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1-5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1 권
제 1장 묘령(妙齡)의 낭자와 곤륜삼성(崑崙三聖)
화창한 봄날
해마다 맞는 한식(寒食)
배꽃의 계절이어라.
흰 비단결처럼 활짝 핀 저 꽃은 진정 향기롭거니와
잎새 무성함은 백설과 같도다.
조용한 밤.
차가운 달빛에 젖어
그 찬란한 빛을 뿌리니
속세의 천상이 따로 있을소냐.
그 수려한 자태
고결한 기질은 가히 천자이어라.
많은 꽃 속에 섞여
더욱 돋보이는 우아함이여
그 드높은 기상 어디에다 견주랴.
이것은 남송말년 무학명가인 구처기(丘處耭)가 지은 무속념(無
俗念)의 한 귀절이다.
구처기의 도호는 장춘자(張春子)라 하며, 전진칠자(全眞七子)중
의 한 사람이며 전진교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 중의 하나였다.
그가 지은 이 사는 배꽃을 읊조린 것 같지만 사실은 흰옷을 입
은 미모의 소녀를 찬미한 것이다.
<고결한 기질>, <만화속에 섞여 더욱 돋보이는 우아함>이라고
그가 찬송한 절세미인은 바로 고묘파(古墓派)의 제자인 소용녀
(小龍女)였다.
그녀는 늘 흰 옷을 즐겨 입었으며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장춘자 구처기는 종남산에서 그녀와 이웃해 살면서 단 한 번
보고 이 사(詞)를 지은 것이다.
구처기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소용녀도 이미 신주대협
양과(揚過)의 아내가 되었다. 한데, 하남 소실산으로 뻗은 산길
에서 한 소녀가 이 사를 읊조리고 있지 않은가.
소녀의 나이는 줄잡아 열 아홉, 담황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나귀를 타고 천천히 산길을 따라 오르며 깊은 생각에 잠
겼다.
'용언니 같은 인물이어야만이 그분과 짝지을 자격이 있지.....'
그녀가 말한 '그'는 바로 신주대협 양과였다.
그녀는 고삐도 잡지 않은 채 나귀가 이끄는 대로 느릿느릿 산길
을 거슬러 올라갔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중얼거리듯 나직이 읊조렸다.
"만남의 기쁨은 짧고 헤어짐의 고통은 길어라. 누가 알랴, 여인
의 일편단심을. 불러도 님은 대답없고 구름 저 만리 겹겹 산중
을 헤매며, 외로운 그림자 누구에게 향하는 걸까?"
그녀의 허리에는 단검이 걸려 있고, 여독이 가시지 않은것으로
미루어 먼 길을 온 게 분명했다.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꽃다운 나이건만 그녀의 얼굴엔
우수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이 소녀의 성은 곽(郭), 이름은 외자 양(襄)으로서 바로 대협
곽정(郭靖)과 여협 황용(黃蓉)의 차녀였다. 그리고 외호는 소동
사(小東邪).
그녀가 홀로 나귀를 타고 심산대천을 유랑하는 것은 울적한 심
정을 털어 버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울적함은 날이 갈수록 더
짙어질 뿐이었다.
하남 소실산은 산세가 가파르지만 넓은 돌계단이 구불구불 이
어져 있다. 그 돌계단의 공정은 엄청난 것으로서 당조때 고종이
소림사로 어림(御臨)하기 위해 일부러 닦은 길이며, 그 길이가
팔리(八里)에 이르렀다.
곽양은 나귀를 타고 계속 울창한 숲길을 올랐다.
맞은편에서 떨어져내리는 폭포는 일대장관을 이루고, 멀리는 구
름에 어렴풋이 가려진 산봉우리들이 병풍을 이루고 있었다. 산
길을 따라 모퉁이를 꺾어 돌자 멀리 황색 담장에 싸인 커다란 사
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곽양은 끝없이 이어진 사원의 지붕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다
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림사는 천하 무학의 발원지인데, 어째서 화산에서 두 번 열
린 논검대회(論劍大會)에서 오절중에 소림사의 고승이 없었을까?
자신이 없어서 행여나 명성에 손상이 갈까 봐 참석을 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무공이 비록 높다 하지만 명리를 다투기 싫어서
였을까?"
그녀는 나귀에서 내려 천천히 소림사를 향해 걸음을 옮겨 갔다.
하늘을 뒤덮을 듯 울창한 숲길, 그 사이 곳곳에 돌비석이 세워
져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돌비석에 새겨진 글은 오랜 세
월 풍파에 시달려 거의 흐릿하게 마멸돼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곽양의 마음에 새로운 감회가 어렸다.
'돌에 새긴 글도 오랜 세월이 흐르면 지워지기 마련인데, 어찌
내 가슴 속에 새겨진 것은 날이 갈수록 더욱 뚜렷해지는 걸까?'
문득, 커다란 석패에 당태종이 소림사 승려들에게 직접 시사한
어묵(御墨)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 가허소림사승입공평란(嘉許小林寺僧立功平亂) ------
비문에는 당태종이 당시 진왕(秦王)의 신분으로 왕세충(王世忠)
을 토벌할 때 소림 승려들이 종군하여 공을 세운 업적이 수록돼
있었다.
당시 이름이 알려진 고승은 모두 열 세 명이었는데, 단지 운종
만이 대장군으로 봉해졌고 나머지 열 두명은 벼슬을 원치 않아
당태종이 그들 각자에게 자라가사(紫羅袈裟) 한 벌씩을 시사했다
고 한다.
곽양은 속으로 생각했다.
'수당때에 소림사의 무공은 이미 천하에 그 명성을 떨쳤으니,
그후 수백 년이 흐른 지금은 더욱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을 것
이다.'
와호장용(臥虎藏龍)의 소림사!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속세를 등진 채 이 속에서 불학과 무공을
연마하고 있을까!
곽양은 소림사에 대해 새롭게 경의를 느꼈다.
그녀는 양과,소용녀 부부와 화산(華山)에서 헤어진 후, 삼년이
넘도록 그들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곽양은 그들이 그리워졌다. 이번에 강호를 돌아보고 오겠다는
구실로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집을 떠났지만, 사실은 양과의 소
식을 알아보는게 목적이 었다. 그들 부부와 꼭 대면을 하지 않아
도 좋았다. 다만 양과의 소식을 얻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
다.
이날, 곽양은 하남으로 들어서 문득, 소림사의 무색선사(無色禪
師)가 양과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는 생각이 되살아났다. 자
기가 열 여섯 번째 생일을 맞았을 때, 무색선사가 양과의 체면
을 생각해 사람을 시켜 한 가지 선물을 보내왔었다. 비록 직접
무색선사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혹시 양과의 행적을 알고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소림사를 찾아온 것이다.
그녀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쇠사슬을 질질 끄는
소리에 이어 낭랑한 염불소리가 들려왔다.
".......무량백천만억대중지중(無量百千萬億大衆之中) 설승묘
가타왈(說勝妙伽他曰), 유애고생우(由愛故生憂), 우애고생포(由
愛故生怖) 약이어애자(若離於愛者) 무우역무포(無憂亦無
怖)......."
곽양은 그 소리에 넋 나간사람처럼 멍해지며 중얼거렸다.
'사랑함으로써 근심이 생기고(由愛故生憂), 사랑함으로써 두려
움이 생기니(由愛故生怖), 만약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若離
於愛者) 근심도 두려움도 없으리(無憂亦無怖).......'
사슬 끄는 소리와 더불어 염불소리가 차츰 멀어져 갔다.
곽양은 아랫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지만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지만
근심과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지 그에게 물어봐야겠다!'
그녀는 나귀를 아무렇게나 나무에 묶고 뒤쫓아갔다.
숲속 뒤편에 산 위로 뻗친 작은 오솔길이 있는데 한 스님이 작
대기 양쪽에 커다란 통을 대롱대롱 매달아 짊어지고 천천히 걸어
가고 있었다.
급히 뒤쫓아간 곽양은 절로 눈이 휘둥그래졌다. 작대기 양쪽에
매달려 있는 통은 보통 물통보다 두 배 가량 더 컸다. 뿐만 아
니라 스님의 목과 손발에는 굵은 사슬이 감겨져 있어 걸음을 옮
길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냈다. 철통의 무게만 하더라도 최소한
삼백근은 넘을것이다. 게다가 물이 가득 찼으니 실로 엄청난 무
게였다.
곽양은 얼른 소리쳤다.
"대화상(大和尙), 여쭈어 볼 말이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
요."
스님은 고개를 돌렸다.
순간, 두 사람은 모두 멍해지고 말았다. 뜻밖에도 그 스님은 각
원(覺遠)이 아닌가!
삼 년 전에 두 사람은 화산 절정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각원은 비록 성격은 괴팍하지만 공력이 심후하여 당금무림 중
어느 고수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곽양은
반색을 했다.
"이제 보니 각원대사였군요. 그런데 왜 이 모양으로 변했죠?"
각원은 소리없이 웃으며 합장을 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대꾸없이 이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가는 게 아닌가.
곽양은 약간 당황해 하며 소리쳤다.
"각원대사, 저를 모르겠어요? 저는 곽양이예요!"
각원은 고개를 돌려 빙긋이 웃으며 턱을 끄덕여 보였으나 걸음
을 멈추지는 않았다.
곽양은 다시 소리쳤다.
"누가 이렇게 대사를 쇠사슬로 묶어 학대를 하는 거죠?"
각원대사는 등 뒤를 향해 손을 흔들며 더 이상 묻지 말라고 했
다.
곽양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졌다. 게다가 무시를 당한
듯한 느낌에 오기가 뻗쳤다. 그녀는 각원대사의 앞을 가로막고
따지기 위해 재빨리 쫓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각원대사는 온몸이 쇠사슬로 감겨져 있
고, 또한 육중한 철통을 짊어진 상황이거늘 아무리 곽양이 소리
를 내어 뛰어가도 그를 앞지를 수가 없었다.
곽양은 더욱 오기가 뻗쳤다.
이번에는 가전비학인 경신술을 전개해 허공을 가로지르며 몸을
날렸다. 아쉬운 대로 우선 철통이라도 낚아잡을 생각이었다. 그
러나 결과는 매 마찬가지. 곧 손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시종 석
자 남짓의 간격이 떨어졌다. 남달리 자존심이 강한 곽양은 아랫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대화상, 꼭 붙잡고야 말겠어요!"
각원대사는 계속 일정한 속도로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사슬
에서 나는 금속성과 더불어 그는 오솔길을 따라 뒷산 쪽으로 향
했다.
곽양은 계속 경신술을 쓰며 뒤쫓아가다가 제풀에 지쳐 숨을 씩
씩 몰아쉬었다. 이제 그녀는 오기보다도 감탄이 앞섰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화산에서는 이 대화상의 무공이 비범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당시엔 별로 믿지 않았는데, 오늘 직접 대해 보니
과연사실이군...."
곽양은 그를 붙잡겠다는 생각을 포기한 채 여유를 갖고 뒤 따랐
다.
얼마 후, 각원대사는 작은 집 안으로 들어가 철통의 물을 모두
뜨락에 있는 우물 속에다 부었다.
곽양은 어리둥절해져 소리쳤다.
"대화상, 혹시 미친 게 아니예요? 왜 애써 물을 길어 우물에다
붓죠?"
각원대사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두를 뿐이었다.
곽양은 문득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음....., 이제보니 고매한 무공을 연마하는 중이군요?"
각원대사는 대꾸없이 고개만 또 내둘렀다.
곽양은 은근히 화가 났다.
"조금 전에 분명히 염불을 하는 걸 들었는데, 벙어리가 아니면
서 왜 말을 하지 않는 거죠?"
각원대사는 합장을 하며 미안해 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철통
을 짊어지고 산을 내려갔다.
곽양은 얼른 우물로 달려갔다. 우물은 바닥이 환히 보일정도로
맑았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녀는 멀어져
가는 각원대사의 뒷모습을 멀건히 바라보며 의혹만 짙어갔다.
뒤쫓아간들 소용없다는 것을 안 곽양은 아예 우물 둘레의 난간에
걸터앉아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소실산이 하늘을 찌르듯 우뚝 솟아 있고, 그 주위에 면면히 이
어진 붕우리가 엷은 안개에 싸여 병풍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는
광활한 소림사가 발 아래로 내려다 보였다. 그곳으로부터 종소리
가 바람결에 실려 은은하게 들려오니, 실로 세속을 벗어난 아늑
함이었다.
곽양은 턱을 괴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 대화상의 제자는 어디에 있을까? 대화상이 도무지 입을 열
지 않으니 그를 찾아 내 물어 봐야지.....'
그녀는 각원대사의 나이 어린 제자인 장군보(張君寶)를 찾아 연
유를 물을 생각으로 천천히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얼마 동안 걸
어 내려가자 홀연 사슬이끌리는 소리가 들리며 각원대사가 다시
물을 길어서 올라오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곽양은 얼른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중얼거렸다.
'대관절 무슨 꿍꿍이 속인지 몰래 지켜봐야지.....'
사슬소리가 가까이 들려옴에 따라 물통을 짊어진 각원대사가 손
에 책을 들고 열심히 섕조리는 모습이 시야에 뚜렷이 들어왔다.
곽양은 그가 자기 곁에까지 걸어노자 난데없이 뛰쳐나가 소리쳤
다.
"대화상, 무슨 책을 읽죠?"
각원대사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아니?!..... 낭자가....."
곽양은 이제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이젠 벙어리 흉내를 내지 못하겠죠? 왜 말을 하지 않는거죠?"
각원은 다소 두려운 표정으로 좌우를 두리번 살피며 연신 손을
흔들었다.
곽양은 눈쌀을 가볍게 찌푸렸다.
"뭘 두려워하는 겨예요?"
각원대사가 뭐라고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갑자기 숲속에서 키
가 훤칠하고 작달막한 두 회의(灰衣) 스님이 걸어나왔다. 그 훤
칠한 스님이 대뜸 호퉁을 쳤다.
"각원, 계법(戒法)을 어기고 스스로 입을 여는 것도 용서못할
일인데, 더구나 젊은 여시주(女施主)와 대화를 하다니! 여서 우
리를 따라 계율당(戒律堂) 수좌(首座)에게 가자!"
각원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변명도 못하고 두 스
님의 뒤를 따랐다.
이것을 본 곽양은 크게 노했다.
"세상에 말을 못하게 하는 엉터리 계율이 어디 있어여! 나는 저
대사와 잘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말을 걸었는데, 당신네들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
훤칠한 스님은 이내 눈을 부라렸다.
"분사는 천 년 동안 여시주의 출입을 금해 왔소. 낭자는 더 이
상 말썽을 부리지 말고 속히 하산하도록 하시오!"
곽양은 더욱 화가 나서 대꾸했다.
"여자가 어쨌다는 거예요? 여자는 사람이 아닌가요? 그리고 무
엇 때문에 이 각원대사를 사슬로 묶고 말도 못하게 괴롭히는 거
예요?"
스님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설령 황제라 해도 본사의 일을 간섭하지 못하는데 낭자가 무엇
때문에 나서는 거요?"
곽양은 성난 음성으로 따졌다.
"이 각원대사는 충짓하고 선량한 사람이예요! 당신네들은 그가
착하다고 해서 멋대로 괴롭혀도 되는 거예요? 흥! 천명선사(天鳴
禪師)는 어디에 있죠? 그리고 무색화상과 무상화상(無相和尙)은
어디에 있어요? 그들에게 직접 따지겠으니 어서 불러오세요!"
두 스님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랐다.
천명선사는 소림사의 장문인(掌門人)이고, 무색선사는 나한당
(羅漢堂)의 수좌, 무상선사는 달마당(達摩堂)의 수좌로서, 모두
무림 천하에 그 법명이 널리 알려진 덕망 높은 고승들이었다. 본
사내의 승려들은 항상 장문인, 나한당 소좌, 달마당 소좌로만 칭
할 뿐, 감히 직접 법명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런데, 한낱 젊
은 낭자가 산에 나타나 멋대로 이름을 부르다니,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스님은 모두 계율당 수좌의 제자로서 스승님의 명에 따라 각
원을 감시하고 있던 중이었다.
곽양의 무례한 말에 훤칠한 스님이 대뜸 호통을 쳤다.
"여시주, 다시 불문성지(佛門聖地)를 욕되게 하는 언동을 하면
용서치 않을 것이오!"
곽양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런다고 해서 내가 겁먹을 줄 아나요? 어서 각원대사의 몸에
묶은 사슬을 풀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장 천명 노화상을 찾
아가 따지겠어요!"
키 작은 스님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그녀의 허리에 단
검이 있는 것을 보고 홀연 입을 열었다.
"여시주와 공연히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 무기를 버리고
어서 하산을 하시오!"
곽양은 순순히 단검을 풀어 두 손으로 받쳐든 채 냉소를 날렸
다.
"좋아요, 원한다면 분부에 따르죠."
어릴 적에 소림사의 불문에 입적한 키 작은 스님은 윗 사람들로
부터 소림사가 천하무학의 발원지이며, 제 아무리 명망이 높거나
무공이 고매한 무림 고수라 할지라도 감히 무기를 갖고 입산하지
못한다는 말을 누누히 들어 왔었다. 이 젊은 낭자는 비록 사문
(寺門)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지는 않았지만, 소림사 경내에서 검
을 휴대하고 있자 따끔하게 일침을 놓은 것이다.
그녀가 순순히 검을 풀자 겁을 먹은 걸로 생각한 스님은, 느긋
하게 손을 내밀어 검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그의 손이 검집에 닿는 순간, 갑자기 손목에 심한 충격을 느끼
며 한 갈래의 힘줄기가 단검으로부터 뻗쳐 나왔다. 그러자 그는
비틀거리며 이내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는 비탈길에 서 있었
는데, 쓰러지자 데굴데굴 아래로 굴러내려가 간신히 몸을 가누었
다.
훤칠한 스님은 놀라움과 분노가 엇갈려 냅다 호통을 쳤다.
"감히 소림사에서 행패를 부리다니, 호랑이 간(肝)이라도 먹은
모양이군."
그 스님은 호통을 치기 무섭게 앞으로 한 걸음 내닫으며 왼손을
오른쪽 손등에 붙여 쌍장을 쭉 З어냈다. 바로 소림의 절학인 츰
소림의 스물 여덟번째 초식인 번신벽격(飜身劈擊)의 자세였다.
곽양은 검을 쥔 채 검집으로 스님의 어깨를 후려쳤다. 그러자
스님은 어깨를 살짝 번뜩이며 손으로 허공에 반원을 그리듯 검집
을 낚아챘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각원대사는 다급해졌다.
"어서 손을 거두시오!"
스님이 이렇게 말하며 검집을 나꿔챈 순간, 손목에 심한 진통을
느꼈다.
'아뿔사!'
그가 내심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을 때는, 곽양의 왼발이 이미
가슴을 강타했다. 그도 비탈길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가 받은
충격은 좀전 키 작은 스님보다 더 심해, 얼굴에 찰과상을 입어
피가 흘러내렸다.
곽양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양대협의 소식을 물으러 왔다가 공연히 싸움만 벌였군.'
그녀는 각원이 울상이 되어 한쪽에 서 있는 것을 보자, 이내 단
검을 뽑아 사슬을 끊어 주었다. 이 단검은 절세기보(絶世奇寶)는
아니지만, 지극히 예리해 요란한 금속성을 내며 사슬을 여러 토
막으로 잘라 버렸다.
각원은 크게 당황해 하며 소리쳤다.
"낭자, 이러면 아니 되오!"
곽양은 아랑곳하지 않고,
"뭐가 안 된다는 거예요!"
하고 한 마디 쏘아 붙이더니, 사내(寺內)를 향해 달려가는 두
스님을 바라보며 다음 말을 이었다.
"저 못된 화상들이 가서 고자질하면 일이 귀찮게 될 테니, 우린
어서 달아나요! 참 대사의 제자는 어디에 있죠?"
각원은 그저 손을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
이때 등 뒤에서 갑자기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염려해 주어서 고마워요. 저는 여기 있어요!"
곽양이 고개를 돌려보니, 열 대여섯 살 가량된 소년이 서 있었
다. 짙은 눈썹에 초롱초롱한 눈동자, 몸집은 비록 크지만 얼굴에
는 천진난만한 티가 남아 있었다. 바로 삼 년 전, 화산에서 본
적이 있는 장군보(張君寶)였다.
곽양은 무척 반가왔다.
"이곳의 못된 화상들이 너의 사부를 업신여기니, 어서 떠나도록
하자!"
장군보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의 사부님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없어요."
곽양은 각원대사를 가리키며 따졌다.
"너의 사부님을 저렇게 사슬로 묶고 말 한 마디 못하게 하는 것
이 괴롭히는 게 아니고 뭣이냐?"
각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 이상 일을 확대시키지 말고 속히
하산하라는 뜻으로 연신 산 아래쪽을 가리켰다.
곽양은 더 이상 꾸물댈 수 없었다. 소림사의 고수들이 몰려오면
불리해질 것이 뻔했다.
그녀는 다짜고짜 장군보와 각원대사의 손을 잡고 재촉했다.
"어서가요! 자세한 얘기는 이곳을 벗어난 다음에 하기로 해요!"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사이에 비탈길 아래 사원쪽으로
부터 칠팔 명의 승려가 손에 곤봉을 들고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어디서 온 못된 것이 감히 소림사에서 행패를 부리느냐?"
장군보가 얼른 목청을 높여 외쳤다.
"여러 사형들, 고정하십시요! 이 분은....."
곽양이 이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 이름을 밝히지 마!"
그녀는 오늘 일이 크게 벌어질지 모르므로, 될수 있는 한 부모
님을 연루 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다시 재촉했다.
"어서 산을 내려가요! 절대 우리 부모님의 신분을 밝히지 말아
요!"
이때 그들의 뒤쪽 산 위에서도 대여섯 명의 승려가 달려왔다.
곽양은 눈살을 찌푸리며 더욱 다급하게 재촉했다.
"사내 대장부가 왜 이다지도 용단이 없죠? 대관절 떠날 거예요,
안 떠날 거예요?"
장군보는 각원대사의 눈치를 살폈다.
"스승님, 곽 낭자는 우리를 위해....."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아래쪽에서 또 네 명의 황의 승인이 뛰쳐
나와 날렵한 신법으로 비탈길 위로 달려왔다. 그들은 모두 무기
는 갖지 않았지만, 비범한 신법으로 미루어 무공이 상당한 경지
에 있는 것 같았다.
곽양은 주위의 상황이 이젠 혼자서 달아나기에도 때가 늦었음을
알고, 길게 숨을 들이쉬며 다음 변화를 기다렸다.
앞장서 달려온 승인이 그녀와 사 장(丈)의 간격을 두고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한당 수좌의 명을 전하는 바이니, 불청객은 속히 무기를 내
려놓고 산 아래 일위정(一韋亭)으로 내려가 다음 분부를 받들도
록 하시오!"
곽양은 냉소를 날렸다.
"소림사의 대화상이 벼슬아치의 못된 말투를 흉내내는군요. 속
세를 떠나 염불이나 하는 대화상들이 대송(大宋) 황제의 관원이
라도 된단 말인가요? 아니면, 몽고(蒙古) 황제의 신하라도 된단
말입니까?"
이 무렵--------
송조(宋朝)의 국토는 이미 함락되어 소림사의 소재지는 벌써 몽
고관할에 들어갔다.
다만, 몽고 대군이 몇 년째 양양(襄陽)을 함락시키겨다 실패하
는 바람에 소림사까지 그 힘이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소
림사는 예전과 변함없는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승인은 곽양의 비웃는 듯한 말을 듣자 얼굴이 좀 붉어졌다. 자
신이 생각하기에도 사내 제자가 아닌 외부 사람에게 지나치게 명
령투로 말했다는 것을 깨닫고, 이번에는 합장을 하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여시주께서 무슨 일로 폐사를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무
기를 내려놓으시고 일위정으로 가서 기다려 주십시오. 따끈한 차
라도 대접해 올리겠습니다."
곽양은 상대방의 말투가 부드러워지자 이를 기회삼아 일을 마무
리 지으려했다.
"사내로 들어기지 못하게 한다면 그만두죠. 흥! 혹시 소림사안
에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될 보물 단지라도 있나요!"
이에 장군보에게 눈짓을 하며 나직이 물었다.
"같이 떠나지 않겠어?"
장군보는 고개를 내두르며 스승님을 모셔야 한다는 뜻으로 살짝
턱으로 각원대사를 가르켰다.
곽양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좋아, 나 혼자 떠나는 수밖에 없겠군!"
그녀는 비탈길 아래로 달려내려갔다.
첫번째 황의 승인이 옆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그러나 두 번째
승인과 세 번째 승려가 동시에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무기를 내려놓고 가시오!"
곽양은 대뜸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검을 쥐었다.
첫 번째 승인이 입을 열었다.
"여시주께서 산 아래로 내려가시면, 우린 즉시 보검을 돌려드릴
겨요. 이것은 소림사가 천 년 동안 엄수해 온 규칙이니 양해해
주십시오."
곽양은 그가 예의를 갖추고 정중하게 말하자 내심 망설여 졌다.
'만약 단검을 내놓지 않으면 틀림없이 싸움이 벌어질 텐데, 나
혼자서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당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
다고 해서 단검을 풀어놓으면 부모님과 여러 사람들의 체면이 손
상될 게 뻔한데........'
그녀가 망설이며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
기 눈앞에 황영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차가운 호통이 들려왔다.
"검을 하고 소림사에 나타나 사람까지 다치게 했으니, 이런 법
이 어디 있나?"
이어 경풍(勁風)이 일며 곽양의 검을 나꿔채려 했다.
이 승인이 서둘러 출수만 하지 않았더라도, 곽양은 스스로 검을
풀어 놓았을 것이다. 그녀는 언니인 곽부(郭芙)와 성격이 달라
비록 호방한 면은 있지만 경솔하지는 않았다. 당장 자신이 처한
상황이 불리하므로, 모든 것을 꾹 참았다가 나중에 웃어른들과
상의 해 체면을 만회할 생각이었다. 한데, 상대방이 갑자기 기습
을 가해 오자 오기가 생겼다.
이 승인의 금나수법(檎拿手法)은 날카로우면서도 절묘했다. 그
는 기습을 가하기 전부터 단단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속세를 떠
난 승려가 감을 한 자루 가운데 두고 젊은 여자와 함께 서로 끌
고 당기는 것은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므로, 단 일격에 검을 빼
앗아 오려고 했다. 하여, 검집을 나꿔쥐는 동시, 왼손으로 곽양
의 어깨를 향해 장풍(掌風)을 뻗어 냈다. 곽양이 스스로 검을 포
기하고 물러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순순히 검을 빼앗길 곽양이 아니었다. 그녀는 상대방의
장풍을 피해 뒤로 물러나면서 검을 뽑았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쥐고 있는 검집은 포기한 채 검만 뽑은 것이다. 순간, 그녀의 검
은 허공에 싸은 "한 광채를 뿌렸다. 그와 동시에 검집을 나꿔쥔
승인은, 왼손 두 손가락이 절단되며 그 고통으로 인해 검집을 떨
어뜨리고 황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승인들은 동문(同門)이 부상
을 당한것을 보자, 격노하며 일제히 곤봉을 휘둘러 공격해 왔
다.
그녀는 곧 가전비학인 낙영검법(落影劍法)을 펼치며 산 아래로
뚫고 내려갔다. 승인들은 삼열로 나누어 그녀의 앞을 막았다.
낙영검법은 바로 황약사(黃藥師)의 낙영장법((落影掌法)에서변
화시킨 것으로, 비록 옥소검법(玉篠劍法)만큼 절묘하지는 못해도
도화도(桃花島)의 절학임에 틀림없었다.
삽시간에 주위는 무수한 검화(劍花)로 뒤덮혔다. 눈깜짝할 사이
에 다시 두 명의 승려가 부상을 입었다. 뒤쪽에서 지켜 보고 있
던 승려들도 달려와 협공을 펼쳤다.
상례로 보아, 곽양은 중과부적으로 이십여 명이나 되는 소림 승
려들의 협공을 당해 낼 수 없었다. 하지남, 소림 승려들은 자비
(慈悲)를 근본으로 삼고 있는 만큼 그녀의 생명을 손상시키고 싶
지 않았다. 살수(殺手)를 피해, 단지 그녀를 쓰러뜨려 무기를 빼
앗고 훈계를 하여 쫓아버리는 게 목적이었다.
어런 상황아래 곽양의 검법이 뜻밖에도 절묘하여 승려들은 좀처
럼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승려들은 처음엔 상대가 한낱 묘령
의 여인이므로,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검법이 정교한 것을 보고 비로소 그녀가 범상치 않은 내
력을 지녔다는 것을 깨닫고 뒷일을 생각해 도욱 지나친 공격을
펼치지 못했다.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한 사람을 시켜 나한당 수
좌인 무색선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잠시 후--------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키가 훤칠하고 깡마른 노승
이 느긋한 걸음으로 가까이 걸어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싸움을
지켜보았다.
두 명의 승인이 얼른 그에게 다가가 나직이 아뢰었다.
곽양은 이미 지쳐 있었다. 따라서 검법도 흩어져 아슬아슬하게
몸을 피하며 소리쳤다.
"무학의 발상지라더니, 열댓 명의 화상이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소림의 무학이란 말이냐?"
노승은 바로 나한당의 수좌인 무색선사였다. 그는 곽양의 외침
을 듣자 이내 명령을 했다.
"모두 손을 거두어라!"
승인들은 즉시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무색선사는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낭자의 이름은 무엇이며 영존(令尊)과 영사(令師)는 어느분인
가? 그리고 무슨일로 소림사에 왔는지 밝혀줄 수 있겠나?"
곽양은 속으로 잽싸게 생각을 굴렸다.
'부모님의 이름을 밝힐 순 없다. 양대협의 소식을 얻기 위해 이
곳에 왔다는 것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털어 놓을 수 없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부모님이 아시면 틀림없이 나를 나무랄 테니 시
치미를 떼고 일단 이곳을 벗어나고 봐야겠다.........'
그녀는 곧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의 이름을 밝힐 수는 없어요. 난 다만 산 위의 경치가 아름
다워 감상하기 위해 올라온 것뿐이예요. 소림사가 황궁보다 더
무서운 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무엇 때문에 아무 이유 없
이 남의 무기를 몰수하려는 거죠? 내가 귀사 산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라도 했나요? 내가 알기로는, 애당초 달마조사가 무예를
전수한 것은 승려들의 튼튼한 몸을 단련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어
요. 한데 소림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 무예를 발전시켜 마치 무림
의 군주처럼 행세하는군요! 좋아요! 무기를 몰수하겠다면 기꺼이
드리죠. 나를 죽이지 않는 한 오늘 당한 이 억울한 일을 온 강호
에 알리겠어요!"
곽양은 본디 말에 재치가 있었다. 게다가 오늘 일은 그녀의 일
방적인 잘못도 아니었다. 무색선사는 그녀의 장황한 말을 듣고
나서 할말을 잃었다.
곽양은 내심 득의 만만해 하며 냉소를 짓더니 단검을 땅에 팽개
치고 곧장 앞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무색선사가 앞으로 비스듬히 걸음을 떼어 승포 소맷자락을 살짝
떨치자, 단검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는 단검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입을 열었다.
"낭자가 정녕 가문과 사문의 내력을 밝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면, 이 보검을 다시 거두게. 노승이 직접 산 아래까지 모셔다 주
겠네."
곽양은 생긋이 웃었다.
"역시 노화상께선 수양이 깊고 사리 판단이 바르시군요. 이것이
바로 명문의 풍도(風度)가 아니겠어요?"
그녀는 상대방 노승을 승복시켰다는 생각에 칭찬까지 아끼지 않
았다. 그러나 검을 받으려는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상대방의
손에서 한 갈래의 흡인력(吸引力)이 뻗쳐나와 검을 자기 쪽으로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하여 연거푸 세
번을 시도해 보았으나, 단검은 무색선사의 손에 뿌리가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그녀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좋아요! 공력이 심후하다는 걸 자랑하는 모양인데........"
그녀는 말을 내뱉으며 상대방의 왼쪽 목 부위 천정(天鼎), 거골
(巨骨) 두 군데 혈도를 향해 잽싸게 지풍을 나렸다. 무색은 흠칫
하며 얼른 몸을 비스듬히 피했다. 순간, 그가 전새했던 흡인력이
약간 흐트러졌고, 곽양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단검을 빼
앗아 왔다.
무색선사는 껄껄 웃었다.
"정말 멋진 난화불혈(蘭花拂穴) 수법이군. 낭자는 도화도주를
어떻게 칭호하는가?"
곽앙은 빙긋이 웃었다.
"도화도주 말인가요? 나는 그를 노동사(老東邪)라고 불러요!"
도화도주 동사 황약사는 곽양의 외조부로서, 성품이 괴팍하여
평생 예법을 무시하며 살아 다. 그는 자신의 외손녀를 소동사
(小東邪)라 불렀고, 곽양은 그를 노동사로 부렀다. 황약사는 그
럴 때마다 나무라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기뻐했다.
무색선사는 젊었을 때 녹림(綠林)에 몸담은 바가 있어, 비록 불
문에 귀의하여 수십년간 참수(參修)를 해왔지만 예전의 호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렇지않고서야 어떻게 양과와 친한 친분을
맺을 수 있었겠는가!
지금 눈앞에 있는 깜찍한 낭자가 한사코 사문을 숨기려 하자 무
슨 수를 써서라도 밝혀낼 생각으로 낭랑하게 웃으며 말했다.
"열 초식만 교환하면 낭자의 사문 내력을 알아낼 수 있을텐
데........."
곽양이 그의 말을 받았다.
"만약 열 추식 이내에 알아내지 못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무색 선사는 다시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낭자가 만약 노승의 열 초식을 받아낸다면, 무슨 요구든 응해
줄 용의가 있네."
곽양은 각원을 가리켰다.
"나는 이 대사님과 왕년에 일면지연(一面之緣)이 있어요. 그래
서 그를 대신해 한 가지 청을 드리고 싶어요. 만약 열 초식을
받아낸 후에도 나의 사문 내력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다시는 이
대사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무색선사는 심히 이상했다. 각원은 흐리명텅한 사람이고, 또한
수십 년간 오직 장경각에서 책만 관리해 왔을 뿐 외부 사람과 내
황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해서 이 낭자를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곧 정색을 하고 말했다.
"우리가 그를 괴롭힌 일은 없네. 본사의 승려들은 누구를 막론
하고, 계율을 어기면 벌을 받게 되어 있네. 그게 괴롭히는 거라
고는 할 수 없지."
곽양은 입을 삐쭉거리며 냉소를 날렸다.
"흥! 그렇다면 나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인가요?"
무색선사는 어이가 없든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낭자의 요구대로 하지. 만약, 노승이 지면 각원을 대
신하여 물을 삼천 백 팔 번을 길겠네. 자, 이제부터 출수를 할
테니 조심하게!"
곽양은 그와 얘기를 나눌 때, 이미 속으로 결정한 것이 있었다.
'이 노화상의 기(氣)가 태산처럼 온중한 것을 보니 무공이 대단
한 것 같다. 만약 그가 먼저 출수를 하면 난 전력을 다해 방어해
야 하므로, 부득이 부모님의 무학을 펼쳐야만 한다. 그러니, 내
가 먼저 기선을 잡아 십 초식을 전개해야지......'
하여, 곽양은 상대방이 공격을 전개하기도 전에 단검을 가슴에
세워 곧장 뻗어냈다. 바로 낙영검법 중에 만자천홍(萬紫千紅)이
란 초식이었다. 이것은 검 끝을 파르르 떨리게 하여 상대방이 어
느 부위를 겨냥하는지 종잡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무색선사는 허실(虛實)을 점칠 수 없어 일단 정면 대결을 피하
며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곽양의 외침이 터졌
다.
"제 이 초식이예요!"
단검이 원을 그리는 듯하며 이번에는 아래서 위로 찔러 올라갔
다. 이 검초는 전진파(全眞派)의 천신도현(天神到懸)이란 초식이
었다.
무색의 입에서 짤막한 일성이 뱉어졌다.
"멋진 전진검법이군!"
곽양이 쏘아붙이듯 한 마디 응수했다.
"과찬은 아직 일러요!"
그녀의 일검이 빗나가지 무색선사는 수세에서 공세로 바꾸며 손
목을 나꿔채 왔다.
곽양은 흠칫 놀랐다.
'역시 대단하군. 이런 예리한 검초하에서 적수공권(赤手空拳)으
로 반격을 해오다니.......'
그의 손끝이 가까이 뻗쳐오자 단검을 질풍처럼 펼쳐, 뜻밖에도
타구봉법(打拘棒法) 중에 한 초식인 악견난로(惡犬爛路)를 시권
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개방 전임 방주였던 노유각(盧有脚)과 친분
을 맺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예를 가르쳐 달라고 때를 썼었
다. 개방은 법규가 엄했고, 게다가 타구봉법은 개방의 상징적인
진방비학(鎭幇秘學)이므로, 방주 계승인이 아니면 전수받지 못하
게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생떼에 못 이겨 몇 번 얼버무리는 동
작에서, 곽양은 한두 초식을 훔쳐 배울수가 있었다.
더군다나 선임 방주인 황용(黃龍)은 그녀의 어머니고, 현임 방
주 야율제(耶律齊)는 형부이므로 타구봉법을 여러번 접할 기회가
있었다. 비록 초식 속에 담겨져 있는 오묘한 변화를 모두 알 수
는 없지만, 수박 곁핥기식으로 전개한 것만으로도 위력이 대단했
다.
무색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목에 닿으려는 순간, 갑자기 백광이
번뜩이며 검날의 방향에 절묘한 변화가 일어, 하마터면 다섯 손
가락이 잘라질 뻔했다. 다행히도 무색선사는 무공이 탁월해 신속
하게 초식을 변화시켜 그 긴박한 상황에서 두 걸음 물러났다. 간
신히 위기를 모면했지만, 무색선사의 왼쪽 소매가 단검에 의해
찢겨져 나갔다. 무색선사는 아연실색하며 등에 식은땀이 배었다.
곽양은 득의 양양해 하며 입가에 미소를 띄고 물었다.
"이게 무슨 검법인지 아세요?"
사실 천하 무림에도 이러한 검법은 없었다. 단지 그녀가 훔쳐
배운 타구봉법을 검법으로 응용했을 뿐이다. 타구봉법은 워낙 현
묘하여, 곽양이 사이비로 전개했는데도 이 명성이 쟁쟁한 소림의
고승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무색선사는 입이 딱 벌어진
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곽양은 무척이나 안타까왔다.
'계속 타구봉법을 전개하면 틀림없이 이 노화상을 격파시킬 수
있을 텐데, 더 이상 제대로 아는 것이 없으니.......'
그녀는 무색선사가 숨을 돌리기도 전에 앞으로 표연히 미끄러져
가며, 수중의 단검을 경쾌하레 떨쳤다. 이러한 자세는 흡사 선녀
하볍을 연상케 했으며, 검날이 노린것은 무색선사의 하반신이었
다.
이것은 소용네에게서 배운 옥녀검법중에 소원예국(小園藝菊)이
란 초식이었다. 옥녀검법은 왕녕에 임조영(林朝英) 여협이 창안
한 것으로서, 비단 검초가 매서울 뿐 아니라 탈속한 자세와 우아
한 손놀림에 중점을 두었다.
주위에 있는 승려들은, 난생 처음 보는 절미(絶美)한 검법에 넋
을 잃은 듯 눈이 휘둥그래졌다. 소림파의 달마검법(達摩劍法)과,
나한검법(羅漢劍法)은 모두 강맹한 것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옥
녀검법은 그와는 정반대이며 강호에 선보인 적이 많지 않았다.
사실 검법의 경지로 따진다면, 옥녀검법이 꼭 소림의 각종 검법
을 능가한다고는 단언할 수 없었다. 단지 옆에서 보기에 절로 감
탄이 나올 정도로 멋드러진 검법일 뿐 이었다. 무색선사는 이렇
게 아름다운 검법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옆으로 살짝 미끄러
지며 몸을 피했다. 그러나 곽양의 검법은 이내 변하여 동서로 번
갈아 번뜩였다.
한쪽에서 넋을잃고 바라보던 장군보의 입에서 갑자기 짤막한 경
탕이 터져 나왔다.
"앗 ? !"
곽양의 이 초식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라 하여, 바로 삼년 전
에 양과가 화산에서 장군보에게 전수해 준 장법이 아닌가! 당시
곽양은 옆에서 지켜보았는데 지금 검법으로 변화시켜 시전한 것
이다. 비록 그 위력은 감소됐지만 상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기에는 충분했다.
곽양이 이미 다섯 초식을 펼쳤는데도, 무색선사는 아무런 실마
리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는 젊었을 때 강호를 종횡하며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게다가 십여 년 전부터 나한당 수좌직을 맡아오
면서, 소림사의 무학을 보다 더 보강시키기 위해 각문파의 무하
을 연구해 왔다. 그래서 자신있게 열 초식 이내에 사문 내력을
알아내겠다고 곽양과 약속을 한 것이었다. 한데,곽양의 부모와
사문의 사람들이 모두 당대의 일류 고수이며, 그녀가 그들의 무
공 중에서 자기 멋대로 변화시킨 초식만 전개할 줄이야 어찌 생
각이나 했겠는가! 무색선사는 갈수록 어리둥절해질 뿐이었다.
사통팔달의 초식이 끝나자, 무색선사는 내심 느끼는 바가있었
다.
'그녀가 먼저 출초하도록 내버려두면, 십 초식이 아니라 백 초
식이 지나도 확실한 것을 알아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내
가 주동이 되어 맹렬한 공격을 퍼부면 어쩔 수 없이 본문의 무학
을 펼치게 되겠지.....!'
그의 생각은 즉시 행동으로 옮겨져, 상반신을 왼쪽으로 돌리며
일초 쌍관수(雙貫手)를 펼쳐냈다. 쌍장의 호구(虎口)를 곁붙여
손가락을 부채살 모양으로 펼쳐 밀어낸 것이다. 순간, 엄청난 힘
줄기가 성난 파도인 양 곽양에게 휘몰아쳐 갔다.곽양은 정면 대
결할 엄두가 나지 않아, 몸을 절묘하게 비틀며 힘줄기 사이로 미
끄러져 갔다. 그녀는 왕년에 흑룡담(黑龍潭)에서 영고(瑛姑)각
양과와 싸우다가 불리해지자, 니추공(泥鰍功)을 전개해 교묘히
빠져 나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대로 흉내를 낸 것이다. 그녀
의 무공과 신법은 물론 영고와 비교가 될 수 없지만, 무색선사에
겐 그녀에게 살술르 전개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가볍게
빠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무색선사는 저절로 갈채를 보냈다.
"훌륭한 신법이군, 다시 일초를 받아라!"
외침과 함께 왼손으로 원을 그려 팔꿈치를 가슴에 붙이고 호구
를 위로 했으니, 바로 소림권(小林拳)중에 황앵낙가(黃鶯落架)였
다.
그는 소림의 무학대사(武學大師)로서 비록 다른 문파의 무학에
대해 곽양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지만, 일초 일식이 모두 순수한
본문 무공이었다.
소림권법은 단단한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겉보기에는
평범하지만 일단 심오한 경지로 연마하면 그 위력이 무공무진했
다. 그가 왼손으로 원을 그리는 순간, 곽양은 이미 상반신이 전
부 그의 장력 범위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얼른 검의 손잡이를 거꾸로 돌려, 검으로서 손가락을 대신하여
무수문(武修門)으로부터 배운 일양지(一陽指)를 전개했다. 그녀
가 노린 것은 무색선사의 손목 부위 완골(腕骨), 양곡(陽谷), 양
노(養老) 세 구네 혈도였다. 그녀가 배운 일양지의 점혈수법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불과했다. 그러나 단 한 번에 세 군데 혈
도를 노렸으니, 이게 바로 일양지의 정수였다.
일등대사(一燈大師)의 일양지는 만천하에 명성이 알려져 있어,
무색선사는 이내 간파하고 깜짝 놀라며 황급히 손을 거두어 초식
을 변화시켰다.
만약에 무색선사가 손을 거두지 않았다면, 곽양이 전개한 일양
지가 빈껍데기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곽양은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노화상께서도 일양지의 위력을 잘 알고 있군요!"
무색선사는 냉소를 날리며 단봉조양(單鳳朝陽)의 초식을 격출해
냈다. 이 일초는 쌍장을 넓게 벌려 큰 원을 그리며 밀어내는 것
으로, 그 힘줄기가 미치는 범위가 매우 넓었다. 곽양은 도저히
피할 수 없어 손에 쥐고 있는 단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상대방이 자기에게 악랄한 살수를 전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별로 당황하지 않고 쌍권을 교차시켜, 늙은 개구장
이 주백통(周伯通)의 걸작인 칠십이로 공명권(七十二路 空明拳)
중에 오십 사 초식인 묘수공공(妙手空空)을 펼쳐 냈다.
이 권법은 주백통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으로 아직 강호에 전
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제아무리 견식이 넓은 무색선사라 해도
알아볼 리가 없었다.
무색은 곧 쌍장으로 다시 원을 그리며, 편화칠성(偏花七星)이란
초식을 펼쳐 전광석화같이 곽양의 손을 추려쳤다. 곽양이 만약
내력을 끌어올려 그와 정면 대결을 하지 않으면, 손목이 뒤로 젖
혀져 뼈가 꺾이게 될 것이다. 소림의 기본 무학인 이 편화칠성은
겉보기에 느린 것 같지만 사실은 빠르고, 언뜻 보아 가벼운 것
같지만 실은 엄청난 힘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비록 츰소림의
자세지만,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내력은 신화소림의 정수에서 비
롯된 것이다.
곽양은 위기의 상황에서 잽싸게 생각을 굴렸다.
'설마 정말로 내 손목뼈를 부러뜨리진 않겠지!'
그녀는 창졸간에 초식을 변화시켜 철포선수(鐵葡扇手)인 장풍대
장풍으로 반격해 갔다. 이 초식은 그녀가 무수문의 아내 완안평
(完顔萍)으로부터 배운 것으로서, 왕년에 철장수상표(鐵掌水上
飄) 구천인(求千刃)이 남긴 심법에 근거를 둔것이다. 이 철장공
(鐵掌功)은 모든 장법 중 강맹한 면에서 으뜸으로 꼽았다.
무색선사는 십수 년간 장법을 연구해 왔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 젊은 낭자가 난데없이 이 철장방(鐵掌幇)의 진방비학
을 전개하는 것을 보자 깜작 놀랐다. 정면대결을 하자니 상대방
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고, 또한 철장공에 대해 어느 정도 경원
심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세히 생각을 굴릴 겨를도 없이, 얼른
손을 거두고 뒤로 다섯 자 가량 물러났다.
곽양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여유있는 미소를 지었다.
"이번이 마지막 초식이니 내가 어느 문파인지 자세히 보세요."
그녀는 왼손을 펼치며 앞으로 미끄러져가는 동시에, 오른손으로
무색선사의 턱을 노렸다. 무색과 옆에서 관전하고 있는 모든 사
람의 입에서 놀람의 외침이 터진 것도 바로 이때였다. 곽양이 마
지막으로 펼친 초식은 고해회두(苦海回頭)로 바로 소림파 정통
무예인 나한권법 중의 한 초식이 아닌가! 다른 문파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초식이었다.
이 초식의 묘미는 왼손으로 상대방의 머리를 누르고, 오른손으
로 턱을 받쳐 비트는 데 있었다. 일단 이 초식이 성공을 거두면,
심할 경우 상대의 목이 부러지고, 약한 경우는 관절이 빠지는 실
로 무서운 살초(殺招)였다.
무색선사는 그녀가 이 초식을 펼치자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공자 앞에서 효경읽기요, 하마 앞에서 입 크다고 으스대는 것이
아닌가!
무색선사는 은근히 화가 치밀면서도 한편으론 웃음이 나왔다.
그는 수십 년 전에 이미 이 권법을 익혀 손바닥 보듯이 훤해, 설
령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 누가 이 권법으로 공격해 온다 해도 가
볍게 와해시킬 수 있었다.
그는 곧 바람에 돛단배 가듯 지극히 자연스럽게 비스듬히 걸음
을 떼어, 왼손으로 수평을 그리며 살짝 손목을 젖혀 곽양의 오른
쪽 어깨를 나꿔잡고 오른손을 전공석화처럼 그녀의 뒷덜미로 뻗
어냈다. 이 초식은 협산초해(挾山超海)라 하며, 고해회두를 파괴
하는 오직 하나의 수법이었다.
다음 순간, 무색선사가 쌍장에 힘을 주자 곽양의 몸이 지면에서
한 자 가량 번쩍 들려졌다. 곽양이 잽싸게 팔꿈치로 상대방의 손
목을 공격하면, 위기를 모면하는 동시에 도리어 상대방을 제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색선사의 이 일초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라 그녀의발끝이 이미 지면에서 벗어났으니, 더 이상 초식을
전개할 수 없었다. 자연히 곽양이 패한 것이다.
무색선사는 손쉽게 그녀를 제압시켰으나, 문득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뿔사! 제압하는 데만 신경을 쓰다 보니 사문 내력을 알아내
는 원래 목적을 소홀히 했구나! 그녀가 전개한 열 초식은 모두
다른 열 문파의 무학이니 뭐라고 단언을 해야 된단 말인가? 소림
파라고 할 수동 없는 노릇이고.......'
곽양은 몸을 뒤츨며 소리쳤다.
"어서 손을 놔요!"
이때, 그녀의 몸에서 한 가지 물건이 떨어졌다.
곽양은 다시 소리쳤다.
"노화상, 어서 손을 놓지 못하겠어요!"
무색선사는 이미 남녀유별을 초월한 고승이므로,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노승의 나이는 낭자의 할아버지 뻘인데, 무엇을 두려워 하는
가?"
이렇게 말하며 손을 살짝 밀어내, 그녀를 이장 밖으로 던져 버
렸다.
이번 싸움은 비록 곽양이 마지막에 제압당했지만, 열 초식 이내
에 그녀의 사문 내력을 알아내지 못했으니 무색선사는 약속한 대
로 패배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막 패배를 시인하려는
데, 문득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거무튀튀한 물체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쇠로 만든 한 쌍의 작은 나한(羅漢)이었다.
곽양은 사뿐히 땅에 내려서면서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대화상, 패배를 시인하겠죠?"
무색은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노승이 어째서 패했다는 겉가? 난 영존이 대협 곽정이며 영당
이 여협 황용, 그리고 도화도주가 낭자의 외조부라는 사실을 알
고 있네, 그리고 낭자의 이름은 양양(襄陽)의 양(襄)자를 땄으
며, 영준이 강남칠괴(江南七怪), 도화도, 구지신개(九指神개),
전진파의 비학을 한몸에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
이 말을 들은 곽양은 그만 눈이 휘둥그래지며 입이 딱 벌어져,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이 노화상은 정말 귀신 같군. 내가 열 초식을 제멋대로 전개했
는데도 용케 내력을 알아내다니.....'
무색선사는 그녀가 망연자실해 있는 것을 보자 히죽 웃으며, 그
한 쌍의 작은 철나한을 집어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 놓았다.
"곽 낭자, 이 노승이 어찌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는가? 사실은 이
철나한을 보고 낭자의 내력을 알아낸 걸세. 양대협은 편안하신
가?"
곽양은 명해졌다가 이내 깨달은 바가 있었다.
"앗! 그럼 무색선사시군요? 이 철나한은 선사께서 저의 생일 선
물로 주신 것이니 저의 내력을 알아낸 게 당연하죠. 제가 이곳에
온 것도 양대협 부부의 소식을 묻기 위함이었는데, 선사께서도
그들을 보지 못한 모양이군요?"
무색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몇 년 전에, 양대협은 폐사에 와서 며칠 머물며 나와 많은 얘
기를 나누었네. 나중에 그가 양양에서 적과 싸운다는 소식을 듣
고 노승도 달려가 미력이나마 보탰네. 한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
지 전혀 알 수가 없네."
곽양은 잠시 멍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 양대협의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무공이 그렇게 고강하셨
군요. 참, 저에게 생일 선물을 주셨는데 아직 인사를 드리지 못
했어요. 오늘 이 자리를 빌어 정식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겠
어요."
"싸워야 서로 알게 된다더니, 우리가 바로 그 꼴이군. 나중에
양대협을 만나면 이 노화상이 후배를 괴롭혔다고 고해 바치진 말
게."
곽양은 먼산을 바로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언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곽양이 열 여섯 번째 생일을 맞던 날, 양과는 갑자기 기발한 착
상을 하고는 강호 친구들에게 청첩을 띄워, 그들로 하여금 양양
아로 달려와 곽양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던 것이다. 당시 흑백양
도(黑白兩道)의 무수한 고수들이 양과의 체면을 행각해 앞을 다
투어 양양으로 몰려들었다. 설령 틈을 낼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
라도, 대신 인편으로 진귀한 선물을 보내 왔었다. 무색선사가 인
편으로 보내 온 생일 선물이 바로 이 한 쌍의 철나한이었다.
이 철나한의 뱃속에는 절묘한 기관 장치가 되어 있어, 태엽을
감으면 그것이 소림 나한권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삼백 년전
소림사의 한 기승(奇僧)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것으로, 실로 졍교
하기 이를데 없었다. 곽양은 갖고 놀기가 재미있기 때문에 늘 몸
에 지녀 왔는데, 오늘 뜻하지 않게 품 속에서 떨어져 무색선사로
하여금 자신의 내력을 알아차리게 한 것이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펼친 소림권법도 바로 이 철나한을 통해 배운 것이다.
무색선사는 자상하게 웃으며 말했다.
"본사는 역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사규(寺規) 때문에 곽 낭자를
안으로 모셔 대접할 수 없으니, 실로 유감이라 생각하네."
곽양은 이곳에서도 양과의 소식을 알아내지 못하자 시무룩해져
있었다.
"괜찮아요. 물으려 한 것은 이미 다 물었는걸요."
무색선사는 각원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저 사제(師弟)에 관한 일은 나중에 천천히 설명해 주겠네. 이
제 이 노화상이 낭자를 모시고 하산하여 한 턱 두둑하게 내고 싶
은데, 낭자의 생각은 어떤가?"
무색선사는 소림사에서 직위가 대단히 높은 고승인데 한낱 젊은
낭자에게 이렇게후한 대접을 베풀다니, 중승들은 그저 어리둥절
할 따름이었다.
곽양은 정중히 사양했다.
"저는 그런 과분한 대접을 받을 수 없어요. 조금 전에 제가 경
솔한 탓으로 몇 분 대사를 노하게 했으니, 대신 사과의 뜻을 전
해 주세요.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뵙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작별을 고할까 해요."
이렇게 말하며 공손히 예를 올리고, 곧 몸을 돌려 비탈길 아래
로 내려갔다.
무색선사는 그녀의 뒤를 쫓아가며 웃는 낯으로 말했다.
"이 노화상더러 전송하지 말라고 해도 전송을 해야겠네. 그 해,
노화상은 양대협의 분부를 받들어 남양(南陽)의 몽고대군(蒙古大
軍) 식량 창고와 무기 창고를 불지른 후 곧장 사내로 돌아오는
바람에 미쳐 낭자의 생일 축하연에 참석하지 못했네. 그 일이 늘
가슴에 걸렸는데 오늘 직접 본사를 찾아준 이 마당에, 내 삼십
리를 전송해 주지 않고서야 어찌 귀빈을 대한 예라 할 수 있겠는
가?"
곽양은 그의 성의와 호탕한 말투가 맘에 들어 망년지교(忘年之
交)를 맺기로 작심하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두 사람은 곧 어깨를 나란히 하고 비탈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
들이 일위정을 막 지나쳤을 때 등 뒤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려와
돌아보니, 장군보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서 뒤따라오는
것이었다.
곽양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장 형제도 나를 바래다 주로 오는 건가?"
장군보는 얼굴을 약간 붉히며 대답했다.
"네!"
바로 이때였다. 산문 쪽에서 한 승인이 질풍 같은 신법을 전개
해 내려왔다. 무색은 눈쌀을 가볍게 찌푸렸다.
"무슨 일인데, 저리 수선인가?"
승인은 이내 가까이 달려와 정중히 인사를 하더니, 나직이 몇
마디를 아뢰었다. 그러자 무색선사의 안색이 대뜸 변하며 다르치
듯 물었다.
"그게 사실이란 말이냐?"
승인은 몸을 숙이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장문인께서 급히 수좌를 모셔오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곽양은 무색선사가 난처해 하는 것을 보자 얼른 입을 열었다.
"노선사, 친구를 사귐에 있어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
지 형식에 얽매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급한 잎이 생기신 모양
인데 어서 돌아가세요.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강호에서 만나 서
로 회포를 풀어도 되잖아요?"
무색선사는 매우 기뻐했다.
"양대협이 낭자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를 알 것 같네. 낭자야말
로 인중영협(人中英挾)이며 여중장부(女中丈夫)일세. 앞으로 진
정한 친구가 되고 싶네."
곽양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노선사는양대협의 친구이시니 일찌기 저의 친구였던 셈이에
요."
두 사람은 곧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무색은 산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곽양은 계속 산길을 따라 하산했다. 장군보는 시종 그녀
와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고 대여섯 걸음의 간격을 두고
뒤따랐다.
곽양이 걸으면서 물었다.
"장 형제, 그들은 무엇 때문에 자네 스승님을 괴롭히는 거지?
자네 스승님은 그 심후한 내공으로 굳이 그들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을 텐데........"
장군보는 앞으로 두 걸음 더 나아가며 대답했다.
"사내의 규율이 엄해 누굴 막론하고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게
돼 있어요. 그들이 일부러 스승님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에요."
곽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네의 스승님 같은 정인군자는 세상에 둘도 없을 텐데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거지?"
장군보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낭자께서도 알고 있는 일입니다. 바로 그 능가경(稜伽經)
때문이죠."
"아니?..... 그 소상자(簫湘子)와 윤극서(尹克西) 두 녀석이 훔
쳐간 경서 말인가?"
"그래요. 그날 화산 절정에서 소인은 양과대협의 지시에 따라
직접 그 두 사람의 몸을 뒤져보았습니다. 화산에서 내려온 뒤 다
시는 그들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어요. 스승님과 저는 어쩔 수
없이 사내로 돌아와 장문인께 사실대로 보고했어요. 그 능가경은
달마조사께서 직접 쓰신 것으로 계율당의 수좌께서 스승님의 불
찰로 그 귀중한 경서를 잃었다면서 마땅한 중벌을 내리신 겁니
다.
듣고 난 곽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땅한 벌이 아니라 화풀이를 하는 걸세."
그녀는 장군보보다 몇 살 위지만 누나로 자처하며 다시 물었다.
"그 일 때문에 자네의 스승님께 말을 못하게 하는 중벌을 내렸
단 말인가?"
장군보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것은 사내에서 역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규율이에요. 사슬에
묶인 채 물알 기도고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죠. 사내의 노선사
들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는데, 그것이 비록 벌이긴 하지만
벌받는 사람에게도 이득이 있대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정신적
인 수양을 닦는 거며, 물을 긷는 것은 신체적인 단련을 하는 거
래요."
곽양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자네 스승님은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무
공을 연마하고 있는 중인데, 내가 공연히 방해를 한 셈이군.
장군보는 얼른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낭자의 깊은 호의를 스승님과 저는 모두 가슴 속에 새기고 있
어요. 아마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곽양은 길게 숨을 들이쉬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나를 벌써 깨끗이 잊은 모양이야.....'
이때, 숲속에서 나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귀는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곽양은 장군보에게,
"장 형제, 이제 그만 돌아가."
라고 말하더니 휘파람을 불어 나귀를 가까이 불렀다.
장군보는 못내 이별을 아쉬워했으나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곽양은 손에 쥐고 있는 한 쌍의 철나한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줄께."
장군보는 머뭇거리며 선뜻 받지 못했다.
"그..... 그건......."
"그냥 주고 싶어서 그래. 어서 받아둬."
"나..... 나는......."
곽양은 철나한을 그의 손에 쥐어 주고는 이내 몸을 날려 나귀
등에 오랐다.
갑자기------ 언덕 너머 돌계단 위쪽에서 한 사람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곽 낭자! 잠깐만 기다려 주게."
바로 무색선사가 다시 사문 안에서 뛰어왔다. 곽양은 내심 혀를
찼다.
"나를 끝까지 전송할 모양인데, 정말 고집이 대단한 노화상이시
군......"
무색선사는 신법이 뛰어나 눈깜짝할 사이에 앞으로 가까이 달려
왔다. 그는 먼저 장군보에게 위엄있게 말했다.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어서 사내로 돌아가라!"
장군보는 공손히 몸을 숙여 대답한 후 산위로 올라갔다.
무색선사는 그가 떠나가자, 비로소 품 속에서 서찰 한 장을 꺼
내 곽양을 똑바로 주시하며 물었다.
"곽 낭자, 누가 써보낸 건지 알겠나?"
곽양은 나귀에서 내려 서찰을 받았다. 그곳에는 두 줄의 글월이
적혀 있었다.
------소림파의 무학이 중원과 서역(西域)에서 옰 동안 웅림(雄
臨)해 온 것을 알고 있소. 열흘 후 곤륜삼성(崑崙三聖)이 직접
찾아와 가르침을 받으리라.-------
필체가 빼어나고 웅후한 힘이 곁들여 있었다. 곽양은 고개를 갸
우뚱했다.
"곤륜삼성이 누구죠? 이 세 사람의 말투는 대단한 것 같은데
요."
"낭자도 역시 이들을 모르는 모양이군."
"전혀 몰라요. 곤륜삼성이란 이름은 부모님에게서도 들어본 적
이 없어요."
무색은 눈쌀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렇다면 이상하군."
곽양은 얼른 반문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예요?"
무색선사의 표정이 심히 달라졌다.
"낭자는 이 노화상과 친구이니 솔직히 말해야겠군. 이 서찰이
어떻게 우리 수중에 들어왔는지 아는가?"
곽양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곤륜삼성이 사람을 시켜 보내온 것이겠죠!"
무색선사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만약 사람을 시켜 보내온 것이라면 조금도 이상할 게 없지. 가
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소림사는 부
색 년 동안 무학의 발상지로 알려져 왔기 때문에 계속해서 많은
고수들이 무학을 겨루기 위해 도전해 왔네. 그 때마다 우린 찾아
온 무림인들을 깍듯이 대접했고, 무공을 겨루는 일에 대해선 한
사코 사절을 해왔네. 알다시피, 우린속세를 떠난 사람들이 아닌
가? 무쟁(無爭)을 근본으로 삼아야 할 우리가 일일이 그들을 받
아들여 싸움질이나 한다면 어찌 불문 제자라 할 수 있겠는가?"
곽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보니 그렇군요."
무색은 다시 말했다.
"하지만 대단한 각오를 하고 찾아온 고수들인데, 우리가 한 수
펼쳐 보이기 전에 순순히 돌아갈 리가 있겠는가? 소림사의 나한
당은 바로 그러한 외래 고수들을 접대하는 일을 맡고 있네."
곽양은 빙긋이 웃었다.
"알고 보니 대화상의 직책은 전적으로 남들과 싸우는 거군요!"
무색선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반 고수들의 무공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본당의 제자들이
능히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이 노화상이 나설 필요는 없
네. 오늘은 낭자의 솜씨가 너무 비범했기 때문에 모처럼 직접 나
선 것뿐이네."
곽양은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처음부터 나를 높이 평가해 주셨군요."
무색선사는 그녀의 말에 껄껄 웃다가 무엇이 생각난 듯, 얼른
정색을 했다.
"늙으면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더니........ 엉뚱한 말만 늘어놓
고 있었군.솔직히 말해, 이 서찰은 나한당 항룡나한불상(降龍羅
漢佛像)의 손에서 발견된 것이네."
곽양은 이상하다고 느꼈다.
"누가 그 높은 불상의 손에다 서찰을 갖다 놓았죠?"
무색선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글쎄.....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사내의 승려가 수백 명이나
있는데, 만약 누가 잠입해 들어오면 모를 리가 있겠는가? 더우기
나한당에는 여덟 명의 제자가 밤낮으로 교대해 지키고 있었네.
조금 전에서야 이 서찰이 발견돼 급히 장문인께 보고를 울리게
되었고, 모두들 납득이 가지 않아 비로소 이 노화상을 급히 사내
로 불러들인 걸세."
여기까지 들은 곽양은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제가 그 곤륜삼성과 내통했다고 의심하는 모양이군요. 내가 일
부러 산문 밖에서 소란을 피우고 그 틈늘 타서 곤륜삼성이 나한
당으로 잠입해 들어가 서찰을 남겼다..... 이런 말이 아닌가요?"
무색은 숨김없이 얘기했다.
"이 노화상은 낭자를 절대 의심하지 않지만, 일이 묘하게도 우
연의 일치가 되어 낭자가 떠나자마자 나한당에서 이 서찰이 발견
되었네. 그러니 장문인과 무상(無相) 사제 등이 낭자를 의심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지."
곽양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그 세 녀석을 전혀 몰라요. 대화상, 뭐가 겁나나요? 열흘
후 그들이 정말 찾아온다 해도 따끔하게 혼을 내주면 되잖아요!"
