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러리 퀸] 앨러리 퀸 단편선
1.죽은고양이의모험
2.보이지않는연인의모험
3.세명의미망인
4.암흑의집의모험
5.에이브라함링컨의힌트
6.용조각문버팀쇠의비밀
7.수수께끼의038사건
▶ 죽은 고양이의 모험 ◀
엘러리 퀸 (Ellery Queen) - 미국의 추리소설 작가. 맨프레드 버닝턴 리 (1905-1971)와 프레드
릭 더네이 (1905-1982) 라는 사촌 형제가 공동으로 창조해 낸 인
물. 30편이 넘는 장편과 수많은 단편으로 오랜동안 독자들의 사
랑을 받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데뷔작인 로마 모자의 비밀 과 국
명 시리즈, 버나비 로스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X,Y,Z의 비극 시
리즈, 가상의 도시 라이츠빌을 무대로 벌어지는 라이츠빌 시리즈
등이 있다. 20세기 최고의 추리 거장으로 에드거 상을 수 차례 받
은 경력이 있으며, 추리 잡지의 발간, 신인 작가의 발굴 등 추리소
설계에도 매우 많은 영향을 끼친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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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각형인 검은 봉투 위에 오렌지색 잉크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엘러리는
언짢은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고 저작권을 기꺼이 인정했다. 쾌활한 여조
수를 짐짓 흘겨보긴 했지만, 그녀는 정열적인 사고와 추진력의 소유자로, 좀
더 성능이 뛰어난 쥐덫을 개발하기 위해 당혹스런 표정을 짓는 사내의 적
잖은 돈을 축낼 정도였다. 걸핏하면 생쥐 신세가 되어야 했던 엘러리는 편
지 겉봉에 미스 니키 포터 라고 적혀 있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왜 당신 아파트로 온 거죠?
니키는 검은 봉투를 앞뒤로 살폈지만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단순한 장난이겠지. 정직한 처녀의 명성을 한방에 무너뜨리려는 악취미를
가진 여자가 보낸 게 분명해. 열어 보지 마. 그냥 불속에 처넣고 하던 일이
나 계속하라구.
하지만 니키는 평소의 그녀답게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는 고양이 형태의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난 은유의 대가지.
엘러리가 중얼거렸다.
뭐라구요?
접힌 고양이를 펴면서 니키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계속해서 생쥐를 갖고 놀고 싶다면, 어디 한 번 읽어 보라
구.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또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유령 친구에게....
니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더 이상 읽지 마. 다음 얘기야 뻔하......
입좀 다물어요. 검은 고양이 인너 서클 비밀 집회가 10월 31일 첸셀러
호텔 1313호에서 열립니다.
다음 얘기도 논리적으로 따져 보면 뻔하겠지.
엘러리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도미노 마스크를 쓰고 정장 차림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정확히 9시 5분
에 도착해야 합니다. 유령. 이상이에요.
단서는 없나?
없어요. 필체도 못 알아보겠구......
물론 안 가겠지?
당연히 갈 거에요!
친구이자 보호자, 그리고 고용주로서 나의 도덕적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충고를 하지. 그 형편없는 편지를 내던지고 타자기 앞에 앉으라고.
한가지 더 있어요. 당신도 함께 가는 거에요.
니키가 덧붙였다.
엘러리는 세 번째로 손꼽히는 그의 미소---이를 드러내는---를 떠올렸다.
내가?
뒷면에 후기가 있어요. 당신의 그 두목 고양이를 데리고 올 것. 역시 정장
차림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고양이들에게 무소 가죽 채찍을 휘두르는 장화 신은
고양이를 엘러리는 눈 앞에 떠올렸다. 오..끔찍해.
난 기꺼이 사양하지.
당신은 너무 점잔을 빼요.
난 지적인 사람이야.
어떻게 해야 즐겁게 지낼 수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구요.
이런 자리는 빤해. 훤칠하고, 살결이 검고, 잘생긴 낯선 사내에게 아내를
빼앗긴 남편이 핏대를 올리는 장면으로 끝날 거라구.
겁쟁이......
하느님께 맹세코, 난......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첸셀러 호텔 13층의 한 객실 앞에서 엘러리는 드루이드(고대 골 및 켈트족
의 사제이자 마법사)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서 있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10월의 그 어리석은 행사의 근원에는 사마인(Samain)이라
불리던 축제의 이끼 낀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과거에 의식을
집행하던 게일(스코틀랜드 고지대 사람이나 아일랜드의 켈트인)족에게는 숲
속 빈터에서 타오르는 횃불이 지극히 자연스러웠으리라. 골(고대 프랑스)의
숲 또한 유령과 마녀들의 연례적인 모임을 위한 장소로서 나무랄 데가 없었
을 것이다. 심지어 이교도의 신에 대한 책임감이 일시적인 연대 수준을 지나
좀더 멀리까지 나아갔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드루이드의 죽음의 신은 맨해
튼의 한 호텔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횃불이 피어오를 거라고 예언했을 터
였다.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은 말할 것도 없이.
엘러리는 막 움트기 시작하던 할로윈 전설에 호두와 사과를 갖다붙인 과일
의 여신인 포모나를 기억에 떠올렸다. 그리고 나서 로마인들에게 저주를 퍼
부었다.
사실 사립탐정 퀸은 모든 것을 무시하기로, 마음을 편하게 먹자고 쉽게 결
론을 내렸었다. 동성연애자 모임에 가느냐고 묻던 택시 운전사의 은근한 비
웃음, 널찍한 첸셀러 로비를 가로지를 때 들려오던 고양이들의 끔찍한 합창,
그리고 엘리베이터 속에서 꼬리로 엘러리 몸을 휘감으려 애쓰며 고약한 냄
새를 풍기던 사내, 정말이지 그 녀석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계집 티를 내고
있었다.
엘러리는 고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다시는 결코, 결코, 결코 이런 짓을......
그만 투덜거리고 여길 좀 보세요.
도미노 마스크 속에서 니키의 눈이 반짝거렸다.
도대체 뭘 보라는 거야? 이 빌어먹을 물건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아무것도
볼 수 없잖아?
문에 이렇게 적혀 있어요. 검은 고양이면, 들어오시오!
좋아, 좋아. 어디 한 번 들어가 보자구.
잠겨 있지 않은 1313호의 문을 연 그들을 맞이한 것은 당연하게도 어둠이
었다. 그리고 침묵.
이제 뭘 한다?
니키가 킥킥거리며 뒤쪽으로 껑충 뛰어갔다.
당장 이곳에서 나가자구!
엘러리가 소리쳤지만, 니키는 이미 어둠에 묻혀 버렸다.
기다려! 당신 손을 내밀라고, 니키.
미스터 퀸, 그건 내 손이 아니에요.
빌어먹을. 함정에 빠진 것 같은데 말이야......
엘러리가 중얼거렸다.
저기 빨간 불빛이 비쳐요! 복도 끝인가 봐요.
엘러리는 니키를 껴안고 있는 뼈조각을 떼어 주었다.
엘러리! 장난이 아닌가 봐요.
동감이야.
두 사람은 불빛을 향해 더듬어 나갔다. 불빛이라기보다는 장밋빛 그늘이었
는데, 다양한 까마귀 박제가 진열대 위쪽에 희미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빌
어먹을 마녀가 시장에서 검은 종이를 사다 사방에 발라놓은 모양이군 투덜
거리는 엘러리의 눈에 진열대 받침에 노랗게 적힌 고대 게르만 문자가 들어
왔다.
왼쪽으로!
그래, 기꺼이 가마.
그가 으르렁거리며 왼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허공이 잡힐 뿐이다. 미스터리
를 해결하고 악마적인 유희를 즐기는 범인을 붙잡고 말겠다는 강렬한 욕구
가 두려움을 저 멀리 쫓아내 버렸다. 어둠 속으로 대담하게 걸음을 내딛는
엘러리 뒤를 니키가 바짝 붙어 따라왔다.
읔!
왜 그래요?
니키가 가쁜 숨을 내몰았다.
의자에 부딪혔어. 정강이가 얼얼해. 도대체 의자에 무슨 짓을......
니키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 가여운 엘러리, 오우!
으...... 이걸 날려 버려!
엘러리, 어디 있어요? 악!
으, 내 발. 이게 뭐지? 탱크 트랩? 바닥에 베개와 방석들이 흩어져 있어.
어둠 속에서 엘러리의 목소리가 울렸다.
차갑고 축축한 뭔가가 있어요, 얼음통처럼...... 우!
금속과 축축한 물체가 서로 부딪치는 거친 소리가 들리고 나서 침묵이 찾
아왔다.
니키, 무슨 일이지?
부젓가락 선반에 걸려 넘어진 것 같아요.
니키의 목소리가 바닥에서 위로 올라왔다.
맞아요, 부젓가락이에요.
멍청하고, 유치하고, 하나도 재미없는......
읔..
정신병원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아. 뭣 때문에 가구들을 이렇게 어질러 놓
은 것일까?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엘러리, 어디 있어요?
런던의 베들렘 정신병원에 있다구. 니키, 머리를 들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세인트 버나드가 달려와서 구해 줄 테니.?
니키가 비명을 질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엘러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방 안은 에디슨 조명기구의 불빛으로 가득했다. 고양이 의상과 마스크 차림
의 어른들이 깔깔대고 소리를 지르며 껑충껑충 뛰어댔다. 정신착란에 빠진
멍청한 유령들처럼.
놀랐지!
오, 빌어먹을 할로윈데이!
앤, 앤 트렌트구나!
니키가 탄성을 내질렀다.
오, 앤, 이 바보야, 어떻게 날 찾아냈니?
니키, 정말 놀랍게 변했구나. 오, 넌 자신이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모르
고 있어. 엘러리 퀸의 비서......
솔직히 네 눈에는 내가 멍청하게 비치겠지, 안 그래? 니키는 속으로 혼자
말을 했다. 앤은 무척 활기찼다. 점잔을 빼며 걷는 히피, 눈에 확 띄는 멋쟁
이, 달걀을 하나 잘못 부쳐도 쉽게 잊지 못하는 여자다운 여자. 그녀는 이런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앤 트렌트는 실제보다 다섯 살이나 더
먹어 보였다.
니키, 난 더 이상 트렌트가 아니야. 존 크롬비 부인, 조니!
앤, 너 결혼했니? 그런데도 결혼식에 날 초대하지 않았단 말야?
존은 영국인이야. 오, 지금은 아니지. 조니, 에디스 백스터와 그만 수다떨
고 이리 와봐요.
알았소, 앤. 오, 우아한 숙녀분께서 오셨군. 스카치? 아니면 버번을 들겠
소, 니키? 당신이 신중한 스타일이라면 스카치를 선택할 거요. 버번은 빨리
취하니까 말이오.
존 크롬비. 인공적인 파란색의 눈, 비굴한 미소, 반들반들한 얼굴, 올리비에
를 쏙 빼닮은 턱, 영국인 클럽과 여우 사냥개. 그는 거실에 앉아서 모든 것
을 처리하는 사람이었아. 언제고 미국인들을 혐오한다고 고백하겠지. 니키
는 생각했다. 앤 트렌트 크롬비 또한 구역질나는 오물덩어리가 안에 가득
차 있을 것이 분명했다. 존 크롬비는 자기 마누라인 앤은 경멸하지만, 그녀
의 친구들에게는 호의를 베풀었다. 그는 니키에게 우월감에 가득 찬 영국식
미소로 알랑거리며 연약한 갈색 손을 살짝 흔들고는 했다.
조심해, 니키. 난 만나는 여자마다 올라타려고 애쓰는 사내에게 발목을 붙
잡혀 있으니까.
니키는 낯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했다. 친구들은 도저히 상상이 불가능한
모습으로 탈바꿈하곤 했다.
오, 루시! 니키, 내 동생 루시를 기억......
루시 트렌트! 정말 루시 맞니?
내가 너무 커졌나, 니키 언니?
맙소사!
루시가 파티 장식을 혼자서 해냈어. 종일 이 안에 갇혀서 말이야. 영감이
번뜩이는 작업이었다고 생각지 않니? 불행하게도 난 아무 도움도 되지 못
했지만.
언니 얘기는 자기 안목이 낮다는 얘기야. 니키 언니. 시골뜨기처럼.
묘한 웃음. 가여운 루시. 젊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뉴욕 사람이 되려고 안간
힘을 쓰는 모습이라니. 잔을 채우고, 재떨이를 비우고, 부엌으로 달려가고....
젠장!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려고 애쓰는,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여자. 형부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게 좋을 거야, 루시. 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한 네 가슴 때문에라도 말이야.
오, 엘러리. 이리 와요. 백스터 씨 부부를 소개시켜 드릴께요. 백스터 부인,
에디스, 그리고 이쪽은 엘러리 퀸......
이게 뭐람? 등을 돌린 사람은 마치 벌레 같았다. 결혼생활에 지친 부부.
자그맣지만 옆으로 퍼진 몸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다시금 치장에 신경을 쓰
기 시작했다. 곱게 빗질한 머리를 창백한 얼굴 위로 들어올렸다. 두 번 다시
는 들어가고 싶지 않아 했던 우리 속에서 거만한 걸음을 걷는 늙은 암말
처럼. 앤 크롬비를 바라볼 때마다, 깜빡거리는 갈색 눈에서는 은밀한 쾌감과
악의에 가까운 빛이 흘러나왔다.
제리 백스터, 에디스의 남편이에요. 여긴 엘러리 퀸이구요.
안녕하시오, 젊은이.
반갑습니다, 제리 씨.
세일즈맨? 광고회사 사원? 브로드웨이 대리인? 파티를 위해 살아가는 인생.
. 술 석잔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런 삶. 사과를 담은 통에 가장 먼저 넘어
질 사람. 당나귀가 아니라 루시와 니키에게 먼저 꼬리를 들이밀 사람. 가장
먼저 욕지기를 하고, 뻗을 사람. 추파를 던지고, 비틀거리고, 땀을 흘리고, 고
함을 내지르고. 왜 소리를 지르는 거요, 제리 백스터?
엘러리는 뜨거워진 손바닥을 흔들고, 매력적으로 보이기를 기대하며 미소를
떠올렸다. 물론입니다, 전에 다른 곳에서 만난 적이 있던가요?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이런 얘기를 건네는 동안, 엘러리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
는 건지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호텔 거실은 사과, 매쉬멜로우, 호두 등이
주렁주렁 매달린 줄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미소를 짓고 있는
호박, 검은 색과 오렌지 색 마분지로 만든 고양이, 해골, 마녀 따위가 허공을
가로지르는 종이 줄에 역시 매달려 있었다. 방 안은 버번, 담배, 샤넬 5번
향수가 내뿜는 냄새로 인해 질식할 것만 같았다. 중국산 랜턴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소란은 점점 광기를 띠었으며, 방 안을 가로지르는 단
순한 일에도 목숨을 거는 탐험 같은 대담함이 요구되었다. 여기저기 나동그
라진 가구와 장애물들---검은 고양이들이 덫에 빠지도록 교묘하게 설계된-
--때문이었다.
엘러리는 손에 하이볼을 들고 안전한 구석에 처박혔다. 드루이드와 로마인
들은 니키에게 맡긴 채.
엘러리는 군소리없이 살인 게임을 받아들였다. 항의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게 뻔했으니까.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살인 게임을 하자고 아우
성이었다. 버스 운전수는 버스밖에 모르지 않느냐는 주장을 내세우며. 물론
그에게는 탐정 역이 떨어졌다.
그럼 시작하지요.
전통적인 할로윈 게임들을 모두 즐긴 뒤라, 그는 유쾌하게 말을 꺼냈다. 니
키는 낄낄거리는 제리 백스터를 한 번 찰싹 때리고, 영국인 조니는---그는
결코 웃지 않았다---두 번 때렸다. 그는 니키가 파티 요리를 적당히 즐겨
주기를 내심 간절하게 바랐다.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니키는 앤 크롬비와 루시 트렌트와
한데 어울려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존 크롬비는 손을 니키의 어깨에 슬그
머니 올려 놓았고, 에디스 백스터는 버번을 그녀의 술잔에 가득 채웠다.
제리 백스터는 고양이처럼 바닥에 납작 엎어져 있었다.
금방 돌아올께요.
니키는 짧게 말은 남기고 부엌 쪽---도마 위에서 뛰어 다니는 칼 소리로
판단하건대---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롬비의 손은 허공에서 얼어붙어 버렸
다.
에디스 백스터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제리, 어서 일어나지 못해요? 이게 무슨 꼴이에요!
니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자,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어요. 모두들 원을 그리며 모이세요. 제가 카드
를 돌릴 겁니다. 스페이드 에이스를 쥔 사람은 아무 말도 하면 안됩니다.
그가 바로 살인자니까요.
오우!
앤, 엿보는 짓은 그만둬.
엿보긴 누가 엿본다구?
당첨은 나지. 난 범죄형으로 생겼으니까.
크롬비가 낄낄거렸다.
살인자는 나라구! 흐흐흐!
제리 백스터가 고함을 내질렀다. 엘러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엘러리, 눈을 떠요.
음?
니키가 그를 흔들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부엌 반대쪽 벽에 얼굴을 마주하
고 쭉 늘어섰다. 순간, 엘러리는 성 발렌타인 축일에 벌어진 대학살을 떠올
렸다.
당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벽을 보고 서세요. 살인자를 봐서는 안되니깐.
눈을 감고....
내 생각과 완벽하게 일치하는군.
엘러리는 벽 쪽에 붙은 다섯 사람에게로 걸어갔다.
서로 간격을 두고서세요. 옆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안되니까요. 됐어요, 모두 눈을 감았지요? 스페이드 에이스를 쥔 사람, 그
러니까 살인범은 살짝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제자리로 가세요.
크리켓 하곤 엄청나게 다른 놀이군. 이제 곧 범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겠
죠?
약간 짜증이 섞인 저음으로 존 크롬비가 투덜거렸다. 에디스 백스터가 역시
못마땅한 투로 대꾸했다.
물론, 불이 켜져 있으니까.
잡담은 나누지 마세요. 눈을 꼭 감아야 해요. 살인범은 뒤로 나오세요. 됐
어요! 조용히 하세요! 잡담을 나누지 말라고 경고했잖아요! 퀸 씨는 목소리
로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단 말이에요.
계속하라고, 니키.
엘러리가 점잔을 뺐다.
자, 살인범이 할 일은 바로 이거에요. 부엌 식탁 위에 얼굴이 완전히 가려
지는 마스크와 손전등, 식빵용 칼이 있어요. 잠깐 기다려요! 아직 부엌으로
향하진 말아요. 내가 이곳에서 불을 끄면 움직이세요. 부엌에 가면, 마스크
를 쓰고 손전등과 칼을 들고 다시금 이 방으로 슬며시 들어오는 거에요.
그리고 희생자를 고르는 거에요!
우.
아......
읔!
퀸은 머리를 살짝 벽에 찧었다. 미치겠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야?
니키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범인은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돼요. 당신이 원하는 한 사람을 찍어야 한
다는 것 말이에요. 물론 엘러리는 빼놓고. 그는 범인을 잡을 때 까지는 살
아 있어야 하니까요.
니키, 서두르지 않는다면 난 온갖 질병에 시달리다 죽고 말 거라구.
주위는 완전한 어둠에 파묻힐 거에요. 범인이 든 손전등 하나만 빼놓고
말이에요. 저도 희생자가 누군지 전혀 모르게 될 거에요.
칼의 용도가 뭔지 물어봐도 되겠소? 사건 해결에 단서가 될 지도 모르니.
탐정이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오, 칼은 가짜에요. 단지 분위기를 고조시킬 뿐이죠. 범인은 그걸로 희생자
어깨를 톡 건드리면 돼요. 그러면 희생자는 살인범을 따라 부엌으로 따라
가는 거에요.
부엌이 바로 살인현장이군.
퀸이 우울하게 말했다.
우...... 희생자는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비명을 질러대야 해요. 칼에 찔린 것
처럼 말이에요. 실감나게 해야 돼요! 모두 들었죠? 준비됐습니까? 이제 내
가 불을 끄면, 살인범은 부엌으로 향하세요. 마스크를 쓰고 손전등과 칼을
든 다음, 다시 돌아와서 희생자를 고르세요. 시작!
전등 스위치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났다. 엘러리는 눈을 떴다. 예고한 대로
사방은 새까만 어둠에 덮여 있었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깐!
니키가 고함을 질렀다.
무슨 일이지? 왜 그래?
엘러리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오, 당신한테 한 말이 아니에요, 엘러리. 살인범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것
중에서 한가지 잊어버린 게 있어요. 지금 어디 있죠? 아니, 됐어요. 대답할
필요 없어요. 제 말 잘 들으세요. 부엌에서 희생자를 찌른 뒤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벽을 마주보고 서 있는 거에요. 소리는 물론 내지 않고 말
이죠. 누굴 만져서도 안 되구요. 지금처럼 조용해야 해요. 손전등은 돌아오
는 길을 찾는 데 쓰는 거에요. 하지만 벽을 마주하고 서는 즉시, 손전등을
끄고, 마스크와 손전등을 거실 한가운데로 던지세요. 물증을 없애야 할 것
아니겠어요? 무슨 말인지 알았죠? 물론 쉽진 않겠죠?
정말 독특한 여자야, 니키는.....
비록 어둡긴 하지만, 모두 눈을 감으세요. 모두, 됐어요. 그럼 범인은 앞으
로 전진!
엘러리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찬 니키의 음성이 들려 왔다.
방금 살인자가 희생자를 툭 쳤어요. 손전등을 조심히 다뤄요, 범인! 우리
탐정에게 단서를 주어서는 안 되니까요. 됐나요, 희생자? 이제 범인이 당
신을 부엌으로 데리고 갈 겁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눈을 뜨지 말고 계속
감고 있으세요. 뒤돌아 보지도 말고.
엘러리는 다시금 졸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남자의 비명에 엘러리는 졸음에서 깨어났다.
여기요! 무슨......
엘러리 퀸, 또 졸았어요? 지금 부엌에서 토막 살인극이 벌어지고 있어요.
자, 됐어요! 범인의 손전등 불빛이군요. 벽 쪽으로 조용히 움직이고 있어요.
이제 불을 끄세요! 좋아요, 마스크와 함께 던지세요. 와장창! 끝났군요, 살인
범. 뒤로 돌아섰나요? 다른 사람들처럼? 모두 준비됐나요? 그럼 불을 켭니
다!
자, 이제......
엘러리가 활기차게 말했다.
존이 보이지 않아요.
루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가-여-운-존.
제리가 노래하듯 말했다.
오, 불쌍한 내 남편. 조-온, 내게 돌아와요!
앤이 울부짖었다.
존!
니키가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에디스 백스터도 보이지 않는데?
엘러리가 말했다.
오, 내 마누라 말이오? 이봐, 어서 그 장작더미 속에서 빠져나오라구!
제리의 고함에 루시가 덧붙였다.
이런, 희생자가 둘이면 안되잖아, 니키. 게임을 망치는 거라구.
사건 현장으로 갑시다. 가서 보면 알겠지.
니키가 말했다.
웃고 떠들면서 그들은 부엌으로 향했다. 왼쪽으로 모퉁이를 꺾고 현관 입
구를 가로질러 부엌으로 들어간 그들은 목이 잘린 채 바닥에 누워 있는 존
을 발견했다.
퀸 경위와 유쾌한 전화 통화를 마치고 부엌으로 들어간 엘러리의 눈에 싱
크대에 머리를 처박고 욕지기를 하고 있는 앤 크롬비가 눈에 띄었다. 새파
랗게 질린 루시 트렌트의 역시 새파란 손이 그녀의 이마를 떠받치고 있었
다. 니키는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제리 백스터는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내 아내는 어디 있지? 에디스 어디 있소? 어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해.
엘러리가 제리 백스터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제리, 긴장을 풀어요. 긴 밤이 될테니. 니키......
알았어요.
그녀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이 바보같은 게임에서 누가 범인이었지? 스페이드 에이스를 쥔 사람 말야
. 당신은 누구인지 알고 있잖아?
엘러리가 다그쳤다.
에디스 백스터, 그녀가 에이스를 쥐었어요.
제리 백스터가 엘러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거짓말! 이 구역질나는 사건에 내 아내를 개입시키지 말라고! 이 거짓말
쟁이!
싱크대에서 기어내려온 앤이, 천으로 덮인 주검과 다른 사람들을 피해 부
엌 입구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러다 부엌 바로 바깥에 있는 화장실 문에
부딪혀 나동그라졌다. 뒤에서 따라 기어가던 루시가 그녀를 안고 훌쩍였다.
앤도 훌쩍이기 시작했다.
에디스 백스터가 범인이에요. 어디까지나 게임이지만.
니키가 몽롱하게 입을 열었다.
거짓말! 또 거짓말을......
엘러리가 아프지 않게 그의 입을 탁 쳤다. 그러자 제리 백스터는 다시금
울음을 터뜨렸다.
돌아왔을 때 또 다른 사람의 목이 잘려 있지 않았으면 좋겠군.
엘러리는 부엌에서 빠져나왔다.
스페이드 에이스를 쥔 에디스 백스터가 살인범 역할을 너무 진지하게 해내
다 그만 사람을 죽이고 달아난 것은 아닐까? 이 추측은 상당히 매력적이었
다. 존 크롬비의 아내를 바라보던 에디스 백스터의 눈에서 빛나던 악의, 밤
새도록 니키를 쫓아다니던 남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서린 분노가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에디스 백스터가 존 크롬비를 희생자로 찍고 그의 어깨
에 손을 얹은 것은 절대로 운명의 장난이 아니었다. 에디스 백스터는 결국
충동에 무릎을 꿇고 크롬비의 목을 그의 영국제 옷깃에서 떼어낸 것이리라.
하지만 조사가 진행되자, 엘러리의 추측은 빗나가 버렸다. 현관은 안쪽에서
단단히 잠겨 있었다. 니키는 순간적인 영감 에서 게임을 시작하기 전 바로
자신이 그 현관문을 잠갔다고 말했다.
창문을 통해 도망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페가수스처럼 에디스
백스터에게 날개가 달려 있다면 몰라도.
에디스 백스터는 도망치려는 시도를 젼혀 하지 않았다. 엘러리는 존 크롬비
의 아내와 그녀의 동생이 훌쩍이며 등을 기대고 있던 화장실 문 안쪽에서
에디스 백스터를 발견했다. 백스터 부인은 의식을 잃은 채 내팽개쳐져 있었
다.
에디스 백스터가 탄산암모늄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는 순간, 엘
러리의 부친인 퀸 경감과 벨리 경사가 부하들을 이끌고 들이닥쳤다.
크롬비라는 사내의 목이 잘렸다고?
벨리 경사가 다짜고짜 윽박질렀다.
에디스 백스터의 눈이 까뒤집어지자, 니키는 냄새나는 탄산암모늄을 다시
써야 했다.
살인 게임이군. 할로윈. 그렇지, 얘야?
퀸 경감이 아들 엘러리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엘러리는 낯을 붉히고, 자초
지종을 설명했다.
알았다. 우리가 곧 해결해 주마.
경감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그는 백스터 부인의 턱을 두 눈이 번
쩍 뜨일 때 까지 흔들어댔다.
부인, 우리 처지로서는 도저히 이런 파티를 이해할 수 없군요. 도대체 화
장실에서 뭘 하고 있었습니까?
에디스가 비명을 질렀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에요? 제리 백스터, 당신은 왜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에디스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의 남편은 허리를 숙이며 그녀
의 시선을 피했다.
엘러리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니키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랐소. 에디스, 그녀가 불을 끄자 당신은
거실에서 부엌으로 향했지요.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날 함부로 다루지 말아요!
백스터 부인이 고함을 질러댔다.
부엌 입구를 막 지나치는데, 등뒤에서 누군가 내 코와 입을 틀어막았어요.
그리고 난 의식을 잃었지요. 제리 백스터, 당신은 아내를 보호하지도 못하
면서 어떻게 남편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난, 난......
목이 잘렸다구?
벨리 경사가 중얼거렸다. 경사는 아이들과 함께 동네 할로윈 파티에 참석
했다가, 급히 연락을 받고 달려온 것이다.
엘러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살인자, 진짜 살인자에요, 아버님. 니키가 불을 껐을 때, 에디스 백스터는
니키의 마지막 지시를 받느라고 방 안에 있었습니다. 벽에 늘어서 있던 나
머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니키와 에디스 백스터를 지나 방 안을 가로지
른 다음, 어딘가에 숨어......
부인을 때려눕히기 위해서겠지.
퀸 경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다음 화장실에 처넣고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경사가 시를 읊듯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퀸 경감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백스터 부인을 화장실에 넣고, 부엌으로 가서 마스크를 쓰고, 손전등과 칼
을 집어들고 나서, 다시 거실로 돌아와 존 크롬비를 툭 친 다음, 그를 부엌
으로 유인해 목을 베었다는 결론인데...... 물론 어느 정도는 설득력이 있지.
크롬비는 아무 의심없이 부엌으로 향했을 테니까. 하지만 백스터 부인이 기
절했다는 부분은 아무래도 좀 그래. 범인이 의식을 잃은 부인을 화장실로
끌고가는 동안 아무 소리도 안 났단 말이오?
전 졸고 있었습니다......
엘러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니키가 나섰다.
아무 소리도 안 났습니다, 경감님. 게임 도중에는요. 제가 불을 끄고 나서
들린 첫 번째 소리는 존의 비명이었어요. 그리고 두 번째는 범인이 손전등
을 방 한가운데에다가 내던지는 소리였구요. 그녀는...... 아니 범인이 누구인
지는 몰라도...... 일을 마친 후 원래 자리인 벽에 가 선 거에요.
제리 백스터가 땀이 흥건한 얼굴을 들어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퀸 경감이 말을 꺼내려 했지만, 벨리 경사의 탄식이 가로막았다.
이런!
늙은 신사의 주검을 살피다 너무도 처참한 광경에 벨리 경사가 자기도 모
르게 탄식을 내뱉은 것이었다.
다시 엘러리가 끼여들었다.
그럴 가능성도 있고, 그러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에디스는 몸집이 아
주 작습니다. 아무도 눈치 못 채게 그녀를 몇걸음 떨어지지 않은 화장실로
옮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죠. 힘이 센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순간 앤 크롬비와 루시 트렌트, 제리 백스터는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에디
스 백스터는 오히려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해 보이려고 애를 썼다. 트렌트 자
매는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타고난 체격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제리으 경우 상당한 효과를 보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체구는 코끼리를 연상
케 했다.
엘러리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니키를 바라보았다.
니키, 불이 켜져 있었을 때, 벼겡서 발을 뒤쪽으로 살짝 내민 사람이 에디
스가 분명해?
틀림없어요, 엘러리.
그럼 희생자를 고르기 위해서 부엌에 돌아온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
나?
불을 끈 다음에 말이에요? 물론이에요. 손전등 불빛에 마스크가 비쳤으니
까.
남자였소, 여자였소? 생각보다 결론이 쉽게 날 지도 모르겠군. 범인이 남
자라면......
경사가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니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전등 불빛은 아주 희미했어요, 경사님. 그리고 우리 모두 검은 고양이
차림이었구요.
난 테크닉이 뛰어난 권투선수는 아니오.
퀸 경감이 느닷없이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한 남자가 살해됐소. 내가 알고 싶은 건 누가 언제 어디서 살인을 저질렀
느냐가 아니라,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느냐는 것이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른 움츠림이 네 사람의 목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모두들 알고 있어. 엘러리는 생각했다.
그는 지나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존 크롬비와 에디스 백스터 사이에......
이건 생명이 달린 문제예요!
에디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들 듯이 앞으로 나서며 거칠게 손을
내저었다.
조노가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어요. 아무일도. 아무 일도 없다구요!
제리, 저 사람들 말을 믿어서는 안돼요.
제리 백스터의 눈길이 다시 떨구어졌다. 그가 중얼거렸다.
두 사람 관계? 나도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구. 나를 얽어매려는 수작이야.
놀랍게도 그는 아내가 아니라 앤 크롬비에게 시선을 던졌다.
앤?
하지만 앤의 입술은 공포로 인해 젤리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구요!
제리의 아내가 고함을 질러댔다.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이번에는 루시 차례였다. 충격이 커서 용기가 생긴 것일까.
존은...... 그러니까...... 만나는 모든 여자와 사랑을 나누었어요. 저와도......
너와 말이지?
앤이 동생을 향해 눈을 끔뻑였다.
그래. 그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어. 난......
에디스 백스터를 향하는 루시의 눈은 비웃음과 혐오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그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겠지, 에디스.
에디스도 지지 않고 루시를 노려보았다.
에디스, 당신은 그와 4주일을 함께 지냈어. 어느날 밤, 디너 파티에서 당신
들 두 사람은 슬쩍 자리를 피했지. 당신은 내가 엿들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만...... 당신은 결혼해 달라고 그에게 매달렸어.
더러운 계집 같으니라고......
에디스가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난 똑똑히 들었어. 만약 존이 앤과 이혼한다면, 당신도 제리와 이혼하겠노
라고. 그러자 존은 낄낄대며 당신을 비웃었지, 안 그래? 별 더러운 여자를
다 보겠다는 듯이. 난 당신 눈을 보았지, 에디스. 당신 눈......
그러자 모두들 에디스 백스터의 눈을 바라보았다.
난 말할 수 없었어, 앤. 할 수 없었다구, 할 수 없었어......
루시는 얼굴을 손에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제리 백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는 거요?
벨리 경사가 친절하게 물었다. 제리 백스터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크롬비 부인, 당신은 아무것도 몰랐습니까?
퀸 경감이 딱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녀는 에디스 백스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에디스 백스터는 육중한
몸을 의자에 의지한 채 아무 말없이 앉아 있었다. 땀으로 흥건해진 늙은 여
인. 앤이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어요.
팽팽하게 당겨진 그녀의 입 근육이 느슨해졌다.
하지만 전 겁이 많아요. 전 그와 부딪칠 수 없었어요. 제가 아무 일 없었
다는 듯이 못 본 체 한다면......
나도 겁이 많지.
뭐라구? 지금 뭐라고 했느냐? 무슨 말인지 못 들었다.
퀸 경감이 고개를 돌렸다.
크롬비의 목을 자른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실 한쪽 벽을 마주한 채 늘어서 있었다. 앤 크롬비, 루시 트렌트,
에디스 백스터, 제리 백스터. 백스터 부부 사이에는 사람 하나가 족히 들어
갈 만한 정도의 틈이 자리했다. 니키는 전등 스위치 옆에 서 있었고, 퀸 경
감과 벨리 경사는 부엌으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었다. 엘러리는 방 한가운
데 놓인 방석에 앉아 있었는데, 두 무릎 사이에서 손이 달랑거렸다.
몇 시간 전 모습 그대로를 재현한 것입니다, 아버님. 저와 존 크롬비가
벽에 있었다는 점만 빼놓는다면요. 저 빈자리가 바로 그의 자리입니다.
퀸 경감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지금처럼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니키는 살인자더러 벽에서 돌아서서 방
안을 가로지르라고 했습니다. 지금 두 분이 서 계신 쪽으로 말이죠. 다시
한 번 해보세요, 에디스.
당신 지금......
부탁입니다.
에디스 백스터는 벽에서 살짝 뒷걸음질을 친 다음 등을 돌리고 잔뜩 어질
러진 가구들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경감과 경사 바로 앞에서 걸음
을 우뚝 멈추었다.
그러니까 에디스가 바로 저 지점에 서 있었을 때, 그녀더러 부엌으로 가
라고 지시했다, 이거지, 니키? 마스크를 쓴 채 손전등과 칼을 들고 돌아와
희생자를 선택하라고 말이야. 맞나?
그래요......
그런 다음에 불을 내렸고, 니키? 맞아?
그래요......
해 봐.
해 보라뇨, 엘러리?
그대로 해 보라고, 니키.
어두워지자, 벽 쪽에 서 있는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침묵이 찾
아왔다.
잠시 후, 엘러리의 지친 목소리가 울렸다.
바로 이 때, 니키 당신이 에디스더러 잠깐! 이라고 소리를 친 다음 몇가
지 지시를 더 내렸지. 범죄 를 저지른 다음 어떻게 하라고 말이야. 방금
전에 지적했듯이, 아버님, 그러니까 에디스가 니키의 지시를 받느라고 잠
깐 서 있는 동안, 방 안은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진
짜 살인자는 몰래 벽에서 등을 돌린 다음 방 안을 가로지른 겁니다. 그리
고 니키와 에디스를 지나 부엌 입구에서 에디스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건 확실하구나, 그래서?
그런데 문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범인이 어떻게 아무런 소리도 내
지 않고 방 안을 가로지를 수 있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벽에 서 있던 제리 백스터가 쉰 음성으로 말했다.
난 여기 서 있을 이유가 없다구. 여기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단 말이야!
놀랍게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니키, 당신은 분명 이렇게 말했
어. 바로 지금처럼 조용해야 합니다. 라고. 방금 전에 당신은, 전등을 끈
다음 처음 들은 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온 존의 비명이라고 했지. 그리고 살
인자가 벽으로 돌아온 뒤에 손전등을 방 안에 내던질 때 난 소리가 두 번
째라고 했어. 다시 한 번 반복하는데, 문제는 살인자가 어떻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방 안을 가로지를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벨리 경사가 투덜거렸다.
경사님, 방 안을 이미 둘러보셨지요? 가구, 베게, 방석 따위의 잡동사니로
온통 난장판이잖습니까? 경사님은 이런 난장판 속을 아무 소리도 내지 않
고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니키, 우린 이 곳에 도착하고 나서 한
참을 헤매......
어둠 때문에 우왕좌왕 했지요. 여기저기 긁히고 말이에요. 전 넘어......
그런데 왜 살인범은 그러지 않았을까?
퀸 경감이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었다.
내가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아무도 방 안을 가로지르지 않았던 거야. 불이
꺼진 상태에서 그런다는 건 불가능하지. 하지만 그때 방 안에는 불이 꺼져
있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니키가 정확히 목격했을 테고 말이야.
그렇다면 결론은 명확하겠군요, 경감님.
경사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리가 알기로 방을 가로지른 사람은 딱 한 사람이야. 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에 니키는 똑똑히 볼 수 있었지. 그 사람은 바로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은 채로 발견되었네, 벨리. 에디스 백스터!
오, 아니야. 난 아니라구!
에디스가 꺽꺽거리며 부인했다.
오, 물론 그러시겠지요, 백스터 부인. 당신은 부엌으로 가서 마스크를 쓰고
손전등과 칼을 집어들었소. 그리고는 돌아와서 마스크를 쓰고, 손전등과 칼
을 집어들었소. 그리고는 돌아와서 존 크롬비를 지목했소. 그가 따라나오자
부엌에서 그의 목을......
아니야!
일을 마치고 나서 당신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실신한 척 꾸몄지. 사람들이
당신을 발견할 때 까지 기다렸다가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다고 엄청난 거짓
말을 해 대고.
아버님.
엘러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응? 왜 그러느냐?
이와 유사한 사건들에 대한 기억이 아직 뚜렷했기 때문에, 경감의 목소리는
약간 거칠었다.
내가 틀렸다는 얘길 하려는 거냐, 엘러리!
에디스 백스터는 존 크롬비를 죽일 수 없는 사람 가운데 하나로 오늘 밤
판명되었잖습니까?
당신은 알고 있군요?
에디스가 신음 소리를 냈다. 헐떡거리는 그녀의 숨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크롬비가 비명을 지른 뒤에 누군가 손전등을 들고 돌아오는 모습을 니키
가 목격했습니다. 범인이 벽으로 다가가서 손전등을 방 한가운데다가 던지
는 소리도 들었구요. 니키가 본 사람은 누구일까요? 우린 진짜 범인이 누구
인지 이미 추론해 냈습니다. 손전등이 떨어지는 소리가난 직후, 니키는 불
을 켰습니다. 에디스 백스터가 범인이라면, 벽에 붙어 있던 나머지 사람들
은 불이 켜진 즉시 그녀를 발견해야 하잖습니까? 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
았습니다. 그녀는 거실에 없었지요. 우린 그녀를 화장실에서 발견했습니다.
진짜 범인에게 얻어맞아 의식을 잃은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녀는 크롬
비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에디스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누가 범인이란 말이냐?
경감이 다그쳤다. 이 황당한 살인사건을 어서 마무리짓고 집에 돌아가 푹
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그의 음성에서 뚝뚝 묻어나왔다.
엘러리 역시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범인은 어둠 속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방을 가로지를 수 있는 사람
입니다. 에디스는 범인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으니, 이제 초점은 벽에 서 있
는 세 사람에게로 옮겨진 셈이지요. 저 중 한 사람이 바로 아무도 몰래 방
안을 가로지른 겁니다.
엘러리의 설명에는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설득력이 있었다. 퀸 경감이 다
시 끼어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이 난장판 속을 헤쳐나갈
수 있단 말이냐? 깜쪽같이 말이야!
오직 한 가지 해석만이 가능합니다.
갑자기 엘러리의 목소리에 활기가 돌았다. 그는 칼을 집어들고 끝을 매만
졌다.
여러분은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내가 완전히 탈진한 채 방석에 앉아 있
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어리석은......
장면이지요.
벨리가 울부짖었다.
스위치는 어디 있지? 니키 포터 양, 불을 켜주겠소?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요!
니키가 흐느꼈다.
모두들 꼼짝 말아요!
경위가 소리쳤다.
자, 이제 칼을 던지겠습니다.
엘러리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을 던집니다.
자그마한 소리에 이어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이 미로를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은,
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미로를 꾸민 바로 그 사람입니다.
엘러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달리 얘기한다면, 난장판은 우연이 아니고 아주 치밀한 계획에 따른 겁니
다. 머릿속에 장애물 코스를 입력시켜 놓고, 예행 연습을 했겠지요.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닌. 우린 당신이 파티 준비를 하기 위해 온종일 이 방에서 혼
자 지냈다는 얘길 들었소.
여기 있어요!
흐느낌을 멈추고 니키가 스위치를 올렸다.
엘러리는 부드럽게 처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트렌트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 복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
겠지, 루시......
-The end-
보이지 않는 연인의 모험
-Ellery Queen
로저 바웬은 눈이 푸르고 얼굴이 흰 30살의 청년이었다. 어떤 사람인가 하
면 키가 크고 좀 지나치게 웃는다 싶을만큼 잘 웃으며, 하버드 사투리가 심
한 영어를 썼다. 때로 칵테일을 마셨으며 담배는 도가 넘칠만큼 많이 피웠
다. 그리고 유일하게 살아있는 친척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며 주로 로저가
보내주는 생활비로 살고 있는 늙은 숙모- 에 대해 매우 인정이 많으며, 독
서경향은 사바티니와 쇼의 중간인 중용을 취하고 있었다. 뉴욕주 코시카
(인구 745명)에서 변호사를 필요로 하는 사건이 있을 경우에는 변호사업무
를 하고 있었는데, 코시카는 그가 태어난 고향이며, 어렸을 때 카터노인의
과수원에서 몰래 사과를 따먹고 메이지어 냇가에서 벌거벗고 헤엄도 치고,
토요일밤이면 코시카 바빌리언(두쌍의 밴드로 쉬지않고 춤을 출 수 있었다)
의 테라스에서 아이리스 스코트와 장난을 하던 마을이었다.
코시카 인구의 100%에 이르는, 로저를 아는 사람들 말에 의하면, 로저는'
귀공자'이고, '정말로 선량한 젊은이'이며 '손톱만큼도 교양을 내세우지 않
으며' '착실한 사나이'였다. 친구들 -거의 대부분 메인가 변두리에 있는 재
스민가의 마이클 스코트의 하숙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데- 도 로저만큼 쾌
활하고 친절하고 상냥하며 밉지않은 청년은 없다는 것이었다.
뉴욕에서 코시카에 도착한 지 반시간도 안되어 엘러리 퀸은 그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시민에 대하여 코시카 사람들이 어떤 애정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엘러리는 메인가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고 있는 클라우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약간의 정보를, 군(郡)재판소 부근의 길거리에서 공기놀이를 하고 있던 이
름도 모르는 개구장이한테서 꽤 재미있는 단편을 , 그리고 코시카 우체국장
부인인 퍼킨스라는 여자로부터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로저 바웬 본인의 입으로부터는 거의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는데,
그는 아주 성실한 사람으로 보기에도 분명 분개하여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군 구치소를 떠나 하숙집 쪽으로 -엘러리가 허둥지둥 맨해턴에서 달려온
원인이 된 로저 바웬의 친한 친구에게로 가는 도중 엘러리 퀸의 가슴을 세
게 때린 것은 이와 같이 모든 미덕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제1급살인
혐의를 받고 어두침침한 철창 속에 누워서 통탄스럽게도 공판을 기다려야만
한다는 기묘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하고 엘러리 퀸은 한참 뒤 장미꽃으로 덮인 포치에서 흔들의자를
앞으로 움직이면서 말했다.
"이 사건은 틀림없이 겉보기보다는 그다지 비관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바웬에 대해 들은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볼때 -."
앤소니 신부는 마디가 불거진 두 손을 꽉 쥐고 있었다.
"나는 이 손으로 로저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하고 목소리를 떨며 그는
말했다.
"퀸씨,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그에게 세례를 주었으니까
요. 그리고 본인도 단호하게 맥거번을 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구요. 나는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로저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요. 그런데도..
로저의 변호를 맡고 있는 군에서 제일 가는 변호사인 존 그레엄은 지금까
지 자기가 맡은 사건 가운데 이건 가장 불리한 정황증거 사건의 하나라고
말하고 있단 말입니다."
"게다가" 하고 몸집이 큰 마이클 스코트가 우람한 가슴의 멜빵을 잡아당겨
철썩 하는 소리를 내며 으르렁대듯이 말했다.
"로저까지도 분명하게 그렇게 말하고 있거든요. 제기랄, 난 로저가 자신이
그랬다고 자백한다 해도 그 말을 믿지 않겠어요. 신부님, 용서하세요, 말
씨가 너무 험해서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하고 갠디부인이 휠체어에서 물어뜯을 듯이 말했
다.
"뉴욕에서 온 그 교활한 검은머리 악당을 로저가 쏘아 죽였다고 말하는 녀
석이 멍청이라는 거에요. 생각해보면 알 것 아니예요. 그 사건이 나던 날
밤 로저는 자기 방에 혼자 있었단 말예요. 누구든지 잠잘 권리는 있지 않
겠어요. 잠을 자는데, 왜 증인이 필요합니까, 네? 퀸씨. 가여운 로저는 불
량배가 아니예요. 제가 알고 있는 누구처럼."
"알리바이가 없습니다." 엘러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 점이 불리하단 말씀이야." 하고 몹시 뚱뚱하고 튼튼한 노인인 코시카
경찰서장 프링글이 신음하듯이 말했다.
"그 점이 아무래도 불리해. 그날 밤 로저가 누군가를 데리고 왔다면 좋았
을텐데 말이야. 아무튼-." 서장은 갠디부인의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길을
보자 당황해서 덧붙였다. "로저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거든. 하지만
로저가 맥거번과 싸웠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
"오오!" 엘러리는 부드럽게 말했다. "둘이 서로 치고받기라도 했습니까?
아니면 협박 비슷한 말이라도 했습니까?"
"아니, 때리기까지는 안했지만...." 앤소니 신부가 주저하면서 말했다.
"어쨌든 싸움을 했습니다. 그 일이 있던 날 저녁이었지요. 맥거번이 살해
된 건 자정무렵이었는데, 로저가 그 친구와 말다툼을 한 것은 바로 그 한
시간쯤 전이었어요. 사실은 퀸씨, 그들이 싸운 것은 그게 처음이 아니었습
니다. 전에도 몇 차례 심하게 싸운 적이 있었답니다. 지방검사가 만족할
만한 동기를 구성하기에는 충분하겠지요."
"하지만" 마이클 스코트가 신음하듯 말했다. "그 총탄이라는 것이 있어요"
"바로 그겁니다." 몸집이 작고 생쥐처럼 이지적인 용모를 한 도드 의사가
말했다. 한심한 듯한 말투였다.
"나는 군(郡)의 검시관이자 이 고장의 장의사를 겸하고 있습니다, 퀸씨.
검시때 맥거번의 시체에서 적출된 총탄을 조사하는게 내 임무였지요. 프링
글서 서장이 로저를 용의자로 구속하고 그의 총을 압수했을 때 우리는 당
연한 일로 총알의 탄흔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탄흔을 말입니까?" 엘러리는 귀찮은 듯이 말했다. "정말입니까?" 이렇게
말하며 설마하는 듯한 감탄한 태도로 프링글서장과 도드 검시관을 찬찬히
보고 있었다.
"그럼요, 그런 문제가 되고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판단을 믿을 수가 없
으니까요." 하고 검시관은 얼른 덧붙였다.
"내 현미경 검사로는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되었습니다만.....아주 성가신
일이라서 말이예요, 퀸씨. 하지만 직무도 직무고, 법을 옹호해야 하는 직
책에 있는 사람은 지켜야 할 서약이 있지요. 우리는 그것을 탄도전문가의
감정을 받기 위해 총과 함께 뉴욕으로 보냈답니다. 감정 결과는 우리의 판
정을 뒷받침하는 것이었어요. 일이 이쯤 되니 우리들이 할일이 무엇이겠습
니까? 이런 이유로 프링글 서장이 로저를 체포한 것입니다."
"때로는" 앤소니 신부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보다 숭고한 의무가 있는게
아닐까요, 새뮤얼?"
검시관은 그야말로 비참해 보였다. 엘러리가 말했다.
"바웬은 총기소지 허가증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뚱뚱한 경찰관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지방 사람들은 대
개 가지고 있지요. 저어기 저 산이 아주 좋은 사냥터라서 말입니다. 사용
한 것은 38구경으로 -로저의 것은 콜트38 자동권총, 그것도 아주 근사한
것이었지요."
"로저는 사격의 명수였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좋겠지요." 하고 스코트는 소리쳤다. "대단한 솜씨입니다"
그 우락부락한 얼굴이 누그러졌다. "나도 그런 것을 볼 줄 알아요. 이래뵈
도 내 팔에는 지금도 여섯개의 유산탄 파편이 박혀 있단 말입니다. 벨로의
격전(1918년 6월~7월)때 독일놈들의 총탄을 피해다니다가 얻어맞은 거지
요."
"사격에는 기막힌 명수였어요." 검시관이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우리는
곧잘 같이 토끼사냥을 갔었는데 로저가 50야드 앞을 달리고 있는 놈을 콜
트로 잡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로저는 소총을 쓰지 않았습니다. 소총
은 참다운 스포츠로서는 재미가 없다면서....."
"이번 일에 대해서 바웬 자신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엘러리는 담배
연기를 곁눈으로 보면서 물었다. "나한테는 도무지 말하려 들지 않습니다"
"로저는" 앤소니 신부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부정하고 있습니다. 맥거
번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어요. 나는 그말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지방검사한테는 그것으로 통하지 않습니다." 엘러리는 또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로저의 자동권총이 사용되었다고 한다면 이론적으로는 -
그 젊은이의 말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 누군가가 그 권총을 훔쳐 살인을
한 다음 몰래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는 것이 되겠군요?"
모두들 당황한 듯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앤소니 신부는 보일듯 말듯
한 자랑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때 스코트가 큰 소리로 지껄여댔다
"도무지 말도 안됩니다. 글레엄이 -우리들의 변호사인 글레엄이 로저에게
말했지요. '잘 듣게, 로저, 권총을 자네 방에서 훔쳐 낼 수 있었다는 사실
을 증명하는 것이 자네를 위해 절대 필요한 일일세. 자네의 목숨은 그 점
에 달려있다고도 할 수 있지.' 하며 입에서 신물이 나도록 타일렀습니다.
그런데 그 바보같은 젊은이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싫다'는 거예요.
'글레엄씨,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아무도 내 권총을 훔친 사람은 없습
니다. 나는 원래 눈치가 빠른 편이거든요. 그리고 권총을 넣어 둔 것은 내
가 자는 침대 바로 옆에 있습니다. 또 그날밤에는 문에 빗장을 걸어 놓았
어요. 아무도 들어와서 훔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난 그런 증언은 할
수 없습니다.' 라는 거예요."
엘러리는 휘파람과 더불어 동그랗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오오, 우리의 영웅이여' 라고 해야 할 판이군요. 그렇게 되면-" 엘러리
는 어깨를 움찔하며 말했다. "아까 말씀하신 -그 -싸움 말입니다, 제가 알
고 있는 점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 원인은-"
"아이리스 스코트예요." 망을 친 문쪽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예요, 일어나지 마세요, 퀸씨. 괜찮아요, 아버지, 저도 이제는 다 컸어요.
그리고 온 동네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퀸씨에게 숨긴들 무슨 뜻이 있겠어
요." 여자의 목소리가 잠시 끊어졌다. "어떤 것을 알고 싶으세요, 퀸씨?"
보아하니 엘러리는 일시적으로 말을 못하게 된 것 같았다. 벌떡 일어서서,
박물관 구경온 촌사람처럼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코시카의 흙먼지 속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근사한 다이아몬드를 발견했다 하더라고 이처럼 놀라지
는 않았을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미인은 드물다. 코시카에서는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가 아이리스 스코트인가 하고 엘러리
는 생각했다. 이름을 잘도 지었군, 오, 마이클! 아이리스는 신선하고 나
긋나긋하고 아름답게 창조되어, 그 이름이 가리키는 꽃(붓꽃) 바로 그 자체
인것처럼 싱싱하고 우아했다. 정말 싹트기에는 기묘한 땅을 골랐다. 이상할
정도로 갸름한 검은 눈동자는 엘러리를 완전히 매혹시켜버려 그 사랑스러움
앞에서 그는 망연히 넋을 잃고 있었다. 어두침침한 문 앞에 여자는 혼자
서 있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보고 있기만 해도 즐거웠다. 아이리스에게 유
혹적인 데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완벽함에서 생기는 무의식적인 고혹이
었다 - 눈썹의 곡선, 입술의 곡선, 조각같은 가슴의 융기.
그리하여 지금 엘러리 퀸은 비로소 로저 바웬같은 미덕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나이가 어째서 전기의자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될 파국에 빠졌는
지 그 까닭을 알았다.
