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외-인생을 최고로 살아가는 23인의 지혜 1권
인생을 최고로 살아가는 23인의 지혜
삶의 방법
전2권 중 제1권
이문열 외 22인
@[ (책머리에)
사람은 살다 보면 즐거운 일을 만날 때도 있고 괴로움에 시달릴 때도 있다. 마치 길
을 걷다가
오르막길에서는 땀을 흘리기도 하고 내리막길에서는 시원스런 기분에 젖어 보기도 하
는 것과
같다.
그러면서 가끔씩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기도 하고 또 희망을 가질 때도
있다.
이렇게 인생에 대한 반성과 통찰의 시간을 갖는 데서 우리는 발전도 하고 비약의 기회
를
엿보기도 한다.
한편, 우리는 스스로의 생각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에 대해서도 유의하며 살펴보는 것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혜롭고 영리한
방법이라는 것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뜻에서 우리 나라의 저명한 지성인들은 과연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도 어
떻게 살피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글을 청하여 한자리에 모아 보았다.
사람은 모두가 개성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듯이, 이곳에 실린 글들도 모두 특
이하고
예리한 생각들로, 읽는 사람들에게 남다른 인상과 감동을 안겨 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스스로의 굳건한 신념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신념은 합리
적이면서
이지적이고 건전하면서도 웅대한 모습을 띠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다른 사
람의 훌륭한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고 남의 뛰어난 생각도 참작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 아래 씌어진 스물세 편의 글들
은 읽는
사람에게 교훈과 용기를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사는 길을 더욱 뜻깊게 하고 또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
해서 깨어
있는 지성인의 인생에 관한 말은 그냥 스쳐 갈 수 없는 커다란 계시와 희망을 안겨 줄
것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반성과 통찰의 시간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한
계기를
만드는 데 이 책에 모아진 글들이 커다란 힘이 되어 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끝으로 자유문학사의 이와 같은 기획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글을 써 주신 분들에게
거듭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편집부 @ff
@[ 기도하는 마음으로
* 강영계(건국대 교수)
1943 년 평남 진남포 출생. 서울대 철학과 졸업. 서독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철학박
사 학위
받음. 현재 건국대 철학과 교수. 저서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철학에 이르는
길', '기독교
신비주의 철학', '베르그송의 삶의 철학', '청소년을 위한 철학에세이'등과 역서 '도
덕과 종교의 두
원칙', '인식과 관심', '중세 철학 입문', '서양철학사', '중세철학사', '에티카'외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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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침'으로서의 과거
'하루에 세 번 반성하라'는 말이 있다.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루에 세
번은커녕
일주일에 한 번, 아니 한달 에 한 번도 반성하기 힘든 처지에 놓여 있다. 어느 누구든
자신의
인생관이나 세계관 또는 가치관을 하루에 한 번쯤 되짚어 보면서 반성할 수 있다면 현
재와 같은
삶의 짙은 안개는 쉽사리 걷어치울 수 있을 것이다.
지난날이 오늘을 만들고, 오늘은 내일을 만든다. 그러나 지난날과 오늘 그리고 내일
모두를
만드는 것은 삶의 주인인 인간으로서의 '나'이다. 자아가 본능과 습관을 벗어나지 못
하여 의식의
눈을 뜨지 못하고 문화의 싹을 틔우지 못할 때 삶은 혼미 속에 허우적거린다.
나의 지난날 그리고 지난날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한마디로 그것은 '지나침'이
었다.
의식도 없고 결단도 없으며, 습관과 사회에 질질 끌려 다니다시피 한 '지나침'으로서
의 삶이
지난날의 나의 모습이었다.
나의 과거는 정리되지 않은 채 암울한 색깔의 크고 작은 무수한 파편들로 뒤범벅되
어 아무런
명료한 형태도 나에게 보여주지 않기에, 삶의 의미를 분명히 제시할 수 없다.
해방, 탱크에는 인형같이 생긴 얼굴 하얀 외국인 아저씨들이 있었다.
전쟁, 부모님 손을 잡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뛰다 걷다 하면서 아무것도 몰랐던 피
난길.
피난, 기차와 배를 타고 혼이 나간 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던 피난살이. 부산에서 인
천으로
인천에서 서울로.
학창시절, 배고픔의 연속.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허기진 탓이었을까? 가리지 않고
마구 읽고
아무것이나 먹었다.
결혼하고 대학 강사 짓도 하고 유학도 가고^5,5,5^ 이제는 대학 강단에 서 있다. 그
러나
지난날이 너무 희미하기에, 과거의 뚜렷한 의미가 전혀 손에 잡히지 않기에 순간순간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너는 누구인가?"
"너는 지금까지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가?"
"너는 단지 본능적 욕망만을 충족시켜 왔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시도조차 하
지 않았던
것이 아니냐?"
"너는 왜 사는가?"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 나는 깊이 병들어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멀리서 본다. 과거
의 나는 내
삶의 주인이 아니었다. 나는 '지나침'으로서의 삶에 더부살이로 끌려 다녔다. 거대한
사회적
관습의 손아귀를 벗어날 줄 모르고 나는 '지나치면서'이리저리 끌려 다니기만 하였다.
끌려
다니면서 나는 공허한 독백만 되뇌이고 있었다.
"내가 제아무리 떠들어도 누구 한 사람 귀기울여 줄 것도 아니고, 쥐뿔 나게 그러느
니 차라리
고분고분 남들 하는 대로 살면 되는 거지 뭐."
"모든 것이 팔자소관이지. 세상 만사를 주무르는 것은 돈 가진 자와 권력가진 자들
인걸. 나야
하라는 대로 따라 가다가 혹시 기회 있으면 작은 고물이라도 주울 수 있을 테지."
지난날을 하나 둘 예리하게 통찰하노라면, 나는 난쟁이처럼 작아지다가 점점 더 오
그라들어
애기처럼 작아지고, 드디어는 먼지 만한 크기로 줄어들었다가 완전히 형태를 잃어버린
다. 나의
과거와 과거의 나를 응시하고 있자면 수치와 좌절과 절망 그리고 무의미가 한꺼번에
나를
억누르기에, 나는 발버둥치고 절규할 힘마저 상실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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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금은 시 한 편 쓰는 마음으로
지난날의 나는 '겨울 나그네'였다. 일정한 목적이나 가야할 곳 없이 정처 없이 방황
하는
나그네였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무조건 방황하기만 하는 나그네는 아니었다. 때로는 그림 그
리기를
천직으로 삼겠다고 잠시 목적을 정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종교에 헌신하
여야겠다고
잠시 작심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때는 글쓰기에 전념하는 사람이 되겠노
라고 잠깐
동안 결심한 일도 있었다. 아^36^예 돈벌기로 작심하고 장사에 몰두했거나, 아니면 관
리로
출세하려고 마음먹고 매진했었더라면 지금보다 덜 절망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
다.
예술이나 종교 또는 학문 어느 분야의 일도 젊은 시절 결단력을 가지고 결정하지 못
한 채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면서 겉맛만 핥을 수 있었기에, 지금의 나는 깊디깊은 좌절과 절망의
늪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사방이 회색으로 뒤덮이고 모든 것은 안개 속에 희미하다.
삶은 이제 무의미로 감싸이고 더이상 진리나 신앙은 빛을 발하지 못하며 허구의 커
다란 입만
멍하니 벌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떤 의미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냐?
지금까지 동서고금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상가들이 삶의 정도에 관하여 나름대로
역설하였다. 공자는 성인, 군자의 삶을 최고의 삶으로 강조하였고, 예수는 절대자 하
느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가장 행복한 삶으로 역설하였으며, 소크라테스는 정의롭게 사는 것
이 가장
값진 삶이라고 주장하였고, 석가모니는 '깨닫는 것'을 최상의 삶이라고 하였다. 이들
은 모두 삶의
뚜렷한 목적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러기에 일상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잠시 여유를 가지고 소위 위대한 사상가들이 주장한 최고의 가치,
곧 최상의
삶을 곰곰이 음미할 경우 그것이 바로 나에게도 정확히 해당되는 최고의 가치이며 삶
일 수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의 구체적인 체험이 들어 있지 않은 주장
이란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몽블랑이 제아무리 웅장하다고 떠들어도
직접
가보지 않은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거의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체험은 삶의 단편들을 종합한다. 체험은 삶의 이론과 실천을 종합한다. 단순한 기계
적 종합이
아니라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는 종합이다. 그러므로 삶의 어떤 분야에서 종사하든
간에 체험이
바탕에 깔려 있지 않다면 그러한 삶은 끝없는 좌절을 가져다 줄 것이다.
나는 삶을 산에 비유한다. 삶이란 마치 산이 다양한 것처럼 다양하므로 하나의 결정
된 삶만을
고집 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얕은 산, 높은 산 그리고 민둥산과
험준한 산을
오르고 내린다. 그런가 하면 하나의 산을 오르고 내리는 데도 가파른 길과 수월한 길
그리고 긴
길과 짧은 길을 택하여 산행할 수 있다. 삶을 이끌어 가는 것 역시 산을 오르내리는
것과 커다란
차이는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 이 산, 저 산 오르내리다 보면 언젠가는 등산의 달인의 경지에 다다를 것
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나는 학생들과 대화하다 보면 학생들에게 가르치
기보다
오히려 학생들로부터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때가 많다.
"소크라테스의 철학 방법론은 역설법과 산파술이야."
"선생님, 그런데 역설법과 산파술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인가요? 아니면 순수하게 이
론적인
방법인가요?"
"미애 학생은 순수한 이론적 방법과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서로 다른 것으로 말했는
데, 과연
그런지 안 그런지 밝히고 또 그렇게 밝힐 수 있는 근거를 분명히 제시할 수 있나?"
"선생님, 어려운 질문인데요. 삶을 살아가는 실천적 방법과 순수한 이론적 방법이
구분되기는
하지만 이론도 역시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속할 것 같은데요."
"미애 학생, 조금만 더 나아갑시다.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전체이고 이론적 방법은
그 전체의
한 부분이니까 양자가 서로 다르지만, 두 가지 모두 삶이라는 점에서 똑같은 것이 아
닐까?"
나는 학생들과 자주 대화하면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체험한다. 이제 와서 과거의
헝클어진
나의 삶을 한 가닥 풀어 주는 것은 나와 남의 공감으로써의 체험이다.
체험하면서 나는 삶을 보다 넓고 깊게 확장하여 나가고 있다.
비록 지난날이 착잡하고 무의미로 가득 차 있다고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에 나는
공감의
체험으로 매일을 색칠하고 있다. 지금 나는 하루하루를 마치 시 한 편 쓰는 마음으로
정성 들여
체험으로 수용하고 있다.
맛이 서로 다른 스물 여섯 가지 나물이 합하여 비빔밥이 되지만 비빔밥 맛은 한 맛
이다. 시를
쓰는 마음은 삶의 다양한 맛들을 한 가지 맛으로 체험하게 해준다. 허위를 배격하고
진리만을
추구하거나, 악을 물리치고 선만을 찾거나, 또는 아름다움만을 고집하고 추함을 물리
치고자
한다면, 그러한 자세는 결국 독단과 독선만을 초래할 것이다.
삶의 다양한 조각들을 모두 체험하면서 한 맛으로 삶을 창조해 나아갈 때, 나는 죽
음을 앞에
대하고서도 삶과 죽음을 한가지 맛으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영롱한 빛을 발하는 '순간'의 문턱에서
한 편의
시를 쓰는 마음으로 나의 삶을 체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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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인 삶
삶은 물음과 답의 연속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부부는 결혼 이후 30 년간 부부 싸움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끈질기게 지탱하여 왔다. 그 부부는 사사건건 다툰다. 감정 싸움
에서부터
시작하여 말싸움으로 그리고 심하면 물건을 때려부수고 급기야는 서로 밀치고 당기기
까지 한다.
사실 이러한 삶은 피곤하며 비생산적이고 비창조적이다. 삶을 창조적으로 꾸밀 수
있는 물음과
답은 넓고 깊어야 한다. 항상 같은 수준을 물매미 돌듯 빙글빙글 제자리 돌아가는 물
음과 답은
단지 형식으로만 그치고 만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처한 이 어려움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을 설득하려면 우선 그의 장점을 몇 가지 분명히 늘어놓은 다음에 내 주장
을 부드럽게
이야기해야지."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안 다음에 쉬
운
해결책부터 하나씩 실행하여 나가는 수밖에 없어."
"오늘 결혼식에는 갈 필요가 전혀 없어. 신랑과 신부는 물론이고, 청첩장을 보면 신
랑 부모도
평소 나와 그다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니까."
우리는 매일 이처럼 거의 반복되는 무의미한 물음과 답의 홍수 속을 헤엄치며 살아
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과 답도 어느 순간엔가 생동감 넘치는 물음과 답으로 전환할 수 있
다.
"왜 삶은 물음과 답으로 채색되어 있는 것이냐?"
"나는 왜 사는 것인가?"
나는 감히 다음처럼 말하고 싶다. 즉 우리들이 '왜?'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왜?'의
의미를
음미하고 그 답을 찾고자 할 때 삶은 창조적일 수 있다는 것을.
젖먹이였던 과거의 내가 갑자기 오늘의 어른이 된 것은 아니다. 젖먹이는 오랜 세월
을 거쳐
한없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삶의 넓이와 깊이를 보태어 왔기에, 그토록 지루한 방랑
의 길로부터
이제 누추하고 작으나마 삶을 여유 있게 관조할 수 있는 장소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
다.
그러나 여기에서 너무나도 분명한 것은 삶을 통찰하는 자세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
적으로
보편적이며 필수적인 그러한 자세가 아니라 오로지 나의 체험에 의한 것이므로, 그것
은 나의
고유한 자세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것은 다시 시행착오를 거칠 여지가 있으며, 그러
기에 나의
삶은 또한 창조적일 수 있다.
누구나 다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의식하거나 체험
하지 못할
뿐이다. 일단 체험으로서의 삶을 소유하기 시작할 때 우리들 각자는 보다 풍요로운 삶
을 가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
이 물음은 우리들 삶의 한 순간에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물음을
일생을 통하여 되묻고 답할 때 비로소 삶은 의미를 얻으며 창조적으로 된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물음을 되뇌어 본다. @ff
@[ 삶의 보람
* 구상(시인)
1919 년 함남 문천 출생. 일본 니혼대학 종교과 졸업.
1946 년 원산문학가동맹의 동인시집 '음향'에 '길', '여명도', '밤'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함.
저서에 시집 '구상 시집', '초토의 시', '말씀의 실상', '까마귀', '구상 연작시집'
등과 평론집
'민주고발', '형상파 시학'등이 있고 에세이집 '시와 삶의 노트'외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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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기쁨으로서의 '삶'
인간은 누구나 삶의 보람을 찾고 있다. 그러나 이 삶의 보람이라는 것이 그리 쉽사
리 손에
잡히지 않고 또 그 실체도 단순치 않아 한마디로 쳐들어 보이기는 실상 어려운 것이
다.
훌륭한 사회적 지위에 있고 또 원만한 가정을 지니고 있다는, 소위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이,
이성으로서는 자신의 삶이 다행스럽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예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볼 때 삶의 보람에 대해 가장 정직한 것은 감정인 듯싶다. 가령 마음속으로
부터 삶의
힘차고도 싱싱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보람의 가장 소박한 모습이 아
니겠는가.
이러한 기쁨은 어떤 때 예상치도 않던 경우에 일어나 그 자신마저 놀라게 되는 수가
있는데,
그때 자기 삶의 보람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실체를 비로소 깨닫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참된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 삶의 보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인간 활동 속에서 '참된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하여
대체로 학자들은 목적, 효용, 필요, 이유 등과 관계없이 '그것 자체를 위한 활동'이라
고 말한다.
확실히 어떤 이익이나 효과를 목표로 하는 활동보다는 '그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인간에게
싱싱한 기쁨을 주는 게 사실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은 돈을 버는 것을
목적으로
어떤 일을 하기보다는 돈 때문이 아닌 일, 돈이 되지 않는 일을 하기를 더욱 즐겨한
다.
실례를 들면, 가령 취미로 돌을 주우러 다니는 사람에게는 돌을 찾아 산천계곡을 헤
매는 것이
즐거움이요, 그 피로도 하나의 흥겨움이지만, 똑같은 돌 줍기를 장사로 하는 사람에게
는 그것이
고역이 되고 싫증을 일으키게 한다.
그래서 아주 어려서는 몰라도 어른이 되어서는 목적이나 효용이라는 것을 일체 떠난
활동과 그
순수한 기쁨을 맛본다는 것은 어렵고, 또 있다 해도 점점 줄어드는 게 실제의 인생살
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런 어른에게 있어서도 삶의 순수하고 가장 깊은 기쁨을 선명하게 맛보는
것은
첫아기를 낳은 직후의 어머니들이다.
아가의 머리맡에 햇빛이 앉아 놉니다
햇빛은 아가의 손님입니다
아가가 세상에 온 후로는
비단결 같은 매일이었습니다
아직 눈도 아니 뵈는 죄그만 우리 아가
아가는 진종일 고이 잡니다
잠은 아가의 요람
아가는 잠에 안겨 자라납니다
아가는 평화의 동산
지줄 대는 기쁨의 시내입니다
아가는 엄마의 등불입니다
아가와 함께 있으면
훤히 밝아 오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시는 김남조의 '아가에게'라는 시의 전반부로서, 참으로 이런 존재의 밑뿌리로부
터 솟구치듯
하는 기쁨은 여성의 특권적 삶의 보람 중의 보람을 반증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모성으로서의 기쁨은 보다 생물학적인 것이라 하겠지만, 이와는 달리
정신적
인식이나 정서적 감동으로서 맛보는 순수한 기쁨도 없지 않다.
나는 이제사 탕아가 아버지 품에
되돌아온 심회로
세상 만물을 바라본다
저 창 밖으로 보이는
6월의 젖빛 하늘도
싱그러운 신록 위에 튀는 햇살도
지절대며 나는 참새 떼들도
베란다 화분에 흐느러진 베츄니아도
새롭고 놀랍고 신기하기 그지없다
한편 아파트 거실을 휘저으며
나불대며 씩씩거리는 손주놈도
돋보기를 쓰고 베갯모 수를 놓는 아내도
앞 행길을 제각기 모습으로 오가는 이웃도
새삼 사랑스럽고 미쁘고 소중하다
오오 곳간의 재물과는 비할 바 없는
신령하고 무한량한 소유!
정녕, 하늘에 계신 아버지 것이
모두 다 내 것이로구나.
이 시는 나의 '신령한 소유'라는 시로서, 좋게 말하면 신령한 것에 대한 눈뜸이랄
까. 모든 만물
만상에서 창조주의 그 크신 혜여를 느낌으로써 거기에 따르는 감동과 기쁨을 서투르게
나마
표현해 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 방황과 고뇌 끝에 도달하여 얻어진 기쁨의 세계로서, 요즘 발간
한 '말씀의
실상'이라는 내 시집에 이 시와 함께 수록된 '하루'라는 작품을 보면,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구정물로 살았다
오물과 폐수로 찬 나의 암거 속에서
그 청렬한 수정들은
거품을 물고 죽어 갔다
진창반죽이 된 시간의 무덤!
한 가닥 눈물만이 하수구를 빠져 나와
이 또한 연탄빛 강에 합류한다
일월도 제 빛을 잃고
은총의 꽃을 피운 사물들도
이지러진 모습으로 조응한다
나의 현존과 그 의미가
저 바다에 흘러들어
영원한 푸르름을 되찾을
그날은 언제일까?
똑같은 여건 속에서 또한 같은 사람이 이렇듯 어둡고 괴로운 절망에 빠지기도 하고,
앞에서처럼 삶의 충만감 속에 놓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앞 시에서 보는 바처럼, 이러한 삶의 충만에의 도달은 어린이들의 기
쁨이나
아기 엄마의 기쁨처럼 단순한 생물적인 것이 아니라 좀도 정신적인 차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나 감동은 심각한 사색의 추구나 핍진한 체험의 결과에서 우러나
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루소는 그의 유명한 '에밀'의 서두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것
은 그
수명이 길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가장 풍부하게 산 사람을 가르치는 것
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삶을 가장 풍부하게 산다는 것은 매일매일의 시간의 내용이 꽉차 있어 그것
에 매달려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저항감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나
쉽사리
흘러가는 시간은 우리의 의식 속에 거의 자국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으로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에는 삶의 흐름이 너무 순탄한 것보다 다소
의 저항감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살아가는 데 있어 노력을 필요로 하는 시간, 살아가는 데 있어
노력을
필요로 하는 시간, 살아가는 데 있어 고통스러운 시간 쪽이 쉬고 노는 시간보다 오히
려 삶의
충실 감을 강화해 준다는 뜻이 된다. 물론 이럴 때 그 시간은 미래를 향해서 열려 있
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가 무엇인가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
닐 때만 그
노력이나 고통을 자기 목표에 대한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별로 생활상의 필요에 몰려 있지 않더라도 자진해서 수고로운 일을
맡고 그
어떤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려고 든다. 이러한 예로 정년으로 퇴직한 이들이 경제적인
면에서
그리 곤란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 시간의 공허감을 무엇보다도 호소하고 있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보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항상 전도에다 목표를 두고 나아갈 때만이 삶의 최소한의 보람
속에
산다고 하겠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무목적, 무보상의 기쁨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별로 남에게 부탁 받지 않더라도 스스로가 여러 가지 목표를 세우
는데,
이것을 엄격히 객관적으로 따지면 그 목표가 아니라, 오직 인간은 모두가 그 스스로
형성한
이러한 삶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할 따름인 것이다.
그러한 증거로는, 가령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간의 속성이기 때
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칼붓세는 너무나도 유명한 '저 산 너머'에서,
저 산 너머 멀리 헤매어 가면
행복이 산다고들 말하기에
아아 남들과 얼려 찾아갔다가
눈물만 남긴 눈으로 되돌아왔네
저 산 너머 멀리 저 멀리에는
행복이 산다고들 말하건만^5,5,5^.
이라고 읊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무한한 저편, 저 산 너머의 목표를 좇는 존
재라고나
하겠다.
한편 수고가 없고 괴로움이 없는 삶에서보다 고생 끝에, 고통 끝에 도달하거나 획득
하는 삶이
큰 보람을 안겨 준다는 것은 하나의 공식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공부를 하여 대
학에 합격한
여학생의 기쁨이나 그녀가 분망한 일과의 틈바구니에서 정진하는 학습의 즐거움은, 순
탄한
가정에서 자라나 어쩌면 하기 싫은 공부를 마지못해 하는 학생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맛볼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삶의 보람은 시인 소포클레스가 그린 '안티고네'의 숭
고한 모습을
비롯해 이러한 헌신적 사랑에다 삶의 보람을 찾아낸 문학 작품들은 동서고금 이루 헤
아리지 못할
만큼 많으며, 특히 여성이 대부분 그 주인공이 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헌신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자칫 잘못하면 그 고통 자체가 쾌감으로 여겨지는
줄
오해하기 쉬우나 그것은 마조히즘적인 착각으로서, 가령 자기 고유의 욕망이나 자유를
희생하며
이에 따른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사랑하는 상대방의 안전이나 평화
나 그
기쁨을 위해서이기 때문에 거기서 구하는 것은 자기의 쾌락이 아닌 것이다.
이외에 미래에다 어떤 시간적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현재의 고통스러운
삶의 참고
살기도 한다. 이런 경우 현실적 나날은 미래에 연결되어 있다는 그 희망에서 의미를
찾는다고
하겠다. 가령 중병을 앓고 누워서 매일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 속에서 적극적 삶의
보람을 느낄
수도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적이거나 철학적 인생관으로, 세상을 버리고 금욕
적인 수도를
하는 것은 소극적, 수동적 자세가 아니라 삶의 보람을 찾는 적극적 태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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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감 속에서 찾는 행복
그러면 이제 여기서 잠시 삶의 보람이라는 것과 행복이라는 것, 또 쾌락이라는 것과
의 차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대체적으로 말하면 삶의 보람이라는 것은 행복감의 일종으로 그 중
에서도 가장
큰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양자 속에는 약간의 뉘앙스의 차이가 없지 않
으니, 가령
현재의 생활이 아무리 암담하더라도, 즉 행복에서 벗어나 있더라도 밝은 희망이나 목
표가 있을
때에는 삶의 보람을 느낄 수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현재가 행복하다 해도 그 행복감
속에서
자신의 사명감 같은 것을 찾아내지 못할 때는 그는 자아의 본질적 부분에 오히려 고통
을 느끼는
수도 있는 것이다.
적십자사를 창설한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도 젊었을 때는 오히려 상류 사회의 딸로
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화려한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사명감을 찾고자 암중모색하는 그
불안감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적어 넣고 있다.
^5,5,5^ 내가 지금 떠올리고 있는 생각이나 느낌은 여섯 살 때부터라고 기억한다.
어떤 하나의
직업이나 일, 또는 그것에 필요한 기술, 나의 전 능력을 다 쏟아서 나를 채워 주는
것, 그것만이
바로 나에게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고, 또한 언제나 그것을 동경해 왔
다. 그런데
나에게는 외국여행, 친절한 벗들, 훌륭한 배필감, 또 무엇무엇^5,5,5^ 다 쓸데 없다.
그런 것이
나에게 무슨 필요가 있담^5,5,5^ 서른한 살이 된 지금, 나는 죽음 이외에 다른 것을
바랄 게
없구나^5,5,5^.
이상에서 보듯 행복보다 삶의 보람이 더욱 자아의 본질을 좌우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실상
행복감에는 자아의 일부나 말초적인 것만으로 충족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많
은
남성들에게 있어 가정 생활의 행복이 삶의 전면적 보람을 안겨 준다고는 말할 수 없
다. 하지만
남성들은 사회 생활 속에서 여러가지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이것은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자랑스러운 느낌을 가질 때 삶의 보람을 전적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삶의
보람에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거나 가치의 인식이 또한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다.
한편 쾌락은 저 행복감 속에서도 극히 말초적인 것이다. 즉 쾌락은 육체적인 것이
요, 관능적인
것이요, 일시적인 것으로, 그것은 한번 충족되면 곧 시들해지며 물리고 만다. 그래서
육체적
쾌락을 행복감으로 알거나 더구나 삶의 보람으로 알고 좇다가는 허망밖에 남지 않음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도 잘 알고 있다.
물론 관능적 고취도 생명력이 한 발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것과 정신적, 인격적
분리로는
찰나적일 뿐 아니라 삶의 보람과는 동떨어진 결과만을 낳게 된다.
그러면 이제 삶의 참된 보람이란 무엇이며 어떤 것일까. 이상에서도 살펴본 대로 삶
의
보람이란 소박한 모습으로는 생명의 기반, 그것에 밀착되어 있으므로 고작 삶의 기쁨
이나 그
충실감으로 밖에는 의식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누가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
을 삶의
보람으로 삼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당장 대답에 궁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흔히 젊었을 때는 삶의 보람을 맹렬히 찾아 헤매던 사람도 어른이 되어서는 아주 잊
어버리고
태연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즉 남성들은 대체로 웬만큼 괜찮은 직업을 얻고
안정된
가정을 이루고 살면 자기 생활은 살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여기게 되며, 여자들은 한층
더
소박하게 출가를 하여 어린애를 낳고 어느 정도 실림을 꾸려 나가기만 하면 자기의 존
재의
보람을 십이분 느끼는 듯 보인다. 그래서 이러한 최소한 인간 생존의 욕구나 그 역할
이
이루어지면 삶의 안이한 자족감이 결코 계속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사람은 이따금 스스로 의식해서 생각을 꺼내지 않더라도 '나의 삶이 이대로 좋은가'
하는
반문이 일어나고, '이것이 참으로 산다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존재 내면에서부터 솟
구쳐 나와서
가슴에 회오리가 일고 구명이 뻥뻥 뚫리기도 한다.
이같은 근원적 질문에 응답할 수 있는 삶의 보람이란 없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서
내가 감히
그 해답을 시험해 본다면, 삶의 보람이란 결코 어떤 목표의 높고 낮음이나 그 성과의
많고
적음에서 얻어지지 않고, 또 주어진 삶의 행, 불행한 여건 속에 있지 않고, 그 삶 자
체의 본질적
추구나 그 감응에 있다고 하겠다.
즉 철학에서 말하는 소유자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존재의 세계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지녀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 한 주부 시인의 시 하나를 소개하면,
햇살 고운 한낮
구부리고 앉아
나분대며 쏟아지는 수돗물의 수다를 듣는다
피곤이 모인 셔츠 언저리
아가의 내음이 남은 작은 저고리
한줌 한줌
물에 적시고 꺼내는 손놀림은
때론 눈먼 내 나태한 여자의 이름을
불러 일깨우고
여자의 가장 맑은 얼굴을 보는 자리,
아낙의 어진 정성이
뽀얗게 피는 시간
소담스러이 빠짐없이
나의 빨래를 건져내어 힘주어 짜며
햇살에 빛나며 날리는
내 일월을 보리.
정두리의 '빨래' 전문
라고 쓰여 있다.
우리는 여기서 가령 소유의 세계, 즉 물질의 세계에서 생각한다면 훨씬 수고도 덜고
능률도
오를 것이다. 또한 소유의 세계에서 가족에게 향한 애정의 농도도 이것보다 더 짙고
직접적인
것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본다면 그녀에게 있어 이러한 손빨래는 그 수고라든가 능률이
라든가의
문제를 넘어 생활의 충족감을 주고 있고, 오히려 남편이나 어린것에게 향한 애정에 있
어서도 그
밀도를 더하게 하고 승화시키고 있음을 넉넉히 엿볼 수가 있다. 그래서 삶의 보람이란
결코
소유에서나 그 소유가 지니는 기술에서가 아니라, 존재와 그 존재가 지니는 신비하고
무한한
감각 속에서 좌우되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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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소유
20세기의 철학자 중 '존재와 소유' 문제로 가장 깊은 통찰을 보여준 가브리엘 마르
셀 선생이
지난 1966 년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나는 마침 그곳에 체재 중이었는데, 그분이 일본
철학자들과 '악(여기서는 윤리악이 아니라 자연적인 물리악)은 극복될 수 있는가'라는
토론회
석상에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이를 설명하는 것을 나는 텔레비전을 통해 본 일이
있었다.
"^5,5,5^ 앞날이 유망한 젊은이 하나가 병원에서 돌연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그 수
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았다고 하자. 그럴 때 이 젊은이는 자기에게 부닥친 그 악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가 있겠는가. 그는 의사에게서 완전히 버림을 받았으니 소유의 세계에
서는 억만의
돈을 쌓아도 그 악을 벗어날 수가 없고 또한 소유의 세계인 어떤 기술로도 이제는 도
저히 이
악을 물리칠 길이 없다. 그렇다면 그 청년에게는 악에 대한 완전한 패배와 절망의 길
밖에는 없는
것인가.
아니다! 그가 이 악을 극복하는 길은 소유와 기술에서가 아니라 존재와 그 비의(신
령함)에서
찾을 수가 있다. 가령 이 젊은이가 이 세상을 희생과 고통 속에서 떠난 이들의 죽음을
떠올려
그들의 인내와 용기를 본받아 자기 죽음에 대처할 수도 있고, 또한 신앙으로 존재가
지니는 그
신령한 세계 속에서 절대자와 만나 죽음을 영원한 새출발로 삼아 기쁨으로 맞을 수까
지 있는
것이다. 즉 신앙인의 실존적 확신인 사랑으로써 이 죽음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자기 희생으로까지 승화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
내가 마르셀 선생의 말씀을 잘 전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건 삶의 진정한 보람과 그
영속성을
찾는 길은 소유에게서가 아니라 존재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저 비유는 간명하
게 가르치고
있다고 하겠다.
이제 나는 여기서 결론 대신 유한한 인간의 삶속에서 영원한 삶의 보람을 찾아내는
그
본보기로, 미국 현대시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에밀리 디킨슨의 '내가 만일 한 마음의
상처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이라는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만일 한 마음의 상처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일 한 생명의 고통을 덜게 할 수 있다면
혹시 그 오뇌를 식힐 수가 있다면
또는 내가 숨져 가는 한 마리 물새를
그 보금자리에 다시 살게 한다면
나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ff
@[ 스스로 양분을 생산하는 삶
* 김남조(시인)
1927 년 경북 대구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1961 년 시집 '목숨'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함.
자유문협상, 시인협회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문화^36^예술상 수상, 한국 예술원
회원.
현재 숙명여대 국문과 교수.
저서에 시집 '목숨', '나무와 바람', '겨울바다', '빛과 고요', '바람세례'등과 에
세이집 '그래도
못다한 말', '바람에게 주는 말', '끝나는 고통 끝이 없는 사랑' 외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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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외경, 죽음에의 경건성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다시금 이 질문 앞에 지금 서 있다. 그간 너무나도 많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한 다
른
이로부터 이 물음에 또 한번 나의 답안을 간추려 보려 한다. 이 말은 아직도 정답을
못 내었다는
자인이 되기도 하리라.
'불확실이 나의 고통이다'라고 한 누군가의 말에 나는 공감한다. 나의 견해로도 삶
은 모순과
혼란에 가득차 있고 불규칙하며 어리석은 반복을 일삼는 그것에서 왔다. 그러면서 어
떤 본능적인
집착이 삶의 전 과정에 유착하는 그 기능에 의해 삶과의 일치를 얻어낸다. 그러면서
불확실과
미혹 등의 잦은 현기증을 면치 못한다. 정녕 그러하다. 두터운 안개층 같은 반투명의
어둠이
존재의 성벽처럼 에워싼 거기에서 사람들은 마치 날개를 꿈꾸는 번데기처럼 보다 광명
한 인식의
갱신을 희구해 오고 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선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을 일이다. 이를 삶의 제일 개념으로, 아울러
삶의
터전으로 삼아야 하리라. 굳이 성서적 지향을 따르려 해서가 아니고 사람의 본성이 이
와 같은
발성을 내어 지르는 점을 지적함이다. 모든 이가 생명이 불켜진 상태를 좋아하며, 그
지속을,
아니 가능하다면 영생까지를 갈구한다. 그리고 이 욕구와 열정이 우리의 인간성에 깊
이 침윤해
있을수록, 다시 말해 성숙한 열의와 긍정으로 삶을 대접하고 있을수록 생활은 충실해
지고 삶의
덕성과 책임감도 더욱 실하게 된다고 말하겠다.
오래 전 필자의 대학 졸업 사은회 석상에서 한 스승이 이런 말을 하셨다. 사범대 학
생이던
우리는 대부분 교사 지망생이었고, 따라서 교직을 전제로 하는 얘기였다.
"끊임없이 열정을 불태워라. 또한 날마다 이 점에 대해 스스로 진단해라. 그러다가
어느 날
열정이 없다고 판단될 때가 오거든 그날 사표를 내고 학생들 앞을 떠나라"고.
하지만 정열은 교사의 기본 여건이기에 앞서 모든 이의 삶 그 자체의 절대 여건이
다. 어떠한
고통이나 시련에 처하여도 성실하게 더운 가슴, 죽음에 임해서조차 삶의 외경을 죽음
에의
경건성으로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면 혹여 논리의 사치라고 평하는 이가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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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에 대한 갈증
자유를 구가하는 사조가 도도한 흐름으로 지나간 다음 인권이나 정의 등의 어휘가
특대문자로
계시되던 일을 익히 기억한다. 더하여 인류 복지라는 말은 총괄적인 표현으로 더 보탤
바가
없었으며 모든 시대의 줄기찬 부르짖음이던 사랑의 권장은 더더욱 타당했다. 그러고
보니 옳은
말이 부족한 시대는 한 번도 없었다. 물질 문화의 너무 빠른 걸음으로 상대적 열세를
면치
못하는 정신 문화에 대한 염려와 옹호도 어지간히는 보아 왔음이 사실이다. 그렇건만
오늘의
우리가 아직도 별반 행복하지 않음은 어인 일인가.
물품의 범람기에 이르고 보니 소유의 빛남과 기쁨이 줄었다. 새 크레용을 가진 어린
이의
감격은 옛말이며 오늘날은 분실물을 찾으러 오는 어린이를 드물게밖엔 볼 수 없다는
보고서가
나와 있다. 사물에 감탄하는 어린이와 자연을 예찬하는 어른들이 많이 않음은 감동의
품귀
현상으로 지적되며, 귀한 것과 잃은 것에의 아쉬움을 못 느낌은 심정의 퇴화라는 병증
으로
풀이될 수 있다.
