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본)부산의 마이너리티 힘
이 책은 부산에서 한때는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지만 지금은 마이너리티 지역으로 물러나 있
는 부산진, 구포, 만덕 지역의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전한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살아온 저자는
특히 부산진과 구포는 부산을 키워 낸 부산의 또 다른 중요한 터전이라면서, 지금은 다소 소외 지역
(마이너리티)으로 전락하였지만 이 지역의 삶이 있었기에 부산이 커 나올 수 있었다고 역설한다.
부산의 마이너리티 힘
▣ Short Summary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 속에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가까이 있기에 더 소중하고 더
깊은 감동을 주는 것들이지만, 대부분은 무관심과 무지 속에 내팽개쳐진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금 더
눈을 크게 뜨고 의도적으로 살펴보면, 의외로 흥미로운 것도 많고 값진 가치를 지닌 것도 많다. 따라
서 우리는 그런 지역의 이야깃거리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잘 보존해 후손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이 책은 부산에서 한때는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지만 지금은 마이너리티 지역으로 물러나 있
는 부산진, 구포, 만덕 지역의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전한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살아온 저자는
특히 부산진과 구포는 부산을 키워 낸 부산의 또 다른 중요한 터전이라면서, 지금은 다소 소외 지역
(마이너리티)으로 전락하였지만 이 지역의 삶이 있었기에 부산이 커 나올 수 있었다고 역설한다.
아울러 부산에서 35년 이상 중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쳐 온 저자는 이 책에서 부산 사람들의 삶과 역사
와 흔적을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마음도 함께 전하고자 한다. 첫째, 교과서를 통해 익히는
지식이 ‘삶의 현장’과 연결되어야 하며, 이는 교과 교육의 당연한 원리이다. 둘째, 멀리 해외를 통해 넓
은 세상의 지식을 얻는 만큼이나 가까이 우리 지역의 좁은 세상 이야기를 자세히 배워야 한다. 전자가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고 견문을 넓혀 가는 일이라면, 후자는 자신의 내면을 알아 가는 자기 정체성,
자기 자존감과 관련된 일이다. 셋째, 사회 지식을 내면화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관련 사회 현장을
답사하는 활동인데, 이는 복잡한 사회 현상을 더 정확하고 바르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 차례
시작하며
부산진은 어디일까?
부산진구에 부산진이 없다! / ‘부산진’은 어디입니까?
고지도 속의 부산진 / 옛 사진 두 장으로 보는 부산진
부산진이 나누어지다 / 부산진 과선교에서
자성대에 뒤엉킨 부산진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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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마이너리티 힘
부산진의 상징, 영가대 / 자성대와 부산진성
여전히 남아 있는 왜성 / 진남대(鎭南臺)와 천장군기념비
신령스러운 곳, 최영장군비각 / 독립운동가 박재혁을 아시나요?
부산진 사람들의 의로운 삶과 죽음
임진왜란 부산진성 전투가 있었던 곳은 지금의 어디일까? / 의로운 죽음, 정공단
인류애를 유감없이 보여 준 매견시 / 매견시의 두 딸, 매혜란과 매혜영
독립운동가 정오연의 생가에서 / 또 다른 의로운 죽음, 순교자 데이비스
부산진일신여학교 / 담장 갤러리에서 만나는 독립운동가들
안용복도 부산진 사람 / 의로운 삶의 표본 최천택 선생
증산공원에 올라 부산항을 바라보다
민족 운동의 진원지, 구포
구포라는 이름 / 구포역에서 격세지감을 느끼다
구포만세거리를 거닐다 / 구포만세거리에서 3.1 운동 속에 빠져들다
3.1 운동 기념비가 있어야 할 곳 / 구포의 상징, 구포시장
금빛노을브릿지를 거닐다 / 의성산의 구포왜성
북구빙상센터 2층 전망대에 서서
숨은 감동이 있는 곳, 만덕
만덕사지 3층 석탑 / 만덕사지를 거닐다
만덕사지에 대한 작은 고찰 / 부산만덕사지의 가치
병풍암 석불사를 향하여 / 석조 건물 대웅전, 칠성각
병풍사의 석불 세계 / 지하 통로를 개방할 수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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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마이너리티 힘
부산의 마이너리티 힘
부산진은 어디일까?
증산의 옛 이름 부산(釜山), 그 가까이 있는 포구가 부산포였다. 이 부산포 언저리에 조선 시대 군부대
가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부산진(釜山鎭)이었다. 지금의 부산이란 말은 부산진이 있던 곳에서 출발한 셈
이다. 그러면 부산진(釜山鎭)은 어디에 있었을까? 부산진역, 부산진시장, 부산진초등학교, 부산진구청
등 여러 지명이 부산진을 나타내고 있지만, 이 지명들의 위치는 제각각 떨어져 있다. 왜 그럴까?
부산진구(釜山鎭區)에 부산진(釜山鎭)이 없다!
‘부산진구에 부산진이 없다!’는 말의 뜻을 아는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라는 행정 구역 안에는 ‘부산진
(釜山鎭)’이 없다는 뜻이다. 부산진이라는 말은 조선 시대에 있었던 해안 군사 진영을 의미하는데, 그
진영이 있었던 위치가 지금의 부산진구 지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부산진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
가?
부산진은 지금의 동구 좌천동과 범일동에 해당하는 해안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시의
발달과 함께 해안 매립이 이뤄지면서 해안선이 많이 달라진 지금은 그 정확한 위치마저도 쉽게 판단할
수 없게 되었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부산진은 해안선을 조금도 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면
어째서 부산진이 있던 곳이 동구가 되고 부산진구라는 지명은 다른 지역에 사용되었을까?