설사 퀸에게 아름다운 것을 볼 줄 아는 눈이 없었다 할지라도 포치에 않아
있던 사람들이 곧바로 아름다움을 알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도드는 조심
스러운 차분한 존경심을 가지고 조용히 아이리스를 보고 있었다. 프링글은
높이 우러러보는 모습으로 아이리스를 응시하고 있었다-그렇다, 그 뚱뚱한
늙은이 프링글까지도. 그리고 앤소니 신부의 늙은 눈은 자랑스러워 보였으
며 보일듯말듯한 슬픔을 깃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이클 스코트의 눈에는
아름다운 딸을 가진 아버지의 한없는 환희가 있을 뿐이었다. 아이리스야말
로 키르케(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양의 딸)와 베스타(로마신화에 나오는
가정의 여신)가 합쳐진 것 같은 처녀로 시인이 시적 황홀경에 들어가는 것
과 마찬가지로 쉽게 남성을 움직여 살인을 범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거 정말 -" 엘러리는 깊숙이 숨을 들이쉬면서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즐거운 놀라움이었습니다. 자, 앉으세요, 스코트양. 나도 정신을 차리겠
습니다. 맥거번도 아가씨의 숭배자였겠지요?"
아이리스의 구두굽이 포치에 조그만 소리를 울렸다. "네" 하고 그녀는 조
심스운 목소리로 대답하고서 무릎위에 포개진 상아같은 손을 바라보고 있
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저도 -저도 그분을 좋아했어요
그분에게는 어딘지 남다른 데가 있었어요. 뉴욕에서 온 화가였지요. 코시
카의 유명한 언덕을 그리기 위해서 약 6개월전에 이곳에 왔어요. 무척 박
식했고 프랑스, 독일, 영국 같은 곳을 많이 여행해서 유명한 친구들도 있
었고........여기서는 우리 모두 대부분 농사를 짓고 있거든요, 퀸씨. 전
지금까지 그런 분을 만난적이 없었어요."
"그 교활한 악마녀석이......" 갠디 부인이 얼굴을 실룩거리며 혀를 찼다.
"실례지만" 엘러리는 미소지었다. "아가씨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나요
?"
꿀벌 한마리가 프링글의 털복숭이 귀근처를 붕붕거리며 날고 있었다. 서장
을 화를 내며 그것을 철썩 내리쳤다. 아이리스는 대답했다.
"전 -그것을 -하지만 그분이 돌아가신 지금은 사랑하지 않아요. 죽음이라
는 것은 왜 그런지 -사물을 바꿔 버리는군요. 아마 전 -그분의 참모습을
본 거겠지요."
"하지만 아가씨는 그 사람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게 아닙니까 -살아
있었을 때는?"
"네."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이윽고 마이클 스코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딸에게 감섭하지 않기로 하고 있어요. 아이리스에게는 자기 나름대
로 생활방법이 있을테니까요. 그러나 나로서는 맥거번이 도무지 마음에 들
지 ㅎ았습니다. 그 자는 살이 보들보들한 허영만 찾는 녀석이라 아무짝에
도 쓸모가 없는 친구였지요. 하나에서 열까지 나는 그를 믿지 않았소. 아
이리스한테도 주의를 주었지만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여자
아이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지만, 홀딱 반했던 모양이에요. 그는 의외로 오
래 머물러서 -나한테 빚까지 졌답니다." 하고 불쾌한 듯이 말했다.
"5주일 치 방값을 말입니다. 왜 어물어물하고 있었는지, 왜 주머니에 한푼
도 없는지 그건 알 수가 없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은 문제로군요." 하고 엘러리는 귀찮은 듯이 말했다. "
그리고 로저 바웬은 어땠습니까, 아가씨?"
"저희는 -저어, 함께 자랐어요." 아이리스는 역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갑자기 머리를 들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그야말로 판에 박힌
것처럼 정해져있어요. 아마 저는 그것이 무척 싫었던가 봐요. 그리고 로저
가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도 싫었어요. 그는 맥거번씨에 대해 진짜로 화를
내고 있었어요. 언젠가 몇 주일전에는 로저가 그 사람을 죽이겠다고 했어
요. 우리가 모두 듣고 있는 앞에서요. 그들은-저기 저 객실에서 말다툼을
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이 포치에 앉아 있었구요...."
잠시동안 또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엘러기가 샹냥하게 말했다.
"그래서 아가씨는 로저가 그 사람을 쏘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이리스는 미칠 것 같은 눈을 엘러리쪽으로 들었다.
"아니요. 전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로저는 아니예요. 그는 화를
냈어요. 하지만 그것뿐이예요. 그냥 말로만 그랬을 뿐이지, 본심은 아니었
을 거예요."
그리고는 목멘 소리로 모두들 당황하도록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마이클
스코트는 삶은 문어처럼 새빨개졌고, 앤소니 신부는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
였다. 다른 사람들도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미...미안해요." 하고 아이리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아가씨는 누가 그랬다고 생각해요?" 엘러리는 부드럽게 물었다.
"전 모르겠어요."
"다른 분들은?" 모두들 머리를 저었다.
"그런데 프링글씨. 맥거번의 방은 사건이 있던 날 밤 당신이 조사했을 때
의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시체는 어떻게
되었죠?"
"네" 검시관이 말했다. "검시를 한 뒤 물론 검시 재판을 위해 보존해 두었
지요. 그리고 시체를 인수해 갈 사람을 찾아보았습니다만, 그 사람은 연고
가 없는 사람이었는지 친구 하나 나타나지 않더군요. 뉴욕의 화실에 남겨
놓은 약간의 물건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내 손으로 처리해서
코시카의 새묘지에 매장했습니다."
"여기 방 열쇠가 있소." 서장은 천천히 일어서면서 숨이 답답한 것처럼 말
했다. "나는 지금부터 저쪽 기슭 마을로 가야합니다. 도드 의사가 뭐든지
질문에 대답해 드릴 수 있을걸고 믿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서장은 체념한 것처럼 말을 끊더니 포치에서 비틀거리듯이 걸어나갔다.
"신부님도 가시겠습니까?" 하고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중얼거리듯이 말했
다.
"그러지요." 앤소니 신부는 대답했다. "퀸씨, 부디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잘아시겠지만 -"
서장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는 신부의 야윈 어깨는 힘없이 처져 있었다.
"실례지만" 엘러리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시체를 발견했습니까
?"
엘러리는 남은 사람들과 함께 집안의 서늘한 어두운 층계를 올라갔다.
"나요." 검시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벌써 2년째 마이클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지요. 스코트부인이 돌아가신 뒤로는 줄곧 늙은 두 홀아비
가 같이 사는 셈이지요. 안그런가, 마이클?"
두 사람은 한숨을 쉬었다.
"약 3주일전의 태풍이 휘몰아치던 날 밤이었어요 -심한 우뢰와 함께 비가
내렸는데 당신도 기억하고 있지요? 나는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자
정쯤이었어요- 자리에 들기전에 2층 복도에 있는 화장실에 가느라고 맥거
번의 방 앞을 지나갔는데, 문이 활짝 열린 채 전등이 켜져 있지 않겠어요.
그 사람은 문쪽을 향해 앉아 있더군요."
검시관은 두 어깨를 움츠렸다. "난 즉시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심
장을 맞고 말입니다. 피가 잠옷에..... 그래서 나는 곧 마이클을 깨웠습니
다. 아이리스도 우리의 소리를 듣고 달려왔지요."
모두들 층계 꼭대기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엘러리는 아이리스가 숨을 몰아
쉬고 스코트가 헐떡이는 소리를 들었다.
"죽은 뒤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습니까?" 엘러리는 검시관이 손가락질한
닫혀진 문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바로 몇분전이었던가 봅니다. 아직 몸이 따뜻했으니까요. 즉사했던 거지
요."
"내가 예상하는 바로는 태풍 ㎖문에 아무도 총소리를 못 들었겠지요 -상처
는 한군데뿐이었을거구요."
도드의사는 혼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 이방이군요."
엘러리는 프링글한테서 받은 열쇠를 구멍에 찔러 한바퀴 돌렸다. 그리고
몸으로 밀어 문을 열었다. 아무도 말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다.
방에는 햇빛이 가득했다. 갓난아기처럼 폭력같은 것과는 관계가 없어 보였
다. 방은 무척 컸는데 엘러리가 묵고 있는 방과 똑같았다. 가구도 엘러리의
방에 있는 것과 아주 똑같았다. 침대도 같았고, 두개의 창문 중간인 똑같은
장소에 놓여있었다. 방 한가운데 있는 테이블과 골풀로 엮은 등받이가 달린
등나무의자도 엘러리의 방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해도 좋을 정
도였다. 양탄자, 책상, 다리가 높은 옷장.....그런데 옷장의 위치만은 달랐
다.
"방마다 똑같이 꾸며져 있습니까?" 엘러리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스코트는 굵직한 눈썹을 들엇다.
"그렇습니다. 내가 영업을 시작하려고 쓰러져가는 집을 하숙집으로 개조했
을때 오바니의 어느 파산한 가게에서 잔뜩 사들였지요, 똑같은 물건만 말
이죠. 그래서 방마다 꾸밈새가 같답니다. 왜 그런것을 물으시죠?"
"뭐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흥미를 느꼈을 뿐입니다."
엘러리는 입구 문 옆에 기대서서 담배를 꺼내면서, 그동안 침착하지 못한
잿빛 눈으로 현장을 살피고 있었다.
격투한 흔적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문 바로 앞에 탁자와 등의자가 있고
의자는 문을 향해 놓여 있었다. 문과 의자를 연결하는 직선상의 방 저쪽 편
에는 다리 높은 구식 옷장이 벽에 붙여 놓여 있었다. 엘러리의 눈은 또 가
늘어졌다. 그리고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저 옷장 말인데요, 내 방의 것은 두개의 창문 중간에 있지요."
뒤에서 아이리스의 부드러운 숨결이 들렸다.
"하지만......아버지, 옷장은 저기 없었어요- 맥거번씨가 살아있었을 때는
요."
"그거 이상한데." 스코트가 깜짝 놀라며 중얼거렸다.
"사건이 있던날 밤에도 저 옷장은 지금의 장소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네, 그랬어요." 하고 아이리스는 의아한 듯이 대답했다.
"틀림없이 저기에 있었습니다. 나도 지금 생각나는군요." 검시관도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엘러리는 귀찮은 듯이 말하고는 문에서 몸을 떼었다. "무슨
단서가 되겠지요."
엘러리는 옷장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몸을 굽히고 옷장을 잡아당기고 하
더니 결국 벽에서 옷장을 끌어내고 말았다. 그리고 옷장 뒤에 무릎을 꿇고
벽을 한치 한치 열심히 점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벽 널판지에서 약 1야드쯤 위쪽의 벽면에 괴상하게 움푹 파인 곳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지름이 4분의 1인치도 못되는 거의 원형으로 1인치의 16분
의 1정도쯤 벽이 파여있었다. 벽가루가 떨어져 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이 보
였다.
엘러리가 일어섰을 때쯤 실망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으로
되돌아왔다.
"별거아니군요. 살인이 있던 날부터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건 확실하지요?
"
"그것은 내가 보증합니다." 스코트가 말했다.
"흠, 아직도 맥거번의 소지품들이 여기 있는 것 같군요. 살인이 있던 날
밤, 프링글서장님께서는 이 방을 철저히 수사하셨겠지요, 도드씨?"
"물론이지요."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스코트가 신음하듯이 말했다.
"전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은 틀림없죠?"
"아무렴요. 서장이 조사하고 있는 동안 우리 모두 여기 있었는걸요, 퀸씨.
"
엘러리는 미소를 짓고 묘하게 열심히 방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트집을 잡으려고 그러는 건 아닙니다, 스코트씨. 그럼, 나는 이만 내방으
로 물러가서 이 성가신 사건을 좀 생각해보기로 할까요. 이 열쇠는 내가
맡아두겠습니다, 도드씨."
"좋습니다, 뭐든지 부탁할 일이 있으면 -"
"우선 당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을때 어디로 연락하면 될까요
?"
"메인가에 있는 내 장의사로 연락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엘러리는 어딘가 멍하니 피곤한 듯이 웃고는 문을 잠그고 조용히 복도를
걸어갔다.
방은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다. 엘러리는 깍지낀 손을 두통이 나는 머리 밑
에 받치고 침대에 누워서 생각하고 있었다. 집안은 조용했다. 창밖에서는
멧새가 지저귀고 꿀벌이 붕붕거리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을 통해서 향기로운 산들바람이 언덕에서 흘러왔다.
엘러리는 한번 복도 층계참에서 아이리스의 가벼운 발소리가 나는 것을 들
었다. 그리고 또 아래층에서 마이클 스코트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엘러리는 담배를 피우면서 20분쯤 누워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침대
에서 벌떡 일어나 문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문을 빠끔히 열고 귀를 기울
였다.......인적은 아무데도 없었다. 엘러리는 조용히 복도로 나갔다. 잠궈
놓은 살인이 있었던 방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문을 잠궜다.
"만일 이 부조리한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
엘러리는 중얼거리면서 발을 멈추었다가 다시 종종걸음으로 맥거번이 죽었
을때 앉아 있었던 등의자로 다가갔다.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골풀로
엮은 의자등받이를 세세히 점검했다. 그러나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미간을 모으고 일어서서 엘러리는 주위를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방의 이
구석에서 저 구석으로 서성거렸다. 늙은 꼽추처럼 등을 웅크리고 아랫입술
을 쑥 내밀고는 눈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가구 밑에 기어들어가기 위해 배
를 바닥에 깔고 엎드리기까지 했다. 적과 아군 진지 사이의 무인 지대에 잠
입한 공병처럼 침대밑을 한바퀴 돌았다. 방바닥 조사는 완전히 끝났으나 아
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엘러리는 얼굴을 찌푸리고 양복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우울한 얼굴로 휴지통 속의 물건들을 도로 집어넣고 있을때, 갑자기 엘러
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됐어!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리고 다시 문을 열고 방을 나가 조심스럽게 재빨리 주위를 살피고 귀를
기울이면서 복도를 걸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천연스럽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조용 다른 방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엘러리는 네 번 ㎖로 조사한 방의 등의자에서 추론의 결과 발견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찾아냈다. 그 방은 미리부터 엘러리가 어렴풋하게나마 그 사
람의 방이리라 짐작했던 인물의 방이었다.
엘러리 퀸은 조심스럽게 방을 본래대로 해놓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세
수를 하고 타이를 고쳐 맨 다음 다시 한번 양복에 솔질을 하고서 꿈꾸는 듯
한 미소를 지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포치에서는 갠디부인과 마이클 스코트가 둘이서 심심풀이로 휘스트 놀이를
하고 있었다. 엘러리는 혼자 입속웃음을 지으며 집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
리고 아이리스가 커다란 동굴같은 부엌에서 매워 보였지만 맛이 좋을 것 같
은 무엇인가를 큼직한 난로위에서 젓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흰 앞
치마를 두르고 뜨거운 열기로 볼을 빨갛게 하고 있었는데 그 태도가 전체적
으로 무척 즐거워보였다.
"어머나, 퀸씨 아니세요. 무슨 볼일이라도......"
아이리스는 손에 쥐고 있던 국자를 내려놓고, 진지하고 애원하는 듯한 눈
으로 엘러리를 돌아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가씨는 그렇게까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나요?"
엘러리는 아이리스의 아름다움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로저는 행복한 친구군요. 아이리스양 -나는 이래뵈도 아버지다운 마음씨
를 가진 사람이랍니다. 그래서 아가씨가 그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프군요 -하지만 아무튼 일은 꽤 진척이 되었소. 정말
입니다. 그 젊은 미남자도 오늘 아침에 비한다면 앞날이 훨씬 밝아졌소.
아무렴, 큰 진보를 이루었지요."
"그럼, 그럼 - 그는 -오, 퀸씨!"
엘러리는 길이 들어 반들반들한 부엌의자에 앉아 탁자위에 있는 사기접시
속에서 설탕을 뿌린 쿠키를 한개 먹은 다음 눈을 크게 뜨고 싱긋 웃고 또
한개 집었다.
"아가씨가 만든건가요? 아주 맛있는데. 진짜 클크레치아인데! 아니면 페넬
로페인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말이오....그래요, 난 아가씨에게 그만큼
감탄하고 있소. 만일 이것이 아가씨 솜씨의 견본이라고 한다면 -"
"이건 쿠키인걸요."
아이리스는 갑자기 앞으로 뛰어나오더니 얼떨떨해있는 엘러리의 손을 덥썩
잡아 가슴에 대었다.
"퀸씨, 만일 퀸씨가 할 수 있다면 - 전 모르고 있었어요. 제가 이렇게 로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지금까지 -지금까지...감옥에 들어갈때까지..."
아이리스는 몸부림쳤다. "전 뭐든지 하겠어요 - 무슨 일이든지-"
엘러리는 눈을 깜박깜박거렸다. 그리고 칼라를 늦추며 애써 무관심을 가장
하고 조용히 아이리스의 손을 놓았다.
"그렇군요. 아가씨의 기분은 잘 알아요. 하지만 나한테는 두번다시 이러지
말아요. 어쩐지 하느님이라도 된 것같아 식은땀이 나는데요."
엘러리는 이마를 닦았다. "이야기할 게 있는데 아이리스양, 잘 들어요. 아
가씨가 할 수 있는 일이 꼭 한가지 있소."
아이리스는 얼굴을 빛내며 엘러리를 쳐다보았다. 엘러리는 일어서서 먼지
하나 없는 부엌 마루를 걷기 시작했다.
"새뮤얼 도드씨는 직무에 대단히 충실하다고 들었는데, 틀림없겠지요?"
아이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뮤얼 도드씨 말인가요? 어머나, 어째서 그런 말씀을 -그분은 자기 "리
에 무척 성실해요. 당신이 알고 싶은게 그거라면 -"
"나도 그런 줄 알고 있었소. 그래서 일이 번거로와지겠는데." 엘러리는 씁
쓰레 하게 웃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현실은 어쩔 수가 없소.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말입
니다, 이 추악한 지상에 지금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분은 한번도 내려온 적
이 없었을 만큼 아름다운 여신인 아가씨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
오늘 밤 그 새뮤얼 도드선생이 잠시동안 그 임무를 잊어버리도록 유혹해
주었으면 하는데, 어떨까요?"
아이리스의 까만 눈동자에 분노의 빛이 언뜻 스쳤다.
"어머나, 퀸씨."
"글쎄, 오해하지 말고....아가씨에게 꼭 알맞은 일이예요. 그렇다고 -뭐-
대담한 짓을 해달라는 것은 아니오. 과자를 하나 더 먹겠습니다."
엘러리는 두개를 더 집었다. "오늘 밤에 그 사람과 영화구경을 갈 수 없을
까요? 도드씨가 집에 있으면 일이 복잡해지기때문에 그럽니다. 아무튼 오
늘 저녁에 집에서 내몰지 않으면 내 일을 방해할지도 몰라요."
"새뮤얼 도드씨라면 제가 하자는 대로 다 해줘요."
여자는 지극히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발갛게 물들었던 볼의 붉은 기도
사라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전 무엇때문에 그런 짓을 하라고 하는지 이
해가 안가요."
"그것은 말이오." 엘러리는 과자를 한입 가득 물고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내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지요. 난 오늘 저녁에 도드씨의 권위를 짓밟으
려는 겁니다. 세상없어도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좀 까다로운 정식 서류
가 없으면 그 일은 분명히 불법행위지요, 범죄행위까지는 안되더라도 말입
니다. 도드씨가 협력만 해준다면 괜찮겠지만, 그에 대한 내 판단이 맞는다
면 그는 협력해 줄 것 같지가 않거든요. 하지만 모르고 있다면 그 사람이
나 나나 이른바 양심에 거리낄 게 없을테니까요."
아이리스는 엘러리를 냉정하게 저울질하고 있었다. 엘러리는 똑바로 쳐다
보는 아이리스의 눈길에 좀 당황했다.
"그렇게 하면 로저를 위해 도움이 될까요?"
"물론이지요." 엘러리는 열정을 담아 말했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를만
큼."
"그렇다면 하겠어요."
이렇게 말하더니 아이리스는 갑자기 눈을 내리깔고 앞치마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부엌에서 나가 주시겠어요, 퀸씨? 지금부터 저녁준비를 해야겠어요
. 그리고 퀸씨는 -"
아이리스는 난로쪽으로 가서 국자를 집어들었다. "정말 멋진 분이라고 생
각해요."
엘러리 퀸은 황홀해하면서 얼굴을 붉히고 부지런히 물러갔다.
엘러리가 망으로 된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갠디부인은 이제 없었다. 그리
고 스코트가 앤소니 신부와 포치에 앉아있었다.
"마침 잘됐군. 두분이 같이 계시는군요." 엘러리는 유쾌한 듯이 말했다.
"몸이 편찮으신 갠디부인은 어디 가셨나요? 그 휠체어로 어떻게 계단을 올
라가지요?"
"계단은 올라가지 않습니다. 부인의 방은 아래층에 있으니까요." 하고 스
코트가 대답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요, 퀸씨?" 스코트의 눈은 초췌해져
있었다.
앤소니 신부는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엘러리를 찬찬히 보고 있었다. 엘러
리의 얼굴이 갑자기 긴장되었다. 흔들의자에 앉아 그는 의자를 두사람쪽으
로 바싹 끌어당겼다.
"신부님" 엘러리가 조용히 말했다. "무엇인가 제게 은밀히 암시를 해주고
있습니다만 신부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법률보다 더 숭고한 법칙을 섬기고
계십니다 -성심성의껏 봉사하고 계시지요."
늙은 신부는 잠시동안 엘러리를 찬찬히 보고 있었다. "나는 법률은 잘 모
릅니다, 퀸씨. 나는 두분의 주님이신 - 그리스도와, 주님께서 그로 인해
목숨을 내던지신 분들을 섬기고 있지요."
엘러리는 말없이 이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스코트씨, 당신은 아까 벨로의 전투에 참가했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죽
음같은 건 조금도 두렵지 않겠군요?"
튼튼하게 생긴 사나이의 매서운 눈이 엘러리의 눈을 파고들었다.
"들어보십시오, 퀸씨. 나는 제일 친한 친구가 내 눈앞에서 두동강이 나는
것을 보았소. 이 손으로 전우의 창자까지 쓸어담지 않으면 안되었지요. 나
는 내 앞에 지옥을 다발로 묶어 가져온다고 해도 무섭지 않아요. 내가 직
접 지옥에 다녀온 사람이니까요."
"대단히 좋습니다." 엘러리는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 대단히 좋습니다.
아라미스와 포르투스, 그리고 -건방진 말씀입니다만 -제가 달타냥이라고
해두지요. 좀 억지같은 느낌이 있습니다만, 뭐 어떻습니까. 신부님, 스코
트씨!"
신부와 아이리스의 아버지는 엘러리의 입술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 밤에 무덤파는 일을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성 발푸르기스 밤의 축제 (독일의 전설로, 5월 1일 전날 밤 마녀들이 하르
츠산에 모여서 마왕과 술잔치를 벌인다)로부터 여러 달이나 지났지만,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밤 마녀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마녀들은
무시무시한 산허리의 어두운 달빛 아래서 미친 듯이 춤을 추며 말없이 늘
어선 묘비위를 스치는 바람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엘러리 퀸은 그날 밤 자신이 그 세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상
당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묘지는 코시카 변두리에 있었으며 철책이 둘
러쳐져 있고 울창한 나무들로 에워싸여 있었다. 얼음같이 찬 바람이 세 사
람의 머리위에 죽음을 휘몰아붙이고 있었다. 떼지어 있는 묘비들은 산허리
의 지표에서 마치 바람에 바래 허옇게 된 송장의 뼈처럼 어렴풋이 반짝이
고 있었다. 성난 듯한 먹구름이 달을 반쯤 가리고 있었으며, 나무들은 쉴
새없이 흐느껴 울었다. 그렇다. 마녀들이 춤추는 광경을 상상하기에는 아
무런 노력도 필요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묵묵히 본능적으로 바싹 붙어서 걸어가고 있었다. 망령을 조금
도 개의치 않는 앤소니 신부는 앞장서 달리는 큰 배처럼 심상치 않은 공기
를 가르면서 꿋꿋하게 가슴을 펴고 신부옷자락을 휘날리며 걸어가고 있었
다. 그 표정은 어둡고 엄격했지만 침착함 바로 그것이었다. 엘러리와 마이
클 스코트는 삽, 곡괭이, 밧줄, 그리고 커다란 보퉁이 하나를 들고 무거워
허덕이면서 그 뒤를 따랐다. 꿈틀거리고 속삭이며, 그림자에 에워싸인 컴
컴한 산중턱에는 이 세사람을 빼고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맥거번의 무덤은 묘지의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쓸쓸한 언
덕의 막바지라 독수리가 서식할 것 같은 곳이었다. 무덤의 봉분은 아직도
새 흙이었다. 그곳에 누워있는 시체의 표시로 가느다란 막대기가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입을 다문채 얼굴을 긴장시키고 두 사나이는 곡괭
이질을 시작했으며 앤소니 신부는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달은 구름사이
로 성난듯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단단한 흙이 물러지자 두 사람은 곡괭이를 버리고 삽으로 흙을 팠다. 두
사람 다 옷 위에 헌 작업복을 걸치고 있었다.
"나도 이제야 겨우 알겠습니다." 엘러리는 무덤 옆에 수북이 쌓인 흙더미
옆에서 잠시 일을 쉬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체도둑들의 심정을 말입니다. 신부님, 신부님께서 옆에 계시니까 얼마
나 든든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되지못한 상상을 잘 하는 편이라서요."
"엘러리씨,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소." 노신부는 좀 언짢은 듯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순한 시체니까요."
엘러리는 몸을 떨었다. 스코트가 투덜거렸다. "빨리빨리 합시다."
그리하여 마침내 두 사람의 삽은 덜커덕 하는 소리를 내며 목재에 부딪혔
다.
어떻게 해서 해냈는지 엘러리는 생각도 잘 나지 않았다. 도저히 이야기로
다 쓸 수 없는 작업이었다. 작업이 아직 끝나기 훨씬 전부터 엘러리는 땀
으로 범벅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고드름처럼 살갗을 찔렀다. 악몽 속의 망
령처럼 온 몸이 산산히 흩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코트가 혼자서
묵묵히 대작업을 계속하고 있는동안 엘러리는 그 옆에서 숨을 헐떡거렸고
앤소니 신부는 무뚝뚝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깨닫고 보니 엘러리는
파헤친 무덤 옆에서 스코트와 마주 밧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길쭉하고
무거운 시커먼 덩어리같은 것이 구덩이 밑에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위태
위태하게 흔들리며 올라왔다. 마지막으로 쓴 안간힘으로 그것은 구덩이 옆
에 쿵하고 소리를 내며 내려졌는데, 엘러리는 너무나 무서워서 정신이 아
찔했다.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아 엘러리는 담배를 더듬었다.
"난 -아무튼 -한숨 돌려야겠군."
엘러리는 나직한 소리로 말하고 정신없이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기 시작했
다. 스코트는 태연하게 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단지 한 사람 앤소니 신부
만이 소나무목재로 된 관 옆으로 다가가서, 안전하게 관을 끌어당겨 위치
를 바로잡고 부드러운 손으로 천천히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엘러리는 넋 나간 사람처럼 이 노인을 지켜보고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서
담배를 집어던지고 입속으로 한마디 욕을 하고는 신부의 손에서 곡괭이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하여 힘껏 한번 치자 관뚜껑이 부서졌다.
스코트가 두툼한 입술을 꾹 다물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튼튼한 목장
갑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시체위에 몸을 굽혔다. 앤소니 신부는 뒤로 물
러나서 피곤한 눈을 감았다. 엘러리는 멀리 재스민가에서 일부러 가져온
커다란 보퉁이를 부지런히 풀어, <코시카 콜>신문의 편집장으로부터 몰래
빌어 온 다리가 달린 큼지막한 사진기를 꺼냈다. 그리고 뭔가 만지작거리
고 있었다.
"있습니까?" 엘러리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코트씨, 있어요?"
"있는데요, 퀸씨." 튼튼한 몸집의 사나이는 또렷하게 말했다.
"하나뿐입니다."
"뒤집어 봐 주세요." 잠시 뒤 엘러리는 또 말했다.
"있습니까?"
"있습니다." 하고 스코트가 대꾸했다.
"하나뿐입니까?"
"네"
"내가 있을 것 같다고 한 곳에 말입니까?"
"그렇소."
엘러리는 무엇인가 머리 위로 높다랗게 들어올려 한 손으로 쥐고, 흙투성
이 관속에 누워있는 물체에 사진기의 렌즈를 대더니 떨리는 손을 불끈 쥐
었다. 그러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도깨비불을 연상시키는 새파란 섬광이
연옥의 불길처럼 잠시 산등성이를 환하게 비추었다. 엘러리는 일손을 멈추
고 삽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마이클 스코트는 넓은 잔등을 굽히고 한결같이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앤
소니 신부는 다시 카메라를 싼 보퉁이위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늙은 얼굴
을 가리고 있었다.
"이야기하지요." 엘러리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것은 참으로 놀랄정도로 교묘한 사건이라 그 계략이 발각되었다는 것은
.....신부님, 역시 이 세상에 신은 있는 모양입니다. 맥거번 방의 옷장이
사건이 벌어졌다고 추정되는 시간에 늘 있던 장소에서 움직여졌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저는 범인 자신이 이것을 움직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었습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반드시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옷장을 한쪽으로 밀어 보았더니 과연 벽판자로부터 약 1야드위의
벽에 조그맣게 파인 곳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파인 곳과 그 앞에 놓인 옷
장은 두 가지 것을 연결하는 직선상에 있었습니다. 즉 맥거번이 총을 맞았
을 때 앉아 있었다고 생각되는 등의자와 범인이 방아쇠를 당겼을 때 서 있
었을 것이 틀림없는 문을 연결하는 직선입니다. 이건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닙니다. 그렇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저는 당장 그 파인 곳이 총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파인 곳이 얕은 점으로 보아 힘을 잃은 총알입니다. 그리고
또 범인이 서 있었고 피해자가 앉아 있었다고 한다면 -아무튼 총알은 심장
을 관통했으니까요 -의자에서 몇 야드 떨어진 뒤쪽 벽의 파인 곳이 범인
이 쏜 총알로 생긴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내가 발견한 곳 언저리에 흔적이
생길 것이고 탄도는 약간 아래로 향할 것이 분명합니다."
흙덩이가 소리를 내며 관위로 굴러떨어졌다.
"또 명백한 것은 " 엘러리는 삽을 쥐면서 이상한 어조로 말했다.
"만일 벽에 구멍을 만든 그 맥없는 총알이 맥거번의 몸을 관통했다고 한다
면 그 사람이 앉았던 등의자 등받이에도 구멍이 뚫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의자를 조사했습니다만 총알 자국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벽에 자국
을 낸 총알은 맥거번의 몸을 관통한 것이 아니라 빗나간 총알이엇다고 생
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폭풍이 치던 날 밤에 두 방의 총이
발사되어 한 방은 몸속에 남고 또 한방은 벽에 자국을 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방안을 샅샅이 세밀하게 조사하였다는 여러분들의 증언에도 불구하
고 제2탄이 발견되었다는 말은 전혀 없습니다. 제 자신도 방바닥을 조사했
습니다만, 헛일이었습니다. 제2탄이 그곳에 없다고 한다면 옷장을 움직여
벽의 구멍을 가렸을 때 범인이 가져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엘러리는 숨을 쉬고 어두운 얼굴로 덮여저 가는 무덤구덩이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 범인은 한개의 총알은 가져갔으나 중요한 쪽 -피해자의 몸
속에 남아 있던 총알은 그대로 놓아두었을까요? 이건 좀 이상한 일입니다.
동시에 또 뜻이 있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처음부터 두개의
총알따위는 없었고, 쏜 것은 단지 한방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산허리에서는 마녀가 춤을 추며 어둠속에서 떨고 있었다.
"저는 그래서" 엘러리는 피곤한 듯이 뒷말을 이었다.
"그 가정위에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단 한방밖에 발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면 그것은 맥거번을 죽인 총알로 그 친구의 심장을 뚫고 잔등을 빠져나가
의자 등받이까지 뚫고 방을 가로질러 그 흔즉이 발견된 벽에 부딪쳐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맥거번의 의자에는 총알
자국이 없었을까요? 그 이유는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 그 의자는 맥거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총알이 피해자의 몸 속을 관통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이미 어떤 일을 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옷장을
움직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밖의 일을 해서 안된다는 이유는 없지 않겠
습니까? 그래서 의자까지 바꿔치기했던 것입니다. 스코트씨, 댁의 방들에
는 모두 똑같은 물건들이 놓여 있더군요. 범인은 맥거번의 의자를 끌어다
가 자기방에 갖다놓고 자기 것과 맥거번의 의자를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저의 추리는 만일 등받이에 구멍이 뚫린 등의자를 -의자에 앉
아 있는 사람의 심장을 관통했을 경우에 생기리라고 가정되는 곳에 구멍이
뚫려있는 등의자를 발견할 수 있다면 옳다는 것이 입증되는 셈입니다. 그
런데 저는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 스코트씨, 댁의 어느 한 방에서 말입니
다."
파헤쳐졌던 흙은 다시 언덕 면과 같이 평평해지고 나머지는 봉분 흙이 약
간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앤소니 신부는 흐릿한 고뇌에 찬 눈으로 엘러리를
보고 있었다. 한순간 먹구름이 달을 가려 세 사람은 칠흙같은 어둠에 싸였
다.
"왜 -" 엘러리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범인은 사용한 총알을 숨기려 했을까요? 거기에는 단 한가지 이유밖에 없
습니다. 총알이 발견되어 조사당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총
알은 발견되어 조사를 당했습니다."
구름은 화난 듯이 흩어지고 또 다시 달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발견된 총알은 진짜가 아니었다는 말이 됩니다."
겨우 작업이 끝났다. 봉분은 달빛에 둥글고 검실검실하게 떠올라 있었다.
앤소니 신부는 넋나간 사람처럼 조그만 나무 막대기 묘표에 손을 ㉫어 봉
분에 찔러 세웠다. 마이클 스코트는 허리를 펴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진짜가 아니라고 하면?" 스코트가 목쉰 소리로 말했다.
"진짜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발견된 그 총알이 해낸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 두말할 것도 없이 로저 바웬을 살인범으로 만들어 버린 거지요. 그 총알
은 바웬의 39구경 자동권총의 것이라고 실증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
이 진짜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바웬은 누군가에 의하여 억울한 누명을 뒤
집어 쓴 것입니다. 그는 바웬의 방의 경계가 엄중해서 그의 자동권총을 훔
쳐내지는 못했지만, 전에 바웬이 사냥터에서 자동권총을 쏘았을 때 몰래
총알을 주워 두었다가 -말하자면 애매한 총알을 맥거번 살해에 실제로 사
용된 총알인 것처럼 꾸몄던 것입니다."
엘러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범인의 총에서 발포된 총알에는 물론 바웬의 총알과는 다른 탄흔이 있으
므로 거기서 꼬리가 잡히게 됩니다. 범인이 자기가 쏜 총알을 그대로 내버
려 두었다가 발견되는 날에는 감식 결과 바웬의 38구경에서 발사된 것이
아님이 밝혀질 뿐만 아니라, 그 트릭이 당장에 드러나게 되고 맙니다. 그
래서 범인은 맥거번을 죽인 그 총알을 가져가고 벽의 구멍을 숨긴 다음 등
의자를 바꿔치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스코트가 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물었다. "그 멍청한 녀석은
어째서 의자를 그냥 내버려두고, 벽의 구멍이 눈에 띄도록 해놓지 않았을
까요?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더 간단했을텐데. 그리고 총알이 몸을 관통
했다는 사실을 구태여 숨길 필요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
"당연한 의문입니다." 엘러리는 조용히 말했다.
"정말 범인은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틀림
없이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일겁니다. 범인이 사건을 저질렀을때 주워
두었던 바웬의 헌 총알을 갖고 있지 않았던 거지요. 범인이 살인을 했을
때는 그것을 다른 곳에 두고 있어서 갑자기 써먹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총알이 맥거번의 몸을 보기 좋게 관통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셈이군요." 하고 스코트는 소리치며 굵은 팔을 휘둘러서, 그 그림
자가 맥거번의 보기 흉한 무덤위를 가로질러 이리뛰고 저리 뛰었다.
"그러니까 녀석은 나중에 그 총알과 바웬의 총알을 바꿔치기할 수 있으리
라고 생각한 모양이군요. 죽인 뒤에, 경찰의 조사가 끝난 뒤에...."
"그렇습니다." 엘러리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
그리고 말을 중단했다. 투명하리만큼 하얀 옷에 몸을 감싼 유령이 컴컴한
땅위에 닿을락말락 떠오르더니 세 사람쪽을 향해 산허리를 줄달음쳐 달려
왔다. 앤소니 신부가 벌떡 일어섰다. 이 세상 사람같이 않을 만큼 키가 커
보였다. 엘러리는 삽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마이클 스코트가 거칠
게 소리쳤다.
"아이리스, 웬일이냐 -"
아이리스는 미친듯이 엘러리에게로 달려와 숨이 턱에 찬 소리로 말했다.
"퀸씨! 다들 -다들 이리로 오고 있어요. 봤어요 -누군가가 퀸씨와 아버지
와 앤소니 신부님이 삽을 들고 이 길을 오는 걸 봤어요....프링글 서장님
이 새뮤얼 도드씨를 데리러 왔더군요......그래서 전 뛰어서 -"
"고맙소, 아이리스양." 엘러리는 부드럽게 말했다. "아가씨는 여러가지 미
덕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는 용기도 포함되어 있군요."
그러나 엘러리는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도망칩시다." 마이클 스코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아무래도 -"
"이것을 범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엘러리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축복받은 죽은자와 친구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 아니, 나는 기다리겠
습니다."
두개의 그림자가 나타나 인형이 춤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점점 커져서 미친 사람처럼 언덕을 기어올라왔다. 첫번째 그림자는
뚱뚱하였으며 손에서 무엇인가가 둔중하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 뒤에서
몸집이 작고 살결이 흰 사나이가 기를 쓰며 오고 있었다.
"마이클!" 프링글 서장이 권총을 휘두르면서 버럭 소리질렀다.
"신부님, 그리고 퀸씨,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다들 정신이 돌았소? 무
덤을 파헤치다니."
"다행이군." 검시관은 헐떡이면서 말했다. "늦지 않아서. 아직 파지는 않
았군 -" 검시관은 봉분과 도구들을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바라보았다.
"퀸씨, 당신은 이런 짓을 하는 것이 법률위반이라는 것쯤은 아실텐데요-"
"프링글 서장." 엘러리는 앞으로 걸어나가 잿빛 눈으로 검시관을 빤히 쳐
다 보면서 안됐다는 듯이 말했다.
"서장님은 이 사람을 계획적인 맥거번 살해 및 로저 바웬에게 누명을 씌운
죄목으로 체포하셔야 합니다."
포치는 보라색 그림자로 감싸여 있었다. 달은 이미 오래 전에 지고 코시카
마을은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단지 아이리스의 흰 가운이 아련하게 빛
나고 마이클 스코트가 뻐끔거리는 파이프가 빨갛게 타올랐다 꺼졌다. 하고
있었다.
"새뮤얼 도드가 -" 마이클은 신음하듯이 말했다. "내 딴에는 새뮤얼 도드
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
"오,신부님!" 아이리스는 신음하면서 곁에 있는 흔들의자 위의 앤소니 신
부손을 더듬었다.
"도드 외에는 있을수가 없었지요." 엘러리는 피곤한 듯이 말했다. 발은 난
간위에 얹혀 있었다.
"스코트씨, 당신이 범인은 나중에 총알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설
마하니 총알이 보기좋게 맥거번의 몸을 관통할 줄을 몰랐을 거라고 말씀하
신 건 정말 정곡을 찌른 의견이었습니다. 범인이 발포전에 예상했던 대로
총알이 몸 속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면, 그 몸속의 총알을 바꿔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도드 외에는 없습니다. 살인 사건에 따르기 마
련인 검시를 하는 것은 검시관이기 때문입니다. 또 총알이 맥거번의 몸을
관통했다는 것을 숨길 수 있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게 누구겠습니까? 매
장을 위해 시체를 처리하는 장의사 도드말고는 없습니다. 총알이 맥거번의
몸속에 남아 있었다고 증언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검시를 한 검시관 도
드뿐이었습니다. 만일 그 사람에게 거리끼는 점이 없었다면 어째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바웬의 총알을 증거품으로 갖고 나온 것이 누구였습니
까? 그것을 피해자이 심장에서 꺼냈다고 주장한 도드뿐이었습니다."
아이리스는 조그맣게 흐느껴 울고 있었다.
"증거가 있냐구요? 얼마든지 있습니다. 도드는 이 집에서 사니까 그날 밤
맥거번의 방에 접근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요. 시체를 발견한 것도
도드였으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얼마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엇
지요. 도드는 검시관으로서 사망시간을 추정하였습니다. 실제로 살인이 행
해졌던 시간보다 조금 늦추어서, 옷장을 움직이고 의자를 바꿔치기하는데
소요된 시간을 속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도드는 로저 바웬과 함께 가끔
토끼 사냥갔던 일을 직접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웬의 헌 총알, 바
웬이 쏘아 맞히지 못한 총알을 줍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도드는 검시
관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지식이 있었지요. 탄도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고
탄흔을 조사하기 위한 현미경도 갖추고 있었습니다.....그리고 나는 증거
를 발견했습니다. 등받이에 총알 자국이 난 등의자를 발견한 곳은 도드의
방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맥거번의 시체를 발굴해서 흉부
에 난 하나의 탄환 자국과 잔등에 그것이 빠져나간 구멍을 발견할 수 있다
면 도드는 정식보고서에 허위신고를 한 것이므로 저의 추리가 옳았다는 것
이 입증된다는 것을 제가 알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체를 발굴했는데,
과연 잔등에는 총알구멍이 있었습니다. 저의 증거사진은 도드를 전기의자
로 보내게 되겠지요."
"엘러리씨, 당신이 신이 있다고 말한 것은?"
앤소니 신부가 어둠속에서 조용히 물었다. 엘러리는 한숨을 쉬었다.
"전 도드가 쏜 총알이 맥거번의 몸을 관통했다는 사실 자체가 어쩐지 신이
있기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하고 싶은 겁니다. 만일 총알이 도드가 예상했던
대로 맥거번의 심장에 머물러 있었다면 벽에는 구멍도 나지 않았을 것이고
의자에도 물론 구멍이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체를 발굴해야 할
이유도 없었겠지요. 도드는 검시 후 바웬의 총알을 꺼내 놓고 맥거번의 몸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겠지요. 실제로 그렇게 했잖습니까. 그리고
바웬은 더할 나위없이 불행한 청년이 되었겠지요."
"하지만 도드씨가 그런 짓을 하다니...." 아이리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
리고 소리쳤다.
"전 어렸을 때부터 무척 오랫동안 그 분을 알고 있어요. 늘 조용하고 다정
하고 그야말로 -정말이지...."
엘러리는 일어섰다. 캄캄한 포치에 구두가 소리를 냈다. 엘러리는 희끄무
레하게 떠오른 아이리스의 모습 위로 몸을 굽히고 두 손으로 그 턱을 받쳐
들듯이 해서 뭐라 말할 수 없이 기묘한 사모의 정을 담아 전혀 보이지 않
는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아가씨같이 아름다운 분은 참으로 위험한 하늘의 선물입니다. 그 온후한
도드는 한 사람의 경쟁상대를 내쫓기 위해 맥거번을 죽이고 또 하나의 경
쟁자를 없애기 위해 바웬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려 했던 겁니다."
"경쟁상대라구요?" 아이리스는 숨을 삼켰다.
"경쟁상대라고? 괘씸한 녀석같으니." 스코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엘러리씨, 당신 눈은 -" 앤소니 신부가 속삭였다. "아주 훌륭합니다."
"희망은 영원히 통하는 수도 있고 또 죽음을 초래하는 수도 있습니다." 엘
러리는 조용히 말햇다.
"새뮤얼 도드는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
<세 명의 미망인 ;The Three Widows>
보통의 사람들에게라면, 살인사건은 불유쾌한 일이다. 하지만 엘러리는
그런 문제들을 즐기는 미식가였으며, 몇몇 사건의 경우에는 혀끝을
감도는 풍미에 사로잡혀있었다고 스스로 증언할 정도였다. 이런 위험한
미식들 중에서도 엘러리는 <세 명의 미망인> 사건을 높이 평가했다.
그 미망인들 중 두 사람은 자매였다. 페넬로페는 돈에는 관심이 없었고,
라이라는 돈이 전부였지만, 결과적으로 두사람은 각기 많은 돈을 필요로
하였다. 두사람다 젊은 나이에 낭비벽이 심했던 남편을 무덤에 묻었으며,
그후에 그들의 아버지의 집인 머레이 힐 맨션으로 돌아왔다. 모든 사람들
이 존경해마지않는 늙은 테오도르 후드씨는 딸들에게 매우 너그러웠으며
항상 응석을 받아주었다. 페넬로페와 라이라가 그들이 처녀시절에 사용
하던 침대를 다시 차지하게된지 얼마 안되어, 테오도르 후드씨는 두번째
아내를 데려왔는데, 그녀는 강력한 힘을 가진 영국국교회파처럼 위엄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 자매들은 놀랍게도 의붓어머니의 엄격함에 대항
하는 전투를 벌였고, 늙은 테오도르는 그 십자포화 속에 사로잡혀서 오로지
평화만을 갈구하였다. 마침내 그는 집안일들을 미망인들에게 남겨놓고
떠남으로써 평화를 발견했다.
그들의 아버지가 죽은지 그리 오래지않은 어느날 저녁, 뚱뚱한 페넬로페와
홀쭉한 라이라는 하인을 통해서 응접실로 오라는 소환을 받았다. 그들은
그곳에서 가족변호사인 스트로크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스트로크씨의 평소억양은 판사의 입술로부터 나온 것같았는데, 오늘밤
그가 "자, 숙녀분들, 앉아주시겠습니까?"라고 발음할 때 그의 억양은 너무나
불길해서, 그 범죄가 명백한 것으로 느껴지게 했다. 그 숙녀들은 한번 힐끗
보더니 눈길을 내리깔았다.
몇분 후, 빅토리아식의 벽을 따라서 큰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사라
후드가 후드가족의 주치의인 닥터 베네딕트 의 팔을 잡고 들어왔다.
후드 부인은 경멸어린 눈초리로 그녀의 의붓딸들을 훑어보다가 말했다.
"닥터 베네딕트와 스트로크씨가 먼저 말씀을 하시면, 그 다음에 내가 말하
겠다."
"지난 주", 닥터 베네딕트가 말을 꺼냈다. "당신들의 의붓어머니꼐서 제
사무실에 정기검진차 오셨습니다. 저는 정규적인 검사를 해드렸습니다.
그분의 연세를 감안하면, 정말로 보기드문 건강상태를 유지하고 계셨지요.
하지만 그 다음날, 그분은 8년만에 처음으로 아파서 오셨습니다. 저는
그때 그분이 어떤 종류의 장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
다만 후드 부인은 좀 다른 진단을 하게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공상적인
것이 아닐까 고려했습니다만, 하여튼 그분께선 제가 어떤 테스트를 해봐야
한다고 주장하셨고,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인이 옳으셨습니다.
그분은 중독되셨었습니다."
페넬로페의 통통한 볼이 천천히 핑크색으로 물들었고, 라이라의 홀쭉한
뺨은 천천히 창백해졌다.
"저는 확신합니다.", 닥터 베네딕트는 그 자매들 사이로 시선을 두면서
말했다. " 따라서 두분께선 왜 제가 두분께 경고를 해야만 하는지 왜
지금까지 계속해서 매일매일 당신들의 의붓어머니를 검진하는지 이해
하셨을겁니다."
"스트로크 씨", 늙은 후드 부인이 웃으며 불렀다.
"당신들 부친의 유언장에 의하면," 스트로크 씨가 갑자기 말했다.
"두 분은 각각 부친재산의 이자로부터 작은 양을 받게 되어 있고,
그 이자의 대부분은 후드부인이 살아있는 동안은 그분께 가게
되어있습니다. 후드 부인의 별세시에는 두 분께서 똑같이 2백만 달러
를 상속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후드 부인이 돌아가실 경우 이득을
얻는 사람은 두분밖에 없다는 얘기지요. 저는 이 사실을 후드 부인과
닥터 베네딕트로부터 들었습니다. 당신들이 살인기도 실패라는
행운을 경고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저는 앞으로의 제 인생을 범인
을 법적으로 최대한 처벌하는 것에 전념할 것입니다. 사실, 즉시 경
찰에 전화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 제 충고였지요."
"당장 경찰에 전화를 해요!", 페넬로페가 울부짖었다.
라이라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당장 전화를 걸 수 있어, 페니." 후드 부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너희들은 둘다 매우 교활하기
때문에 어떤 일도 결정되지는 않을거야. 나를 가장 강력하게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너희둘을 집밖으로 내쫓는 것이겠지만,
불행하게도, 너희 아버지의 유언이 그것을 막고 있기울일거다." 후드 부인은
여전히 胄?참을성이 없어지는걸 이해하고
있다. 너희는 사치스럽게 사는 취향을 갖고 있으니, 내가 사는
검소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 너희들은 둘 다 결혼하고
싶어하고, 아마 돈을 가지고서라면 너희는 남편들을 살 수
있을거다." 그 노부인은 몸을 약간 앞으로 숙였다. "하지만
너희들에게 나쁜 소식이 있구나. 내 어머니께선 아흔아홉에
돌아가셨고, 내 아버지께서는 103 년을 사셨지. 닥터 베네딕
트가 그러는데, 난 앞으로 삼십년은 더 살 수 있다는구나. 따라서
나도 그렇게 살기 위한 모든 관심을 기울일거다." 후드 부인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면서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사실, 난 확신
할 수 있는 모종의 예방조치를 취해놓았다." 말을 마치자 후드
부인은 가버렸다.
정확하게 일주일 후, 엘러리는 후드 부인의 거대한 마호가니 침대
옆에서, 닥터 베네딕트와 스트레이크씨의 이글거리는 눈빛 아래
앉아있었다.
후드 부인은 다시 중독되었으나 다행스럽게도 닥터 베네딕트가
제때에 막을 수 있었다.
엘러리는 마치 석고처럼 보이는 노부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후드 부인, 이런 예방조치들은.---"
"내가 말하지만," 노부인이 속삭였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여전히," 엘러리가 활기차게 응답했다. "독살기도는 행해졌습니다.
따라서 검토해보지요. 부인의 침실창문에는 빗장이 질러져 있고,
문에는 새 자물쇠가 설치되었고, 하나뿐인 열쇠는 항상 부인 스스로
가지고 다니십니다. 부인께선 스스로 음식을 사셨고, 이 방에서
스스로 요리를 하셨고, 이 방에서 혼자 드셨습니다. 명백하게, 독은
부인의 음식 속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더나아가서, 부인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새 식기들을 사셨고 그것들을 이방에 보관했으며, 그 식
기들을 다룬 사람은 부인 혼자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독은
부인의 식사안에 들어갔거나, 식기에 묻어 있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
다면, 독은 어떻게 주입되었을까요?"
"바로 그게 문젭니다." 닥터 베네딕트가 소리쳤다.
"이 문제는, 퀸씨.", 스트레이크씨가 말했다. "제 생각에는-닥터 베네딕트도
동의했지만- 경찰보다는 당신의 방식이 적합한 종류의 문제인것 같습니다."
"제 방식은 항상 간단합니다." 엘러리가 대답했다. "음, 제가 부인께 많은
질문을 해야할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닥터?"
닥터 베네딕트는 노부인의 맥박을 재본 뒤 끄덕였다. 엘러리는 시작했다.
노부인은 속삭이듯 말했지만, 아주 명확하게 대답했다. 부인은 자신의 공성
기간을 위해 새 칫솔과 치약을 샀다. 부인의 이빨은 아직 자신의 것이었다.
후드 부인은 치료받는 것을 싫어했기때문에 약이나 어떤 종류의 완화제도
복용하지 않았다. 부인은 또한 물 이외의 음료는 마시지 않았다. 담배도
피우지 않았으며, 단것을 먹지도, 껌을 씹지도, 화장품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이런 질문들이 계속되었다. 엘러리는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물었으며, 더이상을 생각해내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마침내, 엘러리는 후드 부인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감사를 표하면서
일어나 닥터 베네딕트와 스트레이크씨와 함께 걸어나왔다.
"당신의 진단은 무엇입니까, 퀸씨?" 닥터 베네딕트가 물었다.
"당신의 평결은?'" 스트로크 씨가 참을성없이 말했다.
"여러분", 엘러리가 말했다. "후드 부인의 화장실에 있는 파이프와 수도꼭지
를 검사해보았고, 또 그것들이 누군가가 만지작거린 흔적이 없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부인의 식수는 소거되었고, 저는 마지막 가능성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독은 분명히 입으로 복용되었습니다." 닥터 베네딕트가 날카롭게
말했다. "의학적 확증을 얻기 위해 주의깊게 검사했지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닥터" 엘러리가 말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설
명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후드 부인은 스스로 독약을 먹었습니다. 제가 당신이라면 정신과의사
에게 전화를 걸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열흘 후 엘러리는 사라 후드의 침실에 다시 와있었다. 그 노부인은
죽었다. 부인은 세번째 독살시도에 굴복하고 말았다.
엘러리는 아버지 퀸 경감에게 "자살"이라고 보고했었다.
하지만 부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었다. 경찰의 전문가들의 엄청나게
수고스러운 조사에도 불구하고, 후드 부인의 침실이나 화장실에서
독약의 흔적이나 독약을 담고있을만한 것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엘러리는 스스로를 조롱하면서, 전에 내렸던 결론을 검토했다. 그의
미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엘러리는 노부인이 전에 말했던 진술이나 전문가들의 발견에 모순
되는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엘러리는 하인들을 엄하게 심문
했다. 흐느껴우는 페넬로페와 으르렁거리는 라이라를 무자비하게
능률적으로 심문한 다음, 마침내 엘러리는 떠났다.
이런 문제는 엘러리의 육체로 하여금 이의를 제기하게하는 사고
기관이다. 46시간동안, 잠을 자지도 않고 아파트를 쉬지 않고 걸어
다니면서, 엘러리는 그의 머리속에서 살았다. 47시간이 되자, 퀸 경감
은 아들을 팔로 안아 침대로 데려갔다.
"내가 생각하기엔" 퀸 경감이 말했다. "무엇이 상처받았느냐,아들아?"
"제 존재 전부요" 엘러리가 웅얼거렸다. 그러고나서는 아스피린을
삼키고, 얼음주머니를 대고, 버터로 구운 스테이크를 들었다.
스테이크를 먹던 중 엘러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전화기를 잡아챘다.
