고 그는 가 버렸어요. 그후 한 주일 동안은 뼈가 쑤시
고 아파서 혼이 났어요. 서방님은 저더러 늘 혼자 있느냐고 말씀하시지만, 언제나 그런 건
아니예요. 마을 사람들도 가끔 들여다봐 주지요. 그렇다고 폐를 끼치는 건 아니지만요. 마을
처녀들도 와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그리고 순례하는 여인들이 길을 잘못 들
어 여기 와서는 예루살렘의 이야기며 갈릴리의 이야기, 그 밖에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재미
나는 이야기들을 들려주기도 해요. 게다가 저는 혼자 있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편
이 좋은 걸요.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니 서방님은 제 걱정일랑 조금도 하지 마세요. 병원같
은 곳에 제발 보내지 말아 주세요. 호의만은 감사하지만 제발 제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을 쓰지 말아 주세요. 부탁해요.
그렇다면 좋도록 해요. 루케리아, 나는 다만 당신을 위해서 한 말입니다.
서방님이 저를 위해 염려하시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서방님, 저를 도와주시겠다
는 것이 뜻대로 될 것 같아요? 사람은 남의 마음 속을 알 수 없는 법이거든요. 그리고 사람
은 누구나 자기 일을 스스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서방님은 제 말을 믿지 못하
시겠지만, 사실 저도 가끔 외로운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리고 이 세상에는 저 하나밖에
아무도 없는 것같이 생각되기도 하지요. 다만 저 혼자 살고 있는 것같이 말예요. 그러나 한
편 누군가가 저를 축복해 주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저는 가끔 이상한 환
상에 사로잡히기도 해요.
대체 어떤 환상인데요? 루케리아!
뭐라고 설명하기도 어려운 환상이에요. 게다가 보는 즉시 잊어버리고 말아요. 마치 구름
같은 것이 공중에서 내려와 확 퍼지면서 둥둥 뜨는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이 되거든요. 그렇
지만 그게 뭔지 알 수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곁에 있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아요. 그리고
그럴 때는 제가 불행하다는 생각밖에는 안 들어요. 루케리아는 괴로운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호흡도 수족과 마찬가지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서방님은 제 일을 몹시
염려하시는데 제발 그러지 마세요. 서방님께서 마음 놓으시도록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혹 기억 나세요? 제가 젊었을 때는 얼마나 활달했는지? 그야말로 말괄량이였지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지금도 툭하면 노래를 부르곤 해요.
노래를 불러요, 당신이?
예. 옛날 노래며, 흥겨운 노래, 캐럴송 같은 여러 가지 노래를 부르죠! 저는 노래를 많이
기억하고 있어요. 아직도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무도회의 노래만은 안 불러요. 이
런 몸으로 춤을 출 수가 있어야지요.
어떤 의미에서 부르죠? 기분 전환을 위해선가요?
네, 기분 전환을 위해서죠. 소리를 크게 낼 수는 없지만, 옆에서 알아들을 수는 있지요.
아까 소녀가 저를 돌봐준다고 말씀드렸죠. 그 소녀는 아주 똑똑한 아이예요. 벌써 노래를 네
가지나 배웠거든요. 제 말이 믿어지지 않으시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곧 노래를 불러드
릴 테니까요.
루케리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이 산송장 같은 인간이 노래를 부르려고 한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했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겨우 들릴
정도의 맑고 깨끗한 노랫소리가 귓전을 울려왔다.
노래는 한 가지, 두 가지 계속되었다. 그녀는 목장에서 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노래
했지만 돌같이 굳은 그녀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 눈도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었
다. 그러나 한 가닥의 연기처럼 주위를 뒤흔들며 사라지는 가느다란 그녀의 노랫소리는 듣
는 이의 심금을 울렸다. 그녀는 그 속에다 모든 상념을 부어 넣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어
느 새 내 마음 속을 차지하고 있던 두려움은 씻은 듯이 가셔 버렸다. 그리고 내 가슴 속에
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연민으로 차올랐다.
아아, 이젠 안 되겠어요, 힘이 없군요. 서방님을 만난 기쁨으로 가슴이 두근거려서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나는 나뭇가지와도 같은 그녀의 조그만 손가락 위에 나의 손을 포갰다. 금빛 속눈썹에 에
워싸인 축축한 눈꺼풀은 다시 감기고 조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어두컴컴한 속에서도 그녀의 눈은 눈물에 젖은 채 빛나고 있었다. 나는 꼼짝 않
고 서 있었다.
전 바보였어요! 루케리아는 뜻밖에도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눈을 깜박거리며
눈물을 삼키려고 했다. 정말 부끄럽군요. 내가 왜 이럴까! 이런 일은 통 없었는데. 작년 봄
에 바실리가 다녀간 이후로는 없었던 일입니다. 그 사람이 제 곁에 앉아 서로 이야기할 때
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떠나고 나니까 몹시 쓸쓸해져 많이 울었지요. 저는 왜 눈물
을 흘렸을까요? 하기야 여인들이란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곧잘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니까
요. 서방님, 손수건 갖고 계시죠? 미안하지만 좀 닦아주시겠어요?
나는 즉시 그녀의 눈언저리를 닦아주었다. 그리고 그 손수건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그녀
는 처음에는 사양했다. 이런 걸 놓고 가신들 제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 손수건은 매우 값진 것일 뿐만 아니라 아직 하얗고 깨끗했다. 그녀는 가냘픈 손가락으
로 손수건을 잡더니 놓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차츰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그녀의 용
모를 환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창백한 구릿빛 얼굴에는 불그스레한 홍조가 떠돌고 있
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직도 지난날의 아름답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서방님, 저에게 잠을 잘 수 있느냐고 물으셨죠? 루케리아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잠자는 시간은 불과 얼마 안 되지만, 잠잘 때마다 꿈을 꾸지요. 그건 정말 아름다운 꿈이에
요! 꿈 속에서는 앓아 누워 있진 않아요. 언제나 젊고 건강한 몸이죠... 다만 한 가지 안타까
운 것은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려고 하면 마치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같이 몸이 부자유
한 것이지요. 언젠가는 정말 굉장한 꿈을 꾸었어요! 그 얘기를 들려 드릴까요? 그럼 들어보
세요. 저는 주위가 온통 키가 큰 밀이 황금빛으로 무르익은 어느 농장의 밀밭에 서 있었어
요. 저는 그때 붉은색의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서 있었어요. 그런데 그 개는 본래 심술궂어서
자꾸만 저를 물어뜯으려고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저는 낫을 한 자루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
은 보통 낫이 아니고 낫 모양을 한 달이었어요. 저는 그 달로 밀을 메어야 했어요. 그러는
동안에 저는 더위에 지치고 달빛이 저를 노려보는 것 같아 그만 몸이 축 늘어지고 맥이 빠
졌어요. 주위에는 들국화가 가득 피어 있었어요. 그리고 그 꽃송이들은 모두 저를 바라보고
있었지요. 저는 정신없이 그 꽃을 따려고 했어요. 바실리가 오기로 되어 있어서 화환을 만들
려고 했지요. 악속시간까지면 충분히 화환을 엮을 수 있을 줄 알았지요. 그래서 꽃을 꺾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꺾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 버리잖겠어요. 그래서 화환을 만들 수가 없
었어요. 계속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가 제 곁에 와서 루케리아! 루케리아! 하고 부르는 거예
요. 아아, 시간을 맞추지 못했구나. 결국 못 만들고 말았구나 하고 저는 생각했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지라 저는 화환 대신 달을 머리 위에 얹었어요. 제가 그것을 머리 위에 얹자
곧 온 몸에서 광채가 나면서 사방을 환하게 비추는 것이었어요. 그러자 별 조화가 다 있죠!
밀밭을 가로질러 저에게 다가온 분은 바실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아니겠어요? 저도 그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림으로 본 모습과도 달랐어요. 그렇지만
그분은 틀림없는 예수님이었어요. 수염이 없고 키가 크며 젊으셨어요. 몸에는 흰 옷을 입고
금빛 허리띠를 두르고 계셨어요. 예수님께서는 제게 손을 내밀며 말씀하셨어요. 두려워 마
라, 나의 어린양아. 나를 따르라, 그리하여 하늘나라의 합창과 무도회를 지휘하며 낙원의 노
래를 부르라. 하고요. 저는 그 손에 꽉 매달렸어요. 개는 제 발뒤꿈치를 따라왔어요. 우리는
갑자기 공중으로 떠올랐어요. 예수님은 앞장서서 기러기같이 긴 날개를 펼치시고 저는 그
뒤를 따라갔어요. 그러나 저의 개는 우리를 뒤쫓질 못했어요. 저는 그 때에야 비로소 깨달았
어요. 그 개가 내 병이라는 것을, 그리고 천국에는 병이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말예요. 루
케리아는 잠시 숨을 돌렸다. 그리고 말을 계속했다. 그 밖에 또 한 가지 본 것이 있어요.
그건 아마 환상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제가 이 오
두막집에서 자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돌아가신 부모님이 찾아오셔서 아무 말 없이 제
게 깍듯이 절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지요. 아버님, 어머님, 대체 무슨 까닭으로 제게
절을 하십니까? 그러자 부모님이 대답하셨어요. 무슨 까닭이냐구? 너는 이 세상에서 온갖
풍파를 다 겪었다. 그 때문에 너는 네 영혼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짐마저 벗게 하
였다. 그래서 우린 매우 편하게 지내고 있단다. 너는 네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의 죄마저 벗
겨 주었단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또다시 저에게 절을 하시는 것 같더니 그대로 사라지셨어
요. 그 뒤에는 별밖엔 다른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 일이 자꾸 맘에 걸려 고해성
사를 할 적에 신부님께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신부님께서 그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환영
은 다른 데 나타납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지요. 루케리아는 말을
계속했다. 꿈 속에서 저는 길가 버드나무 밑에 앉아 있었어요. 저는 마치 순례자처럼 지팡
이를 들고, 어깨에는 전대를 메고, 손수건으로 이마를 동여맸지요. 그리고 저는 먼 곳으로
순례를 떠나야만 했어요. 순례자들은 잇따라 내 곁을 지나갔어요. 그들은 터덜터덜 걸어와서
는 모두 같은 방향으로 사라졌어요. 어느 누구나 몹시 피곤해 보였으며, 모두 비슷한 모습들
을 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들 가운데서 서성거리고 있는 한 여인을 보았어요. 그 여인은 다
른 사람들보다 건장하고 이상한 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것은 러시아 의복도 아니었어요. 얼
굴도 거칠고 험상궂은 것이 여느 사람과는 달랐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여인의
곁을 피해 가더군요. 그런데 그 여인이 갑자기 성큼성큼 제게로 다가오는 것이었어요. 그러
더니 발걸음을 멈추고 저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는 것이었어요. 그 크고 누런 눈은 마치 매
의 눈과 같았어요. 저는 그녀에게 물었어요. 누구시지요? 그러자 그 여인은 대답했어요. 나
는 당신을 데리러 온 죽음의 사자요. 그러나 저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어요. 오히려 몹시 기
쁘더군요. 저는 성호를 그었어요. 그러자 죽음의 사자인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어요. 루케리
아, 미안하지만 아직 당신을 데려갈 수는 없소. 잘 있어요! 저는 이 말을 듣고 몹시 슬퍼했
어요. 저를 데려 가세요, 아주머니. 제발 데려가 주세요! 제가 애원하자 저의 사자는 뒤돌아
보면서 입을 열었어요. 그러나 무슨 소리인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성 베드로 축
일이 지난 다음에... 이 말을 듣자마자 저는 잠에서 깨어났어요, 정말 이상한 꿈이었지요...
루케리아는 천장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는 안타깝게도 가
끔 일주일씩이나 한잠도 못 이룰 때가 있어요. 작년엔 어느 아주머니가 찾아오셔서 수면제
를 한 병 주셨어요. 그리고 한 번에 마흔 방울씩 마시라고 하시더군요. 그 약은 효과가 좋아
서 잠을 잘 이룰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약도 이젠 거의 다 떨어졌어요. 서방님은 그게 무
슨 약인지 아세요? 어떻게 하면 그 약을 구할 수 있을까요?
그 여인은 필시 루케리아에게 모르핀제를 구해 주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과 같은 약을 구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그녀의 끈질긴 인내력에 다시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서방님도!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인내니 뭐니 하세요. 그게
누구였더라? 그렇지 고행자 시메온이었어요. 그분이야말로 인내가 대단한 분이지요. 사십 년
동안이나 기둥 위에서 살았다지 뭐예요? 그리고 또한 성인은 가슴까지 땅 속에 파묻혀 얼굴
을 개미 떼한테 파먹혔다더군요? 어느 학자한테서 들은 이야기인데, 그 중에는 이런 것도
있어요. 어느 나라에 한때 이슈마엘군이 쳐들어 왔대요. 그들은 그 나라 백성들을 괴롭히고
죽이는 등 온갖 행패를 다 부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러자 순결한 처녀가 나타났어요.
그 처녀는 큰 칼을 차고 8파운드나 되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나서서 그들의 원수인 이슈마
엘군을 공격하여 멀리 쫓아내었다니 않아요? 적을 몰아낸 그녀는 적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더군요. 나를 화형에 처해 주시오. 내 나라를 위해서 나는 화형을 받겠다고 맹세했으니까
요. 그러자 이슈마엘군은 그 여인을 붙들어 불에 태워 죽였대요. 그 때부터 그 나라 사람들
은 자유를 되찾게 되었대요! 이 얼마나 훌륭한 행위입니까, 그런 것에 비한다면 저의 경우
는 아무 것도 아니지요.
나는 어떻게 그녀가 잔다르크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나는 그녀의
나이를 물어보았다.
스물 여덟이나 아홉... 아직 서른까진 안되었어요. 그런데 왜 나이 같은 걸 물으시죠? 저
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루케리아는 갑자기 자지러질 듯이 기침을 했다.
너무 이야길 많이 해서 그런가 보군요. 내가 입을 열었다.
아마 그런가 봐요. 그녀는 간신히 기침을 참으며, 겨우 들릴 정도의 작은 소리로 말했
다. 이제는 말을 그만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서방님이 떠나시면 저는 또 말없이 누워만 있을 텐데요. 그런데 어쨌든 가슴이 꽉 메이는
것 같군요.
나는 약을 보내 주겠다고 거듭 말하고 나서 그녀와 작별을 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
으면 말하라고 당부했다.
아무 것도 필요 없어요. 저는 이 상태로 만족해요. 그녀는 감격한 어조로 말했다. 부디
서방님의 가족 모두가 안녕하시기를 빕니다. 서방님, 어머님께도 안부 전해 주세요. 이 근처
의 농부들은 모두 가난해요. 만일 소작료를 조금이라도 덜어 주신다면... 농부들은 농토도 적
고 돈도 없지 않겠어요? 그렇게 해 주신다면 모두들 얼마나 고마워할까요. 그렇지만 저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어요. 저는 만족하니까요.
나는 그녀의 소원을 이루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는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서방님, 혹시 기억나세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과 입
술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발했다. 옛날에 제 머리카락이 어떠했는지 생각나세요? 무릎까지
닿는 치렁치렁한 긴 머리였지요. 그걸 큰 맘 먹고 잘라버렸지요. 벌써 오래 됐어요. 정말 탐
스러운 머리였지요. 그렇지만 몸이 이렇게 되고 보니 가눌 수도 없어 미련없이 잘라 버리게
되었죠. 그럼 서방님, 안녕히 가세요! 이젠 더 이야기할 기력도 없군요.
나는 그날 사냥을 나서기 전에 그 마을의 관할 순경과 루케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
다. 그는 나에게 루케리아를 마을에서 살아있는 송장이라고 부른다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
녀는 불구의 몸이지만, 남에게 전혀 폐를 끼치지 않을뿐더러 한 마디의 불평이나 불만도 털
어놓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쉬운 소리를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일을 해 주어도 기뻐해요. 그야
말로 보기 드문 선량한 여인이지요. 순경은 말을 계속했다. 그 여자가 하나님에게 벌을 받
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 여
인이 벌을 받고 있는지 아닌지... 어쨌든 그런 것을 판단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저 두고
볼 뿐이지요.
몇 주일 후 나는 루케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의 죽음의 사자는 성 베드로
축일이 끝나자 그녀에게 찾아간 것이다.
그날 루케리아는 종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것이다. 알렉세예프에서 교회당까지는 5마일도
더 될 뿐만 아니라 그날은 주일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루케리아는 사람들에게 종소리가 교회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고 공중에서 들려온다고 했
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그 종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던 모
양이다.
투르게네프(1818-1883): 러시아의 소설가.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대학을 마
치고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844년에 서사시 파리샤 를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
고, 여러 작품들을 모아 엮은 사냥꾼의 일기 로 작가로서의 확고한 인정을 받았다. 러시아
사회의 현실과 문제점들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며,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함
께 러시아의 3대 문호로 꼽힌다. 주요작품으로 루딘 , 그 전날밤 , 아버지와 아들 , 처녀집
등이 있다.
쥘르 아저씨
수염이 하얗게 난 늙은 거지가 우리들 앞에 손을 내밀었다. 친구인 조제프 다브랑쉬가 그
에게 5프랑을 쥐어 주었다. 내가 놀라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 늙은 거지를 보면 언제나 머릿속에 어떤 추억이 떠오른다네. 이젠 그 이야기를 자네
에게 해주려네.
우리 집안은 아브르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리 넉넉한 형편이 못되었네. 간신히 꾸려 나가
는 형편이었지. 아버지는 직장에서 언제나 늦게 돌아오셨지만, 수입은 별로 많지 못했고, 그
리고 누나도 둘이나 있었네.
살림이 옹색하였으므로 어머니는 괴로움을 당하셨지. 그래서 때때로 아버지의 귀에 거슬
리는 말도 하고, 또 은근히 비꼬기도 하구...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난처해 하셨네. 아버지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손으로 땀을 씻으려는 듯이 이마를 매만지는 것이었네. 그러나 실상 이
마에는 땀이 배어 있지 않았네. 나는 그분이 몹시 괴로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돈을 아껴 썼지. 혹시 어떤 사람이 식사에 초대해도 답례하기가 뭣해서 짐짓
가지 않았으며, 식료품 같은 것도 깎고 깎아서 사들이고, 그 밖에 다른 물건도 주로 재고품
을 사곤 했다네. 누이들은 자기 옷을 손수 지어 입고, 1미터에 15쌍팀 밖에 안하는 레이스를
살 때에도 오랫동안 흥정을 하곤 했지. 식사도 기름기 있는 수프나 소스로 요리한 고기뿐이
었네. 물론 위생적이고 영양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난 좀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네.
