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 녹정기06
第61章. 천지회의 영웅들과 짜고 연적 정극상을 혼내주다
아가는 흥분해 있었다.
[나는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십여 리 길을 나아가자 등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일면서 수십
필의 말이 뒤쫓아왔다.
아가는 일굴에 대뜸 기쁜 빚을 띄웠다. 그러나 그 수십 필의 말은 그들
을 스쳐 지나갔으며 조금도 멈출 기색이 없이 앞으로 달려갈 뿐이었다.
아가의 표정은 다시 어두워졌다.
위소보는 말했다.
[애석하다, 애석해. 그게 아니었군 그래.]
아가는 말했다.
[뭐가 애석하다는 거예요?]
위소보는 말했다.
[정 공자가 뒤쫓아오지 않는 것이 애석하다는 말이오.]
아가는 말했다.
[그가, 그가 쫓아와서 뭘 하겠다는 거예요?]
위소보는 말했다.
[어쩌면 그가 그대한테도 대만으로 놀러가자고 청할지도 모르지.]
아가는 왁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구난은 아가의 마음을 이해하고 위소보를 꾸짖었다.
[소보! 자꾸만 뚱딴지 같은 말을 해서 너의 사저를 자극하지 않도록 해
라.]
위소보는 대답했다.
[예,예.]
그는 다시 말했다.
[천하의 왕손 공자들은 처와 첩들을 세 명이나 네 명, 또는 여덟 명이
나 아흡 명씩 거느리니 그야말로 가장 양심없는 사람들이지. 그 네 명
의 아리따운 소저들도 대만에 들어갔다 하면 아무래도 나오기 힘들 것
같더군. 그 정 공자는 절강성과 복건성에 가서 몇 명의 미녀들을 더 데
리고..]
구난은 호통을 쳤다.
[소보야!]
위소보는 말했다.
[예,예.]
세 사람은 정오 무렵 길가에 있는 조그만 국수 집에서 점심을 먹게 되
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일면서 다시 수십 필의 말이 서쪽
에서 달려왔다.
이 일행들은 국수집 문 밖에 이르러서 말에서 내리더니 가게 안으로 들
어왔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소리쳤다.
[닭을 잡고 쇠고기를 자르시오. 국수를 빨리 만들어 주시오.]
그들은 다투어 자리에 앉았다. 위소보가 보니 모두 다 잘 아는 사람이
었다. 서천천, 전노본, 관안기, 이력세, 풍제중, 고언초, 현정도인, 번
강 등 천지회 청목당의 고수들도 있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어젯밤 나는 그 모임에서 몇 마디의 말을 하고 욕을 했지만 많은 사람
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었고, 또 그들은 나와 멀리 떨어져 앉아
있었기 때문에 어둠 속이라 반드시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
으면 그 당시 어찌하여 다가와서 인사를 하지 않았겠는가? 이제 내가
나서서 아는 척을 하게 된다면 갖가지 일들을 줄줄이 말하여야 될 것이
다. 거기다가 내가 다른 사부님을 모시게 된 것을 보면 그들은 매우 언
짢게 생각할 것이니 차라리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좋겠다.)
그는 즉시 몸을 비스듬히 돌려 시선이 그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했다.
잠시 후 서천천 등이 요구하는 술과 음식들이 나왔다.
사람들이 젓가락을 들고 막 먹으려고 할 때 갑자기 말발굽 소리와 더불
어 한 떼의 사람들이 객점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부르짖었다.
[닭을 잡고 쇠고기를 잘라서 빨리 국수를 만들어 주시오.]
아가는 기뻐서 부르짖었다.
[아, 정 공자가 오셨어요.]
이 한 떼의 사람들은 정극상과 그의 동료들이었다.
정극상은 아가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더니 크
게 기뻐서는 재빨리 다가와 입을 열었다.
[진 소저, 사태, 그대들은 여기에 계셨군요. 저는 여러 곳을 찾았지만
찾지를 못했습니다.]
이 국수 가게는 무척 협소했다. 천지회의 군웅들이 여섯 탁자에 나누어
앉고 아가 등 세 사람이 한 탁자를 차지하여 이미 빈 탁자가 없었다.
정 공자의 시종 한 명이 서천천에게 말했다.
[이것 보시오, 늙은이. 당신네들이 좀 함께 모여 앉도록 하고 몇 개의
탁자를 양보해 주구려.]
어젯밤 살귀대회에서 정극상은 명나라 복색을 하고 있어서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관계로 서천천 등도 그를 알아보았다.
천지회는 연평군왕에게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원래 자리를 양보할 뜻
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시종의 말이 무척 무례하였는지라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울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현정 도인이 말했다.
[제기랄, 네가 뭐냐?]
이력세가 눈짓을 하며 나직이 말했다.
[모두 한집안 사람이니 그와 똑같이 행동하지 말고 양보해 줍시다.]
그 즉시 서천천, 관안기, 고언초, 번강 네 사람이 몸을 일으켜 풍제중
의 탁자 곁으로 다가가 앉았고, 한 탁자를 비워 주었다.
이때 정극상은 이미 구난의 탁자에 앉아 있었다.
아가는 위소보를 노려보며 말했다.
[거짓말을 하다니! 무슨 정 공자가 네 명의 여자를 데리고,]
위소보는 재빨리 그 말을 가로챘다.
[정 공자께서 오셨으니 그대는 내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겠
고 또 내가 있으니 국수를 먹지 못하시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좋소이
다.]
그는 서천천의 겉으로 가서 앉으며 나직이 말했다.
[모두들 나를 아는 척하지 마시오.]
서천천 등은 그를 발견하자 모두 다 놀라워하면서 기뻐했다.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강호에서 노련한 사람들이있고 기민하기 짝이 없
는 사람들이라 그가 그와 같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즉시 그 뜻을 알아
차리고는 모두들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위소보는 다시 나직이 말했다.
[우리들은 그저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하시오. 서 세째 형
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시오.]
서천천은 몸을 일으켜서는 이력세의 자리로 가서 나직이 말했다.
[본당의 위 향주께서 왕림하셨소. 그런데 모두들 모르는 것처럼 하라는
분부시오.]
이력세 등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저 술과 음식을 들면서 속으로 하나
같이 기뻐했다. 삽시간에 모든 탁자의 사람들에게 그 말이 전해지게 되
었다.
저쪽 탁자의 정극상은 신이 나서 큰소리로 말했다.
[사태, 어젯밤 모임에서 영웅호걸들은 저를 복건성의 맹주로 추대했습
니다. 모두들 대사를 논의하느라고 날이 밝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지요. 내가 객점으로 가 그대들을 찾으니 그대들은 이미 떠났다기
에 뒤를 쫓아왔는데 다행히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군요.]
구난은 말했다.
[정 공자, 축하하오. 하지만 앞으로는 그와 같은 기밀 대사는 여러 사
람이 있는 앞에서 들먹이지 않도록 하시오.]
정극상은 말했다.
[예. 다행히 이곳에는 다른 사람이 없습니다. 저 시골 사람들은 거친
사람들이라 듣고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원래 천지회의 군웅들은 모두 다 시골 농사꾼 차림을 하고 있었고 하나
같이 버선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곡괭이와 삽자루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다.
어젯밤 모인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정극상은 하나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위소보는 고개를 숙이고 국수를 먹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저 녀석은 너무 기고만장하오. 이 며칠간 하간부 곳곳에서 큰소리를
치더군요. 우리 천지회는 그들 대만 연평왕부의 부하라고 해서 총타주
도 그를 보게 되면 공손해져서는 숨도 크게 못 쉴 뿐만 아니라 입 한번
뻥긋하지 못한다는구려. 그리고 우리 무슨 당의 향주 채 노형은 옛날
그의 할아버지의 마부였고 무슨 당의 향주 이 노형은 그의 할아버지의
요강을 들고 다녔던 사람이라고....]
판안기는 노해 말했다.
[그런 일이 어디 있었소? 채 향주와 이 향주는 국성야의 부하였지만 모
두 다 싸움터에 나가서 용감하게 싸운 군관들이었는데..]
서천천은 나직이 말했다.
[관형, 음성을 낮추시오.]
관안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는 다시 말했다.
[그는 또 우리 청목당의 윤 향주를 비난하는 나쁜 말들을 했소이다. 다
른 사람이 옆에 있다가 윤 향주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까 그 녀
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죠. '그렇소, 그 윤가는 무공이 얕고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는 터라 나는 이미 그가 목숨을 오랫동안 보존하지 못할 줄
내다보았소.']
관안기는 분노가 극도로 치솟아서는 손을 들어 탁자를 힘주어 내리치려
고 했으나 서천천의 손이 빨라 대뜸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위소보는 군웅들이 연평왕부의 사람들에게 죄를 지으려고 하지 않는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정극상 녀석은 왕야의 아들이니 만약 크게 이간질을 하지 않
는 이상 그들을 충동질하여 손을 쓰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그는 사람들이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속으로는 기뻤지만 얼굴에는
오히려 깊은 우려의 빚을 띄우고 말했다.
[저 녀석이 터무니없이 말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길을 오면서 멋대로
까불며 우리 천지회의 많은 기밀대사를 말했으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암
호를 말하고 뭐냐, 그 '진진고강(地振高岡) 일파계산천고수(一派溪山千
古秀)'를 읊으며 그 스스로는 홍화정(紅花亭)의 맨 꼭대기에 앉는 사람
이라고 자칭하면서 총타주는 여섯 개의 향을 피우는데 그는 일곱 대의
향을 피운다고도 했소. 듣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면 그는 상세히 설명
을 하기도 했지.]
군웅들은 일제히 고개를 흔들었다. 천지회의 기밀을 이토록 누설하였다
가 만약 조정의 앞잡이들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천지회의 형제들은
모두 목숨을 잃을 우려가 있었다.
정극상의 태도가 경박하고 또 데리고 있는 시종들이 기고만장한 것을
보면 위소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
나 조금전 그가 한 여자에게 큰소리로 어젯밤 살귀대회에서 있었던 일
을 떠들어대며 의기양양해서는 자기가 복건성의 맹주로 추대되었다고
떠벌이지 않았는가 말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내가 보기에 우리들은 반드시 그의 기를 꺾어 놓아야 할 것 같소. 그
렇지 않으면 일이 크게 잘못될 것 같소이다.]
군웅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는 풍제중을 바라보며 말했
다.
[풍형이 그를 때려 주도록 하시오. 그러나 너무 심하게 때리지는 마시
오. 그저 버릇을 가르쳐 주는 정도로 끝내시오. 그리고 나중에 내가 나
서서 싸움을 막을 테니 풍형은 일부러 나에게 져주구려.]
풍제중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는 다시 말했다.
[전노본, 어젯밤 그대는 모임에서 말을 한 적이 있소. 그렇기 때문에
저 녀석은 아마 그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오.]
전노본은 나직이 말했다.
[예, 내가 먼저 피하도록 하지요.]
정 공자의 시종들 가운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는 자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한 사람이 천지회의 군웅들 탁자에 아직도 빈 자리가 있는 것을 보고
서천천의 등을 가볍게 밀면서 말했다.
[이것 보시오. 저쪽에 빈 자리가 있군. 당신네들은 이 탁자를 비워주시
오.]
서천천은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말했다.
[탁자를 하나 양보해도 부족하단 말이오? 나는 돈 있는 집의 공자 나부
랭이가 세력만을 믿고 사람을 업수이 여기는 것을 가장 꼴 사납게 여긴
단 말이오.]
그는 기침을 쿨럭 하더니 짙은 가래를 정극상을 향해서 내뱉었다. 정극
상은 아가와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무방비 상태였다.
그리하여 바람소리를 느꼈을 때 짙은 가래는 이미 뺨에 떨어지려는 찰
라였다. 그는 급히 얼굴을 털었으나 그 가래는 목덜미에 떨어졌다. 끈
적끈적한 것이 무척 불쾌했다.
그는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서 닦고는 크게 화가 나서는 욕을 퍼부었다.
[몇 명의 시골 무지랭이들이 이토록 무법천지로 노는구나. 얘들아. 때
려 주어라!]
한 명의 시종이 서천천에게 한 대의 주먹을 내질렀다. 서천천은 부르짖
었다.
[어이쿠!]
주먹이 그의 안면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뒤로 나가떨어졌으며 일부러
낭패한 꼴로 쓰러져서는 부르짖었다.
[사람 죽인다, 사람 죽여!]
정극상과 아가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풍제중은 몸을 일으키고는 정극상을 손가락질하며 호통을 내질렀다.
[뭐가 우습소?]
정극상은 노해 부르짖엇다.
[내가 웃건 말건 네가 참견할 바 아니다.]
풍제중이 손을 뻗쳐 철썩, 하고 심하게 정극상의 따귀를 갈겼다.
정극상은 놀람과 분노에 치를 떨며 잇따라 두 대의 주먹을 내질렀다.
풍제중은 왼쪽을 피하고 오른쪽으로 몸을 날리더니 냅다 등을 돌려서는
문 밖으로 달아났다.
정극상은 뒤쫓아갔다. 그는 풍제중의 얼굴을 노리고는 한 대의 주먹을
내질렀으나 풍제중은 비스듬히 몸을 날려 피해 버리고 말았다.
풍제중은 위소보의 뜻을 알고 있었다. 될 수 있으면 이 정 공자로 하여
금 추한 꼴을 보이게 하여 그의 기염을 꺾어놔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동쪽에서 한 대의 주먹을 내지르고 서쪽에서 한 번 발길질로 걷어
차는 등의 방법으로 싸움을 이끌어 나갔다.
서천천은 부르짖었다.
[우리 하남 복우산 호걸들의 위풍을 저 어린 녀석의 손에 꺾이게 할 수
는 없지.]
군웅들은 덩달아 호통을 내질렀다.
모두들 이 젊은이를 회롱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결코 상대방이 자기
들의 내력을 알아내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호통소리와 부르짖는 말씨도 어느 정도 분수를 지켜 그의 가문에 욕되
는 말은 반 마디도 지껄이지 않았다.
이력세는 호통을 내질렀다.
[우리 복우산에서는 이번에 한 건을 하려고 나왔는데 마침 일을 시작하
자마자 금을 두르고 은을 감은 녀석을 만나게 되었군. 그를 잡아가서는
그의 애비에게 일백만 냥의 은자를 내놓고서 아들을 찾아가도록 해야
지.]
정 공자의 시종들은 공자가 시골뜨기 한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고
또 사람들이 호통을 치는 것을 듣고는 복우산의 산적들인 줄 알고 즉시
무기를 뽑아들고 공격을 해갔다.
서천천, 번강, 현정 도인, 고언초, 관안기, 이력세 등도 일제히 손을
써서 대뜸 신나게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정 공자의 그 시종들은 모두 다 연평왕부에서 정선을 한 위사들이었지
만 어찌 천지회의 군웅들을 따를 수 있겠는가?
거기다가 수일 전 라마들에게 손과 발이 분질러지고 하나같이 몸에 상
처를 입었던 바라, 몇 합을 싸우기도 전에 모두 제압을 당하고 말았다.
천지회의 군웅들은 손에 사정을 두었으며 그저 그들의 손에 들린 무기
를 뽑아서는 그들을 에워싼 채 칼을 들고 감시를 했을 뿐 그들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
저쪽의 정극상은 십여 합을 싸우고 있었는데 풍제중의 손발이 우둔하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는 것이 하반신이 온전하지 못한 듯 보이자 즉시
정신을 돋구어서는 한평생 쌓은 절기를 모조리 펼쳐냈다.
그는 아가의 앞에서 무공을 자랑을 하고 싶었고 미인의 주목을 받고 싶
어 바람이 일도록 주먹을 뻗쳐 내고 파공성이 나도록 힘차게 발길질을
하는 등 한 수 한 수마다 있는 힘을 다했다.
풍제중은 그저 겨우 막아내는 도리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듯 했으며 종
종 위기일발의 순간에 간신히 상대방의 공세를 피하곤 했다.
아가는 보기가 초조한 듯 연신 부르짖었다.
[아이구, 애석하군. 조금만 더 뻗쳤더라면 좋았을걸.]
위소보는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사부님, 어르신께서는 몸이 완전히 낫지 않으셨습니다. 저들 대도적들
은 흉악하기 이를 데 없으니 정 공자가 만약 진다하더라도 어르신께서
는 나서지 마십시오.]
아가는 노해 말했다.
[그가 완전히 우세를 점하고 있는데 어째서 진단 말이에요? 정말 터무
니없는 말을 지껄이는군.]
구난은 미소지었다.
[이 사람들은 정 공자에 대해서 별로 악의가 없는 것 같구나. 그저 장
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 한 분의 적수는 무공에 있어서 정 공자보다
는 훨씬 고강한 편이다.]
아가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물었다.
[사부님, 사부님께서는 저 강도의 무공이 정 공자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구난은 미소했다.
[두말할 필요가 있느냐? 저 사람의 무공은 정말 뛰어나다. 아무래도 복
우산의 강도 같지는 않다. 만약 그들이 진짜 강도라면 함부로 떠벌이며
사람을 잡아가서는 돈을 내놓도록 하겠다는 말은 하지않을 것이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사부님의 안목은 고명하군.)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제자가 그들에게 싸우지 말라고 권해 볼까요?]
아가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대가 나선다고 해서 그들이 말을 들어요? 그리고 또 무슨 재간이 있
어서 그들이 싸우지 못하도록 권할 수 있단 말이에요?]
위소보는 말했다.
[저 강도들의 무공은 고강하지만 권간법에는 적지 않은 빈틈이 있소.
정 공자는 그를 이겨내지 못하고 있지만 나는 십초 안으로 반드시 그를
때려 도망치도록 만들 수 있소.]
구난은 그의 무공이 얕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쩌면 이상야릇한 방
법이 있어서 충분히 승리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저 한 패의 사람들은 본래 나쁜 사람 같지 않으니 그들의 목숨을 해치
지 않도록 해라.]
그녀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비열하게 몽한약이나 쓰고 독 같은 것을 뿌리는 수단은 만약 생사 고
비길에 접어 들지 않는 한 결코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너는 이미
우리 철검문의 문하이니 본파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짓을 하면 못쓴다.]
위소보는 말했다.
[예, 예. 사부님 말씀에 따라 결코 그들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않겠습
니다.]
구난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과거 화산 봉우리 위에서 철검문
의 장문인이었던 옥진자(王眞子)가 목상 도인(木桑 道人)에게 싸움을
걸어 왔던 일이 생각났다. 옥진자는 간음을 하거나 노략질을 하기도 하
는 등 못된 짓을 마구 해대고 있었다.
그 당시 철검문은 문하 제자가 적어 강호에 크게 알려지지 않고 있었
고, 옥진자는 별로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나이 어린 제자가 경박스러운 데가 있어 만약 올바른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옥진자의 전철을 밟게 될 것 같고,
그렇게 된다면 크게 잘못된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위소보는 그녀가 갑자기 근심의 빚을 띄우는 것을 보았으나, 그녀가 마
음속으로 걱정하고 있는 바가 무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가 천지회의 군웅들이 무공이 약하지 않으나 그녀의 무공이
회복되지 않아 천지회의 고수들과 상대할 수 없는 것을 느끼고 걱정을
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저는 정 공자의 목숨을 구해 줄 방
법이 있습니다.]
아가는 쳇, 하고 혀를 찼다.
[또 터무니없는 소리, 정 공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이기게 될 텐데 그
대가 나서서 목숨을 구한다니 무슨 소리지?]
아가가 막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꽉, 하는 소리가 나면서 정극상의 장
포가 어느덧 한 조각 찢겨 나가게 되었다.
정극상은 크게 노해서는 더욱더 빨리 손을 썼다. 그렇게 되자 찍찍찍,
하는 소리가 연달아 이는 가운데 풍제중의 열 개의 손가락은 마치 무쇠
갈고리처럼 그의 장포, 내의, 바지를 한 조각씩 찢어냈는데 그 힘의 안
배는 적절하기 이를 데 없어 정극상의 근육에는 조금도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 정극상은 다시 및 번 더 옷을 찢기면 몸뚱어리가 벌거숭이가
될 판이라 놀람과 당황함에 몸을 돌려서는 도망을 치려고 했다.
이때 풍제중은 두 팔을 구부리더니 두 손과 팔굽을 어느덧 그의 가슴팍
앞에 갖다대었다.
정극상은 급히 뒤로 물러서며 두 대의 주먹을 내질렀다. 그 순간 손목
이 바짝 조여지는 것을 느꼈다.
풍제중의 왼손이 어느덧 그의 오른손을 잡고 오른손은 그의 왼손을 잡
는 것이 아닌가?
풍제중은 그의 몸뚱어리를 획 하니 내던지며 말했다.
[받게나!]
한 번 내동댕이쳐지자 정극상은 칠팔 장이나 날아가게 되었다.
현정 도인은 경신법을 전개해서는 쫓아가며 고개를 쳐들고 부르짖었다.
[고 형제, 자네가 대신 나서게.]
고언초는 즉시 달려나왔다. 번강, 서천천, 관안기 등은 재미있다고 느
끼는 듯 다투어 큰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현정 도인이 정극상을 받아들더니 다시 내던졌는데 떨어지는 순간 마침
알맞게 고언초가 달려와서 정극상을 받아들었고 재차 수장 밖의 서천천
에게 내던졌다.
이 사람들의 팔힘에는 강약의 구분이 있었고 경신법에도 높고 낮음이
있었다. 따라서 사람을 던질 때 혹은 멀리 떨어지거나 혹은 가까이 떨
어지기도 했고 달려갈 때 혹은 빠르고 혹은 느리기도 했다.
정극상은 허공에서 수십 장 밖으로 날아가게 되었으나 시종 땅에 떨어
지지를 않았다.
천지회의 군웅들은 각기 자기의 장점을 펼치게 되었는데 이때서야 그들
의 진짜 실력이 드러나게 되있다.
관안기는 팔 힘이 엄청나 먼저 정극상을 하늘 위로 사오 장이나 높이
던졌다. 그리하여 그가 다시 떨어질 무렵 두 손으로 그의 등을 밀었다.
두 괄로 밀어내자 정극상은 마치 구름을 뚫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높고 멀리 그리고 보다 힘차게 날아가게 되었다.
위소보는 너무나 기뻐서 박장대소를 하는데 갑자기 뒤통수에 딱,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가 어느덧 그의 뒤통수에 알밤을 한 대 먹인 것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가는 놀람과 분노에 뒤얽혀서는 급히 말했다.
[그들이 그를 잡아갔어요. 그대는, 그대는 빨리 가서 그 사람을 구하도
록 해요.]
위소보는 말했다.
[그들은 정 공자와 아무런 원한이 없고 사부님께서도 장난을 칠 뿐이라
고 했는데 그대가 왜 안달이 나서 그러시오?]
아가는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들은 그를 잡아가서는 백만 냥의 은자를 내놓
으라고 협박을 한다고 했어요.]
위소보는 말했다.
[정 공자의 집에는 은자가 많아서 삼백만 냥이고 사백만 냥이고 내놓을
수 있는데 백만 냥의 은자쯤 무슨 상관이 있겠소?]
아가는 오른발로 땅바닥을 힘주어 구르며 말했다.
[아, 그대는 눈이 없어요? 그는, 그는 저 강도들에게 고통을 당해 반쯤
죽어 가고 있잖아요?]
위소보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그대가 나보고 저 사람을 구하라고 한다면 그거야 뭐 별로 어렵지 않
은 일이요. 그러나 그대는 나의 마누라가 되겠다고 약속을 하시오.]
아가는 노해 말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그녀는 시선을 돌려 바라보았다. 정극상은 사람들에게 받아 안겼는가
하면 다시 내던져지곤 했는데 그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것 보시오! 그대들은 빨리 돌아가서 은자를 가지고 복우산으로 와서
사람을 되찾아가도록 하시오. 우리들은 이 녀석의 목숨을 해치지는 않
겠으나 매일 삼백 대의 곤장을 안기겠소. 은자가 하루라도 일찍 도달하
게 된다면 그는 삼백 대의 매를 덜 맞게 되는 것이며 열흘이 늦어지게
된다면 삼천 대의 곤장을 더 얻어맞게 될 것이오.]
아가는 위소보의 손을 잡고 급히 말했다.
[들어봐요, 들어봐요! 그들은 매일같이 그에게 삼백 대의 곤장을 때리
겠다고 했어요. 이곳에서 대만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 멀어서 한 달 안
으로 돌아올 수 없어요.]
위소보는 말했다.
[매일 삼백 대라면 설사 이 개월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이 개월은 육십
일이니 삼육 십팔이라 천팔백 대에 지나지 않는데......]
아가는 말했다.
[아, 아니에요. 일만 팔천 대란 말이에요. 그대라는 사람은 정말]
위소보는 웃었다.
[나는 산술에 있어서 별로 뛰어나지 못하오. 일만팔천 대를 맞게 된다
면 그는 엉덩이로 매를 맞는 무공을 절정에 이를 정도로 연마할 수 있
겠군.]
아가는 극도로 분에 차서는 그의 손을 와락 뿌리치며 말했다.
[다시는 그대를 상대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화가 나고 다급해져서는 울음을 터뜨렸다. 위소보는 말했다.
[좋소, 좋아. 울지 마시오. 내가 방법을 강구해 보리다. 하지만 내가
조금 전에 제의한 조건에 대해서 그대는 억지를 쓰지 마시오.]
아가는 말했다.
[그대가 빨리 그를 구한 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해요.]
위소보는 그녀가 그저 얼렁뚱땅 얼버무리려고 하는 수작이며 정말 그녀
가 자기에게 시집오겠다는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서 말했다.
[나는 그대를 위해서 끓는 물 속이 아니라 타는 불길 속이라도 마다하
지 않겠소. 그러나 이후 그대는 다시 나를 못살게 굴지 않도록 해야 하
오.]
아가는 말했다.
[그래요, 그래요. 빨리 가요, 빨리 가!]
그와 같은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눈초리는 위소보에게 한 번도 옮겨지
지 않았다. 그저 멀리 정극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극상의 두 손은 이미 뒤로 묶여서는 사람에게 안겨서 말 등에 태워지
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사람들은 정극상을 데리고 떠날 것 같은지라 다급
한 김에 그녀는 다시 손을 뻗쳐 위소보의 등을 밀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욕을 했다.
(제기랄, 내가 만난 아름다운 여자들은 언제나 나에게 그녀의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 달라고 빈단 말이야! 나야말로 이런 억울한 노릇에 익숙해
졌으니 그야말로 억울함을 참아 내는 재간에 있어서 나는 절정에 달했
다고 할 수 있겠구나.)
그는 재빠른 걸음으로 달려나가며 부르짖었다.
[이것 보시오, 이것 보시오! 복우산의 대왕, 불초가 할 말이 있소이
다.]
군웅들은 이미 그가 나서 주기를 바라고 있던 터라 즉시 모두 몸을 돌
렸다. 고언초는 말했다.
[소형제, 그대는 무슨 할 말이 있소?]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들은 어째서 그를 잡아가시는 거요?]
고언초는 말했다.
[우리 산채에는 형제들이 많은데 양식이 모자라오. 오늘 그를 잠시 가
두어서 그의 아비에게 일백만 냥의 은자를 빌리고자 하는 것이오.]
위소보는 말했다.
[일백만 냥의 은자라면 그까짓 것 조그만 일이 아니겠소? 내가 그대들
에게 빌려 주도록 하지.]
고언초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소형제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무잇을 믿고 그와 같이 큰 소리
를 치시오?]
위소보는 말했다.
[나의 이름은 위소보라고 하오.]
고언초는 아이쿠, 하는 소리를 내고 포권을 하며 절을 하더니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알고보니 소백룡 위 영웅이시군요. 그대가 만주 제일 용사 오배를 죽
이고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을 알고 있으며, 우리들은 무척 우러
러보던 터인데 오늘 이렇게 귀하를 만나 보게 되었으니 실로 영광스럽
기 짝이 없소이다.]
번강 등은 일제히 공손하게 절을 했다. 위소보는 포권을 하고 답례한
후 말했다.
[감당할 수 없소이다.]
고언초는 말했다.
[위 영웅의 하늘과 같은 체면을 봐서 우리들이 이 녀석을 놓아주리다.
일백만 냥의 은자도 감히 달라고 하지 않겠소이다.]
서천천은 몸에서 두 개의 커다란 원보를 꺼내 두 손으로 공손히 바치며
말했다.
[위 영웅, 길에서 만약 노자가 부족하다면 이곳에 일백 냥의 은자가 있
으니 먼저 거두어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위소보는 말했다.
[정말 고맙소.]
그는 원보를 거두어 몸을 돌려 뒤따라온 아가에게 건네주었다.
아가는 이 소악인의 명성이 이토록 드높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던
터라 천만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흉신악귀와 같은 강도들이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마치 부하가 바
로 위의 상관을 대하듯 하니 그녀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다. 그녀는 소악인이 바로 실제로 이들 대강도들의 바로 위의 상관이라
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대강도들이 그저 재미삼아 일부러 위소보의 호의를 사느라고 한 토막의
연극을 했다는 사실은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곧이어 정 공자가 마침내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구나, 하고 기
쁨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풍제중이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잠깐, 위 영웅, 그대가 오배를 죽인 데 대해서 우리들은 매우 탄복하
고 있소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이니 그대가
진짜 위 영웅인지, 아니면 그 어르신의 대명을 사칭하여서는 밖에 나와
남을 속이려고 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안단 말이오?]
위소보는 말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구려. 귀하는 어떻게 해야만 믿을 수 있겠소?]
풍제중은 말했다.
[불초는 당돌하나마 위 영웅에게 삼 초의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만주의
제일 용사마저도 그대의 손 아래 죽어 갔으니 귀하의 무공은 자연 뛰어
날 것이 아닙니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한번 시험해 보면 즉시 알게
될 것입니다.]
위소보는 즉시 말했다.
[좋소. 우리는 그저 초식을 시험하되 손이 몸에 닿는 것으로 멈추어야
할 것이오.]
풍제중은 말했다.
[그렇소이다. 위 영웅께서는 손에 사정을 두시어 이 몸이 몸에 중상을
입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오.]
위소보는 속으로 우스꽝스럽게 생각했다.
(풍형은 언제나 말이 없고 과묵한 편인데 연극은 정말 그럴싸하게 하는
구나.)
그는 말했다.
[노형은 너무 겸손한 말씀을 하지 마시오. 어쩌면 내가 그대의 적수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오.]
그는 왼손의 손가락을 슬쩍 쳐들며 오른손을 날렵하게 후려치듯 앞으로
뻗쳐내었다. 그런데 반 자 정도 뻗쳐내면서 손을 한 바퀴 빙글 돌리며
비스듬히 후려치던 것을 오히려 건어내는 시늉을 하였다.
이것은 바로 징관이 펼쳐 보인 반야장 가운데 일초인 무색무상(無色無
相)이었다.
풍제중은 견문이 무척 넓어서 부르짖었다.
[정말 묘하군. 이것은 반야장법 가운데의 절초로서 무색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그는 손을 뻗쳐서는 받으려는 순간 뒤로 몸을 벌렁 젖히면서 하마터면
쓰러질 뻔하였다.
위소보는 손에 반푼의 내력도 없었던 참이라 웃으면서 말했다.
[귀하의 말씀이 옳소이다. 이것은 무색무상이라는 일초이외다.]
그는 곧이어 왼손을 비스듬히 쳐들고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를 향해
서 내려치려다가 갑자기 다섯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해서 몇번 휘둘렀
다. 풍제중은 큰소리로 말했다.
[대단하시군. 또 반야장의 신공인데 이것은 영취청경(靈鷲聽經)이라는
일초구려.]
그는 몸을 반쯤 웅크려서 마보(馬步)의 자세를 취하고는 두 손가락 끝
이 미미하게 부딪치는 순간 즉시 아, 하는 큰소리를 내지르며 뒤로 급
히 세 번 곤두박질쳤다.
그는 재주를 넘을 때 내력을 암암리에 돋구었다. 그리하여 자세를 가다
듬고 서게 되었을 때는 온 얼굴은 그만 시뻘겋게 변해 마치 열일곱여덟
대접의 독한 술을 마신 것처럼 되어서는 몸을 몇 번 휘청거리다가 털썩
주저앉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안 되오. 겨루지 않겠소. 탄복했소이다. 의 영웅, 목숨을 살려준
것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오.]
위소보는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노형꼐서 양보해 주셨으니 고맙소이다.]
그 말을 하면서 연신 그에게 눈을 껌뻑거렸다.
풍제중은 매우 그럴싸하게 행동했으며 얼굴에는 다시 의기소침해 하는
표정을 짓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고맙고도 어느 정도 충심으로 탄복
했다는 빛을 떠올리기도 하였다.
서천천이 성큼성큼 다가서더니 말했다.
[위 영웅의 무공이 놀랍구려. 정말 명불허전이오이다. 불초가 몇 수 가
르침을 받을까 하오.]
위소보는 말했다.
[좋소.]
그는 당장 달려들어서는 두 손을 교차하며 한 손으로는 그의 왼쪽 가슴
팍을 비틀고 한 손으로는 그의 오른쪽 옆구리를 잡으려 들었다. 이것은
바로 소림파의 상승 무공인 염화금나수 가운데 일초였다.
서천천은 그의 일초의 금나수법이 매우 고명한 것을 보고 암암리에 탄
복했다.
(위 향주는 정말 총명하기 이를 데 없구나. 무공을 배우자마자 매우 신
속한 진보를 했구나.)
그러나 그는 위소보가 손을 쓰는 초식은 그럴싸했으나 기실 내력은 눈
꼽만큼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설사 그에게 잡혔지만 역시 아
무런 손상도 입을 수가 없었다.
서천천은 체구가 왜소했으며 그의 특기는 바로 경쾌하고 교묘한 경신법
과 금나수법이었다.
그는 즉시 자기의 재간을 펼쳐서는 위소보와 대결을 하기 시작했다. 몇
초가 지난 이후에 두 사람은 서로 두 손을 잡고 비틀어대었다. 그러다
가 서천천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슨을 맥없이 아래로 떨구면서
마치 관절이 비틀어진 것처럼 가장을 하며 말했다.
[매우 탄복했소이다.]
그는 두 걸음 물러나 왼손으로 자기의 오른손을 받쳐들고 살짝 뽑았다
가는 디밀어 관절을 똑바로 맞추는 시늉을 했다.
이 관절을 되박는 수법은 원래 금나수 가운데의 상승 무공이었다. 곧이
어 번강, 현정 도인, 이력세 세 사람이 일일이 나서서 도전을 했다. 위
소보가 펼치는 것은 모두 다 징관에게 전수받은 상승의 초식이었다. 번
강 등 세 사람은 모두 삼사 초나 칠팔 초에 물러섰다. 고언초는 낭랑히
말했다.
[오늘 위 영웅의 교묘한 무예를 구경하게 되어 시야를 크게 넓혔으며
소인 등은 탄복해 마지 않는 바입니다. 훗날 위 영웅께서 복우산을 지
나시게 된다면 아무쪼록 밉게 보지 마시고 또 초라하다 생각하지 마시
고 산 위로 올라와서 며칠 묵고 가 주십시오.]
위소보는 말했다.
[기회가 있다면 폐를 끼치겠소이다.]
군웅들이 허리를 굽히고 절을 하더니 말을 끌고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
했다. 그리고 그 고을 밖을 다 나가서야 겨우 말에 올라탔다.
그들은 놀랍게도 감히 위소보 앞에서 말을 타려고 하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위소보를 공경한다는 뜻이었다.
아가는 끝내 승복하고 말았다.
(이 소악인은 원래 무공이 고강하구나. 매번 나에게 지는 척 가장을 한
것은 일부러 나에게 양보를 했던 것이었구나.)
일이 이렇게 되자 정극상은 부득이 위소보에게 다가와서 고마움을 표하
지 않을 수 없었다.
第62章. 정극상을 다른 여자에게 장가보내다
[정 공자, 너무 겸손해 할 것 없소. 나는 그저 운수가 좋아 어쩌다 보
니 그들을 이기게 된 것이고 진짜 무공 실력에 있어서는 귀하에 비해
훨씬 떨어지오.]
이 몇 마디의 말은 정말이었다. 그러나 정극상이 들을 때는 지극히 신
랄하게 자신을 풍자하는 것 같아서 그는 그만 온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
이고 말았다.
이날 밤 일행은 남쪽으로 헌현(獻縣)에 이르러서 객점에 투숙하게 되었
다.
구난은 아가를 물리치고 위소보에게 물었다.
[대낮에 너와 연극을 한 그 사람들은 모두 너의 친구들이지?]
구난의 눈초리는 역시 매서웠다. 풍제중, 서천천 등의 수작은 정극상과
아가쯤은 속일 수 있었지만 이 무학의 고인을 어찌 속일 수가 있겠는
가?
위소보는 들통이 났다는 것을 알고서 웃으며 말했다.
[친구라고도 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
구난은 말했다.
[그 사람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뛰어난데 어째서 너를 상대로 그와 같은
장난을 쳤지?]
위소보는 웃었다.
[그들은 십중팔구 정 공자의 교만 방자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보고, 제
자를 이용해서 그의 교만한 기를 한번 꺾어 놓으려고 한 것일 겁니다.]
구난은 속으로 생각해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 말했다.
[너는 그 몇 수 반야장과 염화금나수법을 그럴싸하게 펼치더구나.]
위소보는 읏었다.
[그것은 그저 남을 놀라게 하려는 시늉에 불과한 것으로써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을 주고받을 때였다. 갑자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와 말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한 때의 무리들이 객점에 투숙하러 온 모양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말했다.
[한 칸은 상방(上房)을 주시오. 반드시 가장 좋은 방이어야 하고 나머
지 방은 그저 그러면 되는 것이오.]
위소보는 그 말을 듣자 속으로 기뻐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목
왕부의 요두사자 오립신이었다.
위소보는 물었다.
[사부님, 우리들은 오삼계를 죽이러 가는 것이 아닙니까?]
구난은 말했다.
[내가 이번에 입은 내상은 정말 가볍지 않다. 지금 상처는 나은 편이라
하겠으나 내력이 회복되지 못해 반드시 조용한 장소를 찾아가서 며칠간
조섭을 한 이후,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짓자. 그렇지 않을 때에 만약 다
시 적을 만나게 된다면 나는 손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고 언제나 네가
나서서 마구잡이로 상대를 해야 될 판이니 우리 철검문으로서는 너무나
창피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말한 그녀도 픽, 하니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예, 예. 사부님의 몸이 더 중요합니다.]
그는 행낭에서 지극히 상품인 용정차(龍井茶)를 꺼내서 커다란 대접에
풀어 우러나게 하면서 말했다.
[제자는 이후 사부님의 무공을 익히게 되었을 때 적을 만나게 된다면
광명정대하게 손을 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부님, 저는 거리에 나가
신선한 야채가 있는지 보고 오겠습니다.]
그는 방을 나섰다. 이때 아가와 정극상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객점 밖
으로 나서고 있었는데, 그 태도가 매우 다정해 보였다. 대뜸 그는 마음
으로부터 질투심이 북받쳐오르는 것을 느끼고서 그들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아가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왜 나를 따라오는 것이죠?]
위소보는 말했다.
[내가 왜 그대를 따라가겠소? 나는 사부님에게 야채를 사다드리려고 가
는 길이오.]
아가는 말했다.
[좋아요. 정 공자, 우리는 이쪽으로 가요.]
그러면서 손을 뻗쳐 성의 서쪽에 있는 한 채의 조그만 산을 가리켰다.
위소보는 질투심이 더욱더 불타올라서 말했다.
[조심하시오. 산 대왕과 다시 부딪히게 된다면 나는 그대들을 구해 줄
수 없소.]
아가는 그를 홀겨보며 말했다.
[누가 그대에게 구해 달라고 했어요?]
정극상은 위소보가 자기의 못난 꼴을 보인 사실을 다시 들먹이고 있다
는 것을 알고는 매우 화가 난듯이 흥, 하더니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위소보는 두 사람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가가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격노하게 된 그는 비수를 뽑아 들고 뒤쫓아가 정극상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두 걸음쯤 옮기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싸우게 된다면 나는 두 사람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그는 억지로 노기를 가라앉히고 거리 쪽으로 나가 버섯, 목이(木耳),
분사(粉絲)를 사 들고 객점으로 돌아왔다.
아가와 정공자는 아직도 돌아와 있지 않았다. 위소보는 그들 두 사람이
외딴 곳에서 정이 담뿍 담긴 말들을 주고받고 어쩌면 못된 짓을 했을지
도 모른다고 상상하자, 그만 울화가 치밀어 끊임없이 욕을 하게 되었
다. 그때 별안간 누가 그의 어깻죽지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대뜸 끌어안
으며 말했다.
[위 형제,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소?]
위소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바로 어전시위 총관 다륭이 아닌가? 그
는 크게 기뻐서 웃었다.
[그대가 어떻게 왔소?]
그러고 보니 다륭의 등 뒤에는 십여 명이나 뒤따르고 있었는데 모두 어
전시위였고 입은 옷은 여느 군졸들이 입고 있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시위들은 그를 보더니 하나같이 싱글벙글 웃었으나 앞으로 나와 인사는
하지 않았다.
다륭은 말했다.
[이곳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니 우리는 방으로 가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원래 이 한 떼의 어전시위들은 바로 이 객점에 묶고 있었던 참이었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시위들은 그제서야 일일이 나서며 인사를 올렸다.
위소보는 웃었다.
[그만두시 오, 그만둬.]
일천 냥의 은표를 꺼내면서 그는 말했다.
[여러 형제들은 나가서 술이나 마시도록 하시오.]
시위들은 이미 어전시위 부총관 위소보의 손 씀씀이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득을 본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는지라 즉시 기뻐하며 고맙다는 인사말을 했다. 다륭은 나직
이 말했다.
[위 형제, 그대가 오대산에서 위험한 일을 당한 이후 황상께서는 매일
같이 근심을 하고 계셨소. 그리하여 우리들을 내보내 그대의 행방을 찾
게 하신 것이오.]
위소보는 마음속으로 너무나 고마워서 몸을 일으킨 후 말했다.
[황상의 은덕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다형에게 이런 수고를 끼치
게 되다니 정말 미안하군요.]
다륭은 웃었다.
[황상께서는 본래 나를 파견하지 않고 그저 십오 명의 시위 형제들을
파견하였으나 내 스스로 나섰던 것이외다. 첫째로 나는 정말 그대가 걱
정이 되었고, 그리고 둘쩨로는 이 기회에 북경을 나가서 노닐고 싶었던
것이오. 이 모두가 그대의 흥복이외다.]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다륭은 다시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우리 몇 사람은 큰 공을 세우게 되었소. 북경으로 돌아
가게 되면, 이후 황상께서는 위 형제가 이미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고 매우 즐거워하실 것이오. 그리고 우리들은 길을 오면서 수소문을 하
게 되있는데 위 형제의 소식을 얻지는 못했지만 한떼의 반적들이 밀모
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간부에 모여 일을 논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
소. 그래서 우리들은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오.]
위소보는 말했다.
[나 역시 바로 그 일 때문에 온 것이의다. 소문에 들으니 그들의 이번
모임은 살귀대회라고 하던가요?]
다륭은 커다란 엄지손가락을 내세우며 말했다.
[무섭군요, 무서워요. 무슨 일이든지 위 형제의 이목을 속이지는 못하
는구려.]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들은 무슨 소식을 알아냈소?]
다륭은 말했다.
[이곳의 두 형제가 대회에 섞여 들어가 그들이 오삼계를 상대하려고 각
성에서 맹주를 추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소. 그리고 몇
몇 맹주들의 이름까지도 알아냈다오.]
위소보는 마음 속으로 짐작되는 바가 있어서 물었다.
[누구 누구요?]
다륭은 말했다.
[운남성의 맹주는 목검성이고 복건성의 맹주는 대만의 역적 정경의 친
자로서 정극상이라는 자이오.]
그는 다시 몇 명의 맹주들 이름을 들먹였다.
의소보는 말했다.
[목검성과 정극상 등의 모습을 보면 알아볼 수 있겠소?]
다륭은 말했다.
[어두운 밤이라 사람들을 똑똑히 보지 못했다오. 그렇다고 해서 감히
다가가 자세히 볼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오.]
위소보는 말했다.
[다형, 그대가 북경으로 돌아가거든 황상께 보고를 하시오. 바로 이 위
소보 역시 그 일을 조사하고 있으니 일단 어떤 단서를 잡게 된다면 즉
시 북경으로 돌아가 직접 아뢰겠다고 말이오.]
다륭은 말했다.
[좋소. 좋아. 위 형제가 이토록 충성을 다해 일을 처리하고 이번에 큰
공을 세우게 되었으니 황상께서는 반드시 큰 상을 내리실 것이오.]
위소보는 말했다.
[만약 공로가 있다면 역시 우리 어전시위 모두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소? 그런데 당장 한 가지 일을 여러분들이 좀 도와줘야 되겠소.]
시의들은 일제히 말했다.
[위 부총관께서 시키시는 일이라면 마땅히 수고를 해야지요.]
위소보는 말했다.
[이 일을 말하자면 정말 울화가 터질 지경이오. 내가 좋아하는 소저가
있는데 지금쯤 어느 멀쑥하게 생긴 녀석과 노닥거리고 있단 말이외다.]
거기까지 말하게 되었을 때 시위들은 모두 울화가 치민다는 듯 하나같
이 욕을 해댔다.
[제기랄, 어느 녀석이 그토록 대담하단 말인가? 감히 위 부총관의 사람
을 건드려? 우리 즉시 가서 그 녀석을 죽이겠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죽일 필요는 없소이다. 그대들은 그저 가서 그를 한바탕 때려 나의 화
풀이를 해 주시면 되오. 하지만 그 녀석은 나의 친구이니 너무 지나치
게 때려서도 안 되며 그 소저를 건드려서도 안 되오.]
시위들은 웃었다.
[그거야 우리들이 알아서 처리하조 위 부총관이 좋아하시는 소저인데
어찌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위소보는 웃었다.
[그들 두 사람은 서쪽으로 갔소이다. 그대들이 손을 쓰게 되었을 때 나
는 일부러 구원하는 척하고 그대들을 쫓아 보내겠소이다. 여러분들은
크게 양보하시어 이 형제로 하여금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크게 위풍을
떨치도록 해 주셔야겠소이다.]
시위들은 일제히 소리내어 웃으며 하나같이 말했다.
[위 부총관이 나누어 준 이 일이야말로 정말 재미있는 일입니다요.]
다륭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모두들 이대로 가서 일을 행하도록 하게. 이것들 봐, 하나같이 조심해
야 한다구. 만약 마각을 드러내게 된다면 위 부총관께서 그대들을 사이
좋은 형제로 여기지 않게 될 것이네.]
시위들은 모두 웃었다.
[위 부총관의 큰일이라면 모두들 끓는 물 속이 아니라 타는 불길 속이
라도 뛰어들 판인데 어찌 물러설 수 있겠소이까?]
한 명의 시위가 말했다.
[제기랄, 그 녀석이 위 부총관이 좋아하는 사람을 회롱한다는 것은 마
치 나의 친어머니를 희롱하는 것과 다름없는데 내가 어찌 목숨을 걸고
그와 싸우지 않겠소?]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내어 웃었다. 위소보도 웃으며 말했다.
[소리를 좀 낮추시오. 다른 사람에게 들리도록 해서야 쓰겠소.]
시위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소매를 걷어 올리는 등 히히, 하하, 하며
우르르 몰려나갔다.
위소보는 소채를 들고서 주방에 갗다주고 오전의 은자를 수고비로 내린
뒤에, 정갈한 소채를 만들어 달라고 분부했다. 그런 후에야 그는 천천
히 서쪽으로 나갔다.
일 마장쯤 나아가자 호통치는 소리, 욕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멀
리서 보니 수십 명이 무기를 들고 매우 떠들썩하제 싸우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녀석은 꽤 대단하구나. 시위들을 상대해 내다니.)
천천히 다가가 본 그는 깜짝 놀라게 되었다. 시위들이 칠팔 명을 에워
싸고 매서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상대방은 완강하게 저항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목검성과
그의 부하인 오립신 등이 아닌가!
목검성의 옆에는 젊은 소저가 손에 쌍칼을 들고 싸우고 있었는데 이미
싸움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성벽 위에서 손을 잡고 구
경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아가와 정극상이었다.
위소보는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제기랄, 사람을 잘못 알고 싸움을 벌였구나. 틀림없이 그들은 먼저 목
공자가 어떤 소저를 데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시비곡직을 따지지 않고
앞으로 달려들어 손을 쓰게 된 것인가 보구나.)
그러고 보니 다륭은 손에 한 자루의 귀두도를 들고 뒤에서 싸움을 독려
하고 있었다. 즉시 그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나직이 말했다.
[잘못 알고 있소이다. 내가 말한 사람은 성벽 위에 있는 저 두 사람이
외다.]
그와 같은 한 마디를 하고는 즉시 떨어져 나갔다. 다륭은 호통을 내질
렀다.
[틀렸다. 이봐, 친구들, 원래 빚진 사람들은 그대들이 아니야. 좋아,
모두들 물러서도록 하고 그들을 놓아 주도록 하게.]
시위들은 그 말을 듣자 다투어 물러섰다.
목검성과 오립신 등은 그렇지 않아도 사람수가 적어 대적하지 못하던
참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자기들의 정체가 드러나서 청나라 군사들이 잡으러 온
줄 알았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들이 물러선다니 그야말로 원하던 바였
다. 오립신은 즉시 힐끗 위소보를 발견하고 속으로 부르짖었다.
(부끄럽구나. 이번에도 다시 위 은공(恩公)의 도움을 받게 되었구나.
내가 죽게 되었으면 상관이 없는 노릇이지만 젊은 주인께서 오랑캐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더라면 그야말로 만번 죽어도 속죄할 길이 없게
되지 않았겠는가?)
이때 그는 위소보를 아는 척 할 수가 없었다. 목검성 등은 성문을 나서
서 곧장 북쪽으로 달려갔다.
위소보는 성 위로 올라가서는 아가에게 물었다.
[사저, 그들은 왜 싸우고 있지요? 어떤 사람들입니까?]
아가는 조그만 입술을 삐죽하더니 말했다.
[누가 알겠어요? 관병들은 빚을 받으러 온 거래요.]
의소보는 말했다.
[우리들은 객점으로 돌아갑시다. 사부님께서 걱정을 하시도록 하지는
말아야죠.]
아가는 말했다.
[그대 먼저 돌아가요. 내 곧 뒤따라 가겠어요.]
막 여기까지 말하게 되었을 때 시위들은 이미 성벽 위로 올라왔다. 한
명의 시위가 정극상을 손가락질하며 부르짖있다.
[이자이다. 나의 은자를 빌린 자는 이 녀석이야.]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정 공자, 사저, 우리 빨리 갑시다. 오랑캐 관병들은 터무니없는 짓거
리를 곧잘 하는데 만약 그들을 건드리면 귀찮아지지요.]
아가 역시 약간 두려워서 말했다.
[좋아요,돌아가요.]
한 명의 시위가 달려 들어서는 손가락으로 정극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는 그저께 밤 하간부 기녀원에서 아가씨를 데리고 놀면서 나에게
일만 냥의 은자를 빌리지 않았느냐? 빨리 갚아라!]
정극상은 당황해서 큰소리로 말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누가 기녀원에 갔으며 또 어떻게 하여 내가 그대의
은자를 빌렸다는 것이오?]
한 명의 시위가 말했다.
[그래도 아니라고? 그저께 밤 너의 무릎 위에 앉혀 놓았던 두 계집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했지?]
다른 한 명의 시위가 말했다.
[나이가 좀 많은 계집애는 아취(阿翠)라고 했고 작은 것은 홍보(紅寶)
라고 했지. 너는 왼쪽 계집에게 입을 한번 맞추고 술을 한 모금 머금고
그녀의 입 속에 넣어주었다. 그러더니 다시 오른쪽 계집애의 얼굴을 한
번 만지고는 다시 술 한 모금을 먹었다. 매우 재미있게 놀더니 이제 와
서 시치미를 때는 것이냐?]
다른 한 명의 시위가 말했다.
[네가 두 기녀를 끼고서 우리들과 주사위 노름을 벌이며 이천 냥의 은
자를 빌려가지 않았느냐? 그리고 밑천을 되찾겠다고 나에게서 다시 삼
천 냥을 빌려가고 이 노형에게 이천 냥을 빌려갔으며 그후 다시 그에게
천오백 냥을 빌렸으며 저 분에게 이천 냥을 빌렸었지.]
또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거기다가 나에게 친오백 냥을 빌려 모두 일만 냥의 허연 은자를 빚지
게 되었지.]
다섯 사람은 일제히 손을 내밀었다.
[사람을 죽이면 목숨으로 갚아야 하고 빚을 지게 된다면 돈으로 갚아야
한다. 빨리 내놔라!]
아가는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자, 그때 기녀원에서 위소보가 기녀들을
데리고 노닥거리던 광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
전 짚단더미 안에서 정공자가 자기의 몸을 마구 더듬고 주물럭거리던
광경을 떠을리게 되었고, 따라서 이 일도 십중팔구 거짓말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 날짜를 헤아려 보니 그제 밤은 바로 살귀대회가 있기 전날 밤이
아닌가!
정 공자는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야 술에 잔
뜩 취한 얼굴을 하고서 무슨 영웅호걸들이 그를 청해서 술을 먹였다고
하지 않았던가?
술을 먹은 것은 거짓말이 아니고 다만 그를 청했던 사람들이 영웅호걸
이 아니라 기녀원의 천한 여자들일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게 되자 그녀는 그만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시
위들은 정극상의 퇴로를 차단하고 그를 에워쌌다. 뒤에서 한 사람이 손
을 뻗쳐서는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
정극상은 대노하여 팔굽을 뻗쳐서는 힘주어 그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시위는 크게 소리를 내지르며 아파서 몸을 웅크렸다. 나머지 사람들은
와락 달려들며 주먹과 발길질을 해댔다.
이 사람들은 일 대 일로 싸우게 된다면 모두 정극상의 적수가 되지 못
했다. 그러나 칠팔 명이 함께 손을 쓰게 되자 대뜸 그를 땅바닥에 눕힐
수가 있었다.
아가는 다급해져서는 부르짖었다.
[좋은 말로 하세요. 함부로 사람을 때리지 말아요.]
그녀는 달려들어서는 구하려고 하였다. 다륭은 말했다.
[이봐요, 아가씨! 이 일은 그대와 상관없는 일이니 쓸데없는 일에 끼여
들지 마시오.]
아가는 급해서 말했다.
[비켜요!]
그녀는 손을 뻗쳐서는 그의 어껫죽지를 밀어내려고 했다. 다륭은 대내
(大內)의 고수였고 무공이 뛰어났다.
왼손을 가볍게 한번 후려치자 그녀는 뒤뚱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나
게 되었다.
저쪽에서는 시위들이 정극상에게 마구 주먹질을 해댔다. 그리고 철썩철
썩 하니 끊임없이 따귀를 때렸다.
아가는 급히 몇 초 공격을 했으나 다륭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녀를 물
리쳤고, 이렇게 되어 그녀는 공격을 하면 오히려 정극상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다륭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봐 아가씨, 저 화화공자(花花公子)는 술을 마시고 기녀 집에 드나들
며 도박을 하는 등 골고루 못된 짓만 하고 있소.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나에게 오천 냥의 은자를 빌려서는 그 두 계집애를 집으로 데리고 가
작은 마누라로 삼겠다고 했는데 그대가 왜 그를 감싸고 도우려고 하는
것이오?]
한 명의 시위가 웃었다.
[그대가 이자에게 우리들의 은자를 갚으라고 하시오. 그러면 자연히 때
리지 않을 것이오.]
그 말을 하면서 그는 정극상의 안면에다가 퍽, 하니 한 대의 주먹을 내
질렀다. 대뜸 정극상의 코에서 피가 홀러내렸다.
한 명의 시위는 칼을 뽑아들고 부르짖었다.
[그의 두 귀를 잘라내고 보자.]
그는 칼을 허공에 대고는 쉭쉭 하는 소리가 나도록 두 번 헛칼질을 했
다. 아가는 위소보의 손을 잡고 다급해서 울먹이며 말했다.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죠?]
위소보는 말했다.
[일만 냥의 은자가 나에게 있소. 그러나 그에게 주어 도박과 계집질한
돈을 갚아 준다는 것은 결코 가치가 없는 일이 아닐까?]
아가는 말했다.
[그들이 그의 귀를 자르겠대요. 그대는......그대는 내게 빌려 주도록
하세요.]
위소보는 말했다.
[사저가 빌리겠다면 일만 냥이 아니라 십만 냥이라도 빌려 주겠소. 하
지만 이후 그대는 나의 처가 될 몸이니 이 셈을 할 수 없게 될 것이 아
니겠소? 그러니 그대는 정 공자보고 나에게 빌리라고 하시오.]
아가는 발을 굴리면서 말했다.
[아, 그대라는 사람은 정말이지.]
그러면서 그녀는 부르짖었다.
[이것 봐요! 당신들은 때리지 말아요. 그대들의 돈을 갚아 드리도록 하
겠어요.]
시의들 역시 충분히 때렸던 터라 즉시 손을 멈추있다. 그러나 여전히
정극상을 내리누른 채 놓아 주지 않았다.
아가는 부르짖었다.
[정 공자, 저의 사제에게 은자가 있어요. 그대는 그에게 빌어서 빚을
갚도록 하세요.]
정극상은 울화가 치밀어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강철칼이
얼굴 앞에서 왔다갔다 하니 정말 그들이 자기의 귀를 자를까봐 겁이 났
다. 따라서 그는 위소보를 바라보며 얼굴에 간절히 바라는 빚을 드러냈
다. 아가는 위소보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나직이 말했다.
[그에게 빌려 줘요.]
한 명의 시위가 냉소했다.
[일만 냥의 은자는 적은 액수가 아니오. 보증인이 없는데 어떻게 가볍
게 남에게 빌려 준단 말이오? 이 녀석은 몌먹기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
이니 한 번 속지 두 번 속지는 않는다.]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저 소저가 보증인으로 나선다면 모르지. 이 녀석이 만약 시치미를 떼
고 갚지 않을 때에는 저 소저가 몸으로 때워야 해.]
그러자 강철 칼을 높이 쳐들었던 그 시위가 큰소리로 말했다.
[네 녀석이 만약 일만 냥의 은자를 내놓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저 아가
씨가 몸뚱이로 빚을 갚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저 나이 어리고 돈
이 많은 분에게 시집을 가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시위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맞았어. 그 생각은 매우 고명하군.]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사저, 안 되겠소. 그들의 말을 들었소? 그것이야말로 너무나 그대에게
억울한 노릇이 아니겠소?]
이때 철썩, 하는 소리가 났다. 한 명의 시위가 다시 힘주어 정극상의
따귀를 때린 것이다.
정극상의 손과 발은 모조리 잡혀 있어 항거할 힘이 전혀 없었다.
한 명의 시위가 호통을 내질렀다.
[매섭게 쳐라! 그리고 죽여 버려! 그리하여 일만 냥의 은자가 물속에
떨어진 셈으로 치자구. 차라리 포기하고 이놈을 죽이면 모든 일이 간단
히 끝나지 않는가? 왜 골치를 썩이고 있는가?]
그리고 철썩철썩 다시 때리기 시작했다. 정극상은 부르짖었다.
[때리지 마시오. 때리지 마시오! 위 형제, 그대에게 은자가 있다면 나
에게 일만 냥만 빌어 주시오. 나는 반드시 갚을 것을 보증하겠소이다.]
위소보는 곁눈질로 아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저, 빌려 줘야 하는지 사저가 이야기해 보시오.]
아가는 눈물을 글썽이며 목멘 어조로 말했다.
[빌려.... 빌려 주도록 해요.]
한 명의 시위가 옆에서 농담 삼아 큰소리로 말했다.
[큰 아가씨가 보증인이 되있으니 이후 큰 아가씨가 저 분, 나이 어린
도련님께 시집을 가게 된다면 이 못난 녀석이 오히려 중매쟁이가 되겠
군.]
위소보는 품속에서 한 묶음의 은표를 꺼내서는 일만 냥을 집어서 정극
상과 맞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을 해보고 나서는 아가에게 내
주었다.
아가는 받으며 말했다.
[은자는 이곳에 있어요. 그대들은 그를 놓아 주세요.]
시위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처음에 짜기로는 위 부총관이 직접 나서서 사람을 구하기로 했는데 지
금은 돈으로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되고 말았으니 이와 같은 결과가 위
부총관의 마음에 드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따라서 그들은 여전히 정극상을 놓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 일만 냥의 은자를 그대들이 가져가서 나누도록 하시오. 빌어먹을,
어쨌든 국물이 많아서 좋겠군. 그대들은 그야말로 빌어먹을 친구들이
야. 빨리 사람이나 내놓도록 하시오.]
시위들은 그 말을 듣고서 크게 기뻐했다. 위소보의 말 속에 담긴 뜻을
헤아려 보면 일만 냥의 은자를 그들에게 내리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 즉시 그들은 정극상을 놓아 주었다. 아가는 손을 뻗쳐 그를 부축해
일으켜서는 은표를 그에게 내밀었다.
정극상은 극도로 치미는 분노 때문에 그대로 받아서는 한번 보지도 않
고 옆에 있는 한 명의 시위에게 내밀었다.
위소보는 욕을 했다.
[이 한 떼의 오랑캐들 같으니라고. 나의 친구를 이 모양으로 때렸으니
나는 당신들과 이것으로 끝내지는 않을걸.]
아가는 또 싸움이 벌어지게 될까봐 재빨리 말했다.
[욕하지 마세요. 우리 돌아가요.]
위소보는 말했다.
[이 일은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군. 빚을 져서 돈으로 갚았으면 끝나는
일이 아니겠소? 그런데 정 공자가 이와 같이 매를 맞은 것은 헛되이 맞
은 것이 아니오?]
다륭은 껄껄 소리내어 웃더니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은 곤궁한 처지에서 막 벗어나게 되자마자 다시 못된 버릇이
고개를 쳐드는 모양이로군. 빌어먹을, 남의 아가씨 옆에 붙어서 뭐하는
거지?]
그는 손을 뻗쳐서 정극상의 뒷덜미를 잡더니 그의 몸뚱어리를 들어올리
고 허공에 대고 두 번 맴을 돌린 후 호통을 내질렀다.
[내가 너를 성 벽 아래로 던져서 네가 죽는지 사는지 볼까?]
정극상과 아가는 일제히 부르짖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다륭은 정극상을 힘껏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호통을 내질렀다.
[이후 너는 이 아가씨로부터 좀 멀리 떨어지란 말이야. 그녀는 저분 도
련님의 규수인데 너와 같이 기녀 방이나 출입하고 함부로 도박을 하며
닭이나 훔치고 개나 더듬어서 잡아가는 녀석이 함부로 추근거릴 수 있
느냐? 이런 일은 그야말로 그녀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다. 내 너에게
말하지만 이후 다시 네가 이 소저 옆에 있는 것을 본다면 나는 너의 개
같은 목뼈를 분질러 놓고 말겠다.]
그는 왼손으로 그의 땋은 머리를 잡고 오른손으로 머리채의 밑둥을 잡
았다. 그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그의 가슴팍이 대뜸 부풀어 올랐고
팔뚝의 근육이 울퉁불퉁 불거졌다.
순간 호통을 내지르며 왼손을 바깥쪽으로 당겼다. 팍, 하는 소리가 나
면서 맣은 머리카락이 중간에서 끊어지는 것이 아닌가?
시위들은 그와 같이 신력을 보게 되자 대뜸 우뢰와 같은 환호를 내질렀
다.
다륭은 본래 괄힘이 강한 데다가 다시 일신의 외공을 연마했다.
따라서 두 팔에는 실로 천 근의 힘이 실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그가 왼손으로 그의 땅은 머리 뿌리를 잡았기에 망정이지 그렇
지 않았더라면 정극상의 그 가짜 땋은 머리는 가볍게 잡아당기는 순간
에 들통이 나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조정의 영을 어기고 신하가 되고자
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는 큰 죄를 지은 사실이 금방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다륭은 반 토막으로 끊어진 머리채를 내던지더니 다섯 개의 북
을 치는 방망이 같은 커다란 손가락으로 정극상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
다. 정극상의 얼굴은 점차 시뻘겋게 되었고 나중에는 혓바닥마저 내밀
게 되었는데 보기에 곧 질식하여 죽을 것만 같았다.
십여 명의 시위들은 각기 무기를 뽑아들고 두 사람의 곁을 겹겹히 에워
싸고 아가가 달려들어 구하지 못하도록 했다.
위소보는 부르짖었다.
[돈을 갚았는데도 사람을 죽이겠다는 것이오?]
그는 달려들어 퍽, 하니 한 대의 주먹을 내질러 시위 한 명의 배를 때
렸다.
그 시위는 아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곤두박질치며 나가떨어져서 큰소
리를 지르며 손과 발을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전혀 몸을 일으키지 못하
는 것이 아닌가.
위소보는 두 주먹으로 쌍롱창주(雙龍槍珠)라는 일초를 펼쳐서는 다륭을
때렸다.
다륭은 두 손으로 정극상의 목을 조르고 있던 중이라 맞받아 내기가 힘
들어서 대뜸 그 두 대의 주먹에 얻어맞고 말았다.
이 쌍룡창주라는 일초는 본래 적의 태양혈을 후려치는 것이었으나 다륭
의 체구가 우람하고 위소보의 체격이 왜소해서 주먹은 모두 다 그의 옆
구리에 격중되었다.
다륭은 크게 노한 듯 욕을 했다.
[이 죽일 꼬마 같으니, 내 너를 목졸라 죽이겠다.]
그는 정극상을 놓더니 위소보와 싸우기 시작했다.
위소보는 해대부와 징관에게 배운 무공을 펼쳤다. 신법이 민활하기 때
문에 일초 일식은 꽤나 교묘하고 보기에 아름다웠다.
다륭의 주먹질에 파공성이 일었으며 그 주먹질은 모두 다 위소보의 몸
옆의 몇 치쯤 되는 곳을 후려치고 있었다.
돌연 흥이 나는 듯 갑자기 다리를 들어서는 우지끈 뚝, 하는 소리와 함
께 위소보의 옆에 있는 한 그루의 대추나무를 차서 부러뜨렸다.
시위들은 큰소리로 갈채를 보냈다.
아가는 다륭이 이토록 위풍이 늠름한 것을 보고 혹시나 위소보가 그에
게 맞아 죽게 될까봐 부르짖었다.
[사제, 싸우지 말아요. 우리 돌아가도록 해요.]
위소보는 크게 기뻤다.
(그녀가 나에게 관심을 보여 주는군. 조그만 계집애가 전혀 양심이 없
는 것은 아니로구나.)
다륭은 다시 발길질로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커다란 돌을 차서 떠올렸다
가 성 아래쪽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위소보는 더욱더 초식을 빨리 펼쳤다. 팍, 하니 일장을 상대방의 뱃가
죽에 적중시키게 되었다.
다륭은 악, 하고 크게 소리를 내지르더니 두 무릎을 꿇고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는 부르짖었다.
[나는 승복할 수 없다. 다시 싸우자!]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서는 두 팔을 곧장 아래 위로 뻗치며 급격히 주
먹질을 해댔다.
위소보는 몸을 비틀며 피했다. 그 바람에 다륭의 한대 주먹이 성벽을
후려치게 되었고 대뜸 세 조각의 커다란 푸른 벽돌이 떨어지게 되었다.
흙먼지가 흩날리는 가운데 위소보는 오른발을 쳐들어 걷어차게 되었는
데 발 끝이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다륭은 큰소리를 내지르더니 성벽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져서는 성벽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혹시나 정말 그가 떨어져서 죽은 것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륭은 고개를 쳐들고 씩 웃으며 눈을 깜박해 보이고 손을 흔들어 상관
없다는 시늉을 하고는 또다시 엎드렸다.
위소보는 그제서야 안심을 했다. 시위들은 놀라고 당황하여서 다투어
성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위소보는 아가를 잡아당기며 나직이 말했다.
[빨리 가요, 빨리 가!]
세 사람은 한 가닥의 연기처럼 객점으로 달려 들어갔다.
객점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구난은 아가의 표정이 다르고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것을 보고 물었다.
[또 무슨 일이 있었느냐?]
아가는 말했다.
[십여 명의 오랑캐 관병들이 정 공자를 괴롭혔어요. 다행히, 다행히 사
제가 관병의 우두머리를 때려 눕혔어요.]
구난은 말했다.
[객점에 틀어박혀 좀 조용히 지내도록 해라. 함부로 나다니면서 시비를
일으키지 말란 말이다.]
아가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했다.
잠시 후에 아가는 정극상의 상처가 염려되어 그의 방으로 가서 들여다
보게 되었는데 시종들이 이미 그의 상처에 약을 발라 주었고 정극상은
잠이 들어 있었다.
위소보는 그녀가 정극상의 방에서 걸어나오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울
화가 치밀고 한편으로는 후회하는 마음이 일었다.
(조금 전 어째서 그들에게 정말 그 녀석의 두 귀를 잘라 내도록 하지
않았을까?)
그는 다시 생각했다.
(이 계집애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언제나 그 냄새 나는 녀석을 걱정하고
있다. 내가 설사 그 녀석의 귀를 잘라 내고 눈을 찔러 멀게 한다고 하
더라도 그녀는 여전히 그를 마음 속의 보배처럼 여길 것 같구나.)
제 아무리 기민하고 꾀가 많은 그라고 하지만 이와 같은 남녀의 애정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위소보가 잠이 들어 야밤이 되었을 때 누군가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잠에 취한 상태에서 가까스로 그가 일어나 앉자 창 밖에서 누가나직이
불렀다.
[위 은공, 나외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오립신의 음성이 아닌가?
그는 재빨리 창가로 가서 나직이 말했다.
[오 사숙이오?]
오립신은 말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위소보는 가만히 창문을 열었다.
오립신은 즉시 방안으로 들어와 그를 얼싸안고 무척 좋아하면서 나직이
말했다.
[은공, 나는 매일같이 그대를 그리워했소. 그런데 이곳에서 만나게 되
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구려.]
그는 몸을 돌려서는 창문을 닫고 위소보와 나란허 방바닥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하간부의 대회 때 나는 귀회의 친구들에게 그대의 소식을 수소문하였
으나 그들은 모두 말하려고 하지 않더구려.]
위소보는 읏있다.
[그들은 당신이 의부 사람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또 일부러 말을 하
지 않으려 했던 것도 아니의다. 실로 나는 살귀대회에 참가하긴 했으나
변장하였기 때문에 천지회의 형제들도 모르고 있었소이다.]
오립신은 그제서야 의심이 풀어지는 듯 말했다.
[그랬었군. 그런데 오늘 다시 오랑캐의 관명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은공
이 다시 우리의 난처한 입장을 구해 주었구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도 우리의 소공자께서는 어떤 일을 당하게 되었을 것이오. 그리하여 소
공자께서는 저에게 은공을 한시 바삐 찾아보고 크게 고마워한다는 말을
전하라고 했소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모두 절친한 친구 사이인데 겸손해서 뭐합니까? 오 사숙, 은공이니 저
니 하는 말은 실로 듣기 거북합니다. 만약 저를 친구로 생각하신다면
그와 같이 호칭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오립신은 말했다.
[좋소. 내 그대를 은공이라 부르지 않을 테니 그대 역시 나를 오사숙이
라 부르지 마시오. 이후 우리 두 사람은 형제로 칭호하도록 합시다. 내
가 나이를 몇 살 더 많이 먹었으니 그대를 형제라고 부르도록 하지.]
위소보는 웃었다.
[정말 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일주 사질은 그렇게 된다면 나를 사
숙이라 불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립신은 약간 겸연쩍은 듯 말했다.
[그 녀석은 못난 놈이니 우리는 그를 상관하지 않도록 하세. 형제, 그
대는 어디로 가는 길이지?]
위소보는 말했다.
[이 일을 이야기하자면 깁니다. 둘째 형, 이 형제는 이미 짝을 짓게 되
있습니다.]
오립신은 말했다.
[축하하오, 축하하오. 그런데 어느 집 소저인지 모르겠군.]
그는 즉시 생각했다.
(혹시 방이가 아닐까? 그가 방 소저와 소군주를 찾는 모양이던데.)
따라서 그는 얼굴 가득히 기쁜 빚을 띄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나의 안사람은 성이 진씨이오. 하지만 한 가지 일에 있어서 매우 부끄
럽게 생각한답니다.]
오립신은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위소보는 말했다.
[나의 안사람은 따로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성이 정씨랍니다. 그
녀석은 인품에 있어서 지극히 얌전하지 못하답니다. 그 녀석이 나의 안
사람과 히히덕거리는 것은 오히려 작은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가 오랑캐 관병에게 밀고를 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오늘 그 관
병들이 소공자를 괴롭힌 것은 바로 그의 생각입니다.]
오립신은 크게 노해서 말했다.
[그 녀석은 살기가 싫어진 모양이군.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위소보는 말했다.
[그 녀석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는 바로 대만 연평군왕의 둘째 아들
입니다. 그는 연평군왕이 대군을 통솔하고 있으니 그대들 목왕부는 이
미 멸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고 권세도 없으니 말할 가치조차 없다고 말
했지요.]
오립신은 노해서 말했다.
[우리 목왕야로 말하면 대명나라의 개국공신이고 대대로 운남에서 세력
을 떨치는데 새로이 등장한 대만의 정써 집안이 어찌 감히 우리 집안과
견줄 수가 있단 말인가?]
위소보는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 녀석은 누구든지 오삼계를 죽이게 된다면 천하
영웅들 앞에서 크게 체면을 세우는 일이라고 말했죠. 그대들은 운남에
서 그야말로 본 고장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 오삼계를 죽이는 것은
그들 대만 정씨 집안보다는 백 배나 수월한 노릇이라고 했습니다. 그리
고 그는 나에게 와서 목씨 집안의 사람들을 먼저 제거하자고 상의했습
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천지회에서는 목왕부와 이미 누가 먼저 오삼계
를 없애는가 내기를 걸었다고 말해 주었지요. 그리고 영웅호걸이라면
이길 때 영광스럽게 이겨야 하고 질 때는 깨끗하게 져야지 어찌 몰래
상대방을 해칠 수가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 녀석은 승복하지 않고 오히
려 따로 간계를 짜냈습니다. 다행히 오랑캐 관병들이 소공야를 몰라 보
았기에 나는 그들에게 사람을 잘못 알았다고 속였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대들은 빠져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오립신은 잇따라 부르짖었다.
[알고 보니 그랬었군. 알고 보니 그랬어. 제기랄, 그 녀석은 사람이 아
니로군.]
위소보는 말했다.
[둘쩨 형, 그 녀석은 반드시 버릇을 고쳐 놓아야 합니다. 연평군왕의
얼굴을 봐서 우리들이 그를 죽일 수는 없지요.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둘쩨 형이 그를 한번 패주는 것입니다. 그때 이 형제가 나서서 권고하
다가 둘쩨 형과 손을 쓰게 되면 둘쩨 형이 일부러 저에게 몇 초 양보해
주시다가 짐짓 못이기는 척 물러서 주십시오. 되겠습니까?]
오립신은 말했다.
[형제는 우리들의 화풀이를 해 주는데 안 될 것이 있겠는가? 그렇게 하
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네. 그래야만 대만 정써 집안과 얼굴을 붉히게
되는 시끄러운 분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 아니겠나?]
위소보는 말했다.
[그 얼굴에 상처를 입고 이 형제와 함께 있는 녀석이 바로 그 녀석입니
다.]
오립신은 말했다.
[알았네. 그의 정씨 집안이 또 어떻다는 것인가? 목왕부는 오늘 날 거
의 망하다시피 했지만 그렇다고 업신여김을 당할 만한 상대는 아닐세.]
위소보는 말했다.
[그야 그렇죠.]
그는 그날 장씨 집안에서 유령을 만난 일을 물었다. 그는 낮에 서천천
을 만났으나 당시 자세히 물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묻지 못했는데 줄곧
그 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오립신은 얼굴에 부끄러운 빚을 띄우고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
다.
[형제, 그대는 오늘 나를 둘쩨 형이라고 부르는데 이 형 된 사람은 실
로 부끄럽기 짝이 없네. 그날 우리들은 그 한 때의 귀신처럼 날뛰는 녀
석들의 요사한 수법에 제압당했네. 그런데 그 한 떼의 녀석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끌려서 그 집에서 나가게 되었는데 나가는 즉시 잡히고
말았지. 그리하여 몇 명의 여자들이 다가와 우리들을 놓아 주었는데 또
한 떼의 귀신 같은 녀석들이 그 집안으로 공격해 들어와 장노삼 일행을
구해 가버린 것이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신룡교의 사람들이었지. 장 셋째 마나님들께서는 당해낼 수가
없었지.)
오립신은 고개를 흔들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때 나와 서 나으리의 혈도가 막 풀어졌으나 손발의 움직임이 영민하
지 못하고, 어둠 속에 그냥 멍청하게 마구잡이로 한바탕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모두들 흩어지게 되었네. 이튿날 아침 다시 보이게 되었으나 형
제와 소군주, 방 소저, 세 사람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지 않았
겠는가. 우리들은 다시 그 유령의 집으로 들어가서 찾으려고 했는데 그
집에는 한 늙은 할머니만 계시더군. 그런데 그 할머니는 진짜로 귀머거
리인지 아니면 거짓으로 그런 척하는 것인지, 반 나절 동안 붙잡고 물
어봤으나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네. 서 나으리와 나는 단념하지
않고 알게 모르게 조사를 하면서 근 보름을 씨름해 보았지만 전혀 단서
를 잡을 수가 없었다네.]
그는 위소보를 응시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형제, 오늘 그대를 만나 보게 되니 나로서는 정말 기쁘기 짝이 없네.
소군주와 방 소저는 어디로 갔는가? 형제는 그들의 소식을 조금 아는
가? 우리 소왕야께서는 누이 동생을 걱정하여 언제나 우울하게 지내신
다네.]
위소보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저 역시 그녀 두 사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방 소저는 총명하고 영리
하고, 소군주는 얌전하니 일찌기 그녀의 오라버니와 만나게 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그대들은 신롱교에 잡혀가서 독약을 먹도록 강요당한 후 첩자가
된 것은 아니었군. 그것 참 잘되었다.)