이는 지명을 사용할 때 행정 편의적으로 방위를 우선하여 사용했기 때문이다. 부산이라는 도시가 커져
나오면서 구(區) 제도를 처음 시행할 때, 중구, 서구, 영도구, 동구, 부산진구, 동래구라는 6개의 구가
만들어진다. 이때 동구의 범위는 지금의 초량 지역과 함께 부산진 지역을 포함하게 된다. 그런데 초량
과 부산진을 아우르는 지역에 어울리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통상적으로 해오던 방위 지명, 즉 동구를 사용해 버린 것이다. 부산진이라는 지명과 지역성이 엄연히
있었지만 아쉽게도 살리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부산진구라는 이름은 다른 가까운 지역에서 사용하게
된다. ‘부산진(釜山鎭)이 없는 곳에 부산진구’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이다.
고지도 속의 부산진
부산진을 표현한 고지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부산진순절도’인데, 이것은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 전투
를 그린 지도다. ‘부산진순절도’에 표현된 부산진(釜山鎭)은 왜적을 맞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모습
이다. 성 위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정발 장군을 비롯한 부산진 주민들이 적에 맞서고 있다. 또 일본군
들이 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고 성 앞바다에는 엄청난 수의 일본군 배가 가득 채워져 있다.
이때의 성이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부산진성이다. 성을 자세히 보면 성벽 높이가 상당하고 성벽 위에
성가퀴가 잘 만들어져 있다. 남문, 서문, 북문 세 개의 문이 또렷이 보이고, 성안에는 여러 채의 관아
건물도 있다. 성의 뒤쪽으로 산이 있고 이 산의 경사면을 따라 성이 만들어져 있다. 성과 성문 가까이
바다가 접하고 있다. 이러한 산의 형태와 성의 배치 그리고 해안가의 모습으로 보아 이 산이 바로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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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마이너리티 힘
산(釜山), 그러니까 지금의 지하철 1호선 좌천역 가까이 있는 증산일 것으로 쉽게 추측이 간다.
그런데 그림의 아래쪽에 또 하나의 성이 보인다. 이것은 무엇일까? 한쪽에서는 급박하게 전투가 이뤄
지고 있는데 여기는 텅 빈 모습이다. 이것도 부산진성일까? 그러면 부산진성이 2개였단 말인가? 자료
상으로는 조선 전기에 부산진성이 2개였다는 기록은 없는데, 그러면 뭘까? 위치상으로는 지금의 자성
대 부근일 것 같은데,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가 안 된다.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부산진성에 대해 더
정리해 보자. 조선 전기의 부산진성은 임진왜란 때 갈가리 찢겨 해체되어 버린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
도 컸겠지만 일본군이 점령한 후 그들을 위한 성을 쌓으면서 의도적으로 성돌을 모두 빼 갔기 때문이
다. 이때 쌓은 성이 바로 뒷산 증산 꼭대기를 중심으로 쌓은 증산왜성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 후기에 부산진(釜山鎭)이 다시 세워진다. 하지만 부산진성은 완전히 해체되
어 버렸기 때문에 원래 있던 그곳에서 진(鎭)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대신 지금의 자성대 부근
에 부산진이 들어선다. 자성대와 부근 평지를 포함하는 지역에 일본군이 남기고 간 또 다른 성, 자성
대왜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왜성의 경우 산을 끼고 옹벽을 쌓듯 만들어지기 때문에 성내 여유 공간이 부족하다. 우리
식 성과 같이 성내 관아 시설을 두거나 주민이 거주하진 않는다. 따라서 왜성을 우리식 성으로 활용하
기는 어려운 점이 많다. 하지만 자성대왜성은 자성대 언덕을 둘러싼 내성과 함께 자성대 외곽의 평지
를 포함하는 외성이 있어 외성을 중심으로 우리식 진영의 역할을 수행하기 알맞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일부 보수하여 정식 부산진성으로 삼은 것이다.
자성대 부근의 부산진성, 그렇다면 ‘부산진순절도’ 아래쪽에 있는 또 다른 성의 정체는 조선 후기 부산
진성이 아닐까? 임진왜란 때 있었던 성이 아니라 그림을 그릴 당시에 있었던 부산진성 말이다. 그러니
까 전쟁 중 부산진성과 그림 그릴 당시의 부산진성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고지도에서
는 시대별 상황이 다른 내용을 같이 표현하거나 그리는 목적에 따라 여러 시대의 내용을 한꺼번에 반
영한 경우도 허다하다. ‘임진전란도’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시대를 달리하는 두 개의 부산진성
을 똑같이 그려 놓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임진왜란 당시 상황과 조선 후기 부산진성의 모습
이 같이 표현된 ‘부산진순절도’가 좀 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자성대에 뒤엉킨 부산진 흔적
자성대는 부산 사람 모두에게 익숙한 지명이다. 주요 교통로가 통과하는 곳이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지나는 곳이다. 하지만 자성대 위를 올라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부산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자성대에는 복원된 부산진성과 성문을 비롯하여 왜성, 진남대, 최영장군비각, 조선통신사기념관,
영가대 등 주요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자그마한 언덕 자성대에 왜 이렇게 유적이 많은 것일까?
한 번 올라가 자성대에 얽힌 부산진 이야기를 알아가 보자.
