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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 36~40

Casey,Riley 2023. 3. 29.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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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2장 #1/6             03/05 18:55   445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2 장 빗나간 연심(戀心) #1/6

 한편 장무기는 북 속에서  송청서의 얘기를 듣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속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그게 정말이란 말인가? 정말로  그녀가 나에게 일생을 맡길 생
각이란 말인가?'

 장무기는 절로 조민을 올려다보았다. 조민 역시 그의 몸을 깔고
앉은 채 호흡이 좀전보다 가빠지는  것 같았다. 북 속은 비록 침
침했지만 공력이 심후한 장무기는 그녀의 표정을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조민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햇볕처럼 빛났다. 그 눈에
는 무한한 감정이 넘실거렸다.

 장무기는 단전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이 용솟음쳐 올라 그녀의 양
손을 힘있게 움켜쥐었다. 그 순간 조민의 앵두 같은 입술이 동백
꽃처럼 확대되어 그의 눈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

 장무기는 끓어오르는 충동으로 인해 그녀의 입술을 삼키고 있었
다. 강렬한 본능이었다. 그러나 그 본능은 이성(理性)에 의해 억
눌려졌다. 조민의 붉은 입술이  갑자기 주아의 선혈이 낭자한 얼
굴로 음각되었기 때문이다.  끓어올랐던 열정이 삽시간에 증오로
둔갑했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손에 힘을 주었
다. 그 바람에 조민은 손이 으스러지는 듯한 아픔을 느껴 하마터
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비명을 내지 않으려니  눈물이 찔끔 흘러내렸다. 조민은 암팡스
럽게 그를  노려보았으나 장무기는  의식적으로 그녀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한 장무기가 너무나도 얄미웠다. 발로
그의 턱이라도 걷어찼으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이때 진우량의 호기심이 담긴 물음소리가 들려왔다.

 "자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지? 정말 그런 해괴한 일이 있단 말
인가?"

 송청서는 이를 갈아부치듯 열을 내며 말했다.

 "장무기 녀석은 생김새가  평범하여 영웅스런 데라곤 한 군데도
없지만, 마교의 사술(邪術)을 배워 계집을 홀리는데는 비상한 재
주를 갖고 있습니다. 많은  여자들이 그의 마수에 걸려들어 농락
당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집법장로는 납득이 간다는 듯이 턱을 끄덕였다.

 "맞아. 마교에 몸담고 있는 음도(淫徒)라면 남녀를 막론하고 상
대를 홀리는 요사스러운 수법을 알고 있겠지. 아미파의 기효부는
마교 양소의 사술에 걸려들어 몸을 더럽히고 목숨까지 잃게되었
으며, 장무기의 부친  장취산도 백미응왕의 딸이 쳐놓은 요법(妖
法)에 빠져 역시 패가망신하지 않았나? 장무기는 요녀의 피를 타
고났으며 명색이  마교의 우두머리이니, 채화보양술(採花補陽術)
에 일가견을 갖고 있을 게  분명하지. 아마 그 오랑캐 군주도 그
의 마수에 걸려들어 몸을 더럽혔을 걸세. 생쌀이 이미 익은 밥으
로 변했는데 그 계집이 소마두에게 매달리는 것이 당연하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동감이라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중에서 전공장로는 분개를 금치 못해 한 마디 했다.

 "그런 강호의 패륜아들은 하루속히 죽여 없애야지. 그렇지 않으
면 얼마나 많은 양가집 규수가 그들의 희생물이 되겠는가!"

 사화룡은 혓바닥을 내밀어 입술을 천천히 핥더니 음흉하게 웃으
며 말했다.

 "빌어먹을, 어쨌든 장무기 녀석은 여복이 터져 살맛 나겠군."

 장무기는 이들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울화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분명 자기는 아직까지 동자지신(童子之身)이
거늘 아미파 멸절사태부터  말끝마다 자기더러 음적이니, 음도라
고 몰아붙이니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지
금 이곳에선 한 술 더 떠 자기가 이미 조민의 몸을 더럽혔다느니
생쌀이 익은 밥이 됐다느니,  멋대로 말을 주워삼키니 실로 어처
구니가 없었다.

 이때 조민이 갑자기  그의 가슴을 꼬집었다. 장무기는 흠칫하며
공연히 당황해졌다.

 '조 낭자와 내가 이곳에서  몸을 맞붙인 채 숨어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정말로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되겠군.'

 전공장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미파의 주지약  낭자가 정녕 그  음적의 손에 걸려들었다면,
이미 청백(淸白)을 잃었을  가능성이 농후하군. 송형제, 아무 염
려 말게. 우리가  자네를 도와 틀림없이 주  낭자를 빼앗아 오겠
네. 절대 기효부의 일이 재현되게끔 하지 않을 걸세."

 집법장로도 한 마디 거들었다.

 "형님의 말이 맞습니다. 무당파는 왕년에 은이정을 돕지 못했으
니 이번에도 송형제를 돕지  못할 게 뻔합니다. 송형제는 무당에
서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본방에 가
입하기로 작심했으니,  우리가 어찌  그를 돕지 않을  수가 있겠
소?"

 개방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일처럼 흥분하여 장무기를 음적으로
몰아붙이는 동시에 송청서를  위해 주지약을 되찾아 주겠다고 다
짐했다.

 이즈음 북 속에  있는 조민이 장무기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이 얼마나  음탕하다는 것을 이제  알았죠? 나를 생쌀에서
익은 밥으로 만든 것도 당신이라면서요?"

 그녀의 말  속에는 다소간의 분노와 질책,  그리고 장난이 섞여
있었다. 그러한 것들이 묘한 색깔로 어우러져 묘하게도 장무기의
본능을 자극했다.  일순 장무기는 본능적인  힘에 이끌려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말았다. 그 즉시 소녀 특유의 감미로운 채취가 그
를 아찔한 현기증 속으로 몰아넣었다.

 장무기는 언제까지나 이런 상태로  그녀와 더불어 함께 있고 싶
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원초적인 욕심일  뿐, 결코 현실로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랑과 미움,
그는 두 개의 상반된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발견하자
공연히 짜증이 났다.

 '이 여인이  음탕하지 않다면, 아니  나의 사촌누이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도 난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그녀와 일생을 같이 할 텐
데.....'

 송청서는 개방 사람들에게 형식적이나마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자 사화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음적이 무슨 방법으로 오랑캐 군주를 유혹해 수중에 넣었는
지 자세히 알고 있는가?"

 송청서는 고개를 한 차례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그 자세한 내막은  당사자가 은밀하게 음수(淫手)를 뻗은 것이
니 만치 제  삼자로선 알 도리가 없습니다.  아무튼 그날 요녀가
조정의 무사들을 이끌고  태사부님을 잡기 위해 무당산에 나타났
는데, 그  음적의 얼굴을 보자 순순히  물러갔습니다. 그로 인해
무당파는 큰 화를 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나의 삼사숙께서 지
골(肢骨)이 부러져 이십 년  동안 행동에 불편을 겪어왔는데, 그
요녀가 준 약으로 뼈를 잇게 되었습니다."

 집법장로가 그의 말을 받았다.

 "바로 그것이네. 조정은 줄곧  무당파를 눈에 가시로 생각해 왔
는데, 그 오랑캐 군주가 만약 음수에 걸려들어 몸과 마음을 바치
지 않았다면,  선뜻 약을 내주어 유삼협을  도울 리가 있겠는가?
어쨌든 그 음적은 질이  좋지 않은 녀석임에 틀림없지만, 태사부
님과 사숙백들에게 도움을 준 것만큼은 부인할 수가 없군."

 송청서도 그 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맞습니다.  녀석은 태사부님과  사숙백님들의 은혜를 잊을
만큼 아직까지는 배은망덕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진우량이 교활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얼른 나섰다.

 "방주께 아뢰옵니다. 지금 송형제의 말을 듣고 보니 한 가지 좋
은 수가 떠올랐습니다. 그  수가 성공한다면 녀석을 꼼짝 못하게
굴복시켜 마교의  모든 마도들이 우리 명령에  따르게끔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사화룡은 솔깃했다.

 "그런 기똥찬 묘책이 있다면,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 보게."

 진우량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모두 한집안 식구지만,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합니다."

 이 말에 주위에 있는 개방  고수들 중에 십여 명이 스스로 대전
밖으로 물러나 직책이 높은 몇몇 핵심 인물만 남았다. 그래도 진
우량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일이 조금이라도 누설되면  엄청난 결과가 벌어질 테니, 송
형제와 두 분 용두 형님께서 혹시 엿듣는 자가 있는지 다시 한번
주위를 살펴봐 주십시오."

 장봉용두와 장발용두는 즉시 대전 지붕 위로 몸을 솟구쳤고, 진
우량과 송청서는 대전 앞뒤를  자세히 살폈다. 심지어 여러 개의
신상 뒤와 휘장 뒤, 액자 뒤까지 확인해 보았다.

 장무기와 조민은 숨을죽인 채 긴장에 싸여 있었다. 장무기는 조
민의 지혜에 다시 한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전 안에 이 거고
(巨鼓)이외에는 완벽하게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었다.

 네 사람은 구석구석 살펴보고 나서 다시 대전에 모였다. 진우량
은 비로소 나직하게 말했다.

 "이번 일은 성사시킬 수 있는 열쇠를 쥔 자가 바로 송형제요."

 송청서는 멍해졌다.

 "내가.....?"

 진우량은 그를 똑바로 주시했다.

 "그렇다네.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듣게."

 북 속에 숨어 있는 장무기도 진우량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된 채 신경을 곤두세웠다.

 진우량은 이번에 장발용두에게 고개를 돌렸다.

 "수고스럽지만, 장발용두께서 오독실심산(五毒失心散)을 만들어
주셔야겠습니다. 그것을 송형제에게 내주시면 됩니다."

 진우량은 다시 송청서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그 오독실심산을  갖고 곧장 무당산으로 달려가 암암리
에 장진인과 무당 대협들의  음식에다 풀어넣게. 우린 산 아래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네가 일을 성사시키면 한꺼번에 잡아오겠네."

 여기까지 들은  중인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장진인
등을 납치해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것인가?

 진우량은 본격적인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들을 인질로 삼아 장무기 녀석을 위협하면, 녀석은 틀림없이
본방의 명령에 따르게 될 겁니다."

 사화룡이 먼저 손뼉을 치며 찬성을 했다.

 "그거 아주 좋은 수군. 좋아, 좋아. 훌륭해!"

 집법장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도해 볼 만한 계획이야. 본방의 오독실심산을 음식에 풀어넣
을 수만 있다면, 설령 장무기라 하더라도 영락없이 우리 손에 걸
려들기 마련이지. 하지만 마교의  경계가 워낙 삼엄해 직접 그들
에게 오독실심산을 전개하기는  어렵지만, 송형제는 무당의 제자
이니 무당파 사람들을 상대하기엔  아주 쉬울 걸세. 그래서 집안
도둑이 무섭다는 말도 있지 않는 가? 송형제가 나서 주기만 한다
면, 일은 감쪽같이 해치울 수가 있을 걸세."

 송청서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건 곤란합니다.  어떻게 내 손으로 태사부님과 아
버님께 해로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진우량이 그를 설득했다.

 "오독실심산은 본방의 독특한  영약으로 잠시 동안사람의 정신
을 잃게 할 뿐 몸에 전혀 해로움을 주지 않네. 우린 영존과 장진
인을 누구보다도  존경하는데 그들에게 해가 되는  짓을 할 리가
있겠는가?"

 송청서는 그래도 승낙하지 않았다.

 "제가 사전에 태사부님과  부친의 승낙없이 본방에 가입한 것만
도 나중에 큰 꾸지람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 대신 본방과 무당
파는 모두 협의도를 근본으로 삼고 있으므로, 큰 죄가 되지 않는
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다릅니다.  저는 절대 그런
불효막심한 짓을 할 수 없습니다."

 진우량은 끈질겼다.

 "송형제, 왜 그다지도 생각이 좁은가? 자고로 큰일을 위해선 작
은 일을  희생시킬 수 있으며,  대의(大義)를 위해서 혈육까지도
외면해야 된다고 하지 않는가?  더군다나 우리의 목적은 단지 마
교를 섬멸하는데 있을 뿐,  무당파의 여러분을 모셔 오겠다는 것
은 그 방법에  불과하네. 그들도 나중에 우리의  굳은 뜻을 알게
되면 이해해 줄 걸세. 왕년에 육대문파가 마교를 협공할 때도 무
당파 역시 큰 역할을 하지 않았던가?"

 송청서는 여전히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제가 만약 이번 일을  실천에 옮긴다면, 평생을 두고 죄책감을
느낄 겁니다. 그리고 강호인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니 무슨
면목으로 얼굴을 들고 다니겠습니까?"

 진우량은 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방금 내가 무엇  때문에 팔대장로들까지 자리를 피하게 했는지
그 이유를 아는가? 주위를 다시  샅샅이 확인한 것도 이 일을 극
비리에 진행하기 위함이네. 자네도 약을 풀은 후 정신을 잃은 척
하게. 우리가  자네까지 붙잡아올 테니  아무도 자네를 의심하지
않을 걸세. 이곳에  있는 우리 일곱 명을  제외하고 세상에서 이
비밀을 아는 자가  없을 게 아닌가? 우리야  자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할 것이니 조금도 위축될 게 없네."

 송청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정녕 방주님과 진형님의  분부라면 따라야 마땅하지만, 사람이
라면 누구나 효(孝)와 의(義)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거늘, 내 어
찌 부친에게 해를 끼치는 불효를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이번 일
만큼은 분부에 따를 수가 없습니다."

 개방은 늘 효(孝)를 강조해 왔다. 그래서 송청서가 효를 앞세워
거절하자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다. 한데 진우량이 갑자기 냉소
를 날렸다.

 "아랫 사람으로서  윗 사람에게 해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묻고 싶은 말이 있네. 막칠협과 자네의 관계는 어떻
게 되는가? 그의 배분이 높은가, 아니면 자네의 배분이 높은가?"

 진우량의 물음은 실로 엉뚱한 것이었다. 장무기는 그가 왜 갑자
기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송청서는 다시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그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좋습니다. 방주님과 여러분들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그 대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저의 부친께 해가 되는 행위를 해선 아니 됩
니다. 만약 이 약속을 지켜주지 않겠다면 절대 이번 일을 행하지
않을 겁니다."

 사화룡, 진우량 등은 그가 승낙하자 모두 기뻐했다.

 진우량은 쾌히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를 말게. 진형제는 우리와 서로
형제로 칭호하고 있으니 송대협 역시 우리의 존장임에 틀림없네.
그러니 송형제가 그런 제의를 하지 않더라도 우린 그 어르신네를
정중히 모실 걸세."

 장무기는 내심의혹을 금치 못했다.

 '송사형은 줄곧 승낙을  하지 않다가 진우량이 막칠숙을 거론하
자 왜  생각이 달라진 것일까?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텐데.....
나중에 막칠숙을 뵙고 직접 여쭈어보면 알게 되겠지.'

 이어 집법장로와 진우량이 나직이 상의를 했다. 장삼봉 등이 중
독된 후 어떤 방법으로 연락할 것이며, 어떻게 그들을 납치해 올
것인가에 대해 소상히 의견을 나누었다.

 한편 사화룡은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진우
량의 의견에 따라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장발용두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 했다.

 "지금은 엄동설한이니  오독사(五毒蛇)가 땅  속에 깊이 들어가
동면을 하고 있을 것이오. 소제가 바로 장백산으로 달려가 몇 마
리 잡아오겠습니다.  빠르면 스무 날, 늦어도  한 달이면 돌아올
겁니다. 동면을 하는 오독사로 오독실심산을 만들면 가장 독성이
강할 뿐 아니라  무색무취의 효과도 거둘 수  있어, 설령 장진인
같은 고수들도 절대 사전에 눈치를 채지 못할 겁니다."

 집법장로가 그의 말을 받았다.

 "진형제와 송형제는 장발용두와 함께 장백산으로 가게. 우린 먼
저 남쪽으로 내려갈 테니 한 달 뒤에 노하구(老河口)에서 만나기
로 하세. 오늘이 섣달  초여드레이니 해를 넘기고 정월 초여드렛
날 만나면 되겠군."

 그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다음 말을 이었다.

 "그 한림아는 쓸모가 많은  놈이니, 장봉용두가 특별히 잘 지켜
줬으면 좋겠네. 마교에서 놈을  구하러 올지도 모르게. 자, 이제
우린 적의 이목을 피해 서로 흩어져 이곳을 떠나도록 하세."

 그들은 분분히  방주에게 작별을 고하고  나서 송청서, 진우량,
장발용두가 먼저 북쪽으로 향했다. 삽시간에 미륵묘 앞에 운집했
던 개방 제자들이한 명도 남지 않고 모두 떠나 버렸다.

 장무기는 그들이 멀리 떠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비로소
조민을 밀어내며 북 속에서 내왔다. 조민도 따라서 뛰어내리더니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그를 요염하게 쏘아보았다.

 장무기는 억눌렸던 울화가 터졌다.

 "흥! 무슨 염치로 나를 만나려 왔지?"

 조민 역시 차가운 표정으로 쏘아부쳤다.

 "왜 그렇게 화를 내죠? 내가 장교주께 무슨 죄라도 졌다는 건가
요?"

 장무기의 얼굴에 서릿발이 깔렸다.

 "월내 욕심이 많은 여자이니 의천검과 도룡도를 훔쳐간 것은 그
런 데로 이해하겠소! 그리고  나를 무인도에 버려두고 떠난 것도
용서할 순 있소. 하지만 중상을 입은 주아에게 다시 독수를 전개
한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소! 당신같이 악랄한 여인은 세상에
서 둘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오! 그리고서도 뻔뻔스럽게.....!"

 여기까지 말한 장무기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어 앞
으로 한 걸음 내딛기 무섭게 다짜고짜 조민의 뺨을 후려쳤다. 조
민은 그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므로 도저히 피할 새가 없었다.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호되게 뺨을 얻어맞아 얼굴이 이
내 불그죽죽하게 부어올랐다.

 조민은 이  갑작스러운 일에 아픔과  분노보다도 놀라움이 앞섰
다. 그녀는 눈물을 주루루 흘리며 소리쳤다.

 "당신은 내가  의천검과 도룡도를 훔쳤다고  하는데, 그것을 본
사람이 있나요? 그리고 내가 주아에게 독수를 전개했다는데 그녀
를 불러와 대질을 시켜 주세요!"

 장무기는 그녀가 모든 것을 부인하자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좋아! 저승으로 보내 그녀와 대질케 하지!"

 장무기는 전광석화같이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
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배신감에 그는 치를 떨었다.

 조민은 숨이 막힐 것 같아 본능적으로 그의 가슴을 향해 지풍을
날렸다. 그러나 지풍이 그의 가슴에 닿자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사라졌다. 장무기가 구양신공으로 몸을 호위했기 때문이다. 삽시
간에 조민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더니, 혀를 내밀며 그만 까무
라치고 말았다.

 장무기는 원래 그녀를 목졸라 죽일 생각이었으나 까무라친 것을
보자 그만 마음이 약해졌다. 결국 그는 조민의 목에서 손을 풀고
말았다. 조민은 그 즉시 축  늘어진 체 쿵하는 소리와 함께 되로
쓰러졌다.

 한참 후에야 조민은  나직한 신음을 토하며 깨어났다. 장무기의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얼굴에 분명 염려와 당황함
이 엇갈려 있는  것을 조민은 확연히 간파할  수 있었다. 게다가
조민이 깨어난 것을 확인하자 안도의 숨까지 내쉬었다.

 조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를 똑바로 주시하며 물었다.

 "주아가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나요?"

 장무기는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 얼굴에 난도질을 했는데 살아 있겠소?"

 조민은 떨리는 음성으로 반문했다.

 "누가.... 누가 그런  터무니 없는 말을 했죠?  내가 왜 주아의
얼굴에 난도질을 하겠어요? 주낭자가 그렇게 말했겠죠?"

 장무기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주낭자는 절대  뒤꽁무니에서 남의 나쁜 말을  할 사람이 아니
오! 자기가 적접 눈으로 보지 않은 이상 함부로 당신을 모함하지
않소!"

 "그럼 주낭자 자신이 그렇게 말했나요?"

 "주아는 벌써부터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소! 그 무인도에 우리
다섯 명밖에 없었는데 의부님이  그런 짓을 했겠소? 아니면 내가
했겠소? 주아가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난도질 할 지는 더더욱 없
지 않소! 흥! 아무리 발뺌을 한다 해도 이번엔 호락호락 속지 않
을 것이오. 내가  그녀와 혼례를 올릴까 봐  그런 독수를 전개한
것 같은데 똑똑히 들으시오! 그녀가 죽었든 살았든 간에 난 그녀
를 영원한 반려자로 생각하고 있소!"

                                                    계속 ---


#2889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2장 #2/6             03/05 18:57   452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2 장 빗나간 연심(戀心) #2/6

 조민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중원으로 돌아오게 되었죠?"

 장무기는 냉소를 날렸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정말 얼굴에 철판을 깔았군. 사람을 시켜
우리를 배로  유인한 연후에 육지에 가까이  이르면 포격을 해서
몰살시키려 했지만,  나의 의부님이 그  음모를 사전에 알아차려
무사히 중원 땅에 발을  내딛게 되었소. 음모가 제대로 성공되지
않아 몹시 서운하겠군!"