나는 단추를 잃어버리거나, 바지를 좀 찢기기만 해도 크게 야단을 맞곤 했네. 그러나 주일
이면 모두 저마다 정장을 하고 부두로 산책을 나갔었네. 아버지는 플록코트를 걸치시고 실
크햇을 쓰시고 장갑을 끼시고는, 축제일 때처럼 화려한 옷차림을 한 어머니에게 팔을 내맡
기시곤 했지. 누이들은 제일 먼저 떠날 준비를 마치고는 출발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러나 막상 떠나려고 하면, 아버지의 코트에 눈에 잘 띄지 않던 얼룩이 발견되곤 했는데,
그럴 때면 부랴부랴 헝겊 조각에 벤젠을 적셔 가지고 지워버리시곤 했다네.
아버지께서는 머리에 실크햇을 쓰시고 셔츠 바람으로 이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계셨으
며, 어머니는 근시 안경을 고쳐 쓰시고는 장갑을 더럽힐까봐 벗어놓고, 부리나케 그 작업을
하셨다네.
우리 일행은 위풍도 당당하게 길을 떠났네. 두 누님은 서로 팔장을 끼고 앞장을 섰지. 혼
기가 되어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하려는 생각이 아니겠나. 나는 어머니의 왼쪽에, 아버지는 그
오른쪽에 서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지. 나는 지금도 그 때 가난한 부모님들이 그 주일날 소
풍에서 애써 위엄을 보이려고 하시던 일이 눈앞에 선하네. 두 분 다 의젓한 표정으로 마치
무슨 중대한 일이 오직 엄숙한 태도에 달려 있기나 한 것처럼, 목을 곧게 세우시고 다리를
꼿꼿이 펴며 점잖게 걸어가셨네.
그리고 아버지는 주일마다 먼 미지의 바다에서 큰 배들이 항구에 들어오는 것을 보셨는
데, 그럴 때마다 으레 이렇게 말씀하셨다네. 쥘르가 저 배에 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의 동생인 쥘르 아저씨는 우리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나 다름없었네. 한때는 식구들
이 저마다 무서워했지만 말이야. 나는 어릴 적부터 그 아저씨의 인상이 내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다네. 나는 아저씨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까지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 잘 알고 있었어.
그 무렵에 아저씨의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면, 우리는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하곤 했지.
아저씨가 아마 나쁜 일을 저질렀던가봐. 말하자면 돈을 좀 낭비했던 모양이야. 그런 일은
가난한 집안에서는 무엇보다도 큰 죄가 아니겠나. 부잣집에서는 사내가 난봉이나 별 짓을
다하지만 말일세. 그래봐야 세상 사람들은 다만 난봉꾼이라고 웃어넘길 테지. 그러나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 부모의 재산을 축냈다면 그건 문제가 다르다네. 금방 고약한 놈이요, 못된 놈
이요, 불효자로 낙인이 찍히게 되거든.
아무튼 쥘르 아저씨는 아버지가 크게 기대를 걸고 계시던 유산을 상당히 축낸 것이 사실
이야. 물론 자기 몫을 다 없앤 다음의 일이네.
그러자 누가 아저씨에게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태워 준 모양이야. 그 무렵에는 사람들이 아
브르에서 뉴욕으로 가는 상선을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네.
아저씨는 미국에 가자마자 무슨 장사를 시작했다고 편지로 알려 왔네. 그 편지의 사연인
즉, 그간 돈을 좀 벌게 되었으니 아버지께 끼친 피해를 변상해 드리고 싶다는 거야. 아무튼
이 편지는 우리 가족들에게 커다란 감격을 주었네. 남들의 수군거림처럼 한 푼의 값어치도
없는 쥘르가 별안간 훌륭한 사람, 얌전한 사람, 다브랑쉬 가문의 어느 누구보다도 손색이 없
는 성실한 진짜 다브랑쉬가 되었으니 말일세.
어느 선장의 말에 의하면, 아저씨는 큰 가게를 빌려서 유망한 장사를 한다는 거야.
2년 후에 온 두 번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네.
사랑하는 필립 형님! 저는 몸 건강히 잘 있습니다. 저의 건강만큼은 걱정하지 마십사 하
고 이 편지를 드리는 바입니다. 사업도 잘 되어갑니다. 저는 내일 남미로 긴 여행을 떠나려
합니다. 어쩌면 몇 해 동안 소식도 전해 드리지 못하고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지를
드리지 못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밑천 잡으면 아브르로 돌아가겠습니다. 아
마 머지 않은 장래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함께 행복하게 살 것을 빌며...
이 편지는 대뜸 우리 집안의 복음이 되어 버렸다네. 모두들 심심하면 이 편지를 꺼내 읽
고 남들에게 보여 주기도 했다네.
아닌게 아니라,그 후로 십 년 동안이나 아저씨는 감감무소식이었어.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날이 갈수록 기대가 커지는 모양이셨어. 그리고 어머니까지도 때때로 이런 말을 하셨네. 쥘
르 서방님이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 형편이 한결 나아질 텐데. 적어도 고생은 벗어나게 될
거야. 서방님은 그런 사람이니까.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주일마다 수평선 저쪽으로부터 커다란 까만 기선이 뱀처럼 구불구불
하늘로 연기를 뿜으며 오는 것을 보면서, 같은 말을 되풀이하곤 하셨네. 쥘르가 저 배에 타
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는 마치 아저씨가 손수건이라도 흔들면서 필립 형님... 하고 소리치기나 하는 것처
럼 기다리곤 했었네.
아버지는 그가 분명히 돌아올 것을 전제로, 수많은 계획을 세웠다네. 아저씨가 벌어온 돈
으로 앵구우빌 근방에 조그마한 농장을 하나 사려고도 하셨네. 아버지는 아마 진작 그 땅을
사들일 예비 교섭도 하셨을지 모르겠네.
그 때 큰누이는 벌써 나이가 스물여덟이고, 작은누이는 스물여섯이었지. 그런데 두 누이가
다 미혼이라 그것이 또 온 집안에 적지 않은 두통거리였다네.
그런데 마침 작은 누이에게 청혼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네그려. 회사에 다녔는데 돈은 없
지만 정직한 사람이었어. 어느 날 저녁에 보여준 쥘르 아저씨의 편지가 이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망설임을 버리고 결단을 내리게 했으리라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네.
아무튼 그의 청혼은 성립되어, 결혼식을 올린 다음 가족들이 함께 저지로 간단한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네.
저지는 가난한 사람들이 여행하기에는 안성맞춤이거든, 우선 가까우니까. 정기선으로 바다
를 건너가면 타국땅에 내릴 수 있네. 그 조그마한 섬은 영국 땅일세. 그러나 프랑스 사람도
배로 두 시간만 가면 이웃 나라 사람들 눈앞에 나타나서 그 영국식 천막으로 덮여 있는 섬
의 풍습을 살펴볼 수가 있단 말이야. 이 저지 여행이 집안 식구들의 커다란 관심사로 한시
도 잊을 수 없는 꿈이 되고 기대가 되어버렸네.
드디어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네. 나한테는 그것이 마치 어제 일처럼 눈앞에 선하네. 그랑
빌 부두에 머문 증기선은 발동을 걸고 있었네. 아버지는 침착성을 잃고 우리가 짐짝 세 개
를 배에 싣는 것을 감독하시고,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듯 큰누이의 팔을 붙들어 주셨네. 큰누
이는 동생이 떠난 후로는 거의 정신나간 사람처럼 되었네. 마치 혼자 둥지에 남겨진 병아리
의 신세라고나 할까? 한편 신혼부부는 언제나 뒤쳐져 있었으므로 나는 번번이 뒤돌아보곤
했네.
배에서 고동소리가 울려와 우리는 모두 배에 올라탔네. 배는 부두를 떠나 푸른 대리석 탁
자처럼 평평한 바다를 뒤로 하고 떠났네. 우리는 좀처럼 여행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흔히
갖는 자부심과 만족감으로 멀어져 가는 해안선을 바라보고 있었네.
아버지는 바로 그날 아침에 얼룩을 모조리 지워버린 코트 위로 배를 내밀고, 벤젠 냄새를
주위에 온통 퍼뜨리고 계셨지. 외출하실 때는 언제나 그 냄새를 퍼뜨리므로, 나는 그 냄새를
맡기만 하면 주일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
아버지는 갑자기 두 신사가 두 명의 귀부인에게 굴을 권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네. 누더기
를 걸친 한 늙은 선원이 칼로 껍질을 까서 신사들에게 넘겨주면, 그들은 그것을 부인들에게
내미는 것이었네. 부인들은 깨끗한 손수건에 그 껍질을 올려놓고는 옷을 더럽힐까봐 입을
내밀고 물을 빨아 마시고는 껍질을 바다로 내던지곤 했네.
아버지는 달리는 배 위에서 굴을 먹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던가봐. 그리하여 그것을 세련
된 좋은 취미로 생각하시고는 어머니와 누나들의 곁으로 다가오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네. 굴 좀 사 줄까?
어머니는 돈이 아까워 주저하였지만 누나들은 곧 찬성했네. 그러자 어머니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셨지. 나는 배가 아플까봐 겁이 나요. 애들이나 사 주세요. 그러나 많이 사
시면 안돼요. 탈이 날지 모르니까. 그리고는 나에게 이렇게 덧붙여 말씀하셨네. 조제프에
게는 필요 없어요. 사내애들은 버릇이 나빠지면 안되니까요.
그리하여 나는 할 수 없이 어머니 곁에 남아있게 되었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런 차별 대
우를 받는 것이 못마땅했네. 나는 아버지가 위풍당당하게 두 딸과 사위를 데리고 그 누더기
를 걸친 늙은 선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눈여겨보고 있었네.
두 귀부인은 방금 자리를 떠난 뒤였네. 아버지는 굴물을 흘리지 않고 먹는 방법을 누나들
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손수 시범을 보이시려고 굴 하나를 손에 들었네. 그 부인들을 흉내
내려고 하였으나 굴물이 금방 코트에 떨어지고 말았네그려. 어머니의 투덜대는 소리가 들려
왔지. 잠자코 계셨으면 좋잖아요.
그러자 갑자기 아버지는 긴장한 얼굴로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굴 껍질을 까는 선원을
둘러싼 식구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불쑥 우리 앞으로 오시지 않겠나. 얼굴이 몹시 창백
하고 눈빛이 이상하게 보였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하셨네. 저기
저 굴 껍질을 까는 사내는 쥘르를 꼭 닮았어.
어머니는 영문을 몰라 이렇게 반문하셨네. 어느 쥘르요?
물론... 내 동생 말이야... 미국에서 잘 살고 있으니까 망정이지, 그렇지만 않다면 틀림없
이 쥘르라고 착각하게 생겼어.
어머니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씀하셨네. 당신 미쳤구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왜
그런 당치 않은 소리를 하세요?
그리도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우기셨네. 그럼 당신이 직접 가서 확인해 보구려.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딸들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겨놓았네. 나는 그 사내를 유심
히 바라보았지. 늙고 추하고 주름살이 굉장한 그는 자기 일에 열중하느라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네.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셨지. 보아하니 후들후들 떨고 계시지 않겠나. 어머니는 다급한 어조
로 말씀하셨네. 내가 보기에도 틀림없이 그 서방님 같아요. 선장에게 가서 알아보세요. 그
러나 조심해야 돼요. 형편이 이렇게 되었다면 우리에게 짐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아버지는 선장을 찾아가셨네. 나도 뒤쫓아갔지. 웬일인지 가슴이 무척 설레었어.
선장은 키가 크고 메마르고 양 볼에 구레나룻을 기른 신사로, 갑판 위를 마치 인도인들의
우편선을 지휘하는 사람처럼 의젓한 모습으로 거닐고 있었네. 아버지는 선장 앞으로 점잖게
다가가서, 찬사를 섞어가며 선장 직책에 관한 것을 몇 가지 물으셨네.
저지 섬의 중요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생산물은 무엇입니까? 인구는 얼마나 됩니까? 풍
속과 습관은 어떻습니까? 토질은요...?
마치 미합중국을 화제로 삼고 있는 것같은 말투였네. 그리고는 우리가 타고 있는 선박 익
스프레스호에 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더니, 화제가 자연히 승무원에게로 옮아갔네. 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마침내 이렇게 물었네. 저기 굴 껍질을 까는 사람이 있지요? 무척 재미있
는 사람같아 보이는데 저 노인의 내막을 좀 아십니까?
선장은 이 말에 짜증이 나는 듯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네. 작년에 미국에서 만난 부랑자인
데, 프랑스 사람이기에 데리고 왔지요. 아브르에 친척도 살고 있나봐요. 그러나 그들에게 빚
을 진 것이 있어 찾아가지 않겠다는 거요. 이름은 아마 쥘르 다르망쉬인가 다르방쉬인가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와 비슷해요. 한동안 유복하게 지낸 적도 있는 모양인데 이젠 보시다시
피 저 꼴이 되었지요.
아버지는 얼굴이 납덩이처럼 되면서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목이 막혀 더듬더듬 간신히 이
렇게 말씀하셨네. 아...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지요... 선장님 고
맙습니다.
아버지는 그 자리를 뜨셨네. 선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
었네. 아버지는 어머니 곁으로 돌아오셨네. 얼마나 당황하고 계셨던지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여셨네. 앉으세요. 남들이 눈치채겠어요.
아버지는 의자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리셨네. 맞았어. 쥘르야, 틀림없는 쥘르야! 그리고 이
렇게 덧붙이셨네. 어떡하지?
어머니는 얼른 대답하셨네. 아이들을 데려와야 해요. 조제프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니,
그 애를 보내서 데려 오도록 해요. 사위가 눈치채지 못하게 각별히 조심해야 돼요.
아버지는 얼빠진 사람처럼 중얼거리셨네. 아, 이게 무슨 꼴이람!
어머니는 화를 버럭 내며 덧붙여 말씀하셨네. 그 도둑이 무엇을 하랴 싶어 언제나 의심
이 가더니... 그러니 다시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그럼 그렇지, 다브랑쉬 집안 사
람에게서 무엇을 바랄꼬!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핀잔을 받으면 언제나 그러하시듯 손을 이
마로 가져가셨고, 어머니는 말씀을 계속하셨네. 조제프가 가서 먹은 굴 값이나 치르도록 그
에게 돈이나 주세요. 그 거지가 절대로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해야 되요. 눈에 띄어봐요.
우리 꼴이 어떻게 되겠어요. 자 우리는 저 끝으로 가요. 그 작자가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못
하도록 해요.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5프랑을 주시고 나서, 가족들은 모두 데리고 멀찌감치
가버리셨네.
누이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네. 나는 어머니가 배멀미를 하신다고
일러주었지. 그리고는 굴 까는 사람에게 가서 물었네. 우리가 먹은 굴 값이 모두 얼마나 됩
니까?
나는 그때 얼마나 아저씨! 하고 부르고 싶었는지 정말 모르네.
그가 대답했네. 2프랑 50쌍팀입니다.
내가 5프랑을 내어주니까, 그는 돈을 거슬러 주었네.
나는 그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네. 쭈글쭈글해진 가엾은 뱃사람 손 말일세. 나는 또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네. 지치고 늙은 비참한 얼굴이었네.
나는 생각했네. 저 사람이 바로 아버지의 동생이면 우리 삼촌이로구나!
나는 그에게 10수를 팁으로 주었네.
그는 매우 고맙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네. 복 많이 받으십시오. 도련님!
그것은 구걸하는 자의 가엾은 목소리였네. 아마 그는 미국에서 거지생활을 했을 걸세.
누이들은 내가 그에게 선심을 쓰는 것을 보자 어이가 없다는 듯이 힐끗 쳐다보았네.
내가 남은 2프랑을 아버지에게 돌려드리자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물으셨네. 아니 그게 3
프랑이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나는 분명한 목소리로 어머니께 말했네. 팁으로 10수를 주었어요.
어머니는 펄쩍 뛰며 나를 빤히 쳐다보셨네. 미친 녀석 같으니! 그래 저 비렁뱅이에게 10
수나 주었단 말이야!
아버지가 눈짓으로 사위를 가리키자, 어머니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리셨지. 우리도 입을
다물어 버렸네.
그때 우리 앞으로 멀리 수평선 위에 보랏빛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네. 그것이 바로 저지
섬이었네.
배가 부두에 가까이 갔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쥘르 아저씨를 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
네. 그에게 가서 다정한 말로 위로해 주고 싶었네.
그러나 더는 굴을 먹으려는 사람이 없게 되자, 그의 모습도 사라져 버렸네. 아마 그는 냄
새가 고약한 배 밑창으로 내려갔을 걸세. 거기가 그 비참한 남자의 숙소였을 테니까.
우리는 돌아올 때, 그를 다시 만나지 않으려고 생 말로호를 탔네. 어머니는 불쾌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계셨지.
그 후로 나는 삼촌을 다시는 보지 못했네.
자, 이제는 자네도 알겠지. 내가 왜 때때로 5프랑씩이나 거지에게 쥐어 주는지...
모파상(1850-1893): 프랑스의 극작가이며 소설가.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부터
플로베르에게서 문학 지도를 받았다. 그의 작품은 뛰어난 기교와 정확한 필치로 10여 년의
작품활동 기간에 3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일컬어지는 그는, 자연주
의적 수법으로 인생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데, 대표작으로는 여자의 일생 , 목걸이 ,
달빛 등이 있다.
겨울의 꿈
심한 추위에 그녀는 감기를 앓고 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웃 마을에서 양봉가가 벌을 옮기
러 온 것이 바로 그때였다. 벌통은 그녀의 침실 창문 밖 발코니의 함석지붕 밑 깊숙한 곳에
여러 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쇳덩이, 얼음, 돌 등 광물성 경치를 내다보고 있었다. 요염한 유령처럼 푸른빛을
띤 유백색 서리 안개는 위쪽으로 갈수록 한결 흰빛이 짙었다. 그 뒤에서 희멀건 해가 열기
를 잃고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지를 내린 채 돌보는 이 없는 가스등이, 어느 빈집의
수의를 걸친 물건들이며 검은 유품들을 기가 막히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고, 사방에는
너무나 깊은 고요가 깃들어 오히려 그녀 귀에는 끊임없는 여운으로 메아리치는 듯했다.