부산진의 상징, 영가대(永嘉臺)
영가대. 부산진을 이해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구조물이다. 조선 후기, 부산진성 옆에 있던 누대가 있는
아름다운 언덕으로 부산진성과 함께 잘 어울렸던 한 쌍의 구조물이었다. 어쩌면 부산진의 상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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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마이너리티 힘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영가대 모습은 조선 후기의 그림인 ‘사로승구도’의 ‘부산’에서 잘 볼 수 있다. 그
림을 보면 뒤쪽으로 제일 크게 보이는 산이 자성대이고, 자성대 앞으로 부산진성과 성안의 관아들이
보인다. 그리고 부산진성 앞에 언덕이 있고 언덕 위에 누대가 얹혀 있는데 이것이 영가대다.
영가대는 부산진에 선창을 새로 만들면서 파낸 흙이 언덕을 이루자 그 위에 누대를 세우면서 완성되었
다. 부산진성의 성벽 일부가 이곳과 이어져 있어 부산진성에 딸린 누대와 언덕의 모습은 바다 등 주위
환경과 어우러져 너무나 절묘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래서 당시 고지도나 고문서는 부산진성이 있
는 곳에 항상 영가대를 같이 표현하였으며, 많은 문인들도 이곳의 아름다움을 시로 읊을 정도로 귀하
게 다루었다.
조선 후기 조선 통신사들은 이곳 영가대를 일본을 오고 갈 때 출발하고 귀환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삼
았다. 이들 통신사 무리의 안녕을 위해 관에서 드리는 해신제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누대 옆에는 임진
왜란 부산진성 전투의 영웅 ‘정발장군전망비’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영가대가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부산진 마을로부터 잘려 나간다. 이어 전차가 놓이면서 누대와
함께 영가대의 대부분이 사라져 부산이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완전히 희생당해 버린 것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영가대 터는 남아 있다. 누대도 없어지고 언덕도 사라졌는데 그 터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어찌 된 일일까? 자성대의 부산진 지역은 이 사실을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과선교에서 동쪽을 향해 계단을 내려오는 것은 부산진성 서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내려온 길에
있는 남문시장에서 얼마 가지 않아 첫 교차로를 만나 그곳에서 남쪽으로 난 길로 접어든다. 좁다란 이
길은 한때 우암선 철도가 있던 길인데, 지금은 남문시장의 시장 길 한 부분이다. 이 길을 따라 50m 정
도 걸어가는데 ‘영가대 본터’라는 큰 안내판이 머리 위로 보인다. 안내판의 화살표 방향을 따라 돌아서
들어가니 철도 담장에 ‘영가대 본터’라는 이름이 쓰여 있고 잘 가꿔진 작은 공간이 나온다.
이곳 영가대 본터에 부산진 전체를 보여 주는 모형도를 만들면 어떨까? 영가대 본터의 부산진 모형도.
상상해 보니 참 잘 어울리는 구성이겠다. 분명 영가대가 어우러진 모습을 표현한다는 점도 의미가 있
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산진의 상징이었던 곳에 부산진의 원래 모습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
미 있겠다.
지금은 철도와 도로에 의해 쪼개지고 갈라진 부산진, 어디가 정확한 부산진인지 애매해져 버린 부산진,
게다가 해안 매립으로 해안 지형마저 변해 버린 부산진, 이런 현재의 모습과 비교되는 원래 부산진을
보여 주는 모형도라면 부산진을 이해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잃어버린 ‘부산진 지
역’이라는 지역성의 원형을 이야기해 주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겠다. 그러면 ‘부산진이 어디지?’ 하는
말에 답을 해 줄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자성대와 부산진성
영가대 본터를 빠져나와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과선교에서 내려온 길을 만나 동쪽으로 꺾어 걷
는다. 남문시장 길이다. 이 길은 옛날로 치면 부산진성 서문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성안의 관아 거리
와 같은 중심부다. 지금도 그 길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의 이름도 여전히 남문시장이다. 이 길
을 따라 남문시장이 끝나는 지점에 다다르면 큰길(범일로)을 만난다. 여기서 끊어진 듯 보이지만, 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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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마이너리티 힘
을 가로질러 보면 건너편 길이 보이고, 눈짐작으로도 길이 곧장 연결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
산진의 중심 거리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남문시장을 지나 건널목을 건너 건너편 길 사이로 들어
서니 도심 속에 커다란 숲이 보인다. 자성대다.
자성대. 이곳은 서면과 동래 지역 사람들과 수영과 남구 지역 사람들이 도심이었던 남포동이나 광복동
으로 가기 위한 길목이다. 자성대를 중심으로, 범일로, 자성로, 진시장길 등 굵직한 길이 통과하고 있
고 버스나 자동차가 그 옆을 수없이 지나다니고 있다. 그만큼 부산의 교통 요지이다. 따라서 나이 지
긋한 세대들은 버스를 타고 부산 도심을 오가면서 예외 없이 자성대 옆을 통과해 보았으니 자성대를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지하철이 생겨나고부터 자성대는 범일역에서 좌천역 사이의 통과 구간이 되었고 더구나 지하로
지나다니다 보니 통과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곳으로 되어 있다. 그래도 워낙 많이 불리는 지명이었으므
로 한 번쯤 들어 본 장소이다. 그래서 부산에서 제법 살아왔다면 자성대를 모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곳 자성대를 직접 올라 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조선의 진영으로서 대표적인 곳, 조선의 역사와 흥망을 오롯이 안고 있었던 부산진의 대표적인 곳 자
성대. 그 속으로 들어간다. 지금은 도심 속의 작은 공원이 되어 있다. 가볍게 산책한다는 마음을 안고
자성대로 들어서는 순간, 우뚝한 성과 성문이 맞이한다. 성문의 정면 위에는 금루관(金壘關)이라는 이
름의 현판이 달려 있다. 이는 부산진성의 서문임을 의미한다.
