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대중문화의 형성
서구사회에서 문화의 문제가 ‘대중’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정치적 영역으로 부상
하여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문화 생산물의 기계적 대량 복제가 가능해진 시
기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1) 물론 그 이전에도 문화와 그 정치성이 논의되기는 했
지만 대중이라는 특정 주체를 끌어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문화 생산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다. 엘리트적 문화 생산과 그 수단 등의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
진 상태에서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혹은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뚜
렷하게 나타나는 사회 구성체의 형성·변화 ?
말미암은 대중의 등장, 그리고
이들의 대량 소비 행태가 주목을 받으면서 문화는 서서히 정치적 층위로 부상하게
된다. 근대적인 의미로서 대중매체의 등장, 다시 말해 기계적 복제 기술을 통한
문화의 대량 생산·대량 소비를 목격한 시기가 바로 본격적인 유럽과 북미 대중문
화 담론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요컨대 전체적인 사회 변화는 문화와 대중을 한데
묶은 이른바 ‘대중문화론’ 혹은 ‘대중사회론’의 대두를 촉진케 하였다.2)
한국사회내 대중문화에 대한 논의의 진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상당 기
간 지연된 근대화
식민지의 구체적 경험으로 말미암아 문화에 대한 논의가
‘대중문화론’이라는 서구로부터 이식된 기왕의 담론틀에 기초해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대중문화와 이를 둘러싼 담론의 수준이 양적 또는 질적으로 서구에 비
해 크게 낮은 수준이라는 점을 그 특성으로 꼽을 수 있겠다. 한국사회내 대중문화
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1960년 근대화 이후 미국과 일본 등지로부터 유입된 자본주
의적 대중문화와 함께 본격화되었다. 1990년대 들면서 소비 자본주의의 급격한 팽
창에 힘 입어 대중문화 및 이를 둘러싼 이론적 수준의 질적·양적인 수
諛?
눈에 띈다. 이는 대중가요나 영화, TV 등 개별 영역에서, 그리고 인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언론학 등 학문분야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1997년 말 불어닥친 종속적
IMF체제 하에서 이러한 현상을 두고 일종의 ‘거품’ 혹은 ‘환상’으로 설명하는
냉소적 시각도 존재하며, 이는 틀림없이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의 사회적 확산과 정치화는 부인하기 힘든 현실이라면, 여전히 필요한 것
은 그 실재적 조건과 과정, 효과를 꼼꼼히 따져보는 비판·생성적 논의일 것이다.
1. 대중문화론의 범주
대중문화?
다양한 이름의 이론들을 개별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이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 맺고 배치시키는 담론적 지형을 파악하는 작업이 바람직하다
. 이론적 지형을 파악하는 일은 단순하거나 도식적인 작업이다. 그 자체가 대중문
화에 관한 개별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학문적 작업으로서 의미가 매
우 크다. 숲의 얼개를 파악한 후 그 안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과연 어떠한 군집을
이루고 있는가 탐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에 비춰볼 때 국내의 대중문화
논의는 다분히 숲의 지형을 그리는 작업에 앞서 나무의 모습과 특?
여주는
데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대중문화를 논하는 한 편
의 논문에서 다양하고 이질적인 이론들이 아무런 일관성 없이 뒤섞여 있음을 발견
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논의가 상식적, 일반적 수준에서
대중문화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겠다. 그렇지만 보다 체계적
이고 과학적인 수준까지 대중문화의 논의를 끌어 올리는 데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우선 ‘대중문화론’이라는 숲을 보여주는 데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이 바
로 개념의 문?
陸衫??均?과연 어떠한 개념들이 포함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이론간 견해의 차이가 크다. 문화를 개념짓는 방식 자체에 이미 커다란 차이
가 나타난다. 예컨대 우리말로도 ‘대중문화’, ‘민중문화’, ‘민속문화’, ‘공
중문화’ 등 다양한 번역어들이 상존하고 있다. 이로 인해 개념설정 및 설명이 상
당한 혼동을 겪는다. 예를 들어 민중의 문화는 자본주의적 한계가 명백한 대중문화
로부터 분명한 차별성을 지닌다는 식의 주장도 있다. 대중문화는 제국주의적, 자본
주의적 거짓 문화로서 ‘민중적’, ‘전통적’인 순수 문화와 대?
그러나 ‘
대중’과 ‘민중’의 구분 자체가 용이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한 개념들이 본질적
으로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시각은 문제가 많다. 일종의 근본주의적, 중
심주의적 오류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보다는 이러한 개념들을 유동적 기
표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중문화가 민중문화일 수 있고 민속문화가 대중
문화로 바뀔 수 있는 일이다. 요컨대 우리가 사용하는 이론적 범주의 의미는 그 대
상인 문화가 위치한 사회·역사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대중문화에 관한 연구가
‘대중문화론’이라는 기존 담
체에서 출발하면서도 여전히 그 문제설정에
서 벗어나 실제 맥락과의 접속을 끊임없이 시도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대중문화에 대한 연구는 우선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생산·소비되
며, 그 결과 어떠한 의미로 만들어지는가 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명제가 어슴
프레 드러난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중문화란 어떤 본질적이거나 고정된 형태
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내 계속적으로 작용하는 다양한 횡단적 힘들에
의해 구성·생성되는 것일 따름이다. 이러한 점에서 대중문화가 특정 상황에서 과
한 내용으로 채워지고 논의되는지가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3) 예를 들어 어
떤 이론들은 대중문화라는 개념을 사회 병리적 현상으로 파악하여 이를 응징하는
입장을 보여준다.4) 그러한 내용들로 대중문화론을 만들고 또한 대중문화를 개념
지은 것이다. 반면에 보다 최근의 문화론에서는 대중문화를 평범한 ‘우리’가 매
일 매일 살아가고 즐기는 방식으로 규정짓고, 그 안에서 나름의 문화적 생명력을
찾고자 한다. 문화연구가 그 대표적 전통에 해당된다. 이 경우에 대중문화는 거부
하거나 폄하될 수 없는 사회적 현실이 된다. 이렇듯 대
란 개념은 속이 텅빈
범주이며, 그 의미는 누가 어떠한 내용을 채울 것이지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이
제 문제는 ‘대중문화는 과연 무엇인가?’가 아닌, ‘대중문화는 과연 어떻게 만들
어지며 그 의미는 어떻게 규정되는가?’ 하는 것이 된다.
대중문화론의 대상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문화의 일반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문화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레이몬드 윌리엄스(R. Williams)
는 문화의 정의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토한 후 다음과 같이 대략 세 가지로 의미
를 구분하고 있다.5) 우선 첫번째는 전통적 의미
되는 것으로서, 문화는 “?
痔岵?작품이나 실천 행위”를 가리킨다. 매우 부르주아적이고 협의의 개념이지만,
윌리엄즈는 이것을 문화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다. 두번째, 보다 넓은 의미에서
문화는 “의미를 나타내는 모든 실천행위(signifying practices)”가 된다. 의미를
생산·전달·해석하는 모든 실천적 습속이나 과정들이 포함된다. 그리하여 비단 클
래식 음악감상뿐만 아니라 대중가요, 영화, 만화, 심지어 일반의 옷차림도 문화 연
구의 영역 안으로 포섭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광의의 차원에서 문화는 “한 인간이
나 시대 또?
?특정 생활방식”을 지시한다. 흔히 인류학적 정의로 불리워지
며, 이에 따르면 문화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 삶의 방식(ways of everyday life
)이 된다. 여기에서 문화가 단수가 아닌 복수로 이해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
다. 이제 문화는 더 이상 예술가의 고상한 정신이나 심미적 작품, 품위 있는 공연
장에 머물지 않고 소박하고 복잡 다단하며 시끌벅적한 일상으로 내려온다.
최근 국내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중문화에 관한 논의는 주로 두번째와 세번째
개념을 출밤점으로 한다. 가령 세번째 범주를 통해 연구자들은 ‘우리
??
평범한 생활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된다. 즉, ‘그들’이 아닌 우리의 일상
생활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다양한 삶의 문화들(lived cultures)
을 찾아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의 개념으로부터 연구자들이 도출한 것은
구체적 문화 형식과 내용에 관한 것이다. 대중문화론이 여러 문화적 텍스트(cultu-
ral text)를 연구 대상으로 가져오게 된 것을 가리킨다. 한편 과정의 측면에서 파
악해 볼 때 대중문화 연구는 문화가 생산되는 방식이나 생산물 자체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그것이 과연 어떻게 사회적으로
며 소비되는가 하는 부분으로 관심을
확대시킨다.6) 이처럼 확장된 대중문화의 영역은 연구자가 무엇에 초점을 맞추며
또한 어떠한 방식으로 이를 해석할 것인지 판단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여러 대중문
화론들의 적실성이나 타당성을 평가함에 있어서도 요긴한 기준이 된다.
2. 대중문화와 이데올로기
이상과 같이 정의되는 대중문화의 연구 영역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문화
연구자들의 머리를 떠나지 않고 괴롭히는 어려운 용어가 문화 외에 하나 더 있다.
바로 이데올로기의 개념이다. 사실 대중문화 연구는 바로 이데올로기?
구
에 다름 아니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로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는 가깝다.7) 대
중문화론자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란 개념의 규정이 문화의 개념만
큼이나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문화의 개념이 이데올로기라는 개념
과 즉각적 호환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논의되기도 한다. 특히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비롯해서 전통적 맑스주의적 입장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뚜렷하며,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분명한 것은 대중문화 담론을 살찌우기 위해서라도 이데올로기
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거쳐야 할 사안?
÷甄? 문화가 바로 이데올로기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데올로기는 틀림없이 문화의 일부분이다. 대중문화를 논하면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간과했을 경우에는 대중문화가 지닌 일정한 억압적 성격을
놓치고, 자칫 문화적 대중주의로 흐를 위험이 따른다. 아래에서 전개될 대중문화
의 여러 논의에서도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의 개념과 관련하여, 우선 이를 특정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체계화된
사상의 형태로 해석하는 입장이 있다. 각 집단들의 행위 방식이나 목표를 규정하
는 (
릿鳴?이해되는) 정치·경제적 사상들의 집합을 의미하며, 가장 일반
적으로 사용되는 해석이다. 가령 전문가 의식(professionalism)을 전문가 집단 구
성원들이 지닌 차별적 이데올로기로 규정하는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러한 견해
에 따르면 ‘신한국당의 이데올로기’ 혹은 ‘한국 대학생들의 이데올로기’ 등 무
수하게 이름 붙여진 이데올로기들이 존재한다. 거꾸로 말해 어떤 특수한 집단이 존
재하기 위해서는 윌리엄즈가 ‘감정 구조(structure of feeling)’로 표현한 것의
일부로서 그 외부와 차별화되는 나름의 이데올로기를 필?
다고 볼 수도 있겠
다.
두번째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의는 ‘사실(facts)’ 혹은 현실 부정의 의미로 쓰이
는 개념들로 이루어져 있다. 요컨대 이데올로기는 진실을 감추거나 왜곡시키며 위
장하는 어떤 것을 지칭하며, 분석의 초점은 자연스럽게 문화적 내용물이나 문화적
행위가 어떠한 방식으로 사실을 왜곡하는가에 맞추어진다. 특히 전통적 맑스주의
내에서 대중문화는 바로 이데올로기, 다시 말해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
?막?간주된다. 허위의식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문화는 자본가 계급의 노동
자 계급에 대한 지?
하게 하는 데 기능하거나 효과를 발휘한다. 지배 계급
의 군림이나 횡포를 은폐시키고 정당화하며, 피지배 계급의 저항을 무화시키는 데
서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을 찾는다. 피지배 계급이 자신의 억압적 상황을 인식하고
자신에 대한 자본가 계급의 지배가 정당하지 못함을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이데올로기가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와 같은 기능적 시각은 집단간 관계에서 물리적 수단을 지배
한 집단이 문화적 수단 및 이데올로기 수단을 갖게 되며, 이를 통해 상대방에 대한
지배를 비폭력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
종의 결정론적, 도구론적 해석을 바탕
으로 한다. 뒤집어 말하자면, 사회내 생산·유포되는 문화적 내용물이나 이데올로
기는 필연적으로 지배 집단의 이익을 대변할 수 밖에 없다. 전통 맑스주의가 지적
한 것도 경제적 영역에서 생산 수단을 차지한 자본가 계급이 그에 상응하는 상부구
조의 이데올로기적, 사상적 수단까지도 독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맑
스의 생각을 지나치게 교조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비난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
나 기본적 설명틀은 좌파 문화연구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받아들여 진다. 최근에는
허위
동일시된 이데올로기의 개념이 자본주의내 계급의 문제뿐만 아니라 남
녀 관계와 지역 모순, 세대간 갈등, 세계체제내 민족 또는 인종 관계를 설명하는
데도 적용된다. 예컨대 불평등한 현실과 여성의 질곡을 왜곡되게 보여주고, 남성
의 지배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비추며,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구조적
모순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라고 설명하는 식이다.
세번째는 구조주의 맑스주의자로 알려진 알튀세르(L. Althus-ser)의 이데올로기에
관한 설명이다. 최근까지 국내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널
는 해석이다. 그의
사상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실천의 문제이고, 의식이 아닌 무의식적
으로 작용하며, 물리적인 기초를 지닌다는 점이다. 우선 이데올로기란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으로서 존재하는 것일 뿐 아니라 광범위하게 (무의식적으로) 실천된
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데올로기란 일상생활내 실천을 통해 그 효과가 발휘된다.
근대적 의미의 공휴일이나 국경일을 예로 들면, 휴일에 우리는 으례히 즐거움을 줄
일을 찾는다. 이를 통해 일상의 긴장을 풀거나 귀찮은 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
공휴일의 휴식이란 다음 공휴일이 될 때까지 사람들
의 노동력을 수탈하고 억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실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가령 소비자, 남성, 한국인 등 특정한 주체의 위치로
호명(interpellation)함으로써 기능하며, 이때 주체 구성의 경로는 철저하게 무의
식적인 것이다. 맑스주의와 라깡식 정식분석학의 접합이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마
지막으로 이데올로기는 언론을 포함하여 이른바 ‘이데올로기 국가 기구(ideologic-
al state apparatuses)’로 이름 붙여진 물리적 제도나 장치를 필요로 한?
지막으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의는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 문화 이론가인 바
르트(R. Barthes)에 의한 것이다. 바르트는 주체 구성의 수준까지 정교화된 맑스주
의적 이데올로기론을 각종 언어와 문화 텍스트 분석에 접목시킨다. 바르트가 볼 때
이데올로기는 이차적 의미 생성의 단계를 거치면서 내포적 의미(connotations) 혹
은 암시적 뉘앙스의 모습으로 사회내에 순환된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이데올로
기를 신화(myth)라고도 불렀는데, 이데올로기는 기호의 의미를 한정 짓고 결과적으
로 사회적 의미 해석의 조건을 정한다. 권위주
?하에서 학생운동에 대한 언
론의 보도를 예로써 들어보자. 당시의 언론은 운동권을 ‘급진 좌익세력’이라고
불렀는데 학생들이 행하는 모든 운동을 ‘반국가적’인 것으로 몰아붙이고 북한과
관계 있는 것으로 의미 고정하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운동세력은 자유민주주의와
같은 개념의 반대편에 서 있는 ‘무질서’와 ‘혼란’을 조장하는 ‘폭력세력’으
로 이어질 수 있다. 일부 학생들에게서 나타난 급진성을 선택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친북화’ ‘좌경화’를 일반화하려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처럼 텍스트
내 이데올로기
기호학적, 미시적 방식에 주목하면서도, 바르트는 해석의 가
능성을 열어둠으로써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주체 구성에 성공한다는 식의 견해에는
반대한다.
서로 차이나는 관점 혹은 수준에서의 개념 정의인데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에 대
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영역을 설정하고 이데올로기와 대중문화, 매체가 상호 관련
맺고 있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알튀세르에서 바르트로 내
려오면서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정치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층위에
서 오히려 중요해짐을 알게 된다. 정치적인 것도 문화?
?거쳐 완결되거나
전파되는 현상을 흔히 볼 수 있다. 요컨대 이데올로기는 문화적인 것이며, 마찬가
지로 문화는 정치적인 것이다. 이는 이데올로기와 문화, 권력의 연관성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 대중문화 연구의 영역이 일반의 생각과 달리 매우
넓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다.
3. 대중문화의 정의
이제 이상의 문화에 대한 일반적 정의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다양한 정의,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대중문화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
를 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
우선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대중’이
라는 개념이다. 사실 대중문화란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대중의 삶의 방식이자 의
미화 실천, 혹은 미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사회에서는 생
산 양식의 대량 산업화와 도시화, 일반 학교 교육의 발달로 인해 정치·경제·문화
적 권위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적 질서가 성립되는 바, 이것을 쉴즈(E. Shils)와 같
은 학자는 대중사회로 부른다. 결국 대중은 자본주의 사회내 노동계급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며, 대중문화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함께 등장한 역사적 삶
중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있다. 2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한 영화와
라디오 등 대중매체는 이러한 대중매체의 확산에 결정적인 힘을 행사하였다. 그리
하여 대중문화는 이른바 대중사회에서 매스 미디어를 통해 형성되는 문화로 자리잡
으며, 대중사회와 대중, 대중매체, 그리고 대중문화는 서로 뗄 수 없는 하나의 몸
체가 된다.8)
윌리엄스는 대중(mass 혹은 popular)문화라는 개념이 대체적으로 네 개의 다른 정
의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저속한 것’, ‘사람
들의 호의를 끌기 위해서 정교히 만들
’, 그리고 ‘민중 스스로에 의해 만
들어 진 것’ 등 약간씩 차이 나는 해석이다.9) 대중문화에 대한 정의는 이러한 대
중의 개념을 문화의 개념과 어떻게 혼합시키는가에 따라 다양하게 정해진다. 제일
먼저 등장하고 가장 평범한 정의는 대중문화가 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문화라는 것이다. 시청률이나 베스트 셀러와 같이 수용자의 머릿수와 관련된 수치
들이 이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원인과 효과에 대한 설명을 생략한 매우 현상 기술
적 정의이며, 대중문화의 개념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다는 점에서 한계가 뚜렷하다
. 다
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수적인 문제가 대중문화의 논의에서 고려되
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두 사람이 즐기는 문화는 대중문화의 차원에서 논의될 성질
이 아니라는 범주적 교훈을 주고 있다.
두번째 대중문화를 정의하는 방식은 ‘고급문화(high culture)’가 아닌 문화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 정의에서 대중문화는 고급문화가 지니고 있는 질적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문화적 실천이나 내용물을 가리키게 된다. 이러한 정의가 지니고 있
는 고급/대중 문화의 판단 기준은 매우 다양하다. 문화적 형식의 복잡성(formal co-
mplexity)이 기
기도 하고, 도덕적 가치나 비판적 통찰력의 유무가 그 기준
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준거는 수용자들이 얼마나 손쉽
게 즐길 수 있는지 여부에 있다. 우선 다중이 근접할 수 없을 만큼 어렵고 차원이
높으면 고급문화의 영역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대중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오페라 전당이라는 공간 자체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품위 있는 예술 행위, 그리
고 이를 감상하는 것은 별 문제 없이 고급문화로 구분된다. 반면에 다중의 접근이
용이한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형식적 복잡성이나 비판적 통찰성, 예술
胄㉯?
로서 아우라(aura)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쉽게 따른다. 대량 상품성에 따른 불가피
한 결과라는 것이며, 이는 곧 대중문화에 대한 ‘저질성’ 시비로 이어진다. 특히
대중문화를 둘러싼 논란은 국내에서 최근까지도 심각하게 제기된다.
부르디외(P. Bourdieu)는 이와 관련하여 매우 뛰어난 통찰력을 제공한다. 문화적
차이(cultural distinctions)라는 것이 계급적 차이를 나타내고 이를 재생산하는
데 쓰이고 있음에 주목하면서, 그는 문화적 기호(cultural tastes)를 무엇보다 이
데올로기적인 범주로 파악한다. 문화적 취향은 계
치를 정해주는 지표의 역
할을 한다. 그리하여 대중문화란 다수 대중을 위해 생산된 상업적 문화이고 고급문
화는 일부 문화 생산자들의 창의력을 바탕으로 한 희귀한 문화라는 구분 자체가 이
데올로기적인 것이 된다. 지금까지의 사회적 통념에 따르면 그러한 구분은 매우 분
명하고 뚜렷한 것으로 고착되어 있다. 그러나 부르디에가 주장하고자 한 것은 구분
혹은 그 구분의 바탕이 되고 있는 미학 자체가 인위적이라는 점이다. 대중/고급 문
화의 미학적 구분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구분의 필요성은 바로 권력 관계의 재생산
에 있다. 예를
Х】컥막?꼽히고 고급문화로 분류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도 그 당시에는 철저하게 대중문화의 전형이었다. 결국 문화를 형식으로 평가하거
나 미학적 차이가 있다는 식의 본질주의적 논의는 문화나 미학를 둘러싼 사회적 역
학 관계를 읽어내는 데 도움을 주질 못한다는 지적이다.
세번째로는 대중문화를 상업화된 상품과 일치시키는 방법이 있다. 대중문화는 대
중 소비를 위해 대량 생산된 상품으로, 수용자는 어떠한 특성으로도 구분되지 않는
동질적이고 수동적 소비자로 규정된다. 요컨대 분별력 없는 대중의 소비를 바탕으
로 대량 ?
뮌邱??문화 상품, 그리고 이를 통한 대중 조작 등이 핵심 요소
가 된다. 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대표되는 입장이며, 최근까지도 대중문화에 대
한 비판적 논의들 가운데 가장 빈번히 대할 수 있는 정의이기도 하다. 대중문화가
이윤 축적을 위해 시장을 통해 유통된다는 점에서 상업적이고, 외형적으로 파고
사는 상품의 모습을 지닌다는 점에서 상품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의가 설명할 수 있는 한계는 매우 뚜렷하다
. 가령 이러한 정의에서 연구자들이 갖게 되는 해결되지 않은 ?
만약 획일화
된 문화 상품을 소비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면 과연 인기를 끄는 문화 내용
물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생기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10) 제
작자가 성공할 거라고 생각해서 만든 많은 문화 상품들이 성공하지 못하거나 뜻밖
의 작품이 인기를 끄는 이유에 대해 이러한 정의 방법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
한편 대중문화를 상업화된 문화로 파악하는 시각에는 대중문화를 서구의 ‘퇴폐적
’ 문화와 일치시키는 성향이 포함된다. 이른바 문화제국주의적 시각이 바로 여기
에 해당된다. 한국사회의 경
幷?아니어서, 대중문화를 통한 서구화, 보다
구체적으로 ‘미국화(Americanization)’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대중문화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매우 높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대중문화는 우리 것이 아닌 ‘타자’
의 것이며, 미국적인 문화의 수용으로 인해 전통 문화, 민족 의식은 죽게 된다. 대
중문화를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기제로 간주할 때, 서구적 문화를 접함으로써
수용자들은 그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고 궁극적으로 국가간 불평등이나 모순을 잊고
당연시하는 수동적 존재로 간주된다. 이러한 문화제국주의론의 비판적 적실성을
히 부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 또한 매우 명백하다. 가
령 내부와 외부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이분법적 접근, 내재적으로 작용하는 국가
와 자본의 문제의 간과, 민족 문화에 대한 근본주의적 발상, 그리고 유입의 구체적
과정이나 효과에 대한 관심 부족 등이 심각한 약점으로 꼽힌다. 요컨대 문화제국주
의론은 (반)주변부 사회 내부에 대한 세밀한 분석 없이 모든 것을 외부 구조적인
요인으로 설명해 버리는 결정론적 한계가 눈에
띈다.
마지막으로 찾아볼 수 있는 대중문화에 대한 시각은 이상의 정의 방법과
히
모양을 달리한다. 대중문화를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문화로 파악하는 방법이
다. 여기에도 두 가지 차이나는 시각이 발견된다. 우선, 대중문화의 본산지인 미국
에서는 셀데스(G. Seldes)와 매닝 화이트(D. M. White) 등을 중심으로 해서 매우
긍정적이고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들은 기존의 정의들이 대
중문화를 위로부터 강제된 저질의 상품 혹은 이데올로기로 보는 잘못을 지적하면서
, 대중문화야말로 민중의 손에 의해 발생한 문화라고 반박한다.
가령 셀데스의 경우, 현재의 대량화된 문화가 그 이전의 ?
높은 가치를 지
녔다고 보기는 힘들더라도, 무조건적으로 천박하고 열등한 것으로 볼 이유도 없다
고 지적한다. 화이트도 비평가들이 현재를 비판하기 위해 과거를 지나치게 낭만시
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대중문화는 민속문화(folk culture)와 마
찬가지로 부정할 수도 가치 폄하할 수도 없는 사회적 현실이다.
대중문화에 대해 긍정적인 두번째 시각으로는 최근 크게 유행되고 있는 문화연구
전통을 들 수 있겠다. 국내외 문화연구자들은 기존의 좌편향적 비평으로부터 완전
한 거리두기를 하지는 않지만, 대중문화가 지?
?의미나 즐거움 생성의 가능
성, 대중문화를 통한 다양한 정치성 등에 주목한다. 대중문화는 늘 위로부터 강제
된 것이 아닌, 이른바 대중이라는 이름의 ‘우리’가 갖고 놀 자원으로 파악된다.
대중매체가 전해주는 자원의 편협함과 한계성을 부인하긴 힘들다 하더라도, 대중
문화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이끌어낼 가능성을 고려할 때 대중의 능동성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손에 주어지는 문화는 어떤 식이든 자
본주의화한 제도나 장치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에 그 제도나 장치에 대한 완전한 부
정은 생산적 논
단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대중매체를 통한 대중문화물
자체를 바로 우리의 문화로 보기는 힘들지만, 그것이 우리의 손에 닿아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며, 소비되는 방식을 살펴보고자 하는 노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요컨대
대중문화는 미리 결정된 어떤 것이 아닌 계속해서 다양한 힘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다. 문화주의적 정의는 대중문화의 소비 주체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문화적 텍스트와 소비 주체의 만남을 중시한 데서 상당한 의의를 갖는다
.11)
4. 대중문화와 헤게모니
문화연구자들은 대중문화를 ?
력의 도구라기보다는 다양한 세력들이 행
사되는 지점으로 파악한다. 요컨대 대중문화는 패권(hegemony) 다툼의 장이 된다.
사실 헤게모니라는 용어 자체는 지배 권력에 의한 일방적 지배라는 해석을 거부하
고 있다. 지배계급 혹은 지배집단은 피지배층으로부터의 자발적 동의를 바탕으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후자의 동의에 기초하여 도덕적이고 지적인 지도력을
행사하며, 결과적으로 자신의 질서를 유지시켜 나간다.12) 이처럼 지도력이 자연
스럽게 행사되는 시점이 바로 헤게모니인 것이다. 여기에서 헤게모니를 시간적으로
파악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헤게모니의 순간에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끊임없는 경쟁이나 투쟁이 투입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배(domination)라
는 개념은 자칫 일방적이고 고착적인 것이 되기 쉽고, 제로섬 게임(zero-sum game)
과 같이 지배 권력의 숭리 아니면 피지배층의 승리로 일별해버리는 모순을 범할 가
능성이 높다. 이에 비해 헤게모니라는 개념을 채택함으로써 일방적이거나 ‘전부
아니면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접근법을 배제할 수 있다. 헤게모니는 조금씩 뺏
고 빼앗기는 지속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을 가리킨다.
그?
???이러한 헤게모니 과정과 어떠한 관계가 있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대중문화는 헤게모니 싸움의 장이 된다. 대
중문화라는 생활의 실천을 통해 헤게모니의 바탕이 되는 동의가 만들어지거나 반대
로 해체될 수 있으므로 대중문화의 문제는 헤게모니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대중문화 내에서 기존의 질서나 신념 가치체계에 대한 도전 및 이를 상식의
이름으로 봉쇄하려는 위로부터의 힘들 사이에 끊임없는 대결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대중문화란 앞서 살펴보았던 정의들과는 ?
?손에 의해 자발적
으로 생겨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된 것도 아닌
셈이다. 오히려 양자 사이의 예측하기 힘든 상호 작용의 결과로 (재)생성되는 것이
라 볼 수 있다. 단지 현대 자본주의 사회내 민중들의 대중문화를 통한 도전이나 투
쟁보다는 이를 가로막는 힘이 더 크게 보이는 바람에 대중문화가 마치 민중을 억압
하는 구조로 보일 따름이다. 이러한 정의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아래로부터의
도전이나 저항의 잠재력마저 부정함으로써 지금 당장 이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하
고 새로운 변화 가능?
漫??지나치게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의 문화 연구자들은 대중문화에 대한 역사적, 맥락주의적인 접
근법을 강조한다. 한 시점의 대중문화 모습은 전체적인 헤게모니 과정에서 특정 단
면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금 당장 뿐만 아니라 과거를 다시 가져오고 미래를 가져
오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역사적인 흐름에 주목함으로써 대중문화에 대한 본질
적 관점을 피할 수 있다. 대중문화를 통한 내화(incorporation)과 탈화(excorporat-
ion)의 움직임에 대한 유의 깊은 관찰이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의 부침을 윌리엄스는 부상문화와 주도문화, 잔여문화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 한때의 주도문화는 잔여문화로 변할 수 있으며, 잔여문화가 다시 주도문화의 위
치로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13) 예컨대
씨름이라는 문화적 형태를 예로 들어보자. 씨름은 80년대 군부가 전통적 문화를
대중매체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시도로 기획되었다. 지금도 명절 때마다 방송을 타고 씨름 선수들이 스타로 부상
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90년대의 텔레비전 씨름이 원래의 의도된 의
미
로 유지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시청자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씨름의 모습
을 자신의 기억이나 일상생활 속 경험에 비춰 의미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권력은 국가 공권력이나 거대 자본력, 신체 구금과 같은 직접적 방식
보다는 대중문화를 통해 간접적, 상징적으로 행사된다. 권력은 사회내 미시적 관계
망을 통해 행사되며, 대중문화는 그 그물코가 된다. 한편 피지배 계급의 입장에서
는 사회 변화의 전제 조건으로서 제도화된 상식 및 지식, 담론의 체계를 부정할 수
밖에 없으며, 대중문화는 바로 그 충돌과 탈주가 빚?
지점이 되는 것이다.
“대중문화는 헤게모니를 얻으려는 지배계급의 의도와 그에 대항하려는 민중들의
의도로 짜여져 있는 일종의 투쟁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배이데올로
기라 불리우는 주어진 상업문화적인 요소와 그 주어진 문화와 끊임없이 투쟁, 협상
하려고 하는 피지배계급의 의도가 뒤섞여져 있다.”14)
대중문화를 투쟁의 장이라고 해서 대중문화를 통한 갈등이 반드시 계급적인 축으
로 움직여야 할 이유는 없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나 모순은
계급적인 축 외에도 성(性)과 지역, 세대, 민족
환경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는 계급 외에도 이질적인 힘들이 횡단하면
서 상호 복잡하게 대립과 접합을 보이는 매우 복잡한 영역이다. 가장 최근의 대중
문화론이라 할 수 있는 후기구조주의론에서는 오히려 계급을 강조하는 전통적 맑스
주의 이론에 반대하는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후기구조주의적 인식틀에서는 사회적
모순 및 이에 대한 투쟁을 자본주의 경제나 계급 등 특정 사회적 요인으로 환원시
켜 설명하는 데 반대한다. 그 대신에 성적 불평등과 환경문제, 지역문제, 세대간
갈등 등 다양한 모?
謎뼉聆?사회내에서 동시 다발적이고 상대적으로 자율
적인 상태로 발생한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현재의 많은 대중문화론자들은 ─ 비록
포스트모더니즘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 이러한 통찰력을 받아
들이고, 계급 중심의 대중문화론에서 ‘급진적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15)
를 염두에 둔 대중문화론으로 배치를 달리하고 있다.
대중문화에 대한 이와 같은 접근법에서는 ‘접합(articulation)’이란 용어가 매
우 중요하게 간주된다. 접합은 말 그대로 상이한 요소들을 연결시켜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키는 과정을
.16) 민속씨름의 예로 다시 돌아가 보자.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사회내 민족문화의 개념은 이조시대 양반문화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국가의 위엄과 지도자의 권위를 구현하는 데 유교적인 문화를 구사하는 편이 유용
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평민의 민속문화는 전근대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수난을 당
하였다. 씨름이란 것도 같은 이유로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강한
민족주의를 내세운 학생을 중심으로 한 운동 세력이 끊임없이 민속문화의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한편 1980년대 초 등장한 군부는 정치적 강압을 앞?
?문
화적으로는 상당히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였다. 통금을 해제하고, 교복을 자율화
시켰으며, 칼라 텔레비전 방송을 실시하였다. 동시에 ‘민족문화 창달’을 내세우
면서 기존 양반문화만을 내세우던 것에서 방향을 전환하여 민속문화를 민족문화로
규정 짓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민속씨름과 마당놀이가 태어나게 된다. 민속적 스펙터클화
을 통해 군사정권은 한민족의 우수성과 새로운 역사적 사명, 좌경화된 세력의 분쇄
를 끊임없이 외친다. 물론 이와 같은 주제는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 아닌, 민족성과
새로?
‘조정세력’ 등의 개념의 등장을 통해 전혀 새롭게 창출된 것이다.
이를 가리켜 접합이라고 하며, 접합을 통해 ‘우리’는 한 민족이고 따라서 ‘분
열’을 막고 힘을 합쳐야 하며 새로운 국제 질서에 대동 단결해 대응해야 한다는
의미가 만들어진다. 한편 민족문화가 급진적 학생 운동세력에 의해 ‘이용’되어
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진보 세력과 민족주의의 고리를 끊어 놓으려는 ‘탈구(di-
sarticulation)’의 작업도 병행된다. 이처럼 대중문화내 헤게모니 생성의 과정을
살펴보고, 접합과 탈구의 구체적 메커니즘을 해체시켜 드러
痼?비판적 문화
연구의 목표이자 내용이 된다. 이를 위해 채택되는 방법론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 역사적인 탐구를 통한 국면 분석(conjunctional analysis)과 대중이 주어진 문화
내용물을 어떻게 소화하고 협상하는지를 살펴보는 민중탐사법 혹은 민속지학(ethno-
graphy)을 우선 들 수 있겠다. 분석을 통해 연구자들은 헤게모니의 창출 뿐만 아니
라 대항 헤게모니(counter hegemony)의 생성 가능성 및 그 실천 전략까지도 함께
모색한다.
5. 대중문화와 사회, 역사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드러나는 것은 대중문화의 등장 배경에
정도 공통
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정의법들은 대중문화의 뿌리를 19세기 말과 20
세기 초 서구 산업화와 도시화에서 찾는다. 이러한 배경이 대중문화의 생성의 배후
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맑스주의자들의 지적대로 대중문화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대중문화가 생산·소비되고 의미를 확보
하는 장이 바로 시장이라는 점을 무시하는 순간 우리는 낭만적 대중주의(romantic
populism)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하나의 특
성으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어 1990년대 한국 자본주의의 모습은 1960년
대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IMF 위기에 빠진 1997년의 한국
자본주의는 전 지구적 패권을 자랑하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
다. 그렇다면 대중문화에 대한 논의도 이러한 거시적 맥락 혹은 외부적 지형의 변
화를 고려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시대적 흐름이나 국제적 추세, 한 사
회내 다양한 힘의 양상에 따라 대중문화는 모습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
대 대중문화가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謎뼉聆퓽?문화양식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인
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우리가 대중문화를 분석함에 있어 문맥주의적,
역사적 접근법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17) 한국사회내 대중문
화의 모습을 보더라도, 국가의 이해에 따라 대중문화는 지금까지 상당히 다른 모습
을 보여 왔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까지 근대화를 위해 서구화가 불가피하다고
느껴졌을 때는 대중매체를 통해 서구의 대중문화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외래
적인 대중 문화물은 1973년 유신 이후 한동안 된서리를
된다. 즉, 자주 경제
와 자주 국방이라는 기치 아래 고립적 민족주의의 추세가 강해지고 독재를 위해 권
위적 요소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대중문화에서도 유교적인 윤리 규범을 강요하는
성향이 높아진 것이다. 그리하여 1970년대 초반까지 서구적인 청년 문화를 주도한
연예인들과 이들의 문화적 생산물은 비윤리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장발 단속이나
대마초 등등으로 이들의 활동이 상당한 제약을 받았으며, 심지어 외국 이름을 지
닌 가수들은 새로운 한국식 이름을 구하기까지도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역사적 맥
락에 대한 이해는 대중?
П맙?있어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된다.
이 책은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하여 1920~193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대중문화 현
상을 논하고 있다. 대중문화 자체를 따로 떼어내 분석하는 방식 대신에, 그것을 당
시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경제적 맥락, 이데올로기적 조건 등과 결부시켜 살펴보고
자 한다.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별로 시도되지 않은 일종의 역사주의적 문화연구라
고 할 수도 있겠다. 이론에서 현실로 들어가는 대신에 이 논문은 기본적으로 구체
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이론을 경유하고 다시 현실로 되돌아가는 이른바 ‘급진?
賤聆?radical contextualism)’의 입장을 취한다. 사실 대중문화가 산업화와
도시화에서 유래하였다는 점을 비춰볼 때, 1920년대 미국의 대중문화 상황을 살펴
보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1920년대가 바로 미국 자본주의가 본격적으
로 번창한 시점이고, 결국 미국 대중문화의 형식과 내용을 갖추게 된 시점이기 때
문이다. 그 효과는 비단 미국내에만 제한되지 않고, 현재까지 한국사회를 비롯하여
전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연 어떠한 제조건 하에서 다양한 형태의 대중
문화들이 형성되었고, 그 과정에 어떠한 힘들이
였으며, 그 효과는 어떠한
방식과 방향으로 나타났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
구체적으로 이 책의 제 2 장에서는 1920~1930년대 미국사회의 정치·경제·문화적
배경에 관해 살펴보고 있다. 문화의 변화를 초래한 토대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이것이 어떻게 중층적 효과를 발휘하는가에 주목하고자 한다. 제 3 장에서는 광고
가 등장하게 된 배경과 당시 광고가 얻고자 한 사회적 효과를 중심으로 논의한다.
포디즘(Fordism)적 생산 양식에 맞춘 소비 주체의 형성에 대중매체 광고가 어떻게
기여하였는지를 다룰 것이다. ?
【??시·공간의 개념을 변화시킨 라디오라
는 새롭게 등장한 매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장에서는 특히 라디오의 발전이 광
고와 대중문화의 전파 공간을 급격히 확장시킨 사실에 주목한다. 아울러 라디오가
가족의 개념을 어떻게 변화시키며, 가족성원 모두를 어떻게 소비 주체로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제 5 장에서는 영화를 다루고 있는 바, 당시의 주도적
매체로서 영화가 자본주의적 욕망을 주입시키기 위해 채택한 스타 시스템과 장르의
확장 등에 초점을 맞춘다. 제 6 장에서는 주변 문화였던 재즈가 국가 이데올로기와
업에 의해 주류 문화로 편입되고 결국 소수자적 성격을 상실하게 되는 과정
을 추적할 것이다. 제 7 장에서는 1920~1930년대 미국의 스포츠가 자본주의의 발달
에 따라 모습을 변화시켜 가는 과정을 정리할 것이다. 생활 스포츠와 프로페셔널
스포츠의 발전이 노동 과정과 어떻게 맞물려 있으며 새로운 주체와 육체적 감수성
의 형성을 어떻게 주도했는지를 비판적으로 따져 보고자 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전체적인 논의 과정에서는 개별 대중문화 장르의 발전을
독자적으로 이야기하는 방식 대신에 미국 사회의 물적 변화, 국제 관계
?
그리고 일상생활의 변화를 문맥으로 해서 각 장르들이 변화하고 관련 맺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었다. 편의적인 구분에도 불구하고 각 장르는 분명 매우 밀접하게 상호
가로지르고 있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이러한 미국 대중문화의 출현과 발전, 사회적
효과 등에 대한 분석이 당대의 한국사회 대중문화를 이해함에 있어 과연 어떠한 통
찰력을 제공할 것인지에 관해 잠시 논의해 볼 것이다. 타자를 살펴보는 것은 무엇
보다 동일자를 알고자 하는 욕망에서 출발하며, 특히 미국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한
국문화를 이해함에 있어 일종의 필수
된다. 이 저서도 궁극적으로는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를 되살려 글쓰기 할 계기가 될 때 비로소 제대로의 의미를 다할
것이다.
1920년대의 미국은 흔히 ‘재즈 시대(the jazz age)’로 기억되며, 온갖 기묘한
것들로 법석을 떤 미국 역사상 최고의 ‘향략의 시대’로 일컬어진다. 그리하여
바로 앞선 1차 세계대전이나 1930년대 대공황의 암울함과는 크게 비교된다. ‘재
즈 시대’는 이후 미국 대중문화의 성격 규정에 지대한 역할을 한 시기로 알려진다
.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에 대중문화나 문화산업이 할 수 있는 역할이 굳혀진 시기
하다. 이러한 시기적 중요도에 비춰 볼 때 당시 대중문화에 대한 논의는 별
로 많지 않다. 미국 문화사의 경우에도 그러하거니와, 대중문화 연구에 있어서도
1920년대의 문화적 성격 파악은 두고라도 구체적인 자료 수집조차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은 실정이다. 1930년대나 1950년대 미국의 대중 문화적 삶에 대해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진 것과 크게 차이가 난다.
1920년대라는 특정 시기 미국사회의 대중문화를 논함에 있어 외부 연구자들이 접
하는 어려움은 대단히 크다. 우선 1920년대라는 시대를 다른 글쓰기를 통해 간접적
으로 들여?
밖에 없다는 점이다. 미리 쓰여진 텍스트에 담긴 사관이나 이념
에 대한 해석으로 인해 왜곡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한계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역사적 경험을 전혀 달리하는 외부에서 미국사회의 내재적 흐름을 일관성 있게 간
파하기란 결코 만만치 않는 작업이다. 즉, 미국과 미국 대중문화 역사에 대한 일관
된 시각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유럽 중심의 제 3 세계 타
자에 대한 식민지적 관찰 기록은 무수하게 많다. 그러나 대상화된 주변부에서 서구
의 역사를 미세하게 기록하고자 한 주체적 노력은 매우 드물?
매?서양 ‘바
라보기’는 많은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 듯하지만 실제로는 이루어진 것이 별로 없
다. 국내의 경우 미국의 근·현대사에 대해 몇 권의 텍스트만 존재할 따름이며, 그
마저도 오래된 번역서나 개론적 수준의 교재에 그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해준
다. 최근 주변부의 정체성 회복과 더불어 서구(역사)성에 대한 비판적 되쓰기(writ-
e back)와 되읽기(read back) 작업이 시도되는 점은 다행스런 일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점에 유의하면서 지금까지 인지적 경계, 학술적 탐사 필요성을 넘어 위치
해 온 1920년대 미국이라는 ?
ㅀ彭@?정리하는 것이 본 장의 목적이다. 대
중문화 현상에 접근하기에 앞서 1920년대라는 미국의 사회구성체 전반에 걸친 변화
를 다루고자 한다. 정치적으로 보수 공화주의 정치의 부활, 경제적으로 대파국에
앞선 경제적 풍요, 그리고 사회적으로 도시화와 소비 대중화, 인종주의의 득세와
같은 변화들이 이른바 ‘새로운 시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정리해 볼 것이
다. 이와 함께 문화적 측면에 있어서는 대중문화의 본격적 등장과 전세계적 팽창의
과정을 따라잡고자 한다. 바로 이러한 사회내 다양한 심급들이 상호 결정적 과정?
면서 1920년대 대중문화 현상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하여
본 장이 의미를 갖는다면 시·공간적 특수성의 효과로서 대중문화를 파악하고자
하는 글 전체의 밑그림에 해당한다는 점이며, 라디오와 광고 등 개별 대중문화 장
르를 기술함에 있어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정치 및 경제, 사회, 문
화적 맥락에 대한 지도그리기 작업을 시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대중문화
현상 기술의 깊이 없음을 본 연구에서는 최대한 피하고자 한다.
1. 공화주의 정치의 부활
1920년대에 들면서 미국은 정치적으?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위대한 국
가(National Greatness)’ 건설과 ‘만민의 자유(Liberty for All Men)’의 기치를
내밀었던 윌슨(Wilson) 민주당 정권이 모든 이의 예상과 달리 퇴진하게 된 것이다.
1차 세계 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윌슨은 야심에 찬 계획을 수립했다. 앵글로 색슨의
문화적 우월성을 앞세우면서 유럽과 미국 사이의 협조 체제를 근간으로 한 새로운
국제질서 수립을 구상했던 것이다. 사실 윌슨 행정부는 국제연맹(League of Natio-
ns)을 국제적 테러와 폭정, 전쟁을 종식시키고 이른바 ‘보편적 정의’를 실현할
수 ?
?없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이 기획들은 예상치 못했던 강력
한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국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상당한 반발을 사게 된 것
이다.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한 직접적인 캠페인과 개인적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러
한 계획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결국 윌슨은 정권에서 퇴진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윌슨의 선거 패배는 당시에는 거의 누구도 상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미 역사가인 앙드레 모로아(A. Maurois)는 이 사건을 두고 “셰익스피어
라도 감히 상상치 못했을 비극”이라고 적고 있다.1)
사
년의 대통령 선거는 윌슨 민주당정권 반대와 평화조약 반대, 그리고 국
제연맹 참여 반대를 위한 투표라는 3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의 대다수
유권자들은 유럽의 분쟁에 미국이 개입하게 된 것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
었다. 선거운동 과정에 불거져 나온 여러 캠페인을 통해 미국의 개입이 마치 소수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한 것처럼 알려졌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전쟁 이전의 안정된
생활로 빨리 돌아가고자 하는 대중의 심리가 짙게 깔려 있기도 했다. 아무튼 네브
라스카주의 조지 노리스(G. W. Norris)를 비롯하여 라 폴
. La Follett), 비
버리지(A. J. Beveridge)와 같은 공화당 출신의 정치인들은 이런 국민적 정서에 기
초하여 윌슨의 국제주의적(internationalist) 입장에 정면으로 반발하였다. 이들은
건국 초기 제퍼슨(Jeffer-son)이 제기한 공화정적 비젼을 피력하였다. 즉, 미국이
유럽으로부터 독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모범적인 대중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보다 주력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결국 이들의 고립주의적(isolationist)
주장이 1920년 대통령 선거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으면서 보수 공화당의 하딩(W. G.
Harding) 정권이 전체
의 61%라는 압도적 승리를 얻고 출발한다.
하딩의 당선은 쿨리지(C. Coolidge)2)와 후버(H. C. Hoover)
로3) 이어지는 공화당 정권의 ‘새로운 시기(new era)’를 알리는 전조가 된다.
19세기 말의 맥킨리(McKinley) 정권에 비교될 정도로 매우 보수적인 정치를 일관
되게 추구하였으며, 이들의 정치적 능력에 대해서는 후기 역사가들 사이에서 부정
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1920년대 미국의 정치사가 정부 고위직을 차지한 ‘오하
이오 갱(Ohio Gang)’에 의한 조직적인 부정 부패의 시기로 기록된다는 점에서도
그 무능함을 엿볼 수 있다
?1920년대 미 공화당 정권은 이전 윌슨 정권의
국제주의와 반동적 분리주의를 적절하게 결합시킨 이른바 ‘독립적 국제주의(inde-
pendent internationalism)’의 외교 정책을 고수하였다. 국제적 사건에 대한 직접
적인 정부 개입에 반대하면서 윌슨 이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1890년대의 옛
공화적 질서로 미국 사회를 복귀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정치적인
의미에서 1920년대 ‘새로운 시기’의 도래는 복고적 질서 회복의 기획에 다름 아
니었다.
한편 경제적 분야에 있어 1920년대의 공화당 정권은 대기업을 위주?
우 보
수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높은 관세를 중심으로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정책을 택
하였으며, 부의 집중이나 기업 독점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에 반해 노동자 계급과 노조 활동에 대해서는 매우 비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친자본·반노조주의적 정책은 1920년대 중반까지 경제적 풍요가
계속될 때는 어느 정도 성공한 듯이 보였다. 그렇지만 1929년에 경제적 위기가 불
어닥치게 되면서 공화당 정부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는 공화당 정권의 과거 지향적 정치
가 위주의 정책으로 인해 당시의 사회,
경제적 요구에 제대로 맞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강하게 대두된다. 요컨
대 1920년대 공화당 정권은 이념적으로는 보수적이었으나, 효과적인 정책 부재로
인해 경제적 풍요를 오래 지속시키지 못하였으며 결국 경제적 부패와 무능력의 오
점만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시민사회의 차원에서 볼 때도 1920년대는 보수적 경향이 거셌던 시대로 파악된다.
특히 남부의 농촌과 소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백인 인종차별주의 집단인 KKK(Ku Klu-
x Klan)의 위력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 집단은 극단적인
? 반가톨릭, 반이
민적 입장을 취하면서, 종교적으로 기독교 근본주의를 내세웠다. 이 인종차별주의
집단은 19세기의 프로테스탄적 가치를 당시 공화당 정권의 이념과 접합시키면서
그 위력을 더욱 높여 갔다. 그리하여 1922년과 1925년 사이에 미국 역사상 유래
없을 정도로 ‘증오집단(hate organization)’이 농촌과 소도시에 조직적으로 자
리잡게 되었고, 국내 정치의 주된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KKK는 1925년 이후 지
도부의 스캔들로 인해 그 세력이 급속히 쇠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는 북부 도심의 빈민화한 흑?
?유럽 이주민들에 대한 두려움, 이질적 이념
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적색 공포(red scare) 등으로 말미암아 보편적 회의주의와
인종적 편협성, 보수주의, 그리고 폐쇄적 지방주의 시대를 열어 놓았다. 이에 비해
진보주의 정치는 급격히 약화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1921년
국회의 진보주의자들과 농촌 블록(farm bloc)간 연대를 통해 두 개의 중요 법안이
통과되었고, CPPA(Conference for Progressive Political Ac-tion)만이 기록될 만
한 진보단체로 활동하였을 따름이다.
요컨대 1920년대 미국의 정치는 그 이전의
의와 진보주의가 쇠퇴하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자국민 중심주의와 고립주의, 보수적 공화주의 등이 부활한 것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물리적 강압에 의하지 않은, 어떤 식으로든 다수 대중의 자발적
인 동의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헤게모니 구조의 시기라고 하겠다. 이러한 정치적
맥락은 다음 장부터 살펴볼 대중문화의 다양한 생성과정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가령 백인중심적 인종주의와 흑인 재즈음악은 결코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
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문화와 정치의 이러한 관련성은 영화와 라디오
등 여타 매체
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다만 보수 공화당 정권의 패
권적 위치는 경제적 토대의 급작스런 붕괴와 이로 인한 사회적 위기의 유발, 계층
간 합의 구조의 와해로 말미암아 지속적인 안정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1929년에 이
르러 그 종지부를 찍게 된다.
2. 원더랜드의 부침
이처럼 1920년대의 미국 사회를 정치적으로 새로운 공화정의 시대라고 부른다면,
경제적으로는 최소한 1929년에 대공황이 도래하기 이전까지 번영과 팽창의 시기로
기록될 수 있다. 이른바 원더랜드의 시대가 거의 10년간 지속된 것이다. 1945년 제
2차 세?
식과 더불어 시작된 냉전시대가 그러했던 것과 거의 유사하다.
물론 1920년대 내내 모든 분야에 걸쳐 경제적 번영이 계속된 것은 아니다. 가령
1921년의 경우 실업자 수가 4백7십만 명에 이르렀으며, GNP도 전년에 비해 28%나
떨어졌다. 또한 농산물 가격의 급격한 하락으로 인해 대부분의 농촌 인구가 생산
비조차 맞출 수 없었던 것도 바로 그 해의 일이었다. 사실 1880년에 인구의 44%가
생계의 근거를 농업 분야에서 찾았던 것과 비교해 볼 때 1920년대에 이르면 그 중
요도는 26% 정도로 낮아진다. 결국 1920년대는 농업을 위주로 한 ?