무색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물론 두려워할 거야 없지. 낭자가 그들과 관련이 없다면, 이
노화상은 아무 걱정도 하지 않네."
곽양은 그의 호의를 알수 있었다. 혹시 곤륜삼성이 자기와 아는
사이라면 노화상의 입장이 난처해지기 때문이다.
"노화상, 그들의 글월을 보니 광기가 대단한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세요."
여기가지 말한 그녀는 홀연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사내에서 누가 그들과 내통하여 미리 서찰을 갖다 놓은
것이 아닐까요?"
무색선사는 고개를 내둘렀다.
"그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지만 절대 가능성이 없네. 황룡
나한불상의 손은 지면에서 백 자가 넘어, 평상시 청소를 할 때는
높은 사다리를 연결해 딛고 올라가야만 했네. 그 정도 높이를 단
숨에 날아오를 수 있는 자라면, 실로 찾아보기 드문 절세신법의
소유자일 걸세. 설령, 사내에 반도(叛徒)가 있다 해도 그 정도의
실력을 지녔을 리 만무하네."
곽양은 은근히 호기심이 생겼다. 곤륜삼성이 어떠한 인물이며,
소림을 찾아와 무공을 겨루게 되면 과연 승부가 어떻게 판가름날
지 자못 궁금했다. 하지만, 여인은 소림사로 들어갈 수 없으니
이 흥미진진한 구경을 직접 보지는 못할 것이다.
무색선사는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소림을 위해
대책을 강구 중인 것으로 알고 얼른 입을 열었다.
"소림은 천 년 동안 숱한 풍파를 겪어 왔네. 곤륜삼성이 제아무
리 뛰어난 무공을 지녔다 해도, 소림이란 천년고송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걸세. 보름 수쯤 강호의 풍문을 귀담아 들어보면 자연히
알게 될 걸세."
곽양은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노화상게서 장담하시니 틀림없겠죠. 좋아요, 보름 후에 기분
좋은 풍문이 나돌기를 바라겠어요."
그녀는 곧 나귀에 올라탔고, 두 사람은 마주 보며 마음과 마음
으로 미소를 나누었다.
곽양은 나귀를 몰고 하산하며 이미 속으로 한 가지 결정을 내렸
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흥미있는 구경을 놓치지 않겠다고!
그녀는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열흘 후에 무슨 방법으로 소림사에 잠입해 들어갈 수 있을까?'
뾰족한 수가 선뜻 떠오르지 않자 다음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 곤륜삼성의 실력이 평범하다면 별로 재미가 없을 텐데.....
하지만 할아버님이나 아버님, 그리고 양대협의 절반 정도의 실력
만 갖추었더라도 볼 만하겠군.......'
양과의 생각이 떠오르자 그녀는 다시 울적해졌다. 삼 년동안 방
방곡곡을 찾아헤맸건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적막과 공허뿐이
었다. 곽양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읊조렸다.
"종남산고묘장폐(綜南山古墓長閉), 만화요화락무성(萬花拗花落
無聲), 절정곡공산적적(絶情谷空山寂寂), 풍릉도냉월명명(風陵渡
冷月冥冥)........"
------종남산의 고묘는 영원히 폐쇄되고, 만화요의 꽃은 소리없
이 떨어지니, 절정곡은 텅 비어 적막함에 잠기어 퐁릉도의 달빛
만이 차갑구나......-----
그녀의 입에서 다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를 찾아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상념만 더욱 깊어지고, 번
뇌만 늘어날 게 아니겠는가? 그가 조용히 멀리 떠난것도 나를 위
함이 아니었던가? 그 모든 것이 경화수월(鏡花水月)처럼 허망된
것임을 알면서도 못내 이 상념의 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구
나.....'
그녀는 나귀가 이끄는 대로 소실산을 만유(漫遊)하며 서쪽으로
향했다.
어느덧 그녀는 숭산(嵩山)으로 접어들었다. 멀리 바라다보이는
소실산의 동쪽 봉우리가 창림(蒼林)에 둘러싸여, 우뚝 솟은 것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이렇게 며칠동안 산 속을노닐
다가 삼휴대(三休坮)에 당도했다. 곽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 번 쉬었다 가라는 뜻에서 삼휴라 이름지었거늘, 인간만사기
천휴(人間萬事幾千休)라....... 어찌 삼휴뿐이겠는가......?'
북쪽으로 길을 꺾어 산봉우리 하나를 넘어서자, 앞에 펼쳐진 경
치가 놀랄 만했다. 수백 그루의 고송이 창공을 배경으로 하여 무
리를 이루고 있으며, 멋드러지게 휘어진 가지위에 백로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어 세외도원(世外桃源)을 연상케 했다.
곽양이 이 아름다운 경관에 도치해 있는데, 홀연 산비탈길 움푹
패인 응달 뒤쪽에서 웬 거문고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곽양
은 내심 의아해 했다.
'이런 깊은 산중에서 거문고 뜯는 고인야사(高人倻士)가 있다
니......'
그녀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로부터 금기서화(琴棋書畵)를 배워
왔다. 비록 어느 분야도 남들에게 내세울 만큼 높은 경지를 터득
하지는 못했지만, 워낙 총명하고 엉뚱한 데가 있어 어머니와 논
금(論琴) 담서(談書)할 때 곧잘 남들이 생각해 내지 못하는 독특
한의견을 내놓곤 했었다. 그런 곽양인지라 거문고 소리를 듣자
호기심이 생겨, 곧 나귀에서 내려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겨갔다.
약 십여 장 정도 갔을까, 거문고 소리 속에 무수한 새들의 지저
귀는 소리가 한데 어울려 들려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자세히 들어보니 거문고 소리와 새소리가 서로
응답을 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곽양은 몸을 숨긴 채 거문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세 그루의 소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곳에 흰옷을 입은 남자가 등
진 채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리를 틀고 앉아 있는 그의 무
릎 위에 초미금(焦尾琴)이 놓여 있고, 손을 절묘하게 움직여 거
문고를 뜯고 있는 중이었다. 그 둘레 나무 위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뭇새들로 가득했다. 새들은 제각기 지저귀며 거문고 소리와
일문일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 어울려 합창을 하는 것 같기
도 했다.
곽양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머님께서는 금조(琴調)중에 이미 실전된지 오래된 공산조어
(空山鳥語)라는 신곡(神曲)이 있다고 하였는데, 혹시 바로 그 곡
이 아닐까?'
잠시 귀를 기울여 보니 거문고소리는 차츰 높아졌다. 하지만 높
아질수록 흐름이 더욱 온화해지며 결코 소란스럽지가 않았다.
그러자------
새떼들은 어 이상 지저귀지 않았다. 단지 허공에서 날개짓하는
소리가 크게 일며 동서남북으로부터 무수한 새들이 떼지어 날아
와 나뭇 가지에 내려 앉거나 원을 그리며 호공을 맴도았다. 새
들의 날개는 햇살을 받아 오색찬연한 빛이 발해지며 일대 기관
(奇觀)을 이루었다.
거문고 음률이 계속 들려오며 온 우주를 그 음률 속에 감싸버릴
듯했다. 곽양의 놀라움과 호기심은 갈수록 짙어졌다.
'거문고소리로 새떼를 끌어모을 수 있다면, 혹시 이 곡이 바로
백조조봉(百鳥朝鳳)이 아닐까?'
그녀는 외조부님이 이곳에 계시지 않는것을 애석하게 생각했다.
외조부의 천하무쌍한 옥소와 함께 어우러진다면 가히 병세쌍절이
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흰 옷의 사나이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랍은 음을 몇 번 튕기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었다.
"무장검(撫長劍), 일양미(一揚眉), 청수백석하리리(淸水白石何
離離)? 세간무지음(世間無知音), 종활천재(縱活千載), 역복하익
(亦復何益)?.........."
--------검을 어루만지며 눈썹을 휘날려 물줄기 따라 어디메로
흘러가는고? 세상에 이 소리를 아는자없으니 천 년을 산들 무슨
낙이 있으랴?-------
여기까지 읊조린 그는 거문고 아래서 한 자루의 장검을 뽑았다.
순간, 시퍼런 검광이 주위에 뿌려졌다. 곽양은 호기심어린 눈으
로 그의 동작을 지켜보았다.
'이제보니 문무(文武)를 겸비한 사람이군. 검법은 과연 어느 정
도일까?'
그는 고송 앞 공지로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검 끝으로 땅을 가
리키며 한 획 한 획 그어 나가기 시작했다. 곽양은 몹시 이상하
게 느껴졌다.
'세상에 저런 괴이한 검법이 있나? 검 끝으로 땅에 획을 그린다
고 해서 적을 제압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괴인
이군..........'
곽양이 은밀히 그의 검초를 세어보니 가로로 모두 열 아홈초를
그었다. 이어 검초가 세로로 바뀌어 역시 열 아홉 획을 그었다.
그의 검초는 종횡을 막론하고 시종 일직선으로 그어 내리기만 할
뿐, 변화가 없었다.
곽양은 그의 검세(劍勢)에 따라 손 끝으로 땅에다 그려보더니,
이내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가 전개한 것은 괴이한 검법이
아니라 검 끝으로 땅에다 종횡 열 아홉 줄의 바둑판을 그린 것이
다. 그는 바둑판을 그리고 나서 검 끝으로 좌상을 그린 것이다.
그는바둑판을 그리고 나서 검 끝으로 좌상각(左上角)과 우하각
(右下角)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어 우상각과 우하각에다
×표를 그렸다. 이번에는 곽양은 작은 동그라미와 ×표의 의미를
곧 알 수 있었다. 동그라미는 흰돌이며 ×표는 검은 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계속 그려나가다가 열 아홉 수에 이르자, 그는 갑자기
고개를 숙인 체 깊은 생각에 잠겼다. 대마를 이을 것인지 아니면
변(邊)을 취할 것인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곽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나하고 마찬가지로 적막한가 보지. 아무도 없는 산
속에서 거문고를 튕겨 새를 불러 모으고, 상대도 없이 홀로 바둑
을 두고 있으니.........'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흰 돌을 좌상각에 놓으며 검은 돌과
치열한 다툼을 벌여 나갔다. 삽시간에 묘수가 백출되었다. 북에
서 남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중원(中原)을 차지하기 위한 혈투가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나갔다.
곽양은 속출되는 모수에 빨려들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
차츰 가까이 접근해 갔다. 흰 돌의 포진은 시종 열세에 처해 있
어, 아흔 세 수째에 패가 되자 백세(白勢)가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여전히 억지로 버텨나갔다. 당국자미(當局者迷) 방관자
청(傍觀者淸)이란 말이 있듯이, 곽양은 비록 바둑 실력이 상댑다
뛰어나지 못하지만 전세를 보다 정확하게 짚을 수 있었다. 흰 돌
이 만약 대마를 계속 물고 늘어지면 불계패를 당할 게 뻔했다.
곽양은 안타까와 자신도 모르게 한 마디 토했다.
"중원을 포기하고 서역(西域)을 취하세요!"
그는 멍해졌다. 바둑판 서쪽 귀퉁이는 아직 허허 벌판인 상태이
므로, 패를 이용해 집을 확보해 나간다면 설령 복판을 전부 내준
다 해도 한판 승부를 걸어볼 만했다.
그는 곽양의 한 마디 귀띔을 듣자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좋은 생각이야!"
그는 곧 일사천리로 국세(局勢)를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누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생각난 듯 장검을 한쪽에 버리며 몸을
돌렸다.
"어느 고인인지는 몰라도 가르침을 주어 고맙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곽양이 몸을 숨기고 있는 쪽을 향해 포권의 예를
취했다.
곽양은 비로소 상대방 "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얼굴은
길쭉한 편이며, 패인 두 눈에선 날카로운 광채가 번뜩였다. 몸집
은 깡마른데다 나이는 서른 정도로 보였다.
곽양은 본디 성격이 호방하며 남녀유별을 무시한 채 당당히 앞
으로 걸어나가 입가에 미소를 띄고 말했다.
"조금 전에 귀하의 신곡에 이끌려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또
다시 흑백교전(黑白交戰)에 넋을 빼앗겨 무례하게도 훈수를 두게
되었으니 너그러이 양해해 주십시요."
그는 상대가 묘령의 소녀라는 것을 보자 약간 의아해 했다. 그
러나 곧 만면에 미소를 띄고 낭랑하게 말했다.
"낭자께서도 거문고에 대해 조예가 깊은 것 같은데, 무례가 되
지 않는다면 한 곡 들려 주시겠소?"
곽양은 역시 곽양이었다. 그녀는 주저없이 기꺼이 상대방의 청
을 받아 들였다.
"저의 어머님으로부터 탄금(彈琴)을 배웠지만, 귀하의 신기(神
技)와는 거리가 멀어요. 하지만 귀하의 묘곡(妙曲)을 들었으니
한 곡 답례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한 곡 뜯을 테니 흉보지나
마세요."
"내 어찌 감히......"
그는 거문고를 두 손으로 받쳐들어 곽양에게 건네주었다. 거문
고는 고색찬연하여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 같았다. 곽양은 금현
(琴絃)을 한 번 어루만지고 나서 뜯기 시작했다. 그녀가 뜯는 곡
은 고반(考槃)이었다. 그녀의 주법은 별로걸출하지 못했다. 하
지만 백의인의 얼굴에는 환희의 빛이 피어 올랐다. 그는 금성에
따라 나직이 읊어나갔다.
"고반재간(考槃在澗) 석인지관(碩人之寬) 독매오언(獨寐寤言)
영시물훤(永示勿萱)........"
-----즐겁게 심산유곡을 노니느니 님의 마음 너그러워라, 자연
을 벗삼아 홀로 잠들고 홀로 말하니, 님이여 영원히 잊지 않으
리.-----
이 사(詞)는 시경(詩經)에서 발췌한 것으로 은거지사(隱居之士)
를 노래한 것이다. 대장부가 심산유곡을 홀몸으로 유랑하며 비록
적막하고 안색이 초췌하지만, 그 높은 기상은 영원히 변치 않는
다는 뜻이다.
백의인은 이 금성에 뼈 속 깊이 와닿는 것이 있어 크게 감격해
했다. 탄금이 끝났는데도 그는넋을 잃고 제자리에 서서 움직일
줄 몰랐다.
곽양은 거문고를 가볍게 내려놓고 송림을 빠져 나가며 낭랑한
음성으로 노래했다.
"즐겁도다 송림 우거진 곳에 님의 마음 유유하리라. 자나 깨나
외로운 몸 이 마음 알리지 말지어다......"
그녀는 나귀에 올라타 다시 울울창창한 숲숙으로 향했다.
삼 년의 유랑 생활.
그녀가 겪고 보아온 기특한 일들은 너무 많았다. 백의인의 새떼
를 모으는 신기의 곡조, 검 한 자루로 혼자 바둑을 두는 괴벽 따
위는 한낱 허공을 스치는 연기에 불과했다. 바람따라 흩어지며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다시 이틀이 지났다.
손꼽아 보니 소림사의 흥미있는 구경거리가 눈앞에 다가왔다.
곽양은 아직도 소림사로 잠입해 들어갈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머님은 어떤 어려운 일도 척척 묘책을 생각해냈는데, 난 왜
이다지도 우둔할까? 좋다. 어쨌든 소림사로 가고 보자. 궁하면
통한다고, 무슨 수가 있겠지!'
그녀는 간단히 요기를 채우고 나귀를 몰아 소림사로 향했다.
소림사에서 약 십여 리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였다. 홀연
말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왼편 산기슭으로부터 세필의 준마가
질풍을 몰며 달려왔다.
그들은 삽시간에 곽양의 곁을 스쳐지나며 소림사 쪽으로 질주
해 갔다. 말을 탄 사람은 모두 쉰 살 가량의 노인으로써, 정장
차림에 무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곽양은 직감적으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
'셋이서 무기를 갖고 소림사로 향하는 것을 보니 곤륜삼성임이
분명하다. 조금만 늦었다면 재미있는 구경을 놓칠 뻔했군.'
그녀는 대뜸 나귀의 뒷볼기를 내리쳤다.
"히히힝....!"
나귀는 길게 울부짖으며 세 필의 준마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나
도저히 세 필의 준마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쌍
방의 간격이 멀리 벌어졌다. 앞서 달리는 세 노인 중에 한 사람
이 문득 뒤돌아보며 뭔가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곽양이
다시 이삼 리를 쫓아가지 세 필의 준마는 시야에 보이지 않을 정
도로 멀어졌다. 곽양은 약이 올라 호통을 쳤다.
"이 쓸모없는 나귀야! 평상시는 투정을 부리느라고 쓸데없이 힘
을 남용하더니, 막상 내가 필요할 때는 황소걸음도 제대로 못 따
라 가는구나!"
나귀를 더 재촉해 본들 소용없음을 알고, 곽양은 아예 길옆 석
정에서 쉬기로 작심했다. 나귀는 그녀의 눈치를 보듯 눈을 껌벅
거리며 석정을 끼고 흐르는 개울물을 마셨다.
이렇게 잠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홀연 말굽소리가 들
리며 세 필의 준마가 산모퉁이를 휘돌아 달려왔다. 바로 조금전
에 소림사쪽으로 질주해 가던 그들이었다. 곽양은 절론 눈쌀을
찌푸렸다.
'왜 금방 되돌아오지? 단 일격도 받아내지 못할 만큼 형편없는
존재였단 말인가?'
세 필의 준마는 곧장 석정 앞까지 달려와 멎더니 세 사람이 동
시에 안장 위에서 뛰어내렸다.
곽양은 비로소 세 사람의 모습을 똑똑히 살펴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은 몸집이 왜소하며, 얼굴은 마치 주사를 칠해 놓은 듯 붉었
다. 그러나 더욱 붉은 것은, 얼굴 한복판에 붙어 있는 유난히 큰
주먹코였다. 그 코는 주독이 올라 빨갛게 타오르고 있는 것 같았
다. 코와는 달리 눈은 하현달처럼 가늘어 가만히 있어도 웃는 낯
이었다. 제법 자상한 인상을 풍기는 노인이었다. 두 번째 노인
은, 몸집이대나무를 연상케 하며 일년 내내 햇살을 받지 못한
사람처럼 얼굴에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이 사람의 몸집과 용모
는 첫 번째 노인과 극히 대조적이었다. 세 번째 노인의 외모는
평범했다. 단지 병자처럼 안색이 누르스름했다.
곽양은 또 버릇처럼 호기심이 생겨 넌지시 물었다.
"세 분은 소림사까지 갔다오셨나요? 어째 이렇게 빨리 돌아왔
죠?"
대나무처럼 깡마른 노인이 그녀의 말이 몹시 못마땅한 듯 눈을
브라렸다. 그러나 딸기코 노인은 헤벌쭉 웃으며 오히려 반문했
다.
"낭자는 우리가 소림사에 간 것을 어떻게 알지?"
곽양은 입을 삐쭉거리며 대답했다.
"이곳에서 곧장 올라갔으니 소림사로 간 게 당연하잖아요!"
역시 딸기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 낭자는 어디로 가는 길인가?"
"세 분이 소림사로 갔으니 저도 소림사로 가는 길이죠!"
이번에는 깡마른 노인이 입을 열었다.
"소림사는 예로부터 여자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더우기 무기를
휴대하고 들어간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그의 말투는 매우 거만했다. 그리고 워낙 크기도 했지만, 시선
을 곽양의 머리 위로 준 채 아예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곽
양은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 자연히 말투가 도전적으로 변했다.
"그럼 당신네들은 왜 무기를 갖고 있죠? 안장에 걸려 있는 길쭉
한 봇짐은 무기가 아닌가요?"
깡마른 노인의 음성은 더욱 냉랭하게 변했다.
"네가 어찌 우리와 비교가 되겠느냐?"
곽양은 냉소를 날렸다.
"당신네들이 더 잘난 것도 없죠! 곤륜삼성이 소림사의 노화상들
과 제대로 싸워보기라도 했나요? 싸운 결과가 어떻게 됐죠?"
세 노인은 그녀의 말에 거의 동시에 안색이 변했다. 딸기코 노
인이 다그치듯이 물었다.
"낭자는 곤륜삼성의 일을 어떻게 알고 있지?"
곽양은 짤막하게 대꾸했다.
"아는 수가 있죠!"
깡마른 노인은 대뜸 앞으로 한 걸음 내닫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며 누구의 제자냐? 그리고 무엇하러 소림사
에 왔느냐?"
곽양은 그의 위험에 순순히 굴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턱을
치켜올리며 차갑게 쏘아 부쳤다.
"그걸 당신이 상관할 필요가 있나뇨!?"
깡마른 노인은 성질이 매우 거칠고 급한 듯, 손을 떨쳐 그녀의
빰을 후려칠 기세였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을 생각해 아랫 입술
을 깨물며 참았다. 대신, 잽싸게 수법을 변화시켜 전공석화 같은
동작으로 몸을 번뜩이는가 싶더니, 어느 새 곽양의 검을 빼앗아
갔다. 실로 뜻밖의 기습이었다. 여지껏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곽
양이 이런 낭패를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녀의 무
공과 견식으로서 험악한 강호를 휘젓고 다니기에는 역부족이었
다.
무림에서는 그녀가 황용의 딸이라는 사실을 십중팔구 알고 있기
때문에, 행동하기가 편리했을 뿐이다. 특히 그녀의 생일 때 곽양
이 무림 각처에 청첩을 보냈으므로, 흑도(黑道)의 인물들까지도
거의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설령 곽정 황용의
체면을 무시한다 하더라도, 양과의 체면을 봐서라도 그녀의 비위
를 건드리는 짓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곽양 자신이 빼어난 용모
를 지녔고, 성격 또한 쾌활하여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은 게 사
실이었다. 하여 여지껏 강호에서 비록 적지 않은 퐁파를 겪었지
만 언제나 순조롭게 그 고비를 넘기곤 했다.
그런데, 창졸간에 깡마른 노인에게 검을 빼앗기자 곽양은 당황
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면 대결을 하여 빼앗아 오자니 자신의
실력으로선 도저히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깡마른 노인은 왼손 중지(中指)와 식지(食指)로 단검을 집은 채
냉랭하게 말했다.
"이 검을 내가 당분간 보관하겠다. 네가 감히 웃어른들에게 이
렇게 무례한 것을 보니, 부모님의 가르침이 아직까지 부족했던
게 분명하다. 검을 찾고 싶으면 부모를 데리고 오라. 그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해줘야겠다!"
이 말을 들은 곽양은 화가 치밀어 얼굴이 푸르락붉으락했다. 그
녀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좋다! 나의 부모님까지 들먹여 모욕을 주다니, 네가 뭘 믿고
이렇게 건방진지 두고 보자!'
그녀는 억지로 화를 참으려는 듯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당신의 이름이 뭐죠?"
깡마른 노인은 코방귀를 날렸다.
"흥! 이른이 뭐냐고? 역시 버릇이 없구나. 내가 가르쳐줄 테니
똑똑히 들어라. 어른에게 물을 때는 [존성대명이 어떻게 되십니
까?]해야 하느니라!"
곽양은 앙칼지게 말했다.
"그 따위 어설픈 훈계는 듣고 싶지 않아요! 내가 묻는 것은 순
수한 당신의 이름뿐이예요! 이름을 밝히기 싫으면 그만두세요.
그 검이 탐나면 기꺼이 줄 용의가 있어요!"
말을 끝낸 그녀는 곧 몸을 돌려 석정 밖으러 걸어나갔다.
"다 큰 계집애의 성격이 그렇게 고약해서야 어느 누가 색시감으
로 데려가겠는가? 그렇게도 궁금하다면 내가 우리의 신분을 밝혀
주겠네. 우린 며칠 전에 불원천리(不願千里) 서역에서 이곳 중원
까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곽양은 입을 삐죽거리며 쏘아 붙였
다.
"얘기하지 않아도 알아요. 우리 중원에는 당신네들 같은 외호
(外號)를 가진 사람이 없어요!"
세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딸기코 노인이 물었다.
"낭자, 사부님은 어느 분인가?"
곽양은 소림사에서 부모의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았지만, 지금
은 오기가 치밀어 당당하게 말했다.
"나의 아버님은 성이 곽이며 함자는 정이라 해요. 그리고 어머
님의 성을 황이며 함자는 용이에요! 스승은 없고 단지 부노님에
게 몇 가지 잔재주를 배웠을 뿐이에요!"
세 사람은 다시 서로 마주 보더니 깡마른 노인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중얼거렸다.
"곽정? 황용?...... 그들이 어느 문파며 누구의 제자지......?"
이렇게 되자 곽양은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부모님의 명성은
이미 만천하에 알려죠, 설령 무림인이 아닌 일반 백성이라 해도
양양을 끝까지 지킨 곽대협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데, 이
세 사람은 모른다고 하니..... 그들의 표정으로 미루어 거짓이
아닌 성 싶었다. 잠시 생각을 굴린 곽양은 이내 깨달았다.
'이들 곤륜삼성은 틀림없이 줄곧 서역 심산유곡에서 무공을 닦
아 왔으며 바깥 세상의 일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모양이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화가 풀렸다. 그녀는 본디 작은 일을 미
투리꼬투리 따지는 옹졸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나의 이름은 곽양이라고 해요. 내 이름을 밝혔으니, 이제 세
분도 존성대명을 밝히셔야죠!"
딸기코 노인은 헤벌쭉 웃었다.
"뉘 집 딸인지 똑똑하군, 한 번 가프쳐 주니까 금방 말투가 공
손해졌단 말야! 웃어른에게 그렇게 깍듯이 대하는 게 도리지."
그는 안색이 누르스름한 노인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쪽은 우리의 큰 형님이신 반천경(潘天耕) 어른이시다."
이어 자신의 주먹만한 딸기코를 엄지로 가리켰다.
"나는 둘째인 방천로(方天勞)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대나무처럼 깡마른 노인을 소개했다.
"이 분은 세째인 위천망(衛天望)이다. 우리 사형제의 이름은 모
두 천(天)자 돌림이지."
곽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이름을 속으로 한 번 외고 나
서 물었다.
"당신네들은 소림사까지 갔다 왔나요? 그 노화상들과 싸워 승부
가 어떻게 판가름났죠?"
깡마른 위천망의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넌 어째 무엇이든 다 알고 있지? 우리가 소림의 화상들과 무예
를 겨룬 일을 아는 사람이 없는데, 네가 어떻게 알았지? 어서 이
실직고 해봐라!"
이렇게 다그치면서 흡사 금방이라도 무력을 행사할 듯이 주먹을
움켜쥔 채 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곽양은 속으로 코웃음쳤다.
"흥! 고분고분하게 묻는다면 솔직히 대답해 줄 수도 있지만, 그
런 투로는 어림도 없지! 내가 그 따위 위협에 넘어갈 성 싶으
나?"
그녀도 상대방에게 눈을 부라리며 차갑게 말했다.
"당신의 이름은 좋지 않아요. 차라리 천악(天惡)이라고 고치는
게 어때요?"
위천망은 버럭 화를 냈다.
"뭣이?!"
곽양은 한 발자국도 양보를 하지 않았다.
"당신같이 흉악무도한 사람은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가 어려워
요! 내 물건을 빼앗아 가고서도 그렇게 태도가 흉악하니 하늘에
서 떨어진 악성(惡星), 즉 천악이 아니고 뭐겠어요!"
위천망의 목에서 이내 야수의 신음 같은 괴성이 토해지면 가슴
이 갑자기 배로 팽창되고, 머리카락과 심지어 눈썹마저 곤두서는
것 같았다. 딸기코 노인 방천로가 황급히 만류를 했다.
"삼제(三弟), 제발 참게!"
그는 얼른 곽양의 손묵을 잡아 쥐고 끌어당기면서, 두 사람 사
이에 가로막고 섰다. 곽양은 위천망의 노기충만한 모습을 보자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다. 위천망은 분풀이를 하듯 검집에서 검
을 뽑아 두 손가락으로 검신(劍身)을 집어 살짝 힘을 주자, 맑은
금속성이 들리며 검이 두 동강이로 부러졌다. 이어 반 토막의 단
검을 검집에 다시 밀어넣고 퉁명스럽게 한 마디 내뱉었다.
"이런 쓸모없는 검을 누가 갖는다고 했느냐?"
곽양은 그가 두 손가락으로 검을 부러뜨린 것을 보자 더욱 놀랐
다. 위천망은 그녀의 표정을 지켜보면 심히 득의해 앙천광소를
날렸다. 그 웃음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주이에 울려 퍼지며, 석
정의 기왓장마저 바스스 진동이 일었다.
그런데 석정 지붕이 뚫리며 커다란 물체가 떨어져 내린 것은 바
로 이때였다. 모두들 흠칫 놀랐다. 심지어 위천망 자신도 의아해
했다. 사실, 그가 내공을 끌어올려 광소를 터뜨린것은, 자신의
심후한 공력을 과시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래서 기왓장이 들썩거
린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지만 천장이 뚫린 것은 실로 예외였
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력이 증진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진 물체를 확인한 순간, 더욱 놀라고 말았다.
흰 옷을 입은 중년 사나이가 거문고를 가슴에 안은 채 눈을 감고
그것에 누워 있는 게 아닌가!
곽양은 이내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앗! 여기에 있었군요!"
바닥에 떨어져 누워 있는 자는, 바로 며칠 전에 보았던 그 괴팍
한 탄금의 명수였던 것이다.
그 자는 곽양의 음성을 듣자 벌떡 일어났다.
"낭자, 낭자를 찾아헤맸는데 여기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정말 뜻밖이요."
곽양은 무슨 소린가 싶어 의아해졌다.
"왜 날 찾았죠?"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낭자의 존성대명을 묻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오."
곽양은 눈을 곱게 흘겼다.
"존성대명이 뭐예요? 그런 고상한 말투는 듣기가 거북해요."
백의인은 약간 쑥스러워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뎠은 말이오. 말투가 고상할수록 겉만 번드르르할뿐
숙이 텅 비었죠.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런 사람을 우러러 보는 자
는 없을 것이오."
이렇게 말한 그는,한쪽에 서 있는 위천망을 힐끗 쳐다보며 입
가에 냉솔르 띄었다. 곽양은 그의 말을 듣자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린 듯 속이 후련했다. 그와 반대로 위천망은 눈에서 독기가 뿜
어지며, 그렇지 않아도 파르스름하던 안색이 더욱 푸르죽죽해졌
다.
"당신은 누구요?!"
백의인은 위천망의 묻는 말에 아예 대꾸할 생각도 않고 곽양에
게 정중히 물었다.
"낭잔 이름이 무엇이요?"
곽양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곽양이라고 해요."
백의인은 대듬 손뼉을 쳤다.
"엇! 눈앞에 태산을 두고도 몰라 본다더니, 이제 보니 그 이름
도 유명한 곽양 낭자였군! 영준 곽정 곽대협과 영당 황용 황여협
의 명성은, 사해(四海)에 널리 알려져 몇몇 무식한 망나니를 제
외하고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소? 그 두분이야말로 문무를 겸비
한 고금쌍절(古今雙絶)이오!"
곽양은 가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석정 지붕위에서 내가 이 세 사람과 예기하는 것을 전부 엿들
은 모양이군.'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띈 채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죠?"
백의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의 성은 별(別), 이름은 건가(建家)요."
곽양은 그의 이름을 한 번 뇌까려 보더니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
랐다.
"별건가! 벌거 아니란 뜻인가요? 이름 속에 겸허의 뜻이 담겨
있군요."
별건가는 즉시 그녀의 말을 받았다.
"이름에 하늘(天)을 내세워 스스로 존귀한 양 우쭐대는 족속들
보다야 썩은 냄새가 덜 나는 이름이죠."
별건가는 줄곧 위천망 등을 겨냥해 비꼬았다. 세 사람은 그가
지붕을 뚫고 천신(天神)처럼 떨어진 사실을 예사스럽게 넘길 수
가 없어 벨이 꼴리는 것을 꾹 참고 있었다. 이 백의괴객의 정확
한 정체부터 파악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계속 자기네들을 빗대놓고 말로 몰아붙이자, 위천망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다짜고짜 그의 얼굴을 향해 일장을 날렸
다. 별건가는 살짝 고개를 숙여 그의 일장을 피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위천망은 왼쪽 손목에 따뜻한 느낌이 전해짐과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이 사라졌다.
위천망이 놀라며 홀연 정신을 차렸을 때, 단검은 이미 별건가의
손에 옮겨져 있음을 확인했다. 별건가가 전개한 신법이 어찌나
빠른지 눈으로 분간하기는 어려울 지경이었다. 위천망은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즉시 손가락을 갈
퀴처럼 구부려 상대방의 어깨죽지를 나꿔채 갔다. 역시 별건가는
비스듬히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그의 공격을 피했다. 이째, 반천
경과 방천로는 갑자기 석정 밖으로 몸을 솟구쳤다. 위천망은 좌
권우장(左拳右掌)으로 삽시간에 십여 초식을 전개했다.
일순간, 석정안은 무서운 회오리에 휩싸였다 별건가는 두 손에
단검을 받쳐든 채 여유있게 피하며 전혀 반격할 생각을 하지 않
았다.
곽양은 비록 나이의 한계 때문에 무공이 심후하지는 못하지만,
당세 일류 고수들 틈바구니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견식은 매우 높
았다. 그녀는 별건가의 여유있으면서도 절묘한 신법을 보자 절로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별건가의 신법 무공은 독특하여 중원 각
문파에 알려진 무학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위천망은 삼십여 초식을 펼쳤는데도 상대방의 옷자락조차 건드
리지 못하자, 돌연 나직이 기합을 토하며 권법을 변화시켰다. 이
제는 출초하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러나 힘은 좀전보다 배가 되
었다. 곽양은 팽배되는 권풍에 밀려 한 걸음씩 정자 밖으로 물러
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별건가도 더 이상 수세만 취할 수 없
는 모양인지, 두 손에 받쳐들고 있던단검을 허리에 차고낭랑한
일성을 토했다.
"정면 승부라면 기꺼이 응해 주겠소!"
위천망의 쌍장이 뻗쳐오자, 그는 재빨리 왼손으로 일장을 밀어냈
다.
펑!!
묵직한 굉음이 터지는 가운데 위천망은 비틀거리며 뒤로 두 걸
을 물러났다. 반면 별건가는 제자리에 뿌리가 박힌 듯 전혀 움직
이지 않았다.
위천망은 자신의 심후한 내력(內力)에 대해 늘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한데, 자기보다 이십 년 정도 연하인 별건가와 정면으로
내력 대결을 하여 뒷걸음질치게 되자 놀랍기도 하고, 오기가 뻗
치기도 했다. 그는 한 모금의 진기를 끌어 올려 재차 쌍장을 뻗
어냈다. 별건가도 종전과 마찬가지로 제자리에 우뚝 서서 일장을
밀어냈다. 그 즉시 천둥치는 소리가 들리며 뚫린 천장을 통해 기
왓장의 파편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번에 위천망은 뒤로 네 걸음 물러나서야 겨우 몸을 고정 시켰
다. 그러자, 그의 모습이 갑자기 가공스럽게 봉두난발이 되었다.
그리고 두 손을 단전에 모아 심호흡을 ㉩ 번 하자, 가슴이 움푹
패이며 배가 두꺼비처럼 불어났다. 뿐만 아니라, 전신의 뼈마디
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천천히 별건가를 향해 다가왔다.
별건가는 그의 이러한 형상을 보자 감히 경솔하게 대할 수 없
어, 자기를 고루 조절하며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위천망이 다
섯 자 가량 간격을 두고 출수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쌍장을
펼쳐내 상대방의 목줄기와 아랫배를 동시에 노린다. 쌍장을 상하
로 교차시켜 뻗어낸 것은, 상대방의 공력을 분산시키는데 그 목
적이 있었다. 실로 예측 불허의 매서운 장세(場勢)였다.
별건가도 마찬가지로 동시에 쌍장을 교차시키며 뻗어내 왼손은
상대방의 왼손에, 오른손은 상대방의 오른손에 맞부딪쳤다. 게다
가 그의 장력은 강(剛)과 유(柔)로 나누어졌다.
위천망은 그 즉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상대방의 아
랫배를 노린 장력은 망망대해에 빠진 바늘인 양 자취도 없이 사
라지고, 목줄기를 노렸던 오른손은 흡사 철벽에 부딪친 것 같았
으니........
그가 다음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광풍노도와도 같은 힘줄기에
휘말려 몸뚱아리가 곧장 정자 밖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강(剛)대
강(剛), 역(力)대 역(力)의 정면 대결이므로 결과는 단 한 가지
뿐이었다. 약자필상(弱者必傷)! 위천망이 정자밖으로 날아가 쓰
러지든, 신법을 전개해 사뿐히 내려서든 내샹을 입을 게 뻔한 사
실이었다.
이 순간, 반천경과 방천로의 입에서 동시에 짤막한 기합이 터지
며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몸을 솟구쳐 좌우 양쪽에서 위천망의
팔을 잡아 사뿐히 지면에 내려섰다. 그 바람에 강맹한 장력이 많
이 누그러졌다. 위천망은 비록 부상을 입지 않았지만, 오장육부
가 뒤틀리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딸기코 방천로는 사제가 당
한 것에 저으기 놀랐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히죽히죽 웃으며 말
했다.
"귀하의 장력은 실로 대단하군. 진심으로 탄복하는 바이네."
이 말에 곽양은 속을 코웃음을 쳤다.
'흥! 장벽의 웅후함으로 따진다면, 아버님의 항룡십팔장(降龍十
八掌)을 따라갈 게 없지! 너희들 곤륜삼성은 그야말로 우물 안의
개구리 격이니 언젠가는 더욱 따끔한 맛을 보게 될 거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곽양은, 불현듯 양과의 모습이 뇌리를 스치
고 지나갔다. 양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자기를 위해
건방진 곤륜삼성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었을텐데...... 이때
방천군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나는 비록 보잘것없는 실력이네만, 귀하의 검법을 한 번 견식
하고 싶네."
별건가는 한쪽에 서 있는 곽양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입을 열었
다.
"방형은 곽 낭자에게 무례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적대시하고 싶지 않소. 그러니, 서로 겨루는 것을 피하도록 합시
다."
곽양은 명해졌다.
'저 사람이 위천망을 혼내 준 것은 나 때문이었단 말인가?'
방천로는 자기가 타고 온 말로 걸어가 길쭉한 봇짐 속에서 검
자루를 꺼냈다. 검술을 겨루기로 작심한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내 검집에서 검을 뽑아 손가락으로 검신(劍身)을
살짝 튕겼다.
차--- 잉---
맑은 금속성이 길게 울려퍼졌다. 방천로의 얼굴에선 이제 웃음
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왼손으로 검결(劍訣)을 꼽으며 수평
으로 밀어내는 동시, 오른손에 쥔 검 끝을 하늘로 향하게 하여
부동자세를 취했다.
선인지로(仙人之路)! 방천로가 취한 첫 번째 검초(劍招)의 기수
식(起手式)이었다. 별건가는 여유만만했다.
"방형이 정녕 겨루기를 고집한다면 난 곽 낭자의 단검으로 상대
해 주겠소."
이렇게 말하며 반 토막으로 부러진 단검을 뽑았다. 단검의 원래
길이는 두 자 가량인데, 지금은 겨우칠팔 치밖에 남지 않았다.
더군다나 검 끝이 뭉뚝하여 비수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왼손으로 검집을 쥔 채 잽싸게 선제 공격을 취했다. 실로
쾌속한 출수였다. 방천로가 눈앞에 흰 인영이 번뜩이는 것을 느
끼는 순간, 별건가는 이미 연거푸 삼초를 공격했다. 비록 단검이
너무 짧아 상대방에게 직접적인 부상을 입히기는 어렵지만 기를
꺾게 하기엔 충분했다.
방천로는 내심 흠칫했다.
'검초가 너무 빨라 막기가 어렵구나. 한데, 이게 도대체 무슨
검법이지! 녀석의 손에 만약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면, 난 이미
피를 흘리며 쓰러졌을 것이다......'
별건가는 삼 초를 전개한 후, 곧 옆으로 물러나 움직이지 않았
다. 이번에는 방천로가 검법을 전개했다. 수비를 겸비한 공격을
계속 펼쳐나갔다.
별건가는 몸을 번뜩여 피하며 반격을 하지 않다가, 난데없이 신
속하게 삼 초를 펼쳐 방천로를 당황하게 만들고는 또다시 옆으로
물러났다.
방천로는 안전히 조롱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검
초를 건개해 나갔다. 그의 장검이 허공을 수놓는 가운데 흰 빛이
난무했다.
곽양은 그의 검법을 지켜보며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저 늙은이의 검법은 신랄하고 강맹하여 위천망의 장법과 같은
노선을 띠고 있다. 단지 그보다 더 영활하고 힘이 강한게......'
그녀의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 별건가의 일갈이 들려왔다.
"조심하시오!"
일갈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왼손에 쥐고 있는 검집으로 방천
로의 검 끝을 빨아들이듯 봉쇄하며, 오른손의 단검으로 곧장 그
의 목줄기를 노렸다. 방천로의 장검은 상대방의 검집속으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에 제대로 검초를 구사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단검
이 목줄기를 뻗쳐오자, 장검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뒹굴어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다. 그가 몸
을 튕겨 일어서기도 전에 그림자가 번뜩이며 반천경이 이미 날아
와 장검의 손잡이를 나꿔잡았다. 다음 순간, 별건가의 검집으로
빨려들어갔던 장검이 뽑혀졌다. 별건가와 곽양의 입에서 동시에
갈채가 터졌다.
"멋진 신법!!"
시종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 안색이 누르스름한 노인의 무공이
세 사람 중에 으뜸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다. 별건가는 다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귀하의 무공에 대해 감탄했소!"
이어 곽양에게 고개를 돌려 엉뚱한 말을 했다.
"곽 낭자, 얼마 전에 낭자의 빼어난 탄금 솜씨를 듣고 새로운
곡을 만든게 있소. 한 번 들어보시겠소?"
곽양은 그가 또 무슨 심산으로 갑자기 탄금 얘기를 끄집어 내는
지 자뭇 궁긍했다.
"그게 무슨 곡이죠?"
별건가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거문고를 무릎 위에 올
려놓으며, 곧 한 곡조 뜯을 자세였다. 반천경은 눈꼬리를 치켜올
렸다.
"귀하는 나의 사제들을 연거푸 В패시켰으니, 이번엔 내가 한
수 가르침을 받겠네!"
별건가는 손을 내둘렸다.
"무공은 이미 겨루었으니 더 이상 흥미가 없소. 이제부터 내가
새로 난든 곡을 곽 낭자에게 들려줄 테니, 세 분도 듣고 싶으면
자릴 잡고 앉든지 아니면 그냥 돌아가도록 하시오."
그는 상대방의 대답도 듣지 않고, 왼손으로 현을 절도 있게 누
르며, 오른손으로 거문고를 뜯기 시작했다. 몇 소절을 들은 곽양
은 절로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감격했다. 이 곡조의 일부분은
자기가 얼마 전에 연주했던 고반이고, 다른 일부분은 진풍(秦風)
에 속한 겸가(兼假)였다. 두 곡은 완연하게 다른 가락이지만, 그
가 심혈을 기울여 한데 혼합하자 일응일답(一應一答)하며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고반재간(考槃在澗) 석인지관(碩人之寬) 겸가창창(兼苛蒼
蒼), 백로위상(白露爲霜), 소위이인(所謂伊人) 제천일방(在千一
方).....석인지관(碩人之寬).....소회종지(遡廻縱之) 도조차장
(道阻且長) 소유종지(遡遊縱之) 완재수중앙(完在水中央).....독
매오언(獨寐寤言), 영시물훤(永示勿萱) 영시물훤(永示勿萱).....
-----즐겁게 심산유곡을 노니느니 님의 마음 너그러워라. 갈대
가 우거지고 아침이슬 어느덧 서리가 되었네, 사랑하는 그 사람
은 하늘 저쪽에 산다네,.....님의 마음 너그러워라. 님의 마음
너그러워라.....거슬러 올라가면 험한 길 멀기도 하여라. 물줄기
따라 올라가면, 험한 길 멀기도 하여라. 물줄기 따라 올라가면,
그 줄기 한가운데 있는 듯하니.....홀로 잠들고 홀로 말하니, 영
원히 잊지 않으리라,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곽양은 가슴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그가 거문고를 빌어 말하는 이인(伊人)은 혹시 내가 아닐까?
이 곡은 어이해 이다지도 사모의 정으로 가득 차 있는걸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자신도 모르게 열굴이 도화빛으로 물들었
다. 곡은 갈수록 절묘하게 흘러갔다. 고반고 겸가 두 곡조의 원
래 가락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어
응답하며 극치를 향해 치달았다. 곽양은 여지껏 이런 절묘한 곡
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편, 반천경 등 세 사람은 그 묘미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은 별건가의 광인(狂人)기질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참 치열
한 싸움을 벌이다가 난데없이 한 계집을 위해 거문고를 튕기기
시작했으니..... 반천경 등으로선 미친 짓으로밖에 간주할 수 없
었다. 아니, 무시를 당한 기분에 올화가 치밀기도 했다. 반천경
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장검으로 별건가의 어깨를 살짝 찍으며
소리쳤다.
"어서 일어나라! 너하고 승부를 겨뤄 보고 싶다!"
별건가는 스스로 금성(거문고소리)에 도취해 있었다. 아울러,
아리따운 소녀가 수평선 위에 서서 생긋이 미소지으며 자기에게
손짓하는 환상이 뇌리에 펼쳐졌다.
한데, 어깨에 따끔한 느낌이 전해져 오자 깜짝 놀라 환상에서
깨어났다. 비로소 그는 반천경이 검으로 자기를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자기가 방어를 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더
무서운 공격을 해올 것이다. 그렇다고 거문고를 다 뜯기 전에 탄
금을 중단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반 토막의 단검을 뽑
아 반천경의 장검을 뿌리치면서 오른손으로는 여전히 거문고를
뜯어나갔다.
이렇게 되자, 별건가는 드디어 자신이 평생 동안 닦은 절기(絶
技)를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른손으로 거문고를 뜯고 왼손으
로 검을 전개해야 하므로 더 이상 현을 누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려 다섯 번 번 쪽의 금현을 향해 진기
를 불어낸 것이다. 그러자, 마치 손으로 누른 것과 같이 현이 아
래로 눌려졌다. 다시 말해, 반천경의 날카로운 검초의 공세를 받
으면서도 한 손으로는여전히 거문고를 튕겨나갔다.
반천경의 공격은 모두 빗나갔다. 별건가는 그와 맞서 싸우면서
도 두 눈은 계속 금현을 주시했다. 불어내는 진기의 방향이 달라
져 행여나 곡조를 망치게 할까 봐 매우 진지한 표정이었다. 반천
경은 더욱 울화가 치밀 수밖에! 그는 보다 신속 신랄하게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그의 장검이 어느 방향으로 뻗쳐가든 별건가는
가볍게 막아 내렸다.
곽양은 아름다운 선율에 이끌려 반천경의 맹렬한 공격에 대해
그다지 기의치 않았다. 반천경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그는 돌연 검법을 변화시켜 쾌공(快功)을 시도했다. 순간, 장검
과 단검의 비딪치는 금속성이 쉴새없이 울려퍼지며 주위에 빽빽
한 검막(劍幕)이 조송되었다. 그것은 부드러운 거문고의 음률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별건가의 눈꼬리가 살짝 치켜올려진 것
은 바로 이때였다. 동시에 단검을 쥔 왼쪽 손목에 진기를 집중시
켰다.
창!!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리는 가운데 반천경의 장검이 두 동강이로
잘라지고, 그와 때를 같이하여 칠현금(거문고)의 다섯 번째 줄도
끊어졌다. 반천경은 안색이 잿빛으로 변해 아무 말없이 정자 밖
으로 걸어갔다.
세 사람은 곧 말에 올라 질풍처럼 산 위로 치달렸다. 그들이 달
리는 방향을 바라보며 곽양은 심히 이상하다고 느꼈다.
'아니...... 저들은 패했으면 하산을 해야지 어째 다시 소림사
로 달려가는 걸까?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심산인가?'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별건가는 현이 끊어진 거문고를 어루만
지며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곽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금현 한 줄이 끊어진 걸 갖고 과연 저렇게 심각해 할 필요가
있을까?'
그녀는 거문고를 받아 섀어진 현을 다시 길게 풀어 새로 묶고는
음을 조절했다. 별건가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탄성을 울렸
다.
"여지껏 무학을 닦아오면서 심정(心靜)의 경지를이룩하지 못하
더니..... 왼손으로 그의 장검을 부러뜨리면서, 오른손의 진기를
안배 못해 금현도 끊어진 것이오."
곽양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무공이 아직 고도의 경
지에 이르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곽양은 입가에 미소를 띈 채 그를 위로해 주었다.
"당신처럼 왼손으로 강적을 상대하며 오른손으로 느긋하게 거문
고를 뜯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것은 분심이용지법(分心二用之
法)으로서, 현재 무림에서 그것을 실수없이 해낼 사람은 단 셋밖
에 없어요. 당신은 비록 그 경지까지는 터득하지 못했지만 아주
훌륭했어요. 조금도 자신을 한탄할 필요가 없어요."
별건가는 눈동자가 빛났다.
"그 세 사람은 누구요?"
곽양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첫째는 노완동(老頑童) 주백통이고, 두 번째는 나의 아버님이
고, 세 번째는 양부인 소용녀예요. 그들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설령 나의 외조부이신 도화도주나 나의 어머님, 신주대협 양과
등도해낼 수가 없어요."
별건가는 흥분했다.
"세상에 그러한기인이 있다니 언제쯤 그들을 소개해 주겠소?"
곽양은 울적하게 말했다.
"나의 아버님을 뵙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어
디에 있는지 찾을 길이 없어요."
별건가는 이내 망연한 표정으로 변했다.
고가양은 그를 다시 위로해 주었다.
"당신이 여유있게 곤륜삼성을 격파한 것만 보아도 무공으로서
능히 오시강호(傲視江湖)할 수 있을 거예요."
별건가는 이 말에 깜짝 놀랐다.
"아니, 곤륜삼성이라니.....? 뭐라고 했소? 낭자가 어떻게 알고
있소?"
곽양은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방금 떠난 그 세 사람은 서역(西域)에서 왔으니 당연히 곤륜삼
성이겠죠. 그들의 무공은 확실히 독특한 데가 있지만, 소림에게
도전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아요....."
별건가의 놀란 표정이 갈수록 깊어지자, 곽양은 절로 눈쌀을 찌
푸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죠?"
별건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곤륜삼성이라....... 곤륜삼성 별건가는 바로 난데......"
이번에는 곽양이 깜짝 놀랐다.
"당신이 곤륜삼성이라고요? 그럼 나머지 두 사람은 어디 있죠?"
별건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곤륜삼성은 나 혼자뿐이오. 나는 서역에서 약간의 명성을 얻었
소. 그곳 친구들은 나의 금(琴), 검(劍), 기(棋)를 높이 평가해
주어 금성(琴聖), 검성(劍聖), 기성(棋聖)으로 불러 주었소. 그
리고 난 줄곧 곤륜산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곤륜삼성이란 별호를
붙여 준 것이오. 하지만 나 스스로는 성(聖)의 칭호를 쑴을 자격
이 없다고 생각하오. 그렇다고 해서 날 삼성(三聖)이라 부르는
친구들을 일일이 찾아가 싸울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예 이름을
건가(建家)로 바꾸었소. 별호와 연결해서 부르면 [곤륜삼성 별건
가]가 되기 때문에, 듣는 사람도 내가 스스로 건방떤다고는 말하
지 않을 것이오."
곽양은 재미가 있어 박수를 쳤다.
"그랬었군요! 난 곤륜삼성이라 해서 세 사람인 줄만 알았어요.
그럼 조금 전에 그 세 노인은 누구죠?"
곽양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소림 제자란 말인가요? 음.....그들의 무공은
과연 강맹한 힘을 위주로 하던데.....맞아요! 그 얼굴이 불그스
름한 노인의 검법은 바로 달마검법이었잖아요? 그래요! 마지막으
로 그 병색이 짙은 노인이 전개한 검법은 위타항마검법(韋陀降魔
劍法)이었어요. 단지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기 때문에 선뜻 알아
보지 못한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어째 서역에서 왔죠?"
별건가가 차분한 음성으로 설명해 주었다.
"자세한 것을 예기하자면 사연이 길지요. 작년 봄, 내가 곤륜산
경신봉(驚神峯)에서 탄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초옥(草屋) 밖에
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와 나가 보니, 두 사람이 이미 치명적인
중상을 입은 채 마지막 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소. 그들에게 싸움
을 중단하라고 외쳤지만 듣지 않길래 억지로 떼어 놓았소. 그 중
한 사람은 그 즉시 숨을 거두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겨우 숨만
붙어 있어 초옥으로 데려가 소양단(少陽丹)을 복용시켰지만, 워
낙 기운이 쇠해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었소. 그는 죽기 직전에
윤극서(尹克西)라고 이름을 밝히며......"
여기가지 들은 곽양은,
"앗!"
하고 짤막한 신음소리를 토했다.
"그의 상대는 혹시 소상자(瀟湘子)라는 사람이 이니었나요? 몸
집이 깡마르고 얼굴이 마치 송장처럼 생기지 않았나요?"
이번에는 별건가가 의아해했다.
"맞소, 한데 그것을 어떻게 알았소?"
"나도 그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 한쌍의 앙숙이 끝내 서로
싸우다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됐군요."
"그 윤극서는 자신이 평생 나쁜 일만 해왔다면서 임종을 앞두고
참회를 했소. 그의 말을 빌리면, 소상자가 소림에서 경서(經書)
한 권을 훔쳐 내었는데, 그 후로부터 두 사람은 경서에 수록된
무공을 보다 많이 배워 상대방을 해치고 그 경서를 독차지하려고
했었소. 그러니 두 사람은 침식을 같이 하면서 상대방을 서로 감
시하기 위해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소. 식사를 할 때는 행여나 상
대방이 독을 넣었을까봐 경계했고, 잠 잘 때는 혹시나 기습을 전
개하지않을까 전전긍긍했다고 하오. 게다가 소림사의 추적이두
려워 결국 멀리 서역까지 달아나게 된 것이오. 그들이 경신봉에
당도했을 때는 모두 기진맥진해 있었소....."
별건가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그런 샹황이 계속되면 둘 다 지쳐 죽게 될 것을 예측하고, 드
디어 마지막 생가 대결을 벌이게 된 것이오. 윤극서의 말로는 소
상자의 무공이 원래 한 수 위라고 했소. 그런데 막상 싸움이 벌
어지자 자기가 약간 우세했다는 거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소상
자는 화산에서 부상을 입은 게 아직 완치가 되지 않은 생태임을
알았다는 거요. 어쨌든 둘은 양패구상(兩敗俱傷)하고 말았소."
곽양은 그들이 그 동안 가슴 조이며 서로 좌불 안석해 온 생각
을 하니 절로 측은한 마음이 들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서 한 권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별건가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윤극서가 그러한 얘기를 끝냈을 때는 이미 숨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소. 그는 마지막으로, 나더러 소림사를 찾아가 각원화상에게
그 무슨 경서가 기름 속에 있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부탁했
소.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소. 경서가 기름 속에 있다
니..... 다시 자세한 것을 물으려고 했을 때 그는 더 이상 버티
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소. 나는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리면 물어
보려고 했지만 영영 깨어나지 않았소. 나는 그 경서가 기름종이
에 싸여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두 사람의 몸을 뒤져
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소. 임종을 앞도고 한 부탁인지
라 거절할 수 없어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중원 땅을 밟게 된 것
이오."
곽양은 그를 똑바로 주시햐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소림사로 도전장을 보내게 되었죠?"
별건가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바로 조금 전에 떠난 그 세 사람 때문에 비롯된 거이
오. 그들은 서역 소림파의 속가제자(俗家弟子)요.서역 무림 사람
들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천(天)자 항렬로서 소림사의 장문인
천명선사와 향렬이 같다는 거요. 모름지기 그들의 시조는 오래
전에 소림사에세 사형제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멀리 서역으로 떠
나 소림사의 서역 지파(支派)를 창설한 모양이오. 원래 소림의
무공을 달마조사가 서역으로부터 전해 온 것이므로, 중원에서 서
역으로 뻗어간 것은 당연지사일지도 모르오. 그세 사람은 나의
별호를 듣고 한 번 겨루자고 찾아와, 말끝마다 소림의 무공이 천
하 제일이며 나도러 금성, 기성이란 호는 지니고 있어도 좋지만,
검성이란 호는 당장 지워버리라고 억지를 부렸소. 어차피 소림사
로 가야 하므로,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치르기 위해 그들에게
소림사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이렇게 중원으로 들어온 것이오.
그 세 사람은 생각보다 빨리 내 뒤를 쫓아 중원으로 들어왔소.
곽양은 비로소 모든 것을 납득하게 되었다.
"그랬었군요. 그들 세 사람이 지금쯤 소림사로 돌아갔을텐데 뭐
라고 말할까요?"
별건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는 본디 소림사의 화상들과 하등의 원한이 없소. 그래서 처
음부터 열흘 후에 겨루어 보자고 청했던 것이오. 그 세 사람이
당도한 연후에 서로 무공 대결을 하기 위해서였소. 이제 그들과
겨루어 보았으니, 함께 올라가 그 각원화상에게 말만 전해 주고
곧장 하산합시다.
곽양은 눈썹을 찌푸렸다.
"화상들의 규칙이 엄해 여자들은 사내로 들어갈 수 없어요."
별건가는 코웃음을 날렸다.
"흥! 웬놈의 규칙이 그렇게 까다롭다는 겁니까? 설마 낭자를 죽
이지는 않을 테니까 같이 올라가 보도록 합시다."
곽양은 일을 벌리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무색선사와
이미 교분을 맺었기 때문에 소림사와 적대시하고 싶지 않아 고개
를 고개를 내둘렀다.
"아니예요. 나는 산문 밖에서 기다릴 테니, 혼자 들어가 말을
전하고 나오세요."
별건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조금 전에 그 곡을 끝까지 뜯지 못했으니 돌아
와 다시 들려 주겠소."
------ 제 1 권 1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1 권
제 2 장 무당산(武堂山)의 불세출(不世出) 기인(奇人)
두 사람은 천천히 산에 올랐다. 사문(寺門) 밖까지 이틀 동안
소림사 제자의 모습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별건가는 걸음을
멈추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도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 그 화상을 불러내 말을 전해 줘야
지."
그는 곧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곤륜산의 별건가가 한 말씀 전할 것이 있어 소림을 찾아 왔소
이다!"
그의 외침 떨어지자마자 사내 십여 곳 종루(鐘褸)에서 일제히
종소리가 울려펴졌다.
땡 ! 땡 ! 땡 !.........
우렁찬 종소리가 온 산을 진동시키며, 멀리멀리 메아리쳐 펴졌
다. 그러자, 사문이 활짝 열리며 좌우 양쪽에서 회색 승포를 입
은 승인들이 걸어나왔다. 왼쪽 쉰 네 명, 오른쪽 쉰 네 명 모두
백 팔 명으로 나한당(羅漢堂)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을 가리켜 백
팔나한(百八羅漢)이라 했다. 그 뒤를 이어 열 여덟 명의 승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회색 승포 뒤에 담황색 가시를 걸쳤으며, 나한
당 제자들보다 비교적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들은 한 항렬이 높
은 달마당(達摩堂)의 제자였다.
잠시 후 큼지막한 네모 조각을 이은 승포를 입은 일곱 명의 노
승이 걸어나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깊이 패어 적어도
칠십 세에서 구십 세에 이르는 고령이었다. 그들이 바로 심선당
(心禪堂)의 칠장노(七長老)였다. 이어서 천명선사가 천천히 걸어
나왔고, 그의 왼쪽에는 달마당의 수좌 무상선사, 오른쪽에는 나
한당의 수좌 무색선사가 따르고 있었다. 반천경, 방천로, 위천망
은 그 뒤에서 걸어나왔고, 맨 뒤에는 칠팔십 명의 소림 속가 제
자들이 줄을 이었다. 그날 별건가가 나한당으로 잠입해 들어가
쥐도 새도 모르게서찰을 남긴 것을, 장문인 이하 무색, 무상 등
은 예사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반천경 등이 서역에서 달려와 곤륜삼성과 겨
루기로 약속했다는 것을 예기하자 사내의 고승들은 더욱 경각심
을 높였다.
서역 일파는 워낙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수십 년 동안 중원
소림사와 서로 소식을 내왕하는 예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사
내의 고승들은 왕년에 서역으로 가서 지파(支派)를 창설한 사숙
조 고혜선사(苦彗禪師)의 무공이 걸출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
었다. 그의 무공을 이어받은 후대 제자라면, 역시 무학이 비범할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여, 반천경등이 곤륜삼성에 대해 퍽
높이 평가하는 것을 듣고 더욱 경계를 했다. 더우기 장문인께선
오백 리 이내의 속가제자들로 하여금 모두 사내에 모이도록 명을
내렸다.
한편, 반천경 일행은 이번 일이 자기들로 하여 비롯된 것이니만
큼 스스로 매듭짓겠다는 생각으로, 매일 말을 타고 산길을 오르
내리며 순시를 돈 것이다. 그 금기검삼성(琴棋劍三聖)이란 자를
도중에 가로막아, 아예 산문 가까이 접근하기도 전에 코를 납작
하게 만들어 곤륜으로 다시 쫓아버릴 계획이었던 것이다. 서역
소림의 무학이 중원 소림을 능가한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과시할
속셈도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한데, 석정에서 치른 일전에 세
사람은 민망할 정도로 대패를 당한 것이다.
천명선사는 뒤늦게 그들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오늘 일전이
어쩌면 소림의 흥망성쇠의 관문이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 아래 삼
선당의 칠장노까지 모셔낸 것이다. 칠장노는 이미 수십 년 전부
터 뒷전으로 물러나 앉았기 때문에, 그들의 무학이 어느 정도이
며, 과연 소림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곤륜삼성을 상대하여 일익
을 담당할 수 있을는지 의문스러웠다. 심지어 천명선사와 무상,
무색까지도 정확히 단언을 내릴 수 없었다.
장문인 천명선사는 별건가와 곽양을 보자 합장하며 입을 열었
다.
"이 분이 바로 금검기삼성으로 일컫는 별거사(別居士)인 모양인
데, 노승이 미처 마중나가지 못한 것을 널리 양해해 주시오."
별건가는 몸을 숙여 정중히 답례를 했다.
"후생은 별건가라 하며 비록 삼성이란 허명(虛名)이 붙었지만
그게 별건가요?! 오늘 귀사를 소란케 하여 심히 불안한 마음 금
치 못하는데, 이렇게 많은 고승들을 대동해 영접까지 해주시니
실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천명선사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이 광생(狂生)은 말투로 보아 광인 같지 않은데, 이렇게 벎은
나이에 어떻게 반천경 등 세 사람을 일시에 격패시켰을까?'
천명선사는 반천경 등의 무공을 과대 평가하고 있는 게 분명했
다. 그는 곧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별거사, 너무 겸허하구료. 이렇게 먼 길을 찾아 주었으니 안으
로 들어거 차라도 한 잔 나눕시다. 헌데, 이 여 보살은........"
그는 말끝을 흐리며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별건가는 그가 곽양의 입사(入寺)를 거절하는 눈치를 보이자 이
내 광성(狂性)이 발작되어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노방장, 후생이 귀사를 찾아온 것은 본디 한 사람의 부탁을 받
아 말을 전해 주는 게 목적이외다. 그런데 귀사는 여자를 경시하
는 묘한 규칙이 있는 것 같군요. 그 점이 마음에 거슬립니다. 내
가 알기로 불법(佛法)은 끝이 없으며 중생(衆生)은 모두 똑같거
늘, 어찌 일방적으로 남녀를 차별 대우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습
니다."
천명은 득도한 고승으로서 선심(禪心)이 명천하고 관용지덕을
지녀 별건가의 말에 미소로 답했다.
"별거사의 귀띔을 고맙게 받아들이겠소. 우리 소림이 남녀지분
(男女之分)을 고집한다면 옹졸하다는 핀잔을 받게 될지도 모르
니, 곽 낭자도 함께 사내로 모셔 차를 대접하겠소."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한쪽으로 비켜서며 별건가와 곽양으로 하여
금 앞장서라는 손짓을 했다. 천명 왼쪽에 있던 깡마른 노승이 앞
으로 한 걸음 내닫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벌거사의 한 마디로서 본사가 천 년 동안 지켜온 규율을 파기
하는 것도 좋지만, 과연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한 수 가
르침을 받고 싶소. 그래야지만 대외적으로도 명분이 설 게 아니
겠소?!"
이 자는 바로 달마당의 수좌 무상선사였다. 그의 음성이 카랑카
랑하여 주위를 진동시키는 것으로 보아, 내력이 퍽 심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천경 등 세 사람은 이 말에 모두 안색이
변했다. 무상선사의 말 속에는 자기네들 세 사람을 무시하는 뜻
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별건가가 비록 자기네 세 사람을 격
파했지만, 진정한 실력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뜻이 아닌가!
