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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오아시스 [파제터]

Casey,Riley 2023. 3. 9.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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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오아시스                             M.파제터 작

  맥신 마틴은 카사블랑카에서 하루 종일 쿠르 데스티에로부터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루하게 기다리던 끝에 겨우 연락이 닿아,
그가 기꺼이 만나겠다는 말을 비서의 전화를 통해 들은 것은
이틀째 되는 아침의 일이었다.
 “메르시(감사합니다).” 맥신은 프랑스어로 정중하게 말하고,
이 말이 언짢게 드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역시 프랑스어로 덧붙였다.
“친절하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원 천만에요, 마드모아젤.”
유창한 영어였다. 마치 맥신의 프랑스어가 서투르다는 듯한 투로.
 “므슈 데스티에는 어디서 만나야 될까요?”
비서와의 대화는 더 이사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물었다.
“바쁘시다는 거은 알고 있읍니다만는, 너무 기다리지 않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이에요.” 
붙임성 있는 목소리였다. 이사람은 므슈 데스티에가 어떤 재난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카사에서는 만날 수 없으니까 크사르까지 가셔야 하겠어요.”
“카사?”
“아아, 실례했어요. 카사블랑카말이에요.”
“알겠습니다.” 
어쩐지 바보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았다.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일까?
“거기까지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 므슈 데스티에의 댁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묻습니다마는.“
“므슈는 여러 군데에 저택을 가지고 계십니다.”
비서가 의기양양하게 말을 계속했다. 
“현재는 아틀라스 산맥에 잇는 저택에 계시오. 곧 마라케시로 가 주세요.
공항에 마중나갈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맥신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예정에 들어 있지 않은 일이었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었다.
고용주인 미세스 마틴 - 우연히 맥신과 성이 같았다 - 은 카사블랑카까지만
가면 된다고 했는데...
  비서는 맥신이 자기의 말을 당연히 승낙할 것으로 생각하고 비행기
출발 시간을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 지금 곧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나가라는 다짐까지 해두었다.
  맥신이 어리둥절한 음성으로  “네, 고마워요.”
하고 말하자, 여리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충고해 두겠읍니다마는, 므슈 데스티에를 기다리지 않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바쁜 분이기 때문에 시간 낭비를 매우 싫어하십니다.“
  맥신은 치미는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마드모아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맥신이 말할 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안녕.”  맥신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비서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어제 미세스 마틴의 명으로 쿠르 데스티에를 
만나러 왔다고 했을 때도, 몇 번이나 이름을 물었으나 그 비서는 제 이름을
도통 대려 하지 않았다. 므슈 데스티에는 자기와 같이 괴상한 성격을 가진
인물을 비서로 고용한 모양이었다. 이 비서와는 두 번 다시 애기할 기회가 없을
것이니 무시당한들 무슨 상관이랴.  므슈 데스티에의 시골 저택은
폴즈 잘로메 로와이아드 거리의 최고급 호텔처럼 좋을 리가 없겠지. 하지만
묵어 가라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 저녁때까지는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약혼녀를 가로챈 남자의 누이라는 여자에게 볼일이 있을 턱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녀는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쇼율더백에 화장품을 챙겨 넣었다.
길어야 2, 3일 체재하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옷은 별로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그것마자도 여기 놓아두고 가기로 했다.
  그녀는 미세스 마틴을 대신하여, 그녀의 아들인 코린이 그의 약혼녀를 가로채서
도망친 사건에 대해 사과하러 가는 길이었다. 미세스 마틴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런 경우에는 전화나 편지가 아니라 직접 찾아 가서 사과해야 한다고 했다.
  한 시간 후, 마라케시로 가는 비행기 좌석에 깊이 파묻힌 맥신은 작은 알갱이로 
안고 왔던 마음속의 불안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미세스 마틴한테 사의 겸 도움을 청하려고 영국에 전화를 했으나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일이 제대로 되어가는 것인지 알수 없어 안타까왔지만,
미세스 마틴과의 연락이 되지 않는 이상, 비서가 말한 대로 마라케시에 가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코린은 어째서 데스티에의 약혼여와 눙이 맞아 도망을 쳤을까?
쿠르 데스티에가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마틴의 집안을 망하게 할 힘이 
있는 사나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미세스 마틴 밑에서 일하게
된 이후 코린을 만난 것은 몇 번 되지 않지만, 그의 어리석은 행동이 
노상 모친의 화를 돋우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이렇게까지 엄청난 탈선을 하다니.....
  그녀는 자칫하면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는 침착을 애써 유지하려 하면서, 
자신이 이 가정과 관계를 맺게 된 2, 3년 동안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맥신은 부모를 여의었으나, 아버지가 남겨 준 유산으로 수도원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미세스 마틴에게도 맥신 마틴이란 동성 동명의 딸이 있었다.
그년는 맥신보다 열 살 위로서, 맥신이 수도원에 들어갔을 부렵에는 이미
졸업한 뒤여서 면식이 없었다.  미세스 마틴은 딸이 졸업한 후에도 수도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딸과 동성 동명인 맥신 마티의 일을 알고 있었다.
딸이 자기의 기대를 저버리고 멕시코로 가서 결혼한 다음 두 번 다시 
영국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자, 그녀는 수도원으로 찾아와 맥신에게 같이
살 수 없겠느냐고 제안했던 것이다.
  수도원장이 망설이고 있는 맥신에게 말했다.
“미세스 마티은 네가 자기 딸과 동성 동명이고, 게다고 얼굴도 비슷해서 
진작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 딸이 어머니의 반대을 무릅쓰고 결혼해 버린 지금,
그녀는 너를 그 대리로서 맞으려 하고있는 모양이야. 너자신을 위해서는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미세스 마틴은 비서를 구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사실이야.”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랑스럽다는 듯이 맥신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너는 너 나름대로의 성격을 형성하는 것이
좋을 거야, 다른 사람을 모방하지 말고. 물론 미세스 마틴의 기분도 잘 알겠어.
머리를 금발로 염색한  그 딸은 정말 너하고 꼭 닮았거든. 자그마하며 귀엽고,
젊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지만, 화장만 제대로 하면 가까이에서 보지 않는 한
아주 젊어 보이지.“
  결국 맥신은 그로부터 꼭 1년후, 즉 열 아홉 번째 맞는 생일을 한두 달 앞두고
미세스 마틴네 집으로 이사했다. 고아원이나 수도원 생활밖에 알지 못했던
맥신에게 있어서 어엿한 가정집에서 사는 것은 하나의 꿈이었다.
원장이 하려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 훨신 뒤의 일이었다.
  미세스 마틴은 자기 딸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결혼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수완 있는 사업가였으나 사생활은
수수했다. 런던의 집에서는 맥신과 단둘이 조용하게 살았으며, 맥신이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맥신에게도 그 말을 입밖에 내지
말도록 못박아 두었다.
  모로코에 주재하면서 어머니의 사업을 돕고 있던 외아들마저도 그 일에
한 몫 끼고 있었다. 가끔 맥신과 얼굴을 대할 기회가 있으면, 칠칠하지
못한 누이 탓으로 충격을 받은 어머니를 위하려는 뜻에서인지 맥신에게
감사하는 태도를 보이곤 했다. 그러난 공교롭게도 이번엔 그 코린이
더 큰 사건을 일으키고 말었던 것이다.
누이의 경우는, 그래도 상대자인 멕시코인 카우보이가 다른 사람의
약혼자는 아니었다.
  미세스 마틴은 카사블랑카의 사업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고 있었다.
이 사업에 쿠르 데스티에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맥신으로서는 확실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데스티에는 회사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의 많은 주를 가지고 있으니,
하룻밤 사이에 미세스 마틴의 회사를 망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코린이 그의 아름다운 프랑스인 약혼녀를 빼앗아 버렸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무슨 철없는 짓인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미세스 마틴은 세상의 종말이 온 듯이 
눈물을 흘렸다.
  “이제 나도 끝장이야, 그런 자식을 가졌기 때문에. 애당추 코린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부터가 잘못이었지. 여기 있는 것을 모두 처분하여 카사블랑카에 출자하다니.....
아아, 이렇게 된 이상 쿠르 데스티에한테 보복당하고 말 거야.“
  맥신은 미세스 마틴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의 도피를 한 두 사람이 잡혔을 때 코린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보다는 돈에 대해 걱정을 더 하는 것을 보자 그녀는 그만 아연해졌다.
  “므슈 데스티에는 결코 복수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요.
사건과 직접적 관계는 없지 않아요? 그 보다는 함께 도만친 여자가 추궁당할 거예요.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코리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거 아니에요?“
  “너는 쿠르 데스티에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 살마은 여류 사업가, 아니 여성 그 자체를 경멸하고 있어. 사실은 그녀와의 약혼도
결혼 지참금에 의한 재산 증식과 후계자를 낳는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 같아.
그녀를 찾지 못하면 틀림없이 보복할 거야.“
  “지금은 20세기예요!”  맥신이 숨을 죽였다.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면도 있어. 더구나 쿠르 데스티에에게는 여러 가지 피가 섞여
있는 것 같아. 원래는 프랑스인인 모양이지만, 조상 가운데는 베르베르인도 있었다고 
코린이 말했어. 그는 자기를 시크(족장)라 부르라고 한다나 봐. 우스운 일이지만,
영향력이 큰 것은 사실이야. 아직 서른 대여섯밖에 안 되었지만 대단한 사람이다.“
  맥신은 기가 죽은 미세스 마틴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용기를 북돋워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일 데스티에가 그런 사람이라 해도 법률이란 것이 있어요. 
법이 지켜 줄 거예요.“
  “법!”  미세스 마틴이 내뱉듯이 말했다.  “법을 구실로 삼으면 어떤일이 생기는지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물론 그 역시 법을 어길 바보는 아니니까. 아아, 만일 코린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와는 얼굴도 마주 대할 수 없을 거야. 소문에 따르면, 그는
국제적인 사업가이면서도 상당한 야만인이라니까 말이야.“
  “만나신 적이 있어요?”  맥신은 미세스 마틴이 말하는 쿠르 데스티에의 인물됨을
구체적으로 분명히 머릿속에 떠올릴 수 없었다.
  “응, 꼭 한 번 만났어. 내가 외국 여행을 싫어한다는 것은 너도 알 테지만,
오래 전에 딸과 함께 카사블랑카에 간 일이 있었어. 그때 만나 보았지.
맥스 - 이것이 내 딸의 애칭인데 - 는 막 머리를 염색했을 무렵이라 아주 예뻤지.“
  “따님은 므슈 데스티에한테 호감을 가졌었나요?”
  “응, 매력적인 남자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여자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거야.”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신부를 고르던 중이었다면 따님이 꼭 알맞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미세스 마틴은 맥신이 깜짝 놀랄 정도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내가 생각한 것도 바로 그 점이었어. 그들이 결혼하면 우선 사업에도 큰 도움이
될 테고 해서 말이야. 그러나 한두 번 데이트를 했을 뿐 그 이상 진전되지 않았어.
맥스의 말에 따르면, 그는 거만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 결혼할 경우 절대 복종을
강요할 것이라고 하더군.“
  “그렇다면 그의 약혼녀가 도망친 이유도 짐작이 가는군요.”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어. 코린은 핸섬헌 데다 쿠르 데스티에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이지만, 그것이 원인이 되어 그 몸을 망치게 하리라고는....“
  맥신은 불안스럽게 얼굴을 찌푸렸다.
  “아까 저더러 카사블랑카에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보다 직적 가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천만에.”  그너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 나라를 떠나면 미치고 말 거야, 외국 여행은 질색이라니까. 
더구나 이런 경우에는 말이야. 맥신, 지금까지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한 적은 
한번도 없지 않니? 나로서는 친절을 다했다고 생각하는데.“
  “흥분하지 마세요.” 맥신이 당황하여 그녀의 말을 가로 막았다.
미세스 마틴은 아주 친절했고, 여러 가지 결점이 있는 맥신을 친딸처럼 돌보아
주고 있었다.
  “제가 가겠어요. 하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세요.
므슈 데스티에 같은 사람과는 만나서 이야기한 경험도 없고, 또 외국에
나가 본 일도 없으니까요.“
  미세스 마틴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아무말도 할 필요는 없어, 사과 편지만 전해 주면 돼. 곧 편지를 쓰겠어.
전화로 말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서의가 없게 보여서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직저 찾아가야 도리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딸이 편지를
대신 가지고 간다는 식으로 쓰겠어.“
  “저는 딸이 아니에요!”
  “그는 알지 못해. 다행히 맥스가 멕시코에 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코린에게도
입을 다물라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거짓말을 해야만 하겠군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그가 맥스와 만난 것은 훨씬 전의 일이니까,
너를 보면 맥스라고 여길 거야. 그것으로 충분해. 내가 딸을 대신 보낸다면 그도
성의를 이해해 줄 거야. 그렇지 않겠니?“
  “그가 그만한 힘이 있는 사람이라면.....”
맥신은 말끝을 흐렸다.
  “코린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코린은 오랫동안 모로코에 살고 있었어. 그러므로  그 나라 일은 잘 알고 
있을 것이고, 또 그런 행동을 할 생각이었으니까 면밀한 계획을 세웠을 거야.
상대편 여자는 프랑스의 부유한 집 딸이니 어쩌면 부모가 있는 프랑스에
갔을지도 몰라.“
 “집에서 그들을 환영할까요?”
  “아마 환영은 하지 않을 테지.”  미세스 마틴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유능한 부모일수록 철없는 자식 때문에 고민하게 되는 것인가봐.”
만일 그녀가 사업에 대한 것만큼 자식에게 관심과 정열을 쏟았다면
결과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가 하고 맥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미세스 마틴은 코린의 사건으로 해서 큰 타격을 받고있었다.
이런 판국에, 이미 젊다고는 할 수 없는 그녀를 모로코에까지
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걱정하지 마시고 저한테 맡겨 주세요. 므슈 데스티에는 
저를 매도하는 정도가 고작일 테죠. 만일 비탄에 잠겨 있다면
그것조차도 못할지 모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닌, 미세스 마틴은 물론 맥신도 
미래의 신부를 잃은 쿠르 데스티에를 조금도 동정하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아마 미세스 마틴의 데스티에에 대한
가혹한 비판이 맥신의 마음에 동정이 일어날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지만, 아무리 강하고 비정한 남자라도 눈물을
흘릴 경우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맥신은 개트비크 공항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도무지 자신이 없고 일이 잘 수습될 것이라는 확신이
서질 않았다. 사교의 경험도 없고 어린 내가 이런 큰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카사블랑카는 큰 항구 도시로서, 모로코 동해안의 산업
중심지다. 맥신은 쿠르 데스티에를 만난 다음 곧장
영국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카사블랑카에 도착한 다음에도 좀처럼 그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러다가 겨우 연락이 닿았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그를 만나기 위해 사막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카사블앙카에서 약 250킬로 떨어진 마라케시에서는,
비서가 말한 대로 크사르가지 안내할 차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무잡잡한 운전사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곧 차를
달리기 시작했다.
  “영어를 할 줄 아세요?”  하고 맥신이 묻자  “예스.”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좀더 이야기를 해주어도
좋을 듯했으나, 그는 맥신이 여러 가지 질문을 해도 그저
웃음만 띨 뿐었다. 말을 걸어 봤자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맥신은 바깥 경치로 시선을 돌렸다.
마라케시는 모로코에서 3 대 고도(古都)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으로서 비옷한 평야에 발달한 아름다운 도시였다.
아틀라스 산맥의 여러 봉우리에는 아직 겨울 눈이 그대로
남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시내의 도로는 잘 포장이 되어 깨끗했으나 산에 가까워짐에
따라 점점 울퉁불퉁한 길로 바뀌었다.
  황혼이 깃들어 하늘은 제비꽃 색에서 보라색, 다시 짙은
남색으로 변해 갔다. 해가 서쪽 지평선으로 모습을 감추자,
순식간에 어둠이 찾아들면서 별이 빛나기 시작했다.
네 시간이나 차로 달린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목이 깔깔하게 탔고 얇은 코튼 슈트가 땀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었다. 지긋지긋한 생각이 들어, 견 딜 수 있는
한계에 달했다고 여겼을 때 겨우 큰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성 같기는 했으나 어두워서 분명히 알 수는 없었다.
이윽고 차는 큰 아치형 문으로 들어가 멈추었다.
  음침하고 낡은 성이로군. 맥신은 주저하며 차에서 내렸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견고해 보이는 돌로 된 성곽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금 서 있는 안뜰 한구석에는 
옛날에 사용했던 것인지 현재 쓰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잡이 하나 우뚝 솟아 있었다.
  맥신은 문득 온몸이 섬뜩해지고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난 야만스러운 일인가?
  운전사가 안으로 들어가자는 손짓을 했으므로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안은 바깥보다는 좀 나은 편이었다.
아름답게 장신된 벽, 싸늘한 대리석 바닥, 그러나 살풍경한
느낌은 맥신을 환영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다.
맥신은 떨리는 몸에 힘을 주며 애써 냉정을 유지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마드모아젤.”
  맥신은 피로했음에도 불구하고 펄쩍 뛸 듯이 놀랐다.
어느 사이에 운전사가 흰옷을 입은 하인고 교체되어 있었다.
운전사보다 나이가 좀 많고,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나이였다.
맥신이 조금 안심을 하며 곧 질문을 했다.
  “므슈 데스티에한테 데려다 주시겠습니까?”
하인이 다시 한번 머리를 숙였다.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마드모아젤.”
  “감사합니다. 하지만 즉시 므슈를 만나고 싶은데요.”
그는 잠시 머뭇머뭇하다가 대답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마는, 서방님은 지금 안 계십니다.”
  “안 계시다니요?”
되도록 빨리 마라케시로 돌아가겠다는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
치솟는 공포감과 싸우고 있는 동안, 자기 존재가 처량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장소를 잘못 알고 온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드모아젤. 서방님은 외출중이십니다.
곧 돌아오실 테지만, 어쨌든 지금은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알겠어요.”
더 이상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맥신은 잠자코 그의 뒤를 따라 대리석 복도를 걸어갔다.
아치형 입구를 지나자 바로 침실이었다. 모든 것이 현대와
동떨어져 있어 꿈이 아닌가 생각하고 가만히 벽을 만져 보았다.
꿈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었다. 
널찍하고 아주 조용해 보이는 방이었다.
마루에는 푹신한 융단이 깔려 있고 나직한 소파에는 실크 커버가
덮여 있었다. 반쯤 열린 문을 통해 욕실이 보였다.
 “곧 베가를 부르겠습니다. 서방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그녀가
시중을 들 것입니다.“
  “괜찮아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갈아입을 옷을 안 가져왔기
때문에 샤워만 하면 그만이에요.“
  “그러시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드모아젤. 서방님께서 손님이
오시거든 베가에게 시중들게 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으니까요.“
  그는 인사를 하고 나가 버렸다. 맥신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혀 입술을 깨물었다. 모로코에 온 이후 자신의
의사대로 행동할 권리를 빼앗겨 버렸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 비서, 다음은 운전사, 그리고 지금은 하인. 
이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인형처럼 조종하고 있다. 다음에는
하녀가 등장할 모양이지만, 그녀 역시 몸을 씻어 주고 옷을
입혀 주는 등 마치 어린애 다루듯이 할 것이다.
그런 뒤에 위대한 서방님인지 뭔지 하는 므슈 데스티에가
나타난다는 말인가?  그것도 오늘은 피로해서 만날 수 
없다고 하면 그만이 아닌가?  아아, 어서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다!
  입은 옷은 땀에 젖어 몸에 꼭 달라붙어 있었다. 갈아입을 옷 한 벌쯤은
가져올 걸 그랬어.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더라면, 므슈 데스티에를 쉽게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갑자기 음산한 성벽 주위에서 울부짖는 듯한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운 고독감에 휩싸여 울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았다.
환경의 변화에는 민감한 그녀었는데, 이처럼 격심한 변화를 맛본 것은
처음이었다. 말할 수 업슨 두려움으로 몸을 꼿꼿이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기로에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성의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빨리 여기서 도망쳤으면 좋겠는데.
  숨을 들이쉬는 소리에 스스로 놀라 제정신을 차렸다.
이게 뭐람, 이상한 망상을 하며 멋대로 무서워하다니.
맥신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욕실로 발을 들여 놓았다.
호화롭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어쨌든 욕조가 있기는 했다.
물이 부족한 나라인데 물이 나올까, 하고 수도꼭지를 돌리는 순간, 
문 앞에 소녀가 나타났다.
  “베가입니다.”  하고 그녀가 방긋 웃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맥신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시중들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씻어 드리겠습니다. 마드모아젤.”
맥신이 아무말 안 했는데도 그녀는 별로 언짢아하는 기색도 없이 로두브를 
내밀었다.
  “갈아입으실 것을 안 가져오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많이 있습니다. 어서 옷을 벗으세요. 서방님으로부터 도와드리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마치 이 사람들이 받들어 모시는 성주님의 산 제물이라도 되는 것 같군.
그녀는 씁쓸하게 베가를 향해 미소를 던졌다.
  “목욕은 하겠지만, 옷은 내 것을 도로 입겠어요.”
  물은 알맞게 데워져 있었다. 목욕이 이토록 기분좋은 것인지를 이제야
안 듯했다. 베가가 물속에 탄 향기로운 오일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일 베가가 곁에 있지 않다면 오랫동안 물에 잠겨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베가는 얌전하고 순종을 했으나, 자기의 몸이나 머리를 남이 씻겨 주는 데
익숙지 못한 맥신으로서는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아가씨는 정말 아름답고 젊으시군요.”
베가는 맥신의 날씬한 몸과 허리까지 내려온 금발에 갈색 눈을 돌렸다.
  “틀림없이 서방님의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
  맥신은 연한 보랏빛 눈을 크게 뜨고 입을 꼭 다물었다.
지금까지 누구한테서도 아름답다는 말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적잖이
기뻣으나, 베가의 마지막 말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므슈 데스티에는 내가 어떻게 생겼든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
베가가 머리의 물기를 말리고 있는 동안, 맥신은 부드러운 목욕 타월을
몸에 꼭 감았다.
  “나는 내일 돌아갈 테니 므슈가 어떻게 생각하건 관계없어요.”
  “이곳에 오신 손님 가운데는 오래 체재하시는 분도 많아요.”
하며 베가가 웃었다.
  여자 손님을 말하는군. 므슈 데스티에는 약혼녀가 알지 못하게 이런
사막의 성에서 난잡한 행동을 했을까? 아니야, 그는 지금도 약혼녀를
찾아 헤매고 있지 않은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추측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야.
  도망친 약혼녀를 찾기에 지친 사나이의 모습이 떠오르자 갑자기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미세스 마틴과 둘이서 그를 비난만 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면 반쯤 미치광이가
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이럴 때 약혼녀를 빼앗아 간 사나이의 누이에 
대한 태도가 심하다 해도 어떻게 불평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맥신은 베가가 머리를 다 말리고 솔질을 해주자 곧장 목면 슈트를 입었다.
메가는 난처해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므슈 데스티에와의 공식 면담에 베가가 가져온 번쩍거리는 옷은 적당하지 않다.
편지를 건네 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무복 같은 복장이 좋다.
  맥신은 엷은 화장을 하면서 흥분된 신경을 가라앉히려 했다.
머리를 뒤로 해서 하나로 묶었다. 산뜻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더 젊어 보인다는
것을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베가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들이 맨 밑에 당도했을 때 문이
크게 열리면 한 사나이가 들어왔다. 맥신은 깜짝 놀라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온몸의 신경이 마비된 것만 같았다. 이런 느낌이 든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이것이 언젠가 책에서 읽은 〈충격〉이라는 감각일 것이다.
이 낯선 사나이의 눈을 보았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고 손발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맥신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마드모아제?”  그가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맥신은 떨리는 음성을 애써 감추려 했다. 그는 억센 어깨를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이 모자가 달린 흰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표정은 험악스러웠고, 눈은 매처럼 날카로왔다. 틀림없이 쿠르 데스티에가 
고용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저는 … 므슈 데스티에를 만나기 위해 서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마음의 동요를 억제하고 겨우 이 말을 내뱉었다.
  사나이의 입이 갑자기 부드러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맥신의 떨리는 손으로
시선이 옮아갔다. 
  “나를 잊어 버린 것 같군, 마드모아젤 마틴. 아주 오래 된 일이고 또 이런
식으로 만나기가 싫어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너무 변해서 그런가?“
  맥신의 몸에서 갑자기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가까이 있는 나무 난간에
기대었다. 나무의 감촉이 냉정을 되찾게 해주어 이성(理性)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바로 쿠르 데스티에로구나. 내가 알아보지 못한 것은
첫대면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할까. 그러나 사실을 절대 밝혀서는 안 된다고
거듭 다짐했던 미세스 마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말 실례했습니다. 므슈 데스티에.”
등을 똑바로 펴고 밝게 웃어 보였다.
  “그렇습니다. 그 의상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어요.“


  쿠르 데스티에가 맥신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건 의상이 아니야, 미스 마틴.” 
아주 냉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맥신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미안합니다. 다만 그런 모습을 하고 계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
  “어떤 옷을 입건 그것은 내 자유지. 멋대로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더 이상 그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팔을 내밀어 맥신의 턱을 잡고
위로 쳐들었다.
  “여러 해가 지났으니 내가 변한 것은 당연하지만, 이에 비해 그쪽은 더 젊어 
보이는군. 믿어지지가 앟아, 곧 30이 된다는 것이.“
  맥신이 당황한 낯을 보이지 않으려고 눈을 내리깔았다.
미세스 마틴은 그가 자기 딸에 대해 거의 기억하지 못랄 것이라고 했는데.......
나이 든 여자인 체 행세하고, 더구나 미세스 마틴의 딸같이 보이게 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을 듯싶었다. 쿠르 데스티에를 만나 보고 새삼스럽게 그것을 깨달았다.
미세스 마틴은 내가 어떻게 이런 남자를 속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키가 크고 가무잡잡하며 매와 같은 눈을 가진이 사나이는 미소 한번 떠올리지 않았다.
인생 경험이 적은 나에게는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는 위협적인 존재야.
가차없이 쏘아보는 싸늘한 시선에 그만 다리가 덜덜 떨렸다.
  맥신은 목에 걸린 응어리를 넘기듯이 침을 꿀꺽 삼키고 우울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여자를 젊게 보이도록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그건 것 같군.”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치 옷을 벗겨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맥신의 몸을 위에서 아래까지 자세히 훑어보았다. 맥신의 가슴이 요란하게
고동쳤다. 그녀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아직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했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약혼녀를 찾고 계셨나요?”
의례적인 말로 시작하여 본론에 들어가려 했으나, 사교의 경험이 많은 사람과는
달리 좀처럼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 말을 하러 일부러 여기까지 왔소?”  냉엄한 음성이 들려 왔다.
  적의가 담긴 그의 공격을 받자, 개트비크 공항을 나오면서 몇 번이나
연습했던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므슈. 무어라 사과드려야 할지.....
어머니가 보내는 편지가 여기 있습니다. 사실은 어머니가 사과하러 오셔야
마땅할 것이지만......“
그가 아무말도 하지 않자 맥신은 얼른 핸드백에서 편지를 꺼내 넘겨 주었다.
  쿠르는 편지를 받자 곧 둘로 찢어 버렸다. 어리둥절해 있는 맥신 앞에다
그는 찢은 편지를 내던졌다. 미세스 마틴의 모든 것은 건 편지를.....
이 편지 때문에 내가 이렇게 먼길을 찾아왔는데도.
  “읽어 보시지도 않고.....”
맥신은 몸을 구혀 편지 조각을 주워 모았다.
  “이번 일은 어머니 책임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어머니하고는 전화로 얘기했어, 아가씨가 이리 오는 동안에.
더 이상 어머니를 탓할 생각은 없으나, 남의 일은 생각지 않고 자기 꿈만
좇도록 자식을 키운 어머니에게도 잘못이 없다고는 말 할 수 없지.“
  “코린은 평소.....”  말로 마치기 전에 목 뒤로 그의 손이 내려와 맥신을 
일으켜 세웠다.
  “내버려 둬요.”  그는 맥신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분노의 눈을 빛내면서, 맥신이 자기를 모독한 코린을 변호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다음 그는 맥신의 몸을 붙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맥신은 그 손을 뿌리치려고 세차게 몸부림쳤다. 몸이 아프고 그의 숨결이
얼굴에 와 닿았다. 겨우 그 손아귀에서 벗어났으나, 몸이 비틀거려 가까이
있는 가구에 의지했다.
  “두번 다시 그놈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이 성에 있는 동안에는
이름도 입밖에 내지 말기를 바라겠어. 알겠지?“
  “미안합니다.”  맥신은 눈에 공포의 빛을 띠고 뒷걸음질 쳤다.
어째서 이런 상황에 빠져들어야 한다는 말인가. 사실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그 정도로 까지 미세스 마틴에게 은혜를 입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맥신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약혼녀를 사랑하고 계시니, 코린을 증오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매우 미안해 하고 계십니다.“
  “아아, 상상할 수는 있어. 그녀도 불행하지, 소중한 아들이 도망쳐
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안달하고 있는 것은 자식보다도 사업이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다면 아가씨를 여기까지 보냈을 까닭이 없지.“
  “아, 아닙니다. 므슈.”
  “나를 위로하려고 딸을 보낸 것일 테지?”
머리를 흔드는 맥신에게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오만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아가씨는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분명히 흥미를 자아내게 
하고는 있어. 그러나 천사가 아니라는 것은 갖가지 풍문으로 알고 있지.
벌써 옛날에 순결을 버린 여자야. 나는 그런 여자에게 마음이 끌리지는 않아.“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맥신은 그의 입장이라면 어떤 남자라도 분노가 치솟을 것이라는 점, 또 자신은
그를 달래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는 점을 잊고 큰 소리로 외쳤다.
  “좋아, 좋아. 연극은 그만둬. 아가씨의 본성이 탄로났다고 해서 사막 한가운데
내던지지는 않을 테니까."
  맥신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쿠르의 시선을 견뎠다. 미세스 마틴의 딸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의 이야기가 전혀 거짓말은 아닌 듯싶었다.
멕시코인과 줄행랑을 쳤다는 것, 코린의 말에 따르면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녕 관해 알고 있는 것의 거의 전부였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대역을 하려 하다니..... 맥신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고통스럽게
숨을 들이마셨다.  “제 생각에는.....”
  "뭐지, 이번에는 또 무슨 이야기인가?"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므슈." 
그년는 쿠르의 예리한 시선응ㄹ 받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 기분은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미 말씀드렸기에...."
  "기분?"  그는 조롱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며 다시 맥신의 몸에 손을 댔다.
  "무척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군. 재미있는 여자야. 약혼자가 도망쳐서 실망해 
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상대가 되겠군."
  이 사람은 약혼자인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을까? 그녀는 어째서
이 사람을 버리고 코린을 택했을까? 억세고 탁력이 있어 보이는 육체,
균형잡힌 얼굴 모양, 자신에 넘친 눈, 틀림없이 이 사람은 그녀에게
아무런 자유도 주지 않았을 거야. 그녀가 절망을 느낄 정도로 복종을
강요하고, 반면에 이 사람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으면서 방종한
생활을 한 것이 아닐까?
  어깨에 얹혀 있는 쿠르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맥신은 전율을 느꼈다.
이 넓은 방에는 단둘만이 있었다. 희미한 불빛을 받은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겹쳐져 있었다. 조용했다. 심장의 박동 소리가 점점 커지고 맥박이
빨라졌다. 아아, 얼마나 관능적인 입술인가. 그 입술로 키스를 한다면.....
  맥신은 매혹될 듯한 쿠르의 입술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을 깨닫고
황망히 얼굴을 돌렸다. 쿠르의 손이 어깨에서 떨어지자 숨막힐 듯한 긴장도
어느 정도 풀어 졌다. 
  “미안합니다. 방해를 해서. 하지만 여기까지 온 것은 제 의사가 아니었어요.
다만 저는 카사블랑카에서 편지를 전하고 곧 런던으로 돌아갈 작정이었어요.“
  “런던에는 돌아갈 수 없어, 당장에는.”
쿠르가 다시 다가왔기 때문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다.
  “무슨 뜻이죠? 오늘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읍니다마는, 내일이라면....”
  “어쨌든 아가씨는 당분간 나와 같이 있어야 해, 어머니도 그럴 생각에서
보냈을 테니까.“
  “아니에요, 착각하지 마세요.”
그녀는 미세스 마틴의 의도를 설명하려 했으나 쿠를가 중단시켰다.
  “여자에 대해서는 착각한 일이 없어. 편지를 전하기 위해 일부러 보내다니,
내가 믿을 것 같은가? 화해를 위한 선물이지. 그 두 사람이 돌아올 동안
나를 위안해 주자는 속셈이야. 그것을 몰랐다고는 하지 말아, 미스 마틴.“
  “그렇지 않아요.”  맥신은 창백해지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쿠를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틀림없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 마음이 맥신한테 
끌렸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 거야. 첫눈에 아름답다고 생각했었지.
그러나 가까이서 보니 무절제한 생활의 그림자가 엿보여 마음이 달라졌어.
그 나이에?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정도였어. 몇 번 만나는 동안에
내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겠어?“
그의 태도에는 부아가 났으나, 호기심이 더 컸다.
  “무얼 깨달았죠?”
  “놀랄 정도의 것은 못돼. 동생한테서 그 아름다운 금발이 사실은 물들인
것이라는 말을 들었어.“
비난하는 듯 쿠르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이것은 다름 사람한테 들은 말인데, 어머니와 같이 카사블랑카에
오기 전에 연인과 휴일을 즐겼다고 하더군. 아버지 또래의 나이가 든 사람하고
말이야.“
  맥신이 새파랗게 질려 말도 못하고 있는데도 쿠르는 태연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놀라는 체하지 않아도 좋아. 장난으로 키스할 때 보니 흥이 깨진 듯한
태도더군. 아마도 내가 인사 정도의 키스밖에 하지 않아서 실망했을 거야.
그 후 나도 관심이 없어져 거의 생각하지 않았었지, 바로 이틀 전까지만 해도.“
  “제 말을 좀 들어 보세요.”
  “미안하지만 핑계 따윈 듣고 싶지 않아. 하지만.....”
맥신의 턱을 손으로 받치고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약혼녀를 잃어보리고 나니 마음이 쓸쓸해. 다시 젊은 여성과 기분 전환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제발 그러지 마세요.”
  “동생한테서 연락이 없을 경우, 마드모아젤도 같이 그를 찾으러 가 주어여겠어.
사막에서 돌아올 무렵에는 그 머리가 다시 까맣게 변할지도 몰라.“
  “그럴 수 없어요. 돌아가겠어요.”
  “코린이 내 여자를 돌려줄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맥신은 눈을 크게 뜨고 자기 입장도 잊은 채 크게 외쳤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녀가 돌아오기를 진정으로 기다리는지 의심스러워지는군요.”
쿠르가 눈썹을 찌푸리고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진실한 사랑은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경험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으나, 책을 통해서는 여러 가지를 읽은 그녀였다.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남자는 여자만큼 관대랄 수 없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다신처럼 정조를 소중히 여기는 분이, 다른 남자와 도망친 약혼녀를
용서할 것 같진 않군요.“
  쿠르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맥신으 맥신은 좀더 신중한 말을 택했어야
했다고 후회하면서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당신이 낙담하고 있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나도 그녀를 찾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하지만 나는 런던에 돌아가야만 합니다. 나를 붙들어 놓고 괴롭히는 것도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저주스러운 사내의 누이 띠윈 곁에 두지 않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쿠르는 크게 어깨를 들먹이고 내뱉듯이 말했다. 
“못박아 두지만, 아가씨는 돌아갈 수 없어. 나와 같이 그들을 찾아 보는 것이 왜
싢은지 이해할 수 없군.“
  “아시지 않아요, 므슈? 나는 이 나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 않아. 그도 또한 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지 않겠어? 누이가 여기서
인질로 잡힌 줄 알면 그도 제정신으로 돌아올지 모르지 않겠어?“
  맥신은 억지로 웃음을 띠었다.
“일반적으로 영국의 가정은 그토록 굳게 맺어져 있지 않아요, 므슈. 누이를 위해
자기 장래의 행복을 위험에 빠뜨릴 사람은 없을 거예요.
  “어쨌든 안 돼.”  쿠르의 단호한 태도에 맥신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들이 반결될 때까지 같이 있어 줘야겠어. 당신에게도 인간의 마음이 있다면
나를 조금은 위로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미스 마틴?“
  긴장감이 분노로 변했다. 
  “말도 안 돼요. 사막의 시크처럼 행세하지 마세요.”
  “사실이 그래. 증조모 시대부터 시크의 칭호를 받고 있었지.”
분명히 이 사람은 야만적인 정복자의 이미지에 꼭 들이맞아. 맥신은 치솟는
공포를 억누르면서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사막 사람들에게 친절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돈에 대해서는
아주 후하니까요.“
  “돈으로 사라잡는 것은 아니야. 나는 가능한 한 그들에게 힘을 빌려 주고
있을 뿐이야. 동족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대신에 그들도 충성을 다짐하고
있지. 모두가 형제인 셈이거든. 아무리 뇌물을 뿌려도 미스 마티의 도망을
방조해 줄 사람은 하나도 없어.“
  “어마, 당신은 프랑스인이 아니던가요?”
  “프랑스인이지. 그러나 핏줄을 더듬어 올라가면 스페인인과 영국인의 
피가 섞여 있지. 그렇더라도 이곳은 내 나라이고, 아마 여기에 뼈를 묻게 될 거야.“
  쿠르가 한 걸음도 양보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맥신은 더 이상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증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서로 쏘아보고 있었다.
맥신의 목구멍에 고통이 전해지고 몸 안에서 뜨거운 물결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에 힘이 빠졌다. 위험하다고 생각한 순간, 쿠르의 손이
뻗어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마드모아젤!”
  억양 있는 음성이 맥신을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했다. 홱 몸을 뿌리쳤으나,
머리가 어지러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문득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입밖으로 내었다. 
  “두 사람은 찾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쿠르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관찰하듯
맥신을 바라보았다.
  “그때의 일은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어.”
턱을 긴장시키고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동생한테는 결코 유쾌한 일이 안 생기겠지. 설사 그들을 찾아내지 못한다
해도 꼭 보복은 하겠어.“