"스트레이크씨? 엘러리 퀸입니다. 즉시 후드 하우스에서 저를 만나
주십시오! 예, 닥터 베네딕트에게도 알리세요! - 예, 저는 지금 후드
부인이 어떻게 독살되었는지를 알아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후드가의 거실에 모였을 때, 엘러리는 통통한 페넬로페
와 홀쭉한 라이라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두 분 중 어떤 분이 닥터 베네
딕트와 결혼하려고 하십니까?"
엘러리가 이어서 말했다. "네네, 그런 식으로 행해져야만 했죠.
오직 페넬로페부인이나 라이라 부인만이 의붓어머니의 살인으로
부터 이득을 얻습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살인을 하는 것이 가능
했던 유일한 사람은 닥터 베네딕트였습니다.....어떻게,라고 질문
하시겠습니까, 닥터?" 엘러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매우 간단합니다.
후드 부인은 정기검진 다음날 처음으로 중독되었습니다-바로 당신에
의해서, 닥터. 그런 까닭으로 당신은 후드 부인을 매일 검진해야한다고
알렸지요. 모든 의사들이 환자의 검진에 앞서 행하는 고전적인 사전
조치가 있지요. 제 의견으로는, 닥터 베네딕트," 엘러리가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당신은 후드 부인의 체온을 재는 체온계로 후드 부인의
입에 독을 넣었소!"
- 암흑의 집의 모험 -
엘러리 퀸 단편집 『엘러리 퀸의 새로운 모험』 中..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그리고 이건......
마치 애원하듯 비비꼬인 콧수염을 기르고 있는 되노네이 듀발 씨가 선언하
듯 말문을 열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가 안될 만큼 독창적이라네, 친구. 굳이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자네가 직접 한 번 시험해 보면 알 수 있을 거네. 거 왜,
뭐라더라, 굉장하다는 말 있잖나?
엘러리 퀸은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조그만 위락 시설 구역 건너편
의 길다란 의자에 앉았다.
물론 그렇겠지.
그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굉장하겠지, 듀발. 나야 자네의 그 열정적인 창의성에 항상 공감하
는 사람 아닌가...... 주나! 제발 좀 가만히 앉아 있어!
뜨겁게 작렬하는 오후의 태양 아래, 그의 흰 옷은 벌써부터 몸에 척 달라붙
어 있었다.
주나가 희망에 부푼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계속 둘러봐요.
퀸이 지친 두 다리를 죽 뻗으며 불평조로 말을 받았다.
이제 둘러보는 것은 그만 두고 이야기나 하자꾸나.
그는 이 즐거운 여름 내내 주나에게 이곳에 와서 놀겠다고 약속을 해 놓고
있었지만, 수확 체감의 법칙(토지의 생산력은, 이에 투자하는 자본이나 노력
이 어느 한도를 넘어서면 계속 증가시켜도 이에 비례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현상 : 옮긴이)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그가 알고 있는
놀라울 만큼 많은 각계 각층의 수백 명의 인사들 가운데 하나이며 무대배경
설계 전문가로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듀발 씨의 열성적인 안내를 받
으며--그 지겹고 괴로운 두 시간 동안 조이랜드 유원지의 눈코 뜰 새 없는
유혹에 참여했었고, 지금은 극심한 체력 소모 상태에 있었다. 물론 주나는
예외로 쳐야 할 것이다. 아이에게는 흥분과 순수한 즐거움이 있었고, 지칠
줄 모르는 젊음이 있었다. 한마디로 아이는 아직도 바다에서 불어오는 미풍
처럼 활기찼던 것이다.
듀발이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열성적으로 말했다.
자네도 알게 되겠지만, 여기서 제일 재미있는 곳이라네. 이 조이랜드 유원
지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지.
꼼꼼한 솜씨로 아름답게 꾸며진 조이랜드는 대서양 연안 일대 그 어디에서
도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하고 독창적인 놀이 시설과 기계 장치들--주로 듀발
이 기획한--을 갖춘 전형적인 유원지로 이곳 군민(郡民)들에게는 조금은 생
소한 곳이었다.
암흑의 집...... 여보게, 그건 정말 기막힌 걸작일세!
듀발이 말했다.
그거 끝내 주겠는데요.
엘러리를 흘낏 보며 주나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말을 곱게 써야지, 주나.
엘러리가 또 한 번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준엄하게 말했다.
길 건너에 있는 암흑의 집 은 아무리 다양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라도 그
다지 재미있어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집은 실제와 상상 속에 존재하는
온갖 유령들을 한데 모아 놓은 집이었다. 그리고 악마적 상상력으로 흔들리
는 벽과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듯한 지붕이 설계되어 있었다. 엘러리는 그 집
을 보고--물론 듀발 씨에게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지만--언
젠가 본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이라는 독일 영화의 무대 장치를 떠올렸
다. 집은 뒤틀리고 기울어진데다 터무니없이 튀어나와 있고, 모조 유리창과
문, 낡은 발코니는 모두 부서져 있었다. 무엇하나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이 없
었다. 큰 직사각형 모양으로 지어진 집은 3면이 안뜰을 내려다 보고 있었고,
안뜰에는 부서진 자갈과 낡아빠진 가로등이 있는 음산한 느낌의 좁은 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 난간이 설치된 나머지 한 면이 매표소로 이용되고 있었
다. 탁 트인 안뜰과 접해 있는 도로에는 공기뿐,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자, 그러면......
듀발이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난 잠시 실례해야겠네. 잠깐이면 되네. 금방 돌아오지. 그리고 나서 우리
저 집을 방문하자고...... 실례!
그는 작고 날씬한 몸을 굽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한 다음 재빨리 매표소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조이랜드 유원지 직원복을 입은 젊은 사내 하나
가 여러 사람들을 모아 놓고 뭐라 떠들어대고 있었다.
퀸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유원지에는 결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더구나 목욕탕이나 해변을 찾게 되는 더운 여름날 오후라 유원지는 거의 비
어 있다시피 했다.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는 통로와 보도에서는 유원지 전체
에 걸쳐 숨겨 둔 확성기를 통해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스워!
팝콘의 분홍색이 감도는 뾰족한 부분을 아작 아작 소리내어 씹으며 주나가
말했다.
뭐라고?
엘러리가 침침한 한쪽 눈을 뜨며 물었다.
저 사람은 어딜 저렇게 서둘러 가는 거죠?
누구 말이냐?
엘러리는 한쪽 눈을 마저 뜨고 주나가 고갯짓으로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
다. 큰 덩치에 숱이 많은 회색 머리의 남자 하나가 산책로 위쪽을 향해 열심
히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사내는 검은색 옷에 챙이 처진 중절모자를 눈 바
로 위까지 내려쓰고 있었고,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의 태도에는 서릿발 같은 단호함이 깃들여 있었다.
엘러리가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어휴. 난 대체 사람들이 어디서 저런 힘이 나는지 모르겠구나.
주나가 여전히 아작 아작 소리를 내며 말을 받았다.
우습잖아요.
정말 그렇구나.
엘러리는 도로 눈을 감으며 졸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아주 제대로 봤어. 나야 방금 전까지도 그런 생각을 못했다만, 이 더
운 여름날 오후에 유원지에서 저렇게 바삐 걸어가는 걸 보니 뭔가 이상하
긴 이상하구나. 어쩌면 저 친구가 토끼띠인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주나?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뛰다시피 걸어갈 리가 없잖니. 하지만
이런 유원지를 찾는 사람이라면, 그런 종(種)에 속하는 모든 동물들처럼 고
질적인 방랑족이라고 할 수 있지. 거 참 신경쓰이는 문제구나.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따. 주나가 말했다.
미친 사람인가 보죠.
아냐, 그건 아닐 거다. 얘야, 그렇게 나쁜 쪽으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되지.
우린 우리의 저 토끼 씨가 이 조이랜드 유원지의 즐거움 그 자체를 찾아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정확한 추리를 시작할 수가 있단다.
내 말 알아 듣겠니? 그러니까 저 토끼 씨에게 이 조이랜드는 단순한 수단
이라는 거지. 즉, 저 토끼 씨는...... 저 구깃구깃한 옷을 좀 보렴, 주나. 아주
특이하잖니? 이 조이랜드에는 관심이 없는 거야. 그에게 이 조이랜드는 존
재하지 않는 거야. 저이는 단테의 지옥과 위험한 잠자리 비행기 그리고 팝
콘과 냉동 커스터드까지 그냥 지나쳐 왔어. 마치 눈이 멀었거나 그런 것들
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그렇다면 그 이유가 뭐겠니? 나라면 어떤 아가씨
와 데이트가 있었다고 말하겠구나. 그런데 늦게 온 거지. 이것 참, 내 말을
증명해 보일 방법도 없고...... 제발 주나, 이제 날 좀 내버려 두고 그 딱딱
한 팝콘이나 계속 씹으렴.
벌써 다 먹은 걸요.
주나는 빈 봉지를 내려다보며 못내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그때 듀발의 유쾌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갑시다!
엘러리는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듀발을 보고 또 한 번 터져 나오는 불만의
소리를 삼켜야 했다.
갈까요, 친구분들? 장담하건대, 여기보다 더 재미 있는...... 아이쿠!
듀발이 왈칵 가쁜 숨을 내뱉으며 뒤로 비틀거렸다. 엘러리는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 잡았다. 챙이 처진 중절 모자를 쓰고 있던 덩치 큰 사내였다.
그가 작고 날렵한 몸매의 프랑스 사내 듀발과 몸을 부딪쳤고, 그 바람에 듀
발은 거의 넘어질 뻔 했던 것이다. 사내는 낮은 소리로 뭐라 미안하다는 뜻
의 말을 하고는 서둘러 가 버렸다.
미친놈!
듀발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검은 눈동자를 번득이며 그 빈약한 어깨를
으쓱 하더니 멀어져 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엘러리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토끼 씨께서는 분명히 자네가 만든 명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걸세, 듀발. 틀림없이 자네 직원이 떠들어대는 말을 들으려고 걸음을 멈출
거라고.
토끼 씨?
듀발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의 말을 되받더니 다시 말했다.
어쨌든 상관없어. 저사람은 손님인 걸. 보라고! 손님이 될 사람과 싸울 뻔
했잖나! 자, 갑시다, 친구분들!
덩치 큰 사내는 갑자기 발길을 멈추더니 유원지 직원의 설명을 듣기 위해
빽빽이 몰려 서 있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엘러리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듀발을 따라 건너편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젊은 남자가 친근감이 가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 암흑의 집 에 들어가 보지 않고 조이랜드에 갔다왔
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찍이 이런 전율은 없었습니다! 전혀 새롭고
다른 곳입니다. 이 세상 어느 유원지를 가더라도 이런 곳은 없을 것입니다.
무섭고, 오싹하고, 겁나고......
엘러리 일행 앞에 있던 큰 키의 젊은 여자가 소리내어 웃으며 자기 팔에
기대고 있는 늙은 신사를 보며 말했다.
우리 들어가 봐요!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요!
은근한 즐거움을 나타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밀짚모자 밑의 하얗게 센 머리
가 엘러리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젊은 여자는 사람들을 헤치며 열심히 앞
으로 나아갔다. 늙은 신사는 한사코 여자의 팔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엘러
리는 그 노인의 이상하게 뻣뻣한 움직임과 발을 끄는 듯한 걸음걸이를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젊은 여자는 매표소에서 표 두 장을 산 다음 늙은 신사
를 데리고 안쪽의 난간이 있는 통로로 들어갔다.
이제 젊은 연사는 목소리를 낮추어 극적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암흑의 집 은...... 바로...... 저곳입니다. 저 안에는 여러분의 눈을 밝혀 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여러분의 감각에 의지해 길
을 찾아야 하며, 혹시라도 그 감각이 잘못되었을 때는...... 하하! 암흑 속에
서, 그야말로 절대적인 암흑 속에서...... 저기 갈색 트위드 양복을 입으신 분
께서는 벌써 겁을 먹으신 것 같군요. 하지만 겁낼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심장이 약한 분들을 위한 대책도......
난 그런 겁쟁이가 아냐.
모여 선 사람들 앞쪽 어딘가에서 남자의 화난 듯한 굵직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람들이 소리를 죽여 가며 킥킥댔다. 젊은 직원이 심장이 약하다고
지목한 사람은 힘이 무척 세 보이는 흑인 청년이었다. 그는 세련된 갈색 양
복을 말끔히 차려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숯처럼
새카만 그의 피부와 대조적으로 밀짚 모자가 눈부시게 빛났다. 그의 팔을 잡
고 있던 예쁜 흑인 소녀가 낄낄대며 말했다.
그만둬요, 당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면 될 것 아녜요! 이것 보세
요...... 여기 표 두 장 주세요, 아저씨!
두 사람은 큰 키의 젊은 여자와 늙은 신사를 황급히 따라 들어가며 빙그레
웃었다.
젊은 직원이 다시 열광적으로 외쳤다.
여러분께서는 저곳 어둠 속에서 나오는 길을 찾느라 몇 시간을 헤매게 될
지도 모릅니다. 혹시 너무 무서운 나머지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조그만 녹색 화살표를 찾으십시오. 그 녹색 화살표는 길을 따라 여러
곳에 있을 것이며, 여러분을 보이지 않는 문 쪽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그
문을 통과하면 캄캄한 통로가 나올 것이고, 그 통로는 집을 완전히 한 바퀴
돌아 뒤쪽의 집회실...... 그러니까...... 유령이 나올 것 같은 지하실로 연결되
있습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상, 녹색 화살
표를 따라가지는 마십시오. 왜냐 하면, 그 길은 한쪽으로만 통하니까요.
하하하! 그때는 아시다시피, 다시는 암흑의 집 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지
요. 하지만 그 길을 이용하시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조그만 적색
화살표를 따라......
검은 턱수염을 단정치 못하게 잔뜩 기른, 챙이 넓은 꾀죄죄한 모자에 축 처
진 넥타이를 한 사내 하나가 화구(畵具)처럼 보이는 납작한 가방을 들고 입
장권을 사더니 서둘러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사내는 자신이 사람들의 관심
의 표적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뺨을 붉게 물들였다.
이것 보게, 저건 또 무슨 생각이지?
엘러리가 물었다.
화살표 말인가?
듀발이 멋적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노약자와 겁쟁이들을 위한 배려지. 여긴 정말이지 보통 무시무시한 곳이
아니라네. 친구, 내 명작이라고 했잖아. 그래서......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든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놓았지. 그 표시가 없으면
어떤 사람이라도--저 젊은 직원이 충실히 말한 것처럼--몇 시간을 헤매게
되어 있어. 그리고 녹색과 적색 화살표는 야광이 아니네. 그렇기 때문에 그
게 방해가 되는 일도 없을 걸세.
이제 젊은 직원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적색 화살표를 따라가도 여러분께서는 밖에 나오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적색 화살표 가운데 몇몇은 바른 길을 가리키고 있지만, 나머지는 그렇
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도중에 맞딱뜨리게 되는 짜릿한 모험 다음에..
자 신사 숙녀 여러분, 이 모험의 가격은......
들어가요, 우리. 틀림없이 재미있을 거에요.
젊은 직원의 장삿속에 넘어간 주나가 엘러리를 졸랐다.
물론 그렇겠지.
엘러리가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람들이 술렁대며 왔다갔다 하기 시
작했다. 듀발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정중히 머리를 굽히더니 두 사람에게
입장권 두 장을 내밀었다.
난 여기서 기다리겠네, 친구. 내 보잘 것 없는 암흑의 집 에 대한 자네
의견을 빨리 들어 봤으면 좋겠군. 자, 들어가게나.
그가 껄껄 웃으며 덧붙였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엘러리가 뭐라 투덜대자 주나는 재빨리 앞장서서 깡총대며 난간이 있는 곳
으로 내려가더니 이상한 각도로 기울어진 문 쪽으로 뛰어갔다. 안내원이 그
들의 입장권을 받아 들고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한
낮의 햇볕이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듯한 낡은 층계를 비추려 안간힘을 써대
고 있었다.
엘러리가 중얼거렸다.
내려가라고? 아, 그래. 조금 전에 그 젊은 친구가 유령이 나올 것 같다는
지하실이 있다고 그랬지? 좋아, 듀발. 잘 보라고. 내 기꺼이 즐겨 줄 테니!
그들은 가짜 거미줄이 얼기설기하고 전등이 희미하게 밝혀져 있는, 지하실
같이 좁고 기다란 방에 들어와 있었다. 벽이 푸석푸석하니 몸시 습해 보이는
그 방은 해골 복장을 한 예절바른 인간이 주관하고 있었다. 그 해골 인간은
엘러리의 모자를 받아 한쪽 구석에 있는 기다란 나무 선반에 얹더니 그에게
놋쇠로 된 원반 하나를 건네 주었다. 나무 선반은 거의 비다시피 했다. 그러
나 엘러리는 선반 한 쪽을 차지하고 있는 화구와 또 다른 칸을 차지하고 있
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의 밀짚모자를 볼 수 있었다. 의식은 어쩐지 기분
나빴지만, 주나는 황홀한 예감으로 몸을 떨었다. 쇠창살이 방을 두 구역으로
갈라 놓고 있었다. 엘러리는 이곳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모험을 끝내면 쇠창
살 반대편으로 나타나, 창살에 붙은 문을 통해 자신들의 소지품을 되찾은 다
음, 오른쪽의 또 다른 층계를 밟고 반갑기 그지없는 햇빛을 찾아 위로 올라
가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주나가 조급증을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빨리 가요, 아휴. 왜 이렇게 느려요. 들어가는 길은 이쪽이에요.
입구라고 적혀 있는 왼쪽의 다 찌그러질 듯한 문 쪽으로 달려가던 주나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뒤에서 미적대며 천천히 따라오는 엘러리를 기다렸다.
그 사람을 봤어요.
주나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응? 누구 말이냐?
그 사람 말이에요, 토끼 씨.
엘러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어디서?
방금 저 안으로 들어갔어요.
주나가 장난기 어린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저 사람이 이런 곳에서 데이트를 한다고 생각하세요?
솔직히 데이트를 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장소 같구나.
다 찌그러진 문을 걱정스런 눈으로 보며 엘러리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자, 주나. 그건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니. 이제
부터 우리 남자답게 저 안으로 들어가서 악마를 쫓아내자꾸나. 내가 먼저
들어가지.
제가 먼저 갈래요.
그건 절대로 안돼. 난 네 할아버지께 널 무사히 데리고 돌아가겠다고 약속
했다. 내 코트나 단단히 잡아! 자, 들어가자.
이제부터가 역사에 남을 일이었다. 퀸 가문은, 리처드 퀸 경감이 가끔씩 지
적했듯, 영웅적인 기질이 다분한 가문이다. 그런 반면 엘러리는 정신적으로
오염되지 않은 분명한 성격의 인간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절망적으
로 몸을 떨며 그곳에서 적어도 천 광년 정도는 떨어져 있었으면 하는 마음
으로 길을 더듬어 나갔다.
끔찍한 곳이었다. 끼릭대는 다 찌그러진 문 아래쪽으로 뻗어 있는 층계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그들은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층계 밑에는 뭔가 물컹물컹하니 소름끼치는 것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그들
의 발에 부닥치며 쏜살같이 뒤로 빠져나갔다. 도대체 어떻게 적응할 방법이
없었다. 불행히도 그것은 지금까지 엘러리가 가 본 가장 깊고, 어둡고, 캄캄
한 곳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더듬거리거나 발을 움찔거리는
것, 그렇지 않으면 만사 잘 되라고 기도하는 것 뿐이었다. 그야말로 바로 코
앞의 손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기분 나쁘게도 그들은 전기 충격이 오는 벽에 부딪쳤고, 온통 사람의 뼈다
귀 덜그럭대는 소리와 쥐 찍찍대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들어섰다. 광택이 없
는 작은 적색 화살표를 따라가자 막다른 벽이 나왔고, 그 벽에는 짐승처럼
기어서나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그 구멍을 통과해
나간다 해도 또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나 다를까, 구멍을 통과하자 그들의 체중을 받치고 있던 바닥이 아래로 기
울면서 그들을 반대편 아래쪽의 방--방인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지만--으로
사뿐히 내려 놓았다. 거기서 그들은 다시 1미터 아래쪽의 푸석푸석한 벽과
벽 사이를 통과했고...... 이번에는 그들이 딛고 있던 층계가 갑자기 위로 치
솟으며 그들이 발을 디딜 곳조차 없게 만들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끝없
이 돌게 만든 층계였다. 머리에 부닥치는 천장, 덩치 큰 남자의 어깨 넓이
정도에 난쟁이가 서면 간신히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높이로 된 미로, 하반
신에 차가운 공기를 뿜어대는 창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는 방, 그
런 장난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리고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신경을 더욱 더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덜거덕대는 소리, 삐걱대는 소리, 절거덕대는 소리, 휘
파람 소리, 쿵쾅대는 소리, 그리고 정신병 환자들에게나 명예스러울 온갖 소
리의 교향악이 있었다.
갑자기 미끄러지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은 엘러리가 반은 정신 나간 목소
리로 투덜대며 물었다.
재미있니, 얘야?
그는 살짝 목소리를 낮추어 되도네이 듀발에 대해 뭐라 좋지 못한 소리를
하더니 다시 물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냐?
주나가 엘러리의 팔을 꼭 붙들며 만족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이렇게 깜깜할 수가! 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뭐가 좀 보이세
요?
엘러리는 또 투덜대며 앞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쪽은 가능성이 있겠는걸.
그의 손끝에는 매끈매끈한 표면이 가볍게 와 닿았다. 그는 표면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좁다랗지만,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창틀이었다. 모서리를 따라
나 있는 갈라진 틈이 그 창틀이 과거에 문이나 창문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
을 일러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문고리나 빗장 같은 것은 없었
다. 그는 주머니칼의 날을 세워 유리를 긁어내기 시작했다. 왜냐 하면 그 유
리가 두터운 불투명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기 때
문이다. 그러나 그 힘든 몇 분간의 노력 끝에 그가 얻은 것이라고는 희미하
니 보잘것없는 빛 한 줄기 뿐이었다.
그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아닌데...... 여긴 문이나 창문이 있어야 해. 그리고 이 가느다란 불빛
은 발코니나 어디 안뜰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들어와야 맞아. 우린 거길
찾아야......
아야!
그의 뒤쪽 어딘가에서 주나가 찢어지는 목소리를 냈다. 이어 뭔가 긁히는
소리가 났고, 쿵 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엘러리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맙소사, 주나, 무슨 일이냐?
그의 앞쪽 손이 닿을 듯한 어둠 속에서 주나의 징징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가는 길을 찾다가...... 미끄러졌단 말예요!
저런!
엘러리가 안ㄷ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난 또 혹시 요정 같은 것이 널 공격한 줄 알았구나. 그만 일어나렴. 이 복
잡한 미로에서 처음 미끄러진 것도 아니잖니.
하지만 축축한 걸요.
주나가 우는 소리로 말했다.
축축하다고?
엘러리는 아이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더듬대며 나아가 떨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어디 말이냐?
바닥 말예요. 미끄러지면서 제 손에 조금 묻었어요. 그쪽 손이 아녜요. 이
쪽 손이라고요.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게...... 미지근해요.
축축하고, 끈적거리고, 미지근......
엘러리는 아이의 손을 놓고 주머니를 뒤져 조그만 연필 크기의 손전등을
꺼냈다. 그는 너무도 궁금한 나머지 재빨리 손전등의 버튼을 밀어 올렸다.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그 무엇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
다. 주나는 그의 곁에서 숨을 헐떡이고......
그것은 단순한 입체적 윤곽을 띤, 낮게 댄 상부 가로대와 조그만 문 손잡
이가 있는 보통 크기의 문이었다. 그 문은 닫혀 있었다. 한쪽 틈새에서 새
나온 액체 비슷한 것이 바닥을 검붉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어디 손좀 보자꾸나.
엘러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주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그 작고 가
냘픈 주먹을 내밀었다. 엘러리는 아이의 주먹 쥔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들
여다보았다. 진홍색이었다. 그는 아이의 주먹을 자기 코 끝에 대고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는 거의 넋 나간 얼굴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
진홍색을 훔쳤다.
글쎄! 이건 페인트 냄새가 아닌 것 같구나, 그렇잖니, 주나? 그렇다고 듀발
씨가 어떤 극적인 ㅎ과를 내기 위해 뭔가를 바닥에 부어 놓은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그는 얼룩진 바닥과 서서히 공포감을 느끼는 주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
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 얘야. 우리 이 문을 열어 보자꾸나.
그는 힘껏 문을 밀었다. 그러나 문은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 움직였을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온몸의 체중을 실은 다음 힘껏 문
을 밀어붙였다. 문을 가로막고 있는, 뭔가 크고 무거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좀처럼 밀려나지 않았고, 한 번에 1 센티미터씩......
그는 문이 열리면서 드러나는 방 안의 광경을 주나가 보지 못하게 할 목적
으로 희미한 손전등 불빛을 교묘하게 이리저리 흩어지게 했다. 아무런 시설
도 되어 있지 않은, 완벽한 8각형의 방이었다. 그냥 8개의 벽면과 바닥 그리
고 천장이 있었다. 그들이 들어온 문 말고도 두 개의 문이 더 있었다. 한쪽
문에는 적색 화살표가, 또 한쪽 문에는 녹색 화살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문
은 둘다 닫혀 있었다. 그는 손전등으로 그가 들어온 문 양 옆과 아래를 훑
어보고는 문을 가로막고 있던 물체를 비춰 보았다.
가느다란 불빛이 크고 시커먼, 바닥 위에서 꼼짝도 않고 있는 엉성한 뭔가
를 비추었다. 그것은 문 쪽에 엉덩이를 댄 채 잭나이프처럼 잡혀 있었다. 불
빛이 그 물체의 뒤쪽 한가운데에 있는 시커먼 네 개의 구멍을 비췄다. 그 구
멍에서는 천연의 작은 폭포처럼 피가 쏟아지고 있었고, 그 피는 코트를 적
신 채 바닥으로 흐르고 있었다.
엘러리는 주나에게 딱딱대며 무슨 말인가 하고는 무릎을 꿇고 그 물체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덩치 큰 토끼 씨였다. 그는 죽어 있었다.
잠시 뒤 몸을 일으켰을 때 엘러리의 얼굴은 창백하니 넋 나간 사람 같았다.
그는 손전등으로 바닥을 천천히 비춰 보았다. 붉은색 띠는 방 건너편에서 죽
은 사내에게까지 이어져 있었다. 맞은편 대각선 방향에 총신이 짧은 연발 권
총 한 정이 놓여 있었다. 방에는 아직도 화약 냄새가 묵직하게 배어 있었다.
그 사람...... 그 사람이죠?
주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엘러리는 소년의 팔을 낚아채 방금 그들이 나왔던 방으로 도로 힘껏 밀어
넣었다. 그의 손전등이 조금 전에 그가 주머니칼로 긁어 놓은 유리 표면을
비추었다. 그는 문을 힘껏 걷어찼다. 유리가 몸부림을 치면서 한낮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려 했다. 계속 유리를 걷어차자 그의 몸 하나가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 생겼다. 그는 뱀처럼 몸을 꿈틀대며 깨진 유리 사이를 통
과해 암흑의 집 안뜰이 내려다보이는 작고 환상적인 발코니로 나갔다. 유
리가 깨져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아래쪽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는
매표소 옆에서 카키색 제복 차림의 조이랜드 유원지 상주 경찰 한 사람과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단정한 모습의 듀발을 찾을 수 있었다.
듀발! 누가 이 집에서 나왔지?
엘러리가 소리쳤다.
뭐라고?
키 작은 프랑스 사내 듀발이 침을 꿀꺽 삼키며 되물었다.
내가 이 집에 들어간 다음에 말이야! 빨리, 이 사람아,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지만 말고!
누가 나왔지?
듀발은 잔뜩 겁먹은 눈으로 엘러리를 쳐다보며 입술을 핥았다.
아무도 나온 사람이 없네, 퀸...... 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혹시 자네 머
리가...... 태양을 보려고......
엘러리가 큰 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알았네! 그렇다면 범인은 아직 이 복잠한 미로 속에 있는 거야. 경관님,
빨리 이 지역 담당 경찰을 불러요. 그리고 아무도 여기서 나가지 못하게
해요. 누구든 나가려고 하면 무조건 체포해요. 이 안에서 남자 하나가 살해
됐어요!
쪽지에는 가느다란 여자 글씨체가 휘갈겨져 있었다.
사랑하는 앤스...... 당신을 꼭 만나야겠어요. 중요한 일이에요. 예전에 만났
던 그곳 조이랜드 암흑의 집 에서 일요일 오후 3시에 만나요. 절대로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번에는 특히 더 그래요. 그 사람이
의심하고 있어요. 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사
랑해요!!!
- 매지 -
군 경찰서의 형사 반장 지글러가 손마디를 요란스레 꺾으며 말했다.
이건 보복 행위요, 퀸 선생. 그 쪽지는 죽은 사내의 주머니에서 나왔어요.
그렇다면 매지는 누구며, 의심하고 있다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요? 남편
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방이 한 다스의 불빛 세례를 받았다. 가리개를 제거한 랜턴을 죽은 사내 위
로 높이 들어올리고 있는 경찰 하나를 중심으로 경찰들이 방의 모양 만큼이
나 기이한 방식으로 손전등 불빛을 교차시켰다. 여덟 개의 벽면 가운데 한
벽면에 여섯 사람이 나란히 기대 섰다. 그들 가운데 다섯 사람은 놀라 눈을
휘둥그래 뜬 채 방 한복판의 빛이 환하게 모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섯
번째 사람--키 큰 젊은 여자의 팔을 아직도 잡고 있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은 자기 앞만 똑바로 보고 있었다.
흠......
엘러리의 소리였다. 그는 실내에 갇힌 사람들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분명히 더 이상 숨어 있는 사람이 없습니까, 지글러 반장님?
이 사람들이 전부요. 듀발 씨가 기계를 작동시켜 문을 다 내렸으니까요.
우린 듀발 씨와 함께 이 암흑의 집 구석 구석을 다 뒤졌습니다. 게다가,
이 끔찍한 곳을 빠져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인범
은 분명 이 여섯 사람 가운데 있는 거지요.
형사는 그들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다들 찔끔하며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노인만은 예외였다.
듀발.
엘러리가 나직이 불렀다. 듀발은 몸을 움찔했다. 그의 얼굴색이 백짓장같았
다.
여길 빠져나갈 수 있는 비밀 통로는 없겠지?
엘러리가 물었다.
오, 없네, 없어. 퀸! 이것 보게, 내가 당장 이곳 설계도 사본을 가져오라
해서......
그럴 필요까지는 없네.
그러니까...... 그 지하실이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인 데다......
듀발은 말을 더듬었다.
어, 그러니까 이렇게 되려면......
엘러리가 칙칙한 색깔의 가운을 걸친 채 벽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우아한
여성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당신이 매지군요, 그렇지요?
그제야 그는 여자가 자신이 암흑의 집 밖에서 주나와 듀발과 함께 젊은
직원의 설명을 듣고 있을 때 보았던 여섯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사
실을 기억해 냈다. 여자는 그들보다 먼저 이 집으로 들어온 게 분명했다. 나
머지 다섯 사람은, 키 큰 젊은 여자와 여자의 늙은 아버지, 에술가 넥타이에
턱수염을 기른 사내, 그리고 체격 좋은 젊은 흑인과 그의 동반자인 예쁜 혼
혈 아가씨였다.
실례지만 이름이...... 이름이 어떻게 되시지요?
전...... 매지가 아녜요.
여자가 뒷걸음질치며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여자의 슬퍼보이는 눈 밑에 푸
르스름하니 반달 모양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여자는 서른 다섯 살 정
도로 보였고, 한때는 상당힌 미인이었을 성싶었다. 엘러리는 여자의 나이보
다 여자를 유린하고 있는 공포감이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키 큰 젊은 여자가 숨넘어가는 소리로 말했따.
저 사람은 하디 박사에요!
여자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는 듯 자기 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누구요?
지글러 반장이 재빨리 물었다.
저...... 죽은 사람 말예요. 앤섬 하디 박사라고, 안과 전문의에요. 뉴욕에 살
죠.
맞습니다.
시체 옆에 말없이 무릎을 꿇고 있던 키 작은 남자가 말했다. 그는 형사 반
장에게 뭔가를 건넸다.
이 사람 신분증입니다.
고맙소, 닥터.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되지요?
노라 라이스에요.
여자는 부르르 몸을 떨며 말을 이었다.
이분은 제 아버지 매튜 라이스에요. 우린 이 일, 이 끔찍한 사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우린 오늘 이 조이랜드 유원지에 그냥 놀러 온 거에요. 혹
시라도 우리가......
예야, 노라.
여자의 아버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데도 노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도,
고개 한 번 까딱하지도 않았다.
그럼 이 죽은 사람을 안다는 얘기요?
지글러 반장이 매우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지요.
매튜 라이스가 대답했다. 그는 높낮이가 뚜렷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이
었다.
우리, 그러니까 내 딸과 나는, 하디 박사를 알고 있소. 단지 그의 직업 때
문이기는 하지만 말이오.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지글러 반장
님. 그 사람은 날 몇 년도 더 치료해 왔고, 결국에는 내 눈을 수술했지요.
그의 창백한 얼굴에 고통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백내장이라면서......
지글러 반장이 그의 말을 받았따.
흠, 그렇다면......
난 완전히 시력을 잃었습니다.
놀라움 속에서 잠시 침묵이 있었다. 그때서야 엘러리는 자신의 무지를 깨
닫고 성급히 머리를 저었다. 그걸 모르고 있었다니. 노인의 무기력한 행동,
이상하게 고정된 시선, 희미한 미소, 떨리는 걸음걸이......
당신이 눈을 멀게 된 것이 하디 박사 책임입니까, 라이스 씨?
느닷없이 엘러리가 물었다.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소. 그건 틀림없이 신의 뜻이었을 거요. 그 사람은
최선을 다 했어요. 난 시력을 잃은 지 이미 2년이 됐어요.
노인이 읊조리듯 말했다.
오늘 하디 박사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아니오. 난 그 사람을 본 지가 2년도 넘었소.
경찰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 두 분은 어디에 계셨죠?
매튜 라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앞쪽 어디쯤일 거요. 출구 근처거나.
당신들은요?
엘러리가 흑인 남녀를 보며 물었다.
제 이름은......
흑인 사내는 말을 더듬었다.
주주 존스입니다, 선생님. 프로 권투 선수지요. 체급은 라이트 헤비급 이고
요. 전 이 의사 양반을 전혀 모릅니다. 저와 제시는 계속 저기 아래쪽의 요
동치는 방에 있었어요. 저희들은......
오, 하느님.
예쁜 혼혈 아가씨가 그의 팔에 매달린 채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럼 당신은요?
엘러리가 턱수염을 기른 사내를 보며 물었다.
그는 마치 프랑스 사람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뭘 어쨌다는 거요? 이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오. 난 날만 새면
곶으로 나가 온종일 바위에 걸터앉아 바다 풍경을 그리는 사람이오. 난 화
가요...... 이름은 제임스 올리버 아담스. 어디 마음대로 해 보시지.
그의 태도에는 거의 빈정거림에 가까운 적대감 같은 것이 있었다.
저기 아래층 소지품 보관소로 내려가면 내 화구 가방 안에 물감과 스케치
북이 들어 있을 거요. 난 저기 죽어 있는 저런 인간은 몰라요. 그리고 정말
이지 이런 유치하고 지저분한 장소에는 오고 싶지도 않았다구.
지저분......
듀발의 입이 벌어졌다. 그가 분통을 터뜨렸다.
당신,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요?
그는 턱수염을 기른 사내 앞으로 달려갔다.
내 이름은 듀발......
진정하게, 듀발.
엘러리가 그를 말리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두 분 예술가의 논쟁에 끼여들고 싶지는 않지만, 여하튼 지금은 참게나.
좋아요, 아담스 씨. 이 안의 기계 작동 장치가 멈췄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
었지요?
앞쪽 어딘가에 있었소.
사내는 성대에 이상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졌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나가는 길을 찾고 있었소. 질리기도 했고......
지글러 반장이 그의 말을 잘랐다.
맞아요, 이 사람은 내가 직접 봤어요. 어둠 속에서 자기 혼자 욕을 해대며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날 보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대체 여길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요? 밖에서 떠들어대던 친구는 녹색 화살표를 따라가
면 된다고 했는데, 아무리 가도 실없는 장난만 쳐 대는 방밖에 없잖소 .
자, 아담스 씨. 당신은 왜 그렇게 여기서 빨리 나가고 싶어 했지요? 뭘 알
고 있었던 거요? 어서 실토해요!
화가는 대답 대신 같잖다는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또 한 번 어깨를
으쓱하더니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벽에다 어깨를 기댔다.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반장님.
벽에 기대서 있는 여섯 사람의 얼굴은 천천히 들여다보며 엘러리가 나지막
이 말을 이었다.
반장님꼐서는 매지라는 여성이 쓴 쪽지의 의심한다 는 사람을 찾는 데
더 신경을 쓰시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매지, 이제 털어놓는 게 어떻겠소?
더 이상 버틴다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오. 이건 버틴다고 될 일이 아니
오. 조만간......
우아한 모습의 여자가 입술을 축였다. 여자는 힘이 없어 보였다.
당신 말이 맞겠군요. 결국은 밝혀지겠어요.
여자가 나지막이 공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말하죠. 그래요, 제 이름이 매지에요...... 매지 클라크. 그리고 잘 보셨어요.
그 쪽지는 제가 썼어요...... 하디 박사님께요.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격정적으로 떨렸다.
하지만 그 쪽지는 제가 쓰고 싶어서 쓴게 아녜요! 그 사람이 시켰어요. 이
건 함정이에요. 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저로서는......
누가 그 쪽지를 쓰라고 했죠?
지글러 반장이 큰 소리로 물었다.
제 남편이에요. 하디 박사와 전 친구 사이로...... 그래요, 친구였어요, 순수
하게. 제 남편은 처음에는 몰랐어요. 그런데 그이가...... 그이가 알게 됐죠.
그이는 틀림없이 우리를 미행했을 거에요...... 여러번. 우린....... 예전에 여기
서 만난 적이 있어요. 제 남편은 무척이나 질투심이 강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제게 이 쪽지를 쓰라고 했어요. 날 협박했어요...... 쪽지를 쓰지 않으
면 절 죽이겠다고요. 난 몰라요. 그 사람이 시켰어요! 그 사람이 살인범이라
고요!
여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지글러 반장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클라크 부인.
여자는 고개를 들더니 반장의 손에 들린 짧은 총신의 연발 권총을 내려다
보았다. 다시 반장이 말했다.
이게 당신 남편의 총입니까?
여자는 몸을 떨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아녜요, 그 사람도 총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총신이 길어요! 그 사람은....
명사수에요.
전당포에서 빌린 거로군.
지글러 반장이 총을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엘러리를
보며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러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클라크 부인, 그러니까 부인께서는 남편이 협박을 했는데도 이곳에 오셨다
는 얘기군요?
그래요, 맞아요. 전...... 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하디 박사에게 경고
를 해 줘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정말 용기가 대단하시군요. 부인의 남편 얘긴데, 혹시 부인이 이곳에 들어
오시기 전에 이곳 조이랜드 유원지에서 보지 못하셨나요?
그래요. 못 보았어요. 하지만 분명 톰이 그랬을 거에요. 그 사람은 내게 앤
스를 죽이겠다고 말했단 말예요!
그럼 부인께서는 이곳에 들어와서 하디 박사를 만났나요? 그가 살해되기
전에 말입니다.
여자는 몸을 떨고 있었다.
아녜요,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럼, 여기서 당신 남편은 보지 못했나요?
못 보았......
그렇다면 당신 남편은 어디 있는 거지요?
엘러리는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연기처럼 사라질 수는 없는 거지요. 기적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지글러 반장님, 그 총의 출처를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지글러 반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해 보죠. 제조 번호는 이미 기록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된 총이
라...... 게다가 지문도 없고, 검사 양반이 고생 깨나 하겠죠.
엘러리는 성마르게 혀를 차며 시체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을 내려다
보았다. 주나는 그의 뒤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말했다.
듀발, 이 방을 어떻게 좀 밝게 하는 방법이 없겠나?
듀발이 화들짝 놀랐다. 그의 얼굴이 비수처럼 훑고 지나가는 불빛에 아까보
다 더 창백해 보였다.
이 건물엔는 전선줄도 없고, 전기 장치 같은것도 전혀 되어 있지 않네, 퀸.
지하실만 빼고는 말이야.
그럼 길을 안내하는 화살표는 뭐지? 그건 보인다고 했잖나?
화학 약품이네. 어쨌든 난 이번 일로 완전히......
물론 그렇겠지. 살인이란 어떤 경우에도 즐거운 일이 못돼니까. 하지만 자
네가 만든 이 지옥 같은 곳이 사건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네. 어떻게 생각
하세요, 반장님?
나로서는 간단한 문제 같군요. 여길 어떻게 빠져 나갔는지는 몰라도 그
클라크라는 사람이 범인입니다. 우린 그 사람을 찾아서 심문할 겁니다. 그
는 선생이 권총을 발견한 그 자리에서 박사를 쏘았어요.
엘러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반장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는 시체를 끌고 가 사람들이 지나가게 되어 있는 문 앞에다 기대
놓았지요.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 말입니다. 핏자국을 보면 알 수 있
지요. 총소리는 이 망할 놈의 집에서 나는 그 희한한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을 테고, 범인은 그것까지 계산했던 것이죠.
흠, 아주 훌륭하군요. 클라크가 사라진 방법만 제외하고는...... 범인이 클라
크일 경우에 말입니다.
엘러리는 손톱을 잘근 잘근 씹으며 지글러 반장의 분석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한 가지 잘못된 게 있었다......
아, 검시가 끝났군요. 어때요, 박사?
랜턴 밑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있던 키 작은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벽에
기대선 여섯 사람은 거짓말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검시관이 말했다.
아주 간단하군요. 거의 같은 위치에서 네 발의 총알을 맞았습니다. 뒤에서
맞았는데, 두 발은 심장을 관통했어요. 명사수에요, 퀸 씨.
엘러리는 눈을 깜빡였다.
명사수라...... 그래요, 정말 훌륭한 솜씨 같군요. 박사, 사망 추정 시간은?
약 한시간 전쯤. 즉사했어요.
엘러리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분명 내가 발견하기 몇 분 전에 총을 맞았겠군요. 그때까지도
몸이 따뜻했으니까요.
그는 죽은 사내의 검푸른 얼굴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렇다면 당신이 틀렸군요, 지글러 반장. 범인이 총을 쏜 위치 말입니다.
범인은 하디 박사에게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제 생각으로는 범인이 하디 박사와 아주 가까이 있었던 듯 싶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몸에 화약 자국이 남아 있어야 하는 거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박사?
검시관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화약 자국이요? 아뇨, 없어요, 절대로 없어요. 화약이 탄 흔적은 전혀 없
어요. 지글러 반장 말이 맞아요.
엘러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화약 자국이 없다고요? 설마, 그럴 리가 없어! 분명합니까? 화약 자국은
틀림없이 있을 거요!
검시관과 지글러 반장은 서로를 힐끔 쳐다보았다.
이런 일에 전문가로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퀸 선생님.
키 작은 남자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피살자는 적어도 4미터, 어떠면 4미터도 더 되는 거리에서 총을 맞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엘러리는 엄청나게 놀랍다는 표정을 했다. 그는 입을 열고 무슨 말인가 하
려다 입을 다물더니 다시 한 번 눈을 껌벅거렸다. 그리고는 담배를 꺼내 불
을 붙여 물고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4미터, 화약 자국이 없다......
그는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것 참, 글쎄, 정말 신기하군요. 듀웨이 교수의 흥미를 끌 만한 비논리적
인 교훈이군요. 믿을 수가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어.
검시관이 엘러리를 기분 나쁜 얼굴로 쳐다보았다.
저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퀸 선생님. 그런데도 선생님은 제
말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군요.
지글러 반장이 나섰다.
대체 선생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엘러리가 막연히 되물었다.
두분 다 모르시겠어요? 좋아요. 어디 이 사람 옷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한 번 봅시다.
반장은 바닥에 널린 피살자의 소지품 잡동사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러
리는 주위 사람들의 눈길은 아랑곳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 앉더니 심술궂게
뭐라 투덜대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찾으려던 것, 논리적으로
거기에 있어야 할 것을 찾지 못했떤 것이다. 그곳에는 어떤 종류의 끽연 용
품도, 시계도 없었다. 그는 피살자의 손목에 시계를 찼던 흔적이라도 있나
싶어 손목까지 다 조사해 보았다.
그는 자신을 지켜 보고 있는 의아한 눈총들도 잊은 채 손에 들고 있는 손
전등으로 바닥을 샅샅이 비춰 가며 고개를 숙이고 실내를 열심히 왔다갔다
했다.
마침내 지글러 반장이 분통을 터뜨렸다.
이 방은 벌써 수색을 끝냈어요! 대체 뭘 찾는 거요, 퀸 선생?
엘러리가 엄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면, 분명 이곳에는 뭔가가 있어야 해요.
어디 봅시다, 반장님. 당신 대원들이 뭘 찾아 냈는지.
우리 대원들 역시 아무것도 찾아 내지 못했소!
난 지금 형사들의 눈에 중요하게 보일 만한 물건을 말하는 게 아니오. 아
주 사소한 물건이오. 종이 쪽지나 나무 조각 같은 것...... 아니면 그 어떠한
것이라도.
어깨가 넓은 사내 하나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다 찾아 보았습니다. 퀸 선생님, 먼지 하나 없었어요.
듀발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제발...... 우리가 아주 세심하게 설비를 해 놓았네. 여긴 환기 시설과 진공
청소 시설까지 다 되어 있네. 이 안에 있는 먼지는 죄다 빨아들여서 이 암
흑의 집 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해 놓는 시설 말이네.
엘러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진공 청소 시설! 빨아들인다...... 그렇다면 가능하지! 진공 청소 시설은 온
종일 가동하나, 듀발?
그렇진 않네, 친구. 밤에만 가동한다네. 이 암흑의 집 이 비었을 때, 그리
고...... 자네들이 하는 말로 뭐라더라? 손님이 없을 때만 말이네. 그렇기 때
문에 여기 계신 경찰들께서는 아무것도, 심지어는 먼지 하나 찾아내지 못
했을 거네.
낭패로군.
엘러리가 밑도 끝도 없이 중얼댔다. 그러나 그의 눈은 진지하기만 했다.
진공 청소 시설을 낮에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꺼져 있었다. 반장님
제 고집을 용서해 주십시오. 분명히 모든 곳을 다 수색했다고 했지요? 아
래층의 회의실까지요? 여기 있는 누군가가......
지글러 반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 선생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도대체 몇 번을 얘기하는 겁니까? 지하실
에 근무하는 이곳 직원이 살인이 일어난 시간에는 그곳에 들어온 사람도
나간 사람도 없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런데 뭡니까?
그렇다면......
엘러리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반장님께 저 분들의 몸을 수색해 달라고 부탁드려야겠군요.
그의 목소리에는 일종의 체념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여섯 사람 가운데 마지막 사람의 소지품을 내려놓았을 때 엘러리가 얼굴을
찡그린 모양은 절묘했다. 그는 그들의 소지품을 임의대로 갈라 놓았고, 주로
화가 아담스와 라이스 양의 물건을 뒤적거렸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거기에
있어야 할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웅크린 자세를 풀고 일어서서 말
없이 소지품들을 가리켰다. 주인들에게 돌려 주라는 뜻이었다.
갑자기 듀발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생각을 못했어! 대체 자네가 찾는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친구. 우리 자
신도 모르게 우리 몸에 숨겨져 있을 수도 있어. 그렇지 않나? 혹시라도 그
게 위험한 성질의 것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엘러리가 야릇한 관심을 나타내며 고개를 들었다.
멋진 생각이네, 듀발.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 걸?
그것 보라고.
듀발이 신이 나서 자기 주머니를 뒤집어 보이며 말을 열었다.
이 되도네이 듀발의 머리도 나쁘지는 않다고. 자, 자네가 직접 확인하겠나
퀸?
엘러리는 그의 온갖 잡동사니들을 대충 훑어보았다.
없군, 고맙네, 듀발.
그는 자기 주머니도 뒤지기 시작했다.
주나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도 다 꺼냈어요.
지글러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됐습니까, 퀸 선생님?
엘러리가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곧 끝납니다, 반장님...... 가만!
갑자기 그는 초점 잃은 눈을 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기다려요. 아직은 가능성이......
아무 설명도 없이 그는 녹색 화살표가 표시된 문으로 뛰쳐 나갔다. 밖은
그 방과 연결된 방만큼이나 컴컴하고 좁은 통로였다. 그는 손전등으로 주위
를 비춰 본 다음 복도 맨 끝머리로 다시 돌아가더니 마치 자신의 꼼꼼함에
자신의 인생이 걸려 있기라도 한 듯 바닥을 샅샅이 뒤지며 느릿느릿 걸어갔
다. 모퉁이를 두 번 돌았을 때 그는 회의실 출구 라고 적혀 있는 막다른 문
에 다다랐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간 그는 환하게 밝혀 둔 불빛 때문에 눈
을 깜빡거렸다. 경찰관 하나가 그에게 거수 경례를 했다. 그 옆에 있는 해골
이 으스스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왁스나 깨진 유리 조각, 또는 타다 남은 성냥개비도 하나 없군.
그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뭔가 그의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이봐요, 경관님. 이 창살에 나 있는 문을 좀 열어 주시겠소?
경찰관이 창살에 나 있는 조그만 문을 열쇠로 열자 엘러리는 자신이 서 있
는 곳보다 훨씬 넓은 방으로 들어가, 즉각 벽의 선반 쪽으로 다가갔다. 그곳
각각의 칸에는 엘러리 자신을 포함해 지금 갇혀 있는 사람들이 암흑의 집
으로 들어오기 전에 맡긴 물건들이 있었다. 그는 그 물건들을 세밀하게 조사
했다. 화가의 화구가 든 가방에 이르러서 그는 흘낏 안을 들여다보고 다시
가방을 닫았다. 그 안에는 물갑과 붓 그리고 아주 평범하면서도 영감이라고
는 없이 그린 서툰 솜씨의 그림 세 점--하나는 풍경화, 나머지 둘은 바다
경치--이 들어 있었다.
그는 먼지가 잔뜩 낀 전등알 밑에서 얼굴을 찡그린 채 왔다갔다했다. 몇 분
이 지났다. 암흑의 집 은 뜻하지 않은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는 듯 고요하기
만 했다. 경찰관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엘러리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의 찡그린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
랐다.
그래, 그래, 바로 그거야.
그는 계속 혼자서 중얼거렸따.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지? 경관님! 여기 있는 이 잡동사니 들을 모
두 사건 현장으로 가지고 갑시다. 난 이 조그만 탁자를 가지고 가겠소. 필
요한 물건을 다 갖췄으니, 어둠만 있으면 무시무시한 강신회(降神會)를 열
수가 있을 거요!
그가 복도에서 8각형 방의 문을 두드리자 지글러 반장이 직접 문을 열었다.
아니, 또 온거요?
반장이 투덜대며 말을 이었다.
우린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오. 사체도 다 넣었고......
몇 분 정도는 더 기다려 줄 수 있겠지요?
엘러리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짐을 든 경찰관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시늉을
했다.
잠깐 연설을 좀 해야겠군요.
연설!
영묘함과 교묘함으로 가득 찬 연설 말입니다. 친애하는 반장님, 듀발, 나의
이 연설이 자네 프랑스 사람들의 영혼을 기쁘게 해 줄 거네. 신사 숙녀 여
러분, 잠시만 그대로 계십시오. 좋습니다, 경관님. 탁자 위에 올려놓아요.
자, 여러분, 죄송스럽지만 여러분이 들고 계신 손전등을 저와 이 탁자를 향
해 비춰 주시면 실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방안에서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앤섬 하디 박사의 시신은 고리 버들로
만든 갈색 자루에 들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엘러리는 가느다란 불빛들이 덩
어리를 이루고 있는 방 한가운데 서서 마치 학자처럼 회의를 주관했다. 벽
쪽의 반짝이는 눈빛들이 그를 주시했다.
그럼 신사 숙녀 여러분, 시작하겠습니다. 우린 먼저 이 사건 현장이 어떤
한 가지 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특별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암흑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약간은 평범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여러분이 생각하기 전에 어떤 혼란을 가져
올 수도 있습니다. 이곳은 말 그대로 암흑의 집 입니다. 그리고 이 성스럽
지 못한 방에서 한 남자가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는--희생자
와 저, 그리고 제가 데리고 온 어린아이를 제외하고--듀발 씨의 악마적인
상상력을 즐기기 위해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여섯 명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집을 직접 설계한 듀발 씨의 말에 따르면, 사건이 일어난 시간에 이 집
의 하나밖에 없는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따고 했습
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여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이 하디 박사의 살인범
이란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잠시 술렁임과 한숨 소리가 있었지만 이내 가라앉았다.
엘러리가 꿈을 꾸듯 몽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 이제 어떤 못된 운명이 장난을 놀았는지 살펴 보기로 하지요. 이 비극
적인 암흑 속에는 그것과 연관된 인물이 적어도 세 명은 등장합니다. 라이
스 씨, 이분은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주 존스 씨와 그의 여자 친구
그들은 흑인입니다. 이게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이 사실이 여러분들에게
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입니까?
주주 존스가 으르렁댔다.
난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요, 퀸 선생님.
그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엘러리가 말했다.
게다가 라이스 씨는 타당한 동기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희생자가 그의 눈
을 치료했고, 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그는 시력을 잃었으니까요. 그리고 클
라크 부인에게는 질투심 많은 남편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살해 동
기가 두 가지는 나오는 셈이지요.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
들은 이 범행을 저지를 만큼 결정적이지는 않습니다.
지글러 반장이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뭐가 결정적이란 말이오?
엘러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둠이지요, 반장님. 이 어둠 말입니다. 아마 이 어둠 때문에 혼란을 겪은
사람이 있다면 아마 저 하나 뿐일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찬 기운이 섞여 있었다.
이 방은 완벽하게 캄캄합니다. 전깃불도, 전등도, 랜턴도, 가스등도, 촛불도
없으며 창문 하나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단지 세 개의 문이 이 방 만큼이
나 캄캄한 다른 방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 각각의 문에 표시되어
있는 녹색과 적색 화살표는 야광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는 빛을 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캄캄한 방의 가장 캄캄한 곳에서, 그것도 최소
한 4미터는 떨어진 거리에서 누군가가 보이지도 않는 희생자의 등에 불과
몇 센티미터 간격으로 네 발의 총알을 박아 넣었습니다......