그는 오립신의 성격이 솔직해서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
고 있었다. 만약 그와 같은 말을 유일주에게 들었다면 아마 제대로 믿
지 않았으리라.
오립신은 말했다.
[형제, 몸 조심하게나. 이 형은 가 보겠네.]
그는 몸을 일으키며 퍽이나 작별을 아쉬워했다. 위소보의 손을 다시 잡
더니 말했다.
[형제, 천하에는 훌륭한 소저가 얼마든지 있네. 그대의 그 부인이 만약
그대에게 미안한 노릇을 하게 된다면 그대 역시 너무 마음에 두지 않도
록 하게나.]
위소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울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한숨은 그야말로 진짜였다.
오립신은 창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이튿날 위소보는 구난과 아가를 따라 성을 나서서 북쪽으로 향하게 되
었다. 정극상은 시종을 데리고 그들과 여전히 동행을 했다.
구난은 물었다.
[정 공자, 그대는 어디로 가려는 것이오?]
정극상은 말했다.
[저는 대만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사태를 한동안 관망한 후에 행동을
해야 되겠지요.]
약 이십여 리 정도 나가게 되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말 발굽소리가 요
란하게 일었다. 그리고 한 떼의 사람들이 뒤에서 달려왔다.
가까이 달려온 것을 보니 그 사람들은 시골 농사꾼들이었다. 손에는 곡
괭이와 삽자루 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데 앞장을 선 사람이 큰소리로 부
르짖었다.
[바로 저 녀석이다!]
위소보가 말하는 사람을 바라보니 그 사람은 바로 오립신이 아닌가. 한
몌의 사람들은 커다란 수레를 가로질러서 앞길을 가로막고 섰다. 오립
신은 정극상을 손가락질하며 욕을 했다.
[이 도적 같은 녀석아! 어젯밤 너는 장가장에서 좋은일을 했겠다? 그야
말로 고양이가 먹이를 훔쳐 먹고는 뺑소니를 치겠다는 것이냐?]
정극상은 노해 말했다.
[뭐가 장가장이고 이가장이오? 당신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할 뿐 아
니라 말도 똑바로 하지 못하는군.]
오립신은 부르짖었다.
[잘한다, 이가장의 소저를 네가 능욕한 것임을 네 스스로 실토를 하는
구나. 빌어먹을, 이 도적 같은 녀석아! 하룻밤 사이에 잇따라 두 집의
규수를 능욕하다니 정말 당돌하고 염치가 없구나.]
정왕부의 시종들은 일제히 호통을 내질렀다.
[이분은 우리의 공자이오. 사람을 잘못 알아보고 터무니없는 말씀을 하
지 마시오.]
오립신은 한 시골 소저를 잡아당기더니 정극상을 손가락질하면서 말했
다.
[저 사람이 아니냐? 너는 똑똑히 봐라!]
위소보는 그 시골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골 소녀는 짙은 눈썹에 커다란 눈망울을 하고 있었는데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이빨이 불쑥 퉈어나와 있었는데 몸에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 위에는 무늬가 있는 수건을 쓰고 있었다. 아마도 오
립신이 돈을 써서 빌어온 모양이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웃었다.
(이번 연극은 매우 그럴싸하군.)
그 시골 소저는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저 사람이에요, 저 사람이에요! 틀림없어요. 그는 어젯밤 저의 방으로
들어와서 덥석 저를 끌어안았어요. 흑흑흑, 이건, 이건 너무나 부끄러
워 죽을 지경이에요. 아이고, 흑흑흑, 엄마야.]
그녀는 대성통곡을 했다.
옆에 있던 한 명의 시골 농사꾼이 큰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네가 우리 누이를 업신 여기는 짓을 했구나. 이렇게 되면 나까지 도매
값으로 너의 처남이 되지 않느냐! 빌어먹을, 내 너와 사생결단을 내고
말겠다.]
그는 바로 오립신의 제자 오표였다.
위소보는 목왕부의 많은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그들 가운데 대
여섯 명은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유일주는그 안에 없었
다.
아마도 오립신은 먼저 사람들을 뽑아 위소보와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
들은 포함시키지 않음으로써 일이 들통나지 않도록 한 모양이었다.
아가는 그 시골 소녀의 얼굴이 추악한 것을 보고 정극상이 그녀와 어떤
애매한 일이 있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애써 그런 일
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또 시골 사람들이 정극상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
이 떼를 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반신반의 했다.
위소보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 공자는 너무나 풍류를 즐기는구려. 기녀원으로 가서 논다는 것은
있을 수도 있지만 어쩨서 아, 저 시골 소녀는 저토록 보기 흉칙하군.
사저, 내가 생각컨대 그들은 아마도 틀림없이 사람을 잘못 안 것 같
소.]
아가는 말했다.
[맞았어요. 틀림없이 잘못 안 것일 거예요.]
오립신은 그 시골 소녀에게 말했다.
[빨리 말해, 빨리 말해! 뭐가 부끄럽다는 거야? 그는, 저 좀도적은 너
에게 무슨 짓을 했지?]
그 시골 소녀는 품속에서 커다란 원보를 꺼내 들고
[그는 나에게 이걸 주면서 고분고분 말을 들으라고 자기가 대만에서 왔
으며 그의 아버지는 무슨 왕야라 집안에는 금은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
고 있으며 또, 또]
아가는 아, 하는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속으로 시골 소저
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찌 그와 같은 말을 날조했겠는가 하고생각했
다. 자연히 정극상이 정말 그와 같은 말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게 되
었고 그렇게 되자 마음이 아파왔다.
정 공자의 시종들 역시 모두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이 시골뜨
기 소녀로서는 몸에 이와 같은 커다란 원보를 지닐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다투어 호통을 내질렀다.
[비켜, 비켜! 그대가 원보를 가졌으면 되었지 왜 떠들고 야단이냐! 우
리 큰나리들의 길을 막지 말도록 해라!]
오표는 부르짖었다.
[안 돼, 안 돼! 우리 누이는 그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그녀가 어떻게 다
시 시집을 가겠소? 반드시 우리 동생을 맞아들여야 하오. 그러니 빨리
나를 따라가서 그녀와 혼례를 올리도록 하고 다시 그녀를 데리고 대만
으로 가서는 부모들에게 인사를 시키도록 하시오. 우리 누이로 말하면
훌륭히 자란 규수로서 천박한 계집들과는 다르단 말이오. 설마하니 그
대의 은자를 받고 몸을 팔 줄 알았소? 그는 이 일백 냥의 은자가 뭐하
는 것이라고 했지?]
최후의 이 한 마디는 그 시골 소녀에게 묻는 것이었다.
그 시골 소녀는 말했다.
[그는, 그는 이것이 빙례(聘禮)라고 했어요. 그는 사람을 불러 중매를
세워서 저를 마누라로 맞아들이겠다고 했으며 저를 데리고 왕부로 가게
된다면 일품부인(一品夫人)을 삼겠다고 했어요.]
오표는 말했다.
[바로 그렇지. 매부, 내 그대에게 말하지만 그대가 나의 누이와 혼례를
올리지 않고 이렇게 떠나 버리려고 한다면 그렇게 쉽게 뜻을 이룰 수는
없을걸? 빨리 이 큰 처남을 따라 돌아갑시다.]
정극상은 극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이번에 중원 땅에 와서는 운수 사나
운 일만 당하게 되더니 이제는 시골뜨기들까지 알 수 없는 일로 자기를
찾아와서 시비를 걸지 않는가?
그는 말채찍을 들어 철썩, 하니 오표의 머리를 내리쳤다.
오표는 큰소리로 부르짖있다.
[어이쿠!]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얼싸안고 말에서 거꾸로 떨어졌다. 몇 번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시골 사람들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사람을 때려 죽있다. 사람을 때려 죽였다!]
그 시골뜨기 소녀는 말에서 내려 오표의 몸을 얼싸안고 대성통곡을 했
다.
그녀의 우는 소리는 거칠고 목이 쉬기도 해서 그야말로 돼지 멱따는 소
리와 같았다.
정극상은 깜짝 놀랐다. 지금은 자기가 타향에 와 있고 또 청나라 조정
에서 눈이 벌겋게 번해서는 잡으려고 하는 인물인데 이와 같은 살인 사
건을 일으키게 되었으니 크게 거북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호통을 내질렀다.
[모두들 뚫고 나가라!]
그는 말꼬비를 잡아당기며 말을 재촉해서는 도망을 치려고 했다.
별안간 한 시골 사람이 몸을 일으키더니 허공에서 그에게 덮쳐들었다.
정극상은 왼손으로 냅다 그의 가슴팍을 후려치려고 했다.
시골 사람은 정극상의 손목을 잡고 비틀었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정
극상의 팔이 빠지고 말았다.
시골 사람은 곧 정극상의 말 안장에 올라타게 되었고 오른손을 그의 겨
드랑이로 뻗쳐서는 그의 뒷덜미를 내리누르는 게 아닌가.
이것은 금나수법 가운데 사비역린(斜批逆鱗)이라는 일초였다. 시골 사
람의 신법은 깨끗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입으로는 큰소리로 부르짖었
다.
[아삼(阿三), 아구(阿拘), 빨리 와 좀 도와 주게. 나는, 나는 그에게
얻어맞아 매우 아프군. 어이쿠, 녀석이 나를 때려 죽이려고 해.]
정극상은 전신이 시큰거리고 마비되어 이미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 공자의 시종들은 무기를 뽑아들고 서둘러 공격을 해 왔다. 목왕부에
서 이번에 나선 사람들의 수는 별로 많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솜씨가 뛰
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삽과 곡괭이를 들고서 마구잡이로 두들겨서 정공자의 시
종들을 물리쳤다.
그 시골 사람은 정극상을 안고 말에서 아래로 굴러떨어지며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아화(阿花)야! 빨리 너의 지아비를 붙잡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해라!]
그 시골뜨기 소녀는 웃었다.
[그는 도망칠 수 없을 거예요.]
그녀는 몸을 날리더니 정극상을 꼭 껴안았다. 위소보는 그제서야 이 시
골뜨기 소녀가 원래는 남자인데 여자로 가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러니 그토록 추악하게 생겼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따지고 든다
면 목왕부의 인물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녀가 대뜸 정극상을 안는데 사
용하는 것도 역시 금나수법이 아닌가?
아가는 급히 부르짖었다.
[사부님, 사부님 그들이 정 공자를 잡았어요. 어떻게 하면 좋죠?]
구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 공자는 행동거지가 단정하지 못하니 교훈을 좀 받는 것이 그에게
득이 될 것이다. 이 시골 사람들도 그의 목숨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
다.]
그녀는 바로 수레 안에 누워서 조용히 조섭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
문에 수레 밖에서 시끌벅적 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목왕부의 사람들이
손을 쓰는 사정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녀의 눈썰미
로서 그 사람들의 신법을 보기만 해도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을
대층 짐작했으리라.
아가는 말했다.
[이 한 떼의 시골 사람들은 마치 무공을 아는 것 같아요.]
위소보는 말했다.
[무공은 모르지만 기운만은 제법 세군요.]
오표는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부르짖었다.
[제기랄, 하마터면 나를 때려 죽일 뻔했지 않았는가!]
그러자 한 명의 시골 사람이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매부가 큰 처남을 죽이는 일이 있는가?]
오표는 말했다.
[그렇지. 좋아, 저 녀석을 잡았군. 큰 처남이 죽지 않았으니 그의 목숨
을 빼앗을 것도 없다. 우리 아화 누이가 이제 한평생 의지할 사람이 생
겼다. 그를 잡아다가 혼례를 올려야겠다.]
시골 사람들은 환호하며 크게 부르짖었다.
[이제 국수를 먹으러 가자, 국수를 먹으러 가!]
그리고 정 공자 시종들의 말을 일제히 끌고서는 정극상을 좌우와 전후
에서 호위하듯 하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서 달려갔다.
정 공자의 시종들은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급히 뒤쫓아갔다.
그러나 그 한 패거리의 사람들이 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며 말을 타고 달
아나니 걸어서 어떻게 그들을 뒤쫓을 수 있겠는가?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정 공자가 이곳에서 혼례를 올리다니 그것 참 잘되었군. 원래 이곳의
지방 이름이 고로장(高老莊)이라고 하는 곳인가 보구나.]
아가는 놀람과 분노에 읽혀서는 어떻게 할 바를 몰라 불쑥 물었다.
[그렇지, 서유기 가운데 제 일장에 저팔계가 고로장에서 혼례를 올린다
는 대목이 있지 않소?]
아가는 화가 나서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었다.
[너야말로 저팔계야!]
위소보는 말했다.
[사저, 정 공자가 마누라를 얻게 되는 것은 그야말로 기쁜 일인데 어째
서 그대는 오히려 울고 있소?]
아가는 다시 욕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이 소악인은 신통
력이 대단하니 그에게 도움을 청해야 정 공자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울면서 말했다.
[사제, 어떻게 방법을 강구해서 그를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구해요.]
위소보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매우 놀랍고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대는 그를 위험에서 구해 내자고 말했소? 그는 사람을 때려 죽인 일
도 없고,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사람도 없는데 무슨 위험이 있다는
것이오?]
아가는 말했다.
[그대는 듣지 못했나요? 그 사람들은 그를 핍박하여 그 시골뜨기 소녀
와 혼례를 올리자고 하지 않았어요?]
위소보는 웃있다.
[혼례를 을리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겠소? 내가 그 혼례를 못하게 막는
다면 정 공자가 나를 미워할 것이오.]
그는 음성을 낮추어서 말했다.
[나는 바로 그대와 혼례를 올리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그대가 응하지 않
는군.]
아가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남은 마음이 급해 죽겠는데 그대는 여기서까지 터무니없는 말만 지껄
이고 있군요. 내 다시 당신을 상대하나 두고 봐요.]
第63章. 신나는 결혼식
위소보는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정 공자의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니 약간 쓴맛을 봐야만
도움이 된다고 했소. 더군다나 혼례를 올리는 것은 쓴맛을 보는 일도
아니고 정 공자는 십중팔구 매우 흐뭇하게 여길 것이외다. 그렇지 않고
서야 어찌 어젯밤 그가 그 소저를 찾아가 터무니없는 짓거리를 했겠느
냔 말이외다]
아가는 발을 구르며 노해 부르짖었다.
[그대야말로 터무니없는 짓거리를 하는 사람이지]
이날 아가는 길을 가면서 일부러 일을 만들어 걸음을 지체했다.
점심을 먹게 되었을 때 노새의 뒷발굽에다가 가볍게 칼질을 해서 노새
가 절룩거리며 매우 느리게 가도록 만들었다.
오후에 겨우 십여 리를 가서 어느 고을에서 투숙하게 되었다.
위소보는 그녀가 밤중에 달려가 정극상을 구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저녁밥을 먹은 후 객점의 사람들이 잠이 들었을 때 그는 마굿간으로 가
서 풀더미 위에 쓰러져 잠을 청했다.
과연 초경이 되지 못해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한 검은 그림자가 마굿
간으로 들어와 말을 끌어내려고 했다.
위소보는 나직이 부르짖있다.
[도둑이야!]
그 사람은 바로 아가였다.
깜짝 놀란 그녀는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으나 곧 위소보의 음성인 것
을 알아 듣고 물었다.
[소보, 그대인가요?]
위소보는 웃었다.
[물론 나외다.]
아가는 말했다.
[그대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죠?]
위소보는 말했다.
[나는 점을 쳐 보았는데 오늘밤 누군가 말을 훔치려는 줄을 알고 이곳
에서 도적을 잡으려고 지키고 있는 중이오.]
아가는 쳇, 하고 혀를 차더니 사정했다.
[소보, 그대는 나와 함께 가서... 그를 구하도록 해요.]
위소보는 그녀가 부드러운 말로 부탁을 해 오자 그만 뼈마디까지 녹는
것 같아서 웃으며 말했다.
[만약 그를 구해 낸다면 무슨 상을 주겠소?]
아가는 말했다.
[그대가 요구하는 것이라면 모두 다...]
본래 그녀는 그대가 요구하는 것이라면 모두 다 들어 주겠다고 말하려
고 했다. 그러나 다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 나이 어린 꼬마는 틀림없이 나보고 자기에게 시집을 오라고 할 것
이다. 그것이야 응할 수 없는 노릇이지.)
그리하여 한 마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즉시 말을 바꾸었다.
[그대는.. 그대는 언제나 방법을 강구해서 나를 못살게 굴려고 할 뿐이
지 한 번도 진심으로 나를 도와준 적이 없어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흐느껴 울었다. 그녀가 흐느끼는 것은 거짓이 아
니었다. 그러나 속으로 슬퍼하고 있는 것은 정극상이 경박하다는 것과
지금 그가 함정에 빠져서 정말 혼례를 올리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었지 위소보에 대한 감정은 전혀 없었다.
위소보는 그녀가 그와 같이 울음을 터뜨리자 그만 마음이 누그러져 한
숨을 내쉬었다.
[좋소, 좋아. 내 그대와 함께 가도록 하지.]
아가는 크게 기뻐서 흐느끼며 말했다.
[정.. 정말 고마워요.]
위소보는 말했다.
[고마워할 것까지는 없소. 그런데 고로장이 도대체 어디 있는지 알 수
가 없군.]
아가는 어리둥절해졌으나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고로장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말을 빙글 돌려서 정극상을 욕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나직이 말했다.
[우리, 왔던 길로 되돌아가서 찾아보도록 해요.]
두 사람은 살그머니 객점 뒷문을 열고 말을 끌어내어 나란히 말을 몰아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려갔다.
위소보는 말했다.
[도대체 정 공자의 무엇이 좋아 그대는 그토록 그를 좋아하는 것이오?]
아가는 말했다.
[누가 그를 좋아 한다고 했어요? 하지만.. 하지만 서로 알고 지내는 터
에 그가 위급함을 당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구해 주어야지요.]
위소보는 말했다.
[만약 그 누가 나를 잡아서 혼례를 올리게 된다면 그대는 나를 구할 것
이오?]
아가는 훗, 하고 웃었다.
[꽤 잘난 척하시는군요. 누가 그대를 잡아 혼례를 올리려 하겠어요?]
DNL소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가 볼 때는 내가 눈에 거슬리는지 모르지만, 어떤 소저는 나를 꽤
잘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소?]
아가는 웃었다.
[그렇다면 천지신명에게 감사를 드려야겠죠.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자
꾸만 죽은 귀신처럼 나를 붙들고 늘어질 테니까 말이에요.]
위소보는 말했다.
[좋소. 그대가 이토록 양심이 없는 사람인 줄 몰랐소. 만약 누가 그대
를 잡아서 혼례를 올리려 한다면 나는 그대를 구하지 않겠소.]
아가는 속으로 약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정말 그와 같은 일
에 부딪히게 된다면 반드시 위소보가 구해주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고
나직이 한숨 쉬듯 말했다.
[그대는 반드시 달려와 나를 구하려 할 거예요.]
위소보는 물었다.
[그건 어째서요?]
아가는 말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못살게 구는데 그대는 결코 구경만 하고 있지 않을
거예요. 그대는 바로 나의 사제가 아니겠어요?]
그 한마디의 말은 위소보가 들을 때 여간 달콤하지 않았다. 말을 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낮에 목왕부 군웅들과 만난 지점에 이르렀다.
길가에 십여 명이 앉아 있고 손에는 등롱을 들고 있었는데 바로 정 공
자의 시종들이었다.
아가는 급히 말을 멈추고 물었다.
[정 공자는 어떻게 되었어요?]
시종들은 몸을 일으켰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저쪽 사당에 있어요.]
그는 서북쪽 한 모퉁이를 가리켰다. 아가는 물었다.
[사당? 거기서 무엇하죠?]
그 시종은 말했다.
[그 시골 사람들은 공자를 데리고 가서는 억지로 혼례를 올리려고 하고
있어요. 공자가 싫다고 하자 그들은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대는데 흉악
하기 이를 데 없군요.]
아가는 노해 말했다.
[그대들은.. 흥, 그대들은 모두 고수인데 어쩨서 몇 명밖에 안되는 시
골뜨기들도 이기지 못하는 거예요?]
시종들은 매우 부끄러운듯 고개를 숙였다. 한 사람이 말했다.
[그 시골 사람들은 모두 무공을 지니고 있었소이다.]
아가는 노해 말했다.
[상대방에게 무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대들은 주인을 구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우리 둘이 가서 사람을 구할 터이니 그대들이 앞장을 서요.]
한 나이 많은 시종이 말했다.
[그들은 우리가 다시 와서 잔소리를 하면 우리를 모조리 잡아 죽이겠다
고 했소이다.]
아가는 말했다.
[죽였으면 죽였지 뭐가 두려워요? 연평군왕께서는 그대들에게 공자를
보호하도록 하셨는데 그대들은 이토록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다
니.]
시종들은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소저께서 그들에게 발각되
지 않도록 말을 타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아가는 흥,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위소보와 함께 말에서 내려 말을 길
가 나무에 매었다.
시종들은 등롱을 들고서는 두 사람을 데리고 서북쪽으로 걸어갔다. 일
마장쯤 가자 숲을 가로지르게 되었고 이윽고 칠팔 칸이나 되는 커다란
집 앞에 이르게 되었다.
그 집안에서는 징소리, 북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아가는 속으로 초조해져서 생각했다.
(그는 정말 혼례를 올리는 것일까?)
그녀는 위소보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고 재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그
리고는 돌아서 집으로 갔다. 그러고 보니 한쪽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어두컴컴하니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징소리, 북소리가
들려오는 대청 쪽으로 가서는 몸을 웅크리고 창 틈으로 안을 살폈다.
대청 안의 정경을 보자 아가는 대뜸 크게 초조해졌고 위소보는매우 흐
뭇하게 여겼다.
정극상의 머리 위에는 몇 송이의 붉은 꽃이 꽂혀 있었는데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른 여자와 마주 서 있었다.
대청에는 휘황찬란하게 많은 촛불들이 켜져 있었고, 몇 명의 시골 사람
들이 징을 치고 북을 치며 떠들어댔다.
오립신은 부르짖었다.
[다시 절을 올리시오. 다시 절을 올리시오.]
정극상은 말했다.
[천지신명에게도 절을 했거늘 또 무슨 절을 한단 말이오?]
아가는 그 말을 듣고 하마터면 기절을 할 뻔했다.
오립신은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이곳의 규칙은 신랑이 신부에게 잇따라 백 번의 절을 해야 하오.
그대는 이제 겨우 삼십 번밖에 하지 않았으니 아직도 칠십 번은 더 큰
절을 해야 하오.]
오표가 발을 들어서 정극상의 엉덩이를 찼다. 정극상은 그대로 서 있지
를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오표는 그의 머리를 내리누르며 호통을 내질
렀다.
[너는 오늘 신랑이 되는 날인데 큰절을 몇 번 더 하기로서니 무슨 상관
이 있다는 것이냐?]
위소보는 그들이 시간을 늦추며 자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와 같은 멋진 구경거리는 한 평생 몇 번 볼까
말까한 터이라 좀더 두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삐 사람을 구하려 들지를 않았다. 그러나 아가는 참을 수 없다
는 듯 쿵, 하니 발길로 기다란 창문을 차서 열어젖히고는 손에 칼을 들
고 뛰어들어가며 호통을 내질렀다.
[빨리 그를 놓아줘요. 그렇지 않을 때는 이 소저가 차례로 그대들을 모
조리 죽이겠어요.]
오립신은 웃으며 말했다.
[소저, 그대는 국수를 먹으러 온 사람인데 어쩨서 칼과 창을 함부로 휘
두른단 말이오?]
아가는 한 걸음 다가서며 칼을 휘둘러서는 오표를 내려치려고 했다. 그
녀는 분노하고 다급한 김이라 칼을 쓰는 기세가 매우 날카로웠다. 오표
는 급히 옆으로 피하더니 등 뒤의 기다란 걸상을 들어서는 막았다. 아
가는 내력이 없었으나 무공의 초식은 퍽이나 정묘하고 기이했다.
오표는 기다란 걸상이 손에 잘 맞지 않은 관계로 그녀의 공세에 밀려
연신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오립신은 웃었다.
[허, 꽤 대단하시군.]
그는 손을 뻗쳐 그녀의 공세를 가로챘다. 그의 무공은 오표보다 훨씬
고강했다.
그는 맨손으로 그녀의 칼날 사이를 이리저리 뒤집고 공격했다.
정극상은 몸을 날려서는 아가를 도우려고 했는데 그 순간 등줄기를 그
누구에게 퍽, 퍽, 하니 두 대를 얻어맞고는 그만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
았다. 아가는 칠팔 초를 싸웠으나 도저히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부르짖었다.
[사제, 사제, 빨리 와요!]
이때 위소보는 창 밖에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대단하시군. 내가 당신들과 사생결단을 내겠다.]
그런데 다시 창문 쪽에서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
마도 위소보 역시 다른 사람과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립신은 위소보가 도착한 것을 보고는 재빨리 눈짓을 하며 호통을 내
질렀다.
[게 누구인가?]
두 명의 제자가 서둘러 달려왔다. 그리고는 무기를 들어 아가의 유엽도
를 가로막았다.
오립신은 즉시 대청 밖으로 달려갔다. 그러고 보니 위소보 혼자서 기다
란 창문을 발길질로 퍽, 퍽, 차서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지 그 누구와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오립신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으나 참고 부르짖었다.
[모두 손을 멈추게. 이 어린애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지?]
위소보는 부르짖었다.
[우리 사저는 나보고 사람을 구해 달라는 부탁을 했소. 당신네들은 빨
리 사람을 내놓으시오. 어이쿠, 야단났구나. 이 시골 늙은이는 무공이
뛰어나다!]
입으로 큰소리를 부르짖으면서 그는 문 밖으로 달려갔다. 오립신은 웃
으면서 뒤를 쫓아갔다.
사당 밖에 이르렀을 때 위소보는 걸음을 멈추고 웃으며 말했다.
[둘째 형, 정말 고맙구려. 이 일은 정말 재미있게 처리했군요.]
오립신은 웃었다.
[그 소저가 바로 형제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인가? 정말 무공이 훌륭
하고 인품 역시.. 역시 흐흐흐, 그럴싸하군.]
그의 성격은 거칠면서도 호방한 터였다.
아가의 용모가 지극히 아름다웠으나 그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묘한 초식에 대해서는 퍽이나 탄복하고 있었다.
위소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는 한마음 한뜻으로 그저 그 냄새나는 녀석에
게만 시집을 가려고 하지 나에게는 시집오려고 하지 않아요. 둘째 형과
여러 사람들이 그 냄새나는 녀석을 시골 소저와 혼례를 올리도록 강요
했으니 이제 그녀와 내가 혼례를 올리도록...]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둘쩨 형, 도와주시는 김에 끝까지 도와주시구려. 내가 짐짓 둘째 형에
게 잡히는 척할 터이니 둘쩨 형은 다시 그 소저를 붙잡아서는 나에게
강요하여 혼례를 올리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오립신은 소리 내어 껄껄 웃더니 불현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재빨리 말
했다.
[매우 좋네. 매우 좋아. 형제, 형제는 너무 개의치 말게. 내가 고개를
가로젖는 것은 완전히 버릇이 되있다네. 하지만...하지만....]
거기까지 말하더니 그는 약간 망설였다.
위소보는 물었다.
[하지만 어떻다는 것입니까?]
오립신은 말했다.
[우리는 협의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니 장난을 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형제, 쓸데없는 의심은 하지 말게.
이 형 된 사람은 솔직이 말하는데 그 꽃을 탐하거나 색을 밝히는 음계
(淫戒)는 결코 범할 수가 없는 일이네.]
위소보는 말했다.
[그야 물론이죠. 그녀는 저의 사저입니다. 저와 혼례를 올리게 된 이후
에는 바로 정식으로 맞아들인 처가 되지 않겠습니까? 둘쩨 형! 둘째 형
은 중신애비입니다. 그러니 혼례를 올리는 것이 바로 정식으로 처를 맞
아들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꽃을 꺾거나 오입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 꽃을 탐하고 호색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오립신은 말했다.
[맞았네. 맞았어. 형제는 나에게 약속을 해주게. 그 소저에 대해서 협
의에 어긋나는...나쁜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말일세.]
위소보는 말했다.
[백이십 번이라도 안심하시오. 사내대장부의 일언은 중천금이라 하지
않습니까?]
오립신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원래 그대가 갱쟁한 영웅호걸임을 알고 있네. 저 소저가 그대에
게 시집을 가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복이지.]
위소보는 미소했다.
[둘째 형은 중신애비이니 술은 언제든지 내도록 하겠습니다.]
오립신을 웃었다.
[정말 좋아. 형제, 나는 손을 쓰겠네.]
위소보는 손을 뒤로 돌리고 웃으며 말했다.
[겸손해 할 것 없습니다.]
오립신은 왼손으로 그의 두 손목을 잡고 큰소리로 말했다.
[이것 봐라! 네가 어디로 도망을 치겠느냐?]
그는 위소보를 대청 안으로 밀어넣었다.
이때 아가는 손에 들린 유엽도가 이미 쩽그랑, 하고 땅바닥에 떨어졌고
세 개의 무기가 그녀의 앞가슴 쪽과 등쪽을 겨누고 있는 형편이었다.
오표는 그녀를 제압하기는 했으나 그녀가 위소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
는 것을 알고 조금도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립신은 허리띠를 풀어 위소보의 두 손을 묶고서는 그를 밀어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아가 역시 묶었다.
위소보는 끊임없이 크게 욕을 했다.
오립신은 호통을 내질렀다.
[이 꼬마야! 다시 욕을 하면 너의 눈알을 뽑아 낼 테다.]
위소보는 말했다.
[나는 굳이 욕을 하겠다. 이 좀도적아!]
아가는 나직이 말했다.
[사제, 욕을 하지 말아요. 눈 앞에서 당장 손해볼 필요는 없어요.]
위소보는 그제서야 입을 다물었다. 오립신은 말했다.
[소저는 역시 도리를 아는 사람이구려. 인품도 그럴싸하고 말이오. 매
우 좋소, 좋아. 나에게 형제 한 사람이 있는데 아직 처를 맞아 들이지
않았소. 오늘 그대를 맞아 나의 제수씨로 삼아야겠군.]
아가는 깜짝 놀라 재빨리 말했다.
[안 돼요. 안 돼요.]
오립신은 노해 부르짖었다.
[안 되기는 뭐가 안 되오? 커다란 처녀는 언젠가는 시집을 가야할 몸이
지 않소? 나의 이 형제로 말하면 영웅호걸이라서 결코 그대를 욕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런데 어째서 마다하는 것이오? 정말 분수를 모
르는군. 풍악을 울리도록 해라!]
오표 등은 징과 북을 들어 치기 시작했다. 광! 쾅! 동동!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이 매우 신이 나는 장면이었다.
아가는 한평생 이때처럼 놀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이 시골뜨기가 이토록 거칠고 더러운 것을 보면 그의 동
생 역시 좋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만약 그녀 자신이 이와 같은
시골뜨기에게 몸을 빼앗기게 된다면 설사 자결을 한다 하더라도 때 늦
은 감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녀는 이빨로 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폼이 놀라 말도 나오지 않는 모
양이었다. 오립신은 그 모양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매우 좋아. 그대는 응낙을 했군.]
그는 오른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풍악소리가 멈추었다. 아가는 부르짖
었다.
[아니에요. 나는 응낙하지 않았어요. 당신들은 빨리 나를 죽여주세요.]
오립신은 말했다.
[좋소. 내 이제 그대를 죽이도록 하지. 그대의 사제도 함께 죽이겠소.]
그는 오표의 손에서 강철 칼을 받아들고 높이 쳐들었다.
아가는 울부짖었다.
[그대는 빨리 죽여요. 죽이지 않는다면 호걸이 아니에요. 그대는...그
대는 빨리 나의 사제를 죽이도록 해요. 먼저..먼저 그를 죽이는 것이
좋겠어요.]
오립신은 위소보를 한번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 이 소저가 그대에 대해서 이토록 매정하고 의리도 지키지 않는데 왜
하필 그대는 그녀를 취하려고 하지?)
위소보 역시 배신감이 들어서 욕을 하고 있었다.
(냄새나는 계집 같으니라구. 어째서 먼저 나를 죽이라고 하는 것이지?)
오립신은 노해 부르짖었다.
[나는 오히려 그대의 사제를 죽이지 않겠소. 아구, 이 못난 녀석을 끌
어 내서 목을 쳐라!]
그는 정극상을 손가락질했다. 오표는 대답했다.
[예.]
그는 정극상을 끌어당겼다.
아가는 놀라 부르짖었다.
[아니에요. 그를 해치지 말아요. 그는.. 그는 죽일 수 없는 사람이에
요. 그의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는...]
오립신은 말했다.
[그렇다면 그만두지. 그대는 나의 제수씨가 되겠소, 안 되겠소?]
아가는 울며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대는..그대는 나를 죽이는 것이 좋겠어요.]
오립신은 강철 칼을 던지고서는 말 채찍을 들어올려 호통을 내질렀다.
[내 그대를 죽이지 않고 채찍으로 백 번을 때려 주겠소.]
그는 속으로 노기가 끓어올라 일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채찍을 허공으로 들어올리고 철썩, 하는 소리가 나도록 만든 이후
그녀의 몸을 후려치려고 했다.
위소보가 부르짖었다.
[잠깐!]
오립신은 즉시 채찍을 허공에 들어올린 채 내려치지 않고 물었다.
[왜 그러지?]
위소보는 말했다.
[우리들은 영웅호걸로서 의리를 지키는 사람들이오. 나의 사저로 말하
면 그야말로 친형제와 다름없으니 그 백 대의 채찍으로 나를 때려 주도
록 하시오.]
아가는 오립신이 매섭게 채찍을 들고 후려치려고 하는 양을 보고 이미
놀라 당황하고 말았다.
이때 위소보가 하는 말을 듣고는 속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사제, 그대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위소보는 오립신에게 말했다.
[이것 보시오, 노형. 무슨 일이든지 내가 앞서서 책임을 지겠소. 이것
이야말로 대장부가 어떤 위험이나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않고 나서는 것
이 아니겠소? 그대는 그녀에게 그대의 형제에게 시집을 가라고 할 필요
가 없소. 그대에게 무슨 누님이나 누이가 있어 시집을 못 보내고 있다
면 나와 혼례를 올리도록 해주시오. 이 정 공자가 이미 한 사람을 맞아
들였고 내가 다시 한 사람을 맞아들이게 된다면 두 처녀를 시집보내 주
는 셈이니 그만하면 되지 않겠소? 설사 또 있다면 함께 나에게 시집을
보내도록 하시오. 나는 깨진 그릇 조각 같고 몹쓸 무쇠 조각과 같은 색
시라도 모조리 거두어 들이겠소...]
그가 거기까지 말을 하자 오립신 등은 하나같이 껄껄 소리 내어 웃었
다. 아가 역시 참을 수 없어 웃었으나 자기 자신이 이토록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오립신은 웃으며 말했다.
[이 녀석은 정말 멋지게 노는구나. 정말 사내다운 데가 있어. 나는 본
래 너희들을 놓아 주려고 했었는데 너의 몇 마디의 빈 말에 놀라 자빠
지게 된다면 내가 너무 물렁한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 혼례를 올리는
것은 반드시 거행해야 한다. 도대체 네가 혼례를 올리겠느냐, 아니면
그녀로 하여금 혼례를 올리게 하겠느냐?]
아가는 급히 빠져나오고 싶어서 재빨리 말했다.
[그예요. 그예요.]
오립신은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한참 동안 옹시하다가 큰소리로 물었
다.
[그대는 그로 하여금 혼례를 올리도록 하라는 것이냐?]
아가는 약간 부끄러움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요.]
오립신은 말했다.
[좋아.]
그는 손가락으로 위소보를 가리키며 큰소리로 말했다.
[오늘 네 녀석은 반드시 혼례를 올려야 하겠다.]
위소보는 아가를 바라보았다.
[나는.. 나는..]
아가는 나직이 말했다.
[사제, 그대가 오늘 나를 위급함에서 구해 준다면 나는 영원히 잊지 않
을 거예요. 그대는 응낙하세요.]
위소보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대는 나보고 혼례를 올리라고 하는 것이오? 아, 그대도 알다시피 이
것은 매우 난처한 노릇이외다.]
아가는 나직이 말했다.
[나는 알고 있어요. 그대가 오늘 나를 크게 도와 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저 머리를 부딪쳐 죽을 수밖에 없어요. 나는.. 어쩔 수가 없어서 그
저 그대에게 부탁을 드리는 거예요. 그들.. 그들은 매우 흉악한 자들이
에요.]
위소보는 큰소리로 말했다.
[사저, 오늘 그대가 입을 열어서 부탁한 것이고 이 위소보는 그저 억지
로 어려운 일을 받아들이는 셈치고 그대에게 응낙하는 것이오. 그러니
그대가 나에게 혼례를 올려 달라고 말한 것이지 내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오. 그렇지 않소?]
아가는 말했다.
[예, 그래요. 내가 부탁한 것이에요. 그대는 영응호걸이고 사내대장부
이니 썩 앞으로 나서서 남의 다급함을 구해 주는 것이 당연해요. 또...
또 그대는 저의 말을 가장 잘 듣는 사람이 아니에요?]
위소보는 길게 탄식을 했다.
[사저, 내 그대에 대한 마음을 그대는 이제야 알아차렸군요. 그대가 어
떤 일을 나에게 하라고 하든 나는 단번에 응낙하겠으며 눈썹 하나 찡그
리지 않겠소이다. 그대가 나에게 혼례를 올리라고 한다면 물론 응낙하
겠소.]
아가는 말했다.
[나는 그대가 나에게 잘 대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이후...
이후 나 역시 그대에게 잘 대해 줄 거예요.]
오립신은 말했다.
[바로 그렇게 하도록 하지. 소형제, 나에게는 그대에게 시집보낼만한
누이가 없다네. 그리고 딸은 겨우 세 살뿐이니 안 된단 말일세. 이봐!
그대들 가운데 누구든지 자매가 있는 사람은 빨리 와서는 이 소영웅과
혼례를 올리도록 하라구.]
오표는 웃으며 말했다.
[저는 없습니다.]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이 소영웅의 의리는 하늘을 찌를 것같군요. 만약 제가 그와 처남매부
지간이 된다면 그야말로 운수대통이겠으나 애석하게도 나에게는 형제만
있을 뿐 자매가 없습니다.]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저의 누님은 이미 시집을 가서는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답니다. 소영
웅, 그대가 만약 기다릴 수 있다면 나의 매부가 죽은 이후에 우리 누님
으로 하여금 그대에게 개가를 하도록 하겠소이다.]
오립신은 말했다.
[기다릴 수 없네. 지금 바로 혼례를 올릴 수 있었야만 하는데 그 아무
도 없는가?]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습니다.]
하나같이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여기는 듯 애석해 하는 표정들이 역력
했다. 위소보는 기뻐서 말했다.
[여러 친구들, 내가 마다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에게 자매가 없지 않
소? 그러니 우리들을 놓아 주시구려.]
오립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네. 사내대장부가 일언을 내뱉는다면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라
도 뒤쫓아갈 수 없다네. 오늘 반드시 혼례를 올려야 하네. 그렇지 않을
때는 살신태세(煞神大歲)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서 이곳의 모든 사람들
이 하나 같이 비명에 죽음을 당할 것이니 이와 같은 장난을 칠 수가 없
는 것일세. 좋아, 그대는 바로 그녀와 혼례를 올리도록 하게.]
그는 아가를 손가락질했다. 아가와 위소보는 동시에 부르짖었다.
[안 돼요. 좋지 않소이다.]
오립신은 노해 부르짖었다.
[뭐가 안 된다는 것이며 좋지 않다는 것인가? 소저, 그대는 나의 형제
와 흔례를 올리겠는가, 아니면 이 소영웅과 혼례를 올리겠는가? 그대
스스로 한 사람을 선택하도록 하시오.]
아가는 아름다운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 다 싫어요!]
오립신은 노해 부르짖었다.
[이제 와서도 여전히 이러쿵저러쿵하며 거절을 하다니. 시간이 다 되었
소. 이와 같은 좋은 시간을 놓치게 된다면 흉신이 강림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이곳에 살아 남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없소이다. 이봐,
아삼, 아구, 이 두 어린 사람들은 혼례를 올리려고 하지 않으니 그들의
코를 모두 잘라 내도록 하게.]
오표와 한 명의 사내가 일제히 대답하고는 강철 칼을 쳐들었다.
그리고는 그 칼등을 아가의 코에 대고 몇 번 문질렀다.
아가는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으나 코를 잘리게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극히 흉칙하게 되는 것이라 그만 놀라 얼굴의 핏기가 싹 가셔지고 말
았다.
위소보는 말했다.
[우리 사저의 코를 자르지 말고 내 것을 자르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오립신은 말했다.
[두 사람의 코를 잘라 살신에게 제사를 올려야 하는데 그대 것이라면
하나뿐이지 않는가? 이봐, 정가. 그대의 코를 잘라 이 소저의 것을 대
신하도록 하지, 좋은가?]
아가는 눈을 들어 정극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초리에는 애걸하는 빚이 서려 있었다.
정극상은 고개를 돌리고 감히 그녀를 쳐다보지 못했으나 고개를 가로저
었다. 오립신은 말했다.
[그 녀석은 응하지 않는데 그대의 사제는 응하려 하는군. 흐흐, 그대의
사제야말로 그대에 대해서 너무나 잘 대해 주는군. 이런 사람에게 시집
을 가지 않고 누구에게 시집을 가겠단 말인가? 자, 혼례를 올리도록 하
고 풍악을 울려라!]
징소리와 북소리가 이는 가운데 오표가 다가서서는 가짜 신부의 머리
위에 덮힌 붉은 수건을 들어서는 아가의 머리에 덮어 씌우고는 그녀의
묶인 손을 풀어 주었다.
아가는 대뜸 주먹질을 내질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주먹은 오표
의 가슴팍에 적중되었으나 다행히 그녀의 주먹에는 내력이 실려 있지
않아 적중되었다고 하지만 별로 아프지 않았다.
오표는 재빨리 강철 칼을 들고 그녀의 뒷덜미에 갗다댔다.
오립신은 예를 진행시켰다.
[신랑 신부는 하늘에 절을 하시오.]
아가는 뒷덜미의 살갗이 서늘해지면서 약간 아픈 것을 느끼고 어쩔 수
없이 위소보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바깥쪽을 향해 큰절을 했다.
오립신은 다시 호통을 내질렀다.
[신랑 신부는 땅에 큰절을 하시오.]
오표는 그녀의 몸을 돌려서는 안쪽을 향해 꿇어엎드려 절을 하도록 시
켰다. 그리고 부부가 교배(交拜)하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엎드린 채 몇 번 큰절을 했다.
오립신은 껄껄 소리내어 크게 웃으며 부르짖었다.
[신랑 신부는 중매인에게 사의를 표하시오.]
아가는 극도로 치미는 분노에 별안간 다리를 들어서는 그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이 발길질은 가볍지 않아 오립신은 아, 하는 소리와 더불어 몇 걸음 물
러서더니 연신 기침을 했다.
그러나 그는 웃으며 말했다.
[신부가 꽤 흉악하군. 중매인에게도 발길질을 하다니.]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사당 밖에서 잇따라 피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동서남북에서
모두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적어도 사오십 명은 될 것 같았다.
오립신은 즉시 웃음을 거두고 나직이 호통을 내질렀다.
[촛불을 꺼라!]
사당 안은 즉시 칠흑과 같은 어둠에 휩싸이게 되었다.
위소보는 아가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나직이 말했다.
[밖에 적이 왔소.]
아가는 울화가 치밀고 마음이 쓰라렸다. 그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나는.. 그대와 천지신명께 절을 했어요.]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나야말로 원하는 일이었소. 그러나 혼례 치고는 너무 초라했소. 그게
유감이라면 유감이로군.]
아가는 노해 부르짖었다.
[진짜로 혼례를 올렸다고 할 수 없어요. 그대는 진짜인 줄 아세요?]
위소보는 말했다.
[어찌 거짓일 리가 있겠소? 이것이야말로 생쌀을 익은 밥으로 끓여 놓
은 것이고 나무는 이미 개로 변한 것이 아니겠소?]
아가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뭐가 나무를 이미 개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나무는 이미 배로 만들어
졌다고 해야 맞아요.]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소, 그렇소. 나무는 이미 배로 만들어졌소. 부인의 학문이 훌륭하
니 이후 지아비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도록 하시오.]
아가는 그가 놀랍게도 얼굴 가죽 두껍게 자기를 부인이라 부르고 스스
로를 지아비라 부르자 그만 마음속으로 다급해져서는 울음을 터뜨렸다.
第64章. 야만인의 출현
이때 사당 밖에서 고함소리가 크게 진동했다. 수십 명이 일제히 고함을
질러대는데 짐승들이 울부짖는 것 같기도 하고 황소가 울부짖는 것 같
기도 했다. 도대체 무엇이라고 떠들어대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
가는 속으로 겁이 더럭 나서 위소보 쪽으로 몸을 기대어 왔다.
위소보는 팔을 뻗쳐 그녀를 안으며 나직이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소. 아무래도 한 떼의 서장 라마들이 공격을 해온 것
같소.]
아가는 말했다.
[이걸 어쩌죠?]
위소보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살그머니 신감 뒤로 가서 숨었다. 벌안
간 불빚이 눈부시게 비춰지는 가운데 수십 명이 우르르 사당으로 몰려
들어왔다.
모두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위소보와 아가는 그 모양을 바라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사람들은 얼굴에 알록달록한 칠을 했고 머리에는 새의 깃털을 꽂고
있었다. 그리고 상반신은 벌거숭이인데 허리께에는 짐승의 가죽을 두르
고 있었으며 가슴팍에도 꽃무늬를 문신해 넣고 있었다.
한 떼의 미개인들이었다.
아가는 이 한 떼의 오랑캐들이 사람 같지 않고 도깨비 같지도 않은데
하나같이 얼굴이 흉칙한 것을 보고 더욱더 무서워 위소보의 품속에 파
고들어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오랑캐들은 버럭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앞장 선 사람이 호통을 내질렀
다.
[한나라 사람! 나쁘다. 모두 죽여야 한다. 오랑캐, 좋은 사람이다. 살
인을 하여야 한다. 고화토로 아파사리!]
그러자 오랑캐들은 오랑캐 말로 소리내어 크게 부르짖었다.
오랑캐 말들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오립신은 운남성 오랑
캐의 말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한나라 사람으로 좋은 사람이다. 서로 죽이지 않도록 하자.]
오랑캐의 수령은 말했다.
[한나라 사람 좋지 않다. 모두 죽여라! 고화토로 아파사리!]
오랑캐들은 일제히 부르짖었다.
[고화토로! 아파사리!]
그들은 칼과 창을 들고 공격을 해왔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들고 맞아 싸웠다.
수합을 싸우고 나서 오립신 등은 하나같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유심
히 보니 오랑캐들은 무예에 정통하고 있었으며 무기로서 펼치는 초식도
매우 규칙적이어서 한편으로는 공격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수비를 하는
데 모두 법도에 들어맞았으며 결코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고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었다.
그들과 다시 몇 초를 더 교환하자 위소보와 아가도 알아볼 수가 있었
다. 오립신은 즉시 싸우면서 부르짖었다.
[모두 조심해라! 이 오랑캐들은 우리 한나라의 무공에 익숙하다. 결코
경시할 수 없다!]
우두머리 오랑캐가 부르짖었다.
[한나라 사람이 사람을 잘 죽이는데, 오랑캐도 살인을 할 줄 안다. 한
나라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화토로 아파사리!]
오랑캐들은 사람 수가 많았고 또 무공도 무척 뛰어난 편이었다.
목왕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 대 삼이나 혹은 일 대 사의 싸움을 벌
여야 했다. 순식간에 잇따라 위기를 맞았다.
오립신은 칼을 휘둘러 그 우두머리 오랑캐와 매서운 싸움을 벌였는데
놀랍게 털끝만치도 유리한 싸움을 펼칠 수가 없어 싸우면 싸울수록 놀
라게 되었다.
별안간 아악, 하는 고함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두 명의 제자가 상
처를 입고 쓰러졌다.
잠시 후 오표 역시 엽차에 다리를 찔려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세 명의 오랑캐들이 달려들어 그를 사로잡고 말았다.
얼마 되지 않아 십여 명의 목왕부 사람은 모조리 쓰러졌다.
정극상은 이미 온몸에 상처를 입고 있었는데 약간 저항하다가 사로잡혔
다.
오랑캐들은 몸에 지니고 있던 소의 힘줄로 만든 줄로 사람들을 묶었다.
오랑캐의 두목은 펄쩍펄쩍 뛰면서 큰소리로 오랑캐 말을 지껄이면서 오
립신과 싸움을 벌였다.
오립신은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자기 혼자 도망을 치자니 위소보와 다른 제자가 걱정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있는 힘을 다해서 매섭게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우두머리를 제압해서 오랑캐들을 협박해서 사람을 구출할 결심
이었다.
벌안간 그 우두머리는 오립신의 머리를 겨냥하여 칼을 내려쳤는데 오립
신도 칼을 들어 이를 막았다.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오립신은 손과 팔
이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별안간 등 뒤에서 하나의 막대기가 후려쳐 오는지라 그는 급히 몸을 날
려 피하려고 했다.
그 순간 그 오랑캐 우두머리는 칼을 홱 뒤짚더니 어느덧 그의 목에 칼
을 갗다대고 부르짖었다.
[한나라 사람 졌다. 오랑캐 사람 지지 않았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오랑캐 사람은 정말 아둔하군. 이겼다는 말을 할 줄 몰라서 그저
지지 않았다는 말만 하는구나.)
오립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길게 탄식을 하고 나서 칼을 던지고 포박
을 받았다.
오랑캐들은 횃불을 들고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위소보는 이제 몸을 숨겨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아가를 데리고
밖으로 달려나오며 부르짖었다.
[오랑캐 좋은 사람, 우리 두 사람 모두 오랑캐다. 고화토로 아파사리!]
우두머리는 손을 뻗쳐서 아가의 뒷덜미를 잡았다. 다른 세 명의 오랑캐
가 달려들어 위소보를 얼싸안았다.
위소보는 그 바람에 겨우 오랑캐 말을 반쯤 흉내내다가 입을 다물지 않
을 수 없었다.
오랑캐 두목은 그를 발견하더니 갑자기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리고 손
을 뻗쳐서는 그를 얼싸안으며 말했다.
[희호아포(希呼阿布), 기리온등(奇里溫登).]
그는 위소보를 안고 사당을 나왔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아가를 향해 부르짖었다.
[낭자, 이 오랑캐가 나를 죽이려 하고 있소. 그대는 나를 위해 수절을
하면서 개가하지 마시오. 더군다나 저..]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는 오랑캐에게 안겨서는 이미 대문 밖
을 나서고 있었다.
오랑캐의 우두머리는 십여 장 밖으로 달려가더니 위소보를 내려놓고 말
했다.
[계 공공, 계 공공이 어떻게 이곳에 계시오?]
그 어조에는 놀라고 기뻐하는 빚이 서려 있었다.
위소보는 놀람과 기쁨에 얽혀서 말했다.
[그대는.. 그대라는 오랑캐는 나를 아시오?]
그 사람은 웃었다.
[소인은 양일지입니다. 평서왕부의 양일지 말입니다. 계 공공은 몰라보
시겠죠? 하하하!]
위소보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조용히 입을 열고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자 양일지가 그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
[우리 좀더 멀찌감치 가서 이야기를 나누지요.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
도록 말입니다.]
그는 다시 이십여 장을 나아가더니 그제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양일지는 말했다.
[이곳에서 계 공공을 만나다니 정말 반갑기 짝이 없습니다.]
위소보는 물었다.
[양형은 어떻게 이곳으로 왔소? 그리고 또 어째서 고화토로 아파사리로
변장을 했소?]
양일지는 물었다.
[한 때의 녀석들이 하간부에서 모임을 갗고 우리 왕야에 대해서 불리한
행동을 하려고 했소이다. 왕야는 그와 같은 소문을 듣고 소인을 보내
알아보도록 한 것이외다.]
위소보는 놀라서는 재빨리 생각을 굴리며 말했다.
[지난 번 목왕부의 그 한 몌의 사람들이 궁 안으로 들어가 황상을 찔러
죽이려고 했으며 평서왕을 모함했었는데..]
양일지는 재빨리 그 말을 받았다.
[그때는 정말 공공께서 높으신 의리를 내세워 황상에게 상주하여서 평
서왕의 억울함을 씻어 주셨지요. 우리 왕야께서는 매우 감격해 하시며
종종 그때의 일을 들먹이면서 그저 공공께 친히 사의를 표할 날이 있기
를 바라고 있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고맙다는 말은 감당할 수가 없소. 왕야가 그토록 나를 높이 사주니 내
가 황상의 곁에 있는 이상 어떤 일이고 간에 왕야에게 조그만 도움이라
도 즐 수 있지 않겠소? 이번에 황상께서는 반적들이 하간부에서 모임을
갖고 평서왕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는데 내 스스로 용감하
게 나서서 이 사실을 알아보러 나온 것이외다.]
양일지는 크게 기뻐서 말했다.
[원래 황상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군요. 이제 반적들의 간계는 성사될
수 없게 되었으니 그거 정말 잘되었습니다. 소인은 왕야의 명을 받고
그 빌어먹을 구두대회(狗頭大會)인가 하는 모임에 끼어들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들이 각 성의 맹주를 추대하고 우리 왕야를 해치려고 하는 것
을 알았소이다. 솔직히 계 공공께 말씀드리자면 우리들은 속으로 여간
걱정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 들어오는 창날은 피하기 쉬워도 뒤
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방비하기 어렵습니다. 반적들이 만약 감히 운남
으로 와서 손을 쓴다면 만 명이 오면 만 명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
나 두려운 것은 그들이 지난 번 목씨 집안의 도적들처럼 못된 짓을 마
구 해서는 우리 왕야에게 화를 전가시키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
것은 그야말로 무한한 후환이 될 것입니다.]
위소보는 가슴을 한번 치고 나서 고개를 번쩍 쳐들고서 말했다.
[양형은 왕야에게 조금도 근심할 것이 없다고 말씀을 드려 주시오. 내
가 북경으로 되돌아가면 바로 그 구두대회의 자초지종을 황상에게 상세
히 상주하겠소. 그들이 만약 평서왕과 맞선다면 그것은 바로 황상과 맞
서는 것이외다. 그들이 만약 평서왕을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더욱더 왕
야가 황상에 대해서 충성스럽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셈이조 황상께서 기
뻐하시게 된다면 평서왕은 말할 것도 없고 그대 양형에게도 중히 상을
내리게 될 것이며 벼슬을 올려 재물을 모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양일지는 기뻐서 말했다.
[모두가 계 공공께서 애써 주신 덕택입니다. 소인은 벼슬이 오르거나
재물을 모으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왕야는 선친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풀었고 또 한때 소인의 전 가족 목숨을 살려 주었습니다. 선친께서
돌아가실 때 유언을 남기셨는데 소인더러 맹세코 죽을 때까지 왕야를
보호하여 드리라는 분부를 했습니다. 계 공공, 공공께서 이곳에 온 것
은 바로 목씨 집안 도적들의 음모를 엿보려는 것이었습니까?]
위소보는 무릎을 치며 말했다.
[양형, 그대는 무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정말 일을 귀신처럼 알아맞
추는구려. 정말 탄복했소이다. 탄복했소이다. 나와 사저는 변장을 하고
서 그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그만 그들에
게 들키고 말았구려. 그래서 나는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게 되었는데
그들은 정말로 알고 오히려 나와 사저를 그 자리에서 당장 혼례를 올려
주는 것이 아니겠소. 하하하, 이것이야말로 전화위복이 된 셈이외다.]
양일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은 태감인데 무슨 혼례를 올린다는 것이지? 아, 그렇군. 그대와
그 소저는 한 쌍의 연인으로 변장을 했기 때문에 그들이 믿게하도록 속
인 것이로군.)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그 요두사자는 무공이 뛰어나고 용기는 있으되 지략이 없는 사람입니
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들이 오랑캐로 가장한 것은 바로 그들을 잡기 위해서요?]
양일지는 말했다.
[목씨 집안은 우리 왕부와 바다와 같이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번 그들에게 콘 화를 입게 되었으나 줄곧 밑천을 뽑지 못한 터였
지요. 그런데 이번 구두대회에서 다시 그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소
인은 속으로 헤아려 보았지요. 만약 그들이 경기 일대에서 사건을 일으
키게 되고 황상께서 아시게 된다면 아무래도 우리 왕야를 나무라실 것
이며 평서왕부의 사람이 서울 부근에서 왕법을 지키지 않고 사람을 죽
여서 일을 일으키려 한다고 할 것 같았습니다.]
위소보는 엄지손가락을 내밀고 칭찬의 말을 했다.
[양형의 그와 같은 계책은 정말 고명하기 이를 데 없소이다. 그대들이
오랑캐로 변장을 하고서 고화토로 아파사리라고 지껄였으니 목씨 집안
의 한 패거리들을 모조리 죽인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저 오랑캐
가 반란을 일으켰구나 하고 여길 뿐 그 누구도 평서왕을 의심하지는 않
을 것입니다.]
양일지는 웃었다.
[바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와 같이 이상야릇한 모습으로 분장
을 하게 된 데 대해서 공공께서는 웃으실 것입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어찌 웃을 수 있겠소? 나는 마음속으로 그야말로 부러워서 죽을 지경
이었소. 나도 정말 옷을 벗고는 얼굴에 얼룩덜룩하게 그리고서 그대들
과 더불어 한바탕 크게 뛰어 놀았으면 좋겠소이다.]
양일지는 웃었다.
[공공꼐서 흥미가 있으시다면 우리가 당장 분장을 시켜 드리죠.]
위소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안 되겠소. 내 마누라가 나의 그와 같은 야릇한 모양을 본다
면 반드시 크게 성질을 부릴 것이외다.]
양일지는 말했다.
[공공께서는 정말 부인을 맞아들이셨습니까? 그 도적들이 강요해서 가
장을 한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한두 마디 말로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위소보는 화제를 바꾸어 입을 열었다.
[양형, 나는 그대와 퍽이나 인연이 깊다고 느껴지는구려. 그대가 만약
업신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게 된다면 공공이니 소인이니 하는 거북스러운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니겠소.]
양일지는 크게 기뻐했다. 첫째로 평서왕은 그렇지 않아도 위소보에게
바라는 바가 있었고 앞으로 많은 일에 있어서 위소보가 황제 앞에서 평
서왕을 위해 변명을 해주어야 했다. 그리고 둘쩨로 위소보라는 계 공공
의 사람됨이 호방하고 너그러우며 매우 의리가 깊다고 생각된 것이다.
그날 강친왕부에서 자기에게 매우 깍듯이 대해 주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양일지는 말했다.
[그것은 바라던 바이지만 분에 넘치는 일 같아서요.]
위소보는 말했다.
[뭐가 분에 넘친다는 것이오? 우리 키를 한번 재 봅시다. 그대가 큰지
아니면 내가 큰지?]
양일지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두 사람은 즉시 무릎을 꿇고서 흙을 모아 향을 삼고 여덟 번 큰절을 하
고 이때부터 형제로 칭호하게 되었다.
양일지는 말했다.
[형제, 우리 두 사람은 금후 골육과 다름없는 비범한 관계이네. 그러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 형은 역시 그대를 공공이라 불러 다른 사람의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하겠네.]
[그야 물론이죠. 형님, 목씨 집안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작정입니
까?]
양일지는 말했다.
[나는 그들을 운남으로 데리고 가 천천히 고문을 할 작정이네. 그리하
여 그들이 우리 왕야를 모함하려고 했다는 실토를 받아 낸 이후에 북경
으로 압송해서 황상으로 하여금 평서왕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알도록 하
겠네. 그렇게 해야만 형제가 먼젓번에 평서왕을 애써 변명해 준 사실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좋습니다. 매우 좋습니다. 형님, 그런데 요두사자가 실토를 할
것 같습니까?]
양일지는 말했다.
[요두사자 오립신이란 사람은 강호에서 퍽이나 명망이 뛰어나며 또 소
문에 듣건대 사람됨이 매우 굳건하다고 하더군. 따라서 그는 아마 실토
를 하지 않을 것이네. 나는 그를 호걸로 높이 사기 때문에 그를 괴롭히
지 않을 작정이라네. 그러나 나머지의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은 형벌에
견디지 못해 실토를 하겠지.]
위소보는 말했다.
[맞습니다. 그 계책은 훌륭하군요.]
양일지는 그의 어조가 얼렁뚱땅 얼버무리려는 점이 있는 것을 느끼고
말했다.
[형제, 그대와 나는 이미 아닐세. 그대가 만약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
한다면 아무쪼록 솔직히 알려 주기 바라네.]
위소보는 말했다.
[뭐 적절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은 없습니다만 소문에 듣자니까 목씨
집안에는 목검성이라 불리는 반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가 하면 경
배오룡(硬背,烏龍)인가 하는 유 무엇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도 하더
군요.]
양일지는 말했다.
[철배창룡 유대홍일세. 그는 목검성의 사부라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죠. 형님의 기억력은 무척 좋군요. 황상께서는 그들 두 사람의 동
정을 알아내라고 분부하셨는데 형님은 그들마저도 잡았습니까?]
양일지는 말했다.
[목검성 역시 하간부에 갔있네. 우리들은 줄곧 뒤쫓아왔었는데 헌현(獻
縣)에 이르러 그를 놓치고 말아 그가 어디로 숨었는지 모르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다민 난처하군요. 내가 조금 전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여 그 요
두사자를 속여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사자로 만들어서 나를 데리고 그들
의 소공야를 만나보도록 해주겠다고 말했거든요. 나는 본래 그들이 어
쩨서 음모를 꾸며 평서왕을 모함하려고 했는지 알아내어 황상에게 상주
하려고 하던 참입니다. 그러나 형님께서 자신이 있다면 그들의 음모를
고문으로 밝혀 내는 것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이 아우가 모
험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양일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별로 대단치 않은 몇 명의 인물들을 고문한다고 해서 참된 내막
을 알아낸다고 볼 수 없다. 설사 알고 있다 하더라도 목씨 집안의 그들
도적들은 뼈대가 매우 여무니 실토를 한다고는 볼 수가 없다. 더군다나
왕야 스스로 변명을 하는 것은 황상께서 친히 파견하여 조사토록 한 사
람이 진상을 알아내어 상주하는 것에 비해서 호소력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들이 모르는 척하고 있는데 계 형제가 스스로 황상에게
말씀을 드려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훨씬 나은 일이지.)
그는 즉시 위소보의 손을 잡고 말했다.
[형제, 그대의.방법이 훨썬 고명하군. 모든 점에 있어서 그대의 말을
따르겠네. 우리들이 어떻게 목씨 집안의 그 도적들을 놓아 주어야만이
그들로 하여금 의심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위소보는 말했다.
[그거야 형님이 방법을 강구해야지요.]
양일지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이렇게 하세. 그대가 사당으로 도망쳐서는 일부러 용기 있게 나서서
그대의 사저를 구하는 척하게. 그러민 내가 뒤쫓아오면서 우리 두 사람
은 마구 오랑캐의 말을 지껄인단 말일세.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하고 나
서 나는 그대에게 설복을 당해서 공손하게 절을 하고 따라가는 거지.
그렇게 된다면 전혀 흔적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 아니겠는가?]
위소보는 웃었다.
[정말 묘합니다. 이 계 공공이 오랑캐의 말에 정통해야 되겠군요. 그런
데 그와 같은 일은 이야기로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명황(唐明皇)의
아래에 이 무엇이라고 하는 학문 깊은 선생이 있어서 술을 마시기만 하
면 한 편의 문장을 지어내는데 그 문장을 보고 뭇 오랑캐들은 깜짝 놀
라서는 똥오줌을 바지 가랑이에 갈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양일지는 웃었다.
[그것은 이태백이 술에 취해 초서를 써서 오랑캐를 놀라게 한 것이지.]
위소보는 손삑을 쳤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이 계 공공이 정신을 차려서 오랑캐를 놀라게 하
는 말을 한다면 참으로 대단한 것이죠. 형님, 그러나 우리들은 반드시
그럴싸하게 해내야 합니다. 형님은 나에게 거짓으로 주먹으로 치고 발
로 차는 척하십시오. 그러면 저는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게 됩니다.
아, 그렇군요. 나의 윗몸에는 몸을 보호하는 보의가 있으니 칼과 창에
도 찢어지거나 구멍이 뚫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형님은 저에게 몇 번
칼질을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내력을 돋구지 않는다면 오장육부
에 상처를 입지 않을 테니까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양일지는 말했다.
[형제에게 그와 같은 보의가 있다니 그것 참 잘되었네.]
위소보는 큰소리를 쳤다.
[황상께서는 나를 보내 반적들의 역모를 조사하도록 하시면서 그들에게
내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할까봐 특별히 당신 몸에서 그서양 홍모국(紅
毛國)에서 진공을 해온 보의를 벗어서는 나에게 내려 주셨지요. 형님,
나에게 상처를 입힐까 두려워하지 마시고 먼저 몇 번 칼질을 해서 시험
을 해 보십시오.]
양일지는 칼을 뽑아들고 그의 왼쪽 어깨를 가볍게 그어댔다. 과연 칼날
은 그저 그의 겉옷을 약간 찢어 놓았을 뿐이었고 살 속으로는 도저히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좀더 힘을 주어 다시 그의 왼쪽 어깨에 가볍게 칼질
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조금도 손상을 입힐 수가 없어서 칭찬의 말을 했다.
[정말 훌륭한 보의로군. 훌륭한 보의야!]
위소보는 말했다.
[형님, 안에 정가라는 녀석이 있습니다. 그 녀석은 옷차림만 화려하고
겉모습만 번지르르할 뿐 쓸모없는 공자 나리입니다. 이 녀석은 언제나
나의 사저에게 눈독을 들이고 히히덕거리지요. 이 형제는 그를 보기만
해도 화가 난답니다. 그러니 형님이 잡아가는 것이 정말 좋겠군요.]
양일지는 말했다.
[내가 일장에 그를 쳐죽이도록 하겠네.]
위소보는 말했다.
[죽여서는 안 됩니다. 죽여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은 황상께서 요구하
는 사람입니다. 장래에 큰일을 도모하는데 쓸모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
러니 형님께서 그를 잡아가시어 훌륭히 지키되 그를 괴롭히지 않도록
하시며 또한 그에게 어떤 일을 캐내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이
삼십 년 후 내가 형님에게 요구할 때 형님이 사람을 보내 그를 북경으
로 보내 주시면 됩니다.]
양일지는 말했다.
[좋아. 내 그대를 위해 적절하게 처리하지.]
그는 갑자기 언성을 높여서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호로회도(葫魯希都), 애리파랍(愛里巴拉)! 허로허로(噓老噓老).]
그는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한동안 이야기를 했으니 아무래도 그들이 의심을 하게
될 것 같군.]
위소보 역시 날카롭고 뽀족한 음성으로 크게 소리내어 잇따라 오랑캐
말을 했다. 양일지는 웃었다.
[형제의 오랑캐 말이 이 형보다 훨씬 유창하네 그려.]
위소보는 웃었다.
[그야 물론이죠. 이 형제가 과거 오랑캐 나라에 떠돌게 되었을 때 오랑
캐의 공주가 저를 부마로 삼으려고 했으니 그 오랑캐의 말이 몸에 배었
지요.]
양일지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위소보는 다시 말했다.
[형님, 그런데 한 가지 매우 난처한 일이 있는데 형님이 저를 도와 방
법을 강구해 주셔야겠습니다.]
양일지는 자기 가슴을 치며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형제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이 형은 목숨을 버려서까지 도울 걸세. 그
대가 무슨 분부할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받들어 모시겠네.]
위소보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일은 말하자면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운 노
릇입니다.]
양일지는 말했다.
[형제가 이야기를 해보게. 내가 그대를 도와 생각을 해보도록 하지. 만
약 이 형이 해결하지 못할 일이라면 내가 우리 왕야에게 청을 드리겠
네. 수만의 군사와 기백만 냥의 은자쯤은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고 끌
어낼 수 있다네.]
위소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수만의 군사나 산더미처럼 쌓인 금은은 아마도 쓸모가 없을 것 같습니
다. 그것은 저의 사저 때문입니다. 그녀는 나와 더불어 혼례를 올리도
록 강요를 받게 되었는데 속으로는 지극히 싫어하고 있더군요.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형님에게 어떤 절묘한 방법이 있어 저를 도와 생
쌀을 익혀 익은 밥이 되도록 하고 나무를 깎아서 이미 배가 만들어지도
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양일지는 그만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알고 보니 그랬었구나. 나는 또 무슨 큰일이라구? 그저 계집애를 상대
하는 것이었구나. 그러나 그대는 태감인데 어찌하여 처를 맞아들이려고
하지? 그렇군. 다른 사람의 말을 듣건대 명나라 때의 태감들은 종종 및
명의 마누라를 거느렸다고 하지 않던가? 형제도 아마 그와 같은 수작을
부려서 그저 재미를 좀 보려고 하는 모양이로군.)
그는 위소보가 어릴 적부터 정신을 엉뚱한 데에 빼앗겼다는 사실에 대
해서 속으로 무척 안타깝게 생각했다.
[형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모든 일이 다 순조롭게 되라는 법은
없다네. 옛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대영웅이고 대호걸인 사람들도 몸에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네. 그러나 너무나 개의치 않도록 하게. 자,
이제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 보세.]
위소보는 말했다.
[좋습니다.]
위소보는 다시 큰소리로 오랑캐 말을 했다. 그리고는 달음질을 쳐 사당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양일지는 칼을 들고 달려오며 역시 큰소리로 오랑캐 말을 했다.
대청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는 위소보를 덮쳐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호로희도, 애리파랍, 허로허로, 어쩌구저쩌구 씨부렁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오립신을 가리키며 또 한편으로는 아가를 손가락질
했다. 오립신과 아가 등은 놀람과 기쁨의 감정이 서로 교차되었으며 마
음속으로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가 오랑캐 말을 알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오랑캐들이 손을 거두고
돌아가도록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양일지는 칼을 쳐들고 아가의 머리를 겨냥하고 말했다.
[여인, 좋지 않다. 죽여야 한다.]
위소보는 재빨리 말했다.
[마누라다. 나의 것이야! 죽이면 안돼!]
양일지는 말했다.
[마누라? 너의 것? 죽이지 말라고?]
위소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누라, 나의 것! 죽이지 마라!]
양일지는 대노해서 호통을 내질렀다.
[마누라, 너의 것? 죽이지 말라? 그럼 너를 죽인다.]
위소보는 말했다.
[좋다. 마누라 나의 것, 죽으면 안 된다. 나를 죽여라!]
양일지는 휙, 하니 칼을 들어서는 위소보의 가슴팍을 내려쳤다.
이 칼을 내려치는 힘은 대단해서 주위에는 칼바람이 획획 일었다.
그러나 칼날이 위소보의 몸에 닿는 순간 즉시 거두어들였고 위소보가
손목을 떨치자 그 칼은 오히려 되튕겨 나갔다.
그는 일부러 깜짝 놀란 듯 가장하고는 펄쩍 뛰어오르며 잇따라 세 번
칼질을 해서는 의소보의 옷자락에 세 개의 구멍을 내놓고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너.. 보살이지, 죽일 수 없지?]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보살이다. 죽일 수 없다.]
양일지는 엄지손가락을 내밀고 말했다.
[그대, 보살, 아니다. 대 영웅이다.]
그는 오립신 등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한인, 죽일까?]
위소보는 손을 흔들었다.
[친구, 나의 것이다. 죽이지 마라!]
양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가에게 물었다.
[너, 마누라, 대영웅의 것이지?]
아가는 부인을 하고 싶었으나 그의 손에 들린 시퍼런 강철 칼을 보고
감히 부인할 수가 없었다.
양일지는 칼을 벼락같이 내려쳐서는 공탁을 두 쪽으로 쪼개 놓고는 호
통을 쳤다.
[지아비, 너의 것?]
그러면서 위소보를 가리켰다.
아가는 어쩔 수 없이 나직이 말했다.
[지아비 나의 것!]
양일지는 껄껄 소리내어 웃더니 아가를 들어서 위소보의 앞으로 건네주
었다.
[마누라, 너의 것! 안아라!]
위소보는 두 팔을 벌리고 아가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마누라, 나의 것! 안았다.]
양일지는 정극상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아들, 너의 것?]
第65章. 정극상의 사부 풍석범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들, 아니다. 나의 것 아니다.]
양일지는 큰소리로 몇 마디 오랑캐 말을 하더니 정극상을 붙들고 달려
나갔다. 그리고 입으로 연신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의 수하들은 우르르 몰려 나갔다. 곧이어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
리면서 그들은 떠나가는 것이 아닌가.
아가는 놀란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위소보가 두 팔
로 여전히 자기의 허리를 얼싸안고 놔주지 않는 것을 보고 말했다.
[손을 놔요.]
위소보는 말했다.
[마누라, 나의 것. 안았다.]
아가는 수치와 분노에 얽혀서는 힘주어 그의 팔에서 벗어났다.
위소보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한 자루의 강철 칼을 들고 오립신들을
묶어 놓은 밧줄을 모조리 끊었다.
오립신은 말했다.
[그 오랑캐들은 무공이 매우 뛰어나군. 신랑이 오랑캐 말을 할 줄 알아
서 천만다행이야. 거기다가 금종조(金鐘 ), 철포삼(鐵布衫)과 같은 무
공을 익혀 칼과 창이 들어가지 않으니 모두들 그대의 힘으로 구원을 받
은 셈이 되었소.]
위소보는 말했다.
[그들 오랑캐들도 무공이 고강하지만 두뇌는 단순하기 그지없었소. 내
가 아무렇게 이야기를 해도 그들은 모두 믿는구려.]
아가는 말했다.
[정 공자가 그들에게 잡혀 갔는데 어떻게 구하죠?]
이때 그 가짜 신부가 갑자기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나의 지아비를 오랑캐들이 잡아 갔으니 반드시 익혀서 먹어 치우겠
군.]
그는 소리내어 울었다.
오립신은 위소보에게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실례지만 영웅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위소보는 말했다.
[감당할 수 없소이다. 불초는 성이 위씨외다.]
오립신은 말했다.
[위 상공과 진씨 집안의 낭자가 오늘 혼례를 올리게 되었으니 조그만
예물을 올릴까 합니다. 보잘것없는 것이나 웃으며 받아 주십시오.]
그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 넣더니 금으로 만들어진 조그만 두 개의 원보
를 꺼냈다. 위소보는 말했다.
[정말 고맙소.]
그는 손을 뻗쳐 받아들었다. 아가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발을 굴렀다.
[아니에요. 정말이라고 할 수 없어요.]
오립신은 웃었다.
[그대들은 천지신명에게도 절을 하지 않았소? 그리고 조금 전 그대는
오랑캐에게 지아비는 나의 것이라고 했는데 어찌 또 억지를 쓴단 말이
오? 자, 이제 신랑과 신부가 동방화촉을 밝혀야 할 차례니 우리들은 이
만 폐가 되지 않도록 실례를 하겠소.]
그는 손을 내저으며 오표 등과 성큼성큼 사당에서 나갔다.
삽시간에 그토록 커다란 사당 안은 조용해지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가는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분하기도 했
다. 그래서 위소보를 한번 몰래 쳐다보며 자기가 지아비는 내 것이라고
한 말을 상기하고는 갑자기 탁자 위에 엎드려서 울음을 터뜨리며 발을
굴렀다.
[모두 그대가 나쁜 탓이에요. 모두 그대가 나쁜 탓이에요.]
위소보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소, 그렇소. 모두 내 잘못이오. 언제 내가 다시 방법을 강구해서
정 공자를 구해 내면 그때는 그대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하겠지?]
아가는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그대는.. 그대는 그를 구해 낼 수 있나요?]
붉은 촛불이 흔들거리는 아래 그녀의 화사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에는
수정과 같이 맑은 몇 방울의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진정 백옥에 구슬
을 박았다 하더라도 그 얼굴의 아름다움과는 견줄 수가 없었고 갓 떨어
진 이슬을 머금고 있는 매괴화라 하더라도 그 청초한 아름다움에는 비
길 바가 아니었다.
위소보는 그만 그 모습에 황홀해져서는 대답할 것을 잊고 있었다. 아가
는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내 그대에게 묻고 있잖아요. 어떻게 정 공자는 구출해 내죠?]
위소보는 그제서야 번쩍 정신을 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오랑캐 우두머리는 그들이 한번 나오면 맨손으로는 되돌아갈 수가
없다고 했소. 반드시 한 사람을 잡아서 동굴로 데리고 가 삶아서 모두
함께 나누어 먹는다고 했소이다..]
아가는 놀라 부르짖었다.
[삶아서 모두 나누어 먹는다구요?]
그러자 그 신부가 울부짖던 소리가 떠올라 더욱더 간담이 서늘해졌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소. 처음에는 그대의 살갗이 엷고 또 살이 회고 부드러워 맛이 가
장 좋으리라고 생각하여 그들은 그대를 잡아가서는 먹으려고 했었
소...]
아가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는 문밖을 한번
쳐다보았다. 혹시나 오랑캐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가 싶어서 더럭 겁
이 났던 것이다.
위소보는 계속 말했다.
[내가 그대를 내 마누라라고 하자 그들은 그대를 놓아 준 것이오.]
아가는 급히 말했다.
[정 공자는 그들에게 잡혀갔으니 그렇게 된다면 삶아져서.. 삶아져서..
그들에게.]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소. 내가 용기있게 자진하여 나서서 그들로 하여금 차라리 나를
먹으라고 한다면 정 공자를 바꾸어 내올 수 있을지 모르지.]
아가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가서 그를 바꾸어 오도록 해요.]
그 한 마디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는 자기가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아름다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위소보는 배신감이 들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못된 계집애가 자기의 지아비를 반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구나. 지아비를 오랑캐들에게 삶아 먹히도록 하고 자기의 간부를
구해 내려고 하는군.)
그는 냉랭히 말했다.
[설사 내가 가서 그를 바꾸어 데려 온다고 하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오.]
