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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화-여인천하

Casey,Riley 2023. 2. 23. 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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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천하(상)
박종화
    팔선녀지도
  저 유명한 연산군의 뒤를 이어  반정공신들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은,등극한 지 십 년에 벌써 팔선녀의 비빈을 지니고 있다.중종은 연산의 이
복 동생이었다.
  어머니가 약사발을 받고 원통하게 돌아간 것을 심상한 나머지 연산은 왕
위에 오른 뒤에 어머니의 원수를 모조리 갚았다.지위가 높거나 낮거나,남자
와 여자인 것을 묻지  않고 모조리 갚았다.원수를 갚기  위하여 그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모든 것에 저항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
게 되었다.
  그는 과거의 모든 제도에 대하여 반기를  높이 들었다.모든 예법을 허위
와 의상이라 하여 수백년 뿌리깊게 뻗어 내려온 예절과 국법을  박차 버리
고 새로운 자기의 주관을 세웠다.
  한 나라의 제왕으로서 수천 수백년 이 땅에 뻗어 내려온  나라의 제도와 
국법과 예의를 두들겨 부수면서 자기의 인간으로서의 개성을  뚜렷하게 세
워 본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그러나 연산은 이  일을 단행했다.그
는 그의 어머니가 왕비면서도 요약한 무리들에게 쫓겨나서 비명 횡사를 한 
뒤에 일개 평민의 무덤이 되어 외롭게 있는 것이 불쌍했다.묘를 고쳐서 감
연히 능이라 했다.이것을 반대하는 모든 예법의  탈박 쓴 선비와 대신들을 
단번에 조정에서 내쫓아 버렸다.그는 마침내 선비와 유림들을 저주하기 시
작했다.선비들은 수천 수백년 내려오는 예와 법의  전통만을 받들었다.그들
은 받들 뿐만이 아니라 이것을 가지고 조정에 벼슬을 하면서  일일이 자기 
자신의 하고 싶은 일을 모조리 속박하고 구속을 주었다.
  그는 반동을 하지 아니하면 자기의 개성과 주관을 세울 길이  없게 되었
다.연산은 팔도에 채홍사를 보내서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예쁘다는 미인은 
모조리 뽑아 들여 흥청,운평을 만들어 놓아 노래와 춤을 가르쳐 삼천 궁녀
를 이룩한 뒤에,이것을 반대하는 성균관 유생들을 쫓아버리고 성균관에 분 
냄새를 풍기는 남치마,붉은 치마 자락에 화사하게 웃는 미인들을 배치시켰
다.
  임금의 동산이 적다 해서 백 리를 주위로 하여 양주,파주,고양,장단을 자
기의 사사로운 동산으로 하여 금표 말뚝을 박고 이곳에 말을  달려 사냥을 
했다.오늘날보다 더 큰 서울이 그의 개인의 사냥터요 놀이터였다.
  자하문 밖 세검정 앞 맑게 흐르는 장류수 계곡에는 삼천  궁녀들을 나체
로 목욕시켰고,왕십리 살고지다리 넓은 풀밭과 화양정  앞 푸른 천을 깔아 
논 듯한 오십 리에 뻗친 잔디밭은 미인을 마상에 껴안고 천칠백 필의 말을 
달리던 터전이었다.
  연산의 이러한 반동은 마침내 때를 노리고 있는 무사 박원종  일파의 혁
명으로 말미암아 하룻밤 사이에 제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로 잡혀 가는 
몸이 되오 버렸다.박원종 일파는 연산의 계모인  윤후에게 품한 뒤에 그의 
아드님인 진성군을 받들어 대위에 오르게 하니 이 분이 곧 중종이다.
  중종은 박원종 일파 공신들에게 휩쓸려 왕위에 오른 뒤에,연산이 행하던 
모든 정치를 다시 쳐엎고 옛 전통으로 돌아가려 했으나,역시 그는 수백 궁
녀 속에 더욱 두드러지게 귀염을 보내는 팔선녀를 아니 갖지 못했다.
  중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는 다만 사랑하는 한 사람의 아내가  있을 뿐이
었다.
  아내는 신씨라는 여자였다.신씨는 똑똑하고 예쁘고 소명한  여자 였다.중
종과 신씨 사이는 물과 고기의 존재였다.고기가 물이 없으면 살아 나갈 수
가 없듯이 중종에게 있어서 신비가 없으면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중종은  임금이 된 대가로 사랑하는 아내 신비와 생이별을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신씨의 아버지는 영의정 신수근이란 사람으로 쫓아낸 임금  연산군의 매
부요 쫓아낸 왕후 신비의 오라버니였다.
  그러니 신수근은 연산군한테는 처남이 되고 ,연산의 이복 동생인 중종한
텐 장인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 박원종 일파는 연산을 쫓아내는 반정을  꾸밀 때,먼저 당시의 영
의 정이요 왕후의 오라버니인 신수근을 찾아 의향을 더듬기로 했다.
  박원종은 신수근한테 장기 두기를 청했다.  
  신수근은 쾌하게 허락하고 박원종과 장기를  두고 있었다.박원종은 공연
히 까닭 없이 차를 몰아 궁을 때렸다.신수근은 벌써 눈치를 차렸다.
  “안 되지.장기에는 법이  있는데,까닭 없이 임금인  궁을 칠 수가  있는
가.”
  신수근은 점잖게 말을 한 뒤에 장기판을 쓸었다.박원종은 마음속으로,
  ‘신수근이 벌써 아는구나.’
  감탄하고 얼른 일어나 신수근한테 절을 드렸다.
  “대감께서는 벌써 제 마음을 아십니다 그려.”
  “내가 자네의 뜻을 어떻게 알겠는가.도대체 무슨 말인가?”
  “온 나라는 지금 도탄에 들어 있습니다.”
  “나도 영의정의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미안하이.”
  신수근이 점잖게 대답한다.
  “아까 장기를 두듯,차로 궁을 때려서 치워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거야 차가 궁을 때릴 길이 터져 있다면 쳐도 좋지만,차가 궁을 때리
러 갈 길이 없는데 무작정 궁을 때릴  수가 있는가?길은 법일세.임금과 신
하 사이에는 법이 있는 것일세.신하로 임금을 칠 수는  없는 법일세.이것은 
백대 뒤에 이신벌군이란 누명을 들을 뿐  아니라,역적의 이름을 면치 못하
는 것일세.”
  신수근의 얼굴은 위엄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썩고 곯은 어지러운 정치 속에 우리들은 다  죽어야 합니
까?”
  “자네나 나는 왕상께 벼슬을 하고 있는 신하야.신하로서는 못하는 거야.
군신의 인연이 없는,벼슬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을 고칠 수는  있는 것이지.
그것은 딴사람이 할 것이야.벼슬하지 않는 백성들이 할 일이지...” 
  신수근의 엄숙한 얼굴에는 광채가 이는 듯했다.
  “지금 우리가 반정을 해서 추대해 모실 분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대감
의 사위이신 바로 진성대군이십니다.”
  박원종은 비로소 속을 털어 놓았다.그러나 신수근은 끄떡이 없었다.
  “사위 아니라 아들을 추대한대도 나는 신하로서 그 임금을 치는 일에는 
찬성할 수가 없어.대의 명분이 서지 않는 일을 어찌 하나.”
  신수근의 태도는 의연히 씩씩했다.
  박원종은 또다시 목소리를 떨어뜨렸다.
  “인정상 누이를 폐위시키기가 어려우셔서 그러십니까?그 대신 제  말대
로 하시면,따님이 왕비가 되지 않으십니까.”
  “자네는 공과 사를 왜 혼동하는가.내 누이가  오늘날 왕후 마마로 계시
다 하여 반정을 일으키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고,내 딸이 별안간 왕후가 된
다하여 마음이 변할 수가 있는가.내가 말하는 것은 신하로서 임금을 칠 수 
없다는 것뿐일세.사내자식이 대의 명분을  지키지 않고 어떻게  이 세상을 
광명 정대하게 살아 나갈 수 있는 것인가.”
  신수근은 어질게 눈을 들어 정면으로 박원종을 바라본다.
  “따님이 중하십니까,누이가 더 중하십니까?”
  박원종은 다시 한 번 뇌까렸다.
  “고이한 사람,소인이로구나.이신벌군을 못 하겠다는 것이 나의 쇠뭉치같
이 굳은 결심인데,또다시 사사로운 누이와 딸을 쳐든단 말인가!”
  신수근은 점잖게 꾸짖었다.그는 무든 일을 각오했다.이미 대의에 죽을 것
을 각오했으니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태연히 박원종을 호령해 꾸짖
는다.
  이때였다.박원종은 별안간 소매 속에서 철퇴를 꺼내 들고 바람처럼 신수
근한테로 달려들어 수근의 머리를 갈겼다.박원종은 무사였다.신수근의 힘으
로 당해 내는 도리가  없었다.밖에는 벌써 반정군들이  철옹성같이 영의정 
신수근의 집을 포위해 버렸다.
  신수근은 이렇게 해서 단 한 사람인 연산군의 충신으로 세상을  떠나 버
렸다.신씨 일문은 반정군에 의해서 도륙이 되어 버렸다.이 급한  비보는 몸
을 피해 달아난 한 사람의 여비에 의하여 장차 중종이 될 진성대군의 집으
로 나는 듯이 통기가 되었다.
  그러나 신수근의 사위요 연산의 이복  동생인 진성대군은 말할 것도  없
고,아버지의 비명횡사한 부음을 받은 신씨도 꼼짝달싹을 할 수 없었다.나라
가 뒤집혀 장차 하회가 어찌 될 것을 측량할 수 없는 까닭이다.젊은 두 내
외는 눈물을 머금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때 돌연,박원종은 일지군마를  거느리고 진성대군의 집으로  달려,갑옷 
투구를 입고 문을 두드려 뵈옵기를 청했다.
  진성대군은 무서워서 대문을 열 수가 없었다.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대문 밖에서는 박원종이 큰소리로 외친다.
  “지금 대비(진성대군의 어머니)마마의 명을 받들어 대군을 왕위에 오르
시게 하였습니다.빨리 문을 열어 줍시오.”
  하인들은 박원종의 거래를 진성대군께 전했다.
  진성대군은 이것을 필시 자기를 죽이러 들어오려는 도둑들의  계교라 생
각했다.도둑들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기  손으로 자결해 죽는 것
이 옳다 생각하고 벽상에 걸린 환도를 배어 목숨을 끊으려 했다.
  이 모양을 본 젊은 아내는 얼른 칼을 앗았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오.밖의 동정을 살핀 뒤에 처사를 하십시
다.잠깐만 기다리십쇼.내가 대문에 나가 동정을 보고 들어오리다.”
  신씨는 말을 마치자 재발리 문간으로 나갔다.
  신씨는 대문 편으로 나가 문틈으로 밖의 동정을 살펴보니,박원종은 갑주 
투구를 입어 무장을 하고 마상에 높이 앉아 있으나 얼굴에는  전혀 살기가 
없었다.뿐만 아니라 말 탄  군사들은 전부 말머리를 집  편으로 향해 있지 
않고,말궁둥이와 꼬리를 대문 편으로  둔 채 큰길을 향하고  있었다.이것은 
진성대군의 집을 포위하려는 것이 아니라,진성대군을  호위하기 위하여 군
사를 배치한 것이 분명했다.
  영리한 신씨였다.얼른 이 뜻을 판단할 수 있었다.신씨는 얼굴에  기쁜 빛
을 띠고,걸음을 빨리 하여 안으로 들어와 남편을 대했다.
  “아무 다른 뜻이 없습니다.얼른 문을 열게  하시고 박원종을 만나 보십
시오.”
  “어떻게 당신이 아무 일이 없을 것을 아시오.”
  “그 사람들이 진정으로 우리들을 해할 뜻이 있다면 군사가 수천 명이니 
벌써 대문을 부수고라도 뛰어들었을 것입니다.문틈으로  바깥 동정을 살펴
보니 박원종은 갑주 투구를 하여 무장을 했으나 눈에 살기가 없고,수천 군
사들은 모두 말머리를 돌이켜 큰길을 향하고  섰으니,이것은 또 다른 무슨 
변이 있을까 하여 나으리의 신상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두말 할 것 없이 
안심하시고 박원종을 빨리 만나십시오.”
  진성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아내 신씨가 내어 주는 새 옷을 황망히 갈
아입고 대문을 열어 반정 중신들을 맞이했다.
  “전임금 연산이 포학무도하여,천명이 전하께로 돌아갔습니다.대비전하의 
영을 받들어 전하를 대위에 오르시게  하오니 빨리 연에 오르시어  대궐로 
들어가사이다.”
  박원종은 반정 중신을 대표하여 이렇게 말씀을 올렸다.
  진성대군은 비로소 신씨를 거느리고 두 채 연에 올라 대궐로  들어간 뒤
에,곤룡포에 익선관을 쓰고 용상에 올라 중종대왕이 된 것이었다.
  중종은 이날부터 신씨를 더욱 소중하게 여겼다.작은 일,큰 일을  모두 다 
신씨와 의논해 처리했다.
  임금 노릇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발 하나 떼어 놓는 것,몸 하나 갖
는 것이 모두 다 관심을 가져야 하는 조심되는 일이다.아무리 중종은 어려
서 궁중에서 자랐다 하나,임금이란 책임 있는  자리에 앉아 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구중궁궐 속에는 오직  지척에 신비만이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다.중종은 
한시라도 신비가 곁을 떠나면 허전해서 배겨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기막히도록 아프고 슬픈,검은 운명의 장막이 내리기 
시작했다.
  반정공신의 제일 첫손을 꼽는 대공신 박원종은 만조 백관을 거느리고 조
회를 올린 뒤에 천천히 전상에 올라 아뢰었다.
  “중흥공신 박원종은 만조백관을 거느리고,돈수 백배하여 삼가 주상전하
께 아뢰오.전하께옵서는 오늘 곧 신비를 폐위시켜 주시옵소서.”
  별안간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임금은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신하로 앉
아서 국모를 폐위하라는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일까,임금은 깜짝 놀랐다.
  오랫 동안 침묵이 흘렀다.
  “중전을 폐위시키란 말이오?”
  젊은 임금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늙은 호랑이  같은 공신 앞에 극히 
미약한 힘을 가진 젊은 임금이었다.
  “그러하옵니다.”
  늙은 장수 박원종은 두려움 없이 양연히 대답한다.
  “무슨 죄로?”
  겨우 한 마디 중종은 이렇게 물었다.
  “개인의 죄가 아니라 역적의 딸이옵니다.”
  박원종의 눈은 부리부리 떠진다.이것은 곧 임금과 신하의 체통이 아니라,
신하와 임금이 자리를 바꾸어 된 셈이었다.
  “역적의 딸이라니?”
  역적 소리에 젊은 임금은 깜짝 놀란다.
  “소신들이 전하를 위하여 전왕을 폐위시키는 의로운 혁명  반정을 일으
켰을 때,먼저 중전의 아버지 신수근을 찾았습니다.그러하오나  신수근은 연
산을 위해서 죽을지언정 전하를 위하여 반정을  일으킬 수 없다 하여,어찌
하는 수 없이 신수근을 처치해 버린 것이옵니다.신수근은 전왕 연산한테는 
충신이오나,전하한테는 역적이옵니다.황송하오나 지금 신수근의 딸이  대궐 
안에 전하를 모시고 있습니다.소신들은  반정을 반대한 그의  딸로 전하의 
정비이신 국모를 삼을 수  없습니다.만약에 신비가 그대로  왕후의 자리에 
계신다면 공신들은 두려웁고 위태함을 느낄  것입니다.공신들의 마음이 흔
들린다면,나라가 위태로울  것입니다.대의를  밝혀 신비를  내쫓게  하옵소
서.”
  젊은 임금 중종은 아뜩 현기를 느낀다.익선관을  쓴 이마에는 진땀이 흘
렀다.
  어려서부터 정이 든 아내였다.얼굴도 고웁지만 심덕이  무던했다.정이 폭 
든 아내를 어떻게 차마 내쫓을 수가 있는가.지금 자기는 아무리 임금이 되
었다 하나 외롭기 한량없다.앞으로 자기의 신상은  장차 어떻게 전개될 것
인가.아내는 고웁고 심덕만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머리가 맑고 판단력이 빨
랐다.엊그제 반정 난리가 일어날 때만 해도,별안간 군사들이 자기  집을 포
위한일이 있었다.자기는 연사군의  아우였다.난리가 일어나니 화가  목전에 
당도된 듯했다.반정군의 발길에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깨끗하게 자살을 하
는 것이 낫다 생각했다.이때  아내는 침착하게 칼을 뺏고,대문간으로  나가 
군사들의 행동을 살폈다.급기야 군사들이 말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두고 섰
는 것을 보자 아내는 재빠르게 기미를  판단하여,오늘 자기는 죽지않고 대
위에 오른 것이다.이러한 어진 아내를 어떻게 차마 버릴  수가 있는가,젊은 
중종의 마음은 쥐어짜지는 듯하다.
  ‘공연히 임금이 되었구나.’
  하고 후회하는 생각이 일어난다.무어라고  말대답을 해야 할  텐데 입이 
뻣뻣하고 혀가 굳어서 말이 얼른 나오지 않는다.
  머리 골이 짓이겨 내는 듯 아프다.등에서는 오슬오슬 오한기가 돌았다.
  ‘세상 천하에 어디 이런 놈의 임금의 팔자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아무리 임금이기로서니,어떻게  남의 아내를  내쫓아라 마라 
하는 권한까지 가질 수가 있는가.’
  젊은 임금은 발끈 자존심이 일어난다.눈을 똑바로 떠서 보려 했다.호랑이 
같은 반정공신 박원종은 소리 없는 위압을 눈으로 주면서 대답을 재촉하고 
버티어 섰다.임금의 기운이 푹 떨어진다.
  ‘참으로 이것은 평민의 팔자만도 못 하구나.’
  젊은 임금은 박원종의 타는 듯한 눈을 피하여 고개를 숙였다.
  “전하,어서 분부를 내리게 대답해 주시오.”
  박원종이 핍박해 재촉한다.공신 박원종의 목소리는  왕방울을 흔드는 듯
했다.넓고 넓은 전각이 우렁우렁  울렸다.임금이 앉은 용상 아래론  음산한 
기운이 휩쓸어 일어난다.
  “어려서부터 고생한 아내를 어떻게 차마 버릴 수가 있소.”
  중종은 모기 소리만큼 호소해 애원한다.
  공신 박원종의 눈은 껌벅껌벅 불길을 뿜어 불량하게 굴려진다.
  “전하의 정리는 소신들도 다 짐작하는  바입니다.그러하오나 신비를 정
비로 모실 수 없습니다.국가는 전하의 사사로운  국가가 아닙니다.소신들의 
국가도 됩니다.전하께서 소신들의 말씀을 아니  들으신다면 나라가 위태롭
습니다.”
  퉁방울 같은 원종의 목소리에 대망전 대들보가 우렁우렁 운다.이것은 아
뢰는 말씀이 아니라 위협이요 공갈이요 핍박이었다.
  젊은 임금은 약간 꾀가 움직였다.
  “내쫓지는 말고 후궁의 빈을 만들면 어떠하겠소.이미 나로서는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  있는 내 아내요.칠거지악이 없는  바에야 내쫓을 수는 
없으니,정비에서 내려서 빈으로 봉하게 해주오.”
  젊은 임금은 고개를 숙여 애원을 해본다.
  “아니 됩니다.오늘 저녁 안으로 폐비를 시켜서 궁문 밖으로 내보내셔야 
합니다.”
  박원종은 눈을 부라려 우겨댄다.
  임금은 중흥공신들의 말을 덧들일 수가 없었다.난처해서 용상 위에서 손
끝만 비볐다.
  “잠깐 생각할 여유를 갖게 하오.”
  임금은 살몃 용상에서 일어났다.잠깐 예봉을 피하자는 것이다.
  용상에서 일어나는 임금의 뒤를 봉미선을 든 내시가 호위해 따랐다.임금
은 용상 옆으로 난  계단을 내려,전각 뒷문에서 옥모를  타고 아내 신비가 
있는 내전으로 들었다.
  신비의 나이는 스무 살밖에 아니 됐다.그러나  총명 영리하고 심덕이 있
었다.
  그는 별안간 반정으로 인하여 아버지가 철퇴에 맞아 돌아가고,고모인 연
산비가 평민으로 내려 쫓기는 참변을 당했다.두 겹  세 겹 기막힌 슬픔 속
이언만 남편 진성대군이  대위에 오르게 되니,겹겹이  쌓인 슬픔 속에서도 
남편의 일이 더 크고 소중했다.여자란 남편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었다.친정 
곁으로의 모든 참변을 억누르고,남편의 장래를 위하기로 결심했다.
  하루쯤 입었던 아버지의 상옷을 벗어 버리고 남편을 모시어 대궐로 들었
던 것이다.
  거상옷과 나무 비녀를 뽑아 버리고 화복으로 갈아입을 때,신비는 눈에서 
방울방울 더운 눈물이 옷깃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신수근이 연상의 중신으로 철퇴에 맞아 돌아간 것도 불쌍하고 가
여운데,그분의 딸자식으로 태어나서  삼년 상복을 입지  못하는 것도 한사 
중의 하나였다.그러나 그는 눈물을  닦아 슬픔을 진정하고  태연히 남편을 
모시어 대궐로 들어갔다.남편이 제왕이 되는 큰일에 사위스럽게 슬픔을 가
져서는 아니 될 것을 잘 아는 때문이다.
  신비는 남편을 모시어 대궐에 든 뒤에,처음으로  임금이 되어 모든 의식
과 절차에 바쁜 왕을 도왔다.남편인 왕이 바쁜  것은 곧 왕비 자신이 바쁜 
것이다.신비는 남편인 왕이 처음으로 당하는 모든  일에 체통을 안 잃도록 
노력하고 분별을 했다.
  대궐에 들어온 지 육칠일밖에 아니 된  때 일이었다.공신들은 아침에 별
안간 왕에게 정전에서 친어하시기를 청했다.
  신비는,
  ‘신하들이 나라의 국정을 아뢰려는 것이거니.’
  하고 무심코 외전으로 납시는 왕의 시중을 들어 드렸다.
  얼마 만에 왕은 내전으로 들렀다.왕의 용안이 이상했다.아까 외전으로 납
실때는 용안이 명랑했는데,지금 내전으로 돌아온  왕의 얼굴빛은 우울하고 
참담했다.얼굴빛만이 아니었다.어깨가 내시처럼 축 처지고 풀기가 없었다.
  ‘왠일일까.’
  신비는 염려했다.
  “어디가 미영하시옵니까?”
  분을 따서 넌 듯한 왕비의 보드라운 흰 손길이 이마 위에 가볍게 닿아졌
다.
  “아니.”
  왕의 대답 소리는 더욱 풀기가 없었다.
  신비는 더욱 걱정스러웠다.맑은 눈에는 근심이 서리었다.
  “무슨 걱정이 계시옵니까?”
  신비는 두 손으로 온돌 바닥을 짚어,왕의  용안을 살포시 우러뵈어 애틋
하게 묻는다.
  왕비의 상냥하고 다정한 태도를 바라보는 임금은 금창이  미어지는 듯했
다.
  ‘이 어진 아내를 어떻게 차마 버릴 수가 있는가.’
  왕의 구곡간장은 난도질을 치는 듯 아팠다.왕비한테 자기의 아픈 가슴속
을 털어 말할 수도 없다.
  왕의 얼굴이 더한층 어두웠을 때였다.
  별안간 뜰 밖에서 대전내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국공신 평성부원군 박원종 드오.”
  내시의 우렁차게 아뢰는 목소리에 왕의 얼굴은 백지마냥 하얗게 질렸다.
  신비도 깜짝 놀랐다.아무리  임금을 추대한 중흥공신이라  하나,당돌하게 
내전에까지 통지 없이 들어온다는 일은 전무한 노릇이었다.
  왕과 왕비는 황망히 일어났다.왕비는 협실로 몸을  피하고 왕은 대청 옥
좌에 앉았다.또다시 내시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린다.
  “정국공신 창산부원군 유순정 드오.”
  협실에 있는 왕비는 세 사람의 이름을  귀담아 들었다.그리고 마음 속으
로,
  ‘무례한 놈들이로구나.신하놈들이 통지도 없이 감히 내전까지 들어오다
니.아무리 정국공신이라 하나 이런 무례한 법이 있는가.’
  왕비는 주먹을 쥐어 바르르 떨었다.
  이윽고 질자배기를 깨뜨리는 듯한 박원종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전하,그래도 결단을 못 하세겠습니까?전하께서 결단을 내리시지 못 하
신다면 소신들이 감행하겠습니다.”
  신비는 하얀 귀를 바짝 솟구치고 가는 눈썹을 걷어 올려 정신을 모아 들
었다.
  ‘무엇을 결단하라는 소린가?’
  왕비는 다시 귀를 기울였다.
  임금은 아무런 대답도 없다.왕비는 무척 궁금했다.
  왕비는 갑갑했다.협실 장지 앞으로 걸어 빠끔히 장지문을 밀었다.대청 마
루의 모습이 환하게 비쳤다.왕의 용안이 보인다.얼굴은 백지장보다도 더 희
게 보였다.크나큰 번민 속에 빠져 계신 것이 분명했다.
  “전하께서 말씀을 아니 내리신다면 소신들은 물러가지 않겠사옵니다.어
서 분부를 내려 줍시오.”
  이번엔 박원종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왕비가 문틈
으로 살펴보니,문관으로 중흥공신이 된 성희안이 허리를 굽혀 아뢰고 있었
다.그러나 임금은 여전히 대답이 없다.
  늙은 재상 유순정이 어전에 엎드려 아뢴다.
  “외전에서 아까도 말씀드렸사옵나다마는 이 일은 저희들 몇  사람의 뜻
이 아니옵니다.조정 전체의 공론이옵고,반정을 일으킨 모든  장군들의 한결
같은 뜻이옵니다.만일 신비를 내치지 아니하신다면 나라에는 또다시 큰 사
태가 벌어질 것이옵니다.”
  신비는 비로소 자기를 지적해 말하는 것을 알았다.자기를 왕후의 자리에
서 내치라고 하는 소리다.
  신비의 얼굴이 하얗게 잘렸다.신비의 온 전신은 마비가 되는 듯했다.당장 
푹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신비는 바짝 정신을 모으고 문설주를 붙들었다.슬
픔이 왈칵 북받쳐 오면서 호수 같은 맑은 눈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오오,저자들이 나를 내쫓으려고  하는구나.전왕께 순절해 죽은  사람의 
딸이라 해서 나를 내쫓아라 하는구나.이리해서  저자들은 주상전하를 협박
하는 것이구,전하께서는 대답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것이로구나.’
  신비는 총명 영리했다.반정 난리가 별안간 일어나서 아버지 신수근이 연
산을 위해서 순절을 했다는 기막힌 비보를  듣고,계속해서 자기 남편을 왕
전하로 모신다는 기별을 받았을 때,신비는 혹시나  불길한 일이 있지나 않
을까 하는 예감을 가졌던 것이다.
  신비는 맥이 탁 풀렸다.이내  자리에 기운없이 푹 주저앉아  버렸다.젊고 
어진 얼굴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흘렀다.
  이별---까닭없는 생이별을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정든 내외가 이별하기란 참으로 슬픈 일이다.천명을  어찌 하지 못해 죽
어 이별하기도 어려운 노릇인데 사랑하는 사람으로 어떻게  차마 생이별을 
할 수 있는가.
  지금은 형편으로 보아,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자기의 남편을 임금의 자
리에 앉혔다 해서 조자들의 기세는 하늘과도  파총할 수 없는 형편이다.저
자들의 화염같은 기세를 막아 낼 사람은 아직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생겨나
지 않았다.누가 있어 설혹 저자들을 대항한댔자  도리어 전하의 몸만 위태
로울 것이다.
  신비의 생각이 여기까지 멎었을 때 또다시 대청에서는  우렁우렁 말소리
가 들려 온다.
  “전하,신비를 밤 안으로 내보내십시오.만약 전하께서 말씀을  아니 들으
신다면,저희 공신들이 신비를 내보내겠습니다.알아들으시겠습니까?이 밤 안
으로 내보내셔야 합니다.”
  우락부락한 박원종의 목소리가 분명하다.바로 곧  역적이 임금을 위협하
는 최후의 태도다.
  신비는 한동안 무엇을 생각한 끝에 눈물을 거두고 가만히 협실에서 일어
났다.몸을 매만지고 침착하게 정침으로 돌아갔다.
  첫째로 남편인 왕전하의 마음을 더 괴롭게 하기가 싫었다.
  둘째로 모처럼 왕위에 오른 남편의 자리를 자기 한 몸으로  인해서 위태
롭게 해서는 아니 될 것이라 생각했다.
  셋째로 저것들 반정공신들과 대항하여 대거리를 한다면 까딱 잘못하다가
는 천금 같은 저기의 생명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저자들은 창과 칼과 활과  군사를 가진 자들이다.어디로  보나 반항하는 
것이 오히려 불리할 것이라 생각했다.
  정침으로 돌아온 왕비는 내인 방을 향하여 나직하게 불렀다.
  “이리 오너라.”
  늙은 상궁이 정침으로 나타나 왕비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부르셨사옵니까.”
  “전각에 나가서,전하께 급히 아뢸 말씀이 있으니 잠깐만 듭시사 아뢰어
라.”
  신비는 침착하게 내인을 지휘했다.
  늙은 상궁은 명을 받들어 전각으로 나갔다.
  “상감마마께 아뢰오.곤전마마께옵서 잠깐 듭시라 전갈이 계시오.”
  얼빠진 사람마냥 기운이 떨어져 교의에 앉았던 중종은  공신들의 위협을 
잠시라도 피하려 하여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정침으로 옥보를 옮긴다.
  박원종,성희안,유순정 공신들은 감히 손으로  임금을 막지는 못하나,위압
하는 눈초리로 임금의 동정을 감시하면서 자리를 뜨지 않는다.그들은 마음 
속으로,
  ‘신비가 무슨 일 때문에 왕을 청하는가.’
  하고 왕이 들어가는 정침 편을 응시하고 있다.
  전하는 문을 닫고 정침으로 기운 없이  들어섰다.신비는 왕의 용안을 바
라보자 얼굴에 가득 상냥한 빛을 띠어 왕을 맞았다.
  “황공무지하오나 소비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잠깐 귀담아 듣자오니,공
신들이 소비를 궁중에서 내보내라 하는 모양이옵니다.전하께서는 상지하실 
것이 아니라,쾌하게 허락해 주옵소서.”
  비의 말씀을 듣는 중종은 뜻밖이었다.
  “허락을 해주다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니 허락해 주시면 어찌하실 테오니까.좋지 못한  일이 생길 것이 분
명합니다.못 이기는 체 허락을  해주옵시오.”요조숙녀인 신비였다.모든 슬
픔과 모든 격정을 스스로 누르면서 얼굴빛 하나 고치지 않은  채 안상하고 
품있게 아뢴다.
  “말이 되오?”
  하고 임금은 뱉듯이 대답한다.
  “전하,그들의 인정도 그러할  것이옵니다.소비는 소비의 아비가  그들과 
행동을 같이하지 않은 일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그렇다고 소비의 아빈 결
단코 전하의 역적이 될 수는 없사옵니다.소비의 아비는 전조의 영의정이옵
니다.아무리 사위가 왕위에 오르고 딸이 왕비가  된다 해도 이러한 사사로
운 영화와 행복과 이로써 대의명분을 바꿀 수 없어서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지 않고 그들의 손에 죽은 것뿐이옵니다.그러하나 저들 공신의 형편으로 
생각해 본다면 소비를 꺼려할 것은 당연한 인정이옵니다.그 애비를 죽이고,
그 딸을 왕비로 둘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왕비는 잠깐 임금의 얼굴을 더듬었다.
  임금의 얼굴빛은 여전히 참담했다.아무런 대답도 없다.
  “전하,소비를 내보내 줍시오.아비는 춘추대의에 살고 소비는 비명횡사를 
면해서 전하를 사모하여 살고,전하께서는 아무 탈  없이 제왕의 행복을 내
내 누리시고?이것이 옳은 일이옵니다.소비로 본다면,세  가지 유익한  일이
옵니다.전하!소비를 내보내 주옵소서.소비는 밖에 있사와 전하를 도와 드리
오리다.”
  신비는 행여나 임금이 마음을 상할까 하여 경위를 따져 분석하면서 안산
하고 나직한 음성으로 차근차근 아뢴다.
  중종은 아무 말이 없다.
  “전하,그렇게 해주옵소서.”
  신비는 어린이를 달래듯 한다.한시라도 빨리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편하
게 하기 위해서였다.신비의 눈에는 그가 임금으로 보이지 아니했다.한 사람
의 사랑하는 옛날의 남편으로 보였다.그 부드러운  손을 들어 살몃살몃 남
편의 무릎을 흔들었다.어서 괴로워하지 말고 허락해 버리라는 뜻이다.
  “나도 사람이지,어떻게 갖은 고생을 다 시키던 조강지처인 당신을 차마 
오늘 내쫓는단 말이오.”
  임금은 또다시 고개를 수그린다.
  “전하,생각해 봅시오.저들에게는 무기가 있습니다.저들에게는 말 한마디
면 단박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심복 군사들이 있습니다.저들에게는 아직 전
하보다도 더 무서운 권력이 있습니다.진실로 전하께옵서 소비의 몸을 아끼
신다면,소비를 저들의 희망대로 오늘 밤 안으로  궁 밖으로 나가게 해주옵
시오.잘못하오면 전하의 신상도 위태롭습니다.”
  신비의 목소리는 더한층 낮게 소근댔다.
  그러나 신비도 여자였다.말을 마치자,그 해사하고 어글어글한  눈에는 맑
은 눈물이 글썽글썽 괴었다.맑고 맑은 추파에  맥맥히 슬픈 눈물을 머금은 
신비의 얼굴은 백모란 화판이 이슬을 머금은 얼굴이었다.보다도 어진 얼굴
이었다.성수가 눈에 어린 성녀의 자태였다.
  젊은 임금은 미칠 것 같았다.
  ‘차마 이 사랑하는 아내를 어떻게 내버리나.’
  하고 생각해 본다.금창이 미어지는 듯하다.꼬여지는 듯  오장육부가 아프
다 못해 쓰렸다.
  임금은 왈칵 신비의 가는 허리를 껴안았다.얼굴을  숙여,눈물어린 화사한 
백모란 뺨에 뺨을 비볐다.
  왕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비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눈물과 눈물 속에 두 남녀는 맥맥히 바라본다.젊은 왕과 젊은 왕비의 애
는 난도질을 치는 듯 꿈틀거리고 뒤틀렸다.마지막 끊어지는 단장의 절벽이
었다.
  신비는 전하께 껴안긴 채 눈물을 삼켰다.그리고 또다시 속삭인다.
  “너희들의 뜻대로 오늘 밤 안으로 내보내 주마,이렇게 허락을 내리옵소
서.그렇게 아니 하시면 소비의 목숨이나 전하의  생명은 다 함께 위태롭습
니다.”
  별안간 임금의 떨리는 입술이 신비의 입술 위로 격하게 닿아진다.
  신비는 임금의 입술을 피하지 않고 받았다.뜨거운  입술이었다.마지막 닿
아지는 결별의 입술이었다.
  뜨거운 포옹이 선풍처럼 지나간 뒤에 신비는 고요히 전하의 옥체를 밀었
다.
  “전하!저것들의 날카롭고 독한 눈초리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을 노려보
고 있사옵니다.어서 나가시어 저것들의  살기 띤 독한  마음이 풀어지도록 
하시옵소서.”
  임금은 목숨을 보호하라는 신비의 말씀에 비로소 더 대항할 수  없는 것
을 깨달았다.
  신비의 몸에서 떨어진 왕은 방문을 열고 전각 대청으로 나가서  다시 교
의에 펄썩 주저앉는다.
  박원종의 부리부리한 성난 눈과 성희안의 새치름한 눈초리가  다시 왕의 
일거일동을 사시하고 있었다.
  “경들의 뜻대로 신비를 폐위시키게 하오.”
  기운 없는 중종의 목소리가 마지막 떨어지고 말았다.
  이리와 승냥이 떼 같은 불학무식한 무리들이었다.금방 입이 벙글벙글 벌
어진다.
  “영명하신 성단이옵니다.이 자리에서 승지와 사신들을 부르시어 폐비전
교를 내려 주옵소서.”
  승냥이보다 더한 무리들이었다.임금이 다시 딴말이  있을까 보아 당장에 
사신과 승지들이 보는 데서 폐비전교를 공포하라는 것이다.
  “정원과 춘추관에 나아가 승지와 사관들을 들라 해라.”
  임금은 기운 없이 뜰에 섰는 내시에게 영을 내렸다.
  이윽고 승지와 사신이 국궁해 엎드렸다.
  “왕후 신씨를 폐위 시킨다고 전교를 쓰라.”
  승지는 붓방아를 찧는다.
  사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사기란 백년 뒤까지 전하는 것이옵니다.막중한  국모를 폐위 시키신다
면 죄상을 분명히 기록해야 합니다.무슨 죄오리까?”
  “그저 그렇게 폐위한다구 쓰라.”
  임금은 괴로웠다.사관에게 대답할 말이 없다.
  “그저 그렇게  어떻게 쓰옵니까.대의명분을  들어 죄상을  밝혀 주옵소
서.”
  임금은 양심이 괴로워 더 대답할 수가  없었다.박원종이 퉁방울 같은 눈
을 화경처럼 떠서 승지와 사관을 바라보며 소리를 지른다.
  “요망한 젊은 신하들이 국가의 중대한 일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왕상
의 말씀에 대하여 함부로 지껄이는가.위에서  분부가 계시다면 신하로서는 
받들 뿐이지,무슨 잔소리들이 요란한가.”
  박원종의 호통 소리에 승지와 사관들은 꼼짝도 못 하고 붓을 들었다.
  ‘병인 년 구월 구일 왕비 신씨를 폐한다.’
  승지는 이렇게 쓰고 떨리는 음성으로 읽어 본다.
  “병인 년 구월 구일 신씨를 폐하여 본제로 내보낸다.이렇게 쓰라.”
  박원종은 임금을 제쳐놓고 이렇게 불렀다.박원종은 ‘왕비’ 두 자를 쑥 
뽑아 버렸다.신비를 왕비로 인정치 않는다는 뜻이다.
  승지와 사신은 박원종이 부르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마음씨가 고운 여자라 하나 신비도 사람이었다.더구나 나이 어린 
이십 세의 여자였다.
  남편인 전하를 억지로 나가게 해서 자기를 내쫓을 것을 공신들한테 선포
하라고 말씀은 해놓고도,전하를 내보낸 뒤에 창문을  살몃 밀고 대청 광경
을 바라본다.
  승지와 사신들이 들어와 죄상이 무어냐고 우겨댈 때 그래도 마음이 약간 
상쾌하지 않을 수 없었고,박원종 등의 강박으로 승지는 하는 수 없이?병인 
년 구월 구일 신씨를 폐하여 본제로 내보낸다?이렇게  쓰고 읽어 볼 때,방
안에 있는 신비의 눈에는 옥수 같은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옆에 모시었던 상궁도 소리를 죽여 눈물을 흘렸다
  밖에서는 또다시 박원종의 질뚝배기를  깨뜨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
다.
  “이제부터는 국가의 주석지신들의 마음이  편안하옵니다.나라일이 반석 
위에 올려놓은 듯 튼튼하게 되었습니다.대신들은 이제 물러나 빈청에서 뒷
일을 처리하겠사옵니다.”
  호랑이 같은 공신의 무리들은 임금이 전교를 내린 뒤에도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여,대신들의 처소인 빈청에 앉았다가  왕비가 대궐을 나가는 
꼴을 목도한 뒤에야 헤어질 작정이었다.
  이날 저녁때 내전 뜰 앞에는 초라한  보교 한 채가 놓여졌다.금은주옥으
로 화려하게 장식된 연이 아니라 평민이  타는 초라한 가마였다.가마 중에
도 꽃가마인 사인교가 아니라 겨우 두 사람이 마주 드는 보교였다.
  이제는 국모인 왕비가 아니라 쫓겨 나가는 일개 서민인 신씨가  되고 보
니,연이나 덩은 탈 수 없는 것이다.공신들의 심복 내시는 어서 신비가 나오
기를 재촉한다.
  “날이 저무옵니다.어서 납시도록 하옵시오.”
  내전 방안에서는 신비가 옷을 갈아입는다.왕비의 옷인 봉황을 수놓은 활
옷을 벗어 버렸다.찬란한 금비녀를 뽑고 은비녀로 바꾸어 꽂았다.
  연두빛 깃과 동에 자주빛 삼회장을 단 저고리를 벗고 하이얀  소복을 입
었다.남치마를 벗고 흰 치마를 둘렀다.폐서인이 되는 죄인의 몸이라 화려한 
왕비 복장을 차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인제야 내가 아버지의 순절하신 거상을 다시  입는구나.삼년이 아니라,
한평생 정성껏 입으리라.’
  신비는 옷을 입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꽃 같은 나이 갓 스물,열세 살 때  신정승의 딸로 진성대군인 지금의 상
감한테로 시집을 왔을 때,자기의 팔자가 이쯤 되어 나갈 줄은 꿈에도 생각
해 보지 못했던 노릇이다.
  옷을 다 바꾸어 입은 신비의 눈에는 또다시 엷은 안개가  서리어 두서너 
방울 눈물이 옷섶을 적시었다.마음으로는  목을 놓아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은 심경이었으나,심덕이 있고 교양이 높은 신비였다.혹시나  떠나는 마당
에 남편인 전하의  마음을 상심시킬까 보아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고,두어 
방울 눈물을 떨어뜨린 채 얼른 옷고름으로 눈시울을 꼭꼭 눌러서  눈물 흔
적을 씻는다.
  “마마,어서 나오십시오.”
  무정한 내시의 독촉은 또 한 번 떨어진다.그래도 습관이 되어 마마 소리
는 불렀다.
  신비는 호젓하게 방문을 열었다.시비 한 명이 겨우 뒤를 따랐다.
  “대전마마께 마지막 뵈옵고 가겠다.”
  신비는 가만히 소리로 속삭였다.그러나 목소리는 떨렸다.
  시녀는 비의 명을 받들어 대전으로 들었다.
  중종은 폐비전교를 내린 뒤에 차마 다시 애틋한 아내의 정상을  볼 수가 
없었다.대해 볼 면목도 없었다.슬몃 기운 없이 자기의 처소인  대전으로 들
었던 것이다.
  젊은 전하는 혼자서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아직도 순진한 열 
아홉 살 된 소년이었다.
  “중전마마께옵서 하직을 고하시나이다.”시녀의 전갈을 들은 젊은 임금
의 구곡간장은 또다시 녹아서 젓이 되는 듯했다.
  젊은 전하는 허탈이 된 듯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서 문설주를 붙들고 내전 편 복도로 나섰다.
  마치 죽어 나가는 아내를 영결하러  나가는 심경이었다.시녀가 비틀거리
는 전하를 얼른 부액해 모시었다.
  “무얼 타고 가느냐?”
  “보교가 들어 왔사옵니다.”
  “보교,왜 연은 안 태운다더냐?”
  시녀는 신비의 심복이었다.
  “그것들이 그런 체통을 안다면 오늘날 이 지경을 만들어 억지로 나가시
게 하겠습니까?”
  시녀는 전하를 부액한 채 흑 흑 느꼈다.
  전하는 나이 어린 산송장이었다.비틀비틀 내전 전각에 당도했다.
  신비는 하얀 소복을 입고 전하께 하직을 고하려 하여,성화같이 재촉하는 
내시의 말을 귓전으로 듣고 오똑이 서 있었다.
  젊은 전하의 눈 안으로 환하게 들어오는,소복  입은 신비의 모습은 더한
층 초연하도록 아름다웠다.하이얀 눈 속에 백매화  한 송이가 맑은 품위를 
뿜는 듯도 했다.
  ‘이러한 아내를 생이별을 하다니.’
  젊은 전하는 부풀어오르는 정을 억누르기가 참으로 난감했다.
  통곡이라도 한 번 시원하게 해보고 싶었다.젊은 전하는 복발하는 심정을 
억지로 진정했다.
  저편에서는 마주,남편인 전하를 바라보는 왕비.
  ‘인제는 마지막 갈리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창자가  재릿재릿 비틀어지면서  콧부리가 시큰하고,옥수 
같은 눈물이 펑펑 흘러 눈같이 흰 소복 앞자락으로 떨어진다.
  맥맥히 바라보는 젊은 내외였던 한 쌍의 두 얼굴은,서로 서로 눈으로 소
리 없는 초혼을 피 마르도록 부르는 장면이다.
  이윽고 신비는 복발하는 슬픔을 억지로 진정했다.
  “소비는 지금 나가옵니다.내내 만수무강하옵소서.”
  젊은 전하는 무어라 대답하여야 좋을지 몰랐다.그저  서러웁기만 했다.눈
에서 눈물이 글썽거려서 신비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다.
  호랑이 같은 박원종,성희안 등 공신의 얼굴이  어디서 이곳을 성난 눈으
로 흘겨보는 듯하다.
  신비는 하직 인사를 고하고 초연히 댓돌로 내려선다.전하는 신비를 껴안
아 보지도 못한다.통곡할 수도 없었다.모두가 보는 것 같다.중종은 그 형님 
연산마냥 용감하게 모든 체면과 허식인  껍데기 탈박을 벗어 버리지  못한
다.박차 버리지 못한다.반항하지 못한다.
  “가서 잘 있으오.”
  바보모양 한 마디를 겨우 했다.
  젊은 임금은 맥이 탁 풀리면서 아뜩  현기를 느꼈다.마루 위에서 기둥을 
붙든 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뜰로 내려선 왕비는 또  한 번 젊은 전하를  돌아뵙고,보교 속으로 이내 
몸을 감추어 버렸다.
  보교는 번쩍 들려졌다.보교 안에서는 비로소 왕비의  느껴 우는 철읍 소
리가 새어 나왔다.
  보교는 마침내 궐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버지 신수근과 삼촌들이 모두 다 참혹히 박원종의 손에 죽었으니 왕비
의 친정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사기에는 본제로 내보낸다 했으나,친정 집은 
기둥 뿌리까지 반정 공신들한테 뽑혀 버린 것이다.
  왕비를 태운 보교는 역시 박원종 일당들의 지시에 의해서,나라의 부마인 
하성위 정현조의 집 사랑채 한 모퉁이를 빌어 있게 했다가,다시 시저전 죽
동궁으로 옮아 있게 했다.
  부귀영화가 한 마당 꿈이라는  것은 신씨 왕비에  대한 말이었다.신씨는 
왕비가 된지 겨우 열흘도 못 돼서  까닭 없이 폐서인이 되어 친정도  없는 
훗훗한 몸으로 아들과 딸 하나 낳아 보지도  못한 채,오직 한 사람의 젊은 
전하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면서 한 많은 세월을 흘러 보내게 되었다.
  이것이 중종이 별안간 삼천리 강산에  임금이란 칭호를 받게 된  대가로 
사랑하는 아내를 생판으로 잃어,마음속 깊이 상흔을 받은 불행의 시초였다.
  공신들은 의좋은 남의 내외를 강제로  갈라 놓은 뒤에 자기들의  사람을 
더한층 굳게 하려 하여 자기네끼리 회의를  열었다.말할 것도 없이 반정원
훈 박원종이 주재가 되어 박원종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제 우리들의 뜻대로 신수근의 딸을  궁중에서 내쫓아 보냈으니,다음
엔 우리의 인물로 왕비를  봉하여야 할 텐데,우리 공신들  중에 누가 딸이 
있는가?”
  박원종은 미소를 띠워 좌중을 돌아본다.공신들 속에서 딸을 왕비로 바친
다면,공신들 전체의 권세와 지위는 더 한 번 굳어 지는 것이지만,직접 딸을 
왕비로 들여보내는 사람은 한 평생 허리띠를 풀어 놓고 마음을 턱 놓아 부
귀영화를 누리게 되는 판국이었다.딸을  둔 공신들의 얼굴은  찬란한 꿈을 
꾸어 눈이 번쩍거린다.모두들 왕비의 자리를 탐내서 침이 꿀떡꿀떡 넘어가
는 것이었다.
  “누가 딸이 있는가?”
  박원종은 얼굴에 가득 미소를 풍기면서,더 한 번 외어본다.
  모두들 좋기는 하면서 얼른 ‘내가 딸이 있소’ 하고 대답을 못한다.
  “성대감,따님이 계시오?”
  박원종은 영의정 성희안에게 묻는다.
  “대감,내가 손녀가 하나 있소마는 겨우 두 살밖에 아니  된 돌쟁이요.참
으로 복도 없소.”
  만좌는 까르르 웃는다.
  “다음에 우의정은 어떠하시오.혹시 따님이 있소.?”
  “있기야 있지마는 분한 일이오.작년에 막내딸년을 마저  치워 버렸소.이
럴 줄 알았다면 조금  늦게 시집을 보낼 것을  그랬소.참으로 분하기 짝이 
없소.”
  이번엔 우의정 유순정이 대답한다.하하하 웃음소리가 일제히 일어난다.
  “대감,내가 딸이 있소.나이 꼭 열  아홉 살인데 절묘하오.그러나 지체가 
모자라서 아니 되겠소.첩의 딸이오.”
  큰소리로 지른다.부두들 바라보니 반정공신의 한 사람인 홍경주였다.
  “지체가 모자라다니,대감 지체가 호반이라서 약간  어떤 듯하오마는 반
정공신이면 양반이지 별수가 있소.절묘하다면 한번 간택에 넣어 봅시다.”
  공신들 중의 한 사람이 창의 자락을 헤치면서 홍경주의 앞으로 다가앉는
다.
  “내 지체가 모자란다는 것이 아니라  내 딸의 지체가 약간  떨어진다는 
말씀이오.내 딸이 소실의 소생이라 다리가 좀 짧다는 소리요.”
  홍경주는 호반의 성격다웁게 다 털어 놓고 얘기를 한다.
  “아따 이사람,그렇다면 자네 딸은 후궁으로 들여보내세 그려.”
  박원종은 후궁이란 한 마디에 힘을 주어 쾌하게 말한다.
  박원종의 말에 홍경주의 입은 딱 벌어진다.
  “우리 공신들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내도 좋습니까?”
  “실은 후궁이 더 요긴한 자릴세.우리들 공신이  정실 몸에 딸이 없다면 
작은집 소생이라도 관계치 않으니 삼천 궁녀 후궁 속으로 딸들을  쑥쑥 들
여보내기로 하세.”
  “좋은 말씀입니다.”
  “대감의 큰 배짱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공신들은 입이 제가끔 벌어지면서 모두들 박원종의 말에 손뼉을 쳐서 찬
동한다.
  “그렇다면 나도 작은집의 몸에서  나온 열 일곱 살  된 딸이 있소.내가 
내 딸 칭찬하기는 무엇 하리오마는,얼굴도 묘할  뿐 아니라 침선방적에 막
힐 것이 없소.”
  “대감,나도 딸이 있소.올해 열 아홉 살이오.바로 의주집 태생이오.남남북
녀의 틈에서 나온 것이라 그러한지 정말  참 침어낙안의 태가 있소.대감이 
먼저 한번 선을 보시랴오.”
  “그렇다면 나도 딸이 있소.진주 집 달인데,내가 진주부사로 갔을  때 낳
은 것이오.올해 열 다섯 살인데,남강의 푸른 물 정기를 받아 난  것이 되어 
그러한지 참으로 춘산아미와 단순호치가 군왕의  굄을 받을 만하오.그리고 
도대체 심덕이 좋거든.경상도 태생이라 그러한지 목이 곧고 마음이 착하오.
내 딸도 한몫 후궁 속에 끼워 주시오.”
  “대감,그렇다면 소인의 딸도 후궁으로 한몫 넣어 주시오.소인의 딸은 바
로 전주 집 태생이오.소인이 전주 판관으로 있을 때,전주  기생을 착첩하여 
낳은 딸이오.아까 누가 남남북녀를 초듭디다 마는,여자야 전라도 계집이 제
일이거든.싹싹하기란 바로 제철 참배  맛이지.소인의 달이 제 어미를  닮아 
봄바람에 한들거리는 푸른 버들 천만사 격으로 간드러지게  고웁고 싹싹하
오,소인의 딸도 후궁으로 한몫 넣어 주시오.”
  박원종이 홍경주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내자는 한 마디에  모든 공신들
은 나도나도 하고 손을 들어 덤벼든다.정실 몸에 딸이 없어서 부원군은 되
지 못할망정,딸을 후궁 속으로라도 들여보내서  임금의 첩장인이라도 되어 
한평생을 호강하고 싶었다.모두들 쇠 뼈다귀 한  개를 가운데다 놓고 꼬리
를 쳐 덤벼드는 개 떼의 얼굴이었다.이 꼴을 바라보는 박원종은 껄껄 웃었
다.
  “자아,그렇다면 우리 공신들의 딸들은 모조리  왕비가 아니면 후궁으로 
들여보내기로 결정합시다.그런데 정말 신비를 대신할 왕비 감이 없어 걱정
이오.”
  박원종이 신비를 대신할 정비 감이 없다고 괴탄하면서 좌중을 다시 돌아
다볼 때,그 중 말석에 앉아 있는 젊은 호반 윤임은 아무 말도 아니하고 빙
글빙글 웃고만 앉아 있었다.
  “자네는 어째 아무 말이 없는가?”
  “젊은 놈이 어르신네들  말씀하시는 데 어찌  감히 말참견을  하겠습니
까?”
  “이 사람아,젊다고 말을 못 해.요새  사람이 아니로군.자네도 당당 사등
공신인데,왜 말을 못 하나.아마 딸이 없는 게지.하하하.”
  박원종은 윤임의 말하는 품이 나이는 젊지만 덕성스러워서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웠다.
  “딸은 없습니다마는   누이는 하나  있습니다.누이라도 관계치   않습니
까?”
  “이 사람,누이도 좋고말고.자네 친누이가 있는가,몇 살인가?”
  “올해 열 여섯 살이옵니다.”
  “그러면 꼭 되었네 그려.”
  박원종은 무릎을 탁 친다.모든 공신들은 부러워서 침을 꿀꺽 삼킨다.
  “자아,그럼 윤임의 누이로 신비 대신 정비를 삼으라고 위에 아뢰고,홍경
주 이하 모든 공신의 소실의 딸들은 후궁을 삼으시라고 권합시다.여러분의 
의향은 어떠하시오.”
  박원종은 다시 공신 일동을 둘러본다.
  “좋습니다.”
  공신들은 모두 다 일제히 찬동을 했다.
  이튿날 박원종,성희안은 대궐로 들어가 임금께 입시를 했다.
  “신시를 내보내셨으니,빨리 처녀를 간택하시어 왕비를 봉하옵소서.”
  사랑하는 조강지처를 쫓아버리고 성화 독촉을 하던 늙은  공신들이 이번
에는 또다시 새 왕비를 모셔 들이라고  졸라댄다.임금은 왕비고 아내고 간
에 모든 것이 다 귀찮고 괴로웠다.눈에는 신비의 아리따운 모습이 눈에 걸
려 삼삼하다.그저 신비가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아직 내 마음이 괴로웁소.왕비는 잠깐 두었다가 맞이하기로 합시다.”
  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거절했다.
  “하루라도 중궁의 자리가 비어 계시어서는 아니 됩니다.곧 간택을 하시
도록 하옵시오.”
  공신들은 또다시 임금을 육박한다.
  “나라에서는 후궁들이 있으니,나의 뒤를 받들 사람은 많소.아직 내 마음
을 괴롭히지 마오.”
  젊은 임금은 슬몃 도피해 버렸다.박원종,성희안은 임금이 말하는 후궁 소
리에 얼른 암시를 받았다.강박해서 왕비를 삼으라  했다가 의가 좋지 않으
면 탈이었다.
  “그러면 내년 봄을 기다려 왕비를 간택하옵소서.”
  두 공신은 어전을 물러난 뒤에 자기 집으로 상궁 내인을 불렀다.원래 내
인이란 재상의 집을 출입할 수 없는 것이요,재상이 내인을 부를 수도 없는 
것이었다.그러나 벼락 불덩이 같은 혁혁한 권세를  잡은 박원종 앞에는 국
법도 소용없었다.상궁 내인이 황망히  나온 뒤에 박원종은  늙은 상궁한테 
비밀한 지령을 내렸다.
  “공신의 딸 일곱 명을 후궁으로 들여보낼  테니,내일 밤부터 차례로 대
전 침소로 인도해 모시게 하라.특별히 잘 거행하면 후한 상을 주리라.”
  박원종의 엄한 분부에 늙은 상궁은 허리를 아니 굽힐 수 없었다.
  “대감의 분부대로 거행하오리다.”
  공신 박원종의 비밀한 계획을 받아 공신의 딸 일곱 명은 하나씩 둘씩 대
궐 안 후궁 속으로 들어갔다.임금도 전혀 알 길이 없었다.박원종은 이 일곱 
후궁들 속에 자기의 먼 촌 일가의  딸 하나를 양녀로 하여 끼워  들여보낼 
것을 잊지 아니했다.이것은 박원종이 궁중 지밀속에 자기의 심복인 여자를 
들여보내서 앞으로의 권세를 더욱 농락하고 비밀을 정탐하기  위하여 쐐기
를 지른 것이었다.아무리 자기와 한편인 공신들의 딸들이 궁중으로 들어가 
왕비가 되고 후궁이 된다 하더라도 자기의 딸이 직접 왕비나  후궁이 되는 
것만은 못했다.뿐만 아니라 염량세태란 오늘은 좋았지만 내일은 어떻게 변
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다른 공신의 딸이 왕후가 되고 후궁이 되어 임
금의 총행을 한 몸에 차지하는 날,권력과  세도는 왕비의 아버지나 후궁의 
애비한테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박원종은 불행히 딸이  없었다.미리 이것
을 생각하고 먼 촌 일가의 딸을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넌지시 후궁 속으로 
들여보냈다.
  박원종은 일가 집 딸을 자기의 없는 딸 대신 후궁으로  들여보내기 위하
여,쫓아낸 신비보다도 얼굴과 재주가 뛰어나도록 고운  여자를 골랐다.나이
도 지밀로 들어가 왕과 접근하기만 하면 단박에 아들이나 딸을 낳을 만한,
임금과 걸맞는 이십대의 풍윤한 육체미를 가진 여자를 골랐다.
  신비를 궁 밖으로 내보낸 지도 두어 달이 넘었다.공신들이 새 왕비를 간
택해서 왕후를 봉하십시오 하고 강박해 졸라댄 지도 거의 한  달이 되었을 
때였다.전하는 아직 왕비를 맞지 않겠다고 거절을 하였으나,한참 나이 사춘
기에 든 젊은 왕이었다.글을  읽다가도 무엇이 뭉클하고  떨어지면서 비의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다.더구나 귀뚜리 구슬피 우는 길고 긴 밤과 서리 찬 
겨울 하늘 기러기 소리 처절할 때,전하의 고적한 마음은 더 한층 쓸쓸했다.
이십대 젊은이는 환경이 평탄해도 회의와 동경과 고독 속에 헤매는 시절이
다.임금이 된 대가로 허무하게  아내를 잃어버린 이십대의  임금은 허탈한 
마음을 주체할 길 없는 채 그날을 흘러 보냈다.
  오늘도 젊은 전하는 경연에서 온종일 글을 읽고 있다가 등촉에  불이 켜
졌을 때,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내전 침실로 힘없이 들었다.저녁 수라상을 
대하려는 때문이었다.일찍이 아내 신비가 있을 때는  화락하던 침전이었다.
만백성을 다스리는 천승 임금이 된 뒤에 젊은 아내였던 신비와 함께 이 나
라를 밝은 정치로 다스려 보자고 희망에 벅찬 가슴을 부풀어올리면서 다정
스럽게 계획을 세우고 이야기했던 이 방이었다.
  지금 신비가 없어진,주인 잃은 이 방에는 소슬한 찬바람이 돌았다.구중궁
궐 호화로운 곳이 아무리 겨울이라 한들  온돌이 차가울 리야 있으랴마는,
짝을 잃은 봉황 이불엔 성에가 서려 을씨년스럽고 함께 베던  원앙수 베개
엔 먼지만이 자욱했다.신비를 생이별한 뒤에 가을  밤과 겨울 밤은 전하에
게 있어서 너무나 길고  길었다.신비를 꿈에라도 한 번  만나려 하여 잠을 
청했으나,온몸이 스멀거려 잠을 이루지 못하니 꿈이 꾸어질 리가 없었다.옥
등잔 불을 돋우어 보기도 하고 소매로 후리쳐 꺼 보기도 했으나 잠은 영영 
오지 않았다.전하는 날마다 새벽 종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잠 소게 들곤 했
다.석양이 꺼진 뒤 밤만 되면 전하는 괴로웠다.
  ‘이 긴 밤을 또 어찌 보내리.’
  전하는 말은 못 하고 이렇게 가만히 마음속으로 웅얼거려 한숨을 내뿜었
다.오늘도 전하는 다가오는 밤을  시름하면서 저녁 수라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장지문이 스르르 열리며 늙은  제조상궁이 나타나자 무수리는  수라상을 
받들어 들어오고,그 뒤에는 조그마한 연엽 소반에  반주상을 받든 한 사람
의 미희가 뒤를 따라 들어왔다.
  기이한 훈향이 사각사각 끄는 비단 치맛자락에서 울연히  일어나서 전하
의 코를 스쳤다.좋은 훈향이었다.여태껏 맡아 보지 못하던 즐거운 내음이었
다.전하는 얼굴을 번쩍 들어 연엽 소반을 든 미희를  바라보았다.눈이 환했
다.달이 떠 오는 것이었다.노란 회장 저고리에 남스란치마를 입었다.
  무수리가 수라상을 전하 앞에 반듯이  놓고 뒷걸음질을 쳐 물러나간  뒤 
늙은 상궁은 팔을 짚고 미소를 띠워 아뢴다.
  “오늘은 젊은 내인 한 명으로 수라상을 거행케 하였나이다.늙은 저희들
보다 나을까 하나이다.”
  상궁은 말씀을 아뢰자 고요히 물러난다.
  방 안에는 젊은 왕과 젊은 여인뿐이었다.
  미희는 소르르 수라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스란치맛자락이 고웁게 주저
앉으며 아렷한 훈향이 더 한 번 전하의 코를 엄습했다.싫지 않은 냄새다.전
하는 또 한 번 젊은 내인을 바라보았다.어글어글한 눈이 윤을 흘리며 살폿 
전하의 용안으로 달렸다.눈과 눈이 마주치자,두 편은 제각기 황홀함을 느꼈
다.미희는 이내 황망히 눈을  떨어뜨렸다.전하는 더 한  번 싫지 않았다.몇 
달째의 고적한 마음이 얼음 녹듯 풀리는 듯했다.
  “반주를 따라 올리오리까?”
  이윽고 미희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전하는 신비가 나간 뒤에 비로소 두어 잔  술을 기울여 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미인이 따라 올리는 술은 아직도 받아 마신 적이 없었다.전하의 생
각이 약간 호탕해졌다.
  ‘미인을 앞에 앉히고 술 한잔을 마시는 맛도 홋홋치 않아 좋으려니.’
  이런 생각이 문뜩 일어났다.
  “어디 한 잔 따라 보아라.”
  미희는 금잔에 가득 천일주를 따라 불수같은 보드라운 두 손으로 받들어 
올렸다.전하는 미희의 손에서 술을 받아 마시기란 난생 처음이었다.한 손을 
늘이어 금 술잔을 받는 왕의 눈은 술잔보다도 포근할 듯한 여인의 흰 손으
로 눈이 흘렀다.전하는 이슥히 계집이 잔을 받든 흰  손을 바라본다.붓끝같
이 갸름한 손끝이 혈색이 좋아서 손톱 밑으로 볼그레 고왔다.
  ‘이것이 미로구나.’
  임금은 생각해 보았다.여태껏 대궐에 들어와서 글만  읽었지,이러한 아름
다움은 대해 본 일이 없고 느껴 본  적도 없었다.조강의 아내인 신비의 손
에서도 발견해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이었다.전하는  미희가 받들어 올리는 
술잔을 들어 입술에 대었다.술이 입 안으로 순하게 스르르  흘러 들었다.신
비가 나간 뒤에 늙은 상궁한테 술을 가져오라 해서 상궁의 손으로 따라 올
리던 그 술맛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술맛 참 좋구나.이것이 무슨 술이라 하더냐?”
  전하는 미희한테 말을 붙이고 싶었다.
  “천일주라 하옵니다.”
  미희는 눈을 내리깔아 고웁게 대답했다.
  “한 잔 더 마실까?”
  “아니 되십니다.취하십니다.”
  미희는 벌써 전하를 위했다.전하는 미희가 시키는 대로 밥을 들었다.밥맛
도 구미가 더 당기는 것 같다. 임금은  오래 간만에 수라를 맛있게 자시었
다.
  상을 물린 뒤에 전하가 전각 대청을 거닐려 하여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
을 때,미희는 수라상 자리를 정하고 훔치다가  일어나는 전하의 거동을 뵈
옵자,잽싸게 전하 앞으로 달려 전하의 곁을 부액해 올렸다.
  풀솜같이 다스하고 부드러운 처녀의 손길이 호젓한 심사를  가졌던 젊은 
전하의 겨드랑이에 쾌감을 주었다.
  ‘영리한 계집애다.’
  전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그대로 부액을  받았다.미희가 지척에서 
왕의 겨드랑이를 껴올리니,미희의 몸에서 우러나는  향훈은 아까보다도 더
한층 전하의 코를 강렬하게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젊은 전하는 별안간 전
각에 봄이 온 것을 느꼈다.
  ‘왜 이런 즐거움이 궁 안에 있는 것을 진작 몰랐던가.’
  전하는 마음속으로 웅얼거리며 전각을 거닐었다.이제는  신비 생각도 나
지 아니했다.눈에 걸리는 것은 신비보다도 반주를  따라 올리고 부액을 해 
바쳤던 달과 같이 환한 그 미인이었다.
  “너는 어느 처소의 내인이냐?”
  부액을 떼고 다시 온돌로 들어가는 미희를 향해 전하는 물었다.
  “오늘부터 대전을 지키라 제조상궁이 분별을 했사옵니다.”
  미희는 고개를 다소곳 숙인 채 고웁게 대답했다.전하의 귀에는 꾀꼬리의 
노랫소리보다도 더 고웁게 들렸다.만족한 웃음이 전하의 입가에 돌았다.
  미희는 말씀을 올리고 온돌로 들어가자,방을 정하게 치우고 용상에 전하
의 금침을 조용히 깔았다.
  얼마를 거닐던 왕은 한기를 느꼈다.
  온돌로 들어서니,원앙금침이 불빛 아래 火려하게  깔려졌다.어젯밤까지도 
성에가 선 듯했던 이불 자락인데 오늘 이 밤에 달 같은 미희가  금침 자락
을 펼치고 보니 방 안엔 다시 봄빛이 온 듯했다.
  전하는 일부러 펄썩 금침 위로 주저앉아  본다.마음이 푸근한 탓인지 앉
은 자리도 푸근했다.전하는 푸근한 자리에 앉아 불빛 아래 다시 미희를 바
라본다.두었다 보아도 탐스럽게 잘생긴 얼굴이었다.얼굴만 이 환한 것이 아
니었다.전신의 육체가 고르고 풍만했다.미희는 번쩍번쩍 광채를  뿜는 요강 
타구를 금침 앞에 별여 논 뒤에 몸을 곱게 가져 장지문을 닫고  물러가 문
밖에서 조용히 아뢴다.
  “대전마마,안녕히 취침하시옵소서.”
  전하는 별안간 손에서 구슬을 놓치는 듯했다.
  “벌써 가려느냐?”
  장지 밖에선 아무 대답이 없다.
  “게 있거라.”
  역시 대답이 없다.
  전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장지문을  밀어젖혔다.미희는 가지도 못하
고 오지도 못하는 채,고개를 숙여 수줍음을 머금고 섰다.
  “벌써 가려느냐?밤이 긴데...”
  전하는 덥석 아름다운 여인의 손을 잡아  끌었다.보드랍고 따스했다.촉촉
히 장심에 땀이 배었다.땀이  아니라 향지인 성싶었다.젊은 전하의  마음은 
더한층 설레었다.
  “들어와 놀다 가거라.”
  여인의 혈색 좋은 얼굴이 더 한 번 상기가 되어 빨갛게 물들었다.전하께 
손길을 붙잡힌 채 장지 안으로 다시 끌려 들어왔다.
  “너 언문을 깨쳤느냐?”
  “아옵니다.”
  “그러면 글을 좀 읽어 보아라.”
  전하는 문갑 위에서 <용비어천가>를 들어 미인에게 넘겨 주었다.
  미희는 전하한테서 <용비어천가>를 받아 들고,치마를 거두어 단정히 앉
은 뒤에 와룡촉대의 등심을 다서 불을 밝혔다.
  전하는 글을 안다는 미희의 대답에 한층 흥미가 끌렸다.
  “너 <용비어천가>가 무슨 책인 줄 아느냐?”
  전하는 촛불 아래 앉은 미희를 바라보며 미소를 풍겨 묻는다.
  “세종대왕께옵서 고려의 뒤를 이어 이 나라를 창업하옵신 태조,태종 할
아버님과 아버님 두 분 대왕전하의 창업하옵신 공덕을  거룩하게 예찬하시
어 문신으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신 것이옵니다.”
  미희는 고개를 들어 총명한 눈을 반짝이면서 대답했다.전하는 무릎을 탁 
쳤다.
  “거 용하구나.어떻게 <용비어천가>의 내력을 알았느냐?”
  전하의 입가에는 오래간만에 화려한 웃음이 흘렀다.
  “궁중에 있어서 어전 지척에 전하를 모시옵는  몸으로 <용비어천가>의 
내력을 몰라서야 쓰겠습니까?일부러 틈을 타 배웠습니다.”
  전하가 무릎을 쳐 칭찬하는 바람에 미희도  좋았다.방긋 웃음을 풍겨 아
뢰고 다소곳 고개를 숙였다.웃음을 머금은 붉은  입술이 전하의 눈에 더한
층 고왔다.마치 진다홍 산다화 한 봉오리가  눈앞에 터진 듯하다고 전하는 
생각했다.전하는 대견해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덥석 미희의 손을 어수
로 쥐었다.미희는 임금에게 손을 잡힌 채 황망하지 않았다.일부러  손을 잡
히러 드러온 판이니 놀라울 까닭이 없었다.태연히  손을 잡힌 채 뿌리치지
도 않았다.그러나 처녀 숫색시였다.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지면서  뺨에는 홍
훈이 조수마냥 활짝 퍼졌다.
  “어서 읽어 보아라.”
  “손을 놓아 줍시오.”
  계집은 고요히 대답했다.전하는 아름다움에 취하여 차마 손을 놓을 수가 
없다.
  “책을 연상 위에 놓고 읽어라.”
  미희는 거북하지만,한 손은 전하에게 잡힌 채 한 손으로 책을 연상 위에
서 바로 잡았다.미희는 마음이 설레고도 좋았다.궁중 풍속에 전하가  한 번 
여자의 손을 잡으면 그 여자의 몸은 벌써 전하의 것이었다.어느 다른 사람
이 감히 손을 잡지 못하는 법이다.친정  아버지나 어머니도 임금이 잡았던 
손이라 해서 감히 잡지를  못한다.그러하니 다른 남성이야  더구나 미희의 
손을 잡을 사람은 하늘  아래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계집은 일부러 손을 
잡히러 들어왔으니,마음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곧 빈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미희의 마음속에 일어났다.
  “어서 읽어 보아라.”
  임금은 미희의 장심 안에 촉촉히 서리는 땀을 손끝으로 느끼면서 재촉한
다.전하는 여인의 손에 솟는 땀이 땀이 아니라 향기름이라 생각했다.
  “불휘기픈남간 가마래아니그츨쌔 내히이러 바라래 가나니.”
  (근원이 깊은 물은 가물에도 마르지 아니하여 내를  이루어 바다로 들어
가네.)
  이번엔 금구슬이 옥소반에 구르는 음향이 아니라,청학이 구름을 헤쳐 푸
른 하늘로 나르며 노래하는 목청이다.
  “좋다.”
  전하의 입에서 신흥에 겨워 칭찬하는 소리가 떨어진다.
  “책을 덮어라.”
  전하는 더 이상 글을 미희한테  읽히고 싶지 않았다.<용비어천가>를 읽
는 미희의 목청도 좋았지만,아름다운 처녀와 얘기를 하고 싶었다.
  “나이 몇 살이냐?”
  “열 아홉 살이옵니다.”
  “나하고 동갑이로구나.”
  “성이 무어냐?”
  “박 가옵니다.”
  “너의 아비가 누구지?”
  “호반이온데,소녀가 어릴 때 죽었사옵니다.”
  미희는 일부러 박원종의 일가로서 원종의  양딸이란 말을 아니했다.미희
가 박원종의 명을 받아 대궐로 들어올 때,원종은 여러 차례 미희에게 자기
의 일가나 양딸이라 말씀 드리지 말라고 당부를 했던 것이다.
  “그러면 편모 시하냐?”
  “그러하옵니다.”