 조민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멍하니 쳐다보더니, 눈동
자에 연민의 빛깔이 띄어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무기는 그녀의 미색과 요염한  자태에 행여나 자신이 다시 빨
려들까 봐 얼른 고개를 돌려 냉랭하게 말했다.

 "난 누이동생을  위해 복수해 주기로  맹세했지만, 워낙 모질지
못한 놈이라 오늘은 이대로  떠나겠소. 하지만 계속 악행을 저지
른다면 언젠가는 내 손에 죽게 될 것을 명심하시오!"

 말을 끝낸 장무기는 곧  성큼성큼 미륵묘 밖으로 걸음을 떼어놓
았다.

 그가 약 십여 장쯤걸어나갔을 때 조민이 뒤쫓아와 소리쳤다.

 "이봐요! 지금 어디로 가려는 거죠?"

 장무기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내가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오?"

 조민은 계속 뒤따라오며 말했다.

 "사대협과 주낭자에게 물어볼  말이 있으니 그들에게 안내해 주
세요."

 장무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의 의부님은 나처럼 자비롭지가 못하시니, 그대를 보면 당장
죽여 버릴 것이오!"

 조민은 코웃음을 쳤다.

 "당신의 의부님은 수단이  악랄할지 몰라도 당신처럼 생각이 좁
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사대협이 나를 보자마자 살수를 전개한
다면, 당신은 자연히 누이동생의  복수를 하게 되는 셈이니 바라
는 바가 아니겠어요?"

 장무기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내가 어째서 생각이 좁다는  거요? 어쨌든 난 그대를 의부님께
데려갈 수 없소!"

 조민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봐요! 마음이 약하고 소견이 좀은 양반! 속으로는 날 끔찍이
도 생각하고 있죠? 그래서  내가 행여나 사대협에게 죽음을 당할
까 봐 데려가지 않으려는 거죠?"

 장무기는 그녀가 자신의  정곡을 찌르자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당황함을 감추려는 듯 호통을 쳤다.

 "닥치시오! 그렇게  잘난 척만 하다가는  언젠간 자신의 무덤을
파게 될 것이오!  아무튼 부탁이니 나에게 좀  멀리 떨어져 주시
오. 언제 어느  순간에 내 마음이 달라져  그대를 죽이게 될지도
무르니까!"

 조민은 그에게 바싹 다가왔다.

 "난 사대협과 주낭자를 만나  직접 물어볼 말이 있어요. 그전에
내 추측만으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장무기는 은근히 호기심이 생겼다.

 "그들에게 대관절 무슨 말을 물으려는 거요?"

 조민은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했다.

 "그들과 대면하면 자연히 알게  될 거예요. 내가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겠다는데 왜 당신이 겁을 먹는 거죠?"

 장무기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좋소. 그대신 이것은 그대가 스스로 원한 일이니, 나의 의부님
이 살수를 전개한다 해도 날 원망하진 마시오!"

 조민은 턱을 치켜올리며 도도하게 말했다.

 "당신이 염려할 일이 아니에요!"

 장무기는 다시 비위가 뒤틀렸다.

 "내가 왜 염려를 하겠소!? 흥! 그대가 죽기를 학수고대하겠소!"

 조민은 빙긋이 웃었다.

 "그럼지금이라도 직접 날 죽이면 되잖아요?"

 장무기는 그녀와  더 이상 입씨름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입을 굳게 닫아 버리고 성큼성큼 고을 쪽으로 걸어갔다. 막상 고
을에 당도하자  장무기는 다시 망설여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조낭자, 내가 세  가지 조건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그 첫 번째  요구에 따라 도룡도를 찾아주었으니,  아직 두 가지
일이 남았소. 난 그 약속을 지키고 싶소. 그런데 낭자가 만약 나
의 의부님을 만나게 되면 십중팔구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그
러니 이대로 떠나시오. 내가  나머지 두 가지 조건마저 들어주어
빚을 청산한 연후에 다시  나의 의부님을 뵈어도 늦지 않을 것이
오."

 사실 이것은 장무기의  궁색한 변명이었다. 조민은 그의 속마음
을 꿰뚫어보고 생긋이 웃었다.

 "당신은 내가 죽는 게 겁이 나서 억지로 구실을 내세우는 것 같
은데,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나요?"

 장무기는 그녀를 한 대 쥐어 박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대관절 어떻게 하겠다는 거
요?"

 조민은 정감이 듬뿍 담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아주 기뻐요. 당신이 진심으로 날
좋아하는지 줄곧 확인할 길이 없었는데, 이젠 확신을 얻었어요."

 장무기는 조민에게 손발을 들고 말았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
며 이젠 사정투로 나왔다.

 "조낭자, 제발 부탁이오. 어서 떠나가시오."

 조민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싫어요. 꼭 사대협을 만나야겠어요."

 장무기는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객점으로 향했
다. 사손이 머물러 있는 객방 밖에 이르러 잠시 주춤하다가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의부님!"

 그는 자신의 몸으로 조민의 앞을 가로막고 두어 번 불렀으나 방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다.

 장무기가 문을 밀어보니 문은 안에서 잠겨져 있었다. 그는 웬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의부님은 워낙  청각이 예민하여 자기가
문 밖에 이르면 설령 깊은 잠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깨어날 것이
다. 그리고 만약  외출을 했다면 안에서 문을  잠그어 놓을 리가
없지 않는가!

 장무기가 힘을  주어 문을 밀자 빗장이  끊어지며 문이 열렸다.
과연 사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대신 창문이 반쯤 열려 있
는것으로 보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장무기는 다시 주지약의 방문 앞으로 달려가 소리쳤다.

 "주낭자!"

 역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문을  밀고 들어가 보니
침상에 옷가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을 뿐, 주지약의 모습은 보이
지 않았다.

 장무기는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강적과 맞부딪친 게 아닐까?'

 점원을 불러 물어보니 두 사람이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했
다. 그리고 두 사람 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는 것도 듣지 못했
다고 했다.

 장무기는 다소 마음이 놓였다.

 '둘이 함께 잠시 어디를 간 모양이군.'

 사실 장무기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손은 비록 실명했지
만 무공이 뛰어나 당금 무림에서 적수가 될 만한 자가 많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세심한 주지약과 함께 있으니 별다른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장무기는 사손이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주위를 유
심히 살폈으나,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해 다시 방안으로 돌
아왔다.

 조민이 다시 그의 비위를 슬슬 긁었다.

 "당신은 사대협이 방에 없는  것을 확인하자 왜 안도의 숨을 내
쉬었죠?"

 장무기는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게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요? 내가 언제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는 거요?"

 조민은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었
다.

 "당신의 얼굴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어요. 당신은 문을 열어 아
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긴장돼 있던 안색이 이내 풀리는 것
을 똑똑히 보았어요."

 장무기는 더 이상 그녀와  입씨름을 벌이지 않고 침상에 걸터앉
았다.

 조민은 짓궂게 의자를 끌어당겨  바로 그의 앞에 앉으며 싱글벙
글했다.

 "당신의 마음을 다 알아요.  사대협이 날 보자마자 살수를 전개
할지 모른다고 전전긍긍하다가, 막상 그 분이 없는 것을 알자 천
만다행이라 생각했겠죠?  그렇게도 날 끔찍하게  생각해 주는 지
예전엔 정말 몰랐어요?"

 장무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차마 그녀에게 다시 손찌
검을 할 수 없었다.

 "그래, 그대를 끔찍이 생각한  나머지 밤잠을 설쳐 왔으니 어떻
게 할 생각이오?"

 조민은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띄운 채 말했다.

 "그래서 기쁘다고 했잖아요. 아주 기분이 좋아요. 구름 위를 둥
실둥실날으는 기분이에요."

 장무기는 이를 갈았다.

 "그럼 왜 거듭해서 날 죽이려 했소? 그렇게도 날 끔찍하게 죽이
고 싶었단 말이오?"

 조민은 얼굴을 약간 붉히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그건 부인하지 않겠어요. 예전에  당신을 죽이려 했던 건 사실
이에요. 하지만 녹류장에서 당신을 만난 후로부터는 그런 생각이
없어졌어요. 하늘에 맹세할 수도  있어요. 만약 내가 한 말이 거
짓이라면 벼락을 맞아 십팔 층 지옥에 떨어질 거예요."

 장무기는 그녀가 진지하게 맹세를  하는 것을 듣자 다소 누그러
졌다.

 "그렇다면 왜 의천검과  도룡도를 훔쳐가면서 나를 무인도에 버
려 두었소?"

 조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끝끝내 그렇게 인정한다면 나로선 입이 열개 있어도 변
명하기가 어려워요. 사대협과 주낭자가 돌아온 후 넷이서 대질하
면 자연히 모든 진상이 밝혀질 거예요."

 장무기는 냉소를 날렸다.

 "감언이설로 날 속일 순 있어도 의부님과 주낭자를 속이진 못할
것이오?"

 조민은 다시 그의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당신은 왜 내  감언이설에 속는 거죠? 그게  바로 날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장무기는 말로서 그녀를 당할 수 없었다. 그는 오기가 뻗쳤다.

 "그대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또 어떻게 하겠소?"

 조민은 활짝 웃었다.

 "왜 자꾸만 그런 투로  묻죠? 내 대답은 마찬가지에요. 아주 기
분이 좋아요."

 장무기는 그녀가  오뉴월의 장미처럼 웃는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그 웃음  속으로 빨려들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
다.

 조민은 매우 느긋했다.

 "미륵묘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더니 배가 고파요."

 그녀는 점원을 불러 작은 황금 덩어리를 내주며 가장 좋은 술상
을 차려오라고 했다.  점원은 연신 굽신거리며 물러가더니, 잠시
후 푸짐한 과일부터 갖고 왔다.

 "의부님이 돌아오면 식사를 같이하도록 합시다."

 조민은 막무가내였다.

 "사대협께서 당도하시면 내  목숨이 달아날지도 모르는데, 미리
배불리 먹어두어야 하지 않겠어요?  배불리 먹고 죽은 귀신은 혈
색도 좋대요."

 장무기는 그녀의 너무나 태연한 태도가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되
었다. 조민이 다시 말했다.

 "금덩어리는 얼마든지 있으니, 그들이  오면 다시 한 상 차려오
라고 하면 되잖아요?"

 장무기는 냉랭하게 말했다.

 "낭자와 더 이상  식사를 함께 하지 않겠소.  어느 순간에 다시
십향연근산을 음식에다 넣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까!"

 조민은 이내 토라졌다.

 "좋아요. 강요하진 않겠어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혼자서 과일을 맛있게 먹었다.

 장무기는 점원을  불러 국수를 말아오게  하여 그녀와 멀찌감치
떨어져 게걸스럽게 먹었다.

 조민의 식탁에는  이미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그녀는 얼마동안
혼자서 먹더니 갑자기 눈물이 주루루 흘러내렸다. 그래도 장무기
가 아랑곳하지 않자 아예 젓가락을 팽개치며 식탁에 엎드려 훌쩍
훌쩍 흐느껴 울었다. 그래도 장무기는 한 마디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다.

 조민은 한참 동안  혼자서 울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녀는 창 밖을 살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한 시진만  지나면 날이 어두워지겠네요.  그 한림아는 어디로
끌려갔을까? 그의  행방을 놓치면 다시  찾아내기란 쉽지가 않을
텐데....."

 그 말에 장무기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내가 깜박 잊고 있었군. 난 우선 그를 구하려 갔다 와야
겠소!"

 조민은 입을 삐쭉거리며 그에게 눈을 흘겼다.

 "정말 얼굴이 두껍군요. 누가 당신에게 말했나요? 왜 내가 혼자
서 중얼거린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죠?"

 장무기는 그녀에게 속수무책이었다. 못된 계모 낯짝처럼 흐렸다
풀렸다 하니, 도무지 그녀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입을 열
었다가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는 곧장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 즉시 조민이 따라나섰다.

 "나도 함께 가겠어요!"

 장무기는 앙갚음을 하듯 쏘아부쳤다.

 "그대는 나의  누이동생을 죽인 원수인데,  어찌 원수와 동행을
할 수 있겠소?"

 조민은 턱을 치켜세우며 토라진 표정으로 한 마디 내뱉었다.

 "좋아요! 혼자 가세요!"

 장무기는 밖으로 나가려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물었다.

 "혼자 이곳에 남아 무엇을 하려는 거요?"

 조민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곳에서 당신의  의부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
요!"

 장무기는 내심 당황해졌다.

 "나의 의부님은 악을 원수처럼 여기는 분이라 그대의 목숨을 살
려두지 않을 것이오!"

 조민은 장탄식을 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죠. 그게 내 운명이라면 순순히 죽음을 받
아들이는 수 밖에요."

 장무기는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잠시만이라도 이곳을 피해 줬으면 좋겠소. 나중에 나하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합시다."

 조민은 거절했다.

 "이곳 외에는 몸을 피할 만한 곳이 없어요."

 장무기는 더 이상 얘기해 봤자 우이독경임을 알았다.

 "좋소. 나와 함께 한림아를  구하려 갑시다. 갔다 와서 다시 의
부님과 대질하면 될 테니까."

 조민의 입가에 득이한 미소가 띄어졌다.

 "이것은 당신의 요구에 따라 내가 함께 가는 것이지, 결코 내가
생떼를 써서 같아 가는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하세요."

 장무기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대 같은 여성을 만나게 된 것도 나의 운명인 것 같으니 감수
하는 도리밖에."

 조민은 생긋이 웃으며 장무기를 방문 밖으로 밀어냈다.

 "밖에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어 방문을 닫았다.

 잠시 후 방문이 다시 열렸을 때 조민은 이미 여장으로 갈아입었
다. 붉은 비단 옷에 양피로 만든 피풍(披風)을 걸쳐 매우 호화스
러운 차림새였다.

 장무기는 그녀가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작은 봇짐 속에 이런 귀중
한 옷이 들어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이 여인은  심계가 깊고 하는  일마다 허실을  종잡을 수 없구
나.'

 장무기가 생각을 굴리고 있는  사이에 조민의 눈가에 웃음이 번
졌다.

 "왜 그렇게 넋빠진 사람모양 날 쳐다보죠? 이 옷이 예쁜가요?"

 장무기는 푸념을 하듯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용모가 꽃처럼 예쁘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마음이 사갈(蛇蝎)
같은데....."

 조민은 까르르 웃었다.

 "장교주의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겨두겠어요. 장교주, 당신도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게 어떻겠어요?"

 장무기는 냉랭하게 말했다.

 "난 어려서부터 남루한 차림새로 자라왔소. 내 차림새가 누추해
그 화려한 옷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멀찌감치 떨어져
뒤따라 오도록 하시오."

 "또 심술을 부리는군요. 난 단지 당신이 멋있는 옷을 입은걸 보
고 싶어서  한 말이에요.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내가
가서 옷을 한 벌 사오겠어요. 그 거렁뱅이들은 관도를 따라 산해
관(山海關) 방향으로 갔으니, 우리가 걸음을 재촉하면 충분히 따
라잡을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장무기의 대답을 듣지 않고 객점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러나 장무기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맥없이 침상에 걸터앉으며
자책감에 빠졌다. 자기가 아무리 마음을 모질게 먹어도 그녀에게
질질 끌려가는 것 같았다.  상대방은 분명 자기의 누이동생을 죽
음으로 몰아넣은 흉수이거늘  애당초 맹세한 대로 도저히 그녀에
게 살수를 전개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꾸만 그녀에게 마음
이 쏠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계속 ---



#2890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2장 #3/6             03/05 18:58   458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2 장 빗나간 연심(戀心) #3/6

 장무기는 내심 자신에게 채찍질을 했다.

 '무기야! 이 못난 놈아! 너도 사내 대장부라 자처할 수 있느냐?
네가 무슨 면목으로 명교를 이끌며 천하의 군호를 호령한단 말이
냐?'

 한참 동안 기다렸는데도  조민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덧 날이
어둑어둑해지며 주위에 땅거미가 깔렸다. 그는 웬지 초조해졌다.

 '내가 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 나 혼자서 한림아를 구하
러 갈까?


 그러나 그의 생각은 이내  바뀌어졌다. 만약 그녀가 새 옷을 사
가지고 돌아와 사손과 맞부딪친다면, 사손은 다짜고짜 그녀의 천
령개에 일장을 전개할 것이고,  그럼 그녀는 뇌장이 파열되어 목
숨을 잃을 게  아닌가? 그녀가 사온 옷은  주위에 널부러질 것이
고.....

 그런 상황을 상상하자  장무기는 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진 채 방 안을 왔다갔다 거닐
었다. 그의  뇌리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그때 가벼운
발자국소리가 들리며 조민이 보따리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장무기는 내심 반가왔으나 겉으론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이제야 오는 거요?  난 지금 떠나려던 참이었소. 옷을 갈아
입을 시간이 없으니 어서 떠납시다!"

 "이왕 오래 기다렸으니 옷을 갈아입는 시간을 갖고 논쟁을 벌일
필요는 없어요. 내 이미 말을  두 필 구해 왔으니 밤을 새워가며
길을 재촉해도 될 거예요."

 이렇게 말하며 보따리를 풀어 옷가지를 꺼내 주었다.

 "여긴 작은 고을이기 때문에 좋은 옷이 없어요. 잠시 이 옷으로
갈아입었다가 대도에 당도하면 가죽 옷을 새로 사드리겠어요."

 장무기는 이내 표정이  차가와졌다. 그는 심각한 음성으로 말했
다.

 "조낭자, 혹시  나에게 부귀영화의 허울을  뒤집어 씌워 조정에
귀순하도록 유인하는 것이 아니오? 만약 그런 속셈이라면 일찌감
치 포기하는 게 현명할  것이오. 나 장무기는 당당한 한족(漢族)
의 자손으로서, 설령 왕작(王爵)에 봉해진다 해도 절대로 몽고에
투항하지 않을 것이오."

 조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교주, 그렇게 흥분하시지만 말고  이 옷이 몽고 의복인지 한
인의 의복인지 확인부터 하세요."

 그녀는 회색 비단 장포를 펼쳐 보였다.

 장무기는 그녀가 구입해 온 옷이 한인의 의복임을 확인하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조민은 그가 보는 앞에서 천천히 한 바퀴 돌더
니 물었다.

 "나의 이 차림새가 몽고의 군주 같나요? 아니면 한인의 낭자 같
나요?"

 장무기는 그녀가 묻는 말에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단
지 그녀의  의복이 몹시 화려하다고만 느꼈을  뿐 몽고 의상인지
한인의 의상인지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그녀
의 말을 듣고 비로소  그녀가 한인 낭자의 차림새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조민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정이 듬뿍 담긴 눈동자로 그를 응시
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녀의 눈빛에서 선뜻 가슴에 와 닿은 것
이 있었다.

 조민이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해  준다면 난 더 이상 아무것도 바
라지 않아요? 당신이  한인이든 몽고인이든 상관이 없어요. 당신
이 한인이라면 나도 한인이고, 당신이 몽고인이라면 나도 몽고인
이에요. 당신의  마음 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담겨져 있겠죠.
한인과 몽고인의 분쟁, 한인의 흥망성쇠, 권세위명 등등..... 하
지만 내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에요. 그것이 바로 당
신이에요. 당신이 좋은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나에겐
가장 소중한 존재예요."

 장무기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한 정감이 담긴 그녀의
말을 듣자 절로 의지가 흐려지며 뇌리에 혼란이 왔다. 그는 잠시
동안 넋잃은 사람처럼 굳어져 있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나의 누이동생을  죽인 이유가 무엇인지  솔직히 말해 보시오.
내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까 봐 죽인 게 아니오?"

 조민은 고개를 내두르며 음성을 높여 부인했다.

 "은낭자를 해친 것은 내가 아니에요! 당신이 믿든 믿지 않든 내
가 한 말은 거짓없는 사실이에요."

 장무기는 장탄식을 했다.

 "조낭자, 그대가 나에게 베풀어  준 정의는 잘 알고 있소. 나도
목석이 아니거늘 어찌 그  고마운 정을 외면하겠소? 그런데 이제
와서 굳이 날 속일 필요가 있겠소?"

 조민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예전에 난  똑똑하기만 하면 모든 일에  우위를 차지할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러나 세상 일이  모두 자기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군요. 장교주, 오늘 이곳에 남아 끝까지 사대협과 주낭자를 기다
리도록 해요."

 장무기는 멍해졌다.

 "왜 갑자기 생각이 달라졌소?"

 조민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그 이유는 묻지 마세요. 그리고 한림아를 구하는 일은 염려 마
세요. 내가 책임지고 그를 구해 주겠어요."

 말을 끝낸 그녀는 밖으로 나가더니, 주지약의 방으로 들어가 문
을 닫아 버렸다.

 장무기는 그녀의 속셈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는 침상에
홀로 앉아 곰곰이 생각을  굴리다가 문득 뇌리에 떠오르는 게 있
었다.

 '혹시 그녀는 내가 주지약과 혼약을 한 사실을 알아차린게 아닐
까? 그래서 주아를 죽인 걸로 부족해 다시 주지약을 해치려는 것
이 아닐까? 어쩌면 현명이로가  미륵묘를 떠난 즉시 이곳으로 달
려와 의부님과 주지약을 해쳤을지도 모른다!'