아가는 급히 말했다.
[어째서.. 어째서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위소보는 말했다.
[정 공자는 이미 그 시골 소저와 혼례를 올리지 않았소? 그대가 친히
본 바가 있잖소? 그에게는 이미 정식으로 맞아들인 아내가 있고 나무는
이미 배로 만들어졌으니 그대는 그에게 시집을 가려해도 갈 수가 없게
된 것이 아니오.]
아가는 발을 굴렀다.
[그것은 가짜예요.]
위소보는 분연히 말했다.
[좋소. 그대가 나에게 그를 교환해 오라면 나는 가서 교환해 오도록 하
지. 그런데 오랑캐들의 동굴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하오. 흥,우리 갑
시다.]
아가는 묵묵히 그를 따라 사당에서 걸어 나왔으며 혹시 한 마디라도 말
을 잘못하여 위소보가 정 공자와 자신을 교환하는 것을 마다할까 봐 입
도 벙긋하지 않았다.
큰길로 나서자 정씨 집안의 시종들이 모두 등롱을 든 채 둘러서서 큰소
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자 시종들은 말했다.
[진 소저가 오셨군요. 우리의 공자는 어떻게 되었죠? 우리의 공자는 어
떻게 되었죠?]
그 사람들 가운데 체구가 수척한 한 사람이 돌연 몸을 흔들하니 앞으로
나섰는데 신법이 지극히 빨랐다.
위소보는 눈이 어른거리는 순간 그 사람이 이미 자기 앞으로 와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대번에 그 사람의 날카로운 음성이 질문을 던져 오는 것이 아닌가.
[우리 공자는 어디에 있소?]
그 사람은 등불을 등지고 있어서 위소보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놀라며 두 걸음 물러섰다. 여전히 그와 마주보는 위치
에 서 있었는데 그 간격이 한 자도 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물었다.
[우리 공자는 어디에 있소?]
아가는 말했다.
[그는.. 그는 야만인들에게 붙잡혀 갔어요. 그들은.. 그들은 그를 삶아
먹는대요.]
그 사람은 말했다.
[도대체 중원 땅의 어디서 야만인들이 나타났다는 말이오?]
아가는 말했다.
[진짜 야만인들이에요. 빨리.. 빨리 방법을 강구해 가셔서 구해주도록
해요.]
그 사람은 말했다.
[간 지 얼마나 오래 되었소?]
아가는 말했다.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몸을 갑자기 뽑아 올리더니 뒤로 날렸다. 아래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꼭 알맞게 한 필의 말 안장 위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곧이어 그는 두 팔로 말의 배를 찼다. 그 말은 질풍 같이 달려 삽시간
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위소보와 아가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 사람은 놀라고, 한 사
람은 내심 좋아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무공이 고강하고 신법이 빠른 것이 평생 보기가 드물 정도라
위소보는 속으로 탄복했다.
아가는 말했다.
[저분 고인은 누구인지 모르겠군.]
그러자 그 늙은 시종이 말했다.
[그는 공자님의 사부 풍석범이라는 분이시며 별호는 일검무혈(一劍無
血)이라고 하지요. 풍 사부는 천하무적이니 공자를 구하는데 반드시 성
공하게 될 것입니다.]
위소보와 아가는 말했다.
[알고 보니 그랬었군.]
아가는 다시 말했다.
========================
[풍 사부님이 도착하셨다면 그대들은 어째서 그를 즉시 저쪽 사당으로
모시고 가 공자를 구하도록 하지 않았어요?]
한 명의 시종이 말했다.
[풍 사부께서는 막 도착하셨죠. 그는 우리의 비합전서를 받고 밤을 도
와 하간부에서 달려온 것입니다.]
위소보는 물었다.
[풍 사부가 하간부에 있었다면 어째서 우리가 보지 못했을까?]
시종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 시종은 자기가
실언한 것을 알고 고개를 숙였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대만 정씨 집안에서는 살귀대회장에 암암리에 고수들을 매복시켜
둔 채 줄곧 얼굴을 내밀지 않도록 했구나. 그 못된 녀석이 잡혀가니까
그제서야 달려와 구하려는 것이군.)
그는 자기의 뺨을 비틀며 말했다.
[살아, 내 살들아! 누가 벌써 정 공자를 구하러 갔구나. 이제 너희들은
그녀의 마음속의 보배와 사람을 대신하여 야만인들의 먹이가 되지 않아
도 괜찮게 되었다.]
아가는 얼굴을 붉히며 몇 마디 변명의 말을 하려다가 다시 생각을 바꾸
었다.
(풍 사부가 단신필마로 갔는데 과연 그 많은 야만인들을 이길 수 있을
지 걱정이구나.)
위소보는 그녀가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는 것을 보고 그녀의 심사를 어
느 정도 짐작했다.
[그대는 안심하시오. 풍 사부가 그를 구해내지 못하면 나는 여전히 나
의 질긴 살 덩어리를 주고 그대의 마음속에 새겨져 느끼고 있는 그 보
배와 바꿔 오도록 하겠소. 사내대장부의 일언은 중천금이라고 하지 않
소?]
아가는 말했다.
[풍 사부께서 그를 구하여 돌아오면 되는 거예요. 나는 위 사제의 살코
기는 필요없어요.]
위소보는 발끈 울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나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홀낏 그녀의 아리따운 얼굴을 보니 대뜸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
이 아닌가. 그리하여 몸을 되돌려서는 돌아가 길 옆에 앉았다.
아가는 그가 자리를 뜨는 것을 보고 매우 초조하게 생각했다. 만약에
풍 사부가 정 공자를 구출해 내지 못하고 위소보마저 떠나게 된다면 누
가 가서 정 공자와 교환될 수 있겠는가.
그녀는 그가 다시 돌아와 앉는 것을 보고 겨우 안심을 했다.
이때 그녀는 위소보의 비위를 거슬리고 싶지 않아 바짝 그의 옆으로 다
가와 앉았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너는 나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그러는 모양인데 이 기회에 득을
좀 보지 않고 내가 언제까지 기다리겠는가?)
그는 왼손을 뻗쳐서는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위소보는 크게 흐뭇해서는 생각했다.
(그 풍가가 양일지 형에게 죽음을 당하여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
가 한평생 이와 같이 앉아서 기다릴 수 있겠구나. 그렇게 되면 참 좋겠
다.)
그는 아가가 자기에 대해서 전혀 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
문에 마음속에 분에 넘치는 큰 욕심은 품고 있지 않았다.
그저 이와 같이 그녀를 껴안고 한번쯤 앉아 있으면 만족할 수 있었고
더 큰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노릇조차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잠시 얼싸안고 있는데
큰길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아가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부르짖있다.
[정 공자가 돌아오는 모양이에요.]
말발굽 소리는 점점 더 가까와지면서 어느덧 두 필의 말이 앞서서 달려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좋아. 나는 이제 한 목숨을 건지게 되었고 내 살들을 야만인들에게 주
어 먹이가 되도록 할 필요가 없어지고 말았군.]
위소보의 목소리는 쓸쓸한 빚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러나 그가열 배나
더 울화가 치밀어 말을 한다 하더라도 아가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았으
리라.
그녀는 급히 큰길 쪽으로 마중을 나갔다.
두 필의 말은 차례로 달려왔다. 시종들은 등롱을 들고 비추더니 환호성
을 내질렀다.
앞장 선 한 필의 마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정극상이었다. 그는 아
가가 달려 나오는 것을 보자 후다닥 말에서 뛰어내렸다.
두 사람은 그만 얼싸안더니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가는 머리를 그의 품속에 파묻고는 물었다.
[나는... 그 오랑캐들이 그대를...그대를 어떻게 할까봐 얼마나 걱정했
는지 몰라요.]
위소보는 이미 몸을 일으켰으나 그와 같은 광경을 보자 가슴팍을 한 대
심하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고 그만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한참 동안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눈이 가물가물해졌다.
그는 즉시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제기랄, 내 살아 생전에 저 못된 계집애를 처로 맞아들이지 못한다면
나는 정극상의 십괄 대의 손자가 될 젓이며 위소보는 그야말로 후레자
식이 낳은 곱배기 후레자식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와 같은 경우를 당하게 되면 대개 좌절감을 느끼고 마
음속으로 눈물을 흘릴 것이다. 또한 정을 끊기로 결심할 뿐만 아니라
달리 홀륭한 배필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위소보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끈질긴 고집을 가지고 있었
다. 거기다가 얼굴 가죽도 두터웠고 심보도 대단했다.
그는 다시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간에 나는 한평생 너와 씨름을 해보겠다. 긔리고 귀신이 몸에
달라붙어 죽을 때까지 늘어붙겠다. 설사 네가 시집을 일여덟 번 가더라
도 열아횹 번째는 나에게 시집오게 될 것이다.)
그는 기녀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기녀들이 새 사람을 맞이하면서 옛 사
람을 버리는 것을 흔히 보아 왔기 때문에 한 여자가 따로 사랑하는 사
람을 두는 것을 무슨 대단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남자를 섬기면서 정절을 지켜 두 남편을 섬기지 않
는다는 말을 그는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잠시 동안 괴로웠으나 곧 싱글벙글 웃으며 앞으로 나아
가 말했다.
[정 공자, 그대는 다시 돌아왔구려. 야만인들에게 몸뚱어리 그 어느 부
위를 물어뜯기지는 않았소?]
정극상은 어리둥절해졌다.
[어느 부위를 물어뜯기다니?]
아가 역시 깜짝 놀라서 그의 몸을 아래위로 쳐다보았다. 그의 오관과
손가락이 온전한 것을 보고 그제서야 안심을 했다.
풍석범은 말 위에 앉아서 물었다.
[이 나이 어린 사람은 누구인가?]
정극상은 말했다.
[진 소저의 사제입니다.]
풍석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는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용모는 매우 수척한 편이었고 싯누런 안색에 검은 빛까지 감돌았
는데 욋입술에 제비 꼬리와 같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한 쌍의 눈동자는 너무나 작고 실눈을 뜨고 있는데 그 생김새는 그야말
로 폐병쟁이와 같았다.
그는 속으로 양일지가 걱정되어 말했다.
[풍 선생, 그대는 정말 뛰어난 재간을 지녔군요. 단번에 정 공자를 구
출해 내다니 말입니다. 그 야만인의 우두머리는 죽였나요?]
풍석범은 말했다.
[뭐가 야만인이야? 그들은 가짜였다.]
위소보는 속으로 놀랐다.
[가짜라구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은 야만인의 말을 했죠?]
풍석범은 말했다.
[그것도 역시 가짜였어.]
그는 이 어린 사람과는 더 말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정극상에게 말했
다.
[공자, 그대는 지쳤으니 저쪽 사당으로 가서 잠시 동안 쉬도록 하구
려.]
아가는 사부님이 염려되어 말했다.
[사부님께서 깨어나실 때 제가 보이지 않는다면 걱정을 하실 것 같네
요.]
위소보는 말했다.
[우리는 빨리 돌아갑시다.]
아가는 정극상을 바라보았다. 그저 함께 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정극상은 말했다.
[사부, 모두들 객점으로 가서 간단하게 음식을 먹고 나서 다시 한숨 푹
자도록 하죠.]
가는 길에 위소보는 정극상에게 어떻게 빠져나왔는가를 물었다.
정극상은 자기의 사부가 어떻게 뛰어났는지를 크게 자랑했으며 몇 초만
에 야만인들을 무찔렀다고 말했다.
위소보는 그 야만인들의 우두머리가 목숨을 잃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나
서야 안심했다.
사람들이 객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 날은 이미 밝아 있었고 구난은 이미
일어난 후였다.
그녀는 아가가 위소보를 데리고 정극상을 구하러 간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별로 이상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
정극상 등이 객점으로 돌아와 풍석범을 그녀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구
난은 풍석범이 간혹 한 쌍의 커다란 눈을 뜰 때마다 신광이 형형히 빚
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일검무혈이라 일컬어지고 있는데 보기에 명불허전으로써 확
실히 무공이 뛰어난 것 같구나.)
아침밥을 먹은 후 구난은 말했다.
[정 공자, 우리 사도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곳에
서 혜어질 수 밖에 없구려.]
정극상은 매우 실망하는 듯한 눈치로 말했다.
[이렇게 인연이 있어 사태님을 뵈옵게 된 것은 정말 드문 일이라 할 수
있으니 여러 모로 가르침을 받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태께서는 어디
로 가시려는 것인지요. 후배는 어쨌든 금방 볼일도 없고 하니 선배님을
모시고 동행했으면 좋겠습니다.]
구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출가인은 여러 모로 불편한 점이 많소.]
그녀는 아가와 위소보를 데리고 곧장 수레에 올랐다. 정극상은 망연자
실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가는 대뜸 두 눈을 붉혔으며 하마터면 소리내어 울 뻔했다.
위소보는 애써 얼굴을 무표정하게 굳혔다.
(사부님, 아무쪼록 백 세까지만 사시옵소서. 아니 복을 많이 받으시고
수명을 오랫동안 누리소서. 아미타불 보살께서도 보우하여 주십시오.)
그는 물었다.
[사부님, 우리는 어디로 가죠?]
구난은 말했다.
[북경으로 가자.]
그녀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냉랭한 어조를 입을 열었다.
[그 정가가 만약 뒤따라온다면 그 누구도 그를 아랑곳하지 말아라. 너
희들이 만약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는 그 정가를 죽이고 말겠다.]
아가는 놀라 물었다.
[사부님, 무엇 때문이죠?]
구난은 말했다.
[무엇 때문이 아니다. 나는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이 옆에서
잔소리하는 것을 싫어한다.]
아가는 감히 더 묻지 못했다. 그러나 잠시 후 갑자기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물었다.
[만약 사제가 그와 이야기를 한다면요?]
구난은 말했다.
[나는 똑같이 정 공자를 죽일 것이다.]
위소보는 더 참을 수 없어 그만 실소를 했다.
아가는 말했다.
[사부님, 그건 불공평해요. 사제는 일부러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걸려고
할 거예요.]
구난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 정가가 만약 뒤따라오지 않는다면 소보가 어째서 그와 말을 하겠느
냐? 그가 나에게 귀찮게 군다면 죽여 마땅한 것이다.]
위소보는 그만 흐뭇해져서는 이 세상에 사부보다 더 좋은 사람은 없다
고 생각했다.
갑자기 그는 구난의 손을 끌어다가 그녀의 손바닥에다 입맞춤을 했다.
구난은 그의 손을 떨쳐내며 호통을 내질렀다.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구나.]
그러나 이십여 년간 한번도 그녀에게 이토록 다정하게 군 사람은 없었
다.
이 제자는 비록 방자하기는 하나 참된 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
니 호통을 내지르기는 했으나 입가에는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아가는 사부가 위소보를 감싸고 돌고 또 언제 다시 정 공자와 만나게
될지 모르는지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슬퍼서 그만 눈물을 주르륵 흘
리고 말았다.
수일 후 세 사람은 다시 북경으로 되돌아와 동성(東城)의 어느 조그맣
고 조용한 객점에 머물게 되었다.
잠시 쉰 다음 구난은 위소보의 방으로 들어와서 문을 걸고 나직이 말했
다.
[소보야, 우리가 다시 북경으로 온 것이 무엇 때문인지 네가 한 번 알
아맞춰 보아라.]
위소보는 말했다.
[저의 생각으로는 바로 도 고모님이 아니면 그 나머지 몇 권의경서 때
문이겠죠]
구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바로 그 몇 권의 경서 때문이다.]
그녀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천천히 말했다.
[이번에 몸에 중상을 입은 후 나는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한 사람
이 아무리 무공을 높은 경지까지 연마했다고 하더라도 그 힘은 때로 약
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천하의 대사는 끝내 많은 사람들이 계
책을 짜내고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아야 하며, 많은 사람들의 뜻을 이
루게 되었을 때라야 큰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것과 같다. 군웅들이 하간
부에서 살귀대회를 연 데 대해서 나는 자세히 생각해 보았다. 설사 오
삼계라는 간악한 도적 한 사람을 죽인다 하더라도 우리 강산은 여전히
오랑캐의 손에 쥐어져 있을 것이 아니겠느냐? 모두가 일시 분풀이를 한
다고 해서 궁극적으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만약 내가 경서를 모두
손에 넣은 이후 오랑캐의 용맥을 끊고 천하의 뜻있는 사람들을 불러 함
꼐 의거를 도모한다면 그때 우리 대명나라의 강산을 되찾는 희망을 걸
수가 있을 것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구난은 말했다.
[나는 다시 반 개윌만 조섭을 하면 내력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 그
때 다시 궁중으로 들어가서 확실한 소식을 알아보도록 하자. 어찌 되었
든 간에 방법을 강구해서 나머지 일곱 권의 경서를 손에 넣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제일 시급한 일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제자가 먼저 궁으로 들어가 귀를 바짝 세우고 열심히 수소문하겠습니
다. 어쩌면 하늘이 보우하시어 어떤 단서를 얻게 될지도 모르죠.]
구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총명하고 눈치가 빠르다. 어쩌면 큰일을 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의 커다란 공로는....]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두 눈에는 격려의
빚을 가득 띄웠다.
위소보는 일시 끓어오르는 충동을 느끼고 대뜸 속마음을 토로하고 싶었
다.
(다른 다섯 권의 경서는 제자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고 생각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소현자는 나와 목숨을 바꿀 만한 교분을 가지고 있다. 내가 만약 사부
님을 도와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강산을 파멸시켜 그로 하여금 황제 자
리에서 떠나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너무나 의리가 없는 짓이 아닐까?)
구난은 그가 망설이는 빚을 보이자 일이 성공하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줄로만 알고 말했다.
[이번 일은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모두들 마음을 다
하고 힘을 다 쏟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일은 사람이 하되 승
패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 그런데 주씨 집안의
운이 다한 것인지, 아니면 강산을 되찾을 수 있는지 나도 모르겠구나.
수십 년 동안 나는 절망하여 속세에 대한 마음이 이미 끊어졌있다. 그
런데 뜻밖에도 너와 홍영을 만난 후 내가 본래 신경쓰고 싶지 않았던
국가 대사를 다시 염두에 두게 되었구나.]
위소보는 말했다.
[사부님, 사부님은 대명나라의 공주이십니다. 이 강산은 본래 사부님
집안의 것이 아닙니까? 이제 남에게 억지로 빼앗겼지만 반드시 되찾아
야 합니다.]
구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일은 비단 우리 한 집안의 일만은 아니다. 우리 집안 사람들은 거
의 다 죽고 말았다.]
그녀는 손을 뻗쳐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보, 이러한 일들은 절대로 너의 사저 앞에서 반 마디라도 누설해서
는 안 된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사저는 그와 같이 아름답고 귀여운데 사부는 어째서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구나. 아마도 그녀가 사부의 비위를 맞출
줄 모르기 때문이겠지.)
이튿날 이른 아침 그는 궁 안으로 들어가 황제를 알현했다.
강희는 크게 기뻐서 그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제기랄, 어째서 이제야 돌아오는가? 나는 매일같이 그대를 기다렸네.
나는 줄곧 걱정을 했지. 혹시나 그대가 그 고약한 여승에게 잡혀가 목
숨을 부지할 수 없지나 않을까 하고 말이야. 그런데 그저께 다륭이 돌
아와 그대를 보았다고 하기에 나는 겨우 안심을 했다.
어떻게 위험에서 벗어났지?.....]
위소보는 말했다.
[황상께서 걱정을 해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더군다나 어전시위까지
내보내 소신을 찾으셨으니 그 은혜 백골난망이로소이다. 그 고약한 여
승은 처음에는 매우 화를 냈으며 저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지요. 그
후에 제가 황상께서는 oㅏ드 어지시고 가장 뛰어난 황제라 죽일 수 없
다고 했죠. 그런데 그녀는 많은 대역무도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
가 황상에 대한 칭찬의 말을 한 마디 할 때마다 그녀는 나의 따귀를 한
대씩 갈겼죠. 그 후 저는 당장 눈앞에 닥친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그녀에게 맞아 죽는 것은 헛된 죽음이 될 뿐이야. 그 고약한
여승은 도대체 어떤 내력을 가졌던가? 그녀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누구의 지시를 받아서였지?]
위소보는 말했다.
[그녀가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소신은 모릅니다. 그때 그녀는 나를
잡은 후 밧줄로 저의 두 손을 묶고서 마치 원숭이를 데리고 놀듯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황상, 저는 입으로 감히 욕할 수는 없었지만 속으로
는 그녀의 십칠팔 대 조상까지 욕을 해댔습니다.]
강희는 웃었다.
[그야 물론이지. 그러고도 욕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위소보는 말했다.
[그녀는 저를 끌고 며칠 동안 길을 가면서 몇 번이나 나를 죽이려고 했
죠. 그런데 다행히 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소신과 꽤 교분이 두터운 편이어서 저를 도와 좋은 말을 많이 했지요.
그제서야 그 여승은 저를 때리지 않았습니다.]
강희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게 누구인가?]
위소보는 말했다.
[그 사람은 성이 양써로서 평서왕 세자 휘하의 위사 우두머리였습니
다.]
강희는 크게 흥미를 느끼는 듯 물었다.
[오삼계 그 녀석의 부하가 어찌하여 여승에게 그대를 도와 좋은 말을
했지?]
위소보는 말했다.
[기실 그것은 역시 황상께서 베푸신 은전 때문이죠. 전에 운남 목씨 집
안에서 궁 안으로 들어와 소란을 일으키고는 오삼계를 모함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두들 오삼계의 짓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지만 황상께
서는 영명하기 이를 데 없어서 음모를 간파했지요. 그리고 황상께서는
저를 보내 오삼계의 아들에게 유시를 내리지 않았습니까? 그 양가는 그
때 소신이 알게 된 사람입니다.]
第66章. 태후가 간통하는 현장을 덮치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그랬었군.]
위소보는 궁 안으로 들어올 때 그럴싸한 거짓말을 이미 짜 놓고 있었던
지라 일사천리로 말했다.
[그 양가의 성명은 양일지라고 합니다. 저는 그 여승에게 목씨 집안의
사람들을 들먹이며 울먹였습니다. 황상께서는 나이가 젊지만 견식은 뛰
어나신 분이며 총명하고 지혜로워 그야말로 신선이나 보살이 속세에 내
려오신 것이라고 말했지요. 그 여승은 반신반의했으며 저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밤에 양일지와 여승은 방 안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저는 잠이 든 척 하고서 몰래 엿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승을 교사하여 황상을 시해하라고 사주한 배후 인물은 따
로 있었습니다.]
강희는 말했다.
[오삼계 그 녀석이군!]
위소보는 온 얼굴 가득히 놀람과 의아한 빚을 띄우고 말했다.
[황상께서는 벌써 알고 계셨군요. 다륭이 말씀을 올린 것입니까?]
강희는 말했다.
[아닐세. 오삼계의 위사 우두머리가 그 여승을 알고 있고 그녀와 남몰
래 상의를 하고 있었다면 무슨 좋은 일이 있었겠는가?]
위소보는 놀람과 기쁨에 얽혀 무릎을 꿇고 큰절을 을렸다.
[황상, 제가 황상을 위해 일을 한다는 것은 정말 통쾌합니다. 무슨 일
이건 간에 황상께서는 대뜸 알아맞추시니 제가 길게 말씀드릴 필요도
없군요. 우리 한평생은 그야말로 만사대길(萬事犬吉)이며 영원히 패하
지 않을 것입니다.]
강희는 웃었다.
[일어나게, 일어나게. 지난 번 오대산 청량사에서는 정말 아슬아슬했
네. 만약 그대가 목숨을 던져 내 앞을 그와 같이 막지 않았더라면..]
거기까지 말한 그는 매우 진지한 얼굴빚이 되어서는 계속해서 말을 이
었다.
[그 간악한 도적의 음모는 이미 성공하게 되었을 것이네.]
그렇게 말하는 그는 그날 백의 여승이 그야말로 번개와 같이 찔러온 일
검을 생각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기실 그 여승이 일검으로 찔러올 때 황상께서는 솜씨가 민첩하시니 자
연히 고운출수(高雲出手)라는 일초를 펼쳐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냅다 선학소령(仙鶴梳珝)이라는 일초를 펼쳐 그 고약한
여승의 어깻죽지를 후려치게 된다면 그녀는 크게 항복이라고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혹시나 황상께서 해를 입게 되
실까봐 일시 멍청해져서 그저 황상의 앞을 막고서 대신 그 일검을 받으
려고 했을 뿐입니다. 황상께서 일신의 무공을 펼치시어 소림사의 여러
화상들 앞에서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것이 실로 애석합니
다.]
강희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는 그날 위소보가 그와 같이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백의 여승의 일검
을 받고 죽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위소보가 그토록 충성
을 다하면서도 자기의 공을 내세우지 않는 것을 보고 여간 갸륵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대는 어린 나이에 이미 커다란 벼슬을 하게 되었네. 다시 그대가 몇
살 더 먹게 된다면 그때 다시 그대의 벼슬을 올려 주도록 하지.]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큰 벼슬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종종 황상을 위해 일하되
황상께서 성을 내시지만 않는다면 저는 만족하게 여길 것입니다.]
강희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좋아, 좋아. 그대가 나를 위해 일을 잘 처리해 주는데 내가 기뻐했으
면 기뻐했지 무엇 때문에 화를 내겠는가? 그런데 양가는 그 여승과 또
무슨 말을 했지?]
위소보는 말했다.
[양일지는 끊임없이 그 여승에게 황상의 많은 좋은 점들을 말했습니다.
그는 오삼계가 자기의 부친에게 은혜를 베풀었고 자기의 돌아가신 선친
이 그에게 오삼계를 보호하라는 유언을 남기기는 했지만 오삼계는 한마
음 한뜻으로 황제가 되고자 하며 대역무도한 마음을 품고 있는데 그것
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장래에 이 일이 탄
로나게 된다면 모두들 몰살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승은 자기
의 모든 가족이 다 오랑캐, 모두 우리 만주인들에게 죽었다고 했습니
다. 거기다가 오삼계가 그녀에 대해서 아주 겸손하고 깍듯이 대해 주었
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황상을 찔러 죽이려 한 것은 첫쩨로
오삼계의 체면을 봐서이고 둘째로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의 원한을 갚
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집안 사람들은 이미 모조리 죽
었기 때문에 온 가족이 몰살당하는 것도 두렵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는 다시 말했다.
[양일지는 황상께서 백성들을 잘 대해 주시니 만약... 만약 그 백의 여
승이 황상을 해치고 오삼계가 황제가 된다면 그 자신은 큰 벼슬아치가
되고 또 대장군이 될 수 있으나 천하 백성들은 크게 고통을 당하게 된
다고 했습니다. 그 여승이 오랫동안 생각하더니 그 말이 맞다고 했으며
그녀는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상의하더니 오삼계가 만약 다시 사람을 보내 황상을 찔러 죽이려고 한
다면 그들 두 사람이 몰래 자객을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강희는 기뻐했다.
[그 사람은 대의(大義)를 깊이 알고 있구나.]
위소보는 말했다.
[그런데 양일지는 또 다른 한 가지의 일은 해내기가 쉽지 않다고 했습
니 다.]
강희는 물었다.
[또 무슨 이상한 일이라도 있는가?]
위소보는 말했다.
[그들 두 사람은 음성을 낮추어 많은 말을 했지만 저로서는 제대로 알
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자꾸만 연평군왕이니 대만의 정씨 집안
사람이니 했습니다. 마치 오삼계는 성이 정가라는 사람과 천하를 나누
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강희는 몸을 일으키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원래 그 녀석은 대만의 반적과 몰래 결탁을 하고 있었구나!]
위소보는 물었다.
[대만의 정씨 집안은 제기랄, 무슨 후레자식입니까?]
강희는 말했다.
[그 정가 반적은 대만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우리 청나라 조정의 명령을
받지 않고 있다네. 다만 멀리 바다 밖에 있기 때문에 일시 평정하기가
쉽지 않다네.]
위소보는 그제서야 확연히 깨달았다는 얼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원래 그랬었군요. 그때 소신은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났습니다. 이 강
산은 황상의 것인데 그 성이 오가이고 정가인 사람들이 무엇이길래 감
히 황상의 천하를 나누려고 하느냐고 생각했지요. 양일지는 또 대만의
정가는 그의 둘째 아들을 보냈는데 그 둘째 아들의 이름은 정극.. 정
극..]
강희는 그 말을 받았다.
[정극상이겠지 ?]
위소보는 기뻐서 말했다.
[예, 예. 황상께서는 모든 걸 알고 계시는군요.]
강희는 미소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근년에 이르러 줄곧 대만을 어떻게 청나라의 판도로 거두어 들일
까 하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씨 부자들과 대만의 군정대
사는 말할 것도 없고 군사와 장수들 및 선박 등에 관한 상황은 이미 똑
똑히 파악하고 있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 정극상이 최근 운남으로 가서 오삼계와 보름 남짓 상의를 했다는
겁니다.]
강희는 발끈해져서는 안색이 변해서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가?]
대만과 운남, 이 두 곳은 원래 그가 마음속으로 가장 곤혹스럽게 느끼
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씨와 오씨 두 사람이 결탁을 하
고 밀모를 했다니 큰일이었다. 더군다나 정극상이 운남에 갔던 일은 이
제서야 겨우 알게 된 일이 아닌가 말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대만에서는 무공이 매우 고강한 녀석이 줄곧 정극상을 보호했다고 합
니다. 그 녀석의 이름은 풍가이고 일검에 피를 쏟아낸다고 하던가
요...]
강희는 말했다.
[일검무혈 풍석범이야. 그는 유국헌(劉國軒), 진영화(陣永華)와 함께
대만삼호(台灣三虎)로 일컬어지고 있지.]
위소보는 황제가 자기 사부 진근남의 본명인 진영화라는 이름을 들먹이
는 것을 보자 속으로 섬짓해져서는 말했다.
[예, 예. 바로 일검무혈 풍석범입니다. 양일지는 대만의 이 세 호랑이
가운데 진영화만이 좋은 사람이고 풍석범과 다른 한 사람은 나쁜 사람
이라고 했습니다. 진영화는 황상에게 반역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
지만 그는 한 마리의 호랑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다른 두 마리의 호
랑이를 당해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강희 앞에서 구난과 양일지 그리고 진근남 세 사람에 대해서는 좋
은 말을 하려고 애썼다. 장래 세 사람이 만일에 청나라 조정에 잡히게
되었을 때 그때 가서 구하기 쉽도록 미리 말을 해두자는 것이었다.
강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다. 진영화는 다른 두 마리의 호랑이보다 더욱 무
섭다.]
위소보는 말했다.
[양일지는 그 여승에게 다시 말했지요. 강호에는 많은 오삼계의 적들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하간부에서 모임을 가지고 살귀대회를 열어서 어떻
게 오삼계를 죽일 것인가를 상의해 본다고 했습니다. 정극상과 풍석범
은 그 모임에 들어가 소식을 탐지한 후 오삼계에게 통지했다는 것입니
다. 그들은 갈수록 말을 나직이 해서 저는 반나절 동안 들었으나 똑똑
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들은 황상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상관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후 저는 잠이 들고 말았습
니다. 황상, 소신은 이 일에 대해서 약간 게으름을 피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때는 실로 너무나 피곤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야
밤에 양일지가 살그머니 저를 깨워 혈도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 여승이
지금 타좌하여 내공을 익히고 있으니 저에게 뺑소니를 치라고 했습니
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양가는 그래도 양심이 있군.]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고 말고요. 장래 황제께서 오삼계를 주살하게 되었을 때 양일지만
은 황상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그의 목숨을 살려 주도록 하십시오.]
강희는 말했다.
[만약 그가 공을 세운다면 나는 비단 그의 목숨을 용서해 줄 뿐만 아니
라 상을 내리겠네. 살귀대회에선 또 무슨 소식을 들었는가?]
위소보는 말했다.
[그들은 각 성마다 한 사람의 맹주를 추대했다고 합니다. 정극상은 복
건성의 맹주가 되었고 복건성, 광동성, 절강성, 협서성인가 무엇인가는
모두 다 정씨네가 통괄하게 되었다는 것 같았습니다.]
강희는 빙그레 읏고 속으로 생각했다.
(소계자가 잘못 알고 있군. 틀림없이 강서성이지 협서성이 아닐 것이
다.)
그는 뒷짐을 지고 서재를 서성거렸다. 그는 십여 번 오락가락하더니 갑
자기 입을 열고 말했다.
[소계자, 그대는 감히 운남으로 갈 용기가 있느냐?]
위소보는 깜짝 놀랐다. 이 한 마디는 그야말로 뜻밖이었다.
[황상께서는 저를 오삼계의 그곳으로 보내 소식을 염탐하고자 하는 것
입니까?]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정말 약간 위험하네. 그러나 나이가 어리니 오삼계는 그대를
별로 경계하지 않을 것이네. 양일지는 또한 그대의 친구이니 반드시 그
대를 돌봐 주겠지.]
위소보는 말했다.
[예, 황상. 운남으로 가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궁으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았고 황상을 뵈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황상의
곁을 떠난다니 정말 떠나기가 싫군요.]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 역시 같은 생각이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황제가 되어서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다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운남
으로 가서 내가 오삼계의 수염을 붙잡고 그대는 그의 두 손을 잡고서
동시에 그에게 따지는 것일세. '제기랄, 오삼계야, 항복하지 않겠느냐7
그러면 얼마나 재미가 있을까?]
위소보는 웃었다.
[그거 참 묘합니다. 황상, 황상께서는 운남으로 가실 수가 없으니 제가
오삼계를 속여서 궁으로 데리고 와 우리 두 사람이 다시 그의 수염을
잡아당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강희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좋기는 무척 좋지. 그러나 그 늙은 것은 교활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걸? 아, 소계자, 나는 그가 의심하지 않
는 좋은 방법을 하나 생각해 내있네.]
위소보는 말했다.
[황상께서는 신기묘산이시니 반드시 고명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일 것
입니다.]
강희는 말했다.
[우리가 건녕 공주를 그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내 사돈간이 된다면 그는
조금도 방비하지 않을 것일세.]
위소보는 어리둥절해졌다.
[오응웅이란 녀석에게 시집을 보낸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이것은...
너무나 그에게 득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강희는 말했다.
[그 늙은 계집애의 딸이니 우리는 민저 그녀를 운남으로 시집보내서 그
녀로 하여금 먼저 고통을 당하도록 하자는 것일세. 장래 오삼계의 온
가족이 몰살당하게 되었을 때 그녀마저도 함께 죽이는거지.]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증오에 찬 표정을 지었다.
강희는 어려서부터 누이동생을 매우 귀여워했다. 그런데 태후가 자기의
친어머니를 해쳐 죽이고 부황으로 하여금 화가 나서는 출가하도록 만들
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이 누이까지도 미워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다시 말했다.
[그때 나는 늙은 계집년이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으니 그녀에게 자
진하도록 하라고 말할 것일세.]
위소보는 말했다.
[황상, 소신은 아주 하늘만큼 커다란 좋은 소식을 탐지해 냈습니다. 황
상께서 들으시면 반드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강희는 말했다.
[무슨 좋은 소식인가?]
위소보는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서는 나직이 말했다.
[늙은 계집년은 가짜 태후이고 진짜 태후는 아직도 무사히 자녕궁에 살
아 계십니다.]
위소보는 이윽고 가짜 태후가 진짜 태후를 감금해 놓고 있으며 가짜 태
후인 그녀가 스스로 태후로 가장하여 못된 짓을 했던 사실을 일일이 이
야기했다. 강희는 그와 같은 이야기에 그만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져서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 있었어? 그런 일이 있었다구? 그대는.. 그대는 어떻게 알아
냈지?]
위소보는 말했다.
[소신은 늙은 계집년의 심기가 악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
서 그녀가 황상을 해칠까봐 두려웠기 때문에 자녕궁의 궁녀를 사서는
암암리에 감시를 했죠 그리고 일단 사정이 잘못되었을 때는 즉시 달려
와 황상에게 알려 드리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선수를 써야만 이기지 않
겠습니까? 그런데 소신이 오늘 궁 안으로 들어오자 그 궁녀는 이 어마
어마한 사실을 바로 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강희의 이마에서는 땀이 줄줄 홀러내렸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
다.
[그 궁녀는?]
위소보는 말했다.
[저는 이 일이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 만약 그녀가 누설하게 되면 야단
이 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신은 대담하게 그녀를 우물 안으
로 밀어 넣었는데 마침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 실로 그녀에게 미
안한 노릇이었지만..]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굴에 한가닥 위로를 받은 듯이 느긋
한 표정을 띄우며 말했다.
[잘했네. 내일 그대는 그녀의 시체를 끌어올려서 안장을 해주게. 그리
고 그녀의 가족들에게 많은 위로금을 내리도록 하게.]
위소보는 말했다.
[예, 예. 황상의 분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강희는 말했다.
[쇠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우리 즉시 자녕궁으로 가세.]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벽에서 두 자루의 보검을 내리더니 한
자루를 위소보에게 내주며 나직이 말했다.
[이 일은 우리 두 사람만이 가서 하는 것일세. 그러니 궁녀와 태감들에
게 알리지 않도록 하게.]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상, 늙은 계집의 무공이 무섭습니다. 제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그
녀를 얼싸안을 테니 황상꼐서는 일검으로 먼저 그녀의 팔을 찌르고 다
시 상세한 사정을 묻도록 하십시오.]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위소보는 말했다.
[황상께서는 역시 많은 시위들을 데리고 가서는 자녕궁 밖에서 대기하
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사정이 잘못되었을 때는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약 소신이 가짜 태후를 제대로 얼싸안지 못
하여 그 계집이 흉악한 짓을 하게 되고 황상의 만금지체를 그르치게 한
다면 그야말로..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생각을 굳혔다.
[꼭 필요할 때는 시위들의 도움을 받아야겠지. 그러나 일이 끝난 이후
에 그 시위들은 죽여 입을 봉하도록 해야 한다.]
강희는 서재를 나와서 여덟 명의 시위를 불러서는 보호를 하도록 하고
는 자녕궁 밖에 이르러서 시위들이 화원에서 기다리도록 했다. 그는 위
소보와 함꼐 태후의 침전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녕궁의 긍녀와 태감들
은 다투어 무릎을 끓고 강희를 맞았다. 강희는 입을 열었다.
[너회들은 모두 다 화원으로 물러가 있거라. 아무도 들어 와서는 안 되
느니라!]
시위들은 명을 받고 모두 물러갔다.
위소보는 그 날 가짜 태후가 그의 사부 구난에게 일곱 번의 화골면장을
후려쳤는데 그 음독한 장력이 모조리 그녀 자신에게로 되돌려지게 되었
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사부가 화골면장을 해소시키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 일이
있은 이후 조금이라도 내력을 쓰게 된다면 전신의 골격이 즉시 마디마
디 끊어지게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손을 꼽아 보니 가짜 태후의 체내의 장력이 아직도 모조리 해소되기 전
이었다. 설사 해소되었다 하더라도 그녀가 감히 무공을 쓰리라고는 생
각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기에게는 오룡령이 있으니 모든 점에 있어
서 믿을 데가 있고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태연해졌다.
강희는 가짜 태후의 무공이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가 배운
무공은 모두 다 그녀가 가르친 것이 아닌가. 설사 위소보를 보탠다 하
더라도 두 사람으로서는 여전히 그녀와 비교할 때 훨씬 뒤떨어지는 것
을 알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쌍검으로 맨손인 그녀를 공격하되 그녀의 의표를 찔러
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과거 오배를 암살하게 되었을 때처럼 해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침전 안으로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손바닥에서는 땀이 배어나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오늘이야말로 큰 공을 세울 좋은 기회다. 나는 늙은 갈보에게 달려가
서 꼭 붙잡아야지. 그러면 황상께서는 내가 몸을 돌보지 않고 나선다고
기뻐하실 것이다. 그러나 기실 그것은 한 마리의 꼼짝 못하는 죽은 개
를 때리는 것과 같다. 개를 때려잡는 것은 내가 가장 잘하는 짓이 아닌
가?)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그 계집의 무공이 뛰어나니 황상께서는 결코 위험을 무릅쓰지 않도록
하십시오. 소신이 먼저 달려들도록 하겠습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으로 검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침전 안
으로 들어서자 대전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대 위의 비단 휘장이 나
직이 드리워져 있었다. 태후의 음성이 휘장 안에서 들려왔다.
[황제, 며칠 동안 자녕궁에 오지 않았구려. 그동안 안녕하셨소?]
강희는 처음에는 매일 같이 자녕궁으로 와서는 태후에게 문안을 드렸었
다. 그러나 속사정을 알게 된 후에는 속으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증오
심을 느꼈고 자연 발걸음이 뜸해지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그녀가 대낮에도 침대 위에 누워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
던 터라 먼저 상의했던 방법은 쓸모가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강희는
입을 열었다.
[말을 듣자니까 태후께서는 편찮으시다구요? 그래서 이 아들이 문병을
왔습니다.]
그는 위소보에게 눈짓을 보내며 분부했다.
[휘장을 들어올리도록 하게.]
위소보는 대답했다.
[예.]
그는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태후는 말했다.
[나는 찬바람이 싫으니 휘장을 들어올리지 말아라.]
강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휘장을 들추게 된다면 고녀는 방비를 할지도 모
른다.)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그러지요. 그런데 태후께서는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약은 드셨습니
까?]
태후는 말했다.
[먹었네. 태의는 약한 감기라고 했으니 상관이 없네.]
강희는 말했다.
[이 아들은 태후의 안색이 어떤지, 그리고 열이 나는지 안 나는지 보고
싶습니다.]
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얼굴은 무척 좋으니 볼 필요 없네. 황제는 돌아가서 쉬도록 하
게.]
강희는 속으로 의혹이 일었다.
(그녀가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모르겠군.)
위소보는 침전 안이 어두침침한 것을 보고 즉시 몸을 돌려서는 강희에
게 크게 손짓을 해 보였다.
그 뜻은 자기가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질 것이니 황제는 일검
으로 다리를 잘라내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별안간 강희는 마음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만약 소계자가 말한 것이 모두 거짓말이라면 어떻게 하지? 그 남자가
궁녀로 변장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태후가 그저 음란
한 행동으로 궁 안의 금기를 어지럽게 했다는 것뿐 다른 사연이 없을지
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내가 일검을 내려치게 되고 그녀가 만약 진짜
태후이며 가짜가 아니라면 나야말로 정말 멍청한 불효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차라리 가짜 태후로 하여금 방비를 하게 하고, 또 부득이
시위들을 불러들여 잡는 한이 있더라도 경솔하게 일을 처리하여 내 친
히 진짜 태후를 베어 상처를 입히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즉시 고개를 흔들고 손을 들어 위소보로 하여금 뒤로 물러서게 하
고는 말했다.
[태후, 이 아들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재빠른 걸음으로 칟대 앞으로 가서는 손을 뻗쳐 휘장을 들추어 버
렸다.
비단 금침이 들썩이면서 태후는 급히 벽쪽으로 몸을 돌렸다. 순간적으
로 홀낏 본 것이지만 강희는 이미 태후의 얼굴이 수척해졌고 예전 태후
의 모습과 판이하게 다른 것을 발견했다. 그는 말했다.
[태후, 태후께서는 근래 갑자기 많이 수척해지신 것 같습니다.]
그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대산에서 돌아온 후부터 밥맛이 좋지 않았다네. 그리하여 매일같이
반 그릇도 먹지 못했는데 거울에 비추어 보고 하마터면 내 자신도 알아
보지 못할 뻔했다네.]
강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계자의 말은 정말 틀림이 없다. 이 늙은 계집년은 내가 갑자기 찾아
오리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에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거기다
가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얼굴을 변장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더라도 내가 자기의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내 이미 친히 목격했는데 어찌 잘못될 수가 있겠는가?)
그와 같이 생각하는 사이에 노기가 끓어올라 큰소리로 말했다.
[어이쿠, 태후, 한 마리 커다란 쥐가 벽에 걸려 있는 담요 자락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게 누구 없느냐! 빨리 저 담요를 걷어올리고 쥐를 잡도
록 해라.]
그는 급히 뒤로 두 걸음을 물러섰다. 혹시나 가짜 태후가 일이 탄로나
게 되자 갑자기 습격을 가해올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 때 태후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걸려 있는 담요 뒤에 쥐가 있다구?]
위소보는 한 걸음 다가가서 양털로 짜서 만든 줄을 잡아당겨 담요를 들
어올렸다. 그러자 장농의 문이 나타났다.
강희는 말했다.
[어, 이 곳에 커다란 장농이 있었군. 쥐가 장농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
로군요.]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일은 이미 태반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녀가 이미 준비하고 있다하더라
도 다시는 암습을 가해 올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입구 쪽으로 물러서서는 위소보에게 손짓을 하고 말했다.
[시위들을 들어오라고 하게. 장농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혹시
자객이 숨어 있다가 태후를 놀라게 하지 않을는지 모르겠네.]
위소보는 말했다.
[예.]
그는 문 밖을 향해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시위들은 빨리 들어오너라!]
여덟 명의 시위가 침전의 문 입구로 가서는 허리를 구부리고 분부를 기
다렸다. 태후는 노해 부르짖었다.
[황제, 그대는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오?]
강희는 웃었다.
[아, 그렇군요. 건녕 공주가 장농 안에 숨어서 숨박꼭질을 하고 있는
모양이지요? 태후, 나는 그 애를 찾아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아마도 이
장농 안에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는 오른손을 들어 흔들었다.
위소보는 앞으로 나가 장농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장농 문에는 자
물통이 잠겨져 있어 열 수가 없었다.
강희는 웃었다.
[태후, 장농 열쇠는 어디 있죠?]
태후는 노해 부르짖었다.
[나의 몸이 불편한데 그대들 두 사람은 내 방으로 와서 무공을 겨루며
장난을 하려고 하는군. 어서 나가게!]
시위들은 황제와 건녕 공주가 무공을 겨루는 등 장난질을 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태후가 그와 같은 말을 하자 모두 얼굴에 웃음을 띄
웠다. 강희는 말했다
[장농의 문을 열도록 하게. 태후께서는 몸이 편찮으시니 그 어르신에게
폐가 안 되도록 하게.]
위소보는 대답했다.
[예.]
그는 신발목에 숨겨 두었던 비수를 뽑아 들고 장농 문 사이로 찔러 넣
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내리 긋자 자물통은 어느새 잘라지고 말았다.
와락 잡아당기자 장농의 문이 대뜸 열렸다.
장농 안에는 비단 이불이 쌓여 있었는데 그 날 밤 장농 안에서 본 것과
같았다. 그러나 사람은 없있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그 날 밤 분명히 진짜 태후가 이 장농 안에 갇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어째서 오늘은 보이지 않을까? 혹시 늙은 갈보는 우리 사부님이 비밀을
누설하게 될까 봐 진짜 태후를 죽인 것일까?)
그는 장농 안의 이불 자락을 들추었다. 어렴풋이 밑바닥에 한 권의 책
이 보이는데 아마도 사십이장경인 것 같았다.
그는 급히 이불 자락을 내려 경서를 덮어 버린 후 고개를 돌려 강희를
바라보았다.
강희는 얼굴에 놀람과 의아한 빚을 띠고 있었다.
위소보가 다시 침대 위쪽을 바라보니 이불이 불룩하게 솟아 있는 것이
아무래도 사람을 숨겨 놓은 것 같았다.
위소보는 기뻐서 말했다.
[공주는 태후의 이부자리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강희는 급히 말했다.
[빨리 그녀를 꺼내라!]
강희는 가짜 태후가 일이 탄로나게 되면 즉시 진짜 태후를 죽일까봐 두
려웠다.
위소보는 침대 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태후의 발 옆의 이부자리 밑으로
손을 뻗쳐 들이밀며 진짜 태후를 꺼내려고 했다. 그런데 손이 닿는 곳
에는 털이 부숭부숭 난 굵은 다리가 있지 않은가!
그는 그만 깜짝 놀라게 되었다.
바로 이 때 커다란 발이 갑자기 튀어나오면서 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위소보는 으악, 하는 소리와 함께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이불이 들춰지고 한 명의 뚱뚱한 벌거숭이가 그 속에서 달려 나왔다.
그 사람은 이불 자락과 더불어 태후를 껴안고 문 입구 쪽으로 달려갔
다.
여덟 명의 시위는 깜짝 놀라 급히 막았으나 그 큼직한 비계 덩어리라고
할까 살 덩어리라고 할까, 그 뚱뚱한 난쟁이와 부딪치자 세 명의 시위
가 나가떨어졌다.
그 살 덩어리는 태후를 안고 곧장 문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강희가 문 입구에 달려갔을 때 이미 그 살 덩어리는 나는 듯 달려갔으
며 몇 번 몸을 날리지 않아 어느덧 화원 담장 가에 이르게 되었고, 벌
떡 몸을 날리더니 담장 위로 뛰어 올라 곧 바깥쪽으로 사라졌다. 강희
는 부르짖었다.
[빨리 뒤쫓아랏!]
세 명의 시위는 그 살 덩어리에게 부딪쳐 땅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다.
나머지 다섯 명의 시위들은 담장 밖으로 달려 나갔으나 다시는 그림자
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위소보는 머리가 어지럽기만 했고 가슴팍이 격렬하게 아파왔다. 그는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켜서는 장농 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이불자
락 안으로 집어넣고 그 한 권의 경서를 품속에 갈무리했다. 이때 강희
가 화원에서 크게 소리쳤다.
[돌아오너라! 돌아와!]
위소보는 다시 쓰러졌다.
곧이어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시위들이 달려서 되돌아 왔으
며, 강희는 침전 밖에서 시위들에게 분부했다.
[모두들 그 자리에 서 있으되 아무 소리도 내지 말아라!]
강희는 돌아서 침전 안으로 들어와 방문을 닫고는 나직이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위소보는 탁자를 붙잡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요.. 요괴입니다!]
놀란 위소보의 얼굴은 반푼의 핏기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강희는 고개
를 흔들었다.
[요괴가 아닐세. 늙은 계집년의 간부야.]
위소보는 여전히 그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물었다.
[간부라고요? 제가 보기에는 요괴 같던데요?]
강희는 말했다.
[그 사람은 남자야. 자네는 똑똑히 보지 못했단 말인가? 키는 작고 뚱
뚱한 남자였네.]
위소보는 놀랍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늙은 계집은 이불 자락 속에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을 숨겨 두었군요..
땅, 땅딸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를 말입니다.]
강희는 매우 엄숙한 얼굴빚을 하고 말했다.
[진짜 태후는?]
위소보는 말했다.
[그..늙은 계집에게 해침을 받아 죽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위소보는 갑자기 생각나는 일이 있어서 태후의 침대 위의 요를 들추었
다.
[침대 아래에 비밀리에 만들어 둔 격자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비밀리에 만들어 둔 격자 안에는 한 자루의 아미자가 있었
다. 그 외에 다른 물건은 없었다. 그는 잠시 생각해 보고 말했다.
[침대의 판자대기를 들춰 보도록 하조]
강희는 서둘러 앞으로 나와 위소보를 도와 침대 판자대기를 들추었다.
그러자 한 여자가 비스듬히 누워 있고 그 땅바닥에는 방석이 깔려 있었
다. 그녀의 몸 위에는 엷은 이불이 덮여져 있었다. 침대 위의 판자대기
를 내려 놓게 된다면 그 판자대기는 그녀의 얼굴과 머리 부분과 반 자
도 되지 않을 것이다. 침전 안은 어두컴컴해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강희는 부르짖었다.
[빨리 촛불을 켜라.]
위소보는 불을 켜고 촛대를 가까이 대고 비춰 보았다.
그녀는 안색이 창백했으나 갸름한 얼굴이었다. 과연 바로 그 날밤 장농
안에 감금되어 있던 진짜 태후가 아닌가.
강희는 옛날 진짜 태후를 만나 보게 되었을 때는 나이가 아직도 어린
편이었다. 그리고 오랜 세윌이 흘러 이제 진짜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여자가 평소 보아 왔던 태후의 모습과 지극히 비슷한 지라
재빨리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며 물있다.
[태.. 태후이신가요?]
그 여인은 촛불이 얼굴 앞에서 어른거리자 일시 두 눈을 뜨지 못하고
말했다.
[그대는...그대는...]
위소보는 말했다.
[이분은 당금의 황상이십니다. 친히 태후를 구하러 오셨습니다.]
그녀는 실 같은 눈을 뜨고 강희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떨리는 음성으
로 말했다.
[그대는...그대는 정말 황상이시오?]
별안간 그녀는 왁, 하니 울음을 터뜨리며 팔을 뻗쳐 강희를 얼싸안고
꼭 껴안는 것이 아닌가.
위소보는 촛대를 들고 몇 걸음 물러서서는 사방을 비추어 보았다. 그러
나 어떤 간부나 자객, 또는 가짜 궁녀니 하는 따위는 다시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황상과 진짜 태후께서 만나게 되었으니 반드시 많은 말을 주고 받게
될 것이다. 내가 한 마디라도 더 듣게 된다면 내 모가지가 달랑거리게
된다.)
그는 촛대를 살짝 놓고 살그머니 물러섰으며 손을 뒤로 돌려 침전의 문
을 꼭 닫았다.
이때 마당에는 팔 명의 시위와 궁녀 태감들이 뻣뻣이 서 있었는데 하나
같이 황송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손짓을 해서 사람들을 화원으로 불러들이고 말했다.
[조금 전 황상께서는 건녕 공주와 숨박꼭질을 하며 놀았소. 공주께서는
한 벌의 이상야릇한 옷을 입고 마치 하나의 커다란 살 덩어리로 만든
공처럼 꾸미고서 달려 나갔는데 여러분들은 그녀를 보았소?]
한 명의 시위는 매우 눈치가 빨라 재빨리 말했다.
[예, 예. 건녕 공주의 신법은 매우 빨랐습니다. 그리고 분장한 모양도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위소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까짓 어린애들의 장난에 대해서 황상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소이다. 여기 있는 누군가가 입이 근질근질하다고 느끼게
된다면 어깨 위의 머리통은 제대로 붙어 있지 못할 것이오. 그래도 쓸
데없이 입을 놀려서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겠소?]
시위들과 궁녀, 태감들은 일제히 말했다.
[우리들은 감히 입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세 명의 상처를 입은 시위들에게 말했
다.
[그대들은 어떻게 된 노릇이오? 어쩌다가 상처를 입었지?]
한 명의 시위가 말했다.
[부총관께 말씀드립니다. 소인 등 세 사람은 오늘 오전에 무예를 연마
하다가 지나치게 손을 썼기 때문에 서로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위소보는 욕을 했다.
[빌어먹을, 모두 다 형제라고 할 수 있는데 무예를 연마하면서 그토록
심하게 손을 쓰다니,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도 아니지 않소?]
세 명의 시위는 일제히 말했다.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십 냥의 은자를 약값으로 받아가도록
하시오.]
세 명의 시위는 재빨리 허리를 굽히고 사의를 표했다. 위소보는 다시
말했다.
[제기랄,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대들을 이렇게 크도록 길러 주셨으니 그
한 목숨은 값싼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오. 모두들 만약 여전히
머리통을 남겨 밥을 먹고 싶다면 그 개같은 주둥아리를 조심하도록 하
시오. 만약에 그 누가 잠을 잘 때 잠꼬대를 하게 될까봐 두렵다면 아예
스스로 혓바닥을 자르는 것이 좋겠소. 지금부터 여기 있는 사람들의 이
름을 일일이 보고 하시오.]
시위들과 궁녀들, 그리고 태감들은 자기의 성명을 일일이 보고했다.
[좋소. 오늘 숨박꼭질한 일이 소문이 나서 나의 귀에 다시 들어온다면
어느 누가 입을 벌렸든 간에 서른다섯 명의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목을 치겠소. 알아 들었소?]
사람들은 방금 괴상한 일을 본 이후 목숨을 건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
아차릴 수 있었다. 십중팔구 황상께서는 사람을 죽여 봉하리라고 내다
본 것이다. 그런데 계 공공이 이와 같이 말을 하니 실로 자기네들의 목
숨을 구하는 일인지라 너무나 감격해서는 일제히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공공께서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크게 감사를 드립니다.]
위소보는 손을 내저었다.
[왜 나에게 고맙다고 하는 것이오? 황상의 은전이외다.]
그는 침전 앞 돌계단 위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 반 시간이 훨씬 지나
서야 강희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소계자, 들어 오게.]
그는 침전으로 들어갔다.
태후는 강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있었는데 얼굴은 하나같이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무
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태후께서는 크게 기뻐하십시오. 바깥의 서른다섯 명의 신하들은 오늘
황상꼐서 건녕 공주와 숨박꼭질한 일에 대해서 입을 봉하기로 했습니
다. 어느 누구라도 감히 반 마디라도 누설을 하게 된다면 소신이 그 서
른다섯 명의 목숨을 모조리 처치하고 남겨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들
은 이미 간이 찢어지도록 놀라게 되었으니 아마도 누구하나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못할 것입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러냐?]
위소보는 말했다.
[만약 지금 죽여서 후환을 끊고자 하신다면 소신이 바로 그대로 하겠습
니다.]
강희는 약간 망설이는 듯했다. 태후는 말했다.
[오늘 황상과 나는 모자간에 상봉을 이루었으니 실로 하늘처럼 커다란
기쁜 날이 아니겠는가? 쓸데없이 생명을 해치지 않도록 하게나.]
강희는 말했다.
[예. 우리들은 반드시 크게 불공을 드려 하늘과 보살께서 보우하신데
대해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태후는 위소보를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너는 어린 나이에 이토록 많은 공로를 세웠으니 실로 갸륵하구나.]
위소보는 말했다.
[이것은 모두 태후와 황상의 홍복입니다. 소신은 그저 층성을 다하여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일찍 그 계집의 간악한 음모를 폭로하지 못해 태
후께서 이토록 오랜 세월에 걸쳐 고생을 하시게 된 데 대해서 한스럽게
생각할 뿐입니다.]
태후는 마음속이 쓰라려 그만 눈물을 흘리며 강희에게 말했다.
[반드시 이 어린 사람에게 훌륭한 상을 내려야 할 것이네.]
강희는 말했다.
[예, 예. 소계자, 그대의 벼슬은 이미 적지 않네. 오늘 다시 그대에게
작위를 내리도록 하지. 우리 대청나라는 공후백자남(公候伯子男)이라는
다섯 등급의 직위가 있네. 태후의 은전으로 그대를 일등 자작(子爵)에
봉하겠네.]
위소보는 큰절을 하고 사의를 표했다.
[태후의 은전에 감사드립니다. 황상의 은전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같은 자작의 벼슬을 어디에 쓴담? 도대체 몇 푼의 은자나 나가게
될까?)
그는 강희가 손을 내젓는 것을 보고 그만 물러나고 말았다.
위소보는 자기가 거처하는 곳으로 돌아와 품속에서 책을 꺼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것은 틀림없는 사십이장경이었다.
이 한 권은 남색 비단으로 겉장을 하고 있었고 겉장 가장자리에는 붉은
비단을 대놓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양남기의 경서로군. 그렇군. 도 고모님은 그녀의 사조가 양남
기 기주의 저택에서 경서를 훔치려다가 경서는 훔치지 못하고 오히려
신룡교의 교주들에게 얻어맞아 중상을 입고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았던
가? 그렇다면 이 경서는 십중괄구 신룡교 교주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이 경서를 홍
교주에게 바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 당시 손에 넣지 못하고 최근에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를 일이로구나.)
위소보는 요모조모로 생각해 보았으나 그 가운데의 여러 가지 일들을
정리하여 종합적으로 추측할 수가 없었다.
이 때 가슴팍은 여전히 무섭게 아파와서 그는 다시 생각했다.
(그 땅딸막한 살 덩어리는 무공이 뛰어나다. 어이쿠, 혹시 그가 바로
이 경서를 훔쳐낸 신룡교의 고수가 아닐까? 그가 궁 안으로 들어와 늙
은 갈보와 만나게 되었는데 늙은 갈보는 꽤나 그를 잘 대접하여 진짜
태후를 침전 밑으로 옮기도록 하고는 커다란 장농을 비워 그의 잠자리
를 마련해 주었구나. 나와 소황제가 조금 전에 자녕궁에 갔던 일은 정
말 공교롭기만 하다. 때맞추어 간부를 침대 위에서 잡지 않았는가 말이
다. 그런데 이 살 덩어리가 다시 원수를 갚으려고 하거나 다시 자녕궁
으로 들어와 책을 도로 찾아갈 생각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그는 다륭에게 가서 이야기를 했다. 즉 소식을 들어 알게 된 것인데 도
망간 자가 궁 안으로 들어와 황상을 시해할지도 모르니까 좀더 많은 시
위를 보내 엄밀히 황상과 태후를 보호하라고 하는 말이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늙은 갈보가 만약 신룡교로 돌아가서 흥 교주에게 보고를 한다면 일이
잘못될 것이다. 선수를 쓰는 자가 장땡이라고 경서 안의 지도를 꺼낸
후에 한두 권의 경서를 신룡교로 보내 주면 홍 교주는 나에게 나머지
경서를 찾도록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약을 줄 것이다. 그가 경서에서
지도를 찾지 못하는 것은 그의 일이고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야말로
그의 복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의 수
명은 하늘처럼 높으니까 서둘 필요 없이 천천히 찾으면 되겠지. 그리하
여 십만 팔천 년 동안 찾게 된다면 끝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第67章. 진근남을 죽이려는 정극상
위소보는 황궁을 나서서 이력세, 관안기, 현정 도인, 전노본 등을 만나
보았다. 천지회의 군웅들은 모두들 반가워했다. 이력세는 말했다.
[속하가 방금 들은 소식인데 총타주꼐서 이미 천진에 도착하셔서 일간
상경한다고 합니다. 위 향주께서도 막 북경으로 돌아오셨으니 정말 잘
되었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군요. 정말 잘되었습니다.]
사부를 다시 뵙게 된다는 사실에 그는 가슴이 약간 두근거리고 켕기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군웅들은 즉시 술을 날라오고 닭을 잡아서 그를 환송하는 연회를 베풀
었다.
해질 무렵 위소보는 마언초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말했다.
[마형, 도끼 한 자루를 준비해 주시오. 그리고 끌 한 자루와 철추도 한
자루 준비해 주시오.]
마언초는 대답하고여디론가 가더니 도끼와 쇠망치, 그리고 끌을 구해서
그에게 갖다주었다. 위소보는 그를 앞장 세우고 그 관을 놓아 두었던
화원 가운데의 흙집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말했다.
[나는 관 속에 약간의 물건들을 넣어야겠소.]
마언초는 대답했다.
[예.]
그는 무척 이상하게 여겄으나 향주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더 묻지
않았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저께 밤에, 죽은 이 친구가 꿈속에 나타나 나에게 현몽을 했소이다.
그는 어떤 물건이 필요하다는구려. 친구된 도리로 어찌 그의 청을 들어
주지 않을 수 있겠소?]
마언초는 더욱더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그저 예, 예, 하고 대답할 뿐이
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마형은 문 밖에서 잠시 지켜 서서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주
시오.]
위소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서는 빗장을 걸었다.
그 관 위에 먼지가 가득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는 끌과 도끼로 일일이 관의 뚜껑에 박혀 있는 못들
을 뽑고 뚜껑을 열어젖히고 다섯 권의 경서를 싸고 있는 기름 먹인 베
보자기를 꺼냈다. 그가 막 뚜껑을 닫으려고 했을 때 갑자기 마언초가
문 밖에서 호통을 내질렀다.
[게 누구냐!]
곧이어 누군가 호통을 치며 물었다.
[진근남은 어디 있느냐?]
위소보는 깜짝 놀라 생각했다.
(누가 감히 사부님에 대해서 묻는거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마언초는 말했다.
[당신은 누구시오?]
그러자 냉랭한 음성이 들렸다.
[그가 어디로 가서 숨든지 그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위소보는 이 음성을 듣고 즉시 그 사람이 정극상인 것을 알았다. 그는
더욱더 놀랍고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이 고약한 녀석이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지?)
곧이어 그는 민저 말한 사람이 바로 일검무혈 풍석범이라는 것도 알았
다.
이때 쩡, 하는 소리와 함께 무기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
어 마언초가 신음소리를 내더니 쿵, 하니 쓰러지는 소리가 들렀다.
위소보는 더욱더 깜짝 놀랐다. 그는 즉시 자세히 생각해 보지도 않고
몸을 날려 관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정극상이 말했다.
[이 반적은 틀림없이 이 안에 숨어 있을 겁니다.]
의소보는 놀라고 당황하여 관 뚜껑을 들어올려 닫았다. 그러자 곧이어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흙집의 나무 문이 어느덧 걷어차여 뻐개지고
정극상과 풍석범이 안으로 들어왔다.
위소보는 관 안에서 한 줄기 빚이 새어들어오는 것을 보자 총망 중에
관 뚜낑을 딱 맞게 닫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속으로 야단났다
고 생각했다.
(큰일났군. 큰일났어. 그들은 우리 사부님을 찾고 있는데 우리 사부님
의 제자를 찾아내게 되었구나.)
홀연 문 밖에서 누가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는 무슨 일로 나를 찾으시오? 도대체 무슨 일이오?]
바로 사부 진근남의 음성이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사부님이 오셨다.)
별안간 진근남은 아, 하고 비명을 질렀다.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곧
이어 쩡쩡, 하는 소리가 났고 무기와 무기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
다. 진근남은 노해 부르짖었다.
[풍석범! 네가 감히 갑자기 암산을 하더니. 도대체 무엇 하려는 짓이
냐?]
풍석범은 냉랭히 말했다.
[나는 명을 받들고 너를 잡으러 왔다.]
이때 정극상이 말했다.
[진영화, 당신은 얼마만큼 나를 안중에 두고 있소?]
그 어조는 노기로 충만해 있었다. 진근남은 말했다.
[둘째 공자께서는 어째서 그런 말을 하시오? 불초는 둘째 공자가 북경
에 오셨다는 말을 그저께 듣고 밤을 도와 천진에서 달려왔소. 그런데
뜻밖에도 둘째 공자께서 먼저 도착했구려. 속하가 미처 마중을 하지 못
한 점, 용서하시오.]
위소보는 사부가 공손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 속으로 욕을 했다.
(개방귀 같은 둘째 공자 놈, 지가 뭐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거지?)
이때 정극상이 말했다.
[부왕께서 나에게 중원으로 공무차 파견한 사실을 그대는 알고 계시겠
지?]
진근남은 말했다.
[예.]
정극상은 말했다.
[그대가 이미 알고 있다면 어째서 일찍 와서 수시로 나를 보호하지 않
았소?]
진근남은 말했다.
[속하는 몇 가지 긴급한 큰일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몸을 둘로 나눌
수 없었소이다. 둘째 공자께서는 용서해 주시오. 속하는 풍형이 옆에서
모시고 있고 풍형의 신공이 무적이라 어지간한 사람들은 모조리 제압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히 그가 둘째 공자를 편안무사하게 호위할 수 있으
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정극상은 싸늘히 코웃음치더니 노해 말했다.
[흥, 그런데 어쩨서 내가 천지회에 왕림하였는데도 그대의 수하 졸개들
이 나에 대해서 그토록 무례한 행동을 했단 말이오?]
진근남은 말했다.
[아마도 그들은 둘째 공자를 모르고 있는가 봅니다. 북경과 이 부근 일
대에서 우리 천지회 사람들이 하는 일은 바로 오랑캐에게 반기를 드는
일이기 때문에 모두들 조심하고 특별히 근신을 하느라고 제대로 예의를
갖추지 못한 것 같습니다. 속하가 대신 사과를 드립니다.]
위소보는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나서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이 못된 녀석에게 어쩨서 이토록 겸손해 하실까?)
정극상은 말했다.
[당신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하는데 그렇다면 오히려 내가 잘못
했단 말이오?]
진근남은 말했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곧이어 종이를 뒤적이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정극상 말하는 소리가 들
렸다.
[이것은 부왕의 유시이오. 그대가 읽어 보시오.]
진근남은 말했다.
[예. 왕야의 유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명나라 연평군
왕이 명을 내린다. 정극상을 중원으로 파견하여 공무를 집행하려고 하
니 무릇 매사에 있어 나라에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모든 점에 있어서
정극상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는 바이다.']
정극상이 말했다.
[잘 보셨소?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셨지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
지?]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뜻은 무슨 놈의 뜻이 있겠느냐? 네 녀석이 알아서 기라는 뜻이겠지.)
진근남은 공손히 말했다.
[왕야께서는 둘째 공자님께 분부하시되 그저 나라에 이로운 일이라면
왕야에게 보고를 할 필요없이 스스로 처리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
다.]
정극상은 말했다.
[그대는 부왕의 유시를 받들겠소, 받들지 않겠소?]
진근남은 말했다.
[왕야의 유시는 불초가 물론 받들어야지요.]
정극상은 말했다.
[좋소. 그대 스스로 자기의 오른팔을 자르도록 하시오.]
진근남은 놀라 말했다.
[그것은 어째서입니까?]
정극상은 냉랭히 말했다.
[그대의 눈에는 주군도 보이지 않는 처지가 아니오? 나를 공경하지 않
는 것은 바로 부왕에게 불경하는 것이오. 내가 그대의 수작을 보니 신
하가 되기 싫어하는 마음을 품고 있소. 흥, 그대는 중원에서 죽어라 하
고 자기의 세력을 키우고 천지회를 확충하고 있으니 어찌 대만의 정씨
집안을 마음에 두겠소? 그대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왕으로 봉하려는 것
이 아니오?]
진근남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속하는 결코 그런 속셈이 없습니다.]
정극상은 말했다.
[흥, 결코 그런 속셈이 없다고? 이번 하간부의 대회에서 여러 사람들이
나를 복건성의 맹주로 추대한 것을 그대는 알고 있소?]
진근남은 말했다.
[예. 그것은 온 천하 영웅들이 왕야가 충심으로 나라를 위하는 뜻을 존
경하여 맹주로 추대한 것입니다.]
정극상은 말했다.
[그대의 천지회에서는 몇 성의 맹주가 탄생되었소?]
진근남은 잠자코 있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제기랄, 저 녀석이 크게 성질을 부리고 있는 것이, 바로 천지회를 질
투하고 있기 때문이로군.)
그는 다시 생각했다.
(내 마누라의 간부가 내 사부의 윗사람이라니, 이렇게 되면 이 일은 매
우 더럽게 꼬인 셈이구나. 그러나 이제 두 사람이 크게 충돌을 일으킨
다면 그야말로 멋지게 되는 것이다. 다만 사부가 암산에 걸려 몸에 상
처를 입었으니 걱정이구나. 그들의 해침을 받아 죽지 않게 되었으면 좋
겠구나.)
이때 정극상이 큰소리로 말했다.
[그대의 천지회에서는 세 성의 맹주가 되었는데, 나는 복건성 한 성만
을 차지하고 있소. 그대 천지회와 비교할 때 우리 정씨 집안은 얼마나
초라하냔 말이오. 나는 그저 조그만 복건성의 맹주에 지나지 않는데 그
대는 서간맹의 총군사이니 그대는 그야말로 나의 머리 위로 기어오르는
격이 아니겠소? 그래도 그대의 마음속에 부왕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이
오?]
진근남은 말했다.
[둘째 공자께서는 살피십시오. 천지회는 속하가 돌아가신 국성야의 명
령을 받들어 창립한 것으로, 그 목적은 오랑캐를 내쫓는 데 있습니다.
천지회와 왕야는 본래 한 덩어리이며 피차 나누지 못할 사이입니다. 천
지회의 모든 대사는 속하가 왕야에게 품하고 나서 행하고 있습니다.]
정극상은 냉소했다.
[천지회에서는 그대 진근남이 있을 뿐 대만의 정씨 집안은 존재하지 않
았소. 설사 천지회에서 정말 큰일을 이루어 오랑캐를 내쫓았다 하더라
도 이 천하의 주인은 역시 그대 진근남이 될 것이고 우리 정씨의 천하
는 되지 않을 것이오.]
진근남은 말했다.
[둘째 공자의 그와 같은 말은 틀렸습니다. 오랑캐를 쫓아낸 이후 우리
들은 똑같이 대명나라 황실의 후예 주씨 성을 가진 사람을 주군으로 모
셔야 합니다.]
정극상은 말했다.
[그대는 정말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는군. 벌써부터 그대는 정씨 가문
을 안중에 두지 않고 있는데 훗날 주씨 성을 지닌 사람을 안중에 둘 리
가 있소? 내가 그대에게 한 팔을 자르라고 했는데, 그대는 명령을 듣지
않고 있소. 내가 이번에 하간부에서 돌아올 때 길에서 많은 위험과 고
난을 겪었지만 천지회의 졸개 한 명도 나를 보호하는 것을 볼 수 없었
소. 만약에 풍 사부가 애써 구원해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내 목숨
을 부지했을는지 의문이오. 그대는 내가 오히려 소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데 그와같은 심보를 가졌으니 이미 죽어 마땅
하다고 할 수 있소. 흥, 그대는 그저 우리 형님에게만 아첨을 할 뿐 평
소에 나를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았소.]
진근남은 말했다.
[큰 공자와 둘째 공자는 친형제이며, 속하는 똑같이 받들어 모시고 있
는데 어찌 그 누구의 편을 든다고 하십니까?]
정극상은 말했다.
[우리 형님은 이후 왕이 될 사람인데, 그대의 눈에 어찌 우리 형제 두
사람이 같을 리가 있겠소?]
위소보는 거기까지 듣게 되자 이미 어느 정도 윤곽을 파악하게 되어 속
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은 자기의 형님과 왕의 자리를 다투고 있구나. 그리하여 우리
사부가 자기의 형님을 옹호하는 것을 탓하고 풍석범의 이간질을 받아서
이 기회에 우리 사부님을 제거하려고 하는구나.)
이때 정극상은 다시 말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대는 중원에서 세력이 크니 차라리 나를 죽이도록
하시오.]
진근남은 말했다.
[둘째 공자가 이토록 몰아세우시니 속하로서는 정말 변명하기 어렵습니
다. 곧 대만으로 돌아가서 왕야를 뵈옵고 왕야의 분부를 따르도록 하겠
소이다. 왕야께서도 나를 죽이려고 하면 제가 어찌 항거 하겠소이까?]
정극상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을 뿐 뭐라고 반박하지 못하고 있었다.
매우 난처한 듯했고 또 한편으로는 부친 앞에서 그와 대질하는 것을 두
려워하는 듯했다. 풍석범은 냉랭히 말했다.
[아마도 진 선생은 이곳을 떠나기가 무섭게 오랑캐에게 투항하지 않으
면, 둘째 공자를 배신하고서 흘로 깃발을 내세워 스스로 왕이 되어 다
시는 대만으로 돌아가지 않겠지요?]
진근남은 노해 부르짖었다.
[당신이 조금 전 나에게 암습을 가해 상처를 입힌 것도 왕야의 명을 받
은 것이오? 왕야의 유시가 어디 있소?]
풍석범은 말했다.
[왕야께서는 둘째 공자에게 중원에서 일을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셨소.
둘째 공자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은 바로 반역이니 당신은 죽어 마땅한
것이오.]
진근남은 말했다.
[둘째 공자는 멀썽한데 모두 다 당신이 가운데서 이간질을 했구려. 국
성야께서 얼마나 어렵게 이 기업을 이룩하셨소? 이 커다랗고 홀륭한 기
업은 아마도 당신과 같은 간사한 소인의 손에 의해 그릇치게 될 것 같
구려. 당신 풍가가 설사 무공이 천하무적이라 하더라도 내가 어찌 당신
을 두려워하겠소?]
풍석범은 날카롭게 외쳤다.
[그렇다면 당신은 공공연히 연평왕부에 반기를 들겠다는 것이오?]
진근남은 낭랑히 말했다.
[이 진영화의 왕야에 대한 충성심은 하늘이 알아줄 것이오. 반역이란
두 글자로 나를 모함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을 것이오.]
정극상은 호통을 쳤다.
[진영화는 배반을 하고자 하니 잡도록 하시오.]
풍석범은 말했다.
[예.]
쩡쩡, 하는 소리가 다시 울려퍼지는 가운데 무기가 서로 부딪치면서 세
사람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진근남은 부르짖었다.
[둘째 공자, 아무쪼록 그대는 한 켠에 서 계시오. 속하는 그대에게 손
을 쓸 수가 없소.]
정극상은 말했다.
[그대는 나와 손을 쓸 수 없다고?]
잇따라 두 마디 똑같은 질문을 하며 무기로 치는 소리가 두번 들렸다.
마치 그가 두 마디 물으면서 진근남에게 두 번 칼질을 한 듯 싶었다.
위소보는 크게 초조해서는 가만히 관 뚜껑을 한 치 정도 들어 올리고
내다보았다.
정극상과 풍석범이 좌우 양쪽에서 진근남을 협공하고 있었다. 진근남
은 왼손에 검을 들고 있었는데 오른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팔
에서는 선혈이 끊임없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물론 풍석범의 암습에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풍석범의 검초는 지극히 빨라 진근남은 간신히
저항하고 있었다. 정극상은 한 칼 한 칼을 이리 치고 저리 치고 있었으
나 진근남은 감히 맞받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피하기만 했을 뿐이며 공
격할 엄두도 내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왼손으로 검을 휘두르자니 불
안하기 짝이 없었다. 오른팔의 상처가 가볍지 않은 모양이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초조하게 생각했다.
(풍제중, 관부자, 그들은 어째서 한 사람도 달려와 돕지 않는단 말인
가? 이와 같이 싸우다가는 사부가 반드시 그들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겠
다.)
그러나 밖은 조용했다. 흙집 안에서 쩡쩡, 하니 싸움을 벌이고 있었으
나 바깥에서는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것 같았다.
이때 풍석범은 검을 뻗쳐 질풍과 같이 찔러 오는데 그 기세가 지극히
매서웠다. 진근남은 검을 들어 막았는데 쌍검은 즉시 서로 흡인력이 있
는 듯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정극상은 칼을 휘둘러 비스듬히 내려쳤고 진근남은 몸을 틀어 옆으로
피했다. 정극상은 칼을 옆으로 휘둘러 찍, 하는 가벼운 음향과 더불어
진근남의 왼쪽 다리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진근남은 아, 하더니 장검으로 바닥을 찍으며 껑층 뛰어 뒤로 물러났
다. 그러나 그 순간 풍석범은 어느덧 검을 뻗쳐 그의 오른쪽 어깨를 찔
렀다.