  맥신은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깬 뒤에도, 모든 것이 현실이란 것을 
이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어젯밤 대화가 끝난 뒤, 쿠르는 식사를 같이 할 터이니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맥신이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하자, 제라바(긴 옷)를 입으라고 했다.
다시 그것을 거절하자, 쿠르는 분연한 표정으로 맥신을 번쩍 들어서 안고
계간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맥신은 어린아이처럼 가볍게 들려 침대에 난폭하게 내동댕이쳐졌다.
  “갈아입어, 마드모아젤. 이런 모습을 한 여자와는 같이 식하할 수 없어.”
  머리가 혼란해 있지 않았더라면 쿠르의 횡포를 심하게 비난했을 것이다.
쿠르의 태도가 그토록 오만하지 않았다면, 그녀로서도 자존심을 버리고
제라바로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그의
얼굴조차 보기 싫었기 때문에, 베가에게 식사를 방으로 가져오라고 했다.
  처음에는 두려움이 앞섰으나, 이윽고 호기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미세스 마틴 밑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 핸섬하다는 남자를 몇 사람 만났으나,
쿠르 데스티에만큼 강렬한 안상를 남긴 사람은 없었다. 베르베르인의 
후예라는 말을 듣고 보니 과연 그럴듯했다. 얼른 보기에 유럽인 같은 용모
뒤에 숨은 야성미나, 이상할 정도로 복수심에 불타는 듯한 성격이 그
증거인지도 모른다. 관능적인 입매에도 그 특징이 나타나 보인다.
틀림없이 여자를 기쁘게 하는 데 있어서는 일류의 솜씨를 갖고 있는 동시에,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방법도 또한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맥신은 뜨거워진 얼굴을 싸늘한 베개에 밀어붙였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그년가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손목시계가 멎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빠져나와 창가로
달려갔다. 바로 눈앞에 산과 황야가 전개되고, 기분나쁜 고독감이
육박하듯 몰아쳐 왔다.
  어젯밤의 기억이 되살아나자 얼굴의 핏기가 가셨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쿠르의 허락 없이 어떻게 이런 데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미 때는 늦었다.
  맥신은 고조되어 가는 격정을 억제하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안절부절 못하고 울고 있는 것을 베가가 발견한다면, 곧바로 쿠르에게
보고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해서 그의 경멸을 받게 된다면 점점 더
입장이 곤란해질 것이다.
  마음을 굳게 먹고 크게 심호흡을 했으나, 새로운 하루에 대처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만 같았다. 무엇으로 자기를 지탱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쿠르 데스티에를 찾는 일이었다. 만일 아직도 나를 여기에 잡아둘
생각이라면 어떻게든 설득을 해야지. 어제는 그도 피로해 있었을
것이고, 신경질을 부린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특히 자기 약혼녀를
빼앗아 간 사나이의 누이에게는....
  바져든 궁지에는 벗어날 길은 없을까? 혹시 쿠르에게 진실을
고백한다면.....물론 어제처럼 귀도 기울이려 하지 않을 테지만.
그러나 만일 들어준다면....안 돼!  그렇게 되면 도망친 두 사람을
찾아냈을 때, 코린과 미세스 마틴이 더욱 불리하게 될 뿐이야.
그렇다, 앞으로 하루나 이틀 동안 나를 코린의 누이로 생각하게
내버려 두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녀를 무척 경멸하는 모양이니
말 이상의 과격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그토록 싫어하는
여자에게라면 손을 대는 것조차 피할 것이다.
  나이트 웨어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젯밤엔 할 수 없이
베가가 놓고 간 짧은 실크 나이트 드레스를 입고 잤다.
얇은 옷감을 내려다보면서, 어제 입고 온 옷은 어디 갔을까 하고
생각했다. 베가가 가져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흥분한 맥신의 질문에 대해 베가가 공손히 대답했다.
“서방님이 가져가셨습니다. 그리고 태워 버리라고 명령하셨답니다.”
  “태워 버리다니....그런.....”
  “하지만 사실입니다, 마드모아젤.”
베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니까 이제는 제가 가져온 것을 입으실 도리밖에 없습니다.”
놀람과 분노로 아연해진 맥신의 눈앞에, 베가가 흰 튜닉과 바지를
내놓았다. 이것 역시 고급 실크로 만들어져 있었다. 쿠르가 외출하기
전에 만나려면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불평을 말할 시간이 없고, 
더군다나 베가를 나무란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모든 것이
쿠르 데스티에의 지시에 의한 것이니까.
  “알겠어요.”  맥신은 마음속으로 분놀르 억제하며, 베가가 들고
있는 옷에 손을 내밀었다.
  쿠르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뻔뻔스럽군. 정말 내 옷을 
태워 없앴을까? 어젯밤 옷을 갈아입고 같이 식사하자는 것을 거절한
탓일 거야. 자기 힘을 과시할 속셈이야, 정말 야만스러워.
신중히 처신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 하고 그녀는 다짐했다.
그러지 않고는 당자에라도 뛰어내려가 부아를 터뜨릴 것 같았다.
  마음을 가라앉힌 뒤 얼른 몸을 씻고, 할 수 없이 베가가 가져온 옷을
받아들었다. 베가는 맥신의 아름다운 몸매를 칭찬하면서, 모양 좋게
부풀어오른 가슴에 천을 감았다. 바지는 크고 넓었으며, 가늘게 된 발목
부분은 묶게 되어 있었다. 헐렁하고 편했으나, 걸을 때마다 긴 다리의
선이 돋보였다. 발에는 끝이 굽은 묘한 실내화를 신었다.
  자기 모습을 볼 수 없는 데다, 말끝마다 칭찬의 말만 늘어놓는 베가를
보자 마음이 안타까왔다. 맥신은 얼른 머리를 빗고 뒤로 묶었다.
웨이브 진 머리를 늘어뜨리는 편이 우아햐게 보였으나, 쿠르 데스티에한테는
좋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 옷은 실제와는 달리 요염한 분위기를 풍겨 주고 있었다.
그 속에 있는 자기는 설익고 딱딱한 소녀인데도......
  준비가 끝났다. 맥신은 익숙지 않은 복장에 신경을 쓰며서 계단을
내려갔다. 베가가 아침 식사로 커피와 뜨끈한 크로와상, 그리고
체리 잼을 가져다 주었으나 맥신은 커피만을 입에 대었다.
  놀랍게도 넓은 객실로 걸어오는 쿠르의 모습이 금방 눈에 띄었다.
맥신은 베가가 정성스레 걸쳐 주는 숄을 흔들며 당당하게 쿠르 앞에 나섰다.
복장으로 미루어 그는 외출하려는 것 같았다. 맥신이 다가오자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번 훑어보고는, 숄 틈으로 드러나 보이는 그녀의
맨살에 뚫어질 듯 시선을 꽂았다.
  정말 징그러워. 맥신은 얼굴을 핑크빛으로 물들이고 혐오감을 애써
감추면서 얼른 앞을 가렸다.
  “므슈.”  형식적인 인사는 할 필요도 없었다. 또 옷을 가지고 불평을
해서 새삼스레 그를  적대시하는 것도 불리하다는 생각을 했다.
  “할말이 있읍니다마는.”    “그래?”
맥신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아침 인사를 생략했다. 약간 홍조를 띤
그녀의 뺨에 빈정거리는 듯한 눈길을 던졌을 뿐이었다.
  “네.”  맥신은 예정된 행동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마라케시에 돌아가고 싶어요. 당신이 외출하기 전에 차를 준비 시킬 수 
없을까요? 물론 그냥은 타지 않겠어요.“
  “어째서 내가 차를 수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미스 마틴?”
  치솟는 부아를 참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어제 나를 여기까지 싣고 온 운전사가 있을 거예요. 그에게 부탁해 주세요.”
  “안 돼 !”  그는 기분이 상한 듯 크게 눈을 뜨고 분명하게 말했다.
“미스 마틴은 나와 같이 사막으로 가야만 해.”    “싫어요 !”
맥신은 지금까지 숨겨 온 감정을 노골적으로 터뜨리며서 외쳤다.
“절대로 싫어요. 이 따위 꼴사나운 옷은 입힐 수 있었지만, 사막에는 결코
데려가지 못할 거예요. 누가 무어라 해도 내 의사를 좌우하진 못해요.
당신이 불쌍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갈 수는 없어요.“
  “아니, 가야 해.”  
가까이 다가온 그의 잔인스러운 입술이 희게 빛나고 있었다.
“오는 아침엔 누구나를 해치웠으면 하는 심정이야. 상대가 아가씨라면
안 될까? 비열한 가족의 어느 한 사람에게라도 고통을 주면 내 마음이
조금은 풀릴지도 몰라.“
  “당신이 나를 싫어한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는 눈썹을 잔뜩 치켜올렸다.
  “그러니까 나를 데려간다 해도 즐거울 리가 없지 않겠어요?”
  그는 떡 벌어진 어깨를 보란 듯이 으쓱해 보였다.
“별로 기대는 하고 있지 않아. 단지 욕망의 배설구 정도는 될 것 같아.
그리고 아가씨를 건드릴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면, 욕구불만에 괴로워하는
아가씨의 모양이라도 즐기겠어.“
  “말을 삼가세요.”  맥신은 공포와 분노와 혐오감이 뒤섞인 눈으로
그는 노려보면서 뒷걸음질쳤다. 
  “함께가는 일은 거절하겠어요. 이런 식으로 나오기 때문에 여자가
도망치는 거예요.“
  순간 쿠르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졌다. 맥신은 반사적으로 섬뜩한
느낌이 스쳤다. 그러나 쿠르는 탁 하고 손뼉을 쳤을 뿐이었다.
그러자 충실한 그림자처럼 하녀인 아이자크와 베가가 나타났다.
쿠르는 맥신이 알아듣지 못할 말로 무언가 두 사람에게 명령했다.
  도망칠 길이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그가 아무리 잔인한
계획을 품고 있더라도 빠져나갈 길 이 없는 것이 확실했다. 도망치면
붙들릴 것이다. 퓨마처럼 날랜 몸이니 발도 빠를 것 같았다. 설사 현관
까지 도망친다 해도, 밖에는 그의 부하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베가는 쿠르의 명령에 따라 맥신의 어깨에 모자가 달린 망토를
걸쳐 주었다.
  “추위를 막는 동시에 더위에서도 몸을 지켜 줄 가야. 자아,
어서 밖으로 나가지.“
  맥신은 그 오만한 명령을 무시했다. 그러고는 경멸하듯이 베가를 
노려보면서 망토를 마루에 떨구었다.  “유괴당하기는 싫어요.”
  “뭐, 유괴? 누가 그 말을 믿겠어, 사랑하는 동생을 찾으러
사막에 왔다고 모든 사람이 믿을 텐데?“
  아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맥신의 뇌리에 미세스 마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 돼, 이대로 미세스 마틴의 딸로 행세해야 해. 이 사람은 위협 그
자체만을 즐기고 있을 뿐, 입으로 말했듯이 그 무서운 행동을 실천하지는 
않을 거야.
  도망칠 곳을 잃은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자, 갑자기 쿠르가 그녀를
덥석 안아올렸다. 맥신은 소리 지르려 했으나 두려운 나머지 숨이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젯밤처럼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밖에 서 있는
대형 트럭에 옮겨졌다.
  운전석에 있는 사나이는 키가 작고 아주 험상궃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쿠르는 아무말도 없이 맥신을 그 사나이 옆에 앉히고, 이어서 자신도
그 곁에 앉았다. 그러고 나서 문을 탕 닫고 운전사에게 출발 명령을 내렸다.
  뒤에서도 사나이들을 태운 차가 두 대나 따라오고 있었다. 쿠르가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뒤따르는 차에 신호를 보내는 순간, 맥신은 몸을
구부려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손목을 힘껏 물어뜯었다.
  작은 잇자국에서 피가 스며나왔다. 맥신은 별안간 자기가 한 행동이
무서워졌다. 쿠르가 침묵을 깨고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그는 손에
분노를 집중시켜 맥신의 머리를 자기 쪽으로 돌려놓았다. 맥식은 반쯤
얼이 빠져, 살기등등한 쿠르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쿠르는 프랑스어로 욕을 했으나, 맥신이 생각했던것보다는 휠씬
조용한 어조였다. 도로에 시선을 돌리고 있던 운전사가 쿠르의 손목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조심해서 운전하라는 쿠르의 꾸중을 듣자
서둘러 앞을 보았다.
  맥신을 쿠르의 상처가 뜻밖에 큰 데 놀라 얼굴이 창백해져싸.
“미, 미안합니다, 므슈. 하지만 억지로 트럭에 태우는 법이 어디 있어요?
야만적이에요.“  ”야만적인 것은 내가 아니야.“
쿠르는 상처입는 손을 맥신의 몸에서 떼었다.
  “당신은 정말 싫어요 !”
이렇게 외치기는 했지만, 정면으로 얼굴을 들지는 못했다.
  “내가 일부러 깨문 것은 아니에요.”   “미안해요.”
이번에는 맥신이 얌전히 말했다.  “감아드릴까요?”
쿠르가 손목에 수건을 감으려고 애쓰는 것을 보고 물었다.
  쿠르의 표정이 약간 부드러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겠어.”  씁쓸한 얼굴로 손을 내밀며, 그는 새삼스레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대단치 않은 것을 가지고 법석을 떤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나라에서는
약간의 상처라도 잘 치료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더위 때문에 패혈증에
걸릴 우려가 많지.“    ”알겠어요.“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저도 모르게 손끝을 떨었다.
  “후회할 것은 없어. 다만 잠시 동안은 얌전해지기를 바라겠어.
이 이상 아무일도 안 생긴다 해도, 운전사에게는 큰 화젯거리가 될 테니까.“
  맥신은 손수건을 다 감고 우물쭈물 손목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쿠르의 굳어진 얼굴에서 창밖으로 돌리니, 그곳은 땅이 메말라서 풀이나 나무도
자라지 못하는 곳이었다.
  “사막이지.”  맥신에게 만족을 주는 대답이 아니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자동차를 타고 가서 그 뒤에는 말로 바꿔 타야 해. 지명을
말해 주면 오히려 머리가 혼란해지겠지?“
  맥신은 되도록 쿠르에게서 몸을 멀리하고 다른 일을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불안을 가라앉히고 태연해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점심식사 때도
차는 멈추지 않았고, 다만 수통과 라이보리 빵으로 만든 샌드위치가 건네졌을
뿐이었다. 배가 부르자, 더위 탓인지 그만 졸음이 왔다. 맥신은 시트에 기대고
있는 동안 스르르 잠이 들었다. 몇 시간이나 지난 다음 차가 멈춘 것을 
깨닫고서야 눈을 떴다.
  “일어나요, 마드모아젤.” 쿠르가 조용히 몸을 흔들었다. 맥신은 쿠르의 품안에
안긴 것처럼 그에게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망토가 벗겨져 속에 입은 긴 옷이
드러나 보였다. 쿠르의 시선은 그녀의 목 언저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맥신은 별안간 얼굴이 빨개졌다. 그가 언제부터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었을까?
  허둥지둥 몸을 떼고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좀더 일찍 깨우지 않았어요?”
  “서두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 아기처럼 잘도 자더군, 내 품에 꼭 안겨서
말이야. 이 팔로 안아 주길 잘했지.“
  맥신은 심한 굴욕감을 느끼며 트럭에서 내렸다. 그러나 이런 기분과는 달리
또 다른 흥분이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일까, 오늘은 이것으로 끝난 것일까, 하고 생각한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대신 말이 몇 마리 발을 구르고 있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는 게예요?”
그녀는 정신이 맑아져 쿠르에게 몸을 돌렸다.
  “말 탈 줄 아나?”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투였다.
  맥신은 코린의 누이가 말을 탈 줄 알았는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라요. 어쨌든 더 이상 가는 것은 거절하겠어요. 당신은 비겁하고 
독재적인 유괴범이에요 !”   “말조심해.”
그의 눈에 그늘이 지며, 더 이상 말다툼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누구든지 자기 동생을 찾으러 제 의사에 따라 이곳까지 왔다고 믿을 거야.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만드는 거야?“
  두 사람 앞으로 베르베르인이 큰 수말을 끌고 왔다.
맥신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미터도 가지 못하고
쿠르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꾸짖으며, 발버둥치는 맥신을
높은 안장 위에 올려놓고 자기도 뒤에 올라탔다.
그런 다음 등자(?子)에 발을 얹고, 주위에 있는 무표정한 사나이들에게 지시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이겼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야. 맥신은 쿠르가 데려가는 것을 
단념시키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쳤다. 맥신이 싸우고 있는 상대는 쿠르뿐이
아니었다. 쿠르와 몸을 대고 있는 탓으로 싹트기 시작하는 자신의 내면적 감정과도
싸워야만 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파악할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긴장감이 고조되어 불꽃이 튀겼다. 쿠르를 때리려고 주먹을 꼭 쥐었으나,
이미 그에게 두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마드모아젤, 내게도 인내의 한계는 있어. 이렇게 손목을 잡히고 싶다면 
별문제지만, 그렇지 않다면 얌전히 있는 것이 좋을 거야.“
  “누가 잡혀 있고 싶댔어요 !” 맥신이 낮은 소리로 내뱉듯이 말했다.
“나쁜 일은 코린이 했는데도 나를 붙잡아 두고 있는 당신의 의도를 모르겠군요.”
  쿠르가 손목을 쥔 채 비웃듯이 말했다.
“어찌 된 일인지 마드모아젤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뀐 듯한 기분이야. 초면이
아닌데오 처음 만난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는 그 비결을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어.“
  “비결 따위는 없어요.” 
어제 한 말과 모순되는 것을 맥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좀더 그럴듯한 말로 나를 응징하는게 어떻겠어요?”
  몸부림을 쳤으나 안장과 그의 손 때문에 오힐 아픔이 더해질 분이었다.
맥신은 그의 격렬한 심자의 고동이 전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맥신의 심장도 고동쳤다. 가는 다리에 그의 다리가 압박하듯 닿았다.
쿠르의 근육은 긴장되어 있었다. 맥신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몸을
떼려 했으나, 그럴 때마다 바로 뒤에서 그가 힘을 가해 왔다.
  쿠르는 손목을 쥐었던 손을 맥신의 턱밑으로 가져갔다. 그녀가 홱 돌아보자,
“언젠가 이렇게 안아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어? 그 소원을 이루는 데 10 년이나
걸렸군. 잃어버린 시간을 메워야 하지 않겠어?“   하고 속삭었다.
  맥신은 부정하려 했으나, 그 무방비한 입술은 난폭한 쿠르의 키스로 
막히고 말았다.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말 등에 타고 있는데도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쿠르의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를 애무하고 손은 허리를 감아 왔다.
맥신은 겨우 몸을 빼고 타는 듯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정말 싫어요 !”  
쿠르에게 말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게 믿게 하려고 했다.
  쿠르의 손이 맥신을 떠나 뒷발을 구르고 있는 말을 어루만졌다.
“사랑하지 않더라도 즐길 수는 있는 거아, 마드모아젤. 괴롭혀 줄 생각이라고 
내가 아침에 말하지 않았어? 자아, 내 말이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말을 삼가고 여행을 계속하는 것이 좋을 거야.“  하고 말했다.
  다음 장소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해가 져서 어두웠다. 이런 고장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밤이 빨리 찾아온다. 인원을 세어 보니 쿠르의 부하는 
열 두명으로서, 나란히 서서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를 존경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리더의 뒤를 따른다는 습관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쿠르는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그 부하인
베르베르인들이 그를 시크라 부르며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쿠르가 멈춰 서서 손을 들자 그들은 야자나무 밑으로 들어갔다. 쿠르가
말을 진정시키고 있는 동안, 맥신도 조심스럽게 말에서 내렸다. 발의 감각이
약간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이 땅에 닿기까지에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강력한 팔에 의지하여 말을 타고 있는 동안에는 편했으나, 그와 오랫동안
몸을 붙이고 있어서 예기치 않은 변화가 맥신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괜찮아?”  무뚝뚝한 목소리에 그녀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맥신은 머리도
들지 않고 가만히 끄덕였다.
  더 이상 쿠르와 말다툼을 한다는 건 무리였다. 지금상태에서는 어떤 수단을
쓰건 승산이 없다. 진실을 말해 버릴까 하고 몇 번이나 망설였던가. 맥신이
주저하고 있는 까닭은 미세스 마틴을 생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일 쿠르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것을 감안할 때
도저히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쿠르의 약혼녀란 도데체 어떤 여자일까?
쿠르와 코린, 이 두남자로부터 사랑을 받는 여자라....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바람이 야자나무를 흔드니, 적막한 사막이 더욱 황량하게 느껴졌다.
맥신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코린이 정말 이런 데 숨어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코린은 모험을 즐기는 청년은 아니니까, 호화로운 호텔이 아니면
도시의 맨션, 또는 유명한 관광지에서 연인과 즐기고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사막에 와서 고생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몇 시간이나 걸려 이곳까지 왔으나 눈에 띄는 것은 바람에 날리는
모래뿐이었다. 그리고 보니 멀리서 모래 바람이 일고 있었다. 쿠르도 이것을
보고 이마를 찌푸렸으나, 그들이 있는 곳까지는 오지 않았다. 
하늘에는 벌써 별이 떠서 달과 경쟁이라도 하듯 반짝거리고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사나이들이 모닥불을 피우며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구릿빛 피부를 가진 엄해 보이는 사나이가 물을 담은
작은 그릇을 꺼냈다.
  “물이 넉넉하지 않아.”  
어둠 속에서 쿠르가 발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여기는 오아시스지만 물이 완전히 말랐어. 내일 캠프에 도착할 때까지
절약해야만 해.“  하고 말했다. 
  “별로 불편할 것도 없어요, 므슈.”
  쿠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걸어갔다.
천막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맥신은 쾌적한 장소가 없다고 하여
절말하지는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여행도 즐거울 수 있을 것이다.
젊고 모험심도 있으니까. 모닥불을 배경으로 한 베르베르인들의 
검은 그림자가 비쳤다. 맥신은 향긋한 음식 냄새로 약간 기운이 돌았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풀어 뒤로 묶었다. 약간 서늘해진 듯해서 입고 있던
겉옷을 곁의 그릇 위세 펼쳐 놓고 그 위에 앉았다.
  쿠르가 가져다 준 음식은 맛보다는 양이라는 느낌이 들었으나,
맥식은 정신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문명 사회를 떠나니 음식의 고마움을 알게 되는 모양이군, 마드모아젤.”
  맥신은 좀 무안해졌다.   “하루 종일 거의 먹지 못한 걸요.”
핑계를 대며 말했다. 쿠르는 어째서 〈마드모아젤〉을 이처럼 연발하는 것일까?
 쿠르가 빈정대는 웃음을 떠올렸다.
  “그 식욕을 비난한 것이 아니야, 마드모아젤. 다만 다른 일에 대해서도
그만큼 적극적이었으면 하고 생각했을 뿐이지.“
  맥신은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었으나 어쩐지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그는 하루 종일 입고 있던 
흰 하이크(haik:아라비아인이 머리로부터 들써서 몸 전체를 가리는 천)를 여전히
입고 있었다. 저것을 것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그녀는 하이크를 응시한 채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을 입은 채로 잠도 자나요?”  “설마,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맥신은 깜짝 놀라며 숨을 삼켰다. 이번에는 그 말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쿠르의 얼굴 표정은 경직되어 있었고, 음성에도 매서운 데가 있었다. 
어떤 위협을 받더라도 겁먹은 듯이 보이지는 말아야지.
  “위협하기란....”  그녀는 도적적으로 쿠르를 쳐다보았다.
“말로는 간단해요. 므슈. 하지만 실행에 옮기는 것은 달라요. 당신은 영국과는
떨어져 있어서 안심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내 몸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 거예요.“
  빈정거리는 눈빛으로 쿠르가 대답했다.  “원 저런, 나를 위협하나?”
  만일 음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쿠르의 얼굴에다 끼얹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증오의 눈빛으로 노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어하는군요. 하지만 최후로 웃을 사람은 나예요. 내가 사막에
익숙지 못하다는 걸 잊었나요? 쓰러지거나 하여 경찰이라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만일 병이 들기라도 한다면 계속 두 사람을
찾아 나설 수도 없어요.“
  “앙갚음할 생각만 하면 안 돼, 마드모아젤. 우리 모두에게 시간 낭비만
될 뿐이니까, 이나라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어. 수다장이 여자의 잠꼬대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맥신은 목이 메어 하마터면 커피를 토해 낼 뻔했다.
“당신의 약혼녀가 왜 도망쳤는지 이제야 분명히 알겠군요.”
  쿠르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면서 맥신의 팔을 붙들고 불을 뿜을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말이 지나치군, 마드모아젤. 충고해 두지만 더 이상 
함부로 말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겠어.“
눈빛이 진실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리와요.”
맥신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 것을 보자 그의 음성이 약간 누그러뜨렸다.
“잠을 좀 자야 해, 피로가 풀리면 독설도 내뱉지 않게 될 테지.”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맥신을 모닥불 있는 데로 데려갔다.
모래 위에 안장이 놓여 있고, 그 곁에 낡은 담요가 두장 깔려 있었다.
  “미안하지만 내 곁에서 자야 해.”
  다른 사나이들이 자는 장소와는 약간 떨어져 있었다. 맥신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가능하다면 혼자 자고 싶은데요.”
  쿠르는 아무 대답도 않고 땅바닥에 펼쳐 좋은 담요 한 장을 집어들고 
다른 한 장을 자리켰다.   “누워.”   거역할 도리가 없었다.
“위에 이것을 덮어 주지. 나는 다른 친구들로부터 순진한 처녀를 지켜 주겠어.”
  맥신은 위험을 느끼고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긴장되어 있는 몸 위에
쿠르가 조소를 띠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말을 잘 들어서 착하고.”
  머리 위에서 큰 별이 빛나고 있었으나 맥신은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베게에
머리를 파묻었다. 별을 보면 밤의 마법에 휘말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모래 위에서 자는 것과 저 별과는 어떤 공통된 마력이 마력이 있는 듯싶었다.
도망칠 수 없다는 절망감과 쿠르에 대한 분노가 가득 찼는데도 불구하고 
자연의 힘이 몸속에 배어드는 것 같았다. 맥신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자기가 운명에 끌려들어가는 작은 동물처럼 생각되었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동경이 마음속에 싹터서 좀처럼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쿠르 데스티에는 맥신 곁에서 하늘을 보고 누워 있었다. 고르지 못한
숨결이 어느새 깊은 숨 소리로 변했다. 하루의 긴장을 풀고 잠든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몸을 뒤척였다. 맥신을 건드리려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맥신도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을 뜨니 쿠르가 팔꿈치를 짚고 그녀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묶었던 머리가 풀려 아침 햇살에 윤기있게 빛나고 있었다. 곤히 자고 난
핑크빛 얼굴은 때묻지 않은 소녀의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눈을 뜬 그녀 앞에 쿠르의 얼굴이 보였을 때, 맥신은 한순간 기쁨 비숫한
감각이 솟구쳤으나 곧 증오로 바뀌었다.
  “므슈!”  두려움이 등줄기를 따라 올라왔다. 오늘 아침에는 머리에
아무것도 두르지 않고 있어서, 웨이브진 검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맥신은 빨라지는 고동을 억제하면서, 그가 아주 핸섬하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었다.  “부탁이에요.”  이성과는 반대로 움직이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인지 쿠르에게 말하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이런 모양으로 보이고 있었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경멸하는 듯한 예의 그 태도에 맥신은 얼굴을 붉혔다.
  “품에 안고 싶었다면 좀더 은밀한 장소를 택했을 거야. 아침 햇살을
받은 그 눈동자에 흥미를 느꼈을 뿐이야. 사막에서는 진실한 벗을 가장
잘 볼 수 있으니까.”   “내 눈동자를요?”
맥신은 느닷없이 쿠르의 말에 깜짝 놀랐다.
  “이렇게 아름다운 눈동자는 아직 본 일이 없어, 마드모아젤. 
소프트 그레이는 특이한 색이라 잊혀지지 않을 텐데, 어째서 기억을
못하고 있었는지 이상하군.“
  미묘한 감정에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이것이 질투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색깔의 눈동자는 잘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군요, 므슈?”
  쿠르는 맥신을 바라본 채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그의 눈빛이 검다고
생각했는데, 검정에 가까운 다크블루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감정이
격해져 화를 내거나 하면 검게 변하는 모양이다.
  쿠르는 입을 일그러뜨리며 맥신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리고는 벌이라는 듯이 방긋 웃었다.
  “맥신의 눈동자는 매우 아름다운 소프트 그레이로군. 모로코에서는 여러 가지
빛깔의 눈을 볼 수 있지만, 이런 빛깔은 보기가 쉽지 않아. 가끔 내리는
자애로운 단비를 연상시키는군. 살결은 핑크와 흰빛, 머리털은 금빛 구름,
그리고 입술은 장미꽃잎이야. 그 멋진 육체가 머리에 떠올라 어젯밤엔
한참도 자지 못했어. 이렇게 말하면 남자들한테 별로 칭찬을 못 받았을
맥신의 마음도 만족을 느낄까?“
  맥신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고 벌떡 일어났다.
처음에 로맨틱한 말에 도취했던 마음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맥신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를 꺼냈다. 분명히 효과가 있다는 것이
어젯밤에 증명된 셈이었다.
“그러니까 여자한테 퇴짜맞은 거예요, 므슈. 여자는 힘이 아니라 사랑과
부드러움을 원하는 거예요. 당신은 야만인일 뿐이에요.“
  맥신에 못지않게 쿠르의 분노도 격렬했다. 
“충고해 두었을 텐데. 지나친 말은 용서할 수 없어. 이제 그 보상을
받을 때가 와도 우는 소리를 하면 안 돼.“
쿠르는 뚫어질 듯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머리채를 잡았던 손을
놓아주었다.  “정말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아이 같군. 자기 맘대로
되자 않는다고 곧 발끈하다니.“
  맥신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긴장으로 입술이 말라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혀끝으로 핥았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버릇을 고쳐 주겠어. 휠씬 전에 누군가에게
꺾였어야만 했어. 10 년 전에 맥신을 거부했던 내가 바보였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어. 그러나 이런 잘못은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을 거야.
그러고 있으니 정말 순진스러워 보이는군.“
  맥신은 등골이 오싹해질 듯한 실망감을 느꼈다. 냉정한 쿠르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어 자기 손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좀 비켜 주시 않겠어요? 만일 내가 이런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면,
나도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까요.“   ”알았어.“
쿠르는 벌떡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하고 있는 사나이들 쪽으로 걸아갔다.
맥신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는데도 모래 위에 서 있는 뒷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날은 점심을 먹고 말에 물을 먹이기 위해 꼭 한 번 쉬었을 뿐,
곧장 목적지인 베르베르족의 캠프까지 강행군했다. 말 위에서 쿠르에게
바싹 몸을 붙이고 앉아 있어야 했던 긴장감이 겨우 풀렸다. 
빈정거림과 조소, 그리고 그 사이의 침묵 때문에 십년은 감수한 느낌이었다.
  이곳은 어제 묵었던 곳보다 휠씬 더 큰 오아시스였다. 놀랍게도
텐트가 몇 개나 설치되어 있었고, 남자들 틈에 여자도 몇 명 끼여 있었다.
쿠르는 그중에서 제일 큰 텐트 쪽으로 맥신을 안내했다.
  “2, 3일 동안은 여기서 묵겠어. 나는 여러 가지로 바쁜일이 있으니까
맥신은 자유롭게 지내도 좋아, 계속 곁에 두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미안하다고는 생각지 않아.“
  맥신은 텐트 주위를 의아한 듯이 둘러보았다. 사막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책을 통해서 알고 있었으나, 설마 자기가 그런 사람들 속에
끼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러나 설비가 잘된 이 큰 텐트가
유목민들의 보편적인 주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맥신에게 쿠르가 냉소적인 시선을 던졌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는 위대한 지도자라는 것을 잊은 모양이군.
이 텐트는 내가 여기 올 때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게 준비되어 있는거야.“
  “별로 자주 오지도 않잖아요?”
  한 여자가 마루에 돗자리를 깔고 쿠션을 정리하고 있었으나, 맥신은
애써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존경하는 지도자가
애인을 데려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표정은 짓지 마.”  쿠르는 안으로 들어가 입구를 가리키며 여자에게 
나가라고 손으로 지시했다. 
“평소에는 다른 지도자가 살고 있지. 내가 그들의 생활을 지휘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가능한 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돕고 있지.“
  “돈의 힘으로 말이군요?”
  자랑스러운 그의 얼굴이 흐려졌다.
“돈이라....돈은 그들에게는 맥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도움이 
되고 있지. 내가 항상 그들 옆에 있는 것보다 돈이 있는 것이 더 중요하지.
사막은 대단한 곳이야. 주식이 되는 양이나 염소를 기르는 일도 쉽지 않지.
유목민들은 일용품을 구입하고 싶어도 그것과 바꿀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거든.“
쿠르는 맥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맥신에게는 하녀를 하나 딸려 주겠어. 몸을 씻거나 식사를 할 때마다 
내 덕이라 여기며 감사하는 것이 좋을 거야.“
  “그러느니 차라리 굶어 죽는 편이 낫겠어요.”
  “어린애처럼 억지를 부려도 소용없어. 한가지 말해두겠는데, 만일
목욕을 하거나 옷 갈아입는 것을 마다하여 하녀를 골탕먹이면
내가 직접 오겠어. 그들도 말을 듣지 않는 여자는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만히 있는다면 오히려 체면이 손상되지.“
  “저 사람들은 내가 여기 온 진짜 이유를 알고나 있나요?”
  쿠르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모두 알고 있으니까, 위안삼아 데려온 것이라 
생각할 테지. 누구 하나 맥신 편을 들 사람은 없어.“
  “그렇다면 혼자서라도 싸우겠어요.”
  다시 쿠르의 입이 일그러졌다. 
“맥신이 그런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아. 여러 가지 위험한 상황에서
아무 일ㄹ 없이 빠져나갈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군. 운명은 가혹한 것이야,
특히 자기 흥미대로 남자를 자주 바꾼 사람에게는.“
  맥신은 한걸음 물러서서 쿠르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모약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협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당신의 말을 잘 모르겠군요.”
  “아니지, 알고 있을 거야.”   맥신의 팔을 잡아 끌어 당기더니 눈을 크게
뜨고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우리 마음에 싹튼 감정은 알고 있겠지? 그러나 맥신의 지난날의 남자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어.“
  “앞서 말하지 않았어요, 오해라구요!”
점점 더 무서워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가 한 말은 진실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있다.
서로 바라보았을 때와 키스를 교환했을 때, 두 생명은 부딪치며 하날로 녹아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유는 어찌 되었든 환상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영원한 사랑이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 쉽게 싹틀 리가 없다.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한번도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어.”
  “당신의 약혼녀에 대해서도요?”
  쿠르의 눈동자가 살기로 빛났다.
“그 말 좀 안할 수 없나? 두 번 다시 입밖에 내서는 안 돼 !”
  맥신도지지 않고 소리쳤다. 
“위협한다고 통하지는 않아요 !”   “그럴테지.”
뜻밖에 음성이 부드러워져 오히려 불안스러웠다.
“낙타가 물어뜯을까봐 비명을 지르거나, 태양빛이 지나치게 강렬해서 피부가
아프다고 엄살을 떠는 소녀와는 다른 사람 같으니까. 이 새로운 맥신에게
흥미가 솟는군.“
  쿠르는 맥신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텐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맥신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면서 침착해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뼈까지 녹아 벼릴 듯한 감정에 휩쓸린 것을 맥신은 후회하고 있었다.
아무리 바보라도 자신에게 위험이 닥친다는 것쯤은 안다. 쿠르 데스티에는
여자의 마음을 마치게 하는 사람이야. 분명히 이곳저곳에 여자를 가지고
있을거야. 사막의 족장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여러 역할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 거야. 내가 미세스 마틴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해도 그에게는 별다른 영향이 없을 테고, 믿게 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고달플 뿐일 거야.
  베가와 비슷한 소녀가 들어왔다. 자라라는 이름을 자진 소녀인데,
영어는 전혀 못하고 약간의 프랑스어만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쪽의 의사를 전하는 것만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내가 지나친 것을
묻거나 도망치는 것을 돕지 못하도록, 쿠르는 일보러 영어를 모르는
사람을 보냈을 거야.
  자라가 더운물을 가져왔다. 맥신은 혼자 씻겠다는 의사를 겨우 전달했다.
그러자 자라는 베가와 마찬가지로 할 수 없다는 듯이 옆에서 보고 있었다.
자라는 내가 얌전히 목욕했다는 것을 쿠르에게 보고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도 조금은 점잖고 부드럽게 대해 줄지도 모른다.