  “너 언제부터 궁 안에 들어왔느냐?혹시 우리 형님 연산을 모신 일이 있
느냐?”
  처녀의 얼굴은 새빨개졌다.부끄러웁지만 일신의 결백을  변명 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도 대답을 아니 하면 큰일이었다.
  “대왕마마께옵서 즉위하신 뒤에 엊그제 새로이 배치되옵는 내인에 뽑혔
사옵니다.처녀옵니다.”
  미희는 처녀 한 마디에 더 힘을 주어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엊그제 들어왔느냐?”
  왕은 더욱 신선함을 느꼈다.
  “너 나의 후궁이 되어 보려느냐?”
  전하는 말을 마치자 미희의 윤이 흐르는  검은 머리를 쓸었다.대답 없이 
고개를 숙인,불빛 아래 비쳐지는 미희의 얼굴은 붉은 안개를 끼얹은 듯 더
한층 화사 했다.
  이날 밤에 박원종의 양딸인 달같이 아름다운 미희는 전하를 모시는 은총
을 입었다.
  이튿날 미희에게는 경빈이라는 첩지가 내렸다.
  전하는 신비 다음 두  번째의 애인을 만난  것이었다.풍윤하고 아름다운 
경빈 박씨의 발달된 육체미는 어릴 때부터 진성군의 부인으로 들어온 신비
에 비하여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전하는  박빈으로 인하여 비로소 새
로운 청춘의 세계를 발견했다.
  애틋하고 가엾고 불쌍하게 생각했던 신비에 대한 생각은 차츰 차츰 아득
한 옛 기억으로 엷어지기 시작했다.하루 낮,하룻밤에  시시때때로 문뜩문뜩 
금창이 미어질 듯 일어나던 신비의 생각이 이제는 하루에 한  번쯤 났다가 
곧 스러져 버리곤 했다.하루에 한 번쯤 나던 신비의 생각은 다음날에는 박
빈의 웃는 얼굴에 도취되어 한 번도  생각이 나지 아니했다.중종은 차츰차
츰 신비를 잊기 시작했다.
  경빈 박씨가 임금을 날마다 모신지 대엿새 뒤였다.중종의 성격은 완전히 
경쾌한 젊은이로 다시 되어 버렸다.
  이날도 경연에서 신하들을 대하고 편전으로 돌아와 저녁  수라를 받으려 
할 때였다.늙은 제조상궁이  무수리한테 수라상을 받들고  들어오는데,뒤에 
따르는 여인이 경빈 박씨인  줄 알았더니 박빈이  아니었다.전하는 용안을 
번쩍 들었다.보지 못하던 묘한 계집이 수라상의 뒤를 따랐다.
  “경빈 박씨 몸이 고단하와,새로운 나인이 거행을 드리옵나이다.”
  밖에서 떠메어 임금이 되어 들어온 전하인지라,아주 후궁 속 일을 알 까
닭이 없었다.나인의 배치는 제조상궁이 절대로 권한을 가졌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내력 있는 집의  딸이옵니다.공신 홍경주의 딸이
옵니다.대전마마,귀여워해 주옵소서.”
  공신 홍경주란 말에 임금의 귀가 번쩍 뜨였다.
  “공신 홍경주의 딸?”
  전하는 말을 되받았다.
  홍경주는 공신이지마는 박원종이나 성희안처럼 임금을 강박하는  공신이 
아니었다.다만 자기를 도와서 반정을 일으켜 준 사람의 하나였다.신비를 내
쫓으라고 강박도 아니 했다.전하는 얼마쯤 친근한 생각이 들었다.
  전하는 앞에 조용히 서 있는,홍경주의 딸이라는 처녀를 바라 보았다.머리
에는 금첩지를 얹고,그 위에는  조그마한 황금 화관을 썼다.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서 있는 모습은 청초한 월궁 항아가 지밀 궁중에 하강 을  한 듯했
다.고운 눈매,흰 귓불,미소가 항상 흐르는  듯한 입,참으로 절염이었다.여기
다가 어깨는 날씬해서 제비가 곧 물을 박차고 날 듯한 날렵한 자태다.경빈 
박씨가 달덩이 같다면 홍경주의 딸은 수련이 향을 풍겨 주는 듯했다.
  이윽고 홍경주의 딸은 전하의 상 앞에 꿇어앉아 열두 첩 반상 뚜껑 열리
는 소리조차 나지 아니했다.
  이날 밤에 전하는 홍경주의  딸과 자리를 같이했다.전하는  세번째로 또 
하나의 여인의 비밀을 알았다.이튿날 홍경주의  딸에게는 희빈이라는 첩지
를 내렸다.
  공신들은 어서 자기 딸을 먼저 후궁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제조상궁에게 
뇌물을 썼고,황금,백금,비취옥,갖은 보배가 끊일 사이  없이 제조상궁한테로 
들어갔다.아직 전하는 민간에서 들어온 풋임금이라,그 형님  연산처럼 능동
적으로 놀지 못했다.공신의 딸들은 제조상궁이 대어 주는 기회를 가져야만 
전한한테 가까이 갈 수가 있었다.경빈 박씨가  임금을 모시고 희빈 홍씨가 
임금을 모셨다는 소리를 듣자,내인으로 딸을 들여보낸 공신들은 다투어 가
며 제조상궁한테 뇌물을 보내고,은근히 졸라대는 독촉이  성화 같았다.뇌물
이 적어서 그러한가 하고,세 번 네  번 금은보화를 상궁에게 들여보내자는 
궐자도 많았다.이왕 딸이 후궁이 된다면 남보다  먼저 귀염을 받아서 전하
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할 판이었다.
  두 번 세 번 상궁에게 뇌물을 들여보낸 공신들은 날마다  아침이면 기별
지를 들여다 보았다.
  기별지에는 벼슬하는 사람의 사령을  반포하듯이 누구로 내명부를  삼아 
빈을 봉한다는 글들이 적혀 있는 까닭이다.
  상궁은 뇌물이 많고 적은 것을 비교해서 하나씩 둘씩 공신의  딸들을 틈
을 타서 침전으로 들여보냈다.자리를 깔러 들여보낼 때도 있고,수라상을 받
들려 접근을 시키기도 했다.
  전하는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를 만나듯 네 번째로 창빈 안씨를 만나고,
다섯 번째로 만난 여인이 숙의 이씨요,여섯 번째 만난 후궁이 숙의 홍씨요,
일곱 번째 만난 여인이 숙원 이씨요,여덟 번째 만난 여인이 숙원 김씨요,아
홉 번째 만난 여인이 사등공신 윤임의 누이인 윤숙의였다.
  이제 전하는 신비가 없으니 팔선녀 속에서 놀았다.
  공신들은 임금이 얼른 정비를 두려고 아니 하니 이렇게 하여  제각기 딸
들을 후궁으로 들여보냈고 사등공신인 윤임의 누이도 첩의 딸이 아니라 정
실의 딸이건만,일이 급하니 후궁으로 들여 보내어 윤숙의가 되었던 것이다.
  이듬해 정묘년이 되자 공신들은 약속대로 다시 전하께 정궁을 맞아 가례
를 치르라고 우겨댔다.
  간택령을 내려 처녀들을 뽑을 것이 아니라,후궁  중에서 마음에 드는 여
인으로 정비를 택하라는 것이었다.
  
    국상
  전하는 해가 바뀐 뒤에도 정궁을 맞지  않겠다고 강변할 수는 없었다.간
택령이 내려서 반가집 처녀들의 혼인을 중지시키고 천하를  시끄럽게 하는 
것보다,공신들의 말대로 차라리 일  년 동안 정이 든  공신의 딸들인 후궁 
팔선녀 속에서 정비를 택하기로 했다.
  전하는 팔선녀 후궁 중에서 정비를  고르는데,일등공신 박원종의 양딸인 
경빈 박씨도 아니요 홍경주의 첩의 딸인 희빈 홍씨도 아니었다.사등공신인 
윤임의 누이 숙의 윤씨를 골랐다.
  숙의 윤씨는 자색의 미보다도 마음이 더 고왔다.윤임이 아버지 윤여필의 
정실 부인의 딸이었다.첩의 소생이 아닌 윤숙의는  덕이 있고 성정이 어질
었다.팔선녀들은 서로들 고움을 자랑하여 임금의  총행을 제각기 독점하려 
했으나,윤숙의만은 남을 시새고 중상하고 임금을  독차지하려 들지 아니했
다.모든 동료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아랫 나인들을 덕으로 잘 거느렸다.궁에 
들어온 지 일 년 동안에 윤숙의 의 어진 소문은 궁중 안에 자자했다.
  “정실 부인의 소생은 다른 거야.”
  “사람이란 바탕이 좋아야 하는 거다.윤숙의는 마치 관음보살이 이 세상
에 다시 하강한 것 같단 말이야.참으로 본받을 만한 여자거든.”
  대궐 안 나인의 처소마다 늙고  젊은 나인들은 모두들 이같이  윤숙의를 
제일인자로 논평했다.
  그가 왕후로 결정된 것은 첫째로 윤씨네  집 정실의 딸이라는 점,둘째로 
그의 심덕이 후궁 중에서 제일 뛰어나다는 점으로,쫓겨난 신비를 대신하여 
신비가 쫓겨난 지 햇 수로 이태 만에 왕후의 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전하는 왕후의 곤위를 윤씨로 책봉시킨 뒤에도  팔선녀 후궁들을 
계속 사랑했다.사랑의 열매는 주렁주렁 매달리기 시작했다.
  경빈 박씨는 첫번 수태에 단박 옥동자  아들을 낳았다.임금은 이름을 지
어 미라 하고 복성군의 칭호를 내렸다.경빈  박씨가 아들을 낳으니 다음엔 
숙의 홍씨가 아들을 낳았다.전하는 이름을 지어  희라 하고 해안군이라 봉
했다.숙의 홍씨가 아들을 낳으니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도  아들을 낳았다.
전하는 이름을 영이라 짓고  금원군의 칭호를 내렸다.희빈  홍씨가 아들을 
낳으니 창빈 안씨도 아들을 낳았다.전하는 거라 이름을 짓고,영양군을 봉했
다.
  이제 전하는 완전히 신비를 잊어버린 중에 팔선녀 속에서 향락이 무궁했
다.희빈 홍씨와 창빈 안씨는 아기집이 좋아서 쑥쑥 아들만  뽑아 놓았다.희
빈은 둘째로 봉성군 완을 낳고,창빈은 들째로 나중에 선조대왕의 아버지가 
될 덕흥대원군 초를 낳았다.한편으로 딸들이 또 무수하게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팔선녀 후궁들은 제각기 전하의 사랑을 받아 아들과 딸들을 낳는 
중에,새로 된 왕비 윤씨는 딸 하나를 낳은 뒤에 몸이 허약하기 시작했다.약
원에서는 산삼,녹용의 숱한 보약을 써서 겨우 그의 생명을 유지했다.
  세월은 흘러서 윤 왕후가 왕비의 위에 오른 지 아홉 해째 되는  해에 왕
비는 다시 태기가 있어 오래간만에 원자를 탄생했다.
  왕비인 정궁의 몸에서 십년 만에 임금의 뒤를 이을 원자가 탄생되었다는 
것은 나라의 큰 기쁨이었다.왕궁을 위시하여 온 조정과 온 백성 나라의 융
숭한 복력을 축하했다.
  전하는 원자의 이름을 고라 짓고,장차 자신의  뒤를 이을 원자라 생각했
다.
  그러나 왕실에는 또 한 번 불행이 찾아왔다.
  중종 십년 을해 이월 이십오일에 원자를 탄생한 새 왕비 윤씨는 해산 후 
더침으로 삼월 이일에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꼭 한  이레 만에 원자 
하나를 낳고,스물 다섯 살이란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하직한 것이었다.
  이 돌연한 어진 왕비의 국상은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전
하는 참으로 아내 복이 없는 임금이었다.첫번째  조강의 아내였던 왕비 신
씨는 반정을 찬성하지 않았던 신수근의 딸이라 해서 공신들의 등쌀에 쫓겨
나서 생이별을 하였고,둘째 번  왕비로 삼은 윤비는 생각지도 않은 산후발
한으로 인하여 죽음으로 이별을 해 버리게  되었다.이제 왕비의 정궁은 또 
한 번 비어 버리고 말았다.
  구슬픈 국상 속에서 인심은 술렁거렸다.궁중과 조정과 유림과 시정은 말
할 것 없이 모두 다 걱정과 근심들이 가득했다.
  “저 어린 핏덩이 원자의 신세가 어찌 되나?”
  어머니 왕비를 잃은 핏덩이 원자 어린 아기의 운명은 진실로  바람 앞의 
등불인,외롭고 고단한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다.핏덩이 왕자는  다만 아버
지 중종전하가 있을 뿐,임금의  후궁인 꽃 같은 팔선녀가  모두 다 핏덩이 
원자의 대적이었다.꽃 같은  팔선녀들의 소생인  복성군,해안군,금원군,영양
군,덕양군,봉성군,덕흥군 등 일곱 후궁의 아들이,나이는 어리나 모두  다 이 
핏덩이 원자의 적국이었다.
  “나라가 장차 어지럽겠구나!”
  유림들은 탄식했다.
  “후궁 속에서 누가 왕후가 되는지,그 아들이  전하의 뒤를 잇기가 십상
팔구다.원자의 복은 박하고 기구하기도 하다.”
  시정 백성들은 이렇게 걱정들을 했다.
  “복성군의 어머니 경빈 박씨가  제일 상감의 귀염을  받는다.필경 경빈 
박씨가 계비로 뽑히고 복성군이 왕세자가 될 거다.”
  “아니다.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는  왜 경빈 박씨 만큼  귀염을 아니 받
나?희빈 홍씨가 더 유력할 거다.”
  “아니다.창빈 안씨가 유력하다.창빈 안씨는 한 삼줄에 내리 아들을 둘씩
이나 뽑지 아니했는가.창빈 안씨가 왕비로 들어설 거야.”
  “천만에,희빈 홍씨도 아들이 둘이  아닌가배.금원군도 그의 아들이구,봉
성군도 그의 소생이 아니냐.”
  궁녀들은 이렇게 왕비가 누가 될 것인지 호기심을 가져 뒷공론이 분주했
다.
  이 궁에 제일 기막혀 하는 사람은 윤 왕후의 오라버니 되는 윤임이었다.
딸을 두드려 통곡을 해도 시원치가 않았다.발버둥질을  쳐서 벽을 차 무너
뜨려도 신통치가 않았다.십년  공부가 나무아미타불이라더니  자기를 두고 
이른 말이라 생각했다.
  정비로 된 자기 누이가 아들을 낳아서 앞으로 이 나라의  제왕이 된다면 
자기는 임금의 외숙이 되는 것이었다.임금의 외숙으로 앉아서 천하의 권세
를 잡아 좌지우지할 텐데,천행으로 누이가 왕자  하나를 낳기는 했으나 뜻
밖에 이렇게 거연히 세상을 떠나갈 줄은  몰랐다.핏덩이 왕자의 일이 외로 
될지 바로 될지 큰일이었다.윤임은 부모상을 당한 것보다 더한층 슬펐다.
  그러나 팔선녀 후궁들에게 있어서는 마음이 사뭇 설레고  움직이는 기회
였다.뜻밖에 왕비 윤씨가 핏덩이  왕자를 낳고 산후발한으로  돌연 세상을 
떠나고 보니,처음에는 놀랍고 가엾다 생각했다.그러나 다음  순간부터 팔선
녀 후궁들의 마음엔 제각기 야욕이 움직였다.여덟 해 전에 왕후가 못 됐던 
일이 이번에는 꼭 성사가 되려나 보다 생각했다.푸른 행복의 문이 바로 그
들 눈앞에 활짝 열려지는 것 같았다.바로 문지방 앞에는 행운의 황금 열쇠
가 떨어져 있는 듯했다.주인을 잃고 비어 있는 왕후의 황금 보좌가 모두들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성싶었다.제각기 용종인 왕의  씨를 받아 왕자 하나
씩을 쑥쑥 낳은 팔선녀  후궁들이었다.왕의 은총을 밤마다  무르익게 받고 
있는,백화가 요란하게 피어 있는 천하 절염들이었다.베갯머리  송사로 소근
소근 두어 마디만 하면 전하의 마음을 단통 움직여 왕후의  자리로 올라갈 
자신들이 만만했다.
  경빈 박씨,희빈 홍씨,창빈 안씨는 팔선녀들 중에도 제일 귀염을  받는 여
인들이었다.육체가 풍성한 달덩이 같은 경빈 박씨,백합이 이슬을 머금어 향
을 뿜는 듯한 희빈 홍씨,물찬 제비 같은 창빈 안씨,이들 세  후궁은 왕후의 
부음을 받자 신을 거꾸로 끌고 대전으로 올라가 전하를 위로한다.
  “천만 꿈밖에 이게 어인 변고 오니까.”
  희빈 홍씨는 자기가 제일 먼저 들어온  줄 알았더니,박원종의 양딸 경빈 
박씨는 벌써 이렇게 전하를 위로하고 있었다.
  “망극한 일도 분수가 있지,이런 법이  어디 있사옵니까?천도도 무심 하
시옵니다.듣자오니 대전마마께서도 밤을 새우셨다 합니다.얼마나  놀라셨습
니까?”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는 이렇게 전하를  위로한 뒤에,살포시 무릎을 꿇
어 전하의 두 손길을 꼬옥 쥔다.
  홍빈은 경빈 박씨한테 뒤진 것이 분했다.어수를 꼭 잡아 쥐어 드리는 감
각의 고혹으로 경빈 박씨를 젖혀 버리자는 것이다.
  경빈 박씨는 어이가 없었다.그러나 얼굴에 나타내어  난색은 할 수 없었
다.
  “밤잠을 못 이루시어 신기가 어지러우십니까?”
  박빈은 슬몃 홍빈보다 한 술을 더 떠서 임금의 이맛전을 짚었다.너는 하
는데 나는 못하랴 하는 솜씨다.
  창빈 안씨가 신을 거꾸로 끌고 대전 앞에 들어와 보니 벌써 박빈과 홍빈
이 전하를 휩싸서 머리와 손을 잡고 있었다.
  안빈은 잠깐 현기를 느꼈다.그러나 다음 순간  부리나케 자기 처소로 되
돌아가자,무수리한테 새옹을 정하게 가시게 하고 손수 불을 피워 부랴부랴 
미음을 다린 뒤에 은다반에 미음 그릇을 받들어 어전으로 들어갔다.
  “듣자오니 저녁 수라도  그냥 물리셨다  하옵니다.곤전마마께서는 하는 
수 없이 세상을 떠나시었사오나 대전마마께옵서는 옥체를 보중하시와야 합
니다.속이 비셨으니 미음을 잡수옵소서.”
  창빈 안씨는 따끈따끈한 미음에 눈 같은  소금을 뿌려 전하께 권했다.전
하는 빈속에 미음이 좋을 성싶었다.어수를 늘여  미음 그릇을 들고 후루루 
마셨다.
  “떨리는 속이 약간 풀리는 듯하구나.”
  창빈 안씨는 미음 한 그릇으로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를 대항했다.
  팔선녀들은 이렇게 모여들어 임금의 마음을 낚시질하는 경쟁을  하는 것
이었다.
  왕후 윤씨의 상은 정식으로 반포되어  발상거애를 했다.내외곡반이 이루
어지고 성복을 입어 통곡을  했다.그러나 진정으로 슬프고  원통한 사람은 
윤왕후의 오빠인 윤임 단 한 사람뿐이었다.
  경빈 박씨를 위시하여 희빈 홍씨,창빈 안씨 팔선녀들도 정궁의 국상이라 
하이얀 눈 같은 소복에 베 치마들을 두르고 성복날 내곡반에  참여하여 간
드러진 곡성을 내어 통곡들을 하였으나 진정한  피눈물이 나올 리 없었다.
모두 다 가짜 울음을 엉엉 울면서,
  ‘어떻게 하면 왕후로 들어앉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아들로 세자를 책봉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계획을 세우면서 애를 태웠다.
  돌아간 윤비의 시호는 장경왕후로 봉하고,산릉의  칭호는 희릉이라 하여 
광주 헌릉(뒤에 고양 원당리로 옮김)바른편 언덕에 장사 지내게  되었다.스
물 다섯 살 된 윤왕후는 이렇게 하여 아홉 살 된 딸 하나와 핏덩이 왕자를 
세상에 남긴 채 길이 이 세상과 연을 끊어 버렸다.
  이때 한 세상을 흔들어 임금을 협박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던 반정공신 
박원종과 성희안들은 늙고 병들어 다 죽어 버렸다.다만 그들이 심어 논 열
매들이 조정 안에 넌출지고 뻗어 있을 뿐이었다.
  나라의 장사까지 치르고 보니,조정과 왕실에서는 빈 왕후의 자리를 둘러
싸고 한바탕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임금이 홀아비가 되어서 쓸쓸하니 왕비 없는 것이 가여워서 하는 짓들이 
아니었다.
  왕비와 세자라는 이원을 둘러싸고 앞으로의 권세를 잡을  쟁탈전을 일으
키는 것이었다.
  “또다시 처녀 간택을 해서 왕비를 봉하면  무얼 하는가.경빈 박씨나 희
빈 홍씨가 아니면 창빈 안씨로 왕비를 올려서 모시면 고만 아닌가.지금 전
하께서는 이들 세  후궁을 가장 총애하시니,대왕전하보고  세 후궁 중에서 
누구 한 분을 골라서 왕비를 책봉하시라면 고만 아닌가.”
  이렇게 떠들고 여론을 일으키는 조정 신하들은 박원종과 성희안 등 공신
의 뿌리인 일당들이었다.공신의 딸들이 왕후로 승차를 하고 공신의 외손이 
왕세자가 되어야만 자기들의 권력은 계속해서 유지될 것이었다.
  돌아간 장경왕후 윤씨의 오라비 윤임도 사등공신으로 그  누이가 왕후가 
되었을 때는 으쓱되었지마는,이제  그 누이가 돌아가고  보니 그도 새로이 
다른 공신의 딸인 경빈 박씨나 희빈 홍씨나 창빈 안씨를 붙들어야 할 판이
었다.
  사실로 이 세 후궁들은 왕의 총애가  극진했다.사랑이 극진한 후궁 중의 
한 여인을 왕비로 만들기는 손바닥을 뒤집기  보다도 더 쉬운 노릇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패를 짓고 당을 이루어 여론을 일으켰다.
  조정에는 공신이 아니면서 벼슬하는 사람들의  일파가 있었다.벼슬 지위
는 높지 못하나,선비들을 배경으로 하여 과거를 보아 조정에 선 유림의 일
파였다.
  연산 때 사화를 만나서 결딴이 나다시피 한 유림들은 새로이  중종이 등
극한 뒤에 바른 정치와 어진 덕으로 나라를 발전시키고 백성을  다스릴 줄 
생각하고 쌍수를 들어 새 세상이 된  것을 찬성했더니,나라의 주권은 함빡 
공신인 박원종과 성희안의 무리한테로 옮아져서 날 정치는  엉망진창이 되
어 버렸다.
  여기다가 공신들은 일신의 영화를 탐내어서 자기들 세력을  전부 금탕의 
철옹성으로 만들어 놓으려고,까닭 없이 죄 없는  왕후 신씨를 쫓아내고 자
기들의 딸들로 왕비와 후궁들을 만들어 놨던 것이다.
  이제 공신의 머드러기인 박원종과 성희안이  죽고 새로 된 왕비  윤씨가 
돌연 돌아가고 보니,까딱하면 빈 왕비의 자리가 역시 공신의 딸인 경빈 박
씨나 희빈 홍씨에게로 돌아가기가 십중팔구다.원자인  핏덩이 아기의 몸은 
위태롭기 한량 없었다.그들은 원자보다도 먼저 아들을  낳은 후궁들이었다.
경빈이나 희빈이 왕후가 되는 날은  자기 아들로 세자를 삼으려는  음모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유림들은 이  기회를 타서 대의명분을  세우면서 어린 
원자를 보호하리라 결심했다.그들은 유림의 대표로  박상과 김정을 뽑아서 
이 일을 처리한 것을 일임해 버렸다.두 사람은 날마다 모였다.
  “여보게 눌재,궁중 안 일이  탈일세 그려.뜻밖에 젊은 왕후께서  핏덩이 
왕자를 두신 채 돌아가셨으니,장차 어린 왕자를  어떻게 보호하면 좋단 말
인가.”
  눌재는 박상의 아호였다.
  “글쎄 말일세.정궁인 왕비께서 산후발한으로 급하게 세상을 떠나셨으나 
어린 원자의 일이 딱하기가 한량없네.”
  “아무리 핏덩이라 하나 왕세자를 봉했다면 아무 문제될  것도 없겠지만 
몸을 푸시자 곧 승하하시고 말았으니  어머니 없이 원자가 되기는  용이한 
일이 아닐세.”
  “그러나 적자와 서자의 분별은 엄하게 가려야 하네.”
  “그렇다 마다.적서를 가린다는 것은 우리  동방예의 지국으로서의 유교
의 대의명분을 가진 삼강오륜의 엄연한 정도일세.”
  두 사람은 말을 멈추고 한동안 무슨 궁리를 하다가 충암 김정이,
  “여보게,눌재.”
  하고 박상을 불렀다.
  “무슨 좋은 생각이 돌았나?”
  “여보게,희한한 수가 있네.한 팔매에 새  두 마리를 맞히는 격일세.우리 
폐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세.신씨야말로 참으로  억울하게 쫓겨나지 않았
는가.공신들은 신수근을 죽여 놓고 앞일이 무서워서  그의 딸인 국모를 쫓
아냈으니 천하에 이런 놈의  변괴가 어데 있는가.임금을  강박해서 국모를 
내쫓은 일은 곧 무군 아닌가.이제 와서는  박원종도 죽고 성희안도 죽었으
니 복위 시키자는 우리들의 공론을 반대할 사람도 없을 뿐더러,전하께서는 
내쫓은 뒤에도 항상 신비를 생각하셨으니 이번 기회에 신비를 복위 시켜서 
철천의 한을 풀어 드리게 하고,핏덩이 어린  왕자는 신비의 아드님으로 만
들어서 뒷날 세자궁을 봉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나.일거양득의 일이 아
니고 무엇이겠나.”
  “거 참,자네 의견이 훌륭하이.더구나 신비께서는 아무 소생도 낳아 보지 
못하신 채 폐비가 되셨으니 이것은 아주 안성맞춤일세.”
  박상은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운 채 대답했다.
  두 사람은 당장 상소문을 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소문에는 핏덩이 원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폐비 신씨를 복위 시
키라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원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폐비 신찌를 복위 시
키자고 요구한다면 자기네들의 장래를 위하여 원자를 휩싸고  돈다는 중상
과 모략을 받기가 십중팔구인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대로 대의명분을 들어 쫓겨난 신비의 복위를 주창하기로 결
론을 얻었다.
  “미신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은 돈수백배하옵고 삼가 성상전하 
밝으신 정치 아래 아뢰나이다.사람의  만 가지 사업은  부부의 길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생각되옵니다.부부의 길은 인생의  살아 나가는 원천이요 
강령인 것입니다.부부의 길은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라다니고,산울림이 
메아리를 지어 부르는 소리에 화답하는  것과 매한가지라 생각합니다.미신
들이 그윽이 살펴보오니 전왕후 신비께옵서 까닭 없이 폐비되신 지 어느덧 
벌써 십 년이 되었습니다.도대체 신비께서는 무슨 죄로 폐위를 당하셨습니
까.백 번 생각해 보아도 모를 일이옵니다.신비는 전하께옵서 왕위에 오르시
기 이전부터 전하께로 출가하시어 전하를 내조해 도우신 공이 클  뿐 아니
라,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뒤에도 신하와 백성들의 경축하옵는 축하를 받
으시어 왕후의 자리네 나가셨으니,이 나라 수천만  백성들의 국모이십니다.
어머님을 죄목 없이 내치는 일이 천하만고에 어느 곳에 있사옵니까.신들은 
알고 있습니다.이것은 전하의 높으신 본뜻이 아니고 박원종 일파의 강요에 
눌리시어 마지 못해 처리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박원종의 무리도 사람인 
이상 대의명분이 그럴 수 없는 것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그러하나 그들은 
사사로운 자기들 몸에 혹시나 앞으로 해가 미칠까 하여 알면서도  이 참혹
한 짓을 단행했으니,이자들은 임금을 협박하고  국모를 내쫓은 불충불효한 
자들이옵니다.불충불효뿐만이 아니라 이것은 역적의 완패한 행동이라 단정
할 것이옵니다.”
  두 사람의 붓끝은 서릿발 같아서,일세를 혼천  동지해서 흔들던 공신 박
원종의 무리를 역적으로 엄숙히 몰았다.
  그들은 다시 계속해서 상소를 쓴다.
  “요사이 하늘의 일기 고르지 못하여 여름에 서리 내리고 비올  때 우박
이 퍼붓는 등 날은 가물어 인심이  오오할 뿐 아니라,새로운 왕비께옵서는 
돌연 승하를 하시어 온 나라가 화할 기운을 잃었으니,이것은 한 여자가 원
한을 품으면 오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옛말을 하늘이 그대로 실천한 것이
라 생각하옵니다.”
  두 사람은 하늘과 땅의 화기가 고르지  못한 것과 새로 된 왕비가  급히 
흉서한 일이 모두 다 한 여자가 원한을 품고 있는 까닭이라 규정  지어 마
음이 선뜻하도록 글을 썼다.
  “전하,하늘도 싫어하고 천지신명도 싫어하는 이 원통한 일을 장차 어찌 
처리하시렵니까?”
  두 사람의 붓끝은 신명이 났다.
  “돌아간 분은 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신비는 살아 계십니다.중궁의 자리
는 비어 있습니다.이 자리에는 불가불 어떤  분이든 다시 앉으시어 천지의 
정도를 계속해 결성시키셔야 할 것입니다.전하께서는  이때를 당하시어 예
전 잘못을 고치시고 신비를 다시 복위 시키시어 백대의 억울한  한을 풀게 
하옵소서.전하께옵서 용단을 내리시어  감연히 이 일을  행하신다면,국가에 
다행한 일일 뿐 아니라 천지신명이 바라는 바요 억조 창생들이  원하는 바
이옵니다.”
  박상,김정 두 사람은 붓대를 놓고 서로를 바라보아 미소를 풍겼다.
  “자아,천하의 명문일세.이만하면 돌아앉았던 돌부처라도 미소를 풍겨 다
시 고쳐 앉을 것일세.”
  두 사람은 또 한 번 마주 보며 껄껄 웃었다.
  박상,김정은 제자를 시켜 상소를 정원에 올린 뒤에 또다시 공론을 한다.
  “여보게 눌재,우리가 세상을 바로잡아 돌려 놓자면 먼저 무식한 호반들
과 소인 권문 세가인 공신들의  일당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우리들  선비와 
유림이 정권을 잡아서 밝은 임금을 도와야  할 것이라 생각하네.이 기회에 
아주 박원종 일파의 죄상을 천하에 폭로 시켜서 그들의 세력을  뽑아 버리
게 한 뒤에 유림에서 정치를 장악하도록 하세.”
  김정은 박상한테 자기의 포부를 자랑했다.
  “자네 말이 좋은 소릴세.연산 때 점필재  김선생과 탁영 김일손 선생들
이 사화를 당한 뒤에 우리 선비들은 계속해서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잃었
으니,그래도 나라 꼴을 만들자면 우리들 선비들이 정사를 다스려야 할걸세.
이것은 우리뿐 아니라 유림 전체가 찬성하는 일이니,이 기회에 아주 또 한 
번 상소를 올리도록 하세.”
  두 사람은 다시 상소 초를 잡았다.
  “미신 박상과 김정은 다시 성상폐하께  상소를 올리나이다.신비를 폐위 
시킨 박원종의 무리는 비록 반정을 일으켜 어둔 임금 연산을  내치고 왕실
을 바로잡은 큰 공이 있다 하오나,군부를  협박하여 국모를 방축한 자들이
옵니다.그 죄상은 고금 천하에 대역부도를 범한 자이옵니다.만대에 죄를 지
은 강상의 죄인이오니,박원종 성희안은 비록 죽었다  하나 마땅히 그 죄를 
밝혀서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뒷사람을 징계해야 할 것이옵니다.박원종
과 성희안의 벼슬을 삭탈하시어 왕법이 밝고 밝게 하늘 아래 있는 것을 밝
혀 주옵소서.”
  두 사람은 아직 젊은 사람들이었다.두 번째  상소를 올리고 자못 의기가 
헌앙했다.
  박원종,성희안은 죽었다 하나 임금은 아직도  공신의 아들이요 부하들의 
세력 속에서 놀았다.
  두 사람의 상소를 정원에 내려 대신들이 의논해 처결하라 하였다.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모두 다 박원종의 일파였다.박원종의 벼슬을 깎으
라 하니 이것은 자기들의 생명을 뺏는  거나 마찬가지요,폐비 신씨를 다시 
궁중으로 모시어 왕후를 삼으라 하니 장경왕후 윤씨의 소생인 원자를 폐비 
신씨의 아들로 만들어 원자의 지위를 튼튼하게 보호하자는  계획임을 짐작
했다.
  이렇게 된다면 앞으로 경빈 박씨나 희빈 홍씨 등 공신들의  딸인 후궁들
은 영영 왕후가 될 가망이 없을 뿐더러,앞으로의 정치 세력은 함빡 김정과 
박상들 유림과 선비들한테로 돌아가 버리고 말게 되는 것이다.참으로 큰일
이었다.그들은 한동안 비밀한 회의를  한 뒤에 가짜  선비들을 동원시켜서 
박상과 김정의 상소를 논박하게 했다.
  가짜 선비란 유림에 연원을 갖지 못한 사람들로서  공신들한테 아첨하고 
부동이 되어 벼슬자리에 벌여 있는  무리들이었다.그들은 공신들에게 아첨
하고 후궁들한테 연줄을 달아 벼슬자리가 저절로 올라가서  대사헌이니 대
사간이니 대제학이니 하는,이 나라의 높고 맑고  깨끗한 역사 깊은 벼슬자
리를 더럽히고 있는 자들이었다.
  대사헌,대사간,홍문관의 장으로 있는 가짜 선비들은 한데 굳게 합심이 되
어 박상,김정을 논박하는 추상 같은 반대 상소를 올렸다.만약  공신의 자리
가 위태롭고 후궁의 자리가 흔들린다면 자기 자신들의  벼슬자리도 위태롭
게 되기 때문이다.
  “사헌부 대사헌,사간원 대사간,홍문관 대제학의 삼사는 연합하여 영명하
신 전하께 상소를 올리나이다.도대체 박상과 김정의  상소는 사론이옵니다.
그들은 정신이 불순합니다.정정당당하게 말을 할 때는 겁을 집어먹어 말을 
못하고 꼼짝달싹을 못 하고 있다가,이제 박원종과  성희안이 죽고 나니 폐
비를 다시 모시라는 등 박원종들이 공신 칭호를 없애 버리라는 등 별 수작
을 다하옵니다.실제로 나라를 바꾸어서 반정한 사람들의 빛나는 공을 어떻
게 이제 와서 십 년 뒤에 깎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만약 그렇게 한다면 전
하께옵서 연산군을 내치시고 반정하시어 왕이 되신 일이 나쁜 짓이라 규정
짓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 됩니다.딱한 사람의  어리석은 억설이옵니다.박
상과 김정의 상소는 나라의 민심을 현혹시켜서 새상을 소란케 하는 간특한 
상소올시다.세상을 소란케 하는 두 사람을  잡아들이시어 엄하게 치죄하소
서.”
  사헌부,사간원,홍문관 삼사가 상소를 올려 들고일어나니 재상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신씨를 폐위하신 일은 전하께옵서 나라를 반정하신 후에 조정의 큰 공
론을 들으시어 신씨를 내보내신 일이옵고,장경왕후는  저희들 신민이 이미 
국모로 받들어 모시어 아드님까지 탄생하시었습니다.요망한 무리들은 이제 
장경왕후가 아니 계시다  하여 이러한 간특한  꾀를 농락하려 하니,이것은 
장경왕후를 무시하는 이론이옵니다.오늘 왕후의 자리가  비어 있고 공신들
이 세상을 떠난 틈을 타서 이러한 해괴한 상소를 올리는 것은,신씨에게 아
첨하여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나중에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계책입니다.만
일 이제 다시 신씨를 왕비로 모신다면,신씨는 먼저 가례를 치른 분이고 돌
아가신 장경왕후는 나중에 후궁에서  들어간 분이니 장경왕후의  소생이신 
원자는 적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이렇게 된다면 장차 원자는 어느 곳에 
계시게 됩니까?요망한 소리를 내어 나라 인심을 현란케 하는 자들을  목베
입소서.”
  대신들은 직접 어전에 아뢰었다.권력과 세도를 잡은 무리들은 폐비 신씨
와 돌아간 왕후의 연조를 들추어 적서론을  꺼내 들면서,원자를 서자로 떨
어뜨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도리어 원자를 두둔하는 체하고  박상과 김정을 
때려 부쉈다.
  박상과 김정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폐비도 정궁이요 돌아간 장경왕후도 계비이신 정궁이십니다.설혹 정궁
의 아들인 원자를 다시 정궁이 되신 신비의 아들을 삼는다  해도 적자이기
는 마찬가지올시다.”
  하고 지지 않고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공신 편에서도 또다시 박상과 김정을 공박했다.
  “신비가 다시 왕비가 되시어 대궐에 들어오신 뒤에 만약 왕자를 낳으신
다면,당연히 신비의 아들이  적자가 되고 장경왕후의  아들인 지금 원자는 
혼인의 차례로 보아서 서자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이 일을 장차 전하는 어
떻게 처리하시렵니까.두 말씀 마시고  박상과 김정의 목을  베시어 왕실의 
인심을 어지럽힌 죄를 밝히시옵소서.만일 이자들을  그대로 두셨다가는 종
묘사직이 위태로울 것입니다.”
  집권자의 당파들은 생사 관두에 달려 있는 일이라,목숨들을 내걸고 박상
과 김정을 궁지에 몰아넣어 버렸다.사태는 칼자루를 잡은 자가 제일이었다.

    선과 악의 대결
  임금은 하는 수 없어,박상과 김정을 귀양 보내라는 영을 내린다.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은 함부로 온당치 않은  발론을 꺼내어 
조정을 현혹케 했으니,박상은 전라도 남원으로 귀양을 보내고 김정은 충청
도 보은으로 귀양을 보내라.”
  나라의 정치를 바른 길로 옮아가게  해서 억울하게 쫓겨난 신비를  다시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 둘째 비 장경왕후 윤씨의 몸에서  낳은 원자의 
뒤를 팔선녀 후궁들의 시기 속에서 구해 내려던 유림 대표 박상과 김정은,
공신들의 뿌리깊은 텃세에 밀려서 힘없이 귀양 길을 떠나 버리게  되고 말
았다.유림과 선비들의 바른 세력은 땅에 떨어져  다시는 일어날 희망이 없
게 되었다.
  이때 사간원 간관 중에 새로이 정언 벼슬을 한 조광조라는 이가 있었다.
나이는 비록 삼십 여 세밖에 아니 되었으나 연산조 때 사화로 몰렸던 한훤
당 김굉필 선생의  수제자로,얼굴이 청수하여 백옥을  다듬어 놓은 듯하고 
눈은 초롱거려 서천에 떠 있는 장경성 같았으나 눈매가 약간  팽팽해서 성
정이 급했다.허나 원체 도학의 연원이 깊어서 걸음걸이와 말소리가 노성하
고 의젓해서 아관박대로 단정히 앉은 품은 선관이 티끌 세상으로  잠깐 자
리를 옮긴 듯하고 주칠을 한 듯한 붉은 입술에서 장강대하 같이 쏟아 놓는 
마디마디 바른말은 마음속 옥호빙심을 다  기울여 맑은 향기가 도는  듯했
다.
  그의 풍채가 어찌나 아름답고 좋았던지,그가 처음으로 과거를 보러 서울
에 올라와 사처를 잡고 있을 때 일이었다.
  간촐한 부담 농짝을 나귀 등에 싣고  마부를 거느려 여각으로 들어가니,
어떻게 풍신이 좋았던지 보름 둥근 달이 문으로 기어드는 듯해서  여각 전
체가 환하도록 빛났다.
  늙은 여각 주인은 과거 보러 오는  선비인 줄 짐작하고 정한 방을  치워 
선생을 인도했다.이때 여각 주인은 후취 장가를 들어 젊은  아내를 두었다.
여각 주인의 젊은  아내가 부엌에서 잠깐  조광조의 얼굴을 바라보니,세상 
천하에 이다지 잘생긴 남자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눈이  부시도록 환해서 
현기가 아찔하도록 느껴졌다.계집은 당장에 마음이 흔들렸다.부리나케 손님
의 밥을 짓느라고 뒤주문을 열면서도 조광조가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그러
나 그의 모습은 얼른 나타나지 않았다.계집은  부엌에 내려 쌀을 씻으면서 
사랑방을 건너다 보았다.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변소는 안뜰 앞을 지나
서 사랑으로 쓰는 아랫방 앞을 거쳐가야만  했다.계집은 일부러 소변이 마
렵지 않건만,사랑 앞을 지나서  소변을 보러 갔다.비로소 조광조의  달같이 
환한 얼굴이 다시 보였다.계집은 돌아서면서 가만히 한숨을 지었다.
  ‘세상 천하에 어쩌면 저렇게도 잘생긴 남자가 있는가.’
  마음속으로 한 번 한탄을 했다.
  계집은 난생 처음 보는 이 잘생긴 남자에게 밥값은 교계치  않고 자기의 
솜씨를 다하여 정성껏 찬을 해주고 싶었다.고기를 굽고 된장찌개를 맛깔스
럽게 알 뚝배기에 바글바글 끓여서 정하게 상을 본 뒤에,벽장 속에 감추어 
두었던 백통 수저를 본치 좋게 놓아 손수 받들고 사랑방으로  들어가 공손
히 밥 뚜껑을 벗겨 올리고 물러났다.
  조광조가 가만히 바라보니  계집은 해끄무레하게  면추가 되었는데,음식 
솜씨도 조촐하고 깨끗했다.그는 마음에 싫지 않아서  저녁밥을 한 그릇 달
게 먹었다.계집은 다시 숭늉을 떠 오는데 손길이 분길 같았다.
  조광조가 숭늉을 받아 마시면서 가만히 바라보니 어째  계집의 탯거리가 
수상했다.가을 물 같은 곁눈질이 정을 풍겨 열을 뿜었다.매끈하고 보드라운 
흰 손이 숭늉 대접을 잡았는데 까닭 없이 바르르 떨렸다.조광조의 눈에 보
이는 떠는 듯한 흰 손은 몹시도 매혹적이었다.덥석 손을 쥐기만 하면 여인
은 금방 응할 것만 같았다.
  조광조도 사람이었다.사람 중에도 한참 푸른 봄  삼십대였다.아무리 학식
과 덕행과 도학이 높다 하나 본능이  있는 사람인 이상 약간 마음이  아니 
흔들릴 수 없었다.계집은 숭늉 대접을 놓고 잠깐 무릎을 꿇었다.
  “과거 보러 오셨습니까?”
  벼르고 별러서 겨우 한 마디 수작을  남자에게 붙이는 것이다.여인은 말
을 마치고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조광조는 아름다운  계집이라 생각했다.
남자로 앉아서 아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과거를 보러 왔소.”
  “과거를 보시면 당장 장원급제를 하시겠습니다.”
  “어떻게 내가 당장 곧 장원급제가 될 줄 아오?”
  계집은 약간 웃음을 풍기며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조광조는 이 
계집이 꼬리를 치는구나 생각했다.
  “고개만 숙이고 있음 어떡허나.말대답을 해주어야지.”
  “신수가 하도 훤하시니,장원급제를 아니 하시고 배겨나시겠습니까?”
  “얼굴만 잘생기면 장원급제를 누구든지 할 수가 있는 건가,하하하.”
  “잘생기셨다고 여쭙는 말씀이 아니라,얼굴에 운이 트이신 듯합니다.”
  “관상까지 할 줄 아오.”
  여자는 또다시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숙였다.
  “전에 청상과부 노릇을 한 일이 있어서 관상쟁이한테 관상을 많이 봤더
니,저도 인제는 약간 이력이 터진 듯합니다.”
  조광조는 비로소 이 여자가 과부  노릇을 하다가 여각 주인한테  개가해 
온 여자인 것을 알았다.저녁상을 물린 뒤였다.초저녁에 여각 집  주인이 들
어와서 인사를 한 다음 이 얘기 저 얘기 서울 시골 얘기를  하다가 말꼬리
가 자기 신세타령으로 변해서 자기도 본시는 젊어서 글자도 배우고 했는데 
자식이 없어서 늙마에 소생을 보기 위하여 과부 여자를 하나  얻어 가지고 
이 생활을 하는데,앞으로 자식만 낳으면 공부를 좋이 가르치겠노라고 지껄
이고 들어갔다.영감이 안으로 들어간 뒤에,젊은 아내는 더운 김이 무럭무럭 
나는 시루떡을 얌전하게 썰어서 백 청을 곁들여 쟁반에 들고 나왔다.
  “별맛은 없습니다마는 정성을 들여서 만든 것이니 밤참으로  잡수어 줍
시오.”
  은근히 권하고 들어갔다.조광조가 떡 한 개를 들고  막 먹으려 할 때 계
집은 또다시 숭늉을 데워 가지고 나왔다.
  “숭늉을 내왔습니다.더운 물이니,마시고 떡을 잡수십시오.”
  이번에는 방으로 올라오지는 않고 문만 빠끔히 열고 숭늉 대접을 디밀고
는 문을 닫았다.
  불빛 아래 비치는 여인의 얼굴은 낮보다도 더 한결 아름다워 보였다.
  조광조의 마음은 어지럽고 산란했다.
  꼬리를 치는 주인댁의 손길을 붙드느냐  아니 붙드느냐 하는 기로에  서 
헤매게 되었다.욕심으로는 여자의 손길을 한 번  만져 보고 싶은데 자기가 
여태껏 쌓아 온 도덕으로는 거리 도중에서 남의 여자와 야합할  수는 없었
다.
  조광조는 도덕이라는 윤리와 본능이라는 욕망의 갈랫길에서 괴로운 번뇌
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사랑 덧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불을 끈 뒤에 잠을 청하고 있
었다.조광조가 문고리를 걸은 것은  문고리 하나를 방패로  하여 본능보다 
약한 자기의 도덕 의식을 강화 시켜 보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만뢰가 고요한 한밤중이 되었는데,조광조가 누워 있는 방 
앞에서는 신발 끄는 소리가 바싹바싹 들리더니 문득 발길은 멈춰지고 덧문 
잡아당기는 소리가 들렸다.조광조는 눈이 반반해지면서  자리 속에서 동정
을 살폈다.
  밖에서는 덧문을 잡아당기다가 문고리가 잠겨진 것을 알자  한동안 망설
이더니,덧문 창살을 똑똑 두드렸다.걸린 문을 열어 달라는 군호였다.조광조
는 눈을 번쩍 뜨고 베개에서 고개를 들었다.
  ‘누굴까?’
  귀를 귀울였다.똑,똑,똑,덧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손으로  두드리는 음향이 
아니었다.가볍게 일어나는 금속성의 메아리였다.소리는 계속해서 대여섯 번
이나 일어났다.마치 어서 문을  열어 달라는 애원성 같았다.이때  조광조의 
마음은 몹시도 산란했다.확실히 아까 꼬리를 치던  주인의 젊은 아내가 정
을 못 이겨 자기한테로 다가들다가,덧문고리가 걸렸으니 살폿 비녀를 뽑아 
가만히 덧문 창살을 두드리는 은비녀 소리임이 분명했다.
  조광조는,
  “누구요?”
  하고 소리를 내어 불러 보려다가,차마 목구멍으로 말소리가 기어 나오지
를 않았다.가래 같은 것이 목구멍을 콱 눌러서 소리가 나오지를 않는 것이
었다.
  이때 밖에서는 또다시 두어 번 창살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이내 댕그
렁하고 비녀가 돌에 부딪쳐 떨어지는 음향이  들렸다.마치 금이 옥에 부딪
쳐 떨어지는 소리였다.계집이 실수를  해서 비녀를 댓돌  위에 떨어뜨리는 
것이 분명했다.
  댕그렁 떨어지는 비녀 소리가 일어나자  캄캄철야 어둔 방에 누워  있는 
조광조의 눈앞에는 지금 밖에 서 있을 달덩이 같은 주인 아내의 얼굴이 환
하게 떠올랐다.조광조는 본능을 이겨 낼 길이 없었다.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덧문고리를 벗겨 주고 싶었다.장차 그 풍윤한  주인 아내의 육체미를 자리 
속으로 맞아들이려는 생각이었다.
  돌과 쇠가 부딪쳤다.어둠 속에 줄불이 찬란하게 일어났다.
  줄불을 본 조광조의 가슴은 출렁하고 무엇을 강하게 느끼면서 뚝 떨어졌
다.자기의 마음은 지금 선비의 도덕을 짓밟고  남의 아내한테 유혹이 되어 
천길 지옥 속으로 떨어지려는 것이다.
  조광조는 황연히 깨달았다.돌과 쇠가 부딪치면 불이  일어나는 것이다.자
기가 남의 아내와 자리를 같이해 보겠다는 생각은 마치 돌과  쇠가 부딪치
는 거나 매일반이었다.자기와 그  여자가 부딪치기만 하는 때,선의  결과나 
악의 결과나 불은 일어나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이 불이 선의 불이라면 아
무런 불행이 없겠지만 이불이 악의 불을 뿜는 불이라면 백 가지 불행과 천 
가지 재앙이 있을 뿐이라 생각했다.자기는 지금 까딱했더라면 불륜을 범할 
뻔했다고 생각하니 머리털이 쭈뼛하고 뼛골  속이 자릿하도록 아팠다.조광
조는 맹연히 불을 켜려던 부시 쌈지를 내던졌다.
  “나의 도학이 아직도 미력하고나.”
  그는 마음속으로 탄식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격려했다.
  밖에서 비녀를 떨어뜨린 여인은 떨어지는 비녀 소리에 제 정신을 돌려서 
기운 없이 안채로 발길을 옮겼다.
  다음엔 이내 창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지 아니했다.조광조는 밤새도록 자
신을 책망하고 격려했다.도대체 자기는 너무나 비겁했던 것이다.
  문을 닫아 걸고 고리를 잠근 그 행위부터가 자기의 도학이  너무나 보자
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태연히 자다가 여자가 정을 못  이겨 방으로 들어온다면 자기는  순순히 
그를 타일러서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행실을 바로잡아 가르쳐 주었어야 할 
것이었다.여자가 방으로 기어들까 겁이 나서 문고리를  걸어 잠근 것은 아
직 학의 힘이 부족한 것이다.
  괴탄했다.
  부동심.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이 공부가 그에게는 가장 절실하다 생각했
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서 밤새도록 마음이 움직
이지 않는 부동심의 공부를 했다.
  부동심?마음이 흔들려 움직이지 않는 공부와,불혹?즐거운 성색에 고혹되
지 않는 공부는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높은 학행의 경지였다.사람이 옳
게 살고 깨끗이 살아 나가려는 인간  최고의 이상이었다.흔들리지 않는 마
음 하나를 갖는다면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는  것이다.아무리 탐학한 제왕
의 위력이라도 부동심 앞에는 그 빛깔이  무색할 것이요,외롭지 않은 찬란
한 부귀영화도 부동심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일  수는 없는 것이다.모든 악
과 사가 인간인 사람의 마음을 고혹 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륜의 
아름다움 미색도 그의 마음을 유혹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조광조는 벌떡 일어나 비겁한 행동이라  생각했다.문고리를 벗겨 버리고 
밤새도록 부동심의 공부를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깐 눈을 붙였다.
  조광조는 한참 단잠에 취했다가 창 밖에서 수선거리는 인기척 소리에 눈
을 깨어 보니,문이 철썩 열리면서 주인  계집이 해반주그레한 얼굴을 방으
로 디밀면서,
  “안녕히 주무셨습니까?고단하셨지요.”
  해죽 웃은 뒤에,
  “여기 퇴침을 내왔습니다.머리 빗으시고 세수를 합시오.”
  하고 퇴침을 들고 방으로 들어온 뒤에 퇴침 뚜껑을 열어서  거울을 버티
어 놓고 빗접을 퇴침 속에서 꺼내어 참빗 민빗을 차근히 벌여 놓았다.
  “제가 머리를 빗겨 드리오리까?”
  계집은 또 한번 해죽 웃었다.
  조광조는 마음속으로 계집이 간밤에 문 두드리던 생각을 하고,
  ‘무던히 끈기 있는 찰거머리 같은 계집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그는 밤새도록 부동심 공부를 한  것을 시험해 보고 싶었
다.
  “미안해서 어찌하나.미상불 나 혼자 머리를 빗을  때는 상투 틀기가 어
려워서 남보고 틀어 달라 하는데,주인댁이 머리를 빗겨 준다 하니 이런 고
마울 데가 있나.”
  조광조는 일부러 한번 미연히 웃어 보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 계집은 조광조의 상투를 푼 뒤에,펼쳐  논 빗접에서 얼레빗을 들어 
머리를 가리고 다음 참빗을 들어 때를  뽑았다.계집은 조광조의 등뒤에 꿇
어앉아 왼편 손으로는 조광조의 칠흑 같은 검은 머리를 휘어  잡고 바른편 
손으로는 전주 월소와 담양 참빗을 곱게 내려서 빗긴다.
  여인의 꿇어앉은 무릎이 조광조의 잔허리에  슬몃 닿고,여인의 섬섬옥수
가 팔을 늘여 길고 긴 머리채를 휘어 잡아 가릴 때마다 여인의 겨드랑이와 
젖가슴에서 풍겨지는 이성의 특이한 몸  냄새는 훈훈하게 젊은 그의  코를 
엄습해 왔다.
  그는 약간 현기를 느꼈다.다음엔  여인의 푹신푹신한 젊은  손길이 그의 
이마를 스쳤다.쾌한 감각이었다.여인은 동백 기름을 병에서 따라 손바닥 장
심 위에 얹은 뒤에 부드러운 두 손으로 머리 속을 시원스럽게 문질렀다.그
는 슬몃 눈을 감다가,이내 정신을 모았다.시원스런 감각으로 도취되어 넘어
가려는 자기의 마음을 얼핏 단속해 보는 것이었다.
  “어쩜,머리털이 윤이 나면서도 이렇게 부드러웁습니까,머리털이  부드러
우면 마음이 고와서 다정하다는데...”
  젊은 여인은 조광조의 등 뒤에서 그의 머리털을 예찬해 속삭였다.여인의 
뜨겁게 단 입김이 조광조의 귀청을 화끈하도록 간질였다.
  여인의 붉은 입술은 금방 그의 귓전으로 닿는 듯했다.그의 마음은 또 한 
번 어지러웠다.그는 또다시 정신을 바짝 모았다.
  “머리털만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알아 볼 수 있는가?오래 사귀어  보기 
전엔 모르는 것이지,하하하.”
  그는 이렇게 슬쩍 답하면서 산란해지려는 마음을 바로잡았다.
  “오래 묵으시렵니까?”
  “하도 주인댁의 대접이 융숭하니 과거 볼 때까지 묵어 보려 하는데...”
  “어제도 말씀 드렸지만 이번에 과거를 보시면 꼭 장원급제를 하십니다.
그리구 장가를 드시면 옥동자 귀한 아들을 점지 받으실 테고.”
  여인은 또다시 꼬리를 쳤다.
  “...”
  “제가 생원님 오시던 날 새벽에 꿈을 꾸니,청룡이 바로 안채 대청 안으
로 기어드는 꿈을 꾸었습니다.”
  “청룡이?”
  “네,청룡이.어디 손금을 좀 보십시다.과거를 하시겠나.”
  여인은 머리 빗기던 손으로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여인은 육박전으로 
공세를 취하려는 것이었다.그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부동심 
공부를 여전히 계속했다.
  “아이그,손금 참 좋으시네.재상의 자리까지 오르시겠네.아들을 낳으시면 
한 삼 줄에 삼 형제를 내리 두실 것이구.”
  조광조는 미연히 웃었다.차차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이 퇴침 속 거울로 나타나자 그의 등 뒤에서 머리를 
빗기는 여인의 얼굴이 눈웃음을 풍기며 거울 속으로 비쳐지는 그의 웃음을 
맞아들였다.
  조광조의 눈에 비쳐지는 거울 속  미인의 웃음은 돌연 해골의  웃음으로 
변해졌다.아름답게 웃어 보이는 그 풍윤한 살  껍질 하나를 벗겨 버린다면 
추하고 더러운 해골임이 분명했다.조광조는 이제는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
지 않았다.손을 여인에게 잡힌 채  가만히 웃음만 풍겼다.여인은 무료했다.
혼자 지껄이다가 조광조의 상투를  틀었다.그러나 남은 정을  주체할 길이 
없는 모양이었다.
  “샌님,제가 정표로 물건 하나를 드리니,앞으로 저를 본 듯  건사를 잘하
십시오.”
  계집은 조광조의 은 동곳을 제쳐놓고 치마를 해쳐 주머니 속에서 비취옥 
동곳을 꺼내 상 투고에 꽂아 주었다.
  그는 여인이 동곳을 꽂아 주는 대로 태연히 앉아서 웃음으로 대답한다.
  여인은 상투를 틀어 비취옥 동곳을 꽂아 준 뒤에 안으로 들어가 손을 씨
시고 조광조의 아침상을 차려 내왔는데,상배와  음식이 어제보다도 더한층 
맛깔스럽고 정성을 들였다.
  조광조는 아침밥을 다 마친 뒤에 한동안 무엇을 궁리하다가 자기가 데리
고 온 하인을 불렀다.
  “바깥 주인을 불러오너라.”
  하인이 명을 받고 바깥 주인을 찾으니 안주인은 설거지를 마친  뒤에 머
리를 빗고 앉았고 바깥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아침을 자신 뒤에 옷을 갈아
입고 밖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조광조는 또다시 무엇을 한동안 생각한 뒤에 하인에게 분부를 내렸다.
  “나귀에 부담을 실어라.”
  “어디,행차를 하시렵니까?:”
  “서울 온 김에 구경도 할 겸 물건을 사러 나가야겠다.”
  하인은 주인 샌님의 영대로 마구간에서 당나귀를 끌어낸 뒤에 부담 농을 
실었다.
  안에서 머리를 빗고 난 여인은 깜짝 놀랐다.
  “부담을 싣고 어디로 가십니까?과거날이 아직도 멀었는데.”
  여인은 신을 거꾸로 끌면서 내달았다.
  “서울 구경을 할 겸 소풍을 나가신다 합니다.”
  “그러면 왜 부담 농짝은?우리를 못 믿어 그리하시나.”
  “아니올시다.물건을 사러 나가신다 합니다.”
  밖에서 하인과 여인의 지껄이는 수작을 들으면서 조광조는  방안에서 밥
값을 교계하여 피륙을 끊어  선반 위에 얹어 논  뒤에,맞은편 선반 틈에는 
아까 여인이 상투 고에 꽂아 준  비취 동곳을 뽑아서 끼워 놓고  시치미를 
뚝 떼고 방 안에서 나왔다.
  “그럼,빨리 다녀오세요.저녁 진지를 지어 놓겠습니다.”
  여인은 문간까지 쫓아 나와서 해죽 웃고,차마 떨어지기를 싫어했다.
  조광조는 여각을 떠나자 비로소 하인한테 분부를 다시 내렸다.
  “다른 여각으로 찾아가 사처를 잡아라.”
  “아까 여각으로는 아니 가시렵니까?”
  “어째,마음이 긴치 않다.다른 곳을 잡기로 하자.”
  하인은 눈치를 챘다.조광조는 이렇게 하여 다른 여각으로 숙소를 옮겼다.
  여각 주인은 이날 밤에 술이 거나하게 취해 가지고 돌아왔다.
  품안에는 칼 한 자루를 사서 품었다.그는 간밤에 계집이 사랑방 문을 두
드리던 일과 오늘 아침에 계집이 조광조의 머리를 빗겨 주던 일을 다 알고 
있었다.오늘 밤에는 반드시 일이 있으려니 하고,칼을 사서 품은  뒤에 한꺼
번에 남녀를 다 죽여 버리려고 일부러  술을 마시고 돌아왔다.주인이 펄썩 
사랑문을 열고 보니; 손님도 없고 부담 농짝도 없었다.방으로 들어가 보니,
밥값이 될 만큼 선반 위에 피륙 한 필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손님은 어디로 갔나?”
  주인은 계집에게 물었다.
  “물건을 사러 나간다고 부담을 싣고 나갔소.”
  주인은 비로소 조광조가 계집을 피해서 간 갓을 알았다.
  “참으로 점잖은 양반이다.”
  혼자 지껄인 뒤에 눈을 흘겨 계집을  또 한 번 바라보고 조광조가  두고 
간 밥값 피륙을 계집 앞에 내던졌다.
  이렇게 하여 조광조의 부동심은 자신을 살리고 사람 둘의 생명을 구해냈
다.계집은 나중에 벽 틈에서 비취 동곳을 발견하고 마음을 고쳐서 착한 아
내가 되었다.
  조광조의 덕행은 이렇도록 높았다.이 소문은 서울과 시골에 짜하게 퍼졌
다.선비들은 모두 다 그의,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부동심 공부를 칭송했다.
  그는 과거를 보아 대과급제를 한 뒤에,자기보다  학문과 식견이 높은 사
람이면 계급의 높고 낮은 것을 가리지 않고 배우려 했다.그의 선배와 동지
로는 안당,이장곤 같은  제상을 위시하여 한훤당의  제자로 도학과 문장의 
명성이 높은 모재 김안국,사재 김정국,청송  성수침,숙옥 성수종 형제와 일
대의 도학의 사표였던 송당  박영,야천 박소 등 제제다사가  많았다.그러나 
그는 자기보다 한 가지라도 나은 점이 있는 사람이면 그를 찾아 도학을 배
웠다.
  왕조 풍속에 의 생의 직업을 가진 이는 중인이라 하여  양반으로 대접을 
아니했다.이때 안찬이란 명의가 있었다.안찬은 의학에만 정통할  뿐 아니라 
이학에도 조예가 깊어서,병을 다스리는 데 증세에 따라 약을 쓰는데,의학에
다가 이학의 이치를 겹쳐서  약을 쓰게 하니  약효는 백발백중이었다.이때 
병자 한 사람이 있는데,새벽에 자다가 깨어 보니  두 눈이 별안간 달라 붙
어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손으로 아무리 문질러 보아도 부레풀을 붙인 듯 떨어지지를 않았다.병자
는 각처로 의원을 찾았으나,의원들은 이런 병은 난생 처음 보는 병이라 고
칠 도리가 없다 했다.환자는 마침내 의원 안찬의 유명한 소문을 듣고 안찬
을 찾았다.안찬은 병자를 잠깐 바라본 뒤에,
  “이것은 폐경 화기에서 일어난 병이니 폐를 맑게 하는 약을  쓰지 아니
하면 안 되오.”
  하고 폐 맑히는 약을 주었다.안찬의 약을 다려  먹은 환자는 약 두 첩에 
눈이 활짝 떠졌다.서울 장안에서는,
  “의원 안찬이 눈먼 장님을 뜨게 했다.”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여인 한 사람이 안찬을 찾았는데,아침에 일
어나 양치를 하고 보니 혀끝에서 피가 내줄기 뻗치듯 용솟음을  쳐 나오는
데 며칠을 두고 그치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피가 그치라고 지혈제를 암만 써도 그치지를 않으니 아마 죽는 사람인
가 봅니다.병을 고쳐 줍시요.”
  “더디면 구원할 길이 없으니 빨리 사향소합원 네 개를 한  번에 자시도
록 하시오.”
  사향소합원이란 곽란 토사에 쓰는 체증약이었다.옆에  있던 환자의 남편
은 약간 약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었다.피가 혀에서 나는데  피 고칠 약은 
주지 않고 체증에 쓰는 사향소합원을 주니 마음에 딱하게 생각이 들었다.
  “혓바닥에 피가 뻗치는데,배 아파 먹는  사향소합원을 주시니 웬일이오
니까?”
  하고 못마땅하게 물었다.의원 안찬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혀라는 것은 심경에 속해 있는 것이구  피는 더우면 끓는 법이라,지금 
이 부인은 성정이 급해서 마음을 많이 쓰는 분인데,마음에 열이 생겨서 피
가 끓다가 잘못 혀로 뻗친 것이니 심경을 서늘하게 하는 약을 쓴다면 피가 
저절로 그칠 것입니다.이것을 그대로  둔다면 전신의 피가  빈혈을 일으켜 
심경이 허하게 되는 때는 편작의 재주라도 구할 도리가 없소.”
  안찬은 이치를 설명해 주었다.과연 여인의 사향소합원 네 개를 즉석에서 
먹은 뒤에 피는 그쳐  버리고 말았다.의원 안찬이 용하다는  소문은 더 한 
번 장안에 유명하게 되었다.
  어떤 재상의 부인이 태기가 있었는데,별안간  복통이 심해지면서 해복을 
하려 했다.그러나 아이는 아니 나오고 뱃속에서 소와 말의 털 같은 뭉치가 
자꾸 쏟아져 나왔다.여자는 정신을 잃어 혼도될 지경에 이르렀다.처음에 집
안 사람들은 아기를 밴 줄 알았는데,뜻밖에 이 지경이었다.재상은  의원 안
찬을 청했다.안찬은 진맥을 한 뒤에,
  “이것은 피장난이지 결코 아이를 밴 것이 아닙니다.혈분을 맑히고 몸을 
보해서 피가 잘 돌도록 한다면 마소의  털 같은 것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
다.”
  안찬은 사물탕 본방에 홍화를 넣어서 생혈을 시키고 도인을 넣어서 나쁜 
피를 몰아내게 했다.
  약은 한 제를 다 못 써서 병은 구름 걷히듯 나아 버렸다.의원 안찬의 명
성은 더한층 높아지게 되었다.
  조광조는 자기 몸을 굽혀 안찬을 찾아  다니면서 이학 공부를 했다.조광
조가 깊이 안찬을 사귀어 보니 그는 이학에만 밝은 것이 아니라 법전과 전
고와 역사와 백성을 다스리는  행정에도 막힐 것이  없이 밝았다.조광조는 
안찬과 심허하는 교분을 맺은 뒤에  경연 자리에서 안찬을 임금께  천거했
다.
  “안찬은 의학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법에도 밝은 사람이옵니다.만약 그
로 형조판서를 시켜서 나라의 법을 다스리게 한다면 형조에서 처결하지 못
한 의옥을 대 쪼개 내듯 처리할 것입니다.”
  하고 안찬을 극구 칭찬하여 계급을 타파하고 조정에 쓸 것을 주장했다.
  왕조 때는 백정이란 지지하천의 계급이었다.백정은  버들로 고리 그릇을 
만드는 부류와,고기를 파는 부류와,갖바치라 해서 신을 만드는 부류가 있었
다.이들은 사람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인권  없는 사람들이었다.양반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보통 상놈 소리를 듣는 평민들도 그들과는 혼인을 하지 않
고 서로 동리를 같이해서 살지를 아니했다.
  동소문 안에는 갖바치들만 집단을 이루어 사는 곳이 있었다.이때 갖바치 
속에는 도덕과 학식이 높은 군자가 한 사람 있었다.조광조는 불치하문이란 
옛 성인의 행동을 실천하려 했다.그는 곧 도덕과 학문이 높다는 갖바치 속
의 은군자를 동소문 안으로 찾았다.갖바치들은 아관박대로 선비의 옷을 차
리고 자기네 소굴을 찾는 조광조를 보자 의심이 더럭 일어나서 은군자한테 
만나 보도록 주선을 아니 했다.조광조는 삼고초려를  해서 세 번씩이나 갖
바치를 찾았다.
  갖바치들은 비로소 조광조가 진심으로 그의 선생을 만나 보러 온 선비인 
줄 짐작하고 그제서야 은군자가 거처하고 있는 깊은 사랑으로 그를 인도해 
들였다.
  깊은 사랑이란 것은 움집을 말하는 것이었다.조광조가 젊은 갖바치를 따
라 움문을 열고 움집으로 들어가 보니,겉으로  보던 움집과는 달라서 속은 
크고 넓고 밝은데 겨울이면서도 땅속의  지기를 받아 훈훈하고 춥지  않았
다.바닥에는 짚을 두둑하게 깔고 그 위에는 방석을 깔고,다시 그 위에는 자
리를 깔고,또다시 그 위에는 병풍을 두르고 보료 방석을  보전해 놓고,문방
사우를 벌여 놨는데,이것은 또 하나의 별천지요 인간의 세계  같지 않았다.
조광조가 앞을 바라보니 연치가 오십이 넘을  둥 말 둥 한 사람이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꿇어앉았는데,얼굴은 청수하고 품이  있어 저절로 위엄기
가 몸에서 스며 일어나는 것이었다.
  조광조는 위풍에 눌려 그대로 절을 하고 무릎을 꿇어 공손히  앉을 수밖
에 없었다.
  갖바치는 조광조의 절을 받자 황망히 답례를 한 뒤에 여전히  입을 다물
며 조용히 앉았다.
  조광조는 공손히 말을 꺼냈다.
  “저는 조광조라 합니다.한훤당 김굉필 선생께 학문을  배운 제자올시다.
선생의 신성이 하도 높으시기에 도학을 배우러 왔습니다.”
  갖바치는 한훤당 소리를 듣자,이내 자리에 벌떡  일어나 조광조의 두 손
을 마주 잡았다.
  “한훤당 선생은 소인의 선생님도 되십니다.원체 보시는 바와 같이 갖바
치 상놈이라 감히 문하에 뵈옵고 직접 배우지는  못했습니다마는 선생님의 
저술과 행정을 통하여 항상 사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갖바치는 자기의 몸을 낮추어 소인이라 불렀다.
  두 사람은 일면이 여구하게 대하게 되었다.
  “한훤당 선생께서는 때를 만나지 못하시어  제자를 많이 가르치시고도,
갑자사화에 고만 쉰한 살이란 아까운 나이로 돌아가 버리고 마셨습니다.”
  갖바치는 이렇게 탄식하면서 김굉필 선생을 생각했다.
  “인제는 반정이 되어 좋은 세상이  되었으니,한훤당 선생님의 시대보다
는 나을 줄 압니다.”
  조광조는 갖바치에게 공대하는 말을 썼다.갖바치는  미소를 풍겨 대답이 
없었다.
  조광조는 학문 이야기를 꺼내서 갖바치를 슬몃 시험해 보니 천문,지리,병
법,정치,경제에 막힐 것이 없었다.조광조는 참으로 자기의 지기라 생각하고 
학식을 다 기울여 토론을 한 뒤에 갖바치의 의향을 더듬었다.
  “선생 같으신 분이 갖바치 속에서  일평생을 썩어 버리는 것은  참으로 
아까웁소이다.내가 기회 있으면 상감께 선생을 천거하겠소이다.”
  “천만의 말씀요,백정인 상놈이 벼슬이라니 당키나 한 말씀입니까.”
  “선생 같은 분이 이 나라의 재상이 되신다면 이 나라는  국태민안이 되
겠습니다.”
  “반상의 제도가 있는 이상,소인이 어찌 감히 벼슬을 바라오리까.몇 백년 
뒤에 이 제도가 없어져야만 인재는 나올 것입니다.소인이 학문을 공부하는 
것은 다만 자기 몸을 고상하게 닦고,우리  갖바치 족속들의 품위가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도록 하자는 것뿐입니다.”
  갖바치는 말을 마치고 미연히 웃었다.
  “지금 상감께서는 밝은 임금이십니다.선생이 아무리  싫다 하셔도 나는 
선생을 나라에 천거하겠소이다.”
  “당치 않은 말씀이오.소인의  걱정은 마시고,당신도  벼슬은 아예  마시
오.”
  벼슬을 말란 소리에 조광조는 깜짝 놀랐다.
  “벼슬을 하자는 것은 내 일신의 호강을  취해서 하려는 것이 아니라,이 
세상을 바로잡아 보자는 것입니다.”
  “압니다.당신의 높은 학식과 재주는 넉넉히 한  세상을 바로 잡으실 만
합니다.그러나 당신의 경세의 재주를 알아 줄 만한 임금이 계셔야만 할 것
입니다.”
  “지금 상감께서는 영명하고 밝으신 임금입니다.”
  조광조는 임금의 어진 것을 다시 자랑했다.
  갖바치는 빙긋 웃고 대답이 없었다.
  “앞으로 기회만 있으면 상감께 초야에 묻힌 어진 인물들을 조정에 등용
해 쓰시라 할 작정입니다.존성대명을 가르쳐 주십시오.”
  “동소문 안에서 신을 꿰매고 사는 갖바치로만 알고 계시면 그만합니다.
성명이 없는 놈이올시다.”
  갖바치는 영영 성명을 대주지 아니했다.

    언론 보장
  조광조는 유림과 선비들뿐 아니라 중인 상사람을 가릴 것 없이,자기보다 
학식과 도덕이 높다는 사람이면 계급을 가리지 않고 이렇게 친구와 스승을 
삼아서 교분을 맺었다.이러하니 조광조의 성명은 일국에  진동하고,그를 지
지하는 사람은 점점 많게  되었다.이러한 조광조가 분연히  언론의 자유를 
위하여 일어났다.