진근남은 그야말로 피투성이가 되어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는데 도저히
지탱하기 어려운 것을 알고 한 걸음 한 걸음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
고 있있다. 문을 박차고 나가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풍석범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먼저 문 앞을 막아서면서 냉소했다.
[이 반적, 이래도 달아날 생각이냐?]
위소보는 풍석범이 관 옆으로 와 주기만 바랬다. 그러면 관 안에서 비
수를 찔러 댈 참이었다. 이것은 바로 객점에서 라마를 죽인 수법인데
이 수법을 써서 그를 죽이자는 생각이었다. 판자대기를 격하고 사람을
찌르는 것은 원래 그의 한평생 쌓은 절기라 할 수 있었으며 권법에 뛰
어난 고수가 펼치는 격산타우(隔山打牛)보다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었
다. 그러나 풍석범은 싸우면 싸울수록 더욱 멀어지니 어떻게 그를 찌를
수가 있겠는가!
정극상이 이때 호통을 내질렀다.
[반적, 그래도 검을 버리고 포박을 받지 않겠느냐!]
위소보는 형세가 위태로워지자 오늘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사부
님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목에 힘을 주고서는 갑자기 두 번 짹짹,
하는 소리를 냈다. 풍석범 등 세 사람은 그 소리를 듣자 깜짝 놀랐다.
정극상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뭐죠?]
풍석범온 고개를 흔들어 보였으나 손은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위소보는 다시 짹짹짹, 하고 세 번 소리를 냈다. 정극상은 지극히 유령
을 무서워하는 듯 그 소리에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별안간 관 뚜껑이 열려지더니 한 무더기의 하얀 가루가 날아왔다. 세
사람은 대뜸 눈이 찌르는 듯 아파왔고 숨이 컥컥 막혔다. 원래 시체를
염하게 될 때를 위해서 관 안에 반드시 대량의 석회를 넣어 두기 마련
이었다. 그 날 마언초는 석회를 바로 관 안에 넣어 두었던 것인데 이때
위소보가 한 웅큼 손에 쥐어서 뿌린 것이다.
풍석범은 결코 유령의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급히 앞으로 달려와 눈
을 감고서는 몸을 구부리고 관 안에다가 검을 뻗쳐 내려찍었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검끝은 관 뚜껑을 찔러 들어갔다. 그리하여 검을
뽑고 다시 찌르려고 했을 때 갑자기 오른쪽 가슴팍이 아파왔다.
그는 암산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고는 급히 몸을 날려 피했는데 그 바
람에 등이 무섭게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의 무공은 매우 뛰어난 편이라 왼손으로 가슴팍의 상처를 누르고 오
른손으로 검을 휘둘러 빗방울조차 스며들지 못하도록 하고서 몸을 보호
했다.
위소보는 관 안에서 판자대기를 격하고 사람을 찌르는 수법을 써서 단
숨에 성공을 하게 되자 비수를 쥔 채 뛰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풍석범
과 정극상, 그리고 진근남 세 사람은 모두 눈을 꼭 감고서 칼과 검을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 풍석범은 가슴팍을 찔렸으나 치명상은 아니었
다. 다시 바짝 앞으로 다가가서 일검을 더 찌르고 싶었지만 풍석범이나
정극상이 칼과 검을 휘둘러대기 때문에 경솔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때 시기가 너무나 긴박한 편이라 그들 두 사람이 눈 안에 든 생석회
를 씻어 내고 사물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큰 일이 난다 싶었다.
일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서 그는 왼손으로 생석회를 집어서 풍석
범과 정극상이 손을 뻗쳐 눈을 훔치려 드는 것을 보고 한 웅큼의 생석
회를 다시 뿌렸다. 석회를 뿌리는 것은 원래 그가 자랑하는 또 다른 절
초이기도 했다.
몇 번 뿌리지 않아서 풍석범은 석회가 날아오는 위치를 알아차린듯 갈
마분천(渴,馬奔泉)이라는 일초를 펼쳐서는 검을 뻗쳐 곧장 찔러 왔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서 급히 뒤로 물러서다가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다.
그 순간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은 관을 찔렀다.
위소보는 기고 구르며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풍석범은 검을 들고 관
을 잇따라 마구 내려치고 찔러댔다. 아직도 적이 그 안에 있는 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무공 수위로 볼 때 위소보가 낭패하기 짝이 없는 몰골로 도망을
치는 것은 즉시 알아차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별안간 사물을 볼
수 없고 가슴에 상처까지 입게 되자 일시 심신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거기다가 무공이 탁윌하여 결코 자기에 못지 않은 진근남이 곁에 있었
다. 강적이 옆에 있으니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당황하고 다
급한 김에 진근남도 이미 사물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로지 재빨리 적을 죽이려고 서둘렀기 때문에 위소보는 즉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다.
풍석범은 관을 향해 몇 빈 찔렀으나 사람의 몸을 찌르지 못한 것을 느
끼자 즉시 그는 천암경수(千巖競秀)라는 일초를 펼쳐 검화를 점점이 뿌
려 몸주위를지키며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어깻죽지가 벽에 부딪히는
순간 그는 벽을 등지고 서게 되었다.
그가 이와 같이 전력을 다해 몸을 움직이자 가슴팍의 상처에서는 더욱
많은 양의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는 살짝 눈을 떠보았다. 석회 가루가
즉시 눈 안으로 들어왔다. 몹시 아파서 감당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고
혹시나 눈이 이대로 멀지 않는가 싶어 다시 눈을 뜰 엄두를 내지 못하
고 벽에 등을 의지한 채 한 걸음 한 걸음씩 움직였다. 마음속으로 그저
벽을 따라 걸음을 옮겨 놓는다면 문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
고 일단 문 밖으로 나가면 도망을 쳐서 쉽게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으
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위소보는 문 입구에 서 있었는데 그가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이미
그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그는 풍석범이 문 입구 쪽으로 더듬어 왔을
때 일검으로 찌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무공이 너무나 고강
하여 설사 그가 찌르는 데 성공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가 죽기 직전에
장검을 한 번이라도 휘두른다면 즉시 자기의 목숨도 끊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좋은 꾀를 짜내어 그는 비수를 문에다가 가볍게 두 치 정도 박
아 넣었다. 풍석범이 이 문에서 이미 두 자도 되지 않는 곳에 이른 것
을 보고 갑자기 날카로운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난 여기에 있는데 어디서 더듬느냐?]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풍석범은 재빠르기 이를 데 없이 검을 뻗
쳐내었다. 일검을 벼락같이 내려치는 순간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
은 비수에 부딪히게 되었고, 대뜸 두 동강이 났으며 반 토막의 잘라진
검이 툭 튀어올라 그의 이마를 때리고서야 땅 위에 떨어졌다.
위소보는 이미 흙집 옆으로 몸을 숨기고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
때 풍석범이 크게 비명을 지르더니 질풍같이 달려나갔다. 위소보는 문
입구 쪽으로 되돌아섰다. 그러고 보니 진근남과 정극상은 여전히 칼과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강적이 이미 사라진 이상 그는 이 정씨 집안의
둘째 공자에 대해서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는 불렀다.
[사부님, 그 일검무혈은 이미 저의 칼질에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뼁
소니를 치고 말았습니다. 사부님은 어서 이리 오십시오.]
진근남은 어리둥절해져 물었다.
[너는 누구냐?]
위소보는 말했다.
[제자 소보입니다.]
진근남은 크게 기뻐서 검을 가슴 앞에 비껴 들고 다시 휘두르지 않았
다. 위소보는 불렀다.
[장형, 이형, 왕형, 그대들이 오셨구려. 잘되었소. 이 정가라는 못난
녀석은 아직도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을 하지 않으니 그대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그를 난도질해서 죽이도록 하시오.]
정극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위소보가 허장성세로 그러는 줄도
모르고 부르짖었다.
[사부님, 사부님!]
그런데 풍석범의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약간 주저하더니 즉시
손에 들고 있는 칼을 던졌다. 위소보는 호통을 내질렀다.
[끓어 앉아라!]
정극상은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앉았다. 위소보는 껄껄 웃으며 칼을
집어들고 그 끝으로 가볍게 정극상의 목을 겨눈 채 호통을 내질렀다.
[몸을 일으켜 오른쪽으로 향하고, 앞으로 세 걸음 기어서 들어가도록
해라!]
위소보가 한 마디씩 부르짖을수록 정극상은 전전긍긍하며 그 명령에 좇
아 행동을 했으며 관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위소보는 껄껄 소리내어 웃고는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 관 뚜껑을 닫고
그 경서를 싼 보따리를 등에 짊어지고 말했다.
[사부님, 우리 빨리 눈을 씻으러 갑시다.]
그는 진근남의 손을 이끌고 흙집에서 나왔다. 칠팔 걸음 걸었을 때 마
언초가 화단 옆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위소보는 깜짝 놀라 앞으로
나가 부축하려고 했다.
마언초는 말했다.
[총타주를 구하는 것이 급합니다. 속하는 그저 혈도가 봉해져 있을 뿐
이니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진근남은 몸을 굽혀서 그의 허리께를 몇 번 어루만지자 혈도가 즉시 풀
어졌다. 마언초는 말했다.
[총타주의 눈이 어떻게 되셨습니까?]
진근남은 눈살을 찌푸렸다.
[석회 가루가 들어갔네.]
마언초는 말했다.
[그렇다면 채소 기름으로 씻어야지 물로 씻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진근남의 괄짱을 끼고 재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위소보는 말했
다.
[나도 즉시 가겠소이다.]
그는 흙집으로 되돌아가서 도끼를 들고 일곱 내지 여덟 개의 못을 관
뚜껑에 박아 놓고 말했다.
[정 공자, 누워서 며칠 쉬도록 하시오. 그야말로 그대는 재수가 좋은
편이라 할 수 있소. 나에게 빚진 일만 냥의 은자는 없었던 것으로 할
테니 갚을 필요가 없어졌소.]
그는 크게 소리내어 웃고는 대청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마언초는 이미 채소 기름으로 진근남의 눈에 들어간 석회
를 씻어 내고 다시 몸의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준 후였다.
대청에는 풍제중과 전노본, 현정 도인 등이 모조리 이리저리 쓰러져 있
었는데 진근남은 그들 각자의 혈도를 풀어 주고 있었다. 풍석범이 갑자
기 습격을 해 오자, 원래 풍석범의 무공이 고강한 데다가 사람들이 손
을 쓸 겨를을 주지 않고 기습했고, 거기다가 풍제중 등은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소리를 듣고 달려나와 대응하려고 했으나 풍석범에게 차례
로 혈도를 짚혀 쓰러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극도의 분노에 찼으나 다만 총타주의 앞이라 감히 욕을
하지 못했다.
마언초가 위소보가 간계를 써서 풍석범에게 중상을 입힌 사실을 이야기
하자, 사람들은 그제서야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으며 모두 다 풍석범
이라는 녀석이 그토록 간악하니 석회로 인해 그냥 눈이 멀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들을 했다.
진근남은 두 눈이 벌겋게 부어올라서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
데 매우 엄숙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전 형제, 마 형제, 그대들은 정 둘째 공자의 눈에 든 석회를 씻어 주
고 이곳으로 모셔 오도록 하게.]
전노본과 마언초 두 사람은 대답을 했다.
[예.]
위소보는 갑자기 아, 하는 소리를 지르며 어지러워 쓰러지는 척 했으며
두 눈을 꼭 감았다. 진근남은 왼손을 뻗쳐 그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왜 그러느냐?]
위소보는 말했다.
[저는...저는...저는 조금 전.. 무척.. 무척 놀랐습니다. 혹시 그들이
사부님을 해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이번에는.. 이번에는 손발에
모조리 기운이 빠지는군요..]
진근남은 그를 안아서 의자 위에 눕히고 말했다.
[너는 좀 쉬도록 해라.]
사실 위소보는 석회를 사람의 눈에 뿌린 것이 실로 비열한 짓임을 알고
있었다. 과거 모십팔은 그 일 때문에 그를 한바탕 때리기까지 하지 않
았던가.
물론 군웅들이 그의 기지가 놀랍다고 크게 칭찬의 말을 했으나 그들이
자기 부하인 것을 생각할 때 물론 아첨을 떠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사부님은 대영웅이시고 대호걸이시니 모십괄보다 열 배나 뛰어난 분이
시다. 따라서 반드시 중벌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아예
미리 까무러친 척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손을 쓰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
이었다. 또한 벌을 받게 되어도 좀 가벼운 벌을 받을 속셈이었던 것이
다. 전노본과 마언초 두 사람은 천천히 대청으로 되돌아와서 말했다.
[총타주, 정 공자를 볼 수가 없습니다. 아마 떠난 것 같습니다.]
진근남은 눈살을 찌푸렸다.
[갔다구? 관 안에 없던가?]
전노본과 마언초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흙집 안에 관이
하나 있기는 있었으나 정 둘째 공자가 어찌 그 안에 있겠는가 하는 표
정 이었다. 진근남은 말했다.
[우리 가 보세.]
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흙집으로 향했다. 위소보는 다급한 심정으로 부
득히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엉덩이를 어루만지
며 속으로 생각했다.
(엉덩이 살들아, 사부님께서는 내가 그 못된 녀석을 관 안으로 들어가
도록 하는 것을 들으셨으니 너희들은 아무래도 곤장을 몇 대 맞아야 하
겠다. 정말 미안하게 되었구나.)
흙집 안으로 들어왔으나 곳곳에 석회와 선혈이 뿌려져 있을뿐 과연 정
극상은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다.
진근남은 위소보가 정극상을 강요하여 관 안으로 기어 들어가게 한 것
을 분명히 들은 바 있는데, 이때 바라보니 관 뚜껑에는 못질이 되어 있
는 것이 아닌가! 그는 엄한 표정으로 위소보를 바라보았다.
[소보, 너는 둘째 공자를 관 안에 들어 가도록 한 후에 못을 박았느
냐?]
위소보는 사부의 안색이 곱지 못한 것을 보고 잡아떼었다.
[어찌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쩌면 그가 사부님께서 그를 죽일
까봐 두려워서 스스로 못을 박은 것이겠죠.]
진근남은 호통을 내질렀다.
[터무니없는 소리. 빨리 뚜껑을 열어라. 그가 답답해서 죽지 않게, 빨
리 빨리!]
전노본과 마언초는 재빨리 도끼와 끌을 갖고와서 뚜껑에 박혀 있는 못
을 뽑았다. 관 뚜낑을 열었더니 안에는 과연 사람이 누워 있었다. 진근
남은 부르짖었다.
[둘째 공자!]
진근남은 그 사람을 부축해 일으켜 앉혔다.
그 순간 사람들은 모두 다 그 사람을 보고 아,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진근남은 손을 놓고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다시 관
안으로 쓰러졌다.
[관부자이구려 !]
이 찰라에 사람들은 관 안의 그 사람이 관안기라는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진근남은 다시 달려들어 재차 그를 부축했다. 그러고 보니 관안기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이미 죽어 있었다. 그러나 몸이 아직 따뜻한 것으로 보
아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놀람과 비통에 잠겼고 풍제중과 현정 도인 등은 담장 밖으로
달려나가 살펴보았으나 이미 적의 종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진근남
은 관안기의 옷을 풀어헤쳤다. 그의 가슴팍에 핏빚처럼 붉은 손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부르짖었다.
[풍석범이다!]
현정 도인은 노해 말했다.
[정말 풍석범이군요. 이 홍사장(紅沙掌)은 그의 곤륜파의 독특한 독문
무공입니다. 그 악적은 중상을 입었는데도 삽시간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제기랄, 정 둘째 공자를 구해 갔으면 그뿐이지 어째서 관 둘째 형을 해
쳐 죽였단 말인가!]
사람들은 성이 나서 중구난방으로 욕을 해댔다. 관안기의 처남인 가 여
섯째는 슬피 통곡을 했다. 진근남도 침울해져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사람들은 대청으로 돌아왔다. 전노본이 말했다.
[총타주, 둘째 공자가 큰공자와 자리 다툼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 천지회에서는 언제나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
고 있고 또 큰공자가 윗사람이라 자연 큰공자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겠
습니까. 둘째 공자는 이미 총타주를 눈옛가시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번
에는 풍석범의 이간질을 받아서 이 기회에 총타주를 제거하려고 한 것
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모두는 둘째 공자에게 죄를 더 짓게 되었으
니 이렇게 된다면 왕야까지도 그들의 말을 믿게 될 것입니다. 총타주께
서는 차후 다시는 대만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진근남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국성야(國姓爺)께서는 나에게 깊고도 무거운 은혜와 의리를 베푸셨네.
내 몸이 가루가 된다고 하더라도 보답하기 어렵다네. 왕야께서는 언제
나 영명하시고 또 나에 대해서 예의를 다해서 대해 주신다네. 왕야께서
는 결코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모해하여 죽일 분이 아닐세.]
현정 도인은 말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둘째 공자는 우리 천지회에서
대만의 명령을 받들지 않는다고 모함하고 있지 않습니까? 중원에서 그
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니 대만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더욱더 모함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씨 집안에는 모두 여덟 분의 공자가 있어 모두
들 권리와 자리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고 있으니 우리 천지회는 그들의
싸움에 말려들 필요가 없습니다. 총타주, 우리들은 진회(秦檜)와 같은
간신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악비(岳飛)처럼 맹목적인 충성을 하다가 억
울하게 피살되어서도 안 됩니다.]
전노본은 말했다.
[총타주는 한평생 정씨 집안을 위해 층성과 온 힘을 다했지만 하마터면
둘째 공자에게 해침을 당해 돌아가실 뻔하였으니 이런 일을 어찌 참을
수 있단 말이오?]
진근남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사내대장부가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하늘과 땅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
다면 다른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더라도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
이오. 그러나 정말 이와 같은 빈고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치 못했구
려. 조금 전 만약 소보의 기지가 아니었더라면 모두들 이미 죽은 목숨
이었을 것이오. 아! 애석하게도 관 둘째 형만이..]
위소보는 사부가 석회를 뿌리고 관에 못질을 한 사실에 대해서 따지지
않자 그만 마음이 느긋해졌다. 혹시나 그가 일시 생각이 미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반드시 화제를 돌려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이와 같이 소란을 피우게 되었으니 이웃집에서 모두 알아차
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관가에 보고를 할지도 모르니 아무래
도.. 아무래도...빨리 집을 옮겨야겠습니다.]
진근남은 말했다.
[바로 그렇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
나.]
즉시 몇 사람은 화원에 땅을 파서 관안기의 시체를 묻고 눈물을 뿌리며
무릎을 끓고 절을 했다. 그리고는 지니고 있던 물건들을 나누어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났다.
천지회의 군웅들은 북경에서 수시로 집을 옮겨 다녔기 때문에 거처 옮
기기를 밥먹듯 하였다.
위소보는 혹시나 사부가 자기의 무공에 대해서 시험을 할까봐그 기회를
빌어 작별을 고하고는 궁 안으로 돌아갔다.
그는 자기의 거처로 돌아와 방문의 빗장을 걸고 여섯 권의 경서를 하나
하나 뜯었다. 경서마다 겉장의 두 종이 사이에는 많은 양피지로 된 조
각들이 있었다.
그는 그 조각들을 꺼내고 겉장을 다시 봉해서 본래대로 환원시켰는데
반 권도 봉하지 못해 그만 싫증을 느끼고 속으로 생각했다.
(쌍아가 이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소림사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지. 내가 구난 사부에게 잡혀갔으니 이 계집애는 반드시
죽어라고 걱정을 할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보내 그녀를 불러와야지.)
그는 다시 경서의 겉장을 꿰매기 시작했는데 몇 번 꿰매자 눈꺼풀이 무
거워서 눈을 뜰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경서를 숨기고는
누워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튿날 이른 아침, 위소보는 서재로 가서 황상의 시중을 들었다.
강희는 말했다.
[내일은 조정에서 분부를 내리게 될 것일세. 그대로 하여금 건녕공주를
운남으로 호송하게 할 것이네. 그 오가라는 작은 후레자식에게 건녕 공
주를 시집보낼 생각일세.]
위소보는 말했다.
[예. 그러나 황상을 위해 며칠 시중을 들지도 못하고 또 멀리 떠나야
한다니 애석합니다.]
강희는 나직이 말했다.
[태후께서는 나에게 한 가지 큰일을 이야기했네. 이번에 운남으로 가거
든 이 기회에 그 일을 처리해 줘야겠네.]
위소보가 대답하자 강희는 다시 말했다.
[태후께서는 그 고약한 계집이 가짜 태후로 가장을 한 것은 원래 중대
한 음모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거야. 그녀는 우리 만주 용맥의 소재지를
알아내고 방법을 강구해서 깨뜨리려고 했다는군.]
위소보는 자기도 모르게 불쑥 부르짖있다.
[그 늙은 갈보는 너무나 큰죄를 지었군요.]
그러다가 그는 급히 손을 뻗쳐서는 자기의 입을 가로막았다. 황제의 앞
에서 그와 같이 상스러운 욕을 하는 것이 너무나 불경스러운 일인 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강희는 조금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듯 덩달아서 말했다.
[맞았어. 그 늙은 갈보는 정말 몹쓸 것이야. 태후께서는 욕됨을 참고
고통도 견뎌 내면서 죽어라 하고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늙은 갈
보로 하여금 간계를 이루지 못하도록 한 것일세. 하늘이 보우하시어 태
후께서 오늘까지 무사하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커다란 비밀
을 실토하지 않은 덕택일세.]
위소보는 이미 알고 있었으나 넌즈시 말했다.
[황상, 그와 같이 커다란 비밀에 대해서 황상께서는 될 수 있으면 저에
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알게 된다면 그만큼
누설될 위험이 있습니다.]
강희는 칭찬의 말을 했다.
[그대는 갈수록 철이 드는 것 같군. 그리고 매사에 있어 조심해야 된다
는 것도 알고 있군. 하지만 그대는 나와 일을 처리하게 된 이후로부터
한번도 어떤 일에 대해서든 남에게 누설한 적이 없지않은가? 만약 그대
마저도 내가 믿을 수 없다면 나는 그야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도 없는 것일세.]
위소보는 온몸의 수백 대나 되는 뼈들이 하나같이 대뜸 몇 냥쯤가벼워
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서 무릎을 꿇어 큰절을 했다.
[황상께서 그토록 믿어 주시니 소신은 바로 저 자신의 혓바닥을 잘랐으
면 잘랐지 감히 황상께서 들려 주신 말을 반 마디도 누설하지 않겠습니
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우리 대청나라 용맥의 비밀은 원래 여덟 권의 사십이장경 가운데 숨겨
져 있었다는군.]
위소보는 짐짓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이상하군요. 그런 일도 있습니까? 그것은 정말 생각 밖이었군요.]
강희는 계속해서 말했다.
[과거 섭정왕(攝政王)께서 중원으로 들어온 이후 여덟 권의 경서를 팔
기의 기주에게 나누어 내렸다네. 팔기 가운데 정황, 정백, 양황등 세
기의 명마는 물론 천자가 직접 지휘하게 되지만 밭이나 땅, 재물에 관
해서는 여전히 세 기주에게 나누어 관리하도록 했네. 그리고 정황기의
경서는 부황께서 줄곧 곁에 두고 계시다가 오대산으로 가지고 가셨고
그 후 그대에게 명하여 가져다가 나에게 주었었지. 양백기 기주는 어떤
일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양백기의 경서는 궁 안으로 몰수당하게 되었
는데 부황께서는 그 경서를 단경 황후에게 내렸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노황야께서 단경 황후를 좋아하셨으니 가장 좋은 물건은 자연히 그녀
에게 내리셨겠지. 만약 내가 순치 황제였다고 해도 여덟 권의 경서를
모조리 궁중으로 몰수해 들여서는 몽땅 그녀에게 주었을 것이다.)
강희는 계속해서 말했다.
[늙은 갈보가 단경 황후를 해쳐 죽였으니 자연 그녀의 경서를 차지하게
되었지. 오배는 양황기의 기주일세. 그 날 그대를 보며 오배의 가산을
몰수하게 되었을 때 늙은 갈보는 그대에게 두 권의 경서를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 권은 바로 양황기의 것이고 다른 한 권은 정백기의
것이었다네.]
위소보는 말했다.
[예. 진작 늙은 갈보가 이토록 나쁜 줄 알았더라면 소신은 늙은 갈보에
게 찾지 못했다고 말씀드리고 경서를 살그머니 황상께 바칠 것을 그랬
습니다.]
강희는 웃었다.
[그때 우리는 늙은 갈보가 가짜 태후인 줄 몰랐고 또 사십이장경과 그
와 같은 중대한 관계가 있는지 몰랐지. 만약 알고도 그대가 그토록 터
무니없는 짓을 했다면 나는 반드시.. 반드시 그대의 볼기를 때렸을 것
이네.]
위소보는 말했다.
[예.예.]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볼기쯤 때리고 끝날 일인가? 그대 역시 너무 겸손해 하실 것은 없소이
다.)
그는 물었다.
[그렇다면 다른 한 권의 정백기의 것은 오배가 어디서 손에 넣은 것이
죠?]
第68章. 건녕 공주를 미끼로 이용하다
강희는 말했다.
[그는 정백기의 기주 소극살합(蘇克薩哈)을 죽이고 가산과 재물은 물론
경서까지 차지했다. 흥, 그 역적은 죽어서도 죄를 다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예. 그렇게 된다면 늙은 갈보의 수중에는 세 권의 경서가 있겠군요.]
강희는 말했다.
[어찌 세 권뿐이겠는가? 그녀는 또 어전시위 부총관 서동을 파견해서
정홍기 기주 화찰박(和蔡博)을 괴롭혔네. 그 당시 나는 어인 연고인지
도 몰랐지. 거기다가 화찰박이란 늙은 녀석은 언제나 오배와 결탁을 하
고 있었으니 나 역시 상관하지 않았다네. 지금 생각하니 물론 그가 가
지고 있는 경서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서동은 아리
송하게 실종되고 말았으니 틀림없이 늙은 갈보에게 죽음을 당해 입을
봉하게 된 것 같아.]
위소보는 재빨리 말했다.
[예, 예. 황상께서는 정말 귀신처럼 알아맞추십시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대는 서동이 늙은 갈보에게 죽었다고 인정했는데, 내가 귀신처럼 알
아맞추었다고 그대를 칭찬한 것은 미리 못을 박아 두자는 것이다. 그대
가 설사 서동이 나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때 가
서 다른 말을 하면서 나를 조사하지는 못할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 스스로 자기가 귀신처럼 일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을 인
정하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황상의 몸으로 일을 짐작하는 데 있어서
귀신보다 못하다면 어찌 말이 되겠는가 말이다.)
강희는 말했다.
[만약 나의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위소보는 재빨리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절대 틀림이 없습니다.]
강희는 말했다.
[늙은 갈보의 수중에는 이미 네 권의 경서가 들어갔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네. 부황께서 나에게 내린 그 정황기의 경서를 나는 줄
곧 서재 책상 위에다 놓아 두고 있었는데 요즘 들어 갑자기 보이지 않
게 되었단 말일세. 그대는 생각해 보게. 어느 놈이 이토록 대담하게스
리 감히 황제의 서재로 들어와서 물건을 훔쳐 갔을까?]
위소보는 말했다.
[서재를 출입을 하면서 감히 스스로 경서를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은 오
로지....오로지....]
강희는 말했다.
[건녕 공주!]
위소보는 감히 그 말을 따라하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그대는 진짜 귀신처럼 헤아렸군.)
강희는 말했다.
[늙은 갈보는 딸을 보내서 그 경서를 훔치도록 한 것일세. 이렇게 된다
면 그녀의 수중에는 이미 다섯 권이 있는 셈이네.]
위소보는 말했다.
[빨리 자녕궁으로 가서 조사를 해 보지요. 늙은 갈보는 맨몸으로 궁에
서 도망을 쳤으니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말을 하면서 그는 속으로 크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 황상께서 만약 내 방으로 가서 조사를 하게 된다면 소계자에게
백 개의 머리가 있다 하더라도 모조리 달아나겠구나.)
강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이미 자세히 뒤져봤으나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네. 그저 한 벌
의 승포 자락을 찾아냈을 뿐이지. 늙은 갈보가 좋아하는 사람은 알고
보니 화상이었더군. 하하, 하하.]
위소보는 덩달아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나 두어 번 웃다보니 자신이 심
히 무례하다고 생각되어 재빨리 웃음을 멈추었다.
강희는 여전히 소리내어 웃으머 말했다.
[하하하, 그러나 그 호박처럼 생긴 녀석이 늙은 갈보를 안고 도망칠 때
나는 그의 뒤통수에 자라난 기다란 머리카락을 보았으니 이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닌가? 십중팔구 그 역시 궁녀로 가장을 했을 터이니 머
리카락은 가짜이겠지. 그 녀석은 키가 작은 데다가 또 뚱뚱한데 늙은
갈보는 왜 하필이면 다른 사내를 끌어들이지 않고 그 애호박 같은 친구
를 끌어들였을까?]
위소보는 웃었다.
[애호박의 무공은 매우 고강했습니다. 외모가 준수한 사람은 궁안으로
몰래 들어올 수 있는 재간이 없으니까요. 지난 번 그 가짜 궁녀도 매우
추악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강희는 웃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다른 세 권의 경서는 나누어 정홍기, 정남기, 양남기, 삼 기의 기주
손 안에 들어 있네. 정홍기의 기주는 지금 강친왕인데 나는 이미 그에
게 경서를 바치라고 명령을 내렸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강친왕의 그 경서는 그 날 밤 이미 남에게 도적질을 당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나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닌가? 강친왕이 어떻게 내놓는단 말인
가? 이번에야말로 강친왕은 큰 야단이 나게 되었구나.)
강희는 다시 말했다.
[정남기 기주 부등(富登)은 나이가 아직 어린데 내 조금 전에 그에게
물어 보았지. 그는 말하기를, 선임 기주였던 가곤(嘉坤)이 운남을 공격
할 때 전사하였고 그 뒤의 일은 모두 오삼계가 알아서 처리했다는군.
오삼계가 그의 손에 넘긴 것은 그저 하나의 도장과 몇 폭의 군기(軍
旗), 그리고 몇 만 냥의 은자뿐이었고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
더군.]
위소보는 말했다.
[그 경서는 틀림없이 오삼계가 삼켰을 것입니다.]
강희는 말했다.
[그래. 그렇기 때문에 그대가 오삼계의 왕부에 들어가서 자세히 그 일
을 수소문하여 방법을 강구해서 그 경서를 가져오도록 하게. 오삼계라
는 녀석은 늙고 간사하며 교활하기 그지 없으니 절대로 그가 사정을 알
도록 해서는 안 되네.]
위소보는 말했다.
[예. 소신이 임기응변으로 방법을 강구해서 그를 속여 책을 손에 넣도
록 하겠습니다.]
강희는 눈살을 찌푸리고 서재에서 서성거리더니 말했다.
[상관없어.양남기의 기주 악석극합은 매우 멍청해. 내가 그에게 경서를
바치라고 했더니 그는 놀랍게도 몇 년 전부터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군.
나는 시위들을 보내 그 집을 수색했으나 아무런 종적이 없네. 나는 이
미 그를 지하 뇌옥에 가두고서 사람을 시켜 차근차근 고문하도록 했네.
도대체 정말 도적질을 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감추고 바치지 않는 것
인지 알아보려는 것일세.]
위소보는 말했다.
[아무래도 역시 늙은 갈보가 사람을 보내서 수작을 부린 것 같은데 알
게 빼앗았는지 아니면 모르게 훔쳤는지는 짐작할 수 없는 일이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늙은 갈보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것이 아니다. 알게
빼앗거나 몰래 훔친 사람은 십중팔구 그 애호박처럼 생겨먹은 녀석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는 다시 말했다.
[만약 그것 역시 늙은 갈보가 손에 넣은 것이라면 여섯 권의 경서를 어
디에 숨겼을까요?]
그러나 그는 약간 후회하는 마음이 일었다.
(나의 이 한 마디는 내 자신이 큰 손해를 입는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늙은 갈보가 여섯 권의 경서를 얻었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여섯 권의 경
서를 얻은 것은 위소보이다. 이렇게 된다면 내 자신이 늙은 갈보가 되
지 않겠는가?)
강희는 말했다.
[늙은 갈보는 도대체 어떤 내력이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단서조차
찾을 길이 없네. 그녀가 그와 같이 큰일을 저지른 것을 보면 반드시 함
께 도모한 사람이 있을 것이네. 그녀가 경서를 얻게 된 이후 반드시 차
례로 궁에서 빼돌렸을 것인즉 이 여섯 권의 경서를 모조리 되찾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렵기 이를 데 없는 일일세. 다행히 태후께서는 대청나
라의 용맥의 소재지를 찾으려면 반드시 여덟 권의 경서를 모두 손에 넣
어야 하며 설사 일곱 권을 손에 넣었다 하더라도 한 권이 모자라면 쓸
모가 없다고 말했네. 그러니 우리가 강친왕과 오삼계의 손에 있는 두
권의 경서를 가져와 없애버린다면 일은 무사태평이 된다네. 우리들의
목적은 그 용맥을 찾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일세. 하지만 부황이 내리신 경서를 잃어버리고 다시 되찾아 오지 못
한다면 나로서는 크게 불효한 짓을 한 셈이 되는 걸세. 흥, 건녕 공주,
이 조그만....이 조그만....]
강희가 이번엔 차마 욕을 할 수 없는 듯 말을 더듬거리자 위소보는 마
음속으로 그를 대신해서 보충해 주었다.
(조그만 갈보!)
이때 강희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순치가 오대산 금각사의
선방에서 그에게 당부했던 말이었다.
[아이야, 너는 정말 똑똑하고 부지런하며 백성을 사랑하니 황제 노릇을
하는데 있어서는 나보다 훨씬 낫다. 그 여덟 권의 사십이장경에 숨겨져
있는 지도는 매우 많은 보물이 숨겨져 있는 곳이란다. 과거 우리 팔기
병이 중원의 관문 안으로 들어설 때 중원 각지에서 약탈하여 얻은 금은
보화를 모조리 그 보고에 숨겨 두었다. 그 보고는 팔기의 공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를 여덟 조각으로 나누어서 괄기에 나누어 준 것이
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느 한 기주가 독차지하는 것을 방지하려 한 것
이다. 중원의 한인들은 우리 만주사람보다 백 배나 더 많다. 만약 일제
히 들고 일어나 반란을 일으킨다면 우리들은 무슨 수로도 제압할 수가
없다. 그때 우리들은 마땅히 관의(關外)로 물러가 보고를 열어젖히고
팔기가 똑같이 보물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금후 수백
년간 먹고 입을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강희는 다시 부황이 위소보에게 전하여 자기에게 들려 준 말을 생각했
다.
[천하의 일은 반드시 그 일이 자연스럽게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
며 억지로 바로잡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능히 중원의 창생들에게 복을
만들어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잘하는 것이다. 만약 천하의 백성들
이 모두 다 우리보고 가라고 한다면 우리들이 어디서 왔는가를 따져 다
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순치는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 만주인이 제운 청나라가 천하를 얻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라 할
수 있으며 이 가운데는 그야말로 매우 요행스러웠다고 보이는 점도 없
잖아 있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중원을 차지하고 있을 생각은 갖지 말아
야 하며, 결코 우리 만주 사람들이 모조리 중윈에서 멸망을 당하여 한
필의 말도 관외로 나가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강희는 입으로 예예, 하고 대답을 했으나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
했다.
(우리 대청나라가 중원에서 세운 커다란 기업은 갈수록 튼튼해 지고 있
다. 금후로는 반드시 강토를 개척하여 만세가 지나도 뽑혀지지 않는 기
틀을 세워야 하지 어째서 물러갈 곳을 고려해야 한단 말인가? 일단 물
러갈 곳을 고려하게 된다면 일은 그릇될 뿐이다. 부친께서는 출가하신
몸이라 마음이 너그러워지시고 욕심이 없으셔서 세상과 다툴 생각이 없
어진 관계로 그와 같이 생각하신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부친은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하지만 과거 섭정왕은 각 기의 기주에게 분부하셨다. 관의에 숨겨 놓
은 보물에 대해서는 절대 누설하면 안 된다고. 그렇지 않으면 만주의
왕공이나 군사 장수들은 마음속으로 아직도 물러갈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한나라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도 모두 다 죽자사자 싸우려
고 하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된다면 대사는 기울어지고 말 것이다. 그
렇기 때문에 팔기의 기주는 경서를 후손에게 건네줄 때 그 경서 속에
숨겨져 있는 비밀은 청나라의 용맥에 관계가 있고, 용맥이 일단 사람들
에 의해 파이고 끊어지게 된다면 만주 사람들은 모조리 죽어 뼈를 묻힐
곳이 없다는 말만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첫째로, 팔기의 후
손들이 감히 욕심을 내어 몰래 숨겨 놓은 보물을 파내려고 하는 마음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고, 둘째는, 만약 누군가가 보물을 파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팔기가 모조리 들고 일어나 공격을 가함으로
써 저지하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오로지 한 나라의 주인만이 그 참된
비밀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강희는 그 날의 말들을 돌이켜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다시 단정했다.
(섭정왕은 그야말로 포부가 큰 사람이었다. 보는 견해도 지극히 옳았
다.)
그는 위소보를 한번 바라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소계자는 층성스러우나 그에게 용맥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이 녀석이 나이가 많아지면 욕
심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을 할 수 있겠는가? 태후께서는 어제
나에게, 부황이 과거 출가하기로 결심하였을 때 그 비밀을 태후에게 말
했으며 그녀로 하여금 내가 자란 이후에 전하여 주라고 일렀기 때문에
태후께서는 욕됨을 참고 구차한 삶을 이어오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이미 오대산으로 가서 부황을 만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
다. 다행히 그러했기 때문에 태후는 또 늙은 갈보에게 해침을 당해 죽
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위소보는 강희가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자 갑자기 마음
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어서 입을 열었다.
[황상, 만약 늙은 갈보가 오삼계 쪽에서 궁안으로 들여보낸 사람이라면
그....그의 손에 바로 일곱 권의 경서가 있지 않겠습니까?]
강희는 깜짝 놀라 속으로 그런 일이 진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말
했다.
[상의감(尙衣監)을 불러들이도록 하게.]
잠시 후에 한 명의 늙은 태감이 서재 안으로 들어와 큰절을 올렸다. 바
로 상의감의 총관 태감이었다. 강희는 물었다.
[다 조사해 알아냈느냐?]
태감은 말했다.
[황상께 알립니다. 소신은 이미 자세히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이 승포와
옷감은 북경성 안에서 만든 것입니다.]
강희는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위소보는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원래 황상께서는 그 애호박 같은 녀석의 내력을 알려고 했군. 옷감이
북경성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겠구나.)
그 태감은 다시 말했다.
[그러나 그 남자의 내의와 안에 있는 바지는 요동성에서 나는 명주로서
바로 금주(錦州) 일대에서 나는 것입니다.]
강희는 얼굴에 기쁜 빚을 띄우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물러가라!]
그 태감은 고개를 숙여 큰절을 한 후 물러갔다. 강희는 말했다.
[아무래도 그대의 짐작이 맞는 것 같네. 그 애호박 같은 녀석은 어쩌면
오삼계와 어떤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위소보는 말했다.
[소신은 그 이유를 잘 모르겠군요.]
강희는 말했다.
[오삼계는 옛날 산해관을 지켰던 사람이고 금주는 그가 통괄하던 곳이
라네. 그 애호박 같은 녀석은 어쩌면 그의 옛날 부하였는지도 모르지.]
위소보는 기뻐서 말했다.
[그렇군요. 황상꼐서는 영명하시어 짐작하시는 바가 틀림이 없을 것입
니다.]
강희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만약 늙은 갈보가 도망쳐 운남으로 갔다면 그대는 이번 길에 더 많은
위험을 겪게 될 것일세. 그대는 좀더 많은 시위를 거느리고 다시 삼천
의 효기영 군사들을 이끌고 가도록 하게.]
위소보는 말했다.
[황상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소신이 늙은 애호박 같은 녀석을 모조리 잡
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죽여서 태후의 화풀이를 해주었으면 제일
좋겠습니다.]
강희는 위소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미소했다.
[그대가 만약 다시 그와 같은 큰공을 세워 태후의 원수를 갚는다면, 흐
흐흐, 그대는 나이가 너무 어린데 벼슬은 너무나 크게 되니 내가 오히
려 약간 난처해지겠군. 하지만 우리 소황제와 소대신이 함께 큰일을 해
내어서는 그 한 떼의 늙은 벼슬아치들이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래지
고 입이 딱 벌어지도록 만든다면 꽤나 재미있는 일이 될 걸세.]
위소보는 말했다.
[황상께서는 나이가 적다고 하시지만 영명하시어 멀리 내다보실 줄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미 그 한 떼의 늙은 것들로 하여금 마음속으
로부터 탄복하게 했습니다. 다시 황상께서 오삼계를 요리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전에도 나타난 사람이 없었고 후에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강희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기랄, 전무후무하다고 해야 말이 되지. 그대라는 사람은 근본은 총
명하고 영리한데 그저 배우지 않으려고 해서 탈일세.]
위소보는 웃었다.
[예, 에. 소신 언제 여가가 생기면 차분하게 며칠 간 글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실 위소보가 조잡하고 학문이 없기 때문에 강희는 오히려 더 좋아하
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의 곁에는 학문을 하는 시종과 신하들이 얼
마든지 있었다. 온종일 공자왈 맹자왈 하는 말들을 너무나 많이 들어
왔기 때문에 위소보와 시정 무뢰배의 속된 말을 주고받음으로써 퍽이나
통쾌감을 느끼곤 하는 것이었다.
위소보가 인사를 하고 서재에서 막 나설 무렵이었다. 바로 한 명의 시
위가 맞은편에서 달려와서 인사를 하고 나직이 말했다.
[위 부총관, 강친왕께서 뵙자고 하시는데 위 부총관께서는 여가가 있으
시겠습니까?]
위소보는 물었다.
[왕야는 어디 계신가?]
그 시위는 말했다.
[왕야는 시위의 방에서 전갈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위소보가 물었다.
[그가 친히 오셨는가?]
그 시위는 말했다.
[예, 예. 그는 위 부총관을 모시고 술을 마시며 연극을 구경하고자 하
는데, 그저 황상께서 또 중요한 일을 위 부총관에게 시킴으로써 위 부
총관 어르신께서 여가가 없으실까봐 걱정이시랍니다.]
위소보는 웃었다.
[제기랄, 내가 무슨 어르신이야.]
그는 시위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강친왕은 한 손에 찻잔을
들고 멍하니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것이
깊은 근심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위소보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재빨리 찻잔을 놓고 달려와 그의 손
을 잡고 말했다.
[형제, 머칠 동안 만나지 못했군. 정말 그리워 죽을 뻔했네.]
위소보는 그가 경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기에게 부탁하려고 온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가 그렇게 다정하게 나오자 역시 기뻐하며 말했
다.
[왕야께서 볼일이 있으시다면 사람을 시켜 한 마디 분부만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술을 내리고 밥을 내린다고 하시길래 비직이 이렇게 달려오
지 않았습니까. 이토록 체면을 세워 주시고 친히 저를 찾아오시다니 황
송할 따름입니다.]
강친왕은 말했다.
[나는 집에 이미 연극 무대를 세워 놓고 있는데 형제에게 여가가 없을
까봐 걱정했다네. 잠시 동안 가서 구경할 여가가 있겠는가?]
위소보는 웃었다.
[좋습니다. 왕야께서 밥을 내리시겠다니, 황상께서 저에게 어떤 급한
일을 해치우라는 분부만 없다면 설사 저의 친아버지가 죽었다 하더라도
비직은 먼저 왕야의 그 한 끼 밥을 먹고 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궁을 나서서 말을 타고 왕부로 들어갔다. 강친왕
은 융숭하게 그를 접대했으며 온갖 예의를 다했다. 이번에는 달리 의부
손님이 없었다. 식사가 끝나자 강친왕은 그를 서재로 초청해서는 환담
을 나누었다.
강친왕은 위소보가 황상을 대신하여 소림사에서 출가하고 무수한 공덕
을 세운 데 대해서 칭찬의 말을 했다. 또 위소보가 젊은 나이에 어전시
위 부총관이 되었고 효기영의 도통이 되어 전도가 양양하다며 칭찬을
했다. 위소보는 겸손의 말을 했고 또 앞으로도 왕야가 이끌어 주시기를
바란다는 인사말을 했다.
강친왕은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형제, 그대와 나는 한 집안 사람과 다름없으니 어떤 일에 있어서도 그
대를 속일 수가 없네. 이 형은 당장 큰 화를 당하게 되었네. 아무래도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 같네.]
위소보는 짐짓 크게 놀라면서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왕야는 대선대(代善大) 패륵의 직계 자손이 아니십니까? 그야말로 끄
덕없는 왕위에 앉아 있고 황상께서는 정히 신임하여 중용하고 계시온데
무슨 큰 화가 닥쳤다고 하십니까?]
강친왕은 말했다.
[형제는 잘 모르네. 과거 우리 만주 사람이 청나라를 세우고 중원 안으
로 들어오게 되었을 때 일 기의 기주마다 돌아가신 황제로부터 한 권의
불경을 하사받았네. 나는 정홍기의 기주여서 역시 한 권을 하사받는 은
혜를 입었다네. 오늘 황제께서 부르시더니 나에게 돌아가신 황제께서
하사하신 불경을 내놓으라고 하시지 않겠나? 그러나....그러나 그 경서
는 어떻게 된 노릇인지 모르지만 그만....그만 도적질을 당하지 않았겠
는가!]
위소보는 얼굴 가득 의아한 빚을 띄우고 말했다.
[정말 희한한 일이군요.금이나 은은 훔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책을
누가 훔치겠습니까? 그 책은 혹시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까? 그
리고 비취와 구슬들을 박아서 무척 값나가게 만든 것이 아닙니까?]
강친왕은 말했다.
[뭐 그렇지는 않고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경서일세. 그러나 나는 돌아
가신 황제께서 내리신 물건을 제대로 보관하지 못했으니 그야말로 크게
불경스러운 죄를 지은 것이라네. 황상께서 갑자기 나에게 바치라고 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이미 내가 경서를 잃어 버린 것을 알고 그 일을 따
지려고 드는 것 같단 말일세. 형제, 그대가 나를 한번 구해 줘야겠네.]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큰절을 하려고 했다. 위소보는 재빨리 반례하고
말했다.
[왕야께서 이토록 깍듯이 대해 주시니 이야말로 소인의 수명을 단축시
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강친왕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형제, 그대가 만약 나를 대신해서 방법을 강구해 주지 않는다면 나
는....나는 그저 자결하는 수밖에 없다네.]
위소보는 말했다.
[왕야께서는 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시는군요. 내일 소인이 황상께
잘 아뢴다면 기껏해야 왕야에게 몇 달 봉은(俸銀)을 주지 않는 벌을 내
리거나, 아니면 왕부를 관리하는 사람을 불러 한바탕 꾸짖을 수는 있겠
지만 어찌 목숨과 관계가 있겠습니까?]
강친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저 이 목숨만 부지할 수 있다면, 설사 친왕이라는 직위를 빼앗은 후
서민으로 강등시킨다 하더라도 나는 그야말로 천지신명에게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이고 만족할 수 있다네. 양남기 기주 악석극합은 바로 황제께
서 하사하신 경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어제 지하 뇌옥에 갇히게 되었
다네. 소문에 듣자니까 고문과 매질을 매우 당하고 있으며 황상께서는
사람을 보내 엄히 심문을 하시는데 바로 그 하사한 경서를 어떻게 했느
냐고 따지셨다는 것일세.]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 근육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지하
뇌옥에 끌려가 온갖 악형을 참혹하게 받는 광경을 떠올린 것이 분명한
것 같았다. 위소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경서는 정말 그렇게 요긴한 것입니까? 그렇군요. 그 날 오배의 집
으로 들어가 가산을 몰수하게 되었을 때 태후는 나에게 오배의 집으로
가서 두 권의, 뭐라더라, 삼십이장경인가 사십이장경인가 하는 것을 찾
으라고 했었지요. 왕야가 보이지 않는다고 걱정하시는 것은 바로 그 물
건이 아닙니까?]
강친왕은 얼굴에 근심의 빚을 더욱 깊게 드러내며 말했다.
[바로 그렇다네. 사십이장경이지. 오배의 가산을 몰수하게 되었을 때
태후께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경서만 요구한 것을 보면 이 물
건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알 수가 있지 않겠나? 형제는 찾았는가?]
위소보는 말했다.
[찾기는 찾았지요. 오배 그 녀석은 경서를 그의 침실 바닥에다가 땅굴
을 파서는 그 땅굴 안에다가 귀중한 물건과 함께 넣어 두었더군요. 그
바람에 내가 찾느라고 땀을 흠뻑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 경서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는 겁니까? 화상들의 절간으로 찾아간다면 열 권이고 여
덟 권이고 구할 수 있을 테니까 그 가운데 한 권을 황상께 바치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강친왕은 말했다.
[선황께서 하사하신 경서는 화상묘(和尙廟)에 있는 여느 불경과는 크게
달라서 바꿔치기를 할 수가 없단 말이네.]
위소보는 진지한 안색이 되어서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 번거롭게 되었군요. 왕야께서는 저에게 무슨 일을 하라
는 것입니까?]
강친왕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 일은 나로서도 실로 말하기 거북하다네. 내 어찌....어찌 형제에게
황상을 기만하는 일을 시킬 수 있겠는가?]
위소보는 크게 가슴을 치머 말했다.
[왕야께서는 말씀을 해보십시오. 왕야가 위소보를 친구로 아는 이상 이
위소보가 왕야를 위해 이 조그만 목숨을 버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리
를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좋습니다. 왕야꼐서는 황상에게 그 경서를
이 위소보가 빌려 보게 되었는데 그만 잘못해서 잃어버렸다고 말씀을
드리십시오. 황상은 이 며칠 동안 저를 무척 귀여워하셨으니 저의 목을
짜를 리 있겠습니까?]
강친왕은 말했다.
[형제의 호의는 고맙네만 그 방법은 아마 통하지 않을 것 같네. 황상께
서는 형제가 경서를 빌려 보리라고는 믿지 않을걸.]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화상 노릇도 해 보았지만 알고 있는 글자는 얼마 되지 않는 형편
입니다. 그런데 경서를 빌려 보았다면 황상께서는 아마 제대로 믿지 않
을 것입니다. 달리 방법을 강구해야겠군요.]
강친왕은 말했다.
[나는 형제에게....형제에게....형제에게....]
그는 잇따라 형제에게라고만 말할 뿐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는
위소보를 바라보았는데 위소보의 표정을 살피는 눈치였다. 위소보는 말
했다.
[왕야, 난처해 하실 것 없습니다. 이 형제의 조그만 한 목숨은....]
그는 왼손으로 자기의 맣은 머리를 잡고는 오른손으로 자기의 목을 치
는 시늉을 하고 다시 두 손으로 머리통을 바치는 자세를 취하며 말했
다.
[이미 왕야에게 맡겼습니다. 그저 황상을 해치는 일이 아니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왕야의 분부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강친왕은 크게 기뻐했다.
[형제가 그토록 의리가 깊으니. 아! 이 형 된 사람은 다른 말은 더하지
도 않겠네. 나의 바램은 형제가 태후나 황상의 곁에서 한 권의 경서를
훔쳐 주었으면 하는 것일세. 나는 이미 수십 명이나 되는 솜씨 좋은 장
인(匠人)들을 모아서 이곳에 대기시켜 놓고 있다네. 밤을 도와 일을 해
서는 그 한 권의 경서를 모방해서 이 난관을 혜쳐 나가려는 것일세.]
위소보는 물었다.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강친왕은 재빨리 말했다.
[만들 수 있고 말고. 반드시 똑같이 만들어 전혀 탄로나지 않을 것을
보장하겠네. 견본을 만든 후 형제는 원래의 경서를 되돌려 놓으면 될
것이니 결코 추호도 손상을 입히지 않을 것이네.]
기실 그는 창졸지간에 한 권의 경서를 모방해서 만들면서 그 모방해서
만든 경서가 전혀 빈틈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바랄 수없다는 사실
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진짜와 가짜 경서를 슬쩍 바꿔치기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가짜 경서를 위소보에게 돌려 주어 원래
의 위치에 놓아 두도록 하고 진짜의 경서를 자기가 나서서 황제에게 바
치자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분별을 못할테니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힘들 것이고 장래에 발견되지 않으면 그야말로 무척 좋은 일이고 설사
발견된다 하더라도 이미 자기와는 관계없는 일이 되기 때문에 자기는
무사하리라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의도를 지금 곧이 곧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좋습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나는 곧 가서 방법을 강구하여 그
경서를 훔치도록 하지요. 왕야는 왕부에서 조용히 소식 오기를 기다리
도록 하십시오.]
강친왕은 천번 만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친히 그를 문 밖까지 전송했
다. 그는 끊임없이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위소보는 자기의 거처로 돌아왔다. 그는 등불 아래서 수십 편의 양피지
조각들을 맞추어 보았다. 속으로 여덟 권의 경서 가운데 이미 일곱 권
을 얻었으니 한 권에 들어 있는 양피지 조각들이 모자라도 대강은 맞출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반 시진을 넘게 짜맞춰 보았지만 지
도의 한 모서리도 맞출 수가 없었다.
본디 그는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라 곧 싫증을 느끼고 다시 짜맞추지 않
게 되었으며 즉시 수천 수백 개나 되는 조각들을 기름종이로 쌌다. 그
위에다가 다시 기름을 먹인 베로 싸서는 몸속에 갈무리하고 속으로 생
각했다.
(강친왕은 정황기의 기주이니 그의 경서는 물론 붉은 책장으로 만들어
진 것일게다. 내일 나는 다른 한 권을 그에게 갖다 줘야지.)
이튿날 아침 그는 양백기 경서의 양피로 된 겉장을 잘 봉하여 붙인 후
품속에 넣고 곧장 강친왕부로 찾아갔다.
강친왕은 그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껑충낑충 뛰다시피 마중을 나와서
손을 잡고 물었다.
[어떻게 되었는가? 어떻게 되었는가?]
위소보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친왕은 그만 가슴이 덜
컹 주저앉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이 일은 본래 어려운 일일세. 설사 오늘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
도....]
위소보는 나직이 말했다.
[물론 손에 넣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열흘이고 보름 안으로는 가짜를 만
들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강친왕은 크게 기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를 얼싸안고서
서재로 달려 들어갔다.
시종들과 시위들은 왕야의 그와 같은 모습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위소
보는 경서를 꺼내 두 손으로 바치며 물었다.
[이 물건입니까?]
강친왕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경서를 담아 놓은 상자를열고 바
라보더니 말했다.
[맞았네. 맞았네. 이것은 양백기가 하사받은 경서일세. 그렇기 때문에
하얀 겉장에 가장자리에는 붉은 테를 두른 것이지. 우리는 즉시 일에
착수하도록 하겠네. 그런데 형제가 다시 나에게 며칠간 여유를 얻는 방
법을 가르쳐 주도록 하게. 음, 내가 말에서 떨어져 머리가 깨어지고 피
를 흘리며 인사불성이 되면 어떨까? 그리하여 가짜 경서가 다 만들어진
후 다시 황상을 찾아 뵙는다면 되지 않겠는가?]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상께서는 영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왕야가 그와 같은 수작을 부
리게 된다면 그는 마음속으로 의심을 품게 될 것이고 그때 왕야가 가짜
를 바친다면 황상께서는 자세히 살필 것이니 그렇게 된다면 금방 들통
이 나게 됩니다. 이 한 권의 경서는 왕야가 잃어버린 그 한 권과 비교
할 때 겉장의 빚깔이 다른 것 말고 또 어떤 다른 점이 있습니까?]
강친왕은 말했다.
[그저 겉장의 빚깔만 다르다 뿐이지 다른 것은 모두 같다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다면 쉽습니다. 왕야는 이 경서의 겉장만 바꾸어 오늘 즉시 황상
에게 바치도록 하십시오.]
강친왕은 놀람과 기쁨에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건......이건......궁에서 경서를 잃어버린 사실을 알고 조사를 하
게 된다면 아마도 형제에게 누를 끼치게 될 것일세.]
위소보는 말했다.
[내가 어젯밤 서재에서 이 경서를 살그머니 훔쳐 나올 때 본 사람이 없
습니다. 설사 그 누가 보았다고 하더라도, 감히 말을 하지 못할 것입니
다. 이 점에 관해서는 내가 책임을 지도록 하지요.]
강친왕은 너무나 고마워서 그만 눈가를 붉히고 그의 두 손을 잡고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소보는 궁으로 들어가서 다시 두권의 경서를 갈무리하고는 반두타와
육고헌을 찾아 나섰다.
정황기의 경서는 독수를 묻혀서 상결 라마에게 주었고, 이제 양백기의
기주가 보관하던 경서는 강친왕에게 주었다. 나머지 다섯 권 가운데 양
황, 정백 두 권은 오배의 집에서 몰수한 것이고, 양남기의 기주가 보관
하고 있던 경서는 늙은 갈보의 장농에서 취한 것이니 이 세 권의 경서
는 늙은 갈보가 이미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때 늙은 갈보가 만
약 홍 교주 곁에 가까이 있올지도 모르는데 바친다면 야단이라고 생각
했다. 반면에 정홍기 기주인 강친왕이 보관하고 있던 경서는 강친왕부
에서 슬쩍 한 것이고 양홍기의 기주가 가지고 있딘 경서는 서동의 몸에
서 취한 것이니 늙은 갈보가 내력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
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반두타와 육고헌 두 사람에게 정홍기와 양홍기
의 기주가 가지고 있던 두 권의 경서를 건네주었다.
반두타와 육고헌 두 사람은 눈이 빠지게 위소보를 기다리고 있던 참인
데 그가 갑자기 나타난 데다가 교주가 요구하는 두 권의 경서를 얻은
것을 보고는 그야말로 뛸 듯이 기뻐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육 선생, 그대는 경서를 교주와 교주 부인에게 바치시오. 그리고 내가
수소문해 알아낸 것인데, 오삼계가 다른 여섯 권의 행방을 알고 있다고
말씀드리시오. 이 백룡사는 교주와 부인을 위해서는 충성을 다하는 바
이고 십만 번이나 백만 번 죽는다 하더라도 사양하지 않을 몸이기 때문
에 운남으로 가서 끓는 물속이나 타는 불속을 마다하지 않고 경서를 찾
아내겠다고 말씀드리시오. 그리고 반존자, 그대는 내가 다시 교주를 위
해 공을 세우러 가는 길이니 나를 호송해 주시오.]
반두타와 육고헌 두 사람은 기꺼이 응했다. 반두타는 말했다.
[육형, 백룡사께서 이와 같은 큰 공을 세웠으니 우리 두 사람도 득을
보게 되었소. 그대는 교주가 내리시는 표태역근환의 해약을 될 수 있는
한 빨리 사람을 시켜 운남으로 반드시 보내 주시오.]
육고헌은 연신 대답을 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백룡사는 어린 나이에 이토록 뛰어난 솜씨를 가졌다. 교주의 커다란
자리는 이후 반드시 그에게 전해지게 될 것이다. 내가 이 기회에 그의
호감을 사지 않고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이 해약은 대단한 것입니다. 속하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을
마음놓을 수가 없으므로 반드시 직접 가져오겠습니다. 백룡사, 속하는
그대에 대해서 충성심이 깊습니다. 반드시 그대가 해약을 먹도록 시중
을 든 이후에 속하와 반형이 다시 복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표태역
근환의 약기운이 퍼지게 되고 속하의 수중에 해약이 있다 하더라도 차
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먼저 복용하지 않겠소이다.]
위소보는 웃었다.
[매우 좋소. 매우 좋아. 그대가 나에 대해서 그토록 충성을 다 한다면
나는 영원히 그대의 좋은 점을 잊지 않을 것이오.]
第69章. 공주와의 동침
위소보가 궁으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태감이 달려와서 조정에 내
리는 성지를 선포했다. 그 내용은 위소보를 일등 자작에 봉하고 사혼사
(賜婚使)라는 직책을 하사해서 건녕 공주를 호송하여 운남으로 가 평서
왕의 세자인 오응웅에게 시집을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오응웅을
삼등정기니합번(三等精奇尼哈番)에다가 소보(小保) 겸 태자태보(大子大
保)에 봉한다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은자를 꺼내서 태감에게 수고비로
주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된다면 오응웅이란 녀석이 득을 보는 셈이로구나. 아름다운 공
주를 맞아들이게 될 뿐만 아니라 큰 벼슬에 봉해지는군. 이야기 선생은
정충악전(精忠岳傳)에서 악비 악 나으리가 소보에 봉해졌다고 했다. 그
런데 너 오응웅이란 못난 녀석이 어찌 악 나으리와 견줄 수 있겠는가?)
그는 다시 생각했다.
(황상께서 그에게 큰 벼슬을 내리는 것은 그저 오삼계로 하여금 의심하
지 않게 하자는 것이고 조만간 그의 목을 자를 것이다. 오배 역시 소보
에 봉해지지 않았던가? 맞았다, 맞았다. 악비 악 소보 역시 황제에게
살해당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소보라는 관직에 봉한다는 것은 바로
그의 머리를 자르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음에 황상께서 만약에 나
에게 소보라는 벼슬을 내리겠다고 한다면 나는 죽어라 하고 사양을 해
야겠다.)
즉시 그는 황제에게 가서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말했다.
[황상, 소신은 이번에 운남으로 달려가서 황상을 위해 일을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황상께서 어떤 금낭묘계(錦囊妙計)가 있으시다면 저에게
말씀을 해주십시오.]
강희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소계자는 역시 학문이 부족하구만. 금낭묘계는 바로 금낭 안에 들어
있는 것으로써 천기를 누설할 수 없다는 말인데 어찌 먼저 그대에게 이
야기할 수 있겠는가?]
위소보는 말했다.
[아. 그렇군요. 애석하게도 저는 글자를 모릅니다. 황상께서 만약 금낭
묘계가 있다면 반드시 그림으로 그려야 할 것입니다. 황상, 지난 번 청
량사 주지로 임하게 되었을 때 내린 그 그림은 정말 멋지더군요.]
강희는 웃었다.
[자고로 성지에 글자를 사용하지 않고 그림을 그린 것은 아마도 우리
군신 두 사람이 처음으로 시도해 본 것일 게야.]
위소보는 말했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일이죠.]
강희는 웃었다.
[좋아, 좋아. 자네 기억력이 무척 좋군. 숙어를 금방기억하는군.]
위소보는 말했다.
[저는 황상께서 가르치는 것은 언제나 기억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이
가르치는 것은 언제나 제대로 기억을 하지 못한답니다. 정말 어떻게 된
노릇인지 모르겠군요. 예를 들면 한 마디를 내뱉으면 무슨 말이고 뒤쫓
아 잡을 수 없다고 할 때, 그 한 필의 말이 무슨 말인지 언제나 기억할
수가 없답니다.]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태감이 들어와서 건녕 공주가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고 전했다.
강희는 위소보를 한 번 바라보고는 들어오라는 분부를 내렸다. 건녕 공
주는 서재로 들어서자 그만 강희의 품안으로 뛰어들면서 대성통곡을 했
다.
[황제 오라버니, 저는....저는....저는....운남으로 시집가고 싶지 않
아요. 제발 성지를 거두어 주세요.]
강희는 어릴 적부터 이 누이동생을 좋아했었다. 그러나 가짜 태후의 악
행을 알게 된 이후부터 누이동생에게까지도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를 오응웅에게 시집보내는 것은 오삼계를 멸하려는 계책도 있었지
만 한편으로는 실로 그녀를 불행에 빠뜨리려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
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토록 불쌍하게 우는 것을 보고 차마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이 이른 이상 이미 내린 명령을 거두어
들일 수는 없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부드럽게 타일렀다.
[여자는 성장하면 반드시 시집을 가야 된다. 내가 너를 위해 선택한 남
편감은 정말 괜찮다. 소계자, 그대가 공주에게 이야기해보게. 그 오응
웅이란 녀석 용모가 꽤나 준수하지 않던가, 그렇지?]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공주, 그대의 부마는 운남성에서 유명한 미남자입니다.
지난 번 오 공자가 북경으로 들어올 때 앞문 밖에서 십여 명의 소저가
싸워 세 사람이나 목숨을 잃는 일이 있었습니다.]
건녕 공주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무엇 때문에 싸웠나요?]
위소보는 말했다.
[평서왕의 세자는 미남으로 천하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가 서울로
들어오던 그 날 북경성의 수천 수만이 되는 소저들과 부인들이 몰려들
어 구경을 하게 되았습니다. 그리하여 십여 명의 소저가 서로 밀고 밀
치다가 싸움을 벌이게 된 것이죠.]
건녕 공주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환히 미소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쳇, 거짓말을 하는군요. 그런 일이 어딨어요?]
의소보는 말했다.
[공주, 그대는 황상께서 어찌하여 나를 시켜 그대를 호송하여 운남으로
가게 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소? 그리고 또 어째서 나에게 분부하여 많
은 시위들과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그대를 적절히 보호하도록 분부하셨
는지 아시겠소?]
공주는 말했다.
[그것은 황제 오라버니가 나를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이죠.]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소. 이것은 황상께서 영명하시어 멀리 내다보고 생각을 하시기 때
문이오. 공주도 생각해 보시오. 부마가 그토록 영준하고 뛰어나니 얼마
나 많은 소저들이 그의 부인이 되고 싶어하겠소? 그런데 이제 공주에게
빼앗기게 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물건들이 부숴질는지 모르는 일이오.
부녀자들은 질투가 생기고 화가나면 곧잘 물건을 부수지 않소? 무예를
할 줄 아는 어떤 소저는 노해서 그대를 괴롭히려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
오. 물론 공주의 무공이 고강하긴 하나 질투에 눈이 먼 수많은 여자들
을 상대하려면 아무래도 중과부적이 아니겠소? 그렇기 때문에 소신이
이번에 공주를 호송하여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저로서는 맡은
책임이 가볍지 않단 말이오. 그야말로 질투심에 불타는 낭자들을 수도
없이 상대해야 하니, 그대도 생각해 보시오. 얼마나 어렵겠는가?]
건녕 공주는 웃었다.
[뭐가 질투심이 많은 낭자들이라는 거예요? 정말 터무니없는 말을 잘도
하시네요.]
이때 그녀는 꽃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빰에는 여전히 몇 줄
기의 수정 같은 맑은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강희에게 말했다.
[황제 오라버니, 소계자가 저를 운남으로 호위한 이후 그로 하여금 저
를 상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심심풀이 상대가 되도록 해주세요. 그렇
지 않으면 가지 않겠어요.]
강희는 웃었다.
[좋다. 좋아. 그로 하여금 어느 정도 너를 더 모시도록 하겠다. 그리하
여 네가 모든 일에 익숙해진 이후에 돌아오게 하마.]
건녕 공주는 말했다.
[저는 그가 영원히 나와 함께 있기를 바라며 그가 돌아가도록 하지 않
겠어요.]
위소보는 혀를 내밀며 말했다.
[그것은 안 됩니다. 그대의 부마가 만약 나를 보고 혐오감을 일으켜 화
를 내고 한 칼로 저를 내려 친다면 저는 머리통 없는 소계자가 되지 않
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공주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심심풀이 상
대 노릇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건녕 공주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흥, 그가 감히 그럴 수 있겠어요?]
강희는 말했다.
[소계자, 그대는 운남으로 가기 전에 먼저 한 가지 일을 조사하여 주
게. 서재에서 한 권의 불경이 없어졌는데 이 일은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이곳에 있는 물건을 누가 감히 훔치겠는가?]
마지막 한 마디 말은 그 어조가 퍽이나 준엄했다. 위소보는 대답했다.
[예,예.]
건녕 공주는 불쑥 입을 열었다.
[황제 오라버니, 그 한 권의 불경은 제가 가져간 거예요. 히히히!]
[네가 가져가서 무엇에 썼느냐? 어째서 먼저 나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가
져갔지?]
공주는 웃으며 말했다그
[태후께서 저에게 분부해서 가져오라고 한 것이에요. 태후께서는 한 권
의 불경을 가져가는 것은 하찮은 일이며, 황제께서는 매일같이 수백 수
천 가지의 군국대사를 처리해야 하니 그 일로 황제를 번거롭게 하지 말
라고 말씀하셨어요.]
강희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더 말하지 않았다. 건녕 공주는 혓바
닥을 낼름 내밀어 보이고 부탁했다.
[황제 오라버니, 그 일로 저에게 화를 내지 마세요. 이제 제가 운남으
로 가게 되면 다시 이곳에 와서 황제 오라버님의 책을 가져가고 싶어도
가져갈 수 없지 않겠어요?]
강희는 그녀가 가련하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 대뜸 마음이 누그러져서는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운남으로 가는 이 마당에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나에게 달라고
해라!]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평서왕부에는 없는 물건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원한다면 무엇이
든 줄 수 있다.]
위소보는 서재에서 나왔다. 그러자 시위들과 태감들이 다투어 축하를
했다. 모든 시위들은 위소보가 자기를 데리고 운남으로 가 주기를 바랐
다. 오삼계의 재산은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평서왕부로 들어가면 많은
돈을 사례금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후에 강친왕은 다시 궁 안으로 들어와 위소보를 만나 보고 기뻐서 말
했다.
[형제, 경서는 이미 황상에게 바쳤네. 황상께서는 매우 기뻐하셨으며
나에게 몇 마디 칭찬의 말을 하시더군.]
위소보는 말했다.
[그것 참 잘되었군요.]
강친왕은 말했다.
[그대가 며칠 후에 운남으로 가게 되니 오늘은 이 형이 한턱 내겠네.
첫째로, 그대가 자작에 봉해진 것을 축하하고 둘째로는, 그대의 환송연
을 열어 주겠네.]
강친왕은 위소보의 손을 잡고 궁에서 나왔다. 그러나 강친왕부로 가지
않고 동성에 있는 한 채의 매우 멋진 저택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강친
왕부의 저택처럼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기둥이나 대들보에 조각을 새기
고 꽃나무와 바위들을 심고 나열해 놓은 것이 꽤나 호사스러워 보였다.
강친왕은 말했다.
[형제, 그대가 보기에 이 집은 어떤가?]
위소보는 말했다.
[정말 좋습니다. 아름답기 그지없군요. 왕야께서는 정말 복을 누릴 줄
아십니다. 이곳은 소복진(小福晋:왕의 작은 마누라)의 거처입니까?]
강친왕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데리고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대청에는
이미 높은 벼슬아치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색액도, 다륭 등도 그 안에
있다가 위소보를 맞으며 축하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해댔다. 강친왕은
웃었다.
[오늘 이 자리는 위 대인이 높은 벼슬길에 오르심을 축하하기 위해서
마련하였으니 위 대인이 가장 상석에 앉아야 옳을 것이오. 하지만 위
대인은 이 집의 주인이니 부득이 주인석에 앉을 수밖에 없겠구려.]
위소보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 집의 주인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강친왕은 웃었다.
[이 저택으로 말하자면 바로 위 대인의 자작부(子爵府)일세. 이 형이
그대를 위해 마련한 것이라네. 마부, 요리사, 하인, 시녀, 모두 골고루
갖추어 놓았네. 너무나 총망해서 완전하지 못한 점도 있을 것이니 형제
가 보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분부를 하시게. 사람을 시켜 내
집으로 가서 무슨 물건이든지 옮겨 오도록 하겠네.]
위소보는 놀람과 기쁨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자기가 강친왕에게큰 도움
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한 푼의 돈도 들이지 않았고 대단한위험을 겪은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가 어떤 보답을 하리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와 같은 굉장한 예물을 갖추어 선사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그만 잠시 말을 못하고 더듬거렸다.
[이건.. 이건.. 이럴 수가 있습니까?]
강친왕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형제 두 사람은 그야말로 목숨을 같이 하기로 한 사이 아닌가?
어찌 네 것 내 것을 가리겠는가?자자자, 모두들 술을 마십시다. 어느
분이건 오늘 취하지 않는다면 놓아 주지 않겠습니다.]
모두들 즐겁게 술을 마시고 흠뻑 취해서 헤어졌다.
위소보는 자작에 오르게 되었고, 모두들 그가 태감 노릇을 한 것은 황
제의 명을 받들어 가장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궁안으로 들
어가 잠을 자지 않아도 되었다.
이날 밤 그는 화려한 침실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모
두가 금그릇, 은그릇이거나 능라비단이었다.
그는 갑자기 생각했다.
(제기랄, 내가 만약 이 자작부에 기녀원을 차리게 된다면 여춘원보다
훨씬 호화스럽겠다.)
이튿날 아침 일찍 그는 구난을 찾아뵙고 황제가 그를 운남으로 보내 공
주의 혼사를 추진시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구난은 말했다.
[매우 잘되었다.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
위소보는 크게 기뻐하며 고개를 돌리고 아가를 바라보았다. 구난은 말
했다.
[아가 역시 함께 간다.]
위소보는 더욱더 기뻐했다. 황제가 그를 자작에 백번 봉하는 것보다 이
사실이 그에게는 더 기쁜 것이었다.
그는 구난과 작별하고 천지회의 은거지로 갔다. 그는 공주를 오삼계에
게 시집보내려고 자기가 수행하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다. 진근남은 한
참 동안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오랑캐 황제가 오삼계에 대해서 그토록 총애를 하니 오삼계를 쓰러뜨
릴 수는 없겠구나.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좋은 기회이다. 소보, 오삼계
이 간악한 도적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를 충동질해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여 스스로 무덤을 파도록 만들자. 충동질에 성공
하지 못한다 해도 억지로라도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는 누명을 씌워야
할 것이다. 나는 본디 너와 함께 가려고 했으나 둘째 공자와 풍석범이
대만으로 돌아가서 반드시 왕야에게 참언을 하였을 것이니 왕야께서는
반드시 사람을 보내 천지회의 일을 묻게 될 것이다. 나는 이곳에 남아
있다가 솔직히 보고를 해야겠다. 이곳의 형제들은 네가 모두 데리고 운
남으로 가도록 해라.]
위소보는 말했다.
[풍석범이란 녀석이 또다시 사부님을 해칠까 걱정이 됩니다. 이곳의 형
제들은 역시 이곳에 남아서 사부님을 돕도록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이
제자는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진근남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그토록 효성심이 있다니 갸륵하다. 풍석범의 무공이 강하다고는
하나 너의 사부가 그보다 약하지는 않다. 저번에 그는 우리들의 의표를
찌르고 공격을 한 데다가 다짜고짜 문 뒤에 숨어서 암습을 가해 왔기
때문에 나의 팔에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에 만나게 된다
면 그가 이긴다고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오삼계를 주살하는 일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큰일이다. 우리들은 반드시 전력을 기울여 임해야
한다. 이곳의 일이 해결되면 나도 운남으로 달려가겠다. 우리들은 목씨
집안에서 선수를 쓰도록 놔둘 수는 없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만약 목왕부에서 먼저 성공을 하게 된다면 앞으로 천지회는 그들의 명
령을 받들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된다면 재미없게 되는 것이죠.]
진근남은 손을 뻗어 그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 혓
바닥을 내밀어 보라고 하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중독된 독이 어째서 또 성질이 바뀌었지? 다행히 한꺼번에 퍼지
지는 않겠다. 내가 너에게 전수한 내공은 잠시 연마하지 말아라. 그래
야 독성이 경맥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겠구나.]
위소보는 몹시 기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사부님이 제자에게 내공을 연마하지 말라고 직접 말씀하신 것
이니 이후에 저를 탓하면 안 됩니다.)그는 다시 생각했다.
(이 표태역근환은 정말 무섭구나. 사부님도 해독할 자신이 없으신가 보
구나. 아무쪼록 육 선생이 해약을 가져다 주었으면 좋겠구나.)
며칠 후 모든 일이 갖추어졌다. 위소보는 어전시위, 효기영, 천지회의
군웅, 신룡교의 반두타 등을 데리고 강희와 태후에게 작별을 고하고 건
녕 공주를 호송해서 운남을 향해 떠났다.
구난과 아가는 궁녀로 변장하고 사람들 틈에 섞여 들었다. 천지회의 군
응들과 반두타는 모두 변장을 하였는데 위소보의 시종이 되거나 효기영
군사의 복장을 하였다.
위소보는 강친왕이 선사한 옥총마를 타고 앞뒤로 호위를 받으며 의기양
양하게 남쪽으로 향했다.
그는 이미 하남성으로 사람을 보내서 쌍아에게 남쪽으로 오라고 통지했
다. 그는 도중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지금 이 순간 유일
하게 필요한 것은 바로 곁에서 그와 같이 온순하고 알뜰하게 시중을 들
어줄 하녀였다.
길을 가는 동안 관가에서는 융숭하게 그들을 대접했는데 그야말로 그
대접이 지나칠 정도였다. 위소보는 벼슬을 한 이래 지금처럼 신나고 마
음 편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늙은 갈보가 힘을 쓰지 않아서 딸을 딱 하나밖에 낳지 못했구나. 빌어
먹을, 만약 단숨에 열일곱, 여덟 명을 낳았더라면 나는 그저 매일같이
사혼사라는 대신이 되어서는 그들을 하나하나 시집보낼 것이 아니겠는
가? 그렇게 된다면 한평생 먹고 마시며 즐길 수 있을 것이고 금은보화
를 매일처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니 그야말로 다른 짓을 하는 것보
다 훨씬 낫겠다.)
정주(鄭州)에 이르자 지부는 이 일행들을 영접하여 정주에서 가장 큰
부호의 화원에다가 유숙을 시켰다. 그리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대접
을 했는데 잔치가 끝난 후 건녕 공주는 다시 위소보를 불러 한담을 나
누었다. 북경에서 출발한 이래 매일같이 건녕 공주는 그를 불러 한담을
나누곤 했다. 위소보는 공주가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찰까봐 매번 전노본
과 마언초를 대동하고 공주를 만났다. 공주가 부탁을 하든 화를 내든
간에 두 사람을 곁에 두고 자신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이 날 저녁밥을 먹은 후에 공주는 위소보를 불렀다. 세 사람은 공주의
거실 밖에 조그만 객청에 이르게 되었다. 공주는 위소보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전노본과 마언초 두 사람은 그 뒤에 서 있있다.