  자라가 맥신의 지친 다리에 향기로운 올리브유를 발라 주고 있는 동안
주위가 어두워졌다. 자라는 손놀림이 매우 익숙하고 매끄러웠다.
말은 통하지 않았으나 무엇이나 알고 있는 듯했다. 복잡하게 제스처를 
쓸 필요도 없었다. 사막에 살기 때문에 외국인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을 텐데도 정말 이상했다. 맥신은 자라의 도움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자라가 나간 뒤 맥신은 불안한 생각으로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를 악물고 끓어오르는 오뇌를 참으며 떨리는 마음과 필사적으로 싸웠다.
쿠르가 들어왔을 때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있었다. 오늘은 더 이상
쿠르와 만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고 기대했었으나, 그 희망이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쿠르는 맥신의 얼굴에 떠오른 실망의 빛을 놓치지 않고
보며 빙그레 웃었다.
  마음속은 쿠르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찼는데도 그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뛰는 것은 웬일일까? 쿠르는 가슴이 팬 하얀 실크 튜닉에, 맥신의 
것과 같이 가랑이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예리한 눈을 가진 위험스런
동물과도 같았다. 검은 머리는 흩어져 있고, 얼굴과 손은 깨끗이 씻은
듯했다. 고된 하루가 지났는데도 아직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맥신은
이러한 그를 보자 주눅이 들고 말았다.
  쿠르는 일부러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창백한 얼굴로 불안해 하는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고는 풍성하게 늘어져 있는 기다란 금발에
눈을 고정시켰다. 
“내가 왔는데도 별로 기쁘지 않은 모양이군. 하지만 아까보다는 기분이
좋아졌을 테지?“  맥신이 대답을 않자 그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같이 식사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네.”
맥신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쿠르의 시선이 온 몸을 더듬는 바람에 그녀는
안절부줄 못했다. 그는 끌어안는 일도 태연히 해낼 것이다. 물론
프랑스인이 라면 누구라도 친밀하다는 표시로 그 정도의 일은 할 것이고,
여자 쪽에서도 인사치레라는 것은 알면서도 싫은 느낌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맥신을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인사치레는 사양하고 싶었다.
영국을 떠날 때 입고 있었던 털 스웨터를 가져왔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맥신은 자신이 입고 있는 투명한 옷에 눈길을 돌렸다.
얼마나 음탕스러워 보이는 옷인가. 드러나는 가슴을 감추기 위해 두 팔을
앞으로 교차시켰으나 쿠르의 대담한 시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싶었다.
  음식을 가져온 여자가 나가 버리자, 쿠르가 않으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볼 때마다 마치 미숙한 처녀인것처럼 놀라는군. 용케도 그런 연극을
하는군 그래.“    ”정말 부끄러워서 그래요. 므슈.“
쿠르가 불쾌한 듯이 웃었다. 
“나는 벌써 옛날에 그런 순진성을 잃어버린 것으로 알았어.” 
  “남을 모독하는 경박스런 말도 이젠 그만둘 만한 나이일 텐데요.”
  “모독하는 데 있어서는 맥신도 둘째가라면 섭섭하겠는걸.”
그는 맥신의 고집스러워 보이는 턱에 시선을 보냈다.
  “위세가 당당하군.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우선 나를 쿠르라
불러주는 것이 좋겠어, 익숙해지면 간단한 일이지.“
  “바보 같은 말은 하지도 마세요.”
맥신은 상대도 하지 않으려 하며 음식에 손을 댔다. 좀더 다른 상황이 었다면
기꺼이 쿠르라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위험했다. 여기서 그의 말대로 하면
위험천만이다.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과도 같다. 쿠르같이 경험 많은
사나이에 의해서 미지의 영역을로 발을 들여놓는 것보다는 여기 남아 있는
것이 안전핟.
  쿠르는 바보로 불르는 것에 익숙해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신상을 생각해야 할걸, 마드모아젤.”
온화한 표정이 가시고 험상궃은 얼굴이 되었다.
  “유머를 모르시는 것 같군요.“
  “그런 건 내 약혼녀를 찾아낼 때까지는 보류야. 내 기분이 나쁜 것은 
모두 당신과, 당신 동생 탓이니까.“
  두 사람은 묵묵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이윽고 맥신이 입을 열었다.
“자기 자신의 일만 생각하고 남의 일은 염두에도 없나요?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미세스 마틴이 얼마나 걱정할 것인지 생각해 본적이 있어요?“
  “어째서 내가 그런 생각까지 해야 하지?”
  “당신같이 이기적인 사람은 처음 보았어요.”
  “말조심하라니까.”  이번에는 아까 그 여자가 커피를 가지고 왔다.
“사막의 사나이는 말을 못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
  “마음속의 생각을 말로 하는 것은 죄가 아니에요.”
  “그것이 현명하지 못할 경우도 때에 따라서는 있는 법이지.”
  맥신이 쿠르를 노려보았다. 커피잔을 뒤엎고 싶을 정도였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녀는 약간 겁이 나서 신중하게 말했다.
  “나에 대한 생각을 일부러 말로 할 것까진 없어, 그 눈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게 하는 것은 내 임무라고 생각해.“
  캠프 어딘가에서 여자가 노래하는자, 입구 쪽에서 가늘고 높은 소리가 음악에
맞추어 들려 왔다. 밤공기는 따뜻했으나, 어둠의 베일에 싸인 불모의 사막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맥신은 사막이 지닌 밤과 새벽의 마력을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낮에은 40도를 웃도는 무더위라는 것도.
  맥신은 쿠르의 마지막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그녀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쿠르는 커피를 마시고 난 다음
입구에 있는 휘장을 내렸다. 램프 하나가 텐트 안을 빨갛게 비추고 있었다.
맥신은 아까까지의 그 용기는 어디로 갔는지, 머뭇머뭇하면서 일어섰다.
  “괜찮다면 먼저 자고 싶어요.”
  “어째서?”
  “피곤하기 때문이에요.”   도전하듯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내 앞에 앉아 나를 괴롭히지 않았어. 피곤하다니, 
내가 그 말을 믿을 줄 알고 있나?“
  순간 그의 두 손이 뻗쳐와 맥신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움직이지도
못하고 얼굴을 붉히면서 겨우 소리쳤다.
  “부탁이에요. 놓아주세요. 므슈.”       “안 돼.”   
번득이는 눈이 맥신을 쏘아보았다.
  “나중에 놓아주지, 지금 당장은 안 돼. 내 호기심을 만족시킬 때까지는 가만히 있어.”
  쿠르의 얼굴이 다가와 맥신의 가냘픈 저항마저 지워버렸다. 쿠르의 입술은
굶주렸다는 듯이 그녀의 입술을 더듬고, 두 팔을 허리에 감았다. 맥신은
본능적으로 입을 꼭 다물었으나, 마침내 그의 강렬한 입술에 그만 힘이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뜨겁게 타오르고 충격과 흥분은 
파도와 불꽃으로 변해 온몸에서 넘실거렸다. 힘이 점점 빠지면서 쿠르가 이끄는
대로 되어갔다. 쿠르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는 전신이 부들 부들 떨리고 있었다.
  쿠르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그녀의 입술을 비롯한 전신의 떨림을 바라보았아.
“이런 정도는 아직 서론에 지나지 않겠지, 지금까지의 경홈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신은 나쁜 사람이에요.”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말했다.     “쉿.”
까다로운 말괄량이 아가씨를 다독거리듯이 그는 다정하게 맥신을 끌어안았다.
홍조 띤 뺨에서 풍성한 머리털로 손을 옮기며 조개껍데기와도 같은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좀 거칠었는지도 모르겠군.”
달래듯 하면서 맥신의 뺨에 키스했다.
  “이제 가지.”
쿠르가 가만히 맥신을 안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침실로 옮겨 침대 위에 내려놓은 뒤 자신도 곁에
앉았다.
“맥신의 결정에 따르기로 하겠어, 원한다면 말이야. 나는 결코 서두르지 않아.
하룻밤, 아니 일주일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결국 맥신은 내 것이 될거야,
아무리 싫다고 해도.“     ”당신의 약혼녀는 어떻게 하고요?“
머리가 어지러웠으나 애써 대항해 보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요구를
뿌리쳐야만 했다.
  쿠르는 맥신 이외의 여자 따윈 염두에도 없다는 듯이 일소에 붙였다.
그러면서 세차게 맥신을 끌어안으며 입술로 맥신의 입술을 꼭 눌렀다.
어찌 된 일인지 맥신은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저항할 기력이 점점 
없어졌다. 그녀는 아무 생각도 못하고 쿠르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지금까지 넘어 본 일이 없는 경계선 저쪽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쿠르......”   팔로 목을 감으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맥신은 자기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열중해 있었으므로 바깥 일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지며 점점 커지자, 쿠르는 갑자기 맥신에게서
몸을 일으켰다. 홍조 띤 얼굴에 씁쓸하고 불쾌한 표정이 번지며 혀를 찼다.
“누구야, 방해하는 놈이 ! 그냥 주지 않겠어 !”
  흐릿한 맥신의 눈에 쿠르의 뒷모습이 비쳤다. 어느 새 옷을 입고 있었다.
맥신도 서둘러 옷매무시를 고쳤다. 부끄러워 얼굴이 타는 듯이 달아올랐다.
쿠르는 진심으로 나늘 안으려 한 것이 아니었어. 내가 어느 정도 까지
허락하는지 시험할 셈이었어. 민감하게 반응해 버린 것이 억울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나 곧 얼굴을 들고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쿠르가 방에서 기다리라고 했으나, 자꾸 신경이 쏠려 내다보고 싶었다.
낮고 위엄있는 음성이 들려 왔다. 쿠르였다. 그 후 강한 어조로 말하는 
또 다른 음성이 들렸으나, 마침내 점점 멀어지면서 말소리가 작아졌다.
그러곤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이것 역시 밤의 사막에서 볼 수 있는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듯......
  맥신은 쿠션에 기댄 채 쿠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상당히 오래 기다렸으나 돌아오는 기색이 없었다. 싸움이라고 말리러
간 것일까?
  마음이 놓이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미진한 것 같기도 한 복잡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잠을 자려 했으나, 쿠르에 의해 새로이 눈뜬 감정이
진정되지 않아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 서로 미워하는 두 사람인데도,
끌어안고 있으면 어째서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일까? 쿠르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다. 그에 비해 나는 남자 친구 하나도 없다. 수도원의 생활은 매우
엄했어며, 미세스 마틴에게 옮겨 간 뒤에도 바빠서 남자 친구를 사귈 
틈이 없었다. 미세스 마틴과 함께 극장에 가거나 사업상 나간 일 외에는 
외출한 적도 없었다. 쿠르와 키스했을 때 그런 기분에 휩사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겨우 한두 번 출석한 일이 있는 파티에서 키스를 받았을 때는
별다른 감정이 일지 않았었는데.
  여러 가지 일로 머리가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새벽녘에 눈을 뜨니 자라가 곁에 서있었다. 자라는 그녀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잔 것을 보고 놀란 듯 나이트 웨어를 꺼내 들었다.
  맥신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문득 어젯밤의 일을 상기하고, 무슨 일이었을까 생각했다. 
구김살투성이가 된 옷보다 어젯밤 소동이 더 마음에 걸려 급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쿠르는 어떤 핑계를 댈 것인가?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설명해 줄 것인가?
  맥신이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을 무렵,
예고도 없이 쿠르가 침실로 들어왔다. 질겨 보이는 천으로 만든 반바지에
검은 셔츠를 입은 그는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맥신처럼 눈 밑에
그늘이 져 있지 않았다. 어디서 실컷 잔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은근히 부아가 났다.
  쿠르는 맥신의 토라진 표정을 보고, 자기가 너무 빨리 왔기 때문이라고
오해한 듯싶었다. 그는 맥신의 몸을 훑어보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하지만 이것은 내 텐트야. 입구에 쪽지라도 달아 놓지 그랬어?
그러면 들어가도 좋을지 금방 알 수 있었을 텐데.“
  “재치 있는 농담 같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아요.”
맥신은 쿠르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며서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쿠르가 조소하면서 자라에게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당신은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이야, 내가 키스했을 때만 해도....”
  맥신은 그 일을 다시 회상하고 싶지 않아 달려들 듯한 어조로 말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말해 주지 않겠어요? 밤새도록 마음에 걸렸어요.
다른 부족의 습격이라도 받은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오직 그 일 때문에만 잠을 자지 못했나?”
  “또 뭐가 있겠어요?”
  갑자기 쿠르가 다가와 맥신을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 턱을 손으로 받치고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마드모아젤, 고조된 이 기분은 공포 때문만은 아닌 것 같군. 어젯밤의 
소동은, 광견병에 걸린 사나이가 이 오아시스에 기어들었기 때문이었어.“
  “어머, 가엾어라.”  그녀는 쿠르에게 안겨 있다는 사림을 잊고 말했다.
“그 사람에게 손을 썼나요?”   “손을 썼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죽었어.”
“그랬었군요.”  그녀의 얼굴이 흐려졌다. 쿠르가 바로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좀처럼 침착해질 수가 없었다.
“의사가 있지 않아요?”
“우수한 의사가 있지. 하지만 그의 경우는 어떤 의사라도 고칠 수 없었어.”
  맥신이 잠자코 있자, 쿠르가 귓불을 가만히 애무했다.
“내가 돌아오지 않아서 실망했겠지?”    “천만에요 !”
쏘아붙이듯이 말하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나를 길에서 주운 여자처럼 취급하지 마세요 !”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쿠르는 무쇠 같은 팔로, 안간힘을 쓰는 그녀를 꼭 붙들고 어깨를 앞으로 당겼다.
맥신의 심장이 사정없이 마구 뛰고, 무례한 쿠르의 시선을 곧바로 받아 
얼굴은 부끄러움과 거북함으로 발갛게 물들었다. 다시 대들려고 했으나
곧 그의 입술이 덮쳐 왔다.
  뜨거운 키스에 감각이 마비되어 갔다. 쿠르는 맥신의 몸을 돌려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파도치는 심장 위에 손가락을 댔다.
“내 탓으로 이럴까?”   “놓으세요 !”
맥신은 있는 힘을 다해 팔을 뿌리치려했다.
“나를 바보로 알고 장난하는 거예요?”
  “맥신은 말대답을 할 입장이 아니야.”
  “정말 비열한 치한이에요 ! 그러니까 당신은......”
  “그만두지 못하겠어? 더 이상 말하면 정말 치한이 되겠어.”
쿠르는 맥신의 어깨를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내게 마음이 없는 체하지 말아. 대관절 나한테는 왜 다른 남자들에게처럼
기쁨을 주려 하지 않는 거야?“    ”그렇지 않아요, 므슈.“
  “또 므슈로군. 어젯밤엔 아무 저항도 없이 쿠르라 부르던데.
므슈보다는 훨씬 듣기 좋더군. 그리고 흥분하는 그 모습이란....“
“흥분 따윈 안했어요 !” 
맥신은 떨리는 마음응ㄹ 감추기라도 하듯 일부러 크게 외쳤다.
“지레짐작은 그만 하세요. 다만 도망치려고 했을 뿐이에요.”
  “유감이군. 지금 시간이 조금만 더 있다면 그 말이 거짓이란 걸
금방 증명할 수 있겠는데. 오늘 아침에는 예정을 바꿀 수가 없으니,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겠어. 저녁때까지 나는 밖에 나가 있겠는데,
그동안 나를 므슈 이외의 말로 부를 연구를 해두도록 해.“
  맥신은 쿠르의 말을 어디까지 진실로 믿어야 할지 몰라 하루 종일
머리를 썩였다. 약혼녀를 사랑하고 있다면 어째서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지려 하는 것일까? 맥신은 자신이 그의 약혼녀를 질투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이것이 질투라는 것인가? 쿠르 데스티에
같은 남자를 좋아하게 되다니.....약혼녀를 찾게 되면 나는 당장
돌아가야 하고, 다시는 일생동안 그를 만나지 못할 텐데.
  쿠르가 나갔기 때문에 더 이상 텐즈 안에 있을 필요가 없어.,
그녀는 밖으로 나가 보았다. 남자들의 대부분이 쿠르를 따라간 것 같았으나,
여자들은 남아 있었다. 모두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묵묵히 일하고 있었다.
  어젯밤 식사를 날라다 준 여자가 맥신의 뒤를 따라왔다.
쿠르의 명령에 의한 것인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더워서 몇 번이나 
물을 부탁했는데도, 그녀는 기꺼이 갖다 주었다. 그러나 무슨 말을 
물어 보면, 절대 답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는지 한사코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마을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여자는 그저 시선을 돌리고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
  여기에는 맥신의 처량한 입장을 잊게 해 줄 아무것도 없다.
예전에는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언제 어떤 재난이 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는 도저히 여행을
즐길 마음의 여유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애초의
직감대로 카사블랑카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될 뿐이다.
만일 단순한 여행자로 와 있다면 사막에도 흥미를 느꼈을 것이고, 
어쩌면 그 색다른 흥미에 열중하느라 여념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수의 화신과도 같은 쿠르에게 사로잡힌 상태에서는 단 일분이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마라케시와 연락할 방법이 없느냐고 여자에게 물어보았으나
“노우.”  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아무하고도 연락할 수 없나요?”
맥신이 초조감을 억누르며 다시 한번 물었다.
  “서방님이 돌아오시거든 여쭈어 보세요.”
  쿠르는 틀림없이 사업상 외부와 연락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맥신은 다시 오아시스를 서성거리기 시작했으나, 마음을 진정시켜 줄
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양과 염소가 매여 있었다.
그 슬픈 듯한 눈을 보자, 무엇 때문에 거기 묶여 있는지 짐작이 갔다.
검은 텐트 안에서는 여자와 아이들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막을 가로질로 도망친다는 것은 자살 행위와도 같을 거야.
결국 빠져나갈 길을 완전히 막혀 버린 거야.