‘그래, 이곳에 부산진성을 복원해 두었구나!’ 그렇다면 이것도 실제 부산진성의 위치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위치와 상관없이 상징적으로 복원해 놓은 것이다. 원래 부산진성터는 이미 도시화 되어 시가지
속에 포함되어 버렸고 위치와 흔적을 되찾기 어렵다. 안내판을 보니 1975년에 복원했다고 한다.
지난날 부산진을 떠올리며 한참을 쳐다보고 서 있다. 부산진의 가장 중요한 시설물 부산진성이다. 이
것을 보면 부산진(釜山鎭)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왠지 답답함만 느껴진다. 옛 부산진의 모습
을 연상할 수가 없다. 당시의 생활 모습을 유추하거나 대입시켜 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복원된 성
과 성문 뒤로 자성대라는 작은 산이 가로막고 있고, 산에 둘러 막혀 있는 성과 성문의 모습은 지난날
우리의 성과 성문이 가지고 있었던 모습이 아니다.
마을이 있고, 행정 치소가 있고, 성을 오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상상을 전혀 할 수가 없다. 그나마
이 정도로서 지난날의 부산진이라도 기억하자는 뜻이라면 충분한 의미가 있겠지만 아쉽기만 하다. 원
래의 성터를 유지하지 못한 지난날 우리 역사의 아픔이 그대로 배여 있는 듯하다. 부산진이 바로 그런
곳임을 또 한 번 또렷이 확인한다.
부산진 사람들의 의로운 삶과 죽음
정공단-정공단은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충장공(忠壯公) 정발과 그를 따라 함
께 순절한 군민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제단임-이 있는 부산진 지역은 정공단을 중심으로 반
경 100m 이내에 굵직한 의미를 가진 유적들이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다. 정공단, 일신기독병원,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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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마이너리티 힘
진교회, 일신여학교 등이다. 의미 있는 유적이 이렇게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곳은 부산뿐 아니라 어디
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모두 부산진 사람들이 뒤엉켜 살아왔던 흔적들이다. 이곳에서 특별히 의롭게
살아온 부산진 사람들을 만난다. 거리거리를 누비며 그들의 숨결을 느껴 보자.
임진왜란 부산진성 전투가 있었던 곳은 지금의 어디일까?
정공단 지역 부산진을 둘러보자. 지하철 1호선 좌천역의 7번 출구를 나선다. 넓게 뚫린 도로와 인도가
있고 일신기독병원이라는 간판과 함께 병원 주차장이 철망을 사이에 두고 맞이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구점이 많이 늘어서 있고 좌천 가구 거리라는 간판도 보인다. 이곳이 정공단에서 가장 가까운 중앙
대로가 맞닿은 부분이다. 이 부근이 부산진성 전투가 있었던 부산진성 남문 자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부산진성은 이곳에서 뒷산 증산 쪽으로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성의 모습은커녕 부산진 전투와 관련한 아무런 흔적도 없다. 도로와 건물로만 뒤덮여
있다.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이후 42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내버려져 있었고 끝내 없어져 버렸다. 그러
니 이곳에 서서 부산진성 전투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상상하는 일이 오히려 우습게 여겨
진다.
이곳이 그 중요한 부산진성 전투의 남문터 부근인 것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부산진성 전투가 일어난
남문 앞’이라는 사실을 밝혀 두어야 하지 않을까? 정발 장군과 부산진 주민들이 목숨을 내어놓고 싸우
던 자리라면, ‘임진왜란 부산진성 전투가 있었던 곳’이라는 안내판이라도 만들어 놓아야 하지 않을까?
이곳을 오가는 부산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전투, 임진왜란 하면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는 전투, 그 전
투가 바로 이곳에서 있었다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참으로 아쉽다.
인류애를 유감없이 보여 준 매견시
정공단을 내려와 쌓아 놓은 축대를 보며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데 정공단 옆 골목에 새까만 비석이 하
나 보인다. 정공단과 일신기독병원 사이 골목이라고 해야겠는데, 건물 사이에 있는지라 건물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모습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뒤로 돌아 들어가도록 만들어 놓았
다. 그 옆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비석의 글과 안내판을 하나하나 읽으며 그 내용을 훑어본다.
비석에는 한자로 ‘매견시 기념비(梅見施 紀念碑)’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부산 나병 관리자’라는 작은
글도 딸려 있다. 그러니까 이 비석은 매견시(Mackenzie)라는 이름을 가진 분을 기리는 비석이다. 이분
이 부산의 나병 환자를 관리해 주었다는 뜻이다. 비석 옆면에 적힌 연도를 보니 일제 강점기이다. 좀
독특하다 싶어 안내판을 여러 번 차근차근 읽어 본다. 그 시절 나병이라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병이었
는데, 매견시라는 분이 어떻게 부산, 경남 지역의 나병 환자들을 관리했었던가를 기록해 두었다. 글 속
에서 목사, 선교사, 의사 그리고 한센병, 상애원, 상애교회 등의 단어를 읽을 수 있다.