이때는 한참 더운 여름철이라 공주는 엷은 비단 장삼을 걸치고 있었고
두 명의 궁녀들은 손에 부채를 들고 그녀의 등 뒤에서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다.
공주의 얼굴은 발그레했으며 입술가에 방울 방울 땀방울이 맺히기도 했
는데 그 얼굴 모습이 무척이나 화사해서 위소보는 마음속으로 생각했
다.
(공주는 내 마누라보다 아름답진 못하지만 역시 보기 드문 미인이라 할
수 있다. 오응웅이란 녀석이 그녀를 맞아들이게 되었으니그야말로 염복
이 터진 셈이다.)
공주는 고개를 돌리고 미소지으며 물었다.
[소계자, 덥지 않아요?]
위소보는 말했다.
[괜찮습니다.]
공주는 말했다.
[덥지도 않다면서 어째서 이마에 그토록 많은 땀을 흘리죠?]
위소보는 웃으며 소맷자락으로 땀을 훔쳤다. 이때 궁녀가 오색 무늬가
새겨진 커다란 항아리를 들고 들어왔다.
[공주님, 이것은 맹(孟) 지부(知府)가 바친 빙진산매탕(氷鎭酸梅湯)인
데 더위와 갈증을 푸는 데 좋다고 공주님께서 드시라고 하는군요.]
공주는 기뻐서 말했다.
[좋아. 한 그릇 떠서 나에게 먹여 다오.]
궁녀는 푸른 바탕에 꽃이 새겨진 자기 그릇에다가 산매탕을 따라서 공
주 앞으로 나아가 바쳤다.
공주는 숟가락을 들고 몇 모금 먹어 보더니 말했다.
[조그만 정주 지부인데도 한여름철에 얼음을 구할 수 있다니 대단하구
나.]
산매탕의 맑고 달콤한 계화 향기가 대청 안에 가득 차게 되었고 조그만
얼음 조각과 숟가락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위소보와 전노본, 마언
초 세 사람은 그만 침을 꿀꺽 삼켰다. 공주는 말했다.
[모두들 매우 더위를 타시니 한 그릇씩 드리도록 해라.]
위소보, 전노본, 마언초는 사의를 표하고 나서 얼음같이 차가운 산매탕
을 마셨다. 시원한 기운이 곧장 가슴팍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
아 뭐라 말할 수 없는 통쾌함을 느꼈다. 삽시간에 세 사람은 모조리 깨
끗하게 산매탕 그릇을 비웠다.
공주는 말했다.
[이와 같은 더운 날 길을 재촉하려니 정말 고생스럽네요. 내일부터는
하루에 사십 리만 가도록 하고 새벽녘에 출발해서 해가 뜨면 휴식을 취
하도록 해요.]
위소보는 말했다.
[공주께서 친히 아랫사람을 아껴주시니 모두들 그 은덕에 감격할 따름
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가 시일이 너무 지체될까봐 걱정입니다.]
공주는 웃으며 말했다.
[뭐가 두려워요? 나는 급하지 않은데 오히려 그대가 급하게 구는군. 오
응웅이라는 녀석이 기다리는 것도 좋아요.]
위소보가 미소지으며 막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띵하
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공주가 물었다.
[왜 그래요? 더위를 먹었나요?]
[아무래도....아무래도 조금 전에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군요. 공
주 전하,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공주가 말했다.
[술을 많이 마셨다고? 그렇다면 모두들 산매탕을 더 마시도록 해요. 그
래야 술이 깰 테니까.]
위소보는 말했다.
[고....고맙습니다.]
궁녀는 다시 세 그릇의 산매탕을 가져왔다. 전노본과 마언초 두 사람
역시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허겁지겁 산매탕을 마셔댔는데
갑자기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위소보 역시 눈앞에 별이 번쩍이
는 것을 느끼며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회미한 의식 속에서 그는 물줄기가 머리 위에
쏟아지는 느낌을 받고 눈을 뜨려고 하는데 다시 한바탕의 물줄기가 머
리 위로 쏟아졌다. 잠시 후 머리가 약간 맑아지면서 온 몸에 한기가 느
껴졌다. 그때 어디선가 킥, 하는 웃음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고 바라보니 공주가 히히덕거리며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위소보는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자기가 바닥에 누워 있
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몸을 지탱해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손과 발
은 이미 꽁꽁 묶여 있었다. 깜짝 놀라 몇 번 버둥거렸으나 몸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자기는 어느덧 공주의 침실에 와 있었고 온
몸은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옷이 홀딱 벗겨져 있는 것을 알고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라 부르짖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방안에는 촛불이 휘황하게 밝혀져 있었고 공주와 그 두 사람뿐이었다.
궁녀들, 전노본, 마언초 등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놀란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그들은 어디로 갔죠?]
공주는 아름다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당신의 시종들을 보기만 하면 구역질이 치미밀어요. 나는 이미
그 두 녀석의 머리통을 잘라버렸어요.]
위소보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지 참말을 하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공주는 무슨 짓이건 가리지 않고 저지르는 성격이었다. 전노본과 마언
초 두 사람을 죽이는 짓도 능히 해낼 수 있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로소 위소보는 그녀가 산매탕에다 무슨 수작을 부렸음을 깨닫고 물어
보았다.
[산매탕에 몽한약을 탔나요?]
공주는 히히 웃었다.
[그대는 정말 총명해요. 조금만 더 일찍 그 총명함을 발휘했으면 좋았
을 텐데 이미 늦었어요.]
위소보는 물었다.
[몽한약을.... 시위들로부터 얻었나요?]
위소보는 오립신 일행을 탈출시킬 때 시위들로부터 몽한약을 얻은 적이
있었다. 그 후 그는 몽한약은 상결을 비롯한 라마들을 상대할 때 모조
리 사용했었다. 이번에 북경에 돌아오자 그는 즉시 장강년에게 부탁해
서 한 봉지의 몽한약을 행낭 안에 넣어 두었다.
비수, 보의, 몽한약은 소백룡 위소보가 공격과 수비를 하는데 쓰이는
삼대법보(三大法寶)였다. 건녕 공주는 시위들에게 무공을 배웠으며 강
호에서 일어나는 회한한 일들에 대해서도 간간이 들은 적이 있었다. 따
라서 시위들로부터 몽한약을 얻어서 장난을 친 것 같았다. 공주는 웃었
다.
[그대는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인데 산매탕에 몽한약이 들어 있다는 것
을 어떻게 알아채지 못했지?]
위소보가 말했다.
[공주님은 저보다 백 배나 더 총명하시지 않습니까? 공주님께서 소신을
어떻게 다루시든 손발이 묶인 저로서는 그저 처분에 맡길 뿐이지 별 수
있겠습니까?]
입으로는 고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으나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주는 냉소했
다.
[그대의 도둑놈 같은 눈동자가 자꾸 구르고 있군. 아무래도 못된 생각
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공주는 위소보의 비수를 쳐들면서 말했다.
[그대가 소리를 지르기만 해봐요. 나는 즉시 배때기에다가 열여덟 개의
구멍을 뚫어버릴 테니. 그러면 그대는 죽은 태감이 될까, 아니면 살아
있는 태감이 될까?]
위소보는 비수의 날에서 싸늘한 광채가 번쩍이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죽일 계집애, 염병할 계집애, 무법천지로구나! 저 비수를 내 몸에
갖다대고 한번 살짝 긋기만 하면 이 어르신께서는 왔던 곳으로 돌아가
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그녀를 놀라게 만들어 감히 나를 죽이지 못하게
하자. 그런 후에 도망칠 방법을 강구하자.)
그는 생각을 정리하고 즉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죽은 태감도 되지 않고 살아 있는 태감도 되지 않고
바로 흡혈귀나 강시가 되겠소.]
공주는 그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죽일 꼬마야, 또 나를 놀라게 만들거냐?]
위소보는 아파서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공주는 말했다.
[창자가 삐져 나온 것도 아닌데 왜 엄살을 떠는 거지? 아하, 그렇지.
내가 몇 번 발로 밟으면 창자가 나올까, 아니면 염통이 튀어 나올까?
알아맞추면 그대를 놓아 주지.]
위소보는 말했다.
[저는 일단 사로잡혀 꼼짝을 못하게 되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답니다.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게 되죠.]
공주가 말했다.
[짐작할 수 없다? 그럼 내가 한번 시험해 봐야지. 한 발! 두 발! 세
발!]
한 번씩 셀 때마다 그녀는 발바닥으로 그의 배를 꽉꽉 밟았다.
위소보는 부르짖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다시 한 발만 더 밟으면 내 뱃속의 구린내 나
는 똥이 나올 것입니다.]
공주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밟아서 창자가 터져나오는 것은 상관
이 없지만 똥이 나온다면 그야말로 구린내가 충천할 것이니 더럽기 짝
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착한 공주님, 제발 부탁이니 저를 놓아 주세요. 소계자는 공주님의 분
부를 받들어 무공을 겨루겠습니다.]
공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는 싸우는 건 싫고 때리는 게 좋더라.]
그녀는 침대 밑에서 한 자루의 채찍을 꺼내더니 위소보의 벌거벗은 몸
뚱어리를 십여 번이나 철썩, 철썩, 소리가 나도록 후려쳤다.
살갗이 터지고 피가 흘렀다.
공주는 피를 보자 눈가에 주름이 지도록 웃으며 허리를 굽히고 다가와
가볍게 그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위소보는 불에 데인 듯 쓰리고 아픈
것을 느끼고 애걸했다.
[착한 공주님, 오늘은 실컷 때렸을 것입니다. 저는 공주님에게 죄를 지
은 적이 없습니다.]
공주는 갑자기 화를 내더니 그의 코를 찼다. 대뜸 코피가 터졌다.
[네가 나에게 죄를 짓지 않았다구? 황제 오라버니가 나를 오응웅이란
녀석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은 모두 너의 발상이란 말이야.]
위소보는 즉시 말했다.
[아니, 아니오. 이것은 황상께서 거룩하신 결단을 내린 것이며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소.]
공주는 몹시 화를 내며 말했다.
[책임을 전가하려고? 태후는 줄곧 나를 귀여워하셨다. 그런데 무엇 때
문에 내가 멀리 운남으로 시집을 가는데도 태후께서는 아무 말도 안 하
셨느냐? 심지어 내가 태후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데도 태후께서는 본 척
도 하지 않았다. 그녀.. 그녀는 바로 나의 친어머니인데도 말어야. 그
러니 모두 네가 꾸민 수작이 아니고 뭐냐?]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위소보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태후는 이미 바뀌어졌지. 늙은 갈보는 이미 진짜 태후로 바뀌었고 진
짜 태후는 너를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니 자연히 그대를 본체만체한
것이다. 너에게 욕을 하지 않은 것만 해도 많이 봐준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비밀이니 말할 수가 없지.)
공주는 한바탕 울더니 한 맺힌 음성으로 말했다.
[모두 네가 꾸민 수작이야! 모두 네가 꾸민 수작이야!]
그녀는 위소보에게 마구 발길질을 했다. 위소보는 갑자기 꾀를 생각해
냈다.
[공주, 그대가 오응웅에게 시집을 가고 싶지 않았다면 어째서 진작 말
하지 않았소? 나에게 좋은 방법이 있소.]
공주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나를 속이려고? 너에게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이야? 이것은 황제 오라버
니의 뜻이니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단 말이야.]
위소보는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황상의 뜻을 어길 수 없는 것은 사실이죠. 그러나 한
녀석만은 황상조차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오.]
공주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게 누구죠?]
위소보가 말했다.
[염라대왕이오.]
공주는 여전히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물었다.
[염라대왕이라니?]
위소보가 말했다.
[염라대왕께서 도와주시어 오응웅이란 녀석을 잡아간다면 공주님은 시
집을 가지 않아도 되죠.]
공주는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그토록 공교로운 일이 있을 수 있겠어? 오응웅이 바로 이때 죽을 리가
있나?]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그가 염라대왕을 만나러 가지 않으면 우리가 그를 보내면 되오.]
공주가 말했다.
[그를 찔러 죽이자는 건가?]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찔러 죽이는 것이 아니오. 영문도 모르는 죽음을 당하는 사람도 있지
않소? 그 누구도 영문을 알지 못하는 죽음 말이오.]
공주는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소리쳤다.
[너는 나보고 남편을 모살하라는 거냐? 안 돼. 너는 오응웅이란 녀석이
준수하여 친하의 아가씨들이 누구나 그에게 시집을 가고싶어 한다고 하
지 않았어? 네가 만약 그를 죽인다면 나는 너를 죽이겠다.]
그녀는 채찍을 들더니 다시 그를 한 차례 매질을 했다. 위소보는 너무
나 아파서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공주는 웃으며 말했다.
[많이 아파? 나는 아파하면 아파할수록 재미있더라. 너는 너무 크게 비
명을 지르면 안 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들으면 대영웅의 기개가 없
다고 비웃을 테니까.]
위소보는 말했다.
[나는 영웅이 아니오. 나는 구웅(狗熊)이오.]
공주는 욕을 해댔다.
[제기랄! 알고보니 너는 구웅이었구나.]
이 금지옥엽인 공주가 갑자기 천한 욕을 해대자 위소보는 어리둥절했
다. 공주는 위소보의 발에서 버선 한 짝을 벗겨 단번에 위소보의 입 안
에다 쑤셔넣고 채찍을 들고 개 패듯 후려쳤다. 몇 번 매질을 당한 위소
보는 기절한 척했다. 두 눈을 까뒤집고 흰자위를 드러내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공주는 욕을 했다.
[좀도적아, 너는 죽은 척하려고? 그렇다면 너의 배를 세 번 비수로 찔
러 보겠다. 네가 정말 죽었다면 움직이지 않겠지.]
위소보는 절대로 시험당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 급히 몸을 바둥거렸다.
공주는 히히, 웃으며 다시 채찍질을 시작했다. 가죽 채찍은 그의 윤기
가 흐르는 살결 위에 철썩 철썩, 맑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녀는
십여 번 채찍질을 하더니 채찍을 내던지고 웃으며 말했다.
[제갈양이 불로 등갑병을 태우려고 하신다.]
위소보는 다급해졌다.
(오늘 이런 미친년을 만난 것은 나의 조상 십구 대가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공주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등갑병의 몸에 등갑이 없으면 좀처럼 불에 타지 않으니 아무래도 기름
을 좀 쳐야 되겠다.]
말을 마치자 그녀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기름을 찾아 나선 것이
었다.
위소보는 온힘을 다해서 버둥거렸다. 그러나 손발을 묶고 있는 줄은 단
단히 매어져 있어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다급한 그는 갑자기
사부가 생각났다.
(이 어르신은 적지 않은 사부들을 모셨다. 해대부 늙은 자라가 첫 번째
사부이고 그 후에 진 총타주 사부를 모셨다. 홍 교주라는 수명이 하늘
처럼 긴 사부, 여우 같은 홍 부인, 소황제 사부, 징관 사질, 노화상 사
부, 구난이라는 아름다운 비구니 사부 등등, 그러나 한 꾸러미나 되는
이 많은 사부들 가운데 쓸모있는 무공을 가르쳐준 사람은 한 명도 없
다. 이 어르신네께서 만약 고강한 내공(內功)을 익혀 놨더라면 두 손과
두 발에 약간의 힘만 주어도 줄은 즉시 끊어졌을 것이니 무엇을 두려워
하랴? 그 고약한 계집애가 등갑병을 불태운다 해도 걱정할 게 없었을
텐데.)
그가 다급하고 초조하여 하늘이 무심하다고 원망하고 있는데 홀연 창
밖에서 누군가가 나직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 그를 구출해라!]
바로 구난이라는 아름다운 비구니 사부의 음성이 아닌가?
그 한 마디 말이 귓전을 울리자 위소보는 뛸 듯이 기뻤으나 애석하게도
손발이 묶여 있어서 뛸 수가 없었다.
곧 아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그는 옷을 입지 않았어요. 저는 구할 수가 없어요.]
위소보는 대노하여 속으로 마구 욕을 했다.
(죽일 년 같으니! 내가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해서 구하지 못할 까닭이
뭐냐? 설마하니 옷을 입어야만 구하겠다는 거냐? 네가 남편을 구하지
않는 것은 곧 남편을 모살하는 것이다. 스스로 청상과부 노릇을 하려고
하니 저런 병신 머저리가 있나?)
구난의 음성이 들렸다.
[네가 눈을 감고 손발을 묶은 밧줄을 잘라 놓으면 될 게 아니냐?]
아가가 말했다.
[안 돼요. 눈을 감으면 볼 수가 없게 되잖아요? 그러다가 만약....만
약.... 저의 손이 잘못 더듬어 만지지 못할 곳을 만진다면 큰 일이 아
니에요? 사부님.. 아무래도 사부님께서 그를 구하시는 게 좋겠어요.]
구난은 노해 말했다.
[나는 출가인인데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위소보의 나이가 어리다고 하나 역시 남자였다. 벌거벗은 모습을 어찌
바라볼 수 있겠는가?
위소보는 버선짝이 입을 틀어막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의쳤을 것이다.
[민저 옷을 던져 나의 몸을 덮으면 그곳을 볼 수 없을 것이 아니겠소?]
애석하게도 냄새 나는 버선이 입을 틀어막고 있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
다. 더군다나 구난과 아가 두 사람은 임기응번의 기지가 없었다.
두 여인은 궁녀처럼 변장하기 위해서 누런 가루를 얼굴에 바르고 공주
가 의심을 하고 캐물을까봐 잡일을 하는 궁녀들과 섞여 있었기 때문에
공주와 대면한 적이 없었다.
이날 밤 어렴풋이 공주의 침실에서 채찍질하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려
오자 살금살금 창가로 와서 살펴보았던 것인데 뜻밖에도 위소보가 발가
벗겨져서 꽁꽁 묶인 채 공주에게 지독한 매질을 당하고 있었다.
창 밖의 구난과 아가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괴 있는 동안에 건
녕 공주가 돌아와서 히히, 웃으며 말했다.
[돼지기름, 소기름, 참기름, 들기름 등을 구할 수 없으니 개와 곰의 기
름을 짜낼 수밖에 없다. 너 스스로 영웅이 아니고 구웅이라 했지? 구웅
의 기름이 어떤지 나는 본 적이 없는데 너는 본 적이 있냐?]
그녀는 탁자 위의 촛대를 들고 촛불로 위소보의 가슴팍을 태우기 시작
했다.
위소보는 극심한 통증에 몸을 뒤로 뻣대며 버둥거렸다. 공주는 왼손으
로 그의 머리채를 휘어 잡고 그가 피하지 못하게 하고는 오른손의 촛불
로 그의 살갗을 태웠다. 삽시간에 고기 타는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구난은 대경실색하여 와락 창문을 열고 아가를 방안으로 던져넣으며 외
쳤다.
[구해라!]
구난은 즉시 고개를 돌렸다. 위소보의 나체를 보게 될까봐 두 눈을 질
끈 감았다. 아가는 사부에 의해 방안으로 던져졌다. 위소보의 벌거벗을
몸뚱이가 눈에 들어왔다. 보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부
득이 그녀는 일장을 들어 건녕 공주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공주는 깜짝
놀라 외쳤다.
[누구냐?]
왼손을 들어 막으려고 하면 오른손을 흔들어 반격하는데 그 바람에 손
에 들고 있던 촛불이 즉시 꺼지고 말았다. 그러나 탁자에는 아직도 너
댓 자루의 촛불이 실내를 환히 밝혀 주고 있었다.
아가는 연달아 손을 썼다. 공주가 어찌 그녀의 적수가 되겠는가!
뚜뚝, 하는 소리와 함께 왼괄과 왼쪽 다리가 탈골이 된 채로 공주는 침
대 옆에 쓰러지고 말았다. 공주는 성질이 못돼서 그런 와중에도 쉬지
않고 욕을 해댔다. 아가는 노해 외쳤다.
[모두 네 탓인데 누굴 욕하는 거냐?]
아가는 왁, 하니 울음을 터뜨렸다. 마음속으로 매우 억울한 모양이었
다.
공주는 흠칫해서 더 욕을 하지 못했다. 공주는 남을 때려 놓고 오히려
자기가 울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가는 바닥에 떨어
져 있는 비수를 집어 들고 위소보의 손발을 묶고 있는 밧줄을 잘랐다.
그녀의 얼굴은 수치심에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비수를 던지고 즉시 창문으로 뛰쳐나가더니 나는 듯이 달려갔
다. 구난은 그 뒤를 따라 달려갔다.
실내에서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한 소란이 일어나니 바깥에 있는 궁
녀나 태감들의 귀에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리 없건만 그들은 사전에
공주의 엄명을 받았다.
방 안에서 아무리 이상한 비명소리가 나도 부르기 전에는 그 누구도 안
으로 들어오지 말 것이며 함부로 머리를 방 안으로 디밀면 즉시 머리통
을 자르겠다고 엄포를 놓았던 것이다.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얄궂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 공주는 어려서부터 터무니없는 짓을 잘했고 별 희한한 일들을 끊임
없이 저질러댔기 때문에 모두들 그녀의 이상한 장난에 습관이 되어 있
었다. 공주의 생모가 가짜이고 강호초망(江湖草褥)
출신이니 제대로 딸을 가르칠 수 없었으리라.
순치는 출가하여 중이 되었고 강희는 나이가 어렸으니 건녕 공주가 무
법천지로 소란을 피워도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다. 가짜 태후가 버릇
을 제대로 가르칠 리는 더욱 만무했다.
조금 전에 그녀는 궁녀와 태감들을 들어오라고 하고는 정신을 잃고 쓰
러져 있는 전노본과 마언초 두 사람을 묶으라고 했었다.
여러 사람들은 그 때 이미 오늘 밤 해괴한 일이 벌어질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주가 남에게 얻어맞아 쓰러질 줄은 정말 생각도 못하
고 있었다. 위소보는 아름다운 비구니 사부와 아가가 이미 멀리 간 것
을 알고 즉시 입 안에 틀어박힌 버선을 빼고 창문을 닫으며 욕을 퍼부
었다.
[냄새 나는 계집애야! 여우의 기름을 너는 본 적이 있느냐? 나는 본 적
이 없다. 우리 한번 짜내서 살펴보자.]
그는 그녀를 두어 번 걷어찼다. 곧이어 그녀의 두 팔을 뒤로 돌리고 그
녀의 치맛자락을 찢어서 그녀의 두 손을 묶었다. 공주는 이미 손과 다
리의 관절이 탈골되어 고통에 식은땀을 흘릴 지경이라 전혀 반항하지
못하고 있었다.
위소보는 그녀의 앞섶을 힘껏 잡아당겼다. 꽉, 소리와 함께 옷자락이
즉시 찢어졌다. 그녀가 입고 있는 비단옷이 찢어지자 눈처럼 희고 탐스
러운 유방이 툭 튀어 나왔다.
위소보는 원한이 극에 달하여 바닥에 나뒹구는 촛대를 집어들고 초에
불을 붙였다. 촛불을 공주의 젖꼭지에 가져가며 욕을 했다.
[냄새 나는 계집애야! 눈앞에서 보복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빠
르냐? 여우의 기름을 나는 많이 짜내지는 않겠다. 그저 한 그릇의 산매
탕 정도만 짜면 그걸로 층분하다.]
위소보가 촛불을 갖다대자 공주는 고통스러워 악! 하는 비명을 질렀다.
위소보는 말했다.
[옳지. 너도 나의 냄새 나는 버선짝 맛을 보아라.]
그는 버선을 집어들고 공주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그러자 공주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계 패륵, 버선으로 틀어막을 필요 없어요.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을게
요.]
계 패륵이란 한 마디를 듣자 위소보는 순간 멍해졌다. 그 날 공주의 침
실에서도 그녀는 시녀로 분장하고 위소보를 시중 들며 그와 같은 칭호
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와 같은 다정한 칭호를 들
으니 그만 가슴이 설레었다. 그녀는 다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계 패륵, 아무쪼록 소신을 용서해 주세요. 언짢으면 채찍질로 소신을
한 차례 매질을 하셔도 좋아요.]
위소보는 말했다.
[물론이지. 신나게 패주지 않고는 내 가슴에 맺힌 한을 풀기 어려울 것
이다.]
그는 촛대를 내려놓고 채찍으로 그녀의 몸을 갈기기 시작했다.
공주는 나직이 부르짖었다.
[아야,아야!]
그런데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앵두 같은 입술에 웃음을 머금고는 말
할 수 없이 기분좋은 듯한 표정이 아닌가?
위소보는 욕을 했다.
[천한 것아! 뭐가 그리 좋으냐?]
공주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이 노예는 비천한 년이에요. 계 패륵께서는 아무쪼록 더 힘껏
때려주세요. 아아!]
위소보는 채찍을 던지고 말했다.
[그렇다면 때리지 않겠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옷을 찾았으나 어디에 숨겼는지 보이지 않았다.
[내 옷은 어떻게 했느냐?]
공주가 말했다.
[제발 나의 관절을 맞춰 주세요. 이 하녀로 하여금 게 패륵께서 옷 입
는 것을 시중들게 해주세요.]
위소보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천한 년은 정말 괴상학탁. 그러나 황상께서는 그녀를 운남으로 데
려가라고 했으니 그녀를 죽일 수는 없다.)
그는 욕을 했 다.
[제기랄! 개같은년.]
공주는 웃으며 물었다.
[재미있었나요?]
위소보는 노해서 말했다.
[네 에미야 말로 못된 짓을 하며 재미를 느끼지.]
그는 그녀의 손과 발을 잡고 관절을 맞춰주었다. 그는 뼈를 맞출 줄 몰
라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겨우 맞출 수 있었다. 공주는 아파서 아야,
아야, 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다리 관절을 다 맞췄을 때 공주는 그
의 등에 엎드려 있는 형상이었다. 공주의 유방이 등 뒤를 압박하자 위
소보는 목이 마르고 입술이 바싹 타 들어가고 마음이 설레어 급히 말했
다.
[너는 제대로 잘 앉아라. 이와 같이 구는 것은 그야말로 마누라 노릇을
하겠다는 뜻이다.]
공주는 코 막힌 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신의 마누라 노릇을 하고 싶었어요.]
공주는 갑자기 그를 힘껏 껴안았다. 위소보는 가볍게 몸을 흔들며 그녀
를 떨치려고 했다. 그러나 공주는 더욱 힘껏 그를 끌어안더니 갑자기
그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위소보는 머리가 띵하니 울리고 눈이 가물
거렸으며 두둥실 구름을 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곁에 있는 이 비천
하고 백 년 묵은 여우 같은 것이 말할 수 없이 귀엽고 아름답게 보였
다.
방 안의 촛불이 한 자루, 두 자루 차례로 꺼져 갔다. 그는 얼떨떨한 정
신에서 본능적으로 공주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한창 넋이 나가 있는데 창 밖에서 아가의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소보, 당신은 안에 있나요?]
위소보는 깜짝 놀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나는 여기 있소.]
아가는 분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위소보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아무것도....아무것도 하지 않소.]
그는 공주를 밀어내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공주는 죽어라
그를 껴안고 나직이 말했다.
[가지 말아요. 그녀보고 꺼지라고 해요. 그녀는 누구죠?]
위소보는 되는 대로 지껄였다.
[바로....나의 마누라요.]
공주가 말했다.
[내가....내가 그대의 마누라예요. 그녀는 아니에요.]
아가는 수치스럽고 화가 나 발을 동동 구르다가 몸을 돌려 떠나갔다.
위소보는 다급해서 소리쳤다.
[사저, 사저!]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입을 꼭 틀어막아 다시는 아가를 부를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위소보는 옷을 입고 살금살금 공주의 침실에서 나왔다.
밖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태감에게 물어 전노본과 마언초가 무사하며
아직도 동쪽 상방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알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부끄럽고 창피스러워 감히 두 사람을 볼 면목도 없었다. 그는
태감에게 빨리 두 사람을 풀어 주라고 말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는 공주를 범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한편으로
기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그는 감히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했다.
이 날 오후에 그는 구난을 만났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어쩌면 사부님이 크게 벌을 내리실 것이고 일 장으로 자기를 때려 죽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뜻밖에도 구난은 전혀 사정을 알지 못하는 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위로의 말을 했다.
[그 계집애가 그토록 악독하니, 정말 그 에미에 그 딸이로구나. 상처는
어떠냐?]
위소보는 비로소 마음을 놓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다행히 근골은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것을 보고 얼른
말했다.
[사부님과 사저가 구해 주시지 않았다면 그녀는....그녀는 어젯밤 저를
태워 죽였을 것입니다.]
아가가 말했다.
[당신은....당신은 어젯밤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녀는....공주는....몽한약을 썼습니다. 사저가 방안으로 뛰어 들어
와 나를 구하게 되었을 때.... 약기운이 다 가시지 않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구난은 가여운 생각이 들어 말했다.
[내가 너를 제자로 거두어들였으나 줄곧 너에게 어떤 무공도 전수해 주
지 못했구나. 그런 계집애에게 그토록 고통을 당했으니 너에게 미안하
구나.]
위소보가 훌륭한 무공을 배울 마음이 있었다면 이때 간청을 했을 것이
고 구난은 반드시 적당한 무공을 전수했을 것이다. 그가 무공을 배웠다
면 한평생 써 먹고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생스러운 일
을 피하려는 습성이 있었다. 어젯밤 공주에게 꽁꽁 묶여 채찍에 맞고
불로 지지는 고통을 당할 때는 속으로 사부가 무공을 전수하지 않았다
고 탓했으나 정작 사부가 무공을 전수하려 하자 그는 끙끙거리는 신음
소리를 내며 말했다.
[사부님, 저는 골치가 매우 아픕니다. 마치 머리통이 빠개질 것만 같습
니다. 몸의 살점도 한 조각 한 조각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구난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가서 쉬어라. 앞으로는 그 계집애를 자주 만나지 않도록 조심해라. 정
말 만나야 할 때는 반드시 여러 사람을 대동하도록 해라. 그녀는 공공
연히 너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주는 음식은 무조건 먹거나
마시지 말아라.]
위소보는 연신 대답하고 물러나며 한마디 했다.
[그녀는....그녀는 운남으로 시집가기 싫다고 했습니다. 운남으로 시집
보내는 것이 제가 꾸민 꾀라고 말했습니다. 또 사부님과 제가 그녀의
어머니를 상대했던 일을 그 천한 것이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거짓말로 공주가 어젯밤 그를 때린 이유를 대고 그 책임의 대부분
을 구난에게 떠넘긴 셈이었다. 구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에미가 그녀에게 말을 했을 게다. 그러니 앞으로는 각별히 조
심하도록 해라.]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날 나는 궁에서 가짜 태후에게 매우 악독하게 대했다. 그러나 그
날 소보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는데 가짜 태후가 어떻게 알아차리고 그
녀의 딸을 시켜 보복을 하게 했을까?)
일행은 천천히 서남쪽으로 갔다. 매일 밤 공주는 살며시 위소보를 불러
서 함께 있자고 했다. 위소보는 처음에는 사부와 천지회의 동료들이 알
게 될까봐 두려워했으나 젊은이가 난생 처음 낟녀의 일을 알게 된 데다
가 간드러지고 아름다운 공주가 매달리는데 어떻게 뿌리칠 수 있겠는
가? 설사 성인군자라도 거절하기 힘들었으리라. 그는 윤리와 예법에 대
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남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
았으나 나중에는 공주의 방에서 밤을 새우며 운우의 기쁨을 누렸다. 그
러니까 밤에는 부마 나으리가 되었던 것이다.
궁녀들과 태감들은 공주를 두려워했고 위소보가 은자를 마구 뿌렸기 때
문에 어느 누구도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아가가 공주의 손발 관절을 비틀어 놓자 공주는 자연히 위소보
에게 그 사저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위소보가 교묘하게 둘러대니 공주
는 한창 쾌락에 젖어서 자세히 묻지 않았다. 두 젊은 남녀는 애정의 진
미를 속속들이 맛보았는데 꿀보다 달콤하다고 느꼈다. 공주는 그 야만
스러운 성질을 버리고 스스로 하녀로 자처하며 그가 방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엎드려 영접을 하며 연신 계 패륵,계부마, 라고 불러 주었다.
옛날 방이가 거짓말을 하며 위소보를 신룡도로 데려가게 되었을 때 배
안에서 방이는 친밀한 태도와 부드러운 말로 그의 정신을 빼앗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공주는 말로만 하는 게 아니고 몸을 바쳐가며
섬기니 진짜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위소보는 반은 미치다시피 그녀와
의 정사에 탐닉했다. 두 남녀는 이 길이 영원히 끝나지 말기를 바랐다.
아가가 궁녀들과 함께 섞여 있었으나 위소보는 그녀가 공주처럼 자기에
게 헌신하며 섬기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추근거리지 않
았다.
이날 장사(長7少)에 도달하자, 육고헌이 신룡도에서 쾌마를 타고 달려
와 홍 교주의 말을 전했다. 홍 교주는 두 권의 경서를 얻자 매우 기뻐
하면서 백룡사가 똑똑하고 부지런하며 충성을 바쳐 일을 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위소보가 신룡교의 크나큰 공신이라고 추켜올리며, 특별히
표태역근환의 해약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이 며칠 동안 공주
와의 사랑에 빠져 극독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육고헌의 말을 듣자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공주와 표태역근환의 해약
을 얻으니 경사가 겹친 셈이었다. 그는 당장 육고헌, 반두타와 함께 해
약을 복용했다. 반두타와 육고헌 두 사람은 다시 허리를 굽혀 사의를
표하며 모두 백룡사가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 덕에 힘입어 두 사람
은 교주의 영약을 하사받고 심복지환(心腹之患)을 제거하게 되었다고
고마워했다.
육고헌은 또 말했다.
[교주와 부인께서는 백룡사에게 유시를 내리셨습니다. 즉, 나머지 여섯
권의 경서도 계속해서 찾아내야 한다는 분부입니다. 백룡사께서 다시
큰 공을 세우면 교주는 큰 상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위소보는 말했
다.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소? 몸을 아끼지 말고 노럭해야지요. 교주와 부
인의 은혜가 태산 같으시니 우리들로서는 분골쇄신(粉骨碎身)해도 보답
하기 어려울 것이오.]
반두타와 육고헌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교주께서는 영원히 선복을 누리시고 수명은 하늘과 같을지어다. 백룡
사께서는 영원히 청복을 누리시며 수명은 남산과 같을지어다.]
위소보는 그 말에 미소를 보내머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청복을 누리는 게 뭐가 좋아? 매일 요즘처럼 영원히 염복을 누리고 수
명이 남산 같다고 한다면 내 마음에 쏙 들 텐데.)
第70章. 사지를 잘리운 양일지
위소보와 공주는 운남으로 가는 길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무
리 길이 멀고 걸음이 느려도 끝내 도달하는 날은 있기 마련이다.
귀주성(貴州省)은 오삼계가 관할하는 곳이었다. 귀주성의 나전(羅甸)에
는 겹겹이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건녕 공주 일행이 귀주성 접경에
이르자 오삼계는 즉시 병마를 파견해 영접했다. 운남성(雪南省) 부근에
도달하니 오응웅이 직접 운남성 밖까지 나와서 영접을 했으며 위소보를
만나자 쉬지 않고 고맙다는 말을 했다. 청나라 조정의 예법에 의하면
혼례를 올리기 전에는 공주와 만날 수 없었다.
이 무렵 공주는 위소보에게 아교풀처럼 달라붙어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
다. 오응웅이 왔다는 말을 듣자 그녀는 버들같은 눈썹을 찡그리며 신경
질을 부렸다. 그날 밤 공주는 위소보에게 방법을 강구해서 오응웅을 염
라대왕에게 보내고 자기와 늙을 때까지 함께 부부 노릇을 하자고 고집
을 피웠다. 위소보는 깜짝 놀랐다.
(가짜 부마 노릇을 밤중에 남몰래 하는 것은 괜찮지만 진짜 부마가 된
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주는 그가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화를 냈다.
[왜 말이 없어요? 오응웅이란 그 녀석을 염라대왕에게 보내겠다고 제안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 아니에요? 내가 생각해 낸 것이 아니잖아요?]
위소보는 말했다.
[반드시 보낼 것이오. 하지만 기회를 봐서 손을 써야지 무모하게 함부
로 손을 쓰면 남들에게 의심을 받기 쉽소.]
공주가 말했다.
[좋아요. 당분간은 당신의 말을 듣기로 하지요. 어찌 되었든 나는 당신
을 따르기로 결심했으니 그 녀석과는 동침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그를
염라대왕 앞으로 보내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나는 폭
로할 거예요. 나는 오삼계에게 당신이 나를 강간했다고 말할래요. 황제
오라버니가 아무리 당신을 좋아해도 오삼계는 당신을 열일곱 조각이나
스물여덟 조각으로 쪼개버리고 말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당신이 오응웅
보다 앞서서 염라대왕에게 인사를 드려야 할 거예 요.]
위소보는 크게 화가 나서 그녀의 따귀를 갈기며 외쳤다.
[터무니없는 소리, 내가 언제 너를 강간했느냐?]
공주는 히히, 웃으면서 그를 껴안고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음이 모질어서 일찍 죽을 이 원수 덩어리, 그토록 사정없이 때리다
니, 내가 얼마나 아파하는지 몰라요?]
다음날 곤명(昆明)에 도달했다. 호각 소리가 나더니 한 명의 군관이 보
고했다.
[평서왕께서 친히 왕림하여 공주의 난가(鸞駕)를 영접하려 합니다.]
위소보는 말을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수많은 병사들이 갑주투구도 선
명한 모습으로 대마(大,馬)를 타고 달려오더니 일제히 말에서 내려 양
쪽으로 늘어섰다. 군악대가 주악소리를 연주하는 가운데 몸에 홍포(紅
袍)를 걸친 수백 명의 소년 동자들이 손에 깃발을 들고한 명의 장군을
인도해서 군사들 앞으로 나섰다. 찬례관(贊禮官)이 외쳤다.
[평서 친왕 오삼계가 건녕 공주 전하를 알현합니다.]
위소보는 오삼계를 살펴보았다. 그의 체구는 매우 건장한데 자색 빛이
나는 얼굴은 네모졌으며 수염과 머리카락은 허옇게 센 것이 많고 검은
것이 적은 편이었다. 나이는 많았지만 발걸음도 민첩하게 성큼성큼 다
가오고 있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다 이 늙은 자라의 이름을 들먹이고 있는데, 알
고 보니 이렇게 생겨 먹었군!)
위소보는 그가 공주의 수레 앞으로 나아가 꿇어 엎드려 큰절을 하는 것
을 보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늙은 자라 오삼계의 인사를 받을까 말까?)
그는 오삼계가 공주를 알현하기를 끝낸 후에 입을 열었다.
[평서 친왕, 저에게 인사를 할 필요는 없소.]
오삼계는 몸을 일으키고 위소보의 곁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혹시 용감하게 오배를 사로잡아 천하에 명성을 떨치신 위 자작 나으리
가 아니시오?]
위소보는 말했다.
[감당할 수 없구려. 비직은 위소보라 하는데 왕야께 인사드립니다.]
오삼계는 껄껄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위 나으리께서 대인대의(大仁大義)하시다는 영명(英名)은 소왕(小王)
이 오래 전부터 들어 왔소. 소왕 부자는 이제부터 위 자작 나으리에게
많은 신세를 져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 있어서 한 가족처럼
지내기로 합시다.]
위소보는 그의 말에 양주 사투리가 섞여 있는 것을 보고 내심 기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빌어먹을, 너는 나와 동향 사람이로구나.)
그는 말했다.
[그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어찌 감히 높은 사다리를 오를 수 있겠습니
까?]
위소보는 약간 양주 사투리를 섞어 말했다. 오삼계는 웃으며 말했다.
[위 자작 나으리는 양주 사람이오?]
[그렇습니다.]
오삼계는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잘되었소. 소왕은 요동에 거주하고 있지만 원래 고향은
고우(高郵)라오. 그러고 보니 우리들은 정말 한 집안 사람이군요.]
위소보는 생각했다.
(빌어먹을, 네놈은 고우 땅의 보따리 장사꾼이었구나. 양주 땅이 너와
같은 대매국노를 배출했으니 이 어르신은 매우 기분이 나쁘시다.)
오삼계와 위소보는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앞으로 나아가며 공주를 성
(城) 안으로 인도했다.
곤명성(昆明城)의 백성들은 공주가 평서왕의 세자에게 시집온다는 것을
알고 떼지어 몰려나왔다.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 떠들썩하기
짝이 없었다. 성 안에는 연등과 오색 종이를 걸어 놓았고 거리 곳곳의
누각마다 회장(喜帳)을 늘어뜨렸고 성까지 오는 동안 징소리, 북소리,
폭죽소리에 하늘이 떠나가는 듯했다.
위소보와 오삼계는 나란히 성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사람들이 허리를
굽혀 영접을 했다. 위소보는 우쭐거리다가 다시 생각해 보았다.
(꽃과 같고 옥과 같은 공주는 교태롭기 이를 데 없는데 나는 오응웅이
란 녀석에게 주기 위해 친히 먼 길을 달려왔다. 그 못된 녀석은 염복이
정말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구나.)
그는 매우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오삼계는 공주를 곤명성의 서쪽 안부원(安阜園)으로 안내했다. 이곳은
명나라 금국공 목씨 집안의 옛 거처였다. 원래 고루거각들로 이루어져
있고 정원과 정자들이 아름다움을 다투고 있었는데, 오삼계는 공주가
시집을 오게 되자 크게 토목공사를 해서 다시 증축하고 수리하여 더욱
산뜻하게 치장을 해 놓았다. 오삼계 부자는 주렴 밖에서 공주에게 인사
를 드린 후에 위소보를 평서왕부로 데려갔다.
평서왕부는 오화산(五華山)에 있었다. 원래 명나라 영력제(永歷帝)의
고궁이었으며 그 넓이가 수 리(里)에 달했다. 오삼계가 머문 뒤로 해마
다 끊임없이 누대와 전각을 세우게 되니, 높다란 누각, 조각을 한 담
장, 붉은 정자, 파란 물결이 일렁이는 연못 등이 즐비해 있어서 황궁
못지 않았다. 대청에는 이미 성대한 연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평서왕
휘하의 문무백관이 모두 참석한 것은 물론이었다.
흠차대신(欽差大臣) 위소보는 자연히 수석(首席)에 앉았다.
술이 세 순배 돌자 위소보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왕야, 북경에 있을 때 항상 왕야께서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지요....]
오삼계는 즉시 안색이 새파래졌으며 백관들도 일제히 안색이 변했다.
위소보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늘 왕부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이 모두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
껄였다는 걸 알았습니다.]
오삼계는 안색이 풀어지면서 말했다.
[위 자작 나으리께서는 명찰하십시오. 비열한 소인들이 질투심을 못 이
겨서 함부로 모함을 하는 것이니 결코 믿지 마십시오.]
위소보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왕야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그 이유는 황제가 되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직접 와서 보니 황상의 궁전도 왕야
의 궁전같이 화려하지 못하며 옷차림도 왕야처럼 멋지지 못합니다. 황
상께서 드시는 수라상은 언제나 내 휘하의 태감들이 만드는데 부끄러운
얘기지만 왕야의 왕부 음식처럼 맛이 좋지 않습니다. 왕야께서 평서왕
노릇을 하는 것만 해도 황상보다 편안하고 풍족한데 무엇 때문에 황제
가 되려 하겠습니까? 나중에 제가 북경으로 돌아가면 황상께 평서왕이
결코 반란을 일으킬 사람이 아니며 설사 황상을 하라고 권한다 해도 왕
야 어르신께서는 결코 하지 않을 테니 염려 놓으시라고 말씀드리겠습니
다.]
대청 안은 조용했다. 백관들은 술을 마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얼이 빠
져 멍하니 그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을 졸였다. 오삼
계는 난처한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들으니 황제는 이미 내가 반역할 뜻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
고 있구나.)
그는 억지로 메마른 웃음을 몇 번 흘리며 입을 열었다.
[황상께서는 영명하시고 인자하시고 효성이 지극하십니다. 나라를 다스
림에 있어서 온갖 정성을 다하고 계시니 옛날의 어진 황제들도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죠. 오생어탕도 스스로 황상보다 못함을 자인할 것입니다.]
오삼계는 어리둥절해서 잠시 생각해 보고서야 비로소 그가 말하는 '오
생어탕'이 '요순우탕(堯舜禹湯)'을 잘못 발음한 것임을 알고 말했다.
[소신은 황상의 검소한 덕행을 앙모하기 때문에 감히 호사스럽게 지내
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은이 망극하시어 공주님을 보내시니 우리는 소
흘히 대접할 수 없어서 온 정성을 다해서 공주님과 위 자작 나으리를
대접하려는 것이지요. 혼례를 치르고 난 후에는 절약을 할 것입니다.]
그는 속으로 이 꼬마가 북경으로 돌아가면 황제에게 자기가 사치하게
지내고 있다고 보고할 것이고 황제는 반드시 성을 낼 것이니 방법을 강
구해서 위소보의 입을 막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절약할 필요 없지요. 시원시원하게 마구 돈을 쓰는 것이 재미있다오.
왕야께 돈이 있어도 마음껏 쓰지 않는다면 무슨 재미로 왕야 노릇을 하
겠소? 왕야께서 금은이 너무 많아 다 쓰지 못해 걱정하신다면 제가 도
와드릴 용의도 있습니다. 하하하!]
그의 이 한 마디에 오삼계는 크게 기뻐하며 가슴을 짓누르던 커다란 근
심 덩어리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속으로 위소보가 돈만 받아 준다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무백관들은 그가 연회석에서
공공연히 돈을 달라고 하자 모두들 웃음을 머금고 어린애는 역시 상대
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여러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동안에 어떤 예물을
주어 그의 호감를 살까 하고 궁리하였다. 연회석의 어색하고 긴장되었
던 분위기는 말끔히 가시고 여러 사람들은 그의 공덕을 칭송하고 크게
아첨을 떨면서 즐겁게 마신 후에 흩어졌다.
오응웅은 친히 위소보를 데리고 안부원으로 가서 대청에 좌정했다. 오
응웅은 한 개의 금합(錦盒)을 두 손으로 바치며 말했다.
[이것은 약간의 은자입니다. 위 자작 나으리께서는 용돈으로 쓰십시오.
돌아가실 때 부왕께서는 따로 위 자작 나으리께 보답을 할 것입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잘 쓰겠습니다. 나는 북경에서 출발할 때 황제로부터 다음과 같은 분
부를 받았지요. '소계자, 오삼계를 간신이라 하는데 네가 가서 친히 그
가 충신인지 간신인지 똑똑히 살펴보도록 해라. 자세히 살펴야지 잘못
보면 안 돼.'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황상께서는 안심하
십시오. 소신이 눈을 크게 뜨고 머리부터 꼬리까지 똑똑히 살펴보겠습
니다.' 하하하! 소왕야, 그러니 층신인지 간신인지는 내 한마디에 달려
있지 않겠소?]
오응웅은 속으로 화가 났다.
(청나라의 강산은 모두 우리 아버지가 세운 것과 다름 없다. 나라를 세
우고 나자 은혜를 망각하고 의리를 저버리고 우리 부자가 충신인지 간
신인지 살펴보라고 하다니, 공주를 나에게 시집보내는 것도 좋은 뜻에
서 나온 것은 아니겠구나.)
그는 겉으로는 겸손하게 말했다.
[우리 부자는 층성으로 황상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개나 말이 되
어서라도 황상의 은덕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위소보는 한쪽 다리를 들어 한쪽 무릎 위에 포개며 말했다.
[그러믄요. 나도 당신이 가장 충성스럽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황상
께서 당신을 믿지 않았다면 당신을 매부로 삼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왕
야, 당신은 황제의 매부가 되어 관직이 여덟 등급이나 뛰어 올랐으니
매우 빠른 진급이 아니겠소?]
오응웅은 말했다.
[황상의 성은이 망극합니다. 위 자작 나으리께서 가운데서 돌봐주신 덕
택이기도 하구요. 뭐라고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위소보는 속으로 섕각했다.
(나는 네 마누라를 먼저 맛보았다. 그러니 너무 고마워할 것은 없다.)
오응웅을 전송하고 위소보는 금합을 열었다. 안에는 열 묶음의 은표(銀
票)가 들어 있었다. 한 묶음에 사십 장씩 묶여 있었으며 매장의 은표는
하나같이 오백 냥짜리였다. 모두 이십만 냥의 은자였다. 위소보는 놀라
고 기뻤다.
(야! 돈을 물쓰듯 하는구나. 이십만 냥의 은자를 용돈으로 주다니! 이
어르신께서 어르고 뺨치는 수단을 잘 구사하면 일백만 냥이나 이백만
냥의 은자를 긁어모으는 것도 어렵지는 않겠다.)
이튿날 오응웅이 흠차대신(欽差大臣) 위소보에게 와서 무예장으로 가서
열명식에 참관하라고 권했다. 위소보는 오삼계와 나란히 열병대 위에
섰다. 평서왕 휘하의 도통(都統) 두 사람이 수십 명의 좌령(佐領)을 이
끌고 갑주투구 차림으로 열명대 앞에서 절을 했다.
곧이어 명마들이 열병대 아래를 지나갔다. 번왕(藩土)의 군사들이 모조
리 지나간 후 새로 편성한 오영(九營)의 의용병과 오영의 충용명(忠勇
兵)이 열병을 했다. 각각의 영을 한 명의 총병이 통솔하고 있는데 진을
펼치고 조련을 하는 군사들은 매우 건장하고 말들은 튼튼했으며 훈련이
매우 잘되어 있었다.
위소보는 군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으나 명졸과 장수들이 건장하고
일대의 군사들이 위풍당당하게 끊임없이 지나가는 것을 보자 오삼계에
게 말했다.
[왕야, 오늘 저는 왕야에게 탄복했습니다. 저는 효기영의 도통이며 효
기영은 황상의 친위군입니다. 부끄럽지만 왕야의 부하인 충용영이나 의
용영과 싸운다면 효기영은 반드시 크게 패해 도망치기 바쁠 것입니다.]
오삼계는 득의 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위 자작 나으리께서 과찬의 말씀을 하시는군요. 소왕은 무관 출신이라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을 본분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이때 갑자기 대포 소리가 울려퍼지더니 군사들과 장수들이 일제히 함성
을 지르는데 그 소리에 천지가 떠나가는 듯했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털썩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오삼계는 그 꼴을 보자 속으로 웃었다.
(너는 황상의 곁에서 농간을 부리는 간신에 불과하다. 교묘한 언변으로
어린 황제의 환심을 사는 것을 제외하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젖비린
내가 가시지 않은 꼬마를 자작에 봉하고 효기영의 도통에 임명하는가
하면 흠차대신에 임명했으니 이것만 봐도 소황제는 정말 멍청하다.)
그는 처음부터 강희를 눈에 두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위소보가 이런
병신같은 추태를 보이자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청나라 조정에 인재가 없
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제멋대로 짐작했다. 열병식이 끝난 후에 위소
보는 황제의 성지를 오삼계에게 주며 말했다.
[이것은 황제의 성유(聖諭)이니 왕야께서 모두에게 큰소리로 읽어 주도
록 하십시오.]
오삼계는 무릎을 끓고 성유를 받들며 말했다.
[황상의 성유이니 역시 흠차께서 읽는 것을 봐야겠습니다.]
위소보는 웃었다.
[글자는 저를 알아봐도 저는 글자를 알아보지 못한답니다. 저는 일자무
식인데 어떻게 읽겠습니까?]
오삼계는 빙그레 웃으며 성유를 쳐들고 군사와 장수들이 들을 수 있도
록 큰소리로 읽었다. 그의 목소리는 우렁차고 드높아 한 마디 한 마디
가 멀리 울려퍼졌다. 광장에 있는 수만 명이나 되는 장수와 군사들은
무릎을 끓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성유에는 평서친왕이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우고 왕의 임무를 게을리하
지 않아서 변경을 굳게 지키면서 오랑캐들을 무마하고 평정한 것에 대
해 칭찬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부하 장수들과 군사들도 공을 세웠으니
모두들 한 계급씩 올려주고 따로 상을 내린다는 내용이었다. 성유를 다
읽은 오삼계는 북쪽을 향해 무릎을 끓고 큰절을 하며 외쳤다.
[삼가 황상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장수들과 군사들도 일제히 부르짖었다.
[삼가 황상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위소보는 이번에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깜짝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수만이나 되는 군사들과 장수들이 천지가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
니 그는 가슴이 떨려 제대로 서 있기 힘들 지경이었다.
평서왕부로 돌아오자 오삼계는 그에게 공주의 혼인 날짜를 언제로 잡는
게 좋으냐고 물었다. 위소보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
다. 오삼계는 말했다.
[다음 달 초나흘이 황도길일(黃道吉日)이니 혼인을 하는데는 크게 길한
날이오. 위 자작 나으리가 볼 때 이 날이 어떨는지요?]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공주가 오응웅에게 시집을 가면 다시는 이 재미 있는 가짜 부마 노릇
을 할 수 없겠구나.)
그는 말했다.
[너무 촉박한 것 같군요. 공주가 시집을 가는 일은 큰일입니다. 왕야께
서는 모든 준비를 빠짐없이 하셔야 할 것입니다. 공주는 태후와 황상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얼렁뚱땅 얼버무릴 수 없지요. 만약 적당히 넘겼다
가는 우리 신하들은 큰 봉변을 당할 것입니다.]
오삼계는 속으로 흠칫 놀랐다.
(그는 일부러 일을 어렵게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뇌물을 받으
려고 이러는 것일까?)
그는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위 자작 나으리께서 잘 돌봐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빠뜨리
는 점이 있다면 아무쪼록 기탄없이 지적해 주십시오. 우리들은 마땅히
정성을 다해서 일을 처리해야 되지요. 초나흘이 너무 촉박하다 여기신
다면 다음 달 열엿새 역시 극히 좋은 날이고, 공주님과 아들놈의 사주
와도 전혀 충극(沖剋)되지 않으며 금기가 전혀 없는 날입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좋습니다. 제가 공주에게 가서 공주님께서 어떻게 말씀을 하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안부원으로 돌아오니 운남의 관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소보는
그들이 건네주는 예물을 받아들고 몇 마디 고맙다는 말을 던지고 그들
을 내보냈다. 그는 비로소 운남에 온 후에 의형제를 맺은 양일지가 보
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는 오응웅에게 사람을 보내 양일지
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에 오응웅이 친히 와서 말했다.
[위 자작 나으리, 부왕께서는 양일지를 바깥일을 보러 내보냈는데, 아
직 돌아오지 않아 자작 나으리의 시중을 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양해
하여 주십시오.]
위소보는 크게 실망하여 물었다.
[그는 어디로 갔소? 언제 돌아옵니까?]
오응웅은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그는 서장(西藏)으로 갔습니다. 길이 멀어서 아무래도 이번
에....위 자작 나으리께서는 그를 보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위소보는 그가 당황해하는 것을 보자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지?)
그래서 다시 물었다.
[양형은 무슨 일로 서장까지 갔소? 간 지 얼마나 되었소?]
오응웅이 말했다.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서장의 라마가 예물을 보내오자 부왕께서
는 그 보답으로 선물을 보내면서 양일지를 시킨 것입니다.]
위소보가 말했다.
[공교로운 일이로구먼.]
오응웅을 보내고 위소보는 생각할수록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들은 자기
와 양일지의 교분이 좋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자기가 운남으
로 온다는 사실을 알면서 양일지로 하여금 그를 접대하도록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가 운남에 도달할 무렵 양일지를 바깥으로 내보냈으니 일부
러 그가 자기를 만나는 것을 방해한 것 같았다.
즉시 위소보는 조제현과 장강년을 불렀다. 그들에게 오삼계의 시위들과
술을 마시고 노름판을 벌이면서 양일지의 소식을 염탐해 내라고 명했
다. 이날 밤 그는 공주와 만났다. 그가 혼례식을 다음 달 열 엿새에 올
리기로 했다고 하자 공주는 말했다.
[혼례를 치르기 전에 오응웅이란 녀석을 염라대왕 앞으로 보내주기 바
래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폭로하고 그에게
결코 시집가지 않겠어요.]
위소보는 그와 같은 말을 듣자 노기가 치밀어 발을 한번 구르고 방문을
나섰다.
공주는 재빨리 달려와 그의 소매를 잡았으나 위소보는 매정하게 뿌리치
고 방을 나섰다. 공주가 큰소리로 울었으나 그는 못들은 체 했다.
위소보는 혼자서 시간을 보내려니 무척 따분했다. 그는 십여 명의 시위
를 불러다가 주사위 노름을 했다. 이때서야 기분이 좋아졌다. 이 날은
밤이 으슥하도록 노름은 계속되었다. 조제현과 장강년이 방 안으로 들
어왔다. 위소보는 주사위를 막 던지려고 하다가 두 사람이 들어서는 것
을 보자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되었소?]
조제현은 말했다.
[분부하신 일에 대해서 약간의 소식을 알아냈습니다.]
[좋소.]
그는 주사위를 던졌다. 천문(天門)에 놓인 돈은 따먹을 수 있었으나 상
문(上門)과 하문(下門)에 돈을 보태주어야 했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
어나 두 사람의 손을 잡고 옆방으로 가서 물었다.
[어떻게 되었소?]
조제현이 말했다.
[부총관에게 보고드립니다. 양일지는 서장으로 가지 않았고 평서왕에게
감금당해 있습니다.]
[무슨 잘못이라도 범했소?]
[속하는 왕부 위사들과 술을 마시면서 '내가 양가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으니 그를 데려다가 술을 마시며 노름을 합시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한 명의 위사가 말했습니다. '양일지를 찾는 것이오? 그러면 흑
감자(黑蠱子)로 가야 할 것이오.' 나는 그에게 흑감자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위사들이 그 위사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
인 것이니 그의 말을 믿지 말라고 했습니다.]
위소보가 되뇌었다.
[흑감자라?]
조제현이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그들과 한동안 술을 마시고 헤어져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았
지요. 흑감자는 바로 감옥이라는 게 아닙니까? 그제서야 양일지가 평서
왕에 의해 감금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지요. 도대체 어떤 죄를 범했는지
그들이 의심을 하게 될까봐 더 묻지 못했습니다.]
위소보가 물었다.
[흑감자는 어디에 있소?]
[오화궁 서남쪽으로 약 오 리쯤 되는 곳에 있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두 분은 수고했소. 당신들은 가서 신나게 노름이나 하시오. 나대신 전
주(嶺主)가 되도록 하시오.]
조제현과 장강년 두 사람은 크게 기뻐서 곧장 노름판에 뛰어들었다. 두
사람은 위소보를 대신해 전주가 되면 돈을 잃게 되었을 때는 위소보의
돈을 잃게 되지만 따는 돈은 바로 자기네 것이라 크게 좋아한 것이었
다.
위소보는 답답해서 속으로 생각했다.
(양형은 반드시 큰 죄를 저지른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응웅이 나
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큰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들
부자는 나의 체면을 봐서라도 석방했을 것이다. 오응웅이 이미 거짓말
을 한 이상 내가 다시 물어본다 해도 끝까지 시치미를 뗄 것이고 심지
어 그를 죽이고 시체를 없애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죽으
면 대실할 사람이 없어지는 법, 그를 구해 내기 위해서 실력을 발휘하
는 수밖에 없겠다. 오삼계가 화를 낸들 나는 그가 두렵지 않다. 아마
그는 감히 나에게 따지지 못할 것이다.)
즉시 그는 이력세, 마언초, 전노본, 현정 도인, 서천천 등 천지회의 군
웅들을 데려왔다. 그는 어떻게 사람을 구할 것인가를 상의했다. 이력세
가 말했다.
[위 향주, 이 일은 우리들이 처리하겠소. 양형을 구출해 낼 수 있다면
물론 좋은 일이고, 설사 구출해 내지 못한다 해도 오삼계는 위 향주가
자기에게 손을 쓰면 황제의 명을 받고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
다. 그를 놀라게 만들어 반쯤 죽게 만든다면 그로 하여금 일찍 반란을
일으키도록 핍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소보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묘책이오! 그러나 그가 정말 반란을 일으켜 우리들을 모조리 잡아 들
여, 우리들이 흑감자라는 큰 감옥에서 노름판을 벌이는 일이 생기면 어
처구니없는 일이 아니겠소?]
현정 도인이 말했다.
[일이 잘못 돌아가면 우리들은 재빨리 말을 타고 채찍질을 가하지 않으
면 안되죠.]
위소보는 말했다.
[당신들은 방법을 강구해서 사람을 구출하시오. 나는 오응웅이란 녀석
을 이쪽으로 데려다가 인질로 삼아 오삼계로 하여금 함부로 망동하지
못하도록 하겠소.]
전노본은 말했다.
[위 향주의 계책은 정말 고명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내일 흑감
자의 지세를 살펴보고 오삼계의 심복으로 가장하고 감옥으로 들어가 사
람을 꺼내 오겠습니다.]
이튿날 오후에 위소보는 사람을 시켜 오응웅을 모셔오게 했다. 혼례를
올리는 일을 상의하자는 구실을 달고 모셔온 것이었다.
안부원의 대청에 풍악소리가 울려퍼지고 술과 고기들이 쉬임없이 술상
으로 오르고 있을 때 천지회의 군웅들은 이미 평서왕부 시종의 복장을
하고 흑감자라는 감옥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위소보는 효기영 군사와
어전 시위들에게 명해 사방을 엄히 지키고 오응웅이 데리고 온 시위들
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는 오응웅과 술을 마시는 한편 연극 구경을 했다. 이때 펼쳐지고 있
는 한 토막의 연극은 곤곡(崑曲)의 일종인 종규가매(鐘筮嫁妹)였다. 다
섯 명의 꼬마 광대들이 곤두박질을 치면서 제반 무예를펼치는 솜씨에
모두들 무척 재미있어 했다.
위소보는 연극을 보는 동안 연신 '잘한다'고 외치며 은자를 내리라고
분부했다.
한창 흥이 나서 연극 구경을 하고 있는데 누가 그의 등 뒤로 다가와서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위소보가 고개를 돌리니 마언초가 서 있었다.
마언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일이 이미 성공했다는 사실
을 눈치챈 그는 속으로 크게 기뻐서오응웅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왕야, 나는 오줌을 갈기고 오겠소. 곧 다녀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
시기 바라오.]
오응웅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나이 어린 건달은 말하는 것이 언제나 품위가 없고 천박하더라. 오
줌을 갈긴다니, 소변을 본다고 하면 될 것을!)
그러나 웃으면서 말했다.
[자작 나으리께서는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오시기 바랍니다.]
위소보는 후당으로 갔다. 천지회의 군웅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여
있었다. 위소보는 기뻐서 말했다.
[매우 좋소. 매우 좋소. 여러 형제들, 부상을 입지 않았군요. 사람은
구출해 냈소?]
여러 사람들의 얼굴빛이 침중한 것으로 보아 다른 사정이 있는 것 같아
서 그는 입을 다물었다. 마언초가 이를 갈며 말했다.
[오삼계라는 이 간교한 도적은 손 씀씀이가 너무나 악독합니다.]
위소보가 물었다.
[아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마언초와 서천천은 밖으로 나가더니 담요에 싸인 한 사람을 떠메고 들
어왔다. 담요는 온통 피로 흥건히 얼룩져 있었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재빨리 앞으로 다가갔다. 담요에 싸여 있는 사람은
바로 양일지였다. 두 눈은 꼭 감겨져 있고 얼굴은 창백했다. 위소보는
부르짖었다.
[양형, 이 아우가 당신을 구하러 왔습니다!]
양일지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는 외쳤다.
[형님은 상처를 입었습니까?]
서천천은 가볍게 담요 자락을 들추었다. 그 순간 위소보는 놀라 소리를
지르며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하마터면 놀라 쓰러질 뻔했는데 전노본
이 급히 손을 뻗쳐서 그를 부축했다.
양일지의 두 손은 손목 부근에서 잘려져 나가고 두 발도 무릎이 있는
곳이 잘려나간 상태였다. 서천천이 나직이 말했다.
[그의 혓바닥도 잘렸고 두 눈알도 뽑혔소.]
이와 같은 참상을 위소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마음이 아파서 소리
내어 통곡했다. 본디 그는 양일지와 두터운 교분은 없었다. 서로 말을
주고받다 의기투합하게 된 사이였는데 의형제를 맺은 후에는 복이 있으
면 함께 나누고 어려움이 있으면 함께 감당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그의 사지가 모조리 끊어진 모양을 보자 끓어오르는 비분을 억제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 위소보는 비수를 뽑아들고 부르짖었다.
[내가 가서 오응웅의 손과 발을 모조리 잘라 버리겠소.]
풍제중이 얼른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천천히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풍제중은 과묵했으나 입을 열면 옳은 소리만 했다. 위소보는 그런 그를
꺼리고 있었던 터라 즉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풍형의 말이 옳소.]
서천천은 담요를 덮으며 말했다.
[이 일은 과연 우리들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오삼계는 양형이 위 향주
와 사귀고 의형제를 맺었다는 것을 알자 그에게 옛 주인을 배반하고 부
귀공명을 탐하여 조정에 빌붙었다는 죄를 씌웠지요. 그를 죽은 것도 살
아 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만들어 그의 부하 장수들이 배반할 마음을
품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위소보는 눈물을 흘렸다.
[오삼계는 조상 십팔 대까지 모두 죽어 마땅한 자라새끼들이오. 양형은
나와 의형제를 맺었으나 오삼계를 배반하지는 않았소. 이 매국노는 스
스로 나쁜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남을 의심하는 것이오. 양형이
이렇게 된 것이야말로 이 매국노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획책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오. 양형이 정말 조정에 빌붙었다고 칩시다. 그게 어디가 잘
못되었소?]
전노본은 말했다.
[맞습니다. 위 향주께서는 양형을 북경으로 데리고 가서 소황제에게 진
상을 알리십시오.]
위소보는 서천천에게 물었다.
[오삼계가 이처럼 독수를 쓴 이유가 바로 양형이 나와 사귀었기 때문이
라고 하셨는데 서형은 그것을 어떻게 아셨소?]
서천천은 바깥으로 나가더니 한 사람을 떠메고 들어와서 땅바닥에 내동
댕이쳤다. 이 사람은 칠품관의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부옇게 살이 올라
있었다. 그는 땅바닥에 엎어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천천은 말했다.
[위 향주, 위 향주께서는 이 녀석의 이름을 들어 알고는 계시겠지만 한
번도 본 적은 없을 것입니다. 이 자가 바로 노일봉입니다.]
위소보는 차갑게 웃었다.
[흥, 원래 노형이셨군. 당신은 북경에서 함부로 날뛰다가 오응웅에게
다리뼈가 부러졌는데 어찌해서 이곳에 계신고?]
노일봉은 놀라서 말했다.
[예, 예.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서천천은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원수가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는 격이군. 이 녀석은 흑감
자라는 감옥의 전옥관(典獄官)을 하고 있었습니다. 재로 변해도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있지요. 우리들이 오삼계의 심복 시종으로 분장하고 감
옥으로 들어가 사람을 구하려고 했을 때 이 녀석이 거드름을 피우며 평
서왕이 직접 내린 유시를 봐야 한다고 하지 뭡니까? 빌어먹을, 이놈의
개 같은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바로 평서왕의 뜻입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참 공교롭구려. 이런 겁쟁이 녀석을 만나면 사람을 구하는 일은
훨씬 수월하게 되는 법이죠.]
그는 군웅들이 그의 목에 칼을 겨누고 위협하여 일을 성사시켰다는 것
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서천천은 말했다.
[양형이 오삼계에게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바로 이 노가가 나에게 알려
주더군요.]
노일봉은 재빨리 말했다.
[예....어르신께서....어르신께서 말하도록 다그쳤지요. 나에겐 비밀을
누설할 용기가 없습니다.]
위소보는 발로 걷어차 노일봉의 앞니 세 대를 부러뜨리고 말했다.
[나는 가서 오응웅을 상대해야 되겠소. 여러분들은 이 녀석에게 자세히
물어보도록 하시오. 그가 만약 진실을 숨긴다면 그의 두 팔과 두 다리
를 잘라 버리시오.]
노일봉은 입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부르짖었다.
[말하겠소.말하겠소.]
그는 이 한 패거리의 사람들이 무법천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양일지처럼 사지가 잘린다고 생각하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위소보는 양
일지 앞으로 가서 외쳤다.
[형님!]
양일지는 부르는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켜 앉으려고 했다. 그는 상체를
들어올리다가 끝내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군웅들은 그 참상을 보고 분
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삼계 부자가 충성스러운 부하들에게 이렇게
악랄한 독수를 쓴 것을 보자 그 악독함을 짐작할 수 있어 자기도 모르
게 양일지를 동정하게 된 것이다. 위소보는 정신을 가다듬고 대청으로
돌아가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재미있구려.]
무대 위의 배우들은 멍하니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위소보가 온 것
을 보자 다시 징과 북을 치며 종규가매라는 연극을 시작했다. 위소보가
소변을 보러 나가자 오응웅은 명을 내려 연극을 멈추게 하고 위소보가
나오자 다시 연극을 계속하도록 하여 위소보가 보지 못하는 장면이 없
도록 배려한 것이다. 위소보는 오응웅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공주님이
오응웅에게 관심이 아주 많아 평소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무슨 옷을 즐
겨 입는지 궁금해 하더라는 말을 하는 등 쓸데없는 질문을 하니 오응웅
은 내막도 모르고 무척 기뻐하며 일일이 상세하게 대답해주었다.
오응웅을 보내고 위소보는 상방(相房)으로 갔다. 천지회의 군웅들이 보
이지 않기에 물어보니 모두 나갔다는 것이었다. 깊은 밤중에 군응들이
돌아왔는데 또 한 사람을 잡아왔다. 서천천은 노일봉에게 오삼계가 양
일지를 처벌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는데 오삼계는 양일지가 위소보
와 의형제를 맺고 자기를 배반할까 염려한 것이었다. 양일지를 처벌한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으니 이는 바로 몽고 왕자 갈이단 때문이었다.
갈이단과 오삼계는 근년에 관계가 무척 돈독해졌다. 서로 예물을 주고
받더니 최근에 갈이단은 다시 사자를 파견하여 예물을 곤명으로 가져오
게 한 것이었다. 이 사자의 이름은 한첩마(罕帖摩)라고 했다. 그자는
오삼계와 며칠 동안 긴 이야기를 하였다. 그 내용을 양일지가 알고 양
일지가 오삼계에게 질문을 하자 오삼계는 크게 분노했던 것이다.
노일봉은 관직이 낮아 상세한 사정은 모르고 오삼계의 위사들 입으로부
터 몇 마디 말을 들었을 뿐인데, 천지회 군웅들이 고문을 하자 더 이상
속일 수가 없어 아는 대로 털어놓았다.
군웅들은 내친 김에 오삼계의 시종으로 가장하고 몽고의 사자 한첩마를
잡아온 것이다.
위소보는 소림사에서 갈이단을 만난 적이 있었다. 갈이단은 교만하고
무례하였다. 그는 자기 부하들을 시켜 위소보에게 표창을 던지도록 한
적이 있는데 만약 보의가 몸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이미 위소보는 목숨
을 잃었을 것이다. 위소보는 갈이단의 사자 역시 좋은 사람일 수는 없
으리라 생각했다. 한첩마는 약 오십 여 세 정도에 턱 밑에 누렇게 수염
을 기르고 있었다. 불안한 듯 눈알을 연신 굴리는 것이 무척 교활해 보
였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를 양형에게 데려가도록 하시오.]
마언초는 대답하고 그를 옆방으로 밀고 갔다. 다음 순간 한첩마는 크게
비명을 질렀다. 공포에 떨고 있는 음성이었다. 양일지의 참상을 보고
혼비백산한 모양이었다. 마언초는 다시 그를 위소보 앞으로 데리고 돌
아왔다. 한첩마는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고 몸을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
고 있었다. 위소보는 물었다.
[방금 그 사람을 너는 잘 보았느냐?]
한첩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는 말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였는데 그가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나에게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나에게 한 마디의
거짓말을 하면 나는 그의 한쪽 다리를 잘라 내고 두 마디의 거짓말을
하면 두 다리를 잘라 낸다. 그 사람이 몇 마디의 거짓말을 했는지 아느
냐? 마형이 말해주구려.]
마언초는 말했다.
[일곱 마디의 거짓말을 했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잘 들었느냐? 그 사람은 일곱 번이나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부득이 그
의 사지를 자르고 두 눈알을 뽑았으며 혓바닥을 잘라 없애 버린 것이
다.]
그는 비수를 뽑아들고 몸을 굽혀 가볍게 그어 싹, 하니 나무 걸상의 다
리를 한쪽 잘라내어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이 칼은 매우 예리하여 사람의 손발을 자르는 데는 조금도 힘이 들지
않는다. 네 몸에 한번 시험해 볼까?]
한첩마는 몽고의 용사였으나 양일지의 참상을 보고 혼비백산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대인....대인께서 무엇을 묻든지 소인은....소인은....반 마디도 감
히....속이지....속이지 않을 것입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매우 좋다. 평서친왕은 나보고 너에게 물어 보라고 했다. 네가 왕야에
게 한 말은 도대체 진심이냐, 아니냐?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알아 보라
고 했다.]
한첩마는 머리를 조아렸다.
[대인께서는 명찰하십시오. 소인....소인이 어찌 감히 왕야를 속이겠습
니까? 거짓은 결코 없었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왕야는 믿지 않으신다. 왕야께서는 너회들 몽고 사람들은 교활하기 짝
이 없어서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지 않고 억지를 부리는 근성이 있
다고 하셨다.]
한첩마는 분개하여 말했다.
[우리들은 징기즈칸의 자손답게 하나라면 하나이고 둘이라면 둘입니
다.]
위소보는 말했다.
[맞다. 셋이라면 셋이고 넷이라면 넷이지.]
한첩마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한어에 매우 능통한 편이었으나 각종
사투리와 숙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는 위소보가 조롱
하는 말을 한 줄은 모르고 어떤 깊은 뜻이 있는 줄 알고 일시 대답할
바를 몰랐다. 위소보는 엄숙하게 물었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한첩마는 말했다.
[소인은 모릅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어디 짐작해 보아라.]
한첩마는 안부원의 건물이 웅장하고 화려하며 또 평서왕부의 시종이 그
를 데리고 왔을 뿐만 아니라, 위소보가 나이는 어리지만 몸에 일품의
무관 복장을 하고 있음은 물론 황마괘를 입고 머리에는 붉은 보석을 박
은 모자를 쓰고 쌍안공작(雙眼孔雀)이라는 깃털을 꽂아 놓은 것을 보았
다. 조정에서 커다란 벼슬을 하고 있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
다. 황제가 내린 황마괘를 입고 있으니 가장 존귀스럽고 영광스러운 무
관이 아닐 수 없었다. 한첩마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높은 벼슬에 오른 것은 오로지 애비의 덕을 본 것이 분명
하다. 곤명성 안에서 평서친왕을 애비로 두지 않은 이상 그 누가 이토
록 큰 권세를 지닐 수 있겠는가? 평서왕의 시종들이 너에게 이토록 공
손한 것을 보니 내 짐작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는 공손하게 말했다.
[소인이 보는 안목이 없었습니다. 알고보니 대인은 평서왕의 소공자(小
公子)셨군요.]
그는 오응웅을 만난 적이 있었다. 위소보의 복장이 오응웅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을 보자 나름대로 짐작한 것이었다. 위소보는 즉시 욕을 했다.
[제기랄! 뮈라고 했느냐?]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는 나를 대매국노인 늙은자라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나보고 작은 매
국노에 어린 자라 새끼가 되라는 거냐?)
곧이어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너는 정말 총명하다. 갈이단 왕자가 너를 이곳으로 보내 그와
같은 큰일을 시킨 것도 무리는 아니야. 너희들의 왕자와 나와의 교분도
괜찮은 편이다.]
그는 갈이단의 모습과 옷차림을 이야기하고 말을 이었다.
[그날 나는 너회 왕자와 무공을 거론하게 되었는데 그가 펼친 몇 수의
초식은 정말 뛰어나더군.]
그는 갈이단이 소림사에서 펼친 초식을 흉내내 보였다. 한첩마는 크게
기뻐하며 새로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소왕야께서는 저희 왕자의 절친한 친구이시니 우리는 모두 한 집안 사
람입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왕야께서는 안녕하신가? 그는 창제(昌齊) 라마와 함께 있느냐?]
한첩마는 말했다.
[창제 라마는 현재 우리 왕부에 손님으로 와 있소.]
위소보는 말했다.
[그랬군.]
그는 다시 물었다.
[한 분의 남색옷을 입은 한인 소저가 있는데 이름은 아기라고 하던가?
그 소저 역시 그대들의 왕부에 있는가?]
한첩마는 얼굴 가득 놀람과 기쁜 빛을 띠며 말했다.
[소왕야께서는 그 사실까지 알고 계셨군요. 과연....과연 대단하십니
다.]
위소보는 아무렇계나 짐작해본 것인데 적중되자 매우 득의 양양해서 껄
껄 웃으며 말했다.
[너희 왕자께서는 어떤 일이든 나를 속이지 않는다. 아기 소저는 너회
왕자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의 사매 아가 소저는 바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들은 과연 한 집안 사람이 아니고 뭐냐? 하하
하!]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이리하여 서먹서먹한 기운
이 말끔히 가시고 말았다. 위소보는 존대말로 말했다.
[부왕께서 나를 보내 그대가 부왕에게 한 말이 진심으로 한 것인지 달
리 다른 음모는 없는지 알아 보라고 하시었소.]
한첩마는 말했다.
[소왕야께서는 우리 왕자와 교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까지도 의심을
하십니까?]
위소보는 말했다.
[부왕께서는 거짓말을 할 때는 첫 번째 말과 두 번째 말이 아무래도 좀
달라진다고 하셨소. 이 일의 관계가 실로 중대하여 조심하지 않으면 창
피한 꼴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패망하게 되니, 그대가 자초지종을 다
시 나에게 한 번 더 이야기해 주셔야 되오. 두 번 한 말 가운데 혹시
다른 점이 있는지 알아 보려는 것이오. 한첩마 노형, 나는 결코 갈이단
왕자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오. 하지만 그대를 처음 만나니 그대의
위인됨을 모르겠구려. 따라서 자세히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점 양해
하시오.]