곽양은 무상선사의 난처해 하는 표정을 보고, 얼른 나서서 낭랑
한 음성으로 말했다.
"별대협, 우린 꼭 소림사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요. 말만
전해 주고 곧 떠나도록 해요."
그녀는 쌍방이 서로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소림사가 패하든
별건가가 패하든 모두 그녀가 바라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어 그녀는 무색선사에게 눈길을 주며 말을 계속했다.
"무색선사는 나와 친분이 있으니 서로 화기(和氣)가 손상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별건가는 멍해졌다.
"앗! 그랬었구료."
이어 천명선사를 향해 말했다.
"노방장, 귀사의 각원선사는 어느 분입니까? 부탁받은 일이 있
어 그에게 몇 마디 전해 줄까 합니다."
천명선사는 나직이 뇌까렸다.
"각원선사......?"
직위가 낮은 각원은 수십 년 동안 장경각에서 은신해 왔기 때문
에 별로 이름이 알려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이름 뒤에다<선
사>라는 두 글자를 붙이자 천명은 선뜻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잠시 명해져 있다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앗, 바로 그 능가경을 분실한 자를 말하는 거요? 벌거사가 그
를 찾는 것은 혹시 능가경과 관련이 있소?"
"나도 모르겠습니다."
천명이 곧 제자 한 사람에게 분부했다.
"가서 각원을 불러 오라."
분부를 받은 제자는 총총히 사내로 달려갔다.
무상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별거사가 금검기삼성으로 자처하는 것으로 보아 각 방면에 빼
어난 조예를 지니고 있는 게 분명한데, 오늘 이렇게 어려운 걸음
을 한 감에 한 수 보여 주지 않고 그냥 떠나실 수가 있겠소?"
별건가는 여전히 고개를 내둘렀다.
"이 곽 낭자가 말했듯이, 우린 서로 화기를 손상시키지 않는 것
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무상선사는 그가 계속 거절하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상대방은 분명 도전의 기미가
짙은 서찰을 미리 보내오지 않았던가! 어째서, 막상 한판 승부를
눈앞에 둔 이 순간에 이르러 점잖을 빼는 것일까? 무상선사는 희
롱을 당한 기분이었다. 천 년 이래 그 누가 감히 소림사에 이런
무례를 범한 예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반천경 등이 패했으니,
이 사실이 강호에 알려진다면 명실 공히 검성(劍聖)이란 호가 더
욱 굳건해질 게 아니겠는가!
무상선사는 기필코 소림의 위신을 만회하겠다는 일념에서 끈질
기게 상대방의 출수를 유도했다.
"무학을 겨루는 것은 서로의 실력을 측량하는 것으로서 화기에
손상되지는 않을 것이외다."
그는 상대방이 뭐라고 발뺌하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 달마당 제
자들에게 소리쳤다.
"검을 갖고 오라! 오늘 이 기회에 <검성>의 검솔이 어느 정도로
성스러운지 가르침을 받아 보자!"
사내에는 각종 무기가 이미 준비돼 있었다. 단지 예의상 주(主)
된 입장에서 객(客)이 무기를 전개하기 전에 먼저 무기를 전개하
지 않는 것뿐이었다.
무상선사의 분부를 듣자 제자들은 이내 사내로 들어가, 대여섯
자루의 장검을 갖고 와 두 손에 받쳐들고 별건가에게 보이며 말
했다.
"별건가께선 자신이 갖고 온 보검을 사용할 겁니까? 아니면 본
사의 평범한 겸을 사용할 겁니까?"
별건가는 아무 대꾸없이 몸을 굽혀 모서리가 뾰족한 돌을 줍고
는, 갑자기 사문 앞 청석판(靑石板)에다 종횡으로 금을 긋기 시
작했다. 삽시간에 종횡 열 아홉 줄이 되는 커다란 바독판이 완성
되었다. 한 줄 한 줄이 마치 자로 잰 듯 반듯하며, 모두 고르게
청석판에 반 치 가량 패어 들어갔다. 이 석판은 소실산에서 나는
청석으로서 견고하기가 무쇠에 버금갔다. 소백 년 동안 숱한 사
람이 밟고 다녔지만 전혀 닳은 흔적이 없었다.
그런데, 별건가가 아무렇게나 돌로 그어 깊이 패이게 했으니,
실로 놀라운 내력이 아닐 수 없었다.
별건가는 여유있게 웃으며 말했다.
"검을 겨루다 보면 본의 아니게 불상사가 생길 우려도 있으니,
바둑으로서 한 판 승부를 겨루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가 펼친 놀라운 절기에 천명,무색, 칠장노는 모두 서로 마주
보며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명선사는 사내에서 이 자의
웅후한 내력을 당해 낼 자가 없음을 간파하고 솔직히 패배를 시
인하려는데, 홀연 사슬이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각원화상이 그 큼직한 철통을 짊어지고 가까이 걸어왔다. 그의
뒤에는 나이 어린 소년이 따랐다. 각원은 왼손으로 지게를 잡은
채,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올려 천명께 정중히 인사를 올렸
다.
"장문인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천명은 별건가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거사께서 너에게 전할 말이 있다고 한다."
각원은 몸을 돌려 별건가를 쳐다보았다. 그를 알 리가 없었다.
"소승이 각원인데, 거사께선 무슨 분부가 있습니까?"
별건가는 바둑판을 완성했으므로 기흥(棋興)이 일어 다소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전할 말은 나중에 천천히 해도 늦지 않소. 어느 대사께서 먼저
소생과 바둑을 한 판 두시겠소?"
그가 일부러 무공을 과시하기 위해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금검기에 대해 광적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일단 흥이 나면 하늘
이 무너져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오직 바둑
에만 몰두해 다른 일을 모두 뒷전으로 미룬 것이다.
천명선사가 정색을 하고 그의 말을 받았다.
"별거사가 펼친 화석위극(畵石爲克)의 신공은, 노승이 난생 처
음 보는 것으로 본사 중승이 도저히 따를 수 없음을 시인하오."
각원은 천명선사의 말을 듣고 다시 청석판에 그려진 바둑판을
보자, 상대방이 무공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여, 그
는 철통을 짊어진 채 한 모금의 진기를 들이키더니, 평생 동안
닦은 공력을 전부 두 다리에 주입시켜 바둑판 위를 천천히 걸어
다녔다. 그가 사슬을 끌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청석판에 다섯 치
가량의 깊은 발자국이 찍혔다. 그로 인해 별건가가 그린 줄이 지
워졌다. 중승은 그것을 보자 절로 갈채를 보냈다. 천명, 무색,
무상 등은 더욱 놀라움과 기쁨을 금치 못했다. 어수룩하게 생긴
각원이 이런 심후한 내력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그와 수십 년
동안 한 울타리 안에서 생활해 오면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천명선사는 한 사람의 내공이 제아무리 심후하다 해도, 청석판
에 다섯 치 가량 패이는 발자국을 남기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각원은 한 쌍의 커다란 철통을 짊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속에 물이 가득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의
무게만 해도 사백 근이 넘었다. 그 중량의 힘과 자신의 내력을
합쳐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그렇다 하더라도 보기 드문 절세
신공임에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별건가는 그가 바둑판의 줄을 다 지워버리기도 전에 소리 높히
외쳤다.
"대화상, 소생은 그 심후한 내공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음을 시
인합니다."
각원은 단전의 진기가 성해질수록 두 다리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상대방의 외침을 듣자 이내 걸음을 멈추며 입가
에 미소를 띄고 말했다.
"송구스럽소."
별건가는 각원에 대해 대단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바둑은 내가 패했으니, 이번에는 검법을 가르침 받고 싶소이
다!"
그는 곧 등에 맨 칠현금 바닥 밑에서 한 자루의 장검을 뽑아 검
끝으로 자신의 가슴을 겨냥하며 검자루를 비스듬히 바깥쪽으로
뻗어냈다. 마치 검을 돌려 자결하는 것과 같으니,실로 괴이한 기
수식(起手式)이었다. 천하 검법 중에 이런 엉뚱한 일초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각원은 몹시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노승은 평생 염불만 외고 책을 손질하며 청소하는 일만 해왔을
뿐, 무공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소이다."
별건가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스쳐가는 순가, 장검이 휘어지면서 튕겨나가 곧장 각원의 가슴을
향하였다. 어느 검법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신속했다. 이 일 초
는 일단 검신에 진력을 주입시켜 그 진력을 이용해 튕겨 내는 것
이었다.
한편, 각원대사의 내력은 이미 이심제동(以心制動)의 경지에 이
르러 있었다. 심신합일(心身合一)! 별건가의 검이 비록 빨랐지만
각원의 심념(心念)은 더욱 빨랐다. 뇌리에 스치는 생각에 따라
몸이 움직인 것이다. 순간 지게 양쪽에 매달려 있는 철통이 자연
스럽게 그네처럼 흔들려 그의 앞을 막아 주었다.
챙!!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리는 가운데 검 끝이 철통에 찔렸다. 부드
러운 검신(劍身)은 반원을 그리며 휘어졌다. 별건가가 즉시 초식
을 변화시켜, 두 번째 공격을 시도하자 각원은 역시 철통으로 막
아냈다.
별건가는 내심 생각해 보았다.
'무공이 제아무리 고강해도, 저렇게 육중한 철통으로 나의 쾌속
한 검을 막진 못할 것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검신을 살짝 튕기자 용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
가 메아리 쳐 퍼졌다.
"대화상, 조심하시오!"
그는 전후좌우로 순식간에 십 육초식을 펼쳐냈다. 거기에 따라
요란한 금속성이 연거푸 열 여섯 번 울려 퍼졌다. 뜻밖에도, 별
건가가 전개한 열 여섯 초식 신뢰검(迅雷劍)이 전부 철통에 적중
된 것이다. 주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
이 손에 식은땀을 쥐었다. 각원의 몸놀림이 너무나 위대해 보였
기 때문이다. 그는 당황해 하며 단지 본능적으로 몸을 피할 뿐,
정말 무공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의 상황이
오죽이나 아슬아슬해 보였겠는가! 그런데도 그의 둔해 보이면서
도 우스꽝스러운 몸놀림에 따라 별건가의 절묘무쌍한 검법이 모
조리 봉쇄당한 것이다.
무색, 무상선사등은 차마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 약속이나 한
듯 소리쳤다.
"벌거사, 그만 손을 거두시오!"
곽양도 소리쳤다.
"그만 하세요!"
모두들 각원이 무공을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지 직접
공격을 전개하고 있는 별건가만이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뿐이
다. 전력을 다해 공격을 시전해도, 상대방의 옷자락조차 건드리
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은근히 오기가 생겨, 갑자기
대갈일성하며 한광(寒光)이 뿌려지는 가운데 각원의 아랫배를 향
해 곧장 찔러갔다. 각원은 놀라 짤막한 비명을 질렸다.
"앗!"
아울러 반사적으로 철통 두 개를 가운데로 모았다.
창!
순간, 거창한 금속성이 터지며 두 개의 철통이 서로 맞부딪치더
니 상대방의 장검을 사이에 끼웠다. 별건가는 즉시 손목에 진력
을 주입시켜 검을 거두려고 했지만, 뿌리가 박힌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임기웅변은 실로 신속 정확했다. 그는 검에서 오른손을 떼
며 쌍장을 일제히 밀어냈다. 순간, 한 갈래의 산을 무너뜨릴 듯
한 장력이 각원의 얼굴을 향해 휘몰아쳐 갔다. 각원이 철통에서
손을 떼 그 장풍을 막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이었다. 이때 한쪽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장군보는, 생각
을 굴릴 겨를도 없이 앞으로 몸을 솟구쳐 예전에 양과로부터 배
운 사통팔달의 초식으로서 비스듬히 별건가의 어깨를 강타해 갔
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각원의 내력이 철통속으로 연결돼 두 줄
기의 물기둥이 별건가의 얼굴을 향해 쏜살같이 뻗쳐나갔다.
장력과 물기둥이 서로 허공에서 맞부딪치자 불꽃이 사방으로 튕
겨 두 사람 모두 물벼락을 맞은 꼴이 되었다. 어쨌든 별건가의
웅후한 장력은 이로써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 반면, 별
건가는 미처 장군보의 기습을 피할 새가 없이 어깻죽지에 일장을
맞았다. 장군보는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장법이 기이하고 내력
(內力) 또한 믿어지지 않을 만큼심후해, 별건가는 비틀거리며
비스듬히 세 걸음이나 물러나 겨우 몸을 고정시켰다.
각원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미타불.....아미타불..... 별거사, 노승을 살려 주시구료.
가슴이 두근거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소이다."
별건가는 우롱당한 기분이었다. 그는 성난 음성으로 외쳤다.
"소림사가 와호장룡(臥虎藏龍)한 곳이라더니 과연 사실이구료.
일개 어린 소년까지 이런 비범한 무공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오!
이놈, 네가 나의 십 초식을 받아낸다면, 다시는 살아 생전 중원
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
무색, 무상 등은 장군보가 장경각에서 자일을 돕는 애일 뿐 무
공을 전혀 배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아무렇게나 일장을 전개해, 우연히 별건가에게 충격을 준 것이라
생각했다. 만약 정말로 별건가와 겨루게 된다면, 십 초식이 아니
라 단 일 초도 받아내지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무상선사는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별거사, 그건 당치도 않은 말이오! 곤륜삼성이라 자처하는 자
가 어찌 일개 잡일을 하는 어린 것과 무공을 겨루겠다는 거요!
정녕 원한다면 빈승이 대신 십 초를 받아보겠소!"
별건가는 고개를 내둘렀다.
"난 여지껏 이런 낭패를 당한 적이 없소. 이 일장의 빚은 기어
코 갚고야 말겠소! 자, 이놈아! 각오를 단단히 해라!"
말을 내뱉기 무섭게 장군보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뻗어냈다. 신
속한 출수였다. 장군보는 그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무
색, 무상 등이 구원의 손길을 뻗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주위
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가슴이 철렁했다.
순간, 장군보는 제자리에 서서 발끝을 살짝 왼쪽으로 트는 동시
몸을 오른쪽 방향으로 돌려 우인전보(右引箭步)로서 절묘하게 그
의 일장을 피했다. 뿐만 아니라, 잇따라 왼손으로 주먹을 쥐어
허리를 호위하고, 오른손을 칼날처럼 세워 격출하니..... 이것은
바로 소림파의 기본 장법인 우천화수(右穿花手)가 아닌가! 이 일
초에 담긴 진기는 태산 같고, 장세(掌勢)는 황하(黃河)의 물줄기
같았다. 도저히 어린 한 소년의 솜씨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별건가는 직접 일장을 맞아 보았기 때문에, 이 소년의 내력이
반천경 등 세 사람보다 훨씬 심후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일 초식 이내에 이 소년을 격패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소년이 전개한 우천화수는, 비록 소림의 가장 기초적인 초식이지
만 그 웅후한 힘과 온건한 자세는 실로 반격을 가할 수 있는 틈
이 없었다.
별건가는 자신도 모르게 갈채를 보냈다.
"훌륭한 장법이군!
무상은 문득 느끼는 바가 있어 무색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사형, 축하합니다. 언제 저런 훌륭한 제자를 거두었습니까?"
무색은 고개를 내둘렀다.
"아니..... 난....."
그가 말을 잇기도 전에 장군보는 이보랍궁(移步拉弓), 단봉조양
(單鳳朝陽) 이랑담삼(二郞擔衫), 세 초식을 연거푸 전개했다. 그
엄한법도의 강맹한 힘은 소림파 일류 고수에 비해 추호도 손색
이 없었다. 천명, 무색, 무상과 칠장노는 장군보가 소림의 초식
을 이렇게 멋드러지게 전개하는 것을 보자, 모두 눈이 휘둥그래
질 뿐이었다.
무상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장법의 법도가 이렇게 엄한 것은 고사하고 저 내력은 도저
히....."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별건가는 여섯 번째 초식을 펼쳤다.
그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 어린애도 당해 내지 못하면서 소림사에 도전장을 보냈으니,
천하 무림인의 웃음거리가 될 게 아니겠는가!'
그는 갑작스레 몸을 회전시켜 천산설표(天山雪瓢)의 초식을 전
개했다. 순간, 장영이 난비하며 장군보의 사면팔방을 모두 감싸
버렸다. 장군보는 화산 절정에서 양과로부터 네 초식을 가르침
받은 것 외에는 누구에게도 무공을 전수받은 일이 없었다. 한데,
이렇게 현묘무쌍한 상승 장법을 어떻게 와해시킬 수 있단 말인
가? 위급한 상황 아래서 그는 상반신을 좌측으로 돌려 한계세(寒
鷄勢)를 취하고, 쌍장을 이마 위로 올려 왼손 호구와 오른손 호
구가 멀리 마주 보게 만들었으니..... 바로 소림권법 중에 한 초
식인 쌍권수(雙拳手)였다. 이 일 초를 펼친 장군보의 늠름한 자
세는 대웅전에 모셔놓은 금동불상을 연상시킬 만큼 중압감이 있
었다. 별건가가 어느 방위에서 진격해 오든 모두 그의 쌍권수 아
래 감싸 여질 것이다.
달마당과 나한당 제자들의 입에서 절로 우뢰와 같은 갈채가 터
졌다. 그들은 장군보에게 진심으로 탄복했다. 그는 소림의 가장
평범한 권초로서 상대방의 가장 오묘하고 복잡한 초식을 와해 시
킨 것이다.
갈채가 터지는 가운데 별건가는 맑은 기합을 토하며 장군보의
가슴을 향해 일권을 격출해 냈다. 그 일권은 그가 임기웅변으로
변화시킨 것이지만 위력이 엄청났다. 장군보는 거기에 대항하여
쌍장으로 편화칠성(偏花七星)이란 초식을 밀어냈다.
평!!
권풍과 장풍이 격돌되자 일성 굉음이 터지며 별건가는 몸이 휘
청거렸고, 장군보는 뒤로 세 걸음 밀려났다.
"흥!"
별건가는 냉소를 날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내딛는 동시에, 똑같은
권법을 구사했다. 장군보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편화칠성을 수평
으로 밀어냈다. 또다시 굉음이 터지며 이번에는 장군보가 다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별건가는 하마터면 뒤로 한 걸음 밀려날 뻔했기 때문에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이제 한 초식밖에 남지 않았으니 각별히 조심해라!"
그는 앞으로 세 걸음 내딛어 자세를 굳건히 하더니, 일권을 천
천히 격출했다.
이때, 소림사 앞에 모인 수백 명은 모두 숨을 죽였다. 그들은
별건가의 마지막 일격이 어느 정도 위력을 지니고 있는 지 짐작
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 일격은, 그가 평생 동안 쌓아올린
명성이 좌우될 것이다.
장군보는 세 번째로 편화칠성 초식을 전개했다. 이번에도 장
(掌)과 권(拳)이 맞부딪쳤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갑자기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제각
기 모든 내력을 끌어올려 대치했다. 무공의 기교로 따진다면 별
건가가 장군보보다 백 배는 더 앞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내력을 겨룸에 있어서는 상황이 달랐다. 장군보는 구양진경(九陽
眞經)의 심법(心法)을 배워 체내의 내력이 도도한 물줄기처럼 팽
배했다.
별건가는 즉시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도저히 장군보의 내력
을 당해 낼 자신이 없음을 간파하고, 곧장 몸을 솟구쳐 장군보의
장력이 허공에 분산되게 만들었다. 동시에 민첩한 신법을 펼쳐
장군보의 등을 살짝 밀었다. 장군보는 그 바람에 땅에 쓰러져 약
간의 충격을 받은 듯 금새 일어나지 못했다.
별건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탄하듯
중얼거렸다.
"별건가야, 정말 별게 아니었구나!"
그는 천명선사를 향해 턱이 땅에 닿도록 큰절을 올렸다.
"천 년 동안 명성을 떨쳐온 소림의 무공은 정말 대단하군요. 오
늘에서야 소림의 명성이 명실상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진심으로 승복합니다."
말을 끝낸 그는 곧 몸을 돌려 발끝으로 살짝 땅을 찍어 수장 밖
으로 표연히 날아갔다. 곧 사뿐히 땅에 내려선 그는 각원대사에
게 말했다.
"각원대사, 대사께 말을 전해 주라는 사람이 있었소. 경서가 기
름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말을 끝낸 그는 다시 몸을 솟구쳐 눈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사
라졌다. 혀를 내두를 만큼 신속 절륜한 신법이었다.
장군보는 비로소 천천히 꿈틀대며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온통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비록 별건가에 의해 쓰러졌지만
주위에 있는 고수들은 내력 대결에서 장군보가 한수 위였음을 알
고 있었다.
심선당 칠장노 중에 한 사람이 갑자기 소리쳤다.
"저제자의 무공은 누가 전수해 주었느냐?"
그의 음성은 지극히 냉랭하여 엄동설한에 밤까마귀가 울어대는
것 같았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한기
를 느꼈다.
천명, 무색, 무상도 벌써부터 똑같은 의문을 갖고 있었기 때문
에, 일제히 각원과 장군보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각원과 장군
보는 멀건히 서서 선뜻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천명이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각원은 비록 내력이 심후하지만 권법은 배우지 않았다. 한데
저 애의 소림권은 누구로부터 전수받은 것이지?"
달마당과 나한당의 제자들도 자못 궁금했다. 오늘 소림이 봉착
한 위기를 해결해 준 장본인이 일개 잡일을 하는 어린애일 줄이
야. 실로 뜻밖이었다. 만약 그에게 무공을 전수해 준 사부가 나
선다면, 장문인께서 필시 후한 상을 내릴 것이라 생각했다.
칠장노 중의 노승은 장군보가 멀건히 서 있는 것을 보자, 눈꼬
리를 치켜세우며 만면에 살기를 띄었다.
"너에게 묻질 않았느냐! 대관절 누가 너에게 나한권을 가르쳐
주었느냐?"
장군보는 품 속에서 그 곽양이 준 한 쌍의 철나한을 꺼냈다.
"제자는 이 철나한의 흉내를 내서 혼자 몇 수 연습했을 뿐, 어
느 누구에게도 무공을 전수받은 일이 없사옵니다."
노승은 성큼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음성을 낮추었다.
"다시 한 번 똑똑히 말해 보아라! 너의 나한권을 본사의 어느
사부로부터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운 것이란 말이냐?"
그는 비록 음성을 낮추었지만, 그 음성 속에는 짙은 살기가 풍
겼다.
장군보는 잘못한 일이 없으므로, 노승의 살기등등한 모습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낭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제자는 단지 장경각에서 차를 끓이고 청소를 하며 각원 사부님
의시중을 들어왔습니다. 본사의 어느 사부님도 제자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한권은 제자가 스스로 배운 것입니
다. 만약 틀린 데가 있으면, 노사부님께서 지도를 해주십시오."
노승의 눈에선 갈수록 짙은 살기가 뿜어지며, 한참 동안 꼼짝도
않고 장군보만 노려보았다.
각원대사는 이 심선당의 노승이 장문인의 사숙으로서 항렬이 자
뭇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장군보를 살기
띤 눈으로 노려보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곧 뇌리
에 전광석화처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어느 해였는지 기억이 없지만, 장경각에서 우연히 한 권의 작은
책자를 훑어본 적이 있었다. 그 얄팍한 책은 수초본(手抄本)으로
서 소림의 한 가지 중대 사건이 기록돼 있었다.
-------- 약 칠십 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소림의 장문인은 고승
선사(苦乘禪師)로서 바로 천명선사의 사조였다.
그 해 가을이 무르익어 갈 무렵, 사내의 연례 행사로 달마당대
교(達摩棠大校)가 거행되었다. 그것은 달마당과 나한당의 두 수
좌가 제자들의 무공이 일 년 동안 얼마 만큼의 진전이 있었는지
평가하는 행사였다. 제자들이 모두 무공을 펼쳐 보인 후, 달마당
의 수좌인 고지선사(苦智禪師)가 평을 하기 위해 단상에 올랐다.
그 순가, 머리를 기른 두타(頭陀)하나가 앞으로 뛰쳐나와 고지선
사에게 삿대질을 하며 무공도 제대로 모르면서 건방지게 달마당
수좌 행세를 한다고 폭언을 서슴치 않았다.
중승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 자를 자세히 보니, 바로 사내
주방에서 잡일을 하는 화공두타(火工頭陀)였다. 달마당의 제자들
은 사부가입을 열기도 전에 다투어 호통을 쳤다.
그 화공두타는 코웃음을 날렸다.
"스승이란 작자가 흐리멍텅하니 제자들은 더욱 형편이없군!"
그는 즉시 한가운데로 나섰다. 달마당의 제자들은 그를 혼내주
기 위해 한 명씩 나섰다. 그러나, 모두 그와 몇 초식을 겨뤄 보
지도 못한 채 비참한 패배를 당했다. 원래 동문끼리 비무(比武)
할 때는 적당한 정도에서 승패를 판가름 지을 뿐 불상사를 빚는
일이 없었다. 한데, 이 화공두타의 출수는 지극히 악랄하여 달마
당의 구대제자(九代弟子)를 연패시켰을 뿐 아니라 모두에게 중상
을 입혔다.
수좌인 고지선사는 놀라움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 화공두타
가 전개한 무공은 모두 본사의 정통 권법이었으므로, 그는 노기
를 억제하고 누구에게 무공을 전수 받았느냐고 다그쳤다.
그 화공두타의 대답은 간단했다.
"아무도 나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 스스로
배웠다!"
알고 보니, 그 화공두타가 소속되어 있는 선당(膳堂)의 일을 감
독하는 승인의 성격이 매우 거칠어, 걸핏하면 아랫사람들에게 주
먹질을 했다. 그 화공두타는 삼 년간 숱하게 얻어 맞아 피를 토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자연히 그의 가슴에 원한이 응어리져
은밀히 무공을 훔쳐 배우기로 결심했다. 소림의 제자들은 모두
무공을 알고 있으므로,권법 초식을 훔쳐 배울 기회는 많았다.
그는 본래 지혜가 탁월한데다가 앙심을 품었기 때문에, 이십 년
간의 피나는 각고 끝에 최상승의 무공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러
나 그는 겉으로 전혀 내색하지 않고 꾸준히 주방에서 온갖 잡일
을 도맡아 했다. 그 선당을 감독하는 승인이 주먹으로 구타해도
전혀 반격을 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이미 심후한 내공을 쌓았기
때문에 더 이상 부상을 입는 일은 없었다. 이 화공두타는 천성이
음흉하여 자신의 무공이 소림의 모든 승려를 젖힐 수 있다는 판
단이 선 후에야 비로소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쌓
아온 원한이 일시에 폭발하자, 그 기세는 걷잡을 길이 없었다.
고지선사는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냉소를 날렸다.
"너의 각고는 실로 대단하구나!"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화공두타와 직접 겨루기에 이르렀다.
고지선사는 당시 소림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고수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워낙 고령인데다가 자비심이 두터워 출수
하는 데도 관용을 베풀었다. 그 반면, 화공두타는 시종일관 살수
를 전개했다. 그리하여 오백여 회합이 경과도어서야 고지선사가
겨우 확고한 승산을 잡을 수 있었다.
마침 두 사람은 대연사(大連絲)의 초식으로 맞서고 있었는데,
서로 팔을 감은 상태에서 고지선사의 쌍장은 이미 상대방 가슴
부위 사혈(死穴)을 누르고 있었다. 그가 내력을 발출시키면 화공
두타는 즉시 목숨을 잃게 될 것이었다. 화공두타의 입장에선 도
저히 이 죽음의 고비를 모면할 여지가 없었다.
고지선사는 그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소림의 무학을 이렇게 높은
경지로 터득한 것을 가상히 여겨, 차마 목숨을 끊을 수 없었다.
"물러나라!"
그는 짤막하게 일성을 토하며 쌍장을 좌우 양쪽으로 갈랐다. 그
러나 화공두타는, 그의 진의를 오해해 신장팔타(神掌八打) 중에
한 초식을 전개한 것으로 알았다. 이 신장팔타는 소림 절학 중의
하나로서, 그는 달마당의 제자가 이 초식을 전개해 굵은 통나무
를 절단시키는 걸 본 적이 있던 터라, 그 위력이 엄청나다는 것
도 알고 있었다.
화공두타는 비록 무공이 고강하지만 어디까지나 훔쳐 배운 것이
므로, 소림 무학의 심오한 바탕까지 통달할 수는 없었다. 고지선
사의 이 초식은 사실 분해장(分解掌)으로서 쌍방이 동시에 뒤로
물러나 싸움을 중단하자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화공두타
는 그것을 신장팔타 중의 여섯 번째 초식인 열심장(裂心掌)으로
생각했다.
'나를 죽이려 하지만 어림없다!'
그는 속으로 울부짖으며 재빨리 앞을 향해 덮쳐가며 쌍권을 일
제히 격출해 냈다. 순간, 그의 배산도해(排山倒海)할 듯한 권풍
이 휘몰아쳐 오자 고지선사는 흠칫 놀라 황급히 쌍장으로 대항했
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뿌드득------
그의 왼쪽 팔뼈와 가슴 앞 갈비뼈 네 개가 즉시 부러졌다. 중승
들은 대경실색하여 그에게 달려가 호위했다. 고지선사는 숨을 미
약하게 내쉬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극심한 내상까지 입은
것이다. 중승이 다시 화공두타에게 눈길을 돌렸을때, 그는 이미
혼란을 틈타 어디론가 달아나버렸다.
그날 밤, 고지선사는 세상을 떠났다. 사내가 슬픔으로 뒤덮여
있을 때 그 화공두타가 다시 잠입해 들어와, 주방 일을 감독해
온 승인을 비롯해 평상시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승인 다섯
을 죽였다. 이 일로 해서 소림사 전체는 발칵 뒤집혔고 수십 명
의 고수들을 내보내 추적을 벌였지만, 아무리 대강(大江)남북을
샅샅이 뒤져도 화공두타를 찾아 내지 못했다.
사내에서는 항렬이 높은 승려들이 이 일을 놓고 서로 논쟁을 벌
이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나한당의 수좌인 고혜선사(苦慧禪師)
가 대노하여 멀리 서역으로 떠나 소림의 서역 지파를 창설한 것
이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소림의 무학은 수십 년이나 후퇴하
게 되었다.
그 후로 새로운 사규를 정해, 스승으로부터 직접무공을 전수받
지 않고 몰래 배운 자가 발각될 때는 전신의 근맥(筋脈)을 잘라
폐인으로 만들거나 죽이기로 했다. 수십 년 이래 사내의 규율이
워낙 엄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공을 훔쳐 배우는 자가 생겨나지
않았다. 아울러 그 새로 정했던 사규는 승려들의 뇌리에서 잊혀
져 갔던 것이다.
이 삼선당의 노승은 바로 그 고지선사의 수제자였으므로, 은사
의 참사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장군보가 또다시 스승을 통하지 않고 스스로 무공을 배
웠다는 것을 듣고는 옛일이 되살아나 비분이 교차된 것이다.
각원은 심선당의 노승이 장군보를 화공두타에 비유한다는 사실
을 깨닫자, 이내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황급히 소리쳤다.
"노사부님, 이..... 이건 군보의 잘못이 아니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달마당의 수좌 무상선사의 추상같
은 호령이 떨어졌다.
"달마당의 제자는 모두 힘을 합해 저 녀석을 잡아라!"
달마당의 십팔 제자가 즉시 앞으로 뛰쳐나와 각원과 장군보를
사면팔방으로 포위했다. 그들이 구축한 포위망은 워낙 넓어 곽양
까지 포위망에 포함시켰다.
심선당의 노승이 싸늘하게 외쳤다.
"나한당의 제자들도 어서 행동 개시를 하지 않고 뭘 꾸물대느
냐!"
나한당의 백팔 제자들은 우뢰 같이 대답을 했다.
"예!"
그들은 달마당 십팔 제자의 바깥쪽에다 다시 세 겹의 포위망을
구축했다. 장군보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자기가
나서서 별건가를 쫓아버린 것이 사규에 어긋난 줄로만 알고 스승
님에게 구원의 눈길을 던졌다.
"스승님, 저는......!"
각원은 그와 십여 년간 생활을 같이 해오며 부자 이상의 정을
쏟아왔다. 지금 상태에서 장군보가 붙잡히면 목숨을 잃거나 폐인
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상선사의 불호령이 다시 떨어졌다.
"어서 행동 개시해라!"
달마당의 십팔 제자는 일제히 불호를 외치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음을 옮겨 갔다. 각원은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한시
도 지체할 수 없이 즉시 몸을 한 바퀴 회전시켰다. 두 개의 철통
이 허공에 떨쳐졌다.
중승은 한 갈래의 강맹한 힘줄기가 뻗쳐오자, 섣불리 더이상 앞
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각원이 다시 한 번 몸을 회전시키자,
철통 안에 들어 있던 물이 모조리 주위에 뿌려진다. 그러는 가운
데 각원은 좌측 철통에 곽양을 담고, 우측 철통 속에 장군보를
담았다. 그가 연거푸 칠팔 번의 원을 그리자, 두 개의 철통이 흡
사 유성추(流星鎚)처럼 허공을 휘저었다. 그 천 근이 넘는 힘을
천하에 어느 누가 당해 낼 수 있단 말인가?!
달마당의 제자들은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각원은 날을 듯이 걸
음을 재촉해 곽양과 장군보를 철통 속에 넣은 상태로 하산했다.
중승들은 고함을 지르며 뒤쫓아왔지만 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차
츰 멀어져갔다. 소림사의 규율은 극히 엄해, 달마당 수좌가 장군
보를 잡으라고 명령을 내린 이상 어느 누구도 감히 거역할 수 없
었다. 중승들은 도저히 쫓아갈 수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신법을
최고 경지로 전개해 계속 추적했다. 승려들의 신법은 모두 차이
가 있어 차츰많은 사람들이 뒤떨어지게 되었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는, 단지 달마당의 오대 제자만이 앞장에
남게 되었다. 그들은 벌써 여러 군데 갈림길을 지나왔다. 이젠
각원이 어느 방향으로 달아났는지조차 종잡을 수 없었다. 설령
그를 쫓아간들 자기네 다섯 명의 무공으로선 각원과 장군보의 적
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풀이 죽은 채로 소
림사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각원은 곧장 수십 리 길을 달려 비로소 철통을 내려놓았다. 주
위를 둘러보니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어느덧 날은 저물
고 까마귀가 삼삼오오 때를 지어 둥우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각
원의 내력이 제아무리 타인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더라도, 단숨에
육중한 철통을 짊어지고 수십 리 길을 달려왔기 때문에 기진맥진
해 있었다.
장군보와 곽양은 철통 속에서 뛰쳐나왔다. 장군보는 기진맥진해
있는 스승님의 모습이 안타까와 콧등이 시큰했다.
"스승님, 편히 쉬십시오. 제가 가서 먹을 것을 찾아 오겠습니
다."
이런 황산절지(荒山絶地)에서 먹을 것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
이 아니었다. 한참 후에야 장군보는 산딸기를 한아름 갖고 왔다.
세 사람은 대충 요기를 채우고 바윗돌에 기대어 휴식을 취했다.
곽양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화상, 정말 어처구니가 없죠? 물에 빠진 것을 건져 주니 보
따리 내놓으라는 격이예요! 내가 보기에 소림사의 화상들 중에서
당신과 무색선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괴팍하고 엉뚱한 일면을 지
니고 있는 것 같아요."
각원은 턱을 한번 끄덕여 보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곽양은 분해 죽겠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만약 대화상 사도(師徒)가 아니었다면 소림사는 오늘 그 곤륜
삼성에게 혼줄이 났을 거예요. 그들은 대화상에게 백 번 감사를
드려도 부족할 텐데,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장 형제를 잡으려
하니 세상에 이런 경우 없는 일이 어디 또 있겠어요!"
각원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장문인과 무상사형만 나무랄 일도 아니지. 소림사에 엄한 사규
가 한 가지 있는데......"
여기까지 말한 그는 숨이 막히는지 기침을 계속했다.
곽양은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너무 지쳤어요. 얘기는 내일 해도 늦지 않으니, 우선 눈이나
붙이세요."
각원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너무 지쳤어."
장군보는 곧 나무를 주워 불을 피우고는 곽양과 함께 옷을 말리
고 나서 나무아래 누워 잠이 들었다.
얼마동안의 시간이 흘렀을까. 곽양은 잠결에 어렴풋이 염불 외
는 듯한 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과연 각원대사가 무엇인가 읊조
리고 있었다.
"........피지력방침아지피모(被之力方侵我之皮毛), 아지의이입
피골리(我之意已入被骨裏)........"
---------상대의 힘이 나의 살갖에 닿는 순간, 나의 마음은 이
미 상대의 뼈 속으로 들어가고----------
그의 읊조리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두 손으로 지탱하여 단숨에 관통할지어다. 좌(左)에
치중하면, 우(右)에 허가 생기고, 우에 치중하면 좌에 허(虛)가
생기니........"
곽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건 그 무슨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불경
이 아니잖아! 좌중우허(左中右虛) 우중좌허(右中左虛)라..... 무
학 권경(拳經) 같기도 하고.......'
각원은 멈칫하더니 다시 읊조려 나갔다.
"........기(氣)는 수레바퀴와 같으니 몸이 거기에 따라야 하
며, 따르지 않을 시에는 몸이 흐트러지니........"
여기까지 들은 곽양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지금 각
원이 읊조리고 있는 것은 무공구결(無功口訣)임이 분명했다. 곽
양은 절로 깨닫는 바가 있었다. 각원은 정말 무공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단지 고질적으로 책 읽는 것을 즐겨 일단 무슨 책이든
손에 쥐기만 하면 달달 외어 버린다.
왕년에 화산에서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분명 장마조사가 남긴
능가경 행간 사이에 다시 한 부의 구양진경(九陽眞經)이 수록되
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각원은 그것을 강신지술(强身之
術)로 생각해, 틈나는 대로 그 구양진경에 적힌 구절대로 연마를
했다. 동시에 제자인 장군보에게도 가금 한두귀절씩 귀띔해 주었
다. 그로 인하여 사도 두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천
하 제일 고수의 경지를 터득하게 된 것이다.
그 날, 소상자가 그에게 일장을 건재했지만 멀쩡했다. 오히려
장풍을 전개한 소상자가 반탄지력(反彈之力)에 의해 중상을 입지
않았던가!
그러한 신공(神功)은 곽정과 양과라 할지라도 불가능했다. 오늘
이들 사도가 별건가를 격패한 것도 이 구양진경의 공로임에 분명
했다.
곽양은 내심 생각했다.
'그가 지금 중얼거리며 읽고 있는 게, 혹시 그 구양진경의 귀절
이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행여나 기회를 놓칠세라, 조용히 일어나
앉아 경문(經文)에 귀를 기울이며 뇌리에 암기해 두었다.
'만약 정말 구양진경의 귀절이라면 오묘무쌍하여 짧은 시간 내
에 이해하진 못할 것이다. 그러니 우선 뇌리에 기억해 두었다가
내일 다시 자세한 것을 물어야지......'
각원의 읊조림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곽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귀절 속에 빠져들었다.
이때, 희미한 달빛 아래 장군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역시 귀
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각원의 읊조림은 이제 간간이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가끔 능가경의 경문이 섞여
나왔다. 능가경은 본디 천축문(天竺文)으로 적혀 있었다. 각원은
그것을 역문(譯文)으로 읽었지만 듣는 사람을 헛갈리게 만들었
다. 곽양은 영특하여, 오분의 일 정도는 뇌리에 기억할 수 있었
다.
어느덧 달이 서산마루로 기울고, 사람의 그림자가 더욱 길게 드
리워졌다. 각원의 읊조리는 소리도 점차 미약해져 알아 듣지 못
하는 대목이 많아졌다.
곽양은 안타까왔다.
"대화상, 이제 그만두시고 다시 잠을 청하세요."
각원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듯 계속 읊어나갔다.
"......역종인차(力從人借), 기유척발(氣由脊發)......"
-------힘은 상대방으로부터 빌려야 하며 기는 등성마루로부터
비롯된다. 기가 아래로 내려가 양어깨에서 등뼈로 흡수되어 허리
로 집결된다. 이렇게 기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일컬어
합(合)이라 한다. 등골로 뻗쳐, 다시 양팔로 퍼져 손가락으로 전
개한다. 이렇듯 기가 아래서 위로 향하는 것을 소위 개(開)라 한
다.--------
"......합위시수(合爲是收), 개위시방(開爲是放), 능해개합(能
解開合), 편지음양(便知陰陽)......"
-------합은 거두는 것이며, 개는 푸는 것을 뜻한다. 개와 합을
이해하면 음과 양을 알게 된다-------
각원의 음성이 차츰 낮아지더니, 드디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
았다. 이미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별이 자리를 옮김에 따라 달이 서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
다. 홀연 먹장구름이 깔리듯 대지가 칠흑에 덮였다. 다시 한 식
경이 지나자 동녘 하늘에 서광이 밝아왔다.
각원은 어느새 일어났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정좌한 채 움직이
지 않았다. 그러나 아침 햇살을 받은 그의 얼굴에는 미미한 웃음
이 드리워져 있었다.
장군보는 홀연 이상한 예감이 들어 고개를 획 돌렸다. 멀리 떨
어지지 않은 나무 뒤에서 한 줄기의 사람 그림자가 번뜩였다. 그
는 황색 가사의 자락을 언뜻 보고는 흠칫하며 소리쳤다.
"누구세요?"
그러자, 나무 뒤에서 몸집이 훤칠한 노승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바로 나한당의 수좌 무색선사였다.
곽양은 놀라움과 반가움이 엇갈렸다.
"대화상, 못내 아쉬움이 남아 뒤쫓아 왔나요? 아니면 이들 사도
를 기필코 잡아가기 위해 왔나요?"
무색선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부처님의 자비로세. 만약 노승이 어떤 행동을취할 생각이었다
면, 삼경(三更)에 이곳에 당도해 지금까지 기다리지는 않았을 걸
세. 이 노승이 시시비비도 분간 못하는 흐리멍텅한 사람 같은가?
각원사제, 무상사제는 달마다의 제자들을 이끌고 동으로 추격해
갔네. 그러니 어서 서쪽으로 달아나게나."
그는 각원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나 각원은 여전히 눈
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본 장군보가
스승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스승님, 이젠 눈을 좀 뜨십시오. 나한당의 수좌께서 오셨습니
다."
각원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장군보는 당황해져 조
심스럽게 그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운 감
촉이 손에 전해져 왔다. 각원이 원적(圓寂)한 지 이미 오래였다.
장군보는 하늘이 무너질 듯 슬픔이 복받쳐 통곡을 하며 소리쳤
다.
"스승님! 스승님.....!"
그러나 깨어날 리 만무였다. 무색선사는 조용히 합장했다.
"아미타불..... 팔방의 구름이 걷히니 사면이 청명하고 미풍에
향기가 실려오니 군산(郡山)이 조용할지어다. 무우무욕(無憂無
慾)할 지언데, 이보다 더 큰 경축이 있을손가?"
말을 끝낸 그는 표연히 떠나갔다.
장군보는 스승님 시신 앞에 쓰러져 통곡을 하였다. 곽양도 하염
없이 눈물을 뿌렸다.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어차피 빈
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 아니던가!
소림사의 승려들이 숨을 거두면 모두 화장을 치르는 게 상례였
다. 두 사람은 곧 마른 나뭇 가지를 주워 모아 각원의 법신(法
身)을 범화(梵火)했다.
곽양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장 형제, 소림사의 승려들이 끝내 자네의 행방을 쫓을 테니,
여러 모로 조심해야 하네. 우리 다시 만날 기약을 하고 이만 헤
어져야겠네."
장군보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곽 낭자, 낭자는 어디로 가실 겁니까? 그리고 이 몸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
곽양은 그가 자기의 갈 곳을 물어오자 마음이 울적해졌다.
"하늘 끝 바다 저편까지 발길 닿는 대로 정처없이 떠돌아 다닐
것이니, 나도 내가 갈 곳이 어딘지 알 수가 없네. 장 형제, 자네
는 나이도 어리고 강호의 경험도 없으니 이렇게 하도록 하지."
그녀는 금팔찌 하나를 뽑아 장군보에게 건네주었다.
"이 팔찌를 갖고 곧장 양양으로 가서 나의 부모님을 만나보게.
자네를 잘 보살펴 줄 거야. 나의 부모님과 함께 있으면 소림사의
승려가 제아무리 악랄하다 하더라도 자네를 괴롭히지 못할 걸
세."
장군보는 눈물을 흘리며 팔찌를 받았다.
곽양이 다시 말했다.
"나의 부모님을 만나면 나는 잘 있다고 안부난 전해 주게. 나의
아버님은 소년 영웅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에 자네 같은 인재를
보면 제자로 삼을지도 모르네. 내 남자 동생은 무던하여 틀림없
이 자네와 원만하게 지낼 거야. 단지 언니의 성질이 고약해 자기
의 비위에 뒤틀리면 남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도 서슴치 않
으니, 자네가 될 수 있는 대로 참게. 그러면 큰 문제는 없을 걸
세."
그녀는 당부를 끝내고 곧 몸을 돌려 어디론가 떠나갔다.
장군보는 외톨이가 되었다. 천지간이 끝없이 넓거늘 그의 안식
처는 한 곳도 없었다. 그는 스승님의 유골 앞에서 반나절 동안
말뚝처럼 서 있었다. 어디론가 가야만 했다. 자기는 쫓기는 몸이
아니던가!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놓았다. 약 십여 장 정도 걸
어나가다가 홀연 숨을 돌려 되돌아와, 스승님이 남긴 그 육중한
철통을 짊어지고 휘청휘청 다시 걸음을 떼어놓았다. 아무리 돌아
보아도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산절령(荒山絶嶺). 깡마른
소년은 자기 몸집보다 큰 철통을 짊어지고 묵묵히 서쪽으로 향해
걸어갔다. 이따금 이름을 모르는 산새가 허공을 가로질러 어디론
가 날아갈 뿐.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장군보! 그는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육중한 철통이
그의 육신을 짓눌러 왔지만 마음은 그보다 몇 갑절이나 더 무거
웠다.
그로부터 보름 후, 장군보는 호북(湖北) 경내로 들어섰다. 이제
양양도 멀지 않았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결국 그를 찾아내지 못
했다. 무색선사가 암중에 그를 위해 중승들을 동쪽으로 따돌린
것이다. 자연히 쌍방이 거리가 갈수록 멀어질 수 밖에.
이날 오수, 장군보는 큰 산 앞에 이르렀다. 울울창창 둘러 싸인
산세가 매우 웅위했다. 장군보는 길 가는 나무꾼에게 물어 비로
소 이 산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무당산(武堂山)!!
그는 산기슭 바윗돌에 기대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때마침 한
쌍의 남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산길을 지나갔다. 농부 차림을
한 두 사람은 다정한 모습으로 무엇인가 불평을 털어놓는 것 같
았고, 남편은 고개를 떨군 채 잠자코 있었다. 곧 이어 부인이 다
음과 같이 말하는 게 들려왔다.
"당신은 사내 대장부로서 왜 스스로 앞날을 개척하려 하지 않
고, 한사코 언니와 형부를 의지하려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우린 아직 젊고 손발이 멀쩡하니 얼마든지 자립을 할 수 있어요.
겉보리를 삶아 먹더라도 그게 마음이 편하잖아요? 제발 마음을
단단하게 가지세요."
남편은 묵묵히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부인이 다시 말했다.
"옛날에도 <죽음 외에 큰일이 없다>고 했잖아요? 굳이 남에게
의탁할 필요가 있나요?"
남편은 한 마디도 반발하지 못하며 얼굴을 붉혔다.
한편, 장군보는 부인의 말이 구구절절 가슴을 파고 들었다.
-----사내 대장부가 스스로 앞날을 개척할 생각은 않고......옛
날에도 <죽음 외엔 큰일이 없다>고 하잖았어요? 굳이 남에게 의
탁할 필요가 있나요? -----
그는 이들 부부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굳어
있었다. 아무리 되풀이해서 생각해 보아도 그 촌부의 말이 백 번
지당했다. 멀리서 두 부부의 웃음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남
편이 부인의 권유에 따라 뜻을 결정한게 분명했다.
장군보는 다시 생각을 굴렸다.
'곽 낭자께서는 언니의 성격이좋지 않으니 설령 자존심을 건드
리는 말을 해도 나더러 참으라고 했다. 나도 사내 대장부이거늘
어찌 일시적인 편안을 구하기 위해 남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겠
는가? 저 한 쌍의 평범한 부부도 스스로 앞날을 개척하는데 이
장군보가 남의 눈치밥을 먹으면서 어떻게 청운의 뜻을 펼 수 있
갰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한 가지 결심을 하고 철통을 짊어
진 채 무당산을 올랐다. 그는 곧 은밀한 동굴을 찾았다. 그곳에
서 목이 마르면 옹달샘의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열매로 허기
를 채웠다. 그리고 끊임없이 각원으로부터 전수받은 구양진경을
연마해 나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그로부터 몇 년 후, 장군보는 깨달은 바가 있었다.
----- 달마조사는 천축 사람이므로 설령 중화(中華)의 문자를
안다 해도 매끄럽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뜻이 심오한 구양진경
을 스스로 쓰진 못했을 게 뻔하다. 틀림없이 후세의 중원인(中原
人)이 만들었을 것이며, 소림 고승 중에 한 사람일 가능성이 짙
었다. 그 고인이 달마조사의 이름을 빌어 천축문으로 된 능가경
새 중간에 수록해 놓았을 것이다. -----
물론, 이것은 장군보의 추측일 뿐 확실한 고증(考證)에 의한 것
은 아니었다. 장군보는 오랫동안 각원과 생활해 오며 구양진경을
절반 가량 외고 있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다시 십여 년간
스스로 연마한 결과 내력이 크게 증진 되었다. 그 후로 장군보는
도경(道經)과 도가(道家)의 연기지술(練氣之術)에 심취하여, 더
욱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어느 날, 장군보는 심산유곡을 노닐다가 뜬구름을 바라보고 흐
르는 물줄기를 굽어보다가 불현듯 가슴에 와닿는 충격이 있었다.
그는 곧 자신을 동굴에 가두어 칠일(七一) 밤나을 심사(深思)하
여 확연히 얻은 게있었으니..... 바로 이유극강(以柔克剛)이었
다. 큰 깨달음을 얻은 그는 벅찬 환희를 억제할 수 없어 앙천장
소를 터뜨렸다. 그 장소(長笑)가 전무후무한 무학의 일대종사(一
代宗師)를 탄생시켰다.
그는 스스로 깨우친 권리(拳理)와 도가의 이유극강 원리, 그리
고 구양진경에 수록된 내공을 바탕으로 하여 쳔세(千世)에 빛날
무당파(武堂派)를 창출한 것이다.
나중에 북쪽으로 보명(寶鳴)을 유람하다가 세 개의 산봉우리가
운해(雲海)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고, 또한 무학의 새로운 장
(章)을 깨달았다. 그리고 스스로 삼봉(三奉)이란 호(號)를 지었
으니..... 그가 바로 중국(中國) 무학사(武學史)에 불세출(不世
出)의 기인 장삼봉(張三奉)이다.
----- 제 1 권 2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1 권
제 3 장 도룡보도(屠龍寶刀)의 출현
꽃은 피고 지고, 다시 지고 피니..... 무상한 것 세월이라 했던
가!!
가는 세월은 막을 길 없어 홍안의 소년이 어느덧 하얀 백발로
변했다.
때는 원(元) 순제(順帝) 2년. 송조(宋朝)가 패망한 지도 어언
오십 년이 지났다.
햇살도 화사한 춘 삼월의 강남(江南).
멀리 바다가 굽어보이는 관도(官道) 위에 서른 살 가량의 건장
한 사나이가 짚신을 신고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뉘엇뉘엇 서산마루로 기울어져 갔다. 관도 양쪽으
로 복사꽃이 만개하여 완연한 봄기운과 더불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지만, 사나이는 전혀 감상할 생각없이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는 속으로 묵묵히 손을 꼽아 보았다.
'오늘이 삼월 스무 나흘이니 사월 초아흐레까지는 아직 열 나흘
이 남았구나. 길을 빨리 재촉해야지만 때맞추어 마당산에 당도해
은사님의 구십 회 생신을 축하해 드릴 수 있을 텐데.....'
이 사나이의 이름은 유대암(兪垈巖). 바로 무당파의 조사이신
장삼봉의 세 번째 제자였다.
연초에 그는 스승님의 분부를 받들어 복건성(福建省)에서 양민
을 해치는 잔악무오한 거도(巨盜)를 죽이기 위해 강호로 나온 것
이다. 그 거도는 미리 풍문을 전해 듣고 잠적해 버리는 바람에,
유대암은 두 달이 넘어서야 겨우 그의 비밀 소굴을 찾아내 사문
의 현허도법(玄虛刀法)으로 십일 초 만에 그를 죽일 수 있었다.
원래 열흘이면 일을 마무리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두 달 남짓을 허비하게 된 것이다. 일을 끝내고 손꼽아 보니 스
승님의 구십회 생신이 눈앞에 다가와 서둘러 길을 재촉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날, 그는 절강성(浙江省) 동쪽에위치한 전당강(錢塘江) 남쪽
기슭에 당도했다. 관도에서 벗어나 오른쪽 바다 가까이 넓은 염
전(鹽田)이 보였다.
한창 길을 걷고 있는데 서편 샛길로부터 이십여 명의 사나이들
이 틀가락을 어깨에 메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틀가락 양쪽 끝 목
도중에 제각기 커다란 나무통이 메달려 있는데 그 속에는 소금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청색 짧은 바지 차림에
챙이 짧은 삿갓을 쓰고 있었다. 당시 나라에서는 폭정(暴政)으로
소금의 세금을 과중하게 거두었기 때문에, 설령 바잣가에 사는
백성이라 할지라도 관염(官鹽)을 먹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사염
(私鹽)을 판매하는 암조직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행동이 거칠고
몸이 단단했다. 일반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염효(鹽梟)라 했
다.
유대암은 그들을 보는 순간부터 이상한 점을 느꼈다. 어깨에 메
고 있는 틀가락은 대(竹)도 나무도 아니고 거무튀튀한게 전혀 탄
력성이 없었다. 아마도 쇠로 된 틀가락 같았다. 그들은 각자 이
백 근 상당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걸으면서도 걸음걸이가 매우
가벼웠다.
유대암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염효들은 모두 무공을 지니고 있군. 들은 바에 의하면, 강
남 해사파(海沙派)의 사염(私鹽) 판매 조직이 가장 세력이 크고
무공 고수들도 많이 확보하고 있다는데..... 하지만, 이십여 명
의 고수들이 떼지어 소금을 팔러 다닐 리는 없을 것이다.'
만약 갈 길이 바쁘지 않았다면 뒤쫓아가 내막을 밝히고 싶었다.
하지만 한시가 급한지라 유대암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저녁 무렵에, 그는 여요현(餘姚縣)의 암동진(庵東鎭)으로 들어
섰다. 이곳에서 전당강을 건너면 바로 임안(臨安)에 닿을 수 있
고, 다시 서북으로 길을 택해 강서와 호남성을 거쳐야지만 비로
소 호북의 무당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날 밤, 강을 건널 뱃길이 끊겨 그는 부득이 암동진에서 작은
객점을 찻아 유숙하게 되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침상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왁자지걸한 소리가 들려왔다. 투숙객이
떼지어 몰려온 모양이었다. 그들의 말투는 절강(浙江) 사투리가
섞여 있었지만, 기(氣)가 충배되어 있어 무공을 연마한 자들임이
분명했다.
유대암이 창문을 통해 살펴보니, 바로 도중에서 만났던 그 염효
떼거리들이었다. 츄대암은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가부좌
를 틀고 앉아, 운기행공(運氣行功)을 세 번하고 나서 잠을 청했
다.
삼경(三更)쯤 되었을까. 옆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유대암은
이내 깨어났다. 곧 한 사람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모두들 조용히 떠나도록 해라. 옆방 손님을 깨우게 되면 공연
히 귀찮아진다."
나머지 사람들은 살며시 문을 열고 뜨락으로 나갔다. 유대암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창문 틈으로 살펴보니 염효들이 틀가락을 짊
어지고 잽싸게 대문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유대암은 내심 생각을 굴렸다.
'저 염효들의 수상한 행동으로 미루어 무슨 일을 저지르려는 게
분명하다.내가 그것을 안 이상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
가? 뒤쫓아가 보면 죄없는 몇 사람을 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날이 밝기 전에는 강을 건널 수 없으므로, 그는 곧 무기
와 암기(暗器)가 들어 있는 봇짐을 어깨에 매고 담을 넘어 객정
을 빠져 나갔다. 귀를 기울여 보니 염효 떼거리들은 동북쪽으로
향하고 있어, 즉시 경공술을 전개해 은밀히 뒤쫓아갔다.
이날 다라 하늘에 먹구름이 깔려 주위는 어두침침했다. 이 십여
명의 염효들은 어둠을 뚫고 민첩하게 달려나갔다. 반 시간도 채
못 돼서 염효들은 이십리 밖으로 벗어났다. 유대암은 경공술이
뛰어나 시종 그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바다가 가가와져 철석거
리는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홀연, 앞장서 가던 자가 무엇을 발견
한 듯 손을 번쩍 들어올리자 나머지 사람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
추었다. 앞장서 있는 자는 곧 나직하게 외쳤다.
"누구냐?"
그러자 어둠 속에서 걸쭉한 음성이 들려왔다.
"삼수변(三水邊)의 친구들인가?"
앞장서 있는 자가 경계스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소. 귀하는 누구요?"
유대암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삼수변의 친구라니? 그게 대관절 무엇일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내 깨달은 바가 있었다.
'맞아. 과연 해사파의 사람들이군. 해사파(海沙派) 세 글자가
모두 삼수변이니까....."
걸쭉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미리 충고를 하겠는데, 도룡도(屠龍刀)에 관한 일에는 곁다리
끼지 않는 게 신상에 좋을걸!"
앞장서 있는 자의 음성이 냉랭하게 변했다.
"귀하도 역시 도룡도 때문에 왔소?"
걸쭉한 음성은 징그럽게 웃었다.
"흐흐흣...!"
그의 웃음소리는 듣는 이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는 단
지 음흉하게 웃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유대암이 해변의 암석 뒤에 몸을 숨긴 채 바라보니, 키가 훤칠
한 자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둠 속이라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흰 장포를 입고 있었다. 야행인이면서 흰 옷
을 입고 있다는 것은 무공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해사파의 앞장서 있는 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도룡도는 이미 우리의 소유가 되었는데, 놈들이 훔쳐 갔소. 그
러니 되찾아오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백의인은 다시 징그럽게 웃으며 버젓이 깊을 막고 서 있었다.
그러자 해사파 염효 중의 한 사람이 참다 못해싸늘하게 외쳤다.
"어서 비켜라! 죽고 싶어 환장을.....!"
그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쓰
러졌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순간,
어둠 속에서 백포자락이 펄럭이는가 싶더니 백의인은 어느새 흔
적도 없이 사라졌다. 해사파의 쓰러진 자는 몸이 뒤틀리더니 이
내 숨이 끊어졌다. 그것을 지켜본 동료들은 분노와 놀라움이 겹
쳐, 떼지어 백의인이 사라진 방향으로 쫓아갔으나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유대암은 내심 생각을 굴렸다.
'백의객의 출수는 정말 빠르군. 그가 전개한 초식은 소림파의
대력금강조(大力金剛조) 같은데, 어두워서 내가 잘못 본 것일까?
그의 말투를 들어 보념 서북(西北) 새외(塞外)에서 온 것 같은
데, 어떻게 해서 강남 해사파의 원한을 맺게 된 것일까...?'
유대암은 갯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해사파의
염효들에게 발가되면 공연한 회오리에 말려들게 될 것이기 때문
이다.
해사파의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
었다.
"넷째의 시체를 우선 한쪽으로 치워라. 나중에 돌아오는 길에
옴의 정체를 밝혀 보자!"
일행은 일제히 대답하고 다시 틀가락을 메고 앞으로 달려갔다.
유대암은 그들이 멀어져 가자 비로소 가까이 다가가 시체를 살
펴보았다. 죽은 자의 목에 두 개의 작은 구멈이 뚫려 계속 선혈
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생각했던 대로 대력금강조에 의한 치명상
인 것 같았다. 유대암은 심상치 않은 예감이 뇌리를 스치자, 얼
른 신법을 펼쳐 염효들의 뒤를 쫓아갔다.
일행이 다시 몇 리 밖으로 달려나갔을 때였다. 우두머리인 듯한
자의 손짓에 따라 이십여 명은 사방으로 흩어져 동북쪽에 보이는
커다란 목옥(木屋)을 향해 천천히 접근해 갔다.
유대암은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저들이 말하던 도룡도가 바로 저 집 안에 있단 말인가?'
목옥의 굴뚝에선 계속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염효들은 목도
줄에 연결된 통을 내려놓더니, 커다란 주걱 같은 물건을 꺼내 통
속에서 무엇을 퍼내 사방에다 뿌렸다. 유대암은 그들이 뿌리고
있는 것이 소금이라고 생각했다.
'왜 사방에다 소금을 뿌리는 것일까?'
그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자세히 보니, 염
효들은 행여나 소금이 옷에 묻을세라 매우 조심스럽게 뿌리고 있
는 게 아닌가!
유대암은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지금 그들이 뿌리고 있는
소금은 독이 묻은 독염(毒鹽)으로서 목옥 안에 있는 사람을 해치
려는 게 분명했다.
유대암은 목옥 안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야겠다느 생각으로 살며시 목옥 뒤쪽으로
빙 돌아가 담장을 사뿐히 뛰어넘었다. 목옥 가까이 접근해 가자
화끈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살펴보니 목옥 한쪽에 커다란 화
로가 있고, 바로 그곳에서 거센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화로
옆에는 세 사람이 서서 번갈아가며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들
은 모두 육순의 노인으로서 한결같이 청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화로에 불을 지폈다.
유대암의 시선은 한 곳에 쏠려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회로불
위에 뜻밖에도 넉 자 가량 되는 한 자루의 거무스름한 단도(單
刀)가 결려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대암이 목옥 밖에서
화끈한 열기를 느낄 수 있는 화로불에도 그 단도는 빨갛게 달구
어지지 않고 시종 거무스름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지붕 위에서 갑자기 걸쭉한 음성이 들려왔다.
"보검을 손상시키면 천벌을받는다. 어서 손을 거두지 못하겠느
나!?"
유대암은 그 걸쭉한 음성의 주인공이 바로 좀전에 만났던 그 백
의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세 명의 청의 노인은 그의 외침을 아예
듣지도 못한 듯 계속해서 부채질만 하고 있었다. 곧이어 냉소와
함께 들창이 열리며 백의인이 바람처럼 목옥안에 나타났다. 화로
의 빨갛게 달아오른 불길로 해서, 유대암은 비로소 백의인의 모
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의 나이는 사십 안팎으로 안색이
창백하고 아무런 무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장백삼금(長白三禽)! 너희들이 도룡보도를 탐내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 보물을 훼손하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며 앞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세 명의 노인 중에 서쪽에 서 있는 자가 대뜸 왼손을 З쳐내 백
의인의 얼굴을 내리쳤다. 맥의인은 살짝 피하며 앞으로 한 걸음
미끄러져 갔다. 동쪽에 서 있는 노인은 그가 가까이 접근해 오
자, 화로 옆에 놓여 있는 커다란 쇠망치를 집어 다짜고짜 백으인
의 머리를 향해 후려쳐 내렸다. 백의인이 다시 절묘한 신법으로
피하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쇠망치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 즉시
불꽃이 사방으로 튕겼다. 바닥에 깔려있는 것은 보통 벽돌이 아
니라 견고하기 이를데 없는 화강석이었다. 서쪽에 있는 노인은
협공을 전개해, 쌍장을 갈퀴처럼 구부려 상하를 비무하며 공세가
신랄했다.
유대암은 이들이 싸우는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백의인이
전새하는 무공의 바탕은 소림 무학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그의
악랄한 출수는 소림파의 강맹 정대한 명문 수법과는 판이하게 달
랐다. 몇 회합을 거루자 철추(鐵錘)를 사용하는 노인이 분노가
서린 음성으로 다그쳤다.
"네늠은 누구냐? 이 보도를 빼앗아 가려면 이름이라도 남겨야
할 게 아니냐?"
백의인은 냉소만 날릴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가 전광
석화같이 몸을 회전시키며 반격을 전개하자, 서쪽 노인의 입에서
나작한 신음이 토해졌다.
"윽.....!"
그의 양쪽 손목이 일제히 부러진 것이다. 이와 동시에, 동쪽 노
인의 철추가 손에서 벗어나 곧장 천장으로 날아갔다.
평!!
천정에 구명이 선리며 철추는 곧 뜨락에 떨어져내렸다. 이 노인
은 얼른 쇠집게로 화로 속에 있는 단도를 집으려 했다.