진실에 대한 갈증이 잠자코 공감에의 목마름도 사그라졌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당연히
고쳐지고 회복되도록 힘써야 한다. 신을 잃었다면 신을 찾아야 하고, 우리 각자의 진
정한 자아를
잃었다면 이 역시 즉각에 찾아 나서야 할 일이다. 기계 활용의 비중이 커지면서 인간
본연의
창의적 에너지를 위축시켜 왔다면 이에 있어서도 그 취할 바는 확연하다. 인간의 출생
시에 이미
부여받은 천부의 자질과 능력을 가꾸고 길러서 보배롭게 지니며 삶을 마치는 날엔 이
를 주신
조물주께 공손히 되돌려야 할 것이다. 생명의 양분을 늘리는 선스러움이야말로 삶에서
으뜸의
도의요 도덕일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도까지 인간다워야 하겠기에 이를 위한 교육 과정을 존중하며 인간적일 수
있게
해주는 그 좋은 것 중의 하나인 마음의 꽃핌이 순조롭고 풍요하도록 우리의 감성을 계
발,
양육해야 한다.
어떻게 마음을 기르는가.
잘은 모르지만 인간성의 순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고 온화하고 규율있게 처
신한다면
어느 정도는 뜻하는 바에 다가가게 될 것이다. 씨앗부터 만들어 내는 게 아니고 이미
놓은
씨앗은 허락 받아 소유하게 된 그 다음 단계로 이를 싹틔워, 양육할 일만이 사람의 몫
이라고
말하게 된다.
생명은 무한히 은혜롭다. 또한 생명은 여럿이 함께 햇볕을 쪼일수록 아름답다. 이를
테면
관현악에 있어서의 화음의 미학을 본받아야 할 것 같다. 어떠한 직분이나 사명을 짊어
졌던간에
사람다운 사람, 마음다움 마음에 머물러야겠다는 그 말이며 이는 나 자신부터를 일깨
우는
계율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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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의 질량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 물음에 다시금 낯설음을 타는 일이 정녕 묘하다.
문득 사람에겐 일거리가 있다는 사실이 찾고 있던 신호등처럼 반갑게 조명을 비춰
준다.
사람은 일을 해야 하며 일을 할 수 있다는 행복을 부여받았다. 문명도 사실상 거대한
노동의
결과이며, 육체만이 아닌 지적 노동, 정신적 혈액이 흥건히 따르어져서 이룩해 낸 값
진 결과인
점을 상찬할 일이다.
사람에겐 저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게 마련이며 이 구분은 누구보
다도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피를 끓이는 열광적 의욕과 집념은 그 무엇으로도 저지될
수 없으며,
그것 아니면 천하가 공허하다고 여겨지는 특별한 지향이 있게 된다. 이건 일이라기보
다 인생을
던지는 투신처이며 주택에서처럼 그 안에 몸을 담는다.
일을 통하여 삶의 가치와 보람을 찾으며 시대와 세계를 보는 인식의 눈뜸과 아울러
점차로
성숙하는 철학에 나아가게도 된다. 물론 의무적이거나 강요에 의해 하게 되는 일거리
도 있을
것이지만 이때에도 그 일의 주인이 되거나 노^36^예가 되는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
할 기회는
꼭 주어진다.
하루의 일과를 되돌아보면 거기에 쌓아진 부피의 대부분이 다른 이로부터 받은 봉사
의 질량인
것을 알게 된다. 누군가 만들어준 물품을 구입하고 다른 누군가가 태워주는 차를 타는
등,
생활의 대부분이 봉사와 선물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인 '
나'도 자신의
일을 통하여 거대한 전체의 운용에 참여함으로써 작은 부분이나마 분담함이 마땅하리
라. 일의
영광과 일의 감사를 무르는 '행복된 삶'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일하되 진지
하게, 일하되
성의 있게, 일하되 보다 더 다수인의 유익을 염두에 두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하다.
괴테의 산문에서 잃은 말에 의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마치 운명의 총아처럼 추켜세
우지만
진실은 노고와 일의 연속이었을 뿐 긴 생애를 통틀어 얼마간의 휴식을 맛본 건 한달
정도를 넘지
못한다고 했다. '나의 연대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내 활동에 대한 요구는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너무나 과다하고 가혹했다'고 술회하는 그의 말에서 삶이 감당해야 하는
부담과
고비의 의미를 새삼 되씹으면서 숙연해진다. 그러나 비참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가
령 낙숫물이
떨어져 돌이 동그랗게 패였음을 본다 해서 그 누구도 비극적으로 여기진 않을 것이다.
쓰임 있는
한 쓰이면서 일의 결과를 빛나게 함이란 거룩하고 값진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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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우침과 격려
나는 문학을 하고 있다.
하면 문학 하나에 내 선택의 기회를 써버린 셈인가. 아니 그렇지가 않다. 문학은 선
택의
일부일 뿐 나의 삶에선 그 외에도 여러 번 결정의 기회가 있었다. 종교와 결혼 등에서
작게는
여행의 행선지까지를 들 수가 있겠으며, 여러 선택과 가지런히 놓고 볼 때 문학이 특
별히
중요했다 곤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학 이상으로 포기 못할 몇 가지가 있었단 사실
때문이다.
내 영혼의 문제도 문제려니와 신과 사람과 자연 등이 문학을 상회하는 가치이던 점을
구태여
숨길 이유도 없을 듯 하다.
길고 은밀한 심정의 오지에 푸르른 나무들처럼 심어 두고 간절히 바라보며 비바람
사계절에
눈길을 돌릴 수가 없는 그 아프게 보배로운 것들.
그렇구나. 이 귀중한 연분들이 있었기에 생각과 말이 분수처럼 치솟아 오르고, 그리
하여
문학의 기능을 아니 선택할 수가 없었다고 여겨진다. 소나무에 돋아나는 솔방울처럼
나의 운명,
아니 운명적인 만남 들이 돋아 올랐기에 오늘까지 이를 문학으로 풀어 온 것이었다.
단순히 문학인 게 아니고 인간적인, 그리고 작으나마 인격적인 면모의 그 엄격한 품
평서일
수가 있었다. 그의 삶만큼 그의 사람됨만큼의 눈금을 짚어 보일 뿐 더이상의 평가 절
상이 없다는
단정이 가능하다. 바로 이 점에서 수많은 문인들이 자기의 문학 옆에서 추워하며 초라
하게
웅크리게 된다고 말하리라.
결국 삶의 이야기로 다시 왔다. 삶 안에서 삶과 살결을 맞대며 함께 지나온 긴긴 세
월 끝에
지치고 늙어진 내 모습 나의 얼굴, 그 더욱 가려져 안 보이는 가책과 회오의 무수한
주름살들.
이 모두에 대하여 책임을 의미하는 그 서명과 날인을 면제 받을 수란 없다.
그러면서 이와 같은 자아의 부담도 상당히는 익숙해져서 못 견딜 만하지는 않다. 근
래에
이르러 삶과 세상에도 정이 들어 처음으로 위화감을 떨치게 되었고 편안함과 환희, 이
러한
감정의 악수를 받곤 한다. 맛이 배어든 추수기의 과일처럼 내 안에도 삶의 여러 미각
이 잦아들어
조립 단계가 끝난 한 기성품이 되었음을 알겠다. 이는 완성품의 뜻이 아니고 크게는
교정이
어렵게 된 고정 단계라는 그 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나에겐 너무 늦어 버린 물음인 게 분명하다. 비록 그렇더라도 넉넉히 희망은 남아
있다.
아침마다 새롭게 광명해지는 천문의 원리부터를 깨우침과 격려로 믿고 신뢰하며, 생명
을 주신
은혜와 삶 가운데의 가호를 끔찍이도 소중히 받들 일이다.
어떤 날은 책을 읽으면서도 전에는 무심했을 정신의 아픔이 병의 전염처럼 나의 정
신에
옮겨온다. 정신의 아픔이나 그 어둠은 사람에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진정한 존재의
보건이란
육체와 정신, 아울러 영혼까지를 함께 고려하는 차원이 아니면 안 된다. 따라서 참 평
화와
진정한 고요는 더한층 바라기 어려운 위치께 놓인다 하겠는 것을.
사는 일이 진정 두렵다. 큰 기관 하나를 운영하기보다 사람 하나의 삶의 영위가 더
어렵고 그
막중한 책임에 있어서도 더욱 무겁다고 말할 수가 있다. 머지않은 훗날엔 어떻게 살아
야
하는가를 궁리하는 좌석이 아닌 어떻게 살았다고 하는 사실보고서를 작성하게 되리니,
그날의
두려움은 얼마나 더할 것이랴. @ff
@[ 타령조의 인생풀이
* 김열규(인제대 교수)
1932 년 강남 고성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충남대 조교수, 하버드 대 연경학회 및 U.C.B. 한국학 연구소 객원교수.
서강대 국문과 교수 역임. 현재 인제대 교수.
저서에 '한국민속과 문학연구', '한국신화와 무속연구', '한맥원류', '서정과 인식'
, '어떻게 읽고
쓸 것인가', '흔들리는 시대의 언어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한국인 우리들은
누구인가',
'한국여성 그들은 누구인가' 외 다수가 있음.
------------
뱃전에 부딪히는 물고기 한 마리
살아간다고들 한다. 우리들이 살아간다면 어디를 어떻게 가고 또 예는 것일까?
오월에 보리밭 건너가는 바람결을 닮은 것일까? 한여름 마삭 덩굴처럼 땅을 기다가
풀섶에
얽히다 스스로 칭칭 감기면서 가는 것일까? 늦가을 무서리 뿌리며 구름 헤집고 가는
쇠기러기처럼 간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동지섣달 얼다 말다하는 벼랑 끝 물사품 떨어
지듯 가는
것이던가?
아무려나 간다고들 한다. 태어나기 이전 그 미지에서 목숨이 다한 그 뒤의 불가지에
이르는
아주 수유의 길, 엎어지지 않아도 코닿을 그 지척을 간다고들 한다. 마파람 우짖는 한
바다,
피어서 지는 포말의 예정은 몇 치나 된단 말인가.
한데도 간다고들 한다. 제대로 행장을 차린다면 명아주 꺾어서 다듬기도 전에 이미
파하고
없을 그 이정을 가고 또 엔다고들 한다. 해서 나서다 말아야 하는 나그네는 더욱 서러
운 것이다.
하지만 어디 아니 갈 수 있던가. 돌너설 타고 한사코 도랑물 건너는 개미처럼 이라
고 해도
도리 없이 삶이란 건너야 하는 것. 질레가시와 가시 사이가 하도 멀어서 불타듯 날개
젓고젓고
넘어가야 하는 풍뎅이처럼 피치 못하게 인생이란 넘어가야 하는 것. 늦장마 시진한 비
기운에
밀려서 꾸역꾸역 고개 넘어가는 하늬바람처럼이라도 남기는 넘어야 하는 게 이승살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다들 간다고들 했을 것이다. 건너가고 넘어가고 돌아간다고들 했던가.
가지만, 가긴 가지만 외길 외곬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환히 트인 신작로, 앞이 빤
히
내다보이는 한 길 자로 잰 듯이 가는 것은 차마 아니다.
안개 속을 간다. 오리무중이라도 도리 없다.
눈보라 속을 간다. 알몸 맨살이라도 딴 길이 없다.
그러다가 꽃다지라도 눈부시게 흐드러진 초록 들판을 만나거든 쉬어서 가되 아주 허
리
내리지는 못한다.
청머루 넝쿨 속을 간다. 조리대 숲을 가야 한다. 팔이 넝쿨에 감기고 발목에 대줄기
에
잡히면서도 그^36^예 가긴 가야 한다.
그러다가 행여라도 억새바람에 설레는 느긋한 등성이라도 만날라치면 다리는 잠시
잠깐 뻗되,
아주 내버린 듯이 뻗지는 말아야 한다. 아마 흥건한 땀방울을 훔치다가, 손결에 한두
방울
입안에 들면 그 짠맛 다시고 또 다시면서 기운이라도 차릴 일이다. 그렇게 예고 또 가
야 한다.
그렇게 저렇게 삶이란 가고 예고 건너고 넘고 가야 하는 것.
그렇지만 말일세. 아무려나 넘을 수도 건널 수도 뒤로 할 수도 없는 게 있기는 있는
법. 무슨
악연인지 웬놈의 정의 사슬이 얽혔는지 친친 감고 휘둘러서 걸치고 돌돌 감아 붙이고
하면서 갈
수밖에 없는 것, 그런 게 있으니 고독이라 하고 죽음의 예감이라고도 한다던가.
그것들은 팔자속보다 더 짙은 것, 핏줄보다 더 진한 것. 우리들 각자의 분신 같은
것들이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과 동반한다는 뜻이다. 삶을 가다가 가다가 휘고 예도는
구비쯤,
서낭나무 한 그루조차 보이지 않는 불모의 고비쯤에서 무엇을 만나고 갈 것인가? 목숨
이끌고
목숨에 이끌려서 우줄우줄 넘어가고 건너가다가 가다가, 나루쯤에서 고갯마루쯤에서
누굴 만나고
갈 것인가?
넋을 빼앗길 사람일까? 내 호주머니 털릴 사람일까? 고개 숙여 엎드릴 그 무엇일까?
아니면
발가락 끝으로 문질러 지나쳐 버려 옳을 그 무엇일까? 물살 머리 스칠 바람처럼 만날
인연일까?
혹은 행여라도 걸려서 넘어질 돌부리 박힌 듯한 연줄일까?
하필이면 수몰하는 배속에 갇혀서 겨우 내다본 시선에 와서 부딪치던 한 마리 물고
기의
눈길이나 곱상하게 닮은 것을 만나고 갈 것인가?
아무려나 별의별 것을 다 만나게 되리라. 하지만 잘만 내다보면, 조금만 눈치 약으
면 물차는
제비 아니라도 아슬아슬 피해갈 수 있는 것이야 왜하니 설마 없을라고. 개나 한두 마
리 말뚝에
매어 두고 그리고 수상쩍을 적마다 헛기침 두세 번 쾅쾅 모질게 할라치면 무당 푸닥거
리하듯
미리 물릴 수 있는 것들이 아주 없기야 할라고.
허다 못해 맨발로 줄행랑도 놓고, 아니면 꽁지부터 먼저 묻고 어설프게 숨는 방법인
들 아주
쓸모 없다고는 잘라 말못할 경우인들 왜 없을라고.
그러다가 정히 안 된다고 하면 줄을 대고 손을 맞비벼 대고, 아주 영 죽지는 못해도
그나마
죽는시늉이라도 지으면 쪽박 쓰고 벼락 피하듯 할 수도 더러더러 있을 법도 한 일. 그
게 사바
세계의 진여고법이 아니던가.
이도 저도 드디어 궁하게 되면 지옥 문 앞에 버티고 선셈치고는 쌍지팡이 짚고 눈
부릅뜨고
컹컹 공갈을 치는 수도 있는 것 아니던가. 어차피 안 된다면 그냥 당하기보다 오기나
부리자고
한 것인데 뜻밖에 봉사 문고리 잡고 황소 뒷걸음치다 쥐잡는 꼴이 생긴다면 삶의 길,
넌짓넌짓
가볼 만도 한 게 아닌가.
그러나 무슨 끈적이가 지독해서 무슨 고, 웬 사슬이 그리도 질겨서 애시당초 면피할
염도 못
낼 것들 있으니, 우리들 살아가다 가다가 만나게 되는 것들 가운데, 그렇게 모질고 흉
한 것이
있으니, 그를 일러서 죽음의 예감이라고 하고 고독이라고 한다.
죽음과 고독, 고독과 죽음.
어느쪽이 보다 더 견디기 힘겨울까? 대답을 찾기 어려울 것 같다. 그 두 가지 그늘
을 가늠할
저울대가 우리들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을 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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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죽음의 집행유^36^예
오늘의 우리들은 그 둘을 하나같이 가출한 지 오래고 오랜 강아지 한 마리인 듯 잊
고 살려고
한다. 없는 것으로 따돌리는 것이 안 되면 피치 못하게 불시에 당할 그때, 바로 그때
가서
보기로 하되, 미리 마음으로 챙기려 들지는 않는다. 말썽을 피우다가 스스로 나가버린
식솔처럼
영 마음에서 떨치기는 어려워도 되도록 그가 돌아와 주지 말기를, 그리하여 되도록 생
각나 주지
말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의식에서 얼마쯤 지워진 상태, 이를테면 성능
이 나쁜
지우개로서 서투르게 지워낸 잘못 쓰인 글자나 기호 같은 상태에다 죽음도 고독도 처
박아 두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 지극히 엉성한 상태를 죽음과 고독의 '알리바이'로 치부하려고 든다.
그러한
우리들 의식으로는 죽음과 고독, 고독과 죽음의 무게를 겨루어볼 염을 낼 수가 없다.
다만 어느
쪽이 일시보다 더 많이 지워져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오늘의 우리들에게 죽음은 오직 지레 갖는 공포뿐이다.
말을 낮추어서 불안이라고 해도 좋다. 미리 경험하는 두려움이다. 언제나 저만큼 앞
서 있는
죽음의 뒷모습을 우리들은 이따금 천야만야 깊은 웅덩이를 들여다보듯 흘깃흘깃 넘겨
다보면서
몸을 떨고 그리곤 겁에 질린다. 물론 때로는 잘 마련된 비상구 같다는 생각, 아니면
여름
뙤약볕의 정자나무 그늘 밑 같다는 생각에 젖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생각의 경우에나 사람들은 죽음을 저만큼 멀리 외돌아 세우기 마련이
다. 하기에
죽음은, 우리들의 몫인 죽음은 언제나 미래의 시계에 속해 있다. 사람들은 적어도 그
러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죽음은 언젠가 올 그 무엇이다. 우리들은 그것이 삶 속에 매양
어느
순간에나 내재해 있다는 것을 시인하려 들지 않는다.
원체 죽음이란 뜻밖이 없고 느닷없이도 있을 수 있다. 불의라든가 졸지라는 말은 죽
음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부고장에 쓰는 심히 관습적인 말귀 아니면 말버릇
에 지나지
못한다.
삶과 죽음은 시작을 함께 한다. 오직 삶이 그 종말을 죽음과 나누어 갖지 못할 뿐이
다.
'졸지'에나 '불의'를 굳이 쓰려고 한다면 죽음을 두고 쓸 게 아니라 삶을 두고, 말하
자면 삶의
시작을 두고 써야 한다. 삶이 다하고서야 비로소 죽음이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삶과 더불어서 죽음이 자라다가 어느 순간 죽음은 더이상 성장을 정지한 삶을
까마득히
앞질러 버린다. 그때서야 뒤쳐져 버린 삶이, 죽음이 결코 만만한 동반자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지만 이미 늦다. 하지만 성장해 가고 있는 죽음이 아닌, 완성 체로서의 죽음은 우리
들이 결코
미리 누리지도 갖지도 못한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죽음이 우리들에게 언제나 미래의 시제에 속한다는 것은 이런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
다. 그런
나머지 심하면 그것이 오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기를 바란다. 죽음은 인간에게 망
각의
욕망이거나 무시의 욕망이거나 할 것 같다. 가능만 하다면 영원히 유^36^예된 미래의
시제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영원한 집행유^36^예까지는 못 가도, 적어도 시기를 미리 못박아 놓지 않는 집행유^
36^예로서
죽음이 우리들에게 있기를 사람들은 바라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온전히 자기 몫
인 삶을
포기하는 데 길들어 간다. 아주 낯선 죽음, 도무지 자기의 것 같지 않은 외면당한 죽
음을 갖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죽음을 유^36^예 당한 미래 시제에다 내맡겨 놓으면서 사람들은 마침내 자신의 죽음
을 자기
자신에게서 소외하고 만다. 그리하여 그것이 이른바, 자기 증명을 얻어낼 마지막 보
루, 최후의
근거란 것을 그만 놓치고 만다. 그리하여 그것이 이른바, 자기 증명을 얻어낼 마지막
보루,
최후의 근거란 것을 그만 놓치고 만다.
사람들은 죽음을 미래 시제로만 생각하면서 필경 죽음을 포기해 버린다. 그리하여
자신 속에서
시시각각으로 자라고 있을 죽음과 친화할 기회를 붙들지 못하고 만다. 죽음과 정, 그
것은 우리들
인간의 마지막 정이다. 그것은 우리들 삶의 사랑의 첫정과 아구맞춤을 하기 알맞다.
세월이 가면
잊을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세월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서 잊어버리고자 하
는 것,
그것이 우리들 죽음이다.
그러나 고독이란 완강하게 현재의 시제를 고집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외로움을 영원
한
현재진행형으로 누리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죽음을 미래로 밀쳐 내고 그 빈 공간
에 고독을
들어 앉힌 것일까? 고독은 집행유^36^예 판결을 내릴 판관으로서 우리 앞에 있지 않
다. 다름
아닌 형의 집행 자로서 우리와 함께 있다.
지금 당장 우리들은 외로움의 얼음굴에 갇혀서 무시로 떨고 질리곤 한다. "내일이야
운명의
물레에 맡긴다고 해도 오늘만 감당해 낼 수만 있다면^5,5,5^" 하고 다짐두기 버릇할
때는, 말할
것도 없이 고독이 더 무섭고 두려워진다. 죽음이야 얼결에 당할 수도 있고 불시에 넘
겨 버릴
수도 있다. 지레 들려 있던 그 지리하고 기나긴 겁에 비하면 실제의 죽음은 눈 깜짝할
수유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어릴 적에 등치 큰 녀석들에게서 폭행을 당할 때와 비슷한 것 같다. 힘센 깡
패가
얼러대면 우선 겁을 먹고 허둥댄다. 하지만 막상 눈에서 불이 번쩍 나고 나면 그때부
턴 별것
아니다. 순간적이라 미처 아픔도 느끼지 못한 채, 너 죽고 나 죽자는 오기나 악이 발
동하는
서슬에 그만 작은 불콩 맞은 멧돼지가 되고 만다. 지레 겪는 죽음의 공포는 깡패의 주
먹질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독은 현재형으로 진행되는데 영속된다. 말하자면 묘하게도 우리들은 현재
진행형의
고독에 발이 묶이고 만다. 무진할 미로 안에서 제자리걸음하는 꼴이나 별로 다를 게
없다. 하루
온밤을 야금야금 아파대던 치통을 연상하게 된다. 고독은 끈적대고 이죽댄다. 상당한
점액질,
끈끈이주걱 같은 속성을 이 냉혹한 빙혈은 인간이란 곤충을 향해서 발휘한다. 이때 사
람들은
아교투성이의 얼음찜질을 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 고독과 심심함이 전혀 무관하다는 점에 유념해 두어야 한다. 남을
만나면
누군지 옆에 있어 주면 그걸로 심심함은 이미 끝장이 난다. 하지만 옆에 사람이 다가
와서 비로소
덧나는 외로움이 있다는 것을 따져 캐게 되면, 이 유사 고독증인 심심함을 쉬 깔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남들은 내게 와서 심심함은 걷어 가지만 고독은 덧씌울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독은
아^36^예 유^36^예라든가 말미라든가 하는 미결정의 상태, 유보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
한다.
때로는 살기 등등한 야수처럼, 때로는 지극히 평온한 안개의 진액처럼 우리 둘레를 맴
돌고
우리에게 다가든다.
하기에 고독이 죽음보다 훨씬 악성이란 결론을 우선 내리게 된다. 죽음의 골짝 저
끝,
어둠에서 당할 외로움을 미리 그려보게 되면 고독의 악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해
서 기왕
내성을 기른다고 하면, 그래서 조금이나마 면역성을 닦아 나간다고 하면 아무래도 고
독 쪽을
택해야 할거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이야, '아서라 내 몰라라'고 시침을 떼면 얼마쯤 비켜서 주기라도 하지만, 억지
로 돌아서는
우리들 앞에 재빨리 고독은 앞질러 와 있기 마련이다. 고독의 구렁텅이에서 설마하니
항아리 속
술처럼이야 익을까마는 정히 하다못해 밭은 바위 비늘에 붙어서 가뭄을 견뎌내는 이끼
의 흉내야
못 낼라고.
------------
물살과 바람이 영겁이듯
남쪽 바다 끝, 산남 땅의 또 산남 물 깃으로 옮겨 앉은 뒤로 무시로 혼자 지내는 시
간이
길어져 가고 있다. 헤매다가 홀연 길 자국이 사라지고 마는 산을 가도 혼자. 조수가
넘나든 물금,
모래 금을 따라서 어슬렁대는 것도 혼자. '우우'밀물이 몰려드는 소리에 귀기울여도
보이는 것은
물살뿐이다. 아무도 없는 섬깃에 섬처럼 앉아도 혼자. 그런 시간이 늘어갈수록 마음에
부는
바람이 더해 갔다.
시린 물살에 허리 담그고 있는 벼랑머리, 외톨이 무덤 가에서 망연자실 바다바라기
에 골몰했던
것이 어찌 한두 번이던가. 그리하여 이미 봉분이 자국만 남을 만큼 착실히 삭아진 그
무덤머리에서 지금 당장 세월이 삭아 가는 그 바스락대는 아슬한 소리에 마음연 지도
이미
오랜데^5,5,5^.
뜰에서 온종일 풀을 매다가, 진종일 밭을 매다가 풀 더미에 걸터앉아 갖는 그 혼자
의 시공, 먼
산봉우리를 바라보면서 그 시공을 새삼 확인하는데, 뜻밖에 나비 한 마리 풀 더미 자
락에 날개
쉬고 있음이 발견하던 것. 그 경험은 무엇이었을까? 해서 아주 옛날에 읽은 적이 있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비슷한 시구절이 거듭 가슴에서 응얼대었다면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
야밤중 짐짓 책상머리 불을 끄면 바깥은 칠흑 어둠뿐이고 나는 다만 그 어둠의 껍질
을
뒤집어쓴 한 마리 애벌레 같기를 기구한 시간은 또 얼마나 자주 되풀이된 것인데^5,5,
5^
그리하여 바다와 하늘, 물살과 바람이 이따금 가뭇없는 눈치 같은 별빛을 머금은 한덩
치 어둠이
되고 나는 거기 돌돌 감겨서, 눈뜨고 앉아도 잠드는 시간이 다소곳하게 마치 영겁이듯
계속되곤
하던 것인데^5,5,5^.
내 살갗을 짚으면 나의 아주 깊은 속에서 다만 어둠살이 집히고, 바람결이 집혀 오
는 기척에
아스라이 눈감음은 또 얼마나 자주자주 되풀이된 것인데^5,5,5^.
월흥 마을을 지나 동화리를 또 지나기까지 제법 먼길을, 그 바닷길을 혼자서 어정대
기도 한다.
이따금 송어일까, 물위로 날아오르는 소리가 솔새 울음과 회답할 뿐이다. 그 서슬에
이미 너무
오래 걸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곤 신발에 앉은 먼지를 멀건히 내려다본다. 그러면서
돌아갈
길이 너무 멀다는 생각을 아주 즐거운 추억의 한토막처럼 반기게 된다. 어스름 바람이
일고
신발끈에서 먼지가 소스라친다.
하지만 그럴수록 '혼자 있음'과 '외로움에의 익음'이 굳이 같거나 하다못해 닮기라
도 했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문득 이런 대목을 떠올린다.
"당신은 아주 훌륭한 고기잡이에요."
"아냐, 더 윗길인 어부가 얼마든지 있지 않고."
"하지만 당신은 당신인 걸요."
욕지섬이 어슴하게 떠 있는 물마루를 내다보는 좌이산 기슭에서 생각해 낸 '노인과
바다'의 한
대목. 원문에서는 '유아 온리'라고 하였으니까, "당신 같은 분은 이 세상에 혼자뿐인
걸요"라고
번역해야 하리라.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바닷가 언덕에서 나도 누구에게선가 이 말을 듣고 싶다. 총명
한 소년
친구가 없다면 누구에게, 무엇에게 기대해야 하는 것일까? 다만 물머금은 바닷바람에
귀가 젖을
뿐이다.
몇 시가 아니라, 몇 물이냐를 눈여겨보는 버릇도 이제 석곡을 캘 때, 바위 이끼에서
이는
가느다란 향내만큼이나 설지는 않게 되었다. 반 마장쯤 떨어진 가룡곶의 코앞, 개구리
섬이 물에
잠기고 드러나는 높낮이가 나의 새로운 시계 바늘이 된지도 오래다. 안개가 짙어지면
귓전을
손으로 가리고 들고 나는 물소리를 듣는다.
그러면서 이제 저 기나길었던 삶의 서툰 잠에서 눈비비고 비비고 깨어날 새벽, 갓밝
이의
물때가 멀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싶다. 그러면서 혼자임이 곧 외톨이가 아님을 스스로
타이르고
싶다. 별들이 사라져 내려서는 잘게잘게 구슬 가루이듯 부스러지는 솔섬의 물가를 아
무도 없이
혼자 걷는 것이 어둠 걷어 내는 것이 아니라 어둠살 한복판에서 비로소 영그는 빛살,
아주
은근한 빛낟알로 영그는 일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런가 하면, 벽방산 정수리로
해서
올라서는 해돋이 한 가운데를 향해서 내딛는 새벽 걸음이 존재의 화심박힘 같아지기를
소망하기도 한다.
지금은 철갈이의 여름. 앙글방글하는 제 꼬리 장단에 맞추어서 활처럼 흰 긴 부리로
물 속을
엿보곤 하던 알록꼬리 도요 무리가 수런스레 저안을 지나간 뒤에 뜰 안 딱새의 병아리
들이 둥지
떠날 채비를 차리는 즈음, 아비 어미에게서 먹이를 낚아채는 그들 노랑부리에서 햇살
이
자지러진다.
절기 따른 새들의 번가름, 그리고 천시를 어기지 않는 물때의 번가름. 내왕이란 그
런 것,
왕래란 또한 그런 것, 지금은 지나간 어느 철보다도 혼자 있음에 어울리는 절기를 누
려야 한다.
고독과 죽음, 죽음의 예감과 고독의 현실.
지금은 그 둘을 따로따로 바라볼 때가 아니다. 두 손에 하나씩, 별개로 들고 들여다
볼 째는
아니다. 두 손 모아서, 합장하고 또 하고 해서 한 움큼으로 받들고 받쳐들고, 찬찬히
소슬하게
살피고 보살필 때다.
하기에 지금은 살아가는 것의 새 고비, 새 고개. 이 고비, 이 고개를 내일의 너머를
위해서
뚜벅뚜벅 혼자서, 외로이가 아니고 다만 혼자서 넘어가는 철이다.
그리하여 두 손바닥에 받는 것을, 눈엽에 설레는 햇살 받아서 오직 혼자서, 외톨이
가 아니고
오직 혼자가 되어서 앙구고 앙구는 그런 철갈이의 어름이다. @ff
@[ 삶의 보람,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 김태길(서울대 명예교수)
1920 년 충북 중원 출생. 서울대 철학과 및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원 졸업. 철학박
사.
1955 년 '시상계'에 수필 '화단'으로 문학에 데뷔함.
도의문화저작상을 수상했으며, 철학연구회장과 연세대 교수, 서울대 교수 역임.
현재 철학문화저작상을 수상했으며, 철학연구 회장과 연세대 교수, 서울대 교수 역
임.
현재 철학문화연구소 이사장, 학술원 회원.
저서에 '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서양철학사', '철학 그리고 현실', '흐르지
않는 세월',
'빛이 그리운 생각들', '멋없는 세상 멋있는 사람', '검은 마음 휜 마음', '삶이란 무
엇인가'외
다수가 있음.
------------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이미 세상에 태어났으며 유한한 기간 동안 살다가 가게 마련이다. 아무렇게
나 되는 대로
살다 가면 그만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건전한 생각이 아니다.
산과 들의
잡초와 잡목조차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며 살고 있다. 하물며 인간으로
태어난
내가 나의 삶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자연의 이치에 대한 배반이요,
나 자신에
대한 배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말로 대답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을 얻도록 살아라." "너의 자아가 실현되도록 살아라." "인간으로
서
자연스럽게 살아라." "네 힘이 허락하는 한, 되도록 많은 가치가 실현되도록 최선을
다하여라."
"바르고 착하게 살아라." 어느 대답이 옳은 것인지 헷갈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
을 것이다.
그러나 말이 다르고 표현이 다르듯이 위의 대답들이 의미하는 바가 서로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다. 비록 말은 서로 다르지만, 위의 대답들이 가르치는 내용은 결국에 가서는 상
당히 서로
접근한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자아를 실현함이 필수적이며, 자아를 실현한 사람
은 행복에
가까운 사람이다.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과 자아를 실현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를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거의 같을 수도 있으며, 그것은 크게 가치를 실현하는 결과도 가
져올
것이다.
그리고 '바르고 착하게 산다'는 것과 '행복' 또는 '자아 실현'은 내면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 길은 바로 '인간으로 자연스럽게 사는'길과 함께 만난다.
동서남북 어느 기슭에서 출발하여도 산 정상에 이르면 모두 함께 만나게 되듯이, '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앞에 놓고 표현과 강조점을 달리하여 여러 가지로 제시한
선철들의
길 가운데서 어느 길을 선택하더라도, 착실하게 걸어가면 우리는 결국 같은 지점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대자연 속의 삼라만상은 각각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있다고 본 세계관을 말
한 사람이
있었다. 바위와 돌 같은 물건까지도 어떤 목적을 가졌다고 본 것인데, 무생물까지도
목적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하나의 믿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가진 동물이나 식물에 대해서는 그것들의 '목적'을 말하는 것이 무리
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길가에 자생하는 한 포기의 풀도 살기 위해서 영양분을 흡수하고 동
화작용을
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여름날 나무 줄기에 붙어서 열심히 우는 매미는 암컷을 부르
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동물과 식물은 생존 또는 생식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여
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인간도 일종의 동물로서 '생존과 생식'이라는 목적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생존'과
'생식'이 인간이 가진 목적의 일부가 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는 것이
우리들의 전통적인 상식이다.
다른 동물들처럼 단순히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만으로는 '인간다운 삶'이
성립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우리 조상들의 전통적인 생각이었고, 오늘날 우리 후손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
봄바람에 나부끼는 민들레 씨앗이 적당한 땅에 떨어져서 싹을 틔우고, 자라서 다시
꽃을
피우고 새로운 씨앗을 공중에 날려 보냈다고 하자. 민들레의 씨앗으로서는 그 이상 더
바랄 일이
없을 것이다. 솔방울이 벌어지면서 그 속에 들었던 솔씨가 땅에 떨어지고 싹이 터서
노송이
되도록 살았다고 하자. 솔씨로서는 그 이상 더 바랄 일이없을 것이다. 민들레나 소나
무의 씨앗
속에 잠재해 있던 가능성의 전부가 현실태로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어린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 늙을 때까지 살았을 뿐 아니라 아들과 딸을 남
기고
죽었다고 하자.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선뜻 그렇다고 말하기가 어렵
다. 인간의
어린이에게는 그 이상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생물학적 성장과 쇠퇴 이상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으며, 생물학적 생존과
성장 내지
발달 이상의 것을 희구하는 욕구가 있다. 생물학적 발달을 넘어서서 그 이상의 가능성
까지도
실현되었을 때, 그것이 다름아닌 자아 실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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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삶을 위한 현명한 선택
생물학적 가능성 이외의 가능성을 편의상 '문화적 가능성'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한
어린이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가능성은 매우 다양하다.
특별히 다재다능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보통 사람들도 여러 가지 소질을 다소간
가지고
태어난다. 같은 사람이 수공업 기술자의 소질과 조각가의 소질 그리고 화가의 소질을
아울러
가지고 태어날 경우도 있고, 학자와 문인 그리고 음악가의 소질을 아울러 가질 경우도
있다.
한 개인이 타고난 여러 가지 소질을 모두 발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다. 소질의
발휘를 위해서는 부단한 연마가 필요하거니와, 시간과 체력에 한도가 있는 인간으로서
여러 가지
소질을 모두 연마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거의 예외적인 경우로써, 서^36^예와 그림, 의학과 문학, 전각과 음악 그리고 태권
도 등 여러
분야에서 상당한 수준에 이른 사람이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분야에서도 정상급에는 이르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만약 그가
한두 가지
일에만 전념했다면, 아마 그는 우리 나라 문화사에 더 큰 업적을 기록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일을 조금씩 잘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일에서 남보다 특
출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더욱 바람직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자가 타고난 여러 가지 소질 가운데서 어느 것을 크게 발전시킬 것
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 앞에 서게 된다. 우선 적성에 맞는 소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 시대 우리 사회가 어떤 분야의 일꾼들을 많이 요구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이유로 적성을 무시하고 법학 또는 의학의 길을
지망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반대로 자신의 적성과 취향만을 생각하고 사회적 수요가 거의 없는 일에 매달려서
호구지책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처자들에게 고생을 강요하는 것도 바람직한 선택이 아
니다.