  쿠르가 돌아온 것은 저녁때 훨씬 지나서였다. 맥신은 기다리기에 지쳐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으나,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몸을 씻어내기 위해서였다. 오늘 밤에는 엷은 
하늘색 바지를 입고 반짝이는 은빛 진주 장신이 달린 짧은 웃옷을 입었다.
자라가 가져다 준 리본으로 머리를 묶자 목덜미가 시원했다. 햇볕에 타서
살갗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맥신은 쿠르가 귀찮게 말을 할 기력도 없을 만큼 피곤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 방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쿠르가 뭔가 지시하는 음성과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 그 뒤를 따라 물을 가진 하녀도 들어왔다.
  “기분이 어떤가, 맥신?” 
그는 재빨리 맥신의 몸에 시선을 보내고, 만족스러운 듯이 웃음을 띠었다.
“빨리 식사하고 싶겠지만 10 분만 기다려 줘, 몸을 씻고 올 테니.”
쿠르는 웃음을 띤 채 간막이 뒤로 사라졌다. 쏴 하고 물 흐르는 소리,
하루 일을 끝낸 사나이가 몸을 씻는, 귀에 익지 않은 소리가 들려 왔다.
맥신은 자기로서도 알 수 없는 울렁거리는 마음을 애써 억제했다.
쿠르는 그의 말대로 단시간에 몸단장을 하고 다시 맥신 앞에 나타났다.
그는 전혀 약혼녀를 놓쳐 버린 사나이 같지가 않았다.
  “그들을 찾았나요?”  맥신은 물으면서도 어리석은 질문이라 생각했다.
찾았다면 그녀를 데려왔을 것이니까. 아직 그녀를 찾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놓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보이나?”    “아뇨, 다만 어떻게 되었나 해서 물었어요.”
맥신은 목에 걸린 침을 삼키듯이 하며 말했다. 쿠르는 흰 실크 바지를 입고,
튜닉을 허리 언저리끼지 열어젖히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시선에 들어오자
도저히 침착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아직 찾지 못했어.”   쿠르는 분명한 말로 부인하고 맥신 곁에 앉았다.
마법을 쓴 것도 아닌데,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하녀가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아아, 고마워. 아침부터 굶었더니 배가 몹시 고프군.”
  쿠르의 시선이 향해지자 맥신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시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음식이 놓이자 하녀가 물러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맥신은 낮에 밖에서
본 양이 생각나 식욕이 일어나지 않았다. 
“왜 먹지 않나?”  쿠르가 예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여기서는 고기가 사치품이야, 알고 있을 테지? 음식에 손을 대지 않으면
그들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이 돼.“
  “오늘 아침 양이 묶여 있는 것을 보았어요, 므슈.”
  “여기는 영국과 달라. 영국에서는 들에 있는 양과 푸줏간에 있는 
양고기가 다를지도 몰라. 하지만 사막의 생활은 점더 현실적이야. 이곳 사람들한테
푸줏간으로 고기를 사러 가라고 할 수 있겠어? 제일 가까운 곳이라도 
수백 킬로나 떨어져 있는 데다가, 50도 이상의 기온에서 수백 킬로나 떨어져 있는
데다가, 50도 이상의 기온에서 운반해 온다면 고기가 어떻게 되겠어?
그러니 산 채로 가져올 수 밖에 없지 않아?“
  “결코 비난하는 것은 아니예요.”
맥신이 작은 목소리로 반론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비난의 원인이 되는 거야. 유목민들은 실제로 고기 같은
것을 거의 입에 대지 못해. 보통 식사는 옥수수나 또는 야자열매 등, 
유럽인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것들로 하지.“
  “하지만 좀더 부유한 사람들이 있지 않아요, 모로코인이라든지 
중동의 아랍인 등......“
  “많이 있지. 그러나 중동에도 가난한 사람은 많아. 정부가 생활 수준을
높이고자 노력하고는 있으나, 대부분의 땅이 메말라 있어서 부유한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거야.“
  “사막의 관개 계획을 들은 적은 있는데요.”
  쿠르가 한숨을 쉬며 맥신을 바라보았다.
“여러가지 계획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것이 자연과의 직접적인 싸움이지.
그리고 사막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방랑자이기 때문에 한곳에 정착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
  맥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데, 어째서 바꾸어야 하나요?”
  “바꿔야 된다고 한 것은 맥신이 아니였어? 매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않았어? 좀더 신중해 지는 것이 좋겠어.“
  “네. 양은 그렇다치고, 사막에는 흥미있는 일이 많아요.
아침에 밖으로 나가 이곳 사람들을 보았어요. 가난하고 혜택받지
못했는데도 모두 즐거워하고 있더군요. 자기 일에 만족하는 표정이었어요.
무지해서 그렇다고는 생각되지 않더군요.“
  “용케 관찰했군.”
  맥신은 열중해 있었기 때문에 쿠르의 빈정거림도 깨닫지 못했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애정에 넘쳐 있는 듯했어요.
처음 보는 나에게까지 다정한 눈길을 보내 주더군요.“
  “맥신이 내 여자니까 환영하는 거야. 그들은 우리 아이들도 기다리고 있어.”
  맥신의 붉어진 얼굴에 모욕감으로 적의가 떠올랐다.
어떤 의미에서는 쿠르에게 따뜻한 감정을 품기 시작하고 있었던만큼,
그의 이 말을 계기로 다시 냉정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내가 당신의 소유물이라 생각한다면 환영할 테죠.‘
  “내가 맥신의 입장이라면 별로 신경쓰지 않겠어. 어차피 2,3일밖에 머무르지
않을 테니까, 우리가 돌아간 뒤엔 그들은 맥신의 일 따윈 잊어버리고 말 거야.“
  “그러면, 줄곧 여기에 있을 작정이 아니군요?”
  “용무가 끝날 때까지만.”
  맥신은 당황한 모습으로 커피잔 너머의 쿠르를 바라보았다.
잔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천천히 밑으로 내려 놓았다.
“그 두 사람을 찾을 때까지 말인가요?”
“그렇지 않아. 제스처야, 맥신.”    “제스처라뇨?”
“별로 큰 뜻은 없어. 맥신의 가족을 불안하게 만들기 위해 잠시 여기에
있게 하는 것뿐이지. 맥신의 가족은 누구 한 사람 내 복수의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엇어.“
  아아, 다해이야. 좀더 무서운 일이 생길 줄 알았더.
그래, 이 사람은 언제나 입으로는 겁 주는 말을 하지만, 실은 위협에만
그치고 있어. 맥신은 더 이상 이런 얘기를 계속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온종일 마음속에 걸려 있던 것을 입밖에 내었다.
“어째서 코린은 당신의 약혼녀와 도망치게 되었나요?”
  다시 사생활 문제를 들고나왔다는 것을 깨닫고 곧 후회했다.
그러나 쿠르는 화를 내려는 기색은 없고, 어디서부터 이야기했으면 
좋을까를 생각하는 듯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코린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나도 용서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사랑하지 않았어. 코린은 몇 년 동안이나 나보다 더 힘이 
있다는 것을 보이려다가 실패했어. 아마 최후의 찬스라 생각했을 테지.
그래서, 지루한 나머지 무엇이든 O.K. 할 것 같은 여자의 마음에 덤벼든 거야.“
  “어째서 지루했죠? 당신과 약혼하지 않았던가요?”
별로 깊이 생각도 않고 되물었다.
  쿠르는 그녀의 의아해 하는 모습을 보고 씁쓸히 웃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군. 그것은 맥신은 나를 지루한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뜻이군. 옛날에 맥신이 얼마나 나를 원했었는지를 잊은 것은
아니자만, 지금도 그때와 다름없는 감정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알겠군.
자아, 이리 와.“



  맥신으로서는 승복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쿠르는 맥신이 어떻게 거절할까를
망설인다는 것을 깨닫고, 앉은 채로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미스 마틴의 애인으로서 충분한 만족을 줄 수 있을 만큼 나는 여자에 대해
잘 알고 있어.“
  “그만두세요. 쿠르. 부탁이에요.”
그녀는 당장에라도 꺼질 것 같은 가냘픈 자제심에 의지하면서 외쳤다.
드러난 팔을 붙들고 있는 쿠르의 손에서 무엇인가가 전해져 왔다.
맥신은 이것을 떨쳐 버리듯 의연히 얼굴을 들었다.
“내가 그만 물러가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당신 혼자 있어야 편히
쉴 수도 있고요?“
  “오늘 밤엔 혼자 지낼 생각이 없어.”
  맥신은 그의 빛나는 눈동자와 팔을 붙잡은 억센 힘에 압도되어 마음이
크게 동요했다. 벌떡 일어서며 쿠르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나 고작 두서너 걸음 물러섰을 뿐 곧 붙드리고 말았다.
  쿠르는 거칠게 맥신의 허리에 팔을 감고는 몸을 굽혀 무방비 상태인 입술을
덮쳤다. 복수의 키스라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필사적인 저항을 시도하려 했으나, 무쇠와도 같은 팔에서 전해져 오는 감각이
힘을 둔화시켰다. 조그마한 주먹을 휘두르려 했지만 역시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발로 그를 걷어찼다. 그러자 쿠르는 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얌전히 굴지 못하겠어?” 
입술이 떨어지며 무서운 눈이 노려보았다.
“이런 연극에는 진적머리가 나. 순진한 체하는 것은 질색이야.”
  맥신이 타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물론 당신은 힘이 강해요. 하지만 내 입을 봉할 수는 없어요.
자기 도취에 빠진 당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나, 나는 추호도
당신의 애인이 될 생각은 없어요.“
  “애인 이상의 관계를 바라고 있나?”  그는 경멸하듯 입을 삐쭉 내밀었다.
“아내가 되고 싶지?”   “천만에요. 정신 나갔어요?”
그녀는 뜻하지 않은 공격을 받자, 맥박이 빨라지고 목소리가 떨렸다.
  “그건 서로 마찬가지야.” 
쿠르는 그녀의 몸을 확 끌어당기고 덮어씌우듯이 입술을 겹쳐 왔다.
정열적인 키스에 맥신의 자제심이 마비되어 갔다.
  쿠르의 탄탄한 육체에서 전해 오는 감각이 뇌의 작용을 정지시켰다.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고, 저항하려는 의사마저 사라졌다.
눈을 감고 찰싹 그에게 휘감겼다. 쿠르의 키스에서 약간의 커피 냄새가 났다.
맥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직한 신음소리를 내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맥신 ! 정말 아름답군. 맥신을 잊어버렸었다니, 나도 큰 바보로군.
부탁이야, 다시는 내 마음을 거절하지 말아 줘.“
  맥신은 쿠르의 몸에 전율이 일고 근육이 긴장되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것이 맥신의 몸속에서도 꿈틀거렸다. 맥신은 이것이
남자를 갈구하는 본능이라는 것을 난생 처음으로 알았다. 그 마음이 점점
더 팽창되어 무시할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르렀다.
이때 쿠르가 결심을 촉구하듯이 맥신의 가슴에 손을 밀어넣었다.
  “오늘 밤엔.....”  쿠르가 맥신의 촉촉이 젖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도중에 방해물이 끼어들지 않을 테지. 맥신은 내 것이 되는 거야.”
  맥신은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안돼요.”
  그가 아무말도 하지 않고 행동에 옮겼더라면, 맥신이 저항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쿠르의 말은 순진한 그녀의 마음에 자극을 주었다.
그의 뜻대로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 밑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부끄러움이 앞섰다.
“안돼요. 쿠르. 그런 일을 하면.”
  쿠르는 가만히 맥신의 표정을 살핀 뒤 난폭하게 말했다.
“완전히 내 것이 될 때까지 영국에는 돌려보내지 않겠어. 이런 스캔들이
미세스 마틴한테는 가장 큰 충격을 줄 수 있을 테니까.“
  맥신은 그 말뜻을 금방은 이해하지 못했으나, 본능적으로 홱 몸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무슨 말인지 잠시 동안 머릿속에서 정리해 보았다.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 테죠?”
  “그렇게 생각하나?”  맥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동정이나 부드러움도 느낄 수가 없었다.
  “건드리지 마세요 !”  하고 외치며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쿠르의 의도가 분명해지자, 그녀는 충격으로 가슴이 아팠다.
  쿠르는 맥신의 신경질적인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다가왔다.
꼭 다문 입이 그 육체의 강인함을 상징하는 듯했다. 바로 코앞에서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아직까지는 무리할 생각이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다투는 건 이제 진력이 났어. 맥신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겠어. 아까의 행동으로 보면, 그때가 별로 멀지 않을 것 같군.“
  맥신은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그러자 쿠르의 손이 그녀의 턱을 받쳤다. 
“멋진 연기로군, 서른 살이나 되었으면서도 열 여섯 살 처녀처럼
굴다니. 다음에는 어떤 연기를 보여 주겠어?
가끔가다 맥신이 그녀석과 남매라는 것이 의심스러울때가 있어.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ㅈ.“
  맥신은 부정하려고 했다. 울고 싶은 마음인데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때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동시에, 그에게 매달려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것을 고백하고 자기는 그런 인간이 아니란 것을 밝히고 싶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랐으나,
비난하듯 노려보는 쿠르의 눈동자를 대하자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맥신은 창백한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가냘푼 손으로 닦았다.
  “침대에 가서 자도록 해. 맥신. 옛날 일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고민할 
필요는 없으니까. 어젯밤에도 말했듯이, 나는 성급해 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는 성격으로, 맥신을 어디에도 보내지 않을 테니까.“
  그 말대로 맥신은 침대에 드렁누웠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쿠르에 대한 마음을 자기 자신으로서도 분명히 알 수 없었다.
여자라면 누구나 쳐다볼 정도로 핸섬하고, 냉정하고 오만한 태도도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쿠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 자체는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의 이 기분은 여학생에게나 
볼 수 있는 일시적인 연정이거나, 사막의 무드에 도취한 일시적인 감상일
것이다. 여기에 오게 된 진짜 이유를 상기하고 달콤한 환상을 떨쳐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맥신은 이튿날 새벽, 아직 날이 새기 정에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공기는 맑고 신선했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텐트 밖으로 나왔다.
오아시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가서 모자가 달린 망토를 걸쳤다.
쿠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 자고 있는 것 같다. 일어났다
하더라도 바쁠 것이 분명하다.
  이때 큰 모래언덕 쪽에서 헬리콥터 한 대가 날아왔다. 처음에는 반신반의 했으나
그 모습을 분명하게 확인하자 너무나 의외여서 깜짝 놀랐다. 헬리콥저는 
몇 번 상공을 선회한 뒤 수백 미터 앞에 있는 평지에 착륙했다.
맥신이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무작정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여기서 도망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기면서.
  그러나 운이 나빴다. 맥신보다 먼저 쿠르가 헤리콥터에 접근했던 것이다.
그는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서 돌아가.”
그가 불쾌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맥신은 정색을 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차라리 당신이 나를 끌고 가지 그래요.”
머리를 뒤로 젖히며 도전적으로 외쳤다.
  “곧 그렇게 하겠어. 하지만 후회하는 것은 그쪽일걸. 그전에, 헬리콥터를
타고 온 바보 녀석과 애길 하고 오겠어.“
  쿠르에게 바보 녀석이라 불린 사나이가 마침 헬리콥터에서 내리려
하고 있었다. 쿠르의 말을 들었음이 분명했다. 그는 인상이 좋은
사나이로서, 쿠르보다 한두 살 많아 보였다. 쿠르의 태도로 보아 환영받지
못할 것이 분명한데도, 그는 주저없이 내려왔다.
  “잘 있었나, 쿠르?”   그는 의미심장하게 맥신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러나 쿠르는 인사말은커녕 맥신을 소개하려고 하기도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 여기엔 오지 말라고 했는데?”    “미안해.‘
사나이는 큰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알고 있었지만, 급히 전할 말이 있어서....”    “알겠네.”
언짢은 소식임을 예감했는지, 쿠르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사나이는 다시 한번 맥신에게 시선을 보낸 뒤, 
“단 둘이 할 말이 있는데....”   하고 말끝을 흐렸다.
  쿠르가 맥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텐트에 가 있어.”
  맥신능 재빨리 두뇌를 회전시켰다.  “므슈”
사나이한테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쿠르가 더 빨랐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예상했는지, 뒤따라온 베르베르인에게 손을 들어 신호하고 
그들 언ㅇ어로 무어라 말했다. 순간 맥신은 그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사태를 직감한 맥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잘 알았어요. 실력행사를 할 필요까진 없어요. 내 발로 걸어갈 테니까요.”
분하다는 듯이 뺨을 붉히고, 마치 경찰관들에게 포위된 죄인처럼
텐즈로 돌아갔다. 그 헬리콥터에 탔던 사람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안타까운 내 입장을 이해하여 도와주었으면 좋으련만....
  맥신이 텐트에 돌아와 30 분쯤 지나자 헬리콥터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맥신의 희망도 사라졌다. 사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초조해 하면서
텐트 안을 서성거렸다. 왜 그런지, 도망친 두 사람의 행방을 알리러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걱정으로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코린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영국에 혼자 있는 미세스 마틴은
어떻게 될 것인가? 두 사람이 무사하다면 쿠르는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자기를 배반하고 다른 남자와 도망친 약혼녀를 데리고 온다면 쿠르로서도
무척 괴로울 것이다. 어쩌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맥신은 처음으로
쿠르에 대한 동정심이 일어났다. 약혼녀가 돌아온다면 지금까지의 일을
물에 흘려보내듯 모두 잊어버리고 용서 할 수 있을 것인가?
  쿠르가 텐트로 돌아온 것은 한낮이 지나서 였다. 오전중에는 두 사람씩이나
계속 입구에서 파수를 보았기 때문에, 맥신은 텐트 밖으로 한걸음도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밖에 나가더라도 도망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한없이 계속되는 사막을 횡단하기란, 백 명의 남자를 상대로 하여
고군분투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것보다도, 지금 오아시스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가 더 알고 싶었다. 쿠르는 일부러 나한테 알리려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알게 된 소식의 충격이 가라앉을 때까지,
나를 방해가 되지 않는 곳에 놓아두려고 생각한 것일까?
  텐트 안네 들어왔을 때의 쿠르는 평소보다 약간 표정이 굳어져 있었을 뿐,
그 밖에는 전과 다름이 없었다. 맥신과 눈이 마주치자 담담한 목소리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지금 당장 여기서 떠나야만 하겠어.”    “당장이라고요?”
어쩐지 그 말에서 공포감이 느껴졌다.
“그래, 어디로 가는 것이죠?”
  “크사르에 돌아가는 거야. 언제 헬리콥터가 오더라도 탈 수 있도록
망토를 준비해 가지고 있어야 해.“    ”쿠르 !“
그에게 다가가 팔에 손을 얹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리고 아까 그 사람은 누구죠?”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지.”
그는 구체적인 대답을 않고 쌀쌀하게 맥신을 바라보았다.
“절대로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이야.”
  “하지만 그가 왔을 때 당신은 별로 반기는 듯한 표정이 아니던데요?”
맥신은 쿠르의 아까의 그 표정을 상기하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자기 방으로 가던 쿠르가 걸음을 멈췄다.
“여기 오지 말라고 했었기 때문이지.”
  “그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알려야 할 중대한 일이 있었군요?”    “그래.”
그러고는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맥신은 씁쓸한 마음으로 망토를 들고 그의 뒤를
따라 텐트에서 나왔다. 막상 떠난다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미련이 남는 듯
아쉽게 느껴졌다. 이런 곳은 질샏이라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무슨일이 일어났다. 분명히 알수는 없었으나, 이 오아시스에 올 때와
같은  순진무구한 소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쿠르는 어깨를 흔들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쩐지 이상했다. 
평소와는 달랐다.
  “므슈” 맥신은 빠른 걸음으로 쿠르를 따라잡았다.
“주제넘은 질문 같지만, 아침의 소식은 코린의 행방에 대한 것인가요, 
아니면 사업에 관한 일인가요?“
  “잠자코 있으라는 말을 못 알아들었나 !” 
그는 가엾어하는 기색도 없이 큰 소리로 외쳤다. 맥신은 불안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크사르에 돌아가거든 그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지. 그때까지는 안돼.
나중에 모두 이야기해 주겠어, 약속하지.“
  여기 올 때까지 상당히 고생스런 여행을 한 것을 생각하니, 어째서 그때는 
헬리콥터를 이용하지 않았는지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쿠르에게
물어 보았다.
  “사막을 여행할 때는 가능한 한 헬리콥터는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있어.”
  “어째서요?”  개운치 않고 떨떠름한 것이 맥신의 입속에 남았다.
이런 이야기라도 하지 않는 다면 미칠 것 만 같았다. 가만히 있으면 똑같은
일만 계속 생각하게 된다.
  “질문을 언제까지 계속할 셈인가 !”  
화가 난 듯한 쿠르의 목소리에 그녀가 흘끔 시선을 보냈다.
“사막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는 생활 양식을 존중하고 싶어서지.
그 이상 말할 것은 없어. 이번 여행이 그토록 고생스러웠나?“
  “아뇨.”  분명히 그의 말이 옳다고 맥신도 생각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한껏 즐겼을 것이 분명하다.
까만 하늘, 반짝이는 별빛 아래에서 잠을 잔 것은 가슴 설레는 낭만적인
경험이었다. 뺨이 어루만져 주는 밤바람과 머리 위에서 비치는 큰 달은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별로 고생스럽지는 않았어요. 어히려 즐거울 정도였어요. 하지만,
만일에 사로잡힌 몸이 아니었다면.....“
  이 말은 전혀 쿠르의 반항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모양이었다.
대답이 없었으므로 맥신은 할 수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쨌거나 좋은 이야기가 아닐 것이라는 건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크사르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쿠르는 맥신이 조종사에게
이야기할 틈도 주지 않고 곧 헬리콥터에서 내리게 했다.
아침에 사막에 왔던 조종사는 아니었으나, 헬리콥토는 같은 형의 것이었다.
아마 쿠르의 명령에 따라, 아침의 사나이가 돌아가자 곧 이 사람이
오게 된 모양이었다.
  맥신은 체념한 표정을 짓고 말없이 성을로 향했다.
쿠르가 뒤에서 따라오는 사나이와 프랑스어로 거칠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헬리콥터는 착륙한 채로 있었다. 맥신의 마음에 한 조각 희망이 생겼다.
우리를 카사블랑카에 데려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쿠르는 짓궂은 성격에다가 또 나를 미워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기뻐하는
것이 싫어서 비밀에 붙여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큰 성은 조용하기만 했다. 넓은 복도에서 하녀인 아이자크가 마중나와 주었으나,
곧 어디론지 가버리고 말았다.
  쿠르는 몇 마디 하녀에게 지시를 내린 뒤 맥신을 데리고 가까이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맥신, 얼른 애기해야 하겠어. 어두워지기전에 헬리콥터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야지, 시간이 없어.“
  맥신은 여기서 떠난다는 말을 듣고 기뻐해야 할 것인데도, 웬일인지 눈빛이
어두워졌다. 아이자크가 커피를 가져왔다. 그녀가 물러가기를 기다려,
쿠르가 굳어진 표정으로 커피를 따랐다. 그리고 잔을 건넸으나 맥신은 고개를 저었다.
  “마셔 두는 것이 좋을 거야.”
  “부탁이에요, 쿠르.”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어서 이야기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으나, 쿠르가 입을 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작은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그가 짧게 말하는 바람에 맥신은 아름다운 무늬가 그려진 잔에서
눈을 들었다. 
“맥신이 매우 알고 싶어하는 이야기말인데, 오늘 아침 노엘 프랭크가 
나쁜소식을 전해 왔어. 내 약혼녀와 맥신의 동생이 함께 죽었다는군.“
  “어머나, 어째서.....”  
맥신은 입이 굳어져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쿠르는 마치 자기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라도 하듯 냉혹할 정도로 태연했다.
“멕시코로 갈 모양이었는데, 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했어.”
  너무나 의외의 일이어서 맥신은 당장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코린은 버릇없고 무책임한 사람이긴 했으나,
그런 사고를 당하다니 놀랍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곧 쿠르도 약혼녀를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감이에요, 므슈.”  맥신의 눈에 동정의 빛이 펴졌다.
“사랑하고 계셨는데,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쿠르는 자기 기분을 이야기할 생각이 없는 듯, 씁쓸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평범한 위로는 시간 낭비일 뿐이야, 미스 마틴. 두 사람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할 어른들이야.“
  “네, 하지만.....그렇다면 나는 곧 런던에 돌아가겠어요. 도와야 할 일이 
많을 테니까요.“
미세스 마틴은 미칠 정도로 슬퍼하고 있을 것이다. 코린을 남달리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가공할 사건이 생겼으니 나는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어요. 이미 나에게는 
용무가 없어졌지 않아요?“
  자신의 냉담한 태도를 쿠르가 깨닫지 못했으면 하고 바랐다.
맥신은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가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알자 시선을 떨구었다. 쿠르와 헤어져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게 
되었는데도, 기대했던 것 같은 안도감은 생기지 않았다.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쿠르를 보니 가엾은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이처럼 실의에
찬 쿠르와는 도저히 헤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의 그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쿠르는 맥신을 냉랭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그녀의 동정심을
날려 버릴 듯한 차갑고 단호한 말을 입밖에 내었다. 
“어디든 갈 수 없어, 맥신. 내 반지를 받아들일 때까지는 영국에 보내지 않겠어.”
  “당신의 반지라고요?”
  “그래, 내 반지야.”  그는 천천히 말하고 나서 다짐하듯 되풀이했다.
“오늘 우리는 결혼하는 거야, 정확히 말해서 한 시간 후에. 
목사도 대기시켜 놓았어.“
  “결혼 !”  그녀는 농담이라 생각하고 쿠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신 나갔어요?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마세요 !”
  “농담이 아니야, 맥신.” 그는 맥신의 입에서 나올 비난의 말을 예상했다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물론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아. 평소 같았으면 절대로 당신같이
과거가 있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찬스를 놓칠 수는 없어.“
  “무슨 찬스죠?”  
위험을 느낀 맥신은 금방이라고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지탱했다.
쿠르의 말은 진실이 아니야. 짓궂게 놀리고 있을 뿐이야.
  쿠르는 충격을 받고 있는 맥신의 얼굴을 보고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마틴 일가에 앙갚음할 찬스지. 맥신, 내 약혼녀는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되어 있는 큰 부자였어. 그러니 맥신의 동생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하겠어. 맥신도 어머니의 재산을 상속받게 될 것이니까,
상당한 재산이 되겠지.“
  “농담은 관두고 진심으로 이야기해 주세요.”
맥신은 머리가 어지러워 쿠르가 한 말의 뜻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다.
약혼녀를 잃은 충격으로 순간적인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진심을 말하고 있어. 마틴의 일가는 더할 나위 없이 비열해.
맥신을 사막에 데려간 것도 동생의 죄값에 대한 고통을 주기 위해서였어.
이 무슨 운명이 내 손에 굴러들어온 것일까 ! 맥신이 내 아내가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어머니 표정이 어떨까? 그것을 생각만 해도 즐겁군. 
회사를 처분해서 재산을 자선 단체에라도 기부하겠노라 할 테지만,
그전에 내 손으로 쓰러뜨리겠어.“
  “어째서 어머니가 회사를 처분하겠어요? 코린이 없어도 상관없어요.
아무리 당신이 주(株)를 사려 해도.“
  쿠르의 눈썹이 꿈틀했다. 
“어째서 일부러 살 필요가 있겠어? 맥신과 결혼하면 저절로 손에 
들어오는 거야. 걱정할 필요는 없어. 물론 어머니는 나를 사위로
환영하지는 않을 테지만, 사업상의 수완은 높이 평가 할 거야.“
  맥신은 갑자기 진상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르, 내 말을 잘 들으세요. 나는 미세스 마틴의 딸이 아니에요.
여기 오기 전에 말하려 했지만, 들어주지 않아서.....“
  그의 검은 눈동자가 번쩍 빛나며 맥신의 말을 가로 막았다.
“지어낸 말을 들을 여유는 없어. 시간이 없다고 아까도 말했지 않아?”
  “하지만 쿠르, 정말 나는 동성동명인 타인이에요. 지금 말했듯이....”
  “그만, 더 이상 아무말도 말아 !”
  맥신은 최면술에 걸린 토끼처럼 몸을 움츠리고 떨었다. 쿠르가 
납득할 때까지 내가 미세스 마틴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해야 할 것인가?
그는 코린에게 빼앗겼던 약혼녀가 죽어서 지금은 제정신이 아니다. 
이럴 때 이중의 충격을 주어도 될 것인가?
  하지만 그와 결혼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지 않은가, 불행해질 것은 뻔한 일이다. 쿠르를 단념시킬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당신이 나를 유괴한 사실을 안다면, 미세스 마틴은 경찰을 부를 거예요.”
  쿠르가 빙그레 웃었다. 
“나하고 결혼하기 위해 맥신이 먼저 뛰어들었다고 설명하겠어.”
  미세스 마틴도 틀림없이 그의 말을 믿을 것이다. 그녀는 돈을 위해서라면
인간은 무슨 일이나 한다고 여기고 있으며, 그녀 자신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미세스 마틴은 우리가 몇 년 전에 이미 결혼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맥신은 유괴, 유괴하고 떠들어대지만, 누구 한 사람 저항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잖아?“
  맥신은 분하고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씨근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소용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
  “내 몸속에서는 황홀한 경지에 빠져 있었으면서도? 어쨌든 결혼하고
나면 맥신 자신도 자기의 마음에 놀랄 거야.“
  “닥쳐요 !”  맥신은 무서워 견딜 수 없었다.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는지
쿠르는 알지 못할 것이다. 실제보다 열 살이나 나이가 많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자아, 어서 와.”  그는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투로 맥신을 재촉했다.
“목사가 기다리고 있어.”
  “부탁이에요.”  다시 한번 설득하려 했을 때, 갑자기 마루가 기울어지며
그녀 앞에 벽이 다가왔다.
  맥신은 실신을 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쿠르의 팔에 안겨 있었다.
  그의 몸을 밀어젖히고 흐릿한 눈을 똑바로 떠 보았으나 아직 주위가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요.”    “괜찮아.”
쿠르에게 안겨 있는데도, 그 음성은 멀리에서 들려 오는 듯싶었다.
“이러고 있으면 돼.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쿠르는 소파에 맥신을 뉘고 방에서 나갔다. 몇 분 뒤 글래스를 든 아이자크와
같이 들어왔다. 그는 마루에 무릎을 꿇고 맥신의 머리를 쳐들었다.
“이걸 마셔, 곧 기분이 좋아질 테니까.”
  맥신은 하라는 대로 글래스에 든 액체를 마셨다. 그러나 쿠르의 말고는 
반대로, 아까보다 더 심해졌다. 다시 제정신이 든 다음에도 눈은 여전히 흐렸다.
  쿠르는 창백해진 맥신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긴장이 풀려
잠든 것 같은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지금 당장 결혼하겠다고 해도 맥신으로서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목사가 하는 말을 반복하기만하면 되는 거야. 걱정할 것 없어, 잘 될 테니까.”


  상당한 시간이 흘러 현기증이 가라앉았을 무렵에는, 맥신은 이미 쿠르의 아내인
셈이 되어 있었다. 목사에게 따지려고 애썼으나, 쿠르가 먹인 약기운 때문에
도무지 입밖으로 사실을 토로할 수가 없었다. 분노로 몸을 떨면서도 〈예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었다. 목사는 맥신이 일사병으로 쓰러진 것이라 믿고
있는 듯 했다.
  목사가 돌아간 뒤, 쿠르는 아내가 된 기분이 어떠냐고 빈정거리며 물었다.
  “속였군요.”  잿빛 눈동자가 분노로 타올랐다.  “정말 비겁해요 !”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내 말을 잘 기억해 둬.
아내가 된 이상 나에게 복종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나를 존경하지 않으면 안 돼.“
  “복족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존경하게 할 수는 없어요. 당신에게는
그럴 가치가 조금도 없어요.“
  쿠르는 나직이 웃으며 맥신의 몸을 끌어당겼다.
“존경받지 못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단지 맥신에게 좀더 넓은 아량이
필요할 것 같군.“