한편, 남쪽에 서 있는 노인은 손에 암기를 움켜쥐고 계속 기회
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백의인의 신법이 워낙 빨라 좀처럼 기
회를 포착 못하고 있다가, 동쪽 노인이 집게로 단도를 집는 것을
보자 갑자기 손을 화로 속에 넣어 먼저 칼자루를 잡았다. 순간,
한 갈래의 흰 연기와 함께 짙은 노린내가 풍겼다. 보도는 여전히
거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었지만, 오랫 동안 염화 속에 달구어
졌으니 맨손이 성해 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보도를 놓을
생각을 않고 곧장 뒤로 솟구쳤다. 이어서 손이 타들어가는 고통
과 육중한 무게에 눌린듯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고종시켰다.
하지만 보도의 무게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무거워, 그 무게에 부
담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도 보도를 꼭 쥐고 있자, 살이 타
들어가는 소리가 더욱 요란하게 들렸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자지러지게 놀라 표정이 굳어
졌다. 그 틈을 타서 노인은 두 손에 보도를 받쳐들고 냅다 밖으
로 뛰쳐나갔다. 백의인은 냉소를 날렸다.
"어림없다!"
그는 질풍처럼 노인의 등을 나꿔챘다.
노인은 등 뒤에서 뻗쳐오는 바람소리를 의식하며 본능적으로 보
도를 뒤로 휘둘렀다. 순가, 화끈한 열기가 뻗치자 백의인은 눈썹
과 머리카락이 도르르 말렸다. 그는 감히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
고 노인의 몸을 보도와 함께 화로 속으로 집어던졌다.
유대암은 쌍방의 행동이 모두 흉악하여 어느 편을 들지도 않았
다. 하지만 이 노인의 몸이 화로 속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호공에서 노인의 몸을 나꿔채 사뿐히 화덕
곁에 떨어져 내렸다. 실로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른 신법이었다.
백의인과 장백삼금도 사실 벌써부터 그를 발견했다. 단지 그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가 절세 신법을 펼친
것을 보자, 백의인이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다그쳤다.
"지금 전개한 신법이 바로 천하에 알려진 제운종(梯雲縱)이냐?"
유대암은 상대방이 대번에 자신의 겅공술의 내력을 알아내자 처
음엔 좀 놀랐으나 곧 의기양양해 했다.
'우리 무당파의 무학도 이젠 강호에 널리 알려졌구나......'
그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귀하 같은 고인에게 보잘것없는 경공술 따위가 눈에 차겠소이
까?"
백의인의 얼굴에선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당의 무학에 과연 쓸 만한 것도 있군,"
그의 말투는 매우 거만했다. 유대암은 내심 화가 났으나 내색하
지 않았다.
"귀하가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해사파의 고수를 죽인 그 무공이
야말로 신출 귀몰하여,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소."
백의인은 흠칫했다.
'저놈이 모든 것을 보았구나, 대관절 어디에 숨어 있었길래 난
놈을 발견하지 못했지?'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 내 무학은 고심막측하여 좀처럼 내력을 알아볼 수 없
지. 너뿐만 아니라 설령 무당파의 장문인 장삼봉이라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유대암은 백의인에게서 스승님을 모독하는 언사를 듣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무당파의 제자들은 수심양성(修心養性)
이 깊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줄 알았다.
'저 자가 일부러 내 비위를 긁는 것은 모종의 속셈이 있을 것이
다. 몇 마디 무례한 말로 인해 저 무공이 괴이한 자와 원한을 ⅸ
을 필요는 없다.....'
그는 곧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천하의 무학은 무궁무진하여 정파와 사파를 망라하여 수천 수
만의 무학이 있지만, 그 중에 무당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일
엽편주에 불과하오. 귀하의 무공은 소림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
으니, 실로 종잡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오."
그는 비록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백의인의 무공을 사이
비라 빗댄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백의인은 그의 말에 처음으로
안색이 변했다.
두 사람이 서로 뼈 있는 말을 주고 받는 사이에, 맨손으로 그
보도를 쥐고 있는 노인은 갈수록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이제 거의 뼈속까지 타들어간 것 같았다.
동쪽과 서쪽에 있는 두 노인은 모두 보도를 빼앗기 위해 호시탐
탐 기회를 노렸다. 돌연, 보도를 쥐고 있는 노인의 입에서 싸늘
한 기합소리가 터졌다.
"얍!!"
그는 다짜고짜 보도를 휘두르며 미친 들소처럼 밖으로 뛰쳐나갔
다. 그는 누구 한 사람을 겨냥해 보도를 휘두른 게 아니었기 때
문에,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유대암이 먼저 당하게 되었다. 유대
암으로서는 실로 뜻밖이었다. 자기를 구해 준 사람에게도 마구잡
이로 칼을 휘두르다니, 유대암은 황급히 몸을 솟구쳐 칼날을 피
했다. 노인은 두 손으로 칼자루를 쥔 채, 발광하듯 보도를 휘두
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백의인과 나머지 두 노인은 그 거친 기
세에 정면으로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황급히 피했다가 뒤쫓아
나갔다.
보도를 가진 노인은 비실비실 대문 밖으로 뛰쳐나갔으나, 갑자
기 돌뿌리에 채인 듯 앞으로 고꾸라졌다. 동시에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중상을 입은 듯 싶었다. 백의인과 나머지 두 노인이 일
제히 달려가 보도를 나꿔채려다가, 흡사 독사에게 물린 듯 모두
잘막한 외마디를 토했다. 백의인은 곤두박질을 한 번 하더니 이
내 솟구쳐 일어나 황급히 밖으로 달려나갔지만, 두 노인은 앞서
쓰러진 노인과 마찬가지로 고꾸라진 채 계속 뒹굴며 일어나지 못
했다. 실로 뜻하지 않은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으앗...!"
"앗...!"
그들의 입에선 계속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유대암은 이런 처절한 광경을 보고 얼른 달려가 구해 주려다가,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주춤했다. 해사파가 목옥 밖에 독
염을 뿌린 일이 생각난 것이다. 지금 목옥 밖은 온통 독염으로
깔려 있을 것이다. 유대암은 그 자신도 꼼짝없이 갇히게 된 사실
을 깨달았다.
주위를 두러보니 대문 안쪽 좌우에 제각기 긴 걸상이 하나씩 놓
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유대암은 지체없이 그 두 개의 걸상을
높이 세워 그 위로 몸을 솟구쳤다. 그는 두 발을 제각기 걸상에
얽어 걸고 마치 긴 목발을 발밑에 붙인 듯이 하고는 성큼성큼 밖
으로 걸어나갔다. 세 명의 노인은 여전히 비명을 지르며 땅에서
딩굴고 있었다.
유대암은 옷자락을 찢어 손을 감더니, 그 보도를 품에 안고 있
는 노인의 등을 나꿔올려 곧장 동쪽으로 향했다. 그의 이렇나 임
기웅변은 해사파의 예측에 크게 벗어난 것이었다. 목적을 달성하
기 일보 직전에 엉뚱한 자가 도룡도를 가로채자, 그들은 일제히
뛰쳐나와 암기를 날렸다. 삽시간에 십여 종의 암기가 벌떼처럼
유대암을 향해 날아왔다. 유대암이 두 발에 걸상을 얽어 걸은 채
살짝 솟구쳐 앞으로 일 장(丈)남짓 밀려나자 암기들은 모조리 빗
나갔다. 걸상의 길이는 다섯 자 남짓 되어 그가 앞으로 대어섯
번 정도 솟구치며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해사파의 염효들을 멀리
떼어놓을 수 있었다. 염효들은 제각기 고함을 지르며 뒤쫓아왔
다.
유대암은 일단 독염 범의 안에서 벗어나자, 노인을 잡은 채 허
공으로 치솟아오르면서 냅다 두 발을 뒤로 걷어차냈다. 그러자,
발에 얽어 있던 걸상이 예리한 바람소리를 내며 뒤로 날아갔다.
그 즉시 뒤쪽에서 연달아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걸상에 몇
몇이 적중된 것 같았다. 이 틈을 타서 유대암은 이미 십여 장 밖
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비록 한 사람을 들고 있지만, 경공
술이 뛰어나 시간이 경과될수록 해사파 염효들의 추격을 멀리 뿌
리칠 수 있었다.
얼마 동안 달렸을까, 유대암의 귓전에 거센 파도소리가 들려왔
다. 이제 더 이상 쫓아올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비로소
노인에게 물었다.
"몸은 어떻소?"
노인은 코웃음을 칠 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어 고통스럽게
신음을 계속했다.
유대암은 우선 그의 몸에 묻은 독염부터 씻어 주기로 마음 먹었
다. 그래서 해변을 달려가 노인을 얕은 물에 담그였다. 보도는
아직도 불에 달아 있어 바닷물에 닿자 치지지 소리가 나며 흰 연
기가 피어올랐다.
노인은 거의 혼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얼마 동안 바닷물 속에
잠겨져 있었는데도 그는 정신을 못 차렸다. 유대암이 그를 끌어
안고 일으키려는데, 마침 큰 파도가 밀려와 노인을 모래 사장으
로 밀어냈다. 유대암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이제는 위험에서 벗어났소. 난 급한 일이 있기 때문에 이만 떠
나야겠소."
노인은 안간힘을 써서 몸을 일으켰다.
"너... 너는 왜... 왜 보도를 빼앗지 않느냐!"
유대암은 담담하게 웃었다.
"보도가 비록 좋지만 내 것이 아닌데 어떻게 무력으로 빼앗을
수 있겠소?"
노인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너... 너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이야? 나를 어떻게 괴롭히려
고..."
유대암은 어이가 없었다.
"당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괴롭히겠소? 난 오늘밤 이곳
을 지나다가 우연히 당신을 발견하고 도와준 것뿐이오."
노인은 고개를 내두르며 싸늘하게 외쳤다.
"내 목숨은 네 손에 달려 있으니, 죽이든 말든 맘대로 해라! 하
지만 죽어서 귀신이 되어서라도 이 원한을 갚고야 말겠다!"
유대암은 그가 심한 부상을 입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무슨 말을 들든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가 담담하게
웃으며 막 떠나려는데, 또 한 차례 큰 파도가 밀려왔다. 노인은
바닷물에 잠겨 신음을 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유대암은 그
를 이대로 방치하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냥 떠난다면 바다 속에
빠져 죽게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노인을 번적 들어올려 가까운
언덕 위로 올라가 사방을 둘러 보니, 동북쪽 작은 산중턱에 낡은
암자가 있는게 보였다. 그는 노인을 안고 달려갔다. 과연 생각했
던 대로 낡은 암자였다.
-----해신묘(海神廟)-----
현판에 적혀 있는 글씨를 어렴풋이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암자
안은 군데군데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유대암은 노인을 신상(神
像) 앞에 내려놓고 화석(火石)을 찾아 반 토막밖에 남지 않은 초
에 불을 붙였다. 불빛을 빌려 노인의 얼굴을 살펴보니, 독이 이
미 깊이 펴져서 푸르스름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대암은 품 속에서 천심해독단(天心解毒丹)을 꺼냈다.
"어서 이 해독단을 먹으시오."
노인은 눈을 감고 있다가 그이 말에 눈을 번쩍 떴다.
"어림없다! 절대 그 독약을 먹지 않을 거댜!"
유대암의 수심이 제아무리 깊다 해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누군지 아시오? 무당파의 문하가 독을 사용하는 따위의
비겁한 짓을 할 것 같소?! 이해독단으로 당신 몸에 퍼진 독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소. 단지 목숨을 사흘 더 연장해 줄 뿐이
오. 그러니 일찌감치 보도를 해사파에게 내주여 해약과 바꾸도록
하시오."
노인은 불현듯 몸을 벌떡 일으켜 소리쳤다.
"안 돼! 안 돼! 누구도 내 도룡도를 빼앗아 가지 못할거야!"
유대암은 측은한 생각마져 들었다.
"목숨까지 져버리면서 그 도룡도를 갖고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
겠소?"
노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목숨을 내줄 수는 있어도 절대 도룡도를 내줄 수는 없다!"
이렇게 소리치며 보도를 꼭 껴안고 볼을 도룡도에 붙인 체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애착을 드러냈다. 그러더니 유대암이 건
네준 천심해독단을 삼켜 버렸다.
유대암은 호기심이 생겨 이 도룡도가 대관절 무슨 보도인지 묻
고 싶었다. 그러나 노인의 눈에 탐욕의 빛이 이글거리는 것을 보
고 크게 혐오감이 생겨 곧 암자 밖으로 걸어나갔다. 순간, 등 뒤
에서 노인의 싸늘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멈춰라! 어디로 가려는 거냐?"
유대암은 어이없게 웃었다.
"내가 어디로 가든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소?"
말을 마친 그는 다시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가 몇걸음 떼어놓
기도 전에 갑자기 노인이 방성통곡을 했다. 유대암은 고개를 돌
려 물었다.
"무엇 때문에 우는 거요?"
노인은 울먹이며 말했다.
"천신만고 끝에 이 보도를 수중에 넣었는데, 곧 죽게 된다니 이
보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유대암은 턱을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니 어서 해사파를 찾아가 독문(毒門)해약과 바꾸시오. 그
방법밖에 없소!"
노인은 여전히 울면서 말했다.
"싫어, 싫어! 아까와서 내줄 수 없어!"
그의 태도와 표정은 실로 가증스러우면서도 우스꽝스러웠다.
유대암은 하마터면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참았다.
"무림인이라면 자신의 실력을 바탕으로 하여 적을 제압하고 협
의를 행해야 하거늘, 보도보검(寶刀寶劍) 따위는 단지 한낱 부속
물에 불과하오. 있어도 그뿐 없어도 그뿐이니, 노인장께서도 그
보도에 지나치게 연연할 필요는 없소."
노인은 버럭 화를 냈다.
"<무림지존(武林之尊). 보도도룡(寶刀屠龍), 호령천하(號令天
下), 막감불종(莫敢不從)>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유대암은 끝내 아연실소를 금치 못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적이 있소. 그 다음에 두 마디가 더 있잖
소? 뭐라고 하더라..... 맞아 <의천도룡(倚天屠龍) 수여쟁봉(誰
與爭鋒)?>이오. 그 말들은 수십 년 전 무림에서 있었던 경천동지
할 큰일을 뜻하는 것이지, 당신이 생각하는 그 보도와는 아무 상
관이 없소."
노인은 다그치듯이 물었다.
"그 경천동지할 일이 무엇이었단 말인가?"
유대암은 아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그것은 왕년에 신주대협 양과가 몽고 황제를 죽여 한인(漢人)
의 긍지를 새롭게 해준 일이었소. 그후로부터 양대협이 호령하면
천하 어느 누가 따르지 않겠느냐는 즉, 호령천하 막감불종이란
말이 생겨났던 것이오. 그리고 용(龍)은 몽고 황제를 가리키는
것이고, 도룡(屠龍)은 바로 그 몽고 황제를 죽였다는 뜻이오. 다
시 말해, 도룡은 상징적인 말일 뿐 진짜 그런 이름을 가진 보도
는 없소이다."
노인은 냉소를 날렸다.
"그럼 묻겠는데, 의천불출 수여쟁봉은 무엇을 뜻하는가?"
유대암은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잘 모르겠소. 의천(倚天)은 어쩌면 한 사람을 말하는 것
인지도 모르오. 양대협이 그의 아내로부터 무공을 배웠다던데,
의천이 그의 아내이거나 아니면 양양을 사수한 곽정 곽대협일 수
도 있겠죠!"
노인은 비꼬듯이 말했다.
"아, 그래? 모르면 솔직히 모른다고 할 것이지..... 잘도 꾸며
대는군! 똑똑히 들어라. 도룡은 칼의 이름이며 바로 이 도룡도
다. 그리고 의천은 한 자루의 검으로서 의천검(倚天劍)이라 한
다. 그 여섯마디의 뜻은 무림의 지존(至尊)이 바로 도룡도이며,
누구든 그를 얻으면 천하를 호령할 수 있고, 모든 영웅 호걸들이
그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 두 마디는 의천검이 나
타나지 않는 한 도룡도와 쟁패할 것이 없다는 뜻이지!"
유대암이 그의 말이 그럴듯하여 반신반의했다.
"그 칼이 대관절 뭐가 신기한지 한 번 구경이나 합시다."
노인은 단도를 더욱 품안에 꼭 껴안고 코웃음을 쳤다.
"내가 세 살 먹은 어린애인 줄 아느냐? 내 보도를 강탈해 가려
하지만 어림도 없다! 윽....."
그는 중독된 후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 유대암이 준 해독단을
먹고 겨우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단도를 품안에 꼭 껴안으려고
힘을 쓰더니 다시 신음을 토했다.
유대암은 쓴웃음을 지었다.
"보여 주고 싶지 않으면 그만두시오. 당신은 비록 도룡도를 얻
었지만 무슨 수로 천하를 호령하겠소? 그렇게 도룡도만 품에 품
고 있으면 모두들 당신한테 벌벌 기어야 하겠군요? 자, 이젠 당
신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겠소?"
노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젊은이, 우리 한 가지 약속을 하지 않겠나? 자네가 내 목숨을
구해 주면 나도 도룡보도의 잇점을 절반 나누어 주겠네."
유대암은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노인장, 우리 무당파를 너무 과소 평가하고 있는 것 같소. 약
한 자를 돕는 것은 무림인의 본분이거늘 내가 거기에 대한 대사
를 바랄 것 같소? 게다가 당신이 당한 독은 오직 해사파의 독문
해약이여야만이 제거할 수 있으니 그들을 찾아가 사정해 보도록
하시오."
"내가 그들에게서 이 도룡보도를 빼앗아 왔는데 그들이 날 살려
줄 것 같은가?"
"칼을 돌려주겠다는 조건을 내걸면 자연히 해약을 줄 게 아니겠
소?"
노인은 다시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엉뚱한 제의를 했다.
"자네의 무공이 상당히 뛰어난 것 같은데, 직접 해사파를 찾아
가 해약을 빼앗아 와 나를 구해 주지 않겠나?"
유대암은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급한 일이 있어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몸이오. 설령 여
유가 있다 해도 애당초 당신이 그들에게서 빼앗아 온 단도인데,
내 어찌 당신을 위해 다시 그릇된 일을 저지를 수 있겠소?"
노인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이, 자네의 성은 유(兪)인가, 아니면 장(張)인가?"
유대암은 약간 의아해 했다.
"나의 성은 유인데 노인장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소?"
노인은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당파의 장진인(張眞人)께서 제자 일곱을 거두어들인 것을 누
가 모르겠는가? 그들 무당칠협(武堂七俠)중에 맏이인 송대협(宋
大俠)의 나이는 사십 줄이 넘었고, 그 아래로 둘째와 세째의 성
은 유이며 네째와 다섯째가 장이란 걸 모르는 자가 없을 걸세.
이제 보니 유삼협(兪三俠)이군, 어쩐지 무공이 대단하다고 생각
했는데..... 무당칠협의 명성이 천하를 진동시킨다더니 오늘에서
야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걸 알았네."
유대암은 비록 나이가 많지 않았지만 강호의 경험은 풍부했다.
그는 상대방의 아첨을 듣자 오히려 혐오감이 생겼다.
"노인장의 존성대명은 무엇이요?"
"노부의 성은 덕(德)이며 이름은 외자로서 성(成)이라 하네. 요
동(遼東)지방에선 나에게 해동청(海東靑)이란 외호를 붙여주었
지."
해동청은 요동지방에서 볼 수 있는 몸집이 큼 독수리로서, 천성
이 흉폭하여 작은 들짐승을 잡아먹는, 관외(關外)에서 유명한 날
짐승이었다.
유대암은 공수의 예를 취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외다."
그는 곧 하늘색을 살펴보았다. 해동청 덕성은 그가 떠나려한다
는 것을 알고 얼른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자네는 <호령천하 막감불종>이란 말을 우습게 생각하는 모양인
데, 사실은 거기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대암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며 재빨
리 촛불을 끄고 나직이 말했다.
"누가 이리로 오고 있소!"
해동청의 내공은 그에게 훨씬 뒤떨어져 미처 이상한 소리를 듣
지 못했다. 그가 의아해 하며 자세한 것을 물으려는 데 멀리서
휘파람소리가 서로 신호를 하듯 들려왔다. 한두 명이 아닌 듯 싶
었다. 해동청은 기겁을 했다.
"놈들이 쫓아온 모양인데, 우린 어서 뒤쪽으로 달아나세."
"뒤쪽에서도 누가 접근해 오고 있소."
"그럴 리가......!"
"해사파가 쫓아온 모양인데 마침 잘된 것 같소. 그들에게 해약
을 달라고 하시오. 난 이번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소."
해동청은 불현듯 손을 뻗어내어 유대암의 손목을 나꿔잡았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을 말했다.
"유삼협, 제발 날 버리고 가지 말게. 제발 부탁이니....."
유대암은 그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것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손목을 젖혀 구전단성(九轉丹成)의 초식을 전개해 이내 그의 손
을 뿌리칠 수 있었다.
이때 해사파 염효들의 뛰어오는 소리가 가까이 들리는가 싶더
니, 곧이어 펑하는 소리와 함께 암자의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
에 미세한 물체가 빗발치듯 어둠을 뚫고 날아왔다. 유대암은 잽
싸게 해신보살(海神菩薩)의 신상 뒤로 몸을 숨겼다.
"으악....!"
순간 해동청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졌다. 미세한 물체
가 계속해서 날아들어와 해동청의 몸에 적중됐다가 다시 바닥에
떨어지곤 했다.
유대암은 그것이 해사파의 독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때, 암자
지붕 위에서 기왓장을 뜯어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천정이
뚫리고, 그곳에서 무수한 독염이 쏟아져 내렸다. 유대암은 독염
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다. 장백삼금이 당한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무공이 뛰어난 백의인도 독염이 닿자 마자 모든 것을 팽개치
고 달아나지 않았던가!
유대암은 다급해졌다. 독염이 마구 뿌러지니 영락없이 몸에 닿
게 될 것이다. 그는 번뜩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해신보
살상의 등 쪽을 주먹으로 깨고 잽싸게 그 안으로 뚫고 들어갔다.
마치 두꺼운 흙으로 만든 겉옷을 입은 격이니, 제아무리 많은 독
염이 뿌려져도 피해를 입을 리는 없었다.
잠시 후 밖에서 해사파 염효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조용한 것을 보니 쓰러진 모양이야."
"그 젊은 녀석은 보통내기가 아니니 서두룰 필요없이 잠시 더
기다려 보자."
"혹시 놈이 달아나 해신묘 안에 없는 게 아닐까요?"
"이봐! 네놈은 완전히 포위됐으니 살고 싶으면 순순히 나와 항
복해라!"
해사파의 염효들이 한창 소란을 피우고 있는데, 갑자기 멀리서
말굽소리가 들려오더니, 삽시간에십여 필의 준마가 어둠을 가르
고 가까이 달려왔다. 말굽소리와 더불어 한 사람의 낭랑한 외침
이 터졌다.
"일월광조(日月光照), 응왕전시(鷹王展시)!"
해신묘 밖에 서 있던 해사파의 염효들은 흡사 찬물 세례를 받은
듯 조용해졌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천..... 천응교(天應敎)다! 어서 달아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란한 말굽소리가 해신묘 밖에서 멎
었다.
해사파의 또 한 사람이 나직하게 말했다.
"이미 때가 늦었어!"
곧이어 발자국소리가 들리며 몇몇 사람이 해신묘 안으로 들어왔
다. 유대암은 신상 속에 숨어 있으면서도 불 빛을 볼수 있었다.
상대방은 횃불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물었다.
"여러분들은 우리가 누군지 아시오?"
해사파의 몇몇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네, 네!"
앞서 그 자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이 분이 바로 천응교 천시당(天市堂)의 이당주(李堂主)올시다.
이당주 어르신네께선 좀처럼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데, 오늘 여러분들이 이렇게 직접 그 어르신네를 뵙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오. 이당주께서 알고 싶은 것은 그
도룡도의 행방이오. 순순히 내놓으며 이당주게서 자비를 베풀어
여러분들을 살려줄 수도 있을 것이오."
해사파의 한 사람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 이 자가 빼앗아갔기에 우리가 뒤쫓아온 것인데....."
그는 한쪽에 쓰러져 있는 해동청을 가리키는 모양이었다.
천응교의 사람이 즉시 다그쳤다.
"그럼 도룡도는 어디 있느냐?"
"저... 저 자가....."
"놈은 이미 죽은 모양인데 그의 몸을 뒤져 보아라!"
곧이어 몸을 수색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응교의 그 자가 보고
를 했다.
"당주께 아뢰옵니다.이 자의 몸에는 아무 물건이 없습니다."
해사파의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떨리는 음성으로 얼른 변명했
다.
"이... 이당주, 그 도룡도를 분명 이 자가 갖고 도망쳤으며 우
리 곧장 뒤쫓아온 것입니다. 절대 거짓이 아닙니다....."
그의 음성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마 이당주의 눈빛을 접하
자 혼비백산한 모양이다.
유대암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해동청이 분명 그 칼을 쥐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천응교 사람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게 사실이라면 어째 도룡도가 보이지 않느냐? 틀림없이 네놈
들이 숨겼을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하지. 누가 먼저 진상을 털어
놓으며 이당주께서 그만은 살려줄 것이다. 자,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뿐이야! 늦으며 기회가 없으니 어서 말해 보아
라!"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드디어 해사파의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입을 열었다.
"이당주, 우린 정말 모릅니다. 천응교가 원하는 물건인데 우리
가 어찌 감히 숨길 수 있겠습니까.....?"
이당주는 냉소만 날릴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부하
가 다시 해사파에게 다그쳤다.
"자, 누구든 살고 싶으면 어서 진상을 털어놓아라!"
그는 기다렸으나 해사파 중에서는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갑자기 한 사람이 소리쳤다.
"우린 도룡도를 되찾기 위해 이곳까지 쫓아왔지만 해신묘 안으
로 먼저 발을 들여놓은 것은 천응교요! 그런데 도룡도가 어디로
갔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소? 우리가 아무리 사실대로 말해도
믿지 않으니. 어차피 죽을 바엔 차라리....."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목슴
을 잃은 게 분명했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얼마 전에 서른 살 가량의 녀석이 이 늙은이를 구해 갔습니
다. 그 녀석은 경공솔이 뛰어났는데, 지금 보이지 않으니, 틀림
없이 녀석이 그 도룡도를 갖고 갔을 겁니다."
이당주라는 자의 냉랭한 음성이 비로소 들려왔다.
"이들의 몸을 샅샅이 뒤져 보아라!"
곧이어 몸을 뒤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후에 이당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녀석이 갖고 간 게 틀림없는 모양이다.
자, 이만 떠나자!"
다시 발자국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천응교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갔다. 이어 말굽소리가 들리며 차츰 동북쪽으로 멀어져 갔다.
유대암은 이 공연한 다툼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 해사파의 염효
까지 모두 떠난 후에야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들이 떠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흡사 그들은 갑자기 땅 속
으로 꺼진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대암이 신상 뒤에서
살짝 내다보니, 이십여 명의 염효들은 모두 말뚝처럼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 혈도가 찍힌 모양이었다.
유대암은 신상 속에서 나왔다. 천응교 사람들이 버리고 간 횃불
이 있어 주위를 환하게 비쳐 주었다. 해사파의 염효들은 한결같
이 표정이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유대암은 내심 생각했다.
'그 천응교는 대관절 어떠한 파일까? 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는
데..... 이 악랄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해사파가 쩔쩔매는 것으
로 보아 더욱 무서운 존재임은 분명한데.....'
유대암은 천응교의 정체를 물어보기 위해 가까이 있는 한 염효
의 화개혈(華蓋穴)을 살짝 눌렀다. 혈도를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순간, 손에 닿는 감촉이 차디찼다. 흠칫하며 자세히 살펴보니 이
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사혈(死穴)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놀랍
게도 이십여 명이 모두 마찬가지로 사혈이 찍혀 있었다.
유대암은 이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천응교의 사람들은
사혈을 찍으면서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으니, 그 수법이야말
로 악랄하고도 괴이했다. 유대암은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필
요가 없었다. 주위에 독염이 뿌려져 있는 것을 보고 행여나 나중
에 죄없는 사람이 다칠까 봐 이 해신묘를 불지르기로 했다. 이렇
게 결심하자 한쪽에 쓰러져 죽어 있는 해동청이 측은하게 느껴졌
다. 한낱 쇠붙이를 탐하다가 목숨마저 잃게 된 것이다. 시체나마
묻어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한데 유대암이 그의 시체를
들어올리는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시체가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목줄기 아래 커다란 상구
(傷口)가 나 있었고, 그 상구 주위는 선지피로 얼룩져 있었다.
유대암은 선뜻 느끼는 바가 있어 그 상구 속으로 손을 넣었다.
즉시 차가운 느낌이 손끝에 전해 오며 한 자루의 칼을 끄집어냈
다. 칼의 무게는 최소한 백 근 남짓 될 것 같았다. 바로 많은 사
람의 목숨을 앗아간 그 도룡보도였다. 해동청은 도조히 살아서
이곳을 벗어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도룡도로서 자
신의 목줄기 아랫 부분을 찌른 것이다. 워낙 칼의 무게가 무거운
데다가 그가 뜻한 바가 있어, 도룡도는 목줄기 아랫 부분에서부
터 곧장 뱃속 깊숙이 파고 들어간 것이다. 자루까지 몸 속으로
뚫고 들어갔으니 조금 전에 천응교의 사람이 그의 몸을 뒤졌지만
도룡도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유대암은 칼을 쥔 채 우뚝 서서 생각했다.
'이 칼이 정말 무림지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불길한 물건임에는
틀림없다. 벌써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으니..... 일
단 이것을 사문으로 갖고 가 스승님의 분부에 따라 처리해야겠
다.'
그는 해신묘 곳곳에 불을 붙이 후 해동청의 시체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해동청의 시체를 들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빌어 도룡
도를 다시 유심히 살펴보았다. 도신(刀身)자체는 검은 유기가 흐
르는 것이 어떠한 금속인지 알 수 없었다. 아뭏든 열화에도 아무
런 손상을 입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물(異物)임에는 분명했다.
유대암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렇게 무거운 칼을 어떻게 사용하려고 만들었을까? 관운장(關
雲長)의 청룡도(靑龍刀)도 팔십 근에 불과했는데.....'
그는 칼을 봇짐에 싸고 나서 해동청이 묻힌 곳을 향해 나직이
축원을 했다.
'이제 부디 편안히 잠드시오. 내가 이 칼을 차지하려는 것은 아
니오. 더 이상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승님께 갖고 가려는 것
뿐이오. 그 어르신네께서 필히 선처를 내리실 것이오.'
유대암은 봇짐을 쓩어지고 북쪽으로 달려갔다. 반 시간도 채 못
되어서 그는 강변에 다다를 수 있었다. 희미한 별빛이 뿌려지는
가운데 주위를 뎔어보니 배가 보이지 않았다. 유대암이 강줄기를
따라 동쪽으로 얼마쯤 내려갔을 때 강물 위에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몇 척의 고기배가 조업을 하고 있었다.
유대암은 소리 높여 외쳤다.
"여보시오! 뱃삯은 두둑히 줄 테니 강 좀 건넙시다!"
배와의 거리가 워낙 멀어 어부들은 그의 외침을 듣지 못한 모양
이었다. 유대암은 한 모금의 진기를 끌어올려 다시 소리를 치려
는데, 상류 쪽에서 작은 배 한 척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뱃머리
에서 노를 젖고 있는 사공이 먼저 그에게 물었다.
"손님, 강을 건너시겠습니까?"
유대암은 얼른 대답했다.
"그렇소. 수고스럽지만 편의 좀 봐주시오."
유대암은 몸을 솟구쳐 뱃머리에 내려서는 순간, 배가 기우뚱했
다.
사공은 깜짝 놀랐다.
"상당한 무겐데... 손님, 봇짐 속에 무엇이 들었습니까?"
유대암은 담담하게 웃었다.
"벌것 아니오. 워낙 몸이 둔해서..... 자, 어서 강을 건넙시
다."
사공은 돛을 달고 물살 따라 바람 따라 비스듬히 동북쪽으로 미
끄러져 갔다.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약 일 리 가량 벗어났을 때
갑자기 멀리서 천둥치는 듯한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며 물살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유대암은 사공에게 물었다.
"사공, 혹시 비가 쏟아지려는 게 아니오?"
사공은 빙긋이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이것은 전당강의 야조(夜潮)입니다. 물살이 거세졌지만 그 물
살을 따라가면 속도가 훨씬 더 빨라질 겁니다."
유대암이 동쪽을 바라보니, 하늘과 맞닿는 곳으로부터 한줄기의
거센 파도가 도도하게 용솟음쳐 왔다. 그 파도가 가까와질수록
흡사 천군만마가 달리는 듯한 장관을 이루었다.
바로 이때였다. 한 척의 범선이 파도를 뚫고 쏜살같이 미끄러져
왔다. 돛대에는 한 마리의 거대한 독수리가 그려져 있어,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마치 그 거대한 독수리가 날개짓을 하며 덮쳐오는
것 같았다. 유대암은 대뜸 천응교가 떠올라 경각심을 높였다.
그런데, 사공이 갑자기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눈깜짝할 사이에
자취를 감추어버리는 게 아닌가? 노를 젖는 사람이 없자 배는 중
심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유대암은 황급히 배 뒷전으로 달려가
노를 잡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평하는 소리가 들리며 어느새
접근한 범선(帆船)이 좌현을 들이받았다. 범선 뱃머리에 단단한
쇠를 부착한 듯 충돌하자마자 작은 배에 구멍이 뻥 뚫렸다. 그
즉시 거센 강물이 용솟음쳐 들어왔다.유대암은 놀라면서도 분노
를 금치 못했다.
'이 교활한 천응교의 놈들, 이제 보니 사공도 한패였구나.....'
그는 더 이상 작은 나룻배에 머물 수가 없어 몸을 숫구쳐 범선
뱃머리에 내려섰다. 순간 거센 파도가 밀려와, 범선은 그 파도에
밀려 허공으로 삼 장 가량 치솟아올랐다. 유대암은 몸의 중심을
잡기도 전에 황급히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려 양팔을 펼치며 제운
종(梯雲縱)신법을 전개해 다시 사뿐히 뱃머리에 내려섰다. 선창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유대암은 소리높여 외쳤다.
"천응교의 친구들인가?!"
그가 거듭 두 번이나 소리쳤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선창 문을 밀었다. 순간 차가운 감촉이 손에 전해져 왔다. 뜻밖
에도 선창 문은 쇠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가 힘주어 밀어도 열리
지 않았다. 유대암은 공력을 양팔에 모아 대갈일성과 함께 쌍장
을 뻗어냈다.
펑!
철문이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선창과 철문의 연결 부
분이 그의 장력에 의해 떨어져 나갔다. 이제 일장을 더 가하기만
해도 열릴 것이다. 그제서야 선창 안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
왔다.
"무당파의 제운중 신법과진산장(震山掌)의 장령은 과연 듣던대
로 대단하군. 유삼협, 등에 지고 있는 도룡도만 내준다면 우리가
무사히 강을 건너드리겠소."
말뜻은 겸손한 것 같았으나, 그 말투는 건방지고 위협의 냄새가
짙게 풍겼다.
유대암은 눈쌀을 가볍게 찌푸렸다.
'저들이 내 정체를 어떻게 알았을까?'
상대방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유삼협, 우리가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 모양이구료.
사실 이상할 게 하나도 없소. 무당파의 고수를 제외하고 당금 상
호에서 제운종 신법과 진산장을 그렇게 출신입화(出神入化)할 경
지로 전개할 사람이 또 누가 있겠소? 유삼협이 모처럼 강남으로
왔는데, 우리 천응교는 주인된 입장에서 대접도 제대로 못했으니
송구스러울 뿐이오."
유대암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귀하의 존성대명은 무엇이오? 정녕 주인으로 자처한다면 모습
을 드러내 얘기를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소?"
"천응교는 귀파와 친분도 없고 원한도 없으니 서로 대면하지 않
는 게 좋을 것 같소. 유삼협, 어서 도룡도를 뱃머리에 내려놓으
시오. 그럼 편안하게 목적지까지 모셔드리리다."
유대암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이 도룡도가 귀교의 물건이외까?"
"그건 아니오. 단지 그 칼이 무림지존이기 때문에, 무림인으로
서 수중에 넣고 싶은 것뿐이오."
"그렇다면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일단은 나의 소유가 된 게 아니
겠소? 나는 사문으로 돌아가 스승님의 분부에 따라 이 검을 처리
할 생각이니 그리 아시오!"
상대방은 뭐라고 몇 마디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워낙 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유대암은 갑갑하여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소?"
선창 안에서 다시 모기만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대암이 들을 수
있는 것은, 유삼협... 도룡도 등 한 두 마디뿐이었다. 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가 반문했다.
"뭐라고 했소?"
이대 마침 파도가 밀려와 범선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고, 유대암
은 별로 개의치 않고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귀교는 ㅋ 한 자루를 얻기 위해, 해신묘에서 이십 명이나 넘는
목숨을 죽였소. 그 수단이 너무 악랄하다고 생각되지 않소?"
선창 안에 있는 자는 여유만만했다.
"천응교는 언제나 경우에 따라 수단을 전개해 왔소. 악인에게는
악랄한 수법을 쓰지만 유삼협에게야 그럴 수가 있겠소? 목숨까지
는 노리고 싶지 않으니 그 도룡도만 건네준다면당장 문수침(吻
鬚針)의 해약을 내드리겠소!"
유대암은 <문수침>이란 말에 가슴이 철렁하여 얼른 가슴을 만져
보니, 조금 전 모기에게 물린 듯한 허벅지의 부위가 은근히 아팠
다.
그는 비로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순순히 도룡도를 내주든지 아니면 모종의 행동
을 취해야만 했다. 그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일단 상대방을
제압하면 해약은 자연히 내줄 것이다.
그는 곧 좌장으로 얼굴을 호위하고 우장으로 가슴을 호위한 채,
몸을 솟구쳐 선창 안으로 뚫고 들어갔다. 그의 발이 선창 안에
떨어지기도 전에 어둠을 뚫고 한 갈래의 경풍이 뻗쳐왔다. 유대
암은 즉시 우장을 격출했다. 그는 극도로 분노한 상황에서 이 일
장에 십 성의 공력을 주입시켰다. 쌍방의 장풍이 맞부딪치자 펑
하는 굉음이 터지며 선창 안에 있던 사람은 곧장 뒤로 날아갔다.
요란한 소리가 잇따라 들린 것으로 미루어 탁자나 의자 따위가
박살난 모양이었다.
유대암은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방금 일장을 교환하면서 또 암
수를 당한 것이다. 상대방은 장심에 암기를 숨기고 있다가 쌍장
이 교차되는 순간 암기가 그의 장심을 파고든 것이다. 상대방은
비록 그의 웅후한 장력에 부상을 입었겠지만, 어둠 속에 얼마나
많은 적이 도사리고 있는지 예측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대암
은 감히 경솔한 행동을 하지 못하고 즉시 뱃머리로 다시 뛰쳐나
왔다.
선창 안에서 그 자가 기침을 몇 번 하더니 소리쳤다.
"유삼협의 장력은 과연 놀랍군. 하지만 내가 전개한 칠성정(七
星釘)도 빗나기지 않았으니, 이번 회합은 막상 막하라 할수 있을
것이오!"
유대암은 얼른 천심해독단을 몇 알 먹고 나서 봇짐을 풀어 도룡
도를 꺼냈다. 그 즉시 도룡도를 펼치며 선창으로 덮쳐갔다.
창!
도룡도가 닿자 그 육중한 철문이 나무판자처럼 두 쪽으로 쪼개
졌다. 과연 예리하기 이를데 없는 도룡보도였다. 유대암은 그 예
봉을 시험이라도 하듯 연거푸 도룡도를 펼치자 쇠로된 선창이 지
푸라기처럼 베어져 나갔다. 선창 안에 있던 자는 자지러지게 놀
라 뒤쪽으로 몸을 솟구치며 소리쳤다.
"너는 연거푸 두 번씩이나 중독됐는데 그래도.....!"
유대암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룡도를 펼치며 덮쳐갔다.
그 자는 황급히 쇠닻을 집어 막았다.
창!
금속성이 들리는 가운데 쇠닻은 영락없이 잘려져 나갔다. 그 자
는 옆으로 피하며 다시 소리쳤다.
"목숨보다 보도가 더 중요하냐?!"
유대암은 공격을 멈추었다.
"좋다! 해약을 내주면 이 칼을 주겠다!"
이때, 그는 문수침을 맞은 다리 부분으로부터 통증이 밀려 오는
것을 느끼며, 천심해독단으로선 도저히 그 독을 제거할 수 없다
는 걸 알았다. 어차피 이 도룡보도는 우연한 기회에 얻은 것이므
로 별로 중요시할 게 없었다. 그 자는 크게 기뻐하며 도룡도를
집어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 자는 달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
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보도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
해약을 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대암은 장심의 통증이 극심해져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어서 해약을 내 놓아라!"
그러자 상대방은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핫.....!"
유대암은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해약을 달라는데 뭐가 그렇게 우습느냐?"
상대방은 그의 얼굴을 겨냥해 삿대질을 하며 교활하게 말했다.
"흐흐.....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내가 해약을 내주기도 전에
먼저 보도를 건네주다니....."
유대암은 발끈했다.
"남아일언중천금이거늘, 그럼 이제와서 약속을 저버리겠단 말이
냐?"
"네 손에 보도가 쥐어져 있을 때는 도저히 널 당해 낼 수 없었
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런데 뭐가 아쉬워 너에게 해약
을 내주겠느냐?"
유대암은 그의 말에 마치 물벼락을 맞은 듯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너무 경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대암은
우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물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상대방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나는 단지 천응교의 일개 무명 소졸에 불과하다. 무당파가 복
수를 하겠다면 본교의 교주와 여러 당주가 나서서상대해 줄 것
이니, 굳이 나의 이름을 알 필요는 없다. 더우기 오늘 밤 유삼협
이 쥐도 새도 모르개 죽으면 제아무리 신통한 능력을 기진 장삼
봉이라 해도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모를 것이다."
유대암은 더 이상 얘기해 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잘려져
나간 쇠닻을 집었다.
'오늘 이곳에서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과 죽음을 함께
하리라!'
마음을 굳힌 그는 상대방이 양양해 있는 틈을 타서 다짜고짜 덮
쳐가, 왼손으로 쇠닻을 휘두르며 오른손으로 웅후한 장풍을 뻗어
냈다. 사나이는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도룡보도를 휘둘러
막으려 했다. 그러나 도룡도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무거워 동작
이 머뭇거려졌다. 그 순간에 쇠닻이 Ð날아왔다. 그 위맹한 기세
를 도저히 막아낼 재간이 없자 사나이는 발끝으로 바닥을 걷어차
며 강물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비록 아슬아슬하게 쇠닻을 피
했지만, 유대암이 오른손으로 전개한 장풍이 등에 적중되었다.
사나이는 오장육뷰가 뒤틀리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지를 새도 없
이 풍덩 강물 속에 빠져 정신을 잃었다.
유대암은 길게 숨을 들이켰다. 상대방은 강물 속에 빠지면서도
그 도룡도를 놓지 않았다.
'보도를 얻었지만 물귀신이 됐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냐.....?'
유대암은 내심 한탄하고 있는데, 갑자기 흰 광채가 번뜩이며 한
줄기의 가느다란 사슬이 강물 속으로 떨어진 사나이의 허리를 휘
감았다. 이어 칼을 쥐고 있는 사나이의 몸이 사슬에 감긴 채 선
창 위로 튕겨져 올라왔다.
유대암은 흠칫 놀라 흰 사슬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
에 훤칠한 청의인이 사슬을 쥔 채 서 있었다. 유대암은 즉시 그
를 향해 ㅍ쳐가려 했으나, 독성이 발작해 눈앞이 캄캄해지며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유대암은 몽롱한 의식속에서 눈을 떴다. 맨 먼저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비단잉어가 수놓아진 작은 깃발이었다. 유대암은 눈
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여전히 그 작은 깃발이 눈에 선명했다.
그 깃발은 청화(靑花)가 조각된 자기병 속에 꽃혀 있었다. 비단
잉어 살아서 낭파를 헤집고 다니듯 생생했다.
유대암은 내심 이상하게 느껴졌다.
'저것은 임안부(臨安付) 용문표국(龍門標局)의 깃발이 아닌가?
대관절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는 머리가 어지럽고 지근지근거려 생각이 잘떠오르지 않았
다. 아뭏든 그가 지금 들것 위에 누워 있고 어느 대청에 와 있다
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는 좌우를 둘러보려고 했으나 목이 뻣뻣하여 도저히 불가능했
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들것에서 뛰어내리려 했지만, 사지가
솜처럼 풀려 전혀 힘을 쓸 수 없었다. 비로소 그는 전당강에서
칠성정과 문수침을 맞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때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귀하의 성함을 밝혀줄 수 있겠소?"
한 사람이 묻자 다른 한 사람이 그의 말을 받았다.
"내 이름을 물을 필요는 없어요. 단지 이번 거래를 수락할 건지
의 여부만 확실하게 대답해 주세요."
그 음성은 간드러진 여자였다.
우렁찬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우리 용문표국은 일이 밀려 있소이다. 귀하가 정녕 신분을 밝
히지 않겠다면 거래를 할 수 없으니 다른 표국을 찾아가는 게 좋
겠소."
간드러진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임안부에서 용문표국 외에는 제대로 실력을 갖춘 표국이 없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온 것이예요. 만약 당신이 결정을 내릴 수 없
다면 속히 가서 총표두(總標頭)를 불러오세요."
그 말투는 매우 무례했다. 상대방은 기분이 상한 듯 퉁명스레
말했다.
"내가 바로 총표두요. 다른 볼일이 있어 이만 실례하야겠소."
간드러진 음성은 다소 의외인 듯했다.
"아..... 당신이 바로 다비웅(多臂熊) 도대금(都大錦)이란 말예
요.....?"
그녀는 말끝을 약간 흐리며 다시 말했다.
"도총표두, 오래 전부터 명성은 들어왔어요. 나의 성은 은(殷)
이라 해요."
도대금은 언짢았던 기분이 다소 누그러진 것 같았다.
"당신은 무슨 일로 오셨소?"
"그 전에 우선 다짐받고 싶은 게 있어요. 이번에 호송을 부탁할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므로 추호의 착오가 생겨서는 않돼요!"
도대금의 음성이 다시 높아졌다.
"우리 용문표국은 개설된 지 이십 년 동안 큰 거래를 숱하게 해
왔지만, 아직 한 번도 실수를 한 예가 없소이다!"
유대암도 도대금의 명성을 들은 바 있었다. 그는 소림파의 속가
제자로서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해 있고, 특히 연주강표(連
珠鋼標) 암기 수법이 뛰어나 단숨에 사십 구 매의 강표를 발출해
낼 수 있었다. 그로 인해 강호에서 그를 일컬어 다비웅, 즉 팔이
많은 곰이란 외호를 붙여 주게 된 것이다.
그가 개설한 용문표국은 강남 일대에서 제법 알려져 있었다. 단
지 무당과 소림의 제자들은 서로 왕래가 없으므로 이름만 전해
들었을 뿐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다.
은씨 성을 가진 여자가 당당하게 웃으며 말했다.
"용문표국의 명성을 들어서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찾아왔다고
하잖았어요? 도총표두, 호송할 것을 맡기기 전에 세가지 조건을
제시하겠어요."
도대금이 먼저 단호하게 말했다.
"말썽이 생길 소지가 있는 것은 받지 않소. 그리고 출처가 불투
명한 물건도, 은자 오만 냥 이하의 물건도 받지 않소이다."
그는 상대방이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겠다는 말을 듣자 먼저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은씨 성을 가진 여자는 느긋하게 말했다.
"내가 의뢰할 표화(標貨)는 미안하지만 말썽의 소지를 전혀 배
제할 순 없어요. 동시에 출처도 불투명해요. 마지막으로 댓가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도 없어요. 그리고 내가 요구
하는 세 가지 조건도 결코 쉬운 게 아니예요. 첫째, 도총표두 당
신이 직접 호송을 해야 돼요. 둘째, 임안에서 호북 양양부(襄陽
府)까지 밤낮을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해 열흘 이내에 목적지에 당
도해야 하며, 세째, 만약 조금이라도 착오가 생길시엔...... 흥!
도총표두 당신의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용문표국의 살아 숨쉬는
것은 모조리 마지막이 될 거예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꽝! 하는 소리가 들렸으니, 아마 도대금
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친 모양이었다.
"지금 밥 먹고 할 짓이 없어 용문표국을 찾아와 장난을 하는 거
냐?! 허우대라도 좋았다면 당장 따끔한 맛을 보여 줬을 것이다!"
은씨 성을 가진 여자가 냉소를 날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시끄러
운 금속성이 연달아 들렸다. 무거운 물건을 탁자 위에 쏟아놓는
것 같은 소리였다. 이어서 그 여자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건 황금 이천냥이니 우선 수고비로 받아주세요!"
유대암은 이 말에 깜짝 놀랐다.
"황금 이천 냥이면 수만 냥의 은자가 될 텐데....."
사실 이천 냥의 황금이라면 표국을 경영하는 자가 몇 년을 벌어
도 만져볼 수 없는 큰 액수었다. 움직일 수가 없는 유대암은, 눈
을 떠보았자 단지 화병에 꽃혀 있는 깃발밖에 볼 수 없었다.
이때, 대청 안은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파리가 윙
윙거리며 나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니, 도대금의 가쁜
숨소리도 들려왔다.
유대암은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지만 능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
었다. 틀림없이 입이 딱 벌어진 채, 탁자 위에 쏟아놓은 눈부신
금덩어리를 응시하며 넋을 잃고 있을 게 뻔했다. 비록 표국을 운
영해 오면서 많은 양의 금은보화를 보아 왔지만 그것은 언제나
남의 소유였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가 고개만 한
번 끄덕이면 황금 이천 냥을 수중에 넣게 된다. 어찌 마음이 동
요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참 후에 도대금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은 나으리, 호송할 게 무엇입니까?"
은씨 성을 가진 여자는 다짐부터 받으려 했다.
"우선 묻겠는데, 내가 제시한 세 가지 조건을 받아들이겠어요?"
도대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신의 허벅지를 탁 내리쳤다.
"좋소이다. 은 나으리께서 이렇게 후한 댓가를 치르니 목슴을
바쳐서라도 협력하겠소. 보물을 언제쯤 보내올 겁니까?"
은씨 성을 가진 여자는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당신이 호송할 것은 바로 저 들것에 누워 있는 어르신네예요."
"아니....!"
도대금은 크게놀랐다. 그러나 더욱 놀란 것은 유대암이었다.
그는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입만 벌려질 뿐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도대금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따.
"이..... 이 어르신네를.....?"
"맞아요! 당신이 직접 호송하세요. 도중에서 말을 바꾸어 탈 수
는 있지만 사람은 갈아서는 안 돼요. 열흘 이내에 틀림없이 호북
양양부 무당산에 당도해 무당파의 장문인 장삼봉 진인에게 건네
줘야 해요."
여기가지 들은 유대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도대금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무당파.....? 우리 소림 제자들은 비록 무당과 연짢은 일은 없
지만, 아무 내왕이 없었기 때문에 좀....."
은씨 성을 가진 여자가 냉랭하게 말했다.
"이 어르신네는 중상을 입고 있어 한시도지체할 수 없는 입장이
예요. 그러니 이번 일을 맡든 안 맡든 얼른 결정을 내리세요. 대
장부일언중천금인데 왜 이랬다 저랬다 하죠?"
도대금은 단호하게 말했다.
"좋소! 은 나으리의 체면을 봐서라도 이번 거래를 맡겠소이다!"
은씨 성을 가진 여자는 가볍게 웃었다.
"좋아요. 오늘이 삼월 스무 아흐렛 날이니 사월 초아흐렛 날까
지 만약 저 어르신네를 무사히 무당산으로 호송해 주지 못한다
면, 약속대로 용문표국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테니 명심하
세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리한 파공음이 들리며 십여 개의 작
은 바늘이 뻗쳐와 깃발이 꽂혀 있는 자기 병에 적중되었다.
창!
맑은 음향이 들리는 곳에 자기병이 수십 조각으로 갈라져 사방
으로 흩날렸다. 실로 놀라운 암기 수법이었다.
"앗!"
도대금은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비명을 내질렀다. 유대암도 가
슴이 섬뜩했다.
은씨 성을 가진 여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가자!"
그러자 들것을 앞뒤에서 들고 왔던 두 사람은 일제히 대답하며
들것을 내려놓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참 후에야 도대금이 유대암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형씨의 존성대명은 무엇이오? 무당파의 제자요?"
유대암은 그를 멀건히 쳐다볼 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비로소 도대금 총표두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나
이는 오십 줄이며 허우대가 건장하고 팔의 근육이 뱀처럼 엉켜
있었다. 첫눈에 외공(外功) 고수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도대금은 다시 물었다.
"방금 그 은 나으리는 청수하게 생겼는데, 그런 놀라운 무공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정말 뜻밖이오. 그는 대관절 어느 집안 어느
문파의 제자요?"
그가 계속 물어오자 유대암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도대금은 다비웅이란 외호가 말해 주듯이 암기의 명수였지만,
그 은씨 성을 가진 젊은 여자가 전개한 암기 수법에 혀를 내둘렀
다. 자신의 실력이 도저히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시인하
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금은 이십여 년 동안 표국을 운영해 오
며 해괴한 일을 많이 겪었다. 그러나 황금 이천 냥으로 한 사람
을 목적지까지 호송해 달라는 청탁은 처음받아 보는 것이다. 전
에는 이러한 예를 아예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는 곧 황금을 챙기고 유대암을 방 안으로 옮기게 해 휴식을
취하도록 분부했다. 이어 표국의 각 표두들을 불러 모아 모든 채
비를 갖추어 즉시 출발하기로 합의했다.
----- 용문리삼약(龍門鯉三躍), 어아화위룡(魚兒化爲龍) -----
(용문의 잉어가 세 번 뛰면 용이 되어 승천한다.)
용문표국의 깃발이 펼쳐져 바람에 나부꼈다.
유대암은 표차 안에 누워 감회에 젖었다.
'나 유대암은 여지껏 강호에서 종횡해 오묘 표국을 안중에도 두
지 않았는데, 오늘 이런 어려움을 당해 그들의 호송을 받아 사문
으로 돌아가게 될 줄이야.....'
그의 생각은 이어졌다.
'나를 구해 준 그 은씨 성을 가진 자는 누구일까? 음성만 들어
선 여자 같은데 됴총표두의 말투로 미루어선 젊은 남자 같기도
하고.....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으니, 만약 죽지 않고 다
시 강호에서 활약할 수 있다면 이 은혜를 꼭 갚아야지.....'
말굽소리도 요란하게 일행은 서쪽을 향해 진발했다. 도대금은
사실 우려가 없지는 않았다. 필시 도중에서 적지 않은 싸움이 벌
어질 것이라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절강(浙江)을 떠나 안휘(安
徽)를 거쳐 호북성까지 들어올 때까지 아무런 불상사도 생기지
않았다. 이날 태평점(太平店), 선인도(仙人渡)를 지나 다시 한수
(漢水)를 건너 노하구(老河口)에 당도했다. 이곳에서 무당산까지
는 하루 거리면 충분했다.
드음날 정오 무렵에 예정대로 쌍정자(雙井子)에 다다랐다. 이제
무당산은 불과 십 리 밖에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비록
길을 재촉하느라고 고생도 많았지만, 약속을 어기지 않고 사월
초 아흐렛 날을 맞추어 무당산에 당도하게 된 것이다. 그 동안
모두들 긴장에 싸여 있었지만, 이제는 안도의 숨을내쉴 수 있게
되었다. 도대금은 여유 있게 말을 몰며 채찍으로 구름에 가려진
채 우뚝 솟아 있는 천주봉을 가리켰다.
"축삼제(祝三第), 무당파의 명성이 비록 우리 소림만은 못하지
만, 그래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 보아 무당칠협의 실력도 만만치
는 않은 모양이다."
축표두가 그의 말을 받았다.
"무당의 명성이 그래에 널리 알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기
초가 얕아 천여 년을 이어온 우리 소림과는 비교도 할수 없죠.
다른 것은 고사하고 단지 총표두의 이십 사수 항마장(降魔掌)과
사십 구 매의 연주장표만 하더라도, 아마 무당파의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할 겁니다."
그의 곁에 있던 사표두(史標頭)가 한 마디 거들었다.
"맞습니다. 강호의 소문을 어떻게 그대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무당필협의 명성이 알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우리 중에 본 사람이 없잖아요. 아마 일반 촌부들이
그들의 실력을 과대 평가하여 소문을 퍼뜨린 모양입니다."
도대금은 빙긋이 웃었다. 그는 두 표두보다 견식이 높았다. 그
래서 무당칠협의 명성이 결코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럴만
한 실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
십여 년 동안 험악한 강호에서 행표(行標)를 해오면서 아직 적수
를 만나지 못한 자신의 무학에 대해서도 적이 자부심을 갖고 있
었다.
다시 일단의 거리를 가자 산길이 좁아져 세 필의 준마가 나란히
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사표두는 말고삐를 늦추어 뒤로 쳐졌다.
축표두가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했다.
"총표두, 잠시 후 무당파의 장삼봉을 만나면 인사를 어떻게 해
야 마땅하죠?"
도대금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서로 동문이 아니니 원래는 동배(同裴)의 예를 행해야겠지. 하
지만 장노도인은 나이가 구십 줄로서 당금 무림에선 찾아보기 드
문 고령이니, 무림 선배로 받들어 큰절을 올려도 무방할 걸세."
축표두가 교활하게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 생각 같아선 그냥 몸을 숙여 인사를 하면서 <장진인, 후배
들이 큰절을 올리겠습니다.>하고 말하면 틀림없이 만류할 테니,
그렇게 되면 못 이기는 척하고 큰절을 생략해 보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도대금은 빙긋이 웃었다. 그는 마차 안에 누워 있는 자의 내력
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그 동안 말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
아 표사들이 번갈아가며 음식 시중을 들어왔다. 도대금은 표사들
과 여러 번 논의를 했지만, 결국 그의 정확한 신분을 알아내지
못했다. 대관절 무당파의 제자 쑨 친구인지, 아니면 적인지 종잡
을 수가 없었다.
이제 무당산이 가까와질수록 도대금의 의문은 더욱 짙어갔다.
어쨌든 이제 곧 장삼봉을 만나게 될 거고, 의문도 풀리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을 굳히고 있는데, 갑자기 서쪽 산길로부터
몇 필의 준마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축표두가 얼른 앞으로 말을
몰고 나가 살펴보았다. 눈깜짝 할 사이에 여섯 필의 준마가 가까
이 달려와 앞에 멎었다. 앞뒤로 세 필씩 표차의 길을 가로막는
꼴이 되었다.
도대금은 다소 긴장되었다.
'이제 무당산에 다 당도하여 말썽이 생가는 게 아닐까?'
그는 나직이 사표두에게 말했다.
"표차를 잘 호위하게."
이어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그와 동시에 표사들이 표기(標
旗)를 말았다 떨쳤다 하며 인사를 하는 표시를 했다. 동시에 소
리를 높여 외쳤다.
"임안부의 용문표국이 귀지(貴地)를 지나게 됐으니, 예의에 어
긋나는 점이 있으면 너그럽게 양해해 주십시오."
도대금은 길을 가로막고 있는 여섯 명을 살펴보았다. 그들중에
둘은 도관(道冠)을 쓴 도사이며 나머지 넷은 속가 차림이었다.
한결같이 무기를 휴대하고 눈빛이 형형한 것으로 미루어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달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도대금은 나름대로 짐작을 해보았다.
'이들이 바로 무당칠협 중에 여섯명이 아닐까?'
그는 가까이로 말을 몰고가 포권의 예를 취했다.
"나는 임안부 용문표국의 도대금이오. 여러분들의 존성대명을
알고 싶소이다."
앞쪽에 서 있는 세명 중에, 키가 가장 크고 왼쪽 볼에 콩알 만
한 사마귀가 붙어 있는 자가 냉랭하게 입을열었다.
"도형은 무엇하러 무당산에 왔소?"
도대금은 기분이 언짢았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우린 부탁을 받아 한 중상자를 귀산까지 호송해 왔소. 귀파의
장문 장진인을 뵙고자 하니 전해 주시오."
사마귀가 붙어 있는 자가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중상을 입은 자를.....? 그게 누구요?"
도대금은 또렷하게 말했다.
"우리는 은씨 성을 가진 손님의 부탁을 받아 이 중상을 입은 어
른을 무당산까지 호송해 온 것뿐이오. 이 어르신이 누구이며 어
떻게 해서 부상을 입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오. 용문표국은 남
의 부탁을 받아 그 부탁을 충실히 이행할 뿐, 그 외에 손님의 사
사로운 일은 전혀 물을 수가 없게끔 되어 있소."
그는 강호에서 수십 년간 생활해 왔으며, 또한 하는 일이 표국
인지라 일을 처리하는 요령이 비상했다. 지금도 단 몇마디로서
모두 책임을 끼끗이 회피해 버렸다. 유대암이 무당의 친구이든
적이든 간에, 자기와 결부시키지 못하도록 미리 조치를 취해 놓
은 것이다.
사마귀가 붙어 있는 자가 곁에 있는 자와 눈짓을 한 번 교환하
더니 물었다.
"은씨 성을 가진 손님은 어떻게 생겼소?"
도대금은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고상하게 생긴 젊은이였소. 그리고 암기 수법이 매우 뛰어났
소."
사마귀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그와 직접 싸워 보았소?"
도대금은 얼른 고개를 내둘렀다.
"그게 아니라 그가 스스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사마귀 옆에 있는 대머리가
다그치듯이 물었다.
"그 도룡도는 누구 손에 있소?"
도대금은 멍해졌다.
"도룡도라니.....? 바로 그 소문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무리지
존 도룡보도를 말하는 겁니까?"
대머리는 성질이 매우 급한 듯,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안장위에
서 뛰어내려 마차 앞으로 달려와 다짜고짜 천막을 제치고 안을
살펴보았다.
도대금은 그가 안장에서 뛰어내리는 것부터 마차를 제쳐 살피기
까지 전개한 날렵한 신법이 눈에 익은 것 같아 내심 중얼거렸다.
'무당파의 조사인 장삼봉이 한때 우리 소림사에 머룰렀다는데,
과연 그들의 무공도 우리 소림 무공의 범주 안에서 크게 벗어나
지 못하는구나. 일부에선 장삼봉이 무공을 스스로 만들어 냈다고
하지만 그렇지가 못하군.'
그는 상대방이 무당 제자라고 더욱 믿게 되었다.
"여러분들이 바로 강호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무당칠협이오? 어
느 분이 송대협(宋大俠)이오? 소제는 오래 전부터 그의 영명을
듣고 흠모해 왔소."
얼굴에 사마귀가 있는 자가 그의 말을 받았다.
"그까짓 허명(虛明)을 입에 올릴 팰요가 있겠소? 도형은 너무
겸허한 것 같소."
대머리가 다시 돌아와 안장에 오르며 말했다.
"상처가 심해 시간을 지체할수록 위험하니 우리가 먼저 인계 받
읍시다."
사마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도대금에게 포권의 예를 취했
다.
"도형, 먼길을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소. 소제가 본파를 대신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겠소."
도대금도 공수로서 답례했다.
"원 별말씀을......"
"저 사람의 상처가 워낙 심해 우리가 인계해 빨리 손을 써야 할
것 같소."
도대금은 그렇지 않아도 일찌감치 중상자를 넘겨 주어 속 시원
히 책임을 벗을 생각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우린 이곳에서 이 사람을 무당파에게 넘겨 주
겠소."
"도형, 안심하시오. 모든 걸 내가 책임지겠소."
사마귀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 품 속에서 이십 냥 가량 되는 금
덩어리를 꺼내 도대금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것은 작은 성의이니 받아 주시오."
도대금은 사양했다.
"우리 이미 황금 이천 냥을 표금으로 받았소. 어찌 더 이상 받
을 수 있겠소?"
"음.....! 왕금 이천 냥을!"
사마귀의 곁에 있던 두 사람이 곧 말을 몰고 와 마차를 인수해
갔다. 얼굴에 사마귀가 있는 자는 손에 쥐고 있는 금덩어리를 살
짝 도대금에게 던져 주었다.
"도형, 우리의 성의를 무시하지 마시오. 이젠 편히 임안으로 돌
아가돌고 하시오."
도대금은 날아오는 금덩어리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다시
들려주려고 했을 때, 상대방은 이미 말머리를 돌려 질풍처럼 마
차 뒤를 쫓아갔다. 이어 산모퉁이를 꺾어 돌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도대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금덩어리를 내려다 보았다. 순간, 그
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십 냥 가량 되는 금덩어리에 손자국이
깊이 패여 있는 게 아닌가! 물론 순금이 다른 금속에 비해 부드
럽기는 하지만 이렇나 지력(指力)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도대금은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
다.
'무당칠협의 명성은 과연 헛소문이 아니군. 우리 소림파에서도
이미 몇몇 금강지력(金剛指力)을 달통한 사백 사숙 외에는 이런
엄청난 지력을 지닌 자가 없을 거야.....'