물질적 현실에 너무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잘못이듯이, 그것을 너무 무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천재들 가운데는 현실을 무시함으로써 큰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상식
적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 천재들 가운도 큰 업적을 남간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
며, 상식적
현실에 적응해 가며 한 생물로서 건강하게 사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
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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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
한 인간이 타고난 소질을 발휘하여 문화적으로 뜻있는 일을 한다는 것은 가치를 창
조하는 일에
해당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일을 성취함으로서 많은 가치를 창조했을 때, 삶의 보
람과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타고난 소질을 발휘하는 일, 즉 '자아의 성장' 한 가지만으로 참으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드물다.
참된 행복을 위해서는 자아의 성장 이외에도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조건들
이 있다. 이
조건들은 자아의 성장 그 자체를 위해서도 크게 도움이 되는 소중한 항목들이다.
행복을 위한 다른 조건의 첫째는 원만한 대인 관계, 즉 인화다. 빛나는 업적이 있어
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하더라도, 대인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사람
들이
없으면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 금력 또는 권력으로 크게 알려졌으나 남의 미움을 많이
사는
사람보다는, 평범한 서민에 불과하나 가까운 사람들의 사랑 속에 사는 사람들이 오히
려 행복할
경우가 많다.
대인 관계가 원만하기 위해서도 노력이 필요하다. 지혜로운 노력 없이는 인화를 얻
기가
어렵다. 인화를 위해서는 우선 참을 줄 알아야 한다. 참지 못하고 말이나 행동을 마구
하면 대인
관계에 갈등이 생긴다.
인화를 위해서는 겸손한 자세가 상책이다. 잘난 것은 축복 받은 일이나, 잘난 척하
는 것은
복을 쫓는 어리석음이다. 인화를 위한 지혜 중 또 하나는 욕심을 부리지 아니함이다.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작은 것을 얻고 큰 것을 잃으며, 욕심이 적은 사람은 작은 것을 잃는
대신 큰
것을 얻게 된다.
행복을 위해서 갖추어야 할 또 하나의 조건은 공동체를 위하여 떳떳한 구실을 하는
일이다.
우리는 누구나 크고 작은 몇 가지 공동체에 속해 있거니와,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
를 위해서
필요한 일꾼 노릇을 할 때 스스로 보람도 느끼고 남의 대접도 받게 된다.
심신에 과로가 올 정도로 지나치게 많은 일을 떠맡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를
위하여 도움이 되는 일에 종사하는 것은, 설령 물질적 보수가 따르지 않더라도 그저
놀고
있느니보다는 자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자아의 성장을 위한 노력에 있어서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 위해서나, 항상
기본이
되는 것은 건강이다. 정신이 건전하지 못한 사람은 행복을 얻기에 적합한 삶을 설계함
에
어려움을 겪는다. 비록 좋은 뜻을 세우는 데까지는 성공한다 하더라도, 육체의 건강의
뒷받침이
없으면 그 뜻을 실천에 옮기기에 어려움이 따른다.
건강은 타고난 체질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건강을 위한
후천적
노력이다. 어린이 시절의 건강 여부는 부모들이 책임져야 할 몫이고, 성년 이후의 건
강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
사람이 40세가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 링컨의 말이 명
언으로
전해지고 있다. 비슷한 논리를 따져서, 우리는 30세 이후의 건강에 대해서 각자가 책
임을 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이 없으면 하루를 살기에도 어려움이 많은 세상이다. 기본 생활의 안정에 필요한
정도의
경제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자아의 성장도, 건강의 증진에도 애당초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 뜻에서 우리가 돈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
복을 위해서
반드시 막대한 재물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소유가 많을수록 행복이 커지는 것도 아니
다.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있는 향락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유의 극대화 또는 향락의 극대화가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하리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그릇된 가치관이다. 이 잘못된 가치관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에
게 행복의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행복은 행복이 있는 곳에서 찾아야 한다. @ff
@[ 지혜로운 선택을 위하여
* 김형석(연세대 명예 교수)
1920 년 평남 대동 출생. 일본 상지대학 철학과 졸업. 연세대 철학과 교수 역임.
저서에 '철학 입문', '현대인의 철학', '그래도 인생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 '우리
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일생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희망과 사랑이 있는 공간', '영원과
사랑의 대화',
'오늘을 사는 지혜', '현대인과 그 과제', '고독이라는 병', '자기답게 살아라' 외 다
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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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가치와 의미
일제 말, 태평양전쟁 때의 일이다.
고향이 함경도인 두 친구가 함께 하숙을 하고 있었다. 둘다 동경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되었다. 한 친구는 집으로 직행하기 위해 동경 서북쪽에 있는 니가타 항구
에서
청진으로 가는 배를 타기로 했고, 한 친구는 서울에 들르기 위해 시모노세키에서 부산
으로 가는
큰 연락선을 타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불행한 일이 생겼다. 안전하리라고 믿었던 대형 연락선이 미 해군의 공격을
받아
침몰되는 바람에 한 친구는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 가서 만나기로 했던 약속은 무산되
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인생에서 모든 것이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인
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선택이 아닌 것이 없다. 친구를 사귀며, 결혼 상대를 정하며, 직
장을 찾으며,
전공 분야를 결정짓는 일 모두가 선택이다.
그 선택이 선하게 잘되면 행복과 성공이 뒤따르나, 그 선택이 잘못되면 고통과 치욕
의 결과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바르고 선한 선택을 했는데도 불고하고 악과 실패의 결과가 뒤따
르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어려운 문제는 상당히 많은 지도급 인사들도 잘못된
선택
때문에 과거의 값있는 노력과 존경스러웠던 명예와 업적까지 상실하게 된다는 데 있
다.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런 지도급 인사들을 많이 대해 왔지만 그런 사태는 쉬
가시지
않을 것 같다. 자유당 말기, 공화당이 끝날 때, 5공이 마무리될 때, 문민 정부가 들어
설 때, 그
어느 때에도 예외 없이 지도자로 자처했던 인사들이 부끄럽게 퇴진하는 것들을 보아
왔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인생과 가치관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하면서도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케
된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도 그런 과오를 범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개의 경우 사람들이 다 같은 과오에 빠진다는 사실이 걱정인 것이다.
우리는 올바른 선택을 위하여 다음의 몇 가지 기본적인 물음을 제시해 보기로 하자.
그 하나는 제물을 소유하는 것이 귀한가, 일의 가치를 따지는 것이 옳은가 함이다.
어느 편을
먼저 택해야 하며 또 어느 것이 삶의 목적일 수 있는가 함이다.
100 명 중의 90 명은 아무 비판이나 반성이 없이, 남들도 그길을 택하기 때문에 재
물을
소유하려는 방향을 따른다.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은 인간 본연의 욕망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것이 다 잘못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며
그 길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과 무의미한 삶으로 끝나기 쉽다. 재물
을 가장
많이 취급하는 사람은 기업인들이다. 그러나 정당한 기업인들은 기업을 치부의 목적으
로 삼는
사람은 성공하기도 어려우며, 치부를 할수록 인생의 가치와 의미는 희소되는 법이다.
그 치부의
수단과 방법이 정당하지 못하고 사회 질서를 해치게 되면 그 기업인은 사회 및 법적인
제재를
받아야 한다.
공직자가 치부를 했다든지, 기업인이 탈세를 했거나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수입을
올렸다면
같은 범주의 제재를 받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지도급 인사들이 그런 선택을 했다면
그 지위와
명예가 높았던 만큼의 반비례적인 대응을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일다운 일을 앞세우며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에 열중한다면 그 일의 대
가로서의
경제적 보수도 얻게 되며, 그 일의 결과가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을 때는 존경과 명예
도 뒤따르는
법이다. 그리고 그 일의 능력에 따라서 더 높은 직책과 인간적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재물을 탐낸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일다운 일을 한
다는 것은
인생의 가치있는 선택이 되는 것이다. 이제 욕심스러이 재물을 모은 사람이 할 수 있
는 선택은
그 재물을 값있게 쓸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하나의 길밖에 없다. 재물은 소유할수록
인생의
불필요한 부담이 되나, 일은 하면 할수록 더 값있는 결과를 사회에 제공하도록 되어
있는
까닭이다.
돈을 벌기 위해 의사가 된 사람과 고통을 겪는 환자들은 돕기 위해 의사의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의 평가와 결과는 세월이 갈수록 달라지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예술가와, 인기와 명예를 얻기 위해 뛰어 다니는
예술가의
말로는 같아질 수가 없다. 역사는 길게 볼수록 그 의미가 적당히 가려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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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선택
나는 몇해 전 특수한 종교 분야 지도자의 아들이 창피스럽고도 파렴치한 법적 제재
를 받았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깊은 생각에 빠진 일이 있었다. 그 아버지는 수십만 신도들의 지도
자로
자처했는데, 그 아들은 아버지의 말이나 설교와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세상에서는 자녀를 다스리는 일이 전쟁에 승리하기보다도 어렵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말하기는 쉬우나 실천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가지 사실은, 그 아버
지가
종교적 신앙을 빙자해 치부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역시 잘못된 선택 중의 하나였
던 것이다.
두번째 선택의 하나는 명예와 봉사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함이다.
많은 사람들은 소유의 노^36^예가 된다. 그 소유 중 재물에 대한 욕심이 가장 일반
적이다.
그러나 지적 수준이 높고 사회적 경험을 쌓은 사람들은 권력이나 출세를 원한다. 그것
들이
사회적 평가를 높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이 있는 사람은 정
치를 하려
하며,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이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기를 바란다. 권력과 출세는 사
나이들의
뜻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의 많은 수는 권력이 사회를 위해 맡겨진 일의 의무임을 생각지 못한다.
그 사람이
장관이 되었기 때문에 국민들이 받은 피해가 대단히 크더라도, 그 사람은 내가 장관을
지냈다는
사실로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또 어떤 이들은 주어진 일을 더 높이 출세하기 위한 수
단과
발판으로 삼기도 한다. 그 감투와 명예가 더 높은 권력과 직책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정치계 인사들 가운데는 그런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역겨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승만과
박정희 같은 사람의 말로를 생각해 보는 사람은 권력과 지위가 목적이 아닌 일을 위한
위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권력과 지위에 대한 종말을 모르는 욕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재음미해 보기 바란다.
그러나 권력이나 지위 못지않게 우리들의 관심과 기대를 모으는 또 하나의 선택과
선망의
대상이 있다. 그것은 명예이다. 낮은 명예는 인기로 나타나며, 중간 명예는 유명해지
는 것이며,
높은 명예는 존경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명예를 탐하거나 노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름을 나타내거나 명예의 대가가 전혀 없었다면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성취된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파스칼도 지적해 준 바가 있다.
나는 존경하는 친구의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자기는 돈이나 재물, 지위나 권
력은 생각해
본 일이 없으나 그래도 세상을 살고 간 어떤 업적은 남겨야 할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
였다. 그
친구는 재물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오래 대학에 있었으나 보직이나 감투 같은
것은 생각지
않는 편이었다. 여러 번 정부나 사회에서 좋은 자리를 제공해 왔으나 거절하면서 살았
다.
그러기에 아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무욕의 선비라는 칭찬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신도 어떤 업적은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
고 사람은
죽은 뒤에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격언도 바로 그런 뜻이다. 그래서 우리 주변의 어떤
사람들은
별로 도움도 안 되는 저서를 의도적으로 남기기도 하며, 자기 이름이 인명록에 오르는
것을
영광으로 삼기도 하고, 심지어는 비석을 세워 보기도 한다.
그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유명해지는 일이며 명예로워지는 것이다. 물론 유명해지는
것과
명예를 얻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한때 히틀러와 스탈린은 유명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에서
존경받거나 명예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를 이끌어 가는 사람과 역사를
건설하는
사람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명예는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명예를 얻고 싶다
는 것은
존경을 받고 싶다는 것과 일치된다. 그래서 진정한 명예는 유명해지는 것보다는 존경
을 받는
것이며, 더 많은 사람의 더 높은 존경을 받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영예로운
영광과
존경에 명예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명예를 상품을 사듯이 따라다니며, 유명해질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습성에 빠진다. 그들은 진정한 명예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 신기루를 따
르는 것
같아서 역사의 무대에서는 곧 사라져 버리고 만다.
---------------
명예와 존경
그러면 참다운 명예는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자신을 갖고 말할 수가 있다. 진정한 봉사를 택하는 사람이 그 봉사의 대가
만큼의
명예를 얻게 되는 것이다. 명예를 선택하는 사람은 명예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봉사
를 선택,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명예가 주어지는 것이다. 찾는 것이 아니라 따라오는 것이다. 봉
사라는
실체 뒤에 명예라는 영상은 봉사 없이 존재할 수가 없다.
나는 우리 나라의 어떤 지도자가 자신이 십년만 더 젊다면 한국의 간디가 되고 싶다
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바 있다. 크게 모순된 이야기다. 지금 곧 간디와 같은 봉사와 희생에
해당하는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 앞서야 한다. 우리는 간디의 봉사적 노력과 희생적인 최후가 있
어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여, 사회는 그에게 영예를 바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주의자는 명예를 얻을 수 없으며, 실리주의자는 명예를 따라가다가 삶
의 자기
모순에 빠질 뿐이다. 그러나 인기, 명예, 존경받는 일들을 생각지 않고 묵묵히 정성어
린 봉사
생활을 하는 사람은 생각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못했던 명예와 존경을 얻도록 되어 있
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감사와 존경을 바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봉사의 정신과 신념이
투철한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명예까지도 사양하거나 타인들에게 환원하기 때문에 더 큰
영광을
역사에 남기게 된다.
진정한 애국자는 나라를 위해 일한 것을 자랑삼지 않으며, 참다운 예술가나 학자는
남들이 그
업적을 칭찬할 때 스스로를 숨기는 것이 보통이다. 해야 할 더 많은 일이 남아 있으며
자신의
부족과 미숙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명예를 좇는 어리석은 행위에 머물지 말고 어
떻게 더
많은 값진 봉사를 할 수 있을까 함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과 노력이 자
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높은 인격과 더 풍부한 봉사를 가능케 하기 때
문이다.
@ff
@[ 삶은 가을 하늘의 둥근 사과처럼
* 김화영(시인)
1941 년 서울 출생. 서울대 불문과 졸업.
프랑스 엑스앙 프로방스대학 졸업.
문학박사. 1964 년 '세대'에 '과원'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함. 현재 고려대 불문과
교수.
저서에 '봄밤의 가족', '길 위에서', '아침의 시', '어둠의 중심', '겨울연가'외 다
수가 있음.
------------
꽃이 가면 신록이 온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뒤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무성한 산이 있다. 이 동네로
이사온 지
7 년째가 된다. 서울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상자곽 같은 아파트에 불과하지만 집
뒤의 산
때문에 나는 이 집에 깊이 정이 들었다.
산비탈에 지은 고층 아파트여서 길이 가파른데다가 마당이고 도로고 온통 주차장이
되어
있어서 한가하게 걸어다닐 공간도 거의 없이 삭막할 뿐이다. 강가에서 위치하고 있어
야 마땅히
그 넘실거리는 강물이 시원스럽게 내다보여야 하겠건만 앞에 또 고층 아파트가 사리고
있어서
남의 집의 번다한 생활의 창문틀만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다.
집 앞의 고층 아파트는 그러나 시야만 가리는 것이 아니라, 저 너머 도로로 씽씽 달
리는
자동차의 소음도 차단해 주는 것이어서 우리집은 놀라울 정도로 고요하다. 다행한 일
이다.
나는 매년 3월 중순이면 가슴이 설렌다. 뒷산에 잡초들이 뾰족뾰족 새싹을 내미는가
하면 이내
그늘진 북쪽으로 진달래가 만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개나리도 지천으로
피어 신명이
난다. 이때부터 약 한달 동안 진달래, 개나리로부터 산복숭아와 산벗꽃으로 이어지는
잔치가
무르익어 간다. 그런데 지금은 벚꽃도 모두 떨어지고 연두색 잎사귀들이 초록으로 짙
어 가고만
있다. 그러나 축제는 더욱 화려하게 폭발할 것이다.
이제 곧 뒷산에 우거진 아카시아꽃이 만발하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짙은 꽃향기가
주차장을
가득 채우고 급기야는 우리집 뒷문으로 넘쳐 방과 거실로 밀려들 것이다. 그러면 친구
들을
불러모아 잔치를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가슴이 설렌다.
하지만 이 찬란한 봄의 기쁨을 그냥 안방에 가만히 들어앉아서 맞아들일 수 있는 것
은 아니다.
집안에서는 뒤꼍으로 난 조그만 창문을 통해서 자연의 아주 인색한 한 귀퉁이를 바라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아침마다 뒷산으로 올라간다. 처음에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가
너무나
힘들고 숨이 찼다. 그러나 7 년간의 되풀이된 나들이로 인하여 나는 산과 아주 친숙해
졌다.
더구나 비교적 자유로운 직업 덕분에, 나는 이른 새벽에 마이크까지 크게 틀어 놓고
체조를
하는 저 부지런한 사람들의 물결이 완전히 빠져 나가고 난 다음, 해뜬 뒤의 투명하고
한가해진
산과 만나게 된다.
나는 성동구로 산길을 올라가서 용산구를 거쳐 중구 소속의 정상에 올라갔다가 다시
성동구로
돌아 같은 코스를 한 바퀴 더 돌고 내려온다.
성동구와 용산구의 산비탈과 정상에서는 고요하고 크게 구비도는 한강의 빛나는 모
습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반면에 북쪽의 중구 쪽으로 난 산 중턱길은 인적이 거의 없어
호젓하지만, 발 아래 대로로 지나는 자동차들의 소음이 꼭 장마철에 흙탕물이 불어난
대하의
세찬 물살 소리같이 줄곧 으르렁거리며 나를 따라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나무숲에 가려서 차도가 보이지 않으므로 나는 늘 저 발아래에는 거센 냇물
이 흐르거니
하는 상상을 하며 그 오솔길을 걷는다. 더군다나 산의 이 북쪽면의 서쪽 내리막길과
동쪽
오르막길 부근에는 오솔길을 약간 비켜서 큰 벚나무가 몇 그루씩 서 있어서 4월 중순
부터
하순까지 나는 여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다. 아침빛이 청명하고 꽃이 한창인 날은
그 꽃나무
아래서 꽤 오래 머문다.
나와 그 꽃나무들과의 밀회의 순간이다.
나는 늘 오직 나만이 그 꽃나무들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황홀하다.
더러는 서쪽 내리막길 꽃나무 밑에 오래 서 있어 보고, 더러는 동쪽 오르막길에서
한참 비켜
있는 너럭바위 아래의 큰 파라솔 같은 벚꽃 더미를 내려다본다.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행복의
전율과 더불어 그 덧없음이 가져오는 슬픔을 가슴 쓰리게 맛보는 며칠이 계속된다.
세상에 와서 한낱 착각 같은 봄을 보았던 것인가? 그 아름다움을 두고 나는 산을 내
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어디 그 뿐이랴. 꽃들이 빛의 폭죽 터지듯이 만발했는데 어느 날 난데없는 비바람이
몰아쳐
이튿날 아침에 가보면 반 넘어 떨어져 버린 것이다. 꽃이 가면 산록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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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과 세월을 영혼에 각인시킨다.
'왜 사냐건 웃지요.' 어떤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그러나 그보다 천년도 더 된 오
랜 옛날에
이미 그렇게 웃었다 시인이 있었다.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물으면
그저 웃으며 대답하지 아니하니
마음이 절로 한가하도다
복사꽃 싣고
물은 어디론가 아득히 흘러가니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이 아니로다
이백의 시 '산중문답'
그러나 이제는 인간 세상이 아닌 '별천지'의 꿈은 어디에도 없다. 삶이 무엇인지 묻
는
철학자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번뇌하는 시인도, 깨달음을 찾는 수도승도 징집
당하게
되어 있고, 시인이 쓴 시의 원고료도 컴퓨터에 입력되어 세금이 부과되는 세상에 우리
는 살고
있다.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 손쉬운 질문에 사실 우리는 매일같이 대답하
고 있다.
잠자리에서 눈을 뜨면 몇 번 뒤척이다가 더러는 거뜬하게, 더러는 나른하게 일어나
칫솔을
입에 물고 조간 신문을 읽는다. 현관에 배달된 우유와 빵과 커피로, 혹은 된장국으로
허둥지둥
아침식사를 하고, 월부로 산 자동차에 올라타거나 지하철을 타고 일터로 간다. 사무실
에서
부지런히 일한다.
물건을 배달하고 관공서에 서류를 제출하고 전화를 걸고 고객을 만난다. 사무실 근
처의 단골
식당이나 구내 식당에서 점심, 다시 분주한 근무, 그리고 자동차의 물결이 도도한 삶
의 바다를
헤엄쳐서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들이 과외 공부에서 돌아오고 있다. 저녁식사에 이어
텔레비전에
멍한 시선을 비끄러매고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본다. 코미디도 흘러가고 연속 방송극도
흘러가고
통기타도 랩뮤직도 흘러가고 5공도 6공도 그 네모난 통 속으로 흘러간다.
그 끝없는 흐름의 끝은 생각하기도 싫다. 그러나 성실하게 절약하여 모은 덕택에 적
금도
늘어가고, 아파트 평수도 자동자의 배기량도 늘어간다. 자리가 집힌다. 자리가 올라간
다. 잘살게
되었다. 희망도 꿈도 커간다. 이만하면 괜찮다. 안심이다.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
다.
이런 외면적 물질적인 삶도 물론 귀중하다. 저물면 등불이 켜지는 저 창 너머의 단
란한 작은
행복은 물론 중요하다. 물론 소중하다. 누구나 부유하게든 가난하게든 그렇게 희망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목표도 세운다. 결심도 한다. 억척으로 난관을 극복한다. 여차직하면 싸
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각박한 세상을 원망만 하면 패자가 되기 때문이다.
언젠가 서울시청 건물이 이마에 '다시 뛰자'는 표어를 커다랗게 써붙이고 시민들의
삶을
독려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 표어를 바라보면서 다시 힘을 내어 뛰는
것 같았다.
내가 아침마다 뒷산에 오르는 것은 물론 건강과 활력을 유지하여 숨찬 삶의 길을 뛰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목적이었다면 나의 친구가 몇 년 전부터 권하는
헬스
클럽의 회원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한 바퀴 두 바퀴 산길을 '혼자' 돌기 위해서 산을 오른다. 나는 한 바퀴 두 바
퀴 돌아가는
순간과 세월을 영혼에 각인하기 위하여 산을 오른다. 산에서 마주치곤 하는 동네 사람
이
배드민턴을 치자고 해도 나는 웃기만 한다.
나는 하루 중 이 시간만은 혼자이고 싶다. 유난히 고독이 좋다.
오솔길에서는 풀과 꽃나무만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다람쥐도 만나고 장끼도 까투리
도 만나고
까치도 만난다.
그러나 참으로 만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인적이 없는 오솔길을 호젓이 걸어
가는 나
자신과 만나 산길을 둥글게 둥글게 돌아가노라면 가끔 머리에 떠오르는 말이 있다. 알
프스가
남쪽으로 무너져 내리다가 골짜기를 이룬 프랑스의 작은 마을 마노스크가 고향이고 그
산간의
고향에서 일생을 살다간 소설가 장 지오노는 힘차고 생명감이 넘치는 산문을 많이 남
겼다.
하루하루는 혼탁한 어둠의 시각에 시작하고 또 끝난다. 그 하루하루는 화살이나 길
이나 인간의
질주와 같은 목표를 향하여 가는 것들의 모습이 그러하듯이 길다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는 태양이나 세계나 신과 같이 영원하며 변함이 없는 것들의 모습이 그러하
듯이
'둥근'모습을 하고 있다. 인간의 문명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향하여, 원대한 목표를 향
하여 가고
있는 것이라고 믿게 만들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목표는 그냥
사는 것임을
잊어버리고 지낸다.
그냥 사는 것이야말고 우리가 매일같이 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살아가기만 하면
매일
매순간 우리의 진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임을 우리는 잊어버리고 지낸다.
문명된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루는 새벽에, 혹은 새벽보다 조금 늦게, 혹은 훨씬 늦
게, 요컨대
각자가 일을 시작하기로 되어 있는 시각에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일을 하는 동안 '하루 종일' 계속되다가 눈을 감고 잠들 때 끝난다고 생각
한다. 그런
사람들은 하루가 '길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하루는 '길지' 않고 '둥글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감각 기관들을 통하여 느낄 준비만 하고 있으면 그 순간 모든
것에 다
이를 수 있다.
하루하루는 과일이다. 우리가 맡은 역할은 그 과일을 먹는 것이다. 각자의 천성에
따라 천천히
혹은 미칠 듯이 그 과일을 음미하는 것이며, 그 과일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의 혜택을
입는
것이며, 그것으로 우리의 정신과 영혼의 살이 되게 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에 그밖의 다른 의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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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또는 사랑의 순간은 둥글다.
같은 맥락에서 화가 반 고흐도 '삶은 둥글다'고 했다.
"사람들은 삶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다. 삶은 둥글다"라고 시인 조
보스케는
말했다.
내가 생명의 아침 산길에서 만나는 호젓한 '나'의 모습은 둥글다. 생명의 중심을 향
해서 존재가
집중되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같이 혼자서 아침 산길을 돌면서, 새싹이 돋고, 꽃이 피
고, 다시
어느 날 아침 그 아름답던 꽃이 지는 것을 본다.
기쁨의 전율이 부서지는 행복의 덧없음과 동시에 가슴을 흔든다. 그리고 봄이 가면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로 순화하는 것을 산을 따라 돌면서 느낀다.
그 생명의 순환이 삶의 덧없음을 일깨운다. 그래서 허무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반
대다. 그
덧없음이 매순간의 귀중함과 그 집중의 아름다움을 일깨운다.
새싹을 보아도, 떨어지는 꽃잎을 보아도, 한강 위에 쏟아지는아지는 햇빛을 보아도,
소나무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아도, 어느 시인이 '뒤에 두고 온 세상 / 온갖 괴로움 마치고 /
한 장의
수의에 덮여 있다'고 노래한 흰눈 덮인 산을 보아도 생명의 감각 기관을 싱싱하게 열
고 있으면
매순간의 삶이 둥글고 가득찬 과일로 느껴지도록 하기 위하여 나는 산속의 오솔길을
돈다. 둥근
아침이슬을 본다.
덧없음의 빛.
그렇다. 하는 아침 산길을 가면서, 순간의 새소리를 따라 솟아 오르면서 웃는다. 영
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덧없이 지나가고 돌아오지 않는 매순간을 힘껏 사랑하리라. 쉬 져버
리는
풀꽃을 사랑하리라. 다시 다시 만나지 못할 뒷모습을 사랑하리라. 차를 타고 지나가다
가 모퉁이
도는 길가의 레코드 상점에서 언뜻 들은 한 소절의 멜로디, 다시는 반복하지 못할 그
순간의
감미로움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들을 사랑하리라. 그 모든 순간들은 둥글다. 내 존재를
다하여
사랑한 순간들은 둥글다.
나는 어린 시절을 드넓은 과수원 속에서 자랐다. 과수원 옆 언덕 위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봄철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내려다보면 사과꽃이 허연 바다가 되어 출렁거렸다.
그러나 꽃핀 봄보다도 더욱 빛나는 날은 사과를 따는 가을날이었다. 서리가 내리고
잎이
시들거나 떨어져 버리고 나면, 푸른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탐스러운 사과가 자욱이 익
어
매달리는 것이었다.
삼각 사닥다리를 고이고 올라가 잘 익은 한 알 한 알의 사과를 따기 위하여 손을 뻗
치면 '속이
무르익은 다음에야 겨우 뺨에 빛이 내비치는 실과'가 우리 일생의 투명하고 텅 빈 하
늘 속에서
둥글게 둥글게 뜬다. 우리의 삶의 매순간이, 그리고 덧없는 우리의 일생이 그 가을 하
늘의
사과처럼 둥글게 익는 모습을 나는 가끔 꿈속처럼 그린다. 오, 살아 있음의 청명한 기
쁨이여!
그렇게 둥글어진 다음에야 떨어지리라. @ff
@[ 우주 속의 나를 인식할 때
* 김후란 (시인)
1934 년 서울 출생. 서울대 사범대 수료.
1959 년 '현대문학'에 '오늘을 위한 노래'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함.
현대문학상, 월탄문학상 수상. 한국일보 기자, 부산일보 논설위원, 한국여성개발원
원장 역임.
저서에 시집 '장도와 장미', '음계', '어떤 파도', '눈의 나라'등과 에세이집 '사랑
과 사색이 있는
오솔길'외 다수가 있음.
----------
신앙은 인생의 힘
종교를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 이 앞에서 얼른 입이 열리지 않는 게 지금의 나의 심
정이다.
"신앙은 인생의 힘"이라고 말한 톨스토이나, "종교를 통한 이해는 곧 정신적 이해의
열쇠"라고
했던 토인비의 깊은 철학적 통찰에 공감하면서, 다만 그것이 어느 특정 종교나 한 길
로만
연결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길을 찾는 것이며, 사람과 사람이 서
로 정신적
이해의 길을 트는 데 있다고 내 나름으로 해석해 본다. 때문에 어떤 길을 트는 데 있
다고 내
나름으로 해석해 본다. 때문에 어떤 종류의 종교든 그 길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온전
한 삶을
위한 것임을 생각할 때, 불교든 기독교든 또 다른 종교든 각기 특성은 있되 도달점은
같은게
아닌가 한다.
기독교의 박애 정신이나 불교의 무아의 동체자비에 있어서나 맥은 같을 것이다. 즉,
내 생명이
귀하고 내 생활이 절실한 것처럼 다른 생명도 귀하고 애틋한 것이며, 남의 괴로움이나
기쁨이 곧
나의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눈길을 든다면, 어떤 경우에나 좋은 인간 관계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근래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극단적인 이기심과 인명 경시 풍토와 부도덕성에 환
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남을 해치고, 돈이 필요하다고 남의 것을 무
조건
강탈하고 남의 일생을 짓밟는 인신 매매까지 성행하는, 이처럼 각박하고 무자비한 행
위가 인간
세계를 이성이 없는 동물 차원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이러한 크고 작은 불상사는 모두가 마음이 병든 자의 잘못 된 생각에서 나온 비인간
적인
행위일 것이다.
나 혼자만을 위해서 이기심을 가지면 자신도 남도 괴로워 지지만, 나와 함께 있는
이웃의 모든
이를 위하고 아끼는 마음을 가진 이타심의 주인공은 자신도 남도 행복하게 해준다.
이러한 이타심이 누구에게나 체질화되고 생활화된다면 지상의 혼란도 아픔도 소멸하
고 낙원이
될 것이나, 그렇게 되기에는 우리 인간 개개인의 자기 중심적 탐심의 굴레가 너무 큰
듯하다.
그러한 속성을 다스려 주는 것이 종교의 힘이며 수도로 얻어지는 깊은 신앙심이 아닐
까 한다.
나에게 한가닥 의지가 되는 명언이 있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때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려는 노력이 있다. 어떤 불우한 경우에도 생존에 대한 애
착과 소유에
집착하여 몸부림치기보다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어진 여건 아래 최선을 다하
는 동안에
언젠가는 먼동이 트임을 믿는다. 가장 짙은 어둠 끝에 새벽이 오듯이.
불의의 교통 사고로 입원해 있는 후배를 위문가서 "그동안 너무 바쁘게 열심히 살아
왔으니
잠시나마 누워서 심신 휴식을 취하라는 하느님의 배려가 아니겠느냐"하는 말이 진심으
로 나왔다.
여기서 하느님을 내세운 건 그녀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이었다. 가정인으로
서
직업인으로서 종교인으로서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는 나날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일
시적인
병석에라도 누워서 재충전할 시간이 필요하고 안식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한
결 초조함이
덜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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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나'
'시사저널'최근 호에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우주 물리학자 스티븐 W. 호킹 박사
에 관한
기사를 감명깊게 읽었다.
전 우주의 시공간의 역사를 꿰뚫어 보는 장대한 작업에 몰두해 있다는 호킹 박사는
이미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과학자로 존중받고 있다고 한다. 그가 창출해 낸 우주 과학의
이론적
설명은 문외한인 나에게는 경이롭고 난해한 것이어서 접근할 수도 없겠으나, '우주의
나이와
인류의 나이'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해 놓은 것은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여기 옮겨 본
다.
"인류의 역사는 이제 겨우 3백만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대우주의 역사를 1 년으
로 축소할
때, 즉 150억 년을 1 년으로 압축하여 1월 1일 1시를 대우주의 탄생으로 잡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을 12월 31일 밤 12시로 잡아 우주력을 만들어볼 때, 우리의 은하계가 혼
돈 속에서
자취를 나타낸 것이 5월 1일경이며, 지구는 학생들의 가을 학기가 시작되는 9월 1일경
에
생겨난다. 한때 이 지상을 주름잡았던 공룡은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에 나타나고, 12
월 31일
밤 11시 55분경에는 사람이 농사짓는 법을 배운다. 그 막강한 로마 제국은 12월 31일
밤 11시
59문 58초에 망하게 되며, 문예부흥이란 문화사상 큰 사건은 11시 59분 59초에 일어난
다.
우리들의 문화사나 역사란 정말로 마지막 1초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며, 대우
주의
장엄한 역사로 볼 때 정말로 하잘것없고 스쳐 가는 일순간밖에 되지 않는다."
이 글을 읽고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나의 인생관이 우주관과 연결
되는 구체적
경험의 감동이기도 했다.
스쳐 가는 일순간에 불과한 현대사 가운데 또 스쳐 가는 일순간에 불과한 우리들의
일생은
너무나 미미하고 너무나 애잔한 유한성으로 해서 가슴이 저릿해 오는 것이었다.
종교는 자기 초월의 수단이라고 정의되기도 한다. 인간의 욕구 중에는 죽음이 예정
된 생명체를
초월하여 보다 크게 보다 영속적인 삶을 희구하려는 강한 욕구가 있고, 종교야말로 그
러한 자기
확대 의식의 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희구가 개인 차원에 머물기보다 인간 사회의 아름다운 영위에 기여하는
사회성을
지녀야 하고, 그러한 노력이야말로 짧은 일생을 보다 크게 보다 영속적이 되게 하는게
아닌가
한다.
-------------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주는 '시'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평소 잊지 않으려는 슈만의 한마디가 있다.
"예술가의 천직은 사람의 마음속 깊이 빛을 보내는 일이다."
이 말대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빛을 안겨주는 시가 얼마나 써질 건지 자신은 없으나,
그렇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의 생은 그 나름의 존재 가치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편의 시가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주
는
따사로운 입김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시를 쓰는 일은 이슬을 진주로 바꾸는
일, 즉
햇빛에 스러져 버릴 이슬방울을 언어로 형상화하여 진주 같은 보석으로 만드는 작업이
라고
생각하면서, 이 역시 존재의 확충이라고 표현해 본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에 그 나름의 가치 부여를 하기도 한다. 시인은 문학적 미학으로
생명은
존귀함을 노래하고, 나와 남과의 관계에 이해의 길을 터 가는 존재인 것이다.
사람만이 우주 속의 나, 세계 속의 나, 생명의 유한성을 인식하건만 일생은 너무나
짧다.
그만큼 소중하다. @ff
@[ 살아가는 길의 선택
* 박동규(문학평론가)
1939 년 경북 월성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현재 서울대
국문과
교수. 월간'심상'편집고문.
저서에 에세이집 '별을 밟고 오는 혼', '당신이 고독할 때',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등과
논문집 '한국 현대소설의 비평적 분석', '현대 한국소설의 성격 연구', '전후 대표작
품 분석'외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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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보면 알 수 있는 삶이기에
어린 날에는 어떻게 살아야 참다운 인간으로서의 삶일까 하는 물음에 대해 막연하게
추상적
개념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길을 가다가 빨간 판에 별을 달고 지나가는 지프차를
보게 되는
날이면 내가 군인이 되어 별을 달고 살아가는 꿈을 꾸게 되기고 하고, 선생님이 위대
한 과학자의
이야기라도 들려주는 날에는 과학자가 되어 우주의 신비를 알아보는 꿈을 꾸기도 하였
던 것이다.
