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과 기쁨의 철학; 스피노자와 니체
긍정과 기쁨의 철학; 스피노자와 니체
1. 표현으로서의 속성들
들뢰즈의 {스피노자: 표현의 문제}는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자기 원인(causa sui), 실체(substance), 속성(attribut)과 양태(mode), 그리고 무엇보다 신에 대한 정의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인간의 예속과 자유라는 실천적?윤리적 문제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표현"이라는 개념의 놀이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가로지르면서 그 원리들을 독해하는 가운데 줄곧 그 중심을 차지할 "표현"의 역할과 중요성이 친절하게도 서문에서 서술된다. 신에 대한 최초의 정의인 {에티카} I부 정의6, "신에 의해, 나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무한한 속성―각각의 속성은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한다―으로 구성된 실체를 이해한다."1)에서, 들뢰즈는 표현 개념이 지닌 중요성을 모색할 수 있게 해주는 최초의 싹을 발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그 정의를 이처럼 이해한다:
i)각각의 속성은 어떤 무한하며, 영원한 본질, 즉 특정한 종류의 속성에 상응하는 하나의 본질을 표현한다; ii)각각의 속성은 실체의 본질, 그것의 존재 혹은 실재(realite)를 표현한다; iii)각각의 속성은 실체적 실존(l'existence)의 무한성과 필연성을, 즉 영원성을 표현한다. 2)
이러한 속성들의 표현적 본성에 대한 이해는 1차적 수준의 표현이고, 나아가 2차적 수준의 표현은 양태들에서도 나타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의 본성을, 달리 말해 신의 본질을 어떤 그리고 한정된 방식으로(즉, 어떤 양태 아래서―들뢰즈) 표현한다"({에티카} I부 정리36의 증명).3) 따라서, 속성들은 자신들을 자신들에 종속된 양태들 내에서 표현하고, 그러한 각각의 양태들은 속성들의 변양(modification)을 표현한다. 이와 같은 표현의 두 차원은 스피노자의 자연에 대한 구분에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신은 자신 안에서 natura naturata를 산출함(produisant)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기 이전에, 신은 자신 속에서 natura naturans를 구성함(constituant)으로써 자신을 표현한다."4) 들뢰즈의 이러한 표현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 사이의 존재론적 차원에 대한 논의는 속성들을 매개항으로하여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일자(l'Un) 혹은 무한자와 다자(le multiple)혹은 개별자라는 두 축 사이에서 존재의 단성성(univocite)을, 또한 내재성(immanence)을 주장할 수 있게되는 단초가 된다: 무한자는 개별자를 통해서만 스스로가 펼쳐지고(unfold) 표현되며,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 속에 함축되어(involved)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이 무한자와 개별자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속성들은 곧바로 표현들이 된다.
표현은 triade로 제시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실체, 속성들, 그리고 본질을 구별해야 한다. 실체는 스스로를 표현하고, 속성들은 표현들이며, 본질은 표현되어진다(강조-인용자). [...] 스스로를 표현하는 실체, 실체를 표현하는 속성, 표현되어지는 본질.5)
이처럼 (그 자체로) 표현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속성들이 지닌 어떤 전복적 가치는, 신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있어서 부정 신학적인 패러다임에 대한 대립을 보여주는 점이기도 하다. "내재성은 탁월성(eminence)에 대립되고, 범신론은 초월성에 대립된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일원론은 부정적이고 유비적인 일체의 이원론에 반대"6)하는 것이 된다.
{에티카}의 I부 정의6을 뒤따르는 들뢰즈의 해석은 신의 정의에서 실체의 단성성, 속성들(표현)을 통한 존재의 긍정에 우리를 인도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존재에 대한 하나의 사변적 원리만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속성들은 긍정들이다. 그러나 긍정은 그 본질에 있어서 언제나 형식적(formel)이고 현실적(actuel)이며 단성적이다: 긍정이 표현적인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순수한 긍정의 철학이다. 긍정은 {에티카} 전체가 매달리고 있는 사변적(speculatif) 원리이다.7)
마이클 하트는 "사변은 세계를 구성하거나 존재를 건설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 존재가 구성되는 근본적인 원리들을 제공해 줄 수 있을 뿐이"8)라고 하면서, 스피노자의 존재의 단수성, 단성성, 내재성을 긍정하는 존재론적 사색으로부터 스피노자적 실천의 생산적?구성적인 본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결정적인 매개로서 또 하나의 존재론적 원리를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스피노자적인 "역량(puissance)"의 원리이다.