축표두는 그가 금덩어리에 찍힌 손자국을 쳐다보며 넋을 잃고
있는 것을 보더니 몹시 못마땅한 투로 입을 열었다.
"총표두, 무당파의 제자들은 너무 예의가 없군요. 자기네 이름
을 밝히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불원천리 이곳까지 달려온 우리
에게 차 한 잔도 대접하지 않으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무림은
모두 일맥(一脈)이라는데 정말 너무 째째한 것 같습니다."
도대금은 벌써부터 불만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당당하게 웃
었다.
"공연한 걸음을 생략하게 됐으니 오히려 잘 된 일이 아니가? 소
림 제자가 무당 도관(道觀)에 들어가는 것도 사실은 어색한 일이
네. 자, 어서 돌아가도록 하세."
이번 행표는 비록 이렇다 할 말썽이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기
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특히 무당칠협에게 무시를 당한 듯한 느
낌을 좀처럼 떨쳐버릴 수 없었다. 도대금은 나중에 기회가 있으
면 앙갚음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되돌아가는 길에 도대금을 제외
하고 다른 표두와 표사들은 모두 기분이 좋았다. 열흘 밤낮을 고
생하여 이천 냥의 황금을 벌었으니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이날 밤.
쌍정자를 떠난 지 십여 리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도대금이 계속
우울해 하는 것을 보고 축표두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총표두, 비록 오늘 우리가 다소의 무시는 당했지만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면 언젠가는 강호에서 그
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그 때 가서 무당칠협의 콧대를 납
작하게 만들면 되잖습니까?"
도대금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 심히 후회되는 일이 있네."
축표두가 물었다.
"그게 무슨 일입니까?"
이때, 뒤쪽에서 말굽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차츰 가까이 들
려오는 속도가 이상하리 만큼 빨랐다. 모두는 고개를 돌려 보고
나서 비로소 그 이유를 알았다. 그 말의 다리는 보통 말에 비해
한 자 가량이나 더 길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말보다 느릿하
게 걸어도 속도가 더 빠른 게 당연했다. 그 말은 잡털을 찾아볼
수 없는 청총이었다. 축표두는 절로 찬사를 보냈다.
"좋은 말이군!"
이어 도대금에게 물었다.
"축표두, 우리가 잘못한 건 없잖습니까?"
도대금은 울적하게 말했다.
"난 지금 이십 오 년 전의 일을 얘기하는 걸세. 당시 소림사에
서 무학을 터득해 하산하려는데, 스승님께서 나더러 오년을 더
머물면서 대위타장(大韋陀掌)을 완성하라고 권했다. 그런데, 난
젊은 혈기에 당시 배운 무학만으로도 능히 강호를 종횡할 수 있
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냥 하산해 버렸네. 그 때 오 년을 더 연마
했다면 무당칠협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을 텐데....."
그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 청충마가 곁을 스쳐갔다. 말을 타
고 있는 자는 곁눈질로 도대금과 축표두를 힐끗 쳐다보며 좀 의
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금은 낮선 자가 지나가자 하던 말을 중
단했다.
청총마를 타고 있는 자는 스물 두 살 가량의 젊은이로서, 용모
가 준수하고 비록 체격은 마른 편이지만 인상이 강인해 보였다.
그 젊은이는 주춤거리다가 말머리를 돌려 포권의 예를 취했다.
"혹시 임안부의 용문표국이 아니십니까?"
축표두가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소."
젊은이는 표기를 한 번 바라복 나서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다시
물었다.
"여러분들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십니까? 귀국 축표두께선 편
안하시죠?"
축표두는 그가 비록 예의바르게 나왔지만, 강호의 풍운은 예측
하기 어려운지라 선뜻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았다.
"나의 성은 축이라 하오. 친구의 성함은 무엇이오. 그리고 본국
의 총표두와는 잘 아는 사이요?"
젊은이는 안장에서 내려왔다.
"나의 성은 장(張)이라 하며 이름은 취산(翠山)이라 합니다. 귀
국 총표두의 대명은 들어서 익히 알고 있지만 아직 인연이 닿지
않아 뵙지는 못했습니다."
도대금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내가 바로 도대금이외다. 귀하가 바로 강호에서 은구철획(銀鉤
鐵劃)이라 불리는 장오협이란 말이오?"
젊은이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대답했다.
"협자는 과분한 칭호입니다. 여러분들께선 멀리 이곳 무당까지
오셨는데 어찌 본문에 들리시지도 않았습니까? 오늘이 바로 저의
스승님의 구십 회 생신이니 일에 지장이 없으시다면 술이라도 한
잔 드시고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도대금은 그의 성의있는 태도를 보고 내심 생각을 굴렸다.
'무당칠협 중에 여섯 명은 건방지기 이를데 없더니 어찌 이 장
오협은 그들과 판이하게 틀리지.....?'
그는 곧 말에서 내려 웃으며 말했다.
"만약 영사형과 영사제들도 장오협처럼 이렇게 친구를 좋아하는
활달한성품이었다면, 우린 아마 지금쯤 무당산에 올라가 있었을
것이오."
장취산은 멍해졌다.
"아니.....? 총표두께선 저의 사형을 만나보셨습니까? 어느 분
이죠?"
도대금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흥! 이 장오협도 마찬가지로 엉큼하군. 분명히 알면서도 시치
미를 떼니......"
그는 비꼬듯이 대답했다.
"오늘은 운이 좋아 하룻 사이에 무당칠협을 전부 만났소이다."
"네?!"
장취산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매우 의아해 했다.
"저의 세째 형님도 보셨단 말입니까?"
도대금은 눈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유대암 유삼협말이오? 난 어느 분이 유대협인지는 몰라도 아뭏
든 무당육협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으니 유삼협도 그 속에 끼어
있었겠죠!"
장취산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여섯이라뇨? 그것 참 이상하군요. 어느 여섯 사람을 말하는 건
지......?"
도대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들이 존성대명을 안 밝히니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알겠소? 귀
하가 정녕 장오협이라면 그들 여섯 분은 자연히 송대협에서 막
(莫)칠협까지 여섯 분이겠죠!"
그는 일부러 <협>자를 길게 끌어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장취산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다시 물었
다.
"도총표두, 정말 저의 사형과 사제를 모두 보았단 말입니까?"
"비단 나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똑똑히 보
았소이다."
장취산은 고개를 세차게 내둘렀다.
"절데 그럴 리가 없습니다. 송대협등은 오늘 줄곧 자소궁(紫宵
宮)에서 스승님의 시중을 들며 한 발짝도 하산한 일이 없습니다.
단지 저만이 세째 사형이 돌아오지 않아 혹시 늦게라도 오시지
않을까 해서 이렇게 마중나온 겁니다."
도대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얼굴에 큰 사마귀가 있는 분이 바로 송대협이 아니오?"
장취산은 다시 멍해졌다.
"우리 사형제 중에는 사마귀가 있는 자가 없습니다."
이 몇 마디에 도대금은 직감적으로 느끼는 게 있어 등골이 오싹
해졌다.
"그 여섯 사람은 자칭 무당육협이라 하며 무당산에서 내려 왔
소. 그 중 두 사람은 도관을 쓴 도인이며....."
장취산이 그의 말에 끼어들었다.
"저의 스승님은 비록 도인이지만 제자들은 모두 속가 제자입니
다. 그 여섯 사람이 자칭 무당육협이라 했단 말입니까?"
도대금은 얼마 전의 일을 되새기며 내심 아뿔싸를 토했다. 단지
자기가 스스로 그들을 무당육협으로 단정했을 뿐, 그들이 신분에
대해 언급한 바는 한 마디도 없었다. 도대금은 절로 두 표두와
경악의 표정을 교환하고 나서 침통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그 여섯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어서 쫓아가
세!"
그는 즉시 안장에 뛰어올라 앞장서 달리기 시작했다. 장취산은
청총마에 올랐다. 그는 여유 있게 도대금의 말을 쫓아갔다. 그는
자세한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뒤쫓아가며 물었다.
"그 여섯 사람이 실없이 남의 이름을 도용한 모양인데, 피해가
없으면 내버려두시지요."
도대감은 숨을 할딱거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우린 부탁을 받고 한 사람을 무당산 장
진인께 인도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오. 한데 그 여섯 명이
무당육협으로 가장해 중간에서 가로채 갔으니, 아마..... 일이
심상치 않은 것 같소."
장취산은 안색이 변하며 물었다.
"누구의 부탁을 받았습니까? 그리고 그 어섯 명이 가로채 간 사
람은 누구입니까?"
도대금은 계속 말을 재촉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을 대충 얘기
해 주었다.
장취산은 그의 설명을 듣고 나서 몹시 의아해 했다.
"그 부상당한 자의 이름이 뭐며, 어떻게 생겼습니까?"
"그의 이름은 알 수 없소. 부상이 심해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
였소. 나이는 서른 살 정도로......"
이어 유대암의 생김새를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장취산은 이내
낯빛이 크게 변했다.
"그..... 그렇다면 바로 저의 세째 사형입니다!"
그는 비록 당황하였으나 이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왼손
을 잽싸게 뻗어서 도대금의 말고삐를 잡았다. 전력을 다해 달리
던 말은 즉시 멎어서 앞으로 한 발짝도 더 내딛지 못했다. 장취
산이 갑자기 고삐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길게 울부짖으며 입가에
서는 선혈이 흘러내렸다. 도대금은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흠칫
하며 비스듬히 안장에서 뛰어내려 본능적으로 단도를 뽑아 쥐었
다.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약해 보이는 장취산이 달리
던 말을 간단히 멈추게 한 완력(腕力)은실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
였다.
장취산은 얼른 정색을 하고 말했다.
"도총표두, 오해하지 마십시오. 불원천리 저의 삼사형을 이곳까
지 호송해 주신데 대하여 그저 고맙게 느낄 뿐입니다."
도대금은 단도를 칼집에 넣었지만 손에는 여전히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장취산은 다급하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저의 삼사형은 어떻게 해서 부상을 당했습니까? 그 상대는 누
구이며, 누가 그를 이곳으로 호송해 달라고 부탁했습니까?"
도대금은 그의 세 가지 질문을 단 한 가지도 대답할 수 없었다.
장취산은 눈쌀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저의 삼사형을 가로채 간 자들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이때 뒤쫓아온 사표두가 앞을 아투어 설명해 주었다. 장취산은
한 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소제가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도권의 예를 취하더니 이내 말을 몰고 앞으로 질주해 갔
다. 청총마는 실로 그 속도가 쏜살같이 빨랐다.
무당칠협은 형육 이상으로 정이 두터웠다. 장취산은 세째 사형
의 안위가 염려되어 청총마에 날개가 달리지 않은 게 한스러울
뿐이었다. 그는 단숨에 삼 리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곳은 삼거리
로서 한쪽 길은 무당으로 통하고, 한쪽 길은 동북 방향으로 뻗쳐
신양(新陽)까지 연결되었다.
장취산은 잽싸게 생각을 굴렸다.
'그 여섯 사람이 삼사형을 사문으로 호송해 줄 생각이었다면,
내가 하산하는 길에 마주쳤을 것이다.'
그는 곧장 동북쪽을 향해 말을 몰았다. 약 반 시진 가량 달렸을
까. 제아무리 청총마라해도 쉬지 않고 달려왔기 때문에 몹시 지
쳐 있었다.
어느덧 날이 차츰 어두어졌다. 이 일대에는 인적이 드물어 누구
에게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장취산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
다.
'삼사형의 무공은 강호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울 텐데, 대관
절 누구에게 중상을 입은 걸까? 도대금 등의 표정을 보아 거짓도
아닌 것 같고....'
이제 곧 십안진(十雁鎭)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이때 장취산은
길 옆에 마차 한 대가 잡초더미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
했다. 즉시 앞으로 달려가 보니 마차를 몰고 온 말은 두개골이
박살난 채 죽어 있었다.장취산은 황급히 안장에서 뛰어내려 마차
안을 살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얼른 주위를 둘러보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잡초더미 속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장취산은 가슴이
철렁했다. 얼른 달려가 일으켜 보니 예측했던 대로 세째 사형이
었다. 유대암은 눈을 감은 채 안색이 파르스름하게 변해 있어 공
포스럽기까지 했다. 장취산은 울먹이며 자신의 얼굴을 그의 얼굴
에다 갖다 댔다. 뜻밖에도 약간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장취산은
기뻐하며 재빨리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아직도 천천
히 뛰고 있었다. 단지 뛰었다가 다시 멎으며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장취산은 울먹이며 소리쳤다.
"삼사형,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저는 오제(五第)예요. 오제란
말입니다."
그는 유대암을 안고 천천히 일어났다. 순가, 유대암의 팔다리가
모두 아래로 축 늘어졌다. 장취산이 깜짝 놀라 살펴보니 사지의
골절이 모두 절단된 상태였다. 지골(指骨), 완골(腕骨), 비골(碑
骨), 퇴골(腿骨), 골절마다 선혈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적이 독수를 전개한 지는 얼마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적은 한꺼번에 독수를 전개한 것이 아니라, 하나씩 골절을 부러
뜨린 게 분명했다. 그 악랄한 수법은 실로 목불인견이었을 것이
다. 장취산은 노화가 치밀어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청총마를
타고 뒤쫓아가면 능히 추격을 수도 있었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되
었따.
'사형의 생명이 위독하니 복수를 나중에 미루고, 우선 스승님께
달려가야겠다!'
그는 지체 않고 조심스럽게 유대암을 품안에 안은 채 질풍처럼
경공술을 전개했다.
이날, 무당파의 창파사조인 장삼봉의 구십 회 생신을 맞아, 자
소궁(紫宵宮)은 이른 아침부터 제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경축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송대교(宋大橋)를 위시해 여섯 제자들은
일일이 스승님께 배수(拜壽)를 했다. 일곱 제자 중에 단지 유대
암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장삼봉과 제자들은 그가 아무리 늦
어도 오늘 이내로 당도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정오가 넘도록
그가 돌아오지 않자 모두는 은근히 짜증이 났고, 장취산은 기다
리다 못해 직접 하산하여 마중하겠다고 했다.
헌데, 그자머 쩌난 지 오래 됐는데 캄캄 무소식이었다. 그는 청
총마를 타고 갔기 때문에 설령 노하구(老河口)까지 마중 나갔다
해도 벌써 돌아와야 했다. 모두는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특
히 여섯째 은이정(殷利亭)과 일곱째 막성곡(莫聲谷)은 안절부절
못하여 자소궁 문 밖까지 몇 번씩이나 들락거렸다.
장삼봉은 제자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유대암은
침착하고 대범해 큰일을 해낼 수 있고, 장취산은 총명하고 칸단
력이 빨라 매사에 정확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장삼봉은 틀림없이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이라 생각했
다. 그는 다른 제자를 다시 내보내 볼까 하고도 생각해 보았다.
이때, 송원교와 둘째 제자 유연주(兪蓮舟)가 일제히 대청밖으로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삼제(三第)인가?"
그러자 장취산의 대답이 들려왔다.
"접니다!"
울먹이는 음성이었다.
곧이어 그는 피투성이가 된 한 사라 섯 " 안고 대청 안으로 뛰쳐
들어와 장삼봉 앞에 무릎을 꿇으며 통곡을 터뜨렸다.
"스승님!..... 삼...삼사형이 암습을 당했습니다.....!"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라는 순간, 장취산은 비틀거리더니 뒤로
벌렁 쓰러졌다. 그는 쉬지 않고 단숨에 이곳까지 달려온데다가
극도의 비통함이 복받쳐 끝내 정신을 잃고 만 것이다. 송원교와
유연주는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몸을 번뜩여 유대암을 안아 일
으켰다. 유대암은 곧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장삼봉은 사랑하는 제자가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중상
을 입은 걸 보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세한 것을 물을 겨
를도 없이 내당으로 뛰어 들어가 백호탈명단(白虎奪命丹) 한 병
을 꺼내 왔다.
약병은 원래 납으로 봉해져 있었는데, 장삼봉은 납을 뜯을 겨를
도 없이 순가락으로 병을 깨 백호탈명단 세 알을 유대암의 입 안
에 넣어 주었다. 그러나 유대암은 이미 정신을 잃어 그 단약을
삼킬 리가 업었다. 장삼봉은 양손 식지와 엄지를 구부려 학구경
(鶴口經)의 자세를 취했다. 이어 식지로 유대암 귀 끝 부위 세
군데 용약규(龍躍窺)를 찍어 내력을 끌어올리며 천천히 움직였
다.
그의 이와 같은 공력으로서 이 학구경점용약규(鶴口經點龍躍窺)
를 전개하면, 설령 갓 숨이 넘어간 사람도 짧은 시간 안에 반혼
(返魂)시킬 수 있었다. 한데 그의 손가락이 이십여 차례나 움직
였으나 유대암은 여전히 나무토막처럼 윰직일 줄 몰랐다.
장삼봉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그는 쌍장으로 검결
(劍訣)을 꼽으며 장심(掌心)을 아래쪽으로 향하며 유대암의 협차
혈(頰車穴)을 취했다. 그 협차혈은 바로 턱 위 아관(牙關)이 결
합되는 부위에 있었다. 장삼봉은 장심을 아래로 하여 음수(陰手)
를 펼치다가 다시 장심을 위로 하여 양수(陽手)로 바꾸며 거듭
열 두 번째 음양을 교차시켰다. 그제서야 드디어 유대암은 입을
벌렸고 입 안에 있던 단약이 천천히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갔다.
은이정과 막성곡은 잔뜩 긴장된 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앗! 하고 소리를 내지렀다.
한편, 유대암은 후두의 근 빰이 뻣뻣하게 굳어 단약이 목구멍으
로 들어갔지만 좀처럼 뱃속까지 미치지 못했다. 장송계(張松溪)
가 얼른 나서서 그의 후두를 안마해 주었다. 장삼봉은 얼른 유대
암의 결분(訣盆), 유부(兪府), 양관(陽關), 명문(命門)등 혈도를
찍었다. 그가 깨어나는 즉시 사지에 전해오는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다시 기절할까 봐 미리 취한 조치였다.
송원교와 유연주는 스승님이 평소 어떤 어려운 일을 직면해도
시종 태연자약해 온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양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사제의 상태가 얼마나 절망
적인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장취산이 유유히 깨어나 대뜸 장삼봉에게 소리쳤다.
"스승님! 세째 사형을 살려낼 수 있으십니까?"
장삼봉은 직접적인 대답을 피했다.
"취산아, 세상에 죽지 않는 사람이 있더냐?"
이때, 어린 도동(道童)이 들어와 아뢰었다.
"관 밖에 한 무리의 표객들이 찾아와 조사님을 빕겠답니다. 그
중 한 분은 임안 용문표국의 도대금이라고 성함을 밝혔습니다."
장취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눈에 살기를 띤 채 소리쳤다.
"바로 그놈이다!"
그는 다짜고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즉시 밖에서요란한 소리
가 들렸다. 십여 자루의 무기가 연거푸 땅에 떨어지는 소리 같았
다. 은이정과 막성곡이 막 뛰쳐나가사형을 도우려는데, 장취산이
이미 한 사나이의 뒷덜미를 번쩍 들어올린 채 들어와 한쪽에 팽
개치며 외쳤다.
"모두 이놈 때문에 생긴 불상사입니다!"
막성곡은 이 자가 바로 세째 사형에게 중상을 입힌 장본인인 줄
알고 대뜸 달려가 발로 걷어차려는 것을 송원교가 제지했다.
"잠깐!"
막성곡은 즉시 발을 거두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대청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위 명문이란 무당파가 이럴 수 있는 거요! 우린 일부러 뵙기
위해 찾아왔는데 이렇게 무례한 짓을 할수 있소!"
송원교는 눈쌀을 가볍게 찌 덩리며 도대금의 어깨와 등을 몇 번
두드려 장취산이 찍은 혈도를 풀어 주었다.
"밖에 있는 손님들은 조용히 하시오. 잠시만 기다려 주면 옳고
그른 것이 가려질 것이오!"
이 몇 마디는 내력이 충배하고 위엄이 있었다. 축표두와 사표두
는 이내 위압감을 느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장삼봉이 직접 외
친 걸로남 알았다.
송원교는 장취산에게 물었다.
"오제, 삼제가 어떻게 해서 부상을 입었는지 서둘지 말고 차근
차근 얘기해 보아라."
장취산은 도대금을 한 번 노려보고 나서, 용문표국이 유대암의
호송을 청탁받아 무당산까지 오게 된 것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여
섯 놈에게 당한 일을 간략하게 얘기해 주었다.
송원교는 도대금의 무공으로서는 도저히 유대암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없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더우기 상대방은 스스
로 찾아오지 않았던가! 송원교는 곧 웃는 낯으로 도대금에게 상
세한 경위를 물었다. 도대금은 모든 것을 솔직이 털어놓고 나서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송대협, 나의 불찰로 인해 유삼협이 이 모양이 됐으니 죽어도
할 말이 없소. 단지 임안 표국에 남아 있는 가족이 지금쯤 제대
로 목숨이 붙어 있을지 모르겠군요."
장삼봉은 줄곧 쌍장을 유대암의 신장(神藏), 영대(靈臺) 두 혈
도에 붙인 채 내력을 체내에 주입시켜 주고 있었다.
그는 도대금의 말을 듣자 갑자기 입을 열었다.
"연주, 넌 성곡을 데리고 즉시 임안으로 달려가 용문표국의 가
족을 보호하도록 해라."
유연주는 얼른 대답을 했지만 내심 멍해졌다. 그는 스승님의 자
비로움과 협의지심을 잘 알고 있었다. 스승님은 도대금을 탓하거
나 원망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를 도우려고 했다.
장취산이 분연한 표정으로 나섰다.
"스승님, 이 도가의 잘못으로 인해 삼사형이 이 모양이 된건데,
어찌 책임을 추궁하시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려고 하십니까?"
송원교가 대신 입을 열었다.
"오제, 자넨 어찌 그다지도 속이 좁은가? 도총표두가 불원천리
이곳까지 누굴 위해 왔겠는가?"
장취산은 냉소를 날렸다.
"그 이천 낭의 황금 때문이지 진심으로 삼사형을 위해 온 것은
아니잖습니까?"
도대금은 이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솔직히 말해서 그 황금 이
천 냥때문에 이번 일을 맡은 게 사실이었다.
송원교가 대뜸 호통을 쳤다.
"오제! 손님에게 무례를 범해선 아니 되네. 자넨 몹시 지쳤으니
일찍 들어가 쉬도록 하게."
무당 문중에서 송원교의 사람됨이 가장 단엄(端嚴)하여 모두를
그를 존경했다. 장취산은 그의 호통을 듣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유대암의 상태가 걱정되어 쉬러 가지는 않
았다.
송원교는 다시 유연주에게 말했다.
"이제, 스승님의 분부이시니 어서 칠사제와 함께 길을 떠나게.
화급을 다투는 일이니 절대 도중에서 지체해서는 안되네."
유연주와 막성곡은 대답을 하고 제각기 돌아가 옷가지와 무기를
챙겼다.
도대금은 유,막 두 사람이 자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임안으로
떠나려는 걸 보자, 아루 말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는
곧 장삼봉에게 포권의 예를 취했다.
"장진인, 후배의 일로 인해 유대협과 막소협에게까지 폐를 끼칠
수 없으니 이만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송원교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여러분들은 오늘 이곳애서 유숙하십시오. 몇 가지 기르침을 받
을 일이 있소."
그의 음성은 담담했지만 겨역할 수 업는 힘이 들어 있었다. 도
대금은 어쩔 수 없이 묵묵히 한쪽에 앉아 있었다.
유연주와 막성곡은 스승님께 큰절을 올리고 나서 못내 아쉬운
듯 유대암을 바라보더니 곧 하산하였다. 이번 헤어짐이 어쩌면
유대암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제 대청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단지 장삼봉의 진기를
들이키는 소리와 그 진기를 다시 토해내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
릴 뿐이었다. 차츰 그의 머리 위에 백기(白氣)가 피오올라 운무
를 형성했다. 약 반 시간이 경과되었을까.
돌연, 유대암의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터졌다.
"으앗!"
그 비명으로 인해 기왓장마저 들썩거리는 것 같았다. 도대금은
화들짝 놀라 조심스럽게 장삼봉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장삼봉
의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아 유대암의 갑작스런
비명이 길조인지 흉조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장삼봉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송계와 이정은 대암을 안으로 들고가 편히 쉬도록 해줘라."
장송계와 은이정은 유대암을 내당으로 들고 들어가 편히 누이고
는 다시 대청으로 나왔다. 은이정이 견딜 수 없어 물었다.
"스승님, 삼사형의 무공은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장삼봉은 장탄식을 했다.
"그가 과연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한 달 후에나 확실한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끊어진 손발의 관절은 이을 수가 없구나. 그
는 평생 동안.....평생동안....."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장삼봉은 고개를 설래설래 내둘렀다.
은이정은 갑자기 통곡을 터뜨렸다. 장취산은 펄쩍 뛰어 다짜고짜
도대금의 뺨을 후려쳤다.
찰싹!
그의 출수는 전광석화 같아 도대금이 막으려 했을 때는 이미 늦
었다. 그의 뺨에 즉시 붉은 순자국이 찍혔다. 장취산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그의 허리를 향해 걷어차려 했다. 이 공격
도 지극히 빨랐다. 그러나 장송계가 적시에 손을 뻗어내 장취산
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그 바람에 장취산의 공격이 아슬아슬하
게 빗나갔고, 도대금은 질겁을 하며 뒤로 급히 피했다. 순간, 품
안에 있던 금덩어리가 떨어졌다. 장취산은 발끝을 살짝 치켜세워
금덩어리를 받았다.
"흥! 돈에 눈이 어두워 죄 없는 사람의 신세를 망쳐놓았으니,
이....."
마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안색이 급변하더니, 금덩어리에 패
여 있는 손자국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대사형, 이.....이건 소림파의 금강대력지공(金剛大力之功)이
아닙니까?"
송원교는 얼른 금덩어리를 받아 살펴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스승님께 건네 주었다. 장삼봉도 금덩어리를 이리저리 유심히 살
펴보더니, 송원교와 마주 보며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장취산이 큰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이것은 소림의 금강대력지공입니다. 소림을 제외하고
는 천하에 이러한 지공을 하는 문파가 없습니다. 제자의 말이 맞
죠?"
그 순간, 장삼봉은 어렸을 때 소림사에서 각원선사와 함께 지낸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금덩어리에 패인 손자
국으로 보아 틀림없는 소림의 금강지법이었다. 장취산의 말대로
당금 무림에서 소림을 제외하고 이렇나 지법을 터득한 문파는 절
대 있을 수 없었다. 무당파만 하더라도 심후한 내공을 바탕으로
한 무공으로서 장력, 권력, 벽력, 퇴력 등은 독특한 경지를 개척
했지만, 지력만큼은 이러한 조예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장취산은 스승님이 침묵을 지키자, 자신의 생각이 적중한 것을
알고 다시 물었다.
"스승님, 무림의 어떤 기인이사가 스스로 이런 금강지력을 연성
(鍊成)할 수 있습니까?"
장삼봉은 계속 대답을 회피할 수만은 없어 천천히 고개를 내두
르며 입을 열었다.
"소림은 천 년의 전통을 면면이 이어와 비로소 이러한 절예를
달성할 수 있 ㉦던 것이다. 절대 짧은 세월에 이룩할 수 없는 금
강지법이다. 그리고 제아무리 자질이 뛰어난 자라 할지라도 스스
로의 노력으론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말끝을 멈칫하더니 다시 이었다.
"왕년에 나는 소림사에 얼마 동안 기거한 적이 있었지만, 아직
도 사람의 손으로 어떻게 그런 지력을 터득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송원교의 눈에서 갑자기 이상한 광채가 번뜩였다.
"삼제의 관절과 심줄은 모두 이 금강지력에 의해 절단된 것입니
다!"
은이정은 앗! 하고 일성을 토하며 이내 눈물을 글썽거렸다. 도
대금은 유대암을 해친 자가 소림 제자라는 말을 듣자 더욱 놀라
고 당황해 했다. 그는 입이 딱 벌어진 채 한참 후에야 세차게 고
개를 저으며 말했다.
"절대.....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나도 소림사에서 십여년간
무예를 배웠지만, 그렇게 얼굴에 큰 사마귀가 있는 자는 보지 못
했습니다!"
송원교는 그의 두 눈을 응시하며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은이정
에게 분부했다.
"육제, 네가 도총표두 일행을 뒷뜰로 모셔 편히 쉬시도록 도와
줘라. 그리고 주방에 분부하여 술과 요리를 마련해 멀리서 오신
손님을 대접케 해라. 절대 소홀함이 있어선 아니 된다."
은이정은 대답하고 나서 도대금 일행을 뒷뜰로 안내했다. 도대
금은 몇 마디 더 변명을 늘어놓고 싶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는
한 마디도 더 나오지 않았다.
은이정은 표사들을 안내한후 다시 유대암의 방으로 갔다. 유대
암은 눈을 멀건히 뜬 채 백치처럼 누워 있었다. 은이정은 절로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얼굴을 가리며 뛰쳐
나와 곧장 대청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송원교등이 모두 스승님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도
순서대로 장취산 곁에 자리잡고 앉았다. 장삼봉은 한참동안 천장
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입을 열었
다.
"이번 일은 정말 어렵군. 송계, 너의 의견을 어떻느냐?"
무당 칠제자 중에 장송계의 지모가 가장 뛰어났다. 그는 평상시
엔 별로 말수가 없었다. 그러나 매사에 판단이 정확하고 생각이
깊었다. 이번에도 장취산이 유대암을 안고 돌아온 순간부터, 그
는 쓴록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졸곧 자초지종에 대해 속
으로 헤아려 보았었다. 그런 터라 스승님이 묻자 망설임없이 입
을 열었다.
"제자의 생각으로는, 원흉은 소림이 아니라 도룡도인 것 같습니
다."
장취산과 은이정은 동시에 놀란 외침을 토했다.
"앗!"
송원교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사제, 틀림없이 깊은 생각을 거쳐 그런 결론을 얻은 것 같은데
자세한 것을 스승님께 말씀드리게."
장송계는 또박또박 말했다.
"삼사형은 매사에 침착하고 대인 관계가 원만하여 절대 경솔하
게 누구와 원한을 맺지 않습니다. 그가 강남으로 가서 죽인 거도
는 형편없는 패류(敗流)이므로 무림인의 지탄을 받아왔기 때문
에, 소림이 그를 위해 삼사형에게 이런 악랄한 수단을 전개하진
않았을 겁니다."
장삼봉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송계는 말을 계속했다.
"삼사형의 관절이 절단된 것은 모두 외상(外傷)입니다. 그러나
절강 임안부에서 이미 독상을 입었습니다. 제자의 생각으로는 우
선 임안으로 가서 삼사형이 어떻게 중독됐으며, 누가 독수를 전
개했는지부터 알아보는 게 순서인 것 같습니다."
장삼봉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대암이 당한 독은 매우 괴이하여 난 아직까지도그게 무슨 독
이지 알아내지 못했다. 대암의 장심에 일곱 개의 작은 구멍이 뚫
려 있고, 허리와 허벅지에도 몇 군데 바늘 구멍이 있다. 강호에
서 어느 고수가 이런 악랄한 암기를 사용하는지 아직 들어본 적
이 없다."
송원교가 그의 말을 받았다.
"이 일은 정말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아마도 삼사제가 피하지
못할 정도라면 상대방의 암기 수법은 필시 일류 고수였을 겁니
다. 하지만 진짜 일류 고수라면 왜 구태여 암기에다 독을 묻혔는
지....."
그는 말끝을 흐렸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침묵을 지킨 체 생각
을 굴렸다. 대관절 어느 문파의 어느 인물이 이러한 암기를 사용
할까? 그들은 서로 얼굴만 마주 볼 뿐 어느 누구도 이렇다 할 단
서를 제시하지 못했다.
장송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얼굴에 사마귀가 있는 자가 왜 삼사형의 관절을 절단시켰겠
습니까? 만약 그 자가 삼사형과 원한이 있었다면, 충분히 살수를
전개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보다 많은 고통을 줄 생각이었
다면 척추, 혹은 갈비뼈를 손상시켰을 겁니다. 이 점으로 미루
어, 그는 삼사형에게서 무엇을 알아내려고 협바 고문을 한게 분
명합니다. 제자의 추측으로는, 그들이 알고자 하는 것이 바로 도
룡도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도대금의 말을 빌리면 그 여섯 사람
중에 하나가 대뜸 도룡도의 행방을 물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은이정이 눈쌀을 찌푸렸다.
"무림지존(武林之尊) 보도도룡(寶刀屠龍) 호령천하(號令天下),
막감불종(莫敢不從) 의천도룡(倚天屠龍) 수여쟁봉(誰與爭鋒)....
이 말은 기백 년 전부터 강호에 떠돈 것 같은데 정말 그 도룡도
가 세상에 나타났단 말입니까?
장삼봉이 입을 열었다.
"기백 년 전이 아니라 길어야 칠, 팔십 년부터 나돈 소문일 거
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그런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장취산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사사형의 말이 맞습니다. 삼사형을 해친 원흉이 틀림없이 강남
일대에 있을 테니 즉시 가서 찾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 소림파의
악적이 이렇게 악랄한 수단을 전개했으니, 그도 절대 살려둘 수
가 없습니다."
장삼봉은 송원교의 의견을 물었다.
"원교, 지금으로선 어떻게 하는 것이 좋느지 너의 의견을 발해
보아라."
근래에 와서 장삼봉은 무당의 제반 일들을 모두 송원교에게 맡
겼다. 송원교는 그 동안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 장삼봉은 별로 신
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송원교는 몸을 일으켜 공송하게 말했
다.
"스승님, 이번 일은 삼사제의 복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본파
의 명예에도 관계되므로, 만약 조금이라도 대책 방법이 빗나가면
무림에 일대 풍파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없지 않으니 스승님의 분
부를 기다릴 뿐입니다."
장삼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와 송계, 이정은 내 서찰을 가족 숭산 소림사로 가서,
장문인 공문선사(空聞禪師)를 뵙고 이번 일을 소상히 알린 다음
지시를 청해라. 이번 일에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소림은 문규가
엄하고 또한 공문선사의 덕망이 높아 필시 적당한 선처가 있을
것이다."
장송계는 내심 생각했다.
'만약 단순히 서찰을 보내는 일이라면 육제 혼자서도 충분히 해
낼 수 있을 텐데, 스승님께서 나와 대사형까지 함께 보내는 것은
필시 깊은 뜻이 있다. 아마 소림이 일방적으로 제자들을 감싸며
부인할 시엔 우리더러 상황에 따라 행동을 취하라는 뜻일 게다.'
과연 장삼봉은 그의 생각대로 다음 말을 이었다.
"본파와 소림의 사이는 매우 특수하다. 나는 한때 소림에 몸을
기탁하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반도(返徒)로 낙인 찍히기도 했
다. 이젠 많은 세월이 흘러 그들은 더 이상 무당산으로 날 잡으
러 오진 않겠지만, 아뭏든 불편한 사이임엔 분명하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너희들은 소림으로 가서 공문박장에게 공손해야 함은 물론이
고, 본문의 명성을 추락시켜서도 안 된다."
세 명의 제자는 일제히 대답을 했다. 장삼봉은 다시 장취산에게
말했다.
"위산, 넌 내일 강남으로 떠나도록 해라. 자세한 내막을 알아내
야 하며 이사형과 회합하여 그의 분부에 따르도록 해라."
장취산은 숙연히 대답했다.
장삼봉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 수주(壽酒)는 더 이상 마시지 않겠다. 한 달 후에 모
두 이것에 모여야 한다. 대암이 만약 불행을 당하게 되면 너희들
과 마지막 대면을 해야 하니까....."
그는 말끝을 흐리며 태연함을 금치 못했다. 무림에서 수 십 년
간 위명을 떨쳐온 그가, 구십 회 생일을 맞아 뜻밖에도 사랑하는
제자의 불행을 보게 될 줄이야.....
은이정은 원래 마음이 약해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흐느꼈다. 장
삼봉은 소매를 펼치며 말했다.
"모두들 가서 잠을 청하도록 해라."
송원교는 안타깝게 입을 열었다.
"스승님, 삼사제는일생 동안 협의를 바탕삼아 후한 공덕을 쌓아
왔습니다. 하늘은 길인(吉人)을 돕는다는데 설마 삼사제를......
삼사제를......"
그도 눈물을 흘리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스승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려다 오히려 슬픔을 가중시킨 것 같
은 죄스러움에, 얼른 사제들을 이끌고 대청을 빠져 나갔다.
** 註 : 고서(古書)에 장삼봉에게 일곱 제자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순서대로 송원교, 유연주, 유대암, 장송계,
장취산, 은이형(殷利亨), 막성곡이다. 본책에서는 단지 은이형을
은이정(殷利亭)으로 고쳤다.
----- 제 1 권 3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1 권
제 4 장 장취산(張翠山)의 억울한 누명(陋名)
장취산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억제할 수 없었다. 침상에
누워 아무리 몸을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도대금을 찾아가 분풀이라도 할 양으로 슬그머니 일어났
다. 행여나 대사형, 사사형에게 들켜 제지당할까 봐 조심스럽게
대청 쪽으로 옮겨갔다. 대청을 지나 곧장 뒷뜰로 달려갈 생각이
었다. 그런데 그가 대청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뒷짐을 진 채 배
회하는 모습이 보였다. 주위는 어슴프레했지만 중압감을 주는 뒷
모습에 묵직한 걸음만 보아도 스승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취산은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
방으로 되돌아간다 해도 스승님께 발각될 우려가 있었다. 일단
스승님께서 문책하면 솔직히 대답드려야 하며 호된 훈계를 들어
야 할 게 뻔했다.
장취산은 그의 손놀림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장삼봉이 쓴 것은
상란(喪亂) 이란 두 글자였다. 장취산의 호가 은구철획(銀鉤鐵
劃)이듯, 왼손으로는 난은호두구(爛銀虎頭鉤)를 사용하고 오른손
으로는 빈철판관필(濱鐵判官筆)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호에 어울
리게 서예에도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다 하여, 기금 스승님의 필
차가 바로 왕희지(王羲之)의 상란체(喪亂體)라는 것을 금방 알수
있었다.
장취산도 이 년 전에 이 상란체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비록 필
체가 청강준발(淸剛峻拔)하지만 난정시서체(蘭亭時序體)만큼 장
엄숙목(莊嚴肅穆), 기상만천(氣象萬千)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지
금 허공에다 상란체를 써내려 가고 있는 스승님의 일필 잎획은
비분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취산은 비로소
왕희지가 왕년에 어떠한 심정으로 이 상란체를 썼는지 납득이 갔
다.
왕희지는 동진(東晋) 때 사람으로서 당시 중원은 극도로 혼란해
있었다. 호족(豪族)들이 서로 판도 다툼을 하고 오랑케들의 침략
이 그칠 날이 없었다. 왕희지는 오랑케들이 선인(先人)의 묘까지
파헤치는 만행을 보고 비통한 심정에서 이 상란체를 쓴 것이다.
장취산은 아직 나이가 젊고 패기 발랄하여, 예전에는 이 상란체
에 담긴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사형이 뜻하지
않은 큰 변을 당한 상태에서, 스승님이 상란체를 써내려 가는 필
치를 보고 비로소 뼈저리게 가슴에 와닿는 바가 있었다.
장삼봉은 한참 써내려 가다가 장탄식을 했다. 그는 다시 대청
안을 서성거리며 무엇인가 깊은 상념에 잠기는 듯하더니 다시 허
공에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의 필체는 좀전과 달랐다. 장취
산이 그의 손놀림을 주의깊게 바라보니, 첫자는 무(武), 두 번째
자는 림(林)이었다.
장삼봉은 계속 써내려 가 삽시간에 스물 네 글자를 완성했으
니..... 바로 다음과 같았다.
------武林之尊, 寶刀屠龍, 號令天下, 莫敢不從, 倚天屠龍, 誰
與爭鋒------
장삼봉은 이 스물 네 글자가 유대암의 부상과 어떤 관계가 있는
지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의천검과 도룡도!
그 두 가지 전설의 신병이기(神兵利器)는 대관절 이번 일과 무
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장삼봉은 한 번 또 한 번 되풀이 하여
스물 네 글자를 허공에다 휘갈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거듭될
수록 필획이 길어지며 손놀림도 느려졌다. 나중에 이르러서는 마
치 장법을 전개하는 자세를 연상케 했다.
장취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일필 일획에 심취되었다. 얼
마 동안 시간이 흐르자, 장취산은 뇌리가 확연해지며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아 놀라움과 기쁨에 사로잡혔다. 스승님이 쓰고
있는 스물 네 글자를 연결해 보니, 분명 하나의 고명한 무공 초
식이었다. 한 굴자에 여러 가지 초식이 담겨 있으며 변화 또한
많았다. 용(龍)자와 봉(鋒)자의 획이 많고 도(刀)자와 하(下)자
의 획이 적지만, 많은 획수는 번거롭게 느껴지지 않고 적은 획수
는 전혀 단조로운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 획의 뻗고 거둠은 태
산처럼 무거운가 하면, 또한 낙엽처럼 가벼워 보이기도 했다. 아
울러 그 손놀림의 민첩함은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를 연상케 했
고, 때로는 웅후한 힘이 곁들여 코끼리 걸음을 방불케 했다.
장취산의 눈에서는 신광이 발해지며, 그 일필 일획은 가슴 깊이
새겼다. 이 스물 네 글자 중에 불(不)과 천(天)자가 모두 두 개
씩 있지만 제각기 형상만 같을 뿐 그 뜻은 달랐고, 그 기(氣)가
비슷하지만 그 속에 담긴 혼(魂)은 같지 않았다. 더우기 변화의
묘미는 제각기 독특했다.
근래에 와서 장삼봉은 좀처럼 무공을 직접 시범해 보이는 예가
드물었다. 은이정과 막성곡의 무공은 대부분 송원교와 유연주가
대신 전수해 준 것이다. 그래서 장취산은 비록 다섯 번째 제자지
만 사실은 장삼봉의 직접 가르침을 받은 마지막 제자, 즉 관문제
자(關門弟子)라 할 수 있었다. 예전에 장취산은 조예가 부족해
비록 스승님이 권검(拳劍)을 시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그 속
에 담긴 박대 심오한 뜻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제
장취산의 무학은 큰 진전을 보았으므로, 이날 밤 비로소 스승님
과 의기상통, 청치합일(淸致合一)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상란체의 비분을 공감했고, 스물 네 글자에서 새로운
무공의 경지를 간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장삼봉도 처음에는 스물 네 글자로 무공을 창출할 뜻이 없었고,
장취산이 가둥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게 된 것도 우연한 일에
불과했다. 사도 두 사람으 심신이 도취되어 무학과 서예의 새로
운 경지로 빠져들어 차음 망아지경(忘我之境)으로 돌입했다. 장
삼봉은 이 이십사자권볍(二十四字拳法)을 거듭하여 펼쳐나가니,
어느덧 달이 중천으로 떠올랐다.
돌연, 장삼봉의 입에서 맑은 기합이 토해지며 오른손을 위에서
부터 아래로 곧장 힘있게 그어내렸다. 그 기세는 실로 검광만발
(劍光萬發) 뇌전추월(雷電追月)에 비견되니, 바로 봉(峰)자의 마
지막 한 획이었다.
장삼봉은 하늘을 우러러 보더니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취산아, 이 서예를 어찌 생각하느냐?"
장취산은 흠칫 놀랐다. 스승님은 한 번도 고개를 돌린 적이 없
는데, 자기가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사실을 벌써 알고 있
었던 것이다.
그는 얼른 앞으로 걸어나갔다.
"제자는 우연히 스승님의 절예를 엇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이라
도 가서 대사형 등을 볼러 와 함께 가르침을 받아도 되겠습니
까?"
장삼봉은 고개를 내둘렀다.
"난 이미 흥취가 사라졌으니 더이상 그런 좋은 글을 써내지 못
할 것 같다. 그리고 원교와 송계는 서예에 조예가 깊지 않기 때
문에, 설령 옆에서 지켜보아도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
이다."
말을 끝낸 스승은 승포 자락을 표연히 펼치며 내당으로 들어갔
다.
장취산은 행여나 조금 전에 보았던 절묘한 초식을 잊어먹을까
봐, 감히 취침을 못하고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한 획 한
획을 새롭게 뇌리에 심어두었다. 아울러 이따금씩 몸을 일으켜
직접 시전을 해보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장취산은 스물 네 자, 이백 십 오획의
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뇌리에 새길 수가 있었다. 그는 벌떡 일
어나 처음부터 차근차근 시전해 나갔다. 순간, 낭파(浪波)헤치는
바다 제비인 양, 구름을 꿰 선는 독수리처럼 온 몸이 표연하니 흡
사 하늘을 날으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마지막으로 일획을
내리긋자 바람을 가르는 예리한 소리와 함께 자신의 옷자락을 손
바닥만큼이나 베어버렸다.
장취산은 뛸 듯이 기뻐했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덧 해
가 중천에 걸려 있었다. 장취산은 혹시 자기가 잘못 본 것이 아
닌가 해서 손등으로 눈을 비벼 보았으나, 이미 다음날 정오가 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연공에 심취되어 이미 반나절이상이 경과
된 사실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장취산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곧장 유대암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장삼봉이 유대암의 가슴에 쌍장을 붙인 채 운공요상(運
功燎傷)을 해주고 있었다.
장취산은 송원교, 장송계, 은이정은 벌써 이른 새벽에 출발했다
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자기가 정좌묵상(正坐默想)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방해가 될까 봐 그냥 떠났다고 했다. 용문표국의 사람
들은 이미 하산을 한 뒤였다. 장취산은 온몸이 땀으로 축축히 젖
어 있었지만, 사형의 원한을 갚겠다는 마음이 앞서 미처 옷도 갈
아입지 않고 대충 옷가지와 무기를 챙겨 다시 유대암의 방으로
달려갔다.
"스승님, 제자는 분부대로 이만 떠날까 합니다."
장삼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이 웃었다.
유대암의 침상 가가이 다가가 장취산은 그의 아색이 잿빛으로
변해 송장처럼 누워 있는 것을 보자 다시 슬픔이 복받쳐 울먹겨
렸다.
"삼사형, 소제가 분신쇄골되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이 원한을
갚아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 큰절을 올리더니 이내 밖으
로 뛰쳐나갔다. 그는 총총마를 타고 곧장 하산하여 오십리 밖에
달리지 못했는데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 그가 막 객점에 몸을 풀
자마자 짙은 먹장구름이 몰려오더니 곧이어 억수 같은 비기 쏟아
졌다. 빗줄기는 갈수록 굵어져 한밤중까지 그칠 줄을 몰랐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주위가 어스름하니 귓전에 비가 쏟아
지는 소리가 삭삭 들려왔다. 장취산은 도롱이와 삿갓을 구입해
배속을 뚫고 길을 재촉했다. 그가 노하구에 당도해 한수(漢水)를
건널 무렵, 강줄기가 불어나 수세(水勢)가 심히 흉험했다. 양번
(襄樊)을 지나자 하류의 둑이 뚫려 무수한 사람이 재해를 당했다
는 소문이 퍼졌다.
이날 그는 의성(宜城)으로 들어섰다. 도처에 수재를 당한 난민
들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비에 흠뻑 젖은 그들의 모습은 실로 측은해 보였다.
장취산이 계속 길을 재촉하고 있는데, 앞쪽에 일행의 인마가 보
였다. 장취산은 즉시 눈에서 이상한 광채가 번뜩였다. 바로 용문
표국의 깃발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즉시 말을 재촉해 달려가 그
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도대금은 장취산이 나타난 것을 보자 내
심 크게 당황했다.
"장... 장오협이 웬일로.....!"
장취산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도총표두는 수재를 당한 난민들을 보았소?"
도대금은 그의 엉뚱한 물음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게 어쨌다는 거요?"
장취산은 냉소를 날렸다.
"덕을 베풀어 재민들을 도와줘야 되잖겠소?"
도대금은 안색이 변했다.
"우리 같이 행표를 하는 사람들은 칼날 위에서 목숨을 걸고 겨
우 끼니를 채우는데, 무슨 힘이 있어 재민들을 돕는단 말이오?"
장취산은 뚜렷하게 말했다.
"주머니 속에 있는 황금 이천 냥을 전부 내놓으시오!"
도대금은 본능적으로 손이 칼자루로 갔다.
"장오협, 끝까지 이렇게 나오기오?"
장취산은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렇소. 오늘 당신을 찍기로 작심했소!"
축표두와 사표두는 얼른 무기를 뽑아쥐고 도대금과 어깨를 나란
히 했다. 장취산은 여전히 빈 손인 채 입가에 냉소를 흘렸다.
"도총표두, 댓가를 받았으면 그 댓가에 상당하는일을 하는 게
당연하거늘, 그렇지 못하면서도 황금 이천 냥을 차지할 염치가
있소이까?"
도대금의 안색은 썩은 돼지 간처럼 변했다.
"유삼협은 이미 무당산에 당도해 있잖소!? 우리가 그를 인도받
기 전에 이미 중상을 입었으며, 지금도 죽은 건 아니잖소!"
장취산은 그의 변명에 노화가 치밀었다.
"쥐도 찍소리를 낼 줄 안다더니 이제 와서 억지를 부리는군! 그
럼 나의 삼사형이 임안을 떠날 때, 손발의 관절이 절단돼 있었단
말이오?"
도대금은 할 말을 잃었다.
사표두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장오협, 그래서 대관절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장취산은 감정이 복받쳐 살기 띤 음성으로 외쳤다.
"너희들의 손발 관절도 모두 부러뜨리고 말겠다!"
이 말을 내뱉자마자 잽싸게 앞으로 몸을 날렸다. 사표두는 즉시
곤봉을 번쩍 들어올려 공격 자세를 취했다. 순간, 장취산은 왼손
을 살짝 떨치며 새로 터득한 이십사자신공(二十四字神功)의 천
(天)자 초식을 펼쳤다.
팍!
사표두가 들어올린 곤봉은 멀리 날아가고, 그는 안장 위에서 떨
어졌다. 축표두는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때가 늦었
다. 장취산이 전개한 천(天)자의 마지막 획이 그의 옆구리에 적
중되었다.
펑!
축표두는 안장과 함께 일 장 밖으로 날아갔다. 축표두는 두 발
을 등자(燈子)에 단단히 끼고 있었는데, 장취산이 전개한 마지막
일획의 힘이 워낙 강맹하여 안장을 묶은 가죽끈이 함께 끊어진
것이다. 안장을 사타구니에 끼고 쓰러진 축표두는 좀처럼 일어나
지 못했다. 도대금은 그의 섬광처럼 민첩한 출수에 깜짝 놀라 곧
장 말을 몰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장취산은 대뜸 진기를 끌어올
려 좌권(左拳)을 뻗어냈으나, 바로 하(下)자의 첫 번째 획이었
다.
팍!
둔탁한 소리와 함께 권풍이 그의 등을 강타했다. 도대금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의 무공은 역시 두 표두보다 뛰어나 말에서 떨어
지지는 않았다. 그는 분노가 끓어올라 안장위에서 뛰어내려 한판
승부를 걸어 보려는데, 돌연 목구멍에서 단물이 넘어오며 울컥
한 모금의 신혈을 뿜어냈다. 그는 비칠거리며 한 모금의 진기를
들이켰으나 뜨거운 피가 다시 가슴으로 치밀어올랐다. 안간힘을
써서 버티려 했으나, 끝내 두 다리가 솜처럼 풀려 그 자리에 푹
석 주저앉았다. 나머지 열댓 명의 표사들은 놀라 눈이 휘둥그래
져 감히 앞으로 달려와 부축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장취산은 본디 노화가 충천하여 도대금 등의 손발 관절을 모조
리 절단시켜 버리려 했었다. 그래야지만 분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자기가 아무렇게나 전개한 일장 일권이 세 명의 표두를
이렇게 비참한 꼴로 만들자 스스로 놀랐다. 새로 배운 이십사자
신공이 이렇게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내심 기쁨이 샘솟아 더이상 신랄한 방법을 전개하고 싶지
않았다.
"도가야! 오늘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이 정도로서 그치겠다. 그
대신 이천 냥의 황금을 모두 재민을 돕는데 쓰도록 해라. 너의
행동을 암중에서 지켜볼 테니, 만약 한 푼이라도 네가 착복하면
용문표국을 박살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줄 알아라!"
도대금은 천천히 일어났다. 등골이 으스러지는 듯한 아픔을 느
끼며 다시 울컥 한 모금의 신혈을 토했다. 사표두는 가벼운 상처
를 입었을 뿐이다. 하지만 입심좋은 그도 장취산의 적수가 못 된
다는 것을 알고는 전처럼 감히 입을 함부로 놀리지 못했다.
"장오협, 우린 비록 표금을 받았지만, 이번 일에 차질이 생겨
다시 돌려줘야 할 판이오. 더우기 그 황금은 임안 표국에 있어
지금으로선 재민을 구제해 주고 싶어도 형편이 닿지 않소이다."
장취산은 냉소를 날렸다.
"내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인 줄 아느냐? 이번 일로 너희 용문
표국은 모조리 출동했는데, 노약자들만 덩그러니 남은 집에다 황
금 이천 냥을 놔둘 리 있겠느냐?"
그는 표사 일행을 매섭게 뎔어보며 한 대의 마차 가까이 다가가
살짝 손을 떨쳤다.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쪽 귀퉁이가 박
살나면서 십여 개의 금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표사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마차 한귀퉁이에
금덩어리를 숨겨 은밀하게 판자로 가려놓았는데 장취산이 그것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장취산은 비록 나이가 젊지만 사형들과 자주 행협 강호하며 경
험을 많이 쌓았는데 그러하기에 이 마차의 바퀴 자국이 진흙땅에
유난히 깊이 패인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느낀 바가 있었다. 게다
가 금덩어리 얘기가 나오자 몇몇 표사들이 본능적으로 이 마차를
호위하는 것을 보고 더욱 확신을 갖게 된것이다. 그는 진흙땅에
떨어져 있는 금덩어리를 쳐다보며 냉소를 몇 번 날리더니, 곧 말
에 올라 유유히 떠나갔다.
그는 다소나마 마음이 후련했다. 도대금은 가족들의 안위가 걱
정되어서라도 감히 이천 냥의 황금을 재민 돕는데 인색하지 못할
것이다.
장취산은 길을 재촉하면서 이십사자신공의 초식을 다시 한 획
한 획 되새겨 보았다. 그러자 더 깊은 변화를 깨우칠 수 있어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유대암의 위중함이 떠오르자 이내 울적해지
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비기 계속 내렸다. 청총마는 비록 다른 말에 비해 건
장했지만 연일 빗속을 달려오는 바람에 몹시 지쳐 있었다. 강서
성(江西城)으로 접어들 즈음 갑자기 흰 거품을 토하며 열병을 앓
기 시작했다. 장취산은 어쩔 수 없이 천천히 걷기로 했다. 이렇
게 되자 그가 임안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월 말이 되어 있었
다. 장취산은 객점을 찾아 들어가 내심 생각을 굴렸다.
'도대금 등은 이미 표국으로 돌아왔을까? 이사형과 칠사제는 지
금쯤 어디에 있을까? 난 표국의 사람들과 이미 등을 졌으니 정식
으로 찾아가 물을 수도 없고....... 오늘 밤 암탐을 하는 도리밖
에.......'
그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용문표국이 서호(西湖)변에 있
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우선 새 옷과 접선(摺扇:부채)을 구입한 후 몸단장을 깨
끗이 했다. 졸지에 그는 영준한 귀공자로 둔갑했다. 그는 붓을
빌어 부채에다 시를 한 수 써내려 갔다. 바로 의천도룡(倚天屠
龍)에 관한 스물 네 글자였다. 일필 일획을 정성들여 쓰고 나서
넌지시 바라보고는스스로 만족해 했다.
'스승님의 그 새로운 권법을 배우고 나니 서예마저도 한 경지
높아진 것 같군.....'
그는 부채를 흔들며 느긋한 걸음으로 서호로 향했다.
송조(宋朝)가 몰락한 후로부터 임안부도 자연히 원(元)의 손아
귀에 들어갔다. 원을 세운 몽고인은 임안이 남송(南宋)의 도성
(都城)의 추종자들이 모반을 꾀할까 봐 유난히 많은 명사를 주둔
시켰다. 게다가 몽고 병사들은 기강을 바로 잡겠다는 명목하에
도처에서 잔학한 행위를 저질렀다. 그로 인해 성안의 무고한 백
성들은 학정에 견디다 못해 뿔뿔이 다른 고장으로 옮겨가, 예전
에 그 번영을 누렸던 임안부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장취
산은 길을 걸으며 도처에 폐옥이 방치 돼 있는 것을 보고 씁쓸한
감회에 젖었다.
날이 어두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
이 걸어 행인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간혹 몽고 병사들이
순라를 도는 모습이 눈에 띄일 따름이었다. 장취산은 공연한 소
란을 피하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몽고 병사와 맞부딪치지 않았
다. 예전 같으면 서호에 등불이 휘황찬란하게 밝혀져 있을 텐데,
지금은 칠흑처럼 어두울 뿐 유람객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장취산은 객점에서 가르쳐 준 대로 용문표국을 찾아갔다. 용문
표국은 앞뒤가 모두 다섯 칸으로 연결돼 있었으며, 서호를 마주
보고 우뚝 숫은 문루(門樓)앞에 한 쌍의 돌사자가 웅크리고 있어
제법 기상이 웅위(雄威)하였다.
장취산은 용문표국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표국 앞
쪽 호변에는 뜻밖에도 유람선 한 척이 정박 돼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뱃머리에는 벽사등롱(碧紗燈籠)을 밝혀놓고 한 사람이
유유자작하는 모습도 어렴풋이 보였다.
장취산 "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제법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군.....'
한편, 표국 앞에 걸려 있는 두 개의 커다란 등롱에는 불이 밝혀
져 있지 않고, 붉게 칠한 대문도 굳게 닫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모두들 이미 잠자리에 들어간 것 같았다. 장취산은 문 앞에 이르
러 내심 생각을 굴렸다.
'한 달 전에 삼사형을 이곳으로 보내 호송을 청탁한 자가 대관
절 누구일까?'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 돌연 등 뒤에서 울적한 한숨소리가 들
려왔다. 어두운 한밤중에 들려온 한숨소리는 귀기마저 느끼게 하
였다. 장취산은 잽싸게 몸을 돌렸으나 등 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살펴보니 호변 유람에 앉아있는 유객 외에는 사
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장취산은 다소 의아해 했다. 그는 뱃머리에 앉아 있는 유객을
새삼 유심히 살폈다. 그는 청색 장삼에 자기와 같은 문사(文士)
차림이었다. 주위가 어슴프레하여 얼굴을 똑똑히 볼 수는 없지
만, 안색이 매우 창백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조용히 뱃
머리에 앉아 한참 동안 소매자락만 바람에 날릴 뿐 움직일 줄 몰
랐다.
장취산은 원래 어둠을 틈타 담장을 뛰어넘을 생각이었다. 그러
나 유람선에 앉아 있는 사람을 의식해 차마 그런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음을 굳게 먹고 직접 문을 두드
렀다.
쿵! 쿵! 쿵!
조용한 야밤인지라 문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잠시 기다렸으나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장취산은 다
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좀전보다 소리가 더 켰다. 그러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장취산은 이상하다고 느껴져 문을 살짝 밀
자 소리없이 열렸다. 안에서 빗장을 걸지 않았던 것이다. 장취산
은 성큼 안으로 들어서 낭랑한 음성으로 위쳤다.
"도총표두, 집에 있소이까?"
이어 대청을 향해 걸음을 떼어 놓았다.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져
주위는 어둡기만 했다.
이때였다.
꽝!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뜻밖에도 대문이 닫혀졌다. 장취산은 직
감적으로 느끼는 바가 있어 대문 쪽을 향해 날렵하게 몸을 날렸
다. 예측한 대로 대문에 빗장이 채워져 있었다. 장취산은 냉소를
날렸다.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두고 봐야겠군!'
그는 두려움도 없이 다시 성큼성큼 대청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대청 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전후좌우에서 예리한 바람이 일
며 네 사람이 동시에 그에게 덮쳐갔다. 장취산은 비스듬히 미끄
러지면서 피했다. 어둠 속에서 흰 광채가 번뜩였다. 네 사람은
모두 손에 무기를 쥐고 있었다. 장취산은 재빨리 걸음을 떼며 우
장(右掌)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이 되게 긋자 팍! 하는 소
리와 함께 한 사람의 태양혈을 격중시켰다. 그 자는 즉시 그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이어 장취산은 왼손을 우상각(右上角)에서 비스듬히 아래로 굴
려내려 다른 한 사람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이 두 번의 공격은
바로 불(不)자의 두 획이었다. 이것이 성공을 거두자 좌우쌍권
을 동시에 떨쳐내 불(不)자를 완성시켰다. 거기에 따라 상대방
네 사람은 모두 쓰러졌다. 실로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
다. 장취산은 상대방의 정확한 정체를 몰랐기 때문에 출수를 엄
하게 하지는 않았다. 네 번째로 쓰러진 자는 대뜸 악을 쓰듯 소
리쳤다.
"이렇게 악랄한 수단을 전개하다니! 사내 대장부라면 정체를 밝
혀라!"
장취산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내가 만약 정말로 악락한 수단을 전개했다면, 너희들은 벌써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난 무당파의 장취산이다!"
"아니.....!"
상대방은 몹시 경악하는 것 같았다.
"네가 정말 무당파의 장오... 은구철획 장취산이란 말이냐? 혹
시 그의 이름을 도용하는 게 아니냐?"
장취산은 빙긋이 웃으며 허리에서 무기를 뽑았다. 왼손에는 난
은호투구, 오른손에는 빈철판관필! 이 두 가지 무기가 서로 맞부
딪치자 맑은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튕겼다. 그 순간, 장취산은
쓰러져 있는 네 사람이 모두 황색 승포를 입고 있는 것을 확인했
다. 그들은 모두 화상이었다. 네 명의 승인중에 둘은 그와 마주
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장취산은 두 승인의
얼굴이 피로 얼룩진 채 눈에서 원독(怨毒)의 불길이 뿜어지는 것
을 보고 의아해 하며 물었다.
"네 분 대사는 누구요?"
그러자 한 승인이 싸늘하게 소리쳤다.
"이 피맺힌 원한을 오늘 갚기는 들렸으니 일단 이곳을 떠나자!"
그의 외침에 따라 네 명의 승려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
다. 그 중 하나는 무척이나 심한 부상을 입은 듯 비틀거리며 몇
걸을 앞으로 달려나가다가 다시 쓰려졌다. 그러자 두 승인이 얼
른 되돌아와 그를 부축해 대청 밖으로 뛰쳐나갔다.
장취산은 얼른 소리쳤다.
"잠깐만! 피맺힌 원한이라니......?"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네 명의 승려는 담을 넘어 사라졌다.
장취산은 오늘 일이 심상치 않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아무리 생
각해도 뚜렷이 집히는 게 없었다. 어째서 네 명의 화상이 용문국
에 매복해 있다가 느닷없이 자기에게 기습을 전개한 것일까? 그
들은 피맺힌 원한 운운했는데, 그게 무슨 뜻일까?
'표국의 사람을 찾아내 물으면 모든 게 확연히 밝혀지겠지.'
장취산은 다시 소리높여 외쳤다.
"도총표두, 안에 있으면 대답하시오!"
그의 외침소리는 대청 안에 찌렁찌렁 울려퍼졌으나 아무도 대답
하는 자가 없었다.
'내가 두려워 모두 숨어버린 걸까? 아니면 화를 당할까봐 미리
달아난 걸까.....?'
장취산은 화석을 꺼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촛대에 불을 달겼
다. 그촛불을 들고 조심스레 대청 뒤쪽으로 항하던 장취산은 갑
자기 멈칫했다. 대청 뒤쪽에 한 여인이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몸이 빳빳하게 굳은 것으로 봐서 이미 숨이 끊어진 게 분명했다.
그는 여인의 시체를 바로 뉘이고 촛불로 얼굴을 살피는 순간 하
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 여인의 얼굴은 웃음을 활짝 띄고
있었다. 그러나 근육은 굳어져 있어 죽은 지는 오래 된 것 같았
다. 어둠 속에서 웃는 얼굴의 여자 시체를 보았으니 그가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가 몸을 일으켜 보니 얼마 떨어지지 않
은 곳에 또 한 구의 시체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하
인 차림의 노인으로서 역시 헤벌쪽 웃는 낯으로 죽어 있었다.
장취산은 매우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그는 왼손으로 호두구를
뽑아 쥐고 오른손으로는 촛불을 높이 받쳐든 채, 주위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 결과, 주위 곳곳에 수십 명의 시체가 널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넓은 용문표국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뜻밖에도 용문표국은 멸문지화를
당한 것이다.
장취산은 선뜻 뇌링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도대금의 말에 의
하면, 그 유사형의 호송을 의뢰한 자가 만약 차질이 생길 시에는
멸문지화를 각오하라고 공언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실로 악랄하군. 선뜻 이천 냥의 황금을 내놓아 삼사형의 호송
을 부탁한 것으로 미루어 상당한 친분이 있는 사이인 것 같은데,
삼사형이 어째서 그런 수단이 악랄한 자와 친분을 맺게 되었을
까?'
