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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권력

Casey,Riley 2023. 3. 10.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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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권력
  
  
  
          <광기의 역사>의 탄생 

 <광기의 역사>의 역사를 잠깐 훑어 보겠습니다. 이 책은 원래 1958년에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에 박사논문으로 제출되었으나 탈락된 것입니다. 당시 푸코는 웁살라의 프랑스 문화원장으로 있었습니다. 푸코의 논문을 읽은 과학사 전공의 린드로트 교수는 원고의 부피와 문체의 현란함에 기가 질렸고, 차라리 문학에 가까운, 한껏 멋을 부린 이 긴 글이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대학에 제출될수 있는 논문이라고는 상상도 할수 없었습니다. 원고를 돌려 받은 푸코는 "문체가 지루하고, 글을 명확하게 쓰지 못하는"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그러나 정신분석학이 발달해온 사회적, 도덕적, 상상적 맥락의 역사를 쓰는것이 자신의 의도라고 말하며 논문을 받아줄것을 호소했으나 허사였습니다. 린드로트는 천재의 징후를 알아보지 못했던것이지요. 푸코는 프랑스에 돌아와 소르본느에서 이 논문을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습니다. 1961년의 일입니다. 

          <광기의 역사>의 초기 반응 

 푸코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기념비적인 책이지만 이 책이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은 다양했습니다. 초기의 반응 중에서 미셸 세르와 롤랑 바르트의 견해가 재미있습니다.  미셸 세르는 "논리적 추론의 한 가운데에, 박학한 역사적 자료의 한 가운데에 이 어둠의 사람들에 대한 막연히 인도주의적인 사랑이 아니라 거의 경건한 애정이 감돌고 있다. 그의 책 안에서 이 어둠의 사람들은 영원한 우리의 이웃, 우리의 또 다른 자아로 당당하게 인정받고 있다. 이 책은 하나의 고함소리이다. 그리하여 투명한 기하학은 삭제, 치욕, 추방, 격리, 패각추방, 파문들의 엄청난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비장한 언어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롤랑 바르트는 "물론 푸코는 광기를 정의하지 않았다. 광기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며 단지 그 역사를 찾아보아야 한다. 굳이 인식을 말하자면 광기 자체가 인식이다. 광기는 병이 아니며 시대에 따라 변하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의미일뿐이다. 푸코는 광기를 결코 기능적 실재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광기는 이성과 비이성, 보는자와 보이는자 한 쌍이 만들어내는 순수 기능일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한 사회에서 패각추방 당하고 격리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라는 미셸 세르의 독서법과 광기는 이성과 비이성의 대립적 쌍이 만들어내는 기능이라는 롤랑 바르트의 독서법은 그 후 이 책이 사람들에게 수용되는 양대 방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정신의학 운동을 주도 

 우선 광인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애정은 반정신의학의 흐름과 연결되었습니다. 1965년 영국에 번역된 포켙판이 당시의 반정신의학 운동을 주도하던 레잉과 쿠퍼의 관심을 끌었던것입니다. 그들은 프랑스에서 읽힌것과는 전혀 의미를 이 책에 부여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이 책이 사회 운동에 기여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된것은 68년 5월 혁명 이후였습니다.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고 모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이 팽배한 분위기 속에서 이 책은 가장 전복적이고 도발적인 책으로 각광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흐름은 저자의 생각도 바꿔 놓았습니다.   
 1972년에 재판을 발행하면서 푸코는 초판의 서문을 없애고 반정신의학과 보조를 맞추는 서문을 쓸까 망서리다가 결국 서문을 쓰지 않는 이유를 짤막하게 써넣는것으로 서문을 대신했습니다. 서문을 쓰지 않는 이유란 저자가 자기 책의 적합한 사용법을 미리 한정할 필요가 없다는것입니다. <광기의 역사>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억압, 폭력, 감금, 분할통치, 분리, 배제등의 단어들이 사회의 키워드가 되었습니다. 
 반정신의학 운동은 이 책의 해석을 아주 빈곤하게 만들어준 측면도 있습니다. 이 책이 갖고 있는 다채로운 이미지의 문학적 가치가 단순히 억압 세력에 대한 고발로만 의미가 축소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식론적 단절'의 전통 

 이 책은 원래는 그렇게 실천적인 관심 속에서 쓰여진 글이 아닙니다. 한 문명이 자신의 외부로 간주되는 어떤것을 배척하는 과정을 광기의 예에서 살펴보는 방법은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전복적인것도 아닙니다. 과학적 담론의 진실성이 절대적인것인가?라는 질문은 이미 60년대 초 당시의 대학 전통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 또는 '인식론적 문턱'의 개념이라든가 캉길렘의 '개념의 변형과 자리이동'이라는 주제 안에 이미 들어 있었습니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도 그것이지요. 토마스 쿤은 "한 세대가 유연하고 복합적이라고 경탄하는 한 개념이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는 그저 단지 모호하고, 불투명하며, 거추장스러운 개념이 되는가?"라는 문제에서 과학이란 그 시대의 과학적 영역을 제한하는 한 패러다임에 일치함으로써만 견고성을 유지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광기의 역사>는 바슐라르나 캉길렘의 인식론적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대학논문으로도 읽힐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정치적 반향은 푸코의 그 후의 연구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권력의 문제가 그것입니다. 70년대초 이탈리아에서 열린 심포지움에서 그는 "모든것이 마치 보이지 않는 잉크로 쓰여졌다가 적당한 시약을 바르면 종이 위에 나타나는 비밀 문서처럼 그렇게 홀연히 나타났다. 그것은 권력이라는 단어였다."라고 말했습니다. <광기의 역사>에서 아직 권력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나
중에 권력의 개념 혹은 지식-권력의 짝을 연구하게될 출발점이라는것이지요.
 과연 <광기의 역사>에는 권력의 문제가 보이지 않는 백색 잉크로 쓰여져 있습니다. 광기에 대한 꼼꼼하고 끈질긴 묘사를 읽다보면 그 뒤에서 권력의 모습이 은근히 떠오르니 말입니다. 그는 광기를 비이성에 대한 이성의 담론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이성이 바로 추방의 모델로서 기능하는 권력의 모습입니다.
 그럼 <광기의 역사>의 내용으로 들어가 봅시다. 역사적으로 서구 사회는 광기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요? 