2. 스피노자적인 역량의 원리
스피노자의 역량의 원리는 신의 현존에 대한 후험적(a posteriori) 증명들에서 그 싹을 발견 할 수 있다. {에티카} I부 정리11의 증명3을 하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i)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역량을 갖는다는 것이다; ii)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가 현존하지 않는데, 유한한 존재들이 현존한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한한 존재들이 보다 많은 역량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iii)그러므로, 아무것도 현존하지 않거나 아니면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역시 현존한다; iv)우리가 현존하므로,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는 필연적으로 현존한다.9)
이것은 단순한 신의 현존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역량을 곧 존재가 실존하는데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중요한 구절이다. 들뢰즈는, 역량은 사실 본질과 동일하다고 하면서, 모든 "역량은 언제나 작용[활동](acte)이거나 적어도 현동적(en acte)"10)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역량 개념은 존재가 지닌 생산적 본성과 관련하여 본질적으로 하나의 능동작용(action)의 원리를 제시함과 동시에, 같은 정도로 변용(affection)의 원리도 제시한다: potentia와 potestas. 들뢰즈가 보기에, "스피노자주의에서 모든 역량은 그에 상응하고 그와 분리 불가능한 변용되는 능력(pouvoir d'etre affecte)을 지니고 있다".11) 그러므로, 역량은 언제나 동등하며 분리할 수 없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작용하는 역량(puissance d'agir)과 겪는 역량(puissance de patir) 혹은 생산과 감성(sensibilite). 이것은 앞으로 니체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을 역량에 대한 하나의 관점이다.
스피노자에게서 다시 역량에 관한 테마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양태들의 수준에서, 신체와 정신 사이의 서로 규정하지 않는 관계를 증명할 때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III부 정리 2의 주석에서,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지금까지 아직 아무도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도 모든 신체의 기능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신체 구조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기존의 신체가 정신에 의해 규정된다고 보는 확신이 있었다고 한다. 들뢰즈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신체의 구조는 어떠한가?"라는 두 질문이 동등한 것이라고 본다; 신체의 구조, 그것은 신체의 관계의 구성(composition)이다. 신체가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신체의 변용되는 능력의 본성과 한계이다.12) 스피노자는 신체가 정신에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신체의) 변용은 능동적(active)일 수도 있고 수동적(passive)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그 변용의 원인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에 따라, 혹은 그 변용의 관념이 어떠하냐에 따라 나뉘어진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affect(affectus)"라고 부른다: "나는 affect를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러한 변용의 어떤 적합한(adequate) 원인이 될 수 있다면, 그 경우 나는 affect를 능동작용으로 이해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는 수동작용으로 이해한다."13) 이 능동적 변용과 수동적 변용은 우리의 변용되는 역량을 가득 채우며, 서로 반비례하여 전체의 동일한 역량을 구성한다. 이는 곧장 우리에게 하나의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어떻게 능동적 변용들을 선호할 수 있는가, 그래서 결국 어떻게 변용되는 역량이 수동작용들이 아닌 능동작용들로써 대부분 채워질 수 있는가?