  쿠르가 맥신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나긋한 허리에 팔을 감았다.
  맥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손발을 휘져으며 쿠르를 노려보았다.
“부부가 될 수는 없어요.”
  “그러면 안 돼. 지금 곧 부부가 되는 거야.”
쿠르가 비웃듯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더 이상 맥신을 귀찮게 하지는 
않았으나, 그녀에게는 이미 저항할 힘이 없엇다. 몸을 맡겨 버린 것도 아닌데.
  “글래스 속에 무엇을 넣었었뇨?”
몸을 지키기 어려운 것이 참으로 억울하다는 듯, 그의 비열한 행위를 나무랐다.
  “해롭지 않은 약초야. 그러지 않으면 바보같이 소란을 피워 목사를 
난처하게 만들 것 같아서.“
  미세스 마틴의 딸이 아니라고 한 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나간 일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지금부터라도 이 상태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지.
“부부가 될 수는 없어요. 베르베르인의 결혼식에 대해서는 예전에 책에서 읽었지만...”
  쿠르가 빙긋 웃었다. “내게은 베르베르인의 피가 섞여 있으나 완전한
베르베르인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 그들은 나를 동족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오래지 않아 맥신을 사막에 데리고 가서 내 아내라고 소개하겠어.
맥신이 젊고 순수한 처녀였다면 사막에서 식을 올렸을지도 몰라. 하지만 맥신이
내 아내로서 알맞지 않은 여자라는 것을 그들이 알까 두려웠어. 그들은
순결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여자를 아내의 첫째 조건으로 여기고 있거든.
그러나 관계없어, 나는 이대로 만족하고 있으니까. 내 약혼녀는 유서 깊은
프랑스 귀족의 후예였지만, 맥신 역시 미세스 마틴의 상속녀니까.
친구들에게 소개해도 손가락질받을 염려는 없겠지.“
  상기되었던 맥신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의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것은 관계없다. 그러나 쿠르가 미세스 마틴을 만나, 내가 그의 친딸이
아니라 비서였다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자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맥신은 그때 쿠르가 격노할 모습을 상상하고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내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멋대로 일을 저지른 것은 쿠르였으나,
그렇다고 쿠르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가짜라는 것을
그가 알 수 있도록 좀더 손을 썼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맥신은
죄의식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갑자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쿠르의 음성이 들려 왔다.
“본 쉬도록 하라고.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 베가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나서 함께 식사하기로 하지.“
  맥신은 베가의 뒤을 따라가면서, 할 일이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했다.
우리의 결혼을 미세스 마틴에게 알리려는 것일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물어 보지 않았다는 게 후회스럽기 짝이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런
결혼이었기 때문에 다른 일은 그만 잊어버리고 있었다. 미세스 마틴은
자식의 죽음을 얼마나 비통해 하고 있을까? 곁에서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고 싶었다.
  맥신의 생각은 자꾸 꼬리를 이었다. 쿠르는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
사막에서처럼 여기서도 도망칠 길은 없다. 모래는 없으나 산이 너무 높다.
뜨겁게 내리 쬐는 태양, 큰 돌로 된 요새, 좀처럼 도망칠 방법이 없으니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몸인 것이다.
  쿠르는 맥신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기는 하나, 그한테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입을 맞출 때는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이상한 감정이 고개를 드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사랑이라
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욕망이라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맥신은 쿠르 데스티에를 만난 후에야 비로서
남성을 원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알았다.
  베가가 기쁜 낯으로 목욕물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맥신은 소파에
깊이 몸을 파묻고 자기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엄한 수도원생활이 고맙게 여겨졌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 덕분이었다. 맥신은 피가 맺힐 정도로 입술을 꼭 깨물며
울고 싶은 심정을 참았다. 아마도 그는 영국에 가서 미세스 마틴을
만나기까지는, 내가 그녀의 친딸이 아니란 사실을 믿지 않을 것이다.
미세스 마틴이나 그녀의 친딸을 직접 만난 다음에야 비로서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쿠르는 어떻게 나올 것인가? 제일 가능성이
큰 해결 방법은 이혼일 테지만........ 그의 종교는 ---- 만일 열심히 믿고
있는 종교가 있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 이혼을 시인할 것인가?
어쨌든 미세스 마틴을 만날 때까지 며칠 동안은, 복수로 알고 
기뻐하고 있을 쿠르의 조롱을 받아야 할 것이다.
  맥신은 갑자기 두 배나 늙은 것같이 여겨졌다. 속세에 물들이지 
않았다 해도, 바보가 아닌 보통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금까지 살아온
나날을 돌이켜보지 않고는 못 베길 것이다. 쿠르가 부부 생활을 요구한다면
미세스 마틴과 만나기 전에 임신하게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상상만 해도 기분이 언짢아졌다.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쿠르가 이혼을 원하거나 하지 않거나간에 일시적인 환상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맥신은 목욕을 한 뒤 좀 쉬려고 큼직한 침대에 드러누워 보았다.
그러나 곧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가 아프고 목 뒤의 근육이
몹시 뻐근했다. 그녀의 안색이 나쁜 것을 보자 베가가 걱정스러운 듯이
다가와서는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맥신을 엎어 놓고 어깨와 등을
정성껏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맥신은 쿠르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고 머리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아, 기분이 좋군.
동방의 여자는 남자를 기쁘게 하는 불가사의한 손을 가졌다는 것을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났다. 맥신은 베가의 안마술에 녹아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베가가  옷을 입히고 있었다. 투명한 스커트를 몸에 둘러 주고
짧은 웃옷을 입히고 있는 참이었다. 허리 부분은 맨살이 드러나, 마치
무희와도 같은 스타일이었다. 향수를 뿌리고 번쩍번쩍 빛나는 액세서리를
달았다. 베가는 윤이 날 정도로 맥신의 머리를 곱게 빗겨 주었다.
맥신은 흥미잇게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아름다운 처녀가 거기 있었다. 그렇다, 성숙한 여자라고는 할 수 없으나
쿠르 데스티에를 매료시키키에 충분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광선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야. 쿠르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므로 이런 겉모양에 현혹되지는 않을 거야. 맥신은
절망적인 한숨을 쉬며 베가를 따라 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자,
놀랍게도 쿠르가 관능적인 입매에 웃음을 띠고, 신부를 맞는
신랑답게 기다리고 있었다.
  쿠르는 맥신의 모습을 보고 잠시 표정이 굳어졌으나 곧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맥신에게는 그의 눈에 기쁨의 기색이 떠오른
듯이 생각되었다. 
“오늘 밤의 베가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옷시중 솜씨를 보여주었군.”
그의 시선이 나긋나긋한 맥신의 허리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살짝 건드려 보고는 빙긋 웃었다. “온몸이 다 이렇게 보르라운가?”
  맥신의 목덜미에 피가 역류했다. 그의 시선을 받고 있으면
타는 것같이 얼굴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종소리처럼 고동친다.
하녀가 음식을 가져오자 얼른 의자에 앉았다.
“내 옷을 입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입었을뿐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런 옷은 입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얇은 스커트를 손으로 털었다.
“잘 기억해 두세요. 당신을 위해서 이런 옷을 입은 것은 절대 아니에요.”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쿠르의 남성적인 매력에
이끌리고 만다. 큰 키에 피부는 햇볕에 타서 구릿빛이었고, 
헐렁한 흰옷 위로도 그의 떡벌어진 어깨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유럽의 슈트를 입고 있다면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역시 매력적일 것임에는 틀림없을 듯싶었다. 손짓만 해도 여자가
따라올지도 모른다.
  이상한 생각은 마음을 산란하게 할 분이다. 맥신은 이렇게 생각하고
시선을 떨구었다. 쿠르가 곁에 앉았으나 시선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생각을 돌릴 마음에서 요리에 손을 대자, 무척 배가 고팠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젯밤부터 거의 먹은 것이 없기 때문에 쑥스러울 만큼
식욕이 왕성했다.
  쿠르가 맥신의 잔에 커피를 따르면서 상냥하게 웃었다.
“식욕만큼 애정도 왕성했으면 좋겠어.”
  “언제나 이렇게 많이 먹지는 않아요. 특별히 배가 고플때만 그래요.”
그녀는 몸을 경직시키며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다.
  “알고 있어. 그건 그렇고,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 여기 있는 
동안에는 단둘뿐이니 쓸데없는 말다툼은 하지 말고 즐겁게 지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 후에는 도시로 나가게 되나요?”
맥신의 음성은 불안 때문에 쉬어 있었다.
  “음,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서로의 생활을 흐트러뜨리지 않게 될 거야.”
  다른 여자와 어울릴 것이기 때문이라 생각하니 저절로 어투가
거세어졌다.  
“나는 어떻게 되든 괜찮다는 말이군요?”
  “그런 뜻이 아니야. 내 아내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하고 행동도
신중히 해야 하겠지만, 사업에는 일체 관여하지 말기를 바라겠어.
내 집은 여기에도 많고 프랑스에도 많아, 그런 것에라도 마음을 붙이고
즐기기를 바라겠어.“
  “집안에 처박아 놓을 작정이로군요?”
  “틀림없이 혼자 있고 싶어질 거야, 여기서 떠날 무렵에는 서로가
품고 있던 약간의 흥미마저 엷어질 테니까. 맥신의 동생이 내게 어떤 짓을
했는지 마음에 새겨 두고, 그 보상을 한다는 마음으로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쿠르의 말이 맥신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코린이 억지로 그녀를 끌어낸 것은 아니에요.”
  쿠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그걸 알지, 지한 것으로 만족하고 있어. 아름다운 여자와의 결혼은
사업에도 도움이 될 테고, 밤에 걸프렌드와 외출해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의 생활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이것을 가리킨 말이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 결혼은 형식적인 것 같아. 쿠르가 그것을 실행하려
한다면, 그 양심에 호소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일는지 몰라.
  맥신은 마음의 동요를 억제하면서 애원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아직 서로를 잘 알지 못해요. 그리고 당신은 이제 막 약혼녀를
잃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나를 학대하는 걸 즐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결국 이 결혼은
사업 때문일 테죠? 당신은 아직 약혼녀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나를 사랑하지도 않을 거예요.“
  쿠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약혼녀를 잃은 것은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야. 맥신.
맥신 역시 여러 가지로 마음을 쓰는 데 비해서는 동생이나 어머니에 
대해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 같지 않군. 다시 말해서 우리 두 사람은
모두 그들의 죽음을 별로 슬퍼하지 않는 셈이야.“
  “지독한 사람이군요.”
  “슬퍼하는 체하는 위선자보다는 낫지. 이 결혼이 비즈니스란 점에서
동감이지만, 나는 좀더 깊이 생각하고 있어. 맥신이 내 곁에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자기의사로 한 결혼인지 아닌지는 어머니가 알지 못해.
그러니 무척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맥신은 더 참을 수가 없어 벌떡 일어섰다. 
“피곤해서 이제는 쉬고 싶어요.”
  쿠르의 높은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기다릴 수 없다는 말인가?”
  “기다릴 수 없다니요? 설마.....”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었다.
  쿠르도 눈빛을 빛내며 일어섰다. 
“우리 결혼이 형식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하면 그건 맥신의 잘못이야.
그런 애매한 입장에 맥신을 놓아둘 수는 없어.“
  맥신은 소름이 끼치는 듯한 생각으로 쿠르 곁을 떠나려 했으나,
곧 붙들려 끌어당겨졌다. 쿠르의 입술이 비명을 막아 버리기하도 하듯이
사납게 맥신의 입술을 덮쳐 왔다.
  “알겠어?”  쿠르는 그녀의 턱에 손을 대고 얼굴을 정면으로 향하도록 했다.
그리고 떨고 있는 입술을 다시 한번 막아 버렸다.
  “무슨 사람이 이래요 ! 짐승이에요 ! 잔인하고.....”
자기 음성도 들리지 않을 만큼 격렬하게 가슴이 뛰고 있었다.
맥신은 달려들 듯이 그의 눈을 쏘아보았다.
  쿠르가 씁쓸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냈다.
“순결한 처녀인 체하지 마. 생각해 봐, 나와 결혼함으로써 지금까지 손에
넣지 못했던 사회적 지위를 얻은 거야. 그러니 이 결혼을 비극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을 테지?“
  “그럴지도 모르지만.....”
  “내게 마음이 없지도 않을 텐테.”
  맥신은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에게 안겨 입술을 빼앗겼을 때의
기분을 어떻게 부인해야 좋을까? 그의 매력에 금세 이끌리고 마는
자신이 부끄럽고 또 억울했다.
  “용케 나이를 속이고 있지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는 없을 거야.
좋은 상대를 만날 기회도 없어진 거야. 다시 말하지만, 둘이서 잘해 보자고.
나도 오늘 밤을 기다리고 있었어.“
  맥신은 방에서 뛰쳐나왔으나,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려 왔다.
그녀는 공포에 질리고 악마에 끌리기라도 하는 듯이 세찬 기세로 
침실로 뛰어들어갔다. 
  안에서는 신부의 옷 갈아입는 것을 도우려고 베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맥신은 베가의 얼굴에 떠오른 겁먹은 표정 따위는 아라아곳하지
않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베가는 어찌 된 일인가 하고 어리둥절해 하고있었다.
틀림없이 쿠르에게 일러바칠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역시 그녀는 
방을 나갔다.
  맥신은 쓰러질 듯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을 정리하여 했으나
희미해질 뿐이었다. 쿠르가 좀더 친절히 대해 주었으면.....
지금은 어느 정도 쿠르에게 연심(戀心)을 품고 있는 그녀였다. 쿠르가 가까이
있으면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이 되는 것과,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어쩔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히는 것은 웬일일까? 맥신으로서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쿠르가 내게 애정을 품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그가 복수와 사업상의 이익만을 위해 결혼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동시에 처음부터 그에게 호의를 가졌던 자기 자신이 어리석고
분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나 오래 그러고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문이 열리고 쿠르가 들어왔을 때,
새로운 긴장이 맥신을 엄습했다. 그의 목적은 분명했다. 맥신의 얼굴에 
두려움의 빛이 떠올랐다.
  쿠르는 오만하게 입을 다물고 맥신을 내려다보았다.
“잠자리에 들 준비는 이미 끝났나? 베가는 어디 있지, 도와주라고 했는데?”
  문자 그대로 사막의 족장답게, 자기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맥신은 쿠르에게서 시선을 때려 했으나,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는 저녁식사 때 입고 있던 것과는 다른 풍성한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쫒아냈어요.”  
그녀는 치솟는 불안을 감추려는 듯이 불쾌한 음성이 말했다.
“어린아이처럼 입혀 주고 벗겨 주고 하는 것은 싫어요.”
  “싫건좋건 따라야 해.”
점잖은 음성인데도 위압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제부터는 내 명령대로 움직이길 바라겠어.”
  “싫어요 !”
  그러나 쿠르는 순식간에 곁으로 다가와서 맥신을 안아 올렸다.
“우선 기억해 두어야 할 일은, 나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야.
내 기분을 상하게 하면 위험하다는 것은 알겠지?“
  “이것 놓으세요 !”  꼭 쥐었던 작은 주먹으로 쿠르를 때렸다.
그는 맥신의 팔을 한 손으로 붙들었다. 
“베가가 벗겨 주는 것이 싫다면 혼자서 벗을 거야, 아니면
내가 벗겨 줄까? 순진한 신부인 체하겠다면 거기 어울리게 놔두겠어.“
  “건드리지 마세요 !”
 쿠르는 호탕하게 웃고 맥신의 손을 놓아준 다음, 이번에는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그렇게는 못하겠어. 맥신이 결코 싫은 것도 아니고, 또 내 아내니까.
그리고 맥신은 마음으로부터 코린의 일을 슬퍼하지도 않고 있어, 그렇지?“
  이점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쿠르의 팔에 힘이 가해짐에
따라 몸을 떨었으나, 머리를 흔들지는 않았다. 코린 마틴과는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으므로, 쿠로가 말했듯이 슬퍼하는 체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쿠르의 손이 맥신의 날씬한 몸을 더듬어 내려갔다.
뿌리치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의 분노를 돋우며 줄 것만 같아 내버려 두었다.
쿠르는 억세게 맥신의 입술을 덮쳐 왔다. 맥신은 몸 깊숙한 곳에서
공포가 전율이 되어 치닫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았다.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꼭 안겨 뜨거운 키스를 받는 동안, 그녀는
온몸의 피가 끓어올랐다. 맥신은 그의 팔을 푼다는 것이 무리임을 깨닫고,
조금이라도 얼굴을 멀리하려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쿠르는 안타까운 듯 옷에
손을 대고 당장에라도 찢을 듯이 덤볐다.
  “싫어요 !”  마지막 힘을 다해 결사적으로 쿠르의 몸을 떼밀었다.
머리로 피가 역류했다. 자제심이 없어지기 전에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그에게 애정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부탁이에요, 쿠르. 10분만 여유를 주세요.”
  쿠르가 불분명한 소리로 무어라 내뱉었으나, 맥신의 부탁을 들어줄 기색은
없었다. 
“10초도 안 되겠어. 자아, 이리 와. 지난날 맥신이 사나이들한테 어떤 표정으로
대했었는지 잘 알고 있어. 자기 남편에게는 그 특권을 안 주겠나?
얌전히 굴기만 하면 나도 거칠게 나가지 않겠어. 하지만 지금처럼 앙탈을
부린다면 그 약속은 지킬 수 없어.“
  “아, 그만둬요.”
  쿠르는 맥신의 비병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천천히 그녀의 은빛 단추를
벗기기 시작했다.
  “맥신이 이렇게 아름다우리라고는 도무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어.”
  “쿠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그녀의 자제심이 점점 마비되면서, 그에게 몸을 맡기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것만 같았다.
  갑자기 맥신은 있는 힘을 다해 쿠르의 몸을 뿌리쳤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하면서 햇볕에 탄 그의 얼굴을 할퀴었다. 피가 맺히는 것을 
보고서야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의 손이 맥신에게서 떨어져
피가 흐르는 뺨을 누르는 순간, 그녀는 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쿠르의 손에서 놓여난 것은 잠간 동안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쿠르는 사막의 호랑이처럼 날쌔게 덤벼들어, 도망치는 그녀의 긴 머리를
움켜쥐었다. 얼굴에 핏줄이 선 그는 눈꼬리를 치켜올리고 있었다.
  “그만둬요.”
  “어째서 그만둬야 하나?”
그는 싸늘하게 내뱉고는 머리를 놓고 그 대신 허리를 껴안았다.
  맥신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사태를 더 악화시킨 것을 후회했다.
  쿠르는 맥신의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젖히고 입술에 키스했다. 크녀에게 있어서는 굴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후회할 거예요.”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맥신을 잘 순종하는 아내로 교육시키고 말겠어.
이젠 그 연극도 재미없어, 싫증이 났단 말이야.“
  “시간을 주세요. 쿠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는 맥박치고 있는 맥신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었다. 그러고는 맥신의 기색을
살피려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게도 도망치려는 것은 무리야, 알겠어?”
  “싫어요 !”  그녀의 항의는 비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쿠르에 의해서 눈뜬
그 무엇인가가, 마치 의지를 가진 듯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저항하고 있었지만, 몸에서는 힘이 빠져나갔다.
  “옳지.”  쿠르는 맥신의 다리에서 완전히 힘이 빠지자 그녀를 안고 침대로 갔다.
“저항은 이제 그만두는거야.”
맥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된 것이 본의가 아닌지는 모르나, 서로가 최대한 즐기는 것도 좋지 않겠어.
경험 없는 여자도 아니고 말이야? 남자를 즐겁게 해주는 방법도 알고 있을 테지.
물로 즐거움을 줄 뿐만 아니라 얻는 방법도. 자아....“
쿠르는 맥신 곁에 누워 얼굴 전체에 키스를 퍼부었다.
  맥신은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으나, 덮쳐 오는 쿠르의 몸무게을
도저히 당할 수 없었다. 그녀는 벌주듯 하는 격렬한 키스 세례에, 온몸이 욕망의 
급류에 휩쓸려 들어갔다.
  그녀는 쿠르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이 몸에서 승리에 도취한 듯한 웃음이
전해지는 듯싶었다.
  “암, 그래야지.”  쿠르는 그녀의 나긋나긋한 몸이 자기 뜻대로 되어가는데
만족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맥신의 머리에서는 쿠르 이외의 것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의 심장의 고동 소리와 체온이 전해질 때마다 묘한 반응이 일어났다.
맥신은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만난 순간부터 맥신이 탐났어, 맥신도 그랬었지? 이것 봐,
이렇게 가슴이 뛰는군.“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온몸의 감각이 마비된 것 같았다. 맥신은 
완전히 몸을 내맡겼다. 의식이 흐려져 갔다. 도망칠 길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도망칠 기력도 없었다. 순수한 육체적 욕망에 몸도
마음도 녹아드는 것 같았다.


  쿠르가 일어난 뒤에도 맥신은 멍하니 누워 있었다.
점점 의식이 되살아나자 고통스러운 생각이 들었으나, 그 이상으로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감각이 없어진 손으로 뜨거워진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약간 짭짤했다. 입술을 격렬한 키스 때문에 아팠다.
“쿠르.”  그녀가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리며 팔을 뻗었다.
“쿠르?”  이번에는 적의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린 듯이, 촉촉이
젖은 눈을 반쯤 뜨고 쿠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쿠르가 곁에서 떠나 잠자코 있는 것은 양심의 가책 때문이 아니라
화가 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참고 있는 듯싶었으나
그의 얼굴에는 감출 길 없는 분노가 일렁거렸다. 조금 전에 보였던
정열의 흔적도 없었다.
  쿠르는 마루에서 가운을 주워 들어 난폭하게 걸쳤다. 그러고는, 당황하여
움츠리고 있는 맥신에게 다가와, 아무런 정감도 없는 어투로 다그쳤다.
“도대체 너는 누구야?”
  내가 누구냐고요? 맥신의 머릿속에서 그 말이 메아리쳤다.
“당신의 아내라고 생각하지만....” 
격에 맞지 않는 대답이었다.
  “바보 ! 네 정체를 묻고 있는 거야. 이제야 겨우 미세스 마틴의 딸이
아니란 것을 알았어.“
쿠르는 분노에 찬 눈으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심하게 
흔들었다. 그녀의 가냘픈 목 위에서 머리가 마구 흔들이고 눈에서는
눈물이 넘쳐흘렀다.
  “이미 이야기했을 텐데요. 당신이 들으려 하지 않았을 뿐.....”
  “내게 말했다고?”  쿠르의 분노는 전혀 진정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 와서 한참 지난 후였지 않아? 애초에는 코린의 누나로 
버틸 생각이었으면서....“
“미세스 마틴이 그렇게 부탁했기 때문이에요.”
“왜? 무엇 때문에?”
“중요한 사람을 보냈다고 당신이 믿게 하기 위해서 였어요.”
맥신은 격양된 쿠르 앞에서, 마음먹었던 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커질 듯한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그래서 승낙했다는 말인가?”
  쿠르가 힘을 가하자 팔이 아팠다. 맥신은 한없이 처량해졌다.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까? 눈을 감고 증오를 불태우고 있는 쿠르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를 썼다. 물론 쿠르를 속인 것은 큰 잘못이다. 하지만
은혜를 입은 미세스 마티의 부탁을 모질게 거절할 수는 없지 않았던가.
  “미세스 마틴은 나에게 사죄의 편지를 전하라고 했던 것뿐이에요. 
당신과는 잠깐 얼굴을 마주 대하면 될 뿐이라고 여겼어요.“
  "그럼, 속일 생각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녀는 화해를 위해 맥신을
나한테 보내고,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내 분노를 가라앉혀 줄 속셈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싸늘한 말에 등골이 오싹했다. 
“잘은 모르지만, 그녀는 그럴 속셈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미세스 마틴도
충격으로 머리가 혼란했을 거라는 점을 감안해 주세요.“
  “가증스럽군 !”  갑자기 맥신을 떼밀었다.
“언제까지나 거기에 그렇게 하고 서 있겠어? 그런 모습은 두 번다시 
보고 싶지 않아.“
  그는 구겨진 시트를 맥신을 향해 내던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턱까지
시트를 끌어올려 몸을 가렸다. 두 사람이 나누었던 정열은 완전히
식어 버렸다. 그리고 맥신에 대한 쿠르의 욕망은 이제 증오로 변해 있었다.
사납고 가무잡잡한 그의 얼굴에는 증오만이 깃들여 있었다.