이것이 나의 어린 시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꿈꾸며 겪었던 꿈의 솔직한 고백이
다. 뿐만
아니다.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환상의 그림도 이와 같이 형태가 잡히지 않은 아름다움
이라는
개념의 여성만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피난처 대구에서 살고 있었다. 이
때 나는
아침이면 학교로 가는 길에 담요를 감아서 둥글게 만들어 어깨에 마치 캠페인을 벌이
는 여성들이
띠를 감듯이 하고 시가를 서글픈 목소리로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는 군인들을 볼 수 있
었다.
미군의 군복을 그대로 입고 있어서 팔소매나 옷의 길이가 맞는 군인은 한 사람도 없었
다.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이들이 이렇게 행진을 하고 난 다음 곧 기차를 타고 일선으로
달려간다는
것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구역 앞을 지나게 되어 있어서 나는 역 안에
가끔
들어가 화물 열차에 빽빽이 앉아 있는 군인들이 북으로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또
역 개찰구
근처에서 흰옷을 입은 아주머니들이나 젊은 아낙네들이 플랫폼 안에 있는 기차를 향해
서 손을
흔들며 울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역에 들러 이들을 보고 오는 것을 싫어하셨기 때문에 다른 길로 돌아
서 집으로
오라고 일러 주셨지만, 나는 이 비참한 광경이 내 마음에 견딜 수 없는 어떤 충동을
느끼게
하였으므로 자주 들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역에서 본 광경은 나로 하여금 전쟁의 비참함이나 헤어짐의 서러움을 깨닫게 하
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보다도 더 내 삶의 길에 영향을 미친 것은 생명을 지니고 사는 일이 결코
자신이
우선하는 방향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막연한 느낌이었다.
이 막연한 느낌의 종착역은 결국 추상적인 개념의 삶에 대한 인식으로 현실을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생명을 이어가는 일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마치 하나의 탑을 세워
가듯이
이루어진다는 점이었다.
이를 깨닫게 된 것은 물론 대구역 앞에서 펼쳐지는 이별이 자신의 생명 의지와는 관
계가 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주는 충격과 함께, 산다는 것은 이러한 일들을 겪어 나가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날의 이 체험을 통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살아 있다는 것에 즐거움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소중한 삶을 스스로 소유하자고 하는 일의 첫걸음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생명에 대한 겸허한 자아 각성은 살아 보면 안다는 옛 어른의 술회
적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많이 들은 말 중의 하나가 "다 커서 아들 낳고 살아 보면 알 수 있
을
거야"하는 말이었다. 이 말은 아들을 낳고 키우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것인
가를 말해
주는 뜻이 담겨 있지만,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새로 생명을 유지해 가는 일이 우선이
라는
감추어진 의미도 담겨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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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대신 짊어져 주지 않는 삶이기에
이 하루의 삶을 인생이라는 긴 여정의 끈으로 묶어 가면서 이를 보다 바르고 가치있
는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실제로 한밤중 캄캄한 산속에서 길
을 찾으려고
할 때 우리가 변하지 않는 별자리를 보고 가야 할 곳을 알아내듯이, 인간의 삶에도 이
러한
방향을 금세 알게 해 주는 지표가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젊은 날 내가 어느 여성과 사귀고 있을 때였다. 이 여성은 성격이 섬세해서 내가 아
무렇게나
단지는 한마디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다음에 만나면 "그때 왜 그런 말을 했어요."하고
물어 보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잊어버린 아무런 의미도 없이 한 말을 자꾸 물어 오니까 점점 서
로 만나
대화하는 것이 거북해지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말로 "오늘 바람이 시원하지요"하고 이야기를 하면, "시
원하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지요"라고 되묻는 것이었다. 나는 이 여성과의 만남을 포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마디 말도 그대로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
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 여성과의 만남이 뒤틀리고 나서 나는 어느 날 문득 '어떻게 해야
여성과의
대화에서 내 마음에 있는 그대로를 전하며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만들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대화의 방식이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그 분위기에 따라 다르고
교육의
수준에 따라 다르고 살아온 과거에 따라 다르고 교육의 수준에 따라 다르고 살아온 과
거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결국 인간끼리의 대화에는 방식은 있지만 그 방
식에
알맞는 이해의 폭은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작은 체험에서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인간과 세계와의 교섭이 얼마나 어려
운
것인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의 진실한 관계를 맺
을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삶의 궤적을 바르게 그려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말
해 주는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랑을 바라보며 이를 성취하려고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
인가는
분명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위대한 사랑을 달성하고자 하는 이는 위대한 사랑에 대
한 전망이
있어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참다운 인간의 삶인가' 하고 묻게 되지만, 이 물음
은 별자리를
보고 깊을 찾아가듯이 자신의 삶에 대한 전망을 지니고 이를 향해서 지향하고 있을 때
에 비로소
그 방향에 대한 옳고 그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만히 혼자 방안에 앉아 어
떻게 살아
볼까 하고 궁리하는 것은, 살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가를 제거해 놓고 어디를 가야
하는지를
물어 보는 것과 같은 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지향점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지난 봄날이었다. 학교에 가려고 문을 밀고 나오다가 앞집 담장에 눈길이 갔다. 앞
집은 이십
년 전에 이사를 왔다. 이사를 오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퇴근을 하다 보니까 담장
곁에
라일락나무를 다섯 그루나 심는 것이었다. 나는 단지 '저 사람이 라일락을 무척 좋아
하나
보다'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이십 년이 지난 이날 아침, 앞집의 라일락나무는 엄청나게 자라
서 담장을
넘어 하얀 벽을 이루고 있었다. 참으로 세월이 빠르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고 학교에
갔다. 그날
저녁 친구들과 회식을 하고 밤이 깊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술을 조금 마셨는데
여간
어지럽지가 않아서 택시에 올라타고는 창 밖을 내다보지도 못한 채 그냥 앉아 있었다.
얼마 후 운전기사가 "다 왔어요" 해서 돈을 치르고는 가방을 들고 내렸다. 캄캄한
밤이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어 두리번거리는데 코 끝에 향긋한 라일락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닌가.
우리집은 골목 안에 있는데 라일락 향기가 큰길까지 흘러 나와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우리 동네에 온 것에 안도의 마음이 생기고 그 향기를 따라 올라가 우리집 문 앞에 도
착했다.
문을 밀고 들어가려다가 뒤를 돌아보니 온 동네에 밤안개가 깔리고 있었고, 그 안개와
함께
라일락 향기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에게 골고루 뿌려지고 있
는
것이었다. 나도 라일락꽃처럼 누구에게나 향기를 나누어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
었다.
이 라일락나무처럼 누구에게나 향기를 나누어줄 수 있는 삶이 되는 것, 이런 것이
하나의
지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어야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돈
을 벌어 큰
집을 가지고자 할 때는 경제 운용의 상식을 배워야 하듯이, 총체적인 자아의 삶의 가
치를 어떻게
세워야겠다는 질량을 지닐 때 비로소 가야 할 방법이 정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의 목표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고, 그 목표의 의미
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무거운 삶의 짐을 대신 져주지 않듯이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외롭고
쓸쓸함을 느낄 때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그 외로움의 무게를 가늠해 대신 앓아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삶의 지향을 느낄 때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그 외로움의 무
게를
가늠해 대신 앓아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삶의 지향을 바르게 세우
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명철한 자성이 있어야 하고, 이 자성은 보다 나은 삶이 어떤 것
인지를 볼
수 있느냐는 자아 욕구의 근거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남의 삶을 알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의 마음도 모르고 아버지가 나를 위해서
어떤
고행을 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어느 젊은이가 결혼을 앞두고 나에게 신부감이 괜
찮은
여성인가를 물어 온 적이 있다. 나는 부모에게 물어 보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고 이야
기하였다.
그러자 이 젊은이는 "부모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
다.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 젊은이는 받는 입장에서만 부모를 생각하고 있었다.
주는 입장의
부모를 보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없어서 자식에게
주지
못하지, 있으면서도 주지 않는 부모는 드물다. 더욱이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는 부모
의 마음은
더 안타까운 것이다. 그런데도 받는 입장에서 보면 없는 것은 부모의 무능이라고 생각
하게 되고,
남들은 다 잘 받는데 자신만 받지 못하는 것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부모와 자식은 줄 것과 받을 것들 사이에 두고 맺어진 인간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잊고 있기에 생겨나는 일인 것이다. 주고받기 이전에 존재하는, 나를
있게 한
사람과 나를 이어가는 사람이라는 혈연의 생명적 동일성을 의식한다면 이러한 관계의
설정이
보다 정직하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은 자칫 자신의 편견적 동굴에 갇혀서 남의 훌륭한 삶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에서만 삶의 설계를 하려고 하는 일이 있다. 훌륭하고 가치있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고 그 속에서 자신의 행복한 삶을 그려보는 일이야말로 바쁜 길을 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대신 짊어져 주지 않는 자신의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스
스로의 갇힌
세계를 벗어나서 자신을 둘러보고 진실한 삶이 어떤 것인가 살피는 지혜가 필요한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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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을 살고 싶다는 의지와 욕망
입시철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을 때 친구를 만나면 "자식이 이번에 ()()대학에 들어
갔어"하고
무척 자랑스러운 듯이 말하는 것을 듣곤 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왜 그 대학에
들어갔어?"하고 내가 물으면, "대학은 좋은 데 나와야 취직도 제대로 하지 않는가"하
고 도리어
묻는 나를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는 경우가 있다.
친구의 말이 옳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취직도 잘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취직
을 하여
월급을 받고 살아가는 일을 하다가 보면 곧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기계적으로 월급을 받고 살아가는 일을 하다가 보면 곧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기계적으로 월급을 보고 살아가는 자신의 초라함에 실망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살아가는 일에 대한 자신의 명확한 삶의 지표, 즉 '어떻게
살고 싶다'는
의지와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은 이에게는 소방관이 되든, 경찰관이 되든, 혹
은 공무원이
되든 자신의 삶이 보람있게 마련이고, 더욱이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직업의 귀천이나
직업이
주는 옹색한 열등감이 생길 수 없는 법이다. 진리를 탐구하고 싶은 의욕을 가진 이가
교수를
하고, 정의로운 삶을 세상에 구현하고 싶은 이가 검사나 변호사를 해야 바른사회를 만
들 수 있는
것이다.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한 수단만으로 직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바로 인간의 삶을
기계화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명을 가진 이는 누구나 이 생명으로 해서 이 세계에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 생명의
가치를 높이거나 허망하게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이 생명의 의미를 어떻게 세워 가느
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가난하지만 떳떳하게 살아왔다는 것은 정직한 삶이 가치있다는 점을 믿
고 있는
데서 얻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하고 자문을
하는
일이야말로 의미있는 생애를 만드는 첫 작업이 될 것이다. @ff
@[ 대변혁기를 경험하는 인간
* 박홍(서강대 총장)
1941 년 부산에서 출생. 가톨릭대 철학과 졸업. 대건신학대 신학과 졸업.
세인트루이스대학에서 영성신학 전공 후 교황청 그레고리안대학에서 박사 학위 받음.
생명문화연구소 이사장,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부회장 역임.
현재 서강대 총장. 역서에 '예수회 교육의 특성', '순례자의 이야기', '영적 성장과
내적 치유'
외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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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재 이유
돌맹이 하나, 풀 한 포기에도 다 존재 이유가 있듯이, 시간, 공간, 사건들 안에 초
대된 우리
인간도 귀한 존재로서 고유한 존재 이유가 있다. 이 존재 이유를 인간은 서서히 깨달
아 가고
있다.
이러한 인간을 두고 '우리 인간은 실패하면서 배우는 존재다(Errando Discimus)'라
는
표현으로 함축하고 있다. 인간은 자기가 살고 있는 동안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들과
사회의
문제들은 풀기 위해 질문을 하고 답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우리는 대변혁기라고 말한다. 이 안팎의 대변혁기를 살
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몇 가지 점에 대해서 성찰하고, 답을 주는 자로서가 아니라 답을 함께 찾
는 심정으로
중요한 관심사를 적어본다.
인간은 가장 위대하면서도 가장 비참한 양면성을 가진 모순적인 존재임을, 한손으로
만들고
다른 손으로 부수는 존재임을, 권리주장에는 의식이 발달했으나 책임과 의무 그리고
희생은
남에게 미루는 자기 중심적, 이기주의적 인간, 거짓합리화의 명수들, 민주화를 외치면
서
비민주적인 방법을 선택하고 폭력을 거부하면서 다른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신뢰를 원
하면서
불신하고, 사랑한다면서 미워하는^5,5,5^ 등등 이러한 인간들의 행동 양식을 보게 된
다.
즉, 모순적인 인간의 행동 양식들의 근거는 바로 인간 내면 속에 있는 것이 외면화
되고 또한
외면적인 것이 내면화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대변혁기를 맞은 인간의 특성은 마치 화산이 터지면 속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분출
되는 것과
흡사하다. 생업에 바쁜 나날을 보내는 오늘날의 우리 인간은 우리 인간의 존재의 근거
를 좀더
깊이 성찰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다.
시간과 사건들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 되어 그 문제들 속에 함몰되어 가는가 하면,
무엇이
잘못되어 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양심으로 문득문득 느끼다가 욱하는 심정으로 당위와
절규를
외치다가 속수무책으로 냉소주의로 돌아가기도 하고, 이 시대를 이끌어갈 각 분야의
참된
지도자를 요청하기도 한다.
이러한 변혁기를 가장 예리하게 체험하는 젊은이들이 모인 것이 바로 노동 세계와
대학 세계,
그리고 군대 세계이다. 젊은이들은 시대의 진통 속에 사상적으로 방황하며 이 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사상과 인간의 존재 이유를 여기저기서 찾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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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문제와 사회 문제
우리가 겪는 이 변혁은 양적인 변화뿐 아니라 질적인 변화를 말하며, 양을 겸한 질
적인 답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 시대의 인간 문제와 사회 문제를 풀 질적인 답을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창조적으로 만들어 내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마치 에이즈를 치유할
약이 새롭게
나와야 되듯이, 우리의 주관심사들인 경제, 정치, 문화, 교육, 교통, 통일, 환경 등
외면적 문제와
우리 내면 세계, 심성의 문제 등에서 새로운 처방이 요청되고 있다.
여기서 인간의 존재 이유를 뿌리 차원에서 성찰하고 우리 인간의 행동 양식에 대한
새로운
선택을 함으로써 우리는 문제를 풀고 해결하는 새로운 태도와 목적 그리고 목적에 부
합하는
방법들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1. 이 시대의 징표를 직시하는 일이다.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변혁기의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가 과거와 싸우면서 현재와
미래를
부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겠다. 과거의 잘못된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잘못된 것을
보고
버리고 끊어 버리는 결단과 태도는 바꿀 수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여, 과거와 미래가
화해할
때이다.
2. 인간과 자연의 화해가 요청되는 때이다.
과학 기술의 발달과 개발이 인간을 위하는 방향으로 추진 되어야 함을 인간은 깨닫
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공기, 물, 땅의 오염의 주범이 바로 교만한 인간 자신임을 깨닫고 새로운
자세와
선택을 함으로 화해가 가능하리라. 인간 생명과 자연 생명의 가치가 존엄성을 깨닫는
진통이 막
시작되고 있다.
3. 사람과 사람간의 화해가 요청되는 때이다.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방황은 하나 타락하여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은 하
지 않는
법이다. 사람은 존중과 사랑의 대상이지 지배와 착취와 이용의 대상이 아님을 각성할
때이다.
특히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거스르는 방법, 즉 폭력
은 아무리
정당화시키더라도 다 거짓임을 경험의 진리는 가르쳐 주고 있다.
4. 빵과 말씀(진리: 정의, 사랑)은 대립시켜도, 분리시켜도 다 오류로 빠짐을 인간
은 깨닫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분리시키고 대립시킬 때 여기는 잘못된 정신, 영적 주의와 잘못된
물질주의
내지 비인간화, 물화로 인간이 전락됨을 경험의 진리에서 깨닫기 시작하는 진통이다.
5. 남북이 만나고 화해해야 하는 때이다. 타율에 의해 분단되고 찢어진 분열의 아픔
은 자율적
식별과 선택으로, 화해 교류를 통한 통일로 가는 과업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도전하고
있다.
한쪽은 프롤레타리아 폭력 혁명의 교육을 통하여 인간과 사회를 재고하려고 혼신의 노
력을 하여
왔고 또 한쪽은 반공 교육으로 대응하여 왔다. 잘못 놓은 주판을 털고 다시 놓듯이,
잘못되고
부족한 과거의 교육을 버리고 새로운 화해 교육, 통일 교육을 연구하고 실천할 때이
다.
6. 생산에도 참여하고 분배에도 참여하는 일, 노동의 의미와 정의를 정신적, 육체적
노동의
현장에서 갈등하며 깨닫기 시작하는 때이다. 노동을 통해 인간이 인간답게 된다는 진
리를,
노동의 고귀함을 깨닫고 노동의 물성뿐 아니라 노동의 정신성을 깨닫기 시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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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변혁기를 경험하는 우리 인간에 대해 몇 가지 성찰하여 보았다. 이 변혁기는 한 상
태에서 다른
상태로 도약할 수 있는 전환기이기도 하다.
가장 위대하면서도 가장 비참한 양면성을 가진 우리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다. 이 자
유는
선택의 자유를 말한다. 이 변혁기, 갈등기, 전환기 한가운데에 있는 우리가 무었을 선
택하느냐에
따라 화해, 용서, 창조의 길로 갈 수도 있고, 분열, 미움, 파괴의 길로 갈 수도 있다.
특히 정치, 경제, 교육, 언론, 종교인들이 공동선을 위해, 올바른 일을 위해 연대를
맺고 함께
노력할 때 우리가 바라는 좋은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희망은 있다. 근원적이고 알맹이 있는 대화와 화해를 통해 창조적이고 긍정적
이고
적극적인 답을 찾고, 이 시대의 우리 인간 문제와 사회 문제를 풀기를 진정으로 원할
때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올바른 목적과 목적에 부합하는 방법을 창
조적으로
선택하는 자생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ff
@[ 사랑의 삶
* 손봉호(서울대 교수)
경북 영일 출생. 서울대 영문과 졸업.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졸업 후 화란 자유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 받음. 한국외국어대 교수 역임. 현재 서울대 사회교육과 교수.
저서에 '나는 누구인가', '현대정신과 기독교적 지성', '윗물은 더러워도', '사도신
경 강해설교',
'별 수 없는 인간', '오늘은 위한 철학', '꼬집어본 세상' 외 다수가 있음.
--------------
선택의 문제
나무나 짐승은 선택할 능력이 없다. 어떤 나무가 결심한다고 해서 좋은 나무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짐승이 노력해서 더 멋진 짐승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태어날
때 얻게
된 생물학적 조건과 주위 환경에 의하여 절대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는 다르다. 철학자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 그래서 둘 가운데 하나 혹은 여럿 가운데 한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고,
그 선택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도록 '결정되었다'. 그래서 사람은 잘 선택하면 아주 뜻있고 행복
한 삶을 살
수 있거니와, 잘못 선택하면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고 만다.
불행하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선택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고 산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지도 않고 생각조차도 해보지 않고 사는 것이다. 그저 주위의 환경과 조
건에
의하여 결정되는 대로 살고,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 버린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시키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는 대로' 사는 것이 오히려 속편 하다 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그런 삶은 짐
승의 삶과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
그렇게 살아도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이 된다는 보장만 있으면 오죽 좋겠는가마는, 대
부분의
경우 그런 삶이 가치 있고 행복하게 되기는 어렵다. 정원의 나무도 잘 보살펴야 아름
답게 되고
몸도 잘 돌보아야 건강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보다 훨씬 더 인위적으로 영위되는 인간
의
일생이랴!
그러나 선택만 잘한다 해서 저절로 뜻있게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선택한 삶을 올
바르게
이끌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물리적 시간은 동일하게 흐른다. 사람에게 따라서 시계
가 빨리
가거나 천천히 가주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시간이라도 그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는 사람과 전혀 낭비하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나다. 어떤 사람이 하찮은 음란서적이나 들여다보고 시시덕거리는 동안, 다른 사
람은 진정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있는 고전을 읽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남의 돈을 사기하는 방
법을
연구하는 동안, 다른 사람은 위대한 과학적 연구에 몰두하거나 불쌍한 사람을 도울 방
안을
논의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일생이란 바로 그렇게 보낸 시간의 조각들이 모아져서 이루어지므로,
순간순간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기로 결정하는가에 따라 우리 삶의 질이 좌우된다.
시간은 우리 마음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시간은 흐른
다.
썰어지는 무처럼 조금씩 조금씩 시간은 흘러서 마침내 무가 없어지듯 우리 일생도 끝
난다.
값없이 흘려버린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삶이 값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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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정말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차라리 '태
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한 사람들'이다. 그랬더라면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적게 받았을
것이고
자신도 그렇게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인데 공연히 태어나서 걸레 같은 삶을 살다가 비
참하게
죽는 사람들이 있다.
일생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끼친 이익보다는 손해가 훨씬 큰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
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는 끼치더라도 자신만 행복하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
수 있는데,
그것은 좀 모자라는 생각이다.
인간의 삶이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혼자서만
행복해질 확률은 매우 낮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진정한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하고,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감옥살이를 할 확률이 높다. 땅위에서는 예외가 있을 수 있으나, 그런
사람들은
내세에서라도 보응을 받아야 할 것이다.
철학자 플라톤과 칸트는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에라도 내세는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
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사회 전체가 평균적으로 불행해
진다.
이 세상에는 또 '태어나나마나 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 다른 사람에게 덕도 끼
치지만
손해도 끼치며, 덕을 입히기도 하지만 덕을 입기도 해서 서로 더하고 빼어 버리면 별
로 남는
것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흔히 평균적 시민이라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할 수
있다. 공동 묘지에 이름 없이 묻혀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정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큰일날 뻔한 사람들'도 있다. 이들
은 다른
사람의 덕도 보고 다른 사람에게 손해도 끼치지만, 전체적으로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
은 이익을
주고 덕을 입히는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첫번째 종류의 사람들보다는 쾌락을 누리
지 못하고
우선 보기에는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관적으
로는 반드시
불행한 사람들이라할 수는 없다. 혹 이 세상에서 숱한 고난을 겪더라도 그런 사람은
내세에
엄청난 상을 받을 것이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없다면 사회는 유지될 수 없고,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사람살 만한 사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한평생밖에 살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윤회설을 믿어 사람이 죽었다가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지만,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다음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의 전생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므로 여러 번 산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의식하는 한 우리의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 뿐이다. 그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훨씬 좋았을 뻔한 삶을 살 것인가, 아니
면 안
태어났더라면 큰일날 뻔한 삶을 살 것인가? 혹은 그저 태어나나마나 한 삶을 살 것인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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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삶
어떤 삶이 의미 있는 삶인가? 여러 사상가들이 수많은 의견들을 제시했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삶,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할 수 있는 삶, 창조적인 삶, 많은 업적을 남
기는 삶 등.
그리고 그 모든 의견들이 모두 일리가 있고 긍정적이라서 그 어느 하나에 충실하더라
도 그것을
비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요즘은 다원주의 시대라 어떤 특정한 이상이나 가치관만이 옳고 다른 것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 어렵게 되었다. 사람은 다 제 잘난 멋으로 살고, 우리는 그것
을 존경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
의 권리를
빼앗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다른 사람에게 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존중될 수 있다.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결코 혼자서 살 수 없고 행복해질 수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옛날에는
오히려 인간에게 개인적인 영혼이 있고 영원한 이성이 주어져서 사람을 단순히 독립된
개체로
취급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렇게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누구든지 혼자
서라도
영원불변한 원칙에 따라 행동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요,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하려면 다른 사람
이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과 정상적인 관계에서만 행복해질 수 있으며, 다른 사람과 협동하지
않으면 아무
중요한 것도 성취할 수 없음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의미가 있는 삶의 내용이 서로 다를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반드
시
존중해야 할 기본적인 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곧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정상적이라야
하고 다른
사람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무시하여 다른 사람을 경쟁의
상대로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나의 이상을 성취하여야 뜻있는 삶을 산다고 착각한
다. 돈을
많이 버는 것, 큰 권력을 행사하는 것, 통속적인 명예를 얻는 것 등이 삶의 목적이요,
그런 삶이
뜻있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착각을 많이 발견한다.
물론 열심히, 그리고 창조적으로 일하여 돈을 많이 번다면 그것은 반드시 다른 사람
에게
손해를 끼칠 필요가 없고, 열심히 노력하여 큰 권력을 얻어 그것으로 사회 질서 유지
에
공헌한다면 그것은 뜻있는 삶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부정한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돈을 많이 벌고 큰 권
력을
얻는다면 그것은 결코 뜻있는 삶이 될 수 없다.
다른 사람 때문에 손해보고 불행해진 사람들이 결코 당하기만 하고 가만있지 않을
것이므로
사회 전체가 불안해지고, 결과적으로는 자신 혹은 자신의 후손들이 그 피해자가 되고
말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급 가치라는 것을 추구하면 이와 같이 다른 사람과 경쟁적인
관계에
빠지고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칠 가능성이 커진다.
하급 가치란 내가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이 적게 가지거나,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배타적인 가치들을 뜻한다. 돈이 그 전형적인 예다. 물론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고 열
심히
일해서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창조하고 소유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아무 손해
도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한 사람의 경제적인 이득은 제로 섬 게임(zero-sum game) 원칙에
의하여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다. 그런 경제적 가치 추구는 삶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권력도 비슷하다. 권력이란 다른 사람의 의사 혹은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뜻
하는 데,
권력이 커지면 그만큼 다른 사람의 복종의 정도와 폭은 넓어진다. 복종이 결코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면, 나의 권력을 키우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없다.
물론 많은 돈과 큰 권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사실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그것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변호한
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그 명분을 실천에 옮긴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
다. 대부분
돈과 권력을 즐기는 데 그쳤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한 경우에는 그것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손해를 충분히 상쇄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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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삶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불행하지 않게 살려면 고
급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고급 가치란 배타적이 아니라 내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다른 사람이
적게 가질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덕이 되는 것들이다.
진리와 지혜(지식), 아름다움(예술), 참함(도덕), 거룩함(종교), 사랑은 그런 것들
이다. 그것은
아^36^예 다른 사람의 행복 혹은 이익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남녀가 서로 느끼는 연정이나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정 같은
것을
뜻하지 않는다. 시인들은 그런 사랑도 아름답다 하거니와, 남녀간 혹은 부모 자식간의
애정
가운데서 정말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런 것들은 상당할 정
도로
생물적 본능에 기인하고 대부분 수동적이고 이기적이다. 그런 사랑이 삶의 이상이 될
수는 없다.
진정 가치 있는 사랑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 원수도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다. 그것은
생물학적
본능과 무관하고 수동적인 동정과도 다른 능동적인 것이며 이익과는 무관한 것이다.
본능과
매력에 끌려 생기는 감정이 아니고 처참한 몰골이 일으키는 수동적인 연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겠다는 전인격의 결정이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개인을 위한 것일 수도 있으나, 사회 전체 혹은 인류 전체의 이
익을 위한
것일 때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타난다.
이런 사랑이 왜 고상한지 그 이유를 제시하기는 어렵다. 이유를 찾으려면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고상한 근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랑의 고상함은 직관적이라
할 수
있다. 즉 누구든지 인간이라면 그런 사랑은 고상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사랑의 결과는 항상 긍정적이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랑은 경쟁을
제거하여
인간 관계에서 생기는 엄청난 경제적.시간적.정신적 낭비를 막아 준다. 협동을 가능케
하기
때문에 훨씬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고, 사회 혹은 인류 공동의 적에 대해서 더욱 강
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평화롭고 건강하고 강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은 삶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돈, 명예,
권력 획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도모가 주목적인 모든 생산적인 노동과 활동은 사랑의 삶이
다.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 주목적인 의료 행위, 국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 공
무, 인류에게
이바지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 수많은 사람의 감정을 순화시키고 아름다움
을 창조하는
예술 활동 등 인간 활동의 거의 대부분이 사랑의 삶이 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하고 있는 거의 모든 건설적인 활동이 사랑을 위한 것이 될 수 있다.
다만 그런
활동을 하는 우리의 목적을 바꾸고 그 목적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비록 잘못 할 수
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으나, 사랑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활동은 뜻있고 고상하다.
사랑이 절대 가치를 가진 삶은 가장 충실하고 멋지게 이루어질 가치가 있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활동은 비효율적이면 그럴수록 좋고 실패하면 더욱 좋으나, 사랑의 삶은 가장 효
율적이고
성공적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삶을 선택한 사람은 더욱더 연구사고 준비해서 한 시간, 한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수록 다른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되고, 그 결과 자신도
행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ff
@[ 삶에 대한 의욕과 창조성
* 신달자(시인)
1943 년 경남 거창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70 년 '현대문학'에
'발', '처음
목소리'의 시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함. 1989 년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현재 평택대학 국문과 교수.
저서에 시집 '본헌문자', '겨울축제' 등과 소설 '물위를 걷는 여자', '노을을 삼키
는 여자'와
에세이집 '백치애인', '그대에게 줄 말은 연습이 필요하다', '시간을 선물합니다', '
길은 어디에
있는지요', '사랑' 외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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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적인 욕망
나는 이 글이 참으로 내 마음에 딱 들어맞게 풀어질 것 같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한
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물음에 나는 아직도 분명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분명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한데, 다시 말해서 내가 분명한 길을 정해 놓고 오
직 그 길만
보며 살아온 것도 아닌데 이 글이 신명나게 잘 풀어질 리가 있겠는가.
솔직하게 말하면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하고 싶은 글이었던 것이다.
나는 가끔 기자들이나 학생들이 좌우명이니 인생관이니 이런 것을 물으면 속시원하
게 대답을
하는 사람이 못 된다. 하다못해 뭘 좋아하느냐, 어느 빛깔이 좋으냐, 어느 나라에 가
장 가고
싶으냐, 이런 대답도 늘 어정쩡하게 머뭇거린다.
우리가 흔히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이 "요즘 어떻습니까?"하고 지나가는 인사말로 물
으면, "예
그저 그렇습니다."라고 또 지나가는 인사말로 대답하는 것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 늘
이런
허물허물한, 어떻게 보면 자의식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어쨌든 한마디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령,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 더듬거리면서라도 할
말이 있을지
모른다.
살아가는 데 기본적인 것이 건강이며, 가정이든 직장이든 연결되어 있는 소속감이
둘째이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의 사회 안에서 인간적 신뢰를 받는 사랑이 셋째일 것이며, 그
사회 안에서
많은 사람의 존중을 받는 것이 넷째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의 또 무엇을 원하는
것이
넷째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의 또 무엇을 원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자신이 뜻한 바
를 이루는
자아 실현이 다섯째가 될 것이다.
이 원칙은 어떤 인본 심리학자의 인간의 다섯 가지 욕구에 근원을 둔 것이지만, 나
는 이 다섯
가지 항목이 결국 인간 생활의 중요한 테마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삶의 기본 원칙은 건강이다. 건강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을 때 그 인생에 기대를 걸
수 있으며,
보다 높은 이상을 향하는 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한 생명이 갖는 본능적인 욕망, 그것이 모든 삶에 대한 의욕의 출발이 될 것이
다.
건강한 생명이 허용되어 있는 그 다음 단계는 무엇으로부터 연결되어 있는 소속감이
며, 이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이 된다.
인간은 결코 혼자여서는 안 되며 혼자일 수도 없다. 인간이 생활한다고 하는 것, 즉
생명의
연장은 무엇무엇과 연결되어 그 연결된 고리와 더불어 함께 가는 것이다. 그것이 가정
이든
직장이든 사회이든 분명한 자기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
가령 부모와 나, 형제와 나, 친구와 나, 애인과 남편, 혹은 학교 선배와 나라는 연
결 의식의
소속감이 생활에 질서와 기쁨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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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 확장의 위대성
직장도 마찬가지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 나의 능력을 고맙게 생각하는 곳, 바꾸어
말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의 여부를 모두 발휘할 수 있는 곳, 이런 직장에 소속되어 있
는
유대감은 필요 없는 방황이나 고독에서 자기를 구해 준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사회성을 잃고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다음이 사랑이다. 사랑은 그 뜻이 모호하므로 애매한 만큼 모든 것에 적용된다.
아니
사랑이 끼여들지 않는 인간 생활은 이미 생활밖에 있고 죽음 안에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강한 생명, 단란한 소속감, 이 두 가지 가지고는 아무래도 삶에 별 뜻이 없다. 사
뭇
의무적이다. 여기에 사랑이 함께 해야 한다.
소속되어 있는 관계^36,36^부모, 자녀, 애인, 남편, 친구, 직장의 사람들 등등의 건
조한
소속감은 수숫대 마냥 미움 없이도 상처를 받기 쉽다.
본능적인 관계에서의 소속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는, 혹은 사랑 받는 소속감의
관계일 때
가정과 사회는 자랑할 만한 자원 없이도 풍성해지고 탄력성이 붙어 무능한 사람에게도
예기치
않던 능력이 주어진다.
인간 사회의 기적은 인간끼리의 사랑 안에서 결국은 참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신이 만약 인간을 만들어 놓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완벽한
실패작이다.
인간은 사랑하는 것을 앎으로 해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도 감동하는 순수를
알게 된
것이다.
다만 사랑하는 일에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오늘의 인간들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는 있지만,
오늘날 사랑의 부족으로 상처받고 사랑을 가면으로 쓰고 희롱하다가 우는 자들이 있음
을 볼 때,
사랑이 희생 없이는 소유할 수 없음을 알게 될 날이 곧 오리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사랑하는 관계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삶을 보다 의욕적으로 살고 싶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리라.
건강한 생명, 인간과 사회와의 소속 그리고 사랑하는 관계의 사회성을 이루는 사랑
이 있다면,
이만해도 성공하는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오늘날 좀더 풍부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랑에서 끝나지 않는 인간적인
존중의
의미가 결여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자아 존중의 욕구'라고 부르는 이 대목은 좀더 사회에 가깝게 다가서는 폭넓은 활
동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예쁜 여자, 사랑스러운 여자에서 한층 올라서서 한 인간으로서 어떤 세계
를
창조하기도 하고, 베풀기도 하는 인격 확장의 위대성도 잠재되어 있는 보람찬 의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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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삶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도 좋겠지만 인간적으로 존중받는 큰 여자, 여기에서 많은
노력과
남모르는 겸허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여성의 활동이 늘어가고 여성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 인간적인
존중은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여성의 섬세함과 치밀함을 살리면서 어머니의 사랑 같은 원대한 수용 능력과 인내를
더불어
자신의 일에 사랑의 힘을 쏟아 부을 때 가장 다부진 성실성을 바탕으로 한 큰 인간상
이 탄생되지
않을까 한다.
존중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러나는 것이므로 결코 권위의 그림자는 아닌 것이다.
사람되어짐, 이것도 얼마나 우리 인생에 거두어야 할 덕목인가.
마지막으로 반드시 첨가되어야 하는 것이 '자아 실현의 욕구'다. 물론 누구나 이러
한 경지를
탐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 혹은 공자, 석가 같은 성인들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자기의 인생에서 반드
시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은 삶을 사랑하는 이유가 된다.
이 길은 사뭇 고독한 것이다. 물론 고통도 자신의 의지로 견뎌내야 한다.
많은 회의도 갖게 된다. 성취감보다 좌절감이 더 자주 찾아오게도 될 것이다.
그러나 나를 실현한다는 높은 뜻은 그러한 내적 고통 안에서 고통으로 켜는 불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자아 실현이 없는 인생은 꽃만 피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과수나무와 다를 바 없다고
나는
생각해 오고 있다.