벌들이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들려주던 그 연약한 가물가물한 윙윙거림을 아직도 보내오
는 것인가? 한 겨울 동안 소리를 죽이고 가만가만 중얼거리다가 따스한 날씨에 따라 한결
높아지고 커지고 소리가 아니던가? 그때가 되면 마치 하나의 구심력에 붙들릴 수 없는 머리
들이 그 중심축을 뛰쳐나가 사방으로 흩어지려고, 헛된 발버둥을 치는 것처럼 뚜렷하게 윙
윙거리고 다투는 것이다.
그러나 벌들은 조용했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도 없었다. 뜰로 나간 모양이다. 다른 모든
것처럼 아이들도 추위에 짓눌려 있나보다.
갑자기 사다리의 일부가 창을 가로질러 흔들흔들 올려지더니 제자리를 잡아 멎었다. 이윽
고 낡은 모자를 쓴 남자의 머리와 어깨가 나타났다. 그녀가 베개에 묻혀 있는 것을 곁눈질
해 본 그의 얼굴은, 주름살 투성이지만 즐거운 듯 헤벌름하게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그가 인사를 했다.
그녀는 말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손을 흔들고 미소를 지으며 목을 가리켰다.
편찮으신 게로군요? 거참, 안됐습니다. 고약한 감기가 유행하니까요. 정말 이런 날씨엔
자리에 누워 있는 게 제일이죠.
그는 발코니로 올라와서 긴 유리창을 가리며 버티고 섰다. 후드가 달린 카키색 재킷을 입
은 키가 작고 어깨가 넓은 체격이었다. 희극 배우 얼굴처럼 마르고 주름살이 잡힌 타원형
얼굴이, 하루 동안 자란 수염으로 높고 낮은 데가 있어, 희미한 속에서도 반짝이는 푸른 두
눈이 영락없는 농사꾼의 눈이었다.
여기까지 벌을 옮기러 왔지만요, 분봉하기엔 고약한 시기랍니다. 이런 날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에요. 따뜻한 날이 적당하지요. 하지만 날씨가 더 궂을 것 같지는 않고, 별
로 할 일도 없는데다가 댁에서 와 달라고 하셔서 왔어요.
그의 말은 이상하게 느리면서도 울리는 것이 조금도 이 지방 사투리를 닮지 않았다. 사투
리는 좀 더 활발하고 박력이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안개 낀 창으로 격리되어 있지만, 하
루 동안의 친구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병석에 누워있는 이 집 여주인에 대한 예의범절같
은 건 그로서도 문제될 게 없었다. 그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단순한 즐거움을 느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을 하면서 말동무가 생긴 게 즐거웠다.
친구를 데리고 올라와야겠군.
그가 사라지더니 아래 마당에서, 조지!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뭐라고 중
얼거리더니, 그가 다시 올라오고 젊은 일꾼 하나가 연장이 든 배낭을 메고 따라 올라왔다.
조지는 일자리가 어색했던지, 창 너머를 힐끗 바라본 후로는 제 일만 하고 다시는 그녀 있
는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무척 젊고, 일꾼치고는 고상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턱이란 이마는 깊숙하게 윤곽이
졌고, 다문 입술도 뚜렷했으며, 두드러진 광대뼈에 우묵하게 파인 볼, 눈 언저리는 깊은 동
굴 같았는데, 그 속에 그지없는 슬픔을 간직한 두 눈이 있었다. 슬픔이 한 자리에 굳어서 이
미 슬픔 그것밖에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 마치 동물이나 초상화의 눈 같았다. 이런 추
상적인 얼굴은 젊은이에게도 늙은이에게도 있는 얼굴이며, 여기저기서 기관사 모자나 군인
모자를 쓰고 나타나기도 하고, 숙련공의 작업복을 입고 도로 수선반에서 지나가는 그녀 자
동차를 쳐다보던 그런 얼굴이었다.
그런 싱싱한 얼굴을 볼 때마다 그녀는 막연하게, 그리고 로맨틱하게 정말 미더운 얼굴이
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평생 수많은 얼굴을 관찰할 한가한 시간이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혁명적인 이념을 품고 있는 친구나 이념적 독서회에 속해 있는 친구도 있었다.
이거 꽤 시간이 걸리겠는걸. 하고 양봉가가 말했다. 굉장히 깊이 내려간 모양이야.
일종의 공포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마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모험적인 대
수술이 실시되려고 하는데, 자기가 그 수술 장면을 목격해야만 하는 기분이었다. 그 종양은
이 집 몸뚱이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다. 신열의 물결이 다시 밀려오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사라졌다. 그녀는 아이들이 사다리 위에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내 아이들이 나
타났다. 존은 미리 방어할 요량으로 여동생에게 치마 위에 바지를 껴입히고, 사다리에 발 디
딜 자리를 가리켜 주었다. 그들은 발코니를 활보하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방 안을 들여다보
고 전에 없이 소란스럽게 굴었다.
벌치는 사람이 왔어요!
조심해야 돼. 존이 그녀는 앞질러서 비웃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말없이 그녀
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음을 지으며 눈동자를 굴릴 뿐이었다.
조크도 데리고 올라올까요? 그 말에 그녀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그래두 올려 달라구 낑낑거리는 걸. 제인은 실망한 투로 말했다.
자기 친구들과 떨어진 개가 미친 듯이 짖는 소리가 아래서 들려왔다.
개한테로 내려가는 게 좋겠다. 하고 존이 싫증이 난 듯 말했다. 막상 정복을 해 놓고 보
니까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또 하나의 경우였다.
일꾼들이 온다. 우리가 있어봤자 걸리적거리기나 하겠지 뭘. 여기야, 여기다 발을 놓으란
말이야. 이 바보!
아이들은 가 버렸다. 다시 만나서 미친 듯이 떠들썩한 소리를 내고는 이윽고 조용해졌다.
그녀는 제인의 주관적인 흥미는 이미 바닥났으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존만은 짙은 분홍빛
두 귀를 가진 과학적인 관찰자로서, 오늘의 자기 위치를 지켜 어떻게 해서든지 이 일의 영
역 안으로 슬며시 끼어들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양봉가와 그의 조수가 함께 올라왔다. 그들은 함석 지붕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낮은 음성으로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벌소리같은 낮은 음조가 약간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
다가 간간이 아아! 하는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외침소리가 들렸다.
치고 두드리고 비트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자기는 도저히 그런 소리에는 못 견
딘다고 누가 일러 줘야 했으나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벨을 눌러서 커튼을 쳐달라고
말하고, 커튼이 쳐지자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존이 문을 열고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그녀는 잠이 깨었다. 점심 먹으러들 갔어요. 저
녁 때 벌을 옮기러 오겠대요. 지붕은 거의 다 벗겼어. 전 벌을 봤어요. 엄마도 커튼만 걷었
으면 볼 수 있었을 거야. 불렀는데도 엄마는 안 들렸나봐요? 고양이가 비둘기하고 새를 또
두 마리나 물어 왔는데, 우리가 뺏어서 가마솥 뒤에다가 따뜻하게 싸 놨어요.
그는 복도를 쿵쿵거리고 휘파람을 불면서 가 버렸다.
3시. 쌀쌀한 날씨는 매시간 굳어만 갔다. 그러나 햇볕이 엷어지기 시작하자, 한 때 푸른
대기가 바싹 다가와서 나무 꼭대기를 샅샅이 뒤지고 창살에 괴이하게 빛나는 순간이 있었
다. 마치 푸른 파도가 돌아와서 암벽 동굴과 소금에 찌든 암석을 침식하듯이.
사다리가 흔들렸다. 바람구멍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일종의 램프를 들고 그가
다시 나타났다.
한 번 구경해 보세요. 하고 그는 활달하게 불렀다.
제법 구경거리가 됩니다. 이런 구경은 아마 생전 처음일 걸요.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과 숄을 걸치고 비틀거리면서 창가로 걸어갔다. 요술쟁이처
럼 그는 검정 부대를 활짝 벗겼다. 그러자 엄청난 광경이 나타났다. 희멀건 벌집의 환초가
도리와 중방을 가로 세로 이랑 지우고, 톱니꼴로 덩어리가 진 채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웅웅거리는 까만 벌 무리가 갑자기 바깥 구경을 하자 귀찮다는 듯이
웅성거렸으나, 얼음처럼 차가운 공기에 힘을 잃고 꼼짝도 못했다. 비교적 활기가 있는 몇 마
리가 그 무리에서 기어 나와 공중으로 맴돌아 올라가다가는 정신을 잃고 도로 떨어져 버렸
다.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활기차지요? 양봉가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그녀는 그
의 얼굴을 가리켰다. 거기엔 벌이 서너 마리 느릿느릿 기어다녔다. 그는 킬킬거리면서 그걸
털어 버렸다. 전 안 쏜답니다. 쏘여도 대수롭지 않구요. 수없이 쏘여 면역이 되었으니까요.
그는 벌집 한 쪽을 뜯어서 들어 보였다. 그녀는 어찌나 그게 만져보고 싶은지 창문을 억
지로 밀어내리고, 얼굴에 폭풍처럼 와닿는 공기를 받으면서 그 남자 손에서 받아들었다. 연
약하고 색깔이 곱고 곧 부서질 듯하고 섬세한 것이, 마치 아직 덜 여문 산호 같았고, 마른
해면이나 해초 한 쪽처럼 무게가 없었다.
말랐죠, 네? 하고 양봉가는 말했다. 여기선 별로 꿀을 많이 못 따겠는데요. 지난 여름만
해도 꿀이 줄줄 흘렀겠는데요. 일 년 전에만 이 통에서 땄더라면 제법 가득 땄을 텐데, 이제
여기선 꿀다운 꿀은 못 따게 되었군요.
그녀는 그제야 알았다. 이 섬세하고 얇은 투명한 벌집은 이미 사라진 세계를 의미했던 것
이다. 그녀는 격렬하게 몸을 떨다가 예상 밖의 광경을 목격하고는 마음이 억눌렸다. 꿈이 너
무 컸었다. 지붕 밑에서 꿀이 흠뻑 쏟아지면 독이랑 항아리랑 주발에다가 받아서 저장해 두
고 빵에도 발라먹고, 푸딩에도 단맛을 내고, 아이들에게 설탕이 떨어졌다는 말을 조금 더 늦
출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너무 늦었다! 꿀은 요술처럼 사라져 버렸다.
벌을 옮길 시기가 아니야. 하고 양봉가는 되풀이 말했다. 그는 부글거리고 번쩍이는 덩어
리 위에 맥없이 램프를 흔들어대며 아무렇게나 연기를 쏘였다. 그래도 댁에서는 해 달라고
하셨지요?
그녀는 변명하고 싶었다. 벌을 옮겨야 할 필요성을 설명하고 9월부터 그를 기다렸다고 말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창을 밀어 올리고 벌집을 화장대
위에 놓고 다시 침대에 털썩 누웠다.
전쟁이 터진 이래 착 달라붙어 있는 그녀의 적이 그녀 귀에 속삭였다. 꼭 내가 생각한 그
대로야. 또 하나의 감상적인 환상이지. 행운의 마력으로 음식을 만들어 내겠다는 수작이야.
인생은 이미 그런 달콤한 종말로 이야기를 꾸미지는 않는다니까, 알겠나? 다시는 없어. 새벽
이고 황혼이고 그 싱싱한 음성으로 너를 달래던 정력의 원천이, 우리는 당신을 위해서 일합
니다, 우리가 먹고 남는 건 당신 것입니다 했지. 그러나 정작 가지려니까 없어져 버렸거든!
너는 꿀을 축적하게 내버려두고,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너무 오래 놔 뒀어. 우글우글
한 벌떼한테서 얻는 거라고는 낡아빠진 기계가 닳는 소리같은 윙윙거리는 소리 이외엔 아무
것도 없단 말이야. 일벌들이 저희들 양식을 다 먹어 버리고 너 먹을 건 안 남겼어. 이번에는
톡톡히 맛을 봤지. 얘야, 너같은 사람은 점점 배급을 못 얻게 될 거야. 머지 않아 시골집에
사는 사람들이 공평한 자기 몫보다 더 얻게 될 걸. 일하지 않고 따내던 선물이 옛날 그대로
의 벽에서 나오기는 이제 글렀어. 너희 집 지붕은 항상 석회를 바르고 기름을 칠하고 해서
여전히 교묘하게 간직되어 있지 않니!
반쯤 뜬 눈으로 그녀는 그가 허리를 구부리고 여기저기 살피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갑
자기 그가 얼른 칼을 꺼내어 팔을 뻗어서 어디엔지 밀어 넣었다. 조금 후에 칼이 올라오고
다시 손이 누렇고 찐득찐득한 덩어리를 듬뿍 들어 올렸다. 꿀이었다.
꿀 봐!
정말 꿀이었다. 그 푸성지고 탐스럽게 엉킨 꿀이 칼 끝에 듬뿍 묻어 나왔다. 나이프를 쳐
들자 꿀물이 천천히 길다할게 호박빛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겨울이 한창 맹위
를 떨치는 속에서도 여름의 소우주가 달콤한 액체로 녹아든 채 매달려 있었다.
꿀 봐! 존이 아래서 소리를 질렀다.
이젠 됐다. 양봉가는 마치 실망의 중압감에서 해방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여긴 많
아, 바로 이 구석에. 이렇게 교묘하게 감춰둔 걸 본 일 있니? 한 방울이라도 안 떨어지게 해
야지 오오, 너희들도 좀 줘야지. 아가, 뛰어가서 가정부더러 접시 하나 달래서 가져와라. 그
럼 차에 타 먹게 한 덩어리 줄 테니.
아들이 급히 뛰어가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마치 아들이 자기를 데리고 뛰어가는 것 같았
고, 자기를 뚫고 뛰어가는 것 같았다. 모든 장애를 박차고 그가 가 버리기 전에 접시를 가지
고 돌아와서 지체없이 내줌으로써 이 중요한 사명을 다하려는 것 같았다. 이러한 아이들의
순수한 호의와 완전히 어떤 일에 정신을 집중해서 그 일에 녹아들고, 그 일과 하나가 되어
버리는 동심이 그녀로 하여금 마치 사랑이나 해산을 한 다음처럼, 몸의 괴로움을 잊고 시원
한 물결 위에 두둥실 뜨게 해서, 순간적이나마 그지없이 평화스러운 마음으로 희고 형체없
는 해변으로 실어다 주었다.
댁의 아드님, 참 기특한데요? 양봉가는 바삐 자르고 긁어내고 하면서 말했다. 나는 이
꿀만 보면 반갑답니다. 이 세상에 내가 보기 싫은 게 꼭 한 가지 있는데, 그건 꿀이 마른 벌
통이랍니다.
이 말에 그녀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극히 미세한 단계를 밟으면서 기어서 다가오는 죽음
이 여분이 없다는 정도가 아닌 생을 영위할 만한 먹고 살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다. 매몰된
광부들처럼 모든 집단의 무덤처럼 느껴졌다.
아래서 인기척과 존의 높은 음성이 들려왔다. 이거면 돼요?
되고말고, 올려 보내라구.
부엌 찬장에서 가져온 제일 큰 쇠고기 쟁반이 눈앞에 나타났다.
고맙네 이 친구, 단 게 먹고 싶을 테니 내가 조금 떼어 주지. 먹고 싶지? 엄마가 걱정 안
하실까? 그는 껄걸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가정적인 물음에 금방 재치있는 대답을 할 수가 없던 존은, 어머니에게 무안한 듯
계면쩍은 웃음을 짓곤 급히 사라져 버렸다.
햇볕은 서서히 엷어졌으나, 떠오르는 달이 어둠이 내리는 것을 막고 있었다. 황혼에 희미
하게 표백된 그의 그림자가 창에 비친 채 떠나지 않고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했다. 흥얼거
리고 콧노래를 하다가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간간이 벌에게 상냥스럽게 말을 걸기도 했다.
달아나라 아가, 달아나.
그리고는 가끔 벌이 닥지닥지 붙은 손을 들어 보였다. 이 녀석들이 쏘아봤자 난 괜찮아
요. 그저 좀 얼얼하지요. 꼭 망치로 잘못하다가 손가락을 때린 정도지요.
그가 벌을 쓸어버리자, 벌들은 마치 목걸이 알이 흩어지듯 떨어졌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미소지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창살을 가만히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그녀는 까닭 모를 놀라움에 사로잡힌 채 누워 있었
다. 아래 창이 삐걱거리며 황급하게 열리고, 창턱 너머로 어둠침침한 속에 무엇인가 그녀를
내리덮듯 다가오더니 도깨비같은 그림자가 기어 들어와서 꿋꿋이 버티고 섰다. 머리가 없는
그림자,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는 흔들리는 어둠밖에 없다. 열 때문인 게다. 기다리자, 그러
면 가 버리겠지.
그녀가 용기를 내어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켜자 양봉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얇은 천으
로 된 길고 둥근 베일이 어깨까지 달려 있는 둥그런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안 나오는 소리를 간신히 가다듬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게 분봉할 때 쓰는 모자예요?
아아, 이거 말이죠? 그는 웃으면서 모자를 벗었다. 이걸 쓰고 있는 걸 깜박 잊었군요.
놀라셨나요?
멋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일을 마쳤다는 걸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저 아래로 갖다 놨습니다. 꿀도 꽤 땄구
요. 내 마음도 흐뭇합니다. 벌통이 텅 빈 건 질색이니까요.
그는 창문 커튼을 닫았다.
닫아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등화관제에 걸려들면 여간 귀찮아야죠.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난로 곁으로 다가왔다.
난로가 곧 꺼질 것 같더군요. 그래서 제가 들어왔지요. 불을 봐드릴까 해서요.
그는 꿇어앉아 재를 쑤셔내리고, 멍들고 붓고 꿀이 묻은 손으로 석탄을 더 지폈다.
금방 따뜻해질 겁니다. 아니, 그런데 심부름하는 사람도 없습니까?
있어요.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곧 누가 올 거예요. 잊어버리고 벨을 안 눌렀어요.
그녀는 스스로가 가엾어져서 울고 싶었다.
퍽 괴로우신 것 같은데요. 장뇌유로 가슴을 실컷 문질러야 합니다. 그것밖에는 없어요.
그는 금방이라도 달려들어서 가슴을 문질러 줄 듯했다.