  맥신은 굴욕으로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입을 열었다.
“이혼할 생각일 테죠?”
“음, 언젠가는, 그러나 당장은 아니야. 나를 세상의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나?
처음에는 약혼녀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고, 다음엔 엉터리 결혼을 하고,
맥신이 남자를 몰랐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죽이고 싶도록 미웠어.
어떻게 하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어?“
  “모르겠어요.”  그녀는 창백한 얼굴에 수치스런 빛을 띠고 흐트러진
침대로 시선을 옮겼다.
  쿠르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싸늘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나는 정말 바보였어. 맥신의 젊음이 진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다니,
그리고 또 베가에게서 이 머리는 염색한 것이 아니란 말을 들었는데도.“
그는 맥신의 눈에서 당장에라도 떨어져 내릴 듯한 눈물을 야비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당신도 당연히 명문 출신이겠지? 양친은?”
  “두 분 다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요.”
  그는 조금도 가엾어 하는 기색 없이 파고들며 물었다.
“그러면 어디서 자랐어?”
  그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 ! 맥신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사회 사업 시설에서....”     “뭐라고 !”
경멸과 분노가 뒤섞인 그의 말에 맥신의 말이 끊겼다.
“고아원에서 자란 여자로군. 형편없는 여자하고 결혼했군. 카사블랑카의 
뒷골목을 뒤져도 이 보다는 나은 여자를 발견했을 거야.“
  맥신은 입술까지 파래져서 외쳤다.
“고아라도 같은 인간이에요. 다른 사람과 똑같이 이해와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이렇게 말한 순간, 마지막 말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정을
구걸하고 있다는 듯이 여겨지면 곤란하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필요없었다.
쿠르가 거칠게 맥신의 팔을 잡았다. 아파서 다시 눈물이 나왔다.
  “그만둬, 이젠 진력이 났어. 맥신과 같은 인간을 동정하는 것도 좋은
일일지 모르지만 아내로 삼는다는 것은 질색이야.“
  그는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 우선 상대의 경제 상태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야 한다고 교육받아 왔다. 맥신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가진 재산은 있나?”
  있다고 한다면 조금은 친절히 대해 줄 것인가? 아아, 내가 부자였다면
이 사나이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수 있을 텐데. 맥신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굴욕 때문에 몸이 타는 듯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아뇨, 불행하게도 전혀 없어요.”
  “흥, 태생도 나쁘고 한푼도 없는 여자한테 깜쪽같이 속았군.”
쿠르는 맥신의 팔을 붙들고 있던 손을 어깨로 미끄러뜨렸다.
“반드시 앙갚음을 하겠어, 이 사기꾼!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고통을 주고야 말겠어.”
  맥신은 어깨의 아픔도 잊고 망연히 쿠르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도
피와 눈물이 없는 사나이라 생각해 왔으나, 오늘은 각별했다. 내가 그에게
아무 필요도 없는 인간이란 것을 알고 자존심이 크게 상한 모양이야.
그러니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로군. 그러나 맥신은
서로 정열을 불태웠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타오르던 입술과 가슴, 상상으로만 알고 있었던 희열이
육체에 깃들여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던 것이다.
  “이야기는 내일 아침에 계속하기로 하겠어. 그때까지는 머리가
어지간히 정리될 것이니 앞으로의 일도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내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야. 내가 버리고 싶은
생각이들 때까지는 도망치지 못해.“
  그는 분개한 표정으로 맥신을 자리에 쓰러뜨렸다.
쿠르가 받은 타격은 단순히 여자에게 속았다는 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총명한 그는 아마도 당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누군가에게 그 분풀이를 해서
기분을 풀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맥신은 그 누군가가 자기라는
것을 잘 알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맥신은 불안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으나, 쿠르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오전중에 카사블랑카로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메모를 베가를 통해 전해 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기 
올 때 입고 온 옷이 되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베가 앞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순간, 이 옷을 벗었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악몽과 같아 도저히 현실에서 일어난 일 같지 않았다.
  그러나 요 며칠 동안에 일어난 일은 악몽과 달리 그렇게 간단히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미 아무것도 모르고 모로코에 왔을 때와
같이 순진한 처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쿠르는 쿠르대로 속아서 나와
결혼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미세스 마틴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도
없는 하찮은 여자와. 그녀의 재산을 손에 넣음으로써, 코린의 행위에
대한 복수를 하려던 쿠르의 시도는 무참히 실패로 돌아갔던 것이다.
  쿠르는 결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 앙갚음은 고통스러웠다.
고독에 몸부림치며 잠이 오지 않는 밤을 하루 지냈을 뿐인데도, 
자기 의사에 반하여 육체는 쿠르의 품에 안겼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두 번다시 자기를 향해 벌려 줄 리가 없는 그 가슴에....
  맥신은 몸단장을 하고,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섰는 베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베가는 남의 인사를 받는 일ㄹ에 익숙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이상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방긋 웃었다.
“안녕히 가세요, 마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겠어요.”
  다시 올 기회가 있을 것인가? 맥신은 깊이 한숨을 쉬고 걷기 시작했다.
아래층에서 쿠르가 기다리고 있었으나, 어젯밤과는 다른 태도였다.
처음 보는 검정 슈트 차림으로 홀 쪽에서 성큼성큼 걸어왔다.
슈트는 아주 잘 만들어져 나무랄 데가 없었다. 속에 받쳐 입은
흰 셔츠도 햇볕에 탄 얼굴과는 대조적이었다. 맥신은 약간 놀랐으나,
쿠르의 얼굴을 보니 묘하게 밝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유럽의
비즈니스맨을 보는 느낌이었다.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복장이라
딴사람같이 보였는데, 들뜬 자기 마음을 억누르는 데는 그것이 오히려
좋았다.
  쿠르의 험상궃은 눈동자는 맥신의 시선을 뿌리쳤다.
“잘 잤어?”  어쩌다 한 지붕 밑에서 하룻밤을 지낸 사람에게 하는 
것 같은 어색한 인사였다. 
“트럭으로 가게 되었어. 산 저쪽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헬리콥터를 
탈 거야, 저녁때까지 카사블랑카에 도착해야 하니까.“
  그는 맥신의 창백한 얼굴이나 눈 밑의 그늘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전에는 쿠르와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좋았으나, 지금은 무언가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결혼이 재로 화해 버리기 전에, 아직 불씨가 남아 있는 동안에
조금이라도 돌이키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만 앞설 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쿠르 !”  맥신은 그가 등을 돌렸을 때 서둘러 불렀다.
“나와 할 애기가 있지 않았어요?”
  “마담.”   그는 맥신의 가련한 얼굴을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흥미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제는 잘못 생각했었어. 카사블랑카에 돌아가 두서너 가지 지시를
하려 했을 뿐, 특별히 얘기할 것은 하나도 없어.“
  맥신은 흘러내릴 듯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눈을
내리깔았다.
“서로 얘기해 둘 일이 있을 것 같은데요.”
  “없어. 오늘부터 우리는 남아야, 잠시 동안은 한지붕 밑에서
살게 되겠지만, 나는 못된 지혜를 짜내어 살아가는 여자에게는 용무가 없어.“
  “아니에요. 쿠르. 그렇지 않아요.”
  아이자크가 밖에서 트럭 운전사와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안에는
단둘뿐이었다. 쿠르는 떨리는 목소리를 낮출 필요가 없었다.
“맥신은 자신에게 눈독을 들여 비싼 값을 매겨 주는 사나이에게
몸을 팔았어. 그러니 살 사람이 마음에 없으면 버리는 것도 자유가
아니겠어? 그것이 맥신의 장래야, 마담. 어쨌든 애정을 구걸하는
듯한 흉내는 내지 않길 바라겠어, 그것은 시간 낭비니까.“
  카사블랑카까지의 여행은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나,
맥신에게는 그 길이 영원으로 계속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분이 우울해 카사블랑카에 도착했을 때는 인내의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공항에서 기다리던 차를 타고 그녀는 쿠르의
맨션으로 향했다.
  맨션은 그의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맥신의 눈을 휘둥그래지게 했다.
이 집은 크사르나 사막의 텐트에 비해 클 뿐만 아니라 초현대적인
설비에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방은 몇 가지 골동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맥신은 미세스 마틴으로부터 골동품에 관한 것을
자세히 배웠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었다. 금빛 실크 천으로 
감싼 아름다운 소파, 윗단에 시계가 곁들여진 보기좋은 프랑스 책상,
객실 반대쪽에는 다리가 굽은 화려한 19세기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밖에도 맥신으로서는 그 가치를 알 수 없는 고급스럽고
우아한 것들이 많았으나, 언제까지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쿠르가 긴 복도를 가르켰다. 
“침실은 저쪽이야. 제일 구석에 내 침실이 있는데, 그 방말고는 
아무 방이나 다 사용해도 좋아. 물론 나하고 같은 방에서 잘 생각도
없을 테지만.“
  맥신은 방을 정하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곁에 있는
쿠르를 쳐다보았다.
“입을 것을 별로 안 가져왔어요. 롱 드레스말고는 현재 입고 있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아무러면 어떠냐는 듯이 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맥신은 그의 냉담한 태도에 기가 꺾였지만 용기를 내어 이야기했다.
“같은 옷만 계속 입고 있을 수는 없어요.”
  “그렇게 하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어. 비서에게 말해 큰 상점에다
맥신의 구좌를 만들도록 하겠어. 파리에 갈 경우도 있을 테니
그때마다 적당한 것을 사도록 해. 물질적인 부자유는 주지 않겠어. 마담.“
  마담이라니, 어째서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일까?
그리고 다른 것을 모두 빼앗긴 여자에게 있어서 〈물질〉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쿠르 자신도 어젯밤에 그토록 정열적으로
사랑해 준 사람답지 않게 먼 존재처럼 느껴졌다. 맥신은 얼굴을
붉히고, 그가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하도록 고개를 떨구었다.
“호텔에 가면 옷이 있으니까 구태여 구좌를 만들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옷을 살정도의 돈도 가지고 있고요.“
  쿠르가 눈을 치뜨며 맥신의 어깨를 붙들었다.
“내 아내로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이목을 생각해야 해. 내 돈으로
산 것만을 입기 바라겠어. 내 아내가 싸구려 누더기만 입는
것을 보기는 싫으니까. 당신의 짐은 며칠 안에 호텔에서
가져오도록 하겠어. 이 부근 어디에 있을 테지.“
  맥신의 얼굴에 쿠르의 입김이 와 닿았으나 비정과 분노를 
토해 낼 뿐, 정열 따위는 느낄 수 없었다. 눈동자가 흥미있게 빛나고
있었으나, 그것은 정감이 깃들인 것이 아니었다. 맥신의 거칠어진
입술과, 저항하다 쿠르에 의해 생긴 목덜미의 상처 작국을 조소하듯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몸을 도사리자 쿠르는 방긋 웃었다.
“무서워 할 필요는 없어. 지금은 아무 짓ㅗ 하지 않을 테니까.
욕구를 만족시키고 싶을 때는....아무도 없으니까 협정을
맺어 두는 것이 어떻겠어?“
  쿠르를 때려 주어야겠다는 마음을 억제할 틈도 없이 주먹이
먼저 나가고 말았다. 계속 억누르고 있던 굴욕감이 마침내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쿠르는 그 손이 도달하기 전에 맥신의 팔을 꽉 붙들었다.
사나운 표정에 붉은 기미마저 감돌아 금방이라도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맥신이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나며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잠시 맥신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무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빠른 프랑스어로 쿠르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떨어졌다. 누군가가 쿠르와 연락을 취하고 싶어하며, 나중에
다시 전화하겠노라 했다는 말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쿠르가 대답하고 나서 맥신을 소개했다.  “내 아내요.”
  그 여자는 놀란 듯했으나 억지로 그걸 참고 있었다.
두사람이 어제 결혼했다는 말을 듣자 눈을 크게 떴다.
  “이쪽은 마담 랑케. 매일 와서 가사를 도와주고 있어.”
쿠르는 그녀의 놀란 모습이나 맥신의 불쾌한 표정등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까? 마담 랑케가 가사를 모두 맡아 한다면,
나는 하루 종일 무엇을 한단 말인가?
  마담 랑케는 어쩔 줄 모르는 맥신에게서 쿠르에게 시선을 돌려,
평소처럼 식사를 여덟 시에 준비해도 좋으냐고 물었다.
  “좋아요. 그리고 손님이 있을지 모르니 1 인분 정도 여유있게
준비하도록 해요.“
  맥신은 내객에게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고 있었다. 마담 랑케가
물러가자 곧 방으로 돌아가도 좋으냐고 물었다. 누가 온다면
쿠르가 혼자 만나도 될 것이고, 가령 여기 있으라고 한 대도 울적하고
쓸쓸한 마음으로는 아무와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쿠르는 잠시 생각하다가 홱 맥신에게 몸을 돌렸다.
“방을 선택하라고 하지 않았어? 그리고 맥신의 슈트케이스도 
찾을 수 있을 거야.“
  맥신의 슈트케이스는 복도 끝에 있는 쿠르의 방 곁에 놓여 있었다.
그의 방과는 너무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지금 상태라면 몇 미터이건 몇 백킬로이건 마찬가지 아닌가.
  방에는 욕실이 딸려 있고, 완전히 독립된 형태로 꾸며져 있었다.
그녀는 다행이라 생각하고 얼른 샤워를 한 뒤 침대에 드러누웠다.
피로 때문에 발이 천근같았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안했는데도
피곤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맥신은 몸을 떨면서 흐느껴 울다가
어느 틈에 잠이 들고 말았다. 그랬다가 한 시간쯤 후에 눈을 뜨고,
다시 샤워를 한 다음 옷을 갈아입었다.
  맥신이 가지고 온 드레스는 구기말 하나 가지 않고 당장
입을 수 있는 상태로 슈트케이스에서 나왔다. 슬픈 미소를 띤
맥신은 얼른 실크로 된 그 드레스를 입고 매무시를 고쳤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드레스는 아니야. 적어도 쿠르와 같은 남자,
아내와 헤어지려고 하는 남편 따위에게는....
  그녀는 깊이 탄식하고,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지우고자 파운데이션을
바랐다. 얼굴은 어떻게 감출 수 있었으나, 충혈된 눈동자는 속일
수 없었다. 어쨌든 자존심을 가지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쿠르는 어덟 시에 식사를 한다고 했다. 아직 일곱 시 반이지만 
얼른 가야 식사 시간에 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복도를 걸으면서, 쿠르가 외출한 것이나 아닐까 하고 걱정했다.
얼굴을 마주하기가 싫으면서도, 그가 없으면 왠지 쓸쓸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비록 그가 자신을 아내로 인정을 하지 않더라도......
  쿠르는 널따란 거실에 있었다. 거실은 현대식으로 꾸민 방으로서,
폭신한 카핏에 안락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다. 겉보기에는 
훌륭한 방이었으나, 왜 그런지 따스함을 느낄 수 없었다.
골동품이 있기는 했으나, 큰 거실에 있던 것처럼 값비싼 것은 아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쿠르는 가구라도 바라보는 듯한 무표정한
시선을 던졌다. 
“그것이 마음에 드는 드레스인가? 갖다 버려, 여기는 고아원이 아니니까.”
  맥신의 머리로 피가 역류했으나 못 들은 체했다. 
“마담 랑케는 가정부인가요?”
  쿠르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런 것이 중요한가?”
맥신이 대답하지 않자,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상주하는 것은 아니지만, 집안을 돌보아 주고 있지. 그런 것을
가정부라 부르는 모양이더군.“
  “우리들이 결혼했다는 것을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었군요.”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당신의 약혼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어요.”
  쿠르의 음성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약혼녀에 대해서는 거의 알고들 있어. 그러나 곧 잊어버리겠지.
언젠가는 맥신에 대해서도 잊어버릴 거야.”
  맥신은 또다시 단검으로 찔린 듯한 충격을 받았으나 얼굴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쿠르에게 다가가서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마담 랑케가 집안일을 보살핀다면, 나는 하루 종일
무엇을 하면 좋아요?“
  “무엇이든 재미있는 일을 찾지 그래. 보통 프랑스의 아내들은
남편의 마음에 들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하지만, 맥신은 싫어하게
만들려고 애쓰고 있지 않아?“
  맥신이 얼굴을 붉혔다.
“그런 말을 한다고 신경이라도 쓸 줄 아세요?”
  쿠르는 갑자기 그녀를 끌어당겨, 도망칠 사이도 주시 않고
억지로 입술을 밀어붙였다. 두 팔에 꼭 붙들려 있었기 때문에 
어깨와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몸 속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감정에 밀려 차차 힘이 빠졌다. 쿠르의 뜨거운 눈동자와 입술이, 그녀로
하여금 더할 나위 없는 기쁨에 눈뜨게 했다.
  그러나 쿠르는 맥신이 그의 목에 팔을 감으려 하자 그녀의 몸을
밀쳐 버렸다. 조롱하는 듯한 낮은 음성이 들렸다.
“침착해, 맥신. 언제 어느때 손님이 올지 모르니까.”
  자기 스스로 그런 짓을 하고도 쿠르는 냉정했다.
  “두번 다시 키스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어요? 
내가 바란 것도 아닌데.....“
  “계속 무시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 말로는 나를 싫다고 하면서,
이 팔에 안겼을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더군.“
  마침 그때 마담 랑케가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맥신은 깊숙이 의자에 파묻혔다. 정말 뻔뻔스런 사람이야 !
  “손님이 오셨어요, 미스 마틴이란 분입니다.”
  미스 마틴이라고 ! 몸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으로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멕시코에 있을 거야.
코린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미세스 마틴이 연락하려 했으나
안 되었지 않아?
  “맥신, 잘 왔어.”  정감이 깃들인 쿠르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녀는 틀림없이 그 여자가 미세스 맥신의 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천천히 두 팔을ㄹ 벌리면서 쿠르에게 다가갔다. 직접 만난
일은 한번도 없었다. 자기와 똑같은 모습의 소녀 때 사진을 
보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지금 눈앞에 나타난 여자는 별로 닮은 
것 같진 않았다. 억지로 말한다면 키가 비슷하고 코의 생김새가 
닮았으며, 눈빛이 약간 진하기는 해도 같은 잿빛이라는 정도였다.
젊었을 때는 날씬했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허리에 살이붙어 있어서
헐렁한 드레스로 그 허리를 감추고 있는 듯싶었다.
모피 코우트만 해도 상당히 값이 나가는 것인 듯했다.
  쿠르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전에 만났을때는 금발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저는 그동안 멕시코에 가 있었어요.”  그녀는 아름답게 염색한
갈색 머리에 쿠르의 시선을 받으며 방긋 웃었다.
“멕시코에서는 언제나 머리 염색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아요.”
  그녀의 시선이 쿠르에게서 맥신한테로 옮겨 갔다. 흠칫 놀란 듯
다시 한번 그를 쳐다보았다.  “이분이 어머니가 보낸 분이로군요. 
어머니는 나하고 똑같이 생겼다고 했지만........”
  "음, 옛날의 당신과 똑같아. 젊어서 한창 무료할 무렵이었지.
게다가 동성동명이었고.“
  “이었었다니요?”
  “역시 예리하군. 지금은 맥신 데스티에로, 내 아내지. 
우리는 어제 결혼했지.“
  “어머나, 결혼을?”   그녀는 침을 삼켰다.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어, 약간 실수했을 뿐이니까.”
  “무슨 뜻이죠, 쿠르?”  
이번에는 창백해진 얼굴을 맥신에게 돌렸다.
“어머니는 편지를 전하도록 했을 뿐이라고 하던데요?”
  맥신이 일어서려 하자 쿠르는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잠자코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여러 가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리 서두를 필요는 없어.
당장 돌아갈 것도 아니지 않아?“
  어쩔 줄 몰라하는 맥신의 눈앞에서 쿠르는 그녀를 방 한가운데로
안내하고 음료를 권했다. 그런 뒤 그녀를 불쌍히 여기는
듯한 태도로,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냐고 물었다.
  잠시 후 그는 마담 랑케에게 식사를 부탁하겠다며 방을 나갔다.
그러자 미스 마틴이 맥신 곁으로 왔다. 쿠르에게 보였던 거 같은
다정한 태도는 전혀 없이 짓궂은 시선을 보내 왔다.
“사기꾼 ! 당신의 계락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쿠르에게 곧 버림받을 거예요.”
  맥신은 몹시 충격을 받고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쿠르가 이 결혼은 잘못된 것이라 했으나, 새삼스레 부정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결혼할 수 있었던 거예요. 만일 내가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쿠르와 나는 벌써 옛날에 결혼했을 거예요.“
  맥신은 절망적인 마음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분과 결혼하셨지 않아요?”
  “나요? 천만에요. 쿠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요? 물론 전에는 
결혼했었지만 헤어졌어요. 멕시코가 싫어져서, 당신이
떠나온 직후에 런던으로 돌아왔어요.“
  “그럼, 코린의 일을 알고 계시겠군요?”
  “그렇게 작은 소리로 말할 필요 없어요. 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별로 슬프지는 않아요. 우리는 사이가 좋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어머니는?”
  “시간이 가면 가라앉을 거예요. 내가 일을 돕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코린보다 내가 휠씬 더 머리가 좋죠. 쿠르와 함께 잘해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여기에 체재할 생각이세요?”
  “물론이죠. 쿠르가 진짜 결혼이 아니라고 부정했지 않아요? ]
곧 이혼할 것이라 생각해요. 2, 3개월을 넘기지 않고 내가 당신 자리를
차지해 보이겠어요. 물론 비공식적으로는 그 이전이죠, 알겠어요?“
  맥신은 자리를 떠선 안 된다는 쿠르의 말을 지켜, 식사하는 동안
계속 자리를 지키며 싸늘한 시선을 견디고 있었다. 
미세스 마틴의 딸 맥스는 쿠르와 마찬가지로 버릇없는 약탈자를
상기케 했다. 아마도 그런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의기가 투합하는
모양이었다.
  맥스는 야무지고 세상 경험이 많으며 매력적이고 머리도 좋은 것 같았다.
코르는 그녀와의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아니, 마음까지 빼앗기고
있을 거야. 내가 앞에 있다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아.
쿠르는 맥스의 드러난 팔에 손을 올려놓고 단둘이 있는 듯한 투로 웃고 있었다.
맥스가 일아났을 때, 쿠르는 그녀를 호텔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맥신은 쿠르의 조롱하는 듯한 시선을 받고 미칠 것 같았으나, 그녀가 이집에
묵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약간 안심을 했다.
  이튿날 아침까지 쿠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맥신은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혼자 밤을 지세웠다.
아침 일찍 일어나 쿠르의 모습을 찾았으나 아물래도 없었다.
맥스와 같이 호텔에 묵었으리라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으나,
마담 랑케가 그는 이미 한시간 전에 아침 식사를 끝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바람을 쐴 겸 외출이라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마담 랑케가 
권했지만, 맥신은 하루 종일 맨션에서 나가지 않았다. 쿠르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을까하는 한가닥 희망도 헛되어, 집안은 을씨년스러울 만큼
조용했다.
  생각하는 일말고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누군가 이 고민을
들어줄 사람이 있었으면, 하지만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어.
그녀는 이제야 비로소 그렇게 생각했다. 맥스를 만난 뒤, 쿠르가 그녀에게
친절을 다하는 것을 보고부터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복스 밖에
모르는 사나이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일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코린에 대한 것이었던 격렬한 증오가, 지금은 나한테 향해지고 있다.
아내에게 고통을 주고, 버릴 것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맥스에게는 그녀의 어머니의 비서였던 여자와 왜 서둘러
결혼하게 되었는지 벌써 설명을 했을까? 
이미 얘기해 버렸으면 좋겠는데....  내입으로 모두 이야기 하려면
정말 고통스러울 거야. 맥신은 자기가 이토록 심한 보복을 받아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데도, 이 결혼 때문에 쿠르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 밤 쿠르는 노크도 하지 않고 맥신의 방에 들어왔다.
맥신은 막 샤워를 하고 머리 손질을 위해 브러시를 잡은 순간이었다.
  “쿠르.”  브러시를 떨어뜨리고 그쪽으로 돌아섰다. 어젯밤은 
한 치의 틈도 없어 보였으나 오늘 밤에는 머리마저도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입가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맥신은 그가 가엾다고 생각했다.
“피곤하세요?”  머뭇거리며 물었다.
  쿠르가 브러시를 주워 들었다. 나를 때릴 생각일까?
“피곤하다기보다 자신의 어리석음이 싫어져서 그래.”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맥신은 싸늘한 시건을 받자, 큰 소리로 외쳤다.
“이번에는 무슨 일을 했다는 거예요?”
  쿠르는 그녀의 가냘픈 몸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불쾌한 듯이 입을
열었다.
“코린과 내 약혼녀였던 여자가 결혼했을 때, 내 약혼녀는 재산을 모두
코린에게 양도하도록 절차를 밟고 있었어. 알고 있었나?“
  “아뇨. 내가 어떻게 그런 것을 알겠어요?”
잠시후에야 그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세스 마틴과 그 딸이 재산을 모두 상속받게 되겠군요?”
  “그래. 전부를.”
  “그럼, 잠시 기다렸다가 그녀와 결혼하면.....”
  “걱정할 거 없어, 멀지 않아 모두 내 손에 들어올 테니까,
맥신과 이혼하여 자유롭게 되는 날에.“
  “쿠르 !”  그가 그렇게 욕심사나운 사람인 줄은 알지 못했다.
프랑스인들에게는 돈이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앞서도 말했지만, 당신은 이 결혼에 대해서는 나를 탓할 수 없어요.”
  “이제 그만둬.” 브러시를 쥔 그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맥신도 숨을 죽이고 주먹을 꼭 쥐었다.
“맥스에게 우리가 왜 결혼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했어요?”
  “아니, 맥신에게도 이야기할 필ㄹ요 어???어. 맥신이 그녀의 젊었을 때
모습과 비슷해서 내가 충동적으로 결혼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내게 매력이 있다고 그녀늘 생각지 않을 거예요.”
  “그럴 테지. 맥스는 변했어. 맥신 같은 젊음은 없지만 성숙한 여인이야.”
  “경험을 쌓은 여자겠죠.”      “아주 많이.”
쿠르는 브러시를 놓고 맥신의 턱에 손을 대어 얼굴을 위로 쳐들었다.
“장미 봉우리는 향기로울지 모르지만, 만개한 꽃이 되려면 신중해야 해.”
  “그런 바보 같은 비유는 안해도 좋아요.”
  “조심해.”  쿠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를 바보라 부르는 자는 모두 후회하게 될 거야, 물론 그러는자는
거의 없지만.“
그는 맥신의 매끄러운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맥신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일어섰다.
  가운이 벗겨지자 더울 몸을 떨었다. 나를 증오하고 괴롭히고 있으면서
어째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 맥신의 귓전에 쿠르의 싸늘한 음성이 울렸다.
“맥신이 나에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할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야. 
나를 화나게 한뒤 후회할 사람은 결국 맥신이야. 그 마음에 불을 붙여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어. 내 품속이나 침대에서 용서를 빌게 
할 수도 있고. 결혼식날밤......“
쿠르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거친 숨결이 들려 왔다. 그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아아 !”  그는 홱 몸을 떼었다.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아. 맥신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갑자기 말을 끊고 흘러내린 검은 머리를 난폭하게 쓸어올렸다.
  “쿠르.....”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모순되어 있다.
아마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맥신의 몸에 손을 댈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결혼식날 밤의 일도 입밖에 낼 생각이 아니었을 텐데,
마음속의 무엇인가가 진실을 토로하게 했을 거야. 아마 
자기 자신으로서도 놀라고 있을지도 몰라. 맥신도 쿠르의 마음을
깨달았으나, 그것을 말한다면 그를 더욱 분노케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쿠르는 맥신의 뜨거운 시건을 피해 방을 나가면서 어깨너머로 말했다.
“오늘 밤엔 밖에서 식사할 테니 맥신은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어.
마담 랑케에게 식사를 방으로 갖다 달라는 것이 좋겠다면,
그렇게 말하지. 그러면 금방 잘수도 있을 테니까.“



  그로부터 몇 주일 동안, 맥신은 남편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저녁 식사 후 어쩌다가 한 시간쯤 이야기하는 일이 있기는 했으나,
그런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쿠르는 외출하지 않는 날에도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으므로 맥신으로서는 방해할 수도 없었다.
마담랑케는 이상한 부부라 생각하겠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었다. 맥신은 낮 시간에 되도록 마담랑케의 일을 도우려 했으나,
방을 어지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곧 일이 끝나 버리고 말았다.
  맥신은 혼자 시내에 나가 쇼핑을 하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았다.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제일의 도시로서, 큰 항구가 있는 상업중심지였다.
대부분의 건물은 무어식 건축물로서, 고풍스런 건물도 있고 
더러워진 콘크리트 그대로인 건물도 있었다. 사실 오래 전에 식민지가
된 근대 도시인 것이다.
  카사블랑카 교외에 있는 안퍼는 12세기부터 발달한 마을 인데,
스페인, 포르투칼, 프랑스 및 무어인에게 점령되어 왔다. 마라케시와
가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에서 비교적 풍부한 산물을
수집할 수 있어서, 몇 세기 동안 매우 중요한 고장으로 번창해 왔다.
항구는 크고 활기에 차 있으며, 인광(燐鑛)의 수출항으로서는
세계 제일이다. 맥신이 거닐고 있는 동안에도 국제적으로 유명한 회사의
공장이 몇 개나 눈에 띄었다. 
  맥신은 쿠르의 사업과 관계 있는 것을 찾아보려고 주의를 기울이며
걸었으나 잘 알 수 없었다.
  쿠르는 맥신에게 옷을 잘 입으라고 귀찮을 정도로 말했다.
대부분의 상점들은 아름답고 현대적이었다. 만일 부부 사이가 원만했다면,
새 옷을 사는 등 쇼핑하는 것이 여간 즐겁지 않았을 것이다.
맥신은 결국 마당 랑케가 소개한 작은 양장점에서 옷을 맞추어 입기로 했다.
양장점 여주인은 아름다운 드레스 몇 벌에 대해 아주 싼값을 불렀기
때문에, 맥신은 깜짝 놀라며 좀더 돈을 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마당 랑케에게 물었다. 그러나 마당 랑케는 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마님께서 돈을 더 지불하시면 다른 사람한테도 비싼 값을 매기려
할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맥신은 이상한 사고 방식이라 생각했으나 그냥 가만히 있었다.
마담 랑케는 모로코인이었지만 반은 프랑스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필요 이상으로 여분의 돈을 지불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새 드레스를 입을 기회가 과연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가하고 있던
중에 놀라운 일이 생겼다. 어느 날 아침, 아직 자리에 누워 있는데
쿠르가 방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대로 있어도 좋아.”
그는 깜짝 놀라 일어나려는 맥신을 제지했다.
“오늘 밤에 맥스와 친구 한 사람과 넷이서 외출하게 될 것 같아. 
새 드레스는 이미 만들어져 있겠지?“
  “네.”  너무 기쁜 나머지, 청구서를 받아 들고 지불하러 간 것이
쿠르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여유도 없었다.
카사블랑카에 온 이후 계속 그녀를 무시하여 왔는데, 오늘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의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얘기에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인상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나,
기쁨이 깃들인 눈빛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기꺼이 가겠어요. 그런데 친구란 누구예요. 남자인가요?”
  “물론이지. 노엘 프랭크. 지난번 사막에 왔던 사나이말이야.”
  “나쁜 소식을 가져왔던 사람말이군요?”    “그래.”
  틀림없이 맥스는 노엘과 어울리고 있을 거야. 그는 쿠르의 회사에서
중요한 일을 맡고 있다니 자연스런 일이야. 하지만 맥스와 만나고
있지 않다면, 쿠르는 도데체 밤마다 어디에 가는 것일까?
설마 사업 때문은 아닐 테고.
  “내 드레스가 마음에 드실 거예요.”
맥신은 방긋 웃고 나서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네글리제를 통해
살이 드러나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순간 쿠르이 눈이 빛났다.
  “여덟 시에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 둬. 마담 랑케에게는
저녁식사를 준비하지 말라고 하는게 좋겠어.“
  “알았어요.”
  쿠르가 곧 방에서 나갈 기색이었으므로, 그녀는 아쉬운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평소의 근엄한 표정으로 되돌아간 
쿠르가 엄한 어투로 말했다.
“내가 다음에 여기 들어올 때는 몸단장을 해두도록 해. 이런 
아침시간에 맥신의 유혹에 응할 생각은 없으니까.“
  쿠르는 다시 낯선 사람이 되고 말았다. 맥신은 얼굴을 붉히고
황망히 무릎을 감싸면서 몸을 감췄다.
“미안해요. 쿠르.”
  쿠르의 눈동자에 잔인한 빛이 어리는 듯싶었다. 그도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세탁소에서 흰 재킷이 배달되어 왔는지 살펴봐 주겠어?
마담 랑케는 그런 일에 게으르니까 말이야.“
  맥신은 쿠르를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여기 온 이래 아무런 마음의 위한도 없이 세월만 허송한 그녀였다.
진공 상태로 떠 있는 듯한 언짢은 기분을 참으면서, 쿠르로부터의
마지막 선고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쿠르의 허락을 받고 그의 방에 간다는 것은, 마치 몇주일이나
계속된 장마 후에 햇볕을 받는 것고도 같았다. 물론 이 비유는
항상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지만....
  맥신은 혼자 성스러운 곳에 들어가는 마음으로 쿠르의 방에
발을 들여놓았다.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온 적이 없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그러면서 정말 신부처럼
매일 밤 여기서 쿠르 곁에 누워 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방 한가운데 잠시 서 있었다. 가슴이 죄어드는 느낌으로 큰 침대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쿠르의 그 억센 몸이 뉘어질 테지.
여기서 몇 사람의 여자를 가슴에 품고 사랑을 나누었을까?
크사르에서 나를 가슴에 품었듯이.
  맥신은 크사르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나 애써 잊어버리려 했다.
쿠르는 맥스나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미녀들을 과연 이곳에
데려왔었을까?
  맥신은 얼굴을 붉히며 쿠르의 옷장으로 뛰어갔다. 재킷은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다른 옷 세벌과 함께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군, 며칠 밤을 입어도 다 입지 못할 만큼 좋은 옷들이
많은데, 하필이면 이 옷에만 연연해 하다니....
  방에서 나가려 할 때, 한쪽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가만히 가서 사진을 집어 들었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맥스 마틴이었다.
더구나 최근에 찍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쿠르는 이것을 보도록
하기 위해 나를 이방으로 보낸거야. 재킷을 살펴보라고 한 것은,
되도록 빠른 시일안에 맥스와 결홥하고 싶다는 그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아. 아름다운 액자 밑에 예쁜 글씨로
무언가가 씌어 있었다.  〈둘이서 지낸 오후의 추억을 위해서〉
  맥신은 침통한 마음으로 사진을 떨어뜨리고 침대에 쓰러져
마구 울었다.
  방에 돌아와 겨우 옷을 갈아입었을 무렵에야 기분이 약간
가라앉았다.
  쿠르가 돌아온 기척이 났다. 맥신은 그를 만나럴 가지 않고
가만히 자기 방에 서서, 그가 그의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얼굴에 눈물 자국이 없느걸 확인하고 거실로 가서
그를 기다렸다. 쿠르가 왜 외출을 종용했는지 이제는 분명해졌다.
맥스와의 스캔들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날 이용하려는 거야.
그러나 매일 밤 혼자 맨션에 있는 것보다는 낫다.
  거실로 들어온 쿠르의 시선이 날씬한 맥신의 모습을 포착했다.
“아주 매력적이군. 마담.”
  쿠르의 빈정거림에 이미 익숙해진 맥신이었다. “노력했는걸요.”
침착하게 말하는 맥신의 입가에는 미소마저 떠올랐다.
  “노엘이 기뻐하겠군.”
  이 일격으로 희망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녀는 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쿠르는 무자비하게 공격을 계속했다.
  “마음 산란해 할 필요 없어. 내가 언짢은 말을 할 때마다 그렇게
글썽거리면 하루 종일 울고 있어야 할 거야. 눈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내 침대를 그렇게 적셔놓은 건 좋은 일이 못돼. 베게가
흠뻑 젖어 있더군.“
  맥신은 깜짝 놀라 얼굴을 들고 몸을ㄹ 움츠렸다. 아아, 얼마나
어릭석은 짓을 했었나. 마담 랑케가 부르는 바람에 얼른 눈물을
닦고 방에서 나와 버렸으니. “미안해요, 머리가 아파서....”
  “이유를 묻는 게 아니야. 좀더 자제심을 가졌으면 해서 하는 
말이지. 남자와 여자가 같은 집에서 살려면 어느정도의 자제력은
필요해.“
  조금도 동정해 주지 않는군. 맥신은 시선을 돌리고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두번 다시 그런 일을 하지 않겠어요.”
  쿠르는 무쇠같이 억세고 찬 손으로 맥신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마담 랑케가 손님이 왔다는 것을
알리러 왔다.
  노엘 프랭그가 대형 승용차를 몰고 왔다. 조수석엔 맥스가 타고 있었다.
노엘은 곁에 매력적인 여자가 앉아 있어서 마음이 들떠 있었던지,
쿠르와 맥신을 보고는 그제야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맥신이
뒷자석에 앉으며 방긋 미소를 보냈다.
  차는 거리로 나가 해안을 달렸다. 대서양의 거친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차 앞쪽에는 많은 해수욕장이 있고,
반대쪽에는 카사블랑카에서도 유명한 나이트 클럽과 레스토랑이
즐비해 있었다.
  맥스는 좌석에 기대어 쿠르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쿠르도 몸을 꺾듯이 하고, 곁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는 시선도 주시
않고 맥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일행은 호화로운 무어식 나이트 클럽에서 식사를 하고 춤을
추기로 했다. 맥신은 음식엔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최근에는
식욕이 없고 체중도 자꾸 줄기 시작하고 있었다. 푸짐한 요리와 와인이
식욕을 자극하기는커녕 오히려 질리게 만들었다.
  노엘은 무척 자상한 사람으로서 맥신에게 여러 가지로 친절을 다해 주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도저리 자리에 앉아 있지 못했을 것 같았다. 노엘은
식사가 끝나자 겸손한 말로 쿠르에게 이야기했다.
“부인과 춤을 추어도 괜찮겠나, 쿠르?”
  “암, 좋지.”  쿠르가 맥신에게 시선을 보냈다.   “한번 추구료.”
  맥신은 주눅이 들었다. 정말 무관심한 말투로군. 일부너 나를 상심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일까? 식사하는 동안에도 내게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맥스하고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맥스는 마치 만족스런 고양이처멈
목구멍을 울리며.....
  맥신은 노엘이 이상하다는 듯이 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춤을 추는 동안에도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가엾게 생각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말도 하기가 싫었다. 아직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동정 비슷한 말을 듣게 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춤을 끝내고 테이블로 돌아왔을 때, 쿠르와 맥신의 모습은 이미 거기에
있지 않았다. 맥신의 어두워진 표정을 보고 노엘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지 마세요, 마드모아젤. 아니, 실례했습니다. 마담.
젊으시기에 그만 말을 잘못했습니다. 쿠르는 곧 돌아올 것입니다.“
  맥신도 애써 태연을 가장하려 하면서  “네, 그럴 테죠.”
하고 대답했으나, 따돌림을 당했다는 절망적인 마음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고는 반끔 체념한 듯 웃어 보였다.
“쿠르와는 전부터 알고 지내셨나요. 므슈?”
  “노엘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네, 그와는 안지가 꽤 오래 되었죠.
나이도 비슷하고.“
  “오아시스에선 말할 기회가 없어서 유감이었어요.”
맥신은 오아시스에서의 일을 얘기해야 할 것인지 망설이던 끝에 말했다.
노엘은 온화한 눈을 가지고 있어서 친근해지기 쉬울 것 같았다.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그의 어투는 전혀 비난할데 가 없었다. 그는 오아시스에서의 일보다
맥신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쿠르에 대한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맥신의 질문은
그에 대한 것뿐이었다. 어째서 쿠르에게 직접 묻지 않는지 그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쿠르의 부모는 프랑스인이지만, 그도 부모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태어났죠.
실제로 모로코인의 피는 이어받지 않았으나, 모로코인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베르베르인의 피도 흐르고 있다던데요?”
  “그래요, 몇 대조인지는 모르나 조상 가운데 베르베르인이 있었던
듯해요. 그래서 시간을 내어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지요.“
  “한가한 때는 언제나 그렇게 하나요?”
  노엘이 빙긋 웃었다.
“때로는 로맨스도 있었죠, 마담. 이젠 결혼했으니 그러지 않겠지만,
그는 워낙 매력적이거든요.“
  분명히 그러했다. 그 사나이다운 매력에 이끌림녀 심장의 고동을
억제할 수 없게 된다.
  웨이터가 와서 노엘에게 메모를 전했다. 그것을 읽는 노엘의
입가가 굳어지는 것을 보자, 맥신은 그것이 쿠르의 일이라고 
직감했다.  “무엇이에요?”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저어.....”  그는 말하기가 거북스러운지 말꼬리를 흐렸다.
“직접 읽어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아니예요, 가르쳐 주세요.”  쿠르가 쓴 메모를 읽을 용기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메모에 시선을 떨군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쿠르와 미스 마틴은 어디엔가 간 모양입니다. 나더러 당신을 곧장
집에 바래다주라는 말이 씌어 있군요.”   “어머나, 그런....”
맥신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며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마음을 진정하세요, 맥신. 어떤 연인이라도 싸울때가 있습니다.
화해할 때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물론 쿠르의 
행동이 옳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럴 만한 이유가 없지도 않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설명하는 데는 익숙지 못한 것 같습니다마는.......
특히 여자분에게는.....“    ”하지만 저는 아내예요.“
“알고 있습니다.”
노엘이 할말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맥신은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결혼은 잘못되어 있어요.
쿠르는 저를 사랑하지 않아요.“
노엘은 쿠르에게 충실했으나, 쿠르의 아내에 대해서는 다른 뜻으로 
끌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그마하고 상냥하며 아주 귀엽다. 그는 자기가
맥신을 지켜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쿠르의 말대로 곧 바래다주지
않고, 좀더 커피를 마시며 춤을 추다 가면 어떻겠느냐고 맥신에게
제의 했다.
“걱정하면서 잠자리에 든다고 해서 좋을 것을 없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흘러, 두사람이 맨션에 도착한 것은 두시간이 지난 후의일이었다.
맥신이 방에 들어가려 했을 때 쿠르의 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나, 신경을 쓴 때문이라고 스스를 납득시켰다.
  노엘이 한 말은 옳았다. 완전히 지쳐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생각할 틈도 없이 깊은 잠이 들었다.
  그런데 노엘의 치료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튿날 아침에 알게 되었다.
쿠르는 좀처럼 맥신과 조반을 같이 먹는 일이 없이, 언제나 그녀가
자고 있을 때 외출했다. 맥신은 커피가 마시고 싶어, 아마 쿠르가 외출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네글리제 차림으로 식당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두 번째 커피를 따르고 있는 쿠르의 모습이 눈에 띄자
깜짝 놀랐다. 사무실에 갈 때의 복장이었으나 아직 상의는 입고 있지
않았다. 완벽한 몸차림과는 어울리지 않게 아주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젯밤 맥스와 어떻게 지냈을까 하고 상상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그는 수면 부족을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아내에
대한 미안한 생각이 없을까, 그를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맥신이 당황하며 물러가려 하자, 쿠르가 고개를 들고 싸늘한 음성을로
말했다.
“도망치면 안 돼, 할말이 있으니까.”   
“무슨 말이에요?”     맥신이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쿠르가 일어서는지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맥신이 돌아보았다.
쿠르는 사막에서 그랬던 것처럼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맥신을
붙들어 지금까지 자기가 앉았던 의자에 억지로 앉혔다. 
“어제는 무척 늦었더군.”
  순간 침묵이 흘렸다. 맥신은 잠시 몸을 떨었으나 의연한 자세로 맞섰다.
“어떻게 아세요?”   “돌아올 때 소리가 났어.”
  맥신은 깜짝 놀라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쿠르의 방에서
소리가 난 것은 사실이었다는 말인가? 그렇더라도 왜 사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인가?
“그래요, 그것이 어떻게 되었다는 거예요?”
도전적으로 쿠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매너가 나쁜 것은 당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잔소리를 하는 거예요?”
  “보통 정상적인 부부라면 그렇지만, 우리는 달라.”
  “하지만 남한테는 정상적인 부부처럼 보이게 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쿠르의 표정이 더욱 험해졌다.
“노엘을 믿고 위세를 부리는군. 그와 함께 남겨 둔 내가 잘못이었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로군요.”
맥신은 자기의 냉정에 만족하고 있었으나, 지나친 말을 했기 때문에
모처럼의 냉정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당신이야말로 맥스와 같이 나가고선 뻔뻔스럽게도 그런 말을 하는군요.”
  “나는 맥신보다 한 시간이나 먼저 돌아왔어.”
  “정말이세요?”
  “맥스가 두통이 났어. 하지만 그걸 어떻게 믿겠어?
맥스는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어.“
  “그래요?”  맥신이 씁쓸하게 웃었다.
“언제나 잘 나간다고는 할 수 없죠. 그런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기도 하지만...”
  “무슨 뜻이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맥신, 말해 두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대답하는 것을 제일 싫어해.”
  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맥신을 몸을 움츠렸다. 맥스에게는 이런 거친
소리를 하지 않으련만, 쿠르는 바쁠 텐데 어째서 오늘 아침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쓸데없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아닐 테고. 어젯밤에 일찍
돌아왔다면 맥스와 싸웠을 거야. 아아,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도 하루 종일 이런 일을 생각하는 것밖에는 소일거리가
없다는 말인가?
  “쿠르, 내가 할 일이 뭐 없을까요? 타이프라이터라면 칠 수 있는데요.”
  쿠르가 조롱하듯이 웃었다.  “맥신은 내 아내야.”
  “그러면 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요?”
  “당연하지.”
  “말도 안 돼요. 당신이 보통 남편이라면, 무언가 할 일을 찾아 
줄 거예요.“
  “내가 보통 남편이라면, 맥신이 다른 일에 열중하도록 할 거야.”
  “어떻게요?” 
맥신은 노엘이 말해 준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쿠르가 일어서는 것을 보고도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군.”
그는 맥신의 몸을 재빨리 끌어당겼다.  “대답은 바로 이겨야.”
쿠르가 맥신의 입을 막았다.
  “싫어요 !”  세차게 저항했다. 쿠르는 나를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전에 그랬던 것처럼 떠보려 하고 있는 것뿐이야.
  쿠르는 도망치려 하는 맥신의 머리채를 홱 휘어잡고 자기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한 다음, 버둥거리는 몸을 억누르면서 몇 번이나
키스를 되풀이했다. 그는 키스의 효과를 잘 알고 있었다. 맥신의
눈동자가 젖어 오는 것을 눈으로 자세히 확인하고 있었다.
  맥신의 눈동자는 솔직 담백하여, 마음에 있는 것을 전혀
감추지 못한다. 쿠르의 긴 손이 뺨을 따라 내려와 목덜미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맥신의 눈은 절망적으로 변해 있었다.
  쿠르는 떨리는 그녀의 입술 끝에 달래듯이 입을 가져갔다.
“맥신은 내 온몸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고 있어.”
  맥신의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조심해야지. 그는 시험하느라고
이렇게 하고 있는 거야. 이것도 앙갚음의 하나야.
그러나 맥신의 심적 욕구는 이성의 속삭임도 무시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그의 키스에 응하면서 팔을 올려 그의 목에 둘렀다.
  쿠르도 맥신의 가슴의 고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거칠어져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한 번 더 키스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쿠르의 쉰 목소리의 뜻을 겨우 깨닫자,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뉘우쳤다. 몸을 뿌리치려 했으나,
허리가 꽉 껴안겨 있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쿠르의 체취가 떨어지지 말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쿠르의
숨소리가 커지고, 맥신의 몸을 감은 그의 팔에 더욱 힘이 
가해졌다. 쿠르가 맥신을 안아 올리려 했을 때 마담 랑케가 들어왔다.
  그년는 식당에 들어오자 흥미있는 듯이 눈길을 보냈으나,
당황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놀랐다면, 이런 시간에
외출하기 않고 아직 식당에 남아 있는 쿠르에 대한 놀람이었을 것이다.
  “두 분 모두 전화 소리를 듣지 못했어요?”
그녀의 말에 맥신은 귀밑까지 빨개졌다.
  “미스 마틴이 서방님과 할말이 있다는데, 거절하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쿠르는 이렇게 대답하고 난폭하게 맥신을 밀어 버리며 마담 랑케 앞을 
지나 식당에서 나갔다.
  마담 랑케는 그리 간단하게 충격을 받는 타입이 아닌 듯 싶었다.
맥신의 흩어진 네글리제에 시선을 던진 다음 퍼컬레이터에 손을 뻗쳤다.
  맥신은 입술을 깨물고 떨리는 손으로 옷매무시를 바로잡았다.
  원두 커피를 거르면서 마담 랑케가 말했다.
“아까 서방님이 어째서 그런 무서운 얼굴로 저를 노려보셨는지 모르겠어요.
매일 이 시간에 식당으로 온다는 것은 아실 것이고, 또 바쁘실 때는 
제가 전화를 받게 되어있는데 말입니다.“
  “그 이야기는 그만둬요.”
맥신은 자기 음성이 분명한데 놀랐다. 마담 랑케는 한숨을 쉬고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전화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은
우리가 열중했기 때문이라 생각할 테지. 마음속에서는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고, 몸의 여기저기에 쿠르에게 안겼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
아아, 어째서 이토록 괴로워해야 한단 말인가?
  만일 마담 랑케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쿠르는 나를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나를 침실로 데려가 침대 위에 내동댕이치고는 껄껄거리고 웃었을 것이다.
맥스로 부터의 전화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태도로 보아 분명해. 
역시 맥스와의 찬스를 놓칠 생각은 없는 모양이야.
  맥신은 쿠르가 닫고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그가 돌아왔을 때 무엇이라
말했으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마담 랑케가 콧노래를 부르며 끓여
준 커피를 마시고 있노라니, 쿠르의 외출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담 랑케는 맥신의 얼굴이 긴장된 것을 보고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그날은 니세스 마틴에게서 편지가 온 것을 제외한다면 별로
특별한 일이 없이 무사 평온하게 지나갔다. 맥신은 쿠르의 일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편지가 일시적이나마 기분을 전환시켜 준
것이 고마웠다. 매긴은 카사블랑카에 도착하고 얼마 후 미세스 마틴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편지를 통해 그녀는 코린의 사고에 대한 애도와,
쿠르와의 갑작스런 결혼에 대해 짤막하게 보고했었다. 사정을 모두
자세히 이야기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나, 전혀 알리지 않을 수도 없었다.
  미세스 마틴은 지금까지 회답을 보내오지 않았었고, 이편지에서도
많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코린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는 것, 
맥신의 결혼이 잘 되어 나가기를 원한다는 것 등이 짤막하게 씌어 있었다.
  맥신은 편지에 시선을 떨구면서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맥신이
원한다면 다시 옛날ㄹ로 돌아와도 좋다는 말도 덧붙여져 있었다.
끝으로 맥스가 카사블랑카에 갔으니 모든 일이 잘 정리될 것이라는 
말로 끝을 맺었는데, 그것이 사업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었다.
  미세스 마틴에게 되돌아갈 수는 없어. 그녀는 나를 속일 생각이
아니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를 이용한 것만은 사실이야. 그 결과 나는 이토록
비참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어. 두 번 다시 미세스 마틴을 믿지는 않겠어.
그리고 쿠르와 헤어진다면 그녀에 대한 생각이 나지않는 곳으로 가고 싶어.
  그날은 하루 종일 쿠르를 보지 못했고,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가 돌아온 소리를 들은 것은 한밤중이 자니서였다.
  이튿날은 일찍 눈을 떳으나 쿠르가 이미 외출한 후여서, 그녀로서는 
여저니 지루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겨야지 그렇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노엘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는 살 것만 같았다. 그는 맥신의 형편을
묻고, 별일이 없으면 점심이라도 같이하자고 했다. 맥신은 처음 쿠르에 
대한 생각에서 주저했으나, 절도를 잃지 않는 한 쿠르도 잔소리를 
안할것이라 여기고 승낙했다. 노엘에게는 쿠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했었기 때문에, 친구를 대하는 듯한 가벼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노엘은 시내의 깨끗한 음식점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맥신은 화장과 몸치장에 정성을 다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새로 맞추어 놓은 크림빛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모습은 무척
우아해 보였다. 윤이 나도록 곱게 빗은 머리를 뒤에서 높이 묶었다.
가늘고 아름다운 목덜미는 맥신의 젊음과 고혹적인 성숙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노엘은 맥신의 손에 가만히 입을 맞추고 아주 매력적이라고 칭찬했다.
맥신도 이러한 그를 보면서, 이토록 멋진 사람이 왜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았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
  헤어지면서 이번 주 안으로 다시 한번 만날 수 없겠느냐고 했을 때,
맥신은 자신도 놀랄 만큼 분명히 승낙하고 말았다.
  노엘이 돌아가는 길에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말했을 때, 맥신의 눈에 가까이 서 있는 쿠르와 맥스의 모습이 
비쳤다. 순간 맥신은 확 얼굴을 붉혔으나, 쿠르가 웃고 있는 것을 보고
약간 마음을 놓았다.
  “이왕이면 동석하는 것이 어떨까?”
  “공교롭게도 이제 돌아가려던 참이에요.”
쿠르으 시선을 의식하면서 쌀쌀하게 대답했다.
  “유감천만이로군.”  
쿠르가 대답하고 아름다운 아내의 모습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럼, 다음 기회로 미루지, 노엘.”
  쿠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방향을 돌려 맥스의 팔을 끼고, 
당황해 하는 맥신 앞에서 멀어져 갔다.
  