  “전하!전하께서는 신하들에게 나라를 위하여 바른말을 하라 하셨습니다.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로서 나라 일을 근심하지 않는 사람은 시위소찬으로 
나라의 녹을 그저 먹는 신하올시다.나라 일을  위하여 바른말로 그 임금을 
간하는 신하는 충신이옵니다.전하께서는 나라를 위하여  언로를 주어 바른
말을 하라 하시고,오히려,그 신하를 죄주시니 이것은 온당치 못하신 처사이
십니다.만일 전하께서 이번에 박상과  김정을 죄준다 하시면  앞으로는 한 
사람의 신하도 전하를 위하여 바른말을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뿐만 아
니라 법을 맡은 헌관과 언론을 맡은  간관은 바른말을 하는 언관입니다.이
러한 책임을 맡은 사람들로서 바른말 하는 사람을 권장하고 칭찬은  못 해
줄망정 권신에게 아부해서 오히려 죄를 주라 했으니,이러한 언관은 만고에 
없는 언관입니다.박상과 김정을 죄주라 한 간관과 헌관을 죄주옵소서.”
  바른말 잘하고 인망 높은 젊은 언관 조광조의 상소가 정원을  통하여 들
어가니 홍문관의 벼슬하는 신하들,성균관의 선비들은  일제히 조광조를 지
지하여,박상과 김정의 신씨를 복위 시키잔 말은 정정당당한 소리요 대사간
과 대사헌의 상소는 부당할 뿐 아니라  나라의 재상으로 있는 남곤,심정의 
말도 공평치 않다는 상소를 올려 여론을 물 끓듯 했다.
  이때 이조판서 안당이란 이가 있었다.성정이 장중하고  공평 정대했다.연
산조 때는 훌륭한  언관으로 명성이 높았고,중종이  반정한 뒤에는 벼슬이 
대사간과 대제학을 역임하여 뭉그러져 가는 기강을 떨쳐  일으키고 백성들
의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신원  시켜 줄 뿐 아니라,조광조,김식 같은  어진 
이를 나라에 천거하고,김안국,김정국 같은 글 잘하고 도덕 높은  이를 발탁
해 쓴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세조가 조카 단종을 영월로 내쫓아 없애  버리고 그이 
모후 권씨를 폐위 시킨  것을 다시 복위 시키자고  감연히 주장했고,국 초 
때 고려의 충신으로 태종한테 선죽교에서 철퇴로 맞아 암살을 당해 돌아간 
포은 정몽주 선생을 공자님의 사당  문묘(성균관)에 종사 시키자고 주장한 
강철같이 강직한 재상이었다.
  박상과 김정 같은 많은 선비가 신씨를 복위 시키자는 말 한 마디로 반정
공신도 아니면서 반정공신들한테 아부해서 오늘날 재상의 지위를  얻은 남
곤과 심정 같은 소인한테  몰려서 귀양을 가는 것이  딱할 뿐 아니라,소위 
대사간이니 대사헌이니 하는 언론의 창달을 맡고 기강의 해이한 것을 바로
잡아야 할 이것들이  소인 남곤,심정한테 달라붙어서  오히려 맑은 선비를 
박해하는 것이 가증스러웠다.
  조광조의 언론 자유를 부르짖는 상소가 들어가자,그는 초헌을 몰아 대궐
로 들어가 임금께 독대를 드려 뵈옵기를 청했다.
  임금은 이조판서의 독대를 거부할 수 없었다.
  “이조판서 안당을 들라 해라.”
  허락을 내렸다.
  이조판서 안당은 어전에서 아뢴다.
  “김정과 박상은 전하의 바른말을 구하시는 거룩한 뜻을  받들어 진심으
로 간담을 헤쳐 충성된 말씀을 아뢴  것이옵니다.대사헌과 간관은 나라 법
에 어긋난 일을 탄핵하는 책임을 가졌을 뿐,언론을 막고 여론을 짓밟을 수 
없는 것입니다.그들은 너무나 난폭한 일을 저질렀습니다.이것은  언론을 탄
압하는 폭행이옵니다.전하께서 이들의 말씀을 들으시어  바른말 하는 신하
를 탄압하여 죄주신다면 어느 선비가 감히 몸을 죽여 나라에  순국할 까닭
이 있겠습니까.이제 소인에 아부해 붙은 한두  사람의 말씀을 들으시고 박
상과 김정을 귀양 보내 죄주신다면 사기는 떨어져 저상이 될 뿐 아니라,반
정을 하시어 나라를 바로잡으시는 전하의 사업은 만대의 조소를 면치 못하
게 됩니다.다시 성심을 돌려 주시옵소서.”
  임금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묵연히 말이 없었다.
  안당이 어전에서 물러나오니,정원에서는 조광조를 위시하여 홍문관 선비
들이 함빡 이조판서 안당의 말을 지지했다.
  대사헌 권민수와 사간 이행은  남곤,심정의 사수를  받아 다시 이조판서 
안당을 반박했다.
  “이조판서 안당은 나라를 망쳐서 오국하는 자올시다.중대한 이조판서의 
벼슬자리에 앉아서,박상,김정의 신비 복위하는 말을 두호하니 죄당만사옵니
다.박상,김정과 함께 벌을 내리옵소서.”
  강경한 태도로 우겨댔다.그들의 등  뒤에는 공신의 딸들인  후궁이 있고 
또다시 후궁들과 공신을 조종하고 있는  소인 남곤과 심정이 있는  때문이
다.
  조정 여론은 완전히 두 갈래로 갈라지고 말았다.한 패는 공신의 딸인 후
궁들과 이것을 놀리고 앉은 남곤,심정의 앞잡이인 대사헌 권민수,사간 이행
의 일당이요,한 패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여  박상과 김정의 언론을 탄압
할 수 없다 하는 이조판서 안당,병조판서 이장곤,직제학 김안국 등 맑은 이
름을 날리는 사람들이었다.
  임금 중종은 양 갈래 틈에 끼어 어찌 조치해야 좋을지 몰랐다.
  정언 조광조는 모든 악과 불의와 대결할 것을 결정한 뒤에 죽을 것을 각
오하고 분연히 상소를 또 올렸다.
  “정언 조광조는 삼가 성상전하께 상소를  올리옵니다.소신의 직책은 간
관이옵니다.사간과 대사헌이 주창하여 올린 상소는  언론을 봉쇄하는 일이
옵니다.이들은 신의 상사이옵니다.그러하오나  논박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
다.대간인 그들의 맡은 바 임무는 언론을 창달 시키는  일이온데,이행과 권
민수는 도리어 바른 말 하는 사람들을 죄주라 하니 이것은  바른말을 봉쇄
해서 임금을 어둔 길로 빠지게 하려는  간악한 자들이옵니다.두 사람의 벼
슬을 갈아 버리시옵소서.”
  조광조는 두 번 세 번 상소를 올렸다.
  임금이 두 갈래로 나뉜 조정 공론을 무마하기 위하여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한 사람의 기회를 엿보는 신하가 상소를 올렸다.
  “홍문관 직제학 김안로는 삼가 성상께  상소를 올리나이다.지금 조정이 
두 갈래로 나뉜 여론을 들어보오니 두 편의 말이 다 옳습니다.언론을 봉쇄
할 수 없다는 조광조나 안당의 말도 옳고,신씨를  다시 복위 시킬 수 없다
는 이행이나 권민수의 말씀도 옳습니다.국가의  백년대계로 보아서 신비를 
복위 시킬 수는 없습니다.또 한편으로 선비의  언론을 봉쇄할 수도 없습니
다.그러하오니 이들의 벼슬을 갈아 버리시옵소서.”
  임금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직제학 김안로의 상소는  묘한 꾀였다.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데 두 파의 말이 다 옳다고 해놓고  벼슬을 슬쩍 
갈아 버리면 떠들어대지 않을 것 같았다.
  임금은 김안로의 상소를 듣고 두 갈래로 나뉜 조정 공론을  무마하기 위
하여,사간 이행의 벼슬과 대사헌 권민수의 벼슬을 갈아 보고,순창군수 김정
은 충청도 보은으로,담양부사 박상은 전라도 남원으로 귀양을 보내 버리고,
병조판서 이장곤을 대사헌으로 임명하고,직제학 김안국으로 대사간을 임명
시키고,정언 조광조로 직제학을 제수했다.
  언론의 보장을 들고 나서 신씨의 복위를 주장한 박상,김정도 옳고,국가의 
백년대계로 보아서 신씨 복위가 불가하다고 주장한 대사헌  권민수나 사간 
이행도 옳다고 양시론을 주장한 김안로는  묘한 기회주의자였다.장차 앞으
로 정계에서의 활약을 위해서  이러한 첫 바둑을 한  번 둔 것이었다.그는 
연안 김씨로 호를 희락당이라 했다.연산 병인  년에 문과에 장원급제를 하
여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는데 얼굴이  아름다웁기가 여자 같았다.온종일 
단정히 앉아서 책을 읽는 모습은 마치 관옥으로 만들어 논 사람인 양했다.
옷을 입는데도 어찌나 곱게 입는지  의복에는 주름살 하나 구기지  아니했
다.그러나 그가 눈을 들어 사람을 한 번  바라볼 때는 요태가 물같이 흘렀
다.쌍긋 웃는 그 모습은 남자의 웃음이 아니라 계집의  웃음이요,계집의 웃
음 중에서도 창녀의 웃음이었다.
  김안로는 두 편이 다 옳다는 양시론을 주창해서 대사간과 대사헌을 체임 
시킨 뒤에 조광조를 찾았다.
  “어떻소 선생,내가 주창한 양시론이 옳지 않소?언론을 봉쇄하다니 말이 
되오?선비들이 말하는 길은 터놔 주어야지.선생,내 말이 옳지 않소?”
  김안로는 선비의 영수인 조광조에게 긴한 체  한 마디를 붙였다.미인 같
은 흰 뺨에 흐르는 물인 듯한 탕녀같은 웃음이 살짝 물결 치면서 조광조를 
첨하여 바라보았다.조광조는 김안로의 요사스런 눈매를 바라보자 불쾌했다.
얼굴을 외면해 버리고 대답했다.
  “언론의 창달을 위해서 노형이 박상과  김정의 말이 옳다 하면서  신비 
복위는 불가하다구 주장한 것은 도대체 무슨 논법이오?그르면 그르고 옳으
면 옳은 것이지,다 옳다는 법이 천하에 있단 말이요?”
  조광조는 단박에 평을 내려 쾌하게 끊어 버렸다.김안로는 새로 일어나는 
신흥 세력인 조광조에 첨을 하여 붙어  보려다가,단번에 구박을 받고 주먹
에 맞은 감투가 되어 무색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김안로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벼슬  떨어진 대사헌 권민수와 
사간 이행을 찾았다.
  “영감들,내가 양시론을 주장했다고 원망을 마시오.우선 이렇게 해놓아야 
저 깍다귀 같은 유림들의 악마구리 같은 여론을 막을 것입니다.두 분 벼슬
이 잠깐 갈렸지마는 뒷길이 또 있지 않소?이래 놓아야만 신비가 다시 복위
가 되기 어렵게 된단 말씀요,신비가 다시 복위 되는 날은 영감들의 장래는 
여지가 없게 되거든...”
  김안로는 그 흐르는 듯한 눈에 도화 같은 웃음을 살짝 풍기고 이행과 권
민수를 바라본다.
  벼슬 떨어진 대사헌 권민수는 주먹을  번쩍 들어 김안로를 갈기고  싶었
다.
  “도대체 자네가 사람인가?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니...”
  권민수는 눈방울을 굴렸다.
  “정치란 그런 게 아니야,영감.또다시 뒷날이 있소.”
  김안로는 쌍긋 웃고 돌아갔다.
  두 편이 다 옳다고 양시론을 내세워서 박상도 귀양을 보내고  이행도 벼
슬을 갈게 한 김안로는,조광조가 거느린 유림한테도  긴치 않은 사람이 되
고 벼슬이 떨어진 권민수,이행한테도 귀염은 못 받게 되었지만,임금 중종의 
눈에는 천하의 제일가는 기재로 보였다.임금이  김안로를 불러보니 얼굴은 
관옥 같고 행동은 안상한데 눈은 가을 물 같이 영채가 돌고 옷거리는 맵자
해서,언뜻 보니 선관이 천상에서 하강한 듯했다.
  “네가 이번에 양시론을 주장해서 난마같이 어지러운 조정이  잠깐 무마
된 듯하니,네 공이 적지 않다.”
  임금은 김안로를 친히 위로했다.
  김안로는 그 흐르는 듯한 다정한 눈으로 임금을 바라보았다.임금은 흐르
는 듯한 김안로의 눈에 다시 한 번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다 성상의 큰 복력이시옵고,큰 덕택이시옵니다.소신이  아무리 양
시론을 주창하였다 한들 전하께옵서 안  들으시었다면,이러한 조정의 어려
운 난국이 가라앉을 수 있사옵니까?그저 명철하옵신 성주께옵서 위에 계신 
덕분이옵니다.” 
  “너는 모름지기 나를 도와 더욱 충성을 다하라.”
  “백골이 진토가 되옵고,이마를 갈아 발뒤꿈치  닳도록 충성을 다하겠사
옵니다.그저 왕은이 감격하올 뿐이옵니다.”
  김안로가 말을 마치자 물 같은  그 요사스러운 눈에서 눈물이  뎅겅뎅겅 
떨어져 단령 옷깃을 적시었다.
  임금이 가만히 바라보니 울기까지 하는  신하는 난생 처음이었다.마음속
으로,
  ‘참으로 충신이오구나.’
  하고 생각했다.
  “너의 벼슬이 지금 무엇이냐?”
  “홍문과 직제학이옵니다.”
  임금은 당장 내시를 불렀다.
  “정원에 빨리 나가서 도승지를 들라 일러라.”
  내시는 명을 받들어 정원으로 달렸다.이윽고 도승지가 들어와 부복했다.
  “직제학 김안로로 이조참의를 제수시켜라.”
  승지는 봉명하고 물러갔다.
  “천은이 우악하시옵니다.”
  김안로의 흐르는 듯한 눈에서는 또다시 눈물이 방울졌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너한테 물을 테니,힘을 다하여 일을 살펴라.”
  “삼가 충성을 다하겠사옵니다.”
  김안로는 어전을 떠나기가 서운한 듯 두 번 세 번 임금을 돌아보며 물러
간다.마치 주인의 곁을 차마 떠나기 서운해 하는 흰개의 눈망울이었다.
  임금은 이런 신하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임금은 밤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김안로에게 벼슬을 더 주고 싶었다.
  이튿날 임금은 승지를 어전에 불렀다.
  “이조참의 김안로로 광주부윤을 제수시켜라.”
  광주부윤은 서울에 가까운 외임이었다.이조참의보다 높은 벼슬을 시키자
면 한 번 외임을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승지는 이조참의 김안로에게 광주부윤을 제수하는 교지를 써서 내렸다.
  김안로는 사은숙배를 하러 들어와서 또다시 그물 같은 눈물을 흘려 임금
을 바라 뵈었다.
  김안로가 사은숙배를 드리고 퇴궐을 하여 광주부윤이라는 영광스런 길을 
떠나려 할 때,위에서는 또다시 왕명이 내렸다.
  “광주부윤 김안로로 이조참판을 제수한다.”
  기막힌 영광이었다.이조참판은 판서 다음가는 자리다.
  엊그제 이조참판의 옥관자를 붙였는데,사흘이 채  못 가서 광주부윤이라
는 직함을 거쳐 가지고 이조참판의 금관자를 붙이게 되었다.김안로는 일약 
야경의 자리로 뛰어올랐다.기회를 타서 중간파의 입장에  서서 말을 한 때
문에 임금의 총애를 얻은 것이다.
  김안로의 집안의 경사는 말할 나위도 없고 그는 일약 벼슬하는  속된 부
리들의 부러워하는 대상이 되어 버렸다.
  김안로가 별안간 사다리 오르듯 벼슬이 올라가는  것을 보자,이 일을 무
심치 않게 보는 한 사람의 외척이  있었다.돌아간 중종비 장경왕후 윤씨의 
오라버니요 핏덩이 원자의 외삼촌이 되는 윤임이었다.뜻밖에 누이 되는 왕
후가 산후발한으로 급히 돌아가자 윤임은 끈 떨어진 뒤웅박의 신세가 되어 
버렸다.
  누이인 왕후가 안 계시니 자기의 세력은 일패도지로 땅에 떨어지고 말았
다.
  누구든지 새로이 왕후가 되는 분이  외척이 자기의 권력을 대신할  것이 
분명했다.
  윤임에게 있어서는 폐비가 되었던 신비가 복위 된대도 아무런 영광이 없
는 일이요,공신의 딸들인 후궁 속에서 경빈 박씨나 희빈 홍씨가 왕후가 된
대도 세력을 잡을 길이 없는 것은 매일반이었다.
  자기가 사는 길은 다만 핏덩이인 원자가 잘 성장해서 세자가  되고 중종
의 뒤를 계승하여 임금이 되어야만 자기는 다시 부귀영화를 누려서 권세가 
혁혁할 것이었다.
  윤임이 밤과 낮으로 노심초사해서 생각하는 일은 어떻게 하면 원자를 잘 
보호하나 하는 이 생각뿐이었다.신비를 복위  시키자고 떠들어대는 선비들
의 일파가 있었으나 자기와는 약간 거리가  먼 주장이요,신비를 복위 시키
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공신들의 일파가 있었으나  이것은 
후궁들인 공신의 딸 속에서 왕후를 뽑아  내자는 복선이 있는 주장이었다.
만약 후궁이 왕비로 승차를 하는 날은 원자보다 먼저 탄생된  후궁의 아들
들이 많으니 이 일은 원자한테 더욱 불리한 일이었다.
  윤임이 손톱눈을 썰면서 물 끓듯 하는 조정 여론의 귀추만  살피고 있을 
때 두 편이 다 옳다는 김안로의  양시론이 일어나고,임금은 김안로의 말을 
들어 두 편의 벼슬을 다 갈아 버리고 새로이 간관과  언관을 임명했던  것
이다.
  윤임이 더욱더 조정의 귀추를 주목하고 있을 때 김안로는 일약 직제학에
서 단박 이조참위가 되고,참의가 된 지 하루가 못 되어 광주부윤으로 승차
를 하고,또다시 하룻밤 사이에 이조참판의 금관자를 붙이게 되었다.
  윤임은 이 소식을 듣자 손뼉을 쳤다.상노를 불렀다.
  “안에 들어가 내 의관을  내오게 하고,구종별배에게  자비를 차리라 해
라.”
  상노는 명을 받고 안에서 의관을 내온 뒤에 사인교를 사랑 뜰 앞에 등대 
시켰다.
  
    정략 결혼
  윤임이 사인교에 오르니 별배는 주인 대감께 물었다.
  “어디로 행차를 하십니까?”
  “화개동 김참판 댁으로 몰아라.”
  김안로의 집은 화개동에 있었다.교동  윤임의 집을 떠난  사인교는 벽제 
소리를 치면서 화개동 김안로의 집으로 향했다.
  나부죽한 조그마한 기와집이었다.어제까지도 직제학이라는  조그마한 벼
슬 자리에 있었으니 집도 조그마한 집일 수밖에 없었다.사인교가 이 집 대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윤임은 사인교 속에 들어앉은 채 별배를 시켜서  통자(명함을 들여 보내
는 것)를 했다.
  이윽고 들어오시라는 기별이 나오고,김안로는 대문간까지 쫓아 나왔다.
  왕후 오라버니 윤임이 자기를 친히 찾으니 광영이 아닐 수 없었다.
  “판부사 대감 이거 웬일이십니까?”
  김안로는 얼굴에 가득히 웃음 빛을  띠며 두 손으로 사인교에서  내리는 
윤임을 부축해 맞아 들인다.그의 눈에는 가을 물 같은 요염한 매력이 연파
를 일으켜 출렁거린다.다정이 똑똑 흐르는 듯했다.
  “왜,나 같은 사람은 김참판을 찾아 뵈올 수 없소?하하하하.”
  “웬,천만의 말씀이지,대감 같으신 귀하신 몸이 어떻게  누지를 찾으십니
까?”
  “별소리 마오.”
  “이왕 오셨으니,추한 방이오나 들어오십시오.”
  김안로는 윤임을 부축하여 대문 옆에 붙은 사랑 일각대문 안으로 인도했
다.
  “정말 말씀이지,땅이 비좁고 추합니다.그리고 불을 못 때서 방바닥이 차
가웁습니다.”
  “선비의 방이 그렇지,별말씀을 다 하시오.”
  김안로는 좁은 방으로 들어가자 윤임에게 개잘량을 권했다.
  “방이 찹니다.추하지만 이것이라도 깔고 앉으십시오.”
  윤임은 사양치 않고 개털을 깔고 앉았다.
  “그런데 영감,이번에 참,치하하오.”
  “천만의 말씀올시다.다만 왕은이 감격할 뿐입니다.”
  “이번에 양시론은 참으로 좋은 의견이야.선비들의 언론도 보장 시켜 주
어야 하고,신비를 다시 모신다면 또다시 여러 가지 거북한 일이 많고 하니 
아니 모셔야 옳은 일이구.”
  “그저,의향이 그렇게 들어서 한 번 주창해 본 것뿐입니다.”
  김안로는 윤임이 무슨 소리를  꺼내려 하나 궁금했다.살살  눈치를 채어 
곁눈질을 했다.
  “천하의 실재야.당금에 영감 같은 재분이 없거든.”
  “너무 과찬을 하십니다.”
  김안로는 실 같은 뱀 눈에 웃음을 담뿍 실어 또 한 번 윤임을 쳐다본다.
  윤임은 별안간 김안로의 손을 덥석 쥐었다.
  “여보 김참판 영감,나라 일이 큰 염려요.”
  “염려될 것 무어  있습니까?위로는 밝은 성군이  계시고,아래로는 대감 
같으신 훌륭한 신하가 많이 계신데...”
  김안로는 또다시 핼끔 추파를 흘려 윤임의 얼굴을 더듬는다.
  “그야,지금은 영특한 상감이 계시니 아무 일이 없지마는,원자가 아직 핏
덩이로 계신 채 모후께서 돌아가셔서 아니 계시니 말이요.”
  윤임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간특한 김안로였다.벌써 윤임의 눈치를 채었다.윤임이 이  까닭으로 자기
를 찾았구나 생각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아무리 모후가 승하하시고 아니 계시다  할지
라도 원자는 언제든지 원칙적으로 원자지 무슨 말씀입니까?당연히  앞으로 
세자로 봉하셔야 하고 또 그 다음에는 왕위에 오르셔야 당연하지요.”
  “그저,당연한 것을 누가 모르나.세상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그러
나 만약 후궁 중에서 누구든지 왕후가 되시는 날에는 그 분의 소생으로 세
자를 책봉하자고 주장할 테니 이것이 탈이란 말요.”
  김안로는 확실히 윤임이 자기를 찾아온 까닭을 알았다.
  “그것,안 될 말씀이지요.우리 나라 법에는 적서의 구별이 있습니다.아무
리 후궁 속에서 정비로 승차하는 후궁이  있더라도,후궁으로 있을 때 탄생
한 아들은 적자가 못 되고 서자가 됩니다.서자로 어떻게 막중한 왕통을 계
승 시킬 수 있습니까?그리고 후궁이 정궁이 된  뒤에 왕자를 낳는다 하면,
이것은 형제의 차례가 있으니 먼저 나신 원자께옵서 아무리 돌아가신 왕비
의 소생이라 하나,당연히 형님의 자격으로 세자가  되시고 왕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김안로는 안상하게 방싯 방싯 웃으며 차근차근 대답했다.
  윤임의 가슴은 참배를 깎아 먹은 듯 시원했다.
  “만일 왕비가 후궁 속에서 나오지 않고,여염  재상의 집에서 간택을 해
서 새로이 모셔 들인다면...?”
  “매일반입지요.승하하신 왕후도 정통이시고 새로 들어온 왕비도 정통이
시니 나이 순서대로 지금 원자께옵서 세자가 되시고 왕통을 받드셔야죠.”
  윤임의 입은 떡 벌어진다.
  “천하의 실재야.우리 나라의 국보거든.”
  윤임은 더 한 번 김안로의 손을 꼭 쥐었다.
  “영감,영감의 큰 자제가 올해 몇 살요?”
  김안로는 윤임이 별안간 자기 아들의 나이를  왜 묻나 하고 생각했다.윤
임이 딸이 있어서 자기 아들로 사위를 삼으려나 하고 생각했다.마음속으로 
괜치 않다 생각했다.지체로 따져 본대도,자기도 연안 김가의 양반이라고 손
을 꼽는 집안이지만 윤임은  장경왕후의 동생이요 원자아기씨의  외숙이었
다.나중에 원자가 임금이 된다면 자기 며느리는 임금과 외사촌간이 된다.이
런 좋은 혼처가 없다고 마음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했다.
  “열 두 살,참으로 좋구먼...”
  윤임은 혼자 말하고,
  “어디 나가지 않고 댁에 있다면 잠깐 만나 보게 해주시오.”
  “글방에서 글을 읽고 있을 겝니다.잠깐 기다려 줍시오.”
  김안로는 말을 마치자,
  “이리 오너라.”
  상노를 불렀다.
  문밖에 대령하고 섰던 상노가 들어왔다.
  “글방에 가서 도련님을 불러들여라.”
  이윽고 김안로의 아들이 들어왔다.
  “너,저 어른께 뵈어라.윤판부사 대감이시다.장경왕후마마의  동생이시고,
원자마마의 외삼촌이시다.”
  김안로는 아들한테 이렇게 손님을 소개하면서 절을 해보이라 했다.
  김안로의 아들은 열 두 살밖에 아니 되었으나 저희 아버지를  닮아 영리
하고 똑똑했다.얼굴은 관옥 같고 눈은 어글어글 총기가 서렸는데,도리어 아
비 김안로의 눈보다 요사스러운 기운이 없어서 귀공자 다웁게 청수했다.붉
은 중치막에 남띠를 두르고 치렁거리는 땋은 머리에 검은 갑사  댕기를 떨
어뜨렸는데,높직이 모시 행전을 치고 삼승 버선을  신은 모습은 나이에 비
해서 훨씬 숙성했다.
  김안로의 아들은 아비의 영을 받들어 공손히 윤임에게 절을 올리고 다시 
일어나 두 손을 마주 잡아 단정히 모시어 섰다.
  윤임은 진사립 갓을 번쩍거리면서  한동안 김안로의 아들을  바라보다가 
귀여운 생각이 들었다.
  “이리 와 앉아라.”
  “좋습니다.”
  김안로의 아들은 조심스럽게 사양했다.윤임은 마음속으로,
  ‘자식을 제법 잘 가르쳤구나.’
  하고 감탄했다.
  “이리와 앉아.어디 손 좀 만져 보자꾸나.”
  윤임은 미소를 풍겨 안로의 아들을 불렀다.
  “어른이 부르시는데,하라 시는 대로 해라.”
  김안로는 점잖게 아들을 타일렀다.아들은 분홍 중치막 자락을 잡고 고웁
게 발을 옮겨 윤판부사 대감 앞에 꿇어앉았다.
  윤임은 덥석 김안로의 아들의 손을 잡았다.
  “네 나이 열 두 살이라지?”
  “그러하옵니다.”
  “이름이 무엔고?”
  “희라고 하옵니다.”
  “무슨 희 잔고?”
  “복 희자 올시다.”
  “어,그 이름 좋구나.”
  “누가 지어 주셨느냐?”
  “아버님께서 지어 주시었습니다.”
  “복이 많으라구,잘 지어 주셨구나.”
  김안로는 윤판부사 대감과 자기 아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미소를 풍겨 앉
았다.
  “글은 무엇을 배었느냐?”
  “대학,중용,맹자,논어 사서를 다 마치고,지금 시전을 시작했습니다.”
  “무어?네가 열 두 살인데 벌써 시전을 읽는단 말이냐?”
  윤임은 깜짝 놀랐다.열 두 살에 시전을 읽는다면 신동이 분명했다.
  “참으로 자제를 잘 두셨소이다.”
  윤임은 김안로를 바라보며 칭찬을 했다.
  “어디 글 뜻을 알고 읽었습니까?그저 아동관수 육갑 외듯 입으로만  외
는 것입죠.”
  아버지 안로는 이렇게 겸손해서 말을 했다.
  “어디 손금 좀 보자.”
  윤판부사 대감은 손금을 한동안 보다가,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공부 잘해라.”
  윤임은 김도령의 손을 풀어 주었다.김도령은 나가라는 눈치인 것을 짐작
하고 뒷걸음을 쳐서 물러난다.행도거지가 출중해서 완연히 노성한 티가 드
러난다.
  김안로의 아들이 물러간 뒤에 윤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감, 우리 통혼합시다.”
  김안로는 아까 생각한 바와 같이 꼭 윤임이 딸이 있어  통혼을 하는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그러나 시치미를 뚝 떼고 점잖게 대답했다.
  “어디 좋은 규수가 있습니까?합당하면  하지요.더구나 대감께서 중간에 
드시는 터인데,누구의 딸이오니까?”
  “내 생질녀가 하나 있소.”
  생질녀란 소리에 김안로는 약간 의외라  생각했다.생질녀면 누군가 하고 
궁금했다.
  “생질녀시면 누구의 딸이오니까?매씨께서 여러 분 계십니까?”
  “아니,내 누이는 한 분이시지.장경왕후의 따님 효혜공주 말씀야.”
  김안로는 얼떨떨했다.이것은 평지에서 연꽃을 피는  격이요,금시발복이라
면 기막힌 발복이었다.윤임의 딸쯤으로 생각했는데 너무나 어마어마했다.
  “효혜공주시면 금상전하의 따님이 아니십니까?”
  “그렇지.바로 돌아가신 우리 누이의 첫딸이시고  상감마마의 큰 따님이
시지.원자아기씨의 동기간이시구.”
  김안로는 너무 좋아서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자기는  국혼을 해서 
임금과 사돈이 되고 아들은 부마가 되어서 왕자와 어깨를 겨눌  것은 생각
하니,아뜩 현기를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어때,생각이 없소?”
  윤임은 또 한 번 재촉한다.김안로는 잠깐 어지러운 심경을 수습했다.
  “원래 우리 나라의 맑은 선비는 부귀영화를 탐내서 국혼하는 것을 긴하
게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보통 인물이 아닌 김안로였다.한  번 슬쩍 버티어 본다.언론보장을  위해 
일어나는 선비도 옳고 신비 복위가 불가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옳다는 양시
론을 주장해서 별안간 참의 참판으로 뛰어오른 김안로의 관록을 보이는 것
이었다.세상에서는 김안로를 높고 깨끗한 맑은 선비로 대접을 하지 않건만,
자기 자신은 한 번 이렇게 아스러지게 자처해서 교만한 태를 보여 보는 것
이다.
  이번에는 윤임이 당황했다.
  “무어 그런 말이 혹  있지만,삼한갑족인 선비가  공주한테 장가를 가지 
아니하면 누가 장가를 가겠소?모두들 입에  발린 소리지.그래 생각이 없으
시오?”
  윤임도 탁 한 번 버티어 보기는 했으나 이러한 자리를 놓칠 것이 두려웠
다.
  “글쎄,너무 황송쩍어 그럽니다.자식이 불민하옵고.”
  “무어,그리 겸사를 마시오.”
  “그러면 판부사 대감 말씀에 따라 그대로 봉행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소.그러면 나도 마음이 놓이오.돌아가신 우리  누이의 생각
을 해도 항상 걱정이 되더니 이제는 다리를 뻗고 자겠소이다.”
  “상감께서 말씀이 계셨습니까?”
  김안로는 허락을 해놓고도 이 일이 궁금했다.성사가 안 되면 큰일이었다.
윤임의 생각만으로 이러는 것인가 임금도 아시는 일인가 알고 싶었다.
  “상감께서는 곧 예궐을 해서 허락을 받아올 작정입니다.공주 일에 대해
서는 전부터 나한테 좋은 부마 감을 골라 보라 이르셨습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만족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윽고 윤임은 자비를 돌려 대궐을 몰았다.
  김안로를 새로이 곱게 본 왕 전하는 윤임의 말에 의지해서  공주의 대혼
을 김안로의 아들한테로 내릴 것을 결정했다.
  김안로의 집으로는 칙사가 나오고,김안로의 아들  김희는 일약 공주한테 
장가 들 부마도위감이 되었다.
  김안로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여  안팎으로 드나들고,그의 집으로는 
치하하러 몰려드는 공경 대부들의 사인교와 초헌과 남여가  문이 메이도록 
들어갔다.김안로는 가난한 선비 직제학으로 나라의  사돈인 대세력가가 되
었다.
  호화로운 가례를 치른 지 며칠 뒤에  김안로의 벼슬은 판서로 올라가고,
판부사 대감 윤임은 김안로를 다시 찾았다.김안로는  일약 재상 줄에 올라
갈 수 있는 정경이었다.얼굴도 더한층 동탕해졌고  의복도 더 다시 화려해
졌다.다만 변하지 않은 것은 그 요사스러운 눈웃음과 물  같은 눈물이었다.
찾아오는 판부사 대감 윤임을 바라보자 얼굴에 가득히 눈웃음을 머금었다.
  “참으로 국은이 망극하옵니다.그리고 판부사 대감의  은혜도 갚을 길이 
없사옵니다.”
  김안로는 방싯 웃음을 눈으로 흘렸다.교태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도 
남았다.
  “별말씀을.”
  윤임은 간단히 대답했다.
  “어떻게 이렇게 행차를 또 하셨습니까?”
  “대감은 나하고 이제는 사돈이 되지  않소?부마는 나의 생질서가 되고,
아하하하,날마다라도 와야지.”
  영감인 김안로는 인제는 대감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하옵니다.날마다 오시기만 하면 저의 집의 광영입지요.”
  김안로의 눈웃음은 또 한 번 화려했다.
  “우리 집은 부원군 집이고,대감의 집은 부마댁이고...하하하.”
  윤임도 마음이 호화로웠다.이윽고 윤임은 정색을  하면서 김안로의 손을 
잡았다.
  “대감도 인제는 국혼을 하셨으니,나라에 대하신  관심이 여타 자별하실 
것입니다.원자를 든든히 보호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공주와  원자는 돌아가
신 내 우이 장경왕후의 둘도 없는 단 한 분씩의 아들과 따님입니다.”
  “보호해 드리구말구.부탁을 아니 하셔도 보호해 드릴 것 아닙니까?명심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돌아간 중종비 장경왕후의 오라버니 윤임은  장경왕후의 소
생인 효혜공주를 김안로의 아들 희에게 하가  시켜서,쥐도 새도 모르는 결
에 하나의 정치 세력을 이루었다.
  조정의 정치 세력은 완전히 세 갈래로 나뉘게 되었다.곧고 바른 길을 표
방하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유림 세력과,공신들의 후예를 떠받들어 후
궁들과 연락을 취하는 소인의 일당 남곤,심정과,기회를 찾아 움직이는 김안
로의 일당으로 나뉘어졌다.
  김안로는 윤임과 결탁하여 일약 부마의 아버지가 된 뒤에 앞으로의 정치
적 세력을 더한층 펴 볼 야망이 생겼다.그는 윤임을 찾았다.
  “대감,시생은 이제는 나라의 국은을  두텁게 받고  있는 척신의 집안이 
되었으니 더욱 나라 일에 관심이 크게 되었소이다.지금 왕비전하의 곤위가 
비어 있는데,선비들 일파는 신비를 복위 시키자고 주장하고 공신들의 앞잡
이 남곤과 심정의 일파는 모두 다 후궁 속에서 왕비를  들여보내려 공작을 
하니,신비를 복위 시킨다 해도 원자에게는 이로울  것이 없고 더구나 후궁 
속에서 왕비가 나온다면 더욱 해로울 것이니,이 기회에 처녀를 간택하시어 
새로이 계비를 정하게 하는 것이 가한 줄로 생각하오.”
  김안로는 흐르는 듯한 그 독특한 눈매에 교활한 웃음을 가득  띠워 윤임
을 바라본다.
  “대감의 말씀이 옳소 마는 처녀 간택을 하시어 계비를 모신다  해도 결
국에 가서 그 몸에 아들이 나오게 되면 또다시 원자아기씨에게는  적이 될 
것이니 이것이 딱한 일이 아니겠소.”
  “하,하,하,하.”
  김안로는 윤임의 말을 듣자 간드러지게 한 번 웃어댄다.웃고 난 뒤에 다
시 말을 계속했다.
  “그러면 대감은 상감을 왕비  아니 계신 홀아비로 두실  작정요?대감이 
아무리 왕비를 아니 모시려 해도 결국에 가서는 왕비는 생기시고  마실 것
을...하,하,하,하.”
  “그야 그렇지.”
  윤임은 입맛이 씁쓸해서 대답한다.
  “그러하니,우리가 먼저 선수를 걸어서 우리 편  사람의 딸로 왕비를 모
시도록 하잔 말요.”
  “대감,그것 참 좋은 말씀이오이다.”
  윤임은 무릎을 쳤다.
  “그렇다면...”
  김안로는 눈을 또 한 번 가늘게 뜨면서 ‘그렇다면’ 소리를 한 번 야무
지게 한 뒤에 무엇을 잠깐 생각하다가,
  “대감 일가에 윤지임이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지.”
  “윤지임의 딸이 올해 열 일곱 살 가량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사람의 딸의 나이가 그쯤 됐을걸.”
  “어떠합니까,대감 의향엔?”
  “지금 윤지임은 궁한 처지에 있으니 내가 천거해 준다면 여지없이 기뻐
할 터이지.”
  “자아,그럼 두말 마시고 우리는 윤지임의 딸을  왕비로 모실 것을 결정
합시다.”
  “내가 오늘 밤으로 윤지임을 불러 다가 의향을 물어 보기로 합시다.”
  “그런데 간택에는 한 사람만 가지고는 아니 될 테니 또 한 사람의 후보
를 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 한 사람의 후보자라면 역시  우리 일가에 한 사람 또  있
소.파성군 윤금손의 딸로 정합시다.”
  “좋습니다.”
  두 사람은 이렇게 왕비 감을 윤씨네 집 딸로만 골랐다.
  이날 밤에 판부사 윤임은 그의 일가인 윤지임을 청했다.
  “자네,딸이 있지 않은가?”
  “있습니다.”
  “몇 살이 되었나?”
  “아들 형제에 딸이 하나가 있는데 열 일곱 살이 되었습니다.”
  “귀한 딸일세 그려.아들들은 몇 살이 되었나?”
  “큰애가 원로이온데,스물 다섯 살이 되었고,둘째 애는  원형이라 하옵는
데 스물 세 살(편집자주:원형은 문정왕후의 동생이므로,이것은 저자의 착각
인 듯하다)이 되었습니다.”
  윤지임은 구차하게 사는 호반이었다.장경왕후의 오라비인 판부사 대감이 
별안간 불러서 딸의 나이와 아들들의 나이를 묻는 것을 보자,속 중으로 웬
일인가 아들들은 발신을 시켜 주고 딸은 좋은 사윗감을 골라  주려나 하고 
판부사 대감의 동정만 바라보고 있었다.한동안 무엇을 생각하던 윤임은,
  “자네 딸을 위에 말씀 드려서 간택해 보신 뒤에 왕후로 모시게 할 테니 
의향이 어떠한가?”
  “네?왕후 오니까?”
  윤지임의 눈은 경풍을 한  듯 놀라서 둥그렇게  떠졌다.몸뚱이가 별안간 
허공으로 둥둥 떠오르는 듯했다.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이었다.
  “왜 의향이 없나?”
  “아니올시다.”
  윤지임은 또다시 황망했다.마음속으로는 무척 좋은데,절대로 의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별안간 금시발복이 되어 부원군이 되라 하니 얼떨떨해서 어
찌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게끔 되었다.
  “그러면,왜?”
  윤임은 미소를 풍기며 지임을 바라본다.
  “너무 황송쩍어서 그럽니다.”
  윤임은 지임의 당황해 하는 모습이 도리어 좋다고 생각했다.사람이 솔직
하고 소박해서 자기의 심복을 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뒤에는 내가 있으니 과히 황송쩍어 하지 말게.내 딸 대신으로 알고 자
네 딸을 들여보내려 하는 것일세.”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그러하오나  간택에서  떨어지면   어찌합니
까?”
  “그야,내가 있는데 설마 자네 딸을 간택에서 떨어뜨리게 하겠나.그 염렬
랑 말게.”
  윤지임의 목에서는 비로소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면 그렇게 알고 있게.내일이라도 우리 집  사람을 자네 댁으로 보
내서,아기에게 대하여 모든 궁중 풍속과 행동하는  범절을 미리 다 가르쳐 
주게 할 테니,아기한테도 일러서 모든 예법을 배우도록 하게나.”
  “아,정부인께서 누추한 집까지 행차를 하십니까?그렇다면 제 마음이 탁 
놓이겠습니다.살실인즉 상처한 홀아비 제몸이 아까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해
야 남에게 빠지지 않도록 하게 하나 하고 무척 속으로 걱정을 했습니다.”
  윤지임은 황송하고 감격해서 두 손을 마주잡아 부빈다.
  윤임은 벽장문을 열자 원보 대여섯 덩이를  꺼냈다.말굽 은덩이였다.찬란
한 은빛이 불빛 아래 번쩍번쩍 빛났다.
  “자,이것을 우선 가지고 아기의 의복 감을 사도록 하게.내일  우리 마누
라가 갈 때 또다시 피륙과 식량을 보내도록 할 테니 그리 알게.”
  윤지임은 무릎을 꿇어 은 덩이를 받았다.
  기막힌 발복이었다.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어렸다.
  “대감,은혜는 백골난망올시다.”
  “이 사람아,그런 소리는 나중 부원군이 된 뒤에 할 말일세.”
  윤임은 말을 마치자 드높게 껄껄 웃었다.윤임과 김안로가 윤지임의 딸을 
왕후로 밀어 모실 것을 결정한 뒤에,이조참판  김안로는 대궐로 들어가 임
금께 뵈옵기를 청했다.이제는 이조참판의 김안로보다도 공주의 시아버지가 
되는 임금의 사돈인 김안로였다.전하는 정중하게 김안로를 맞았다.
  “소신 김안로는 돈수백배하옵고,전하께 아뢰옵나이다.그 사이  오랫동안 
왕비전하의 곤위가 비었으니,신민들의 마음이 의지할 곳이 없사옵니다.하루 
속히 왕비를 정하시어 신민들의 마음이 화락하게 하옵소서.”
  김안로는 흐르는 듯 눈매를 지어 전하를 바라 뵈오며 애원하는  듯 호소
하는 듯 아뢴다.왕실을 걱정하는 마음이 눈매에 서리고 엉킨 듯했다.전하는 
김안로의 눈에 홀렸다.과연 나라를 걱정하는 충신이라 생각했다.
  “나도 왕비의 자리가 오래 비어 있으니 불편한 일이 많은 것을 잘 알고 
있으나,유림의 일파는 신비를 복위 시키라 주장하고 공신들의 일파는 후궁 
속에서 왕비를 승차시키라는 눈치를 보이고  있어 조정 여론이 통일  되지 
않으니,이래서 아직도 결정하지 못한 것 아닌가.경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닐
세.”
  전하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소신은 그때 양시론을 주장했습니다마는 그때  드린 말씀 같이,신비를 
다시 복위 시킬 수도 없는 일이옵고,공신들의  따님인 후궁 속에서 왕비전
하를 승차시킨다면 또다시 공신들 속에  갈등이 생길 것이오니,전하께서는 
단을 내리시어 이도 아니오 저도 아닌 사대부 집의 처녀를  간택하시와 왕
비를 봉하시는 것이 가장 현명하신 처사인 줄로 아뢰오.”
  김안로는 그 흐르는 듯한 요사스러운 눈을 다시 들어 전하를 바라 뵌다.
  “경의 말이 근리한 말이니,생각하여 대비께 아뢰고 곧 처사하리라.”
  전하는 김안로의 말을 옳게 들었다.
  “전하,신중히 처리하옵소서.”
  김안로는 한 번 더 다지고 어전을 추창해 나왔다.
  김안로가 전하를 만나 뵙는 같은 시각이었다.
  판돈령부사 윤임은 왕대비께 뵈옵기를 청했다.상궁을  통하여 대비께 뵈
었다.윤임이 대궐로 들어가기 직전에 상궁한테는 판부사 윤임의 집에서 금
은보화의 뇌물을 많이 들여보냈다.뿐만 아니라  대비께서 처녀를 하문하시
는 경우에는 윤지임의 딸이 가장 가합한 처자인 것을 아뢰어  달라는 부탁
까지 해 두었다.
  판부사 윤임은 상궁을 통하여 대비께 뵈었다.모두  다 파평 윤씨네 일가
들이었다.
  윤임은 대비전 장지 웃간에서 곡배를 드리고 문후를 올렸다.
  “오랫동안 승후를 드리지 못했사옵니다.”
  “바쁜 터에 오늘,어떻게 들어왔는가?”
  “왕실의 일로 아뢸 말씀이 있사와 들어왔사옵니다.”
  “무슨 일인가.”
  “장경왕후께옵서 불행히 승하하신 이래 곤전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모
든 신하와 백성들이 걱정하는  바입니다.하루 바삐 왕비의  자리를 비우지 
않도록 하옵소서.”
  “나는 주야로 이 일을 생각하는 중일세.그러하나  이 자리를 가지고 유
림과 공신들이 두 패로 갈리어 공론이 서지 아니하니 딱한 일일세.”
  “그러하옵니다.그러하니 대비전하께서는  공평하게 처리하시어   유림도 
아니오 공신도 아닌 사람의 딸을 간택하게 하시옵소서.”
  “신비도 아니요 후궁도 아닌 다른 곳에서 구하란 말일세 그려.”
  대비는 미소를 띠워 묻는다.
  “그러하옵니다.그리하셔야만 쓸데없는 시비가 멎어질 것이 옵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딸로 간택을 하는 것이 좋겠나?”
  “대비전하께 여쭙기 황송하오나,파평 윤씨네 일문  속에서 고르시는 게 
적당하다 생각하옵니다.”
  파평 윤씨네 일문 속에서 왕비 감을 고르는 것이 좋다는 윤임의 말에 대
비의 귀는 솔깃해졌다.대비도 파평 윤씨인 때문이다.같은 값이면 자기의 친
정인 파평 윤씨 속에서 왕비 감이 나오는  것이 든든하고,친정 집안 속 일
이라 속도 알아 보기가 쉬웁고,이모저모로 보아서 좋았다.
  “파평 윤씨네 집이면  뉘 집에  가합한 규수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
가?”
  “저도 파평 윤가올시다마는 안의 일을 어찌 자세히 알겠습니까.파평 윤
씨라는 테두리 안에서 전하께옵서 친히 간택을 해보옵소서.”
  윤임은 이쯤 아뢰었다.더 자세히  누구의 딸이요 누구의  누이라는 것을 
말한다면 오히려 대비의 의심을 살까 보아,짐짓 이쯤 해 두는 것이었다.
  윤임이 물러간 뒤에 대비는 제조상궁을 불렀다.대비의 가장 신임하는 늙
은 상궁이었다.
  “너,우리 집 친정인 파평 윤씨네 집안에 가합한 규수가 몇 명이나 있는
지 알아보아라.”
  “계비인 곤전마마를 간택하시려 하시옵니까?”
  상궁은 나직이 여쭈어 보았다.
  “원칙으로는 전국에 간택령을 내려서 재상의 집 처녀들의  혼인을 중지
시키고 왕비 감을 고르는 것이 법이지마는,두 번 세 번째 모시는 계비이고 
보니 윤씨네 집안에서 골라 뽑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한다.자세히 수소문을 
해서 올리도록 해라.”
  “말씀대로 봉행하겠습니다.며칠만 유수를 주시옵소서.”
  늙은 상궁은 유수를 받고 물러나와  윤임의 집을 거쳐서 윤지임의  딸과 
윤금손의 딸을 보고 들어갔다.늙은 상궁이 윤임의  집으로 찾았을 때 윤임
과 윤임 아낙을 만나서 특별한 관대를  받고,윤지임의 딸이 간택에 기어이 
뽑히도록 주선해 달라는 청촉을 받은 것은 다시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
다.
  상궁은 두 윤씨의 딸을 자세히 살핀 뒤에 대궐로 들어가  복명해 아뢰었
다.
  “대비마마,이번에 대비마마의 분부를 받자옵고 파평  윤씨댁 일문을 찾
았사옵니다.”
  “그래,가합한 규수가 몇 사람이나 있더냐?”
  “파평 윤씨 댁은 참으로 운이 트이신 댁이옵니다.”
  파평 윤씨 댁이 운이 터졌다는 말에 대비 윤씨의 마음은 흥그러웠다.
  “어찌해서 운이 트였다고 하느냐?”
  “대비마마께옵서도 파평 윤씨옵고 돌아가신 장경왕후도 파평  윤씨옵니
다마는,파평 윤씨 댁 규수들을 찾으니 모두  다 출중하시와 부덕이 높으시
옵니다.그 중에도 윤지임의 따님은 열 일곱  살이옵고 윤금손의 따님은 열 
여덟 살이온데,참으로 난형 난제한 자색과 재덕이  겸비한 분들이옵니다.소
인의 생각에는 두 분을 다 왕비로  모시었으면 하는데,정 그렇지 못하다면 
윤지임의 따님으로 점을 찍으시는 것이 좋을 성 싶으옵니다.”
  능소능대한 노련한 상궁이었다.파평 윤씨를 쳐들어서  같은 윤씨인 대비
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상궁의 말에 취한 대비는,
  “왕비를 어떻게 한꺼번에 두 분씩이나 모실 수가 있느냐?”
  하면서 미연히 웃어 만족한 뜻을 표했다.
  이날 저녁에 대비는 왕을 청했다.대비는 웃는 낯으로 전하를 맞이했다.
  “부르셨사옵니까?”
  전하도 화한 얼굴로 대비를 바라 뵈었다.
  “아까 아침 문안 때 의논을 했으련만 약간 알아볼 일이 있어서 말을 꺼
내지 않았는데,상감은 이제 중전을 맞아야 하지 않겠소.”
  “체통상 중전을 두어야 하겠사온데,그 동안 여기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
지 않은 것은 이 자리로 인하여 조정 공론이 두 길로 나기  때문에 일부러 
보류를 했던 것이옵니다.이제 이러한 일로 어마마마의 성심을 수고롭게 하
였으니 죄송스럽기 한량없사옵니다.”
  전하는 부드럽게 대답을 올렸다.
  “나도 상감의 심정을 짐작해서 여지껏 말을 하지 아니했으나 이제는 조
정 공론도 일단락을 지었으니 내일이라도 곧 중전을 간택하도록 합시다.지
금 신비를 복위 시키기는 어려운 노릇이고 후궁들 중에서 누구든 중전으로 
승차를 시켜도 무방할 것 같으나 역시 원자를 위하는 일이 되지 모사니,차
라리 새로이 처녀를 간택하여 왕비를 봉하는 것이 좋을 성 싶소.상감의 의
향은 어떠하오?”
  전하는 김안로의 말을 듣고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한 바 있었던 것이다.
이제 대비의 말씀을 들으니 김안로의 의견과 매한가지였다.
  “분부대로 삼가 봉행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간택을 하는 것이 좋겠소?”
  “소자를 생각해 주시는 분이 이 세상에서 어마마마 이외에 또  다시 누
가 계시오니까?모든 일은 어마마마께 맡기오니 어마마마께옵서 좋도록  처
리해 주시옵소서.”
   임금은 어마마마께 응석을 부려 웃음을 웃어 사뢰었다.
  대비는 전하의 말씀을 들으니 마음속으로 효자라 생각하면서  더욱 기뻤
다.
  “상감의 생각이 정 그러하다면 내가  초간택을 하고 상감이 다시  한번 
고르게 할 테니 그렇게 알고 처리하도록 하오.”
  “황감하오이다.”
  전하는 치사를 올린 뒤에 어마마마를 모시어 한담을 사뢰다가 경연 자리
로 물러갔다.
  대비는 아드님의 일이 순조롭게 되어가는데 만족했다.이날 밤 저녁 수라
를 자신 뒤에 늙은 상궁을 불렀다.
  “이번 계비를 간택하는 일은 상감께 의론하여 대강 방침을 결정하였다.
상감게서도 이번에는 중전을 봉하시기로 하셨으니,내일  일찍 윤지임과 윤
금손의 집으로 네가 나가서 딸들을 대궐 안으로 들려보내도록 일러라.초간
택을 내가 한 뒤에 재간택을 상감께옵서 하실 것이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이만한 큰 경사가 없사옵니다.”
  상궁도 마음으로 기뻤다.더구나 이번 간택에는 누가 왕비가 되는지 자기
의 공로가 번듯하게 되었다.늙은 상궁은 신명이 나서 이날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이튿날 늙은 상궁은 일찍 일어나 소세한 뒤에 대비께 문안을  드리고 바
로 곧 궐문 밖으로 나갔다.
  늙은 상궁의 보교가 윤지임의 집과 윤금손의 집보다도 윤임의 집을 먼저 
찾은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한편으로 윤임은 윤지임에게 약속한 대로 자기의 아내  정부인을 윤지임
의 집으로 보냈다.
  정부인의 사인교가 떴을 때 사인교 뒤에는 교전비들이  좌우편으로 모시
어 따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피륙바리,쌀 바리,나무바리가 끊일 사이 없
이 사인교의 뒤를 이어 윤지임의 집으로 들어갔다.
  째지게 구차하던 홀아비 윤지임의 집은  파평 윤씨가 된 덕으로  별안간 
금시발복이 되었다.뒤주와 쌀독에는 어백미가 가득하게  채워지고,휑뎅그렁
하게 부지깽이 한 개만 나자빠졌던 부엌에는 장작가리와  섶나무단이 차곡
차곡 종보를 해서 쌓아  올라갔다.몇 십년 동안 도배를  못 해서 고약같이 
때가 끼었던 안방은 분통같이 도배가 되어 분 벽 사창에 밝고 따스한 기운
이 어른거렸다.
  윤판부사 댁 교전비가 먼저 윤지임의 집으로 정부인이 오시는 것을 연통
하러 들어갔을 때 마루 끝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여주인은,원래 이 집이 홀
아비 집이라,장차 간택에 뽑힐 이 집의 외딸 열 일곱 살 된 처녀일 수밖에 
없었다.
  엊그제 아버지한테 별안간 말씀을 들었다.아버지는 일가 집 판부사 댁으
로 대감이 불러서 갔더니 대감은 아들이 몇 형제고 딸이 있던가 하고 묻더
니,고명딸이 하나 있다는 말을 듣자 왕비로  모실 테니 간택에 참례하겠느
냐 다시 물어서 아버지는 이내 대답을 했노라 하고,얼마 있으면 판부사 댁 
정부인이 모든 궁중 절차를 가르쳐 주시러 집에까지 오신다는 말씀을 들었
다.그리고 아버지는 주먹덩이보다도 더 큰 원보  은덩이를 대여섯 개 내놓
으시면서,이것은 대감이 너의 의복과 패물붙이를  마련하라고 주신 것이라 
했다.그리고 아버지는 걱정이 부산했던 것이다.
  “이 누추한 집에 정부인이 오시면 장차 어떻게 하고,궐 안에서 혹시 상
궁이나 나인이 나오면 어찌하나?당장 입어야 할 네 옷은 누가 지어 입어야 
한단 말이냐?”
  하고 걱정이 너저분했던 것이다.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또다시 딸 앞에서 
괴탄을 했다.
  “만약에 간택에 들었다가 떨어지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서 한편으론 무척 좋은 듯,한편으론 무한히  조바심이 되는 듯 아버
지는 안절부절 못 했다.
  이때 딸은 아버지의 말씀을 다 듣자 남의 일을 대하듯  냉정하면서도 침
착했다.
  “옷감은 내일이라도 말굽 은을 가지고 끊어다 주시면 소녀가 밤을 도와 
지어 입겠습니다.그리구 집안이 추한 것을 걱정하십니다마는,내일  곧 지전
에 기별하시어 도배장이를 불러다 도배를  하시면 고만이올시다.집이 추한 
것이 병이지 집이 좁은 것이야 가난한 살림에 별수 있습니까?이것은 흉 될 
것이 없습니다.그리고 이왕 간택을  허락하셨다 하니 당하는  대로 하시지 
걱정하실 게 없습니다.간택에 뽑히는 것도 제 명이요,간택에 떨어지는 것도 
제 명이옵니다.”
  하도 침착한 딸의 대답에 윤지임은 용기가 도리어 백배나 솟구쳐서,밝은 
날은 선전에 나가서 딸의 옷감을 끊어 오고 큰아들 원로와 작은 아들 원형
을 시켜서 지전에 나가서 도배장이들을 불러들여서 부랴부랴  분통같은 도
배를 시작했던 것이다.
  딸은 밤을 새워 아버지가 끊어 온 노랑 제병 저고리와 진다홍 치마를 감
치고 훔쳤다.밝은 날 윤판부사 댁 정부인을 맞이할 옷이었다.원체  딸은 어
머니를 일찍 여의고 어려서부터 홀 아버지 지임과 두 오라버니들의 간구한 
뒷배를 받들었던 까닭에 이다지 행동이 의젓하고 숙성했다.
  윤지임의 딸이 판부사 댁 교전비의 마마님이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마루 
끝에 섰을 때,윤판부사 댁 정부인은 대문이 좁아서 교자를 문밖에 두고 안 
문으로 걸어서 들어섰다.마루 끝에 오똑이 섰던 딸은 곱게 몸을 놀려 섬돌
에 놓인 청목 당혜를 얌전히 신자,뜰 아래로 내려서서 고개를 다소곳 숙이
고 말없이 정부인을 부액해 맞아들였다.
  정부인이 당에 오른 뒤에 처녀는 목청을 부드럽게 낮추어,
  “앉으십시오.”
  하고 말한 뒤에 날아갈 듯 절을 올린다.
  절을 드리는데 어깨는 날씬해서 마치 학이  깃을 가지런히 펴는 듯하고,
몸을 어찌나 곱게 가지는지 치맛자락에서는  바람 한 점 날리지  아니하고 
절을 마쳤다.윤임의 부인은 마음 속으로 생각하던  바와 아주 딴판이라 생
각했다.간구한 살림에 더구나 어미 없이 자라난 딸이고 보니,이것을 대궐에 
들여보내서 체통을 잃지 않도록 가르치자면 좋이 힘깨나  들겠다고 생각했
더니,예법을 차리는 행동거지가 바로 일류 계급인 자기네들 외명부가 무색
할 지경이었다.
  여기다가 얼굴은 청초하고 코는 오똑이  솟았는데 하관은 너부죽하고,한 
곳 나무랄 데가 없는 총명한 얼굴이었다.다시  흠을 억지로 잡는다면 몸이 
좀 약해 보이는 것이 흠이었다.
  “판부사 대감께서 자네를 좀 도와 두라고  나를 보내셨네.올해 나이 열 
일곱 살이라지?”
  “네,그러하옵니다.말씀 낮추어서 하십시오.”
  처녀는 수줍어하지도 않고 평탄하게 대답했다.
  “이 저고리는 자네가 지어 입은 것인가.”
  “아버님께서,대감께서 보내신 은  덩이로 옷감을 사다  주셨습니다.지어 
입으라신 것이기에 분부대로 밤을 도와 소녀가 지어 입은 것이올시다.”
  깃을 단 것이라든지 섶을 돌린  것이라든지 진동과 화장이 똑  알맞아서 
바느질 솜씨도 일등이었다.
  “어머니도 안 계신 터에 어떻게 이렇게 바느질을 배웠나?”
  “홀아버님을 모시고 두 오빠를  뒷배 보아  드려야 하니,간구한 살림에 
침모를 두고 지낼 수 있습니까?제가 이웃집 노인을 청쪼와서 밤마다  바느
질 공부를 했습니다.”
  윤임의 부인은 혀를 찼다.자라면 보통 여인이  될 사람이 아니라 생각했
다.역시 자기네 집에서 정치적으로 일부러 이런 무의 무탁한 일가 집 처녀
를 골라서 왕비를 들여보내려 한 것이지만,왕비가  될 사람은 벌써 하늘이 
따로 정해 놓아서 다르다고 생각했다.
  윤임의 부인은 처녀를 앞에 앉히고 궁중 풍속을 몇 가지 일러 주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궁중은 민간과 달라서 여러 가지 예법이 많은 
곳일세.예법뿐이 아니라 말투도 다르네.나중에 상궁한테서 자세히 배우겠지
만,절을 하려면 바로 정면으로 절을 드리지 못하고 곡배를  드리는 것일세.
황송쩍어서 바로 절을 드리지  못하고 옆으로 절을  드리는 것이야.그리고 
잡숫는다는 말을 젓숩는다  하고,진지상을 수라상이라 하고,의복을  의대라 
하고,이런 것들은 차차 간택에 뽑히면 상궁들한테 자세히 배울꺼야.”
  윤임의 부인은 대강 궁중의 풍속을 가르쳐  준 뒤에,머리를 빗기고 단정
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다시 임금과 대비께 뵈옵는 절차를 여러 차례 습의 
시킨 뒤에 또 올 것을 약속하고 돌아갔다.
  윤임의 부인은 대강 윤지임의 딸을 보고 온 뒤에 남편을  향하여 칭찬이 
놀라웠다.
  “왕비 될 사람은 암만 해도 어딘지  보통 사람과 다릅디다.어쩌면 어머
니도 없이 자란 색시가 그대도록 출중합니까?아무리 우리 집에서 밀어  바
치는 왕비지마는 하늘이 마련해 주어야만 왕비도 되나 봅디다.”
  윤임은 보잘것없는 가난한 일가 윤지임의 딸을 왕비 후보로 밀어 놓고도 
마음이 놓이지 아니해서 아내 돌아오기만  은근히 기다렸는데,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마음이 탁 놓였다.
  “그래,과히 외모가 잔졸하지는 않습디까?”
  “외모도 잘생겼거니와 행동거지가 숙성하고  진중해서 우리 같은  사람 
찜쪄 먹게 되었습니다.”
  윤임의 내외가 주고받아 이야기를 하는 참인데 대궐에서는  상궁이 나왔
다.
  윤임의 내외는 상궁을 반가이 맞아들였다.
  “자주 나와서 죄송합니다.”
  “천만의 말씀을 다 하시오.상궁께서  자주 나오시면 우리  집엔 그대로 
꽃이 핍니다.”
  윤임의 아내는 상궁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
  “그야 중전마마께옵서 생존해 계시다면야 하루에도 몇 번씩  문안을 나
왔을 텝죠.”
  말을 마친 상궁은 얼굴에 웃음 빛을 띠우고,
  “일전 말씀하시던 윤지임의  따님 말씀입니다.대비께옵서  오늘 간택해 
보신다 합니다.그래서 소인이 전갈을 나왔습니다.”
  상궁은 자기의 사명을 다했다는 듯 은근히 공치사를 한다.
  “참으로 수고하셨소.”
  윤임은 점잖게 상궁의 수고를 위로했다.상궁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늙은
이였다.이 혼인이 윤임과 김안로가 속으로 원자를 내세우고 자기들 세력을 
펴려는 정치의 복선을 넣어 조성시키는 혼인인 것을 유리를 붙은  듯 환하
게 알고 있었다.
  “판부사 대감,후한 상을 내리 셔야 합니다.”
  “아암,여부가 있소?가례가 순성이 되고  원자마마께서 안녕하게 장성만 
하신다면,노항아님의 한평생이야 부귀영화가 끊일 사이 없겠지.”
  윤임은 이쯤 대답해 놓고,
  “그럼 어떻게 하나?지임의 딸과  금손의 딸을 함께 대궐로  들여보내야 
할 텐데.”
  윤임은 아내와 상궁을 번갈아 바라본다.
  “노항아님은 윤금손의 딸을  데리고 대궐로  들어가시고,윤지임의 딸은 
제가 데리고 들어가면 좋지 않을까요?”
  윤임의 아내가 의견을 말했다.
  “아냐 마누라는 치송만  해주고 대궐로  들어갈 때는  빠지는 것이  좋
아.”
  “그렇습니다.판부사 대감 말씀이 옳습니다.정부인께서는 윤지임의  아가
씨를 치장만 치러 주십시오. 그러면 소인이  윤금손의 댁을 다녀서 윤금손
의 따님을 먼저 대궐로 들여보내고,다기 윤지임의 따님을 모시고 들어가겠
습니다.”
  “그서 참 잘 되었소.그렇게 해주시오.”
  윤임은 만족한 듯 상궁의 의견을 찬동했다.
  윤임의 아내는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자비를 놓아 윤지임의 집으로 향
하고,늙은 상궁은 윤금손의 집으로 향했다.늙은 상궁이 작별 인사를  할 때 
판부사 윤임은,
  “기어코 윤지임의 딸이 간택에 뽑히도록 밀어 주시오.”
  하는 부탁을 상궁한테 더 한 번 당부했다.상궁은,
  “염려 맙시오.돌아가신 중전마마를 뵈옵고 원자아기씨의 장래를 생각한
들,대감 말씀을 어이 어기오리까.”
  하고 가마에 올랐다.
  약속한 대로 상궁은 윤금손의 집으로 먼저 가서 금손의 딸을  대궐로 들
여보내고,다음 지임의 딸을 사인교에 태워 대궐로 들여보내기로 했다.
  윤임의 아낙은 지임의 딸을 곱게 단장을 시키려 하여 사인교를  몰아 지
임의 집에 당도해 보니,뜻밖의  큰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당장 머리를  빗고 
단장을 하고 새 옷을 갈이입고 대비와 전하를 뵈오러 들어가야만 할 이 집 
주인의 딸이 별안간 토사곽란에 걸려 자반 뒤집기를 하고 있었다.
   시집 갈 달에 등창이 났다는 것보다도 더 황급하고 기막힐 일이었다.윤
임의 아낙은 댓돌에 올라서면서,홀아비 주인한테 이  소식을 들었다.윤임의 
아낙은 어이가 없었다.
  “웬일인지 아침 먹은 것이 체했는지,별안간 관격이 되어 자반 뒤집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간택을 하신다고 해서 상궁이 나왔는데 이 일을 어찌하나?”
  윤임의 아낙은 펄썩 마루 끝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안방에서는 괴로워하는 처녀의 신음 소리가 굽이굽이 들려왔다.
  홀아비 윤지임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지면서,
  “복철이가 되어서 그렇습니다.제까짓 복력에 왕후  팔자가 당키나 합니
까?”
  “사향소합원은 먹이셨습니까?”
  “아까 한 개를 사다 먹였습니다마는 아직 차도가 없습니다.”
  윤임의 아낙은 교군꾼을 불렀다.
  “빨리 댁에 가서 대감마님께 이 사유를 여쭙고 집에서 지은 사향소합원
과 청심환을 줍소사 해 가지고 오너라.”
  교군꾼은 부인의 영을 받들고 달음질쳤다.
  윤임의 아낙은 방으로 들어가 처녀를 대해 보니 얼굴은 백지장  같고 수
족은 얼음같이 차가웠다.오늘 대궐로 들어가기는 다 틀린 노릇이었다.
  교군꾼한테 이 소식을 들은 윤임도 깜짝 놀랐다.손수 사향소합원과 산삼 
청심환을 가지고 자비를 타고 쫓아왔다.김안로와 함께  짜고 했던 모든 계
획은 다 틀려 넘어가고 말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은혜는 백골난망이올시다.”
  홀아비 윤지임은 황망한 중에 판부사 대감을 맞아들인다.
  “어서 빨리 이 약을 써 보게.”
  판부사 대감은 특제로 지은 산삼 청심환과 사향소합원을  홀아비한테 내
주었다.
  이러는 판에 상궁은 윤금손의 딸을 대궐로 들여보내고  약속대로 윤지임
의 딸을 데리러 왔다.
  모두들 어안이 벙벙했다.상궁은 벌써 윤금손의 딸을 대궐로 들여보내 놓
았으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럼 소인은 들어가서 아기씨가 병탈이  난 것을 아뢸 수밖에  없습니
다.”
  “그렇게 아뢰어야지 별수가 없소.”
  윤임은 윤금손의 딸로 왕비를 삼을 수밖에 없다고 체념해 버렸다.
  “세상 일이 다 마음먹은 대로 되기가 어려운 거야.”
  윤임은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저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복철이가 되어서 그렇습니다.”
  :어서 병 조섭이나 잘하소.”
  윤임은 이렇게 한 마디를 하고 발길을 돌이켰다.
  이날 밤에 윤지임의 딸은 병에 차도가 있기 시작했다.
  홀아비 윤지임은 자기 딸이 왕후가 될 복력이 없어서 이렇게  별안간 병
이 난 것이라 생각하고 아깝고 애석한 마음에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대사동에는 백인이라는 명복이 한 사람 있었다.얼굴도 희고 머리도 
희어서 백인이란 별명을 가진 늙은이였다.본시 영남  태생으로 서울 온 지 
수십 년에 점을 치면 백발백중 앞의 일을 맞쳐 내니 그의 이름은  장안 안
에 첫손을 꼽게끔 됐다.백인은  남의 점을 치기 전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매일 자기 점을 먼저 쳐 보는 습관이 있었다.
  백인은 부리는 아이가 방을 깨끗이 소제하자,향을 사르고 단정히 앉아서 
자기 점을 쳐 보았다.점을 치던 백인은 무릎을 탁 쳤다.
  “허 허,참 별일도 다 많다.”
  혼잣소리를 하고 있었다.부리는 아이가 백인의  혼잣소리를 유심하게 듣
고 마구를 쓸고 있을 때,백인은 부리는 아이를 불렀다.
  “얘,미삼차를 좀 다려라.암만해도 큰 귀인이 오시겠다.”
  미삼차는 백인이 가장 아끼는 인삼차였다.간혹 혼자는 마시는 일이 있어
도,손님한테는 여간해서 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큰 귀인이 오십니까?”
  “문을 열어 논 뒤에  제일 먼저 찾아오시는 분이  있을 것이다.이 분은 
이 나라에서 몇째 안 가는 귀한 분이다.진하게 삼차를 다려라.”
  백인은 분부를 내린 뒤에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사동은 부리나케 화로에 불을 피워 차를 다리고 있었다.
  해가 환하게 창에 비칠 무렵이었다.대문 밖에서,
  “이리 오너라.”
  하고 주인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인삼차를 다리던 사동 아이는 빨리 대문  밖으로 뛰어가 보니,주인을 찾
는 사람은 사인교에 초헌을 탄 귀한 사람이 아니라 꾀죄죄한  남루한 옷을 
입었는데 당나귀도 못 탄 채 상노 하나 없이 홀몸으로 걸어온 사람이었다.
  “누구를 찾으십니까?”
  “여기가 백인의 댁이냐?”
  “그렇습니다.”
  “계시냐?”
  “일어나 기침을 하셨는데 알리고 나와야겠습니다.”
  부리는 아이는 이쯤 해놓고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백인한테  거래를 올렸
다.
  “손님이 한 분 오시기는 했는데 귀인이 아니십니다.”
  “왜?”
  “사인교도 아니 타고 구종별배도 없이 그대로 혼자서  터덜터덜 걸어온 
궁한 사람입니다.”
  “허어,두말 말고 들어오시라구 해라.”
  사동은 어이가 없다는 듯  문간으로 나가서 손을  인도해 들였다.백인은 
들어오는 손을 보자 마루 끝까지 나가서 맞아들인다.
  “누추한 곳에 귀인이 오십니다.”
  두 손으로 손을 맞이했다.손도 오히려 귀인이라는 바람에 놀라운 모양이
었다.
  “차를 내오너라.”
  사동은 삼차를 받들어 공손히 내왔다.손이 차를  드니 인삼 향내가 코를 
스쳤다.초면에 너무나 넘치는 대접이라 고마웁게 생각했다.손은  차를 마신 
뒤에 춤 안에서 생월생시를 적은 사주 쪽지를 꺼내 놓았다.
  “선생의 고명하신 말씀을 듣고 사주를 풀러 왔습니다.”
  “남자의 사주입니까,여자의 사주입니까?”
  백인은 먼저 남녀를 분간해 물었다.
  “여자의 사주입니다.”
  손은 간단히 대답했다.
  백인은 벼룻상을 당기어 사주를 풀기 시작하더니,
  “허 허.”
  소리를 여러 번 지르면서 주지에 사주를 풀어 썼다.
  사주를 풀던 백인은 남의 사주건만,하도 좋아서 콧노래를 연신 불렀다.
  쓰기를 다한 백인은 사주 푼 주지를 무릎 앞에 내려놓고,벌떡 일어나 손
한테 절을 드린다.
  “대감,참 사주 좋습니다.한턱 내십쇼.”
  손은 얼떨떨했다.얼른 일어나 백인의 절을 마주 대답한 뒤에,
  “대감이라니,나는 초사도 못하고 남향호반으로 겨우 별좌라는 직함밖에 
갖지 못했소.”
  “그저 대감,두말 마시오.대감은 보통 대감이 아니라 왕후의 아버지신 부
원군 대감요.”
  “부원군이라니,당신이 당장 나를 목도해 보면서 그러시오?이 사주는 내 
여식의 사주고,보다시피 나는 이렇게 가난한 사람요.”
  손은 짐짓 얼굴에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다.