사회가 서
서히 붕괴되고 대신에 상공업 중심의 도시 공동체가 삶의 근원지로 자리잡게 된 시
기가 된다. 이와 함께 섬유업이나 석탄업과 같은 농업 외 분야들도 1920년대 초까
지 상당한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면서 신흥 제조업 분야와 무역, 교통 및 운송 분야 등에서
그 이전과 비교될 수 없는 정도로 급속한 증가율을 보였다. 그리하여 산업 전반적
으로 따져 볼 때 최소한 1920년대 말 대공황이 불어닥치기 전까지를 ‘번영의 시대
’라고 부르는 데 별다른 의의가 없어 보인다. 구체적인 수치를 보면, 산업 총생?
1920년부터 1930년까지 10년 사이에 50% 정도 늘어났으며, 같은 시간 동안 국
가 총수입은 790억 불에서 880억 불로 늘어났다. 비록 1924년과 1927년에 경기가
일시적으로 하락한 것으로 기록되지만, 그 정도는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 이와 같
이 증가된 국민 총생산량과 상대적으로 안정된 물가 수준, 그리고 다양한 소비재의
급증된 생산으로 인해 1920년대 대도시의 백인주류 사회에 속한 미국인들은 그 이
전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유복한 삶을 영유할 수 있었다. 특히 은행에
약간씩 자금을 저축할 여유까지 생긴 백인 중산층
營쳄?미국은 경제적인 ‘
원더랜드(wonderland)’에 다름 아니었다.4)
앞서 간략히 언급한 바와 같이, 1920년대 미국의 경제적 부를 주도한 것은 철도
건설과 새롭게 등장한 자동차 산업이었다. 포드사의 자동차 생산대수가 1920년의
9백만 대에서 1925년에 2천만 대, 그리고 1929년에 이르러 2천6백만 대로 급격히
늘어난 것만 봐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1919년에 800만 대에 불과하던 미국내 가
정의 자동차 소유대수는 십년 후 2,300만 대를 헤아리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량
생산·대량소비의 포디즘(Fordism)적 생산 양식의 구축을
트로이트를 중심
으로 한 자동차 산업은 1929년에 미국내 총 제조업 달러 가치의 1/7을 차지하게 되
었으며, 임금 노동자의 약 7%를 고용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타이어와 가솔린, 유리
등 관련 산업에 고용된 인구까지 포함시키면 농업 분야를 제외하고 노동인구의 약
1/10에 이르는 수치였다. 그 밖에 화학과 전자제품 분야도 이 시기에 급격히 성장
하였으며, 특히 전자제품은 전기 공급 가구수의 증가에 따라 그 경제적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1912년만 하더라도 전가구의 1/6에 그쳤던 전기 공급이 1927년에 이
르면 2/3 수준까지 향상되
이다. 1920년대에 급부상하여 1929년에는 무려 8
억 4,200만 불에 이르게 되는 라디오 시장도 이러한 기간산업적 토대 없이는 불가
능하였다.
미국의 경제적 풍요 현상은 대외적인 시장 확보에 있어서도 여실히 나타났다. 상
품 수출과 자본 투자, 자사망의 확대 등에 있어 1920년대는 미국 역사상 경제적인
팽창 정도가 가장 심했던 시기로 꼽힌다.5) 예컨대 1919년에 38억 불이던 해외 직
접투자 규모가 1929년에 이르면 두 배 정도인 75억 불로 늘어났으며, 특히 유럽에
서는 미국의 ‘시장 중심적(market-oriented)’ 투자가 집중적으로
낫? 이
와 달리 남미 등 제 3 세계에 대해서는 ‘공급 중심적(supply-oriented)’ 투자 방
식을 통해 석유와 고무, 커피 등 원자재를 값싸게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이 미 정부
와 기업의 협조체제하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을 비롯하여 아시아 지역에
대해 원자재 및 완제품 시장 확보를 위한 이른바 ‘문호개방(open door)’의 노력
이 심화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요컨대 국경과 관계없는 자유로운 시장 접근(fr-
ee market access)의 원칙을 내세운 세계 시장내 미국의 패권주의적 관심은 지역별
로 약간씩 차별적인 전략을 취?
알 수 있다.
아무튼 1920년대에 이르러 미국은 석유와 자동차, 농업기계, 전자제품, 정밀기계
부문을 중심으로 국제 시장에서 유럽의 어느 국가와도 비교될 수 없는 지배적 우
위를 확보하게 된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연구 개발 및 집중적 자본 투자를 게을
리 하지 않은 미국 기업의 경쟁력과 제품의 질 확보 노력이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상황적 요인 및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도 빠트릴 수 없다.
구체적으로 말해, 1차 세계대전이후 급격히 퇴락한 유럽의 경제력과 이로 인한 유
럽의 소비 시장화, 그리고 공?
括?보호주의적 관세 정책도 미국 경제의 세
계적 팽창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간 상호 이
익성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자국 자본의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공화당
의 ‘달러 외교 정책(diplomacy of the dollar)’은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결국
1920년대 미국 자본의 대내외적인 승리는 독자적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보수화
된 국가의 정책적 후원에 크게 힘입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겠다.
자본에 대한 이와 같은 국가의 입장은 노조와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는 전혀 반대
의 방향으로 확인된
?경제적 풍요와 노동조합의 가입률이 정비례한다는 것
은 어느 정도 일반화된 사실이다. 보다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고용됨으로 인해 노
조 가입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이며, 또한 기업들도 수익 전망을 낙관하는
상태에서 굳이 노조와의 갈등을 원치 않고 따라서 많은 양보를 할 수 있기 때문이
다. 그러나 1920년대 미국의 경우에는 이와 전혀 달라, 노조 가입자 수와 노조의
영향력이 오히려 줄어들었다. 구체적으로 1920년에 약 5백만에 이르던 전체 노조
원의 수가 29년에 이르면 3백50으로 감소하게 된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년
당시 전체 노동인구의 12퍼센트가 노조에 가입했던 것과 달리 1929년에는 가입률이
고작 7퍼센트에 그치게 됨을 뜻한다.6) 1922년에 알바라마주 남자 직공의 평균 시
간당 임금이 25센트였으며, 이들은 주당 50시간 정도의 작업량을 맡았다. 철강 노
동자들과 남부 섬유 공장의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주당 70~80시간의 중노동에 시달
리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 비춰보더라도 낮은 노조 가입률은 쉽게 이해가지 않는
측면이 많다.
이에 대해서는 세 가지 정도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겠다. 우선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보?
화당 정부의 지원 하에 고용주들의 강력한 노조
통제가 이루어졌다. 1차 세계대전 종식과 더불어 미국의 대기업들은 노조가 전통적
으로 고수해 온 입장과 대치되며 노조원의 가입이 선택적인 ‘오픈-샵(open shop)?
?정책을 고집하였다. 나아가 노조의 정치적 활동(unionism)을 ‘반미국적’인 것
으로 이름 붙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매도하였다. 심지어는 채용시 고용주가 노동자
로 하여금 노조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는 과거의 이른바 ‘옐로우 독(ye-
llow dog)’ 계약방식이 불법적으로 부활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 요인으로는
한 강압적인 ‘채찍’과 더불어 기업들이 다양한 형태의 ‘당근’도 사용하였는 점
이다. 1920년대의 미국내 고용주들은 노조 활동을 무마시킬 목적으로 여러 가지 ‘
복지 자본주의(welfare capitalism)’ 프로그램을 확대시켜 나갔다. 노동자 사주제
도와 체육 프로그램의 강화, 직장내 사교 모임의 활성화, 화장실이나 락커와 같은
기본 시설의 확충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마지막 세번째로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노조에 관한 관심이 급격히 감소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경영주의 반노조
적 태도, 노조 지도자들의 유인책 부재 등이 ?
조장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1920년대의 도시 노동자들이 그 이전에 비해 월등하게 풍요로운 소비
생활을 맛볼 수 있었고, 이러한 상태에서 노조 정치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미국 자본주의의 ‘예외주의(exceptionalism)’적 신화
에 막 도시로 이주해 온 백인 노동자들이 크게 편입되었음을 뜻한다. 물론 모든 노
동자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어서, 노조에 무관심한 노동자들은 이른바 ‘회사쪽 사
람들(company man)’이라는 경멸적 이름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갈등적
양상은 자동?
滑┎?등 새로운 산업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졌으며, 부진했던
노조 활동은 10년의 세월이 흘러 1930년대 공황을 맞이하고 또한 농촌출신 노동자
들이 노사관계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고 노조에 참여하게 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요컨대 1920년대의 미국사회는 놀랄 만한 기술의 진보와 영화, 라디오, 항공 등
새로운 산업의 등장에 힘입어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를 경험하게 된다. 경제적 측
면에서는 1950년대와 비교될 정도의 체제 안정기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경제적
부는 이데올로기 지형의 보수화를 가져오고 노조 활
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후반부 후버 정권에 가면서 물가가 상승하고 특히 농민 계층의 불만이 높아지며,
30년대에 이르러서는 상태가 급변하여 경제공황을 맞이하게 된다. 20년대 초 전문
가들이 영원할 것으로 믿었던 경제적 번영이 환상처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7) 구체적으로 1929년 10월 주식시장의 붕괴로 시작된 대공황은 과거 어
느 경제 불황보다 심각하고 장기적이었으며, 1933년에 이르면 실업자의 수가 무려
1천3백~4백만에 이르게 된다. 도처에서 은행들이 파산하고 화폐의 가치가 폭락하
였으며, 수많은 공장
을 닫게 된다. 1인당 실질 소득은 1929년의 681불에서
32년에 495불로 줄어든다. 결국 20년대 초와 중엽의 “이례적 호경기는 30년대 극
심한 불경기에로 길을 닦은 것”이라는 평가가 가능해 진다.8)
3. 도시화와 인구의 재배치
앞서 간략히 언급된 바와 같이 1920년대는 새로운 산업의 발달로 인해 농촌 인구
가 도시로 대거 유입됨으로써 도시화가 급격히 이루어진 시기였다. 농촌 지역에서
지역 소도시로, 그로부터 대도시로의 이동이 전형적인 이동 경로가 된다. 그리하
여 1920년대에는 1천1백만 정도의 미국인이 농업 분야에 종?
駭摸?그 세
배 정도에 해당되는 수가 도시 임금 노동자의 신분으로 생활하였다. 구체적으로
1888년에는 농촌 인구가 71.4%였고 도시 인구는 28.1%에 그쳤다. 그러나 1920년에
이르면 전자는 43.8%로 떨어지고 후자가 오히려 56.2%로 자리 바꿈을 한다.9) 특히
뉴욕과 오대호 주변의 시카고나 디트로이트와 같은 산업 도시, 서부의 샌프란시스
코와 로스엔젤레스 등이 당시 가장 큰 성장을 기록하였다. 뉴욕에는 주로 동부와
남동부로부터, 캘리포니아에는 서부와 중서부로부터 상당수의 인구가 유입되었다.
또한 중서부 도시에는 주변 농촌
남부로부터의 유입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
러한 인구의 도시 집중은 19세기 말에 시작된 경향이 심화된 것으로, 제조업 분야
의 발달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 이전 노예제도로 악명을 떨친 남부의 전통적 농경사회로부터 북부 또는 서부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나선 아프리카계 흑인의 대량 이주사도 바로 이와 같은 1920
년대 도시화 현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거꾸로 말해 흑인의 집단 이주
현상은 앞서 지적한 정치, 경제적 맥락의 변화와 연관시킬 때 비로소 이해가 가능
하다. 구체적으로 남부의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백인 ?
, 북부의 급진적 공업
화, 이에 따른 값싼 예비 노동력의 폭발적 수요가 바로 이러한 문맥적 조건에 해당
된다. 아무튼 1910년까지만 하더라도 90%의 흑인들은 남부 혹은 그 경계에 있는 지
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단지 85만 명의 흑인들이 그 외의 지역에 살았다. 그러던
것이 1915년부터 점차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여, 1930년에 실시된 인구조사에 따르
면 북서부에만 230만 명의 흑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1920년대에만 약
75만 명의 흑인이 북부로 옮겨간 것이다. 요컨대 흑인의 삶이 남부 빈농으로부터
북부나 서부의 가난
자계급 혹은 ‘저계층(underclass)’으로 위치를 바꾼
시기가 바로 1920년대라고 하겠다.10)
이처럼 북부와 중부의 도시로 이주해 온 1920년대의 가난한 흑인들은 도심의 슬럼
(slum) 혹은 동유럽 유태인들의 거주지에서 이름을 빌린 ‘게토(ghetto)’에 집단
거주하는 수준을 넘지 못했다. 남부의 인종 차별주의적 구조를 공간적으로 변형시
킨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일종의 보이지 않는 감옥이나 푸코가 지적해낸 감시 체계
에 비유될 만큼 비참한 삶을 영위하였다. 1917년에 미 대법원이 주거지역의 구분
정책을 불법적인 것으로 판결하였
불구하고 만성적 빈곤과 범죄자들로 우굴
대는 흑인 슬럼과 풍요로운 백인 거주지역은 보이지 않는 벽으로 상호 분리되었다.
시카고와 디트로이트, 뉴욕 맨하탄 등 당시 도심의 슬럼들은 수많은 흑인 빈민들으
로 북적댔으며, 할렘(Harlem)의 경우에는 30년까지 약 20만 명에 가까운 흑인들의
거주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가정부나 웨이터, 짐꾼과 같이
백인들이 기피한 이른바 저임금의 ‘검둥이 직업(negro jobs)’에 한정되었다. 당
시 이들의 생활상에 대해 맨하탄 흑인들을 대상으로 봇짐장사를 하던 한 조선인 유
─ 제 삼자의 눈으로 ─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자유와 평등, 박애를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근대화되고 부유한 나라인 미국에
는 두 개의 사회가 존재한다. 하나는 풍요로운 물질문화로 축복받은 백인사회이고,
또 하나는 백인들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가루를 먹고 사는 흑인사회이다. … 법적
으로는 자유가 주어졌지만 흑인들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노예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이것이 미국사회의 잘못인지 아니면 흑인들 스스로의 탓인지
알 수가 없다”11)
그러나 동시에 주목할 점은 바로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
의 흑인들은 매우
독특한 문화적 공간을 형성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특히 뉴욕의 경우에는 같은 시기
에 이른바 ‘할렘 르네상스(the Harlem Renaissance)’로 불리우는 아프리카계 문
화의 융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두 보이스(W. E. B. Du Bois)와 가비(Gurvey)와 같
은 급진적인 흑인 운동가, 전국 유색민 지위 향상협회 NAACP(the National Associa-
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와 같은 개량주의적 단체 등의 등장
으로 인해 독자적인 흑인 정치의 토대가 갖추어진 것도 척박한 게토내에서 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
봉?경우에는 흑인을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 아닌
징후”로서 파악할 것을 주장하면서, 인종(주의)의 문제를 20세기 미국의 가장 심
각한 과제로 강조하였다.12) 한편 두 보이스의 사회주의적인 노선과 NAACP의 개량
적 입장과 달리 가비의 경우에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자(Back-to-Africa)’라는 분
리주의적 흑인 민족주의 메시지를 갖고 게토 빈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
사하였다. 미국이 인종을 축으로 해서 두 개의 전혀 별개의 사회로 쪼개지기 시작
한 것이 바로 1920년대라고 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정확한 통찰이 된?
울러 1920년대는 미 근대사에 있어 맹목적 애국심에 의해 이민의 수를 제한하고
자 한 ‘개혁적’(보다 정확하게는 인종주의적) 움직임이 강했던 시기로 기억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를 비롯해 남부와 동부 유럽으로부터 새로운 이민이 유
입되면서 그 수를 줄여야 한다는 불만이 전 사회적으로 증가하였다. 사실 전쟁 이
전과 전쟁 동안에는 기존의 많은 노동 인구들이 전쟁터로 차출되면서 저임금에 쉽
게 활용 가능한 자원으로서 이민이 전 산업분야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전후에도
기업의 입장에서는 노조에 대한 효과적 분산 통
ide and conquer) 수단으로
최대한의 인력 집단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현장으로 되돌아온 백인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이민의 유입은 생계를 위협하는 적으로 받아 들여지게 된다.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해결해 나갈 유연한 노동 정치를 채 정립시
키지 못한 상태에서, 많은 백인 노조와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듯한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모든 탓을 돌리고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시하였다. 세인트 루
이스나 시카고 등지에서 발생한 인종 폭동(race riots)은 그 대표적 사례에 불과하
다.
비과학적인
鳴탭漫?그랜트(M. Grant) 같은 이들은 라틴계나 슬라브계를
인종적으로 하등의 집단이라고 규정해 버렸다. 이들이 앵글로 색슨 중심의 ‘미국
적 삶(the American life)’을 위협하고 있다고 터무니 없이 공론화시키기도 했다.
이른바 ‘열등 종족’의 유입이 없었다면 건국 초 소도시를 중심으로 한 전원식 미
국생활이 유지됐을거라고 향수를 자극하였다. 현재를 ‘타락’의 상태로 규정하면
서 그 원인을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돌린 것이다. 더 나아가 몇몇 극단적 인종주의
자들은 인구 형태의 변화가 자연환경의 파손을 가져온다는 억설을
?했다. 결
국 볼셰비즘과 도덕 기준의 변화, 기독교적 윤리관의 후퇴, 금주법 실패로 인한 사
회 폭력의 증가 등이 모두 외국 이민의 책임으로 돌려졌다.13) 이러한 인종주의적
정치로부터 중국과 조선, 일본 등지로부터 건너온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의 소수 아
시아 이민자들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14) 결국 외국인 혐오증과 인종주의적
정서는 1924년 존슨-리드법(The Johnson-Reed Act)에 의해 법령으로 발효되었으며
, 앵글로 색슨족을 정점으로 한 국가별 쿼터제가 채택되었다. 물론 노동조합도 자
신의 직업적 안정을 위해 이러한
이민제도를 적극 지지하였다.
4. 여가의 확대와 여성의 진출
새로운 이민자 그룹 및 흑인사회의 이러한 수탈적 경험과 전혀 무관하게 1920년대
미국 백인 주류사회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이전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풍
요로움을 즐길 수 있었다. 경제적 풍요의 효과는 사회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동시
에 나타났다. 그중 무엇보다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자동차의 증가 및 기계화에 따
른 노동시간의 단축 등으로 인한 여가생활의 확대였다. 1929년에 가면 자동차와 사
람이 1대 6의 비율에 육박하였으며, 새롭게 건설된 고속도
에는 각종 빌보
도와 간이 레스토랑, 주유소들이 가득 들어서는 새로운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공간
개념의 변화 및 대중 소비사회로의 본격적 진입을 가리키는 징후가 된다고 하겠다.
구체적으로 1920년대에는 수천의 가족들이 차량을 이용하여 장거리 여름 휴가여행
을 떠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자동차의 붐은 도시 팽창이라는 요인과 더불어 중산
층의 교외 이주 현상을 가속화시킨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와 더불어 자동차가 가져
온 당시의 가장 두드러진 효과 중 하나로 학교 교육의 변화를 들 수 있다. 통학버
스로 인해 그 이전까지
ㅏ【?그쳐야 했던 농촌의 어린이들도 도시 어린이
들과 별반 차이 없는 수준의 학교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자동차는 이처럼 도시와
농촌 생활의 구분을 급속하게 무너뜨려 나갔다. 물론 완전한 동질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골 농부의 삶이 도시 거주자의 그것과 별로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거
리 개념이 변화되었다. 요컨대 운송 및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대중화는 당시 대중들
에게 전혀 다른 시·공간 개념을 제공하였으며, 일상생활의 가치 기준에도 많은 영
향을 미치게 되었다. 즉, 가족과 공동체에 가치의 중심을 두었던 삶의 질?
노동현장에서 벗어나 얼마나 여유롭게 개인적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스스로의 개발
에 더 신경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1920년대 미국 주류사회의 풍요로움은 고등학교 학생수의 급상승에서 단적으로 드
러난다. 1920년에 220만이던 고등학교의 재학생 수는 1930년에 이르면 거의 두 배
의 숫자로 늘어나게 된다. 같은 해 14세에서 18세 사이 인구의 약 1/2이 학교에 적
을 두고 있었으며, 이는 부모의 재정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청
소년들이 과거와 달리 노동현장으로부터 해방되어 학교로 위치 이?
?된 것
은 경제적 조건이 향상되고 이들의 노동을 반대할 정도로 사회적 인식이 향상되었
음을 뜻한다. 아무튼 1929년에 이르러 대부분의 도시 청소년들이 고등학교를 다니
고 있었으며, 백인 중산층과 노동계층 공통적으로 고등학교 학력이 보편적인 것으
로 자리잡게 되었다. 1920년대에는 미국내 대학 또한 크게 늘어나게 된다. 1920년
에 약 60만 명에 그쳤던 대학생의 수가 1930년에는 두 배로 늘어났으며, 각종 직업
분야와 사범대, 엔지니어링, 경영학 분야 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여성의 사?
㎞?급격하게 변화한
시기도 바로 1920년대부터이다. 우선 여성 노동자의 수가 1920년의 840만 명에서
1930년에는 1천만 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다만 전체 여성 중 직업을 가진 여성의
비율에 있어서는 큰 변화가 없는 셈으로, 1920년의 23.3%에서 1930년의 24.3%로
고작 1%가 늘어난 셈이다. 1910년의 수치가 25.2%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여성의
취업 비율은 오히려 줄어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직종에 있어서도 속기사나 타자
원, 백화점 판매원 등의 한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 수
치와 상관없이 여성의 일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경제의 활황과 전후 향락
적 사회 분위기는 여성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쳐 일부 대도시 중상층 여성들의 경우
공개적으로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고 대중문화 공연장을 자주 찾는 모습을 보
이기도 하였다. 특히 노동계급 출신의 여자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극장을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문화를 형성해 가는 경향을 보였는 데, 종교단체와 관공서에서는 이를
일탈로 파악하고 규율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정치적 차원에서도 여성의 달라진 위상은 쉽게 확인된다. 사실 1920년대에는 여성
이 중요한 사회·정치적 ?
자리잡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1920년
에 테네시주가 36번째로 수정헌법 제19조를 인준시킴으로써, 성차에 근거하여 투표
권을 제한하는 것이 불법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여성들의
정치 참여는 전국적인 참정권 확보 이후 오히려 크게 후퇴하는 양상을 보였다. 성
차에 근거하여 자신들을 차별적 집단으로 파악했던 이전 ‘여성 참정권 운동(suffr-
age movement)’의 집단적 유대감이 한마디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1920년대에 들어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여성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으며, 심지어 투
?
여하는 여성의 수도 현저하게 줄었다. 급진적 페미니즘을 표방한 전국 여성당 NWP
(the National Women? Party)을 제외하고 어떠한 이념적 운동을 표방한 집단도 없
었으며, 여성당과 타집단간에는 끊임없는 마찰이 표출되었다. 요컨대 여성의 입장
에서 1920년대는 경제적, 사회 문화적, 정치적으로는 기대와 달리 큰 분수령이 될
수 없었지만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상당한 변화를 가져온 시기로 기억될 것이다.15
)
5. 대중문화의 성장과 문화 팽창주의
대중문화의 급성장은 문화적 차원에서 1920년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꼽힌?
이러한 문화의 세속화 경향에 대한 고급취향 집단의 노골적 거부감과 소외
감으로 대표될 수도 있겠다. 해롤드 스턴스(H. Sterns)가 그 대표적인 예로, 그의
책 《미국의 문명》(Civilization in the United States)에 기고한 30여 명의 작
가들은 한결같이 당시 미국의 문화적 현실에 대해 비관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미국
은 더 이상 르네상스가 가능하지 않은 곳이고, 거부감이 일 정도로 물질적으로 타
락했으며, 예술적으로나 지적으로 황야에 가까운 곳이라는 것이다. 독일 태생으로
부르조아적 배경을 지닌 발티모아의 신문 발행인 헨
決?멘켄(H. L. Mencken
)도 밀매된 맥주를 제외한 모든 미국적인 것을 비난하였다. “선량한 정치가란 정
직한 도둑만큼이나 기대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면서, 자유의 여신상을 바다에 빠뜨
리자는 역설을 펴기도 하였다. 유럽으로 이주한 헤밍웨이나 스코트 핏제랄드(F. S.
Fitzgerald)의 경우에도 노골적인 비난은 삼가하였으나, 당시의 지배적 가치에 대
해 부정적 입장을 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를 대표하는 극작가 유진 오닐
(E. O?eill)의 작품들도 당시 대중문화의 얄팍한 표면 아래에 있는 폭력과 폭력으
로 인한 긴장, 그?
辣?봉?문제를 일관되게 폭로하였다.
사실 1920년대의 경제적 풍요로움은 대중 일반의 고급예술에 대한 관심을 크게 고
취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미술 작품은 소
수 부르조아의 소장품으로 그 가치가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20년대에 이
르게 되면 어느 정도 경제적 부를 갖춘 도시 중산층들도 다투어 미술작품을 구입하
고자 하게 된다. 미술품을 구입하여 집안을 가꾸는 일은 자신이 지닌 문화적 취향
의 고상함 혹은 사회적 신분 상승의 징표로 받아들여졌다. 당시에 전국 각도시에
60여
見4?미술 박물관들이 들어섰다는 사실도 고급예술에 대한 사회적 관
심 (혹은 미술이 지닌 기호적, 상징적 가치)의 증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점
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미국사회의 대다수 대중들에게 고급예술은 여전히 정서적
으로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들은 일상적 접근과 소비가 훨씬 용이한 대중문화, 대
중매체와 더욱 친밀한 애정관계를 맺게 된다. 요컨대 1920년대는 대중과 대중사회,
대중문화 사이의 3자간 근친관계가 맺어지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구체적으로 1920년대에는 허스트(W. R. Hearst)류의 선정
적(sen
l)인 타블로이드판 대중신문들이 대도시의 독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
를 누리게 된다. 체인화와 소유권 통합을 통해서 신문 자본의 집중화 경향이 본격
화되었으며, 스크립 하워드(Scripps-Howard)의 등장은 전후 가장 큰 변화로 꼽을
수 있다. 그리하여 당시 11개의 일간지를 소유하고 있던 허스트(Hearst) 체인과
더불어 시장을 독점하는 현상을 낳게 되며, 센세이셔널리즘을 무기로 대중지들 사
이에 치열한 부수 경쟁이 펼쳐지게 된다. 맥파든(Macfadden)이 발간하던 뉴욕 《데
일리 그래픽》(Daily Graphic)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선정적인
막?인해 일반
에게 “데일리 포르노그래픽(Daily Pornographic)”으로 더 잘 알려질 정도였다.
단지 이러한 선정주의적 경향에 대항하여 일단의 잡지 저널리스트들이 담합하여
《더 뉴욕커》(The New Yorker)라는 소수 취향 집단을 대상으로 한 고급 잡지를
내놓게 되는 것도 바로 1920년대의 일이다. 또한 헨리 루스(Henry Luce)도 《타임
》(Time)을 내놓아 중간 취향(middle-brow) 집단의 차별적 정보 욕구에 어필하고자
하였다.
1920년대에는 신문과 더불어 라디오와 할리우드 영화가 주류 문화적인 현상으로
본격 등장하게 된다. ?
酬퓸汰湄欲?마찬가지로 라디오와 영화, 그리고 광
고주들은 모두 대중적인 취향에 어필하고, 최대의 수용층을 확보하며,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최대의 수익을 올리는 데 인식을 같이 하였다. 사실 도시 노동 대중을
표적으로 한 타블로이드 신문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라디오와 영화의 내용은 수준이
그다지 높지 못하였다. 헐리우드 제작자들이나 경영자들 사이에서조차 “영화산업
은 속옷산업과 별반 다르지 않다. 둘다 철저히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좌우된
다”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아다닐 정도였다. 결국 이윤 추구라는 경제적 동기
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이 이 시기 문화산업의 자본가들간에 확고하게 인식적 위치
를 점하게 되었다고 하겠다.16)
이처럼 급속히 발달하게 된 미국 대중문화는 1920년대를 거치면서 국내뿐만 아니
라 해외에서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특히 헐리우드 영화는 예술성과 무관
하게 스타의 세련된 복장과 뛰어난 매너리즘, 호화스런 자동차 등의 배경에 힘입어
유럽시장을 휩쓴 가장 잘 팔리는 수출 품목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1925
년도에 미국 영화는 이미 영국과 캐나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약 95%, 프랑스
시장의 70%
?남미에서는 80%를 차지하는 독점적 위치를 구축하게 된다.17)
헐리우드는 유럽에서 ‘스타 숭배’의 현상을 낳게 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닐 해
리스(N. Harris)라는 사람은 당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수백만의 관람객들은 영화배우들이 어떻게 걷고, 어떤 옷을 입으며, 어떻게 먹
고, 키스하고, 싸우고, 기도하고, 이야기하고 또 여행하는지를 보았으며, 더 나아
가 그들이 어떤 식으로 방에 들어가는지, 또 어떻게 돈을 지불하고 애도의 감정은
어떻게 표시하는지 그리고 파티석상에선 어떤 행동을 하는지 눈여겨 보았
?
와 관객 사이의 영향은 상호적이어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기가 어려웠던 반면,
세부적인 사항은 놀랍고도 황홀감을 불러일으킬 만하였다. 수많은 외국인들은 이
것이 바로 미국인들의 행동방식이며 또한 그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라고
들었다.”18)
사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고급영화에 식상한 많은 유럽인들은 화려한 스타
가 등장하고 엄청난 제작비가 투자되는 할리우드의 상품을 훨씬 더 선호하게 된다.
이들에게 있어 로망스와 희극, 미스터리물, 서부극, 멜로드라마 등 장르에 관계없
이 할리우드 영화는 전형적
이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일
종의 선전 켐페인으로 작동하게 된다. 유럽인들과 그 밖의 대중들에게 이른바 ‘미
국의 꿈(Amercian Dream)’을 파는 신비로운 ‘꿈의 궁전’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
다.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재즈 음악과 사교댄스, 뮤지컬 코미디 등 새로운 형태의
미국 대중오락도 1920년대에 유럽 등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그리고 이
러한 미국 대중문화의 세계적인 확산 이면에는 막 갖추어진 케이블망과 무선 전신,
뉴스 통신사 등 커뮤니케이션 하부구조와 더불어 매체산업의 철저한 사적 소유
?熾幣?국가(promotional state)’가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20년대에 등장한 공화당 정부는 영화의 해외 수출에
상당한 정책적 비중을 두었다. 1926년에 후버 정권은 상무성 산하에 ‘극영화 특별
국’이라는 별도의 상설 부서를 설치할 정도였다. 해외시장 확보에서 확인된 바 있
는 자본과 국가의 상호적 관계가 대중문화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진
행되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이와 같은 미국의 적극적 문화 팽창 정책은 유럽 제
국가들로부터 상당한 반발을 가져오게 된다. 유럽의 정치가
ㅈ??湧?헐리
우드 영화가 ‘유럽적 문화 전통’과 ‘민족적 정체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반대하
고 끊임없는 비난을 퍼부었다. 독일과 영국과 같은 국가들은 심지어 쿼터제 등을
도입해서라도 ‘싸구려’ 대중문화의 침입을 막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은 문
화와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free flow of information)’이라는 원칙을 고집한
미국과 심각한 외교적 마찰을 낳기도 하였다. 미국 중심의 문화제국주의적 구조와
이로 인한 국가간 갈등 양상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제 3 세계와의 관계로 전이되기
에 앞서 1920년대에 벌써 고급
고집해 온 유럽에서 이미 본격화되었다고 하
겠다.
요컨대 문화적인 측면에서 1920년대는 대중매체와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미국사
회내에 자리잡게 된 시기로 요약될 수 있다. 19세기 말부터 활성화된 선정주의적
인쇄매체의 바톤을 이어받아 라디오와 영화 등 전혀 새로운 매체와 그 내용물이
도심의 노동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으며, 단순 오락거리가 아닌 대중적 삶
의 양식의 일부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이제 대중문화를 미국사회와 떼 놓고 설명하
기 어려울 정도로 양자간 관계가 밀접히 맞물리게 된 것이다. 물론 당시 대중매
陸衫???내용은 혁신적 메시지가 크게 배제된 주로 가볍고 체제지향적인 것
들이었으며, 철저하게 최대 이윤 축적을 고려한 자본주의적 양식을 통해 생산·유
통되었다. 결국 비판적 관점에서 따져 볼 때 상품 및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한 것
으로 유추 가능하며, 그 효과는 비단 국내뿐만 아니라 유럽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그대로 확인되었다. 그리하여 패권적 할리우드 문화산업과 그 배후의 국가의 지원
,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미국 안팎의 부르조아적 고급취향과의 마찰, 바로 이것이
1920년대 문화정치적 지형의 개관으로 그려질 수
.
이러한 점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 1920년대는 미국이 자본주의적 대중사회로
본격적으로 이행된 시기가 된다. 일상적 삶의 방식이 그 이전과 크게 달라졌고, 시
·공간적 개념을 달리할 만큼 교통과 통신의 인프라가 구축되기도 하였다. 경제적
호황은 적극적인 대량 소비를 필요로 하였고, 대중은 이에 맞추어 자신들의 삶의
가치를 얼마나 즐길 수 있느냐는 개인적인 것에 두는 경향이 높아졌다. 이로 말미
암아 그 이전의 공동체 가치나 가족 중심적 생활방식에 급격한 변화가 오게 된다.
한편 보편적 교육 기회의 확대로 인해 ?
린?급격히 늘어났으며, 이는 자본
주의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인간형의 양산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치적 환경 또한
국제적, 보편주의적 시각보다는 미국 중심적 가치를 내세운 보수화된 분위기로 일
관했다. 결국 1920년대의 대중문화는 바로 이러한 새로운 ‘재즈 시대’의 산물인
동시에, 재즈 시대를 이끌어간 증폭기 역할을 담당했다. 급속하게 바뀐 사회적 조
건 하에서 개별 대중문화 장르가 과연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것이 다시
본격적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새로운 주체 및 삶의 방식을 어떻게 형성해 나가는지
를 살펴보
이 다음의 장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윌리엄 레이스(W. Leiss)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광고를 두고 “사물간의 그리고
사물에 관한 특권을 부여받은 담론”이라고 정의 내린 바 있다.1) 이와 비슷하게
레이몬드 윌리암스(R. Willi-ams)는 광고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들어서는 시
점에 새롭게 등장한 ‘독점(법인)’ 자본주의의 특성과 연관을 맺고 있는 일종의
시장 통제제도라고 지적하였다.2) 사실 20세기에 접어들어 대량생산 체제가 본격
적으로 가동되면서 양산된 상품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된 광고는
현대사회?
영향력 있는 사회적 기제 중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광고는 더
이상 상품의 단순 판매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한 대중매체를 통해 쏟아져
나오면서 대중의 일상생활과 의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화 담론적 기
제로 자리매김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겠다.
이처럼 광고를 사회적 제도의 하나로 연구하기 시작한 데이비드 포터(D. Potter)
는 광고가 미국에서 라디오와 신문의 역할을 크게 변화시켰음을 지적한다. 시장에
존재하는 소비자의 수요와 생산자의 공급 사이의 단순한 연결에서 넘어서 수요 자
체를 ?
창출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주장한다.3) 심지어 광고가 각 개인
을 기만할 뿐만 아니라 광고의 개념에 순응토록 함으로써 대중의 생활을 특정 방향
을 끌어가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소수 자본가의 사회 통제수단 가운데 하나라고 하
는 주장까지 펴기도 했다. 분명 광고는 그의 주장처럼 단순히 수요를 창출하는 데
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광고는 생산자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수요를 일정한 방향으
로 조작·조정하는 역할까지 맡는다.4) 뿐만 아니라 광고는 수요를 조절하고 조장
함과 동시에 그 수요의 행위 주체들까지도 조절하고 형성
岵?발휘한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의미가 크게 상승한 광고의 역할에 대해 장 보드리야르
는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다. 그는 “자본이 노동력으로서의 노예뿐만 아니라 소비
자로서의 개인을 생산한다”고 지적한다. 이때 생산되는 개인을 가리켜 그는 “새
로운 유형의 노예, 곧 소비력으로서의 개인”5)이라고 간파하였다.
이 장에서는 1920년과 1930년 사이에 광고가 미국 사회 내에서 상품 정보 전달의
기능을 넘어서 새로운 소비 주체를 만들어내는 기획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밝혀보
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당시의 미국
장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
다. 여기서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의 경제적 성장과 이로 인한 노동자들
의 삶의 변화, 즉 노동자들이 단순 생산자에서 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로 변모하는
과정이다. 다음은 광고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서술한 후, 1920년대와 1930년대 광고
시장의 현황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이어 광고가 주체들을 형성해내고 사회적 관
계를 변화시키는 기능을 수행하는 방식을 가족 구성원의 역할 변화라는 문제와 관
련시켜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당시의 광고 이미지들이 주체들의 욕망
을 구성
방식을 실제 사례들을 통해 고찰하면서 광고가 주체를 호명하는 방
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볼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1920~1930년대 미국의
광고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대량생산 체제내에서 소비 주체를 구성해내는 이데올
로기적 기제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1. 광고시장의 본격적 형성
현대적 광고를 구축하는 기반이 광고를 필요로 하는 상품과 그 시장의 형성이라고
볼 때, 1920년대의 미국은 바로 이러한 토대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어 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광고의 기본적 제도 형태, 다시 말해 광고?
대행사, 대중매
체간 관계, 대행사 수수료 제도의 공식화, 대중매체의 광고수입 의존도 상승과 같
은 현상은 사실 1920년 이전에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광고가 팽창하는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상품의 소비 주체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생산해내는 역할까
지 본격적으로 담당하기 시작하는 것은 틀림없이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였다.
이 시기의 미국에서는 대량생산 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
하였다. 동시에 소비가 미덕으로 치장될 정도로 임금이 증가하고 노동시간이 줄어
들었으며, 이에 따라 노동자
다 여유로운 소비 활동이 가능해지는 등 자본주
의의
꽃이라고 불리우는 광고의 본격적 발달을 위한 경제적, 정신적 토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 경제 성장의 이중적 모습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차 세계대전 이후에 힘들었던 노동 문제가 다소간 완화되
고 노동조합들이 급격히 무기력해지자 기업들은 아무런 외풍 없이 탄탄대로를 달려
가기 시작했다. 그런 맥락에서 1920년대의 미국 사회는 기업인들이 최고의 사회적
지위를 군림하는 시절이 된다. 기업과 기업가들이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물질
적 팽창이 모든 가치의 기
이 시기의 사회적 분위기를 사뮤엘 모리슨(S.
E. Morison)은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 대부분은 소위 그들의 기업적 측면의 통찰력 때문에 선출되었으
며, 그들을 대변하는 인물들은 실업가들이었다. 대학교에서는 매년 은행가와 기업
가들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하였다. 심지어는 성직자들과 교사들까지도 실업가처럼
보이려 노력했으며, 교회와 학교의 가르침은 기업인들의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로
타리클럽의 이상에 의해 통제되었다. 모든 대학들은 학생들에게 직업교육을 시키고
학교의 재정적 보상을 ?
위하여 황급히 경영대학을 세웠다. 사회적 처신은
회사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졌고 예술조차 상업적으로 바뀌었으며, 문학은 광고의
한 분야가 되었다. 실용주의는 물질적인 성공의 철학으로 가치가 하락하였다.”6)
여기에다 금주법의 실시는 노동자들의 유휴 노동력을 더욱 생산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확실한 기제로 작용함으로써 1920년대의 미국 기업가들이 이윤 극대화의 목
표를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사실 1918년에는 이미 전 국민의 2/
3가 금주법이 실시되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대중들은 금주법이 “위대한
?운동”이자 자신의 건강을 보호할 수단이며, 가정의 고결성을 “악마와 같은 술
의 파괴”로부터 보존하는 수단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았다. 그러나 이처럼 도덕
적, 사회적 이상주의를 강제적으로 부과한 금주법이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가들의
통제적 의도를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대량 생산 메커니
즘에서 노동자들의 금욕적인 생활은 생산 효율성의 확보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
었다. 기업가들은 금주가 기업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신념하에 노동자들로 하여금
술을 마시지 않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
느만? 이를 통해서 생산량의
확대와 이익의 증가를 기대하였다. 요컨대 금주법의 배후에는 자본가 계급의 빈틈
없는 노림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흐름에 힘을 얹어준 것이 국가였다. 경제의 안정과 평온을 강조했던 하딩 대
통령의 후임자인 쿨리지는 “미국이 견지해야 할 본분은 기업(the business of the
United States is business)”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천명하였다. 하딩과 쿨리지,
후버로 이어지는 공화당 정권은 일관되게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지대한 관심
을 보였으며, 이러한 정책들은 중산층과 기업가들로부터 큰 인
었다. 이러한
정책의 시행으로 인해 경제 성장은 그 이전 시대와 비교해볼 때 상당한 증가를 보
였다. 1909년에 270억 달러에 지나지 않던 총생산액이 1922년에는 660억 달러로,
그리고 1929년에 이르렀을 때에는 820억 달러 수준으로 증가하였다. 그 동안의 인
구 증가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국민 일인당 부(富)는 20세기의 처음 30년 동안 1,20
0달러에서 2,977달러로 두배 이상 증가하였으며, 국가의 부도 880억 달러에서 3,61
0억 달러로 무려 4배나 성장하였다. 결론적으로 미국 총 재화의 75% 이상의 실질적
성장이 1909년과 1929년 사이
난 셈이다.7) 그러나 이런 급속한 성장은 쉽게
치유될 수 없는 그늘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물론 부의 편
중과 시장 독점의 문제였다.
사실 1920년대 말엽에 이르러 화려했던 1920년대의 뒤편에 드리워진 공황의 조짐
이 전면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 원인 중 가장 먼저 꼽힐 수 있는 것이
바로 생산과 소비의 불균등 현상이었고 또한 부의 편중화 현상이었다. 이는 특히
농민들에게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1929년의 통계에 의하면, 도시 소비자들은
농촌에서 88억 달러에 사들였던 식료품을 구입하기 ?
?세 배에 이르는 210
억 달러를 지불해야만 했다. 또한 농장에서 농부들에게 1톤당 6달러에 사들인 양배
추는 중간 도매상인의 손을 거치면서 가게에서는 무려 200달러에 판매되고 있었다.
수치상으로도 나타나듯이 중간 단계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모두 중간 판매상들의 몫
으로 돌아갔다. 반면에 농부들의 경우에는 신발 한 켤레를 사기 위해 송아지 한 마
리를 팔고 받은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 한편 도시에서도 1920년대
초까지는 전체 6가구 중 1가구만이 자동차를 소유했고, 전체 가구의 20%만이 고정
된 욕실 또는 전기
하였으며, 전화를 소유한 가정은 고작 10%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빈부의 격차가 결국 심각한 사회 문제로 터져나오게 된 것이다.
농민과 대다수 노동자들의 빈곤한 생활과 대조적으로 행정 관리들과 부르조아 계
급은 놀라울 정도로 저축을 하고 있었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 전체 저축의 2/3를
1년에 1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가구가 보유하고 있었다. 소수에게 집중된
이런 엄청난 자본으로 인해 제조업자들은 이들의 구매력을 충족 혹은 조장할 수
있는 사치품들과 새로운 고안품들을 계속해서 시장에 내 놓았다. 이와 함께 기업
?
鳧?충분치 않은 중·하층 소비자들에게는 비싼 자동차와 세탁기, 라디오,
노동 절약형 가정용품들을 할부로 구입토록 유혹하였으며, 그 역할을 바로 광고가
맡았다. 결국 1920년대에는 가난한 대중이 부르조아적 사치품을 할부 구입하는 일
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행을 이루었으며, 이른바 ‘모범시민’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적어도 하나 이상의 사치품들을 할부로 구입하지 않은 가정이 없을 지경이 되
었다. 이런 까닭에 1912년 이후에 가구와 의복, 일반 가전제품의 판매량은 3배나
증가했으며, 그중 할부 구매가 차지하는 비중도 엄?
늘어났다.8) 이런 점에
서 볼 때 당시 상황에 대한 다음과 같은 유감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노동자를 수익성 있는 고객으로 바꾸어 놓은 비결은 ‘대기업’인가, 낭비하는
동작과 노력의 중복을 효과적으로 연구한 경제와 표준인가, 또는 기계류, 포드산
트랙터, 타이프라이터, 전화에 대한 한층 더 높은 믿음인가 또는 인색하지 않은
임금인가? 아니면 그것은 아직 개간되지 않은 천연자원의 착취이며, 또 전쟁에 시
달린 유럽을 이용한 폭리의 취득인가?”9)
이 시기의 미국 경제에서 부의 편중에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로 대두한
?
주의의 승리와 이에 따른 기업내 경영통제의 발달이었다. 1929년 통계에 따르면,
그 해 총 87억4천만 달러의 순이익을 내면서 미국내에서 활발하게 생산활동을 한
주식회사의 수는 대략 456,000개에 달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총액 가운데 거의
70억 달러, 퍼센트로 따져볼 때 거의 60% 이상을 1,000여 개의 주식회사들이 벌어
들인 것이었다. 요컨대 미국내 전체 회사의 약 0.3%에 해당하는 기업들이 미국 전
체 회사 수입의 4/5를 긁어 모은 것이다. 특히 그중 200개의 대기업들은 전국 회사
부의 거의 50%와 전체 국가 부의 22%를 소?
羚駭?10) 이렇게 독점화된 경제
력을 바탕으로 대량생산 체제를 확립한 기업들은 이제 자신의 체제를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줄 수 있는 기반을 필요로 했다. 구체적으로 끊임없는 생산체제는 지속
적인 소비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음을 간파한 기업들은 바로 그러한 소비의 몫을
노동자들에게 떠맡기기 시작했다. 요컨대 1920년대 노동자들의 고임금 구조는 이러
한 맥락에서 보자면 일종의 당근이 되는 셈이었다.
2) 노동계급에서 소비자로의 전환
대량생산 체제가 확립되기 이전에 미국의 산업은 주로 중산층과 상류계급의 시장
에 물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면서 대량생산 체
제로 생산의 메커니즘이 변화하고 상품의 생산과 유통의 방향이 전국적 규모로 변
모함에 따라 시장은 보다 역동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전국적으로 확장된
시장과 계급 모두를 아우르지 않는다면 대량생산의 메커니즘은 기능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기업들은 물품을 구매하는 대중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서 넘어서 이
들의 소비 성향을 어떻게 대량생산 방식에 맞게 변화시키는가 하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고주들과 대행사들이 찾?
나의 방안은 이
데올로기적으로 소비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대량생산 체제에 대한 적
절한 반응으로서 이전의 절약이라는 개념 대신에 과잉을 사회적 미덕으로 부각시키
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는 이데올로기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소비의 주체인 대중들에
게 소비하고 싶은 금전적, 심리적 욕망을 심어주는 것도 필요하였다. 대량생산 시
대 소비의 문제에 직면한 기업가들과 광고주들에게 있어 긴급한 관건은 과연 대중
들에게 상품을 소비할 수 있는 재정적 능력 외에 심리적인 욕망을 어떻게 부여하는
가 하는 것이
실 소비의 확산을 위해서는 대중들에게 보다 능동적인 위치에
서 상품 구매에 나설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소비 주체들에게 경제적 안
정감을 심어주는 동시에 심리적으로 소비의 충동을 끌어낼 수 있는 기제가 요구됨
을 뜻한다. 그리하여 기업은 상품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 계급을 새로운 소비 주체
로 변모시키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대량생산 체제에서 공장의 ‘마차바퀴’처럼
봉사하기를 강요받던 대중들을 ‘노동자’로, 그리고 여기서 다시 ‘소비자’로 전
환시키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노동자를 생산자이자 동
贊?소비자
로 만들어내면서 자본의 열망을 마치 노동자 자신의 욕망으로 동일시하도록 하는
장치가 마련된 것이 바로 1920년대였다.
한편 대량소비를 극적으로 가능하게 만든 계기 또한 이 시기에 마련되는데, 그것
은 다름 아닌 “보다 많은 임금과 보다 줄어든 노동시간”이라는 움직임이었다. 고
임금 현상은 이미 20세기 이전에 등장한 것이지만, 노동자들의 늘어난 여가 시간이
본격적으로 소비의 전략과 맞물리게 된 것은 20세기 들어서였다. 안정적으로 임금
을 받으면서 그 임금을 소비 활동에 사용할 수 있는 체제가 확립되는 것이
확대에 필수적이라고 할 때, 이미 1914년 포드사에서 실시한 일당 5달러의 임금정
책에서 그 대표적인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튼 안정된 임금과 보다 줄어든 노
동시간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시장에서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직접
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줄어든 노동시간과 보다 많은 임금이라는 ‘보상’
을 받게 된 노동자들에게는 이제 절제의 미덕이 아닌 대량생산에 걸맞는 대량소비
의 미덕이 끊임없이 강요되었다. 광고는 바로 이처럼 생산과 소비의 과정을 연결시
켜주면서 그 기폭제 역할을 담당하였다.1
1920~1930년대 미국의 광고
1) 19세기 말의 미국 광고
미국 최초의 광고는 영국 식민지 상태였던 1704년에 발행된 《보스턴 뉴스 레터?
?The Boston News Letter)라는 신문에서 발견된다. 4월 24일자 이 신문에는 세 가
지의 광고가 게재되었다. 두 가지는 도둑을 잡으면 보상금을 지급하겠다는 광고였
고, 마지막 하나는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오이스터 만(Oyster Bay)에 있는 한 부동
산을 팔겠다는 광고였다. 그러나 광고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벤자
민 프랭클린(B. Franklin)의 《펜실바니아 가제트》(Pennsylvania Gaz
등장
한 이후라고 볼 수 있다. 1729년 첫호에서 이 신문은 “아주 합리적으로 좋은 비누
를 고르세요”라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그후 《펜실바니아 가제트》는 도망친 하인
과 노예, 선편 안내에서부터 가게에서 파는 책이나 초콜릿, 커피, 치즈, 옷가지들,
스페인산 포도주, 안경, 콤퍼스, 자 등에 이르는 온갖 상품들을 계속 광고하기 시
작했다.
한편 1830년대에는 코네티컷주 출신으로 ‘익살꾸러기 코끼리’라는 애칭을 가진
바넘(P. T. Barnum)이라는 인물이 광고계에 등장하게 된다. 1850년 출간된 자서전
에서 그는 자신의 광고 철?
러분들은 아주 뛰어난 문구들로 광고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한 번은 살 수 있도록 유혹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
은 여러분들을 점차 사기꾼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할 것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12
) 그러나 미국내 광고대행은 그보다 약간 앞선 1841년에 필라델피아의 팔머(V. B.
Palmer)라는 인물이 광고주들에게 자신이 일련의 선택되고 제한된 신문사의 광고
를 대행한다고 발표했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 그는 말 그대로 신문의 지면을 파는
사람이었다. 광고를 기획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광고를 하려는 잠재적
令湧?접촉하고 그들에게 광고를 할 수 있는 공간을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 대
가로 신문사로부터 대략 25%에 달하는 수수료를 챙겼으며, 1861년에 이르러서도 이
처럼 신문의 지면을 파는 대행인 수는 고작 30여 명에 불과했다.
이처럼 초보적 수준에 그친 광고 대행업은 1890년대에 이르면서 어느 정도 서비스
조직으로 완결된 기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특히 1898년에 알버트 래스커(A. D.
Lasker)가 Lord & Thomas Agency사와 합치면서 미국의 광고계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래스커는 그 당시 존 케네디(J. E. Kennedy)와 조지 ?
G. C. Hopk-
ins)라는 인물을 고용하였다. 케네디는 “광고는 인쇄물로 된 판매방식”이라는 주
장으로 래스커에게 강한 인상을 준 일종의 카피라이터였다. 홉킨스 또한 “잘 생각
해 봅시다”라는 문구, 즉 특정 물건이 뛰어난 이유와 소비자들이 구매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들을 제시하는 광고 문안들을 사용함으로써 엄청난 판매량 증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래스커와 케네디, 그리고 홉킨스로 구성된 팀은 매력적인 광고문
안(copy)의 작성을 광고 대행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지정함으로써 그 후 미국
광고산업의 방향에 지대한
미쳤다.13) 그렇지만 미국에서 광고 시장과 광
고 대행사들이 본격적인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그 이후로도 최소한 20여 년의 시간
이 더 필요했다.