누군가가 숨을 헐떡였다. 지글러 반장이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다시 엘러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사격 솜씨는 정확했습니다. 그게 사고였을
리는 없습니다. 처음에 저는 희생자의 코트에 분명히 화약 자국이 있을 것
이며, 살인자가 하디 박사 바로 뒤에 서서, 그를 만져 보거나 움직이지 못
하게 잡고서, 그의 등에다 총부리를 대고 권총을 쏘았을 것이라고 생각했
습니다. 그러나 검시관께서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전 도대체 불가능한 일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완벽하게 깜깜한 방에서? 그것도 4미터나 떨어진 거
리에서? 살인자가 귀 하나에 의존해 움직임이나 발소리를 듣고 하디 박사
를 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사격 솜씨가 너무나도
정확했습니다. 게다가, 비록 느리기는 했겠지만, 살인자가 노리는 표적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그 점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해답은 살인범이
볼 수 있는 불빛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불이 없습니다.
매튜 라이스가 노래하듯이 말했다.
아주 현명하시군요, 선생.
아니죠, 그건 기본적인 사실이지요, 라이스 씨. 우선 이 방에는 불이 없으
니까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이곳에는 듀발 씨의 진공 청소 시설 덕분에
조그만 부스러기 하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뭔가를 발견
한다면 그것은 용의자 가운데 한 사람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찰은 이 안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손전등을 들고, 타다 남은 성냥개비나 양초 같은 것--하디 박사를
총으로 쏘아 맞힐 수 있는 정도의 빛을 내는 그 어떤 것--을 찾아 이 방을
이 잡듯 뒤졌습니다. 저는 사실을 분석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분석한 여느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제가 무엇을 찾아야 하는 지를 알았습니다. 하지만
빛의 성질을 띤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을 때 저는 당황할 수밖에 없
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있는 여섯 명의 용의자들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내용물까지
전부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나 빛의 성분을 띤 물건은 없었습니다. 성냥개
비 하나만 나왔더라도, 비록 그것이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
을 알고 있었지만,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것은 미리 준비해
놓은 덫이었기 때문입니다. 살인범은 그의 희생자를 이 암흑의 집 으로 유
인했던 게 분명합니다. 그는 이곳에서 살인을 저지를 생각을 하고 있었습
니다. 분명히 그는 예전에 여기 들어온 적이 있을 것이며, 이 안에 불이라
고는 없다는 것까지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미리 빛의
성분을 띤 어떤 것을 준비해 왔을 것입니다. 성냥을 준비할 확률은 거의
없고, 손전등이 분명히 나았겠지요. 하지만 이곳에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
었습니다. 타다 남은 성냥개비조차 없었습니다. 몸에 지니지 않았다면 버린
게 분명할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어디에? 성냥개비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방이나 복도 어느 곳에서도.
엘러리는 담배를 피우느라 잠시 말을 끊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불빛은 희생자 본인의 몸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그럴 리가!
듀발이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어느 바보가 그런 짓을......
물론 일부러 그렇게 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불빛을
내보내고 있었을 걸세. 나는 하디 박사의 시신을 살펴보았네. 그는 어두운
색 옷을 입고 있었고, 야광으로 된 시침이나 분침이 있는 손목시계도 차고
있지 않았네. 하다못해 끽연 도구도 없었네. 그는 분명 금연가였던 거지. 그
러니까, 성냥이나 라이터도 없었고, 손전등도 없었네. 빛을 낼 만한 성질의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살인범이 어떻게 그를 겨냥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
면......
그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남은 가능성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는 거지요.
그게 뭐지......
신사 여러분, 들고 계신 등불과 손전등을 꺼 주시겠습니까?
잠깐 동안 이해할 수 없는 정적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 둘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방이 엘러리가 처음 이 방에 비틀대며 들어왔을 때와 마찬
가지로 완전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엘러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자리를 지켜 주십시오. 아무도 움직이면 안 됩니다.
처음에는 뻣뻣하게 굳어 있는 사람들의 가쁜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엘러리가 피우던 담뱃불이 점차 사그라들더니 마침내 꺼져 버
렸다. 그러자 가볍게 부스럭대는 소리와 날카롭게 딸깍대는 소리가 났다. 사
람들의 놀란 눈앞에서 각설탕만한 거의 직사각형 모양의 희미한 진주색을
띤 불빛이 방을 가로질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빛은 집을 찾아 날아가는
비둘기처럼 일직선으로 돌진했고, 또 하나의 작은 불빛을 만들더니 어딘가
부닥쳤다. 그러자 보시라! 또 하나의 불빛이, 세 번째의 불빛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엘러리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연이 자신의 가장 고집스러운 자식에게 어던 식으로 기적을 보여 주었
는지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인(燐)입니다. 물감 형태를 한 인.
가령, 살인범이 희생자가 이 암흑의 집 에 들어오기 전에...... 아마 사람들
에게 떠밀렸을 때겠지요--그의 코트 뒤에다 이 물감을 칠해 놓았다면, 살
인범은 자신의 범행을 위한 충분한 조명을 확보해 놓은 셈이지요. 살인범
은 완벽한 어둠 속에서 인광만 찾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캄캄하고 4미터나 떨어진 거리라지만, 명사수로서 네 발의 총알은 별로 어
려운 일이 아닌 거지요. 그리고 희생자에 몸에 묻어 있던 인은 총알이 박힌
순간 거의 없어져 버렸겠지요. 설사 조금 남아 있었다 하더라도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덮어 버렸을 것이고...... 그래서 살인범은 어디를 가더라
도 안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주 영리했어요...... 안돼요, 움직이면 안
돼요!
세 번째 불빛이 갑자기 난폭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앞으로 뛰쳐나갔다. 불빛
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더니 녹색 화살표가 있는 문 쪽으로 나아갔다. 우당
탕 쿵쾅 하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싸우는 소리가 났다. 전등불이 미친 듯이
켜지며 서로가 서로를 비췄다. 경찰들은 절망적인 침묵 속에서 안간힘을 쓰
고 있는 한 사내와 싸우고 있는 엘러리를 비추었다. 그들은 바닥에서 뒹굴
고 있었고, 그들 옆에는 화구 가방이 열린 채 놓여 있었다.
지글러 반장이 그들에게로 뛰어가더니 곤봉으로 사내의 머리를 내려쳤다.
사내는 신음 소리를 내며 뒤로 고개를 젖히더니 의식을 잃었다. 그는 화가
아담스였다.
범인이 아담스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요?
잠시 뒤 어느 정도 정돈이 되었을 때 지글러 반장이 물었다. 아담스는 수갑
을 찬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이, 안심이 되거나 놀란 얼굴들
로 그들 주위로 모여들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었지요.
엘러리는 숨을 헐떡이며 옷의 먼지를 털었다.
주나, 이제 그만 잡아당기렴! 난 괜찮아...... 당신이 당신 입으로 직접 말했
잖소, 반장. 당신이 아담스를 발견했을 때 그가 컴컴한 곳에서 더듬대며 나
가는 출구를 찾지 못해 투덜대고 있었다고 말이오. 당연히 그랬겠지! 그는
녹색 화살표를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잇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럴수록 미로 깊숙히 들어 가기만 했지요. 녹색 화살표만 따라갔었
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 녹색 화살표 가운데 어
느 하나만 찾았더라도 그는 출구로 통하는, 속임수라고는 전혀 없는 복도로
곧바로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녹색 화살표를 따라가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는 그 사실에 대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고,
또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녹색 화살표를 따라간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적색 화살표를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아주 간단합니다. 그는 색맹인 것이지요. 그는 사물의 녹색과 적색을 구분
하지 못하는 평범한 증상의 색맹이었습니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는 자신에
게 그런 증상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그는 이 암흑의 집 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곳 안내원에게 들은
분명히 출구로 연결되어 있다는 녹색 화살표에 의존해 시체가 발견되기 전
에 빨리 여기서 도망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지요. 중요한 문제는 그가 자신이 화
가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색맹인 사람이 화가라는 것이 맞아떨어지
지가 않았던 거지요. 자기 꾀에 넘어가 적색 화살표를 잘못 따라갔다는 것
은 자신이 적녹색맹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화구 가방에 들어 있던 풍경화와 바다 그림을 보았고, 그 그림들
이 정상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저는 그 그림들이 그가 그린 그림
이 아니며, 그가 가장을 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화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변장을 하고 있다면 결정적인 용의
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저는 그 빛이 어디서 나왔느냐에 대한 최종적 연역을 종합해 보았
고, 그때 갑자기 모든 해답이 떠올랐습니다. 화구 가방 속의 인광성 물감이
었지요. 그리고 그는 곧바로 하디 박사를 뒤따라 이곳으로 들어왔을 것이고
...... 그 뒤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된 거지요. 그는 자신이 인을 가지고 있다
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위험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화구 가방
을 조사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밝은 곳에서 그것을 열어 볼 것이고, 밝
은 곳에서는 화학 약품인 인 성분이 드러나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게
바로 저것이지요.
그럼 제 남편은......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살인범을 내려다보며 클라크 부인이 질식할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 동기가 뭔가, 친구? 동기가 없잖나! 저 친구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디 박사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듀발이 이의를 제기했다.
동기?
엘러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자넨 이미 그 동기를 알고 있네, 듀발. 사실, 자네도 알다시피......
그는 말을 멈추더니, 갑자기 턱수염을 기른 사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손이 재빨리 뭔가를 낚아챘다. 사내의 얼굴에서 턱수염이 떨어져 나왔
다. 순간 클라크 부인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이 친구는 목소리까지 변조했지. 안됐지만, 이게 당신의 최후요.
클라크 씨!
에이브라함 링컨의 힌트.(엘러리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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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건은 뉴욕 시 북부 변두리 유랄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이미 칠이 다 벗
겨지고 펑퍼짐한 나선형 집의, 이리저리 마구 금이 간 셔터들 뒤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 집은 마치 화려한 1890년대의 속옷만 입은 헤픈 여자를 연상시
켰다.
그 집의 소유자는 한때 부유했던 사람으로 이름이 디캄포였다. 그는 이미 늙
었지만, 그래도 자기 집과는 달리 웅장한 맛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매처
럼 생긴 그의 얼굴은 빅토리아적이라기 보다는 플로렌스적이라고 할 수 있었
는데, 집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운이 다함에 따라 이제 피폐한 모습이었다. 그
러나 피폐하더라도 오만하게 피폐한 모습이었다. 디캄포는 마치 군주처럼 진
홍색 벨벳으로 만든 실내용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비듬이 떨
어져 있었다. 사실 디캄포는 자신을 스스로 군주라고 부를 만한 자격이 있다
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그 말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아름다
운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비앙카였다. 그녀는 유랄리아 국민학교에서 아
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수입만으로 아버지와 자신의 생
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로렌조 산 마르코 보르헤스 루포 디캄포가 이 쇠퇴해 가는 저택
에서 살게 되었는가는 우리의 관심사가 이니다. 하지만 이 날 하비저라는 사
람과 텅스톤이란 사람이 그 집에 오게 된 것은 우리의 관심사이다. 하비저는
시카고에서, 텅스톤은 필라델피아에서 왔다. 그들은 몹시 탐나는 어떤 물건을
사려 왔는데 디캄포가 그것을 팔기 위해 이들을 자기 집으로 부른 것이다. 두
방문객은 고물 수집가들이었다. 하비저는 에이브라함 링컨에 관심이 많았으며,
텅스톤은 에드가 알렌 포우에 관심이 많았다.
링컨 수집가는 나이 든 사람으로 마치 이민 온 과일 장수처럼 보였다. 사실
그는 돈을 잘 벙었기 때문에 한 4백만 달러의 돈쯤은 링컨의 유물을 수집하는
자신의 취미에 마음대로 써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비저와 비슷한 부자인
텅스톤은 시인처럼 홀쭉하고 날랜 몸매에 굶주린 곰같은 사나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몸매와 눈, 이것이 포우의 유물 수집가들 사이의 불꽃 튀기는 경쟁
에서 그를 지켜준 훌륭한 무기였다.
하비저가 입을 열었다.
"디캄포 선생, 우선 당신 편지가 나를 놀라게 했다는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하비저는 주인이 오래된 유명한 술병으로부터 따라준 포도주 맛을 음미하느
라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사실 디캄포는 그들이 오기 전에 그 병에다 값싼 캘
리포니아산 포도주를 채워 넣었었다).
"무엇 때문에 그 책과 문서를 팔 생각을 하셨는지 여쭈어 보아도 되겠습니
까?"
디캄포는 그의 빈약한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링컨이 다른 맥락에서 사용한 말을 여기서 인용하자면, '조용한 과거의 도그
마들은 폭풍우가 치는 현재에는 부적합하다'라는 게 이유지요. 간단히 말해서
배고픈 사람은 자기 피라도 파는 법이라, 이겁니다."
늙은 텅스톤이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혈액형이 맞기만 하다면야. 당신은 이제까지 그 책과 문서를 수집가들이나
역사가들이 손도 못대게 하셨지요. 지금 여기에 가져오셨습니까? 좀 조사를
해보고 싶습니다만."
"소유권을 가진 사람 외에는 아무도 거기에 손을 댈 수 없소."
로렐조 디캄포가 냉랭하게 대답했다. 그는 이제까지 자기가 발견한 그 보물
들을 절대 내놓치 않겠다며, 구두쇠처럼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었다. 그런
데 이제 할 수 없이 팔게 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면서도 취
하는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마치, 의심으로 가득한 늙은 노인이 간신히 금맥을
발견하고는 세상 사람들이 그 위치를 모르도록 비밀 지도를 그려두는 것과 같
은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내가 두 분께 알려드렸듯이 그 책에는 각각 포우와 링컨의 서명이 들어 있
소. 그리고 그 문서는 링컨이 직접 작성한 것이오. 나는 만일 그것이 내가 말
한 대로ㄹ 진본이 아니라면 돈을 되돌려주겠다는 조건하에 그것들을 판매하겠
소. 그래도 마음에 안 드신다면......."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 여기서,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아, 앉으세요, 앉으세요, 디캄포 선생."
하비저가 말했다.
"당신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나는 물건을 보지 않고
사는데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돈을 돌려준다는 보장이 있다면 당신 방식대로
합니다."
텅스톤이 말했다. 로렌조 디캄포가 귿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좋습니다. 그러면 둘 다 사실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이죠! 얼마에 파시겠습니까?"
디캄포가 되물었다. 그러자 하비저가 목을 가다듬었다. 목에는 침이 잔뜩 고
여 있었다.
"만일 그 책과 서류가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디캄포 선생, 당신이 경매
를 주도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5만 달러에서 시작하시겠다구요? 난
그럼 5만 5천 달러를 부르겠습니다."
"5만 6천 달러."
텅스톤이 말했다.
"5만 7천 달러."
하비저가 말했다.
"5만 8천 달러."
"5만 9천 달러."
하비저가 부르는 액수를 듣고, 잠시 멈춘 텅스톤이 이빨을 드러내어 맞섰다.
"6만 달러 내겠소."
하비저도 여기서 입을 다물었다. 디캄포는 기다렸다. 그러나 디캄포는 기적을
기대하지 않았다. 이 두 사람한테는 6만 달러의 다섯 배라 하더라도 지금 그
들이 마시고 잇는 평범한 포도주 만치도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경
매장에서 뼈가 굵어진 전문가들이었다. 이들에게는 그 물건을 얻는냐 못 얻는
냐 하는 문제에 못지않게, 그 가격을 얼마에 정하느냐 하는 점도 재미를 돋구
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궁핍한 군주 디캄포는 하비저의 이같은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텅스톤 선생과 잠시 둘이서만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디캄포는 일어나서 방을 나왔다. 그리고는 한ㄸ는 이탈이라식 정원이었던 잡
초밭에 서서 창문 틈으로 몰래 그들 모습을 훔쳐보았다.
디캄포를 다시 들어오라고 부른 사람은 포우 수집가인 텅스톤이었다.
"하비저 말을 듣고, 우리가 계속 경합을 벌이다가는 터무니없는 가격만 올라
가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디캄포 선생을 재미있게 해드
리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비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내가 텅스톤 선생에게 그 책과 서류에 6만 5천달러를 지불하자고 제안했고,
텅스톤 선생도 동의하셨습니다. 우리 두사람 다 그 돈은 기꺼이 드릴 수 있습
니다. 하지마 ㄴ거기서 한푼도 더 올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디캄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결국 거기서 매듭이 지어지는군. 하지만 난 이해할 수가 없소. 두분이 똑같
은 액수를 부른다면 그 물건은 누가 가지게 되는 것이오?"
텅스톤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디캄포 선생, 우리는 그결정을 당신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이제까지 놀라운 일을 볼 만큼 보아온 디캄포도 이 말에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서야 디캄포는 그 두 부자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정말 재미있는 제안이구료. 나한테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겠소?"
두 사람이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에 디캄포는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디캄포
가 고개를 들자 그의 얼굴에는 여우같은 미소가 번졌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소! 내가 타자를 쳐서 보내드린 문서의 사본을 보셨을
테니 아시겠지만, 링컨은 그 책이 어디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단지 그 감추
어둔 장소에 대한 힌트만 이야기 해 놓았소. 얼마전에 나는 링컨 대통령이 낸
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었소. 나도 링컨 대통령의 힌트에 따라서 책과 문서
를 감추어 두겠소."
"당신 말씀은, 우리둘 가운데 링컨이 낸 문제를 풀수 있는 사람만이, 당신이
책과 문서를 감추어둔 장소도 알아낼 수 있단 뜻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찾는
사람이 그 두가지 모두, 아까 얘기한 가격에 살 수 있다는 뜻입니까?"
"바로 그렇소."
링컨 수집가인 하비저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글쎄.....나는....."
그러자 텅스톤이 눈을 반짝이며 하비저의 말을 가로챘다.
"이봐요, 하비저. 디캄포 선생에게 맡기기로 했으면 그걸로 족하오. 좋습니다,
수락하겠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나한테 시간을 좀 주시오. 사흘 후에 다시 볼까요?"
엘러리는 사무실로 들어오자 가방을 옆에 던져놓고 창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는 사건 때문에 한 일 주일간 사무실을 비웠었다. 아버지인 퀸 경감은 애틀
란틱 시에서 열리는 경찰 회의에 가 있었다.
한숨 돌리고 난 엘러리는 일 주일간 쌓인 우편물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우편
물 중의 하나가 그를 잠시 멈추게 했다. 그것은 등기 항공 우편으로 온 것이
었다. 그리고 나흘 전의 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었다. 봉투 왼쪽 밑에는 빨간
글씨로 '긴급'이라고 쓰여 있었고, 인쇄된 주소는 'L.S.M.B.-R. 디캄포, 뉴욕,
유랄리아, 남구 사서함 69'이었다. 이름의 머리 글자만 잔뜩 나열된 그 이름
위에 '비앙카'라고 손으로 쓴 글시가 적혀 있었다.
봉투를 뜯어보니 값비싼 종이에 여자 글씨로 급하게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
다.
퀸 선생님께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추리 소설 책이 사라졌습니다. 저를 위해 그것을 찾
아주시겠습니까?
기차로 유랄리아 PR역에 오시거나, 비행기로 오셔서 전화를 주시면 제가
모시러 나가겠습니다.
비앙카 디캄포
그리고 또 하나의 노란 봉투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것은 어제 날짜로 되
어 있는 전보였다.
왜 소식이 없습니까? 당신의 도움이 정말 필요합니다.
비앙카 디캄포
전보를 다 읽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장거리 전화였다. 전화에서 저음의 여
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퀸 선생님이세요? 맙소사, 이제야 연락이 닿았군요! 하루 종일 전화를......."
"그동안 사무실을 비웠었습니다. 유랄리아의 비앙카 디캄포 양이신가보죠?
간단히 여쭈어보죠, 디캄포 양.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큄 선생님, 에이브라함 링컨 때문이에요."
엘러리는 깜짝 놀라하며 껄껄 웃었다.
"내가 안 가고는 못 뱃길 사건을 내미시는군요. 사실 나는 링컨에 중독되어
구제 불능이 된 사람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네요. 하여간, 편지
를 보니 책 이야기를 하셨던데요, 디캄포 양. 무슨 책입니까?"
그 저음 목소리가 또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 이런 일이었습니다. 오실 수 있으시죠, 퀸 선생님?"
"가능하면 오늘 밤에라도 가고 싶군요! 가만있자.....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
자 내 차를 타고 가면...... 유랄리아에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비저와 텅스
톤도 그 근처에 있겠죠?"
"물론이죠. 그 분들은 시내 모텔에 묵고 있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도 댁으로 오게끔 해주시죠?"
엘러리는 전화를 끊자마자 서가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쾌락을 위한 살인'이
란 책 한권을 뽑아들었다. 엘러리의 친한 친구 하워드 헤이크라프트가 쓴 추
리 소설의 역사에 대한 책이었다. 엘러리는 찾던 것을 26쪽에서 찾았다.
........ 젋은 윌리암 딘 하웰즈는 미합중국 대통령 지명자에게 다음과 같은 찬
사를 보내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에이브라함 링컨의 정신적 특성은 수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링컨은 에드가 알렌 포우의 이야기와 소묘들의 추상적이고 논리적
인 방법을 좋아했다. 포우의 글에서는 신비스러운 문제가 교모한 분석 과
정을 통해서 일상적 사실로 환원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링컨은 포우의
작품을 한 해도 빼좋치 않고 읽었다고 보인다.
하월즈는 1860년에 출판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선거운동 기록'이란 책에서
위와 같은 말을 하였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그것을 읽고 맞는 말이라고 확인
해 주었다....... 이 예는 아주 주목할 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에이브라함 링컨과
에드가 알렌 포우라는 이 두 위대한 미국인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생
각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엘러리는 파일에서 서류 몇 가기를 꺼내어 가방에 넣은
다음, 아버지인 퀸 경감에게 메모를 남기고 유랄리아 쪽으로 차를 몰았다.
엘러리는 디캄포의 집에 매력을 느꼈다. 마치 포우의 작품에 나오는 집같았
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그것은 비앙카 때문이기도 했다. 비앙카는 북부 이탈
리아가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이었다. 금갈색의 머리카락에 지중해처럼 푸른
눈....... 그렇게 마르지만 않았다면 세계 미인 대회에도 충분히 나갈 수 있는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비앙카는 지금 상중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비운의 공주
같은 모습이었다.
비앙카는 좀 작아 보이는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퀸 선생님, 아버지는 뇌출혈로 돌아가셨어요. 하비저 씨와 텅스톤 씨를 만나
기로 한 전 날 밤에요."
그렇게 로렌조 산 마르코 보르헤스 루포 디캄포는 사랑스러운 딸 비앙카에게
궁핍과 비밀을 남겨놓고 죽은 것이다.
"아버지가 남겨놓으신 것 가운데 가치가 있는 것은 그 책과 문서밖에 없어
요. 그것으로 6만 5천 달러를 얻게 된다면 아버지의 빚도 갚고 저도 새출발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퀸 선생님, 전 그걸 못 찾겠어요. 하비저 씨와 텅스톤
씨도 마찬가지에요. 두 분은 곧 이리로 오실 거예요. 아버지는 그 분들에게 약
속하신 대로 책과 문서를 감추어두셨어요. 그런데 집을 다 뒤져보아도, 도대체
어디다 숨겨 놓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 책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아야기를 해주시죠, 디캄포 양."
"전화로 말씀드렸듯이 그 책은 '1845년이 선물'이라는 이름이래요. 해마다 크
리스마스 때면 나오던 책이라는데, 거기에 에드가 알렌 포우의 '잃어버린 편
지'가 처름 실렸대요."
"케리와 하트가 필라델피아에서 발행한 책 말이군요. 표지가 붉은 색이죠?"
비앙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러리가 말을 이었다.
"아시겠지만 그 '1845년의 선물'의 보통 판본은 50달러 이상 나가지 않습니
다. 디캄포 양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판본이 그렇게 값지싼 까닭은, 디캄포 양
이 말씁하신 대로 거기에 두 사람의 친필 서명이 있기 때문이군요."
"아버지가 그렇게 말씁하셨어요, 퀸 선생님. 제가 그 책을 보여드릴 수 있으
면 좋으련만. 그 책 속표지에는 아주 아름다운 글씨로 에드라 알렌 포우라고
쓰여 있고, 그 포우의 서명 밑에는 에이브라함 링컨이라는 서명이 있어요."
엘러리가 천천히 말했다.
"원래 포우가 가졌던 책이라서 서명을 해 놓았는데, 그것을 다시 링컨이 읽
은 것이라는 이야기군요. 그렇다면 그것을 수집가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판본
이겠군요. 그런데 디캄포양, 그 링컨의 문서라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비앙카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앨러리에게 해주었다.
1865년 봄날의 어느 아침, 링컨은 백악관 이층의 남서쪽 구석에 있는 그의
침실의 장미나무 문을 열고 붉은 카펫이 깔린 홀로 나왔다. 시간은 오전 7시,
링컨으로서는 아주 늦은 시간이었다. 평소에 링컨은 아침 6시면 일을 시작했
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렐조 디캄포가 가선을 재구성해본 바에 따르면) 그날 아침 링컨은
침실에서 한동안 지체했다. 링컨은 평소대로의 시간에 일어나긴 했다. 그러나
그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바로 집무실로 나가는 대신에 둥근 탁자 앞에 놓여
있는 등나무 의자에 앉았다. 링컨은 가스로 켜는 독서용 램프를 켜놓고, 1845
년 연감에 들어 있는 포우의 "잃어버린 편지"를 다시 읽었다. 쌀쌀한 아침이
었다. 날씨는 흐려 있었고, 대통령은 혼자였다. 링컨 부인의 침실로 향하는 문
은 닫혀 있었다.
언제나처럼 포우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은 링컨의 머리 속에 교모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그 생각을 적거 놓으려 하였으나 주면에 종이가 없었다. 링컨
은 주머니에 있던 편지 봉투를 하나 꺼내 내용물은 버리고 볼투의 중간을 잘
라서 커다란 종이 한 장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주소가 적힌 반대 편의 백지에
글을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 봉투가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디캄포 양."
"기다란 편지 봉투예요. 아마 그 속에는 두툼한 편지가 들어 있었던 것 같아
요. 받는 사람 주소에는 백악관이 적혀 있는데, 보내는 사람 주소는 없어요.
그리고 필적을 판독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저희 아버지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실 수 없었어요. 하지낭 그것이 우편으로 배잘되었다는 사실
은 알아냈어요. 봉투에 링컨 초상화를 그린 우표 두 장이 붙어 있었거든요. 그
리고 희미하긴 하지만 분명 우제국 소인도 찍혀 있었고."
"링컨이 그날 아침 그 편지 봉투 안쪽에다 무슨 이야기를 써놓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비앙카는 그녀의 아버지가 링컨이 쓴 내용을 다시 타자로 쳐놓은 종이 한 장
을 엘러리에게 건네주었다. 편지를 읽어내려 가던 엘러리는 자기도 모르는 새
에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1865. 4. 14
포우 씨의 '잃어버린 편지'는 독특한 독창성을 가진 작품이다. 그 단순성은
위대한 작가에게만 가능한 기교이다. 그것은 늘 나에게 놀라움을 불러일으킨
다.
오늘 아침에 그 이야기를 다시 읽다가 나한테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만일
내가 책을 한 권 숨기려 한다면? 바로 이 책을 숨기려 한다면? 그렇다면 어
디가 좋을까? 포우 씨의 이야기에서 편지가 편지들 사이에 숨겨졌듯이, 책도
책들 사이에 숨겨지는 것이 어떨까? 만일 이 책을 도서관에 갖다 놓고 등록
을 하지 않는다면....... 도서관은 의회 도서관이 가장 낫겠지!...... 그러면 이 책
은 거기 놓인 채 한 30년은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포우 씨의 '생각'을 한번 거꾸로 보도록 하자. 만일 책이 책들
사이가 아니라, 책이 놓여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될 수 없는 곳에 놓여
있는다면? (그러면 나는 포우 씨의 예를 따라서 하나의 '추리'를 쓰는 셈이 될
것이다!)
이 '생각'이 나를 기쁘게 하고 있는데, 시간은 벌써 7시다. 오늘 중에 언젠가,
만일 그 욕심쟁이들과 약속들 사이에서 몇분만이라도 한가한 시간을 낼 수 있
다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책을 감추는 장소에 대해서 더 써 볼수 있을 것 같
다.
나도 잊어먹으면 안 돼지. 책을 감춘 장소는 30d. 그곳은
엘러리는 고개를 들었다.
"문서는 여기서 끝납니까?"
"아버지는, 링컨이 이 순간 다시 시계를 보고는 얼른 일어나서 집무실로 갔
을 것이라고 하셨어요. 문장을 다 끝내지도 못한 거죠. 그리고 다시 그것을 이
어서 쓸 시간은 없었던 것이 분명해요."
엘러리는 생각에 잠겼다. 디캄포의 말이 맞는다. 그 성 금요일 아침 에이브라
함 링컨은조끼에 걸린 두툼한 금시계를 만지며 침실문을 나섰을 것이다. 링컨
은 아직 긴장을 풀지 않고 있는 야간 경비병에게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안녕
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하고 홀의 맞은 편에 있는 집무실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때부터 링컨의 바쁜 하루 일정이 시작되었다. 링컨은 부탁을 하러온 군중
하이를 온화한 얼굴로 참을성 있게 뚫고 나갔다. 그리고 그 군중의 대부분은
홀의 카펫 위에서 밤을 새었다. 링컨은 간신히 피신처인 넓은 집무실로 들어
가 공문서들을 읽고, 아침 8시에 가족들과 식사를 했다. 링컨 부인은 저녁 계
획에 대해서 이것저것 이야기했다. 언청이인 12살짜리 아들 태드는 불분명한
발음으로 '아무도 나한테는 같이 가자고 안 그래'하며 투덜거렸다. 막 제대를
하고 돌아온 젊은 아들 로버트 링컨은 전쟁의 영웅인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에
대한 이야기, 최근의 전쟁 상황에 대해 침을 튀겨가며 이야기를 했다. 식사 후
에 링컨은 대통령 집무실로 돌아와 아침 신문들을 훑어보았다.(한때 링컨은
자신은 '결코' 신문을 읽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날은 어디나
좋은 소식만 들어 있는 행복한 시절이었으니까 신문을 보았을 것이다.) 링컨
은 두 개의 서류에 서명을 하고 문간에 있는 경비병을 불러 아침의 첫 방문객
을 들여보내라고 일렀다. 첫 방문객은 대변인인 슈일러 콜팩스였다.(이자는 내
각의 자리 하나를 얻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신중하게 다루러랴 했
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하루가 흘러갔다..... 아침 11시에는 역사적인 내각 회
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그랜트 장군이 직접 참석했다. 그 회의는 오후까지
이어졌다. 2시반쯤에는 링컨 부인과 함께 서둘러 점심을 먹었다. (평균 체중에
서 45 파운드나 모자라는 사나이는 이 날도 그의 평소 점심인 비스켓 한조각,
우유 한잔, 사과 하나만 먹었을까?) 식사 후에 다시 집무실에서 방문객들을
맞이하였다(그 중에는 예정에 없던 낸시 부쉬로드 부인도 끼어 있었다. 그 부
인은 탈출한 노예이자 탈출한 노예의 아내였고, 세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포토맥 부대의 사병인 자기 남편 톰의 월급을 못받고 있다고 훌쩌거렸다. 키
가 큰 대통령은 '당신은 당신 남편의 월급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십시오'라고 말한 다음 그 흑인 여자가 마치 귀족 부인이라도
되는 양 문간까지 배웅해 주었다.). 오후 늦게 4인숭 대형 쌍두마차를 타고 해
군 공창에 갔다가 부인과 함께 돌아왔다. 저녁 8시 5분에 에이브라함 링컨은
백악관 공식 마차에 부인의 뒤를 따라 올라탄 뒤 포드 극장에서 공연되는 연
극 '우리 미국인 사촌'을 보러 갔다. 링컨은 별로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엘러리는 링컨이 그 글을 쓴 날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비앙카 디캄포
는 전문가의 진단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근심스러운 얼굴로 엘러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비저와 텅스톤은 택시를 타고 왔다. 그들은 수평선에서 난파당한 사람들처
럼 열광적으로 엘러리에게 인사를 했다. 엘러리는 그들을 진정시킨 다음에 말
했다.
"내가 들은 바로는, 두 분 다 링컨이 남긴 힌트를 디캄포 씨가 어떻게 해석
했는가 하는 문제를 풀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그 책과 문
서를 찾아내게 되면 두 분 가운데 어느 분이 그것을 갖게 됩니까?"
하비저가 대답했다.
"우리는 6만 5천 달러를 반반씩 부담한 다음에 그것을 공동 소유하기로 하였
습니다."
그러자 텅스톤이 언짢은 듯 말했다.
"원칙적으로는 그런 공동 소유에 반대합니다만, 현실이 현실이니만큼 어쩔수
가 없지요."
하비저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뭐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텅스톤은 예전에 먹이로 점찍어 놓은 새한테 가까이 가는 고양이처럼 디캄포
양 쪽을 바라보았다.
"물론 이제 디캄포 양이 그 책과 문서의 소유자이십니다. 따라서 디캄포 양
의 의사에 따라서는 , 새로운 조건으로 새로 협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디캄포 양은 전혀 밀리지 않고 텅스톤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저는 아버지 생각에 따를꺼예요. 아버지가 거신 조건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그러자 하비저는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히 그러시다면 뭐 어쩔 수 없지요. 우리 둘중의 한 사람이 책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서류를 가지고 있다가, 일 년마다 그것을 바꾼다든가 해
야겠지요."
텅스톤 역시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만이 현 상황에서는 합당한 결론이지요. 하지만 그 책과 서류를 찾기
전까지는 그것마저도 탁상공론이오."
엘러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문제는 그 서류에 나와 있는 30d를 디캄포 씨가 어떻게 해석했냐
하는 것입니다. 30d라...... 참, 디캄포 양, 아니 비앙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 비앙카, 당신 아버지의 타자로 친 종이에는 3과 0과 d가 띄어쓰기 없이
다 붙어 있었던 것 같은데, 원본에도 그렇습니까?"
"네, 그래요."
"음.... 30d라.....d자는 이(day)을 가리키니까 30일이란 뜻이 될 수도 있고......
영국식으로는 돈의 단위인 펜스(pence)의 약자인데.... 신문 부고란에 죽었다
(died)는 말의 약자로도 쓰이고... 비앙카, 당신은 뭐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까?"
"없어요."
"혹시 당신 아버지가 약학에 관심이 있지 않았습니까? 화학? 물리학? 수학?
전기? 소문자 d는 그런 학문들에서 다 약자로 쓰이는데......"
그러나 비앙카는 그 우아한 머리를 옆으로 저을 뿐이었다.
"은행 일은? 은행에서는 소문자 d가 달러(dollars)나 배당금(dividends)의 약
자로 쓰이는데........."
"거의 관심이 없으셨어요."
비앙카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극 일은 어때요? 혹시 아버님이 연극 연출에 관심이 있으시진 않았나요?
무대 연출의 대본에서는 d자가 문(door)의 약자로 쓰이는데.........."
"퀀 선갱님, 저도 사전에서 d가 약자로써 나타내는 말들을 다 찾아보았어요.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아버지의 그 d자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만한 건 없
었습니다."
엘러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타이프로 친 종이가 정확한 것이라면, d자 다음에 점을 찍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약자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순요. 30d....... 그 숫자에 관심을 가져봅시
다. 30이란 숫자가 당신한테 무슨 의미라도 있습니까?"
"네, 있어요."
비앙카가 대답하자 세 남자가 모두 자세를 고쳐 앉았다.
"몇 년 있으면 제 나이가 30이 되지요. 저한텐 무척 큰 의미가 있지만........"
세 남자는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엘러리는 비앙카의 무안함을 달
래주기 위해 놀담을 했다.
"당신 역시 30의 두배가 되는 나이에는 할머니가 되겠지요. 어쨌든 간에....
그 숫자가 당신 아버지의 생활이나 습관과 관련된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요?"
"그런 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요,, 퀸 선생님. 그리고....."
비앙카는 뺨을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텅스톤이 신경질적인 목소리고 끼어들었다.
"하던 이야기나 계속합시다."
"아까와 같은 식으로 말입니다, 비앙카. 내가 30에서 연상되는 것들을 죽 나
열할 테니까, 만일 그 중에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말해줘요. 30명의 전제 군
주.... 혹시 고대 아테네에 관심이 있으셨을까? 30년 전쟁..... 17세기 유럽 역사
에는? 30대 30(thirty all).... 테니스에는? 아니면... 혹시 당신 아버지가 30이
포함된 주소에 산 적이 있으신가요?"
엘러리는 계속 30에서 연상되는 것들을 나열하였으나, 비앙카 디캄포는 그때
마다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엘러리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디캄포 씨가 30d에 띄어쓰기가 없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요. 디캄포 씨는 자의적으로 그것을 3 Od라고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텅스톤이 그 말을 받았다.
"세 개의 Od라고? 도데치 그게 무슨 뜻이요?"
"Od요? Od는 자연 전체를 지배하는 힘을 의미하는데, 바론 폰 라이헨바흐가
1950년엔가 이야기 한 것입니다. Od는 자석이나 수정에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바론에 따르면, 그 Od를 가지고 동물의 자기적 성질이나 최면을 설명할 수 있
다고 하지요. 혹시 아버지가 최면술 같은데 관심을 가지시진 않았나요, 비앙
카? 아니면 초자연적인 일에............"
"전혀 그런 적 없어요."
하비저가 음성을 높였다.
"퀸 선생, 당신은 지금 진지한 거요, 아니면 말장난을 하는거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뭔가 하나 찾아내기 전에는 나도 모르는 일이죠. Od
라..... 이 단어는 접두사와 함께 쓰이기도 하는데... biod, 동물적 생명력이란
뚯이고..... elod, 전기의 힘을 뜻하는 말이고.... 세 개의 Od...그러니까 triod라고
해도 되는데, 이건 삼위 일체의 힘을 뜻하고.... 하비저 씨, 하비저씨를 무시하
는 게 아니고, 단지 말을 만들어보고 있을 뿐입니다... 삼위일체라...... 비앙카,
혹시 아버지가 개인적으로든, 학문적으로든, 혹은 어떤 식으로든 교회와 관련
을 맺으셨나요? 아니라고요? 그것, 참..... Od라고 대문자로 시작하면, 이건 16
세기 이후에 하나님(God)을 조심스럽게 부를 때 쓰는 말이 되는데... 집안에
혹시 성경 있습니까? 왜냐면......."
에러리는 앞으로 나아가다가 갑자기 절대 움직이지 않는 갈력한 물체와 부딪
히기라도 한 것처럼 멈추어버렸다. 나머지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비앙카는 별
뜻없이 링컨의 글을 타자로 옮겨친 종이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비앙카는 그것
을 읽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아무렇게나 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엘러리는 그 종이를 가리키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순수한 발견
의 기쁨으로 가득 차 소리쳤다.
"바로 저거야!"
"뭔데요, 퀸 선생님?"
비앙카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 종이 좀 이리 주세요."
엘러리는 비앙카의 손에서 종이를 뺏듯이 집어들더니 말을 이었다.
"바로 이거야. 여길 좀 보세요. 다른 한편으로, 포우 시의 '생각'을 한번 거꾸
로 음미해 보도록 하자. '거꾸로 보도록 하자!' 이 3Od를 '거꾸로 보도록 합시
다' 내가 금방 비앙카가 들고 있는 것을 거꾸로 보았듯이!"
엘러리는 글씨가 거꾸로 보이도록 사람들한테 종이를 들어 보였다. 사람들은
그 위치에서 3Od를 보았다. 텅스톤이 소리를 질렀다.
"POE!"
엘러리가 빠르게 말했다.
"예, 어색하긴 하지만 그렇게 읽을 수 있겠지요. 따라서 우리는 링컨이 준 힌
트를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책을 감춘 장소는 포우(poe)!'"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후 하비저가 띄엄띄엄 말을 했다.
"포우라...."
텅스톤이 그 말을 받았다.
"포우라고? 디캄포의 서재에는 포우의 책은 두어 권밖에 없습니다. 하비저,
우리가 다 뒤져보지 않았소? 우린 거기 있는 모든 책을 다 뒤져보았습니다."
"디캄포 씨는 공공 도서권에 있는 포우의 책들 사이에 두었을 수도 있지요.
디캄포 양........"
"잠깐만 기다리고 계세요."
비앙카는 빠른 걸으믕로 방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고개를 떨구
고 돌아왔다.
"없어요. 유랄리라에는 공공 도서관이 두 개 있는데 제가 그곳 도서관장 두
분을 다 알거든요. 금방 전화를 해보았더니, 아버지가 들리신 적이 없대요."
엘러리는 손톱을 깨물었다.
"혹시 이 집에 포우의 흉상이 있습니까? 아니면 뭐 책 말고 포우와 관계된
것은?"
"안됐지만 없어요."
"이상하군. 하지만 디캄포 씨가 '책을 감춘 장소는 포우'라고 링컨의 글을 해
석한 것만은 틀림없어. 그러니까 디캄포 씨도 그 책과 서류를 '포우'에 감추었
을 건데........"
엘러리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점차 작아지더니 이윽고 침묵으로 변했다. 엘러
리의 눈꺼풀이 깜박깜박 하였다. 엘러리는 코끝이 빨개지도록 코를 잡아당기
고 죄없는 귀를 잡아당기기도 하였다.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기도 하면서..... 그
러다 갑자기 엘러리의 얼굴이 밝아지면서 자기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앙카, 전화 좀써도 되겠습니까?"
비앙카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엘러리는 달려나갔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엘러리가 현관과 이어진 홀에서 전화를 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엘러리는 2분쯤 후 방으로돌라와 힘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한가지 더요, 비앙카. 그러면 우린 숲에서 빠져나갈 수가 있습니다. 디캄포
씨가 열쇠 꾸러미를 하나 가지고 계셨을 것 같은데요, 비앙카? 그걸 저한테
좀 주시겠습니까?"
비앙카는 나가서 열쇠 상자를 들고 왔다. 두 백만장자한테 그 열쇠 상자는
참 꼴불견으로 보였다. 다 떨어지고 낡아빠진, 모조 가죽으로 만든 상자였다.
하지만 엘러리는 그것이 마치 고분을 발굴하다 발견해낸 귀중한 골동품이라도
되는 듯이 그 열쇠 상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그 상자를 아주 조심스럽게
열어 그 안에 든 것을 과학자처럼 신중하게 살펴보았다. 마침내 엘러리는 그
가운데 한 열쇠를 골랐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그 말만 던지고 엘러리는 밖으로나갔다.
"저 친구가 천재인지, 아니면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정신병자인지 알 수가 없
어."
그러나 하비저와 비앙카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심 둘 다 같은 심
정인 것 같았다.
그들은 장장 20분이나 기다렸다. 21분이 되었을 때 엘러리의 차 소리가 들렸
다. 세 사람 모두 현관에 나가보았다. 엘러리가 걸어들어고 있었다.
엘러리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손에는 빨란 표지의책을 들고 있었다. 그 미소
에는 연민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세 사람 중 누구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당신....... 그책을 찾았군요!"
세사람은 띄엄띄엄 각자 한 마디씩 했다.
"그것은 링컨의 책이 맞소?"
하비저의 물음에 엘러리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자 안으로 들어갈까요> 안에 들어가갸 마음놓고 슬퍼할 수 있을
테니까....."
비앙카와 두 수집가가 자리에 앉자 엘러리가 말했다.
"좋지 않은 소식이 있습니다. 텅스톤 씨, 실제로 디캄포 씨으 lcor을 보신 일
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속표지의 포우의 서명을 지금 한번 보시겠습
니까?"
곰이 발톱을 드러내듯 텅스톤이 긴장했다. 책의 속표지 위쪽에 희미한 잉크
자국이 있었다. 에드가 알렌 포우라는 서명이었다.
곰이 발톱을 오무리듯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텅스톤이 고개를 들었다.
"디캄포는 여기 쓴 서명이 이름을 다 쓴 서명이라고 한 적은 없소. 그냥 '포
우의 서명'이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에드가 알렌 포우라..... 나느 포우가 웨스
트 포인트에 살던 시절 외에는 한 번도 그가 서명을 하면서 자기 가운데 이름
을 쓴 것을 본 적이 없어요! 포우가 이 서명을 아무리 일찍 했다 하더라도 이
1845년판 연감이 나왔을 때야 가능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그 시기는 발라
야, 1844년 가을이 됩니다. 1844년이면 포우는 '알렌'이란 가운데 이름을 약자
로 썼을 것입니다. '에드가 A. 포우'라고 말이오. 어디에나 그런 식으로 서명을
했어요! 그러니 이건 가짜요!"
"맙소사!"
비앙카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포우의 작품에 나오는 르노어만큼이나
창백해져 있었다. 그녀가 엘러리에게 물었다.
"그게 사실이에요, 퀸 선생님?"
슬픈 표정으로 엘러리가 말했다.
"안됐지만 사실입니다. 나는 처음에 당신이 나찬헤 이야기를 해주면서 포우
의 서명에, 가운데 이름 '알렌'이 들어가 있다고 할 때부터 의심스러웠습니다.
만일 포우의 서명이 가짜라면, 책 자체도 포우가 가지고 있던 책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하비저가 신음 소리를 냈다.
"퀸 선생, 포우의 서명 밑에 있는 링컨의 서명을 좀 보시오! 디캄포는 나한테
그것이 에이브라함 링컨이라고 쓰여 있다고 말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공
식 문서가 아닌 경우에 링컨은 늘 자기 이름을 'A. 링컨'이라고 서명했습니다.
퀸 선생, 이것 역시 가짜라고 말하려는 거요?"
엘러리는 풀이 죽은 비앙카를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하비저 시, 나도 디캄포 양으로부터 '에이브라함'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드
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검사해 볼 수 있도록 준비를 해왔습
니다."
엘러리는 가방에 넣어 온 서류들을 꺼내며 말했다.
"이것들이 링컨이 서명한 역사적 문서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들의 복사본
들입니다. 이제 이 추리 소설 책에 있는 링컨의 서명을 트레이싱 용지를 놓고
정확하게 모사해 보겠습니다."
엘러리는 그 책의 링컨 서명을 모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자, 그리고 이것을 진품의 링컨 서명 문서에 있는 링컨의 서명 위에 올려
놓고 비교를 해보겠습니다."
엘러리는 재빠르게 일을 처리해갔다. 세 번째의 비교를 끝내고 나서 엘러리
는 고개를 들었다.
"자, 보십시오. 지금 이 책에서 모사해낸 서명은 노예 해방 선언의 복사본에
있는 링컨의 서명과 조금도 틀리지 않고 딱 맞아 떨어집니다. 진짜라면 이럴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이름을 서명할 때 완전히 똑같이 두 번 쓸수
없는 것입니다. 늘 약간씩의 차이는 있게 마련이지요. 오직 가짜만이 다른 서
명과 완벽하게 똑같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모사한 것이니까요. 그러
므로 이 책 속표지에 있는 '에이브라함 링컨'이라는 서명은 더 생각해볼 나위
동 없이 가짜입니다. 이것은 노예 해방 문서의 서명을 모사해 놓은 것입니다.
이 책은 포우가 소유했던 핵이 아닐 뿐더라, 링컨이 서명한 책도 아닙니다.
따라서 링컨이 소유했던 책도 아니지요. 디캄포 씨가 어떻게 이 책을 손에 넣
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비앙카, 당신 아버지는 사기를 당했던 겁니다."
"불쌍한 아버지.........!"
비앙카는 그저 그 말만 했을 뿐 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비앙카의 교양을 보
여주는 장면이었다.
하비저는 다 닳아빠진 낡은 봉투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존경
하는 링컨 대통령의 친필이 들어 있었다. 하비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게 있으니까."
"그럴까요? 그것을 뒤집어 보십시오, 하비저 씨."
엘러리가 상냥하게 말했다. 그러자 하비저가 고개를 들더니 소리를 질렀다.
"안 돼! 당신은 나한테서 이것마저 빼앗아가려는 거지!"
"뒤집어 보세요."
엘러리는 역시 상냥한 어조로 반복했다. 하비저는 머뭇거리며 엘러리의 말을
따랐다. 엘러리가 물었다.
"뭐가 보입니까?"
"링컨 시대의 진짜 봉투요! 그리고 링컨의 초상화가 그려진 진짜 우표가 두
개 붙어 있소!"
"그렇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살아 있는 미국인의 초상화를 그린 우펴를 한번
도 발행한 적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한테만 그의 얼굴리 그려진 우표가 나올
자격이 주어지게 되지요. 링컨 초상화가 그려진 우펴가 미국에서 판매된 것은
1866년 4월 15일, 즉 링컨이 죽은 지 꼭 1년이 되던 날입니다. 그러니까 생전
의 링컨은 지가 초상화가 그려진 우표가 붙은 봉투를 글 쓸 종이로 사용할 수
가 없겠지요. 따라서 그 문서도 가짜입니다. 정말 안됐습니다, 비앙카."
그러나 믿을 수 없게도 비앙카 디캄포는 얼굴에 미소를 짓더니 이탈리아어로
말했다.
"괜찮아요, 선생님."
엘러리는 그녀 때문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 수집가 가운데 하비저는 충
격을 받아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텅스톤은 억지로 힘을 내어 입을 열었다. 그
러나 텅스톤은 억지로 힘을 내어 입을 열었다.
"도데체 디캄포는 어디에다 이 책을 숨겨 놓았었소, 퀸? 그리고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았소."
엘러리는 어서 그 두사람을 보내 비앙카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 빠르게 설명
을 했다.
"나는 디캄포가 링컨의, 아니 어떤 사기꾼이 만들어낸 힌트를 poe라고 읽었
다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감춘 장소는 포우'라는 말로는 그 이상 전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p,o,e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았지요. 만일 이 세 글자가 포우
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뜻할까? 그때 나는 비앙카, 당신이 내게
보낸 편지가 떠올랐습니다. 당신은 아버지의 봉투를 사용했는데 거기에는 주
소가 나와 있었습니다. 뉴욕, 유랄리아, 남구, 사서함 69(Post Pffice Box 69,
Southern District, Eulalia, N. Y.)라고 되어 있었지요. 유랄리아에 만일 남구
우체국이 있다면, 다른 구에도 우체국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인 일입
니다. 예를 들어 동구 우체국(Post Office Eastern)그 머릿자를 따볼까요?
P.O.E.가 됩니다."
"포우군요!"
비앙카가 소리쳤다.
"텅스톤 씨의 질문에 계속 답을 하지요. 나는 중앙우체국에 전화를 걸어 동
구 우체국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치를 물은 다
음 여기로 와서 디캄포 씨의 열쇠 상자에서 사서함 열쇠를 찾았던 겁니다. 그
리고는 동구 우체국으로 가서 디캄포 씨가 준비해 놓은 사서함 상자를 열었습
니다. 거기 책이 있었습니다."
엘러리는 체념하는 투로 덧붙였다.
"그건 그걸로 끝난 일입니다."
"그건 그걸로 끝난 일이에요."
비앙카가 두 수집가를 배웅하고 돌아와서 말했다.
"우유병이 빈 걸 가지고 울지는 않을 거예요, 팽개쳐버리지요, 퀸 선생님. 어
떻게 해서든지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빚들을 정이해 보도록 하죠, 뭐. 지금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아버지가 그 서명들과 문서가 가짜라는 것을
모르고 돌아가져서 다행이라는 거예요. 언젠가는 전문가들이 밝여낼 일이잖아
요?"
"비앙카, 난 아직도 당신 우유병에 우유가 좀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무슨 말씀이세요?"
엘러리는 가짜 링컨의 봉투를 들었다.
"당신은 나한테 이 봉투를 정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어요. 당신이 말한 것
은 우체국 소인이 찍힌 링컨 초상화 우표가 두 개 붙어 있다는 것뿐이었지
요."
"그렇지 않나요?"
"어린 시절을 재미없게 보냈군요. 아니, 여자 아이들은 뭘 수집하질 않던가
요? 어쨌든, 이 '소인이 찍힌 링컨 초상화 우표 두 개'를 잘 살펴보면, 이것이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첫째로 이것은 두 개의 별도의
우표가 아닙니다. 실제로는 한 쌍이지요. 즉 양쪽 우표의 가로면이 서로 맞아
떨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이 붕투의 우표를 좀 봐요."
비앙카의 파란 눈이 커졌다.
"거꾸로 되어 있네요, 그렇죠?"
"그래요, 거꾸로 되어 있어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한쌍이라도 각각 그 네면
의 가장자리 우표를 찢기 쉽도록 뚫어 놓은 구멍이 나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 두 우표가 서러 만나는 면에는 그런 구멍이 없지요?
비앙카,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이 붕투를 만든 사기꾼이 링컨
시대의 봉투를 만든다고 하면서도 모르공 었던 것은, 바로 우포 수집가들이
말하는 이중의 인쇄 실수라는 것입니다. 가로 면의 가장자리에 구멍이 안 뚫
려 있는 실수가 그 하나, 한 쪽이 거꾸로 인쇄된 실수가 또 하나, 이 둘을 합
쳐서 이중의 실수라고 하는 거지요. 이것은 1866년의 15센트짜리 검정색의 링
컨 초상화 우표인데, 이제까지 링컨의 초상화가 그려진 우표 가운데 이런 이
중 인쇄이 실수 우표가 있다는 이야긴 들어본 적이 없어요. 따라서 비앙카, 당
신은 이제 미국 우표 수집에서 가장 진귀한, 그리고 가장 값어치가 있는 우표
의 소유주가 된 겁입니다."
세상은 남의 일에 신경도 쓰지 않고, 또 남의 일을 오래 기억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런 세상의 관례도 비앙카 디캄포만은 비켜가고 있었다.
용 조각 문버팀쇠의 비밀
- Written By Ellery Queen
신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고 늘상 얘기하는 메리벨 양은 그 정력적인
콘트랄토(Contralto,소프라노와 테너 중간의 여성 최저음; 옮긴이) 목소리로,
가능한 신을 돕는 것이 좋을거라고 조심스레 덧붙여 놓고도, 꺾일줄 모르는
신앙심으로 또 한 번 자신의 말을 확인했다.
그럼 당신은 신을 도울 수 있습니까?
엘러리 퀸 선생이 조금은 반발조로 물었다. 메리벨양의 알아듣지도 못할 이
상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에는 조금 불쾌한 시간에 느닷없이 주나에게
침대에서 끌려나온 탓도 있었지만, 그는 소문난 이교도였던 것이다. 모르페
우스(Morpheus, 꿈의 신; 옮긴이)는 여전히 그를 향해 애타게 손짓하고 있
었고, 엘러리는 이 건장하고 풍만한 육체를 가진 젊은 아가씨가-실제로 여
자는 코너코피아(Cornucopia,어린 제우스 신에게 젖을 먹인 염소의 뿔로, 그
속에 과일, 곡식, 꽃 따위를 가득 담은 형태로 표현되는 풍요의 상징:옮긴이)
처럼 풍요롭고 건강해 보였다- 단지 자신에게 설교를 할 목적으로 온 것이
라면 단호히 돌려보내고 다시 잠자리에 들 작정이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느냐고요?