그러나 그는 난로 곁을 떠나지 않고 생각에 잠기는 듯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 방을 보니까 옛날이 그립군요. 물론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있지요. 영감님이 우리를
데려다가 저녁에 공부를 시켰으니까요. 그분은 남을 가르치는 데는 훌륭하셨어요. 그는 킬
킬거리고 혼자 웃었다. 돌아가신 지 십 년은 됐을까요? 전혀 접촉이 없었어요. 난 열일곱에
캐나다로 건너갔지요. 그게 이십 년 전. 마누라도 못 얻고, 돈도 못 벌고, 아무 것도 아니지
요. 그는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돌아온 것만도 다행이지요. 출
발점으로 되돌아온 것, 그것이 지금 내가 있는 곳이죠. 지금은 결혼한 누이하고 살고 있답니
다.
그녀는 말했다. 차 한 잔 드시겠어요?
아니요, 집에 가야지요. 하여간 고맙습니다. 꿀은 잘 딴 셈입니다. 형편없었으니까요.
살아나겠어요?
글쎄, 그건 모르지요. 벌을 옮길 시기가 아니니까요.
꿀을 훔쳐가면 벌들은 무척 풀이 죽는 모양이지요?
슬픈 노래를, 아주 슬픈 노래를 부른답니다.
그는 창가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렇지만, 잘 되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밖에요. 조지가 아침에 와서 함석을 고쳐 드릴 겁
니다. 자아,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내일은 훨씬 나으시기를 바랍니다.
창 앞에서 그는 걸음을 멈췄다.
아니, 이리로 나가야 할 까닭이 없군. 안 그래요? 하고 그는 물었다.
신사답게 나가는 게 좋겠어요.
그는 방을 가로질러 그녀의 침실 문을 열고 나간 다음에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의 경쾌
한 발자국 소리가 계단에서 들리더니 멀리 사라졌다.
그녀는 체온을 재어보고 훨씬 내려간 것을 알았다. 그 사람 덕분일 게다. 그녀는 자신이
자아내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누워 있었다. 사람이란 의지에 따라서 행동을 한다. 그러
기 때문에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인생의 일부분은 영원히 억눌려 있
다. 부서진 발코니의 영상이 그녀 뇌리에 무겁게 자리잡고 있었다. 폭격당한 집의 사진처럼
찢기고 속이 드러난 황폐해진 영상이 펼쳐졌다.
정말 이상한 날이었고, 정말 기묘한 만남과 헤어짐이었다. 자꾸만 되뇌일수록 그녀의 소극
적이고 몽상적인 한가한 삶은 덧없는 역설적인 영상과 상징이었고, 이것을 간직하기 위해
존재하는 움직일 수 없는 한 분자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만 같았다. 이것이 그녀가 궁극
적으로 기억하는 전부였다.
뜰 어디에선지 큰 가지가 와지끈 꺾이면서 떨어졌다.
아이들이 꿀 쟁반을 들고 뛰어 들어왔다.
좀 드려요?
지금은 싫다. 정말 아무 것도 목구멍을 넘기지 못하겠다. 그렇게 맛있는 꿀까지도.
맛있는 게 다 뭐예요. 형편없어요. 보기엔 아교풀 같고 맛은 너무 달아요.
확실히 식욕이 당기는 빛깔은 아니었다. 거의 갈색이고 찐득찐득해 보였다. 너무 오래 벌
통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목에 걸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희들은 이 방에 와선 안
돼. 메리는 어디 갔니? 내 옆에 가까이 오지 마라.
어휴, 어머니. 독감이 옮을까봐서요? 존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소파의 팔걸이를 넘
어 벌렁 누워서 방바닥에 뒹굴었다.
엄마, 엄마는 뭣 때문에 그 놈들을 치워 버릴려구 그래요? 거기 있어도 아무 일 없잖아
요?
얼마나 시끄러운 줄 아니?
우리는 그 소리가 좋은 걸요. 그까짓 벌소리가 듣기 싫다면 공습이 오면 어떡하지?
분봉하는 구경을 하니까 재미있었잖니?
그건 그랬지만.
그러나 이젠 모든 것이 없어졌다. 싫도록 구경했고 실망했을 뿐이다.
작년 여름에 얼마나 많이 벌들에 쏘였나 생각해 보렴. 로버트랑, 핸슨씨랑.
아, 엄마 손님 말이지요?
주말이면 그 벌이 얼마나 낙이 되고,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가. 그러나 이제부터는 물론 주
말파티같은 건 있을 수 없다. 벌도 가 버릴 때가 되었다.
제인의 눈 생각을 좀 해 보렴. 며칠을 붕대로 감고 있었잖니.
저도 생각나요. 제인은 얼굴을 붉히고 엄숙하게 말했다.
아물찮았어.
저런 말투 좀 봐!
존이 역정을 내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물찮았다는 건 피피 디드콕크 책에서 배운 거예요.
제인은 유쾌한 듯 말했다.
모두들 쓰는 말이에요. 옥스퍼드 지방 말투라나?
그녀는 방 안을 이리저리 뛰면서 치마를 휘날리고 머리를 나풀거리더니 가만히 서서 가슴
에 손을 얹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데? 하고 그녀는 물었다.
바보같으니라구. 하고 오빠가 말했다. 갑자기 미쳤니?
모르지? 하고 제인이 말했다. 심장이야, 심장이 멈추면 죽거든. 뛰었더니 내 심장 소리
가 들려.
심장이 왜 멈추니? 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언제고 한 번은 멈추지요. 하고 존이 말했다. 오늘밤이라도 멈출지 누가 알아? 아, 참...
그는 포켓에 손을 넣더니 뭔지 시커먼 물건을 꺼냈다.
이 참새를 마지막으로 엄마 방 난로의 온기로 살려보려고 가지고 왔어요. 가마솥 뒤에
놓았었는데 고양이가 돌아다니니까요. 비둘기도 잡았어요. 딱딱해서 안 먹었나봐요.
그는 참새를 살펴보았다.
살았어!
그는 그걸 가지고 불 옆으로 뛰어가서 웅크리고 앉더니, 이제 막 살아난 불 앞으로 손에
놓은 채 내밀었다.
눈을 떴어. 날개를 놀리는 걸.
제인도 그 곁에 가서 꿇어앉았다.
무척 예쁜 참새네?
갑자기 새는 손바닥에서 쏜살같이 날아오르더니 난로 선반에 가 부딪치고 다시 난로 곁의
융단에 떨어졌다. 모두들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잠시 후에 그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다시 새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자 새는 곧바로 불 속
으로 날아들어 석탄 위에서 파닥거리고 짹짹거렸다.
눈 깜짝할 순간에 그녀는 달려가 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뺐다. 날개 타는 냄새가 나고
숯이 된 조각이 날리면서 떨어졌다. 난로 곁의 돌 위에다가 놓았다. 모두들 가만히 들여다보
고 있었다. 갑자기 참새는 되살아나서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그 연약한 몸에 숨은 끈질
긴 생명력이 그녀는 오히려 두려웠다.
융단 위에서 참새는 절뚝절뚝 뛰어다녔다. 날개 하나는 타서 없어지고, 다리 하나는 가슴
밑에 오그라져 붙고, 꽁지도 없이 펄떨펄떡 힘차게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저래도 살까? 하고 제인이 물었다.
그럼. 존이 냉담하고 침울하게 대답했다.
이젠 두고 보는 수밖에 없지.
로자먼드 레이먼: 영국의 소설가. 런던 태생의 여류작가로, 섬세하고 서정시적 문체와 흠
잡을 데 없는 감성으로 글을 썼다. 작품으로는 싱거운 대답 , 콘힐 , 고독의 샘 등이 있다.
열망
조금 전부터 닫혀있는 버스 유리창 안에서 파리 한 마리가 빙빙 날아다니고 있었다.
파리는 웬일인지 지친 듯 소리없이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쟈닌느는 유심히 그 파리를 지
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없어졌다 싶더니 잠시 후 움직이지 않고 있는 남편의 손위에 앉을
것을 보았다.
날씨는 싸늘했다. 모래 섞인 바람이 유리창에 휘몰아칠 때마다 파리는 바르르 몸을 떨었
다. 한겨울 아침나절의 희미한 햇살을 받아가며 버스는 철판과 차축이 울리는 요란한 소리
를 내며 크게 흔들거리면서 겨우 굴러가고 있었다.
쟈닌느는 남편 마르셀을 바라보았다. 좁은 이마 위에 짤막하게 난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넓적한 코, 일그러진 입술을 가진 그는, 마치 화가 난 반쯤은 사람이고, 반쯤은 짐승인 목신
처럼 보였다.
버스가 행길의 파인 곳을 지날 때마다 남편의 몸이 쟈닌느에게 쏠리곤 하였다. 그리하여
생기잃은 공허한 눈초리를 하고, 육중한 몸체로 다시 벌어진 아내의 두 다리 위에 주저앉는
것이었다. 다만 와이셔츠 소매보다 훨씬 긴 호색 프란넬 양복 저고리 소매가 손등을 덮고
있었으므로, 더욱 짧게 보이는 매끈매끈한 두 손만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텐트천으로 만든 조그마한 트렁크를 꼭 쥐고 있었으므로, 그는 손
등에서 파리가 살금살금 기어다니는 것도 미처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바람소리가 갑자기 소란스럽더니 버스를 에워싼 모래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마치 누가
숨어서 던지기라도 하는 듯이 모래는 유리창에 부딪치는 것이었다.
파리는 추운 듯이 한쪽 날개를 움직이며 네 다리 위로 몸을 굽히더니 어디론지 날아가 버
렸다. 버스는 속도를 늦추면서 곧 멈추려는 듯했다. 이윽고 바람이 좀 가라앉는 듯 싶더니
그 모래 안개도 좀 걷혀졌다. 버스는 다시 속력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먼지 속에 훤하게
햇빛이 비쳐왔다. 마치 쇠붙이를 깎아 세운 듯이 호리호리하고 하얀 두세 그루의 종려나무
가 유리창 너머로 보이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마르셀이 말했다. 무슨 동네가 이 모양이람!
버스에는 조는 듯한 아랍인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아랍식 외투를 걸치고 있
었으며, 그 중에 몇몇은 좌석에 다리를 올려놓은 탓으로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유난히 건들
거리는 것이었다. 그들의 침묵과 태연자약한 태도가 쟈닌느의 마음을 몹시 억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여러 날을 그런 벙어리들과 함께 여행하고 있는 듯 생각되었다.
자동차는 새벽녘 철도의 종점에서 출발하여 싸늘한 아침나절 두 시간째, 이렇게 돌부리에
부딪히며 쓸쓸한 고원을 지나고 있는 참이었다.
출발할 무렵에 고원은 불그스름하게 물든 지평선까지 뻗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넓은 지
역을 바람이 휘몰아쳐 삼켜버렸다. 그 때부터 승객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차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버스 속으로 스며들어 입이나 눈에 묻은 모래를 닦아내면서, 마
치 철야라도 하듯이 침묵 속에서 여행을 계속했다.
쟈닌느!
남편이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체격이 건장한 자기에게 그 이름이 얼
마나 우스꽝스러운가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마르셀은 트렁크의 행방을 물었다. 그녀는 좌석
밑의 빈 곳을 발로 더듬었다. 어떤 물체가 발에 닿았다. 그녀는 그것이 트렁크라고 단정해버
렸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수그리기만 하여도 숨이 턱에 닿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학생 시절
엔 체육을 제일 잘했으며, 호흡곤란 같은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그때가 그렇게 오래
전 일이었는지 어느덧 이십오 년이나 된다. 실은 이십오 년이 문제가 아니었다. 쟈닌느가 자
유로운 독신생활을 버리고 결혼하기를 주저하며, 또한 혼자 늙어갈 앞날을 불안하게 생각하
던 것이 엊그제 같았던 것이다.
쟈닌느는 외톨이가 아니었다. 그녀의 곁을 잠시도 떠나려 하지 않던 그 법대생이 지금 곁
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의 작은 몸집이며, 탐욕스럽고 붙임성 없는 웃음소리와 불쑥
튀어나온 검은 눈동자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결국 그를 남편으로 맞게 되었다.
그녀는 그 남자의 강한 생활욕을 사랑했던 것이다. 생활이래야 물론 그 지방의 다른 프랑
스 사람들과 별로 다른 것은 없었다. 어떤 사건이나 사람들에 대한 기대가 어긋났을 때, 실
망하는 그의 모습도 사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사랑받기를 원했다. 그런 그녀를
그는 끈질기게 정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쟈닌느가 자기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라는
것을 언제나 느끼게 함으로써, 그녀로 하여금 뚜렷한 존재가치를 깨닫게 한 셈이었다. 그렇
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버스는 요란스럽게 경적을 울리면서 얼른 눈에 띄지 않는 장애물을 헤치며 간신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안에서는 아무도 꼼짝 않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누군가가 자기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 버스 통로 건너편에 자기 자리와 나란히 놓인 좌석에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은 아랍인은 아니었다. 쟈닌느는 출발할 때 그를 미처 보지 못한 것이 기이하게
생각되었다. 그는 사하라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었으며, 갈색 군모를 쓰고
있었는데, 햇볕에 그을린 길쭉한 얼굴은 외인부대의 날쌘 병사답게 날카롭게 보였다. 그는
약간 침울한 표정을 하고 밝은 눈초리로 쟈닌느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쟈닌
느는 얼굴이 화끈거려 남편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남편은 여전히 눈앞의 안개와 스쳐
가는 바람결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외투를 몸에 걸쳤다. 하지만 프랑스 군인의 모습은
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후리후리한 키에 날씬한 그 사내는 메마른 몸에 군복이 꼭 끼어 마치 말려서 부서지기 쉬
운 물건 즉, 뼈와 모래를 반죽하여 만든 사람같이 보였다. 맞은편에는 메마른 손과 햇볕에
그을린 아랍인들이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남편과 그녀는 겨우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그들은 큼직한 옷을 걸치고도 편안하게 앉아
있는 듯이 보였다. 그녀는 외투자락을 잡아올렸다. 그녀는 후리후리한 키에 별로 뚱뚱하지도
않고 알맞게 살쪄 육감적이고 탐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그것을 뭇사람들의 시선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얼굴에는 아직 애띤 데가 엿보였으며, 맑고 시원스러운 눈은 건장한 그녀의
몸집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쟈닌느가 예상했던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이 사업관계로 여행을 떠나면서 그녀
를 동반하려고 하였으나 그녀는 이를 반대했다. 전쟁이 끝나고 모든 거래가 정상화된 후부
터 오랜 시일을 두고 그는 이런 여행을 계획하여 왔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그는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소규모의 포목 도매상을 하면서 그들 부부는 그럭저
럭 살아왔던 것이다.
그들이 젊었을 땐 바닷가에 나가면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마르셀은 힘드는 운동
을 좋아하지 않아 아내와 바다에 나가는 것을 곧 중지해 버렸다. 그들의 소형 자가용은 일
요일의 소풍 때 밖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 밖의 시간에는 반은 터키식이고, 반은 유럽식으
로 된 그 동네의 아르카드 그늘이 진 자기 가게에서 지내는 걸 좋아했다. 그들은 가지각색
천이 걸린 가게 위층에서 아랍식 커튼과 바로크식 가구로 장식된 방 세 개를 쓰고 있었다.
그들에겐 아기가 없었다. 언제나 덧문이 절반쯤 닫힌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그들은 몇 해
의 세월을 흘러보냈다. 여름, 바닷가, 소풍, 심지어는 하늘마저 등진 생활이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당신만은 괜찮을 거야. 그는 간혹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
다.
하지만 달갑지 않은 일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큰 불상사라도 일어난다면 어떻게 한담?
그녀는 가끔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쟈닌느는 남편의 장부정리를 하기도 하고, 가게를 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무엇보다
도 괴로운 것은 여름이었다. 여름의 무더위가 포근한 권태감까지도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삼복 더위에 전쟁이 일어났다. 마르셀도 군대에 동원되었다가 곧 풀려나왔다. 포목
은 동이 나고, 거래는 끊기었다. 거리는 쓸쓸하고 무더웠다. 그때부터 집안에는 걱정이 생기
게 되었다.
시장에 다시 옷감이 나돌게 되자, 마르셀은 중간 도매상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직접 아랍
상인들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고원지대나 남부의 마을을 돌아다닐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는 아내를 데리고 다닐 생각이었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하여 아내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
므로 집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마르셀이 고집을 부리므로 그녀는 못마땅한대로 승
낙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길을 나서고 보니 그녀의 상상과는 딴판이었다. 그녀는 더위
와 파리떼와 갖가지 냄새가 코를 찌르는 더러운 호텔같은 곳이 두려웠다. 추위나 살을 저미
는 듯한 바람이라든가, 돌이 깔린 극지와 같은 고원지대는 생각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녀는
종려나무와 부드러운 모래밭을 상상했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사막이란 온통 돌뿐이었다.
그리하여 땅 위에는 돌 사이에 드문드문 말라빠진 풀만 보일 뿐, 거칠고 싸늘한 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갑자기 버스가 멎더니, 운전수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쟈닌느는 늘 들어오면서도 알 수 없
는 말이었다.
왜 그러시오? 하고 마르셀이 물었다. 운전사는 불어로 카뷰레터가 모래로 막힌 것 같다
고 대답했다. 마르셀은 또 다시 그 고장을 저주했다. 운전사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어 웃으
며, 대단치 않은 일이므로 모래를 쓸어내면 곧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운전사가 문을 열자 차
디찬 모래바람이 그들의 얼굴로 몰아쳤다. 아랍인들은 제각기 외투 속에 코를 파묻었다.
문 닫아! 마르셀이 소리쳤다. 운전사는 문 앞으로 다가오면서 웃고 있었다. 그는 침착하
게 몇 개의 연장을 꺼내어 들고, 문을 열어 놓은 채 버스 앞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마르셀은 한숨을 쉬었다.
저 운전사는 난생 처음으로 엔진을 잡았나봐요. 쟈닌느가 말했다. 그녀는 갑자기 질겁을
했다. 차 옆에 있는 언덕 위에 검은 피륙에 감긴 형체들이 어디선가 말없이 나타나서 외투
깃 아래 베일을 쓴 눈을 껌벅거리며 여행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자들이야! 하고 마르셀이 말했다.
차 안은 조용했다. 승객들은 고개를 숙인 채, 고원 위를 몰아치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는
듯이 보였다. 쟈닌느는 갑자기 짐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데 적지 아니 놀랐다. 실은 기차 종
점에서 운전사가 여객들의 고리짝과 수하물을 버스 지붕 위에 얹었던 것이다. 차 찬의 그물
선반에는 우툴두툴한 지팡이와 넓적한 광주리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남쪽 사람들은 거의가
빈손으로 여행을 하는 모양이었다.