 현명이로가 연상되자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녹장객과 학필옹의
무공은 막강하여 사손이 설령  실명되지 않았다 해도 그들 두 사
람의 협공은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장무기는 벌떡 일어나 조민이 들어 있는 객방으로 달려갔다.

 "조낭자, 현명이로는 어디로 갔소?"

 조민은 방문을 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들은 내가 미륵묘를 벗어나 산해관 쪽으로 갔을 것이라 생각
하고 남쪽으로 쫓아갔을 거예요."

 "그게 정말이오?"

 조민은 냉소를 날렸다.

 "흥! 내가 아무리 진실을  얘기해도 믿지 않으면서 무엇 때문에
쓸데없이 질문을 하는 거죠!"

 장무기는 말문이 막혀 잠시  멍청하니 문 밖에 서 있었다. 그러
자 조민이 그의 비위를 긁듯 다시 말했다.

 "만약 내가 현명이로를 시켜 이 객점으로 달려와 사대협과 당신
이 사랑하는 주낭자를 죽이려고 시켰다면, 내 마을 믿겠나요?"

 그녀의 말은 예리한  화살처럼 장무기의 정곡을 찔렀다. 그것이
자기가 가장 두려워하던 가상이 아니었는가!

 장무기는 대뜸 방문을 걷어차며 안으로 뛰쳐들어가 살기띤 음성
으로 외쳤다.

 "방금 뭐라고 했소?"

 조민은 그의 살기등등한 모습을 보자 겁이 났다. 아울러 공연한
말을 내뱉은 것이 후회되었다.

 "그렇게 화를 내지  마세요. 난 다만 당신을  놀리기 위해서 한
말이에요. 절대 그런 일은 없었어요."

 장무기는  그녀를 뚫어지게 주시했다.

 "한사코 나의 의부님을  기다려 대질하겠다고 느긋한 태도를 취
해 온 것이, 혹시 그들을 이미 저승으로 보냈기 때문이 아니오?"

 조민은 그의 살기띤 눈을 주시하며 정색을 했다.

 "장교주, 내 말을  똑똑히 들으세요. 세상만사는 복잡 미묘하여
자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엔, 남의 망언에 좌우되거나 스
스로 경솔한 판단을  내려선 안 돼요. 정녕  나를 죽이고 싶으면
얼마든지 살수를 전개하세요. 그대신 당신의 의부님이 무사히 돌
아와 당신의  추측이 빗나갔다는게  밝혀지면 어떻게  할 생각이
죠?"

 장무기는 그녀의 말에 마치 찬물  세례를 받은 듯 정신이 확 들
었다. 그는 자신이 경솔한 행동을 하려던 것이 부끄러웠다.

 "나의 의부님이 무사히 돌아온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있겠소?
앞으론 의부님의 생사안위를 갖고 실없는 얘기를 하지 마시오."

 조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쓸데없이 입을 놀려  미안해요. 앞으론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겠어요."

 장무기는 그녀가 잘못을 시인하자 마음이 봄눈 녹듯 풀렸다.

 "나 역시 경솔한 행동을 해서 미안하오."

 그는 다시 사손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날 밤을 꼬박 세우고 이튿날 동이 터올 무렵까지 사손과 주지
약은 돌아오지 않았다.

 장무기는 다시 걱정이 되었다. 날이 완전히 밝자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친 그는 조민과  진지하게 상의를 했다. 그러나 조민도
그들 두 사람의 행방에 대해 짚이는 바가 없었다.

 조민은 한참 생각을 굴리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차라리 사화룡  일당을 쫓아가 소식을
알아보는 게 좋겠어요."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부님도 내가 개방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떠났다는 것을 알고
계시니,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두 사람은 곧 계산을  치렀다. 장무기는 객점 주인에게 만약 사
손과 주지약이 돌아오면  객점에서 자기를 기다려 달라고 신신당
부했다.

 그들이 객점을나서자 점원이  밤색 준마 두 필을 끌고왔다. 장
무기는 두 필의 준마가  건장하며 털에 윤기가 흐르는 것을 보고
아주 귀한 명마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조민은 어제 이
두 필의 준마를 구하느라고  밖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했던 것 같
았다.

 조민은 장무기가 감탄해 하는 것을 보자 몹시 만족해 하며 입가
에 미소를 띄우고 안장에 올랐다. 곧이어 두 필의 준마는 남쪽을
향해 질주해 갔다. 길가는 행인들은 준수하게 생긴 한 쌍의 젊은
남녀가 화려한 차림새로 준마를 몰고가는 것을 보자 모두 부러워
하는 눈치였다.

 두 사람은 이날 하루  종일 길을 재촉해 이백여 리를 벗어났다.
그들은 밤이 깊어서야 객점을 찾아 하룻밤을 유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이날 정오 무렵, 삭풍이 갑자기 기승을 부리는가 싶더니 먹장구
름이 낮게 주저앉으며  날씨가 잔뜩 흐려졌다. 다시  이 십여 리
가량 달리자 하늘에서 닭털  같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길을
재촉하는 동안 두 사람은 줄곧 말이 없었다. 눈발은 갈수록 굵어
졌다. 두 사람은 그래도 아무 말 없이 길을 재촉하는데만 열중했
다.

 이날 그들이 거쳐온 곳은 거의 가 황산준령이었다. 저녁쯤 되자
눈이 한 자  가량 쌓였다. 그들이 타고 온  말은 비록 보기 드문
준마였지만 더 이상 지탱하기가 어려웠다.

 땅거미가 깔리기 무섭게  주위는 어두컴컴해졌다. 두 사람은 안
장에서 내려 어둠을  뚫고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민가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장무기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조낭자, 낭자의 생각으론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무리하게 계
속 길을 재촉한다면 말이 견뎌내지 못할 것이오."

 조민은 앙칼지게 쏘아부쳤다.

 "당신은 타고 온 말만 걱정해 줄 뿐, 내가 지쳐서 죽든 말든 전
혀 신경을 쓰지 않는군요!"

 장무기는 아차 하며 내심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체내에 구양신공이 축적돼 있어 피로와 추위를 이겨낼 수
있지만, 그녀는 여지껏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해 오느라고 몹시 길
을 재촉해 오느라고 몹시 지쳐 있겠군.....'

 장무기는 적당한  곳을 찾아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말에 올라  다시 얼마쯤 가자 바스락소리가  들리며 길옆에서 한
마리의 노루가 뛰쳐나와 산 속으로 달려가는 게 눈에 띄었다.

 장무기는 즉시 소리쳤다.

 "저놈을 잡아 저녁 식사를 합시다."

 말을 내뱉기 무섭게 안장 위에서 몸을 날려 노루새끼의 뒤를 쫓
아갔다. 눈이 쌓인 산길에 노루 발자국이 찍혀 있어 뒤를 쫓기가
수월했다. 언덕배기를  넘어서자 야음이 깔린  가운데 그 노루가
어느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보였다.

 장무기는 시위에서 벗어난  화살처럼 몸을 날렸다. 노루가 미처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그는 재빨리 노루의 뒷덜미를 움켜
잡았다. 노루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손목을 물려 했지
만, 장무기가 손에 힘을 가하자 으드득 소리와 함께 노루의 목뼈
가 부러졌다.

 동굴을 살펴보니 비록 넓지는  않지만 두 사람이 쉬기엔 충분했
다. 장무기는 곧 노루를  짊어지고 조민에게 돌아가 넌지시 제의
했다.

 "저쪽에 작은 동굴이 있는데,  하룻밤 쉬었다 가는 것이 어떻겠
소?"

 조민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답지
않게 수줍어하는 것을 보자 오히려 장무기가 쑥스러웠다. 장무기
가 말고삐를 잡고 노루를 안장  위에 올린 채 앞장서 걷자, 조민
은 묵묵히 뒤를 따랐다.

 어제는 객점에서 따로 방을 정해 하룻밤을 지냈지만, 오늘은 부
득이 함께 동굴  속에서 밤을 새우게 되었다.  부부가 아닌 젊은
남녀로서 사실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장무기는 두 필의 말을  언덕배기 아래 늙은 소나무가 마주보고
있는 곳으로 끌고가 눈을 피하게 했다. 동굴 앞으로 돌아온 그는
마른 나뭇 가지를 주워 불을  피웠다. 불빛을 빌려 다시 동굴 안
을 자세히 살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깨끗했다. 동굴 안쪽은 칠
흑같은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

 장무기는 노루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더니, 눈(雪)으로 물을
대신해 깨끗이 씻어 굽기시작했다. 한편 조민은 가죽 겉옷을 벗
어 동굴 바닥에 깔았다.  앞쪽에서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어
동굴 안은 봄날처럼 훈훈했다.

 장무기는 고개를 돌려 다시  동굴 안을 살폈다. 불빛이 명암(明
暗)되는 가운데  조민의 달덩어리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비치자,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묘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조민의 모습은 마치 신방을 꾸미고 있는 화사한 새색시 같았다.
이 순간 조민도 마침  고개를 돌리자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쳤
다. 그러자 약속이나 한 듯 그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
랐다. 오늘 온종일 추위와 허기에 시달려 온 것이, 서로 마주 보
며 짓는 미소로 인해 말끔히 씻어지는 것 같았다.

 노루 고기가 알맞게 익자 두 사람은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맛있
게 뜯어먹었다. 장무기는 조민이 입김을 후후 불어가며 노루고기
를 열심히 뜯어먹는 모습을  지긋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는 온
갖 부귀 영화를 누려온  몽고족의 군주가 자기로 인해 추위를 무
릅쓰고 이런 고생을 하는 것이 한편으론 안스럽게 느껴지기도 했
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는 안스러운 빛깔보다는 사랑스러운 색
채가 더 진하게 담겨져 있었다.

 조민의 지금 모습은  한없이 천진난만했다. 그녀가 강호의 효웅
(梟雄)들을 좌지우지하는  여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
다. 더우기 누이동생의 얼굴을 난도질한 악랄한 여인이라고는 더
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조민은 한창 게걸스럽게 노루고기를 뜯다가 그의 눈길을 의식했
는지 홀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양볼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지
며 눈을 곱게 흘겼다.

 "내가 음식을 먹는 것을 처음 보나요?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
으니까 고기가 넘어가지 않잖아요!"

 장무기는 얼른 얼버무렸다.

 "하도 맛있게 먹길래 부러워서 쳐다본 것뿐이오."

 조민은 티없이 맑게 웃었다.

 "여지껏 산해진미를  다 먹어 보았지만,  이렇게 맛있는 고기는
처음이에요. 아마 당신이 직접 구워서 그런가 봐요."

 장무기는 그녀의  웃는 모습이  해당화(海棠花)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는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
여 고기를 뜯었다.

 '낭자가 원한다면 매일 고기를 구워줄 수도 있을 텐데.....'

 그는 이 말을 고기와 함께 삼켜 버렸다.

 식사를 마치자 장무기는 모닥불에 마른 장작을 충분하게 집어넣
고 조민과 함께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덧 눈발은 그치고 먹구름 사이로 하현달이 수줍은 처녀처럼
삐끔히 얼굴을 내밀었다.  주위는 조용하기만 했다. 이따금 어디
선가 밤새가 우는 소리가 들려와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더
불어 정적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뿐이었다.

 장무기는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으나 잠이 올리가 만
무였다. 그는  살며시 눈을 떴다. 조민은  그의 맞은편에서 세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으나,  역시 잠을 못 이루는 것 같
았다. 장무기는이러한  침묵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정적이 이렇
게 어색하게  느껴지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잠들었소?"

 그가 나직이 묻자 조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담담하
게 웃으며  고개를 내둘렀다. 당돌하고  매사에 적극적인 그녀가
침묵을 지키자 장무기는 오히려 불편했다.

 "몹시 피곤할 텐데 눈을 좀 붙이시구료."

 조민은 잔잔한 미소에 싸여 있는 앵두 같은 입술을 열었다.

 "잠이 오지 않는군요. 당신과 만났던 순간들을 생각하고 있었어
요."

 동굴은협소하여 두 사람은 비록 떨어져 앉아 있지만 서로 손을
내밀면 맞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왔다. 장무기는 그녀에게서
야래향(夜來香)의 향기가 은은히 풍겨오는 것을 느꼈다.

 조민이 다시 말했다.

 "당신이 내  신을 벗기고  발바닥을 간지럽히던  일이 생각나나
요?"

 그 말에 장무기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 때는..... 사실....."

 그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한밤중에 단둘이 심산 동굴
에 있으면서 그녀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자 당황함이 앞섰다.
당시는 단지 그녀를  굴복시키기 위해 즉흥적으로 취한 행동이었
지만, 나중에 그 생각을 할 때마다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렸던 게
사실이었다.

 조민은 역시 당돌하고 도전적이었다.

 "어쩌면 그  일로 인해 내가 당신에게  마음이 쏠렸는지도 몰라
요....."

 그녀는 장무기를 똑바로 주시하며 다음 말을 이었다.

 "사실 이틀 동안 아무  말 않고 참아왔지만, 미륵불묘에서 거렁
뱅이에게 곤봉으로  발뒤꿈치를 맞은 게  은근히 아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추운 데 있다가 이렇게 따스한 곳에 들어오니 더 쑤시
는군요. 당신은 의술도 능통하다고  들었는데 좀 살펴 봐 주겠어
요?"

 장무기의 시선은 절로 그녀의 발에 쏠렸다. 비록 가죽신을 신고
있었지만, 그의 뇌리에  그녀의 고운 맨발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만안사에 잠입해 들어갔을 때 비녀가 대청에서 그녀의 맨발을 씻
겨 주던 광경을 창문 틈으로 훔쳐보지 않았던가! 그 당시 장무기
가 느꼈던 감정은 처음  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발바닥을 간지럽
혔을 때와 또 달랐었다. 당시 가슴이 설레였던 게 아직도 기억해
생생했다.

 한데, 오늘  밤 조민이 스스로 자기에게  맨발을 보이겠다고 한
것은 또 의미가 달랐다.  물론 장무기도 미륵불묘에서 그녀가 곤
봉에 발뒤꿈치를 맞고 쓰러진 것을 똑똑히 보았고,그래서 그녀를
구해 준 것이기도 했다. 당시 곤봉으로 호되게 맞았기 때문에 그
아픔이 아직 남아  있는 게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러한
이유를 내세워 자기에게 발을  치료해 달라고 한 것을, 장무기는
그저 단순하게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조민은 몽고의  형통을 타고 났기  때문에 한인(漢人)의 풍속에
구애받지 않을지 모르지만, 한인의  규수라면 평생을 함께 할 반
려자가 아닌 이상  절대 맨발을 보여 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한인의 풍속대로라면  그녀가 맨발을  맡김으로써 자신의 확고한
마음을 표하는 것이고,  장무기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녀의
마음까지 받아들이는 걸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장무기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그가 다시 바라본 조민의 눈동자는 뜨거웠다. 장
무기는 왈칵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바로 이때였
다. 갑자기 멀리서  말굽소리가 들려왔다. 정적을 깨며 들려오는
그 말굽소리는 그의 사슴을  질타했다. 조민의 표정은 이내 긴장
되었다.

                                                    계속 ---



#2891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2장 #4/6             03/05 18:59   420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2 장 빗나간 연심(戀心) #4/6

 장무기가 조용히 귀를 기울여보니, 남쪽으로부터 달려오는 말은
모두 네 필이었다. 동굴 밖을 보니 멎었던 눈발이 다시 뿌려지고
있었다.

 '야심한데 눈보라를 무릅쓰고 길을 재촉하는 것을 보면 필시 급
한 일이 있는 사람들 같은데.....'

 그가 생각을 굴리는 사이에  말굽소리는 언덕 아래에 이르러 갑
자기 멎었다. 그러더니 곧 이어 동굴 쪽으로 옮겨져 왔다.

 장무기는 긴장되었다.

 '이 동굴은 언덕 넘어 은밀한곳에 위치해 있어 노루의 뒤를 쫓
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텐데, 저들이 어찌 이쪽을 향해 다
가오는 것일까?'

 그는 의혹을 느꼈으나 이내 그 의혹에 대한 해답을 찾아냈다.

 '맞아 우리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겨놓았으니 저들은 그 발자국
을 따라 이곳으로 오는 게 분명하다.'

 조민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상대가 적일지도  모르니, 일단 몸을  숨겨 상대방의 정체부터
파악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녀는 먼저 동굴 밖으로 나가 눈을 쓸어모아 모닥불을 껐다.

 이때 말굽소리가 멎고 대신 네 사람이 눈을 밟으며 다가오는 발
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삽시간에 그들은 동굴에서 십여 장 떨어진
곳까지 접근해 왔다.

 장무기가 나직하게 말했다.

 "네 사람의 빠른 신법으로  미루어,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
해 있는 고수인 것 같소."

 지금의 상황에서 만약 동굴 밖으로 나가 다시 몸을 숨길만한 곳
을 찾는다면, 영락없이 상대방에게 발각될 것이다.

 장무기가 엉거주춤하고  있는 사이에 조민이  그의 손을 잡으며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동굴은 협소해졌
다. 그러나 생각보다 깊었다. 그들이 약 이 장 가량 들어갔을 때
밖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렸다.

 "이곳에 동굴이 있습니다!"

 장무기는 그 음성을 듣자 갑자기 눈동자가 빛났다.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임에 분명했다. 다음 순간, 그는 음성의 주인공이 누
구인가를 떠올렸다. 뜻밖에도 사숙부인 장송계였다.

 곧 이어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발자국이 이 동굴까지 연결돼 있군요."

 이번에는 은이정의 음성임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장무기는 당장
소리쳐 자신을 알리려 했다.  한데 조민이 난데없이 손으로 그의
입을 막으며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가 단둘이 이곳에 있는 게 누구에게 발각되면 공연한 오해
를 사게 될 거예요."

 장무기는 그녀의 말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와 조민은
비록 아무런 관계도 없었지만,  야밤중에 단둘이 동굴 속에 있는
것이 사숙백들에게 발각된다면 입장이 난처해질 게 뻔했다. 자기
가 아무리 변명을 해도  상대방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더군
다나 조민은  원조(元朝) 황실의 군주로서  장송계, 은이정 등을
만안사에 감금했던 장본인이  아닌가! 쌍방이 맞닥뜨린다면 필경
심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물론 자신의 입장은 더욱 난
처해질 게 분명했다.

 '역시 장사숙과 은육숙이 떠날  때까지 잠자코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그가 속으로 이렇게 결정을  내리는 순간 유연주의 음성이 들려
왔다.

 "여기 보십시오. 타다 남은  솔가지와 노루의 가죽과 피도 있군
요."

 다른 한 사람이 그의 말을 받았다.

 "난 줄곧 불길한 감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칠제(七弟)가 무
사하길 바랄 뿐이네."

 이번에 들려온 것은 송원교의 음성이었다.

 장무기는 표정이 굳어졌다.  네 분의 사숙백님이 일제히 강호로
나온 것도 뜻밖이지만, 그들의 말투를 들어보니 막칠숙께서 위험
에 처해 있는 것 같았다. 장무기도 은근히 염려가 되었다.

 장송계의 낭랑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대사형께선 막사제를 아직도 철부지 소년으로 생각하시는 모양
이군요. 근래에  와서 막사제의 위명은  강호에 널리 알려졌습니
다. 예전의 막내둥이가 아닙니다. 설사 강적을 만났다 해도 혼자
의 힘으로 충분히 상대해 낼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을 이은 사람은 은이정이었다.

 "저는 칠제에 대해선 별로  염려를 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장무
기가 걱정됩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소식이 없으니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이제 명교의 교주이니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있듯이 어려움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는 비
록 무공은 강하지만 마음이  모질지 못해, 험악한 강호의 풍파를
잘 헤쳐나갈지 의문입니다."

 장무기는 그 말에  심히 감동되었다. 사백님과 사숙님들이 자기
를 얼마나 염려해 주고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조민은 그의 귀에 대고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나같이 사악한 사람이 당신  곁에 꼭 붙어 있다는사실을 알면
모두들 기절초풍하시겠군요."

 송원교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칠제가 북쪽으로 장무기를  찾으러 내려갔다가 무슨 단서를 잡
은 게 분명한데, 그가 천준  객점에 남긴 글이 이해가 가지 않는
단 말야. 물을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급히 남긴 글 같은데....."

 장송계가 그의 말을 이었다.

 "문중에 변절자가  있으니 처리해 달라고  글을 남겼는데, 우리
무당파에 변절자가 있을리 있겠습니까? 혹시 무기 그 애가....!"

 여기까지 말한 그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은이정이 단호한 음
성으로 말했다.

 "무기는 절대 문중의 명예를 더럽힐 애가 아닙니다. 그 점에 대
해서는 제가 장담을 할 수가 있습니다."

 장송계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그 조민이란 요녀가 너무 간교하다는 사실
이네. 무기는 젊은 나이에  혈기가 왕성해 미색에 현혹되기가 쉽
네. 그는 절대 부친처럼 불행한 과정을 밟지 말아야 할텐데...."

 네 사람은  모두 침묵을 지키며 제각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부싯돌로 불을  지피는 소리가 들리더니,  솔가지가 타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피어올랐다.

 그 불빛은 동굴 안까지 비쳐서 장무기와 조민은 비록 한번 꺾어
진 동굴 안쪽에 몸을 도사리고 있지만, 그 불빛의 혜택을 조금이
나마 받을 수가 있었다.