메리벨양이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도울 수 있죠!
여자는 한 번 더 자신의 말을 확인하며 모자를 벗었다. 무슨 수프 접시처
럼 보이는 그 모자가 예쁜 디자인이 아니라는 것 말고는, 엘러리는 그 모자
에서 어떤 특이한 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자를 보며 짜증
스레 눈을 껌벅였다.
이것보세요!
여자가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순간 엘러리는 여자가 엉뚱하게 기도를
올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여자는 그 긴손가락을 잽싸게 위로
올리더니 자신의 왼쪽 과자놀이 부근을 덮고 있는 줄그스레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여자의 황갈색 머리카락 밑에 상한 고기 빛깔을 띤, 크기와 모양
이 비둘기 알만한 혹이 나 있었다.
그가 몸을 꼿꼿이 세우며 큰 소리로 물었다.
아니, 어쩌다 그런 끔찍한 혹이 생겼습니까?
메리벨양은 애써 아픔을 참으며 머리를 원래대로 해 놓고, 그 위에 다시
그 수프 접시를 뒤집어 썼다.
모르겠어요.
모른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메리벨 양은 그 긴다리를 하나로 꼬며 담뱃불을 붙였다.
이제 두통은 거의 가셨어요. 계속 냉찜질을 했더니만 냉찜질 요령 아세
요? 혹을 가라앉히느라 밤새 한숨도 못 잤지 뭐예요. 새벽 한 시에 보셨어
야 하는 건데! 마치 누가 제 입에다 자전거 펌프를 꽃아두고는 깜빡 잊고
그냥 가 버린 것 같지 뭐예요.
엘러리는 턱을 긁적거렸다.
실수로 그런 건 아니겠지요? 전 아시다시피 의사가 아니라......
메리벨 양이 그의 말을 잘랐다.
제게 필요한 사람은 탐정이에요.
하지만 대체 어떻게......
트위드 천 옷 속에 든 여자의 넓은 어깨가 으쓱했다.
이건 중요하지가 않아요, 퀸 선생님. 그러니까 제가 머리를 얻어맞은 것
말예요. 보시다시피, 저는 힘이 엄청나게 세요. 그리고 6년째 정규 간호사로
일하고 있지만, 이 백합처럼 흰 피부에 긁힘이나 타박상이 없었던 날은 하
루도 없어요. 심지어 제 정강이를 걷어차면서 희열을 느끼는 환자를 만난
적도 있는걸요.
여자는 한숨을 내귀었다. 눈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번득였고, 입술은 살짝
다물려져 있었다.
이건 뭔가 달라요, 아시겠어요? 뭔가...... 이상하다고요.
짧은 침묵이 퀸의 거실을 휩쓸고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엘러리는 뭔가 피
부에 기어오르는 듯한 께름칙한 느낌이 들었다. 메리벨양의 깊숙하니 가라
앉은 목소리에는 납골당에서 흘러나오는 공허한 신음 소리를 연상시키는 무
엇인가가 있었다.
이상해요?
위안삼아 담배 케이스로 손을 뻗으며 엘러리가 물었다.
이상해요. 온 몸의 털이 다 곤두서는 느낌이에요. 그 집에 가면 선생님도
그렇게 느끼실거예요. 전 예민한 여자가 아녜요, 퀸 선생님. 만약 제가 그런
걸 겁내는 여자였다면, 벌써 몇 주 전에 그 일을 그만뒀을 거라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엘러리는 여자의 차분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제 아무리 간 큰 유령이라도
이 여자와는 사귀기 힘들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태연하게 물었다.
설마 지금 아가씨가 일하고 있는 집에서 유령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슬쩍
돌려서 얘기하는 건 아니겠지요?
여자가 코방귀를 뀌었다.
유령이라뇨! 전 그런 터무니 없는 것들은 믿지 않아요, 퀸 선생님. 선생님
은 지금 절 놀리시느라......
메리벨 양, 정말 머리가 좋군요!
게다가 전 사람의 머리에 혹을 나게 하는 유령이 있다는 얘기는 더더욱
들어보지 못했어요.
아주 훌륭한 생각입니다.
이건 그런 것과는 달라요.
메리벨 양은 생각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요. 그냥 마치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 같
은데, 어디서 그런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르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듯한
느낌...... 도대체 그게 뭘까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예요.
엘러리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젠 불확실한 점은 분명히 없어졌군요.:
그는 여자의 수프 접시를 흘낏 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아가씨가 걱정하던 그 어떤 것이 아가씨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뜻
인가요?
메리벨 양의 침착하던 두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퀸 선생님, 아무도 절 공격하지 않았는걸요!
지금 뭐라고 하셨지요?
엘러리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제 말은 제가 공격을 받았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게 고의가 아니 었다는
것만은 분명해요, 그냥 우연히 제가 방해를 한 거겠죠.
뭘 말입니까?
엘러리가 짜증스레 눈을 감으며 물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제가 기분나쁘다는 게 바로 그 점이에요.
엘러리는 앓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자, 자, 메리벨 양, 이제 우리 정리를 해 봅시다. 솔직히 말해서, 난 갈피를
잡지 못하겠어요. 그렇다면 여긴 왜 온거요? 대체 무슨 사건이 일어났기
에......
메리벨 양이 큰 소리로 활기차게 말했다.
있잖아요. 가기와 씨는 유난히 키가 작은 사람인데, 얼마나 무력한지 혼자
서는 아무것도 하지를 못해요. 그 불쌍한 노인네가 정말 안됐지 뭐예요. 무
슨 동물이 얽혀있는 듯한 그 작도 흉측스러운 문 버팀쇠를 누가 훔쳐갔다면
글쎄요, 이 정도면 누군가를 의심하기에 충분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여자는 자신의 뛰어난 언변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았느냐는 듯 의기양양
한 웃음을 보이며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소독약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손수건으로 입을 눌러 닦았다.
엘러리는 자신이 말할 준비가 됐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담배를 네 번이나
연거푸 빨아댔다.
지금 문버팀쇠라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틀림없어요. 문을 열어 놓을 때 바닥에 놓고 괴는 그런 것 말예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걸 도둑맞았다고 했습니까?
글쎄, 그게 없어졌지 뭐예요. 어젯밤 제가 머리를 얻어맞기 전까지는 분명
히 거기 있었어요. 서재 문 바로 옆에 있는 걸 제 두 눈으로 직접 보았는
걸요. 이건 거짓말이 아녜요, 선생님. 아무도 그 물건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
만......
엘러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믿을 수가 없군. 문 버팀쇠. 좀도둑 치고는 제법 취미가 고상한 걸! 흐음...
동물이라! 뭔가 얽혀 있는 것 같다고 말씀 하셨지요? 죄송하지만, 지금 아가
씨가 한 얘기로는 어떤 동물인지 감을 잡지를 못하겠군요.
뱀처럼 생긴 괴물이에요. 그런게 집안 곳곳에 있어요. 아마 그걸 사람들은
용이라고 부를거예요. 환각 상태에서 그걸 봤다는 사람은 있어도 실제로 그
걸 봤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어요.
엘러리는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해가 가는군요. 가기와라는 그 늙은 신사분...... 그 사람이 지금 아
가씨가 돌보고 있다는 환자인가요?
메리벨 양이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고개를 끄덕이며 밝게 말했다.
맞아요. 만성 신장 질환이었어요. 종합 병원의 서터 박사님이 두어달 전에
가기와 씨의 신장 하나를 절개했고, 그 가엾은 양반은 이제 막 회복 단계로
들어서고 있어요. 워낙 나이 드신 분이라 지금 살아서 말을 하고 있다는 것
만도 놀라운 일이죠. 얼마나 위험 한 수술이었는지 서터 박사님은 할 수 없
이......
전문적인 사항은 얘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메리벨 양. 이제 알 것 같으니
까요. 물론, 신장을 떼내고 회복단계에 있다는 그 환자는 일본 사람이겠지
요?
그래요, 전 일본 환자는 처음이었어요.
엘러리가 껄껄대며 웃었다.
아가씨는 꼭 첫아이를 낳기 전에 엄마가 된다는 기분에 들떠 있는 젊은
아가씨처럼 말하는군요. 그러니까, 메리벨 양, 당신의 그 일본 환자와 이상
하게 생겼다는 문버팀쇠 그리고 당신의 그 예쁜 머리에 생긴 혹이 제 관심
을 몹시 끄는군요. 잠깐만 기다려 주신다면, 옷을 갈아입고 당신과 함께 탐
색 여행을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기 관한 모든 얘기는 가는 길에
차근차근 듣도록 하지요.
엘러리의 볼품없고 기름만 많이 먹는 듀센버그 안에서 메리벨 양은 몇 킬
로미터 앞쪽의 시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숨을 힘차게 한 번 들이마시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메리벨 간호사는 서터 박사의 추천으로 웨스트 체스터
의 저택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일본 노신사 지토 가기와씨의 간호를 맡
았었다. 여자는 그 집- 메리벨 양은 그 아름답고 오래 된 집이 몇 에이커도
넘게 꾸불꾸불 뻗어 있어, 뒤쪽이 사운드 해(海)의 물속에 박힌 돌기둥 위에
얹혀 있다고 묘사했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일종의 불안감과도 같은 극도
의 짜증과 안달로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 원인이 뭔지는 여자 자신도
정확히 알지를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집안과 밖의 너무도 대조적인 분위기
-여자는 그 집이 외관상으로는 식민지 시대풍의 건축양식이지만, 안으로 들
어가면 특이한 외제 가구들과 도자기류, 그림들 그리고 여러 가지 물건들로
가득한 동양의 박물관 같다고 말했다-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심지어는 냄새까지도 이국적이었어요. 아주 달착지근한 냄새가......
여자가 얼굴을 예쁘게 찡그리며 설명했다.
늙은이들의 몸에서 나는 악취?
엘러리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그는 이미 버릇처럼 굳어 버린, 위험천만한
속도로 차를 운전하랴 여자의 얘기를 들으랴 정신이 없었다.
우린 손으로 만지거나 눈으로 보지 못하는 불가해한 것들에 대해 귀에 의
존하려는 경향이 있지요, 메리벨 양. 혹시 단순한 향내가 아닐까요?
메리벨 양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여자는 자신이 느낌에 대해 민
감하기 때문에 조금은 영적인 작용을 받기 쉬운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리
고는 다시 어쩌면 단순히 그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고 계속해 말했다. 그
사람들은, 신께서는 알고 계시겠지만, 레티샤 갤런트만 빼고는 모두가 겉으
로 보기에는 좋은 사람들 같았다고 여자는 경건하게 말했던 것이다. 가기와
씨는 동양의 골동품을 수입하는 수입상으로, 엄청난 부자였다. 그는 40년 넘
게 미국에 살고 있었고, 거의 미국 사람이 다 되어 있었다. 실제 그는 미국
이혼녀와 결혼했었고, 그 이혼녀는 자신의 동양인 남편에게 수많은 아름다
운 추억과 미식 축구 선수처럼 덩치 큰 금발머리 아들 그리고 깐깐하고 고
집 센 독신 여동생을 남기고 결국은 죽고 말았다. 죽은 어머니의 처녀 적
이름인 갤런트를 그대로 쓰고 있는 가기와 씨의 의붓아들 빌은 늙고 키 작
은 동양인 의붓아버지를 몹시 좋아했으며, 메리벨 양의 말에 따르면, 지난
몇 년 동안 실제적으로 그 일본 노인의 사업을 경영하기도 했다고 했다.
빌의 이모인 레티샤 갤런트에 대해 말하자면, 그 여자는 소위 이교도의 은
혜-자신의 표현에 따르자면- 속으로 내던져진 자신의 잔인한 운명을 드러내
놀고 슬퍼하며,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그 착한 사람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
할 경멸과 신랄한 냉대로 대해 식구들 모두가 끔찍하게 생각했다고 메리벨
양은 그 튼튼한 이빨을 딱딱대며 말했다.
이교도라......
엘러리가 듀센버그를 펠럼 고속도로로 몰고 들어가며 생각 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메리벨 양. 이국적 분위기라는 것은 일반적으
로 우리에게 불쾌한 느낌을 주니까요...... 그런데, 그 문버팀쇠가 값나가는
물건입니까?
그렇게 평범한 물건을 도둑맞았다는 사실이 그의 뇌세포를 갉아 먹고 있었
던 것이다.
오, 아녜요. 그냥 몇 달러 짜리예요. 예전에 가기와씨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메리벨 양은 그 튼튼한 팔로 문버팀쇠를 일격에 쓸어내 버리고는 초롱초롱
빛나는 두 눈으로 불안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가면서 더욱 더 극적인 이
야기를 펼쳐 나갔다.
어젯밤 그녀는 자기가 돌보는 늙은 화자를 저택뒤의 이층 침실에 눕혀 놓
고, 그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나서 - 그것으로 여자의 그날 임무
는 끝났다 - 노신사의 서재와 붙어있는 아래층 서고로 내려가 한 시간동안
조용히 책을 읽었다. 여자는 집이 너무도 조용해서 벽난로 선반 위의 조그
만 일제 시계 바늘이 똑딱대는 소리가 무척 크게 들렸다고 상기했다. 저녁
식사 뒤로 여자는 환자를 돌보기에 바빠 다른 식구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
르고 있었다. 11시가 넘은 시각이라 다들 자고 있을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 메리벨 양의 두 눈은 더 이상 차분하지가 않았다. 뭔가 기분 나쁜 듯
한, 그러면서도 흥분된 빛을 띄고 있었다.
여자가 나지막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긴 정말 아늑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제 왼
쪽 어깨 너머에 등불을 켜 놓고 <백인 여자>라는 책을 읽고 있었어요. 환
자를 돌보다 그 환자의 비서와 사랑에 빠진 젊고 아름다운 간호원의 이야기
인데, 여하튼 그러고 있었어요.>
여자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잽싸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싹한 느낌이 들지 뭐겠어요. 그냥...... 오싹했어요. 책 때
문에 그랬던 건 절대 아녜요. 그 책은 정말 재미있었어요, 퀸 선생님. 시계
는 계속 똑딱대며 가고 있었고, 집 뒤편 아래쪽 돌기둥에서는 철썩대는 물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런데 갑자기 제 몸이 떨리기 시작했어요. 왜 그럤는지
는 저도 몰라요. 그냥 온몸이 으스스했어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어요. 서재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기는 했는데, 거기는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전...... 조금 이상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죠. 그 때
무슨 소리가 들리지 뭐예요!
그게 무슨 소리였습니까?
엘러리가 참을성있게 물었다.
전 정말 모르겠어요.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뭔가 주르르 미끄
러지는 듯한, 그러니까......
여자는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말을 뱉었다.
오, 웃으시면 안돼요, 퀸 선생님. 하지만 그건 뱀 소리 같았어요!
엘러리는 웃지 않았다. 머케덤 도로(잡석을 여러 겹으로 깔아 만든 포장도
로:옮긴이) 위에서 용들이 춤을 추고 있는 듯 했다.
그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용인지도 모르지요. 용이 소리를 낸다고 생각해 봐요. 그렇지 않습
니까, 메리벨 양? 그런데, 혹시 라디오에서 그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습
니까? 물을 담은 유리잔에 아스피린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아름다운 소녀가
바다로 뛰어드는 소리로 바뀌지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상상력이
란...... 그런데, 그 이상한 소리가 어디서 났습니까?
가기와 씨의 서재. 어둠 속에서요.
이제 메리벨 양의 분홍색 피부는 조금 전보다 더 하얘져 있었고, 두 눈에
는 온전한 이성으로는 가라 앉힐 수 없는 희미한 공포가 번득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별별 희한한 생각이 다 나는 게 견딜 수가 있어야죠. 저는 거
길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에 의자에서 일어났어요. 그런데...... 갑자기 서재 문
이 세게 닫히지 뭐예요!
엘러리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물었다.
저런, 그런데도 아가씨는 문을 열고 거길 살펴 보았나요?
메리벨 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어리석었죠. 정말 무모했어요. 그곳에 위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전
바보같이 문을 열었고, 멍청하게 안을 들여다 보았죠. 그 때 뭔가가 제 머리
를 쳤어요. 진짜 별이 보이더군요, 퀸 선생님.
여자가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공허한, 절망적인 웃음이었다.
여자의 눈이 안식을 구하듯 엘러리 쪽으로 돌아왔다. 에럴 리가 나직이 대
꾸했다.
정말 용기가 대단하군요, 메리벨 양. 그리고요?
그들은 우편물 수송도로로 접어들었고, 이제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한 시간정도 의식을 잃었던가 봐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문지방 위
에 누워있지 뭐예요. 서고와 서재 복판에요. 서재는 여전히 캄캄했어요. 달
라진 것도 없고 전 서재 불을 켜고 주위를 둘러보았죠, 하지만 그대로였어
요. 문버팀쇠만 빼 놓고요. 그게 없어졌더라구요, 그때서야 문이 왜 그렇게
세게 닫혔는지 이해가 가더군요. 우습죠? ...... 그리고 저는 밤새 혹을 가라
앉히며 시간을 보내야 했죠.
그럼, 간밤에 있었던 일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나요?
안했죠.
여자는 찡그린 얼굴로 차창 밖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그걸 말해야 될지 않아야 될지 알 수가 없었어요. 혹시 그 집에 누군가.....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누군가 있다 하더라도, 제가 어쩌다 그런 일
을 당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그냥 내버려 두세요. 사실 전 아무것도 모
르는 걸요.
엘러리는 말이 없었다. 그러자 다시 여자가 말했다.
오늘 아침엔 사람들이 전부 똑같이 보이더군요.
메리벨 양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제가 쉬는 날이예요.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이렇게 시내
로 나올 수 있었던 거죠. 누가 그런 일에 신경을 쓰겠어요! 저만 어리석어
보일 뿐이죠. 그렇지 않은가요, 퀸 선생님?
바로 그 점이 제 관심을 끈단 말입니다. 여기서 돌아야죠?
놀란 눈을 한 하녀가 현관 문을 열고 나와 그들을 고상한 분위기의 응접실
로 안내했을 때 엘러리 퀸 선생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
나는 이 집이 그가 지금까지 보아 온 집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이 집에 뭔가 이상하게 잘못된 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
느낌은 대담하게 비치된, 특색있는 동양식 가재도구들에서 오는 것들이었다.
동양식의 현란한 기교를 써서 화려하고 부드럽게 짠, 보풀이 무성한 마룻바
닥 깔개, 자개를 입힌 티크 탁자, 천장에 매달린 탑 모양의 조그만 등불, 이
국의 정서를 느끼게 하는 수많은 국화 다발들, 갖가지 색깔로 여러마리의
용들을 수놓은 비단 장막. 두 번째 느낌이 그를 괴롭혔다. 어쩌면 그것은 하
녀의 창백하니 겁먹은 얼굴 때문이거나 코를 찌르는 듯한 향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공기 속에 묵직하게 배어 있는 역겨울 정도로 달착지근한 냄새-이
미 메리벨 양이 묘사한 바 있지만-가 그의 오감을 괴롭히며, 그로 하여금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
게 했다.
메리벨 양!
남자의 큰 목소리에 엘러리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홀쭉한 턱에 지적인 눈
을 가진 큰 키의 청년 하나가 메리벨 양이 말한 서고로 통하는 문간쪽에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여자 쪽으로 몸을 돌리던 엘러리는 메
리밸 양의 두 뺨이 불타듯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메리벨 양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쿠퍼씨. 제 친구 엘러리 퀸 선생님을 소개하죠. 오는 길에 우
연히 만났는데......
두 사람은 엘러리의 우연찮은 방문을 설명하기 위해 미리 입을 맞춰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결코 대접받을 운명이 못 되는 듯 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청년이 엘러리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엎어질 듯 두 사람 쪽으로 다가오더니 메리벨 양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
자 여자의 두 뺨이 조금 전보다 더 붉게 물들었다.
메리벨 양, 대체 지토 어른은 어디 계시죠?
가기와씨요? 저기, 이층 그분 침실에......
안계세요. 없어졌다고요!
없어져요?
메리벨 양은 입을 쩍 벌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젯밤 제가 직접 침대에 눕혀 드린 걸요! 오늘 아침에도 제가 나가기 전
에 잠깐 그 방을 들여다봤는데, 그때까지도 주무시고.
아뇨, 그분이 아니었어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 거겠죠. 베개며 옷가지로
사람처럼 꾸미고 침대 시트로 덮어놓았는데, 당신은 그걸 본 모양이죠.
쿠퍼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왔다갔다했다.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단 말씀이야.
엘러리가 공손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이런 일에 조금 경험이 있습니다.
젊은 사내가 멈춰서며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다시 엘러리가 말했다.
가기와 씨는 몹시 연로하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상적 인 상태
가 아닐 수도 있다고 봐야지요. 그분이 여러분 모두에게 약간은 노망기 섞
인 장난을 치고 있는게 아닐까요?
맙소사, 아녜요! 그분은 위피트(영국산의 날쌘 경주견:옮긴이)만큼이나 예
리하신 분이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은 어린애처럼 그런 유치한 짓을 좋아하
지 않아요. 이건 무슨 일인가 생긴 거요. 틀림없어요, 퀸 씨...... 퀸!
갑자기 쿠퍼는 엘러리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맙소사 들은 적이 있는 이름......
메리벵 양이 풀죽은 목소리로 그의 말을 가로챘다.
퀸 선생님은 탐정이세요.
맞아! 이제 기억이 나. 메리 벨 양, 그럼 당신은......
청년이 갑자기 긴장을 한 채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의혹에 찬 눈길을
받은 여자의 얼굴이 또 한 번 빨개졌다. 그러자 다시 청년이 말했다.
메리벨 양, 당신은 뭔가 알고 있군요!
엘러리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아주 조금 알고 있을 뿐이지요. 메리벨 양이 대강 얘기해 주었는데. 무척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당신은 가기와 씨의 문버팀쇠가 없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쿠퍼씨?
문버팀쇠...... 아, 그분 서재에 있는 그 이상한 괴물 모양의 물건 말이군요.
그럴 리가 있나요. 어젯밤까지도 있었는데......
메리벨 양이 울부짖듯 말했다.
오, 그랬어요! 그런데...... 누군가 제 머리를 쳤어요, 쿠, 쿠퍼씨. 그리고 그
걸 가, 가져갔어요.
청년의 얼굴이 하얘졌다.
무슨 소리요, 메리벨 양? 그건...... 그렇게 흉측한 걸! 다쳤다고요?
오, 쿠퍼씨......
엘러리가 단호한 말투로 나섰다.
자, 자 눈물은 거두세요. 그런데 쿠퍼씨. 이 이상한 방정식에서 당신은 어
떤 인수 역할을 맡고 있지요? 메리벨 양은 이 문제를 얘기하면서 당신 이름
은 언급하지 않더군요.
메리벨 양의 얼굴이 또 한 번 확실하게 붉어졌다. 엘러리는 날카롭기 그지
없는 눈길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메리벨 양이 환자의 비서와 사랑에 빠진
젊고 아름다운 간호원의 사랑 얘기를 읽고 있었다는 생각이 갑자기 그의 머
리를 스쳤다.
쿠퍼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가기와 씨의 비서입니다. 이것보세요, 그 이상하게 생긴 문버팀쇠가
가기와씨가 사라진 것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겁니까?
엘러리가 대답했다.
그게 바로 제가 알아보려는 것입니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그 틈을 타 메리벨 양이 엘러리에게 자신의 비밀을
지켜 달라는 듯 간절한 눈길을 보냈다.
다른 건 없어진 게 없습니까?
엘러리가 물었다.
그때 서고 문간 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지요, 젊은 양반? 하지만, 찬양하라, 이교도가 사라졌
네. 가방도 짐도 모두 사라졌네. 정말이지, 속이 다 후련해. 그 능구렁이 같
은 황색 악마가 좋지 않게 끝날거라고 내가 벌 써 몇번이나 얘기했었지.
엘러리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레티샤 갤런트 양, 맞지요?
메리벨 양과 쿠퍼 씨가 잔뜩 긴장한 채 표정이 굳어지는 것으로 보아 엘러
리는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때 여자의 뒤에서 남자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하세요, 레티 이모, 제발!
여자가 에어데일 종의 개처럼 코방귀를 뀌며 그 기다란 치맛자락을 옆으로
홱 치켜올렸다. 빌 갤런트는 붉은 얼굴에 큰 몸집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는
밤새 잠을 한숨도 못 잔 사람처럼 두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고, 옷은
풀기라고는 없이 온통 구김이 가 있었다. 그의 이모는 실제로 보니, 메리벨
양이 묘사한 그대로였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마른
여자는 고래뼈와 질긴 고무 그리고 심술로 뭉쳐 놓은 듯 했다. 조금은 광기
가 비치는 눈에 전전(戰前)에 한창 유행하던 드레스를 입은 오십대의 키 큰
마녀라고 하는 게 차라리 옳을 듯했다. 엘러리는 여자의 혀가 뱀의 그것처
럼 갈라져 있는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교활하게도
그 순간부터 입을 굳게 다물고 고집스레 침묵을 지켰고, 엘러리가 거북할
정도로 그를 독살스레 쳐다보았다.
짐이라니요?
자기 소개를 끝낸 엘러리가 그들과 함께 서고로 가면서 물었다.
빌 갤런트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분의 옷가방이 없어졌어요. 옷가지도요...... 전부는 아니지만,
옷 여러 벌과 양말, 모자까지요.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일일이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그분이 집을 나가는 걸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우린 집안 구석구
석을 다 찾아보았고, 혹시 발자국이라도 남아있을까 싶어 이곳 바닥까지 전
부 조사했습니다. 그분은 그냥 저 옅은 공기 속으로 사라진 거예요...... 맙소
사, 이게 무슨 날리람! 그분은 미친게 틀림 없어.
밤새 몰래 빠져 나가신 건가?
쿠퍼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분은 미치지 않았어요, 갤런트 씨. 그건 당신도 잘 알고 있잖소.
만약 그분이 사라졌다면,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거요.
혹시 무슨 쪽지 같은 건 없나요?
엘러리가 흘낏 주위를 둘러보며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그들이 몰고 들어
온 묵직한 향내가 특이한 방식으로 진열된 동양식 가재도구들을 감쌌다. 일
단은 사라졌다고 추측되는 일본 노인의 서재로 통하는 문은 닫혀 있었다.
그는 서고를 가로질러 가 그 문을 열었다. 서재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그 문은 현관의 널따란 방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젯밤 메리벨
양을 공격했던 사람은 저 문을 통해 서재로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문버
팀쇠는 왜 훔쳐갔단 말인가?
없었어요.
갤런트가 말했다. 엘러리를 따라 서재로 들어온 그들은 무엇이 신기한지
그를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갤런트가 덧붙였다.
아무것도 없었어요. 한마디 말도 남겨 놓지 않았습니다.
엘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고 문 몇 발짝 뒤로 돌아가 무릎을 꿇
고 앉아 두꺼운 동양 카펫의 보풀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직사각형 모양의
눌린 자국이 있었다. 가로 15센티미터에 세로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뭐가
무거운 것이 거기 오랜 시간 놓여 있었던 것이다. 보풀은 마치 지속적으로
무거운 힘을 받았던 듯 똑같이 평평하게 눌려 있었다. 분명히 사라진 문 버
팀쇠였다. 그는 무릎을 펴고 일어나 담뱃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연꽃과 용이
꼬여 있는 모습이 자개로 조각되어 있는 커다란 마호가니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메리벨 양이 머뭇거리며 제안했다.
서두를 것 없습니다.
엘러리가 기분 좋게 한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앉아서 이 문제에 대해 천천히 얘기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든 아무
설명 없이 자신의 집을 나갔다고 해서 범죄 행위가 될 수는 없습니다...... 비
록 이교도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갤런트 양. 게다가 전 뭔가 잘못되었다는
확신도 없습니다. 황인종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사고를 지닌 미묘한 인
종이니까요. 하지만 문버팀쇠를 도둑맞았다는 게 이상하군요.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 문버팀쇠에대해 제게 설명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메리벨 양이 도움을 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일종의 무력감
에 빠져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빌 갤런트가 그 건장한 어깨를 구부리며 불평조로 말했다.
이것보세요, 퀸씨. 자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지 말아요.
그는 마음속으로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겼다고 생각하는지 초췌하니 걱정
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약 경찰을 부르지 않겠다면, 이건 분명히 제 양부의 대리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제가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서......
엘러리가 점잖게 그의 말을 잘랐다.
물론 그렇게 하셔야겠지요. 하지만 제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어느 분이든
제게 그 문버팀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건 제가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겠군요.
쿠퍼가 음악가처럼 흰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는 머리카락을 또 한 번 뒤로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제가 그 물건을 여러번 다루었고, 그 물건이 이곳으로 배달됐을
때 속달 영수증에 서명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가로 15센티미터에 세로 30센
티미터, 높이는 15센티미터입니다. 얕은 돋을 새김이 된 용장식을 빼고는 거
의 사각형 모양이지요. 아무튼 그건 전형적인 일본의 공예 상품이었습니다.
특별한 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교도의 우상숭배야. 악마라고!
레티샤 갤런트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의 뱀 같은 두 눈이 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광신적인 증오로 번득였
다.
엘러리가 흘낏 여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메리벨 양은 제게 그 문버팀쇠가 별로 값나가는 물건이 아니라고 말하더
군요.
쿠퍼와 갤런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엘러리가 물었다.
그 문버팀쇠가 뭘로 만들어졌지요?
빌 갤런트가 여전히 걱정스런 얼굴로 대답했다.
천연 활석입니다. 아시다시피, 동양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부드럽고 매끄
러운 광석, 전문 용어로는 동성, 즉 운모라고 하지요. 제 양부께서는 그 돌
로 만든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많이 수입하셨습니다.
아, 그럼 그 문버팀쇠는 그분의 골동품 회사에서 보내온 거군요?
아니오. 그건 4,5개월 전에 일본을 여행하던 어떤 친구분이 선물로 보내온
것입니다.
백인입니까?
엘러리의 엉뚱한 질문에 다들 멍청한 얼굴을 했다. 쿠퍼가 억지로 웃어보
이며 대답했다.
가기와씨는 그 친구분의 이름이나 신상에 관해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
습니다, 퀸씨.
알겠습니다.
엘러리는 잠시 조용히 담배를 피우다가 다시 물었다.
배달이라고요? 속달로?
쿠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엘러리가 물었다.
당신은 아주 꼼꼼한 편이지요, 쿠퍼씨?
쿠퍼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분명해, 암, 그렇고 말고. 비서들은 유감스럽게도 뭐든 모아두는 버릇이
있지요. 제게 그 속달 영수증을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변호사들이 항상 하
는 얘기지만, 증거는 항상 증언보다 요긴한 것이지요. 그 영수증이 어떤 단
서를 제공해 줄지도 모릅니다...... 발신인의 이름이 적혀 있을 수도......
쿠퍼가 그의 말을 잘랐다.
아,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유감이군요, 퀸씨. 그 영수증에는 발신인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건 제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엘러리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담배 연기를 자욱이
내뿜더니, 그 연기의 장막에 휩싸인 채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그리
고는 마치 과감한 모험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처럼 갑작스레 말을
꺼냈다.
그 문버팀쇠에는 용이 몇마리나 조각되어 있었지요, 쿠퍼씨?
우상숭배야.
레티샤 갤런트가 또 한 번 독살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메리벨 양의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다.
선생님, 설마......
쿠퍼가 엘러리의 말에 대답했다.
다섯마리요. 물론 바닥엔 아무것도 없었고요. 다섯 마리였습니다, 퀸 씨.
엘러리가 웃지도 않고 말을 받았다.
일곱 마리가 아닌 게 유감이군요. 7은 신비로운 숫자지요.
그는 일어서서 실내를 한 바퀴 돌더니 달콤하고 묵직한 공기 속에서 잔뜩
찡그린 얼굴로 담배를 피며 비단 방막에 수놓여 꿈틀대는 금색 괴물을 쳐다
보았다. 갑자기 메리벨 양이 부르르 몸을 떨며 야윈 얼굴의 쿠퍼 옆으로 바
짝 다가 앉았다.
엘러리가 이빨로 딱 소리를 내며 다시 말했다.
말해봐요.
그는 발뒤꿈치를 이용해 홱 몸을 돌리더니 희뿌연 담배 연기 사이로 실눈
을 하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지토 가기와 씨는 기독교인이었습니까?
레티샤 갤런트 양만 놀라지 않았다. 여자는 바알세불(성서에 나오는 악마 :
옮긴이)이라도 가만히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이여 우릴 구하소서! 그 악마가요?
여자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엘러리가 참을성 있게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자꾸 형부를 악마라 부르는 거지요, 갤런트 양?
여자는 금속처럼 차갑게 보이는 입술을 꼭 다물고 엘러리를 노려 보았다.
그러자 메리벨 양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그분은 친절하고 착한 노인이에요. 기독교인은 아닐지라
도, 퀸 선생님, 이교도도 아녜요. 그분은 그런 용 같은 것은 절대로 믿지 않
으셨어요. 제게 종종 그렇게 말씀하신 걸요.
엘러리가 나직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분은 이교도가 아닌 게 분명하군요. 엄격히 말해서 이교도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기독교나 유대교 또는 회교를 믿지 않는 국가나 민족
에 속하면서 자기 민족 고유의 종교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거니까
요.
레티샤 겔런트가 당황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여자는 금방 기고만장하게
고함을 질렀다.
그렇지 않아요! 난 그 사람이 어떤 이방종교에 대해 얘기하는 걸 종종 들
었다고요...... 그게 뭐라더라......
쿠퍼가 나직이 말을 받았다.
신도(神道, 일본의 종교 : 옮긴이). 가기와 씨가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메리벨 양. 그분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인간의 가장
좋은 길잡이가 되는 근본적인 선을 믿으셨습니다. 그게 바로 신도라는 종교
의 본질적 사상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퀸 씨?
엘러리가 멍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그랬던가요? 하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주 흥미롭군요. 혹시 그분이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나요? 아시다시피 신도는 조금 원시적이지요.
우상숭배자야.
레티샤 갤런트가 마치 레코드 판이 튀듯 계속 같은 소리를 했다.
그들은 찜찜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재 책상 위에 반짝이는 흑
요석으로 만든, 배가 볼록 나온 작은 신상이 하나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땅
딸막하니 튼튼해 보이는 사무라이 갑옷 한 벌이 진열되어 있었다. 열린 창
문으로 들어오는 바닷바람에 용이 수놓아진 비단 장막이 가볍게 일렁거렸
다.
그분이 고대 일본의 어떤 비밀 단체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았나요?
엘러리는 집요했다.
혹시 동양에서 연락이 자주 오지는 않았습니까? 눈이 위로 삐죽 올라간
사람이 찾아오지는 않았나요? 뭘 두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던가요?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용은 다시 심술궂게 펄럭였고, 사무라이는
그 불가해한 얼굴을 갑옷 속에 감춘 채 그들을 노려보았다. 메스꺼울 정도
로 달착지근한 향내가 점점 더 진해지면서 사람들의 머릿속을 끔찍한 공포
의 환상으로 가득 채웠다. 그들은 막연한 원시적 공포에 사로잡혀 말없이,
무기력하니 엘러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그 문버팀쇠는 단순한 활석이었다 이거지요?
창밖의 넘실대는 사운드 해를 바라보며 엘러리가 나직이 말했다. 모든게
넘실대며 요동을 치는 듯 했다. 집 자체가 망망대해에 뜬 채 바다가 호흡하
는 데 따라 흔들리고 있는 듯했다. 그는 그들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큰 덩치의 빌 갤런트가 발을 질질 끌며 걸어갔다. 그는
조금 전보다 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그럴 리가 없지요.
엘러리가 생각 깊은 얼굴로 자기 질문에 자기 스스로 답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지 궁금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거죠, 퀸 선생님?
메리벨 양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상식이지요. 그 문버팀쇠는 실용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가치가 없는 물건
입니다. 그런데 그 물건을 어젯밤 왜 도둑맞았을까요? 어떤 감상적 이유 때
문에? 그 물건에 그 정도의 애정을 가질 만한 사람은 가기와씨밖에 없습니
다. 만약 그분이 그 물건을 그렇게 아꼈다면, 메리벨 양, 당신의 머리를 때
리면서까지 자신의 물건을 가져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모와 조카가 깜짝 놀라는 얼굴을 했다.
다시 엘러리가 말했다.
아, 물론 여러분께서는 모르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요, 어젯밤 여기서 작
지만 고통이 뒤따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바람에 메리벨 양이 두통깨나
앓았지요. 정말이지, 그 혹 한번 대단하더군요. 그 문버팀쇠에 무슨 비밀이
라도 있는 겁니까? 무슨 상징이나 표시, 아니면 의미나 경고 같은 것이 말
입니다.
용을 수놓은 비단 장막이 또 한 번 불어 온 미풍에 일렁이자 사람들은 부
르르 온 몸을 떨었다. 레티샤 갤런트의 광기 어린 눈에 서려있던 증오는 어
느새 사라지고 없었고, 대신 그 곳에는 작고 못된 영혼의 적나라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건......
쿠퍼가 머리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그는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고 다시
말했다.
지금은 20세기요, 퀸씨.
엘러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정상적이고 증명이 가능한 일만을 생각
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실제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문버팀쇠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 물건이 그걸 가져간 사람에게는 가치가 있었을 것이라
는 겁니다. 하지만 물건 그 자체가 가치가 있었던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
렇게 추리하자면, 그 물건에는 뭔가 가치있는 것이 들어 있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 문버팀쇠가 단순한 활석만은 아닐 것이라
고 말한거지요.
그게 가장......
빌 갤런트가 구부정하니 허리를 굽힌 채 말했다. 그는 말을 끊고 신기한
눈초리로 엘러리를 쳐다보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지요?
엘러리가 부드럽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저 제 생각에는......
제가 제대로 맞췄다고 생각하십니까, 갤런트 씨?
덩치 큰 갤런트는 얼굴을 붉히며 아래로 눈길을 떨구었다. 그리고는 느슨
하게 뒷짐을 진 채 조금 전보다 더 걱정스런 얼굴로 방 안을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메리벨 양은 입술을 깨물며 바로 곁에 있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
었다. 쿠퍼는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이었다. 레티샤 갤런트의 빳빳한 옷에서
한밤중 나무 덤불 아래 몸을 숨긴 짐승이 바스락 거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갤런트가 걸음을 멈추며 갑자기 말을 뱉었다.
아무래도 털어놓아야겠군요. 그래요, 당신 추측이 맞았어요. 퀸 선생. 당신
이 맞았다고요.
엘러리가 놀란 얼굴을 했다. 갤런트가 계속 말했다.
그 문버팀쇠는 속이 비어 있었어요. 속에 구멍이 있었다고요.
그랬군요! 그런데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었지요, 갤런트 씨?
오만 달러요, 백 달러짜리 지폐로.
돈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말이 속담에도 있다. 지토 가기와 씨의 서재에서
바로 그 말이 증명된 것이다.
용은 죽었다. 가죽과 금속으로 된 사무라이의 갑옷은 바스러진 빈조개 껍
질이 되었다. 집은 요동을 그치고 주춧돌 위에 반듯하게 섰다. 조금 전의 그
진하던 향내는 정화되어 제자리로 들어갔고, 더 이상 아무 냄새도 나지 않
았다. 돈이 친숙한 억양으로 말을 하자 겁먹은 구경꾼들의 말 잔치는 눈 깜
짝 할 새에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다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들의
눈은 다시 인간세상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예의 그 특이한 단조로움으로 돌
아갔다. 그 문버팀쇠 안에는 그냥 돈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메리벨 양은 가
볍게 킥킥대기까지 했다.
백달러 짜리 지폐로 5만 달러라......
엘러리 퀸 선생은 선망과 실망이 엇갈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 거리며
말을 이었다.
백달러 짜리 지폐로 5만 달러라면 부피가 꽤 나가겠군요, 갤런트 씨. 자세
히 설명을 해 보시지요.
빌 갤런트가 재빨리 자세한 설명을 했다. 마치 마음 속의 큰 짐을 덜었다
는 듯 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가기와 노인의 사업은, 이제 더 이
상 감출 것도 없이, 파산 직전에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 경주에 대해
불굴의 의지를 지닌, 차분하니 조용한 성격의 가기와 노인은 의붓 아들의
제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신의 일생을 바친 사업 방침을 바꾸기를 거부
했다. 파산이 확실시 되었을때야 그의 결심이 흔들렸지만, 그때는 이미 난파
선을 구조하기에 너무 늦은 시기였다.
양부께서는 그 사실을 비밀로 했습니다.
갤런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전 며칠 전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때 그 분은 절 자기 방으
로 불러서 문을 닫아 걸고는 문버팀쇠를 집어들더니 - 항상 마룻바닥에 놓
여 있던 그 물건을 말입니다- 여러마ㅇ리의 용들 가운데 한 마리를 쑥 뽑아
냈는데...... 마치 무슨 마개처럼 뽑혔지요. 그 분께서는 그 문버팀쇠 안에 비
밀스런 공간이 있다는 것을 선물로 받은 직후 우연히 알게 됐다고 말씀하셨
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면서, 그 물건의 내력
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물건은 원래부터
문버팀쇠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일본 사람들이 그런 물건을 문버팀쇠로
사용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거야 어ㅉㅆ든...... 그 안에는 꽁꽁 뭉쳐
둔 돈 뭉치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분이 몰래 감추어 둔 돈이었지요. 전 그분
에게 그런 식으로 돈을 감춰 두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씀그렸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그 안에 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과 저
밖에 없기 때문에 안심해도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저로서
는 당연히......
그는 얼굴을 붉혔다.
엘러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당신이 왜 그런 사실을 털어놓기를 꺼려 했는지 말입니다. 그
런 사실을 얘기한다는 자체가 자신에게 분명히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
겠지요.
덩치 큰 청년은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듯 양손을 펴 보였다.
전 그 망할 놈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누가 절 믿어 주겠습
니까?
그는 손으로 담배를 더듬어 찾으며 자리에 앉았다.
엘러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에겐 한 가지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적어도 그럴 것 같
은데, 당신은 그분의 상속자지요?
갤런트는 힘차게 고개를 들었다.
그렇습니다!
쿠퍼가 천천히, 거의 마지못한 투로 말했다.
네, 맞습니다. 제가 그분의 유언장을 직접 보았습니다.
쯧쯧. 공연히 법석을 떨었군. 그렇다면 당신은 어차피 당신 소유가 될 물
건을 훔칠 리가 없지요. 힘내세요. 갤런트시, 이제 당신은 충분히 신뢰할 수
있습니다.
엘러리는 한숨을 귀더니 코트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사건에 대한 제 관심은 사라졌
습니다. 전 뭔가 기이한 일이 있을 줄 알고......
그는 빙그레 웃으며 모자를 집어들었다.
결국 이 일은 경찰이 나서야겠군요. 물론 저도 가능한 한 여러분을 돕겠
지만, 제가 경험한 바로는, 지방 경찰들은 단독으로 일하기를 더 좋아합니
다. 그리고 사실, 더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메리벨 양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당신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죠? 혹시 가엾은 가기
와 씨가......
저는 심리학자가 아닙니다, 메리벨 양. 사실 심리학자라 하더라도 동양인
의 마음 속 깉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아낼 수는 없는거지요. 경찰들
은 그런 미묘한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지
역 경찰들이 금방 이 사건을 깨끗이 해결해 주리라 믿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레티샤 양이 코방귀를 뀌더니 거만한 자세로 치맛자락을 날리며 엘러리를
스쳐 지나갔다. 메리벨 양도 모자를 홱 집어 들더리 짜증스럽다는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쿠퍼는 전화기 쪽으로 걸어갔고, 겔런트는 찌푸린 얼굴로
창 밖의 사운드 해를 바라보았다.
경찰 본부죠? 서장님 좀 부탁합니다.
쿠퍼가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수화기 저편에서 상대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실내는 다시 그 짙은 이
국적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요.
문간 쪽에서 엘러리가 말했다.
두 사내가 깜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엘러리가 미안하게 됐다는 듯 웃으면
서 말했다.
방금 뭔가가 떠올랐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정말 무섭군요. 한심하게도
제가 무시하고 넘어간 게 있지 뭐겠습니까. 여러분. 아직은 다른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잠깐만요. 전화 끊지 말아요.
쿠퍼가 전화기에 대고 말하더니, 다시 엘러리를 보며 물었다.
가능성이라고요?
엘러리는 점잖게 한 손을 흔들었다.
혹시 제가 틀릴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두 분 가운데 누가 제게 연감(年
鑑)이 있는 곳을 알려 주시겠습니까?
갤런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연감이오? 그거야 얼마든지...... 하지만 저로서는 이해가...... 서고 탁자 위
에 하나가 있어요, 퀸씨. 여기 계세요. 제가 갖다 드리죠.
그는 옆방으로 들어가더니 두툼한 표지의 책 한권을 들고 금방 다시 나타
났다.
엘러리는 그 책을 받아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요란스레 책장을 넘겼다. 쿠
퍼와 갤런트가 눈길을 교환했다. 이윽고 쿠퍼는 어깨를 으쓱하며 전화를 끊
었다.
엘러리가 갑자기 콧노래를 멈추며 말했다.
아! 흠. 그래, 그래. 역시 지혜가 힘을 이기지. 문(文 )은 무(武)보다 강한
거라고. 아냐, 내가 틀릴지도 몰라.
그는 책을 덮고 코트를 벗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합(合)에서 상당한 차이가 난단 말씀이야. 역시 연감은 유
용해...... 쿠퍼씨!
그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그 속달 영수증좀 보여 주십시오.
엘러리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몸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쿠퍼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키며 불평조로 말했다.
이것 보세요, 지금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까?
쯧쯧. 빨리 영수증이나 주세요, 쿠퍼씨.
엘러리가 말했다.
빌 갤런트가 찜찜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갖다 드리세요, 쿠퍼씨. 퀸 씨가 시키는 대로 해요. 하지만 저로서는 그
영수증이 무슨 가치가 있는지......
가치란 내적인 것입니다, 갤런트 씨. 손이 눈보다 빠를 수도 있지만, 머리
는 그 두가지 다보다 빠르답니다.
쿠퍼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그러나 그는 조각이 된 책상 서랍을 열고
그 안을 뒤지기 시작했고,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잡다한 영수증들을 모아 둔
듯한 종이 뭉치 하나를 꺼내 그것들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마침내 노란 색
의 조그만 종이 한 장이 나왔다.
그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 있소. 난 이게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엘러리가 온화한 목
소리로 말을 맏았다.
당신 생각은 중요하지가 않답니다, 쿠퍼씨.
그는 쿠퍼가 건네준 노란색의 영수증 쪽지를 마치 고가학자가 탐색이라도
하듯 아주 신중하게 들여다 보았다. 그것은 평범한 속달 우편물 영수증이었
고, 거기에는 우편물의 배달 날짜, 발신지, 요금 그런 비슷한 종류의 내용들
이 적혀 있었다. 발신인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포장물은 일본의 요코하마
항에서 일본 유센 가이샤 증기선에 선적되어 샌프란시스코의 속달우편물회
사로 넘어갔고, 거기서 다시 웨스트 체스터 주소지에 살고 있는 수신자 지
토 가기와 앞으로 배달되었다. 선적과 속달요금은 문버팀쇠의 무게 20킬로
그램에 근거해 요코하마에서 선불로 지급되었다고 나와 있었다. 문버팀쇠에
대해서는 가로 15센티미터, 세로 30센티미터, 높이 15센티미터의 활석으로
만들어 졌으며, 윗면에 얕은 돋을 새김으로 용들이 조각되어 있다고 간략하
게 묘사되어 있었다.
거기 어지럽게 적힌 수치들이 당신에겐 중요한 모양이군요.
쿠퍼가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여기 적힌 이 수치들은......
엘러리가 영수증 쪽지를 주머니에 넣으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제게는 몹시 소중한 것입니다. 이 쪽지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는게 천만 다
행이지요. 내겐 마치 로제타석(1799년 나일강 어귀의로제타 부근에서 발견
된, 이집트 상형 문자 해독의 단서가 된 현무암의 돌 조각:옮긴이) 같다고나
할까요...... 또 다른 신비로운 사실에 대한 열쇠인 셈이지요.
그는 혼자 기뻐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회색 눈동자에 경계의 빛을
띄며 덧붙였다.
옛날 명언이 틀렸어. 숫자에서 찾는 건 안전이 아니라 계몽이라고.
갤런트가 두 손을 들어올리며 말헀다.
정말 못 알아들을 소리만 하는군요, 퀸 씨.
엘러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물론 두 신사분의 양해를 얻어야겠지만, 어떻게든 경찰 서장을 불러야겠
군요...... 하지만 부르는 사람은 접니다. 여러분이 나가 주신다면...... 저 혼자
서.
그 날 저녁 엘러리 퀸 선생이 발표했다.
저는 결국 제 기이한 이야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침착하니 절제하는 말투였다. 그는 서재 책상의 한쪽귀퉁이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 배가 볼록한 흑요석 상을 만지작 거렸다.
쿠퍼, 메리벨 양, 두명의 갤런트가 그를 노려보았다. 다들 초조의 극에 달
해 있는 듯한 눈치였다. 다시 집이 흔들리고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
는 바람에 용들이 비비 꼬인 몸들을 사시나무처럼 떨어댔다. 사무라이 역시
마술처럼 또 한 번의 삶을 얻은 듯 그 불가해한 얼굴을 갑옷 속에 감춘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어두컴컴하니 검은 색의
짙은 구름들로 얼룩덜룩했다. 달은 아직도 바다의 경계선 아래쪽에서 솟아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엘러리는 경찰 서장과 전화 통화를 한 다음 가기와씨의 집을 나갔다가 저
녁 무렵에야 다시 나타났다. 그것도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건장한 체격을
지닌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두명의 갤런트, 비서, 간호
원, 하인들, 그 누구에게도 접근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대표자인 듯하 사
내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서재 창문 밖의 바다에서 이상하게
절거덕 대는 소리와 물 첨벙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
도 감히 몸을 일으키고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엘러리가 말했다.
이 무슨 세상이란 말인가? 얼마나 그 무게를 견디지 못했으면 죽음의 신
이 갈라놓은 그들을 다시 만나게 해야 한단 말인가? 감동적인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 아주 적절한 말이지죠. 여러분, 우리는 오늘밤 죽음의 신
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무게는 없어질
것입니다. 사우디(영국의 계관 시인 : 옮긴이)가 예견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얼빠진 사람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캄한 바깥에서
는 계속 쇠사슬 절거덕 대는 듯한 소리와 물 첨벙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
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고함을 지르는 남자의 큰 목소리도 들려왔다.
엘러리는 담뱃불을 붙였다.
저는......
그는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또 한 번 제가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오늘 오전 여러분
에게 그 문버팀쇠를 도둑맞은 가장 그럴듯한 이유가 그 안에 든 내용물 때
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틀렸습니다. 그 무너팀쇠는 안에 든 내용
물 때문에 도둑맞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용의 복부는 결코 두둑맞지 못
하게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만 달러는......
메리벨 양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빌 갤런트가 고함을 질렀다.
퀸 씨,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저 경찰들이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말이오? 그리고 저 소리는 뭐죠? 당신은 우리한테......
엘러리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놀릴란 어떻게 보면 매끈매끈하지요. 거의 활석처럼 말입니다, 갤런트씨.
그 논리가 오늘은 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습니다. 전 그 문버팀쇠가 물
건 그 자체만으로는 도둑맞을 이유가 없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제가 또
한 번 틀린거지요.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그 문버팀쇠는 물건 그 자체 만으
로 도둑 맞을 수 있었습니다. 그 문버팀쇠에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어떤
감상적 이유나 상징정 중요성을 뛰어넘는 한 가지 가치가 있었습니다. 바
로...... 문버팀쇠의 용도영ㅆ지요.
쿠퍼가 입을 쩍 벌리며 말했다.
용도? 그럼 당신은 누군가 그 물건을 그냥 문버팀쇠로 쓰기 위해 훔쳐갔
다는 말이오?
그거야 당연히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하지만 그 문버팀쇠는 다른 용도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쿠퍼씨. 용들이 조각된 그 특이한 돌의 특성이 무엇
이지요? 물리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지요? 그 물건의 본질과 무게 말입
니다. 그것은 돌이며 20킬로그램의 무개를 지니고 있습니다.
갤런트가 한손으로 뭔가를 털어 내듯 이상한 동작을 취하더니 마치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처럼 몸을 일으키고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머뭇거렸다. 그러나 금방 같이 몸을 일으키고 그들을 짓누르는 억압된 공포
와 호기심을 최후까지 억누르며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엘러리는 조용히 그
들을 지켜보았다.
이제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달 아래 펼쳐진 풍경은 검푸른 색깔의 날카로
운, 움직이는 작은 동판화 같았다. 커다란 배 한 척이 가기와 노인의 집 뒤
편 몇 야드 떨어진 곳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누군가 뱃전에 몸을 기댄 채
열심히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물 표면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더
니 심하게 요동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남자의 머리가
나타났고, 그는 입을 잔뜩 벌리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반나체 차림의 그는
배로 올라가 뱃전에 기댄 사람에게 무슨 말인가를 했다. 그러자 배 위의 기
계가 끼릭대는 소리를 냈고, 검푸른 바닷물 속에서 밧줄이 나타났다. 작은
윈치(크랭크를 돌려 박줄을 동체에 감아 무거운 것을 끌어올리는 기구 : 옮
긴이)는 밧줄을 감아올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있는 그들 뒤편에서 엘러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물건이 돌이며 20킬로그램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도
둑맞아야했던 이유가 뭘까요?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 이유는 명쾌해
질겁니다. 한 사람이 신비롭게, 그리고 불가사의 하게 실종되었습니다...... 병
약하고 무방비 상태인, 돈 많은 늙은 노인이 말입니다. 무거운 돌덩이도 없
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노인의 집 뒤에는 바다가 있었습니다. 제가 말한 첫
번째 사실과 두 번째 사실, 그리고 세 번째 사실을 종합해 보면 여러분께서
는......
누군가 배에서 쉰 목소리로 괌을 질렀다. 보름달 아래쪽 물 속의 밧줄 끝
에서 커다란 덩어리 하나가 물을 뚝뚝 흘리며 나타났다. 그 덩어리는 세 개
의 뭉치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옷가방이었다.또 하나는 위에 조각이 되
어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돌덩이였다. 마지막은 누런 피부색에 눈이 위로
삐죽 올라간, 조그만 노인의 뻣뻣하게 굳은 알몸이었다.