장취산으로선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는서쪽 대청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순가, 불빛 아래 두 황
의 승려가 담벽에 기대어 이빨을 드러낸 채 자기를 노려보며 징
그럽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장취산은 절로 모골이 송연해
지며 급히 뒤로 두 걸음 물러나 일갈을 토했다.
"누구냐?!"
그러나 두 승인은 말뚝처럼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장취산은
리로소 긴장이 풀리며 두 승려 역시 죽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그런데, 그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문득 뇌리에 떠오르
는 생각이 있어 가슴이 철렁했다.
'아뿔싸! 피맺힌 원한이라며.....'
달아난 네 명의 승인이 남긴 말을 되새겨보니, 자기를 흉수로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순간은 상대방의 내력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도대금이 소림의 속가제자인 것으로 미
루어 필시 용문표국이 도움을 청해 달려온 소림 제자들임에 들림
없었다.
그렇다면 유사형과 막사제는 어디로 간 것일까? 스승님은 그들
에게 용문표국의 가족을 지켜주라고 분부했는데, 어째서 이런 참
변을 당하게끔 방치했을까? 장취산은 곰곰 생각해 보았으나 뚜렷
한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소림 제자들이 필시 나를 찾아올 것이다. 하지
만 사필귀정이니 모든 게 명확히밝혀질 날이 있겠지. 소림과 무
당이 손을 잡으면 원흉을 찾아 내는 건 시간 문제다.'
장취산은 무엇보다도 이사형과 칠사제를 찾는 게 시급하다고 판
단하고는 곧 춧불을 끄고 담장 앞에 이르러 살짝 몸을 솟구쳤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난데없이 회오리 바람이 일며 어둠 속에서
기습을 가해 오는 자가 있었다.
"장취산, 목숨을 내놔라!"
장취산은 몸이 허공에 떠 있는 상태에서 피할 도리가 없었다.
적의 이 기습은 실로 맹렬하고도신속했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
다. 장취산은 왼손으로 적의 무기를 살짝 누르며 그 힘을 빌어
물찬 제비처럼 사뿐히 담장 위로 뛰어올랐다. 이 일초는 무(武)
자의 과결(戈訣)이었다. 만약 장취산이 새로이 이십사자신공을
배우지 않았다면, 상대방의 이 무서운 기습에서 요행을 바라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답장 위에 내려서는 순간 오른손에 이미 판
관필을 꺼내 쥐었다. 상대방은 그가 여유있게 기습을 피한것을
보자 의외인 듯 놀란 외침을 발했다.
"아니.....제법이군!"
장취산은 좌구우필(左鉤右筆)로 가슴을 호위한 채 아래를 내려
다보았다. 담장 아래 두 명의 승인은 제각기 굵은 선장(禪杖)을
들고 좌우로 갈라져 서 있었다. 좌측의 승인이 선장으로 땅을 내
리찍으며 소리쳤다.
"장취산, 무당칠협이라면 강호에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인데, 어
째서 사파의 무리들보다 더 수단이 악랄하느냐?"
장취산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대사는 불문곡직하고 담 구석에 숨어 기습을 가했으니, 그 행
위야말로 소인배의 짓거리가 아니겠소? 소림의 무학이 대단하다
는 소문은 들었는데, 이제보니 암수를 전개하는 데도 일가견이
있구료!"
그 승인은 노한 일성 "르 토하며 다짜고짜 담장 위로 뛰어오르
며 선장을 내둘렀다.
장취산은 상대방이 가까이 덮쳐오기도 전에 벌써 선장의 끝이
가슴을 향해 З쳐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곧 호두구를
펼쳐 선장의 예봉을 봉쇄하며 판관필을 질풍처럼 찍어냈다.
창!
봇끝이 선장을 찍는 순간, 승인은 손목에 진통을 느끼며 담장
위에 제대로 몸을 고정시키지도 못하고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장취산도 팔뚝이 얼얼해 오는 것을 느꼈다.
"두 분은 누군지, 법호라도 밝혀야 하지 않소!"
오른쪽에 있는 승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빈승은 원음(圓音)이며, 이쪽은 나의 사제 원업(圓業)이외다."
장취산은 호두구와 판관필의 예봉을 내려놓고 공수의 예를 취했
다.
"소림 원(圓)자 항렬의 두 대사시군요. 만나뵙게 되어 반갑소이
다. 한데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
원음은 숨을 몰아쉬며 심각하게 말했다.
"이번 일은 소림과 무당 문파간에 얽힌 일이니 항렬 낮은 빈승
으로선 뭐라고 확언할 수 없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묻고 싶소.
용문표국의 남녀 수십 명과 나의 두 사질이 모두 장오혀에 의해
목숨을잃었으니, 거기에 대해 책임을 어떻게 질건지 말해 보시
오!"
장취산은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용문표국이 불행을 당한 것에 대하여 나 역시 의아함을 금치
못하는 바이오. 대사는 어디에 근거를 두고 나더러 독수를 전개
했다고 단언을 하시는지요. 직접 목격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원음은 대답하기에 앞서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혜풍(蕙風), 네가 직접 장오협과 대질을 해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뒤쪽 으슥한 곳에서 네 명의 황의 승인
이 걸어나왔다. 바로 조금 전의 그 승려들이었다. 법명이 혜풍이
라는 승인은 몸을 숙이며 대답했다.
"사벡께 아뢰옵니다. 용문 뇬의 그 많은 무고한 목숨과 혜통(蕙
通), 혜광(蕙光) 두 사제는 모두 이..... 장가에게 독수를 당했
습니다!"
원음은 신중하게 물었다.
"너희들이 직접 보았느냐?"
역시 혜풍이 대답했다.
"우리들이 직접 이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적시에 도망치
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 변을 당했을 겁니다."
원음은 다시 한 번 확인을 하듯 정색을 하고 말했다.
"불문의 제자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더우기 이 일을 소림과
무당 문파간에 얽힌 일이니 절대 망언을 해서는 아니된다."
혜풍은 무릎을 꿇고 합장을 했다.
"부처님께 맹세를 합니다. 제자 혜풍의 말은 조금도 거짓이 없
는 사실입니다."
원음은 장취산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길게 숨을 들이켰다.
"네가 목격한 것을 자세히 예기해 보아라."
여기까지 들은 장취산은 담장 위에서 사뿐히 뛰어내렸다.
원업은 장취산이 혜풍을 해치려는 줄 알고 대뜸 선장을 펼쳐 왔
다. 장취산은 살짝 고개를 숙여 앞으로 미끄러지면서 이미 혜풍
의 등 뒤로 바싹 달라붙었다. 원업은 더 이상 공격을 취할 수 없
었다.
"어쩔 작정이오?"
장취산은 힘주어 말했다.
"내가 어떻게 표국의 사람들을 죽였다고 꾸며 대는지 자세히 들
어볼 생각이외다."
혜풍은 장취산이 충분히 살수를 전개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는 것을 알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원심(圓心)사숙께선 강북(江北)에서 도대금 사형의 구원을 청
하는 서찰을 받자, 곧 혜통과 혜광 두 사제를 시켜 밤세워 이곳
으로 달려오라고 했습니다. 그후 제자도 전갈을 받고 사제 셋과
함께 뒤따라 용문표국으로 달려왔습니다.혜광은 오늘 밤에 적이
습격을 해올지도 모르니 우리더러 동쪽 담벽아래 매복해 있으라
하고, 자기와 혜통은 후청(後廳)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원음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혜풍은 눈에서 분노의 불길을 뿜으며 말을 게속했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청 쪽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혜통의 처절한 비명이......
제자가 급히 달려가 보니 혜통은 이미 숨이 끊어진 채였고 이 장
가는....."
여기까지 말한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장취산에게 삿대질을 했
다.
"제자는 이 악적이 혜광사제를 벽으로 밀어붙여 죽이는 것을 똑
똑히 보았습니다. 제자는 이 악적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창 밖에 몸을 숨겼습니다. 이 악적은 곧장 뒷뜰로 달려나가
닥치는 대로 살인을 했고, 여덟 명의 표사가 달아나자 뒤쫓아가
일일이 지풍을 날려 죽였습니다. 그는 표국 안에 있는 모든 남녀
노소를 죽이고 나서 비로소 담장을 뛰어넘어 사라졌습니다."
이번에는 장취산이 직접 냉랭하게 물었다.
"그래서 나중에 어떻게 됐다는 거냐?"
혜풍은 분연하게 말했다.
"어떻게 돼는지 몰라서 묻느냐! 너는 곧바로 되돌아와 우리에게
출수했고, 스스로 장취산이라 이름을 밝히지 않았느냐?"
장취산은 기가 막혔다.
"내가 너희들에게 출수하고 이름을 밝힌 것은 사실이다. 하지
만, 그 이전에 일어난 살인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자,
똑똑히 보아라.....!"
이렇게 말하며 장취산은 화석을 밝혀 자신의 얼굴을 비쳤다.
"네가 본 것이 정말 이 얼굴이며 이러한 차림새였느냐?"
혜풍은 무섭게 그를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래, 바로 장포에 방건이 차림새였다. 맞아! 그 당시 왼손에
쥐고 있던 부채는 지금 등 뒤에 꽂고 있겠지?!"
장취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상대방이 대관절 무슨 억
하 심정으로 자기를 모함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화석을 높이
쳐들고 앞으로 바싹 다가가 소리쳤다.
"다시 한 번 말해 보아라! 정말 이 장취산이가 살인자란 말이
냐?"
순간, 혜풍의 눈에서 기이한 광채가 번뜩였다.
"아니... 네가... 네가..."
그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갑작스레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원음과 원업은 동시에 놀란 외침을 토하며 달려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러나 혜풍은 만면에 공포의 기색이 굳어진 채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원음은 싸늘하게 외쳤다.
"네가... 또 살수를...!"
이 순식간의 변화로 인해 원음과 원업은 놀라움과 분노가 엇갈
렸다. 더욱 놀란 것은 장취산이었다. 그로선 천만 뜻밖이었다.
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보니 뒤쪽 수목이 우거진 곳에 뭔가 어
른거리는 게 보였다. 장취산은 대뜸 소리쳤다.
"누구냐?!"
그는 지체없이 몸을 솟구쳤다. 수목이 우거진 곳에 매복이 있다
는 것은 알면서도 장취산은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어싸. 암기를
발출한 흉수를 잡지 못하면 영락없이 누명을 뒤집어쓰게 될 판이
었다.
그런데, 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순간, 두 자루의 선장이
좌우 양쪽에서 번개처럼 기습해 왔다. 동시에 원업의 싸늘한 일
갈이 터졌다.
"달아날 생각 말아라!"
장취산은 필과 구를 아래로 긁어내 도(刀)자결을 펼치며 사뿐히
담장 위에 오를 수 있었다. 수목이 우거진 곳을 다시 바라보았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원업은 괴성을 연발하며 선장을
펼쳐 담장 위로 오르려고 안간힘을 썼다. 장취산은 마음이 조급
했다.
"원흉을 쫓는 일이 시급하니 제발 방해하지 마시오!"
원음은 씩씩 숨을 뿜어내며 악을 썼다.
"감히... 내가 보는 앞에서 살인을 하고도 부인할 작정이냐?"
장취산은 계속 호두구를 펼쳐 원업이 담장 위로 올라오려는 것
을 제지했다.
원음이 다시 소리쳤다.
"장취산, 아무리 부인해도 소용없으니 어서 무기를 버리고 우리
와 함께 소림으로 가자!"
장취산은 짜증스럽고 화가 치밀었다.
"당신네들 때문에 흉수를 놓쳤소! 대관절 내가 왜 당신네들을
따라 소림으로 가야 한단 말이오!"
원음은 자못 위엄있게 말했다.
"본파 장문인께서 직접 결정을 내릴 것이다. 너는 본파 제자를
셋이나 죽였으니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장취산은 코웃음을 쳤다.
"소림 원자 항렬의 고소가 이렇게도 형펴없을 줄이야, 정말 실
망했소! 흉수가 달아난 것도 느끼지 못했소?"
원음은 막무가내였다.
"발뺌하려고 하지만 어림없다!"
장취산은 아무리 변명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좋소이다! 실력이 있으면 날 잡아가 보시오!"
이때 원업은 선장으로 땅을 찍으며 그 힘을 빌어 허공으로 치솟
아올랐다. 장취산도 덩달아 담장 위에서 몸을 솟구쳐 흡사 독수
리가 먹이를 나꿔채듯 덮쳐내렸다. 그의 경공술은 워음보다 한
수 위였다. 두 줄기의 그림자는 즉시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팍!
원업의 선장이 허공을 가르며 장취산의 하반신을 노렸고, 장취
산은 호두구로 원을 그리며 그의 선장 사이로 빗겨가 어깨를 적
중시켰다.
"윽!"
원업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뱉어지며 그대로 땅에 떨어져내렸
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선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도 장취산이 사정을 봐줬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
호두구를 약간만 위로 찍었더라면 원업은 목줄기에 구멍이 뚫려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원음이 황급히 외쳤다.
"원업사제, 괜찮겠나?"
원업은 성난 음성으로 그의 출수를 재촉했다.
"난 괜찮으니, 어서 출수하지 않고 뭘 꾸물댑니까?"
원음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선장을 휘둘러 공격을 전개했다.
원업은 성난 들소처럼 거칠었다. 그는 어깨의 상처를 동여맬 생
각도 않고 선장을 풍차처럼 휘둘러 원음과 더불어 협공을 펼쳤
다.
장취산은 이 두 승려의 힘이 대담하다는 것을 아록 있었다. 게
다가 그들이 무기로 사용하는 선장은 육중하여 정면대결을 벌이
면 불리했다. 하여, 그들이 담장 위로 뛰어오르지 못하도록 공격
보다 수비에 치중했다. 두 승려는 쉴새없이 맹공을 퍼 부었으나
좀처럼 기선을 잡지 못했다. 한편, 혜자 항렬의 승려 셋은 사숙
들이 사움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는 것을 보고 거들어 주고 싶었
으나, 어디서부터 끼어들어야 좋을지 몰랐다.
장취산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오늘은 원흉을 찾아 내는 게 중요하니 여기서 계속 이들과 시
간을 낭비할 수 없다.....'
그는 일단 이곳을 벗어날 결심을 하고 맑은 기합을 토하며 막
몸을 솟구치려는데, 난데없이 청천벼락 같은 기합이 들리며 등
뒤에서 한 갈래의 노도와 같은 힘줄기가 뻗쳐왔다. 그 바람에 장
취산은 황급히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켜 담장 안쪽으로 떨어져내
렸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몸집이 우람한 승려가 담장을 뛰어넘어 다
짜고짜 쌍장을 뻗어내 그의 호두구와 판관필을 나꿔채려 했다.
어둠 속이라 상대방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없었지만, 열 손가
락을 갚퀴처럼 구부려 맨손으로 무기를 나꿔채 오는 수법으로 보
아 소림파의 독특한 호조공(虎爪功)임에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
까, 적시에 원업의 외침이 들려왔다.
"원심(圓心)사형, 절대 놈을 놓치면 안 됩니다!"
장취산은 강호 출도 이래 적수다운 적수를 만난 적이 없었다.
게다가 한 달 전에 이십사자신공을 새로 터득해 무공이 더욱 높
은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는 소림 승려들의 공세가 대담히 위
맹스러운 것을 보자 은근히 호승심이 생겼다. 그는 즉시 호두구
와 판관필을 옆구리에 꽂고 소리쳤다.
"소림 고수 셋이 한꺼번에 덤벼도 이 장취산을 어떻게 하진 못
할 것이다!"
이 순간, 원심의 왼손이 ㉫쳐오는 것을 보고 질풍처럼 우장을
뻗어내 도중에서 손가락을 구부려 금나 수법으로 변화 시켰다.
그가 노린 것은 상대방의 손목이었다.
찍!
승포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원심의 소매가 그의 금나수법에
의해 한 귀퉁이가 찢겨나갔다. 원심은 그것을 개의치 않고 곧장
그의 어깨쭉지를 나꿔채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장취산이 왼발을
날려 그의 무릎을 정확하게 걷어찼다. 상대방이 틀림없이 그 자
리에 무릎을 꿇리라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빗나갔다.
원심의 하체는 뜻밖에도 무쇠처럼 단단했다. 무릎에 심한 일격
을 당했으면서도 단지 몸이 한 차례 비틀거렸을 뿐 쓰러지지 않
았다. 오히려 포효하며 잇따라 오른손을 뻗어냈다. 그와 동시에
원음과 원업의 선장이 옆구리와 무릎을 노리며 날아왔다. 원음은
심병을 앓고 있는지 숨소리가 거칠고 이따금 기침을 토했다. 그
러나 세 사람 중에 그의 무공이 가장 정확하게 전게하며 찍고 후
리고 베고 쓸어올리며 공수(攻守)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장취산은 이제야 비로소 호적수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우리 무당과 소림은 근래에 무림에서 똑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번이야말로 서로의 무학을 비교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
이다!'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적수 공권으로 세 고승을 상대하며 좌
충우돌, 오히려 갈수록 우위를 차지했다. 소림과 무당의 무공은
제각기 장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무당파에는 불가일세한 기재(奇
才) 장삼봉이 버티고 있는 반면, 소림은 천 여년의 전통을 바탕
으로 하고 있어 결코 무학의 차원을 무시할수는 없었다. 하지만
장취산의 현 무학으로 보아 무당의 일류고수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반면, 원심 등 삼승(三僧)은 비록 그런 대로 상승 무학을
지니긴 했지만 역시 소림의 이류(二流) 고수임에 불과했다.
장취산은 시간이 흐를수록 생룡활호(生龍活虎)로 변해 갔다. 불
현듯 오른손을 펼쳐내 용(龍)자결의 절초(絶招)로 원업의 선장을
나꿔채 살짝 끌어당기며 원음의 선장을 향해 맞부딪쳐 갔다.
차력타력(借力打力)!
평!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들리는 가운데, 원업과 원음은 모두
극심한 진통에 의해 엄지와 식지의 중간 부위가 찢어져 피가 흘
러내렸다. 원음과 원업의 엄청난 완력에다 장취산의 경력(經力)
까지 합쳤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원심은 소스라치게 놀라 장취산
이 그들에게 더 이상 공격을 전개하지 못하게끔 양팔을 넓게 펼
치며 덮쳐왔다.
장취산은 승부가 뚜렷하게 가려졌다고 생각되어 더 이상 이곳에
남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날렵하게 뒤로 몸을 솟구치
며 냉소를 날렸다.
"나를 소림사로 잡아가려면 무공을 몇 년 더 연마해야 가능할
것다!"
그는 즉시 신법을 전개했다.
원심은 대뜸 뒤를 쫓아가며 소리쳤다.
"게 서지 못하겠느냐!"
이미 원음과 원업도 추격해 왔다. 장취산은 심사가 뒤틀렸으나
더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계속 붙잡고 늘어진다 해
서 살수(殺手)를 전개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장취산은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려 질풍처럼 달려나갔다. 원심
등은 고래고래 소리치며 뒤쫓아왔으나, 장취산의 경공술을 도저
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장취산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날쫓아오기엔 어림도 없다!'
이때, 갑자기 등 뒤에서 원심과 원업의 짤막한 비명이 동시에
들려왔다.
"앗!"
그와 거의 동시에,
"윽!"
하는 원음의 나직한 신음도 터졌다.
모두들 갑자기 독사에게라도 물린 것만 같았다. 장취산은 흠칫
놀라며 얼른 고개를 돌려 보니 삼승은 제각기 손으로 눈을 가리
고 있었다. 눈에 암기를 맞은 듯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원
업의 거칠은 외침이 들려왔다.
"장가야, 이 독종아! 차라리 나의 왼쪽 눈마저 멀게 해봐라!"
장취산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누가 그들의 오른쪽 눈을 멀게 만든 모양인데 누구일까? 혹
시.....'
그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소리쳤다.
"칠제! 칠제!....."
무당칠협 중의 막내인 막성곡의 암기 수법이 가장 뛰어났다. 그
래서 장취산은 자기가 쫓기는 것을 보고 칠제가 숨어서 암기를
날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장취산은 주위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역시 아무도 발견
하지 못했다.
땋업은 한쪽 눈이 실명되자 더욱 성난 야수처럼 광포해져 목숨
을 도외시한 채 장취산과 생사 결단을 내려 했다. 그러나 원음이
얼른 그를 만류했다. 눈이 멀쩡한 상태에서도 셋이 장취산을 당
해내지 못했는데, 무슨 수로 그를 소림사로 데려갈 수 있단 말인
가? 오히려 더 큰 희생을 당하게 될 게 뻔했다.
"원업사제, 복수는 나중에 해도 늦진 않을 걸세. 설령 우리가
이대로 포기한다 해도 장문인과 두 분 사숙께서 가만히 있겠는
가?"
장취산은 삼승이 뒤쫓아오지 않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시 의혹에 잠겼다. 암암리에 암기를 발출한 자는 대관절 누구
일까? 그는 더 이상 호변에서 서성거릴 수가 없어 객점으로 돌아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약 십여 장 가량 달려나갔을 때, 호
변 한쪽에 갈대가 흔들리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바람 한 점 없
는 상태에서 갈대가 움직인다는 것은 사람이 숨어 있다는 증거였
다. 장취산이 가까이 다가가 누구냐고 물으려는데, 난데없이 갈
대숲에서 한 사람이 숫구쳐 오르며 다짜고짜 그의 머리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게 아닌가!
"이놈아, 너 죽고 나 죽자!"
장취산은 잽싸게 옆으로 미끄러지며 상대방의 손목을 걷어찼다.
기습자의 강도(鋼刀)가 손에서 벗어나 포물선을 그리며 호변으로
날아갔다. 장취산은 비로소 상대방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
다. 승포에 대머리, 역시 소림승이었다.
장취산은 대뜸 호통을 쳤다.
"이게 대관절 무슨 짓이냐?"
순간, 그는 갈대밭에 세 사람이 누워 있는 거을 발견했다. 그들
은 꼼짝 않고 누워 있어 죽었는지 아니면 중상을 입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장취산은 방금 자기에게 기습을 전개한 소림승이 무공이
극히 평범하다는 것을 알고 거리낌없이 앞으로 몇 걸음 더 내디
뎌 자세히 살펴보았다. 뜻밖에도 갈대밭에 누워 있는 자들은 용
문표국의 도총표두와 축,사 두 표두였다. 장취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총표두, 이게... 어떻게 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대금의 몸이 용수철에 튕겨지 듯 뛰
어올라 장취산의 멱살을 잡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악랄한 놈! 난 겨우 삼백냥의 황금을 남겼을 뿐인데, 이...
이... 복수를 전개하디니.....!"
"그게 무슨 소리요!?"
장취산은 놀라움보다 당황암이 앞섰다. 그가 상대방의 손을 뿌
리치려 했다. 순간, 그는 도대금의 눈가와 입가에서 선혈이 흘러
내리는 것을 발견했다. 주위가 비록 어두웠으나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니... 내상을 입었소?"
도대금은 그가 묻는 말에 대꾸하지 않고 왼쪽에 서 있는 소림승
에게 소리쳤다.
"사제, 똑똑히 보았나? 이놈이 바로 은구철필이라는 장취산이
다! 잔인무도한 살인마!..... 어서 달아나라! 어서.....!"
도대금은 갑작스레 장취산의 멱살을 힘껏 잡고는 얼굴을 향해
박치기를 해왔다. 같이 죽자는 심산이었다. 장취산은 황급히 쌍
장을 젖혀 그의 팔을 밀어냈다.
찍!
도대금은 그에게 밀려 뒤로 벌렁 나자빠졌고 장취산의 옷깃도
찢겨져 나갔다. 장취산은 비록 간담이 크지만 오늘 밤 거듭하여
해괴한일을 당하자 절로 가슴이 뛰었다. 가가 다시 도대금을 살
펴보았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장취산은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금은 이미 심한 내상을
입고 있었는데 자기가 밀어뜨린 것으로 인해 숨이 끊어진 것이었
다. 한쪽에 서 있던 소림승이 기절초풍하며 소리쳤다.
"네가... 네가... 표사형까지 죽이다니.....!"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달아났다. 장취산은 귀신에게 홀린 기분
이었다. 그는 고개를 몇 차례 세차게 흔들더니 사표두와 축표두
를 살펴보았다. 그들은 호수에 팔을 담근체 벌써 숨이 끊어져있
었다. 세 구의 시체를 쳐다보며 장취산은 무상함을 느꼈다. 그의
귓전에 도대금의 마지막 울부짖음이 다시들려오는 것 같았다.
----- 난 단지 삼백 냥의 황금을 남겼을 뿐인데.....-----
자기가 도대금에게 황금 이천 냥을 전부 재민들을 구제하는데
쓰리고 했지만 도대금은 삼배 냥을 남긴 모양이다. 장취산은 그
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설령 알았다 해도 일소에 부칠
뿐 절대 그 꼬투리를 잡아 도대금에게 살수를 전개하진 않았을
것이다. 장취산은 절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호수 한가
운데로부터 거문고를 뜯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을 뚫고 갑자기
들려온 금성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장취산이
얼른 고개를 돌려 보니, 얼마전에 표국 앞에서 보았던 그 젊은
문사가 뱃머리에 앉아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 장취산은 이것에서
더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아 막 떠나려는데, 홀연 금성이 끊이며
젊은 문사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노형께서 한밤중에 서호(西湖)의 야경을 감상할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다면, 이 배에 잠깐 머물다 가지 않겠소.....?"
그가 손을 살짝 휘두르자 배 후미에 엎드려 있던 사공이 벌떡
일어나 힘차게 노를 저었다. 작은 배는 순식간에 갈대밭 쪽으로
미끄러져 왔다. 장취산은 엉거주춤하며 내심생각을 굴렸다.
'저 자가 줄곧 호수에 있었다면 무엇을 보았을지도 모르니, 한
번 물어봐야겠다.'
생각을 굳힌 그는 배가 가까이 오자 서슴없이 뱃 "리로 사뿐히
몸을 날렸다. 서생은 몸을 일으켜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띄운 채
공수의 예를 취했다. 그리고는 정중히 자리를 권했다.
백사등롱의 불빛을 빌어 장취산은 이 서생의 손이 백설처럼 희
다는 것을 느꼈다. 다시 그의 얼굴을 보니 갸름한 턱에 초승달
같은 눈썹, 오똑한 콧날, 미소와 더불어 양쪽 보조개가 엷게 패
여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는 풍류공자인줄 알았는데, 막
상 가까이 대하고 보니 여반남장을 한 절세가인이었다.
장취산은 늠름한 사내 대장부지만 엄한 문규에 따르다 보니 여
인과 접촉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지금, 상대방이 묘령의 여인이
라는 것을 알고는 흠칫 놀라며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다음
생각을 굴릴 여유도 없이 곧장 육지로 몸을 솟구쳐 공수의 예를
갖추고 말했다.
"소생은 낭자가 남장을 한 사실을 몰랐소. 무례함이 있었다면
사과하겠소."
여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뒤이어 노젓는 소리가 들리며
편주가 천천히 호심으로 미끄러져 갔다. 아울러 여인은 금을 뜯
으며 노래를 했다.
"밤은 깊어 흥취가 사라지니, 내일 밤이 기다려지노라, 육보탑
(六寶塔) 아래 수양버들 세 그루, 일엽편주 띄워 임 기다려 볼까
하니, 임은 와주시려는지....."
배는 차츰 멀어져가고 노랫소리도 시나브로 어둠에 묻혔다. 장
취산은 제자리에 우뚝 서서 한동안 넋을 잃었다. 도광검영이 번
뜩이며 피비린내가 풍기는 상황에 이어 난데없이 춘풍명월과 같
이 부드러운 일을 겪게 되자, 장취산은 만감(萬感)에 사로잡혔
다. 콩알만하게 변한 벽사등롱이 호면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후에야 장취산은 상념을 떨 Т리고 객점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용문표국의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혈겁(大血劫)이
파다하게 퍼졌다. 장취산은 외모가 고상하여 비록 이 고장 사람
들에게는 낯선 얼굴이었지만 그를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그는
오전서부터 오후까지 줄곧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사형과 칠사제의
행방을 찾았으나 헛수고였다. 아무 데서도 무당칠협이 서로 연락
을 위할 때 사용하는 기호를 발견할수가 없었다.
신시(申時) 무렵이 되자, 그 여인의 노랫소리가 다시 귓전에 맴
돌았다. 그 노래 속에는 오늘 밤 육보탑 아래서 기다리겠다는 뜻
이 담겨져 있었다. 장취산은 그 여인의 모습을 뇌리에서 지워버
리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더욱 뚜렸이 떠올랐다. 그는 그 여인
을 만나야 할 이유를 스스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깎듯이 예의를 갖추면 그녀를 못 만날 이유도 없지.....그리고
그녀 외에는 어젯밤에 일어난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물어볼 사람
이 없으니.....'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그는 전당강변에 위치한 육보탑으로 가기
로 결심했다.
----- 제 1 권 4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1 권
제 5 장 신비(神秘)의 절세미녀(絶世美女)
전당강은 육보탑 아래 이르러 크게 휘어져 곧장 동쪽으로 흘렀
다. 이곳은 임안부의 성(城)과는 상당한 거리가 떨어졌다.
장취산은 비록 걸음이 빠르지만 육보탑 아래 이르렀을 때는 이
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탑 동쪽 세 그루의 수양버들이 나란히
늘어진 곳에 과연 배 한 척이 정박돼 있었다.
전당강에 띄워 있는 배들은 대부분 돛을 달았고, 서호의 유람선
보다 규모가 컸다. 그러나 장취산은 어젯밤에 보았던 그 벽사등
롱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웬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길게 숨을 들이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가까이 가보니 그
여인이 홀로 뱃머리에 앉아 있었다. 몸에 엷은 녹색 치마를 입고
있어 어제와 같은 남장이 아니었다. 장취산은 마음을 굳게 먹고
찾아왔지만, 막상 그녀가 여자 차림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
다시 망설여졌다.
이때, 여인의 꾀꼬리같이 고운 음성이 들려왔다.
"무릎에 턱을 괴고 뱃머리에 홀로 앉아, 오실 님을 기다리니,
미풍에 물결이 살랑, 이 내 마음 띄워볼까....."
장취산은 그녀의 마음을 엿보는 듯한 당혹감에 얼른 낭랑한 음
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생 장취산은 여쭤볼 일이 있어 이렇게 무례함을 무릅쓰고 찾
아왔소."
여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어서 배에 올라오세요."
장취산은 사뿐히 뱃머리로 뛰어내렸다.
여인은 스스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젯밤은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 달빛을 찾아볼 수 없었는데,
오늘은 달빛도 곱군요."
그녀의 음성은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
선을 하늘에 두고 장취산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장취산은 입술에 침을 바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낭자의 존성을 물어도 좋을지 모르겠군요?"
여인은 홀연 고개를 돌려 샛별처럼 맑은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
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장취산은 그녀의 눈빛과 접하자 감
전된 듯 갑자기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하늘에서 하범(下凡)한
선녀인 듯, 그녀의 아름다움에 눈이 부셨다. 장취산은 야릇한 감
정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자신을 읫기하며 크게 당황하고는,
황급히 강변으로 다시 뛰어올라 도망치듯 앞으로 달려갔다. 약
십여 장쯤 달려나가서야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아직도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는 자신의 당혹함을 책망하듯 고개를 몇 차례 세
차게 흔들었다.
'장취산아, 이 쑥맥 같은 장취산아! 넌 칠척장구의 사내 대장부
로서 거침없이 강호행도를 해오지 않았더냐?! 어찌 일개 젊은 낭
자 앞에 움츠러드느냐.....'
고개를 돌려 보니 여인을 태운 배가 물줄기를 따라 천천히 하류
쪽으로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장취산은 수면에 비친 벽사등롱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강뚝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
다. 한 사람은 강둑을 걸으며 한 사람은 배를 타고, 같은 속도로
하류 쪽을 향해 내려갔다. 소녀는 여전히 무릎을 끌어안은 채 하
늘에 걸려 있는 초생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동안 걷던 장취산도 절로 그녀의 눈길을 따라 하늘을 우러
러보았다. 때마침 동북 방향에서 시꺼먼 먹구름이 때를 지어 몰
려왔다. 하늘의 풍운(風雲)만큼 예측하기 어려운 게 없다는데,
거짓말처럼 먹구름이 몰려와 아내 달빛을 삼켜 버렸다. 한 차례
바람이 전당강을 훑고 지나가자 가는 빗방울이 떨어졌다. 강변은
확 트인 평야이므로 비를 피할 만한 곳이 없었다. 장취산은 착잡
한 심정에 사로잡혀 비를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비록 실비가
뿌려지고 있지만 그의 몸은 곧 축축하게 젖었다. 그런데 여인은
여전히 뱃머리에 비를 맞고 앉아 있었다.
장취산은 공연스레 무너져오는 안타까움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
쳤다.
"낭자, 어서 비를 피해 선창 안으로 들어가시오!"
그녀는 깜짝 놀란 듯 벌떡 일어나 장취산이 서 있는 쪽을 바라
보았다.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여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스
쳤다.
"당신은 비를 맞아도 되나요?"
그녀는 곧 선창 안으로 들어거더니 우산을 들고 나와 강뚝으로
던져 주었다. 장취산이 우산을 받아 펼쳐보니 우산 속에 한 푹의
산수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일곱 글자가 적혀 있었다.
----- 사풍세우불회귀(斜風細雨不回歸) -----
----- 찬바람 이슬비에 돌아가지 말지어다 -----
우산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은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그림은
장인(匠人)의 솜씨니만큼 강서(江西)의 도자기처럼 투박한 먼이
없지 않았다. 한데, 이 우산에 그러진 산수화는 심히 정교했고
일곱 글자 또한 규수의 손에 의해 씌여진 듯 청려탈속(淸麗脫俗)
하였다.
장취산은 우산의 서화를 보며 걷다가 작은 도랑에 발을 헛딛였
다. 보통 사람 같으면 영락없이 고꾸라졌을 텐데, 장취산은 변초
(變招)가 빨라 이내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라 물찬 제비처럼 사
뿐히 도랑을 뛰어넘었다. 순간, 배에서 갈채가 들려왔다.
"멋져요!"
장취산이 고개를 돌려보니 여인이 어느새 죽립(竹笠)을 쓰고 뱃
머리에 서 있었다. 비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능파선자(凌波仙子)를 연상케 했다.
여인이 다소곳이 물었다.
"우산의 서화가 장상공의 눈에 차는지 모르겠어요?"
장취산은 그림에 대해 관심이 없어 서예에 중점을 두고 말했다.
"이것은 위부인(緯夫人) 명희체(明姬體)의 서법인데, 글자체에
서 그윽한 국화 향기가 풍기는 것 같습니다."
여인은 그가 자기의 서체를 대번에 알아보자 내심 매우 기뻐했
다.
"그 일곱 자 중에 불(不)자가 가장 잘못 쓰여졌죠?"
장취산은 자시 응시하고 나서 고개를 내둘렀다.
"불자는 아주 자연스럽군요. 단지 함축이 부족한 게 옥에 티지
만 다른 여섯 자와 어울려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같으니,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한 느낌이 들게 하는군요."
"맞아요. 그 불자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지
만, 그 결점이 무엇인지 집어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상공의
말씀을 듣고 비로소 확연히 깨달았어요."
소녀는 배를 타고 장취산은 여전히 강물을 따라 걸으며 두 사람
은 서법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
덧 일 리 밖까지 내려갔다.
이 무렵 날은 더욱 어두워져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없었다. 여인은 갑자기 작별을 고했다.
"상공과의 대화에서 실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어요. 오늘 일
은 결코 잊지 못할 겨예요."
그녀가 손을 살짝 떨쳐 보이자 후미에 있던 사공이 돛을 올렸
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돛단배는 쏜살처럼 빨라졌다.
장취산은 차츰 멀어져 가는 돛단배를 바라보며 무엇을 잃은 듯
허전함에 사로잡혔다.
"저의 성은 은(殷)..... 나중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거예
요....."
장취산은 그녀의 성이 은(殷)이라는 것을 듣자 대뜸 뇌리에 떠
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날 도대금에게 삼사형을 호송해 달라고 청탁한 자가 은씨 성
을 가진 준수한 서생이었다는데 혹시 이 낭자가 남장한 게 아니
었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곧장 경공술을 전개해 쫓아갔다. 돛단배
의 속도가 빨랐지만 장취산은 곧 따라잡을 수가 있었다.
그는 낭랑한 음성을 외쳤다.
"은 낭자, 혹시 나의 삼사형 유대암을 알고 있소?"
그녀는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않았다. 장취산은 그
녀의 나직한 한숨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소리쳤다.
"난 지금 많은 의문을 갖고 있소. 낭자가 확실하게 대답을 해줬
으면 좋겠소!"
소녀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것을 꼭 물어야 하나요?"
"용문표국에 나의 삼사형을 호송해 달라고 청탁한 장본인이 바
로 낭자요? 그게 사실이라면 은덕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오."
"은은원원(恩恩怨怨).....그게 그렇게도 중요한가요?"
"나의 삼사형이 무당산 아래서 다시 독수를 당한 사실을 알고
있소?"
"그 일로 가슴이 아파요. 그리고 죄스럽기도 하고요."
두 사람이 일문일답하는 사이에 바람이 거세져 배의 속도가 갈
수록 빨라졌다. 장취산은 내력이 심후하여 시종 돛단배와 보조를
맞출 수 있었다.
전당강은 하류로 내려갈수록 강폭이 넓어졌다. 게다가 가늘게
뿌려지던 빗줄기도 어느덧 폭우로 변했다. 장취산은 단전의 진기
를 끌어올려 큰 소리로 물었다.
"어젯밤 용문표국의 멀문지화를 당했는데, 낭자는 혹시 누가 독
수를 전개했는지 알고 있소?"
여인은 아까부터 묻는 말에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도대금에게 미리 약속을 받은 게 있었어요....."
"도중에서 차질이 생기면 멸문지화를 각오하라고....."
"맞아요. 그들은 유대협을 보호하지 못했으니 그 약속한 댓가를
받은 거예요."
장취산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표국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모두..... 모두 낭자가.....!"
"모두 내가 죽인 거예요!"
장취산은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
꽃처럼 아름다운 낭자가 잔인무도한 살인 흉수라고는 도저히 믿
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잠시 망연자실해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 소림사의 화상들은....."
"역시 내가 죽인 거예요. 원래는 소림과 원한을 맺을 생각은 없
었어요. 하지만 그들이 먼저 악랄한 암기로 나에게 상처를 입혔
기 때문에 그 앙갚음을 한 것뿐이예요."
"한데..... 그들은 어째서 나를 흉수로 생각하는지....."
여인은 갑자기 까르르 웃었다.
"그것은 내가 일부러 꾸민 일이예요."
장취산은 다시 심한 충격을 받았다.
"낭자가 일부러 나에게 누명을 씌웠단 말이오?"
"그래요."
그녀의 태연한 대답에 장취산은 울화가 치밀었다.
"낭자는 나하고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소?"
여인은 더이상 대답을 하고 싶지 않은 듯 선창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장취산은 이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배는 강변에서 멀
리 떨어져 도저히 뛰어오를 수가 없었다. 장취산은 끓어오르는
분노로 인해 대뜸 한 그루의 단풍나무를 향해 장풍을 펼쳐냈다.
우지끈!
장취산은 굵은 나뭇가지 두 개를 꺾어 그 중 하나를 강물에 던
지더니 이내 몸을 솟구쳤다. 그는 강심에 떠 있는 나뭇가지를 살
짝 발끝으로 찍는 동시에 두 번째 나뭇가지를 던지며 재차 몸을
솟구쳤다. 이렇게 하여 뱃머리에 오를 수 있었다.
"낭자, 무슨 수로 날 함정에 빠뜨렸소?"
선창 안은 캄캄하니 조용하기만 했다. 장취산은 분노가 치민 상
태에서도 자제력을 잃지는 않았다. 그는 함부로 아녀자의 선창
안으로 뛰어들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엉거주춤
하고 있는데 선창 안에 촛불이 밝혀졌다. 이어 여인의 음성이 들
렸다.
"들어오세요."
장취산은 옷매무새를 바로 하며 선창 안으로 들어가자 이내 멍
해졌다. 선창 안에 앉아 있는 자는청색 장삼에 방건을 머리에
쓰고, 손에 부채를 쥔 젊은 서생이었다. 그녀는 삽시간에 남장으
로 갈아입은 것이다. 언뜻 보아 그녀의 남장한 모습은 장취산과
흡사했다. 장취산은 그녀가 무슨 방법으로 자기에게 누명을 씌웠
는지 다그쳤는데, 그녀의 차림새를 보니 절로 해답을 얻을 수 있
었다. 어슴프레한 곳에서는 누군들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착각하
기 십상일 것이다. 소림승 혜풍과 도대금이 한결같이 자기가 독
수를 전개한 원흉이라고 물고 늘어지는 이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여인은 맞은편 자리를 부채로 가리키며 자리를 권했다.
"장오협, 앉으세요."
그녀는 작은 앉은뱅이 탁상에 놓여 있는 찻잔에다 차를 따라 장
취산 앞으로 건네주며 말했다.
"귀한 손님이 찾아 주셨는데, 배 안에 술이 없으니 차로 대신하
는 수밖에 없군요."
그녀가 이렇게 다소곳이 차를 권하자 장취산은 끓어오르는 분노
를 차마 쏟아낼 수가 없었다.
"고맙소."
소녀는 그의 옷이 축축하게 젖은 것을 보자 부드럽게 말했다.
"배 안에 옷이 있어요. 비를 맞은 후엔 오한을 앓을 염려가 있
으니 후미로 가서 갈아입는 게 어때요?"
장취산은 고개를 내둘렀다.
"그럴 필요는 없소."
그는 곧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단전으로부터 한 갈래의 뜨
거운 기운이 피어올라 온몸으로 퍼졌다. 그러자 옷의 수분이 차
츰 증발되었다.
소녀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의 내공은 천하 으뜸이라는데, 내가 부질없이 장오협에게
옷을 갈아입으라는 청을 했군요."
장취산은 그녀의 말을 흘려보내며 물었다.
"낭자는 어느 문파인지 밝혀줄 수 있겠소?"
여인은 이 물음에 이내 시선을 선창 밖으로 돌리며 양미간에 우
수가 피어올랐다. 장취산은 그녀에게 말 못할 사연이 있다는 것
을 알고 더이상 문파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중요한 일부터 물었다.
"누가 나의 삼사형을 상하게 했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여인은 엉뚱한 말을 했다.
"무당칠협이 영준비범하다는 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신중을
기하는데는 좀 부족한 것 같아요....."
장취산은 그녀가 동문서답하며 자기를 앞에 앉혀 놓고 영준비범
을 운운하자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어쨌든 그녀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지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여인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별안간 소매를 걷어 붙여 야들야들한 팔을 드러냈다.
장취산은 당황하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의 귓전에 여인의 음
성이 들려왔다.
"이 암기를 아시겠어요?"
장취산은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비로소 그녀의 왼
팔에 작은 흑색 강표(鋼標) 세 개가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살결은 백설처럼 희지만, 암기를 맞은 부위는 먹물을 뿌
린 듯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강표의 꼬리 부분은 모두 매화 모
양으로 되어 있었다.
장취산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소림의 매화표(梅花標)가 아니니까? 어... 어째서 검은
색이지.....?"
"맞아요. 소림의매화표인데 독을 먹였어요."
장취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소림은 명문 정파로서 절대 암기에 독을 묻힐 리가 없소. 하지
만 이 매화표는 다른 문파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독문암기(獨
門暗器)이니..... 한데, 암기를 당한 지 얼마나 되었소? 서둘러
그 독을 제거해야 될 거요."
여인은 그가 염려하는 것을 지켜보며 눈동자에 야릇한 광채가
스쳤다.
"벌써 이십 일이 넘었어요. 독성을 한 곳에 응결시켜 당분간은
확산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강표를 뽑을 엄두를 내지 못하겠
어요. 강표가 뽑히면 독이 금방 전신으로 퍼질 것 같아서....."
"독표를 당한 지 이십 일이 넘도록 뽑지 않으면 나중에 완치가
된다 해도..... 흉터가 생길 우려가 있소."
여인은 이내 눈물을 글썽이며 울적한표정이 되었다.
"난 이미 모든 방법을 써보았어요. 어젯밤에 그 소림승의 몸도
뒤져 보았지만 해약을 찾아 내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이 팔을 못
쓰게 될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며 천천히 소매를 내렸다.
장취산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뜨거운 감정이 용솟음쳐 올랐다.
"은 낭자, 나를 믿을 수 있겠소? 소생은 비록 내력이 미천하지
만 낭자를 도와 그 독기를 밀어낼 자신이 있소."
여인은 보조개를 드러내며 생긋이 웃었다. 그녀는 내심 매우 좋
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미소를 거두고 조심스럽게 말했
다.
"물론 장오협을 믿을 수 있어요. 하지만 장오협은 나에 대해 많
은 의문을 갖고 있으니, 치료해 준 후에 혹시 후회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서는군요."
장취산은 단호하게 말했다.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구하는 것이 바로 우리 무림인의 본분이
거늘 내 어찌 후회할 수 있겠소?"
여인은 그의 다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하지만 이십 일도 견뎌 왔으니 서둘 필요는 없어요.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보세요. 그날 난 유삼협을 용문표국에
맡긴 후 바로 표차 행렬을 뒤따라갔어요. 도중에서 과연 몇몇 무
리들이 유삼협에게 손을 쓰려는 것을 내가 암중에서 모두 처리했
어요. 도대금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죠."
장취산은 얼른 공수의 예를 취했다.
"소생이 무당 제자를 대신해 낭자의 대은대덕에 감사를 드리겠
소."
여인의 음성이 갑자기 차갑게 변했다.
"고마와할 것 없어요. 잠시 후면 나를 원망하게 될 테니까요."
장취산은 그녀의 진의를 몰라 멀쑥해졌다.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도중에 나는 수시로 차림을 바꾸어 때로는 농부, 때로는 상인
으로 둔갑해 멀리서 표차 행렬을 따랐어요. 한데 무당산에 다 이
르러 불상사가 생기리라곤 정말 뜻밖이었어요."
장취산은 아랫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낭자는 혹시 그여섯 명의 흉수를 똑똑히 보았소? 도대금은 흐
리멍텅하여 그들의 내력을 전혀 설명하지 못했소."
여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비단 그들을 보았을 뿐 아니라 직접 싸우기까지 했어요. 그
러나 나 역시 흐리멍텅하여 그들의 내력을 알아내지 못했어요."
그녀는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그날 난 그 여섯 사람이 무당산 방향에서 내려오는 것을 멀리
서 지켜보았어요. 도대금이 그들을 무당육협으로 단정짓는 것도
들었죠. 난 그들이 도대금으로부터 유삼협을 인도받아 떠난 후에
야 갑자기 심상치 않은 생각이 들었어요. 무당칠협은 친형제 이
상으로 정이 두텁다고 들었는데, 그들은 유삼협이 중상을 입었다
는 말을 듣고서도 우르르 달려와 상세를 살피기는 커녕 오히려
몇몇은 좋아하는 눈치였던 것을 상기하고는 황급히 말을 몰아 뒤
쫓아갔어요."
"낭자는 세심하여 정확하게 짚었소."
"그들은 나하고 옥신각신하게 되었고, 급기야 싸움이 벌어졌어
요. 한데 그들 중에 서른 살 가량 된 빼빼 마른 자가 갑자기 왼
손을 떨치자 난 팔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몽롱한 상태에서 매
화표를 맞게 된 거예요. 그 빼빼 마른 자는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며 나를 사로잡으려 하기에 나는 은침(銀針) 삼 매를 날려 겨
우 달아날 수 있었어요."
장취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 매화표를 왼손으로 발출했다면..... 소림파 제자중에 그런
패류(敗流)가 있다는 게 납득이가지 않는군요. 그런데 왜....."
"무슨 말을 물으려는지 알아요. 왜 즉시 무당산으로 올라가 모
든 걸 설명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려는 거죠? 난 무당산에 오를 수
가 없는 입장이예요. 내가 직접 나설 수만 있다면, 왜 그렇게 번
거롭게 도대금에게 청탁을 했겠어요? 나는 속수무책이 되어 힘없
이 길을 가다가 당신이 도대금 등과 얘기를 나누는 걸 보았어요.
그리고 당신이 유삼협을 찾아 떠나는 것을 보고 일단은 마음이
놓였어요. 사실 그 당시 내가 당신의 뒤를 쫓아가 도우려는 생각
도 없지 않았지만, 실력이 모자라 별로도움이 도리 것 같지 않
았어요. 더군다나 난 급히 독을 제거하려는 생각에 곧장 동쪽으
로 향했어요. 그건 그렇고 유삼협은 나중에 어떻게 됐죠?"
장취산은 유대암이 당한 일을 얘기해 주었다. 여인은 장탄식을
하며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하늘의 도움을 받아 유삼협이 완쾌되길 진심으로 바라는 바예
요. 만약...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녀의 음성은 촉촉하게 젖어오며 제대로 말을잇지 못했다. 장
취산은 그녀의 진지한 태도에 감격했다.
"나의 삼사형을 그렇게도 생각해 주시니 정말 고맙소."
여인은 고개를 내두르며 하던 말을 계속했다.
"내가 강남으로 돌아와 알아본 결과, 이 매화표는 소림의 독문
암기로서 소림의 해약이 아니면 독성을 제거하기가 어렵다는 사
실을 알아냈어요. 임안부에는 용문표국을 제외하곤 소림파가 없
기 때문에 야밤을 틈타 표국 안으로 잠입해 해약을 빼앗아낼 생
각으로 들어갔어요. 그 그런데 해약 얘기를 비치기도 전에, 그들
은 어두운 곳에 사람을 매복시켰다가 불문곡직하고 나에게 독수
를 저개했던 거예요."
장취산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굴리는 듯 하더
니 불쑥 입을 열었다.
"낭자는 일부러 날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똑같은 차림을 한 모
양인데..... 그 이유가 무엇이오?"
여인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어 손톱을 만지작거
리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 그날 당신이 옷가게에서 새 옷과 방
건을 구해 갈아입은 것을 보니 너무... 너무 멋있어서 나도 따라
서 똑같은 차림을 한 거예요."
장취산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울화통이 터질 것 같기도 했다.
그녀 때문에 자기는 영락없이 소림 제자들에게 잔악무도한 흉수
로 낙인이 찍혔다. 장취산은감정이 폭발한 듯 자연히 언성을 높
였다.
"그건 그렇다 치고, 무엇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에게까지 살수를
전개했소? 그들은 낭자와 아무런 원한도 없을 텐데, 그렇게 악랄
한 수단을 쓰다니 너무 지나쳤다고 느껴지지 않소?!"
여인은 그가 언성을 높이자 처음에는 당황하는 것 같더니 곧 안
색이 차갑게 변하며 냉소를 날렸다.
"흥! 지금 날 훈계하는 건가요? 난 열 아홉 살이 되도록 살아오
면서 누구의 훈계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도 대자대비를
앞세우는 장오협인 줄은 미처 몰랐군요. 나 같이 수단이 악랄한
무리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을 테니 어서 떠나도록 하세요!"
장취산은 그녀가 축객령을 내리자 얼굴이 빨갛게 상기돼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막 선창 밖으로 걸음을 떼어놓다가 문득 그녀의 독상을 치
료해 주겠다고 한 약속이 떠올라 주춤했다.
"낭자, 소매를 걷으시오."
여인은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날 마치 독사나 전갈같이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런 사
람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아요."
장취산은 숨을 들이키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낭자, 치료를 계속 늦춘다면 독이 발작하여 어쩌면..... 어쩌
면..... 치료하기 어렵게 될 거요!"
그는 최악의 경우 팔을 잃게 된다는 말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
했다.
"목숨을 잃게 된다면 차라리 속이 시원하겠어요. 어쨌든 당신이
날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까요!"
장취산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소림파의 악인이 낭자에게 독표를 발출한 건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요!"
여인은 눈을 흘기며 암팡지게 말했다.
"만약 내가 당신의 삼사형을 불원천리 무당산까지 호송하지 않
았다면 그 여섯 명의 악적을 만날 리 있겠어요?! 그리고 그 여섯
사람이 당신의 삼사형을 가로채든 말든, 내가 만약 수수방관했다
면 독표를 당했겠어요? 더군다나 당신이 만약 한 발 일찍 달려와
나를 도와줬더라면, 내가 부상을 입었을 리가 있었겠어요?!"
맨 마지막 말은 억지였다. 그러나 다른 말은 일리가 없지 않았
다.
장취산은 공수의 예를 취했다.
"옳은 말이오. 소생이 그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낭자의 독상을
치료해 드리겠소!"
여인은 곁눈질로 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이젠 당신의 잘못을 시인하겠죠?"
장취산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대관절 무엇을 잘못했다는 거요?"
"당신은 나더러 수단이 악랄하다고 했잖아요! 그 말은 틀렸어
요. 그 소림의 화상들과 도대금의 졸개들은 죽어 마땅한 자들이
예요!"
장취산은 고개를 내둘렀다.
"낭자는 비록 팔에 독상을 입었지만 완치될 수 있소. 그리고 나
의 삼사형은 중상을 입었지만 아직 죽진 않았소. 설령 불행한 일
이 생긴다. 해도 흉수만 찾아내 해결해야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외다."
여인은 다시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흥! 내가 사람을 잘못 죽였다는 건가요? 이 매화표를 발출해
날 죽이려한 게 소림파의 소행이 아니란 말예요?!"
장취산은 진지하게 그녀를 설득했다.
"소림의 제자는 천하 도처에 산재해 있소. 낭자는 그 매화표를
맞았다고 해서 그들을 일일이 찾아가 모두 죽일 수는 없는 노릇
이 아니겠소?"
여인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말로서는 도저히 장취산을 당해
내지 못할 것 같자 갑자기 오른손을 번쩍 들어올려 매화표가 꽃
혀 있는 부위를 냅다 내리쳤다. 그 바람에 매화표가 살 속 깊이
박혀 상세가 더욱 심해졌다.
장취산은 그녀의 성깔리 이렇게 고약한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
다. 자신의성깔을 주체하지 못해 자해 행위를 서슴지 않는 여자
이니, 살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게 당연했다.
장취산이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어 다급하게
소리쳤다.
"낭자! 이러면....."
그녀의 소매가 벌써 검붉은 피로 물들었다. 그 동안 자신의 내
력으로 응결시켰던 독형이 터진 것이다. 이 상태로 방치하면 목
숨을 잃게 될 우려도 있었다. 장취산은 생각을 돌릴 겨를도 없이
대뜸 그녀의 왼팔을 나꿔잡아 소매를 찢으려 했다.
이때, 난데없이 등 뒤에서 호통이 들려왔다.
"어서 낭자의 몸에서 손을 떼지못하겠느냐!"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한 자루의 강도가 등을 향해 찍어 왔
다. 장취산은 상대방이 뱃사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화급을 다투는 상황인지라 자세히 설명할 여유가 없어, 냅다 뒤
로 발을 날려 사공을 선창 밖으로 걷어찼다.
여인이 다시 앙칼지게 소리쳤다.
"당신의 도움은 필요없어요. 내가 죽는 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죠!"
그녀는 악을 쓰고 소리치면서 잽싸게 손을 펼쳐냈다.
찰싹!
장취산은 순식간에 뺨을 얻어맞고 말았다. 장취산은 사전에 전
혀 방비가 없었다. 게다가 여인의출수가 전공석화처럼 빨랐기
때문에 어처구니없게도 뺨을 얻어맞은 것이다.
여인의 안색은 얼음장처럼 차가왔다.
"어서 떠나세요! 다시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
장취산은 난생 처음으로 당한 수모에 발끈했다.
"좋소! 낭자처럼 이렇게 방자하고 무례한 여자는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오!"
그는 성큼 뱃머리로 걸어나갔다. 여인의 냉소가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흥! 이제 내가 어떤 계집이라는 걸 알아챘죠!"
장취산은 널판지 하나를 강물에 던졌다. 그것을 발판삼아 육지
로 오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법을 막 전개하려는 순간, 다시
망설여졌다.
'내가 이대로 떠나면 그녀는 영락없이 목숨을 잃게 될 텐
데....."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짓누르며 다시 선창 안으로 들어갔다.
"낭자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니 어서 소매를 걷으시오.
목숨을 살리고 봐야 되잖겠소?"
여인은 입을 삐쭉거리며 토라진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내 목숨을 내가 버리겠다는데 당신이 웬 참견이죠?"
"낭장는 불원천리 나의 삼사형을 호송해 주었소. 그 은혜를 어
찌 갚지 않을 수 있겠소."
"흥! 이제 보니 단순히 그 보답을 하기 위해 날 도와주려는 것
뿐이군요. 만약 내가 당신의 삼사형을 호송해 주지 않았다면, 더
심한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거들떠보지 않겠군요."
장취산은 절로 멍해졌다.
"꼭 그렇지만은 않소."
여인은 갑자기 몸을 한 차례 오싹하더니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
다. 독성이 전신으로 퍼지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
"어서 소매를 걷으시오! 자신의 목숨을 갖고 부질없이 고집을
부려서야 되겠소!"
여인은 정말 고집불통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도리질을 했
다.
"싫어요! 당신이 잘못을 시인하기 전에는 도움을 받지 않겠어
요!"
암팡지게 토라진 그녀의 모습은 요염스럽기까지 했다.
장취산은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소. 내가 잘못했다고 합시다. 낭자는 사람을 잘못 죽인 게
아니오."
여인은 한술 더 떴다.
"안 돼요. <잘못했다고 합시다>가 뭐예요! 게다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잘못을 시인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그것만 봐도 당신은
진심으로 잘못을 시인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장취산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한시가 급했다. 그녀와 쓸데없는
입씨름을 벌일 여유가 없었다.
"좋소이다. 하늘을 두고 맹세컨대, 나 장취산은 진심으로 은...
은..."
그가 말끝을 멈칫거리자 여인이 얼른 이었다.
"은소소(殷素素)예요."
장취산은 하던 말을 미무리 지었다.
"은소소 낭자에게 잘못을 시인하는 바이오!"
은소소는 크게 기뻐하며 오뉴월의 장미꽃처럼 활짝 웃었다. 그
리고는 으스러지게 의자에 주저앉았다.
장취산은 얼른 품속에서 약병을 꺼내 천심해독단(天心解毒丹)
한 알을 쏟아내 그녀에게 복용시키고는 소매를 걷어 붙였다. 그
녀의 팔똑은 이미 거무죽죽하게 변색돼 있었다. 독이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증거였다. 장취산은 손을 뻗어 그녀의 팔뚝 양쪽을
움켜쥐었다.
"낭자, 느낌이 어떻소?"
은소소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가슴이 갑갑해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아요. 왜 좀더 일찍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죠?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그건 당신 책임이예
요!"
장취산은 그녀의 비위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부드럽게 말했다.
"아무 일 없을 테니 안심히시오. 몸의 힘을 풀고 마치 잠자는
것처럼 해보시오."
은소소는 다시 눈을 흘겼다.
"내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면 간단하잖아요?"
장취산은 속으로 투덜겨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생떼를 쓰니 장차 어느 남자가 색시로 데려갈
건지 몰라도 평생 고생께나 하겠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행여나 은소소가 자신의 마음을 읽을까 봐, 흡
사 죄를 짓다가 들킨 사람처럼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순간, 그
녀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창백하던 양볼이
도화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눈빛이 마주치자 약속이나
한 듯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은소소가 갑자기 속삭이듯 나직이 말했다.
"장가가(張歌歌), 저의 말이 지나쳤죠? 그리고 손찌검까지 했으
니..... 용서해 주시겠죠?"
그녀가 갑자기 칭호를 장가가로 바꾸자, 장취산은 더욱 가슴이
뛰었다. 그는 황급히 숨을 들이켜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혔다.
이어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려 양팔에 집결시켰다. 잠시 후 장취
산의 머리 위에서 백기(白氣)가 스물스물 피어올라 운막(雲幕)을
형성했다. 그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내력을 전부 발동시킨 것이
다.
은소소는 내심 감격했다. 지금이 중요한 순간임을 알고 행여나
그의 집중력이 분산될까 봐 눈을 꼭 감은 체 입을 열지 않았다.
홀연 팍! 미미한 소리가 들리며 팔에 꽃혀 있는 매화표 하나가
튕겨져 나왔다. 잇따라 한 갈래의 검붉은 피가 치솟았다. 그 검
붉은 피가 차츰 빨갛게 변해 가는 사이에 두 번째 매화표도 장취
산의 내력에 의해 뽑혀졌다.
바로 이때, 갑자기 강물 위에서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은 낭자, 여기에 있습니까? 주작단(朱雀壇)의 단주가 뵙고자
합니다."
장취산은 다소 이상하게 느껴졌으나 내력을 운용(運用)하는 긴
박한 상황인자라 신경을 쓰지 않았다. 상대방이 다시 소리를 치
자 돛단배에서 그 사공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곳에 엉뚱한 자가 은 낭자를 헤치려 하니, 상(常) 단주께서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상대방은 우악스럽게 소리쳤다.
"웬놈이냐? 만약 은 낭자의 솜털 하나만 상하게 해도 내놈은 살
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 외침소리는 마치 거종(巨鐘)과 같아 듣는 이의 고막을 진동
시켰다. 은소소는 눈을 떠 장취산에게 은은한 미소를 지어보였
다. 오해가 생긴 데 대하여 미안하다는 뜻을 표하는 것 같았다.
세번째 매화표는, 좀전에 은소소가 자해 행위를 하는 바람에 살
속 깊이 막혀 좀처럼 뽑혀지지 않았다.
이즈음, 노 젓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상대방의 배가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곧이어 돛단배가 한
차례 기우뚱 하더니 상대방이 이미 뱃머리에 올라섰다.
장취산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최후 수단을 쓰기로 결정했
다. 그 결정이 듯시 행동으로 옮겨져 그는 거침없이 은소소의 팔
에 입술을 대었다. 이빨로 마지막 매화표를 뽑아낼 심산이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한 사람이 선창 안으로 뛰쳐들어왔다. 그는
장취산이 애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걸 보자, 다짜고짜 등을
향해 일장을 내리찍으며 대갈했다.
"이놈!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장취산은 반격하거나 피할 입장이 못 되었다. 그는 한 모금의
진기를 끌어올리며 상대방의 일장을 감수했다.
펑!
웅후한 장풍이 정확하게 그의 등마루에 떨어졌다. 은 무당의 내
공 정요(精要)를 깊이 터득하여 몸을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차
력어력(借力御力)을 이용해 이빨로 독표를 뽑아냈다.그 순간 은
소소의 팔에서 검붉은 피화살이 치솟아 선창 뒷부분을 붉게 물들
였다. 장풍을 전개한 자는 잇따라 두 번째 공격을 펼치려다가 이
렇나 상황을 확인하자 황급히 도중에서 손을 멈추었다.
"은 낭자! 저... 괜찮습니까?"
그는 은소소의 팔에서 검붉은 피가 흐르는 것을 보는 순간, 자
신이 출수를 잘못했다는 걸 이내 알아차릴 정도로 강호의 견식이
넓었다. 그래서 가슴이 철렁했다. 자기의 일장을 맞은 자는 영락
없이 오장육뷰가 파열돼 목숨을 잃게 될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다. 그는 황급히 품속에서 내상약을 꺼내 장취산에게 복용시키려
했다. 그러나 장취산은 입에 물고 있는 독표를 뱉어내며 고개를
내돌렸다. 이어 은소소의 팔에서 붉은 피가 흐르는 것을 확인한
후에 비로소 손을 풀었다.
그는 좀전에 은소소의 팔에 입술을 갖다 댄 일로 인해 감히 그
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사나이에게 고개를 돌려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 대단한 장력이더군요."
사나이는 깜작 놀랐다.
"아니... 이게.....!"
그는 믿어지지 않는 듯 장취산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며 맥을 짚
어 보았다.
장취산은 그를 더욱 놀라게 하려고 선뜻 내력을 끌어올려 복막
(腹膜)을 위로 밀어붙이자 이내 심장의 박동이 멎어졌다. 사나이
는 그의 맥이 끊긴 것을 확인하자 놀라움이 더 컸다.
장취산은 이렇게 장난을 치고 나니 다소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
아 은소소가 건네주는 손수건으로 그녀의 상처난 곳을 동여매 주
고 나서 넌지시 말했다.
"독소가 이미 피와 함께 유출됐으니, 앞으로 며칠간 보통 해독
단만 복용해도 완쾌될 것이오."
은소소는 야릇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사의를 표했다.
"정말 고마와요."
이어 안색이 차갑게 번해 있는 사나이에게 말했다.
"상단주, 어서 무당파의 장오협께 인사를 드리세요."
사나이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정중히 몸을 꺽었다.
"무당칠협의 장오협이었군요. 어쩐지 내력이 그렇게 심후한가
했더니만..... 소인은 상금붕(常金鵬)이라고 합니다. 좀전에 경
솔했던 행동을 용서해 주십시오."