          르네상스 시대의 광기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흥미로운 문학적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16세기, 그러니까 르네상스 시대에 "라인강이나 화란의 조용한 운하를 미끄러지듯 흐르는 이상한 배"가 나타납니다. 소위 '바보들의 배'입니다. 도시에서 추방된 광인들을 태우고 라인강을 따라 유럽의 도시에서 도시로 이어지던 신비한 배의 모티프는 보쉬, 브뤼겔등의 그림과 브란트의 문학등 초기 르네상스의 전 작품에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 광인들을 선원에게 넘겨주는것은 그들을 더 이상 도시의 성벽 안에서 배회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인 동시에 그들을 순화하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희랍 신화의 율리시즈에서 셱스피어의 <함렛>, 그리고 선원들을 미치게 만드는 로렐라이의 전설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유럽인의 상상 속에서 물과 광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인들의 항해가 서구인들의 꿈 속에서 아득한 옛날의 모티프와 닿아 있는것이라면 왜 15세기에 갑자기 이것이 문학이나 성상화(聖像畵)의 주제로 떠올랐을까요? 왜 바보들의 배와 미친 선원들의 모습이 갑자기 일상적인 풍경 안에 침입해 들어왔을까요? 그것은 광기와 광인이 세상이라는 연극의 주인공으로 떠올라, 세상을 조롱하고 인간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소극(笑劇), 풍자 희극 등에서 광인, 바보, 멍텅구리들이 점점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무대 한 옆에 서있는 우스꽝스러운 보조 인물이 아니라 무서운 진실을 말하는 어떤 전언자가 되었습니다. 
 양반을 거침없이 조롱하는 우리의 탈춤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갈것입니다. 그들의 존재는 그 자체가 위협이었습니다. 그들의 거침없는 말에 위협을 느낀 정상적인 사람들은 그들을 쫒아내고 싶었겠지요. 보슈, 브뢰겔, 뒤러의 그림에서 보이는 광기는 감성적 세계의 진실을 무화시키는 어떤 은밀한 비밀입니다. 그것은 악과 어둠의 세력과 연결된 광기이며, 사탄의 승리와 비슷한 광기입니다. 요컨대 바보들의 배는 중세말 유럽 문화의 지평에 갑자기 떠오른 불안감의 상징입니다. 
 같은 시대에 에라스무스는 <광기 예찬>(1509)이라는 저서에서 광기를 마술적이고 허구적인 이미지로 다루었는데 이것은 인간의 환상과 이성의 불확실성을 폭로하기 위한것이고, 또 박학한 학자와 신학자들의 무지와 자만을 조롱하기 위한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라스무스의 광기는 이성과 대화하는 광기입니다. 
 한쪽에는 비극적 광기가 있고, 또 한쪽에는 인본주의자의 냉소적인 시선 밑에서 그 힘이 한껏 약화된, 거의 순치된 광기가 있습니다. 이때부터 두 길의 분리가 시작되고, 틈이 벌어졌으며, 그 틈새는 세기를 거치면서 더욱 더 깊어졌습니다. 하나는 비판적 의식의 길인데, 이것은 과학에 귀착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비극적 면모의 길인데, 이것은 침묵으로 귀결되고, 나중에 고야, 반 고흐, 니체, 아르토의 작품에서 되살아나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여하튼 광기는 아직 사람들 사이에서 친숙한 것이었습니다.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 

 이 모든것이 17세기에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광기가 사회에서 배척되고 금지된것입니다. 르네상스 시대가 광인들을 바보들의 배에 실어 물로 추방을 했다고는 하나 그 숫자는 아주 미미한것이어서 역사적 의미 보다는 차라리 문학과 회화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예술사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17세기, 소위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러 광인들을 대대적으로 감금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 났습니다. 1656년 왕의 칙령에 의해 병기창이었던 살페트리에르, 상이군인 병원이었던 비세트르등 기존의 시설들이 단일 행정체계 안에 편입되어 구빈원(H pital G n ral)이라는 이름으로 파리에 세워졌습니다. 

          구빈원의 탄생 

 오피탈 제네랄은 영어로는 General Hospital, 그러니까 종합병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피탈 제네랄은 병원이 아니었고, 성별, 나이, 거주지, 태생, 직업을 막론하고, 몸이 성하거나 불구거나 혹은 환자거나 간에 파리의 모든 가난한 사람들을 수용하는 시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 번역은 '구빈원'이 더 적절합니다. 이 구빈원은 스스로 찾아 오거나 사법당국 혹은 왕명에 의해 보내진 사람들을 받아들여 먹여주고 재워주는 임무를 갖고 있었습니다.  자리가 없어 미처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의 생계, 행실, 규율도 이 기관이 맡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원장의 권한은 수용시설 안에만 한정되지 않고 파리 시내와 그 너머에까지 미쳤습니다. 구빈원 안에 수용된 사람은 물론 구빈원 밖에 있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원장의 관할 대상이었습니다. 
 원장은 시설의 운영은 물론 행정, 경찰, 사법, 교정, 처벌등 모든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의사 한 명을 채용했는데, 이 의사가 1주일에 두번씩 병동을 돌아 다니며 회진했습니다. 의사가 있었지만 처음부터 구빈원은 의료기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쯤 사법기관이었고, 일종의 행정적 실체였으며, 재판소 밖에서 재판하고, 집행하는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구빈원 안에는 죄수를 비끄러 맬 말뚝과 쇠고리, 감방과 지하감옥이 있었습니다. 
 병원 내부의 법규에는 아무런 항소가 허용되지 않았고, 병원 외부에 적용되는 법규도 반대나 호소가 효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거의 절대적인 지상권이고, 항소가 허용되지 않는 사법권이며, 그 무엇의 지배도 받지 않는 형벌권이었습니다. 구빈원은 경찰과 사법 사이, 법의 경계선상에 왕이 세워 놓은 이상한 권력 기관이었습니다. 즉 제3의 억압 체계였습니다. 그 기능과 목적에 있어서 의료적 이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왕권과 당시 프랑스에서 형성되고 있던 부르주아 체제의 질서 유지적 심급이었다고 푸코는 말합니다. 
 절대 왕정 치하에서 왕권과 부르주아의 혼합 질서가 만들어낸 이 특이한 구조는 곧 프랑스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1676년 6월 16일의 왕의 칙령은 전국 모든 도시에 구빈원을 설치할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파리에 처음으로 설치된지 불과 몇년만에 수용인원은 6천명에 달해 파리 인구(당시 50만명)의 1%가 감금되는 기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관이 가진 절대적인 사법권에서 볼수 있듯이 구빈원의 목적은 질병 치료 이외의 다른곳에 있는듯 했습니다. 그것은 노동력의 확보라는 측면입니다. 1656년의 설치령에 의하면 이 기관의 임무는 모든 무질서의 근원인 구걸과 게으름을 척결하는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오랫동안 구빈원은 실업자, 부랑자, 게으름뱅이들을 수용하는데에 이용되었습니다. 이 억압적인 기능의 유용성은 일하지 않는자들을 단순히 가두기만 하는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일거리를 주어 공동의 번영에 기여하게 하는것이었습니다. 경기가 좋아 임금이 높을때는 값싼 노동력을 공급할수 있었고, 불경기로 실업이 만연될때는 게으름뱅이들을 흡수하여 폭동과 소요의 위협에서 사회를 보호하는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전주의 시대의 구빈원은 실업을 해소하거나 적어도 실업의 가장 가시적인 사회적 효과를 지우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은 이런 경제적 사회적 기능만 갖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서구 기독교인들의 의식 속에서 원죄 이전의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은 오만입니다. 그러나 일단 에덴 동산으로 전락하고 난 후의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죄악은 게으름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게으름을 신에 대한 피조물의 두번째 반역으로 간주했습니다. 따라서 수용 시설 안에서의 노동은 윤리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게으름이 반역의 절대적 형태이므로 강제 노동을 통해 그들을 교화시키는것입니다. 노동의 체험 속에서 강제수용의 경제적 도덕적 목표가 실현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근면과 게으름의 분할은 과거 중세 시대에 문둥병을 추방하던 분할선의 고전주의적 버전이라 할수 있습니다. 문둥이를 추방하던 의식(儀式)이 이제는 생산과 산업의 영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특이한것은 17세기 구빈원의 탄생과 함께 광기가 가난한자, 게으름뱅이, 부랑자들과 나란히 갇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광인에 대한 사회의 감각이 이제는 더 이상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것으로 되었습니다. 광인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경찰의 문제로 새롭게 떠올랐습니다. 과거에 진실의 담지자로서 비판적 기능을 갖고 있던 광기가 게으름으로 단죄받았고, 노동 윤리라는 사회적 공간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중세까지 사람들은 광인을 신들린 사람으로 생각하여 성스럽게 취급했고,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광기는 상상적 초월성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것이 고전주의 시대로 넘어 오면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광기는 노동 공동체의 사회 안에서 윤리적 단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르네상스가 그 목소리를 해방시켰던 광기를 고전주의 시대는 이상한 폭력적 수단에 의해 침묵하게 만들것이다."라고 푸코는 말합니다. 이상한 폭력적 수단이란 다름아닌 이성입니다.  