운전사가 돌아왔다. 여전히 활달했다. 그도 역시 얼굴을 싸매고 있었는데 눈만은 웃고 있
었다. 그는 출발을 알리며 문을 닫았다. 바람소리는 들리지 않고 유리창에 부딪는 모래소리
만이 들려왔다. 엔진이 붕붕거리더니 꺼져버렸다.
오랜 실랑이 끝에 겨우 엔진이 걸리었으므로 운전사는 엑셀레이터를 밟아 요란한 소리를
냈다. 버스는 한참 허덕이다가 다시 떠났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던 목자들의 누더기 더
미 속에서 팔 하나가 올라가더니 곧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길은 더욱 험악하여 버스가 마구 뒤뚱거리기 시작했다. 그 진동으로 말미암아 아랍인들은
사뭇 건들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쟈닌느가 잠이 들려는데, 향기로운 사탕이 가득 든 노란
봉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주둔병은 그녀에게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쟈닌느는 주저하다가 하
나 집어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주둔병은 봉지를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미소를 거
두었다. 그리고 그는 오른편 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로 몸을 돌렸으나 겨
우 억센 목덜미가 보일 따름이었다. 그는 유리창 너머로 푸석푸석한 흙더미에서 일어나는
짙은 먼지 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스는 여러 시간을 달렸다. 승객들은 피로로 말미암아 숨소리조차 조용했다. 그런데 밖에
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랍식 외투를 입은 아이들이 팽이처럼 뱅뱅 돌면서
손벽을 치며 버스 주변에 모여들었다. 버스는 나지막한 집들이 늘어선 가도를 달리고 있었
다. 오아시스에 도착한 것이다. 바람은 여전히 몰아쳤으나 벽돌이 가로막아 모래먼지가 햇빛
을 가리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은 흐렸다. 아이들의 아우성 속에서 브레이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버스는 더러운 유리창이 달린 진흙으로 지은 호텔 앞에 멈추었다.
쟈닌느는 버스에서 내렸다. 그녀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지붕 너머로 노랗고 가느다란
회교사원의 탑이 보였다. 왼쪽에는 오아시스 종려나무들이 무성하여 그곳으로 가보고 싶었
다. 그러나 정오가 가까웠는데도 추위는 여전하여 바람에 온몸이 떨릴 정도였다.
쟈닌느는 남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남편보다도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그 군인이
먼저 눈에 띄었다. 그녀는 그의 미소나 인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녀 곁을 지나가 버렸다. 남편은 버스 지붕에 얹어둔 포목 트렁크와 거무스름한 고리짝을 내
리게 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운전사 혼자서 짐을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
을 멈추고 지붕 위에 서서 버스 주변에 몰려든 아랍식 외투들에게 무어라고 떠들어대고 있
었다. 쟈닌느는 뼈와 가죽으로 만들어진 듯 보이는 얼굴들에 둘러싸여, 그들이 떠들어대는
아우성 소리에 심한 피로를 느꼈다.
전 방으로 올라가겠어요. 하고 그는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은 조급하게 운전사에게 지시
하고 있었다. 쟈닌느는 호텔로 들어섰다. 메마르고 무뚝뚝한 주인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주인은 그녀를 거리가 내다보이는 차고 위의 2층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쇠로 된 침대,
흰 페인트칠을 한 의자와 옷걸이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갈대로 만든 병풍 뒤가 화장실로
되어 있는데, 세면대는 부드러운 모래 먼지로 덮여 있었다. 주인이 문을 닫았을 때, 석회칠
을 한 벽에서 싸늘한 한기가 솟아나왔다. 쟈닌느는 핸드백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또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눕든가 서 있어야 했다. 그리고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그녀는
핸드백을 손에 든 채, 하늘이 내다보이는 천장 가까이 뚫린 바람구멍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쟈닌느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자기도 모르는 것이었다. 다만 고독과
추위 그리고 가슴을 누르는 압박감만 있을 뿐이었다. 사실 그녀는 꿈속에 잠겨 있는 듯이
보였다. 남편의 고함소리와 함께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보다도, 바람구멍으로 통하여 들려
오는 소리에 더 정신을 팔고 있었다. 이제는 잔물결이 조잘대는 것같이 종려나무를 흔들어
대는 바람소리에 일종의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윽고 바람이 한층 세차게 몰아치는가
싶더니 물결의 조잘거림은 거센 파도의 울부짖음으로 변하였다. 쟈닌느는 벽 저편에 종려나
무의 바다가 폭풍에 물결치고 있는 광경을 상상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예상했던 거와 딴판
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파도는 피로한 눈을 한결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어깨를 웅크리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냉기가 무거운 두 다리를 타고 기어오
르는 것이었다. 그녀는 날씬한 종려나무와 자기의 처녀시절을 연상하고 있었다.
일행은 몸을 씻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남루한 벽 위에는 울긋울긋하게 잼 속에 빠진 듯한
낙타와 종려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아치 모양의 창문을 통하여 약간의 광선이 스며들었다.
마르셀은 호텔 주인에게서 상인들에게 관한 정보를 들었다. 작업복에 훈장을 단 늙은 아랍
인 두 사람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마르셀은 빵을 뜯으며 골똘히 생각하다가 아내에게 냉수
를 마시지 않도록 주의시켰다. 끓인 물이 아니야. 포도주를 마셔.
온몸이 노곤한 그녀는 모든 게 귀찮았다. 포도주도 좋아하지 않았던 그녀는, 메뉴에 돼지
고기라고 적혀 있는 거이 눈에 띄었다. - 코란에 돼지고기는 금하고 있지만, 잘 구우면 아
주 좋은 음식이죠. 우린 그런 요리법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쟈닌느는 아무 생각도 않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예언자를 무색케 하는 요리사들을 생각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서둘러야 했다. 그들은 이튿날 아침에는 더 남쪽으로 떠나야 했고, 그날 오후에는
그곳의 굵직한 상인들을 모두 만나야 했다. 마르셀은 늙은 아랍인에게 커피를 독촉했다. 아
랍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종종걸음으로 나가버렸다.
아침에는 조용히, 밤에는 서두르지 말고. 마르셀은 웃으면서 말했다. 커피가 나왔다. 그
들은 급히 커피를 마시고 먼지투성이인 거리로 나섰다. 마르셀은 트렁크를 나르기 위해 젊
은 아랍인 한 사람을 불렀다. 그런데 품삯 때문에 시비가 벌어졌다. 마르셀은 이 점에 대하
여 여러 번 말했지만, 그들은 두 배의 품삯을 요구했던 것이다. 쟈닌느는 몹시 못마땅했지만
짐을 진 두 사람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홀가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육중한
털외투를 껴입고 있었다. 잘 굽기는 했지만 돼지고기와 포도주가 그녀에게는 달가운 것이
못되었다.
그들 일행은 나무들이 뽀얀 먼지를 쓰고 죽 늘어선 조그마한 공원 곁을 지나갔다.
간간이 마주치는 아랍인들은 외투자락을 걷어올리고 이쪽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쟈닌느는 그들에게서 몸에는 비록 누더기를 걸쳤을망정 자기 고장에서 볼 수 없
었던 당당한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군중들 속을 헤치고 지나가는 트렁크를 뒤쫓고
있었다. 그들은 황토로 된 성벽문을 지나서, 역시 먼지를 뒤집어 쓴 나무들이 무성하고 상점
들이 길게 늘어선 좁은 광장에 이르렀다. 그들은 포탄 모양으로 된 푸른 회칠을 한 작은
집 앞에 멈춰섰다. 안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었으며, 출입구를 통해서만 겨우 햇빛이 들어가
게 되어 있었다. 반짝거리는 판자 뒤에 흰 콧수염을 기른 늙은 아랍인 한 사람이, 각각 색깔
이 다른 세 개의 작은 컵에 차주전자를 기울였다 들었다 하면서 차를 따르고 있었다.
어둠침침한 상점 안에서 그들은 아무 것도 분별할 수 없었지만, 박하차의 신선한 향기가
문턱에 선 마르셀과 쟈닌느를 맞아 주었다. 문을 들어서니, 주석으로 만든 차주전자와 찻잔
과 쟁반들이 그림엽서를 꽂은 회전대에 뒤섞여 일종의 장식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
마르셀은 카운터와 마주쳤다.
쟈닌느는 입구에서 햇볕을 막지 않으려고 비켜서서 기다렸다. 그러자 그녀는 늙은이 뒤의
어둠침침한 곳에 아랍인 두 사람이 자기를 쳐다보며 웃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상점 안쪽으로 잔뜩 쌓여 있는 불룩한 부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진홍색과 검은색의 양탄자와 수를 놓은 명주가 벽에 죽 걸려 있었다. 땅바닥에는
향기로운 씨앗이 든 작은 상자가 가득 놓여 있었다. 카운터 위에는 반짝이는 구리 쟁반이
달린 저울과 눈금이 닳아서 지워진 낡은 자 둘레에 설탕 덩어리가 놓이고, 그 중의 하나는
푸른 포장지가 벗겨져서 꼭대기가 부서져 나갔다. 늙은 상인이 카운터 위에 찻잔을 놓고 인
사를 할 때, 차 향기와 방 안에서 나는 포목과 향료의 냄새가 진동했다.
흥정을 할 때 마르셀은 언제나 하는 버릇대로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했다.
그는 트렁크를 열고 늙은 상인에게 포목과 명주를 꺼내 보이고는 그것을 펴놓기 위해 저
울과 자를 밀어놓았다. 그는 흥분하여 언성을 높이면서 어색하게 웃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
치 남의 마음에 들고 싶어하면서도 자신이 없는 여자의 태도 같았다. 그는 손을 크게 벌리
고 매매하는 시늉을 하였지만, 늙은이는 고개를 저으며 자기 뒤에 앉은 두 아랍인에게 차
쟁반을 넘겨주며 몇 마디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은 마르셀을 실망케 한 모양이었다.
마르셀은 포목을 걷어서 트렁크에 집어넣고는 이마에 나지도 않은 땀을 씻는 것이었다.
그는 어린 짐꾼을 불러서 시장 쪽으로 발을 옮겼다. 첫 가게에서 주인의 태도는 거만스러웠
지만 먼젓번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자식들, 마치 성인이라도 된 줄 알지만 장삿속은 매일반이야. 먹고살기란 어려운 것이
지. 마르셀은 이렇게 말했다.
쟈닌느는 말없이 남편의 뒤를 따랐다. 바람은 전혀 일지 않았다. 하늘은 군데군데 개이기
시작했고, 싸늘한 햇빛이 두꺼운 구름을 뚫고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광장을 떠나 흙담을 끼고 좁은 길을 걷고 있었다. 흙담 위에는 시든 섣달의 장미
가 매달려 있었고, 여기저기 시들고 벌레먹은 석류가 달려 있었다. 먼지와 커피의 향기, 나
무 껍질을 태우는 연기, 돌냄새, 양냄새 등이 뒤섞여 그 거리에 감돌고 있었다. 흙벽으로 된
상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쟈닌느는 다리가 무거워졌다. 그러나 남편은 물건이 팔리
기 시작하자 점점 명랑해지고 더욱 상냥해졌다. 그는 쟈닌느를 프리트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번 여행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아무렴요. 하고 쟈닌느도 맞장구를 쳤다. 그들과 직접 타협하는 게 좋겠어요.
그들은 다름 도심지로 돌아왔다. 해는 오후가 된지 오래고 이제 하늘도 거의 개어 있었다.
그들은 광장에서 발을 멈추었다. 마르셀은 손을 비비며 트렁크를 살펴보고 있었다.
저것 봐요. 쟈닌느가 말했다.
광장 저쪽에서 메마르고 억세게 생긴 아랍인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하늘색 외투
를 입고 노랗고 부드러운 장화를 신고, 손에 장갑을 끼고, 햇볕에 그을린 독수리같은 얼굴을
쳐들고 있었다. 터번에 달린 수실만이 쟈닌느가 때때로 동경하여 오던 식민지 부대의 프랑
스 장교들과 구별되었다. 그는 그들이 서 있는 곳으로 곧장 걸어왔다. 그는 천천히 장갑을
빼면서 그들이 서 있는 곳 너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저런, 저 녀석도 장군이나 된 듯이 으시대는군 그래. 마르셀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
다. 사실 그러했다. 이 고장 사람들은 모두들 거만했지만 그자는 더욱 심했다. 그는 텅 빈
광장을 지나 트렁크도 일행도 안중에 없다는 듯이 곧장 걸어오고 있었다. 그 아랍인이 가까
이 다가오자 마르셀은 갑자기 트렁크의 손잡이를 쥐고 뒤로 잡아당겼다. 아랍인은 아무 것
도 못 본 듯이 성벽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쟈닌느는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는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놈들은 안하무인이란 말이야.
쟈닌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도 아랍인이 으시대는 꼴이 밉살스럽고
갑자기 자기 자신이 불행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더욱 그들의 아파트
가 그리워졌다. 그러나 호텔의 차디찬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몹시도 심란
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문득 사막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성벽의 망루에 올라가보라고 하던 호텔주인의 말
이 생각났다. 그녀는 트렁크는 호텔에 맡기고 망루에 올라가 구경이나 하자고 남편에게 말
했다. 그러나 남편은 오히려 피곤하니 저녁식사 전에 한잠 자고 싶다고 했다.
제발 그렇게 해요.
그녀는 호텔 앞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흰옷을 입은 군중들은 점점 수가 늘어갔다. 모두가
남자들뿐이므로 그녀는 그렇게 많은 남자들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만 몇몇 남자들이 그 메마르고 누르죽죽한 얼굴을 이쪽으로 돌릴
뿐이었다.
쟈닌느에게는 그 얼굴들이 버스 속의 프랑스 병정이나, 장갑을 낀 아랍인이나 모두가 한
결같이 교활하고 거만하게 보였다. 그들은 타국 여자에게 얼굴을 돌리기는 하였지만, 결코
유심히 바라보지 않았으며, 발목이 아파서 서 있는 그녀의 곁을 가볍게 그리고 묵묵히 스쳐
서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쟈닌느는 불쾌하여 더욱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자신이 왜
따라와서 이 고생인가 하고 생각하니 더욱 기분이 씁쓸했다. 그때 마르셀이 저만치서 내려
오고 있었다.
그들이 성벽에 오른 것은 오후 다섯시였다. 바람은 전혀 일지 않았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었다. 오늘따라 더욱 매서워진 추위가 그들의 볼을 저미는 듯 하였다.
층계 중간에 한 늙은 아랍사람이 벽에 기대어 서서 그들에게 안내해 드릴까요 하고 물었
다. 그러나 그들이 거절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흙이 굳어버
린 층계가 몇 군데 있었는데, 위태로운 길다란 층계는 위로 올라감에 따라서 공간이 넓어져,
점점 퍼져가는 차고 건조한 햇빛을 받고 있었다.
오아시스 특유의 갖가지 소리가 역력히 들려왔다. 맑은 대기가 위로 올라갈수록 긴 진폭
으로 주위에서 진동하는 것 같았다. 마치 그들이 지나가면서 광선의 결정체 위에 더욱 큰
음파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망루에 이르러 우렁찬 또 하나의 음악으로 울려, 그 반
향이 점점 자기 위의 공간을 채우다가 갑자기 멎어버리고, 끝없는 벌판에 자기 혼자 남게
되는 것같이 느껴졌다.
쟈닌느의 시선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천천히 옮겨갔으나, 그 순수한 곡선 위엔 단 하나의
장애물도 없었다. 발 밑에는 아랍인 촌락의 푸르고도 흰 테라스가 얼기설기 겹쳐 있었으며,
햇볕에 널어놓은 고추가 군데군데 검붉게 얼룩져 보였다. 사람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
만,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진흙담으로 고르지 못하게 구분된 네모꼴 종려나무밭이
망루에서는 맛볼 수 없던 바람으로 꼭대기가 설렁거리고, 더욱 멀리서는 생명의 흔적을 찾
아볼 수 없는 거무칙칙한 돌이 깔린 벌판이 지평선까지 뻗고 있었다. 오아시스가 있는 마을
에서 서쪽으로 종려나무밭을 따라 흐르고 있는 냇가엔 거무스름하고 큼직한 천막들이 보였
다. 그리고 그 주변에 거리가 멀어서 콩알만하게 보이는 낙타떼들이 잿빛 대지 위에 숨은
뜻을 지닌 이상한 암호를 이루고 있었다. 사막에서의 침묵은 허공처럼 끝도 없이 펼쳐졌다.
쟈닌느는 몸 전체를 벽에 기대인 채 소리없이 앞에 벌어진 허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옆에서는 남편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는 추워서 내려가고 싶어했다. 도대체 여기
서 볼 게 무엇이람?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쟈닌느는 지평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멀
리 남쪽 하늘과 땅이 선을 이루며 마주치는 곳에서 그녀가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그 무엇
이, 자기에게 부족했던 그 무엇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오
후의 햇볕은 점점 엷어져 결정체같아 보이던 빛이 액체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한 여인의 마음 속에 몇 해를 두고 습관과 권태로 단단히 묶여있던 매듭이 서서
히 풀려가는 것이었다.
쟈닌느는 유목민들의 야영소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는 없
었다. 그 검은 텐트 마을에는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그곳 사람들의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까지 그들의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보잘것없는
사람들로서, 집도 없이 세상과 동떨어져서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방대한 지역을 방황하는
한 무리의 나그네들이었다.
그 지역은 넓은 대지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 대지는 멀리 남쪽으로 강물이 숲을
기름지게 하는 곳까지 수천 킬로미터나 뻗쳐 있었다. 옛날부터 속속들이 황폐한 이 메마른
벌판을 끊임없이 헤매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으나, 아
무도 섬기지 않는 이 기이한 왕국에 비참하지만 자유스러운 영주들이었다.
쟈닌느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녀는 어찌하여 이런 생각이 그토록 마음을 흐뭇하게 하
고 또한 못 견디게 애수에 잠기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다만 언젠가는 그 왕국이
자기에게 약속되어 있으면서도 결코 자기의 것이 될 수 없으며, 다만 언제나 거기에 있는
하늘과 흘러넘치는 햇살 위에 눈을 뜬 순간만이 영원히 자기 것이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
었다. 그녀는 아랍인 촌락에서 들려오던 사람들의 말소리가 갑자기 잠잠해지는 순간, 세월의
흐름이 정지된 듯이 느껴졌다. 따라서 그 순간부터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을 듯이 생각되었
다. 이제부터는 괴로움과 감격에 울던 자기 마음 이외의 생명은 정지된 것만 같았다.