그러나 세상 안에서 의미와 가치를 두는 돈, 권력, 명예,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자아 실현'이 예술적 가치로 승화된 것이나 종교적 심미안의 승화로서만이 아
니라,
누구나 자아 실현의 절정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가정주부도 대학생도 샐러리맨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가정주부가 가족을 위
해
기도하므로 가족에 관계된 일이 이루어지는 것도 자아 실현의 단계에 놓고 싶은 것이
며,
대학생의 장래에 대한 꿈, 직장인의 단계적 승진, 모두가 자아 실현의 한 모습이므로
그 실현을
향해 고통을 참아 내며 걸어가는 순간 순간의 시간이 모두 아름다움의 실체라고 생각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자아 실현의 욕구'를 체험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것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탐욕이 아니라 의욕으로, 욕심이 아니라 애정으로 풀이할 수 있는 자기 성취를 한시
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에 대한 의욕이 곧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며, 행복을 창조하는 자
아의
모습으로 살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원한다면 더불어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 함께 하고 싶은 다정한 사
람으로
기억되는^5,5,5^ 그러한 부드러운 삶이면 흡족할 것이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내 천주님이 기뻐하실 것이 아니겠는가. @ff
@[ 생명의 완성
* 안병욱(숭실대 명예 교수)
1920 년 평남 용강 출생.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 졸업. '사상계' 주간 및 편집위
원, 숭실대
철학과 교수 역임.
저서에 '삶에 길목에서', '젊은이여 희망의 등불을 켜라', '처음을 위하여 마지막을
위하여',
'현대사상', '실존주의 철학', '파스칼 사상', '사색노트', '마음의 창문을 열고', '
아름다운 창조',
'사람답게 하는 길', '논어 인생론' 외 다수가 있음.
--------------
생의 의미는 최고의 자아 완성에 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의 목적이 무엇이냐. 자기 실현이요 자아 완성이다.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의무와 책임은 내가 나의 생명을 최고도로 실현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최고의 자아 완성을 하여라. 최대의 자기 실현을 하여라. 이것이 생의 목적이요 의
미다.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인생은 창조적 자기 표현이다.
장미는 빨간 장미꽃을 피움으로써 자기 표현을 한다. 뻐꾸기는 구슬픈 노래를 부름
으로써
자기를 표현한다. 사과나무는 빨간 사과를 결실케 하는 것이 생의 목적이다. 시인은
아름다운
시를 쓰고, 화가는 훌륭한 그림을 그리고, 웅변가는 힘찬 말씀을 하고, 기업가는 새로
운 기업을
일으키고, 발명가는 기계를 만들고, 정치인은 새로운 사회를 설계한다.
모두가 자기 표현의 행동이요, 자아 실현과 자아 완성의 행동이다. "하느님이 온전
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여라." 그리스도는 이렇게 외쳤다. 하느님은 완전한 존재다. 인간은 결
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인간은 영원한 미완성의 존재다. 그러나 완전과 완성을 향하여 부
단히
노력하는 것이 인간이요, 인간다운 자세다.
나의 가장 존귀한 것, 나의 가장 아름다운 것, 나의 가장 참된 것, 나의 가장 착한
것, 나의
가장 깊은 것을 우리는 표현하고 개발하고 실현해야 한다.
신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고, 건강을 주었고, 재능을 주었고, 시간을 주었고, 인격
을 주었고,
활동력을 주었고, 정열을 주었다.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무엇인가 보람있는 것을 만들
어야 하고,
가치 있는 것을 창조해야 한다.
산다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이루어 놓은 것이다. 신은
나에게 6,
70 년의 시간과 많은 기회와 여러 재능과 훌륭한 인격과 왕성한 활동력을 주었는데 아
무것도
이루어 좋지 못한다면 생명에 대해서 부끄러운 일이다. 세계는 창조의 무대요, 인간은
생명의
예술가다. 인생은 예술이요, 생활은 작품이다.
우리가 죽을 때에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엄숙한 질문이 있다.
당신은 민족 앞에 무엇을 남겨 놓고 갑니까?
우리는 6, 70 년의 인생을 살다 가면서 무엇인가 보람있는 것을 남겨 놓고 가야 한
다. 올
때에는 빈손으로 왔지만 갈 때에는 훌륭한 것을 남겨놓고 가는 것이 인생이다.
아무것도 남겨 놓지 못한다면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어떤 이는 위대한 작품
을 남기고,
어떤 이는 훌륭한 인격을 남기고, 어떤 이는 보람있는 사업을 남기고, 어떤 이는 본받
을 만한
생애를 남기고, 어떤 이는 뛰어난 자녀를 남기고, 어떤 이는 탁월한 사상을 남긴다.
-------------
최대의 비극을 최고의 승리로
최악의 운명을 가지고 최고의 유산을 남긴 사람, 최대의 비극에서 최고의 승리를 거
둔 인간은
성녀 헬렌 켈러다.
헬렌 켈러는 열병으로 생후 19개월 만에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비참한 인
간이
되었다. 그 여자는 완전한 암흑과 침묵의 구렁으로 전락했다. 그녀는 맹인과 벙어리와
귀머거리의 삼중고의 십자가를 짊어졌다. 말하는 자유도 듣는 자유도 모두 박탈된 그
녀의 생활은
지옥이요, 저주요, 절망이었다.
그녀는 낙망 끝에 자포자기하여 반항하고 파괴하고 절규했다. 이 지상에 태어났던
생명 중에서
가장 비참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여덟 살 났을 때 광명과 사랑의 위대한 사자,
설리반
선생이 그녀 앞에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설리반은 20 대의 젊은 처녀 선생이었다.
설리반은 헬렌 켈러를 위하여 헌신적 봉사를 하였다. 헬렌 켈러는 설리반 선생에게
서 말하는
것을 배웠다. 책읽는 것을 배웠고, 글씨 쓰는 것을 배웠다. 헬렌 켈러는 하버드 대학
을 마치고
여러 권의 책을 썼고, 전세계를 순회하면서 맹인과 농아들을 위하여 많은 강연을 했
다.
1936 년에 우리 나라에도 왔었다. 그녀는 빛을 찾았고 사랑을 찾았고 행복을 찾았고
승리를
찾았다. 그것은 20세기의 기적이었다. 그것은 인간 정신의 위대한 승리요, 인간 교육
의 놀라운
성공이요, 인간 사랑의 최고의 교훈이다. 설리반 여사가 헬렌 켈러를 위하여 바친 수
십 년의
헌신적 정성과 사랑은 위대한 감동의 드라마다.
나는 헬렌 켈러가 쓴 여러 권의 저서를 읽으면서 인생에 이런 기적이 있을 수 있을
까, 세상에
이런 감격과 신비가 있을 수 있을까 하고 놀라움과 감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헬렌 켈러는 최대의 비극을 최고의 승리와 영광으로 바꾸었다. 그녀는 생명의 최고
완성의
위대한 본보기다. 그녀는 최고의 자아 실현의 뛰어난 증인이다.
인생에 절망은 없다. 인생에 패배는 없다. 산다는 것은 위대한 것에 도전하는 것이
다. 산다는
것은 자아를 실현하려는 꾸준한 노력이다. 산다는 것은 희망을 갖는 것이요, 신념을
갖는 것이요,
용기를 갖는 것이다.
생명의 자아 실현, 자기 완성을 위하여 나는 세 가지 원리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는 극기요, 둘째는 수기요, 셋째는 성기다.
극기란 무엇이냐,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다. 남을 이기기는 쉽지만 자신을 이기기는
어렵다.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 최대의 승리는 내가 나를 이기는 것
이다."
나의 마음속에서 두 개의 자기가 항상 싸우고 있다. 인간의 마음은 두 자아의 싸움
터다.
게으른 자기와 부지런한 자기, 선한 자기와 악한 자기, 커다란 자기의 조그만 자기가
나의
마음속에서 항상 내적 투쟁을 한다.
인간의 마음은 소아와 대아의 싸움터요, 가아와 진아의 전쟁터다. 어느 자기가 이기
느냐에
따라서 위대한 가지가 되느냐, 비열한 자기로 전락하느냐가 결정된다. 우리는 거짓된
자기,
게으른 자가, 무책임한 자기, 불성실한 자기, 조그만 자기한테 패배하지 않아야 한다.
남을
이기기는 쉽다. 그러나 내가 나를 이기기는 어렵다. 그래서 노자는 '도덕경' 33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승인자유력 자승자강(남한테 이기는 사람은 그 사람보다 다소 힘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진정한 강자요 참된 용사다.)"
극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갈파한 명언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극기
인 이었다.
나를 이기는 마음을 극기심이라고 하고, 나를 이기는 힘을 극기력이라고 하고, 나를
이기기 위한
훈련을 극기 훈련이라고 한다. 우리는 진지한 극기 훈련으로 자기의 정신력을 강화해
야 한다.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가 극기인이 될 수 있고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산중의 도둑은 물리치기 쉽지만 마음속의 도둑은 물리치기 어렵다."라고 중국의 사
상가
왕양명은 갈파했다. 산속의 도둑은 격파하기 쉽지만 내 마음속의 도둑은 격파하기 어
렵다.
극기의 어려움을 지적한 금언이다.
우리는 먼저 극기인이 되어야 한다.
둘째는 수기다.
내가 나를 갈고 닦아야 한다. 우리는 부단히 자기 수양을 하고 정신 연마를 하고 인
격 도야를
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탐진치의 삼독에 빠지기 쉽다.
탐은 탐욕이다. 자기 분수를 망각하고 지나친 욕심의 노^36^예가 되기 쉽다. 진은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분노하는 것이다. 치는 어리석은 것이다. 무명의 어둠 속
에 빠져
공정한 사리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탐진치의 삼독을 제거하면 우리는 명경지수와 같은 심경에 도달
한다.
마음의 더러운 때와 티를 없애면 우리의 정신은 밝은 거울처럼 맑아지고 조용한 물처
럼
평정해진다. 이것이 명경지수다. 명경지수의 마음이 되어야만 진리를 볼 수 있고 지혜
를 얻을 수
있다.
지혜와 진리를 보는 눈을 법안이라고 하고 또 혜안이라고 한다. 우리는 혜안을 가져
야 한다.
공자는 사무사를 역설했다. 우리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없어야 하고 사심이 없어
야 하고
사리사욕이 없어야 한다. 청천백일처럼 광명정대해야 한다. 푸른 하늘의 찬란한 태양
처럼 마음이
빛나고 밝고 곧고 커야 한다. 그래야만 공정한 사리판단을 할 수 있다.
"마음이 맑은 사람이 하느님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외쳤다. 아무나 하
느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청정심의 소유자만이 하느님을 볼 수 있다.
불교의 명경지수, 공자의 사무사, 그리스도의 청정심. 표현은 다르지만 의미는 비슷
하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려면 부단히 마음을 갈고 닦는 수심 공부를 해야 한다.
셋째는 성기다.
성기는 내가 나를 완성하는 것이다. 내가 나다운 내가 되고 참되고 건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요, 본래적 자기가 되고 본연의 자아를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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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최고로 사는 자세
우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하고 자기를 정화하고 자기를 순화하고 자기를 심화하고
자기를
성화해야 한다. 그것이 자아 완성의 길이다.
일찍이 장자는 청무성의 철리를 외쳤다. 무성을 들으라고 했다. 우리는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뒤에 들리는 유성의 소리는 누구나 들을 줄 안다.
무성을 들으려면 마음의 귀, 영혼의 귀가 필요하다. 양심의 소리, 영혼의 소리, 진
리의 소리,
하느님의 소리, 이성의 소리, 역사의 소리, 하늘의 소리, 우주의 소리는 모두 무성의
소리다.
그것은 소리 없는 소리다. 소리 없는 소리는 깊은 소리요, 참된 소리다. 우리는 무
성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양심의 소리, 진실의 소리, 영혼의 소리, 내부의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
고 그
소리를 따라야 한다.
극기와 수기의 성기, 이것이 자아 실현의 과정이다. 극기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수
기에는
정성이 필요하고, 성기에는 정열이 필요하다.
생명은 아름답다.
생명은 신비롭다.
생명은 존귀하다.
우리는 생명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생명을 확대해야 한다.
우리는 생명을 완성해야 한다.
우리는 고귀한 생명을 정성과 정열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것이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의무요, 책임이요, 사명이다. 인생은 오늘의 연속이요,
현재의
연속이다.
어제는 이미 지나가 버린 날이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날이다. 내가 소유하는 유
일한 날은
오늘뿐이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랑하고, 오늘 내가 하는 일에 온 정성을 다 바쳐야 한다. 이 세
상에 가장
소중한 시간은 현재뿐이다.
과거는 내 기억 속에 있을 뿐이요, 미래는 나의 기대 속에 존재할 뿐이다. 이미 지
나가 버린
과거에 얽매이고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미래는 장차 오겠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 공연히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지
금 내 앞에
있는 이 현재, 내가 소유하고 관리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현재를 사랑하고, 현재를
아끼고,
현재에 충실하며 살아야 한다.
오늘처럼 중요한 날이 없다.
현재처럼 중요한 시간이 없다.
그러므로 오늘 이 현재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지금 이 시간에 내가 하고 있는 일
에 온
정열을 기울이고 온 정성을 쏟아야 한다. 이것이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근본이요,
내 생명을
최고로 완성하는 길이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에게 친절과 정성을 베풀어라.
하나밖에 없는 생명,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을 우리는 소중히 여기고 순간순간
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야 한다.
내가 남의 인생을 살아줄 수 없고 남이 나의 인생을 살아줄 수 없다.
내 인생은 내가 산다.
생명의 열애자가 되어라.
네 생명의 최고의 정열과 정성을 가지고 살아라.
이것이 인생을 최고로 하는 기본 자세다.
@[ 행복과 의무
* 엄정식(서강대 교수)
서울 출생. 서강대 철학과 졸업. 서울대 신문대학원 석사. 미국 웨인 주립대 석사
후 미시건 주립대에서 철학박사 학위 받음. 현재 서강대 철학과 교수.
저서에 에세이집 '철학하는 마음'등과 '확실성의 추구', '비트겐슈타인과 분석
철학', '사회과학 방법론 비판', '비트겐슈타인의 이해', '칸트철학의 제문제',
'종교언어의 철학적 분석', '지혜의 윤리학' 외 다수의 논문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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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되지 않은 삶
어쩌다가 가까운 친구들과 어울려 저녁 식사라도 나누게 되면 여러 가지 주제를
놓고 이야기의 꽃을 피우게 된다. 극한 상황으로 달려가기만 하는 국제 정세를
걱정하기도 하고, 국내 경제 사정의 전망에 관하여 우려하기도 하며, 대학
입시제도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하여 비판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막연한 불평과 공이공담에 그칠 뿐 물론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지는
못한다.
이윽고 화제가 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파고드는 퇴폐와 향락, 부정과 부패의
풍조에 이르게 되면, 서로 멋쩍게 얼굴만 바라볼 뿐 누구 하나 자신있게 자기의
입장을 피력하는 사람이 없다. 너무도 심각하고 또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인가?'라는 의문을 남겨 둔 채,
때로는 철학 교수인 나에게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기도 하며 아쉬운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철학을 좀 공부한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잘 풀려 가며 하고 싶은 일들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는 않는다. 삶의 문제는 사는 동안 문제가 생겼을 때
제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에만 비로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인지의 문제를 반성해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소를 잃고 난 다음에야 외양간을 고치는 경우와 같다. 바람직한 삶을
항상 염두에 두고 진지하게 자기 자신을 반성하며 살아간다면 삶 자체를 문제삼을
정도로 사태가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반성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했을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제 우리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철학자들에게 삶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모든 문제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고 본다면, 철학은 곧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마련하는 학문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인간을 욕구와 의무
사이에서 방황하는 역설적인 존재로 파악할 때 그것은 철학의 한 분과인 윤리학의
과제로 좁혀진다.
윤리학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해서는 안 되는 경우와
하기 싫은 일이 있어도 할 수밖에 없는 경우를 규정함으로써 바람직한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밝혀 보려는 학문인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려면 말할 필요도 없이
먼저 인간이 무엇인지를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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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바둑을 두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우리는 다른 존재와 달리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원래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것으로써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동물과 구별되지만, 동물의 일종이기 때문에 동물적 본능과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생래적으로 고달픈 존재임을 간과할 수 있다. 인간에게
이성이 없다면 맹목적으로 본능에 따라 행동해도 되겠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며, 인간에게 이성만 있다면 하는 일마다 모두 바람직한 것일 뿐이므로
갈등이 없을 것인데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는 이성의 능력을 교묘하게 사용하여 단순히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들보다 훨씬 더 사악한 존재로 타락할 수도 있다.
실로 윤리학의 과제는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하면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를 다루는 데 있는 것이다.
인간이 생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이성과 본능의 갈등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견해대로 아^36^예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든가, 기왕에
태어났으니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죽어 버리든가 둘 중에 한 가지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 아무도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이 세상을 기꺼이
하직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다. 철학자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삶에 대한 철학적 관심은, 혹은 윤리학의 과제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하면 이 갈등을 극소화할 수 있는지의 방안을, 다시 말해서 차선의 방안을
마련해 보려는 노력에 그칠 뿐이다.
그리고 그 방안은 이성적 판단과 실천의 능력을 극대화하여 본능을 최대한으로
억제하는 데서 찾아진다는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본능을 무제한적으로 억제할 수은 없고 또 반드시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윤리학자들은 어느 정도로 자기 자신을 다스려야 하는지의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도덕의 법칙이 무엇인지를 규명함으로써 밝혀 질 수도 있고,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를 제시함으로써 분명해질 수도 있다. 전자를 '의무론적
윤리설'이라고 하며, 후자를 '목적론적 윤리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떠한 윤리설이든 한 가지 공통적인 데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는
바람직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객관적인 행위의 법칙이나 목표가 있다는 사실이다.
의무론적 윤리설의 대표자로 우리는 칸트(I. Kant)를 들수가 있는데, 그에 의하면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듯이, 인격을
갖춘 우리 인간들은 자유의 법칙인 도덕률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그것을
준수함으로써 사회의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법칙을 그는 무조건적인 명령의 형식에 담아 "네 의지의 격률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로 표현한다.
여기서 격률이란 개인적 차원에서의 생활 신조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의 생활 신조가 모든 사람의 생활 신조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도덕률로 승화될 수 있으며, 이러한 행위의 법칙을
준수하며 살아갈 때 나는 바람직한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이다.
의무론적 윤리설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행위의 목표를 너무 의식하지 말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명예나 권력 혹은 부귀 따위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바람직한 삶을 사는데 전혀 무의미하고, 심지어 해를
끼치기만 할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데 그러한 것들이 따라와 주지 않는다면 인생이 얼마나
무미건조할 것인가.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데 있다.
칸트에 의하면, 참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마나 얻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얻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삶을 바람직하게 하는 것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삶의 태도뿐이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것은 바둑에 임하는 어느
기사의 말을 연상케 한다. "좋은 바둑을 두고 싶을 뿐"이라는^5,5,5^.
좋은 바둑을 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바둑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의 규칙인 도덕률을 지켜야 한다.
또한 좋은 바둑을 두기 위해서는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의무의 이행이며,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획득된
명예나 권력이나 부귀라야 비로소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궁극적 목표인 행복조차도 예외가 아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확보한다는 것은(적어도 간접적으로는) 의무이다. 여러 가지
근심에 싸이고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의 소용돌이에 빠져서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다 보면 그것이 곧 의무를 위반하게 되는 큰 유혹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경우에도 하나의 법칙이 남아 있음을 강조하며, "그것은
경향에서가 아니라 의무로부터 자신의 행복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법칙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그의 행위는 본래의 의미로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고 말한다.
사실 행복에도 우연적인 요소가 많이 개입되고, 대부분의 경우 행운이 따라와
주어야 비로소 그것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만을 삶의 유일한 목표로 삼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볼 수도 있다. 행운과 우연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또
그것을 자랑스러워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바둑을 두는 사람이 실제로는 승부에 전혀 무관심할 수 없듯이, 우리가
행복이나 불행을 무시하고 바람직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적어도
현실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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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본능의 투쟁
목적론적 윤리관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하여 바람직한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밝혀
보려는 입장이다. 그 대표적인 철학자로 우리는 공리주의자인 밀(J. S. Mill)을 들
수 있는데, 그에 의하면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며, 우리가 이 목표에 얼마나 이바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어느
정도로 바람직한 것인지도 또한 측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정의 기준을 그는 '공리성의 원리'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행위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오로지 그 행위의 결과, 즉 얼마나 나 자신의 행복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행복의 증진에 이바지했는가에 따라 규정된다고 하는 원리이다. 이것은
행위의 동기를 강조하는 칸트의 입장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예를 들어 우리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칸트에 의하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도덕률이므로 무조건적 의무가 되어
"거짓말을 하지 말라!"라는 명령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도덕적 가치는 이
명령을 지키려는 우리의 태도나 의도 속에 있다. 그러나 밀의 경우에는 그것이
"정직만이 최선의 방책이다"라는 명령의 형태로 나타난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우리 모두의 행복이 증진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만약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확실히
보장된다면 경우에 따라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는, 아니 오히려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의무를 함축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의무론과 행복론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바둑의 비유를
든다면 '좋은 바둑을 둔다'는 것은 규칙에 따라 최선을 다한다기보다 어느 정도
규칙을 어기더라도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도덕률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해도 그것을 항상 지킬 수는 없으며,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행복이라고 해도 그것은 무지개처럼 언제나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인간이 이성과 본능의 투쟁이라는 자기 모순적 갈등의
생래적 환자임을 새삼스럽게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삶에 대한 철학적 자세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질문에 피상적인 답변을
마련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질문에는 답변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은 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영원히 살아남은들 풀릴 수 있는 수수께끼가 있을까? 현재의 내 삶만큼이나
이 영원한 삶이라는 것도 수수께끼투성이가 아닐까? 삶이, 시간이, 그리고 공간이
갖는 수수께끼의 해결은 공간과 시간의 밖에 놓여 있다^5,5,5^. 있을 수 있는 모든
과학적 질문이 해답을 찾는다고 해도 삶의 문제는 전혀 손도 대보지 못한 채로
남는다는 것을 우리는 느끼고 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아무런 질문도 남아 있지
않으며, 이것 자체가 그 해답이 된다. 삶의 문제에 관한 해결은 그 문제가 소멸되는
데서 찾아진다."
그러나 삶의 문제를 소멸시킨다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반성된 삶을 살고 있는 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포기할 수도
없고 또 포기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참으로 삶의 문제를 소멸시키고 싶다면 이
질문이 닳아서 없어질 때까지 계속 다그쳐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정말 어떻게 살 것인가?'를^5,5,5^.
삶의 문제를 소멸시키려면 먼저 문제 의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의식을 서로 나눌
때 우리는 '삶'이란 생래의 불치병을 함께 앓고 있는 환자들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우려와 불평과 비난 대신 환자들이 서로 환부를
어루만지듯 이해와 연민과 포용을 배우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ff
@[ 부단하게 자신을 성찰하는 삶
* 오세영(시인)
1942 년 전남 영광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68 년 '현대문학'에
'잠깨는 추상', '새벽'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함.
한국시인협회상, 녹원문학상 수상. 충남대 단국대 교수 역임. 현재 서울대 국문과
교수. 저서에 시집 '반란하는 빛',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등이 있고 에세이집
'사랑에 지친 사람아' 외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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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운 삶
한국어에서 '사람'이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살다'에서 온 명사라고 한다. 사람이란
즉 '사는 존재'인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것'들은 물론 인간만이 아니다.
들에 피어 있는 꽃, 개울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산에서 서식하는 동물이나 하늘을
나는 새, 나아가서 흙 속의 벌레나 바위에 붙어 있는 이끼, 심지어 병을 옮기는
세균들까지도 다 살아 있는 생명체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앞서서 인간에게만 오직 '사람'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은 한국인들이 그만큼 '사람'에게 있어서 삶의 문제는 다른 생명체의
그것과 다른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의 그 수많은 '사는 것'들 가운데 왜 하필 인간만을
구별하여 '사람'이라는 명칭을 부여했을 것인가.
이 말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이란 동물의 그것과 다른 것이며, 인간의 삶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동물의 삶은 기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삶이란 동물의 그것처럼 단순히 생명을 영위하는 행위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식물과 구분되는 '인간다운 삶'을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진정한 의미에서 '사는 것', 그러니까 그렇게 삶으로써
'사람'으로 불려질 수 있는 그러한 삶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맹목적으로 생명을
영위하는 동물의 삶과 달리 '그렇게' 살아야만 인간다운 삶 혹은 진정한 살이라고
말할 때의 그렇게라는 말은 어떤 주어진 길 혹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걷는 삶을
뜻하는 말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렇게'라는 말은 사실 '어떻게'라는 말의 해답이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당면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고민한 끝에 '그렇게'하자고 결론을 짓는다.
따라서 '그렇게'살아야 한다는 말에는 이미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하는
고뇌가 전제되어 있고, 이러한 고뇌 끝에 각자는 자기 나름의 인생관에 따라
'그렇게'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 내린 결론이 인간다운 삶의 길로 나아갈 수도, 오히려 그 반대의 길로
후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이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은
자신이 삶에 대해 '어떻게' 살 것인가 고뇌한다는 점에서 일단은 다른 동물들의 삶과
구분된다.
이렇듯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일차적으로 갖는 조건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고민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는 대상에 대한 성찰을 전제한 말이다. '어떻게 살것인가' 하는 고민은
우선 자신의 현재적인 삶에 대한 인식과 반성 없이는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먼저 부딪히는 것은 전체적인 문제의 이해와
아울러 사태를 파악하는 일이며, 그것은 문제를 냉정하게 성찰하는 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는 객관이 되었건 주관이 되었건 인식 대상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우선 성찰할 수
있으므로 그 다음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고뇌에 부딪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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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 인간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대하여는 고대 부터 많은 견해들이 있어 왔다. 예컨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든지,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든지, 인간은 '유희를 할 줄
아는 동물'이라든지, 인간은 '상징적 동물'이라든지 하는 따위들이다.
'사회적 동물'이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정치학'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이란
홀로 살 수 없고 더불어 사는 존재, 즉 타인과 어떤 형식이든 관계를 맺고 사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 세상의 그 수많은 생명체들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또한 여타의 동물들과 달리 인간에겐 '이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인식이 17세기 합리주의 시대에 접어들자 마침내 인간의
본성을 이성에서 찾고자 하기에 이른다.
확실히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에게서 우리는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이성을
발견할 수 없다. '이성적 동물'이란 인간은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또 행동하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한편 호이징거는 인간의 본성을 '유희'로 파악하였다. 그것은 이 세상의 동물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데, 문화란 유희 충동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가치로 보았기 때문이다.
문화는 결코 노동이나 작업의 소산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의 관습이나 일에서
해방된, 일종의 자유스러운 세계의 구현 혹은 그 창조이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 카시이러는 다른 관점에서 인간을 '상징적 동물'이라고
규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성적인 관점에서
대면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인간이 세계를 받아들이고 또 이에 반응하는 행위 사이에는 우리가
동물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어떤 상징의 체계가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가령 언어, 신화, 예술, 종교 등은 모두 이 상징의 세계에 주거하는 것들로서
인간이 아닌 동물의 세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이외에도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는 다른 많은 견해들이 있을 수 있다.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든가 하는 따위등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앞서 언급한 제
인간의 본성에서 파생된 이차적인 특징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가령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고 할 때 그 언어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설명이 될 수 있는데,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바와 같이 그것을
'로고스(logos)'로 이해할 때 '이성적 동물'과 같은 뜻이며, '상징(symbol)' 혹은
'기호'로 이해할 때 '상징적 동물'과 같은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해 본다면 또 다른 관점에서 인간이란 지적인 호기심을 갖는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에서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규정했으나
'형이상학'에서는 또한 인간을 지적 호기심을 갖는 동물로 정의하였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본질적으로 무엇이든 알고자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꼭 이해 관계에서 기인되는 것만은 물론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실제 삶과 아무 관계가 없는, 달리 말해 아무 필요성이 없는
사물들에 대하여도 그것을 알고자 하는 강한 지적인 관심 혹은 호기심을 갖는다. 그
호기심에서 얻어진 해답이 나중에 결과적으로 우리의 현실 생활에 실용되거나 혹은
실용되지 않거나 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실제적 목적을 떠나 우선 인간은 그가 대면한 세계 그 자체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인가, 왜 그런 것인가 하는 강한 의문을 가지며 그 의문을 풀지 않고는
궁금해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이 이처럼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동물들에게서는 이와 같은 지적인 호기심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사슴이나 곰이 '왜 바닷물은 짠것일까', '왜 밤은 어두운 것일까', '왜
봄에는 꽃이 피는 것일까' 하고 고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다운 것, 즉 동물과 다른 것으로서의 인간의 본성을 '지적인 호기심'에서 찾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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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호기심
앞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기본적으로 자신의 삶이나
세계를 성찰하는 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성찰이란 또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에 대한 지적인 관심 또는 호기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유의 한 형식이 아니겠는가.
지적 관심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 인간은 결코 반성적인 사유를 하지 않는다. 가령
태양이 동쪽에서 떴다고 하자. 그러나 왜 그것이 서쪽에서 뜨지 않고 동쪽에서만
뜨는 것인지 '지적인 관심'혹은 '지적인 호기심'이 없는 사람에게 있어 천체의
운행이란 무의미하다. 그들에게는 태양이 동쪽에서 뜨든 서쪽에서 뜨든 자신의 삶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다운 삶이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성찰에서
비롯하는 것이요,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성찰은 또 삶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다운 삶의 규준은 인생에 대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적
호기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이 지적인 호기심에 있다는 견해는 오늘날 '사람'을 지칭하는 서구어
human, humain, 라틴어 homo 등의 어원을 고찰해 보면 암시적으로 해명이 된다.
이들 어휘는 모두 라틴어에서 '흙'을 의미하는 Humus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어원론적으로 인간이란 '흙'을 뜻하는 말인 것이다.
구약성서에서도 여호와는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사람'과
'흙'과 '지적인 호기심'의 관계에 대하여 고대 희랍 신화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심려(지적인 호기심 혹은 관심, Sorge)'가 어떤 강을 건너가다가 진흙을 보았다.
생각에 잠겨서 그는 진흙 한 조각을 떼어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형상을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주피터가 나타났다. 심려는 주피터에게
자기가 빚어 놓은 그 형상에게 혼을 넣어줄 것을 애원했다. 그러자 주피터는 이
소원을 아주 달갑게 받아주었다.
그러나 심려가 자기가 만든 그 형상에 자기 이름을 붙여 주고자 했을 때 주피터는
맹렬히 대들면서 자기의 이름을 쓸 것을 요구했다.
심려와 주피터가 그 이름을 가지고 다투고 있을 때 지신이 머리를 들고
일어나더니 사실 그가 자기 몸의 한 조각을 제공한 것이니까 자기의 이름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서로 다투던 이들은 농신(Saturn)을 심판관으로
찾아내었는데, 새턴은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려 주었다.
"그대 주피터는 혼을 제공했으니 죽을 때에는 그 혼을 가져갈 것이고, 그대
대지는 육신을 제공했으니 그것이 죽을 때는 그 육신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심려는 이 형상을 처음 빚어 놓았으니까 그것이 살고 있는 한 그것을 소유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 이름에 관해서 논쟁을 한 것이니 그것은 땅(humus)으로부터
만들어졌다고 보아 '사람(homo)'이라고 부르라."
이 신화는 인간의 탄생이 심려^36,36^지적인 호기심에서 비롯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본성 역시 지적 호기심에 있다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심려가
현재적 인간을 소유해야 한다는 이 신화의 인생관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이름부터가 상징적으로 암시해 주는 것이지만, 만일 심려에게 지적인 호기심이
없었더라면 강을 건너다가 우연히 발견한 진흙을 굳이 빚어 어떤 형상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경우의 진흙은 단순히 진흙일 따름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존재하는 상태가 아니라 그저 그렇게 있는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이 단순히 그저 그렇게 있는 상태로부터 그것이 하나의 존재로, 인간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오로지 심려가 지닌 지적인 관심 때문이었다.
심려는 그가 본성적으로 지닌 '지적인 호기심' 탓에 그 진흙을 우연으로 보아
넘기지 못하고 그것을 의미있는 형상으로 빚어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신화에서 인간의 본질에는 지적인 호기심이 있다는 것과
아울러 이 지적인 호기심이 이 세상에 그저 그렇게 있는 사물들을 의미있는 존재로
만들어 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다. 인간이란 지적인 호기심을 가진 까닭에 인간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선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환언해
볼 수 있고,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지적 호기심을 갖는
삶'이라는 해답을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 있다.
생물학적인 면에서 두 발로 걷고 언어를 구사한다고 해서 모두 인간이 아니다.
지적인 호기심이 없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일로 일생을 보낸 사람들, 예컨대
일생을 돈과 권력과 욕정에 탐닉하여 이를 충족하는 일로 세상을 보낸 사람들은
비록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실제에 있어서는 동물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지적인 호기심이 없이 돈에 탐욕을 가져 수탈을 일삼는 자는 그러므로 돼지이며,
지적인 호기심이 없이 권력을 쟁취하여 횡포를 자행하는 자는 그러므로 사자이며,
지적인 호기심이 없이 욕정에 사로잡혀 본능대로 행동하는 자는 그러므로 물개라 할
수 있다.
비록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소크라테스나 예수, 석가, 아니 아인슈타인이나
우리의 원효, 퇴계 같은 분을 존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은 가치있는 것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을 갖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될 명제라고 말할 수 있다. @ff
@[ 자기 창조로 이루어지는 생
* 유안진'시인'
1941 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대 사범대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음. 1966 년 '현대문학'에 '달' 등으로 문단에 데뷔함.
현재 서울대 소비자아동학과 교수.
저서에 시집 '달하', '물로 바람으로'등과 장편소설'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
'땡삐', 에세이집 '향기여 사랑의 향기여', '별들의 약속',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한국여성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 '종이배' 외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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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완행 열차를 타고
뛰지마!
그러면 그대는 보아낼 수 있어
그대 주위의 수많은 아름다움들을
꽃 속마다 사랑이 가득한 세상이 있다는 걸 그대는 모르지?
뛰지마!
그러면 그대는 찾아낼 수 있어
길섶이 돌틈새에 그대만을 기다리는 다이아몬드를
멈춰 서면 알 수 있어
그대는 많이 뛰어왔지만
항상 그 자린 걸 그대 아는가?
이 가사는 지난 시대 이태리 청년들에게 유행되었다는 칸초네이다. 당시 이태리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유능하고 신속한 기계병에 결려
있었다. 기계 문명에 대한 과신으로 산업화의 열병이 이태리에 전염된 대였으니까.
그런 열병에 시달리는 세상에서도 이태리 청년들은 이런 칸초네를 지어 불렀으니,
얼마나 현명한 세대였는가.
가을이 오고 있다. 시의 계절 가을이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나는 일어나 시의
계절 가을 속으로, 아니 나의 고향 시속으로, 가을 고향으로 다가가야 하라. 시란,
고향이란, 눈부시게 화려하고 대단스럽고 물질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시와 고향은
버려진 듯 존재하고 없는 듯하지만, 실상은 놀랍고 기막힌 힘인 정신의 세상이
아닌가.
나도 뛰지 말고 천천히 걸으면서, 아니 제일 느린 완행 열차를 타고 가을
고향으로 돌아가리가. 내가 찾는 진정한 기쁨이란 내 주위 꽃 속에 있다는 것도
보아내면서 길섶 돌틈 사이에 나만을 위해 숨어 있는 다이아몬드보다 값진 그
무엇을 찾아내어 갖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건 걸어왔다기보단 뛰어왔다. 내 온 힘을 다해 앞만 보고
초고속으로 뛰어만 온 듯, 그러느라 진짜 중요한 것은 못 보고 못 갖고, 중요치도
않은 것만을 움켜잡은 셈이 된 듯.
이 가을, 나는 느리디느린 달구지 같은 중앙선 완행 열차를 타고 가을 고향으로
가고 싶다. 급행과 특급들이 뛰듯이 빨리 달리느라고 멈춰 서지 않는 서너 평짜리
역사 한 칸뿐인 간이역이 죄지은 듯 미안스레 서 있으리. 그런 간이역 하나도 못본
체로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고, 일일이 멈추어서 안부를 묻듯 위로해 주듯 격려하고,
한두 마디 정담으로 사랑과 친애를 확인받는 완행을 타고 싶다.
초라해서 미안해요. 마음만큼 웃고 얼싸안지 못해서 미안해요. 이런 마음 그대로
안 보일 때까지도 갈대꽃 같은 손을 흔들어 주는 고향 이웃 같은 간이역을 만나러
완행 열차에 몸을 얹고 싶다.