매견시는 의사였다. 그는 당시 우리 사회에 심각했던 문둥병 문제에 주목하여 치료 약을 직접 개발하
였음은 물론 이들을 치료하고, 관리하는 일에 주력했다. 감만동에 문둥병자들을 위한 병원이자 사회
보호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상애원을 세우고 그 운영을 책임졌다. 문둥병은 치료가 중요하기도 했지
만 치료와 함께 그 후 살아갈 방도를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랬기에 매견시는 문둥병 환자들을
위한 사회 시설을 마련한 것이다. 일본이라는 지배자로부터 차별받던 시절, 같은 민족에게도 차별받는
지극히 약한 자였던 그 문둥이를 인류애의 마음으로 거두어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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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마이너리티 힘
매견시의 두 딸, 매혜란과 매혜영
매견시는 종종 “내게 아들이 없어서 내 후임을 물려주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내게 있는 딸을
공부시켜 한국에 꼭 보내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두 딸 매혜
란과 매혜영은 산부인과 의사와 간호 조산사가 되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그때가 1952년, 한국 전쟁으로 인해 피폐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두 딸은 아버지의 터전이었던 부산진에 한국 여성을 위해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하고 산부인과 진료와
함께 조산 간호원 및 여의사에 대한 전문 교육을 했다.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다. 대를 이어 한국에 온
몸과 영혼을 불살랐다. 더구나 그들은 평생 독신이었다. 그러니 희생과 헌신이란 말을 이들 말고 어디
에 붙이겠는가!
민족 운동의 진원지, 구포(龜浦)
거북이 형상을 한 산이 낙동강을 향해 내려오는 모습에서 구포(龜浦)라는 이름이 지어졌는데, 수많은
물자가 오가던 큰 포구였다. 위치상 부산과 이웃 김해, 양산을 잇는 교통의 결절지이기도 했다. 그랬기
에 일찍부터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고, 구포 3.1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많은 민족의 지
도자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감당해 온 곳이었다. 구포시
장이 그랬고, 구포역이 그러했다. 구포,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구포라는 이름
부산광역시 북구청에서 구(區) 명칭 변경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렇듯이
‘북’이라는 이름은 왠지 거북스럽게 느껴진다. 소외되고 후미진 지역으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다. 북구
가 그런 지역으로 보이는 것이 싫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름이 좋을까? 부산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은 북구하면 단연 구포라는 지명을 먼저 떠올린다. 과거 오랫동안 구포면이라는 이름을 썼던 적도
있었고, 역사적으로 구포가 가지는 위치나 역할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구포라는 포구는 낙동강 하구에서 가장 큰 포구로 어산물이 풍부한 곳이었고, 감동창(甘同倉)이 있어
세곡이 집결되는 곳이기도 했다. 경부선 구포역이 개통되고, 구포다리가 생겨나면서 부산과 김해, 양
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며 매우 번창했던 곳이었다. 그래서 구포는 오랫동안 북구 전
체를 포괄하는 지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구포구라고 이름하면 어떨까?
지금 젊은 사람들의 입장은 다른 것 같다. 북구하면 구포가 떠오른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 구포
의 포구 역할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고, 옛 구포다리도 없어졌다. 대신 구포대교가 놓였지만 부산의 강
서, 김해, 양산을 연결하는 길은 구포대교 외에도 여러 곳으로 통할 수 있게 되어 교통의 요충지 기능
도 사라진 지 오래다. 구포역이 있지만 지하철이 생겨나고선 오히려 덕천역이 더 활기찬 곳이 되었으
며, 구포동보다는 화명동, 만덕동이 새로운 신시가지로 번창한 지역이 되었다. 구의 이름이란 것이 구
전체를 대표하는 지명이어야 할 것 같은데 구포를 대표 지명으로 내세우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때 북구 지역의 대표 주자였던 구포, 이제는 구포동이라는 한정된 지명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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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마이너리티 힘
같다. 구포에 애정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은 이를 안타깝게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세태는 그렇게 변
했다. 그런 구포를 돌아보고자 한다. 어려웠던 시절 삶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구포, 지금은 마이너리
티로 전락한 구포의 모습을 보기 위해 먼저 구포역으로 향한다.
구포만세거리를 거닐다
썰렁해진 구포역 앞 광장을 서성인다. 사람들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구포역을 이용하는 몇몇 사람들은
자못 분주하게 오간다. 광장 옆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위한 어묵, 떡볶이, 라면 같은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음식을 파는 작은 상점들이 자리하고 있다. 역 앞 특유의 모습이라고 할까? 여행객을 위한 간단
한 요깃거리가 잘 진열된 모습이다. 역 광장은 휑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아기자기하게 만들어진 것들이
여럿 있다. 그중에 가로등 기둥마다 쓰인 글귀 하나가 눈에 와 닿는다. ‘구포만세길’
그래! 이곳에 만세거리가 있다. 구포 3.1 운동을 기념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거리를 따라가 봐야
겠다. 구포만세거리는 구포역 앞에서 남북으로 난 길이다. 남쪽과 북쪽 모두 가 보고 싶지만 구포시장
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야겠다 싶어 북쪽 길로 들어선다. 2차선 정도의 길은 한적하기만 하다. 길 따라
놓인 건물은 대부분 1~2층의 낮은 층으로 되어 있고 상점들이 연이어 붙어 있다. 길에 들어선 첫 느
낌, 다소 예스런 분위기라고 할까? 3.1 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당시의 분위기까지는 아니지만, 현대의
도시 분위기와도 전혀 다른 모습이다. 80년대 전후의 모습으로 보인다. 세월을 넘어 타임머신을 타고
온 느낌이다. 1, 2층의 나지막한 건물들이 일렬로 이어져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그때의 모습이다.
하지만 한때 구포역 앞이 번화가였다는 사실이 전혀 납득이 가지 않을 만큼 너무나 작고 초라하다. 잘
못 본 것은 아닐까? 아니면 잘못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를 의심해 보았지만 틀림이 없다.
어찌 보면 고작 30여 년 전의 모습인데도 너무나 허름하게 보인다. 왜 그럴까? 바로 우리가 변해 버린
까닭이다. 불과 얼마 전의 삶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금 우리 삶의 방식이 달라져 버린 것이다.
그 변화의 차이를 가늠하면서 놀란 마음을 안고 한참을 서 있게 된다.