2) 1920년대 광고의 성장
1920년대는 광고 대행사의 본격적 형성 시기로 간주될 수 있다. 많은 광고대행사
들이 광고 철학이나 고객의 요구와 같은 요소에 기반하여 자신들의 서비스를 확대
시켜 나갔다. 1920년대에 들면서 광고는 기업 활동의 중요한 부분이자 그 자체로서
매우 중요한 산업으로 자리잡았다. 전체 광고 비용을 나타내는 통계를 보면 이러한
사실은 금방 확인된다. 예컨대 19
내 전체 광고 비용은 14억 6천 8백만 달
러였다. 그러던 것이 1919년에는 22억 8천만 달러로 상승했으며, 1920년에는 거의
30억 달러에 육박하였다. 그 후 약 3년 동안 침체기를 맞기도 했으나, 1929년에
이르면 광고 비용은 다시 40억 달러에 이르게 된다.14) 광고 비용의 이와 같은 증
가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여유 자금과 그것을 쓰고자 하는 욕
망을 갖게 된 것에 기반을 둔다. 판매자와 상품 구매자간 본격적 시장 형성을 의미
하는 것이며, 광고주들에게는 일종의 황금시장의 도래를 뜻하였다. 결국 노동 대중
의
상승에 힙입어 광고는 생산과 소비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나아가 소비자
를 효과적으로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기능하게 된다.
1920년대에는 대중들의 본능에 적절하게 호소하도록 만들어진 광고 카피가 구매
충동을 크게 증가시킬 것이라는 신념이 광고 제작자와 광고주들 사이에서 보편적
으로 자리잡게 된다. 광고주들과 광고 대행업자들은 소비자들에게 ‘환상적 욕구(f-
ancied need)’를 끊임없이 창조하고자 했다. 대중들이 자신의 근본적 욕구를 충족
시키기는 방식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기제를
객?방향으로 소비의 습관을 길들여 나간 것이다. 자연스럽게 전국적인 광
고의 목표는 대중의 욕망과 습관을 창조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대중의 지속적인
소비 습관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품이 지닌 장점을 파편적으로 강조하기
보다는 대중들에게 시장의 ‘해결’과 어울리는 비판적 자의식을 부여하는 것이 보
다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광범위하게 인식된 셈이다. 《프린터스 잉크》(Printer?
Ink)의 한 필자는 “광고는 대중들이 계속해서 그들의 삶의 방식에 만족하지 못하
고 그들 주변의 지저분한 물건들에 불편을 느끼도록
. (삶에) 만족한 소비자
들은 불만족한 소비자들보다 광고주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는 존재다”15)라고 그
인식의 방향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이제 광고의 덕택에 소비는 명백히 문화적인 색조를 띠게 되었다. 광고주와 기업
인들을 비롯해서 이들의 이익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은 정부 관료들도 ‘계급’이라
는 개념을 슬쩍 ‘대중’의 개념으로 바꾸어 나갔다. 대중의 욕구와 좌절을 자신의
삶의 질과 내용보다는 상품 소비라는 측면에 위치시키는 방식으로 자본주의적 ‘개
인’을 창조하는 데 힘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광고는 매혹적?
灌?도발적으
로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였고, 교묘하며 때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볼
거리들을 제공하였다. 광고 수입에 힘입어 대중 잡지들은 빠른 속도로 인쇄 방식을
발전시킬 수 있었으며, 광고주들과 대행사들은 이를 다시 자신의 광고 전략에 최대
한 활용하였다. 특히 1920년대에는 상품 추천 광고에 유명한 ‘스타’들이 등장함
으로써 대중의 시선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광고의 성격을 오락적인 장르로 변모시
켰다. 오페라 무대의 스타들과 사회적으로 명성을 지닌 여성들, 프로 권투선수들,
야구선수들이 상당히 비싼 대
고 비누나 로션, 음식들을 찬양하는 노래들을
부르는 데 동원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20년대였다.
3) 1930년대 광고의 침체
이처럼 화려한 시기를 구가하던 광고도 1929년 10월 29일 증권시장이 급작스럽게
붕괴하고 대공황이 불어닥치면서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약 34억 달러에 이
르던 광고 비용이 1933년에는 고작 13억 달러로 머무는 등 광고시장의 급격한 하락
세는 30년대 동안 지속되었다. 요컨대 1920년대에 경제적 부흥과 함께 활성화된 미
국의 광고산업은 채 10년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교적 짧은, 그렇지만 질적으로?
결과를 낳은 동면기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제 고가품 광고나 신체적 질병, 위생 문제와 관련된 제약 광고는 라디오, 신문,
잡지 등 대중매체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대다수 소비자들에게 있어 이제는
“무엇을 소비하는가?” 보다는 한 번 산 제품을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탈 없이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품의
불량 상태를 검사하고 하자를 찾아내며, 소비자의 불만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담당
한 상품 품질 테스트 조직인 소비자 연구소(consumer? research)가 발달하였다.
藪?전국적으로 12,000여 개이던 것이 6년 뒤에는 48,000개로 증가하게 된
것이다. 이에 비례하여 상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엄격한 심사 요구와 테스트, 그리
고 기업에 대한 불평도 급증하였다. 당시 아서 켈릿(A. Kallet)과 프레드릭 쉴링크
(F. Schlink)가 “아무 쓸모없고 위험하기만 한 재산가들”에 대해 공격한 《1억
마리의 기니아 돼지》(100,000,000 Guinea Pigs)라는 책이 1933년에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당시의 반기업적 분위기를 여실히 반영하였다. 그 책을 뒤따라 사회적 비
판의 목소리를 담은 많은 책들이 연이어 발간되기도
6)
국가 또한 이에 뒤질세라 상품 광고에 대해 크게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
다. 당시에 통과된 ‘휠러-리아(The Wheeler-Lea)’ 개정안은 허위 광고나 사기성
높은 광고를 국가가 감독·통제할 것을 명시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지금까지
국가가 취해 온 친자본가 계급 지원 정책으로부터 완전히 후퇴했다는 뜻은 아니다
. 다만 시장 질서가 와해되고 도덕적 지도력을 상실한 기업들에 대해 소비자들의
정당성 시비가 일어나게 되면서 대중의 비판에 봉착한 국가가 일종의 대중주의적
전략을 취하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겠다. ?
퓽?보호는 기업과 소비자 사
이에 위치한 국가의 간섭 기능, 다시 말해 시장 조절의 기능이 크게 확대되었음을
뜻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러한 외부적 비판에 대하여 미국 광고 대행인 협회 AAAA
(The American Association of Advertising Agencies)는 1932년 회원들의 윤리 강
령을 마련하는 등 나름대로의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광고계를 휘청하게 한 공황은 1934년을 기점으로 차츰 수그러지기 시작했
다. 사실 그 직전인 1933년부터 기업의 광고 지출 비용은 점차적으로 증가하기 시
작했다. 금주법의 철폐와 더불어 주류 광고?
퓸解? 냉장고와 가정용 영화,
전기 토스터, 실크 스타킹, 브래지어 등과 같은 상품들이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접
근한 당시의 주요 광고 목록이었다. 다만 1920년대의 화려했던 내수 시장이 사라진
상황 속에서 카피라이터들은 소비자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상품의 구매를 촉진시
키기 위해 점점 더 ‘단어의 마술성’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소비지향적 가
치가 실종된 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광고 기획자들은 더욱 더 산업디
자인의 용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17) 그리고 이렇게 제작된 광고들은 다시
미국사회의
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광고가 학교나 교회 등
에 못지 않은 강력한 국가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회복했으며, 대중을 ‘교화’하
는 기능까지 수행하게 된 것이다.
3. 광고와 새로운 가족 개념의 형성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급격하게 진전된 대량생산 체제와 소비주의는 당시 대중들
의 일상생활의 가장 세밀한 부분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에는 여권 의식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이혼 비율이 점차 늘어났으며, 가족간 역할에 대해서도 문제
가 제기되는 등 전통적 개념의 가족적 삶이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었다.
?
한 상황에서 폭발적으로 등장한 광고는 지금까지 당위적으로 여겨졌던 가족간 관계
를 해체시키는 동시에 이를 전혀 새롭게 구성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즉, 광고가
가족의 역할을 당시의 사회 경제적 조류에 맞게 조절하는 일을 대신하게 됨을 뜻한
다. 이 문제는 1920년대의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확산과 밀접히 연결되는 것으로
서, 그 이전 가족 구성원들의 상황과의 비교를 통해 명확하게 고찰해 볼 수 있겠다
.
1) 전통적 가족의 해체
산업구조가 대량 생산의 단계로 접어들기 이전에 미국 사회내 가족 구성원들간 관
계와 상?
그리고 노동의 문제는 생산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특히 가
장의 노동력에 주로 의존하는 가족 관계하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자신의 생존을 책
임진 아버지의 권위에 절대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20세기 이전 미국 사회
에서 가족은 가부장적 권위를 정점으로 한 통합체이자 단일 집단이었다. 이는 생산
과 소비의 측면에서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산업화 이전인 19세기 말에 쓰여졌던 다
음 한 농부의 일기를 보면 가부장제도 하에서의 소비생활의 단면을 잘 엿볼 수 있
다.
“내 농장은 나와 내 가족들에게 거기서 나는 것만으로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줄 뿐만 아니라 여분까지도 남겨준다. 한 해에 거기서 나는 곡식
으로 내가 버는 돈은 은화 150달러인데 나는 소금, 못 등과 같은 것들을 사기 위해
일년에 10달러 이상은 쓰지 않는다. 나는 음식이나 음료수, 의복 등을 결코 사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내 농장에서 다 자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18)
대량 생산이 시작되고 산업 자본이 농업 공동체로 침투하면서 이러한 상황이 급격
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임금 체계가 아버지의 권위를 대신하여 가족 생존의 지배
적 수단으로 부상하게 된 것
凰育?농업 공동체의 상당수 성원들은 이제 도
시 자본이 운영하는 공장에 고용되었으며, 가족은 자급자족하기보다는 자체적으로
생산하지 못하는 생활필수품들을 구입하는 데 많은 돈과 시간을 소비할 수밖에 없
었다. 공장 경영자들은 노동자를 결코 가족 단위가 아닌 개별적 단위에서 고용하였
으며, 이제 남성과 여성은 누구든지 일정 요건만 갖추었다면 자신의 노동력을 임금
을 받고 파는 임금 노동자가 될 수 있었다. 거꾸로 말해 노동의 능력을 갖추지 못
한 가부장은 더 이상 가정내에서 힘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요컨대 가족 구?
이 아버지의 권위로부터 해방하면서 사물화된 모습으로 임금의 자식이 되었다고
하겠다. 주부들과 심지어 청소년들도 일정한 조건만 갖춘다면 자신의 노동력을 파
는 대신에 임금을 받을 수 있고, 생산의 현장에 참여할 수 있다는 기업의 달콤한
선전을 끊임없이 들을 수 있었다.
이처럼 가족 부양을 전적으로 책임진 가장에게 쏠렸던 가정의 중심축은 개별 구성
원들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인물로 옮겨갔다. 독립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끔 임금을 제공하는 자본가, 공장 소유주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처
럼 가족 단위
적이고 공동체적 통합 관계를 필요로 했던 전(前)산업사회의
노동이 차츰 남성과 여성, 청소년 등의 노동으로 분산되면서, 가족 개념에도 급격
한 변화가 일어났다. 가족 구성원들이 시장에서 자신의 개별적 노동력을 파는 노동
자들로 변모함에 따라 가족이 더 이상 예전의 공통체적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
이다. 그 대신에 공장이 사회 구조의 기반으로 자리잡았다. 내적 필연성을 빼앗긴
가족은 급속도로 와해되어 갔으며, 일종의 감정적 결합체로서만 남겨지게 되었다.
가족은 이제 임금 체계와 산업화 과정에 의해 매개되며, 또한 이
漫??그 권
위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1925년 당시 한 사회학자는 임금 체계가 사회적 삶의 성
격을 규정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필라델피아에 거주하고 있던 한 노동계급의 가
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공산품이 가정에서 만든 일용품들을 밀어냈으며, 공장 노동력이 가내수공업의
노동력과 경쟁하고 심지어 이를 대체하였다. 가족들의 수입은 이제 기성품을 구입
하는 데 지불될 자본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개별 구성원들이 지닌 노동력이라는
자원이 가정내에서 생산품들을 만들어내는 데 부분적으로 사용되는 반면에, ?
점점 더 임금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족의 노동이 가정내 생산을 덜 하
면 덜 할수록 가족들은 보다 많은 지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19)
1920년대에 이르러 가족 구성원들이 이처럼 동료 노동자들이라는 개념에서 독자적
인 봉급 생활자의 위치로 바뀌면서 임금은 개별 구성원과 생존의 문제를 직접 연관
시키는 가장 명확한 매개체로 자리잡았다. 기혼, 미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돈을
벌어들이는 데 가족 모두가 매달리기 시작하는 모습이 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통적 가족에 대한 자본주의적 임금 체계의 이와 같은 승리
들의 삶으로부
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빼앗아갔다. 우선, 효율성이라는 명
분하에 노동을 단순히 일련의 일상화되고 습관화된 몸짓으로 환원시키는 결과를 낳
았다. 둘째, 생산의 공업화는 가정과 공동체로부터 조직이라는 영역을 제거시키고,
그 대신에 중앙집권화되고 연합된 회사 조직을 가장 중심적인 것으로 자리매김했다
. 가정은 안식처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이런 과정에서 당시의 개인들이 무기
력한 개체들로 전락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비바 부스(V.
Booth)는 그 속에서 발생?
?삶의 모순적 양태, 특히 여성의 갈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상황 하에서 ‘여성이 지킬 자리는 가정이다’라는 옛말을 지키려
면 남편들은 고용 상황이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벌어들일 수 있는 임금으로는 가족
들에게 현재의 문명이 가시적으로 제시하는 것들을 충족시켜 줄 수 없을 뿐만 아니
라 제대로 가족들을 부양할 수도 없는 그런 체계 속에서 여전히 가족들에게 경제적
으로 봉사하는 유일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연히 갈등이 생겨난다. 주
부들에 대해 비생산적이고 의존적이며 아이들?
존재로서의 역할만을 요구
하는 과거의 낡은 규범들은 이들이 자신이 욕망하는 것보다 훨씬 낮은 물질적 수준
의 삶과 복지에 만족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20)
2) 가정의 해체와 광고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라 변모된 가족 질서 가운데 특히 주목할 수 있는 것은 가옥
구조 및 거주 공간의 변화였다. 이 논의는 라디오의 등장과 가족 변화의 문제를 다
룰 다음 장에서도 되풀이 될 것이다. 아무튼 거주 공간으로서 가옥의 구조는 이전
과는 크게 판이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무엇보다도 1920년대의 새로운 가옥은 전
통적으?
공업을 위해 마련되었던 공간들, 예컨대 바느질 방이나 빵을 굽는
방, 세탁실, 건조실 등이 사라지면서 크기가 이전에 비해 현저히 좁아들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1920년대 말 사이에 시카고에 있던 아파트의 평
균 면적은 25% 감소하였다. 또한 같은 기간에 방이 5개 이상인 아파트의 건축 비율
은 25%에서 8%로 급격히 줄어들었다.21) 이런 식으로 가옥의 구조, 나아가 가정의
구성 방식 자체가 새로운 소비 유형에 맞추어 재조정되는 현상이 1920년대에 나타
났다.
이처럼 가족 구성원들의 삶이 철저하게 해체되고 개
?가운데 한편에서는
이를 자신의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코자 하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다름 아
닌 자본가들이었다. 기업주들은 가족의 해체 현상을 자본의 지배력 강화의 계기로
삼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기업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제도 안에서 아버지가 행사했
던 엄격한 지배로부터 아내와 청소년들을 ‘해방’시키는 동시에 이들을 도시의 공
장으로 내몰았다. 아울러 그 이전에 아버지에게 보였던 충성심을 생산의 현장에 바
치도록 요구했다. 산업화의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가정으로 침윤해 들어온 데는 대
량 생산과 대량 소비라
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사
실 공산품들이 대량 생산되면서 이에 상응하는 규모의 수요와 소비가 필요해지고
또한 산업의 제국면이 점증하는 인구 비율을 포함해 감에 따라서 사회적 삶과 가
족의 생활이 얼마나 공산품의
요구, 다시 말해 소비와 사회적 질서라는 보다 광의의 틀에 맞추어지는 여부가 기
업주들에게는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광고는 바로 그 연결고리의 역할을 매우 효과
적으로 수행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전통적으로 가족은 사회적 결집체로서 구성되어 왔다. 그
러나 1920년대 들면서 본
酉?생산의 맥락 하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개별적
으로 문제와 대면할 수 있는 반면, 이들을 상호 연결시켜 주는 역할은 부모로부터
점차 더 생산력을 지니고 상업화된 대리인들의 몫으로 옮겨갔다. 이제 가족은 부
르주아화한 기업의 권위에 대해 개인적이고 개별적으로 관계를 맺는 부차적 환경의
역할을 수행할 따름이었다. 공장이 그 일차적 위치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1924년
에 나온 《진짜 이야기》(True Story)라는 잡지에는 가정에서 대기업으로 지혜의
무게중심이 넘어 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광고를 싣고 있
“5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던 성인 남녀나 청소년들이 삶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이제는 아무 데에도 없었습니다. 이젠 우리 모두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삶과 마주하도록 세상 속으로 내던져졌습니다. … 여기 이전의 그 어느
잡지와도 차별성 있는 《진짜 이야기》(True Story)가 있습니다. 이 잡지는 진리
라는 견고한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 바로 이 잡지가 여러분들을 도와 줄 것입
니다.”22)
전통적인 가족 개념의 해체로 비롯된 무기력감과 불안감을 은근히 부추기면서 이
광고는 독자들로 하여금 가족?
?일차적 원천이 아닌 일종의 부차적 맥락
으로 여기도록 유도한다. 광고 스스로가 가장을 대리하여 진실된 거울의 역할, 사
회화의 역할을 떠맡는다. 이처럼 광고는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나갔다. 뒤집어 말하자면, 가족 구성원들은 모든 전
거(典據)를 소비와 광고에서 찾았으며 후자를 통해 ‘소비자’라는 정체성으로 호
명(interpellate)되었다. 자본의 공동체로의 유입, 라디오와 자동차의 대중화를 통
한 공·시간 개념의 변화, 가족과 가족 공간, 가족 구성원간 약속된 역할의 해체
등
해 노동자들은 근거의 기제들을 크게 상실했다. 대신에 광고가 새롭게
요구되는 주체 형성의 기제로 자리잡았다. 특히 이와 같이 새롭게 주체를 구성하
고 정체성을 만들어냄에 있어 광고는 특정한 이야기를 만들어 노동자들이 여기에
자신을 얻도록 유도해 나갔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욕망을 창출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4. 광고와 욕망만들기
광고는 상품에 대해 정보를 전해주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고 설명한다면 이는
단지 부분적으로만 맞을 따름이다. 광고는 오히려 상품에 관한 정보를 비우고 새
로운 정보로 상품을
상품 속에 내포된 자본과 노동간 갈등, 공장 노동의
힘겨움, 상품을 구성하는 여러 다양한 질료 등에 관해서 광고는 어떠한 정보도 제
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정보를 지워버린다. 대신에 전혀 새로
운 정보를 만들어 냄으로써 소비자의 욕망을 부추기고자 한다. 즉, 텅빈 기표 속에
욕망이라는 메시지를 은밀하게 혹은 명백하게 채워넣고, 이를 갖고 우리를 소비자
로 유혹한다. 이러한 상황은 1920년대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1923년에 해리 덱스터 킷슨(H. D. Kitson)은 광고의 욕망만들기에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소비자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욕망에 이끌리고 욕망을 고조시키는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소비자들이 상상을 통해 상품 획득이 가져다줄 쾌락
의 측면들을 그림 그리기에 앞서 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맥락을 만들어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23)
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표적인 산업 디자이너였던 헤롤드 반 도렌(H. V. Doren)도
산업 디자이너의 역할은 “시각적 매력의 견지에서 유용한 것들의 기능을 해석하
는 것, 그것들에게 형태와 색의 미를 부여하는 것, 그래서
소비자들로 하
여금 소유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24)에 있다고 단정하였다. 광고의 일차적 목
적이 정보 제공이 아닌 욕망의 생성에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토마스 에
트킨슨(T. G. Atkinson)이라는 심리학자도 1925년 당시의 광고업자들에게 “강력한
추진 이미지를 지닌 당신의 이미지에 사람들이 스스로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느끼도
록 만들어라.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운 게임을 배우기를 원하는 것처럼”이라고 충
고하였다. 이에 덧붙여 그는 상품이 소비자들에게 어떤 권력을 부여할 수 있는 것
처럼 광고를 통해 제시해야
점을 덧붙였다.25) 다시 말해 광고는 소비자들
에게 일종의 상품 신화를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1920년대의 광고 분야에서 가장 초점이 된 것이 주체의 욕
망 문제였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20년대의 풍부한 소비 시장이 1920년대 말의
경제 공황을 거쳐 30년대에 급격한 침체기로 들어서자 기업가들과 광고주들은 다투
어 소비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광고를 통해 상품 이미지를 각인시키고자 했다. 이를
통한 상품 소비 촉진은 기업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이제 광고주들은 사람들을
“자?
暈鉞求?것에 의해 동일시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소비하는 것에
따라 동일시되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는 효과에 주목했다.26) 광고 대행사들
도 상품 소비 후 지닐 수 있는 효과를 욕망으로 전이시키는 기제를 창출하는 데 사
력을 다했다.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사회적 효과를 소비자들이 욕망하
는 그 무엇과 연결시키는 것이 핵심 과제였다. 그중 1920년대 광고의 두드러진 특
징은 상품 소비와 젊음, 사회적 성공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그 후에도 이는
상품 광고에 있어 일종의 보편적 공식이 되는 바, 그 당?
의 욕망 생산방식이
미국 광고 제작의 전범(典範)이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광고가 1920년대에 큰 힘을 행사했다는 것은 광고가 소비자의 자유선택 논리를 앞
세워 자본주의의 위기를 관리할 수 있었고 나아가 소비 시장의 팽창에 크게 기여했
음을 뜻한다. 이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광고가 가져다 쓴 젊음이라는 기호를
빠뜨릴 수 없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사회에서 가족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소
비 주체의 단순 집합으로만 의미가 있었으며, 바로 그 한 가운데에 청소년들이 자
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노동의 새로운
동시에 욕망의 상징인 청춘을 소유한
주체였다. 1920년대에 들면서 노동시장에서 제외되기 시작했지만, 이들이 지닌 젊
음이라는 상징은 광고주들과 기업인들의 전략적 사고틀 속에서 여전히 중심적인 위
치를 차지하였다. 우선 유년기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상품 및 서비스의 새로운 소비
주체로 성장함에 따라 시장내 이들의 중요성이 매우 커졌다. ‘청춘이 사업’이라
는 말이 생겨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나아가 ‘젊음’이라는 추상적 단어가
욕망 생성의 언어가 되었으며, 이를 가장 잘 활용한 것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광고
였다
?광고는 젊음을 이상화, 신비화하는 가장 중요한 기제로 작동했다.
젊음이라는 이미지가 맡은 역할은 무엇보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청춘의 개념과 맞
물려 청소년들을 욕망 가능한 현실의 대변자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실제적인 힘이 아버지로부터 아이들에게로 완전히 옮겨갔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 단지 가족 안에서 새롭게 소비 주체로 부상한 청소년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유인하려는 전략이었을 따름이다. 당시의 많은 광고들은 직접적으로 청소년들을
표적으로 하는 메시지를 담아냈다. 청소년들의 순진무구한 태?
미 많은 편견
에 물든 부모 세대보다는 어필하기에 훨씬 더 좋다는 것이 당시 광고계에 종사했던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직접적으로 청소년들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광고에
서도 젊음은 부모들의 보수적 태도와 자주 비교되었다. 심지어 어떤 광고들은 자녀
를 위해 적정한 수준 이상으로 지출하지 않는 부모들을 비난하면서, 자녀들이 현대
사회에서 생존하는 데 필수적인 상품이 어떤 것인지 말해 주었다.
1920년과 1930년 사이에 대학 입학자의 수가 두 배로 증가했다는 사실에서도 우리
는 광고가 젊음의 상품화에 열중한 이유를 ?
?있다. 당시에는 정규 대학뿐
만 아니라 학비가 부족한 학생들을 위해 인가된 통신 강좌와 독학 교본들도 두드러
진 증가 추세를 보였다. 대학에 대한 이러한 관심 증대가 학위에 대한 일반의 기대
에서 비롯된 측면도 무시할 수 없지만, 여기에는 교육의 상품화를 부채질한 광고도
큰 몫을 했다. 대학의 분위기가 신문과 잡지, 라디오 등에 의해 속속들이 전국으로
전파되었으며, 대중들은 이를 열렬히 흡수했다. 대학내 문화는 곧 사회내 보편적
문화로 자리잡아갔으며, 대학생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사람들은 열성적으로 자
녀 교육에 ?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고는 끊임없이 대학의 문화를 새
로운 문화, 젊은 문화로 규정짓고 이를 따르도록 소비자들을 부추겼다. 이런 면에
서 1920년대의 미국 대학생들과 그 부모들은 미국 교육사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표준화된 상품에 지나지 않았다. 광고는 그 언저리를 결코 비켜가지 않
았으며, 적극적으로 대학과 젊음의 기호를 상품 소비와 상호 연결시키는 노력을 기
울였다.
그렇다고 해서 1920년대의 광고물들이 타 연령층과 비교해서 젊은이들에게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니었다. 젊음은 사회·문?
??상징적 표현
으로 활용되는 측면이 보다 강했다. 즉, “이제 19세의 소년이 단지 몇 주 정도만
기계를 다루고 나면 45살 된 그의 아버지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노동을 할 수 있
는” 그런 변화를 의미했다. 젊음은 이제 일종의 이상으로 자리 잡았으며, 젊음과
관련된 이미지와 상품들이 전국적인 망을 통해 대량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성인
들도 제품을 구입할 경우 아이들처럼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광고 메시지의
기본이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헬렌 우드워드(H. Woodward)는 “우리가 판매하고
있는 것은 미가 아니라 청?
것을 명심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
에 그녀는 “우리는 만들어져 존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판매할 것이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어질 수 있는 것, 젊어질 수 있는 것, 그래 젊어질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을 말이야! 우리는 여인들이 젊어진다고 느끼도록 만들어야만 해”27)라고 덧
붙인다. 이렇게 보면 젊음에 대한 광고의 예찬은 젊음, 욕망, 소비로 이어지는 신
화적 조작에 지나지 않았다.
1920년대 광고의 청춘에 대한 지속적인 약속은 신체 외모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접합하는 방식으로도 나타났다. 젊은이들처럼 빛나
를 보여주고 이를 약속
하는 광고들이 대중으로부터 큰 관심을 끈 것이다. ‘젊음’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이제 ‘건강한 육체’라는 보다 구체화된 이미지로 자리바꿈했다. “깨끗하고 빛
나는 젊은 피부”는 소비자들의 당연한 선망의 대상인 것처럼 비춰졌다. 그리하여
당시의 레지놀 비누 광고는 그것을 사용하면 전혀 ‘새로운 사람’처럼 보이게 될
것이라고 소비자들을 유혹했다. 힌즈 크림의 광고도 마치 “아이의 피부와 같은 피
부를 갖게 해 줄” 것이라고 했으며, 다른 광고는 팜 올리브 비누를 사용하면 “여
학생의 피부와 같이
퓟罐?갖게 될 것”28)이라고 소비를 조장했다. 이는 결
코 젊은 소비자들에게만 접근하려는 제한된 의미의 광고전략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상품 소비를 통해 다시 젊어질 수 있다는 신화에 기초하여 나이 든 광고 수용자들
까지도 포섭하려는 매우 적극적이고 이중적인 전략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와 비교해 볼 때 당시의 광고에서 기성세대가 대체적으로 현대성과 조화를 이루
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은 일면 당연하다. 광고의 젊은 모델들은 부조화를
이룬 기성세대의 모습을 힐책하고 젊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찾으라고 소리 높
1922년에 여성 잡지에 실린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광고를 봐도 이를 잘 알 수 있
다. 이 광고는 이제 부모들의 권위가 무너지고 청소년들이 새로운 질서를 이끌어가
는 창조자로 등장했음을 알린다. “젊은이들과 보조 맞추기”를 강요하면서 광고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부모들이 그들에게 해주는 것만
큼 부모들에게 해준다.” 물론 이처럼 젊은이들의 특권적 위치를 강조하는 것은 시
장의 이익과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가령 앞선 신세대의 진보성을 앞세우면서 “아?
絹湧?없다면 여러분 부모들 가운데 몇몇은
진 분야에서 파라마운트사가 얼
마나 엄청난 발전적인 변화를 추동해왔는지를 결코 모를 것이다”라고 은근히 영화
라는 상품의 가치를 강조한다.29) 이처럼 신세대의 광고 출연은 젊음 그 자체를 욕
망 가능하고 판매 가능한 상품으로 만드는 데 있었다. 젊음을 사고팔 수 있는 것으
로 각인시키면서 소비자들을 대량 소비시장으로 끌어내고자 하는 전략이었던 셈이
다.
5. 광고와 세속적 욕망
1920년대 광고에서 욕망의 신화는 세속적인 출세이라는 의미로도 나타났다. 예컨
대 1929년에 제작된 에지워드 파이프 담배 광고는 다음과 같
다. 한 노동
자가 회사를 찾아 온 손님에게 사장을 가리키면서, “사장님요? 저기 저 파이프 담
배 문 분 보이시죠?”라고 말한다. 파이프와 사장이라는 두 가지 기호를 결합시키
고 있는 이 광고는 아직까지 파이프 담배를 피우지 않는 소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을 한다.
“정상에 선 사람들은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다. 명심하라. 파이프 담배는
조용하고 심사숙고하는 습관일 뿐 아니라 여유롭고 자극을 준다. 파이프 담배는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한 대의 파이프 담배는 엄청나게 커다란 생각을 낳게
한다.”30)
沌構?사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지위에 대해 환상을 부추기는
이러한 광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 있게 여겨지는 미덕이 과연 무엇인지를 여
실히 드러내고 있다. 상호 치열한 경쟁을 통해 정상에 오르는 것, 주어진 직장 안
에서 성실히 일하는 것, 그리고 가정의 행복을 위해 멋진 상품을 구입하는 것 등등
이 사회적 미덕으로 설명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성공의 지표이고 또한 사
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제시된다. 결국 광고 속에는 자본
주의를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 보다 정확하게 말하
謎뼉聆품?유지 발전
될 수 있는 논리가 담겨져 있다. 이와 관련하여 1920년대에는 시간 관리에 대한 기
업의 관심, 그리고 이를 대중의 신분 상승 욕망과 연결시키고자 하는 광고들도 자
주 나왔다. 대량생산 체제에서 공장의 라인이 멈추지 않도록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시간을 관리하는 것은 기업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1929년 크리
스마스 무렵에 나온 아래 해밀턴 시계회사의 광고는 현명한 아내라면 남편의 크리
스마스 선물로 좋은 시계를 준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남편은 당신에게 크리스
갬?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
만 그에게는 자신에게 꼭 필요하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공장에서
성공을 위해 애쓰는 매일매일의 수많은 시간 속에서 그는 제대로 안심하고 믿을 수
없는 시계 때문에 곤란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공적인 남자는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는 정확한 정신을 가진 사람임이 모든 조사에서 밝혀졌습니다. 그에게 시간은
곧 돈입니다. 매순간 그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의 시계는 정확하지 않
으면 안됩니다. 여러분들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에게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주십시오. … 그를 성공으로 이끌어주어 당신과 당신의 남편, 두 분 모두에
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시계를 사주십시오.”31)
시계는 이제 단순히 시간을 가리키는 도구가 아니라 직업 안정과 신분 상승의 지
름길로 인도해주는 사회적 필수품으로 바뀌면서 남편의 성공을 원하는 가정주부들
의 욕망을 자극한다. 당시에는 이런 식의 광고가 별로 드물지 않았다. 보다 구체적
으로 1920년대의 광고들은 남을 위해 무엇인가를 구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
의 욕구는 반드시 새로운 소비 영역에서 실현될 수 있으며, 자기 정체성을
가는 과정 또한 소비 영역 및 돈을 벌 수 있는 능력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음
을 상기시키고자 했다. 이런 모습은 당시 여성을 대상으로 한 광고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음은 1929년 한 주말신문에 실린 후버 진공 청소기의 광고 문안이다.
“저는 남편이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자질구레한 보석들을 사주곤 했어요. 하지
만 여자의 젊음이란 것은 너무도 빨리 사라져 버리잖아요. 청소하는 데 힘이 너무
들잖아요. … 저는 이제 얼마 동안은 더이상 제 젊음이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발견했죠. 청소가 저를 더이상 힘들게 하?
니까요. 지난 크리스마스에 제
남편이 후버 진공청소기를 사왔지 뭐예요.”32)
이와 더불어 새로운 상품을 양산하기 시작한 1920년대의 기업주들은 주부들에게
산업 노동자로서 자신들의 이미지에 보다 많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새로운 관
념들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당시의 광고들은 ‘산업화된 가정’이라는 이
데올로기를 가정을 둔 여성들에게 주입시키고자 했다. 부엌의 구조라든가 부엌의
배치와 같은 데 관심이 집중된 것도 이러한 전략에 연유했다. 생산성의 가치가 근
대화된 가정이라는 일상적 맥락 속에서조차 계
쳄徘像만? 이같은 현상은
여성 노동력이 절실해짐에 따라 더욱 강화되었다. 게다가 대량 생산된 상품들을
소비하는 것도 결국 가정주부들의 몫이었으므로 이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효과를
노리는 광고들이 가전제품과 생활용품을 중심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런 광고들의 특징은 모두 주부들의 가정내 일상 활동을 공장 생산체제의 유지에
핵심적인 것으로 의미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여성들은 광고를 통해 가정의
경제적인 관리자로 그 위치가 격상된다. 1929년의 보나리트 자동차 광고는 당시의
여성들을 다음과 같이 추켜세우고
“오늘날 미국의 여인들은 진보와 성취에 관해서 이해심 많고 명확한 이해를 하고
있다.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물건들을 그녀들이 건드리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
지만 이제 부인들은 무엇이 어찌 돌아가는지 그 이유까지도 모두 알고 있다. 현대
의 여성 운전자들은 이 향상된 피스톤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알고 있다.”33)
궁극적으로 여성들에게 자동차를 판매하기 위해 마련된 이 광고는 여러 가지 점들
을 함축하고 있다. 우선은 여성들이 차를 살 정도로 경제적 상황이 호전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편 그만큼 자동차들이 대량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른 하나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차를 스스로 돈을 지불하고 구매하려면 고정된 수
익원을 가져야 하는 바, 이는 곧 이들이 노동 현장에 투입되는 기회가 그만큼 확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여성들이 새로운 제품 소비를 위해서
라도 노동의 고된 현장으로 투입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결국은 자본의 끊임
없는 굴레 안으로 얽혀들어 가는 순환의 과정이 재생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의 광고는 이렇듯 주부를 비롯해서 모든 여성을 생산의 주체인 동시에 소
비의 대상으로 형
기 시작했다. 기업인들과 광고 대행사들은 특히 부모 세대
가 자신이 이루지 못한 욕망을 자식들을 통해 대리 만족하도록 심리적으로 자극하
는 광고를 내보내기도 했다. 사실 이 시기의 부모들은 대부분 대량 생산 체제 이전
에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따라서 산업화된 20세기의 풍요로운 상품 세례를 뒤늦게
받으면서 지나간 유년 시절의 결핍된 생활을 늘 가슴아프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던
세대였다. 소비가 사회적 신분의 기호로, 신분 상승의 표상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기업과 광고계는 과거의 욕망 결핍에
結?같은 대중의 기억을 바로 지금의
풍요로운 현실과 고리매김함으로써 소비를 조장해 갔다. 이와 같은 전략은 다음
광고물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한 여성잡지에 실린 광고이며, 어떤 어머니가 피
아노 앞에 앉은 딸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 아래 편에 다음과 같은 카피가 적혀 있다
.
“당신이 원했던 모든 것, 그대가 되기를 희망했던 모든 것이 지금 저 아이에게는
가능합니다. … 예전의 희망, 예전의 야망 … 이런 것들이 얼마나 생생하게 되살아
나시는지요! 당신이 무시했던 재능 … 당신이 모르고 지나쳤던 기회들 … 지금 저
?
자녀에게는 얼마나 달라지기를 바라십니까.”34)
이러한 광고는 자식들이 자신과 똑같은 길을 걷지 않기를 소망하는 노동자 계급의
부모들 사이에서 보다 확실하게 호소력을 발휘했다. 결국 1920년대의 광고가 신분
상승을 미끼로 해서 노동자 계급에게 매우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행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량화된 소비 주체의 지속적 형성과 궁
극적으로 자본주의 생산 메커니즘의 유지·확대로 나타났다.
6. 소결: 대량생산 체제하 소비주체의 형성 기제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1920~1930년대?
막?급격한 변화가 일어났
다. 1920년대에 들면서 대중들은 대량생산 체제의 확립과 이로 인한 놀라운 경제의
활성화를 경험하였다. 풍요로운 세계를 맞이하면서 자신들의 미래 또한 장미빛으로
채색되는 것을 보았으며, 생산방식이 바뀜에 따라 전통적인 가족 체계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겨났다.
가족 구성원들은 공동체라는 결속력에서 벗어나 개별 주체로서 자신의 역할을 떠
맡을 따름이었다. 물론 그 역할이란 기본적으로 대량생산 체제에 합당한 것들이었
으며, 가족 구성원들은 이제 누구라 할 것 없이 생산 현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
이전까지는 가사일에 제한되었던 여성들까지도 자신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공장으로 유입되었다. 노동의 대가로 벌어들이는 임금이 생활을 보다 윤택하게 해
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며, 실제로 그들의 생활은 이전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이제 주부들은 각종 전기제품의 혜택을 누리면서 보다 많은 시간을
자신을 위해 투자할 수 있었다.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여성들과 약간 다른 양상으
로 1920년대의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에 편입되어 갔다. 이들이 직접 노동의 주
체로 편입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생산 현장
寧?떨어져 소비를 자극
하고 대리 욕망을 낳는 일종의 상징적 도구로 이용되었다. 이들이 지닌 젊음은 각
종 광고를 통해 그들 부모 세대의 욕망을 자극하고 결국 소비를 창출하는 이데올로
기적 표상으로 작동했다.
기업은 이러한 외적인 팽창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한편, 대중들을 자본주의 경제체
제 속으로 확고하게 유인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기업가들은 국가의 든든한 지원에
힘입어 사실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반을 쌓아 갔다. 그러
한 가운데서도 기업들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대량생산 체제를 갖고 생산?
것이 결코 체제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리하
여 그들은 생산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소비의 문제가 보다 중
요하다는 데에 인식을 함께 하고, 대중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소비의 대열에 참여하
도록 자극할 수 있는 방안을 다각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목적에 가장
적합한 수단이 바로 광고였다. 광고는 당시의 소비자들에게 새롭게 양산되는 상품
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든 사지 않으면 안된다는 신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자 했
다. 셧 잘리(S. Jhally)는 이와 관련해서 다
걋?지적하고 있다.
“대량생산은 개성보다는 획일성을 양산하게 되고, 이때 광고의 주기능은 대량생
산될 수 있는 한정된 숫자의 상품과 상품 성격에 대해 일반 대중이 동의하도록 만
드는 것이다. 소비자의 자유선택이란 이렇게 대량생산된 상품 가운데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광고는 수요를 창
출하는 것이 아니고 생산자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수요를 일정한 방향으로 조작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35)
1920~1930년대에 광고는 바로 이러한 역할을 최초로 수행하기 시작했다. 소
湧?상품 광고를 통해 대량생산 체제 속으로 끝없이 빠져들어 갔으며, 이는 독
점화된 언론매체에 인해 더욱 강화되었다. 사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미국내
일간지의 수는 꾸준히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에 따라 내용의 다양성도 이전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다. 아무튼 1910년에 미국 도시의 58% 정도가 소유권과 논조가
다른 매체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 1920년에 이르면 같은 비율의 도시에서 언론
독점화 양상을 보이게 된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미국 도시의 80%가 독점의 상
태에 놓일 정도로 상태는 심해졌다. 광고는 이러
常?과정에 결정적으로 기여
했으며, 거꾸로 거대 신문은 더욱 효과적인 광고 전달 매체로 자리잡았다. 1900년
대부터 30년대 사이에 전국적인 광고 비용은 무려 13배(2억 달러에서 26억 달러로)
나 증가했으며, 이러한 증가 추세의 주된 요인으로 작동한 것이 바로 독점화 단계
에 돌입한 거대 매체였다.
소비는 필연적으로 역사적 산물36)이며, 근대적 대량 소비와 더불어 활발해진 광
고는 단순히 상품에 관한 정보를 제공할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상품의
소비라는 일차적인 목적 이외에도 광고는 사람들을 대량생산과 소비의 ?
?
맞는 자본주의적 주체로 호명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1920년대에 대한 역사적 고찰
은 이처럼 광고가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대중들을 생산의 주체이자 동시에
상품의 적극적 소비 주체로 형성하는 기제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견주어 볼
때 제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점에서 “재화의 소비는 먼저 생명의 필요 또
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그야말로 문화적 강제에 종속한다. 요컨대 하나의 제
도이다”라는 보드리야르(J. Baudrillard)의 말은 이미 1920년대의 상황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括?향락과는 이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 소비는 사회생활 당사자들의
의식에 의해 숙고되기도 전에 그들의 행동을 결정짓는 강제적인 ‘사회제도’라는
쪽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37)
보드리야르의 말을 빌리자면, 1920년대 미국의 생산과 소비 양식도 일종의 사회적
제도의 효과였다고 할 수 있다. 전후의 놀라운 경제 활황이라는 외적 요인에 힙입
어 성장한 자본가계급은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튼튼한 기반을 필요로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생산력의 재생산과 상품의 지속적인 소비였으며, 이 두 가지 역할을 동
시에 맡을 주체가 다름
산현장에서 상품을 만들어내는 노동자들이었다. 산
업화 이전의 상품처럼 상류계층만을 위해 소규모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일관작업
방식의 라인생산공정을 통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상품들은 그만큼 많은 소비자
들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고, 노동시간을 줄이는
대신 더 많은 여가시간을 줌으로써 상품 소비에 보다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하
지 않고서는 대량 생산과 소비의 체제가 결코 유지될 수 없었다. 자본가들은 이러
한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광고는 그런 자본가계급의 수하에 있
1920~30년대의 광고는 이미 사회 구성원들을 생산과 소비의 적극적 주체로 구성해
내는 기제에 가까웠다.
1938년 9월 30일 오후 8시 15분. CBS의 라디오 방송에서 “뉴스 속보입니다”라는
아나운서의 말과 함께 수많은 운석들이 뉴저지주의 그로버스빌 근처에 떨어졌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이어서 아나운서는 현장에 나가 있는 리포터를 곧바로 연결시
켰다. 약간의 현장 잡음과 함께 리포터는 긴급한 목소리로 끔찍한 소식을 전해 왔
다. 원형의 운석들로부터 갑자기 화성인 군인들이 나타났는데, 이와 싸우던 미군이
대패했다는 것?
사상자 수와 교통마비 상황, 후퇴하던 공군 조종사가 전
송한 내용 등이 현장으로부터 생생히 전달되었으며, 마지막으로는 불길한 소음과
함께 현장 리포터와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져버렸다. 이윽고 현장 리포터가 사망한
것 같다는 아나운서의 말과 함께 무선 통신사의 다음과 같은 찢어지는 목소리가 들
려왔다. “거기 아무도 없습니까? 응답하세요! 거기 아무도 없습니까?”
오후 8시 30분경 이 뉴스를 청취하던 상당수의 뉴욕 시민들이 더이상 뉴스를 듣지
않고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여 거리로 뛰쳐나왔다. 뉴욕은 삽시간에 혼란 상태에
? 뉴욕의 호손가에서는 화성인들의 독가스 공격에 대비하여 물에 젖은 수건과
손수건을 얼굴에 가린 시민들이 자기 집에서 뛰쳐나와 공원으로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어떤 이들은 가구를 집 밖으로 옮기기도 했으며, 다급하게 경찰을 부르
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났다. 뉴욕에 있는 신문사와 라디오 방송국에는 독가스 공격
에 대비하는 방법을 물어보는 시민들의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1) 그러나 이처럼 화
성인의 지구 공격을 보도했던 뉴스는 실제로는 미국 라디오 역사상 가장 극적인 효
과를 자아낸 허구적 상황이었다. 뉴욕 시민들?
의 공포로 몰아갔던 이 뉴스가
사실인즉 영화감독이자 극작가였던 오손 웰즈(O. Welles)가 할로윈 축제를 맞이하
여 H. G. 웰스(H. G. Wells)의 공상과학 소설인 《세계전쟁》(the War of the Worl-
d)을 각색해 내보낸 《화성침공》(The Invasion from Mars)라는 이름의 라디오 드
라마였던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훗날 많은 미디어 학자들은 당시 뉴욕 시민들이 보인 반응들을 다
양하게 해석해 왔다. 몇몇 학자들은 청취자들의 단순한 오해에서 기인한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몇몇 사람들은 대중들의 전형적 군중심리로, 또 어떤 이들은 한
에 있었던 ‘뮌헨 위기’2)에 대한 히스테리칼한 상황적 반응으로 사건을 설명하기
도 했다.3) 뉴욕 시민들의 반응에 대해 이처럼 무수한 해석들이 오고갔지만, 결국
공통된 결론은 이 사건이야말로 당시 미국인들이 라디오에 대해 생각했던 방식 ─
즉, ‘라디오에 나왔다면 그것은 진실이다’ 라고 생각하는 방식 ─ 을 단적으로
드러낸 예라는 것이었다.4) 그런데 정작 이 소동의 당사자였던 웰즈는 청취자들의
반응에
대해 별로 놀라거나 개의치 않았다. 이미 그는 라디오라는 매체의 위력을 어느 정
도 알고 있었거나 그 정도의 반응을
기획의 승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
른다.
이번 장에서는 대중들에 대한 이와 같은 라디오의 영향력 행사가 어떻게 가능했는
지, 라디오가 당대의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을 어떠한 식으로 바꿔 놓았는지 살펴보
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라디오가 겪
은 변화와 발전까지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초기 라디오의 발전 양상이
당시 미국 사람들이 갖고 있던 라디오에 대한 이미지를 규정했기 때문이며, 또 한
편으로는 그러한 발전 양상이 라디오가 대중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정의 ?
형태와 범위 등을 틀 지웠기 때문이다. 크게 보아 이 시기의 라디오에는 다음과
같은 측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국적 방송망의 등장, 1920년 후반부터 1930년
중반에 걸쳐 진행된 상업방송의 구축, 방송시간 확장으로 인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황금시대 도래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라디오의
기술·제도적인 발전, 대기업 광고주 혹은 스폰서쉽의 영향력 증가, 마지막으로
유료 라디오 방송국의 급격한 확장 및 라디오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정치인들의
자각이라는 여러 가지 정치·경제·사회적 원인들
款叢?있었다.
1. 라디오의 대중화: 공간과 시간 개념의 변화
1) 미국 사회변화와 라디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흔히 ‘격동의 시대(the Roaring Twen-ties)’로 불리우
는 미국의 1920년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찾아왔다. 1921년에 하딩 행
정부가 등장한 이후 이른바 정치적 안정기가 찾아왔으며, 적어도 ‘사회적’ 또는
‘문화적’으로는 오늘날의 미국적 일상생활의 틀을 마련할 만큼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자본주의적 임금체계가 본격적으로 생산관계를 규정하기 시작했고, 포
드주의적 대량생산 체계가 광범위하
도입됨으로써 생산단위로서의 가족이
소비의 단위로 급속히 변모해 갔다. 여기에다가 제1차 세계대전과 그 후유증으로
인해 훈련소나 전쟁터로 보내진 군인들의 ‘먹고-마시고-결혼하고-내일-죽는다’
라는 생각, 여성 노동력의 공장으로의 유입에 따른 성적 해방감, 그리고 이러한 것
들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은 대다수 젊은이들의 자유주의적 태도 등이 합쳐 기존의
청교도적인 성적·도덕적 윤리가 급속히 해체되었다.5)
그러나 무엇보다도 라디오라는 새로운 전파매체의 대중화가 없었더라면 당시 미국
인들의 삶의 양식이 그토록 격렬한
겪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라디오가
모든 변화의 일차적 출발점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일종의 비역사적 기술 결정론(te-
chnological determinism)의 오류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피해야 하겠다. 그렇지
만 라디오가 당시의 사회적 변화상을 전국적으로 유포시키고 결과적으로 변화의 폭
을 급격하게 확장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데는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이다. 요컨
대 라디오가 사회적 변화·생성의 기폭제 역할을 맡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겠으며
, 적어도 1949년에 전국적인 TV 네트워크가 생겨나기 전까지 라디오는 이러한 역할
覃?갔다.6) 1955년에 발표된 한 보고서는 TV의 영향력이 크게 증대되는 현
상을 보여주고 있는 바, 동 보고서는 1949년 이전까지 라디오가 미국인들의 일상생
활에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를 우회적으로 그리고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
여준다.
이 자료에 따르면 텔리비전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라디오가 잡지와 신문을 압도
하면서 가정내 가장 중요한 매체로 자리잡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1920년대나 1930
년대에도 상황은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으로 짐작 가능하다. 오히려 1930년대 중?
ㅘ캣鳧?미국 역사상 라디오가 가장 중대?
발휘한 시대라고 보는 것도 별 무
리가 없어 보인다. 텔리비전의 등장은 여러 매체 가운데 바로 이와 같은 라디오 청
취에 가장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이제 미국에서 라디오가 어떻게 기술적·제도적
으로 발달했는지를 간략히 들여다보고, 이것이 1920년대에 이르러 대중들의 시·공
간 개념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2) 라디오 체계의 발전과 시·공간 개념의 변화
1906년을 기점으로 나단 스터블필드(N. B. Stubblefield)와 같은 무선 연구자들에
의해 시도된 라디오 방송이 미국에서 최초로 실험에 성공했다. 10년이 ?
년
에는 라디오 제작회사인 웨스팅 하우스의 엔지니어였던 프랭크 콘라드(F. Conrad)
가 음성과 음악을 멀리까지 보내는 데 성공하면서 라디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차츰 생겨났다. 1920년 11월 2일에는 피츠버그의 KDKA가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으
로서 전파를 보냈다. 그 내용은 웨런 하딩과 제임스 콕스(J. Cox)가 대결한 대통령
선거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KDKA의 개국 이후에도 라디오의 보급률은 극히 미미
한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22년에 들어 갑자기 가속화되었는 바, 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이는 대단히 이례적?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약 1년여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무선 통신을 ‘아주 신비스러운 것’쯤으로 여기고 있었
기 때문이다. 당시 국무장관을 맡았던 허버트 후버(H. Hoover)와 같은 사람은 갑작
스럽게 다가온 라디오의 대중화를 가리켜 “무선 열풍(wireless fever)”이라고 지
칭하였으며, 이러한 열풍은 자신이 지금껏 경험한 것 중 가장 놀라운 일이라고 덧
붙였다.