  “허허,비록 오늘까지는 별좌로 계실는지 모르지만,열흘 안에  대감은 부
원군이 되십니다.우리 고름 맺기 내기합시다.”
  손은 그제서야 입이 딱 벌어진다.
  “과연 그렇게 이 사주가 왕후가 될 팔자요?”
  “두말 마시라니까 그러시오.왕후가  되어도 이만저만한  왕후가 아니라 
그대로 막 재상의 기상입니다.치마는 둘렀을망정 천하의 도리질 칠 왕후십
니다.앞으로 소인 같은 사람은 대감의 힘을 많이 빌어야겠소이다.”
  그대로 막 재상의 기상이란 소리에 손은 더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정녕,그렇겠소이까?”
  “두말 마시라니까 그러시오?언제 백인의 점이 비뚜로 나갔다는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소?”
  백인은 오히려 불쾌한 듯 언성을 높였다.
  손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홀아비 윤지임이었다.
  어제 당장 금시발복이 되어  대궐에서는 상궁이 나오고  판부사댁에서는 
정부인이 건너와서 상감과 대비께 딸이 선을 뵈러 대내 안으로 들어가려는 
판인데,그만 운수가 불길해서 윤금손의 딸은 들어갔는데  자기 딸은 못 들
어갔으니 이런 놈의 복철이가 세상천하에 어디 있는가 하고 윤지임은 밤새
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가,딸의 사주팔자가 어떻게 되었기에 이 꼴인가 하고 명복한테 물어 볼 생
각이 나서 오늘 새벽 동이 환하게 트이자 조금 너누룩한 자기 딸을 들여다
본 뒤에 <천세력>갈피에 꽂아 두었던 딸의 사주를 꺼내 가지고 서울 안에
서 제일간다는 명복 백인을 찾았던 것이다.
  하도 못 믿어 하니 백인이 증을 내서  소리를 버럭 높이는 것을 보자,윤
지임은 비로소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성명을 통한다.
  “나는 윤지임이란 사람인데,기실은 내 딸이 국혼  말이 있어서 어제 대
궐에서 상궁이 나오고 우리 딸은 간택에 뽑혀 들어가려 하는  참인데 별안
간 옹이에 마디로 토사곽란이 일어나서 간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소.남
의 집 딸은 들어갔는데 내 딸만 못 들어갔으니,이래 가지고는 무슨 희망이 
있으리까?”
  “허허,그것이 오히려 잘된 노릇입니다.세상에는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어제 들어가셨더라면 일진에 살이 있어서 일이 잘 안될 뻔했습니
다.미구불원 다시 소식이 있을 겝니다.어서 댁으로 돌아가시어 따님  고 수
련이나 잘하고 계십시오.금명간 반가운 소식이 들릴 것입니다.”
  윤지임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그는 백인을 찾은 김에 눌러서 큰아들 원로와 둘째 아들  원형의 사주를 
내주고 보아 달라 했다.
  백인은 두 형제의 사주를 눈으로 한번 훑어보더니 벌써 짐작이  가는 모
양이었다.
  “누이가 왕후가 되셨는데 부귀공영이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둘째  분
은 영의정까지 되실 것입니다.”
  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한편으로 상궁은 윤지임의 딸을 못  데리고 들어가게 되니 낙심이  되었
다.그러나 윤금손의 딸을 먼저 들여보내 놓았으니  대비한테 아니 아뢸 수
도 없었다.상궁은 대비전에 아뢰었다.
  “오늘 윤금손의 딸과 윤지임의  딸은 한꺼번에 간택하시도록  거행하려 
했더니,공교롭게 윤지임의 딸은 병이 나서 데리고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무슨 병이 났느냐.”
  “관격이 되었답니다.”
  “하는 수가 있느냐?윤금손의 딸이라도 먼저 보시로 하자.”
  대비는 말씀을 내린 뒤에 윤금손의 딸을 불러 보셨다.
  열 여덟 살이나 된 처녀였다.더욱이 문벌과  지위는 윤지임보다 나은 집
안의 딸이다.견문이 있고 사람이 덕성스러워 보였다.대비는 경험이 많은 분
이라 얼굴 예쁜 것보다 덕이 제일이라 생각했다.이윽고 본 뒤에,
  “내 맘에 가장 합당하다마는 대전마마께 뵙고 결정하도록 해라.”
  하는 분부를 내렸다.
  상궁은 대비의 명을 받들어 윤금손의 딸을 전하가 계신 대전으로 인도했
다.전하는 윤금손의 딸을 바라보았다.얼굴이 두둑하고 몸집도  커서 덕성스
러워 보였다.그러나 팔선녀들,꽃보다 더  고운 미인들 틈에서 놀던  전하의 
눈 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윤금손의 딸이 뵈옵고 물러간 뒤에,
  “윤지임의 딸의 병이 차도가 있거든 들어오라 한 뒤에 다시 한 번 함께 
보기로 하자.”
  전하는 상궁에게 말씀을 내렸다.
  난망 속에 빠졌던 윤지임의 집에는 다시 희망의 봄빛이 돌았다.윤지임이 
반가운 기별을 들은 것은 바로 백인을 찾아서 사주를 풀어 보고 돌아온 그
날 저녁때였다.마음속으로 백인은 과연 천하의 명복이라 생각했다.
  윤임의 아내가 다시 지임의 딸의 고수련을 해주러 건너오고,상궁은 날마
다 궁중 풍속의 습의를 가르치느라고 나왔다.윤지임의  딸이 다시 병이 완
쾌하니 얼굴은 더한층 예쁘고 몸맵시는 앓기 전보다도 탯거리가 고왔다.
  윤지임의 딸이 병이 나았다는 소식은 상궁을 통하여 대내 안으로 들어갔
다.
  “윤지임의 딸의 병이 완쾌했사옵니다.”
  “길한 날을 가려서 윤금손의 딸과 일시에 들게 하라.”
  전하와 대비의 칙령이 내렸다.윤지임의 딸은 윤임의 특별한 윗배가 있는 
터라 기구가 더한층 좋았다.구슬로 꾸민 칠보화관을 단정히 머리에 얹고,황
금 금박을 눈이 부시도록 박은 길이 넘는 도투락 댕기에  값비싼 석웅황을 
멋지게 달아 늘였다.
  연두 빛 푸른 깃에 오색을 동달아 무지개를 뿜는 듯한 당의와 불구슬 빛
으로 밝은 대화단 다홍치마를 입고 수운혜를 가볍게 끌어 유소보장이 드리
운 사인교 위에 사뿐  올랐다.영리하고 단정한 얼굴은  초롱거리는 눈매와 
함께 화려한 의복과 의장에 어울려 하늘에서 내린 듯한 귀인 모습이었다.
  윤지임의 딸의 사인교는 사람 물결을  헤치고 교동 병문을 지나  파지교 
다리를 거쳐서 돈화문 대궐로 들어갔다.
  대비와 전하는 이번엔 자리를 함께  하여 윤금손의 딸과 윤지임의  딸을 
대하게 되었다.
  두 소녀는 한 쌍의 좋은 대조가  되었다.하나는 소박하고 하나는 영리했
다.
  하나는 여염의 소박한 색시라면,하나는 구중 높은  전각의 주인이 될 기
상이 있었다.
  상궁은 윤금손의 딸을 인도하여 먼저 대비께 큰 절을 드려 뵈입게 한 뒤
에 전하께 절을 드리게 했다.걸음걸이와 뭄  가지는 품이 의젓하고 무거웠
다.열 여덟 살로는 몸집이 너무도 컸다.여인의 얼굴을 꽃에  비유한다면 푸
근한 면화 한 송이가 핀 듯했다.
  윤금손의 딸은 절을 올린 뒤에 장지 웃간에 손을 모아 고요히 섰다.아무
리 보아도 촌스러웠다.전하의 시선이 두어 번 흘렀다.금손의 딸은  두 번째
의 대면이었다.그러나 전하의 눈에 비쳐지는 금손의  딸은 첫째 번 인상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상궁은 다음에 윤지임의 딸을 어전으로 인도했다.역시 먼저 대비께 뵈입
고 다음에 전하께 큰절을 드렸다.
  “윤지임의 딸이올시다.”
  상궁이 뒤에서 큰절을 드리는 지임의 딸을 거들면서 어전을 향하여 소근
거린다.얼굴에 총명한 기운이 밝은 창마냥 흘렀다.살빛이  투명하도록 희었
다.눈은 별빛마냥 초롱거렸다.어깨가 날씬했다.귀뿌리는  도독하고 코는 오
똑해서 빚어서 얹은 듯 예뻤다.얼굴이 위아래가  출무성해서 한 곳 빈데가 
없는 상그러운 자태였다.윤금손의 딸은 투실투실한 면화  송이에 비한다면,
윤지임의 딸은 백옥병에 꽂아 놓은 백배화 한 가지랄까.
  전하의 눈에 비쳐지는 윤지임의 딸은 여태 보던 좌우의 후궁 팔선녀들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더구나 전하는 어느덧 삼십이 되었고,지임의 딸은  묘령인 열 일곱 살이
었다.
  삼십에 가까운 팔선녀 후궁들은 제각기 제대로의 독특한 운을 풍기는 멋
이 있지만,열 일곱 살 먹은 윤지임의 딸마냥 새롭고 신선할 수는 없었다.전
하의 눈이 환했다.마치 오월 달 석류꽃을 바라보는 듯 정신기가 번쩍 들었
다.
  후궁들,박빈,홍빈 등 삼십대의 여성들은 윤지임의 딸에  비한다면 어느덧 
벌서 녹이 슬어가고 이끼가 앉기 시작했다.지임의 딸은 절을 마친 뒤에 살
몃 뒷걸음으로 걸어 장지  밖으로 물러선다.윤임의 아내가  날마다 습의를 
시켜 주고 늙은 상궁이 나갈 때마다 주의를 주었던 세련되고  닦여진 걸음
씨였다.울연하고도 그윽하고,안존하면서 한가로운 걸음씨였다.
  높고 귀해 뵈는 품 있는 걸음걸이다.붉은  대화단 치맛자락 밑으로 하이
얀 버선코가 나올 듯 말 듯 걸음을 곱게 옮겼다.
  전하의 마음은 윤지임의 달한테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장지문이 스르르 닫혀지고,상궁은 두 처녀를 별실로 인도한 뒤에 대례복
을 벗겼다.민 모습으로 다시 한 번 대비와 전하께 간택을 보이려는 것이다.
  화관은 내려지고 당의는 벗겨졌다.노랑 삼회장 저고리와 연두 삼회장 저
고리를 입은 두 처녀의  모습으로 변했다.윤지임의 딸의  검은 머리채에서 
도투락 댕기가 떼어지고 붉은 제비부리  댕기가 풍정 있게 상궁의  손으로 
고를 내고 매듭을 지어 떨어졌다.
  장지문이 다시 상궁의 손으로 소리 없이 열려지면서 전하와 대비의 눈에
는 민머리로 평복을 차린 두 처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비쳐졌다.
  윤지임의 딸의 모습이 봉황새라면 윤금손의 딸의 모습은  닭밖에는 되지 
않았다.
  윤지임의 딸의 검은 머리채가 치렁치렁 발꿈치에 닿았다.검은 머리는 마
치 굽이치는 물결 같았다.대례복  속에 감추어졌던 처녀의  손길은 이번엔 
민 옷이라 곱게 드러났다.지임의 딸의 손길은 분을  따 놓은 듯 희고 고운 
데다가,판부사 대감 댁에서 보낸 톡트일 듯한 누른 금패 쌍 가락지가 희고 
고운 지임의 딸의 무명지에 끼여져서 찬란하고 휘황한 빛이 희고 부드러운 
손길을 더한층 화사하게 만들었다.
  전하의 눈은 완전히 윤지임의 딸의 모습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가례
  이윽고 상궁은 두 처녀를 데리고 어전을 물러나왔다.
  상궁이 물러난 뒤에 대비는 전하한테 물었다.
  “두 처녀 중에 상감은 누구를 간택하려 하오?”
  얼굴빛을 화하게 하여 물었다.
  “윤지임의 딸로 정할까 하옵니다.”
  전하는 단번에 윤지임의 딸을 주장했다.
  대비도 윤지임의 딸이 윤금손의 딸보다 훨씬 교양이 있고 세련되어 보이
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그러나 대비는 윤지임의 딸의 아름다운 속에 결
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얼굴에는 훈훈한 부덕이 없어 보였다.성미가 무척 
급하리라 생각했다.윤금손의 딸은 어리석은 듯하나 부덕이 있어 보이고 성
정도 부드러울 듯했다.다만 흠이라면 그녀의 얼굴이 뛰어나게 곱지 못하고 
촌스러운 점뿐이었다.뿐만 아니라 윤지임의 딸의 눈은 너무 밝고 초롱거려
서 과붓살이 약간 비쳤다.대비는 말은 아니  냈으나 마음속으로 이것을 꺼
렸다.그러나 대비는 전하와 지임의 딸이 나이를 비교해 보았다.전하는 삼십
이요 지임의 딸은 열 일곱  살이었다.열 네 살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결국 
아들인 전하가 이 젊은 왕비와 해로를 하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다.대비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그러나 한 마디 말을 해보고는 싶었다.
  “윤금손의 딸은 얼굴은 예쁘지 못하지만 부덕은 있어 보이는 구먼.어떤
가,아주 생각이 없는가?”
  “얼굴이 문제가 아니올시다.자식을 난다면 역시  총명해야만 할 것입니
다.윤지임의 딸로 허락을 내려 줍시오.”
  대비에겐 아드님이라 하나 소중한  전하였다.여러 해 동안  왕비가 없이 
지내 온 것이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전하의 마음대로 윤지임의 딸로 비점을 찍도록 하지.”
  대비와 전하의 의논은 완전히 합하게 되었다.
  이윽고 정원에서는 승지가 어전으로 불려 들어왔다.
  “별좌 윤지임의 딸로 대혼을 정하기로 했다.공식으로 윤지임의 집에 알
려 기별하게 하고 친영에 대한 가례도감을 앉히게 해라.”
  승지가 물러간 뒤에 전하는 다시 예조판서를 불러 전교를 내렸다.
  “대비전의 의지에 의하여 윤지임의 딸로  왕비를 책봉하기로 정했노라.
윤지임의 집은 여러 대 공경대부의 집안으로 높은 덕행이 있어  국혼을 하
기에 가합할 분 아니라 나의 뜻도 또한 그렇게 결정했으니  길일을 택하여 
친영례를 갖추게 하라.”
  예조판서는 전교를 받들고 물러나고 승지는 영을 받들어  윤지임 집으로 
말을 달려 교지를 내렸다.
  별좌 윤지임은 황망히 대문을 열어 칙령을  받았다.이 소식은 단번에 판
부사 윤임의 집과 판서 김안로의 집으로  전해지고,윤지임의 입은 다물 사
이가 없었다.
  윤임,김안로는 윤지임의 집으로 치하를 하러 가고 대궐 안에는 가례도감
이 앉혀졌다.
  이윽고 윤지임의 딸은 대평관으로 궁녀들이  모시어 거처케 하였다.장차 
왕비가 될 분을 여염에 있게 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윤지임의 딸은 백인의 말대로 왕비의 위에 오르게 되고 윤지임은 금시발
복이 되어 초초한 양반으로 일약 부원군이 되게 되었다.
  삼월 달에 결정된 혼인은 칠월 달에 가서 가례를 거행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 옛 풍속에 남자는 여자의 집으로 장가를 들어가는  풍속이 있
었다.색시를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색시가 있는  처가 집으로 사위가 들
어가는 것이 상례였다.이것은 데릴사위의 풍속으로  모계 시대의 혼인하는 
유풍을 그대로 답습해 내려온 것이었다.남자와 여자가 약혼이 되어 혼례를 
거행하게 되면,남자는 처가에 살면서 아들과 딸을  낳은 뒤에야 비로소 며
느리가 시가로 와서 시부모를 뵈옵는 것이 전례가 되고,이러하므로 외손자
들은 외가에서 외조부 밑에서 응석을 부리면서 자라나서 정말 할아비와 할
미는 도리어 알지 못하게끔 되어 버렸던 것이다.이 풍속은 삼국시대서부터 
고려까지 내려왔고 국 초에도 이  풍속에 젖어서 민간에서는 으레  사위가 
처가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  나라의 문화를 높이 이끌어  놓은 가장 밝은 
임금의 한 분인 세종대왕은 등극한 지 십 년째 되던 해에 교서를 내렸다.
  “혼례라는 것은 삼강이 근본이 되는 것이고,정도의  시작인 것이다.이러
므로 성인은 혼례를 소중하게 생각해서 친영이라는 의범을  제정해 놓았건
만,우리 나라 풍속에는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를 들어가는 풍속이 오
랫동안 전해져서 이 풍속을 졸연히 고치기 어려웁다.이제부터는 왕자나 왕
녀의 혼인을 옛 성인이 정하신 친영례를 치러서 솔선하여 백성들의 모범을 
보이도록 하라.”
  하는 전교를 내리고,한편으로 <삼강행실>이라는  책을 문신들에게 편집 
시켜서 중 외에 널리 반포한 일이 있었다.그러나 삼국과 고려시대 수 천년
을 내려오는 혼인 풍습은 세종의 말씀대로 얼른 고쳐지지 아니했다.민간에
서는 의연히 남자가 처가 집으로 장가를 들어갔던 것이다.
  친영례를 가장 주장하는 사람들은 삼강오륜으로 기강을 세우자는 유림들
이었다.국혼이 정해지자 유림 조광조는 경연 자리에서 전하에게 말씀을 아
뢰었다.
  “혼인은 인륜의 대사이온지라,옛적에 육례를 갖추어  친영하는 법이 있
사오나 우리 나라 풍속에는 이 예를 행하지 못하였고, 밝으신 임금 세종대
왕께옵서는 왕자 대군이라도 우선 먼저 친영례를 거행하여  백성의 모범을 
보이라 하였으나 역시 얼른 행해지지  아니합니다.전하께서는 이번 대혼에 
반드시 친영례의 절차를 밟으시어 친히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시도록 하
시옵소서.”
  전하는 세종대왕을 들어 말씀을 올리는  조광조의 말을 듣자,마음속으로 
자기도 어진 임금이 되고 싶었다.
  “세종대왕께서 교서를 내리신 뒤에 혼인 대 이 예법을 실천하신 임금이 
몇 분이나 되는가?”
  “실록과 모든 문헌을 참고했사오나,아직 우리  나라에서 친영례를 거행
하신 일은 없사옵니다.전하께서는 삼강오륜의 근본인  부부의 체통을 밝히
시는 큰 뜻으로 이 친영례를 단행하옵신다면 만고에 법이 세어질 것이옵니
다.”
  전하는 만고에 법이 세워진다는 바람에 마음이 더욱 흡족했다.
  “친영례를 거행한다면 어떠한 절차를 차리게 되는 것인가?”
  “먼저 왕비가 되시는 댁으로 납채,문명,납길,납징,청기,다섯 가지 예의를 
치르시고 맨 나중엔 친히 거동을 하시어 왕비를 맞아들이는 의식을 친영이
라 하시는 것이옵니다.이것을 합해서 육례라 하옵니다.”
  전하는 기쁘게 조광조의 말을 듣기로 했다.
  “성군이셨던 세정대왕께서 행하려 하셨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셨던 일을 
가인이 처음 시작해 보리라.”
  조광조는 전하의 쾌하신 허락을 듣자 성군을 만난 듯 기뻤다.
  조광조의 말씀을 옳게 생각한 전하는 정원을 통하여 전교를 내렸다.
  “혼인 예법이 정중한 연후에 모든 일이 하늘 뜻에 배합되는  것이니 예
관은 친영하는 예법을 마련하여 대평관을 중수하고 과인은 면복을 입은 뒤
에 왕비를 맞으리라.”
  전하의 전교가 한번 조정에 내리니 남곤,심정들은 이것이 유림 조광조의 
진언으로 된 것을 알고 반대하는 의견을 올렸다.
  “전하께서 친히 나가시어 왕비를 맞아들이는 일은 우리 나라 예법인 오
례의에도 없는 일이옵니다.어찌 임금의 지극히 귀하신 몸으로 누추한 여염
집으로 나가시어 비를 맞으시오리까?가하지 못한 일이옵니다.”
  하고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전하는 넌지시 조광조를 경연에 불러 남곤,
심정들의 반대하는 상소를 보이니 조광조는 즉석에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논박했다.
  “노애공이 왕비를 맞을 때 공자께서 면복을 갖추고 왕비를 맞으라 하니 
애공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물었습니다.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두 
성이 좋게 합하여 선성의 뒤를 이어 하늘과 땅과 종묘와 사직의 주인이 되
는 것이 혼례이온데 어찌하여 면복을 입고 친히 맞는 예절이  과하다 하십
니까?친영하는 예법은 정례라,정례를 폐할 수는 없소이다.배필의 소중한 것
을 신민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친영례를 단행하시옵소서’하고  공자께서는 
밝히신 일이 있습니다.이  뜻을 조정에 공포하시옵소서.그리하옵고  주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천자는 반드시 왕후의 집으로  친임할 것이 아니
라 왕후의 집 옆에 한 곳을 지어 놓고 이곳에서 친영례를 행하는  일이 옳
다’했으니,지금 전하께서 대평관으로 납시어 왕후를 맞아 들이는 것은 공
사의 배필을 소중하게 하시는 뜻에 배합될 뿐 아니라 주자가  말씀한 처자
가 옆에 따로이 한 집을 지어 놓고 왕후를 맞는다는 말씀에도 부합이 되오
니 이 뜻을 조정에 알려 주시옵소서.”
  임금은 조광조의 말대로 승지에게 전교를 써서 조정에 반포하게 했다.
  그러나 후궁을 배경으로 한 남곤과  심정의 일당은 기어이 친영례를  못 
하도록 우겨댔다.
  “선 왕조에 없던 일을 전하는 단행하려 하십니까?이것은 오례의에도 없
는 일이옵니다.”
  하고 불가하다고 고집을 다시 세웠다.조광조는  친영례를 행해야만 비로
소 이 나라 유교의 권위가 서고 공자와 주자가 말씀하는  삼강오륜의 근본
을 세우는 길이라 생각했다.만약 이 예법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 나라의 문
명은 의연히 미개한 곳에 두는 것이라 생각했다.
  “세종대왕께서는 하시라고 주장하신 일이옵니다.어찌 선왕조에 없던 일
이라 합니까?전하께서는 이번 일을  단행하셔야만 밝은 임금이 되시고  이 
땅의 문화 수준을 몸소 높이시어 실천  중행하시는 일이 되옵니다.만약 이 
일을 단행하시지 못한다면 이 나라의 삼강오륜의 대법칙은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옵니다.”
  전하는 첫째로 성군이란 칭호를 들어 보고 싶고,들째로 장엄한 의식으로 
호화롭게 왕비를 맞고 싶었다.
   “조종조 예법에 있는 일을 과인이 안 한다면 선조에 대하여 죄가 되지
만,없는 정례를 과인이 새로이 행하여 신민에게  모범을 보인다면 좋지 아
니한가.앞으로 정례를 단행키로 하라.”
  전하는 단호한 칙령을 내렸다.
  전하는 임금이 된 지 십년 정축 칠월에 면류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어 황
금 연에 오른 뒤에 만조백관과 모든 의장을 거느려 남대문  안 대평관으로 
왕비를 맞으러 향하니,면류관을 쓴 면복은 제왕의 제일가는 대례복이요 모
든 의장은 면복에 해당하는 화려 장엄한 절차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대평관 안에서는 윤지임의 딸이 금은주옥으로 꾸민  눈이 부신 
칠보화관에 용봉을 수놓은 붉은 활옷으로 성장을 차려 대왕의 친영례를 기
다리고 있었다.
  이 천만고에 없는 제왕의 친영례는 거리거리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의 
눈을 현란케 하고 감탄케 하였다.
  전하의 친영례 거동은 행렬이 십 리에  뻗쳤다.대궐서부터 남대문 안 대
평관까지 사이에는 황토를  뿌려 길을 정하게  치워 놓고,한성판윤이 말을 
달려 앞을 인도했다.금부은월의  은도끼 금도끼와  기치장검의 어마어마한 
의장은 공중에 펄럭여 하늘을 가릴 듯하고,어전취타  누른 옷에 초립을 쓴 
조라치들의 군악 소리는 태평한 기상을 아뢰는 듯했다.전하의 연과 어승마
가 지나간 뒤에 만조백관은 차례를 따라  행렬을 지어 나가는데,이 중에는 
내일의 큰 권세를 잡기 위하여 오늘의 대혼이 이루어지도록 심혈을 기울여 
짜낸 판돈령부사 윤임과 예조판서 김안로의 웃음을 머금은  얼굴도 보이고 
이 나라 유교의 강상을 세우기 위하여 기어코 친영례를 거행하라고 주장한 
유림의 대표 조광조가 사모 품대로 남여를 타고 따르는 모습도 보였다.
  전하가 대평관에 당도하여 전안을 드려 천지신명께 맹세한  뒤에 초례청
에 올라 왕비와 교배를 했다.궁녀들은 왕비를 옹위하여 먼저 전하께 두 번 
절을 올리니 전하는 한 번 답례를 하여 반복하기 세 번 한 뒤에 술을 나누
어 삼삼 구도의 합환주를 나눈 뒤에  친영례를 마치고,전하는 왕비와 함께 
대궐로 돌아오니 돌아오는 행차에는 왕비의 행차까지 겹쳐  져서 청사초롱
과 황사초롱은 왕비가 탄 황금 등을  휩싸서 옹위했고,수백 궁녀들은 부용
향을 손에 들어 피우면서 성장을 입어 쌍쌍이 앞에서 인도하니  전에 없던 
이번 친영례는 일대의 장관이었다.
  “새 왕비는 열 일곱 살이라지.”
  “전하께서는 삼십이시구.”
  “퍽이나 귀염을 받을 거야.”
  “새 왕비의 사주팔자는 얼마나 좋길래 저렇도록 호강을 하나.”
  거리거리 남녀노소 인민들은 이렇게 부러워하고 감탄했다.
  그러나 한 모퉁이에서는,
  “가엾이 쫓겨난 신비께서 대궐로 다시 들어가시기는 영영  희망이 없게 
되었네.”
  “한동안은 복위 시킨다고 조정에서 떠들썩하더니,인제는 감감 소식조차 
듣지 못하겠어.”
  “전하도 인정 없는 분이란 말야.인제는 공신들도 죽었으니 슬며시 복위
를 시켜서 모셔 들일 게지 또다시 새 왕비를 모실 것은 무엇 있나?”
  :글게 열 길 물 속은 알 수 있지만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지 아
니한가?조강지처를 차마 어떻게 내쫓느냐고 공신들한테 울며불며 말씀했다
는 전하가,이제는 신비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아니하고 새로이 왕비를 또 간
택해 뽑았으니 가엾은 일이 아니겠소?”
  “아들,딸 하나 낳아 보지 못한 채,그래도 전하만 바라 뵙고 한평생을 독
수공방을 해 보내니 기막힌 일이 아닌가.”
  “올해 나이도 많지 않으시겠다?”
  “전하보다 한 살이 위니까,서른 한 살이지.”
  “아까운 청춘이 그대로 썩는구나.”
  “사람 팔자란 참으로 알 수 없다.신정승의  딸로서 누가 그분의 팔자가 
그처럼 기구하게 될 줄 알았던가?”
  인산인해를 이룬 구경꾼 속에는,새로운 국혼으로 인하여 영영 다시는 희
망이 끊어져 버린 폐비 신씨를 위하여 탄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거둥 행렬이 대궐로 들어간 뒤에 왕비는 새로 중창을 해서  아름답게 꾸
며 논 내전으로 들어가고,전하는 외전에서 면류관 망룡의를 진사립과 창의
로 갈아입었다.
  이날 밤에 내전에는 새 왕비를 모시어 아름다운 화촉이 밝혀졌는데,늙은 
상궁은 외전으로 나가서  대왕전하를 모셔  들였다.대왕전하는 무예청들이 
멘 옥교를 타고,열 두 쌍의 청사초롱을 든 궁녀들은 앞뒤로 옥교를 휩싸서 
모시었다.
  대왕이 내전 전각에 올라 새 왕비의  처소인 동온돌로 들어가니,열 일곱 
살 먹은 왕비는 화관 족두리로 상궁한테 부액이 되어 한삼 속에 손을 늘이
고 대왕전하를 맞아들였다.
  촛불 아래 단정히 서서 대왕을 맞는 왕비의 태깔은 전하의  눈에 그림인 
듯 예쁘게 보였다.
  간택 때 바라볼 때보다도 더 조촐해 보였고 아까 대례복으로 대평관에서 
교배를 드릴 때보다도 더한층 아름답게 보였다.
  삼십 된 전하는 열 일곱 살 된 소녀를 귀엽게 볼 낫세였다.
  그림 같은 왕비를 바라보는 전하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일 사이 없었다.
  “대왕마마,앉으십시오.”
  “비전하께서도 인제는 앉으십시오.”
  늙은 상궁은 신랑 신부인 왕과 왕비를 마주 앉혔다.
  “대왕마마,새 비마마께서는 끔찍하신 효녀셨답니다.그리고 학식도  많으
시죠.소학,춘추,열녀전을 빠짐없이 읽으셨고,친정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는 나이 겨우 열 두 살밖에  아니 되셨건만 어린 상제의 몸으로  조상식을 
꼭 받드셨답니다.오라버님들이 철없이 웃고 장난들을 치시니 비마마께서는 
어머님은 아니 계신데 무엇이 좋아서  상제 몸으로 웃고 장난들을  치느냐 
라고 손위 오라버님들을 나무라신 일까지 있답니다.이것은 쇤네가 처음 간
선하려 뵈러 나갔을 때 친정댁 하인들한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하늘이 내
신 큰 분의 마음씨는 어려서부터  다르시옵니다.전하께옵서도 미리 아시고 
비마마의 어지신 것을 통찰하옵소서.”
  늙은 상궁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새 왕비의 칭찬을 했다.
  전하는 늙은 상궁의 말을 듣자  어린 왕비가 더한층 대견하도록  귀엽게 
보였다.
  “그런 일이 있었더냐?내일 내가 사신한테  말을 해서,새 왕비의 아름다
운 덕을 사기에 써서 칭송하라 이르리라.”
  상궁은 물러가고 새로운 신방에는 젊은 왕과 어린 왕비 단  둘만이 남아 
있었다.
  혼자서 아름다운 어린 왕비를 바라보는 전하의 마음은 더 한층 기뻤다.
  “온종일 족두리를 쓰고 있었으니 머리가  괴로우리다.족두리를 내려 주
리까?”
  삼십 먹은 노신랑은 부끄러울 리가 없었다.
  영리한 어린 새 비는 미소를 풍기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전하의 어수가 족두리를 벗기다가 손이 잘못 가서 비의 황금  비녀가 댕
그렁 소리를 내며 방바닥으로 떨어진다.젊은 비는  소리 없이 금비녀를 집
어 섬섬옥수로 고요히 머리에 꽂는다.침착한 행동이었다.지밀  창문 밖에서
는 팔선녀 후궁들의 질투의 눈길이 문틈마다 새파랗게 타오른다.
  의젓한 경빈 박씨,복성군 미의  어머니가 그  탐스러운 살갗을 생초깨끼 
겹저고리에 은은히 비치면서 허리를 굽혀 지밀 문틈으로 대왕마마와 새 비
마마의 동정을 보살핀다.
  흑공단 같은 검은 머리쪽엔 비취 옥잠이 풍정있게 꽂혀졌다.신비를 내쫓
은 뒤에 왕이 첫번째로 만났던  박원종의 양딸이었다.원자보다도 복성군을 
먼저 낳았지만 후궁인 때문에 아들은 군밖에  되지 못했다.경빈 박씨는 상
감과 동갑인 삼십이었다.삼십 된 박씨의 아름다운 육체미는 후궁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도 더한층  풍성하고 싱그러웠다.어제까지도  가장 전하의 
굄을 독점하다시피 많이 받았다는 경빈 박씨였다.이 경빈 박씨는 장경왕후
인 원자의 어마마가 돌아간 뒤에 한때는 곧 오늘 새 비가 앉은  이 지존의 
자리,왕비로 오르게 된다는 소문이 안팎에 높았던  인물이다.전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고,공신들의 뒤를 받드는 남곤과  심정들이 경빈 박씨를 왕
후로 승차시켜서 자기들의 정권을 다시 더 한 번 태산반석으로  만들어 놓
자는 계획으로 밀었던 것이다.그러나 선비들은 신비  복위 문제를 들고 일
어나서 경빈 박씨를 왕후로 승차시키려던 일은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이 
틈을 타서 윤임과 김안로는 손을 잡고 윤지임의 딸인 새 비를 밀어서 오늘 
이 간례를 치르게 만들었다.
  지밀 안 협실 문틈으로 대왕마마와 새 비의 동정을 보살피는  경빈 박씨
의 눈은 평상시에는 어글어글하고 다정하고 착하던 눈이었는데,오늘 이 자
리에서는 파랗고 노란 불이 독기를 피우며  연기를 뿜었다.입술이 까닭 없
이 씰쭉해지면서 비뚤어진다.그리고 이내 마음속으로,
  ‘깜찍하게도 저 어린 것이 감히 내 자리를 뺏는구나.’
  하고 창을 향하여 가만히 한숨을 쉰다.지금 백지  한 장을 격한 하고 창 
안에서는 어제까지도 자기를 애무해 주던 전하의 부드러운 손길이 지금 무
어라고 도란거리면서 새 비의  화관 족두리를 벗겨  주는 것이었다.전하가 
손을 잘못 놀려서 새 비의 금비녀가 댕그렁 소리를 내면서 떨어진다.
  ‘에구머니나,잘코사니.’
  첫날밤에 비녀가 떨어지면 좋지 않다는 속담을 경빈 박씨는 귀에 익도록 
들었다.들었을 뿐만  아니었다.자기는 왕비는  아니지만,후궁으로 첫날밤을 
당했을 때 임금이 화관을 손수 벗기는데  금비녀가 떨어진 일은 없었다.자
기는 아직 왕비가 못 됐지만 앞의  복력은 그래도 새 비보다 나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에구머니나,잘코사니’ 소리를 속살거려 보는  것이었다.그러
나 다음 순간,그녀는 어린  새 왕비가 당황하지 않고  얼른 떨어진 비녀를 
손수 주워서 고요히 미소를 풍기면서  태연히 뒷손질을 해서 꽂는  모습을 
바라보자,
  ‘깜찍하구나,사람깨나 궂히겠다.’
  하고 경빈 박씨는 마음속으로 속살거리면서  차마 창 앞을 떠나지  못한
다.아무리 진중하다 하나 사랑을 뺏기는 이 기막힌 꼴 앞에는 질투의 본능
을 어찌하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또 한방의 지밀의 협실,이곳에는 희빈 홍씨의 모습이 보인다.공신 홍경주
의 딸로서 신비를 폐위 시킨 뒤에 경빈 박씨와 함께 후궁으로 들어가서 팔
선녀 중에 첫손에 꼽는  미인이었다.몸은 약한 듯하건만  아기집이 좋아서 
아들만 쑥쑥 뽑아 놓는 전하의 사랑하는  미인이었다.벌써 두 아들의 어머
니가 되었다.큰아들이 금원군 영이요 둘째 아들이 봉성군 원이다.그러나 살
결이 곱고 애잔하게 생겨서 두 아들을 난 어머니 같지는 않았다.한산 세모
시 박아 지은 깨끼 적삼을 풀기를 약간  먹여서 싹 다려 입고,곱게 빗질한 
알맞은 쪽에 검붉은 자주빛 댕기를 풍정 있게 물려서 백옥잠 흰 비녀를 슬
몃 물려 꽂았다.
  눈같이 흰 깨끼 적삼,예쁘게 돌린 도련이 도독한 젖가슴 앞을 스쳐 아름
다운 곡선미를 날리는 아래로는 이 나라의 하늘빛보다도 더 푸른  한산 세
모시 치맛자락이 옥류천 물빛으로 주름을 지어 청초하게 흘렀다.
  곱게 틀어 올린 공단결 같은 머리쪽에 자주 댕기를 물려서  백옥 비녀를 
꽂은 위에 잠자리 날개 같은 한산 모시 깨끼 적삼을 입고 푸른  치마를 늘
인 모습은 얼굴이 박색이라도 고와 보일 텐데,고운 눈매,흰 귓불,가만한 웃
음을 항상 풍기는 듯한 아름다운  입모습으로 밤이나 낮이나 전하의  굄을 
받았던 홍빈이었다.새색시보다도 더 아름다워 보였다.
  홍빈은 날씬한 어깨를 펴서 백학이 활개를 펴고 선 듯한  자세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협실 창문 틈을 빠끔히 들여 다 본다.
  전하는 방금 자리에 앉고,늙은 상궁은 새 비를 전하 앞에 앉히는 중이었
다.상궁이 지껄였다.
  “대왕마마,새 비마마께서는 끔찍한 효녀셨답니다.그리고 학식도  많으시
죠.소학,춘추,열녀전을 빠짐없이 읽으셨고,친정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나이 겨우 열 두 살밖에 아니 되셨건만 어리신 상제의 몸으로 조상식을 꼭 
받드셨답니다.”
  상궁의 지껄이는 소리를 듣자,그 어진 희빈  홍씨의 눈매는 삽시간에 마
귀가 흘기는 눈으로 흉하도록 변했다.누가 옆에서  보는 이가 있다면 이것
이 어질고 어질었던 희빈 홍씨의 눈인가 하고 깜짝 놀라 기절을 할 지경이
었다.
  ‘망할 년!소학,춘추,열녀전은 누구는 못 읽었나.부모가 돌아가서  조상식
을 받든 것도 세상에 없는 자랑거린가.누구는  삼년 괴연에 조상식도 아니 
받들라.’
  희빈 홍씨는 마음속으로 늙은 상궁을 욕을 하면서 미워했다.
  ‘저 년이 윤가네 뇌물을 얼마나 받아 먹구 저 지랄인가.’
  이렇게 생각했을 때 전하의 옥음이 창 틈으로 낭랑히 새어 나왔다.
  “그런 일이 있었더냐?내일 내가 사신한테 말을 해서 새 비의  아름다운 
덕을 사기에 써서 칭송하라 이르리라.”
  이 소리는 아프도록 희빈 홍씨의 귀를 찔렀다.
  ‘저 양반이 첫날밤도 치르기 전에 벌써 저렇게 미쳤나.’
  홍빈은 그 고운 입매를 비쭉 씰그러뜨린다.
  또 한 군데의 협실,이곳에도 후궁들이 발자취를 죽여 가면서 백지 한 장
인 창지 하나를 격하여 대왕과 새  비의 신방 치르는 재미를 엿보고  있었
다.
  창빈 안씨,숙의 이씨,숙의 홍씨,숙원  이씨,숙원 김씨들,모두들 내노라 뽐
내는 공신들이 딸로서 군과 옹주를  낳은 팔선녀들의 하나였다.누구누구를 
가릴 것 없이 열 일곱 살 먹은  새 왕비의 적들이었다.모두들 눈이 실룩해
지고 입이 씰쭉해져서 대왕마마와 새 비마마의 신변을  엿보면서 수군거렸
다.
  대왕전하가 새 비의 당의들을 벗기고 나서 다음 순간 노랑  삼회장 저고
리의 자주 옷고름을 끄르려 할 때였다.나이 어린  새 비는 대왕의 고름 끄
르는 손을 막고 가만히 아뢰었다.
  “전하께옵서는 정중하게 체모를 지니시옵소서.지밀 방 옆에는 군데군데 
협실문이 있사옵니다.전하께옵서는 체통을 지키옵소서.”
  새 비의 나직하게 아뢰는 말씀을 들은 전하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전하는 친히 일어나 백자동 수병풍을 어수로 둘러쳐 협실문을 막았다.
  ‘?깜찍하다.’
  하는 소리가 팔선녀 입 속에서 가만히 일어난다.
  이튿날 새 비는 상궁 이하 수십 명 궁녀들에게 옹위되어  대비전에 올라 
대비께 새로이 왕비가 되었다는 조견례를 마친 뒤에,대비가 내리시는 사찬
을 받고 본궁으로 돌아와 잠깐 쉰  후 선정전으로 나와 용상 위에  단정히 
앉으시니,일품 이하 후궁과 내인  수백 명,내명부와 정승,판서,참판,참의 등
의 부인들인 외명부의 치하를 받으려는 것이었다.
  선정전 넓고 넓은 뜰 앞은 울긋불긋 화관과 족두리며 원삼과  활옷을 입
은 내명부,외명부들의 꽃밭으로 변했다.지분과 연지 향냄새는  전각에 일고 
맑은 아악 소리는 반공에 사무쳐서 청아했다.
  이제 첫날밤에 대왕마마와 세 비의 재미를 보는 신방 협실에서  푸른 불
을 뿜어 입을 비쭉거리던  경빈 박씨,희빈 홍씨,창빈  안씨,숙의 이씨 등은 
내노라고 뽐내면서 대왕의 총애를 한 몸에 간직했던 팔선녀들 일류 후궁들
도,조체 앞에는 어찌하는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열 일곱 살밖에 아니 된 깜찍스러운 새 비였으나  이제는 상감의 
정위의 배필인 정정당당한 국모였다.아무리 마음속으로  아니꼬웁지만,능소
능대한 삼십대의 후궁들은 열자 소리를 면치 못한 새 왕비 앞에 네  번 절
하여 조하를 올리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월대 위에서 제조상궁의 국,궁,배,하,망 소리를 부르는 군호에  따라 경빈 
박씨,희빈 홍씨,이하 내명부와 윤임의 아낙이며 김안로의 아내들,기라 화려
한 비단 대례복을 입은 내외명부들은 일제히 절을 올려 천세를  불러 하례
를 올린다.엄숙한 의식이었다.이곳에서는  입을 비쭉거리고 눈을  흘겨보는 
팔선녀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인정전에서는 대왕전하가 면류관,망룡의로  금관홍포의 대례복
을 입은 만조 백관들의 조하를 받아 건곤의 위가 다시 정해진 것을 축하했
다.
  의식이 끝난 다음 왕은 사관을 불렀다.
  “새 비의 덕행이 어릴 때부터 갸륵하다 하니 사관은 상궁한테  물어 이 
일을 사기에 기록하게 하라.”
  “삼가 영을 받들어 거행하겠사옵니다.”
  이날 실록을 맡아 쓰는 사관은 임금의 명을 받들어 상궁에게  비의 어렸
을 때의 덕행을 물어 본 뒤에 이렇게 썼다.
  “정축 년 칠월 계사일에 임금은 면복을 갖추고 대평관에서 왕비를 친영
하다.사신은 기록하노라.비,학식이 있어,일찍 어머니  상울 당했을 때  그의 
오라버니가 항상 장난하고 웃으니,비 책망하여  말하기를 오라버니는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웃고 장난만  하시오 하고 삼년상이 마치도록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깊고 간절하게 하였다.”
  인정전과 선정전의 조하가 끝난 뒤에는 왕과 왕비는 대비를 모시어 진풍
정 큰 잔치를 베풀고 만조백관과 내외 명부에게는 산해진미의 사찬상을 내
렸다.
  군신과 내외명부들은 자리를 달리하여 잔치에 참례하는데,머리에는 어사
화를 꽂고 사찬상에는 상상이 수파련 꽃을  꽂아 눈이 부시도록 화려했다.
화관 족두리에 푸른 옷 붉은 치마를 입은 기생들은 ‘지화자’  노래를 불
러 아름다운 금 술잔에 술을 따르고 아악 소리가 아련히  일어나는 곳에는 
기생들이   몽금척,장춘보연,헌선도,가인전목단,포구락,무고,선유락,관동무,검
무,처용무,춘앵무 등의 춤을 추어 때  가는 줄을 모르고 잔치는 흥이  겨웁
다.
  
    절벽
  서울 장안은 궁중과 시정을 말할 것 없이 새 왕비를 친영하는 일로 한참 
수선거리고 호화로울 때,폐비 신씨는 죽동궁 조그마한  곁방에 비부 한 명
과 시비 한 사람을  거느리고 초솔하게 지내고 있었다.딸  하나 없고 아들 
하나 낳아 보지 못한 묘령 이십으로  폐비가 되어 이제 삼십일 세가  되었
다.
  사람이란 어리석은 물건이었다.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어리석
을 때는 한량없이 어리석은  것이었다.폐비는 공신들의 등살에  아니 쫓길 
수가 없어서 손톱 끝만한 죄도 없이 폐비가 되어 쫓겨나온 뒤에,그래도 일
루의 희망을 붙여서 살아왔다.전하가 공신들한테 강박을 당하여 자기를 내
보낼 때 공신들에게 한 말, ‘조강의 아내를 어떻게 버리란 말이오’ 하던 
그 말씀은 십 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오늘도  귓가에 쟁했다.십여 년 전 일
이었다.신비가 대궐에서,
  “소비는 지금 나가옵니다.내내 만수무강하옵소서.”
  이렇게 마지막 하직을 고했을 때,
  “가서,잘 있으오.”
  전하는 바보모양 한 마디를 겨우 대답하고 맥이 탁 풀려서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 기둥을 껴안아 붙들던 단자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신비가 쫓겨난 지 두어 달 뒤의 일이었다.중국에서는 새로이 왕이 된 전
하께 치하를 드리기 위하여 사신을 보낸  일이 있었다.전하는 중국 황제의 
칙사를 맞으려 하여 친히 모화관까지 마중을 나간 일이 있었다.
  전하는 어구에서 바친 백설 같은 어승마를 타고 만조백관을 거느려 대궐
문 밖으로 나왔다.전하가 말을 타고 궐문 밖으로  나가 보니 불현듯 두 달 
전에 대궐 밖으로 나간 신비 생각이 났다.전하는 신비가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전하는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잠깐이라도 만나 볼 수 있
을까 하고 궁리를 했다.전하는 말 위에서 어자를 향해서 영을 내렸다.
  “얘야,말이 배가 고픈가 보다.말죽을 쑤어  먹어야 할 텐데,말에서 내려 
쉴 마땅한 곳이 없다.신비가 나가 있다는 죽동궁으로 가서 잠깐 쉬자.”
  어자는 대왕의 분부를 받았다.전하는 말을 탄  채 어자의 인도로 신비가 
있는 죽동궁으로 향했다.
  임금이 거둥을 하는데 어자가 행렬 밖으로 빠져 나오니 십리에  뻗친 거
둥 행렬은 별안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별안간 왕의 행차를 맞은 죽동궁은 황황망조했다.
  왕은 말에서 내려서 신비가 있는 곁방살이 처소로 들어갔다.시위 소리가 
일어나고 별감과 무예청은 전하를 부액해서 들어갔다.
  별안간 꿈이었다.시녀가 뛰어나오자 전하의 행차인 것을 알았다.시녀는,
  “곤전마마,상감마마의 행차이시오.”
  하고 방을 향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흰 저고리 베 치마로 소복을 입은 신비가 방문을 가볍게 열고 나타났다.
마루 끝에는 과연 전하가 서 계셨다.
  전하를 바라보는 신비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하고 반가워서 무어라 말
씀을 해야 할지 몰랐다.폐서인이 된 몸으로 어떻게 전하를 대해야 할지 몰
랐다.그대로 섬돌 아래로 내려가서 땅에 부복해 엎드릴 수 밖에 없었다.
  전하는 말이 없이 초라한 평민의 모습인 신비를 바라보았다.역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전하는 신비를 바라보고,
  “당신이 보고 싶어서 왔소.”
  이렇게 말을 붙여 보고 싶었으나 목에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공신들의 
귀에 이 말이 들어갔다가는 큰일이 날 것이었다.
  전하는 방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마루 끝에 걸터앉아 버린다.
  신비의 시녀는 방석이라도 내고 싶었으나 쫓겨난 신비의  초라한 살림이
라 방석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어쩌나,마룻 바닥에 그대로 앉아 계시네.”
  하고 갈팡질팡했다.
  “괜찮다.말이 배가 고파서 가지를 아니한다.죽을 좀 쑤어 말을  먹여 다
오.”
  오래간만에 듣는 전하의 부드러운 음성이었다.부복했던  신비가 벌떡 일
어났다.
  “죽을 곧 쑤어 먹이오리다.”
  신비는 말을 마치자 시녀와 함께 부엌으로 들어가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쌀독에서 쌀을 퍼서 가마솥에 넣고 아궁이에  불을 살라 말죽을 쑤었다.전
하가 타는 어마라 일부러 어백미로 죽을  쑤는 것이었다.마루 끝에 앉아서 
가만히 이 모양을 바라보는 전하는 마음속으로 기뻤다.
  ‘참으로 어진 아내였는데...’
  하고 탄식했다.
  말죽은 순식간에 끓여졌다.더운 김이 무럭무럭 나는 흰 죽이 외양간으로 
나갔다.
  말이 죽을 먹는 동안 전하와 신비는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
었다.더 이상 어떠한 행동이 나올 수 없었다.
  이윽고 말이 먹기를 다했다.
  “말이 죽을 다 먹었사옵니다.”
  어자가 전하께 아뢰었다.어서 가자는 재촉이었다.
  전하는 아무 말 없이 이윽고 신비를 바라보면서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
길을 돌렸다.또 만나자고 말할 수도 없고 다시 보자고  하기도 어려웠다.다
시는 또 만나 볼 기약이 묘연한 때문이다.
  신비는 전하가 타시는 말을 위해서 자기 손으로 말죽을 쑤어  먹인 것으
로 만족했다.참으로 꿈 밖이었다.전하가 말죽을 쑤어 먹이려 자기를 찾으신 
것은 오로지 사랑하는 때문이라 생각했다.억지로 남의 힘으로 내외의 은정
을 끊겼으나 나직도 잊지 않고 생각해  주는 전하의 심정이 고마웠다.신비
는 묵묵히 문설주를 붙들고 서서  발길을 돌이키는 전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또 들러 줍시오.”
  이렇게 당부할 수도 없었다.전하의 모습은 이내 문밖으로 사라졌다.
  이것은 벌써 십이 년 전의 옛일이었다.신비는 자나깨나 마음속으로,
  ‘상감은 나를 잊지 않고 사랑해 주고 계시거니.’
  이렇게 희망을 붙이고 십여 년을 살아왔다.
  공신들은 이 눈치를 채자 부랴부랴 자기 딸들로 팔선녀 후궁들을 들여보
내고 그 속에서 왕비를 골라 장경왕후를 책봉했다.
  그러나 그래도 신비는 죽지 않고 살아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든 나를 다시 찾으시고 또 한 번 만나 보시려니.’
  신비는 이렇게  생각했다.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뜻밖이었다.장경왕후가 
원자를 낳고 산후발한으로 돌아갔다.
  어느 날 비부쟁이는 숨이 턱에 차서 신비의 안채로 뛰어 들어왔다.
  “곤전마마께 아뢰오.국상이 났습니다.”
  신비를 모시고 있는 비부와 시녀들은 폐비된 지가 십년이 넘었건만 신씨
를 대하여 아직도 곤전마마라고 불렀다.
  신비는 국상 소리에 삼척이 소스라쳤다.
  “국상이라니?”
  신비는 깜짝 놀랐다.혹시나 대왕전하께서 신변에 큰 변이 일어나셨나 하
고 가슴이 사뭇 뚝 떨어지면서 뭇 방망이질을 쳤다.
  “새 왕후마마께옵서 원자를 탄생하신 채 산후발한이 일어나셔서 걷잡을 
새 없이 돌아가셨다 하옵니다.”
  신비는 대왕전하가 아니어서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으나,그래도 착하고 
인자한 마음씨였다.첫아들을 낳으면서 곧 돌아간 새 비가 불쌍하다고 생각
했다.
  “나이가 아까웁구나.스물 댓밖에 아니 되었을 텐데.그리고 저 핏덩이 원
자아기씨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신비는 이렇게 언짢아 하고  탄식했다.그러나 새 왕후가  돌아갔다 해서 
자기가 다시 왕비가 되리라 하고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그저 남의 일 같지 
않게 죽은 비와 원자에게 동정이 갈 뿐이었다.
  나라에서는 한참 인신으로 법석을 하는 판이지만 폐비가 있는 곳은 여전
히 쓸쓸하고 선선하고 찬바람이 돌 뿐이었다.
  뜻밖이었다.하루는 먼 촌으로 조카뻘  되는 신사원이 폐비가  들어 있는 
처소로 싱글벙글 웃으면서 찾아  들어왔다.아버지,삼촌,온 집안이 공신들한
테 반정에 찬성하지 아니했다 해서 멸문지화를 당했으니,온 집안은 풍비박
산이 되어 조카라도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다만  친척 뻘 되는 조카가 한 
사람 있었는데 어디 가 있었는지 영영 그림자도 비치지 않던 그 조카가 만
면에 웃음을 띠우고 들어와서,
  “아주머니,인제 운이 터지셨습니다.”
  하고 기뻐했다.
  “폐서인이 되어 들어앉은 사람이 무슨 운이 터질 리가 있겠나?”
  신비는 안존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아니올시다.아주머니께서 대운이 터지셨습니다.그 동안 고생도 많이 하
셨습니다만,인제는 악운이 다  지나가고 밝은 달이  검은 구름장을 헤치고 
나오시는 듯합니다.”
  신비도 운이 좋아진다는데 듣기 싫을 까닭이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알 수가 없는 소릴세.”
  폐비 신씨는 여전히 웃으며 다시 물었다.
  “지금 박상과 김정들 유림에 있는 선비들이 들고일어나서  온통 상소를 
올리고 야단 법석입니다.공신 놈들이 저희들의  부귀영화를 탐내서 아주머
니를 폐위시켰다구 떠들고 일어났습니다.그러하니 이번  국상도 나고 했으
니,다시 왕비를 간택해 구하실 것이 아니라  아주머님을 도루 모셔 들여서 
원자 아기를 아주머님 몫으로 정하고 복위를 시키라고 야단 법석들입니다.
그러하니 인제는 대운이 다시 오신 것이 아닙니까.”
  “아이그머니나,정말 그렇게 되셨으면 작히나 좋을 깝쇼.”
  옆에 모시어 섰던 시녀는 신비보다도 한층 더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
다.자나 깨나 만나 보고 싶던 그리운 상감을  다시 받들게 되나 보다 생각
하니 눈앞에는 따뜻한 봄날 아지랑이가 금방 모락모락 일어나는 듯했다.
  “원자아기씨는 나라의 근본인데 지금  후궁들 중에 남자아기씨를  가진 
사람들이 좀 많은가?원자아기씨를 극력 보호해야지.”
  폐비 신씨는 점잖게 이쯤 대답해 둔다.
  “그러니까 유림에서들은 원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죄 없이  쫓겨나신 아
주머님을 다시 모시자는 것이 아닙니까.”
  조카 신사원은 마음이 푸근해서 대답한다.
  조카 신사원의 말을 듣는 폐비의  시녀는 마음이 조바심이 되도록  좋았
다.
  “그저 축수발원이올시다.오늘 안으로라도 좋으시다는  상감마마의 허락
이 내리시어 내일 안으로 복위를 하시어 대궐로 들어가시도록 하옵시오.”
  시녀는 마음이 간지러운 듯 손을 싹싹 비빈다.
  “곧 허락이 내리실 꺼야.그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박원종과 성희안이 
살아 있을 때도 조강의 아내를 차마 어떻게 버리느냐구 항변까지  하신 일
이 있지 않은가.”
  “그나,그뿐입니까?모화관 거둥 때는 마마가 보구 싶으셔서 일부러 어승
마의 말죽을 먹이러 상감께서 친히 나오시지 않으셨습니까?얼마나 보구 싶
으시기에 말죽을 먹인다구 핑계를 대시고 이곳까지 나오셨겠습니까.”
  시녀는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돌다가 이내 방울을 꼴짝 넘긴다.
  “참,그런 일까지 계셨다지.그러하니 이번에는 유생들의 말씀을 들으셔서 
꼭 아주머님을 도루 모실 가야.유생들의 말씀은 정정당당하거든.”
  이때 신비의 눈에서도 가슴츠레  안개가 돌았다.여태껏 십  년이라는 긴 
세월에 갖은 고생을 다해 가면서  모진 목숨이 무던히 참아왔다고  생각을 
했다.이렇듯 참아 온 지극한 정서에 하느님이  감동해서 유생들의 입을 빌
어 조정 여론을 일으키려는 것이라 생각하니,하늘의 천도는 확실히 무심치
가 않구나 하고 감동도 해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야 작히나 좋을까.’
  신비는 안개 서린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꿈을 꾸었다.
  “걱정 맙시오.아주머님 덕택으로 망했던 신가네가  인제는 다시 일어나
려나 봅니다.아주머님,부디 몸조심하시어 며칠만 더 기다리십쇼.”
  조카 신사원은 이렇게 좋아하면서 신시를 작별하고 나갔던 것이다.
  신비의 노주는 날마다 조정  공론을 수소문했다.그러나 어째  일은 얼른 
순조롭게 진행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공연히  마음은 허공에 뜨고 손에는 
일이 잡히지 아니했다.하루는 조카 사원이 또 찾아왔다.
  “그 놈들 공신 앞잡이 때문에 일이 잘되지 않습니다.남곤,심정이란 놈들
이 경빈 박씨를 중전으로 미느라고 유생들을 반대하여 훼방을 놓고 있습니
다.이 사람이 중전이 되었다가는  원자 꼴이 무에  됩니까?절대로 아니 될 
일이지요.아주머니,그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다.사필귀정이지,별수가 있
습니까?또다시 와서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번엔 조카 사원이 약간 풀이 죽어서 연통만 하고 또 온다고 말한 뒤에 
돌아갔다.신비의 마음은 공연히 어수선하기만 했다.폐비의 노주들은 또다시 
궁금한 며칠을 지냈다.
  폐비의 조카 사원은 또다시 나타났다.얼굴에는 기가  차서 분한 빛이 돌
았다.
  “세상에 이런 법이 있습니까?소위 언관이란 것들이 공신들의 편이 되어 
아주머니를 다시 복위 시키자는 박상과 김정을 귀양  보내도록 만들었습니
다.바른 공론은 땅에 떨어지고 간사한 의논이 머리를 들고 일어났습니다.그
러나 유림에서는 적극 반대올시다.조금만 더 기다리고 계십쇼.”
  조카는 이렇게 말을 하고 돌아갔다.
  조카 신사원은 며칠 뒤에 폐비를 또 찾았다.
  “세상 천하에 악한 놈은 공신 놈들의 앞잡이인 줄만 알았더니 또 한 놈
의 간사한 놈이 생겨났습니다.김안로란 놈이 양시론을  주창했습니다.이 일
도 옳고,저 일도 옳다는 것입니다.말하자면 선비들 측에서 주장하는 아주머
님을 복위 시켜서 원자를 보호하자는 여론도 옳고,이미 나가신 아주머님을 
다시 모셔 들이는 것은 불가하다는 공신들의 앞잡이들의 말도 옳다는 것입
니다.글쎄,이런 놈의 논법이 세상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그 자의 말에 의지
하면 선비들이 주장은  대의 명분상 좋은  것이구,공신들의 앞잡이 주장도 
역시 일리가 있다는 것입니다.바꾸어 말하면,지금 원자는 나중에 들어온 장
경왕후의 소생인데,만약 아주머니께서  들어오셔서 아드님을  낳으시면 이 
아기씨로 원자를 삼아야 하느냐 지금  있는 원자로 후계자를 삼아야  하느
냐,앞으로 장차 일어날 이 문제를 어찌  처리하겠는가,그러하니 아주머님을 
다시 들어오시게 할 수 없다는 이  여론도 옳다는 것입니다.도대체 모두들 
아주머님의 일을 훼방을 놓자는 것입니다.”
  조카 사원은 말을 마치자 길게 한숨을 쉰다.
  “이 사람,언제 내가 다시 왕후가  되어 궁중으로 들어가겠다구 하든가?
공연히들 나를 중간에 넣고 이리저리 시끄럽히지 말라 일르게.세상 만사가 
모두 다 귀찮으이.그저 이대로 조용히 늙다가 나  갈 길로 가면 그만 아닌
가.친정 아버지나 삼촌들의 소생이라구는 나 한 사람뿐일세.비록 여자 하나
나,살아 있는 동안에  원통하게 돌아가신 부모님의  향화나 받들다가 죽겠
네.”
  폐비 신씨는 분함을 못 이겨 씨근거리는 조카를 오히려 위로해 보냈다.
  달포나 지났을까,조카 사원은 또다시 신비를 찾았다.
  “아주머님,거 참 일 묘하게 되어갑니다.돌아간 윤비의  딸하고 김안로의 
아들하고 혼인이 됩니다.원자의 외삼촌  윤임이 중간에 들어  일을 궂기게 
한 것 같습니다.지금 조정에는 유림의 한 패가  있고 공신의 한 패가 있는
데,유림들은 아주머님을 복위 시키려고 하고 공신들은 복성군의 어머니 경
빈 박씨를 밀고 있습니다.그런데 양시론을 주장하던 김안로가 별안간 윤임
과 손을 마주 잡고  국혼을 해서 부마의 아버지가  되었으니,요것 참 일이 
묘하게 되어갑니다.”
  “그 애가 벌써 시집을 가게 되었나?돌아간 윤비가 후궁으로 있을 때 낳
은 딸이니까,벌써 십여 세가 되었겠지?”
  신비는 별로 흥미가 없는 듯 쓸쓸히 대답했다.
  또다시 몇 달이 지나갔다.조카 신사원은 어깨가  축 처져 가지고 들어왔
다.
  “대혼이 돌아간 왕후의 먼 촌  일가 되는 윤지임의 딸한테로  내리기로 
작정이 되었습니다.모두 다 윤임과 김안로의 장난인  듯 합니다.상감께서는 
결국 궁전을 두시기는 두셔야 할 텐데,아주머님을  다시 모시려고 하면 경
빈 박씨를 둘러메고 나오는 공신들의 앞잡이가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경빈 
박씨를 궁전으로 봉한다면 선비들 여론이 가만 있지 아니하니,공신과 유림 
두 군데를 다 무마하느라고 이두 아니요 저두 아닌 윤지임의 딸을 골라 택
한 것 같습니다.이제 만사는 글렀습니다.천만다행하게 하늘이  도우셔서 아
주머니께서 복위가 되신다면 신가집 일문은 다시 회복될 줄 알았더니.”
  말을 마치자 사원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난 뒤에 가을철이  되었다.그러나 한낮은 아직도 볕
이 쨍하게 내리쬐면서 따갑도록 더웠다.볕이 쨍한  장안 거리는 온종일 인
산인해를 이루어 법석거렸다.
  오늘은 대왕마마가 새 비를 맞아들이는  가례날이라는 것이다.가례를 치
르는데,전처럼 새 비가 덩을 타고 스물 네  쌍 하님을 거느려 대궐로 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임금이 유림의 높은 학자  조광조의 말씀을 들어서 유교
의 예법대로 이 나라에 일찍 없었던 친영례를 거행하려 남문  안 대평동에 
있는 대평관으로 새 비를  맞으러 나간다는 것이었다.전대에  없던 새로운 
구경거리라 해서 사람들은 새벽부터 웅성거렸다.
  폐비가 거처하고 있는 죽동궁은 상감이 창덕궁 대궐에서 남대문 안 대평
관으로 거둥 행차를 하는 역로에 있었다.죽동궁이 있는 대사동 어구 앞 좌
우편 큰길에는 거둥 행차를 구경하러 양반의 집에서는 여막을 잡아 앉았고 
노소남녀 백성들은 첩첩이 사람성을 쌓아 소란스러웠다.
  이 소란스런 거리의 소음은 단정히 상 앞에 앉아 화엄경을 읽고 있는 폐
비의 귀에도 들렸다.
  “행길이 왜 저리 새벽부터 소란스러우냐?”
  하얀 소복을 입은 폐비 신씨가 조용히 시녀한테 물었다.
  “오늘은 상감께서 새 비를 맞아들이시는  가례날이랍니다.전에 없던 친
영례를 지내시느라고,상감이 남대문 안 대평관으로 거둥을 하시어 새 비를 
맞아 가지고 대궐로 들어가신다 합니다.이 구경을 하려고 사람들은 새벽부
터 거리로 나와서 야단 법석입니다.아까부터 말씀을 드리려고 생각을 했습
니다마는 마마께서 상심이 되실까 하여 여쭙지를 아니했습니다.”
  시녀는 말을 마치자 목이 메었다.
  “상심이 무슨 상심이냐?상심이 되었던 일은 벌써 십여 년 전에  공신한
테 몰려서 이리로 쫓겨나올 때 상심이 되었지 지금은 상심이 되지 않는다.
그저 서운할 뿐이지.”
  품 높은 폐비의 흰 얼굴에 오히려 미소가 고요히 흘렀다.
  “마마,시앗을 한 분 더 보시는데 어째 상심이 아니 되십니까?소녀 같으
면 살아 있을 것 같지 아니합니다.아마  마마께서는 항상 불경을 읽으셔서 
관음보살 같은 마음이 되셨나 봅니다.”
  시녀도 눈물을 씻고 웃었다.
  “사람이란 마음 하나로 살고 죽고 하는  것이다.마음을 좁게 가지면 상
심이 되고,욕심을 가져야만 시앗 샘도 나는 법이다.그러나 지금  나는 욕심
을 갖지 않았다.욕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보다도 욕심을 가질 수 없는 끊어
진 절벽 위에 오똑이 서서 있다.이 절벽 위에  서서 내가 시앗 샘을 할 수
가 있느냐?”
  폐비 신씨는 고요히 미소를 더 한 번 풍긴다.
  이십대에 백모란 같던 폐비는 삼십대 오늘에 와서는 백의 관음이 현신을 
하고 앉은 듯하다.
  “절벽 위에서 사는 길은 마음을 편안케 하는 한 가지 길밖에 없다.여태
까지 나는 희망에 살았지만 인제부터 나는 마음을 편안케 하고 살고 싶다.
내가 발을 붙이고 있는 곳이 절벽이기에 더욱 나는 마음을 편안케 하고 살
아야 한다.나도 한때는 죽고 싶은 생각도 많이 해보았다.그러나  자살은 죄
악이다.하늘이 주신 몸으로 부모가 주신 몸을  가지고 절벽 위에서 내리뛰
어 자살하기는 싫다.그대로 하늘이 주신 천수를 마치려 한다.원통히 돌아간 
아버님의 명복을 빌고 한때 연을 맺었던 상감의  무영하시기를 축수하면서 
가만히 이 세상을 바라보며 살려 한다.”
  신비는 불경으로 다시 눈을 옮겼다.
  
    밝은 정치
  새 비가 중전의 정위에 오른 뒤에,조정에  세력을 펴놓은 바둑의 분포는 
은은히 세 갈래로 흐리게  되었다.후궁들을 배경으로 하고  공신들의 뒤를 
받치는 남곤과 심정의 한 물결이 흐르고  있고,신라와 고려 때 전성시대를 
이루었던 불교와 신도를 지양하고 나라의 윤리요 국시를 유교로 돌려서 왕
도정치를 달성 시키려 든 선비들의  일파?안당,이장곤,조광조,김안국,김정국 
등 유림의 계통이 있고,새로이 양시론을 주창하여 금시발복이 되어 귀하게 
된 김안로는 윤임과 새 비의 친정인  윤지임의 부자 윤원로,윤원형이 은은
히 한 덩어리로 엉킨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임금의 대혼이 지나가자 정국은 다소 안정이 되었다.
  유림의 대표인 조광조는 약간 가라앉은  정국의 기회를 타서 이  나라의 
정치를 진정한 왕도정치로 지향해 나가고 싶었다.나라의 문명을 높이고 나
라를 부강케 하기 위하여,임금은 밝은 임금이 되게 하고 백성은 어진 사람
이 되게 하자는 것이 그의 한평생의  공부요 포부였던 것이다.그는 불교와 
신도는 사도라 생각하고,고려 이후에 문성공 안유와 정포은 선생이 제창해 
일으킨 유학만을 왕도라 생각했다.
  이때 전하는 새로 왕비를 맞아 친영례를 치른 뒤에 경연자리를  여러 날 
폐지하고 신하들을 만나지 아니했다.정언 조광조는  전하의 마음이 혹시나 
여색으로 기울어질까 하여 감연히 상소를 올린다.
  “전하께서는 이 나라를 잘 다스리시려 하여 뜻을 요순의 지치에 두시고 
옛 법인 친영례를 거행하시니,이 아름다운 의식을  목도해 본 시민들은 모
두 다 손을 들어 감격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그러하오나 대례를 행
하신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사온데 전하께서는 경연 자리를  오래 폐하시
어 신하들을 대해 보지 아니하시고  날마다 간사한 내시와 탕한  후궁들만 
가까이하시어 마음 흔들려서 고혹 되시니 참으로 딱한 일이옵니다.빨리 경
연 자리를 다시 여시어 평일과 같이 신들과 함게 역대제왕의  치락 득실과 
흥망성쇠의 자취를 토론하시도록 하옵소서.만일 전하께서  경연을 다시 결
하신다면 이것은 벌써 전하의 마음이 풀어지신 것이옵니다.”
  조광조의 차가운 상소가 들어가니 전하는 깜짝 놀라 등에 찬  땀이 흘렀
다.
  “어찌 과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어진 신하들을 대하기 싫어서 그랬
음 이리오?내 몸이 조금 분주하여 그랬노라.내일부터는 다시 조석 강을 열
고 어진 신하들의 좋은 말을 들어서 이것을 곧 실천하리라.”
  전하는 시각을 지체치 않고 친필로 비답을 써서 내렸다.
  전하가 이제는 제왕의 자리에 나간 지도 십이 년의 세월이 넘었다.그 동
안 공신들의 추대로 왕이 되어서 까닭  없는 풍파도 많이 겪었다.사람이라
기보다도 허수아비가 되어 까닭 없이 죄없는  아내도 버려 보기도 했고,다
시 왕비를 정했으나 핏덩이 원자를 낳자  불행해 버렸다.왕실은 연거푸 불
행만 했다.이제는 새로이 왕비도 정했고 임금인  자기보다도 더 세상을 흔
천동지하던 공신들도 늙어서 죽어 버렸다.전하는 어린 원자를 잘 보호하면
서 내우외환이 없이 이 나라를 잘 다스려 밝은 임금이 되고 싶었다.
  전하는 생각했다.밝은 임금이 되자면 밝은 정치를 해야 하겠고,밝은 정치
를 하자면 궈문세가인 신하들보다도 신진 기예한 신하들을  가까이해서 나
라의 민정을 보살피고 그들과 함께 옳은 정사를 베풀어야만 할  것이라 생
각했다.전하는 이리하여 나이 젊은 조광조를 경연관으로 뽑았던 것이다.
  다시 열리는 경연 자리에서 조광조는  경학을 강론한 뒤에 어전에  아뢴
다.
  “대왕정하께옵서는 삼대의 지치를 본받으시어 성인의 예법인  친영례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이리하여 우리 나라 문교는  더한층 빛나게 되었습니
다.그러하오나 요사이 소문을 듣자오니 돌아가신  장경왕후의 대상 제삿날 
왕후의 천도를 위하여 나라에서는 승려 수백 명을 대궐 안으로 불러들여서 
재를 올려 불사를 거행한다 하오니,이것은 왕도정치를 하시려는 전하의 근
본 뜻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전하께서는 빨리 이 일을 금지하시옵소서.”
  “이 풍속은 대궐 안에서 예로부터 전해  오는 모양이라.신라와 고려 때
부터 내려오는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이니 경의 말을  들어 이것을 
금하리라.”
  “명복을 빈다는 것은 승려들의 허무맹랑한 말이옵니다.부모가 돌아가면 
마음껏 슬퍼하고 정성껏 제사를 지내는 것만이 우리나라에서  국본으로 정
한 유교의 근본 정신이옵니다.”
  이때 대궐에서는 조광조의 말대로,돌아간 장경왕후 대상제사를 불식으로 
올리려 했다.임금은 내탕금과 밀과 종이와 피륙을 친히 내리시고 팔도대본
산의 수백 승려들은 검은 장삼에 붉은 가사를 메고 범패를 불러 대궐로 들
어오게 하려는 판인데,조광조의 한 마디 말씀은  왕 전하의 왕도정치를 행
해 보려는 마음을 날카롭게 찔러 버렸다.
  전하는 급히 전교를 내렸다.
  “지금 이후로 우리 나라 풍속에 기일 날 승려들이 재를  올리는 불식으
로 지내는 기신재를 폐지하도록 하라.”
  왕의 전교가 한번 내리니 승려들은 머리를  싸 안고 절로 올라가고,대상 
제사는 순전한 유교식으로만 경건히 지내게 되었다.
  이날 조광조에게는 특별히  부제학을 제수한다는  특명이 내렸다.모두들 
조광조의 영예를 부러워했다.경연은 날마다 열리게 되었다.전하는  한 달에 
두어 번 있던 경연자리를 날마다 열라는  전교를 내렸다.젊은 임금은 어진 
신하의 말을 들어 기어코 좋은 정치를 실천해 볼 생각이 울연히 일어났다.
  조광조는 날마다 경연 자리에 나아가 나라를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린 옛 
임금의 사적을 이야기하고 성현이 말씀한 왕도정치를 이  나라에 실천해서 
동양의 성군이 되시라고 간절하게 권했다.