 장무기는 어렴풋이 조민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조민의 얼굴
에는 분노가 깔려 있었다. 아마 장송계의 말에 기분이 몹시 상한
모양이었다. 장무기는 문득 가슴에  와닿는 것이 있어 섬뜩한 느
낌이 들었다.

 '장사숙님의 말씀이 옳을지도 모른다. 나의 어머님은 아무런 잘
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결국 아버님을 최악의 경우로 몰아넣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조낭자는  명문정파의 공적일 뿐 아니라 나
의 누이동생을 상해했고, 태사부님과 사백, 사숙님들을 모독했으
니 오죽하겠는가?'

 이때 송원교가 갑자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장사제, 난 줄곧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네. 이미 작고
한 오제를 생각해 차마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못했는데....."

 장송계가 천천히 말했다.

 "사형께선 혹시  칠제가 무기에게  독수를 당했다고 염려하시는
게 아닙니까?"

 송원교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장무기는 그가 고개를 끄
덕였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장송계가 다시 말했다.

 "무기는 천성이 착해 절대  그럴 리가 없겠지만, 칠제의 성질이
워낙 직선적인데다가 다혈질이므로 무기를 진퇴양난의 궁지로 몰
아붙일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그런 상황하에서 그 요녀가 충동질
을 했다면 사형께서 우려하는 불행이 벌어졌을지도 모르죠. 어쨌
든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 속은 예측할 수 없
다고 하니.....  게다가 자고로 영웅은  미색에 약하다는 옛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로선 무기가  이성을 잃지 않길 바라는 도리
밖에 없습니다."

 은이정은 그들과 생각이 다소 달랐다.

 "대사형, 그리고 장사형, 지금  두 분이 갖고 있는 생각은 모두
지나친 기우가 아닐까요? 무기가  아무리 이성을 잃는다 해도 천
륜을 저버리는 짓을 할 리가 만무합니다."

 송원교의 음성은 여전히 염려가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칠제의 장검을  발견한 순간부터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
릴 수가 없었네."

 유연주가 그의 말을 이었다.

 "그 일은 정말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처럼 무공을 연마한
자는 무기를 목숨처럼 여기는데, 더군다나 그 장검은 스승님께서
하사한것이 아닙니까? 그  귀중한 검인데 검만 발견되고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장무기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막칠숙의  안위가 염려되는 한편
자신이 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울적했다. 일이 이렇
게 된 이상 몸을 도사려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져다. 만약 발
각되는 날이면 자신과 조민의 관계를 오해받게 될 뿐 아니라, 자
칫 막사숙을 불리하게 만든 누명까지 뒤집어 쓰게 될 것이다.

 장무기는 감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조민의 손을 잡고 살금
살금 동굴깊숙이 기어들어갔다. 그런데 깊이 들어갈수록 이상한
냄새가 풍겨왔다. 비릿한 것이  들짐승의 냄새 같기도 하고 피비
린내 같기도 했다.

 장무기는 손으로 앞을 더듬으며 좁은 동굴을 꺾어 돌자, 갑자기
손끝에 이상한 물체가 와  닿았다. 물렁물렁한 것이 사람의 몸이
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순간 장무기는 소스
라치게 놀랐다.  그의 뇌리에 전광석화같이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자가 친구든 적이든 간에 소리를 내는 날엔 사백숙님들에게
발각될 것이다!'

 그는 반사적으로 지풍을 날려 상대방의 가슴 앞 다섯 군데 혈도
를 찍는 동시 손목을 나꿔잡았다. 그러자 차가운 감촉이 손을 통
해 전달돼 왔다. 상대방은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된 것이다.

 장무기는 희미한 불빛을  빌려 상대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순
간, 장무기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는 눈 앞에 벌어
져 있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럴 수가.....!'

 동굴 깊숙한 곳에 시체로 변해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그의 칠사
숙인 막성곡이었다.

 장무기의 놀라움은  실로 형용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시체를 끌어안고 동굴 바깥쪽으로 다시 얼마 정
도 걸어나갔다. 불빛이 잘 새어 들어오는 지점에 이르러 다시 확
인해 보았으나 틀림없는 막성곡 막칠숙이었다.

 장무기는 청천벽력을  맞은 듯 그 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그가
막성곡의 시신을 안고  반사적으로 동굴 바깥쪽을 향해 뛰쳐나오
는 바람에 동굴 밖에  있는 송원교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대뜸 소
리쳤다.

 "동굴 안에 누가 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싸늘한 검광이 연거푸 번뜩였다. 무
당 사협이 모두 검을 뽑은 게 분명했다.

 장무기는 내심 아뿔싸를 토했다.

 '내가 막칠숙을 살해한 대역무도한 죄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군.
사백님과 사숙님들이 동굴 입구를 가로막고 있어 달아날 수도 없
고.....'

 막칠숙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여러  가지 고마움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송원교 등이 동굴 안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변명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역시 조민의 생각은 그보다 빨랐다. 그녀는 갑자기 동굴 밖으로
몸을 날리며 장검을 떨쳐 연거푸 사검(四劍)을 전개했다. 그녀가
펼친 검초는 모두 아미파의  무서운 살초였다. 물론 그녀가 노린
것은 무당 사협이었다.

 무당 사협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기습에 재빨리 수비 자세를 취
했다. 그 틈을  타서 조민은 무당 사협이 타고  온 네 필의 준마
중의 한  필을 골라 전광석화같이 안장  위로 올라타며 송원교가
반격해 오는  일검을 뿌리침과 동시에 말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
다. 그 말은 고통을 못 이겨 곧 앞을 향해 치달렸다.

 그 순간 조민은 등줄기에  심한 충격을 느끼며 눈앞이 캄캄해지
고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유연주가 전개한  일장을 맞은 것이
다.

 무당 사협은 지체하지 않고 경공을 전개해 뒤쫓아 왔다.

 조민은 자신의 안위보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내가 멀리 달아날수록 그가 굴 안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꼼짝없이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될 것이다. 넷이 모
두 날 쫓아오는  것으로 보아 동굴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미처 생각지 못한 모양이니 천만다행이다!'

 그녀는 등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참음 검으로 말의 엉덩
이를 살짝 찔렀다. 그러자 준마는 길게 울부짖으며 죽을 힘을 다
해 앞으로 달려나갔다.

 한편, 장무기는 조민이난데없이 동굴 밖으로 뛰쳐 나가자 멍해
졌으나 이내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기를 위해 위험
을 무릅쓰고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를 전개한 것이다. 장무
기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녀의 행동을 만류하기엔 때가 너무
늦었다.

 장무기는 조민의 호의를 헛되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즉시 막성
곡의 시신을 안고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예민한 청각으
로 조민과  무당 사협이 동쪽으로 달려간  것을 알고 반대쪽으로
신법을 전개했다.

 약 이 리(里)쯤 벗어나 커다란 바윗돌 아래 막칠숙의 시신을 감
추고 나서 나무 위로 몸을 솟구쳤다. 그의 가슴은 아직도 심하게
뛰고 있었다. 막칠숙의 처참한  죽음을 생각하자 절로 눈물이 흘
러내렸다.

 '우리 무당파는 왜 계속 이런 불상사를 겪어야 한단 말인가? 도
대체 사숙님을 살해한 흉수는 누구일까? 등뼈가 으스러진 것으로
보아 내가장력(內家掌力)에 의해 목숨을 잃은게 분명한데.....'

 약 반  시진이 지나자 세 필의  준마가 동쪽으로부터 달려왔다.
송원교와 유연주가 제각기 준마 한 필씩 몰고 은이정과 장송계가
말 한 필에 같이 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먼저 유연주의 음성이 뚜렷이 들려왔다.

 "그 요녀는 나의 일장을 맞고 말을 탄 채 절벽 아래로 떨어졌으
니 살아나기 어려울 거야."

 장송계가 그의 말을 받았다.

 "오늘에서야 만안사에서 당했던  수모를 갚게 되었습니다. 그런
데 그 요녀가 이런 황량한 동굴 속에 있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
지 않습니다."

 은이정이 그에게 물었다.

 "사형, 그녀가 혼자 동굴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장송계가 대답했다.

 "글쎄..... 워낙  요사스러운 계집이라  종잡을 수가 있어야지.
그 요녀를  죽인 것은 통쾌한 일이지만  그보다는 칠제의 행방을
속히 찾아내는 게 시급하네."

 장무기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네 사람의 모습이 차츰 멀어질수
록 더 이상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장무기는 송원교 등이  멀어지자 나무에서 뛰어내려 말굽자국을
따라 동쪽으로 치달렸다. 그는 초조하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비록 교활하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날
도와주었다. 만약 이로  인해 그녀가 불상사라도 당하게 된다면,
나는..... 난.....'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신법을  전개했다. 약 사,오 리 가량 달리
자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나타났다. 눈이 쌓인 그곳 벼랑 가장자
리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그리고 발자국과 말굽자
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벼랑 가장자리에 있는
돌더미의 일부가 무너져 버린  흔적 역력했다. 조민이 말을 몰고
허겁지겁 달아나다가 그만 길을  잘못 택해 벼랑 아래로 말과 함
께 떨어진 게 분명했다.

 장무기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벼랑  아래를 향해 소리높여
외쳤다.

 "조낭자! 조낭자!"

 연거푸 외쳐 불렀으나 메아리만 멀리 퍼져 갈 뿐 대답이 들려오
지 않았다.

 장무기는 더욱 조급해졌다.  벼랑 가장자리에 서서 아랫쪽을 살
펴보니 칠흑같은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벼랑은
깎아지른 듯하여 도저히 발을  내딛을 곳이 없었다. 게다가 응달
진 탓인지 두꺼운 얼음층에 덮혀 있었다.

 장무기는 가만히  서서 그녀의 대답이  들려오길 기다릴수 만은
없었다. 그는 곧 몸을 돌려  열 손가락에 진력을 모아 마치 갈퀴
처럼 빙층을 찍어 꽂으며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벼랑은 생
각보다 깊지 않았다. 얼마 후에 그는 벼랑 밑바닥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발밑에 말랑말랑한 느낌이 와 닿았다.
그는 흠칫 놀라며 즉시 옆으로 몸을 피했다.

 알고보니 그가 밟은 것은 말의 시체였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니
조민은 말의 목을 껴안은 채 그곳에 함께 있었다. 장무기는 얼른
그녀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어  보았다. 천만다행하게도 맥박이
미약하게나마 뛰고 있었다. 단지  심한 충격에 의식을 잃었을 뿐
이었다. 장무기는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나마 안
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골짜기 안은 어둠침침하고 눈이녹지 않아 허리까지 쌓여 있었
다. 아마 조민은  안장에서 이탈하지 않은 채  사력을 다해 말의
목을 껴안았기 때문에, 떨어져  버린 충격이 단지 말에게 가해져
말은 그  자리에서 죽고 조민은 구사일생으로  목숨만은 건진 것
같았다. 장무기는 그녀가  비록 심한 중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걸 알았다.

 장무기는 곧 그녀를 끌어안고 자신의 구양신공으로 우선 그녀의
얼은 몸을 녹여 주었다. 이어  운공료상을 하니 반 시진 후에 조
민은 드디어 천천히 깨어났다.

 장무기는 지체하지 않고 그녀의 등에 쌍장을 붙이고 구양진기를
체내에 주입시켜  주었다. 다시 한 시진  가량이 흘렸다. 어느덧
동녘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조민은 갑자기 울컥하고 안 모
금의 검붉은 피를 토해 내더니 비로소 미약하게 입을 열었다.

 "그들은 모두 갔나요? 당신의 얼굴은 보지 못했죠?"

 그녀는 장무기가  누명을 쓰지 않았는지  그것이 가장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장무기는 그녀의 마음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염려 마시오. 나를  보지 못했소. 나 때문에 이런 위험을
무릅쓰다니.....'

 장무기는 말을 하면서 계속  그녀의 체내에 진력을 주입시켜 주
었다. 조민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비록  사지가 나른하여 전혀
힘을 쓸 수 없지만  마음은 한없이 뿌듯했다. 구양진기가 그녀의
체내에 다시 몇 바퀴 유전되자 몸이 한결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담담한 미소를 띄운 채 말했다.

 "이제 됐어요. 좀 쉬도록 하세요."

 장무기는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껴안으며 자신의 볼을 그녀의
왼쪽 볼에 대었다.

                                                    계속 ---



#2892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2장 #5/6             03/05 19:00   427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2 장 빗나간 연심(戀心) #5/6

 "낭자는 나의 명예를  구해 준 것이오. 그것은  나의 목숨을 열
번 구해 준  것보다 더 귀중하오. 난 결코  그 은혜를 잊지 않겠
소."

 조민은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말했
다.

 "나는 간사하고 악랄한 요녀이니, 당신의 명예보다도 당신의 생
명이 더 중요해요."

 바로 이때였다. 벼랑  위에서 갑작스레 유연주의 싸늘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 요망한  계집! 과연 죽지 않았구나.  네가 막칠협을 어떻게
죽였는지 어서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장무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네 분 사백숙님들은 분명 떠나갔
는데 어째서 다시 되돌아온 것일까?

 조민이 황급히 그에게 말했다.

 "어서 얼굴을 돌리세요. 그들이  당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
세요."

 이번에는 장송계의 냉랭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이 악랄한 요녀야!  어서 대답을 하지 않으면  돌을 던져 당장
분신쇄골시키겠다!"

 조민이 별아 위를 올려보니  송원교 등이 벼랑 가장자리에서 제
각기 커다란 바윗돌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그들이 돌을 던진다
면 벼랑 밑 골짜기가 협소하여 자기와 장무기는 목숨을 부지하기
가 어려울 것이다.

 그녀는 장무기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우선 옷자락을 찢어 얼굴을 가리고 날 안고 달아나세요."

 장무기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옷자락을 찢어 복면을 했다. 그리
고 털모자를 눌러 쓰자 두 눈만 노출되었다.

 무당 사협은 강호의 경험이 많은 만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들은 조민을 벼랑 밑으로 몰아넣었지만, 조민이 군주의 신분이므
로 틀림없이 주위에 호위병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일
부러 말을 몰아 멀리  떠나는 척하다가 은밀한 곳에 말을 숨겨두
고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그들은 조민이 나왔던 동굴부터 살폈으나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
지 못했다. 그대신 동굴  밖에서 장무기의 발자국을 찾아서 곧장
뒤쫓아갔다. 그곳에서 뜻밖에도 막성곡의 시체를 발견한 무당 사
협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특히 은이정은 까무라칠 정
도로 통곡을 터뜨렸다.

 한참 후에야 유연주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조민 그 요녀는 비록  무공이 약하지 않지만 그 혼자의 힘으로
선 절대 막칠제를죽이지 못할 것이니, 필경 주위에 고수들이 있
을 걸세. 우린 이곳에서 슬퍼만  할 게 아니라 그들을 일일이 찾
아내 복수를 해야 하네."

 장송계가 그의 말을 받았다.

 "우린 일단 동굴 주위에 은신해 있도록 합시다. 날이 밝으면 요
녀의 부하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는 지혜가 뛰어나 송원교는 항상 그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그들은 곧 슬픔을 억제하고 각자 동굴 주위에 몸을 숨겼다.

 한데 날이 밝아올 무렵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무당 사협은
다시 조민이 떨어졌던 벼랑  쪽으로 달려갔다. 뜻밖에도 벼랑 아
래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와  내려다보니, 비단 옷을 입은 남자가
조민을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당 사협은 그제서야 요녀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막성곡의 사인을 다그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을 캘 생각이 아
니었다면, 벌써 큰 바윗돌을 던져 두 사람을 공격했을 것이다.

 지금 장무기와  조민이 있는 골짜기는  커다란 우물처럼 사면이
막혀 있고 단지 서북쪽에 좁은 출로가 있을 뿐이다.

 장송계의 호통이 다시 들려왔다.

 "이 몽고 오랑캐들아!  어서 이쪽으로올라오지 못하겠느냐? 더
이상 꾸물댄다면 돌을 던지겠다!"

 장무기는 사사백님이 자기를 몽고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고 일단 안심이 되었다.  그는 호화스러운 차림새로 조민과 함께
있기 때문이었다.

 장무기는 주위를 두리번  살펴 몸을 피할 만한  곳이 없다는 걸
알았다. 사백숙님들이 큼지막한  바윗돌을 던진다면 자기는 충분
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지만, 조민은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지금으로선 상대방이 시키는 대로  하는 도리밖에 별 수가 없었
다. 하여 그는 조민을 안고 협소한 벼랑 틈새로 천천히 기어올라
갔다. 그리고 무공이  약하다는 인식을 주기 위해  일부러 몇 번
미끄러지곤 했다. 이 협소한  틈새로 기어오르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일부러  미끄러지는 바람에 벼랑 위까지 올
라가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자연히 그는 숨을 몰아쉬며
낭패한 모습까지 보여 주어야만 했다.

 일단 골짜기를 벗어나면  조민을 안고 달아날 작정이었다. 자신
이 신법을 최고 경지로 전개하면 설령 조민을 안고 있다 해도 능
히 무당사협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송계는
관찰력이 예민하여 그가 일부러 낭패한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다
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나머지  사람에게 알려 장무기가
올라오자마자 선제공격을 취해 제압하기로 서로 약정해 놓았다.

 과연 장무기가 벼랑위로 오르는  순간 네 자루의 장검이 날아와
그의 몸에서 반 자 가량의 간격을 두고 진로를 완전히 봉쇄했다.

 송원교가 이를 갈아부치며 호통쳤다.

 "이 악랄한  오랑캐놈아! 얼굴을 가린다고  해서 목숨이 부지될
것으로 생각했느냐? 무당 막칠협에게 살수를 전개한 놈이 누군지
냉큼 밝혀라! 조금이라도 거짓말이  있을 시엔 난도질을 면치 못
할 것이다!"

 송원교는 본디 성품이  차분하여 좀처럼 흥분하지 않았다. 그러
나 막성곡의 죽음으로 인해 말투가 거칠어졌다.

 조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노금시화(盧金時化) 장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모든 것을 솔
직히 털어놓는 도리밖에 없을 것 같군요."

 그녀는 앞서 이미 장무기에게 성화령의 무공을 전개하도록 귀띔
을 해준 바가 있었다.

 장무기는 본디  사백숙님들에게 무공을  전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부득이한 상황하에선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아랫 입술을 깨물며  갑자기 조민의 몸을 번쩍 들어올려 은
이정을 향해 던지는 동시에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괴성을 지르며
장송계를 겨냥해 공격해 갔다.

 은이정은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멍해졌으나 생각을 굴릴 겨를도
없이 일단 조민의  몸을 받아 혈도를 찍어  한쪽에 팽개쳤다. 그
순간 장송계는 그의 신랄한  금나수법을 피하기 위해 뒤로 한 걸
음 물러났으며, 장무기는  성화령의 괴이한 무공으로 각법(脚法)
을 전개했다.

 모든 것이 눈깜박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장송계가 뒤로 물러나
자마자 그에게 반격을 시도했을 때 장무기는 이미 은이정에게 몸
을 번뜩여 그의 손에서 장검을 빼앗아 왔다. 실로 상식을 초월한
몸놀림이었다.

 무당 사협은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의 일류  고수지만, 그가 단
숨에 전개한  여러 가지 괴이한 초식으로  인해 자중지란이 생겼
다.

 눈속에 쓰러져 있는 조민이  무당 사협을 혼란시키기 위해 소리
쳤다;.

 "노금시화 장군!  이번에는 우리 몽고인의  특기인 씨름 묘기를
보여 주세요!"

 장송계는 적시에 소리쳤다.

 "저 오랑캐의 초식이  괴이하니 태극권(太極拳)으로 상대해야겠
습니다!"

 네 사람은 즉시  검법에서 권법으로 변화시켰다. 일단 수비망이
구축되었다.

 장무기는 무엇보다도 상대방의  혼란을 야기시키는데 중점을 두
었다. 그로선 상대방을 해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조민과 함께 달
아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는  갑자기 땅에 주저앉더니 두 주먹
으로 자신의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무당 사협은 여지껏 살아오
면서 숱한 적을 상대해 왔다. 그런데 지금 상대방이 난데없이 땅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의 가슴을 치는 것을 보자 눈이 휘둥그래졌
다. 이러한 괴초는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생전 들어본 적도 없
었다.

 무당사협은 이미 장검을 거두고 각자 태극권을 전개해 수비망을
구축했지만, 상황이 바뀌자 송원교, 유연주, 장송계가 다시 장검
을 뽑아쥐고 장무기에게 덮쳐갔다.

 한편 은이정은  장무기에게 장검을  빼앗겼지만, 막성곡이 남긴
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검을 다시 뽑아들고는 사형들과 보
조를 맞추었다. 순간 장무기는 상반신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반원
을 그리며 땅에 쌓여 있는  눈을 냅다 걷어찼다. 거기에 따라 허
공에 눈보라가 난비하며 무당사협을 항해 휘몰아쳐 갔다.