          대감금의 이론적 배경으로서의 데카르트의 이성중심주의

 그러면 왜 갑자기 17세기에 이르러 광인들을 대대적으로 가두는 일이 일어났을까요? 모든 역사적 사건들에는 그것을 떠받쳐주는 이론 작업이 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뒤에는 룻소, 볼테르, 디드로등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계몽 사상이 있고, 소련의 공산주의 혁명 뒤에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이 있습니다. 소위 담론적 실천과 역사적 실천 사이의 밀접한 관계입니다. 17세기에는 서구 합리주의 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가 있었습니다. 푸코는 광인들의 대감금을 떠받치는 이론적 근거로서 데카르트의 이성중심주의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몽주의 철학은 당시의 상승계급이던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공동체는 윤리를 앞세운 분할권을 획득하여 모든 사회적 비효율성을 다른 세계로 내몰았습니다. 고전주의 시대가 광기에 대해서 타자를 선언할수 있었던것은 광인이 다른 하늘에서 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부르주아적 질서의 경계선을 넘어서서 그 윤리의 성스러운 한계 밖에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광기가 자연적인 질병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라는것과, 광기의 사회적 추방은 당시 상승계급인 부르주아지의 노동과 근면 이데올로기에 상치되기 때문이라는 푸코의 생각을 읽을수 있습니다. 

          비-이성으로서의 광기 

 불어에서 정신착란을 뜻하는 d raison은 이성을 뜻하는 raison 앞에 부정의 접두사 d 를 붙인것입니다. 당연히 이 단어의 의미는 '이성의 결여' 또는 '부조리'이고, 이성이 결여되었으므로 '실성(失性)' 즉 '미친것'이 됩니다. 불어에서는 d raison이 '비이성'과 '광기'를 동시에 의미하기 때문에 비이성이 곧 광기라는것이 이 단어 하나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푸코의 사상 전체가 이 단어에 요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고전주의 시대에 유럽 문명이 갑자기 광인들을 수용시설에 가둠으로써 광기를 사회에서 배제했는데, 이때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분할의 기준이 바로 이성입니다. 광기는 근엄한 이성에 의해 부인되었습니다. 이성은 광기를 배제하고 묵살했습니다.  

           데카르트의 광기 배제 

 그러면 도대체 데카르트의 어떤 부분이 광기를 비이성으로 간주하여 그것을 패각추방했을까요? 문제의 부분은 데카르트의 <성찰>입니다. 데카르트의 「제1성찰」은 사유가 자명하게 지각한 진실도 의심할수 있다는 회의 가능성의 근거를 제시하고 그것을 다시 부인하는 과정입니다. 이 철학자는 자기가 믿고 있던 견해들을 해체하여 근본에서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하겠다는 말로 성찰을 시작했습니다. 어릴때부터 참된것으로 받아들인 많은 견해들이 사실은 참이 아닐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안정한 원칙들을 근거로 쌓아 올린 학문은 의심스럽고 불확실할수 밖에 없지요. 그러므로 지금까지 믿어왔던 견해들에서 벗어나 기초부터 새로이 출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그는 우선 우리의 인식과 앎의 중요한 토대중의 하나인 감각을 의심해 보기로 합니다. 감각이 우리를 속일수 있는 경우를 하나씩 점검하는 과정에서 오류와 꿈과 광기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푸코는 꿈과 광기의 불균형과 비대칭성을 보고, 데카르트의 이성이 광기를 원천적으로 배제했음을 보여줍니다. 
 데카르트는 실내복을 입고 종이를 손에 들고 불 옆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에서부터 성찰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어떻게 이 손과 육체가 내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수 있겠는가? 라고 씁니다. 정신병자들은 "머리가 혼란스럽고 담즙의 검은 김으로 뿌옇게 서려 있어 아주 가난한 주제에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하며, 벌거벗었는데 황금색이나 자주색 옷을 입었다고 믿고 있고, 자기 몸이 유리로 되었거나 아니면 자기가 항아리라고 상상하는 사람"들이라고 한 후, "그들의 예를 따른다면 나도 또한 미친 사람일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미치지 않은 이상 나는 내 몸과 내 주위의 현실을 의심할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그는 광기의 문제를 일단락지었습니다. 
 두번째는 꿈과 오류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잠을 자고, 누구나 잠 속에서 꿈을 꿉니다. 정신병자들이 깨어있을때 머리에 그리는것과 같은것을, 아니 그보다 더 해괴한 것을 꿈 속에서 보는 일도 허다합니다. 꿈속에서도 지금처럼 실내복을 입고 손에 종이를 들고 불 옆에 앉아 이것이 현실이거니 생각하고 있던 적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장면이 꿈속의 한 장면이 아니라고 믿을만한 근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처럼 현실이 꿈보다 더 실재적이라고 할수 없으므로 현실을 모두 불신해야 할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꿈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고 현실이 우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꿈의 질료는 바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상상도 그렇지만 꿈이란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낸 허구의 상(像)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요소들'을 이리저리 결합시켜 상상 또는 꿈을 만들어냅니다.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요소'란 모든 실재의 사물 안에 들어있는, 더 이상 환원시킬수 없는 형태를 말합니다. 예컨대 삼각형, 사각형 같은 도형이나 빨강, 하양같은 색깔들은 모든 실재의 사물 안에 들어 있으므로 보편적이고, 더 이상 환원시킬수 없으므로 단순합니다. 꿈은 이런 요소들을 조합하는 능력은 있으되, 그것들을 만들어낼 능력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희랍인들의 상상 속에서 반은 사람이고 반은 물고기인 마녀 사이렌이나 반은 사람이고 반은 짐승인 사티로스도 여자와 물고기라는 실체, 남자와 짐승이라는 실체를 조합한것이지요. 아무리 기괴한 상상, 아무리 기상천외한 꿈도 사실은 현실의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요소들을 결합한 것이므로 상상과 꿈의 질료는 어디까지나 현실이고, 상상과 꿈의 토대는 엄연히 현실입니다. 따라서 꿈에 대한 상상의 우위는 자명해집니다. 그러므로 꿈이 아무리 현실과 비슷하다 해도, 꿈을 믿을수 없는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을 믿을수 없다는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데카르트의 의심은 꿈이라는 시련을 이겨냈습니다.  데카르트는 이처럼 의심을 물리치고 확신을 얻기 위해 광기와 꿈, 그리고 감각적 오류들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이 세가지의 위험을 피하고 남는 진실이라면 정말로 믿어도 좋은 진실일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이것들을 하나하나 검증하고 배제하여 보편적 진실, 영속적 진실을 확립해 나아갑니다. 그런데 푸코는 데카르트가 회의의 과정에서 꿈과 모든 형태의 오류를 한 데 묶고 그 반대편에 광기를 놓았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 쪽의 광기와 다른 한쪽의 꿈과 오류 사이에 불균형이 있다는것을 발견했습니다. 즉 데카르트에게서 꿈과 오류의 위험을 피해가는 방식이 광기의 위험을 피해가는 방식과 같지 않다는것이지요.  
 우선 감각적 오류에 대해서 말할것 같으면, 감각이 아무리 우리를 속인다 하나 그것은 우리의 감각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때만입니다. 일부 감각이 우리를 속여 환각 작용을 일으킨다 해도 그것은 언제나 진실의 한 잔재, 즉 "내가 여기 실내복을 입고 벽난로 옆에 앉아 있다"는 최소한의 진실은 남깁니다. 따라서 감각적 오류는 별것이 아닙니다.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꿈이 사실처럼 보인다"는 그 말이야말로 꿈도 훼손시키지 못하는 실재적 진실의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으니까요. 
 이처럼 감각적 오류와 꿈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것이 진실의 영속성이라면, 광기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것은 아예 처음부터 광인이 될수 없다는 불가능성이요 자격박탈입니다. 데카르트는 광인의 예를 든후 "아니 이게 뭐야, 이건 미친 사람들이잖아!"라고 말합니다.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은 할수 없다,라는 얘기지요. 이 불가능성이 사유와 자동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기본 가설이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을 확립했듯이 여기서는 사유와 광기배제의 관계가 자동적으로 연동되어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존재할수 없듯이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미칠수 없기 때문입니다. 꿈이나 환각은 진실 자체의 구조 안에서 극복되지만 광기는 회의하는 주체에 의해 배제됩니다. 꿈이나 오류가 사유의 대상과 관계가 있다면 광기는 사유하는 주체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성에 의한 광기의 배제 