엘러리가 날카롭게 말했다.
여러분꼐서는......
그는 책상 한쪽 귀퉁이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뻣뻣하게 굳어 있는 빌 갤런
트의 등에 자동 권총의 총구를 갖다 대며 말을 이었다.
지토 가기와씨의 살인범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선원들의 의기양양한 고함소리가 일본 노인의 서재에 공허하게 울려퍼지자
갤런트가 돌아보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악마 같으니...... 어떻게 알았지?
레티샤 양의 독살맞은 입이 언변의 존엄성도 성취시키지 못한 채 열렸다
닫혔다.
엘러리가 자동 권통을 바짝 움켜쥐며 말했다.
그 문버팀쇠는 절대 속이 비지 않았다는 것, 속까지 딱딱한 돌덩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지.
당신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어. 당신은 그 문버팀쇠를 보지도 못했다.
추측이겠지. 게다가 당신은......
당신은 내가 추측한다는 이유로 벌써 날 두 번째 비난하고 있어.
엘러리가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친애하는 갤런트씨. 난 그런 식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
오. 난 그 문버팀쇠 속이 비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당신의
말...... 가기와 노인이 그 문버팀쇠의 용이 조각된 마개 를 뽑는 것과 그 문
버팀쇠에 나 있는 구멍 과 돈 을 당신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는 말이...... 거
직말이라는 것을 알았소. 그래서 나는 명백히 곤경에 빠져 있는 저렇게 멋
진 신사분께서 왜 거짓말을 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소. 그랬더니
당신에게는 뭔가 숨겨야 할 사실이 있으며, 또한 그 문버팀쇠가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
었소.
바다는 조용히 달빛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문버팀쇠가 절대로 다시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
려면, 당신은 그 문버팀쇠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지요. 그리고 그 물
건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그 물건을 없앤 사람이
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이방에서 그 불건을 훔쳐갔을 것이고, 그 전에 메
리벨 양의 머리를 때렸겠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당신이 되어야 하는 거
지요. 그 때 메리벨 양이 들었다는, 용이 미끄러지는 것 같은 그 소리는 당
신이 두꺼운 커펫 위에서 발을 끌 때 난 소리겠지요. 어쨌든 그 문버팀쇠를
없앤 사람이 바로 그 작고 착한 지토 가기와씨를 실종시킨 사람입니다. 다
시말해서 살인자이지요. 아니, 아니오, 갤런트씨. 우리 분명히 합시다. 이건
절대로 추측이 아니었고.
메리벨 양이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갤런트씨. 전 도대체...... 왜 그런 끔찍한 짓을 했죠? 끔찍한......
그건 제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엘러리가 한숨을 귀며 말을 이었다.
전 그 문버팀쇠 안에 비밀스런 공간이 있다는 이 사람의 말이 거짓말이라
는 것을 알았을 때, 이 사람이 애초부터 교묘한 이야기를 꾸며 놓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조각이 된 그 문버팀쇠를 훔쳐간
진짜 동기를 감출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단순히 죽은 시체를
가라앉히기 위한 용도에서 돈을 감춰두는 용도로 전환시킴으로써 수사의 초
점을 바꾸려 했던 거지요. 그래서 그 문버팀쇠가 없어졌던 것입니다. 하지
만, 오만 달러라는 거짓말은 왜 했을까요? 왜 그렇게 상세히, 구체적으로,
주의 깊게 했을까요?
엘러리는 갤런트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당신은 당신 양부의 회사에서 오만 달러를 횡령했소, 갤런트씨. 그런데 당
신은 당신이 그 돈을 횡령했다는 사실이 머잖아 들통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
었소. 그랬기 때문에 당신은 몇 달 전 당신이 횡령해 흥청망청 써 버린 그
액수 만큼의 돈을 맞추기 위해 어젯밤 가상의 도둑을 만들었던 거요. 틀렸
나요, 갤런트씨?
빌 갤런트는 말이 없었다.
다시 엘러리가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일련의 계획을 세웠고, 마치 그분이 직접 그렇게 한 것처
럼 밤중에 그 노신사의 침구를 사람모양으로 만들어 놓았소. 그리고는 마치
그분이 도망칠 계획을 세웠던 것 처럼 그분의 옷가지 몇 개를 옷가방에 집
어넣었소. 사실 당신이 그런 모든 일들을 꾸민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가
기와 씨가 자신의 남은 재산을 가지고 서구 사회를 벗어나 자신이 살던 동
양으로 단호히 도망친 것 같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였소. 주로 당신이 횡령
한 탓이기는 하지만, 그분의 사업이 위태로웠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마링오. 그런 식으로만 되었다면, 노인을 찾을 일도, 살인자
가 있으리라는 생각도, 더 나아가 당신이 의심받을 일조차도 없었을거요. 그
리고 그렇게만 되었더라면 당신은 당신이 처음 저지른 범죄행위, 즉 사업
자금을 횡령한 중절도죄에서 풀려날 수도 있었겠지요. 당신은 당신에게 무
든 것을 준 양부가 명예를 귀중히 여기는 여느 신사분이나 마찬가지로 어떤
죄라도 영서하겠지만, 명예를 더럽힌 죄만큼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
실을 알고 있었어요. 가기와 노인이 당신이 회사 돈을 횡령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당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되어 있었던 거지요.
엘러리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추측에도 빌 갤런트는 말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잔잔한 물결 외에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
다. 배, 돌, 옷가방, 시체, 사람들, 모두가 사라져 버렸다. 엘러리는 씁쓸한
만족감 같은 표정을 띤 채 갤런트의 뻣뻣하게 굳은 등을 향해 고개를 끄덕
였다.
쿠퍼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유산을 상속받는거지. 상속자는 당연히 자신이니까. 영리해, 정말
영리해!
엘러리가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어리석은 짓이야. 범죄 행위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지.
갤런트가 그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문버팀쇠의 속이 비지 않았다는 사실, 난 아직도 당신이 그 사실을 추
측으로 알았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는 마치 정중하게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 같았다. 엘러리는 속지 않
았다. 자동 권총을 들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창문을 열려있었고,
바다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 죽음 외에는 탈출구가 없는 사람을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엘러리가 거의 항변조로 말했다.
천만에요.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그렇게 넘어갈 수는 없는 법이지요. 당
신도 알다시피, 그 문제는 분명하지 않았소. 내가 이 집을 나가다 말고 그
문버팀쇠가 활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릴때까지는 말이오. 나는 활
석이 제법 무겁다는 것을 알고있었소. 그리고 그 문버팀쇠가 거의 입방체(정
육면체:옮긴이)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소. 그랬기 때
문에 기본적인 계산이 가능할거라고 생각했었소. 그 문버팀쇠의 속이 비어
있다는 당신의 증언이 정확한지 시험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단 말이
오. 그래서 난 다시 안으로 들어와 백과사전을 찾았고, 거기서 보통 광물질
의 무게표를 찾은 다음 활석을 찾아보았소. 그랬더니 거기 있더군요.
뭐가 말이오?
갤런트가 거의 호기심에 가까운 어조로 물었다.
백과사전에는 1 입방피트(=0.02831입방미터)의 활석은 73킬로그램에서 79
킬로그램까지 나간다고 되어 있었소. 그 문버팀쇠는 활석이었지요. 그 치수
가 어떻게 된다고 했지요? 가로 15센티미터에 세로 30센티미터, 높이가 15
센티미터였습니다. 그렇다면 6/750입방미터입니다.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무
게표의 수치를 계산하고, 거기다 얕은 돋을 새김이 된 용의 무게를 약간 더
하면 그 문버팀쇠의 무게는 약 20킬로그램이 됩니다.
하지만 그건 영수증에 나와 있는 수치가 아닙니까?
쿠퍼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그 20킬로그램이라는 수치가 무엇을 나타내는 거
지요? 그것은 20킬로그램의 속이 비지 않은 활석을 말하는 겁니다! 갤런트
씨는 그 문버팀쇠의 속이 비어 있었으며, 백달러짜리 지폐로 5만달러의 돈
이 들어갈 만큼 큰 공간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지폐가 500장입
니다. 지폐 500장을 집어 넣을 정도의 큰 공간이라면, 제아무리 접고 꽁꽁
뭉친다 해도, 그 문버팀쇠의 총 무게는 20킬로그램보다는 덜 나가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그 문버팀쇠가 속이 비지 않았으며, 갤런트씨가 거짓말
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던 거지요.
밖에서 쿵쾅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났다. 갑자기 실내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지토 가기와의 시체가 소파 위에 놓여졌다. 노인의 알몸은 오래 된 대
리석처럼 노란 색이었고, 사죄라도 하듯 조용히 물을 흘리고 있었다. 빌 갤
런트가 여전히 얼어붙은 얼굴로 몸을 돌렸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시체같은
눈을 하고 있으며, 자신이 저즈른 극안 무도한 짓에 처음으로 놀라고 있다
는 것을 알았다.
엘러리는 바닷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무거운 문버팀쇠를 경찰의 손에서 받
아 들고 거꾸로 뒤집어 보았다. 그리고는 벽에 걸린 용을 올려다보며 친근
한 미소를 보냈다. 이제 그것은 분명 비단과 금색 실로 만든 에쁜 장막이었
지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 The End -
수수께끼의038사건
There was an old woman
ELLERY QUEEN
제 1 부 새벽의 결투
추리 테스트
"아버지, 이제 더 이상은 못 참겠어요."
여기는 미국의 정의를 지키는 곳이라고 불리는 뉴욕 최고 재판소의 넓은 복도.
제법 머리가 똑똑해 보이며, 투명하고 아름다운 눈을 가진 27∼28 살 가량의
청년이 코밑수염을 기르고 몸집이 좋은 50 살 정도 되는 신사에게 이렇게 말했
다. 청년의 이름은 엘러리 퀸. 이제는 이 청년이 누구인지 모두들 알 것이다.
그렇다, '미국 총의 비밀'과 '이집트 십자의 비밀' 등의 수많은 어려운 사건들
을 훌륭한 추리로 해결하고, 또 그것을 뛰어난 문장력으로 발표하여 많은 독자
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명탐정이자 추리 소설 작가인 바로 그 엘러리 퀸이
다. 중년의 신사는 리처드 퀸. 뉴욕 경찰 본부의 노련한 경감이다. 그는 아들인
엘러리가 사건의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그의 오랜 경험에서 얻은 지식으로
적당한 충고를 들려주곤 한다. 만약, 엘러리에게 이런 아버지가 없었다면 오는
같은 명성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엘러리는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존경하
며 한편으로는 고맙게도 생각하고 있다. 엘러리는 바로 앞의 331호 법정이라고
쓰여있는 문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이 관계된 재판만 번번이 뒷전으로 밀려나다니,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아요?"
"그렇게 화내지 말아라, 엘러리. 재판이라는 것은 기다리는 일이야."
아버지는 엘러리의 기분을 달랠 만한 적당한 것이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
았다. 미인은 적당한 것이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인은 없었지만,
조금 떨어져있는 335호 법정 앞에서 30살정도 된 남자가 몹시 초조한 표정으로
서성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그 남자를 심심풀이의 대상
으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엘러리, 관찰력과 추리력 테스트를 한번 해볼까? 3 분내로 저 남자의 직업을
맞춰 보거라."
엘러리는 그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2 분도 채 안 되어서,
"아버지 저 사람의 직업은 변호사입니다."
"맞았어 어떻게 알아냈지?"
"저런 큰 서류 가방을 들고 재판소의 복도를 이리저리 서성거리는 사람은 변
호사밖에 없기 때문 이지요. 이름은 팩스턴이고요. 가방에 작은 글자로 새겨
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엘러리, 눈도 이상이 없군. 그렇다면 저 변호사는 왜 저렇게 초조해 하고 있
을까?"
"아까부터 손목시계를 자주 들여다보는 것을 보니, 재판 시간이 다 되었는데
도 소송 의뢰인이 나타나지 않은 모양이지요.?"
"맞았어, 엘러리. 이제 네 추리력도 무시 못 하겠구나."
"예? 그렇다면 아버지가 잘 아는 사람입니까?"
"그래. 비록 젊지만 실력이 아주 뛰어난 변호사야. 나와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지."
퀸 경감은 성큼성큼 변호사에게 다가가서, 그 큰손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이, 팩스턴."
팩스턴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퀸 경감을 돌아보더니, 곧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아니, 이거 퀸 경감님 아니십니까?"
팩스턴 변호사는 매우 반갑다는 표정으로 퀸 부자를 바라보았다. 퀸 경감은 엘
러리를 소개했다.
"소개하지. 이쪽은 내 아들 엘러리, 아직 풋내기 탐정이야."
"성함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두 청년은 서로 악수를 했다.
구두 저택에 사는 노부인
"그런데, 팩스턴, 오늘은 어떤 사건인가?"
경감이 물었다.
"글세......., 그게 별로 달갑지 않은 사건인데, 참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유명
한 포트 집안의 노부인에 관한 겁니다."
"포트 집안이라면 자네가 고문 변호사로 있는 집이 아닌가? 아, 그 노부인이
또 고소를 한 모양이군."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노부인의 큰아들인 설로우 포트 씨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술에 잔뜩 취한 클립 스태더라는 남자가 다가와서는, '포트야,
포트야(영어로 단지라는 뜻), 금이 간 포트야, 아무리 좋은 술을 마셔도 포트,
포트의 술은 새나가는구나.' 하고 놀렸다는 겁니다. 설로우씨는 매우 화가 나서
집에 돌아와서는 노부인에게 일러바쳤습니다. 그러자 노부인은, '포트 집안의
명예를 손상시켰다.' 라고 화를 내며 설로우씨의 이름으로 클립 스태더를 고소
했던 겁니다. 그런데 개정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고소를 당한 클립 스
태더만 나왔을 뿐, 정말 중요한 설로우씨와 노부인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겁
니다."
엘러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아버지, 포트 집안의 노부인이라는 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퀸 경감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이거 놀랐는데, 엘러리. 아니, 아직까지 그 구두 저택에 살고 있는 유명한 포
트 집안의 노부인을 모르다니, 아직도 너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모양이구나. 포
트 집안의 노부인이라는 사람은 말이야........"
퀸 경감이 설명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팩스턴 변호사가,
"아, 지금 오는군요."
하고 기쁜 듯이 외치면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는 많은 사람이 쏟아져 나왔다. 그 많은 사람들의 맨 앞에 서서 이쪽으로 당당
하게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귤같이 동그란 얼굴에 키가 작은 노부인이었다. 게
다가, 그 부인의 배는 유난히 부풀어올라 있었으며, 다리는 볼품이 없을 정도로
가늘었다.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었으며, 눈이 있는 주위만 움푹 들어가 있었
다.
"저 사람이 바로 코닐리아 포트 부인이야. 고소를 자주 한다고 해서 고소 노
부인이라는 별명이 붙었지.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을 테니 잘 지켜보고 있
어라."
경감이 빠르게 속삭였다. 노부인은 뜻밖에 매우 당당하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
왔다.
검은 치마에 검은 모자를 썼으며, 그 까만 눈은 난로 속의 석탄과 같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버지, 마치 빅토리아 여왕의 나이 들었을 때 모습 같군요. 아니, 그보다는
전설에 나오는 마녀와 좀더 비슷한 것 같아요."
노부인의 뒤에는 많은 신문기자가 바짝 붙어서 따라오고 있었다. 노부인이 가
는 곳을 따라가기만 하면 특종기사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서
도 몸집이 작은 어떤 남자가 눈에 띄었다.
"자 남자는 누굽니까? 기자는 아닌 것 같은데, 부인과 많이 닮았군요."
엘러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물었다.
"아, 저 청년 말이지? 포트 부인의 장남인 설로우야."
"설로우? 아, 술집에서 클립 스태더라는 남자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고소한 사
람 말이군요. 그런데, 굉장히 많이 닮았군요. 부인과 옷이라도 바꿔입는다면 누
가 누구인지 전혀 분간을 못 하겠어요."
사람들의 맨 뒤에는 몸집이 마르고 키가 큰 남자가 진찰 가방을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아버지, 저 키가 큰 사람은 유명한 심장병 전문가 이니스 박사가 아닙니까?"
"맞아. 부인은 심장이 좋지 않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이니스 박사를 꼭 데
리고 다니지. 하여튼, 돈의 힘이란 굉장한 거야."
퀸 경감은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청년 변호사 팩스턴도 끼어있는 기묘한 그 일
행은 335호 법정으로 몰려갔다. 엘러리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참 이상해요. 팩스턴씨는 꽤 똑똑해 보이는 사람 같은데, 왜 저런 집
에서 일을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엘러리, 방금도 말했지만 모두 돈의 힘이야."
"돈의 힘? 포트 부인은 유전이나 금광이라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 엘러리, 너는 미국 사람이면서도 아직 포트 부인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
지 모른단 말이냐? 포트부인은 그 유명한 포트 구두의 창업자야."
"예? 저 부인이요? 포트 구두라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미국 어디에서나 3
달러 99 센트만 주면 살 수 있는 구두 아니에요?"
"그렇단다. 지금 포트 구두는 미국을 대표할 만한 대중 상품의 하나가 되었지.
미국의 어떤 시골 마을에 가더라도 포트 구두점을 볼 수 가 있을 정도니까. 지
금은 국민 학생에서부터 중학생, 고등학생,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도 포
트 구두를 신고 있지. 그런데, 왜 포트 구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해. 값이 싸면서도 튼튼하고, 그리고 모양이 좋
기 때문이지."
퀸 경감은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포트 집안은 , 포트 구두덕분에 천문학적인 재산을 모았어. 그런데도, 포트
부인은 종업원들에게 이익을 조금도 나누어주지 않는 거야. 그리고 자신은 이
뉴욕의 맨해튼 섬 서쪽을 흐르는 허드슨강가의 고속도로 옆에 궁전과 같이 화
려한 집을 짓고 살고 있지. 그러다가 그 동안 말없이 일을 해온 포트제화의 종
업원들도 몇 년 전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면서 파업을 하기로 결정했단다.
그 때, 종업원들이 시위 행진을 하면서 부른 노래가 있는데, 그 가사는 이렇단
다.
'옛날 옛날 마귀 할멈이
구두 저택에 살고 있었습니다.
너무 자식이 많아서
종업원들에게 월급을
어떻게 주면 좋을까……'
엘러리는 끝까지 듣지도 않고,
"아버지, 그것은 영국에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마더 구즈의 동요인 구두 저택
의 가사를 바꾼 노래가 아니에요? 저는 그림책이나 동화책에서 그것을 여러 번
읽었기 때문에 아직도 모두 외고 있어요."
'옛날 옛날 마귀 할멈이 구두 저택에 살고 있었습니다. 너무 자식이 많아서
어떻게 살아 나갈까요. 빵은 주지 않고 수프로 때우고 채찍으로 때려서 잠을
재우지요.'
"맞아. 그 때, 포트 제화 종업원들은 그 노래를 부르면서 그림책에 있는 그림
을 만화 풍으로 그린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행진했었어. 그 뒤로 포트 부인
은 구두 저택에 사는 노파라고 불려지게 되었단다."
"포트 제화의 종업원들은 옛날 동요를 이용해서 여사장을 재미있게 골려주었
군요."
엘러리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엘러리라도 이 옛날 동요
가 그 뒤에 잇달아서 일어난 복잡하고 기괴한 연속살인사건의 기분 나쁜 배경
음악이 되리라는 것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노부인과 아들
그때, 335호 법정에서 갑자기 떠들썩한 소리가 나더니 신문기자 한 사람이 종
이를 한 장손에 들고 급하게 뛰어나왔다. 퀸 경감은 그 기자를 불렀다.
"어이, 판결은 어떻게 되었나?"
그 기자는 뉴욕 경찰 본부의 퀸 경감을 잘 알고 있었다.
"아, 퀸 경감님이시군요. 보나마나지요 뭐. 그 마귀 할멈의 포트 집안이 졌습
니다. 이것으로 37연패입니다. 당연한 판결이지요. '단지의 단지는 새는 단지'
라는 정도의 말로 명예훼손죄가 성립될 수는 없는 거지요. 더구나, 포트 집안의
패소를 선고한 재판장은 그 부인에게, '포트 집안은 억만 장자이기 때문에 재판
에 드는 돈쯤은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이런 하찮은 문제로 모든 국민이 이용하
는 재판소의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쓰게 하는 일은 두 번 다시 하지 말기 바랍
니다.' 라고 말하면서 몹시 화를 내더군요."
"그래? 그렇다면, 그 당당한 포트 집안의 부인이라도 조금 풀이 죽었겠군."
퀸 경감이 이렇게 말했을 때, 335호 법정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포트
부인이 나왔다. 이것이 돈 많은 사람이 재판에 진 모습인가? 74살의 부인은 큰
양산을 빙빙 돌리면서 당당한 발걸음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부인의 바로 뒤
에는 패소 때문에 화가 잔뜩 나 있는 설로우가 뒤뚱거리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게다가, 키가 큰 이니스박사, 매번 거듭되는 패소에 혹시 변호사를 바꾸지 않을
까 걱정하는 팩스턴, 그리고 신문 기자와 구경꾼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뒤를 따
라가고 있었다. "엘러리,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거야."
퀸 경감은 엘러리를 데리고 뒤를 따라갔다. 그러자, 정말로 재판소의 현관에서
큰 소동이 벌어졌다. 패소하고 돌아가는 부인을 찍기 위해서 현판 앞에서 기다
리고 있던 사진 기자들이 포트부인이 나타나자 일제히 셔터를 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찰칵, 찰칵! 보통 사람의 귀에도 거슬리는 셔터 터지는 소리가 계속 들
렸다. 부인은 '야아앗!' 하고 인디언 같은 소리를 지르더니 양산을 야구 방방이
처럼 휘두르면서 사진 기자들의 사이를 뚫고 나가려고 했다. 사진 기자들은 부
인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한 덩어리가 되어 부인과 맞섰다. 그
가운데에는 카메라의 3각 다리를 휘두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 때, 퀸 경감의 부
하인 벨리 경찰 부장이 달려 왔다. 부장은 재빨리 신문 기자들 사이를 뚫고 들
어왔다.
"모두 그만둬요, 그만둬."
"그만둬야 할 쪽은 부인입니다."
어떤 사진기자가 헐떡이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 조, 어떻게 된 거야, 코피가 나오잖아?"
조라고 하는 사진 기자는 빨갛게 물든 손수건으로 코를 누르면서 말했다.
"부인이 내 코와 사진기를 부쉈습니다. 벨리 부장님, 이건 상해죄와 기물 파손
죄가 아닙니까?"
그러자, 부인은 겁이 났던지 빳빳한 100달러 짜리 지폐 2장을 조에게 던졌다.
"자, 이것으로 새 사진기를 사시오. 코는 어렸을 때부터 깨졌을 테니 괜찮소."
그러더니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동차에 이니스 박사와 함께 올라타고는
재빨리 달려가 버렸다. 코피를 흘리는 조는 한 손에는 부서진 사진기를 들고,
또 한 손에는 200 달러를 들고 웃고 있었다. 사실은, 부인이 부순 사진기는 부
인의 이런 행동을 짐작하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낡은 사진기였던 것이다. 진
짜 사진기는 이런 광경을 찍기 위해서 조수가 멀리에서 들고 있었다. 지금 포
트 부인이 부순 것은 100 달러 짜리이다. 조는 그것의 2배를 받은 셈이다. 포트
부인을 따라가지 않고 혼자 남은 설로우는 무엇을 하려는지 재판소 앞쪽의 돌
계단으로 올라가서,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큰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뒤를 돌아다보며 재판소의 건물을 가리켰다.
"여러분, 재판소는 내 고소를 쌀쌀맞게 페소 시켰습니다. 지금부터 나는 재판
소 같은 것은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내 스스로 재판을 하겠다는 말입니다. 나는
전 세계의 권총을 사 모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와 포트 집안을 모
욕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녀석을 쏘아 죽일 겁니다."
대담하게 살인 선언을 한 설로우는 와글와글 모여있는 사람들 속을 당당하게
뚫고서 어디론가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것을 본 팩스턴 변호사는 한숨을 쉬면
서 옆에 있는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퀸 경감이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팩스턴. 너무 걱정하지 말게. 지금 설로우가 한 말은 진정이 아닐 거네. 아마
홧김에 내뱉은 말일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팩스턴 변호사는 목소리를 낮추어서,
"포트부인은, 발끈하는 성질은 있지만 그래도 비정상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그
렇지만, 설로우씨는 정말 이상합니다. 어떤 때 보면 마치 미신 사람이 발광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오는 밤에 권총을 들고 클립 스태더를 찾아갈
지도 몰라요."
"그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겠군요."
엘러리는 설로우의 눈빛을 머리 속에 그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팩스턴 변호
사는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포트집안에서 이상한 것은 설로우씨만이 아닙니다. 그 가
족의 반이 미쳤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그 사람들은 정말로 정신 병
원에 가야 할 정도입니다. 만약에 얼굴을 맞대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아마
총에 맞아 죽을 겁니다."
"그러면, 힘 좀 쓰는 사람을 두어서 감시하도록 해보지 그러나."
그러자, 팩스턴 변호사는 엘러리 탐정을 돌아보면서,
"엘러리 씨 같은 분이라면 괜찮겠습니다만................."
그러자, 엘러리는 선뜻 대답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요. 나도 지금 그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퀸 경감은 깜짝 놀란 듯이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엘러리가 나서는 곳에
는 언제나 기묘한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팩스턴. 내 아파트로 같이 가지 않겠나? 몇 가지 물어 볼 것이 있네."
다 큰 어린애들
엘러리 탐정의 아파트로 간 팩스턴 변호사는 포트 부인과 포트 집안의 이야기
를 자세하게 해주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코닐리아 포트 부인도 처음부터 마귀 할멈이나 고소 노부인은 아니었다. 포트
부인도 보통 여자와 마찬가지로 귀엽고 꿈 많은 소녀였던 때가 있었다. 그때,
코닐리아의 꿈 많은 소녀였던 때가 있었다. 그 때, 코닐리아의 꿈은 돈을 많이
벌어서 매일 예쁜 옷을 입고 언덕 위의 훌륭한 집에서 사는 것이었다. 1982 년,
그녀가 20 살이 되었을 때 코닐리아는 배커스 포트라는 구두 수선공과 결혼했
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던 코닐리아가 왜 구두 수선공과 결혼
을 했을까?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가난한 남편을 부자로 만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코닐리아가 시골 수의사의 부인이 되었다면, 그 수의사는 루이
파스퇴르같은 정도로 훌륭한 수의사가 되었을 것이고, 어느 왕국의 가난한 기
사와 결혼했다면 코닐리아는 그 기사에게 야심을 불어넣어 주어 그 왕국을 차
지하게 하고 자신은 왕비가 되었을 것이다. 코닐리아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남
편을 격려하고 도와주었다. 그 덕분에 결혼한지 7년만에 그들 부부는 커다란
구두 공장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인 배커스 포트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
다. 왜냐하면, 배커스의 꿈은 자신이 좋아하는 구두를 정성껏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장은 도깨비같이 점점 커지고 종업원은 드디어 수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리고, 공장에서 만든 구두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까지
유명하게 되었다. 게다가, 공장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서 포트 제화 회사라고
했다. 따라서, 배커스는 어디에 가더라도 마음놓고 재채기 한 번 할 수 없을 정
도로 유명한 인물이 된 것이다. 결국 그 배커스 포트는 그 위엄에 견디지 못해
서 어느 날 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코닐리아와 결혼한지 10 년째
되던 해에 일어난 일이었다. 코닐리아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지는
않았다. 물론, 배커스도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코닐리아는 자신이 사장이
되어서 포트구두의 판매를 더욱 활발하게 하였고, 회사는 점점 더 커졌다. 회사
의 크기에 맞추어서 코닐리아의 몸은 보기 흉하게 살이 뒤룩뒤룩 쪄갔다. 얼마
뒤, 코닐리아는 뉴욕의 허드슨 강가에 궁전과 같이 화려한 집을 짓고 세 자식
들을 데리고 이사했다.
"그 자식들의 성격에 대해서는 뒤에 천천히 이야기하겠습니다만."
팩스턴 변호사는 엘러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나사 이야기를 이었다.
배커스 포트가 7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재판소는 코닐리아에게 다른 남
자와 결혼을 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렸다. 마침 그 때, 허드슨 강가에 있는 코닐
리아 부인의 집에는 이상한 손님이 들어와 있었다. 한 사람은 스테픈 브렌트라
고 하는, 말레이지아 반도에서 돌아온 탐험가인데 얼굴이 매우 잘 생겼다. 다른
한 사람은 스테픈과 함께 말레이지아 최남단의 섬들을 탐험하고 돌아온 고치
소령이었다. 두 사람은 그림자같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스테픈을 좋아하게
된 코닐리아는 스테픈의 세 자녀는 물론이고 고치 소령까지도 영원히 구두 저
택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말하며 청혼했다.
여기까지 말하고 팩스턴 변호사는 엘러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엘러리씨,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코닐리아 부인이 낳은 자식 세 명은 모
두 머리가 조금 이상합니다."
변호사는 한 사람씩 자세하게 설명을 했다.
큰아들 설로우(47살)----꼬마 설로우라고 한다. 누군가가 자신을 해치지나 않
을까 하고 항상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상대방에게 이상한 기미
가 보이면 자신이 먼저 싸움을 건다.
큰딸 루엘라(44살)----자신을 여자 에디슨이라고 믿고있는 발명광.
둘째아들 호레이쇼(41살)---- 하루 종일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만년 어린이.
이 세 사람 가운데서는 가장 얌전하다.
물론 세 사람 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 여기에 비해서 스테픈의 자식들은,
로버트(쌍둥이 가운데서 형, 30살). 메클린(쌍둥이 가운데서 동생, 30살). 두 사
람 다 머리가 좋고 일도 유능하게 잘해서, 두 사람 모두 포트 제화 회사의 부
사장으로 있으면서 사장인 코닐리아 부인을 도와주고 있다.
쉴라(불타는 듯한 빨간 머리카락과 귀여운 보조개가 특징이며, 성격이 매우
밝은 처녀. 24 살)
이 때, 갑자기 엘러리가 팩스턴 변호사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쉴라양과 당신은 친구이상의 관계이겠군요."
팩스턴은 깜짝 놀라서,
"아니, 엘러리씨, 어떻게 그것을 아셨습니까?"
"하하, 팩스턴씨가 쉴라양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당신의 눈이 유난히 반짝거
렸습니다. 사람들의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 정말 놀랐습니다. 사실, 쉴라와 나는 결혼할 예정입니다."
팩스턴 변호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포트집안을 지키고 싶은 겁니다. 그런
데, 아까 설로우 씨가 한 이야기가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그는 정말 그 말대로
할 것 같습니다. 그는 그 길로 즉시 단골 총포 점으로 갔을 겁니다."
"그 단골 총포 점의 이름을 아신다면 전화를 걸어 보는 게 어떻습니까?"
팩스턴은 전화를 걸어보더니 곧 어두운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엘러리
는 몸을 내밀고,
"벌써 사갔군요."
"그렇습니다. 그것도 14 자루나 사갔다고 합니다."
"예? 14 자루라고요? 무슨 전쟁을 하려고 그러나?"
"점원에게는 권총을 모으기 위해서라고 말했답니다. 설로우씨는 총기 소지 허
가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법에 걸리는 일은 아닙니다."
"수집이라니, 아주 좋은 구실이군요. 미친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없
는 기발한 지혜를 짜내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요."
"퀸 씨, 웃을 일이 아닙니다. 지금 설로우씨는 총을 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
면 좋겠습니까?"
"빨리 나를 포트 저택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만약에 위험이 닥치면 아버님에
게 부탁해서 설로우씨의 허가증을 빼앗도록 해보지요."
"알았습니다. 그러면, 오후 6시에 쉴라와 함께 차로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림자가 있는 보조개
'아주 사랑스런 여자로군.'
엘러리 퀸은 팩스턴 변호사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쉴라를 보고 마음속으로 이
렇게 생각했다. 딸기같이 빨간 머리카락과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안녕하세요, 엘러리 씨?"
쉴라가 웃으면서 인사를 하자 왼쪽 뺨에 보조개가 패었다. 그러나, 엘러리는 쉴
라의 고운 얼굴에 희미하게 슬픈 그림자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혹시, 그 고소 노부인이 쉴라 양과 팩스턴 변호사의 결혼을 반대하고 있는 것
은 아닐까?'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그러한 것을 본인들에게 직접 물어 볼 수는 없는 일이
었다. 세 사람을 태운 자동차는 구두 저택을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뒤,
쉴라양이 먼저 입을 열었다.
"퀸 씨, 처음 뵙는 분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실례인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 어머니는 팩스턴씨와 저와의 결혼을 반대하고 있어요."
"예? 왜요? 팩스턴씨같이 좋은 분과 결혼하는 것을 왜 반대하실 까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데요."
"이유가 한가지 있어요. 그것은 루엘라 언니가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에
요. 나이가 많은 딸부터 순서대로 시집보내겠다는 말씀이지요."
엘러리는 포트 부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자기가 낳은 루엘라에게 슬픈 경
험을 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부모들은 대개 성격이 나쁜 자식일수록 정이
많이 간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엘러리가 말했다.
"당신들은 이미 어른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님이 반대를 한다해도 얼마든지
결혼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포트부인의 승낙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무슨 특별한 까닭이 있는 모양이군요."
팩스턴 변호사는 쉴라 양에게 그만두라고 하는 눈짓을 보냈으나, 쉴라양은 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답을 했다.
"그래요. 퀸 씨 말대로 우리는 허락 없이도 결혼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렇
게 하면 저는 유산을 한 푼도 받을 수 없어요. 저는 돈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
습니다만, 찰리에게 훌륭한 사무실을 하나 차려 주고 싶어요."
팩스턴 변호사는 운전대를 꺾으며,
"퀸 씨, 쉴라의 이야기로는 내가 유산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들리시겠습니다
만, 나도 유산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쉴라는 보기와는 달리
지독한 고집쟁이입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도 않았는데, 그 점은 포트 부인과
꼭 닮았어요."
"그렇지 않아요."
쉴라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팩스턴 변호사의 말에 정말 화가 난 것 같았다.
"찰리, 그건 어머니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에요. 사람들은 어머니를 마귀 할멈
이니, 고소 노부인이니 하고 부르고 있지만 어머니는 정말로 상냥한 분이에요.
어머니가 낳으신 설로우, 루엘라 언니, 호레이쇼 오빠 못지 않게 우리들 세 남
매에게 무척 잘해주세요. 작년에 제가 아파서 누워 있을 때, 어머니는 새벽 3시
까지 주무시지도 않고 저를 돌봐 주셨어요."
'고소 노부인은 집에서는 상냥한 어머니로군. 정말 사람은 겉만 보고서는 판
단할 수 없단 말이야.'
엘러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어머님을 설득시키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러자, 쉴라는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며,
"퀸 씨, 사실은 말이에요, 어머니는 더 이상 사실 수 없어요."
"예?"
"이니스 박사님이 어머니의 심장병은 이제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는 최악
의 상태라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앞으로 열흘이나 그 정도밖에 사실 수 없어
요."
'아아,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방해하고 있는 계모인데도 어떻게 저렇게까
지 마음을 쓸 수 있을까? 정말 착한 처녀야.'
엘러리는 팩스턴 변호사가 조금은 부러웠다. 그 때, 신호등이 빨간 색으로 바뀌
었다.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팩스턴 변호사가 재빨리 브레이크를 밟았
다. 그러자, 쉴라는 문을 열고,
'찰리,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을 어머니가 보신다면, 또 걱정을 하실 거예요. 저
는 여기에서 내리겠어요. 퀸 씨,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아서 죄송합니다."
10분 뒤, 자동차는 허드슨 강가에 세워진 포트 저택에 도착했다. 무어 건축 양
식(8세기경에 스페인과 아라비아의 영향을 받아서 모로코 등에서 발달한 건축
양식) 으로 세워진 높은 문에서부터 저택의 현관까지의 거리는 70m 도 되었다.
그리고, 건물의 앞쪽은 넒은 잔디밭으로 되어있고, 여기저기에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자동차에서 내린 엘러리의 눈에 나무와 나무사이에 걸려져있는 기분
나쁜 물체가 들어왔다. 높이가 4m 폭이 5∼6m정도 되는 어떤 물체가 허드슨
강에서 반사되는 황혼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것은 무엇입니까?"
가까이 가서보니 그것은 돌기둥 위에 얹혀있는, 끈이 달린 여자 구두 동상이었
다. 2∼3 톤은 나갈 것같은, 구리로 만들어진 동상이었다. 구두 위에는 네온사
인으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엘러리는 그 글자들을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포트 구두, 전국 균일 가격. 3 달러 99센트."
"저녁 식사 때까지는 30 분 정도 시간이 있으니까 집을 한 바퀴 돌아봅시다."
팩스턴 변호사의 말대로 엘러리는 구두 저택을 돌아보기로 했다.
"정말 소문대로 뉴욕에서 제일 가는 집이군요."
주위를 둘러보면서 엘러리가 중얼거렸다. 보통 이런 집은 고딕 풍이라든가 비
잔틴 풍으로 짓게 마련인데, 이 저택은 그런 형식에 따라 지은 것이 아니었다.
무어 풍과 페르시아 풍에 따라 지은 것이 아니었다. 무어 풍과 페르시아 풍에
따라 지은 것이 아니었다. 무어 풍과 페르시아 풍에 고딕 풍을 섞어서 지은 좀
특이한 건물이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램프의 거인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로
군."
엘러리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1층의 중앙 홀에서 시작되는 나선형 계단을 올
라갔다. 2 층에 올라가자 긴 복도가 이어져있었다. 복도가 끝나는 곳에는 좁은
탑이 있었고, 그곳에 또 나선형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니 문이 나왔다.
"여기는 누구 방입니까?"
"발명광인 루엘라양의 방입니다."
팩스턴 변호사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두꺼운 유리로 된 작은 창의 저쪽에서
어떤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곧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야, 이건 살아있는 미이라로군!'
엘러리는 등골이 오싹했다. 그 여자의 얼굴은 누렇게 바싹 말랐으며 머리카락
은 하얀 데다가 커다란 눈동자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 여자는 의사처
럼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볼품없이 가는 다리가 보였다. 팩스
턴 변호사가 엘러리를 소개하자 루엘라는 큰 소리로,
"당신이 탐정이라고요? 거짓말이에요. 팩스턴 씨, 이 사람은 나의 발명품을 훔
치기 위해서 온 산업 스파이일 거예요. 빨리 쫓아 보내요."
팩스턴 변호사와 엘러리는 허둥지둥 나선 계단을 내려왔다. 휴 하고 한숨을 쉬
면서 엘러리는,
"저 여자는 분명히 천재 같은 데가 있긴 있군요.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연구
하고 있는 겁니까?"
"그게 말입니다....., 한번 사면 평생 신을 수 있는 플라스틱 구두를 만든다고
하더군요."
"그런 구두를 만든다면 포트 집안은 이미 지금까지 밀린 세금 때문에 무너질
지도 모릅니다."
팩스턴 변호사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러면, 둘째 아들 호레이쇼를 만나 봅시다."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열면서,
"이 저택은 U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가운데는 넓은 정원이 있습니다. 호레이
쇼씨의 동화의 집은 바로 그 정원의 옆에 있습니다."
"동화의 집?"
엘러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팩스턴 변호사가 가리키는 건물을 보자,
"오, 정말 동화 속에 나오는 집 같군요."
라고 감탄했다.
몽당 연필과 같은 탑이 몇 개가 솟아 있었으며, 정면의 문은 금으로 만든 하프
와 같은 모양이었다. 창문은 모두 분홍색이었으며, 그밖에는 푸른색의 쇠덧문이
닫혀 있었다. 고풍스러운 굴뚝에서는 초록색의 연기가 뭉게뭉게 올라오고 있었
다. 약품을 써서 연기에 색깔을 낸 것 같았다. 팩스턴 변호사가 하프 모양의 문
을 두드리자 문이 열리고 뒤룩뒤룩 살이 찐 키가 작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 얼
굴은 어디선가 만났던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렇다! 산타클로스다. 턱수염을 깎은 산타클로스다.'
동화의 나라에 사는 만년 어린이 호레이쇼는 엘러리와 악수를 나누었다. 보기
와는 달리 그는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엘러리는 손이 아플 정도였다.
"퀸 씨, 들어오셔서 집안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호레이쇼는 기분이 매우 들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퀸은 또 한 번 놀랐다. 넓
은 방에 가득히 장난감 철도가 놓여 있었고, 그 철도를 따라서 증기 기관차가
재빨리 달리고 있었기 ㄸ문이다. 장난감 철도 주위에는 그림책이 잔뜩 쌓여 있
었고, 동물 인형도 몇 개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낙서한 그림책이 여기저기 지저
분하게 널려 있고, 천장에는 모형 비행기가 끈으로 매달려 있었다.
"어떻습니까? 훌륭한 집이지요. 나는 언제까지나 여기에서 살고 싶습니다. 바
깥 세상은 도저히 나와는 맞지 않아요."
엘러리는 이렇게 말하는 41 살의 호레이쇼의 눈동자가 소년과 같이 빛나고 있
는 것을 보았다. 호레이쇼는 엘러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이런 이야기를 늘
어놓았다.
"퀸 씨, 지금 나는 시를 쓰고 있었어요. 한번 들어보시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은 모두 미쳐있다.
모두 안절부절 허둥거리고
왜 저렇게 움직일까?
모두 돈을 탐낸다.
그렇다면, 마술사를 불러와서
나뭇잎을 돈으로 만들어 볼까?
금 베개에 금 침대
모두 사이 좋게 잠잔다."
엘러리는 슬슬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
'호레이쇼씨는 부인이 낳은 다른 자식들과는 성격이 다르군. 그러나, 호레이쇼
씨가 정상이고 내가 미친 건지도 모르지.'
오후 7시, 포트 집안의 저녁 식사시간이 되었다. 퀸도 저녁 식사에 자리를 함
께 했다. 퀸의 바로 앞에는 포트 부인이 여왕처럼 앉아있었고, 그 왼쪽으로는
버마 제비같이 마른 55∼56 살 정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포트 부인의 두먼
째 남편인 스테픈이다. 그 옆에는 곰처럼 몸집이 듬직한 스테픈의 친구인 고치
소령이 앉아 있었다. 설로우는 오른쪽에 앉아서 식탁 위에 책 두 권을 올려 놓
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싱글거리고 있었다. 발명광 루엘라는 천장의 샹들리
에를 물끄러미 쳐보고 있었다. 갑자기 무언가 굉장한 아이디어라도 떠오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옆에는 쉴라가 앉아 있었으며, 호레이쇼는 동화의 집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싶다면서 오지 않았다. 스테픈의 쌍둥이 아들인 로버트와 매
클린은 회사의 일이 밀렸기 때문에 조금 늦는다고 했다고 한다. 곧 저녁 식사
가 들어왔다. 뜻밖에 포트 부인은 붙임성이 좋고 상냥한 여주인이었다. 포트 부
인은 엘러리가 서먹서먹하지 않게 몇 마디의 이야기를 걸어왔다. 설로우는 책
을 읽으면서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무척 재미있는 책인가 보군요. 무슨 책입니까?"
엘러리는 옆에 앉아있는 팩스턴 변호사에게 물었다. 팩스턴 변호사는 곁눈질로
힐끗 보고서는,
"퀸 씨, '결투의 역사와 예절' 과 '권총 사용법'입니다."
"예?"
엘러리는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이 정말로 결투를 할 모양인가? 수프가 나왔다.
굉장히 맛있는 닭고기 수프였다. 엘러리는 식탁 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마땅
히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엘러리는 팔꿈치로 변호사를 꾹 찔렀다.
"이 식탁에는 왜 빵이 없습니까?"
"그건 말씀이죠.........,"
팩스턴 변호사는 목소리를 낮추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포트 노부인이 이니스 박사님에게 빵은 몸에 해로우니 잡수시지 말라
는 엄중한 주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부인은, 빵이 그렇게 나쁜 것이
라면 가족들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니 빵을 먹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 버렸어요.
이 집에서는 노부인의 명령이 절대적이니까요."
엘러리는 마더 구즈의 동요가사가 생각났다. 그래서, 팩스턴 변호사의 귀에다
속삭였다.
" '옛날 옛날 마귀 할멈이 구두 저택에 살고 있었습니다. 너무 자식이 많아서
어떻게 살아 나갈까요. 빵은 주지 않고 수프로 때우고...............' 지금의 포트 집
안이 그대로 아닙니까?"
"퀸 씨, 이 집에서는 절대로 '마더 구즈' 의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팩스턴 변호사가 엄숙한 얼굴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루엘라가 큰 소리
로 말했다.
"어머니, 저, 부탁이 있어요."
"무슨 부탁이냐, 갑자기?"
"저, 연구비가 필요해요. 2천 달라만 있으면, 지금 연구하고 있는 플라스틱 구
두를 완전히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어머니, 주시는 거죠?"
그러자, 포트 부인의 얼굴은 정말 마귀 할멈처럼 변했다.
"루엘라, 요전에 1천 달러 주었을 때 그것으로 끝이라고 했잖아. 이제는 더 이
상 1 달러도 줄 수 없다."
그러자, 40 살의 딸은 4 살 난 어린애처럼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너무 인색해요. 구두쇠, 욕심쟁이."
"루엘라, 손님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 자, 어서 일어나서 방으로 돌아가거
라."
"싫어, 싫어요."
"루엘라, 에미 말을 거역할 참이냐? 그렇다면 잠을 재워야겠구나."
"너무해요, 어머니. 나는 배가 너무 고파요."
"배가 고파도 할 수 없어."
포트 부인은 루엘라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와앙―! 루엘라는 큰 소리로 울면
서 밖으로 끌려나갔다. 엘러리는 동요의 다음 구절을 생각하고 입속으로 중얼
거렸다.
'회초리로 때려서 잠을 재우지요.――. 야, 정말 지독하군.'
엘러리가 더 놀란 것은 부인의 심한 태도보다도, 쉴라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의
태도였다. 다른 가족들은 그런 루엘라를 쳐다보지도 않고 유유히 수프를 마시
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이런 일이 매일 벌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쉴라만은
달랐다. 엘러리에게 이런 광경을 보여주게 된 것이 매우 부끄럽고 슬픈 것 같
았다. 쉴라는 계속 눈시울을 닦더니 식당에서 나가고 말았다. 팩스턴 변호사도
뒤를 따라서 나갔다. 팩스턴 변호사는 10 분 정도 지나서 돌아와서는 엘러리에
게 속삭였다.
"쉴라가 당신에게 잘 말씀드려 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자신에게 맹세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정신 병원에서 쉴라를 데리고 나가야 할 텐데............"
고기 요리가 나왔을 때, 로버트와 매클린이 돌아왔다. 두 사람은 엘러리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식탁에 앉았다. 이 쌍둥이 형제는 얼굴이나 몸집이 너무
도 닮았다. 더구나, 똑같은 옷에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잘 알고있는 팩스턴 변호사도 엘러리에게 소개하는데 엉뚱하게 바꾸어서 소개
를 하고 말았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나이프와 포크를 손에 들긴 했지만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있는 모양이군.'
그러자, 드디어 로버트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포트 부인에게 이야기를 꺼
냈다.
"이러한 것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려서 쓸데없는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는 않
습니다만, 실은 저희들은 무척 곤란한 지경에 있습니다."
"곤란하다니, 구두값의 변동이 심한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어머니. 실은, 설로우 형님에 관한 일입니다."
"이봐, 로버트, 식사 때에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야."
매클린이 말렸다. 그러자, 포트 부인은 매클린을 쏘아보면서,
"매클린 잠자코 있어."
"예."
"로버트, 설로우일로 무언가 불만이 있다면, 어서 말해 보거라. 한번 말한 것
을 그만두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 아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말씀드리지요. 어머니, 앞으로는 설로우 형님이 어머니에
게 울면서 애원을 해도 이번과 같은 일로 재판에 소송하는 것은 피해주시기 바
랍니다."
"로버트, 이번 재판에 비용은 별로 들지 않았다."
"어머니, 비용문제가 아닙니다. 이번과 같은 하찮은 일로 계속 소송을 한다면
회사의 이미지가 나빠질 뿐만 아니라 구두 판매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정말 그럴까?"
포트 부인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설로우가 사나운 개와 같이 눈을 크게 뜨고
덤벼들었다.
"뭐가 하찮다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나를 모욕한 녀석을 그냥 놔두란 말이
야."
보통 때는 얌전한 로버트이지만, 오늘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형님, 그건 형님이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형님이 이번 일로 재판을 건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더구나, 오늘은 권총을 14 자루나 사시지 않았습
니까? 무슨 폭력 조직이라도 조직할 작정입니까?"
"둘 다, 조용히 해!"
포트 부인이 말렸지만, 설로우와 로버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설로우는 깁자기 식탁 위의 냅킨을 집어들어서 로버트의 얼굴을 휘갈겼다. 그
리고,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큰 소리를 질렀다.
"너는 나에게 굉장한 모욕을 주었어. 우리는 이름만 형제이지, 사실 너와 나는
남이야. 나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복수를 하겠다. 여기에서 꼼짝 말고 있어.
권총 두 자루를 가지고 올 테니까 네가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설로우는 쿵쿵거리면서 식당을 나갔다. 가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기만 할뿐이다. 팩스턴 변호사는 엘러리 탐정에게,
"저 책이 문제였습니다. 설로우씨는 저 책대로 실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설마 진정으로 저러는 것은 아니겠지요?"
엘러리가 이렇게 말했을 때, 설로우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권총 두 자루
가 들려 있었다. 엘러리는 무심결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엘러리씨, 진정해 주세요."
설로우가 이렇게 말하자 엘러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설로우는 의자에 앉아 있
는 로버트 코앞에 권총 두 자루를 들이댔다.
"자, 로버트, 마음에 드는 것을 집어. 결투를 신청 받은 쪽이 무기를 쥘 권리
가 있는 거다. 이것은 결투할 때의 기본적인 예절이야."
로버트는 주저하지 않고 권총하나를 집어들었다. 스미스 웨슨제 38/32형 0.38
인치 구경이다. 길이는 겨우 15㎝ 정도 되는 것이었지만, 로버트에게는 기관총
보다도 더 무섭게 느껴졌다. 옆에 서 있던 매클린은 너무 떨려서 손 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설로우는 그의 손에 남겨진 권총을 내려다보았다. 콜트 0.25
구경으로, 로버트가 가진 권총보다 작은 미니 권총이었다. 길이는 11㎝였다. 따
라서 명중률도 낮았다. 그러나, 설로우는 자신이 있다는 웃음을 지으면서 그것
을 주머니에 넣었다.
"엘러리씨, 결투할 때는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미안합니다만,
엘러리 씨가 좀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예? 내가요? 그건 좀……."
엘러리가 꺼려하는 눈빛을 보이자, 팩스턴 변호사가 '하여튼 승낙하시오' 라는
눈짓을 보내와서 마지못해 응했다. 설로우는 과장된 몸짓으로 엘러리에게 고맙
다는 인사를 한 다음 로버트에게,
"로버트, 결투시간은 새벽 6시. 장소는 구두 동상 앞이다."
로버트는 멍하니 서 있었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설로
우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로버트, 이 총에는 총알이 한 발밖에 들어있지않다. 결투할 때는 총알을 한
발만 준비하는 것이라고 책에 쓰여있어. 특히 주의해 두겠는데, 도망가도 소용
없어. 나는 지구 끝까지라도 따라갈 테니까. 자, 새벽에 구두 동상 앞에서 만나
자. 한 발로 처리해 주겠다."
설로우는 의기양양하게 식당에서 나가 버렸다.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듯이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쉴라가 들어왔다.
"모두, 이상해요. 지금, 설로우 오빠가 총을 들고 방으로……."
쉴라는 여기까지 말을 하다가 로버트의 손에도 총이 쥐어져있는 것을 보고 깜
짝 놀라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팩스턴 변호사는 재빨리 쉴라에게 다가가서,
"쉴라, 걱정할 것 없어. 두 사람은 새벽에 결투 흉내를 내기로 했어. 설로우씨
는 항상 이상한 장난을 잘하잖아."
"이번에는 장난이 아니에요. 설로우 오빠는 굉장히 심각한 표정이었어요."
쉴라는 포트 부인의 팔에 매달려서,
"어머니, 말려 주세요. 너무 무서워요."
그러나, 포트 부인은 고소 노부인답게 결투에 굉장히 관심이 가는 듯했다. 부인
은 눈을 날카롭게 뜨고는,
"쉴라, 여자가 남자들이 하는 일에 이렇더저렇다 끼어드는 것이 아니다."
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엘러리를 향하여,
"나는 당신이 누구에게 부탁을 받고 여기에 왔는지 알고 있어요."
라고 말하고 나서 침실로 돌아가 버렸다. 이어서, 스테픈과 고치 소령도 돌아갔
다. 식당에 남은 사람은 로버트와 매클린 쌍둥이 형제와 쉴라, 팩스턴 변호사,
그리고 엘러리 퀸 이렇게 5명이었다. 이 5 사람은 어떻게 하면 이 쓸데없는 놀
이를 중지시킬 수 있을까 의논하기로 했다.
"중지시킬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긴 합니다."
먼저 퀸이 말을 꺼냈다.
"첫 번째는 설로우 포트씨를 지금 곧 정신 병원에 입원시키는 겁니다. 그렇죠,
무조건 입원시키는 겁니다."
"그건 너무 지나친 방법입니다."
팩스턴 변호사가 반대했다.
"그리고, 포트 부인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설로우씨는 그것을 핑계
로 우리들에게도 결투를 신청할겁니다. 그러지말고, 설로우씨에게 결투를 하도
록 내버려둡시다."
"예? 결투를?"
"그렇습니다. 단, 총알이 없는 권총으로요. 설로우씨는 아까, 결투할 때 권총에
한 발밖에 넣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한 발을 공포탄으로 바꿔놓는 겁니
다. 그렇게 하면 내일 새벽, 설로우씨가 방아쇠를 당겨도 소리와 연기만 나고
총알은 나가지 않을 겁니다."
"아, 그것도 좋은 방법이군요."
엘러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팩스턴 변호사는 로버트를 보면서,
"자, 이재 됐습니다. 로버트씨."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공포탄으로 바꾸는 것은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설로우 형님이 전혀 알아채지 못하게 바꾸어 놓는 것이 문제로군요."