  맥스는 그 뒤 몇 주일 동안, 점심식사는 두 번, 저녁식사는 여러 차례
노엘과 같이 했다. 횟수를 줄이려고 하지만 않았다면, 그는 매일이라도
맥신을 불러냈을 것이다. 그의 본심에 응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쿠르가 맥스와 외출해 버리기 때문에 노엘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결혼이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이미 누구나 알고 있었다.
물론 맥신은 쿠르의 아내로서 환영받았고, 그의 친구들과도 만났으며,
식사에 초대되기도 했다. 의외로 쿠르는 그들의 초대에 보답하기 위해
파티를 열겠다고 했다. 맥신은 미세스 마틴에게 손님 접대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파티는 손색없이 치를 수가 있었다. 만족스러워하는 
쿠르의 표정을 보고 맥신은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맥스를 초대했는지는 감히 쿠르에게 묻지 못했으나, 역시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맥스는 오지 않았다.
  이윽고 맥신은 여기저기서 초대를 받아 정신없이 바빴다. 거의가 
점심때였고, 일주일에 한 번을 쿠르와 함께 외출하게 되었다. 모두 그녀가
밤에는 바쁠 것으로 알고 피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맥신은 쿠르의 생활의 일부분과 톱니가 맞는다는 것이 기뻤다.
그의 친구들은 모로코인만이 아니라 국적이 다양했다.
  어느 날 밤, 노엘과 식사를 하고 돌아온 맥신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노엘은 최근에 와서 무척 진지한 태도로, 그녀가 꺼리는 화제를 꺼내곤 했다.
  두 사람은 어두컴컴한 나이트 클럽에서 식사를 했다. 다른 커플들은 
모두 연인끼리인 것이 분명한데,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위험하였다. 맥신은
노엘의 말을 듣자 자신의 예감이 적중했음을 알았다. 
“사랑하게 되고 말았어요, 맥신.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맥신은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네, 그래요.”   그녀는 부정할 수 없어 그 말을 시인했으나, 
침통하기 그지 없는 표정이었다.
  “아아, 맥신.....”
  “안돼요, 노엘 !”  그녀는 겹쳐진 손을 빼냈다.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맥신. 맥신은 어떤 남자한테도 사랑받을 수 있는 
훌륭한 여자요. 그런데도 쿠르는 맥신을 무시하고 있어요.“
  “노엘 !”
  “그렇지 않은가요?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군요.”
  “제발 부탁이에요. 노엑 ! 당신의 말이 옳다는 것은 알아요.
나는 무시당하고 있어요. 그로부터 다정한 말을 들은 것은 벌써 
옛날 일이에요.“
  “낙심하지 말아요.”   노엘이 동정어린 시선을 보냈다.
“언젠가는 나한테 이야기할 날이 올 테죠. 맥신이 자유롭게 된 날에.”
  “그래요.” 
그렇게 될 날이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아직 멀었나요? 쿠르는 머리가 좋고 사업에는 열성적이죠.
그 점에서는 그를 존경해요. 하지만 맥신에 대한 태도는 이해할 수 
없어요. 도대체 어떤 연유로 결혼하게 되었죠?“
  이 일은 쿠르에게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겠다고 약속한 일이며, 
설사 그런 약속이 없었다 해도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핏기가 가신 얼굴로 급히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아직 초저녁이라는 노엘의 말도 맥신의 결심을 흐트러지게 하지는
못했다.
  분명히 시간은 아직 이르다. 그래서 침착할 수가 없고 잠도 
오지 않는 것이리라. 노엘의 말이 가슴을 찔렀으나, 이미 만성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불면증의 원인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노엘이 사랑을 고백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것은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일이다.
  잠이 오지 않는 것은 노엘 탓이 아니다. 맥신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뜨거운 음료수를 들고 침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책을 읽기로 작정하고 테이블에 조심스레 잔을 놓고 책을 폈다.
  눈은 글자를 향해 있었으나 머릿속에서는 안개 같은 것이
맴돌고 있었다. 쿠르는 어디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맥스 마티의
침대 속에서 장래를 이야기 하고 있을까?
  쿠르가 돌아온 기척은 없었다. 가만히 현관문을 열었음이 분명하다.
쿠르의 방에서 소리가 나 깜짝 놀란 것은 열 두시가 가까워서였다.
  맥신은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쿠르가 얼른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잠든 이 시간에 그가 왜 이런 소리를 냈을까?
셔츠를 벗고 샤워을 한뒤 허리에 타월을 감은 그의 건장한 육체가
눈앞에 떠올랐다. 그의 피부는 매끄럽고 탄력이 있다.
이교도의 신과도 같은 모습이다. 아아, 어째서 쿠르의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일까?
  맥신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문을 열고 쿠르가 들어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왜 노크를 하지 않느냐고 항의할 틈도
없었다. 그녀의 생각과 어긋나게 쿠르는 지금까지 계속 잠을 잔
듯한 모습이었다. 턱은 수염이 자라서 거무칙칙했고, 평소와는 달리
머리가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식사를 하러 
갔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맥신은 놀란 나머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쿠르가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오더니 난폭하게 책을 빼앗았다.
“맥신, 할 이야기가 있어.”      “그러세요.‘
냉랭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쿠르의 부아를 건드린 듯했다.
  “아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좋지 못해.”
  “어마, 진정한 아내가 되었다면....”
흥분한 김에 말을 내뱉었으나 곧 지나쳤다은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말을 쿠르에게 해보았자 아무 소용 없다. 오만한 사람이므로
다시 그 앙갚음을 할 것이 분명해.
  맥신이 입을 다물자 쿠르가 픽 웃었다.
“맥신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 어엿한 아내로 대하는 것이 첫째 조건인가?
전에는 순진한 소녀였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겠지? 충분히 내게 
반항할 수 있을 거야. 부인해도 소용없어.“
  맥신은 얼굴을 붉히고,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만큼 주먹을 꼭 쥐었다.
“할 이야기란 뭐예요?”
  “노엘에 대해서야. 너무 자주 만난다고 생각지 않나, 맥신?”
  “별로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으나, 마음속으로는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럴까?”   쿠르는 찬찬히 맥신을 들여다보더니, 그녀가 아주
여윈 것을 비로소 깨달은 듯싶었다.
“노엘은 식사나 와인 등을 맥신의 몸으로는 도저히 지탱하지 못할 
것만 대접한 모양이군.“
  머리칼이 이마로 흘러내렸으나 맥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 먹었으면 살이 쪘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데. 그리고 나는 바람에 날릴 듯한 여윈 몸은
좋아하지 않아.“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
“맥신, 얼마 동안 노엘을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 할수 없을까?
  “나를 생각해서인가요, 아니면 그를?”
  “노엘도 보통 인간이야. 일을 할 수 있는 유능한 사람인데,
최근에 집중력이 없어지기 시작했어.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중요한
일이 눈앞에 있어. 꼭 그이 힘이 필요해.“
  우리라니? 쿠르와 맥스를 말하는군. 가슴속에서 메스꺼운 것이 솟아올랐다.
“당신이 이혼에 주신다면 아마 나는 노엘과 결혼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만사가 원만히 해결되지 않겠어요?“
  쿠르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실눈을 뜨고는 맥신을 내려다보았다.
“맥신, 농담은 그만둬.”
  농담이라고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죠? 나를 괴롭히고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나를 무참히 거절하는 주제에. 얼마나 당신을 원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나요?
  “왜 농담을 해요? 당신도 미스 마틴과 계속 만나고 있는데,
나도 노엘과 만나고 싶을 때 만나겠어요.“
  “맥신은 노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잖아? 어째서 당신은 
또 다른 남자의 인싱까지 망치려 드른 거지?“
그는 격한 어조로 다그쳤다. 맥신은 몸을 움츠렸으나, 그래도 
태연히 맞섰다.
  “또 다른 남자란 말은, 결굴 첫 번째 희생자가 당신이라는 뜻인가요?”
  “정말이지.....”  그는 부아가 난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 비뚤어지게만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충고하고 있을 뿐이야.”
  지금까지 참고 있던 눈물이 그만 와락 터져 나왔다.
신경을 많이 쓴 탓인지 몹시 피곤했다. 오직 쿠르 앞에 엎드려 
울고만 싶었다. 이런 마음의 고통은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다.
몸이 갈가리 찢어질 것 같아서 혼자 있고만 싶었다.
  “부탁이에요.”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중얼거렸다.
“나가 주세요.”
  “맥신 !”
눈물이 쿠르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았다. 그는 놀란 듯이 중얼거리고는
맥신 곁에 앉아 그려를 끌어안았다.
“울지 마. 다른 일은 무엇인든지 참을 수 있지만, 맥신의 눈물에는 약해.
이봐요, 맥신. 노엘은 맥신에게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지 않아?“
  ‘네, 내게 중요한 것은 당신뿐이에요.’ 하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런 말을 하면 쿠르가 거북해 할 뿐이다. 그렇다고 쿠르의 손을
뿌리칠 생각도 없었다.
쿠르는 정답게 위로하듯 맥신의 몸을 안고 있었다. 맥신이 바라고 있는
것은 위안과 사랑이었으나, 사랑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위안만으로라도
견딜 수밖에 없다.
  그의 품속에서는 자신이 일개 미물처럼 생각되었다.
맥신은 잠시 동안 아무말도 않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 노엘에 대한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음속은 쿠르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나 충만된
기쁨인가, 물론 쿠르가 자기에게서 느끼고 있는 것은 연민뿐이란 것은 
알고 있지만.
  눈물로 젖은 쿠르의 어깨가 맥신의 뺨에 온기를 전해 왔다.
“미안해요.”
그녀는 어떻게든 냉정해져야겠다는 생각에서, 싫었지만 그에게서 
몸을 떼었다. 맥스는 오랫동안 이러고 있었을 것이므로, 아내인 맥신이
잠시 행복한 분위기에 젖는다 해서 언짢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맥신?”
크게 숨을 들이쉬는 바람에 그의 가슴이 팽창했다. 쿠르는 몸의 자세를
바로잡고, 가만히 맥신의 눈물젖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슬퍼?”
  맥신은 어린아이처럼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여자란 하찮은 일에도 눈물을 흘리게 마련이에요.”
  “맥신의 문제는 예상 외로 큰 것 같군. 얘길를 하면 조금 후련해질지도
몰라. 침대로 안고 가서 던져 버렸기 때문에 그러나?“
  쿠르는 아주 직선적이었다. 창백한 맥신의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돌았다.
“그런지도 몰라요. 하지만.....”
하고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심정을 토로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쿠르가 씁쓸히 웃으면서, 그녀의 뜨거운 이마에 흘러내린 금발을
쓸어 넘겨 주었다. 그러고는 다정하게 맥신의 넓은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아직 경험이 적어서 모르는 거야. 하지만 그것을 노엘에게서 
배우게 하고 싶지는 않군. 내가 가르쳐 주겠어. 그로서는 맥신의
정열적인 성격을 만족시킬 수 없어. 맥신은 너무 매력적이야.
멀지않아 좀더 성숙해질 거야.“
  쿠르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맥신의 가슴을 찔러,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노엘에게도 결점은 있으나 결코
위선자는 아니다.
“노엘은 친절해요. 그리고 당신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잖아요?”
  쿠르는 가볍게 웃으며 맥신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가냘픈
몸에 전율이 일어 쿠르의 마음을 더욱 흥분시켰다. 그런데도
쿠르의 얼굴이 경직된 것은 화가 아직도 풀리지 않았기 때문일까?
  “나 역시 맥신이 탐나. 미녀는 남자를 미치게 하는 법이지,
특히 지금처멈 껴안고 있을 때는, 자신의 매력을 과소평가하면 안돼.“
  쿠르의 타는 듯한 시선을 받자, 맥신은 온몸의 피가 끓기 시작했다.
쿠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자기 마음조차 헤아릴 길이
없었다. 이대로 쿠르에게 안겨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하다.
여기서 감정을 억눌러야지 하고 생각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가슴이 확 뜨거워지면서, 저도 모르게 두 손이 쿠르의 넓은 어깨로
뻗어 갔다. 그리고 머리며 뺨을 어루만지다가 이윽고 천천히
내려가면서, 마치 무언가를 호소하듯 그의 입술의 만지작거렸다.
  쿠르의 낮은 음성이 들리는 순간 방의 불이 꺼졌다.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나두 우아해질 수 있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될 거야.“  쿠르의 입술이 이마에서 떠나 귓불로 옮겨 갔다.
맥신의 몸이 그의 품속에서 경련했다. 이미 저항할 수 없었다.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며 쿠르의 입에 키스했다.
  곧 키스가 되돌아오지는 않았다. 그 대신 쿠르은 맥신의 머리를
천천히 베개 위에 뉘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맥신도
마두 쳐다보려 했으나, 격한 감정과 눈물 때문에 눈앞이 희미해져,
쿠르의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에 초점을 맞출 수 없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겠어. 맥시을 건드리기만해도 내 몸이 불타
올라. 맥신이 필요해. 정말.“
  조금전까지의 다정함이 사라지고, 그 암회색의 눈에 비정한 
빛이 깃들였다. 맥신은 이미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쿠르의 탄탄한 몸에 눌려, 고통과 기쁨이 뒤섞인 묘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고통도 마침내는 감정의 파도에 떠밀려 버렸다.
  “쿠르, 달링....”  생각할 여유도 없이 가냘픈 신음소리를 내며
맥신은 커다란 파도에 몸을 맡겼다.


  이튿날 아침 열 시경, 깊이 잠들어 있던 맥신은 노엘의 전화에 
눈을 떴다. 의식이 분명하지 않은 채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자 
놀라는 듯한 노엘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직도 침대 속에 있어요?”
그녀의 잠디 덜깬 듯한 목소리에 노엘이 놀란 모양이었다.
“달링, 괜찮아요?”     “네.“
  “이번에는 분명한 음성이로군요.”
그는 일단 말을 끊고, 애써 명랑한 음성을 꾸미려 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무슨 일이 있었어요? 쿠르는 살인이라도 하고 
온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더군요. 나는 용케 도망쳤지만,
운수 사나운 친구가 몇몇 희생됐죠.“
  “무슨 용무예요. 노엘?”
  “무슨 용무냐고요?.......아, 그렇군. 식사나 함께 할까해서요.”
  맥신은 노엘과 교제를 끊기 위해서는 그와 대화하는 것이 
첩경이라 생각하고 승낙했다. 레스토랑의 이름을 묻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잠시 동안 흰색의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다가 일어서서
욕실로 가 샤워를 했다. 쿠르는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다. 오늘
아침의 쿠르는 평소와 다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그것은 
지레짐작일 뿐이었나 보다. 샤워의 따뜻한 물이 어젯밤 쿠르의 
입술처럼 맥신의 부드럽게 감쌌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없었고,
쿠르가 나간 것도 알지 못했다. 틀림없이 그는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후회하는 말을 내뱉으며 나가 버렸을 것이다.
  맥신은 노엘과 두 번 다시 만나지 말라고 한 쿠르의 말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노엘의 이야기에 따르면, 쿠르는 아내와
밤을 같이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사무실에 가기 전에
나를 깨웠을 것이다. 역시 그는 내 눈물에 마음이 움직인 것뿐이었어.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어. 나의 정열적인
행위의 그늘에는 애정이 있지만, 쿠르는 그것을 믿어주지 않을 거야.
  맥신은 금세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얼굴로 한숨을 쉬며 
샤워를 잠그고, 두꺼운 타월에 손을 뻗었다. 물기를 깨끗이 닦은 뒤,
약간 사치스런 드레스를 골랐다. 이것을 입자 어쩐지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눈 밑의 그늘을 감추기 위해 정성껏 화장을 했으며, 시큰거리며
아픈 입술에는 연지를 엷게 발랐다. 마담 랑케는 휴식시간이었기
때문에 누구와 상의할 수도 없었다. 거실로 나가니 쿠르의 메모지가 있었다.
〈친구와 약속이 있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저녁때까지는 돌아올 수 없다〉
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친구란 아마 맥스를 가리키는 것일 테지.
  노엘과는 한 시 가까이 되어서야 만났다. 같이 식사를 했으나
마음은 즐겁지 않았다. 쿠르를 잊을 수 있다면 즐길 수 있을 텐데.....
밤새도록 곁에 있으면서 키스도 해주고 사랑을 속삭여 준 쿠르.....
어쩐지 환상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울적하여 노엘과의 대화도 내키지 않았으나, 지루하지는 않았다.
식사가 끝난 뒤 노엘이 드라이브를 하자고 제의했다. 그들은 안퍼의
해안을 따라 달리다가 다른 레스토랑에서 홍차를 마시며 대서양의
거친 파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집에 들어온 것은 다섯 시경이었다.
의외로 쿠르가 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 메모를 읽고 오늘도 얼굴을 대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느긋하게 있다가 돌아오면서, 이왕이면 쿠르도 늦게 돌아왔으면
하고 바랐었다.
  자세를 바로잡고 분명히 불만스런 기색을 나타내고 있는 쿠르와
얼굴을 마주 대했다.
  “식사는 즐거웠나? 그 뒤 노엘이 어디로 데겨가 주었지?”
그는 손목시계에 흘끗 시선을 보냈다.
  “해안을 드라이브하고 왔어요.”
  “많이 기다렸어.”
  “어마, 어째서요? 늦게 돌아오신다고 메모를 남겨두지 않았어요?
미스 마틴과 저녁 식사를 하는 줄 알았어요.“
  “그만두었어, 맥신과 함께 외출할 일이 생겨서.”
  “어딘체요?”
쿠르의 태도가 평소와 다른 것을 보고 갑자기 두려워졌다.
안색이 나쁜데 눈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모종의 비밀 계획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군, 결혼식 다음날 아침과 같군.
내가 맥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때와 같아. 약속을 깨고
노엘과 만나서 화를 내는 것일까? 단지 그것뿐일까?
  “우리는 어디에 가는 거예요?”  다시 한번 물었다.
  “사막으로 가는 거야.”
  “사막?”
  맥신이 의아해 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입을 열었다.
“전에도 갔던 일이 있지 않소, 마담?”
  “어머나, 쿠르.....”  맥신은 애원하듯 갑자기 그의 팔에 매달렸다.
은밀한 밤을 보내고도 남남인 듯이 말을  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쿠르를 접하는 순간, 그리 간단하게 해결될 문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손을 움츠렸다.
“미안해요.”
부끄러워서 얼굴이 타는 듯이 화끈거렸다.
  쿠르는 맥신의 동요하는 모습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사과할 필요는 없어. 사막의 친구들이 우리의 결혼소식을
듣고 만나보고 싶다는 거야.“
  “친구들과 나를 만나게 해도....그....이혼이 가능한가요?”
  “그리 간단하지는 않겠지. 그러니까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아내로서의 의무를 완전히 이행할 각오를 해야 해.“
  그녀의 잿빛 눈이 고통으로 흐려졌다.  “의무요?”
  “사회적 의무지, 마담. 언제 이 엄청난 상태에서 벗어날 날이 
올지 모르나, 그때까지는 서로 지금의 상태에 순응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돼.“
  “알겠어요.”   맥신은 냉혹하고 무정한 쿠르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때, 도어의 벨이 울렸기 때문에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쿠르가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문께로 갔다. 들어온 사람은 마담 랑케가
아니었다. 맥신의 가슴을 바늘로 삐르듯이 맥스 마틴이 모습을 나타냈다.
  맥스는 쿠르에게 미소를 보낸 뒤, 이어서 적의에 찬 시선을 
맥신에게 돌렸다. 쿠르를 보는 눈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마치 맥신은
안중에도 없는 듯, 쿠르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그의 허리를 안고 
뜨거운 눈초리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할 이야기가 있어요, 쿠르. 방해해도 상관없겠죠?”
  “물론 상관없지.”
다정하게 손으로 턱을 받치고 새빨간 입술에 키스했다.
“상관없고말고.”
  “쿠르 !”  맥신이 떨리는 소리로 조그맣게 외쳤다.
  그는 이 소리를 들었는지 얼굴을 쳐들고 엄한 음성으로 
“가만히 있어 !”   하고 명령했다.
  그러고는 빙그레 웃으며 미스 마틴의 팔을 잡고 맥신에게 말했다.
“잠깐 실례하겠어.”
  맥신은 그들이 거실로 들어가 문을 닫는 것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았으나, 맥신은 비참한 마음이 들어 문을
닫으로 갈 여유가 없었다. 쿠르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맥스의 높은 음성이 들렸다. 분명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한테 언제 얘기할 작정이에요. 쿠르?”
  “확실한 결정은 아니지만, 우리 사이가 끝나 가는 건 사실이야.
2, 3일 동안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보겠어. 필요 이상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진 않으니까.“
  맥신은 칼로 가슴을 도려내듯 아파 방을 뛰쳐나왔다. 얘기의 
진행 여부는 알 수 없었으나, 쿠르가 드디어 결혼 생활을 끝내려 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막에 가자고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일까?  내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으로 헤어지겠다고 했는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 해도 이혼의
충격은 결코 적지 않을 텐데.
  쿠르는 미스 마틴이 돌아간 몇 분 후에 맥신을 찾으로 왔다.
맥신은 그가 마음도 결코 편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또 맥신으로서도
거실에서의 이야기를 들은 이상 구태여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짐을 꾸려요.” 그는 옷장 앞에 장승처럼 서 있는 맥신을 보고
인상을 썼다.   “도와줄 하녀가 필요한가?”
“아니, 내가 하겠어요.”
맥신은 마음의 혼란을 감추려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며칠이나 있을 생각이세요?”
“2, 3일 걸릴까, 일주일 정도가 될지도 몰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나여?”
“음.”   쿠르가 흘끗 맥신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런 말을 묻지?”
  그녀는 다시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당신이 나를 친구에게 소개할 생각이라면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몰라 그러는 거예요. 지난번에는 조금밖에 못가져갔었기 때문이에요.“
  “그런 것이 생각되었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드레스가 필요할까요, 아니면 슬랙스?”
  “슬랙스는 필요하겠지.”
쿠르는 움직이려 하지 않자, 못 참겠다는 듯이 옷장을 열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원피스를 두 벌 꺼낸 뒤 롱드레스도 끄집어냈다.
“우아한 것도 필요해, 밤에는 마라케시에서 묵어야 할 테니까. 이미 
늦었으니 그 이상은 갈 수 없을 거야.“
  그들은 30킬로 정도 떨어진 공항으로 차를 몰아 다시 비행기로
마파케시까지 갔다. 그런 뒤 다시 다른 차로 호텔로 향했다.
쿠르는 집을 나온 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비행기 안에서도
그것이 무슨 서류인지 잘 알 수 없었다.
  아무 호텔에나 방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차는 규모가 
작기는 하나 고급스러운 호텔 앞에 멈췄다. 그런데 프런트에 갔더니
이미 예약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언제 예약한 것일까?
  “마음에 들리라 생각해.”
깜짝 놀라는 맥신에게 쿠르가 웃으면서 말했다.
“마라케시에서 첫째가는 호텔이야. 북아프리카에서는 제일이라는 사람도 있어.”
  쿠르의 말대로 맥신의 마음에도 들었다. 즐거운 기분으로 왔다면 
더욱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쿠르의 심중을
알 수 없어 무척 고민했으나, 결국 맥신이나 맥스는 모두 그에게 
조롱당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혼하려는 아내와 일부러
사막에 가더니 정말 바보스런 일이다. 또 진심으로 아내 이외의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사나이라면, 그런 앞뒤가 맞지 않는 말로 속일 까닭이 없다.
두 사람 모두 바보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맥신의 
마음은 약간 가벼워지는 것이었다.
  방은 완전한 스위트 룸으로서, 복도로 나가는 문은 하나뿐이었다.
맥신은 이런 방에서 묵는 것은 처음이었다. 압도되어 버릴 만큼
호화로왔다. 쿠르는 맥신의 놀라는 모습에 만족스러운 듯이 웃고 있었다.
  그는 두 개의 침실 중 하나를 가리켰다.
“맥신은 이쪽방을 쓰는 것이 좋겠어, 여자더러 고르라고 하면 언제나
망설이거든. 배가 고프니 너무 오래 기다릴 수없어.“
  “네.”
  “샤워는 저쪽에 있어, 한가롭게 사용할ㄹ 만한 시간은 없지만.”
  “언제까지나 꾸물거리고 있을 줄 아세요?”
쿠르가 푸른 눈에 웃음을 띠고 맥신을 발라보았다.
“세수만하고 샤워는 나중에 하겠어요. 나도 배가 몹시 고파요.”
  “좋다록 해.”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
“그럼 10분 후에.”
  맥신의 방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방처럼 아름답게 장식되었고
쾌적하게 꾸며져 있었다. 맥신은 방을 한번 둘러보고는 곧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정확히 10분이 지나자, 그녀의 몸단장을 완전히 끝났다.