장취산은 답례를 하며 상금붕을 살펴보았다. 그의 나이는 오십
전후이며 얼굴과 손등에 근육이 울퉁불퉁하게 엉켜 있어 매우 거
친 느낌을 주었다. 상금붕은 장취산과 인사를 나누고 나서 곧이
어 은소소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 은소소는 거침없이 그의 절
을 받으며 단지 고개만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장취산은 이들이
어떤 관계인지 자뭇 궁금했으나 맞대놓고 물을 수가 없었다. 상
금붕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현무단(玄武壇)의 백(白)단주는 이미 해사파, 거경방(巨鯨幇),
그리고 신권문(神拳門)의 사람들과 내일 아침 전당강 강구에 위
치한 왕반산도(王盤山島)에서 만나 칼의 위력을 보여 주기로 약
속했습니다. 낭자께서는 몸이 불편하시니 소인이 직접 임안부로
모셔드리겠습니다. 왕반산도의 일은 백단주 혼자서도 충분히 처
리할 수 있을 겁니다."
은소소는 코웃음을 날렸다.
"해사파, 거경방, 신권문이라..... 음, 신권문의 장문인 과삼권
(過三拳)도 간다고 했나요?"
"듣자 하니 그는 열 두 명의 제자를 이끌고 갈 것이라 하더군
요."
"흥, 과삼권의 명성은 비록 많이 알려져 있지만 백단주의 적수
가 못 되죠! 그 외에 또 어느 고수들이 있나요?"
상금붕은 약간 엉거주춤하더니 입을 열었다.
"소문에 의하면 곤륜파(崑崙派)의 두 젊은 검객도 올 것이라 합
니다. 그들은 도... 도..."
그는 옆에 있는 장취산을 곁눈질로 한 번 훑으며 말끝을 흐렸
다.
은소소가 차가운 음성으로 거침없이 그의 말을 받았다.
"도룡보도의 위력을 직접 확인해 보겠다고 하던가요? 어쩌면 엉
뚱한 속셈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죠....."
장취산은 <도룡도>란 세 글자를 듣자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은소소의 말이 계속되었다.
"음..... 곤륜파의 제자라면 과소평가할 수 없죠. 내 팔의 부상
은 별것 아니니 함께 가겠어요. 필요에 따라 백단주를 도울 수도
있으니까요."
이어 그녀는 장취산에게 고개를 돌렸다.
"장오협, 우린 이만 헤어져야겠어요. 저는 상단주의 배를 타고
갈 테니 내 배를 타고 임안으로 돌아가세요. 당신은 무당파의 제
자이니 이번 일에 끼어들 필요가 없어요."
"나의 삼사형께서 부상을 당한 것은 도룡도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소?"
은소소는 대답을 회피했다.
"그 중간에는 복잡 미묘한 곡절이 얽혀 있어 저도 자세한 것을
말씀드릴 수 없어요. 나중에 직접 당사자에게 물어 보세요."
장취산은 그녀의 애매모호한 태도에서 더 이상 물어도 소용없다
는 걸 알았다.
'삼사형을 해친 자는 도룡보도를 노리고 있었을 가능성이 짙다.
상단주의 말을 들어 보면 도룡도가 이들의 수중에 있는 것 같은
데, 그 악적이 만약 소식을 들으면 필시 달려올 것이다.'
그는 곧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 낭자, 이 매화표를 발출한 자들이 혹시 왕반산도에 나타나
지 않을까요?"
은소소는 히죽 웃더니 그가 묻는 말엔 대답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꼭 나하고 함께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이어 장취산이 태도를 결정하기도 전에 상금붕에게 말했다.
"상단주가 앞장 서세요."
"네!"
상금붕은 공손히 대답하고 물러났다. 그는 흡사 하인이 주인을
대하듯 은소소에게 공손했다. 상금붕이 물러가자 은소소는 장취
산의 장포를 기리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헤진 데를 기워드릴 테니 어서 옷을 벗으세요."
살펴보니, 조금 전에 상금붕에게 장풍을 맞은 부위가 찢어져 있
었다. 장취산이얼른 사양했다.
"괜찮소!"
"제 바느질 솜씨가 못미더워선가요?"
"아니오."
장취산은 짤막하게 대꾸하고 나서 침묵을 지켰다.
어젯밤부터 그녀가 용문표국의 많은 무고한 생명을 죽인 일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자기는 본디 이런 잔악무도한 흉수를
거침없이 Ð치해야 하는데 지금은 한 배에 타고 있을 뿐 아니라
독상까지 치료해주지 않았던가! 게다가 팔뚝에 입술까지 갖다
댔으니..... 물론, 부득이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지만 장취산
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왕반산도의 일을 마치는 즉시 그녀
와 헤어져야 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은소소는 그의 표정을 읽으며 짚이는 게 있는지 냉소를 날렸다.
"도대금과 표국의 사람들, 그리고 두 소림승을 죽인 것도 나지
만 그 혜풍이란 화상을 죽인 것도 역시 나예요!"
장취산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낭자의 짓이라고 이미 예측하고 있었소. 한데, 어떤 방법으
로....."
"간단해요. 나는 갈대밭에서 가까이 떨어진 물 속에 숨어 당신
네들의 대화를 전부 엿들었어요. 그 혜풍은 나중에 당신의 얼굴
이 내 얼굴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막 입을 열려고 하기에, 입
속에다 은침(銀針)을 발출한 거예요."
"그렇게 되자 소림파는 더욱 나를 흉수로 단정하게 됐소! 은 낭
자, 정말 대단히 똑똑하고, 대단히 수단이 좋구료!"
그의 음성이 격분이 가득 차 있었다. 은소소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생긋이 웃었다.
"그건 장오협의 과찬이예요."
장취산은 도조히 참을 수 없어 버럭 소리쳤다.
"난 낭자와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왜 모함을 하는 거요?"
은소소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띄우는 여유를 보였다.
"당신을 모함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어요. 단지 무림의 양대 산
맥이라 일컬어지는 소림과 무당이 서로 맞붙게 되면 어느 쪽이
이길 건지 시험해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장취산은 아연실색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스스로 억제하고 경
각심을 높였다.
'이제 보니 나 한 사람을 겨냥한 게 아니라 더 큰 음모가 도사
리고 있었군. 정말 그녀가 꾸민 대로 소림과 무당이 정면대결을
하게 된다면, 필시 양패구상되어 무림의 일대겁난(一大劫亂)을
불러 일으킬 텐데.....'
은소소는 부채를 흔들거리며 여유만만했다.
"장오협, 당신 부채에도 서화가 있을 텐데 좀 보여주시겠어요?"
장취산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앞쪽에서 상금붕의 그 카랑카
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거경방의 배가 아니오? 어느 분이 배에 있소이까?"
상대방의 대꾸가 강의 우측에서 들려왔다.
"거경방의 소방주께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왕반산도로 가는 중
이외다!"
상금붕이 다시 소리쳤다.
"천응교(天應敎) 은 낭자와 주작단 단주가 이곳에 있으니 배를
뒤쪽으로 돌려줬으면 고맙겠소."
상대방의 음성이 거칠게 변했다.
"만약 귀공의 교주라면 당연히 양보하겠지만, 다른 사람에게까
지 그런 예우를 베풀고 싶지 않소이다."
장취산은 이내 생각을 굴렸다.
'천응교? 뭐하는 사교(邪敎)지? 한 번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
는데 아마 최근에 생겨난 방파인 모양이군. 우린 강남에서 활동
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기도 할 거야..... 거경방은 전에도
들은 적이 있지만 가히 좋은 평을 받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는 선창 문을 밀어 밖을 내다보았다. 과연 강줄기 우측에 거
대한 배가 보였다. 이 배의 머리 부분은 고래 모양을 하고 있으
며, 수십 자루의 칼을 가지런히 세워 고래의 이빨을 연상케 했
다. 그리고 후미가 고래 꼬리처럼 생긴 것이 특징이었다. 이 거
경선(巨鯨船)은 상금붕이 몰고 있는 배보다 길고 돛대도 훨씬 커
속도가 한결 빠른 것 같았다. 상금붕은 뱃머리에 서서 소리쳤다.
"맥(麥)소방주, 은 낭자가 이곳에 있으니 그녀의 체면을 생각해
줘야 되잖겠소?"
거경선 선창 안에서 이내 황의 청년이 뛰쳐나와 냉소를 날렸다.
"육지에서는 당신네들 천응방이 엄지손가락이지만, 물에서는 우
리 거경방을 꼽아야 하오. 그런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뱃길마저
천응방에게 양보해야 한단 말이오?!"
장취산은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강면이 이렇게 넓어 수백 척의 배도 한꺼번에 통과할 수 있을
텐데, 왜 한사코 길을 비키라고 고집하는지..... 천응방도 너무
경우가 없군."
이때 거경선에 또 하나의 돛대가 올려졌다. 자연히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삽시간에 쌍방의 거리가 멀어져 상금붕의 배가 도저히
쫓아갈 수 없게 되었다. 상금붕은 콧방귀를 날리더니 멀리 미끄
러져가는 배를 향해 소리쳤다.
"거경방..... 도룡도..... 그리고 도룡도가.....!"
바람이 거세고 쌍방의 간격이 멀리 떨어져 무슨 말인가 자세히
들리지 않았다. 거경방의 소방주는단지 도룡도라는 말만 어렴풋
이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어
얼른 부하들을 시켜 배를 가까이 하라고 했다. 상금붕의 배는 곧
거경선을 쫓아올 수 있었다. 거경방의 소방주는 거리가 가까와지
자 소리 높여 물었다.
"상단주, 방금 뭐라고 했소이까?"
상금붕은 손짓을 해가며 외쳤다.
"맥 소방주...! 우리 현무단의 백단주가... 그 도룡도는... 그
러니까... 바로..."
장취산은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상금붕의 말이 중간에서 토막토
막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도 역시 무슨 말인지 한 마디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이 사이에 거경선과 상금붕의 배는 더욱 가까와졌다. 상금붕이
갑자기 육 뻗한 닻을 지어 냅다 거경선을 향해 던졌다. ㅊ에 연결
된 쇠사슬에서 요란한 금속성이 들리며 곧이어 처절한 비명이 터
졌다. 상금붕이 던진 쇠닻에 거경선의 수수(水手)들이 크게 다쳤
다.
맥 소방주가 깜작 놀라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상금붕은 아무 대꾸없이 또 하나의 육중한 쇠닻을 거경선으로
던졌다.
"으악!"
이번에는 한 수수의 머리 위에 쇠닻이 떨어져 두개골이 박살나
며 그 자리에서 숨졌다.
상금붕은 두 개의 쇠닻을 연거푸 던져 거경선의 수수 셋을 살상
기키고, 두 척의 배를 한꺼번에 묶어놓게 되었다. 맥 소방주는
즉시 뱃머리로 달려가 갑판에 꽃힌 쇠닻을 뽑으려 했다. 순간 상
금붕의 오른손이 떨쳐짐에 따라 사슬에 연결된 커다란 수작 덩어
리가 거경선으로 날아갔다.
펑!
그 커다란 수박 덩어리가 정확히 거경선 돛대에 적중되었다. 장
취산은 비로소 그 커다란 수박이 상금붕의 무기라는 사실을 알았
다. 순전히 강철로 만든 그것은 짙은 녹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그려 있어 언뜻 보아 영락없는 수박이었다. 그 쇠수박은 모두 한
쌍으로서 사슬로 연결되어 있어 유성추(流星錘)와도 같았다. 단
지 유성추보다 무게가 훨씬 무거워 최소한 쇠수박 하나에 오십
근이 넘어갈 것 같았다. 놀랄만한 팔힘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그
무기를 사용할 수 없었다.
상금붕이 두 개의 쇠수박을 번갈아 던지며 거경선의 돛대를 강
타하자 곧 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리며 그 굵은 돛대가 두 동강이
로 부러졌다. 거경선의 사람들은 자지러지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
다.
상금붕은 이번에는 두 개의 쇠수박을 동시에 날려 뒤쪽 돛대를
강타했다. 후미의 돛대는 약해 단 일격에 박살이 났다. 이때, 쌍
방의 간격은 이 장 남짓에 불과했다. 맥 소방주는 두 개의 돛대
가 부러지는 것을 빤히 지켜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목청을 높여 욕을 퍼붓는 게 고작이었다.
상금붕은 한바탕 위력을 괴사하고 나서 싸늘하게 소리쳤다.
"천응교가 이곳에 있는 한 물에서도 너의 거경방이 멋대로 행동
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오른팔을 떨치자 쇠수박이 다시 예리한 파공음을 대동한
채 날아갔다. 이번에 그가 노린 것은 뱃전이었다.
꽝!
뱃전 한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강물이 용솟음쳐 들어갔다. 수
수들은 다시 소리를 지르며 혼란을 빚었다.
맥 소방주는 분수아미자(分水峨眉刺)를 뽑아 움켜쥐고는 발끝으
로 살짝 갑판을 찍자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라 곧장 상금붕의 뱃
머리로 덮쳐갔다. 상금붕은 그의 몸이 가장 높이 치솟아 오른 순
간에 왼손의 쇠수박을 정면으로 날렸다. 이 일격은 실로 악랄했
다. 쇠수박이 날아왔을 즈음 맥 소방주의 몸은 떨어지는 순간이
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허공에서 진기를 끌어올려 신법을 변화
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내심아뿔싸를 토하며 한 쌍의
아미자로 쇠수박을 맞이했다. 그는 본디 아미자로 쇠수박을 찍어
그 힘을 빌려 신법을 다시 구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미
자가 쇠수박에 닿는 순간 엄청난 반탄지력에 가슴팍이 빠개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순간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뒤로 밀려
쿵하고 거경선 갑판위에 떨어졌다.
상금붕이 쉬지 않고 쌍과(雙瓜)를 떨쳐내자 삽시간에 대여 섯
군데나 큰 구멍이 뚫렸다. 이어 닻줄을 힘껏 끌어당기자 우지끈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거경선의 갑판이 갈라지기 시작했
다. 천응교의 수수들은 상금붕의 분부가 떨어지기도 전에 닻을
올려 앞을 향해 배를 전속력으로 몰았다.
장취산은 상금붕이 거경선을 격파시킨 위세를 직접 지켜보며 내
심 흠칫했다. 만약 스승님으로부터 차력어력지법(借力御力之法)
을 배우지 않았다면, 그의 일장을 맞아 벌써 등골이 부러졌을 것
이다. 상금붕은 비단 무공만 뛰어날 뿐 아니라 심계가 깊고 수단
이 악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취산이 은소소를 살펴보니, 그녀는 이와 유사한 일을 많이 겪
어 대수롭지 않은 듯 그저 태연자약했다. 이때, 천둥치는 듯한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전당강의 야조(夜潮)가 밀어 닥칠 시
간이 된 모양이다. 거경방의 수수들은 비록 모두 헤엄 솜씨까 뛰
어 났지만, 지금은 강과 바다가 이어지는 지점에 이르러 강변의
폭이 수십리로 넓어졌다. 게다가 야조가 밀려오자 모두들 살려달
라고 소리쳤다.
상금붕과 은소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동쪽으로 배를 몰았
다. 장취산이 뒤쪽을 바라보니 그 거경선은 거의 절반 가량이 침
몰되어, 이제 곧 조수가 밀려오면 영락없이 박살나고 말 것이었
다. 그의 귓전에는 살려달라는 처절한 아비규환이 계속 들려왔
다. 실로 안타까왔다. 그러나 은소소와 상금붕은 모두 악랄한 무
리들이라 도와주라고 청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입술을 굳게
다문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소소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빙긋이 웃더니 이내 소리 높여 외
쳤다.
"상단주! 우리의 귀빈이신 장오협께서 대자비를 베풀길 원하시
니, 어서 거경선의 녀석들을 구해 주세요!"
장취산으로선 실로 뜻밖이었다.
앞쪽에서 상금붕의 대답이 들려왔다.
"귀빈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그는 뱃머리를 돌리게 하여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곧이어 상
금붕의 외침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거경방의 애들은 잘 들어라! 무당파의 장오협께서 너희들의 목
숨을 구해 주라는 분부가 계셨다. 살고 싶으면 어서 헤엄쳐 오
라!"
거경방의 부하들은 즉시 물살을 따라 하류로 헤엄쳐 왔다. 상금
붕도 배를 역류로 하여 밀고 올라가 조수 속에 묻혀 있는 맥 소
방주를 비롯해 이십여 명을 구해 주었다. 하지만 팔 구 명은 어
쩔 수 없이 거센 조수에 묻혀 익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장취산은 마치 무거운 짐을 덜어놓은 기분이었다.
"낭자, 고맙소."
은소소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거경방은 살인을 일삼는 무리들이예요. 오늘 살아난 녀석치고
손에 피비린내를 묻히지 않은 자가 없어요. 그런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들을 구해 줬죠?"
장취산은 망연자실하며 대답할 말을 잃었다. 거경방은 수상(水
上) 사대 악방 중의 하나로서, 그 악명이 드높다는 것을 장취산
도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따금한 맛을 보여 주어도 부족할 텐데, 오늘 오히려 그들
을 구해 준 것이다.
은소소는 곁눈질로 그의 표정을 읽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흥! 만약 그들을 구해 주지 않았다면 장오협께선 속으로 또 욕
하셨겠죠? <젊은 계집이 독사처럼 악랄하군. 애당초 독상을 치료
해 주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하고 투덜거리며 후회 막급했
겠죠?!"
그녀는 족집게처럼 장취산의 마음을 꿰뚫어보았다.
장취산은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낭자와 입씨름을 벌이고 싶진 않소. 저들을 구한 것은 낭자 스
스로 공덕을 쌓은 것이니,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소."
이때 천둥치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동시에 장취산과 은소소
를 태운 배가 파도에 실려 허공으로 높이 떠올랐다. 장취산이 창
밖을 보니 수십 길이 되는 거센 파도가 온 천지를 집어삼킬 듯
밀어닥치고 있었다. 거경방의 사람들을 배에 태우지 않았다면 지
금쯤 모두 물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은소소는 뒤편 선창으로 들어가 잠시 후 여장으로 갈아입고 나
왔다. 그녀는 장취산에게 자포를 벗으라는 손짓을 했다. 장취산
은 더 이상 거절하기도 쑥스러워 장포를 벗어 주었다. 은소소가
헤진 데를 기워 줄 것으로만 생각했다. 한데 뜻밖에도 그녀가 조
금 전에 입었던 남장을 던져 주며 갈아입으라고 하느 게 아닌가!
장취산은 어쩔 수 없이 은소소의 남장으로 갈아입었다. 장취산
은 그녀보다 몸집이 훨씬 컸지만 장포가 워낙 헐렁하여 벌로 불
편함이없었다. 장취산은 한 갈래의 담담한 유향(幽香)을 느끼며
가슴에 야릇한 파문이 일었다.
그는 감히 은소소에게 시선을 주지 못하고 멀쑥하니 앉아, 일부
러 선창 벽판에 있는 그림을 감상하는 척했다. 그러나 가슴 속에
거센 회오리가 일어 도무지 그림이 뇌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은
소소가 지금 어떠한 표정, 어떠한 생각으로 자기를 쳐다보고 있
는지 알 수 없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때 갑자기 큰 파도가
밀려와 배가 기우뚱하더니 선창 안에 밝혀놓은 촛불이 꺼졌다.
장취산으 더욱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젊은 남녀가 어두운 선창 안에 단 둘이 앉아 있으면 은낭자의
청명(淸名)에 누를 끼칠 수도 있지.....'
장취산은 곧 선창 문을 밀고 후미로 나가 사공이 익숙한 솜씨로
노를 젓는 것을 지켜보았다. 파도의 성난 포효가 뱃전에 부서졌
다. 하지만 그 거센 파도도 그의 상념을 지워비릴 수 없었다.
반 시진 남짓 지났을까, 위로 용솟음쳐 밀려오던 조수도 이젠
바다 쪽을 향해 되돌아가며 물살이 잔잔해졌다. 순풍의 돛단배는
물살 따라 쏜살같이 미끄러져 갔다.
동녘 하늘에 동이 틀 무렵, 배는 왕반산도에 접근했다. 왕반산
도는 전당강이 시작되는 동해(東海)에 위치한 황량한 작은 섬이
었다. 섬에는 깎아지른 듯한 기암산석(奇岩山石)이 군데군데 솟
아 있을 뿐 사람이 살지는 않았다. 두 척의 배가 섬 남쪽으로 접
근해 가자 섬에서 호각소리가 길게 여운을 끌며 들려왔다. 이어
연안에 두 사람이 제각기 거대한 깃발을 흔들어 신호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배가 차츰 육지와 가까와질수록 깃발마다 거대한 독수리가 수놓
아져 있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날개를 활짝 펼친 독수리
는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아 살아서 움직이듯 위풍당당했다.
두 깃발 사이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곧 그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현무단 백구수(白龜壽)는 은 낭자께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의 외침소리는 도도한 물결인 양 허공에 메아리지면서 뚜렷하
게 들려왔다. 심후한 내력이 담긴 음성이었다. 삽시간에 배가 연
안에 닿았다. 백구수가 직접 널을 배에 연결시켰다.
은소소는 장취산을 앞장세워 연안에 발을 딛자 곧 백구수를 소
개 시켰다. 백구수는 은소소가 장취산을 대하는 정중한 태도에서
이미 감을 잡은 게 있었다. 이어 그가 무당칠협 중에 장오협이라
는 것을 듣자 안색이 약간 변했다.
"무당칠협의 대명을 일찌기 전해듣고 흠모해 왔는데, 오늘 이렇
게 만나보게 되어 실로 더없는 영광이외다."
장취산도 몇 마디 겸손의 말을 늘어놓았다.
한쪽에 서 있던 은소소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그들 사이에 기
어들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형식적으로 늘어놓지 말고 속 시원히 진심
을 털언 으세요. 한 사람은 속으로 <아뿔싸! 무당파의 사람도
왔구나! 도룡보도를 빼앗으려는 고수가 또 한 명 들어난 셈이
군.> 하고 중얼거렸을 거고, 또 한 사람은 <너희들같은 사파의
인물과 친분을 맺고 싶진 않다!>하고 내심 부르짖었을 게 아니겠
어요? 그러니 이제부터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솔직하게 털어
놓으세요!"
백구수는 호탕하게 웃었다. 장취산도 얼른 정색을 하고 말했다.
"백단주께서 격해전음(隔海傳音)을 전개한 심후한 내공에 대해
진심으로 탄복하는 바이오. 그리고 소생은 단지 은 낭자를 모시
고 구경만 하러 왔을 뿐 도룡도에 전혀 뜻이 없다는 걸 미리 밝
혀두는 바입니다."
은소소는 그의 이러한 말을 듣자 백합처럼 활짝 웃었다. 매우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백구수는 은소소의 차가운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지
껏 누구를 안중에 둔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장취산에게만은
태도가 판이하게 달랐다. 장취산이 그녀의 마음속에 상당한 비중
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내 눈치챌 수 있었다. 게다가 장취산
이 자기의 내공을 칭찬해 주고 도룡도를 탐할 뜻이 없다는 걸 밝
히자 경계심을 완전히 풀었다.
"은 낭자, 해사파와 거경방, 신권문의 조무라기들이 벌써 당도
해 있습니다. 그리고 곤륜파의 두 젊은 검객도 와 있는데, 어찌
나 건방을 떠는지 눈꼴이 사나와 못 봐줄 지경이오. 우리 장오협
은 이렇게도 의젓하고 겸허한데..... 그들과 비교하면 정말 하늘
과 땅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 뒤에서 차가운 외침이 들려왔다.
"등 뒤에서 함부로 남을 모함해도 되는 겁니까?!"
이 외침과 함께 암석 되에서 두사람이 걸어나왔다. 그들은 모두
청색 장포를 입고 등에 비스듬히 장검을 메고 있었다. 나이는 이
십 대 후반으로 보이며, 눈동자를 날카롭게 굴리는 것으로 미루
어 성깔이 꽤나 있을 것 같았다.
백구수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자, 이리 오시오. 내가 소개해 줄
테니까....."
곤륜파의 두 젊은 검객은 원래 한바탕 성질을 부릴 생각이었는
데, 불현듯 은솟의 빼어난 미모를 접하자 입이 딱 벌어지며 넋을
빼앗겼다. 한 사람은 아예 주위의 이목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
의 얼굴에 시선을 못박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곁눈질로 그녀를 훔쳐보았다.
백구수는 은소소를 넋 잃고 쳐다보는 자를 기리키며,
"이쪽은 고칙성(高則成) 대협이고....." 하고 소개하더니 다시
그의 동료를 가리켰다.
"이쪽은 장도(蔣濤)라는 대검객이오. 두 분은 모두 곤륜파의 무
학 고수들로서 서역(西域)에 쟁쟁한 명성을 떨쳐온 걸로 믿어지
오. 이번에 무처럼 중원으로 들어왔으니, 틀림없이 곤륜의 비장
한 무학을 우리에게 보여 그 대명(大名)을 중원 천지에까지 드날
리게 될 것이오."
그의 이러한 말은 비고는 의미가 다분히 풍겼다.
장취산은 곤륜 제자들이 설령 당장 무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말로써라도 반박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언중
유골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그저 홍야항야 하며고개를 끄덕일 뿐
이었다. 이상하다 느껴져 다시 그들의 표정을 살펴보자,비로소
납득이 가며 내심 웃음을 금치 못했다.
'곤륜파는 천하에 이름이 알려졌고 특히 검술에 일가견을 지녔
다고 들었는데, 문중 제자가 이렇게 실 없는 행동을 할 줄이
야....."
장취산은 내심 혀를 끌끌 내찼다. 백구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쪽은 무당파의 장취산 장상공이고, 이쪽은 은소소 은낭자,
이 분은 본교의 상금붕 상단주요."
그는 세 사람을 극히 간략하게 소개했다. 심지어 장취산을 장상
공으로 칭하며 장오협이란 보다 정확한 명칭도 생갹해 버렸다.
그것은 미치 장취산을 자기네 사람에 포함시켜 소개한 느낌마저
주었다. 은소소는 거기에 맞장구라도 치겠다는 듯이 장취산에게
추파를 던지며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띄었다.
고칙성은 은소소가 장취산에게 친근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자,
영문을 알 수 없는 노화가 치밀어 장취산을 한 차례 무섭게 노려
보았다. 이어 장도에게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
"장사제, 우리가 서역에 있을 때 무당파가 중원 무림에서는 그
래도 정파에 속한다고 들었는데....."
장도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나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죠."
고칙성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런데,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맞군."
"아, 그래요? 하기야 강호의 소문은 십중팔구가 믿을 만한 게
못 되죠. 한데, 무당파가 어찌됐다는 겁니까?"
"명문 정파의 제자라면 어째서 사파의 인물과 어울려 다니겠는
가? 스스로 타락했다면 모르지만....."
두 사람은 한 마디씩 주거니 받거니 장단을 맞추며 장취산에게
화살을 겨냥했다. 그들은 은소소도 천응교의 인물이라는 것을 모
르고 있었다. 사교라 한 것은 백구수와 상금봉을 기리킨 말이었
다.
장취산은 그들이 공연히 시비를 걸어 오자 즉시 본떼를 모여 주
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자기는 단순히 삼사형을 가해한 흉수를
찾기 위해 이곳 왕반산도에 왔을 뿐이다. 게다가 상대방은 비록
자기보다 나이는 약간 위지만 중원 강호에 첫발을 갓 들여놓은
풋나기가 아닌가! 굳이 일시적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자기가 천응교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밝히고 싶었다. 그리하여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두 분 형씨와 마찬가지로 천응교와 이 몇몇 분과는 초면
일 뿐이요."
이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은 모두 안색이 약간씩 변했다. 천응
교의 두 단주는 그가 은소소와 두터운 정분을 맺고 있는 걸로 알
았는데, 알고 보니 역시 초면이었다. 은소소는 내심 분노가 치밀
었다. 장취산의 이 말은 천응교를 멸시하는 뜻이 다분히 내포되
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곤륜파의 제자들은 서로 마주 보며 냉소를 띄었다. 그들
은 공통된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겁장이 같은 녀석, 우리 곤룬파의 명성을 듣고 벌써부터 우리
를 두려워하는군.'
백구수는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얼른 나섰다.
"여러 귀빈들께서 다 당도했는데, 단지 거경방의 소방주만 빠진
것 같구료. 그를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 같소. 모두들
마음 내키는 대로 섬을 구경하시다가 정오 무렵에 저쪽 골짜기에
모이도록 하시오. 푸짐한 술상을 마련해 놓을 테니, 즐겁게 한
잔씩 마시며 보도의 위력을 구경해 봅시다."
상금붕이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거경방의 맥 소방주는 이곳가지 오는 도중 배가 침몰되는 바람
에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장상공이 사람을 시켜 구해 주었소.
지금 선창안에 있으니 나중에 술좌석에 모시도록 합시다."
장취산은 천응교의 두 단주가 자기에게 깍듯이 대하는 것과, 은
소소의 은근한 눈길이 부담스러워 될 수 있는 한 그들을 멀리하
기로 작심했다.
"소제는 혼자서 섬 안을 거닐 생각이니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대답도 듣지 않고 돋 동쪽 숲이 우거지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았다.
왕반산도는 작은 섬이었다. 산석과 수목도 별로 빼어난 데가 없
었다. 섬 동남족에 십여 척의 돛단배가 정박돼 있는 것이 보였
다. 아마 거경방, 해사파 사람들이 타고 온 배인 모양이다.
장취산은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은소소의 잔
인한 수단과 무엇이든 자기 멋대로 하려는 것에 대하여 심히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녀의 생각이 계속 뇌리
를 맴돌며 덜쳐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그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확대됐다.
'그 은 낭자는 천응교에서 상당히 존귀한 위치에 있는 것 같은
데..... 상금붕과 백구수가 그녀를 마치 공주대하듯 하지만, 분
명 교주는 아닌 것 같다. 대관절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천응교가 이 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룡도를 구경시키는 것
은 자파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속셈이다. 상대방 해사파와 신권
문, 거경방은 모두 핵심인물을 보내온 데 반해 천응교는 단지 두
단주를 내세워 이 일을 주관케 했다. 이것만 보아도 그들이 상대
방을 전혀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현무단
백단주의 기파(氣派)로 보아 무공이 주작단 상단주보다 한 수 위
인 것 같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천응교는 이미 무림에서 막대
한 세력을 확보한 게 분명하다. 어쩌면 장차 무림의 큰 화근으로
부각될지도 모르니, 오늘 이 기회에 그들의 정체를 파악해 둘 필
요가 있다. 장차 우리 무당파와도적대 관계가 될 테니까.....'
장취산이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홀연 숲 밖에서
무기가 서로 부딪치는 금속성이 들려왔다. 그는 은근히 호기심이
생겨 금속성이 들려오는 쪽으로 접근해 갔다. 과연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곳에서 곤륜파의 두 검객이 제각기 장검을 쥔 채 검술
연습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 은소소가 만면에 화사한 웃음을 띄
우고 지켜보고 있었다.
장취산은 선뜻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스승님께서는 곤륜파의 검술이 독특한 일면이 있다고 가끔 말
씀하셨다. 그 어르신네도 젊으셨을 때 검성(劍聖)이라 불리워지
는 곤륜과 겨룬 경험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번 기회에 견식을 넓
히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얼른 고개를 내둘렀다. 무림인은 무
공 연마를 엿보는 것을 금기로 삼고 있었다. 장취산은 그 사실을
떠올리며 곧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한데 은소소가 어느새 그를
발견했는지 손짓을 하며 소리쳤다.
"장가가, 이리 오세요!"
그녀는 가장 친근한 칭호로 바꾸어 불렀다.
장취산이 만약 이대로 돌아선다면, 오히려 연검을 엿보았다는
오해를 사게 될 것이다.
"두 분 형씨께서 검법을 연마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린 방해하
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갑시다."
은소소가 뭐라고 대답히기도 전에 백광(白光)이 번뜩이며 나직
한 신음이 들려왔다. 알고 보니 장도가 전개한 일검이 고칙성의
왼팔에 적중되어 선혈이 쏟아졌다.
이것을 본 장취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장도가 실수
한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생각이 사실과 다르다는 게
이내 드러났다. 고칙성은 냉소를 날리며 안색이 붉그락 푸르락해
지더니 연거푸 전광석화같이 삼검(三劍)을 전개했다. 이 삼검은
신랄할 뿐 아니라 뜻밖에도 모두 장도의 급소를 노렸다. 장취산
은 두 사람이 검법을 연마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진자로 싸움을 벌
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소소가 생긋생긋 웃으며 한 마디 내뱉었다.
"이제 보니 사형이 사제만큼 실력이 뛰어나지 못하군요. 장대협
의 검법은 정말 멋져요!"
고칙성은 이 말을 듣자 이를아굴며 몸을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백장비폭(百丈飛瀑)이란 초식을 전개해 성난 독수리처럼 덮쳐내
렸다.
장취산은 절로 갈채를 보냈다.
"훌륭한 검법이오!"
장도는 황급히 뒤로 피하려 했다. 그러나 고칙성은 중도에서 검
초를 변화시켜 짤막한 기합과 함께 장도의 왼쪽 허벅지에 일검을
찍었다. 그 즉시 은소소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알고보니 사형도 대단하군요. 장대협은 이제 패배를 시인해야
겠군요."
장도는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냉랭하게 말했다.
"아직 승부가 나지 않았소이다!"
그는 대뜸 검초를 변화기켜 비스듬히 검끝을 떨치며 우중비화
(雨中飛花)의 검법을 구사했다. 이 검법은 실초(實招)보다 허초
(虛招)가 많아 상대방으로 하여금 허허실실을 종잡지 못하게 했
다. 하지만 고칙성은 이 본문 검법에 대해 손바닥보듯 잘 알고
있어, 일사천리로 분쇄시키며 빈틈을 정확히 간파해 여지없이 반
격을 가했다.
장도는 오기가 뻗쳐 도중에서 검법을 임의로 변화시켜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든 후에 여러 군데 상처를 입혔다. 삽시간에 이들은
얼굴, 팔, 가슴, 어깨, 허벅지 등에 상처를 입어 비록 급소는 아
니지만 입고 있던 옷이 붉게 물들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 사형제간의 싸움은 치열해져 나중에는 목
숨까지 걸고 생사투를 벌이는 것 같았다. 은소소는 옆에서 계속
이간질을 했다. 때로는 고칙성을 칭찬하고 때로는 장도에게 갈채
를 보냈다. 두 사람은 그녀의 충동질에 말려들어, 단숨에 상대방
을 스러뜨려 그녀의 칭찬과 환심을 독차지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장취산은 어이가 없었다. 은소소는 조금 전에 그들 사형제가 천
응교를 멸시한 언사를 했기 때문에 앙갚음을 하고 있는게 분명했
다. 이 상태로 사움이 계속된다면 어느 한쪽이 죽기 전에는 싸움
이 중단될 것 같지않았다. 두 사람의 검법은 비록 정묘(精妙)한
게 사실이지만, 변화가 명확하지 못하고 내력의 뒷받침도 부족해
원래 검법이 지니고 있는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은소소는 손뼉을 치며 매우 재미있어 했다.
"장가가, 곤륜 검법이 어떻다고 생각하세요?"
그녀는 계속 싸움을 지켜보며 불쑥 질문을 던졌는데, 한참을 기
다려도 장취산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절로 고개를 돌렸다. 순
간, 장취산이 눈쌀을 찌푸린 채 얼굴에 혐오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자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아무리 지켜봐도 더 이상 신통한게 없군요. 우리 저쪽으로 가
서 해변 풍경이나 감상해요."
이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장취산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에서 따스한 기운이 젼해져 오자 장취산은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는 은소소가 곤륜 제자들을 격노시키기
위해 일부러 이러는지 알면서도, 선뜻 그녀의 손을 뿌리 칠수가
없어 그녀가 이끄는 대로 해변으로 향했다. 은소소는 일망무변
(一望無邊)의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잠시 깊은 사색에 잠겼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에 이런 말이 있어요. <천하지수(天
下之水) 막대어해(莫大於海) 만천귀지(萬川歸之) 부지하시지이불
영(不知何時止而不盈)>... 하늘 아래 물은 바다보다 더 넓은 것
이 없고 온갖 물줄기에 합쳐지니, 언제 멈출 것이며 언제 넘칠
건지 알 길이 없도다..... 그런데 바다는 조금도 우쭐대지 않고
이렇게 말했데요. <오재어천지지간(五在於天地之間) 유소석소목
지재대산야(猶小石小木之在大山也)>... 즉, 내가 하늘과 땅 사이
에 있는 것은 작은 돌과 작은 나무가 튼 산에 있는 것과 같다고
했대요. 그런 넓은 흉금을 지닌 장자니까 후인의 존경을 받게 된
것이겠죠?"
장취산은 그녀가 곤륜 제자들을 이간질시켜 혈투를 벌이게 만들
고는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다. 한데,
그녀가 갑자기 이런 감상적인 말을 하자 절로 멍해졌다.
장자는 도가(道家)에서 수심(修心)을 쌓는데 꼭 읽어야 할 책이
므로 장삼봉은 늘 제자들에게 강해(講解)를 해주었다. 그런데 살
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 은소소의 입에서 갑자기 이런
고상한 말이 흘러나왔으니, 장취산으로선 뜻밖이 아닐 수 없었
다.
장취산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소. <부천리지원(부천리지원) 부족이거기대(不足以擧其大)
천장지고(千丈之高) 부족이기심(不足以其深)>이라 하듯이 진리인
들 그의 큰뜻에 비견될 수 없고, 천 길 높이인들 그의 깊음에 따
르지 못하겠죠."
은소소는 그가 <장자, 추수편>으로 상답(相答)하여 얼굴에 존경
과 흠모의 표정이 역력히 지어지는 것을 보고 이내 짚이는 바가
있었다.
"당신은 지금 스승님을 생각하고 계시죠?"
장취산은 이 물음에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다른 손을
덥석 잡았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소!"
장취산이 무당에서 사형들과 <장자, 추수편>을 함께 읽을 때 유
대암이 이렇게 말한 것이 있었다.
"우리들이 스승님으로부터 할예를 배우고 있지만, 배울수록 스
승님과 차이가 많이 벌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장자 추수
편의 망망대해로만이 그 어르신네의 고심막측, 무궁무진한 학식
과 무공을 비유해야 옳을 겁니다."
당신 송원교와 장취산 등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었
다. 지금, 은소소와 함께 <장자, 추수편>을 상답하면서 자연히
스승님을 떠올린 것이다.
은소소는 깜찍하게 말했다.
"당신의 그 진지한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어요. <천리지원부족
이거기대>라 함은 당금 무림에서 장삼봉 진인을 제외하고 또 누
가 있겠어요."
장취산은 심히 기뻐했다.
"낭자는 정말 총명하구료."
그는 너무나 감격한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의 손을 잡
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황급히 손을 풀며 얼굴을 붉혔다.
은소소는 정감어린눈망울로 그를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영사의 무학이 도대체 어느 정도로 출신입화(出神入化)한지 좀
들려줄 수 있어요?"
장취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무학은 그 어르신네가 지니고 계신 극히 일부분의 학문에 불과
하오. 그 심오하고 광대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료
....."
은소소는 엉뚱하면서도 깜찍한 일면을 갖고 있어, 장취산이 좋
아하는 방향으로 자꾸만 화제를 끌고 갔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갯바위에 걸터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
기꽃을 피웠다.
어느덧 해가 중천으로 자리바꿈을 했다. 홀연 멀리서 육중한 발
자국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헛기침과 한 사람의 낭랑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장상공, 은 낭자, 정오가 됐으니 어서 주연에 참석하시오!"
장취산이 고개를 돌려 보니, 상금붕이 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
서있는 게 보였다. 그의 표정은 비록 정중했지만 입가에 묘한 미
소가 얼룩져 있었다. 흡사 자상한 윗사람이 젊은 한 쌍의 정인
(情人)을 지긋한 눈길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은소소는 줄곧 그
를 아랫사람 대하듯 교만을 부렸지만, 이 순간만큼은 양볼이 도
화빛으로 물들어 수줍어하며 고개를 숙였다. 장취산은 하늘을 우
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지만, 두 사람의 신색을 보자 덩달아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졌다.
상금붕은 곧 몸을 돌려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은소소는 속삭이듯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먼저 갈 테니 바싹 뒤따라오진 마세요."
장취산은 다시 멍해졌다.
'이 낭자가 왜 갑자기 수즙음을 타게 됐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은소소는 걸음을 재촉해 상금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장취산은 그들의 마모습을 바라보며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들의 모습이 수목 뒤로 사라지자 비로소
천천한 걸음을 옮겨 골짜기 쪽으로 향했다.
골짜기 안으로 들어거자 잔디가 깔린 넓은 공지에 이미 칠 팔
개의 상이 놓여져 있었다. 제일 상좌로 꼽는 동쪽 탁상을 제외하
고 거의 모든 상이 꽉 차 있었다.
상금붕은 그가 나타난 것을 보자 우렁찬 음성으로 외쳤다.
"무당파의 장오협께서 당도했습니다!"
그의 외침이 골짝기에 찌렁찌렁 울려퍼졌다.
그는 곧 백구수와 함께 성큼성큼 장취산을 맞이해 갔다. 그들의
뒤에는 제각기 다섯 명의 타주(舵主)들아 따랐다. 열두 명은 골
짜기 입구에 이르러 양쪽으로 갈라서며 공손히 몸을 굽혔다. 그
리고 백구수가 정중하게 말했다.
"천응교 은 교주의 부하 현무단 백구수와 주작단 상금붕이, 장
오협의 왕림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은소소는 비록 그들과 함께 골짜기 입구로 영접나오지 않았지만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장취산은 <은 교주>라는 세 글자를 듣는 순간 대뜸 가슴에 와닿
는 것이 있었다.
'음... 생각했던 대로 교주의 성이 은(殷)이었군.'
그는 곧 공수의 답례를 취했다.
"보잘것 없는 소생을 이렇게 영접해 주니 송구스러울 따름입니
다."
그는 걸음을 옮겨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면서 주위를 보니, 모두
분연한 표정을 하고 있어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별로 개의
치 않았다.
그는 한 가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앞서
해서파, 거경방, 신권문의 수뇌 인물이 나타났을 때는 천응교가
단지 타주 한 사람을 내세워 맞이했을 뿐이다. 지금 장취산을 영
접한 분위기와는 천양지차가 있었다. 해사파등이 멸시당한 느낌
에 분연함을 금치 못하는 게 당연했다.
백구수는 장취산을 동쪽 제일 상좌의 제일 상석으로 안내했다.
장취산은 얼른 사양했다.
"소생은 무림 후진으로서 감히 이 상좌에 앉을 수 없습니다."
백구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무당파는 당금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이며 장오협은 천하
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데, 이 자리를 사양하면 누가 감히 앉겠습
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옆 탁상에 앉아 있던 고칙성과
장도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장도가 홀연 자기의 의자를 허
공으로 던졌다. 그 의자는 허공을 가로질러 백구수가 장취산에게
권하는 좌석 바로 옆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
리에 놓여 있었던 것처럼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웬만한 사람
이 흉내낼 수 없는 솜씨였다.
장도가 의자를 던져내자 고칙성이 곧 거만하게 소리쳤다.
"흐흐... 태산북두라고.....? 누가 받드는 태산북두인지 모르겠
군! 장가가 감히 앉을 용기가 없다면 우리 형제가 대신 앉겠소이
다!"
두 사람은 질퐁처럼 신법을 펼쳐 의자 옆으로 달려왔다.
얼마전에, 은소소는 그들 두 사람을 불러 누구의 무공이 더 높
냐고 물으며 곤륜파의 검법을 구경해 보고 싶다고 이간질의 포석
을 깔았었다. 두 사람은 전혀 망설임이 없이 서로 검법을 펼쳐
보였다. 처음에는 단지 상대방을 눌러 자신을 돋보이게 할 심산
이었으나, 갈수록 은소소의 충동질에 말려 결국 생사투로 발전된
것이다. 나중에 은소소가 장취산과 다정히 손을 잡고 떠나가자
비로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검을 거두고 서
로 상처를 치료해 주며, 감히 은소소에게 분풀이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가 엉뚱한 장취산에게 분노와 질투의 화살을 던졌다.
지금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장취산을 망신시키
려 하는 것이다. 이때 상금붕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한편, 장취산은 그들과 싸울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두 분이 여기에 나란히 앉으면 어울릴 것이오. 나는 다른 자리
를 찾아 보겠소."
그는 상대방의 반응도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걸어나가자 은소소
가 갑자기 그에게 손짓을 하며 소리쳤다.
"장가가! 이쪽으로 오세요!"
장취산은 그녀가 자기에게 할 말이 있는 것으로 알고 곧 다가갔
다. 그런데 은소소는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자기 옆에 붙이며 미
소를 머금고 말했다.
"여기 앉으세요."
장취산은 그녀가 군호들 앞에서 이렇게 거리낌없이 친근하게 하
는 것이 너무 뜻밖인지라 엉거주춤했다. 그녀와 나란히 앉자니
너무 친밀한 느낌을 줄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외면하면 은소소
의 자존심이 손상될 게 뻔했다.
은소소는 얼른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장취산은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서 거절할 수 없었다. 그가 자리
에 앉자, 은소소는 다시 만면에 미소를 띄고 그에게 술을 권했
다.
한편, 구칙성과 장도는 비록 상석을 차지했지만, 이러한 광경을
보자 더욱 울화통이 터졌다.
백구수는 소매로 의자의 먼지를 털 듯 몇번 쓸더니 웃으며 말
했다.
"곤륜파의 대검객들께서 상좌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자부하니
어서 앉으십시오."
말을 끝낸 그는 상금붕, 열 명의 타주들과 함께 자기네 좌석으
로 돌아가 앉았다. 고칙성과 장도는 장취산이 죽이고 싶도록 미
웠다.
'겁장이 녀석, 자리를 빼앗기고서도 싸울 생각을 하지 않으니
우리 곤륜파의 위풍에 단단히 눌린 모양이군.....'
둘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거침없이 의자에 앉았다.
순간 -----
우지끈!
폭삭!
의자 다리가 절단되면서 두 사람은 일제히 뒤로 벌렁 나자빠졌
다. 다행히도 엉덩방아를 찧지 않고 적시에 손으로 땅을 짚어 일
어나긴 했지만 낭패스럽기 이를데 없었다. 주위에 있는 군호는
모두 홍소를 터뜨렸다.
장도와 고칙성은 조금 전에 백구수가 소매로 의자를 닦는 척하
며 꾸민 수작임을 빤히 알면서도, 감히 따지지를 못했다. 자기네
들 실력으로선 도저히 이 음력(陰力)을 당해 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본문 검술에 대해 상당히 자부하
며, 천응교를 하찮은 사교로 여겨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왕반산도에서 안하무인격으로 거드름을 피웠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백구수가 펼친 상승무공을 보자 예기(銳氣)가 크게
꺾였다.
이때 백구수의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곤륜파의 무학이 대단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왜
그 죄없는 의자를 박살내 가면서 과시하려는지 모르겠구료. 솔직
히 말해 그 정도의 공력쯤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을 것이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뒤쪽에 앉아 있는 타주 열 명에게 외쳤다.
"너희들도 가능한지 한 번 해보아라!"
다음 순간, 우지끈 하는 소리가 연달아 요란하게 들리며 의자
열 개가 박살났다. 열 명의 타주는 미리 준비된 상태에서 행동을
취한 것이므로 의자를 박살내고도 만면에 웃음을 띄고 태연한 자
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곤륜 제자의 낭패한 모습과
는 극히 대조적이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백구수가 일부러 그들을 망신주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광경이 재미있고도 우스워 절로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웃음바다를 이룬 가운데 천응교의 두 타주
가 제각기 커다란 바윗돌을 들고 상좌 앞으로 걸어가, 그 박살난
의자를 걷어차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무 의자는 너무 약해 두 분의 귀하신 몸을 감당해 내지 못한
것 같으니, 이 바위에 앉도록 하십시오."
두 사람은 천응교에서 가장 힘이 좋다고 알려진 대역사(大力士)
였다. 비록 무공은 평범하지만 타고난 신력(神力)을 지녔다. 지
금 들고 있는 바윗돌은 최소한 사백 근은 넘을 것이었다. 그들은
이 바윗돌을 고칙성과 장도에게 건네주려 했다. 장도와 고칙성은
비록 검법에 조예가 있기는 했지만 이 거대한 바윗돌을 받을 재
간이 만무했다.
고칙성은 눈쌀을 찌푸렸다.
"어서 내려놓으시오!"
그러나 두 대역사는 일제히 기합을 토하며 바윗돌을 번쩍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자, 받으시오!"
이렇게 되자 고칙성과 장도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사백
근이 넘는 바위 덩어리가 날아오면 영락없이 변을 당하게 될 것
이었다.
이때 백구수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곤륜 검객들이 상석을 굳이 사양하시겠다니, 역시 장상공께서
앉는 것이 어울릴 것 같소."
장취산은 은소소 곁에 앉아 그녀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유향(幽
香)에 취해 무지개빛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을 즈음, 홀연 백구수
의 외침을 듣자 흩어진 마음을 얼른 바로잡았다.
'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마(魔)의 수렁으로 빠져들어선 아니
된다. 이 마녀의 달콤한 속삭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나갔다.
백구수는 상금붕이 장취산의 무공을 칭찬하는 것을 들었지만 직
접 보지 못해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었다. 하여, 바윗돌을 높이
쳐들고 있는 두 타주에게 눈짓을 보냈다. 두 타주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장취산이 가까이 오자 일제히 외쳤다.
"장상공, 조심해서 받으시오!"
대갈일성과 함께 무릎을 굽혔다 펴며 두 개의 바윗돌을 동시에
장취산의 머리 위로 던져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 아슬아
슬한 광경을 보자 절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백구수는 본디
장취산의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 절대 악의가 없었다. 그
런데 두 타주가 이렇게 거침없이 바윗돌을 머리 위로 던져내린
것은 뜻밖이라 내심 아뿔싸를 토했다. 장취산은 명문 제자로서
물론 바윗돌에 깔려 부상을 당하게 될 리는 없겠지만, 창졸간에
몸을 피하면서 낭패한 꼴을 보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장취
산의 원망을 사게 될 뿐 아니라 은소소의 비위를 건드리게 될 것
이 분명했다.
한편, 장취산은 거대한 바윗돌이 떨어져내리자 처음엔 흠칫 놀
랐다. 만약 몸을 피한다면 곤륜 제자와 같은 꼴이 되어 사문의
위명을 손상시킬 것이었다. 그는 자세히 생각을 굴릴 겨를이 없
었다. 무공이 어느 경지에 달한 사람이 만약 긴박한 순간을 당하
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적절한 대응수를 펼치게 되기 마
련이다.
장취산은 반사적으로 왼손으로서 무(武) 자결을 펼쳐 왼쪽에서
떨어지는 바윗돌을 겨냥하고, 오른손으론 도(刀) 자결을 꼽아 오
른쪽으로 떨어져내려 오는 바윗돌을 받았다. 두 개의 바윗돌은
자체의 무게만 해도 사백 근이 넘는데다가 허공으로 던져져 다시
가속으로 떨어지니 그 무게는 엄청났다. 장취산의 힘으로 그 무
게를 감당해 내기란 벅찼다. 하지만 장삼풍으로부터 새로 배운
이십사자신공은 실로 신기한 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알다시피 무
당파의 무공은 외적인 힘을 빌려 바윗돌의 방향을 살짝 변화시킨
것뿐이었다. 그리고 손이 소매 속에 가려져, 다른 사람이 보기에
는 흡사 소매로 바윗돌을 허공으로 던져낸 것 같았다.
두 개의 바윗돌이 떨어져 내리자 장취산은 표연히 몸을 솟구쳐
비교적 높이 떠오른 바윗돌 위에 사뿐히 주저앉았다. 다음 순간,
쿵하는 소리와 함께 첫 번째 바윗돌이 땅에 떨어져 절반 이상이
움푹 땅 속에 패이며 잇따라 두 번째 바윗돌이 첫 번째 바윗돌
위에 떨어져 불꽃이 튕겼다.
장취산은 태연하게 바윗돌 위에 앉아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말
했다.
"두 분 타주의 신력(神力)은 정말 대단하군요."
두 타주는 놀란 나머지 눈이 황소 불알만하게 휘둥그래져 한 마
디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삽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골짜기
안이 조용해졌다.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에야 우뢰 같
은 갈채가 터졌다.
은소소는 백구수에게 눈을 곱게 흘기며 활짝 웃었다. 백구수도
내심 기뻐했다. 하마터면 자기가 실술르 저지를 뻔했는데, 장취
산의 놀라운 무공으로 인해 오히려 은 낭자의 환심을 사게 된 것
이다. 하여, 얼른 장취산에게 다가가 술을 가득 따르며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래 전부터 무당칠협의 명성을 들어 왔는데, 오늘 장오협의
무공에 완전히 탄복했소. 자, 존경의 뜻으로 한 잔 올리겠습니
다."
그는 단숨에 술을 비워 버렸고, 장취산도 겸허한 말과 함께 잔
을 비웠다. 좌중은 장취산과 무당칠협에 관한 얘기로 잠시 술렁
거렸다.
좌중의 분위가가 가라앉자 백구수가 정색을 하고 낭랑하게 말했
다.
"본교는 최근에 보도 한 자루를 얻었는데, 도룡도라고 하오. 일
설에 무림지존 도룡보도 호령천하 막감불종이란 말이 있소!"
여기서 그는 말끝을 멈칫하며 좌중을 훑어보았다. 그는 몸집이
크지 않았지만 음성이 우렁차고 눈빛이 칼날처럼 에리해, 좌중을
압도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본교의 은교주께서는 본디 천하의 영웅들을 모두 천응산(天應
山)으로 모셔 보도의 진면목을 보일 계획이었으나 사정상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소. 그대신 본교가 보도를 얻었다는 사실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 가까운 강남 각 방파의 여러 친구분들을 이
자리에 모시게 된 것이외다."
여기까지 말한 그가 손을 흔들어 보이자, 여덟 명의 제자가 일
제히 몸을 숙여 인사를 올리더니 서쪽에 선려 있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그들이 보도를 꺼내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
런데, 여덟 명의 제자가 다시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는 모두 웃
통을 벗어 버린 체 커다란 철로(鐵爐)를 들고 나오는 게 아닌가!
철로에서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불꽃이 높이 솟는 가운
데 여덟 명은 철 "에 연결된 긴 철주(鐵柱)를 어깨에 메고 영차
영차 소리를 지르며 공터 한북판에 철로를 내려놓았다. 사람들은
И로에서 뻗어오는 화끈한 열이 쇠를 달구어 두드릴 때 받침쇠로
쓰는 육중한 철침을 들고 나왔으며, 다른 두 사람은 제각기 큰
쇠망치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백구수가 다시 낭랑한 음성으로 외쳤다.
"상단주, 칼의 위력을 보여 주십시오!"
상금붕은 알았노라고 대답하고 나서 곧 몸을 돌려 분부를 내렸
다.
"칼을 갖고 오라!"
조금 전에 바윗돌을 집어 던졌던 두 타주가 동굴 안으로 들어가
더니, 한 사람은 황색 비단에 싼 길쭉한 물건을 들고 한 사람은
그 물건을 호위하는 양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나왔다. 그 타주는
비단에 싸인 물건을 상금붕에게 건네주고 좌우 양쪽으로 갈라섰
다.
상금붕이 황색 비단을 풀자 한 자루의 단도가 드러났다. 그는
단도를 높이 쳐들고 사람들을 한차례 둘러보더니 날렵하게 칼을
뽑았다.
"이것이 바로 무림지존 도룡보도이니 자세히 보십시오!"
두 손으로 단도를 높이 받쳐든 그의 표정이 매우 숙연했다.
군호들은 도룡보도의 이름은 들었지만, 거무죽죽한 것이 별로
신통한 데가 없는 것 같아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게 정말 도룡보도란 말인가.....?"
상금붕은 칼을 조심스럽게 좌측에 서 있는 타주에게 건네 주었
다.
"쇠망치로 시험해 보여라!"
타주는 단도를 받아 받침쇠 위에 올려놓으며 칼날을위로 세웠
다. 다른 한 타주가 쇠망치를 들어 올려 힘껏 칼날을 내리쳤다.
팍!
다음 순간, 쇠망치의 묵직한 머릿 부분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군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단금절옥(斷金切玉)의 보검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알
고 있었다. 그 중 그그소수는 그러한 보검을 직접 보았을지도 모
른다. 하지만 망치머리를 두부 베듯 하며, 심지어 금속성조차 내
지 않는 보도(寶刀)가 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혹시 자기가 잘못 본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을 느꼈다. 아니면 천
응교가 속임수를 쓴 것이라 생각되기도 했다. 곧 신궈눈과 거경
방에서 제각기 한 사람이 나와 그 반쪽으로 쪼개진 망치머리를
주워 유심히 살폈다. 방금 쪼개진 것이 틀림없었다. 타주는 그들
에게 다시 확인이라도 시키듯, 지켜보는 앞에서 다른 쇠망치로
살짝 칼날을 내리쳤다.
팍!
결과는 앞서와 마찬가지였다.
그제서야 군호들의 박수갈채가 터졌다. 장취산도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보도는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했는데.....'
상금붕이 보도를 들고 상보벽산(上步劈山)의 초식을 전개하자,
그 육중한 받침쇠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이번에는 다시 주위에 있는 십여 그루의 굵은 소나무를 겨냥해
잽싸게 보도를 내리쳤다. 그가 원을 한 바퀴 그리며 다시 제자리
로 돌아올 때까지 소나무들은 멀쩡했다. 군호들이 이해가 가지
않아 눈쌀을 찌푸리는 순간, 상금붕이 소매를 가볍게 떨쳐냈다.
거기에 따라 십여 그루의 소나무가 차례로 뒤쪽을 향해 쓰러졌
다. 상금붕이 앞서 원을 그리며 보도를 떨쳐냈을 때 임 베어져
있었던 것이다. 단지 칼날이 너무 예리하고 상금붕이 전개한 균
형있는 힘과 순간적인 쾌속(快速)으로 인해 위아래가 멀쩡하게
붙어 있었던 것뿐이다. 나중에 소매로 장풍을 뻗쳐내자 비로소
쓰러진 것이다. 상금붕은 광소를 터뜨리며 손을 살짝 떨쳐, 이번
에는 도룡보도를 그 지글지글 타오르는 커다란 화로 속에 던져
버렸다.
이때 멀리서 우지끈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흡사 멀리서
도 누가 나무를 쓰러뜨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백구수와 상금붕은 모두 흠칫 하며 그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
보았다. 순간 그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도저히 눈으로는 믿을
수 없었다. 해변에 정박되어 있는 배의 돛대가 연달아 꺾여지고
있는 게 아닌가! 돛대 위에는 모두 깃발이 걸려 있었다. 천응교,
거경방, 해사파, 신권문 모두는 자기네 깃발이 걸려 있는 돛대가
차례로 꺾여지는 것을 보자 소스라치게 놀라, 제각기 부하들을
시켜 달려가 원인을 알아오라고 했다.
펑!
꽝! 쿵!
요란한 소리가 계속 들리는 가운데 삽시간에 돛대란 돛대는 모
조리 박살나 버렸다. 흡사 바다 속에서 갑자기 괴물이 나타나 한
바탕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것 같았다. 골짜기에 모인 군호들은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아연실색하여 입이 딱 벌어져 한동안 아무 말
도 하지 못했다. 처음에 군호들은 천응교의 음모라고 생각했는
데, 천응교의 배도 조난을 당했으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앞서 해변으로 달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자 다시 십여 명
이 달려갔다. 해변과 골짜기의 거리는 별로 멀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두 번째로 달려간 사람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마주 보며 불안한
기색이 짙어갔다.
백구수가 한 타주에게 분부했다.
"네가 직접 가봐라!"
타주는 즉시 대답을 하고 달려갔다. 백구수는 억지로 태연한 척
하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아마 바다에 무슨 연고가 생긴 모양인데 염려할 것 없소이다.
설령 배가 디 침몰된다 해도 뗏목을 만들어 돌아갈 수도 있을 테
니, 자, 한 잔씩 건배합시다."
군호들은 내심 불안했으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약한 모습을
보리고 싶지 않아 일제히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술잔을 입
에 갖다 대기도 전에 해변 쪽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백구수와 상금붕은 그 비명을 지른 자가 바로 방금 떠난 타주라
는 것을 알고 이내 표정이 굳어갔다.
이때 한 사람이 비칠거리며 달려오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 자가 차츰 가까이 달려옴에 따라 사람들은 비로소 한 혈인(血
人)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조금 전에 떠났던 그 타주
였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며 손가락 새에서 계속 선
혈이 흘러내렸다. 자세히 보니 두피가 찢어졌고 가슴과 등, 허벅
지, 팔뚝, 옷이 갈기갈기 찢겨져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그는 울부짖듯 소리쳤다.
"금모사왕(金毛獅王)! 금모사왕!"
백구수는 눈꼬리를 세우며 물었다.
"사자가 나타났단 말이냐?"
정말 사자가 나타났다면 오히려 안심이 됐다. 한데, 타주는 세
차게 고개를 내둘렀다.
"아니오! 사람이오! 모두 그에게 긁혀 죽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백구수는 더 이상 태연한 척할 수 없었다.
"내가 가보겠소."
상금붕도 앞으로 나섰다.
"나도 함께 가겠소."
백구수는 그를 만류했다.
"상단주는 은 낭자를 보호하시오."
그는 상대방이 예사 고수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수 있
었다.
상금붕은 그의 만류를 받아들였다.
"알았소."
이때 갑자기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콜록..... 금모사왕은 이미 이곳에 와 있다!"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순간, 고목 뒤에서 한 사람이 느릿하
게 걸어나왔다. 이 자의 몸집은 철탑처럼 우람하고 어깨까지 헝
클어져 내려온 머리카락은 황금빛이며, 파란 눈과 손에는 열 다
섯 자 가량되는 양두랑아봉(兩頭狼牙棒)을 쥐고 있었다. 불쑥 나
타나 군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그의 모습은 흡사 천신천장(天神
天將) 같았다.
장취산은 내심 생각을 굴렸다.
'금모사왕이라.....? 아마 머리카락이 사자처럼 황금빛을 띤 것
에서 유래된 외호인 것 같은데 누구일까? 스승님에게 들어본 적
이 없는데.....'
백구수는 앞으로 몇 걸음 나서서 형식적이나마 포권의 예를 취
했다.
"귀하의 존성대명을 밝혀줄 수 있겠소?"
천신 같은 사나이는 생각보다 훨씬 의젓하게 말했다.
"나의 성은 사(謝)라하며 이름은 외자로서 손(遜)이오. 내 꼬락
서니를 보아서 알겠지만 외호가 금모사왕이라 하외다."
백구수는 그의 말투가 정중한 것을 듣자 다소 안심이 되었다.
"사 선생이시군요. 한데, 귀하는 우리와 금시초면이거늘, 어째
섬에 나타나자마자 배를 파괴하고 살인을 행하였소?"
사손은 히죽 웃었다. 하지만 그의 가지런한 이빨에서 빛이 반짝
였다.
"여러분들은무슨 일로 이것에 모였소?"
백구수는 그를 속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무
공이 제아무리 고강해도 단신 홀몸이다. 상금붕과 힘을 합치고
다시 장취산과 은낭자의 도움을 받으면 능히 제거할수 있을 것이
라 믿었다.
백구수는 곧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천응교는 근래 한 자루의 보도를 얻게 되어, 그 위력을
강호 여러 친구들과 같이 음미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것이오."
사손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그 철로 석에서 열화(烈火)에 달구
어지고 있는 도룡도를 뚫어지게 주시하더니 곧 성큼성큼 다가갔
다.
상금붕은 그가 칼을 잡으려는 것을 보자 즉시 일갈을 토했다.
"잠깐!"
사손은 고개를 돌려 당당하게 웃었다.
"왜 그러시오?"
상금붕은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으나 말투는 예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칼은 본교의 소유이니 사 친구가 구경하는 것은 좋지만 손
을 대진 마시오."
"이 칼을 당신네들이 만들었소? 아니면 돈을 주고 사왔소?"
사손이 다시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당신네들도 남의 손에서 빼앗아 왔으니, 내가 다시 당신네들
손에서 빼앗아 가는 것은 지극히 공평하고 당연한 일이 아니겠
소?"
이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다시 맨손으로 칼을 집으려 했다. 순
간,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상금붕이 허리에서 그 한쌍의 철과(鐵
瓜)를 풀었다.
"사 친구. 손을 거두지 않으면 나도 더 이상 예의로 대할수 없
을 것이오!"
그는 경고하는 투로 말을 내뱉었지만, 사실은 왼손의 철과를 이
미 사손의 등마루를 향해 떨쳐냈다. 악랄한 기습이었다. 하지만
사손은 아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랑아봉을 자연스럽게 뒤쪽으로
떨쳐냈다.
창!