1920년대에 라디오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무엇보다도 당시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공간과 시간에 대한 기존 개념을 급속도로 변화시켜 갔다는 데 있다. 사실
捉嘲?열풍은 먼 거리 지역으로부터 소식과 정보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
에 청취자들이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918년부터 서서히 달
아오르기 시작한 ‘자동차 혁명’의 경우에는 기존에 사람들이 지녔던 시간과 공간
적 거리감을 다소간 압축시켜 놓긴 했지만, 자동차가 전면에 등장하기까지는 여전
히 1929년까지 기다려야 했다.7) 라디오는 전신이나 전화와 달리 사람들로 하여금
예전 같으면 누릴 수 없었던 다른 지역의 풍부한 문화적 혜택을 공유할 수 있다고
믿게끔 했으며,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
특히 남부 지역의 농
민들에게 북부 도시와의 교류는 매우 소중한 경험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제 “보편
적 문화의 새벽이 동터 오른다”라는 정서가 미국인들 사이에서 자리 잡았으며, 라
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미국인들은 거리와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보다 쉽
게 상호 정보를 교환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시간과 거리의 정복은 특히 초기 라디오의 대중화와 기술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아마추어 무선통신가(HAM)들을 사로잡았다. 아마추어 무선통신사들에게는
지역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을 청취하는 것도
미로운 경험이었다. 그렇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전파를 성공적으로 보내고 받는 사실 자체가 이들에게는 훨
씬 더 재미있는 일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기계를 제작하고 조작함으로써 자신의 능
력을 과시하기도 했는데, 이들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라디오의 열풍을 더욱더 부
채질하였다. 이들과 함께 당시의 지식인들과 정치가들도 라디오의 기술적 혁신성과
사회적 효과성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특히 이들에게 있어 라디오를 통한 시·공간의 정복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
미를 가졌다. 구체적으로
遮?새로운 매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화된
산업화로 인해 발생한 미국 대중들과 지역공동체의 물리적·심리적 파편화 경향을
일종의 ‘국가적 통일성’으로 대체시킬 수 있는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한 수단으
로 인식되었다. 찰스 호튼 쿨리(C. H. Cooley)와 죤 듀이(J. Dewey), 로버트 파크
(R. Park)와 같은 당대의 지식인들은 라디오야말로 “광범위한 도덕적·정치적 일
치감, 19세기의 비틀린 붕괴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사람들이 믿는 그러한 일치감
을 회복시킬 수 있는 필수 불가결한 대행자”라고 자신들의 공통된 의견을 피?
다.8) 또한 1920년대의 라디오 칼럼니스트들도 이러한 믿음을 다소 정치적인 어
조로 표현했는데, “라디오는 국가 모든 지역의 상호 이해를 확산시키고, 우리의
생각과 이상, 목적을 통일시켜 주며, 우리를 강하고 보다 잘 짜여진 국민으로 만
들어준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라디오가 전국 방방곡곡, 특히 벽지나 농촌 지역
에도 국가적 통일성을 만들어낼 것이다”라는 기대의 표시였다.9)
이처럼 라디오는 그 이전부터 계속되고 있던 국가 건설의 과제를 완성시켜 줄 기
제로 환영받았다. 통신 및 교통의 역할을 확대 계승한 것이었다. 1
?미국의
행정부와 산업자본이 그 이전에 존재하고 있던 간선철도와 전기, 전신 시스템 등
을 전국적 라디오 네트워크 시스템이 따라야 할 하나의 모델로 여겼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당시 라디오 네트워크에 관해 글을 썼던 사람들도 교통의
은유를 자주 사용했다. 예를 들어 ‘하늘의 고속도로(highways through the sky)?
?捉瑩? 공중 질서를 지키기 위해 있는 ‘교통 경찰(traffic cops)’과 같은 표현
들이 그 구체적인 예가 된다. 특히 ‘경찰’의 은유가 사용된 것은, 정해진 숫자의
방송국만이 상호간 전파 방해 없이
할 수 있었고, 따라서 나름의 규준을 정
해 부족한 방송 주파수 채널을 상호 조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10) 아무튼
1920년대의 라디오는 간선철도, 전기, 전신과 마찬가지로, 혹은 이보다 훨씬 더
형식적으로 거리와 시간의 한계를 정복해 줄 수단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제 지식인들이나 평범한 사람들이나 관계없이 사람들은 라디오가 전국을 연결시
킬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몇 개의 주요
지역 방송들이 청취자들에 서비스하고 있긴 했지만, 사람들은 그 이상을 원했던 것
이다. 1926년에
초의 전국 라디오 네트워크인 NBC(National Broad-casting
Company) 방송사가 설립됨으로써 대중의 이같은 꿈, 다시 말해 ‘기술적’으로 전
국을 하나로 연결시키고자 한 욕망은 마침내 실현되었다.
2. 전국적 라디오 네트워크의 탄생
1) 전국 네트워크화의 배경
NBC라는 전국적인 라디오 네트워크가 생겨나자 라디오의 대중화는 본 궤도에 올랐
다. 앞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와 같이, 네트워크의 건설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 요인
들이 작용했다. 보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듣고자 하는 청취자들의 욕구, 수신상의
한계를 제거하고자 한 ?
무선통신사들의 기술 개발 노력, 전국을 연결시
킴으로써 민족적, 국가적 정체감을 심으려 했던 교육자와 지식인들의 열망, 그리고
자신들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전국적으로 행사하려던 정치가들의 야망 등이 뒤섞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정치·기술적인 요인과 더불어 여기에는 방송사 내부적인 요
인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구체적으로 말해,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지역
라디오 방송국들의 노력이 네트워크의 현실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초기의 지
역 방송국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작은 단위였고, 재정적으로 상당
운 상태
에 있었다.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시스템의 통합을 통해 제작 및 운용에 드는 비용
을 줄이고, 보다 향상된 프로그램을 꾸준히 청취자들에게 공급함으로써 수지타산을
맞추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 1920년대 초에 지역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운영되던 대다수의 라디오 방송국
들은 방송시간을 채우는 데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우선 기술상의 문제로 인해 오
랫동안 방송을 할 수가 없었으며, 재정적으로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할 돈이 부
족했기 때문이다. 초기에 라디오를 통해 송·수신을 즐겼던 무선 통신사들은 대부
분의 청취?
고자 원했던 내용을 송신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개인적 관심이나
취향에 따라 송신을 했다. 따라서 방송 프로그램이 그다지 다양하지도 않았을 뿐
만 아니라, 고정 시간 없이 산발적으로 방송되었다. 그 당시의 지역 청취자들은 짤
막한 토크쇼와 시 낭송,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 음악 연주, 스포츠 소식, 여러
종류의 음악들을 범벅해 놓은 방송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편성이라는 개념이 192
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정립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특히 초기의 라디오 방송국
들은 음악방송을 주로 많이 내보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제작 ?
그다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1922년에 이르러 ‘미국 작곡가, 작가, 출판자 협회 ASCAP(American
Society of Composers, Authors, and Publishers)라는 단체가 음악인들이 라디오
에서 연주할 경우에는 방송사가 그에게 응분의 로얄티를 지급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상황은 크게 변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지역의 라디오 방송국들은
레코드로 음악을 방송하지 않고 있었다. 미국에서 라디오라는 매체가 레코드 산업
과 관계를 맺고 음반을 사용해서 음악방송을 하게 된 것은 록앤롤이 등장한 1950년
경에 이르러?
) 당시의 라디오 방송국 경영자들은 가수들이나 연주가들이
방송에 출연해서 대중과 쉽게 접할 새로운 경험을 갖게 되면 그것이 충분한 보상
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주자들이 보수를 요구하고, 청취자들
또한 보다 대중화된 음악을 방송하는 프로그램을 바래며, ASCAP가 음악에 대한 로
얄티 제공을 주장하게 되자 방송국 경영자들은 적잖이 당황했고 프로그램 제작 비
용에 대한 부담은 더욱 커져만 갔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지역 라디오 방송국들에게 전국적인 라디오 네트워
크의 건설이라는 아이디어는 ?
묽袖?탈출구로 받아들여졌다. 전국화된 네트
워크가 타 방송국의 프로그램을 동시 방송 또는 재방송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고,
이와 같은 프로그램의 공유 방식을 통해 궁극적으로 제작비 부담을 낮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트워크의 건설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존
에 있던 간선철도를 모델로 삼았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네트워크를 건설하기 위해
서는 전국의 모든 수신기로 동시에 똑같은 라디오 신호를 받을 수 있는 ‘표준화’
방식과 같은 기술적 문제들이 우선적으로 해결되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불완전한
?시스템으로 인해 라디오의 전파가 불규칙적이었고, 지역 라디오 방송국이
급증함으로써 수신상의 혼선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라디오 전파를 송·
수신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12)
2) 네트워크화 방식을 둘러싼 논쟁
당시에는 전국 네트워크화를 가능케 할 기술로 대략 세 가지 정도가 꼽혔다. 첫째
로는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사의 데이빗 샤노프(D. Sarnoff)가 1922년
초에 제기한 ‘초출력(super-power)’ 방식을 들 수 있다. 이 방식은 고출력 송신
기를 갖춘 몇 개의 라디오 방송국을 건설한
轢旁뭇湧?통해서 라디오 신호
를 전국적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13) 둘째로는 GE(General Electronics)사와 웨스
팅하우스(Westinghouse)사에 의해 공동 제기된 단파(shortwave)를 통한 프로그램
재방송 방식이 있었다. 이는 하나의 방송국이 원래의 프로그램을 단파와 중파의
두 가지 상이한 주파수로 동시에 송신할 시에, 또 다른 방송국은 특수한 수신기로
단파신호를 잡은 뒤 지역 청취자들을 위해 장파로 다시 송신하는 방식이었다.14)
마지막으로는 AT&T(American Telephone & Telegraph)사가 제기한 것처럼 유선 네
트워크(wired ne
를 통하는 방식으로, 이는 기존의 전화선과 전신망을 통해
서 라디오 신호를 전국적으로 보내자는 제안이었다.
각각의 방식은 그것을 대표하는 거대 하드웨어 제작사의 이익과 매우 밀접하게 결
부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전국적인 네트워크의 등장 배경에는 앞서 지적된
요인들 외에도 라디오의 전국적인 보급확대를 통해 자사의 이익을 최대화시키고자
한 하드웨어 제작회사들의 의도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세 가지 방식
중 어느 하나가 선택된다면 특정 기업이 라디오 시장을 독점할지도 모른다는 위기
감이 기업가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팽배하였다. 하드웨어 제작사들은 자사
에 유익한 방식이 채택될 수 있도록 치열하게 경쟁하고 로비를 펼쳤다. 사실 당시
의 사정을 모두 고려해 볼 때는 기존의 전화선과 전신선을 사용하는 유선 네트워크
방식이 가장 현실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1919년부터 1922년 사이에 이루어진 복잡
한 ‘특허권 연합(Patent Pool)’으로 인해 전국적인 라디오 네트워크 건설은 계속
해서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1926년에 특허권 연합이 내부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독점에 따른 대중
들의 항의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협상?
臼눼? 협상에 따라서 AT&T는 자기 소
유의 뉴욕 WEAF 방송국을 RCA에 매각했고, 마침내 NBC가 탄생했다. NBC는 AT&T로부
터 개별적인 지역 방송국들을 연결할 수 있는 전화선을 대여받았다. 그리고 뉴욕에
있던 라디오 방송국인 WJZ와 WEAF가 여타 방송국들을 위해서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로 협약을 맺었다. 협상의 결과 RCA는 자신들의 초출력 방송 방식을 기꺼이 포기하
였는데, 이것은 그 방식이 사람들에게 눈에 띄게 공중파의 독점적 통제로 보였을
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실행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RCA는 NBC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한편 GE와 웨스팅하우스의 경우에는, 단
파를 통한 재방송 방식이 기술적으로 불완전했고 잠재적 이익을 얻으면서 자신 명
의의 개별 방송국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협상에 최종적으로 동의했다.
결국 라디오 특허권에 대한 재협상은 RCA에 의해 운영·지휘되는 자기 충족적 유선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결론 맺었으며, 이로써 최초의 전국 라디오 네트워크가 현실
화되었다.15)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유선 네트워크 방식은 당장 새
로운 문제, 즉 “전선을 빌리는 데 드는 ?
育?어떻게 충당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가장 쉬운 해결책은 광고비 수입을 통해 제작 및 송출 비용
을 충당하는 것이었는데, 초창기 미국의 전국적 라디오 네트워크 서비스가 상대적
으로 비정규적이었기 때문에 사업주들에게 이는 아주 매력적인 해결책으로 보였다.
더구나 여러 지역 방송국들이 결합된 유선 네트워크가 1920년대 초에 이미 형성되
어 있던 산업의 분배·유통 체계와도 비슷했기 때문에 광고주들에게도 매우 친근하
게 다가왔다. 이에 따라 라디오 방송국들은 본격적으로 광고 후원을 받기 시작했다
. 이는 ?
상업적인 매체라는 인식을 대중들에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라디오의 상업화를 가져왔다. 또한 라디오의 상업화는 당연히 라디오
방송의 프로그램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각 라디오 방송국들에게 라
디오 전파를 보내기 위해 AT&T로부터 빌리는 전선의 임대료가 너무나 비쌌기 때문
에, 라디오 방송국들은 한편으로 비용을 절약하는 한편 또 한편으로 전국 청취자들
을 필요로 하는 기업 광고주들의 눈을 끌기 위해 새롭게 내용을 바꿔 나갔다.
3. 라디오 방송의 상업화
위에서 간단히 살펴본 것처럼, 192
?최초의 전국적 네트워크인 NBC가 성
립되자 이제는 AT&T로부터 빌린 전신·전화선의 임대료를 충당하는 것이 문제가 되
었다. 그 해결책으로는 대기업으로부터 광고 후원을 얻는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 또한 그렇게 쉽게 풀릴 만한 성질의 문제는 아니었다. 광고주들의 입장에서는
과연 라디오 프로그램에 광고 후원하는 것이 수지타산에 맞는 일인지 별반 확신이
가지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누가, 어떤 프로그램을, 얼마나 듣는지를, 다시 말
해서 라디오를 통해 자사 상품의 광고가 얼마나 많은 청취자들에게 정확히 선전되
는지를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완전한 라디오 시스템과 라디오
전파의 혼선 문제가 빈번히 발생하면서 광고주들의 의심은 보다 높아갔다. 후에
AT&T사의 부사장이 된 윌리엄 펙 베닝(W. P. Banning)조차도 당시의 상황을 회고
하면서, “라디오(전파)가 정말로 어디로 향해 가는지는 … 아무도 몰랐다. 방송
에 관한 모든 것은 불확실했다”라고 고백할 정도였다.16)
전국화된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1927년에 연방통신위원회 FCC(Federal Communicat-
ion Commission)가 설립되어 부족한 주파수로 인한 공중파의 혼선 문제를 어느 정
도
주면서 광고 후원을 받으려는 라디오 방송국들의 노력이 보다 본격적으
로 이루어졌다. 모든 라디오 방송국들은 후원자 수를 극대화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광고를 내보내는 것이 효과가 크다는 점을 예상 광고주들에게
확신시키고자 했다. 또 한편으로는 어떤 프로그램을 어떠한 유형의 사람들이 좋아
하는지를 실제적으로 조사·연구해서 자료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이에 기초하여 프
로그램을 시간대별로 다양화시키고 고정 편성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특정 프로그램
을 청취하는 청취자층을 형성하고자 노력했다. 네트워
樗?이전에는 전혀 생
각치도 못한 매우 적극적이고 과학적인 전략이었다.
우선 라디오 방송국들은 청취자들과 광고주들에게 라디오야말로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성의 있는(sincere)’17) 매체라고 설명함으로써 라디오를 특별히 신
용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로 신뢰하게끔 했다. 방송국들은 무엇보다도 라
디오가 청취자들에게 친근감을 자아낼 수 있는 장점이 있음을 내세웠다. 요컨대 라
디오는 청취자들로 하여금 마치 방송 진행자가 자신의 옛친구인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들고 그 친구가 자신에게 직접 말을 걸어온다는
빠지도록 하는 장점이 있
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라디오라는 매체가 지닌 친밀성이라는 차별적 속성이
결국 광고 메시지의 경우에도 똑같은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논리로 이어졌다.
이처럼 방송국들은 광고주들로 하여금 전국적인 라디오 네트워크가 건설됨으로써
전국의 모든 소비자들에게 동시에, 그리고 적은 비용으로 자신의 상품을 직접 홍
보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음을 확인시켜 나갔다. 이와 동시에 방송국들은 당시 계속
해서 개발되고 있던 광고 이론에 착안하여, 광고주들에게 라디오를 이용해 보다 새
로운 형태의 광고들?
?보라고 부추겼다.
사실 기존의 광고 이론은 상품의 기능이나 형태, 사용가치 등 인지·정보적 측면
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반면에 새롭게 등장한 광고 이론들은 심리적인 측면과
비이성적 자극의 원칙을 보다 강조하였다. 즉, 상품의 사용가치에 대한 직접적 요
구가 아니라, 연상과 암시를 통해 소비자의 요구와 상품 이미지를 연결시킴로써 ?
갚만탭求?순간에 일어나는 소비자들의 행동을 통제”18)한다는 것이 그 요점이었
다. 방송국들은 라디오야말로 이러한 연상과 암시를 가장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매체라고 광고주들을 설?
ぐТ?19) 그리하여 라디오는 ‘마법 양탄자(Magic
Carpet)’ 혹은 ‘알라딘의 마술램프(Aladdin Lamp)’ 등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예
컨대 향수 광고주들에게 방송국은 청취자들의 청각에 호소하는 라디오야말로 “파?
?그 자체의 패션과 향락의 분위기를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라는 식으로 설
득시키고자 했다.20)
이처럼 라디오 방송국들이 저마다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광고를 방송에 끌어들이게
되면서, 라디오 방송국 경영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을 기본적으로
분과 초의 단위로 사고 팔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퓸駭? 즉, 시간이 곧
이윤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자본주의적 생
산방식의 지배적 형태인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가 일찌감치 적용된 1920년대 초 공
장에서 그리 낯선 문제가 아니었다. 생산과정의 모든 과업을 각각의 구성 부분들로
해체시켜 시간-동작의 원리에 따라 재설계한 테일러 시스템, 그리고 노동자로 하여
금 제품(node)에서 제품으로 옮겨다니게 한 기존의 ‘노달 어셈블리(nodal assembl-
y)’ 방식을 대체한 포드주의의 ‘플로우 라인(flow-line)’ 생산방식은 제품이 노
동자들 사이를 이
함으로써 노동시간을 크게 압축시켰다. 당연히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가 높아졌고, 단위 노동 시간당 생산량이 높아짐으로써 이는 곧 이윤과
직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디오 방송의 시간 판매는 자본, 노동, 시간 사이
의 관계 인식을 더욱 확고히 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특히 방송국의 경영자들의 경우에는 시간대의 할당을 통해 이윤의 극대화를 노렸
는데, 이는 곧 라디오 청취자들의 청취시간 규정을 의미했다. 오늘날 흔히 말하는
‘황금 시간대(prime time)’가 바로 이 시기에 그 맹아적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
?높은 낮시간대에는 주로 화장품회사나 비누회사가 광고
후원하는 여성 취향의 드라마 즉 오페라(soap opera)가 주로 편성되었으며, 여
러 상이한 청취자들의 평균 청취율이 높은 밤 시간대에는 대기업이 후원을 하는 버
라이어티쇼가 방송되었다. 청취율이 오락 프로그램보다 낮다고 생각된 교육 프로그
램들은 주로 청취자들이 거의 듣지 않는 새벽에 편성되었다. 광고주들이 소수 청취
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이러한 프로그램에 광고 후원하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
문이다. 이와 같은 라디오의 상업주의화를 개선하고자 하는 움직임
2년에 실
시된 미 통신법(Communication Act) 개정을 둘러싸고 교육자들을 중심으로 집중적
으로 제기되었다.21)
4. 청취자 기호의 획일화
1) 드라마와 버라이어티쇼의 높은 인기도
초기의 라디오 방송국 운영자들은 대부분 1차 세계대전 당시 통신병으로 근무했던
사람들이거나 아마추어 무선통신사 출신들이었다. 그로 인해 이들은 라디오가 지닌
오락산업적 측면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해를 갖지 못했으며, 프로그램 자체에 대해
서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초기의 라디오 방송국들은 청취자
들의 청취 습관을 파악
シ?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그들의 기호(tas-
te)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지 청취자들이 자발적으로 보낸 편지를 통해서
였다. 당연하게도 이런 상황에서는 프로그램 편성 방향을 둘러싼 방송사내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청취자들이 무슨 프로그램을 즐겨 듣고 또한 듣고자
하는지를 정확히 판단할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전국 네
트워크가 생겨나면서 광고주들은 라디오 청취자들이 특정 프로그램을 선택적으로
듣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 기업들은 유명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인
?프로그램에만 광고를 싣고자 했으며, 라디오 방송국의 경영자들도 이러한 상
황에서 프로그램 자체에 대해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라디오 프로그램은 전국 네트워크가 등장한 이듬해인 1927년
부터 1931년 사이에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이는 1934년부터 1941년에 걸친
이른바 ‘라디오의 황금기(Radio? Golden Age)’를 가능케 하였다. 당시의 가장
두드러진 프로그램상의 변화는 드라마의 급증과 흔히 ‘보드빌(Vaude-vill)’이라
는 명칭으로 알려지게 된 버라이어티쇼의 신설이었다. 앞 장의 <표 4-3
면 19
27년에는 드라마 방송 시간이 전혀 없었던 반면에, 1929년부터는 꾸준히 그 편성
비율이 증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드라마와 버라이어티쇼
는 특정한 한 가지 주제(concept)를 중심으로 해서 노래와 대사를 구성하는 일종의
테마(theme) 프로그램이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프로그램 구성 방식은 청취자들로
하여금 드라마와 버라이어티쇼를 기존의 프로그램과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하게끔
함으로써 청취자들의 관심과 주목을 쉽게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광고주들은 이런
프로그램에 주로 광고 후원을 해주었?
이어티쇼는 1929년과 1933년 사이에
바로 이러한 광고주들의 대폭적인 후원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발전해 갔다.
한편 이 시기에 가장 유명했던 라디오 드라마 프로그램으로는 《아모스와 앤디》
(Amos ??Andy)가 있었다. 두 명의 흑인 택시운전사와 그들의 친구들이 겪는 실수
담을 엮은 것으로서 청취자들로 하여금 폭소를 자아냈다. 이와 함께 일종의 시트콤
(situation comedy)으로서 도시에 사는 유태인 가족의 일상사를 묘사한 《골드버그
가의 출세》(The Rise of Goldbergs)라는 드라마도 있었는데, 두 프로그램이 모두
1929년에 최
송되었다. 특히 《아모스와 앤디》가 전국적으로 공전의 인기
를 누렸던 것은 아직까지도 미국 라디오 프로그램 역사에서 하나의 전설로 남는다.
이 드라마는 당시에 전국적으로 라디오 청취자들의 60%, 때로는 거의 4억에 이르는
사람들을 라디오 수신기 앞에 붙잡아 두었다. 1928년과 1929년 사이에 라디오 수신
기의 판매율이 23%나 증가한 것도 상당 부분 이 프로그램의 인기 덕택이었다.22)
사실 이 두 프로그램은 상당히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던 바, 첫번째는 맨 처
음에는 광고 후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다가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
광범위하게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이 프로그램들이 다루었던 주제가 다
소 미묘했다는 점이다.
《아모스와 앤디》, 《골드버그가의 출세》가 인기만큼이나 많은 논란을 가져온
것은, 두 프로그램의 주제가 다분히 인종적 편견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
히 전자의 경우에는, 주인공이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s)임에도 불구
하고 오히려 백인 청취자들이 매우 즐겨 듣는 프로그램이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들은 이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몇몇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이 드
라마가 ?
비천하게 묘사하고 스테레오타입화시킨다고 비난하기도 했다.23)
다소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골드버그가의 출세》 역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
다. 무엇보다도 이 프로그램을 방송했던 NBC는 사람들이 과연 유태인 가족의 이야
기를 좋아할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유태인에 대해 편견이
매우 심한 상태였고, 더군다나 유태인의 연예계 진출이 두드러진 상황24)에서 직
접적으로 유태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것이 국민 감정상 좋
지 않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2) 라디오의 유사 친근성
부?
肩?사정 때문에 1920년대 후반부터 라디오 방송국들은 프로그램
청취자들의 성격과 여론을 조사·파악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특
히 여기에는 광고주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였으며, 방법론적으로도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 라디오 방송국들은 양질의 프로그램을 요구하는 청취자들
과 인기 프로그램에만 광고 후원을 하려고 하는 광고주들의 이해관계를 동시에 만
족시켜 주어야만 했다. 따라서 방송국들은 청취자들이 보낸 편지에 의존하던 기존
방식에서 탈피하여 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여론조
萱?채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 과학적인 여론조사 방법은 직접적으로 방송 광고의 중요성
을 부각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되기도 했다. 즉, 라디오 방송국 경영자들은 청
취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갖고 광고주들에게 라디오를 청취하는 사람들이 존
재한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고자 했으며, 궁극적으로 라디오 광고가 효력이 있음을
믿게끔 노력하였다.25)
이처럼 라디오 방송국들은 점차 청취자들의 특성과 기호에 대한 분석에 기반해서
프로그램을 제작·편성하게 되었으며, 이제 가장 중요한 (혹은 유일한) 잣대는 ‘
과연
慣瀏??청취자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인기를 얻는가?’ 하는 점이었
다. 방송국들은 앞다투어 대중들이 가장 선호하는 형식과 내용으로 프로그램을 만
들어내고자 했으며, 이러한 상업적 경쟁의 결과 청취자들의 기호는 더욱 획일화되
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특히 대기업들이 광고 후원을 하는 드라마나 버라이어티쇼
와 같은 프로그램들은 청취율의 극대화를 위해 될 수 있는 한 평범한 교육수준의
대중들이 모두 즐길 수 있는 내용을 담고자 했다. 이로 인해 이들 장르에 관한 한
방송국간 차이가 급격히 사라져 갔다. 더구나 라디오에 의해
문화적 특성들
이 활발히 공유됨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고유의 문화적 특성들이 사라져 가는 결과
가 빚어지기도 했다. 이른바 대중문화(mass culture)의 기반이 확고하게 조성되었
다는 것인데, 이는 초기 라디오에 대해 사람들이 기대했던 ‘보편적 문화의 공유’
와는 다소 차이가 나는 모습이었다.
무엇보다도 라디오라는 새로운 매체가 지닌 ‘유사 친근성(pseudo-familiarity)’
의 특성은 청취자들로 하여금 저마다의 생각이나 기호의 차이를 넘어서 상당한 일
체감을 갖도록 해주었다. 라디오가 거리상 한계를 뛰어넘어 타지역의 사람?
건들에 대해 방송하면 할수록, 라디오 청취자들은 마치 자신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세히 알고 있고 또한 주변 사람들과 친숙하다는 착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
다고 해서 라디오가 근본적으로 대중들을 낯선 모든 것들과 친숙해지도록 해 준 것
은 아니었다. 단지 다른 사람들과 상이한 지역, 낯선 상황이나 사건들, 특히 그들
에게 전혀 친숙하지 않은 것들을 청취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재현시킬 따름
이었다. 대부분의 청취자들은 이제 라디오가 가져다준 유사 친근성 덕택에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것도 마치 자기가 겪었던 것?
동하고 사고하며 반응할 수 있
게 되었다.
사실 라디오는 그 어떤 매체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붙임성 좋은 특성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초기의 라디오는 비단 광고뿐만 아니라, 많은 정치가들에 의해
자신들의 정견을 유권자들에게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써 활발하게 사용되기도 했다.
대공황 시절에 당시의 정치적·경제적인 문제들에 관한 프랭클린 루즈벨트(F. D.
Roosevelt) 대통령의 담화를 방송하기 위해 마련된 ‘노변정담(爐邊情談: firesid-
e chats)’은 그 대표적 사례에 불과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잠시 말을 멈추고 물
마시는 소리까지도 스피커를 통해 들을 수 있던 전국의 청취자들은 마치
그가 자신들의 곁에서 이야기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되었다.26) 그 후 라디오
가 지닌 유사 친근성의 정치적 활용은 제 2 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약 3년이 지
난 1942년에 미 국방성의 전쟁정보해외지국(OBOWI: Overseas Branch of the Office
of War Information)이 ‘미국의 목소리(VOA: Voice of America)’라는 대선전용
방송을 시작함으로써 더욱 본격화되었다.
5. 소결: 라디오는 미국인들의 생활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가?
이처럼 1920년대 중반 이?
?緇㈏?설립과 대중화에 힙입은 라디오의 급
속도로 성장은 아래 <표 4-4>에서 볼 수 있듯이, 1929년에 대공황이 시작되고 그
여파가 지속되었던 1930년대 초까지도 전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대공황은 라디
오의 대중화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광고주들은 불황 속에서도 자신들의 상품판매를
촉진시킬 수 있는 비교적 광고비가 적게 들어가는 매체를 필요로 했고, 청취자들도
라디오가 제공해주는 정보와 오락에서 위안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대공
황 상태에 있던 대중들의 입장에서는 라디오가 가장 값 싸고 전 가족이 부담 없이
수 있는 오락거리였으며, 개별 구성원들에게는 사회적 불안으로부터 도망칠
유일한 도피처가 되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대공황 시절 동안 “가구들을 팔고
, 자동차를 고치지 않은 채로 남겨 두었어도, 라디오는 계속 가지고 있었다”는 사
실은 이러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27)
그렇다면 이와 같은 1920~1930년대 라디오의 대중화는 당시 미국인들의 일상생활
을 과연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무엇보다 라디오가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결성하고
상업주의의 길로 진입함에 따라서 공간과 시간에 대한 기존의 생각들이 급속도로
바뀌었다
찼ㅀ彭?개념이 급속도로 압축되었으며, 단위 시간이 판매되어 시
간 자체가 이윤화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음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
에 덧붙여 라디오의 대중화가 임금체계의 도입과 마찬가지로 가족관계를 크게 변형
시켰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제 2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20년대에
들어 임금체계는 가내 노동을 산업화된 생산양식으로 이전시킴으로써 생산의 단위
였던 가족을 소비의 단위로 변모시켰다. 또한 각 노동자들을 개인 단위로 고용함으
로써 가족을 통해 이뤄졌던 사회적 상호의존성을 공장으로
는 등 가족의 해
체 경향을 심화시켰다. 라디오의 경우에도 먼 곳에 있는 것들을 친밀하게 만듦으로
써 혹은 역으로 친밀한 것을 멀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 가족 구성원들의 일차적 친
밀감을 급속하게 해체시켜 버렸다.
라디오가 대중화되고 몇 년이 지나면서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가족의 사회적
특징이 점차 그 매력을 잃어가고, 심지어는 가족이란 개념 자체가 진부하게 느껴
짐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징후를 가옥 구조에서 거실 탁자가 사라진 사
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기존에 거실 탁자가 맡았던 기능을 라디오가 대체
것이며, 이는 라디오가 가족간 유대감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기보다는 거꾸로 가
족의 중심을 더욱 해체시켰다는 점을 보여줄 따름이다.28) 사실 전통적인 가족 형
태에서 거실 탁자의 존재는 매우 컸다. 가족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 주변에 둘러 앉
아 서로의 관심사와 시선을 나눌 수 있도록 해주고, 상호간의 대화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그러던 것이 라디오가 등장하면서 탁자를 치워버리고 가족 구성원들간 대
화를 상당 부분 대체하게 된 것이다. 라디오를 통해 다른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신기한 소식과 흥미로운 오락거리는 더이상
맑봇便湧?서로 얼굴을 마주보
며 담소를 나눌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가족 구성원들은 라디오 방송의 일부분을 듣지 못하는 대가를 치뤄야만 서로 이야
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이러한 기회를 놓치고자 하지 않았다
는 데 있다. 그들은 이제 개별화된 청취자로서 서로의 옆에 앉아 있으면서도 집중
해서 라디오 방송을 듣게 되었으며,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가 공유하는 관심사나 문
제에 대해서는 좀체 시간을 투자하지 않게 되었다. 개별 구성원들이 함께 하는 유
일한 행동은 상호간 가족의 틀 안으로 통합되지
纘쩔【?누구와도 공유하지
못하는 세계, 다시 말해 철저하게 사사화되고 비현실적인 라디오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것뿐이었다.29) 임금체계에 의해 공동체와 생산의 기능을 빼앗긴 가정은 급
속도로 개별적 소비와 여가의 공간으로 재구성되어 갔다. 대중사회의 소외감과 익
명성이 가정이라는 일차적 공간 속으로 깊숙이 침투하게 되었음이며, 가족간 관계
를 정하는 전혀 다른 문법이 자리잡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상황은 그후 1947년에 트랜지스터가 발명됨으로써 더욱 가속화된다. 트랜
지스터는 주파수 신호를 전도(電鍍)하고 ?
증폭시키는 데 있어 기존의 진공
관을 훨씬 능가했다. 그리고 이것을 사용한 라디오는 보다 값이 저렴했고 크기가
작아졌으며 더욱더 내구력이 있었다. 트랜지스터의 발명으로 라디오 성능이 개량
되자 라디오를 갖고 다니기 더욱 쉬워졌고, 라디오 방송 청취는 보다 더 개인적인
일이 되었다.30) 특히 트랜지스터의 발명으로 라디오의 가격이 싸지고 그 크기가
작아지면서 10대 청소년들의 라디오 소지가 크게 유행하였다. 저마다 개인 라디오
를 휴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부모의 방해 없이 자유롭게 라디오를 청취할
수 있게 되
黴킵湧?침실과 해변가에서 자신들의 부모들이 별로 즐기지 않
고 청취를 허락하지 않을 프로그램까지도 친구들이나 연인들과 함께 자유롭게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컨대 방송은 서로 떨어져 있는 청소년들이 같은 내용물을 즐
기게 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로 인해 이들 사이에 독특한 사회·문화적 정체감을
형성할 길을 열어 놓았다.
지금까지 간단히 살펴본 대로, 라디오는 미국의 1920~1930년대를 규정지었던 시대
의 중심 매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1950년대에 들어와 그 자리를 텔레비전에게 내
주고 마침내 1970년대 중반에는 ?
택섭?내려앉지만, 오늘날에도 라디오 청
취는 미국인들이 누리는 일상생활의 일부로서 대다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 이와 같은 매체의 발전은 테크놀러지 및 대중문화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
고 있다. 초기 라디오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유선 네트워크와 FM 등과 같은 기술의
도입은 미디어의 구조와 내용까지도 특정한 모습으로 가져간다. 이와 함께 매체를
둘러싸고 변화되는 대중들의 정서(예컨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의 변화)와 대
중문화(광고 및 상업주의, 하위문화)적 양상도 대중매체의 변화를 역으로 강제한다
.
茱解甦ㅇ隙?논의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일 뿐 아니라 문화가 매체의 성격
을 규정하기도 한다는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1920년대 미국 라디오의 성장과정은
그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 헐리우드의 등장
제 1 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영화의 전 지구적 확산은 어떤 문화현상과도 비교될
수 없는 경이로운 일이었다. 미국은 영화를 국제 통상의 거래품목으로 등록시켰으
며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미국식의 대중문화를 타국의 대중문화 중심에 자리하게
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부터 시작된 영화는 헐리우드를 만나서야 꿈을 만들어내
젊음, 그리고 부를 욕망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근대화된 삶, 그리
고 그것이 발생하는 도시공간을 특정 이야기구조에 얹음으로써 영화는 누구에게나
열린 이야기, 누구나 꿈꿀 수 있는 내용들을 쏟아내게 되었다. 이는 미국 영화를
통해서 근대화의 감정이입(empathy)을 요청했던 근대화론자들의 논지에서도 잘 드
러난다. 미국식의 영화 속에서처럼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기대를 심어주는
기제로서 영화는 근대적 삶의 진열장이 되고 있었다. 그와 같은 경로를 거쳐 이제
미국의 영화는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에 그
歌?또한 미국의 영화에
그치지 않고 너무나도 생생한 현실처럼 미국의 현실이 아닌 보편적인 현실, 근대
적 삶의 예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같은 성취를 바탕으로 전 세계의 영화시장은
헐리우드 독점체제로 변했다. 이같은 불균형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나라들이 노력
을 경주하고 있긴 하지만 역사를 되돌리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이처럼 미국 영화
가 세계 영화시장에서 헤게모니를 잡게 된 것은 제 1 차 세계대전 이후 대체로 192
0년대 쯤으로 설정할 수 있다.
제 1 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은 미국에 맞서는 영화산
장을
지니고 있었다.1) 질적으로도 훨씬 우수한 영화를 만든다는 자부심도 지니고 있었
다. 하지만 제 1 차 세계대전을 즈음해서 이러한 영화의 판세는 전혀 다른 방향으
로 움직이게 된다. 전쟁을 통해 경제적인 부를 집중적으로 축적할 수 있었던 미국
이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영화를 산업의 틀로 묶어 본격적인 상품 소비문화를 열었
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유럽의 영화산업을 대체하려 하는 미국의 영
화산업적 의도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영화는 헐리우드를 중심으로 자본집
약적이고, 노동집약적인 산업체계로?
?갖추게 된다. 영화의 생산, 유통, 흥
행에 본격적으로 자본의 논리가 적용되기 시작한다. 1930년대에 이르면 헐리우드
영화산업은 미국의 주요산업으로 부상하며, 대중문화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또한 이즈음에 헐리우드는 이후 전 세계 영화산업을 휘어잡을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게 된다.
미국의 영화산업이 이 시기에 팽창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로 미국 사회의 전반
적인 변화를 들 수 있다. 전쟁이 가져다 준 경제적 풍요로움은 미국의 가치관에 변
화를 가져왔다. 빅토리아 시대의 금욕주의적인 도덕관과 청교도 정신을
성
적 쾌락을 만끽하고, 자본주의의 발달이 가져다 준 부를 마음껏 즐기고자 했다. 전
쟁에서 돌아온 젊은 남성들은 변화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고, 1921년에 선거권을
쟁취한 여성들은 더 이상 기존의 도덕성과 사회적 규범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제 가정의 울타리를 넘으려는 여성과 젊은이들이 등장하게 되고 이로 인해 가정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2) 경제적 여유를 틈타 젊은이들은 새로운 소비주체로 자리잡
게 된다. 짧은 노동시간과 높은 임금으로 노동자들은 소비주체화되기 시작했고 그
들의 시간과 수입을 소비할 수 있는 공?
資?했다. 이른바 역사가들이 빗대
어 말한 ‘재즈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가정에 대한 개념이 바뀌고 수입을 올릴
수 있었던 젊은이들은 가정 바깥의 레저를 찾고자 했으며 영화산업은 그에 부응한
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적이며, 목적 없는 쾌락의 시대는 1920년대 후반 대공황을 맞
이하면서 마감한다. 헐리우드는 경제적인 난국 속에서 퇴폐와 과잉의 장소로 비난
받게 된다. 1920년대의 나태함이 공황의 원인으로 돌려지는 등 보수적인 세력이 전
에 없는 강한 윤리적 목소리를 내놓은 것이다. 1932년 공황시기에는 실업률이 23.6
%?
, 월 스트리트는 파산한다. 이후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대통령으로 당선
되면서, 트러스트와 독과점 체제를 인정하고 뉴딜정책을 펼친다. 1937년에서 38년
사이에 미국경제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되고, 곧 이어 터진 제 2 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국경제는 다시 성장곡선을 그린다. 미국 영화산업은 제 2 차 세계대전 이
후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린다. 세계적 전쟁을 마친 후에 미국 영화가 호황을 누린
다는 역사적 사실은 영화가 미국의 국력과 평행선을 그으며 성장함을 알려주는 단
서가 되기도 한다. 1929년부터 시작된 공황과 이후의 뉴딜
여파는 헐리우드
에도 미쳐서 헐리우드는 스튜디오 시스템이라는 독과점 체계를 확립하게 된다. 스
타와 장르를 이용해 제작공식을 확립하고 제작, 배급, 흥행망을 일괄통제하게 된다
. 대부분의 영화자본들은 극장체인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극장상영을 위한 끊임
없는 제작공급이 필요했고 산업적 효율성을 감안해 영화자본은 독점체제를 강화시
킨 것이다.
영화 장르도 이 시기에 이르면 다변화된다. 달라진 생활, 다양한 새로운 삶을 반
영해야 했고 스튜디오 시스템과 스타 시스템에 의한 장르영화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영
究?매체를 벗어나 적극적인 오락매체로 역할을 해야 했다.
당시의 관객들이 사회에서 갖는 집단적 무의식, 욕망을 찾아내고 그에 어필할 수
있는 새로운 내용과 포맷을 필요로 했기에 다양화는 당연해 보인다. 영화기술의
발전 ─ 특히 여기서는 음향기술, 칼라 기술의 발전 ─ 도 다양화에 확실한 기여
를 했다. 영화가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총아적 매체로서 자리매김되는 데 영화
기술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3) 유럽 등지에서 행해졌던 실험적 양식 ─ 독일의
표현주의, 프랑스의 인상주의, 러시아의 몽타쥬 ─ 등이 미국의 영화 ?
들어
오게 되어 영화에서 표현양식이 한층 더 다채롭게 해주었다. 더 나아가 유럽의 유
명감독들을 직접 초빙해 제작의 기회를 부여하는 등의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영화는 사회의 직접적인 반영은 아니다. 따라서 영화역사기술 또한 상상적 형식을
벗어날 수 없다. 영화라는 텍스트는 작가 개인의 상상적 형식과 당대의 이데올로기
적 호명의 형식, 그리고 제작조건 등이 충돌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헐
리우드 영화, 특히 장르영화가 투명하고, 잘 다듬어진 결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것
은 단순한 사고이다. 그 갈등의 지점, 그
지점은 당대의 모든 경제적, 법적
, 이데올로기적 수준들이 만난 중층결정의 산물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 미국 사
회의 전반적인 변화의 징후들과 흐름들이 어떻게 영화에 스며들었으며, 그리하여
미국 영화문화를 어떻게 형성해 나갔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
를 수행하기 위해서 먼저 헐리우드 영화산업의 변화를 추적할 것이다. 헐리우드 영
화라는 텍스트를 둘러싼 컨텍스트를 먼저 논의하는 셈이다. 다음으로는 극장의 변
화와 이에 따른 영화관람 양식의 변화를 통해서 영화가 당시의 대중들에게 값 싼
입장료라?
?이유 뿐만 아니라, 다른 오락이나 여타 여가활동을 위한 수단
중 어떻게 영화를 선택해서 왜 영화를 보러 갔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후 영화
기술 발전, 그리고 국가의 개입 등이 영화산업과 영화 텍스트(특히 장르)의 물꼬를
어디로 틀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영화, 스타를 중심으로 관객들의 욕망을
어떻게 관리하고자 했는지를 정리할 것이다. 이는 영화를 단순히 산업의 산물이거
나 작가(author)의 작품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고 산업, 국가, 작가와 관객들의 경
험이 중첩된 사회적 산물로 보고 역사를 적어 나가려는 의지라
?
1920, 30년대 미국의 영화산업, 제도를 일별하는 일은 국외자에게는 많은 한계를
깨닫게 해주는 징벌과도 같아 보인다. 우리는 그 시대를 겪어보지도 못했을 뿐 아
니라, 그 시대가 남긴 유산을 같은 공간에서 경험하지도 않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전혀 낯선 시대의 숨결을 정리한다는 일은 이미 쓰여진 글쓰기 속에 담겨져 있는
사관이나 이념들에 대한 철저한 해석이라는 또 다른 과제를 떠안게 된다. 다른 한
편으로 이런 작업의 의미를 단순히 정보제공 이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각으로 미국을 바라보고, 미국의 대중
돋?기술하고, 해석해야 하는 수미
일관된 시각이 필요했다. 미국의 영화사를 정리한 글들을 되읽고(read back), 비판
적으로 되쓰기(write back) 위해서 미국의 영화제도를 ‘사회적 효과’를 의도한
장치로 이해해 보고자 했다.
2. 영화제도의 변화
1910년대를 미국영화 산업의 기본적인 틀이 마련된 시대라고 본다면, 1920년대는
영화를 둘러싼 제반 산업과 제도를 정교화해서 이를 팽창한 시기였다. 1930년대에
이르면 이는 완성기에 접어들게 된다. 스튜디오 시스템이라고 불리우는 헐리우드
영화산업의 근간은 1920년대와 1
쳐 확실한 토대를 구축하게 된다. 미
국 영화산업을 상징하는 단일어로, 그리고 미국영화를 의미하는 단어로 헐리우드는
거듭 태어난다.4) 제 1 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변화과정을 거쳤던 1920년대와 1930
년대 ‘헐리우드’는 경제적으로 전쟁과 월스트리트 증권 투자자들과의 긴밀한 유
대를 통해 영화산업 자체의 자본을 축적하는 단계였다.5) 한편 문화적으로 헐리우
드라는 ‘서부 개척’의 결과가 미국 대중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한 시기이기
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메이저 스튜디오 왕국의 황제(mogul)들이 각종 로비와 이권
개입?
謙舅?동원하여 외부 압력단체가 헐리우드에 가한 거센 비판을 잠재울
수 있도록 자생력을 쌓아 나간 시기이기도 하다.
1) 스튜디오 시스템
한 때 불모의 땅이었던 헐리우드가 왜 미국 영화산업 아니 대중문화의 메카가 되
었는가? 이 질문에 많은 학자들이 각기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연극과 문학 등 각
종 예술의 중심지는 분명 서부라는 저개발의 땅이 아닌, 뉴욕을 중심으로 한 동부
였다. 애초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바이타그라프사는 브룩클린에서 영화를 제작했고
, 폭스(Fox)와 파라마운트(Paramount)는 맨하탄에 스튜디오를 두었?
楮〉?
새로운 복합 스튜디오를 열었다.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을 공연하던 배우들은 낮 시
간에 영화를 찍었고, 밤에는 연극무대에 등장했다. 영화는 미국 전역에 걸쳐 제작
되고 있었고, 남부 캘리포니아는 그 중 일부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남부 캘리포니
아는 저렴한 제작경비, 좋은 기후, 그리고 다양한 로케 장소를 제공한다는 지역적,
환경적 이유로 인해 서서히 그 중심적 지위를 쌓아 갔다. 하지만 보다 결정적인 이
유는 1920년대 말 영화가 목소리를 갖게 되는 유성영화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성영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우들은 벌이가 더 나은 영화에 전념하
고자 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던 연극배우들은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고,
지속적인 영화작업을 할 수 있는 헐리우드로 가고자 했다. 보다 상업적이고 대중적
인 영화장르에 전념하고자 하는 연극배우들이 늘어나게 된 셈이다. 유성영화 시대
의 개막 이후 헐리우드는 통합과 집중을 통한 독과점 체계를 확실하게 마련해서 국
내, 국외 할 것 없이 많은 영화인들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또
다른 문화생활 중 일부분에 불과했던 뉴욕에서의 영화제작은 본격적이고 전문적인
공간
리를 옮겨가게 된다. 영화와 더불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헐리
우드로 이동하고자 하는 산업과 인력이 늘어나게 되었다.
1920년 한 해에 미국은 750편의 장편영화를 상영했고, 매주 3,500만 명의 미국인
들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 1922년에서 1930년 사이 영화산업의 전체 투자액은
78만 달러에서 850만 달러로 껑충 뛰었으며, 매 해 약 1,000여 편의 영화가 미국에
서 제작되었다. 1910년대 후반부터 장편영화가 기존의 한 릴짜리 영화(원 릴, 상영
시간이 약 10분 정도)보다 흥행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방대한 ?
培茨? 그에 따른 제작비 부담을 적절히 조절하고 통제
하는 메커니즘을 마련해야 하는 새로운 시기를 맞게 된다. 헐리우드는 새로운 제작
시스템을 고안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스튜디오 시스템(studio system)’이
다. 헐리우드 경제학의 많은 부분은 ‘스튜디오 시스템’ 이라는 토대에서 기원한
다. 스튜디오 시스템은 두 번에 걸친 독과점 시기를 거쳐 확실한 발판을 마련, 191
0년대 중반부터 시작, 1950년대까지 의연히 살아남아 미국 영화산업을 장악하게 된
다.
1915년에서 1920년 사이에 메트로(Metro), 유니버설(Univer-sal)
?Goldwin
) 등 새로운 영화사들이 등장하게 된다. 스튜디오 시스템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키
네토스코프, 바이오그래프, 에사네이, 칼렘, 루빈, 멜리에스, 빠떼, 셀리그, 바이
타그래프 등이 주축이 되어서 1908년에 설립한 영화특허권회사 MPPC(Motion Pictur-
e Patents Company)와 1910년에 설립된 배급사 제너럴 영화사(General Film Compan-
y)에 의해 주로 2권짜리 영화가 공급되었다.6) 영화기자재 생산을 주도해 오던 10
개 회사가 모여 카르텔 형식으로 만들어진 MPPC는 1910년에 배급회사까지 설립함으
로써 일시적으로 독점을 형성?
?보였다. 하지만 카르텔에 참가했던 회사들
이 더 많은 수익을 위해 MPPC의 방침을 위반하였다. 이에 연방정부가 반 트러스트
법 위반을 지적하고 규제하고자 했다. 이 트러스트 규제조치가 실행되기 전까지인
1910년대 초반 시기를 (대략 1914년) 제 1 차 독과점 시기라고 부른다. 제 1 차
독과점 시기가 마감7)되면서, 초기의 개척자적 제작사들인 바이오그래프, 칼렘,
루빈 등은 모두 도산하고, 바이타그래프와 에사네이는 활동은 계속했지만,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했을 뿐이다.8) 오랫동안의 MPPC의 독점으로 인해 카르텔 외부의 비
소
사들은 상당한 타격을 입어 왔다. 그 중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독립제작사
로 페이머스 플레이어스사(Famous Players Company)를 들 수 있다.
하지만 페이머스 플레이어스사(나중에 파라마운트사가 된다)는 MPPC가 붕괴하고
난 후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여 독보적인 업체로 떠오르게 된다. 페이머스 플레이
어사는 상품을 차별화하기 위해 스타를 이용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스타를 자회
사 소속 배우로 등록시키는 스타 시스템을 도입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전과는 달리
장편영화 제작에 역점을 두는 차별화 정책을 시작했다. 영화에 스타 시
통해
스타 이미지가 만들어지자 관객들은 영화를 보러 가기보다는 이 영화사에 속한 전
속스타인 메리 픽포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글로리아 스완슨, 윌리엄 허트, 패티
아버클 등을 보기 위해서 줄을 서게 되었다. 페이머스 플레이어사는 또한 전 세계
에 배급망을 갖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제작, 배급, 판촉, 상영의 구분을 통해 각
분야를 전문화하였던 것이다. 그로 인해 페이머스 플레이어사는 1925년 경에 이르
러 전 세계적인 배급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또한 극장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함을
깨달은 페이머스 플레이어스사는 주요
의 주요 개봉관과 재개봉관을 소유하
는 전략을 구사했다. 페이머스 플레이어스사의 뒤를 따라 다른 스튜디오 제작사도
본격적인 일관공정체계9)를 확립하게 된다. 1923년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ther-
s)사가 창립되고, 1924년에는 골드윈과 메트로가 합병해서 메트로-골드윈-메이어(M-
GM)사가 탄생한다. 하지만 여전히 1920년대 미국 영화산업은 제작에 대한 투자보다
는 흥행 즉 극장사업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례로 MGM사도 대
극장회사인 로우스의 방계회사에 불과했다. 전체 자산 중 총 5% 정도만이 제작에
투
?뿐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의미에서 1920년대의 미국 영화산업에 스튜
디오 시스템이란 이름을 붙이기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스튜디오 시스템적 형태를
갖추긴 했지만 여전히 영화산업내에서 제작보다는 흥행, 상영이 더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스튜디오 시스템이 형성되고 운용되는 것은 1930년대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1930년대 미국은 대공황과 뉴딜 정책이 사회, 경제적으로 펼쳐진 시기이다. 영화
산업적으로 보면, 8대 메이저 스튜디오가 유성영화의 개막과 함께 황금기를 맞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극장
湄湧?패권으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스튜
디오 즉 제작사 우위의 체계가 갖추어진다. 오히려 스튜디오들이 상영관을 확보해
나가는 역전적인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8대 스튜디오 외에 디즈니, 모노그램,
리퍼블릭 등이 제작분야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나 특수한 시장만을 공략해 낮
은 시장 점유율을 지니고 있었다. 사운드의 도입은 RKO(Radio-Keith-Orphum)라는
영화사를 설립하게 만들었고, 워너는 최초의 사운드 도입으로 1930년대에 가장 커
다란 회사로 성장하게 된다.10) 워너 브러더스사 제작의 《재즈 가수》(1927)의 성
공적
계기로 1929년에는 파라마운트사, 로우스사, 그리고 유나이티드 아티
스트사가 모두 유성영화 제작에 참여하게 되고 1930년대 헐리우드는 본격적인 유성
영화의 시대에 접어든다. 제 2 의 독과점 시기이기도 한 이 때에 빅 파이브 스튜디
오는 미국 내 제작편수의 50%를, 흥행수익의 70% 이상을 점유하는 거대 공룡이 된
다. 메이저 스튜디오는 자체의 독과점 구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일괄판매방식(bloc-
k booking)11)과 선물거래방식(blind buying)12)을 관행으로 굳히게 된다.