역량의 문제, 신체의 문제가 곧 실천의 문제, 윤리의 문제와 직결된다. 어떻게 나의 신체가 능동작용으로 가득 차도록 운용할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대한 대답을 구하는 과정으로 들뢰즈의 니체를 참조할 것이다. 비록 스피노자의 출발점과 니체의 출발점이 전혀 다를 수는 있지만, 니체가 오른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구름 위로 솟아 있는 이웃의 봉우리에서 스피노자를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혹은 역으로도), 두 철학자의 깊은 유사성은 거장들의 유사성으로서 궁극적으로 철학의 근본적인 지점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도도한 물줄기를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14)
우선 스피노자적 윤리학의 실천적인 질문들을 니체의 힘 혹은 역량, 그리고 권력의지(volonte de puissance)와 권력감정(sentiment de puissance)의 이론에 적용시키며, 니체에게서 작동하는 힘과 역량의 테제들을 독자적으로 밀고 나가서, 종국에 이르러서는 다시 스피노자에게로 돌아오는 우회로를 가보자.
3. 니체의 힘과 역량의 이론; 권력의지, 권력감정
우리는 이제 "니체에게서 신체(물체)를 구성하는 힘들(forces)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그것들은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표현의 문제}를 쓰기 6년 전, {니체와 철학}에서 이미 니체의 "능동적인 것/반동적인 것(actif/reactif)"15)것의 구별을 통해 스피노자적인 신체의 힘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하나의 신체 속에서 우월하거나 지배하는 힘들은 소위 능동적이고, 열등하거나 지배받는 힘들은 소위 반동적이다. 분명히 힘과 힘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원초적인 질(qualite)들은 능동적이거나 반동적이다.16)
들뢰즈는 니체의 사유에서, "정신의 발전에 있어 신체만이 문제이며, 의식이 겸손하게 되는" 어떤 징후를 발견한다. 니체는 의식을, 항상 우월한 것(존재 혹은 신체)과 관련한 열등한 것의 의식으로 바라보며, 거기에서 의식의 노예성을 지적한다. 니체에게서, 의식은 본질적으로 반동적[반응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체가 무엇일 수 있는지,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스피노자와의 유사성!). 그렇다면, 신체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힘의 장(場, champ), 다수의 힘들이 투쟁하는, 영양을 제공하는 환경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정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실상, 그것은 '환경'도, 힘이나 전투의 장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니체를 따라, 신체를 "지배하는 힘들과 지배받는 힘들간의 관계"로 정의하고, 나아가 "힘의 모든 관계가 하나의 (화학적, 생물학적, 사회적, 정치적) 신체를 구성한다"고 주장한다.17)
이러한 신체에 대한 우위 주장, 힘들의 관계에 의한 신체의 정의에서,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들뢰즈는 말하기를:
참된 문제는 그것들 없이는 반작용들(reactions) 자체가 힘이 될 수 없는 능동적 힘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무의식적인 힘들의 능동활동(activite)은 신체를 모든 반작용들보다 우월한 어떤 것 그리고 특히 의식이라고 불리는 자아의 반작용보다 우월한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18)
그러나, 니체가 "승리의 개념"이라고 부른 "힘"은 어떤 보완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권력의지"라고 하는 하나의 내적인 의욕(vouloir)이다. 들뢰즈는 권력의지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권력의지는] i)힘과 힘의 관계를 규정하고 힘의 성질을 생산하는 미분적 요소, 계보학적 요소이다. ii)권력의지는 힘 자체 속에서 표명된다. iii)힘들의 관계는 어떤 힘이 열등하거나 우월한 다른 힘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변용되는](affecte) 한에서 규정된다. vi)권력의지는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변용되는 능력]으로 표명된다."19) (여기서 다시 한 번 니체와 스피노자의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물체가 그만큼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는 보다 더 많은 방식으로 영향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의 권력의지가 형성되어지고 완성되기 위해서는 어떤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어진다. 이 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란 바로 감수성(affectivite), 감성(sensibilite), 감각(sensation)이며, "권력감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권력의지는 "힘의 감성으로 표명된다"20)고 한다.