  드레스는 앏은 천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갈색과 황금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카사블랑카의 의상실에서 최신 유행의 드레스라고 
권한 것이었다. 네클라인이 아주 깊이 패어, 조금 얕았으면 하고 세삼스레
생각했다. 쿠르는 세련된 여성들을 많이 보았을 테니까 이정도의 드레스에는
놀라지 않을 테지만. 머리를 둥글게 틀어 살짝 올려놓았다. 점심때와
마찬가지로, 나쁜 안색을 감추기 위해 상당히 짙은 화장을 했다.
  “아주 예쁘군.”
쿠르는 맥신과 팔짱을 끼고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맥신의 아름다움에 
감동했는지 다시 덧붙였다.
“무척 어울리는 커플이야.”
  맥신은 키가 큰 쿠르에 비해서 키가 약간 작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날아갈 듯한 기쁨을 잠출수가 없었다.
  레스토랑은 음식은 물론 서비스도 일류급이었다. 두 사람 모두 
한껏 식사를 즐겼다. 맥신은 차차 모로코 요리가 좋아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향신료의 사용여하에 따라, 한 가지 요리의 맛이 열 가지나 스무 가지로 변했다.
디저트로 맥신은 과일을, 쿠르는 치즈를 들었다. 쿠르는 식사하는 동안, 
마치 비행기에서 다음 여정에 관해 말하듯이 마라케시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의 시선이 가끔가다 맥신의 얼굴에서 떠나 깊게 팬 그녀의 가슴에 멎곤 했다.
  호텔에는 나이트 클럽도 있었다. 두 사람은 그리로 발을 옮겼다. 맥신은
식사 때 마신 와인 탓인지, 아니면 제법 친절해진 쿠르의 태도
때문인지 비참한 생각이 가시기 시작했다. 과거도 미래도 사라져 버리고,
즐거운 현재의 일로 머리가 가득 찼다. 밤이 점점 깊어짐에 따라
마음도 풀어지는 것이 자기로서도 이상했다. 그러나 쿠르가 방으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지금까지 잠들어 있던 긴장감이 다시금 눈을 떴다.
  맥신은 반대할 이유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일어났다.
방안에 들어서자 뒤에서 쿠르가 문을 닫았다.
“곧 잠을 잘 생각인가?”
  “네.”  그녀는 쿠르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면서, 침착하지 못한
태도로 말했다. 
“오늘은 여러 가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쿠르의 얼굴에서 온화한 표정이 사라지고 굳은 미소가 떠올랐다.
“더 이상 노엘과는 만나지 말아 줘.”
  맥신은 반격할 생각에서 빈정거리듯 웃었다.
“노엘은 집에까지 쳐들어오지는 않아요.”
  “맥스를 두고 하는 말이로군.”
  “그래요.‘
  쿠르는 불쾌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맥신 !”
“부탁이에요, 쿠르. 그만둬요. 멋진 밤을 망치고 싶지 않아요. 어서 주무세요.”
  맥신은 침실에 뛰어들어 숨을 헐떡이면서 문에 기대었다.
잠시 쿠르의 기색을 살폈으나, 따라오는 것 같지 않아 샤워를 했다.
그러고 나서 가운을 걸치고 방으로 돌아갔다. 
샤워 캡을 벗자 금방이 어깨에 펴졌다.
  이때 베개에 등을 기대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쿠르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우뚝 섰다. 두려운 듯 두손을 놀리면서 그녀가 물었다.
“무슨 용무라도 있으세요?”
  “아아, 있지.”  그가 놀리듯 웃었다.
“이 침대는 나만큼이나 크군. 그러니 여기서도 편히 잘 수 있겠는걸.”
  맥신은 심장의 고동소리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농담일 테죠?”
  쿠르는 눈썹을 꿈틀 움직이며 맥신을 응시했다. 
“조롱하는 것도 아니고 위협하는 것도 아니야, 맥신은 아내니까.”
  맥신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의 시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저녁때 맥스에게,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고 헤어질 작정이라 하지 
않았는가. 이상하군, 어제.....그렇다. 어제는 우연이었어. 하지만 오늘
밤 여기 온 것은 그의 의사였어.
  “당신을 이해할 수 없군요.”
  아무려면 어떻냐는 듯이 쿠르가 입을 삐쭉거렸다. 
“이해해 주건말건 관계없어. 맥신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그 이상은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맥신에게 다가오더니 그녀를 안아 올렸다.
억센 팔로 꼭 안고는, 깜짝 놀라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언제나 내가 먼저 바라야만 되나? 가끔가다 맥신이 먼저 뛰어들어도 
좋지 않겠어?“
  맥신이 대꾸할 말을 찾고 있는 동안, 쿠르는 침대에  
그녀를 쓰러뜨리고 가운에 손을 댔다.
  “안 돼요. 쿠르 !”  맥신은 손발을 내저으며 저항했다.
“지금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세요?”
  “물론,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나는 사내가 아냐.”
  “놓으세요, 사람도 아니에요 !”
빨리 쿠르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내 몸에 붙은 불길이 타오르고
말거야. 벌써 그 징후가 나타나고 있어.
  “싫어, 귀여운 사람. 너무 그러지 마. 맥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맥신은 내 것이야. 사실은 당신도 나를 유혹하고 싶었으면서 그러는군.“
  “말도 안 돼요. 당신이 점점 싫어질 뿐이에요.”
  순간 쿠르는 몸을 움찍했으나, 낮은 소리로 무언가 중얼거리며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막았다. 이어서 키스의 홍수를 퍼부었다. 이성
따위는 그림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쿠르에게 안겨 키스를 
되돌려주며, 서로가 원하는 마음에 솔직하게 대응했다.


  이튿날 아침, 창으로 스며든 햇빛으로 인해 눈을 뜬 맥신은,
곁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 쿠르를 바라보았다. 잠자는 쿠르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평소보다 젊어 보였다. 시트가 덮여 있었으나,
다부진 육체의 선을 그 위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손을 뻗어
만져 보거 싶은 마음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맥신은 몸을 돌려 가만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가운을
걸치고 발코니로 나갔다. 가까이에 마을의 성벽이 보이고 
하늘은 천천히 밝아 오고 있었다. 호텔의 뜰고 성벽 저쪽에서,
마치 오케스트라의 전주곡인 양 새소리가 들려 왔다. 열성적인
신자의 기도 소리도 마을 어딘가에서 간간이 들려왔다. 이윽고 
아틀라스 산맥 골짜기로 태양이 얼굴을 드러내어, 눈 덮인 산정을
은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별개의 것으로 들리던 귀에
선 소리가, 지금은 점차 하나로 융합되어 귀에 익은 싱그러운 아침의
소리로 변해 갔다.
  등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맥신이 홱 몸을 돌렸으나 이미 늦었다.
면으로 되 가운을 걸친 쿠르가 웃으며 서 있었다.
  “오늘 아침엔 맥신보다 늑장을 부린 것 같군.”
  “사막에 있을 때,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좋다고 가르쳐 주셨기에....”
부끄러운 듯이 미소짓는 그녀의 뺨에 아침 햇살이 핑크빛을 더해 주었다.
  “그럼, 마라케시의 아름다움을 맛본 모양이군. 나중에 더 많이 보여 주겠어.”
  “시간이 있으면 말이죠?”  
그녀가 점 잖은 말로 대꾸했다.
“지금 몇 시죠?”
곧 쿠르에게 끌려들 것만 같은 나약함을 감추려는 듯이 빠른 말로 물었다.
  “아직 일러.”
쿠르의 시선잉 산을 바라보던 맥신의 몸에 쏠렸다.
“자아, 침대로 돌아가지.”
그의 말에 거부했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맥신은 그의 가슴에 안겨 입술을 입으로 틀어막힌 채, 
그들을 기다리는 침대로 옮겨져 있었다.


  몇 시간 후, 방으로 아침식사가 운반되었다. 쿠르는 맥신의 어두운
표정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질린 얼굴을 할 필요는 없어. 설마 임신한 것은 아닐테지?”
맥신이 얼굴을 붉혔다. 쿠르는 아직 가운 차림으로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요.”
  “누가 걱정한다고 했나? 어젯밤에는 내 품에서 그토록 불타더니,.
지금은 어째서 그렇게 냉랭한 표정을 짓는가를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
맥신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었나?“
  정말 나쁜 사람이야. 만일 진실로 사랑하진 않는다면 얼마든지 
미워할 수 있을 텐데. 맥신은 시선을 떨구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크로와상에 버터를 바르고 그위에 잼을 얹었다.
빵은 금방 구운 것인지 아직 따뜻했다. 그녀는 먹는 것도 잊은 채
처량한 기분으로 빵을 바라보았다. 〈하찮은 여자와 결혼했다〉는
말을 아직 잊지 않았다고 그에게 어떻게 말할까?
  그녀가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쿠르.”
가만히 얼굴을 드니, 그는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온화하며
아주 친근해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쿠르가 서성거리전 발걸음을 멈추고 커피잔을 내려 놓은 뒤
맥신 곁에 와 앉았다. 이어서 가느다란 허리에 가만히 팔을 감았다.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야. 남자와 같은 침대에서 자는 데는 ‘
익숙하지 않겠지? 저런, 벌써 열 두시가 가까웠는걸.“
  쿠르의 팔에 힘이 가해지자, 맥신은 반사적으로 몸을 뺐다.
“부탁이에요. 쿠르.”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이제 충분해요. 마라케시를 구경하는 것도, 사막에 가는 것도
그만두고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영국말이에요. 나는 두 번 다시
당신과 같은 방에서 잘수는 없어요.“
  충동적으로 말해 버린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다.
쿠르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어서 옷이나 입어.”
그는 턱을 내밀고 명령조로 말했다. 
“내일은 시내로 안내하겠어. 모래는 오아시스에 갈 것이고, 미리 말해‘
두지만, 내가 맥신의 방에서 자고 싶으면 그렇게 할 거야. 몇 번이나
말했지만 맥신은 내 아내야. 그것을 잊으면 곤란해.“
  지난번에 마라케시에 갔을때는 큰 한길만 보았기 때문에, 
좀더 천천히 구경했으면....하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뒷길을 조금
걸오 보고는, 혼자 왔더라면 미아가 될 뻔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쿠르는 유능한 안내자였다. 상냥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이 고장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예배당, 시장, 성곽, 묘지등을
둘러보았다. 꼬불꼬불한 뒷골몰으로 들어가서 유적과 정원,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도 구경했다.
  한길가에 있는 프랑스 음식점에서 서둘러 점심을 먹었다.
소중한 시간을 식사로 낭비하는 것이 아까왔다. 쿠르가 다시 남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맥신은 아침에 그토록 행복했던 일이 거짓말처럼
생각되어 무거운 마음이 되는 것이었다.
  점심이 끝나자 맥신은, 스쿠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거기에
가면 기분이 풀릴거야. 자마엘푸나광장에는 마술사와무희, 뱀을 다루는 사람,
만담가 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고, 특히 노점상이 눈길을 끌었다.
야자, 조개류, 가죽제품, 파리투성이의 생선등을 파고 있었다.
장사꾼 여자들이 돗자리에 잦가지 수제품, 가죽 제품 등을 벌여 놓고 앉아
있었다. 가죽 제품은 매우 다양하여, 아름답게 수를 놓은 것, 
가장자리에 장신이 달려 있는 것등이 있었다. 재킷, 핸드백, 슬리퍼 등
다양한 상품이 즐비했다.
  맥신이 여러 가지 색깔의 목걸이에 눈을 팔고 있자, 살갗이 검은 뚱뚱한
여자가 미소를 보냈다.
  쿠르가 흥정하여 그 목걸이를 맥신에게 사주었다. 그리고 입가에 웃음을
띠면서 그녀의 가느다란 목에 걸어 주었다.
“고마워요.”  맥신이 부끄러운 듯이 말하고 쿠르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멋지 하루였어요.”
  “기뻐하는 것을 보니 즐겁군.”
그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한 뒤 그녀의 팔을 끼고 한길로 나갔다. 택시를 불러
타고 그들은 호텔로 돌아왔다.
  맥신은 안정되지 않은 마음으로, 쿠르가 사준 선물을 만지작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쿠르의 태도로 보아 그는 전혀 즐겁지 않은
모양이었다. 언제까지나 이런 상태를 견뎌 내야 하는 것일까?
  저녁식사 후 쿠르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전화를 받고 나더니,
내일 오후 사업상 누구를 만나야 할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에 하룻밤을
더 여기서 묵게 되었다고 맥신에게 말했다. 내일도 오전에는 시간이
있으므로 교외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말했다.
  그날 밤 쿠르는 맥신의 침실에 오지 않았다. 커다란 침대에 혼자
누워 있으려니, 그가 없는 것이 더욱 적적하게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도 그런 기분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쿨르는 차를 빌어 자기가 직접 운전했다. 맥신에게
우리카 협곡을 보여 주겠다고 했다. 스위스를 연상케 하는 골짜기로서,
쿠르는 자주 스키를 타로 온다고 했다. 도로는 새로 닦여진 것이어서
속력을 내기에 좋았으나, 맥신에게 주위 경치를 잘 살피게 하기
위해 천천히 몰았다. 특히 아틀라스 산맥의 마을이 흥미로왔으며,
티시카 고갯길이 아름다웠다.
  아름답고 푸른 산을 배경으로 한 고급 호텔에서 점심을 먹은 후,
약속 시각에 늦게 되면 곤란하므로 마라케시로 돌아가기로 했다.
  맥신은 쿠르의 얼굴을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아침에는
아주 정겹고 친절했으나, 친근감을 별로 느낄수 없었다. 아마도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지만, 허무한 하룻밤을 지내고 보니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헤어지려고 하는
남자를 사랑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단지 나는 그의 일시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용당하고 있을 뿐인걸. 그녀는 식사대금을
지불하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쿠르는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인간이었는데, 차의 운전
역시 그러했다. 맥신은 쿠르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조수석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눈앞에 전개되는 경치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쿠르가 잠시 후에 만날
상대와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리라 여기고 질문은 삼갔다. 차가
마라케시 시내로 접어들었을 무렵, 맥신은 뜻하지 않은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쿠르의 일로 고민하면서, 가까워지고 있는 성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늙은 노새가 회초리로 얻어맞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련한 노새는 바싹 말라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어마, 쿠르 !”   
맥신은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쿠르의 팔을 붙들었다.
순간 쿠르의 손이 핸들을 놓쳐 차는 차선을 잘못 접어들고 말았다.
  나중에 가서 자기가 한 일을 생각하니 머리털이 곤두섰다.
차가 길에서 벗어나고, 끽 하는 금속성과 쿠르의 비명이 맥신의 귀에
울렸다. 노새와 회촐리와 덩치 큰 사나이의 모습이 만화경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이어서 성벽과 쿠르의 얼굴이 겹쳐져 보이고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맥신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노상에서 의식을 잃고 있는 쿠르곁에
끓어앉아 외치고 있었다.   “달링, 달링.!”
  차가 뒤집히고 안에 있던 쿠르는 행인들에 의해 구출된 모양이었다.
그를 구해 준 사람 가운데는, 우연히도 런던의 유명한 외과 의사인
쿠르의 친구가 있었다. 맥신이 고맙다는 말을 하자, 그는 대단한 상처가
아니니 안심하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가 달려왔을때, 쿠르는 아직도
의식이 있어 저 혼자의 힘으로 차에서 빠져나오려 하고 있었다고 했다.
  “부인 되십니까?”  
그는 알란 데이비스 클라크라고 자기 소개를 한 뒤, 충격과 불안에
떨고 있는 맥신의 파리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맥신의 
약지에서 빛나고 있는 반지로 옮겨 갔다. 맥신이 그렇다고 말하자,
“그가 결혼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쿠르는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X선 촬영과 기타 여러 가지 검사가
끝난 것은 이튿날 오후가 되어서였다. 맥신은 초조한 24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경찰이 현장에 달려왔을 때, 사고는 자기가 원인이라고 고백했다.
외국 경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혹시 잡혀가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친절하고 
호의적이었다. 맥신을 특별 취급하며, 아무 걱정 말라고 용기까지 
불어넣어 주었다.
  차라리 벌을 주었으면 좋겠는데..... 맥신의 마음은 의외로 무거워졌다.
모든 사람이 다 친절했다. 병원에서는 검사중인 쿠르 곁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일주일 정도
더 머물러야겠다는 연락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지배인이 전화를 받고 아무 걱정 말라고 위로의 말을ㄹ 해주었다. 
므수 데스티에에 관한 일이라면 그와 종업원을은 어떤 손님보다도
우선적으로 신경을 써주겠다는 말도 했다.
  맥신 자신도 몸이 아팠으나 하루 종일 병원을 떠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쿠르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름을 불러댔다.
마침내 병원에서는 맥신에게도 병실을 마련해 주고 진찰도 해주었다.
  몸과 마음이 너무 피곤한 때문인지 눈을 감자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 후에 눈을 뜨자, 간호원이 따뜻한 음료수를 갖다 주며 여기서
밤을 지내도 좋다고 허락했다.
  “다시 한번 주인을 만날 수 없을까요?”
  “지금은 깊이 잠들어 계시니까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주세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검사도 끝나고 상처도 대단한 것이 아니므ㅗ
내일이라도 퇴원하실 수 있을지 모릅니다.“
  맥신은 그 말을 듣고 호텔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아직 아홉시가
조금 지났을 뿐이니, 쿠르의 용태가 좋다면 굳이 여기서 하룻밤을 
지낼 필요가 없을 듯싶었다. 그리고 사고 원인이 자신한테 있으니,
쿠르의 의식이 돌아왔을 때 자기가 곁에 있으면 그가 흥분할 것 같았다.
그러므로 그가 분노를 터뜨려도 괜찮을 만큼 건강해질 때까지 
호텔에서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이튿날 아침, 맥신은 가벼운 아침 식사를 하고 흰 원피스와 
샌들로 단장했다. 그러고는 쿠르의 용태를 묻기 위해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 퇴원할 수 있다는 말을 듣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여 오전 내내 안절부절 못했다.
오후가 되자 드디어 쿠르가 돌아왔다.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로 
그임이 틀림없음을 알 수 있었다. 쿠르는 혼자서 문을 열고 들어와
가만히 문을 닫았다.
  맥신은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쿠르의 머리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 마치 사막에서 감고 있던 하이크와 같았다.
그녀는 바짝 굳어져서 가슴이 죄어드는 듯했지만, 어떤 비난이라도
잠자코 받아들일 각오를 하고 천천히 일어섰다.
  “미안해요, 쿠르. 내가 잘못했어요.”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을 깨고 드디어 맥신이 입을 열었다. 그가 금방
무슨 말을 한다면 절규할 것만 같았다. 긴장이 온몸에 축적되어
당장이라도 분수처럼 솟구칠 듯했다. 쿠르는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조금도 모를 것이다. 만일 쿠르가 그대로 죽는다면, 나도 따라서 
죽을 생각까지도 했었는데, 지금도 가슴에는 아픔이 남아 있다.
“용서해 주리라고 는 생각지 않아요.”
  쿠르가 앉으며 “당장에라도 용서해 주지.” 하고 가볍게 말했다.
“무엇이건 마실 것을 갖다 주면 말이지.”
  그녀는 얼른 글래스를 가지로 가며, 벼락치는 듯한 비난은 당하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지나 않을까 생각했어요.”
  “글세, 팔을 붙드는 순간에는 죽여도 시원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한들 소용이 있겠어?“
  “어마, 쿠르.......”
  그는 맥신의 초췌해진 모습을 바라보며 글래스를 받아들었다.
“한때는 낫지 않을 정도로 상처가 심했으면 하고 생각하기도 했어. 
그렇게 되면 맥신이 평생 내곁에서 도망치지 못할 테니까 말이지.“
  “아아, 쿠르. 어떻게 그런 일을....”
맥신은 소파에 앉아 있는 쿠르 곁에 끓어앉았다. 단정한 원피스를 입고
금발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모습이 아주 산뜻해 보였다.
“몹시 걱정했어요. 기분은 어떠세요?”
  “괜찮아, 머리 상처를 제외한다면. 그래. 맥신은?”
  “나는 아주 좋아요.”  쿠르의 다정한 말에 맥신은 수줍은 마음이 들었다.
“속이 좀 좋지 않았지만, 당신 걱정을 해서 그랬나 봐요. 지금은 완전히 나았어요.”
  “다행이군.”  갑자기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런데 그때 어째서 갑자기 내 팔을 잡았지?”
  “노새가 불쌍해서 그랬어요. 남자가 잔안하게도 회초리로 때리고 있었어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지.”
  맥신은 굳어진 표정으로 턱을 다겼다.
  “하지만......”
  “맥신 !”
  “동물에겐 감정 따위가 없다고 말하려는 거죠?”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을 하려던 것이 아니야. 맥신이 진작부터 그 노새와 사나이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유 없이 매맞는 것이 아님을 알았으리라 생각했어.
영국에서도 어린이나 개는 때리지 않아? 진심으로 때리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지 않을까?“
  “그래요.”  쿠르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그의 몸에 기대고 싶은 
생각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얼른 입을 열었다.
“당신을 차에서 구해 주신 분과는 잘 아는 사이인가요?”
  “음, 오랜 친구지. 오늘 아침에도 문병을 왔어. 며칠 동안 부부가
마라케시에 체제중이니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하더군.“
  “좋은 분인 것 같군요. 나도 그러고 싶어요.”
  “정말인가, 맥신?”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또다시 남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아팠다.
  “맥신, 할 이야기가 있어.”
  그녀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으나, 쿠르의 안색이 언짢은 것을
보고 자기의 슬픔도 잊고 말리려 했다.
  “쿠르, 지금 이야기해야만 하나요, 병원에서 막 돌아왔잖아요?
조금 더 기다리는 편이....“
  “그렇지 않아, 달링.”
그는 수수께끼 같은 웃음을 띠고는 손을 내밀어 맥신의 손을 잡았다.
  맥신은 멈칫하여 한걸음 물러섰다. 쿠르가 그 놀라는 모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나, 그는 냉정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제, 의식이 희미해져 갈 때 몇 번이나 달링이라 부르는 소리가 드렸다.”
  맥신은 침착해야겠다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너무나 무서워서 그랬어요.”
  “그렇다면 그 음성이 맥신의 것이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는군.”
  그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영국 여자는 그 말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지만, 맥신이 한 것은
처음인 듯싶어.“
  맥신의 마음속에서 질투가 끓어올랐다.
“다른 여자한테도 그 말을 들었었군요?”
  “몇 번들었어.”
쿠르는 그녀의 아름다운 잿빛 눈이 흐려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들에게는 아무의미도 없는 말이었어. 하지만 맥신은 달라.
사랑하는 남자에게밖에는 할 수 없는 말이겠지?“
  부인하고 싶었으나 처량한 마음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맥신은 마루에 깔아 놓은 동양식 카핏에 시선을 떨구었다.
  “아마 그럴 거예요.”
  “아마라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아아, 내가 얼마나 맥신의
일을 걱정하고 있었는지 이애하지 못할 거야. 그래서 오늘
서둘러 병원에서 퇴원했어. 이 팔로 맥신을 껴안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어. 화해하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 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나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어.“
  “하지만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아요?”
놀란 나모지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떴다. 순간 입술이 겹쳐지며 숨이
가빠졌다. 그리고 방안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사랑한다는 가냘픈
소리도 몇 번인가 들렸다. 이제 언어는 필요치 않았다. 맥신도
쿠르에게 반응하며 꿈속으로 녹아드는 듯한 기분에 젖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돼요. 쿠르 !”
맥신은 남아 있던 마지막 힘을 다해서 쿠르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두 사람의 관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쿠르가 사랑한다는 
말을 했으나, 한푼 없는 고아에 대한 경멸과 이혼을 바라는 마음이 
휠씬 더 강한 것이 아닐까
“당신의 말이 옳아요. 이야기해야 해요.”
  쿠르가 상체를 일으켜 의아한 표정으로 맥신을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어요.”
  쿠르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내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을 텐데.”
  그녀는 침을 삼키며 쿠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랑한다는 말은 했지만, 결혼 후 당신이 계속 바란 것은 헤어지는
일이 아니었던가요?“
  “그런 건 바라고 있지 않다.”
그가 가까이 화서 턱에 손을 괴고 진지한 눈으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응시했다.
“최근에는 이혼 따윈 생각지 않고 있어, 얼마나 맥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알게 된 이후부터는.“
  “하지만 나에게는 노상 헤어진다는 말만 하지 않았어요, 
나를 증오한다면서요?“
  “맥신을 증호한 것이 아내야. 사실은 누구를 증오했는지 의심스러워.
약혼녀가 다른 사나이와 도망쳤을 때는 분명히 상처가 컸어.
그리고 상대를 잘못 알고 결혼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 이상의
충격이었어. 하지만 맥신은 또 다른 마음을 일깨워 주었어.“
  쿠르는 다시 맥신에게로 다가왔다.
“맥신, 독신 남자가 30대 중반에 접어들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다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약혼녀는
프랑스의 젊은 미망인이었어. 자식도 없었으며 부유한 귀족 출신으로서,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상대라 생각됐어. 옛날부터 잘 아는 사이이기도
했고, 그 뒤 그녀는 코린과 알게 되었지. 지금 생각하면 내 사랑이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를 잃은 결과가 된 것 같아.
사업에만 열중하고 그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거든.
그래서 코린과 도망친 거야. 이것이 내 자존심을 손상시켰어. 그럴 때
코린의 누나라는 맥신이 찾아오자, 마음속으로 고통을 주기로 
결심했던 거야. 사막에 데려간 것도 그 때문이었지.“
  “내가 코린의 누나라고 진심으로 믿었나요?”
  쿠르가 씁씁히 웃었다. 
“지금이라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겠지만, 하지만 생각해 봐,
10년 만에 만난 상대야. 그 무렵 그녀는 머리를 금발로 염색해서
맥신과 아주 흡사했거든, 물론 맥신처럼 순진한 면은 전혀 없었지만,
차차 그 차이를 알게 되면서 내 머리를 혼란에 빠졌지.“
  맥신은 꼭 물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용기를 내어 말했다.
“당신은 미스 마틴을 좋아했나요? 그녀는 당신의 사랑을 받았노라고
항상 자랑하던데요.“
  쿠르가 단호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 무렵 나는 아직 젋고 감수성이 강한 시기였으나, 그녀에게는
내가 미치지 못하는 면이 있었지. 그녀가 사나이들에게 둘러 싸여
좋아하고 있을 때, 나는 그녀를 다시 부를 수가 없었어.“
  “하지만 그녀와 결혼할 생각을 했었지요? 노엘이 오아시스에 
왔을 무렵 당신은 나를 그녀로 알았잖아요?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들어주려 하지 않고....“
  쿠르는 맥신의 몸을 끌어당겨 머리를 어루만지며 자기 어깨에
기대게 했다.
“응. 맥신과 결혼하려 한 것은, 단순히 복수를 위해 그랬는지 또는
미세스 마틴의 재산을 노리고 그랬는지 나로서도 잘 모르겠어.
사막 사람들은 몹시 가난해. 그 돈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줄 생각이었던
것 같으니, 역시 이것도 맥신을 괴롭힐 구실은 되지 못할 거야.‘
  어쨌든 그리 대수로운 일 같지는 않았으나, 호기심 때문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내가 코린의 누나였다면, 이 결혼이 순조로왔을 것이라 생각해요?”
  “그럴 것 같아. 나도 놀랄 정도로 맥신에게 이끌려서 다시는
떨어져 있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진상을 알고.....”
  “음.”  쿠르의 음성이 엄숙해졌다.
“그애 얼마나 분노가 치밀었는지 맥신은 알지 못할 거야. 웃음거리가
된 것 같은 심정이었어, 자존심도 상했고, 맥신에게는 고통이었는지 모르나,
결혼식날 밤 맥신을 안았을 때는 하늘에라도 올라간 기분이었어.
아무리 자존심이 강해도 그것만은 부인하지 않겠어. 그런데 맥신을 사랑한다고
느낀 후부터는 괴로웠어. 내 운명과 사랑는 봉쇄되었어. 이튿날 아침 일찍
찾아가 맥신과 모든 것을 분명히 할 생각이었으나 사정이 복잡하게 
되고 말았어.“
  맥신은 이해가 되지 않아 양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밖에서 식사한다는 메모지를 남기지 않았던가요?”
  “어리석었지. 그러나 사실은 일을 할 생각이었어,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런데 갑자기 맥신과 떨어질 수 없다는 마음이 생겨 얼른 돌아와
사막에 가기로 결심했던 것이지. 거기 가면 맥신도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까 해서.“
  “쿠르.”   맥신이 숨을 들이켰다.
“미스 마틴에게 나와 이혼하겠다는 말을 했을 테죠?”
  “아니야, 이혼 이야기는 맥신에게밖에 하지 않았어.
그녀에게는 한번도 한 일이 없어.“
  “하지만,”  주저하면서도 용기를 내어 말했다.
“객실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어요.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서요.
우리들의 관계를 끝내겠다고 분명히 말했어요, 필요 이상으로
나를 괴롭히지 않겠다고도.....“
  쿠르는 잠시 맥신을 바라보고 있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맥신, 내가 그런 말을 할 까닭이 없지 않겠어? 내가 말한 것은 코린의 어머니.
즉 미세스 마틴에 대한 일이야. 그녀를 위해 경영하고 있는 회사에서 
손을 뗄 생각이야. 그 후에는 정부가 인수하도록 할 작정이지. 
미세스 마틴도 고통스럽겠지만, 나로서는 힘 닿는 데까지 도와줄 생각이지.
맥스도 어머니한테 돌아가 도와줄 모양이더군.“
  “다행이에요.”
맥신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쿠르의 인정에 감격한 때문인지,
미세스 마틴을 생각해서인지 자신으로소도 잘 알 수 없었다.
“미세스 마틴은 내가 고통스러운 입장에 놓였을 때 아무런 변호도 해주지
않았지만, 그전까지는 가련한 고아인 내게 아주 잘 대해 주었어요.“
그녀는 약간의 빈정거림이 섞인 눈으로 쿠르를 쳐다보았다.
  “이젠 누구도 맥신을 그렇게 대하지 못하도록 하겠어.
맥신을 그렇게 대했던만큼 더 사랑해 주겠어.“
  “고아들에 대해서도 말이죠? 노엘한테서 당신이 고아들에게 돈을
기부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 사나이 이름을 입갂에 내지 말아 줘 ! 맥신을 바락보는 
그 녀석의 눈초리를 참을 수가 없어.“
그는 마치 벌이라도 주듯 맥신을 끌어안고 키스를 되풀이했다.
맥신의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잠시 후 쿠르는 핑크빛으로 물든
맥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신음하듯 말했다.
“맥신, 나를 용서하고 같이 살아 주겠어? 아이를 낳고 어디든지
따라올 각오가 되어 잇어? 물론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이 우선이지만....“
  “네, 쿠르.”   맥신은 크게 파도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하면서
열띤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다가 쿠르가 이마에 손을 얹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쿠르, 침대로 가서 누우세요.”
  쿠르는 맥신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웃음을 띠었다.
“붕대가 풀어졌을 뿐이야. 눈을 가리지 않게 하려고 눌렀지.
하지만 맥신의 말처럼, 이런 기분일 때는 침대가 최고지.“
  맥신은 거부하지 않고 뜨거운 뺨을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쿠르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꿈같이 생각되었다.
“사랑해요, 달링.”
맥신을 안고 침대로 가는 쿠르의 귓전에 조용히 속삭였다.
  쿠르는 정답게 웃으며 문을 닫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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