  전하는 조광조보다 여섯 살이 아래였다.젊은 사람은  젊은이가 좋았다.전
하는 조광조의 해박한 학식과 명석한 두뇌와 점잖고 아름다운 풍채를 마음
속으로 존경했다.
  전하는 이 사람을 데리고 한 번  밝은 정치를 해서 이 나라에  제일가는 
성군 소리를 들어 보고 싶었다.
  전하는 밤이 깊도록 조광조를 어전에 불러 놓고 장차 실천할  모든 일을 
의논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을,공자를 모신  성균관 문묘에  신위를 모시어 함께 
제사 지내도록 하시옵소서.아무리 고려를 위한  충신이라 하오나 실상인즉 
우리 나라 선비들도 이 어른을 본 따서 나라에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옵니
다.역대의 조상이 못 하시던 일을 전하께서는  용단을 내리시어 쾌하게 허
락을 내리옵소서.”
  조광조는 감연히 주장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전하의 조상인  태종이 고려의 정권을 뺏으려  했을 
때,태종이 당시의 고려 주석인 포은 선생에게 일을 함께할 것을 더듬어 보
니 포은 선생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는 저 유명한 절개 높은 노래를 불러서 엄연한 신하로서  임금을 치는 
이태조의 불의를 꾸짖다가,태종의  사자인 조영규의  흉악한  철퇴에 맞아 
개성 선죽교에 붉은 피를 뿌려서  불의에 굽히지 않은 정충대절은  누구나 
다 아는 노릇이다.그러나 포은 선생은 고려에는  충신이었으나,정권을 빼앗
은 이씨 왕실로 본다면 눈의 가시였다.포은  선생을 정충대절로 만들어 놓
는다면 이조 왕실은 의롭지 못한 존재가 되니 태조,태종 이후에 여태껏 정
포은 선생을 높이 받들지 못했던 것이다.그러나  포은 정몽주 선생은 문성
공 안유 선생과 함께 고려 때 처음으로  유교를 일으켜 논 부이요,또한 유
교의 삼강오륜의 하나인 군신유의를 몸소 실천해서 순절까지 한 분이었다.
유교를 국시로 하는 이조 왕실에서 포은 선생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유교를 구시로 하는 데 모순을 일으키는 행동이었다.조광조는 유교의 근본 
정신을 뚜렷이 세우기 위하여 감연히 포은 선생을 문묘에 제사  지내서 혈
식천추를 하자 주장했다.
  “좋은 일인 줄은 알지마는 조종조에서 못 하신 일을 내가  어떻게 시작
할 수 있는가.”
  전하는 주저하면서 대답했다.조광조는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다시 아
뢴다.
  “유교가 삼강오륜으로 근본을 삼는 것은 사람들의 윤리를  정하여 인류
의 질서를 유지하자는 데 있습니다.전하께서  충신을 포장하지 아니하신다
면 군신유의라는 것은 말뿐인 군신유의가 됩니다.안  할 말로 전하는 지금 
역적을 장려하실 텝니까,충신을 장려하실 텝니까?전하의 앞에는,고려 때 포
은 선생 같은 분이 계셨듯이 오늘날 이런 신하가 쏟아져 나와야만 이 나라
의 기초는 든든한 반석 위에 놓이리라  생각합니다.아무리 고려를 위한 충
신이라 하나 전하는 이 분을 장려하셔야만 전하 앞에 포은 선생 같은 충신
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전하께서는 적은 혐의를  버리시고 높고 큰 뜻을 
바라보시옵소서.”
  조광조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말에 전하는 한편으로 감동이 되고 한편으
로는 용기를 얻었다.
  “경의 말은 마디마디 옳은 말이다.조종조에서는  이 일을 못하시었으니 
내가 단행해 보리라.”
  조광조는 기뻤다.
  “전하께서는 참으로 명군 이시옵니다.이렇고 나라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경은 나를 더욱 격려하여 바른 일을 행하도록 하라.”
  “우악하옵신 성지를 삼가 받들겠사옵니다.”
  조광조가 물러간 뒤에 전하는 승지를 어전에 불렀다.
  “고려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 선생을,공자님을 모신 성균관 문묘에 종사
케 하라.”
  승지는 전교를 받들어 문묘에 영을 내렸다.성균관 대사성은 포은 선생의 
위패를 모시어 문묘에 배향하는 첫 제사를 올렸다.유림들은 천호만세를 부
르고,고려 충신 포은 선생을 문묘에 모시도록  주창한 조광조의 명성은 더 
한 번 팔도강상을 울렸다.쉬운  듯하나 어려운 일이었다.전하는 일약  밝은 
임금이라는 칭송을 듣고 조광조는 유림의 태산 같은 존재가 되었다.
  국 초 때 일이었다.이태조는 서울에 도읍을  정한 뒤에 삼청동에 소격서
를 두고 삼청성신한테 제사를 지내게 했다.이  풍속은 신선이 도교에서 흘
러 나온 것으로 옥황상제와 태상노군이란 신선을 위하는 곳이었다.
  소격서에서는 소격전과 삼청전과 태을전의 세 전각을 삼청동  안에 드높
게 짓고 우물을 파서 성제 우물이라  이름했다.오늘의 삼청동의 연원은 이
렇게 해서 삼청동이 된 것이다.
  삼청전 전각 안은 옥황상제를  주신으로 하여 태상노군과  보화천존이며 
자동제군과 사해용왕 수부제신에다가 명부십왕등 염라대왕을 제사  지내는 
곳이요,태을전이란 전각은 북두칠성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소격서에서는 관원 이외에 도사들이 있으니 이들은 선도를  공부하는 사
람들이었다.마치 유교를 존숭하는 성균관에 유생들이 있고 불교를 닦고 있
는 절간에 승려가 있듯이,삼청전에는 도사들이  있어서 선도를 공부하면서 
사람들의 명과 복을 빌었다.
  나라에서 왕자나 공주를 낳게 되면 임금은 아들 여러 형제를  두고 복이 
많은 재상을 골라서 삼일 동안 소하고 목욕재계한 뒤에 소요관을  쓴 도사
의 인도로 삼청전,소격전,태을전 세 전각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나라에서 공공연하게 선도를 신앙하니 백성들은 다투어 가면서 삼청동으
로 아들과 딸들의 복을 빌러 갔다.성제우물에는  치성을 드리는 사람이 밤
새도록 끊일 사이가 없었다.조광조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나라 사람들의 교
화도 신앙으로 단일해야 할 텐데 지금 나라 형평으로  본다면 유도,불도,선
도 세 가지 교가 세 갈래를 이루어 백성들을 교도 시키는데 크나큰 지장을 
주고 있는 것이었다.국가에서 유교를 국시로 한  이상 불교와 선교를 인정
해서는 아니 될 것이라 생각했다.조광조는 다시  경연 자리에서 조용히 아
뢰었다.
  “백성들을 교화 시키는 것은 그  나라의 문명의 수준을 올리고  착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올시다.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진 
것은 불교도들의 운영이 그릇되므로 나라가 기울어진 것이옵니다.이러하므
로 태조와 태종께서는 나라를 건국하실 때,불교를 버리고 유교로써 정신을 
지도케 하셨습니다.이제 삼청동에는 소격서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두어 일
월성신을 제사 지내고  복을 비는 풍속이  있으니,이것은 도교의 일종이라 
세상을 고혹 시키고 백성을  속이는 폐풍이옵니다.국시를 유교에  둔 우리 
나라에선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니 전하께서는 단연히  소격서를 폐지하옵소
서.”
  전하는 조광조의 말을 옳게 여겼다.
  “과인도 소격서가 있는 것을 알았으나 미미한 풍속이라  일소에 부치고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아니하였더니,이제 경이  말을 들으니 확실히 문교
에 좋지 못할 것이다.정원에 영을 내려 폐풍을 바로잡게 하리라.”
  전하는 이튿날 입직승지를 어전에 불러 전교를 내렸다.
  “선도가 세상에 있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그러나 유교를 국시
로 하는 이 나라에 소격서라는 관청을 둘  수는 없는 일이다.복을 빌고 제
사 지내는 것은 민간의 자유에 맡기고 소격서라는 관청은 폐지케 하라.”
  승지는 명을 받들어 물러가고 소격서를 폐지한다는 전교는  다음날 조보
에 올랐다.
  유림에서는 다시 조광조의 탁월한 주장을 탄복하고 예찬했다.
  “인제야 조정암이  나와서 우리  나라의 유교를   제자리에 올려놓는구
나.”
  하고 조정암을 칭송했다.정암은 조광조의 호인 것이다.
  조광조는 나라를 잘 다스리자면 좋은 인재를 많이 얻어야 할  것이라 생
각했다.모든 문벌을 타파하고 오직  도학과 경륜이 높은  사람이면 나라에 
천거해 써서 이 나라를 왕성케 하리라 생각했다.그의 머리는 동소문 안 갖
바치의 생각도 떠오르고,중인 의원 안찬의 생각도 났다.이런 이들은 모두다 
양반이 아니고 상놈과 중인들이라 하여 벼슬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조광조
는 계급을 타파하고 싶었다.상놈이건 중인이건 양반인 것을 묻지 않고,탁월
한 학식과 포부만 있는 어진 사람이면 벼슬을 주어 국가의  정치에 참여케 
하여 나라를 잘 다스리게 하고 싶었다.그는  다시 경연 자리에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전하께옵서는 밝은 정치를 시작하시는 길에 현량과를 새로이 설치하시
어 초야에 묻혀서 썩고 있는 인재를 널리 구하시옵소서.전하께옵서는 요나 
순 같은 성군의 정치를 빨리 실천하시려 하오나 이것이 얼른  실천되지 않
는 것은 사람다운 신하를 얻지 못하신  까닭입니다.모든 반벌과 모든 문벌
을 타파하시고 오직 어진 사람이면  벼슬을 주게 하시는 현량과를  특별히 
마련하시어 인재를 구하신다면 초야에 묻힌 좋은 사람들이  전하의 앞으로 
구름 뫼듯 나타날 것이옵니다.”
  전하는 기뻤다.요순의 성군이 곧 되는 듯했다.
  “경의 말이 옳다.글만 잘하는  사람으로 과거를 보이는  것보다 도학과 
예법이 높은 사람에게 과거 볼 기회를 주는 것이 당연하다.보통 과거 이외
에 경의 말을 들어 현량과를 특설하리라.”
  전하는 곧 전교를 내렸다.
  “보통 소과,대과 이외에 현량과를 특설하노니,초야에 묻혀  세월을 허송
하는 덕망 높은 어진 이들이 모두  다 이 과거에 응시하여 나라에  벼슬을 
하게 하라.”
  현량과를 특설한다는 전교가 조보에 한번 실리니 선비들은  더한층 조광
조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조광조는 마음속으로 기뻤다.일대의 밝은 임금을 만났다고 생각했다.자기
의 맡은 바 임무는 참으로 크다고 생각했다.하루  바삐 이 밝은 임금을 도
와서 훌륭한 정치를 하는 밝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그는 자기의 몸을 돌
아다보지 않고 살이 으깨지고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밝은 임금
을 위하여 바른말을 하고 바른 일을 실천할 것을 굳게 맹세했다.모든 선배
와 동지들은 그를 격려했다.
  “당신은 확실히 왕좌의 재주가 있는 분이니 어서 밝은 임금을 격려하고 
고무하여 더 좋은 일을 많이 하도록 하시오.뒤에서는 우리가 밀어드리오리
다.”
  이조판서 일당은 이렇게 조광조를 고무하고,
  “점필재,김종직 선생이시라든지 한훤당 김굉필 선생께서 뜻만 가지시고 
실천을 못 하셨던 왕도정치를 정암은 기어코 실행해 보시오.”
  대사헌 이장곤은 이렇게 장려했다.
  조광조의 짐으로는 날마다 시골과 서울에서 젊은 사람들이  제자 되기를 
원하면서 구름 뫼듯  모여들었다.그들의 생각에도 점필재,김종직  선생이나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 마음만 먹고  이루지 못했던 유교도의 근본  정신인 
왕도정치를 정암 조광조는 이번에 꼬고 성취할 것만 같았다.청송 성수침,복
재 기준,월봉 김명달,휴암 백인걸 같은 명망 높은 선비들이 다투어 정암 조
광조의 문하에 나아가 제자 되기를 원했다.
  부제학 조광조가 하루는 말을 타고  대궐 안으로 입직을 하러  들어가는 
길에 말굽이 미끄러져서 말에서 떨어져 낙상을 당했다.
  전하는 이날 전과 같이 경연 자리를 열고 여러 경연관들과  함께 강론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당연히 보여야 할 조광조의 얼굴이 보이지 아니했다.
  전하는 좌우를 돌아다보았다.
  “오늘 어찌해서 조광조의 얼굴이 보이지 안느냐?”
  “아까 대궐로 입직을 하러 들어오다가 말굽이 미끄러져 낙상을 하와,집
에서 치료를 하고 있사옵니다.”
  승지가 아뢰었다.승지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전하는 깜짝 놀랐다.
  “과히 다치지는 아니했느냐?”
  “생명에는 관계가 없을 듯하옵니다.”
  “큰일 날 뻔했구나.빨리 전의를 내보내서 치료를 시키게 하라.”
  승지는 명을 받들어 임금을 보는 전의를 조광조의 집으로 내보내었다.전
례가 없는 파격의 은전이었다.영의정이나 좌우의정쯤  되는 재상이라면 모
르겠지만 일개 부제학에게 임금이 보는 의원을 왕명으로  내보낸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조광조는 더욱 전하의 깊은 은혜에 감복이 되고,조정의 신하들은 모두들 
부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전하가 조광조를 아끼는 마음은 이대도록 두터워 갔다.
  조광조는 병이 나은 뒤에 더욱 나라 일을 잘되게 하기 위하여 모재 김안
국이 편찬한 <향악>을 서울과  시골에 전파하여 이대로 동리에서  예법을 
실천하여 나라의 풍속을 바로잡게 하고,<이륜행실>과 <삼강행실>의 목판
본을 인쇄하여 방방곡곡에 돌려서  이 글을 읽게  했다.이륜행실은 유교의 
근본을 삼는 충과 효 두 가지 윤리를 말하는  것이요,삼강행실은 부자유친,
군신유의인 효자와 충신의 길에다가 부부유별인 열녀의 행실을  더 넣어서 
세 가지 큰 배리를  잡은 것이다.조광조는 이 나라  백성들에게 널리 읽게 
하기 위하여 세종대왕께서 정음을 반포한 뒤에 조정에서  공공연하게 쓰지 
아니했던 한글인 정음으로 이륜행실과 삼강행실을 목각하였다.백성들도 알
기 쉽도록 읽게 하자는 것이었다.더욱이 놀라운 것은 한 가지 사실마다 그
림을 넣어 새겼다.조광조는 유림을 대표하여 이와  같이 정치와 풍속을 바
로잡으려 노력했다.
  임금은 <이륜행실>과 <삼강행실>을 보지 무릎을 쳐서 칭찬했다 조광조
의 신임은 나날이 높아 가고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외교에 대한  큰 의논이 일어나게  되었다.만주의 야인 
속고내는 여진 야인의 영수였다.세종대왕 때 김종서가 육진을 개척하여 복
속 시킨 뒤에 그들은 겉으로는 우리 나라의 신하가 되어  복종하는 체하고 
안으로는 딴 야심을 품고 있다가,별안간 군사를  거느리고 회령 땅을 넘어
서 삼수,갑산을 침범하여 사람과 가축들을 빼앗아  가지고 달아난 일이 생
겼다.
  이때 함경도 남병사는 가만히 비밀한 장계를 나라에 올렸다.
  “여진 야인의 두목 속고내는 그 동안 여러 차례 이곳에서  잡으려 했으
나 국경 너머로 깊이 달아나 잡지를  못했사온데,이자들이 요사이 갑산 근
처로 자주 사냥을 하러 나오고 있사옵니다.이  틈을 타서 조정에서는 군사
를 출병하시어 매복 시켰다가 출기불의로 별안간 습격을 하면 감쪽같이 속
고내를 잡을 수 있사옵니다.빨리 대장을 보내 주시옵소서.”
  남병사의 비밀한 장계는 파발 말에  띄워 말방울 소리 요란하게  서울로 
뛰달렸다.
  남병사의 장계는 비변사로 올라가고  비변사에서는 어전에 장계를  바쳤
다.
  전하는 곧 대신과 대장들을 대궐에 불러 회의를 열었다.
  “야인은 우리나라 개국 이래의 골칫덩어리였다.전에 세종대왕께옵서 육
진을 개척하신 이래 이자들은 면종복배를 하여,신하가 되어 조공을 바치면
서도 항상 변방을 소란케 구니 백성들이 편안히 베개를 높이 하고 잘 수가 
없다.이자들을 장차 어찌 처치해야 좋을지 여러 신하는 의견을 말하라.”
  전하의 말씀이 낭랑히 떨어졌다.
  “남 병사의 비밀한 계획이 적당한 줄로  아뢰오.원래 여진 오랑캐는 날
쌔고 간특한 무리오라,정면으로 싸움을 하여  두목을 사로잡기는 어려우리
라 생각합니다.장군 이시방에게 일지병마를 주시어  가만히 갑산으로 나가
서 계교로써 속고내를 잡는 것이 좋을까 하옵니다.”
  대신과 장수들은 일제히 이렇게 아뢰었다.
  전하는 모든 신하의 말을 옳게 생각하고 정식으로 선정전에 임어하신 뒤
에 모든 대신과 장신들을 불러,모시어 선  곳에서 친히 이시방에게 갑주투
구와 활과 창을 내리시면서,
  “너로써 대장군을 삼아 야인을 잡게  하나니 너는 지체치 말고  군사를 
거느려 갑산으로 내려가 기회를 보아 군사를 매복해 있다가,속고내가 사냥
을 하러 갑산으로 들어오거든 남  병사와 합세하여 감쪽같이 속고내를  산 
채로 잡아 돌아오라.”
  이시방은 어명을 받아 상장군의 직첩과  친히 내리는 칼과 활을  받들어 
사은숙배를 올리고 있는 판이었다.
  이때 홍문관 부제학 조광조는 대궐 밖에서 이 소문을 듣고 깜짝 놀라 급
히 대궐로 들어가 임금께 뵈옵기를 청했다.
  “홍문관 부제학 신 조광조는 긴급한 일이 있사와 뵈오려 하오니,아무리 
어전회의 중이라 하오나 잠깐 용안을 우러러 뵈옵기 원하나이다.”
  정원에 있는 승지는 급히 어전으로 주창해 아뢰었다.
  “홍문관 부제학 조광조가 급히 어전에 아뢸 일이 있다 하와 입대하기를 
청하나이다.”
  전하는 신임하는 조광조가 급히 뵈옵기를 청한다는 말을 듣자,아무리 대
장군을 전송해 보내는 중요한 자리지마는,
  “들라 해라.”
  하고 허락을 내렸다.
  조광조는 만조백관과 대장 이시방이  사은숙배를 드리는 자리로  들어섰
다.
  “전하,밖에서 듣자오니 여진 속고내를 속여서  잡으라 하시어 이시방을 
보내신다 하옵니다.이것은 왕도정치를 하시는 성스러운 외교가 아니옵니다.
여진 속고내를 징계하시려면 정정당당하게 왕사를 움직여서 속고내를 성토
하시고 속고내를 잡아 들여서 죄를  주시는 것이 왕도정치올시다.속임수로 
사냥 들어 온 자를 몰래 잡는다는 것은 비겁한 일이옵니다.국가 위신과 나
라 체통에 좋지 않은 일이오니 대장들이 만약 우리의 군사를  정돈하지 못
했다 하오면 차라리 중지하실지언정 속임수로 오랑캐의 두목을 잡아들인다
는 일은 불가한 줄로 아뢰오.”
  조광조의 얼굴빛은 엄숙했다.속임수로 속고내를 잡는다는 것은 왕도정치
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정정당당하게 외교를 하라고 반대했다.
  전하는 한동안 침묵을 지켜 생각해 보다가 조광조의  정정당당하게 하라
는 말을 옳게 들었다.
  “지금 부제학의 말을 들이니 참으로 점잖은 군자의 말이다.속임수로 도
둑을 잡는다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니 중지하라.”
  이미 다 결정된 일에 전하의 중지 명령이 떨어지니 만좌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병조판서 유담년이 어전에 아뢴다.
  “병법에는 기와 정이 있고,외적을 막는 데는  상도와 권도가 있는 것입
니다.임기응변을 하는 것이 도둑을 막는 병법이온데,조광조는 한 가지 정도
만 가지고 말씀을 아뢰니,이것은 병법을 모르는 사람의 말이올시다.농사 짓
는 일은 시골 농부한테 물으셔야 하고 옷감을 짜는 일은 길쌈 짜는 여인네
한테 알아봐야만 합니다.글을 잘하는  조광조는 글만 알뿐  싸우는 병법은 
모를 것입니다.소신은 젊어서부터 백수풍에 전쟁터에서 늙었습니다.자주 변
방에 나아가 오랑캐와 싸웠으니 오랑캐의 사정은 젊은 조광조보다 늙은 소
신이 더 잘 알 것입니다.소신의 말씀을  들으시어 장군 이시방을 보내시어 
속고내를 잡아오게 하소서.”
  병조판서 유담년은 분연히 아뢰었다.
  그러나 전하의 의사는 굳었다.
  “의롭지 못한 일이다.중지하라.”
  분부를 내린 뒤에 옥좌에서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갔다.
  모든 신하들은 혀를 둘렀다.일이 이쯤 되니,젊은 부제학 조광조의 위세는 
만조정 신하들을 눌러 버리고 말았다.
  임금은 이렇도록 조광조를 신임했다.정암 조광조는  임금이 자기를 알아
주는데 더한층 감복 되어 눈물을 머금었다.자기 몸이 분골쇄신이 되더라도 
밝은 임금을 도와 밝은 정치를 해볼 것을 마음속으로 깊이 맹세했다.
  조광조는 기회를 보아 또 한 가지의 바른말을 아뢰었다.
  “전임 순창군수 김정과 담양부사 박상은 공신 박원종을  탄핵하고 전비 
신씨를 복위 시키자고 상소를 올린 일로 귀양들을 갔사옵니다.복위 문제는 
지금 새로이 왕비전하를 맞이하셨으니 말씀  드리지 않으렵니다.다만 폐비
할 당시에 있어서 공신 박원종들이 강제로 전하를 협박한 것은 사실이옵니
다.이 사실을 정정당당하게 말한 박상과 김정을 여태껏 귀양살이를 시키시
다니 이것은 너무 선비들의 기운을 저상 시키는 일이라 생각하옵니다.원컨
데 전하께옵서는 김정과 박상의 죄를  풀어 주시어 다시 벼슬을  주시옵소
서.”
  “경의 말이 옳은 말이다.박상과 김정의 귀양이  아직도 아니 풀렸느냐?
그때 간관과 헌관이 우겨대니,나도 그럴 듯하게  생각해서 두 사람을 죄준 
것이다.정원에 기별하여 두 사람의 죄를 풀리라.”
  전하는 조광조의 한마디 아뢰는  말에 이렇게 마음이  풀렸다.말만 하면 
임금은 들었다.그야말로 언청계용이었다.조광조는 더욱더 신명이 났다.정말 
자기 힘으로 전하를 요임금이나 순임금 같은 임금을 만들어 이  나라를 요
순 같은 시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광조에 대한 임금의 신임이 두터울수록 가장 공포를 느끼는 일
군이 있었다.공신과 후궁을  떠받드는 남곤과 심정의  일당들이었다.그들은 
어진 선비로 이름 있는 박상과 김정을 남원과 보은으로 귀양을  가게 했던 
사람들이었다.자기들이 주장하여 귀양을  보냈던 박상과  김정은 조광조의 
한 마디 아뢰는 말씀으로 구원이 되어 내직으로 영전이 되고  자기들의 주
장에 동조했던 이행과 권민수는 벼슬이 떨어져 아직도 귀양살이를 하고 있
었다.
  남곤과 심정은 몹시 초조 했다.임금은 너무나 조광조의 말을 들었다.대궐 
안에서 불식으로 승려들을 불러 기일 재를  지내는 일을,조광조의 한 마디 
간하는 말에 임금은 이것을 폐지해 버렸다.고려 때 충신 정포은 선생을 조
광조의 한 마디 말로 문묘에 배향시켰다.향약 법을 조광조의 한 마디 말로 
서울과 시골에 실시 시켰다.삼청동에 있는 선도를 받드는 소격서를 조광조
의 한 마디 아뢰는 말에 즉석에서  폐지시켜 버렸다.계급을 타파하고 어진 
사람을 뽑아 쓴다는 현량과란 과거 보는 제도를 조광조의 한 마디 말에 의
하여 새로이 창설 시켰다.야인 속고내를 계교로  잡기 위하여 대장 이시방
을 서북으로 보내려고 이미 결정해 놓고 임금이 친히 갑주와  칼까지 내린 
일을 조광조의 한 마디 말로 정당치 못한 일이라 해서 중지시켜 버렸다.박
상,김정의 귀양간 것을 조광조의 한 마디 말에 의하여 그대로 풀어 버렸다.
어느덧 조광조는 욱일 승천의  기상이 되어 버렸다.지금  조광조의 선배인 
안당과 동지인 이장곤이며 새로이 귀양이 풀린 박상과 김정은 다시 한림학
사 벼슬을 하게 되었다.조정암이 선배와 제자들은  조정에 가득히 차 있게 
되었다.남곤과 심정은 언제 어느 때 벼슬이 떨어져 나갈지  몰랐다.소인 남
곤과 심정은 마치 바늘 방석에 앉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하는 경연에서 조광조의 바른말을 들을수록 바른 정치를 하고 싶었다.
바른 정치를 하자면 어진 사람에게 정권을 맡겨야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전하는 드디어 등극한 지 십삼년 무인 오월에 이조판서 안당으로 우의정
을 시키고 이장곤으로 이조판서를 제수하고  김정으로 이조참판을 시켰다.
김정은 신비 복위 사건으로 남곤,심정,이행,권민수와 대립이 되었다가 그들
의 탄핵하는 상소를  만나서 죄 없이  귀양갔던 것을,이제 이조참판에까지 
오르게 되었다.모든 선한 사람들이 조정에 가득하게  모인 셈이었다.이들이 
조정에 모인 지 얼마 안 돼서의 일이었다.
  마침 조정에는 형조판서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남곤은 자기 당을 추천해 
올리기 위하여 심정으로 형조판서를 시키십시오  하고 추천해 아뢰었다.그
러나 벼슬은 이조에서 전형을 해서 적어 올려야만 물망에 오르게  되는 것
이다.이조판서 이장곤은 소인 심정에게 형조판서를 주고 싶지 않았다.
  “간사한 심정으로 형조판서라는 법을 맡은 정경을 시킨다면  이 나라의 
법은 어찌 되겠는가.”
  하고 단번에 전형하기를 거부해 버렸다.
  우의정의 정승 자리에 앉은 안당도,
  “심정은 공신 칭호를 받아 화천군이 되었다.군의 칭호만 받아도 과남한 
일인데,형조판서란 당치 않다.”
  하고 코대답을 했다.
  그러나 남곤과 심정은 백방으로 운동을 하여 기어코  형조판서의 물망에 
오르도록 만들어 놓았다.
  전하는 물망에 의하여 심정에게  형조판서를 제수하라는 전교를  내리게 
되었다.
  온 조정의 여론은 물 끓듯 했다.이때 별안간 천변지이를 내렸다.난데없이 
지동이 일어나면서 대궐 전각이 요란하게 흔들렸다.지진은 세 차레나 진동
이 되었다.서울과 시골 백성의 집은 쓰러지고 무너지는 집까지 허다했다.때
마침 정암 조광조는 용인 땅 선산으로  성묘를 갔다가 지진을 만났다.정암 
조광조는 지동을 보고 한동안 무슨 생각을 하다가 옆에 있는  제자를 돌아
보았다.
  “허허,이상한 지동이로군,필시 소인 심정이 형조판서의 중임을 맡으려나 
보다.급히 자비를 차리게 해라.곧 서울로 올라 가자.”
  조광조는 지동 치는 천변지이를 보자  심정이 형조판서가 될 것을  미리 
짐작한 것이다.조광조는 빨리 말을  타고 서울로 올라와 보니,과연  심정은 
형조판서의 직첩을 받았고 조정 여론은 술렁술렁 물 끓듯 하는 것이었다.
  부제학 조광조는 통문관 한림 학사들을 거느려 상소를 올린다.
  “나라의 형벌을 맡은 법관이란 아무나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심정
은 법을 모르는 사람이옵니다.이러한 사람에게  형조판서라는 중대한 직책
을 내리시니 하늘은 지동을 치시어  경고하시는 것이옵니다.불가하옵다 생
각하옵니다.”
  한림 학사들은 연명을 해서 상소를 올렸다.
  통문관 한림 학사들이 반대 상소를 올리니 사간원 간관들도 들고 일어나 
상소를 올린다.
  “대사간 김안국은 간관 일동을 거느려  성상께 상소를 올리나이다.심정
은 선비를 박해하고 나라를 좀먹게 한 자올시다.형조판서의 자리는 추상같
이 엄하고 바른 법을 맡은 자리이온데 이 사람으로 법을  다스리는 정경을 
삼는다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나라의 풍기와 법을 맡은 사헌부에서도 헌관들이 들고일어나  상소를 아
뢴다.
  “심정은 반정할 때도 아무런 공로가 없이 소인 유자광한테 붙어서 火천
군이란 참람한 칭호를 받은 자올시다.심정으로  형조판서를 시켜어서는 아
니 됩니다.”
  하고 추상같이 논박을 했다.홍문관,사간원,사헌부?글을 맡아 주장하는 곳,
언론을 맡아 주장하는 곳,기강과 법을 맡아  주장하는 세 곳에서 한꺼번에 
심정의 형조판서 되는 것을 반대하니 임금도 하는 수가 없었다.
  “심정에게 제수하려던 형조판서의 벼슬은 아직 보류하라.”
  하고 전교를 내렸다.
  심정은 형조판서를 따 놓고도 선비들이 등살에  못 하고 말았다.그이 한
은 뼛골 속속들이 스며들었다.심정은 주먹으로 방바닥을 치면서 이를 부드
득 갈았다.
  같은 동지인 남곤이 심정을 위로하기 위하여 조용히 찾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다 된 형조판서가  선비 놈들의 등살에 깨지
다니.”
  남곤이 심정을 위로한다.
  “그 놈의 선비 놈들은 나의 살부지수보다  더한 놈일세.이 놈들을 모조
리 죽여 없애 고야 말 텔세.”
  심정은 울분을 못 이기어 주먹으로 책상을 친다.
  “자네,화가 몹시 나나 보이.책상을 치면  주먹만 아프지 별수가 있나.그
리구 속만 썩고 곯는 것이지 누가 왼편 눈이나 꿈쩍할 줄 아나?”
  “여보게,글쎄 분하지 아니한가?이 나라에는 임금도  없고 모두 다 선비 
놈들의 세상이란 말인가.”
  “이 사람,왕도정치를 하는데 유학을 실천궁행하는  선비들이 제일이 아
니고 무엇인가,하,하,하.火를 내지 말라니까 공연히 화를 내네 그려.화를 암
만 내두 소용이 없대두 그러네.쓸데없이 마음만 상한단 말일세.여보게,화를 
내지말고 차근히 의논하세.이까짓 형조판서가 문제가 아닐세.앞의  일이 더 
큰일일세.”
  “더 큰일은 무슨 더 큰일이 있어.설마 그 놈들이 우리를 죽이기야 하겠
나?”
  심정은 뱉듯 대답한다.
  “허,허,허,자네도 허무한 소리만 하고  앉았네 그려.설마 우리를  죽이다
니,그게 무슨 소린가?설마가 사람 죽인다네.혹시 그들이 우리를  죽일 경우
가 생길런지 누가 아는가?그러하니 그러한 우활한 소리는 작작 하구  우리
는 미리 죽지않을 대책을  차근하게 생각하고 연구해야  하네.공연히 화가 
난다구 수선만 떨어야 아무  소용이 없네.우리는 살기  위해서 선비들한테 
뺏긴 정권을 다시 잡아 보도록 일을 만들어야만 하네.”
  남곤은 해사한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은근히 심정을 달랜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빼앗긴 정권을 다시 잡겠나?”
  심정은 뻘겋게 상기된 눈으로 초조하게 남곤의 얼굴을 바라본다.
  “여보게,평시엔 자네 꾀가 나보다  열 곱절 낫더니,오늘은 형조판서  한 
자리쯤 떨어졌다고 이다지  슬기 구멍까지  막혀 버릴  줄은 몰랐네.하,하,
하.”
  남곤은 슬며시 심정을 놀려댄다.
  “어떡함 되느냐 말야?”
  심정은 더욱 초조하다.
  “조광조 이하 선비 놈들을 모조리 쫓아내 버려야 하지.하,하,하.”
  “싱거운 사람,누가 그것을 모르나.그것쯤이야 내 아무리  숙맥이라도 잘 
알고 있지.이 사람이 정말 나를 천치  바보로 알고 있네 그려,그서 참.지금 
상감께서 조광조를 신임하시기를 전무후무하게 믿고 계시고,조광조의 동지
로 안당 같은 사람은 지위가 우의정  대감이요,이장곤은 이조판서요,김안국
은 대사간이란 말야.이 사람들을 몰아낸다는 일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닐
세.잘못했다가는 점점 우리가 더 몰리게 되기 십상 팔굴세.”
  심정은 말을 마치자,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후하고 내쉰다.
  “여보게 심판서,그래도 그러네.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
이야.여보게,상감은 별수 있다던가?상감도 신이 아니라 사람일세.사람이 사
람의 마음을 돌리게 하기란 여반장일세 조광조가 상감께  왕도정치를 하시
라는 바람에 상감은 금방 당신이 요순이나 된 듯 첫정을 쏟아서 조광조,조
광조 하시지만 얼마 안  가서 싫증이 나실 때가  올 것일세.세상의 임금은 
자고로 호강을 하자는 게 욕심인데,임금보고 꼼짝달짝을 못하도록 좋은 음
식도 먹지 마라,아름다운 풍류도 듣지  마라,예를 지켜라,법을 지켜라 하고 
꼼짝달짝을 못 하도록 묶어 놓으려 하니,임금도  사람일세.화려찬란한 구중
궁궐 안 삼천 궁녀들 틈에 임금은 성색에  욕심이 나지 않고 배겨 나겠나.
반드시 싫증이 날 때가 올 것일세.이때 가서 우리는 적당하게 수단 방법을 
쓰면 임금은 별수 있나?우리  말을 듣게 되네.그러니  우리는 미리 그때가 
오기를 노리면서 차차 수단 방법을 써 두어야만 할 것일세.”
  남곤의 말은 그럴 듯했다.심정의 귀가 솔깃해진다.심정은 바싹 무릎을 남
곤 앞으로 내민다.
  “그러면 어떻게 차차 수단을 써야 하나?”
  “자네가 한턱을 낸다 하면 내가 가르쳐 주지.”
  “이 사람아,자네와 나는 결의형제를 한 사람들이 아닌가.매부 좋고 누이 
좋다구 내가 좋으면 자네가 좋구,자네가 잘되면 내가 좋지.한턱이  어디 따
루 있을 까닭이 있는가.”
  심정의 마음은 비로소 눅어지기 시작한다.
  남곤은 해끄무레한 얼굴에 눈을 깜박이면서 또다시 미소를 띠웠다.
  “한턱두 안 내고 비계를 가르쳐 달란 말인가.하,하,하.”
  남곤은 대소를 하며 말한다.
  “보채지 말고 어서 말하게.”
  심정은 또 졸랐다.
  “자아,그럼 내 계교를 말해 주기로 하지.우리는 세칭 공신의  일당이 아
닌가.또 공신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자타가 모두 다 그렇게 인정을 하지.”
  “지금 우리들의 적은,선비들만이 아니라 또 한 파가 있네.”
  “그렇지.김안로와 윤임의 일파가 있지.”
  “우리는 애당초 복성군의 어머니 경빈 박씨를 돌아간 장경왕후 뒤에 모
시어 왕비로 받들려다가 선비 놈들이 신비를 복위 시키자고 떠메고 나오는 
바람에 일이 깨어져 버리고 말지않았나?”
  “그랬지.”
  “요 틈을 타서 김안로란 놈은  폐비를 복위 시키자는 선비들의  주장도 
옳고 폐비를 왕비로 다시 모셔서는  아니 된다는 공신들이 주장도  옳다고 
하면서 슬며시 양시론을 주장하다가,슬쩍 장경왕후의 동생 윤임과 손을 붙
잡고 장경왕후의 공주를 며느리로 모신  다음에 상감께 윤가의 결지인  새 
왕비 윤씨를 맞아들이게 했으니,요것은 알토란같이 제 세력을 조정과 궁중
에 뿌리깊게 박아 놓은 음흉한 계책일세.그러하니 선비도 우리들의 적이지
마는 김안로도 우리들의 적이라 생각하네.”
  “그래,자네 말이 옳아.선비 놈들만 우리들의 대적이 아니라 김안로와 윤
임도 인제는 우리의 적일세.”
  “그러하니 먼저 선비 놈들을 쫓아내 버리고 다음에는  김안로와 윤임을 
몰아내야 하네.”
  “글쎄,그건 나도 짐작하네.그러나 모두가  용이한 일이 아니거든.조광조
는 지금 한찬 상감의 신임을 받는  유림의 대표요,김안로는 공주마마의 시
아버지에다가 원자의 외삼촌인 윤임과 배가 맞아서 새로이 왕후를 모셔 들
인 사람이고 보니,한참 서슬이 푸른 세도 재상일세.어떻게 이것들을 없애버
린단 말인가?”
  심정은 다시 초조해서 묻는다.
  “다 되는 수가 있어.”
  남곤은 이렇게 말하고 다시 목소리를 낮춘 뒤에 인지 장지  두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을 계속한다.
  “지금 박빈은 새 왕비가 들어왔지만,아직도 왕후  될 야망을 잃지 않고 
있네 복성군의 어머니 경빈 박씨는 아직도 총관 후궁이야.얼굴이 훤출하게 
달덩이 모양으로 잘생겨서 몸체가 미끈하게 씻어 논 배추포기 같고,나이가 
한찬 좋은 삼십대야.여기다가 복성군이란  상감이 귀해 하는  아들이 있어 
조개 속의 게 같은 나이 어린 새  왕비에 댈 것이 아니거든.그러니까 상감
의 밤 자리는 요새도 경빈 박씨가  새 왕비보다 더 보살펴 드린다구  하지 
않는가?나는 경빈 박씨와 전부터 친하니 경빈 박씨를 통해서 일을 꾸며 보
겠네.말하자면 상감과 조광조 사이를 이간질 쳐서  떼어 놓도록 하잔 말일
세.”
  “그건 참 된 수작일세.”
  심정은 무릎을 탁 친다.
  “그런데 나는 경빈 박씨를 맡겠지만,자네는 희빈 홍씨를 맡도록 하게.희
빈 홍씨도 박빈한테 못지 않게 지금  상감의 귀여움을 받는 후궁일세.얼굴
이 대견하게 예쁜 데다가 경빈 박씨만한 왕자가 있어서 상간의  마음을 막 
흔들고 있거든.이 역시 아들을 위해서 속으론 야심이 많으이.우리는  이 야
심을 이용하잔 말야.”
  남곤은 손가락을 까닥거리면서 심정한테 비계를 가르쳐준다.
  “자네는 전부터 연락이 있지만 내사 구중궁궐 속에 저같이 들어앉아 있
는 희빈 홍씨를 어떻게 가까이 할 수 있는가.”
  심정은 엄두가 아니 나는 듯 남곤을 바라다본다.
  “체,딱한 사람일세.희빈 홍씨의 아버지는 반정공신 홍경주가  아닌가?홍
경주와 자네가 손을 잡으면 그만  아닌가?본시 홍경주는 우리 편이 될  수 
있는 데다가,지난번에 찬성벼슬로 승차를 시키려 했을 때 조광조의 유림들
이 호반이 어떻게 찬성이 될 수  있느냐구 반대를 하는 통에 찬성이  되지 
못했네.지금 홍경주는 선비들을 이를 갈아 미워하고 있을 것일세.우리가 조
광조를 내쫓는다구 하기만 하면 그는 단통 우리와 같이 일을  하자고 응할 
사람일세.그런데 그는 무식한 호반일세.그대로  빈손 들고 가서는 아니  되
네.내가 무명 한 통을 보낼 테니 자네는 베 한 통만 보내게.그리구 희빈 홍
씨한테 들여보낼 금은보화도 얼마만큼 준비를 해야 하네.”
  남곤과 심정은 이쯤 계획을 정하고 잇는 판인데,심정의 상노가 대궐에서 
나온 조보를 가지고 들어왔다.조보는  관보 비슷한 것으로  조정 대관들의 
벼슬하는 동정을 적은 기별지였다.
  상노에게 조보를 받아 든 심정은 위아래로 쭉 조보를 훑어  보다가 별안
간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렸다.남곤은 심정의 얼굴을 바라보자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줄 알았다.
  “왜 그러나,얼굴빛이 별안간 좋지 않으니 무슨 일이 생겼는가?”
  “허허,조광조가 대사헌이 됐네 그려!”
  “무어,조광조가 대사헌이 됐어?”
  남곤도 깜짝 놀란다.
  대사헌은 나라의 풍기와 법을 바로잡는  헌관의 장이었다.사람을 죽이려
면 죽이고 살리려면 살릴 수 있는 생살여탈의 권한을 맡은  가을 서리같이 
무서운 높은 벼슬이었다.남곤과 심정 두 사람의  얼굴은 파랗다 못하여 노
랗게 질려 버린다.
  “인제 우리들은 조광조의 손에 다 죽었네 그려.”
  남곤이 괴탄을 했다.
  “한참 등양을 막 하는구나.일 년 만에 또박 한림학사로,직제학으로,부제
학으로,대사헌으로?조금 있으면 이조판서에 대제학에 좌우의정에 영의정이 
될 터이지.”
  심정이 비꼬아 탄식을 한다.
  “조광조의 위에는 우의정 안당과 이조판서  이장곤이 있지 않은가.그리
구 정포은 선생과 한훤당 김굉필을 떠메고 나온 조광조 앞에는  모든 선비
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간관,대관,교리,옥당,은대,후원 등 세 높고 기세 좋
은 벼슬아치들이 되어 조정에 꽉 차  있지 않은가.그러니 우리들이 배겨날 
수가 있는가?”
  심정의 대답소리다.
  “어서 빨리 홍경주를 찾세.”
  두 사람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광조를 신임하기 시작한 전하는 대사헌이란 중책을 그에게  맡기고 맑
은 정치를 단행하려 들었다.나라를 좀먹는 탐관오리를 조광조의 손으로 숙
청 시키고 모든 해이한 풍기와 기강을 조광조의 손으로 바로잡게  하기 위
하여 진정한 왕도정치를 실천해 보려는 작정이었다.
  조광조는 특명으로 내리는 대사헌의 중책을 받자 마음이  불안하여 사직
하는 상소를 올렸다.
  “신의 나이 아직 사십이 되지 못하였삽고 학문이 부족 하온데 대사헌이
란 벼슬은 너무 높사옵니다.전하께서는 소신의 간곡한 뜻을 부축하시와 소
신에게 조그마한 한가로운 고을에 있게 해주신다면,소신은 더욱 몸을 닦고 
글을 읽어서 훌륭한 자격을 얻은 뒤에 다시 조정에 참례하여  벼슬을 하겠
나이다.”
  조광조의 상소가 한번 올라가니 전하는 더욱 그를 가상하게 생각했다.
  “세상 사람들은 벼슬이 높아 가기를 바라고 지위가  올라가기를 희망하
는 것이 상정인데,경은 도리어 벼슬을 사양하니 그대의 맑은 거울 같은 마
음을 짐작할 수 있다.경은 굳이 사양하지 말고 대사헌의 자리에 앉아 백성
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풍속을 고취해서  이 나라를 문명한 정치로  인도하
라.”
  조광조는 더욱 황감했다.세 번  상소를 올려 사양했으나  전하는 도리어 
그에게 또 한 가지의 겸직을 내렸다.
  “대사헌 조광조에게 세자우빈객을 겸하게 하라.”
  승지는 전하의 명을 받들어 다시 세자우빈객의 직첩을  조광조에게 내렸
다.세자우빈객이란 벼슬은 장차 이 나라의 임금이  될 세자를 지도하는 벼
슬이었다.조광조의 영예는 일신에 넘쳤다.
  그는 임금의 이렇듯 넘치는 총우를 받자 천재일우의 성군을 만났다 생각
했다.몸을 국가에 바쳐서 기어코  나라를 요순의 세계로  만들어 놓으리라 
맹세했다.
  조광조가 대사헌이 됐다는 소문이 나자 시정의 백성들은  모두들 경계했
다.
  “조정암 선생이 대사헌이 되셨다네.인제 좋은 세상이 되려나 보이.”
  “대사헌뿐이신가,세자의 선생님인 세자우빈객이 되셨다네.우리도 부모를 
잘 섬겨서 조정암이 반포한 이륜행실과 삼강행실을 그대로  실천해 보아야 
하겠네.”
  백성들은 이렇게 주고받았다.
  시정은 말할 것도 없고 영문의 졸아치와 남의 집 비부쟁이까지라도 늙은 
부모를 정성께서 봉양하다가 부모가  돌아가시면 굴건제복의 삼년  거상을 
입고 여막에 짚베게를 짚어 예법을 지켰다.지방으로 모시던 신위를 나무로 
신주를 만들어 모시고 무덤 앞에는 반드시 비석을 세워서 아버지와 어머니
의 공덕을 찬양했다.장터와 거리에는 다투는 소리가  없고 밤에 문을 닫지 
아니해도 도둑의 발자취가 끊어져 버렸다.
  시정의 풍속이 이처럼 변해가니 나라의 녹을 먹는  벼슬아치들도 서로들 
수군거렸다.
  “조정암한테 탄핵을 만나면 큰일일세.성정이 맺고 끊는 듯해서 추상 열
일 같거든.자네,조심해 처리하게.”
  벼슬아치 사이에는 뇌물을 주고받던 누추한 풍속도 하루아침에  씻은 듯 
없어졌다.
  조광조가 사헌부 대사헌이 되어  출사한 지 며칠  뒤의 일이었다.사헌부 
대문 앞에는 한 사람의 나이 먹은 사내가 수수하게 무명옷을 차려 입고 어
린애 하나를 데리고 와서 조정암께 뵙기를 청했다.
  헌부 하인이 이 뜻을 아뢰니,
  “무슨 소원이 있다 하느냐?들어오라 일러라.”
  조광조는 무심코 들어오라는 영을 내렸다.
  이윽고 나이 먹은 사내는 어린 것을 데리고 헌부 뜰 아래에 부복하자 호
피 교의를 타고 앉은 대사헌 조광조에게 너부죽이 절을 드리고 나서,
  “대감 소인을 알아보십니까?”
  하고 아뢰었다.조광조는 삭막해서 얼른 생각이 나지 아니했다.
  “누군지 모르겠네.자네 성명이 무엇인가?”
  “대감께서 어찌 소인을 알아보실 수가 있겠습니까?소인은 사년 전에 대
감께서 과거를 보라 서울로 올라오셨을 때 남문 안에 사처를  정하셨던 여
각 주인올시다.그리구 이놈은 그 뒤에 낳은 제 자식놈올시다.대감께서 대사
헌이 되셨다 하니,하도 마음에 좋아서 이렇게 치하를 드리러 왔습니다.인제 
우리 나라는 정말 태평성대가 되겠습니다.”
  조광조는 늙은 사람의 말을 듣고 보니  비로소 사 년 전에 처음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왔을 때 꼬리를 치던  여각 주인의 아내가 생각났다.조광
조는 반가움을 이기지 못했다.
  “자네가 바로 그때 여각 주인이었던가?그래,그 뒤에 잘들 지내나?”
  “덕분에 잘들 지냅니다.아내는 그때 대감께서 동곳을  도루 벽 틈에 꽂
고 가신 뒤에 개과천선이 돼서 아주 착실한 사람이 되어 지금은 세  살 난 
이 어린 것을 데리구 남부럽지 않게 이  늙은 것하구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 저희들이 화락하게 가정을 이루어  자식새끼를 낳고 잘 지내는  것은 
모두 다 대감의 어지신 덕화에 감동이 되어 이렇게 잘 지내는 것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일세.”
  조광조는 자기가 실천 궁행한 부동심의 공부가 이렇듯 한 집안을 창성케 
해주게 된 일은 참으로 꿈 밖이었다.마음속으로  선비의 처세가 진실로 어
려운 것을 더 한 번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래,그때 내가 조광조인 줄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가?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하도 고마우신 어른이라 사 년 전에 소인은 과거날 방  붙이는 과장으
로 가서,대감이 창방을 하고  신래 부르는 것을 목도해  구경했습니다.그때 
소인은 대감의 함자를 비로소 기억했습니다.그렇게  도덕이 높으신 어른이 
과거에 뽑히지 않으실 리가 만무하다구 생각해서 대감을  추앙하는 마음에 
일부러 가서 창방하시는 것을 뵈었습니다.그리고 집안이 다시 화합해서 이 
자식을 얻은 뒤부터는 날마다 대감께서 잘되시기만 마음속으로 축수발원을 
했습니다.그저 앞으로 만수무강하시고 만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각 주인은 이렇게 치하를 하고 돌아갔다.
  온 세상은 조광조의 말과 행동의 실천으로 인하여  이렇도록 아름다웁고 
순화되어,나라의 풍속이 한번 바뀌었다.
  사헌부 대문 앞에 늙은 사내가 다녀간 뒤에 이 소문은 점점 퍼져서 장안
에 자자했다.
  “조광조는 참으로 어진 군자다.”
  하는 소리가 더한층 높아졌다.거리의 백성들은  조광조의 행차가 지나가
는 것을 보기만 하면 모두가 손을 이마에 얹어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를 
예찬했다.
  “이제는 법이 밝아져서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고 탐관 오리들도 종적을 
감출 것일세.”
  “법만 밝아진 게 아니라 풍속이 벌써 홱 변했네.효자 열부가 쏟아져 나
오고 삼강오륜이 번듯하게 자리를 잡았네.상 사람들도 부모가 돌아가면 삼
년 거상을 입어 여막을 지킬 줄 알고,행랑방 속에서도 부모의 제사를 지내
는데 축문 읽는 소라가 새어 나오네.참으로 좋은 세상이 되었네.모두 다 조
정암이 우리들을 교화 시킨 덕일세.”
  “도대체 이분은 사람을 똑같이 대접해서 양반과 상놈을  가리지 아니하
니 더욱 좋거든.동소문 안 갖바치 학자도 이분의 친구구,구리개  약국의 주
부들도 모두 다 이분의 심허하는 벗이거든.벼슬  지위가 높고 낮은 것으로 
사람을 사귀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학문이 높고 낮은 것으로  사람을 사귀
니,이런 분이 대사헌이 되었으니 기강이 밝아지지 않고 어찌하겠나.”
  이때 조광조의 초헌이 외바퀴를 굴리면서 사헌부 구종별배에게 옹위되어 
엄숙히 지나간다.사람들은 금관조복으로 높직이 초헌 위에 단정히 앉아 가
는 조광조의 풍채를 취한 듯이 바라본다.
  얼굴은 과연 좋았다.마치 희고 흰 백옥에서  윤기가 뿜어 나오는 듯하고 
찬란한 금덩이에서 정기가 솟아오르는 듯했다.
  그의 얼굴을 달에 비긴다면 마치 추석 한가위 달이 구름 한 점  없는 맑
은 하늘로,이슬을 머금어 둥실 떠오르는 탯거리였다.모두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조광조의 초헌은 엄숙히 군중 앞을 지났다.
  “허허,참,세상 사람이 아니로구나.바로 곧 선관이로구나.”
  “선관 중에서도 서왕모나 월궁 항아의 눈이 가슴츠레해질 선관일세.”
  “나이 사십 미만에 대사헌의 예복을 입었으니 더한층  얼굴이 돋보이네
만,그 풍채를 바라보자  우리들 남자의 마음도  흔들리니 웬만한 여자들이 
이 얼굴을 바라본다면 회가 동하지 않을 사람이 없겠네.”
  “허허,자네 아직 그 이야기 못 들었나?조정암 선생이 처음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왔을 때  여각에 사처를 정했는데,조선생의  풍채에 취한 여각 
주인의 젊은 후취는 꼬리를 치면서  정암 선생에게 동곳을 꽂아  주었더라
네.조정암 선생은 슬몃 동곳을 벽 틈에 꽂아  둔 채 사관을 옮겨 버렸더라
네.사내놈은 이 눈치를 알고 장으로 가서 칼을  사 가지고 와서 보니 조정
암 선생은 계집이 준 동곳을 벽에 꽂아 놓고 자리를 떴단 말이야.놈팽이는 
비로소 선생의 높은 행동에 탄복을 했더라네.뒤에  이 집은 집안이 화락해
서 아들까지 낳고 조정암 선생이 대사헌이 되었단 말을 듣자  사헌부로 치
하까지 왔더라네.”
  “어허,참 조정암은 성인일세.”
  
    음모
  시정과 거리에서는 이렇게들 조정암을 예찬하고 있을 때,소인 남곤과 심
정은 조광조를 해칠 음흉한 계교를 가슴 안에 듬뿍 품고 임금의 후궁인 희
빈 홍씨의 아버지 홍경주를 찾았다.
  홍경주는 원래 무식한 호반이었다.활을 잘 쏘고 창을 잘 쓰는 덕으로 박
원종의 부름을 받아 군사를 거느리고 연산군을 내쫓는 반정에 참례하여 공
신이 되었으나,남곤과 심정 같은 글을 아는  사람하고는 그다지 교분이 없
었다.그러나 그는 항상 글 잘하는 남곤 선생을 존경하고  있었던 판인데,남
곤 선생이 자기를 찾아 왔다 하니  마음에 기쁘고 감격했다.거래를 드리러 
들어온 상노한테,
  “어서 들어오시라구 여쭈어라.”
  한 뒤에 몸소 뜰 아래까지 내려가 두 사람을 맞았다.
  “두 분 대감께서 어떻게 소인의 집까지 찾으셨습니까?”
  하고 반색을 했다.홍경주는 자기가 무관인 까닭에  문관인 두 사람 앞에 
자기 몸을 낮추어 소인이라 말하는 것이다.
  “저희들이 왜,대감을 찾을 수 없습니까?하,하,하.”
  소인 심정은 간드러지게 웃으면서 남곤과 함께 주인  홍경주의 인도하는 
방으로 들어섰다.
  “도대체 두 분 대감 왠일이십니까?”
  주인은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우고 묻는다.
  “대감께 조용히 여쭐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남곤의 말이 떨어지자,
  “사람을 좀 무리 쳐 주십시오.”
  심정이 주인한테 청한다.
  홍경주는 문밖에 있는 상노들을 물리쳤다.이내 사랑은 조용해졌다.남곤은 
기침을 한 번 칵 한 뒤에,
  “대감,오늘 조보를 보셨습니까?”
  홍경주를 쳐다보았다.
  “아직 못 읽었습니다.무슨 소식이 나왔습니까?”
  “좋은 일이 못 됩니다.조광조가 대사헌이 되었습니다.”
  “아,조광조가?”
  홍경주도 깜짝 놀란다.
  홍경주는 자기가 찬성 물망에 올랐을 때 조광조가 선비들을 거느리고 반
대를 하여 찬성이 되지 못한 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젊은 사람이 대사헌이 되다니.”
  경주는 못마땅한 듯 혀를 끌끌 찬다.
  “이제 우리들 공신들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심정이 긴장한 얼굴빛을 해 가지고 홍경주를 경고하는 듯 쳐다본다.
  “장차 조광조는 우리들을 내쫓고  공신들의 벼슬을 삭훈하자고  덤벼들 
것입니다.”
  남곤이 탄식하듯 뱉는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홍경주도 초조했다.
  “우리가 조정에서 물러나지 아니하려면 먼저 저것들을 몰아  내야만 우
리는 부지할 것입니다.저것들이 당을 모아 가지고 역적질을 한다고 고변을 
해서,조정에서 몰아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이렇게  해서 조광조
의 일당을 모조리 쫓아내야 할 것입니다.”
  심정이 계책을 꺼냈다.
  역적질을 한다는 말에 홍경주의 눈이 둥그레져 묻는다.
  “그 일이 잘 성사되겠습니까?”
  “그러기에 조심해서 일을 거사해야지요.이거 보십쇼...”
  남곤은 바싹 홍경주의 앞으로 다가앉자,입을 홍경주의 귀에 대었다.
  무슨 소린지 한동안 소근댄다.홍경주의 얼굴빛이 긴장해졌다가 풀어졌다
가 한동안 지낸 뒤에,경주의 입은 벌어지면서 기쁜 빛이 얼굴에 가득했다.
  남곤이 다시 물러앉는다.
  “인제 터득이 되셨습니까?”
  남곤은 미소를 풍긴다.
  “시키는 대로 해보오리다.”
  홍경주가 이렇게 대답을 했을 때 심정은 상노한테 들려서 가져온 금은보
화를 싼 보를 끌렀다.
  “이것을 안에 바치도록 하십시오.”
  안이란,대궐 안을 말하는 소리다.홍경주의 입이 떡 벌어진다.
  남곤은 다시 목소리를 나직하게 해서 말을 한다.
  “따님 희빈께서는 지금  왕자를 세분이나  두셨습니다.지금 장경왕후의 
소생 원자가 있다 하나,모후께서 돌아가시고  새로이 왕비가 들어오셨으니 
앞으로의 정세가 어찌 될지 모릅니다.우리는 시세를 바라보면서 따님 희빈
의 소생으로 세자를 책봉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그러나 선비들 조광조
의 일당이 조정에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그들은 삼강오륜을 내세워 가지고 
적서를 가리는 통에 희빈 아드님으로는 세자를 봉하려 들지 아니할 것입니
다.우리는 조광조를 없이한 연후에 따님의 아드님으로 세자가 되시도록 공
작을 하겠습니다.그렇게 된다면 대감께서는 장차  임금의 외조부가 되십니
다.알아들으시겠습니까?”
  앞으로 딸이 왕비가 되고 외손자가 임금이 되고,자기는 임금의 외조부가 
된다는 바람에 무식한 홍경주의 마음은 단박 주책없이 쏠려 버렸다.
  “그럼,이 물건은 곧 대궐 안으로 들여보내오리다.”
  홍경주는 손수 금은보화를 거두었다.
  “아까 말씀 드린 일을 조금도 소루하게 처리해서는 아니 됩니다.차근차
근 면밀하게 일을 차려 주십시오.”
  “염려 마시오.나도 낫살 먹은 놈인데,그리구 참 일전에 두  분께서 보내 
주신 베 한 통과 무명 한 통도 대궐 안으로 들여보내서 궁녀들한테 나누어 
주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대감이 쓰시라고 저희들이 보내드린 것인데.”
  “아니 천만에.대감들의 일이 곧 내 일이요  내일이 곧 대감들의 일인데 
내가 그것을 쓰다니 말이 되오?”
  “아무렇게나 처분껏 조처하십시오.”
  소인의 마음들은 서로서로 비쳐졌다.
  남곤과 심정은 홍경주와 작별한 뒤에 남곤은 다시 박빈에게 연락을 취하
러 간다고 심정과 손을 나누었다.
  남곤과 심정들의 음모가 이렇게 진행이 되는 줄을 까맣게 모르는 조광조
는 날마다 사헌부와 대궐로 입직을 했다.
  이때 정부의 언론을 맡은 간관과 풍기를 맡은 헌관과 사기를  맡은 문사
들은 모두 다 조광조가 현량과에서 뽑아 내고 천거해 올린  유림의 대표와 
젊은 선비들이었다.
  그들은 조광조가 대사헌이 되어 임금의 신임을 더욱 받게 되는  것을 보
자 이번엔 반정공신들의 삭훈을 주장했다.연산군을 폐위 시키고 지금의 상
감을 모신 공로로 공신의 칭호를 받은 사람들의 벼슬을 함부로  남발해 주
었으니 이것을 깎아버리자는 것이다.당시의 소인  유자광은 무식한 박원종
을 속이고 자기 아들과 공신의 아들들을 공신으로 집어넣었다.선비들은 이
것을 바로잡지 아니하면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젊은 소장파들은 날마다 여론을 일으켜서 대사헌 조광조를 졸라댔다.
  “나라의 공신이란 것은 천추에 내려가는  빛나는 공훈입니다.실지에 어
그러지고 남발된 공신이 있다면 이것은  국가의 수치일 뿐 아니라  풍기가 
문란해지는 일입니다.정암 선생께서 상감께 아뢰어 이 일을 바로잡지 아니
하시면 아니 되십니다.대사헌으로 계신  동안에 기어코 이  일을 바로잡아 
놓으셔야만 합니다.”
  “반정공신들의 공을 기록한 사람은 소인 유자광이올시다.유자광이란 자
는 연산조 때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우리들 선비들을 박해하고 우
리들의 스승 점필재,김종직  선생과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며 탁영 김일손 
선생님들의 관을 뻐개고 귀양을 보내고 비명횡사를 시켰을 뿐 아니라 공적
의 정도를 유린 시켜서 짓밟았던 간특한 자이었습니다.이자들이 자기의 자
식과 결지들을 위하여 함부로 공신이라구 만들어 놓은 이것을 그대로 덮어
둔다면 선생님이 주장하시는 왕도 정치란 하늘의 별을 따기 보다도  더 어
려울 것입니다.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이번에 바로잡아 놓으셔야 합니다.”
  신진 기예한 젊은 사람들의 여론은 날마다 높아 갔다.
  “조광조 선생도 틀렸어.대사헌이 되더니 슬슬 몸을 빼 돌고 이런 큰 문
제를 해결하지 못한단 말야.벼슬 지위가 높을수록  나라일을 잘해야 할 텐
데,인제는 몸을 사려서 바른말도 못 한단 말야.”
  “선비라는 것이 바른 일을 행해 보려다가 되지 않는 때는  벼슬을 버리
고 조정에서 물러나는 것이 당연하지,무슨 짝에 벼슬자리에 연연해서 나라
의 공밥을 먹고 앉았는 거야.”
  “나는 조광조를 탄핵해 버리려네.조광조란 헛된  이름만 가진 사람에게 
대사헌을 내놓으라고 그래.공신 편으로 변한  조광조는 우리들 왕도정치를 
단행하려는 선비들한테는 필요가 없다.”
  새파란 젊은이들은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천둥 벌거숭이격으로  날뛰었
다.이제는 조광조를 평하기 시작까지 했다.이러한 모든 소리는 조광조의 귀
로 들어갔다.조광조는 미소를 풍기며 제자들을 타일렀다.
  “공신이 남발된 일은 나도 잘 아는 일이니 언제든 위에  아뢰어 바로잡
을 날이 있을 것일세.잠깐 때를 기다리게.”
  그러나 젊은 선비들의 조급한  여론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두  달,석 
달을 두고 여전히 떠들썩했다.
  대사간 이성동과 홍문관 부제학 김구는 대사헌 조광조를 찾았다.모두 다 
정암 조광조의 동지요 지기였다.
  “정암,젊은 사람들의 여론이 대단합니다.너무들 조급하게 굴어서 탈이지
만 말은 옳으니,기회를 보아 상감께 여쭙고 일을 단행해 봅시다.”
  대사간 이성동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도 빨리 이 일을 위에 아뢰어  바로잡고 싶으나 십 년 묵은  뿌리가 
용이하게 뽑아질 것 같지 아니하오.공신들의 뒤에는  상감의 꽃 같은 후궁
들이 병풍처럼 둘러싸 있는 것을 알아야 하오.”
  정암 조광조는 추연히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착한 일을 지향해 나가자면 악한 무리와  싸워야 하는 것이구,악한 무
리와 싸우자면 몸을 돌아볼 수 없습니다.대사헌과 대사간 두 분이 앞을 서
서 아뢰신다면 대가 있는 홍문관에서도 들고일어나 아뢰오리다.두 분은 먼
저 말씀을 아뢰시오.젊은 사람들의 기운을 꺾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부제학 김구도 이렇게 주장했다.
  “그러면 내일 경연 자리에서 단행해 아뢰기로 결정합시다.”
  세 사람은 단단히 약속을 한 뒤에 헤어졌다.
  이튿날은 기묘 시월 이십일 을유였다.대사헌  조광조와 대사간 이성동은 
경연자리에 나가 전하께 서면으로 합서를 올렸다.
  “삼가 성상께 아뢰옵니다.나라를 바로잡은 정국  공신들 중에는 머리카
락만한 공로가 없으면서 칠십  여 명이 공신으로  되어 있습니다.이것들은 
모두 다 명리를 탐내서 거짓 공신으로  적어 놓은 때문입니다.아무리 녹훈
한 지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하오나 공이 없으면서 거짓 녹훈이  된 자
들은 모두 다 깎아 버려야 할 것입니다.이것은 당시에 소인 유자광이 그의 
자질과 인아족척들을 귀하게 만들려 하여,이러한  천추만대에 죄받을 짓을 
감행했습니다.지금 전하께서는 밝은 정치를 하시는 중이온데 이런 일을 바
로 잡지 아니하신다면 국가의  체면을 유지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이등과 
삼등공신 속에 부정한 일이 있사옵고,사등공신이란 자들은 한 사람도 공이 
없이 공신이 된 무자격자들이오니 사등의 전체 오십 여 명은  모조리 공신 
칭호를 없애 버려 주시옵소서.지금 간관과 헌관 일동은 전하께옵서 면대하
심을 허락해 주신다면 하정을 터놓고 아뢰겠다 하옵니다.”
  신임하는 대사헌 조광조와 대사간 이성동의 합사 장계를 읽는 전하는 반
정공신이 거짓으로 공신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자 깜짝 놀랐다.더욱이 부정
한 그 수가 오십 명,육십 명이라 하니 기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대사헌과 대사간이 올린 합게는 나라의 중대한 일이다.간관과 대간 일
동은 사정전으로 빠짐없이 모여 입대하라.”
  전하는 지체 없이 분부를 내렸다.
  이윽고 전하는 옥교를 타고 사정전으로  임어하니,대사헌 조광조와 대사
간 이성동은 제각기 간관과 헌관들  일동을 거느려 어전에 재배를  올리고 
제각기 시립해 섰다.헌관의 장인  대사헌 이외에 헌관 일동과,간관의  장인 
대사간 이외에 간관 전원이 합동해서 어전에 입대를 드린다는 일은 예로부
터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일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사헌
부와 사간원의 전원 입시는 조정과 궁중의 크나큰 충격과 주목을 끌었다.
  전하는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고 백옥홀을 쥐어 용상에 단정히 앉은 뒤에 
모든 신하들을 굽어보며 묻는다.
  “아까 대사헌과 대사간이 올린 합사를 보니 정국공신 중에 아무런 공도 
없이 거짓 훈을 탄 사람들이 오륙십  명이나 된다 하니 크게 놀라운  일이
다.경들은 은휘하지 말고 아는 대로 자세히 말하라.”
  이때 전하의 얼굴빛도 매우 긴장되었다.
  조광조는 금관조복으로 어전에 추창해 나가 아뢴다.
  “공신을 봉한 일은 벌써 십여 년 전의 오랜 일이오나 전하를 속여서 위
훈을 만들어 놓은 일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국가의 위신을 떨어뜨릴 뿐 
아니오라 만대의 치욕거리가 되는 것이옵니다.”
  조광조의 말씀을 듣자 전하는 입을 열었다.
  “그때도 대신들이 있고 공신들이 있는데,당연히  물론이 있어서 공신을 
정했을 것인데,어찌해서 오륙십 명 템이나 위훈을 만들어 왔는지 의심스러
운 일이다.확실히 거짓이 많다고 생각하는가?”
  전하의 말소리는 또렷또렷했다.
  조광조는 언성을 부드럽게 하여 아뢴다.
  “당시의 재상으로는 성희안과 박원종이었습니다.그러하오나 공 주는 일
을 도맡아 한 사람은 유자광이었습니다.이런 까닭에 위훈이 생겨난 것이옵
니다.”
  사간원 정언 김익이 조광조의 뒤를 이어 어전에 엎드렸다.
  “유자광이란 자는 불학무식한 무령군이란 호반으로 항상 소인의 이름을 
듣는 자옵니다.자기의 자질들을 공신 틈에 집어넣으려  하여,먼저 성희안과 
유순정의 아들과 조카들이 이름을 공신 속에 적어 놓았습니다.이러하니 성
희안,유순정 등 재상들은 자기  자식의 이름이 있는 때문에  보고도 못 본 
체 슬몃 넘겨 버렸습니다.”
  이때 조광조는 김익의 증언이 있은 뒤 더한층 신명이 났다.
  “전하 보옵소서.막중 국가의 공신을  정하는 일에 사사로운  자기 일을 
하여 이러한 공평치 못한 추한 일을 범했습니다.이것은 사람이 모두 다 부
귀공명으로만 마음이 휩쓸려서 자기만 이롭자는 데서 나왔습니다.전하께서
는 왕 천하는 도를 가지시어 지금 민심을 바른 길로 지도하고 계십니다.이
때 이 이로운 곳으로만 흘러 가려는 사람의 마음을 쾌하게  끊으시어 엄하
게 삭훈하라는 영을 내려 주십시오.만일 이  일을 그대로 덮어두신다면 이 
세상에 누가 부귀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도둑질을  해서라도 
부귀영화를 탐하려들 것입니다.오늘날 쾌하게 바로잡지 아니하신다면 다시
는 고칠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조광조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로운데로 달아나는 악한 마음을,이 일을 기
회로 하여 바로잡아 놓아야 한다고 도의론을 들어 강경히 주장한다.
  조광조의 말이 떨어지니 대사간 이성동이 어전으로 추창해 아뢴다.
  “박원종과 성희안은 연산주를 폐하여 나라를 바로잡는 일을 시작했으니 
그들은 당연히 일등공신의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그러하오나 사등
공신이 된 사람들의 이름을 훑어본다면 그들의 아들과 조카와 사돈의 팔촌
까지 모두 공신으로 되어 있으니 이렇게 공신이 흔해 빠질 수가 있습니까?
선비들은 이런 추대를 보고 분함을 못  이겨 울분해 하고 있습니다.일등공
신만은 그대로 두고,이등 삼등에는  정상을 보아 몇 명만  깎고,사등공신은 
공신이 아니라 공신들의 일가이오니 전체로 깎아 버리시옵소서.”
  이성동의 말이 떨어지자 조광조는 다시 용안을 우러러 바라보며 아뢴다.
  “이등과 삼등 속에도 강혼 같은  사람은 글재주가 있으나 극히  간사한 
사람이옵고,유순 같은 사람은  반정이 일어날 때  재상으로 있으면서 겁이 
나서 벌벌 떨던 일은 지금도 사람들이 모두 웃고 있사온데  엄연히 이등공
신으로 되어 있고,구수영은 연산 때 채정사,채홍사가 되어 팔도강산에 아름
다운 미녀를 뽑아 들여  흥청,운평을 만들어 놓고 폐주  연산의 악한 일을 
부채질해 돕던 자온데  이 자가 이등공신이  되었삽고,대신 성희안의 아들 
성율은 나이 겨우 열 일곱 살이  온데 젖내 나는 어린애가 국가의  원훈이 
되었으니 이런 기막힐 일이  어디 있습니까?지금 사등공신 속에서  대신과 
재상의 아들과 일가라 해서 공신이 된 자가 삼십 여 명이요,유자광에게 뇌
물을 바쳐서 공신이 된  자가 오륙 명이요,내관으로 공신이  된 자가 칠팔 
명이요,대신의 압력과 위세로 공신이 된 자가 서너 사람이나 됩니다.참으로 
기막힌 일이올시다.개국공신에 다음가는 정국공신의 소중한 칭호를 뇌물을 
받고 내주다니 말이 됩니까?공신도 뇌물로 되는 것입니까?”
  조광조의 아뢰는 말씀은 싸늘하게 차가운 얼음장 같았다.
  뇌물 주고 공신이 되었다는 소리에 전하의 얼굴엔 노기가 띠어졌다.
  “어느 놈이 뇌물을 주고 공신이 됐단 말이냐?”
  전하의 옥음은 떨렸다.
  “평안도 사람 최유정은 잘 두루마기를 유자광이한테 보내고 사등공신이 
되었습니다.”
  “장한공이란 자도 뇌물을 바치고 공신이 되었습니다.”
  대사간 이성동이 조광조의 뒤를 받친다.
  임금은 한동안 잠자코 무엇을 생각하다가,
  “이미 정해 놓은 공을 뒤에 고치기란  심히 어려운 일이다.아직 거론하
지 말고 물러가들 있으라.”
  임금의 생각은 소란을 떨어서  다시 뜯어 고치기가  싫었던 것이다.이쯤 
말해놓고 자리에서 일어날 뜻을 보인다.
  이 모양을 본 젊은 신하들은 당장 전하의 허락을 받으려 했다.사헌부 장
령 벼슬하는 김인손이 앞으로 나섰다.
  “이러한 망유기극한 일은 소인 유자광이 짓인 것을  전하께서도 통촉하
셨으니 빨리 허락을 내려 주십시오.”
  임금께 어서 허락을 내리라 졸라댄다.
  사헌부 장령 김인손이 임금을 졸라대니 사헌부 지평 조광좌도 앞으로 나
섰다.