그 때, 팩스턴 변호사가 쉴라를 쳐다보면서,
"쉴라가 그럴듯한 핑계를 대서 설로우씨를 1 층 서재로 불러낼 겁니다. 그 사
이에, 퀸 탐정과 내가 설로우 씨 방에 들어가서 총알을 바꾸어 놓는 겁니다. 그
러나, 지금 여기에는 콜트 0.25 구경의 공포탄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 거라면 걱정 마십시오. 내가 아버지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공포탄을
부탁해 보겠습니다."
졔획은 잘 세워졌다. 먼저 설로우를 불러낼 쉴라와, 망을 보기로 한 매클린이
나갔다. 10 분 정도 지나자 매클린만 돌아와서,
"팩스턴, 쉴라가 설로우 형님을 도서관으로 불러냈소." 라고 말했다.
엘러리와 팩스턴 변호사가 조심조심 2 층으로 올라가서, 설로우의 방문을 열었
다. 뜻밖에 방안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고, 무척 어려운 책들이 꽂혀 있었다.
"퀸 씨, 빨리 권총을 찾읍시다."
팩스턴 변호사는 침실로 들어가서 침대 옆의 장롱 위에 올려져있는 콜트 권총
을 찾아냈다. 엘러리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탄창을 열었다.
"설로우씨는 훌륭한 기사입니다. 약속한 대로 한 발밖에 들어있지 않군요."
엘러리는 콜트 권총을 주머니에 넣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로버트에게서
스미스 웨슨제의 총을 건네 받고는 차를 타고 뉴욕 경찰 본부로 달려갔다. 아
버지 퀸 경감은 엘러리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나더니 별로 좋아하지 않는 표정
을 지었다.
"나는 그런 위험한 계획에는 찬성할 수 없어. 벨리 부장, 자네 생각은 어떤
가?"
"저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고 해도 총알은 역시 총알
이니까요."
"그러나, 이 이상의 방법은 없어요. 아버지도 설로우씨의 그 이상한 성격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엘러리는 결국 아버지를 설득시켰다. 아버지는 마지못해 권총에서 실탄을 빼고
공포탄으로 바꿔 엘러리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벨리 부장에게,
"벨리 부장, 우리들도 새벽 결투에 나가보세. 무슨 사고가 나지 말아야 할텐
데……."
엘러리는 공포탄을 넣은 권총을 설로우의 침실 옷장 위에 올려놓고, 스미스 웨
슨 권총을 로버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서재로 들
어갔다. 그러자, 설로우가 다가와서는,
"퀸 씨, 밖에 나가서 술이라도 한 잔 할까요?"
하고 말을 걸어왔다.
"좋습니다."
엘러리는 팩스턴, 쉴라와 함께 술집으로 갔다. 될 수 있는 데로 설로우가 술에
잔뜩 취해서 새벽 결투를 포기하도록 하려고, 퀸은 설로우에게 계속 술을 권했
다. 설로우도 사양하지 않고 계속 마셨다. 그런데, 설로우가 새벽이 가까워오자
술잔을 놓았다.
"퀸 씨, 중요한 결투가 있습니다.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지요."
그의 눈은 악마와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제아무리 겁이 없는 엘러리도 그의
눈빛을 보고는 등골이 오싹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오전 5시 45 분, 결투 시간이 15 분 남았다. 설로우는 몹시 긴장해 있었다. 잔
디밭을 지나서 구두 동상 앞에 섰다. '포트 구두 전국 균일 가격 3 달러 99 센
트' 라는 네온사인이 졸립다는 듯이 깜빡거리며, 어리석은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약간 더운 날씨인데도 예절을 지키려는 듯이 설로우는 모직으로 된 양
복을 입고 있었다.
"엘러리 씨, 내 침실에서 권총을 가져다주시겠습니까?"
엘러리는 조금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런 때 조수는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는 것을 책에서 읽어서 알고 있었기 ㄸ문에 그대로 권총을 가지러 집으로 향했
다. 구두 동상 옆을 지나칠 때 엘러리는 아버지와 벨리 경찰 부장이 이미 와서
숨어있는 것을 보고 조금 마음이 놓였다. 엘러리는 2 층으로 올라가서 설로우
의 방으로 향했다. 넓은 집 안은 썰렁했다. 아들 둘의 목숨이 걸린 중대한 일인
데 포트 부인은 쿨쿨 자고만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커튼 사이로 내려다보고
라도 있을까? 엘러리는 설로우의 방문을 열었다. 방안은 어제 저녁과 다른 것
이 하나도 없었다. 콜트 권총은 앨러리가 놓은 대로 침실의 옷장 위에 놓여 있
었다. 엘러리는 권총을 들고 돌아왔다. 6 시, 로버트가 매클린과 함께 나왔다.
설로우와 로버트는 싸늘한 눈초리로 서로를 노려보았지만, 예절대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설로우의 조수인 엘러리와 로버트의 조수인 매클린은 두 사
람에게 화해를 권했다. 그러나, 설로우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권총의
총알이 공포탄인 것을 알고 있는 로버트도 항복하지 않았다. 엘러리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설로우씨, 당신 총입니다."
엘러리는 굳은 표정으로 권총을 건네주었다. 설로우는 얼른 총을 받아서 옷저
고리의 오른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만약 무승부가 된다해도 상대방을 살려두
지 않겠다는 매서운 각오가 설로우의 몸에서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엘러리의 지시에 따라 두 사람은 등을 대고 섰다. 로버트는 어젯밤에 엘러리에
게 받은 스미스 웨슨 권총을 꽉 쥐고 있었다. 설로우도 바로 전에 건네 받은
콜트를 웃저고리의 오른쪽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등을 똑바로 대주십시오."
두사람은 똑바로 대려고 했지만 두 사람 다 몸을 너무 떨고 있었기 때문에 등
이 좀처럼 맞지 않았다. 엘러리는 말했다.
"지금부터 10을 세겠습니다. 내가 셀 때마다 각자 한 발자국씩 앞으로 걸어가
십시오. 10을 다 세고나면, 내가 '겨냥' 하고 외칠 겁니다. 그러면,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권총으로 상대방을 겨냥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 둘, 셋이라고
외치면 총을 쏘는 겁니다."
두 사람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쉴라가 조그맣게 웃음을 터
뜨렷다. 두 사람은 10 발자국을 걸어가더니 몸을 돌려서 서로 마주보았다. 설로
우는 입을 꾹 다물고, 권총을 든 팔을 높이 들어서 로버트를 겨누었다. 로버트
도 똑같이 했다.
"하나."
엘러리는 큰 소리로 천천히 세기 시작했다.
"둘."
퀸 경감과 벨리 부장이 구두 동상 뒤에서 튀어나왔다.
"셋!"
'타앙!' 굉장히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그 총소리는 새벽의 허드슨 강에 크게
울려 퍼져 나갔다. 설로우가 가지고 있는 콜트 0.25 구경의 총구에서 연기가 흘
러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14 개의 시선이 잔디 위로 쏠
렸다. 거기에는 쏘지 않은 권총을 꽉 쥐고 있는 로버트가 쓰러져있었다. 쉴라가
비명을 질렀다. 퀸 경감과 벨리 부장이 재빨리 달려들었다. 제일 먼저 로버트에
게 달려든 것은 매클린이었다.
"로버트, 어서 일어나. 이제 결투는 끝났어."
팩스턴 변호사가 로버트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엘러리가 몸을 굽혀서 조
사해 보고는 무릎에 묻은 풀을 털어 내면서 일어났다.
"죽었습니다. 즉사입니다."
쉴라가 울면서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설로우는 총을 손에 든 채로 멍청히 서
있었다.
"공포탄이 아니었군!"
벨리 부장은 신음하듯이 말했다. 쓰러져있는 로버트의 가슴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와서 잔디에 번지고 있었다. 설로우는 그것을 보더니 권총을 내던지고
비틀비틀 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엘러리, 설로우에게 분명히 실탄을 뺀 권총을 건네주었지? 확실하지?"
경감은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입니다."
엘러리는 로버트의 권총을 조사해보았다. 어제 저녁의 공포탄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로버트는 방아쇠를 당기지도 않은 것이다. 그런데, 설로우의 권총에서
는 튀어나올 리가 없는 실탄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이건, 살인이다."
퀸 영감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살인입니다."
엘러리도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더구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건 대담한 도전입니다. 어떤 녀석이
설로우의 권총에 들어있는 공포탄을 실탄으로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제2부 저주받은 포트집안
날씨는 무척 맑았지만 엘러리의 머리 속에는 검은 구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
다. 기괴한 살인이 자신이 보는 앞에서 펼쳐졌던 것이다. 엘러리는 어디에서 숨
어서 비웃고 있을 범인의 얼굴을 그려보면서 이를 갈았다. 퀸 경감의 부하들이
달려왔다. 집밖에는 경찰차가 서 있었다. 의사가 와서 로버트의 시체를 조사했
다. 벨리 부장은 설로우를 심문하기 위해서 집안으로 들어갔지만 곧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돌아왔다.
"저 설로우란 친구는 정말 미친 모양입니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꿩 한 마리
죽인 것처럼 태연합니다. '나는 책에 있는 대로 결투의 예절에 따라 했을 뿐입
니다. 권총에서 개구리가 튀어나왔다면 이상하지만, 총알이 튀어나왔는데 그것
이 무엇이 이상하다는 겁니까?' 라고 하는 겁니다. 더욱이, 이상한 것은 설로우
씨가 산 나머지 12 자루의 권총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아마 누군가가 숨긴 모
양입니다."
"하여튼 차근차근 수사를 시작해 봐야지."
경감은 부장에게 이렇게 말하고 나서 엘러리에게,
"엘러리, 어젯밤, 경찰 본부를 나오고 난 다음부터 너의 행동을 자세히 말해보
거라."
"저는 곧바로 이곳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설로우씨의 침실로 들어가서 실탄
을 뺀 콜트 권총을 옷장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물론, 로버트에게도 공포탄을 넣
은 스미스 웨슨 권총을 건네주었지요."
"설로우의 침실에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나"
"글세, 아마 없었을 겁니다."
"총알을 바꾸어 넣는 것을 알고있는 사람은 누구누구지?"
"로버트와 매클린, 쉴라양, 팩스턴 변호사, 그리고 저까지 5 명입니다."
"음, 그리고 그 다음에는 무엇을 했지?"
"그 다음에는, 설로우, 쉴라양, 팩스턴 변호사와 함께 술집에 가서 밤새도록
마시다가 오전 5시 45분에 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건 아버지도 보셨지요?"
"음, 보았어 그러면 설로우, 쉴러양, 팩스턴 변호사, 이 세사람은 설로우의 침
실에 숨어들어가 콭트 권총에 손을 대지 못했겠군."
"그건 확실합니다. 세 사람 모두 잠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까요."
"집으로 돌아와서는 어떻게 했어?"
"설로우의 침실에 가서 권총을 꺼내다 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설로우는 총을
받자마자 그대로 옷 저고리의 오른쪽 주머니에 넣었기 때문에, 실탄으로 바꿔
넣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역시 밤중에 누군가가 실탄으로 바꾸어 넣은 거야. 어젯밤에 집에 있
던 사람은?"
"하인은 빼고 다음과 같습니다. 포트 부인, 스테픈 씨, 스테픈 씨의 친구인 고
치 소령, 발명광 루엘라 양, 만년 어린이 호레이쇼, 그리고 매클린과 로버트가
있었습니다."
"먼저 이 7 사람부터 조사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군. 한 사람씩 자세히 조사
해 보기로 하자. 포트 부인부터 시작해 볼까!"
그러자 엘러리는 크게 하품을 했다.
"아버지, 저는 어젯밤부터 계속 설로우씨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한잠도 못
잤어요. 팩스턴 변호사가 특별히 저를 위해서 마련해준 침실에서 한잠 자고 오
겠습니다. '좋은 지혜는 좋은 잠에서' 라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엘러리는 어안이 벙벙해 있는 아버지를 남겨 두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러나, 두 시간도 채 못되어 엘러리는 잠에서 ㄲ어났다. 집밖이 굉장히 시끄러웠
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지?"
창밖을 내다보니 퀸 경감이 신문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몰려서 진땀을 빼고 있
는 것이었다. 엘러리는 서둘러서 내려갔다.
"앗! 명탐정 엘러리 퀸이다. 무언가 중대한 이야기를 해줄 거야."
신문 기자들은 퀸 경감 쪽에서 엘러리에게로 모여들었다.
"퀸 씨, 결투가 벌어졌다는데, 그것도 예법에 따라서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십
시오."
"조용히 하십시오. 사람이 죽었습니다."
엘러리가 이렇게 외쳤지만 더욱 소란할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현관 쪽에서 포트 부인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포트 부인은 이
니스 박사와 함께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조용히 있던 신문 기자들은
갑자기 포트 부인을 향해 와 하고 몰려들었다.
"모두 나가시오! 여기는 내 집이오."
부인은 이렇게 외치면서 치마 주름 밑에서 무엇을 빼내 들었다. 그것은 권총이
었다. 그 총은 햇빛을 받아서 푸른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벨리 부장은 엘러
리에게,
"저것은 설로우가 산 12 자루 총 가운데 하나이네. 역시 포트 부인이 총을 숨
겼군."
하고 속삭이고 나서,
"부인, 그런 위험한 물건은 빨리 버리십시오."
하고 부인에게 경고했다. 그 때, 용감한 사진 기자들이 포트 부인에게 사진기를
들이댔다. 그 순간 '탕!'하고 부인의 총이 불을 뿜었다.
"으악!"
사진 기자들은 사진기를 내동댕이치고 도망가 버렸다.
"귀찮은 녀석들, 이제야 가버렸군."
부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옆에 있는 퀸 경감과 엘러리를 쳐다보았다.
"당신들도 빨리 가시오. 가지 않으면 한 발 쏘아 줄 거요."
포트 부인이 쥔 총이 코브라의 머리처럼 기분 나쁘게 흔들거렸다.
"예, 알았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경감은 도망치는 체하면서 벨리 부장에게 눈짓을 했다. 벨리 부장은 총알같이
빠른 속도로 포트부인에게 달려갔다. 그 순간, 부인은 벨리 부장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벨리 부장이 위험하다! 엘러리는 재빨리 계단을 올라갔다. 퀸 경감은
주머니에서 커다란 만년필을 꺼내어 부인에게 던졌다. 엘러리가 몸으로 포트
부인을 미는 순간, 경감이 던진 만년필이 부인의 손을 정확하게 맞추었다. '타
앙!' 총이 불을 뿜었다. 엘러리는 부인의 가는 다리를 들어 올렸다. 총알은 아
슬아슬하게 벨리 부장의 모자를 뚫고 지나갔다. 권총은 무거운 소리를 내면서
돌계단에 떨어졌다. 벨리 부장은 권총을 주워들고 부인을 노려보았다. 포트 부
인은 엘러리와 이니스 박사에게 붙들리자 암탉 과 같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
쳤다.
"망할 녀석들, 너희들을 고소해 버리겠다!"
그러자, 이니스 박사가 부인의 귀에다 대고 무어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포트
부인이 갑자가 얌전해졌다. 아마 이니스 박사는 '너무 흥분하면 십장에 해롭습
니다.' 라고 속삭인 모양이다. 이니스 박사는 그대로 부인을 데리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벨리 부장은 원망스러운 듯이 자신의 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퀸
경감은 벨리 부장에게서 총을 받아들고,
"이것으로써 설로우 씨가 산 14 자루의 총 가운데 3 자루가 손에 들어왔다.
두 자루는 새벽의 결투때 사용된 것이고, 한 자루는 포트 부인이 가지고 있던
이것이다. 남은 것은 11 자루다. 지금부터 나와 함께 총을 찾도록 한다. 찾아낼
때까지는 점심 식사를 할 수 없다."
"경감님! 그건 너무합니다."
벨리 부장이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엘러리 탐정은 팩스턴 변호사, 쉴라와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들면서 이번 사
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미 로버트와 시체는 검시를 받기 위해서
운반되어 간 뒤였다. 엘러리는 팩스턴 변호사에게,
"호레이쇼 씨는 두 사람이 결투를 하다가 한쪽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게 말이지요, 좀……."
팩스턴 변호사는 조금 주저하면서,
"호레이쇼 씨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렇게 말하더군요. '결투, 남자다운 죽
음, 그것도 형제끼리. 이것은 굉장한 이야기거리겠군. 아, 이것을 어린이들을 위
한 연극으로 꾸미면 좋겠어.' 라고요."
"과연, 호레이쇼 씨다운 말이군요. 그런데……."
엘러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 때, 퀸 경감과 벨리 부장이 큰 상자를 들
고 식당으로 들어왔다.
"엘러리 설로우 씨가 산 권총을 겨우 모두 찾아냈다."
경감이 이렇게 말하자 벨리 부장은 상자 뚜껑을 열고서, 안에 든 권총을 하나
하나 꺼내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엘러리는 눈으로 개수를 세어 보고는,
"12 자루밖에 없잖아요! 2 자루가 부족한데요."
"알고 있어. 나머지 2 자루는 네가 찾아라."
아버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엘러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권총을 살펴보
기 시작했다. 12 자루의 총 가운데는 아까 설로우가 로버트를 죽인 구경 0.25
인치의 콜트 권총과 로버트가 들고 있었던 스미스 웨슨 구경 0.38 인치, 포트부
인이 벨리 부장에게 쏜 해리온 리처드슨도 섞여 있었다. 팩스턴 변호사는 퀸
경감에게,
"이 권총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설로우 씨 침실에 있는 비밀 서랍에 실탄 상자와 함께 있었네."
"오, 역시 거기였군요."
팩스턴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로우 씨 침실의 비밀 서랍이라면 별로 비밀스러운 장소가 아닙니다. 이 집
이 세워진 이래 설로우 씨는 그 서랍이 비밀 장소라고 생각하고 중요한 물건을
늘 그 서랍에 넣어두고 있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어요."
"그러면, 포트 부인도 거기에서 해링튼 리처드슨 권총을 꺼낸 것이군요."
퀸 경감은 몹시 배가 고팠는지 엘러리가 먹던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그 사
이에 엘러리는 12 자루의 권총을 살펴보고 다음과 같은 표를 만들었다.
1. 콜트. 포켓 모델. 자동. 구경 0.25인치. 설로우가 로버트를 죽인 총.
2. 스미스 언더 웨슨, 38/32형. 리벌버. 구경 0.38 인치. 로버트가 사용했음.
3. 해링튼 언더. 리처드슨 트랩. 구경 0.22 인치. 포트 부인이 사용.
4. 아이버 존슨. 자동. 구경 0.32 인치.
5. 슈마이저. 포켓 모델. 자동. 구경 0.25 인치.
6. 스티븐스. 구경 0.22 인치. 단발형.
7. I·J 챔피언. 구경 0.22 인치.
8. 스토거 루거. 구경 7.65㎜.
9. 신형 모저. 구경 7.63㎜. 10 연발.
10. 하이 스탠다드. 자동. 구경 0.22 인치.
11. 브로닝 1912년형. 구경 9㎜.
12. 오트기스. 구경 6.35㎜.
나머지 권총 2 자루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음. 그러나, 찾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됨. 형사 한 사람이 설로우가 총을 산 총포점에 가서 조사해 보기로 했기
때문임.
퀸 경감은 이 표를 보면서,
"권총의 모양이 전부 밝혀진다고 해서 로버트를 죽인 범인까지 밝혀지는 것은
아니야. 로버트를 죽인 범인은 설로우가 가지고 있던 콜트 권총에 들어있던 공
포탄을 다시 실탄으로 바꾼 녀석이다. 아마 그 녀석은 오래 전부터 로버트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던 녀석일 거야."
"그렇다면, 설로우 씨일 겁니다."
팩스턴 변호사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설로우 씨는 2∼3 년 전부터 로버트에 씨에게 계속 잔소리를 들어왔으니까
요."
엘러리는 팩스턴 변호사의 말에 반대했다.
"그러나, 설로우 씨는 내가 콜트 권총의 총알을 바꿔 넣는 동안에는 쉴라 양
과 함께 있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부터 결투할 때까지는 계속 우리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콜트 권총도 내가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실탄과 바꿔 넣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퀸 경감이,
"범인은 로버트가 죽기를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던 녀석일 거야. 로버트가 죽
으면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지 그것을 알 수 있으면, 어느 정도 범인의 윤
곽을 잡아 볼 수 있으텐데. 팩스턴, 자네는 변호사이니까 만약에 코닐리아 포트
부인이 죽는다면 그 막대한 유산이 어떻게 분배될 것인가를 알고 있겠지?"
"물론, 저는 포트 부인과 함께 유언장을 썼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언의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위법입니다."
"제기랄, 법은 역시 귀찮은 존재로군."
경감은 혀를 차면서 투덜거렸다.
"좋아, 포트 부인에게 직접 물어 보지. 팩스턴, 엘러리, 나를 따라와. 아, 벨리
부장, 자네는 나머지 총을 찾아보도록 하게."
퀸 경감과 엘러리, 팩스턴 변호사는 이니스 박사의 안내를 받아서 포트 부인
의 방으로 들어갔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구두 회사의 여사장은 여자 구두 모양
으로 만들어진 침대에 비스듬하게 앉아 퀸 탐정일행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계속 타이프 치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포트 부인은 타이프를 다 치고 나
자, 타이프라이터에서 종이를 빼내어 한번 읽어보고는 심이 굵은 연필로 서명
을 했다. 그리고 나서야 겨우 얼굴을 들어서 퀸 경감을 쳐다보았다.
"경감님 몸이 불룩한 것을 보니, 또 내가 총을 휘두를까 두려워서 방탄 조끼
를 입고 오신 모양이군요."
경감은 빙그레 웃으면서,
"아닙니다. 본디 제가 좀 살이 찐 편이지요."
부인은 경감의 이 말에 빙긋이 웃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요?
"예, 몇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어서요."
"좋습니다. 그런데, 그전에 팩스턴 변호사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요. 자, 이 성
명서를 신문사에 보내서 큼직하게 실어 달라고 하세요."
팩스턴 변호사는 포트 부인에게서 성명서를 받아 들었다. 그 성명서에는 '포트
구두 애용자 여러분에게' 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우리 포트 제화 회사의 부사장 가운데 한 사람인 로버트 포트가 불행하게도
오늘 아침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여사장인 코닐리아 포트 부인이 매
클린 부사장과 함께 직접 지휘를 할 것이기 때문에, 포트 구두의 품질은 점점
더 좋아질 것입니다.
"이, 이것은 부사장님의 죽음을 기업 선전에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까?"
팩스턴 변호사는 두려운 듯이 말했다. 그러자, 포트 부인이 팩스턴 변호사를 무
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팩스턴 변호사,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거예요. 천국에 간 로버트
도 자신의 죽음이 포트 집안의 이름을 더럽히지나 않을까 틀림없이 두려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싫다면 여기를 그만두세요."
"아닙니다. 곧 신문사로 보내겠습니다."
팩스턴 변호사는 깜짝 놀라며 성명서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포트 부인은 이
번에는 퀸 경감을 향하여,
"경감님, 이번 사건은 좀 조용히 끝내 주셨으면 합니다."
엘러리는 포트 부인의 이 말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퀸 경감도 화가 났지만
꾹 참으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부인, 부인은 대단한 연기자입니다. 일부러 괴짜인 체하고 계시는 것이 그럴
듯합니다만, 경찰을 돈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그건 천만
의 말씀입니다."
퀸 경감의 말에 부인은 경감을 노려보았다. 경관도 포트 부인을 노려보았다.
1∼2 분 침묵이 흐른 뒤에 부인이 '아하하'하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퀸 경감님, 당신도 산전 수전 (세상의 온갖 고생과 어려움) 다 겪어 보신 분
이군요. 알았어요, 무엇을 알고 싶은 것입니까?"
"유언장의 내용입니다. 그것을 말씀해 주신다면 범인의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감의 말은 자신이 넘치고 굉장히 진지했다. 포트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좋아요, 이야기하죠. 그러나, 신문에 발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실 수 있
지요?"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포트 부인은 유언장의 내용을 말해 주었
다.
1. 코닐리아 포트가 죽으면 모든 재산은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준다.
2 두 번째 남편인 게으름뱅이 스테픈에게는 1 센트도 주지 않는다.
3. 포트 제화의 새 사장은 자녀들의 투표에 의해서 뽑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회사를 일해왔던 사이먼 언더힐 공장장에게도 투표권을 줄 것.
"자,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제 돌아가 주십시오. 나는 잠을 잘 시간입니다."
퀸 경감 일행은 식당으로 돌아왔다. 엘러리는 팩스턴 변호사에게,
"팩스턴 씨, 포트 부인은 서류를 언제나 저런 식으로 타이프로 쳐서 심이 굵
은 연필로 서명을 합니까?"
"예, 그렇게 하는 것이 확실하다면서 늘 저렇게 합니다."
이번에는 경감이 물었다.
"포트 집안의 재산은 대략 어느 정도 되나?"
"글쎄요. 어림잡아 적어도 3000만 달러는 될 겁니다."
엘러리는 깜짝 놀랐다.
"로버트 씨가 살아 있다면 한 사람이 500 만 달러를 받을 수 있었겠지만 이제
는 한 사람이 600 만 달러를 받을 수 있겠군요."
그리고 경감이 입을 열었다.
"자식들은 유언장의 내용을 알고있나?"
"포트 부인은 무엇을 숨기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아마 알려 주었을 겁니다."
"그러면, 권총에 실탄을 넣을 만한 사람을 차레 차레 조사해 보자. 먼저 루엘
라 양부터 시작해 볼까."
팩스턴 변호사가 말했다.
"루엘라 양은, 재산을 분배받을 사람이 한 명 없어지면 자신의 몫이 그만큼 더
늘어난다는 생각을 할 사람이 못 됩니다."
"그러면, 호레이쇼 씨는 어떨까?"
"그런 일보다는 동화의 나라와 연 날리기에 빠져 있을 겁니다."
"쌍둥이 동생인 매클린 씨는?"
"매클린 씨는 로버트 씨와 굉장히 사이가 좋았습니다. 매클린 씨가 로버트 씨
를 죽었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자, 엘러리가 반대했다.
"그러나, 팩스턴 씨, 매클린 씨에게는 누구보다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매클린 씨는 로버트 씨와 함께 포트 회사의 부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포트 부
인의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로버트 씨가 없어진다면 자신이
틀림없이 사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권총의 실탄을 바
꿔 넣는 계획도 알고 있었군요."
"퀸 씨, 매클린 씨만은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로버트 씨와 사이는 옆
에서 보기에도 부러울 정도였습니다."
"팩스턴 씨, 그런 생각만으로 일을 처리하면 안돼요. 탐정이라고 하면 누구라
도 일단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범인을 밝혀내는 가장 좋은 방법
입니다."
"자, 엘러리, 그만하고 나머지 사람들을 살펴보자. 스테픈 씨는 어떤가, 팩스
턴?"
"좀 게으르지만, 성격은 온순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로버트 씨는 친아들입니
다."
"고치 소령은?"
"로버트 씨가 죽는다 해도 한푼도 받지 못합니다."
그러자, 엘러리가 다시 반대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 부탁을 받아서 실탄을 바꿔 넣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여기에 오기 전에는 무엇을 했는 지 수수께끼에 쌓여 있는 사람이지 않습니
까?"
"좋아, 그렇다면, 고치 소령부터 조사해 보자. 말레이지아에 전보로 물어 보면
곧 알 수 있을 거야."
퀸 경감이 이렇게 말했을 때 벨리 부장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들어왔다.
"13 번째와 14 번째의 권총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나오지 않습니다. 포트 부인
의 침대 밑까지 찾아보았지만 없더군요."
"그렇습니까?"
엘러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총포점에 가서 권총 모양은 알아보았나?"
벨리 부장은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13 번째는 콜트, 포켓 모델, 자동, 구경 0.25."
"설로우 씨가 결투에 사용한 것과 같은 모양이군요."
엘러리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14 번째는 스미스 웨슨, 38/32 형 구경 0.38 인치."
"아니, 그것은 로버트 씨가 가지고 있던 것과 같잖아."
"그 말대로입니다."
벨리 부장은 이 사건이 모두 자기의 책임인 듯이 기가 죽어서,
"지금까지 찾아내지 못한 권총 2 자루가 모두 결투에 사용된 것과 똑같은 모
양이라니, 세상에……."
로버트의 이상한 죽음은 포트 집안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어 놓았다. 매클린은
점점 야위어 가고, 쉴라의 그렇게 귀엽던 보조개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포트
부인은 이니스 박사의 진찰을 받으면서 하루종일 침대에만 누워 있고, 매일 빈
둥거리기만 하던 스테픈과 고치 소령도 역시 행동을 조심하고 있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루엘라와 호레이쇼뿐이었다. 루엘라는 여전히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
고, 호레이쇼는 연 날리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로버트의 장례식에
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엘러리 퀸과 팩스턴 변호사는 1층 서재에
서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고 있었다. 팩스턴 변호사는 걱정스러운 듯
이 눈썹을 치켜올리고 창문 너머로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이 있습니까. 팩스턴 씨?"
팩스턴 변호사의 눈길을 따라간 엘러리도 눈살을 찌푸렸다. 호레이쇼가 정원의
가운데에 서 있는 커다란 시커모어(플라타너스의 일종)의 줄기에 긴 사다리를
걸쳐놓고 올라가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긴 사다리는 그의 몸무게를 못
이겨서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이 휘청거렸다. 거기에서 떨어진다면 틀림없이 큰
상처를 입을 것이다. 곧 그의 몸은 무성한 나뭇잎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었
다.
"도대체 무엇 하는 거지요?"
엘러리가 물었다.
"하여튼, 우리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을 생각해내는 사람이지요."
쓴웃음을 지으면서 팩스턴 변호사가 이렇게 대답했을 때, 나뭇가지 사이에서
호레이쇼가 내려왔다. 그의 오른손에는 연이 쥐어져 있었다. 호레이쇼는 즉시
연을 날리기 시작했다. 연은 하늘 높이 올라갔다.
"정말 행복한 사람이군요."
팩스턴 변호사가 이렇게 말했을 때, 2 층에서 우당탕 하고 굉장히 요란한 소리
가 들렸다. 엘러리와 팩스턴 변호사가 재빨리 나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이어
서, 스테픈과 고치 소령이 달려왔다. 그 요란한 소리는 매클린의 방에서 들리는
거였다. 매클린과 설로우는 융단 위를 뒹굴면서 싸움을 하고 있었다. 매클린의
셔츠는 찢어졌고, 코에서는 피가 나오고 있었다. 엘러리는 매클린을 끌어냈고,
팩스턴 변호사는 설로우를 붙들었다. 매클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 녀석이 로버트를 죽였어요. 나는 로버트를 위해서 내 손으로 반드시 복수
를 하고 말 테다."
그 때, 쉴라가 달려들어 왔다.
"설로우 오빠, 그만둬요. 오빠는 로버트 오빠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매클린
오빠까지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설로우는 이상한 웃음을 지으면서 팩스턴 변호사의 팔을 밀어냈다. 그리고, 주
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세게 매클린의 얼굴에 내던졌다. 그리고 나서 피에
굶주린 악마와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매클린, 너는 나에게 심한 모욕을 주었다. 이 모욕을 씻어 버리는 것은 피밖
에 없어. 나는 로버트와 똑같은 방법으로 너를 저 세상으로 보내 주마. 시간은
내일 아침 새벽, 장소는 로버트와 결투를 한 바로 그 장소다. 유감스럽게도 내
권총은 모두 경찰에 넘겨졌다. 그러나, 권총 두 자루는 내각 준비하겠다. 엘러
리 씨, 미안합니다만, 다시 한 번 나를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자식들이 다시 결투를 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포트 부인은 충격으로 쓰
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니스 박사의 간호로 오후 10시에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 설로우는 11 시가 지나서 집을 나가 버렸다. 엘러리는 2
층의 복도를 서성거리면서 설로우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매클린은 조금 전에
간신히 잠이 들었다. 새벽 1 시 10분, 설로우는 무슨 큰 보따리를 끼고 돌아왔
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2층으로 올라가더니,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곧 이어서, 벨리 부장도 돌아왔다.
"설로우 씨는 골동품 가게에서 큰 권총을 두 자루 샀네. 그가 들고 온 보따리
에 들어 있는 것이 그것이네. 아마 피곤해서 곧 잠이 들었을 거야."
"벨리 부장님, 미안합니다만, 설로우 씨가 잠이 들었다면 그 보따리를 꺼내 왔
으면 좋겠는데요."
10분 뒤, 벨리 부장이 설로우의 방에서 큰 보따리를 들고 나왔다.
"굉장히 깊이 잠이 들었더군.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하지?"
"그 보따리는 제가 맡아 두겠습니다. 부장님은 내일을 위해서 푹 쉬십시오."
보따리를 풀어보니, 구경 0.45 인치의 굉장히 큰 권총 두 자루가 나왔다. 이 총
은 옛날 서부 개척 시대에 무법자들이 즐겨 썼던 콜트 6 연발 권총으로서, 서
부의 역사를 바꿔 놓았던 총이었다. 새벽 2시 30분, 이니스 박사가 포트 부인의
방에서 나왔다. 그는 2 층 작은 홀의 긴 의자에 앉아있는 엘러리에게,
"퀸 씨, 포트 부인은 주사를 맞고 잠이 들었습니다. 내일 아침까지는 계속 주
무실 겁니다."
이니스 박사는 이 말만 하고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발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
려갔다. 잡안은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2시 50분, 엘러리는 임시로 얻은 3층의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권총이 들은 보따리를 껴안고 잠이 들었다.
아침 6시! 설로우가 구두 동상 아래에 나타났다. 거기에는 퀸 경감, 벨리 부장,
스테픈, 팩스턴 변호사, 사복 형사 5명, 그리고 엘러리 탐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설로우는 엘러리가 권총을 들고 있는 것을 보자,
"아, 내 권총이로군요. 잃어버려서 어떻게 된 건가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엘
러리 씨가 잘 보관하고 계셨군요. 정말로 엘러리 씨는 좋은 조수입니다."
그 때, 퀸 경감이 다가왔다.
"포트 씨, 우리들은 당신이 결투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결
투는 법률에서 금지되어 있는 겁니다. 만약, 반드시 결투를 하겠다면 이 자리에
서 포트 씨를 체포하겠습니다."
설로우는 퀸 경감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퀸 경감은
엘러리에게,
"매클린 씨에게도 전혀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엘러리, 어서 가서 매클
린 씨를 여기로 데리고 오너라. 내가 두 사람을 설득해 보겠다."
엘러리는 집안으로 들어가서 2 층에 있는 매클린의 방문을 두드렸다.
"매클린 씨."
큰 소리로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엘러리의 머리를 스치고 지
나갔다. 서둘러서 방문을 열었다. 매클린은 침대에서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이불을 턱까지 덮고 있었고,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은 죽
은 눈이었다. 매클린은 총으로 가슴을 맞고 죽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가늘고
길게 긁힌 자국이 있었다. 채찍으로 맞은 자국 같았다. 채찍은 문 옆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매클린의 베개에는 총알이 지나간 자리가 새까맣게 타 있었다.
매클린을 쏜 것 같은 권총도 채찍 옆에 떨어져 있었다. 매클린은 죽기 직전에
이 기괴한 사건의 범인을 보고 모든 의혹이 풀렸겠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
고 그대로 천국으로 가버린 것이다. 그 때, 퀸 경감이 들어왔다. 퀸 경감은 작
은 탁자에 수프를 담은 접시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다음에 계속.......
"입을 댄 흔적은 없다. 그런데, 왜 수프를 침실까지 가지고 왔을까?"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온통 미치광이들이다. 그 덕택에 이상한 죽음만
계속되고 있어."
검찰 의사인 프라우티 박사가 매클린의 시체를 검시하기 위해서 왔다. 퀸 경감
은,
"살해된 시간은?"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입니다."
엘러리는 옆에서,
"저는 2시 50분까지 이 방 바로 앞에 있는 작은 홀에서 망을 보고 있었습니
다."
엘러리는 자기 나름대로 범행 때의 상황을 그려보았다.
"오전 3시쯤, 범인은 이 방으로 들어와서 푹 자고 있는 매클린 씨의 베개를
빼냈습니다. 그 순간, 매클린은 눈을 떴습니다. 그때 범인은 빼낸 베개에 권총
을 꾹 대고 매클린을 쏘았던 겁니다. 베개가 총성을 흡수하는 역할을 했기 때
문에, 집안 사람은 아무도 총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지요. 하여튼 굉장히 침착
한 녀석입니다.
거기에 퀸 경감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한 굉장히 잔인한 녀석이야. 죽인 뒤에, 또 채찍으로 얼굴을 내리쳤
어."
프라우티 박사는 파란 채찍 자국을 가리키면서,
"이것은 살아 있을 때, 맞은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죽은 다음 1 분 정도 있다
가 맞은 겁니다."
퀸 경감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걸까? 게다가 손도 대지 않은 이 수프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대체 모르겠어."
그리고 벨리 부장에게,
"벨리 부장, 그렇게 멍청하게만 서 있을 건가? 여기에 버려져있던 권총을 2
시간 전에 감식과로 넘겼네. 이제 슬슬 결과가 나올 때가 되었으니, 빨리 가서
알아보고 와주게."
벨리 부장이 나가고 난 다음에 엘러리는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쉴라와
팩스턴이 정원의 한쪽 구석에서 무엇인지 속닥속닥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이
복잡한 집에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스테픈과 고치 소령은 체스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호레이쇼와 루엘라는 여전히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한 발
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이 집에는 모두 이상한 사람만 모여서 사는군.' 이라고 엘러리는 생각하며 독
물조사 결과 이상이 없다고 판멸난 수프 접시를 들고 경관과 함께 부엌에 내려
갔다. 그리고 요리사에게 물었다.
"매클린 씨가 특별히 부탁해서 만든 수프입니까?"
라고 물어 보았다. 요리사는 고개를 흔들며,
"아닙니다. 그것은 저녁 식사를 하고 남은 수프입니다. 냉장고에 넣어 둔 것인
데, 참 이상하군요. 매클린 도련님은 입이 까다로워서 남아 있는 수프 같은 것
은 절대로 드시지 않는 분입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범인이 준비한 것이겠군. 역시 범인은 정신이 나간 녀석이
야."
경감이 말했다. 엘러리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마더 구즈의 동요를 중얼거렸다.
'옛날 옛날 마귀 할멈이
구두 저택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너무 자식이 많아서
어떻게 살아 나갈까요.
빵은 주지 않고 수프로 때우고
채찍으로 때려서 잠을 재우지요.'
"엘러리, 이런 상황에서 노래가 나와? 혹시 이 이상한 사건에 휘말려서 너까
지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니냐?"
엘러리는 조금 화가 난 듯이,
"아버지, 아버지는 이 사건이 정말로 미친 사람의 짓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방금 제가 부른 동요와 이 포트 집안에서 일어난 연속살인사건은 비슷한 점
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처음의 4절은 포트 부인과 똑같습니다.
예를 들어, 마지막 두 절은,
빵은 주지 않고 수프로 때우고
채찍으로 때려서 잠을 재우지요. 입니다."
"그러고 보니, 범인은 동요대로 범행을 저지른 모양이군. 그렇다고 해도, 이번
사건은 미친 녀석의 짓이 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쟎아?"
"아버지, 하나하나 반대하여 죄송합니다만, 동요대로 살인 계획을 짜고, 그대
로 실행에 옮긴다는 것은 정말로 미친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제 생각으로는 미친 사람인 체하는 어떤 잔인한 녀석의 짓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네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 그러면, 그 호레이쇼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겠군. 그 어린애 짓을 하는 것도 어쩌면 연기일지도 몰라. 아무
튼, 이제 유산을 받을 수 있는 사람 가운데서 두 사람이 죽었다. 남아 있는 사
람은 설로우, 루엘라, 호레이쇼, 쉴라, 4명뿐이다. 3000만 달러를 4 명이서 나누
면 한 사람 앞에 750만 달러가 된다. 결국, 한 사람이 250만 달러씩 더 받게 된
셈이군."
그 때, 경찰 본부의 감식 계에 갔던 벨리 부장이 돌아왔다.
"경감님, 감식 계에서는 그 총이 매클린 씨를 죽인 것이 틀림없다고 하더군
요."
"그걸 누가 모르나? 문제는 총알이야, 총알."
사건이 점점 복잡해지자, 안절부절이고 있던 경감이 화를 냈다. 그러자 엘러리
가,
"부장님, 매클린이 맞은 총은 어떤 모양이었습니까? 오늘 아침에는 당황해서
자세히 보지 못해서요."
"스미드 웨슨, 38/32 형 0.38 인치."
그 순간 엘러리는 이상한 소리를 질렀다.
"왜 그래, 엘러리? 기분이 좋지 않아?"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아버지, 설로우 씨가 산 14 자루의 총 가운
데서 아직 두 자루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계시죠? 그 가운데에 13 번
째가 콜트 0.25구경이고 14 번째가 스미드 웨슨 38/32형 0.38구경입니다. 이건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총과 똑같은 겁니다. 더구나, 첫 번째, 두 번째, 14 번째
총은 모두 이상한 사건들과 직접적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발견되
지 않은 13 번째 콜트 권총에 의해서 제 3의 살인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퀸 경감도 엘러리의 이야기를 듣자 얼굴 표정이 굳었다.
"엘러리, 네 이야기가 맞다. 빨리 13 번째 콜트 권총을 찾아내야 하겠군. 벨리
부장, 가만히 서 있지 말고 빨리 찾아보게. 허드슨 강의 바닥까지 샅샅이 뒤져
보란 말이야!"
"경감님, 그 콜트 권총은 쉽게 나오지는 않을 겁니다. 이 집은 양키 스타디움
과 같이 넓은데, 콜트 권총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갈 정도로 작은 겁니다."
"그래도 찾아야 하네, 벨리 부장. 땅을 기어서라도 찾아보게."
권총 찾기는 매클린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지만, 결국 콜트
권총은 나오지 않았다. 거의 포기한 엘러리는 아침 일찍 아버지에게,
"아버지, 이렇게 된 바에야 다시 한 번 포트 부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
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포트 부인은 무슨 숨겨진 비밀을 쥐고 있
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 비밀에는 이번 사건의 실마리가 들어 있을 겁니다."
"그러나, 포트 부인은 매클린이 죽고 난 다음부터 계속 침대에만 누워 있잖아.
이니스 박사가 허락해 줄까?"
"아버지, 저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포트 부인이 괴짜라고는 생각하지 않
아요. 제 3의 살인을 막기 위해서라면 포트 부인도 반드시 이야기를 해줄 거예
요."
엘러리는 아버지와 함께 포트 부인의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두드리자 곧 문이
열렸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아침 진찰을 하기 위해서 들어온 이니스 박사였
다. 박사는 비통한 목소리로,
"내가 들어왔을 때, 포트 부인은 이미 돌아가시고 난 뒤였습니다. 심장 마비입
니다."
코닐리아 포트 부인은 많은 고생을 하면서 혼자 힘으로 거액의 재산을 모은 여
자 사업가였으며 포트 왕국의 여왕이었다. 그런데, 그 여왕은 아무도 보지 않는
가운데서 혼자 외롭게 천국으로 갔던 것이다. 돈에는 아무 부족함이 없었던 포
트 부인이지만 사랑과는 인연이 멀었던 여자였다. 포트 부인의 첫 번째 남편은
행방 불명이 되었다. 두 번째 남편인 스테픈과는 잠시 사이가 좋았지만 지금은
남편이라기보다는 하숙생에 불과했다. 더구나, 부인이 낳은 설로우, 루엘라, 호
레이쇼는 모두 괴짜를 넘어선 미치광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세 사람
모두 전염병인 페스트로 죽었다고 생각하는지 얼굴 한 번 내밀지 않았다. 도리
어, 의붓자식인 쉴라가 와서 슬프게 울뿐이었다. 포트 부인은 자기의 친자식에
게는 포기를 하고 스테픈의 자식인 로버트와 매클린을 포트 제화의 부사장으로
앉혀서 자신을 돕도록 했었다. 그런데, 그 두사람이 잇달아서 기괴한 죽음을 당
하고 만 것이다. 포트 왕국의 앞날을 생각했을 때, 부인은 틀림없이 암담한 기
분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 걱정이 어쩌면 죽음을 재촉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
금, 포트 부인의 침대 옆에는 포트 제화의 직원도 아닌 남자 두 사람이 서 있
었다. 퀸 경감과 엘러리였다. 엘러리는 거기에 서 있으면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
다. 부인의 침대 옆에는 타자기가 놓여있었다. 부인은 타자를 치고 나서 타자기
를 집어넣으려고 했을 때 발작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부인은 돌아가시기 전에 무언가 중요한 서류를 만들었습니다."
엘러리는 부인의 오른손이 침대 시트로 덮여 있는 것을 보았다. 경감도 곧 눈
치를 채고 시트를 걷었다. 부인의 오른손에는 커다란 봉투가 꼭 쥐어져 있었다.
경감은 부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고 그 봉투를 빼냈다. 그 봉투에는 타이프
로 '유언장'이라고 찍혀 있었고, 그 밑에는 부인이 언제나 사용하는 심이 굵은
연필로 코닐리아 포트라고 서명이 되어 있었다. 경감은 팩스턴을 불렀다.
"자네는 포트 부인이 벌써 유언장을 써 두었다고 하지 않았나?"
"예, 그쪽 탁자 서랍에 있을 겁니다."
엘러리는 팩스턴 변호사가 가리킨 탁자의 서랍을 열어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
는 아무것도 없었다.
"유언장은 봉투에 넣어져 있었나?"
"아닙니다. 봉투에 넣지 않았습니다."
"이 봉투는 새것이고 서명도 새로이 한 겁니다. 그러면, 포트 부인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고 전에 만들어 놓았던 유언장을 꺼내서 봉투에 넣은
것일까? 하지만, 그건 좀 이상하군요, 팩스턴 씨."
"저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팩스턴 변호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유언장을 열어보면 알게 되겠지."
퀸 경감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초조해 하지 않았다. 유언장은 법에 따
라서 팩스턴 고문 변호사가 받아 두기로 했다. 사흘 뒤, 장례식은 무사히 끝났
다. 드디어, 유언장을 열어 볼 때가 온 것이다. 유언장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
을만한 사람은 모두 1층 서재에 모여 있었다. 큰아들 설로우, 너무 울어서 눈이
새 빨개진 쉴라, 그리고 스테픈이 들어왔다. 그러나 루엘라와 호레이쇼는 실험
과 모형철도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오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포트 부인이
가장 신임했던 공장장 언더힐 씨가 들어왔다. 엘러리 부자는 한 시간이나 전에
들어와 있었다. 본디는 참석할 수 없는 거지만 제 3의 살인이 일어날 위험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허락을 받고 들어와 있었다. 경감은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하자,
"그러면, 팩스턴 변호사, 유언장을 읽게."
하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팩스턴은 봉투를 찢었다. 그는 내용을 한번 죽 훑
어보고는,
"전에 저와 함께 만들었던 것과 똑같은 겁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다시 쓰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그 때, 탁 하는 소리를 내면서 봉투 속에서 작은 봉투가 탁자 위에 떨
어졌다. 그 봉투의 겉면에도 타이프가 찍혀 있었다. 팩스턴 변호사는 얼른 작은
봉투를 집어들고 읽었다.
"유언장을 발표하고, 포트 제화의 새 사장을 뽑을 때까지 이것을 절대 뜯어보
지 말 것."
팩스턴 변호사는 퀸 부자를 쳐다보았다. 엘러리는,
"포트 부인의 지시대로 해주십시오."
팩스턴은 유언장을 직접 읽어 내려갔다. 내용은 퀸 부자가 포트 부인에게서 직
접 들은 것과 똑같았다. 재산을 자식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줄 것, 스테픈은
회사의 발전에 아무 한 일이 없으므로, 1 달러도 주지 말 것. 새 사장은 포트
집안의 가족(스테픈을 빼고)과 언더힐 공장장의 투표에 따라서 결정할 것. 그리
고 심이 굵은 연필로 부인의 서명이 있었다. 그런데, 그 유언장 뒤에 종이가 한
장 붙어 있었다. 팩스턴은 서재에 모인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더니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새 사장을 뽑고나서 유언장 안에 들어있는 작은 봉투를 열어볼 것."
"그것은 이미 알고있네. 작은 봉투에도 똑같은 말이 찍혀 있었잖아."
경감은 초조해하면서 말했다.
"그런데, 아직 더 남아있어요."
팩스턴 변호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마지막 문구는 이렇습니다. 작은 봉투를 열어 보면 로버트와 매클린을 죽인
범인이 밝혀질 것이다."
그 순간의 퀸 경감의 행동은 아직까지도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경감은 재
빨리 팩스턴에게 다가가서 진짜 범인의 이름이 적혀 있는 작은 봉투를 빼앗았
다. 그러자, 동시에 엘러리는 문 쪽으로 가서 범인이 도망치는 것을 막았다. 아
버지와 아들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훌륭한 행동이었다. 퀸 경감은 가슴이
설레었다. 드디어, 이 기괴한 사건이 풀리게 될 것이다. 진짜 범인의 이름이 지
금 자신이 쥐고 있는 봉투 안에 적혀 있는 것이다. 그 범인은 틀림없이 이 서
재 안에 있을 것이다. 경감은 매서운 눈초리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둘러
보았다. 쉴라 는 스테픈에게,
"어머니는 정말로 범인을 알고 계셨을까요?"라고 물었다.
"글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스테픈은 아내가 죽었는데도 전혀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설로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팩스턴 변호사는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퀸 경감
은 조급한 듯이,
"자, 빨리 새 사장을 뽑게. 팩스턴, 자네가 맡아서 빨리 투표를 진행시키세."
퀸 경감으로서는 범인만 잡을 수 있다면 세계 제일의 구두 회사의 사장은 누가
되어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팩스턴은 손을 흔들면서,
"경감님, 저는 단지 고문 변호사일 뿐입니다. 저에게는 그러한 자격이 없습니
다. 그것은 큰아들인 설로우 씨가 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 그러면, 포트 씨, 당신이 앞에 나가서 투표를 진행시켜 주십시오."
경감은 주저하고 있는 설로우를 끌어다가 앞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그러면, 지금부터 포트 제화 회사 사장 선거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말해 주십시오."
뜻밖에 설로우는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서, 도저히 믿어
지지 않는 행동을 했다. 설로우는 종종걸음으로 자기 자리로 돌아가더니,
"나, 설로우 포트가 포트 제화 회사의 사장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의장자리로 가서는 말했다.
"나는 설로우 포트 씨를 사장 후보로 인정합니다. 다른 후계자를 추천해 주실
분은 없습니까?"
쉴라는 얼굴색이 변하여 일어섰다.
"설로우 오빠, 오빠 같은 사람이 사장이 된다면 지금까지 어머니가 열심히 만
들어 놓으신 포트 제화는 열흘도 못 가서 쓰러져 버릴 거예요. 나는 절대 반대
예요."
설로우는 쉴라의 말에 너무 화가 치밀어 올라서 이야기를 제대로 잇지 못했다.
"쉴라, 너는 나를 모욕했다. 나는, 나는 만약, 네가……."
"말 안 해도 알고 있어요. 만약 내가 남자라면 결투로 쏘아 죽이겠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지요? 나는 언더힐 씨를 사장으로 추천하겠어요."
언더힐은 고개를 흔들면서,
"돌아가신 사장님도 다음 사장은 포트 집안의 가족 가운데서 나오기를 바라셨
을 겁니다. 그리고, 저 같은 사람은 사장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사양했다. 그러나, 쉴라 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언더힐
도 설로우가 사장이 되는 경우, 많은 사원들의 반발을 생각해보고는 회사의 앞
날을 위하여 겨우 쉴라의 말을 받아들였다. 설로우는,
"흥, 언더힐 같은 사람에게 사장자리를 빼앗길 수는 없지."
설로우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밖으로 나갔다. 퀸 경감은 재빨리 문을 열고서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벨리 부장에게 무엇인가 귓속말을 했다. 벨리 부장은
10 분 정도 지나서 돌아왔다.
"경감님, 설로우 씨는 루엘라 씨와 호레이쇼 씨, 두 사람에게 수천 달러를 주
겠다고 꾀어서 서류에 서명을 받아냈습니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설로우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서재로 들어왔다. 그는
옷 저고리 주머니에서 무슨 봉투를 꺼내서 탁자에 올려놓았다.
"사장 선거를 계속하겠습니다. 후보자는 설로우 포트와 사이먼 언더힐 두 사
람입니다. 그러면, 언더힐 씨에게 투표하실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올려진 손은 둘, 쉴라와 언더힐.
"언더힐 씨 2 표."
설로우는 탁자 위에 놓여진 봉투를 집어들었다.
"몸이 졸지 않아서 본 회의에 나오지 못한 루엘라와 호레이쇼는 서면으로 투
표를 해왔습니다. 그러면, 읽겠습니다."
쉴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로우는 첫 번째 종이를 꺼내어,
"루엘라, 설로우 씨에게 투표."
두 번째 종이를 꺼내어,
"호레이쇼, 설로우 씨. 그리고, 설로우는 설로우 씨에게 투표합니다. 이것으로
투표를 마칩니다. 언더힐 씨 2표, 설로우 씨 3 표, 따라서 설로우 포트 씨가 포
트 제화의 새로운 사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 때, 쉴라가 벌떡 일어났다.
"무효예요.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꾀어서 표를 받다니, 그건 무효예요. 다시
해야 되요."
팩스턴 변호사는 설로우에게 달려들려는 쉴라를 붙잡고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쉴라는 불만스러운 듯한 얼굴을 지으면서 물러섰다. 한편, 투표가 끝나
기를 기다리고 있던 퀸 경감은,
"그러면, 지금부터 그 작은 봉투를 열어 보기로 하지요."
벨리 부장은 그 거대한 몸으로 문을 지켰다. 만약 이 서재 안에 범인이 있다면
독 안에 든 쥐인 셈이다. 엘러리는 크게 숨을 내쉬면서 포트 부인이 남긴 수수
께끼의 봉투를 열었다. 서재 안에 모인 사람들의 눈은 봉투에서 나온 종이로
쏠렸다. 고통스러운 시계의 째깍짹깍거리는 소리가 갑자기 더 크게 들렸다.
"그러면……."
엘러리는 읽기 시작했다.
제 3부 역전의 명추리
웬만한 일로는 놀라지 않던 뉴욕 사람들도 포트 부인의 이 글에는 깜짝 놀라
버렸다. 그리고, 어떤 신문은 '구주 저택에 사는 노파'라고 하는 마더 구즈의
동요 가사를 바꾼 노래를 커다랗게 실었다.
옛날 옛날 마귀 할멈이
구두 저택에 살고 있었습니다.