 이 초식은  바로 성화령의 괴초로서  산중노인이 즐겨 사용하던
것이었다. 산중노인이 교를 창립하기 전에 파사국 사막에서 행상
을 해왔는데, 가끔 흉악한  여상(旅商)들을 만나면 이 수법을 사
용하곤 했다. 일단 멀리서 여상의 행렬이 나타나면 그 자리에 주
저앉아 가슴을 치며 괴성을  지른다. 그러면 여상들이 가까이 다
가와 영문을 물을 것이고, 그 순간을 이용해 냅다 몸을 회전시키
며 모래를  걷어찬다. 여상들은 난데없이  날아오는 모래에 눈을
뜰 수 없게  되고 그 틈을 이용해  칼을 전개하면 삽시간에 수십
명의 여상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곤 했다. 실로 악랄한 수법이
었다.

 지금 장무기가 눈보라를 일으키자 모래바람을 일으키는 것과 똑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무당사협은 눈보라로 당황함을  금치 못했으나 임기웅변이 빨라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장무기의 몸놀림은 그들보다 훨씬
빨랐다. 그는 다짜고짜 유연주의  다리를 끌어안고 땅에서 한 바
퀴 뒹굴며 전광석화처럼 세  군데 혈도를 찍었다. 이어 용수철에
의해 튕겨지듯 은이정에게 덮쳐가 단숨에 다섯 군데 혈도를 찍자
은이정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송원교가 적시에 뒤에서 덮쳐왔지
만, 장무기가 팔꿈치를 뒤로 쭉 밀어내는 동시에 흡사 자석에 끌
리듯 몸이 뒤로 미끄러져  송원교의 몸과 맞부딪쳤다. 그러한 동
작이 어찌나 빠른지 송원교는 미처 검초를 전개하기도 전에 가슴
에 심한 충격을 느끼며 혈도가 찍히고 말았다. 그는 장무기의 머
리 위로 쳐들었던 장검을 떨어뜨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장송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네  사람 중에 이제 남은 것은 자
기 혼자뿐이었다.  그는 차라리 상대방과  죽음을 함께 하겠다는
각오로 장검을 싸늘하게 떨치며 양패구상(兩敗俱傷)의 타법을 전
개했다. 그러나 장무기와의  실력 차이가 너무나 현격했다.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역시  아랫배와 왼쪽 허벅지에 혈도가 찍혀 쓰러
지고 말았다. 장무기가 노린  것은 그의 하체였다. 단지 그를 쓰
러뜨려 움직일 수  없게끔 하기 위해 혈도를  찍은 것이다. 한데
장송계는 쓰러지자마자 갑자기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전신에 심
한 경련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장무기는 흠칫 놀랐다.  혹시 장사백님께서 숨겨온 질환이 있는
데, 지금 발작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뇌리에 스쳤다. 그
는 크게 당황하여 얼굴 앞으로 달려가 가슴을 더듬어 보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장송계가 별안간 왼손을  쭉 뻗어내 그의
얼굴을 가렸던  복면을 벗겼다. 너무  뜻밖의 행동이라 장무기는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복면이 벗겨지고 말았다. 일순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모두 돌처럼 굳어졌다.

 한참 후에야 장송계가 한맺힌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무기.....  이놈! 이제  봤더니 네가.....  배은망덕도 유분수
지....."

 그는 너무나 놀랍고 분노한  나머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
았다. 오히려 눈에서 눈물이 먼저 흘러내렸다. 그는 배신감에 치
를 떨 수밖에 없었다.

 알고보니, 장송계는 도저히 상대방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대로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원수가 누구이며
대관절 어떤 누구인지 알기  위해 일부러 비명을 질러 복면을 벗
기게 된 것이다.

 장무기는 정체가 탄로나자 혼백이  달아난 듯 뇌리에 혼란이 오
며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사사백님! 제가 아닙니다! 네가..... 어찌 칠사숙님을.....!"

 장송계는 처연하게 웃었다.

 "좋다, 좋아!  어서 우리마저 죽여라.  대사형, 이사형, 그리고
육제, 모두들 똑똑히 보셨죠? 이 오랑캐의 앞잡이가 다름아닌 우
리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무기입니다!"

 송원교, 유연주, 은이정은 몸을 움직일 수 없어 그저 넋빠진 사
람모양 멍하니 장무기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들은 눈앞에 전개된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장무기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갑자기 땅에서 한자루의
장검을 주워들어 자신의 목을  향해 베어갔다. 그것을 본 조민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잠깐만! 대장부라면 모든 진실을 밝혀야 할 줄도 알아야 해요!
만약 당신이 이대로 헛된  죽음을 택한다면, 막칠협을 살해한 진
짜 흉수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것은 결코 무당
제협들이 바라는 바가 아닐 거예요."

 장무기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오?"

 그는 조민에게 다가가  혈도를 풀어주었다. 조민은 부드러운 음
성으로 그를 위로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당신이  이끄는 명교에 많은 고수가 있
고 내 수하 중에서도 지혜가 뛰어난 인물이 있으니, 틀림없이 원
흉을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장송계가 소리쳤다.

 "무기야! 네놈이 눈꼽만큼이라도 양심이 남아 있다면 어서 우리
에게 살수를 전개해라!"

 장무기는 안색이 창백해져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조민은 그
를 똑바로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기분이 어때요? 당신은 나더러 주 낭
자를 죽인 흉수라 고집했는데, 이제 내 심정을 이해하겠어요?"

 장무기는 비로소 그녀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졌다.

 '그럼.....그녀가 정말 나와 마찬가지로 억울하게 누명을.....'

 조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사백숙님들에게 혈도를  찍었는데 그들이 스스로 풀 수
있나요?"

 장무기는 고개를 내둘렀다.

 "성화령에 수록된 점혈수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풀지 못할 것이
오. 하지만 열 두 시진 후에는 스스로 풀어지게 될 거요."

 조민은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선 이분들을 동굴로 데려다  놓고 우린 떠나요. 진짜 흉수를
잡기 전엔 이분들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장무기는 도저히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그녀의 의견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알았소."

 그는 무당  사협을 안아 커다란 바윗돌  뒤로 옮겨놓았다. 일단
풍설을 피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무당 사협은 계속 욕을 해댔지만, 장무기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
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민이 그를 거들었다.

 "네 분은  모두 무림고인인데 어찌  이다지도 생각이 얄팍하죠?
만약 장상공이 흉수라면 이 자리에서 당장 네 분을 죽여 입을 봉
하면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될 게 아니겠어요? 만약 네 분이 계속
욕설을 한다면 각자의 뺨을  후려치고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
겠어요. 나는 원래 사악한 요녀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일쯤은 서
슴없이 해낼 수가 있다는 걸 어려분들은 잘 알고 있겠죠?"

 송원교 등은 아연실색해졌다.  대장부는 목이 떨어지는 한이 있
어도 모욕을 당할 수는 없는  법, 만약 이 요녀에게 뺨을 얻어맞
고 무릎을 꿇리게 된다면, 평생을 두고 그 치욕감을 떨쳐 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곧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욕을 하지 않았다.

 조민은 빙긋이 웃으며 장무기에게 말했다.

 "내가 가서 말을 끌고 올께요. 나를 남겨두고 당신이 말을 끌러
가기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죠?"

 장무기는 그녀의  말을 부인할 수 없었다.  조민은 워낙 성격이
당돌해 사백숙님들에게 무슨  행동을 전개할지 사실 염려가 되었
다.

 "그럼 수고를 좀 해주시오."

 조민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저들을  끔찍이 생각하고 있지만,  저들은 당신을 믿지
않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장무기는 그녀의 투덜거림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조민은 곧 천
천히 걸어나갔다.  그녀는 상세가 심한  탓인지 걸음이 비틀거렸
다. 장무기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고마움과 미안함이 엇갈
렸다.

한데, 조민이 앞으로 얼마정도 걸어나갔을 때, 북쪽 대로로부터
급박한 말굽소리가 들려왔다. 한  필의 말이 앞서 달리고 있으며
두 필의 말이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뒤따라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민은 그 소리를 듣자 다시 되돌아왔다.

 "누가 이곳을 향해 말을 몰고 오는 것 같아요."

 장무기는 그녀와 함께 바윗돌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유연주
의 몸이 바윗돌 밖으로 조금 노출돼 있는 것을 보고 안으로 끌어
들였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무당 사협의 아혈(啞穴)을
찍어 입을 열 수 없게 했다.

 곧이어 앞서 달리던 말이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까
지 이르렀다. 뒤를  따르고 있는 두 필의  말은 약 이,삼 십장의
간격이 떨어져 있었다. 앞서 달리는 말에 쫓기고 있는 게 분명했
다. 순간, 장무기는 앞서  달려온 말에 탄 사람을 알아보고 나직
이 외쳤다.

 "앗! 송청서 사형이.....!"

 조민이 즉시 그에게 귀띔을 했다.

 "어서 그를 막으세요."

 "아니.....? 무엇 때문에?"

 "그 이유는 묻지 마세요!  미륵묘에서 있었던 일을 벌써 잊었나
요?"

 장무기는 그 말에 불현듯 느끼는 바가 있어 얼음조각을 집어 냅
다 던지자 정확하게 송청서가 몰고 오는 준마의 무릎뼈에 적중되
었다.

 준마는 그  즉시 무릎이 꺾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바람에
송청서의 몸도 허공으로 날아올라 한 바퀴 회전하더니 사뿐히 땅
에 떨어져 내렸다.

 장무기는 다시 작은 얼음조각을  던져 그의 오른쪽 다리의 혈도
를 찍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두  필의 준마가 가까이 달려왔으며 송청서
는 나직한 신음과  함께 쓰러졌다. 뒤따라 말을  몰고 달려온 두
사람은 바로 개방의 진우량과 장발용두였다.

 장무기는내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들 세 사람은 실심산을 만드는 독물을 구하기 위해 장백산으
로 가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쫓기고 쫓으며  이곳까지 온 것일
까?'

 진우량과 장발용두는 즉시 안장에서 뛰어내려 무기를 뽑아 쥐었
다. 그들은 송청서의 말이 지쳐 쓰러진 것으로 생각했다. 송청서
는 장무기가 얼음조각으로 자신의 무릎 혈도를 찍은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해 단지 낙마하면서 무릎을 다친 것으로만 알았다.

 장무기가 다시 얼음조각을  집어 진우량에게 던지려는데 조민이
만류했다. 그녀가 턱으로 진우량과 송청서를 가리키며 눈짓을 하
자 장무기는 비로소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하여 일단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눌 것인지 들어보기로 했다.

 장발용두가 먼저 성난 음성으로 외쳤다.

 "송가야, 야밤중에 몰래  달아난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의 계획
을 너의 부친께 알리기 위해서냐?"

                                                    계속 ---



#2893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2장 #6/6             03/05 19:01   430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2 장 빗나간 연심(戀心) #6/6

 그는 팔괘도(八卦刀)를 좌우로  떨치며 당장이라도 송청서의 목
을 내리칠 기세였다.

 송청서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아버님께 알릴  생각은 없었소. 그러나  아버님을 해치는 일에
협조할 순 없었소. 그것은 짐승만도 못한....."

 장발용두는 대뜸 호통을 쳤다.

 "닥쳐라! 네가 감히 방주의 명을 거역할 작정이냐? 방을 배신하
는 자는 어떠한 벌을 받는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송청서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나는 천하에 둘도  없는 죄인이오.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도
없소. 요 며칠 동안 눈만  감으면 막칠숙의 혼백이 내 목을 조르
는 악몽에 시달려 왔소. 장발용두, 제발 단칼에 날 죽여 주시오.
그러면 감사를 할 것이오!"

 장발용두는 팔괘도를 번쩍 들어올렸다.

 "좋다! 소원이라면 기꺼이 막성곡의 곁으로 보내 주마!"

 진우량이 얼른 나섰다.

 "용두 형님, 송형제가 우리를 협조하지 않겠다면 죽여도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자신의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
십시오."

 장발용두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놓아 주자는 뜻인가?"

 진우량은 교활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기의  손으로 막성곡을 죽였으니 무당파가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저런 대역무도한  자는 언젠가는 우리를
배신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건 비겁한 자를 죽이기 위해 구태여
우리 협의도의 칼을 더럽힐 필요가 있겠습니까?"

 장무기는 미륵묘에서 진우량이 막성곡을 언급하자, 송청서가 갑
자기 태도를 바꿔 고분고분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송청서
가 바로 막성곡을 살해한  흉수일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
이었다. 그는 청천벼락을 맞은 듯 심한 충격을 받았다.

 송원교 등 네 사람은 바윗돌에 가려져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
황을 볼 수 없지만 그들의  대화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들
역시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랐다.

 단지 조민만이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는지 입가에 경멸에 찬
웃음이 스쳐가며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송청서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진형님, 그  일은 절대 누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았습니
까? 사나이로서 어찌 그 약속을 저버릴 수가 있습니까?"

 진우량은 냉랭하게 웃었다.

 "자넨 내가 한 맹세를 기억하고 있군. 자네가 스스로 맹세한 것
을 잊었는가? 자네는 분명 모든 일을 내 명령에 따라 움직이겠다
고 하지 않았던가? 자네가 먼저 약속을 저버렸기 때문에 나도 그
사실을 이 자리서 털어놓은 걸세."

 송청서는 안색이 참담해졌다.

 "나더러 태사부님과 아버님의  음식에다 독을 풀어 넣으라는 명
령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으니, 어서 날 죽여 주시오!"

 진우량은 느긋하게 말했다.

 "송형제, 흐름을 잘 타는 사람만이 현명한 인물이네. 난 자네더
러 그들을 죽이라는 뜻이 아니라, 단지 정신을 잃게 하는 미약을
먹이라고 했네. 미륵묘에서 자넨 분명히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
하지 않았는가!?"

 송청서는 세차게 고개를 내둘렀다.

 "난 단지 미약을 풀어넣겠다고 약속했을 뿐이오! 그런데 알고보
니 장발용두가  잡으려는 오독사와 지네 따위는  모두 살인을 할
수 있는 독약이오. 절대 미약에 쓰여질 수가 없소!"

 진우량은 천천히 장검을 거두었다.

 "아미파의 주 낭자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미인인데, 자넨 그 여
인이 장무기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그냥  방관만 하겠다는 건
가? 그날 밤에 자넨 아미파 여제자들의 침실을 훔쳐 보다가 막성
곡에게 들켜 달아나는 바람에 막성곡은 뒤쫓아가게 되었고, 결국
석강(石江)에서 맞부딪쳐  싸움을 벌여  자네가 막성곡을 죽이지
않았던가? 그 엄청난 일을 저지른 원인도 따지고 보면 자네가 그
미모의 주 낭자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인데, 이제 그녀를 아
내로 맞이할 수 있게  된 마당에 포기하려 하다니 나로선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네."

 송청서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악을 쓰듯 성난 음성
으로 외쳤다.

 "그날 밤 난 막사숙을 당해 내지 못해 차라리 그의 손에 죽으려
했소. 그런데 당신이 난데없이  나서서 날 돕지 않았소? 난 결국
당신의 간계에  넘어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
오!"

 진우량은 간사하게 웃었다.

 "이제와서 나를 원망하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그날 밤 막
성곡에게 치명상을 입힌 진천철장(震天鐵掌)은 내가 전개한 것인
가? 아니면 자네가 전개한  것인가? 그건 분명 자네 무당파의 무
공이잖는가? 그날 밤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서 자네의 목
숨을 구해줬을 뿐 아니라 명성까지 지켜 주었는데, 이제 와서 오
히려 날  원망하다니! 그리고서도 자네는 인간이라  할 수 있나?
아무튼 좋네. 자네를 사귀게 된 것도 내 전생의 업보일지 모르니
더 이상 지난 일을 따지고  싶지 않네. 그리고 자네가 사숙을 죽
인 일도 더 이상 입 밖에 내지 않겠네. 기회가 있으면 다시 만나
게 되겠지. 난 이만 가야겠네."

 송청서는 그가  이렇게 고분고분 물러갈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대..... 대관절 날..... 어떻게 할 생각이오?"

 그의 표정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우량은 태연하게 말했
다.

 "내 자네를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불안해  할 필요는 없네.
참, 자네에게 보여 줄 것이 있네. 이게 무엇인지 똑똑히 보게."

 장무기는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진우량이 송청서에게 무엇을 보여주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때 송청서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터졌다.

 "앗! 그것은..... 아미 장문인을 상징하는 철지환이 아니오? 분
명히 주낭자의 반지인데 어째서..... 당신 손에.....!"

 놀란 것은 장무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지약과 헤어졌을 때 분명 저 철지환을 손에 끼고 있는 것
을 보았는데,  어째서 진우량의 수중에  들어간 것일까? 음.....
틀림없이 진우량이 또 무슨  흉계를 꾸미기 위해 가짜를 만든 게
분명해!'

 진우량이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자세히 보게.  이 철지환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부터 확인해
보게."

 잠시 후 송청서의 격동된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서역에서 멸절사태에게  무공을 가르침받은 적이 있는데,
당시 이 반지를 끼고 있었소. 내가 보기엔 진짜인 것 같소."

 이어 검으로 반지를  연거푸 내리치는 금속성이 들려오더니, 진
우량이 입을 열었다.

 "만약 가짜라면 벌써 토막났을  걸세. 자세히 보게. 이 반지 안
쪽에 유태양녀(留胎襄女)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지 않
은가? 바로 왕년에 대협  곽정이 그의 딸이자 아미파의 조사이신
곽양 여협에게 준 것으로,  역대 아미파 장문인의 징표로 전해져
온 철지환이네."

 "그것을 어떻게..... 그럼 주 낭자는.....!"

 "하핫.....!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네. 장발용두 우린 이만 떠
나도록 합시다."

 진우량은 즉시  몸을 돌려 장발용두와  떠나가려 하자 송청서가
다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진형님!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주낭자가 어떻게 되었소? 주
낭자가 이미 진형님의 수중에.....?"

 진우량은 몸을  돌려 다시 앞으로  다가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데로 주낭자는 이미 내 손아귀에 들어왔
네. 남자라면 누구나 그  같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마음이 끌리지
않는 자가  없을 걸세.자네가 정녕  그녀를 포기하겠다면 나라도
그녀를 차지해야 할 게  아니겠는가? 물론 자네가 지금이라도 마
음을 돌려  우릴 돕는다면 문제가  달라지겠지만, 자네같이 뜻이
확고한 자가 마음을 돌릴 리가 있겠나?"

 그는 다시  몸을 돌려 떠나가려 했다.  그러자 송청서가 황급히
외쳤다.

 "잠깐만!"

 진우량은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이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주시했다. 송청서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그는 모종의 결단을  내리기 위해 괴로워하고 있는게 분
명했다.

 장무기는 자신도 모르게 송원교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송원교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비통함이 극에 달해 있는 모습
이었다.

 이때 송청서의 음성이 들려왔다.

 "진형님, 용두형님, 소제가  한때나마 어리석은 생각을 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무든 것은 진형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진우량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진작 그렇게 나와야지. 자넨 역시 나의 좋은 형제
일세. 나만 믿게. 곧 자네와 주낭자가 혼례를 올릴 수 있게끔 주
선을 해 주겠네. 일단 우리를 협조해 장진인과 영존 등을 제압시
키면 장무기 녀석도 틀림없이 우리에게 무릎을 꿇게 될 걸세!"

  "그렇고 말고,  거듭 말하지만 우린 단지  장진인과 영존 등을
당분간 연금하려는 것뿐이네. 그들을  인질로 잡고 있지 않는 한
장무기를 굴복시킬 수 없기  때문이네. 우리가 만약 장진인 등을
해친다면 장무기는 필시 혈안이 되어 우리 개방을 찾아와 복수하
려고 날뛸 텐데, 그 결과는 오히려 우리에게 해로울 게 아니겠는
가?"

 진우량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개방이 장무기를 굴복시킨  다음 오랑캐들을 몰아내 천하를 거
머쥔다면 자네야말로 개국공신이 될 것이고, 아름다운 아내와 더
불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걸세."

 송청서는 고개를 떨구었다.

 "소제는 부귀영화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선 주낭자부터 만나보
고 싶으니....."

 "하하.....! 염려 말게.  지금 방주님과 모든 장로께서 노룡(盧
龍)에 와 있네. 물론 주낭자도 함께 있네."

 송청서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주 낭자는 어떻게 해서 진형님에게.....!"

 진우량은 빙긋이 웃었다.

 "그것은 용두형님의 공로였네.  그날 장봉용두와 장발용두가 주
루에서 술을 마실 때 낯설은 세 사람이 본방 제자로 위장해 있는
것을 발견했네. 당시는 내색을  하지 않고 나중에 암암리에 조사
해 보니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천하일색 주낭자라는 것을 알았
네. 장발용두께서 곧 사람을 시켜 그녀를 모셔오게 되었지. 주낭
자는 머리카락  하나 다친 데  없이 편안하니  조금도 염려를 말
게."

 장무기는 내심 아뿔싸를 토했다.

 '이제보니 그나 주루에서 이미 들통이 났군. 의부님께서 실명만
하시지 않았다면 미리 낌새를 알아차렸을 것인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진우량은 사손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득의하게 말했다.

 "주낭자가 자네와 혼례를 올리면 아미, 무당 두 문파가 모두 개
방의 분부에 따라야  할 걸세. 게다가 명교까지  흡수 될 것이니
그 기세가 얼마나 호호탕탕한가를  한번 상상해 보게. 몽고 오랑
캐만 몰아내면 이 금수강산은 하하.....주인이 바뀌게 될 걸세."