그러면, 니체에게서 힘의 작용과 반작용은 권력의지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작용과 반작용은 오로지 물리적 원리로서 힘들의 구분을 나타내지만, 그것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목적 달성을 위한 권력의지로서의 긍정과 부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긍정과 부정은 작용과 반작용을 넘쳐나게 된다. "긍정은 작용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되는 역량, 능동적 생성(devenir actif)의 화신이며, 부정은 단순한 반작용이 아니라 반동적 생성(devenir reactif)이다."21)
우리가 힘들의 생성과 힘들의 성질을 탐구하는 이 같은 역동론(dynamique)을 구체적인 차원으로 고찰하면, 우리는 결코 반갑지 않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니체가 그토록 혐오했던 반동적 힘들의 승리, 삶에 대한 적대감, 니힐리즘. 반동적 힘들은 능동적 힘들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키며, 능동적 힘들을 반동적으로 만든다. 즉 힘들의 생성을 반동적 생성으로 만든다.
우리는 반동적 생성 이외의 다른 생성은 느끼지도, 경험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반동적 힘들의 존재 이외는 아무 것도 확인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처에서 우리는 그것들의 승리를 확인한다.22)
원한(ressentiment), 양심의 가책, 니힐리즘과 같은 반동적 힘들은 순수 생성(pur devenir)으로서의 영원회귀(l'eternel retour) 속에서 반동적 힘들을 재생산하고 생성들 자체를 반동적으로 영구히 회귀하도록 한다. 변증법의 사유가 가진 부정과 모순의 논리, 차이를 환원시키는 동일성의 논리가 또한 그와 같은 반동적 힘들의 논리이다. 힘들의 반동적 생성, 니힐리즘의 생성은 힘들 사이의 관계에서 아주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되는데, 들뢰즈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반동적이지 않은지, 그리고 반동적 생성이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한다. 만약 인간의 조건이 반동적 생성 자체라면, 그것은 "너무도 심각하게 영원회귀를 위태롭게 만들고 그것을 감염시켜서 그것 자체가 불안, 불쾌, 혐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23) 그러므로, 허무주의적 생성을 스스로 긍정할 수 있는 순수 생성으로서의 영원회귀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가 중요해진다: "하나의 다른 생성, 다른 감성은 바로 초인(le surhomme)이다."24)
4. 다시 스피노자에게로; devenir joie, devenir actif
니체가 삶을 긍정하고, 능동적으로 되라고 하는 것은 스피노자에게서 역시 거의 동일한 요구처럼 나타난다: 즐겁게 되기(devenir joie). "우리는 어떻게 긍정적으로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즐겁게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동등한 윤리학적 질문이다: 허무주의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니체) 인간은 예속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를 획득할 것인가?(스피노자)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세계에 대한 윤리적 통찰을 통해 윤리학은 언제나 능력과 역량의 문제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으며, 여기에서 감정들과 행위, 의도는 초월적 가치에 관계함으로써가 아니라, 실존하는 (내재적) 양태들에 관계함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매 경우에, "이러한 느낌은 우리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는가, 그렇지 못하는가? 그것은 우리를 그러한 역량의 완전한 소유가 가능하도록 돕는 것인가?"25)라고 묻게 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철학의 실천적 의미를 모든 신비화, 모든 미신들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미신의 폭정, 종교라는 베일로 감싼―자신들을 예속하는 그것을 위해 싸우도록 하는―공포에 대항하는 비판적 관점을 강조한다.
슬픈 수동들(passions tristes)에 대한 평가절하와 슬픈 수동들을 키우고 거기에 의존하는 사람들에 대한 거부는 철학의 실천적 목적을 형성한다. [...] 슬픔을 포함하는 모든 것은 폭정을 표현한다.26)
스피노자는 억압적 권력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슬픈 수동을 타인들에게 불어넣음으로써 그들을 지배하게 되는 원리에 대해 따지고 있는 것이다. {에티카}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쁨(joie)과 기쁜 수동들(passions joyeuses)을 환기시키고 인간의 예속에서 자유로 나아갈 것을 독려한다. 모든 슬픈 수동들은 어떤 경우에라도(사회적으로 유용할지라도) 나쁘다. 오로지 우리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유일한 수동적 변용인 기쁨만이 능동적일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순수한 긍정의 철학, {에티카}는 그러한 긍정에 상응하는 진정한 기쁨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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