그러나 햇빛은 흐려지기 시작했다. 열기가 식어버린 태양은 붉게 물든 서쪽 하늘로 기울
어져 갔다. 한편 동쪽에서는 잿빛 파도가 넓은 공간으로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개 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싸늘한 하늘에 메아리쳤다. 쟈닌느
는 추위에 이가 덜덜 떨리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다간 얼어죽겠어, 바보같이. 그만 돌아가지. 이렇게 말하며 마르셀은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난간에서 몸을 돌려 남편의 뒤를 따랐다. 층계에 앉아 있던 아랍 노인은 이
들 내외가 마을로 내려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쟈닌느는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고 발을 옮겨놓다가 갑자기 심한 피로를 느꼈으므로, 허리를 굽히고 무거운 자기 자신을
질질 끌다시피 길을 걷고 있었다. 이미 흥분은 가라앉았다. 그녀는 자기가 발을 들여놓았던
그 세계에 어울리기에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덩치가 크고 살결이 희다고 생각했다. 어린이,
소녀, 말라빠진 사내, 슬쩍 스치고 지나가던 주둔병 따위만이 이 땅을 활보할 수 있는 사람
들이었다. 쟈닌느는 잠들기까지, 아니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끌고 다니는 일 외에 무엇이 남
아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실 식당까지 몸을 질질 끌고 갔다. 남편은 피곤하다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는 그동안 감기와 싸우고 있었다.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침대까지 남편의 뒤를 따라
억지로 기어가 말없이 곧 불을 껐다. 방은 쌀쌀했다. 그녀는 열이 심해지며 오한이 났다. 숨
도 답답해졌다. 피는 맥박을 치며 돌고 있었으나 전신은 차가웠다. 그녀는 무서운 생각이 들
어 돌아누웠다. 그러자 침대가 삐걱거렸다. 그녀는 병을 물리치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남편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거리의 소음이 공기구멍을 통해 귀에 들려왔다. 그녀는 잠을 자야만 했
다. 그러나 검은 천막의 환상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속눈썹 밑으로 움직이지 않던 낙타들이
스쳐가고, 호젓한 고독감이 그녀의 마음 속에 몰려오고 있었다. 거듭 생각할수록 이곳에 온
것이 불만이었다. 그녀는 그같이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잠시 후에 눈을 떴다. 주위는 고요하였다. 그러나 마을 변두리에서 목쉰 개 짖는 소리가
고요한 밤 공기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몸서리쳤다. 다시 뒤로 돌아누웠다. 그녀의 어깨
에 남편의 단단한 어깨가 닿았다. 그녀는 잠결에 남편에게 몸을 기대었다. 아주 잠든 것이
아니라, 어렴풋이 잠이 오자 가장 마음놓을 수 있는 안식처나 되는 듯이 남편의 어깨에 무
의식적으로 마구 매달리는 것이었다. 말은 하느라고 하였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
지 않았다. 따라서 자신에게도 전혀 들리지 않고, 다만 남편의 체온만을 느낄 따름이었다.
이십 년 동안 아플 때나 여행을 할 때나 두 사람은 밤마다 이렇게 체온을 나누며 지내온 것
이다. 그밖에 쟈닌느는 집에서 할 일이란 별로 없었다. 어린애도 없었다. 그녀에게 아쉬운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오직 남편이 자기를 필요로 하는 것에 만족을 느끼며, 남편과 고락을 같이 해 왔
을 뿐이다. 마르셀이 그녀에게 준 기쁨이란 그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느끼게 하는 것뿐
이었다. 그는 아마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비록 증오에 찬 사랑이라도 느낀다
면 그와 같이 찌푸린 얼굴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스런 얼굴이란 어떤 것인
가? 그들은 밤이면 손으로 더듬으며 사랑해왔다.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 이외에, 대낮
에 떳떳이 내세울 수 있는 사랑이 있었단 말인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오직 그녀가 남편
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것을 의지하고 살아왔다. 특히
밤에는 그러했다. 밤마다 남편은 세상 남자들의 얼굴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그런 완고한 태
도로 있기를 싫어하고, 늙어 죽기를 싫어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광란에 사로잡혀 오직 관능
속에 고독과 밤의 불안을 몰아내 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육욕에 사로잡힌 광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공통된 모습이었다.
마르셀은 마치 아내를 멀리하려는 듯이 몸을 꿈틀거렸다. 그렇다!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
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내 아닌 다른 애인에게 손을 대기가 두려웠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들 부부는 이미 헤어졌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혼자서 어떻게 산단 말인가. 하기야 혼자
사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그들의 천직이나 불행이 이성과 가까워지는 것을 가로막아 밤마
다 죽음과 같은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셀은 특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어린애
처럼 무력하고 고통을 두려워하며, 쟈닌느를 필요로 하는 마르셀은 그때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남편에게 바싹 다가가서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속으로 옛날 자기가 붙
인 애칭으로 그를 불렀다. 그 애칭은 지금도 때때로 사용해 왔지만, 둘이 다 그 의미에 대해
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 애칭을 불렀다. 그녀 역시 남편과 그의 힘과 기백이 필요했
던 것이다. 그리고 죽는 것이 두려웠다. 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
고 그녀는 까닭모를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남편에게서 몸을 떼었다. 아니다. 나는 아
무 것도 극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행복하지 못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실 가슴아프게도
그녀는 죽을 때까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마음의 짐에 눌려 질식할 것
같았다.
그 짐은 이십 년 동안이나 무의식 중에 지고 오다가 갑자기 깨닫게 되어 힘껏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남편이나 다른 사람은 벗어나지 못할지라도 그녀만은 그 무거운 짐에서 벗어
나고 싶었다. 그녀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서 가까이서 들리는 듯한 부름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밤의 한 끝에서 개 짖는 소리만이 힘없이 계속해 들려왔다. 미풍이 종려나무 숲을
스쳐가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그 바람은 고요한 하늘 아래 사막과 밤이 연결되어 생명
의 영위가 끊어짐으로써 늙은이도 죽는 이도 없는 곳으로부터 불어오고 있었다. 드디어 바
람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녀는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사실 그 소리
는 묵살할 수도 있고, 알아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귀에는 다만 소리없는 호소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당장에 대꾸하지 않으면 영원히 정체를 알 수 없는 호소였다.
그렇다, 당장에. 적어도 그것만은 확실했다.
쟈닌느는 살며시 몸을 일으켜 움직이지 않는 남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남편은 잠
들어 있었다. 곧 침대 속에서 느끼던 온도가 사라져 온몸이 추워왔다. 그녀는 현관의 덧문을
통해 스며드는 희미한 광선 속에서 주섬주섬 옷을 찾아 입기 시작했다. 구두를 들고 문 앞
으로 갔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살며시 손잡이를 돌렸다. 손잡이 소리가 삐꺽거려서
그녀는 잠시 주춤했다. 가슴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녀는 귀를 기울였다.
사방의 정적이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으므로 다시 손잡이를 돌렸다. 손잡이가 돌아
가는 소리가 그녀에게 무한한 해방감을 가져다주었다. 드디어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가
조심스럽게 다시 문을 닫았다. 그리고 뺨을 문에 대고 서 있었다. 잠시 후 남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돌아섰다. 얼굴에 차디찬 밤바람이 부딪쳤다. 그녀는 복도를 뛰어갔다. 호
텔 문은 닫혀 있었다. 빗장을 뽑는 동안에 순찰을 돌던 경비원이 찌푸린 얼굴을 하고 층계
위에 나타나 아랍어로 말을 걸었다.
곧 돌아와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어둠 속으로 뛰어나갔다.
하늘에서는 별들이 종려나무들과 집들 위에 내리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큰길을 따라 달음
질치고 있었다. 그 길은 성벽쪽으로 뻗쳐 있었는데, 밤이라 인기척은 없었다. 이제는 태양을
정복해버린 추위가 밤을 독점하고 있었다. 차디찬 공기가 폐부를 찌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장님처럼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큰길 끝에서 불빛이 나타나더니 이리저리 휘저
으면서 다가왔다. 그녀는 발길을 멈추었다. 날개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점점 커
지는 불빛 뒤에 커다란 아랍식 외투들과 그 밑에 반짝이는 가느다란 자전거 바퀴들이 눈에
띄었다. 아랍외투들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세 개의 붉은 불길이 솟아오르
더니 곧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다시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층계 한복판에서 숨이 가빴으므
로 좀 쉬고 싶었다. 안간힘을 쓰며 테라스에 올라가 난간에 몸을 던져 아랫배를 기대었다.
그녀는 숨이 턱에 닿았다. 모든 것이 눈앞에 가물거렸다. 그렇게 달려왔지만 몸은 조금도 녹
지 않고 도리어 사지가 덜덜 떨렸다. 그러나 들이마신 찬 공기가 체내에서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토록 떨리는 중에도 미지근한 체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밤의 공간으로
눈을 돌렸다.
가끔 사나운 추위가 돌을 깨뜨려 모래를 만드느라고 사그락거리는 희미한 소리가 들릴
뿐, 그 밖엔 아무 소리도 그녀를 에워싼 고적과 침묵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잠시 후
에 일종의 소용돌이가 온통 하늘을 자기 주위에 끌어내리려는 듯했다. 메마르고 차디찬 밤
의 장막 속에서 수천 개의 별들이 끊임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번들거리는 얼음 덩어
리들은 순식간에 흩어져서 어느새 지평선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쟈닌느는 하늘에 떠도는 별들을 한없이 바라보며, 그 별들과 함께 돌아가고 있었다. 신비
한 이 천체의 운행이, 추위와 욕정으로 싸우고 있는 그녀를 차츰 심오한 자기 존재에로 이
끌어가고 있었다. 눈앞에서 별이 하나씩 떨어져서 사라졌다. 그때마다 그녀는 밤을 향해 마
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 추위도, 생사에 대한 불안도 잊어버렸
다.
두려움에 쫓기면서 무작정 뛰쳐나온 그녀는 드디어 자기 자신의 근원을 발견한 것 같았
다. 이젠 더 이상 떨지 않게 된 육체의 피가 다시 솟아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난간 꼭대기에
아랫배를 기대고 움직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아직도 산란한 자기의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
리고 있었다. 별들이 성좌에서 사막의 지평선 위에 하나씩 떨어지고 있었다. 어둠의 물결이
그녀를 부드럽게 애무하기 시작해 추위를 몰아내고, 그녀의 심장으로부터 솟아올라 끊임없
이 출렁거리며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는 입술까지 넘쳐흐르고 있었다. 푸른 하늘이 그녀 위에
펼쳐지자 그녀는 그 순간 차디찬 대지 위에 쓰러졌다.
그녀가 방을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조심 되돌아왔을 때, 아직 남편은 잠에서 깨어나
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리에 눕자 그는 낑낑거리며 요란스럽게 일어났다. 그는 무
엇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일어나서 전등을 켰다. 등불이 쟈닌느
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쳐왔다. 그는 비틀거리며 세면대로 걸어가서 물병을 주욱 들이켰다.
그는 침대에 누우려고 한쪽 무릎을 침대에 올려놓은 채, 영문도 모르며 아내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아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눈물을 떨어뜨리며 울고 있었다.
염려 말아요. 하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알베르 카뮈(1913-1960):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극작가.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에서 태어
나 제1차 세계대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빈민가에서 소년시절을 보내고, 고학
으로 대학을 다녔다. 그는 세상의 근원적인 부조리에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이방인
으로 명성을 떨친다. 1957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1960년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
다. 작품으로 페스트 , 시지프의 신화 , 전락 등이 있다.
작은이의 소망이야기
토머스 하디 외
붉은 고양이
그놈의 붉은 고양이 새끼의 일이 자꾸만 생각나서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내가 그런 짓을
한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도 분간할 수가 없다.
우리집 뜰에는 폭탄이 떨어져서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는데, 이야기는 그 언저리의 돌무더
기에 내가 앉아 있었던 때부터 시작된다.
돌무더기라고 했지만, 우리 집은 반 이상이 파괴되어 그것이 산처럼 쌓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나머지 반도 못되는 집 속에 우리 가족, 즉 나와 어머니와 페터 그리고 레니가 살고
있었다. 페터와 레니는 나의 동생들이다. 하여간 나는 그 돌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그 긴
사각형의 집터에 쐐기풀과 이름 모를 잡초들이 우거져 있었다. 나는 빵을 한 조각 손에 들
고 있었다. 벌써 단단하게 굳어버린 빵이었지만, 어머니는 늘 묵은 빵이 새로 구운 빵보다
건강에 좋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묵은 빵은 오랫동안 씹어야 되고, 그래서 조금만 먹어도 배
가 부르다고 어머니는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배가 불러본 적이라곤 없었다.
갑자기 그 빵조각이 내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몸을 구부려 주우려 했지만, 그 순간
에 쐐기풀 가운데서 붉은 앞발이 쑥 나오더니 빵조각을 채어가고 말았다. 나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눈 깜짝할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윽고 나는 쐐기풀 사이
에 고양이란 놈이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여우같이 붉고 깡마른 놈이었다.
이놈의 새끼! 나는 소리를 지르면서 돌을 그놈한테 내던졌다. 그러나 맞힐 생각은 조금
도 없었고, 다만 쫓아버릴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그 돌에 얻어맞았는지 그놈은 꽥 하고 소
리를 질렀던 것이다. 단 한 번 꽥 했을 뿐이었지만, 꼭 어린애가 지르는 소리 같았다. 그러
나 도망치지는 않았다. 돌을 던지다니 몹쓸 짓을 했다고 생각해서 나는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나 그놈은 쐐기풀 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화가 난 듯 숨만 헐떡였다. 배에 들러
붙은 붉은 털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놈은 줄곧 푸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
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도대체 너는 어쩌자는 거야? 하고 그놈에게 말을 걸었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놈이 인간이 아닌 바에야 말을 걸어서 무엇하랴. 그렇게 생각하자. 나
는 그 고양이놈에 대해서도, 나 자시에 대해서도 화가 치밀어 왔기 때문에 이젠 그놈을 쳐
다보지 않기로 하고, 아주 급하게 내 빵을 입에 구겨 처넣다시피 했다. 마지막 한 입은 아직
큰 덩어리였는데, 그것을 고양이놈에게 던져주고는 화가 난 채 그곳을 떠났다.
집 앞의 정원까지 오니 페터와 레니가 그곳에서 완두콩을 따고 있는 중이었다. 둘이 다
그 완두콩을 입 안에다 쑤셔넣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서걱서걱하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레
니가, 오빠는 아직 빵을 한 조각 가지고 있지 않으냐고 들릴까말까 한 소리로 물었다. 그래
서 나는 말해주었다. 그래, 어쩌란 말이냐. 너희들도 나하고 똑같은 빵을 받지 않았니? 그
리고 너는 겨우 아홉 살이지만, 난 열세 살이란 말이야. 큰 사람이 더 먹어야 하지 않니?
그렇지. 하고 여동생은 말했을 뿐, 더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자 페터가 말참견을 했다.
레니는 빵을 고양이한테 줘버렸단 말이야.
어떤 고양이한테 줬니? 하고 내가 묻자 레니가 말했다. 어떤 고양이냐고? 빨간 고양이
가 한 마리 왔었는데 조그만 여우같은 거였어. 아주 말라빠지고 내가 빵을 먹으려고 하니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걸.
바보같으니. 하고 나는 화가 나서 말했다. 우리들 먹을 것도 없는데...
그러자 여동생은 다만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슬쩍 페터쪽을 바라보았다. 페터가 얼굴이
새빨개졌기 때문에 나는 틀림없이 저놈도 고양이한테 빵을 주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정말 화가 나서 후다닥 그 자리를 떠났다.
큰길로 나가니 미제 자동차가 서 있었다. 크고 기다란 차였는데, 아마 비크였었다고 생각
된다. 운전하고 있던 사람이 시청이 어디냐고 물어왔다. 영어로 물어본 것이었으나 나도 영
어쯤은 좀 할 줄 아니까 대답해 주었다. 다음 거리예요, 그리고 왼쪽... 그리고... 똑바로라
는 말을 영어로는 뭐라고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것은 손짓으로 가리켜 주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내가 말하는 것을 바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교회 뒤에 광장이 있는데,
시청은 거기 있어요.
아마 그것은 멋진 영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차 안에 있던 여자가 내게 몇 조
각의 흰 빵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새하얀 빵이었고, 빵과 빵 사이를 쪼개 보니 어마
어마하게 두꺼운 소시지가 끼여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곧장 그 빵을 가지고 집으로 달려갔다.
내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동생들이 놀란 듯 무엇인가 소파 밑에다 감췄지만 나는 벌써 눈치
채고 있었다. 그것은 그 붉은 고양이였다. 게다가 마룻바닥에 우유가 좀 흘려져 있었기 때문
에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모든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너희들은 미쳤구나. 하고 나는 호통을 쳤다. 우리는 하루에 단지 반그릇밖에는 탈지분유
를 배급받지 못한단 말이다. 더구나 네 식구나 되고.
그리고 나서 나는 그 고양이를 소파 밑에서 끄집어내서는 창 너머로 내던져 버렸다. 동생
들은 한마디 말도 안 했다. 그런 다음 나는 미국인한테서 받은 흰 빵을 넷으로 잘라 어머니
몫을 부엌 찬장 안에다 감춰두었다.
어디서 났어? 하고 그 녀석들은 물으며 아주 불안하게 쳐다보는 것이었다.
훔쳤다. 나는 그렇게 대꾸를 하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길바닥에 석탄이 떨어져 있지
않나 빨리 살펴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석탄을 실은 차가 막 지나갔기 때문인데, 가끔
그런 차들이 석탄을 흘리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집 앞 정원에 나가 보니 그 붉은 고양이가
웅크리고 앉아서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저리 가! 하고 나는 발로 그 고양이를 걷어차 버렸다. 그렇지만 그놈은 꼼짝도 하지 않았
다. 단지 조그만 주둥이를 벌리고서 야아옹 했을 뿐이었다. 그 고양이는 다른 고양이와는 달
리 마구 울어대지를 않고 단지 야아옹 할 뿐이었는데, 나는 그 꼴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놈
은 그렇게 울면서 푸른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잔뜩 화가
치밀어 미국사람이 준 빵 부스러기를 고양이를 향해 내던졌다. 나중에 생각하니 후회가 되
었다.