 그는 마치 개방이  천하를 얻으면 자기가 용좌에  오를 것 같이
득의양양했다. 그는 송청서에게 물었다.

 "송형제, 무릎을 다친 것 같은데 괜찮은가?"

 송청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고 온 말이 갑자기 고꾸라지는 바람에 얼음조각이 튀어 공교
롭게도 무릎 혈도에 맞았는데 이젠 괜찮습니다."

 진우량은 껄껄 웃었다.

 "막칠협이 이 부근에서 죽음을 당했으며 그의 시체를 숨겨둔 동
굴도 이곳에서 멀지 않기  때문에 귀신에 씌운 모양일세. 그렇지
않고서야 멀쩡하게 달리던  말이 갑자기 여기에서 고꾸라질 리가
있겠는가? 하핫..... 자, 이제 그만 떠나세."

 송청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곧 말에 올라타
고 떠나갔다.

 장무기는 그들이 멀어지자 얼른 송원교 등 네 사람의 혈도를 풀
어 무릎을 꿇고 백배사죄했다.

 "사백님, 사숙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으니 중벌을 내려 주십시
오."

 송원교는 장탄식과 함께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유연주가 얼른 장무기를 부축해 일으켰다.

 "조금 전에 우리가 너를 오해했으니 잘못이 있다면 우리에게 있
다. 우린 한집안 식구이니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 청서가.....
청서가..... 정말 뜻밖이다. 만약 우리가 직접 듣지 않았다면 도
저히 믿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송원교는 장검을 뽑아쥐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짐승만도 못한 놈! 아미 여협의 침실을 훔쳐봤기 때문에 막
사제가 혼을 내주려고 했던  건데, 그놈이 감히 그런 대역무도한
짓을..... 이놈을 당장 쫓아가 내 손으로 죽여 없애겠다!"

 그는 즉시 신법을 전개해  송청서 등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갔
다.

 장송계가 얼른 소리쳤다.

 "형님! 고정하십시오.  심사숙고한 연후에  행동을 취해야 합니
다."

 송원교는 그의 만류를 무시하고 계속 앞으로 치달렸다.

 그러자 장무기가 즉시 신법을  펼쳐 눈깜짝할 사이에 그의 앞을
가로막고 공손히 몸을 숙였다.

 "대사백님, 사사백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는 모양입니다. 송사형
께선 사교한 무리에게  현혹되어 일시적으로 그릇된 일을 저질렀
지만 차후에 틀림없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겁니다. 그때 가서
다시 벌을 주셔도 늦지 않을 겁니다."

 송원교는 울먹였다.

 "칠제..... 칠제..... 이 못난 사형을 용서해 주게."

 그의 뇌리에 갑자기  왕년에 장취산이 자결한 일막이 떠올랐다.
당시 장취산은 유대암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목숨을 끊지 않았던
가! 지금에서야 당시 오사제의  심정을 뼈저리게 공감할 수 있었
다. 그는 홀연 검끝을 돌리더니 자신의 목을 향해 그어갔다.

 장무기는 소스라치게 놀라  건곤이위신공을 전개해 맨손으로 장
검을 집어 빼앗았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출수였는데도 불구하고
송원교의 목줄기에 혈흔이 그려졌다.

 이때 유연주 등이 달려왔다. 장송계는 간곡하게 말했다.

 "형님, 청서가 저지른  대역무도는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겠지만
그보다 강산을  되찾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소(小)로  인해 대
(大)를 그릇쳐서는 아니됩니다."

 송원교는 대뜸 눈을 부라리며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그..... 그럼  그 대역무도한 놈을 그냥  내버려 두란 말인가?
내 아들이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를 줄이야.....!"

 장송계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 진우량의 말을 들어보면,  개방은 청서를 앞세워 우리의 은
사를 모해(謀害)하고 무림을  어지럽혀 천하를 넘보는 것 같습니
다. 이러한 마당에 은사님과 본문의 안위가 먼저 해결해야 할 급
선무이며, 천하무림과  만백성의 화복은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청서의 행위는 언젠가 댓가를  치루게 될 것이니 우린 먼저 대사
(大事)를 상의하는 게 급합니다."

 송원교는 그의 말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장검을 거
두었다.

 "내가 너무 흥분했던 것 같네. 자네의 말에 따르도록 하겠네."

 은이정이 약을 꺼내 그의 목에 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장송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개방이 은사님께  불리한 행동을 취할 음모를  갖고 있는 이상
우리는 속히 문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진우량은 교활한 자이므
로 음모를 앞당길지도 무르기 때문입니다."

 송원교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네. 난  아들 녀석을 벌하는데만 흥분하여 은사님의
안위를 잊고 있었으니..... 자, 어서 무당산으로 떠나세."

 장송계가 장무기에게 말했다.

 "무기야, 주낭자를 구하는  일은 너에게 맡기겠다. 일을 무사히
마친 후에 무당에 들려주길 바란다."

 장무기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사백님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장송계가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저 조낭자는 무슨 속셈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각별히 조
심하도록 해라. 남아 대장부가  미색으로 인해 큰 일을 그릇쳐서
는 아니 된다. 내 말을 명심하겠느냐?"

 무당 사협과 장무기는 곧  막성곡의 시신을 묻어주고 눈물을 뿌
리며 재를 올렸다.

 이어 송원교 등이 먼저 떠나갔다.

 그제서야 멀찌감치떨어져 서  있던 조민이 장무기 곁으로 다가
왔다.

 "당신의 사사백이 이  요녀에게 현혹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
셨죠? 그리고 송청서가 좋은 본보기라고도 말했겠군요."

 장무기는 멋쩍어하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조민은 냉소를 날
리며 다시 말해다.

 "송대협께선 나중엔  아들보다도 주낭자를  더 원망하게 될테니
두고 보세요. 틀림없이 주낭자가  자기 아들을 유혹해 신세를 망
치게 만들었다고 할 거예요."

 장무기는 속으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의 대사백님은 사리에 분명한 정인군자이신데 함부로 무고한
사람을 원망할 리 있겠소?"

 조민은 다시 코웃음을 쳤다.

 "군자로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잘못을 타인에게 돌리기 마련이에
요."

 그녀는 말끝을 멈칫하더니 생긋이 웃었다.

 "자, 이젠 당신의 사랑스러운 주낭자를 구하려 갈 차례군요. 송
청서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날엔 산통이 깨질 테니까요."

 장무기는 공연히 얼굴이 붉어졌다.

 "산통이 깨진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솔직히 말해 가슴이 찔리는 바가 없지 않았다.

                ----- 제 6권 2장 끝 -----



#2894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3장 #1/3             03/05 19:03   388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3 장 홀연히 나타난 황삼미인(黃杉美女) #1/3

 장무기는 말을 끌고 와 조민과 관내를 향해 달렸다.

 만약 의부가 진짜 개방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면, 그를 이용해 명
교에 협박해 올 것이  분명한 일이므로 당장 의부를 해치지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주지약은 너무  순진한 탓에 진우량 같은 음흉
한 놈과 송청서와 같은  염치없는 놈들의 강압을 받을 때는 필시
자살을 해 버릴 것이 분명했다. 장무기는 그런 생각이 들자 더욱
채찍질을 가했다. 그러나 부상입은  조민과 함께 있으므로 한 조
그마한 객점에 투숙했다. 방에  누운 장무기는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밖으로 나와 조민의 방  곁에 와서 조민이 깊이 잠들어 있
는 것을 확인하고는 간단히  쪽지 한 장을 남기고 남쪽 방향으로
달려갔다.

 다음날 그는 새로 말 한  필을 구입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
렸다.

 노룡은 하북의 중진(重鎭)으로,  당대(唐代)에는 절도사가 주재
하던 곳이며, 그 뒤 송대(宋代)에는 전쟁을 치뤄 많은 파손을 당
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인구가 많은 곳이다.

 장무기는노룡의 큰길과  골목을 샅샅이 쏘다녔지만 이상하게도
거지라고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구나. 이런 큰 고장에  거지 한 명 보이지 않다니, 아마
모두 방주를 참배하러 간  모양이군. 집회 장소만 알아내면 의부
와 주지약을  정말 개방에서 납치해  갔는지 알아낼  수 있을 텐
데.....'

 장무기는 절간 사당, 빈 집이나 넓은 뜰까지 샅샅이 뒤졌다. 그
러나 여전히 조금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자 갑자
기 동남쪽 끝에 있는 누각에  불이 밝게 켜져 있는 것이 눈에 들
어왔다.

 '저 집은 분명히 어느  벼슬아치의 집이 아니면 어느 갑부의 집
이 틀림없으니 개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겠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갑자기 한  그림자가 창문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어 자세히 볼 수
는 없었다.

 '저 집에 도둑놈이 들어갔었나 한번 가서 살펴보자.'

 그는 즉시 경공을 써  누각까지 달려가 담을 넘어 들어갔다. 그
러자 안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진장로는 정말 웃기는 사람이야. 분명히 정원 초파일 노하구에
서 모임을 갖기로 하자고  그렇게 급하게 연락을 하고 우리를 여
기서 기다리게  해놓더니, 자기가 방주도  아닌데 이래라 저래라
하다니."

 그것은 분명 개방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장무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장무기는 조용히 말소리가 나는 곳으로 접근했다.

 안에서 다시 개방의 방주 사화룡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진장로는 정말 보통이 아니야.  그 무슨 금모사왕 사손인가 하
는 자를 강호에서 이십여 년이나 찾으러 다녔는데도 아무도 그의
그림자조차 보지를 못했는데,  그 진장로가 그 자를 잡아왔으니,
우리 개방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을 뿐 아니라 무림 전체에서도
그를 따를 자가 없을 것이야....."

 장무기는 의부의 행방을  알아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한편
그는 놀랍기도 했다. 개방에  그런 고수가 있었다니 의부를 구출
하는 일이 쉬울 것 같지만은  않았다. 그는 창문 틈으로 안을 들
여다 보았다.

 안에는 사화룡이 중앙에,  그리고 양옆으로 전공, 집법, 장봉용
두, 그리고 차림새가 화려한  한 중년으로 보이는 뚱뚱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보기엔  무척 거부(巨富)로 보이는데, 등에는 여섯
개의 자루를 메고 있었다.

 '그랬었군. 노룡의 이 거부가 바로 개방의 제자였구나. 이런 부
자집에서 집회를 할 줄 누가 생각을 했겠는가.'

 "진장로가 그렇게 급하게 연락을  해 왔을 땐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야. 우리가 큰  일을 하려면 제기랄, 걱정하지 않을 수
가 없지....."

 그러자 장봉용두가 입을 열었다.

 "방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강호에서 그  자를 찾아다닌 것은
순전히 도룡도를 얻기 위해서였는데,  이제 그 도룡도가 그 자의
손에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  자를 잡아 두고 밥만 먹여 주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다른 형제들의 말을 들어보면, 독한 고문을
해서 자백을 받아내자는 겁니다."

 사화룡은 손을 저었다.

 "안돼, 안돼. 그렇게 하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가 있을거야.
진장로가 도착한 뒤에 다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을거야."

 장봉용두는 방주가 사사건건 진우량의 말만 듣는 것이 불만스럽
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화룡은 품 속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어 장봉용두에게 건네며
말했다.

 "풍형제(風兄弟), 당신이 즉시 호주(濠洲)로 가서 이 편지를 한
산동(韓山童)에게 전해 주게.  한산동의 아들이 여기에서 아무일
도 없이  잘 있다고, 그리고 한산동이  우리 개방에만 들어오면,
아들은 무사할 것이라고 얘기하게."

 "이런 작은 일은 내가 직접 갈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반 년 동안 한산동의 세력이 많이 커졌어. 듣자 하니, 그의 밑
에는 무슨 주원장이니 서달이니 상우춘이니 하는 무척 재주가 많
은 자들이 있다고 하더군. 그러니 이번 일은 풍형제가 직접 가야
겠소. 첫째는  한산동이 우리 개방으로  들어오게끔 잘 얘기해야
되고, 또한  그의 부하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둘째는 도대체 명교에 무슨  대단한 점이있는지 알아보시오. 모
두 작은 일이 아니니 풍형제가 직접 가야 된다는 거요."

 장봉용두는 더 이상 대꾸를 하지 못했다.

 "네, 분부대로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무림  각파를 모두 통일하면  만족이라는 그들의 말이
들려왔다. 들어 보니, 사화룡은 진우량보다는 야심이 없었다. 강
산을 뺏어 황제가 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장무
기는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보아 하니  의부와 주지약은 이곳에 감금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을 먼저 구출하고 나서,  다시 이놈들을 단단히 혼내 줘야겠
다고 장무기는 생각했다.

 그는 가볍게 오른발을 튕겨 나무 위로 올라가 사방을 살펴보니,
누각 밑 한 곳에 십여  명의 개방 제자들이 모두 무기를 들고 경
비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곳이 바로 사손과 주지약을
감금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무에서 내려와  그곳으로 접근했다. 조용히 창가로 다가
가 살펴보니  이상하게도 안은 조용했고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그는 다시 서쪽에 있는 방으로 가서 살펴보니, 안에는 술잔과 먹
다 남은 안주가  널려있었고 역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다시 가운데에 있는  방으로 가서 보니, 안에는  촛불도 켜 있지
않은 체 조용해 살며시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 문은 안으로 잠
겨져 있었다.

 그는 낮은 소리로 불렀다.

 "의부님, 여기 계십니까?"

 그러나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 여기에 감금되지 않은 모양이군. 그런데 왜 개방 제자들
이 여기를 그렇게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나를 속
이려고 한 것인가?'

 그러나 그는 갑자기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재빨리 내력을 모아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그는 앞으로 첫발을 내딛자 그만 뭉클한 느낌을 느꼈다. 사람을
밟은 것이 분명했다. 그는 얼른  허리를 굽혀 만져 보니 조금 전
에 죽은 것  같았다. 칠,팔 구의 시체가  모두 심한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그는  한 시체의 옷을 찢어  보니, 가슴에 주먹자국이
나 있고 갈비뼈가 부러져  있었다. 실로 위력이 대단한 주먹이었
다.

 '의부께서 위력을 발휘하셨군. 경비들을 모두 죽이고 탈출한 모
양인데.'

 그가 방 주위를 살펴보니, 과연 한 구석에 불길 모양을 그린 명
교의 표시가그려져 있었다.

 '그렇구나. 조금 전에 창문  밖으로 달아난 그림자가 바로 의부
였구나. 그런데 의부께서  어떻게 개방에 붙잡혔을까? 아마 앞을
못 봐 개방의 함정에 빠진  모양이군. 의부께서 아직 멀리 못 가
셨을 거야. 빨리 찾아서  돌아와 이 개방놈들에게 명교가 얼마나
무서운지 단단히 혼내줘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그림자가 달아난 서쪽을 향해 쏜살같이
달렸다. 큰길을 따라  몇 리 길을 달려가자  앞에 갈림길이 있었
다. 그가 사방을 둘러보니 큰 바위덩어리에 또 불길이 그려져 있
었다.

 장무기는 불길이 그려진  방향으로 달렸다. 명교에서 연락을 취
하는 수단으로 불길을 그리는 암호에 대해서는 양소에게 들은 적
이 있었다. 또한 조금 전에 본 불길은 간단하게 그린 것 같지만,
사손과 같이 문무를 겸비한  분이면 그렇게 그릴 수 있을 것이라
고 생각했다.

 그는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숨에 사하역(沙河驛)
까지 달려가니 날이 이미 밝아왔다.  그는 만두 몇 개를 사 먹어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다시 서쪽으로 달렸다.

 큰길 끝까지 오니 다시 불길을 그린 것이 보였다. 그 방향은 한
낡은 사당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의부가 분명히 여기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매우 기뻤다.

 안으로 들어가자,  웬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보니
대청에 많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도박을 하고 있었다.

 옷이 매우 화려하며  부귀해 보이는 도박장의 주인은, 장무기가
들어오자 큰 손님으로 알고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하였
다.

 "자, 도련님, 어서  오십시요. 재수가 좋으실 것  같은데 한 번
하시지요?"

 장무기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도박꾼들 중에 강호 인물이 없
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불렀다.

 "의부님, 의부님! 어디에 계십니까?"

 한참 지나도 아무 대답이 없자. 그는 다시 몇 번을 불렀다.

 한 도박꾼이 장무기가 노름을  하지 않고 시끄럽게 외치자 귀찮
다는 듯이 그를 놀렸다.

 "그래, 네 의부가 여기 있다. 와서 주사위놀음이나 하거라."

 장내는 와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장무기는 도박장 주인에게 물었다.

 "혹시 머리가 노랗고 키 큰  어른께서 한 분 오시지 않았소? 앞
을 못 보는 장님인데....."

 "농담도 잘 하시는군요. 그래 세상에 장님이 주사위놀이하는 일
도 있소? 그 장님이 미친 사람이 아니오?"

 장무기는 의부를 찾지 못하고  거기다 자기를 놀려대자 그만 화
가 치밀어 한 손에 한 놈씩 움켜잡고 지붕 위로 던져 버렸다. 그
리고는 노름판의 은덩어리를 모두 품 속에 집어넣고 큰 걸음으로
걸어나갔다. 노름꾼들은 모두 겁에  질려 감히 그를 따라나와 잡
으려고 하지를 못했다.

 장무기가 다시  서쪽 방향으로 걸어가니, 또  불길 표시가 있었
다. 저녁 때가 되자 그는 풍윤(豊潤)에 도착했다. 이곳은 하북성
의 큰 성이다. 그는 불길  표시를 따라 한참을 가니 불길은 여전
히 서남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장무기는 날이 어두워지자 어둠  속에서 불길 표시를 못 알아보
고 지나칠까 염려되어 객점에  투숙하고, 다시 이튿날 아침에 길
을 떠나 오후에 옥전(玉田)에  당도하여 보니, 불길 표시는 다시
삼하(三河)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삼하에서 다시 향하까지
갔다. 장무기는 내심 아무래도  개방의 속임수에 속은 느낌이 들
었다. 그러나 그는 불길 표시를  따라 찾으러 가지 않을 수 없었
다. 향하에서  보성, 다시 대백장, 번장,  다시 동남쪽으로 해서
영하까지 온 장무기는 다시는 불길 표시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
는 영하에서 아무리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아무런 표시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음, 이 괘씸한 놈들!  과연 내가 속아 며칠을 헛되이 여기까지
왔구나.'

 그는 즉시 말 한 필을 사서 쏜살같이 다시 노룡을 향해 달렸다.
그는 거리에서 백색 장포를  사 입고, 옷에다 큰 불길을 그렸다.
그것은 그가 이번엔  정정당당히 명교의 신분으로 찾아가려고 했
던 것이다.

 장무기가 그 갑부의 저택 앞에 당도해 보니, 문이 꼭 잠겨 있었
다. 그가 쌍장을 뻗자 꽝! 하는 요란한 소리와 동시에 양쪽 대문
이 부서져 안으로 넘어지면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리며, 큰 어
항 두 개가 문짝에 부딪쳐  깨지고 말았다. 그는 큰 걸음으로 걸
어 들어가며 외쳤다.

 "개방은 듣거라! 빨리 사화룡을 불러 나를 만나게 해라!"

 마당에는 십여 명의 사,오  대 제자들이 모여 있다가 문짝이 부
서져 날아오자 이미 놀라 눈이 휘둥그래져 있는데, 한 백의 소년
이 유유히  걸어 들어오면서 소란을 피우자  그의 앞을 가로막았
다.

 "넌 누구냐? 뭐하는 놈이냐?"

 장무기가 양팔을 내두르자 칠,팔 명의 개방 제자가 나뒹굴었다.
그는 대청을  지나 다시 일장에 중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안에는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거기엔 사화룡이 중앙에 앉아 있었다.

 이때 이미 연회석에 앉아  있던 개방 수령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듣자, 무슨  영문인지 조사하러  뛰쳐나오다 장무기와 마주쳤다.
장무기는 그  자의 앞가슴을 휘어잡고  사화룡을 향해 내던졌다.
갑부처럼 보이는 주인이 맨 끝에 앉아있다가 사람이 연회석 위로
날아오자 재빨리 일어나 그 자를 받았지만, 그만 그 무서운 힘에
뒤로 칠,팔 보 밀렸다.  다행히 큰 기둥으로 밀려 쓰러지지는 않
았다. 온몸의 힘이 빠져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만 기둥 밑에 주
저앉고 말았다. 그것을 목격한 개방 사람들은 모두 놀라 겁에 질
렸다.

 바로 이때 장무기는 엇! 하고 소리를 냈다. 정말 놀랍고도 기뻤
다. 원탁의 왼쪽 맨 위에 주지약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
의 옆에는 송청서가 앉아 있었다.

 주지약은 놀라 외쳤다.

 "무기 오빠!"

 그녀는 일어서자 그만 휘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장무기는
놀라 앞으로 달려나가 그녀를  부축하며 안았다. 그런데 아직 몸
을 제대로 일으키지도 않았는데  팍! 하고 송청서의 일장이 그의
등을 때렸다. 거기다 또 한 명의 개방의 일권을 맞았다.

 그 때 이미 장무기의  온몸에는 구양신공이 감돌아 장풍과 주먹
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는 주지약을 안고 마당으로 뛰어가 주
지약에게 물었다.

 "의부께선 어디에 계시오?"

 주지약의 음성은 매우 떨렸다.

 "저는..... 저는....."