얼마 가지 않아 감춰진 듯한 건물 하나가 나타난다. ‘구포국수체험관ㆍ제면소’라는 이름이다. 순간, ‘아!
구포국수다!’는 말이 튀어나온다. ‘그래! 이곳에 만들어 놓았구나!’ 옛날 그 유명하던 구포국수, 부산에
좀 오래 산 사람들이라면 모를 리 없었던 구포국수, 그 이야기를 해 놓은 것이다. 요즈음이야 그냥 붙
여 놓은 상점 이름이려니 싶지만, 부산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국수하면 온통 구포국수였던 때도 있었다.
그 유명했던 구포국수 이야기를 여기에 살려 놓은 것이다. 한때의 명성이지만 기억하고자 하는 의도일
것이다. 구포국수를 키워 낸 구포 지역이 갖는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뜻일 것이다.
구포만세거리는 계속 이어진다. 깔끔한 간판을 이고 있는 1, 2층의 건물들이 정감 어린 모습으로 다가
온다. 하지만 거리의 상점들은 대부분 규모가 작고 너무 단출하다. 시대 속에 겨우 버텨 내는 듯한 모
습이다. 더 오래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지난날의 활기찼던 시절을 추억하는 것도 지금뿐, 이 작
은 건물의 상점들이 사라지면 거리 모습도 변할 게 분명하다. 21세기 우리 삶의 방식은 이런 모습을
오래 내버려 두지 않을 것 같아, 아쉬운 마음 금할 길 없다.
구포만세거리에서 3.1 운동 속에 빠져들다
구포만세거리를 계속 간다. 구포역 담벼락 쪽에 벽화가 불쑥 나타난다. 짙은 갈색의 철판 같은 벽면
위에 쓰인 첫 글자는 ‘만세~’이다. 구포만세거리라는 이름에 걸맞은 장면이 펼쳐진다. 구포장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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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마이너리티 힘
일어났던 구포 3.1 운동과 관련한 이야기를 파노라마와 같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길거리 한 면 전체
가 벽화다. 대충 잡아 약 300m 정도는 되겠다. 벽면에 3.1 운동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그림을
그렸다. 어떻게 이런 시설을 설치할 수 있었을까? 일단 멀리서 거리를 가늠해 보다가 전체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왔다 갔다 해 본다. 구포 3.1 운동의 과정, 그 주도자의 사진, 태극기, 만
세 함성의 울부짖음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곳이 구포 3.1 운동의 현장임을 느끼게 한다.
구포에서의 3.1 운동은 부산진(3.11), 동래(3.13)에 이어 1919년 3월 29일 구포장날에 일어난 대규모
독립 만세 운동이었다. 구포장터를 중심으로 벌어진 이곳 만세 운동도 치밀한 계획 속에 이루어졌다.
주도자가 먼저 독립 만세를 외치면 장터에 있던 사람들도 함께 외친 대대적인 독립 만세 운동이었다.
미리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도 배부되었다. 더구나 주도자가 체포되자 그를 구하기 위해 주재소까지 습
격하는 사건도 있었다. 구포 3.1 운동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주도자가 학생들이 아니라 구포 지역 주
민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상인이나 농민, 일꾼 등 일반 백성들이었다. 이는 다른 지역에서 일어
난 3.1 운동이 주로 학생들의 주동이 많았다는 점과 차별성이 있다.
파노라마 벽화를 본다. 특별히 따로 설치된 다섯 명의 사진과 인물 조형도를 다시 본다. 가까이 다가
가 사진과 함께 써 놓은 글을 읽는다. 양봉근, 임봉례, 윤경, 손진태 그리고 윤현진이다. 이들 중 손진
태, 윤현진 두 사람은 알겠다. 그런데 양봉근, 임봉례, 윤경 세 사람은 정말 생소하다. 기소문, 수형 명
부표와 대조해 보니 바로 이 세 사람이 구포 3.1 운동의 대표적인 주도자이다. 구포 3.1 운동 후 기소
되었던 42명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소개한 글을 읽으니 직업이 의사, 면서기, 농부다.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구포
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평범한 구포 사람들이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당연히 참여하였고 이후 옥고를
치르고 나와서도 끝까지 구포 땅을 지키며 살아간 한 사람 한 사람이다. 비록 세 명의 사진만 걸려 있
지만 같이 기소된 42명 모두가, 그날 구포장을 뒤엎어 놓을 정도로 만세 소리를 외쳤던 1,200여 명의
구포 사람 모두가, 다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왠지 애착이 더 간다. 그래서 빛바랜 사진을 한 번 더
쳐다보게 된다.
숨은 감동이 있는 곳, 만덕
만덕, 이곳엔 잊지 말아야 할 절터 만덕사지가 있다. 학계에선 그 중요성을 알고 많은 연구가 이뤄진
상태이지만 일반인에겐 그저 절터로만 알려져 있는 곳이다. 그 내용을 좀 알면 그냥 절터로 남겨 놓고
있는 것이 무척 아쉽게 여겨진다. 구석구석 돌아보면 애처로운 감동을 자아내는 절터다. 반대로 못내
자랑하고 싶은 절, 병풍암 석불사가 있다. 험한 바위에 숨어 있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다.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 커다란 감동에 흥분된 가슴을 안고 오게 된다. 가까운 곳에 이만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곳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절인데 왜 남다른 감동을 주는 것일까?
만덕사지 3층 석탑
만덕사지 3층 석탑은 부산박물관 뜰 야외 전시장에 놓여 있다. 우리 눈에 가장 익숙한 전형적인 3층
석탑이다. 불국사 석가탑에 비하면 조금 작다. 탑 몸체는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아담한 석탑이다.