한첩마는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 일이 조금이라도 누설된다면 즉시 살신지화
를 당하게 되지요. 평서왕께선 매우 꼼꼼하시고 정확하시지요. 소왕야
께서는 돌아가셔서 왕야께 말씀을 드려주십시오. 우리 사가(四家)에서
결맹(結盟)을 하고서 일제히 출명(出兵)하여 사분천하(四分天下)하되,
중원의 강산은 틀림없이 왕야 혼자서 독차지할 것입니다. 나머지 삼가
(三家)에서는 결코 욕심을 내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
니다.]
위소보는 속으로 깜짝 놀라 생각했다.
(사분천하? 그들이 과연 누구누구인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그에게 묻다
가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들통날 것이다.)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 일에 대해서 나는 갈이단 왕자와 몇 번 상의한 적이 있었소. 그러
나 이 일이 성사된 후에 이 천하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 아무리 이야기
를 해봐도 언제나 결론이 나지 않았소. 이번에 갈이단 왕자는 어떤 말
씀을 하셨소?]
한첩마는 말했다.
[우리 왕자께서는 결코 편리함을 취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나찰국
(羅刹國)에 연락하여 출병토록 하는 것은 바로....]
위소보는 나찰국에서 출병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한첩마는 계
속해서 말했다.
[왕자 전하가 천신만고 끝에 성사시켰다고 합니다. 나찰국의 화기(火
器)는 무섭기 짝이 없으며 총과 포를 쏘면 청나라 군사들은 감당하기
어렵지요. 나찰국에서 출명하면 대사를 반드시 이룰 것입니다. 평서왕
은 중국의 대황제가 될 것이고 소왕야는 바로 친왕(親王)이 되시지요.]
나찰국은 바로 아라사(俄羅斯:러시아)였다. 러시아 사람들은 노란 머리
에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달라서 중국 사람들은 도깨비
처럼 여겼다. 나찰은 불경에서는 악귀(惡鬼)를 뜻했다. 순치 연간에 나
찰국의 가살극(哥薩克)의 기병대가 청나라 군사들과 몇 차례 교전한 적
이 있었다. 비록 매번 청나라 군사에 의해서 격퇴당하기는 했으나 청나
라 군사들도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위소보는 국가의 대사를 몰랐으나 나찰국의 병사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포악하며 화기가 무서워 감당하기 어렵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야단났다. 오삼계는 나라를 파는 못된 습성이 또다시 고개를 쳐들어
이번에는 나찰국과 결탁했구나. 그야말로 빨리 소황제에게 상주하여 나
찰국의 총과 포를 비롯한 화기를 막아내야 되겠구나.)
한첩마는 그가 생각에 잠겨 얼굴에 불쾌한 빛을 띠고 있자 물었다.
[소왕야께서는 무슨 가르침이라도 계신지요?]
위소보는 재빠리 궁리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다시 한첩마가 다른 것을
실토하도록 할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그는 문득 정극상이 그의 형님과
자리 다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자리 다툼에 혈안이 된 정
극상은 풍석범을 시켜 위소보의 사부 진근남을 해치려고 했었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분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기랄! 부왕이 황제가 된다면 내 형님이 황제 제위에 오를 것이 아니
겠소? 나는 그저 친왕이 되는 것뿐인데 뮈가 그리 좋겠소?]
한첩마는 비로소 깨닫고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나직이 말했다.
[우리 왕자께서 소왕야와 사이가 좋으시니 소인은 돌아가서 왕자님께
소왕야의 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사를 이룬 후에 몽고, 나찰국, 서
장의 활불(活佛)을 합쳐서 삼가가 소왕야를 세자로 추대하겠습니다. 그
러면 되겠지요?]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알고 보니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네 집안은 몽고, 서장, 나찰국, 오
삼계였군.)
그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그대들 세 집안에서 밀어주어 내가 대권을 쥐면 물론 크게 보답을 할
것이며 나는 결코 노형의 호의를 잊지 않을 것이오.]
그는 몸에서 오백 냥짜리 은표 세 장을 뽑아서 그에게 건네주며 말했
다.
[우선 용돈으로 쓰시오.]
한첩마는 크게 기뻐하며 절을 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품었던 일말의 의
심까지도 말끔이 벗어던졌다. 한첩마는 이 소왕야가 그의 형님 오응웅
과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툰다면 갈이단 왕자와 자기는 농간을 부려 크게
돈을 긁어 모을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위소보는 물었다.
[갈이단 왕자는 일을 성사시킨 후에 천하를 어떻게 나눈다고 합디까?]
한첩마는 말했다.
[중원의 금수강산은모두 오씨 집안의 것이 되며, 사천성은 서장 활불에
게 돌려주고, 천산남북로(天山胡匕路)와 내몽동서맹(內蒙東西盟), 서이
맹(西二盟), 찰합이(蔡哈雨), 열하(熱河), 서원성은 모두 몽고에 속하
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 땅은 매우 넓지요?]
그는 얼마나 넓고 좁온지 몰랐으나 한첩마가 땅 이름을 들먹이자 물론
작지 않으리라 짐작했다. 한첩마는 빙그레 웃었다.
[우리 몽고가 왕야를 위해서 많이 애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위소보는 껄껄 웃으머 물었다.
[그럼 나찰국은?]
한첩마는 말했다.
[나찰국의 대황제는 말하기를, 나찰국과 왕야가 다스리는 지역의 경계
를 산해관(山海關)으로 할 것이며, 그들은 결코 관 안으로 한 걸음도
들어오지 않겠다고 했지요. 산해관 밖은 본디 모두 만주 오랑캐의 땅이
니 나찰국에서는 만주인의 땅만 차지할 뿐, 결코 중국의 땅은 한 치도
차지하지 않겠다고 했지요.]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다면 무척 공평하군. 갈이단 왕자는 언제 거사하기로 했소?]
한첩마는 말했다.
[이번의 거사는 왕야가 주관하시는 것이고 나머지 세 집안에서 호응하
여 협공을 할 뿐이니 모든 것은 왕야의 결정에 따라야죠.]
第71章. 오삼계의 서재
위소보는 말했다.
[부왕께서는 확실히 알고 싶어하시오. 우리들이 출병한 후 삼가에서는
어떻게 호응할 생각입니까?]
한첩마는 말했다.
[왕야꺼1서는 그 점은 걱정하실 필요없습니다. 왕야의 대군이 일단 운
남성과 귀주성에서 나오면 우리 몽고의 정예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쳐
들어갈 것이고 나찰국의 가살극 정예 기병대는 북쪽에서 남으로 쳐내려
와 양쪽에서 북경을 협공하게 될 것입니다. 서장 활불의 군사들은 사천
성의 변경을 공격할 것이고 신룡교의 기병(奇兵)은....]
위소보는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신룡교의 일을 당신....당신들도 알고 있었군. 홍 교주, 그는....그는
뭐라고 말했소?]
신룡교가 이 큰 음모와 관계를 맺었다는 말에 크게 층격을 받은 위소보
는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한첩마는 그의 표정이 달라지자 물었다.
[신룡교의 일을 왕야께서 소왕야에게 말씀하셨나요?]
위소보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물론이오. 나는 홍 교주와 홍 부인을 만나 두 차례 긴 이야기
를 나누었을 뿐 아니라 교 안의 오룡사를 모두 만나 보았소. 나는 갈이
단 왕자가 이 일은 모르는 줄 알았소.]
한첩마는 웃으며 말했다.
[신룡교의 홍 교주는 나찰국 대황제의 칙봉(勅封)을 받은 몸이오. 따라
서 나찰국에서 출명하면 신룡교에서도 호응하게 되지요. 대만과 해남도
(海南島)를 비롯한 중국 연해의 섬들은 모두 신룡교가 다스리게 될 것
이오. 그리고 복건성의 경정충(耿精忠), 광동성의 상가희(常可喜), 광
서성의 공사정(孔四貞) 등이 일제히 호응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야께서 높은 곳에 오르시어 한 번 외치기만 하면 동서남북에서 일제
히 떨쳐 일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청나라 천하는 바로 왕야의 천
하로 변하게 되지요.]
위소보는 여유있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묘하다. 정말 묘해.]
그러나 속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큰일났다! 큰일났어!)
그는 아직은 나이가 어렸다. 평범한 일들은 거짓말을 하여 얼버무릴 수
있었으나 일단 국가대사에 부딪히자 소황제를 위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묘하다는 말을 하면서도 기뻐하는 표정이 없었다. 한첩마
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다. 나름대로 눈치를 채고 의아하여 물었다.
[소왕야는 우리 왕자와 교분이 깊고 소인을 잘 대접해주시니 소인은 분
골쇄신해도 그 은혜를 보답하기 어렵습니다. 어려운 점이 있으시면 허
심탄회하게 지적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소인은 만 번 죽는 한이 있어도
소왕야의 뜻을 받들 것입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동쪽을 한쪽 때어가고 서쪽을 한쪽 떼어가면 장래 내가 황제가 되었다
고 해도 관할할 영토가 이리저리 잘려나가 손바닥처럼 좁게 되지 않을
까 걱정이 되는구려.]
한첩마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
그는 나직이 말했다.
[소왕야, 명찰하십시오. 큰 공을 세운 후에 경정층, 상가회, 공사정 일
당을 하나하나 제거하면 됩니다. 그때 우리 몽고에 도움을 요청한다면
기꺼이 맡아서 처치해줄 것입니다.]
[매우 고맙소. 매우 고마워. 우리가 한 말을 갈이단 왕자에게 꼭 전해
주구려. 당신은 갈이단 왕자의 심복이니 그대의 말은 왕자 전하가 친히
응낙한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오.]
한첩마는 난처했다. 그러나 장래의 일이니 당장은 아무렇게나 응낙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소인은 소왕야를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위소보는 궁금했던 일을 다 묻고나서 다짐을 했다.
[당신은 이곳에서 쉬시오. 나는 돌아가 부왕께 보고하겠소. 우리들이
한 말을 그대가 누설하면 우리 형님은 반드시 나를 죽이려 들 것이오.
그렇게 되면 부왕께서도 나를 구할 수 없을 것이오.]
몽고에서 형제들이 자리 다툼을 하며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한첩마는
많이 보아왔다. 그는 즉시 무릎을 꿇고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세했다. 위
소보는 방을 나오자 풍제중과 서천천에게 한첩마를 감시하라고 이르고
양일지를 찾았다. 그는 방문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양일지의 몸은
땅바닥에 굴러 떨어져 있었다. 양일지는 두 눈을 멀거니 뜨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죽은 것이 확실했다. 침대 위의 하얀 이부자리에는 피로
글씨가 씌어 있었다. 위소보는 그저 석삼(三) 자와 계수나무 계(桂) 자
만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무슨 내용이오?]
마언초는 말했다.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팔려고 한다는 내용입니다.]
위소보는 한숨을 내쉬었다.
[양형이 죽기 직전에 끊어진 팔로 쓴 것이군요.]
마언초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위소보는 즉시 천지회의 호걸들을 소집하고 한첩마가 한 말을 전했다.
호걸들은 모두 분개했으며 오삼계는 한 번 나라를 팔더니 또다시 나라
를 팔려고 한다며 통렬하게 욕을 퍼부었다. 현정 도인은 이를 부드득
갈며 옷자락을 들추고 말했다.
[여러분, 이것을 보시오.]
그의 가슴팍에는 대접만한 커다란 상처 자국이 있었다. 그 상처는 쭈글
쭈글하고 우둘두둘하며 지극히 공포스러웠다. 또 왼쪽 어깨 위에는 한
자 길이의 칼에 맞은 상처 자국이 나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그와 오랫
동안 사귀었지만 이와 같은 중상을 입은 줄은 모르고 있어 모두들 놀라
고 말았다. 현정 도인은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나찰국 놈들의 화창(火槍)에 입은 상처요.]
위소보는 말했다.
[도장은 나찰국 사람들과 싸운 적이 있단 말이오?]
현정 도인은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의 부친, 백부, 숙부, 아흡 분의 형님 모두 나찰국 놈들의 손에 죽
임을 당했소. 빈도가 출가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지요.]
그는 그 경과를 대충 들려주었다. 그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가죽을 팔
고 사는 장사를 했다. 장가구(張家□)에서 피혁을 파는 가게를 열었는
데 백 년의 전통이 있었다. 한번은 그의 부친이 백부, 숙부, 아들들,
조카들을 데리고 새외로 가서 은호(銀狐)와 자초(紫昭) 등의 값비싼 가
죽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나찰국 사람들을 만났다.
나찰국 사람들은 그들의 금은과 물건을 약탈했다. 그의 집안에서는 세
명의 호위 무사를 대동하였으나 나찰국 사람들의 화기는 무서웠다. 총
을 쏘자 세 명의 호위 무사들은 즉시 죽었고 부친과 형들은 물론이고
백부와 숙부들도 모조리 화창과 마도(,馬刀) 아래 죽음을 당했다. 현정
은 어캣죽지에 칼을 맞고 가슴팍에 총상을 입은 채 피바다 속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나찰국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금은과 화물을 빼
앗아 떠났다. 현정은 몇 달 동안 요양을 한 후에 겨우 상처를 치료했
다. 이 커다란 재앙이 있은 후로 그의 가게는 문을 닫았다. 그는 좌절
하여 도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나라에 빈란이 일어나자 천지회에 가입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찰국의 화기를 생각하면 그는 소름이 끼쳤다. 이미 이십 년이 지났지
만 때때로 한밤중에 악몽을 꾸고 비명을 지르다가 놀라 깨어나곤 한다
는 것이다. 이력세는 말했다.
[나찰국의 화기가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방법을 강구해서 깨뜨리기만
한다면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소.]
현정 도인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화기가 한 번 터지면 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아 아무리 무
공이 고강한 사람도 피할 수 없고 막을 수 없소.]
서천천은 말했다.
[나찰국 사람들이 오삼계와 연합하여 만주 오랑캐의 천하를 빼앗게 된
다면 우리들은 수수방관하며 구경을 하면 될 것이 아니오? 우리들은 어
부지리를 노려 그 기회에 대명나라의 강산을 되찾을 수도 있을 것이
오.]
현정 도인은 말했다.
[대문에 있는 호랑이를 내쫓기 위해서 뒷문으로 이리를 끌어들이는 꼴
이 되지 않을까 두렵소. 나찰국 놈들은 만주 놈들보다 열배나 더 흉악
하오. 그들은 청나라를 정벌한 후에 산해관을 국경으로 삼지 않고 반드
시 산해관 안으로 들어와 천하를 차지하려고 획책 할 것이오.]
서천천은 말했다.
[그럼 우리가 만주 오랑캐를 도와아 한단 말이오?]
호걸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위소보는 강희를 도을 결심을 했으나 드러
내놓고 그와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 일은 당장 서둘러 결정할 필요는 없소. 당장 급한 문제는 따로 있
소. 우리가 양형을 빼앗아 오고 한첩마와 노일봉을 잡아왔는데 이 사실
이 즉시 오삼계에게 알려질 것이오. 그러니 어떻게 대응해야 되겠소?]
여러 호걸들은 제각기 의견을 내놓았다. 어떤 사람은 즉시 오삼계를 죽
이자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야음을 틈타 도망치자고 했다. 위소보는 말
했다.
[늙은 자라는 거느리고 있는 병마가 많으니 싸워서 그를 이길 수는 없
소. 운남성과 귀주성이 이토록 넓으니 도망칠 수도 없소. 이렇게 합시
다. 여러분은 개 같은 벼슬아치 노일봉을 양형의 시체와 함께 즉시 흑
감자로 돌려 보내시오.]
[되돌려 보낸다구요?]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소. 노일봉이란 개 같은 도적놈에게 겁을 주기만 하면 십중팔구
그는 아무 소리도 못할 것이오. 그가 만약 보고를 한다면 당장 죽게 될
데니 함부로 까불지 못할 것이오. 그리고 양형이 이미 죽은 이상 그의
시체를 남겨 무엇에 쓰겠소?]
호걸들은 강호의 경험은 풍부했으나 벼슬아치들의 습성에 대해서는 위
소보처럼 철두철미하게 알지 못했다. 모두들 이 한 수가 너무 위험하다
고 생각했다. 노일봉이 어찌 상사에게 보고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한 것
이었다. 이력세는 말했다.
[노일봉이라는 개 같은 관리는 담이 너무나 작아 이 큰일을 감히 숨기
고 있을 위인이 못 될 것 같소.]
위소보는 웃었다.
[그는 담이 적은 것이 아니지요. 윗사람은 속여도 아랫사람은 속일 수
없다는 속담이 있소. 아무리 큰일이라 해도 얼버무릴 수만 있다면 일부
러 올가미 속으로 자기 머리를 들이밀지 않는 법이오. 당신들은 그 개
같은 도적놈을 데려오시오. 내 그에게 몇 마디 깨우쳐주겠소.]
마언초가 나가더니 노일봉을 끌고와 땅바닥에 팽개쳤다. 노일봉은 얻어
맞고 놀라 얼굴은 혈색 하나 없이 창백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노형, 정말 고생이 많구려.]
노일봉은 머리를 조아렸다. 위소보는 말했다.
[노형은 정말 좋은 친구였소. 평서왕의 기밀을 숨김없이 모두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추호도 속이지 않았소. 좋소. 그 공을 인정하여 우리들은
당신을 놓아 주겠소. 노형이 평서왕의 비밀을 누설했지만 우리들은 결
코 노형이 그런 짓을 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소. 강호의 훌
륭한 사내들은 누구나 하나라면 하나이고 둘이라면 둘이지 결코 두 말
하지 않는다오. 노형이 스스로의 잘못을 떠벌리기 좋아하고 공공연히
평서왕과 대항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시오. 우리는 당신이 자기의 무
덤을 파는 것을 막고 싶은 생각은없소.]
노일봉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소인이 아무리 간덩이가 부었기로 어찌 감히..감히..]
위소보는 말했다.
[좋소. 여러 형제들, 노 대인을 아문(衙門)으로 호송하시오. 그 죄수의
시체도 함께 돌려 보내서 위에서 조사를 할 때 노 대인이 난처해지지
않도록 하시오.]
호걸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노일봉은 놀랍고 기뻐서 얼떨떨한 상태로
호걸들의 보호를 받으며 나갔다.
며칠 동안 천지회의 군웅들은 마음을 졸이며 혹시나 노일봉이 오삼계에
게 보고하여 평서왕 휘하의 병사들이 안부원으로 공격해 들어올까봐 두
려워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오삼계가 교활한
늙은이라서 좋은 계책을 강구한 후에 움직이려는 것인지 위 향주의 짐
작이 맞아서 노일봉이 감히 욋사람에게 보고하지 못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군웅들은 심히 불안하여 연일 모여 상의를 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내가 가서 오삼계를 만나보고 동정을 탐지하겠소.]
서천천은 말했다.
[그가 위 향주를 인질로 사로잡을까 두렵군요. 그러면 큰일이 아닐 수
없소.]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이미 우리 모두 그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는 셈이오.]
그는 효기영의 관병과 어전시위들을 몇 명 추려서 그들을 데리고 겁도
없이 평서왕부로 갔다.
오삼계는 친히 마중나와 위소보의 손을 잡고 함께 왕부 안으로 들어가
며 말했다.
[위 자작 나으리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면 아들 놈을 불러 분부하시면
될 것이오. 어찌 이와 같이 행차하신단 말이오?]
위소보는 정색하고 말했다.
[왕야께서는 겸손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소인은 관직이 낮아 부마에 비
하면 미관말직이 아니겠습니까? 왕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소인
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입니다.]
오삼계는 말했다.
[위 자작 나으리께서는 황상께서 총애하시며 가장 아끼는 분이 아니겠
소? 앞길이 창창하시니 장래 이 왕부로 와서 왕야 노릇을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안색이 변한 채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왕야의 그 말씀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오삼계는 말했다.
[어디가 잘못되었다는 말씀이오? 위 자작 나으리께서는 겨우 열 대 여
섯 살의 나이에 불과하지만 이미 효기영의 도통이고 어전시위 부총관이
며 흠차대신일 뿐 아니라 작위는 자작에 이르지 않았소? 자작(子爵)에
서 백작(伯爵), 후작(侯爵), 공작(公爵), 왕작(王爵)을 거쳐 친왕(親
王)이 되는 데는 십 년이나 이십 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오.]
위소보는 말했다.
[왕야, 소장(小將)이 이번에 북경에서 출발할 때 황상께서는 다음과 같
이 말씀하셨소. '자네는 오삼계에게 왕 노릇을 잘 하라고 하게. 훗날
그 평서친왕은 바로 나의 매부인 오응웅이 계승할 것이네. 오응웅이 죽
은 후에 그 친왕은 바로 나의 생질이 이어받을 것이고 생질이 죽으면
생질의 아들이 그 뒤를 계승할 것일세. 평서친왕은 오씨 집안에서 계승
할 것이네.'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왕야, 황상께서는 정말 간곡한 어조
로 그 말씀을 하셨소.]
오삼계는 기뻐하며 말했다.
[황상께서 정말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단 말이오?]
위소보는 말했다.
[내가 어찌 거짓말을 하겠소? 하지만 황상께서는 그와 같은 말을 미리
왕야에게 말하지 말고 우선 자세히 살펴보라고 하셨습니다. 왕야께서
정말 대충신이라는 확신이 서면 그때 그와 같은 말을 왕야에게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헤헤헤, 만세야께서 헛소리를 한 꼴이 아니겠습니까? 한
마디 말을 내뱉은 이상 사마(四馬)가 어떻게 쫓아올 수 있느냐 하는 말
이 있지 않습니까?]
오삼계는 위소보의 무식함을 속으로 비웃으며 말했다.
[위 자작 나으리께서 오늘 나에게 그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나를 대충신
으로 보고 계시다는 말씀 같구려?]
위소보는 얼른 말을 받았다.
[물론이죠. 왕야께서 충신이 아니라면 천하에 그 누가 층신이 될 수 있
겠습니까? 이 위소보가 훗날 정말 왕야의 말씀대로 정동왕(征東王)이나
소북왕(掛匕王), 혹은 정남왕(定南王)에 봉해질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평서왕부에선 혜혜헤, 영원히 손님일 뿐 주인이 될 수 없죠.]
두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삼계는 무척
기뻐하며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자자자, 서재로 가서 앉읍시다.]
두 사람은 화원과 정원을 지나 서재로 들어갔다. 이 방은 말이 서재이
지 여기 저기에 칼과 창 등이 잔뜩 걸려 있고 서가나 책들은 별로 없었
다. 중앙에는 태사의가 놓여 있고 그 위에 호랑이 가죽을 씌워 놓았다.
호랑이 가죽은 노란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호랑이
가죽은 하얀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어서 무척 특이 했다. 위소보는 말
했다.
[와! 왕야, 이 하얀 호랑이 가죽은 진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장은
황궁에서도 이런 물건은 본 적이 없는데 오늘 크게 안목을 넓히게 되었
습니다.]
오삼계는 의기 양양해서 말했다.
[이것은 옛날 내가 산해관을 지킬 때 영원(寧遠) 부근에서 사냥한 것이
오. 하얀 호랑이를 추우라고 하는데 극히 회귀한 것이고, 손에 넣으면
대길대리(大吉大利)한다는 말이 있소.]
위소보는 말했다.
[왕야께서는 매일 이 하얀 호랑이 가죽 위에 앉으시니 영원히 벼슬이
오르고 재물을 모으겠군요. 허, 정말 대단하시군요.]
호랑이 가죽을 깔아 놓은 의자 옆에는 두 개의 대리석 병풍이 세워져
있었다. 대여섯 자 높이의 그 대리석 위에는 산수(山水)와 목석(木石)
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림을 그린 듯이 정교했다. 한 개의 병풍에는
산봉우리가 하나 새겨져 있고 산봉우리 위에 꾀꼬리가 있으며 물가에는
호랑이가 새겨져 있어서 생동감이 넘쳐 흘렀다. 위소보는 칭찬했다.
[이 두 개의 병풍 또한 크나큰 보물이군요. 저는 황궁에서도 본 적이
없을 정도입니다. 왕야,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이와 같은 그림을 손에
넣은 사람은 길하게 된다고 하더군요.]
오삼계는 물었다.
[이 두 개의 병풍에 어떤 길한 조짐이라도 보입니까?]
위소보는 말했다.
[소장이 보기에 높은 곳에 있는 것은 한 마리의 조그만 꾀꼬리인데 꾀
꼬리는 울기만 할 뿐 아무런 쓸모도 없겠으나 아래의 커다란 호랑이는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 실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커다란 호랑
이는 물론 왕야를 뜻하는 것이지요.]
오삼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이 조그만 꾀꼬리를 보고 높은 곳에서 그저 울 줄만 알았지 아무
런 쓸모도 없다고 한 것은 소황제를 비웃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이
몇 마디의 말로 나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 아닐까?)
그는 물었다.
[이 작은 꾀꼬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더군요.]
[왕야는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르겠소. 위 자작 나으리께서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소.]
위소보는 빙그레 웃으며 다른 병풍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에는 산도 있고 물도 있으니 만리강산(萬里江山)이 아닙니까? 하
하하! 정말 길한 징조입니다.]
오삼계는 그 말에 가슴이 두근거려 감히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입
안이 바싹 말라오는 듯했다.
탁자 위에는 한 권의 경서가 놓여 있었다. 위소보는 흘낏 본 순간 그것
이 사십이장경임을 알 수 있었다. 이 경서는 겉장을 남색 비단으로 쌌
다. 그는 가슴이 뛰었다.
(여덟 권째의 경서는 과연 늙은 자라에게 있었구나. 묘하다. 정말 묘
해.)
그는 경서는 바라보지 않고 벽에 걸려 있는 칼과 창을 바라보며 말했
다.
[왕야께서는 정말 대영웅, 대호걸입니다. 서재에 무기가 가득 차 있으
니 말입니다. 소장은 일자무식이라서 서재라는 말만 들어도 골치가 아
픕니다. 뜻밖에도 왕야의 이 서재가 이처럼 고명하니 정말 탄복을 금할
수 없군요.]
오삼계는 웃으며 말했다.
[이 무기들은 저마다 내력이 있소. 소왕이 이곳에 걸어 놓은 것은 옛일
을 잊지 않으려 함이오.]
[아. 그랬었군요. 왕야께서는 옛날 동쪽을 소탕하고 서쪽을 평정하셨으
며 남북까지 정벌하시느라 땀을 흘리셨는데 이 무기들은 혹시 왕야께서
군중에서 사용하시던 것들이 아닌지요.]
[그렇소. 본번(本藩)은 한평생 크고 작은 싸움을 수백 번이나 치렀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오. 이 왕의 자리는 목숨을 걸고 싸워 얻은
것이오.]
나는 너 같은 꼬마와는 다르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 말이었다. 또한 위
소보와 같은 꼬마는 재수가 좋아서 황상의 총애를 받아 벼슬에 오르고
작위도 받게 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
했다.
[옛날 왕야께서 산해관을 지키실 때 어떤 무기를 사용하셨는지 궁금하
군요? 그 무기로 어떤 큰 공을 세웠는지요?]
오삼계의 안색이 변했다. 산해관을 지킬 때 그는 만주인들과 싸움을 했
으며 세운 공로가 크면 클수록 만주 사람을 많이 죽인 것이다. 위소보
가 그와 같이 묻는 것은 바로 자기가 매국노라는 것을 풍자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두 손을 부르르 떨며 화를 낼 뻔했다. 그
때 위소보가 다시 말했다.
[듣자니 명나라의 영력 황제는 운남에서부터 버마까지 왕야의 추격을
받다가 끝내 잡혀서 왕야의 활 시위에 목이 졸려서 죽었다고 하더군
요....]
그는 벽에 걸려 있는 장궁(長弓)을 지적하며 물었다.
[혹시 저 활이 아닙니까?]
第72章. 시체를 준비하라
오삼계가 명나라의 영력 황제를 죽인 것은 청나라에 충성을 바칠 결심
을 드러내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하
지만 그는 이 일을 마음속으로는 매우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왕부
에서는 그 누구도 이 일을 감히 들먹이지 못했는데 위소보가 그의 상처
를 건드린 것이었다. 오삼계는 순간 미칠 듯한 분노가 치솟아 억제하기
힘들었다. 오삼계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위 자작 나으리는 오늘 여러 번 나를 비웃는데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위소보는 놀라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어찌 감히 왕야를 비웃는단 말입니까? 저는
북경에 있을 때 궁중과 조정의 사람들로부터 왕야께서 명나라의 황제를
목 졸라 죽였고 지금도 우리 청나라에 대해서 충성을 다한다는 말씀을
들었을 뿐입니다. 들어보니 왕야께서 영력 황제를 친히 목 졸라 죽이실
때 활시위 줄에서는 찍찍찍, 하는 소리가 났고 영력 황제는 윽윽윽, 하
는 신음소리를 냈는데 왕야께서는 하하하, 하고 웃음소리를 내셨다고
하더군요. 매우 좋습니다. 매우 좋습니다. 정말 충성스러운 행동이었습
니다.]
오삼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이 어린애가 간이 얼마나 크다고 감히 나와 맞서겠는가? 황제가 그를
시켜서 나를 시험하라고 한 것이겠지. 아니면 조정에 있는 내 원수가
일부러 그에게 자극적인 말을 하도록 시켜서 나의 진심을 떠보려고 했
을 것이다.)
그는 교활한 늙은이답게 즉시 분노를 감추고 웃으면서 말했다.
[본번이 세운 공로는 별 게 아니지요. 다만 황상에 대한 충성심은 누구
못지 않다고 자부합니다. 아우님, 그대가 정동왕이나 소북왕이 되려고
한다면 이 늙은 형의 황상에 대한 충성심을 본받아야 할 것이오.]
[그렇죠. 그렇죠. 반드시 배워야지요. 제가 늦게 세상에 태어나 명나라
의 황제를 목 졸라 죽일 기회가 없는 게 애석합니다.]
오삼계는 속으로 욕을 했다.
(언젠가는 너를 사로잡아 천참만륙할 것이다.)
그는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위 자작 나으리께서 공을 세우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어찌 기회가 없겠
습니까? 특별히 걱정할 필요 있겠소?]
위소보는 말했다.
[누가 반란을 일으키면 좋겠는데....]
오삼계는 흠칫해서 물었다.
[그건 무엇 때문이오?]
[누가 반란을 일으키면 황상은 저를 출정시킬 것입니다. 소장은 왕야를
본받아 목숨을 걸고 싸워서 반역자를 사로잡아 활 시위로 목을 졸라 죽
일 수 있을 게 아니겠소? 그러면 황상께서는 저에게도 땅을 쪼개 줄 것
이오.]
오삼계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위 형제,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마시오. 어진 천자께서 위에 계시고
천하 사람 모두가 황상을 옹호하고 있는데 그 누가 감히 반란을 일으킨
단 말이오?]
[왕야, 반란을 일으킬 사람이 없다는 말이오?]
[반란을 일으킬 사람이 절대 없다고 단언할 순 없지요. 명나라의 잔당
들과 각지의 도배들이 망령되이 난을 일으킬 수는 있을 것이오.]
[반란을 일으키는 이유는 바로 어지신 천자께서 황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못마땅해서 그러는 것이겠지요?]
오삼계는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우님은 말씀을 재미있게 하시는군요.]
위소보는 탁자 위에 사십이장경이 놓여 있는 것을 보자 오삼계를 격노
시키려고 했다. 오삼계가 대노하여 소매를 떨치고 나가 주면 자기는 그
기회에 경서를 훔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삼계는 심계가 깊어
화를 참고 그의 계책에 쉽게 말려들지 않았다.
그 경서는 위소보가 손을 뻗치면 닿는 곳에 놓여 있었으나 손을 뻗칠
기회는 없었다. 위소보는 작전을 바꿔 오삼계가 좋아할 말만 했다. 그
는 아첨을 하는 동안에도 어떻게 하면 경서를 훔쳐 갈 수 있는지를 궁
리하였다.
(황상께서 이 경서를 요구한다고 거짓말을 하면 이 늙은 자라는 감히
바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황상께서는 이 경서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나에게 운남으로 가면 찾아보라고 하였다. 그러니 내가
이 늙은 자라에게 책을 바치라고 요구해도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늙은 자라가 뒤에서 몰래 수작을 부리면 곤란하다. 강
친왕처럼 가짜를 한 권 만들어서 황제에게 바치면 곤란하다. 그러면 책
속의 조각난 양피지를 얻을 수 없게 된다.)
가짜 경서를 만드는데 생각이 미치자 그는 즉시 말했다.
[황상께서는 비밀 성지를 내리셨소.]
오삼계는 깜짝 놀라 즉시 고개를 조아렸다.
[신 오삼계는 성지를 받들겠나이다.]
위소보는 그의 손을 잡았다.
[긴장할 것 없소.]
[예,예.]
[황상께서는 왕야가 충신인 줄 아시면서도 나에게 왕야가 충신인지 간
신인지 알아 보라고 하셨는데 왕야는 그분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아
십니까?]
[저는 모릅니다.]
[원래 황상께서는 큰일을 왕야에게 시키려고 하시는데 안심을 할 수 없
으신 모양입디다. 건녕 공주를 왕야의 세자에게 시집보내는 것도 원래
는....뭐냐, 격....격....]
오삼계는 말했다.
[격려하는 뜻이 있다는 것이오?]
[맞아요. 황상께서는 격려하는 뜻이 있다고 했지요. 저는 너무나 무식
해서 그 단어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군요.]
[황상께서 명하시는 일이라면 소신은 정성과 힘을 다해 견마지로를 아
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황상께서 따로 소신에게 어떤 일을 분부하
셨는지 소신은 모르겠습니다.]
[이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일 이때쯤 왕야께서는 부중(府中)
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소장이 다시 와서 황상의 밀지를 전하겠습니
다.]
[황상의 성지가 있다면 신이 안부원으로 가서 삼가 받으면 될 것입니
다. 수고스럽게 여기까지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안부원에는 이목이 많으니 이곳이 적당할 것이오.]
그는 즉시 작별을 고했다. 오삼계도 그가 무슨 농간을 부리고 있는지
몰라 공손히 그를 전송했다. 다음 날 위소보는 시간에 맞춰 다시 오삼
계를 찾아갔다. 두 사람이 서재로 들어가자 위소보는 말했다.
[왕야, 제가 말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니 왕야께서는 절대로 누설하지
마십시오. 설사 황상께 올리는 상주문에서도 들먹이면 안됩니다.]
[비밀을 어찌 감히 누설하겠소?]
위소보는 말했다.
[황상께서는 비밀 정보를 얻었는데 상가회와 경정충이 반란을 일으킨다
는 것이오.]
오삼계는 대뜸 안색이 변했다. 평남왕(平南王) 상가희는 광동성을 지키
고 있었고, 정남왕(靖南王) 경정충은 복건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오삼계와 함께 삼번(三藩)으로 일컬어졌다. 삼번은 운명을 함께
하고 있었으며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오삼계가 감히 역모를 꾀
할 수 있었던 것은 상가회와 경정충의 협조에 힘입었기 때문인데 황제
가 그 두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안다고 하니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삼계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게....그게 사실이오?]
위소보는 어제 밀지를 날조해서 오삼계를 놀라게 만들어 그 기회를 틈
타 책을 훔치려는 게획을 세웠는데 역시 그는 나이가 어려 국가대사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는 만약 터무니없는 말을 하다가는 오
삼계가 믿지 않을 것이고 훗날 들통이 나면 강희의 꾸지람을 받게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우선 안부원으로 돌아가 군웅들과 상의한 후에
이튿날 다시 성지를 전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삼번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문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황상께서는 터무
니없는 헛소문이라고 일축하셨지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황상께서는 정말 성명(聖明)하십니다.]
[하지만 상가희와 경정충의 역모에 대한 증거를 황상께서 가지고 계시
니 큰일입니다. 황상께서는 그들이 모반을 꾀했으나 아직 드러나지 않
고 있을 뿐이니 잠시 동안 타초경사(打草驚蛇: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함)의 잘못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된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왕야
께서 대군을 움직여 광동성과 광서성의 변경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지
요. 왕야, 그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왕야께서 즉시 군사를 광동성과
복건성으로 파견해서 그 두 명의 반적을 사로잡아 북경으로 보내시면
그야말로 큰 공을 세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삼계는 허리를 굽혔다.
[삼가 성지를 받들겠습니다. 상가회와 경정층이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소신은 즉시 출병하여 두 사람을 사로잡아 북경에 바치도록 하겠습니
다.]
[황상께서는 상가희는 멍청하고 경정충은 쓸모없는 녀석이니 결코 왕야
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하셨지요. 왕야께서 출명을 하시면 조정에서
는 졸개 한 명 움직이지 않고 쉽게 반란을 평정하고 우두머리를 잡을
수 있다고 내다본 것이지요.]
오삼계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황상께 안심하시라고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늙은 이 몸이 이곳에서 병
마를 조련하는 일을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황상께서 언젠
가 필요로 하실 날이 있으리라 내다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늙은이가 휘
하에 거느리고 있는 장명들은 모두들 삼기(三旗)의 친위병처럼 황상에
게 죽도록 충성할 것입니다.]
[저는 왕야의 그 말을 상주하겠소. 황상께서 들으시면 매우 기뻐하실
것이오.]
오삼계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내가 군사를 일으켜도 나이 어린 황제는 의심을 하지 않
을 것이다.)
위소보는 벽에 걸려 있는 한 자루의 화창(火槍:총)을 손가락으로 가리
키며 물었다.
[왕야, 이것은 서양인들의 화기입니까?]
[맞습니다. 이것은 나찰국의 화창이지요. 과거 우리 대청나라와 나찰국
이 관외에서 싸움을 할 때 노획한 것인데 매우 무서운 무기입니다.]
[저는 한번도 화창을 쏴 본 적이 없는데 제가 한번 쏴봐도 되겠습니
까?]
[물론 되지요. 이 화창은 전쟁터에서 사용하는 것이라 멀리까지 총탄이
날아가지만 가지고 다니기가 불편하지요. 그래서 나찰국 사람들은 단총
(短銃:권총)이라는 화창을 지니고 다니죠.]
그는 나무로 만든 장농 앞으로 다가가 서 랍을 열고 붉은 나무 상자를
꺼내 손바닥 위에 받쳐 들었다. 이때 위소보는 탁자 옆에 서 있다가 재
빨리 몸을 돌려 입고 있는 황마괘를 들추고 호주머니에서 다른 사십이
장경을 꺼내 탁자 위에 놓고 탁자 위의 그 경서를 황마괘의 호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여덟 권의 경서는 모양이 똑같았으며 다른 점은 겉장
의 빛깔이었다. 그는 양주 바닥에서 배운 훔치는 솜씨를 십분 발휘하여
감쪽같이 경서를 바꿔치기 했다. 위소보는 어젯밤 양남기의 경서에서
겉장의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는 붉은 비단을 뜯어내어 한 권의 정남기
의 경서처럼 만들어낸 것이었다.
오삼계는 나무 상자를 열고 길이가 한 자 정도 되는 단창 두 자루를 꺼
내어 총구에 화약을 장전하고 굵직한 철사같은 것으로 화약을 밀어넣고
꾹꾹 누른 후에 다시 세 알의 철탄(鐵彈)을 넣고 화도(火刀)와 화석(火
石)을 쳐서 지매(紙媒)에 불을 붙였다. 그는 이어 단창과 지매를 위소
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화약선에 불을 붙이기만 하면 철탄이 발사됩니다.]
위소보는 받아들고 총구를 창밖의 가산(假山)으로 향한 채 화약선에 불
을 붙였다. 그 순간 쾅, 하는 굉음이 울려퍼지면서 한 줄기 화끈한 기
운이 얼굴에 덮쳐왔고 손과 팔이 맹렬하게 진동했다. 그는 화창을 땅바
닥에 떨어뜨리고 눈앞에 연기 같고 안개 같은 것이 가득 차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두 걸음 물러섰다. 오삼계는 하하 웃으며 말했다.
[이 화창의 위력이 십분 무섭지요?]
위소보는 손과 팔이 충격을 받아 마비되어 오는 것을 느끼고 욕을 했
다.
[제기랄! 서양놈들의 장난감은 정말 요사스럽군!]
오삼계는 웃으며 말했다.
[밖의 가산을 보시오.]
위소보가 바라보니 가산의 한 귀퉁이가 부서져 돌조각이 땅바닥에 떨어
져 있었다. 그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이 총으로 사람을 쏘면 제 아무리 동근철골(銅筋鐵骨)로 만들어진 사
람이라 해도 감당할 수 없겠군요.]
그는 몸을 굽히고 단총을 나무 상자 안에 넣었다. 왕부의 위사들이 총
소리를 듣고 일제히 창 밖으로 몰려들어 살펴보더니 왕야가 무사한 모
습으로 위소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자 안심하고 물러갔다. 오
삼계는 나무 상자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이 두 자루의 물건은 아우님이 가지고 놀도록 하시오.]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것은 몸을 보호하는 무기입니다. 왕야의 두터운 상을 감히 받을 수
없군요.]
오삼계는 그 상자를 위소보의 손에 쥐어 주며 웃었다.
[우리는 형제와 같은 사이인데 네 것 내 것을 나눠서 무엇하오? 내 것
이 바로 아우님의 것이오.]
[이것은 나찰국 사람들의 보물로써 다시 얻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소장은 감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소보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은 나찰국 사람들과 결탁하고 있으니 이와 같은 화기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으니까 자연히 귀한 줄 모르겠지.)
오삼계는 웃었다.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형제에게 선물하는 것이오. 보통 물건이라면 위
형제의 눈에 차지 않을 것이 아니오? 하하!]
위소보는 못 이기는 체하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받아들고 웃으며 말했
다.
[이후 누구든지 저를 해치려 할 때 제가 이 화창을 꺼내 탕, 하고 한번
만 쏘면 그는 분신쇄골이 될 것입니다. 그럼 저의 한 목숨을 왕야께서
선물한 셈이 되겠지요.]
오삼계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그렇다고 너무 겸손한 말을 할 건 없소. 화창은 확실히 무섭소. 하지
만 화약과 철탄을 넣고 불을 당겨 화약선에 불을 붙이는 절차가 매우
귀찮소. 우리들의 활처럼 연달아 쏘아댈 수는 없는 것이오.]
[그렇군요. 서양 사람들의 화창을 화살처럼 연달아 쏠 수 있다면 우리
중국 사람들의 목숨이 붙어 있겠습니까? 대청나라의 금수강산도 보존하
기 힘들 것입니다.]
그는 히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화창은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제가 이 두 자루의 화창을 가지
고 있으민 무공을 연마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어떤 무학의 고수도 저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한담을 나눈 후 위소보는 작별을 고하고 안부원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닫고 그 경서의 겉장을 뜯었다. 과연 조각 난 양피(羊支)로 만든 종이
가 그 안에 수도 없이 많이 들어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여덟 권의 경서 속에 숨겨져 있는 지도 조각을 모조리 손에 넣었다.
천천히 조각을 맞추면 오랑캐의 보물과 용맥은 모두 내 손에 들어올 것
이다.)
그는 이 수천 조각이나 되는 양피지들을 맞춰서 한 장의 지도를 만들어
야 한다고 생각하니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이 일은 서두르지 말자.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그는 겉장을 꿰매고 조각난 양긔지를 다른 양피지와 함께 싸서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는 의기 양양했다.
(소황제, 늙은 갈보, 늙은 폐병쟁이, 홍 교주, 매국노, 그리고 나의 사
부이신 늙은이도 아니고 젊지도 않은 여승 등은 이 여덟 권의 경서를
손에 넣으려고 했지만 끝내 이 위소보가 독차지하게 되었구나. 하하!
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사람은 나의 손을 잡고 어떤 사람
은 나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질 것이다. 그들이 사방에서 잡아당기면 나
는 오마분시(五馬分屍)가 되고 말 것이다.)
위소보는 생각할수록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누구에게도 말
할 수가 없었다.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하며 그는 못내 서운함을
느꼈다.
그는 다리를 포개고 앉아 양주 기녀원에서 들은 소곡(小曲)을 흥얼거렸
다.
한 잔의 술,
천천히 따르라.
내 님에게 고향을 물으니
양주 사람이라네.
양주엔 스물네 개의 나무 다리가 있고 다리마다 미녀가 있네.
나의 다정한 님이시여....흥이 나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가볍
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 번 두드리고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두 번을 두드리고 재차 세 번을 두드렸다. 바로 천지회의 암호였
다.
위소보는 일어나 문을 일었다. 서천천과 마언초가 들어왔다. 두 사람의
안색이 매우 침중한 것을 보고 위소보는 물었다.
[무슨 일이오?]
서천천이 말했다.
[시위들의 말을 들으니 왕부의 위사들이 사방을 수색하며 한 명의 몽고
인을 찾고 있다는 겁니다. 한첩마를 찾으려는 것이겠지요. 그들은 우리
를 의심하고 있으나 감히 공공연히 조사를 하지 못할 뿐입니다. 위 향
주, 이 노릇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가서 그 녀석을 데려와 꽁꽁 묶어서 내 침대 밑에다 숨기시오. 오삼계
의 부하들은 감히 내 방까지는 들어오지 못할 것이오.]
서천천은 말했다.
[위 향주께서 외출하셨을 때 매국노의 위사들이 어떤 구실을 붙여서 억
지로 들어와 뒤져보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여하한 경우에도 그들을 들어오게 해서는 안되오. 다급한 경우에는 손
을 쓰도록 하시오. 그들이 감히 사람을 죽이기야 하겠소?]
서천천과 마언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홀연 전노본이 총총히 달려왔다.
[매국노가 불을 지르려 합니다.]
세 사람은 깜짝 놀라 동시에 물었다.
[뭐요?]
전노본은 말했다.
[이 며칠간 저는 안부원 주변을 살펴보며 대매국노가 다른 수작을 부리
는 것을 방비하고 있었소. 조금 전에 서쪽 숲속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살며시 다가가 살펴보니 십여 명이 그곳에 숨어 있었으며 기름과 유황
같은 인화물질을 가지고 있었소.]
위소보는 욕을 했다.
[제기랄! 늙은 매국노는 정말 간덩이가 부었군. 공주를 불태워 죽이려
하다니!]
전노본은 말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한첩마가 우리들에게 잡혀온 줄 의
심하고 있는데 갇히 안부원으로 들어와 수색을 할 수 없으므로 불을 질
러 모든 사람들이 불을 끄려고 달려나오도록 유인한 후에 그 기회를 틈
타 수색을 하려는 수작 같아요.]
위소보는 말했다.
[그랬군. 세 분에게는 어떤 고견이 있소?]
서천천은 손으로 머리를 내리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모조리 죽여 입을 봉하그 시체를 없애 혼적을 남기지 않으면 됩니다.]
위소보는 시체를 없애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을 듣자 생각했다.
(그건 내가 잘하는 짓이다. 아주 쉬운 일이지. 나는 그 몽고의 털보를
순식간에 한 무더기의 노란 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녀석은 매국
노가 나찰국의 사람과 결탁한 내막을 알고 있다. 반드시 북경으로 압송
해서 소황제가 친히 심문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는 말했다.
[매국노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그 몽고의 털보가 최대의 증거란
말이오.]
서천천은 말했다.
[위 향주께서 깨우쳐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큰일을 망칠 뻔 했습니
다.]
전노본이 말했다.
[우선은 매국노의 부하들이 불을 지르고 수색을 하는 것을 대비하여 한
첩마를 데리고 매국노가 다스리고 있는 지방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운남성과 귀주성의 길목마다 엄하게 검문을 하고 있으니 곤명에서 떠나
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전노본, 당신은 예전에 화소복렁저를 황궁으로 가지고 들어오시 않았
소? 살찐 돼지를 곤명성에서 사돌리는 것도 멸로 어렵지는 않을 것같구
려.]
전노본은 말했다.
[살찐 돼지를 성 밖으로 옮기는 섯은 아무래도 검문이 심하여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는 있기요. 관에 집어넣는 것
은 너무 흔한 방법이라 다른 사람읕 속이기 어렵습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시체로 위장하는 것이 쉽지 않으면 살아 있는 채로 써먹으면 되지 않
겠소? 전노본, 그의 더부룩한 수염을 깎고 그의 얼굴에 밀가루나 석고
같은 것을 발라서 얼굴을 바꿔보시오. 효기영 관병의 복장을 하도록 하
시오. 나는 한 소대의 효기영 군사들을 뽑아서 북경으로 보내면서 공주
께서 황상에게 안부를 전하는 행차라고 하겠소. 혼례를 치르는 길일을
황태후와 황상께 알리러 간다고 하지 뭐. 수염이 없는 털보를 효기영의
군사 가운데 섞어 놓고 그의 아혈을 찍어 말을 못하게 하면 되오. 오삼
계의 부하믈이 어찌 감히 황상의 친위병들까시 일일이 검문할 수 있겠
소?]
세 사람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위소보는 불쑥 엉뚱한 말을 했다.
[곤명에는 기녀원이 없소?]
전노본 일헹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위 향주가 기녀원에 놀러 갈 생각인가?)
전노본은 웃으며 말했다.
[물론 있겠지요.
[현정 도인을 기녀원에 보내야 되겠소. 그가 가려고 할지 걱정이.]
전노본은 말했다.
[도장은 출가한 사람이니 기녀원에 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위 향
주께서 흥미가 있으시다면 속하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당신도 물론 가야 하지만 현정 도인은 체구가 우람하오. 우리 형제들
가운데 그 사람이 털보의 체구와 가장 비슷하단 말이오.]
세 사람은 그제서야 현정 도인을 한첩마로 변장시키려는 것을알아차렸
다. 마언초는 웃으며 말했다.
[본회의 큰일이니 현정 도인께서는 기녀원으로 놀러 가지 않으면 안되
죠.]
네 사람은 껄껄 웃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당신들은 그에게 털보의 의복을 입히고 털보의 물건을 빠짐없이 갖추
도록 하시오. 아래턱에는 털보의 얼굴에서 깎아 낸 수염을 붙여서 진짜
털보처럼 만들어야 하오. 다른 형제들은 평서왕부의 시종처럼 옷을 차
려 입고 제법 큰 기녀원으로 가서 술을 마시다가 아름다운 계집애를 독
차지하려는 싸움을 하도록 하시오. 그런 와중에 전노본이 한 칼에 현정
도인을 죽이는 것이오.]
전노본은 깜짝 놀랐으나 즉시 진짜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님을 깨닫
고 웃었다.
[위 향주의 계책은 정말 묘합니다. 현정 도인과 제가 서로 여자를 가운
데 놓고 싸우는 동안 현정 도인은 몽고 말을 그럴싸하게 씨부렁거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따로 한 구의 시체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맞았소. 당신들은 나가서 찾아보시오. 곤명성 안에서 체구가 털보만한
못된 녀석을 찾아 죽여 그 시체를 기녀원 옆에 감춰두도록 하시오. 전
노본이 도인을 죽이는 시늉을 한 후에는 여자들을 몰아내시오. 도인은
즉시 살아나고 털보의 옷을 시체에 입히는 것이오.]
마언초가 웃으며 말했다.
[그 시체의 얼굴을 짓뭉개 버려야죠. 그리고 빡빡 깎은 수염을 침대에
던져 놓아 오삼계의 부하들이 수색하도록 합니다. 그들은 살인을 한 흉
수가 죽은 사람이 한첩마라는 사실을 감추려 했다고 믿을 것입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마형은 나보다 생각이 치밀하군요. 그럼 모두들 은자를 가지고 기녀원
으로 놀러 가시오. 이 일은 매우 재미있는 일인데 애석하게도 나는 여
러분들과 같이 가서 놀 수가 없구려.]
위소보는 저녁밥을 먹은 후에 날이 으슥해지기를 기다려 건녕 공주의
방으로 들어갔다. 공주는 기다리기에 지쳤는지 그를 보자 벌컥 화를 냈
다.
[왜 이제야 오는 거예요?]
위소보는 말했다.
[당신의 시아버지가 나에게 대역무도한 말을 함부로 지껄였소. 그래서
나는 그와 한참 동안 다투었소. 만약 그대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와 다투고 있었을 것이오.]
[그가 뭐라고 했는데요?]
[그는 황상께서 자기를 간신이라고 의심하기 때문에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고 했소. 그래서 나는 말했소. 황상께서 의심을 한다면 어째서 공
주를 그대의 며느리로 주었겠느냐고 했소이다. 그러자 그는 황상께서
공주를 싫어하기 때문에 일부러 그대를 해치려고 시집을 보냈다고 말했
소.]
공주는 크게 노해서 손으로 탁자를 꽝, 하니 후려치고 소리쳤다.
[늙은 자라가 허튼소리를 지껄이는군. 내가 가서 그의 수염을 뽑아버려
야지. 빨리 그에게 가서 내가 보잔다고 전해요.]
위소보도 화가 난다는 듯 욕을 했다.
[제에미! 나는 그와 목숨을 걸고 싸우려고 했소. 나는 황상께서 공주를
애지중지하신다고 말했소. 공주는 아름답고 영리하여 그의 아들은 감히
공주의 배필이 될 자격이 없다고 했소. 나는 그에게 '당신이 감히 그와
같은 소리를 지껄인다면 공주는 시집을 오려고 하지 않고 내일 즉시 북
경으로 돌아갈 것이오'라고 했소. 나는 또 천하의 수많은 남자들이 공
주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어 안달을 하고 있다고 했소.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한 마디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소. 나는 그 늙은 자
라에게 '이 위소보 역시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소'라는 말을 하
고 싶었소.]
공주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어째서 그 말을 하지 않았어요? 소보, 우리 내일 북경으로 돌
아가요. 황제 오라버니에게 그대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말하겠어요.]
위소보는 고개를 저었다.
[늙은 자라는 내가 화를 내자 기가 죽어 조금 전에는 농담을 한 것이니
심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하였소. 또 공주에게 고자질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소. 하지만 나는 황상과 공주에게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이니 감
히 황상이나 공주를 속일 수는 없다고 했소.]
第73章. 태감이 된 오응웅
공주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이미 그대가 나에게 층성을 다하는 것을 알고 있어요.]
위소보도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말했다.
[늙은 자라는 당황해 하며 땅바닥에 끓어앉아 빌기까지 했소. 나에게
두 자루의 나찰국 사람들이 만든 화창을 주면서 자기가 한 말을 고자질
하지 말라고 했소.]
그는 화창을 꺼내 화약과 철탄을 넣고 공주에게 주며 화원을 향해 쏘아
보라고 했다. 공주는 총을 쏘았는데 굉음과 함께 커다란 나뭇가지가 뚝
부러지는 것을 보자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당신이 한 자루 지니고 내가 한 자루 지니도록 합시다. 이 화창은 본
래 한 쌍이었다오.]
[두 자루 화창 가운데 하나는 수컷이고 하나는 암컷이에요. 나란히 누
워 있는 모습이 얼마나 다정해요? 따로 떼어놓으면 두 화창은 매우 외
로워할 거예요. 나는 갖지 않을 테니 당신 혼자 다 가져요.]
위소보는 그녀를 덥석 껴안고 그녀의 귓가에 입을 대고 경박한 말을 했
다. 공주는 음탕한 말을 듣자 두 뺨을 붉히며 킥킥 웃었다. 위소보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 비단 금침으로 그녀의 벌거벗은 몸뚱이를 덮어 주
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매국노의 부하들은 왜 아직까지 불을 지르지 않을까? 이곳에 달려들어
수색을 하다가 공주의 벌거숭이 몸을 보았으면 참 좋겠는데. 그러면 공
주는 즉시 화를 낼 것이 아닌가?)
그는 침대가에 앉아 공주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집 밖의 동정에 귀를 기
울였다. 공주는 콧소리로 말했다.
[응, 나는....자고 싶은데 그대는.... 그대는....]
이때 초경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징소리가 꽝꽝, 울리면서
십여 명이 큰소리로 외쳤다.
[불이야! 불이야!]
공주는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키고 위소보의 목을 끌어안으며 떨리
는 목소리로 말했다.
[불이 났대요!]
[제에미! 분명히 늙은 자라가 불을 질러 우리 두 사람을 불태워 죽여
그가 오늘 지껄인 허튼소리가 누설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일게요.]
공주는 더욱 놀라서 물었다.
[이걸....이걸 어쩌죠?]
[무서워할 것 없소. 위소보는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남자요. 목숨을 버
리는 한이 있어도 나의 다정한 공주님은 무사하게 지킬 것이오.]
그는 살며시 그녀를 밀어내고 문 쪽으로 다가가 누가 달려오면 즉시 공
주의 침실에서 튀어나갈 채비를 했다.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가 나고 사방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불이야, 불이야! 빨리 공주님을 보호해라!]
위소보는 밖을 두리번거렸다. 화원에서 십여 명이 재빨리 달려왔다. 그
는 속으로 생각했다.
(매국노의 부하들이 매우 빠르게 달려오는구나. 그들은 이미 안부원 안
으로 들어와 으슥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이 났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공주, 큰 불은 아니니 두려워 마오. 늙은 자라는 간통하는 사람을 잡
으러 온 모양이오.]
공주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누구를....누구를 잡는다구요?]
[그는 당신과 내가 수상한 짓을 하는 줄 알고 간통하는 현장을 덮치려
고 하는 것이오.]
그는 다시 말했다.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키지 마시오. 내가 문 밖에 서 있다가 정말 불
이 이곳으로 번지면 당신을 업고 도망치겠소.]
공주는 감격해서 말했다.
[소보, 당신은....당신은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시는군요.]
위소보는 문 밖에 서서 큰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공주님을 보호하시오!]
평서왕부의 무사들이 달려와 외쳤다.
[위 자작 나으리, 안부원에 불이 났습니다. 세자께서 친히 달려와 공주
를 보호하고자 하십니다.]
이때 동북쪽 모퉁이에서 몇 개의 등롱이 다가왔다. 한 떼의 사람들이
등롱을 들고 삽시간에 위소보 앞에 다가왔다. 앞장선 사람은 바로 오응
웅이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몽고의 털보를 수색하기 위해서 나이 어린 매국노가 친히 나섰군! 이
로 미루어 볼 때 털보를 매우 중시하고 있구나.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
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로구나.)
오응웅이 멀리서 외쳤다.
[공주 전하께서는 편안하시냐?]
한 명의 위사가 의쳤다.
[위 자작 나으리께서 이미 지키고 계십니다.]
오응웅은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참 잘되었다. 위 자작 나으리, 정말 수고가 많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내가 무슨 수고를 했겠소? 내가 공주를 안고 침대 위에서 뒹구는 것을
보고 수고했다고 할 수 있는지요? 그대는 그런 일로 나에게 고마워하는
데, 너무 겸손할 것 없소이다.)
곧이어 위소보가 거느리는 어전시위, 효기영의 좌령 등이 달려왔다. 모
두들 잠을 자다가 놀라 깬 몸들이라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었고 어떤 사
람은 맨발이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저고리도 걸치지 못하고 있었다.
불이 났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이들은 공주가 불에 타 죽으면 자기들의
목이 잘릴 것이라 느끼고 황급히 달려온 것이다. 위소보는 시위와 관병
들에게 사방을 지키도록 했다. 장강년은 위소보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
며 귀엣말로 말했다.
[위 부총관, 이것은 속임수입니다.]
[무슨 소리요?]
[불이 났다는 소리와 함께 평서왕부의 위사들이 사면에서 담장을 뛰어
넘어 들어온 것을 볼 때 사전에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입으로는 불을 끄라고 외쳤지만 그들은 방마다 들어가 수색을 했습니
다. 우리 형제들이 저지해도 소용없었으며 몇 명은 그들과 싸움을 하기
도 했습니다.]
[오삼계는 우리가 그를 해칠까 봐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오. 아무래도
그가 반란을 일으킬 것 같소.]
장강년은 깜짝 놀라 오응웅을 훔쳐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들이 수색하도록 내버려두시오. 막을 필요 없소.]
장강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북경에서 온 관병들에게 나직이 그 말을 전
했다. 안부원의 서남쪽과 동남쪽에서 화광이 충천했다. 곧이어 십여 대
의 수룡(水龍)이 허공으로 물을 뿜기 시작했다. 한줄기 희뿌연 물기둥
은 커다란 분수 같았다. 위소보는 오응웅에게 다가가 말했다.
[소왕야, 그대의 신기묘산에 탄복을 금치 못하오. 옛날의 제갈양이나
유백온(劉伯溫)도 그대의 능력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오.]
오응웅은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위 자작께서는 농담을 하시는군요.]
[농담이 아니오. 그대는 오늘 밤에 안부원에서 불이 날 것을 미리 예견
하시지 않았소? 그래서 미리 옷을 단정하게 입고 안부원 밖에서 참고
기다린 것이 아니겠소? 그러다가 불이 나자마자 일제히 담장을 뛰어넘
어 불을 끄러 오지 않았느냔 말이오. 하하하, 정말 훌륭한 재간입니다.
훌륭한 재간이에요.]
오응웅의 얼굴이 붉어졌다.
[결코 사전에 예견한 것은 아닙니다. 우연이었죠. 오늘 밤 나의 자형인
하국상(夏國相)이 손님을 청하게 되었기에 저는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
가 마침 위사들을 이끌고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안부원에
불이 난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소왕야께서는 술을 먹으러 거면서도 수롱룡(水龍隊:소방대)를 데리고
다녔으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바람이 거세고 건조해서 불이 잘 날 때라 역시 조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유비무환이라고나 할까요.]
[옳은 말씀이오. 그러나 애석하게도 소왕야께서도 빠뜨린 것이 있구
려.]
[빠뜨리다뇨?]
[다음부터는 소왕야께서 자형 댁으로 술을 마시러 가실 때는, 한 떼의
목공들, 흙일을 하는 사람들을 거느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벽돌, 기와,
목재, 석회, 못 등도 갖추시기 바랍니다.]
[왜요?]
[그대의 자형 집에서 불이 난다면 수룡대는 하늘에 물을 뿜어댈 뿐 불
은 끄지 않으니 자형네 집이 잿더미로 변할 것이 아니겠소? 그러면 소
왕야께서는 즉시 목공들과 흙일을 하는 사람들을 시켜 자형 집을 다시
세워 줘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유비무환이 되는거죠.]
오응응은 어색하게 웃더니 곁에 있는 위사에게 말했다.
[위 자작 나으리께서는 수룡대가 불을 제대로 끄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아내셨네. 자네는 가서 수룡대의 대장을 잡아오게. 내 그들의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놔야지.]
그 위사는 즉시 달려갔다. 위소보는 물었다.
[소왕야, 수룡대 대장의 다리를 분지른 후에 그들의 벼슬을 올려줄 생
각이죠?]
[위 자작 나으리,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군요.]
[흐흐흐, 소왕야께서는 부득이 커다란 감옥을 지어 다리가 부러진 대장
을 간수장에 임명시킬 것 같다는 말이외다. 예전에도 종종 그래 오지
않았소?]
오응응은 생각했다.
(이 녀석은 노일봉이 흑감자의 전옥관(典獄官)이 된 것을 알아차린 모
양이다.)
그는 짐짓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위 자작 나으리께서는 정말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그래서 황상께서 그
토록 좋아하시는 모양이오.]
그는 속으로 결심했다.
(돌아가서 노일봉을 죽여야 되겠다. 그러면 이 녀석은 증인이 없어진
다.)
잠시 후에 평서왕부의 위사들이 와서 오응웅에게 귀엣말로 보고하는 것
을 위소보는 엿들었다. 그러나 남모르는 암호로 말하기 때문에 알아들
을 수 없었다. 오응웅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한첩마를 찾아내지 못
한 듯했다. 한 명의 시위가 다시 달려와 보고했다. 불길이 갑자기 거세
지면서 이쪽으로 번질 우려가 있으니 공주님이 놀라지 않도록 거처를
옮기시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오응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는 그 옆에 서서 그들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런
데 오응웅이 눈을 내리뜨며 그 시위의 오른쪽 다리를 곁눈질로 바라보
는 게 아닌가? 위소보도 그의 시선을 따라 그 시위의 다리를 바라보았
다. 그 시위는 오른손의 엄지와 식지를 둥글게 모아 무릎 옆에 대고 있
었다. 위소보는 대뜸 깨달았다.
(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드는 것은 바로 한첩마를 찾지 못했음을
뜻하는구나.)
오응웅은 말했다.
[위 자작 나으리, 불길이 이쪽으로 번지고 있다는군요. 우리들은 역시
공주님의 거처를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주 전하께서 놀라신다면
만 번 죽어 마땅한 죄를 짓는 것이 아니겠소?]
위소보는 평서왕부의 시종들이 곳곳에서 한첩마를 수색하였고 안부원에
서 오직 공주의 침실만 수색하지 못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들은 공주
의 침실마저 수색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는 울화가 치밀어 오른손
엄지와 식지를 동그랗게 모아서 오응웅의 앞에서 몇 번 흔들었다. 이것
을 본 오응웅은 깜짝 놀랐고 그 시위 역시 안색이 변했다. 오응웅은 떨
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위....위 자작 나으리....그게....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 뜻을 모른단 말이오?]
[아, 알았소. 동전을 뜻하는 것이군. 위 자작 나으리께서는 돈을 받아
야 공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줄 수 있다는 것이군요?]
위소보는 생각했다.
(작은 매국노의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위소보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동전이나 은자라면 얼마든지 상의할 수 있습니다.]
[소왕야께 우리 형제들을 대신하여 고마움을 표하는 바입니다. 소왕야,
공주님의 거처를 옮기시는 일은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시오.]
그는 빙그레 웃고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부부이니까 상의하기 좋을 것이오. 나는 밤중에 함부로 공주
의 방으로 뛰어들 수는 없구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 몽고의 털보가 그녀의 방에 숨어 있는지 없는지 네 스스로 확인해
보아라.)
오응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문 가까이 다가가 낭랑히 외쳤다.
[신 오응웅은 사람들을 데리고 불을 끄고 있으며 공주 전하를 보호하고
자 합니다. 불길이 이쪽으로 번지고 있으니 공주께서는 다른 곳으로 옮
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방안에서 나직이 응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응웅은 속으로 생각
했다.
(너와 나는 아직 혼례는 치르지 않았으나 부부이다. 사태가 급하게 되
었으니 내가 방으로 들어가도 예의에 어긋나는 게 아니다. 이번 일은
끝까지 조사해서 밝혀내야 한다. 그리고 나 이외의 그 누구도 너의 방
에 들어갈 수 없으니 잘됐다.)
그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위소보와 백여 명의 어전시위, 효기영의 관병, 평서왕부의 시위들은 모
두 밖에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났으나 방안에서는 어떤 동정도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모두의 생각
은 똑같았다.
(이 한 쌍의 미혼 부부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오늘에서야 공주의
침실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서로 다정한 말을 주고받고 있겠지. 소왕야
는 공주를 품에 안고 있지 않을까? 입맞춤을 하지 않을까?)
위소보만 속으로 질투를 하고 있었다. 오응웅이 한첩마를 찾으려고 혈
안이 된 이때 공주와 다정하게 굴 마음의 여유가 없을 테지만 공주의
성격이 하도 괴상하니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녀가 적극적으로
오응웅에게 다정하게 굴지도 모르는 일이다.
별안간 공주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대담하고 무례하다! 너는....너는....감히 이럴 수 있느냐? 빨리 나가
거라!]
밖의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소왕야께서 참지 못하고 손을 댄 모양이구나.)
공주는 다시 외쳤다.
[너는....너는 이럴 수 없다. 나의 옷을 벗길 수는 없어. 빨리 나가거
라!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이 사람이 나를 강간하려고 해요! 나를 강
간하려고 해요!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사람들은 킥킥 웃었다. 모두들 오응웅이 너무 급하게 군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공주가 그의 마누라가 될 몸이지만 아직 혼례도 올리지 않았는
데 어찌 함부로 겁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모두들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응웅이란 녀석이 공주를 강간하려고 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긴 하지
만 그들 부부간의 사사로운 일이다. 우리 신하들은 함부로 간섭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간섭해서도 안된다.)
위소보는 가슴이 뛰었다.
(나이 어린 매국노는 제법 똑똑한데 어째서 이와 같이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다지? 그가 정말 공주를 범하지는 않겠지?)
그는 즉시 큰소리로 외쳤다.
[소왕야, 빨리 나오시오. 공주님께 너무 무례하면 안되오.]
공주는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사람 살려!]
그 소리는 매우 처절했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외쳤다.
[큰 사고를 친 모양이다!]
그는 재빨리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몇 명의 어전시위와 왕부의 시위들
이 그를 따라 방안에 들어갔다. 이때 공주는 침대에 웅크리고 이불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한 쌍의 회디휜 허벅지가 이불 밖으로 드러나 있
었고 두 팔도 밖으로 드러난 걸 보면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오응웅은 옷을 모두 벗은 채 침대 밑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하반신은 선혈로 물들어 있고 그의 손에는 한 자루
의 단도가 들려져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이같은 광경을 보자 대경실색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서왕부의 시위들은 우르르 달려가 오응웅이 죽
었는지 살았는지 살펴보았다. 오응웅의 코 앞에 손을 대보니 숨을 쉬고
있고 심장도 뛰고 있는 걸로 보아 기절한 것이었다. 공주는 울며 하소
연했다.
[이 사람....이 사람은 나에게 무례한 짓을 하려고 했어요. 그는 누구
죠? 위 자작 나으리, 빨리 그를 죽여버려요.]
위소보는 말했다.
[그가 바로 부마 오응웅입니다.]
공주는 외쳤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는 나의 옷을 벗기고 자기 옷을 벗더니 나를
강간하려고 했어요....이 악당을 빨리 죽여요.]
사람들은 모두들 분노했다. 자기들은 황상의 명을 받들어 공주를 보호
하고 있었다. 공주는 황상의 누이동생이고 금지옥엽 귀하신 몸인데 오
응웅이란 녀석에게 모욕을 당했으니 이는 모두 자기의 직분을 완수하지
못한 결과가 되는 것이고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평서왕부의 시위들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매우 부끄러워 했다. 그
들 가운데의 몇 명은 똑똑하고 능력이 있었다. 만약 공주의 방에서 한
첩마를 찾아낸다면 공주를 몰아세울 수도 있고 최소한 억지를 부릴 여
지도 있었다. 그들은 오응웅을 살펴보는 척하면서 사방을 살폈다. 침대
밑까지 살펴보았지만 한첩마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별안간 평서
왕부의 시위가 외쳤다.
[앗! 세자, 세자의 하체....하체가....]
오응웅의 하반신이 선혈로 물들어 있는 것을 여러 사람들은 모두 보았
었다. 처음에는 그가 공주를 강간하느라고 공주의 몸이 찢어져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의 하체에서는 선혈이 샘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놀라고 당황했다. 금창약을 지닌 사람이 재빨리
약을 꺼내 상처에 발라 주었다. 위소보는 호통을 내질렀다.
[오응웅은 공주에게 무례한 짓을 했으니 불경죄를 지은 것이오. 사로잡
아 놓고 황상께 아뢰어 죄를 다스려야 되겠소!]
시위들은 일제히 대답하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평서왕부의 시위들은
친히 귀로 듣고 눈으로 목격한 이상 오응웅이 공주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잡아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위소보의 말을 듣고 속으로
외쳤다.
(큰일났다. 큰일났어!)
그들은 감히 항거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 명의 시위가 허리를 굽히
고 말했다.
[위 자작 나으리께서는 은혜를 베푸소서. 세자께서는 상처를 입었으니
아무쪼록 세자가 집으로 돌아가 치료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
러면 우리 왕야께서는 위 자작 나으리의 은덕을 잊지 못하실 것입니다.
세자는 확실히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공주께서 넓으신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고 위 자작 나으리께서도 한 번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이와 같은 큰 죄를 지었는데 우리들이 어떻게 감히 황상을 기만할 수
있겠소? 할말이 있으면 밖에 나가서 합시다. 공주의 침실에 몰려들어
이 무슨 꼴들이오? 도대체 무법천지로군.]
시위들은 연신 허리를 굽히고 예예, 하면서 오응웅을 부축하여 물러갔
다. 이제 공주와 위소보 두 사람만 남았다. 공주는 갑자기 미소지으며
의소보에게 손짓을 했다. 위소보가 침대 앞으로 다가가자 공주는 그의
어깨를 얼싸안고 그의 귓가에 입을 대고 나직이 말했다.
[내가 그의 물건을 잘라 냈어요.]
위소보는 깜짝 놀라 외쳤다.
[아니, 뭐라구?]
공주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화창으로 그를 겨누고 옷을 벗도록 했어요. 이어서 화창의 손잡
이로 그의 뒤통수를 힘껏 내리쳤어요. 그가 기절해서 쓰러지자 즉시 그
의 못생긴 물건을 잘라 냈어요. 이제 그는 태감이 되었으니 나의 남편
노릇을 할 수 없어요.]
위소보는 우습고 놀라워 말했다.
[어째서 이런 대담하고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소? 커다란 화를 불러일
으켰군.]
공주는 말했다.
[무슨 화를 불러일으켰다고 그래요? 나는 한마음 한뜻으로 그대를 위하
는 마음에서 그랬단 말이에요. 내가 그에게 시집을 간다 해도 진정한
아내 행세를 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그대가 파란 모자를 쓴 자라가 되
지 않도록 도와준 거예요.]
파란 모자를 쓴 자라는 바로 아내를 남에게 빼앗긴 사람을 말한다. 위
소보는 여러 모로 궁리해 보았으나 이 일은 너무나 큰일이라 어떻게 처
리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공주는 다시 말했다.
[그는 강간도 하지 않았고 무례한 짓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나는 큰
소리로 그렇게 외쳤으니 모든 사람들이 밖에서 들었을 거예요. 그렇
죠?]
위소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공주는 활짝 웃었다.
[그러니 우리가 그를 두려워할 게 뮈가 있어요? 오삼계가 화를 낸다 해
도 자기 아들이 못된 짓을 한 줄 알 거예요.]
위소보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가 죽게 된다면 어쩌지?]
[그까짓 것이 잘려진다고 죽을 리가 있어요? 황궁 안에는 수천 명이나
되는 태감들이 있어요. 어느 한 사람 그것이 잘려서 죽은 적이 있나
요?]
[좋소. 그대는 한사코 그가 강간하려고 칼을 들고 딤벼들었다고 주장하
시오. 그대는 목숨을 걸고 반항하며 손을 뻗쳐 그를 밀치려고 했소. 그
는 옷을 벗고 있었기 때문에 밀고 밀치다 그만 그 칼이 그것을 잘라 냈
다고 주장하시오.]
공주는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고 킥킥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그가 스스로 잘랐어요.]
위소보는 밖으로 나갔다. 그는 오응웅이 칼을 들고 강요하고 공주는 힘
써 대항하였는데 실랑이를 하다 보니까 오응웅 스스로 그 물건을 잘라
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시위들에게 이야기했다. 모두들 우스워하며 오응
웅이 색을 너무 밝히다가 천벌을 받았다고 말했다. 오응웅이 데리고 온
시위들 가운데 몇 명이 남아 있다가 그 말을 듣자 모두들 부끄러운 표
정을 지었다.
안부원에서 이토록 커다란 변고가 생기자 평서왕부의 시종들은 즉시 불
을 끄고 즉시 오삼계에게 보고하는 한편 급히 의원을 불러 오응웅의 상
처를 치료했다. 어전시위는 오응웅이 상처를 입은 사연을 즉시 퍼뜨렸
고 평서왕부의 시위들 역시 똑같이 말했다. 누구나 세자가 공주에게 무
례한 행동을 하다가 빚어진 일이라고 했다. 여러 사람들은 있는 말 없
는 말을 보태어 재미있게 사건을 구성했다. 세자가 칼을 들고 공주의
목을 겨누었는데 공주가 어떻게 발버둥을 치며 저지했는지, 어떻게 세
자의 손과 팔을 밀게 되었는지, 칼이 스치는 곳에 그만 야단날 일이 발
생하고 말았다는 사연을 그럴듯하게 꾸며내어 소문을 퍼뜨렸다. 모두들
그 광경을 친히 목격한 것처럼 떠들어댔으며 또 어떤 사람은 입에 침을
튀기며 손짓발짓을 하며 흉내내기도 했다.
반 시진이 지나자 오삼계는 말을 몰아 달려왔다. 그는 공주의 침실 밖
에서 꿇어엎드려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며 말했다.
[만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위소보는 그 옆에서 우려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왕야께서는 몸을 일으키십시오. 제가 들어가 공주의 뜻이 어떤지 들어
보겠습니다.]
오삼계는 품속에서 한 웅큼의 비취를 꺼내 그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
다.
[위 형제, 이 늙은이가 총총히 달려오느라고 은표를 가져오지 못했소.
이 보석들을 그대가 여러 시위들에게 나눠 주시오. 제발 공주 앞에서
좋은 말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위소보는 구슬을 다시 오삼계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왕야, 안심하십시오. 저도 힘을 다할 결심이나 왕야가 내리시는 물건
은 받지 않겠습니다. 이 일은 실로 큰일이니 공주의 뜻이 어떠한지 저
역시 모르겠습니다. 공주의 성질은 너무나 사나운 편이지요. 그녀는 정
조가 있고 어릴 때부터 귀여움을 받고 자란 규수이며, 태후와 황상께서
도 그녀에 대해서는 많은 양보를 하신답니다. 세자는 실로....실로 너
무나 무례한 짓을 한 것 같습니다.]
[예, 예. 위 형제는 공주님 앞에서 말씀을 올릴 수 있는 분이시니 제발
저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공주의 방문 앞으로 가서
낭랑히 말했다.
[공주님께 아룁니다. 평서왕야께서 친히 사죄를 하러 오셨습니다. 공주
님께서는 왕야께서 많은 공을 세우신 노신(老臣)임을 감안하시어 너그
럽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삼계는 고개를 조아리며 연이어 말했다.
[그렇지요. 그렇지요. 노신이 이곳에서 큰절을 올리오니 아무쪼록 공주
님께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공주의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위소보가 다시 한 번 같
은 말을 되풀이하는데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났다. 걸상이 쓰러지는
듯했다. 위소보와 오삼계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의혹스런 표정울
지었다. 이때 한 명의 궁녀가 외쳤다.