길에 나가 보니, 벌써 다른 녀석들이 둘이나 와 있었다. 나보다도 큰 아이들이었는데 벌써
석탄을 주워가 버렸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놈들은 양동이 하나
가득히 주웠다. 나는 그 속에다 얼른 침을 퉤 하고 뱉어주었다. 고양이놈하고 실랑이만 안했
더라면 이것이 모조리 내 것이 됐을 판이었다. 이것만 있었더라면 저녁 한 끼는 끓일 수가
있었을 것이다. 정말 번쩍번쩍하는 좋은 석탄이었다. 그 대신 나는 나중에 감자를 실은 마차
를 만났다. 내가 좀 쑤셔 보았더니 감자 몇 개가 마차에서 굴러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호주
머니 속에 집어넣고 모자에도 담았다. 마부가 돌아다보길래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
감자 잃어버리겠어요.
그리고는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어머니 혼자뿐이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무릎 위에
는 그 붉은 고양이가 앉아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을 했다. 제기랄, 이놈의
고양이 벌써 또 왔구나.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렇게 지독한 말을 하지 말아라. 이 고양
이는 주인을 잃었단다. 얼마나 오랫동안 아무 것도 못 얻어먹었는지 모른다. 자 보렴, 이렇
게 말랐구나.
우리들도 그렇게 마르지 않았어요? 하고 내가 말하자 어머니는, 나는 내 몫의 빵을 주
었단다. 하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곁눈으로 보시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들의 빵과 우유와 그
흰 빵을 생각했지만,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감자를 삶아 먹었다. 어머
니는 기쁘신 듯했다.
그런데 내가 그런 것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묻지도 않으셨다. 나중에 커피를 마실 때가 되
자 어머니는 오늘따라 커피에다 우유를 넣지 않으셨다.
그 붉은 고양이가 우유를 핥아먹는 것을 모두들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고양이놈은 창으로 해서 뛰어나가 버렸다. 나는 재빨리 문을 닫아버리고, 이젠 됐
다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튿날 아침 여섯시에 나는 야채를 얻기 위해 줄을 서려고 나갔다.
여덟시에 집으로 돌아와 보니 동생들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둘 사이의 의자 위에는 그놈
의 고양이가 쪼그리고 앉아서, 레니의 받침접시에서 커피에 적셔 무르게 한 빵을 처먹고 있
는 것이었다. 잠시 후에 어머니가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다섯시반부터 푸줏간 앞에 가서 줄을 서고 계셨던 것이다. 그 고양이놈은 곧 어
머니에게로 뛰어갔다. 어머니는 내가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하셨는지 소시지 한 조각을 떨
어뜨려 주셨다. 그것은 배급표가 필요없는 회색빛의 소시지였지만, 우리들은 그런 것이라도
빵에다 끼워 먹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것쯤은 어머니도 알고 계셔야 할 것 아닌가. 나는 부
아가 끓어오르는 것을 억지로 삼키며, 모자를 집어들고 뛰어나갔다.
나는 지하실에서 낡은 자전거를 끄집어내어 그것을 타고 교외로 달렸다. 그곳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서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낚시 도구가 있을 리 없고, 다만 뾰족한 송곳이 달린
작살같은 것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고기를 찍었다. 그것을 나는 벌써 여러 번 성공
했었는데, 이번에도 잘 되었다. 열시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나는 벌써 아주 굉장한 놈을 두
마리 잡았다. 점심에는 이것이면 충분할 것이다. 나는 될 수 있는대로 빨리 집으로 달려왔
다. 그리고 그 물고기를 부엌의 식탁 위에다 올려놓고 곧 지하실에 내려가서 어머니께 말씀
드렸다. 어머니는 거기서 세탁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어머니와 나는 함께 부엌으로 올라왔
다. 그러나 물고기는 한 마리밖에 없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작은 것만이 남아 있었다. 얼른
창틀을 바라보니 붉은 고양이놈이 그곳에 올라앉아 물고기를 깡그리 먹어치우고 있는 중이
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나무토막을 한 개 집어 던졌더니 이번에도 제대로 들어맞았던 것이
다. 고양이는 창틀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마치 무슨 자루가 떨어질 때처럼 마당에서 털썩 하
는 소리가 났다.
이놈의 새끼, 꼴 좋다.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그 순간 어머니의 손이 찰싹 하고 내
뺨을 갈겼다. 나는 열세 살이 될 때까지 최근 오 년 동안 한번도 얻어맞은 적이 없었다.
왜 동물을 못살게 구니? 하고 어머니는 소리를 치시고, 내가 한 짓에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셨다. 나는 당장 도망치는 것 이외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점심상에 생선 샐러
드가 나오기는 했으나, 그것은 감자가 물고기보다 훨씬 많은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그놈
의 붉은 고양이를 쫓아낸 셈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동생들
은 여기저기 정원을 뛰어다니면서 고양이를 불렀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저녁마다 우유가
든 작은 접시를 문 밖에 놓아두고는 내 얼굴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
자신도 구석구석 고양이를 찾아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병이 들었든지 혹은 죽어서 어
디 가서 뒹굴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흘만에 고양이가 되돌아왔다.
그놈은 절룩거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발에 상처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오른쪽 앞
다리의 상처는 내가 나무토막을 내던졌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곳에다 붕대를
감아주고 게다가 먹을 것까지 주었다. 그 후로는 고양이놈이 매일같이 찾아왔다. 식사를 할
때마다 반드시 그 붉은 고양이가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들은 아무 것도 그놈 몰래 감추어 둘
수가 없었다. 우리들이 무엇을 먹기 시작하면 그놈은 꼭 그 곁에 앉아서 누군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두 고양이가 먹고 싶어하는 것을 주고 마
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했다. 물론 화가 나기는 했지만. 그놈은 점점 살이 쪄갔다. 원래가
그놈은 품종이 좋은 고양이였던 것 같다.
이렇게 해서 1946년에서 47년에 걸친 겨울이 닥쳐왔다. 그 무렵 우리들은 말 그대로 먹을
것이 없었다. 몇 주일에 걸쳐서 약간의 고기도 얻을 수 없었고, 단지 얼어터진 감자뿐일 때
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입은 옷이 몸에서 헐렁거릴 지경이었다.
어느 날 레니가 허기진 나머지 빵가게에서 빵 한 개를 훔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나뿐이었다. 2월초였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이제 저 동물
을 처치하기로 하지요?
어떤 동물을 말이냐? 하고 어머니는 물으시면서, 나를 노려보시는 것이었다.
저 고양이지 뭐예요? 하고 나는 말하면서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그 말로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벌써 알고 있었다. 모두들 일제히 내게 대드는 것이었다. 뭐라고? 우리
들의 고양이를? 부끄럽지도 않아?
뭐가 부끄럽니? 하고 나는 대답해주었다. 우리들은 그놈의 고양이를 우리들이 먹을 것
으로 살찌게 했어. 그놈은 돼지새끼처럼 살이 찌고 더군다나 아직도 어려. 그러니까 어떨
까?
그랬더니 레니는 왕왕 울부짖기 시작했고, 페터는 식탁 밑에서 나를 발길로 걷어차고, 어
머니는 슬픈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네가 그렇게도 마음이 고약한 줄 나는
몰랐구나.
고양이는 부뚜막 위에 배를 깔고 자고 있었다. 정말 통통하게 살이 찌고 게으른 버릇까지
생겨서, 이제 집에서 쫓아내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이윽고 4월이 되자, 감자마저 떨어지게 된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할지 걱정이었다. 어
느 날 나는 완전히 미칠 지경이 되어 단단히 마음먹고 고양이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이놈
아, 들어보란 말이다. 우리는 먹을 것이 없단 말이야. 너는 그것도 모른단 말이냐?
그리고 나는 텅텅 빈 감자 상자와 빵그릇을 그놈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놈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자, 나가란 말이다. 우리집이 어떤 형편인지 너는 모른단 말이냐?
그러나 그놈은 눈만 껌벅거리고 부뚜막 위에서 돌아눕기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나
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식탁을 탕 하고 두들겼다. 그러나 그놈은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놈을 움켜쥐고 겨드랑이에 끼운 채 밖으로 나왔다. 벌써 집 밖은 어
두워지고 있었다. 동생들은 차도에서 석탄을 줍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나가고 없었다. 그런
데 붉은 고양이놈은 게으르기 짝이 없어, 붙들려 가는대로 잠자코 있었다.
나는 강가로 걸어갔다. 도중에서 어떤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 사람은 고양이를 팔 생각이
냐고 내게 물었다.
그래요. 하고 나는 대답하면서 살 사람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해 좋아했다. 그러나 그 사
람은 그저 웃었을 뿐, 그대로 가버리고 말았다. 어느덧 나는 강가에 이르렀다. 강에는 얼음
이 떠내려가고 안개가 자욱했으며 몹시 추웠다. 고양이는 내게 몸을 바싹 붙이고 있었다. 나
는 털을 쓰다듬어 주면서 고양이에게 타일렀다. 나는 이제 더 바라볼 수가 없다. 내 동생들
이 허기져서는 안 되겠다. 그런데 너는 이렇게 통통하게 살이 쪘어. 나는 그것을 더는 바라
볼 수가 없단 말이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며, 그 붉은 고양이의 뒷발을 잡고는 어떤 나무기둥에
다 패대기를 쳤다.
그러나 그 놈은 비명을 지를 뿐, 그렇게 쉽사리 죽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얼음 덩어
리를 향해 내리쳤더니만 머리를 다쳤을 뿐이었다. 머리에서 피가 솟아나와서 사방에 깔린
눈 위에 검붉은 핏방울이 번졌다. 고양이는 어린애처럼 울어댔다. 나는 그만두고 싶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해치울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나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얼음 덩
어리에다 고양이를 내리쳤다.
딱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지만, 그것이 뼈가 부러지는 소리였는지 얼음이 깨지는 소리
였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고양이는 죽지 않았다. 고양이는 일곱 번 다시
살아난다고들 하지만, 그놈은 더 많은 목숨을 가지고 있었다. 패대기를 칠 때마다 고양이는
큰 소리로 울었다. 나도 엉엉 큰 소리로 울었다. 무섭게 추웠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신이
땀으로 축축했다. 이윽고 고양이는 죽어버렸다. 나는 그놈을 강에다 던져 버리고 두 손을 눈
으로 씻었다. 다시 한번 그쪽을 바라보니, 그놈은 벌써 저쪽 강 한가운데로 떠내려가 곧 안
개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오싹 한기가 들었다. 그러나 아직 집으로 가고 싶은 생
각은 없었다. 갈 곳도 없이 시내를 서성거리다가 결국은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너, 어떻게 된 거냐? 하고 어머니가 물으셨다. 얼굴빛이 새파랗구나! 그리고 웃저고리에
묻은 피는 뭐냐?
코피가 나왔어요. 하고 나는 대답을 했다.
어머니는 별로 내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부뚜막이 있는 쪽으로 가시더니 박하차를 달여주
셨다. 갑자기 나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아무리 해도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곧 잠
자리에 들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오셔서 아주 조용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난 다
알고 있단다. 이젠 더 이상 그 일을 생각하지 말거라.
그러나 그 후에 나는 페터와 레니가 얼굴을 베개 속에 파묻고 밤이 깊도록 엉엉 우는 소
리를 들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붉은 고양이놈을 죽인 일이 옳았는지 어떤지
나는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원래 그런 정도의 동물이란 별로 많이 먹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
다.
루이제 린저: 독일 바이에른 태생의 여류작가. 작품으로는 와르소에서 온 사나이 얀 로
벨 , 생의 한가운데 , 니이라 , 투명한 굴레 등이 있으며, 여기 실린 붉은 고양이 는 소년의
모습에 비친 전쟁 후의 혼란기를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다.
신호
세몬 이바노프는 철도의 선로지기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가 근무하는 간수 초소에서 한쪽
역까지의 거리는 13베르스타, 다른쪽 역까지는 10베르스타였다. 지난해 그곳으로부터 약 4베
르스타 떨어진 곳에는 커다란 방적 공장이 생겨 그 높은 굴뚝이 숲 너머로 보였지만, 그보
다 가까운 곳에는 이웃 간수 초소들을 제외하고는 인가라고는 없었다.
세몬 이바노프는 병약한 여윈 남자였다. 9년 전에 그는 전쟁터에 있었는데, 어떤 장교의
부하가 되어 함께 먼 행군도 했었다. 무더위와 강추위 속에서 굶주린 채 하루 40베르스타,
50베르스타씩 행군을 했었다. 총탄이 빗발치는 아래에서 행군한 경우도 있었지만, 부상 하나
당하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이었다. 그의 연대가 최전방에 나갔을 때에는 한 주일 내내 터키
군과 교전한 일도 있었다. 이쪽편에 전초기지가 있으며, 오목한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쪽편은 터키군의 전초기지가 있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로 총질하는 것이었다.
세몬이 섬기는 장교도 그 전초기지에 있었다. 매일 세 번씩 세몬은 골짜기에 있는 연대의
주방에서 끓고 있는 사모바르 주전자와 식사를 그 장교에게 날라다 주었다. 사모바르를 들
고 탁 트인 곳을 갈 때면, 총탄이 피융 소리를 내며 날아와 탁탁 바위를 맞히곤 했었다. 세
몬은 무서워서 울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대로 걸어갔다. 장교들은 그의 행동에 매우 만족했
다. 그의 덕택으로 항상 뜨거운 차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사히 전쟁터에서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그 후로는 팔다리가 쑤시기 시작했으므로,
적잖은 비애를 맛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선 집에 돌아와보니 늙은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후였다. 아들도 역시 네 살 되던 해에
인후염으로 죽고 없었다. 남은 것은 세몬과 그의 아내 두 사람뿐이었다. 살림살이도 시원치
않았고, 게다가 퉁퉁 부은 팔다리를 가지고서는 농사일은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
기 고장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무작정 새로운 고장으로 떠났다.
세몬과 그의 아내는 국경 지방에도, 헤르손에도, 그리고 돈강 지방에도 잠시 머물러 보았
다. 그러나 아무 곳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아내는 가정부로 보내고, 세몬은 홀로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기차를 타고 여행했었는데, 어느 한 역에서 역장을 보니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사람같았다. 세몬이 역장을 쳐다보자 역장도 역시 찬찬히 세몬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
이었다. 그때서야 그들은 서로 생각이 났다. 그가 소속해 있던 연대의 장교였던 것이다.
자네 이바노프가 아닌가? 하고 장교가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장교님, 제가 바로 이바노프입니다.
어떻게 이런 곳에 왔지?
세몬은 그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럼 이젠 어디로 갈 건가?
알 수 없습니다, 장교님.
무슨 바보같은 소리냐, 알 수 없다구?
그렇습니다, 장교님. 갈 곳이 없으니 말입니다. 뭔가 일자리를 구하는 중입니다.
역장은 그를 쳐다보면서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여보게, 당분간 이 역
에 있어보게. 자네는 아마 아내가 있었지? 그래 아내는 지금 어디에 있나?
예, 장교님. 처가 있습니다. 처는 지금 쿠르스트시의 상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아내에게도 이리 오도록 편지를 쓰게. 무임 승차권을 주선해보지. 마침 우
리 선로지기 간수초소에 빈 자리가 생긴단 말이야. 관구 과장에게 자네를 부탁해 보겠네.
대단히 감사합니다, 장교님. 하고 세몬은 대답했다.
이바노프는 그 역에 있게 되었다. 역장의 집 주방일을 도왔고, 장작을 팼으며, 구내의 플
랫폼을 청소했다. 2주일 후에는 아내가 도착했기 때문에, 세몬은 수동차를 타고 자기가 근무
하는 간수 초소로 되돌아갔다.
간수 초소는 새것이어서 따스했고, 장작은 얼마든지 있었으며, 조그마한 채소밭도 전임자
가 남기고 간 것이 있었다. 그리고 선로의 양쪽에도 작은 밭이 있었다. 세몬은 매우 기뻤다.
이것을 어떻게 경작해 나갈까, 소와 말을 사들일까 하고 생각했다.
필수품은 모두 지급받았다. 초록색 기, 붉은 기, 휴대등, 호루라기, 망치, 드라이버, 지렛대,
삽, 빗자루, 볼트, 자, 쇠못 등등. 그리고 근무 규정집 2권과 열차 시간표도 받았다. 처음 얼
마동안 세몬은 밤에도 자지 않고 시간표를 모조리 암기하였고, 열차가 아직 두 시간이 지나
야 올 터인데도 담당 구역을 순찰했으며, 간수 초소의 벤치에 앉아서 선로가 진동하지나 않
는지, 열차의 소리가 들리지나 않는지 살피곤 했던 것이었다. 근무 규정집도 모조리 암기해
버렸다. 잘 읽지는 못하는 편이어서 더듬더듬 읽기는 했지만 여하튼 모두 암기했다.
그것은 어느 여름날의 일이었다. 일은 힘들지 않았고, 눈을 치울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이 선로에는 지나가는 열차도 드물었다. 그래서 세몬은 일주일에 두 번, 자신의 담당 구역을
순시하고 여기저기의 나사를 다시 조이고 자갈을 고르고 통수관을 검사하면 그만이었고, 그
리고는 집에 돌아와 농사일을 했다.
그의 농사일에는 단 한가지 귀찮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무엇 하나 하는 데에도 낱낱이
그것을 선로 감독에게 신청하고, 거기서 또 관구 과장에서 상신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데 문제는 신청한 것이 허가되어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때가 지나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세
몬은 처와 함께 지리함을 불평하게까지 되었다.
약 두 달이 지났다. 세몬은 이웃의 선로지기들과도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은 이미 늙은 노
인이어서 그를 교체한다는 말도 나왔고, 초소 밖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그를 대신해서 순찰도 하곤 했었다. 또 한 사람의 역에 가까운 선로지기는 아직 젊
은 친구로, 여윈 힘줄이 눈에 띄는 사내였다. 그가 세몬과 처음 만난 것은 순찰할 때에 이웃
간수 초소의 중간 선로 위에서였다. 세몬은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웃 양반.
이웃 친구는 곁눈길로 그를 보고는, 안녕하시오? 하고 말했다.
그리고 돌아서더니 그만 성큼성큼 가버렸다. 안사람끼리도 그 뒤에 만났다. 세몬의 아내
아리나는 이웃집 부인에게 인사했지만, 상대방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만 가 버렸다.
세몬도 한 번 그녀와 만난 일이 있었다.
아주머니, 댁의 바깥주인은 말이 별로 없으신가봐요.