너무 자식이 많아서
어떻게 살아 나갈까요.
생각하다 못 해 한 사람씩
죽여버리기로 했지요.
모두 죽이기 전에는
자신은 죽을 수 없었습니다.
이 글을 보고 화가 난 사람들은 포트 부인이 세운 구두 동상 앞으로 몰려와서
동상을 향해 마구 돌을 던졌다. 자기 아파트로 돌아온 퀸은 다음날부터 새로운
추리 소설을 쓰기 시작했지만 도저히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포트 집안의 사건
이 어금니 사이에 낀 것처럼 시원치 않았다. 포트 집안 사건이 일어난 지 3 주
일이 지난 어느 날, 엘러리가 책상 앞에 멍청히 앉아 있는데, 팩스턴 변호사가
찾아왔다.
"아, 팩스턴 씨, 쉴라 양과의 결혼 날짜가 정해 졌습니까? 두 분의 결혼을 반
대하던 포트 부인이……."
이렇게 말하던 엘러리는 팩스턴의 얼굴에 매우 언짢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포트 집안에 또 무슨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팩스턴은 한 숨을 내쉬면서,
"별다른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재산을 둘러싸고 싸움을 벌이고 있습
니다. 모두 설로우 씨의 욕심 때문이지요. 쉴라 는 재산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
니다. 쉴라 는 나를 만날 때마다, '사건이 깨끗이 정리될 때까지는 절대 결혼할
수 없어요.' 라고 말하는 겁니다."
엘러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정리라니요? 포트 부인이 남겨놓은 글로 모든 것이 다 확실해지지 않았습니
까?"
팩스턴은 엘러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엘러리 씨, 당신은 포트 부인의 그 글을 모두 믿으셨습니까? 나로서는 도저
히 믿어지지 않는 점이 몇 가지 있던데요. 예를 들어 권총 말입니다. 포트 부인
은 자기가 해링튼 리처드슨 권총을 훔쳤다고 했습니다."
"아아, 벨리 부장의 모자에 구멍을 낸 그 총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설로우 씨의 총 가운데서 다시 한 자루를 훔쳐서 한밤중
에 매클린 씨의 침실에 몰래 들어가서 쏘았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가 잘못되었습니까?"
"포트 부인이 매클린 씨를 쏜 총은 없어졌던 14 번째의 스미드 웨슨 38/32
0.38 구경이었습니다."
"그렇지요."
"엘러리 씨, 그 때 없어진 총은 13 번째와 14 번째 두 자루였습니다. 그러니
까, 13 번째 총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건지,
그렇지 않으면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13 번째의 권총
이 쉴라 에게 향해질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듭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나는 밤
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
"엘러리 씨, 나는 포트 집안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그 3 형제의 성격을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루엘라 씨와 호레이쇼 씨고 설로우 씨 이상으로 쉴
라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포트 부인의 그 글은 모두 거
짓입니다. 자기 자식들의 죄를 덮어 주려고 거짓말을 했던 겁니다. 진짜 범인은
아마 포트 저택 어딘가에 숨어서 다음 목표를 노리고 있을 겁니다."
엘러리는 일어서면서 말했다.
"팩스턴 씨, 사실 나도 그 글을 읽으면서 당신과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포트
부인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진짜 범인은 그 죄를 덮어쓰고 죽었다는 생
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포트 부인이 남겨놓은 글을 좀더 자세히 살
펴봅시다. 첫 번째, 그 글은 포트 부인이 자기가 죄를 뒤집어쓰기 위해서 직접
쓴 것이다. 두 번째, 그 글은 진짜 범인이 포트 부인에게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서 만든 가짜다. 분명히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한쪽일 겁니다. 어떻습니까,
팩스턴 씨, 포트 부인은 우리들이 부인의 방으로 들어가기 한 시간 전에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방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까,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그 방에는 타자기도 놓
여있었으니까, 누군가가 그 글을 꾸밀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겁니다."
"엘러리 씨, 말씀 도중에 끼여들어서 죄송합니다만, 만약 그 글이 누군가가 꾸
민 거라면 서명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엘러리 씨는 그 때 유언장은 서명과 비
교해 보시고 똑같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때 내가 너무 서둘렀던 것 같습니다. 좀 더 자세히 살
펴보았어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다시 해보죠."
"좋습니다. 서명은 같은 사람이 쓴 것이라도 조금씩 바뀌니까 될 수 있는 대
로 최근의 것이 좋은데. 아 참, 로버트 씨가 죽은 뒤에 포트 부인이 신문에 낼
성명서를 만들고 연필로 서명을 했지요. 그것이라면 아주 좋겠는데, 남아 있을
까요?"
"아아, 그것이라면 1층 서재에 있는 책상 서랍에 있습니다."
"그것 참 잘 됐군요. 팩스턴 씨, 먼저 경찰 본부로 가서 아버지에게 그 글을
받은 다음, 포트 저택으로 가서 그 글을 비교해 봅시다."
한 시간 뒤, 엘러리와 팩스턴은 포트 저택의 서재에 도착했다. 팩스턴 변호사에
게서 성명서를 받은 엘러리는 밝은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햇빛이 비치
고 있었다. 엘러리는 유리창 위에다 성명서와 포트 부인의 쓴 글을 겹쳐 놓고
서명한 곳을 맞추어 보았다.
"팩스턴 변호사, 이것 좀 보십시오. 너무 똑같지 않습니까? 점이라든지 올라간
곳이라든지 하나도 틀린 곳이 없습니다."
"이, 이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겹쳐놓고 베낀 겁니다."
"그러면, 어느 쪽의 서명이 가짜일까요?"
"나는 포트 부인이 침대 위에서 이 서명서에 서명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에 있는 서명이 가짜이지요. 서명뿐만 아니라 글의 내용도 엉터
리입니다. 진짜 범인은 부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부인의 타자기로 내용을
치고, 지금 내가 한 것같이 하여, 성명서에서 서명을 베껴 냈던 겁니다. 엘러리
는 경찰 본부에 전화를 걸어서 퀸 경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경감은,
"뭐라고, 그러면 수사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되잖아?"
"물론입니다. 포트 부인이 남겨 놓은 글에 있는 서명은 성명서에 있는 서명을
그대로 베낀 겁니다. 그리고, 지금 범인은 저택의 어딘가 에서 마다 구즈의 동
요를 부르면서 그대로 다음 목표를 죽일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겁니다. 아버지
도 빨리 와 주세요."
엘러리는 수화기를 놓고 인기척이 느껴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쉴라가
서있었다.
"엘러리 씨, 미안합니다만, 저는 지금 엘러리 씨가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어요."
쉴라 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엘러리에게 매달렸다.
"엘러리 씨, 당신은 지금 어머니가 범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머니는
조금 유별나시긴 했지만, 마음은 상냥하고 따뜻한 분이었어요. 그런 어머니가
오빠들을 죽였다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어요. 저와 아버지는 틀림없이 범인은
다른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엘러리 씨, 제발 범인을 잡아 주세요.
이렇게 부탁합니다."
엘러리와 팩스턴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포트 저택은 다시 죽음의 검은 구름으로 뒤덮였다.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한
13번의 콜트 0.25 구경이 불을 뿜을 때는 제 3의 희생자가 나올 것이다. 그 때
문인지 저택의 공기는 14세기의 고성처럼 무겁고 답답했다. 엘러리는 정원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테라스로 나왔다. 엘러리는 조용히 서서 구두 저택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무척 훌륭하게 지은 집이었다. 정원의 연못에는 물이 가
득 차 있었고, 그 주위에는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정원 옆에는 호레이쇼의 동
화의 집이 햇빛을 받으면서 평화롭게 서 있었다. 그 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
리가 들려왔다.
"엘러리."
돌아보니 퀸 경감이 벨리 부장과 함께 서 있었다. 경감은,
"성명서와 포트 부인이 쓴 글을 보여다오."
엘러리는 주머니에서 꺼내어 경감에게 건네주었다. 경감은 엘러리와 똑같은 방
법으로 두 장을 겹쳐보았다.
"흠……, 정말 그대로 베낀 것이군. 이것은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겠다."
퀸 경감은 그 서류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때, 동화의 집의 하프 모양의 문
이 열리고 호레이쇼가 나왔다. 그는 집의 뒤로 돌아가서 전의 그 긴 사다리를
끌고 나왔다. 그리고, 시커모어 나무에 걸쳐놓고 성큼성큼 올라가기 시작했다.
퀸 경감은,
"저 사람은 도대체 뭐를 하는 거야?"
"높은 가지에 걸린 연을 끌어내리려고 하는 겁니다."
팩스턴이 대답했다. 모두들 와 하고 소리내며 웃었다. 그러나, 엘러리만은 얼
굴 색이 변했다.
"호레이쇼 씨, 그만, 그만둬요. 위험해요."
엘러리는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면서 정원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호레이쇼는
그대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왜 그러니, 엘러리? 무엇이 위험하다는 거야?"
뒤에 따라온 퀸 경감이 물었다.
"동요입니다. 마더 구즈의 동요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땅딸보 같은 사람이
쿵 하고 떨어져 죽어 버렸습니다.' 만약, 저 사다리에 누가 칼자국이라도 내놓
았다면 동요대로 되는 거잖아요. 이 사건은 모든 것이 동요와 똑같이 되고 있
어요."
"조심해요, 호레이쇼 씨."
엘러리가 나무 밑에서 소리를 지르자, 호레이쇼가 나뭇가지 사이로 둥근 얼굴
을 내밀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사다리가 부서질지도 모르니까 내려올 때는 살금살금
조심해서 내려오십시오. 이 사다리는 내가 매일 사용하는 건데요. 절대로 부서
지지 않아요."
호레이쇼는 오른손에 연을 쥐고 오른발을 사다리의 제일 윗 단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곧 삐거덕하는 소리가 났다.
"어! 새 둥우리잖아. 재미있겠는데."
호레이쇼가 위에서 몸을 쑥 내밀었기 때문에, 사다리가 흔들거렸다. 엘러리와
벨리 부장이 깜짝 놀라서 사다리를 붙잡았다.
"앗, 둥우리 속에 무언가가 들어 있어요. 새알치고는 너무 까맣군. 어디 꺼내
볼까."
호레이쇼는 둥우리 속으로 하얀 손을 집어넣었다. 그 때, 벨리 부장이 화를 내
면서,
"엘러리, 나는 이런 미친 녀석을 돌봐주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 아니네."
그러나, 다음 순간 모두 앗 하고 소리를 쳤다. 호레이쇼가 둥우리 속에서 대단
한 물건을 찾아낸 것이다. 작은 권총이었다. 총에는 새똥이 잔뜩 올라가서 호레
이쇼의 손에서 그 권총을 빼앗았다.
"콜트 권총이 이런 곳에 있었다니!"
"무엇하고 있나, 벨리 부장! 빨리 내려오게."
경감이 벨리 부장에게 소리를 질렸다.
"우리들이 찾고있는 13 번 권총이 틀림없습니다."
엘러리가 벨리 부장에게 총을 건네 받으면서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집안으로
들여보내고, 나무 밑에는 엘러리와 퀸 경감만이 남았다. 경감은 콜트 권총을 이
리저리 살펴보았다. 탄창을 열어보니 총알이 한 발 들어 있었다.
"둥우리 속에다 이 총을 숨긴 녀석이 진짜 범인이다. 아마 매클린 씨를 죽인
녀석이 진짜 범인이다. 아마 매클린 씨를 죽인 스미드 웨슨 총도 어딘가에 숨
겨 놓았었겠지."
"아버지, 이 권총을 이용해서 진짜 범인을 잡도록 하지요."
"음,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니?"
"연극을 하는 거예요. 먼저 13번 권총이 새둥우리 속에서 발견됨으로써, 이번
사건이 완전히 해결되었으며 범인을 잡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집안에다 소문을
퍼뜨리는 겁니다."
"해결되었다고, 그게 정말이니?"
"아버지, 사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태도로 연
극을 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범인의 윤곽을
잡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녁 7시, 이곳은 1층의 서재. 창문 옆에 있는 탁자 위에는 구경 0.25의 콜트
권총과 새둥우리가 놓여있다. 그리고 엘러리는 탁자 앞의 가죽 의자에 앉아 있
었다. 날씨가 무덥기 때문에 문이란 문은 모두 활짝 열어 놓았다. 바깥은 이미
어두워졌다. 서재의 조명은 탁자에 붙어 있는 스탠드뿐이다. 스탠드의 둥근 빛
은 콜트 권총과 새둥우리와 엘러리만을 비추고 있었다. 서재의 어두운 구석에
는 검은 옷을 입음 퀸 경감과 팩스턴, 그리고 쉴라가 웅크리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이 이 연극의 관객인 셈이다. 드디어, 막이 올랐다.
"프린트 형사."
젊은 형사가 서재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엘러리 씨?"
"설로우 포트 씨를 불러 주시오."
프린트 형사가 나가더니 잠시 뒤에 설로우가 머뭇거리면서 서재로 들어왔다.
설로우와 엘러리는 권총이 놓인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엘러리는 스
탠드를 설로우 쪽으로 돌렸다. 설로우는 눈이 부신지 눈을 비볐다. 엘러리는 매
서운 눈초리로 설로우를 노려보았다.
"사람들은 포트 부인이 남겨놓은 글로 이번 사건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하고 있
겠지만, 경찰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남겨놓은 글이 가짜이기 때문에 수사를
다시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엘러리 씨, 당신은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겁니까?"
"잠깐만, 설로우 씨, 이제는 우리들이 당신의 그 무모한 결투를 막기 위해서
콜트 권총에 넣어진 실탄을 공포탄으로 바꿔 놓았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런
데, 그것을 누군가가 다시 실탄으로 바꿔 놓았기 때문에 로버트 씨가 죽은 겁
니다. 설로우 씨, 알고 계신 것을 모두 말씀하시지요."
설로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면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모르겠습니까? 설로우 씨, 이 탁자 위를 똑바로 쳐다보십시오. 이 권
총을 보란 말입니다."
"보, 보고 있습니다."
"이 총을 보면 무엇인가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까?"
"로버트와 결투할 때 내가 사용했던 콜트 0.25 구경 같군요."
"그렇습니다. 이건 콜트 0.25 구경입니다. 그러나, 설로우 씨가 결투할 때 사용
했던 그 총은 아닙니다. 당신이 결투하기 전 날에 산 14 자루의 총 가운데는
똑같은 것이 두 자루씩,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기억하고 있습니까?"
설로우는 더듬거리면서,
"예, 그래요. 콜트 권총과 스미드 웨슨 총이 두 자루 씩 있었습니다."
"기억하고 있군요."
엘러리는 탁자에 놓인 콜트 권총을 들어서 탄창을 열어 보았다. 콜트 0.25 구경
이라고 새겨져 있는 총알이 스탠드의 불빛으로 희미하게 보였다. 거기에는 총
알이 하나 들어 있었다. 설로우는 고개를 쑥 내밀고서 총알을 보았다. 엘러리는
콜트 권총을 둥우리에 넣으면서,
"이 권총이 어디에서 발견되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정원의 시커모어 나무에서 발견되었다지요?"
"왜 그런 곳에 숨겼습니까?"
그 말에 설로우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총은 내가 사오자마자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으로 설로우에 대한 질문은 끝났다. 다음엔 루엘라가 불려왔다. 엘러리는
루엘라에게도 똑같은 것을 물어보고, 총알이 들어 있는 콜트 권총을 보여 주었
다. 계속해서 호레이쇼, 스테픈, 고치 소령이 불려왔다. 네 사람은 총알이 든 콜
트 권총을 보여 주어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엘러리는 프린트 형사에게
이제 끝났다는 신호를 보내고 의자에게 일어났다. 여전히 밖은 깜깜했다. 그
때, 퀸 경감과 팩스턴 변호사, 쉴라가 다가왔다. 쉴라는 자기 아버지를 조사해
서 그런지 조금 뾰로통해져 있었다. 퀸 경감도 무슨 까닭에서인지 별로 기분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엘러리, 역시 결정적인 증거는 잡히지 않는군. 어째 이런 방법이 적합하지 않
은 것 같은데."
하면서 퀸 경감은 전등을 켜려고 했다. 엘러리는 그 손을 막으면서,
"아직 불을 켜면 안 돼요, 아버지. 지금 전등을 켠다면 제 계획이 모두 물거품
이 되어 버릴 거예요."
엘러리는 탁자 위의 콜트 권총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말에 퀸 경감은 곧 엘
러리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 알겠다, 엘러리. 그것이 함정이었구나. 범인의 윤곽을 알았다는 소문을 집
안에 퍼뜨려 놓은 다음, 사람들에게 콜트 권총을 보여준다. 증거품인 권총을 본
범인은 매우 초초한 끝에 이 어둠을 이용해서 권총을 빼앗으러 온다. 그것을
기다렸다가 붙잡으려는 것이 네 계획인 모양이구나. 그러나, 그 계획이 조금이
라도 어긋난다면, 도리어 네가 당하게 될 텐데……. 범인은 사람을 죽이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잔인한 녀석이야."
쉴라가 옆에서 끼여들었다.
"그래요. 엘러리 씨, 경감님 말씀이 맞아요. 그 총에는 총알이 들어 있잖아요?"
엘러리는 쉴라를 걱정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괜찮습니다.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벨리 부장
님, 테라스 밖의 기둥 뒤에 숨어 있다가 테라스 쪽으로 다가오는 녀석이 있으
면 재빨리 잡아 주세요. 그것보다도 여러분들은 빨리 어두운 곳으로 숨어 주세
요. 이렇게 웅성거리고 있으면 범인은 물론 귀신이라도 무서워서 오지 못할 겁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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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 부장 혼자서는 위험할 텐데. 몸집은 크지만 행동이 빠르지 못해서, 아무
래도 내가 지켜야하는 건데 말이야."
퀸 경감은 투덜거리면서 서재에서 나가려고 했다. 그 때, 새카만 테라스 쪽의
열려 있는 창문 너머로 하얀 뱀 머리 같은 것이 나타났다. 사람의 팔이었다. 장
갑을 낀 그 손은 타자 위의 콜트 권총을 잡았다. 그 콜트 권총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엘러리의 가슴을 겨냥했다.
"악!"
쉴라의 비명이 어둠을 뚫고 지나갔다. 엘러리는 총알을 막으려는 건지 한 쪽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퀸 경감은 재빨리 엘러리의 발을 쳐서 넘어뜨렸다. 그러
나, 그거보다도 먼저 장갑 낀 손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엘러리를 쏜 죽음의 손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화약 연기가 탁자의 새
둥우리 위를 맴돌다가 점차 없어졌다. 퀸 경감은 쓰러져 있는 아들에게 달려들
었다.
"엘러리, 괜찮아?"
엘러리의 얼굴이 몹시 일그러져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쏘았는데 안 맞
을 리는 없다. 쉴라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엘러리 씨는 죽었어요."
이렇게 말했을 때, 엘러리가 괴로운 듯이 입을 열었다.
"누가 내 발을 쳐서 넘어뜨렸습니까? 덕택에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군요."
쉴라의 얼굴에 기쁨이 넘쳐흘렀다.
"어머, 엘러리 씨, 살았군요. 퀸 경감님이 당신을 넘어뜨렸어요. 아, 아직 안 돼
요. 움직이면 피가 나와요."
옆에서 팩스턴 변호사가,
"엘러리 씨, 나입니다. 팩스턴입니다. 알겠습니까? 어디를 다쳤습니까? 곧 치
료해 드릴 테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괜찮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엘러리는 화가 난 듯이 말했다. 퀸 경감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아무래도 의사를 불러와야겠네. 외과와 정신과 양쪽 의사를 모두 불러와야겠
어. 머리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아."
그러자, 엘러리가 큰 소리로,
"머리가 이상한 것은 아버지 쪽이에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아버지, 빨리
총을 쏜 녀석을 쫓아가지 않고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그러면서, 엘러리가 벌떡 일어났다. 경감은 깜짝 놀라며,
"엘러리, 일어나면 안 돼. 어서 눕거라."
"아버지, 저는 정말 다친 곳이 없어요."
"아니,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맞고도 다친 곳이 없다는 말이냐?"
"그래요. 저도 이상할 정도로 아무데도 다치지 않았어요."
쉴라 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엘러리는 답답하다는 듯이,
"할 수 없이 전등을 켜야 되겠군요.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방탄 조끼를 입고
있었어요. 작년에 런던 경시청의 총감이 아버지에게 선물로 주셨던 것 말입니
다. 그것보다도 벨리 부장님은 어떻게 되셨어요? 설마 주무시고 있는 것은 아
니겠지요? 부장님이 확실히 지키고 있었다면 녀석을 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엘러리, 권총을 쏜 것은 누구의 손이지? 조금 전에 연극에 등장했던 사람 중
에 한 사람인가?"
"하여튼, 테라스에 불을 켜주세요."
쉴라가 복도로 뛰어나가서 벽의 스위치를 올렸다. 테라스가 밝아졌다. 콜트 권
총은 창문 아래에 버려져 있었다. 경감은 그 총을 집어들면서,
"엘러리를 쏜 총이군. 그건 그렇고, 벨리 부장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벨리
부장!"
대답이 없다. 그 때, 프린트 형사가 쉴라의 팔을 잡고 들어왔다.
"수상한 여자를 잡았습니다. 이 여자가 복도의 스위치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범인과 한 패인 것 같습니다."
"프린트 형사, 어서 그 손을 놓게! 그 처녀는 아니야. 자네는 빨리 벨리 부장
을 찾아보게."
프린트 형사는 테라스 쪽으로 내려가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 있습니다, 있어요. 여기에 쓰러져 있는데요."
프린트 형사는 테라스의 기둥 뒤에서 벨리 부장을 끌어냈다. 벨리 부장의 그
큰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 퀸 경감과 엘러리가 다가가서 그의 몸을 세게 흔들
자, 벨리 부장은 '으음' 하면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경감님, 범인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벨리 부장,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벨리 부장은 더듬거리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심하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이 기둥 뒤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단단한 것이 제 머리를 세게 내리치는 거였습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
는 줄 알았습니다. 큰 나무 몽둥이 같더군요."
"뒤에서 내리쳤다면, 아무리 자네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겠군. 나무 몽둥이로
맞았길 다행이야."
엘러리는 테라스 주위를 조사해 보았지만, 벨리 부장을 내리친 범인은 무엇하
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경감은 서재로 들어가서 열심히 조사해 보더니 고개
를 갸우뚱거렸다.
"무엇이 나왔어요, 아버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군."
"무엇이 말씀입니까?"
벨리 부장이 정신을 차리려고 브랜디를 마시면서 물었다.
"권총은 틀림없이 이 서재 안에서 발사되었는데, 도대체 총알이 보이지 않아."
"제 방탄 조끼에 맞고 정원으로 튀어 날아가서 흙 속에 묻혔겠지요."
엘러리는 옷저고리를 벗고 방탄 조끼를 조사했다. 그런데, 총알에 맞은 흔적은
없었다. 조끼뿐만 아니라 옷저고리와 속옷에도 없었다. 경감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는 분명히 권총이 불을 뿜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아무 자국도 없다니 정
말 이상한 일이군. 혹시 환상의 총알이었나?"
"환상의 총알?"
옷 저고리의 단추를 채우면서 엘러리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갑자기 '하하하!' 하
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 거지, 엘러리?"
경감이 물었다.
"알았어요, 아버지."
"무엇을?"
퀸 경감, 벨리 부장, 팩스턴, 쉴라 이 네 사람이 다가오자 엘러리는 마치 연극
대사를 외듯이 말했다.
"녀석은 로버트 씨와 매클린을 죽이고 이제는 저를 죽이려고 한 겁니다."
"도대체 녀석이 누구입니까?"
먼저 팩스턴 변호사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어서, 벨리 부장과 쉴라가 똑
같이 물었다. 그러나, 퀸 경감은 의심스러운 듯이,
"엘러리, 확실한 것이 아니라면 이야기도 꺼내지 말아라."
이렇게 말하면서도 사실 퀸 경감은 아들에게 누구보다도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퀸 경감의 마음을 모르고 벨리 부장은,
"이번 사건만큼 복잡한 사건은 없을 거네. 설로우 씨가 로버트 씨를 쏘긴 했
지만, 진짜 범인은 따로 있어. 저번에 포트 부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진짜 범인
은 자기라는 글을 써놓아서 그것으로 사건이 끝나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서명
이 가짜라고 했네. 엘러리,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그런
데, 이번에는 무엇을 알아냈다는 건가?"
엘러리는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앞쪽을 바라보면서,
"누가 울새를 죽였을까? '저입니다.'라고 참새가 말했습니다. 무엇으로 울새를
죽였지? '멀리서 쏘는 물건으로,' 참새가 대답했습니다. 이런 구절이 마더 구즈
의 동요에 있습니다. 그 참새가 누구라고 하기 전에 어째서 살인이 일어났는지
그것을 밝혀 보도록 하지요. 이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누구도 제 말을 믿으려
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습니까? 설로우 씨는 결투를 신청하기 전에 권총
을 14 자루 샀습니다. 이것이 그 총들을 종류대로 분류한 표입니다."
엘러리는 주머니에서 전에 자기가 만든 표를 꺼내어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13번과 14번 총은 그 때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총포 점에 물어 보
아서 종류를 알아 냈습니다. 13번은 콜트 구경 0.25인치이고, 14번은 스미드 웨
슨 38/32형 구경 0.38인치입니다. 14번의 스미드 웨슨 0.38 인치는 매클린 씨
의 시체 옆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13번과 14번 총은 표의 1번과 2번 총과
제조 회사, 모양, 크기가 똑같은 겁니다.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콜트 권
총과 스미드 웨슨이 다른 종류의 총에 비해서 무척 작다는 겁니다. 길이와 구
경이 모두 작지요. 이것이 사건의 요점이니까 머리 속에 잘 넣어두십시오. 설로
우 씨는 식당에서 결투를 신청하면서 예절대로 로버트 씨에게 총을 고르라고
했습니다. 그 때, 설로우 씨는 총을 14 자루나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콜트 권총
과 스미드 웨슨 권총만을 내밀었습니다. '왜, 그 두 자루만 내밀었을까?' 저는
곧 이것을 의심해 보았습니다. 콜트 권총이나, 스미드 웨슨 권총은 모두 결투에
는 적합하지 않은 포켓용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권총이 똑같이 두 자루 씩
있다는 것, 이것은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반드시 두 자루씩 있어야만 하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설로우 씨
의 악마와 같은 계획을 알아차린 겁니다."
"어떤 계획인가?"
경감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버지, 로버트 씨는 그 두 자루 중에서 한 자루를 고를 겁니다. 예를 들어
로버트 씨가 콜트 권총을 쥔다면, 설로우에게는 스미드 웨슨이 두 자루 남게
됩니다. 만약, 로버트 씨가 스미드 웨슨을 고른다면 콜트가 두 자루 남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요. 로버트 씨가 스미드 웨슨 0.38을 쥔다면 설로우의 손에는 콜트가
두 자루 남게 되는 거지요."
팩스턴 변호사가 엘러리의 말을 따라했다.
"잠깐만, 엘러리."
경감은 이상하다는 듯이,
"설로우가 똑같은 총을 두 자루 가지고 있다고 해서 별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왜 그렇습니까?"
"설로우 씨가 똑같은 권총을 두 자루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이번 사건과는 아
무 관계가 없어. 엘러리, 설로우 씨는 로버트를 죽이고 싶어도 죽이지 못 했을
거다. 설로우 씨는 결투 순간까지 공포탄이 있는 콜트 권총에 손을 댈 기회가
전혀 없었잖아. 쉴라 양이 설로우 씨를 서재로 불러서 이야기하는 사이에 팩스
턴과 네가 설로우 씨의 방에서 권총을 훔쳐내었고, 내가 공포탄으로 바꾸어 넣
었다. 너는 공포탄으로 바꿔 넣은 콜트 총을 설로우 씨의 방에 갖다 놓고는 즉
시 설로우 씨와 함께 술집에 가서 밤새도록 마셨어. 새벽에 포트 저택에 돌아
와서 설로우 씨는 정원에 있고, 네가 가서 공포탄이 넣어져 있는 콜트 권총을
가지고 왔다. 지난번에, 네가 나에게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설로우 씨의 침실
에 몰래 들어가서 공포탄을 실탄으로 바꾸어 넣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했던 사
람은 팩스턴, 쉴라, 그리고 설로우 씨―이 3 사람이라고."
그러자, 벨리 부장은,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고 맞장구쳤다. 그러자 엘러리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아버지 말씀대로 설로우는 공포탄을 실탄으로 바꾸어 넣지는 않았습니다. 그
러나, 설로우가 로버트 씨를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
"뭐, 뭐라고?"
"로버트 씨를 죽인 것은 설로우입니다. 결투에 사용된 것은 공포탄이 넣어진
콜트 권총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콜트 권총이었습니다."
경감은 조그맣게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엘러리는 이야기를
이었다.
"실은 설로우는 실탄을 넣은 콜트 권총을 결투 전날부터 옷 저고리의 안주머
니에 숨겨놓고 있었습니다. 결투 시간이 다가오자, 설로우는 술집에서 우리들과
함께 돌아와서 공포탄이 든 권총을 갖다 달라고 하며 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결투 때 권총에서 실탄이 튀어나왔어요. 그 것은 설로우가 마술을 부린 것이
아니라, 다른 콜트 권총을 사용했던 겁니다. 설로우는 주머니 속에서 감쪽같이
바꾸어서 뺐던 겁니다. 그런 것을 모르고 저는 공포탄을 실탄으로 바꿔넣은 녀
석이 진짜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찾아다녔던 겁니다. 그런데, 바뀐
것은 총알이 아니라 권총이었던 겁니다. 저는 틀림없이 공포탄이 들어있는 콜
트 권총을 설로우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 때, 설로우는 어떻게 했지요? 팩스턴
씨, 쉴라 양, 생각이 납니까? 설로우는 총을 받아 들자마자 옷 저고리의 안 주
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실탄이 넣어져 있는 콜트 권총을 꺼내어 로버
트 씨를 쏘았던 겁니다. 로버트 씨를 쏜 권총은 그 자리에다 버리고, 우리들이
1번이라고 한 콜트 권총은 잘 가지고 있다가 시커모어 나무에 있는 둥우리 속
에 숨겼던 겁니다. 우리들이 13번이라고 하면서 필사적으로 찾던 콜트 권총은
사실은 1번이었습니다. 오늘 호레이쇼 씨가 찾아낸 것이 바로 그 1 번 총입니
다. 이것을 안 설로우는 초조하고 불안한 끝에 저를 쏘았습니다. 그렇지만, 저
는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공포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전에 바꿔놓은거지요. 저는 조금 전에 설로우에게 총알을 보여주었지만, 그 때
는 그것이 실탄인지 공포탄인지 몰랐습니다. 이것은 나무 세공과 같이 정밀하
게 계획된 범죄였습니다. 설로우는 우리들이 공포탄으로 바꿔넣자고 하는 이야
기를 엿들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공포탄을 실탄으로 바꾸어 넣었기 때문에, 로버트 씨가 죽게 된 것이라고 경찰
에게 생각하게 만든 겁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결투 전의 설로우의 행동
이 모두 들어맞습니다. 먼저 무리들에게 술집에 가자고 말한 것도 설로우이고,
결투 직전에 침실로 권총을 가지려 보낸 것도 설로우입니다. 설로우는 이렇게
해서 자신은 절대로 실탄으로 바꾸어 넣지 않았다는 것을 은연중에 우리에게
알린 겁니다. 굉장히 치밀하게 짜여진 범죄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몇 번이
나 속아넘어간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그거야 그렇지, 우리는 그 때 똑같은 권총이 두 자루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
랐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설로우는 우리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1번 콜트 권총을 감쪽같이 둥우리 속에 숨겼던 겁니다."
"매클린 씨를 죽인 방법과 까닭도 알고 있나?"
"매클린 씨와 결투하기 전 날, 설로우는 14자루와는 별도로 또 두 자루의 총
을 사왔습니다. 그리고, 자는 체하며 벨리 부장이 그 총들을 훔쳐가게 내버려두
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을 안심시켜 놓은 설로우는 14번 스미드 웨슨
0.38구경으로 매클린 씨를 죽였습니다. 아마 그 권총도 새둥우리 속에 숨겨두었
을 겁니다. 왜 설로우는 로버트 씨와 매클린 씨를 죽였을까요? 그것은 포트 제
화 회사의 사장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씨와 매클린 씨가 살아 있
다면, 그 둘 중에서 한 사람이 사장이 될 거라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사장
투표에는 설로우, 루엘라, 호레이쇼, 로버트, 매클린, 쉴라 양, 언더힐 이렇게 7
사람이 참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설로우는 이 중에서 루엘라 씨와 호레이쇼 씨
는 매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표를 합해서 3표는 확실
한 거지요.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예를 들어서 로버트 씨가 후보가 된다면
틀림없이 그에게 표를 던질 겁니다. 그러면, 설로우는 3표, 상대방은 4표, 결국
아깝게 한 표 차이로 떨어지게 되는 거지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설로우로서
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력한 사장 후보인 로버트 씨
와 매클린 씨를 죽이기로 한 거지요. 결국, 설로우는 3대 2로 포트 제화 회사의
사장 자리를 차지했던 겁니다. 제 추리가 어떻습니까, 아버지?"
"아주 훌륭해, 그렇지만 증거가 있어야 해."
그러자, 팩스턴 변호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증거라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정적인 것인지는 엘러리 씨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실은 설로우 씨는 얼마 전에 단골
양복점에 부탁해서 옷저고리를 고쳤습니다. 설로우 씨가 결투할 때에 입었던
옷저고리의 오른쪽 안 주머니를 이중 주머니로 만들었던 거지요."
"이중 주머니!"
경감이 이렇게 외치자 벨리 부장도,
"이중 주머니에 똑같은 모양의 권총 두 자루, 기발한 생각인데."
"그렇습니다. 경감님. 실탄이 들은 콜트와 공포탄이 든 콜트를 따로따로 이중
주머니에 넣으면 간단하게 꺼낼 수 있습니다. 그 옷 저고리를 압수하죠. 이것만
은 설로우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겁니다."
팩스턴 변호사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 테라스에서 검은 그림자가 소리
도 없이 들어왔다. 설로우였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테라스에서 엿들었던 것이
다. 설로우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팩스턴 변호사를 노려보았다.
"나쁜 녀석, 이중 주머니 이야기를 하다니, 로버트와 매클린처럼 너도 죽여 버
리겠다."
설로우는 재빨리 팩스턴을 덮치더니 그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퀸 경감과 엘
러리, 벨리 부장이 설로우에게 덤벼들었다. 벨리 부장은 설로우의 다리를 붙잡
으려고 했지만, 설로우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엘러리는 설로우의 두
팔을 꺾어서 힘껏 들어 올렸다. 그러자, 설로우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 버
린 듯 축 늘어졌다. 설로우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의
증오에 찬 그런 눈이 아니었다. 설로우는 자신의 완전 범죄가 엘러리의 추리와
팩스턴의 증언으로 밝혀졌다는 것을 알자 그 충격으로 완전히 미쳐 버렸던 것
이다.
그토록 기괴함에 휩싸였던 포트 집안의 살인 사건은 엘러리의 뛰어난 추리로
막을 내렸다. 설로우가 팩스턴에게 달려들면서, '로버트와 매클린처럼 너도 죽
여 버리겠다.'라는 말은 마더 구즈의 동요에서 '저입니다.'하고 참새가 말했습
니다에 해당되는 말이었다. 신문에서는 한결같이 엘러리의 솜씨를 칭찬했다. 그
러나, 사건이 해결된 지 1주일이 지났는데도 엘러리의 기분은 개운치 않았다.
눈앞에 파리가 한 마리 날아다니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파리는 쫓아버려
도 멀리 도망가지 않고 계속 그의 주위를 날아다니는 것이었다. 지금도 엘러리
는 아침을 들면서 계속 생각에 잠겨 있다.
'이번 사건은 마치 기차 시간표와 같이 무척 치밀하게 짜여 있고, 또 그대로
실행되었다. 이런 치밀한 계획이 설로우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 아니,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틀림없이 어떤 잔인한 녀석이 설로우를 조종한 것이
다. 아, 다시 한 번 설로우를 만나서 이야기해 본다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
는데…….'
엘러리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날로 설로
우는 정신 병원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 때,누가 문을 두드렸다. 열어보니, 쉴
라가 화려하고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뒤에는 팩스턴이 있었다.
"갑자기 이게 웬일입니까?"
"우리들은 내일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어요. 두 분이 꼭 참석해 주셨으면 해서
요."
"축하합니다. 기꺼이 가지요."
퀸 경감과 엘러리는 쉴라와 팩스턴에게 축하를 해주었다. 퀸 경감은 이들에게
의자를 권하면서 물었다.
"설로우 다음에는 누가 포트 제화의 사장이 되는 겁니까?"
그러자, 팩스턴이 큰 소리로 답했다.
"다시, 여사장입니다. 쉴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름만 사장이에요. 모든 경영은 영업 부장에게 맡길 예정이에
요."
쉴라는 즐거운 듯이 팩스턴의 얼굴을 보았다.
"오라, 여 사장에 영업 부장. 두 분 다 굉장히 출세하셨군요."
조금 부러운 듯이 경감이 말했다. 그러나, 쉴라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이것도 모두 엘러리 씨의 덕택이지요, 엘러리 씨, 미안합니다만, 내일 신랑을
좀 도와주셨으면 하는 데요."
"기꺼이 도와 드리겠습니다."
엘러리가 대답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리들은 지금 여기 하나님 앞에 모여……."
목사의 목소리가 조용한 교회당의 구석구석에까지 퍼져 울렸다. 엘러리는 신랑
인 팩스턴의 뒤에 서 있었지만, 오른손을 휘두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
었다. 1 주일 동안이나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그 파리가 오늘은 100배나 더 큰
모습으로, 게다가 '붕붕' 비행기와 같은 소리를 내면서 날아다니고 있었기 때문
이다. 엘러리는 그것을 떨쳐버리려고 옷저고리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
자, 딱딱한 것이 손가락에 닿았다. 조금 뒤에 신랑 팩스턴의 왼손 넷째 손가락
에 끼어질 반지였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것이 잡혔다. 오늘 아침 이곳으로 오
는 길에 아버지가, '사건은 끝났다. 이제 내가 보관하고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팩스턴에게 돌려주거라.'라고 하시면서 건네 준 포트 부인의 가짜 고백서와 성
명서였다. 엘러리는 누군가의 손에 끄려가듯이 노부인의 가짜 고백서를 주머니
에서 꺼냈다. 심이 굵고 부드러운 연필로 코닐리아 포트라고 서명이 되어 있지
만, 그것은 진짜 서명서 에서 베껴 낸 것이다. 엘러리는 그 가짜 고백서를 살짝
뒤집었다. 그러나, 뒤에는 아무런 자국이 없었다.
"그대, 신을 받들고 경솔한 결혼을 하지 않도록."
목사의 목소리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목소리같이 엘러리의 귀에 은은하게
울렸다. 엘러리는 서명서를 꺼내 보았다. 그 고백서에 있는 포트 부인의 서명은
이 서명서를 밑에 깔고 베껴낸 것이라고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
금은 다르다. 엘러리는 떨리는 손으로 성명서를 뒤집어 보았다. 그러자, 희미하
지만 분명하게 코닐리아 포트라고 하는 연필의 서명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이
게 무슨 일인가? 밑에 놓여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위이고, 위에 놓여져 있었
다고 믿었던 것이 아래였던 것이다. 엘러리는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
다.
"두 사람은 지금 주님 앞에서 부부가 되는 것을 서약합니다."
"그만! 이 결혼식을 중지하시오!"
엘러리는 재빨리 앞으로 뛰어나갔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목사는
성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엘러리, 너 미쳤니?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라!"
퀸 경감은 엘러리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엘러리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
다.
"아버지, 저는 악마가 활개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나쁜 짓을
한 녀석에게는 반드시 정의의 심판이 내려진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싶습니
다. 목사님, 미안합니다만, 잠깐 나가 주시겠습니까?"
목사는 신랑인 팩스턴을 보았다. 팩스턴은 나가 달라는 눈짓을 했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것은 쉴라의 아버지 스테픈이었다.
"목사님, 목사님은 여기에 계십시오. 이 신성한 장소에서 나가야 할 사람은 목
사님이 아니라 이 미친놈입니다."
스테픈은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서 엘러리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쉴라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버지, 부탁이에요. 엘러리 씨의 말씀대로 하세요."
목사는 잠자코 교회당에서 나가고 안에는 몇몇 사람만이 남았다. 엘러리는 문
을 잠그고,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이번 사건에서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습
니다. 다행히 지금 그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경감은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설로우가 범인이 아니란 말이냐? 설로우는 분명히 로버트와 매클린
을 권총으로 쏘아 죽였고, 또 동요의 참새와 같이 자백도 했잖아."
"그렇지만, 설로우는 진짜 범인이 아닙니다. 그는 꼭두각시에 불과했어요. 설
로우는 확실히 방아쇠를 당기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모두 뒤에 숨어있는 사
람의 지시였습니다."
이 터무니없는 엘러리의 말에 경감은 입도 열 수 없었다. 엘러리는 퀸 경감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전에 저는 고백서에 있던 포트 부인의 서명이 가짜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저는 성명서 위에 고백서를 얹고, 서명이 정확하게 겹쳐지는 것을 확인한 결과,
고백서의 서명은 성명서의 것을 베껴 낸 가짜라고 판정했습니다."
엘러리는 주머니에서 고백서와 성명서를 꺼내어 두 장을 겹쳐서 오후의 밝은
빛이 비치는 유리창에 댔다.
"한 쪽은 진짜 서명이고, 다른 한 쪽은 가짜 서명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고백서쪽의 서명을 가짜라고 믿었던 것은 포트 부인이 굵은 연필로 서명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도 함께 계셨지요. 그런데, 그것이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습니다."
엘러리는 두 장의 종이를 손에 쥐면서,
"서명을 베낄 때, 진짜와 가짜 둘 중에 어느 것을 밑에 놓을까요?"
"그거야 진짜를 밑에 놓겠지."
"그러면, 유리창 위에 진짜를 대고 , 서명을 베끼려고 하는 종이를 이렇게 그
위에 둡니다. 만약, 고백서가 가짜라고 한다면 성명서를 유리창에 꼭 붙이고 그
위에다가 고백서를 놓겠지요. 그렇지요, 아버지?"
"당연하지."
"그런데, 포트 부인은 언제나 심이 굵고 부드러운 연필로 서명을 했습니다."
퀸 경감은 엘러리의 이 이야기에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엘러리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이었다.
"이와 같이 심이 굵고 부드러운 연필로 쓰여진 글자는, 그 위에 종이를 대고
베끼게 되면 심의 검은 가루가 윗 종이의 뒷면에 묻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번
경우에는 고백서의 뒷면에 진짜 서명을 한 연필의 흔적이 거꾸로 찍혀 있어야
하는 거지요."
"그거야 분명한 이야기이지."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가짜라고 믿고 있던 포트 부인의 고백서 뒷면은 이렇
습니다."
엘러리는 고백서의 뒷면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연필 흔적이 전혀 없는 하얀
종이였다.
"아버지, 실은 저도 이것을 몇 분전에야 알아차렸습니다. 물론, 지우개로 지우
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지우개를 사용한 흔적도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빨리 성명서의 뒷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흐릿하지만 확실하게 코
닐리아 포트의 서명이 거꾸로 찍혀 있는 거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짜라는
증거지요. 성명서의 서명과 고백서의 서명을 맞춰보십시오. 딱 맞지요.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성명서는 진짜이고, 고백서는 가짜라는 방향에서 수사를 했습니
다. 그런데, 가짜라고 믿었던 고백서가 사실은 진짜였습니다."
"엘러리, 고백서가 진짜라면 포트 부인이 범인이라는 말인가?"
"고백서는 진짜이지만, 내용은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포트 부인은 살인이 어
떻게 행해졌는지도 몰랐습니다. 고백서에는 모두 자기가 저질렀다고 쓰여 있습
니다만, 내용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첫 번째 콜트의 실탄은 우
리들이 공포탄으로 바꾸어 넣었습니다만, 그 공포탄을 바꾼 사람은 아무도 없
었습니다. 바꾸어진 것은 총알이 아니라 총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고백서에
서 포트 부인은 설로우의 총에서 공포탄을 빼고, 실탄을 집어넣은 것이 바로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포트 부인은 이중 권총의 조작 따위는 전혀 몰랐다
는 것이지요. 이것은 포트 부인이 이번 사건과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는 증거입
니다. 그리고, 포트 부인은 설로우가 숨겼던 권총을 훔쳐서 매클린의 방으로 들
어가 쏘아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매클린이 죽단 날 밤, 포트 부인은 이니
스 박사에게서 수면제 주사를 맞고 깊은 잠에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일어
날 리가 없는 거지요. 머리가 좋은 포트 부인의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 그렇다
면, 무엇이 포트 부인을 여기까지 몰아 넣었을까요? 그것은 포트 부인이 설로
우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트 부인은 설로우를 구하기
위해서 자기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부모님이란 정말 고마
운 분들입니다. 하여튼, 포트 부인은 모든 죄는 자기에게 있다는 글을 남기고서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포트 부인의 글로 진짜 범인은 몹시 곤란해졌습니다. 지
나 범인은 설로우를 이용해서 로버트와 매클린을 죽인 다음, 설로우마저 경찰
에 넘기겠다고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포트 부인이 모두 자기가 저
지른 것이라는 글을 남기고 죽었으니, 자기 계획이 허사로 돌아가게 된 겁니다.
물론 녀석은 포트 부인의 글을 몰래 태워 버리고 싶었겠지만, 꼼꼼한 부인은
고백서가 있다는 것을 유언장의 뒤에 적어 두었지요. 유언장이 없어진다면 자
신에게 올 재산까지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범인은 그 고백서가 가짜라
고 우리들이 판정하도록 계획을 세웠습니다. 범인은 포트 부인이 쓴 성명서를
없애고, 그와 똑같은 내용의 글을 포트 부인의 타이프로 치고, 고백서에 있는
서명을 베껴 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똑같은 서명이 두 개가 되는 거지요.
저는 포트 부인이 성명서에 서명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성명서는 틀림없이
진짜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범인의 계획에 걸려들고 만 거지요. 그리고, 설로
우를 진짜 범인이라고 단정짓고 그를 정신 병원으로 보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진짜 범인에게 거추장스러운 사람이 모두 없어져 버렸습니다. 진짜 범인
은 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좋아했을 겁니다."
엘러리는 숨을 돌리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로버트, 매클린, 설로우 이렇게 3 사람의 사장 후보가 없어졌습니다. 포트 집
안에 남은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쉴라 양과 루엘라, 호레이쇼 뿐입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사장 자리에 가장 가깝겠습니까? 가장 유리한 사람은 누구겠
습니까?"
"물론, 쉴라이지."
엘러리의 물음에 답한 사람은 경감이 아니라 쉴라의 아버지 스테픈이었다.
"그렇습니다. 쉴라 양입니다."
엘러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팩스턴이 주먹을 쥐고 엘러리에게 다가섰
다.
"엘러리 씨, 그 말에는 무슨 뜻이 있는 것 같군요?"
"팩스턴, 그만 두게."
퀸 경감의 큰 소리에 팩스턴은 한 발자국 물러섰다. 경감은 멍청히 서 있는 쉴
라를 보면서,
"엘러리, 이 사건을 뒤에서 조종했던 냉혹하고 잔인한 범인이 이 보조개의 아
가씨란 말이냐? 아마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아버지, 그건 저도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쉴라 양은 이번 살인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진짜 범인은 따로 있습니다. 범인은 아버지의 뒤에 있는 사람
입니다."
"뭐?"
경감이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팩스턴의 창백한 얼굴이 있었다.
"설마! 팩스턴은 우리들의 수사를 누구보다도 열심히 도와준 사람이잖아?"
경감은 정말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팩스턴의 팔을 잡았다. 엘러리는 차
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팩스턴은 머리가 무척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고문 변호사로서 포트 집안
에 들어가자, 그는 막대한 재산을 자기의 손에 넣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쉴라 양에게 접근하여 약혼까지는 성공했습니
다. 그런데, 포트 집안의 큰아들인 설로우가 명예와 재산에 집념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팩스턴은 설로우를 조종해서 로버트와 매클린을
죽이려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엘러리가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팩스턴이 뭐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팩스턴, 얌전히 이야기를 들으시오!"
엘러리의 이 말에 퀸 경감은 권총을 꺼내서 안전 장치를 풀었다.
"팩스턴은 설로우를 꾀어서 로버트와 매클린 두 사람을 없애는 데 성공했습니
다. 모든 증거가 설로우에게 불리하게 되었지만, 저는 설로우의 머리로는 도저
히 그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로우가
콜트 권총의 총알을 공포탄으로 바꿔 넣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저는 설로우
의 말대로 그가 우리의 이야기를 엿들었을 거라고 이야기해 준 사람이 있었습
니다. 그 사람은 바로 팩스턴이었습니다. 총알을 공포탄으로 바꿔 넣자고 우리
에게 제안한 것도, 권총을 살 때 그 종류는 같은 모양의 것을 2 개씩 사라고
가르쳐 준 것도, 또 권총을 주머니 속에서 바꿔치기 하도록 시킨 것도 바로 팩
스턴입니다. 그리고, 설로우가 진짜 범인이라고 밝혀지고 나서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 설로우가 옷저고리의 안주머니를 이중으로 고쳤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려 준 것은 바로 누구였습니까?"
"팩스턴이다!"
경감이 외쳤다.
"설로우가 테라스에서 달려들었을 때 누구를 덮쳤습니까? 곧장 팩스턴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설로우는 팩스턴을 믿고 그의 명령대로 행동했는데, 마지막에
가서 팩스턴이 배반하고 만 겁니다.
아직도 저는 그 때 설로우가 외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쁜 녀석, 이
중 주머니 이야기를 하다니!" 팩스턴의 배반에 충격을 받은 설로우는 완전히
정신이 돌아버렸던 겁니다."
"불쌍한 설로우 오빠."
쉴라가 울먹이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증오에 찬 눈으로 팩스턴을 쳐다보았
다. 팩스턴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대들 듯이 고함을 쳤다.
"거짓말이오! 모두 음모야! 엘러리는 쉴라와 결혼하고 싶어서 나를 몰아내려고
음모를 꾸민 겁니다. 그래서,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한 겁니다. 엘러리,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렇게 지껄이지 마시오!"
"내가 음모를 꾸민 거라고? 좋아, 그러면 당신이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할 이
야기를 들러 주지요. 팩스턴의 잔인한 가르침 덕분에 설로우는 로버트를 감쪽
같이 해치웠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매클린을 죽일 때는 팩스턴이 가르쳐 준
것 외에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었습니다. 채찍이라든가 수프 접시 따위를 매클
린의 방에 놓아 둔 겁니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그것은 신문과 라디오에서
포트 집안의 사건은 마더 구즈의 동요처럼 일어나고 있다고 이야기를 했기 때
문에, 설로우의 머리에는 늘 그 동요가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설로우는 '
빵은 주지 않고 수프로 때우고 회초리로 때려서 잠을 재우지요.'처럼 해본 겁
니다. 어쩌면 수사진의 눈을 동요를 좋아하는 호레이쇼 씨에게 돌려놓으려고
한 짓인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저는 설로우가 혼자 저지른 짓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포트 부인은 자신이 범인이라고 하는 글을 남기고 돌
아가셨습니다. 팩스턴은 포트 부인의 그 고백서가 있는 이상, 설로우를 범인으
로 몰아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백서에 있는 서명을 베껴서 성명서를
새로 만든 다음, 우리가 본 진짜 성명서를 버렸습니다. 사실 팩스턴 변호사는
그 고백서의 문구도 다시 만들고 싶었을 겁니다. '로버트와 매클린을 죽인 것
은 내가 낳은 설로우입니다. 나는 설로우가 사형 당하는 것을 차마 이 눈으로
볼 수가 없어서 먼저 갑니다. 코닐리아 포트'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포
트 부인은 자식을 지나치게 사랑하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설로우의 죄를 뒤집어썼으면 썼지 자식을 어떻게 사형 대에 보내려고
하겠습니까? 누가 그것을 믿겠습니까? 그래서, 성명서를 만들어서 진짜 범인이
따로 있다고 꾸미기로 한 겁니다. 그런데, 고백서에 있는 서명을 가짜 성명서에
옮길 수 있었던 사람은 팩스턴 단 한 사람뿐입니다. 포트 부인은 유언장이 든
커다란 봉투를 손에 꼭 쥐고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뜯어보지도 않
고, 그대로 고문 변호사인 팩스턴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3 일 뒤, 장례식이
끝나고 식구들이 모인 가운데 유언장이 공개되고 고백서가 나왔습니다. 그러니
까, 그 사흘 동안에 유언장을 뜯고 고백서를 읽을 수가 있었던 사람은 팩스턴
뿐이라는 이야기이지요. 팩스턴은 그 사이에 고백서가 가짜라고 꾸미기 위해서
가짜 성명서를 만들고 고백서에서 서명을 베껴 냈던 겁니다. 팩스턴은 거추장
스러운 것을 차례차례로 없애고, 쉴라 양과 결혼해서 포트 제화의 재산을 자기
손에 넣으려고 했던 겁니다."
엘러리는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팩스턴, 이상이 나의 추리요. 지금 당신에게도 할 말이 있을 겁니다. 자, 모두
가 있는 앞에서 말해 보시지요."
경감은 팩스턴 변호사가 엘러리에게 덤벼들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팩스턴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버
렸다.
"지쳤소. 나는 완전히 지쳤어요. 엘러리 씨가 방금 말한 것은 모두 사실입니
다. 나는 이제 홀가분해요. 앞으로 계속 이런 식으로 머리를 써가면서 복잡하게
살아야 한다면 더 이상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퀸 경감은 팩스턴의 이 마지막 말은 미국 범죄 사상 오래 남을 만한 유명한 이
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벨리 부장과 프린트 형사가 팩스턴 변호사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자동차에 태웠다. 쉴라는 웨딩 드레스를 입은 채로 창문 너머로 그 모
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러리는 쉴라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려고 가까이 다가
갔지만 쉴라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쉴라의 얼굴에서는 조금 전까지의 노여움
이 사라지고, 대신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엘러리는 쉴라가 중얼거리는 소리
를 분명히 들었다.
"불쌍한 찰리, 나는 당신이 가난한 변호사였더라도 사랑했을 거예요……."
'쉴라는 정말 아름답고 착한 여자야. 이런 쉴라에게 사랑을 받았던 팩스턴이
부러운데…….'
엘러리는 중얼거리면서 교회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