날아오던 철과는 랑아봉에 맞부딪치자 더욱 빠른 속도로 뒤를
향해 튕겨져 나갔다. 상금붕은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오른손의
철과를 떨쳐냈다. 이번에든 두 개의 철과가 허공에서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상금붕은 앞서 튕겨져 오는 철과를 충분히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사손의
신력(神力)은 그의 상상르 훨씬 초월하여 쌍과가 허공에서 부딪
치며 동시에 상금붕의 가슴으로 날아온 것이다.
팍!
으악!
쌍과가 가슴에 적중된 상금붕은 그 엄청난 충격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가슴뼈가 모조리 으스러진 채 횡사하고
말았다. 전당강에서 거경방의 소방주를 샹대해서는 그렇게도 위
풍당당하던 그가, 사손의 일격도 받아내지 못하고 영원히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주작단의 다섯 타주는 대경실색하며 달려와, 둘은 상금붕을 부
축해 일으키고 나버지 셋으 칼을 뽑아 목숨따위는 도외사한 체
사손에게 덮쳐갔다. 사손은 이미 왼손으로 도룡도를 움켜쥐었다.
그런데도 그의 손은 멀쩡하였다.그는 오른손에 쥐고 있는 랑아봉
으로 그 육중한 화로를 살짝 긁어올리자, 수백 근이나 되는 철로
가 허공으로 붕 떠올라 타주 세 명을 동시에 압시시켰다. 화로는
계속 앞으로 굴러가, 상금붕의 시체를 부축하고 있는 두 타주마
저 깔아 뭉갰다.다섯 타주와 상금붕의 시체에 모두 불씨가 떨어
져 옷이 일제히 타 올랐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취산은 강호에서 활동해 오면서 많은 고수들과 대면했지만,
사손 같이 초인적인 신력과 무공을 지닌 자는 보지 못했다. 그는
자기가 도저히 사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설령
대사형과 이사형이라 해도 그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스승님께
서 직접 하산하신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그를 꺾지
못할 것이다.
사손이 맨손으로 도룡도를 맑 채 손가락으로 살짝 도신(刀身)을
튕기자, 금속성이 아닌 묵직한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졌다.
그는 스스로 턱을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음..... 무성무색(無聲無色)이라, 과연 보도로군....."
그는 한쪽 탁자 위에 칼집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대뜸 백
구수에게 명령투로 말했다.
"저것이 도룡도의 칼집인 것 같은데 이리 갖고 오라!"
좀전의 점잖은 말투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백구수는 오늘 도저
히 살아서 돌아갈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맞섰
다.
"죽이려면 어서 죽여라! 하지만 칼집은 내줄 수 없다!"
"흐흐... 제법 배짱이 좋구나! 천응교에 과연 인물다운 자가 몇
명 있는 모양이구나!"
이렇게 말하며 다짜고짜 도룡도를 백구수에게 던졌다.
백구수는 감히 정면 대결을 벌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황급히 옆
으로 피했다. 순간, 날아오던 도룡도가 비스듬히 방향을 틀며 탁
자 위에 놓여 있는 칼집 속으로 정확히 파고들어갔다. 워낙엄청
난 힘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칼집에 꽂히고서도 도룡도는 계속
허공으로 날아갔다. 사손의 우람한 몸이 허공에 번뜩인 것은바
로 그때였다.
착!
그는 도룡도를 나꿔채 허공에서 한 차례 곤두박질하며 사쁜히
제자리에 떨어졌다. 그가 방금 전개한 칼집을 탈취하는 수법과
신법은 실로 불가사의 할 정도였다.
그는 군호를 한 차례 훑고 나서 목청을 높여 외쳤다.
"이 도룡도를 내가 갖고 가겠다! 불만 있는 자가 있느냐!"
그가 연거푸 두 번씩이나 물었지만 감히 찍소리 하는 자가 없었
다.
홀연 해사파 석상에서 한 사람이 일어났다.
"사 선배님은 덕망이 높고 사해(四海)에 명성을 떨치고 있으니,
그 도룡도를 차지하는 게 당연합니다. 우리 모두 쌍수를 들어 찬
성합니다."
사손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네가 바로 해사파의 총타주 원광파(元廣波)냐?"
"그렇습니다."
원광파는 상대방이 자기의 이름을 알고 있자 한편으로는 기뻐하
고, 한편으로는 당황했다.
사손은 그에게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나의 사부가 누구이며, 어느 문파인지, 그리고 내가 무슨
훌륭한 일을 했는지 알고 있느냐?"
원광파는 우물쭈물했다.
"저..... 사 선배님은....."
사실 그는 쥐뿔도 아는 게 없었다.
사손이 다시 냉랭하게 말했다.
"그것도 모르면서 나더러 덕망이 높다느니, 사해에 명성을 떨친
다고 멋대로 지껄일 수가 있느냐? 난 아첨하는 녀석을 가장 싫어
한다. 네놈이 바로 그런 놈이야! 원광파, 이리 와 봐라!"
맨 나중에 내뱉은 한 마디는 청천벽력 같았다.
원광파는 감히 거역할 수없어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앞으로 걸어
갔으나, 벌써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사손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너희 해사파의 무공은 형편없다. 단지 독염으로 사람을 해칠
뿐이다. 작년에 여요(餘姚)에서 장등운(張燈運)일가를 죽였고,
이번 달 초순에 설부련이 해문(海門)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그
게 모두 너희들이 한 짓이지?"
원광파의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그가 생각하기로는 쥐
도 새도 모르게 일을 해치웠는데, 사손이 어떻게 알았을까?
사손이 갑자기 음성을 높였다.
"너희 부하더러 독염 두 사발을 갖고 오라고 해라. 독염이 어떻
게 생겼는지 구경 좀 해봐야겠다."
해사파의 사람들은 모두 독염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원광파
는 감히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부하들을 시켜 독염을 두 사
발 담아 갖고 오게 했다. 사손은 그 중 한 사발을 집어 냄새를
맡아 보더니 엉뚱한 제의를 했다.
"우리 서로 한 사발씩 먹자!"
그는 랑아봉을 힘껏 땅에 찍어 꽂고 나서, 다짜고짜 원광파의
뒷덜미를 잡아 우악스럽게 턱주가리를 잡아당겼다.
삐걱!
그의 턱주가리가 관절에서 벗어나 축 늘어져 입을 다물 수 없게
됐다. 그러자 사손은 독염 한 사발을 몽땅 그의 뱃속에다 쏟아넣
었다. 여요에서 장등운 일가가 하룻밤 사이에 멸문지화를 당한
것과 해문에서 설부련이 객점에서 기습을 받아 목숨을 잃은 사건
은 근래 무림의 이대(二大) 수수께끼였다. 그들은 모두 정파의
인물인데 뜻밖에도 해사파에 의해 독살된 것임이 밝혀졌다.
장취산은 사손이 독염을 원광파의 입 안에다가 쏟아넣는 것을
지켜보며 통쾌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한데 사손은 독염이 가득
들어 있는 또 하나의 사발을 집어들었다.
"나 사손은 매사에 공정을 기한다. 네가 한 사발을 먹었으니 나
도 한 사발을 먹겠다."
그는 즉시 입을 크게 벌려 독염 한 사발을 모조리 털어 넣었다.
이것은 실로 뜻밖의 일이었다.
장취산은 그의 행동이 비록 거칠고 악랄하지만 양미간에 정기
(正氣)가 서려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그가 죽인
것은 모두 흉악무도한 무리들이므로 자뭇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사손이 스스로 독염을 먹는 것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
쳤다.
"사 선배님! 어서 해독단을 복용하십시오!"
사손은 대뜸 고개를 돌려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장취산은 입
가에 담담한 미소를 띄운 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손은 냉랭하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후배는 무당파의 장취산입니다."
"음..... 네가 바로 무당의 장오협이군. 너도 도룡도를 쟁탈하
기 위해 이곳에 왔느냐?"
"후배는 삼사형이 부상을 당하게 된 원인을 캐기 위해 왔을 뿐
입니다. 만약 사 선배님께서 그 내막을 아시면 자세히 들려 주십
시오."
사손이 대답하기도 전에 원광파가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땅에
서 데굴데굴 딩굴더니 곧 달팽이처럼 몸이 움츠려진 채 시체로
변했다.
장취산이 다시 소리쳤다.
"사 선배님, 어서 해약을 복용해야 될 겁니다!"
사손은 코웃음을 쳤다.
"해약은 무슨 얼어 죽을 해약이냐? 술을 갖고 오라!"
천응교의 손님을 접대하던 졸개 하나가 얼른 술단지를 갖다 주
었다. 사손은 술단지를 받쳐놓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약 이십 근
이나 되는 독주를 단숨에 바닥낸 그는 불룩해진 배를 몇 번 쓰다
듬더니 갑자기 입을 벌려 한 줄기의 술줄기를 뿜어냈다. 그 주전
(酒箭)은 전광석화 같이 백구수의 몸으로 날아갔다. 백구수는 아
예 몸을 피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백 근이 넘는 쇠뭉치로 온몸
을 얻어 맞은 듯 심한 충격에 신음과 함께 몸을 뒤틀더니, 그 자
리에 기절해 버렸다.
사손은 다시 고개를 돌려 허공을 향해 술화살을 뿜어냈다. 그
술화살은 순식간에 빗발치듯 거경방 사람들의 몸에 뿌려졌다. 방
주인 맥경(麥鯨)을 위시해 모두들 비 맞은 생쥐처럼 축축하게 젖
었다. 그들은 비릿한 냄새에 역겨움을 견디지 못해, 공력이 약한
자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알고 보니, 사손은 술로서 뱃속에 있는 독염을 말끔히 씻어 다
시 내력으로 뿜어낸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뿜어낸 것은 모두
독주(毒酒)였다.
거경방주 맥경은 이런 모욕을 당하자 발끈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감히 대적을 하지 못하고 다시 의자에 주저 앉
았다.
사손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맥 방주, 오월 중순께 넌 민강(悶江)에서 원양 어선 한 척을
턴 일이 있느냐?"
맥경의 안색이 이내 잿빛으로 변했다.
"그..... 그렇소만....."
"너는 바다에서 해적 노릇을 생업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일을
문제삼진 않겠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십여 명의 상인을 모조리
바다속에 쳐놓은 것도 그런대로 용서하겠다. 하지만 일곱 명의
부녀자를 잔인한 방법으로 윤간하여 죽인 것은 천벌을 받아 마땅
하지 않겠느냐?"
"그건..... 그건..... 제자들이 한 짓이지 나하고는..... 관계
가 없소!"
"흐흐..... 이제 와서 변명하기엔 너무 늦었다. 내 손에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맥경은 도저히 요행을 바랄 수 없다고 판단해 대뜸 칼을 뽑아쥐
고 성난 야수처럼 그에게 덮쳐갔다.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에 공세가 용맹했다. 그러나 상대는 그와의 공력 차가 너무
나도 현저했다. 사손은 여유있게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그의 등을
강타했다.
빠드득!
맥경은 자신의 등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 자리에 떨
어져 뼈없는 해삼처럼 축 늘어졌다.
"으윽.....!"
고통스러운 신음이 그의 벌어진 입을 통해 새어나왔다. 거경방
의 제자 셋이 그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허사였다.
사손이 칼집에 들어 있는 도룡도를 허공에 떨치는 순간,
"으악!"
"앗!"
"으으악.....!"
단말마의 비명이 줄을 이으며 모두들 두개골이 박살나 피를 흘
리며 쓰러졌다. 이제 더 이상 감히 덤비는 자가 없었다.
사손은 축 늘어져 있는 맥경에게 다가갔다.
"네놈은 원래 물 속에서 활개를 쳐왔기 때문에 이대로 죽기가
억울하겠지? 그러니 기회를 한 번 주겠다. 원래는 물속에 쳐박아
숨을 수지 않고 오래 버티면 살려 줄 생각이었는데, 이 자리에선
그럴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쓰겠다."
이렇게 말을 끝낸 그는 땅에서 진흙을 한 줌 집어 술을 쏟아 찐
득하게 버무려 찰싹 얼굴에다 붙였다. 이렇게 되자 맥경은 코와
입이 봉해져 숨을 쉴 수 없게 되었다. 중인은 이 광경이 우스꽝
스럽게 느껴졌으나 아무도 웃는 자가 없었다.
사손은 이번엔 신권문의 장문인 과삼권에게 걸어갔다. 과삼권은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신권문을 관장하면서 평생 배운 것이 권법뿐이니 몇수 가
르침을 받겠소!"
그는 사손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냅다 그의 아랫배를 향해 일
권을 뻗어내며 잇따라 이권을 떨쳐냈다. 강호에서 웬만한 사람은
그의 삼권을 받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과삼권(過三拳)이라 불리
게 됐으며, 그 별호가 널리 알려지는 바람에 그의 원래 이름을
기억하는 자가 별로 없었다.
사손은 그의 이권을 여유있게 와해시켰다. 과삼권은 상대방의
공력이 생각만큼 고강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대갈일성을 토했다.
"제삼권!"
그의 이 제삼권은 그럴싸한 명칭이 있었다.
----- 횡소천군 직추만마(橫掃千軍 直追萬馬) -----
바로 그가 평생동안 연마한 권법 중에 가장 위력있는 일초였다.
이 일초에 숱한 강호의 고수들이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만 했다.
한편, 맥경은 눈알이 빨갛게 충혈되어 이마에서 구슬 같은 땀방
울이 흘러내렸다. 더 이상 숨을 안 쉬고는 견딜 수 없는 모양이
었다.
맥 소방주는 안타까움에 지켜볼 수가 없었다. 사손이 마침 과삼
권과 맞붙어 있는 것을 보고 번득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옆에 있는 여타주의 머리에서 은비녀를 뽑아 뾰족한 앞부분을 끊
어 부친의 입을 봉한 진흙을 겨냥해 튕겨내려했다. 물론 부친의
입 안을 상하게 할 우려가 없지도 않았지만, 진흙에 구멍이 뚫리
면 살아날 가망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모험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었다.
그런데 그가 비녀 토막을 튕겨내는 순간, 사손이 잽싸게 작은
돌맹이 하나를 걷어찼다. 작은 돌맹이는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정확하게 그 비녀 토막에 적중되었다. 순간 비녀 토막이 급회전
하여 맥 소방주에게 날아갔다.
"으앗!"
처절한 비명이 터지는 가운데 맥 소방주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의 손은 이내 붉은 피로 물들여졌다. 비녀가 눈에 꽂힌 것이
다.
맥경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진 뎃을 뜯어내려 하는데, 사손이
다시 돌맹이를 연거푸 걷어차 그의 양쪽 어깨를 적중시켰다. 맥
경은 좌우 어깨뼈가 으스러져 팔을 움직일 수 없게 됐다.
바로 이때 과삼권의 제삼권이 사손의 아랫배를 강타했다. 이 일
장의 기세는 풍뢰와 같았다. 과삼권은 상대방이 몸을 피하지 않
고 자기의 제삼장을 정면으로 받아드릴 줄이야, 실로 뜻밖이었
다. 그는 내심 기뻐했다. 하지만 그의 주먹이 사손의 배에 적중
되는 순간, 흡사 강철판을 강타한 듯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아뿔싸!
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았을 땐 이미 늦었다. 어마어마한 반탄지
력에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벌렁 뒤로 나자빠져 생의 종지부
를 찍었다. 사손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맥경은 이미 눈을 하
얗게 치뜨고 죽어 있었다.
사손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네놈들은 오늘에서야 당연한 죄값을 치른 것이
다!"
그는 갑자기 눈에서 광이 번쩍이더니 곤륜파의 두 검객을 노려
보았다. 고칙성와 장도는 그의 눈빛을 접하자 안색이 백짓장처럼
변했다. 그러나 분연히 검을 뽑아쥐고 역시 그를 노려 보았다.
장취산은 사손이 순식간에 사대방파의 수뇌를 죽이고 이어 곤륜
의 제자에게까지 살수를 전개하려는 것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
다.
"사 선배님, 방금 죽인 몇몇 사람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선배님이 만약 불문곡직하고 닥치는 대
로 계속 살수를 전개한다면, 저들과 드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사손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날렸다.
"뭐가 다를 게 있냐고? 흥! 있고 말고! 난 무공이 고강하고 그
들은 무공이 약하다. 약육강식, 그게 바로 다른 점이다!"
"사람과 짐승이 다르다는 것은 옳고 그릇됨을 판별할 능력이 있
기 때문입니다. 만약 힘을 앞세워 약한 자를 누르려 한다면 짐승
과 다를 바가 뭐 있겠습니까?"
사손은 다시 광소를 터뜨렸다.
"이 세상에 진짜 옳고 그릇됨이 뚜렷한 일이 어디 있느냐? 알다
시피, 지금은 몽고 오랑캐가 황제 보좌에 앉아 죽이고 싶은 만큼
우리 한인(漢人)을 죽이고 있는데, 그들이 언제 너에게 옳고 그
릇됨을 내세웠더냐? 그들은 한인의 재산을 빼앗고 싶으면 빼앗고
한인 아녀자를 겁탈하고 싶으면 거침없이 겁탈해 왔다. 한인이
거기에 대항하면 두말 않고 죽여 버린다. 어제 너에게 옳고 그릇
됨을 논한 적이 있더냐?"
장취산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몽고인의 잔안무도함을 가리켜 금수라고 하지 않습니
까? 뜻있는 자들이 힘을 합쳐 언젠가는 오랑캐를 몰아내고 강산
을 다시 되찾게 될 겁니다!"
"예전에 우리 한인도 옳고 그릇됨을 분별한 줄 아느냐? 악비(岳
飛)같은 대충신이 왜 몽고종(蒙高宗)에게 죽어야 했으며, 진회
(秦檜)같은 천고의 간신이 무엇 때문에 높은 벼슬에 올라 부귀영
화를 누려야 했느냐?"
"남송(南宋)의 여러 황제가 간신을 중용하고 충신을 살해했기
때문에 끝내 우리의 금수강산을 오랑캐 손에 넘겨 주게 된 것이
아닙니까? 나쁜 씨앗을 뿌렸기에 나쁜 결과를 거둔 것입니다.
즉, 옳고 그릇됨을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핫... 선유선보(善有善報) 악유악보(惡有惡報) 이 말이렸다.
흐흐... 당치도 않은 소리야! 네가 말해 보아라. 당금 무림에 정
말로 선유선보 악유악보가 성립된다고 생각하느냐?!"
장취산은문득 삼사형의 경우가 뇌리에 떠올랐다. 삼사형은 일
생 동안 선덕을 베풀어 왔는데 결국 지금의 상황은 선보와 거리
가 멀지 않던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의 풍운을 예측할 수 없듯이 인간사를 점치기도 어렵습니
다. 우리가 단지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의 원칙하에 최선
을 다한다면 마음의 편안할 겁니다. 그 결과가 복이 되든 화가
되든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사손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둘렀다.
"소문에 듣기로 장삼봉 선생의 무공이 당세 으뜸이라기에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그의 제자인 네가 이다지도 생각하는 바가 고
리타분 하니 장삼봉도 별게 아닌 모양이다."
장취산은 그가 스승님을 모독하는 언사를 내뱉자 발끈했다.
"나의 은사께선 학예(學藝)가 천인(天人)이거늘, 어찌 당신과
같은 범부(凡夫)가 넘볼 수 있겠소!"
은소소는 얼른 그의 소매를 잡아끌며 참으라고 했다. 그러나 장
취산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대장부가 죽는 건 두렵지 않다. 하지만 스승님을 모독하는 것
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한데, 사손은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장삼봉 선생이 스스로 문파를 창시한 것으로 미루어, 필시 무
궁무진한것인 내가 영사만 못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
어쨌든 언젠가는 무당산으로 찾아가 한 수 가르침을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자, 그 전에 우선 네가 어떤 무공에 가장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 한 번 구경을 하고 싶다!"
드디어 그는 장취산에게 도전을 해온 것이다.
은소소는 사손이 장취산에게 도전을 해오자 경악을 금치 못했
다. 장취산의 무공도 물론 고강하지만, 사손과 격전을 벌인 자들
이 너나 할 것없이 모두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던가? 하
여, 장취산 역시 사손의 적수가 아님을 은소소는 누구보다 잘 아
고 있는 터라 얼른 나섰다.
"사 선배님, 도룡도는 이미 손아귀에 넣으셨는데 뭘 또 원하시
는 겨죠.....?"
사손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뜻밖에 질문을 던져왔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이 도룡도에 관한 전설을 알고 있느냐?"
"말로만 들었을 뿐이예요."
"이 도룡도는 무림지존(武林之尊)으로서 일단 이 도를 소지한
자는 천하를 호령할 수 있다는데, 대관절 이 칼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이 무엇이길래....."
"저 역시 그 비밀을 알고 싶어하던 참이었어요. 선배님께서는
견문도 넓으시니 어디 한 번 말슴해 주세요."
"유감스럽지만, 나 역시 그 비밀을 모른다. 때문에 이제부터 조
용한 곳을 찾아가 그 비밀을 캐고자 한다."
"사 선배님같이 견식이 넓으신 분이라면 쉽사리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줄로 믿어요."
"흐흐..... 물론 무공으로 따진다면 당금 무림에서 나를 능가하
는 사람이 극히 드물지. 하지만, 소림파의 장문인 공문(空聞)대
사와....."
그는 갑자기 말꼬리를 흐리면서 순간적으로 암울한 표정을 지었
다.
"..... 소림사의 공지(空智), 공성(空性) 두 분 대사, 무당파의
장삼봉 도장, 그리고 아미파와 곤륜파의 장문인 등등 한결같이
광세의 절학을 지니지 않으신 분이 또 어디 있겠느냐? 심지어 멀
리 서강에 있는 청해파와 명교의 좌우광명사자(左右光明使者)
들..... 흐흐, 모두가 일세(一世)를 호령할 수 있는 고수들이지.
그리고 낭자가 몸담고 있는 천응교의 백미응왕(白眉鷹王) 은 교
주도 나를 능가하는 광세의 고수지."
은소소는 즉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사손은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만약 백미응왕 은 교주가 여기에 있었다면 난 절대로 오
지 않았을 것이다."
사손은 이어 장취산과 은소소를 번갈아 둘러보더니 장탄식을 토
했다.
"문무(文武)와 수려한 용모를 겸비한 너희들을 죽인다는 것은
마치 천하의 둘도 없는 진귀한 보물을 없애는 것과 같이 아까운
일이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죽이지 않을 수가 없구나!"
은소소는 등골이 오싹했다.
"상황이 어때서요?"
"흐흐..... 이 몸이 도룡도를 손아귀에 거머쥐었다는 사실이 세
상에 알려져 살신지화(殺身之禍)를 초래할 것을 미연에 방지하겠
다는 것이다!"
여지껏 듣고만 있던 장취산은 끓어오르는 분노로 인해 전신에
심한 경련이 일었다.
"살인멸구(殺人滅口)를 하겠다는 말이군요."
"그렇다. 흐흐....."
사손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죽어도 여한이 없게 하기 위해 우리가 서로 공평하게
무공을 겨룰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원하
는 방법에 따라 주겠네. 무기, 내공, 암기, 경공, 어느 것이든
좋다."
은소소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흥, 굉장히 자신만만 하시군요. 어떤 방법을 제시해도 다 상대
해 주시겠다니 말이예요."
그녀는 비록 당당하게 쏘아붙였으나 눈앞이 캄캄했다. 무공으로
사손을 제압한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손은 냉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신이 있다. 자 서론은 그만 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우
리 단판 승부로 승패를 결정짓기로 하자. 물론 너희들이 지면 자
결을 해야 한다."
은소소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럼 승패에 따라 당신도 자결하는 거겠죠?"
사손은 여유만만했다.
"흐흐..... 그 문제라면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몸은 절대로
질 리가 없을 테니까."
"누가 또 알아요? 명문대가의 제자이신 장오협께서 당신을 제압
할 수 있는 무공 한 가지를 구비하고 있을지."
"그의 연륜으로 보아 제아무리 초절한 무공을 터득했다 해도,
공력만큼은 내 적수가 될 수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 상대가 안
된다는 거다."
장취산은 그들 두 사람이 입씨름을 하고 있는 동안 신속하게 머
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와 무승부라도 이룰 수 있는 무공이 없을까? 경공술? 아니,
새로 터득한 이십사자신공.....?'
다음 순간,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지나는 영기(靈杞)가 있었다.
"사 선배님께서 정히 저와 겨루시겠다면 하는 수 없죠. 하지만,
요행히도 제가 무승부를 이룬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손은 고개를 저었다.
"무승부는 있을 수 없다. 승부가 날 때까지 계속 겨루어야 하니
까."
"좋습니다. 그대신 제가 만약 선배님을 이기면 저의 부탁 한 가
지만 들어주시겠습니까?"
"알겠다. 그렇게 하마."
은소소는 크게 걱정되어 나직이 장취산에게 물었다.
"뭘 겨루겨는지 몰라도 자신 있으세요?"
장취산도 나직이 대답했다.
"지금으로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하는 수밖
에......"
"만약에 안 될 것 같으면 일찌감치 도망가기로 해요."
장취산은 씁쓸히 웃으며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내심 중얼거렸
다.
'배가 한 척도 남김없이 모두 파괴되었는데, 이 자그마한 섬에
서 도망가 봤자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는 곧 옷매무새를 바로 고치고 허리춤에서 쇠로 된 판관필을
뽑아 쥐었다.
사손은 약간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 너의 주무기인 호두구를 뽑지 않고 어찌하여 판관필을
꺼내는 거냐?"
장취산은 낭랑하게 웃었다.
"선배님과 무기를 겨루겠다는 것이 아니라 글로서 승부를 내고
자 함입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좌측 산봉우리 앞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바위 앞으로 걸어갔다.
다음 순간, 장취산은맑은 기합과 함께 온몸이 용수철에 튕기듯
허공을 솟구쳐 올랐다. 일 장(丈) 남짓 더 솟구쳐 오르는 동시
에, 손에 쥔 판관필로 바위에다 글을 새기기 시작했다.
"팍! 팍! 팍! 팍!......!"
암석이 깨져나가는 굉음이 들리는 가운데 순식가네 무(武)자를
새겼다. 한 글자를 새기고 나자 몸은 자연히 밑으로 가라앉기 시
작했다. 그는 번개처럼 은구(銀句)를 꺼내 바위 틈 바구니에 꽂
음으로서 몸을 지탱한 채 다시 림(林) 자를 새겼다. 무림(武林)
이라는 두 글자의 일필일획(一筆一劃)은 그야말로 용이 날고 봉
항이 춤추듯 웅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두 글자에 이어 지존(至
尊)이라는 두 글자도 새겼다. 그의 필속(筆速)은 갈수록 빨라지
면서 나중에는 속회가루가 허공을 난무하는 것만 보일 뿐 그의
형체마저 흐릿해졌다. 순식간에 스물 네 글자 중 봉(鋒)자의 마
지막 획을 마치고, 마치 솜털처럼 극히 경교(輕巧)한 신법으로
은소소 곁에 사뿐히 내려섰다.
사손은 바위에 새겨진 글을 주시했다.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
던 그는 마침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대단한 필력(筆力)이군. 내가 졌다."
바위에 새겨진 스물 네 글자의 일획들은 장삼봉의 신령(神靈)이
깃들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필일획에 무당파의 가장 정묘(精
妙)한 무공을 가미시켰던 것이다. 장삼봉의 진전(進展)을 이어받
은 장취산이니 그 필력이 어찌 출신입화(出神入化)의 경지에 이
르니 않았겠는가?
사손은 거기가지 미처 생각지 못하고, 다만 눈앞에서 전개 되었
던 도룡보도(屠龍寶刀)의 쟁탈전으로 인해 장취산이 무림의 오래
된 전언(傳言)을 몇 자 적어 본 걸로만 알았다. 만약, 장취산으
로 하여금 다른 글을 암석에 세기라고 했더라면 그 필력의 경지
가 과연 지금 것만 했을까? 천만에 말이다. 아마 반도 따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은소소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선배님께서 지셨으니 설마 딴소리를 하진 않겠죠?"
사손은 장취산을 넌지시 바라보며 말투가 좀전보다 부드러워졌
다.
"그래, 내게 부탁하고자 하는 일이 뭔가?"
"섬이 있는 모든 사람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겁니다. 그 대신 선
배님이 도룡도를 가져 갔다는 비밀은 절대 누설하지 않겠다고 다
짐을 받아가시면 죄지 않겠습니까?"
"흐흐..... 내가 다짐 따위만 받고 떠날 바보로 보이는가?"
은소소가 앙칼지게 끼어들었다.
"그럼 약속을 어기시겠단 말인가요?'
"흐흐..... 내가 어기겠다는데 누가 감히 뭐라 한단 말이냐?"
그러나 아무래도 경우에 어긋나는 것 같아 말머리를 돌렸다.
"물론 너희 두사람의 목숨만은 살려줄 수 있지. 그 밖의 사람은
절대로 안 된다."
장취산은 급히 말을 이었다.
"곤륜파의 두 검사는 명문대가의 제자로서 평생 악행(惡行) 한
번 저지른 적이 없는데....."
사손은 대뜸 말을 가로챘다.
"악행이고 선행이고 간에 나와는 상관 없으니, 너희들은 어서
옷자락을 찢어 귀를 틀어막고 두 손으로 귀를 꼭 누르고 있어라.
생사가 걸린 일이니 어서 서둘러라!"
행여나 누가 들을까 봐 음성은 극히 나직했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급히 그의 말대로 귀를
틀어막았다.
다음 순간, 사손이 입을 크게 벌렸다. 무슨 장소(長嘯)를 토하
고 있는 듯 싶었다. 두 사람 "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돌연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온몸에 심한 경련이 일었다. 순간, 아!
천응교, 거경방, 해사파, 신권문 등 각 문파의 사람들은 하나같
이 입을 벌린 채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게 아닌가! 마치 온
몸에 심한 고문을 당하듯.....
순식간에 모든 문파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며 온몸을 뒤
틀며 몸부림쳤다. 일각이 지날 즈음에서야 사손은 입을 다물고
장소를 멈추었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비로소 귀를 틀어막은 헝겊을 뺐다. 사손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들은 내 사자후(獅子吼)에 모두 정신 착란증을 일으켜 다시
는 과거지사를 기억하지 못할 거다. 어떤가? 이만하면 자네의 부
탁대로 모두 살려준 셈이지?"
장취산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이건 죽이는 것보다 더욱 잔인하지 않은가?'
한편으로는 사손의 위력적인 사자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손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 가세."
"어디로 가는 겁니까?"
"돌아가야 할 게 아닌가? 모든 일이 해결됐는데."
장취산과 은소소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힐끗 보며 똑같은
생각에 잠겼다.
'같은 배를 타고 가는 동안에 또 무슨 변고를 당할지.....'
이윽고, 그들은 섬 서쪽에 있는 한 작은 산 뒤에 도착했다. 돛
이 세 개 달린 배 한 척이 해변에 정박해 있었다. 사손은 배 가
까이 다가가더니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말하는 게 아닌가!
"먼저 승선을 하시지요."
실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은소소는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흥! 갑자기 왜 그렇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시죠?"
"내 배에 오른 손님인데 어찌 소홀함이 있을 수 있겠소?"
사손의 언동은 광인(狂人)처럼 시시각각으로 변해 실로 종잡을
수 없었다. 그들이 배에 오르자 사손은 즉시 배를 촐발 시키라고
손짓했다. 배에는 모두 열 일곱 명의 타수가 있었다. 그런데 타
(舵)를 잡고 있는 노인에게 명령을 내릴 때마다 사손은 시종 손
짓발짓만 할 뿐 벙어리처럼 한 마디도 내뱉지 않는게 아닌가!
은소소는 즉시 뭔가 알아차리고 비꼬듯이 한 마디 내뱉었다.
"귀머거리와 벙어리들만 골라서 배를 태우다니 정말 재주도 좋
군요."
사손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야 간단하지. 글을 모르는 타수들만 골라서 그들의 귀를 멀
게하고 다시 벙어리가 되는 아약(啞藥)을 먹이면 간단하게 되는
일 아닌가?"
사손의 잔인성에 장취산은 절로 치가 떨렸다. 배는 파도를 가르
며 미끄러지듯 바다로 항진했다.
장취산은 자신의 지금 처지가 너무 어처구니없다는 걸 절감했
다. 그도 그럴 것이, 강호 무림에서 그 누구도 감히 얕잡아보지
못한 무당칠협 중의 한 명인 그가 오늘날에 와서 남의 손에 의해
이리저리 조종되고 있으니 어찌 통탄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장취
산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울화가 치밀어 미칠 것만 같았
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장취산은 다소 마음이 가라앉으면
서 창 밖에 펼쳐 있는 망망대해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석양이 기
울면서 수면은 온통 황금빛 물결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순간 장
취산은 깜짝 놀랐다.
'아니, 석양이 왜 배의 후미로 기울지?'
그는 즉시 고개를 돌려 사손에게 물었다.
"혹시 방향을 잘못 잡으신 게 아니오? 배가 동쪽을 향하고 있습
니다."
사손은 알고 있다는 듯 침착하게 대꾸했다.
"천만에, 이 배는 처음붙 동쪽을 향하고 있었네."
이 말에 더욱 놀란 것은 은소소였다.
"동쪽이라면 망망대해뿐인데 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거예요? 어
서 뱃머리를 돌리라고 하세요."
"좀전에 그 섬에서도 말했듯이 이 도룡보도가 간직하고 있는 비
밀을 캐내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아가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러자면 망망대해에서 인적이 닿지 않는 작은 섬을찾아나설 수밖
에 더 있겠는가?"
"그럼 우선 우리를 중원으로 보내줘야 되잖아요?"
"흐흐..... 자네들이 중원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나의 행적이 금
방 누설될 게 아닌가?"
장취산은 벌떡 일어서며 다그쳤다.
"그렇다면 대관절 우리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미안하지만 나와 함께 가야겠네."
"도룡보도의 비밀을 캐낼 때까지 말이오?"
"흐흐..... 그야 물론이지."
"평생이 걸리지도 모르지 않소?"
"그럼 평생도록 나와 함께 있어야지. 그러나 자네들은 아무 걱
정할 필요가 없을 걸세. 그곳에서 혼례를 올리고애를 낳고 오손
도손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 말일세. 불쌍하고 고독
한 건 오로지 나뿐이지....."
"닥치지 못하겠소!"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장취산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한편 은소소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고 있었
다. 우연치 않게 그녀의 표정을 읽게 된 장취산은 내심 뜨끔했
다. 은소소 같은 절세의 미모를 갖춘 여인과 오래 있다 보면 마
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손 같은 강적까지 목전에 두고 있는 급박한 상황이 아닌가? 그
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빠져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일단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사 선배님, 내 하늘을 두고 맹세컨데 절대로 선배님의 행적으
누설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장오협의 협명(俠名)은 일찌기 들어서 알고 있는 바일세. 하지
만 나도 스물 여덟 살 되던 해에 하늘을 두고 맹세한 적이 한 번
있었지. 이 손가락 좀 보게나."
그는 왼손을 내밀었다.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사손은 암울하면
서도 옛 기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 해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있는 사람에게 속아 부
모님은 물론, 처잣기까지 모두 살해당했었지. 그로 인해 다시는
사람을 믿지 않기로 맹세한 것이네. 그리고 십 삼년이 흐르는 동
안 짐승을 믿었으면 믿었지. 절대로 사람은 믿지 않았네."
장취산은 비로소 사손이 정사(正邪) 군웅을 막론하고 모두 증오
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동정심
마저 일었다.
"그럼, 피맺힌 원한을 갚으셨습니까?"
"아직 갚지 못했네. 내 실력으로는 도무지 그의 적수가 될수 없
기 때문이네."
"네?"
장취산과 은소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선배님보다 더 고강한 무공을 지닌 자가 누굽니까?"
"흐흐..... 내 자존심에 관한 일이라 말해 줄 수가 없네. 만약
에 피맺힌 원한만 아니었다면, 도룡보도를 탈취하려고 이 고생도
하지 않았을 걸세."
그는 말을 끝내는가 싶더니 장취산을 보며 다시 이어 나갔다.
"장소협, 내 자네를 처음 대면하는 순간부터 웬지 모르게 죽이
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네.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도룡보
도의 비밀이 밝혀지는 그 날 어쩔 수 없이 자네를 처치해야겠네.
그 때 가서 너무 나를 원망하지 말게나. 나는 기필코 원한을 갚
아야만 되니까..... 자, 이제 그만 자세."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오장육부마저 토해 버릴 것 같은 고
통과 절망에 찬 장탄식을 했다. 이윽고, 촛불이 꺼지면서 사위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속에 파묻혔다. 간간이 파도 소리만 들려올
뿐.....
바닷바람이 제법 쌀쌀하게 불어닥쳤다. 은소소는 옷을 얇게 입
어 매서운 바닷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약간씩 움츠리는 것 같았
다. 이를 보다못한 장취산이 나직이 물었다.
"춥소?"
"괜찮아요."
장취산은 넌지시 장포를 벗었다.
"몸에 걸치고 있으면 한결 나을 거요."
은소소는 고마와 어쩔 줄을 몰랐다.
"당신도 추울 텐데....."
"나는 괜찮으니 어서 걸치도록 하시오."
은소소는 마지못해 장포를 받아들고 어깨에 걸쳤다. 장취산의
은은한 채취와 따스한 체온이 한꺼번에 가슴에 안겨오는 것 같았
다. 그녀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장취산은
오직 이곳을 빠져 나가야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이 궁리 저 궁
리 하다가, 결국 극단적인 결단을 내리기에 이르렸다.
'사손을 죽이지 않는 한, 절대로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사손은 잠이 깊이 들었는지 규칙적
으로 코를 골고 있었다.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그가 이렇듯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
을까? 혹시 위장술이 아닐까? 다소 위험 부담이 있지만 지금으로
서는 모험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이 여기에 이른 장취산은 천천히 은소소에게 다가가 귀속말
로 이 일을 상의하려고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은소소 역시
때마침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자연히 두 사람의
간격이 좁혀지면서 장취산의 입술이 그녀의 오른쪽 뺨에 맞춰졌
다.
장취산은 크게 당황하여 어떻게 해명을 해야 될지, 몸둘바를 몰
랐다. 은소소는 장취산의 당황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짜릿한
환히에 젖어 슬며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지금 심정 같
아서는 망망대해가 아니라 하늘끝이라도 장취산과 함께라면 만사
를 제쳐놓고 따라갈 용의가 있었다.
이때, 그녀의 귓가에 장취산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은 낭자, 방금 내가 실수한 걸 나무라지 않으시겠죠?"
은소소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앵두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당신만 좋다면 저는 무엇이든지 해드릴 수 있어요."
은소소는 평소 살인을 밥먹듯이 즐기는 여마(女魔)였으나 막상
남녀지간의 애정 문제에 봉착하게 되자, 어느 요조숙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었다.
이쯤되자 당황한 쪽은 오히려 장취산이었다. 사과하는 의미에서
내뱉은 한 마디가 오히려 상대방의 열정을 유발하게 만들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장취산도 혈기 왕성한 젊은이인지
라,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에 차츰 동요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우기 지금 이 순간 은소소의 부드러우면서도 감미로운 체취가 코
끝을 자극하자 장취산의 가슴에 야릇한 격랑을 일으키게 했다.
장취산은 걷잡을 수 없는 격정에 휘말려 자신도 모르게 은소소의
뜨거운 몸을 왈칵 끌어 안았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은소소는
더욱 깊숙이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영원히, 아주 영원히....."
"......."
장취산은 은소소의 도발적인 열정에 도취되어 할 말을 잊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장취산은 마치 예리한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취산아! 어찌하여 이리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느 것이냐? 사부
님께서 가르치신 교훈도 모두 잊었단 말이냐? 어서 정신을 차려
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취산은 즉시 자세를 바로잡고 나직이
은소소에게 속삭였다.
"우리가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저 자부터 처치해야 하
오."
황홀경에 도취해 있던 은소소는 이 한 마디에 넋을 잃고 말았
다.
"뭐라고 하셨죠?"
"저 자를 처치해야 된단 말이오. 그렇다고 잠자고 있는 자를 기
습 공격할 수도 없고 하니, 내가 깨워서 정면 대결을 할 때 낭자
는 기회를 봐서 은침(銀針)을 발사해 주기 바라오. 지금으로서는
그 길만이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오."
바로 이때, 돌연 뒤편에서 우뢰와 같은 광소가 터졌다.
"으핫핫핫......! 내가 잠들어 있을 때 기습을 가했다면 몰라도
이제는 틀렸네. 명문 정파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기습을
가하지 않은 것부터가 큰 실수였네."
말이 끝나는 것과 함께 사손의 거대한 몸이 허공을 가르며 장취
산에게 덮쳐왔다.
장취산은 일찌감치 진기를 끌어모아 방어를 하고 있었기 때문
에, 즉시 사문의 절기인 면장(綿掌)으로 대응했다.
"파지직.....!"
전류가 흐르듯 굉음이 울리면서 사손의 장력이 태산처럼 압도해
왔다. 장취산은 애당초 상대방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직감하고
오직 수비를 펼치기로 작정했다. 무당파의 무공은 면밀하기로 정
평이 나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무공 차이가 판이한 데도 불
구하고 사손은 장취산을 금방 궁지로 몰아놓을 수가 없었다.
사손은 오기가 뻗쳐 집요하게 공격을 펼쳤다. 순식간에 배안은
온통 소용돌이치는 기운으로 인해 질식할 것만 같았다. 장취산은
방어하는데 급급하여 전신에 비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자연히 사
간이 흐를수록 더욱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왜 낭자는 은침을 발사하지 않는 걸까?설령 적중시키지 못한다
해도, 일단 은침만 발사하면 사손이 공격을 멈추고 방어 자세를
취할 것이고, 그 순간을 이용하여 그를 제압해야 하는데.....'
바로 이때, 은소소가 황급히 외쳤다.
"사 선배님, 어디든 따라가겠으니 제발 좀 공격을 멈추세요. 앞
으로 다시는 딴 생각하지 않을께요."
사손은 조금도 공격을 늦추지 않고 장취산에게 다그쳤다.
"장소협,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장취산은 결코 승복할 수 없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내심 외
쳤다.
'은 낭자! 어서 은침을 발사하시오! 지금이 바로 절호의 기회인
데, 어찌 쓸데없이 말만 늘어놓는 거요?'
그는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이를 보다못한 은소소는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사 선배님, 제발 부탁이니 어서 공격을 멈추세요. 선배님이 시
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어서요!"
"흐흐..... 그게 정말인가?"
"물론이예요. 제발....."
"좋아! 장오협에 대한 은 낭자의 절실한 마음을 봐서라도 이번
만은 용서해 주지."
사손은 광소를 터뜨리며 장력을 거두었다.
장취산은 기진맥진하여 간신히 창가에 기댄 채 버티고 서 있었
다. 은소소는 급히 화석을 밝혀 장취산에게 다가갔다. 장취산의
안색은백지장같이 창백했다. 은소소는 내심 움찔하며 황급히 장
취산을 부축해 주었다.
사손은 냉소를 흘렸다.
"과연 무당파의 제자답게 끈질긴 면이 있군."
장취산은 다소나마 긴장이 풀려선지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 지면
서 온몸이 축 늘어졌다. 이를 보다못한 은소소는 다짜고짜 사손
에게 덮쳐갔다.
"살인마! 목숨을 걸고서라도 당신을 죽이고 말겠어요!"
장취산은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순간, 장취산의 몸이 기
우뚱하더니 뒤로 나딩굴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앗!"
"악!"
사손과 은소소가 번갈아 경악의 외침을 토했다. 어디 그뿐인가?
때마침 광풍이 휘몰아치고 거센 파도가 뱃전을 강타했다.
후우우우----- 콰르르르..... 꽝!
장취산의 온몸이 갑자기 차가운 물에 잠기면서 코와 입 속으로
짜디짠 바닷물이 스며들었다. 혼미해 가던 장취산은 반사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혹시 배가 침몰한 게 아닐까?'
장취산은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광풍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몸 주위는 온통 성난 파도가 용트
림하고 있었다.
이때, 사손의 다급한 일갈이 들려왔다.
"장소협! 빨리 선미(船尾)로 가서 타(舵)를 잡아주게나!"
다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갈은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장취산은 지체하지 않고 선미로 몸을 날렸다.
이 무렵, 배에 동승했던 타수들은 하나같이 거센 파도에 휩쓸려
성난 바다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그러나 장취산은 달랐다. 제
아무리 집채만한 파도가 휘몰아치고 배가 요동해도 그의 몸은 마
치 배에 말뚝이 박힌 듯이 끄떡도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그는
선미로 돌아가 타를 움켜잡았다.
콰르르르, 쾅쾅!
요란한 굉음이 터지면서 세 개의 돛대 중 중앙에 있는 것과 전
방에 있는 것이 뚝! 부러지며 파도에 의해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삼켜버렸다. 이어, 낭아봉(浪牙棒)을 움켜쥔 사손의 모습이 파도
사이로 드러났다. 돛대 역시 사손이 절단시킨 것이다. 폭풍의 영
향을 덜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손은 번개처럼 뒤편에 있는 돛대로 다가가 돛을 거두려고 했
으나 그것마저 광풍 폭우로 인해 찢겨져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사손은 어쩔 수 없이 후미의 돛대마저 부러뜨리고 말았다. 돛대
가 모두 없어지자 그야말로 폭풍과 파도가 이끄는 대로 흘러갔
다.
장취산은 비로소 은소소가 보이지 않음을 발견하고 큰소리로 외
쳤다.
"은 낭자! 은 낭자!"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으나 외침소리 가운데 간간이 곡성이
섞여 있는 듯했다. 돌연, 누군가 장취산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때마침 거대한 풍랑이 휘몰아쳐 왔다.
쏴아.....
장취산은 재빨리 중심을 잡고 풍랑이 물러가기를 기다렸다. 갑
자기 나약하면서도 부드러운 손길이 뒤에서 장취산의 목을 휘어
감으며 간드러지게 말했다.
"장상공, 그렇게도 제가 걱정스러웠나요?"
바로 은소소의 목소리였다. 장취산은 은소소에게 아무 탈도 없
자 크게 기뻐하며 즉시 왼손으로 그녀를 꼭 껴안았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은소소는 장취산의 깊은 관심에 한없이 행복감에 젖었다.
"장상공, 죽더라도 우리 같이 죽어요."
"물론이오."
그들이 이렇듯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동안에도 폭풍을 동반한
파도가 태산이 압도해 오듯 줄줄이 엄습해 왔다. 장취산도 오직
은소소를 보호해야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제아무리 좌우에서 노
도가 휘몰아쳐도 타를 굳게 움켜잡은 체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 무렵, 배에 탔던 귀머거리와 벙어리 타수들은 이미 모두 해
일에 휘말려 바다 깊숙이 가라앉고 말았다. 아무런 조짐도 없이
갑자기 광풍 폭우가 휘몰아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해저에서
돌연 지진이 발생하는 것과 동시에 기류가 소용돌이 치면서 해일
이 돌발한 것이었다. 만약에 사손과 장취산이 초절한 무공을 지
니지 않았다면 역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상당히 견
고했던 배는 아예 이미 풍지박산이 되어 초라하기 이를데 없었
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에 먹구름이 짙게 깔리고 폭우까지 몰아치
고 있으니 도무지 방향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아니, 설령 방향
을 간파했다. 하더라도 돛대를 모두 부러뜨렸으니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배를 몰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사손은 무심하게 요동
하는 선체(船體)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림이 없이 선미로
걸어왔다.
"장소협, 정말 잘했네. 이제부터 내가 조종할 테니 자네들은 선
실로 들어가서 좀 쉬게나."
장취산은 은소소를 부축하고 조심스럽게 선실로 들어갔다.
배는 거센 파도로 인해 하늘 높이 치솟는가 하면 금새 또 끝없
이 깊은 계곡으로 빠져들 듯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장취산
과 은소소는 아까 그 절대절명의 위기도 넘긴 몸들이라 결코 대
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은소소는 장취산의 품안에 안긴 채 나직
이 속삭였다.
"우리들이 죽지 않고 살아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당신과 헤어지
지 않겠어요."
"나 역시 동감이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말이오."
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으며 오히려 오늘 이 무서운 해일이
일어난 것을 감사했다. 해일은 세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비로소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먹구름도 천천히 걷히면서 명월(明月)
이 새하얀 얼굴을 드러냈다. 장취산은 선실에서 나와 선미로 갔
다.
"사 선배님, 이제 좀 쉬시지요."
사손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닐세. 이제부터 우리의 목숨은 저 망
할 놈의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네."
신성한 하늘을 망할 놈의 하늘이라고 욕할 정도로 사손은 세상
모든 것을 증오하고 있었다. 사손은 곧 장탄식을 토하더니 장취
산에게 타를 넘겨 주고 선실로 들어가 쉬었다.
은소소는 장취산 곁에 앉아 밤하늘의 은하수를 올려다보았다.
북극성이 보였다. 그리고 배도 해류를 따라 북으로 향하고 있었
다.
"상공, 이 배는 쉬지 않고 북으로 흐르고 있는데요."
"그러게 말이오. 서쪽으로만 돌일 수 있다면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은소소는 잠시 무슨 생각엔가 잠기더니 물었다.
"만약에 이 배가 끊임없이 동쪽으로 향한다면 어디에 도착하게
될까요?"
"끝없는 망망대해뿐이겠지. 그건 그렇고, 앞으로 칠팔 일만 이
대로 떠내려가다가는 마실 물까지 떨어지게 생겼는데....."
은소소는 난생 처음으로 사랑이 뭔지 알게 된지라 자질 구레한
일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오직 행복한 앞날만을 설계하고 있
었다.
"옛 선인들의 말에 의하면, 동해 바다에 장생불로의 신선들이
살고 있는 신선도(神仙島)가 있다는데, 어쩌면 우리가 그 신선도
에 닿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은하를 우러러보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또 은하계까지 흘러들어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
나는 광경도 목격하게 될지 누가 알아요?"
장취산은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그리고 우리가 이 배를 견우에게 주면, 꼭 칠석날
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직녀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게 아니오?"
"견우에게 배를 줘 버리면 우리가 만날 때는 뭘 타고 만나죠?"
"하하.....! 우리는 언제까지나 같이 있을 텐데, 그까짓 배가
있어봤자 무슨 쓸모가 있겠소?"
"아, 정말 그렇겠군요."
은소소는 한 송이 해당화처럼 얼굴을 붉히며 장취산의 손을 어
루만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실 그들 사이에는 말이 필요없었다. 눈
빛만으로도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
런데 은소소는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암울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아니, 갑자기 왜 그러시오?"
은소소는 침통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승에서는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지만, 저승에 가게 되면 당
신은 천당에 가겠지만, 저는..... 저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
거예요."
"당치 않은 소리!"
"아니예요. 제가 저지른 죄는 저 자신이 더 잘 알아요. 무고한
사람을 수도 없이 많이 죽였거든요."
장취산은 비로소 은소소의 본바탕은 그리 악랄하지 않음을 깨달
았다.
"옛말에도 있듯이, 잘못을 알고 뉘우칠 줄만 안다면 어떠한 죄
과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소. 앞으로 개과천선하여 공덕을 많
이 쌓기만 하면 되오."
이때 난데없이 사손의 냉소가 들려왔다.
"흐흐.....! 그야말로 하늘이 정해 준 선남선녀의 뜨거운 만남
같군. 그러다가 두 사람 몸에 불이라도 붙는 날에는 어쩔려고 그
리 가까이 붙어 있소. 하하하.....!"
은소소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면서 외쳤다.
"도둑 고양이처럼 훔쳐 보기예요?"
"자네들이 스스로 내게 보여 주었지, 언제 내가 훔쳐 봤단 말인
가?"
은소소와 장취산은 서로 얼굴을 붉히며 할 말을 잃었다.
다음날 여명이 틀 무렵, 사손은 낭아봉으로 열네 근짜리 고기
한 마리를 잡았다. 낭아봉에는 갈쿠리 같은 가시가 달려있었기
때문에 고기를 잡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살아 있는 생선이라 몹
시 비릿했지만, 이틀을 꼬박 굶은 그들이라 이것저것 가릴형편
이 아니었다. 허겁지겁 먹다 보니 순식간에 생선 한 마리가 가시
밖에 남지 않았다.
해류는 계속해서 북으로 흘렀다. 밤에는 항상 앞쪽에서 북극성
이 반짝거렸고, 해는 우측에서 떠올라 배의 좌측으로 기울었다.
어느덧 십여 일이 흘러가고, 배는 변함없이 계속 북으로 향했
다.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사손과 장취산
은 내공이 심후하여 어느 정도 견디어 냈으나, 은소소는 갈수록
수척해졌다. 장취산과 사손은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입혔으나 역
시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며칠만 더 북쪽으로 흘러갔다가는 얼어
죽기 십상이었다. 그래도 은소소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억지
로 웃음을 지으며 혹한을 견디어 냈다. 장취산은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지 않은가.
이날, 어디선가 갑자기 한 무리의 바다사자들이 배로 몰려왔다.
사손은 두 눈이 반짝 빛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낭아봉을 휘둘러
바다사자 몇 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바다사자들의 가죽을 벗겨
냈다. 삽시간에 훌륭한 가죽 외투가 완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바
다사자의 살코기는 맛 또한 일품이라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이날 밤, 포식을 하고 세 사람은 선실에 앉아 한가로이 잡담을
나누었다. 은소소는 함박꽃처럼 활짝 웃으며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짐승이 뭐죠?"
장취산과 사손은 이구동성으로 대꾸했다.
"그야 물론 바다사자지."
바로 이때,
딩동! 딩동.....!
아주 맑고 청아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일순간 모두 넋을
잃고 귀를 기울였다.
딩동! 딩동.....!
"아! 이건 얼음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네."
사손은 안색이 크게 변하면서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낭아봉
으로 바닷물을 한 번 휘저어 보니 과연 딱딱한 얼음 조각들이 부
딪혔다. 그들은 하나같이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대로 계속 북쪽
을 향해 흘러간다면, 나중에는 얼음조각이 아니라 거대한 빙산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밤은 딩
동! 딩동! 하는 소리에 잠 한숨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상오가 되자 주먹만한 얼음조각들이 뱃전에 부딪히기 시
작했다. 사손은 조만간 바다 전체가 얼음으로 꽁꽁 얼어붙어 끝
내는 배마저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것임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는 몹시 씁쓸히 웃었다.
"도룡보도의 비밀을 캐려다가 오히려 내가 먼저 죽고 말겠군."
사손은 갑자기 도룡도를 번쩍 들면서 한 맺힌 음성으로 외쳤다.
"에라! 너도 용궁으로 들어가 영원히 잠들거라!"
그는 냅다 도룡보도를 바다 속으로 던져 버리려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아쉬운지 장탄식을 토하더니 결국 도룡보도를 내려놓고
말았다.
다시 나흘이 흘러갔다. 집채만한 얼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최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
로 이날 밤, 돌연 쿵! 하는 굉음과 함께 선체가 심하게 진동했
다. 사손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기어이 빙산에 충돌하고 말았군."
장취산과 은소소는 서로를 꼭 껴안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뼈
를 애는 듯한 바닷물이 발밑으로부터 천천히 침투해 들어오기 시
작했다. 순식간에 발목까지 차 올았다. 배 밑부분에 구멍이 뚫린
게 틀림없었다.
사손이 급히 외쳤다.
"어서 빙산으로 뛰어 오르게! 죽을 때 죽더라도 최선을 다해 봐
야 할 게 아닌가!"
장취산과 은소소는 즉시 뱃머리로 나갔다. 앞쪽에 거대한 빙산
이 하나 놓여 있었다. 달빛을 받은 빙산은 온통 시퍼런 빛이 반
사되고 있어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사손은 이미 빙산 한 귀
퉁이에 서 있었다. 은소소와 장취산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빙
산으로 뛰어올랐다. 배는 순식간에 침몰하고 말았다.
빙산은 작은 동산만했다. 길이가 이십여 장, 너비가 열 장 정도
되어 그들이 타고 온 배보다 훨씬 컸다. 사손은 허공을 향해 마
음껏 소리를 한 번 지르고 나서 말했다.
"오랫 동안 그 좁은 배에만 있다가 넓은 빙산에 나오니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군."
그는 산책이라도 하듯 유유자적하게 거닐었다. 빙산은 거울처럼
미끄러웠으나 사손의 걸음걸이는 평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빙산은 풍향과 수류에 따라 계속 해서 북으로 표
류해 갔다.
다시 칠팔 일이 흘러갔다. 낮에는 강렬한 햇빛이 빙산에 반사되
어 그들은 하나같이 까맣게 그을렸다. 심지어 눈까지도 그 반사
되는 빛에 의해 아리고 쑤셨다. 이리하여 그들은 밤과 낮을 거꾸
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낮에는 바다사자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자다가, 밤이 되면 일어나 생선을 잡아 굶주린 배를 채우며 활동
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북으로 갈수록 낮이 점점 길어지
고 밤이 짧아졌다. 나중에는 매일같이 열 한 시진이 낮이고, 밤
은 단 한 시진밖에 안 됐다. 자연히 활동할 시간이 그만치 줄어
들 수밖에 없었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차츰 수척해지면서 지칠
대로 지쳤다. 이와 반면에 사손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뿐
만 아니라 날이 갈수록 그의 두 눈에선 이상 야릇한 광채가 강하
게 번뜩이며 하늘을 향해 오만가지 욕설을 퍼부어 댔다. 심중의
원독(怨毒)이 극에 달한 듯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바다사자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자던 장취산
은 비몽사몽 간에 홀연 은소소의 경악에 찬 외침을 들었다.
"제발 놔주세요! 제발이요.....!"
장취산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빙산 저 편에
서 사손이 은소소의 허리를 끌어안고 욕정에 굶주린 음마처럼 마
구 입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장취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벼락
같은 호통을 쳤다.
"썩 그손을 떼지 못하겠소?"
사손은 음산하게 외쳤다.
"이 간악한 놈아! 네놈이 내 처와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오늘
네 처를 목 졸라 죽이겠다."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왼손으로 은소소의 목을 조르려 했다.
"앗!"
은소소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장취산 역시 대경실색했다.
"나는 당신의 원수가 아닐 뿐더러 당신의 처를 죽이지도 않았
소! 사 선배님,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나는 무당파의 장취산
이지, 원수가 아니란 말입니다."
사손은 약간 멈칫하더니 다그쳤다.
"그럼 이 여인은 누구냐? 네 마누라가 아니냐?"
"그녀는 은 낭자요."
사손은 돌연 두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그가 누구든 간에 내 아내와 어머님이 피살당한 댓가로 이 세
상 여인들을 모두 죽여 버리겠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다시 은소소의 목을 졸랐다. 은소
소는 즉시 호흡 장애를 느끼며 외마디 신음조차 낼 수 없었다.
장취산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전광석화처럼 몸을 날려 사손의 등
을 공격했다. 사손은 기다렸다는 듯이 왼손으로 일장을 응수했
다.
펑! 우르르.....!
두 가닥의 장력이 충돌하면서 장취산의 몸이 약간 뒤로 밀렸다.
워낙 빙판이 미끄러워 장취산은 발끝이 삐끗하면서 그대로 넘어
지고 말았다. 사손은 조금도 공격을 늦추지 않고 오른발을 뻗어
왔다. 장취산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빙판을 짚
고 몸을 일으키는 동시에 사손의 무릎쪽 혈도를 찍어갔다. 그러
자 사손은 돌연 오른발을 거두면서 오른손으로 장취산의 머리를
내리쳤다.
이때를 놓칠새라, 은소소는 몸을 돌려 왼손으로 사손의 뒤통수
를 후려쳤다. 사손은 은소소의 기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장취산의 머리를 향해 장력을 집중시켰다. 장취산은 다급한 나머
지 쌍장으로 맞부딪쳐 갔다.
펑.....!
빙산이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장취산은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
다. 진기마저 끌어모을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때, 은소소의 일장이 정확하게 사손의 뒤통수를 적중시켰다.
그러나 사손은 끄떡도 하지 않고 오히려 은소소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사손은 두 눈이 붉게 충혈되면서 살기등등하게 은소소를
노려보았다. 은소소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엉금엉금 기면서 다시
뒤로 물러섰다.
바로 이때, 눈앞이 번쩍 하며 북쪽에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기
이한 광채가 발산되었다. 황금빛 한 줄기 엷은 자색이 뒤섞인 신
비스러운 광채였다. 돌연, 그 자색이 점점 짙어지면서 길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자색에서 금광(金光), 남광(藍光), 녹광(綠
光), 홍광(紅光)들이 한 줄기씩 뻗쳐나왔다.
"아니.....!"
사손은 두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은소소를 제쳐두고 그 찬란한
광채에 넋이 빠지고 말았다. 알고 보니, 그들은 어느덧 북극에
가까이 도달해 있었고, 이 광채는 바로 북극의 기경(奇景)인 북
극광(北極光)이었다. 장취산은 때를 놓칠세라 재빨리 몸을 날려
은소소를 구출해 냈다. 이날 밤, 사손은 북극광에 정신이 팔려
더 이상 아무런 발광도 하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이 되자 사손은 예전처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어
젯밤에 발광한 사실조차 잊었는지 언행(言行)이 무척 부드럽고
자상했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똑같은 생각에 잠겼다.
'부모님과 처자를 모두 살해당했으니 충격도 컸겠지. 그런데 그
의 원수가 대체 누굴까?'
그들은 생각만으로 끝냈다. 자칫 그얘기를 잘못 들춰냈다가 또
다시 발광하는 날에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며칠 동안은 아무 탈없이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피빛 석양이 서해 수평선에 걸린 채 전혀 기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를 보다못한 사손이 벌떡 자리를 박차
고 일어나 석양을 향해 삿대질하며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석양까지 나를 놀리다니, 에잇! 이 망할 놈의 석
양아!"
그는 돌연 빙산에서 주먹만한 얼음 조각을 깨뜨려 손에 집어들
고 석양을 향해 힘껏 던졌다. 얼음 조각은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
럼 슥! 하고 이십여 장쯤 날아가더니 바다에 떨어졌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사손의 엄청난 완력에 새삼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정말 대단한 팔 힘이군. 우리 같았으면 반도 못 던졌을 텐
데.....'
사손은 하나를 던지고 나서 연달아 칠십여 개를 더 던졌으나 날
아가는 속도는 처음과 비교하여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
무리 얼음 조각을 던져도 석양과 엄청난 간격을 두고 바다에 떨
어지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나머지 발로 빙산을 마구 찼다.
그의 발이 닿는 빙산마다 얼음조각이 산산조각이 나며 사면 팔방
으로 흩날렸다.
은소소는 급히 만류했다.
"사 선배님, 그까짓 석양에 신경쓰지 마시고 좀 쉬세요."
사손은 쓱 고개를 돌려 은소소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온통
피빛으로 충혈되어 있었다. 은소소는 내심 움찔하며 억지로 웃음
을 지어보였다. 돌연, 사손이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번개처럼
몸을 날려 단번에 은소소를 부둥켜잡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죽어라! 이놈아! 내 부모와 처자를 죽인 댓가다!"
장취산은 급히 앞으로 다가가 사손의 팔을 풀려고 했으나 꼼짝
도 하지 않았다. 은소소는 이미 혀를 길게 늘어뜨린 채 절명 직
전까지 다달아 있었다.
장취산은 다급한 나머지 다짜고짜 사손의 등마루 정중앙에 위치
한 신도혈(神道穴)을 내리쳤다. 한데, 이 일장은 마치 철석(鐵
石)에 적중된 듯 튕겨져 나오는 게 아닌가? 사손은 오히려 더 세
게 은소소의 목을 졸랐다. 장취산은 즉시 판관필을 꺼내 사손의
왼손 소해혈(小海穴)을 찍었다. 사손은 심한 통증을 느끼면서 비
로소 손을 풀게 되었다.
은소소는 숨 돌릴 사이도 없이 급히 사손의 품에서 벗어났다.
사손은 왼손으로 장취산의 목을 치는 한편, 오른손으로 은소소의
어깨를 나꿔잡으려고 뻗쳤다. 장취산은 사손의 공격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에 그가 피했다가는 은소소
가 결국 다시 잡힐 게 뻔했기 때문이다.
장취산은 지체하지 않고 면장(綿掌) 중의 일초인 자재비화(自在
飛花)를 전개해 사손의 장력을 다소나마 둔화시킬 의도였다. 그
런데 장취산의 장력이 사손의 장력과 충돌하는 순간, 굉장히 강
력한 흡인력에 빨려들어 선뜻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장취산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그와 손이 맞부딪친 채 전력을 다
해 버티었다. 사손은 냅다 그의 몸을 끌어당기며 다시 은소소에
게 덮쳐갔다. 은소소는 대경실색하여 재빨리 몸을 돌려 벗어나려
고 했다. 순간, 사손은 음흉하게 냉소를 흘리더니 빙판을 걷어찼
다. 빙판이 깨져나가면서 얼음 조각이 송두리째 은소소의 오른발
에 적중 되었다.
"앗.....!"
외마디 신음과 함께 은소소는 빙판에 나딩굴었다. 그와 동시에
사손은 흡인력을 변화시켜 장취산의 몸을 수 장 밖으로 날려 버
렸다.
풍덩!
장취산은 빙산 가장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허공을 가로질러 바닷
물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 제 1 권 5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1 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