서울은 너무 바빠. 그래서 사람 아닌 초고속 기계들만 살 뿐이지. 나도 그런
기계의 일부로서, 부속품으로서 몸이 망그러지고 기능이 쇠퇴하여 심신이 쇠잔해질
대로 쇠잔해져 버렸지.
그러나 고향은 아직도 농경시대. 초고속 정보산업시대인 서울과는 너무 다른 인간
세계지. 말도 걸음도 행동도 느리고, 그래서 이웃집의 고뿔 않는 소리까지 다
알아듣게 되고, 그래서 주변의 아름다운 눈물겹도록 정다운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며 감동하며 살고들 있지. 개똥밭에도 풀섶에도 장마비에 무너진 토담 아래도
보석보다 값진 창조주의 신비와 비밀이 빠끔히 내다보며 깍꿍! 하고 인사하는 것도
보아내고 찾아내고 누리며 살 수 있지.
내 아이 적 기차 철로에 엎드려 귀를 대고 기차 오는 소리를 듣던 그 흥분된
가슴이 쿵쿵 뛰던 꿈의 세상을 떠올리며, 너무나 신기하고 아름답고 눈부시던
미래를 다시 찾아보기 위해서 강물을 건너고 산모퉁이를 돌아가다가 꼬리를 감추어
버리고 마는 기찻길을 따라서 완행 열차를 타고 가듯 인생을 살아가야지.
긴긴 휘파람을 남기고 떠나간 철로변에 가을 갈대꽃처럼 서서, 작아도 하얀 손을
한정없이 흔들어 주었지. 흔들다가 팔이 아파 손을 내리고 보면, 무릎까지 발돋움한
보랏빛 들국화가 앙증스런 낯을 쳐들고 나를 쳐다보며 뭔가를 재잘재잘 일러바치는
뒷집 동생 아이들 같았지.
완행 열차 차창에 이마를 대고 앉아, 가을볕에 피어난 그 옛날의 갈대꽃과 그들
국화들이 스쳐 지나 버려도, 내 얼굴을 알아보곤 소리치며 손흔들며 팔짝팔짝
뛰면서 반가워해 줄 듯.
눈곱보다 작은 얼굴의 코발트빛 달개비꽃, 산에서 갓 내려온 하얀 구절초, 조랑빛
개국과, 개망초와 물망초, 꼬리치는 강아지꽃이 어울려 떼지어 다니는 논두렁길도
내다보리.
연인을 찾아가듯 가을 고향을 찾아가고 싶다. 입대한 동급생을 사랑한 처녀가
낯선 전방으로 첫 위문을 가듯이, 그런 흥분과 감미로운 꿈과 낭만으로 가을 들녘,
가을 산, 가을 수풀, 가을 열매, 가을 시내와 가을 하늘^5,5,5^ 모든 것을 신비와
아름다움으로 보고 느끼며 감동하면서 완행 열차를 타고 싶다.
그리움과 사랑의 가슴이면 눈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닿는 것^5,5,5^ 모두가
아름답고 신비롭고 감사하게 느껴지듯, 그런 가슴으로 캄캄 굴속과 태백의 준엄한
옆모습, 뒷모습, 앞모습을 먼 듯 가까이 바라보며, 그 가슴에 피어난 크고 작은
나무와 수풀과 꽃과 열매와 단풍도 바라보고 싶다. 그 가슴의 산줄기와 깊은
골짜기와 애잔한 개울과 수줍게 엎드린 언덕과 죄지은 듯 움츠린 구렁도 눈물겨운
아픔으로 바라보고 싶다. 꼭같은 나무들이, 수풀들이 각기 다른 빛깔로 단풍이
들었고, 각기 다른 소리로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내다보며, 사람 사는 것도 저와
마찬가지라고 느끼게 되리.
특급을 탔더라면, 비행기를 탔더라면 놓치고 말았을 아름다움과 소중한 풍경들을.
뛰지 말고 걷자. 걸으면서 둘러보고 느끼고 나누고 주고받으며^5,5,5^ 걷다가
더러는 멈춰 서서 내 발자국 찍힌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며 생각도 하면서, 아니
때로는 뒤돌아가서 들르고도 몰랐던 내 것들을 찾아가지고 와서 요긴하게 사용하자.
너무 성급히 뛰다 보면 많은 것을 흘린 채 너무 멀리까지 와버리게 되지. 그래서
돌아봐도 안 보이고, 보인다 해도 다시 되돌아가서 찾아갖고 오기에는 너무 늦어
버리게 되지.
인생은 특급 열차도 비행기길도 아니리. 걷거나 적어도 완행을 타고 가듯 천천히
좌우사방 둘러보며 음미하고 살다가 가는 길이 아닐까. 인생이 어찌 초특급 열차나
비행기를 탄 듯 단숨에 잠깐 달리듯 살다가 죽고 마는 것일까?
나는 늘 기계에 서툴다. 자동차에 컴퓨터에 워드 프로세서에도. 그래서 내 인생도
이들 기계처럼 능률적이기보다는 탐미적이고 관조적인 듯. 안 보이는 따스함과
눈물겨운 위로를 더 탐하며 걷고 멈춰 서고 뒤돌아가 다시 가져오면서.
앞뒤좌우 안 살피는 돌진은 사고이지 목표 성취는 아니리. 소유와 승진과 향락과
위엄으로 돌진하기보다는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완행을 타듯 천천히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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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도 고쳐 가며
비교적 헌 옷을 못 버리며 산다. 아까워서 못 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조금씩 고쳐
가며 입는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헌 옷만을 고쳐 입는 것이 아니라, 내 맘에 들지 않으면 새 옷도 곧잘 고쳐 입곤
한다.
요즘은 기성복 시대라서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은 사람과 우연히 만나기도 한다.
똑같은 옷을 입은 낯선 이와의 마주침에서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나 역시 대량
생산의 기성품 시대에 허다한 규격품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렇게 하며 가볍게 고쳐 입곤 하기 때문에, 직장 동료들은 처음에는 같은 색깔의
비슷한 옷을 두 가지나 샀는냐고 묻기도 한다.
이쯤 되고 보니, 어느 때고 새 옷을 입고 가도 헌 옷을 좀 고쳐 입은 것이
아니냐는 억울한(?) 얘기도 듣는다. 하도 고쳐 입기 때문에 그렇게 본다는 얘기이다.
나는 키가 작은 편이다. 20 년 전만 해도 한국인의 표준 키였는데, 어느새 표준
키가 커져서 억울하게 작은 축에 들게 된 것이다. 아니 기성복의 길이가 너무
길어졌기 때문일 게다. 그래서 옷을 사면 길이를 조금 잘라내어야 내 키에 맞기
때문에, 잘라낸 부분으로 소매나 깃 등에 주름을 잡아 붙여 입기도 한다. 팔이나
목덜미가 드러나는 옷을 싫어하니까, 그렇게 하여 감출 수가 있다.
고작 이 정도로 고쳐 입지만, 옷을 고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보곤 한다. 우리
인생이 가볍게 이 정도만 고쳐져도 새롭고 색다른 모양과 분위기로 바뀌어지지
않을까라고.
옷을 고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인생 고치기에
대한 확신 비슷한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잘 모르며, 살아가면서 자신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신을
알수록 자기에게 맞게 자신의 어떤 허약점을 고쳐 가며 살 수 있고, 그래야 만이
자기다운 인생이라는 적극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본질적으로 나는 비관론자였던 것 같다. 인생은 괴롭고 고통스럽지 않으면
인생다운 인생이 아니라는. 그래서 늘 세상을 떠나 뜬구름 같은 나그네나 돌팔이
무적 승려쯤이 되고 싶고, 지금도 이 증세가 발작하면 지독한 염세에 빠지곤 한다.
그런 때는 마음을 가라앉히느라고 헌 옷을 꺼내어 고치곤 한다. 옷을 고치다 보면
어느새 인생은 기분 내키는 대로 살것이 아니다라고, 비관론자인 나의 본질도
본질대로 살 것이 아니다라고, 즉 누군가가 수없이 많이 만들어낸 옷 중의 하나를
사서 그 옷대로 입고 살 것이 아니라, 내 생김에 맞게 내 일하기에 편하게 고쳐
입듯 신이 만들어 준 내 기질도 내게 맞게 고쳐 가며 살아야 된다고. 그래서 나는
낙천적이 되려 애쓰고 낙천적.긍정적.적극적이 되고 싶다.
정말이지 비관적이고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내 본성도 어느 정도 바뀌어지긴
했으니 내 옷을 고칠 때마다, 고친 옷을 입을 때마다 굳혀진 덕분일까?
막내동생은 유치원 때부터 신장병으로 고생해 왔다. 그래서 유난스레 허약하며
매사에 조심해도 병이 떠나지 않았으나, 북부 캐나다 에드먼튼의 영하 40 도의
강추위를 5 년씩이나 견디면서 심신을 함께 고쳤다. 무척이나 대견스러운 것은 박사
학위를 얻은 것이나 우수 논문으로 그 대학에서 출판까지 하게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막내의 기질이 허약 체질도 아닌 단단하고 강인한 심신으로 고쳐진 것이다.
인생도 옷을 고치듯이 고쳐 가며 살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자기 창조라 했을 것이다. 신은 그러한 고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고 인간을 지으셨다. 그것이 곧 신이 주신 기회이며 우리의 희망이리니, 어찌
적극적으로 이 기회를 활용하지 않을 것인가. 문득 입던 외투도 고쳐 입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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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을 위하여
마테를링크의 동화극에 '파랑새'가 있다. 이 동화극은 이런 내용으로 요약된다.
마술 할미가 치르치르와 미치르 남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파랑새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치르치르와 미치르 남매는 마술 할미의 부탁으로 꿈의 세계로
들어갔다. '추억의 나라'와 '밤의 궁전'숲을 지나서 '행복의 궁전'에 들어섰다. 그러
나
이들 남매는 행복의 궁전에서 물질적 행복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보게 된다.
그리고는 진정한 참행복이란 건강과 정의, 모성적 사랑 등이라고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행복의 상징인 파랑새는 자기들 마음에 살고 있다는 것을
계시받게 되고, '미래의 나라'에서 꿈을 깨게 된다. 꿈에서 깨어보니, 자기 집의
비둘기가 파랑색인 것을 보게 되며, 이들 남매는 그 비둘기를 마술 할미에게 준다.
파랑 비둘기를 받자, 앓고 있던 마술 할미의 딸은 병이 나았다.
그러나 그 비둘기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만다.
"저 새를 찾는 이는 우리에게 돌려주세요." 이렇게 치르치르가 외치면서 동화극은
막을 내린다.
마테를링크는 치르치르 남매의 입을 통하여 행복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먼저 물질적 풍요가 곧 행복은 아니라고 하며,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깨우침을 주고 있지 않은가. 또한 행복한 마음으로 보면 비둘기도
파랑새가 되는 것이니, 행복이란 결국 자기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또한 행복이란 파랑새와 같이 가졌다고
느낄 때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닐까?
작가는 어린이의 입을 통해서 분명히 말했다. 행복이란, 진정한 참행복이란 건강,
정의, 모성적 사랑 등이라고.
건강한 사람은 행복의 첫째 조건을 이미 갖춘 것이다. 미인이냐 아니냐 보다는,
건강한가 아닌가가 행복의 제일 조건이라는 것은 아파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으리.
그래서 우리의 오복에도 건강하게 오래 살아 천수를 누리다가 제 명에 죽는 것을
수와 고종명으로 보았으리라.
그 다음이 정의 또는 우리의 오복에서 말하는 유호덕이나 강령과 관계되지
않을까? 나 혼자만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며 내 가정, 내 직장, 내 사회가
행복해야 진정한 행복이 되리.
이는 우리 가정, 우리 직장, 우리 사회가 정의에 바탕을 둔 덕스럽고 화평스런
분위기인 것을 뜻하지 않을까? 몸의 건강만이 아닌 마음의 건강이 곧 정의와 강령과
유호덕이 아닐까? 뿐만 아니라, '나 혼자만이 아닌 우리'라는 소속 집단의 심리
상태의 건강을 뜻하는 게 아닐까? 그러고 나서 사랑, 특히 모성적 사랑은 모든
행복의 완성으로서 필요한 조건인 듯.
엄마를 찾아 울던 아기는 엄마 품에 안기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행복할 수 있다.
사랑 중의 최고는 성모 마리아의 사랑과 같은 모성적 사랑인 듯. 그래서 모든 종교,
특히 카톨릭에서는 아들 예수의 십자가 참형까지 체험한 참혹한 심정에서 우러난
무한한 자비와 인내, 용서를 통합한 성은의 사랑을 기구하게 되는 듯하다.
그런 사랑을 받는 이도 행복하지만, 이런 사랑을 베풀어줄 줄 아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말이다. 바로 이런 모성적 사랑이 곧 유호덕과 통하지 않을까? 이런
사랑에도 사랑하는 슬픔과 안타까움, 아픔과 고통이 왜 없으랴. 따라서 행복에도
슬퍼하는 행복, 아파하는 행복이 포함되지 않을까?
^5,5,5^ 저만큼 가거라 뒤티(태)를 보자. 이만큼 오너라 앞티를 보자.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티를 보자. 방긋 웃어라 입 속을 보자.
이도령이 춘향과 이별하러 가서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몽룡의 아픈 행복,
그래서 행복은 사랑하는 기쁨 외에 고통까지도 포함하게 되리.
행복은 이렇게 쉽고 편안한 웃음만이 아닌 고통스러운 기쁨, 힘든 극복의
기쁨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에 심리학자들은 행복을 부산물로 여긴다. 즉 목표 그
자체가 아닌 목표 달성에 부수되는 감정, 즉 부산물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행복은 사랑을 느끼는 감정이긴 하지만, 사랑이나 일의 성취, 즉 자기
능력을 시험하며 그 기대한 결과를 바라보고 만족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것이니,
행복의 조건에는 긴장과 스트레스, 힘든 목표 설정과 고통을 극복하는 인내, 때로
좌절하는 슬픔과 아픔, 놓치고 다시 좇는 안타까움 등도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고통, 긴장, 슬픔, 아픔 등을 불행이라고 여기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목표 성취를 위한 노력으로서 기쁘게 여기는 이가 있으니, 꼭같은 것이 누구에겐
불행이 되기도 하고 누구에겐 행복이 되기도 하는 것, 따라서 행복도, 행복의 조건도
같은 것이 각자에 따라 결국 다르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이런 험상궂은 가시나무에도 이처럼 기막히게 아름다운 꽃이 피다니!'라고 장미를
보고 감탄하는 이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예쁜 꽃나무에 이런 험상궂은
가시가 돋히다니?'라고 분노하는 이는 불행한 사람이 아닐까?
'평양 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니, '제 눈에 안경'이니 등의 말은, 행복이 남보기
좋은 어떤 객관적 조건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좋은 표현이 아닌가.
금배지를 달고 싶어 가산을 탕진하며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이는 국회의원이
되어야 행복할 수 있으리. 그러나 자신의 결혼반지를 팔아서 남편이 원하는 시집을
출판해 주어야 하는 여성은 시인의 아내라는 말 한마디로써도 행복할 수 있다.
여름 감기 몸살에 시달리는 나같이 허약한 사람에겐 당장 감기에서 회복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의 조건일 것이며, 나아가서 계속 건강하여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 되지만, 막상 건강해지고 나면 더 나은 무엇을 바라게 되겠지.
오래 살고 부유하고, 귀하게 되고, 많은 자녀들이 건강히 공부 잘해서 일류 대학에
다니면 행복하겠지.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얻고 나서도, 더 나은 무엇을 바라기
때문에 불행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내 마음이 파랑색이면 모든 새가 파랑새이리. 행복은 외적으로 그 누가 갖다 주는
것이기보다는 내 마음의 자세에 달린 것. 욕심을 줄이고, 나아가서 욕심을 버릴 수
있다면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도 있으련만, 장자와 같은 초월자가 아닌 이상, 그런
무욕의 경지에서 일평생을 노닐 수는 없을 테고.
다만 몸이 건강하고, 그 무엇이나 사랑하고자 하며, 사랑하느라고 괴롭고 슬픈
것을 행복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은 보통 사람의 노력으로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왜 행복이 무엇인지 따지면서 살아야 하는가! 행복이 무엇인지,
지금 내가 행복한가는 굳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을
텐데^5,5,5^. @ff
@[ 평범하게 그리고 상식적으로
* 이동진(시인)
1945 년 황해도 신천 출생. 서울대 법학과 졸업.
1970 년 '현대문학'에 시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함.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 외교안보 연구원, 주일 총영사, 주벨기에 공사 역임.
저서에 '한의 숲', '시들린 세월', '객지의 꿈', 장편소설 '우리가 사랑하는 죄인',
'민주화 십자군', 희곡집 '독신자 아파트', '누더기 예수', 번역서 '장미의 이름', '
성난
지구' 외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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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쏘아댄 화살
인생이란 무엇이냐 청춘은 즐거워 피었다가 시들면 다시 못 올 내 청춘^5,5,5^.
술자리에서 또는 노래방에서 지금도 이 유행가를 목청껏 뽑아대는 사람이 적지
않다. 흥겹고 또 약간은 데카당적인 노래다. 물론 나도 이 노래를 좋아한다.
그러나 청춘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닌데다가, 아무리 피었다가 시들면 다시 못
오는 청춘이라고 해도,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춤을 추어야만 속이 시원해지는
청춘도 인생도 아니다. 그래서 이 노래의 가사는 시로 승화되지 못한 채 유행가
가사에 그치고 만다.
그렇다면 인생이란 정말 무엇인가? 누가 이런 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시건방지게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참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지 대답을 해야 만 한다. 인생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삼천포로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케 세라 세라^5,5,5^ 이것은 인생이 뭔지 모르겠으니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적인 생활 태도라고 본다. 이래 가지고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
따지고 자시고 할 건덕지도 없다.
한편,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는 견해가 있다. 우리 유한한 개인의 삶이 결국은
한줄기 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동양 철학과 종교에서 자주 등장한다. 또한 서양의
사상에도 인생은 꿈이라는 비유가 들어 있다.
그러면 인생이 정말 꿈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만일 우리 삶이 꿈이라면 각
개인의 자유와 책임, 죄와 벌은 인위적으로 지어낸 코미디일 뿐이다.
꿈속의 자유가 무슨 자유이며, 꿈속에서 저지른 악행이나 잘못에 왜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러니까 꿈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인생이 부질없는 것, 덧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비유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그러면 인생은 정말 무엇인가? 인생은 모순과 우연투성이 만도 아니고 꿈도 결코
아니다.
인생은 살아 있고,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 삶의 총체다.
생로병사도 삶의 형태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는 고통과 불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도 행복도 있다.
그러니까 인생을 꿈이라고 하거나 모순과 우연투성이라는 말은 극단론이다.
동시에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는 말도 극단론이고,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등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향락주의도 역시 극단론이다.
어느쪽이든 극단론에 빠지게 괸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허공에
쏘아댄 화살 신세다. 무의미하고 오로지 귀찮은 질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중용의 도가 참다운 삶의 길인가? 극단론에 빠지지 않고 중용, 즉
한가운데의 균형을 지키는 것도 길은 길이지만, 너무나 추상적이라서 실생활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해설이 필요한 원칙이기 때문이다.
절름발이 여인이 양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길을 건너가는 모습을 오늘 지켜보았다.
차량 통행이 많은 큰길이다. 뜸해진 틈을 타서 빠른 걸음으로 건너가는 그
걸음걸이가 애처롭다.
두 다리가 멀쩡한 사람들은 그 여인을 병신, 또는 듣기 좋은 말로
지체부자유자라고 한다. 겉보기는 그렇다. 분명히 병신은 병신이다. 병신이란 말을
아무리 그럴듯한 명칭으로 바꾼다고 해도 절름발이라는 사실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절름발이는 그 나름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멀쩡한 인간들이 못 깨닫는다는 데 있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만 살아야 하는 이
세상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겉은 멀쩡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속이 병든 인간으로
가득찬 세상인 것이다.
위장, 간장, 허파, 콩팥, 눈, 신경, 두뇌 등에 병이 든 병자, 즉 병신이 얼마나
많은가?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병원에만 병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병원 바깥의 세상에도 병신이 천지 사방에
널려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병신이면서도 자기가 병신이란 사실을 외면하거나 못 깨닫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병신이라고 비웃고 욕하고 경멸하고 못살게 군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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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인간이 모여 이룬 사회
독선, 편견, 아집, 오만에 사로잡힌 사람도 병신은 병신이다.
돈과 재산에 눈이 먼 사람도 병신은 병신이다. 부동산 투기, 대형 금융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도 병신은 병신이다.
결국은 우리 모두가 형태의 차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병신은 병신인 것이다.
그래서 병신으로서 걸어가는 인생의 길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우화를 하나 들기로 하자.
옛날에 절름나라와 절뚝나라가 있었는데, 두 나라의 왕이 모두 절름발이인 반면,
백성은 모두 두 다리가 멀쩡했다.
절름나라의 왕은 매우 오만해서 스스로 병신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두
다리 멀쩡한 백성이 병신이라고 단정했다. 그래서 하루는 왕명을 내려 모든 백성의
다리 한쪽을 잘라서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왕은 대단히 만족했지만 다리 잘린
백성은 한결같이 고통스럽고 불행했다.
절뚝나라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그 왕은 자신이 병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백성의 다리를 자르지는 않았다. 자기 혼자 병신의 인생길을 걸어가면
그만이라고 믿었다. 백성 가운데 아무도 왕을 병신이라고 흉보지 않았다. 이 나라는
왕도 백성도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느 날 산너머 산도적 떼가 침입해 왔다.
그러자 절름나라의 왕이 도둑 두목의 칼에 맞아 죽고 온 나라가 점령당하고 말았다.
멸망한 것이다.
그러나 절뚝나라는 끄떡없이 버티었다. 버린 정도가 아니라, 얼마 후 절름나라에서
산도적떼를 몰아내고 말았다. 두 나라가 한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런데 두 종류의 백성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서로 병신이라고 욕을 해댔다.
그러자 왕이 명령을 내렸다. 병신이라는 말을 쓰는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고. 우리
나라에는 병신이 단 한명도 없다. 한쪽 다리가 짧든, 두 다리가 멀쩡하든, 그것은
육체의 일부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이윽고 두 다리 멀쩡한 쪽이 절름발이들을 도와 주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고 왕국은 날로 부강해졌다.
위 설화에서 굳이 그럴듯한 교훈을 끄집어낼 생각은 없다. 이 세상에 착하고 어진
사람만 남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아무리 악인을 싹쓸이한다고 해도(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긴 해도), 결국은 또 악인이 나타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악인 또는
선한 인간, 즉 두 패로 갈라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한순간 또는 일정 기간 악을 행하다가도 나중에 착하게 되는 사람이 있고,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것이다.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모두 극단론이라고 본다.
인간은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동시에 간직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매우 어려운 질문 같지만 사실은 간단하다.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일하는 것이다. 동시에 남(또는 이웃,
민족, 나아가서는 인류)을 위해서도 똑같은 성의와 노력을 기울여 일을 하는 것이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자.
이 말은 이웃만을 위해서 살라는 것이 아니다. 이타주의도 극단론에 빠지면
올바르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이기주의도 그렇다. 남을 위하는 것이 결국에는
돌아와서 나의 이익, 나의 행복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신으로 사는 길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인생의 길이라고 본다.
다만 한 가지는, 절뚝나라의 왕처럼 우리 각자가 스스로 병신이라는 점, 부족하고
결함있는 인간이라는 점을 자인해야 한다. 동시에 나의 결함을 덮기 위해서 수많은
타인에게 고통과 불행을 주는 절름나라의 어리석은 왕을 닮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돈, 재산, 학식, 명예, 권력, 지위 등은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모여 이룬 사회에 질서와 평화, 행복과 번영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이지, 어느 개인이 자기만의 쾌락, 안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독점할 그런
목표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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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하게
그러니까 열심히, 정직하게 노력해서 돈을 더 벌려는 활동, 한 단계라도 위로
올라가 출세하려는 노력은 가치가 있다. 지식의 추구, 명예의 유지, 권력의 행사도
마찬가지로 의의가 있고 좋은 일이다.
그러나 불의와 부패를 통해서 이러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자기만을
위해서, 자기 가족이나 가문만을 위해서, 자기 패거리만을 위해서 그런 노력을
한다면 더욱 악한 일이다.
나 자신을 위하고 동시에 남을 위한다는 정신, 자기 분수와 능력에 맞게
추구하겠다는 정신이 중요하다. 그리고 정당하고 합법적이고 양심적인 방법으로
돈이든 재산이든 추구하겠다는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
인생의 목적은 보람이다. 삶에서 보람을 제외하면 그 삶 자체가 정말 개꿈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데 흔히 삶의 목적을 보람에 두지 않고 돈, 재산, 명예, 권력의 획득에 둔다.
그러한 것 모두가 삶의 보람을 축적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시적인 수단임을 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치관의 혼돈 또는 상실이 오고, 사회 질서의 문란, 기강의
파괴가 발생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무슨 절묘한 해답이 나오리라고는 기대할 필요가
없다. 그 대답은 평범한 인간, 상식적인 인간의 가슴에는 다 들어 있다.
다시 한 번 말해 보자.
자기 만족을 위해서 온 백성의 다리 한쪽을 잘라낸 어리석은 왕의 행동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어떠한 행동을 하든, 대화를 하든, 궁리를 하든, 한 번만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자.
나의 이러한 생각, 말, 행동이 혹시라도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은 아닐까?
내가 돈이나 명예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 이상으로 내 능력에 넘치도록
욕심만 부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우화도 기억하자.
어느 날 왕이 한 사람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면서, 하루 종일 걸어가는 범위의
땅을 다 주겠다고 했다. 그 사람은 쉬지 않고 사방을 뛰어다녔다. 광대한 토지가
자기 몫이 되었지만 해질 무렵에 그는 탈진해서 쓰러져 죽었다. 그 사람이 마지막에
소유한 땅은 자기 몸을 누인 흙구덩이 뿐이었다.
이것은 토지나 재산을 경멸하자는 말이 아니다. 땅을 왜 가지려고 하는가 하는
가치관에 관한 이야기다. 광대한 토지, 즉 어마어마한 재산은 그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보람있는 일, 자기와 남을 동시에 위하는 유익한 일을 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을 강조하는
우화다.
가난은 미덕이 아니다. 가난을 후대에 물려주는 것은 더욱 나쁘다. 오늘 가난한
사람은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성실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자기 가난을 남의
탓으로 돌리려고 해선 곤란하다.
부유한 것이 죄는 아니다. 악한 것도 아니다. 재산을 물려 주는 것도 악하지 않다.
그러나 부정한 방법(사회의 상식에 비추어)으로, 부패와 불의를 통하여 부유해지는
것은 나쁘다. 악한 짓이다. 그렇게 얻은 큰 재산을 사회에 돌려주지 않고, 역시
부정한 방법으로 상속시키는 것은 더욱 악한 짓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흔히 말하는 총체적 부패 구조하고 한다.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에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진정 올바른 삶의 길을 각자가
찾아내야 한다. 그 길은 거창하거나 극적인 것이 아니다. 매우 평범한 길이다.
예전부터 우리 민족이 알고 또 실천해 온 것이다.
성실하게 노력하고 부지런히 일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 너무 평범하다. 너무
어리석은 듯 보인다. 그렇게 하다가는 깡통찬다고 야유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고 믿는다. 이렇게 사는 사람만이 자기 삶의 참된 보람으로
발견한다.
비록 일시적으로, 구조적으로 경멸을 당하고 짓눌린다 해도, 상식적 진실을 따르는
사람만이 최후의 한마디를 할 것이다. "나는 정말 잘 살았다!"고. @ff
@[ 숙명 같은 운명을 산다.
* 이문열(소설가)
1948 년 경북 영양 출생. 서울대 사범대 수학.
1977 년 대구 매일신문과 1979 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함. 오늘의 작가상, 동인문학상, 중앙문화대상, 이상문학상 수상.
저서에 '사람의 아들', '그대 다시는 고향에가지 못하리', '젊은날의 초상', '황제
를
위하여', '레테의 연가', '변경',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시인', '오딧세이아
서울' 등의 소설과 산문집 '시대와 불화'가 있음.
----------------
고향의 가치관
갈 길을 다 간 사람에게는 돌아보는 일만이 남게 된다. 그러나 갈 길이 많이 남은
사람에게는 앞을 바라보는 일이 더 소중하다.
나는 이제 우리 나이로 마흔여섯이고, 작가의 길을 걸은 지는 열네 해째다. 태어난
때보다는 죽을 때에 가까우며, 작가로서의 길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이른
셈이다. 하지만 그 어느쪽으로도 아직은 갈 길 또한 많이 남아 돌아보는 일보다는
앞을 바라보는 일이 더 급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의 돌아봄은 돌아봄 그 자체를 위함이기 보다는 앞을 바라보기
위함으로 읽어 주었으면 한다.
내가 명료한 의식으로 작가를 지망한 것은 스무 살 때였고, 작가로 중앙 문단에서
공인을 받은 것은 서른두 살 나던 해였다. 그동안에 12 년의 세월이 걸려 있어 꽤나
참담한 수업 시대를 연상케 하지만 주관적으로는 거의 그런 느낌이 없다. 그것은
'무엇 때문에 작가가 되었는가'란 곤혹스런 질문을 받을 때에 가장 뚜렸해지는데,
나는 왠지 작가가 된 것이 아니라 '되어져 버린'것같이만 느껴진다. 기억의 많은
부분은 오히려 작가가 되지 않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반문학의 논리 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내 구체적인 노력도 작가 수업보다는 작가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삶 쪽에 더 많이
바쳐져 있다. 내 경력에는 이미 30 대 초반에 교원, 신문 기자, 학원 강사, 사법시험
준비 따위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러한 노력을 반영하는 것이다.
결국은 평생을 하게 될 일이면서도 내가 그렇게 문학에 가치 부여를 망설이게 된
것은 개인사와 고향의 가치관이 원인일 것이다.
이미 널리 알려졌듯이 내 아버지의 경력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수원 농대의
학장으로 밀려나 월북하실 때까지 그분은 줄곧 정치적인 활동에 전념해 왔는데,
해방과 동란 전야의 정국이었던 만큼 어지간한 정치적 열정 없이는 그 유지가
어려웠을 것이다.
내 고향은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이란 곳으로, 입향조 격인 14 대조 석계
할아버님 이래로 삼백여 년 동안 우리 문중이 터를 잡고 살아온 동족 부락이다.
그리고 그런 부락의 전통에 맞게 매우 권력 지향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또한 전통적인 유학의 영향이기도 하다. 시사에 찬란한 것은 장부의 일이
아니요, 모름지기 장부는 천하 경륜의 학문을 그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식이다.
아버지는 그 모습조차 기억에 없을 만큼 나의 삶에서 사라지셨고, 고향도 내가
머문 시기는 내 삶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혈통과 고향이 거의
선험적으로 결정한 가치관은 오랫동안 내 삶에 부담을 주었다. 어쩌면 나는
의식적으로 드러낸 것보다 훨씬 전에 이미 작가로서의 삶을 예감했으면서도 그
가치관에 억눌려 스물이 넘어서야 겨우 그런 지향을 드러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됐건 나는 결국 한 작가가 되었으며 거의 틀림없이 한 작가로 늙어
죽게 될 것이다. 소설은 내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고, 내 삶에 관한 얘기는 곧
소설에 관한 것이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지면은 소설과
관계된 얘기에 바쳐지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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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성향의 관계
스물을 갓 넘어 대학 문학 서클에서의 어줍잖은 계기로 소설쓰기가 내 일생의
일이 되고 말았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은밀하게 한 목표 또는 한계를 설정했었다.
추상적으로 말하면 우리 문학의 전통 축적이라는 것이었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실주의 단계까지의 도달이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문학에도 고전적인 전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상고 시대부터
이미 나름의 산문 정신이 형성되어 그 전통은 고려와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상당한
수준의 국한문 소설들로 결정 되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화를 염두에 두고 살펴볼 때 과연 우리에게 충분한 소설 문학의 전통
축적이 있는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우리 작가들이 익숙해져 있는 양식은 이른바 신소설 이후 70여
년 동안 서구에서 수입된 소설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우리의 현대 작가들 중에서도 전통의 계승 내지 전통과 서구적 양식의
접목을 시도한 이들은 많고 그들 중에서 일부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특히 김유정 같은 작가가 그의 몇몇 단편에서 보이는 성취는 눈부신 데마저 있다.
그러나 아무리 후하게 보아주어도 그런 우리 고전의 전통이 우리 현대 작가들의
창작에 중요한 바탕이 되고 있다는 말은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설은 서구적 전통의 바탕에 서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고,
또한 그 경우 절로 우리 현대 소설의 바탕은 엷을 수밖에 없다.
저들(서구 작가들 또는 서구 문학을 모태로 한 주변국 작가들)은 몇백 년에 걸쳐
쌓아 올린 전통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기껏해야 70 년의 전통이 있을 뿐이다.
앞서 내가 지향으로 삼은 것은 바로 그러한 전통, 곧 서구화된 전통의 축적이었다.
어차피 우리 문화만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는 이상, 문학의 세계화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본 까닭이었다.
그러나 쉽게 말해 서구적 전통이지 그 내용은 그것이 쌓여온 세월만큼이나 두텁고
다양하다.
중세의 로망에서 현대의 누보로망.앙티로망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가 담고 있는
주제와 양식은 한 사람의 일생으로는 습득하기 불가능하다.
거기서 어떤 한계 설정이 필요했는데, 나는 스스로 그것을 사실주의까지로 잡았다.
전위와 실험은 다음 세대에 넘긴다. 그대들은 나를 다리로 삼아 세계로 나아가라
-그때는 자못 호기에 차서 그런 엄청난 야망을 품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벌써 이십여 년, 그리고 전문 작가가 된지도 십여 년이 넘은
지금에 와서 스스로를 돌아보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우울해진다.
나는 제법 비슷하게 저들의 고전주의를 지나왔고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도 그럭저럭
넘어온 듯하나 도달점인 사실주의와는 아직도 멀다.
성향이 지식을 결정한 것인지, 지식이 성향을 결정한 것인지 잘 알 수 없지만
나는 벌써 여러 해째 사실주의 소설의 문턱을 배회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같은 느낌 때문에 나는 항상 돌아보는 일보다 앞을 바라보는 일에 쫓겨 허겁지겁
내닫고 있다.
거기다가 요즘 들어 더욱 나를 혼란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온 세계화에
따른 문제들이다. 나는 내 작품의 세계화뿐만 아니라 우리 문학의 세계화에
대해서도 방금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보다 훨씬 비관적으로 보아 왔다.
세계화란 도전은 다음 세대의 작가들에게나 떠맡겨질 짐으로 보았고, 그 때문에
이따금씩 자신의 작품을 번역하는 데 쏟는 선배들의 관심과 열정을 가망 없고
무모한 일로 보아 딱하게 여기기까지 했다.
몇년 전 어쩌다 내가 파리에 소개되었을 때에도 나는 전혀 세계화를 실감하지
못했다. 그들 속담대로 제비 한 마리가 봄을 만드는 법이 없으며, 그것은 복권이
맞아떨어진 것과 같은 행운의 일종으로만 느껴졌을 뿐이었다.
간혹 희미하게 실감을 느낄 때에도 그것은 너무 빨리 왔다는 불안감과 함께였다.
그런데 이번에 파리를 다녀오게 되면서 내 생각은 달라졌다. 드디어 세계화란
말이 실감나게 내 의식을 파고든 것이었다.
물론 파리는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나를 다룬 신문과 방송은 또 파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선뵌 것은 겨우 다섯 권의 포켓판에 지나지 않으며
아직은 그곳의 독자들에게서 온전히 승인을 받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게도 느낌은 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아도 그들의 말씨, 태도, 눈길은
내게 섬뜩하리만치 실제 상황이라는 걸 일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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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 대한 믿음
어떤 문학지의 편집을 한다는 한 시인은 랑데부(인터뷰를 그들은 이렇게
표현했다)를 와서 손때가 까맣게 묻은 나의 책 다섯 권을 내밀며 사인을 청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자신은 잡지를 위한 랑데부보다 내게서 사인을 받는 일을
훨씬 중요하게 여기고 왔다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여러 곳에서 내 작품에 호감을 표시해 준 어떤 평론가는
말하였다.
"우리는 중국의 일부로서거나 일본의 일부로서만 한국의 문화를 상상해 왔다.