 "어르신네께 무슨 사고는 없소?"

 "무르겠어요. 저는  저 자들에게 여기에  잡혀와 봉혈을 당했어
요. 그리고 의부님의 행방은 몰라요."

 장무기는 그녀의 혈도를  풀어주려 했으나, 봉혈의 수법이 너무
괴이해 두 번씩이나 주물러도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두 발을 딛
고 일어서려고 하다가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개방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까지 뛰쳐나갔고, 사
화룡이 포권의 예를 올리며 물었다.

 "각하께서 바로 명교의 교주이시오?"

 장무기는 상대가 개방의 방주인 것 같아 예절을 잊지 않고 역시
포권의 예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귀방의 총타(總舵)까지  쳐들어 와서 무례를 저지
른 죄 용서하십시오."

 "장교주의 명성은 소인의  귀가 시끄럽도록 들어왔습니다.오늘
노형의 신법을 직접 뵈니 정말 소문대로군요. 하! 하! 정말 탄복
했소."

 "사방주에게 웃음거리가  되어 죄송합니다.  그런데 금모사왕은
지금 어디에 있소? 어서 나를 만나게 해주시오."

 사화룡은 하! 하! 하! 하고 크게 웃었다.

 "장교주께서 젊은  나이에 어찌 말투가  그리 당돌합니까? 우린
다만 호의를 베풀려고 술 한 잔 대접하려고 초청했더니, 그 사사
왕은 아무  말도 없이 떠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폐방의 칠,팔
명 제자까지 해치고 달아났습니다.  이 빚은 어떻게 갚아야 합니
까? 장교주께서 얘기해 보시오!"

 '음! 과연 그 개방 제자들을 의부께서 처치했구나. 보아하니 지
금은 여기 안 계시는 것 같군. 그렇다면 어디로 가셨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귀방에서 어찌 주낭자를 감금하셨소."

 "그것은....."

 하고 사화룡이 머뭇거리자 진우량이 재빨리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명교의  장무기의 무공이 고강하다고들 하는데,
알고 보니 매우 경우가  없는 사람이군요. 주낭자는 아미파의 장
문으로서 명문 정파의 수뇌인데,  귀교와 같은 사교와 무슨 관계
가 있다는 거요? 이 송청서 형제는 무당파의 젊은 인재로서 주낭
자와는 정말 천생의 배필감인데, 이 두 사람이 같이 이쪽을 지나
기에 저희 개방에서 손님으로  초대한 것뿐인데, 무슨 이유로 명
교에서 간섭을 하는 거요? 정말 가소롭군."

 "그렇다면 왜 주낭자의 혈도를 봉했소?"

 "아니 지금까지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누가 그녀의
혈도를 봉했다는 거요? 개방과  아미파는 서로 인연이 많은 사이
입니다. 아미파를 창파한 조사 곽여협은 방의 상대(上代) 황방주
의 친딸이고, 폐방 상대의  방주 야율은 곽여협의친형부라는 것
은 세 살 어린애도 다 아는 일인데, 우리 개방에서 어찌 감히 아
미파의 장문을  감금한다는 거요? 장교주는  어찌 세상 사람들이
웃을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까?"

 "흥! 그렇다면 주낭자 자신이 자기의 혈도를 찔렀다는 거요?"

 "천만에! 장교주께서  달려와 주낭자를 납치한  것을 우리 모두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무슨 그런 무례한 말을 하시오? 주낭
자께서 앙탈을  부리자 당신이 그녀의  혈도를 봉한게 아닙니까?
아무리 영웅  호색이라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짓을 하다니, 정말 자기 신분을 알고 체통을 지키시오!"

                                                    계속 ---


#2895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3장 #2/3             03/05 19:04   421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3 장 홀연히 나타난 황삼미인(黃杉美女) #2/3

 장무기는 진우량의 구변을  당해낼 수 없었다. 오히려 상대에게
당하자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나의 의부의 행방을 말할 수 없다 그거요?"

 "장교주, 귀교의 광명좌사 양소가 당년 아미파의 기효부를 간살
(姦殺)하여 천하무림의 손가락질을  받아왔는데, 당신이 오늘 자
신의 무공을 믿고 또 그런  짓을 한다면 아마 살아 남지 못할 거
요!"

 "주낭자, 당신이 직접 어떻게 여기에 잡혀 온 것인지 얘기 하시
오!"

 "저.....저.....는....."

 그녀는 갑자기 말을 못하고 그만 쓰러져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명교의 마두가 또 살인을 했다!"

 개방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웠다.

 "장무기가 여자를 괴롭히려다가  안 되니 아미파의 장문을 죽이
다니!"

 "음적(淫賊) 장무기를 죽여라!"

 장무기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서서히 사화룡을 향해 접근
했다.

 '도둑을 잡으려면 제일 먼저  두목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저놈
을 잡아 의부의 행방도 알아내야 된다.'

 장무기가 이렇게 생각을 굴리는 동안장봉용두와 집법장로가 그
의 앞을 가로막았다.

 장봉용두는 철봉을  들었고, 집법장로는  오른손에 쇠갈고리를,
왼손엔 쇠지팡이를 들고 동시에 장무기를 향해 공격했다.

 장무기는 기합을 넣고 건곤이위심법을 전개했다. 그러자 집법장
로는 쇠갈고리로 장봉용두의  철봉을 가로막고, 쇠자팡이로는 다
시 장봉용두의 겨드랑이를 후려치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전공장
로가 장검을 뽑으며 외쳤다.

 "이놈의 무공은 괴이하니 모두 조심하시오!"

 그러면서 획! 획! 획! 하고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세는 무지개
와도같았다. 매번  장무기의 아랫배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정말
예리하였다.

 '훌륭한 검법이군.'

 그러면서 재빨리 옆으로 피하여 왼손으로 상대의 넙적다리를 향
해 찔렀다. 그러나 전공장로의 검 끝은 다시 장무기의 손을 향해
공격해 오는 것이었다. 어느  사이엔가 번개와 같이 초식을 바꾼
것이다. 그의 이 초식 하나만  봐도 즉시 무림에서 보기 드문 고
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개방의 명성이 강호에 떠들썩하고, 백 년을 내려오면서 조금도
쇠퇴하지 않은 것이 거저 얻은 것이 아니구나. 이런 걸출한 인물
이 있다니.....'

 장무기도 내심 탄복했다.

 순식간에 장무기는 개방의 세  고수와 벌써 이십여 회합을 부딪
쳤다.

 "살구진(殺狗陣)을 쳐라!"

 갑자기 진우량이 소리치자, 스물 한 명이나 되는 개방 제자들은
각기 자기의 병기를 들고 살구진을 쳤다.

 그러자 전공장로가 소리쳤다.

 "장교주, 미안하오. 한 사람을 상대하는데 여럿을 동원해서. 그
러나 악한 자를  처치하는데는 그런 일 대  일 규칙을 지킬 수는
없소!"

 "천만에! 괜찮소!"

 "그렇지만 우린 모두 무기를 들었는데 장교주는 맨손이니, 무슨
무기가 필요하면 말씀하시오. 부탁을 들어줄 것이니."

 장무기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이 전공장로가 무공만 높은 것이 아니라 의기(義氣)도 있는 사
람이구나. 진우량과 같은 놈과는 무척 다른데.....'

 "여러분과 장난 좀 치기로서니 무슨 무기가 필요합니까? 무기가
필요하면 나 스스로 뺏어오지 못할 것 같소?"

 그러자 장무기의 신형이 번쩍 하더니 어느새 살구진에서 뛰쳐나
와 진우량과 송청서의 어깨를  짚고 나서 재빨리 두 사람의 무기
를 빼앗아 들고 다시  살구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살구진
을 치고 있는 스물 한  명의 제자들 옷자락 하나 스치지 않았다.
모두 그의 이런 훌륭한 솜씨에 겁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 하! 하! 귀방의  살구진이란 이름은 정말 잘 지었소. 그것
으로 개를 잡기는 쉬워도  용이나 범을 잡기엔 아무 쓸모가 없군
요."

 그러면서 양쪽 무기를 서로  부딪치자 자신의 경력이 검 끝까지
전도되어 철그렁 하는 소리와  동시에 양쪽 검이 모두 부러져 버
렸다.

 "모두 덮쳐라!"

 장봉용두가 외치며 철봉을  장무기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 집법
장로의 갈고리와 지팡이도 동시에 공격해 왔다.

 장무기는 왼쪽으로  덮치며 건곤이위심법을  전개하여 순식간에
스물 한 명의 만도를 모두  빼앗아 던져 버렸다. 그가 던져 버린
스물 한 개의 칼들은  모두 질서정연하게 차례로 대청 기둥에 순
서대로 꽂히는 것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진우량의 외침이 들려왔다.

 "장무기, 어서 멈추지 못하겠느냐!"

 장무기가 뒤돌아보자 진우량의 장검이 주지약의 등을 노리고 있
었다.

 장무기는 냉소를 지었다.

 "백 년 동안 위세를 떨치던 개방에서 이런 비겁한 짓을 하다니,
홍칠공 대협의 명성에 먹칠할까 두렵지 않소?"

 전공장로가 화를 벌컥 냈다.

 "진장로, 어서 주낭자를 놔주시요! 우리 개방 전체의 힘으로 명
교의 한 사람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비겁한 행동을 하다니
창피하게 그게 무슨 짓이오?"

 진우량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장부란 머리로 싸우지  힘으로 싸우지 않는다. 장무기, 이래
도 항복하지 않겠느냐?"

 장무기는 크게 웃었다.

 "좋소. 오늘에야 이 장무기가 개방의 진짜 위세를 보게 됐소!"

 그러면서 그는  갑자기 뒤로 공중제비를 도니,  어느새 두 발이
사화룡의 양 어깨를 딛고 서 있었다. 그리고는 그의 오른쪽 손바
닥을 사화룡의 정문혈을 노리고, 왼손은 이미 사화룡의 목덜미의
경맥을 움켜쥐었다.

 성화령에서 얻은 무공을 이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장무
기도 천만 뜻밖이었다.

 개방 사람들은 방주가 붙잡히자 모두 놀라 소란을 피웠다. 장무
기가 가볍게 장력을 뻗으면  사화룡은 즉사할 판이었다. 개방 사
람들은 소란을 피우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다.

 바로 이때 갑자기 지붕 위에서 금소화명(琴簫和鳴)의 소리가 가
볍게 들려왔다. 들리는 듯 말 듯 갑자기 동쪽에서 났다가 서쪽에
서 났다가 도대체  종잡을 수 없이 들려오더니,  갑자기 네 명의
백의 소녀가 각기 다른  지붕 위에서 표연히 마당으로 내려왔다.
그들의 손에는 모두 요금(瑤琴)을  들고 있었다. 그러자 문 밖에
서 네 명의 흑의 소녀가 손에 모두 장소(長簫)를 들고 들어왔다.
네 명의 백의 소녀, 네 명의 흑의 소녀는 각기 교차해서 서 있었
다.

 그러자 조용히 한 명의 황삼을 입은 여인이 손에 열 두어 살 된
소녀를 데리고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것이었다.  약 이십 칠,팔
세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뛰어난 각선미에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
다. 그러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핏기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녀가 데리고  온 여자 아이는 모습이  너무나도 추해 보였다.
돼지코에다 큰 입에 덧니까지  나 있어 흉악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런 그 계집아이는 한 손은 미인의 손을 잡고 한 손엔 뜻밖에도
청죽봉(靑竹棒)을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개방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시선이 모
두 그 청죽봉에 쏠려 있었다.

 장무기는 여자들이 들어오자 자기가 여전히 사화룡의 목발을 타
고 있는 꼴이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진우량이 여전
히 검 끝을 주지약의 등에 대고 있어서 사화룡을 풀어줄 수가 없
었다. 그러나 개방 사람들은 한눈 팔지 않고 모두 청죽봉에만 시
선을 두고 있었다. 백의  소녀나 흑의 소녀에게는 아랑곳하지 않
고 세상에 청죽봉만이 제일 중요한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장무기는 의아해 하며 청죽봉을 자세히 보니, 지팡이 전체가 반
들반들하며 온통 녹색이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때가 탔
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밖엔 별로 이상한 점을 볼 수가 없었다.

 황삼 미녀는 눈동자를  돌리며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눈동
자는 매서웠다. 그녀는 사방을 둘러 본 후 나중에 장무기에게 시
선이 멈췄다.

 "장교주, 나이가  어리지도 않은데 아직까지  그런 철없는 짓을
하고 있습니까?"

 책망하는 말투였으나 그의 음성은  매우 친절해 꼭 누나가 동생
을 훈계하는 것처럼 들렸다.

 장무기는 얼굴이 빨개졌다.

 "개방의 진장로께서 비겁한  수단으로 나의 동반을 위협하고 있
어서, 이렇게 하는 도리밖에 없었소."

 미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남의 방주를 발로 취급하다니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장안에
서 여기까지 오면서 들으니 명교의 작은 마두라 하던데, 지금 보
니 과연 소문대로군."

 그러면서 고개를  살랑살랑 저으며 매우  못마땅한 인상을 풍겼
다.

 사화룡이 갑자기 크게 외쳤다.

 "장무기 이 색마야! 빨리 내려오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그는 장무기의 다리를 꺾으려고 했으나 자신의 목덜미
의 경맥을 잡혀 조금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장무기는 그 자가 여자들의  앞에서 자기를 색마라고 부르자 그
만 화가  치밀어 목덜미에 자신의  내력을 주입시키자, 사화룡은
고통을 참지 못해 아야!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개방 사람들은 장무기가  그렇게 무례하자 화가 치밀었으나, 한
편 방주가 이처럼 약하게  보이자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개방의
방주라면 강호의 제일 큰 방의 방주인데, 체통을 잃고 적 앞에서
신음소리를 내다니! 개방의 제자들도 이렇게 적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진우량이 입을 열었다.

 "장무기, 네가 방주를 놔주면 나도 검을 거두겠다."

 그러면서 장무기가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검을 거두었다.

"좋다!"

 장무기의 몸이  잠깐 움직이는 듯하더니  어느새 주지약의 옆에
와 섰다.

 주지약은 기진맥진했는지 두 눈이  움푹 들어가 보기에 매우 가
련하였다. 장무기는 그녀를 부축하여 돌의자에 앉혔다.

 진우량이 황삼 미녀를 향해 읍을 하며 말했다.

 "방가(芳駕)께서 무슨 일로  폐방을 왕림하셨습니까? 어떻게 칭
호를 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주실 수 없습니까?"

 황삼 미녀는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혼원벽력수 성곤은 어디에 있느냐? 빨리 나와서 나를 만나라고
해라!"

 장무기는 혼원벽력수  성곤이란 말에 무슨  영문인지 의아해 했
다. 순간 진우량의 얼굴이 갑자기 크게 일그러지더니, 재빨리 정
색을 하고 담담하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분은 금모사왕 사손의  사부님이 아니요? 그렇다면 장교주에
게 물어야 옳지 않소?"

 "당신은 누구요?"

 "저는 진우량이라 하오. 개방의 팔대 장로올시다."

 황삼 미녀는 사화룡을 노려보더니 다시 물었다.

 "저 자는 누구요? 생김새는  무척 영웅 기개가 있는 듯한데, 어
찌 그렇게  쓸모가 없소?  조금 당했다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다
니."

 개방 사람들은 모두 창피해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진우량이 대답을 했다.

 "이분은 바로 본방의 방주올시다.  그런데 중병을 앓고 이제 막
회복했소. 당신은  손님이라 우리가 양보했지만  앞으로 또 그런
무례한 말을 지껄이면 가만히 두지 않겠소."

 황삼 미녀는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런 표정도 없이 한 흑의 소
녀를 향해 말했다.

 "소취(小翠)야, 그 편지를 보여 줘라."

 네! 하고 대답하고 나서 흑의 소녀는 품 속에서 편지 하나를 꺼
냈다.

 장무기가 옆으로 슬쩍 곁눈질해 보니, 겉봉에 명교 <한산동나리
귀하>라고 씌어 있었고, 밑에는 <개방 사화룡>이라고 적혀 있었
다.

 장봉용두는 그 편지를  보자 그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화를 벌컥 냈다.

 "이 천한 계집애야,  알고 보니 중간에서 편지를  훔친 게 바로
네 계집애였구나!"

 그는 철봉을 쳐들고 앞으로 덮칠 기세였다.

 소녀는 깔깔 웃었다.

 "나야 어린 계집애지만 당신처럼  큰 사람이 편지 하나도 못 지
킵니까?"

 그러면서 가냘픈 팔을 휘두르자  그 편지는 직선을 그으며 장봉
용두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었다. 장봉용두는 재빨리 편지를 낚아
챘다.

 장무기는 사화룡이 장봉용두를 시켜 편지를 한산동에게 갖다 주
라고 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산동의 아들을 인질로,
그를 개방에 항복하게 하려고 했던 것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들
의 대화를 듣자 장무기는 이 백의, 흑의 소녀들이 도중에서 편지
를 절취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봉용두의 무공이 매
우 정강하여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비로소 자기를 희롱한 사람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여덟 명의 소녀들은 모두 매우
영리한 것이 아니면 무공이 장봉용두보다 더 고강한 것이라고 생
각했다. 아마 황삼미녀가 뒤에서 조종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
다. 그때 황삼미녀가 입을 열었다.

 "한산동은 회사에서 몽고놈들을 쫓아내어, 모두 그가 인의를 지
키는 사람이라고들 하는데, 그런  영웅 인물이 자기 아들 때문에
명교를 배반하고 개방에 항복할  것 같소? 이 편지가 한산동에게
전해진다 해도 그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거요. 내가 보기엔
이 장봉용두가 정말 흐리멍텅한 사람이로군요. 개방에 큰 사건이
라 장봉용두가 있는 자리에서 그의 편지를 꺼내 놓는 거요?"

 장무기가 포권의 예를 올리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천만에."

 황삼 미녀는 다시 개방을 향해 말했다.

 "그래 당신들이 한림아를  납치했다고 한산동을 항복시킬 수 있
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장봉용두, 당신이 그날 계속 방해를 받
았을 때 작은 길로 가면 빠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소?"

 진우량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편지를 받아들고 보았다. 겉봉
은 조금도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그래서 그는 겉봉을 찢고 안을
뜯어보더니 그만 안색이 크게  벼해 버렸다. 편지 내용은 완전히
딴판으로, 개방이 명교에 항복하는  것으로 씌어져 있는 것이 아
닌가!

 황삼 미녀는 냉소를 지었다.

 "그렇소. 그 편지 내용은  나도 이미 보았소. 그렇지만 내가 고
친 것은 아니오. 내가 이 편지를 본 후에야 장봉용두가 누군가에
게 당한 것을 알았소. 나는 개방과의 인연을 생각해서 위세가 당
당한 천하  제일의 방회가 이런 창피를  당하지 않게끔 빼앗았던
거요. 당신네들이 잘 생각해 보시오. 이 편지가 명교에 들어갔다
면 개방은 앞으로 무슨 낯으로 강호에 존재하겠소?"

 모두 편지 내용을 보니 사실대로였다. 그렇다면 황삼 미녀가 개
방에게큰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또 누가 이 편지
내용을 바꿔치기 했다는 것인가?

 흑의 소녀 소취가 웃으며 말했다.

 "누가 바꿔치기 했는지 그걸 묻고 싶은 거지요?"

 개방 사람들은 모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를
못했다. 그러자 소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장봉용두, 외포를 벗어 보세요."

 장봉용두는 벌써 아까부터 얼굴이 붉어져 목에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는 외포를 벗어 뒤로 던져 버리며 외쳤다.

 "그래서 어떻다는 거냐?"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개방 사람은 모두 앗! 하고 놀라움을
나타냈다. 무슨 이상한 물체라도 본 것 같았다. 장봉용두는 영문
을 몰라 다시 안에 입은 옷을 벗어 버리자, 몸에 바짝 붙은 속옷
에 큰 박쥐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입가에 피까지 흘리고 있
는 한 마리의 험악한 모습의 박쥐였다.

 "청익복왕 위일소!"

 하고 모두 외쳤다.

 위일소는 중원에 별로 오지를  않아 명성을 그리 날리지 않았으
나, 근래에는 신출귀몰하게 나타나  그의 솜씨를 발휘해 그의 명
성은 백미응왕에 못지 않았다.

 장무기는 내심 기뻤다.

 '이형과 같은 경공이  아니면 장봉용두를 저렇게 조금도 눈치채
지 못하게 할 사람이 없을 거야.'

 장봉용두는 놀라 속옷을 장무기를 향해 휘두르면서 화를 벌컥냈
다.

 "좋다, 알고보니 네놈들이 노부를 희롱한 것이구나!"

 장무기는 가볍게 옷소매를 흔들어 날아오는 옷을 공중으로 날려
나뭇 가지에 걸리게 하였다. 장무기가 가볍게 웃었다.

 "청익복왕이 당신한테 사정을 봐준  것이오. 그가 그 때 당신을
죽이기는 아주 쉬웠을 것이오."

 그 말에 장봉용두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치를 떨었다.

 진우량은 이 일을 밝힐수록 점점 더 창피만 당할 것을 알고, 그
문제는 다시 거론치 않고 황삼 미녀에게 물었다.

 "낭자는 누구신데  저희 개방과  인연이 있다는  말씀을 하십니
까?"