  “전하!밝은 정치를 하시려는 이때,용단을 아니 내리신다면 뒤에 오는 폐
단이 지극히 많은 것입니다.어서 빨리 허락을 내려 줍시오.”
  사헌부 집의 벼슬하는 박수문도 어전 앞으로 나섰다.
  “지금 전하의 성스러운 학문이 높고  밝으신 터에 이러한 허위  사실을 
덮어두실 수는 없습니다.아주 오늘로 용단을 내려서 삭훈을 하라고 허락을 
내려 주십시오.”
  젊은 신하들은 임금이 등에 진땀이 나도록 간한다.
  옆에 있던 승지 박훈도 어전에 아뢴다.
  “지금 대사헌과 대사간 이하 모든 간관이 아뢰는 일은 이들의 사사로운 
의견이 아니오라 나라의 국론이옵니다.쌓이고 쌓였던  국론이 이제 발로가 
되어 아뢰는 것이오니 성상께서는 의심하지 마시고 빨리 허락을 내려 줍시
오.”
  승지 박훈은 호를 강수라 했다.그는 현량과에  뽑힌 사람으로 어진 사람
의 이름을 받았다.벼슬이 간관이나 헌관은 아니라  하나 임금을 지척에 모
시어 어명을 받는 승지인 까닭에 이렇게 바른말을 올리는 것이었다.
  전각에 가득히 모인 젊은 신하들은 모두 다 조광조와 한마음 한 뜻이 되
어 임금에게 빨리 허락을 내리기를 청했다.
  전하는 약간 불쾌한 기분이 마음속에 움직였다.전하는 대답이 없이 슬며
시 용상에서 일어났다.두어 시간 이상을 두고  지루하게 떠들어대니,머리도 
아프고 몸도 피로했다.
  내시는 봉미선을 들고 전하를  모시어 내전으로 물러난다.누구  한 사람 
감히 전하의 곤룡포 자락을 잡아 간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양연히 일어나  전하의 뒤를 따라  추창해 쫓았다.다만 
나라 정치를 바로잡아 보자는 한 조각 붉은 마음이 있을 뿐 털끝만한 사심
이 없었다.
  전하는 힐끗 뒤를 쫓는 대사헌 조광조를 돌아다보시었다.
  “전하!당시의 일등공신으로는 지금 홍경주 단 한 사람이 살아 있사옵니
다.자세한 일을 홍경주한테 물으시면 소상히 말씀하오리다.”
  지금 자기의 뒤에서는 남곤과 심정이 홍경주를 매수해 놓고 홍빈에게 손
을 뻗쳐서 조광조 이하 헌관과 대간들이 공신을 삭훈하자는 의논을 두들겨 
부수라는 음모를 꾸미고 잇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조광조는 곧이곧대로 이
렇게 말을 올렸다.기막히게도 어진 사람이었다.
  전하는 미연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조광조가  물러난 뒤에 무예청들
은 전하의 옥교를 어깨에 메었다,
  “어디로 모시오리까?”
  내시가 아뢰었다.
  상감의 머리에는 조광조가 마지막으로 아뢰었던 홍경주가 머리에 떠올랐
다.
  “홍빈의 처소로 자비를 대어라.”
  상감의 옥교는 홍경주의 딸인 홍빈의 처소로 향했다.
        여인천하 (중)
박종화


    온유지향
  부용당 아늑한 홍빈의 처소에는 무예청들의 시위 소리가 일어났다. 희빈 
홍씨는 시녀를 거느리고 황망히 뜰 아래로 내려서 전하를 맞았다. 
"상감마마, 행차합시오." 홍빈은 말을 마치자 꽃보다도 더 아름다운 웃음을 
풍기며 화사한 흰 손길을 늘이어 상감의 겨드랑이를 껴안아 부액을 해 
올린다. 훈훈한 향기가 전하의 코를 스쳤다. 홍빈에게만 느낄 수 있는 
언제나 싫지 않은 아름다운 향기였다. 홍빈의 보드라운 손길이 전하의 
겨드랑이에 따스한 감촉을 주면서 전하의 마음을 풀솜처럼 부드럽게 
녹였다. 온종일 조광조 이하 헌관과 간관 이하 여러 선비들한테 졸려대던 
터분한 머리가 운권청천이 된 듯 거뜬하고 가벼웠다.
  "부용당으로는 한동안 임어를 안 하시더니 오늘은 서편에서 해가 떴나 
보옵니다."
  시녀들이 물러가고 방 속에서 전하와 홍빈이 미소를 풍겨 서로 대했을 
때, 홍빈은 얼굴에 보조개를 지으면서, 이렇게 도란거렸다. "네가 시샘을 
하는 거냐?" "샘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여 그렇소이다. 어느 날 
어느 땐들 소녀의 마음에 전하께옵서 아니 계신 때가 있사오리까." 희빈 
홍씨는 맑은 눈에 또 한 번 웃음을 흘려서 하소연하는 듯 전하를 
바라다본다. 전하는 취한 듯 홍빈의 얼굴을 건너다본다. 삼십대로 접어든 
홍빈의 얼굴은 이십대 적 홍빈보다도 더 한층 아름다워 보였다. 살갗은 
더욱 기름지고 윤이 흘렀다.
  "중전에서 납시었습니까?"
  홍빈은 지금 전하가 사정전에서 자기의 처소로 임어한 것을 빠하게 알고 
있으면서, 짐짓 화살을 중전한테로 쏘아 임금의 마음을 흔들어 보는 
것이었다. "중전? 중전이라니, 요새는 중전에도 편안히 앉아 볼 틈이 없다. 
조강과 석강을 하느라고 밤낮 경연 자리에만 나가 앉게 되었다." 전하는 
뱉듯이 대답했다.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옥체를 보중하옵시오. 아침 저녁으로 경연 자리에만 나가 앉으시면 
피로하시어 어찌하십니까? 춘추가 삼십이 넘으신 전하께서 너무 공부를 
하십니다." "공부하는 것은 좋다만 그놈의 선비들이 고집이란 참으로 
지독한 것이거든. 그것들이 한참 우셔댈 때는 고만 등에 진땀이 나고 
골치가 지근지근 아프단 말야."
  전하는 아름다운 홍빈을 앞에 앉히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이 행복스런 
순간을 무한히 아끼고 싶었다. 전하는 한숨을 한번 가볍게 쉬면서 안석에 
의지하여 다리를 쭉 편다. "용안이 몹시 피로하신 듯하옵니다. 화채를 타 
올리오리까?" "아아, 입술이 타는 둣하다. 서늘하게 마실 것이 있거든 
가져오너라." 홍빈은 날렵하게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더니 이윽고 불그레한 
오미자 화채를 은그릇에 담아 황금 쟁반에 받쳐 가지고 들어섰다. 홍빈은 
무릎을 꿇고 은대접을 화사한 흰 손으로 받들어 전하의 입가에 대었다. 
오미자의 아름다운 액체가 촉촉히 전하의 타는 듯한 입술을 추켜 주었다. 
 "그러기에 딱한 일이다. 그래서 얼른 허락을 아니 했더니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통에 내가 입술이 타고 진땀을 흘렸다." 임금은 또 한 번 
염증이 나는 듯 한숨을 쉬었다. "조금 누우십시오. 잠깐이라도 옥체의 
피로하신 것을 푸시옵소서." 홍빈은 화채 쟁반을 옆으로 물리고 전하를 
편안히 보료 위에 눕게 했다. 의대 위에는 가볍고 따스한 약과문의 잘 
천의가 덮여졌다. 전하는 몸을 편하게 하여 홍빈이 덮어 주는 잘 천의 
속에 안일하게 누워 본다. 홍빈의 부드러운 손길이 잘 천의 위로 전하의 
무릎과 다리를 주물러 댄다. 전하의 뼈끝은 속속들이 노그라지는 듯 
시원했다.  "선비들이 무슨 일을 하시라구 강박을 했기에 전하의 입술이 
이토록 타시었습니까? 무엄한 자들이옵니다." 홍빈은 전하가 마시는 
은대접을 입술에서 잠깐 떼었다가 이렇게 아뢰고 다시 입가에 대어 준다. 
전하는 목이 타는 듯 한 모금을 더 마시었다. "반정공신들의 벼슬을 
깎으라고 한단다." "웬일이오니까?" 홍빈은 소스라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공 없는 사람들이 공신의 표창을 받았다구." "전하를 위하여 
목숨을 내걸고 반정한 사람들의 공을 어떻게 전하의 손으로 깎으십니까? 
그리구 공신 칭호를 내리신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구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온데 선비들은 오늘 와서 공신의 칭호를 깎으라고 합니까?" 
  홀연 홍빈의 눈시울에 안개가 일어나며 구슬 같은 눈물이 두어 방울 
떨어졌다. 유열 속에 파묻혀서 눈을 스르르 감았던 전하가 우연히 눈을 떠  
보니, 홍빈의 아름다운 눈에는 눈물 흔적이 비쳤고 명랑하던 얼굴엔 
시름이 안개 끼듯 서렸다. "웬일이냐? 우느냐?" 전하는 누워서 홍빈을 
바라보며 묻는다. "아니올시다." "아니라니, 눈엔 눈물 흔적이 완연한데?" 
"제 신상을 생각하고 우연히 눈물이 서렸는데, 황공하옵게도 전하께서 
보시고 물으시니 죄송하기 그지없사옵니다." "네 신상이 왜 어떻다 
하느냐? 내가 이렇게 너를 잊지 않는데, 그리고 너한테는 아들과 딸이 
많지 않으냐?"
  "전하께서 소녀를 사랑하시고 아들, 딸이 많을수록 제 신상이 
딱하옵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소리로구나. 어서 말을 해봐라. 
갑갑하다." "선비들이 공신들을 폄하고 공신들의 벼슬을 깎으라 한다 
하오니, 제 아비 홍경주도 명색이 공신이라 선비들의 손에서 결딴이 날 
테니 소녀의 신상이 탈이 아니오이까?" 홍빈의 눈에서는 연해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전하는 벌떡 일어나 용포 속에서 눈빛 같은 흰 수건을 꺼내 
홍빈의 눈시울을 부드럽게 닦아준다. "염려 마라. 조광조도 네 아비 
홍경주의 벼슬을 깎으라고는 아니 하더라. 도리어 그 때 일을 아는 
일등공신은 네 아비 한 사람이 세상에 남아 있을 뿐이니, 네 아비한테 
물어 보라고 말하더라." 홍빈은 눈물 흐르는 얼굴을 전하한테 맡겼다. 
임금의 수건이 홍빈의 뺨을 닦아 줄 수록 눈물은 멎지 않았다. 전하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염려 말래두 그러는구나." "상감마마, 조광조가 제 아비의 벼슬을 
깎으라구 아니 하는 것은 제 아비가 예뻐서 그러는 것이 아니옵니다. 먼저 
다른 공신들의 공을 깎고 그리고는 서서히 제 아비의 공도 깎으려는 
배짱입니다. 조광조도 홍경주는 후궁 아무개의 아비란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먼저 소녀의 마음을 안심시켜 놓고 모든 공신들의 벼슬을 깎은 
뒤에 아비의 벼슬은 나중에 깎으려 할 것입니다. 소녀의 아비보고 
하문하시라는 것도 모두 다 그 자의 쾌사올시다. 조광조는 전에도, 제 
아비에게 찬성 벼슬을 시키신 것을 호반이 무슨 놈의 찬성이냐구 들고 
일어나 막아 대지 않았습니까? 상감마마께서도 기억하시오리다."
  홍빈의 눈물을 씻어 주는 전하의 손수건은 물초가 되어 흠씬 젖었다. 
홍빈의 눈물은 여전히 흘렀다. 임금은 손수건을 버리고 옥잠을 꽂은 
홍빈의 검은머리를 끌어안아 용포 자락으로 홍빈의 눈시울을 닦아 준다. 
눈물을 머금어 하소연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얼굴은 젊은 임금의 
눈에는 하얀 이화가 봄비에 젖은 듯 도리어 풍정 있게 보였다. 임금의 
뺨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 머금은 여인의 이화꽃 뺨에 닿았다. 
처근하고도 따스한 뺨이었다. 검은 살색과 흰 볼에는 향훈이 안개마냥 
일었다. 전하는 더한층 가련하다 생각했다. 용포 소매 속에서 어수를 
드러내어 이화꽃 홍빈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들어 고이 바라본다. 눈과 
눈이 마주친다. 기름한 여인의 속눈썹엔 아직도 이슬이 맺혀졌다. 호수 
같은 여인의 눈은 소리 없이 하소연을 계속한다. 전하는 또 한 번 용안을 
향기로운 뺨에 살포시 대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홀연, 아름다운 홍빈의 붉은 입술이 전하의 눈 아래서 곱게 움직였다.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 소쩍새 소리보다도 더 심란한 홍빈의 목소리였다. 
"염려 말래두 그러는구나." 전하는 또 한 번 강하게 홍빈을 껴안는다. 
"허락을 내리셨습니까?" "무슨 허락을." "공신들의 벼슬을 깎으라고 허락을 
내리셨느냐 말씀입니다."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냐?" "그러면 아직도 
허락을 아니 내리셨나이까?" "네 아비한테 한번 물어 보고 처사를 하련다." 
"조광조가 아무리 제 아비보고 하문을 하신 뒤에 일을 결정하시라 해도 
조광조를 너무 믿지는 마옵소서. 조광조는 당파를 만들고 있습니다." 
"당파?" 임금은 깜짝 놀란다. "그러하옵니다. 조광조는 당파를 지어서 
조정의  권세를 자기네들끼리만 잡으려 한다 합니다." "어디서 들었느냐?" 
"궁중 안에 궁녀들이 모두 다 이야기하고, 무예청 별감, 내시들......모르는 
사람이 없사옵니다." "그럴 리가 있나? 어진 일을 해서 왕도정치를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인데......" 전하는 아직도 조광조를 믿었다. "왕도정치란 
방패로 내세운 것뿐입니다. 그들은 자기 당파가 하는 일이 아니면 모조리 
훼방을 놓아 못 하도록 만들지 않습니까?" "당파란 
누구들이라더냐?""현량과에 뽑혀서 나온 사람들이 모두 다 조광조의 
당파가 아니옵니까?" "선비들이지, 당판가?" 
  "전하께서는 참으로 어지신 성군이십니다. 아까 사정전에서 듭실 때도 
선비들의 등살에 몸이 피곤하시어 진땀이 흐른다고 하시더니 금방 
잊으셨습니까? 우겨대는 그 행동이 당파를 지어서 저희들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까? 보십쇼, 조광조는 맨 먼저 선비들을 끼고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라고 우겨대지 않았습니까? 조정 여론이 두 갈래로 
벌어지니 전하께서는 선비 두 사람을 귀양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언론을 막아서는 아니 된다고 떠들어서 결국 두 사람을 풀어 놓지 
아니하였습니까? 조정 여론이 두 갈래로 벌어지니 전하께서는 선비 두 
사람을 귀양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언론을 막아서는 아니 된다고 
떠들어서 결국 두 사람을 풀어놓지 아니하였습니까? 조광조는 전에 없던 
현량과 라는 과거를 만들어서 어진 사람입네, 착한 사람입네 하고 저희 편 
사람들만 뽑아서 글 읽으시는 경연 자리를 만들게 하고 그들에게만 자꾸 
벼슬을 높여 주게 하지 않았습니까? 조광조는 몇 천년 내려오는 이 나라 
불교도인 착한 중들을 모두 다 몰아 내쫓아 버리지 않았습니까? 조광조는 
선조 떼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삼청동 삼청전에서 군왕의 명복을 빌어 제사 
지내는 일을 못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모두가 자기만이 옳고 남이 하는 
짓은 그르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전하를 모시어 임금이 되게 한 
공신들마저 없애 버리려하여 공신들의 벼슬을 깎으려 듭니다. 저희들 
혼자만 정권을 잡으려는 욕심이라 합니다."
  총명한 홍빈이었다. 임금의 무릎에 안긴 채, 조광조의 지나간 정치 
활동을 모조리 들어 도란도란 반박을 한다. 홍빈의 말을 조목조목 임금이 
가만히 듣고 보니, 왕도 정치를 하기 위하여 자기를 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치 세력을 심어 놓기 위하여 당파를 세우고 다른 세력들을 
탄압하고 있다는 것도 일리가 있는 듯이 생각됐다. 전하는 홍빈을 안은 채 
마음이 다시 우울해졌다. 날렵한 홍빈이었다. 잽싸게 전하의 우울한 
얼굴빛을 알아차렸다. "공연히 경연 자리에 아침저녁으로 나가지 
마시옵소서. 몸만 피로하시고 실상인즉 조광조의 장단에 전하께서는 넘어 
가시는 것입니다." 홍빈은 말을 마치자 불구슬빛 같은 자주 공단 저고리 
화려한 소매를 늘여 부드러운 흰 손으로 전하의 목덜미를 껴안는다. 
훈향이 미풍을 지어 일어나면서 전하의 코를 더 한 번 엄습한다. "그것, 
소명한 것, 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꼭두각시놀음을 할 뻔했구나."
  전하는 용포의 팔을 늘여 홍빈의 남치마 두른 허리를 껴안는다. 한동안 
유열의 시간이 흘러갔다. 전하는 홍빈을 무릎 앞에 내려놓았다. "벼루를 
가져오너라." 홍빈은 부용당 윗목에 놓인 아담한 화류 연상을 받들어 
어진에 공손히 놓은 뒤에 백옥 화판 화류 벼루뚜껑을 열고 황옥 수적의 
물을 벼룻돌에 똑똑 떨어뜨린 뒤에 당채색을 칠한 수양매월 해주먹을 
가볍게 문질렀다. 벼룻돌에는 오색이 찬란한 먹기름이 구름 일 듯 일었다. 
전하는 서한에 전주 분백지 두루마기를 펼치고 필통에서 무심장봉을 꺼내 
들고 어찰을 쓴다. "지금 조정에서는 조광조 이하 모든 신하들이 반정 
당시에 논공행상을 할 때, 공 없는 사람이 거짓 공신이 됐다 하여 공신 
칭호를 깎아 내리자는 것이다. 당시의 일등공신으로 큰일을 한 사람은 
오직 경이 남아 있을 뿐이다. 목도한 대로 사실을 적어 올리라."
  왕은 쓰기를 마치자 피봉에 수결을 두고 홍빈한테 주었다. "이 편지를 
대전별감한테 줘서 너희 아버지한테로 내보내게하고 곧 답장을 받아 
오라." 홍빈은 어찰을 받들고 나가 상궁에게 전하고 상궁은 내시를 통하여 
대전별감을 불렀다. 홍의에 초립을 쓴 대전별감은 상궁한테 어찰을 받았다. 
"상감이 내리시는 어찰이오, 빨리 남양군꼐 전하고 봉서답장을 받아 
오라는 처분이 계시오." 상궁의 설명을 들은 대전 별감은 전하의 어찰을 
품에 간직한 다음 홍의 자락을 바람에 흩날리며 궐문 밖으로 나섰다. 이때 
남양군 홍경주는 남곤, 심정과 밀모를 의논한 뒤에 자기 딸 희빈한테 남곤, 
심정이 보내는 금은보화를 들여보내고, 조광조를 헐어서 말씀 아뢸 것을 
부탁한 뒤에 궁주의 동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곤과 심정은 날마다 
홍경주의 집에 모여서 동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바깥 사랑에서 
청지기가 들어왔다.
  "대감, 대전별감이 대궐에서 나왔습니다." "대전별감이? 들어오라 
일러라." 남곤, 심정, 홍경주 세 사람의 얼굴엔 희색이 만면했다. 이윽고 
홍의를 떨쳐 입은 대전별감이 창 앞에 서자 어찰을 홍경주에게 전했다. 
"곧 답 봉서를 받아 오라는 처분이 내렸소이다." "그러한가? 바깥 사랑에 
잠깐만 기다리게. 곧 봉서를 써서 올리도록 할 테니." 홍경주는 어찰을 
받아 펴 보기 시작했다. 남곤, 심정도 머리들을 디밀고 어찰을 살펴본다. 
"자, 대감, 되었소. 어서 답 봉서를 쓰시오. 절대로 가짜 공신을 봉한 일이 
없다고만 하시오. 성희안의 아들이나 유순의 아들이 사등공신으로 된 것도 
아버지 일을 아들이 도와서 공신이 된 것이라고 아뢰어 쓰시오." 심정은 
연상을 들여다보고 남곤은 먹을 갈았다. 홍경주는 답장을 쓰기 시작하였다. 
  "하문하신 봉서에 대하와, 삼가 아뢰오. 공신들은 한 사람도 거짓 공신이 
없는 줄 아뢰오. 이 신이 전하를 위하여 반정을 일으킬 때, 모두 다 
목도해서 본 일이옵니다. 일등공신이나 이등공신의 아들이 사등공신이 된 
것은 그의 아버지를 도와서 아들들이 의거를 일으킨 까닭이옵니다. 조광조 
이하 선비들은 그때 사실을 알지도 못하옵고 공연한 소란을 떨고 있사오니 
한심한 노릇이옵니다." 홍경주는 쓰기를 마치고 남곤과 심정한테 답 
봉서를 돌려보였다. 심정과 남곤은 만족했다. "좋소이다." 하고 찬동하는 
뜻을 표했다. 홍경주는 풀로 봉서를 봉한 뒤에 친히 바깥 사랑으로 나가서 
대전하고 청지기한테 일렀다. "별감을 잘 대접했느냐?" "안에 말씀드려 
약주를 한 잔 대접했습니다." "잘먹었습니다." 대전별감은 홍경주 대감을 
보고 치사를 올린다. "노자나 주어서 들여보내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홍경주가 또 사랑으로 들어간 뒤에 청지기는 별감의 속 
허리띠에 엽전 꾸러미를 넌짓 찔러 주었다.
  임금은 대전별감이 올리는 홍경주의 답 봉서를 받아 읽었다. 마음은 
차차 조광조에게서 떠나기 시작했다. 이날 밤 홍빈은 전하를 모시어 
지냈다. 이튿날 전하가 외전으로 납시려 할 때 홍빈은 또다시 속삭였다. 
"전하, 옥체를 평안하게 보중하시옵소서. 너무 경연에 나시는 것도 머리에 
해롭습니다." 홍빈은 조광조와 전하가 자주 만나지 않도록 이렇게 훼방을 
놓았다. 한편으로 대전별감 편에 답 봉서를 들여보낸 홍경주의 사랑에서는 
남곤, 심정, 홍경주 세 사람이 다시 의논을 계속한다. "내일쯤은 
남양군께서 대궐로 들어가시어 따님을 만나 보시고 지난번에 우리들이 
의논했던 그 일에 곧 착수를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남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차차 때가 익어 가니 일을 곧 단행해야 합니다." 심정도 말참견을 
했다. "나는 이목이 번다하므로 우리 딸 희빈한테 몸종을 들여보내서 
편지로 일을 시키려고 생각했소이다." 편지로 일을 시키겠다는 홍경주의 
말을 듣자 남곤과 심정은 펄쩍 뛴다. "편지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누설이 되면 어찌 되라고." "나중에 증거거리가 되면 어찌하려구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내가 꼭 친히 들어가 보아야 할까?" "여부가 
있습니까." 남곤은 뱉듯 대답했다. "먼저 문안 전갈을 들여보내시는 체하고 
비자를 보내시어 조용히 만나실 일이 있다 하신 후에 따님의 형편을 보아 
잠깐 만나 보시도록 하옵시오." 홍경주는 두 사람의 말을 그럴 듯하게 
생각했다. 슬며시 자리에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 시비 옥분을 불렀다. "너, 
세수하고 머리 빗고 옷 갈아입은 뒤에 대내 안 부용당에 문안을 
들어가거라. 빈마마께 내가 그러더라구 아뢰고, 잠깐 내가 만나러 들어갈 
테니 어느 때가 좋을지 여쭈어 알고 나오너라." 
  시비 옥분은 홍경주의 명을 받아 몸단장을 차린 뒤에 대궐협문을 거쳐 
부용당으로 들어갔다. 이때 홍빈은 별감이 봉서를 가지고 온 뒤에 한참 
전하를 모시어 조광조의 험담을 하고 있는 참인데, 상궁이 문밖에서 
기침을 하면서, "마마, 잠깐 뵈옵기 원하오." 하고 거래를 올렸다. 홍빈이 
몸을 일어 영창 밖으로 나가니 상궁은 조용히, "지금, 본댁에서 문안비가 
대감의 전갈을 받들어 들어왔소." 하고 속삭였다. "어디 있느냐?" 
"상감께서 계시옵기, 동온돌로 불러들였소." 홍빈이 잠자코 동온돌로 
들어가 보니 시비 옥분이 반색을 하며 문안을 올리고 내달았다."떠들지 
마라, 상감마마께서 계시다. 무슨 일로 들어왔느냐?" "대감마마께서 긴히 
뵈옵고 말씀을 여쭐 일이 있사와, 먼저 소녀를 보내셨습니다. 어느 때가 
좋을지 여쭈어 보고 돌아오라 하셨습니다." 옥분은 총명한 눈을 들어 주인 
대감의 뜻을 전했다. 홍빈은 중대한 일이 있는 것을 짐작했다. "아무리 
급하시지만, 오늘은 상감께서 듭시었으니 만나 뵈일 기회가 없고, 내일 
저녁 떄쯤 협문으로 들어오시라고 여쭈어라." 시비 옥분은 조용히 전갈을 
받고 물러갔다.
  이튿날 저녁 때가 되자 홍경주는 관복을 갖추어 입고 협문으로 들어와 
내시에게 거래를 하고 부용당으로 들어섰다. "남양군 대감 듭시오." 하는 
내시의 소리에 희빈 홍씨는 부용당 전각 마루 끝까지 나와서 아버지 
홍경주를 맞아들였다. "아버님, 행차합시오." 홍빈은 늙은 아버지를 맞아, 
서온돌로 들었다. "좌우를 좀 멀리 해주게." 홍경주는 딸이언만 임금을 
모신 빈이라 해서 해라를 하지 않고 하게를 한다. "염려 맙시오. 미리 다 
분별해 놓았습니다. 무슨 중대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어제 봉서를 
내리신 일로 미루어 자네가 공신들을 위하여 말씀을 잘 드린 일은 
짐작하겠네마는 큰일이 났어." "무슨 큰일이 났습니까?" 희빈의 아름다운 
얼굴빛이 변해진다. "조광조의 일당들은 나와 함께 일을 했던 돌아간 
박원종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뻐개겠다고 떠들어대네. 세상 천하에 이런 
변괴가 있는가. 조금 있으면 이자들이 나도 죽이려고 할 테니 이자들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큰일나겠단 말일세. 그래서 우리들은 지금 기회를 보아 
이자들을 먼저 없이하려고 벼르고 있네." 아버지의 말을 듣는 홍빈은 깜짝 
놀란다. "정국공신인 박원종 대감을 부관참시를 한다니 말이 됩니까?" 
"그러니까 역적놈들이란 말야." 홍경주는 역적 소리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어떡한 좋습니까?" 홍빈의 눈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그러니 이 기회에 
마음을 바짝 돌려 놓잔 말야." "어제부터 상감께서는 조광조를 뜨악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것 가지고는 안돼 아주 염증이 나시도록 만들어 
놓아야 한단 말야." "어떻게 하오리까?" 홍빈은 초조한 듯 묻는다.
  "우리 공신들은 밖에서 역적 고변을 할 테니 안에서 자네는 중대한 일을 
해주어야겠어. 가만히 심복인 별감이나 무예청을 시켜서 비원 동산 안의 
나무란 나무에는 꿀로 주초위왕이란 네 글자를 쓰게 하란 말야. 이렇게 써 
놓으면 벌레들은 단꿀을 빨아먹으려고 글자를 좀먹듯 모두 다 파먹게 될 
것이란 말야. 이때 가서 자네는 전하께 '비원을 좀 보십시오'하면 
전하께서도 깜짝 놀라실 것이란 말일세. 주초위왕이란 말은 글자를 파자로 
해서 쓰는 것인데 주초 두 자를 합하면 나라 조자가 되는 것이니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뜻이거든." "알겠습니다." 홍빈을 말을 마치자 새까만 눈을 
깜박거리면서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한다. "자신이 있겠는가?" 
"해보겠습니다." 홍빈은 눈을 내리깔고 차근히 대답한다. "이래야만 우리는 
살 수가 있어. 그렇지 않으면 조광조의 일당한테 모조리 몰려 죽네." 
"알았습니다." 홍빈을 말을 마치자 입술을 꼭 다물었다. 홍경주가 
부용당으로 다녀간 이튿날, 구중궁궐 깊은 사람 없는 비원 속에는 한 
사람의 동산지기가 낙락장송 소나무와 아름드리 홰나무 등걸에 꿀을 찍어 
글씨를 쓰고 돌아다녔다. 으슥한 비원 속이라 누구 한 사람 동산지기가 
글씨를 쓰고 돌아다니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 
  며칠 뒤의 일이었다. 동산지기는 부용당 전각 마루 앞에서 스란치마를 
끌고 서온돌로 들어가는 홍빈을 발견했다. "빈마마께 아뢰오. 소인은 
일전에 분부를 내리셨던 동산지기올시다. 한번 비원으로 소풍을 
나오시옵소서." "일간 시녀를 데리고 소풍을 나가리라." 홍빈은 대답하고 
동온돌로 몸을 쓰러뜨렸다. 동산지기의 간단한 한 마디 말에 홍빈은 비원 
나무에 글자 쓰는 일이 계획대로 잘된 것을 이심전심 잘 알았다. 이튿날 
홍빈은 시녀 오륙 명을 거느리고 부용당 뜰 아래로 내려섰다. "날씨도 
좋으니 어디 후원으로 소풍을 가보자." 홍빈의 말소리는 천연스러웠다. 
모든 시녀들은 홍빈의 뒤를 따라 문밖으로 나섰다. 홍빈은 아청빛보다 더 
푸르고 맑은 넓은 하늘 아래 푸른 천을 깔아 놓은 듯한 잔디밭을 
거닐었다. 청송 가지에 앉았던 한 두루미는 인기척에 놀라 푸드득 날고 
검은 깃에 흰 배알을 예쁘게 가진 산새들은 고운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홍빈의 발길이 옥류천 샘이 솟는 한벽정에 당도했을 때, 정자를 휩싸 안아 
둘러싼 낙락장송과 활엽수의 잎들은 모두 다 노랗게 병이 들었다. 홍빈은 
그 중 큰 나무 앞으로 천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나무 등걸에는 '주초위왕' 네 글자를 완연히 이루어 깊숙이 좀이 먹어 
파들어갔다. "나무에 벌레가 생겼구나. 에구머니나, 글자 형국으로 벌레가 
파먹었네." 홍빈은 깜짝 놀라며 부르짖었다. 시비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이구, 이상한 벌레도 다 봤습니다. 글자를 쓰면서 나무를 파먹었습니다." 
한 궁녀가 부르짖었다. " 이 나무뿐이 아니라, 저 나무도 병이 들었습니다." 
"어머나, 이 나무에도." "여기도 그런데," "전부올시다." "등걸뿐 아니라 
잎도 벌레가 먹었는데." "어쩌면 잎사귀마다 글자가 써 있어 똑같은 
글잔데." 궁녀들은 제각기 지껄였다. "도대체 무슨 글자가 쓰여 있나 
자세히 보자." 홍빈의 목소리가 떨어지자. "'주초위왕'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 중에서 진서를 아는 궁녀가 지껄였다. "참으로 자세히 보니 
'주초위왕'이라고 쓰여 있구나. 괴변이다. 위왕이란 왕이 된다는 말인데 
주초라는 것은 무엇일까?" 홍빈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기울였다.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좌우간 괴상한 일이다. 나쁜 징조냐, 좋은 징조냐?" 
홍빈은 발걸음을 무겁게 하여 부용당으로 돌아간다. 
  비원에 나무가 병들었다는 소문은 한 입 건너고 두 입 건너 부용당에 
자자하게 퍼졌다. 나무가 병이 드는데도 그대로 병이 든 것이 아니라 
벌레가 글자 형국으로 좀을 먹고 지나갔는데, 이 글자가 임금 왕자가 
되어졌다는 데 더 한층 변스러운 생각을 갖게 되고 또다시 '주초'가 
무엇인가 하는 데 문젯거리가 있었다. 부용당 내시와 별감들은 제각기 
쌍쌍이 떼를 지어 비원으로 들어가 좀먹어 병이 든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여보게, 이거 큰일났네. '주초위왕'이라는 것은 조씨네가 왕이 된다는 
소릴세. 나라 조 자를 떼어서 써보게. 주초가 되지 않나." "옳거니, 자네 
말이 맞네. 달아날 주 자와 초 자를 합하면 과연 조 자가 되네 그려. 
그러면 조씨가 왕이 된다는 소린가." "이 사람 말조심하게." 내시들은 글을 
알았다. 서로들 이렇게 지껄였다. "아니 우리들 사이야 말 좀 하기로 
어떤가. 조씨면 누굴까?" 내시 한 사람은 가만히 목소리를 낮춰 속삭인다. 
"조씨로 잘난 사람은 조광조 어른이지. 그러나 그분이 바른 정치를 하려는 
분인데 그런 일을 할 리가 있나." "아니 그분이 하려는 것이 아니라 
천심이 그리로 기울어지면 또 모르지." "이 사람. 목 달아날 소리 작작하고 
입을 다물게."
  말조심하라고 저희끼리 주의를 주면서도 주초위왕이 될 장본인은 
조광조밖에 없다는 소문은 자꾸 터져 나갔다. 이제는 부용당의 궁녀와 
내시와 무예청, 별감뿐 아니라 경빈 박씨의 처소, 창빈 안씨의 처소, 숙의 
이씨의 처소, 모든 후궁이며 중전, 대전의 궁녀와 액정들까지 전부 알게 
되고 모든 후궁들의 귀에도 날개가 돋친 듯 들어갔다. 날마다 후궁들은 
비원으로 나무의 좀먹는 구경을 하러갔다. 송구스런 소리는 점점 더 퍼져 
돌았다. 벌레들은 날이 갈수록 나무와 잎을 먹었다. 전하는 희빈 홍씨의 
처소에서 하루를 지낸 뒤부터는 일체 경연을 폐지하고 조광조 이하 
간관들을 만나 보지 아니했다. 경연에서 전하를 만날 수 없는 대사헌. 
대사간, 대제학 등 삼사 관리는 총결속이 되었다. "어서 경연 자리를 열어 
주시옵소서. 어진 임금이신 전하께옵서 어찌해서 요사이는 경연을 열지 
아니하십니까? 하루만 공부를 아니 하시면 입 속에 가시가 돋는 
법이옵니다. 그리고 거짓으로 공신이 된 사람들은 빨리 삭훈을 
하시옵소서." 하고 강경하게 상소를 얼렸다. 전하는 비답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요즘 경연을 열지 않는 것은 몸이 좀 불편한 까닭이다. 며칠 
뒤에는 경연을 열고 다시 그대들과 함께 공부를 할 것이다. 그리고 공신의 
벼슬은 전에도 말했지만 십여 년 전에 이미 처리한 일이다. 소급해 올리라 
말할 필요가 없다." 전하는 강하게 끊어서 대답해 버렸다. 
  임금이 경연을 열지 않고 가짜 공신들의 벼슬 깎는 것을 단연히 거부해 
버린 이 태도에 선비 출신인 젊은 헌관, 간관, 사관 등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삼사가 가짜 공신을 깎자고 바른 
말씀을 드리는데 전하께서 듣지 아니하신다면, 이것은 삼사의중대한 
직분을 무시하는 것이니 우리들은 벼슬을 내놓아 단연코 총사직을 
합시다." 사헌부 지평, 장령 등 젊은 법관과 사간원의 사간, 정언 등 젊은 
언관, 홍문관의 교리, 수찬 등 젊은 사관들은 일제히 결속하여 대사헌 
조광조, 대사간 이성동, 대제학 이자, 대사성 김식한테 사표를 내자고 
우겨댔다. "선비라는 것은 바른 일을 하라고 벼슬자리에 나가는 것입니다. 
바른 말과 바른 일이 행해지진 않는다면 벼슬을 버리고 물러가서 다시 
시세가 오기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대로 벼슬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비루한 짓입니다." 
  대사헌 조광조는 제자들의 말을 옳게 들었다. 붓을 들어 사표를 올린다. 
"대사헌 조광조는 모든 현관을 거느려 전하께 사표를 올리오. 가짜 공신을 
깎자고 누차 상소를 올렸으나 전하는 경연도 제하시고 안연히 듣지 아니 
하시어 이래 가지고는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을 수 없소이다. 삼가 헌관 
일동은 사표를 올리오."
  대사헌의 사직상소가 들어가니 대사간도 사직상소를 올렸다. "대사간 
이성동은 간관들이 총의를 들어 총사직을 아뢰오. 간관으로 있어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공연히 국록을 탐내는 자들의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가짜 공신들의 벼슬을 깎지 않으시는 한, 신의 무리는 조정에 
벼슬할 수 없사옵니다." 
  간관들이 총사직을 하니 홍문관 대제학 이하 사관들도 사직상소를 
올렸다. "춘추필법을 맡은 사관들로서 위훈한 사람들이 무수하게 있는 
것을 알고 그대로 있을 수는 없사옵니다. 홍문관 대제학, 부제학 이하 
교리, 수찬 전원은 총사직을 원하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세 관원이 총사직을 올리니 성균관 대사성과 
사성들도 사직을 
올렸다. "유생들을 지도하는 중책을 진 몸으로서 유선들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가짜 공신들을 그대로 두고 바로잡지 못하니 무슨 낯으로 유선을 
대하여 지도하오리까. 성균관 대사성 이하 관헌들도 총사직을 드리오." 
사직상소는 시시각각으로 올라갔다. 삼사가 사직상소를 전원이 올려서, 
출사를 아니 하고 문교를 지도하는 성균관 대사성이 사표를 올려 총사직을 
한다는 일은 전고에 없는 일이었다. 헌부, 간원, 홍문관, 성균관 네 부의 
관청은 텅 비어 버리고 조정과 들에는 긴장한 공기가 떠돌았다. 삼사가 
글월을 올려 항쟁해서 간하면 임금도 용상에서 내려앉는 게 이 나라의 
전통이었다. 온 세상이 술렁거렸다.
  "대사헌 조광조 대감이 가짜 공신을 깎으라고 간해도 상감이 듣지 
아니하시니 조광조 대감은 사직을 했다지?" "조광조 선생뿐인가? 사헌부 
헌관이 전부 사표를 올리고 대사간, 대제학, 대사성 네 아문의 관원이 
총사직을 했다네." "조광조 어른이 대사헌을 내놓으면 나라 정치는 또다시 
문란해지는 거야." "가신과 소인이 득세를 하고 세상은 또 한바탕 암흑 
세계가 될테지."
  정치에 발언권이 없는 백성들은 이렇게들 탄식만 하고 있었다.
  이때 조광조는 대사헌을 사직한 뒤에 임금의 하회를 기다리고 갈건 
야복으로 집에서 한일월을 보내고 있었다. 선비와 제자들은 나날이 나라 
일을 근심하면서 조광조를 찾았다. 하루는 패랭이에 중추막을 입은 노인 
한 사람이 나타나서 시자에게 조정암을 뵈옵기 청했다.
  "누가 왔다고 여쭈오리까?' 의복이 선비의 복색이 아닌 천인의 복색인 
것을 안 시자는 오만하게 이렇게 물었다. "동소문 안에 사는 갖바치가 
뵈오러 왔다고 말씀을 드려 주시오."
  늙은 손은 태연히 대답했다. 시자가 조정암한테 말씀을 고하니 조정암은 
신을 거꾸로 끌면서 뜰에 내려 반갑게 갖바치를 맞아들였다.
  "선생님, 어떻게 이렇게 누지에 왕림하셨습니까?" 조광조는 공손히 
인사를 드리면서 갖바치를 방으로 인도했다. 삼년 만에 만나는 갖바치 
학자였다.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갖바치라는 것이 백정의 계급인 것을 아는 
시자들은 조광조의 태도에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진다. 갖바치는 천천히 
조광조의 말에 대답한다. "오랜간만이올시다. 대감께서 소인의 집을 
찾아오신 지도 어느덧 삼 년이 됐습니다. 오늘 불현듯 대감을 뵈옵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조광조는 기뻤다. 오라고 불러도 오지 
않을 갖바치 학자가 자기 걸음으로 걸어와서 만나 주니 참으로 감사했다. 
그러나 문밖에 모시어 섰는 시자들은 마음속으로, '선생께서 갖바치한테 
저대도록 말공대를 하시니 이상한 일이다.' 하고 서로들 눈짓을 하면서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동안 선생께서는 많이 수고를 하셨습니다." "천만에, 수고한 일이 
없었습니다. 바른 일은 하려고 합니다마는 얼른 되어지지 않아서 
걱정이올시다." "현량과를 마련해서 어진 사람들을 등용해 쓰실 뿐 아니라 
삼강오륜을 밝혀서 시정 사람들도 모두 다 예문가가 되었고, 삼청동 
삼청전을 없이하시어 사교를 막으셨고 대궐 안에 재를 올리지 못하게 
하시고, 언론의 창달을 위하여 노력하셨고, 이번에 반정공신들의 함부로 공 
준 것을 바로잡으려 하셨으니, 이렇게 십 년만 나간다면 우리나라는 진정 
요순시절이 될 것입니다."
 "불감합니다." 조광조는 갖바치 학자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을 때 
갖바치는 말을 계속한다. "듣자오니 이번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가 
총사직을 올리고 성균관 대사성까지 벼슬을 내놓아서 선비님들께서는 
기어코 반정공신들의 함부로 받은 공신 칭호를 깎으려 하신답지요?" 
"그리했습니다." 조광조는 갖바치의 묻는 말을 긍정해 대답한다. 갖바치는 
한동안 무엇을 생각하는 듯 눈을 감고 앉았다가, "대감께서 소인을 
찾으셨을 때, 소인이 대감께 여쭌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때 소인의 말씀을 
혹시 기억하시겠습니까?" "기억하다뿐이오니까. 선생께서는 나더라 벼슬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조광조는 미연히 웃으며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대감께서 이제 벼슬을 내놓으셨다 하니 소인은 기뻐서 
찾은 것입니다. 대감께서는 그만큼 일을 하셨으니 이제는 물러앉으시어 
한운야학과 벗을 하시고 청풍명월 아래서 후생들을 지도하십시오, 이것이 
소인이 대감께 청하는 일입니다." "글쎄, 내 마음도 그러합니다만, 세상일은 
얼른 그렇게 단순하게 되지 않습니다." "만약 이번에 상감이 삼사가 
총사직한 데 대해서 약간 뉘우치는 기색이 계시어 어느 정도 위훈받은 
공신들을 깎으라고 허락이 내리신다면, 대감께서는 다시 벼슬을 
하시겠습니까?" 갖바치는 정색을 하며 묻는다.
  "허락을 하신다는 건 밝은 처분이시니 밝은 처분을 내리시는 데 벼슬을 
안 하고 어찌하겠습니까? 벼슬을 하자는 것은 전에도 말했지만 내 일신의 
호강을 취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바로잡아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을 하다가 중지할 수야 있겠습니까? 끝까지 바른 일을 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광조는 도리어 반문한다. 조광조의 눈에는 젊은 
기운이 아직도 영명하게 서려있다. 
  갖바치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조광조를 한동안 쳐다본다. "쇠가 너무 
강하면 끊어지는 법입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은 고운 물소리를 내어 
흘러가지 못하고 부서져 구슬이 되어 흩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대감 한 
분만은 제발 벼슬을 하지 마시오. 진정으로 대감을 아껴서 하는 말입니다. 
아니, 우리들의 학문을 위해서 대감은 물러나 제자들을 양성해야 할 
것입니다." 갖바치는 얼굴에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조광조를 바라보았다. 
그의 반짝반짝 타는 듯한 눈에는 별빛같이 빛나는 정기가 함초롬히 서려 
있다. 
  "선생의 말씀을 잘 알아듣겠습니다. 내 몸을 위해 주는 지기의 말씀을 
어찌 못 알아듣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동지들은 기회만 있으면 지지 않고 
착한 일을 해야만 한다고 떠들어댑니다. 물과 불을 가리지 않고 선의 길로 
뛰어들려는 이 젊은 사람들의 용기를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조광조는 
마음의 번뇌를 느끼면서 탄식하듯 대답한다. "대감께서 착한 일을 
하려다가 헌 번 후회를 하는 날은 백 년까지 이 영향이 미칩니다. 그까짓 
공신 칭호쯤 가짜가 있기로서니 무엇이 대단하다고 목숨을 내걸고 
싸웁니까? 앞으로는 착한 일만 잘해 나가도록 합시오." 갖바치는 이렇게 
조광조를 타이르고 돌아간다.

    떨어져 구슬이 되어
  나라 법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가 상소를 올려 들고일어나면 
임금도 용상 위에서 내려앉는다는 것인데, 삼사는커녕 성균관 대사성까지 
합해서 네 곳 마을의 관원들이 총사직을 하고 임금을 간하고 있으니 
전하도 난감했다. 홍빈을 통하여 조광조 일파가 정권을 독점하려고 파당을 
지어 공신을 배척하면서 선비들 일파의 세력으로만 뿌리를 박으련다는 
말을 듣자 전하는 조광조에 대하여 마음이 뜨악하게 내려져 가고 있는 
판인데, 성균관까지 들고일어나서 사사가 총사직을 하는 것을 보자 전하는 
마음속으로 크게 노했다. '과연 이자들이 당파를 만들어 가지고 나를 
위협하는구나!' 하고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선 체면상으로 이 
일을 수습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전하는 전교를 내렸다. "영의정 정광필은 
육조판서를 회동하여 공신들의 위훈을 깎는 것이 옳은 일인지 깎을 수 
없는 일인지 의논하여 판단케 하라."
  대신 이하 육조판서는 어명을 받자 빈청으로 회동하였다. 빈청이란 
대신이 대궐 안에서 회의하는 곳이다. 영의정 정광필, 우의정 안당, 좌찬성 
이장곤, 좌참찬 이유청, 우참찬 이자 등은 곧 회의를 열고 의논한 뒤에 
상소를 올렸다. "정국공신은 사생을 맹서하여 나라 일을 한 사람들이오라, 
이제 와서 고치기 어려운 일이오나, 대간의 공론이 이대도록 비등하니 
사등공신 중에 마땅치 않은 자가 있다면 조사하여 처리하시는 것이 조정을 
편안케 하는 일인가 하옵니다." 영의정 정광필, 우의정 안당, 좌찬성 
이장곤 등은 모두 다 선비를 두둔하는 바른 사람들이었다. 감연히 대간과 
보조를 같이하여 사등공신 만이라도 공을 깎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예조판서 남곤만은 영릉에 참배를 하러 간다고 슬쩍 빠져버렸다. 
  대신까지 우겨대니 임금은 하는 수 없었다. 전하의 등에는 진땀이 
흘렀다. 승지를 어전에 불러 공신 깎는 전교를 쓰게 했다. 임금이 완전히 
조광조 일파 선비들한테 굴복한 것이었다. 빈청에서는 대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옛적에 제왕이 대위에 오르게 되면 반드시 도와주는 신하가 있어 
그의 큰 공을 가상하게 생각하여 공신 칭호를 내리는 것이다. 요사이 
풍속이 해이해져서 의로운 것을 버리고 이로운 곳으로만 달아나서 스스로 
공신이 되어 나라를 속였으니 이것은 임금을 무시하고 하늘을 속인 
일이다. 단연코 법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유순 운수군, 구수영, 정미수, 
강혼 등 이삼 등 공신과 사등공신 전부의 공을 깎아 국법을 바르게 하라. 
아아,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를 원하는 임금은 어질고 의로운 일을 하는 데 
급하고, 도덕을 존중하는 선비는 공리를 천하게 여기는 것이다. 나의 모든 
박관과 모든 선비는 나의 뜻을 받들라."
  승지가 어전에서 쓴 전교는 또박 정원으로 나가서 빈청으로 돌고, 
대사헌, 대사간, 홍문관 대제학, 성균관 대사성의 사직상소는 도로 
환부시켜 버렸다. 선비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공신들은 벌벌 떨었다. 
조광조는 마음속으로, '그래도 어진 임금이시구나. 이러한 성군을 언제 
다시 만나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이분을 도와서 이 
나라를 기어코 밝은 나라를 만드리라.' 하고 생각했다. 갖바치 학자도 
자기보다는 학문이 높다 하나, 아직 임금을 대해 보지 못한 탓으로 나보고 
벼슬을 그만두라고 권한 것이다. 이쯤 생각해 보기도 했다. 조광조는 갈건 
야복을 벗어 놓고 다시 사모를 쓰고 관복을 입고 초헌 위에 올라 사헌부 
마을로 벽제를 치면서 들어간다. 거리거리 시중에서는 조광조가 사헌부 
대제학을 사직했다는 소리를 듣자, "나라가 다시 어둡겠구나."하고들 
탄식했는데, 조광조가 남발한 공신의 위훈을 단연코 깎아 버리고 다시 
사헌부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자, "장하다. 조정암 선생은 백절불굴, 싸워서 
기어코 이기셨구나, 인제는 나라 정치가 다시 반석 위에 올려지게 되었다." 
"암, 사필귀정이지. 못된 짓을 하려던 공신과 오리들의 어깨가 축 
늘어졌겠네." "조광조 선생을 추상열일이야. 참으로 영의정 아니면 대사헌 
감이시지."
  그의 행차를 예찬해 우러러보았다. 대사간 이성동도 초헌을 돌아 
사간원으로 들어가고 홍문관 대제학 이자도 남여를 타고 대궐로 들어가고 
성균관 대사성도 남여를 성균관으로 몰았다. 참람한 공신들의 칭호 받은 
것을 깎는 것은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공신의 칭호를 빙자해 
가지고 모든 불의한 행동과 모든 탐관인 권력을 남용하던 공신들의 악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제치는 일이었다. 이것은 바른 정치를 해 나가려는 
큰길가에 여기저기 가로막혀 있는 더러운 장해물을 치워 버리는 쾌활한 
처사의 하나이기도 했다. 이 어려운 일을 감연히 행해 치운 조광조 이하 
모든 선비들은 비로소 한숨을 내쉬면서 안도감을 느꼈다. 더욱 앞으로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는 서광이 눈앞에 비친다 생각했다. 한편으로 전하의 
공신을 깎는 전교가 급하게 정원으로 내리자 깜짝 놀란 사람들은 남곤과 
심정이었다. 심정은 남곤을 몰아댔다. "대감은 왜 빈청 회의에 나가지 
아니했던가? 모두 다 대감 탓일세. 대감이 빈청 회의에 참례하여 한사코 
반대를 했다면 상감의 전교가 이렇게 급하게 내리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정면 충돌을 하기가 싫어서 그랬지, 누가 이렇게 속히 전교가 내려질 
줄 알았는가? 허허 빨리 서둘러서 뒤엎어 놓아야겠네." 남곤은 변명을 
했다. "일이 여기까지 미쳤으니 별 수 없이 이것들을 당장 곧 처치를 
해야겠네." "어떻게 하면 좋은가?" 남곤은 심정한테 방책을 물었다. 
"자네들 이 길로 박빈한테로 곧 통하게. 나는 홍경주를 찾겠네." "비원 안 
나무마다 '주초위왕'이라고 쓴 것은 어찌 되었나?" 남곤은 심정한테 
묻는다. "그것은 문제없어, 벌써 벌레가 글자 형국을 다 파먹어 버렸어. 
때만 기다리는 판이야." 남곤의 묻는 말에 심정은 이렇게 대답하고 두 
사람은 급급히 흩어진다. 남곤은 심정을 작별하자 문안비를 대궐 안 
박빈한테로 들여보냈다. 문안비 품속에는 남곤의 비밀한 봉서가 들어 
있었다. 
  문안비는 연경당 박빈한테로 들어가 조용히 문안을 올린 뒤에 남곤의 
편지를 올렸다. '일이 급하여 감히 봉서로 여쭈오. 조광조가 공신을 깎은 
것은 먼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 하오나 실은 그들은 장차 
삼강오륜을 내세워서 상감이 동생으로서 형님인 연산군을 내쫓은 죄를 
천하에 성토하면서 상감을 폐위시키려는 기막힌 계획을 세웠다 하오. 
그리고 그들은 가만히 사람을 비원에 들여보내서 꿀로 '주초'라는 글자를 
써서 벌레가 파먹게 한 뒤에, 천심이 조씨한테로 돌아가서 조광조가 장차 
임금이 된다는 것을 선전하게 위하여 이러한 망유기극한 짓을 범했다 
하오. 지금 서울 안 여염 백성들은 모두 다 조광조가 임금이 된다고 
수군대면서 좋아하고 있소. 이렇게 되면 우리들 공신과 후궁들은 모두 다 
도륙이 될 테니 어찌하면 좋소이까. 밤 안으로 상감께 이 일을 아시도록 
하시오.'
  경빈 박씨는 남곤의 비밀한 편지를 보자 부들부들 떨었다. 문안비를 
돌려보낸 뒤에 시비한테 영을 내린다. "상감께서 지금 어느 처소에 계신지 
알아보아라." 경빈 박씨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한편으로 심정은 
홍경주를 찾았다. "기어코 조광조의 일당들이 공신들을 깎아 버렸소이다. 
대감, 빨리 서두르지 아니하시면 우리의 목은 영영 달아나 버리게 되었소. 
홍빈께 어서 말씀을 드려서 조광조의 일당을 없이하라는 상감의 밀지를 
받아 내시오." 홍경주는 시각을 지체치 않고 홍빈한테로 비밀한 편지를 
들여보냈다. '조광조의 일당을 결국 공신들을 깎아 버리고 말았소이다. 
빨리 '주초위왕'이라고 벌레가 먹은 잎새와 나무를 상감께 보시게 하여 
상감을 진노케 한 뒤에 조광조를 없이하게 하라시는 밀지를 받아 
내리시오.' 
  이때 전하는 사등공신과 이삼등 공신 중에서 문제되는 사람들을 깎은 
뒤에 피로한 몸을 쉬려 하여 홍빈의 처소인 부용당으로 들었다. 홍빈은 막 
홍경주의 편지를 받아 잃고 난 직후였다. 상감을 뵙자 격동하는 말씀을 
올린다. "공신 칭호를 깎지 마십사고 그렇게 간해 올렸는데도 결국 
공신들을 깎으셨다 하니 사실이옵니까?" "하는 수 없어서 사등공신을 깎아 
버렸어." 전하는 기운 없이 대답하고, 안석에 피로한 몸을 기댄다. "왜 
소녀의 말씀을 아니 들으셨습니까, 조광조의 말씀은 믿으셔도 소녀의 
말씀은 믿으실 수가 없으십니까?" 홍빈은 원망하는 듯 요염한 눈을 들어 
전하를 살포시 흘겼다. "내가 너를 안 믿을 리가 있느냐. 조체가 있는 
법이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이 한꺼번에 사직을 하면 대신 이하 
정경들의 의견을 처리하는 법이 조체다. 이것은 임금이라도 어찌하는 
도리가 없다. 대신들도 사등공신과 이삼등 공신 중에서 몇몇 사람은 
깎아야겠다고 하니, 대신들의 의견을 참작해서 처리한 것이다." "대신들도 
역적 놈들과 한통속이 된 것을 전하는 모르십니까?"
  홍빈은 대담하게 역적이라 강하게 부르짖었다. 조광조를 새파랗게 
역적으로 몬 것이었다. "설마 조광조가 역적까지야 되겠느냐. 당파를 
지었다는 말은 요전에 들어 알았으나, 역적은 아닌 것 같더라." "당파는 
무엇 때문에 짓고 있는 줄 아십니까? 역적질을 하려고 당파를 짓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증거를 보셔야만 아시겠습니까?" 홍빈은 말을 
마치자 문갑 서랍을 뽑았다. 서랍 안에는 낙엽이 가득하게 있었다. 
"잎사귀마다 집어 보시옵소서. 잎에 무슨 글자가 쓰여 있나 보시옵소서." 
전하는 기괴하게 생각했다. 가만히 잎 하나를 들어 보았다. 총총 구멍을 
뚫어 놓은 듯 벌레가 먹었다. 구멍은 합해서 글자가 되어 보인다. 
'주초위왕' 네 글자가 완연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나무의 종류에 따라 
잎새 형상은 다르지만 글자의 형국은 똑같았다. "이것이 어디서 난 
잎이냐?" "비원에 떨어진 잎이옵니다. 무예청 애들이 주워 왔습니다. 천주 
만주 비원 나무는 모두 다 좀이 먹어서 이렇게 됐습니다. 소녀도 하도 
괴변스러워서 비원엘 나가 보았습니다. 이것은 기막힌 변고이옵니다. 
벌레가 똑같은 글자 모양을 내면서 나무 등걸마다, 잎새마다 이렇게 
파먹었습니다. 소녀만이 아는 일이 아니옵니다. 온 궁중이 다 알고 
있사옵니다. 무예청, 내시, 궁녀, 후궁들 할 것 없이 다 아는 사실이옵니다. 
주초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주초면 조가로구나. 조가가 임금이 된단 말이 아니냐?" 임금은 깜짝 
놀라 부르짖는다. "이래도 조광조가 역적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기막힌 
일이다. 조가가 왕이 된다고 하늘이 예언했단 말이냐?" 전하는 벌겋게 
노했다. "소녀의 말을 믿지 아니하신다면 친히 한번 비원으로 행차를 하여 
보시옵소서." "자비를 놓아라." 임금은 궁녀에게 친히 영을 내렸다. 궁녀는 
내시에게 영을 내리고 무예청에 영을 내렸다. 무예청은 전하를 옥교에 
모신 채 비원 문밖을 나섰다. 옥교 뒤에는 홍빈이 따랐다. 
  전하가 옥교에서 비원을 보살피니 나무와 잎은 모조리 똑같은 형태로 
좀이 먹었다. 쌓이고 쌓인 낙엽을 집어 보았다. 모조리 '주초위왕'이었다. 
등걸마다 역시 그랬다. 전하의 등골엔 소름이 쪽 끼얹어진다. "어느 때부터 
이랬느냐?" "단풍 질 무렵부터 그랬습니다." 무예청, 별감, 내시들이 일제히 
대답한다. 심히 우울하고 불쾌한 일이었다. '조광조는 정말 내 자리를 뺏어 
임금이 되려는가?' 전하의 등에서는 소름이 또 한 번 쪽 끼친다. 등살이 
으스스 추웠다. 온몸이 으슬으슬했다. "옥교를 돌려라." 전하의 옥교가 다시 
부용당 홍빈의 처소롤 들려 할 때, 문 밖에서 연경당 시녀 한 명이 사후를 
하고 있다가 옥교 뒤를 따르는 홍빈을 보고, "저 희빈마마께옵서 급히 
상감께 아뢸 말씀이 있다 하와, 마마 처소로 찾아뵈오려 오신다 하옵니다. 
처분이 어떠하시올지 묻사와 달라 하십니다."
  홍빈은 박빈과 요사이 보조를 같이했다. 조광조를 때려 눕히려 상감께 
뵈옵기를 청하는 줄 짐작해 알았다. 홍빈은 상감의 옥교 옆으로 가까이 가 
전하께 속삭였다. "경빈 박씨, 급히 상감께  아뢸 일이 있사와 부용당으로 
온다 합니다. 처분을 내려 주옵소서." 전하는 마음이 허탈된 이때 경빈 
박씨가 홍빈의 처소로 온다하니 든든하여 좋았다. "네 마음에 관계치 
않다면 함께 이야기하는 것도 좋겠다. 네 마음이 어떠냐?" 홍빈은 다른 때 
같으면 박빈과 함께 전하를 자기 처소에서 모시기가 싫었으나, 오늘만은 
좋으리라 생각했다. 박빈과 홍빈은 팔선녀 후궁 중에서도 제일가는 
쌍벽으로 전하의 사랑을 젓고 틀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조광조를 때려 
눕히는 계기라, 공동 작전을 취하는 게 도리어 효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홍빈은 시비한테 방긋 웃음을 웃어 보이면서, "오셔도 좋다고 
처분이 내리셨으니, 빨리 오시라구 여쭈어라."
  홍빈은 말을 바친 뒤에 부용당으로 전하를 부축하여 올렸다. "도대체 
이상한 일이다. 벌레가 어쩌면 저대도록 파먹어서 또렷또렷 글자를 써 
놓았단 말이냐?" "참으로 전무후무한 변괴올시다. 인력으로 못할 일인가 
합니다." 인력으로 못 할 일이란 말을 듣자 임금의 등살에는 소름이 또 한 
번 쪽 끼얹혀지면서 으스스 추웠다. "그러기에 오늘 밤 안으로 조광조의 
일당을 처치하옵소서." 전하는 묵연히 대답이 없다. 이때 뜰 밖에 합문 
열리는 소리가 조용히 들리면서 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경당 경빈 
박씨 뵈오러 들어왔소." 내인이 다시 창 밖에서 거래를 올린다. "연경당 
경빈 박씨, 들었소." 나인의 구슬을 굴리는 듯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들라 
해라." 전하의 옥음이 떨어지자 희빈 홍씨는 미닫이를 열고 경빈 박씨를 
맞아들였다. 눈과 눈에 서로 뜻 있는 웃음이 서려 있었다. 
  "오랜만야." "참말로." 홍빈은 반갑게 경빈의 손을 이끌고 전하가 계신 
방안으로 들었다. 풍윤한 육체미의 주인공 경빈 박씨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상감 앞으로 곱게 걸어 외씨 같은 흰 발로 사붓이 옮기자 어깨를 
나부죽하게 벌려 문안절을 올린다. 고개를 다소곳 수그려 절을 올리고 
나서 소리 없이 곱게 일어나는 탐스런 치맛자락에서는 향긋한 치마 냄새가 
방안에 취돌았다. 부용당 방안엔 희빈 홍씨의 몸내와 경빈 박씨의 훈기가 
두 갈래 향기를 지어 방안에 가득했다. 우울하던 전하의 얼굴에 약간의 
밝은 빛이 떠올랐다.
  "어떻게 경빈이 여기까지 왔느냐?" "전하께서 홍빈을 데리시고 재미나게 
노시는데 불초한 소녀가 들어와 훼방을 놓아 죄송하기 그지없사옵니다." 
언제 보아도 모란꽃같이 환한 박빈의 얼굴이었다. 환한 얼굴에 화판을 
벌린 듯 화려한 웃음을 터뜨리니 박빈의 얼굴은 더한층 화사했다. "재미가 
무슨 재미요? 박빈은 언제나 실없는 말을 잘해." 이번엔 홍빈이 청초하게 
방긋 웃었다. 화사와 청초 두 아름다운 미인의 가락 높은 웃음소리에 
전하를 중심으로 한 부용당 안은 검은 구름 속에 햇빛이 번쩍하는 듯 잠깐 
밝았다. 전하는 만사를 잊은 듯 두 미인의 웃음소리에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미인을 한자리에 이렇게 앉혀 놓고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자들은 흔히들 시새고 투기하기가 열에 아홉은 되는데 두 여인은 자기를 
위하면서 이렇게 화락하고 즐거워하니 참으로 자기는 행복된 존재라고 
잠깐 유열의 극치 속에 파묻혀 본다. 
  "그래 경빈, 요사이 재미가 어떻소?" 전하 앞에서 희빈 홍씨는 경빈한테 
다정하게 묻는다. 일부러 오늘은 전하 앞임에 더한층 다정하게 묻는 
것이었다. 투기 없는 요조숙녀를 가장하는 다정이었다. "재미가 어떻다니, 
재미는 희빈이 혼자 보면서." "내가 무슨 재미야?" "밤이나 낮이나 이렇게 
상감마마를 혼자 독차지해 모시고 있으면서 도리어 나보고 재미를 묻소? 
그렇지 않습니까, 상감마마?" 까르르 웃음소리가 꽃불처럼 터졌다. 두 
미인의 까르르 웃는 진달래빛 같은 웃음 가락 속에는 전하의 쾌활한 
웃음소리도 섞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하의 만 가지 시름은 안개 슬듯 
스러졌다. 인생의 향락이 이에서 더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해 
오셨소?" 희빈은 웃음을 그치고 다시 박빈에게 물었다. "상감마마를 하도 
당신이 독차지해 보시니 샘이 나서 모시러 왔지." 박빈의 능란한 대답 
소리에 부용당은 또 한바탕 웃음 가락에 잠겼다. 웃음이 멈추었을 때, 경빈 
박씨는 조용히 전하 앞으로 가까이 나가 무릎을 꿇고 아뢴다. "아까 
말씀은 모두 다 웃음의 말씀이옵고, 급히 상감마마께 아뢸 일이 있사와 
들어왔사옵니다." 박빈의 얼굴빛은 딴 사람이 된 듯 단정했다. 
  "무슨 일이냐?" "비원의 나무와 잎을 보셨습니까?" "너도 아느냐? 지금 
희빈과 함께 비원을 보살피고 오는 길이다."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너도가 무슨 말씀입니까.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기막힌 
일이다. 벌레가 그렇게 파먹었으니 전무한 변괴다." "그것을 누가 한 
짓이라 생각하십니까? 박빈의 누가 한 짓이라 생각하십니까 묻는 말에 
희빈의 가슴이 덜렁하고 떨어진다. "누가 한 짓이라니, 벌레가 먹은 
것이지." "글쎄, 벌레가 먹었어도 벌레가 먹도록 누가 한 짓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조광조가 비밀히 사람을 비원 속에 들여보내서 꿀로 글자를 써서 
벌레들이 파먹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일부러 자기가 임금이 될 것을 
선전하려고 그따위 짓을 한 것입니다." 희빈 홍씨의 떨어진 가슴이 비로소 
가라앉는다. "아하, 나는 벌레가 저절로 그렇게 파먹은 줄 알았더니 참말로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럴 듯하구려. 자기가 임금이 되려고 일부러 그런 짓을 
해서 천심이 돌아간 것처럼......"
  홍빈이 옆에서 지껄인다. 전하는 역증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럴 듯한 
소리였다. "어디서 들었느냐?" "지금 여염에서는 조광조가 꼭 임금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신을 깎아 전하의 날개와 깃을 자른 뒤에 
전하를 죄인으로 몰아서 아우가 형님을 쫓아낸 죄를 천하에 성토하고 
성전하를 몰아내서 한다 합니다. 전하의 신상도 위태하시지만 저희들의 
몸은 결딴이 나게 됐습니다." 박빈의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어마나,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홍빈도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전하의 용포 자락을 휘어잡고 바들바들 떨었다. "조광조가 
애당초 현량과를 설치할 때부터 그 자는 딴 배짱을 두고서 만든 것입니다. 
자기의 파당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박빈은 또 한 번 전하를 충동시켰다. 
"지금 조정은 모두 다 조광조의 판국이니 어찌하면 좋으랴?" 전하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지금 조광조의 당이 아닌 사람은 여기 있는 
희빈의 친정 아버지 남양군 홍경주와 남곤, 심정이 있을 뿐입니다. 급히 
홍경주에게 밀지를 보내시어 저자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이 편에서 먼저 
역적들을 한 그물에 잡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박빈의 말이 떨어지자, "저자들한테는 글 잘하는 사람도 많지만 힘찬 
장사도 많다 합니다." 홍빈은 전하의 용포 자락을 아직도 잡은 채 
박빈한테 속삭이다. "많구말구요. 이장곤 같은 사람은 원래 연산조 때부터 
장사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박세희, 윤자임, 한충, 유용근 같은 사람들은 
글을 잘하면서도 기운들이 역사랍니다." "그러니까 옛날 구신들은 모두 
조정에서 쫓아내서 말할 사람이 없게 한 뒤에 역적질을 해 버리자는 것이 
아니겠소?" 박빈은 홍빈의 말에 장단을 친다. 전하의 등에서 또다시 
소름이 쪽 끼쳐진다. "그래서 기준이는 경연에서 항상 말하기를 조광조로 
정승을 삼으라고 하고 유용근이는 거만하게 나를 바라보았구나. 이놈들이 
모두 다 나를 다뤄 보자는 수작이었구나." 전하는 또 한 번 불같이 노한다. 
"지금 저자들은 사등공신들을 모조리 내쫓았으니 내일 무슨 변을 
일으킬지, 우박 변을 일으킬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옛 공신 중에서 의논할 만한 사람은 지금 홍빈의 아버지 남양군 밖에 남은 
분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얼른 밀지를 내리시어 조광조 이하 역적놈들을 
일망타진시키시옵소서." 말을 마치자 경빈은 부용당 윗목에 있는 연상을 
받들어 어전에 놓았다.
  "먹을 갈으오리까?" 경빈 박씨는 벼루 뚜껑을 열며 상감한테 묻는다. 
"갈아라." 젊은 전하의 목소리가 떠는 듯 떨어졌다. 경빈 박씨는 먹을 갈고, 
희빈 홍씨는 주지(두루마리)를 폈다. 전하는 붓꽂이에서 붓을 빼어 들고 
홍빈이 묻히는 주지를 서판에 받쳐 들었다. 전하는 쓰기를 시작한다. 
일부러 언문으로 밀지를 쓰는 것이었다. '광조의 무리가 정국공신을 깎는 
것은 강상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그들이 이렇게 옛 
신하들을 없이한 뒤에 연산군을 함부로 내쫓았다는 죄목을 지어 우리를 
내쫓는 반역을 일으킨다면, 그대들 옛 공신은 어육이 될 것이요, 나도 또한 
쪼기는 몸이 될 것이다. 조광조는 나라 동산에 잎마다 주초란 글자를 써서 
일국의 인심이 함빡 자기에게로 돌아가게 만들었고 만 조정 신하들은 그를 
높게 우러러보고 있다. 그 자가 하루 아침에 나의 곤룡포를 뺏어 입는다면 
누가 능히 이 일을 막을 수 있으랴. 광조가 현량과를 설치한 것도 이제 
생각해 보니 자기의 날개를 만들려 한 것이다. 이것들을 없애 버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나 그대의 사위 김명윤이 그들과 한 당이 되었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내 심복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영의정 정광필은 왕실을 도운 
사람이지마는 이장곤은 믿지 못하겠고, 심정은 믿을 만한 사람이니 나의 
뜻을 심정, 남곤과 의논하여 처리하라.'
  왕은 여기까지 쓰고 잠깐 붓대를 멈춘다. 희빈 홍씨와 경빈 박씨는 
임금이 쓰는 언문 글자를 좌우 옆으로 갈라 앉아 한 자도 빼지 않고 
속으로 읽어 내려간다. 임금이 붓방아를 찧는 것을 보자, 홍빈이 아뢴다. 
"그 자들 중에 천하장사가 누구누구란 것도 밝혀 주옵시오. 그리해야 
일하기가 편리할 것입니다." "네 말이 옳다. 장사 이름도 밝혀 
주어야겠구나." 전하는 말을 마치자 다시 쓰기를 계속하다. '유용근, 한충, 
박세희, 윤자임은 모두 다 조광조의 직계 부하들로서 글도 잘하지만 
무예가 구비한 인물이다. 가장 무서운 놈들이다. 아침에 이자들을 없애 
버린다면 저녁에 죽어도 근심이 없을 것이다. 지난번 경연 때 기준이란 
자는 공석에서 말하기를 조광조 같은 사람은 참말로 정승감이라고 찬양을 
한 일이 있다. 이자들이 몇 번만 말하면 그렇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크고 
작은 벼슬은 모두 다 이자들의 입에서 나오고 보니 나는 임금이 아니라 
빈껍데기 칭호만 듣고 앉았을 뿐이다. 조광조는 처음에 말이 온순하고 
공손하여 사람다웁다고 생각해서 이태가 채 못 돼서 발탁해서 높이 
썼더니, 누가 오늘날 '주초'의 꾀 속에 빠질 줄 알았으랴. 광조를 들어내서 
죄주려 하나 대관, 홍문관의 유생이며 조정의 육조가 들고일어나 못 
한다고 할 테니 나로서도 조처할 수가 없다. 어떻게 처치해야 좋을지 
걱정이다. 요새는 밥을 먹어도 맛이 없고, 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얼굴이 여위어서 뼈가 드러날 지경이다. 내가 임금이라 하나 알지 
못할 노릇이다. 전에 유용근이란 놈은 나를 거만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임금으로서 생각지 않는 모양이다. 그대들은 먼저 이자들을 없앤 뒤에 
처치할 일을 사후에 들어도 좋다.'
  전하는 쓰기를 마치고 수결을 두었다. 전하는 밀서를 홍빈한테 내어 
주었다. "자, 그럼 이 봉서를 빨리 남양군한테로 전하게 해라." 전하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린다. 희빈 홍씨와 경빈 박씨의 입에서는 가벼운 
한숨이 새어 흘렀다. 희빈은 밀서를 단단히 들고 봉한 뒤에 심복 나인을 
어전으로 불렀다. "너, 이 봉서를 가지고 남양군 대감께 친히 면대해 
올려라. 소중한 분부시다." 나인은 봉서를 품속이 깊이 간직한 채, 
어전에서 물러갔다. 남양군 홍경주와 남곤, 심정은 홍경주의 사랑에서 기별 
있기를 학수고대한 지 오래였다. 홍경주는 나인한테서 전하의 밀지를 받자 
사랑으로 나와 남곤, 심정과 함께 있었다. 남곤, 심정은 밀지를 다 읽자 
무릎을 치면서 좋아했다. "오늘 밤 안으로 일을 단행합시다." 남곤과 
심정은 말을 마치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양군 홍경주도 밀지를 
품속에 감춘 채 의관을 정제하고 부리나케 일어난다. 남양군 홍경주는 
품에 밀지를 품고 조광조와 사이가 먼 재상들을 찾았다. 지중추부사 
안윤덕을 찾아 역적질한다는 뜻을 말하고 함께 고변할 것을 의논하니, 
안윤덕은 조광조와 가깝지 못하나 그가 역적질을 할 사람이 아닌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나로서는 이 일을 할 수 없소이다." 하고 단번에 사절해 
버렸다. 홍경주는 권균이란 사람을 찾았다.