 16세기에 광기는 환각의 여러 형태중의 하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꿈꾸지 않는다는 자신이 없었고, 마찬가지로 광인이 되지 않는다는 확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이 확신을 취득하고 그것을 확고하게 견지합니다. 데카르트에게서는 자기가 광인이 된다는 것은 아예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광기는 이성에 의해 단호하게 추방되었습니다. 
 이제 이성은 오류 이외의 다른 함정, 환각 이외의 다른 위험을 만날수 없는 충만한 자기 소유 안에 안전하게 피신해 들어갔습니다. 요컨대 데카르트는 사유하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는 그런 근대인의 이름으로 광기를 추방합니다. 광기는 이제 배제의 영역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꿈이나 오류가 주관성과 진실의 관계인데 반해 광기는 진실의 영역 밖에 놓여졌습니다. 
 진실의 영역이란 뭘까요? 다름 아닌 이성입니다. 이때부터 광기는 이성의 반대항으로서 이성으로부터 추방되었습니다. 이성과 비이성(광기) 사이에는 분할선이 그어졌고, 이 분할선은 르네상스 시대에 그토록 낯익었던 비이성적 이성, 혹은 이성적 비이성의 체험을 완전히 불가능한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데카르트가 주체의 감각, 상상, 두뇌의 기능에 대해 완전히 근거있는 확신을 가질수 있게 된것은 그가 꿈꾸기를 가정해 보고, 또 모든 감각이 그를 속인다는것을 믿는척 해 본 다음에였습니다. 그러나 광기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것이 푸코의 주장입니다. <성찰>의 어느 부분에서도 그는 자기가 광인이 될수 있다는것을 인정한적이 없습니다. 광기는 주체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시험이 아니라 시험 자체가 불가능한것으로 치부된 시험입니다. 뇌와 증기와 광란의 메카니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성찰하는 주체가 이미 광인이 아니어야 합니다.   
 이렇게 미친 철학자의 가능성이 사라진 순간에 질병으로서의 광기가 나타납니다. 이제 광기는 보통 사람들이 아무나 걸릴수 있는 일상사가 아니라 완전히 정상인과 단절된 질병 또는 과오로 나타납니다.   

          피넬과 튜크로부터 시작된 근대 정신의학 

 광기의 역사에서 17세기의 대감금과 함께 가장 중요한 두번째 계기는 18세기말 대혁명 직후 피넬의 정신병자 해방입니다. 피넬이 비세트르의 지하감옥에서 정신병자들의 쇠사슬을 풀어준것이 근대적 정신병원의 탄생이고, 정신의학의 탄생입니다. 
 피넬이 정신병자들의 쇠사슬을 풀어준것은 정신의학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에피소드입니다. 혁명정부의 실력자인 꾸통(1755-1794)이 지명수배자가 숨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수용소를 방문했습니다.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무시무시한 공포정치의 주역을 보고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 벌벌 떨었습니다. 피넬은 그를 발작 환자들의 병동으로 안내했고, 그는 환자들을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환자들이 그를 모욕하고 불경한 언사를 썼으므로 심문이 불가능했습니다. 피넬이 정신병자들의 쇠사슬을 풀어주려 한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꾸통이 피넬에게 "시민이여, 저런 짐승들을 풀어주려 하다니 당신 미치지 않았소?" 라고 말했습니다. 피넬은 조용히 "시민이여, 광인들이 저토록 통제불능이 된것은 그들에게 신선한 공기와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꾸통은 "당신 마음대로 하시요. 
그러나 당신 가설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요."라고 말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가 떠나자 피넬은 곧 광인들의 쇠사슬을 풀어주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우선 열두명의 정신병자를 풀어 주었는데 그중에는 40년 전부터 비세트르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영국인 대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병원에서 가장 흉포한 광인이어서 수갑으로 보조원 한 명을 때려 즉사시키기도 했습니다. 피넬은 그에게 다가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말고 얌전히 있을것을" 명령하고, 만일 그것을 지키면 쇠사슬을 풀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산책도 할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의 몸에서 쇠사슬이 풀리자 그는 밖으로 뛰어나가 햇빛을 바라보며 "아름답구나!"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음날에도 그는 정원에서 달리거나 층계를 오르내리며 끊임없이 "아름답구나!"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후 2년동안 그는 한 번도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고, 마침내 다른 광인들의 감시자로서 병원의 근무자가 되었습니다.   
 근대적 정신병원의 창설에서 또 하나의 전설적인 인물은 영국인 튜크입니다. 그는 '명상의 집'을 만들어 광인들에게 퀘이커 교도의 공동체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기에도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튜크가 '명상의 집'에 처음 부임해 왔을때 아주 힘이 센 젊은 조증(躁症) 환자가 있었습니다. 주위의 환자들만이 아니라 간수들까지도 이 사람 앞에서는 공포에 몸을 떨었습니다. 튜크가 그를 처음 보았을때 그는 사슬과 밧줄에 묶여 있었고, 수갑을 차고 있었습니다. 튜크는 곧 그에게서 모든 구속 장치를 제거하고 간수와 함께 식사하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러자 즉각 발작이 그쳤습니다. 그후 '명상의 집'에서는 환자들이 최대의 자유와 안락함을 누렸고, 규칙을 어기지 않는한 어떤 제재도 받지 않았습니다.              

          시선의 힘

 튜크 자신이 예로 든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 이것은 튜크가 1813년에 쓴 Description of the Retreat, an Institution near York for insane persons에 나와 있는 한 조광증(躁狂症)(maniaque) 환자의 이야기입니다. 감독관과 함께 정원을 걷고 있던 이 환자는 갑자기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광포한 발작에 사로잡혀 커다란 돌을 하나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감독관으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져 당장이라도 그에게 돌을 던질 태세였습니다. 그러자 감독관은 걸음을 멈추고 환자를 쏘아보며 몇걸음 앞으로 내디딘후 침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돌을 내려 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가 환자 앞으로 다가감에 따라 환자는 힘없이 손을 아래로 내리고 마침내 돌을 바닥에 떨어 뜨렸습니다. 그리고는 감독관에게 몸을 맡겨 그가 이끄는대로 조용히 자기 방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물리적 억압과는 다른, 뭔가 새로운것이 생겨나고 있음을 우리는 볼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권위입니다. 조직 폭력배의 세계에서 우람한 몸집의 건장한 부하들이 왜소한 몸집의 두목 앞에서 꼼짝 못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힘으로는 주먹 한 방이면 때려 눕힐수 있는 두목 앞에서 왜 이렇게 꼼짝못할까요? 그 왜소한 몸집의 두목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부하들을 제압한다는것입니다. 시선, 그것은 바로 권위입니다. 시선에는 규율, 규제, 제압의 기능이 있습니다.  뱀의 머리칼을 한 메두사 앞에서 사람들이 돌로 변하듯이 그 앞에서 우리가 꼼짝못하고 얼어붙는 그런 시선에 대해 이미 사르트르는 <구토>와 <존재와 무>에서 말한적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대상화하고 소외시키는 타자의 시선, 그것은 오만한 지배계층의 싸늘한 시선이며, 개개의 인정투쟁에서 승리한 대타(對他)의식의 시선입니다. 사르트르가 이 시선을 고통스럽게 묘사한 이래 현대 프랑스의 사유에서 시선은 아주 부정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푸코는 한 번도 사르트르의 시선에 대해 언급한적이 없지만 이 시선의 문제야말로 두 사상가의 근본적인 유사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본격적으로 시선의 문제를 다루며 보는자와 보이는자의 권력의 비대칭성을 논했습니다.  