[공주님, 공주님, 자결하시면 안됩니다!]
오삼계는 놀라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속으로 생각했다.
(공주가 자결하면 아직 모든 준비가 갖춰지지 못했지만 즉시 군사를 일
으킬 수밖에 없다. 공주를 욕보여 죽였다는 죄명을 어떻게 감당하랴?)
방안에서 몇 명의 궁녀들이 크게 울어댔다. 한 명의 궁녀가 총총히 달
려나와 울면서 말했다.
[위....위 자작 나으리, 공주 전하께서는 대들보에 목을 매달아 자결하
려고 했습니다. 나으리....빨리 와서 구해....구해 주세요.]
위소보는 망설이는 듯이 말했다.
[공주의 침실에 우리 신하들이 어떻게 들어간단 말이오?]
오삼계는 힘껏 그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사태가 급하니 어쩔 수 없소! 공주님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시위들에게 말했다.
[빨리 의원을 불러라.]
그는 다시 위소보의 등을 밀었다. 위소보는 못 이기는 척 방안으로 들
어섰다. 공주는 침대 위에 누워 있고 칠팔 명의 궁녀들이 침대를 에워
싸고 울부짖는 중이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나는 내공(內功)으로 공주를 구할 수 있소.]
궁녀들은 한쪽으로 물러섰다. 공주는 눈을 꼭 감고 있는데 숨쉬는 소리
가 매우 낮고 미미했다. 목에는 붉은 밧줄 자국이 나 있었다. 대들보에
한 줄기의 밧줄이 드리워져 있고 밧줄의 한쪽 토막은 침대 위에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한 개의 걸상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위소보는 속으
로 웃었다.
(연극을 매우 잘하는군. 이 색을 밝히는 공주는 알고 보니 터무니없는
짓만 저지르는 밥통은 아니었구나.)
그는 침대에 다가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윗입술에 있는 인중(人中)을 힘
껏 눌렀다. 공주는 음, 하고 신음소리를 내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녀는 힘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나는 살고 싶지 않아요.]
[공주, 그대는 만금지체이니 죽어서는 아니 되오. 평서왕이 지금 밖에
서 큰절을 올리며 사죄하고 있소. 너그럽게 그를 용서해 주시오.]
[당신은....빨리 그 나쁜 사람을 죽이세요.]
위소보는 몸으로 궁녀들의 시선을 막고 이불 안으로 손을 디밀어 그녀
의 허리를 한 번 꼬집어주었다. 공주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손톱으로 그의 손등을 힘껏 할퀴며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나는 살고 싶지 않아요. 내가 어떻게 사람 노릇울 한단 말이에요?]
오삼계는 문 밖에서 공주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죽지 않았
다는 사실을 알자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어떻게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겠느냐고 울부짖자 오삼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젊은 사람들이 칼과 창을 휘두
르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재수없게 칼날이 하필이면 그것을
잘랐단 말인가? 응웅이 치료된 후에 공주는 생과부 노릇을 해야 한다.
우선 이 일을 얼버무리고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잠시 후 위소보가 방안에서 걸어나왔다.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第74章. 자객을 만난 오삼계
오삼계는 황급히 한걸음 다가서며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공주께선 뭐라고 말씀하셨소?]
[공주는 고집이 세어 아무리 권해도 듣지 않고 반드시 죽고 말겠다고
하십니다. 저는 궁녀들 보고 절대 공주 곁에서 떠나지 말고 공주를 잘
감시하라고 분부했지요. 왕야, 그녀가 독약울 먹지나 않을까 걱정입니
다.]
오삼계는 안색이 변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그 점을 반드시 방비해야 합니다.]
[왕야, 공주님께 어떤 변고가 생기면 저 역시 공주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으니 이 작은 목숨을 보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 왕야께서는
저에게 살길을 열어 주십시오.]
오삼계는 흠칫 놀라서 물었다.
[살길이라니 무슨 살길이오?]
[그 말은 지금은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공주께서 무사하기를 빌 뿐입니
다. 그래야 서로에게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그녀가 한사코 죽으려고
한다면 며칠은 저지할 수 있어도 언제까지나 저지할 수는 없지요. 저로
서는 공주가 하루 빨리 왕야의 왕부로 시집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삼계는 기뻐서 말했다.
[우리 빨리 잔치를 열도록 합시다. 모두 내 아들놈이 멍청한 짓을 하여
생긴 일이오. 위 형제께서 애써 덮어 주시니 소왕은 뭐라고 감사를 드
려야 할지 모르겠소. 결코 위 형제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은 없도록 하
겠소.]
그는 음성을 낮추어 물었다.
[공주가 시집을 오려고 할까요?]
그 말을 하며 오삼계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 아들은 이미 폐인이 되었다. 공주가 나이 어리고 견식이 얕아 남녀
간의 즐거운 일을 모르기를 바랄 뿐이다. 조금 전에 칼질을 하였으나
그녀는 어디를 잘랐는지 모를 것이다.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을
오면, 나무는 이미 배로 만들어진 셈이니 시집살이를 해야 할 것이고
그녀는 이 세상의 남자들이 모두 응웅과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
다.)
위소보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공주는 아직 어리니 남녀간의 일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녀는
귀하신 몸이니 남녀간의 일을 입에 담지도 못할 것입니다.]
오삼계는 크게 기뻐 속으로 생각했다.
(영웅의 견해란 역시 비슷하구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제기랄! 이 꼬마 녀석이 무슨 영웅이란 말인가? 감히 나와 함께 논하
면 안되지.)
오삼계는 이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맞았소. 우리들이 잘 해보도록 합시다. 우리들은 감히 황상을 속이려
고 하는 것이 아니지요. 하지만 만세야께서는 하루에 만 가지 일을 처
리하셔야 하며 나라일을 걱정하시느라고 밤잠을 못 이루고 계시니 얼마
나 바쁘시냔 말이오. 우리 신하들이 군주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한 어찌 황상을 번거롭게 할 수 있겠소? 태후와 황상께서
는 공주를 사랑하시는데 만약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아시면 매
우 마음 아파하실 것이오. 위 형제, 훌륭한 벼슬아치가 되는 비결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경사스런 일은 보고하고 근심스런 일은 보고하지 않는
것이지요.]
위소보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고 곧이어 자기의 모자를 손가락으로 두
번 퉁기고 시원스럽게 말했다.
[앞으로 왕야께서 저를 돌봐 주시고 키워 주시기 바랍니다. 이 일은 저
의 목숨을 걸고 왕야의 분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오삼계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위소보는 다시 말했다.
[그러나 오늘 밤의 일을 본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이 누설하
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렇죠.]
오삼계는 속으로 좋은 계책을 강구해 보았다. 부하들을 강도처럼 꾸며
광서성 경내에 매복시켰다가 위소보 일행이 북경으로 돌아갈 때 모조리
잡아 죽여 버리는 계책이었다. 광서성은 손연경(孫延慶)
이 다스리는 지역이다. 손연경의 처 공사정(孔四貞)은 정남왕 공유덕
(孔有德)의 딸이었다. 태후는 그녀를 수양딸로 삼고 화석격격(和碩格
格)에 봉했고 따라서 조정에서는 그녀를 총애하고 있었다. 오삼계는 광
서성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는 죄명을 공사정에게 덮어씌우려는 것
이었다.
위소보는 눈치가 빠르기는 하나 먼 앞일을 내다보고 심사숙고해서 계책
을 세우는 일은 오삼계에 미치지 못했다. 그는 오삼계가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 그가 이번 일이 누설될까 봐 걱정을 하고 있는 줄 알고 웃으
며 말했다.
[왕야, 부디 안심하십시오. 소장은 철저하게 부하들을 단속하며 그들이
함부로 오늘의 일을 누설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위 형제가 오늘 이토록 나에게 큰 협조를 해주시니 금은이나 보석으로
는 이루 다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 형제가 거느린 관병이
적지 않으니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금은을 보내드리
지 않을 수 없겠소. 그러니 나중에 사람을 시켜 보내 드리겠소.]
[정말 고맙습니다. 세자의 상처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가 가서 살펴보
는 게 어떨까요? 상처가 심하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오삼계와 그는 함께 오응웅을 보러 갔다. 오응응을 치료하고 있던 의원
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만.... 그러나....]
오삼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에 지장이 없으면 됐소.]
그는 위소보가 아들을 사로잡아 감금을 할까 봐 시종들에게 분부해서
즉시 세자를 세자의 저택으로 옮겨가서 치료하도록 하고 그 자신은 친
히 위소보를 붙잡고 늘어져 시간을 보냈다. 오응응이 안부원에서 나간
후에야 오삼계는 위소보에게 작별을 고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나이 어린 매국노는 정신을 차린 후에 진상을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무런 소용도 없다. 금지옥엽의 공주가 남편의 그것을 잘랐다고
그 누가 믿겠어? 대매국노 자신도 결코 믿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아들
을 크게 꾸짖을 것이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공주를 시집보내고 북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가를 잘 토닥거려야 되
겠다. 정성을 많이 기울여야 할 게야.)
그가 처소에 돌아오니 서천천과 현정 도인 등은 이미 소문을 듣고 손뼉
을 치며 통쾌하다고 말했다. 위소보는 그들에게 사실대로 설명하지 않
고 기녀원으로 놀러 갔던 일을 물었다. 군웅들은 그의 계책대로 일을
처리했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말했다. 위소보는 생각했
다.
(오늘 밤 이와 같은 큰 사건이 벌어졌으니 북경으로 사람들을 보낸다면
큰 매국노는 내가 황상에게 고자질을 하려는 줄 알고 의심할 것이다.
이 일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몽고의 털보를 보내자.)
갑자기 어전시위 조제현이 총총히 와서 말했다.
[총관님께 보고드립니다. 평서왕이 자객을 만났답니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재빨리 물었다.
[죽었는가? 자객은 누구지?]
조제현이 천지회의 군웅들이 깊온 밤에 그의 방에 모여 있는 것을 알게
될까 봐 위소보는 즉시 문 밖으로 나가며 다시 물었다.
[대매....대....평서왕은 죽었소, 죽지 않았소?]
[죽지 않았습니다. 가벼운 상처를 입었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자객은
당장에 체포되었습니다. 범인은....공주를 모시는 궁녀였습니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재빨리 물었다.
[공주를 모시는 궁녀라고? 어느 궁녀 말이오? 그녀가 어째서 평서왕을
찔렀단 말이오?]
[자세한 사정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속하는 평서왕이 자객을 만났다
는 소문을 듣자마자 달려와 보고를 하는 것입니다.]
[빨리 가서 자세히 알아보고 다시 보고하시오.]
조제현이 대답하고 막 몸을 돌려 몇 발짝을 때기도 전에 장강년이 황급
히 다가오며 말했다.
[총관님, 평서왕을 찔러 죽이려 했던 궁녀의 이름은 왕가아(王可兒)라
고 합니다.]
위소보는 몸을 비틀거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그녀가....무엇 때문에 그랬지?]
왕가아는 바로 아가의 변명(變名)이었다. 바로 가(珂) 자를 둘로 나누
어 만든 이름이었다. 장강년은 말했다.
[평서왕은 그녀를 왕부로 데리고 가서 친히 심문하여 누구의 사주를 받
았는지 알아내려 합니다.]
위소보는 사랑하는 사람이 체포되었다는 말을 듣자 정신이 흐리멍텅해
져서 좋은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장강년은 말했다.
[그러나 모두들 그녀를 사주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왕가아는
십육칠 세의 나이 어린 소저로 공주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었는데 공주
가 그와 같은 모욕을 당해서 자걸하려고 하는 것을 보자 마음속으로 크
게 분노를 느껴 공주님을 위해 화풀이를 하려고 했을 거라고 말들 하고
있지요.]
그 말이 귓전에 들어오자 위소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한
줄기의 광명을 발견한 듯하여 재빨리 말했다.
[맞소. 맞소. 그 말이 맞소. 그와 같이 아름다운 소저가 평서왕에게 무
슨 원한이 있었겠소? 우리들이 평서왕을 찔러 죽이려고 했다면 결코 나
이 어린 소녀를 보냈을 리 없을 것이오.]
조제현과 장강년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위 부총관께서는 말하는 데 두서가 없구나. 우리가 어째서 사람을 보
내 평서왕을 찔러 죽이려고 한단 말인가?)
장강년은 말했다.
[아마 평서왕은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소문이 퍼
진다면 모두에게 피해가 돌아가니 그는 십중팔구 몰래 그 궁녀를 죽여
이 일을 마무리 지을 것입니다.]
위소보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죽이면 안 돼! 죽이면 안 돼! 그가 만약 그 궁녀를 죽이면 나는 그와
목숨을 걸고 싸우겠소. 늙은 자라인 대매국노의 배때기에 흰 칼이 들어
가 붉은 칼이 나오도록 하겠소.]
조제현과 장강년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서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하니 위 부총관이 공주가 욕을 보자 화가 나서 그 궁녀를 보내 평
서왕을 찔러 죽이려고 한 건 아니겠지?)
그러나 두 사람은 공손히 서서 그런 말을 뱉어내지는 못했다. 위소보는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해야 좋겠소?]
장강년은 그가 여전히 제 정신이 아닌 것을 보고 위로의 말을 던졌다.
[위 부총관, 이 일을 크게 확대하게 되면 황상께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오삼계 부자의 잘못으로 귀착됩니다. 공주를 강간하려고
한 것은 엄청난 짓이 아니겠습니까? 오삼계가 자객을 보낸 사람을 알아
냈다고 해도 우리가 한사코 부인하면 그로서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
다.]
위소보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녀에게 지시한 것은 아니오. 내가 두 분 형제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있겠소?]
조제현과 장강년은 그 말에 마음을 놓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위소
보는 말했다.
[두 분 형은 아무쪼록 수고를 해주시오. 나의 명첩을 가지고 가 평서왕
을 만나서 왕가아가 왕야를 해치려 한 것은 매우 잘못한 일이고 내가
매우 화를 내고 있다고 하시오. 하지만 왕가아는 공주를 시중 드는 궁
녀이니 왕야께서는 그 계집애를 내주어 이 일을 조용히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전하시오. 내가 공주에게 품해서 그 궁녀에게 무거운 벌을 내려
왕야의 화풀이를 해주겠다고 하시오.]
조제현과 장강년은 대답을 하고 떠나면서 마음속으로는 위소보가 쓸데
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오삼계가 그 궁녀를 몰래 죽여 버리면 서
로가 무사하게 되는데 왜 일을 복잡하게 벌이느냐고 생각했다. 위소보
는 즉시 구난의 방으로 달려갔다. 이때 그녀는 침대 위에 앉아서 막 운
기행공을 끝내고 있었다.
[사부님, 사부님께서는 사저가....사저가....큰일을 저지른 것을 알고
계십니까?]
[무슨 일이냐? 왜 그리 당황해 하지?]
[사....사저....그녀가 매국노를 죽이려 하다가 사로잡히고 말았습니
다.]
구난은 눈빛을 번뜩이며 물었다.
[그래 찔러 죽였느냐?]
[죽이지도 못하고 사저가 그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구난은 싸늘히 코웃음 치며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차갑게 말했다.
[쓸모없는 것 같으니.]
위소보는 생각했다.
(그녀는 사부님의 제자가 아닌가? 그녀가 매국노에게 사로잡혔는데 사
부님은 걱정을 하시지 않는 것 같구나.)
그는 다시 말했다.
[사부님, 사저를 구할 방법이 있겠죠?]
구난은 그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다. 쓸모없는 계집애!]
위소보는 길을 오는 동안 사부가 사저에게 냉담하고 자기에게 대하는
것보다 훨씬 차가웠던 것을 보아 왔다. 그는 사부가 정말 아가를 아랑
곳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다시 애원했다.
[매국노가 그녀를 죽일 것입니다. 모진 고문을 당해 지금쯤 그녀는 반
쯤 죽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매국노는....그녀를 고문하여 사주한 사람
을 알아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구난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건 내가 지시한 것이다. 매국노가 재간이 있으면 나를 잡아보라지
뭐.]
구난이 제자를 시켜 오삼계를 찔러 죽이라고 지시한 데 대해 위소보는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명나라 숭정 황제의 공주였
다. 대명나라의 금수강산은 바로 오삼계에 의해 오랑캐에게 넘어가고
말았으니 그녀가 오삼계를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 자신 역시 오대산에서 강희를 찔러 죽이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
나 아가는 무공이 평범하고 오삼계의 신변에는 위사들이 구름처럼 늘어
서 있으니 찌르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도망치기 어려웠다.
아가에게 그와 같은 일을 시킨 것은 그녀를 죽으라고 보낸 것과 다르지
않았다. 위소보는 많은 의문을 느꼈으나 물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아 이
렇게 말했다.
[사저가 배후의 인물을 실토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녀는 아마도
불지 않을 것입니다.]
구난은 시큰둥한 음성으로 말했다.
[글쎄다.]
그녀는 그 말을 하고 눈을 감았다. 위소보는 감히 더 말하지 못하고 밖
으로 나왔다. 조제현과 장강년이 오삼계에게 갔으니 빨리
돌아올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되어 그는 대청에서 서성거렸다. 날이 점
점 밝았다. 그는 세 번이나 소식을 알아보라고 시위들을보냈으나 달려
간 시위들은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 더는 참을 수 없어서 그는 결
국 한 떼의 효기영 군사들을 착출해서 친히 평서왕부로 달려갔다.
왕부에서 삼 리쯤 떨어진 법혜사(法慧寺)에 이르자 효기영의 군사를 멈
춰 세우고 그는 다시 시위를 보내 말을 타고 달려가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한식경이 지나자 말발굽 소리가 촉급하게 울려퍼지며 장강년이
말을 달려 다가와 위소보에게 보고했다.
[속하와 조제현이 부총관님의 명을 받들고 평서왕을 만나러 갔으나 왕
야는 줄곧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조제현은 아직도 왕부의 바깥채에 있
는 방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위소보는 초조하고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며 욕했다.
[제기랄! 오삼계가 감히 왕의 거드름을 피우다니!]
[그는 한 지방을 다스리는 위세당당한 왕야가 아닙니까? 천하에서 황상
을 제외하면 그의 권세가 가장 클 것입니다. 그가 우리같이 하찮은 시
위를 만나 주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내 친히 그를 만나러 가겠소. 모두 나를 따라오시오.]
위소보는 한 명의 효기영 좌령에게 분부했다.
[우리의 군사들을 모조리 출동시켜 오삼계의 소굴 밖에서 진을 치고 있
으면서 명을 기다리도록 하시오.]
그 좌령은 명을 받들어 달려갔다. 장강년 등은 그 말을 듣고 놀람과 두
려움을 느꼈다. 위소보가 다급해 하는 양을 보니 오삼계와 싸움을 벌일
것을 각오한 것 같았다. 평서왕의 휘하에는 명마가 많고 북경에서 공주
를 호송하여 운남에 온 명사들은 이천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서로 싸
운다면 반 시진(時辰)도 되지 않아 모조리 섬멸되고 말 것이었다. 장강
년은 말했다.
[위 부총관, 부총관께선 흠차대신이십니다. 황상의 명을 받들고 곤명으
로 오신 몸이니 평서왕은 부총관의 체면을 세워 주지 않을 수 없을 것
입니다. 속하는 천천히 일을 해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위소보는 벌컥 화를 냈다.
[제기랄, 오삼계가 뭣하는 물건이오? 일을 천천히 해결하려고 하다가
그가 나의....왕가아를 죽여 버리면 그 누가 그녀를 살려 놓을 수 있단
말이오?]
장강년은 그가 호통을 내지르는 것을 보자 감히 더 말하지 못하고 속으
로 이렇게 생각했다.
(궁녀 한 명 죽이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그래? 그녀가 친 누이
동생도 아닌데 일을 크게 확대할 필요가 있느냔 말이다.)
위소보는 외쳤다.
[말을 대령하라! 말을 대령하라!]
말을 끌어 오자 즉시 몸을 날려 말 위에 올라타고 질풍같이 말을 몰아
평서왕부를 향해 달려갔다. 평서왕부의 문공(門公)과 시위들은 흠차대
신이 온 것을 보자 재빨리 대청으로 맞아들이고 즉시 안으로 들어가 보
고했다. 총병으로 있는 하국상과 마보(,男寶) 두 사람이 위소보를 맞이
했다. 하국상은 오삼계의 사위인데 열 명이나 되는 총병 가운데 우두머
리였다. 그는 위소보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위 자작 나으리, 왕야께서 자객의 칼에 찔렸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
시리라 믿습니다, 왕야의 상처가 가볍지 않아 친히 마중을 나오지 못하
시니 용서하십시오.]
위소보는 깜짝 놀라 말했다.
[왕야께서 상처를 입으셨다니? 상처를 입지 않았다고 하던데?]
하국상은 침울한 얼굴로 나직이 말했다.
[자객이 왕야의 가슴팍을 찔렀는데 그 상처는 약 서너 치나 깊이 났습
니다.]
[아이쿠,근일났군!]
하국상은 말했다.
[왕야께서 이번에....이번에 생명을 건지실 수 있는지 아직까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인심이 동요할까 봐 그와 같은 사실을 누설하지
않고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위자작 나으리게서는
한집안 사람이니 속일 수 없지요.]
위소보는 말했다.
[내가 가서 왕야를 위로해 드려야 되겠소.]
하국상은 말했다.
[소인이 안내를 하죠.]
오삼계의 침실에 이르자 하국상은 말했다.
[장인 어른, 위 자작 나으리께서 어르신을 위문차 오셨소이다.]
오삼계는 침대의 휘장 안에서 몇 번 신음소리를 낼 뿐 대답하지 않았
다. 하국상은 휘장을 들췄다. 오삼계는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고 있었다. 침대 위의 요와 이부자리는 피투성이였고 가슴팍
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붕대 사이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
다. 침대가에 두 명의 의원이 서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위소보는 오삼계가 이토록 심한 상처를 입은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여
가슴 가득 끓어오르던 분노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는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삼계가 죽고 사는 것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만약 죽는다면 아가를 구하는 일은더욱 어려워질 것이 아닌가?
그는 나직이 물었다.
[왕야, 많이 고통스러우십니까?]
오삼계는 으윽, 하며 몇 번 신음소리를 내더니 두 눈을 부릅떴는데 눈
동자에 광채가 없었다. 하국상은 다시 말했다.
[장인 어른, 위 자작 나으리께서 어르신을 뵈러 오셨습니다.]
오삼계는 어이구, 어이구, 하는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나는....나는 틀렸다. 너희....너회들은 빨리 가서 응웅....응웅 그
녀석을 죽여라! 모두....모두.... 그 녀석이 잘못한 탓이다.]
하국상은 감히 그 분부를 받들 수가 없어 아무 소리도 없이 휘장을 내
려놓고 위소보와 함께 밖으로 걸어나왔다. 방문을 나서자 하국상은 눈
물을 흘리며 말했다.
[위 자작 나으리, 왕야....왕야께서는 이미 틀린 것 같습니다. 그 어르
신께서는 한평생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셨는데 이와 같은 종말을 맞
이하시다니, 진정....진정 하늘은 착한 사람을 돌보지 않는군요.]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방귀 뀌는 소리 작작해라. 나라를 위해 무슨 충성을 했다는 거냐? 하
늘이 대매국노를 돌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마땅하다.)
그러나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하 총병, 내가 보니 왕야의 상처가 심하기는 하지만 꼭 별세하신다고
는 볼 수 없을 것이오.]
[천지신명께서 보우하셔야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자작 나으리
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나는 관상을 볼 줄 알지요. 왕야의 얼굴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고귀한
상이지요. 장래 그가 누릴 벼슬과 부귀는 현재보다 백 배는 더 클 것이
오. 그런 부귀영화를 누리기 전에는 결코 돌아가시지 않을 것이오.]
오삼계는 친왕이라는 지극히 높은 벼슬에 있었다. 운남성과 귀주성의
모든 군민(軍民)의 정무(政務)를 그 한 사람이 관장하고 있었다. 작위
는 이미 절정에 도달해 있었고 관직도 이미 높을 대로 높았다. 위소보
는 그가 장래에 차지할 벼슬이 현재보다 백 배나 더 크다고 했는데, 황
제가 되는 것 이외에 무슨 벼슬이 평서왕보다 백 배나 더 클 수 있겠는
가? 하국상은 그 말을 듣자 안색이 변하며 말했다.
[황상의 은혜가 크시어 우리 왕야의 작위는 이미 절정에 달해 있으며
더 오를 수가 없습니다. 그저 위 자작 나으리께서 말씀하신대로 그 어
르신께서 이번의 고비를 무사히 넘기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위소보는 그의 표정이 크게 변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을 너도 이미 알고 있었구나. 그
렇지 않고서야 내 말을 듣고 어째서 그토록 놀란단 말이냐? 내친김에
더 놀라도록 만들어 줘야지.)
그는 다시 말했다.
[하 총병은 아무쪼록 안심하시오. 내가 그대의 관상을 보니 역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상이오. 앞으로 그대가 여러 모로 이끌어 주시
고 키워 주시기 바라오.]
하국상은 절을 하며 공손히 말했다.
[흠차대인께서는 과찬의 말씀을 하시는군요. 대인께서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니 소장은 더욱 충성을 다하여 황상폐하와 대청나라의 은혜에 보
답하여 결코 흠차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기대해 보지요. 그대들의 세자는 부마가 되어 소보 벼슬에 태자
태보를 겸하였소. 과거 악비 나으리께서는 주선진(未仙鎭)에서 금나라
군사를 대파하시고 김올출로 하여금 똥, 오줌을 바짓가랑이에 싸도록
만든 큰 공을 세웠지만 고작 소보라는 관직에 봉해졌을 뿐이었소. 공주
의 남편이 되면 이런 크나큰 득을 보는 모양입디다. 하 총병, 잘해 보
시오.]
그는 밖으로 걸어갔다.
하국상은 놀라 식은땀을 손에 쥐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녀석의 말을 들으니 장인 어른께서 황제가 되려고 한다는 것을 비
꼬는 듯하다. 설마....설마 이 비밀이 누설된 건 아니겠지? 아니면 저
녀석이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터운지 모르고 나오는 대로
허튼소리를 마구 지껄인 것일까?)
위소보는 회랑에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왕야를 찌른 자객은 체포했소? 도대체 어떤 사람이오? 누가 사주한 것
이오? 명나라에 충성을 하는 잔당들이 한 짓이오, 아니면 목왕부의 사
람들이 한 짓이오?]
하국상은 말했다.
[자객은 여자이며 이름은 왕가아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합니다. 그녀가 공주의 궁녀라나요? 소장은 그 말을 믿지않습니
다. 흠차대인께서 옳게 보시니 저는 탄복해 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목씨 집안에서 파견한 자객 같습니다.]
위소보는 깜짝 놀랐다.
(야단났다. 그들은 공주에게 죄를 씌울 수 없으니까 아가를 목왕부의
사람이라고 모함하여 아무렇게나 죽이려고 하는구나. 이거 정말 큰일이
다.)
그는 말했다.
[왕가아라구요? 왕가아는 바로 공주의 곁에서 시중드는 궁녀인데? 공주
는 그녀를 매우 좋아하며 잠시도 떨어지지 않지요. 그녀는 십칠팔 세의
나이로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가 수려하지 않습니까?]
하국상은 주저하며 말했다.
[소장은 왕야의 상처에만 신경을 쓰고 있느라고 미처 자객의 모습을 살
펴보지 못했습니다. 그 여자는 이름을 사칭한 것이겠죠. 흠차대인께서
도 생각해 보십시오. 왕가아라는 궁녀가 공주의 총애를 받고 있고 평소
공주의 총애를 받았다면 반드시 예의를 차릴 줄 알며 부드럽고 온순한
성격을 지녔을 것입니다. 그런 궁녀가 어찌 왕야를 찌를 리 있겠습니
까? 결코 그 궁녀가 아닐 것입니다.]
그가 자객이 결코 공주의 궁녀가 아니라고 한사코 우겨대자 위소보는
더욱 놀라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이미.... 그녀를 죽였소?]
[아직 죽이지 않았습니다. 왕야께서 치유되기를 기다려 친히 자세히 심
문을 해서 배후에서 지시한 사람을 알아낼 계획입니다.]
위소보는 약간 안심이 되어 말했다.
[그대가 나를 안내하시오. 나는 그 자객을 한 번 만나 봐야 되겠소. 진
짜 궁녀인지 아닌지 내가 보기만 하면 알 수 있소.]
하국상은 당황하여 말했다.
[흠차대인께 번거로움을 끼쳐 드려서야 쓰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지요.
이 자객은 결코 공주님의 궁녀가 아닐 것입니다. 유언비어가 나도는데,
대인께서는 아랑곳하실 필요 없습니다.]
[왕야께서 자객을 만나시어 중상을 입으셨소. 만약 어떤 변고가 생긴다
면 그 누구도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오. 본인이 북경으로 돌아가
면 황상께서는 자객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을 것이오. 또 어떤 사람이
지시했느냐고 물을 것이오. 내가 친히 보지 않는다면 황상께서 하문을
하실 때 어떻게 대답한단 말이오?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야 한단 말이
오? 군주를 속이는 죄를 나는 감히 지을 수 없소. 하 총병, 그대는 그
책임을 질 용기가 있단 말이오?]
그가 황제를 들먹이고 나오자 하국상은 더이상 할말이 없어서 연신 대
답했다.
[잘 알았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위소보는 얼굴 가득 불쾌한 빛을
띄우고 화난 어조로 다그쳤다.
[하 총병,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꾸 머뭇거리는 거요? 그대는 무슨 수
작을 부리는 거요? 흠차대신인 나를 데리고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
오? 그렇다면 좋소. 어디 해봅시다. 황상을 대신하는 흠차대신인 이 위
소보가 이대로 물러서는지 두고봅시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가 사로잡혀 지극히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어 다급
한 나머지 협박조로 나왔다. 황상을 들먹이는 것도 사양하지 않았다.
하국상은 급히 말했다.
[소장이 어찌 흠차대인에게 수작을 부리겠습니까? 하지만....하지만 실
로 곤란한 점이 있어서 그럽니다.]
[무슨 곤란한 점이 있다는 것이오?]
[흠차대인께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우리 왕야께서는 아랫사람을 엄하게
다스리시는데 소장이 비록 그 어르신의 사위라곤 하지만 왕야께서는 소
장에 대해서는 더욱 엄하십니다. 그 어르신이 불공평하다는 소리를 들
을까 봐 염려하기 때문이죠.]
[정말 사위 노릇 하기란 쉽지 않겠구려? 왕야의 왕비는 소문에 들으니
까 진원원(陳圓圓)이라고 하며 천하 제일의 미녀라는 소문이 들리더군
요. 우리 대청나라가 이 강산을 얻은 것은 진 왕비와 깊은 관계가 있
소. 그대의 장모님이 수화폐월(羞花閉月)의 미인이라면 그대의 아내 역
시 침어낙안(沈魚落雁)의 미모를 지녔을 것이오. 그런 미녀와 함께 꿀
처럼 달콤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그대는 사위 노릇을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을 것이오. 못생긴 마누라를 얻은 사람도 사위 노릇을 잘만 합디
다. 그대는 다만 장모님을 자주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면 되는 것이오.
흔히 장모는 사위를 보고 침을 삼킨다고 하지 않소? 내가 볼 때 그대의
장모님이 그토록 아름다우시니 그 말을 거꾸로 해야 될 것 같소. 사위
가 장모님을 바라볼 때 침을 삼킨다고 해야 할 것이오. 하하하!]
하국상은 겸연쩍어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자식은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는 것이 시정잡배와 다르지 않다.
큰 벼슬아치의 위엄은 전혀 없구나.)
그는 위소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소장의 처는 진 왕비의 소생이 아니외다.]
위소보는 탄식하며 말했다.
[그것 참 애석하군. 그대는 재수가 나빴소.]
위소보는 엄숙한 안색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가서 자객을 심문해야 하는데 그대가 쓸데없는 변명을 늘어놓으
며 그대의 장인, 장모를 들추고 나오니 정말 이상하군.]
하극상은 갈수록 화가 났으나 겉으로는 공손한 표정으로 말했다.
[흠차대신께서 자객을 심문하시면 더욱 잘된 일이죠. 흠차대신께서 한
마디 물어보시는 것이 우리들이 백 마디나 천 마디를 물어보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야께서....왕야께서....]
[왕야가 어떻다는 거요? 왕야께서 내가 자객을 심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거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흠차대신께서는 오해하지 마십시오. 대인께서 자
객을 만나 그 여자의 내력을 알아보면 우리 왕야는 감격할 따름이고 결
코 막을 이유가 없지요. 소장이 당돌하게 한마디하겠으니 대인께서는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휴! 그대라는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우물쭈물하는 것이오? 전혀 사
내대장부다운 기개가 없군. 아무래도 아내의 침대 앞에 너무 많이 꿇어
앉아 있었기 때문일 거요. 빨리 말하시오.]
하극상은 속으로 욕을 했다.
(너희 위가 십팔 대 조상들은 모두 짐승들이다.)
그는 속으로 욕을 한 후에 말했다.
[그 자객이 만일 공주님의 궁녀라면 대인이 보자마자 바로 그녀를 데려
갈까 두렵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왕야께서 그 자객을 보려고 하실 때
소장은 자객을 내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큰일이지요.]
위소보는 생각했다.
(이 녀석은 정말 교활하다. 내가 자객을 데려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미
리 받아내려고 하는구나. 제기랄, 그 자객은 나의 다정한 마누라다. 내
어찌 너희들이 내 마누라를 못살게 굴도록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이냐?)
[그대는 자객이 결코 공주의 궁녀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소? 그런데
왜 걱정이오?]
[그것은 소장의 추측이지요.]
[그대는 내가 그 자객을 데려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말이오?]
[그 말씀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흠차대인께서는 잠시 대청에 편안히
앉아 계십시오. 소장이 왕야께 여쭤 보겠습니다. 그 후의 일은 왕야와
흠차대인 두 분이 결정할 일이지요.]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는 장인에게 볼기짝을 얻어맞게 될까 봐 매우 겁을 내고 있구나.)
그는 흐흐, 웃으면서 말했다.
[좋소. 가서 품하시오. 내 그대에게 말하는데 왕야께서 정신이 있든 없
든 간에 그대는 즉시 돌아와야 하겠소. 그대에게는 왕야의 목숨이 소중
하겠지만 우리들은 공주의 죽고 사는 문제가 더욱 소중하오. 공주 전하
께서는 그대들의 세자에게 괴롭힘을 당하자 기회만 있으면 자결하려 하
오.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이니 나는 빨리 그 자객을 만나보고 즉
시 돌아가야 하오.]
그는 오삼계가 혼수상태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핑계로 하국상이
침대 옆에서 시간을 지체할까 걱정이었다. 하국상은 허리를 굽혔다.
[결코 지체하지 않겠습니다.]
하국상은 안으로 들어가 한참 후에야 다시 나와 말했다.
[소장은 흠차대인께서 초조하게 기다리실까 봐 재빨리 품하고 왕야의
유시를 받들 여유도 없이 그냥 달려나와 대인을 모시고 가 자객을 심문
하려는 것입니다. 흠차대인, 가시죠.]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고 하국상을 따라 안채로 들어갔다. 몇 곳의 회
랑을 지나 화원에 이르니 화원에는 수십 명이나 되는 시종들과 위사들
이 손에 무기를 들고 순라를 도는데 경계가 매우 삼엄했다. 하국상은
그를 데리고 한 채의 커다란 가산 앞에 이르러 한 무관에게 한 대의 금
비영전(金批令箭)을 꺼내 보이고 말했다.
[왕야의 유시를 받들어 흠차대신을 모시고 자객을 심문하러 왔네.]
그 무관은 영전을 살펴보더니 허리를 굽혔다.
[흠차대인과 총병대인께서는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는 한켠으로 물러섰다. 하국상은 말했다.
[소장이 안내하죠.]
그는 가산의 동굴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위소보는 그 무관을 따라 들어
갔는데 몇 걸음 가지 않아 한쪽에 커다란 철문이 있었다. 문 옆에는 두
명의 무사가 지키고 있었다. 원래 이 가산은 지하 감옥의 입구였다. 세
곳의 철문을 지났는데 갈수록 통로가 밑으로 향했다. 그들은 이윽고 한
칸의 조그만 석실 앞에 이르렀다.
석실 앞에는 굵은 철책이 세워져 있고 그 철책 안에는 한 소녀가 땅바
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직이 흐느끼고 있었
고 몇 개의 유등(油橙)이 벽에 걸려 석실 안을 누렇게 물들이고 있었
다.
위소보는 재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 두 손으로 철책을 잡고 눈을
크게 뜨고 그 소녀를 살펴보았다. 하국상이 호통쳤다.
[일어서라, 흠차대인께서 너에게 물으려 하신다.]
그 소녀는 고개를 쳐들었다. 등불빛 아래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위
소보와 그녀의 눈동자가 얽히자 두 사람은 놀라 아, 하고 소리를 질렀
다. 그 소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손과 발에 묶인 쇠사슬에서 챙그
랑, 챙그랑,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녀는 말했다.
[어떻게....어떻게 그대가 이곳에 있죠?]
위소보는 자객이 바로 목왕부의 소군주 목검명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하국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녀를 여기 가두어 두었소?]
[대인께서는 그 자객을 알고 계십니까? 그녀는....그녀는 정말 공주를
시중드는 궁녀입니까?]
하국상의 얼굴에 나타난 의아함은 위소보와 목검병의 얼굴에 떠오른 의
아함에 못지않았다. 위소보는 말했다.
[저 소저가....저 소저가 오....왕야를 지르려고 했던 그 자객이란 말
이오?]
[그렇소. 이 여자는 대담하기 그지없습니다. 감히 하극상의 난을 일으
키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도대체 누가 지시한 일인지 대인께서는 아무
쪼록 상세히 심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위소보는 약간 마음을 놓았다.
(모두들 오해를 하고 있었군. 오삼계를 찌르려고 했던 자객은 아가가
아니고 목씨 집안의 소군주였구나. 그녀의 부친이 오삼계에게 해침을
받아 죽었으니 그녀가 오삼계를 찔러 죽이고 부친의 복수를 하려고 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는 하국상에게 물었다.
[그녀 스스로 왕가아라고 말합디까? 공주의 궁녀라고 말합디까?]
[우리가 그녀의 성명과 교사한 사람을 물었으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려
고 하지 않았소. 그러나 그녀가 궁녀 왕가아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지
요. 정말 왕가아인지 아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인께서 알려
주십시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군주가 사로잡혔으니 나는 마땅히 방법을 강구해서 구출해야한다.
그녀 역시 나의 마누라이다. 남자로 태어나 어느 한 여자만 편애해서야
쓰겠는가?)
[그녀는 물론 공주님을 모시는 궁녀요. 공주는 그녀를 매우 좋아하고
있소.]
그는 목검병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고 말했다.
[너는 어인 일로 평서왕을 찌르려고 했느냐? 너는 삶에 염증을 느꼈느
냐, 아니면 누가 교사한 것이냐?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을 당하기 전
에 어서 빨리 실토해라!]
목검병은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오삼계 그 대매국노는 도적을 아비로 삼고 대명나라의 강산을 오랑캐
에게 바쳤어요. 한인이라면 누구나 그의 목숨을 빼앗고 싶어해요. 애석
하게도 나는 그 간적을 죽이지 못했군요!]
위소보는 짐짓 노성을 질렀다.
[나이 어린 계집애가 이토록 무법천지로 날뛰다니! 너는 궁 안에 그토
록 오래 있었는데 그만한 예의도 배우지 못했단 말이냐? 감히 대역무도
한 말을 지껄이는데 너는 목을 잘리는 것이 두렵지 않느냐?]
第75章. 평서왕부의 감옥에 갇힌 목검병
목검병은 말했다.
[그대는 궁 안에서 나보다 오래 머물렀지만 그대가 제대로 아는게 뭐가
있어요? 내가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곤명으로 오삼계라는 대매국노를 죽
이러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위소보는 한 걸음 다가서며 호통쳤다.
[빨리 실토해라. 도대체 누가 지시했느냐? 너의 일당에는 어떤 사람이
있느냐?]
그 말을 하면서 그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등뒤를 몇 번 가리 켰다.
바로 하국상을 모함하라는 암시였다. 그의 몸이 손을 가리고 있었고 하
국상은 그의 등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가 손짓을 하고 눈을 껌벅거리
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목검병은 즉시 눈치를 채고 하국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의 일당은 바로 저 사람이에요. 그가 나에게 지시했어요.]
하국상은 대노해서 호통을 내질렀다.
[터무니없는 소리!]
목검병은 말했다.
[그대는 여전히 잡아떼려는 거예요? 그대는 나에게 오삼계를 찔러 죽이
라고 했잖아요. 그대는 오삼계가 지극히 나쁜 놈이기에 모두 그를 죽이
고 싶도록 미워한다고 했어요. 그대는....그대는 오삼계를 찔러 죽인
후에 바로....바로....]
그녀는 하국상이 어떤 신분인지 모르는 데다 거짓말을 제대로 하지 못
하여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위소보는 즉시 말했다.
[그는 혹시 벼슬이 오르고 재물을 긁어 모을 수 있게 되며 이후부터 그
누구도 그를 때리고 욕할 사람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맞아요. 그는 오삼계가 종종 그를 때리고 욕하며 그에게 매우 흉악하
게 대한다고 했어요. 그는 벌써부터 오삼계를 죽이려 했으나 그럴 기회
가 없었다고 말했어요.]
하국상이 호통을 지르고 욕을 해도 목검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위소
보는 호통을 질렀다.
[이 계집애야, 너는 말조심해라. 이 장군이 누구신지 아느냐? 이 분은
바로 평서왕의 사위 하국상 하 총병이시다. 평서왕이 때때로 그를 때리
고 욕을 한 것은 모두 그를 아끼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가슴 앞에 엄지손가락을 세워 그녀가 말을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목검병은 말했다.
[하 총병은 일단 오삼계를 죽이면 자기가 평서왕이 된다고 말했어요.
찔러 죽이는 데 성공하든 못하든 그는 나를 살려주어 조금도 고통을 당
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그는 약속을 저버리고 나를 이곳
에 가두었어요. 하 총병, 나는 그대의 지시를 받고 이런 큰일을 저질렀
는데 그대는 언제 나를 놓아줄 거예요?]
하국상은 극도로 분노했다.
(이 계집애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꼬마 녀석이 알려준
것이다. 이 후레자식이 못된 계집애를 구해 내기 위해서 나를 희롱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너희가 서로 잘 아는 사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호통을 내질렀다.
[네가 계속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면 너의 살가죽이 터지도록 매질
을 해 반쯤 죽여 놓겠다.]
목검병은 깜짝 놀라 감히 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위소보는 말했
다.
[네가 마음속으로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털어놓도록 해라. 하 총병은
나의 절친한 친구이니 그가 정말 평서왕을 찔러 죽이라고 지시했다면
숨기지 말고 나에게 이야기해라. 나는 결코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
그는 연신 눈짓을 보냈다. 목검병은 말했다.
[그는 나를 때려 죽일 거예요. 나는 감히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사실이지만 말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네 말은 사실이니 더 물어 볼
필요도 없겠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국상
은 말했다.
[대인께서는 명찰하십시오. 반적이 벼슬아치를 모함하고 물고늘어지는
일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위소보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생각한 후에 다시 말했다.
[그런 일도 있겠지요. 하지만 평서왕은 평소 하 총병에게 매우 엄하게
대한 것이 사실이오. 하 총병이 마음속으로 장인어른을 미워하고 죽일
마음도 품었다는 것을 이 나이 어린 소녀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오?
그대가 말하지 않았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오. 평서왕의 상처가 나
은 후에 내가 그를 잘 타일러서 그대들 장인과 사위가 불과 물이 어떻
게 된다는 그런 사이가 되지 않도록 해주겠소.]
처음에 하국상은 목검병이 모함하는 소리를 듣고 속으로 화가 났으나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자기의 부귀공명은 모두 평서왕이 내린
것이니 그 누구도 자기가 그와 같은 음모를 꾀하리라고 믿지 않을 것이
다. 그러나 위소보가 평서왕에게 그런 말을 하면 장인 어른은 반드시
자기가 마음속으로 한을 품고 위소보에게 원망하는 말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장인 어른은 근년에 신경이 예민해져 부하를 극
히 엄하게 다루고 있는 터에 그런 말을 들으면 상상도 못할 큰 벌을 내
릴지도 모른다.
그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왕야는 저를 친아들처럼 여기고 계시기 때문에 소장은 마음속으로 매
우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흠차대인께서는 절대로 왕야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마십시오.]
위소보는 그가 당황해 하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사람은 호랑이를 해칠 마음이 없지만 호랑이는 사람을 해칠 마음이 있
다고 하지 않았소?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은 이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
오. 평서왕은 나에게 잘 대해 주고 계시니, 나는 반드시 그에게 타일러
자기가 믿고 있는 사람에게 해침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소. 평서왕
은 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있고 곁에는 무수한 고수들이 지키고 있으니
외부 사람이 어찌 그를 해칠 수 있겠소? 그러나 집안의 도적은 방비하
기 어려운 것으로 자기편 사람이 독수를 쓰면 피하기 어려울 것이오.
이번 일만 해도 그렇지 않소?]
하국상은 들을수록 놀랐다. 그는 위소보가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이
바로 그 소저를 구하려는 데 목적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서
왕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고 모든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 전
만 해도 그의 친아우 오삼매(吳三枚)가 후당으로 걸어들어 가며 칼을
풀어 놓는 것을 잊은 일이 있었다. 이때 오삼계는 친히 그 칼을 풀어
놓으면서 크게 꾸짖었다.
위소보가 평서왕에게 바깥의 적은 방비하기 쉬워도 집안의 도적은 방비
하기 어렵다고 말하면 그 한마디가 오삼계의 마음속 깊이 뿌리를 내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기 앞길에 반드시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그는
즉시 말했다.
[흠차대인께서 이끌어 주시고 키워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소장은 영
원히 어르신의 커다란 은덕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대인께서 명령만 내
리시면 소장은 끓는 물 속이나 타는 불길 속으로 들라하셔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위소보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대를 위해서 하는 말이오. 이 계집애의 말은 하늘이 알고, 땅
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알고, 저 계집애가 알고 있소. 그대가 일
찌감치 그녀를 죽여 입을 봉했다면 몰라도 이미 진상이 나의 귀에 들어
왔으니 그대가 그녀의 입을 봉하고 싶다면 먼저 나를 죽여야 할 것이
오. 내 수하의 시위와 장병들은 이미 그 점에 대비하고 있으며 수천 명
이 모조리 왕부 밖에서 기다리며 일단 유사시에 손을 쓸 준비를 하고
있소. 그대가 나를 죽이기는 쉬워도 뒷감당을 하기는 힘들 것이오.]
하국상은 안색이 변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소장이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하 총병, 그대는 열 명의 총명 가운데 우두머리이자 평서왕의 사위가
아니오? 나머지 아흡 분의 총병과 왕부의 문무 백관 가운데는 그대를
시기하는 사람도 있을 터, 그 누가 시기를 하면 국에 기름을 타고 간장
을 치는 일쯤은 쉽게 할 수 있을 것이오. 조금이라도 이 일이 누설되면
평서왕은 귀가 번쩍 뜨일 것이오. 모든 사람들은 그 어르신의 귀에 그
대에 대한 나쁜 말을 퍼부을 것이오. 장작불을 지피고 부채질을 하면
평서왕은 중상을 입은 몸에 신경이 더욱 예민해져 무슨 짓을 할지도 모
르오. 그렇게 되면 공연히 목숨을 잃을 우려도 없지 않을 거요. 아! 정
말 큰일나게 생겼군.]
그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위소보는 아무렇게나 떠벌린 것인데 하국
상은 이 꼬마 녀석이 왕부의 일을 똑똑히도 알고 있다고 느꼈다. 실제
로 그를 질투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말했다.
[대인께서 소장을 생각해 주시니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그대는 이 계집애를 나에게 주어 데려가게 해주오. 왕야께는 공주님이
친히 심문하기 위해서 데려갔다고 하면 될거요.]
그는 귀엣말로 말했다.
[오늘 밤에 나는 저 계집애를 죽여 버리겠소. 그녀가 실토를 하지 않다
가 고문을 못 견디고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리겠소. 그러면 큰 일을 적
게 만드는 것이고 적은 일은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모든 것이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겠소?]
하국상은 이미 그가 그런 말을 할 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혀
를 내둘렀다.
(제기랄! 교활한 꼬마 녀석 같으니, 네가 이 계집애를 구하면서도 나로
하여금 너에게 사정을 하게 만들고 너에게 큰 도움을 받은 것처럼 일을
만들려고 하니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네 녀석은 어떻게 이 계집애
를 알았느냐? 정말 희한한 일이다.)
그는 말했다.
[흠차대인, 그녀가 확실히 공주의 궁녀입니까? 소장이 조금 전 그녀에
게 물었더니 그녀는 공주의 모습이나 나이, 그리고 궁 안의 사정에 대
해서 제대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공주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틀리게 말한 것이
오. 이 계집애는 공주에게 충성을 바치는 한편 하 총병의 부탁을 받고
자객의 임무를 잘 수행했으니 제법 기특하지 않소?]
하국상은 그가 다시 자기를 끌어들이자 재빨리 말했다.
[대인의 계책이 정말 고명하십니다. 그럼 대인께서는 한 장의 유시를
써 주십시오. 대인께서 자객을 데려갔다고 써 주시면 소장은 왕야에게
변명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기랄! 나는 까막눈인데 유시를 어떻게 쓴단 말이오?]
그는 품 속에서 한 자루의 짧은 화창을 꺼내며 말했다.
[이것은 왕야가 나에게 내린 선물이오. 가져가서 왕야에게 보여주고 내
가 공주의 명을 받들어 범인을 데려갔다고 말하시오. 이 화창이 좋은
증거가 될 것이오.]
하국상은 두 손으로 공손하게 화창을 받아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는 밖
으로 나가더니 두 명의 무관을 데리고 들어와 철책을 열고 목검병의 발
목에 채워진 쇠사슬을 풀라고 했다. 그러나 수갑은 풀지 않았다. 하국
상은 친히 수갑에 달려 있는 쇠사슬을 잡고 왕부의 문 밖까지 끌어다
주었다. 그는 쇠사슬을 위소보의 손에 넘기고 다시 수갑열쇠를 그에게
건네주며 큰소리로 말했다.
[흠차대인께서는 공주 전하의 유시에 따라 여죄수 한 명을 데리고 가
심문을 하려 하신다! 모두들 조심하여 범인이 도망치지 않도록 해라!]
위소보는 웃었다.
[그대는 내가 범인을 데려가고도 잡아뗄까봐 두렵소? 모든 사람들이 보
고 들었으니 내가 억지를 부린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잖소?]
하국상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대인께서는 농담도 잘하십니다. 소장은 결코 그런 뜻에서 한 말이 아
닙니다.]
[그대는 가서 왕야께, 내가 그 어르신의 상처를 걱정하여 내일 다시 와
서 문안을 드릴 것이라고 여쭈시오.]
하국상은 허리를 굽혔다.
[잘 알겠습니다.]
위소보는 목검병을 데리고 안부원의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문
을 닫아 걸고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마누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목검명의 자그마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뾰로통한 음성으
로 말했다.
[만나자마자 망측한 말부터 하는군요.]
그녀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우선 수갑을 풀어 준 후에 이야기해요.]
위소보는 웃었다.
[나는 우선 그대에게 다정하게 굴겠소. 쇠고랑을 제거해도 그대는 날
거부하진 않을 테지?]
그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휘감았다. 목검병은 다급해서 말했다.
[아! 그대는....그대는 또 나를 못살게 구는군요.]
[좋소. 내 그대를 못살게 굴지 않을 데니 그대가 나를 못살게 굴도록
하시오.]
그는 자기의 볼을 그녀의 입술로 가져가 가볍게 입맞춤을 하게 한 후에
하국상이 준 열쇠로 수갑을 풀었다. 두 남녀는 침대에 나란히 앉았다.
목검병은 말했다.
[홍 교주와 부인께서는 그대가 보낸 물건을 받고 무척 기뻐하셨으며 저
에게도 해약을 주시어 몸에 퍼진 독을 해소시켜 주었어요. 그리고 적룡
부사(赤龍副使)로 하여금 저를 데리고 그대를 만나 보라고 저와 함께
내보내 그대가 충성스럽게 일을 하는 것을 돕도록 했지요. 교주와 부인
께서는 그대가 나를 보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그래서....]
위소보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래서 그대를 나에게 보내 내 마누라가 되게 했군.]
목검병은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 이니에요. 부인께서는 그대가 나를 걱정하느라고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까봐 걱정이 된다고 했어요. 그녀는 정말 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요.]
[부인께서 말하지 않았을 리가 있나? 그대가 속이고 말하지 않는 것이
분명해.]
위소보는 그녀가 다급해서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보고 부드럽게 말했
다.
[좋아, 좋아. 홍 부인이 마누라가 되라고 하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런
데 그대는 나를 생각했소? 내가 보고 싶었소?]
목검병은 고개를 돌리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소보는 말했다.
[적룡부사는 어떻게 되었소? 그는 뭘하고 그대가 직접 오삼계를 찌르게
되었지?]
[우리들은 그저께 곤명에 왔어요. 오는 즉시 그대를 만나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서문 밖에서 오라버니와 유 사부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아, 그대의 오라버니와 유 사부님도 곤명에 오셨군. 나는 모르고 있었
소]
[오 형과 유 사형도 왔어요. 다만 오 사숙은 명이 나서 오지 못했어요.
모두 곤명에 와서 건녕 공주를 찔러 죽이려고 했지요.]
위소보는 깜짝 놀라 말했다.
[공주를 찔러 죽이다니? 왜? 무엇 때문에 공주를 죽인다는 거지? 공주
는 목왕부에 죄를 짓지 않았잖아?]
[저의 오라버니는 지금이 오삼계라는 대매국노를 쓰러뜨릴 절호의 기회
라고 했어요. 오랑캐 황제가 누이동생을 오삼계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
내는 이때 우리들이 공주를 죽이면 황제는 오삼계가 제대로 공주를 보
호하지 못했다고 꾸짖을 것이고 책임을 추궁할 것이 아니겠어요? 그렇
게 된다면 오삼계는 십중팔구 반란을 일으킨다는 거예요.]
위소보는 그 말을 듣고 식은땀을 흘렸다.
(그 계책은 정말 악랄하다. 나는 한마음으로 오삼계를 도모할 생각만
했지 공주를 제대로 보호할 생각은 하지 않았구나. 목왕부에서 선수를
치면 큰일이다.)
그는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저의 오라버니는 제가 궁녀로 가장하여 공주의 신변으로 다가가 공주
를 찔러 죽이라고 했어요. 그들은 밖에서 접응을 하여 일단 성공하면
저를 구출해서 나가기로 했어요. 적룡부사는 그들의 계책을 듣고 나에
게 말했어요. 그대 백룡사가 공주를 보호할 책임을 지고 있는데 만약
공주가 피살되면 백룡사인 그대에게 누를 끼치게 될 것이라고 말이에
요. 나는 그 말이 옳다고 여기고서 그대와 상의하려 했어요. 그런데 그
사실을 유 사부가 알고 한칼로 적룡부사를 죽여 버렸어요.]
그녀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 참상이 떠오르는 듯했다. 위소보는 목
검병의 손을 꼭 잡고 위로의 말을 했다.
[두려워 마오. 두려워 마오. 그대는 오직 나를 위해서 애를 썼군. 정말
고맙소.]
목검병은 두 줄기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꼈다.
[그러나....그러나 그대는 저를 보자마자 못살게 굴었어요. 그리고....
저의 말을 믿지도 않았구요.]
위소보는 그녀의 손을 들어올려 자기의 따귀를 한 대 갈기고 욕을 했
다.
[이 죽어 마땅한 후레자식, 갈보의 새끼, 너를 죽이고 말겠다.]
목검병은 잡힌 손을 빼내며 말했다.
[싫어요. 그대가 스스로 때리고 욕하는 것을 나는 보기도 싫고 듣기도
싫어요.]
위소보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의 뺨을 어루만지게 하면서 말했
다.
[위소보가 죽을 죄를 지었소. 훌륭한 마누라이며 목씨 집안의 보배 같
은 그대가 오삼계에게 잡혀갔는데 어깨서 진작 구하지 못했느냔 말이
야.]
[그대는 저를 구해 냈잖아요? 우리들은 방법을 강구해서 오라버니와 유
사부를 구해 내야 해요.]
위소보는 놀라 물었다.
[그대의 오라버니와 사부도 잡혀 갔소?]
[그저께 밤, 우리들이 머물고 있는 곳을 갑자기 오삼계의 위사들이 에
워쌌어요. 그들은 인원수가 무척 많았고, 무공이 아주 고강한 사람만
해도 이십여 명이나 되었어요. 우리들은 중과부적이라 오사형은 당장
죽임을 당했지요. 저의 오라버니, 유 사부, 나는 그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어요.]
[오 사형이 매국노에게 죽임을 당했다구? 안됐군. 안됐어.]
그는 다시 물었다.
[그대는 그들에게 사로잡혔는데 어떻게 오삼계를 찌를 수 있었소?]
목검병은 의아하여 물었다.
[오삼계를 찔렀다구요? 나는 그런 일 없어요. 나는 물론 대매국노를 죽
이고 싶어요. 그러나 그 나쁜 시위들이 저의 발과 손에 쇠고랑을 채웠
으니 내가 어떻게 대매국노를 찔러 죽일 수 있었겠어요?]
위소보는 의아해서 물었다.
[그대가 그저께 밤에 잡혔다고? 그렇다면 이틀 동안 어디에 있었소?]
[나는 줄곧 어떤 어두운 방에 갇혀 있었어요. 오늘 그들이 나를 그 지
하뇌옥으로 끌고가 감금하였는데 잠시 후에 그대가 온 것이에요.]
위소보는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았다. 하국상의 속임수에 자기가 넘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오늘 오삼계가 누구에게 찔려 중상을 입었소. 그대가 찌른 것이아니란
말이오?]
[물론 아니에요. 그는 죽을 것 같나요?]
[아직은 잘 모르겠소. 그대는 자신의 신분을 그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
소?]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저를 신문하던 무관은 화를 내며 벙어
리가 아니냐고 물었어요. 위 오라버니, 그대도 저를 벙어리라고 한 적
이 있었죠?]
위소보는 그녀의 뺨에 살짝 입맞춤을 하고 말했다.
[그대는 나의 귀엽고 조그만 벙어리지. 나는 그 때문에 그대의 얼굴에
한 마리의 조그만 자라를 새겨 놓겠다고 말했었지.]
목검병온 부끄러워 외면하고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 위소보는 속
으로 생각해 보았다.
(하국상온 어째서 소군주를 궁녀라고 했울까? 그는 내가 목왕부 사람들
을 알고 있는지 떠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모르고 내가 소군주
를 구했으니 내가 목왕부의 사람들과 한패거리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
아닌가? 그는 함정을 파고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조
심하지 않아 그들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으니 정말 야단났구나!)
그는 눈치가 빠르고 교활했지만 역시 나이가 어려 큰일에 부딪히자 오
삼계와 하국상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는 다급해져서 벌떡 일어났다.
[귀여운 마누라,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나가서 그대의 오라
버니와 유 사부를 어떻게 구할 것인지 상의해봐야 되겠소.]
그는 서쪽 방으로 가서 천지회의 군웅들을 소집하여 그간의 사정을 이
야기했다. 현정 도인은 우려의 빛을 띠고 입을 열었다.
[혹시 우리가 한첩마를 죽인 것처럼 연극을 하고 있음을 오삼계가 눈치
챈 것이 아닐까요?]
전노본은 말했다.
[오삼계는 어디서 정보를 얻었길래 밤중에 목왕부의 친구들을 사로잡았
을까요?]
위소보는 말했다.
[목왕부에 유일주라는 못난 녀석이 있소. 그 작자는 나와 한 번 충돌한
적이 있소. 위인됨이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여색을 위해 대의
를 저버리는 소인인데 십중팔구 그가 밀고한 것일 게요.]
전노본은 말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 향주는 오랑캐 황제가 총애하
는 흠차대신입니다. 대매국노는 그대와 목왕부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
다고 의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기청표가 말했다.
[나의 짐작인데 매국노는 위 향주가 목왕부의 사람들과 내통하고 있는
것을 의심했던 게 아니고 우연히 그렇게 된 것 같군요. 일이 참 공교롭
게 됐군요.]
위소보는 물었다.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니 무슨 말입니까? 또 일이 공교롭게 되었다니
그건 무슨 소리입니까?]
[대매국노를 찔러 죽이려고 한 사람은 십중팔구 공주의 궁녀 왕가아일
것입니다. 모두들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소. 그 왕가아는 확실히 실종되었소. 틀림없이 대매국노에게 잡혀
갔을 것이오.]
[매국노는 공주가 위 향주를 보내 사람을 내달라고 요구할 줄 내다보았
을 것입니다. 공주와 흠차대인의 체면을 보아 그는 사람을 내놓지 않을
수 없는데 그렇다고 그 자객을 내놓기는 아쉬웠을 것입니다. 때마침 목
씨 집안의 소군주가 그들에게 체포당하자 그들은 소군주가 자객이라고
내민 것입니다. 위 향주가 뇌옥으로 가 보면 물론 그녀가 왕가아가 아
니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요. 이렇게 된다면 위 향주도 속수무책이 될
줄 알았을 것입니다.]
위소보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맞았소. 역시 기 셋째 형이 선비 출신이라 생각하는 것이 정확하군요.
그들은 아무 여자나 나에게 내밀며 이렇게 말하겠지. '흠차대인, 이 사
람이 바로 그 자객입니다. 어르신께서 데리고 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데
리고 가십시오. 아니, 그녀가 공주님을 모시는 궁녀가 아니라구요? 그
렇다면 정말 잘되었습니다.' 제에미! 그러면 나는 기껏해야 공주를 모
시는 한 궁녀가 실종되었으니 찾아 주기를 바란다는 말밖에 더 하겠소?
뜻밖에도 내가 목씨 집안의 소군주를 알아 보았으니 그들에게는 정말
뜻밖의 일이었겠지. 이 일에 대해서 대매국노가 물어 보면 정말 둘러대
기 힘들 것 같군.]
기청표는 말했다.
[위 향주, 이렇게 된 이상 억지를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위 향주께서
는 오삼계에게 위 향주가 황제의 성지를 받들어 목씨 집안의 사람들과
알게 되었다고 하십시오.]
위소보는 그 한마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맞소. 맞소. 내가 오립신 등을 풀어 준 것도 실제에 있어서
는....]
거기까지 말하던 그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아차! 황상께서 친히 성지를 내려 오립신 등을 석방했으나 이 말은 결
코 천지회의 호걸들 앞에서 발설하면 안 된다.)
그는 말머리를 돌렸다.
[나는 황제의 성지를 받들었다고 둘러대겠소. 하지만 그 대매국노를 속
일 수는 없을 것이오.]
전노본은 말했다.
[정말 대매국노를 속이기는 물론 쉽지 않겠지요. 하지만 위 향주께서
한사코 잡아떼면 대매국노가 믿지 않는다고 해도 무얼 어떻게 할 수 있
겠습니까? 가급적 위 향주는 그와 다투지 마시고 일단 운남성과 귀주성
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지지요.]
서천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계책은 참으로 고명합니다. 대매국노는 양심에 찔리는 게 있기 때
문에 소황제가 그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을 알고 있어
서 그런 줄 알고 오히려 몸을 사리기 바쁠 것입니다.]
위소보는 말했다.
[목왕부의 사람들은 내가 공주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
도 그녀를 찔러 죽이려 하니 너무나 의리를 돌보지 않는다고 하겠소.
만약 오립신이 이곳에 있었다면 결코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오.]
기청표는 말했다.
[그들은 위 향주가 몸은 조조의 군영에 있지만 마음은 한나라에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그랬을 것입니다. 우리 천지회와 목왕부는 내기를 걸고
다투고 있지만 오삼계에 대해서 모두 똑같은 적개심올 품고 있으니 유
대홍 같은 쟁쟁한 호걸들이 가만히 있을 리는 없지요.]
목검성과 유대홍 등을 어떻게 구할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의논하였지만
좋은 방도를 생각해 내지 못했다. 한참 상의하다가 위소보는 말했다.
[내가 대매국노를 만나본 후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군웅들이 물러가자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나의 마누라 아가가 대매국노를 죽이러 가지 않았으며 잡히지
도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 헛소문을 퍼뜨렸는지도 모른다.)
그는 구난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가가 보이지 않자 그는 다시 물었다.
[사부님, 사저는 어디에 있습니까?]
구난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오삼계가 그녀를 놓아 주었느냐? 그가....알았다더냐?]
그녀의 표정은 야릇했으며 음성도 약간 떨리고 있었다. 위소보는 의아
해서 말했다.
[오삼계가 무엇을 알았다는 것입니까?]
구난은 잠자코 있다가 잠시 후에 다시 물었다.
[그 매국노의 상처는 어떻더냐?]
[매우 심합니다. 제자는 조금 전에 그를 만나 보았는데 그는 정신을 차
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살아나기는 틀린 것 같습니다.]
구난은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눈살을 찌푸리고 나직이 말했
다.
[반드시 그에게 알려야 한다.]
위소보는 무엇을 알려야 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사부의 얼굴빛이 침통
한 것을 보고 감히 더 묻지 못하고 물러나오고 말았다.
위소보는 아가가 어디에 있는지 한동안 이곳저곳을 찾아보았다. 왕가아
라는 이 궁녀는 평소에 얼굴을 내밀 때가 드물었고 더군다나 분장을 하
여 아름다운 모습을 감추있기 때문에 유의하는 사람이 없어서 안부원의
궁녀들과 태감, 시위들은 모두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어떤 시위가 말
했다.
[왕가아라면 바로 평서왕을 찔러 죽이려고 했던 그 궁녀가 아닙니까?
평서왕이 사람을 내주었습니까? 보지 못했는데요.]
그는 하루 종일 바쁘게 설쳐대느라고 말할 수 없이 피로해서 방으로 돌
아와 목검병과 몇 마디의 한담을 나누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第76章. 진원원의 노래
이튿날 위소보는 오삼계의 상처를 살펴볼 겸 평서왕부로 들어갔다. 오
삼계의 둘째 아들이 나와서 접대하며 흠차대인께서 와 주시어 감사한다
고 말했다. 그는 왕야의 상처는 차도가 없으며 지금은 깊이 잠들었으니
깨울 수 없다고 말했다.
위소보는 하국상에 대해서 물었다. 하국상은 지금 군사를 거느리고 이
곳저곳을 순시하며 민심이 동요하지나 않는지, 성 안에 변고가 일어나
지는 않는지 점검하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오응응의 상처가 어떠냐고
물었으나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위소보는 평서왕부에서 그를 의심하고 적의를 품고 있음을 느낄수 있었
다. 이럴 때 목왕부 사람들을 구하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아가를 구하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었다. 잘못하여 왕부를자극하다
가는 아가의 목숨이 즉시 사라지고 자기의 목숨까지 곤명에서 이슬처럼
사라지게 될 것만 같았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그가 전노본, 서천천, 기청표 등과 상의하고 있는
데 고언초가 방 안으로 들어와 한 명의 늙은 여도사가 뵙기를 청한다고
말했다. 위소보는 이상하여 물었다.
[늙은 여도사라니? 왜 나를 찾는다는 거요? 공양을 받으려는 건가?]
[속하가 그녀에게 어인 일로 찾느냐고 물었더니 그 여도사는 어떤 사람
의 명을 받고 흠차대인께 편지를 갖다드리러 왔다고 하더군요.]
그는 노란 봉투의 편지를 내밀었다. 위소보는 눈살을 찌푸렸다.
[수고스럽지만 고형께서 뜯어 보시오. 어떤 내용이오?]
고언초는 겉봉을 뜯어 한 장의 노란 종이를 꺼내더니 다음과 같이 읽었
다.
[아가가 위험하오....]
위소보는 그 말을 듣자 펄쩍 뛰어 일어나며 급히 말했다.
[뭐, 아가가 위험하다고?]
천지회의 군웅들은 구난과 아가의 일을 모르고 있어서 어리둥절해서 위
소보를 쳐다보았다. 고언초는 말했다.
[편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 편지에는 서명도 없습니다. 위 향
주께서 편지를 보낸 사람을 따라가 함께 아가를 구할 방책을상의하자는
내용입니다.]
[그 여도사는 밖에 있소?]
고언초가 막 대답하려고 할 때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여기 있습니다.]
위소보는 번개처럼 뛰어나갔다. 그가 대문 옆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여도사가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지키던 시위가 큰소리로 의쳤다.
[흠차대신께서 왕림하셨소!]
그 여도사는 몸을 일으키고 허리를 굽혔다. 위소보는 물었다.
[누가 그대를 보냈소?]
[청컨대 대인께서 걸음을 옮겨 주십시오. 그러면 자연 아시게 될 것입
니다.]
[어디로 가오?]
[대인께서는 빈도(貧道)를 따라오세요. 지금은 말씀드리기 거북합니
다.]
[좋소. 내 그대를 따라가리다.]
그는 부르짖었다.
[수레와 말을 준비하시오!]
그 여도사는 말했다.
[대인께서는 수레를 타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놀
라지 않을 것입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여도사를 따라 문을 나서서 함께 수레 위
에 올랐다. 서천천과 전노본 등은 적이 판 함정이 아닌가 싶어 멀리서
그 뒤를 따랐다. 그 여도사가 길을 가리키자 마차는 곧장 서쪽으로 나
아가 이윽고 서문을 나섰다. 위소보는 갈수록 주위가 황량해지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어디로 가오?]
[곧 도달합니다.]
다시 삼 마장 정도 나아가 북쪽으로 꺾어들었다. 길은 협소하여 겨우
한 대의 수레가 지나갈 수 있었다. 잠시 후 조그만 암자 앞에 이르자
그 여도사는 말했다.
[다 왔습니다.]
위소보는 수레에서 내렸다. 암자의 편액에는 석 자가 씌어 있었는데 첫
번째 글자는 삼(三)자이고 나머지 두 자는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고언초 등이 멀리서 따라오고 있었다. 위소보는 약간 마음을 놓으
며 그 여도사를 따라 암자 안으로 들어섰다.
둘러보니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뜰 안에는 몇 그루의 다화가 심어져
있었다. 전당(殿堂) 중앙에는 백의의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었다. 그 신
상의 모습은 지극히 아름다워 장엄한 보상(寶相) 가운데 가장 예뻤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소문에 들으니까 오삼계의 마누라 가운데 사면관음(四面觀音)인지 팔
면관음(八面觀音)인지 하는 여자가 있다고 하던데 저 관음보살처럼 예
쁜지 모르겠구나. 제기랄! 대매국노의 염복이 대단하군.)
그 여도사는 그를 동쪽의 편전(偏殿)으로 모시고 차를 올렸는데일진의
향기가 코에 스몄다. 찻물은 파란 빛이 감돌고 있는 게 바로 최근에 새
로 개발된 용정차(龍井茶)였다. 그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용정 찻잎을 강남에서 이곳까지 운반하였으니 값이 매우 비쌀 것이
다. 암자 안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여도사인지 여승인지 모르지만 어쩌
면 이다지도 씀씀이가 헤플까?)
그 여도사는 다시 쟁반에 여덟 가지의 간식을 담아 내왔다. 백자로 된
접시에 송자당(松子糖), 소호도고(小湖桃 =米+ ,떡 고로 바꿨음),핵도
편(核桃片), 매괴고( 塊 ), 당행인(糖杏仁), 녹두고(緣豆 ), 백합수(百
合 ), 계화밀전양매(桂花蜜餞楊梅) 등 모두 소주에서 쌀로 만든 간식인
데 정성을 들여 만든 것이었다. 이런 강남 땅의 간식을 위소보는 양주
의 기녀원에서 종종 먹어 보았다. 기녀와 하룻밤 자려고 찾아온 손님에
게 주모는 종종 이와 같은 간식을 대접했는데 위소보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훔쳐먹기도 했었다. 운남에 있는 작은 암자에서 옛친구
와 다름없는 그 간식들을 대하게 되니 마음속으로 크게 기뻤다.
(내가 다시 양주의 여춘원으로 돌아간 기분이군.)
그 여도사는 간식을 바치고 즉시 물러갔다. 차 탁자 위에는 구리로 만
들어진 향로에서 푸른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타고 있는
향은 아주 유명하고 값이 비싼 단향(檀香)이었다.
위소보는 물건을 알아볼 줄 알았다. 태후의 자녕궁에 갈 때마다 그와
같은 고급 단향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순간 그는 속으로 놀라 부르짖
었다.
(앗! 야단났다. 늙은 갈보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벌떡 몸을 일으키는데 문 밖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한
여인이 걸어들어와 위소보에게 합장하며 말했다.
[출가인 적정(寂靜)이 위 대인께 인사올립니다.]
맑고 부드러운 그 음성은 소주의 억양이었다. 그 여인은 사십 세 전후
의 나이에 연노란색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눈썹과 눈동자는 그린 듯이
수려하고 용모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위소보는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처음 보았다. 그는 손에 찻잔을 들고
입을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그 여인은 미소지었다.
[위 대인께서는 앉으시죠.]
위소보는 넋을 잃고 있다가 곧 말했다.
[예, 예.]
위소보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손에 들린 찻잔이 흔들려
옷자락을 적시고 말았다.
이 아름다운 여인은 천하의 남자들이 자기를 보기만 하면 하나같이 넋
을 잃는 광경을 수없이 많이 보아서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위소보는 나이 어린 소년에 불과한데도 자기를 보자마자 얼이
빠지는 것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말했다.
[위 대인께서는 나이는 젊어도 재주가 대단하시더군요. 옛날 사람 감라
(甘羅)는 십이 세에 승상(丞相)이 되었다고 하던데 위 대인께서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아, 서시인지 양귀비인지 하는 여인들도 반드시
그대에게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여인은 소맷자락 속에 있는 옥과 같은 손으로 입술을 가리
고 방긋 웃는데 온갖 교태가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곧 엄숙한 얼굴로
말했디.
[서시나 양귀비는 모두 팔자가 센 여자들이지요. 저는 이런 용모를 타
고나 천하 창생을 해치고 고달프게 했으니 그 죄가 적지 않습니다. 그
래서 청등고불(淸橙古佛)을 모시고 애써 참회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목탁이 깨어져라 두드리고 불경이 해어지도록 읊어도 옛날의 죄
를 만분의 일도 속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위
소보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미소짓
는 것을 볼 땐 마음이 환해지고 눈물을 흘리자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
게 하는 매력이 흘러넘쳐 그녀를 측은히 여기는 마움이 솟구쳐 올랐다.
그녀가 어떤 내력을 지녔는지도 모르면서 가슴 가득히 뜨거운피가 끓어
올라 그녀를 위해서라면 몸이 가루가 된다 해도 기꺼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가슴을 치고 몸을 일으키면서 격앙된 음성
으로 말했다.
[누가 그대를 업신여겼습니까? 내가 가서 목숨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그대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해내지 못한
다면 저의 머리통을 잘라 그대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는 오른손으로 자기 목을 베는 시늉을 하였다. 이와 같은 대장부의
기개를 보여 준 적은 일찍이 한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사실 이때 그는
조금도 거짓으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아름다운 여인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흐느끼며 말했다.
[위 대인께서는 하늘처럼 커다란 의리와 정을 지니신 분이셨군요. 저는
정말 어떻게 보답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그녀는 무릎을 꿇고 살포시 큰절을 하는 것이었다. 위소보는 부
르짖었다.
[안됩니다. 안됩니다.]
그는 즉시 엎드려 그녀를 향해 쿵쿵쿵, 하니 몇 번 큰절을 올리고 말했
다.
[그대는 선녀가 하강한 것이고 관음보살이 현신하신 몸이시니 마땅히
제가 그대에게 큰절을 해야 옳습니다.]
그 아름다운 여인은 나직이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저의 수명을 감소시키는 일입니다.]
그녀는 손을 뻗쳐 그의 두 괄을 받쳐들더니 가볍게 부축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위소보는 그녀의 뺨에 몇 방울의 눈
물이 맺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눈물방울은 수정 같이 맑고 진주처럼
찬연히 빛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소맷자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가볍게
닦아 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했다.
[울지 마십시오. 울지 마십시오.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우리들은 반
드시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여인은 나이로 보면 그의 어머니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용모, 행동거지, 말투, 표정에서 교태가 뚝뚝 떨어지고
가냘퍼 보여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위소보
는 다시 물었다.
[그대는 도대체 무슨 일로 괴로워하시오?]
[위 대인께서 편지를 보시고 즉시 왕림해 주시니 저는 실로 고마울 따
름입니다.]
위소보는 아이쿠, 하며 자기 이마를 주먹으로 치며 말했다.
[정말 멍청하다. 바로 아가 때문에 왔거늘....]
그는 멍하니 그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다가 비로소 큰 목소리로 말했
다.
[그대는 아가의 어머니이시군요?]
[위 대인은 정말 총명하시군요. 제가 말하지 않았는데 제대로 짐작해
내셨군요.]
[그거야 쉽지요. 그대들 두 사람의 모습은 매우 닮았습니다. 하지
만.... 아가 사저는.... 그대의 아름다움에 미칠 수 없습니다.]
그 아름다운 여인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대는 아가를 사저라고 부르나요?]
[예, 그녀는 저의 사저입니다.]
그는 조금도 숨기지 않고 어떻게 하다가 아가를 알았고, 어떻게 그녀에
의해 팔뼈가 어긋났는지, 어떻게 구난을 사부로 모시고 어떻게 곤명으
로 오게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자기는 아가에게 많은 정을 쏟
고 있으나 그녀는 자기를 조금도 안중에 두지 않는다는 속사정까지 솔
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구난의 신세와 자기가 오삼계에게 불리한
일을 하려는 사실은 사태가 워낙 중대하여 슬쩍 감추고 들먹이지 않았
다.
아름다운 여인은 조용히 듣더니 그의 말이 끝나자 한숨을 내쉬며 나직
이 읊었다.
[제가 어찌 큰일에 간섭할 수 있겠나이까? 영웅은 정이 많은 것이 당연
하고 아름다운 여인은 화근 덩어리라고 했습니다. 위 대인께서는 앞으
로 큰일을....]