이 탑을 소개하는 글에는 만덕사지에서 수거한 돌을 바탕으로 복원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탑을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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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마이너리티 힘
각하면 학창 시절 금정산성 남문으로 소풍을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학창 시절 기억은 논밭에 축대가
있었던 정도뿐인데, 지금은 어떠할까? 궁금한 마음을 안고 만덕사지로 향한다.
만덕사지를 거닐다
만덕사지는 만덕동의 산언덕 경사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지하철 3호선 만덕역에서 약 500m 정도 경
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버스를 타고 구포, 만덕 쪽에서 오면 제1만덕터널로 들어가기 직전 병
풍사 입구에서 내리면 된다. 반대로 동래, 온천 쪽에서 오면 제1만덕터널을 지나자마자 바로 병풍사
입구 정류소에서 내리면 된다. 만덕사지와 함께 병풍암 석불사도 같이 둘러보려면 아예 처음부터 등산
한다는 마음을 먹든지 아니면 승용차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병풍사 입구 정류소에는 육교가 있다. 육교의 북쪽 계단 바로 옆에는 ‘만덕사지’라고 쓰여진 큰 팻말이
있는데,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는 산 쪽을 향하고 있다. 건너편 남쪽 계단 옆에는 ‘만덕사지 당간지
주’를 가리키는 팻말도 보인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둘 다 만덕사지라는 말이 있으니 헷갈린다. 그
런데 ‘당간지주’란 절의 입구에 각종 행사와 관련된 깃발 같은 것을 걸어 두던 돌기둥을 의미하는 것이
다.
그렇다면 절의 모습을 먼저 보고 돌기둥인 당간지주는 시간이 되면 보아도 될 것 같다. ‘만덕사지’라는
팻말을 따라 산으로 난 경사진 언덕길을 올라가니 만덕사지라는 돌 비석과 함께 예사롭지 않은 축대가
떡하니 등장한다. 축대 위에 허름한 절집도 보인다. 만덕사지에는 절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만덕사라
는 절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여기가 옛 만덕사지, 곧 옛 만덕사가 있던 절터이다.
눈앞에 보이는 축대가 정말 예사롭지 않다. 단번에 보아도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쌓았음을 알 수 있
다. 더구나 사람 키보다 더 높아 보이는 큰 바위가 통째로 축대에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다른
돌과 어울리게 잘 짜여져 있다. 축대 앞에는 만덕사지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에는
고려 시대 토기, 국찰급에 가까운 금당지와 치미의 크기, 기비사라는 절의 이름, 그리고 석기 왕자 이
야기, 하지만 조사와 고증이 더 필요하다는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만덕사지에 대한 작은 고찰
이참에 석기 왕자와 만덕사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하고자 한다. 석기 왕자와 만덕사에 관한 이야기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부분적으로 등장한다. 두 책 모두 “충정왕 3년(1351)에 석기 왕자를 삭
발하여 만덕사에 두었다.”고 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이후 고려 공민왕 5년(1356) 원나라를 따르던 자들
이 중심이 되어 석기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사건과 관련된 것이다.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원의 힘이
약화되고 있음을 감지하고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원 자주 개혁 정치를 추진한 왕이다.
이런 상황에 원은 공민왕 대신 석기 왕자를 왕으로 지명한다. 당연히 공민왕은 석기 왕자를 제거하려
했다.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석기 왕자 제거 작전은 실패했지만, 석기 왕자는 숨어만 지낼 뿐 정치적 전
면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다 공민왕이 죽고 난 후 우왕 즉위년(1375)에 죽임을 당한다.
이 과정에서 석기 왕자가 숨어 지냈다는 곳이 만덕사라고 하는데, 그 만덕사의 위치가 어디냐는 것이
초점이다. 고려 시대 만덕사는 기록상으로 5개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 가
장 많이 드러난 곳은 전라남도 강진군에 있는 백련사로, 그 백련사의 또 다른 이름이 만덕사다. 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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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고고학계에서는 부산 만덕사지에 주목하였고, 만덕사에 대한 실체를 증명하기 위해 여러 차례
에 걸쳐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첫 번째 안내판에서와 같이, 이곳이 석기 왕자의 유폐지 만
덕사라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 절의 이름이 만덕사였는지조차 불분명하다고 했다.
그래서 이곳 만덕사지를 최근에 부산 만덕사지라고 이름하면서 몇 가지 분명한 것만 정리하게 되었다.
병풍암 석불사를 향하여
만덕사를 그리워하며 세웠다는 절이 있다. 병풍암 석불사다.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병풍암이고, 이 병풍 같은 바위에 많은 석불을 새겨 놓았기 때문에 석불사라 이름 붙였을 것이다. 일
반적으로는 병풍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부산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가 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경사지고 가파른 곳에 위치하여, 감춰진 듯 있기 때문이다. 절
이 가진 특유의 엄숙함과 위엄이 있고 독특한 특성도 있다. 만덕사지에서 나와 큰 길에서 북쪽의 산으
로 올라간다. 금정산 상하봉 쪽, 그러니까 금정산성 남문으로 올라가는 길을 가면 된다. 걸어가든 자동
차로 가든 ‘병풍암 석불사’라는 안내 팻말이 잘 부착되어 있어 길을 놓칠 염려는 없다.