          이성의 권위 

 18세기말까지 광인들은 얼굴 없는 막연한 권력에 둘러 싸여 있었습니다. 환자들을 감시하는 간수들은 가끔 환자들 사이에서 충원되는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튜크는 간수와 환자 사이에, 다시 말해서 이성과 광기 사이에 매개적 요소를 하나 집어 넣었습니다. 이제 요양원은 사람들을 가둘수 있는 권한과 사람들을 평가하는 이성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감독관은 아무런 무기나 강제의 도구가 없이 그저 시선과 언어만으로 환자를 다룹니다. 불시의 위협에서부터 그를 보호할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그저 맨손으로 광인들의 앞으로 나아가는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광기와 대적하는 그는 평범한 구체적 개인이 아니라 이성의 존재입니다. 그의 권위는 그가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과거에 비이성에 대한 이성의 승리는 물리적 강제력, 다시 말해서 실질적인 몸싸움에서 쟁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광인과 비-광인 사이의 싸움은 비이성의 패배가 아예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그런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19세기의 요양원에서 환자들에 대한 구속이 없어졌다는것은 비이성의 해방이 아니라 광기가 이미 오래전에 제어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의사에게 부여된 부르주아적 가부장의 권위 

 쇠사슬이 풀린 환자들에게는 규칙적인 노동이 치료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신체적 수고를 동반하는 노동은 환자의 환상을 억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습니다. 그러나 노동보다 더 효과가 있는것은 '존경심'이었습니다. '명상의 집'에서는 간수와 광인들 사이에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 가족이라는 개념이 강조되었습니다. 이 가족이 광인들에게 정상적이고 도덕적인 분위기를 제공했지요. 그러나 가족이라는 개념 때문에 광기의 소외는 더욱 심해졌다고 푸코는 말합니다. 광인은 미성년자가 되어 이성적 권위를 가진 사람의 권위와 지위에 전적으로 내맡겨졌습니다. 
 광인들에게 이성적 인간은 성인의 모습을 띄었고, 도달해야할 목적이나 권위로 비쳐졌습니다. 비이성의 존재인 광기는 이제부터 요양원 안에서 미성년자 취급을 받습니다. '명상의 집' 에서 환자들은 완전히 어린애로 다루어집니다. 가끔 넘쳐나는 자신의 힘을 억제하지 못하여 위험한 일을 하므로, 언제나 벌과 보상을 즉각적으로 주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적용된 새로운 교육 방법은 우선 그들을 권위로 제압한뒤 이어서 칭찬하고, 그 다음에는 일을 시키는데,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 방식으로, 일에 흥미를 갖도록 한다는것입니다. 이것은 그대로 어린이 교육을 연상시킵니다. 
 '명상의 집'은 이런 점에서 대가족의 면모를 띄고 있습니다. 물론 오래전부터 광인은 금치산의 의미에서 법적으로 미성년자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법적인 지위일뿐 인간 관계의 구체적 양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튜크의 요양원에서 그들은 완전히 심리적인 미성년자가 되어, 이성적 인간의 권위에 복종하는것입니다. 여기서 이성의 인간들은 성인, 더 나아가서 아버지라는 구체적 모습을 띕니다. 다시 말하면 지배자의 모습이지요. 이 가부장적 권위는 부르주아의 것입니다. 튜크는 부르주아 가정의 구조를 가져와 요양원 안에 그것을 상징적으로 복원시켜 놓았습니다. 광인들에게 일종의 모의(模擬) 가정, 즉 시뮬라크르의 가정을 마련해 준것이지요. 실제의 가정이 아니면서 소도구와 제스추어의 무대장치로 가상의 가정을 꾸며 놓았습니다. 그로부터 1세기후 이 질병은 국가가 떠맡게 될것이고, 요양원은 허구적 가정의 권위를 유지하게 될것입니다. 광인은 미성년자가 될것이고, 이성은  아버지의 모습을 띄게 될 것입니다. 

          피넬과 튜크는 박애주의자인가? 

 근대 정신의학의 아버지로 널리 추앙받는 피넬과 튜크의 정신병자 해방을 박애주의나 인도주의로 보아서는 안된다는것이 푸코의 입장입니다. 정신병자들을 쇠사슬에서 풀어준것을 박애주의로 찬양하는것은 순진한 일이라는것입니다. 사람들은 피넬을 요양원의 창시자로 추앙하지만, 그 요양원은 관찰, 진단, 치료의 자유스러운 구역이 아니라, 환자가 고발되고, 재판받고, 선고받는 사법적인 장소라는것입니다. 광기는 요양원 안에서 처벌의 대상이며, 광인들은 요양원 안에서 영원한 수인(囚人)입니다. 
 정신착란의 환자들에게는 햇빛도 안 들어오는 지하감옥, 쇠사슬, 끊임없는 난동과 욕설들이 차라리 자유의 요소였습니다. 그런대로 인정을 받았고, 마구 지꺼리는 말의 진실성에 수긍하는 외부적 공모자의 지지도 받았으며, 여하튼 진실의 영역에서 쫒겨나지 않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성과 광기 사이에 대화가 있었고, 고전주의 시대에는 광기를 완전히 눌러 침묵하게 했지만, 그러나 여하튼 거기에 언어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용소에 가두거나, 감옥에 가두거나, 지하감옥에 가두더라도, 또 어쩌면 그들에게 고문을 가할지라도, 그리고 비록 침묵의 형태이기는 할지라도 이성과 비이성 사이에는 대화가 있었습니다. 
  
          광인들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과 침묵 

 그러나 쇠사슬이 풀리면서 이 대화의 끈이 끊어지고, 절대적인 침묵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광인들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과 침묵이 그것입니다. 그들의 말에 아무리 진실이 있어도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이 아무리 난동을 부려도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을 조롱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이제 무시되고 경멸당하는것은 광인의 광기가 아니라 광인인 인간 그 자체입니다. 
 그들의 말은 타인들의 절대적 침묵 속에서 메아리 없이 사라져 버리는 독백의 언어입니다. 지금 그들은 지하감옥에서보다 더 철저하게 감금되었고, 쇠사슬에 매인것보다 더 단단히 묶였습니다. 그 누군가의 수인(囚人)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수인이 되었고, 끊임없는 죄의식으로, 자신과의 관계는 과오, 타인과의 관계는 수치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성과 광기 사이에는 공통의 언어가 없습니다. 환각의 언어에는 언어의 부재만이 답할뿐입니다. 환각은 오로지 과오를 드러내는것으로만 간주됩니다. 
 사람들은 튜크와 피넬이 요양원에 의학을 도입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양원에 과학을 도입한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를 도입했으며, 이 인격체는 의학을 자기 작업의 정당화로만 이용했을뿐입니다. 이 인격체의 권력은 근본적으로 도덕적, 사회적인것이며, 광인의 미성년성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요양원에서 의료인들이 광기를 포위한것은 그들이 광기를 잘 알아서가 아니라 광기를 제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객관성은 지배의 다른 측면일뿐입니다. 
 환자들의 복종과 존경심을 끌어내는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주요했습니다. 피넬의 환자 치료 방법은 정신병에 대한 객관적 정의나 분류적 진단에서 출발하는것이 아니라 오로지 위세에만 의존하는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세는 가부장적 가정의 권위와 사랑, 그리고 처벌에 기반한것이었습니다. 의사는 아버지 혹은 심판자의 이미지를 띄었으며, 의학적 능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정신의학의 창시자 프로이트 