그리하여 스튜디오 시스템은 크게 5개의 대형 제작사와 3개의
제작사의 구도
로 구축되었으며, 이를 빅 파이브와 리틀 쓰리로 구분하기도 한다. 빅 파이브에 속
한 스튜디오는 파라마운트, 로우스, 워너 브라더스, 20세기 폭스사, 알케이오사였
는데, 이 스튜디오들은 제작, 배급, 상영 체인을 모두 소유하고 있었다. 한편 리틀
쓰리에 속한 스튜디오는 유니버설사, 칼럼비아,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사이며, 이 스
튜디오들은 제작과 배급망만을 가지고 있었다. 위의 8대 메이저 스튜디오는 1920년
대에 제작, 배급, 상영 체인을 수직 통합하고 소규모 독립영화 제작사나 경영이 부
실한 회사를 흡수하여 수?
?이루는 기본 골격으로 제 2 차 독과점 시기를
구축한다. 초창기의 MPPC가 단명했던 데 비해 메이저 스튜디오는 큰 성공을 거두
었고 성장을 거듭해 갔다. 스튜디오 시스템은 그것 자체로도 든든한 장벽이 되어주
었다. 이제 아무나 영화시장에 뛰어들 수 없게 되었고 모든 면에서 계획적인 통제
가 행해졌다. 그리고 새로운 경쟁자를 막기 위해서 메이저 스튜디오는 담합을 감행
하기도 했다.
극장 체인방식은 처음엔 헐리우드가 아닌 필라델피아에서 일어났다. 1917년 커다
란 헐리우드 회사의 권력에 도전하고자 지방 극장 체인이 자체 ?
를 형성하
게 된다. 주요 멤버는 필라델피아에 기반을 둔 스탠리 미국회사였다. 페이머스 플
레이어스-레스키, 유니버설, 폭스와 같은 헐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는 제작, 배급,
상영이 결합된 새로운 경쟁자를 맞닥뜨려 거대 자본을 이용해서 이를 모방, 급기
야는 통합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수직적 통합이 발생한 것이다. 1920년대 말
사운드 도입기에 은행 자본의 적극적인 참여로 말미암아 영화산업이 다각화되었고
보다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헐리우드 영화는 본격적인 해외 진출까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자본집약적이며 노
岵?영화산업은 점점 더 비대해져 영화
와 라디오, 나아가 텔레비전 방송국까지 합병하는 복합매체산업의 전조를 보이기
시작했다.13) 8대 메이저가 독과점 체제를 확실하게 굳힌 1930년대에 미국 전역에
걸쳐 구축한 흥행 체인, 즉 극장체인체계는 전체의 약 16%에 불과했지만
흥행 수익에 있어서는 약 95%라는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헐리우드는 ‘꿈의 공장’이라고 불리웠다. 스튜디오 시스템
을 통해 본격적인 산업화의 도정을 걸었던 이 ‘꿈의 공장’은 영화를 예술이 아닌
, 오락 그리고 산업으로 확실?
?킥窩?해주었다. 당대에 등장했던 헐리우드
영화는 위와 같은 제반 산업의 토대 위에 스타와 장르라는 층위를 얹음으로 해서
확실한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일괄적이고 통제 가능한 영화가 당대의 영화관객
과 행복하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메이저 스튜디오 황제들은 극장과
일명 헤이즈 코드(Hays Code)라고 불리우는 자체검열제도를 통해서 헐리우드 영화
라는 레이블에 걸맞는 영화를 만들게 된다.
2) 영화관람 양식의 변화
병합과 집중이 이루어졌던 1920년대 미국 영화산업의 변화는 극장 관람의 형식을
바꾸어
920년대와 1930년대 미국에서는 매 주 750만 명이 극장을 찾았고
, 1930년에는 가구 당 일주일에 평균 3편의 영화를 관람했다. 헐리우드가 미국 경
제에서 점점 더 산업적인 영향력을 확장할수록 미국 문화에 미치는 영향 또한 대등
한 수위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영화는 미국 문화의 대표 주자였으며, 당대
의 가치와 신념의 반영이었으며, 민족성을 드러내 주는 프레임으로서의 위상을 지
니고 있었다. 이렇듯 대중들이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오락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었던 영화는 관객들을 최대한 끌어 모으기 위해 지금?
상상할 수 없는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을 뽐내는 극장을 건립하게 된다. 이는 초창기 영화의 주요 향
유층이었던 이민자들과 노동계급 관객에게 부르주아 계급이 향유하는 예술체험과
동등한 수준의 문화생활을 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14)
1920년대 개봉 극장의 경우, ‘극장 가기’ 경험과 ‘영화 보기’ 경험은 동일하
지 않았다.15) 극장은 단순히 영화만을 관람하는 장소가 아니라, 모든 예술을 한꺼
번에 경험할 수 있는 종합체험을 제공해 주는 공간이었다. 영화관객은 극장 안에
장식해 놓은 조각과 건축 양식 자체를 보면서 미?
Ю?때와 비슷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무대에서 행해지는 쇼(보드빌 쇼)를 보면서 연극감상을 할 수 있었
으며, 장편 영화를 보는 영화적 체험을 동시에 할 수 있었다.16) 1920년대 극장은
오페라 하우스처럼 수천명의 객석을 구비하고 있고, 팬시 로비를 제공하는 식으로
꾸며진 영화궁전(picture palace)이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의 디자인이
있었는데, 하나는 관습적인 디자인17)이었고, 하나는 분위기 있는 디자인이었다.
관습적인 영화궁전들은 연극을 볼 수 있는 극장을 모방한 형태를 말하며, 이는 종
종 이탈리아식 바?
匡旼?스타일에 기반한 정교한 장식물로 뒤덮여 있다. 한
편 분위기 있는 영화궁전은 관객에게 밤 하늘 아래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오디토리
움으로 건축되었다. 장식은 스페인 빌라나 혹은 이집트 사원 같은 이국적인 장소를
모방하곤 했다.18)
그러나 이러한 1920년대 영화궁전의 시대는 사운드의 도입과 대공황이라는 거대한
자장의 변화로 인해 마감하게 된다. 유성 영화의 맹아를 보여주는 《재즈 가수》(1
927)를 제작한 워너 브라더스사는 영화관람의 변화를 주도한 스튜디오이다. 워너
브라더스사는 사운드를 도입하면서 무성영화와 항
되어 연주되어지던 오케
스트라와의 협연을 없애고, 극장무대 위에서의 모든 쇼를 제거하는 방식을 과감하
게 택했다. 이와 더불어 화려한 치장과 장식은 대공황이라는 여파에 밀려 점점 감
소되어 갔다. 극장주들은 당시 영화관객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말미암아 다른 여가
활동을 즐기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단편영화를 동시에 상영하
는 방식으로 2, 3편의 영화를 한꺼번에 보여주게 된다. 두번째 상영되는 영화는 저
예산으로 급하게 제작된 B급영화였지만, 관객에게는 영화 두 편을 싼 값에 볼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 동시에 경품을 동원해서 관객을 끌었고, B급영화를
상영하기 전에는 휴식시간을 마련하는 등 영화상영을 중심으로 한 관객 동원 방식
을 선택하게 된다.
1920년대 대중들이 극장에 간다는 의미는 예술의 종합적인 체험을 함축하고 있었
다. 그러므로 극장에 가기와 영화보기는 동일하지 않았다. 극장공간이 주는 안도감
, 그를 통한 꿈의 생산 등과 같은 종합적인 체험을 전해주었다. 1920년대 후반에
등장했던 유성영화와 1930년대 초반에 불어닥친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극장에 간
다는 의미가 모든 예술의 종합적인 체험을 담고 있는 ?
爭ぐ?되었다. 이
러한 영화관람의 변화는 결국 1950년대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인해 강화되어 이전의
습관적인 극장가기에서 좀더 신중하게 계획된 여가활동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므
로 현재 영화관객들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가 정착
된 것은 1950년대에 이르러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때에 비로소 극장가기는 영화
를 보러가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1920년대 영화는 미국인들을 극장
이라는 공적 영역에서 레저를 즐길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였고 아울러 누구에게
나 그런 기회를 제공?
탯??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극장
은 가정을 벗어나 자신들의 새로운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특
히 노동계급 청소년들의 경우 극장을 통해서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기도 했고 정체
성을 찾기도 했다. 이러한 젊은 층의 극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화만들기를 두
고 각종 종교단체나 보수적 사회단체는 극장으로 인해 가정과 기존의 질서가 위협
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규제를 요청하기도 했다.19) 특히 여성들
에게 극장은 최초의 공적 여가장소로 여겨졌다. 여성 특히 노동계급 여성을
극장들은 홍보에 열을 올렸다. “We are aiming to please the ladies”, “Bring
the children”, “Ladies without escorts cordially invited” 등과 같은 홍보
문구로 여성들을 ‘꿈의 궁전’인 극장 공간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리고 극장 주
변에서 값싼 의상을 진열한 의상실 등이 등장하게 되어 극장 주위는 이제 빠뜨릴
수 없는 여가 공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라디오와 더불어 대중적인 매체로서 영화
는 대중문화를 만들어가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가정으로부터 벗어나 소비하
는 시간을 갖는 것을 보편적인 생활습관인 ?
侮毛?놓았다.
3) 헤이즈 코드
1920년대 미국은 ‘재즈 시대’라 불릴 만큼, 그리고 ‘광란의 20년대’라 여길
만큼 빠른 변화의 속도를 보였다. 할리우드는 자본을 탄탄히 축적해 갔고, 스타
시스템을 번창시켰으며, 외국 영화감독들을 헐리우드로 초청하여 제작의 기회를
제공하고, 장르라는 새로운 영화적 문법을 탄생시켰다. 여기에 중요하게 덧붙여질
것은 영화 검열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매우 의미있는 사건이다. 시민사회
영역에서는 영화에 대한 국가적 통제를 끊임없이 요구하여 영화 내용에 대해서 검
열할 것을 요?
헐리우드는 이에 대응하여 발빠르게 자체검열이라는 방식
을 채택한다. 국가가 개입하기 이전에 스스로 자기검열 방식을 채택하여 영화에 가
해지는 통제를 제어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헐리우드가 끊임없이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창의성 도출에 지대한 기여를 하게 된다. 검열이라는 제도는 검
열 내용과 관계없이 창의성에 족쇄를 채우는 겁주기 효과(chilling effect)를 내기
마련인데 정부검열이 아닌 자체검열 방식을 택함으로써 그 효과를 줄였기 때문이다
.
영화산업이 점점 더 팽창함에 따라 다양한 사회집단들은 검열?
봉?역설했
다. 1910년대 후반과 1920년대 초반, 즉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영화는 대
부분 ‘광란의 20년대’ 와 연결된 주제를 선보였다. 재즈 음악, 광란의 파티와 말
괄량이 소녀 등 재즈의 리듬만큼이나 속도감 있고 낙관주의적인 특성을 드러내었다
. 헐리우드 배우들은 당대에 주로 다루었던 영화의 주제만큼이나 광란의 소용돌이
에 휩싸여 있었다. 코메디언인 로스코 아뷰클은 장래가 촉망되는 어린 여배우가 술
파티에서 죽게 되자, 이에 대한 용의자로 지목받아 살인과 강간 혐의로 기소당했다
. 1920년 ‘미국의 스위트하?
貧?픽포드는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인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이혼을 하고, 다음 해 윌리엄 데스몬드 테일러 감독은 몇 명의 잘 알
려진 여배우와의 정사가 드러난 장소에서 살인을 당한다. 1923년 잘 생긴 근육질
스타 왈러스 레이드는 몰핀 남용으로 죽는다.20)
일반인들과 종교단체의 눈에 헐리우드는 퇴폐와 비도덕성이 넘쳐 흐르는 곳으로
비춰졌다. 시민사회는 영화를 통제할 방식을 모색하게 되고 통제방식으로 지방과
연방정부에 통제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움직임에 대응해 메이저 스튜디
오들은 1922년 미국영화제작배급?
DA)를 설립하여 통제를 사전에 봉쇄하려
한다. MPPDA는 체신장관이자 공화당 의장을 역임한 바 있는 윌 헤이즈를 위원장으
로 앉혀 외부간섭을 사전에 봉쇄하고 헐리우드의 자기 쇄신의 움직임을 꾀하고자
한다. MPPDA의 설립 이유는 일련의 헐리우드 스캔들 이후 틈새가 벌어진 대중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그리고 공화당 정부와의 튼실한 로비관계
를 위해, 그리고 미국영화 쿼터제 같은 해외 배급 문제를 조정하기 위한 메이저 스
튜디오들의 상호결속을 도모한 것이었다.21)
종교단체, 특히 가톨릭 단체가 헐리우드?
?압력은 예상 외로 컸다. 특히
1930년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불고 있는 공황의 기운이 1920년대 ‘재즈 시대’ 동
안 해이해진 미국인들의 도덕성 때문이라는 개탄의 목소리가 일고 있었다. 이에 대
한 응답으로 1930년 초반에 미국영화제작배급협회는 영화제작규정 (Production Cod-
e)22)을 만들어서 제작사들에게 배포한다. 노골적인 성묘사를 과감하게 하는 브로
드웨이 연극배우 출신인 매 웨스트(Mae West)의 영화와 갱들을 영웅시하는 갱스터
영화는 압력단체들의 지탄을 지속적으로 받았지만, 제작사들은 단골영화관객들을
위해 성?
묘사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계속해서 취하고 있었다. 1934년
6월 미국영화제작배급협회는 새로운 규칙을 정립하게 된다. 미국영화제작배급협회
소속의 스튜디오가 협회의 승인 도장이 찍혀 있지 않은 영화를 상영할 시에는 25,0
00 달러의 벌금을 물어야 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승인장이 찍혀 있지 않은 영화는
협회 소속 극장에서 상영할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든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제작규
정 운영국 PCA (Pro-duction Code Administration)을 설립, 제작규정의 전 권한을
위임받은 독립적인 기구로 위상을 갖추고 이 PCA의 허가증이
영화의 판매,
배포, 상영시에는 벌금을 부과하는 전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영화에서 성과 폭력에 대한 묘사는 화면 밖으로 밀려나거나 페이드 아
웃으로 처리되었다. 대사 또한 제작규정의 범위를 넘지 않은 범위내에서 많은 암시
를 이용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헐리우드의 자기검열은 각종 압력단체들이 국가
적인 차원에서 검열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지방 검열관
에 의해 짤리게 되거나 카톨릭 단체의 압력으로 인해 금지당할 수 있는 주제의 유
형을 범주화한 것이다. 스튜디오들은 이 제작규정을
지 않은 선상에서 주요
단골들의 보고자 하는 욕구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게 된다. 헐리우드의
검열은 억압적이었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좀더 보수적이고 극단적일 수 있는 국가
의 검열을 사전에 봉쇄시켜 헐리우드 영화산업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자본을 축적하
고 시장을 존속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안내 역할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스튜디오 시스템의 설립으로 영화는 더욱 독점적 산업범주에 접어들게 되고 이 시
기 영화를 통해서 대중들은 가족 바깥의 시간을 즐기고자 했다. 특히 청소년들이나
여성들의 극장공간을 통한 가
은 두드러졌으며 영화를 둘러싼 꿈꾸기가 가능
해졌다. 영화산업은 이러한 새로운 소비 주체들을 위한 제작을 가속화했으며 이로
인해 영화가 문화타락의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영화는 사회적 지탄을 피하기
위해 자체 검열을 시행했으나 실제로는 자체 검열이라기보다는 피할 수 있는 수준
을 스스로 인식하게 되고 표현의 수위를 조절하도록 기능케 했다.
3. 영화 양식의 변화
전례 없는 거대한 영화산업과 제반 법적, 제도적 층위를 갖추고 있었던 헐리우드
는 1920년대와 1930년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라는 거대한 변화를 겪
전
세계적인 지배의 사슬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급기야는 영화의 고전적인 모델을
정립시켰다. 1930년대는 일반적으로 ‘고전적 헐리우드 시네마’의 형성기라고 일
컬어진다.23) ‘고전적 헐리우드 시네마’ 모델은 스튜디오 시스템으로 구축된 영
화산업 모델과 더불어 영화역사에서 하나의 원형을 제공한다. 이는 1950년대, 즉
파라마운트 반트러스트 사건으로 인해 헐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이 와해될 때까지
지속된다. 1920년대 스튜디오 시스템의 수직적 통합이 일어나고, 1차 독과점 시기
를 거쳐 1930년대에 완성단계에 이르러 19
이 산업적 지반이 지속될 때까지
의 산업이라는 물적 토대와 영화라는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는 그 역사적 주기를
함께 한다.
영화 내적인 흐름을 파악해 보자면, 1920년대는 무성영화의 시대였지만, 스타 시
스템과 장르의 형성기였으며, 1930년대는 장르의 개화기였다고 볼 수 있다. 스타와
장르는 헐리우드 영화제작사가 배급방식으로 사용했던 하나의 규칙이었다. 마찬가
지로 영화관객들도 스타와 장르에 따라서 영화를 선택, 관람하는 습관을 익히기 시
작했다. 영화에 이야기를 얹고 그에 따른 다양한 표현양식들이 개발되었는데 특히
【?여러 실험을 했던 영화감독들이 헐리우드에 영입되면서 그 경향은 가속
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제작 기술의 발전이 장르의 다양화를 가능케 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한다. 카메라의 발전적 진화로 인해 카메라 이동의 반경이 확대
되었고 토키의 등장으로 뮤지컬 장르의 탄생도 가능했다.
1) 헐리우드의 유럽 영화감독들
제 1 차 세계대전은 미국에게 경제적인 안정을 주었고, 1920년대 영화를 포함한
미국의 소비재들은 수출에 활기를 띠었다. 동시에 1920년대는 영화사적으로 가장
풍부한 실험이 이뤄진 시기라고 할 수 있
표현주의 영화, 프랑스 인상주
의 영화, 소비에트 몽따쥬 영화, 초현실주의 영화, 다다이즘 영화 등 새로운 매체
에 대한 열광이 응집되어 드러난 때이다. 영화인들의 활발한 국제적 교류 또한 냉
전 시기가 도래하기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세계적인 영화의 흐름이 헐리우
드에서 용해되었다는 사실은 미국의 영화산업이 각종 영화적 실험들을 산업적 이익
을 위해 수용하는 실험적-사업정신을 지속적으로 지니고 있음을 대변한다.
이 시기의 중요한 영화사적 특징을 감독 중심으로 설명하자면 아무래도 해외의 유
명 영화감독들이 헐
?처음으로 입성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메이저
스튜디오들의 실무진들은 관객들에게 보다 다양한 영화를 제공해 경제적인 성장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이유에서, 그리고 짧은 역사로 인한 전통의 부재를 메우고자
유럽의 유명 감독들을 영입했다. 여기에는 유럽 문화에 대한 동경과 추구도 다분
히 깔려 있었는데 그로 인해 해외의 유명 영화감독들은 미국으로 속속들이 들어오
게 된다. 헐리우드 영화사 실무진들은 유럽을 직접 방문해서 가장 최근의 영화를
관람하고, 뛰어난 배우와 감독들을 영입하게 된다. 당시에 가장 뛰어난 영
?
들었던 유럽 국가는 독일, 프랑스, 스웨덴 등이었다. 특히 독일 영화감독들은 제
1 차 세계대전 이후 영화산업을 우파 UFA 국립영화제작소가 지휘하는 국유화 정책
과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으로 헐리우드 영화사의 유혹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들의 헐리우드 입성은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더욱 가속
화한다. 그리하여 독일 영화감독들은 이후 호러 영화나 갱스터 영화와 같은 장르뿐
만 아니라 미국 영화감독의 스타일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대표적인 감독인 F. W. 무르나우는
폭스사와의 계약
으로 헐리우드에 발을 디딘다. 무르나우의 《일출》(1927년)은 음울하고 어두운 독
일식 미쟝센으로 가득 차 있다. 선과 악, 어둠과 빛, 구원과 죄라는 이분법 구도를
축으로 한 이야기, 미국인인 쟈넷 가이너와 조지 오브리언이 과장된 표현주의 연기
스타일을 선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무르나우가 헐리우드에서 만든 작품들은 비록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미국 영화감독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특히 프
랭크 보르자쥬 감독의 《행운을 잡은 스타》(1929)를 비롯, 1920년대 후반에 만들
어진 그의 무성영화들은 독
어둡고,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를 골격으로 해서
무르나우식의 정교한 수직쇼트 등 달인적인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무르나우를 비
롯한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에른스트 루비치는 1920
년대 초반에 파라마운트 영화사에 고용된 후 10년 동안 ‘루비치 류’ 란 말을 유
행시킬 정도로 코메디 영화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당대의 코메디 영화들은
루비치 영화에서 나올 법한 유럽 귀족에 대한 풍자와 아이러니, 섹스에 대한 익살
스런 묘사를 모방한다. 1914년에서 1929년에 미국에서 일한 비엔나 출신의 또 한
기억되야만 하는 감독은 조셉 폰 스턴버그이다. 그의 영화 《지하세계》(192
7)는 갱스터 영화의 원형을 제시했으며, 그와 함께 헐리우드로 건너와 6편의 작품
을 함께 한 마를렌느 디트리히를 스타덤으로 올려 놓은 장본인이다. 폰 스턴버그
영화의 풍부한 시각적 장치, 관능으로 터질 듯한 프레임 구성, 등장인물을 강조하
는 키아로스쿠로 조명 등은 미국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헐리우드로 건너 온 유럽 영화인들은 이 밖에도 독일 표현주의 감독인 폴 레니,
스웨덴 출신의 벤자민 크리스텐센, 빅터 쉐스트롬, 헝가리 출신?
幄떽? 모
리스 투르네르 등이 있다. 폴 레니의 어둡고, 모호한 영화는 대단한 성공을 거뒀고
, 벤자민 크리스텐센은 1910년대 스웨덴에서 일반화한 서커스 영화를 헐리우드에서
만든다. 모리스 투르네르의 《모히칸족의 최후》(1920)는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19세기 미국소설을 원작으로 실내 장면의 빛과 어두움의 대조를 통해 인종적 경계
를 가로지르는 성적 욕망을 잘 포착해 내고 있다. 이러한 시각적 스타일은 투르네
르식 터치로 남아 있다.
헐리우드에서 작업한 유럽 영화감독들은 미국영화 언어의 문법에 실질적이고도 효
과적?
미친다. 이는 유럽 영화감독들이 유성영화의 시대가 도래한 1920년
대 후반에서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그리고 획일화하고 전체화한 스튜디오 시스템
의 외압, 헤이즈 코드로 불리우는 헐리우드내의 자기검열 등에 견디다 못해 미국을
떠나게 되는 1930년대 이후에도 지속된다. 그들은 떠났어도 그들의 ‘터치’는 미
국 영화에 남아 있었다. 미국의 작가들은 유럽의 실험정신을 상업영화 안으로 흡수
하게 되고 관객들에게 전혀 새로운 영상적 경험을 제공하게 되었다. 이는 장르적
확장을 꾀하게 해주었다.
2) 미국 영화감독들의 경향
무성영화의 시기는 유럽 영화감독들과 더불어 미국 영화감독들이 장르의
법칙을 처음으로 구축해 가면서, 혹은 메이저 스튜디오 지배라는 경제적 법칙 하에
서 훌륭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던 시기로 기억할 만하다. 또한 유럽 영화감독들이
거의 대부분 헐리우드를 벗어났을 때인 유성영화 시기에 미국 영화감독들은 그들
의 유산과 미국 자체내의 영화기술적 발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헐리우드 영화
가 영화사의 하나의 원형인 ‘고전적 헐리우드 영화’의 시기로 변모하게 된다. 영
화의 발생지인 유럽의 영화 기풍을 받아들인 헐리우드?
본격적으로 자신들이
중심이 되는 영화사를 기술할 수 있을 정도의 기반을 갖게 된 셈이다.
섹스 코메디를 주로 만든 세실 B. 드밀은 범상치 않은 다작 감독으로 유명하다.
1920년대 중반 미국에 불기 시작한 퇴폐와 쾌락 추구 등 빅토리아 시대의 낡은 도
덕관을 벗어던진 재즈 시대를 영화에 끌어들여 적극적으로 표출한 감독 중 한 명이
다. 《바보 같은 아내들》(1922), 《황금 침대》(1925), 《방종한 딸》(1923) 등을
통해 뇌쇄적인 글로리아 스완슨을 섹스 심볼로 스타덤에 올려 놓았다. 노출과 섹스
씬을 지속적으로 작품에 넣어 광
티와 말괄량이 소녀가 등장하는 크레이지
코메디의 원형을 만들었다. 세실 B. 드밀은 1920년대에 가장 인기 있는 감독이었
으며 그의 영화는 흥행의 보증수표였다. 가톨릭 단체나 여성 단체 등 일부 보수적
인 여론을 의식해서 제정된 헤이즈 코드가 발효된 때 드밀은 《십계》(1923)를 만
들었다. 《십계》는 모호한 멜로 드라마와 종교적인 주제를 적당히 혼합해서 만든
폭력, 섹스, 종교의 대하 서사극이다. 1920년대 초기에 가속화한 월 스트리트 투
자가들의 영화산업 진출로 인해 스튜디오에서는 서사극 영화라는 고예산 영화를 하
나?
?구축하고 있었다.24) 이러한 고예산 영화의 대표적인 감독은 드밀뿐만
아니라, D. W. 그리피스,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등이 있었다. 드밀은 헤이즈 코드
의 규정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섹스, 나체, 부패상, 폭력 등을 삽입해서 마지막에
죄값을 치루도록 처벌하는 식의 검열시대의 영화 만들기 공식을 수립한다.
드밀의 고예산 영화가 성공적이었던 반면, 그 못지 않게 예산을 많이 들여 영화를
만든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은 유니버설사와 골드윈사, 그리고 이후 골드윈을 합병
한 MGM 등 여러 제작사를 전전하면서 과도한 영화길이와 지나친
초과로 인해
내내 말썽을 일으켰다. 결국 유성영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영화감독의 길을 포기
한 채 영화배우로만 남게 되는 불운을 겪은 대표적인 감독이다. 스트로하임이 헐리
우드와 이혼한 결정적인 사유는 그의 대표작이자 영화사 불후의 명작인 《탐욕》(1
923) 때문이었다. 1899년 프랭크 노리스의 소설인 《맥티그》를 원작으로 한 《탐?
櫻렝?제목 그대로 돈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의 무
력함에 대한 영화였다. 촬영 기간 10개월에 75만 달러의 제작비가 소요되었고, 9시
간짜리 영화를 완성했다. 스?
은 그 중 반을 짤라내었지만, 개봉을 앞두고
골드윈사는 MGM으로 넘어가게 되어, MGM의 제작자인 어빙 탈버그는 이 영화를 두
시간으로 편집해 버렸다. 《탐욕》은 1920년대 영화 개봉 당시 흥행과 비평 양 쪽
에서 완전히 실패한 작품이었다. ‘시궁창의 서사극’ 이라는 악평을 받았던 이 작
품은 재즈시대를 살아가는 당대의 관객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작품이었다. 그러나
영화사의 거장들, 오손 웰즈와 장 르노와르 등의 감독이 이 영화를 최고의 영화로
꼽았고, 그리하여 《탐욕》은 미국 헐리우드 무성영화의 저주받은 걸작 중 한 편으
원받게 되었다.
《국가의 탄생》과 《불관용》 등을 통해 1910년대 미국 영화를 주름 잡았던 D.
W. 그리피스 또한 1920년대에 계속해서 장대한 규모의 장편 영화를 계속 만든다.
그리피스의 《폭풍 속의 고아원》(1922)은 프랑스 혁명 당시를 재현하는 셋트를
짓고, 릴리안 기쉬와 도로시 기쉬 자매를 캐스팅 한 작품으로서 흥행 면에서 커다
란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그러나 그리피스가 1915년 《국가의 탄생》부터 지속적
으로 보여준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관과 청교도 정신은 도시의 성장과 그에 따른 생
활방식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1
관객들에게 호소력을 잃게 된다.
유럽에서 온 영화감독 뿐만 아니라 미국 영화감독들은 헐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관객들은 진지하고 심각한 영화보다는 여가활동을
위한 하나의 오락으로서의 영화를 원했다. 감독들은 헐리우드에서 살아 남으려면
관객들을 극장으로 유혹할 보다 새롭고, 보다 재미있고, 보다 자극적인 소재와 주
제를 발견해야 했다. 이제 영화는 철저하게 오락물을 만들기 위한 공식을 도입하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감독들도 대중의 욕구에 따라 그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데
다했다. 감독들은 여러 형태의 실험을 통해 자신들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려 했다. 다양한 장르의 개발과 스타일의 구축으로 인해 이제 영화는 그 범
위를 최대한 확장하여 산업적 제도로서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으며 미국민들의 여
가로 굳건한 자리를 누릴 수 있었다. 이후 뉴엘바그의 기수들이 미국의 영화감독들
을 작가로 대접하고자 한 이유도 이와 같은 영화내에서 보여주었던 실험정신, 영화
정신 탓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유럽식의 예술영화나 심각한 내용을 가진 장
편 영화는 큰 인기를 누리기 힘들었다.
3) 영화기술 발?
변화
1910년대 후반 미국 영화에서 이미 주요한 스타일상의 기법들이 완성단계에 이르
렀다. 연속편집, 아이리스, 매치 커트 등 지금까지 유지되는 헐리우드의 고전적 스
타일은 이 때 맹아기를 거쳤다. 영화적 공간과 시간이 내러티브에 종속되는 구조를
서서히 하나의 전형으로 굳히게 된다. D. 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을 살펴보
면 이러한 헐리우드의 내러티브 직조방식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국가의 탄생》은
남북전쟁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사건과 남부에 사는 귀족집안이라는 가족 로맨스 사
이에서 하나의 균형을 성취해 내고
羞뼈岵막?멜로 드라마의 형식을 취하면
서 그 속에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투사하는 이러한 방식은 그 이후 헐리우드 영
화의 주요한 요소로 유지된다. 이러한 기법들의 확립은 영화기술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
영화의 구체적인 기술 발전에 대해 설명하자면 1920년대는 무엇보다도 촬영에 대
한 새로운 접근과 팬크로마틱 필름이 사용되었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1919년 이전
에 대부분의 영화는 윤곽선이 예리하며, 선명한 포커스 hard-edged, sharp-focus로
되어 있는 쇼트였다. 그러나 그 이후 부드럽고 흐린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렌
?필터나 천을 갖다대기 시작한다. 이는 중요한 이미지에 관객의 주의를 집중
시키는 효과로 인해 고전적 서사 스타일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했다.25) 이 소프
트 스타일은 스타들의 얼굴을 클로즈 업시켜서 관객이 스타 이미지에 몰입할 수 있
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또한 오소크로마틱 필름에서 좀더 가시적 스펙트럼이
넓은 팬크로마틱 필름이 1927년에 완전히 보편화되었고 컬러 필름이 나오기 전까
지 헐리우드 외의 다른 국가에서도 이를 보편적인 표준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새
로운 광학기기들의 등장으로 감독들은 전혀 예상?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현실세계의 두 차원을 동시에 묘사할 수 있게 해주는 이중노출 기술은 분명 영화
미학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
1927년 워너 브러더스사가 제작한 《재즈 가수》의 개봉은 뤼미에르 형제가 프랑
스의 파리에 있는 그랑까페에서 《기차의 도착》을 상영했을 때만큼의 충격을 주었
다. 많은 비평가들은 음향으로 인해 영화예술은 이제 그 생명을 다할지도 모른다고
성급한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초기 음향은 영상을 제한하는 장애물로 작용했다.
음향을 채집하기 위해서 배우를 향한 카메라의 이?
?볜늑?못했고 편집도
주로 장면전환과 같은 최소 기능으로 제한되었다. 그 이후 사운드 녹음 방식은 지
속적으로 향상, 전방향 마이크, 배우를 따라 움직이는 오버헤드 사운드 붐, 사운드
의 원천지 방향을 쫓아갈 수 있는 단방향 마이크가 개발되었다. 무겁고 이동하기가
불편했던 초기의 붐 마이크도 보다 가벼운 붐 마이크에 의해 대체되었다.
유성영화 초기에는 음악과 대사 등 한 장면에서 나오는 사운드를 한 트랙에 담을
수 없었다. 1932년 후반, 다중 트랙 녹음을 통해 음악, 대사 그리고 소음 효과가
따로따로 저장되어 한 트랙
枯鎌?수 있는 시스템이 개발되었다. 이 때에는
필름의 끝 넘버와 녹음 트랙 끝 넘버를 동시녹음에 가깝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사
운드를 발전시켰다. 《킹콩》(1933)은 1930년대 초반에 헐리우드 영화가 사운드를
어떻게 활용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연속성 편집, 셋트 디자인
과 같은 다른 기법처럼, 대부분의 사운드도 독립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닌, 내러
티브를 이끌어 가는 한 요소로 그 초기부터 종속된 것을 볼 수 있다.26) 음악과 자
연적 음향, 화면구도, 편집 등 시청각적 조화는 무성영화시절 에이젠스타인의 ?
포템킨》에서 구사된 몽타즈 편집기법과 같은 완벽한 편집의 표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1920년대 이전의 감독들은 피사체의 동작을 프레임 속에 고착시키려고만 하였다.
한 쇼트에서 카메라를 이동시켜 동일 프레임 속에 움직이는 인물을 계속 따라잡는
감독은 거의 없었다. 1920년대 유럽에서 헐리우드로 진출한 무르나우와 뒤퐁 등은
심리적이며 주제적인 이유로 쇼트내에서도 카메라를 움직였다. 이들의 실험 등을
통해서 예전에는 불가능하던 것으로 생각되던 미묘한 것들을 전달하기 위해 이동
카메라나 카메라 이동을 적절히 사용?
카메라도 초기의 무겁고 이동하기 힘
들었던 단점을 극복하고 보다 튼튼한 카메라 트라이포드를 개발해서 자유로운 카메
라 움직임을 가능하게 했다. 이로써 달리와 크레인은 1930년대 영화에 가장 많이
쓰였던 카메라 기법이 되었다. 유성영화 초기의 카메라가 움직이는 소음까지 다
잡아먹는 전방향 마이크에서 단방향 마이크로 바뀌게 되자, 카메라 또한 이전의
한정된 카메라 부스 안에서 움직였던 데에서 카메라에 블림프27)를 넣어 소음을
최소한 줄이는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칼라 영화가 이스트만 코닥에 의
발되었다. 당시의 칼라
영화라는 혁신적 기술개발은 인간의 눈이 보는 것과 똑같은 사실적 요소로 여긴 것
이 아니라, 환상과 스펙타클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모험 영화나 뮤지컬 영화에 많이
사용되었다. 색은 영화 내에서의 심리적 변화를 드러내는 등의 상징적 요소로도 활
용되었다. 인위적이고 이색적인 느낌을 내기 위한 색의 사용은 주로 일상과 떨어진
스펙타클 영화를 창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게 되었다.
사운드 도입, 광학기기의 발달, 카메라의
개발, 칼라 필름의 사용 등 기술의 놀라운 혁신은 계속되었다. 메이저 스튜디오는
箚?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공황을 타개해 나가는 자구책으로, 여타 여가활
동이 증대되면서 관객의 수가 감소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기술개발에
몰두했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영상제작 기술의 발전을 넘어서서 영화미학 발전
에도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된다. 이로써 영화는 장르 확산이 가능해졌고 영화예술에
가해졌던 시공간 표현의 제한을 하나씩 풀어나가게 되었다.
4. 장르와 스타
문학의 장르개념에서 빌려 온 영화의 “장르는 산업, 텍스트 그리고 주체(관객)를
순환하는 지향, 기대, 그리고 협약 체계”를 말한다.
【?장르는 서부 영
화, 갱스터 영화, 뮤지컬 등 개별 장르로 묶이는 영화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구조와
개별 장르 안에서 각각의 작품으로 구분되는 특수성을 담고 있다. 스튜디오 시스템
에서 취한 영화의 배급방식 중 하나인 장르는 개별 제작사들이 특정한 장르의 영화
만을 지속적으로 배급, 해당 제작사의 대표적인 장르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장르의
역사를 이어갔다. 예를 들어 워너사가 뮤지컬과 갱스터 영화 장르를 자사의 대표
적 장르로 유통시켰다면, 유니버설사는 호러 영화를 간판으로 내세우는 식으로 말
이다.
영화관람이라?
스튜디오 시스템의 독점체계라는 생산을 이어주는 매개체
는 장르와 스타였다. 그러므로 스타와 장르는 상당한 친근성을 지니고 있다. 스타
와 장르간의 긴밀한 연계는 비이클 장르(Vehicle Genre)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장
르는 어떤 특정 배우의 재능 및 이미지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영화들의 묶음을 말
한다. 스타를 위해 영화가 만들어지던 스튜디오 시스템의 절정기에는 영화적 장치
보다는 스타라는 장치를 통해서 영화를 제작하는 것에 그치는 영화로서는 최악의
순간을 맞이한다. 스타와 장르는 영화를 통해서 사회와 대중의 욕망을
수 있
는 징후라 할 수 있다.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고 그 지향점과 기대에 부합하는 스타
와 장르만이 대중문화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10년 이전까지 배우들의 이름은 영화자막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배우들의
이름이 알려질 경우 높은 출연료를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제작자들의 우려 탓이었
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대중은 배우들의 이름을 알게 되고 자신이 좋아하는 배
우들의 이름을 입에 오르내리게 했다. 영화산업에 있어 스타에 대한 대중의 요구는
가장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경제적 변수였기에 영화사는 스타?
?성공을 보증
받기 위한 일종의 담보물로 이용했다. 메이저 스튜디오는 스타를 귀중한 투자대상
으로 삼았고 각 회사는 나름대로 스타양성의 기법을 개발했다. 스타의 모든 일정을
영화사가 챙기고 스타의 사생활까지 통제하는 등 영화사들은 자신들의 투자분에 대
해서 철저한 관리로 일관했고 그 과정을 통해 많은 스타들이 배출되었다. 스타들은
자신들의 개성과 맞는 영화에 투입되어 어느 정도 정형성을 유지하게 되었는데 장
르와 스타의 관계는 이로써 확립되기 시작했다.
1) 서부극, 코메디, 뮤지컬
무성영화 시대였던 1920년대?
기 있었던 장르는 코메디와 서부극이었다.
서부극은 저예산에다 비교적 상영시간이 짧아서 경제적으로 제작사에 별 부담을
지우지 않았다. 존 포드나 프랭크 보르자쥬 같은 감독들은 모두 저예산의 서부극
에서 감독 경력을 시작한다. 서부개척기를 배경으로 미국민의 개척정신과 주인공의
소박한 개인주의를 찬미하는 서부극의 전형적인 내러티브는 사실 영화 초기부터 정
착된 것이다. 또한 서부극은 광활한 황야에서 펼쳐지는 박진감 넘치는 장면과 당시
의 주요 스타들이 많이 등장해서 관객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끈 장르였다. 서부극은
活?등장하여 주요 서부극 팬들을 뺏아가기 전까지 권선징악이 강한 정통파
서부극으로 일관하여 장르적 편차가 크지 않은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1921년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년, 에리히 폼머 감독)이 미국에서 상영된
후, 호러 영화는 미국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장르가 된다. 론 채니는 호러 영화의
대표적인 스타였으며, 1920년대 후반 독일 영화감독이 헐리우드로 이동한 후, 호
러 영화는 정점에 다다르게 된다. 유성영화 초기 호러 영화는 사운드를 통해 긴장
감을 고조시키는 효과와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등 풍부한 원작?
으로 주요
장르로 부상하게 된다.
찰리 채플린, 토마스 인스, 맥 세네트 같은 무성영화 시대의 코메디 장르 감독들
이 만들었던 슬랩스틱 코메디는 사운드의 도입 이후 채플린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
라졌다. 채플린 또한 뒤늦게 사운드를 자신의 영화에 도입한 감독이자 배우였다.
채플린의 무성영화인 《황금광 시대》(1923)와 《모던 타임스》(1936)는 각각 미
국인들의 개척정신에 대한 조롱과 풍자, 대공황을 필연적으로 몰고 올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로 인해 얼마나 인간이 소외당하게 되는지를 통렬하게 꼬집는 코메디이다.
채플린은
?가서야 《위대한 독재자》를 유성영화로 만든다.
유성영화 시대에는 스크루볼 코메디, 즉 지금의 로맨틱 코메디 형태가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몸짓을 통해 웃음을 자아내게 했던 슬랩스틱 코메디는 유성영화의
등장과 함께 사라지게 되고 남녀커플의 사랑싸움을 골격으로 속사포 같이 퍼붓는
재치있는 대사를 구사한 로맨틱 코미디가 웃음을 유발시켰다. 스크루볼 코메디의
대가였던 하워드 혹스는 자신의 영화를 ‘광란의 코메디(crazy comedy)’라고 명
명한 바 있다. 이 장르는 철없는 부잣집 딸, 혹은 말괄량이 상속녀’라는 신?
譴訣嗤?구축하고, 남녀간의 성역할을 전도시킨다. 프랑크 카프라 감독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1934)은 이 장르의 원형으로 일컬어진다. 흔히 ‘미국의 인민주
의’를 보여 주었다는 카프라 감독이 제 장르의 원형을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스크루볼 코메디의 초기 영화들은 대공황을 많이 다뤘다. 등장인물들은 지
속적으로 ‘잊혀진 남자(forgotten man)’, 즉 대공황기에 실직 상태에 있는 사람,
제 1 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많은 사람을 언급했다. 그러나 스크루볼 코메디가 번
창했던 1935~1945년은 실업과 같은 동시대?
문제를 무시하고 커플들의 사랑싸
움과 지나친 말장난들로 얼버무려져서 장르의 컨벤션 속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
였다.
뮤지컬 장르는 유성영화의 도래 이후 등장한 새로운 장르이다. 1928년 개봉된 최
초의 유성영화 《재즈가수》는 무대 뒷편에서 벌어지는 뮤지컬(backstage musical)
의 효시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결여하고 있었던 뮤지컬 컨벤션은 춤이
었다. 음악과 춤을 동시에 보여준 본격적인 뮤지컬은 《42번가》(1933년, 로이드
베이컨 감독)였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안무가인 버스비 버클리를 기용, 본격적
인 제 ?
벤션을 만들었다. 가장 대중적인 뮤지컬은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가 나온 영화들인데, 이 뮤지컬들은 남녀 커플간의 갈등과 긴장이 빠르게 진
행되다가, 화려한 무대, 등장인물들의 춤과 노래가 섞인 한 판의 광란극을 벌인 다
음 이 갈등이 해결되는 구조를 취한다. 뮤지컬은 비한정 공간에서 펼쳐지는 통합의
의식(ritual)으로서 장르들 중 서부극과 더불어 가장 미국적인 것 중 하나이다.29)
주요 오락장르인 서부극, 코미디, 뮤지컬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성공하는 인생을 중
심으로 영화를 끌어가고 있다. 황량한 서부에서의 성공적
? 정착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을 물리치고 이루어지는 인간승리,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루어지는 연애의
성공, 화려한 인생의 상징인 춤과 노래 등등으로 점차 영화는 사회내 성공을 신화
화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2) 갱스터와 사회성 영화
갱스터 장르는 조셉 폰 스턴버그의 《지하세계》(1927)가 그 맹아적 형태로 남아
있지만, 이 장르가 본격적으로 약호를 만들었던 고전적 시기는 1930~1933년으로
알려져 있다. 갱스터 장르는 금주법 시기(1920~1933) 동안에 성장했던 조직범죄에
서 소재를 얻은 시사적인 장르이다. 거시적으로 보?
?장르는 헤이즈 코드
라는 법적 층위와 월 스트리트 붕괴와 공황의 시작이 가져다 주는 전반적인 사회적
층위가 결합된 가장 흥미로운 범주라고 할 수 있다. 《인민의 적》(1931년, 윌리엄
웰먼 감독)이 나온 이후 헤이즈 코드는 범죄에 대한 공감적 묘사를 금지했고, 보수
적인 압력단체들은 폭력을 미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반면, 제작자들은 이 영화가
당대의 사회문제를 드러낸 것뿐이라고 방어했다. 제임스 캐그니를 반영웅(anti-her-
o)의 대열에 오르게 한 《스카페이스》(1932년, 하워드 혹스 감독) 또한 생생한 범
죄와 살인 묘사?
주인공을 영웅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받은 바 있다. 메이
저 제작사들은 검열의 억압을 피하는 방편으로 초기에는 범죄자인 주인공을 마지막
에 가서는 죽이는 식의 플롯을 설정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부터는 제임스 캐그
니와 에드워드 G. 로빈슨과 같은 갱스터 장르의 스타들을 범죄자 뺨치는 거칠고,
무자비한 경찰 역으로 변형시켰다.
《광란의 20년대》(1939년, 라울 월쉬 감독)는 갱스터 장르가 갈등하고 충돌하는
제반 사회적 층위들에 대해서 어떻게 말을 걸고 있는가를 알려주는 영화이다. 《?
ㅆ塚?20년대》는 1920년대를 ?
챰? 즉 미국 역사에서 방탕한 이탈로 대중
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세 명의 주요 남성 등장인물들은 제 1 차 세계대전 동안
만났다. 험악하고 폭력적인 조지(험프리 보가트), 폭력을 두려워 하고 세련된 르
로이드(제프리 린), 둘 사이의 중간쯤에 서 있는 에디(제임스 캐그니)가 그 주인공
들이다. 에디는 일하고 싶어하나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인
상처가 깊으며, 정직한 생활을 하고 싶어 하지만, 그가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범
죄조직 생활이다. 그는 범죄조직을 떠나 꿈에 그리던 여자인 진(프리실라 레인) 곁
?
1?원하지만, 결국 거부당하고 진의 남편을 구해주는 의리의 사나이지만,
결코 범죄조직을 떠나지 못한다. 결국 그는 조직의 보스가 된 조지를 죽이고 그를
뒤쫓는 갱들과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다. 《광란의 20년대》는 1920년대 미국이라
는 역사를 에디라는 개인을 통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헐리우드 몽따쥬 시퀀스를 사
용, 뉴스릴의 권위적인 보이스 오버를 삽입해서 1920년대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다.
영화의 마지막 에디는 결국 금주법의 해제와 루즈벨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새로
운 변화의 역사에 적응하지 못하므로 제거당하는 ?
여기에서 뉴스릴의 몽따
쥬 시퀀스는 이미 작동중인 미래와 그에 적응하지 못하는 관객-에디의 도덕적 정체
성을 중재한다. 《광란의 20년대》는 갱스터 장르의 약호를 사용해서 1930년대 도
덕적 보수주의의 물결을 타지 못한 채, 퇴폐와 과잉의 1920년대에 머물러 있는 자
는 죽음, 즉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명백한 이데올로기적 프로젝트를 보여준다.
대공황은 사회문제를 장르 안에 끌어들이게 한다. 1930년대의 많은 영화들은 사회
성 영화라는 장르에 속한다. 대공황과 같은 경제적 난국을 초래하게 된 이유를 점
검하고 그 피해를 직?
대중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헐리우드는 사회성 영화
안에도 항상 멜로 드라마적 장치를 집어넣거나 고전적 문학작품을 각색하는 식의
그리피스의 전통을 예외 없이 따랐다.30) 《우리의 일용할 양식》(1934년, 킹 비
도 감독), 《열광》(1936년, 프릿츠 랑 감독) 등을 비롯해서 존 스타인벡 소설을
원작으로 한 존 포드 감독의 《분노의 포도》(1940)는 중요한 사회성 영화로 꼽히
고 있다. 이 후 제 2 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미국이 진주만 공격으로 전쟁에 개
입한 후, 감소하는 실업률과 경제회복으로 인해 사회성 영화는 보다 적어지게
.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장르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지니고 있으며, 장르의 역사가
진행될수록 개별 장르들은 서로 착종되고, 혼성장르(hybrid Genre)의 경향으로 나
아간다. 장르의 진화를 포실론의 관점에 따라 실험적 단계, 고전적 단계, 세련화
단계, 자기반영적 단계로 나눠 본다면, 영화의 장르는 1920~1930년대에 실험적 단
계와 고전적 단계를 거쳤다고 볼 수 있다. 장르는 거대해진 스튜디오 시스템의 이
윤을 보장해 주었으며, 관객들은 자신들의 기대와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약호들의 변주를 즐겼다. 헐리우
의 생산과 소비는 장르가 다리를
놓아 연결되었다. 그 다리인 장르는 스타라는 또 다른 매개체와 어울려 그 역할을
수행해내고 있었다. 관객들은 장르의 규칙이 주는 이야기를 즐기기 위해 극장을
갔으며, 또한 스타를 보기위해 특정 영화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장르와 스타는 관
객들이 영화를 선택하고 즐기는 방식의 실마리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 당시만 하더
라도 이미 관객들은 장르적 약호를 읽을 수 있고 장르적 기대를 펼 만큼 영화적 언
어나 관습에 익숙해 있었다.
3) 스타와 관객
영화 역사가들은 흔히 헐리우드에서 스타가
장했던 시기를 1908년에서
1909년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는 헐리우드의 영화산업이 영화특허권회사(MPPC)에
의한 제 1 차 독과점 시기를 형성한 때이다. 이로 인해 독립영화제작사들은 타격을
받게 되고, 페이머스 플레이스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페이머스 플레이스사의 프
로듀서였던 칼 램믈(Carl Laemmle)은 이에 대한 새로운 전략을 제시하는데, 바로
스타를 통한 영화배급망 확보였다. 칼 램믈은 당시 바이오그래프사에 소속되어 있
는 플로렌스 로렌스(Florence Lawrence)를 스카웃해서 그녀를 스타로 만든다. 그는
각종 신문에 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흘린 뒤, 이튿날 즉각 그것은
영화특허권회사의 트러스트에 의한 루머이며, 로렌스는 자사의 다음 작품에 출연할
것이라고 발표한다. 칼 램믈의 명령 하에 조작된 이 기사는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플로렌스 로렌스의 이름을 각인시켰으며, 이후에 나온 로렌스의 영화는 흥행에도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 경우를 본 여타 영화사들도 스타가 이윤창출을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본격적으로 스타를 키우기 시작한다. 이른바
‘스타덤’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헐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
瓦理湧?영입해서 크게 광고(promotion), 홍보
(publicity), 영화(film), 영화평과 논평(comment)이라는 네 가지 범주를 통해 특
정 스타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한다.31) 여기에서 광고란, 특정한 이미지의 창조?
ㅑ뗌?혹은 특정 스타를 위한 이미지의 배경을 만드는 부분을 말한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스튜디오의 확실하고도 획일적인 통제 하에 이루어진 계약조건에 의
해 합법적인 방식으로 스타들의 페르소나(personae)를 창출했다. 홍보는 직접적으
로 스튜디오에서 창출되지 않은, 스타와의 인터뷰, 스타들의 사생활과 앞으로의
?대한 기사, 가쉽 등을 말한다.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스타 비히클(vehicle),
즉 스타의 능력과 매력, 이미지와 연관되어서 만들어진 영화들이 새로운 장르로 떠
오른 시기였다. 특히 1930년대 헐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소속 배우들 중 간판스타들
의 이미지에 알맞는 영화를 대량 생산해낸다. 영화평과 논평은 스타의 연기에 대한
전유 혹은 해석의 범주를 말한다. 다이어에 따르면, 영화평은 스타 이미지에 대해
복합성을 더해 주고, 대중들이 스타 이미지를 수용하는 데에서 오는 변화들을 잡
아내는 데에 도움을 주는 식의 광고와 홍보의 ?