  "조광조가 역적질을 하려 했소. 고변을 같이합시다." 하는 홍경주의 말에, 
"소생 같은 사람은 벼슬계제가 낮아서 감히 이런 일에 참례할 수 
없습니다." 하고 고변자 되기를 사양하였다. 권균도 역시 조광조가 바른말 
잘 하는 사람이요, 유림의 영수인 것을 잘 아는 때문이다. 홍경주는 다음엔 
여성부원군인 송질을 찾았다. 송질은 정국공신의 한 사람으로 유림들한테 
삭훈을 당한 사람이나 홍경주와 보조를 같이하지 아니했다. "대감, 나는 
병이 들어서 이번 일에 참례할 수가 없소이다." 하고 병을 칭탁하고 누워 
버렸다. 한편으로 남곤과 심정은 호조판서 고형산, 공조판서 김전, 
병조참지 성운 등을 찾아서 함께 고변할 일을 약속한 뒤에 다시 남곤은 
영의정 정광필을 찾는데, 일부러 변장을 해서 옷을 잘 입고 영의정 집 
대문을 두드렸다. 예조판서인 남곤이 구종별배를 거느리고 벽제 소리를 
쳐서 정식으로 영의정을 찾는다면 단번에 이 소문은 조광조한테 들어갈까 
겁이 나서 일부러 변복을 한 것이었다. 
  남곤은 초립을 쓰고 꾀죄죄한 추한 옷에 해어진 미투리를 신고 영의정 
정광필의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청지기는 남곤의 옷차림을 보자 수상하게 
생각했다. "누구를 찾으시오?" 하고 남곤의 위아래를 훑어 보았다. "대감 
계신가?" 남곤은 하게를 딱 붙였다. "네, 계십니다." "좀 뵈옵게 해주게." 
"누가 왔다고 여쭈리까?" 남곤은 이름을 대기가 싫었다. "그대루 손이 
왔다구만 여쭈어......" 남곤은 반말짓거리를 탁 붙였다. 청지기는 어이가 
없었다. 초립때기를 쓰고 해진 미투리를 신은 초라한 주제에 영의정 
대감을 뵙겠다고 하는데, 통성명도 안 하고 반말 짓거리로 탁 붙이던 품이 
보통 내기는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수상해서 배겨낼 도리가 없다. 
청지기는 그제서야 안사랑으로 들어가 영의정 대감께 여쭈었다. "손님이 
와서 뵈옵기를 청합니다." "누구란 말이냐?" "얼굴 모습을 보면 남판서 
같사온데 의관은 초라해서 아주 상사람같이 차리고 왔습니다. 영의정 
정광필은 점잖은 재상이었다. 예조판서 남곤이 상사람의 옷을 차리고 
왔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구종별배도 없이 왔단 말이야?" "구종이 
무어오니까? 혼자서 걸어왔습니다."
  영의정 정광필은 해괴하게 생각해서 일부러 친히 바깥 사랑까지 나가 
보니, 과연 예조판서 남곤이 초립때기에 꾀죄죄한 옷을 입고 해어진 
미투리를 끌고 찾아왔다. 정광필은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자가 무슨 
짓을 꾸미려고 저 꼴을 해 가지고 돌아다니누.'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사색을 아니 하고 사랑방 안으로 손짓해 불러들였다. 남곤은 아무 말 없이 
영의정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광필은 자리에 앉은 뒤에 
정색을 하고 묻는다. "대감, 어째 의복을 그렇게 차렸소?" "나라의 급한 
일이 있어 뵈오러 왔습니다." "나라에 급한 일이 있기로서니 예조판서인 
정경으로 앉아서 점잖지 않게 의복이 꼴이 저게 뭐요." 영의정 정광필은 
준절히 나무란다. 
  "상감께서 밀지를 내리셨습니다. 조광조의 일당을 없애 버리라구 
하셨습니다. 밀지에는 대감 말씀도 하셨습니다. 영의정 아무개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구. 지금 조광조는 역적모의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원에 
사람을 넣어서 잎사귀와 나무마다 주초위왕이라고 꿀로 글자를 써서 
벌레들이 파먹게 하여 하늘이 시킨 것처럼 가장하면서 민심을 술렁거리게 
하고 있습니다. 상감께서는 이 일을 아시고 크게 노하여 조광조의 일당을 
제해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상감께서는 영의정 대감께 하문을 
하실 것입니다. 물으시거든 그대로 따라가십시오. 만약 대감께서 조광조 
죽이는 일을 반대하신다면 뒤가 좋지 않으실 것입니다." 남곤은 영의정을 
공갈까지 했다. 영의정 정광필은 평상시 남곤의 인물이 소인인 것을 잘 
알았다. 이자들이 바른 사람들을 모해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분함을 이길 
수 없었다. "도대체  대감은 한 나라의 예조판서라는 중책을 띤 재상의 
몸으로 천한 사람의 옷으로 변복을 하고 거리를 쏘다니니 이게 무슨 
해괴한 꼬락서니요. 나는 이 나라 영의정의 몸으로 사림을 모해할 의사는 
추호도 없소. 이 기막힌 일을 어떻게 차마 한단 말요."
  정광필은 남곤을 준절히 꾸짖는다. 남곤은 영의정 정광필의 마음을 
돌리지 못할 것을 알자 다시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얼굴에 새하얀 독기를 
띠고 소매를 떨쳐 일어났다. 남곤, 심정은 다시 홍경주의 집에 모여서 이날 
밤에 일을 꾸미기로 결정했다. 가만히 홍빈에게 연락하여 신무문 빗장을 
빼게 했다. 원래 대궐 정문을 닫고 여는 것은 승정원 승지한테 사유를 
고한 후에 문을 개폐하게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신무문 자물쇠만은 
사약방의 사약이 열쇠를 가지고 열 수 있는 까닭에 유림인 승지가 모르게 
살짝 대궐로 들어가자는 계획이었다.
  이때 이장곤은 병조판서로 있었다. 이장곤은 대인군자로 우의정 안당과 
함께 조광조를 천거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번연히 이장곤이 조광조를 
역적으로 모는 이 일에 찬동하지 않을 줄을 잘 알았다. 그러나 이장곤이 
모르게는 이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병조판서 이장곤은, 판의금을 
겸한 때문이었다. 판의금이 없으면 역적 다스리는 일이 진행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모든 금부 나졸은 판의금의 명령이 있어야만 움직이는 것이다. 
그들은 걱정이 분분했다. "자, 병조판서에 판의금을 겸한 이장곤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나." 남곤이 탄식했다. "병조판서 이장곤이 이 일을 알기만 
하면, 반대하구 안 하는 것은 고사하고 단통에 조광조한테로 비밀이 새어 
나갈 테니 큰 일이 아닌가." 심정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장곤이 없이는 
이 일이 될 수가 없지 않은가. 조광조 일당을 금부나졸들이 있어야만 
잡아들일 텐데 판의금의 명령이 없이 금부 군사들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가."
  홍경주의 말이었다. 이장곤한테는 아무런 연통도 없이 가만 내버려 
두었다가 우리가 대궐 안으로 들어간 뒤에 덮어놓고 신무문으로 
들어오라고 어명을 내리면 되지 않나." "참말, 그게 그럴 듯한 묘한 
계굘세." 남곤도 무릎을 치고 홍경주도 무릎을 쳤다. 이날 밤 이경때, 
남양군 홍경주, 예조판서 남곤, 호조판서 고형산, 공조판서 김전, 도총관 
심정, 병조참지 성운은 동짓달 서리 찬 달빛을 밟으며 신무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미리 약속한 대로 신무문 빗장은 사약의 손으로 스르르 
뽑아졌다. 전하는 편전에 벌써 나와 있었다. 홍경주가 앞을 서서 어전에 
아뢴다. "신 정광필, 홍경주, 김전, 남곤, 이장곤, 고형산, 심정 등은 조광조 
일당의 역적변고를 아뢰오. 조광조의 일당은 서로 편당을 만들어 자기에게 
아부하는 자는 조정에 천거하고 자기들과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해서 서로 
세력을 만들어 의지하고 권세 있는 요로를 차지하여 임금을 속이고 
사사로운 일을 행하여 조금도 기탄이 없을 뿐 아니라, 후진을 꾀어서 
과격한 풍속을 짓고 젊은 것이 윗사람을 능멸하고, 천한 것이 귀한 이를 
업신여겨 나라 형세가 기울어지게 하고, 조정이 날마다 글러 가옵니다. 
조신들은 분함을 못 이기오나 그들의 세도가 두려워서 감히 입을 벌리지 
못하고 곁눈질로 발을 괴이고 섰을 뿐입니다. 사세가 이러하오니 유사에게 
명을 내리시어 법을 밝혀 주옵소서."
  말을 마치자 홍경주는 또다시 아뢴다. "영의정 정광필과 병조판서 겸 
판의금 이장곤은 이 일을 알았사오나, 급히 궐 안으로 들어올 때 연락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어명으로 두 신하를 빨리 부르시옵소서." 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는 뜻을 표했다. 남곤은 미리 써 가지고 들어온 
이장곤에게 가는 편지와 영의정에게 가는 어명을 선전관에게 전했다. 
선전관은 신무문 밖으로 나가 말을 채질해 달렸다. 이장곤은 집에 있다가 
어명을 받들어 읽었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니 신무문 밖으로 말을 달려 
급히 들어오라." 어명을 받은 이장곤은 영문을 모르면서 깜짝 놀랐다. 
창황망조하여 대궐 뒷문인 신무문으로 달렸다. 한편으로 대내 안에서는 
홍경주가 또다시 아뢴다. "지금 궐내에 있는 입직승지와 사관들은 모두 다 
조광조의 심복들이옵니다. 어명을 내리시어 이자들을 모조리 옥에 내려 
가두어 주옵소서. 비밀이 새는 때는 큰일이옵니다." 전하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라는 뜻이었다. 이때 입직승지 윤자임, 공서린, 주서 
안정은 천문을 보려 하여 후원에 있는 간의대로 올랐을 때였다. 별안간 
정원사령 한 명이 뛰어와 승지한테 고한다. "나리께 여쭙니다. 재상들이 
신무문으로 들어오고 근정전에는 화광이 비쳤는데 군사들이 위립하고 
섰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우리들 정원 승지들이 모르는데, 재상들이 
대궐로 들어왔으며 근정전 안에 불빛이 켜져 있을 리가 있나." 
"아니올시다. 참말이올시다. 소인이 헛소리를 여쭙겠습니까."
  승지들은 의심이 버럭 나서 걸음을 빨리하여 간의대에서 합문 밖으로 
쫓아왔다. 바로 이때였다. 판의금 이장곤이 말을 달려 신무문 앞에 내리니 
이사하게도 문이 열려 있었다. 말에서 내려 궐문 안으로 들어서니 마침 
남곤이 대기하고 섰다가 어둠 속을 향하여, "판의금 대감이 들어오셨다. 
금부나장들은 영을 받으라." 하고 큰소리로 외치니 금부나장과 나졸들은 
일제히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었다. 진짜 판의금을 앞세우고, 남곤이 
판의금이 되어 기민하게 호령을 내린 것이다. 이장곤은, "웬일이요?" 하고 
남곤한테 물으니 남곤은 간단하게, "조광조가 역적질을 했습니다." 하고 
근정전으로 향해 걸었다. 이장곤은 어이가 없었다. 마음속으로, '이자들이 
기어코 조광조를 죽이려고 드는구나.' 하고 한심하게 생각하고 황망히 
남곤의 뒤를 따랐다. 한편으로 입지승지 윤자임, 공서린, 안정, 이구 등은 
간의대에서 정원사령의 말을 듣고 합문 밖으로 걸음을 빨리해 나오니 
근정전 앞에는 동촉이 휘황하고 전각 서편 뜰에는 금부나졸들이 벌려 선 
곳에 철퇴 곤장 형틀이며 가지각색의 모든 형구가 즐비하게 벌려져 
있었다. 입직승지 윤자임은 소리 높여 금부나장들에게, "정원승지가 허락을 
내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함부로 이곳엘 들어왔느냐?" 하며 호령해 물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입직승지 윤자임은 또다시 조신들이 서 있는 곳으로 가서, "정원의 
승지들이 몰랐는데, 대감들은 어느 문으로 어떻게 들어왔소?" 하고 
힐난하니 이장곤은 섰다 앉았다 좌불안석을 하면서 윤자임을 향하여 무슨 
말을 할듯할듯 하다가 말을 못하고, 도총관 심정은, "표신으로 부르신 
때문, 신무문으로 들어왔소." 하고 차갑게 대답했다. 이윽고 편전 합문에서 
내관 한 사람이 나타나면서, "별조참지 성운에게 특명으로 승지를 
제수하시었소. 빨리 들어가 입대를 하시오." 성운은 고변자의 한 사람으로 
남곤, 심정의 한패였다. 성운은 대기하고 있다가 칼을 차고 합문 안으로 
추창해 들어간다. 이 모양을 본 입직승지 윤자임은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여보 성참지, 못 들어가오. 입직승지인 내가 모르는데 내관 말만 듣고 
당신이 어떻게 들어가오." 승지 윤자임은 성운을 합문 안으로 못 들어가게 
막았다. 그러나 성운은 승지 윤자임을 뿌리치고 합문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이때 주서 안정이 성운의 각대 띠를 탁 붙들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사관은 참여해야만 한다. 혼자 못 들어가리라. 함께 
들어가자."
  안정은 일변 말하면서 성운의 각띠를 버쩍 잡아끌었다. 새로이 승지가 
된 성운은 쇳덩이 같은 주먹으로 안정의 팔뚝을 되게 치면서 합문 안으로 
쑥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성운의 뒤를 따르는 내시는 합문 수문장을 
꾸짖는다.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섰느냐. 어서 빨리 잡인을 쫓지 
못하느냐." 수문장은 우르르 달려들어 입직승지 윤자임과 주서 안정의 
팔을 지르르 잡아끌어, 합문 밖으로 나온다. "이놈아, 우리가 어째 
잡인이냐. 당당한 입직승지와 입직 사관이다." 큰소리로 호통을 쳐 
부르짖는다. 이때 심정은 끌려 나오는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오면서, 
"들으니 상감께서 대단히 진노하셨다 하오. 함부로 들어가지 마시오." 하고 
씽긋 웃었다. 승지 윤자임과 주서 안정은 분함을 못 이기어 씨근거리고 
섰을 때, 합문 안에서는 새로된 승지 성운이 나타나자 소매 속에서 조그만 
쪽지 한 장을 판의금 이장곤한테 내밀었다.
  "이 사람들은 모조리 의금부로 가두라 하시오. 이 종이는 상감께서 친히 
쓰신 어필입니다." 이장곤은 쪽지를 받아 보자 얼굴이 백지장이 되었다. 
그러나 어명을 아니 전할 수는 없었다. 금부나장은 판의금 이장곤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승지 윤자임, 승지 공서린, 홍문관 응교 기준, 수찬 
심달원, 주서 안정, 검열 이구 등을 옥에 내리랍신다." 판의금 이장곤의 
목소리는 떨렸다. 금부나졸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즉석에서 입직승지 
윤자임, 사관 안정 등을 비웃 두루 엮듯 해서 금부옥으로 끌고 나간다. 
먼저 대궐 안에 있는 장애물을 없이하자는 것이다. 이때 유림의 영수들인 
대사헌 조광조, 우참찬 이자, 형조판서 김정, 도승지 유인숙, 우부승지 
홍언필, 좌부승지 박세희, 동부승지 박훈, 대사성 김식, 부제학 김구 등은 
남발된 공신들의 칭호를 깎은 뒤에 진심으로 임금을 숭배했다. 십 년 전에 
이미 결정된 공신 칭호를, 정도를 내세워 바로잡기는 하였으나, 보통 
임금으로는 단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서로들 모이기만하면 
이만큼 밝은 임금을 더욱 도와서 밝은 정치를 아니 한다면 이것은 
자기네들이 힘을 쓰지 않는 것이라고 서로를 권장하면서 요순의 시절을 
이룰 것을 맹세하면서 더욱 밝은 정치를 실천하기를 계획하고 있었다.
  조광조는 이날 아침에 일찍이 사헌부에 나가서 일을 처결한 뒤에 늦게 
돌아와 저녁밥을 마치고 사랑에 앉아서 혼자 책상을 대하여 독서를 하고 
있을 대였다. 밤은 늦어 거의 이경이 넘었는데 별안간 대문간이 
떠들썩하면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밤은 늦어 거의 이경이 
넘었는데 별안간 대문간이 떠들썩하면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가 보아라. 누가 찾나 보다." 조광조는 무심코 아랫방에 있는 시자에게 
이르고 다시 책장을 넘기고 있을 때, 시자는 창황하게 들어오면서, 
"선전관이 금부나졸들을 거느리고 어명을 내리러 왔다 하오." "선전관이 
금부나졸을 데리구?" 점잖은 조광조였건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웬일인가.' 속으로 생각하면서 벽에 걸린 의관을 떼어 입으려 할 
찰나였다. 선전관은 벌써 사랑 마루로 성큼 올라서고 뒤이어 금부나졸 
수십 명이 우르르 짚신 감발로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명요. 죄인 
조광조를 잡으랍신다." 선전관의 목소리와 함께 조광조는 꼭꼭 나졸들의 
오랏줄에 묶여졌다. 온 집안은 발끈 뒤집히고 통곡 소리가 요란했다. 
  조광조는, '소인들이 기어코 일을 냈구나.'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집안 
사람들을 진정시킨다. "모든 일이란 바르게 판단되는 법인데, 어째 이리 
소란들을 떠느냐." 준절하게 타이른 뒤에 대궐 안으로 묶여 들어갔다. 이때 
비로소 경복궁 대궐의 정문인 광화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조광조가 대궐 
문앞에 당도해 보니, 우참찬 이자, 형조판서 김정, 도승지 유인숙, 우부승지 
홍언필, 좌부승지 박세희, 동부승지 박훈, 부제학 김구, 대사성 김식 등도 
모조리 잡혀 들어왔다. 조광조는 모든 동지들이 한꺼번에 잡혀 들어온 
것을 보자, 확실히 소인들이 자기네 유림들을 몰아붙이려 하려 옥사를 
꾸며낸 것을 분명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일행은 열을 지어 대궐 안마당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엎드려 있는 마당가에는 
기치창검이 번쩍이는 속에 나졸 수백이 무기를 들어 기립해 서 있고 
군기서의 무기들까지 가득히 벌여 있었다. 합문 안 편전에서는 홍경주, 
남곤이 전하를 모시어 새로된 승지 성운과 내시들에게 계속해서 영을 
내린다.
  "전하, 정원의 육방승지와 대간들을 다 옥에 가두었나 승지한테 하문해 
보옵소서." 남곤이 전하 옆으로 바짝 다가서서 아뢴다. "육방승지와 
대간들을 다 옥에 가두었나 빨리 알아들여라." 전하는 남곤이 시키는 대로 
새로된 승지 성운한테 영을 내린다. 성운은, "예......" 소리를 치면서 신명이 
나서 관의자락을 흩날리고 합문 밖으로 나간다. "육방승지와 대간들을 다 
옥에 가두었나 알아들이랍신다." 성운은 칼자루를 잡고 서서 위엄기 있는 
큰소리로 외친다. "예의, 다 잡아 옥 속에 잡아넣고 옥문을 채웠소." 
금부도사가 큰소리로 대답한다. 성운은 다시 발길을 돌려 합문 안으로 
총총히 걸어 들어갔다. "이미 옥에 가둔 지 오래다 하오." 승지는 전하께 
복명을 아뢴다. "그러하오면 빨리 선전관으로 금부나졸들을 거느리고 
조광조의 일당을 모조리 잡아다가 박살하라시는 분부를 내리옵소서." 
이번엔 홍경주가 전하의 옆으로 가까이 가서 아뢴다. "승지는 빨리 
선전관을 시켜서 죄인 조광조의 일당을 모조리 잡아다가 대궐 안마당에서 
박살을 시키게 하라." 승지 성운은 또다시 영을 받고 합문으로 뛰어나가 
선전관에게 영을 내린다.
  "선전관은 어디 있는가? 죄인 조광조를 빨리 잡아 오라 합신다. 그리고 
금부도사는 죄인이 들어오는 대로 곧 박살을 시키랍신다." 선전관은, 
"예의." 하고 소리치면서 금부나졸들을 지휘하여 궐문 밖으로 나간다. 
죄상이 있고 없는 것을 판정할 것 없이 그대로 막 박살을 시켜버리자는 
홍경주, 남곤, 심정의 계획이었다. 박살 소리를 듣자 깜짝 놀란 사람은 
병조판서에 판의금을 겸한 이장곤이었다. 홍경주, 남곤, 심정 일당이 
죄상이 있고 없는 것을 구별할 것 없이 그대로 조광조를 죽여 버려서 어진 
사람의 씨를 말리자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온몸에는 소름이 쫙 끼쳤다. 
아무리 둘러보나 영의정 정광필의 얼굴도 보이지 아니하고 우의정 안당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조광조를 처치해 버리자는 
계획이 분명했다. 이장곤은 의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곧 소맷자락을 
떨치고 합문 안으로 들어섰다. 수문장이, "누구요?" 하고 이장곤을 
가로막는다. "병조판서 판의금 이장곤이다." 이장곤은 엄숙히 대답하고 
수문장의 막는 팔을 뿌리쳐 버린다. 이장곤은 연산 때부터 유명한, 
천하장사란 소문이 높은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연산 때 귀양까지 
갔던 사실이 있었다. 힘찬 이장곤의 주먹이 한번 수문장의 막은 팔을 
후려치니 수문장은 어깨가 떨어지는 듯했다. 비슬비슬 합문 옆으로 
밀려난다. 승지 성운이 번연히 이장곤인 줄 알면서도, "누구냐" 어명이 
없이는 못 들어온다." 하고 팔을 벌려 막는다. 구 척 장신 이장곤은 눈을 
딱 부릅떴다.
  "재상이 급히 아뢸 일이 있어 들어가는데 요마승지가 어찌 길을 
막느냐?" 구 척 장신 이장곤은 번쩍 주먹을 들어 성운의 볼을 쥐어지르려 
하니, 성운은 이장곤이 연산 때부터 천하장사로 귀양갔던 일을 짐작하는 
위인이라 다시 더 항거를 못하고 비틀비틀 물러나 버린다. 내시도 감히 
막지를 못했다. 이장곤은 쏜살같이 편전으로 들어가 어전에 엎드렸다. 
옆에는 홍경주와 남곤이 아직도 전하를 모시어 서 있었다. 남양군 
홍경주와 예조판서 남곤은 이장곤이 허락 없이 편전으로 들어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병조판서에 판의금을 겸하고 있는 당당한 재상일 
뿐 아니라 아까 자기들이 전하께 고변을 할 때도 영의정 정광필과 
병조판서 이장곤의 이름을 헛탕으로 빌어다가 고변자 속에 넣어 왔으니 
지금 어전 이 자리에서 이장곤이 들어왔다고 힐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장곤은 어전에 곡배를 드린 뒤에 간곡히 아뢴다. "듣자오니 조광조의 
죄상을 문초하기 전에 박살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논이 계셨다 하오니 
사실이온지 알 길이 없어 아뢰나이다. 소신의 맡은 바 책임은 
판의금이옵니다. 죄상을 알기 전에 조광조를 박살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리하옵고 조광조는 한 나라의 소중한 충헌의 책임을 맡은 
대사헌이었습니다. 대사헌의 죄를 다스리는데, 거리의 강도놈을 죄주듯 
박사을 한다는 것은 조정의 체통을 잃은 일일 뿐 아니오라, 이 자리에는 
영의정의 얼굴이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막중한 나라의 큰 의옥을 
다스리는 데 대신이 없이 어떻게 일을 처리하옵니까? 대신이 빈청에 
출두한 뒤에 죄를 다스려도 늦지 않다 생각하옵니다." 
  이장곤의 아뢰는 말씀은 부드럽고 간곡했다. 홍경주와 남곤은 좀이 
쑤시어 배겨낼 수가 없었다. 남곤은 홍경주한테 연해 눈짓을 한다. 
"죄인들은 역적들인데 일을 지체했다가 불의의 사변이 일어난다면 어찌할 
테요." 남곤의 눈짓을 받자 홍경주는 이장곤한테 어서 일을 처치하는 것이 
옳다고 항의를 꺼낸다. 이장곤은 다시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말을 
꺼낸다. "조광조가 아무리 역적모의를 했다 하더라도 일당이 지금 모두 
잡혀서 대궐 안에 와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단 말씀요?" 당치 않은 말씀 
마시오. 어떻든 여의정 모르게는 옥사가 진행될 수 없으리라 생각하오." 
이장곤은 손을 흔들어 홍경주의 말을 막는다. 임금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영의정이 없이는 일이 처리될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영의정은 믿는 
사람이었다. "어서, 영의정을 들라 해라." 전하는 남곤에게 영을 내린다. 
홍경주와 남곤은 애당초 고변을 하는 데 영의정 정광필의 이름만 빌어 
놓고 급히 조광조를 죽여 버리려 했다. 처음 남곤이 변복을 입고 영의정 
정광필을 찾았을 때, 영의정은 조광조를 역적으로 모는 일을 반대할 뿐 
아니라 도리어 예조판서 남곤이 변장을 하고 이따위 일을 하러 다닌다고 
준절하게 꾸짖었으므로, 숫제 영의정은 이번 옥사에 참석시키지 않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장곤이 영의정이 있어야 한다고 우겨대고 임금도 
대신을 부르라고 영을 내리는 바람에 홍경주와 남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남곤은 영의정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이 훨씬 깊어 삼경때나 
되어서 영의정 정광필은 녹사를 통하여 전하의 부르는 어명을 받고 총총히 
평교자를 타고 대궐로 들어가 어전에 엎드렸다. 정광필은 어제 남곤이 
변장하고 찾아와서 조광조가 역적질을 한다는 소리를 듣자 벌써 일이 
일어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임금은 정광필이 입대한 것을 보자, 
"조광조가 역적질을 하려고 편당을 만들었구려. 우선 이자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궐정 안에 대기시켜 놓았소. 이자들을 곧 박살시키도록 하오." 
전하는 대신에게 준엄한 영을 내린다. 영의정 정광필은 지체치 않고 
어전에 아뢴다. "조광조는 아직 나이 어린 유생이옵니다. 적당한 떄를 
가리지 않고 너무 지나치게 국정을 쇄신하려 했을 뿐이옵지, 그들이 무슨 
다른 뜻이야 있었겠습니까? 잠깐 죽이신다는 분부를 중지하시옵고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삼공들이 모여서 신중하게 죄를 다스려 의논한 후에 
처리하셔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영의정 정광필은 말을 마치자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서 관의 자락이 젖어 버린다. 소인이 조정에 득세를 하고 
어진 선비들이 쫓기어 죽을 고비에 든 것을 한탄하는 눈물이었다. 
  전하는 영의정 정광필이 조광조를 두둔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내전으로 들려 한다. 정광필은 발길을 옮기는 
전하의 뒤를 따라 울며 아뢴다. "전하, 그저 조광조는 철이 없는 선비 
옵니다. 조광조를 당장 죽이시지는 마시옵소서. 죄상을 밝혀 심사한 뒤에 
죽여도 늦지 않사옵니다." 영의정은 목이 메이도록 울었다. 눈물은 비 오듯 
쏟아져 턱에까지 흘렀다. 전하는 대답이 없었다. 영의정은 임금의 
용포자락을 받들어 잡고 울면서 따랐다. 전하도 대신이 이토록 울며 
간하니 어찌하는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우선 조광조의 일당을 옥에 
내려 가두게 하고 우의정 안당을 부르게 하라." 전하는 이렇게 영을 
내리고 내전으로 들어간다. 내전에는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를 위시하여 
모든 공신의 딸들이 촛불을 돋우고 상감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의 노기는 아직도 얼굴에 가시지 아니했다.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는 
전하를 반가이 모셔 들었다. 
  "밤을 밝히시어 어찌하시옵니까." "감기가 드시오면 어찌하시옵니까." 
후궁들은 보료를 헤치고 어체를 더운 곳으로 모시었다. "역적 놈들은 
처치하셨습니까?" 홍빈이 고개를 갸우뚱 들어 초조하게 아뢰어 본다. 
"당장, 곧 박살을 하라 했더니 판의금 이장곤과 영의정 정광필이 죄를 
정한 뒤에 죽여도 늦지 않다고 반대를 해서, 아직 옥에 가두라 일렀다." 
희빈의 얼굴빛은 파랗게 질렸다. "역적을 두호하는 대신도 있사옵니까?" 
전하는 묵연히 대답이 없다. "후환이 두렵습니다." 박빈도 속삭인다. 후환 
소리에 전하의 등살에 소름이 쪽 끼친다. "역적을 두호하는 대신이라면 
대신도 한통속입니다." 희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떨어진다. 후궁들의 말을 
들은 전하는 대신을 견제할 것을 생각했다. "벼루를 가져오너라." 희빈이 
연상을 받들어 드렸다. 전하는 주지를 펼쳐 특명을 내려 전지를 쓴다. 
"남곤으로 이조판서를 삼고, 김근사, 성운으로 가승지를 삼고, 봉상직장 
심사순으로 주서를 삼게 하라." 
  특명은 정원으로 내려지니, 정원에서는 빈청으로 특명을 전했다. 
예조판서 남곤은 이조판서의 특명을 받자 마음속으로는 무한 기뻤으나 
선비들의 욕하는 과녁배기가 되기 싫었다. 슬쩍 영의정 정광필의 기색을 
살피며, "시생은 병이 있어 이조판서의 중책을 맡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즉석해서 전하께 사직상소를 올린다. 영의정 정광필은 남곤의 간특한 
배짱을 유리 붙인 듯 알아보았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성난 눈으로 남곤을 
뚫어지게 노려본다. 남곤의 눈이 정광필과 마주치자 남곤의 고개가 이내 
푹 수그러진다. 
  새벽 오경 때나 되어서 우의정 안당은 비로소 어명을 받고 황황히 
빈청으로 들어왔다. "이게 무슨 변고오니까." 안당은 영의정에게 문후하고 
물으니 정광필은 목이 메어 차마 말을 이루지 못한다. 우의정 안당은 
자기가 천거했던 조광조가 이렇게 혹화를 당할 줄은 천만 뜻밖이었다. 
"대감, 이 사람들을 죽여서야 쓰겠습니까? 우선 목숨이라도 살려 놓게 
하십시다." 말을 마치자 우의정은 영의정과 함께 연명으로 상소를 오린다. 
"오늘 같은 성대에 불행히 선비를 죽였다 하오면 이것은 뒷날 사책을 
더럽히는 일이 되옵니다. 청컨대 금부당상으로 죄를 물어 경중을 판단케 
하옵소서." 하고 극간하는 상소를 올렸다. 
  어느덧 날은 밝았다. 나라의 대신인 영의정 우의정이 판의금을 시켜서 
죄상을 살핀 후에 죄인들을 처형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니, 아무리 
임금이라 하나 대신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때 좌의정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홍경주와 남곤, 심정은 발을 동동 굴렸으나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조광조는 비로소 박살 당하는 걸 모면하게 되었다. 아침이 되자 
금부당상인 김전, 이장곤, 홍숙은 좌기를 차리고 죄인 조광조를 국문하기 
시작했다. 대사헌 조광조, 형조판서 김정, 대사성 김식, 부제학 김구 등의 
죄목은 서로 가만히 붕당을 지었다는 일이오. 도승지 유인숙, 우부승지 
홍언필, 좌부승지 박세희, 동부승지 박훈, 응교 기준의 죄목은 조광조와 
부화뇌동이 되어 은근히 한편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조광조는 옥중에서 
하룻밤을 뜬눈으로 고스란히 밝히고 금부도사한테 끌려 국청 뜰에 
엎드리게 되었다. "죄인 조광조는 듣거라. 너는 어이하여 나라의 후한 
국은을 입은 몸으로 역적질을 하려 하여 붕당을 모았느냐. 네 나이 
몇살이냐?" 
  공조판서 김전이 목청을 가다듬어 금부당상의 자격으로 호령을 내린다. 
김전은 남곤, 심정과 함께 조광조의 역적질을 고변한 사람의 하나다. 
조광조는 번쩍 고개를 들어 금부당상들을 바라본다. 해사하고 결곡한 젊은 
얼굴엔 한 점의 검은 그림자도 없었다. "신의 나이는 올해 삼십팔 
세이옵니다. 선비로 이 세상에 태어난 소신의 마음이 다만 믿는 것은 
임금의 마음뿐이옵니다. 망령되이 생각하기를 국가의 병통이 이로만 
달아나는 것을 슬퍼해서 이것을 바로잡으려 노력한 것뿐이옵니다. 이것은 
나라의 맥박을 새롭게 하여 무궁무진한 반석 위에 올려놓자는 것뿐, 아무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추관은 조광조의 공초를 받아쓴다. 다음엔 
형조판서 김정이 국청으로 끌려 나와 문초를 받는다. 형조판서는 죄인을 
다스리는 최고의 책임자였다. 법을 다스리던 관사의 장으로 인제는 
억울하게 죄인의 몸이 되어 공초를 올린다. "소신의 나이는 삼십팔 
세입니다. 나이 젊고 어리석은 몸으로 외람되이 육경의 자리에 올랐사오매 
스스로 공구할 뿐, 다만 나라 은혜를 갚을 것을 같이 맹서할 
따름이었습니다. 자나깨나 어떻게 하면 나라 일을 바르게 처리하나 하고 
생각했을 뿐, 서로 붕당을 만들어 과격한 일을 했거나 국론을 전도시킨 
일은 추호도 없사옵니다."
  청년 재상 김정은 목이 메어 공초를 올린다. 김정의 공초가 끝나니 
성균관 대사성 김식이 끌려 나왔다. "신은 외람되이 천은을 입사와 대관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습니다. 국가에 실끝만한 유익함이라도 있게 
하기를 노력했을 뿐이옵고, 권세 있는 자리에 있어서 사람을 진퇴시킨 
일은 없습니다. 더구나 편당을 만들어 사사로운 짓을 한 일은 더욱 
없사옵니다." 다음엔 홍문관 부제학 김구가 끌려 나왔다. "신의 나이는 
서른 두 살이옵니다. 성질이 본시 어리석으나 옛 사람들이 사우간에 
도움이 컸던 것을 사모해서 뜻맞는 선비들과 교유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 인물을 진퇴시키고 권력을 잡은 일은 없습니다. 다만 선한 
것을 좋아하고 착하지 아니한 자를 싫어하여 한갓 공론을 가려서 시비를 
판단했을 뿐이옵고 붕당을 가진 일은 추호도 없습니다." 원범이라 
지목받는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의 공초가 끝나니 종범이라 지목을 받는 
승지 윤자임이 끌려 들어왔다. "신의 나이는 부제학 김구와 같은 서른 두 
살이옵니다. 다만 옛사람의 글을 읽어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 알 
뿐이옵니다. 국가 일을 의논하고 생각할 때 간혹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와 의견이 같아서 서로 함께 사귀었을 뿐입니다. 그러하오나 나라 
일을 궤격하게 의논하여 부화뇌동한 일은 조금도 없사옵니다."
  이번엔 좌부승지 박세희가 국청 뜰에 엎드렸다. 삼십 미만인 소년 
승지였다. "네 나이는 몇 살이냐?" 김전이 소리쳐 묻는다. "신의 나이는 
스물아홉 살이옵니다. 신의 나이 연소함에 불구하옵고 왕은이 융숭하시매, 
항상 정성을 들여서 직분을 다하기를 맹서하고 있습니다. 조광조는 신이 
어려서부터 안 사람이옵고 김정, 김구와는 뜻이 맞아 같이 학문을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붕당을 만든 일은 없사옵니다." 다음엔 동부승지 
박훈이 국청에 나와 공초를 대답한다. "신의 나이는 삼십육 세옵니다. 옛 
성현의 글을 읽어 다만 충성하고 효도하여 실천궁행하려는 자이옵니다. 
스승이 없고 벗이 없으면 사람이 되기 어려우므로 조광조를 사귀어 지냈을 
뿐, 다른 죄는 없사옵니다. 면정지하에 옳은 판단을 내려 줍시오." 공초를 
받은 추관들은 죄인들을 다시 옥에 가두라 하고 대신 정광필과 안당한테 
공초를 보인 뒤에 편전으로 들어가 전하께 아뢴다. 추관이 아뢰는 말은 다 
각각 달랐다. 추관 김전은 남곤, 심정의 일당이었다. "조광조의 일당은 
간당의 율에 의하여 처결하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죄인들을 참형에 
처하고 가산은 적몰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하옵니다." 김전은 조광조의 
일파를 죽일 것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전하는 김전이 아뢰는 말을 듣자,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네 
사람에게는 죽음을 내리게 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곤장 백 대를 쳐서 
삼천리 밖으로 귀향을 보내게 하라." 전하의 머리 속에는 후궁과 홍경주, 
남곤의 요사스러운 간안이 머리 속에 가득 차 있었다. 김전의 아뢰는 말을 
듣자 전하는 당장 곧 준엄한 분부를 내린다. 판의금 이장곤이 깜짝 놀란다. 
"죄인들은 모두 다 눈물을 흘리고 하늘을 가리켜 붕당을 만든 정실이 
없다고 맹서를 했사옵니다. 다시 처분을 내려 줍시오." 하고 간곡하게 
아뢴다. 전하는 요사이 이장곤을 차차 신복으로 생각하지 아니했다. 홍빈과 
박빈이 이장곤은 천하장산데 조광조의 편이라고 참소를 한 때문, 이장곤을 
뜨악하게 생각했다. "공론이 이미 정해졌으니 별도리가 없다. 딴말 말고 
조광조에게 죽음을 내리게 하라." 전하의 목소리는 강경하고 엄숙했다. 
이때 별안간 대궐 밖에서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바람결에 들려 
오는 소리는 울부짖어 통곡하는 소리였다. 임금은 깜짝 놀란다. "저게 무슨 
소리냐?" 전하는 시신한테 묻는다.
  "성균관 선비들이 모여서 떠들어댑니다." 승지는 사실대로 아뢰었다. 
"선비들이 떠들어대다니?" "조광조를 살려 달라고 떠들어댑니다." "몇 
명이나 모였기에 저렇게 소란스러우냐?" "천여 명이나 됩니다." "무어? 
천여 명!" 임금의 등살에 소름이 쪽 끼쳐진다. 함성은 또 한 번 천지를 
진동한다. 목을 놓아 통곡하는 소리가 악머구리 꿇듯 일어난다. "통곡들은 
왜 저리 하느냐?" "전하께 울면서 하소연하는 소리옵니다." 임금은 마음이 
산란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이때 성균관 유생들은 조광조를 죽인다는 
소리를 듣자, 너도나도 성균관에서 뛰어나와 광화문 대궐로 향했다. 사람은 
갈수록 불어서 천여 명이 넘어서 길거리가 메이게 모여 나왔다. 대궐 앞에 
당도한 선비들은 어떻게 해야 조광조의 원통하게 죽는 것을 풀어 주나 
하고 서성거리고만 있었다. 이때 선비 한 사람이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서서 큰소리로 외친다. "지금 조정암 선생은 죄 없이 소인한테 몰려서 
박살을 당하시게 되었소. 일반 사람들도 선생이 돌아가게 된 것을 가엾게 
생각하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야 있소? 공연히 서성대지만 말고 
우리는 임금께 상소를 올려서 조정암 선생을 구원해 냅시다!"
  선비들이 모두들 바라보니 성균관 유생 신명인이란 사람이었다. 모든 
유생들은 일제히 소리를 치며, "좋소." 하고 대답했다. 신명인은 즉석해서 
벼루에 먹을 갈아 상소를 쓴다. 글씨는 용사가 비등하는 듯했다. 신명인은 
상소 쓰기를 마친 다음에 종이를 펼쳐 들고 목청을 높여 읽는다. "성균관 
유생 일 천여 명은 삼가 성상전하께 글월을 바치오. 대사헌 조광조는 어진 
사람이외다. 나라를 위하여 바른 정치를 하려는 사람을 어찌하여 죽이려 
하시오. 엎드려 원컨대 전하께서는 소인의 말을 멀리하시고 다시 바른 
사람의 말을 들으시어 요순의 정치가 되게 하기를 바라옵니다. 삼가 
유생들 천여 명의 이름으로 아뢰오." 신명인이 읽기를 다하니 천여 명 
유생들은 손뼉을 쳐 갈채를 한다. 유생 신명인은 상소문을 다 읽은 다음, 
피봉을 봉한 뒤에 선비 오륙명과 함께 상소를 올리려 정원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때 대궐문을 지키던 군사는, "못 들어가오." 하고 선비들을 막았다. 
선비들은, "우리는 상소를 올리러 정원으로 들어가오." 하고 사정을 했으나 
군사들은 유생의 팔을 잡아 끌고 등을 밀어 내쫓았다. 유생들은 격분했다. 
와와 소리를 지르며 대궐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문 지키는 군사들은 
수라장을 이루어 유생들을 막았다. 이 통에 진사 박광우는 얼굴이 깨어져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피를 본 유생들은 더욱 격노했다. 밀치고, 떠밀고, 
대궐 마당으로 들어가 통곡들을 하니 선비들의 머리는 풀어져 산발이 되고 
유건은 떨어져 땅에 짓밟혔다. 유생들은 통곡을 하면서 부르짖는다. 
  "조정암 선생을 돌아가게 한다면 우리들 유림은 파멸이다." "유림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 누구의 입에선지 이런 소리가 떨어지자 통곡 
소리는 더한층 악머구리같이 끓었다. 편전 안에 있는 임금은 이 통곡성을 
들은 것이었다. 임금은 마음이 송구하면서도 역증이 불같이 일어났다. 
"유생들이 저렇게 소란을 떠는 일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나라 법에 
과거 보는 과장에 선비가 함부로 들어오는 것도 죄가 되는 법인데 
궐문으로 함부로 뛰어들어 통곡을 하니 천고에 없는 일이다. 앞잡이 선 
유생들을 옥에 가두고 나머지는 금군을 풀어 모조리 궐문 밖으로 내쫓게 
하라." 임금의 전교가 한번 떨어지니 금부나졸들은 육모방치와 철로 만든 
오랏줄을 가지고 풀려 나와서 유생들을 두들겨 내쫓으면서 장두에 선 
사람들을 꼭꼭 묶었다. 이 꼴을 당하는 유생  신명인은 부아가 꼭대기까지 
치밀었다. 눈을 부릅떠 큰 소리로 외친다. "옛날 양진이란 선비가 죄 없이 
옥에 갇히니 태학생 삼천여 명은 대궐에 들어가서 통곡을 하면서 등장을 
든 일이 있었소. 전하가 오늘날 우리 태학생들을 죄인으로 다스려 묶으니 
참말로 천고에 없는 일이오." 모든 유생들은 신명인의 말을 듣자, "옳소!" 
하고 떠들었다.
  금부나졸은 또다시 신명인한테 오랏줄을 던져 올가미를 씌워 묶어 
버렸다. 묶어진 유생들의 수는 여섯 명이나 되었다. 이 모양을 본 이천여 
명의 유생들은 와르르 금부나졸한테로 달려들었다. "이놈아, 나도 묶어라. 
나도 선비다." "금부나졸아, 나도 잡아가거라. 나도 유생이다." "나도 
묶어라. 나도 장두에 선 사람이다." 금부나졸들은 이천여 명의 선비들을 
비웃 두름 엮듯 묶어서 의금부 옥으로 끌어가니 옥은 꽉 차서 가둘 방이 
없게 되었다. 옥이 좁아서 사람들을 가둘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죄인을 
묶을 쇠사슬조차 떨어졌다. 나졸들은 새끼로 유생들의 목을 얽어서 종로 
인경전 앞에 선비들을 둔취시켜 놓았다. "옥이 비좁고 사람이 많아서 
남간에는 더 가둘 수가 없사옵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묶을 철쇄가 동이 
났습니다. 하는 수 없어 짚으로 꼰 새끼로 유생들을 묶어서 인경전 앞에 
붙잡아 두었습니다. 어찌하면 좋사오리까?" 금부나장은 당상한테 묻고, 
금부당상은 임금한테 아뢰었다. 
  여기다가 사태는 또 한 번 벌어졌다. 또 한 패의 유생들 수백명은 
다음날 연명으로 상소를 올린다. "조광조는 나라의 어진 사람이옵니다. 
나라의 어진 사람을 까닭없이 죽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소인들의 참소를 곧이들은 것입니다. 그리하옵고 어제 유생들 수천 명을 
옥에 가두셨으니, 우리들도 마저 가두어 주시옵소서." 기막히는 상소였다. 
임금은 유생의 세력이 이다지 무겁고 강한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앞으로 
몇 천, 몇 백 명의 유생이 또 들고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영의정 
정광필은 대인군자였다. 다시 입대를 청하여 간곡히 아뢴다. "유생들이 
체통을 잘 알지 못하와 일이 이쯤 벌어졌사오니, 전하께서는 물문에 
붙이시어 인심을 진정하도록 하옵소서." 인심을 진정하라는 대신의 한 
마디 말은 강하게 임금의 마음을 움직였다. 임금은 선배들을 들뜨려서는 
아니 되겠다고 비로소 깨달았다. 전하는 승지를 불러 전교를 내린다. "어제 
궐문에서 소란을 일으킨 선비들은 장두에 선 주범 이하, 모두 다 
무죄백방시키라." 명을 내린 뒤에 주서를 시켜 선비들에게 비답을 내렸다. 
  "조광조의 무리가 처음엔 어찌 나라를 그르칠 뜻이 있었으랴. 나 역시 
훌륭한 정치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이 무리들이 
너무나 과격한 일을 하는 까닭에 부득이 죄를 주는 것이다. 대신들도 
되도록 조정을 안정케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소인의 말을 들어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전하는 비로소 유생들을 위로하는 비답을 내렸다. 험악한 
공기는 약간 누그러지듯 하면서 수천 선비들은 비로소 옥에서 풀려 나오게 
되었다. 
  바깥 사태를 모르는 옥에 갇힌 조광조, 김정, 김구, 이자 등은 서로들 
죽을 각오를 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상화 속에 높이 뜬 동짓달 
차가운 달빛은 옥방 속으로 울연히 비쳐졌다. 밤은 깊고 기러기 소리는 
처량했다. 그들은 이승의 마지막 이별주를 옥 안에서 들고 들며 권한다. 
김정이 술 한 잔을 가득 따라 조광조에게 권한다. "자, 정암.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몰려 죽을 줄은 몰랐네. 나라의 성대를 만들어 보려던 
우리들이 역적으로 몰리다니 기막히지 않는가, 하하하. 결별주나 한 잔 
들기로 하세." 정암 조광조는 김정이 따라 주는 술잔을 받아 한숨에 쭉 
마신다. 김정은 마시는 조광조를 바라보자 얼굴빛이 더욱 구슬펐다. "내가 
이별시를 한 수 부를 테니, 들어 보소." 김정은 이내 청을 높여 시를 
읊는다. "이밤에 황천으로 영영 갈 길손이, 공연히, 밝은 달을 인간 속에 
바라보네." 
  김정의 구슬피 읊은 처량한 영시 소리를 듣자, 모든 사람들은 눈물이 두 
뺨으로 줄줄 흐른다. 달빛에 비쳐지는 머리 풀어 산발한 얼굴과 얼굴들, 
구곡간장이 물빛 같은 달빛 속으로 녹아 흐르는 듯했다. 조광조는 
결별주를 마시자 이내 목을 놓아 통곡을 한다. 조광조의 통곡 소리가 
머뭇해지자 김구가 김정에게 술 한잔을 따르며 시를 읊는다. "뼈를 구름 
속에 묻으면 만 가지 일이 다 고만인데, 공연히 인간 세상에 이별 곡조를 
남기네." 김구의 청 좋은 노랫소리는 쌍그렇게 서리 찬 허공으로 옥을 
부스는 듯 흩어진다. 이때 기러기 울음소리가 달빛 속에 엉킨 성에를 뚫고 
옥창 너머로 떨어진다. 김정은 김구의 술을 받아 한 모금을 마신 뒤에, 
손에 잔을 들고 시를 읊는다. "밝은 달, 휘영청 장천에 뜬 밤, 엄동에 
안타깝게 이별을 아끼네," 그들은 모두 다 한순배 연결하는 술을 돌렸다. 
그 중에 나이 젊은 박세희가 정암 조광조한테 묻는다. 
  "정암 선생님께서는 평소에 장중하신 어른이신데, 아까 어째서 통곡까지 
하셨습니까? 조용히 의에 죽어 한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조정암은 
조용히 대답한다. "내가 어찌 의에 조용히 죽는 일을 모를 리가 있겠나. 
임금을 꼭 한 번만 만나 뵙고 싶으나 뵈올 길이 없으니, 이것이 한이 되어 
통곡을 한 것일세. 정말, 내 임금은 나를 죽일 리가 없네, 모두 다 소인의 
짓일세." 조광조는 말을 마치자 허리에 찬 필낭에서 붓을 꺼내들고 저고리 
앞자락을 부드득 뜯어 펼쳤다. 수묵통에 붓을 찍어 상소문을 쓴다. "신의 
무리는 본래 어리석고 광소한 것들로서 밝으신 인군을 만나 경악에 
출입하고 광영을 얻었던 것입니다. 다만 우리 임금의 거룩하시고 밝은 
것만 믿고 어리석은 충정을 펼치다가 모든 사람의 시기를 입게 
되었습니다. 다만 임금이 계신 것만 알 뿐, 다른 일은 교계치 
아니했습니다. 우리 임금께옵서 요순의 착한 일을 행하시기를 바랐을 뿐, 
저희들의 몸을 위하여 마련한 일은 추호도 없사옵니다. 신 등의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하오나 다만 사화가 한 번 터지는 날, 나라의 명맥을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늘 문이 막히고 멀어 회포를 양탈할 길이 
없사옵니다. 긴 말씀을 차마 다 글월로 아뢸 수 없나이다. 다행히 한 번만 
친히 물어주신다면 만 번 죽사와도 한이 없겠나이다."
  조광조는 쓰기를 다한 뒤에 모든 동료들한테 상소문을 돌려 보였다. 
여러 사람들은 눈물을 머금어 상소문을 읽었다. 조광조는 옥사정을 불렀다. 
"이 상소문을 기어코 정원에 바치도록 해주오. 나중에 후한 갚음을 
하리다." 옥사정도 눈물을 머금고 상소문을 받았다. 당장 곧 조광조를 
죽이려 했던 임금의 마음은 늙은 신하 영의정 정광필의 간곡하게 아뢰는 
정성과 선비들의 인심을 들떠 놀 수 없는 난관의 일이며 조광조의 피를 
토하는 듯한 상소문을 대하자 마음이 약간 움직였다. 임금은 승지 성운을 
불러 다시 처분을 내린다. "조광조, 김정, 김구, 김식 네 사람은 특별히 
죽음을 면케 한 뒤에 형장으로 때려 원방에 안치시키게 하고, 윤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 네 사람은 멀리 귀양 보내 부처에 처하게 하라." 승지 
성운은 판을 눌러 대신이 있는 빈청으로 나와, 영의정 정광필과 우의정 
안당은 조광조가 죽음을 면하게 되니 마음이 약간 놓였으나 흉악한 곤장을 
맞는다면 큰일이었다. 영의정 정광필과 안당은 다시 의논하고 합계를 올려 
간한다.
  "이 사람들이 이미 죽음을 면했사오니, 이것은 전하의 하늘과 같이 넓고 
넓은 어진 덕이시옵니다. 그리하오나 이 사람들은 모두 다 몸이 약한 
사람들이옵니다. 혹독한 형장을 맞고 멀리 귀양길을 떠난다면 중도에서 
죽을 것이 분명합니다. 두렵건대 조정에서는 선비를 죽였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니 죽음을 덜게 했다는 실효가 없을 것이옵니다. 원컨대 형장으로 
때리지 말게 하여 주시기 바라오." 임금은 정광필의 상소를 보자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조광조의 죽음을 면케 한 것은 진정으로 조광조를 
동정하여 처리한 것이 아니었다. 선비들의 여론과 대신이 간하는 체면을 
보아서 마지못해 죽이지 않는 것이었다. 임금은, "아니 된다." 불윤 두 
자를 계본에 내려 보냈다. 늙은 재상 정광필은 지성의 사람이었다. 똑같은 
계본을 일곱 번이나 올린다. 그러나 나오는 족족 비답에는, "아니 된다." 
불윤이란 두 자를 써서 빈청으로 각하를 시켜 보낸다. 
  마침내 전임 대사헌 조광조, 전임 형조판서 김정, 전임 홍문관 부제학 
김구, 전임 성균관 대사성 김식은 옥 속에서 금부 국청으로 끌려 나와, 
형틀에 높이 매여져서 볼기를 까헤친 채 아픈 형장을 맞게 된다. 
집장사령들은 모두 다 남곤, 심정의 긴한 청을 받은 자들이었다. 맹호같이 
달려들어 죽장 곤장이 부러지도록 네 사람의 볼기를 번갈아 가며 두들겨 
댄다. 살은 흩어지고 피는 흘러 낭자했다. 모두 다 재상 지위에 있는 어진 
사람들이언만 때를 못 만나 이 기막힌 곤욕을 당하는 것이다. 죄상을 
대라고 때리는 매가 아니었다. 덮어놓고 죽으라고 때리는 매였다. 네 
사람은 몇 번인지 까무러져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이 된다. 결장이 끝나니 
귀양길이 분배되었다. 이윽고 승지는 귀양가는 곳을 분배하는 영을 받들어 
나왔다. "금부도사는 말 듣거라. 조광조는 능주로, 김정은 금산, 김구는 
개녕으로, 김식은 선산으로, 박세희는 상주로, 박훈은 성주로, 윤자임은 
온양으로, 기중은 아산으로 엄하게 압송시키라." 
  이날 밤이 깊어 삼경이었다. 조광조 등 여덟 사람은 여덟 사람의 
금부도사와 수많은 금부나졸들에게 제각기 압령이 되어 아픈 몸을 이끌고 
집에 가서 눈을 조금 붙인 뒤에, 통곡하는 가족들을 구슬피 이별한 뒤에 
동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서 제각기 귀양길로 흩어진다. 이때 임금은 
소란한 인심을 진정시키려 하여 남곤을 어전에 불러 영을 내린다. "경은 
글을 잘하는 사람이다. 선비들의 들뜬 마음이 가라앉도록 좋은 글을 써서 
민심을 진정시키라." 남곤은 어전에서 붓을 들었다. 장차 임금이 조정과 
민간에 내릴 포고문을 짓는 것이다. "덕이 없는 나는 한갓 다스릴 생각만 
갖고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총명을 갖지 못해서 신하를 쓰는 일에 
그릇됨이 있었던 일은 내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바이다. 조광조, 김정, 김식, 
윤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은 모두 다 시종의 자리에 있으면서 아침과 
저녁으로 성리의 학문을 권고하고 연마하므로, 내가 생각하기는 이 
사람들은 과연 나의 정치를 보좌해 줄 사람이라 생각해서 아름다운 벼슬을 
가려서 주고 계급을 뛰어 발탁해 썼으니 내가 그들에 대해서는 저버림 
없이 극진한 대우를 준 것이었다. 뜻밖에 조광조는 서로 결탁되고 
엉크러져서 붙좇는 자는 쓰고 달리하는 사람은 배척하여 권세 있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여 성세를 지어 의지하면서 역조 조종의 법도 족히 지킬 
것이 없고 노성한 이의 의견도 쓸 것이 없다 하면서 후진들을 많이 
끌어내어 궤격한 습관을 이루었다. 국사를 의론하는 곳에서도 조금만 다른 
의견이 있으면 극구 배격하여 그 의론이 꺾여진 뒤에야 그만두었다. 
이러므로 국론은 전도되고 정치는 나날이 글러 갔다. 조정에 있는 다른 
신하들은 가만히 분개함을 품었으나 세력이 두려워 감히 개구를 하지 
못했다. 그들의 소위를 살펴보니, 난정이 아닐 수 없다. 죄상이 현저한지라 
마침내 용서할 수가 없었다. 마땅히 안율치죄하여 백관에게 밝혀 본보기를 
보이려 했으나 전일의 시종이 있었던 일을 생각해서 특별히 죽음을 면케 
하과 광조 등 여덟 사람을 제각기 귀양 보내나니 내 마음이 어찌 좋으랴. 
너희 의정부는 안팎에 이 일을 포고하여 모두 다 나의 뜻을 알게하라."
  남곤은 포고문을 다 쓰자, 어전에 꿇어 읽는다. 임금의 얼굴에 만족한 
빛이 떠돌았다. 임금은 남곤이 초한 글을 승지에게 내어 주었다. "곧, 
정원에 내려서 반포케 하라." 승지는 명을 받들어 정원으로 내려가 
포고문을 조정과 민간에 반포했다. 그러나 글이 아무리 잘 지어진 
명문이라 하나, 유림과 선비와 조광조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거죽으로만 
미끈하게 잘 지어진 이 글을 믿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누구의 
짓인 것을 잘 아는 정부의 간관과 사관들은 다시 조광조 이하 여덟 사람이 
억울하게 귀양가는 것을 구해 내려 한다. 사간원 대사간 윤희인, 사간 
오결, 헌납 이충건, 정언 윤개 등은 간관들 중에도 쟁쟁한 사람들이었다. 
"조광조, 김정 등은 나라의 어진 사람들이온데 죄상이 뚜렷하지 않는 것을 
죄주시니 불가하옵니다. 조광조 등의 귀양가는 것을 풀어 주옵소서." 
상소를 올려 연명으로 극간하고, 전임 대사간 이성동, 전임 승지 유인숙, 
공서린, 홍언필 등 십여 명은 대궐에 들어가, "소신들은 본시 조광조와 
함께 전하를 도와서 밝은 정치를 하도록 주장했던 자들이옵니다. 이제 
조광조를 귀양 보내시니 저희들도 당연히 함께 죄를 입어 귀양을 가야만 
할 것이옵니다. 속히 소신들을 옥에 내려 치죄하옵소서." 하고 자진하여 
죄수 되기를 자원한다.
  억울하게 귀양가는 조광조에게 대한 동정은 조정에 벼슬하는 양심 있는 
사람 이외에 종실에서도 일어난다. 파릉군 이경은 빈청에 나가서, "어진 
이를 멀리하시고 소인들을 가깝게 하시니 나라 형편이 말이 아니옵니다." 
하고 눈물을 흘려 간곡히 간했다. 그러나 전하는 듣지 아니하니 파릉군은 
나라의 일가인 종실 수십 명을 거느리고 조광조를 구원하러 대궐로 
들어갔으나, 정원에서 막고 들이지 아니하니 파릉군은 통곡을 하면서 궐문 
밖으로 나갔다. 이때 전하는 조광조가 하던 대사헌 벼슬을 유운에게 
제수시키니, 유운은 청렴강직한 사람이었다. 새로 임명된 헌관들을 거느려 
대사헌 벼슬을 하지 못하겠노라 사직상소를 올렸다. "조광조의 무리는 
다만 성상전하만 믿사옵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고 언청계용을 
하셨사온데, 이제 별안간 하루 아침에 죄를 내리시니 신의 무리는 까닭을 
알 수 없나이다. 뿐만 아니라, 대간과 간관들도 까닭없이 다 갈아 버리시니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옵니다. 조광조를 다시 복직시키셔야만 소신들은 
제각기 벼슬자리에 나가겠사옵니다. 그리하옵고 조정에서 신하를 죄주는 
것은 공명정대하여 모든 사람이 그 죄상을 다 안 연후에 처리하는 것이요, 
숨기고 비밀에 붙여서는 아니 됩니다. 듣자하오니 간사한 무리들이 전하의 
마음을 공동시켰고, 전하께서 홍경주한테 밀지를 내리시기를 '현량과의 
과거를 보인 것이 처음엔 좋은 일로 알았더니 이제 생각하니 그들의 
날개를 만들려 한 것이라. 현량과에 뽑힌 사람들은 모두 다 죽여 버리려 
했으나 다만 경의 사위 김명윤이 그 속에 끼어 있는 고로 다 죽이지 
못하노라' 하시었다 하니, 이 일이 사실이오니까? 이 말은 사람의 입에 
전파되어 선비 사이에 여론이 물 끓듯 비등하고 있습니다. 과연 죄가 
있다면 한두 사람의 서생을 죄주기가 무엇이 그리 어려우시어 어둔 밤중에 
이렇듯 비밀한 처사를 취하셨습니까. 밖으로는 친하게 믿는 듯이 
뵈이시면서 안으로는 신하를 없이해 버리려고 마음을 잡수신다면 이것은 
나라가 위태롭게 망할 조짐이옵니다. 신의 무리는 통곡을 금할 수 
없사옵니다."
  신임 대사헌 유운은 감연히 동료를 거느려 강경하게 사직상소를 올린다. 
대사헌은 나라의 중직이었다. 새로된 대사헌이 동료를 거느리고 조광조의 
벼슬을 복직시키지 않는 한 벼슬을 받지 않겠다고 강경한 사직상소를 
올리니 전하도 여기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대간들이 와전해서 
사실을 잘못 들은 것이다. 당초에 홍경주는 남곤과 김전한테서 무사들이 
결당하여 문사들을 없애 버린다는 소문을 듣고 그대로 둔다면 큰 변이 
생길 터이므로 조정에서 이렇게 처리한 것이다. 이것은 도리어 조광조 
등에게 대해서는 복이 된 일이다. 조정에서는 앞일을 생각해서 사태를 
안정시키도록 한 일이다." 임금은 이렇게 딴청으로 비답을 내렸다. 말할 
것도 없이 뒤에서는 남곤과 심정이며 홍경주가 전하한테 이렇게 위협 
비슷하게 비답을 내리라고 조종한 것이었다. 대사헌이 사직상소를 올리니 
김구를 대신하여 새로이 부제학으로 임명된 이사균도 사직상소를 올려 
조광조를 구하려 했다. 이사균은 전주부윤으로 있다가 부제학으로 승차된 
사람이었다. 
  "광조의 무리가 죄를 입은 일을 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옵니다. 
이것은 착한 일을 하는 조광조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리 된 
듯합니다. 죄를 주지 않을 곳에 죄를 준다는 것은 임금의 덕에 크게 누가 
되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한 말씀으로 임금을 바르게 깨닫게 했사온데 신 
같은 것은 하늘을 돌이킬 힘이 없습니다. 감히 사직하오니 들어 
주시옵소서." 새로 부제학이 된 이사균도 벼슬이 싫다고 내던져 버린다. 
임금은 그래도 조광조를 무죄백방시키라는 명을 내리지 아니하니, 새로 
대사헌이 된 유운은 또다시 논계를 올린다. "조광조를 풀어놓지 
아니하시면 소신들은 의리상 벼슬을 할 수 없사옵니다. 청컨대 신의 
머리를 베시어 간사한 사람들의 마음이 시원해지도록 하옵소서." 유운은 
또다시 강경하게 사직상소를 올렸다. 유운과 이사균 같은 사람들은 명망이 
있는 사람이나 조광조하고는 친분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조정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가 텅 비게 된 일은 전고에 없는 일이었다. 임금은 
골치를 앓았다. "조정에 삼사가 비었으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하면 좋으냐?" 
임금은 남곤한테 물었다.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면 그만이옵니다." 남곤은 주저없이 대답을 
올렸다. "누구로 대신하면 좋으냐?" "장단부사 이빈으로 대사간을 시키시고 
경상좌도 감사 이항으로 대사헌을 시키시옵소서." 남곤은 아뢰고 물러난 
뒤에 자기 집으로 이항과 이반과 유생 황계옥을 차례차례 불렀다. 그들은 
모두 남곤의 심복들이었다. 남곤의 집에는 이빈이 먼저 불려 왔다. 
"자네한테는 대사간을 제수합시라 했네. 만약 대사간으로 발령이 되거든 
조광조를 대신해서 새로 대사헌이 된 유운을 공박하게. 이유는 이러하이. 
대사헌에 임명이 된 후에 유운은 사은하기도 전에 조광조를 구하는 논계를 
올렸네. 불경일세." 이빈은 남곤보다도 간악한 무리였다. "알아듣겠습니다. 
소인에게 대사간만 주신다면, 한번 본때 있게 유운을 논박해 
몰아대겠습니다." "그리하게." 남곤은 신명이 났다.
  이날 임금은 조광조를 구하려고 노력하던 대사간 윤희인을 무능하다고 
갈아붙이고 남곤이 천거한 이빈으로 대사간 발령을 내렸다. 새로이 
대사간이 된 이빈은 사은숙배를 마친 뒤에 정원으로 들어가 당장 곧 
대사헌 유운을 공박하는 상소를 올린다. "대사헌 유운은 대사헌의 임명을 
받고도 임금께 사은숙배를 아니 드린 채 논쟁하는 계사를 올렸으니, 
이것은 임금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조정의 체통을 잃었을 뿐 아니라 
무군한 행동이옵니다. 대사헌을 갈아야겠사옵니다." 강직한 유운을 
불경으로 몰아붙이니 영의정 정광필이나 좌의정 안당도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이때 조광조가 귀양을 간 뒤에 남곤의 당인 공조판서 김전으로 
우의정을 시키기 위하여 우의정 안당을 좌의정으로 올렸던 것이다. 임금은 
이빈의 상소를 본 뒤에 유운을 체임시키고 경상좌도 감사 이항으로 
대사헌을 임명시켜 버렸다. 이항은 행실이 좋지 못한 사람으로 본시부터 
조광조 등 유림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남곤은 이 일을 잘 아는 까닭에 
이항을 임금에게 추천한 것이었다. 이항이 대사헌이 되어 먼저 남곤을 
찾으니 남곤은 흔연히 이항의 손을 잡았다. 
  "강직한 대사헌이 났으니, 이제는 조정 일이 근심이 없게 되었소. 
조광조의 뿌리는 아직도 조정에 가득 차 있소이다." 남곤은 한편으로 
이항을 추켜 올리면서 은근히 유림을 더욱 공격할 것을 시사한다. 
"조광조의 일당이 아직도 많지만, 그것보다도 더한 것은 대신입니다. 
좌의정 안당과 영의정 정광필은 아직도 조광조의 일파를 두둔하고 있으니 
조정꼴이 되겠습니까?" 엉큼한 이항은 이렇게 남곤의 비위를 맞추어서 
한술을 더 떠넘겼다. "옳은 말씀야." 남곤은 얼굴에 가득 웃음 빛을 띠어 
깔깔 웃는다."이번엔 대감이 대신이 되셔야 합니다." 이항은 또 한 번 
남곤의 비위를 맞춘다. "천만에, 내 따위가 어찌 대신이 되겠소?" 남곤은 
마음속으로 무한 기쁘면서도 겉으로는 정색을 한다. "두고 보시오. 대감이 
이번엔 꼭 대신이 되십니다." 이날 새로된 대사헌 이항과 이조판서 남곤은 
밤이 깊도록 사람을 물리치고 술잔을 기울였다.
  대사헌, 대사간을 새로 낸 남곤은 이튿날 유생 황계옥을 자기 집으로 
청했다. 황계옥은 본시 조광조를 구원하는 상소에 이름을 쓴 자였으나 
염량세태를 보아 붙좇는 자였다. 이조판서 남곤의 부름을 받자, 시각을 
지체치 않고 남곤의 집으로 향했다. 황계옥은 남곤을 바라보자 너부죽이 
절을 올렸다. 며칠 전에도 선비끼리 모이면 남곤은 천하 소인이고 
조광조를 제일 가는 어진 사람이라고 팔을 걷어붙여 분개하던 위인이 
조광조가 귀양을 간 뒤에는 남곤한테 넙죽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얼굴 
가죽이 무던히 두꺼워 보인다. "자네, 조광조를 위하여 또 한 번 상소를 
올려 보지 않겠나?" 남곤은 시치미를 떼고 점잖게 묻는다. "대감께서 
분부를 내리신다면 그대로 봉행하겠습니다." 황계옥도 태연히 대답한다. 
모두들 무던한 배짱들이었다. 남곤은 속으로 이자의 뱃심이 보통내기가 
아니로구나 생각했다. "자네, 조광조만 알지, 남곤은 모르지?" "황송한 
분부십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헤헤, 조광조도 선비요, 남곤 판서도 
선비신데 초록은 다 같은 빛이옵지오." 
  황계옥의 능갈치고 비열한 대답에 남곤은 만족했다. 슬몃 손을 내밀어 
황계옥의 손을 잡는다. "자네, 오늘부터 나를 도와 줄 수 있겠나?" "시생 
같은 사람을 버리지 아니한다면 소금섬을 물로 끄는 시늉은 내오리다." 
"이 사람아, 끌어야지 시늉만 내서야 쓰겠나." "하하하, 끄는 것이 
시늉입지요." "하하하하" 두 사람의 웃음소리는 드높았다. 이날부터 
황계옥은 남곤의 집 식객이 되어 날마다 남곤과 접촉을 했다. 조광조 등 
여덟 사람이 귀양을 간 지 반 달이 채 못 가서 소인들은 이미 일단락을 
지은 조광조의 옥사를 다시 한 번 뒤엎어 놓았다. 유생 황계옥은 유학 
윤세정, 이래와 함께 연명으로 쓴 상소를 정원에 바치고 임금께 올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상소문은 단통 전하 앞에 펼쳐졌다. 
  "지난번에 전하께서는 깨달으신 바 있어 여덟 신하를 추방하시니 안팎이 
모두 다 전하의 밝으심을 칭송하였나이다. 그러하오나 뻗어진 넝쿨과 
엉크러진 그 뿌리는 아직도 조정에 가득 차 있소이다. 이것은 마땅히 죽일 
사람을 죽이지 않는 까닭입니다. 전하는 너무나 어지시어 강기가 
부족하십니다. 용서하온 것이 대왕의 아름다운 덕이지만 죽을 죄를 
용서하는 것은 조종의 법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옵니다. 정법이란 것은 
조종이 마련하신 것이요, 전하로도 가볍게 변할 수 없고 더구나 신하된 
사람으로서는 함부로 어지럽게 천단할 수 없는 바입니다. 전하께서 일곱, 
여덟 신하를 아끼시어 법을 굽히신다면 이것은 조종의 법을 무시하시는 
행동이라, 뒷 세상에서는 전하를 법을 지키지 못한 임금이라 할 
것이옵니다.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는 권력을 잡고 앉아서 노성한 이를 
배척하고 자기의 후진들로만 요로에 앉히고, 윤자임, 기준, 박훈, 박세희 
등은 그의 어금니와 손톱이 되어 그들을 도왔고, 안당, 이자, 김안국은 
그들의 날개가 되어 나라 정치를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전하의 
노염이 풀리시는 날 다시 조정에 돌아와 정치를 문란시킬 테오니 단연코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죄인 조광조 등에게 죽음을 내리시어 국가의 
백년대계를 정하옵소서." 
  며칠 동안 조용했던 조정은 다시 들먹들먹했다. 소인들의 폭탄 상소는 
다시 계속해서 일어났다. 대사헌 이항과 대사간 이빈은 유생 황계옥과 
함꼐 이미 남곤의 사주를 받은 무리들이다. 사헌부와 사간원 헌관과 
간관들 전체의 이름으로 금부당상 이장곤을 탄핵했다. 이장곤은 역시 
조광조를 두둔해서 구해주려고 노력한 사람인 까닭이다. "사헌부, 사간원 
양사는 합계해 아뢰오. 금부에서 지난번 조광조의 무리를 국문할 때 죄인 
조광조는 금부당상 이장곤의 자를 함부로 불러 '희강아, 희강아' 
했다하옵고 또 홍숙을 호명해 불러서 '네가 어떻게 나를 감히 
문죄하겠느냐' 했다 하오니, 죄인으로서 어찌 금부당상에게 이러한 불공한 
말을 쓰게 할 수 있사옵니까. 이것은 이장곤과 조광조의 사이가 너무나 
가까우므로 이런 해괴한 일이 생긴 것이옵니다. 이러고 법이 섰을 까닭이 
만무합니다. 만약에 법대로 국문을 했다면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이장곤에게 법을 문란케 한 죄를 주시옵소서." 임금은 
양사의 합계를 읽자 크게 노했다. "대사헌과 대사간을 들라 해라." 전하는 
승지에게 영을 내린다. 
  대사헌 이항과 대사간 이빈은 어전에 추창해 들었다. "조광조가 
금부당상을 향하여 농지거리 말을 한 것이 사실인가?" "추호인들 어찌 
틀리오리까. 동석에 참석했던 우의정 김전이 다 아는 노릇이옵니다." "과연 
대간의 말과 같다면 금부당상 이장곤을 추고하는 것이 가하다." 승지는 
명을 받들어 금부당상 이장곤의 벼슬을 떼고 추고에 붙여 버렸다. 