 마침내 정신의학의 창시자라고 할수 있는 프로이트가 등장했습니다. 19세기의 모든 정신의학은 프로이트로 수렴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의사와 환자의 상호적 관계를 실질적으로 인정했고, 이들에 대한 관찰과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요양원의 모든 구조를 냉정하게 파헤쳤고, 환자에 대한 의사의 침묵과 싸늘한 시선을 폐기했으며, 거울 효과를 통한 환자의 자기 인식 방법이나 자가비판의 방식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사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를 최대로 활용하여, 의사를 거의 신적인 위치에 올려 놓았습니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에 언어를 도입한것은 사실이지만 종래의 정신과의사들이 시선에 부여했던 특권을 완전히 거부한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신분석은 감시 받는자의 끊임없는 독백에 감시자의 절대적 시선을 덧대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옛 요양원의 비상호적 시선의 구조를 보존했다. 그러나 대답없는 언어라는 새로운 구조에 의해, 그리고 여전히 비대칭적 상호성 안에서 그 구조의 균형을 이루었다."라고 푸코는 말합니다. 
 피넬과 튜크에 이어 프로이트에게 있어서도 의사는 정신병자들에게 기적을 행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요양원 안에 집단적으로 분산되어 있던 모든 권력을 자기 주위에 집중시켜, 그것을 절대적 시선, 완전한 침묵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처벌과 보상을 적절히 안배하는 재판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피넬과 튜크가 수용 시설 안에 배치해 놓았던 모든 구조를 의사쪽으로 몰아 놓았습니다. 마치 하느님 아버지처럼 환자에게 전지전능의 권한을 행사하는 소위 의료 권력의 탄생입니다. 

          정신의학의 탄생

 의학 지식보다는 아버지같은 권위로 환자를 치료했던 피넬과 튜크는 아직 정신의학자(psychiatre)가 아닌 전통적인 광증치료사(ali niste)입니다. 불어로 전통적인 정신병은 ali nation인데 이것은 소외, 혹은 재산 양도의 뜻도 있으며, '정신을 길잃게 하다'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말로 '정신나간 사람' 정도이겠죠. 근대적 정신의학(psychiatrie)이 생기기 이전까지 정신과의사는 ali niste로 불렸습니다. 
 그러면 광증치료에서 정신의학으로, 다시 말해서 광증치료사가 정신과의사로 넘어가는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푸코는 일련의 끔찍한 사건들중 특히 이웃집 여자아이를 살해한 앙리 코르니에 사건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는 1975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비정상인들>이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의에서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신의학의 탄생 계기가 된 앙리에트 코르니에 사건 

 1826년 파리의 가정집 하녀였던 앙리에트 코르니에는 어느날 이웃집에 가서 그 집의 19개월짜리 딸을 봐주겠다고 자청합니다. 아이 엄마는 잠시 망서리다가 아이를 내주었습니다. 앙리에트 코르니에는 여자 아이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와 준비해둔 칼로 아이의 목을 잘라, 한 손에는 몸통을, 다른 한 손에는 머리를 든채로 15분간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아이 엄마가 아이를 찾으러 왔을때 코르니에는 "아이가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믿지 못하고 불안에 사로잡힌 엄마가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코르니에는 앞치마에 아이의 머리를 싸서 창문 밖으로 던졌습니다. 곧 잡혀서 사람들이 왜 그랬느냐고 묻자, 그녀는 "그냥 그러고 싶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의 재판 과정에서도 그녀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웃집 여자에 대해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었고, 아이를 죽여서 얻을수 있는 이득도 없었으며, 한 마디로 그런 범죄를 저지를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의사 변호사들이 범죄 이유를 찾기 위해 달려들었습니다. 그녀의 일생도 시시콜콜하게 점검되었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인 앙리에트 코르니에는 남편과 헤어졌고, 방종한 생활을 하다가 사생아를 둘 낳았으며, 이 아이들을 보호시설에 맡겼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범죄의 이유는 되지 못하지요. 범죄에 이해관계나 이유가 없을때, 그 범죄는 정신착란 상태에서 저질러지는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행위시 정신착란 상태에 있었다는것이 입증되면 범죄가 구성되지 않는다고 법률도 정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앙리에트 코르니에의 기소장은 그녀에게 아무런 전통적 질병의 징후가 없다는것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소위 광증치료사들이 말하는 멜랑콜리도 없었고, 환각의 흔적도 없었습니다. 환각의 흔적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완벽하게 맑은 정신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범죄를 사전에 면밀하게 계획했다는 사실이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그녀는 옆집 여자 아이를 죽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죽이기 위해 옆집으로 갑니다. 가기 전에 자기 방을 잘 정돈합니다. 죽은 아이의 몸에서 흐르는 피를 받기 위해 요강을 침대 밑에 놓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봐주겠다는 핑계를 댑니다. 아이가 사랑스럽다는 가짜 제스추어도 씁니다. 모든것이 계략의 차원에서 잘 계산된 것이지요. 행위의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방으로 올라오는 층계에서 수위를 만났을때 그녀는 아이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행위 직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자기가 저지른 일의 중대성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라고 기소장에는 쓰여있습니다. 아이 엄마가 방에 들어오려 하자 그녀는 "가세요, 당신이 목격자가 될수도 있어요"라고 말했고, 달려온 사람들에게 "이건 사형감이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자기 행위의 도덕적 가치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잘못을 정확히 알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까지 했습니다. 희생자의 신체의 일부를 숨긴것이 그러합니다. 이 모든것은 범죄자인 앙리에트 코르니에의 맑은 정신상태를 보여주는것입니다. 
 범죄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으므로 정신감정을 의뢰했으나 정신착란의 징후는 전혀 없었습니다. 범죄의 구성을 이해(利害)의 유무와 연결시킨 형법 64조의 제정 이래 이런 사건은 처음이었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주체의 이성이야말로 법이 적용되기 위한 조건입니다. 주체가 이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에게 법을 적용할수 없다는것이 64조의 내용입니다. 왜, 그리고 어떻게 그가 그런 행위를 했는지를 알았을때에만, 다시 말해서 문제의 행위에 대한 분석적 이해가 가능할때에만 국가는 범죄자를 처벌할수 있습니다. 이유 없는 행위, 이성 없는 주체에 의해 저질러진 행위는 처벌할수 없지만, 그러나 이 주체가 이성이 결여되어 있지도 않을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 이상 재판이 불가능하므로 사법부는 정신의학에 문제를 이관했습니다. 온전하게 남아있는 도덕적 의식, 전혀 교란되지 않은 이 맑은 정신앞에서 이해없는 행위라는 전통적 법의식은 수정되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도덕의 모든 장벽을 뒤흔들고, 마침내 그것을 허물어뜨릴 정도의 어떤 부조리한 역동성이 인간에게 내재해 있다는것을 증명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강력한 살륙의 충동은 과연 무엇일까요?
  