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이
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스타는 “다중적인 의미를 지닌 구성물(structured polysem-
y)”이 된다.
스타덤은 영화제작이라는 생산과 영화관람이라는 소비의 매개물로서, 스타가 내재
하고 있는 본질적인 이미지를 관객들이 순수하게 발견하는 식이 아닌, 조작되고 가
공된 이미지를 관객들이 동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이는 장르가 제 장르의 규
칙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서 관객의 동의를 구하는 방식으로 구축되는 것과 유사하
다). 그러므로 스타는 당시의 사회가 지니고 있는 어떤 모순들이나 갈등을 직접적
컥막?드러내는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즉 스타를 읽으면 당시 사회의 모순
이나 갈등,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1910년대와 1920년대 미국 여성의 지위는 선거권 쟁취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나
의 전환기를 맞이한 시기였다. 1920년대는 이전 시대 여성에 요구했던 미덕과 변환
기의 여성의 미덕이 혼효된 채 스타에 의해 드러나는 시기였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처럼 순수하고도 금욕적인 미덕을 갖추고 동시에 산업주의의 성장에 의한 미
국인의 에너지를 동시에 갖춘 복합적인 이미지의 스타가 등장한 이유도 거기에 있
다.
농촌과 농업경제에서 도시와 산업경제로 옮겨가는 당시 미국의 토대 변
화에 따라 새로운 지위를 맞게 된다. 당시에는 여성들이 각종 회사나 공장 등으로
취업하는 노동참여율이 점점 더 증가추세에 있었고, 여성들이 자본주의 형성기,
즉 산업주의로의 발달로 미국이 이행하는 시기에 주요한 소비자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는 여성에게 이전보다 커다란 자유를 주었고 새로운 소비의 주
체로서의 지위를 여성에게 부여한다.
당시의 스타들이었던 릴리안 기쉬와 도로쉬 기쉬 자매(그녀들은 그리피스 영화의
주인공을 여러 번
?있다), 매 마쉬, 블랜취 스위트, 메리 픽포드 등은 19
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금욕적인 면들이 느슨해 지면서 좀더 현대적인 감수성으로
천천히 이동해 가는 관객들에게 하나의 전환기적인 형상을 재현한 바 있다. 특히
메리 픽포드는 그녀의 스크린상의 이미지인 ‘미국의 스위트하트’, ‘어린 매리,
긴 황금 머리칼을 가진 소녀’와 여배우라는 일하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유나이티
드 아티스트사와 같은 독립제작사에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린 경영인으로서의 스크
린 밖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구현해낸 스타였다. 메리 픽포드는 인형 같은
?
영화에 계속해서 등장하고, 스튜디오는 그녀를 탈 빅토리아 세계의 현대 미국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신여성’의 이미지로 만들어 나갔다.
또 다른 스타였던 더글라스 페어뱅크스는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가 지배하는 엄
격한 분위기 속에서 고된 노동을 하는 청년 사업가지만, 동시에 건강한 여가활동을
통해 즐거움과 여유를 추구하는 활동적인 남성 역할을 주로 맡았다. 동일시를 통해
서 전혀 새로운 주체가 형성될 수 있도록 스타들은 만들어지고 있었다.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스타는 찰리 채플린이다. 방랑자의 페르소나를 가진
職訝??
사회의 귀족적 가치들이 팽배한 낡은 세상과 이민자들이 만든 신세계의 합법주의
가 가져 온 모든 권위를 부정하는 역할을 주로 맡는다.
픽포드, 페어뱅크스 그리고 채플린은 낡은 19세기의 가치와 관념들과 현대적인 20
세기의 가치와 관념들이 얽혀 있던 당시 관객들의 불안감을 스타 이미지를 통해 보
여주고 있다. 1920년대에는 루돌프 발렌티노와 그레타 가르보와 같은 이국적이고
에로틱한 스타들이 픽포드, 페어뱅크스, 채플린의 스타 대열에 끼게 된다. 후자의
섹슈얼리티가 어린아이거나 혹은 소박한 어른의 것이라면, 발?
가르보는 세
련되고, 성숙한 유럽인들의 에로틱한 모습을 보여준다.32) 그들에 대한 미국 관객
들의 열광은 전쟁 이후에 도래할 성해방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기운을 반영한다. 헐
리우드는 ‘말괄량이’와 ‘재즈 베이비들’로 광란의 1920년대 당시 신여성을 언
급했으며, 춤 추고, 술 마시고, 담배 피고, 성적으로 자유로운 그녀들의 행동은 현
대로 넘어가는 미국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도덕성으로 취급되었다. 발렌티노가 스크
린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이전의 프로테스탄트적인 윤리의식에 입각한 신사가 아
닌, 거칠지만 성적으로 이끌?
봉潔駭? 미국 여성이 발렌티노를 라틴계 연인
으로 열정적으로 좋아했던 만큼 미국남성은 그를 싫어했다.
후기 무성영화 시기에 인기를 끌었던 가르보는 거의 인간이 아닌 하나의 신격화한
존재였다. 가르보는 낭만적이 아닌 종교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가르보는 거의
대부분의 영화에서 연하의 남성을 유혹해서 사랑에 빠지는 연상의, 좀더 경험이
많은 여성이지만 자학적인 성격과 자신의 과거 때문에 비극적으로 죽는 역할을 맡
았다. 가르보의 스크린 페르소나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오면서 변화를 겪
는다. 스크린
배우들이 말을 한다는 것 자체로 인해 관객들은 좀더 인간적
이고 좀더 다가갈 수 있는 스타를 원했다. 또한 영화 역사상의 혁명 ─ 사운드의
도래 ─ 은 공황과 뉴 딜 정책이라는 사회적 격변기와 맞물려 관객들은 현실과 영
화의 벽이 얇아지길 원했다. 가르보의 스타 이미지는 1930년대에 신격화에서 인간
화로 변화를 겪게 된다. 그녀의 첫번째 사운드 영화인 《안나 크리스티》(1930)의
광고문구는 “가르보가 말을 한다!”였고, 그녀의 첫번째 코메디 영화인 《니노치
카》(1939)를 제작사인 MGM은 “가르보가 웃는다!” 라는 광고문구
?관객을
끌어들였다. 동시에 비극적인 시대극 멜로 드라마를 통해 가르보는 동시대 여성의
드레스와 모자 등의 유행을 이끄는 열정적인 소비자로 위치하게 된다. 이제 스타
또한 그 시대를 살아가는 관객과 다름없이 상품을 소비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무성영화 시기의 고상한 귀족적 스타 이미지는 대공황 시기와 유성영화의 시기가
맞물려 노동계급의 낙관적인 성격을 지닌 스타 이미지로 변화하게 된다. 자넷 가
이너와 조안 크로포드와 같은 힘든 일을 하는 점원이나 제임스 캐그니와 제이 C.
로빈슨과 같은 노동계급 터프 가이
?영화의 주요 전형으로 등장하게 된다
. 그 중에서 보조개가 들어가고 금빛 머리칼을 가졌으며,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성
격을 지닌 어린 고아, 셜리 탬플은 공황기 최고의 스타였다. 공황기의 관객에게 템
플은 국가적 차원의 문제에 대한 감상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템플의 극중 인물은
고아이거나(《1월의 지도자》, 1936), 엄마가 없거나(《어린 미스 마커》, 1934),
노동계급의 배경(《마커》, 《딤플스》, 1936)을 갖고 있다. 또한 그녀는 하인이
거나 흑인 모두와 친구가 되는 완벽한 민주주의자이다. 좀더 중요하게 그녀는 새로
운
??위한 초점이 된다. 그녀는 공황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황폐한 마
음을 녹여주는 평등한 사랑을 지녔고, 자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껴안을 줄 아
는 관용과 미덕을 갖춘 스타 이미지이다. 템플은 온정적인 자본주의가 갖춘 온화한
힘을 일깨워 주었다. 단순한 믿음과 사랑으로 인해 구원받고, 보상받는 식의 기적
같은 행운을 가진 템플의 스크린 이미지는 당대의 모든 관객의 욕망을 체화한 이
미지가 된다. 템플이 사춘기를 맞이하고 그녀의 대중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자, 그
자리는 미키 루니와 쥬디 갤런드에 의해서 메워진다. 그
930년대 후반까지 계
속해서 관객에게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를 영화를 통해 심어준다. 《오즈의 마법사?
렛【?갤런드는 무지개 너머에 있는 행복은 사심 없이 순수한 마음을 바쳐서 그것
을 추구했을 때만이 얻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영화는 당시의 관객에게 공황이라는 자본주의가 낳은 가장 잔인한 괴물은 순수하
고 정직한 마음을 가진 개인의 충만한 노력을 통해서 물리칠 수 있다고 말한다. 마
치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주디 갤런드)처럼, 《가장 어린 반항아》(1935)
에서 셜리 템플처럼 말이다. 이러한 미국의 온정적인 ?
, 즉 미국식 인민주
의(populism)는 자본주의 발전법칙의 필연적인 산물인 공황을 극복하는 방식이었다
. 동시에 생산의 잉여를 어떻게 다시 팔 것이냐가 중요해진 소비사회에서 ‘살아
있는 진열장’33) 역할을 한 영화는 소비를 자극하고 행위하게 만드는 중요한 문
화상품이었다. 헐리우드는 광고, 홍보 등 일련의 스타덤을 통해 당대의 대중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고 더 나아가 영화를 통해 대중들의 소비를 자극해서 산업으로
서의 제모습을 갖추게 된다.
1920년대, 30년대 영화장르가 그랬던 것처럼 스타 역시 새로운 소비시대를 맞이
捻舟求?우상, 소비함으로써 빛나는 인간으로 그려내고 있다. 소비를 위해서
이전의 빅토리아적 이미지를 씻고 전혀 새로운 인간형으로 성장하고 있는 스타를
그리고 있다. 공황기에 이르면 스타는 공황을 이기고 자본주의의 승리를 구가할
수 있는 신념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는 1920년대의 스타들이 다분히 향락적
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던 데 비해 역경을 이겨낼 수 있으며 관객들과 친근한 이
미지로 함께 갈 수 있는 인물들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이처럼 장르의
변환과 스타의 기용을 통해 사회가 안고 있는 욕망을
뺐資?했고 사회가 드
러내는 불안을 제거하고자 했다.
5. 소 결
1920~1930년대 헐리우드 미국영화는 사람들이 영화를 기억하는 장소로 남아 있다.
그 곳에서는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가 커플을 이뤄 춤을 추고 있었고, 숨
이 막힐 정도로 고혹적이고 뇌쇄적인 그레타 가르보와 마를렌느 디트리히가 있었으
며, 토토와 함께 노란 벽돌길을 걷던 쥬디 갤런드가 있었다. 한 쪽에서는 셜리 탬
플이 흑인 할아버지와 춤을 추고 있고, 존 웨인이 휑한 서부의 한가운데서 총을 겨
누고 있다. 갱스터인 험프리 보가트는 계속해서 무?
로 냉소적인 대사를
내뱉고 있으며, 키 작고 못생긴 제임스 캐그니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총격질을 하
다가 장렬하게 전사한다. 당시 영화는 하나의 신화이고, 마술이며, 꿈이었다.
헐리우드 영화는 가장 성공적인 대중 오락산업이었으며 옷 입고, 말하고, 사랑하
는 방식을 대중들에게 가르친 교사였다. 대중들은 영화를 통해 삶의 스타일을 일궈
나갔으며, 영화를 통해 근대(modernity)를 받아들였으며, 영화를 통해 가장 어려운
시기(대공황)를 견뎌냈다.34) 미국 자본주의의 초기 단계인 이 시기는 두 번의 세
계대전으로 인해 미국 자본
성장을 추동시켰으며, 그 사이에 공황은 필연으
로 다가왔다. 헐리우드는 이러한 미국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독과점과 검열규칙을
통해 경제 및 제도를 구축, 산업으로서의 체계를 완전히 갖추게 된다. 공황 역시
사운드 개발이라는 혁신적인 기술을 통해서 극복한다.
당시 미국은 대중 사회의 성장기였고, 대중들의 여가 오락이 문화적으로 점점 더
중요해 지는 시기였다. 영화는 생산에서 소비로의 전환을 통해 자본주의의 성장일
로를 구축하는 데에 가장 핵심적인 문화적 장이었으며, 동시에 동부 중심의 고급예
술 향유에서 서부 중심
문화를 구축하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대중들
은 프랑크 카프라 감독의 영화, 셜리 템플, 쥬디 갤런드의 영화, 그 외에 헐리우드
라는 정글의 법칙 하에서 생산된 문화상품을 소비하고 그 안에서 미국식 인민주의
를 익혔다. 삶과는 다른 해피 엔딩의 영화는 고급예술을 향유할 수 없는 대중들을
소외시키지 않은 채 그들을 대상으로, 그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쾌락과 유흥의 도
피처이자 쉼터를 제공했다. 1948년 파라마운트 반트러스트 사건으로 인해 메이저
스튜디오에 의한 제 2 차 독과점 시기는 종말을 맞이한다. 그 후 1950년대
드에 불었던 메카시즘이라는 마녀사냥과 텔레비전의 등장은 대중들의 유일한 꿈과
안식처였던 헐리우드라는 거대한 성을 서서히 무너뜨렸다. 그 결과 메이저 스튜디
오들은 여타 오락산업으로 눈을 돌려 복합기업으로 변신을 꾀했으며, 독립영화제작
사들이 새롭게 세워진다. 1920년대와 1930년대 헐리우드는 제작-배급-상영의 수직
통합, 장르와 스타의 사용, 스튜디오 시스템이라는 초기 자본주의의 일괄공정체제
의 완성을 통해 대중들과 문화를,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와 20세기의 현대를, 공황
이라는 궁핍한 현실과 미국식 인민주의라는
謎뼉聆퓽?이데올로기를 절묘하
게 결합시킨 전무후무한 시공간이었다. 이 후에 어떤 영화산업도 당시 헐리우드의
영화산업만큼 대중문화의, 소비문화의 중심에 서질 못했다.
재즈가 ‘유일하게 독특한 미국적 예술 형식’이라 불리우지만, 막상 그 정의는
대단히 모호하다.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가 무엇이냐고 묻는 순간 그 존재의 의미
는 사리지게 된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굳이 정의하자면, 재즈는 아프리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그 후 유럽의 클래식과 ‘미국적’ 음악과 결합한 일종의 퓨전(fusi-
on)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재즈
를 추적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러한 퓨전적 성격으로부터 유추되는 역사적 사실들일 것이다. 아프리카의 음악적
전통이 과연 어떠한 경로를 통해 그 공동체적 뿌리를 이탈해 ‘신대륙’에 이식되
었는가를 추적하면 재즈의 사회·역사적 성격을 보다 명료하게 알 수 있다. 특히
1920년대에 재즈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사회를 벗어나 헐리우드 문화산업의 상품
화 전략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문화산업의 상품화
전략은 재즈가 백인사회를 조우하게 되는 계기가 되며, 재즈 공동체는 이에 대항하
?
資막灌?적극 백인사회에 재즈를 퍼뜨리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러한 점
에서 재즈라는 장르는 문화적 포섭(incorporation) 전략과 그를 벗어나려는 노력이
함께 한 문화적 헤게모니 쟁탈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1. 남부에서 북부로
일반적으로 재즈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 ‘미국의 남부 흑인들에 의해 생
겨난 음악’으로 정의된다. 당시의 재즈를 흔히 ‘뉴올리언즈(New Orleans) 재즈’
혹은 ‘딕시랜드(Dixieland) 재즈’1)라고 부른다. 남북전쟁의 종식과 더불어 노예
의 해방이 이루어진 1890년경 미 남부지역에는 ?
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
는 이른바 ‘크레올인’2)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대체로 유한계층인 이들은 그 이
전 노예의 삶에서는 상상 못할 수준의 문화적 여가를 즐길 수 있었다. 특히 이들은
유럽의 클래식 전통과 아프리카의 전통적 리듬을 결합시킨 피아노곡을 자주 연주하
였다. 이것이 바로 ‘랙타임(ragtime)’이라고 불리우는 기악곡 형식의 최초 재즈
였다.
랙타임을 최초의 재즈 형식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랙타임에
는 타 음악 장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른바 싱코페이션(당김음)이 있다. 이것은
하나의 ?
앞이나 바로 후로 미끄러지고 전혀 예상치 않은 곳에 강세가 들
어가는 리듬 스타일을 뜻한다.
즉흥 연주(improvisation) 및 스윙(swing)감과 함께 재즈의 본질적 요소 중 하나
로 꼽히는 싱코페이션은 당시 클래식과 재즈가 변별력을 갖는 지점이기도 했다. 사
실 즉흥 연주라는 기법도 바로 이 당시에 재즈에 도입되었다. 흔히 즉흥 연주라는
것을 재즈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많지만, 이는 그 이전 클래식
음악에서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재즈는 마니엘르라
불리던 클래식의 즉흥연주 형
용한 혐의가 매우 짙다.3)
이처럼 뉴올리언즈 재즈는 유럽 클래식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재즈의 연주 스타일로 흔히 꼽히는 ‘집단 즉흥연주(collective improvi-
sation)’가 기본적으로 바로크의 3중 협주곡에 그 뿌리로 두고 있는 것이다. 클라
리넷 주자 조지 루이스(G. Lewis)의 대표적 앨범인 《오하이오 유니온 재즈》(Jazz
at Ohio Union) 중 한 곡인 ‘The world is waiting for you’를 예로 들어보자.
이 노래의 멜로디는 클라리넷이 담당하고 있지만, 트럼펫과 트롬본도 마치 하위
멜로디(sub-melo
念??좋을 정도로 즉흥적으로 카운터 파트를 맡고 있다.
곡의 종반부에 이르게 되면 누가 애드립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클라리넷과
트럼펫, 트롬본이 겹쳐서 연주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뉴올리언즈 재즈를 그 이
름에 걸맞게 만든 ‘콜렉티브 임프로비제이션’이며, 바로 여기서 앞선 바로크 양
식의 심대한 영향력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러한 집단 즉흥연주 형태는 20세기에 들
면서 점차 힘이 사라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지적한 싱코페이션의 개발
과 더불어 ‘집단 즉흥연주’ 양식이 뉴올리언즈를 중심으로 한 초기
척育?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점은 결코 소홀히 될 수 없겠다.
19세기 말 미국 남부지방을 근거지로 발전한 재즈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불어닥
친 엄청난 사회·경제적 변화, 그리고 이에 따른 대규모 인구 이동으로 인해 그 확
산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노예제도로부터 해방된 많은 ‘흑인’들이 새로운 일
자리를 찾아 북부로 몰려들었으며, 여기에는 재즈 음악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
다. 특히 1917년 미국의 제 1 차 세계대전 참전을 기점으로 ‘스토리빌’이라 불리
던 남부 매춘지대가 폐쇄되는데, 이곳에서 연주하며 생?
?많은 음악가들이
새로운 연주 공간을 찾게 되었다. 그들은 일거리를 찾아 미시시피강을 따라 북부
의 공업도시로 이주하였으며, 이 때부터 본격적인 재즈시대가 막을 올리게 된다.
미국의 문학사에서도 특별히 1920년대를 가리켜 ‘재즈 시대(the Jazz Age)’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전쟁이라는 경제 특수와 신생국의 이미지를 벗고 전승국으로
서 열강의 대열에 참여하게 된 미국의 여유로움과 낙관, 번영, 이로 인한 사회적
들뜸을 의미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재즈가 시카고나 캔사스, 뉴욕 등지에서 거
장들을 중심으로 번성하면?
사회적 분위기를 대변하는 음악으로 자리잡기 시
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1929년 10월 ‘암흑의 목요일’이라 불리운 주식 폭락의 날을 기점으로 미국은 극
심한 불황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상황의 변화는 재즈 음악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와, 루이 암스트롱4)과 같은 거장들은 유럽으로 은신해 재기의 날
을 기다리기도 했다. 극심한 침체기를 경험한 미국인들은 이제 보다 달콤한 형식의
스윙 시대를 찾기 시작했다. 흔히 ‘빅 밴드 재즈’라고도 불리는 스윙은 엄밀한
의미에서 뉴올리언즈 재즈와는 궤를 달리하는 백인 ?
. 당시 대중적으로 인
기를 얻은 ‘스윙의 왕’ 베니 굿맨(B. Goodman)5)이나 글렌 밀러(G. Miller), 토
미 도오시(T. Dorsey) 등의 악단이 모두 백인 재즈밴드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입증
한다. 사실 재즈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던 유일한 시절이 바로 1930년대 중반의
스윙 재즈였으며, 이 때의 스윙은 그 이전의 뉴올리언즈 재즈와는 여러 면에서 차
이를 갖는 음악이었다. 금주령 시절의 음습한 무허가 술집이라는 밀폐된 공간으로
부터 벗어나 이제 재즈는 호텔이나 사교 클럽에서 춤곡을 위해 봉사하는 백 밴드의
음악으로 변모했다.
를 대표하는 용어가 되어 버린 스윙은 대다수 백인들에
게 있어 그 이전 갱단이나 밀주, 매춘녀 등을 환기시키던 흑인들의 재즈와는 전혀
관련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백인들의 보수적이고 체제 순응적인 재즈에 반발하면서 생겨난 새로운 재
즈 형식이 이른바 ‘비밥(Bebop)’이었다. 찰스 밍구스(C. Mingus)와 찰리 ‘버드?
?파커(C. Parker), 그리고 디지 길레스피(D. Gillespi) 등 일군의 ‘혁명가’들에
의해 주도된 비밥은 뉴올리언즈 재즈시대로의 복귀를 외치면서 등장하였다. ‘퇴행
적’ 의미의 복귀가 아닌, 재즈의 상?
쩌??일종의 ‘진보적’ 개혁인 셈이
었다. 비밥은 당시 뉴올리언즈와 스윙적 감수성에 젖어 있던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재즈 연주가들에게도 이해하기 어려운 아방가르드로 존재했다. 특히 모던재즈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파커는 ‘버드(Bird)’라는 애칭으로 오히려 더 유명했다. 그
이전 흑인 연주가들과 마찬가지로 독학으로 자신의 재능을 키운 그는 비밥의 선구
자이면서 또한 알토 섹소폰의 대가였다. 코드에 숨겨진 여러 화성을 자유롭게 펼쳐
보임으로써 즉흥 솔로 연주에서는 마치 요술을 부리는 것처럼 다양한 음을 구사한
버드?
?지금까지도 미국 재즈계에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 사회 변화와 함께 이루어진 재즈 스타일의 변화상에 대해 살펴본 대로
재즈만큼이나 10년을 단위로 해서 스타일의 구분이 분명히 이루어지는 장르도 드
물다. 물론 1900년대의 랙타임, 1920년대의 뉴올리언즈(딕시랜드) 재즈, 1930년대
의 스윙(빅 밴드), 그리고 1940년대의 비밥(리밥)이라고 불리운 양식상의 변화는
각 시기마다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재즈가 미국의 사
회·문화사와 운명을 같이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선 수탈적 식민화로 인해 아프
欲?그들의 음악적 전통이 신대륙으로 옮겨지고, 그 음악은 오랜 지역간 불
균등 발전으로 인해 남부에서만 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산업의 발달로 인한 유휴
노동력 필요라는 계기는 남부와 북부의 문화적 충돌, 인종간 만남을 주선하게 된다
. 재즈음악도 남부라는 협소한 무대를 벗어날 새로운 기회를 맞이했다. 그 후 공황
이 불어닥치면서 미국인들은 새로운 음악적 형식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문화산
업은 예전의 재즈 정신이나 형식을 포기하고 재빠르게 대중의 입맛에 맞는 이른바
‘백색화된 재즈’를 내놓았다. 변화된 형식, 변?
신에 반기를 들고 재즈의
복구를 노리며 새로운 비밥 형식이 등장하였고, 결국 재즈는 내적 다양화와 다툼
의 길을 걷게 된다.
2. 1920년대 이전의 재즈
재즈가 미국의 남부에서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한 해답은 앞서 간략히 언급한 바
와 같이 지역간 불균등 발전이라는 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찾을 수 있다. 1861년
에 시작된 남부와 북부의 무력 충돌은 흔히 억압적 노예제도의 철폐 및 흑인 노예
들의 해방을 위한 전쟁, 혹은 주(州)들의 권리 또는 연맹을 보존하고자 했던 전쟁
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남북전쟁은 보다 근본?
자본과 농업자본간 경
제적 이해관계의 대립에서 빚어진 피할 수 없는 결과였으며, 북부의 진보적인 자본
주의 이데올로기와 남부의 보수적인 농업주의 이데올로기간 갈등의 표출이기도 했
다.
당시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남부는 ‘목화가 왕이고 담배가 수상’이라
는 전통적 신념에 갇혀 있었다. 가공되지 않은 농산품을 완성된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필연적으로 북부의 공장을, 그리고 상품의 수송을 위해서는 철도를 필요로
했다. 그리하여 남부의 농장주들은 공장과 수송 수단을 장악하고 있던 북부 기업
가들에 자신들이 점?
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손해 보는 흥정을 해왔고 또한 북부 자본의 횡포 탓에 착취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
했다는 심증을 떨치지 못했다. 마침내 남부는 북부에 필사적이고 절망적인 반항을
하게 되고 결국은 패배하였다. ‘내전’(1861~1865)은 대량생산체제의 산업주의를
전국적으로 의무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 전쟁의 결과 남
부는 기존 가치 질서의 붕괴와 함께 구유럽적 전통, 즉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를 상
실하게 되었다. 흑인 노예들은 정치적으로 해방의 자유를 맛보았으나, 그
보
다는 당장 생계 유지가 힘들어진 자신의 경제적 처지에 대해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 산업화가 크게 진전된 북부에서도 대량으로 생겨난 남부 흑인 실업자군을 수용할
충분한 일자리는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옛 백인 주인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불리한 경제적 상황에서 경제적 자립의 수단
을 모색하던 많은 흑인들은 뉴올리언즈 등 남부의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들에게 있
어 특히 밴드맨은 커다란 선망의 자리였다. 당시의 뉴올리언즈 지역은 남부 최대의
유흥도시로서, 지역 주민들의 생활 양식은 매우 활기에 넘쳐 있었다. 각
식
에도 마치 밴드(march-band)가 동원될 정도로 연주인에 대한 수요가 높았던 것이
이 도시로 흑인들이 몰려들게 된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크레올인들은 클래식
과 서아프리카의 토속적 리듬을 접목시킨 랙타임6)을 완성시켰으며, 이를 어깨 너
머로 배워 익힌 흑인들에게 밴드맨의 길은 생존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재즈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즉흥연주, 싱코페이션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
다. 즉흥연주라는 개념은 재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민속음악이나 록음악에
도 존재하며,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클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바흐나
모차르트와 같은 음악가들은 사실 뛰어난 즉흥 연주가였다. 그러나 재즈의 즉흥연
주는 클래식의 그것보다 세분화된 비트(beat)를 바탕으로 한 리듬감이 중심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두 음악은 결정적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재즈와 즉흥연주는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되었을까? 유럽 클래식 음악의
영향을 제외하고도, 남부 흑인들의 고향인 아프리카의 음악적 전통에서 또다른 중
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아프리카인들에게 있어 음악은 각종 행사나 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러한 행사는 대
?종교적인 색채를 짙게 깔
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아프리카의 음악 연주가들은 무당과 비슷한 역할을 맡
게 되었다. 즉, 이들이 의식이나 행사의 중심에서 부락민들을 이끌어 가는 역할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종교 의식의 열기가 고조되면 음악을 연주하는 이들도 차츰
의식의 세계를 넘어서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연주를 하곤 했다. 마치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무당들이 굿을 하다가 신이 들려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말
을 하던가 자신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행동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재즈는 ?
??전통적 요소를 이어받고, 이후 타 민속적(유럽적) 형
식과의 결합을 통해 즉흥연주라는 무정형의 형식을 발전시키게 된다.
즉흥연주가 발달하게 된 또다른 이유는 당시 재즈 음악가들의 낮은 교육 수준과
관련되어 있다. 당시의 재즈 연주인들은 대부분 악보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곡 전체를 완전한 형태로 편곡해서 악보에 담
을 수가 없었다. 결국은 곡의 주요 멜로디만을 외워 연주할 수밖에 없었고, 부족한
나머지 부분은 즉흥연주로 채워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세번째 중요한 이유
의 문제가 추가된다. 다른 음악들은 가사와 보컬이 거의 필수적이기 때문에
보통 ‘전주-노래-간주-노래-마무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반면에 재즈 음악은
보컬이 없는 기악곡으로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노래에 들어가는 부분
도 연주로 채워야 했다. 악보를 거의 볼 줄 몰랐던 재즈 연주인들은 편곡된 악보를
가지고 연주할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었고 그렇다고 해서 똑같은 멜로디를 계속 반
복 연주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즉흥연주는 재즈에서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이 되어버렸다.
싱코페이션 또한 흑인 특유의
【?기인한 것이었다. 싱코페이션이란 멜로
디나 화음을 중요시하는 서구 음악에선 찾을 수 없는 랩(rap)이나 힙합(hip-hop)
등 미국 흑인 음악의 독특한 비트와 리듬감을 뜻하며, 이 또한 즉흥연주와 맞닿아
있다. 즉, 즉흥연주를 통해 연주와 비트를 일치시키지 않고 상황에 따라 강약을 조
절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리듬감을 창조하는 것이다. 결국 아프리카의 음악적 특질
들이 재즈 안으로 들어오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화적 상황과 맞닿아 재즈의
특성인 싱코페이션과 즉흥연주 방식이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
?재즈가 남부에서 발생·발전한 기본적인 이유는 재즈가 남북전쟁 직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했던 흑인들의 생존 수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겠다. 프랑스적 전통이 강했던 뉴올리언즈라는 상황은 아프리카 음악이 유럽의
클래식과 만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 당시의 음악을 정통 재즈
라고 부르기엔 조금 무리가 따른다. 동시대에 존재했던 음악 형식인 블루스나 영가
와 달리 재즈는 노동요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어두운 분위
기의 재즈가 아닌 제법 밝고 흥청스런 형태의 음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재즈의 북부 유입
1) 희망과 파국의 동시적 축적
1920년대 미국의 경제는 금융 및 상업 자본이 폭발 직전까지 과잉 축적된 상황으
로 묘사된다. 정서적으로 물질주의의 팽창과 기존 공동체의 해체로 인해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은 경제적 팽창이 가져다준 피상적 포만감에 취할
따름이었다. 대중들은 이전 그 어느 시기보다 풍요로운 삶을 즐긴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필연적으로 도래할 공황에 대비하지 못한 채 눈앞에 현재화한 부에 현혹당
했던 것이다. 이러한 성장은 이전부터 미국인들의 뇌리
인되어 있던 국가에
대한 이상주의적 인식을 강화시켰다. 북아메리카라는 광활한 땅에 정착하기 위해,
그리고 다양한 이주민층들을 결속하기 위해 필요했던 ‘개척자 정신’이 미국은
새로운 희망을 담보하고 있는 땅이라는 선민의식으로 굳어간 것이다. 이 이데올로
기는 개인적으로는 새롭게 이주해온 땅에서 부를 성취해 보려는 야심찬 계획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는 역사적 전환기에서 갈등을 겪고 있던 유럽과 대비되는 건설
의 희망으로 나타났다. 1920년대는 이처럼 개인적, 집단적으로 모두 현실을 낙관적
으로 해석하고 현실을 실
?발전시킬 모든 사업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던 시
기였으며, 미국이라는 나라를 이상의 실현이 약속된 지구상 유일한 나라로 인식하
던 시기였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아시아, 남미 등지에 대한 제국주의적 관심은 ‘미국의
이상’을 전세계에 실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정책으로 간주되었고, 미국인들은 이
러한 국가적 사업의 필요성을 대체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기존의 제
국주의적 침탈 및 횡포와 조금도 차이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 미국인들은 세계
대전 후 해외 진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는
?瑛?고립
정책으로 연결되었다. 물론 이에 대한 해석은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제국주
의 정책의 철회는 무엇보다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실리적 이유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유럽식 제국주의 방식이 자본주의 경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
단이 바탕을 깔고 있던 것이다. 여하튼 미국의 자본은 이제 자국 영토내에 갇히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공업화가 이루어진 북부에 집중되었다. 많은 도시가
호황을 누렸으나, 느리게 진행된 공업화는 노동 대중들에게 충분한 정도의 일자리
를 제공하지는 못했다. 사실 당시
많이 남는 사업은 금융업이었고, 자본은
북부의 발전하는 금융업과 상업을 통해 자기 증식을 꾀했다. 이러한 자본 축적은
재즈의 본고장인 뉴올리언즈를 비롯해서 남부에는 제대로 물꼬를 대지 않았다. 아
프리카계 대중들은 인종차별이 만연한 남부에서 최저의 생계 수준을 계속해야만 했
다.
한편 자본의 축적이 계속되는 동안 기업의 활동은 전혀 간섭을 받지 않았다. 1914
년 10월 15일 공포된 클레이턴 트러스트 금지법은 기업 독점을 금지하기 위한 법이
었지만 독점 행위를 금지하려는 당초의 목적은 애초에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
湯?이 법은 독점 기업의 탈법을 용이하게 해주었을 뿐이었다. 기업은 독자적
인 판단에 따라 운영되었고, 미국 이상주의의 실현이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임무라
고 여겨지던 당시의 대중적 정서는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주는 이데올로기
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러한 기업의 자유로운 경쟁과 이윤의 추구는 남부를
복구 불가능한 상태로 피폐화시켰으며, 이상주의의 실현을 위한 금주법의 확산은
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선택으로 공공연히 강조되었다. 고립주의 정책을 고수하던
윌슨 행정부가 1917년 연합군의 일원이 아닌 협력
차 대전에 참전한다는 대
독 선전을 하기 직전 이미 뉴올리언즈의 스토리빌을 비롯한 남부의 공창지대는 미
국적 이상을 더럽히는 치부로 꼽혔다. 곧 이 지역에 대해 폐쇄 조치가 내려지고,
뉴올리언즈 재즈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 재능 있는 이들에게 기회와 이
상을 약속하는 북부의 땅으로 남부의 재즈 연주인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
다.
2) 뉴올리언즈 재즈와 북부의 이동
1차 세계대전이 종반에 들어선 1917년 1월 31일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할 것을 선언하자, 유럽 전쟁을 협상을 통해 평화적 방
식시키고자 한
윌슨의 마지막 희망은 산산이 부숴지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윌슨은 1917년 2월
3일 독일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이후 양국간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며,
그 와중에 이른바 ‘짐머만(Zimmerman) 각서 사건’이 발생하면서 미국을 결정적으
로 1차 세계대전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연합군의 협력자로서 참전하여 결
국 승전국이 된 미국은 이후 신생국의 이미지를 벗고 세계의 열강으로 군림한다.
또한 전쟁 특수라고 하는 경기 호황과 함께 전례 없는 경제 발전과 번영의 시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주로 북부 도시지역에 제한된 것이었다. 오히
려 전시하 국가의 지배·통제 정책이 강화되면서 남부의 유명한 공창지대인 스토리
빌이 폐쇄되는 등 남부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더욱 황폐화되어 갔다. 이와 함께
노예 해방 이후 오히려 강화된 백인 인종주의는 많은 남부 흑인들이 북부로 집단
이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가져왔다.
그 결과 남부에서 활동하던 많은 재즈 뮤지션들도 미시시피강을 따라 대도시가 밀
집한 북부로 이동하게 된다. 당대를 대표하는 루이 암스트롱과 같은 거장들도 리버
보트를 타고 북부의 새로운 일자리를 ?
뭅? 당시에 내려진 ‘금주령(Volste-
ad Act)’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는데, 이는 노동력의 착취를 위한 국가의 개입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국적인 금주령은 그 의도와 달리 미국민들의 생활을 오
히려 부패하게 만들었다. 많은 갱조직들이 나이트클럽 등을 통해 술과 음악을 마음
대로 팔았다. 피부색을 문제 삼지 않은 이 지하 세계에서 흑인 연주자들은 어느 정
도 생활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재즈가 이전의 뉴올리언즈에 한정된
‘지역’ 음악에서 벗어나 전국에 걸친 대중음악의 위치를 획득한 시기가 바로 이
19
눼? 노예해방 이후 지속된 남부의 흑백 분리정책으로 인해 백인과의 음
악적 교류가 전무했던 시기에는 뉴올리언즈 재즈 특유의 흑인 정체성이 온존히 유
지되었다. 반면에 대중성의 확보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흑인
재즈 뮤지션들이 북부로 유입됨에 따라 백인 뮤지션과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결국
대중과의 친밀한 교감이 이루어질 계기가 마련된다. 이러한 요인들이 1920년대에
들어 재즈가 발흥한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1920년대 재즈 스타일의 특징을 결정지운 시대적 환경들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당시는
낯灼?바와 같이 ‘격동의 20년대’라고 불리울 정도로 번영의 시대
였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번영과 더불어 조직화된 범죄와 폭력 그리고 정치적
타락 또한 동 시대의 미국사회에서 놀라울 정도로 번성하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조직화된 범죄 및 폭력이 난무하게 된 데는 1차 세계대전중 소
형 화기들의 성능이 더욱 치명적이고 효과적으로 향상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이러
한 무기들의 판매를 통제할 법률이 부족하였을 뿐 아니라 집행에 있어서도 제대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는 기술적인 이유가 있다. 그러나 더욱
?것은 심리적
이고, 경제적인 이유였다. 남북전쟁 직후 자본가계급에 의해 강화된 ‘아메리칸 드
림’은 이제 모든 대중의 이상이 되었으며, 부를 성취한 수완가들에 대한 미국인들
의 존경심은 축적 과정에 사용된 어떠한 비도덕적 수단에 대해서도 종종 눈을 감게
만들었다. 부의 축적에 관한 한 윤리 의식의 개입 여지가 완전히 실종된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모든 도덕적 경계선이 파괴되는 것과 동시에 갱단의 두목이 일종의
대중적 영웅으로 떠오르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당시에 이처럼 폭력과 탈법 행위가 난무하게 된 가장 큰 원인?
음료의 금지
에 있었다. 이미 1895년부터 술집이 싸구려 알콜을 판매함으로써 노동 대중들의 생
산 능률을 해친다는 매우 실질적인 이유로 거리의 술집을 문 닫게 하려는 운동이
주 단위에서 벌어졌다. 그러던 것이 1917년에 전쟁 경제의 압력 하에 금주법이 실
시되면서 마침내 음주 문제를 주 차원을 넘어서 국가적인 문제로 만들려는 조치들
이 취해졌다. 이제 금주법은 노동자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그리고 가정의 고결성을 악마와 같은 술의 파괴성으로부터 보존하는 신앙적 수단
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남부에서
의 통제가 인종 집단간 마찰을 막는 수단으
로, 인종갈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예방 수단으로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주
류 금지에는 흑백의 차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의 제정
과 그 집행은 별개의 문제로, 금주법은 밀주 제조 및 판매와 연관하여 대규모 갱단
들이 창궐하는 데 오히려 촉매가 되었다.
1920년대의 재즈는 이러한 사회적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일거리를 찾아 북부로
이주한 재즈 연주가들은 시카고와 캔사스 등지에서 백인 뮤지션들과 활발하게 교
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재즈 시대의 닻을 올
羚駭? 뉴올리언즈 재즈의 클래식
으로 불리운 조 킹 올리버, 페르디난드 젤리, 롤 모돈, 시드니 베키트의 음반이 모
두 시카고에서 녹음되었다. 이는 단순한 음악적 형식의 이동 뿐만 아니라, 흑인 집
단의 실질적 공간 이동을 의미했다. 시카고로 대변되는 중·북부의 공업 도시들은
아프리카계 대중들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을 제공하였으며, 재즈라는 음악적 전통
의 공식 후계자가 되었다. 특히 인구 십만의 흑인 거주지역인 시카고 남부 지역(So-
uth Side)은 뉴올리언즈 재즈의 새로운 고향으로 자리잡았으며, 전국 각지로부터
몰려든
악가들이 이곳의 카바레와 극장을 메웠다. 톰 브라운과 같은 백인
음악가들도 시카고라는 공간을 통해 비로소 흑인 음악과 만나게 되고 궁극적으로
많은 백인 중산층 재즈팬들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높은 인기를 끈 킹 올리버 밴
드의 경우에는 백인 팬들을 위해 특별한 세션을 마련할 정도였다. 한 재즈 음악가
는 당시 시카고 남부지역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인종문제라곤 전혀 없었지. 사우스 사이드는 너무나 안전해서 마치 엄마 품속에
있는 것 같았지. 그곳을 온 백인들은 환대를 받았고, 우리도 서로 크게 존중하?
.7)
이처럼 흑인과 백인 연주자들의 만남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재즈는 도심이라는 제
한된 공간내에서나마 인종적 유대감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많은 백인 연주자들
이 재즈 악단에 참가했고, 흑인 여성들이 보칼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재즈
스타일의 특징은 그 이전 집단 즉흥연주의 개념에서 탈피하여 솔로 연주자의 비중
이 크게 강화되었다는 데에 있다. 사실 뉴올리언즈 스타일의 재즈에서 중요하게 간
주되던 집단 즉흥연주는 남부의 목화 재배에서 쓰이던 집단 노동이라는 생산양식에
부분적으로 기인하였다. 그러나 개?
력에 따라 출세의 보장이 달라지는 북
부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하에서는 출중한 개인 연주자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해
진 것이다. 루이 암스트롱은 그 시대 최고의 거물이었다. 1922년에 그가 등장함으
로써 재즈의 형식에는 상당한 변화가 초래되었다. 특히 그가 뉴욕으로 입성하여 플
레처 헨더슨 악단에 가입하면서 보여준 놀라운 연주 실력은 이후 수많은 연주자들
에게 솔로 연주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재즈는 이제 시카고를 점차 벗어나 많은 방송국들이 모여 있는 뉴욕으로 무대를
옮기게 되며, ‘할렘 르?
라는 흑인 대중문화의 붐을 조성하는 데 결정적으
로 기여하게 된다. 당시 뉴욕에는 많은 흑인들이 남부로부터 몰려들어 기존의 인구
와 함께 게토(ghetto), 슬럼(slum)으로 불리운 집단 거주지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뉴욕에는 또한 카튼 클럽(Cotton Club)이나 사보이 볼룸(Savoy Ballroom)과 같은
대중 사교장이 있어 재즈 악단이 태동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온
갖 불법의 온상이기도 한 클럽을 중심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재즈는 1930년대 들어
흑인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백인 연주자들의 새로운 흐름인 스윙이 인?
知瘦沮?갱스터, 밀주, 음습한 공간, 매춘 등 온간 부정한 것들의 상징에 다름
없었다. 특히 재즈가 연주되던 공간에 대한 언론의 공세는 집요하게 이루어졌다.
클럽 안에는 당시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던 여성의 흡연, 섹스에 대한 토론, 기이한
유행 등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것들이 도덕적 타락상으로 지목을 받게 된 것이다
. 언론에 의해 재즈는 원시적 본능이 풀어진 음악으로 지적받았으며, 백인 보수 세
력 및 지식인 층에 의해 극단적으로 ‘반문화’ 혹은 ‘악의 상징’으로 규정받기
도 했다.8)
4. 경제공황과 스윙 시대의 개?
廢꼭?개막
1차 세계대전의 승전과 함께 다가온 경제적 부는 미국인에게 새로운 자긍심의 자
양분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상업과 금융업을 중심으로 축적된 자본주의는 1920년대
동안의 벼락 경기를 지나면서 1929년 공황이라는 최악의 결말을 맞게 된다. 전혀
예상치 못한 뉴욕 주식시장이 붕괴된 것이며, ‘암흑의 목요일’로 기록되는 1929
년 10월 24일은 전세계적인 대공황을 예고하는 우울한 날이기도 했다. 영원한 번영
을 보장해줄 것만 같았던 1920년대의 통계학적 수치에 대한 믿음은 곧 예측할 수
없었던 경제적 결함들을 드러내고
?유사 이래 최악의 공황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은 여러 복합적 원인에 기인한 부의 비극적 결말이었다.
그중 한 가지 중요한 요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계급간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였다. 1920년대의 번영은 계급과 지역별로 평등하게 배분되지 않았으며, 상당
수의 미국민들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할 재정적 여유가
부족했다. 그러나 농민과 노동 대중들의 빈곤과 대조적으로 행정관리와 자본가계
급들은 놀라울 정도로 자본을 축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수중에 집중된 엄
六?구매력은 제조업자들로 하여금 그 잠재력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사치 품목
과 신상품의 생산에 주력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이것으로 충분치는 않았으며, 생산
업자들은 중·하층에게도 자신의 수입 수준에 걸맞지 않은 값비싼 사치품들을 할부
로 구매하도록 부추겼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상당한 빚을 지게 되며, 이와 같은 무
리한 신용판매와 과도한 금융투기 등은 공황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었다. 요컨대 19
20년대의 과잉 풍요, 그리고 이에 대한 기대심리가 공황을 부추긴 셈이었다.
만약 당시의 노동자들이 계급에 기초한 세계관을 ?
었다면 공황의 원인을 분
명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말로 인식했었을 것이다. 유휴 자본과 유휴 노동이 공급되
는 상태에서도 이들 자원을 결합시켜 사회적으로 유용한 성과를 지속적으로 생산해
내지 못한 근본적 원인은 자본가들의 과도한 경쟁과 이미 사회적으로 통제 불가능
한 상태에 이른 자본 축적에 돌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공
황을 극복하려는 전방위적 국가의 노력에 의해 가리워졌다. 사실 자본의 순환에 따
른 일반적이고 개별 국가적인 위기가 현실화되면 국가는 자국내에서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찾고자
堅뮌?전 역사는 이를 실천하여 보여주는 가장 적절한 예가
된다. 독립 이래 일관되게 유지된 ‘위대한 미국 건설’이라는 신념은 ‘개척’이
라는 미명 하에 자행된 토착민들의 영토 침탈 행위마저 당연시하게 만드는 강력한
국가 이데올로기였다. 대공황의 경우에도 1920년대를 지배했던 고립주의적, 보수
적인 분위기는 대중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국가에 신의를 보내고 기대하도록 하는
심리 상태를 가져왔다. 행정부가 변명을 늘어놓기 이전에 대중들은 이미 체제 보호
의 차원에서 국가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
황이라는 파국을 맞이하여서도 미국민들은 이미 내면화되어 있는 이데
올로기에 대해 회의를 갖기보다는 다소 불만이 있더라도 국가의 정책에 보조를 맞
추는 것을 미덕으로 받아들였다. 정책과 일반 대중의 반응 모두가 ‘미국의 이상’
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요구를 거역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단지 개별적
인 이데올로기들이 상호 모순을 빚으면서 토대의 구조를 유지해 가는 현상이 이 시
기에도 결정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기업의 자유
로운 경쟁이 지양될 수 있고 또한 국가 기구의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을 루
즈벨트 행정부가 보여준 것이다. 루즈벨트는 자신의 취임 연설을 통해 금융자본의
비대를 체제 내적 모순이 아닌 개별 자본가들의 잘못에 따른 현상으로 축소시키면
서, 다시 한번 미국의 국민들이 이상을 갖기를 희망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제 ‘재
건’이라는 추상적 이데올로기가
다시 국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자본가들이 꺼려한 사업
들을 안정적으로 지원하고 자본과 결탁 관계를 맺으며 자본의 단기 순환을 위한 기
업간 과도한 경쟁을 무마시킨 루즈벨트의 정책은 공황의 국면을 오히려 ?
체제 강화의 방편으로 가져간 좋은 본보기가 된다.
불황에 허덕이던 미국인들에게 뉴올리언즈 스타일의 즉흥연주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듯 보였다. 이 시기 실제로 많은 재즈 연주인들이 상업 밴드에 가입하거나
방송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흑인보다는 백인 연주자들이 방송국 등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이제 백인들이 흑인문화의 심장부에 들어설 순간이 다가왔으며,
흑인 연주자들은 전업을 하거나 유럽으로 건너가야 했다. 루이 암스트롱이 1932년
에, 듀크 엘링턴(D. Ellington)9)이 그 다음해에 유럽으로 건너간 것도 이러?
한 상황에서 도피하기 위해서였다. 불황기에 이루어진 변화로 인해 재즈는 이제
흑인의 애사를 노래한 음악에서 연방 정부의 정책에 맞추어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담는 음악으로 변할 여지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1930년대에 불황과 그 타개
노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현실화되고 만다. 아프리카계 음악이 자본주의적
모순으로 인해 그 특수성을 잃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운명을 맞이한 것이
다.
2) 스윙: 무력감의 방어 기제
도덕과 윤리적 타락의 상징으로 간주되던 1920년대의 재즈는 1930년대에 들면서
공황기
려는 국가적 노력에 걸맞는 밝고 가벼운 장르로 탈바꿈하게 된다.
불황 탈출이라는 전방위적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장르의 형식과 내용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음악적 수준이 상향 조정되면서 재즈는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
어 더 이상 흑인 대중들의 억압적 생활이나 억눌린 감정을 담기를 거부하였다. 대
신 공황의 탈출, 국가를 중심으로 한 ‘국민 화합’의 유쾌한 음악으로 변모해 갔
다.
바로 이것이 스윙(swing)이며, 스윙은 철저하게 백인화한 재즈를 의미했다. 그 이
전 클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재즈의 전통은 점차 고
?장르로 바뀌어 갔
는데, 이는 단순히 백인 중상층 이상이 이 음악을 선호하게 되었음만을 뜻하는 것
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재즈라는 음악적 형식의 체제 내화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
다. 분명 스윙은 재즈사에 있어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양식이다. 그것은 스윙
이 글렌 밀러, 토미 도오시, 아티 쇼, 그리고 베니 굿맨 등이 주도한 백인들의 재
즈 음악이라는 점에 있다. 스윙은 ‘빅 밴드 재즈’라고도 불리기도 했는데, 즉흥
연주의 개념이 점차 소멸되면서 밴드의 리더이자 편곡자들에 의해 조직화되고 계산
된 재즈 연주가 이루어?
퓜鎌磯? 흑인들의 음악적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백인 뮤지션들의 열망은 이렇듯 재즈 역사의 기저에 흐르는 ‘흑인적 정신’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사운드를 창출해 갔다. 스타일뿐만 아니라 공간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즉, 이전의 무허가 술집이나 사창가 등지의 음습한 공간
에서 성행하던 재즈가 이제 호텔이나 고급 사교장에서 백인 상류계급의 춤을 위한
밝고 달콤한 분위기의 배경음악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아울러 이전 시대의 재즈가 주로 기악곡의 형태로 존재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1930
년대는 밴드 싱어의
로 이어졌다. 빌리 할리데이(B. Holliday), 엘라 핏제랄
드(E. Fitzerald),10) 빙 크로스비(B. Crosby), 그리고 훗날 ‘마이 웨이(My Way)?
??히트시켜 스탠더드 팝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된 프랭크 시나트라(F. Sinatra)
등이 모두 당시의 유명한 빅 밴드 싱어였다. 1920년대 초 ‘whispering’이 백만
장 이상 팔린 후 전미 제일의 스위트 밴드 자리를 차지한 폴 화이트맨 악단은 전
속 남성 코러스 트리오인 ‘리듬 보이즈’를 휘하에 두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솔
로 가수로 새롭게 데뷔한 사람이 바로 금세기 최고의 가수라 불리운 빙 ?
澍?
다. 크로스비는 1931년 CBS방송을 통해 솔로 가수로 첫출발을 했고, 매력적인 바리
톤 보이스로 대중들에게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CBS방송은 이를 계기로 《빙크로스
비 쇼》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방송하여 라디오 프로그램 청취율 기록을 경신하기
도 하였다. 한편 토미 도오시악단에는 프랭크 시나트라가 전속 싱어로 활동하였는
데, 오히려 리더인 토미 도오시보다 높은 인기를 얻었다.