[틀렸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은 화근 덩어리라는 말을 나는 이야기꾼에
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달기니 양귀비니 하는 미녀들이 나라를 해쳤다
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못난 남자만이 미녀의 유혹에 빠져 나라
를 망치는 것입니다. 예컨대 오삼계가 진정으로 명나라에 층성을 다했
다면 설사 열여덟 명의 진원원을 주었다고 해도, 오삼계는 청나라에 투
항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 아름다운 여인은 몸을 일으키더니 날아갈 듯이 살포시 절을 하고 말
했다.
[위 대인께서 밝게 보시니 감사합니다. 천고에 드문 억울한 누명을 쓴
천첩(賤妾)을 위해 변명해 주시니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위소보는 재빨리 반례하고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그대....그대는....그대 는....아....아이쿠, 그렇군요. 저는 정말 너
무나 멍청합니다. 그대가 만약 진원원이 아니라면 천하에 어찌 당신 같
은 미녀가 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대는 평서왕의 왕비가 아
니십니까? 어째서 이곳에서 불도에 전념하고 계신지요? 아가 사저는 어
떻게 하여....그대의 딸이 되었는지요?]
그 아름다운 여인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천첩이 바로 진원원입니다. 이야기하자면 깁니다. 그러나 천첩은 첫째
로 위 대인께 부탁이 있어서 모든 일을 속일 수 없고, 둘째로 방금 대
인께서 천첩이 억울한 누명을 쓴 데 대해서 변명해 주시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감격했습니다. 이십여 년 동안 천첩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욕을 얻어먹었습니다. 나라를 망하게 한 큰 죄는 모조리 천첩의
머리 위에 떨어졌지요. 당금 세상에서 오로지 두 분의 재자(才子)만이
천첩이 억울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뿐입니다. 한 분은 대시인(大詩
人) 오매촌(吳梅村) 오 재자(吳才子)
이시고, 다른 한 분은 바로 위 대인입니다.]
사실 위소보는 국가의 대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진원원
이 억울한 누명을 썼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놀랍고 절세적
인 요염한 용모를 대하자 마음이 기울어져 좋은 말올 골라 아부를 해댔
을 뿐이었다. 그는 오삼계를 매우 미워하고 있었으며, 또 그녀가 아가
의 모친이니 그녀에게 천 가지 만 가지 잘못이 있다 해도 그와 같은 잘
못을 모두 오삼계에게 덮어씌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자기를 재자(才子)라고 칭하는 소리를 들으니 크게 기뻐서 재빨
리 말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저는 글자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나를 보고 재
자라 칭하시려면 그 호칭에 '개방귀'라는 말을 보태야 할 것입니다. 즉
개방귀 같은 재자 위소보라고 해야겠죠.]
진원원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시사와 문장을 잘 짓는 사람들은 조그만 재자에 불과합니다. 견식이
있고 담량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큰 재자이지요.]
위소보는 칭찬의 말을 듣자 전신의 뼈마디가 녹신거리는 것만 같아 속
으로 생각했다.
(이 천하제일의 미녀가 나보고 큰 재자라고 한다. 하하하, 원래 나의
재질이나 감정은 그렇게 낮지 않았다. 제기랄!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이후 이와 같은 칭찬은 처음 듣는구나.)
진원원은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대인께서는 걸음을 옮기시지요. 천첩이 지금까지의 사정을 자세히 말
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는 그녀를 따라 조그만 자갈들이 깔린, 꽃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 어
느 조그만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탁자도 의자도 없었다. 바닥에
두 개의 방석이 놓여 있고 벽에 한 폭의 액자가 걸려 있는데 액자에는
글자가 빽빽이 들어 차 있어 글자 수가 적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옆에
는 한 개의 비파가 걸려 있었다.
[대인께서는 앉으십시오.]
위소보가 방석 위에 앉자 진원원은 벽에 걸린 비파를 내려 품에 안고
방석에 앉더니 벽에 걸린 그 한 폭의 글을 지적하며 나직이 말했다.
[저것은 오매촌 재자가 천첩을 위해 지은 한 수의 시인데 원원곡(圓圓
曲)이라고 하지요. 오늘 이와 같은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 대인을 위해
한 곡조 퉁겨 볼까 합니다. 대인의 귀를 더럽히지 않을까 염려되는군
요.]
위소보는 크게 기뻐서 말했다.
[정말 잘되었습니다. 정말 잘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몇 마디의 노
래를 부르고 난 후에는 반드시 설명을 해주어야 합니다. 이 개방귀 재
자는 학문이 형편없답니다.]
[대인께서는 너무나 겸손하십니다.]
그녀는 즉시 현을 다듬었다. 딩동댕, 하고 및 번 통기더니 다시 말했
다.
[이 곡은 퉁기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니 제대로 퉁기지 못하더라도 이해
하십시오.]
[겸손해 할 것 없습니다. 설사 잘못 통겼다 하더라도 저는 모를 것입니
다.]
그녀는 자세를 가다듬고 비파를 몇 번 퉁기더니 노래부르기 시작했다.
정호당일기인간(鼎湖當日棄人間)
파적수경하옥관(破敵收京下王關)
동곡육군구고소(慟哭六軍俱縞素)
충관일노위홍안(衝冠一怒爲紅預)
진원원은 이 네 마디를 부르더니 말했다.
[이것은 과거 숭정천자께서 붕어하시고 평서왕과 청나라 군사가 연합하
여 이자성(李自成)을 패배시키고 북경으로 쳐들어을 때 관병들이 모두
황제를 위해 상복을 입었으며, 평서왕이 출병한 것이 바로 이 불길한
사람 때문이라는 내용입니다.]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그토록 아름다우시니 오삼계가 그대를 얻기 위해 대청 나라에
투항한 것은 오히려 당연합니다. 만약 이 위소보였다 해도 역시 투항했
을 것입니다.]
진원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나이 어린 아이 역시 나를 희롱하려고 드는 것인가?)
그러나 그의 얼굴빛이 엄숙한 것을 보고서야 그가 진심에서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을 깨달았다. 불현듯 그녀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홍안유락비오련(紅預流落非吾戀)
역적천망자황연(逆賊天亡自荒諒)
전소황건정흑산(電掃黃巾定黑山)
곡파군친재상견(哭罷軍親再相見)
그녀는 여기서 다시 잠시 노래를 멈추고 말했다.
[이 시구는 왕야가 이자성을 패배시킨 일을 말하고 있지요. 시에서는
이자성이 큰일을 도모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은 왕야가 쳐들어
가서 망한 것이 아니고 이자성이 북경을 얻고나서 하는 짓이 황당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왕야는 이 한 구절을 보고 매우 불쾌하게
여겼답니다.]
[그렇겠지요. 그가 어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곡에서는 분명히 이자
성을 패배시킨 것이 결코 그의 공로가 아님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진원원은 말했다.
[이제부터는 천첩의 신세를 읊게 됩니다.]
그녀는 다시 노래를 불렀다상견초경전보가(相見初經田寶家)
후문가무출여화(侯門歌舞出女花)
후허장척리공거(侯許將戚里空車)
등취장군유벽거(等取將軍油壁車)
가본고소완화리(家本姑蘇浣花里)
원원소자교라기(圓圓小字嬌羅綺)
몽향부차원리유(夢向夫差苑裏遊)
궁아옹입군왕기(宮娥擁入君王起)
전신합시채련인(前身合是抹蓮人)
문전일편횡당수(門前一片橫塘水)
음성은 부드럽고 아름답게 흐르고 비파소리는 그윽히 울려퍼지고 있어
마치 미풍이 이는 연못물에 조그만 파문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진원원
은 나직이 말했다.
[이것은 천첩을 서시에 견준 것인데 지나친 칭찬이지요.]
[견준 것이 잘못되었습니다. 잘못되었어요.]
이 말에 진원원은 어리둥절해졌다. 위소보는 계속 말을 했다.
[서시를 어찌 그대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진원원은 약간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위 대인께서는 농담을 잘하시는군요.]
[결코 농담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지요. 저는 서시
가 절강성 소흥부(紹與府) 제기(諸己)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
니다. 소흥의 여인들은 얼굴은 아름다우나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돼지
멱 따는 것 같다는 속담이 있으니 어찌 그대 같은 소주 여인의 음성처
럼 간드러지고 부드럽겠습니까?]
진원원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하, 그와 같은 속담이 있었군요? 그러나 오왕(吳王) 부차(夫差) 역
시 소주 사람인데 어찌해서 소흥의 여인 서시를 좋아했을까요?]
위소보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오왕 부차의 귀가 잘못됐나 보죠.]
진원원은 입을 가리고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두 눈동자는 호수에 물결
치듯 찰랑거리고 입술을 살짝 벌리고 웃는데 모든 근심을 모조리 떨쳐
버린 듯하지 않은가? 그 바람에 온 방안이 교태스럽고도 아름다운 기운
으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위소보는 온몸이 나른해지고 취해 와 자기
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횡당쌍장거여비(橫塘雙奬去女旿)
하처호가강재귀(何處豪家强載歸)
차제기지비박명(此際猜知非薄命)
차시지유루첨의(此時只有淚沾衣)
훈천의기연궁액(薰天意氣連宮掖)
명모호치무인석(明 晧齒無人惜)
탈귀영항폐양가(奪歸永巷閉良家)
교취신성경좌객(敎就新聲傾座客)
여기까지 노래부르고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천첩은 본디 풍상을 겪은 몸입니다. 속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
다....]
[풍상을 겪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천첩은 본디 소주의 기녀 출신이었습니다....]
위소보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거 정말 묘하군요!]
진원원은 약간 화가 난 얼굴빛으로 나직이 말했다.
[그것은 천첩의 팔자가 드세기 때문이죠.]
위소보는 신이 나서 말했다.
[그대와 나는 뜻이 같고 가는 길도 같군요. 저 역시 풍상을 겪었습니
다.]
진원원은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말을 해줬는데도 풍상을 겪었다는 말뜻을 모르는구나.)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도 기녀원 출신이고 저 역시 기녀원 출신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
은 소주 사람이고 한 사람은 양주 사람이군요. 저의 어머니는 바로 양
주의 여춘원에서 기녀 노릇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그대와 비교한다면 천양지차입니다.]
진원원은 몹시 놀라며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 말은 농담이시지요?]
[농담이라뇨? 아, 저는 그 동안 너무나 바빴습니다. 진작 사람을 보내
어머님을 모셔와 기녀 노릇을 못하도록 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저는
어머니가 여춘원에서 매우 재미있게 사시는데 북경으로 모셔와 오히려
즐겁지 못한 여생을 보내게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영웅은 출신이 천한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위 대인께서는 광명정대하
시고 소탈하시며 조금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니 그야말로 영웅의 본색
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그대에게만 이야기했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번도 말하지 않았습
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더러 후레자식이라고 욕할 텐데 그 노릇을 어떻
게 감당한단 말입니까? 더욱 아가 앞에서는 그 사실을 들먹일 수가 없
었습니다. 그녀는 그렇지 않아도 나를 업신여기고 있는데 그와 같은 일
을 알면 아마 영원히 나를 우습게 보고 멸시할 것입니다.]
[위 대인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천첩은 결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실 아가.... 그녀의 어머니 역시 명문의 규수는 아니지
요.]
[어쨌든 그녀에게 말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기녀를 가장 증오합니다.
기녀들을 나쁘게만 보고 있어요.]
진원원은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말했다.
[그녀는....그녀는 기녀원의 여자가 가장....가장 나쁘다고 하던가요?]
[그대는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아가는 결코 그대를 가리킨 것이 아닐
것입니다.]
진원원은 처연하게 말했다.
[그녀는 물론 나를 가리켜 말하지는 않았겠지요. 아가는 내가 그녀의
어머니인 줄을 모르고 있답니다.]
위소보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녀가 모른다구요?]
[그녀는 모릅니다.]
진원원은 고개를 돌리더니 넋을 놓고 생각에 삼겨 있었다. 잠시 후에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숭정 황제의 황후 주(周)씨 또한 소주 사람입니다. 숭정 황제는 전 귀
비(田貴妃)를 총애했지요. 황후는 전 귀비와 많이 싸웠습니다. 황후의
부친 가정백(嘉定伯)이 저를 기녀원에서 사서 궁 안으로 들여보냈는데
전 귀비와 황제의 총애를 나눠 가지기를 바랐지요....]
[정말 묘책이로군요. 전 귀비는 야단이 났겠구만요.]
[그러나 야단이 나지 않았어요. 숭정 황제는 나라 일만 근심하고 여색
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궁에서 머무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황상의 분부에 의해 궁에서 내보내졌지요.]
위소보는 큰소리로 말했다.
[이상하군요. 저는 숭정 황제는 눈은 있어도 눈알이 없어 그저 간신만
믿고 원숭환(袁崇煥)과 같은 층신을 죽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남자를 보는 눈이 없을 뿐 아니라 여자를 보는 눈도 없었군
요. 그대와 같은 사람도 마다했으니, 쯧쯧쯧!]
그는 연신 혀를 차는데 마치 천하에서 가장 기이한 일을 들었다는 표정
이었다. 진원원은 말했다.
[남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부귀공명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금
은보화를 좋아하죠. 그리고 황제들은 그저 어떻게 하면 국가 사직을 보
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마련이지요. 그러니까 모든 남자들이 아름
다운 여자를 좋아한다고는 볼 수 없답니다.]
[저는 부귀공명도 좋아하고 금은보화도 좋아하고 아름다운 여자는 더욱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황제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게 시킨다 해
도 그 노릇을 하지 못할 테니까요. 하! 이 곤명성에는 그런 노형이 있
죠. 천하에서 가장 높은 벼슬을 하고 천하에서 으뜸가는 갑부이고 천하
에서 제일 가는 미녀를 맞아들였는데도 만족할 줄 모르고 황제 자리에
앉아 보려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다.]
진원원은 안색이 변해 물었다.
[평서왕을 말하는 것인가요?]
[나는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간에 당신 진원원도 아니고
이 위소보도 아니랍니다.]
진원원은 말머리를 돌렸다.
[이 곡 가운데 뒷부분은 내가 어떻게 평서왕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이야
기하게 됩니다. 그는 가정백에게 저를 달라고 해서 데려갔지요. 그러나
그 자신은 산해관에 가서 변방을 지켜야 했으므로 나를 북경의 그의 집
에 데려다 놓았지요. 얼마 후에 틈왕....이자성이 북경성으로 쳐들어왔
지요.]
그녀는 다시 노래를 불렀다.
좌객비상홍일모(座客飛觴紅日暮)
일곡애현향수소(一曲哀弦向誰訴)
백석통후최소년(白晳通侯最少年)
간취화지루회고(揀取花枝屢廻顧)
조휴교조출번롱(早携嬌烏出樊籠)
대득은하기시도(待得銀河幾時渡)
한살군서저사최(恨殺軍書底死催)
고류후약장인오(苦留後約將人誤)
상약은심상견난(相約恩深相見難)
일조의적만장안(一朝蟻賊滿長安)
가련사부루두류(可憐思婦 頭柳)
인작천변분서간(認作天邊粉絮看)
거기까지 노래하더니 비파를 멈추고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위소보
는 곡이 이미 끝난 줄 알고는 손뻑을 치며 갈채를 보냈다.
[끝났군요! 정말 노래가 좋습니다. 정말 노래가 절묘합니다. 정말 대단
합니다.]
진원원은 처량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만약 그때 내가 죽었다면 곡은 여기에서 자연히 끝나게 되었겠지요.]
위소보는 얼굴을 붉히고 속으로 생각했다.
(제기랄! 나는 학문이 없어서 언제나 개망신을 당한단 말이야! 이자성
이 북경으로 쳐들어가자 나의 사조(師祖) 격인 숭정 황제의 곡은 모두
다 끝났다고 할 수 있어도 진원원의 곡조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 아닌
가?)
진원원은 나직이 말했다.
[이자성은 저를 빼앗아 갔지요. 후에 평서왕이 다시 나를 빼앗았어요.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한 가지 물건에 지나지 않아요. 힘이 센
사람은 누구라도 빼앗아 갈 수 있있죠.]
그녀는 다시 노래를 불렀다.
편색녹주위내제(遍索綠珠圍內第)
강호강수출조란(强呼絳樹出雕欄)
약비장사전사승(若非壯士全師勝)
쟁득아미필마환(爭得蛾眉匹馬還)
아미마상전호진(蛾眉馬上傳呼進)
운빈부정경혼정(雲賀不整驚魂定)
랍거영래재전장(蠟炬迎來在戰場)
제장만면잔흥인(啼粧滿面殘紅印)
전정소고향진천(專征簫鼓向秦川)
금우도상거천승(金牛道上車千乘)
사곡설심기화루(斜谷雪深起晝樓)
산관일락개장경(散關日落開粧鏡)
전래소식만강향(傳來消息滿江鄕)
오구홍경십도상(烏鉤紅經十度霜)
교곡기사련상재(敎曲技師憐尙在)
완사여반억동행(浣紗女柑意同行)
구소공시함니연(舊果公是銜泥燕)
비상지두변봉황(飛上枝頭變鳳皇)
장향존전비노대(長向尊前悲老大)
유인부서천후왕(有人夫壻擅侯王)
그녀는 '천후왕'이란 석 자를 부르고 다시 멍하니 넋을 잃었다. 이번에
위소보는 감히 그녀에게 노래가 끝났느냐고 묻지 못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노래가 끝났다는 말을 하기 전에는 묻지 말아야지. 그래야만
창피한 꼴을 당하지 않는다.)
이때 그녀는 나직이 하소연하는 투로 말했다.
[저는 평서왕을 따라 사천성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는 평서왕에 봉
해졌습니다. 이 소식이 소주에 전해지자 옛날 기녀원의 자매들은 하나
같이 부러워하며 저의 운이 좋다고 했다나요. 그녀들은 나이가 많았지
만 여전히 기녀원에서 그 짓을 하고 있었답니다.]
[제가 여춘원에 있을 때 그녀들이 '동방야야환신인(洞房夜夜換新人)'이
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진원원은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밤마다 새로운 남자를 끼고 잔다'는
그 말을 하는 위소보가 비웃는 표정을 짓지 않자 나직이 한숨을 쉬었
다.
[대인께서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녀들의 고초를 모른답니다.]
그녀는 비파를 다시 퉁기며 노래를 불렀다.
당시지수성명루(當時只受聲名累)
귀척명호경연치(貴戚名豪競延致)
일곡명주만각수(一斛明珠萬斛愁)
관산표박요지세(關山漂泊腰肢細)
착원광풍표락화(錯怨狂風飇落花)
무변춘색래천지(無邊春色來天地)
당문경국여경성(當聞傾國與傾城)
번사주랑수중명(飜使周郎受重名)
처자기응관대계(妻子猜應關大計)
영웅무나시다정(英雄無奈是多情)
전가백골성회토(全家白骨成灰土)
일대홍장조한청(一代紅粧照汗靑)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비파 퉁기기를 멈추고 목메인 음성으로말했다.
[오매천은 내가 비록 명성을 떨쳤으나 마음은 괴롭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미녀는 화근 덩어리이고
대명나라의 강산을 그르쳤다고 했지만 오 재자는 가냘픈 이 몸이 여자
에 지나지 않아 어떤 능력도 없었음을 알고 있었지요. 그리고 옳고 그
른 것은 모두 남자들이 책임질 일이라고 읊은 것입니다.]
[그렇지요. 대청나라의 수천 수만이나 되는 병마가 공격해 들어오는데
그대같이 연약한 미녀가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이와 같이 비파를 퉁기고 말을 해주니 소주의 이야기꾼이 창을
하는 것과 비슷하구나. 내가 그녀를 상대로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 말
하는 것을 몇 번 거들어 주었으니 이야기꾼의 조수가 된 셈이다. 만약
우리 두 사람이 양주의 찻집으로 가서 사람을 모으고 노래를 부르면 양
주성 안이 떠들썩하게 될 것이고 찻집으로 몰려드는 사람은 홍수처럼
불어날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녀의 이름 덕분에 크게 명성을 떨치게
될 텐데....)
그가 이와 같은 헛된 망상에 잠겨 있을 때 그녀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군불견(君不見)
관왜초기원앙숙(館娃初起鴛鴦宿)
월녀여화간부족(越女如花看不足)
향경진생조자제(香徑塵生島自啼)
첩랑인거태공록(堞廊人去笞空綠)
환우이궁만리수(換羽移宮萬里愁)
주가취무고량주(珠歌翠舞古梁州)
위군별창오궁곡(爲君別唱吳宮曲)
한수동남일야류(漢水東南日夜流)
그녀의 노랫소리는 길게 여운을 남기었고 비파 가락은 점점 높아지기
시작하더니 차차 노랫소리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야 비파소리
가 점차 늦추어져 마치 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끝
내 조용해지고 말았다. 진원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흐느꼈다.
[못난 꼴을 보였습니다.]
몸을 일으켜 비파를 벽에 걸고 다시 방석에 앉으며 말했다.
[곡의 마지막 한 토막은 바로 과거 오왕 부차가 죽임을 당하고 나라가
망하게 된 일을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 당시에 저는 이해되지 않는
게 있었습니다. 저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어째서 오나라 궁전을 들먹이
는지 몰랐던 거예요. 나를 서시와 비유한다 해도 이미 들먹인 바 있지
않아요? 오나라 궁전? 오나라 궁전? 혹시 평서왕의 왕궁을 가리키는 것
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근년에 이르러서야 저
는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어요. 왕야는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으며 극도
로 사치스런 생활을 누리고 있어요. 아무래도.... 아무래도 훗날....
아! 나는 그에게 몇 번이나 권했지만 오히려 그를 화나게 하는 데 그쳤
어요. 그래서 나는 삼성암(三聖庵)에 출가하여 머리를 기른 모습으로
불도를 닦으며 한평생 지은 죄를 참회하여 그저 모두들 무사하기를 기
원했어요. 그런데 아가가.... 아가가 그런 짓을 할 줄 어떻게 알았겠어
요. 아가....]
그녀는 흐느끼느라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
第77章. 이자성의 출현
위소보는 한참 동안 노랫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에 마음이
흘려 찾아온 이유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그녀가 아가를 들먹이자 비로
소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아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녀가 정말 평서왕을 찔렀습니까? 그녀는
그대의 딸이니 왕야의 딸도 되지 않습니까? 아이쿠, 야단났군! 야단났
어.]
진원원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야단났다니요?]
위소보는 얼버무렸다.
[아....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아가가 평서왕의 딸이라면 기녀의 아들인 자기보다 훨씬 고귀한
신분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었다. 진원원은 말했다.
[아가는 태어난 지 두 살 되던 해, 어느 날 밤에 갑자기 실종됐어요.
왕야는 사람을 보내 온 성 안을 뒤졌지만 종적을 찾지 못했어요. 저는
의심을 하게 되었는데.... 의심을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위소보는 물었다.
[무엇을 의심했다는 말입니까?]
[저는 왕야의 원수가 딸을 훔쳐가서 위협을 하거나 돈이라도 긁어내기
위해서 농간을 부릴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어요.]
[왕부에는 그토록 많은 위사와 가장(家將)들이 있는데 귀신도 모르게
아가 사저를 훔쳐가다니, 그 사람의 재간은 대단하군요.]
[그렇지요. 당시 왕야께서는 크게 성질을 부려 위사의 우두머리 두 명
을 죽이고 곤명성의 제독과 지부를 파면시켰지요. 며칠 동안 조사를 했
으나 흔적을 찾지 못하자 왕야가 다시 사람을 죽이려고 할 때 제가 그
를 달랬지요. 이십여 년간 시종 아가의 소식이 없어서 나는 이미 그 애
가 죽은 줄로 알았어요.]
[아가의 성이 진씨인 것도 무리가 아니군요. 그녀는 그대의 성을 따른
것이군요.]
진원원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그녀가 진가라고 말하던가요? 그녀가 어떻게 알았죠?]
위소보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늙은 매국노가 밤낮으로 누가 자기를 해칠까봐 엄하게 경계했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왕부에서 갓난아기를 훔쳐간다는 것은 그를 찔러
죽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노릇이었을 것이다. 천하에 구난 사부를 제외
하고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그녀를 훔쳐간 그 사람이 그녀에게 말해 주었겠지요.]
진원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요. 하지만....하지만 어째서 그녀에게 성이....성이....]
[성이 오씨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구요? 흥, 평서왕의 성은 영광스럽다고
볼 수가 없지 않겠어요.]
진원원은 멍하니 넋을 잃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말을 못 들
은 것 같았다. 위소보는 물었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는 언제나 그녀를 그리워했으며 하늘이 불쌍히 여기시어 그녀가 죽
지 않고 언젠가 다시 그녀와 만나게 되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어제 오
후 왕부에서 소문이 전해졌어요. 왕야가 자객을 만나 중상을 입었다구
요. 저는 재빨리 왕부로 가서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알아보았어요. 왕
야가 자객을 만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상처는 입지 않았어요.]
위소보는 깜짝 놀라 외쳤다.
[뭐라구요? 그는 중상을 입은 척 꾸몄나요?]
[왕야는 자기가 중상을 입은 것처럼 꾸며서 상대방이 경거망동하도록
유인하여 일망타진할 계획이죠.]
[저는....저는 너무나 멍청합니다. 진작 그와 같은 사실을 알아야 했는
데 미처 몰랐군요.]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매국노는 과연 나를 의심하고 있구나.)
진원원은 말했다.
[저는 자객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왕야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저
를 상방으로 데리고 갔어요. 침대 위에 한 소녀가 앉아 있었는데 손발
에 쇠고랑을 차고 있었어요. 저는 대번에 저의 딸이라는 것을 알았어
요. 그녀는 내가 젊었을 때와 똑같은 얼굴이었지요. 그녀는 나를 발견
하더니 물었어요. '그대가 나의 어머니인가요?'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왕야를 가리켰지요. '이 분은 아버님이시다.' 아가는 노해 말했죠. '그
는 대매국노이지 저의 아버지가 아니에요. 그는 저의 아버지를 죽였어
요. 저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거예요' 왕야는 그녀에게 물었죠. '너
의 아버지는 누구냐?' 아가는 말했어요. '나는 몰라요. 사부님께서는
내가 어머니를 만나보면 어머님은 자연히 나에게 알려줄 것이라고 했어
요.' 왕야는 그녀의 사부가 누구인지 물었는데 그녀는 말하지 않았어
요. 나중에 그녀는 사부의 명을 받고 왕야를 찔러 죽이려고 들어왔다고
했어요.]
위소보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된 사연인지 헤아려 볼 수 있었다. 구
난 사부는 오삼계를 극도로 중오했다 그를 죽이는 것만으로는 분을 풀
길이 없어 그의 딸을 훔쳐가 무공을 가르쳐 그녀로 하여금 자기 부친을
찔러 죽이도록 한 것이다. 위소보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갔다.
(그렇다. 사부님께서는 언제나 아가에게 차갑게 대했다. 그녀에게 무공
초식을 가르쳐 주면서도 내공을 전수하지 않았다. 아가는 초식은 고명
했으나 너무 잡다하여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징관 사질은 그
토록 무학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녀의 문파를
알아내지 못했으니! 음, 사부는 그녀를 철검문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
은 것이다. 이 위소보야말로 철검문의 직계 제자인 것이다.)
구난이 원수를 갚는 방법을 매우 악랄하게 꾸민 것을 상기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진원원은 말했다.
[그녀의 사부는 먼 앞날을 내다보고 계책을 세웠어요. 왕야를 극도로
증오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계책을 안배한 것 같아요. 만약 아가가 왕
야를 찔러 죽인다면 큰 원한을 갚은 것이 되겠죠. 그러나 찔러 죽이는
데 실패하더라도 왕야는 자기를 찔러 죽이러 온 사람이 바로 친딸이라
는 것을 알게 되면 속으로 괴로워할 것입니다.]
[그녀는 왕야를 찔러 상처를 입히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대의 가족이 모
이지 않았습니까? 아가에게 이 사연을 설명하면 모두에게 기쁜 일이 되
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천지신명에게 감사를 드려야겠지요.]
[아가가 그대의 친딸이라는 것은 누구나 한번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대와 같은 침어낙안(沈魚落雁)하신 어머니가 아니라면 그녀처럼 수화폐
월(羞花閉月)한 딸을 낳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형용할 때 되풀이해서 침어낙안과 수화폐월이
라는 여덟 글자를 써먹었다. 다른 문자는 말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말
을 이었다.
[왕야께서 아가를 놓아주지 않는다면 설마하니 그녀를 벌한다는 것인가
요? 그녀는 두 살 때 유괴되었으니 그녀가 어떻게 스스로의 신세를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그녀를 탓한단 말입니까?]
[왕야는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네가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너는 나
의 딸이 아니다. 네가 나의 친딸이라 해도 이와 같이 윗사람을 범하며
무법천지로 날뛰는 사람을 이 세상에 남겨 둘 수 없다.'그 말을 하며
그는 자기 코를 어루만졌죠.]
[그는 자기 코를 만지는 버릇이 있나요?]
진원원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가 코를 만지면 반드시 사람을 죽였으며 한 번도 예외가 없었어요.]
위소보는 어이쿠, 하고 말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죠? 그가 아가를...아가를 죽였나요?]
[아직은 죽이지 않았어요. 왕야는.... 배후에서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
지 알아내고 또 아가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려고 하는 거예요.]
[왕야는 의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때도 그대가 아
가의 어머니인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는 어찌하여 못 알아 본다는 말
입니까? 아가가 그를 찔러 죽이려고 하자 매우 화가 난 모양이군요.]
그는 침중한 안색으로 말했다.
[우리는 빨리 아가를 구출해야 합니다. 만약 왕야가 다시 몇 번 코를
만지면 큰일을 망치게 되죠.]
[천첩이 대담하게 대인을 이곳으로 모신 것은 이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
입니다. 대인은 황상이 보내신 흠차대신이니 왕야께서는 반드시 그대의
체면을 세워 주려고 할 것입니다. 아가가 공주의 궁녀로 가장했으니 오
로지 대인께서 나서서 공주가 사람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왕야는
거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위소보는 오른손 식지로 끊임없이 자기 이마를 툉기며 말했다.
[멍청이, 멍청이, 속임수에 완전히 당하고 말았어.]
그는 이어 말했다.
[그대의 계책은 제가 이미 생각해 보았을 뿐만 아니라 이미 써먹었습니
다. 그런데 대....대왕께서 수단이 높아 이 멍청이는 그만 당하고 말았
습니다. 나는 이미 왕야에게 사람을 달라고 했고 왕야는 이미 내주었습
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아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사연을 낱낱이 이야기했다.
[하국상이라는 그 녀석은 미리 계책을 짜 놓고 있었습니다. 왕부 앞 수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공주의 궁녀를 저에게 내주었
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다시 사람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그 녀석은 틀림없이 벼슬아치가 흔히 써먹
는 말투로 다음과 같이 말하겠지요. '위 대인, 소장을 희롱하시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공주의 그 궁녀가 왕야를 찔러 죽이려고 했지만
소장은 대인의 얼굴을 보아서 왕야께 곤장을 맞을 각오를 하고 이미 대
인에게 내주어 데려가게 하지 않았습니까? 왕부 앞의 수천 수백이나 되
는 사람들이 증인입니다. 왕야께서는 대인께서 그 궁녀를 엄히 처분하
여 지시한 사람을 알아내기를 바란다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대
인께서는 다시 사람을 내놓으라고 하시니, 이건....이건 너무 지나친
농담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하국상의 말투를 흉내내었는데 아주 그럴싸하게 흉내를 냈다. 진
원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 부마는 원래 그런 사람이죠. 원래....원
래 그들은 이미 함정을 파놓고서 대인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군요.]
위소보는 발을 구르며 욕을 했다.
[제기랄....]
그는 진원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이 만약 아가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나는 목숨을 걸고 싸울
작정입니다.]
진원원은 절을 하고 말했다.
[대인께서 이토록 천첩을 위해 주시니 천첩이 먼저 사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돌아가서 군사들을 이끌고 평서왕부로 달려들어가 쳐부수겠습
니다. 아가를 구해 내지 못한다면 나는 대매국노의 성을 따르겠습니다.
나의 성이 위씨가 아니고 오씨로 변할 것입니다. 제기랄! 그렇게 된다
면 나는 오소보가 되겠죠.]
진원원은 그가 격동하여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는 것을 보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대인께서 아가에 대해서....]
[뭐가 대인이고 소인입니까? 그대가 만약 저를 한 집안 사람으로 여긴
다면 저를 소보라고 불러 주십시오. 저는 그대를 백모님이라고 불러야
겠습니다. 하지만 제기랄! 백부님을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군
요.]
진원원은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소보, 나를 이모라고 불러라.]
위소보는 크게 기뻐서 말했다.
[좋아요. 저는 그대를 이모라고 부르겠습니다. 나는 양주의 여춘원에
서....]
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진원원은 알아챘다. 그가 여춘원에 있을 때
모든 기녀들을 이모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그녀는 눈치가 빨라 즉시 말
했다.
[나에게 너와 같이 훌륭한 조카가 있으니 나는 기뻐서 죽을 지경이야.
소보, 우리들은 왕야와 맞서면 안 돼. 곤명의 성 안에는 그의 군사들이
너무나 많아. 설사 네가 이긴다 해도, 그가 아가를 한 칼로 죽여 버린
다면 너와 나 두 사람은 한평생 슬퍼하게 될 것이 아니냐?]
그녀의 말흔 강남의 부드러운 억양이라 듣기가 좋았다. 거기다가 위소
보를 자기 식구처럼 여기고 있어서 위소보는 그런 말을 듣고 가슴 가득
히 끓어올랐던 노기가 대뜸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모, 아가를 구할 방법이 있나요?]
진원원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아가가 왕야를 아버지로 인정하도록 권고할 수밖에 없다. 그가 아무리
인정이 없기로 자기의 친딸을 죽이겠는가?]
갑자기 문 밖에서 한 사람이 호통을 내질렀다.
[도적을 애비로 삼다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문 휘장이 들춰지며 성큼성큼 체구가 우람한 노승이 걸어들어왔다. 손
에는 한 자루의 커다란 강철 선장을 들고 힘껏 바닥을 쿵, 내리쳤다.
그러자 그 선장의 쇠고리들이 깽그랑, 쩽그랑, 하는 소리를 내었다. 노
승은 네모진 얼굴인데 턱 밑에는 검은 수염을 기르고 눈동자에서 형형
한 안광이 번개처럼 쏟아지고 있어 위맹해 보였다. 몸매도 매우 우람하
여 방안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그의 허리는 꼿꼿하고 등은 넓어 호랑
이나 사자를 연상시켰으며 그 기세가 사람을 압도하였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뒤로 세 걸음을 물러섰으며 하마터면 진원원의 등
뒤로 숨을 뻔했다. 진원원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노승 앞으로 다가가더
니 나직이 말했다.
[그대가 오셨군요.]
[내가 왔소.]
그 음성은 매우 나직했고 눈빛도 부드러웠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
았는데 그 네 개의 눈동자에는 사랑, 그리운 정, 기뻐하는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위소보는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노화상은 누구란 말인가? 설마....설마 이모의 기둥서방이란 말인
가? 아니면 그녀가 옛날 기녀였을 때 종종 놀러 오던 손님인가? 중이
기녀를 데리고 놀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 아니, 그것도 이상할 건 없
다. 나도 옛날에 중 노릇을 하게 되었을 때 기녀원에 놀러 간 적이 있
지 않은가?)
진원원은 말했다.
[그대는 모두 들있나요?]
[모두 들었소.]
진원원은 말했다.
[그 애는 아직....아직도 살아 있어요. 저는....]
빌안간 그녀는 와락 울음을 터뜨렸으며 노승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노승은 왼손으로 가볍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위로의 말을 했
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를 구해내야 할 것이오. 그대는 너무 서
두르지 마시오.]
그 우렁찬 목소리는 깊은 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원원은 그의 품에
안겨 나직이 흐느끼고 있었다. 위소보는 한편으로 이상하고 또 한편으
로는 두려웠다.
(그대들 두 사람이 나를 죽은 사람으로 알고 기분 내키는 대로 끌어안
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있군. 그렇다면 내가 죽은 것처럼 하는 게
예의를 차리는 게 되겠군.]
진원원은 한동안 울더니 흐느끼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는....그대는 정말 그 애를 구할 수 있나요?]
노승은 싸늘하게 말했다.
[힘을 다할 뿐이오.]
진원원은 몸을 똑바로 세우고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어떻게 하죠? 말씀해 보세요? 어떻게 하죠?]
[그녀가 간악한 도적놈을 아비로 섬기도록 할 수는 없소.]
[그래요, 그래요, 제가 잘못했어요. 저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그대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군요. 정말....정말 미안해요.]
[알고 있소. 결코 그대를 탓하지 않소. 그러나 그녀의 아비라고 자처하
고 나설 수는 없구려.]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늠름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눈앞에 천군만
마가 있다하더라도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그 명을 받들 것 같았다. 갑
자기 문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며 한 사람이 길게 웃음을 터뜨렸다.
곧이어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옛 친구가 곤명에 왕림했으니 본 왕은 크게 영광으로 여기는 바이오!]
바로 오삼계의 음성이었다. 위소보와 진원원은 즉시 안색이 변했다. 노
승의 눈에서 별안간 형형한 안광이 쏟아졌다. 하얀 광채가 번득이는 가
운데 찌익, 하는 소리가 났다. 방문의 휘장이 칼날에 잘려나가고 오삼
계의 싱글벙글 웃는 모습이 드러났다.
곧이어 쾅, 쾅, 하는 소리가 크게 일며 흙먼지와 나뭇조각들이 나는 가
운데 사면의 담과 창문이 커다란 쇠망치에 맞아 깨져 나갔다. 뻥 뚫린
구멍에 여러 명의 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사람은 화살을 시윗
줄에 먹이고 어떤 사람은 손에 커다란 창을 들고 있었다. 화살과 창은
모두 방 안을 겨누고 있었다. 오삼계가 한마디의 명령만 내리면 방 안
의 세 사람은 삽시간에 고슴도치로 변하고 말 것이다. 오삼계는 호통을
내질렀다.
[원원, 이리 나오시오!]
진원원은 잠시 망설이며 한 걸음 내딛다가 우뚝 멈추며 고개를 가로저
었다.
[나는 나가지 않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위소보의 어깨를 가볍게 밀며 말했다.
[소보, 이번 일은 그대와 아무 상관이 없으니 나가거라.]
위소보는 그녀가 자기를 감싸고 돌자 크게 감동하여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나가지 않겠습니다. 제기랄! 오삼계, 그대가 사내라면 나를 죽이
도록 하시오.]
노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 두 사람은 나가도록 하시오. 노승은 이십여 년 전 이미 죽었어야
했을 몸이오.]
진원원은 다가가서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는 그대와 함께 죽겠어요.]
위소보는 큰소랴로 말했다.
[이모가 의리를 지키는데 이 위소보가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할 것
같소? 이모, 나 역시 그대와 함께 죽도록 하겠소.]
오삼계는 오른손을 쳐들며 노갈을 터뜨렸다.
[위소보, 너는 반역도와 행동을 함께했다. 내 그대를 죽이고 황상에게
상주한다면 공이 있을 뿐이지 허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진원원에게 말했다.
[원원, 어째서 이토록 멍청하오? 빨리 나오지 못하겠소?]
진원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소보가 말했다.
[누가 반역도란 말이오? 나는 그대가 좋은 사람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
우는 것임을 알고 있소.]
오삼계는 도리어 웃으며 말했다.
[꼬마야, 너는 아직도 이 노화상이 누구인 줄을 모르는구나.]
노승은 날카롭게 외쳤다.
[나는 숨기지 않겠다. 나는 바로 성은 이(李), 이름은 자성(自戒)
이라는 사람이다.]
위소보는 깜짝 놀라 말했다.
[그대....그대가 바로 이자성?]
노승은 말했다.
[그렇다. 소형제, 그대는 나가게. 사내대장부는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
해서는 혼자 책임을 질 뿐일세. 나는 수많은 싸움을 하면서도 칠십 세
넘게 살았네. 나는 그대와 같은 오랑캐의 벼슬아치와 함께 목숨을 잃는
것을 원하지 않네.]
별안간 하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가운데 천장 위에서 누군가 뛰어내리
더니 오삼계의 머리 위를 덮쳤다. 오삼계는 한소리 노갈을 터뜨렸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네 명의 위사가 장검을 일제히 뻗쳐 하얀 그림자
를 찔러 갔으나 그 사람이 소맷자락을 한번 떨쳐 한 줄기의 세찬 바람
을 몰아내자 네 명의 위사는 층격을 받고 뒤로 밀려났다. 곧이어 그 사
람은 단칼로 오삼계의 등을 내리쳤다. 오삼계는 제대로 서 있지를 못하
고 엎어지고 말았다. 그 사람은 곧이어서 오른손으로 일장을 내리쳤다.
그 일장은 오삼계의 어깻죽지에 적중되었다. 오삼계는 음, 하더니 바닥
에 주저앉았다. 그 사람은 손을 오삼계의 정수리에 갖다대고 사방의 위
사들에게 호통을 내질렀다.
[빨리 화살을 쏘아라!]
갑작스럽게 일어난 변고에 위사들은 놀라고 말았다. 왕야가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으니 그 누가 감히 움직일 수 있겠는가? 위소보는 크
게 기뻐서 부르짖었다.
[사부님, 사부님!]
지붕 위에서 뛰어내려 오삼계를 제압한 사람은 바로 구난이었다. 그녀
는 위소보의 뒤를 몰래 뒤따라와 지붕 위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평
서왕부의 수천이나 되는 위사들이 암자를 겹겹이 에워싸자 암자 밖을
지키고 있던 고언초 등은 경솔하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구난은 처마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위사들이 발견하지못했다. 구난은
차가운 눈초리로 이자성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대가 정말 이자성인가?]
[그렇소.]
[소문에 들으니까 그대는 구궁산(九宮山)에서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다
고 하던데 오늘까지 살아 있었군.]
이자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난이 물었다.
[아가는 그대의 딸인가?]
이자성은 한숨을 쉬고 진원원을 한 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
삼계는 노해 말했다.
[내 이미 알고 있었다. 오직 너 같은 역적만이 그런 딸을 낳을 수....]
구난은 그의 등에 발길질을 하며 욕을 했다.
[너희 두 역적은 막상막하, 어느 누가 더 간악한지 모르겠구나.]
이자성은 선장을 들고 한번 꽝! 하니 땅을 굴렀다. 그 바람에 푸른 벽
들이 대뜸 몇 조각으로 쪼개졌다. 그는 호통을 내질렀다.
[천한 여승, 감히 나에게 그토록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다니!]
위소보는 사부가 나타나자 크게 자신이 생겼다. 이자성이 유명하기는
했으나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호통을 내질렀다.
[그대가 감히 우리 사부님께 무례히 굴어? 살기 싫어졌소? 그대는 본디
역적이 아니오? 우리 사부 어르신은 한번도 잘못 말한 적이 없소....]
별안간 획휙! 하는 소리가 나면서 창밖에서 세 자루의 기다란 창이 날
아들어와 곧장 구난에게로 날아갔다. 구난은 약간 고개를 돌리더니 왼
손의 소멧자락을 한번 떨쳐 이미 두 자루의 기다란 창을 휘말아 바깥
쪽으로 내던지고 오른손으로는 세 번째의 기다란 창을 잡았다.
창밖에서 악, 악, 하는 두 마디의 처참한 비명소리와 함께 두 명의 위
사가 가슴팍을 창날에 꿰뚫려 즉사하고 말았다. 세 번째 긴 창의 날은
어느새 오삼계의 등을 겨누었다. 오삼계는 부르짖었다.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모두 열 걸음 물러서도록 해라!]
위사들은 일제히 대답하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구난은 냉소했다.
[오늘은 정말 재미있군. 이 조그만 방에 천고에 으뜸가는 대역적과 천
고에 으뜸가는 대매국노가 모였으니 말이다.]
와소보는 말했다.
[또 있습니다. 천고에 보기 드문 미녀와 천고 제일의 고수가 모여 있지
요.]
구난은 참지 못하고 차갑고 엄숙하던 얼굴에 한줄기 미소를 지으며 말
했다.
[무공이 천고 제일이라니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느냐? 너야말로 천고
제일의 꼬마 망나니다.]
위소보는 껄껄 웃었고 진원원 역시 나직이 웃었다. 오삼계와 이자성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이곳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한평생 대군을 거느리고 천하를 놓고 싸움을 벌였던 대영웅들이었
다. 한평생 얼마나 어렵고 험난한 일을 겪어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러나 지금 이 처지에 놓이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뇌리에 각기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으나 한 가지도 제대로 써먹을 것이 없었다. 이자
성은 구난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내가 어떻게 하느냐구? 물론 그대를 친히 죽여야지.]
진원원은 말했다.
[이 분 사태께서는 우리 딸 아가의 사부인가요?]
구난은 냉소했다.
[그대의 딸은 내가 안아 갔소. 나는 그녀에게 무공을 가르쳤으나 좋은
마음은 품지 않았소. 나는 그녀가 친히 대매국노를 찔러 죽이기를 바랐
소.]
그녀는 왼손에 약간 힘을 주었다. 기다란 창끝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창
끝이 오삼계의 살 속으로 반 치 정도 파고들었다. 오삼계는 참을 수 없
다는 듯 비명소리를 냈다. 진원원은 말했다.
[스님, 그는....그는 그대와 평소 안면이 없고 아무런 원한도 없는 사
이가 아니겠습니까?]
구난은 깔깔 웃으며 말했다.
[그가....그가 나와 아무런 원한이 없다구? 소보, 너는 그녀에게 내가
누구인지 말해 주어라. 대매국노와 대반적 두 사람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게 말이다.]
위소보는 말했다.
[우리 사부 어르신께서는 바로 대명나라 숭정 황제의 큰공주이신 장평
공주이시오.]
오삼계, 이자성, 진원원 세 사람은 모두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놀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자성은 껄껄 웃더니 말했다.
[하하하, 매우 좋소. 매우 좋아. 내가 과거 그대의 아버님을 핍박해서
죽도록 만들었으니 오늘 그대의 손에 죽는 것은 그야말로 이 대매국노
의 손에 죽는 것보다 백 배 나은 일이외다.]
그는 두 걸음 앞으로 나오더니 선장을 바닥에 푹 꽂았다. 선장의 끝이
바닥으로 한 자 정도 들어갔다. 그는 두 손으로 가슴팍의 옷을 잡고
곽, 찢었다. 옷자락이 찢어지면서 털이 숭숭 난 가슴팍이 드러났다. 그
는 웃으면서 말했다.
[공주, 손을 쓰시오. 내가 매국노의 손에 죽지 않고 오히려 대명나라
공주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되다니, 정말 영광이외다.]
구난은 한평생 이자성을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했다. 그러나 그가 이미
호북성 구궁산(九宮山) 위에서 죽은 줄 알았고 친히 원수를 갚지 못하
게 되었다고 여기고 있던 참인데 오늘 그가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사
실을 알게 되니 뜻밖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가 호방하고 시원시원하
게 태연히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고 전혀 두려워하는 빛이 없는 것을 보
니 마음속으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어 말했다.
[귀하는 뛰어난 호걸이군. 나는 먼저 그대의 원수를 죽이고 다시 그대
의 목숨을 빼앗도록 하지. 그대의 원수의 목이 잘리는 것을 보여주면
죽어도 통쾌할 것이 아니겠소?]
이자성은 크게 기뻐서 두 손을 합장하며 말했다.
[공주께 감사드립니다. 불초는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내 한평생 커
다란 소원은 바로 친히 이 대매국노가 비명에 죽는 것을 보는 것이었습
니다.]
구난은 오삼계가 창날 아래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고 전혀 항거할 힘이
없는 것을 보자 이대로 찔러 죽이고 싶지 않아 이자성에게 말했다.
[아예 그대의 소원풀이를 해 드리지. 그대가 직접 죽이시오.]
이자성은 무척 기뻐하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오삼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간적아, 과거 산해관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을 때 네가 오랑캐 군사의
도움을 받았기에 나는 패하였다. 너는 공주에게 사로잡혔는데 내가 이
대로 너를 죽이면 너는 너무 쉽게 죽는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고 구난에게 말했다.
[공주 전하, 아무쪼록 그를 놓아 주십시오. 나는 이 간적과 목숨을 걸
고 한번 싸워 보겠습니다.]
구난은 기다란 창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누가 누구를 죽이는지 어디 두고 봅시다.]
오삼계는 땅바닥에 웅크려서 신음하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면서 선장
을 거머쥐고 맹렬히 구난의 허리를 후려쳤다. 구난은 호통을 쳤다.
[죽고 사는 것을 모르는 녀석이구나!]
왼손의 기다란 창을 돌려 선장을 내리누르고 내공을 쏟아냈다. 오삼계
는 손과 팔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고 선장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순간 기다란 창날 끝은 어느덧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오삼계의 무
예가 탁월하지만 구난같이 내공이 심오한 대고수 앞에서는 어린애처럼
일초도 감당할 수 없었다. 오삼계는 안색이 잿빛이 되어 끊임없이 뒤로
물러섰으나 창날 끝은 시종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이자성은 몸을 굽혀 선장을 집어들었다. 구난은 창을 오삼계의 손에 쥐
어 주며 말했다.
[두 사람이 공평하게 한번 싸워 보시지.]
오삼계는 호통을 내질렀다.
[좋소.]
그는 창을 번쩍 치켜들어 이자성을 찔러갔다. 이자성은 선장을 휘둘러
막고 일장을 내리쳤다.
두 사람은 조그만 선방에서 결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구난은 위소보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그를 자기 등 뒤에 숨겼다. 기다란 무기에 그가 다
칠까 염려해서였다. 진원원은 선방 한모퉁이로 물러갔다. 얼굴이 창백
해지면서 두 눈을 감았다. 그녀의 뇌리에 과거의 정경이 주마등처럼 스
쳐지나갔다.
(내가 명나라의 황궁에 있을 때 숭정 황제는 황혼 무렵에 찾아오셔서
나의 아름다움에 찬탄을 했지. 이튿날까지 황제는 조정으로 나아가 정
사를 돌보지 않고 침실에서 나와 함께 즐기며 나에게 노래를 부르도록
시켰고 황제는 나에게 연지를 발라 주고 눈썹을 그리는 붓으로 나의 눈
썹을 그려 주기도 했다. 그는 나를 귀비로 봉하고 장래 나를 황후로 봉
하겠다고 했지. 그리고 이제부터는 황궁에서 비빈이나 귀인들 가운데
한 사람도 그의 눈에 차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했다. 황제는 나이가
매우 젊었으며 나를 보자 매우 흐믓해했다. 그는 황제였지만 나의 마음
속에는 옛날 기녀원으로 놀러 왔던 왕손 공자들과 다를 바 없었지. 사
흘 밤낮으로 나와 함께 있었으며 한 걸음도 떠나려고 하지 않았지. 나
흘째 되는 아침 내가 먼저 깨어났었지. 나는 그때 옆자리 베개 위에 핏
기라고는 한 점도 없는 얼굴이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두 뺨은
움푹 들어가고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잠결에도 그는 무슨 걱
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지. '이것이 황제인가?
그는 황제가 되었는데도 어찌하여 이토록 즐겁지 못할까?' 이 날 그는
조정으로 정사를 돌보러 나갔다가 정오 무렵에 돌아왔는데 안색은 더욱
더 창백해졌고 더욱 더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나에게
신경질을 부리며 나 때문에 나라 일을 망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자
기가 여색에 빠진 못난이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정치를 새롭게 해야겠
다고 하며 황후에게 명하여 즉시 나를 궁에서 내보내도록 했지. 그는
내가 나라를 그르치는 요녀라고 했으며 내가 궁 안에서 사흘을 머무는
동안 역적 이자성이 세 채의 성을 함락했다고 했다. 나는 슬퍼하지도
않았다. 남자들은 모두 똑같은 게지. 어떤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을
때는 여인들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황제는 온종일 근심에 휩싸
여 죽게 될까봐 속으로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자성이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때 속으로 생각했었지. '이자성은 대
단하구나. 그는 황제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했는데 도대체 그는 어떤 사
람일까?')
진원원은 두 눈을 떴다. 이자성은 선장을 휘두르며 오삼계에게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오삼계는 재빨리 피하는데 그 몸놀림이 신속했으며 선
장은 시종 그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진원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의 솜씨는 여전히 재빠르구나. 이 몇 년 동안 그는 매일 무예를 연
마하고 있었다. 왜냐하면....왜냐하면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북경으로
쳐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황궁에서 나온 후 주국장(周國丈) 저택으로 돌아가게 된 일을
생각했다. 어느 날 주국장은 잔치를 크게 열고 손님을 청했다. 그는 그
녀에게 나가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손님들을 즐겁게 하라고 했다.
그날 밤 오삼계는 처음 그녀를 만났다. 지금도 똑똑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촛불 아래 정욕으로 이글이글 타는 듯한 오삼계의 눈동자가 술자
리를 사이에 두고 시선을 보내오던 광경이었다. 그와 같은 눈초리는 그
동안 많이 보아왔다. 그와 같은 눈빛을 가진 야수와 같은 남자들은 종
종 그녀에게 달려들어 꼭 끌어안고 그녀의 옷자락을 찢어내곤 했다. 하
지만 그때는 여러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는 연회석상이었다. 갑자기 그
녀는 생각했다.
(조금 전에 저 꼬마도 나를 보고 그와 같은 눈빛을 드러냈으니 정말 우
스꽝스럽다. 저토록 나이 어린 꼬마도 나를 색기 어린 눈동자로 바라보
았으니, 남자는 모두 다 마찬가지이다. 늙은이도 그렇고 어린애도 그
모양이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위소보를 바라보았다.
第78章. 미녀의 일생
위소보는 흥분된 얼굴로 이자성과 오삼계가 싸우는 광경을 주시하고 있
었다. 오삼계는 한창 반격하고 있는데 긴 창날을 끊임없이 찔러 대고
있었다. 진원원은 계속해서 과거를 회상했다.
(그는 주국장에게 나를 달라고 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황제는 오삼계
를 산해관으로 보내 그곳을 지키라고 했으며 만주의 군사들이 쳐들어오
는 것을 막으라고 명했다. 그런데 이자성이 먼저 북경을 점렁하고 숭정
황제는 매산 위에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이자성의 부하가 나를 잡아서
이자성에게 바쳤는데 이 거칠고 호방한 사내가 바로 숭정 황제가 꿈속
에서도 두려워했던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북경을 점령한 후에 매
우 바빠졌다. 명나라의 많은 대관들을 살해하고 그의 부하들은 북경성
에서 간음과 노략질을 일삼고 많은 사람들을 고문하며 돈을 바치라고
강요했다. 무고한 백성들이 해침을 당하고 죽어갔다. 그는 매일 밤 나
와 잠자리를 같이 하며 언제나 즐거워했고 우렁찬 웃음소리를 터뜨리곤
했었다. 그의 코고는 소리는 너무나 커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많았다. 그의 겨드랑이와 허벅지와 가슴팍의 털은 정말 길고도 무성했
다. 나는 그처럼 정력적인 남자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오삼계는 그
가 나를 가로채갔다는 말을 듣고 만주 사람들과 연맹하여 군사를 이끌
고 산해관 안으로 쳐들어왔다. 아! 이리하여 여자가 화근 덩어리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자성은 대군을 이끌고 나가 일편석(一片石)에서
오삼계와 크게 싸웠다. 그때 만주의 정예병이 갑자기 나타나 이자성의
군사들은 모조리 궤멸되고 말았다. 일편석의 싸움터는 선혈로 물들었고
수십 리나 되는 길에는 죽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사람들은 모두 나로 인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내가 그 십여 만
이나 되는 사람들을 해쳐 죽였다고 했다. 내가 정말 그와 같은 큰 죄를
지었을까? 이자성은 패하여 북경으로 되돌아와 즉시 등극하여 황제가
되었고 대순국(大順國)의 황제라고 자칭했다. 그는 나를 데리고 서쪽으
로 도망쳤는데 오삼계는 줄곧 뒤따라 쫓아왔다. 이자성은 싸움에 패하
기는 했으나 여전히 매우 호랑하게 읏었다. 그 휘하의 장수들과 군사들
은 하루하루 적어지고 형세는 점점 불리해졌으나 그는 별로 개의치 않
았다. 그는 본디 자기에게 아무것도 없었으니 기껏해야 여전히 아무것
도 없는 처지가 될 뿐이니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했다. 그는 자기가 한
평생 세 가지 자랑할 만한 큰일을 했다고 했다. 첫째는 명나라 황제를
핍박하여 죽게 만든 것이고, 둘째는 자기가 황제가 된 것이고, 셋째는
천하제일의 미녀를 데리고 잤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 사람은 말하는 것
은 조잡스러웠지만 세 가지 일 중에서 가장 의기 양양하게 여기는 것은
세 변째의 일이라고 했다. 오삼계는 한마음 한뜻으로 황제가 되려 했지
만 한번도 그와 같은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
가 마음속으로 두려워했기 때문이고 언제나 망설이고 있는 탓임을. 손
을 쓸 생각이면서도 감히 그럴 수 없어 미적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가 오늘 죽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황제가 될 것이다. 설사 곤명성 안에
서 황제를 자처할지는 몰라도 결국 단 하루라도 그는 황제 노릇을 해보
고 죽을 것이다. 영력 황제는 버마로 도망쳤는데 오삼계는 쫓아가 그를
죽였다. 사람들은 세 분의 황제가 나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숭
정, 영력, 이자성이라는 황제가 나로 인해 죽었다고 했다. 어찌하여 숭
정 황제의 빛까지 내 앞으로 달았을까? 오늘 오삼계는 과연 죽을까? 만
약 그가 훗날 황제가 된다면 내가 또 한 명의 황제를 해쳐 죽이는 꼴이
되겠구나. 대명나라의 강산과 수십 만의 군사들과 수백 만이나 되는 백
성의 목숨과 네 명의 황제는 모두 이 진원원이 죽였다는 누명을 씌우겠
지. 그러나 나는 어떤 나쁜 짓도 한 적이 없으며 사람을 해치는 말을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다.)
그녀의 귀에 쩡쩡, 하는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을 뿐이다. 고개
를 들고 살펴보니 이자성과 오삼계는 이리 뛰고 저리 몸을 날리며 흉악
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이가 많고 늙었으나 솜씨는 여
전히 매우 민첩했다. 그녀가 한평생 가장 싫어하는 것은 바로 남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증오의 빛
을 드러냈다.
(이자성이 크게 패한 후 수하의 명마들은 모조리 흩어졌다. 어둠 속에
서 그는 나와 혜어졌다. 오삼계의 부하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나를 데리
고 가서 대원수에게 바쳤다. 오삼계는 물론 매우 기뻐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대매국노라 하지만 나를 얻었으니 그와 같은 악명을
듣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그의 정에 감격했다. 그가
대매국노라도 좋고 대청의 신하라도 좋다. 그는 나에게 진심을 보여 주
었으며 나를 위해서 아무것도 돌보지 않았다. 그 이외에 그 누구도 그
와 같이 한 사람은 없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편안한 나
날을 보낼 수 있겠구나 하고. 일품부인, 이품부인이 나는 달갑지 않았
고 다시는 많은 남자들의 품을 전전하는 처지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
었다. 그러나....그러나....곤명에서 몇 년을 살던 그는 친왕에 봉해졌
고 친왕에는 복진(福晋:부인)이 있어야 했다. 그의 본부인은 이미 세상
을 떠난 후였다. 그의 아우 오삼매가 나에게 와서 왕야가 복진의 일로
매우 번뇌하고 있다고 말했었지. 도리를 따지면 나를 복진으로 봉해야
했으나 나의 출신은 천하가 다 아는 바이니, 만약 나의 이름을 황제에
게 알려 책봉받게 하면 조정을 모독하는 셈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물론
친왕이 된 그가 기녀 출신의 천한 여자인 나를 천거하여 황제의 책봉을
받으려 하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다. 나 때문에 그가 난처해지는 것이
싫어서 오삼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리 명문숙녀를 선택해서 복진으
로 삼아 그의 명성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는 나에
게 사과했으며 이번 일 때문에 나에게 매우 미안하다고 했다. 흥! 복진
이 된다고 해서 뭐가 대단한가? 하지만 나는 끝내 그가 나에게 보여 준
애정이 그 정도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왕부에서 나왔다.
왕야로 하여금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고 복진을 책봉하도록 하기 위함이
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이자성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이미 화상이
되어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그가 이미 죽은 줄 알고 며칠 동
안 슬픔에 잠겼던 일도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는 살아 있었다. 이자성은
자기가 승복을 입은 건 남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라고 말했으며 머리
를 땋고 오랑캐의 복장을 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매일
나를 생각하고 곤명에서 이미 삼 년 동안 머물러 있었으며 기회가 생기
면 나를 다시 만나보려고 오늘까지 기다렸다고 했다. 아! 나에 대한 그
의 애정은 오삼계보다는 횔씬 깊은 것이었다. 그는 매일 밤 내게 와서
잠자리를 같이 했다. 내가 계집애를 잉태할 때까지. 그 후에 나는 그를
다시 만날 수가 없었다. 나는 반드시 왕부로 돌아가서 오삼계와 잠을
자야 했다. 그래야 아기가 태어나도 의심받지 않을 테니까. 나는 왕야
가 그리워 다시 모시러 왔다고 말했다. 왕야는 복진을 한번도 좋아한
적이 없었다며 기쁜 마음으로 나를 맞아들였다. 그 후 계집애를 낳게
되었다. 계집아이는 두 살 때 갑자기 실종되었다. 나는 이자성이 사람
을 보내 훔쳐간 줄 알았다. 그의 애니까 그가 요구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혼자서 외롭게 세윌을 보내느니 옆에 아이가
있다면 외로움이 덜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아, 그런데 일이 그런
게 아니었다....)
별안간 한 방울의 액체가 그녀의 손등에 튀었다. 손을 들어 살펴보니
피가 아닌가?
그녀는 깜짝 놀라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오삼계의 온 얼
굴은 선혈로 물들어 있었는데 그는 여전히 창을 휘두르며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이 한 방울의 피는 그의 얼굴에서 튄 것이었다. 집을 에워싼
관병들은 크게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자성과 구난을
위협했다. 그러나 왕야를 해치게 될까봐 감히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
다. 오삼계는 숨을 헐떡이며 두 눈에 공포의 빛을 드러내었다. 별안간
그는 창날을 기울이더니 진원원의 가슴을 찌르려 했다.
진원원은 아, 하고 비명을 질렀다. 순간 탕,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창날
은 이자성의 선장에 의해 밀려나고 말았다. 오삼계는 다시 미친 듯이
날카로운 창날로 진원원을 연거푸 찔러 댔다.
이자성은 크게 욕을 하고 꾸짖었으며 죽을 힘을 다해 막았다. 그러느라
고 오삼계에게 반격할 겨를이 없었다. 위소보는 사부의 등뒤에 숨어 있
다가 무척 의아하게 생각했다.
(대매국노가 어째서 화상을 찌르지 않고 자기 마누라를 찌르려고 하
지?)
그는 즉시 알아차렸다.
(그는 자기 마누라가 화상과 놀아난 데 분노를 느끼고 그녀를 죽여 화
풀이를 하려고 하는구나.)
구난은 이미 오삼계의 속셈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 악인은 교활하기 짝이없다. 이자성을 이기지 못하자 이와 같은 흉
계를 써서 이자성의 빈틈이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구나.)
과연 이자성이 진원원을 구원하느라고 즉시 빈 틈을 드러내자 오삼계는
갑자기 창날을 돌려 이자성의 어깻죽지를 찔렀다. 이자성의 오른손에서
선장이 떨어지고 말았다. 오삼계는 그 기세를 빌어창날로 그의 가슴을
겨누고 흉칙한 미소를 흘렸다.
[역적, 그래도 무릎을 끓고 투항하지 않겠느냐?]
[좋다.]
이자성은 두 무릎을 천천히 꿇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자성이 대단한 호걸인 줄 알았더니 삶을 탐하여....)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이자성은 몸을 데구르르 굴려창끝을
피했다. 곧이어 땅바닥의 선장을 집어들더니 냅다 옆으로후려쳐 오삼계
의 다리를 쳤다. 이자성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선장으로 오삼계의 어
깨를 내리쳤다. 곧이어 그의 정수리를 내리치려고 하였다.
위소보는 정세가 불리하면 투항했다가 기회를 보아 다시 거사하는 것이
이자성이 즐겨 쓰는 책략임을 모르고 있었다. 과거 이자성이 반란을 일
으켰을 때 숭정 칠 년 칠 월 협서성 흥안현(與安縣) 차상협(車箱峽)에
서 포위된 적이 있었다. 관군이 사면에서 에워싸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에게 먹일 양식과 말에게 먹일 풀도 없었다.
전군이 멸망할 순간에 놓이자 이자성은 즉시 투항을 했다가 기회를 틈
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이자성이 오삼계에게 무릎을 꿇고 거짓
으로 투항을 한 것은 옛날의 잔재주를 다시 피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구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들 두 사람은 똑같이 흉악하고 교활하다. 대명나라 강산이 그들 두
사람의 손에 의해 망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때 이자성의 세 번쩨 선장이 떨어지고 있었다. 오삼계는 이번에야말
로 머리통이 박살날 위기에 처했다. 진원원이 갑자기 몸을 날려 오삼계
의 몸을 감싸며 부르짖었다.
[먼저 나를 죽여요!]
이자성은 깜짝 놀랐다. 선장을 내리치는 기세는 매우 매서웠으며 오른
쪽 어깨에 상처를 입고 있어서 선장을 거두어들일 힘이 없었다. 순간
그는 왼손으로 선장을 한쪽으로 밀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선장은
벽을 후려쳤다. 이자성은 즉시 노해 부르짖었다.
[원원, 무슨 짓이오?]
진원원은 말했다.
[나는 이 사람과 이십 년간 부부로 지내 왔어요. 옛날에 그는....그는
정말 진심으로 나를 대한 때도 있었어요. 나는 그가 나 때문에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어요!]
이자성은 호통쳤다.
[비키시오! 나는 그에게 바다같이 깊은 원한이 있으니 반드시 죽여야
하오.]
[나도 함께 죽이세요.]
이자성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알고 보니 그대의 마음은 여전히 그에게 있었구려.]
진원원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그가 그대를 죽인다 해도 역시 그대와 함께 죽을 거예요.)
집 밖의 관병들은 오삼계가 땅바닥에 쓰러진 것을 보고 다시 소리를 지
르며 몰려들었다. 한 명의 무장이 호통을 질렀다.
[왕야를 놓아 주시오. 그러면 그대들을 죽이지 않겠소.]
그는 바로 오삼계의 사위인 하국상이었는데 그는 다시 외쳤다.
[그대들의 동료는 모조리 사로잡혀 있소. 만약 왕야의 털끝 하나라도
다친다면 즉시 목을 잘라버릴 것이오.]
위소보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목검성, 유대홍 등 목왕부의 사람들과 서
천천, 고언초, 현정 도인 등 천지회의 사람은 물론 조제현,
장강년 등 어전시위, 효기영의 참렁, 좌렁 등이 모두 손을 뒤로 돌린
채 묶여 있었고 모든 사람의 등 뒤에서 평서왕부의 무사들이 칼을 뽑아
들고 그들의 목을 내리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위소보는 생각했다.
(사부님이 나를 데리고 곤명에서 도망칠 수 있다 해도 이 친구들은 떼
죽음을 당할 것이다. 오삼계를 죽이는 일은 급히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는 즉시 비수를 뽑아들고 오삼계의 등을 겨누고 말했다.
[왕야, 모두 함께 죽으면 재미가 없으니 그러지 말고 우리 흥정합시
다.]
오삼계는 흥, 하더니 물었다.
[어떤 흥정인가?]
[그대는 모두에게 떠나도록 하시오. 그러면 우리 사부님은 그대의 한
목숨을 살려주실 것이오.]
이자성은 말했다.
[이 간적은 변덕이 죽끓듯하는. 소인이니 그의 말을 믿지 마시오.]
구난 역시 오늘은 오삼계를 살려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
었다.
[그대가 명령을 내려 사람들을 놓아 주면 나는 그대를 놓아 주도록 하
지.]
위소보는 큰소리로 하국상에게 말했다.
[아가는? 그 자객은 어디 있소?]
하국상은 호통쳤다.
[자객을 데려와라!]
두 명의 왕부 무사가 한 소녀를 떠밀고 앞으로 나왔다. 바로 아가였다.
그녀는 두 손이 뒤로 묶여 있었는데 그녀의 목을 시퍼런 칼이 겨누고
있었다. 진원원은 말했다.
[소보, 그대는....그대는 아무쪼록 내 딸의 목숨을 구해 주게.]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군. 그대는 지아비와 기둥서방에게 부탁하지 않고
나에게 부탁을 하는군. 아가는 그대와 내가 즐기는 동안 잉태된 딸이
아니잖소?)
그는 아가의 측은한 표정을 보자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
녀를 구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더구나 진원원의 간구하는 얼굴을 대하
니 더 생각해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대들 두 사람이....]
그는 이자성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두 부모께서 친히 아가를 나의 마누라로 주겠다고 약속하신다면 아가
는 내 마누라이니 어찌 구하지 않겠소?]
구난은 그를 노려보며 호통쳤다.
[언제나 경박스러운 소리만 지껄이는구나!]
진원원은 위소보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고 보낸 시간도 짧았지만 그의
성질을 구난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 꼬마 망나
니가 불난 집에서 약탈을 하고 흙탕물을 일으켜 고기를 잡는 재주를 피
우지 않았다면 어린 나이에 그와 같은 큰 벼슬을 하지 못했을 것이며
버릇이 그러니 탓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좋아, 내가 약속하마.]
위소보는 고개를 돌리고 이자성에게 물었다.
[당신은요?]
이자성은 욕을 하려고 했으나 진원원의 얼굴에 간절히 부탁하는 빛이
보이는지라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
[흥, 그녀의 뜻에 따르겠다.]
위소보는 헤헤, 웃으며 오삼계에게 말했다.
[왕야, 나와 그대는 냇물과 우물물처럼 서로 다투지 않는 사이가 아니
었소? 그러니 서로 잘해봅시다. 그대는 평서왕 노릇을 계속하면 좋을
것이고 나는 위 자작 나으리가 되는 것으로 만족하오.]
오삼계는 말했다.
[좋아, 내 언제 위 자작 나으리에게 불만을 품은 적이 있었는가?]
[그럼 명령을 내려 우리 친구를 모두 석방하시오. 나 역시 사부에게 그
대를 석방해 달라고 부탁하겠소. 이것은 패구(牌九) 노름을 하면서 처
음에는 별십(鼈十)을 잡았다가 나중에 지존(至尊)을 거머쥔 것처럼 이
기지도 않고 지지도 않으며 돈을 잃지도 따지도 못한 것이외다. 그대는
세 방면의 사람들을 죽이려 하지 마시오. 나 역시 그대에게 불리한 짓
을 하지 않겠소. 노름을 했으나 잃지는 않았으니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오.]
오삼계는 말했다.
[그 말대로 하세.]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대는 세자를 불러 오시오. 그리고 공주를 맞으러 갑시다. 수고스럽
지만 왕야가 친히 우리들이 곤명성을 나갈 때까지 전송을 해주시오. 세
자로 하여금 공주를 모시고 북경으로 돌아가 혼례를 올리도록 해주시
오. 왕야, 미리 말하지만 우리는 마음이 놓이지 않소. 그렇기 때문에
세자를 인질로 삼겠소. 그대가 나중에 군사를 보내 추적하면 우리들은
부득이 세자를 먼저 제물로 삼을 수밖에 없소이다. 오응응, 위소보, 그
리고 건녕 공주는 함께 염라대왕을 만나 뵙게될 것이니 저승길이 퍽 재
미있을 것이외다.]
오삼계는 속으로 이 꼬마 녀석은 교활하기 이를 데 없으니 쉽사리 자기
를 놓아 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당장 위험하니 한시 바삐 목숨을 구
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한 그는 즉시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하세.]
그는 음성을 높여 하국상을 불렀다.
[하 총병, 빨리 사람을 보내 공주와 세자를 이곳으로 모셔 오도록 하
게.]
하국상은 말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세자는 이미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오셨습니
다.]
위소보는 칭찬의 말을 했다.
[효성이 갸륵한 아들이군. 대단하군, 대단해.]
얼마 후 오응웅이 군사들을 이끌고 왔다. 그는 중상을 입고 아직 치유
되지 않아 여덟 명의 시종들이 떠메고 들어왔다. 오삼계는 말했다.
[세자가 왔으니 모두 가세.]
그는 다시 명을 내렸다.
[여러 호걸들을 모두 풀어 주어라.]
그는 위소보에게 말했다.
[자네와 사태 두 분은 나의 등 뒤를 바짝 따르게. 내가 그대들이 안전
하게 성을 나서도록 해주겠네. 만약 노부가 신의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
대들은 내 등에 몇 번 칼질을 할 수 있을 것이네. 사태의 무공이 고강
하니 나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네.]
위소보는 웃었다.
[정말 왕야는 일을 시원하게 처리하시는군요. 명나라에 반기를 든 것은
반기를 든 것이고 청나라에 항복을 한 것은 항복을 한 것이지요. 정말
조금도 우물쭈물하지 않아 좋습니다.]
오삼계는 손가락으로 이자성을 가리켰다.
[이 반역자는 위 자작 나으리의 친구가 아니지?]
위소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이자성이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오랑캐의 강아지 같은 벼슬아치 친구가 아니다.]
구난은 칭찬의 말을 했다.
[좋소. 그대라는 반역자는 제법 뼈대가 있군. 오삼계, 그가 우리와 함
께 떠나도록 해주시오.]
진원원은 구난을 바라보았다. 고마워하는 빛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사태....]
구난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과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오삼계는 자
기가 살아나면 그만이고 이자성을 죽이고 못 죽이는 것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는 창문 앞으로 가서 큰소리로 말했다.
[세자는 공주를 호송해서 경성으로 올라가 황상을 배알토록 하라. 모두
들 공주 전하가 출발하시는 것을 전송하도록 하라!]
평서왕의 군사들은 일제히 호각을 불더니 대오를 지어 전송했다. 위소
보와 오삼계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방을 나섰으며 구난은 바짝 그 뒤를
따랐다. 위소보는 오응웅의 가마 앞에 이르러 말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 봐야지]
그는 가마의 휘장을 들추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응웅은 얼굴에 핏기
하나 없이 비스듬히 가마 안에 기대 앉아 있었다. 위소보는 웃으면서
말했다.
[세자, 안녕하시오?]
오응웅은 큰 소리로 물었다.
[아버님 ....별고 없으세요?]
이 말은 오삼계에게 묻는 것인데 위소보가 얼른 대답했다.
[오냐, 나는 잘 있다. 별고 없었다.]
암자 밖에 이르러 바라보니 동서남북은 겹겹이 에워싼 병마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위소보는 칭찬의 말을 했다.
[왕야, 병마가 적지 않군요. 곧바로 북경에 쳐들어가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 같소이다.]
오삼계는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위 자작 나으리, 그대가 황상께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인다면 나도 그
대가 반역도배인 운남 목씨 집안과 한패거리이며 반적 이자성과 결탁했
다는 사실을 상주하겠소.]
[그거 참 이상하군요. 이자성은 천하제일의 미녀와 한 이불 속에 들어
가는 것을 바랄 뿐이기요. 그가 미쳤다고 천하제일의 나이 어린 망나니
이자 청나라의 강아지인 나와 결탁하려 하겠소?]
오삼계는 대노해서 주먹을 쳐들고 위소보를 때리려 했다.
[왕야, 화내지 마시오. 마음을 편하게 가지십시오. 우리 다시 흥정을
합시다. 나는 서울로 가면 그대가 충성스러우며 천하에 둘도 없는 충신
이라고 칭찬의 말을 하겠소. 나는 또 책임지고 세자의 안전을 보호해
드리겠소. 그 대신에 그대는 새해를 맞을 때마다 나에게 금이나 은 같
은 선물을 좀 보내 주시오. 어떻소?]
위소보는 히죽히죽 웃었다. 오삼계는 말했다.
[돈과 재물은 몸 밖의 물건이니 위 자작 나으리가 사용해서 안될 것도
없지. 하지만 그대가 나를 난처하게 만들면 나는 운남에 있고 대군을
장악하고 있으니 그대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네.]
[그야 물론이지요. 왕야께서 손에 한 자루의 창을 쥐면 당할 사람이 없
을 정도로 용감하지 않습니까? 소장은 오늘 작별을 고하도록 하겠습니
다. 왕야께서는 저번에 나에게 용돈을 내린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그
돈을 내리시도록 하세요.]
구난은 그가 연신 쓸데없는 소리를 해대며 뇌물을 갈취하려 하자 들으
면 들을수록 화가 나서 호통쳤다.
[소보, 네 녀석은 어쩌면 그리도 염치가 없느냐?]
위소보는 웃었다.
[사부님은 모르세요. 저의 수하에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북경으로
돌아간 후에는 조정의 문무백관들과 황궁의 비빈과 태감들에게도 선물
을 해야 합니다. 예물을 제대로 바치지 못하면 모든 사람들은 왕야를
탓하게 될 것입니다.]
구난은 흥, 하고 코웃음치며 더 말하지 않았다. 기실 위소보는 뇌물을
받는 것은 둘째고 살아서 도망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다. 그가 끊임
없이 오삼계에게 뇌물에 대해 지껄이는 것은 오삼계에게 머리를 쓸 여
유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고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뇌물을 받은 후에는 뇌물을 바친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
벼슬아치들의 관습이었다. 위소보의 말은 오삼계를 안심시키려는 것이
었는데 구난은 그의 간계를 알 수 없었다. 오삼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은자를 요구한다면 일을 해결하기 쇱다.)
오삼계는 하국상에게 말했다.
[하 총병, 빨리 오십만 냥의 은자를 꺼내서 위 자작 나으리가 데리고
온 시위 관명들에게 내리게. 그리고 다시 위 자작 나으리에게 많은 예
물을 선사하여 위 자작 나으리가 경성으로 가서 우리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게.]
하국상은 심복에게 일을 처리하도록 분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