소인들의 계획은 면밀하게 착착 실행이 되었다. 금부당상 이장곤을 
조정에서 내쫓은 소인들은 다시 세 번째 폭탄을 던졌다. 대사헌 이항과 
대사간 이빈은 또다시 양사 합계를 올린다. "양사는 합계를 올리나이다. 
자금 이후로는 조광조가 말씀드리려 설치하신 현량과를 폐지시켜 
버리소서. 조정에 일어난 모든 병은 이 현량과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소이다. 
지금 조정에 가득히 차 있는 조광조의 일당은 모두 다 현량과의 
출신들이옵니다. 그들은 그것을 발판으로 조정에 모여들어 붕당을 이루고 
국정을 어지럽게 한 자들이옵니다. 더욱이 좌의정 안당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항상 조광조를 두둔하고 발탁해 써서 오늘의 이런 불상사를 
일으켰사오니 안당을 파면시키고 조광조에게 죽음을 내리옵소서. 끝으로 
조광조 일당의 명단을 바치오니 통촉하시어 죄를 내리옵소서." 
  폭탄은 마침내 좌의정 안당한테로 터져 버리고 말았다. 좌의정 안당은 
황공무지하여 대궐 빈청에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근신하여 대명을 하고 
있었다. 임금은 다시 대간의 합계를 받자 영의정 정광필을 대궐 안으로 
급히 들라 했다. 좌의정 안당이 탄핵을 당했다는 소문은 조정에 짜하게 
퍼졌다. 영의정 정광필이 급히 사인교를 몰아 궐내로 들어가 어전에 
부복하니, 임금은 좌의정을 탄핵한 양사 합계와 유생 황계옥이 조광조를 
죽이자고 다시 주장한 상소문을 정광필에게 내보였다. "양사가 좌의정을 
탄핵했을 뿐 아니라, 유생 황계옥은 다시 조광조를 죽이고 그들의 당파를 
뿌리째 뽑아 놓는 것이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하는 일이라 했으니, 경의 
뜻은 어떠하오?" 정광필은 양사의 합계와 황계옥의 상소를 자세히 읽은 
뒤에 얼굴빛을 장중하게 하여 원로 대신의 충도로써 간곡하게 아뢴다. 
"이미 죄를 판정하여 법에 처한 조광조를 또다시 죽인다는 일은 군왕의 
덕기가 손상되는 일일 뿐 아니라 현량과에서 뽑힌 선비들을 모조리 
붕당으로 몰아 죄를 준다는 일도 극히 불가하옵니다. 더구나 좌의정은 
국가의 막중한 재상이온데, 조광조를 가깝게 안다 하여 죄를 준다는 일은 
나라에서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옵니다." 영의정 정광필은 점잖게 
전하를 눌러 간하고 빈청으로 물러나왔다.
  이 소문은 단박 내시를 통하여 후궁 속으로 들어가고 승지를 통하여 
남곤, 심정, 홍경주의 귀로 전해졌다. 남곤, 심정, 홍경주 세 사람은 급하게 
홍경주의 집으로 모였다. 그들은 꼭 조광조를 죽여 버리고 유림들을 
조정에서 뿌리째 뽑아내 버려야 할 텐데, 영의정 정광필이 번번이 
가로막아 훼방을 놓고 앉았으니 참으로 큰일이라 생각했다. "저놈의 늙은 
정가를 어찌하면 좋은가?" 홍경주가 탄식을 하며 남곤, 심정을 바라본다. 
"영의정은 다 무어야. 영의정마저 쫓아내 버리면 고만 아니겠소." 심정이 
독사 같은 입을 열었다. 새빨간 혀끝이 뱀의 혀끝처럼 날름하고 드러났다. 
"유생 황계옥을 시켜서 영의정마저 탄핵을 시킵시다. 그리구 남양군 
대감께서 대궐 안 홍빈마마께 다시 내통을 해줍시오." 소인들의 극악한 
흉계는 결정지어졌다. 홍경주는 시각을 지체치 않고 홍빈한테 문안비를 
들여보냈다. 이날 저녁에 전하는 홍빈의 처소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언제나 전하의 몸을 편안하도록 돌봐 드리는 홍빈이었다. 홍빈은 전하의 
무릎을 치다가 홀연 말끝이 조정공론에 미쳤다. "양사가 합계를 올려서 
좌의정 안당을 탄핵했답지요." 전하는 누워서 고개를 끄덕였다. "궁중에서 
좌의정뿐 아니라 영의정 정광필도 좋지 않은 사람이라구 소문이 
짜합니다." "왜, 영의정은 좋지 않은 사람야? 점잖은 늙은 재상인데......" 
"유생들의 파당을 길러낸 것은, 사실인즉 좌의정 안당보다도 영의정 
정광필이 더한층 윗길이라 합니다. 조정의 붕당을 일으킨 원인은 모두 다 
정광필이 모르는 체하고 덮어둔 것이라고 원성이 자자합니다. 이번에 아주 
대신들까지 뿌리를 뽑아 버리시옵소서. 그리고 조광조는 그대로 살려 두면 
언제든 전하께 원수를 갚을 것이라구 수군수군합니다."
  조광조가 원수를 갚는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는 홍빈의 한마디 독한 
말에 전하의 등은 찬물을 끼얹은 듯 소름이 쪽 끼쳤다. "영의정 정광필도 
한당이라고들 하더냐?" "한당 아니면 조광조를 그다지 두둔할 까닭이 
있습니까. 보십쇼, 그러나 조광조를 죽인다는 소리만 나면 초상집 상제 울 
듯 통곡을 하고 전하께 매달린다 하니, 이것이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정광필도 조광조와 한덩어리옵니다. 아주 단결에 조광조 
일당의 뿌리를 뽑아 버리옵소서." 수그러졌던 임금은 아름다운 후궁 
홍빈의 말을 듣자 발연히 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튿날 임금은 홍빈의 처소에 있으면서 크나큰 개혁을 구상하고 있을 
때였다. 정원에서는 또 하나의 폭탄 상소를 받들어 올렸다. 임금은 겉봉을 
뜯어보니 유생 황계옥의 상소였다. "정광필은 벼슬이 수상 자리에 있으니, 
국가를 위하여 난정대부를 베는 것이 그의 직책이온데, 국가 원수를 도와 
병을 구원하지 못하고 도리어 우레  같은 위엄을 범하여 죄인에게 부월을 
늦추기만 하니, 장차 저따위 정승을 무엇에 쓰겠소이까." 임금은 황계옥의 
상소를 읽자, 자기가 말하고싶은 마음을 그대로 그려 놓은 듯했다. "유생 
황계옥은 참으로 충신이다. 한 개 선비로 당당히 대신을 논박하여 조체를 
바로잡게 하니 무던한 일이다. 황계옥에게 어사주를 내리게 하라." 전하의 
옆에 있는 홍빈은 명을 받들어 내시에게 어명을 전했다. 기막힌 일이었다. 
임금은 함빡 소인의 꾀에 넘어가 버리고 만다. 폭탄 상소는 또다시 꼬리를 
이어 들어왔다. 임금이 뜯어보니 이번엔 대사헌 이항과 대사간 이빈이 
또다시 대신을 논박하는 상소였다. "나라의 대신이란 것은 국사를 
총람하여 임금을 돕는 까닭에 일인지하요 만인지상에 있다 하는 것인데, 
수상 정광필은 조정의 모든 일을 진압하여 옳고 그른 것을 가려야 할 
대임에도 불구하옵고 중립관망하여 나라 일을 남의 일 보듯 하니 이런 
사람을 어찌 대신이라 하오리까. 대간은 정광필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옵니다."
  소인들이 두 번째 영의정을 때리는 기막힌 상소였다. 이때 영의정 
정광필은 빈청에 있다가 유생 황계옥과 양사대간이 한덩어리가 되어 
자기를 탄핵한 것을 알았다. 초연히 한숨을 쉬고 먹을 갈아 사직상소를 
쓴다. "영의정 신 정광필은 삼가 성상전하께 사직하는 글월을 올리나이다. 
요사이 조정 사이에 인심이 어긋나 갈려지고 사기가 꺾여지고 뭉그러져서, 
신같이 늙고 병든 것은 정승의 자리에 보존해 있을 수 없나이다. 다시 
유능한 인물을 가리시어 인심을 진압케 하옵소서." 정광필은 쓰기를 
마치자 녹사를 통하여 승지에게 전하고 늙은 눈에 눈물이 글썽거려 대궐을 
물러난다. 영의정 자리를 내놓기가 아까워서 우는 것이 아니었다. 나라 
일을 걱정하는 늙은 신하의 기막힌 눈물이었다. 영의정 정광필이 
사직상소를 올렸다는 소문은 별안간 짜하게 조정 안에 퍼졌다. 임금은 
정광필의 사직상소를 받자 시각을 지체치 않고 사정전에 임어하여 정부 
대간들을 들라 했다. 남곤, 심정, 홍경주와 대사헌, 대사간 이하 모든 
대간들이 임금을 옹위하여 둘러싸고 있었다. 
  임금은 천천히 옥음을 내렸다. "소인들이 조정에 가득 차 있어 종묘와 
사직에 큰 영향을 주게 된 이때, 대신은 주야로 생각해서 시비를 판단해야 
할 판국인데 마치 이웃집에 일이 난 듯 태평세월로 바라보고만 앉이 
있으니, 어찌 대신의 체통이라 할 것이냐. 영의정 정광필은 좌천하여 
영중추부사를 시키라." 임금의 말이 떨어지니 소인의 어깨는 으쓱했다. 
"좌의정 안당은 몸이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붕당을 만들어 난정을 
도왔으니 삭탈관직을 시키라." 승지는 어전에 명을 받들어 썼다. 승지가 두 
대신의 체임 단자를 쓰고 나니, 임금은 다시 승지에게 영을 내린다. "붓과 
종이를 올리라." 승지는 어전에 필묵을 받들어 올렸다. 임금은 친히 어필로 
우의정과 좌의정과 영의정의 이름을 써서 새로이 삼공을 제수시킨다. 
임금의 붓끝은 종이 위로 달린다. 조정에 가득 찬 소인들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누가 새 정승이 되나 하고 궁금했다. 새 정승이 누가 되느냐 
하는 것으로 모든 일은 결정되는 것이었다. 임금의 붓끝은 영의정에 김전, 
이렇게 썼다. 다음엔 좌의정에 남곤, 이렇게 썼다. 다음엔 우의정에 이유청, 
이렇게 썼다. 임금은 쓰기를 마치자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어 읽는다. 
"영의정은 김전으로 정하여 대배를 시킨다." "남곤으로 좌의정을 삼고, 
이유청으로 우의정을 제수시킨다." 소인들은 가만히 숨을 죽여 웃음이 
얼굴에 물결친다. "새로이 대배를 받은 삼공들은 비현각으로 들게 하라." 
전하는 명을 내리자 만조백관의 조회를 파하고 내시를 거느려 현전으로 
들었다.
  소인들은 활기를 띠어 신바람이 났다. 조회가 파하자 남곤은 홍경주의 
손을 꼭 붙들었다. 심정이 달려들어 남곤의 손을 힘차게 붙든다. 세 사람은 
아주 말 없이 얼굴엔 기쁜 빛이 가득 넘쳐 흘렀다. 독한 눈과 눈에는 
행복의 꽃이 화려하게 터졌다. 만조백관들은 다투어 남곤한테 나아가 새로 
좌의정 된 치사를 올렸다. "인제는 조정이 평안하게 되었소이다." "인제는 
소인이 물러가고 나라가 반석 같은 자리에 놓일 것입니다." 소인들은 
자기네들을 군자라 하고 어진 이들을 도리어 소인이라 태연히 불렀다. 
남곤은 미소를 풍겨 고개만 끄덕인다. 정광필이 영의정을 내놓고 안당이 
좌의정 자리에서 물러나고 이장곤이 금부당상에서 체임되니 조정에서는 
다시 바른말 할 사람이 없었다. 새로 대신이 된 김전, 남곤, 이유청은 
어명을 받들어 임금의 외편전 비현각으로 들어갔다. 장차 조광조 등에게 
죄를 더하려는 어전회의였다. 좌의정 남곤은 먼저 전하께 아뢴다. 
"금부당상 이장곤이 파직된 후에 아직 자리가 비어 있사옵니다. 
금부당상을 임명시킨 뒤에야 죄상을 다시 판단할 것이옵니다." 전하는 
남곤의 말을 옳게 여겼다. "누구로써 금부당상을 시키는 것이 좋을고?" 
좌우를 돌아본다. 새로된 영의정 김전이 아뢰었다. "심정으로 금부당상을 
삼는 것이 좋은 줄로 아뢰오. 심정은 형조판서를 지낸 전력이 있사옵니다." 
모두 다 좌의정 남곤과 함께 미리 의논하고 올리는 말이었다. "좌상과 
우상의 생각은 어떠한가?" 남곤과 이유청은 짜고 하는 노릇이니 반대할 
리가 없었다. "좋사옵니다." 하고 찬성하는 뜻을 표시했다. 임금은 
즉석해서, "심정으로 의금부당상을 임명시키라. 그리고 곧 입대하도록 
일러라." 
  궐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심정은 의금부당상이라는 나라의 최고의 
재판관이 되어 어전회의에 입대를 드렸다. 임금은 모든 간신들이 다 모인 
속에서 위엄기 있게 입을 열었다. "대간과 유생들의 여론에 의하여 불가불 
조광조 등에게 죄를 더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어찌 처리함이 
좋을까 의논하라." 남곤은 영리한 자였다. 일부러 입을 봉한 채 아무런 
말씀도 드리지 않는다. 임금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에게 죽음을 내리라." 소인들의 마음이 탁 내려앉는다. 좌의정 남곤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네 사람 중에는 분별이 있어야 할 것이옵니다. 
괴수만 죽이고 나머지는 호생의 덕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남곤은 조광조 
한 사람만 죽이고 남은 사람한테는 관대한 처분을 내려지이다 하고 빈다. 
자기의 금도가 이만큼 넓다는 것을 뒷 세상에 남기려는 의도다. 이때 
미관말직으로 있는 언관 유효의가 어전에 추창해 감연히 입을 열었다. 
"광조가 비록 죄 있다 하오나 난신적자는 아니 올시다. 난신적자가 아닌 
다음에 어떻게 죽음을 내리십니까?" 강경하게 항변을 한다. 한 떨기 
살구꽃 속에 한 떨기 백매화가 맺은 향기를 토하는 듯했다. 소인의 직계 
부하들은 깜짝 놀랐다. 임금의 마음이 또다시 풀어지면 큰일이었다. 
  "조광조는 죽어 마땅합니다." "조광조의 죄상은 죽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조광조의 무리는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악머구리 끓듯 
일어난다. 임금은 마침내 최후의 판결을 내린다. "광조는 죽여도 아깝지 
않다. 옥 속에서 불공스럽게 옷을 짖어 상소 올린 일만 해도 넉넉히 죽일 
만한 일이다. 광조에게 죽음을 내리라!" 임금의 말은 마침내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누구 한 사람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울며 
간하던 영의정 정광필도 이제는 없고 좌의정 안당도 없고 판의금 이장곤도 
없다. 남곤, 심정 이하 비현각에 가득히 모인 자들은 고개를 수그려 전하의 
뜻을 받았다. 승지는 붓을 들어 흰 장지에 글씨를 쓴다. "조광조에게 
죽음을 내린다." 다음엔 어판이 눌려졌다. 임금은 또다시 결정을 내린다. 
"김정, 김식, 김구는 광조와 함께 죽일 것이나 특별히 생각하는 것이니 
절도에 위리안치시키라." 승지는 다시 어명을 받아 종이에 쓴다. 이때 
금부당상관 심정은 조광조가 추천한 현량과 출신들과 그들의 붕배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올렸다. 임금은 또다시 죄목을 결정한다.
  "안당, 김안국, 김정국, 유운은 파직을 시키고, 한충은 절도로 귀양 
보내고 파릉군과 안탄은 원찬을 보내고, 이장곤, 권발, 이구는 파직을 
시키고, 시산정, 강녕정, 숭선정, 장성수 등 나라 일가들은 삭탈관직을 
시키고, 유용근, 최산두는 부처에 처하고, 최숙생, 이자, 양팽손, 이약수, 
이희민, 이연경, 윤광령, 이충건, 조광좌, 송호지, 송호례는 탈고신을 
시키고, 서울 안 각방 동리에서 들고 일어나 앞잡이 소두인, 충찬위 
정의손, 박자일, 안숭복, 전의 이성, 왜학 정철현, 이세손, 장악원 악생 
송기, 서리 최인석, 이중진은 결장으로 때리고, 왕자제군의 이름으로 
광조를 구원하려 하던 종 학년은 곤장 백 도를 때려 먼 시골로 
유배시키라." 조광조와 함께 벼슬하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조광조를 
구원하려던 사람들까지 일일이 조사하여 죄를 주었다.
  어진 사람 조광조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들을 쓴 사람들의 폭은 
각계 각층을 망라하여 이처럼 넓었다. 유생들인 선배와 양반 계급과 
나라의 일가인 종실서부터 피리 부는 악공, 통역을 맡은 역관, 나라의 
의원, 서리 역졸, 종의 결지까지 일어나 착한 사람 조광조 하나를 구해 
내려고 하다가, 마침내 이같이 참혹한 죄를 입은 것이었다. 승지는 어명을 
받들어 기록을 쓰고 판의금 심정은 전하의 판결을 그대로 받들었다. 
금부도사들은 바빴다. 새로이 된 무수한 죄인들을 압송하여 팔도강산으로 
흩어지고 또 다른 몇 명은 이미 귀양간 조광조 이하 여덟 사람들을 
처형하기 위하여 요란한 말방울 소리를 울리면서 남으로 남으로 천리길을 
내려간다. 이때 조광조는 전라도 능성으로 귀양간 지 겨우 한 달이었다. 
그는 능성에 도착하자 자나깨나 임금을 그리워했다. 앉으면 서울 편으로 
바라보며 북향을 해서 앉고, 잠을 자도 북편으로 바라보다 베개를 베었다. 
사처에 북편 담이 있어 마음이 답답하니 그는 북장을 헐어 보았다. 그러나 
담은 헐렸으나 서울이 보일 까닭이 없고 임금의 얼굴이 나타날 리가 
없었다. 그는 이렇듯 마음을 졸이면서 임금을 생각하고 있을 때, 능성에는 
돌연 금부도사가 나타났다. 그는 금부도사가 찾아왔다는 시자의 말을 듣자 
임금이 다시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크게 기뻤다. 그는 황망히 의관을 
정제한 뒤에 뜰에 내려 금부도사를 맞았다. 그러나 금부도사의 표정은 
암만 해도 반가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얼굴빛이 아니었다. 금부도사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어명을 받으시오." 하고 겨우 한 마디를 떨어뜨렸다. 그는 금부도사의 
눈치를 그래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진 임금이 나를 다시 부르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마당에 자리를 깔고 북향사배한 뒤에 공손히 꿇어앉아 
어명을 받았다. 금부도사는 나졸을 시켜서 행리를 끄르게 하고 행리 
속에서 독약을 꺼내서 조합해 탄 뒤에 약사발에 약을 받들어 조광조의 
앞으로 나갔다. 조광조는 비로소 사약이 내려진 것을 깨달았다. 맥이 탁 
풀리고 얼굴이 백지장같이 희어졌다. 금부도사는 조광조의 꿇어앉은 앞에 
당도하자, "죄인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립신다. 어명이다." 하고 외쳤다. 
조광조는 너무도 허무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이것은 꼭 중간에서 간혹한 
무리들의 장난이다!' 그의 생각은 여기까지 미쳤다. 그는 꿇어앉아 명을 
받은 위에, "죽으라고 말씀만 있고, 죽으라는 글월은 없소이까?" 떨리는 
음성으로 조용히 물었다. 금부도사는 소매 속에서 조그마한 쪽지를 말없이 
내보인다. 쪽지는 옥새를 찍은 어판이 아니라 금부당상이 금부도사에게 
조광조한테 사약을 내리라는 쪽지였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정경대부였는데 죽음을 내리시는 마당에 쪽지를 도사한테 내려 죽이라 
하셨으니, 만약 당신이 아니었다면 내기 믿기가 어려울 뻔했소. 나라에서 
대신을 대접하는 법이 이렇듯 초초할 수가 어디 있소. 혹시 간사한 
무리들이 있어 임금도 모르게 사람을 함부로 죽이게 된다면, 장차 그 
폐단을 어찌 막겠소."
  조광조는 말을 마치자 분연히 상소를 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상소를 올리려던 생각을 눌러 버리고 조용히 다시 도사에게 
묻는다. "근자에 상감의 기체는 안녕하시다 합디까?" "강건하신 줄로 
들었소이다." "지금 정승은 누구요?" "김전이 영의정이 되고, 남곤이 
좌의정이 되고, 이유청이 우의정이 되었습니다." 남곤이 좌의정이 되었다는 
말에 조광조의 가슴은 뚝 떨어졌다. "그러면 영의정이 갈리셨구려." 
조광조는 깜짝 놀란다. "영의정도 벼슬이 떨어지시구, 좌의정 안당 대감도 
파직이 되시고, 금부당상 이장곤 대감도 벼슬이 갈렸소이다." 금부도사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으흠, 남곤이 좌의정이 됐다." 조광조는 혼자 말하고 
가만히 한숨을 쉰다. "심정은 무슨 벼슬을 하였소?" 조광조는 또 물었다. 
"판의금 대감이 되셨습니다." "그럼 오늘 내가 죽는 게 틀림없는 
일이구먼." 조광조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그는 체념한 
모양이었다. 그는 조용히 옆에 모신 시자를 불러서 유언을 이른다. "내가 
죽거든 관을 두껍게 쓰지 말고 얇은 송판으로 쓰게 해라. 길이 머니 
운구를 해서 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너희들한테 고생을 시키기 미안해서 
그리 이르는 것이다." 시자는 목을 놓아 통곡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울면 내가 다시 살아나느냐? 공연히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마라."
  이 때 금부도사는 약사발을 들고 어서 마시라고 재촉을 한다. 조광조는 
조용히 목을 가다듬어 마지막 시 한 수를 읊는다. "임금 생각하기 어버이 
생각하듯 했네, 나라 근심하기 내 집 걱정하듯 했고, 백일이 밝고 밝아 
대지를 비쳤으니, 붉은 내 마음을 거울 보듯 하리라." 아무리 무정한 
금부도사라도 눈물을 아니 머금을 수 없었다. 영시를 끝마친 조광조는 
이내 독약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독약은 묽었는지 얼른 숨이 떨어지지 
않는다. 시간은 자꾸 갔다. 조광조는 취하기만 했다. 금부도사를 따라온 
금부나졸 한 명이 끄나불을 구해 가지고 조광조의 목을 얽으려 했다. 
조광조는 취기를 띠어 나졸을 꾸짖는다. "이놈, 성상께옵서 미신의 목을 
보존해 주시려 하여 일부러 약을 묽게 타 보내셨는데, 네 어찌 무례하야 
나의 목을 얽느냐." 나졸은 주춤하고 물러선다. "그러나 이왕 죽을 바에야 
더 살아서 무얼 바라리. 독약을 한 그릇 더 가져오너라." 조광조는 손을 
늘이어 금부도사에게 명령한다. 금부도사는 얼른 독약을 더 개어 올렸다. 
조광조는 이내 한 그릇 독약을 더 마시고 누운 후에 피를 칠규로 흘리고 
죽으니 이것이 십이월 이십일의 일이었다. 조광조의 기막힌 죽음의 부음을 
듣고 조광조의 아우 숭조는 천리 먼길에 호성을 하며 남으로 내려갔다. 
숭조가 구슬피 울면서 산골길을 지나려니 늙은 노파 하나가 산모퉁이에서 
구슬피 울면서 나타났다. 늙은 노파는 숭조의 우는 것을 바라보자 눈물을 
거두고 묻는다.
  "나는 우리 형님의 상을 당하여 웁니다. 그러나 노인께서 무엇이 그리 
서러우셔서 그같이 통곡을 하셨습니까?" 조광조의 아우 숭조는 이렇게 
반문을 했다. 노파는 한숨을 길게 쉬면서 대답했다. "당신도 선비시니 
짐작하리다마는, 나라에서는 조광조 선생께 사약을 내려 죽였다 하오. 나는 
조광조 선생을 뵈온 적은 없소마는 나라에 제일가는 어진 분이라 하오. 
이러한 어진 분을 나라에서 함부로 죽여 놨으니 이 나라 정치가 올바르게 
될 까닭이 있겠소. 백성들이 장차 살 수 없게 될 테니, 이 일이 안타까워서 
통곡을 한 것이오." 조숭조는 노파의 말을 듣자, 원통하게 돌아간 형님을 
위하여 더욱 느껴 울면서 능성 천리길을 향하여 발상을 하러 내려갔다. 
조광조의 덕화는 이렇듯 향곡에 있는 늙은 부녀자까지 퍼져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나라의 국운을 근심하게 했다. 황해도 강령 땅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조광조가 섣달에 사약을 받은 뒤에 해가 바뀌어 봄이 되었다. 
이른봄부터 가물기 시작한 날씨는 낙종 떄가 지나고 하지 때가 되도록 
구름 한 점 끼지 않고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아니했다. 논두둑 밭두둑에는 
뽀얀 먼지가 팔싹팔싹 나고 낙종한 못자리 논은 바짝바짝 타들어 가곤 
했다. 세 사람의 농부가 밭에서 호미를 들고 돌덩이마냥 굳어진 땅을 
고르면서, "허허, 가뭄이 이렇도록 대단하니 올 농사는 아주 결딴이로고." 
한 사람의 농부가 탄식을 하니, 한 사람이 말을 받는다.
  "허허, 날씨가 가물지 않고 어찌하겠나. 나라에서는 조광조같은 어진 
어른에게 약사발을 내려 돌아가게 했으니 원기가 서려서라도 풍년이 들 
리가 있겠나. 보게나, 그 동안 조정암 선생이 대사헌으로 계신 동안에 우리 
시골 사람들도 참 편안히 잘 지냈지. 이 양반이 원래 청렴강직하시니 
만조백관들은 이 분이 두려워서 감히 시골 원님한테 긁어 들이지를 못했고 
시골 있는 수령 방백들은 재상들한테 벼슬 올려 달라는 청 편지를 올리지 
못했으니, 이 덕에 우리들 시골 사람들도 덕을 보아 편안히 지났었네. 
그러나 이제 그 분이 소인한테 몰려서 돌아가고 보니 우리들의 피땀을 
흘려 농사진 곡식은 모조리 아전들의 손으로 넘어갈 것이구. 수수만금의 
뇌물은 서울 재상들의 배때기를 불리고야 말 것일세. 두고보게, 내 말이 
맞으리. 다시 어려운 세상이 되었네." 한 사람의 푸념은 이렇게 심각했다.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단 세 사람의 친구가 앉아서, 민생이 도탄에 빠진 
것을 탄식한 소리였다. 그러나 조광조가 소인한테 몰려서 참혹하게 돌아간 
이 사실은 순후한 향곡에까지 민심을 변하게 했다. 세 사람 중에 한 자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아내에게 일렀다. "내일 새벽 일찍 서울 
올라갈 테니 웃옷과 버선을 보에 싸 간촐한 괴나리봇짐을 만들어 주어." 
"별안간 서울은 왜?" "수가 생길 거야." 수가 생긴다는 소리에 농부의 
아내는 밤에 괴나리봇짐을 싸놓았다.
  이튿날 새벽이 되자 친구를 배반할 한 사람의 농부는 아내한테 
괴나리봇짐을 받아 든 채, 동리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면서 동리를 벗어나 
서울을 향해 걸었다. 눈앞에는 당장 부귀영화가 벌어질 것 같은 환상의 
꿈을 그리며 의복에서 비파소리가 나도록 걸었다. 사흘 만에 서울 장안에 
당도한 농부는 의금부를 찾아가서 고발을 했다. "소인은 황해도 강령 사는 
농부이온데, 저희 동리에 조광조의 당이 있사와 고변을 하옵니다." 거래를 
들였다. 의금부당상 심정은 황해도 강령 산골 두메 속에도 조광조의 당이 
있다는 소리를 듣자 모골이 송연해서 깜짝 놀랐다. "조광조의 당이 몇 
명이나 있으며, 무엇을 하는 자들이냐?" 심정은 무릎을 내밀어 묻는다. 
"두사람이옵니다. 직업은 농부올시다." "어떠한 일을 했느냐?" "두 사람은 
밭에서 김을 매면서 날이 가문 것을 나라에서 조광조를 억울하게 죽인 
탓이라 말했습니다. 그러하옵고, 이제부터는 강직한 조광조가 세상에 
없어졌으니 조정에는 뇌물과 청이 성하게 될 것이구, 벼슬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의 기름과 피땀을 주저없이 긁고 빨아서 어지러운 세상이 될 
것이라구 했습니다." 심정은 어지러운 세상이 된다는 말에 부아가 불끈 
치밀었다.
  "네가 확실히 들었느냐?" "확실하게 듣구말굽쇼. 소인까지 세 사람이 
모여서 메마른 밭을 고르다가 가뭄타령이 나서 두 사람이 이렇게 조광조의 
죽음을 한탄했습니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소인이올시다. 소인은 
그저 듣고만 있었습니다. 하도 송구스러워서 이렇게 불원천리하옵고 
서울로 올라와서 고변을 하는 것이옵니다." 심정은 잠시 이 자를 옥에 
내려 가두게 한 뒤에 금부나졸을 강령으로 보내서 두 사람의 농부를 
잡아들였다. 의금부당상 심정은 세 사람을 무릎맞춤을 시킨 후에 두 
사람의 농부에게는 치도곤을 안겨서 엄하게 고문을 시켰다. 두 사람의 
농부는 순후한 사람들이었다. "소인들은 조광조 선생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조광조 선생이 어지신 분이라는 말은, 아무리 산골 
속에 파묻혀 사는 저희들이오나 귀에 젖도록 들었사옵니다. 그리고 조광조 
선생이 대사헌이 되신 뒤에는 사실로 시골 일판이 태평했더랬습니다. 지방 
원들이나 아전들은 조선생이 대사헌이 되신 후에는 백성들한테 토호질이나 
토색질을 감히 한 번도 못 했습니다. 이것을 본다면 조광조 어른이 얼마나 
정치를 잘한 분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순진한 
늙은 농부들이었다. 가슴속 말을 숨김없이 다 털어놓아 버렸다.
  심정은 농부 두 사람을 극형에 처하여 멀리 원악도로 귀양보내고 
고변자인 간휼한 농부한테는 무명 열 끝을 내려 상을 주었다. 부귀영화를 
바라서 동리 사람을 팔았던 간특한 농부의 꿈은 끼어져서 무여 열 끝으로 
변해 버렸다. 정암 조광조가 죽은 뒤에 세상 인심은 이렇듯 각박하게 
변하여 친구를 팔기까지 하는 서글픈 풍조가 흘렀다. 유림과 정치에 
관련이 없는 하향의 농부까지, 조광조를 어진 사람이라고 한 마디 입에 
올리기가 무섭게 이렇듯 참혹하게 화를 당하니, 세상에서는 누구 한 사람 
조광조와 유림의 말을 다시 꺼낼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의로운 
기운은 아주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했다. 경주 김세필은 호를 십청이라 
했다. 때마침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요동벌에서 조광조 
이하 모든 선비들이 참혹하게 화를 당한 것을 알았다. "남곤과 심정이 
기어코 선비들을 몰살을 시켰구나. 조광조야 무슨 죄가 있는가? 간사한 
무리들이 없애려고 마음먹은 지 이미 오래였던 것이다. 이 일을 내가 
신원해 주지 않으면 누가 해주겠는가." 십청 김세필은 눈물을 머금고 혼자 
말한 뒤에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왔다.
  이때 임금은 김세필의 귀국한 인사를 받은 뒤에 그의 사신으로의 공로를 
생각하여 형조참판을 제수하고 특진관을 삼은 뒤에 경연에 입시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김세필이 경연관이 되어 어전에 입시한 이날, 임금께 
강연을 드릴 경연 제목은 '과즉물탄개'라는 제목이었다. 허물이 있으면 
주저말고 얼른 고치라는 뜻이었다. 김세필은 절호한 기회라 생각했다. 
천천히 어전에 엎드려 아뢴다. "사람은 신이 아니온지라, 허물이 없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그러나 자기의 잘못을 알아서 뉘우치고 깨달아 용기있게 
잘못된 일을 얼른 고친다면, 이런 사람은 충후한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잘못을 판연히 알면서 고치기에 인색해서 자기 
자신의 몸을 탈피하지 못하면, 이 사람은 자기의 몸을 자포자기하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조광조의 무리는 전하의 정치를 요순의 
정치로 만들려 했고 전하께서는 이 사람들을 믿어 쓰시니, 그들은 
급격하게 묵은 폐단을 고쳐서 삼대의 정치를 시행하려 했고, 전하께서는 
너무 그들의 말을 쫓다가 도리어 오늘의 근심을 떨어뜨리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다 일세의 명사들이온지라, 비록 허물이 있다 하나 그 
허물은 옛적의 바른 정치를 급하게 서두른 죄밖에 아무 다른 죄가 
없습니다. 전하께옵서는 그들의 과격한 것을 경계하시고 온화한 길로 
인도하시어 점진하는 태세로 좋은 정치를 하셨다면 전하의 너그러운 
아량은 옛날 임금도 감히 따르지 못했을 터이온데, 전하는 이들을 당으로 
몰아 귀양 보내 내치셨다가 또다시 죽음을 내리시니 참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전하가 선을 좋아하시는 마음을 가지셨다 
하나 편벽된 행동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용단을 
내리시어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마옵소서, 이것이 나라를 태평케 
하는 근원이 되옵니다."
  김세필은 임금의 마음을 돌리려 하여 악악한 바른말을 주저없이 아뢴다. 
비록 조광조는 이미 죽었다 하나, 착한 유림들을 다시 구원하여 조정에 
바른 정치를 다시 실천해 보자는 각오를 가진 때문이었다. 김세필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임금이 깨닫도록 목이 메어 간한다. 김세필의 
바른말을 듣는 임금의 얼굴빛은 약간 움직이는 듯했다. 이때 한림학사로 
있는 상진이 경연에 참례하여 임금을 모시었다가 김세필의 아뢰는 말씀을 
듣고 마음속으로 감탄하면서밖에 나와 조신들이 있는 앞에서, "오늘날에야 
비로소 참다운 바른말을 들었소." 하고 김세필의 아뢴 말을 찬양해 말했다. 
이 소문은 단번에 영의정 김전, 좌의정 남곤, 우의정 이유청의 귀로 
들어갔다. 남곤의 무리는 펄펄 뛰었다. 이튿날 김전, 남곤, 이유청은 삼공의 
자격으로 대궐로 들어가 임금을 뵈옵고 아뢴다. "듣자오니 어제 경연 
자리에서 형조참판 김세필이 조광조를 죄준 일이 잘못된 일이라 
했다하오니 방자하기 짝 없는 일이옵니다. 김세필은 보통 벼슬아치가 
아니라 재상의 지위에 있는 자로 이렇듯 함부로 방언을 했사오니 
죄당만사이옵니다. 추고하여 국문하시옵소서." 
  소인들 삼정승이 한꺼번에 아뢰니 이들과 창자를 연한 대사헌 홍숙, 
대사간 조언방도 양사합계를 올려 김세필을 탄핵했다. "조광조의 죄상은 
소소한 바 있어 조정에서 이미 법에 의거하여 처단한 것이온데, 재상의 
반열에 있는 김세필이 다시 현란하게 시비를 일으켜 의논이 일정치 
아니하니 일이 장차 불측하게 될 것이옵니다. 국문하시어 극형에 
처하옵소서." 소인들로 메워진 조정은 쟁을 치며 들고 일었다. 임금은 하는 
수 없이 김세필을 볼기 때려 음죽으로 귀양을 보냈다. 양사 대간은 또다시 
들고일어났다. 이번엔 김세필을 칭찬한 상진이 미웠던 것이다. "한림학사 
상진은 사관의 자격이 없는 자올시다. 사관이란 공평해야 하는 것이온데 
죄인 김세필을 칭찬해서 은연중 조광조를 두둔했으니 사관의 벼슬을 
떼시옵소서." 임금은 그들의 말을 들어 한림학사 상진을 좌천하여 사과 
벼슬로 낙직을 시켜 버렸다. 나라 조정은 완전히 소인의 조정으로 변해 
버렸다.
  전라도 능성에서 십이월 이십일 사약을 받아 참혹하게 돌아간 조광조의 
영구는, 이듬해 봄이 되자 아우 조숭조의 주선으로 우차에 실려 용인 
심곡리 선산으로 모시어 장사를 지내게 되었다. 죄인의 몸이라 죽어도 
우차를 쓴 것이었다. 벼슬 지위가 정경대사헌이요 일대의 유림을 거느렸던 
학문과 도학의 영수였으나, 나라의 버림을 받아 사약을 받고 죽었으니 
장사 행렬이 초초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흙탕물이 물결쳐 도도하게 
흐르는 세월에 누구 한사람 회장에 참례하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조정암과 사생을 같이하기를 마음으로 맹세했던 친구 중에 요행히 귀양을 
안 간 몇 사람의 동지는 백리 길을 멀다 아니 하고 용인으로 회장을 와서 
통곡하고 돌아가니, 청송 성수침의 아우 성수종, 이충건, 홍봉세, 이연경의 
네 사람뿐이었다. 이날 흰 무지개는 해를 꿰뚫어 동편 서편으로 두 번 
두르고 남북으로 한 겹을 둘렀으며, 남북으로 뻗친 무지개 끝에는 두 줄기 
술띠 같은 흰 무지개가 하늘에 드리워졌다.

    초승달
  공신들의 일파와 좋은 정치를 해보겠다는 조광조 일파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인하여 조정과 궁중과 온 나라 천지가 수라장을 이루었을 때, 
궁중 지밀 안 중전의 처소에서 이 소란스런 풍파를 고요히 응시해 
바라보면서 차갑도록 한 마디의 발언도 하지 않는 묘령의 여자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왕후 윤씨였다. 열일곱 살에 삼십 된 국왕의 
계비가 되어 대내로 들어온 영리한 왕비는 자기의 주위를 차근하게 
돌아보면서 자기의 처신할 길을 살폈다. 말로는 일국의 지존을 짝하는 
왕비요 곤전마마라 하나, 자기의 주위에는 상전이 하도 많았다. 왕비는 
대왕의 친영례를 받아 구중궁궐 깊고 깊은 으리으리한 대궐로 들어온 
첫날밤부터 가만히 자기 자신의 운명을 생각해 보았다. 우선 자기는 
당당한 국모요 왕비라 하나, 자기의 앞에는 상전이 너무 많았다. 첫째로 
전비의 소생인 원자가 있었다. 아직 세자를 책봉하지는 아니했다 하나, 
앞으로 자기가 왕자를 낳더라도 원자인 큰아들이 세자가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쯤 된다면, 자기는 말로만 왕비지 실권이란 하나도 없는 
뒷방살이의 존재였다. 대왕은 자기보다 십여 세가 위가 된다. 대왕이 한 번 
세상을 떠나는 날, 자기의 말로는 대비라 하나 개밥에 도토리 격이 되고 
말 것이 분명했다. 윤임은 원자의 외숙이요 김안로는 원자의 매부의 
아버지로서, 원자를 돕기 위하여 일가집 딸인 자기를 간택에 추천하여 
왕비로 봉한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지금 왕비의 자리에 앉고 보니 
마음은 또다시 조금 달라지는 것이었다.
  둘째 번 상전은 기막히도록 많은 사람들이었다. 공신들의 딸이 모두 다 
상전이었다. 팔선녀의 아름다운 후궁들이 함빡 자기의 상전이었다. 조강의 
아내였던 신황후도 공신들의 등살에 쫓겨나고 손비의 영수인 조광조도 
이들의 간계로 사약을 받았는데, 이것들이 한번 입을 모으기만 하면 언제 
어느 때 귀신도 모르게 결에 폐비가 될는지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는 상감의 은총이 절정에 올라있었다. 의젓한 풍채에 
탐스러운 살결을 가진 경빈 박씨와 날씬한 어깨에 청초한 눈웃음을 치는 
희빈 홍씨는 모두 다 장성한 왕자들을 앞에 거느린 서슬이 시퍼런 
후궁들이었다. 말로는 자기보다도 지위가 떨어지는 후궁이라 하나 실권은 
왕후 이상의 왕후였다. 영리한 윤비는 나이는 어리나 모든 일을 훤하게 
살폈다. 당분간 입을 꼭 봉한 채 눈으로만 살피리라 마음을 결정했다. 
가끔가끔 비의 오라비가 되는 윤원로와 윤원형이 승후관이 되어 문안을 
하러 왕비 처소로 들어왔다. "조광조가 까닭 없이 억울하게 공신들한테 
몰립니다." "비원에 주초위왕이라구 벌레가 잎을 파먹은 것은 천연으로 
벌레가 먹은 것이 아니라, 홍희빈이 자기 아버지 홍경주의 말을 듣고 
비밀히 무예청을 시켜서 잎새마다 꿀을 찍어 글씨를 써서 벌레가 파먹도록 
한 것이라 합니다." 
  가만히 아뢰었다. "오라비들은 몸조심을 하시오. 아직 아는 체할 때가 
아니오." 윤비는 이렇게 두 오라비를 타일렀다. 윤비는 입을 다물어 정세만 
바라보고 있을 때, 몸에는 이상한 기운이 떠돌았다. 전하의 태기를 받은 
것이었다. 윤비는 마음속으로 무한히 기뻤다. 원자에 못하지 않은 아들을 
낳으리라 생각했다. 열 달이 지난 뒤에 왕비의 희망은 깨어지고 말았다. 
왕비는 왕자가 아닌 공주를 낳았다. 윤비의 첫 번째 꿈은 여지없이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꿈만 깨어져 버린 것이 아니었다. 공주는 난 지 몇 
달이 못 돼서 병을 얻어 죽어 버렸다. 아직 성숙되지 않은 왕비의 몸으로 
아기를 가진 탓이리라. 전하는 어린 왕비를 위로하고 약방에서는 나날이 
산삼과 녹용을 달여 왕비한테 바쳤다. 
  어느덧 일 년은 또 지나갔다. 전하는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를 찾은 
뒤에 가끔가끔 중전을 찾았다. 일 년이 채 못 가서 윤비는 또다시 태기가 
있었다. 윤비는 또 한 번 크나큰 희망을 안은 꿈을 꾸었다. 이번엔 뱃속에 
있는 아기의 건강을 위해서 약방에서는 날마다 지황과 녹용을 달여 
바쳤다. 열 달 뒤에 윤비의 꿈은 또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아들이 아니라 
또다시 공주였다. 다행히 공주는 무럭무럭 자랐다. 이태 뒤에 윤비는 
또다시 태기가 있었다. 윤비는 궁녀들을 가만히 궐문 밖으로 내보내서 
무당과 판수들을 시켜서 산천에 기도를 올리고 아들을 낳을지라 축원을 
올렸다. 그러나 어찌한 일인지 만삭 뒤에 낳은 아기는 역시 왕자가 아니라 
공주였다. 윤비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나라와 조정 일에는 입을 꼭 봉한 
채 더욱 조심을 했다. 궁중에서도 경빈이나 희빈을 대할 때, 왕후 이하의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 셋째 공주가 걸음발을 탈 때 윤비는 또다시 태기가 
있었다. "이번에는 대군을 낳아야 하오." 하는 전하의 부드러운 말을 
들었을 때, 윤비의 귓불은 화끈하게 달아서 발갛게 물들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윤비는 또다시 딸을 낳았다.
  윤비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꿈을 책망한다. 자기는 한평생 딸만 낳고 
말 것인가 하고 깊은 밤중에 혼자 베개를 적시어 운 일까지 있었다. 
새로이 계비가 된 윤비가 한 삼줄에 공주를 사형제템이나 낳고 보니 모든 
후궁들은 왕비를 조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곤전마마는 딸만 낳으시는 
삼신할머니를 모셨나 봐." "부마도위가 많으면 대권들이 많아서 
말썽부리는 것보다 도리어 낫지 무어냐. 다리 짧은 우리 아들들의 팔자가 
좋으라고, 하하하." 박빈과 홍빈 후궁들은 웃어대며 지껄였다. 후궁들의 
아들은 대군이 못 되고 그 아랫도리 군이 되는 때문이다. 왕비 윤씨는 
마침내 후궁들의 경쟁의 대상 속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경빈과 홍빈은 
왕비를 경계하지 않았다. 왕비는 완전히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숨어 있는 
초승달이었다. 그러나 깐깐한 성격을 가진 윤비였다. 한꺼번에 딸 넷을 
낳았다고 낙망은 하지 아니했다. 언제든지 아들을 기어코 하나 낳아서 
모든 굴욕과 수치를 씻으리라 마음먹었다. 윤비는 때를 기다렸다. 마음은 
초조했으나 겉으로는 조금도 사색을 드러내지 아니했다. 궁중과 조정은 
사화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으나 왕후는 영영 여기에 대해서는 
입을 봉했다. 
  대궐 안에서 그 중 조용한 곳은 왕비의 처소였다. 전하는 골치가 아프고 
시끄러우면 바람 없는 왕비의 처소를 찾았다. 왕비의 침전은 바람 없는 
호수 같은 무풍지대였다. 이것에서는 공신들을 욕하고 꾸짖는 사람도 
없었다. 조광조가 역적질을 한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도 없었다. 비원에 있는 
나무와 잎들이 좀이 먹었다고 소곤거리는 고혹적인 목소리도 없었다. 
그대로 고요히 마음놓고 온종일 쉴 만한 아늑한 고장이었다. 전하는 
피곤했다. 날마다 시끄럽게 국문을 해야 하고, 매를 때려야 하고, 귀양을 
보내야 하고, 죽음을 내려야 하고, 죽여서는 아니 되오 하고 떠들어대는 이 
악머구리판 같은 정치 속에 전하의 입술은 타고 마음은 초조했다. 전하는 
넝마같이 피곤한 마음을 쉬려 하면 반드시 왕비 윤씨의 처소를 찾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역시 정궁의 자격은 따로 있는 
게다. 얼마나 입이 무거웁고 마음이 조찰한다.' 이렇게 찬탄을 하면서 
윤비를 미덥게 생각했다. 어느 때는 하도 궁중이 시끄러우니 전하는 
일부러 왕비한테 물었다. "요사이 조광조의 일로 궁중과 조정이 무던히 
시끄러운데, 곤전은 혹시 무슨 말을 들었소?" 믿음직스런 젊은 왕비한테 
혹시난 무슨 비밀한 소문을 들었느냐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비 
윤씨는 얼굴빛을 부드럽게하여 온화하게 대답했다.
  "여자가 정치하는 일을 알아 무삼하오리까. 전하께옵서 만기를 모두 다 
보살피시옵는데 소비 따위가 방자스럽게 참견하올 까닭이 있사옵니까. 
소비는 그저 전하의 잡수시는 음식과 입으시는 의대를 가만히 보살펴 
드리오면 그만인가 하나이다. 소비의 귀에는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아니하며 
들어오지도 아니하나이다." 구슬을 옥반에 굴리는 듯 댕긍댕글 대답하는 
왕비 윤씨의 말에 전하의 입은 저절로 벌어졌다. "어처는 참으로 현처여든. 
그렇지, 여자가 공연히 정치에 참례할 일은 아니지. 참례하면 번거로운 
법이거든." 전하는 얼굴에 가득히 웃음을 띠워 왕비를 칭찬했다. 왕비도 
이제는 나이 어린 왕비가 아니었다. 공주를 넷씩이나 낳는 동안에 왕비의 
나이는 이십오륙 세가 되었다. 한창 무르녹아 익은 여인의 낫세였다. 소녀 
때보다 피부엔 기름이 올라서 흰 살결이 더욱 희었다. 밝은 창을 대한 
듯한 총명한 눈은 윤을 뿜어 더한층 명랑하고, 날씬한 어깨에 알맞게 살이 
올라서 옷거리가 더욱 아름다웠다. 여기에 왕비라는 점잖은 풍도가 저절로 
몸에 배어서 말과 행동이 뭇 닭 속의 학격으로 후궁들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전하는 윤비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아름답게 보였다. '과연 
격이 높다. 천생 왕후 감이로구나.' 하고 은근히 기뻐했다. 전하는 한 달에 
두어 번씩 들리던 윤비의 처소를 하루 걸러 들게 되었다. 다만 한 가지 
한탄은 왕비가 아직도 아들이 없는 것이었다. 전하는 가끔 왕비를 대하여 
사랑을 풍길 때면, "어처도 어서 대군을 하나 낳아야지." 하고 비의 등을 
어루만졌다. "소비의 나이는 아직도 젊으오이다. 삼십 미만이 아니오니까."
  아름다운 보조개를 볼에 지어 웃는 윤비의 모습에 전하는 도연히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동안에 전비의 소생인 세자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세자보다 일 년을 먼저 난 경빈 박씨의 소생인 복성군도 훤칠하게 자라고 
희빈 홍씨의 아들 금원군도 숙성하게 자랐다. 나라의 정치 세력은 
선비들인 조광조릐 힘이 물러간 뒤에 공신들과 합작한 남곤, 심정의 
일파와 전비의 소생인 원자를 보호한다는 윤임, 김안로의 세력으로 갈리게 
되었다. 남곤은 선비인 체하면서도 유림을 몰아 결딴을 낸 소인이요, 
김안로는 중간파로 놀아서 신비 복위 문제가 났을 때도 반대하는 남곤의 
편과 찬성하는 조광조의 말이 다 옳다고 양시론을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이 중간파적인 인물은 이번 조광조의 옥사가 몇 달을 두고 온 조선 천지가 
물 끓듯 떠들어댔건만 몸이 대신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한 마디의 말이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옳고 그른 시비를 번연히 판단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조광조를 구원하는 한 마디의 말도 아니 했다. 남곤, 심정이 조광조를 
제거시키는 것을 힘 안 들이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김안로에게는 
전하의 신임이 더욱더 두터웠다. 그는 전비의 소생인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요, 나라의 부마 연성위 김희의 아버지요, 남곤과 합작을 하여 
조광조를 몰아낸 영의정 김전의 조카였다. 전하는 그를 심복인 사돈으로 
대접해서 김안로의 집에는 사찬과 상급이 무시로 내려졌다.
  이때 윤임은 김안로를 찾았다. "원자의 나이 입학할 때가 되었으니 
세자를 책봉하여 나라의 근본을 정해야겠소이다. 내가 발론해 아뢰고 
싶으나 나는 원자의 바로 외숙이 되고 보니 직접 아뢰기가 난처하외다. 
대감이 아뢰도록 하시오." "내가 자진해서 아뢰오리다. 나도 벌써 아뢰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조광조 옥사로 하도 떠들어대니 잠깐 형세를 
판명하느라고 여지껏 말씀을 아뢰지 못했소이다. 오늘이라도 곧 들어가 
아뢰오리다. 그러나 여보시오, 대감." 감안로는 말을 마치자 윤임의 무릎을 
꼭 찌른 뒤에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건 참 우리끼리 말이지, 하느님이 
우리 일을 도와 주시는거라 생각하오. 새 중전마마가 자꾸 딸만 내리 
사형제를 낳았으니 말이지, 만약 그 동안에 왕자를 낳았더라면 이 일이 
장차 어찌 될 뻔했소. 세자가 누가 될지는 예측을 못할 뻔했구려. 
하하하하, 모두 다 대감의 복이오." 김안로의 가만히 소곤거리는 말에 
윤임의 얼굴에도 기쁜 빛이 가득했다. "아닌게아니라 나도 그 동안 무척 
마음을 졸였소이다. 만약 새 중전마마가 첫아들을 낳았더라면 어찌할 
뻔했소. 첫아들이 아니라 둘째 번에 왕자를 낳았더라도 위태할 뻔했지. 첫 
공주를 낳아서 잃고 둘째 공주, 셋째 공주, 넷째 공주, 이렇게 낳는 동안에 
원자는 겨우 나이 먹어서 입학할 때가 되었구려. 참 아슬아슬한 노릇이오." 
  두 사람은 기뻤다. 진심으로 원자를 위해서 어머니 없는 어린이를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 다 자기들의 앞날의 혁혁한 세도를 
위하여 이렇게 의논하면서 왕비가 딸만 낳은 것을 치하하는 것이었다. 
김안로는 윤임을 돌려보낸 뒤에, 곧 사인교를 타고 구종별배를 거느려 
대궐로 들어가 전하께 뵙기를 청했다. 전하는 신임하는 김안로가 뵙기를 
청하니 시각을 지체치 않고 편전으로 불러들였다. 전하는 김안로를 보자 
기쁜 빛이 얼굴에 가득했다. "근래는 몸이 태평한가.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있기에 나를 찾았는가?" 전하는 김안로를 정중하게 대접했다. 나라의 
사돈이 되는 까닭이다. "국가의 좋은 일을 여쭈려고 뵈옵기를 
원했사옵니다. 이제 원자께서는 어느덧 연세가 입학할 때가 되었습니다. 
춘방에 강관을 마련하시어 공부를 하시게 하시고, 세자를 책봉하시어 
나라의 방본을 정하옵소서. 인민이 모두 다 우러러 바라옵는 바이오이다. 
아무리 전하께옵서 연부역강하오시다 하오나, 나라 근본이 정해진 
연후에야 더욱 태평성대를 이루리라 생각하옵니다." 전하는 요사이 난마 
같은 정사 일로 까마득 세자 봉할 것을 잊었던 것이다. 김안로의 아뢰는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나는 듯했다. 왕자는 무척 많았다. 원자 이외에도 
경빈 박씨의 소생인 복성군이 있고, 숙의 홍씨의 아들인 해안군이 있고, 
희빈 홍씨의 아들인 금원군이 있고, 창빈 안씨의 소생인 영양군과 
덕흥군이 있고, 숙의 이씨의 소생인 덕양군이 있고, 다시 희빈 홍씨의 
소생인 봉성군이 있다. 
  돌아간 정궁의 소생인 원자 이외에도 후궁 속에서 난 왕자가 칠형제나 
된다. 어느 아들이 귀엽지 아니하랴마는 후궁 출신은 나라 법에 의하여 
세자를 책봉할 수가 없고, 다만 정비의 아들은 아직껏 원자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원자로 세자를 봉할 것이나, 그래도 인정상 지금 왕비와 
의논해 보아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왕은 얼굴에 웃음을 지어 대답한다. 
"그대의 나라를 위하는 지극한 충성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원자를 
공부시키는 일은 오늘이라도 곧 지시하려니와, 세자를 봉하는 일은 국가의 
막중한 큰일이니, 생각하여 곧 대신과 의논한 후 처리할 테니 그리 알고 
물러가라." "다시 아뢰오. 세자는 국법에 반드시 원자라야만 봉하는 
것이오니 미리 통촉이 계시기 바라오." 김안로는 의젓이 이렇게 아뢰어 
전하가 다시 딴 생각을 못하도록 말끝을 눌러 버리고 어전에서 추창해 
나왔다. 이날 밤에 전하는 중전 윤비의 처소를 찾았다. "어느덧 세월이 
빨라 원자의 나이 입학할 때가 넘었구려. 대신들이 세자를 책봉하라 
하는데 곤전의 의향을 몰라 아직 결정을 짓지 못했으니 곤전의 뜻은 
어떠하오." 전하는 저녁 수라를 마친 뒤에 윤비한테 이렇게 물었다. 전하의 
말을 듣는 윤비의 가슴은 선뜻하게 떨어지면서 정신이 아뜩했다. 
마음속으로,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윤비는 침착했다. 아찔한 현기를 얼른 수습했다. 딸만을 내리 낳은 것은 
자기의 탓이었다. 이제 다시 무어라 앙탈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
  윤비는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조용히 대답한다. "막중 국가의 대사를 
소비에게 무엇을 안다고 하문하시나이까. 소비는 다만 계비옵니다. 선비의 
뜻을 이어 받들어 전하의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드릴 뿐, 선비의 아들이 
곧 소비의 아들이옵니다. 적자로써 세자를 봉하옵는 것은 예의동방의 
통례일 뿐 아니라, 서민에 이르기까지 조상의 제사는 적자가 받드는 
법이옵니다. 다시 더 무엇을 하문하시옵나이까. 전하의 뜻이 편하실 대로 
처리하옵소서." 보들보들 나직나직 대답하는 윤비의 말소리는 어질고 
착하고 경위가 밝았다. 전하는 윤비의 안상하게 대답해 아뢰는 이 조촐한 
말씀을 듣자, 마음이 함빡 윤비한테로 쏠려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하는 
마음속으로, '세상 천하에 이런 어진 여자가 있는가.' 하고 생각해 본다. 그 
해사한 살결이 흰 얼굴과 너부죽한 턱 위에 상아로 다듬어 놓은 듯 
오뚝하게 앉은 코며 조붓하게 닫혀진 붉은 입술이 더한층 고귀하게 
보였다. 온 세상이 이로만 달아나는 세상이었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이로운 일이 없다면 온갖 일을 방해하는 세상이었다. 
방해하기 위하여 남을 헐고, 깎고, 저미고, 할퀴는 이 세상이었다. 이러한 
세상에 왕후 윤씨는 초연히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이 끝을 내리고, 전비의 
아들인 원자를 동궁으로 정할 것을 선선히 허락했다. 참으로 교양 높은 
어진 왕비가 아니면 취하기 어려운 태도라 생각했다.
  "곤전의 의향이 그러하다면 내일이라도 대신들을 불러서 원자로 세자를 
책봉할 것을 결정하겠소. 참으로 종묘사직의 다행한 일이거니와, 모두 다 
곤전의 넓은 소견과 너그러운 덕이라 생각하오. 원자도 나이 비록 어리나, 
곤전의 산해 같은 은애에 한평생 감읍하오리다." "불감하여이다. 소비, 
아직 나이 어리고 젊은 몸으로 무슨 출중한 생각이 있으오리까. 다만 
전하의 뜻을 평안히 받들고 조종조서부터 정해진 국법을 준수하여 지킬 
뿐이옵나이다." 비의 말씀은 더욱 유식하고, 우아하고, 겸손했다. 떨어지는 
말귀마다 향기가 풍기고 구슬이 흩어지는 듯했다. 전하는 격해지는 사랑의 
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한 손으로 비의 포근한 흰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비의 등을 두어 번 어루만진다. 비는 애무해 주는 전하의 용안을 
잠깐 돌아보자, 눈에 상그러운 웃음을 풍긴 채 슬며시 틀었다. "소비는 
후궁이 아니옵니다. 옆방에서 상궁들이 엿볼 것이옵니다. 황차 지금은 
대낮이옵니다. 왕비의 체통을 지키도록 해주옵소서." 그윽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싸느랗게 옥류천 성에 서린 물이었다. 왕비의 등을 
어루만지던 어수는 슬몃 거두어지고 전하의 용안엔 잠깐 진달래꽃 물을 
끼얹은 듯 홍훈이 감돌았다. 그러나 전하는 더욱 왕비를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하의 애무하는 손길이 어느 때건 닿아지지 
않는 것을 시기하는 후궁들에 비해서, 과연 왕후 윤비의 범절 놓은 태도는 
뭇 닭 속에 우뚝이 솟아 있는 학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이날 밤 전하와 
왕비의 사랑은 조숫물모양 부풀어올랐다. 
  전하는 이튿날 아침 윤비의 처소에서 아침 수라를 마치고 흔쾌한 
마음으로 어전에 임어한 뒤에 즉시 대신들을 어전에 불렀다. "원자의 나이 
이미 입학할 때가 되었으니 춘방을 설시하여 공부를 시키게 하고, 이어 
세자를 책봉하여 나라의 뒷받침을 튼튼케 하려 하니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삼정승인 영의정 김전, 좌의정 남곤, 우의정 이유청과 이조판서 
김안로 등이 입시하고 승지와 사관들이 시립해 있었다. 좌의정 남곤은 
깜짝 놀란다. 남곤은 심정과 함께 경빈 박씨 편이었다. 경빈 박씨는 
원자보다 일 년 전에 복성군을 낳았다. 당연히 차례로는 복성군이 원자의 
형이 되지마는 후궁의 아들이고 보니 법으로는 적자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경빈 박씨는 여태껏 전하의 은총을 가장 많이 받아 왔고 삼천 
궁녀는 말할 것 없고 여기서 뽑혀진 공신의 딸들, 팔선녀 중에서도 그 중 
얼굴이 아름다운 박빈이었다. 왕후의 자리가 비기만 하면 언제나 박빈은 
왕후의 후보로 제일 먼저 입에 오르내리던 존재였다. 남곤과 심정은 
박빈과 함께 은근히 기회만 기다렸던 것인데, 김안로와 윤임이 한데 
어울려 자기들의 세력을 삼기 위하여 새로이 처녀 간택을 하게 하여 
윤비를 왕비로 친영한 뒤에는 크나큰 낙망을 가졌던 것이다. 그 뒤에 
윤비는 딸만 사형제를 낳고 아들 일 없으니 요사이 와서는 또 다시 새로운 
희망이 북돋아 올랐다. 남곤, 심정은 기회만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돌연히 세자를 책봉한다는 분부가 내리고 보니 남곤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부복해 있을 뿐이었다.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자고 독대를 드려 건의를 올린 김안로는 전하의 
말씀이 떨어지자,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잽싸게 어전에 부복해 아뢴다. 
"원자는 나이 비록 어리나 천성이 인자하옵고 효성이 출천하시옵니다. 
진실로 전하의 홍복이시옵고 국가의 경사올시다. 하루바삐 세자를 
책봉하시어 국가의 근본을 튼튼케 하옵소서." 김안로는 얼른 찬성하는 
뜻을 표시한다. 영의정 김전은 김안로의 삼촌이었다. 비록 남곤과 가깝다 
하나 안로의 주장을 전부터 들어 알았을 뿐 아니라 적자로 세자를 
책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하의 높으신 뜻이 당연한 줄로 
아뢰오." 하고 영의정으로서의 찬성하는 뜻을 아뢴다. 우의정 이유청도, 
"좋사옵니다. 국가의 경사올시다." 하고 손을 모아 찬성하는 뜻을 표했다. 
"좌의정의 뜻은 어떠한가?" 남곤의 등에는 찬땀이 흘렀다. 그러나 원체 
원자로 세자를 봉하는 것은 대경대법이고 보니 반대할 거리가 없었다. 
"나라의 경사옵니다." 전하는 만족했다. 옥좌 위에서 승지와 사관에게 명을 
내린다. "원자로 세자를 책봉케 하고 춘방을 열어 세자를 입학케하라." 
승지와 사신은 어전에서 명을 받들어 전교를 썼다. 궁중과 조정에는 
원자로 세자를 책봉한다는 전교가 당일로 돌았다. 
  전하는 세자의 책봉을 결정한 뒤에, 이튿날 대왕과 왕비는 옥좌를 
가지런히 하여 세자의 절을 받아 책봉 의식을 끝마친 다음 만조백관과 
내외 명부들의 치하하는 조하를 받았다. 이날, 조하가 파한 뒤에 내전과 
외전에는 명부와 백관들에게 수파련이 꽂아진 산해진미의 사찬상이 
내렸다. 아악소리는 차일을 넘어 구름 밖으로 자지러지고 무기들의 푸른 
나삼 자락은 태평성대의 봄바람을 일으키는 듯했다. 경빈 박씨, 희빈 
홍씨를 필두로 하여 삼천의 후궁들은 제각기 아름다운 얼굴에 화사한 
의상으로 어전에 나와 대왕과 왕비께 치하를 올린다. 어전 옆에는 새로이 
책봉된 나 어린 세자가 검은 복건에 연분홍 강사포를 받쳐 입고 백옥띠를 
늘어뜨려 단정한 자세로 대왕과 왕비를 모시어 섰다. 경빈 박씨가 
미끈하게 잘생긴 풍윤한 몸집에 푸른 나삼 대례복을 입고 늘씬한 허리에 
남스란치마를 풍정 있게 끌면서 대전과 중전과 세자 앞으로 나간다. 
"나라의 경사시옵니다." 하고 반절을 드리고 물러선다. 왕과 비전하는 
미소로써 대답한다. 아까 정전에서 정식으로 조하를 드렸으나, 사찬을 받기 
전에 삼천궁녀들은 또 한 번 치하를 올리는 것이었다. 희빈 홍씨가 날씬한 
어깨에 연주빛 원삼을 입고 어전을 향하여 나간다. 화관의 금나비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르르 떨린다. 하이얀 솜버선으로 가볍게 치맛자락을 
차면서 어전에 구부렸다. "태평성대의 화려한 기상이옵니다. 두 분 전하와 
세자마마의 산해 같은 복을 비나이다." 윤비는 또다시 미소로써 대답했다. 
삼천궁녀가 꼬리에 꼬리를 이어 대왕과 왕비 앞에 나타나 복을 빌었다. 
왕비의 상냥스런 얼굴에는 답례하는 미소가 삼천 번을 지나갔다.
  잔치가 끝난 뒤, 이날 깊은 밤중에 홀로 중전에 돌아와 누운 왕비는 
삼천 번을 웃던 얼굴에 삼천 번을 울었다. 계비가 된 슬픔이 가슴속에 
터져서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리게 했다. 궁중에 들어온 지 십여 년에 
딸만 넷을 낳고 아들을 두지 못한 한이 마음을 상케 해서 소리 없는 
울음을 울게 했다. 세자를 이미 봉해 놨으니 이제는 아들을 낳는대도 
아무런 힘이 없는 대군밖에 아니 된다. 한평생 권세 없는 왕비와 대비가 
될 테니 이 일이 안타까웠다. 눈물은 밤새도록 베개를 적시었다. 왕비는 
밤이 지새도록 울었으나, 가슴은 시원치 않았다. 더구나 누구 한 사람 알까 
하여 소리를 죽여 울었으니 가슴은 더한층 쓰리고 아프고 답답했다. 
그러나 누구 한사람 나인이나 상궁한테라도 이 답답한 속사정을 헤쳐 
이야기할 사람은 없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 윤비는 느직하게 침소에서 일어났다. 지밀한 늙은 
상궁이 비전하의 금침을 개키다가 비로소 비전하의 두둑하게 부풀어오른 
눈두덩을 발견했다. "곤전마마, 눈이 거북하시나이까?" "아니!" "눈두덩이 
부셨나이다." "어제 잔치에, 고단해서 그런 게지." 윤비는 이렇게 대답하고 
슬쩍 외면을 했다. 윤비는 안타까운 마음을 안은 채 늙은 상궁이 받쳐 
올리는 세숫대야에 손을 담고 세수를 마치고 거울을 대하여 머리를 
빗었다. 그러나 티 한 점 없이 맑은 거울이 윤비의 눈에는 흐리고 
답답하게만 보였다. 마음이 평안치 아니하니 거울이 흐려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말은 못 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가슴만이 답답했다. 머리를 빗고 
단정히 안석에 기대어 앉아 보았다. 마음 안 자꾸 구슬프기만 하고 
설레었다. 춘방내시가 윤비의 처소인 서온돌 뜰 아래 나타났다. "동궁마마 
아침 문안드리오." 아뢰는 말이 떨어지자, 어린 세자는 강포직령에 옥띠를 
띠고 검은 목화를 신고 단정히 뜰에 들어선다. 지밀상궁은 반가운 웃음을 
띠우고 세자를 부축해 전위로 올렸다. 계비인 왕비께 아침 문후를 드리러 
온 것이었다. 세자는 외편전에서 지금 막 부왕께 문후를 드린 뒤에 계비인 
모후께 역시 아침 문후를 드리러 온 것이었다. 세자는 돌아간 어머니를 
닮아 몸이 약했다. 그러나 어린 몸이건만 마음은 착하고 어질었다. 어린 
마음 속으로는 계비인 윤비를 참어머니로 생각하여 받들리라 결심했다.
  지밀상궁은 서온돌 창밖에서, "동궁마마 문안드리러 와 계시오." 연통한 
뒤에 가만히 장지문을 열었다. 문이 부시시 열리며 세자를 인도하여 
서온돌 방안으로 들어선다. 세자는 안석 앞에 단정히 앉은 젊은 모후께 
날아갈 듯 문안절을 드렸다. "어마마마, 어제는 소자 때문에 얼마나 
고단하옵셨습니까." 세자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풍기면서 이렇게 아뢰고 
단정히 방석 위에 꿇어앉는다. 윤비도 겉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지어진 이 미소는 속에서 우러나 터져 나오는 사랑에 넘친 반가운 웃음이 
아니었다. 어제 삼천궁녀를 향하여 삼천 번을 웃던 바로 그 미소였다. 
관습적으로 왕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나온 미소였다. "고단하지?" 
왕비는 고개를 들어 전비의 아들을 바라보면서 또 한 번 미소를 풍긴다. 
그러나 왕비의 웃음은 정열을 띠운 뜨거운 애정의 웃음이 아니었다. 역시 
관습적으로 흘러나오는 담담한 웃음이었다. 웃음이 스러지자, 왕비는 
가슴이 아팠다. 답답했다. 밤새도록 아프고 답답했던 그 가슴은, 답답한 
장본인인 전비의 아들 동궁을 앞에 가로놓고 앉았으니 열 갑절 백 갑절 
아프고 답답했다. 아까 맑은 거울이 흐려져서 구름이 끼고 보이지 않듯이 
아들의 동탕하고 귀엽게 생긴 그 얼굴이 계비인 왕비의 동공에는 아름답게 
비쳐지지 않는다. 남이라도 귀엽고 사랑스런 그 얼굴이 흐려진 거울 같은 
어머니의 눈에는 잘생기고  환하게 비쳐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아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는 어머니의 마음은 그저 두근거리고 
답답할 뿐이었다. 어린 세자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았다가 모자의 
지극한 정과 사랑을 느끼지 못한 채, "물러나옵니다." 한 마디를 남기고 
조심스럽게 발길을 돌린다. 세자가 물러간 뒤에도 윤비의 가슴은 무겁고 
답답했으면, 자기의 주위가 너무도 외롭고 쓸쓸함을 느꼈다. 누구 한 사람 
속을 터놓고 답답한 이 가슴을 헤쳐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 주위는 
모두가 자기의 적뿐이었다. 경빈 박씨, 희빈 홍씨, 모든 공신들의 딸 
팔선녀가 함빡 자기의 적이었다. 아까 문안을 들어왔던 세자도 아들이라 
하나 확실히 자기편은 아니었다. 이런 까닭에 윤비 자신은 십 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딸만 난 죄로 조심조심 얼음을 밟듯 호젓하게 지내왔으나, 
이제 세자를 책봉하고 나니 새삼스럽게 외롭고 쓸쓸한 마음이 더한층 
간절했다. 윤비가 이렇게 한참 괴로운 생각 속에 빠졌을 때 내시가 
창밖에서 상궁한테 거래를 드린다. "대사동 작은 나리께옵서 승후하러 
듭시었소." 대사동 작은 나리는 윤비의 작은 오라비 윤원형이었다. 늙은 
상궁은 내시의 명을 받들어 윤비께 아뢰고 윤원형을 서온돌로 인도했다. 
호젓함을 느꼈던 왕비는 친정 오라비를 대하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요사이는 어떻게 그리 격조했소?" 쓸쓸했던 비의 얼굴엔 웃음이 
떠돌았다. "하도 말이 많은 세상이고 보니 조심하느라고 자주 승후를 
들어오지 못했사옵니다." "그도 그렇기는 해." 비는 또 한 번 쓸쓸하게 
웃는다. "그러나 오늘은 벼르고 들어왔사옵니다. 얼마나 섭섭하시옵니까?"
  섭섭하다는 말은 딸만 여럿이 있고 아들이 없는 왕비가 전비의 소생으로 
세자를 봉했으니 얼마나 섭섭하냐 하는 뜻이다. 혹시 누가 들을까 하여 
윤원형은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말을 꺼냈으나, 윤비는 이심전심으로 
벌써 원형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소명한 윤비였다. 아무런 대답이 없이 
가만히 손을 저어 윤원형의 입을 막았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을 
때였다. "요사이 오라비는 대단한 재미를 보신다 하는구려." 돌연 윤비는 
침묵을 깨뜨리면서 이렇게 말을 내렸다. 얼굴에는 다시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윤원형은 어리둥절했다. "제가 무슨 특별한 재미를 볼 리가 
있습니까?" "나는 혼자 궁에서 쓸쓸하게 지내게 하고 오라비만 깨가 
쏟아지도록 재미를 보고 계시오. 일전에 본갓집 문안비 편에 오라비의 
재미본다는 이야기를 다 들었소." 윤원형은 그제야 얼굴이 약간 
붉어지면서, "뜻밖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서 작첩을 했사옵니다. 이 
말씀이 천청에까지 미쳤사오니 황공하기 짝이 없나이다." "사람이 
어떠하오?" "백령백리하다고 생각하옵니다." "내가 어떤 때는 말벗이 없어 
심심한데, 이야기책이라도 보아 소견을 하고 싶으니 한번 궁중으로 
들여보내 주시오." 윤원형의 입은 벙글벙글 벌어진다. "그러지 않아도 한번 
승후를 했으면 하고 본인도 말은 했습니다마는 황송쩍사와 이내 여쭙지를 
못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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