1930년대 대공황기의 어둡고 암울한 상황 하에서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지닌 스윙
음악이 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
. 많은 도시
대중들이 일상화된 경제적 고통을 잊기 위해 스윙을 찾았으며, 이 시기처럼 재즈
가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적도 없었다. 듀크 엘링턴과 카운트 베이시와 같은 흑인
재즈 연주자들이 면면히 재즈 본질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백인 빅 밴드가
당시 새로운 형식의 재즈인 스윙을 이끌고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스윙은 음
악적 양식의 차원을 넘어서 일종의 사회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즉, 라디오
와 레코드, 영화의 비약적인 보급과 더불어 1930년대 중반 이후의 미합중국을 상징
하는 표상이 되었다. 특히 재즈?
?통하여 지대한 공헌을 했던 레코드산업은
스윙의 폭발적인 대중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당시에는 저렴한 가격의 레코드를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된 ‘데카레코드’가 이후
설립된 ‘컬럼비아’ 및 ‘빅터’와 더불어 이른바 3대 레이블로 자리잡으면서 대
중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재즈 레코드는 1923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졌
다. 그때까지만 해도 레코드는 모두 한쪽 면에 3분 정도밖에 수록되지 않는 25cm
SP(standard playing) 판이었다. 결국 곡이나 연주가 표준시간인 3분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지고 녹음되었던 것?
러나 재즈의 발전과 더불어 감상음악이란
요소가 증가되면서 이러한 시간적 제약은 커다란 족쇄가 되었다. 그리하여 한 편
에서 ‘한곡, 3분’이라는 족쇄를 푸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재즈 레코드사에 큰 족
적을 남긴 듀크 엘링턴은 1931년에 ‘크리올 랩소디’라는 곡을 30cm SP로 양면 재
생을 시도하였고, 32년 2월에는 ‘무드 인디고’ 외 6곡을 한 면에 3곡씩 메들리로
30cm LP(long playing)로 녹음하였다. ‘무드 인디고’판은 연주시간 11분 28초 수
록으로 사상 최초의 33 1/3회전 LP로 기록되고, 이러한 새로운 레코딩 기술은 염가
湄?보급과 함께 스윙의 대중화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같은 해인 1934년도에
는 세계 최초의 재즈 전문 잡지인 《다운 비트》(Down Beat)11)가 창간되기도 했다
.
이해하기 쉽고 춤추기 쉬운 스타일의 스윙이 1930년대에 자리를 잡게 된 배후에는
이전까지 패배를 모르고 숨가쁘게 성공을 향해 달려온 미국민들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준 공황이 자리잡고 있었다. 공황은 미국민들의 무의식에 굴욕과도 같은 상
실감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이처럼 집단 무의식으로까지 번져가는 무력감에 허덕이
던 미국민들에게 스윙의 달콤함과 평이함은
인 위안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일종의 집단 심리적 방어 기제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
스윙이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발전한 데는 국가 차원의 이데올로기적 개입 또한 무
시될 수 없다. 개인주의적 이상의 실현을 최고의 가치이자 덕목으로 내세웠던 미국
이 실로 400만 명에 가까운 실업자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제퍼슨
이래 유지되던 ‘연방 불간섭 원칙’의 포기였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 사업(TVA)
으로 알려진 거대 공공사업의 시행은 거대 정부의 출현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
이었다. 요컨대 새롭고 막강한 거대 정
세력이 미국인들의 삶에 첫발을 내딛
은 것이며, 당시의 대중들은 이러한 국가의 속박과 규제에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쉽게 적응시켜 나갔다. 정부는 법률과 군사 보호의 근원인 동시에 개인의 경제적
안전과 복지의 보증인으로 간주되었다. 대중들을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 안으로
포섭하는 작업이 용이하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사실 국가적 위기감에 사로잡
힌 미국민들에게 이 시대만큼 보수와 안정의 논리가 ‘신의 계시’처럼 절실하고
무게 있게 체감된 적도 없었으며,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밝고 건전한 스타일의 재
즈는 미국
의 ‘국민음악’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솔로 연주자들의 역량이
발휘되는 스타일 대신 한 명의 리더 지휘 하에 일사불란하게 연주하는 빅 밴드 스
타일은 개인 복리보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피와 땀을 모아야 한다는 국가의 메시지
와도 잘 부합하였다.
이처럼 공황이라는 매우 암울한 시기에 가장 경쾌한 스타일의 재즈가 전폭적인 인
기를 얻게 된 아이러니는 스윙이 국가와 미국민 모두에게 내면화된 이데올로기 방
어기제로 기능한 것으로 풀이될 수밖에 없다. 이제 스윙과 재즈라는 두 개의 단어
는 동의어적인 것으로 취급되기 시작했
像?존재가 된 스윙 재즈의 뿌리를
찾으려는 움직임도 활발해져, 1938년과 1939년 2회에 걸쳐 카네기 홀에서는 ‘Fro-
m Spirituals To Swing Concert’12)라는 특별한 이벤트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부산물로 태어난 ‘부기우기’라는 새로운 재즈 형식이 잠깐 동안 붐을 이루기도
했다. 마침내 1930년대가 저물면서 훗날 재즈 매니어들로부터 ‘기형적 장르’로
지탄받기도 한 백인 취향의 ‘스윙의 시대’가 퇴조하고, 이에 반동하는 혁명적인
비밥과 ‘쿨(Cool)’ 재즈의 탄생을 목도하게 된다.
3) 비밥: 재즈의 정체성 찾기
공황
?암스트롱이나 듀크 엘링턴과 같은 ‘거장’들의 유럽 은신은 재즈
계에 커다란 공백을 야기시켰다. 이러한 무주공산의 자리를 백인 빅 밴드들이 점거
하면서부터 스윙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었지만, 이는 곧 또다른 반역의 흐름
에 자리를 내주어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 반역은 찰리 파커(색소폰), 디지
길레스피(트럼펫), 그리고 피아노의 셀로니어스 몽
크13)라는 ‘3각 편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실 이들이 던진 음악적 충격은 상
당히 위력적인 것이었다. 재기 발랄한 신세대 재즈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음
악적 어
색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그 진취적 열기는 일종
의 비밀 지하운동적인 형태를 띠기까지 하였다. 그 온상은 거대 도시인 뉴욕의 ‘M-
inton? Playhouse’나 ‘Monroe? Playhouse’와 같은 클럽이었다. 이러한 공간을
통해 기존의 여러 음악적 법칙들이 그 타당성 여부를 검증받았으며, 많은 경우 새
로운 법칙으로 대체되어 갔다. 그리고 이러한 실험과 탐색의 결과 스윙 시대의 감
미로운 선율을 대신하여 기본음 조직이 새로운 양식을 구축해 갔으며, 근본적으로
전혀 새로운 음악이 탄생했다.
바로 이러한 음악을 사람
비밥(Bebob)’ 또는 ‘리밥(Rebob)’이라고 이름
붙였다. ‘비밥’이란 용어는 그 스타일 특유의 톡톡 튀는 듯한 느낌을 의성어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혹은 디지 길레스피가 ‘Bebob’이라는 곡을 썼는데, 그 곡
명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새로운 음악은 기본적으로 캄보
스타일로 연주되었다. 사실 이전의 스윙 연주 양식, 즉 빅 밴드 스타일에서는 미
리 정해진 악보를 사용함으로써 솔로 연주를 위한 시간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
로 인해 솔로 주자와 반주자 사이의 자연스러운 음악적 상호작용 또한 크게 억?
는 바, 이에 불만을 품은 연주자들에게 캄보 밴드 스타일은 자신의 음악적 테크
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엄격히 말하자면 재즈가 지닌 중
요한 본질 중 하나인 즉흥연주가 다시 부활·개발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비밥
의 선구자들은 오리지널 작품의 코드 진행을 기저로 하면서도 제각기 새로운 해석
을 시도했으며, 이는 스윙에 익숙한 대중들을 경악시키기 충분했다. 그것은 한마디
로 재즈에 있어 혁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이 혁명의 보다 큰 의미는 비밥의 등장이 뉴올리언즈 재즈를 탄생시킨 이들과 전
른 경력과 모습의 흑인 연주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스윙은 단순히 새로운 음악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산업이었고 수익
성 높은 사업이었다. 그로 인해 1930년대 흑인 연주자들의 수입은 백인 연주자들의
수입의 절반 수준에도 못미쳤다. 흑백 혼합 밴드의 출현으로 인해 이러한 문제가
다소 완화되긴 했지만, 신분상의 차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예컨대 로이 앨드리
지(R. Aldridge)나 빌리 할리데이와 같은 재즈계의 거물조차 백인들과 같은 식당,
같은 숙소를 이용할 수 없었다. 이러한 차별에 대
습?중심으로 한 흑인사회
내부의 정치적 자각과 분노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져 갔으며, 이를 계기로 자신들의
뿌리인 아프리카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다. 이른바 흑인의 정체성 찾
기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시기를 대표한 불세출의 디바 빌리 할리데이도 1939
년초 밴드 싱어에서 독립하여 솔로 가수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솔로 가수로서
새로운 레퍼토리가 필요하게 된 그녀는 ‘Strange Fruits’라는 곡을 취입하게 된
다. 재즈계 불후의 명곡으로 알려지게 될 이 곡은 당시에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
으며, 그녀를 일?
?자리에 올려 놓았다.14)
요컨대 대공황과 더불어 시작된 제 2 차 세계대전은 지배층에 대한 저항과 아프리
카계 빈민을 포함한 하층민의 정치 의식을 크게 고무시켜 준 결과를 낳았으며, 비
밥은 바로 이러한 시대 정신의 산물이었다. 이는 스타일을 통해서도 자연스럽게 표
출되었다. 특히 비밥의 자기 진영 구성 방식은 철저하게 백인 타자(the Other)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동질성과 연대감을 위해 일정한
자기 진영 표식이 존재하였는데, 독특한 옷 차림새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대표
적인 예가 흔히 비
쪽 날개라고 불리는 디지 길레스피(D. Gillespi)였다. 그
는 염소 모양의 수염, 베레모 그리고 특이하게도 45?위를 향해 굽은 트럼펫을 소
유한 그야말로 재즈계의 기인이었다. 그렇지만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를 양날
개로 삼아 발전하기 시작한 비밥이 가져다 준 최대의 선물은 연주가들의 역량을 최
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한 즉흥연주 양식이었다. 이전 시대의 빅 밴드는 연주자의
입장에서 보면 솔로 연주의 기회를 최대한으로 박탈당하는 양식이었고 획일적 포
디즘(Fordism)시대의 표상이었다. 이와 비교해 볼 때 비밥은 인간성 상
奴餠?
대한 반발이었으며, 대중음악계 일종의 모더니즘적 징후였다. 1940년대 이후의 재
즈를 흔히 ‘모던재즈’라고 부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비밥 뮤지션들의 즉흥 연주는 대개 8분음표나 16분음표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멜
로디 라인의 흐름은 전혀 매끄럽지 않았다. 음의 구성이 돌연 변화할 때에는 상당
한 인터벌이 생기는 때도 종종 있었다. 이 멜로디 라인에 따르는 리듬은 그 때까지
유럽이나 미국의 어떠한 음악에서도 찾지보지 못할 정도로 많은 싱코페이션을 사용
했으며, 템포 또한 빠르고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
맙㈐羚駭? 이와
같은 비밥은 재즈 즉흥곡의 새 장을 여는 해방의 움직임이었으며, 재즈계 내부의
이러한 변화는 훨씬 이전에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에 비견될 만큼 엄청난 사건이었
다. 비밥의 혁명적 열풍은 제 2 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그 후 고착화된 동·서 냉전
의 상황에서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스윙 재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들에게 비밥의 형식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난해함 그 자체였다. 심지어 1940
년대까지도 스윙 스타일을 고수했던 연주자들 중 상당수는 비밥에 대해 심한 모욕
감을 느낄 정도라고 불만?
超竪?했다. 예컨대 토미 도오시는 《다운비트》?
熾【?“비밥은 재즈의 역사를 20년간 퇴보시켰다”라고 했다. 흑인 연주자인 루이
암스트롱조차 “아무런 뜻도 없는 어려운 음의 나열에 불과 … 기억할 만한 멜로디
도 없고 춤에 어울리는 비트도 없다”라고 혹평을 가했다.
‘스윙은 춤출 수 있으나 비밥은 춤출 수 없다’라는 사실은 비밥이 대중적 인기
도에 있어서도 크게 떨어지게 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스윙의 경우에는 듣기
편했고 따라서 춤추기에도 매우 쉬웠다. 재연이 가능하고 악보에 쓰여진 편곡에
충실한 연주는 일?
감상자에게 별 부담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스윙 감
상자는 방송이나 레코드에서 들은 적 있는 연주를 라이브에서도 그대로 들을 수 있
다. 그러나 비밥과 같이 매회 다르게 연주되는 음악은 대중들에게 상당히 난해한
것이었다. 그 결과 비밥의 대중적 매력은 엷어져 갔다. 비밥이 대중적 인기가 없
음을 설명할 수 있는 또다른 이유로 가수의 부족을 들 수 있다. 예전부터 가수는
악기 주자보다 인기가 있었으며, 더욱이 서정성이 강한 것을 선호하는 대중들에게
가수의 존재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비밥시대에도 빌리 엑스타?
xt-
ein)과 사라 본(S. Vaughan)과 같은 훌륭한 가수가 있었으나, 스윙시대에 비하면
그 수는 훨씬 적었다. 결국 재즈는 모던 재즈 시대에 오히려 그 인기가 퇴락하며,
1970년대 이후 재즈록이나 퓨젼으로 새로운 팬을 얻을 때까지 인기를 되찾지 못하
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적 흐름에 편승하지 않았던 신세대 재즈 혁명가들은 스트
라빈스키, 쇤베르크, 피카소, 칸딘스키 등의 현대 음악과 미술이 갖는 중요성을 깨
닫고 있었으며, 흑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 독특한 매력을 가진 음악에도 똑같은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믿었다.
등장은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좌절과 비관
에 빠진 유럽과 미국의 지식인, 예술가들에게 세상을 파멸로 몰아간 기존의 가치관
을 거부하는 ‘아웃사이더’로서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연주자마다 다른 개성
으로 변덕스러움과 순간적인 감흥을 들려주는 비밥이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
을 목격한 이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사조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한편으
로 이 시기에는 흑·백 문제가 거듭하면서 흑인들이 도시에서 끊임없이 평등권을
얻고자 노력했는데, 이에 대한 ‘신경질적인 기대감’이 비밥과 같은 음악 형식으
層?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재즈의 발달과 함께 성장한 전후 세대의 흔들리
는 도덕관, 인종차별 철폐에 대한 사회적 요구, 순간적 즐거움의 추구, 이 모든 것
들이 그들로 하여금 술과 약물, 비밥에 빠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기존의
음악을 비판하는 컬트(cult)적 의미를 잃지 않았던 비밥은 이후 참신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비밥처럼 흔들어대지 않고 대중을 좀더 부드럽게 감싸주었던 쿨 재
즈와 미국의 서부 해안에서 시작된 ‘하드 밥’15)으로 이어지게 된다.
5. 소결: 재즈를 통해 본 미국사
미국 남부의 뉴올리언
세기 말에 시작된 재즈가 겪은 우여곡절은 음악 내
적인 논리로써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 그 설명은 1920년대의 경제적 부에서 1940
년대 냉전상황에 이르는 미국사회의 전반적 맥락, 그리고 대중문화라는 보다 거시
적인 지형도내 재즈의 위상을 살펴볼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러한 ‘급진적 맥락주
의(radical contextualism)의 자세는 단순히 재즈 연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며,
앞서 설명된 라디오와 영화, 광고 등 여러 다양한 문화현상을 연구함에 있어서도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요컨대 문화적 텍스트와 컨텍스트간 상호 작용
어떠한 문화연구에 있어서도 간과될 수 없다.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이분법적 구분
자체가 애초에 무리라는 주장도 상당히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재즈를 보면 미국사
회를 알 수 있고, 거꾸로 미국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즈에 대한 연구
가 필수적으로 따라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선 재즈가 남부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실은 미국내 남부와 북부의 지역간 불균등
발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 시작된 재즈의 본격적 확
산은 미국 산업의 변화와 맞닿아 있으며, 북부 공업도시에로의 아프리카
森?
의 집단 이주에 따른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흑인과 백인 집단간 인종적, 문화적
교류가 가능해졌고, 재즈의 형식에도 상당한 변화가 나타났다. 한편 흑인 문화적
인 특성이 사라지고 재즈가 백인 문화자본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 것은 대공황을
맞아 국가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친 시기와 일치한다. 국가 이데올로기는 문화산
업과 맞물려 백인 중산층 취향 중심의 재즈를 양산하게 되었으며, 스윙은 그 전형
적 예가 된다. 이후 비밥 재즈라는 형식을 통해 이처럼 변형된 재즈 정신을 복구하
고자 저항의 움직임이 따랐다. 하지만 비?
?대중화되고 변형된 스윙 중심의
재즈를 전복시킬 수는 없었다. 재즈는 이제 더 이상 아프리카계 흑인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문화산업은 타 음악과의 접합을 통해 혼성재즈 등 전혀 새로운 음악 장
르들을 내놓았다. 이상의 변화상를 통해 20세기 초반 자본의 과잉축적과 위기라는
당대의 경제적 상황, 공황, 그리고 이에 개입되는 이데올로기의 정체들을 쉽게 엿
볼 수 있다. 모든 문화적 현상을 토대의 단순 반영물로 인식하기는 어렵겠지만, 경
제 상황이 장르의 변화를 초래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쉽게 부인할 수
없다.
이후 재즈는 주변부 문화에서 주류 문화로 그 위치가 뒤바뀐다. 재즈의
체제 내화(incorporation) 현상이 일어나게 됨을 뜻하며, 나아가 재즈는 ‘공황극
복’과 같은 국가 이데올로기의 형성에 부수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 역할
수행은 재즈 형식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재즈가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커졌다. 이는 한 문화·예술의 장기적인 발전이 상업성과 밀접하
게 맞물려 있다는 전거이기도 하거니와, 주류문화가 주변부 문화를 흡수하는 과정
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심화 과정에서
화적 성격을 그대로 유
지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대중문화화 할 때는 그 성격
이 크게 변질될 수밖에 없다. 민속문화와 대중문화는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일종의
경쟁적 관계를 맺고 있는 바,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는 후자가 승리하게 되는 결과
를 보게 된다. 특히 문화산업을 통해 대중문화는 편재성과 반복성 등의 특성으로
인해 더욱 힘을 얻게 되며, 같은 지배블럭내 국가 이데올로기와 국가 정책의 도움
을 받음으로써 이 과정은 더욱 쉽게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1920년대 이후의 미
국내 재즈의 변화를 ?
?수 있었던 결론이다.
1920~1930년대는 기술 혁신에 따른 산업화와 도시화를 통해 미국이 이전의 생산
중심에서 소비 중심사회으로 급격히 전환한 시대로 평가된다. 자동차를 비롯한 새
로운 상품의 등장과 라디오와 같은 매스미디어의 출현은 가정과 이웃, 그리고 작업
장으로 이어지던 과거의 제한된 생활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물질적 풍족함뿐만 아니라 대중이 대상 세계에 대해 갖게 될 특정
한 인식 태도, 감성과 관련된 메타포까지도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즉, 19
20년대 이후의 산?
?통해 이루어진 기술 혁신은 그 자체가 보편적 목적이
되었고 일반적 정서로 자리잡게 되었다. 기술 혁신을 통해 가능해진 대량생산에
걸맞는 대량소비 촉진을 위해 기업들은 다투어 매스미디어와 광고를 통해 금욕주
의에 기반한 기존의 경제윤리를 급속도로 해체시켜 나갔다. 그 대신에 “지금 상품
을 구입하고 돈은 나중에 지불하면서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살아가십시오(buy now,
pay later, live for the moment)”라는 새로운 소비 윤리를 통해 자본주의사회에
걸맞는 적극적 소비 주체를 구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주체 형성의 필
자본주의의 ‘재생산’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자본주
의가 유지·발전되기 위해서는 물질적 생산력의 증대뿐만 아니라 노동력의 재생산
을 위한 안정적 메커니즘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서는 임금과
같은 물질적 조건을 보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산 과정의 복합적 체계내에서 이용
하기 적합하도록 대중을 훈련시키는 문제가 중요하게 제기된다. 이는 노동력의 재
생산이 바깥, 다시 말해 단위 작업장을 벗어나 대중의 일상적 시·공간에서도 이루
어지게 됨을 의미한다. 노동력이 노동현장 바깥에서 재생산되는 방식에 대?
앞의 논의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예컨대 광고를 통한 소비 주체 형성을 논의
할 수 있고, 라디오에서는 기존 시·공간의 개념을 뛰어넘어 하나 되는 소비 공간
조장이란 점에 대해 논할 수 있었다. 헐리우드 영화 또한 다양한 스펙타클과 스타
의 제공을 통해 ‘욕망하는 기계(desiring machine)’인 주체를 만들고 있었다. 여
기서는 대중문화의 각 영역이 이처럼 총체적 방식으로 자본주의적 주체 형성에 이
바지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스포츠 분야는 과연 어떠한 역할을 맡았는지를 살펴보
고자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1920~1930년대
스포츠가 노동 바깥에서 노동할
수 있는 건강한 육체를 만드는 데 이바지하는 과정을 상세히 그려볼 것이다.
작업장을 벗어난 시·공간의 통제, 주체의 형성은 곧 ‘일상(everyday life)’에
대한 문제설정을 환기시킨다. 여기서 일상이란 작업장을 벗어난 노동자가 노동력
의 가치를 이전 수준으로 보존하고 필요시 노동력을 회복하기 위해 취하게 되는 휴
식시간(여가), 생활을 의미한다. 하루의 노동을 끝낸 노동자가 참여해 놀고 먹고
소비하고 쉬는 모든 활동이 일상에 해당되는 것이다. 1920년대에 이룩된 ‘포디즘
’이라는 자본주의
방식은 바로 이러한 일상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필요로
했다. 정확한 계산에 의한 분업과 작업 한계의 설정, 그리고 노동시간 규칙 등에
기초한 포디즘 체제는 합리성에 기반을 둔 노동 현장이 노동 바깥에서도 지속되도
록 일상 영역에 끊임없이 침투했다. 높은 임금과 많아진 여가시간 속에서도 대중들
이 노동과 동떨어진 습관을 기를 수 없도록 훈련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920
년대 스포츠의 발흥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이 시기는 미국 역
사에서 스포츠의 ‘황금시기’로 불리워진다. 그만큼 프로 스포츠 관람?
폭
발적으로 증가했고, 아울러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인해 생활스포츠의 확대가 가능해
졌음을 가리킨다.
되풀이하건대, 스포츠와 관련하여 1920~1930년대는 미국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
다. 도시의 발달, 생활수준의 향상, 그리고 여가시간의 확대 등은 스포츠가 급속히
확장되는 데 우호적인 토양을 이루었다. 우선 대규모 인구의 도시 유입과 생활수준
의 향상은 도시 대중을 중심으로 스포츠를 상품화시킬 수 있게끔 함으로써 프로스
포츠 활성화의 조건이 되었다. 이와 함께 여가 시간의 확대는 대중이 직접 생활스
포츠에 참여할 수 있
?조건을 창출하였다. 이제 ‘건강’이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소수의 특권층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대중들에게 해당되는 일종의
레크리에이션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노동자 계급도 노동시간의 단축과 고임금이라
는 조건의 향상으로 인해 여가 생활에 보다 많은 시간과 돈을 지출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스포츠가 여가 활동의 대폭적인 증대로 말미암아 놀이와 게임, 여타의
체육활동을 포괄하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의미를 띠게 되는 한편으로, 스포츠는 그
내용을 통해 사회적 효과를 자아내는 ‘포디즘적 기계’로 이용되기도 했
컨
대 스포츠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여러 가지 가치나 규범을 규범화, 육화하
도록 하는 일종의 ‘규범 훈련기계’로 활용된 것이다.
1920~1930년대 스포츠는 사회의 합리화, 제도화 및 세속화 과정에서 이와 동일한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유의미한 사회제도로 자리잡게 되었다. 우선 사회제도로
서 당시의 스포츠는 사회내 독립된 영역으로서 대중의 물리적 공간을 크게 재배열
하였다는 점에 착안할 필요가 있다. 스포츠 관람과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대중들은
새로운 공간과 접할 수 있었고, 그 공간내에서 일상을 재조정·조절
업을 하
게 되었다. 그리고 일상적 활동과 공간이 이처럼 재조직됨에 따라서 새로운 주체가
구성되어 갔다. 이는 바로 당시에 급성장한 자본주의가 요구한 주체라는 점에서 스
포츠와 자본주의 발달 사이의 관계에 대해 탐색해볼 필요성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또한 대중매체가 맡은 역할도 빠뜨릴 수 없는데, 이는 대중매체가 스포츠의 상품화
과정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는 혐의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스포츠의 발달과 그 상
품화가 갖는 의미, 그리고 당시에 급진전된 스포츠가 이후 미국 스포츠 문화 및 대
중문화 전반에 남긴 영향 등에 ?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번 장은 바로
이러한 주제들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1. 자본주의의 발전과 스포츠
1) 스포츠와 자본주의
미국 역사에서 스포츠는 도대체 어떠한 의미와 비중을 갖고 있는가? 이를 살펴보
기 위해서는 20세기에 들면서 스포츠가 미국사회에서 점하게 된 독특한 위치를 우
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복구 과정에 이
루어진 변화상을 면밀하게 짚어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 시기의 가장 두드러
진 특징은 생산영역에서 새로운 자본주의적 방식이 도입?
? 이른바
‘포디즘’으로 일컫는 생산방식의 상징적 개막 시점은 1914년이었다. 이 때부터
헨리 포드(H. Ford)는 ‘하루 5달러, 8시간 노동’이라는 보상체제를 마련하여 자
동화된 자동차 조립 라인에 배치된 노동자들을 본격적인 자본주의 체계내로 흡수해
갔다. 그리고 경제 영역에 해당되는 확정성과 보편주의, 총체화, 기능적 관리, 서
사, 기술적, 과학적 합리성 등과 같은 것들이 일상생활 속에서도 생활윤리 내지 심
미적 기준으로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당시의 노동 현장이나 경제
상황을 설명하는 포디즘은 단순?
영역을 설명하는 용어라기보다는 일종의
‘총체화된 생활방식(a totalized way of everyday life)’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
다.1) 즉, 물질적인 것들이 문화화된 모든 통틀어서 포디즘이란 명칭을 붙일 수 있
겠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스포츠는 여타 어떤 영역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 영
역을 구축하게 되었다. 단순히 이러저러한 경기를 분류하는 것에서는 그 의미가 올
바로 파악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요소로 ‘중층결정’된 영역으로 터잡게 된 것이
다. 1920년대 미국이 자본주의사회로
본격 돌입하면서 스포츠는 단순한 운?
차원을 훨씬 넘어서 사회·정치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스포츠는 문화인 동시에 이데올로기로서 그 독자적 위치를 확
보해 갔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스포츠가 자본주의 체제내에서 그 사회적
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문화적 형태이자 이데올로기적 형식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
다. 이는 스포츠 속에서 의미 생산과 재생산의 계기를 명기하려는 시도를 찾아냄으
로써 보다 명료해진다. 제도적으로 확립된 스포츠의 ‘지배적 표상(representation
)’ 안에 구체화된, 문화적으로 특정한 압력과 한계는 전체 대중과 그들의 관계에
매우 ?
㎶蔥纛막館?보편적 경험과 상식의 범위를 규정하고자 했다.
스포츠는 본질적으로 불확정성이 매우 강한 일면이 있다. 결과를 예상하기 어렵다
는 뜻이며, 바로 이 불확실성의 요소가 빚어내는 고도의 흥분과 긴장감을 각종 경
기가 직·간접적으로 대중들에게 전달해준다. 대중들도 이를 통해 잠시나마 일상적
삶으로부터의 해방감과 그 굴레로부터 탈출하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내 여타 문화적 기제와 마찬가지로 스포츠는 이러한 특성을 통해 갈등보다는
사회통합의 논리로 작용한다. 스포츠는 우선 대중들에게 사회적 ?
가치를 심
어줌으로써 체제 유지에 기여한다. 즉, 생산영역에 헌신할 수 있도록 성취 동기를
부여하며, 운동경기라는 대체물을 통해 에너지의 분출구를 마련하고 긴장을 해소
시킨다. 격투기와 같은 운동경기를 통해 폭력을 일상화시켜 줌으로써 국가권력에
의한 강제를 은폐하는 식이다. 이와 함께 스포츠는 국력 과시를 통해 대중을 동원
하고 과도한 민족주의를 조장함으로써 사회적 정체성(identity)을 만드는 데,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대중적 연대감과 통일감을 조성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적정한
룰을 지닌 스포츠는 근대국가의 ?
수 있다. 근대국가의 탄생과 함께 정체성
의 한계를 그어주고 그 지배를 용이하게 해주는 제도로 존재해 온 셈이다.
2) 스포츠와 권력
스포츠는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그 성격이 점차 변화되어 갔다. 특히 문화산업
의 범주에 포함되면서 자본의 이익과 철저히 결부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스포츠
에 종사하는 직업선수, 운동 클럽, 여가산업, 스포츠 제조업 등이 모두 문화산업의
중요 부분을 구성했다. 자본가계급에 의해 주관된 문화산업은 노동계급의 잠재적이
고 억압된 본능에 분출구를 마련해 주었으며, 이는 곧 후자의 비판적 계
진정시키는 작용을 했다.2) 즉, 자본주의는 스포츠와 같은 여가 형태를 재생산함
으로써 대중들이 ‘일차원적 사고와 행위’ 유형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포츠는 엄연히 국가체계의 공식적 일부였고, 알
튀세르가 지적한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ideological state apparatus)와도 맥
을 같이 했다. 이 논지의 핵심은 국가를 생산관계의 상부구조적 반영으로 보는 전
통 맑스주의적 통념을 거부한 데 있다. 이른바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the rela-
tive autonomy of the state) 개념은 비?
씜脾?막關?계급적 이해관계와
물질적 힘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문화적 실천 유형으로서 스포츠와 하부구조와
의 중충적 결정성을 제시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요컨대 자본주의에서 스포츠는
국가의 일부분으로서 전체 사회적 재생산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스포츠는 잠재적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장3)으로도 기능한다. 대중들은 스포
츠를 즐김으로써 일상생활의 강박감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으며, 이를 통
해 얻게 되는 극적인 감정은 단순히 카타르시스나 개인적 나르시시즘으로 치부
는 너무도 복잡한 문화적 내용들을 담고 있다. 문화적 형태로서 스포츠는 헤게모
니의 수준에서 볼 때 주도적 혹은 지배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상황에 따
라서 혹은 참여하는 행위 주체의 성격에 따라서는 능동적으로, 대안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심지어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의 광적인 축구 팬들이 보여주는 행
태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반사회적이고 파괴적인 방향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
다. 여타 문화적 실천과 마찬가지로 스포츠는 그 성격이 완전히 결정된 것이 아닌,
꾸준한 ‘구조화(structuration)’의 과정에
聆습?가리킨다. 스포츠를 자본
주의적 상품으로, 혹은 특정계급의 지배 이데올로기적 산물로만 해석하는 것에 대
해 지나친 단순성을 지적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스포츠의 구성적 속성
은 주어진 맥락에서 때로는 대항 헤게모니를 창출시킬 수도 있는 것이며, 바로 여
기에 스포츠가 지니는 ‘모순적 성격’의 역설이 있는 것이다.
헤게모니적 과정을 통한 스포츠 정치화의 함의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
사회적 생산과정에서 문화적 형태 내지 사회적 실천으로서 스포츠가 지닌 의미와
더불어 스포츠와 국가권력, 스포
급관계 사이의 관계를 세밀하게 조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스포츠의 사회적 성격과 가능성은 이를 둘러싼 보다 거시적 권력
관계에 의해 조건지워지기 때문이다. 스포츠의 정치성이나 자율성 여부는 지배계
급(지배집단)이 자신들의 견해와 이익을 다른 계급(집단)에 강요하기 위해 스포츠
를 이용하는 정도, 그리고 종속계급(종속집단)이 그러한 시도에 대해 저항하고 이
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수준과 관계되어 있다. 이 과정에는 직접적 지배와 저항뿐
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의 협상과 타협, 그리고 이의의 조정이 있을 수 있다. 중요
한
정 계급지배와 계급권력을 ‘상식’으로 전환시키고 정당화하며, 거꾸로
이를 와해시키는 과정에 기여하는 스포츠의 고유한 특징들을 식별해 내는 작업이다
. 이는 스포츠가 계급지배의 조건을 재생산해 내는 과정을 설명·비판하는 것을 넘
어서, 스포츠를 통해 당시 대중들이 지닌 삶과 의식, ‘감정구조’를 추적하고 스
포츠가 지닐 수 있는 변혁적 잠재력까지도 포착해 내려는 적극적인 관심을 뜻한다.
확실히 말해서 모든 문화적 현상은 상대적인 것이며, 스포츠도 사회적 존재의 주요
한 압력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권력의 성격과 행?
라 스포츠의 내용 및 형
식은 역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의 상품화 권력이든 아니면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힘이든, 혹은 노동 대중의 혁명적 힘이든, 스포츠는 바로 그러한 힘
의 결과이자 효과인 셈이며, 바로 여기에 스포츠 연구의 정치적 의미가 있다. 스포
츠에 대한 문화연구적 관심은 그것이 놀이 및 레크리에이션과 연관되어 단순히 즐
겁고 흥미로운 것으로서 대중들에게 위안을 제공하고 그들의 박탈감, 소외감을 보
상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혹은 “스포츠가 그 속에서 기회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
정받고 자신을 경?
摸?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인간의 속성들(가치 있는 성취,
위엄, 우정, 품위, 지혜, 인내, 진취적 기상, 결단, 용기, 강인함과 같은 것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흥미를 끈다”4)는 것도 지나치게 개인주의적 해석이다. 스포츠
는 바로 당대의 문화이자 대중적 삶의 일편이며, 복잡다단한 권력망(권력관계)의
한 지점이기 때문에 비로소 중요해지는 것이다.
2. 산업화, 도시화와 스포츠
1) 1920년대 이전의 미국 스포츠
미국에서 스포츠는 영국인들이 최초로 정착한 17세기 이후 여타 문화적 측면들과
밀접하게 연결된 상태에서 형성되기
광대한 영토내 나름의 경제적 위치
를 확보해 가면서 식민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과 원시성, 즉 타자(the Other)
인 미국내 토착민들과의 문화·취향적 구분이었다. 그리하여 영국에서 당시 성행하
던 경마가 버지니아를 중심으로 소풍이나 행사시에 공식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영국
식 사냥 예절도 그대로 차용되었다. 이와 함께 영국으로부터 수입된 관련 서적과
의상, 잡지들도 ‘미국 신사’의 고상함을 드러내는 중요 품목으로 등장했다. 요
컨대 스포츠가 식민지 미국사회에서 백인 식민지인들의 사회적 신분을 드러내는 문
화적 자
坪막?사용되었음을 뜻한다. 당시 저급계층(lower class)의 스포츠
활동에 대해서는 별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남부에서는 투견이나 닭싸움과 같
은 것들이 큰 인기를 끈 것으로 기록되며, 노예농장의 흑인들이 백인 주인들 앞에
서 조정이나 권투 시합을 펼쳤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이처럼 미국의 스포츠가 영국에 뿌리를 두면서 그 형식을 기본적으로 가져다 쓴
것과 비교해 볼 때 미국 스포츠의 상징으로 뿌리 내린 야구는 매우 예외적이었다.
1845년에 이미 미국은 영국과 상당히 차별화된 규칙을 마련하고 있었으며, 그 후
오?
刻?야구 관련 리그와 선수 조직체, 뉴스레터 등이 갖추어졌다. 사실
농구나 미식축구 등 타 종목도 궁극적으로 기구화되고 상업화하지만, 야구만큼 미
국인들의 심성에 깊이 그리고 일찌감치 자리잡은 스포츠도 없었다. 무수한 ‘미국
적 영웅’과 장엄한 서사문학을 양산해 낸 것도 야구가 유일하며, 마크 트웨인(M.
Twain)의 지적처럼 20세기에 들어서기 훨씬 이전에 야구는 미국을 상징하는 스포
츠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대중들의 열광과 함께 이에 대한 종교계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종교적 관심
사로부터 멀어지면서 대중들이
독점해 온 권력의 영역을 벗어나 세속적이고
비윤리적인 쾌락에 탐닉하게 된다는 것이 이들의 불만이었다. 이는 앞서 살펴본 30
년대 영화에 대한 보수적 압력 행사와 유사한 것으로, 대중문화에 대한 통제가 반
드시 자본이나 국가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내부에서도 비롯됨을 시사하는 매우 중요
한 대목이다. 결국 도덕주의적 간섭으로 인해 1920년대까지 프로 야구 경기는 일요
일에는 법적으로 열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포츠에 대한 기업가들
의 관심과 신기술의 발달, 철도를 비롯한 교통 통신망의 확대, 그리고 도시 인?
가는 야구를 급속도로 전국적 대중오락, 스펙터클(spectacle)로 자리잡게 만들었
다. 또한 남·북전쟁은 야구를 지역 스포츠가 아닌 전국적인 이벤트로 성격을 변화
시켰다. 전쟁은 남북간 생산양식의 통합 및 정치 권력의 재편을 가져왔을 뿐만 아
니라, 미국사회내 계급구조, 문화적 소비양식, 그리고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의 형
식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대사건이었다.5)
내전 종식 후 미국의 스포츠는 뉴욕과 보스톤 등 북동부를 중심으로 한 거대 도시
의 성장, 전신(telegraph)을 포함한 커뮤니케이션 및 교통망의 발달, 새로운 기술
?
스포츠용품 시장의 활성화, 그리고 우호적 국가의 지원 덕택에 급속도로
탈바꿈하게 된다. 전쟁 후 급속하게 팽창한 제조업 등 산업분야는 그 이전과 판이
하게 다르게 스포츠 문화를 상승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크게 발달한 대중적 저널리즘 또한 스포츠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거꾸로
통신사로부터 입수된 스포츠 뉴스는 신문 부수를 증가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
했다. 신문 스포츠면은 점차 스포츠 ‘영웅’을 중심으로 극화되고 유사 이벤트(ps-
eudo-event)화했으며, 일종의 대중극장으로 변모해 갔
컨대 20세기 들어 미국
을 강력한 산업사회로 이끌어 낸 인구집중식 자본의 힘이 미국 스포츠까지도 만들
어 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맥락을 배제하고 미국 스포츠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요인들과 더불어 대학교육의 발달도 미국 스포츠를 설명함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다. 미국에는 시민전쟁 이전에 이미 250여 개의 대학들이
설립되어 있었으며, 1904년까지는 약 250,000여 명이 대학에 등록해 있었다. 그리
하여 대학간, 혹은 대학내 서클간 경쟁심이 스포츠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었으며, 19세기 말에는 ‘스포츠 광기(sports craze)’라는 유행어가 등장할 정도
였다. 특히 당시 캠퍼스내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끈 미식축구는 야구와 더불어 20세
기 미 프로스포츠를 이끌어 가는 주 종목으로 자리잡게 된다. 당시 유명 대학의 시
합은 인쇄매체로부터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스포츠 뉴스에
대한 대중의 수요가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스포츠 섹션이 별도로 마련되는 등
스포츠는 당시 유행한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의 형식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독자적인 장르로 발전한 스포츠 저널?
거꾸로 대중의 스포츠 참여방
식 및 경기규칙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요컨대 스포츠와 대중매체간 자본주의
적 ‘공생관계(symbiotic relationship)’가 점차 강화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한편 전쟁 후 부르주아 계층의 독점적 지위가 크게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
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스포츠 활동 참여는 노동계급 사이에서는 제대로 자리를 잡
지 못했다. 여전히 스포츠는 특정 계급에 한정(class-specific)된 것이었고, 또한
계급적 신분을 규정하는(class-defining)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6)
사실 당시까지만
類觀隙?노동자들은 농촌지역에 거주하면서 주 60시간의 노
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만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들도 점차 프로 레슬링이나
사이클 경주와 같은 대중적 스펙터클로 유인되기 시작했다. 저렴한 교통 및 통신
의 발달, 가용 소득의 증대, 노동시간의 감소, 그리고 2세대의 주류사회 동화가 그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싸구려 인쇄매체의 발달로 인해 노동 대중들이 간접적으
로 스포츠를 접할 기회도 커졌다. 야구를 국가적 현상 혹은 소일거리(national pas-
time)로 자리잡게 한 것도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 종식까지 ?
?더불어
도시로 유입된 유동적 노동 대중들이었다.
이처럼 1900년대에 들면서 미국의 스포츠는 스포츠 관람과 스포츠 참여, 스포츠
기업,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한 스포츠 신화 등이 새롭게 형성된 당대 삶의 양식과
자연스럽게 결합되면서 전국적인 현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7) 도시의 팽창과 생활
수준의 향상, 여가시간의 확대는 스포츠의 지속적 확장을 가져온 사회적 조건으로
작용했으며, 미국식 독점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구축된 1920년대는 이러한 결합의
완성 단계라고 볼 수 있다. 미국 역사상 ‘스포츠의 황금시대(Golden Age
r-
ts)’이자 스포츠 신문의 황금기(Golden Age of Sportswriting)로 기록되는 것이
바로 1920년대이며,8) 이 시기는 전국적 소일거리가 현대화된 스포츠로 이전해 가
는 징검다리와 같은 기간이기도 했다.
2) 1920년대 스포츠의 활성화
1920년대에 일어난 기술 혁신과 이에 따른 산업화는 노동시간의 단축과 임금 향상
을 통해 미국민들의 생활수준을 전반적으로 향상시켰다. 고도의 산업화를 통한 이
러한 변화는 도시 대중들의 스포츠 관람과 참여를 가능케 했다. 아직까지도 스포츠
관련 상품과 산업은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지만
㈇?÷抉퓽?기회가
늘어나면서 자전거와 당구대, 야구장비, 낚시장비 등 다양한 스포츠 관련 상품들
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대되면서, 이에 부응하기 위해 저렴한 상품을 대량으로 공
급하기 위한 스포츠 제조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 상품 교환을 위한 이동거리가 크
게 단축되면서 도시 대중들의 입장에서도 비교적 값싸게 스포츠 상품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 도시는 이제 자연스럽게 스포츠의 중심지로 자리잡아 갔다. 가령 경마
는 뉴욕과 찰스톤, 뉴올리언즈 등지에 집중되었고, 야구는 뉴욕, 보스톤, 시카고에
집중되었다. 도시가 갖는
즉 대규모 운송시설과 생활수준이 비교적 높은 인
구의 집중, 스포츠 상품 구입 및 스포츠 클럽 구성의 용이성 등으로 인해서 스포츠
는 더욱 도시를 근거지로 하게 되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져온 사회적 변화에 힙입어 1920년대의 스포츠도 점차 상품
화되어 갔다. 또한 기존의 다소 느슨하던 체제에서 보다 조직화되고 경쟁적 형태를
갖춘 체계로 바뀌어 갔다. 그 당시 스포츠의 변화상을 묘사하는 메타포로 ‘밴드왜
건(bandwagon)’9)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스포츠의 황금시대로 불리운 1920년대
의 상황을 두 가지 측면에서 압축?
磯? 첫번째로, 아마추어와 프로 스포츠
가 엄청나게 확대된 점이다. 아마추어 부문을 살펴보면, 기존에는 야구 및 미식축
구가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한정된 규모로 3~4개 정도 운영되던 것
과 달리, 1920년대에는 25개 정도의 다양한 종목이 전국적인 청소년 스포츠 교육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었다. 아울러 일부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남학생들
에게만 제한되었던 스포츠 참여 기회가 남녀 전학생들에게 확대되었다. 한편 프로
스포츠의 경우에도 경기 관람자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당시 경마의 입장 수
입은 ?
?달러에 이르렀고, 프로 야구와 대학 미식축구가 각각 29만 달러를
기록했으며, 프로 미식축구는 11만 달러라는 입장 수입을 올렸다.
두번째로는 일반 대중들의 폭발적인 스포츠 참여를 지적할 수 있다. 이는 무엇보
다도 수입 및 여가시간의 증대라는 삶의 근본적 조건 변화에서 비롯된 효과였다.
또한 스포츠 관련 산업의 부흥도 도시 대중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각종 스포츠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냈다. 이와 함께 당시 장시간 서서 열악한 환경 속
에서 일해야 했던 공장 생산방식 및 이에 따른 질병의 증가도 간단한 운동에 ?
야 하는 강력한 이유를 제공함으로써 스포츠 확산에 한몫했다. 아무튼 노동계급
은 이제 소비의 주체로 당당히 스포츠 활동에 끼어들 수 있었다. 당시의 수치를 보
면, 미국 성인의 약 절반 이상이 매주 스포츠나 간단한 운동을 생활화하고 있던 것
으로 나타난다. 수영에는 100만 명, 골프에는 10만 명, 그리고 수상스키에도 11만
명 정도가 참여한 것으로 파악된다.
1920년대 이후 대중들이 보인 광범위한 스포츠 참여의 증거를 생활 스포츠의 확대
나 프로 스포츠의 성행, 그리고 구체적 관람객의 숫자에서만 제한시켜서는 안된다.
프로 ?
歡汰?통해 적극적으로 스포츠 스타를 만들어내고, 그들에 대한 일종
의 자기 동일시 과정을 주체적으로 수행해 간 당시 대중들의 관람태도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1920~1930년대에는 야구의 베이브 루스(B. Ruth), 권투의
잭 뎀시(J. Dempsey), 골프의 바비 존스(B. Jones)와 같은 선수들이 대단한 인기
를 얻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대중의 폭발적 관심은 스포츠가 제가치를 전달·전
파하는 정형화된 사회제도로 자리잡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사회적 가치는 대중이
추구하는 ‘이상’(Ideal)인 동시에 대상을 인식하고 의미?
하는 기준을 제
공한다. 구체적으로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가를 평가하는 사회적 기준이 되는 한편,
구체적인 행위 상황에서 작동하는 규범적 기대 속에 스스로를 반영하기도 한다. 대
중으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던 1920~1930년대의 스포츠 스타들은 바로 이러한 사회
적 가치를 함축하고 있었다.
즉, 당시의 스포츠 스타들에게는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가치, 많은 시간과 노력
을 통해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기본기의 중요성, 적극적인 정신 자세와 건전한 경쟁
심의 의미, 전체의 승리를 위해 개인의 욕심을 희생시키는 것의 미덕 등이 각인?
었다. 이러한 가치들은 결코 중립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대신 당시의 사회적
관계(특히 계급적 관계와 성의 구분), 사회적 관계에 내재한 종속 구조, 그리고 종
속의 형태로 존재하는 문화에 의한 사회통제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는 사회적 규칙 및 사회적 관계과 관련하여 불평등하게 배분된 사회적 자원에
대해 구조화된 실천으로서 스포츠가 지니게 되는 역사 과정과 정치경제적 측면을
제기하는 동시에 스포츠가 문화적 형태로서 이를 어떻게 가능케 하는지를 명확히
환기시켜 준다.10) 스포츠는 독자적인 논리에 따라
구성과 재생산의 지속적
과정, 계급분파 사이의 관계 변화, 그리고 계급 체계내 특정 직업 범주의 지위 변
화 등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스포츠가 자본주의의 사회·경제적 발전 과
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1920~1930년대 스포츠의 부상은 노동 과정을 둘러싼 자본가와 노동자 집단의
새로운 대립 국면이라는 측면에서 보다 정확하게 규명될 수 있다. 기술 혁신과 산
업구조의 변화로 비롯된 기계 작업의 지루하고 반복적인 노동 조건은 활력을 불어
넣어 줄 외부의 자극을 필요로 했다. 그리하?
?÷抉퓻?대한 노동 대중의
실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이 다방면으로 강구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스
포츠는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당시의 기업주와 노조는 노동자를 위한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 마련에 동의함으로써 스포츠의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
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기업가들은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나 건강에 대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20세기에 들어 노조운동이 증대하면서 새로운
노동자 통제 방식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가
와 노동자는 공
츠나 놀이가 후자의 건강과 생산성 향상에 크게 기여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회사 경영의 일환으로서 기업주의 지원을 받은 스포츠와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들이 1920년대부터 속속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1920년대와 30년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편화되었다. 가령 1927년에는 319개 기업들이 157개 야구장과 50
개 테니스장, 그리고 13개 골프장을 설립하였으며, 야구와 축구팀 등 같은 다양한
스포츠 프로그램을 지원했다. 또한 노동조합도 조합원들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주목하였는 바, 자동차 노조의 경우 1937?
뼁?레크리에이션 부서를 설립하
기에 이르렀다. 몇몇 노동조합들은 스포츠 시설을 설립하기 위해 대규모 토지를 매
입하기도 했다.11)
3. 프로와 생활 스포츠의 분리
1) 프로 스포츠의 발전
1922년 미 대법원은 야구가 주간 상업에 종사하지 않기 때문에 독점 방지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판결하였다. 이는 프로 스포츠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
으로, 그 이후 프로 스포츠는 상업적 오락으로서 사기업적 특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공익에 봉사한다는 명분으로 어느 정도 공기업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이중적 성격
을 부여받게
하자면 당시의 프로 스포츠는 다른 어느 사업도 갖지 못한
영업상 특권을 지니게 된 것이며, 국가로부터의 별다른 규제 없이 급성장할 수 있
는 조건을 갖추게 된 셈이었다. 사실 당시의 프로 스포츠 연맹들은 몇 개의 지역으
로 나누어 선수 입단과 계약 조건을 규제한 점에서 일종의 카르텔적 성격을 보였다
. 가령 새로운 구단은 기존 구단주들의 동의를 얻어야만 비로소 팀을 창설할 수 있
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외부의 간섭은 별로 없었고, 이에 힘입어 여러 스포츠 리
그들이 조직되었다.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 프로야?
款茶? 프
로권투, 미식축구, 프로골프, 프로아이스하키 등이 리그를 통해 경기를 펼쳐나갔으
며, 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러한 프로 스포츠들은 스포츠 산업이라는 새로운 지반을 형성하게 된다. 첫째,
스포츠 용품만을 대량으로 전문 생산한 대기업, 둘째, 선수들과 관중들이 입을 매
력 있고도 실용적인 의류를 생산하는 기업들, 셋째, 스타디움과 각종 경기장, 스키
장 등을 시공한 건축가와 건축업자, 넷째, 프로경기 때마다 10억 달러 이상을 만진
마권 영업자나 도박업자, 다섯째, 선수들의 이익이나 계약 업무
주는 변호사
와 그 종사자들, 여섯째, 수요자들에게 상품을 선전할 수 있는 시간을 팔고 돈을
받는 대중매체.
1920~1930년대를 프로 스포츠의 ‘황금시대’로 만든 이러한 지반을 따져 보면 그
자체가 매우 조직적인 산업 자체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프로 스포츠를 개별적으로
살펴보자면, 우선 프로야구는 1920년대에 이르러 일종의 국가적 스포츠로서 굳건
히 자리를 잡았다. 프로야구가 이와 같은 위치에서 당시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에 어
떠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사실 프로야구의 발전은 여
타 프로 스포?
가지로 기업 및 시장 상황의 변화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보였다. 구체적으로 1920년대의 표면적 번영과 30년대 불황의 고통, 2차 세
계대전 동안의 사회·경제적인 혼란, 1945년 이후 냉전체제 하 또 다른 번영이라는
자본주의 시장의 주기 속에서 프로야구는 그 차별적 위치를 부여받았다. 프로야구
라는 것도 대중들의 입장에서 보면 철저하게 소비적인 행위에 해당하며, 따라서 그
소비의 정도가 경제적 상황에 따라 결정적으로 조건지워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일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1920년대의 프로야구는 경기 호황이라는 ?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일
부 구단이 선수들을 금전으로 매수한 사건이 발생했는가 하면 스포츠 스타들이 만
들어지기도 했다. 당시의 언론들은 다투어 베이브 루스가 44개의 홈런을 쳤다는 대
대적 뉴스를 통해 하나의 스포츠 영웅을 만들어냈다. 이는 1919년에 발생한 ‘Bloc-
k Sox’ 스캔들로 불리워진 불공평 정책을 불식시키기 위한 구단측의 의도적 노력
의 결과이기도 했다. 아무튼 영화, 라디오 등 매스미디어를 통한 스포츠 선수의 영
웅화는 대중들을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꼼짝 못하게 붙들어 놓았는데, 바로 여기
서 스포?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중대한 효과를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12)
이데올로기는 의식이 아닌 무의식적 상태에서 대중들 사이에 존재하며, 그 존재에
대한 대중들의 상태를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이데올로기는 실제 사회내 다수의 관
계들을 자연스럽게 유지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명백히
잘못된 허위의식으로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속성과 관련
하여 1920년대의 프로야구, 그리고 베이브 루스와 같은 ‘필드의 영웅’들은 사회
적 삶의 다양한 체계들을 실제적으로 구현하는 표상의 의미?