           본능의 발견 

 앙리에트 코르니에의 정신감정서 안에는 '억제할길 없는 방향', '억제할길 없는 감정', '거의 억제할수 없는 욕망', '그 근원을 책임질수 없는 잔혹한 성향'등의 말이 나옵니다. 또 혹은 그녀가 자신을 억제할수 없이 '유혈적인 행동'에 이끌려 갔다는 말도 나옵니다. 그녀의 변호사 푸르니에는 '격렬한 열정의 에너지'에 대해 말했고, '인체 기관의 정상적 법칙과 거리가 먼 이상한 요인의 존재'를 말했으며, '끊임없이 극단으로 치닫는 불변의 고정된 결정, 혹은 '그녀의 모든 기능을 관장하고, 모든 순간들을 위압적으로 인도하는 어떤 영향력'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억제할수 없는 힘을 지시하는 이 일련의 명칭과 용어, 형용사들이 바로 본능을 가리키고 있다는것을 여러분들은 짐작할것입니다. 푸르니에는 '야만적인 본능'이라고 했고, 정신감정서를 쓴 마르크는 '본능적 행위' 또는 '본능적 성향'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진단서 안에도 있었고, 변론 안에도 있었지만 그러나 아직 개념이 형성된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개념이 형성될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정신의학적 담론 안에는 이런 대상을 명명할만한 용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광기가 근본적으로 오류, 환각, 또는 진실에의 불복종으로 여겨지던 시대였으므로, 이 날것 그대로의 역동적 요소인 본능은 그 담론 안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습니다. 물론 명명은 했으나 아직 개념으로 구성되지는 못했습니다. 푸르니에나 마르크가 이 본능을 말한 순간에조차 그들은 이것을 정신착란 비슷한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왜냐하면 1826년 당시만 해도 착란은 광기를 구성하는 특징이고 주요 조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는 앙리에트 코르니에의 맹목적 내재적 역동성을 '착란의 행위'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녀의 행위가 환각에 의한 행위라는 이야기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고, 행위가 너무 어처구니 없어서 마치 환각과 비슷하다는 이야기인데, 그러나 그것은 환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앙리에트 코르니에와 함께 정신의학은 본능을 발견했습니다. 범죄 자체가 쇼킹한것은 둘째 문제이고, 범죄의 이유가 없다는것이 법률적, 의학적, 도덕적으로 엄청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19세기의 정신의학이 글자 그대로의 광기에 속하지 않는 모든 혼란, 모든 변칙, 모든 크고 작은 혼란스러운 행동들을 질병과 정신병으로 분류할수 있었던것은 바로 이 본능에서부터입니다. 의학이 왜 앙리에트 코르니에 사건과 같은 이유 없는 범죄에 그토록 매혹되었는지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공중보건으로 출발한 정신의학 

 18세기말, 특히 19세기초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정신의학은 일반의학의 한 분야로서 특화되지 못했습니다. 의학이론의 분야가 아니라 기껏해야 그것은 공중 보건의 한 특수 분야였습니다. 프랑스에서 발행된 첫번 정신의학 잡지의 제호가 <공중보건 연대기>라는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정신의학이 학문적으로 제도화된것은 사회적인 예방, 사회체 전체의 보건으로서였습니다.             
 정신의학이 어엿한 학문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광기를 질병으로 코드화해야 하고, 광기의 무질서, 오류, 환각들을 병리적인것으로 간주해야 하며, 이 병리현상에 대한 사회적 예방을 가능한한 최대로 의학적 앎에 근접시켜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징후학, 질병학, 진단, 관찰, 임상기록등을 확립해야 했습니다. 두번째로는 광기를 위험으로 코드화해야 했습니다. 엄청난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현상으로서 광기를 부각시키는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의 코드화를 통해 정신의학은 실질적인 공중 보건학의 기능을 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칠게 말해보면 정신의학은 한편으로는 공중 보건의 한 부분을 담당했고, 또 한편으로는 정신병의 예방과 치유라는 사회적 예방의 기능을 갖게 되었습니다. 
 공중 보건의 의학화와 사회적 예방이라는 이 이중의 코드화는 19세기 전체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정신의학이 전성기를 맞게된것은 이 두 코드화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정신의학은 공중 보건에 파견나간 의학으로서 기능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앙리에트 코르니에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때부터 정신의학은 광기가 이성의 부재라는 틈새에서 발생하는것이 아니라 본능의 음침한 역동성에서 발생하는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능과 함께 사람들은 광기에 대해 전혀 새로운 문제, 즉 병리적인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18세기만해도 받아들일수 없던 모든 문제들이 앙리에트 코르니에 사건 이후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왔습니다. 

          광기의 병리학화로 의학의 지위를 획득한 정신의학 

 본능을 갖고 있다는것은 병리적인것인가?, 자신의 본능을 그대로 작동시키거나 그 메카니즘이 스스로 발전되도록 내버려두는것은 병인가, 아닌가? 그 자체 안에 질병이나 불구 혹은 괴물성 같은 어떤것을 간직하고 있는 본능이 있는가? 그 자체로 비정상적인 본능은 없는가? 우리는 본능을 통제할수 있는가? 본능은 교정할수 있는가? 본능을 치유할 기술은 있는가? 이런식으로 본능이 정신의학의 커다란 주제가 되었습니다. 과거에 광기의 중심 영역이었던 착란과 환각을 이제는 본능이 완전히 뒤덮어 버렸습니다. 본능의 문제는 이제 모든 영역과 관련이 있게 되었고, 정신의학을 의학적 모델 안에 그리고 동시에 생물학적 문제틀 안에 집어 넣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신의학을 진화론적 병리학에 넣거나, 또는 진화론적 이데올로기를 정신의학 속에 주입해 넣는것은 정신착란이라는 옛날의 개념이 아니라 이 본능의 개념에서부터였습니다. 이때부터 정신의학은 두 개의 커다란 기술에 의해 떠받쳐졌는데, 그것은 우생학과 정신분석학입니다. 우생학의 창시자로부터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우생학은 유전과 인종정화의 문제를 맡게 될것이고,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본능을 규격화하고 교정하는 역할을 하게 될것입니다. 정신의학이 본능의 세계를 장악할 힘을 가질수 있었던것은 우생학과 정신분석학 덕분이었다고 푸코는 말합니다. 
 정신병원의 안과 밖을 막론하고, 광기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비정상적인 행위에 대해 정신의학이 재판권을 갖게 된것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였습니다. 이제 정신의학은 더 이상 환각, 정신착란 혹은 실성의 차원이 아니라 일반적인 행동의 차원에서 동요, 무질서, 위협, 위험등 일련의 모든 행동들을 감시합니다. 가정 안의 부모-자식 관계, 형제-자매 관계, 남편-아내 관계도 정신의학이 간섭하는 장소, 정신의학이 조사의 눈길을 번뜩이는 영역이 되었습니다.         

          광기와 권력

 르네상스 시대 까지 광기는 아직 사람들을 매혹하는 신비한 앎이거나, 강물을 유유히 떠도는 Narrenschiff(바보들의 배)의 이미지였습니다. 광기에 권력이 개입하기 시작한것은 17세기부터입니다. 광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감금이 그것이죠.  문제는 푸코가 막연히 권력이라고 지칭하는 그 익명의 권력이 과연 누구를 말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고전주의 시대에 걸인 부랑자와 함께 광인들을 추방한것은 그들의 게으름 때문이며, 게으름이란 부르주아의 노동 윤리에서 벗어나는 악이었다고 말함으로써, 푸코는 이때의 권력이 부르주아 계급임을 은연중에 밝히고 있습니다. 
 피넬, 튜크를 출발점으로 하여 19세기부터 광기를 다루는 학문으로 정립된 정신의학은 프로이트에 이르면 광기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일상 생활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막강한 학문이 됩니다. 소위 앎-권력의 전형입니다.

          샤를르 주이 사건 

 모든 일상적 인간 행동의 정신의학화가 이루어진 계기는 1867년 낭시 지방의 한 조그만 마을에서 일어난 다음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동네의 바보였던 40여세의 샤를르 주이가 한 소녀의 부모에게 고발된 사건입니다. 소녀의 진술에 의하면 주이는 들판에서 이 아이를 이용해 자위행위를 했습니다. 소녀는 따귀를 맞을까 두려워 부모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내복을 빨던 어머니가 사태를 짐작하고 주이를 사법부에 고발했습니다. 그는 지방 의사에게 첫번째 정신감정을 받았고, 좀 더 큰 병원으로 가 몇주 동안 철저한 정신감정을 받았습니다. 그후 예심판사로부터 면소 판결을 받고, 종신 수감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이가 소녀와 벌인 행위는 시골 마을에서 '엉긴 우유'놀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낯익은 관행이었습니다. 이때까지 흔히 있어왔던 하찮은 일에 갑자기 사법과 정신의학이 개입하여 호들갑을 떤 이 사건은 정신의학의 대상과 기능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보여주는것입니다. 모든 일상적 인간 행동이 이제부터 정신의학의 영역으로 편입될것임을 예고하는 신호탄입니다. 
  