석조 건물 대웅전, 칠성각
무지개 문을 스쳐 지나 시멘트 포장된 길을 따라 돌아서 절의 입구로 들어선다. 절 입구엔 일주문이
있다. 그 기둥을 자세히 보니 아니나 다를까 콘크리트 기둥이다. 기둥 위의 들보랑 도리 등은 워낙 단
청이 잘 되어 있어 구분하기 어렵지만, 서까래와 기와지붕을 제외하면 전부 콘크리트다. 그렇다면 절
은 20세기에 만들어진 오래되지 않은 절이다. 절 안으로 들어서니 왼쪽으로 종무소라고 이름을 붙인
건물 두 채가 일렬로 있고, 오른쪽으로는 낮은 담장이 있다. 담장을 넘어 멀리 산 아래 전망이 툭 펼쳐
진다. 만덕고개가 코앞에 있고, 만덕고개를 넘어 멀리 황령산도 한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황령산
옆으로 바다까지 보인다. ‘와~ 어떻게 이런 깊은 산속에서 이런 전망이 나온단 말인가!’
종무소는 여느 절집과 달리 돌로 만들어져 있다. 잘 다듬은 직사각형의 돌을 쌓아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일반적인 절과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종무소 앞을 지나니 2층 건물 두 채가 나타난다. 역
시 직사각형의 돌을 쌓아 만들었다. 먼저 나타나는 2층 건물의 입구 위에는 대웅전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이게 무슨 대웅전이야!’ 순간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회색빛 돌로 쌓은 건물, 그래서 일반적
인 절집의 이미지와 전혀 다르다. 절의 대웅전은 나무로 만든 집인데… 거대한 나무 기둥에 나무 문을 달
고 나무로 된 도리, 창방이 있고 그 위에 기와로 지붕을 얹은 모습이 대웅전인데….
그런데 이 돌집에도 기둥이 또렷이 보인다. 돌을 빚어 만든 기둥이다. 돌집에 돌기둥이 웬 말인가? 아
니, 자세히 보니 기둥 위의 장식품도 특별하다. 목조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창방, 도리와 비슷한 모습의
돌 장식이 있다. 우리나라 절집의 모습을 닮으려는 듯, 돌을 깎고 다듬어 자랑을 하려는 듯 건물 하나
하나에 목조 건물의 흉내를 내고 있다. 1층은 물론 2층도 그렇다. 그러고 보니 대웅전 앞에 있는 3층
석탑과 석등조차도 예사롭지 않다. 조각해 놓은 것이 매우 다양하고 화려하다.
병풍사의 석불 세계
대웅전과 칠성각 사이로 난 좁은 계단이 있다. 계단 양쪽으로 해태란 놈이 반기듯 서 있고 계단을 다
오르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우와~ 이게 뭐야!’ 탄성이 터져 나오지만 속으로 내지
를 수밖에 없다. 절이기 때문이다. 절 입구에서 본 안내판에 29개의 마애불이 있다고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인 게다. 넓지 않은 공간에 거대한 절벽 같은 암벽이 ㄷ자로 병풍처럼 서 있고 29개의 마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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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거대한 절벽만큼이나 크게 조각된 마애불, 이 작품이 바로 눈앞에 있으니 위압감에 서 있는 사람이 한
없이 작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 모두가
속으로 ‘우와~ 우와~’ 하고 그 위압감에 놀라고 있는 것 같다. 계단을 오르자마자 맞닥뜨린 모습, 순
간의 분위기에 눌려 그냥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지하 통로를 개방할 수 있으면?
29개의 마애불상 무리들을 뒤로하고 대웅전과 칠성각 사이의 계단을 내려온다. 그런데 대웅전 1층 아
래쪽에 무슨 지하 통로 같은 것이 뚫려 있다. ‘이건 또 뭐지?’ 호기심에 그 통로 안을 들어가 보지 않
을 수 없다. 생각보다 깊고 어둡다. 한 사람 정도 다닐 수 있는 길로 이어지는데, 깜깜하지만 전등불이
켜져 있어 이곳저곳을 살펴볼 수 있다. 거대한 암반 사이를 지나는 길인 것 같다. 이 암반 위에 집이
지어졌음을 알겠다. 근데 암반 사이로 또 토굴 같은 곳도 있다. 깨끗하게 치워져 있고 뭔가 활용해도
될 공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재미있는 공간들이다.
조금 더 들어가니 반대편에는 문이 닫혀 있다. 아니 여기에 문이 있다면 밖으로 나가는 길이 있단 말
인가? 그렇다면 지금 걸어 들어온 통로 길이 정말 사람이 다니던 길이란 말인가? 뭐 이럴 수 있는가
싶은데, 순간 머릿속에 ‘바로 그것이다!’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올라올 때 보았던 종각 아래 담벼락의
무지개 문과 연결되는 길이다 싶다. 곧바로 지하 통로 길을 빠져나와 확인해 본다. 축대 위 담장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축대 바깥쪽 아래에 돌로 만든 또 다른 무지개 문이 있는 것이 보인다. ‘그래! 맞
다.’ 지하 통로는 축대 아래쪽으로 통하고 바깥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 바깥쪽은 올라올 때 보았던
종각 아래 담벼락의 무지개 문으로 연결되고 있다. 축대 위 담장에서 내려다보니 그 길이 훤하게 드러
나 보인다. 안전상의 문제 때문이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이 되어 있다.
아마 이 길은 자동차가 없던 시절, 처음 절이 만들어졌을 때, 절을 통행하는 주 통로였던 모양이다. 절
의 모습을 더 경건하게 만들 목적으로 이런 아스라한 길을 의도적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지하 통로, 생
각하면 생각할수록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길을 살린다면 어떨까 싶다. 이 길을 통해 절에 들어온
다면 너무나 운치 있고 절묘한 느낌을 갖게 할 것 같다. 지하 통로는 두 사람이 교차하기 어려울 정도로
좁고 어둡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다면 절 안으로 들어가는 일방통행 길로 삼으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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