하고 있었다.
당시 프로야구의 또다른 두드러진 특징은 커미셔너(commissioner) 형태의 조직이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곧 스포츠와 돈벌이가 결합된 양상을 보여주는 바, 19
19년 시카고 화이트 삭스와 신시네티 레즈와의 월드 시리즈 게임에서 불거진 금전
매수 사건은 바로 그 직접적인 결과였다. 이후 커미셔너를 재조직하고 부정 선수
들을 축출함으로써 프로야구는 겨우 성장을 지속시킬 수 있었고, 기록적인 경제불
황이 계속된 1930년대에도 메이저 리그는 나름의 활로를 찾고자 했다. 구단주들은
다투어 선수들의 봉급을 낮추었
瞿?구단주들은 재정난 때문에 1929년에서
1931년 사이에 팀을 매각하기도 했다. 1930년대 중반까지도 프로야구는 특별한 탈
출구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 이후 이루어진 라디오의 전국적 보급은 어느 정도
경기 침체의 손해를 상쇄시켰다. 널리 보급된 라디오를 통해 야구팬들을 경기에
주목하도록 만들었으며, 특히 여성을 고정 팬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
라 라디오 등 매체를 통해 스포츠 스타를 영웅화하고 전국민의 이상형으로 만듦으
로써 대중적 활로를 개척해 나갔다.
이처럼 프로야구가 1920~1930년대에 국민적인 스?
貫贊求?과정에는 하나의
중요한 모순이 따랐다. 야구 경기의 의미 자체가 완전히 뒤바뀌게 된 것이다. 야구
는 더 이상 참여 스포츠가 아닌 대중적 볼거리, 다시 말해 스펙터클로 변모해 갔다
. 이는 1920년대에 들어 야구가 시골에서 도시 중심으로 공간적 위치를 옮겼다는
사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2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야구는 시골에서
주로 성행하였으며, 매우 소박하고 여유로운 정서를 수반한 스포츠 활동이었다. 하
지만 프로야구의 등장과 더불어 야구는 도시화의 특색이라 할 수 있는 대규모 관중
과 열렬한 환호?
고 이윤 획득이라는 기업적 요구에 적합하도록 재구성되었
던 것이다. 야구의 이와 같은 상업적 재구성은 프로 스포츠의 자본주의적 성격의
일단을 그대로 보여주었는데, 이는 당시 호황이라는 당시의 경제적 상황과 맞물려
크게 부추겨졌다.
한편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프로농구는 하나의 조직화된 형태의 스포츠가 아
니었다. 관중과 선수들이 경기의 생동감을 함께 느끼고 일종의 집단적 일체감을 경
기장 안에서 형성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탓이었다. 비록 1925년에 리
그를 통한 농구경기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1938년
구 리그 NBL(National Ba-
sketball League)가 결성되면서 비로소 지금의 프로농구와 같은 조직적 모습이 갖
추어지게 되었다.13) ‘Rens’와 ‘Harlem Globetrotters’는 당시 막강한 전력을
갖춘 프로농구팀이었다. ‘Rens’는 1923년 로버트 더글라스(R. Douglas)에 의해
창단된 팀이었는데, 1925년과 1926년 시즌중 ‘Celtics’라는 또다른 팀과 6차례
경기를 치렀다. ‘Rens’는 1932년에도 ‘Celtics’를 격파했지만 이듬해에는 패
배하였다. 1939년에는 NBL 정규리그에 참가해 승리를 거두었으나, 1941년에는 바로
아베 사펄스테인(A
stein)이 만든 ‘Harlem Globetrotters’라는 팀에 패배
하게 된다. 이 ‘Harlem Globetrotters’팀은 초창기에는 전국 각지에 흩어진 도시
를 돌아다니면서 경기를 했으나, 후에는 하나의 통합된 리그와 지역에서 경기를 치
루었다. 이 팀의 선수들이 지니고 있던 화려한 드리블과 정확한 슛 실력은 당시의
관중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14)
프로농구의 폭발적인 인기는 프로야구와 마찬가지로 여러 스포츠 스타들을 양산해
냈다. 이러한 현상이 프로 스포츠가 지닌 산업적 논리에 따른 것은 틀림없지만, 스
포츠 스타에 대한 대중의 나르시
동일시는 스포츠를 단지 정치·경제적 영역
의 반영물로만 보는 제한된 인식을 넘어서도록 만든다. 당시 프로농구의 높은 인기
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대중들의 욕망을 규정짓고 실현시키는 사회 집단적 행위와
개인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를 살펴보는 세심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스포츠란 결국
전체적인 사회·물질적 과정의 (재)생산과 관련된 구성적인 실천이기 때문이다. 선
수들 사이의 경쟁, 선수와 관중 사이의 관계는 또한 선수와 스폰서, 그리고 계급간
·남녀간·인종 사이의 확정되지 않는 다양한 사회적 상호작용 방식을 만들어낸다.
?과정이 비인격적 규칙과 자원, 조성된 사회관계 유형의 재생산에 어떻게 통
합되는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이는 모든 실천과 해석,
제한이나 압력 등이 주어진 역사적 시점에서 어떻게 헤게모니15)적 과정으로 통합
되는가 하는 문제설정 속에서 스포츠를 분석해야 함을 뜻한다.
공식 타이틀전의 성격을 띤 프로권투 또한 당시 대중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일
으켰다. 프로권투는 지속적인 체중 관리를 통해 갖추어진 날렵하고 균형잡힌 몸매,
치열한 경기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얼굴 출혈 등 특정한 ‘신체미’를 강조한다
.
는 인간의 생리적, 심리적, 정신적 측면의 총합체로 드러나는 미로서, 이
는 운동 과정과 같은 단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 미는 인체 표
면의 형태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골격과 근육, 피부, 모발 등을 포함해서
성대와 용모, 복장, 장식물 등 유관한 일체의 것들을 포괄한다. 이는 비디오 문화
가 발달·선호되는 현대사회에서 더욱 의미있는 가치를 가지게 된다.16) 아무튼 프
로권투를 통해 육체에 대해 갖게 되는 미적 체험은 관중들로 하여금 감각적 쾌감과
만족감을 수반하는 반응을 가져오고 그들의 정서를 ?
갭? 그 체험은 감각적
으로 고양된 쾌감이나 만족감을 통해 스며든다. 그리고 여기서 미적 체험이란 권투
선수 마음속의 운동 체감을 기반으로 해서 존재하는 미의식이자, 관중의 입장에서
는 ‘본다’라는 객관적 시각을 통해 스포츠의 미로 전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권투가 당시의 다양한 스포츠 사업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복잡하지 않
으면서도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종목으로 각광을 받았다. 과거 선수나 경기 관련
자에게만 수익이 보장되던 것과 달리 프로권투는 광고료와 세금, 경기운영시설 사
용 수입 등을 포함한 하나의 거대
?변신하면서 높은 수익을 보장해 준 것
이다.17) 1910년 제퍼리와 존슨의 경기를 주관했던 텍스 리카르드(T. Rickard)는
다른 게임에서 새로운 챔피언의 모습을 발견했는데, 그가 바로 1920년대 스포츠
영웅으로 떠오른 잭 뎀시(J. Dempsey)였다. 리카르드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가졌
던 “권투가 과연 스포츠로서 타당한가?”라는 의문을 잠재울 만큼 민첩한 수완을
발휘함으로써 프로권투를 대중 스포츠로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2
6년 시카고에서 벌어진 과묵하면서도 영리한 복서 진 터니(J. Tunney)와 파괴력의
소유?
뎀시의 경기는 200만 달러라는 엄청난 수익을 올릴 만큼 대중적인 관
심을 끌었다.18) 이후 얼마간의 침체기를 겪기도 하지만, 조 루이스(J. Louis)라는
새로운 영웅이 등장하면서 프로권투는 재차 명맥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2) 생활 스포츠의 확대
1920년대에 들어 레크리에이션과 스포츠가 미국사회에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음식,
생활용품만큼이나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일부를 차지하게 된 사실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가 있다. 특히 당시에 크게 확대된 생활 스포츠는 미국인들의 여가 활용
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는데, 이는 금
缺痼?노린 스포츠 관련기업의
대규모적 참여와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노동시간의 감소와 임금의 증대, 그리고
스포츠 기술을 익힐 수 있는 학교 내지 사설 체육시설의 증대는 보다 많은 도시 대
중들이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시 미국인들이 즐겼던 생활 스포츠로
는 볼링과 골프, 승마를 비롯해서 수영이나 캠핑, 스키, 낚시, 사냥, 테니스 등 매
우 다양한 종목들이 있었다. 비록 생활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비
용을 지불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갖추어야만 했지만, 노동 대중들은 이를 통해
생산활동?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꺼이 그 비
용과 시간을 감수하였다.
사실 그 당시 프로 스포츠의 확장으로 인해 대중들은 스포츠를 단지 관람하는 소
극적 대상으로 전락시킨 경향이 있었다. 이에 대중들은 근대적 삶에 대한 보다 발
전된 인식 전환을 통해 자신들의 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 방안, 즉 생활 스포츠 프
로그램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게임이 벌어지는 주변에서는 늘 도
박이나 음주를 즐겼다는 이야기는 흔할 정도로 볼링은 당시의 대중들에게 매우 친
숙한 생활 스포츠였다. 1920년대에 이
협회가 일정 규칙을 정하여 ‘친선도
모’라는 기치를 내걸었으며, 약 30만 개의 볼링팀을 두고 있었다. 그 이전 1916년
에는 여성 볼러들의 조직인 IBC(International Bowling Congress)가 설립되기도 했
다. 밀워키에 본부를 둔 미국볼링협회는 매년 대회를 개최했는데, 1920년 이후 대
회 수는 30,000개에 육박하였다. 당시 챔피온 결정전은 다양한 도시에서 개최되었
지만, 주로 대규모 시설과 경기 운영이 가능한 도시들이 선정되었다. 40개의 레인
과 충분한 탈의실 및 대기실, 그리고 4,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중석 등이 최소
한으로
는 조건이었다는 점에서 볼링에 대한 당시의 대중적 관심을 엿볼 수
있다.
국민적인 스포츠로서 볼링은 중서부 지역과 고도로 산업화된 지역에서 특히 인기
가 있었는데, 맨하탄에만 해도 48개의 볼링장이 있었다.19) 볼링이 도시 지역에서
생활 스포츠 종목 중에서도 특별히 각광을 받은 이유는 무엇보다 볼링의 승부 방
식이 당시 대중들의 정서와 비슷하게 비교적 간소하고 소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
녀노소를 불문하고 손쉽게 그리고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종목이었으며, 소유주의
입장에서도 실내 스포츠로서 계절을 타지 않는다는
갖고 있었다. 이와 함
께 볼링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볼링 시설을 마련하는 데 다
른 스포츠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도 인기의 한 요인으로 지
적될 수 있다. 볼링장 시설이 공간의 제한을 크게 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좁은 공간
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하는 도시 환경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1920~1930년대의 산업화 및 급격히 진행된 도시화의 상황에서 노동 대중들 사이에
서 볼링은 생활 스포츠로서 쉽게 자리잡아 갔다.
미국 스포츠의 역사에 있어 골프는 특별히 상업적인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
서 성장한 종목에 해당한다. 골프장 건설에 들어가는 공간 및 투자 비용의 규모가
앞선 볼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 여타 생활 스포츠에 비해 골프가 훨씬 더 고급스럽고, 어느 정도 계급적으로 취
향이 구분지워지는 활동으로 규정된 것도 이러한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그 이후
비용이 저렴해지고 대중의 접근이 가능한 퍼블릭 골프장들이 속속 건설되면서 골
프의 대중화가 이루어지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골프는 미국사회내에서조차 일종의
부르주아적 스포츠에 ?
.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차 세계대전 이
전만 해도 미국에는 전국적으로 약 1,800여 개의 골프장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
30년대에 와서는 무려 6,000여 개로 거의 3배 이상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중 지
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이른바 퍼블릭 코스는 불과 200여 개에 불과하였고, 나머지
4,500여 개 이상의 골프장들은 대부분 개인 소유로 운영되고 있었다. 부동산 업자
들과 호텔업자 등이 골프장 사업에 투자하여 높은 수익을 올리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처럼 골프장 건설사업이 종종 부동산이나 호텔, 리조트와 같은 수익성
결
합되긴 했지만, 1920년대의 골프장 건설은 주로 독자적인 사업으로 활발하게 이루
어졌다. 스파르딩(A. G. Spalding)사는 당시 골프사업을 통해 상업적으로 성공하면
서 골프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회사로 꼽힌다. 이 회사는 1900년 해리 바르돈(H.
Vardon)이라는 영국 최고의 골프선수를 미국으로 데리고 와 시범경기를 갖도록 했
다. 시범경기의 목적은 스파르딩사가 생산한 골프공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경기는 당시 미국인들에게 골프에 관한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 1922년부터 미국골프협회 USGA(United
Golf Association)는 모든 공식 경
기에 사용될 골프공을 표준화시킬 정도로 짜임새를 갖추고 있었으며, 골프 장비와
관련된 기업들의 이러한 기술 혁신은 대중들의 골프 참여 기회를 확대시키는 효과
를 가져왔다. 1921년 USGA는 미농산부 USDA(United States Department of Agricult-
ure)와 함께 잔디 조사 사업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는데, 다양한 실험·조사를 통해
버지니아, 메릴랜드 등지를 골프장 건설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동시에 높은 수익성
을 가져올 장소로 지목하기도 했다.
스키 또한 생활 스포츠에서 없어서는 안될 정도?
1930년대 미국인들의 삶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는데, 많은 기업들이 수익을 목적으로 스키 사업에 관여하고 있
었다. 1932년 플래시드 호수(Lake Placid)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 경기에는 수많은
관중이 모여들었는데, 이는 겨울스포츠가 수익성 높은 사업이 될 수 있음을 입증
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스키장들은 대륙을 가로질러 고르게 분포하고 있었는
데, 특히 인구 밀집 지역이거나 관광지역으로 명성이 높아 수익성이 보장된 곳이라
면 어디든 스키장이 들어섰다. 인구가 크게 밀집되지 않은 북부 록키산맥의 경우에
는 멀리 수많은
?내려다 볼 수 있는 훌륭한 전망을 가졌으며, 이는 스키
타기에 최상의 조건을 제공해주었다. 한편 뉴욕의 유명 백화점들은 실내 스키장을
설치하여 사람들을 끌어모았는데, 주말에는 전문 스키 강사가 젊은 주부를 상대로
초보적인 스키 강좌를 열기도 했다. 이와 함께 많은 상점들이 스키 장비를 할인판
매했고, 철도회사나 여행사들은 다양한 스키 관련 여행상품을 만들어내어 도시 대
중들이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스키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생활 스포츠는 이처럼
당시의 소비자들뿐만 아니라 기업가들에게도 상당히 관심이 가는 분?
4. 대중매체의 발달과 스포츠의 상품화
1) 스포츠 저널리즘의 형성
프로 및 생활 스포츠에 대한 관심은 언론기업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20세
기 들어 급성장한 신문 등 인쇄매체와 라디오 등 전파매체의 입장에서 볼 때도 스
포츠는 그 자원이 풍부하면서 수익성이 높은 매력적인 상품으로 인식되었다. 스포
츠 보도에 대한 대중들의 수요가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사실 스포츠는 끊임없이
공급되는 새로운 소식인 동시에 극화된 이야기이자 영웅과 악당을 등장시킨 현대판
신화에 가까웠다. 세계 기록은 날마다 새롭게 깨?
킵퓸?갔다. 육상, 수
영, 스피드 스케이팅, 스키 활강 등 여러 스포츠 분야에서 새로운 기계·기술을 통
한 기록 측정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모든 스포츠에서 쿠베르탱이 말한 ‘빠르
게, 높게, 멀리’라는 표어는 그 순수성을 상실해 갔다. 대신에 기록 경쟁의 가속
화와 더불어 스포츠는 자유 시장경제 체제 속으로 급속도로 편입되어 갔으며, 이는
곧 물질주의적 관념과 사고가 1920~1930년대의 전반적인 스포츠 활동을 지배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스포츠는 이제 여가선용이나 체력단련이라는 단순한 성격을 떠나 개인적 부의 추
적 우월성의 확인, 국민적 동질성의 확립 등과 같은 사회집단적 준거틀에
그 목적성을 두게 된다. 스포츠가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접합되어 감을 뜻하며, 이
과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라디오와 신문을 비롯한 대중매체였다. 대중매
체는 또한 스포츠를 대중화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 이익집단들이 스포츠에
참여할 수 있는 동기를 창출하는 데 필수적인 전제조건을 형성하였다. 특히 대중
매체는 여러 기업들이 스포츠에 광고나 스폰서 등의 방식으로 관심을 갖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대중매체가 기업과 대?
胎糖?이데올로기적·
경제적으로 연결시키는 매개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뜻이다. 어떻든 1920년대에 들어
급증한 스포츠의 대중적 인기도는 일면 대중매체가 보도하는 스포츠 뉴스에 대한
관심이었고, 뒤집어 보자면 대중매체는 스포츠를 여러 방식으로 취급함으로써 광
고와 판매부수, 궁극적으로 수입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스포
츠가 갑작스럽게 시장 영역으로 빠져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포츠가 각종 매체
와의 결합을 통해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과정은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
계 속에서 제대로 이?
있는 일이다.
스포츠 보도의 급신장은 신문으로 대표되는 현대적 매체가 미국인들의 삶 구석구
석에 침투하기 시작한 바로 그 시기에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다. 매체의 발달을 스포
츠라는 요인을 떼어 놓고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세기 초부
터 1차 세계대전 전까지 스포츠 보도는 미국사회내에서 탄탄한 기반을 갖추면서 점
차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전해 갔다. 1880년대와 1890년대까지만 해도 주요 도시에
서 발행되던 신문들조차 스포츠 보도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10년대에
는 실질적으로 모든 신문들이
투의 챔피언 결정전, 경마 혹은 1903년에 창설
된 월드 시리즈와 같은 주요 경기를 다루고 있었다. 특히 1920년대는 스포츠가 오
락과 공적 생활의 주요 원천으로서 미국 문화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 시기로, 이 기
간 동안 신문들도 스포츠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 시기 일간신문의 지면에
는 스포츠란이 필수불가결한 섹션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언
론은 스포츠의 정치화, 쇼화20)와 같은 당시의 중요한 문제들을 표출시켜 공개장으
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포츠의 오락화를 오히려 보강하고 정치화된 스포츠?
瓚?지탱해 주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1920년대 신문 편집의 뚜렷한 두 가지 경향은 이러한 추세에 너무도 잘 들어맞았
다. 첫째, 당시의 편집 경향은 딱딱한 뉴스(hard news)나 정치보도를 줄이는 대신
넓은 독자층을 끌어들일 수 있는 현실도피적, 선정적 기사를 강조했다. 스포츠는
이러한 착상에 완전히 들어맞았다. 1930년대의 한 조사는 신문 독자들의 80%가 스
포츠란을 자주 읽고 있음을 보여준다. 1940년대에 발표된 발행부수에 관한 보고서
에 따르더라도, 당시 신문의 약 25%가 스포츠란을 기반으로 해서 팔리고 있었음을
알 수
) 둘째, 당시의 신문사들은 경비 절감을 위해 편집과정을 표준화·
합리화시키는 추세에 있었는데, 소수 독점시장내 이러한 경비 절감은 제작비를 거
의 바닥선까지 끌어내려 일간지의 ‘대량생산’이라 불리운 현상을 초래했다. 이
상황에서 기자들이 개별적으로 기사를 구하는 것보다 연합해서 소재를 구하는 것
이 경비가 훨씬 적게 든다는 것을 알았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확장된 통신 서비스
망으로 스포츠 저널리즘은 꽃을 피우게 된다. 스포츠 뉴스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완벽히 들어맞는 것으로, 많은 스포츠 기사들이 통신사를 통해
퓸駭? AP는
1920년대 약 12명의 풀타임 인원을 갖춘 독립된 스포츠 부서를 두고 있었으며, 스
포츠 프로모터나 조직들도 홍보를 위해 일부 경비를 기꺼이 부담하고자 했다. 특히
이는 프로야구에 있어서는 거의 일상적인 관행이었다.22)
이와 같은 스포츠 기사의 증대가 언론의 질 제고에 결코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기
여하지 않았음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첨예한 사회적 갈등 문제, 예를 들어 실업
문제와 환경오염 문제, 정치적 의혹사건 등이 지닌 의미가 축소됨으로써 신문은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시키는 ?
≠?都? 이에 반
해 스포츠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것으로 전달되었으며 스포츠 기
사를 요구하는 독자층에게 정보적 복지를 제공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심지어 대중
지들의 경쟁적인 섹스 기사에 진절머리가 난 독자들도 스포츠 기사에 대해서는 별
반 기분을 상해하지 않을 만큼 스포츠 기사는 모든 계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요컨대 1920년대에 대중매체는 스포츠와 일종의 공생적 관계를 맺게 되며,23) 이
는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된다. 또한 대중적 응집력과 동질성의 기회를 제공함
으로써 신문 스포츠 보도의
는 궁극적으로 대도시화에도 중요한 공헌을 하였
다.
2) 라디오와 스포츠의 상호적 관계
프로야구와 권투, 그리고 대학 미식축구는 1920년대 스포츠 활성화의 주요한 원동
력이었다. 메이저 리그 야구는 이미 그 이전부터 상당한 관중을 끌면서 언론과 구
단주 사이에서 확고한 자리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야구의 붐은 1920년대
에 들어 더욱 확장되었고, 특히 뉴욕 양키즈의 베이브 루스와 같은 선수는 피부색
과 관계없이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제 스포츠는 끊임없는 ‘영웅’을 만
들어냄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
? 스포츠 영웅은 사회내 바람직하다
고 인정된 주요 가치적 지향과 상징들을 구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구체적으로
스포츠 영웅들은 용기 있는 사람이란 겁먹지 않으며, 설사 패배할 위험이 있다고
해서 미리 포기하지 않는 배짱과 담력, 끈기를 가지고 경기에 진지하게 임한다는
것을 몸으로써 보여주었다. 이러한 ‘영웅 만들기’의 과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다름 아닌 대중매체였다. 대중매체는 일종의 영웅에 대한 대중들의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생산하는 기계였다. 유명 선수들의 기록과 사생활, 일거수 일투족
이 신문?
읏?의해 상세하게 알려지고 그것이 대중들 사이에서 회자됨으로써
스포츠 스타의 영웅화가 사회적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특히 1920년대 일어난 라디오 방송의 광범위한 출현은 스포츠와 대중매체의 관계
성립에서 분수령이 되었다. 1922년 400가구당 3대꼴에 불과했던 라디오는 1929년
에 이르러 전 미국 가정의 1/3에 도달하였으며, 이처럼 급성장한 라디오는 신문 이
상으로 스포츠와 밀접하게 상보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우선 1920년대 초반과 중반
동안 스포츠는 이 새로운 매체의 수용을 촉진시킬 목적으로 방송국에 의해 자본화
되었?
츠가 아직 정규방송으로 편성되지는 않았지만, 월드 시리즈나 월드 풋
볼 같은 프로 시합은 특별히 중계방송되었다. 이처럼 스포츠가 라디오를 대중화하
는 것만큼이나 라디오 역시 스포츠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과거 주요한 스포츠
행사에 접근할 수 없었던 수백만의 미국인들에게 라디오가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특히 전국적인 라디오 네트워크의 등장은 스포츠의 전국화를 가속화시
켰고, 사회적 기본제도로서 스포츠를 확립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라디오는 NBC와 두번째 전국 네트워크로 성장한
는
두 거대 방송사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 거대 방송망들은 광고주에게 프로그램 중
시간을 사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인식시켜 나갔다. 광고사들도 다투어
중요한 스포츠 경기의 광고 방영권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가령 1934년 포드 자동차
는 양방송사에게 월드 시리즈를 독점 스폰서하는 대가로 10만 달러를 지불했다. 이
처럼 스포츠 중계와 방송국 광고 수입 사이에 맺어진 상관관계는 스포츠를 중요한
광고 행위체가 되도록 유도했다. 가령 스포츠 경기장 주위의 벽면 광고, 운동선수
들의 유니폼에 실려 있는 특정 회사의
고는 스포츠가 중요한 이윤 획득의
일부분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영화배우 등 인기 연예인이 주가 되었던 광고모델로
이제 운동선수들이 등장하고 있음은 라디오라는 매체에 의해 새롭게 변화된 스포츠
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컨대 라디오 스포츠는 중요한 광고수단이자 기업체
들의 판매 전략의 하부구조로서 확실한 위상을 확립할 수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광고가 라디오 등 대중매체를 스포츠 활동, 그리고 자본주의적 기업 활
동과 더욱 치밀하게 관련시켰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5. 소결: 육체의 지배와 주체 구성
대의 경기 호황에는 포디즘으로 대표되는 생산방식의 변화가 주요한 원인을
제공했다. 이는 매우 높은 생산성을 지닌 조립라인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데 요구되
는 강력한 노동 통제를 뜻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에게 기업의 대량생산 제품인 막대
한 양의 재화들을 소비할 수 있도록 충분한 수입과 여가시간을 제공한다는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다. 대량생산은 그와 함께 대량 소비를 필수적으로 가져온 것이었
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히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자신의 돈을 어떻게 적절하게 여가
및 소비 활동을 통해 지출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鄂?문제로 떠올랐다. 이
에 비해 1930년대는 자본주의 기본 질서의 붕괴에 가까울 정도로 심각한 경제불황
이 불어닥친 시기였다. 노동자들은 보다 높은 효율성을 강조하는 생산체계에 새롭
게 길들여져 갔다. 그러나 이와 함께 하부구조에 대한 생산적 지출을 유도함으로써
이들이 과잉 설비의 일부를 흡수할 수 있도록 하려는 조치들도 끊임없이 강구되었
다. 요컨대 욕망하는 소비 주체의 창출은 1920년대와 1930년대 미국 자본주의의 공
통된 과제였던 셈이다.
경기 순환의 명암이 엇갈린 이 시기에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재생산?
한 생산·소비의 주체를 안정적으로 만들어내는 기능을 수행했다. 일종의 이데올
로기적 제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1920~1930년대 프로 스포츠를 통한 경기 관람층의
폭발적 증가, 그리고 생활 스포츠를 통한 대중의 광범위한 참여를 통해 스포츠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생산·소비 주체의 재생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우선
당시의 스포츠는 산업적 생산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도시화로 가능해진 스포츠 관
련 용품의 대량생산과 경기시설에 대한 과감한 투자는 대규모 도시 인구를 스포츠
로 흡수함으로써 막대한 이윤 창출을 가능케 했
와 함께 들 수 있는 것이 스
포츠의 문화적 측면이다. 당시 신문과 라디오 등 대중매체를 통해 만들어진 스포츠
스타에 대한 대중들의 자기 동일시 과정과 스포츠 관련 광고를 통한 소비 욕구의
창출은 이중적 주체를 (재)구성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대중들은 스펙터클로
변모한 스포츠의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별다른 주저 없이 대답하였다.
스포츠를 통한 이와 같은 생산·소비 주체 재생산의 과정에서 주목할 할 점은 스
포츠가 주체의 ‘욕망’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내 흔
히 ‘욕망’이라 불리우는 ?
뵈胎糖?통해 재구성되는 메커니즘은 대단히 중
요하다. 스포츠를 통한 육체 지배와 욕망 창출의 메커니즘은 단지 생물학적 충동에
기반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정세의 효과, 즉 욕망이 만들어지는 사회적 제도
내에서 사고되어져야 할 대상으로 규정될 수 있다. 문제는 ‘스포츠가 과연 주체
구성과 관련하여 주체의 욕망에 대한 통제와 지배로 가능한 지점들이 어디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우선 스포츠 관람의 문제를 보면, 스포츠는 육체 그 자체와 육체를 이용한 사회적
활동, 정신적 표상 등을 생산함으로써 대중으로 하여금 자?
셀?열중하고 내
부로부터 자기도취적으로 육체에 집착하라고 제안한다. 이는 마치 ‘의료’와 ‘날
씬함’에 대한 대중적 집착과도 유사하다. 사실 의료 숭배를 통해 건강에 대한 태
도는 경쟁의 논리 속으로 빨려들어가며, 의료 및 약에 대한 잠재적으로 무한한 욕
망의 형태로 남는다. 육체에의 자기 도취적 집착과 관련된 강박 관념적 요구인 동
시에 개성화 및 사회 이동 과정과 관련된 지위 향상의 요구가 되는 셈이다. 아름다
움과 건강의 기호는 개성화, 즉 육체의 기호화된 기능으로서 나르시시즘을 사회적
위세와 결합시킨다. 따라?
穩乍“都?의약품에 대한 강박 관념적 수요가,
유복한 계급에게서는 의사에 대한 수요가 존재하게 된다. 날씬함에 대한 숭배는
이처럼 아름다움과 어떠한 자연적 친화성도 갖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음식물이 과
도하게 소비되는 사회에서는 그 자체로서 차이를 표시하는 기호로 자리잡는다. 대
중매체와 광고는 교묘한 방식으로 육체로부터 이러한 관념만을 추출하여 검열된 욕
망의 단순 기호형식으로 만들고, 궁극적으로 육체를 신성화한다.24)
스포츠 관람의 이러한 시각 경험을 통해 대중은 자신과 세계간 차이를 설정하게
되는데, 이때
스포츠 영웅에게 각인된 육체적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ide-
ntification)한다.25) 특히 스포츠 영웅의 육체는 각종 매체에 의해 기호화되면서
실재와 다른 하나의 허상, 즉 신화로 가공된다. 그리고 그 신화는 지배계층의 이
데올로기를 정당화·절대화하면서 사회 전체를 자기기만 속으로 빠뜨린다. 대중들
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비로소 현실 세계를 조직·해석·규정할 방식 혹은 규칙을
가질 수 있다. 이제 신화가 노리는 것은 대중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법적으로 자유
롭고, 자율적인 주체라는 의식을 갖도록 그 조건들을 재생산해내?
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중요한 것은 허상과 실재 사이의 뚜렷한 구분을 잠식하는 탈중심화된
(decentered) 주체 구성의 과정이 1920~1930년대 스포츠를 통해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스포츠 활동이 사회적 한계성을 극복함에 있어 반패권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 입장에서 스포츠 스펙터클
을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 정치경제학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무리라는 지적에도 나
름의 일리가 있다. 스포츠는 분명 즐거움을 주며, 그 즐거움은 반드시 반동적이고
따라서 억압
求?것은 아니다. 스포츠는 기술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미리
그 성격과 방향이 정해진 어떤 것이 아닌,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변화의 과정인 동시에 그 대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정치
행위를 안락하고 중립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할 잠재
력이 매우 크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며, 이것이 바로 1920~1930년대 미국의 스포
츠를 설명함에 있어 빼놓지 않고 지적해야 할 부분이다. 광범위한 프로 스포츠의
확산으로 요약되는 당시의 미국 스포츠는 진정한 의미의 현대 자본주
幣碩?
던 시기에 그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틀림없이 수
행하였다. 스포츠와 기업, 그리고 각종 이데올로기가 지금과 같이 일체를 이루게
된 것도 그 역사적 뿌리는 1920~1930년대라는 구체적인 시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재즈 시대’로 일컬어지는 1920~1930년대는 비단 미국 자본주의의 변천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의 역사에 있어서도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광고,
영화, 스포츠 등 ‘대중문화’라는 문화적 형태가 이 즈음 해서 어느 정도 완결되
는 조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
걱퓔타?상품미학적 차원에서 접근하
여 이미지 판매를 고려하게 된다. 단순히 상품 정보를 제공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
이 아니라 상품의 외피, 즉 있을 만한 효용가치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기능케 된 것
이다. 라디오 또한 이즈음에 이르러 광고를 실으면서 테일러리즘에 입각하여 시간
을 쪼개 광고주에게 판매하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통신수단으로 자리잡았다. 스포츠
의 경우에는 줄어든 노동시간, 늘어난 여가시간에 맞추어 도시 대중들의 스펙터클
관람과 생활 스포츠 참여를 즐기도록 하였으며, 영화는 본격적인 장르 및 스타 개
발을
꿈과 상상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역할하였다. 이 모든 문화산업은 1920
년대의 경제적 호황을 즐길 소비적 주체를 만들기에 분주하였으며, 대중들은 기꺼
이 문화산업이 생산해내는 문화물들을 즐기고 있었다.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양산하는 대중매체, 대중문화라는 기계의 급속한 발
달과 함께 1920년대 이전까지 미국사회를 뒤덮었던 ‘세계 속의 미국, 도덕적인 미
국’이라는 이상주의적 구호는 마찬가지의 속도로 사라져 갔다. 미국민들은 이제
군사적으로 강력하고 전세계 속에서 패권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미국이 아닌 그저
?
풍요로운 미국을 원하고 있었다. 개개인이 그 안에서 풍요롭고 여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잘된 사회라는 개인주의적, 실리적 신념이 빠르
게 자리잡았다. 일상생활내 대중들의 가치가 몰라보게 세속화되었으며, 이러한 가
치들이 사회적 질서를 규정해 갔다. 대중문화는 바로 그 대중적 의식 변화의 산물
이자 효과인 동시에 증폭기 역할을 수행하였다.
대중문화의 수용으로 인해 무엇보다도 전통적 가족제도가 빠르게 해체되어 갔다.
대중문화를 즐기는 행위 자체가 가족단위보다는 개인단위로 이루어졌고, 특히 자
녀들과
이 가장의 권위에 맞섬으로써 얻게 되는 소비의 즐거움은 예전에 상
상할 수도 없던 획기적 매력으로 다가왔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대중문화를 통한
새로운 소비 주체 구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산업
환경의 변화로 인해 모든 가족성원들이 임금 노동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 하에서
개별 구성원들은 전통적인 가족의 경계 바깥에서 새로운 소비 주체로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된 것이다. 대량생산 체제는 많은 소비 품목들을 소비할 주체를
만들어내지 않고는 유지 자체가 불가능하다. 대량생산 체제의 ?
?위해 새로
운 인간형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며, 대중문화는 그 목적을 수행하는 기제
로 작동한다. 이런 점에서 1920~1930년대의 대중문화는 소비주체 형성이라는 첫번
째 역사적 임무를 띠고 있었던 셈이며, 이렇게 보면 ‘소비자’라는 근대적 주체의
형성은 반드시 유쾌하게만 볼 수 없는 일이 된다.
이와 함께 당시의 대중문화는 이미 미국인들이 익숙해져 있던 민속문화나 일상적
놀이에 새로운 룰을 만들어 제공하였다. 후자를 포디즘적 생산양식에 맞추거나 그
에 합당한 규칙 혹은 규범을 체화시키고자 한 것이며, 이는 196
穗?한국사
회의 사회상 및 당시에 이루어진 대중매체의 폭증 현상과도 매우 흡사하다.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농촌 공동체가 급속히 허물어지는 대신에 도시화가 이루어졌으며,
대중문화가 상당한 기세를 떨쳤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대중문화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시기가 바로 1960년대 후반인 점에 미루어 보더라도 미국의 재즈
시대는 그 당시와 상당한 친근성을 보인다. 단지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면, 대중문
화에 대한 국가 및 자본의 개입 정도의 차라고 할 수 있겠다. 재즈 시대 미국의 대
중문화는 기업이 모든 호혜를 누?
藪?발흥했다. 문화산업과 기업들은 대량
소비를 유도할 수 있는 기제를 찾고자 했고 대중문화가 이에 맞추어 등장한 것이다
. 이에 비해 한국의 대중문화는 문화산업이 철저히 국가의 통제를 받던 시절에 시
작되었다. 전근대적 놀이나 일상생활을 지우고 대중문화를 체득시킴으로써 새로운
생산체제에 맞는 ‘근대적’ 주체를 만드는 데 무엇보다
전방위적으로 국가가 앞장선 것이다.
국가 주도의 대중문화 형성과 자본주의 대중문화 형성이 가져온 사회적 효과의 차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예컨대 한국사회내 대중매체와 이를 ?
광
고제도는 국가의 통제를 받고 있다. 미국에서 방송과 광고의 관계가 철저하게 이윤
을 중심으로 짜여진 것과 상당한 대조를 이룬다. 미국의 광고주들은 방송 내용에
개입한다든지 스폰서쉽 거부를 통해 언론을 무력화할 수 있는 데 비해, 한국과 같
은 국가통제 시스템 하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광고와 방송간 관계의 산물인 ‘
한국방송광고공사’는 그 운영 여부에 따라서는 방송을 광고주의 간섭으로부터 배
제시킬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다. 다만 그것이 국가의 통제를 받는다는 점에서 효
용성만을 강조하기 어려울 따름이다. 사
주도의 매체운영과 국가 주도의 매
체운영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평가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정치권력의 배제란 점
에서는 자본 주도의 매체운영이 나아 보이지만 자본 배제란 점에서는 국가 주도의
운영이 탁월해 보인다. 문제는 국가 주도형 매체운영이 여전히 상업성을 띠며 자
본 주도의 매체와 다를 바가 없다는 데 있다. 특히 국내 공영방송 제도는 독특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시스템은 공영방송이지만 그 내용으로 들어가자면 상업
방송에 못지 않은 행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애초 자본을 중심으로 문화산업이 ?
堅뮌?경험과 국가가 오랫동안
주도해온 우리의 대중문화적 경험은 사뭇 다르다. 한국사회에서 국가가 이토록 오
래 간섭한 것은 물론 정치적 욕심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정치적 의도
는 자본의 ‘자율적’ 힘이 증대됨에 따라 그 입지가 점차 줄어드는 형편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간섭의 효과는 남아 있으며, 대중문화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정치성의 문제에 경도되어 있는 점은 그 단적인 증거가 된다. 많은 비평가들의 관
심이 국가와 대중문화간 관계, 매체를 통한 국가 이데올로기 재생산의 문제에 모아
진다. 그리
중문화를 통한 자본주의적 주체 형성의 측면에 대해서는 제대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비해 미국의 경우에는 대중문화와 국가가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며, 대중문화 비평은 자본의 의도가 대중문화
안에 녹아져 자본이 원하는 주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집중된다. 전혀 다른 방식
의 문화산업 운영으로 인해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의 초점도 다르게 정해진 것이다.
최근 대중문화에 대한 국내 담론들이 국가 일변도에서 벗어나 주체 형성 등의 문제
로 다변화되고 있지만, 아직은 시작 단계라고 하겠다.
아울?
穗?재즈의 변천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미국의 경우에도 백인 중
산층 문화가 주류 문화권을 형성하면서 주변부적 취향을 흡수·내화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문화 중심부의 힘을 무시할 수 없더라도, 여전히 주변부 문
화들이 나름의 생명력을 유지하거나 심지어 이에 저항하기도 하는 다원성의 여지를
미국 대중문화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1920년대부터 북부 대도시 도심에 형
성된 아프리카계 게토에서 출발한 랩(rap) 음악을 두고 단순히 체제 내화의 과정으
로만 해석하는 데는 상당히 무리가 따른다. 그러한 힘의 ?
?불구하고 랩을
대안적인 문화·상징적 자원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도 여전히 따랐기 때문이다
. 이른바 골수(hardcore)랩을 아직까지도 ‘게토를 대표하는 유일한 언론’으로 부
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에 비해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전혀 다른 경
험을 갖고 있다. 대중문화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외래문화가 그 주를 차지했다
는 점에서 주변부 문화가 흡수될 가능성은 적어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주변부
문화는 말살되다시피 했으며, 이는 근대화의 논리와 연결시킬 때 제대로 설명 가
능하다.
한국사회에서 ?
를 받아들이는 데 앞장선 것은 대중매체가 아닌 국가였다
고 보는 편이 옳을 듯 싶다. 1960~1970년대의 근대화 시기가 강한 민족주의 색조를
띤 것이 사실이지만, 대중문화적 측면에 있어서는 서구 편향적인 모순된 모습을 보
였다. 정치적 통제를 위해 민족주의도 필요했고 자본주의 주체 구성을 위해서는 서
구문화도 필요했던 셈이다. 대중문화는 보수 민족주의와 엇갈리게 되고, 서구 대중
문화의 표피랄 수 있는 향락적 분위기, 찰나적 쾌락 등의 부분만 섭취되는 기현상
이 나타났다. 오늘날 한국 대중문화의 ‘저질성’을 이해하기 위해?
여 년을
거슬러 가 이러한 연유를 철저히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시 국가는 주변부 문
화를 주변부에 남지 못하도록 물리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 후 재생의 노력이
인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전시 문화행정에 그치면서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애초 문화적 다원성을 위한 토양이 마련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그 한계는 지금
까지도 국내 대중문화계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는 단순히 국가 개입과 자본 개입
의 차이로써 설명될 성질의 것이 아니며, 오히려 대중문화를 스스로 만들어가야 했
던 미국의 경험과 이를 쉽게 이식받
부 한국사회의 경험적 차이라고 볼 수
있겠다.
1920년대에 미국 가정의 해체를 가속화시켰다는 혐의를 받는 대중문화가 한국사회
에서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증거를 찾기란 쉽지 않다. 다만 미루어 짐
작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미국과 유사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것이란 점이다. 19
60년대~70년대에 농촌 공동체로부터 도시로 대량 유입된 한국의 노동자 가족은 여
전히 전통적인 가부장제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도시 임금 노동자화한 청소년들
의 경우에도 농촌 중심적 사고를 견지하고 있었으며, 고향에 남은 가족을 돕는
막?자신을 희생시켰다. 특히 낮은 임금과 부족한 여가시간으로 인해 이들의 문
화접촉 기회가 매우 제한된 상태에서 가족제도의 변화에 당시 서구로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대중문화가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한국적’ 가족
제도의 변화는 오히려 대중교육이 보편화되고 10대 청소년층이 나름의 하부문화를
형성하면서 적극적으로 소비 주체화하면서 이루어졌다. 즉, 대중문화의 시작 지점
이 아닌 대중문화와 대중교육이 본격화한 1980년대 후반을 가족구조 변화의 분기점
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겠다.1)
사실 1980년?
경직된 정치적 상황과 달리 문화적 영역은 상당히 느슨해지는
아이러니를 보였다. 교복 자율화, 통금 해제, 컬러텔리비전의 개시, 프로 스포츠와
경기의 개막, 민속씨름 등 전통문화의 제도적 부활, 해외 여행자율화 등 다양한 변
화가 이어졌으며, 이는 유신체제 하에서 철저하게 억눌렸던 대중의 문화적 욕구를
한꺼번에 터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경제적 모더니티가 정치적 모더니티와 무
관하게 (혹은 이를 지나쳐) 문화적 모더니티로 그 결실을 맺은 셈이다. 물론 이러
한 대중문화의 붐이 진정한 민중적 기대에 부응한 것은 아니었으?
湯?당시의
대중매체·대중문화는 기만적이고 억압적인 성격이 더 뚜렷했다. 프로야구나 ‘국
풍 81’과 같은 대중 문화행사는 대중문화가 국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통치 이데올
로기화한 대표적 사례가 된다. 그렇지만 문화산업은 국가의 지원에 힙입어 급성장
할 수 있었고, 언론기업들도 언론통폐합을 통한 시장 보호 등에 힘입어 독점산업으
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처럼 양적인 경제성장으로 호황을 누린 언론과 문화산업은
점차 보편적인 수용자층에 어필하는 대신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상품을 소비할 계
층을 찾아나섰다. 그리고 그 대상
로운 소비층, 즉 젊은 세대가 선정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새롭게 대중문화 소비층으로 등장한 젊은 세대는 그 이전 세대와
는 크게 구분된다.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자신을 위해 투자할 준비가 되어 있었
고, 근검절약의 정신을 강조한 이전 근대화 세대와 경험적·감각적으로 시공간을
달리 하였다. 전혀 새로운 ‘느낌의 구조’를 지닌 계층, 집단이 탄생한 셈이다.
이전 세대와 상당한 간격을 두고 형성된 10대 청소년들은 특히 대중문화 소비에
있어서도 전혀 새로운 형태를 보이게 된다. 대중문화는 비록 그것이 외부로부터
이
繭?하더라도 ‘그들의 것’이 아닌 바로 ‘나/우리의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대중문화를 둘러싸고 이들과 이전 세대간 감정 다툼이 빈번하게 벌어졌
으며, 이는 세대간 의식적, 커뮤니케이션적 단절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
다. 가족 성원간 불균등한 (대중문화) 소비는 가족내 권위 및 가치 체계에도 변화
를 가져왔고, 가족 안과 바깥의 의미를 상당히 바꾸어 놓았다. 가족의 대중문화 소
비, 그리고 그 사회적 효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세대를 축
으로 한 1980~1990년대 문화적 다툼의 현상을 이해하는 ?
수적이다.
한편 이 글의 전반적 기조에 해당되는 대중문화의 주체 형성 의도를 일방적 과정
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문화산업의 소비 주체형성 의도에 대해 저항도 따랐기 때
문이다. 1920~1930년대 미국에서는 문화산업에 대해 보수적 시민단체, 종교단체들
이 윤리의식의 황폐화를 들어 견제하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 외에도 문화적으로
소외된 집단들은, 예컨대 흑인 비밥 연주자들처럼 자신의 문화를 주류 문화산업으
로부터 보존하거나 나름의 타협을 시도하고자 했다. 심지어 전체 사회과정에 불만
을 지닌 계층들은 문화산업이 생산
을 자신의 의미로 축소시키거나 변형시키
는 적극적인 의미 (재)형성 작업도 수행하였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본격화된 것은
아니며, 대중문화를 통한 헤게모니 다툼은 제 2 차 세계대전 이후 베이비 붐 세대
에 이르러 비로소 가능해진다. 단지 대중문화를 통해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다양한
집단간 경쟁의 가능성이 훨씬 이전부터 상존했다는 뜻일 따름이다.
즉, 1920~1930년대 미국의 대중문화 지형을 살펴보면, 대체로 문화산업과 국가가
한편이 되어 지배세력(power bloc)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보수적인 이데올
로기와 국가 이?
, 그리고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구체적
으로 생산해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안으로부
터의’ 저항 가능성도 차츰 싹트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문화적으로 다양한 메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문화산업의 입장에서 상당히 의미있는 전략이지만, 이를 뒤집
어 보면 사회를 획일화하기 그만큼 어렵다는 징조이기도 하다.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내 대중문화의 형성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중심문화의 무분별한 도입은 국지
적 문화를 말살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외래 대중문화를 통한 저항
?또한
꾸준히 형성되었다. 70년대 청년문화는 그 맹아라고 할 수 있다. 통키타, 청바지,
생맥주로 대변되는 청년문화는 철저하게 소비문화적 외양을 가지고 있었지만, 청년
들은 그 문화적 소재를 통해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내고자 했다. 이를 단지 맹
아라고 부르는 이유는 문화 소비를 통한 저항의 정신이 지속적으로 다른 (정치적)
층위로 이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방적 주체 구성의 과정은
아니었음이 명백하다.
문화산업의 생존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장르의 개발은 미국에서 1920~1930년대
에 걸쳐 어
완성되었다. 전국 네트워크화한 라디오는 음악 프로그램과 드라
마, 그리고 토크쇼 등을 개발함으로써 오락적 매체로서 나름의 차별성을 구축할 수
있었다. 또한 광고 대행사들은 대중들의 감성에 어필하는 이미지 중심 광고의 효과
를 이미 경험한 상태에서, 이를 광고주들에게 적극 확신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헐리
우드 영화에게 있어 장르는 스타시스템과 더불어 생존에 더욱 필수적인 기제였다.
코미디, 서부극, 뮤지컬, 갱스터 무비 등 다양한 장르와 내러티브들이 개발되었으
며, 국가 및 보수적 시민단체의 통제를 피해 시장을 확대시킬
전략이 끊임없
이 모색되었다. 신문과 라디오 등 언론매체의 경우에도 스포츠 보도 및 중계의 활
성화가 얼마나 기업의 이익에 도움되는지를 체험적으로 알 수 있었다. 미국 문화산
업이 1930년대의 대공황 상황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경험을 통해
총체적 생존전략을 갖추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내 대중문화의 경험은 사뭇 달랐다. 이미 구축된 장르와 전략을
그대로 흉내내거나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이식해 사용하는 경향이 높았던 것이며,
이를 통해 당분간은 저비용·고효율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중개나 모방
을 통해서도 후발주자인 국내 문화산업이 어느 정도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
제는 세계화, 탈국경화 시대를 맞이하면서 이처럼 중심 문화를 단순 중개하거나 모
방하는 것이 점차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주변부 문화산업의 지속적 발전
이 그만큼 어려워졌음을 뜻하는 것으로, 문화가 고부가가치 산업이라고 알려진 199
0년대에 들어 한국의 문화산업은 빠른 속도로 미국 문화산업에 종속되는 모습을 보
인다. 나름의 국지적 자원마저 고갈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통찰력도 적고 축적된
?없는 형편에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요
약하자면 국가 주도의 규제적이고 비경쟁적이며 종속적인 시장 구조가 빚은 필연적
결과라고 하겠으며, 이러한 경향은 IMF시대로 일컬어지는 1990년대 후반에 더욱 심
화될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학자적 관심을 요구한다.
1990년대 문화(담론) 과잉의 시대에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제대로의 평가는 이러
한 비교 역사적 고찰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 비춰볼 때 1960년대
이후 양적으로나마 급속히 성장한 한국 대중문화를 문화역사적 관점에서 따져보는
연구는 매우 일천
痔瑛?대중문화 현상을 훑어나가는 노력에 비해 과거의
대중문화 현상과 그 사회적 효과를 통시적으로 따져보려는 논의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서구의 대중문화 현상과 이론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반면, 그
이론의 국내 적용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에 앞서 한국 대중문화의 실증적 데이터도
채 확보되지 못한 상태이다. 대중문화의 발전 방향에 대해 무수한 논의가 이루어
지면서도 막상 가까운 1980년대 대중문화 현상에 대해서도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자
료를 내놓지 못하는 것은 한마디로 우스꽝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
비판
적 문화연구가 구조의 문제와 더불어 역사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출발했으며, 이
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변화 전략을 모색하고자 했던 점에 비춰볼 때, 국내 문화연
구에서의 역사의식의 실종은 심각한 위기의 징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이 연구도 전혀 예외는 아니다. 다만 본 연구가 의의를 가진
다면 자본주의 형성기인 1920~1930년대가 과연 대중문화에도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종합적으로, 그것도 주변부 지식인의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따져본 데 있을 것이다
. 1990년대 전세계적으로 패권적 영향력을 행사하
대중문화를 알고 그 힘을
해체시킴에 있어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전제조건이 된다. 실로 영화의
산업적 전략은 1930년대를 통해 거의 완성 상태에 이르고, 라디오와 광고의 생존
전략도 1920년대 호황기와 1930년대 불황기를 통해 갖추어졌다. 이 시기야 말로
미국이 대중문화의 종주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된 셈이다. 대중문화에
대해 이론적 관점에서 그 부정적 영향을 논하고 거부하고자 하는 다분히 낭만적인
사고가 오늘날 국내 대중문화를 황폐화하고 종속적인 상태로 방치했을지 모른다.
이전의 예술적 엄숙?
适像?순수성을 고집하는 냉소적 사고가 대중문화의
경박함과 서구화에 일단의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경험적 연구의 필요성은 이러한 점에서 더욱 빛을 발하며, 이제 이러
한 노력을 잊혀진 국내 대중문화로 돌려야 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