          정신의학의 중요 대상으로 떠오른 유년 

 정신의학이 인간의 모든 영역에 간섭할수 있게된 것은 유년을 삶의 지속성 혹은 삶의 부동성으로 만들면서부터였습니다. 19세기부터 정신의학은 범죄인의 유년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어린아이의 행동이 성인의 행동을 고정시키고, 봉쇄하고, 저지할수 있으며, 또 그 안에서 재생될수 있다는 점에서 어린이의 모든 행동은 당당히 정신의학적 조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어른의 행동이 인과관계 혹은 유사관계 속에서 어린이의 행동과 겹쳐지고 연관지어질수 있다는 점에서 성인의 모든 행동도 정신의학화될수 있었습니다. 
  행동과 구조의 소아증을 연구하는 학문이 된 정신의학은 정상, 비정상의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이 되었습니다. 정신의학이 일반적 행동의 통제 심급이며 권위있는 재판관이 될수 있었던것은 태어나서 죽을때까지의 한 개인의 발달 전체를 편력하거나 삶 전체를 정복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도정에서 유년이라는 아주 좁은 구석에 초점을 맞추고, 유년을 더욱 더 깊이 파고 들어감으로써 가능했습니다. 이것이 1860년대에 자리잡기 시작한 근대 정신의학의 비밀이라고 푸코는 말합니다.

          정신의학의 권력화 

 그러니까 19세기 이후 광기에 관여하는 권력의 정체는 정신의학입니다. 정신의학이 과학의 지위를 얻을수 있었던것은 19세기초에 광기를 질병으로 간주하는 작업을 벌이면서였습니다. 광기는 원래 전통적 의미에서의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전통적 의미에서의 의학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정신의학은 광기를 질병으로 간주하고 또 그것을 질병이라는것을 부각시킴으로써 의학이 되었습니다. 그 방법은 몇몇 비정상적 인물들의 사례를 이용하여 징후를 분석하고, 형태를 분류하며, 병인(病因)을 추적해 보는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광기의 병리학화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신을 전문으로 하는 의학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의학이 질병과 맺는 대상적 관계를 광기와 맺음으로써 광인에 대한 권력관계를 수립할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사리 대상 영역의 병리학화를 이룩한 정신의학은 1850-1870년대부터 반대로 대상의 탈-병리학를 시도했습니다. 병리학적 대상만이 아닌 모든 일반적 대상들을 다루어야만 자신의 의학적 권력을 일반으로 확산시킬수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정신의학은 정신착란, 실성, 혹은 병으로서의 광기를 방기하고, 인간의 행동, 행동의 일탈과 이상(異常)에 새롭게 주목했습니다. 이제 기본적으로 정신의학이 관심을 갖는것은 더 이상 질병으로서의 정신병이 아니라 인간의 정상적인 발달이었습니다. 병리적이 아닌것을 관장하는 의학권력, 이것이야말로 정신의학의 중심적 문제였고, 그것이 형성된것은 유년의 중심점에서부터였습니다. 

          유전학의 나타남 

 정신의학을 강화시켜준것이 유전학의 등장입니다. 정신의학이 정신병자만이 아니라, 아니 오히려 정신병자가 아닌 정상적인 개인들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은 개인의 몸을 결정짓는것이 과연 무엇인가? 라는것이었습니다. 기능장애 상태의 주체자이며 희생자인 한 개인의 나타남을 설명하고 정당화해줄수 있는 어떤것이 그의 몸 너머에  있을것이라는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한 개인의 너머에 있으면서 그의 모든것을 결정짓는 어떤것, 그것은 부모의 몸, 조상들의 몸, 가족들의 몸일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전입니다. 
 이탈리아의 한 살인범에 대한 롬브로소의 조사보고서는 이 범죄자의 가계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별로 총명하지는 않았으나 매우 활동적이었다. 숙부 하나는 백치였고, 또 다른 숙부는 성마르고 괴상했으며, 세번째 숙부는 다리를 절었고, 사제였던 네번째 숙부는 반쯤 백치였고, 조급한 성격이었다. 아버지는 엉뚱한 성격에 술주정뱅이였고, 큰 형은 음란하고 간질이며 술주정뱅이였고, 남동생은 건강했으며, 둘째 동생은 격렬하고 술주정뱅이였으며, 셋째 동생은 억세어 다루기 힘들었다." 
 여기서 유전이 한 범죄자의 신체적 심리적 기능 이상(異常)들의 원형이 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유전 이론은 정신분석이 단순히 쾌락을 다루는 기술이나 성충동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건전하거나 불건전한 결혼, 유용하거나 위험한 결혼, 유익하거나 해로운 결혼들을 다루는 기술이 되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정신의학이 유전의 계통수 안에서 질병이 아니라 비정상의 상태를 간직하고 있는 한 인물의 모든 일탈, 지체, 탈선에 관심을 갖게 된 순간부터 그것은 모든 인간의 행동에 끊임없이 간섭할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질병의 위로 올라가는 권한, 병적인것이나 병리적인것을 제외시키는 권한, 그리고 행동의 일탈을 유전적이며 동시에 결정적인 상태와 직접 연결시키는 권한을 스스로 부여함으로써 정신의학은 이제 더 이상 병을 치료하지 않아도 된다는 권한을 갖게 되었습니다. 
 광기가 유전적인 비정상 상태로 규정된 순간부터 치료의 기획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정신의학이 관장하는 영역에서 병리학적 내용이 사라진것과 동시에 치료적 기능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정신의학은 이제 더 이상 병을 치료하려는 생각을,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생각만을 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럼 정신의학은 무엇을 하게 되었을까요? 비정상적인 사람들로부터 한 사회를 보호하는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병과 치료의 궁지에 몰린 정신의학은 비정상을 의학화함으로써 보호의 기능과 질서의 기능을 떠맡았습니다. 

          정신의학과 인종주의 

 사회 전체를 수호하는 역할과 동시에 정신의학은 가정의 섹슈얼리티에 간섭할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했습니다. 이것 역시 유전의 개념에 의해서였습니다. 사회를 과학적으로 보호하고, 인류를 생물학적으로 보호하는 학문으로서, 개인의 이상(異常)을 관리하는 학문이 됨으로써 정신의학은 당대 최고의 권력이 될수 있었습니다. 사법을 대체했고, 사법만이 아니라 보건까지, 보건만이 아니라 사회조작과 통제까지 대신하여 정신의학은 모든 위험에서 사회를 지키는 총체적인 심급이 되었습니다. 
 결국 정신의학은 인종주의와 결합되거나 더 심하게 말하면 인종주의를 야기시켰다는것이 푸코의 생각입니다. 민족학적 인종주의와는 달리 정신의학에서 발생한 인종주의는 비정상에 대적하는 인종주의이고, 상태나 증세 혹은 어떤 결점을 보유한 개인들을 퇴치하기 위한 인종주의였습니다. 푸코는 독일의 정신의학이 나치즘의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기능했다는것을 상기시킵니다. 
 비정상인들로부터 사회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20세기 고유의 네오-인종주의는 정신의학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나치즘은 이 새로운 인종주의를 20세기의 풍토병인 민족적 인종주의와 결합시켰습니다. 그러므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유럽을 휩쓴 새로운 형태의 인종주의는 역사적으로 정신의학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한다는것이 푸코의 생각입니다. 
 푸코의 광기의 문제는 결국 권력화된 정신의학에 대한 비판으로 귀착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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