그러나 당신의 작품을 모두 읽고 난 지금은 다르다. 머지않아 우리는 중국의 일부도
아니고 일본의 일부도 아닌 새로운 문화와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사적인 자리에서 주워들은 그들의 얘기도 우리 문학의 세계화를 막연한 미래의
일로 방치해 둘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유럽의 문단이 자신들의 작가만으로 독자들의 문학 수요를 다 채워 주지 못한
지는 오래 되었다.
그들에게도 진지함과 엄숙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너무 많은 작가들이 이론과
실험과 행동에 문학을 탕진한 바람에 대중과의 연결 고리를 잃어버렸다.
그 결과 1960 년대 수반부터 유럽의 출판사들은 중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작가들을 찾아 나섰고 1980 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동구로
눈길을 돌렸다.
고통을 안고 있는 사회, 고뇌하는 정신을 바탕으로 삼은 문학이 그들의 중요한
상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동구에서조차도 독자들은 식상하고 있다.
남은 것은 아시아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새롭지 않고, 중국은 적어도 부르주아
문학에서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
만약 한국이 새롭고도 성숙한 문학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부터는 한국의 날이 될
것이다. 그들의 말은 대개 그랬다.
물론 그중에는 지나친 단순화나 과장도 있고 우리가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도
끼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귀담아들어야 할 구석도 틀림없이 있었다.
따라서 단순히 내 예상보다 빨리 왔다고 해서 내 문학의 세계화에 따른 문제들을
대책없이 미뤄 둘 수는 없다.
이미 세계화는 다음 세대에 넘길 수 있는 점이 아니라 아직은 제법 남았을 성싶은
내 삶 앞에 돌출한 새로운 도전이다. 그리고 그 도전은 적절히 응전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 응전의 방식으로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다. 그 하나는 내 스스로를
세계화.보편화시켜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다가서는 길이다.
이 땅을 떠나 세계의 중심과 가까운 곳에서 나를 새롭게 단련시키고 지역성을
뛰어넘는 안목과 설득력을 획득하는 게 그것인데, 나는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얼마간의 미국 체류를 생각하고 있다.
열정과 힘이 남아 있으면 전공을 정해 공부를 할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감히 유학이라고는 표현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의 길은 반대로 나를 차별화.특수화시켜 저편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길이다.
어차피 내 지식과 안목의 대부분은 제도와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홀로 기른
것이다. 따라서 이 방식은 새롭기보다는 예전의 내 방식으로 돌아감을 뜻하는데,
이때의 구체적인 계획은 어딘가 사람들과 차단된 곳에 숨이 홀로 읽고 생각하는 게
된다. 자칫 무슨 수도 계획처럼 엄청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게 엄중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두 가지 방식 모두 어려움도 있고 좋은 점도 있다. 그러나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두 가지 방식 모두에게 공통되는 어려움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어려움은 사람의 욕망이 언제나 능력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기대만 거창했을 뿐 아무것도 얻은 바 없이 세월만 낭비하고 마는 수도 있다.
그 다음 어려움은 둘 모두 당분간 집을 떠나 있어야만 되는 일이라는 점이다.
나는 낯선 곳으로의 이주에 아주 불리한 나이에 있는 삼남매의 아버지이고 팔순을
바라보는 노모의 아들이다.
아직까지는 내가 베푼 것보다 받은 것이 많은 아내의 남편이며 또 그밖에도 많은
역할을 가진 한 가정의 가장이다.
헤아리려 들면 나의 계획들을 가로막는 어려움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내가 이
끝없는 일상의 반복에서 벗어나야 하는 데는 세계화의 대비란 측면 외에 내면적인
필요도 있다. 아니 어쩌면 그쪽의 필요가 훨씬 다급하고 큰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지쳐 혼란되어 있고 무자비하고 편협해져 있다. 사랑과 욕정을
구별하지 못하고 '우리'를 '나'속에 우겨 넣는 버릇까지 생겼다.
진리에 대한 믿음도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도 희미한 습관으로만 남아 있고
거룩함과 참됨에서조차 그리 큰 감동을 받지 못한다.
내 정신이 빠져 있는 그런 참담한 수렁에서 나를 빼내기 위해서도 너무 늦지 않은
때에 결단이 있어야 한다.
아직은 꽤나 남은 듯한 내 길과 끊임없이 살펴가며 살아야 할 앞날을 위해서도.
@ff
@[ 달 표면에 호텔이 즐비하다.
* 이호철(소설가)
1932 년 함남 원산 출생. 1956 년 '문학 예술'에 '탈향'과 '나상'으로 추천받아
문단에 데뷔함.
1961 년 현대문학 신인상, 1962 년 동인문학상 수상. 자유실천 문인협회 대표
역임.
저서에 '판문점', '닳아지는 살들', '큰 산', '이단자', '인생대리점', '남풍북풍',
'그
겨울 긴 계곡', '월남한 사람들', '서울은 만원이다' 외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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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철학의 기둥
17세기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홉킨스에게 '리버이어선'이라는 저서가 있다.
그는 인간의 성향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는
힘에의 욕망'이고, 인간이라는 것을 마치 새싹이 돋아오르듯이 문득 땅속으로부터
머리를 쳐들고 태어나 서로 아무런 구속도 받는 일 없이 자라난 상태로서 상정해
보면, 그것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상태'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 상태에 있는
한, 인간은 상대방을 말살하기까지 싸울 길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인간에 있어서는 죽음의 공포야말로 중요한 계기를 이룬다. 타인과
경쟁하고 타인에 대한 자신의 우월 의식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허영심'과 이
'죽음의 공포' 두가지에서, 홉스는 근대인의 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는 특색을 미리
보아냈던 것이다.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홉스는 데카르트와 함께 17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데카르트와 비교해 보았을 때의 홉스의 특색은 그의 도덕, 정치
철학에 있는 것이다.
즉 데카르트는 도덕을 여느 모든 학문에 관한 지식을 사그리 섭취한 뒤의 '지혜의
마지막 단계'에다 위치시키면서 끝내 그 도덕 철학을 완성시키지 못했지만, 홉스는
'리버이어선'을 비롯한 몇몇 저작을 통해 그의 도덕, 정치 철학을 논리적으로
체계화시켜서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자연 본성 상태로부터 출발하여, 그 자연권을
보다 더 잘 가꾸고 실현시키기 위해서 이성의 계산을 통한 자연법(도덕)을 발견하고,
계약을 통해서 국가라는 것을 설립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죽음의 공포'를 밑자락에 깔고 자연이성에 기대어서
살아간다. 그렇게 인간 본성의 발현인 자연권의 포기를 결의하면서 계약에 의해서
단체(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그 권력에 의해 생존을 보장받는다. 그것이 바로
국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홉스의 사상은 17세기 중엽 영국 시민 혁명의 중요한 담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영국은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근대적인 국가를 꾸려 내고
인간의 발전과 생존을 확보해 내려고 한 사람들에게 사상적인 기둥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다 아시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늘날까지는 근대적인 민주
국가론과 함께, 범세계적인 지도 원리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온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제시한 사회주의였다.
그러나 작금년에 보는 것처럼 구소련과 동유럽에서의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으로,
최근에는 일찍이 마르크스 자신이 홉스의 인간관을 지나치게 비관적이라고 보았던
그 점이야 말로, 어쩌면 마르크스 쪽의 인간관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보여지고 있다.
어쨌든 간에 홉스의 근대적 의미와는 단지 그 도덕, 정치 철학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차라리 홉스는 코페르니쿠스로부터 갈릴레오에 걸친 근대 자연과학의
원리와 방법을 적극적으로 섭취하면서, 자연, 인간, 국가를 관통하는 철학 전체의
근대화를 이루어낸 것으로 평가된다.
홉스에 있어서는 자연의 유일한 실재는 물체이고, 모든 자연 현상은 이 물체의
인과적인 운동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었다. 물론 인간은 일단 한번 그러한 자연의
인과법칙을 알게 되면, 이번에는 그것을 거꾸로 자연에다 작용시켜서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리하여 자연상의 완전한 기계론화가 성취되면서 도덕, 정치
철학도 그 연장선 위에 세워졌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홉스적인 것에 의해 처음에 열려졌던 근대라는 지평을
찬미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자연상의 기계론은 확실히 인간에 의한 자연의 정복을
가능하게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림으로써 야기된 자연 환경의 파괴는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의 모두에 언급된 '허영심'과 '죽음의 공포'조차, 자연을 지나치게
객체화하여, 그로부터 이탈해간 사유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홉스와 동시대의 시인 한 사람인 카울리는 철학의 역사에 있어서의 홉스의 위치를
신대륙 발견에서의 콜럼버스와 비견했지만, 사실 홉스는 차라리 콜럼버스의 위업을
이어받아서 세계 일주를 해낸 마젤란에 더 가깝지 않은가 보여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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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 개념을 무한대로
그러나 시야를 한번 양껏 넓혀 보자. 여기서 시야를 양껏 넓힌다는 것은, 우리
일상 의식 속의 시공 개념을 무한대로 한번 늘여 보자는 것이다.
가령, 하루 24시간을 기준으로 지구 역사 전체를 하루로 압축해 볼 때, 원시인
네안데르탈인이 출현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2초가 채 못 되고,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설이 시작된 것은 0.1초 전의 일이라고 한다.
"지구상의 생명의 역사는 생물과 환경과의 상호 작용의 역사였다. 지구 위의
동물의 생활 형태와 습성은 적지 않게 환경에 의해서 형성되어 온 것이다. 지구
위에 하나의 씨앗, 즉 인류가 저들이 살아오고 살아가고 있는 자연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것과 같은 엄청난 힘을 지니게 된 것은 금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인
것이다."라고 한 과학자는 지적하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오로지 과학을 믿고 기술을 믿고 있는 것이 오늘의 일반
추세이다. 그 과학 기술의 최첨단 산물인 핵융합과 핵분열은 인류가 이제까지
이루어낸 일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다.
핵융합과 핵분열은 지구를 송두리째 황폐한 사막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고, 거꾸로
사막에다 꽃을 피울 수도 있다. 이것은 인류가 결코 악용해서는 안 되는 무서운
위력으로 등장했다.
한편, 최근에 와서 우리 인류는 우주 시대로 진입, 앞으로 30 년이나 50 년쯤
뒤에는 작금에 해외 여행을 즐기듯이 우주 여행에 나서고 달 표면에 호텔이
즐비하게 늘어날는지도 모른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그러한 미래를 우리 전망권에
현실로서 등장시키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매일매일 텔레비전 화면으로 위성 카메라가 포착한 우리 지구의
모습을^6,36^우주라는 무한한 공간에 하나 청색 축구공처럼 달랑 떠서 빙글빙글
혼자서 귀엽게 돌아가고 있는, 외롭디외로운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위태위태해
보이기도 하는, 우리 지구덩이의 모습을^36,3^노상 보고 있는 것이다.
처음 한동안만 신기로웠을 뿐, 매일처럼 보면서 어느새 그 광경에도 길들여지고
익숙해지다 못해^36,36^거의 무감각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게 보통 일인가. 새로운 우주 시대가 열렸다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어느 만큼이나 그 새로운 우주 감각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새로운 우주 시대의 개막이라곤 하지만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감각은 여전히 이제까지 지니고 있던 세계상이나 우주관에 그대로 깊이
젖어 있고 매여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처럼 8일간의 우주 비행을 하고 돌아온 사람하나가 이렇게 말한다.
"우주에서 내가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은 배설물을 받아내는 일이어서 변소엘
가다가 하나밖에 없는 창으로 밖을 내다본즉, 칠흑으로 새까말 뿐 아무것도 안
보여요.
이게 우주로구나 생각하면서 문득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더니 파란 청색 지구가
보이지 뭡니까. 청색이라기보다 청백색으로 빛나고 있는 신비로운 지구가 보였어요.
정말로 우주로 왔구나, 저게 지구로구나 하고 와락 흥분이 됩디다.
우주는 그 무엇이나 빨아들일 듯이 새까말 뿐, 아무것도 없는 칠흑이에요. 그 속에
별들은 반짝임없이 걸려 있어요. 한편으로 지구가 보였을 때는 청백색의 불꽃마냥
빛나고 있지 뭡니까. 그 순간, 아아 지구는 아름답구나, 하고 느꼈지요."
이어서 그는 말한다.
"칠흑으로 새까만 우주 속에 진백색의 태양을 보았을 때, 저 에네르기를 직접
쐬면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직감했습니다. 하지만 그 태양 광선도 대기층을
통과하면서는, 우리가 늘 익숙해져 있는 그 부드러운 빛살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
대기층의 두께는 겨우 1백 킬로미터. 사과 한 알을 지구 덩어리로 친다면, 대기층
두께는 그 껍질만 할 겁니다.
우리들이 평상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대기층은 나약한 것이고 오염되기 쉬운
것이더군요. 어느 한 나라만 따로 떼어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그대로
이어져 있더군요.
한반도의 서울과 평양이 저렇게도 가까이 붙어 있는 걸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지도 위에서는 뚜렷한 선으로 국경선이라는 게 그어져 있지만, 우주로부터는 그
어떤 국경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게 퍽이나 인상적이었는데,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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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지닌 우주
자, 우주 여행을 하고 돌아온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이 글의
처음으로 거론한 홉스를 생각해 보자. 사실은 그가 언급한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두
가지 요소로 보았던 '허영심'과 '죽음의 공포'조차 자연을 지나치게 객체화하여, 자연
그 자체로부터 이탈해 간 사유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 새삼 곱씹혀진다.
그리하여 우리 인류사 전체를 좀더 큰 시야에다 담아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홉스적 인간관이나 세계상만이 있어왔던 것이 아님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가령 기원 전후의 약 4백 년간에 걸쳐 고대 로마에 흥성하였다고 알려져 있는
스토아주의자들의 우주 감각이 그러하고, 더 나아가서 '우주 국가'라는 사상이
그러하다.
본시 스토아주의에는 희랍의 도시 국가가 붕괴된 뒤, 광대한 세계에 그대로
내팽개쳐졌던 '세계 시민'이라는 철학의 성향이 있었던 것이어서, 바로 오늘날 우주
시대로 접어드는 우리의 상황과 일맥 상통한 것이 있다.
그때까지는 국가라고 하면 일정한 취락을 성벽으로 에워싼 도시 국가를 말했다.
그러나 그 도시 속의 사람들의 삶을 감당하자면, 도시 식량을 생산해 내는 논밭도
있어야 했고, 사람들은 도시 경제나 도시 국가 서로간의 대립을 넘어서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를 희망했고, 우주로서의 비상까지도 끊임없이 꿈꾸어 왔던 것이다.
통 속의 철인 디오게네스가 '우주 시민'이라고 스스로 자처했던 것도 그런
일환이었을 터이다.
그렇게 상정된 우주 국가는 더러는 사람들과 신들이 한데 뒤섞여서 이루어진
조직체로도 불리며, 그 속에 신격화된 천체나 자연 현상까지도 포함시키고 있었다.
예를 들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황제였으면서도 스토아적 정신에 따라
간소한 생활을 했고, 이교도들에게도 당시로서는 드물게 관대했다. 그가 후세에
남긴'자성록'은 스토아주의의 대표적인 저서의 하나로서 많은 명언들이 남겨져 있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더러는 깜짝 놀랄만한 새 시야를 열어 주곤 한다.
가령 그는 우주와의 일체관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우주를 하나의 영혼을 지닌 하나의 살아 있는 생물로 늘 생각하라. 또한,
만물이 어떤 방법으로써 우주라는 하나의 감성으로 귀일되며, 우주는 어떤 길로써
하나인 욕구로부터 저 모든 일을 해내는가, 또 직물이나 실타래와 같은 우주의
연결이나 조직이 어떻게 생겨 있겠는가, 그런 것을 두루두루 끊임없이
생각하라"라고.
그리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의하면, 우주로부터 자신을 떼어 낸다는 것은
바로 손이나 발을 몸뚱이로부터 떼어 놓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향해 본원적으로 묻는다.
"너는 저 우주의 본질적인 통일로부터, 어디 엉뚱한 곳에 다가 자신을 내던져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잇대어서 그는 말한다.
"애시당초에 그 통일체의 일부분으로서 너는 태어났던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그것으로부터 때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다시금 자신의
통일을 되찾을 능력과 가능성을 신으로부터 부여받고 있다"라고.
결국 아우렐리우스가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것은 마음의 편안과 평정뿐이
아니었다.
"너의 내면을(수직으로) 파들어가라. 샘은 마음 그 안에 있다. 네가 간단없이
파들어가면, 항상 용솟음치는 힘을 지니게 되고, 또한 선을 해내는 샘이 그곳에 있게
될 터인즉^5,5,5^."
그대로부터 2천 년이 지난 오늘로 다시 문득 돌아와 보자. 우리 지구에서 쏘아
올린 우주선에서 건너다본 땅덩어리, 청백색 축구공과도 같은 지구 덩이의 모습을
새삼 떠올려 보자. 그위에서 아글바글 살고 있는 우리 인류의 존재에 생각이 미칠
때, 차라리 그 옛날 아우렐리우스의 그 몇 마디 말씀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싸목싸목 젖어 오지 않는가.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우주 시대로 접어들면서 삶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그 해답의 윤곽은 이상의 글 속에 이미 잡혀 있다 할 것이다. @ff
@[ 나를 살고 나를 남기는 인생
* 조병화(시인)
1921 년 경기도 안성 출생. 경성사범을 거쳐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
경희대교수, 인하대 대학원장 역임.
1949 년 첫번째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하여 문단에 데뷔함. 아시아
자유문학상, 세계시인대회상,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저서에 시집 '하루만의 위안', '밤의 이야기'등과 에세이집 '고독과 사색의
창가에서', '마음이 외로울 때', '자유로운 삶을 위하여'외 다수가 있음.
------------
영혼의 세계를 여행하자.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여러 가지 길이 있고, 방법이 있고, 그 스타일이
있을 줄 압니다.
사람에 따라서, 그 성격에 따라서, 그 희망에 따라서, 그 환경에 따라서 인생은
변화하면서, 진행이 되면서 결실을 맞는 종말기로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때문에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인생을 이렇게 살 것이다. 하는 격식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실로 인생은 다양한 것이며, 자기 선택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며, 자기 자신에
대하여 선택의 자유가 있으며, 그 책임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것도 자기의 선택의 자유이며 책임이라고 생각을 하며,
인생을 실패하는 경우도 자기의 자유이며 그 책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자기 인생은 뭐니뭐니 해도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의 것, 이것이 진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나는 지금 73세입니다만, 비교적 내가 선택한 길을 내가 책임지며, 비교적 내가
바라는 대로 살아온 것 같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저 후회없이, 그리 불만없이, 내 생각, 내 인생을 그런대로 잘 이루어 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집이 그리 윤택한 편이 아니어서 경성사범학교로 진학을 했습니다. 다행이도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나왔기 때문에 교장 선생의 좋은 충고와 추천으로 무난히
합격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경성사범학교의 일학년 신입생은 모두 의무적으로 기숙사에 입사를 해야
했습니다.
이 학교는 일본인 학생이 80 퍼센트, 한국인 학생이 20 퍼센트로 기숙사는 일본인
학생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일본인 학생 중심으로 학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기숙사엔 침구만 가지고 입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비교적 가난한
조선인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너나할 것 없이 한국인 학생들의 침구는 일본인
학생들에 비하여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로 이러한 것이 좀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 부끄러운 이부자리에 누워 자면서, 잠이 오지 않는 시간엔 '왜 우리
어머님은 이렇게 가난함 식민지의 아들로 나를 이 땅에 낳아 주셨을까. 기왕이면
좋은 나라, 행복한 땅에 나를 낳아 주시지'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이것이 나의 첫째의 숙명, 이 숙명을 이겨내기
위해서 열심히 살자. 그 길은 보다 많이 이 세상을 사는 것이다. 그러려면 보다
많은 여행을 하는 것이다. 육체를 가지고 보다 많이 이 눈에 보이는 대지, 그 자연의
세계를 여행하고, 책을 보다 많이 읽어서 보다 많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의 세계,
그 영혼의 세계를 여행하자'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어린 나이에
나는 나의 인생관을 정립했던 겁니다.
이것이 나의 일생을 지배한 나의 인생관이요, 인생을 살아온 생활 철학이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인생관 아래서 인생을 출발했던 겁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나의 인생을 회고해 보면, 이 철학이 완전히 관철되어 나는
오로지 이 인생을 살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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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사는 사람
그동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여행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주신 건강한
몸으로 실로 수십 번 세계 여행을 하면서 한없이 이 눈에 보이는 자연계를
돌았습니다. 어렸을 때의 그 꿈을 완전히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교수 생활을 하면서 그런대로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그런대로 보다 많이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의 세계, 그 영혼의 세계를
유감없이 여행했던 겁니다. 더구나 시를 가지고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무한히, 실로 무한히 머리 속에 있는 상상의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 역시 어렸던 시절 세웠던 나의 인생관대로 후회없이 살아온 것이 됩니다.
대학에서 교수, 학장, 부총장, 대학원 원장, 이사장, 그 보직자리를 열심히 일해
오면서, 뜻하지 않았던 한국문인협회 이사장까지 책임지고 봉사해 오면서, 실로 많은
정신생활을 해왔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뜻대로 이루어진 것은, 그 힘이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린 시절의 인생관을 이끌어 온 꿈의 힘이었습니다.
'보다 많이 여행을 한다. 육체적으로 보다 많이 눈에 보이는 자연의 세계를
여행하고, 독서를 통하여 보다 많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의 세계를 여행한다'하는
꿈, 오로지 그 꿈을 살려는 부단한 노력, 그 힘으로 나는 나의 인생의 길을
선택했고, 스스로에 대한 약속, 그 책임을 가지고 그것을 열심히 실천해 온
것입니다.
인생은 무엇이든지 자기의 꿈을 사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꿈을 사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꿈을 사는 사람은 언제나 젊습니다. 이 꿈을
사는 사람은 쉬지 않습니다. 꿈을 사는 사람은 나태가 없습니다. 꿈을 사는 사람은
항상 생명력이 넘쳐 흐릅니다.
지금까지 나는 나를 예로 들어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그 실제의
예를 들었습니다. 인생의 한 샘플로.
실로 인생에는 답이 없습니다. '인생이 무엇이냐'하는 문답도 난센스이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하는 질문도 난센스입니다.
인생은 자기에게 있는 겁니다. 자기의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생은 이래야 한다는 의문도 없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자기의 인생은 자기
것이며, 자기가 만들어 가는 미래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살아가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먼 미래에 자기라는 열매가 있는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남의 인생을 사는 사람은 비참하고 가련하며,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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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업적, 내 업적
나는 경성사범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 동경에 있는 동경고등사범학교
이과로 진학을 했습니다. 이과에서 물리화학을 전공했습니다. 물리화학을
전공하면서 장차 나는 이 물리화학으로 나의 길을 내어, 나의 이름이 붙는 업적을
세울 생각을 꿈꾸었습니다. 내가 노력한 만큼, 내가 연구한 만큼, 내가 실험을 한
것만큼 나의 업적이 남는 일을 하려고 꿈을 꾸었던 겁니다.
그러나 전쟁은 나의 꿈을 무참히 파괴해 버렸습니다.
나는 내가 생각하던 학업을 다 못 마치고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내가 다니던
경성사범학교에서 물리 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매일매일 교과서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의 업적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실로 내
것이 없는 비생산적인 일과를 하면서 나의 그 아까운 인생의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남의 보따리를 가르치는 물리 선생, 그 월급쟁이로 타락을
하고 말았습니다.
매일매일이 권태스러웠습니다. 그렇다고 어디 하나 연구실다운 연구실도 없고,
실험실다운 실험실도 없는, 나는 꼼짝할 수 없는 물리 선생이었습니다.
이 때에,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상상력을 기르기 위하여 읽었던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보다 많이 책을 읽어서 상상의 세계를 보다 많이 여행한다'는
생각에서 시간이 그리 걸리지 않는 시집들을 많이 읽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시들이 몸에 배어서 자연히 다음과 같은 시들이 나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퍼서
물 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에 굳어 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소라'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 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가고
가을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추억'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나는 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꿈의 좌절 속에서, 그 고독감에서, 해방의 혼란 속에서, 그
소외감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끼면서.
그 꿈의 좌절, 고독감, 소외감, 절망감에서 탈출하기 위해 부단히 방황하며 고민을
했던 겁니다. 자살까지 매일 생각하면서.
이러한 시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러한 외로운 시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약간의
위안이 되곤 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상처난 영혼을 치료해 온 것이지요.
영혼의 암울한 깊은 상처가 이러한 시들로서 약간의 치료는 되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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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이 있는 인생
이렇게 시를 쓰고 있던 나의 모습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있었습니다. 김기림 시인,
나는 그때까지는 이 유명한 시인을 모르고 지냈던 겁니다.
김기림 선생이 나의 시들을 보자고 하길래 보여 드렸습니다. 김기림 선생은 같은
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 시를 보자 시집을 내자고 했습니다. 나는 선배들도, 동창들도, 벗도 없는
처지에서 참으로 고맙게 여겨져서 부끄럼도 무릅쓰고 시집을 내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나의 첫번째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이었습니다.
책이 나오자, 나는 나의 소망이었던 '내 것이 하나 남는구나'하고 흐뭇한 생각이
들면서, 나도 살 길이 생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것을 남긴다는 기쁨이 부끄러움보다 앞섰습니다. 작게나마 나의 노력이 결실을
보았다는 생각, 그것이 기뻤습니다. 쓸쓸하고 고독한 결실이지만.
이것이 나의 인생으로 접어든 첫 길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시의 세계로 접어들었던겁니다.
이 시집이 나오자 더한층 기쁨을 느끼면서 나는 과거의 나의 세계에서 탈출을
했던 겁니다.
작품 하나하나가 나의 탈출이었던 것입니다.
탈출, 탈출, 끝없는 탈출로 다음해 4월에 제2의 시집'하루만의 위안'이
산출되었습니다.
고독한 영혼의 고독한 탈출, 그것을 거듭하고 있던 중 6^3456,12,15^전쟁이 나서
나는 부산으로 도피를 했던 겁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완전히 나의 전공이었던 물리화학과 이별을 하고 문학의 세계로
나섰던 겁니다.
이렇게 해서 나의 꿈이었던 '내가 남긴 인생'을 시작했던겁니다.
기쁨이 있는 인생, 그것을 사는 인생이 가장 자기를 잘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인생을 한평생 나는 후회없이 이렇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ff
@[ 무거운 짐 맡기고 영원을 생각하며
* 홍윤숙(시인)
1925 년 평북 정주 출생. 서울대 교육학과 수학.
1947 년 '문예신보'에 시 '가을'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함. 예술원 회원.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
저서에 시집 '여사 시집', '풍차', '장식론', '타관의 햇살', '사는 법'등과 에세이
집
'하루 한순간을', '나의 아픔이 너의 위안이 된다면' 외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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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벌레의 우화
한 마리 푸른 애벌레가 풀밭에 누워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다. 문득 눈을 뜨고
바라보니 저만치 새까맣게 움직이는 거대한 기둥 같은 물체가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꼭 저와 같은 애벌레들, 수천 수만 마리의 애벌레들이
서로 엉켜 저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아우성치며 엉겨붙은 애벌레의
기둥이었다.
"무엇들 하는 것이오?"
애벌레가 물었다.
"올라가는 것이오."
"무엇이 있답디까?"
"모르오, 그냥 올라가 보는 것이오. 남들이 올라가니 나도 올라가 보는 것이오."
푸른 애벌레는 자기도 올라가 보고 싶어졌다. '꼭대기에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굉장한 것이 있나 보다'고 생각한 푸른 애벌레는 용약하여 새까맣게 달라붙은
애벌레 기둥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벌레 기둥 속은 수라장 같은
아귀다툼이었다. 서로 밀치고 밀리고 밟고 밟히며 저마다 먼저 올라가려는, 흡사
치열한 전쟁터 같았다. 다른 애벌레에 밟혀 질식하여 죽는 놈도 있고 떠밀리거나
발을 헛디뎌 새까만 낭떠러지로 곤두박질하여 떨어져 죽는 놈도 있었다.
푸른 애벌레는 생각했다. '이런 방법으로는 도저히 정상까지 올라갈 수 없다.
뿐더러 잘못하다가는 애벌레들에게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 무슨 수를 써야지'라고
생각한 푸른 애벌레는 앞뒤의 애벌레들의 꽁무니를 날카로운 앞니로 슬쩍
물어뜯었다.
그리고 그들이 "누구야!" 소리치며 동요하는 사이 교묘히 길을 뚫고 위로 앞질러
올라갔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푸른 애벌레는 전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그
애벌레 기둥을 기어올라갔다. 그리고 정상 가까이 도달했다.
더이상 올라갈 수 없을 만큼 기진맥진한 애벌레는 잠시 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현기증이 날 만큼 아득하게 높은 곳이었다. 푸른 애벌레는
간신히 떨어지지 않게 매달려서 숨찬 목소리로 꼭대기를 향해 소리쳤다.
"여보슈! 꼭대기에 뭐가 있소?"
그러나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애벌레는 다시 목을 가듬어 소리쳐 물었다.
"여보슈! 꼭대기에 뭐가 있소?"
그제서야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무것도 없소."
"아무것도 없어? 거짓말 마오!"
"믿을 수 없거든 올라와 보구려."
다시 더 퉁명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푸른 애벌레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푸른 애벌레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정상까지 올라갔다. 거기엔 기진맥진한 다른
애벌레들이 서로 밀려나지 않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엎치락 뒤치락 엉겨붙어서
쓰러져 있을 뿐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수가, 이럴 수가 있을까! 무엇 때문에 그처럼 힘들여 여기까지 올라왔단
말인가."
푸른 애벌레가 중얼거렸다.
"나도 마찬가지요, 속아서 올라온 거요. 이제 돌아갈 수도 없으니 여기서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소."
다른 애벌레가 처량하게 말했다.
이 이야기는 트리나 포올러스의 동화와 같은 우화의 일부를 옮긴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애벌레처럼 서로 다투어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려고 한다.
맹목적인 욕망, 호기심, 미지에 대한 동경과 집착이 끝없이 정상을 향해
올라가기를 원한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면서 다만 무엇인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올라간 끝에서 마침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다. 목적도 모르는 등반
끝에 다다르는 허무, 푸른 애벌레의 우화는 그대로 우리들 인생을 비유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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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성 하나
사람의 인체의 생리적 현상은 지극히 합리적이며 즉각적이어서 그 해결도 빠르고
쉽다.
가령 잠을 설친 사람은 하품과 졸음 등의 신호로 수면을 요구하고 땀을 흘린
후에는 시원한 냉수를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정신적인 문제는 그렇게 쉽지가 않다. 예컨대 이상하게 저돌적이며
반항적인 소년, 지나치게 우울하고 폐쇄적인 소녀가 실은 성장기에 애정의 결핍에서
오는 심리적 위축의 결과라고 하지만, 그것은 하루 이틀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긴 시간 동안 눈에 보이지 않게 형성되는 성격이지 때문에 그 해결도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내적.정신적 문제는 미묘하고 복잡하여 좀체 눈에 보이듯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안에 많은 정신적 결핍증을 앓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여 어느덧 치유할 수 없는 환자가 되기도 한다.
생각하면 나는 내 안에 말할 수 없이 많은 병을 앓아 왔다. 물질에 대한 욕망,
명성에 대한 갈등, 사랑이나 이별에 대한 비탄 등 숱한 인생의 병을 남모르게
앓으면서 이 나이에 이르렀다. 인생을 힘겹게 살아온 사람일수록 흔히 이렇게
말한다.
"결국 모든 문제는 자신이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문제이다. 내가
쓰는 글에 누구도 한 줄의 가필을 할 수 없듯이 내 생의 문제도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나 혼자의 십자가다"라고.
사실 나도 젊은 오기로 가득했던 시절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여 누구의 도움도
청하지 않았고 조언도 듣지 않았다.
무거운 짐을 지고 혼자 산을 오르는 사람은 고달프고 외롭다. 그 고독감 때문에
짐의 무게도 갑절로 무겁게 느껴진다. 그러나 누군가 동행하며 나누어 져줄 사람이
있다면, 말 한마디라도 건네주고 위로해 주는 이웃이 있다면 얼마나 큰 마음의 힘이
될까.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몸의 병이건 마음의 병이건 고칠 수가 없다. 의사의
진단이나 처방이 반드시 필요하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안심해도 좋으리라. 그분은 당신의
그 만족을 존중해 주실 것이니."
그렇다. 우리가 그를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부르지 않는다 해도 그는 우리를
탓하지 않으며 간섭하지 않으며 자유로이 방임해 둔다. 하느님(피라미드) 없는
무의미의 '만족' 속에 안주하게 한다. 우리는 '의미'가 부재한 현상 안에서 높고
화려한 가공의 피라미드를 쌓아 가기에 여념이 없다. 끝없는 부귀, 허망한 명성, 꿈
같은 권좌의 모래성을 기어오르기에 아귀다툼한다.
한 마리 애벌래가 기어오르는 미지의 위험한 피라미드, 그러나 그것은 '정상 없는
피라미드'였다. 최후를 완성해야 할 정상의 돌 하나는 어차피 마지막 죽음이
아니던가. 결국 죽음을 향해 인간은 그처럼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어오르는 것이다.
무엇을 서두르며 조바심치는가. 고작 그 끝에 다다를 허무의 낭떠러지는 돌아설
길없는 나락인 것을.
너무도 억울하고 허망하지 않은가. 단 한 번뿐인 생의 종국이 눈앞에 있는데 그
최후가 그처럼 비참하고 허무함은^5,5,5^. 나는 억울하여 내 피라미드의 정상에 나를
만드신 나의 주인을 임의로 모셔다 놓기로 했다.
그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물론 기초가 시원치 않은 나의 피라미드는 자주
흔들리고 작은 바람에도 쓰러질 것 같지만, 오히려 정상에 얹힌 돌 하나가 막강한
힘이 되어 허약한 생의 성 하나를 든든히 받쳐 주고 지탱해 주어 어느덧 내 삶의
중심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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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 의사처럼 참혹한 진리
'믿는 것은 맡기는 것'이라던가. 힘없는 저는 믿을 수밖에 없고 짐질 수 없는 자는
맡길 수밖에 없어 나는 믿으며 맡긴다. 내 온갖 이름, 지울 수 없는 고통과 시름을
나를 만드신 내 주인에게 맡긴다. 기어이 다스리지 못하는 감성의 난맥, 그 고질
같은 병마까지도 그분에게 맡긴다.
그는 우리가 그를 저버리고 허망한 이 세상의 피라미드를 쌓기에 여념이 없었을
때 오직 묵묵히 하늘에서 바다의 물고기떼를 바라보듯 지켜보고 계신다.
마치 물고기들이 아무리 헤엄쳐도 바다 밖을 빠져 나가지 못하듯 당신의 크나큰
품안에 자유로이 뛰놀게 하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지막 돌아설 수 없는 절대
절명의 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피라미드의 정상에 놓일 가장 중요한 돌
하나의 존재로 빛나는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생각하면 당신 없는 인생의 '만족'을 허락하신 듯하면서 실은 피할 수 없는 시간에
다시없이 준엄한 모습을 드러내는분, 지극히 치밀하고 가차없는 생명의
심판자이시다. 이제 내 인생의 수수께끼는 그분을 보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언제부터인가 생각하고 있다.
'진리는 외과 의사처럼 참혹하다'고 한다. 나는 내 안에 숨은 안일, 나태, 무의식의
수면 상태를 좀체로 벗어나지 못하니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내 안에 잠들어 있는
'나'이며 그 '나'를 깨뜨리는 일이 내 생의 가장 큰 과업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의 과업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는 이가 바로 외과 의사와도 같은
그분이시니 그는 내 환부와 상처에 매스가 되기도 하고 유약이 되기도 한다.
생각하면 삶은 하나의 결실을 향해 영위하는 나날의 수련이며 힘든 과정이다.
오늘의 수련 끝에 오는 내일의 결실, 사과나무는 가지마다 무거운 사과 열매를 맺기
위해 겨울부터 땅속에서 새순을 준비한다.
'워털루의 싸움은 이튼의 연습장에서부터 이긴 것이다'라고 했듯이 모든 승리는
길고 긴 훈련과 노력의 결실이다. 올림픽의 기록을 깨뜨리기까지는 얼마나 피나는
훈련을 쌓아야 하는가.