아낙네는 잠시 말이 없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래 그이가 댁과 무슨 할 말이 있겠어
요? 누구나 자기 일이 있잖아요... 그만 빨리 돌아가세요!
그러나 그 후 또 한 달이 지나고 나서는 그들과도 서로 친해졌다. 세몬과 바실리는 선로
위에서 만나면, 한쪽 끝에 앉아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서 각기 살림살이 이야기를 하는 것
이었다. 그러나 바실리 쪽은 대체로 말이 적었으며, 세몬이 자기 마을 이야기와 행군하던 이
야기를 하곤 했다. 이래봬도 나는 적잖이 고생을 겪어왔으니 이제부터 얼마나 더 살지 모
를 일이요. 결국 하늘의 도움은 못 받은 게지요. 운수라는 것은 일단 하느님에게서 받으면
바뀌지 않나봐요. 정말이야, 바실리 스체바노비치.
그러나 바실리 스체바노비치는 파이프로 선로를 딱딱 두드리며 일어서서 말하는 것이었
다. 뭐 피차에 일생을 먹힌 거요. 운수가 아니요, 인간들이지. 이 세상에 인간처럼 욕심이
많고 악독한 짐승은 없고. 늑대도 끼리끼리 잡아먹지 않는데 인간은 인간을 산 채로 잡아먹
거든.
아니야, 늑대도 끼리끼리 잡아먹기도 하지. 그런 소린 하지도 마시오.
말하다 보니 그런 말이 나왔소. 그러나 역시 인간처럼 가혹한 것은 없어. 만일 인간의 가
혹성과 탐욕이 없었더라면 모두가 잘 살 수도 있었을 거요. 그러나 너 나 할 것 없이 상대
방을 산 채로 먹겠다고, 한 입에 먹어버리려고 노리고 있거든.
세몬은 생각에 잠겼다. 모르겠소.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건 그것대로 역시
하느님이 정하신 거죠. 하고 말했다.
그렇게 말한다면... 하고 바실리가 말했다. 뭐 당신과 이러쿵저러쿵 말할 것도 없고. 언
짢은 것은 무엇이든 하느님에게 뒤집어씌우고 가만 앉아서 참는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사람
일 필요가 없지. 짐승이면 족하지.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이요.
그는 돌아서서 인사도 없이 그만 가 버렸다. 세몬도 일어섰다.
여보게, 친구! 하고 그는 외쳤다. 뭐 그렇게 화낼 건 없잖소?
이웃 친구는 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가버렸다. 세몬은 산을 깎은 굽이돌이에서 바실리
가 안 보이게 될 때까지 오랫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아내에게
말하기를, 여보 아리나, 바실리는 지독한 놈이요. 그건 악마지 사람이 아니야.
그러나 그들은 싸우지는 않았다. 만나면 또 여전히 말을 했고 그 화제는 여전했다.
제기랄, 이게 사람이... 그 뭐가 아니라면 우리도 피차에 이런 간수 초소 속에서 어물거리
고 있지는 않을 거요. 안 그렇소? 하고 바실리가 말했다.
간수 초소 속에서 어떻다는 말인가... 그럭저럭 살 수는 있잖소?
살 수 있다? 살 수 있단 말이지? 제기랄. 이건 나이는 먹었어도 세상을 모르고 눈에는
통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로군. 이 따위 간수 초소 속에서 살고 있는 가난뱅이가 이
래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소? 당신도 백정에게 먹히고 있단 말이요. 단물을 모조리 짜먹
고, 늙어빠지면 깻묵처럼 내던지는 돼지먹이밖에 더 돼? 그래 당신 월급은 얼마 받고 있
소?
뭐 하찮은 거요, 바실리 스체바노비치. 12루블이요.
나는 13루블이요.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지? 규정상으로는 상부에서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게 되어 있거든. 한 달에 은화로 15루블, 그리고 연료와 조명비도 지급하고 말이야. 그렇
다면 대체 누가 당신은 12루블, 나는 13루블이라고 정했단 말인가? 누구의 배때기를 살찌웠
고, 나머지 3루블이나 2루블은 누구의 호주머니에 들어가야 한단 말이요? 당신에게 묻고 싶
군... 그래도 당신은 살 수 있다고 말하지! 그러나 나는 그 2루블이나 3루블에 대해서 말하
는 건 아니요. 그거야 몽땅 15루블 받았댔자 마찬가지요. 지난 달 내가 역에 갔을 때의 일이
지만, 마침 국장이 거기를 지나가는 길이었어. 그래서 나는 그를 보았소. 그런 영광을 가졌
다는 말이요. 그 친구 전용 차량에 타고 있었는데 플랫폼에 내려선 것을 보니, 금줄을 배에
돌리고 두 뺨이 붉은 것이 기름기가 넘쳐흐르더군... 우리의 피를 실컷 빨아먹은 거요. 제기
랄, 힘과 권력을 가졌다면... 나도 여기 오래 있지는 않겠어. 아무 데나 마음 내키는 곳으로
갈 거요.
대체 어디로 가겠단 말이요, 바실리? 위를 보면 한이 없는 거요. 여기에만 있다면 따뜻한
집도 있고, 조그마한 땅도 있으며, 당신 처는 살림꾼이구 말이요...
땅이라! 당신은 내 땅을 좀 보고나 말하시오. 나뭇가지 하나 서 있지 않아. 봄에 양배추
를 심으려고 하니, 당장 선로 감독놈이 와서 이건 뭐야? 왜 보고 안했어? 왜 무허가로 하느
냔 말이야? 당장 흔적도 없게 몽땅 파버려. 하지 않겠소? 한 잔 먹었던 모양이지. 다른 때
같으면 아무 말도 없었을 텐데. 그때에는 잊지도 않고 벌금을 3루블이나 부과하지 않겠소...
바실리는 잠시 말없이 파이프를 한 모금 빨고 나서 작은 목소리로 자칫했으면 나는 그 놈
을 죽도록 패 줄 뻔했소.
이것 봐, 이웃 친구. 그렇게 흥분해선 안 되요.
흥분 안 해. 내 말이나 생각은 옳단 말이요. 그 술꾼놈 두고 보라지. 관구장에게 직접 탄
원할 거야. 두고봐!
그것은 사실이었다.
때마침 관구장이 선로를 검사하러 나왔다. 바로 사흘 후에 베체르부르그에서 온 상관들이
선로를 지나가게 되었고, 게다가 그것이 검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통과하기 전에
모든 것을 구비해 놓아야 했던 것이다. 자갈을 깔고 고르고, 침목을 검사하고 큰못을 다시
박고 너트를 조이고 말뚝을 다시 칠해야 했고, 건널목에는 노란 모래를 더 깔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이웃 초소의 노파는 늙은 남편을 풀 베러 들로 내쫓았다.
세몬은 한 주일 내내 일했다. 모든 것을 잘 정돈하고 나서, 이번에는 자기의 작업복을 수
선하여 손질했고, 구리로 된 마크도 광이 나도록 벽돌가루로 닦았다. 바실리도 일했다. 관구
장은 궤도차를 타고 왔다. 인부 네 사람이 핸들을 돌렸고 톱니바퀴가 소리를 냈다. 그렇게
한 시간에 20베르스타나 달리는 것이니 차바퀴는 내내 요란하게 울렸다. 세몬의 간수 초소
에도 그렇게 달려왔다. 세몬은 뛰어가서 군대식으로 보고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있다는 것
이었다.
자네는 여기 온 지 오래 되었는가? 하고 관구장이 물었다.
5월 2일부터입니다, 관구장님.
좋아, 수고했어. 164 간수 초소는 누구지?
궤도차로 관구장과 동행하고 있던 선로 감독이 대답하기를, 바실리 스체바노비치올시다.
스체바노비치, 스체바노비치라... 지난해에 자네가 요주의 인물이라던 바로 그 사람인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래 좋아, 바실리 스체바노비치의 간수 초소를 보기로 하지. 자, 가세.
인부들이 핸들을 돌렸다. 궤도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몬은 궤도차를 전송하면서 생각했다. 이웃 친구가 저들과 한판 벌일까?
몇 시간 후, 그는 순찰에 나섰다. 살펴보니 산을 깎은 곳에서 선로를 따라 누군지 걸어오
는 사람이 있었다. 머리에는 뭔가 하얀 것이 펄럭이고 있었다. 세몬이 자세히 보니 바실리였
다.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어깨에는 조그마한 보따리를 매었으며, 뺨은 수건으로 동여매고
있었다.
이웃 친구, 어디로 가는 거요? 하고 세몬은 외쳤다.
수도로. 하고 그는 말했다. 모스크바로 가는 거요... 본부로 말이요.
본부로... 그렇군! 말하자면 탄원하러 가는 거로군? 그만 둬. 바실리 스체바노비치. 잊어버
려요...
아니오, 그럴 수는 없어. 참기에는 늦었소. 보다시피 그놈은 내 얼굴을 때려 피투성이로
만들었단 말이요. 내가 살아있는 한 잊지 않겠어. 그대로 둘 순 없어. 본보기를 보여줘야지.
그 흡혈귀 놈들에게 말이요...
세몬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만 둬, 스체바노비치. 진심으로 말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
을 거요.
뭣이 뾰족하겠어! 뾰족한 일이 없으리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소. 당신이 언젠가 말한
운수라는 건 옳은 말이요. 나에게 뾰족한 일이 없더라도 정의를 위해서는 나서야지.
그렇지만 좀 말해봐요, 당신 뭣 때문에 그렇게 되었지?
뭣 때문이냔 말이지... 모조리 검사를 받았소. 궤도차에서 내려 간수 초소 안까지 들여다
보았소. 지독하게 검사할 것이라고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잘 정돈해 뒀지. 무
사히 끝나고 막 돌아가려고 하는 판에 내가 직접 탄원을 했소. 그러자 그 놈은 당장에 소리
를 질렀소. 이제 정부의 검열을 받아야 할 판국에 네놈은 야채밭에 대한 탄원을 한단 말이
냐? 하고 말이요. 이제 각하들께서 오신다는데 네놈은 양배추가 어쩌구저쩌구! 나도 화가
치밀어 한마디 해줬지. 대수로운 말은 아니었소. 그것이 놈은 지독히 못마땅했던 모양이지.
다짜고짜 한 대 먹였소. 우리의 참을성이 원수란 말이야! 거기서 그 놈을 그냥... 그렇지만,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뻣뻣이 서 있었소. 놈들이 가버린 다음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곧 세수하고 이렇게 뛰쳐나온 거요.
그래 간수 초소는 어떻게 했지?
집사람이 남아 있소. 빈틈없이 할 거요. 뭐 놈의 선로가 어떻게 되든 알게 뭔가!
바실리는 일어서서 떠나려고 했다.
잘 있소, 이바노프. 올바른 판결을 해 줄지 모르겠지만.
그래 걸어갈 셈이오?
역에 가서 화물차를 부탁해 보겠어. 내일은 모스크바에 가있을 거요.
두 이웃은 작별했다. 바실리는 떠났다. 그리고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밤
이나 낮이나 자질 않고 그를 대신해서 일했다. 남편이 돌아오기를 고대하느라 몹시 수척해
졌다. 사흘째 되던 날 예정된 검열이 있었다. 기관차에 수화물차가 하나, 일등차가 두 대 왔
지만 바실리는 보이지 않았다. 나흘째 세몬은 그의 아내를 만났다. 얼굴은 눈물에 젖어 부풀
었고 눈은 새빨개져 있었다.
주인은 돌아왔어요? 하고 물었다.
아낙네는 손을 저었을 뿐 아무 말도 없이 자기 집 쪽으로 가버렸다.
세몬은 언젠가 아직 어릴 때에 버들피리를 만드는 것을 배웠다. 버들가지 속을 태워서 도
려내고 적당히 구멍을 뚫어놓고, 끝에 소리나는 장치를 만들면 그것으로 훌륭한 피리가 되
는 거이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이 피리를 마들어 안면이 있는 화물 차장에게 부탁하여 시
내의 시장에 보내곤 했다. 그것은 하나에 2꼬베이카씩 받았다.
검열이 있은 지 사흘째 되는 날에도, 그는 저녁 일곱시 차를 맞도록 아내를 남겨놓고 자
신은 칼을 가지고 버들가지를 베러 숲으로 갔다. 그의 담당 구역 끝까지 왔다. 여기서 선로
는 급커브를 그리고 있었다. 그는 둑으로 내려가 숲을 빠져나가 산기슭으로 갔다. 반 베르스
타쯤 더 가서 커다란 늪이 하나 있었고, 그 주위에는 피리 만들기에 매우 적당한 버드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그는 버들가지를 크게 한 단 잘라 가지고 집으로 향했다. 숲은 지났다.
해는 이미 낮게 기울어져 있었다. 죽음같은 고요였다. 들리는 것은 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
와 마른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뿐이었다. 세몬은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제는 선로가 가
까웠다.
그때 뭔가 또 다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디선가 쇠와 쇠가 마주치는 듯한 소리였다.
세몬은 더욱 빨리 걸었다. 그의 담당 구역에서는 지금까지 수리를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었
다. 무슨 소릴까? 하고 생각했다.
숲을 빠져나오니 철도 둑이 눈앞에 높이 보였다. 위쪽 선로 위에서 웅크리고 앉아 무엇인
가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세몬은 조용히 둑에 올라 그 남자 쪽으로 갔다. 누가 볼트를
훔치러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보고 있노라니 그 남자는 일어섰다. 손에는 쇠로 만든 지렛대
를 들고 있는 것이었다. 선로가 옆으로 빠져나가게 그 지렛대로 손질해 놓은 것이다. 세몬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건 바실리가 아닌가.
그는 뛰어 올라갔다.
그러나 상대방은 쇠로 만든 지렛대와 집게를 들고 둑 반대편으로 곤두박질하듯 뛰어내려
갔다.
바실리 스체바노비치! 제발 돌아와요! 지렛대를 이이 줘! 아직 아무도 몰라. 선로로 돌아
와요. 죄를 짓지 마시오!
그러나 바실리는 돌아보지도 않고 숲 속으로 사라졌다.
세몬은 빠져버린 선로 위에 서 있었다. 버들가지 다발도 떨어뜨렸다. 다음 열차는 화물차
가 아니다 객차다. 그러나 그는 정차시킬 도리가 없었다. 신호기가 없는 것이다. 선로를 제
자리에 돌려놓을 수도 없었다. 맨손으로 큰못도 박을 수 없었다. 뛰어가야 했다. 뭔가 연장
을 가지러 간수 초소로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아, 하느님 도와주십시오!
세몬은 간수 초소 쪽으로 뛰어갔다. 헐떡이면서 마구 뛰었다. 금새 고꾸라질 것 같았다.
숲을 빠져나갔다. 이제 간수 초소까지는 1백 싸궤(1싸궤는 2.134미터)밖에 안 된다.
이때 공장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여섯시다. 여섯시 이분에는 열차가 온다. 아아, 하느
님! 죄없는 사람들을 구원하옵소서! 그러는 사이에도 세몬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을 기관
차의 왼쪽 바퀴가 선로가 끊긴 곳에 충돌해 크게 흔들리고, 기울어지면서 침목을 부숴 산산
조각을 내는 광경이었다. 거기에다가 급커브에 경사, 그리고 둑이 있다. 11싸궤는 구를 것이
틀림없다.
특히 3등차는 사람이 꽉 찼을 것이다. 그 속에는 어린것들도 있을 터인데... 그들은 지금
모두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앉아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느님, 저에게 가르침을 주소서... 안
되겠다. 간수 초소까지 갔다가 돌아오면 늦다.
간수 초소까지 뛰어가지 않고 세몬은 뒤로 돌아서서 전보다도 더욱 빨리 뛰었다. 정신없
이 뛰었다. 자신도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겨우 뽑힌 선로까지 돌아왔다. 그의 버
들가지가 묶인 채로 놓여 있었다.
그는 몸을 굽혀 버들가지 하나를 뽑아가지고,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면서 또 뛰기 시작했
다. 이제는 열차가 오는 것 같았다. 먼 곳에서 기적 소리가 들렸다. 선로는 희미했지만 규칙
적으로 진동하기 시작하는 것이 들렸다. 더 뛸 힘이 없었다. 그는 위험 지점에서 약 1백 싸
궤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이때에 번갯불처럼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는 모자
를 벗어 그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고 장화목에서 칼을 꺼냈다. 그리고 성호를 그었다. 하느
님 구원하소서!
그는 칼로 왼쪽 팔굽 위를 찔렀다. 피가 솟아올라 뜨거운 냇물처럼 흘렀다. 그는 손수건을
피에 적셔가지고 펴서 버들가지에 비틀어 매어 붉은 기를 세웠다.
버티고 서서 그는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열차는 이미 보였다. 기관사는 그를 보지 못한
듯 자꾸 접근해 왔다. 1백 싸궤의 거리로 저 무거운 열차를 멈출 수 있을지!
피는 자꾸 흘렀다. 세몬은 상처를 옆구리에 대고 눌러 그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피는 멈추
지 않았다. 상처가 깊었던 것이다. 세몬은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눈에서는 검은 얼굴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그것도 아주 컴컴해졌다. 귀에는 종소리가 들렸다. 그에게는 열
차도 보이지 않았고,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머리 속에는 단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이제는 서 있을 수가 없다. 넘어지겠다. 기를 떨어뜨리겠구나. 나는 열차에 치이겠지... 도
와주십시오, 하느님. 교대할 사람을...
그대로 눈앞은 캄캄해졌고, 그는 정신을 잃고 기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 피묻은 기는 땅
에 떨어지지 않았다. 누구의 손인지 그것을 붙잡아 난폭하게 달려드는 열차를 향해서 높이
들어올렸다.
기관사가 그것을 보고 조절기를 닫아 증기의 흐름을 바꿨다. 열차가 멈춰섰다.
여기저기 차량에서 사람들이 뛰어나와 구름같이 모였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한 남
자가 기절해 쓰러져 있고, 또 한 남자가 그 옆에 피묻은 헝겊을 나뭇가지에 매어 들고 서
있었다.
바실리는 모든 사람들을 둘러본 다음 고개를 푹 수그리며 말했다. 나를 묶어주시오. 내가
선로를 끊었소.
보세볼로드 가르신(1855-1888): 러시아의 소설가. 그는 인간에 대한 인도주의적 태도와,
인간 사회에 불행을 가져오는 악에 대한 뼈저린 감정을 예술의 기조로 삼았고, 작품으로는
상봉 , 겁쟁이 , 병사와 장교 , 병사 이바노프의 회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