한 장의 졸업장은 6 년 또는 4 년의 길고 긴 학습의 결실이며 한 폭의 그림은
무수한 색과의 싸움의 결과이다.
나는 오늘을 잘살기 희망한다. 그리고 내일도 또한 행복하길 희망한다. 그러나
오늘이냐, 내일이냐 그 어느쪽인가를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오늘보다는 내일을
잘살기 원할 것이다. 설사 오늘은 괴롭고 슬프더라도 내일 기쁘고 충만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내일의 희망을 위해 오늘을 열심히 가꾸며 살 것이다.
내일이란 무엇인가. 내일이란 그 끝에 죽음이라는 절대 미래로 직결되는 길이다.
결국 내일은 그대로 죽음에의 길, 바로 피라미드의 정상이 되는 것이다. 하여
'내일을 준비하며 오늘을 열심히 사는 일'은 곧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며, 결국
인간은 아름답고 정복한 죽음을 위해 오늘을 그토록 애타고 힘들게 사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엄연한 사실을 나는 얼마나 깊이 깨우치고 실감하고 있는가. 화사한
봄볕 속에 숨어 보이지 않는 비수를 가는 시간의 싸늘한 음모를 알지 못하기에
오늘도 뜰에 기화요초를 가꾸고 은행 저금통장에 잔고를 불리기에 여념이 없다.
작은 이를 얻기 위해 신의를 팔고, 허망한 이름을 위해 위선을 가장한다.
무엇이 우리를 그같은 장님으로 만들고 있는가. 어찌하여 부당한 욕심, 이름없는
증오, 광포한 분노 속에 빠지게 하는가. 천년을 하루같이 살 것만 생각하고 다가오는
어둠을 보지 못하는가. 내일의 끝에 모습도, 예고도 없이 스며오는 종말의 그림자를
보지 못하는가.
길고 긴 미망과 집착들을 마음으로는 통회하면서도 실제로는 끊지 못하는 인간적
허약을 슬퍼하면서 나는 지리멸렬하는 감성의 실조를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여 왔다.
그런 가운데 60여 년 나를 낳으시고 길러 주시고 평생을 돌보아 주신 어머니가
천수를 마치시고 영면하셨고, 뒤이어 43 년을 함께 걸어온 생의 발려가 또한 불과
20일의 병상을 끝으로 어느 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그뿐인가, 수십년 가까이 지내던 문단의 선배들이 몇 해 사이 훌쩍훌쩍 다투어
유명을 달리하고 보니 이제 이승보다도 저승에 더 많은 그리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같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진실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고 그 죽음이 전처럼 두려운 것만은
아닌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 이승에 남아 있는 몇 가지 일만 끝내고 나면 나는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평안을 스스로 놀라운 눈으로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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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같이 짧은 시간
생각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죽음을 생각하면 못할 일이 없고, 못 참을 일이
없다고 생각해 왔으며 사실이 또한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삶의 절대적 지침이며 힘이다.
진시황은 죽지 않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고, 죽지 않기 위해 삼신산 불로초를
구했다.
인류는 죽지 않기 위해 종교를 창안했다고도 할 수 있다. 불교의 윤회, 기독교의
부활, 그 모두가 죽음을 이기려는 인간의 희망의 철학이 아니던가. 그것은 죽음이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신의 영토, 신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여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마음은 곧 신을, 영원을 생각하며 사는 마음이다.
영원히 생각하며 사는 마음, 그것은 눈에 등불을 켜는 마음이다.
눈 속에 박힌 들보를 빼내는 마음. '눈이 밝아질 때 온몸도 밝아진다'고 했듯이
어두운 눈에 불을 밝히듯 미망과 암흑에서 빠져나와 가시적인 시간을 넘어 영원을
투시하는 마음이다. 불변한 것, 광활한 것, 능력 밖의 것을 깨달으며 주어진 생명의
의미를 새기고 생명의 국적,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찾아 그 앞에 고개숙여
참회하는 마음이다.
영원을 생각하며 사는 마음은 평화로운 마음이다. 작은 일에 범연하지 않고
큰일에 놀라지 않으며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에 실매어 쓰지 않는 여유와 순리를
갖는 마음이다.
길이 막히면 돌아가고 물이 마르면 고이기를 기다리는 유유자적한 마음이다.
사라진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오지 않는 것에 마음을 태우지 아니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아끼는 마음이다.
시기와 미움, 불신과 의혹에서 스스로를 해방하며 천의무봉한 동심으로 돌아가는
마음이다. 내게 돌아오는 부당한 오해나 곤욕을 침묵으로 대답하며 부릅뜬 눈, 굳게
쥔 주먹을 조용히 자기 안으로 돌리는 인내와 용서의 마음이다. 그리고 때가 오면
스스로 꽃이 피듯 시간의 섭리에 맡기는 단란의 마음이다.
영원을 생각하며 사는 마음, 그것은 또 주어진 시간을 금쪽같이 아끼며 쪼개 쓰는
마음이다. '당신들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잠시 눈에 보이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는
안개와 같다(야고보서 4:14--15)'고 한 그안개같이 짧은 시간, 소유의 생명을
기념하기 위해 한순간 한순간을 음악의 한 소절을 건반 위에 새기듯 음미하며 사는
마음이다.
어느 날 안개처럼 사라져 영원으로 귀의할 때 더없이 평화롭고 무흠한 영혼이
되어 하늘의 가장 낮은 자리 하나를 원하는 마음이다.
영원을 생각하며 사는 마음, 그것은 제 마음 안에 제 왕국을 건설하는 마음이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바위 같은, 교목 같은 의지를 구축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얼마나 멀고 높은 험산준령처럼 오르기 힘든 정신의 성채인가.
끊임없이 비상을 시도해 보지만 번번이 추락하여 비애를 안고 돌아온다. 다만 나는
내 자리에서 더이상의 전락을 방비하기 위해 쉬지 않고 사다리를 고쳐 놓는다. 마른
등잔에 기름을 치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끌어올린다. 그리고 정밀한 하오의 봄볕 속에
기도하듯 늘어진 어린 나무처럼 순명하는 지혜를 배운다.
나의 사다리가 끊임없이 높아져 어느 날 영원의 모서리에 닿아지기를 원하면서,
그것이 곧 나의 정상 없는 피라미드의 마지막 정상이 될 것이기에. @ff
@[ 시의 길을 살아온 평생
* 황금찬'시인'
1918 년 강원도 속초 출생. 일본 다이토학원 중퇴. 1953 년 '문예'에 시'경주를
지나며'와 1955 년 '접동새''여운' 등이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함.
시문학상, 월탄문학산, 대한민국문학상, 한국기독교문학상 수상.
저서에 시집 '현장', '5월의 나무', '나비와 분수', '오후의 한강', '산새', '구름
과
바위', '한강' 외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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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유혹을 물리쳤다.
어느 친구가 내게 묻는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땐 어떤 직업을 갖겠느냐?"
나는 단호히 말했다.
"나는 시인이 되겠다."
"또 한 번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는 무슨 직업을 갖겠는가?"
나는 또 단호히 말했다.
"나는 그때에도 시인이 되겠다."
나는 열 번을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시인이 되겟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말한다. 시인이 된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내가 시인이 안 되었으면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없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
나는 아무런 재주도 없다.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대도 할 수 있는 일은 노동과
시쓰는 일뿐이다. 그것도 남만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다는 뜻이다. 내가 시를 쓰지 않았다면 아마도 노동으로 일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 노동과 시쓰는 일 외에 그래도 있다면 아마도 남을 가르치는 일일 것이다.
그것도 남만큼 잘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했을 뿐이다. 시만을 써서 살 수가
없으니까, 노동 대신 택한 것이 교사의 일이었다. 시만을 써서도 살 수 있었다면
나는 다 버리고 시만을 썼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대충 세 가지 일을 해보았다.
학생 때에 열심히 한 일은 노동이었다. 참으로 힘든 일을 했다.
낯선 이국 땅에서 인간 이하의 멸시를 받으며 노동을 했다. 그때 그 노동도 결국
시인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해방이 되면서 택한 것이 교직이었다. 교직 생활도 시를 위하여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있어서 시는 나의 삶의 전부였다. 내 삶에서 시를
우선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모든 것에 시가 우선했다.
나는 중고등학교에 만 33 년을 있었고 대학에도 20 년 이상 있었다. 그렇지만
직업인으로 직장을 삼지 않고 시인으로 직장을 삼았다. 나는 교직에 있으면서도
시도에 방해가 될 것 같은 일은 어떤 일이든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게 능력이
없는 관계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시업의 방해가 될 것 같아 하지 않았다.
교직에 있는 동안 사람들이 감투를 대단히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략하고 중상하고 온갖 짓들을 다하고 있다. 그들은
교직을 통하여 윗자리를 노리고들 있지만 나는 교직을 통하여 좋은 시를 쓰려고
했다. 그렇다고 좋은 시를 썼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마음만 두고 있을 뿐 내가 쓰고 싶은 좋은 시는 못 쓰고 있다.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결국 내가 바라던 시 한편을 못 쓰고 만다 하여도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는 그것만으로 나는 흡족하다.
교직에 오래 있으면서 별의별 권유와 유혹을 다 받았다. 어느 사범학교에 있을
때의 일이다. 내게 교무주임 자리를 주면서 하라고 했다. 완강히 거절했다.
계속하라고 하면 학교를 그만두겠다고까지 하여 겨우 면했다.
다른 직원들은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교무주임 자리가 얼마나 좋은
자리라고 사양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아무런 매력도 없었다. 내가
극력 사양하자 동료 몇 사람이 나를 찾아와 자기를 교무주임으로 추천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하기야 그들은 그것을 명예직으로 하여 장차 교장까지 바라보는 사람들이니까
그렇기도 했겠지만 나는 교장이고 무어고 바라는 게 없으니까 그러했으리라.
그후 어느 시골 학교에서 교감으로 오라고 사람을 보내 왔었다.
하지만 나는 거절하고 말았다.
그 무렵 김흠광 목사님이 어느 학교가 있는 교회에 전도사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전도사로 2 년만 사무하면 곧 목사로 안수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본래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교회 주일 학교 선생과 교회 합창단을 늘 돕고
있었으며 아버지는 내게 목사가 되라고 여러 번 권유도 하였다. 내가 목사가 되려고
했다면 그 목사의 권유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시인이지 그 외에 다른 길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김목사의 권유도
뿌리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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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와 유진오를 만나다.
하나 시인으로 등단하는 길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내가 처음 추천을 받으려고 한
것은 1939 년의 일이다. 1939 년 '문장'지가 새로 발간되었다. 거기 추천 제도가
새로 생겼다. 시는 3 회를 추천받으면 시인으로 등단하는 것이다.
그 '문장'을 구독하면서 나는 누구보다도 가슴이 벅차 있었다. 나도 추천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시 몇 편을 '문장'에 보내고 추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추천은 되지 않았다. 그후 '문장'지에 추천되는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이한직, 김종환 들의 시를 읽고 나는 놀라기도 했고 내가 쓴 것은 시가
아니라 유행가 가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 추천투고를 중지하고 다시 시작
공부에 마음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시를 쓴다고 하지만 시를 어떻게 쓰는지, 또
시인 한 사람 만나본 일도 없이 그저 혼자 공부하고 있었으니 시의 길을 쉽게 찾을
수가 있었겠는가. 나의 시작 수련의 길은 참으로 고독하고 슬픈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참고 견디며 열심히 그 길을 걸었다.
해방이 되고 지방의 보잘것없는 신문에 시랍시고 몇 번 발표한 일은 있었지만
서울에서 발간되는 잡지에 시를 발표한 것은 1947 년 작가 전영택이 하던
'새사람'이란 잡지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작품이 졸작이어서 마음의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더 컸던 작품이었다.
내가 동경 시절, 그러니까 1942 년과 1943 년 그때 우리들이 나가던 교회가
있었다. 완전히 학생들의 교회였다. 그 교회 이름은 간다교회로 나는 목사님의
청으로 매주 교회 주보에 시 한 편씩을 실었다. 그것을 약 1 년 반이나 계속했는데,
어느 날 목사님이 이젠 시를 주보에 실을 수 없다고 했다. 경찰이 강하게 막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의 서글펐던 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시의 길을 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1951 년에 강릉에서 '청포도'
동인지를 발간했다. 최인희, 김유진, 이인수, 함혜련 그리고 나 그렇게 동인이
되었다. 그때 지방에는 인쇄할 만한 곳이 없어 부산까지 가서 책을 만들었다. 그
고생 이야기를 여기에 다 할 수는 없다.
1949 년에 박목월 시인이 '시문학'이란 잡지를 발간했다. 1950 년 '시문학' 제2집
발간에 내 시가 추천되었다. 한데 추천사만 실려 있고 시는 실려 있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조지훈이 그 시고를 가지고 다니다가 취중에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나의 시도는 남들보다 험했고 멀었다. 내가 처음 '문예'에 추천받은 것이
1953 년으로 '경주를 지나며'였다. 그땐 '문장'과 같이 3 회를 추천받아야 등단하게
되는 것이다. 1954 년 두 번째 작품이 추천되었다. '문예'지가 한 10일 있으면
나온다더니 제작비가 없어서 그만 폐간되고 말았다.
참으로 나의 시도는 기구하였다. 그후 나는 '현대문학'에서 추천을 마쳤다.
시도는 준엄한 길이었지만 슬픈 길은 아니었다. 내게는 그 시의 길이 희망의
길로만 생각되었다.
1943 년 동경에서 이광수, 유진오, 박영희, 그분들을 만났을 때 그들로부터 문학의
길이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였다. 특히 이광수 선생과 여러
차례 만난 자리에서 그분은 내가 묻는 말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우리가 말과 글을 다 빼앗기고 말았다 하여도 문학은 해야 됩니다. 결국 그
사람은 역시 민족으로 남을 터이니까. 이 시대가 이렇게 어렵다 하여도 열심히
공부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이런 글을 썼다고 남겨 놓아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그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말과 글이 없어지고 나면 무슨 말로 글을 써야 합니까?"
그때 그분은, "일본말로라도 써야 합니다. 그을 쓴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가가
문제이지 글이나 말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요. 세월이 흘러간 다음에 이 글은 그때
한국 사람이 쓴 글이라고 전해져야 합니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 우리말
아닌 남의 말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었다.
유진오도, "우리가 일본말을 잘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 일본 사람만은 못하다.
그렇게 못하는 말로 문학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붓을 꺾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후 일본말로도 약간의 글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1941년에 우리말로 되어 있던 신문이나 잡지는 한 가지도 남김없이 모두
폐간되고 말았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그리고 유일한 문학 잡지였던 '문장'과 외국
문학을 많이 소개하고 평론을 주로 싣던 지성의 잡지 '인문평론'도 폐간되었다.
매일신보가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 신문이 아니었다. 일본말을 가르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 신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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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한 일에 최선을 다한다.
1940 년대 초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의 한 5 년 동안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시기였다. 우리말과 우리 글로 과연 문학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과, 또는 아무리 일본이 강하다 해도 결국 이 전쟁은 미국에 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으나 과연 그렇게 될까 하는 데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말과 글은 그 민족의 생명이 되는 것이다. 말과 글을 빼앗기고도 남아 있을
민족은 없다. 이 무렵 나는 아주 작은 산간 마을에 숨어 들어서 철학서를 탐독하며
시를 공부하였다. 결국 내가 쓰는 시가 빛을 못 보고 만다고 해도 나는 시를
쓰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강릉에서 서울로 이사온 해가 1954 년이다. 내가 서울로 이사한 것도 시
공부를 좀더 깊이 해보자는 의도에서였다. 나는 서울에 와서도 학교 생활을 했다.
해마다 봄이 되어 학교 사무 담당이 바뀔 때마다 내게 명령조로 학교장이
지시하는 것이었다. 교무주임을 맡으라느니, 연구주임을 맡으라느니, 심지어
생활주임을 맡으라느니, 그 압력이 많이 가해져 왔지만 나는 그것을 단 하루도 맡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시도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였다. 하나 학교 수업만은 누구
못지않게 충실히 했다. 남들은 그렇게도 선호하는 윗자리의 직책을 나는 무슨
형벌처럼 절대 거절했던 것이다.
내 일종의 고집을 안 어느 학교장은 내게 그 점을 존경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도 편한 것을 좋아할 줄 안다. 하지만 나의 시도에 방해되는 일은 어떠한
것이라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1965 년에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인천에서 제일 이름있는 여학교에
교장으로 가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것은 거절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교장 자격증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는 그런 것은 관계하지
말고 승낙하라는 것이다. 나는 또 하나의 이유를 달았다. 나는 학교에 오래
있었으나 행정과 사무를 전혀 몰라 교장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학교의 모든 일은 서무가 할 것이고 교무는 교감과 교무주임이 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동차며 교장 기밀비도 약간 있으니 얼마나 편하겠느냐. 수업도
없고 시 공부하기엔 가장 좋은 곳이란 것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갈 곳은
아니라고 단정하고 거절했다. 그 친구는 내게 "좀 쉽게 잘살아 보라고 했더니 끝내
거절이로군. 앞으론 내게 미안하다고 하며 후회할 날이 있을 걸세"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후회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후회는 없을 것이라고 단연코 장담해 둘 수 있다.
난 고등학교에 있으면서 어느 야간 대학 기독교 문학과의 주임교수로 있으면서도
그랬고, 한신대나 추계^36^예술대에 출강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람에게 가장
보람된 일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가 선택한 일을 위해 흔들리지 않고 일생을
바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 성과는 따지지 않고 자기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보람된 일일 것이라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하나 다른 사업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면 흥하나 망하나 그 결과가 완전히 드러난다. 하지만 이 시의
길은 자기의 일생을 바쳤음에도 그 흥망의 결과를 볼 수 없다.
사람이 가는 길이 어디 편하고 쉬운 길이 있을까마는 그러나 이 예술의 길처럼
험하고 고독한 길은 없다.
더구나 시의 길은 저 높고 험한 산을 열어 길을 새로 내는 일이다. 그리고 자기가
낸 길을 자기가 혼자 걸어가는 일이다. 그 길엔 길벗이 없다. 간혹 뻐꾹새가 울어
줄 뿐이다. 나는 그렇게도 고독한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누가 내게
시의 길을 택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행복했노라"고 대답하리라.
이 산을 넘어가면 저기에 꽃의 호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꽃의 호수는
거기에도 없었다. 다만 가는 길 옆에 몇 송이의 꽃들이 피어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시의 길은 멀고도 한없이 험한 길이었다. 그러나 갈 수 있는 길이다. @ff
@[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
* 황필호(전 동국대 교수)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미국 오클리호마대학 철학과 졸업. 세인트존스대 교육학과
졸업. 덕성여대, 동국대 교수 역임. 현재 한국철학회 회장, '어느 철학자의
편지'발행인.
저서에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랑은 질투가
아니다', '생각하는 여성을 위한 명상록', '철학적 인간, 종교적 인간', '맹자철학에
대한 칸트적인 비판', '분석철학과 종교', '종교란 무엇인가', '길 위에서'외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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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와 영혼의 괴리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육체가 빵을 필요로 한 물질
문명을 필요로 한다면, 영혼은 윤리, 철학, 종교로 대표되는 정신 문화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건전한 개인은 물질 문명과 정신 문화가 조화를 이루면서 작용하는
사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려면 경제와 정체에 나타난 물질적인
확대와 사랑, 정, 의리, 자비로 나타난 정신적인 양식이 잘 조화되어 있어야 한다.
물질 문명만을 앞세우는 사회는 '풍요 속의 빈곤'을 경험할 것이며, 정신 문화만을
앞세우는 사회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아무런 개혁 의지가 없는 '체년의 삶'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플라톤은 그의 영혼 삼분설로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지혜를 사랑하는 이성적인 영혼과 명예를 추구하는 기개적인 영혼과 물질을
추구하는 욕정적인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세 부분의 영혼이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그 개인은 바로 덕을 추구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나 국가도 이성적인 영혼에 해당하는 철학자가 통치 계급을
이루고, 기개적인 영혼에 해당하는 농공상인들의 영양 계급을 구성하고 있는 사회가
바로 이상국가가 된다. 그렇지 않고 한 가지 영혼만이 우세한 개인이나 한 가지
계급만이 지배하는 사회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 개인과 사회일 뿐인 것이다.
물론 오늘날 플라톤의 이러한 사상은 폐쇄된 사회의 패러다임이라는 공격을 받고
있다. 겉으로는 평등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인간 고유의 창조력을 무시한
인간관과 국가관을 그가 제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은 육체와 영혼을
동시에 살찌우는 삶을 영위해야 되며, 사회도 이와 같이 물질 문명과 정신 문화를
조화있게 실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 양자의 괴리에서 초래되는 구체적인 병폐를 진단하고, 이
병폐를 막기 위한 또 하나의 물질 문명적인 대안이 무엇이며, 이 대한이 가지고
오는 악순환의 결과가 무엇이며, 끝으로 이러한 물질 제일주의적인 악순환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겠다.
그러기 위하여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 대한 현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모든 문제는 지나간 과거나 아직 돌아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출발하지 말고 현재에
대한 객관적인 진단으로부터 출발해야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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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만을 중요시하는 현세주의
현세주의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숭배하는 사상이다. 사람이 육체와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행복은 제쳐놓고 육체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상이다. 더 나아가서 우정, 사랑, 의리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까지도 눈에 보이는 금전이나 권력으로 계산해 버리는 사상이다.
현재 우리의 현세주의는 크게 금전만능주의, 권력지향주의, 결과제일주의의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과거의 한국인들은 금전이나 물질에 대하여 극히 비타산적이었다. 특히
선비에게 있어서 재물은 삼강오륜을 해치는 요인이었다. 그리고 일반 부녀자의
경우에도 걸인에게 보리쌀 한줌 집어준 것까지 헤아리는 아낙네는 박복하다고
말했고, 아^36^예 '계집은 그릇 한 죽 헤아릴 줄 몰라야 복받고 산다'고 믿었었다.
이것은 타산이라는 단위조차 몰라야 복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완전히 돈을 버는 기계의 역할에 만족해 있다.
옛날에는 그래도 출세나 권력을 잡기 위하여 재물을 원했지만, 요즈음에는 오히려
돈을 벌기 위하여 출세를 한다. 그리하여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표현은 이제
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삶이 아니라, 나도 돈을 벌어서 남과 같이
흥청망청 쓸 수 있다는 개념으로 타락되어 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금전만능 사상은 차근차근 노력해서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끝장을 보려는 한탕주의로 기울어지고 있다. 사다리를 한 계단씩 오르는
대신에 몇 개단씩 한 번 뛰어오르려고 하고, 가능하면 단 한 번의 '쇼부'로써 끝장을
내려고 했던 것이 바로 금당 사건이었다. 단 한 번의 모험으로 넝쿨째로 떨어지는
호박을 기대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현금만능주의, 현찰주의, 한탕주의로 표현된
현세주의는 내세보다는 현세를 중요시하며, 내일보다는 오늘을 중요시하고, '나중에
보자는 놈'보다는 '지금 당장 보자는 놈'을 무서워한다.
둘째, 현금만을 숭배하는 현세주의는 권력지향주의로 나타난다. 우리는 권력의
허무함을 4^3456,1,24^, 5^3456,1,124^, 10^3456,12,124^사태에서 절실하게
체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려면 우선 출세를 해야 되고, '뭐니뭐니 해도
끗발이 세야 된다'고 믿는다.
셋째, 현금만을 숭배하고 그 수단으로 권력을 지향하는 현세주의는
결과제일주의를 신봉한다. 모든 것은 결과에 달려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판단할 일이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했어도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고등학생과
취직을 하지 못한 대학생은 낙제생일 뿐이다. 그리고 당장 결과를 생산하지 못하는
학문도 눈에 보이는 생산품을 제조하지 못하는 생산 공장과 같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만을 숭상하는 현세주의는 극단적인 공리주의의 변형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현세주의는 최근에 생긴 것이 아닌 듯이 보인다. 우리는 옛날부터
내세보다는 현세를 중요시하고 내세까지도 현세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샤머니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욕을 천시하면서 금전만을 추구하고
현실을 외면하면서 현세만을 추구하고, 이상을 도외시하면서 결과만을 신봉하는
이런 사상은 아무래도 최근에 생긴것 같다. 귀하신 몸 사건, 금당 사건, 하형사
사건, 주교사 사건, 장여인 사건, 은행 대형 사고들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물론 현세주의에 나타난 성취 의식이나 상향 의식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보릿고개'를 넘기는 일은 극히 중요한 일이었다. 다만 그런 의식에
정신적인 성취, 인간의 내면성, 인간적인 대화의 길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 그리하여 조나단
시걸은 "삶이란 먹는 것 이상"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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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가져다 주는 예측 불가능성 질병
파스칼은 인간을 불확정성과 권태라는 두 가지로 특징지었다. 인간의 미래는
언제나 유동적이다. 미래를 정확히 예견할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 불확정적인 미래를 자신의 설계에 맞도록 확정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과정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은 그가 그의 미래를 어느 정도 확정시켜 놓은 다음에는 곧바로
불확정성이 결여된 미래에 대하여 권태를 느낀다. 그는 다시 '모험적인 삶'을
추구하려는 악순환을 걷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불확정성과 권태의 쳇바퀴를
왔다갔다하면서 살게 마련이다. 파스칼이 인간의 외로움을 철저하게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미래를 정확히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미래에 대한 나름대로의 예측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무런 예측이 불가능할 때 그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아무런 행동 방향을
설정할 수 없다. 그저 물결 흐르는 대로 떠내려가면서 사는 로봇이 될 뿐이다.
물질 문명과 정신 문화의 괴리는 인간에게 지독한 예측 불가능성의 질병을
가져온다. 모든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사회에서는 물질적인 추구라는 목적
아래 모든 수단이 그대로 용인된다. 그리하여 사회는 순수하려는 마음, 성실하게
살려는 의지, 우정과 사랑을 심는 자세를 팽개치고 오직 금력과 권력에 대한
의지만이 칭찬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어떻게' 돈을 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버느냐가 문제이며, '어떤
방법'으로 정치에 참여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높이'올라가느냐가 관심의 초점이
된다. 그리하여 '더욱 높이, 더욱 빨리, 더욱 굳세게'라는 올림픽의 구호는 현대인의
삶의 모토가 된다.
오늘날 미래에 대한 예측은 전혀 불가능하며, 또한 예측할 필요도 없다. '안개
정국'과 '불투명 사회'를 헤엄쳐 나가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공격 정신과
무조건적인 명령과 복종의 관계만이 필요하게 된다. 도대체 내일을 점칠 수 없으며,
"간밤에 안녕하셨습니까?"라는 인사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 해야 되는 상황에서 무슨
예측이 필요할 것인가. 오직 어림짐작과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무모한
행동만이 절실히 요구되며, 또한 그런 사람만이 영웅 대접을 받는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지독한 예측 불가능성의 질병을 어떻게 치료 하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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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을 위한 삶
물질 문명과 정신 문화의 괴리가 심화되고 미래에 대한 최소한의 예측이 불가능한
사회는, 그 질병에 대한 유일한 대한으로 쾌락주의를 채택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부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육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른바 스포츠, 섹스, 쇼라는 3S 문화로 대표되고
있다. 일간 신문에서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스포츠가 되며, 말로는 국민 순화를
부르짖으면서도 매일 방영되는 TV의 화면은 우리를 섹스와 쇼로 몰고 간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섹스와 쇼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는 새로운 신화를 믿고
있다. 옛날에는 시합에 이긴 프로 권투 선수가 대통령으로부터 금일봉을 하사받게
되면 이 하사금은 다시 그날 9시 저녁뉴스에 방영되며, 고속 버스라도 타면 4시간씩
프로 야구 중계를 들어야 한다.
물론 감각적 쾌락, 돈, 명예를 추구하는 노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표현은 바로 빵이 사람에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반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쾌락주의는 결국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으며, 도리어 우리 사회를 불신 풍조로 몰고 간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첫째, 모든 쾌락은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물직적인 쾌락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기보다는 이기적인 개인이나 이기적인 공동체를 만들기
쉽다. 어떤 사람은 남녀간의 섹스와 같은 쾌락은 배타적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성한 휴머니즘이 결여된 섹스는 공유된 쾌락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칸트의 표현을 빌리면-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을 성취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상대방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성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리하여 남녀간의 관계는 사랑과 성의 오묘한 변증법적인 관계로 승화되지
못하고, 모든 여성을 소유하려는 돈 후안의 경지로 치달을 뿐이다.
그리하여 에리히 프롬은 동성간의 사랑은 포괄적이지만 이성간의 사랑은^6,36^한
명의 남성이나 한 명의 여성만을 사랑해야 된다는 뜻에서^36,3^배타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사랑하는 한 사람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사랑하도록 발전해야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개방된 결혼'의 저자인 오닐 부부는
사랑의 무한한 가능성을 "사랑에 관한 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 이상이 될 수도
있으며, 사랑의 성장은 바로 사랑의 성장 자체를 돕는다"라고 표현했다. 이들의 말을
통해 볼 때, 사랑과 성은 변증법적인 승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모든 육체적.물질적 쾌락은 완전히 충족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돈을 벌 수
있는 액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버는 돈에 비례하여 더욱 커다란 욕심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목이 마른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고, 선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피를 닦으려고 피를 사용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더욱 커다란 쾌락을 계속 소유하지 못하는 한 언제나 불만을 품게
마련이다. 오늘날 텔레비전이나 영화의 폭력 장면이 더욱 잔인하게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셋째, 또한 쾌락이 어느 정도 충족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서로 상반되는
쾌락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서로 비슷하고 상부상조적인 여러 가지의 쾌락이
아니라, 다른 쾌락을 무효화 시키는 상반되는 행위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역설적인 본성이다. 그리하여 중년의 남성은 충실한 가장이 되어야겠다는 결심과
동시에 가정을 떠나서 훨훨 날아다니고 싶은 충동을 가지고 있으며, 그는 이렇게
상반되는 쾌락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그러므로 쾌락이란 언제나 그 반대의
쾌락을 증진시키는 자기 무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넷째, 모든 쾌락은 인간 전체를 충족시킬 수 없다. 인간은 끝없이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쾌락 이상의 것을 동시에 추구하고픈 본질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쾌락이 만연한 역사 속에서도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의
행복을 초개와 같이 희생하는 고상한 영혼들이 언제나 존재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육체와 더불어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중세 철학의 표현을 빌리면,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넘나들면서 살 수밖에 없는 중간적인 존재다.
다섯째, 모든 쾌락은 일시적이다. 쾌락을 추구하는 삶 자체가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불타는 삶의 상변성을 역설했으며, 예수는 우리들에게 먼저
하늘의 나라를 추구하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쾌락은 죽음을 초월할 수 없다.
실존철학의 선구자인 키르케고르가 인간은 미적인 단계에서 윤리적인 단계로
승화되고, 그 다음에는 다시 윤리적인 단계로부터 종교적인 단계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어울려서 살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대화의 철학자인 부버는 인간을 관계의 존재 혹은 사이의 존재라고 말했으며,
실존철학자들은 안간은 "세계 내의 존재"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언제나 즐거운 사이가 아닐 수도 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움하면서 산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인간 관계는
상대방을 전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불신 풍조다.
쾌락의 배타성과 충족 불가능성은 인간에게 불신 풍조를 조장한다. 나만의 쾌락을
추구하는 이른바 '개명된 이기주의자'들은 언제나 상대방의 의도를 미리
봉쇄함으로써만 자신의 쾌락이 충족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진실된 충고까지도 '양의 탈을 쓴 이리'로 간주해 버린다.
불신 풍조가 극도로 만연된 사회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는 모든 것을
인간의 중심으로부터 보지 않고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뿐이다. 대학 교수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자가용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훌륭한 지성을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아름답고 비싼 옷을 입고 있느냐가 중요하게 된다.
모든 것은 통계와 겉치레로 판단되고, 양심이나 지성과 같은 단어들은 전근대적인
개념으로 간주된다.
더 나아가서, 불신 풍조만이 득세하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내일을 설계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현재 쾌락뿐이다. 지나간 과거의 유산을 재검토한다거나
미래를 차분히 계획한다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일이 될 뿐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외치고 '오늘만을 위한 삶'을 찬미한다. 그리하여 이상은
사라니고 미래에 대한 비전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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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문화의 필요성
의심은 의심을 해결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질 문명의 부정적인 결과들은
물질 문명으로 해결될 수 없다. 그러므로 물질 문명이 가져온 현세주의, 예측
불가능성, 쾌락주의, 불신 풍조는 정신문화의 고양으로만 제거될 수 있다.
정신문화라는 하층 구조가 다시 개선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 물질 문명이라는 상층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진단의 단계를
벗어나서 정신 문화의 개발이라는 구체적인 처방의 단계를 좀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되는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정신 문화의 개발을 외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것을 물질 문명적인 발상에서 하나의 슬로건으로 목청을 돋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현세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결과로
판단한다. 그리하여 당장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없는 윤리, 철학, 종교는 마치 상품을
생산하지 못하는 공장과 다름이 없게 된다. 모든 것은 결과에 달려 있다.
이러한 발상은 정신 문화의 창달이라는 대명제를 바로 물질 문명의 연장선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정신 문화 빈곤이라는 병폐에 대한
조치는 오히려 그 병폐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공리공론만을 일삼는
인문과학자들을 매도한다는 미명 아래 그들이 또다시 하나의 통계적인 숫자로
세계를 파악하려는 것은 바로 인문과학의 본질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신 문화는 어떻게 개발될 수 있는가? 이것을 윤리, 철학, 종교의 분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보자.
첫째, 사람이란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사는 동물이 아니다. 일정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행동해야 된다고 믿는 동물이다. 인간은 언제나
당위성을 의식하고 사는 동물이다.
그리하여 맹자는 "먼저 어떤 일을 하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을 꼭 해야 되겠다고 작정해야 된다"고 말했으며, 프랑스의 베이컨은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해야 되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으며, 킹박사는 1964 년 12월 11일 노벨 평화상을 수락하는 연설에서 "인간의
현재 상태가 인간의 당위성을 결정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윤리성을 망각한
인간은 동물과 다름이 없다.
둘째, 인간은 철학을 버리고 살 수 없다. 만족한 돼지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고민하는 소크라테스로 살아야 하며, 사회와 역사를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신에 그것을 비판적으로 판단하면서 살고, 자신과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 대하여 '영원한 반성'을 계속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철학이 살이 있는
사회는 비판을 더욱 커다란 비판으로 봉쇄하는 대신에 그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열린 사회'이다. 비판적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국민은 국민총화를 이룬 백성이
아니라 전체주의적인 발상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로봇에 불과한 것이다.
반성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사람이다. 소크라테스가 "반성하지 않는 삶이란 살
가치조차도 없다"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반성은 비판과 그 비판에
대한 이성적인 토론의 과정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사회가
반성하면서 발전하는 사회가 되려면 먼저 비판적인 기능으로 대표되는 철학이
소생해야 된다.
셋째, 인간은 당위성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 자신이외의 존재를
믿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함을 믿으며, 허약하기
때문에 강력한 존재를 희구한다. 인간은 무상하기 때문에 영원을 갈망하고,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를 찾는다. "밤이 되면 무신론자까지도 절반은 하느님을
찾는다"는 에드워드 영의 말과 "곤경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있을 수 없다"는 윌리엄
커밍스의 말도 인간이 가지는 신앙의 보편성을 지적하는 표현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종교를
가져야 한다거나 절대로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이야말로 극히 비종교적인 발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교가 부패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경험했다. 불교의 부패와 고려의 망함, 그리고 유교의 부패와 조선의
망함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고려의 패망이 오로지 당시 불교의 패망에만 그 원인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나라의 패망과 종교의 부패는 마치
동전의 앞뒤와 같이 서로 때어놓을 수가 없다. 그 까닭은 분명하다. 종교는 사람의
사람됨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그 보루가 무너지면 사람들은 참된
사람으로서의 삶을 잃게 되고 그것은 곧장 사회의 붕괴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나라를 이끌어 가는 정치 권력자들이 잘못할 때 그것을 바로잡아 주고, 그래도
자꾸만 잘못할 때는 목숨을 걸고 그 길을 가로막아 서야 할 종교인들이, 오히려
그들과 손발을 맞추어 가며 부정과 부패를 조장한다면 그 나라가 무너지지 않을
도리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우리가 정신문화의 빈곤을 인식하고
그것을 새롭게 개발, 발전, 성취시키는 일이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