 황삼 미녀는 냉소를 지었다.

 "당신들과 무슨  인연이 있겠소?  다만 이 청죽봉과  인연이 있
지."

                                                    계속 ---



#2896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3장 #3/3             03/05 19:05   418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3 장 홀연히 나타난 황삼미인(黃杉美女) #3/3

 개방 사람들은 벌써 이 청죽봉이 개방의 신물(信物)인 타구봉이
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어떻게 남의 손에 들어갔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없었다. 모두 사화룡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사화룡의 얼굴은 백짓장과 같이 질려 어찌할 줄을 몰랐다.

 전공장로가 물었다.

 "방주, 저 계집아이가  들고 있는 타구봉(打狗棒)이 진짜요, 가
짜요?"

 "내가 보기엔..... 가짜인 것 같소."

 "방주, 그럼 진짜 타구봉을 꺼내 보여 주시겠소?"

 "타구봉은 개방의  최고의 보물인데 어떻게 함부로  꺼낼 수 있
소. 그리고 지금 지니고  있지도 않소. 만약 잃어 버리면 큰일이
라....."

 그 말에 모두는 체통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개방 방주로서
어떻게 타구봉을 잃어 버린다는 말인가!

 여동(女童)이 죽봉을 쳐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자, 보세요! 이 타구봉이 바로 본방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타구
봉이오. 어째서 이것이 가짜라는 거죠?"

 본방이라는 말에 개방 제자들은  모두 내심 의아해 하며 자세히
보니, 분명 방주의 신물인 타구봉이 틀림없었다. 모두 서로를 쳐
다보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어리둥절해 했다.

 황삼 미녀가 입을 열었다.

 "소문에 개방 방주께서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과 타구봉법으로
천하에 명성을 떨쳤다는데, 소홍(小虹)아, 네가 먼저 사방주한테
항룡십팔장의 무공을 가르침받아 보거라. 소냉(小冷)아, 너는 소
홍 언니가 이긴 후 다시 타구봉법을 실험해 보아라."

 그러자 두 소녀가  앞으로 나와 각기 좌우로  서서 자세를 취했
다.

 진우량이 노기띤 음성으로 나무랐다.

 "낭자께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벌써  우리 개방을 경멸한
것인데, 두  하녀를 시켜 우리 방주에게  도전을 하다니, 강호에
이런 도리도  있소? 사방주님, 이 제자가  먼저 이 계집아이들을
처치하고 나서 다시 이  낭자의 실력을 시험해 보겠습니다. 도대
체 무슨 재주가 있기에 개방을 이렇게 우습게 보는지 모르겠습니
다."

 "좋소. 진장로가 상대하시오."

 진우량은 장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섰다.

 소홍이 물었다.

 "나는 항룡십팔장을 가르침 받으려고  하는 건데, 당신은 그 장
법을 아시오? 그 장법이 검을 사용하는 겁니까?"

 "사방주가 어떤 신분인데 너 같은 계집아이와 상대하겠느냐!"

 황삼 미녀가 장무기에게 말했다.

 "장교주,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말씀해 보십시오."

 "저 진가  놈을 던져 버리고  저 가짜  사방주를 끌어내 주십시
오."

 그 말에 장무기는 그제서야 모든 것을 알았다. 장무기는 어느새
사화룡 앞으로 접근했다.  사화룡이 충천포(沖天抱)의  초식으로
장무기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팍! 하고 주먹이 장무기의 가슴을
때렸다.

 "하! 하! 하! 항룡십팔장이 이런 쓸모없는 권법이오?"

 장무기는 그의 가슴을 움켜쥐고 그를 바짝 치켜올렸다.

 진우량은 이미 자기는 장무기의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어
느새 사람들 속으로 숨어 버렸다.

 못난 계집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나와 사화룡을 때
리고 물어뜯으며 외쳤다.

 "너는 우리 아버지를 죽인 악마다!"

 사화룡은 장무기에게 혈도를 잡혀 꼼짝할 수도 없었다. 그의 키
가 커서 계집아이는 작은  주먹을 그의 아랫배에 때리고 있었다.
장무기가 사화룡을 아래로  누르니 사화룡의 머리가 밑으로 내려
오자, 계집아이는 그의  머리를 낚아챘다. 순간 사화룡의 머리가
갑자기 떨어지며 대머리가 나타났다. 알고보니 그는 원래 대머리
였던 것이다. 그리고 여동이  막 때리고 사화룡의 코를 비틀었으
나 조금도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이었다.

 모두 어리둥절해 자세히 보니 그는 코도 가짜로 만들었다.

 순간 개방 사람들은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넌 누구냐? 도대체 어떤 놈인데 우리 사방주로 변장했느냐?"

 장무기는 힘껏 그 자를  내동댕이치자 그 자는 나가떨어져 아무
말도 하지를 못했다. 장봉용두는 화가 치밀어 그 자의 뺨을 힘껏
몇 번 내리쳤다. 그 가짜 방주의 뺨이 부어올라 그 자는 참지 못
하고 외쳤다.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모두 진장로가 시킨 겁니다!"

 "진우량이 어디 있느냐?"

 집법장로가 외치자 진우량은 그림자조차 나타내지 않았다. 이미
음모가 간파된 것을 알고 도망을 쳐 버린 것이다.

 "발리 그 자를 잡아오거라!"

 장봉용두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계속 그 자의 뺨을 후려쳤
다.

 집법장로가 그를 말렸다.

 "풍형제, 이러면 안 되오.  이 자가 죽어 버리면 우린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합니다."

 그런 후 그는 황삼 미녀에게 포권의 예를 올렸다.

 "낭자께서 모든 것을  밝혀내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까지도 소
고 있었을 겁니다. 낭자의  이름을 밝힐 수 있는지요? 우리 개방
에서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겁니다."

 황삼 미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소녀는 심산에  숨어 살면서 바깥 사람과  왕래를 하지 않습니
다. 그러니 내 이름을  알아 봤자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
애를 누구도 알아 보는 사람이 없습니까?"

 개방 사람들은 모두 계집아이를 쳐다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
다. 전공장로가 앞으로 걸어나와 자세히 쳐다보았다.

 "어딘가 사방주를 많이 닮았는데,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이름은 사홍석(史紅石),  바로 사방주의 외동딸입
니다. 사방주께서 죽기 직전 부인을 시켜 이 아이를 안고 타구봉
을 들고 나를 찾아와 복수를 해 달라고 하셨던 겁니다."

 "아니? 낭자께서는 사방주가 돌아가셨다는 말씀이요? 어떻게 돌
아가신 겁니까?"

 선대의 방주들의 항룡십팔장이 야율제(耶律帝)까지 내려오다 이
미 완전히 끊겨, 그 후 역대 방주들은 십 사 장까지 익힐 수밖에
없었다. 사화룡은 십 이 장까지 연마하고, 이십여 년 전에 그 장
법을 익히려다 그만 내력이  부족해 반신불수가 되어 두 팔을 움
직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부인을 데리고 각처의 명산을 찾
아다니며 영약을 구하려고 했다.  그리고는 개방의 모든 일을 전
공과 집법, 두 장로와 장봉,  장발 두 용두에게 맡긴 것이다. 그
러나 두 장로와 두  용두는 각기 책임이 달라 자기네들의 일만을
관리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 양파로 갈라져 세력이 점점 약해졌던 것인데, 갑
자기 방주가 나타나자 젊은  개방 제자들은 방주를 직접 본 적이
없었고, 또한 전공장로나 다른  사람들은 서로 떨어진 지 이십여
년이나 되어 방주의 용모로 비슷하게 변장한 가짜를 알아보지 못
한 것이다.

 황삼 미녀는 탄식을 했다.

 "사방주는 혼원벽력수 성곤의 손에 죽은 것입니다!"

 '엇! 성곤은 분명히 광명정에서  죽은 것을 내가 직접 목격했는
데 어떻게 사화룡을 죽였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 전에 한 짓이란
말인가?'

 "낭자, 사방주가 언제 피살당했습니까?"

 "작년 시월 육일입니다. 약 두 달 전이지요."

 "그렇다면 이상하군?  성곤이 한 짓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
까?"

"사부인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방주가 한 노인과 십이장이나
싸워 그 노인이  피를 토하고 가 버렸는데,  사방주도 그 노인의
장력에 부상을 입었지요. 그  노인이 삼일 후면 원기를 회복하고
다시 찾아올 것을 안  사방주는 모든 일을 부인한테 부탁하고 그
원수의 이름을 밝혔는데,  바로 혼원벽력수 성곤이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사방주의 마비 증세는  이미 구성이나 다 치료되어 그가
익힌 항룡십팔장 중의 십 이 장으로 이미 강호의 일류 고수가 될
수 있는데, 그 십 이장을  다 사용해도 그 자의 손아귀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사홍석은 거기까지 듣자 그만 소리내어 크게 울고 말았다.

 전공장로는 비분하여 그 더러운 옷소매로 사홍석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소세매(小世妹), 방주의 원수는 우리 수만 제자의 원수니 언젠
가는 성곤을 붙잡아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이다. 네 어머니는 지
금 어디에 계시냐?"

 "어머니는 지금 이 양(楊) 언니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계십니
다."

 지금에서야 모두는 이 황삼 미녀의 성이 양씨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은 여전히 조금도 알 수
없었다.

 황삼 여자는 가벼운 탄식을 토했다.

 "사부인께서도 성곤의 일장을 맞고 상처가 심한데다, 저의 집까
지 왔을 땐 이미 위독하여 완전히 치료할 수 있을지 지금은 아직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집법장로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 성곤이라는 자가 우리  방주와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런 독
수를 썼을까요?"

 "사부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성곤과 전혀 모르는 사이라 원한
이라는 것은 있을 수도 없다는 겁니다.그래서 사방주께서도 죽기
직전까지도 무슨 이유인지 모르고 있었답니다. 사부인의 말에 의
하면, 아마 개방의 어느  제자가 성곤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것 같다는군요. 그래서 사방주를 찾아오게 된 거라는 겁니다."

 "성곤이 사손을 피하기 위해  이미 수십 년 전에 강호에서 종적
을 감추었는데, 개방 제자들이 어떻게 그와 원한을 맺었겠소? 보
아 하니 무슨 큰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이  옆에서 듣고만 있던 장발용두가 갑자
기 반달형의 칼을 집어들고  가짜 방주인 대머리의 목에 대고 외
쳤다.

 "네 이름이 뭐냐? 무슨  이유로 방주로 가장했는지 사실대로 말
해라!"

 대머리도 겁에 질려 혼이 빠졌다.

 "소인..... 대머리 유오(劉敖)라 합니다. 원래 산서해현(山西解
縣) 난석강(亂石岡) 산채의 두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도둑
질을 하러 내려왔는데, 진우량과 그의 사부를 만나게 된 겁니다.
진우량이 저를 걷어차고 나서  검을 들어 죽이려고 하여, 소인이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진우량이  한참 나를 보고
나서 갑자기 말했습니다. '사부님,  이놈이 우리가 이틀 전에 본
그 자와 무척 닮은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 사부란 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더군요. '아니야, 나이도  안 맞고 코도 납작하고 머
리도 대머리잖아!' 이 말에 진장로가 '제가 똑같이 만들 수 있습
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하여 소인을 해현까지 데리고 가
객점에 투숙시키고 저한테 가발을 씌우고 석고로 제 코도 높이고
다른 모습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여러 나리들, 소인이 아무리 간
이 크다 해도 어찌 감히 여러분들을 속일 용기가 있겠습니까? 진
장로가 강제로 시키니 따랐을 뿐입니다. 소인 집엔 여든 살이 넘
은 노모가 계십니다. 제발 좀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그는 무릎을 꿇고 연실 절을 하며 손을 빌었다.

 "진우량은 소림파 출신이다. 그의 사부는 분명 소림사의 고승일
것이야. 그런데 그에게 또 어떤 사부가 있지?"

 집법장로가 낮은 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장무기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라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의 사부는 바로 성곤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성곤이 어떻게 이름을 원진으로 바꿔 공견신승의
제자가 됐고  또 광명정을 기습하여 끝내  은야왕의 칼에 죽었지
만, 나중에 시체가 실종된 얘기까지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그렇다면 틀림없소. 분명히 광명정에서 성곤이 죽은 척하고 있
다가 혼란한 틈을 노려 도망을 쳐 버렸던 겁니다."

 전공장로가 노기띤 음성을 말했다.

 "알고 보니 진우량, 이  못된 놈의 짓이었구나. 그 사부와 제자
두 사람이 야심이 커  천하를 독차지하려고, 사방주를 해치고 이
놈을 변장시켜서 괴뢰를 만들고 다시 명교를 협박해 소림, 무당,
아미 삼파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한 것이야. 그런데 송청서는 어
디로 사라졌지?"

 그제서야 모두들  개방 방주와 황삼 미녀,  사홍석 등에 정신이
팔려 그들이 도망친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을 알았다.

 전공장로는 황삼 미녀에게 포권의 예를 올렸다.

 "낭자의 은혜는 우리  개방에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
다."

 "저의 조상들이 개방과 대대로 인연을 맺었었는데, 이만한 작은
일로 무슨 은혜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까? 다만 사방주의 이 외동
딸을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읍을 하고 나서 어느새 이미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다.

 "낭자, 잠깐만 기다리시오!"

 그러나 어느새 네  명의 백의 소녀와 네  명의 흑의 소녀마저도
지붕을 넘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전공장로는 사홍석의 손을 잡고 장무기를 향해 말했다.

 "장교주, 잠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장무기는 안으로 들어가  전공장로, 그리고 주지약과 같이 자리
에 앉자, 장무기는 일일이 이름을 물어본 후 말했다.

 "조(曺) 장로, 만약 저의  의부님께서 귀방에 계시다면 나를 좀
만나게 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행방이라도  좀 알려 주십시
오."

 전공장로는 긴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진우량 그놈의  간계에 속아 너무 많은  천하 영웅들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사대협과 주낭자는 우리가 관
외에서 어렵게 초청해 온 겁니다. 그런데 그 때 사대협께서 몸에
병이 있어서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싸우지도 않고 여기에 데려온
겁니다. 그런데 닷새 전날  밤에 사대협께서 갑자기 간수들을 죽
이고 도망을 쳐 버렸습니다.  그분이 죽인 개방 제자들의 시체는
아직 뒷마당에 있습니다. 못 믿으시면 직접 가 보셔도 상관 없습
니다."

 장무기는 그의 솔직한  태도와 또 그날 밤  자기가 직접 목격한
것이라 다시 물었다.

 "제가 어찌 안 믿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서쪽 방향으로 그린
폐교의 연락 암호는 제가 조사해 보니 본교 형제들이 한 짓이 아
니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혹시 귀방과 무슨 관
련이 없는지요?"

 "어쩌면 진우량 그놈이 한 짓인지도 모릅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조금도 모릅니다."

 장무기는 내심 성곤이 광명정을 자유자재로 출입하면서 필시 명
교의 기호를 알고 있어 그가 한 짓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
편, 만약 의부가 성곤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면 하고 생각하니 그
만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사홍석에게 물었다.

 "그 양 언니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전에 그를 본 적이 있었느
냐?"

 사홍석은 고개를 저었다.

 "본 적 없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타구봉을 갖고
며칠 동안 마차를 타고 가다 다시 내려 산으로 올랐는데, 나중에
어머님은 더 이상 걷지  못해 기어서 어느 나무숲까지 와서 소리
쳤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검은 옷을 입은 언니가 나오더니 뒤에
양 언니가 나와 저의 어머니에게 뭐라고 한참 물어본 후 이 타구
봉을 갖고 갔고, 반나절이  지나자 그만 어머니는 기절해 버렸습
니다. 그 뒤  양언니가 여덟 명의 언니들과  나를 데리고 마차를
타고 이리로 온 겁니다."

 그녀는 나이가 어려 자세히 얘기하지를 못했다. 지방 이름을 물
어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입에서 조금도 단서를 찾아
낼 수 없었다.

 전공장로가 다시 말했다.

 "귀교의 한산동 나리의 아들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 후 분부하자, 한  제자가 바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가 버
렸다.

 잠시 후 한림아가 큰 소리로 욕설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천벌을  받을 거지떼들아! 또 나를  속이려고 하느냐? 우리
명교의 교주가 어떤 신분인데  너희 같은 거지 소굴에 오겠느냐?
어서 빨리 나를 죽여라! 어떤 간계를 부려도 소용없다!"

 그 말을 들은 개방 장로들은 모두 참회스러운 표정들이었다.

 장무기는 한림아의 인품에 감동해 앞으로 나서며 그를 마중하였
다.

 "한대형, 나요. 며칠 동안 고생이 많았소."

 한림아는 깜짝 놀라 그만 무릎을 끓고 절을 올렸다.

 "교주님께서 정말  오셨군요. 어서 명령을  내려 이 거지떼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게 하십시오."

 장무기는 웃으며 그를 일으켰다.

 "한대형, 개방 여러 장로들도  다른 사람의 간계에 속았던 것입
니다. 이제 모든 것을 알았으니 한형께선 나를 봐서도 이제 그만
화를 푸시고 용서하십시오."

 그 말에 한림아는 개방 장로들을 그저 노려보며 참을 수밖에 없
었다.

 집법장로가 입을 열었다.

 "장교주께서  오늘 이렇게  왕림하셨으니 정말  큰 영광입니다.
자, 어서 연회를 차리고  장교주를 환영하는 동시에 한형에게 사
죄를 합시다."

 장무기는 의부의 안부가 걱정됐고, 또한 주지약에게 물어 볼 말
도 많아 음식을 먹을 심정이 아니었다.

 "여러분의 호의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의 의부님을 찾는
일이 급해 지금 떠나야겠으니 용서하십시오."

 전공장로와 여럿이 완곡하게 만류하자, 장무기는 이대로 떠나면
개방에게 실례를 저지를 것  같아 연회석에 참석할 수 밖에 없었
다. 연회 중에 개방 고수들은 정중히 사죄하고 나서 개방 제자를
시켜 사손의 행방을 사방으로 알아내게 하여 즉시 장무기에게 연
락을 해주겠다고 약속까지  하였다. 장무기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서 그들과 마음껏 먹고 마셨다.

 개방의 여러 고수들은 장무기가  나이도 젊고 무공이 그렇게 높
은데도 조금도  오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성품이 활달한데 반
해, 합심하여 몽고 오랑캐를  몰아내기로 약속하고 노룡 밖 십여
리까지 배웅하고 나서 그제서야 서로 헤어졌다.

                                   ----- 제 6권 3장 끝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4장 #1/5             03/16 22:45   383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4 장 깨져 버린 혼례식(婚禮式) #1/5

 장무기, 주지약, 한림아 세 사람은 개방의 갑부가 마련해 준 말
을 타고 관도를 따라서 남하(南下)했다. 한림아는 도중에서 마치
하인처럼 시중을  들어 주었다. 그러자  장무기는 은근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한대형, 당신은 비록 우리 교에 속해 있는 형제지만, 인간적으
로 당신을 존경하고 있소. 물론 공적인 일에는 나의 호령을 듣겠
지만, 평상시에는 형제, 친구처럼 지내는 게 어떻겠소?"

 그러자 한림아는 몹시황공해 하였다.

 "당치도 않습니다.  항상 교주님을  가까이할 기회가 없었는데,
마침 오늘 제가 모실 수 있게 되어서 실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
습니다."

 이윽고 주지약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당신의 교주도 아닌데 뭣 때문에 나에게도 공경하게 대하는
것이죠?"

 "주낭자께서는 선녀와 대등한  인물입니다. 소인이 같이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만도 전생의 타고난 복입니다. 말투가 좀 거칠어도
흉보지 마십시오."

 주지약은 자신의 용모가  청순하고 아름다워서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한림아처럼 오체투지(五體投地)한
남성은 평생 처음 만났다.  그러니 소녀의 마음이 얼마나 기뻐하
겠는가!

 이윽고 장무기가,  그녀가 개방에게 잡혀가게  된 경위를 묻자,
주지약은 이렇게 말했다.

 ----- 그날 그가 객점을 나간 뒤 얼마 후 사손은 느닷없이 온몸
을 떨면서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겁이 덜컥 나서
있는 힘을 다하여 타이르고  위로해 주었다. 그러자 사손은 마치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이 방 안에서 날뛰었다. 얼마 후 바닥
에 쓰러지면서  인사불성이 되었다. 바로 이때개방의 육,칠 명
고수가 동시에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왔다. 그녀가 미처 검을 뽑
기도 전에 이미  제압당해서 사손과 함께 노룡(盧龍)으로 압송된
것이다.-----

 장무기는 어릴 때부터 의부가 칠상권을 연마하는 바람에 심맥을
상한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온 가족이 성곤에게 살해되었기
에 간간이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
각에 발작되어서 개방의 침습을 막아내지 못할 줄은 정말 뜻밖이
었다. 두 사람은 사손이 있을 만한 곳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전혀 집히는 게 없었다.

 장무기가 말했다.

 "경사(京師)는 각처의 인물이  모이는 곳이오. 우리가 남쪽으로
내려가면 지나가게 될 것이오.  거기서 바로 대도에 가서 수소문
하는 게 어떻겠소? 청익복왕 위형에게 혹 무슨 단서라도 있을 줄
모르지 않소?"

 "당신이 정말 위일소를 만나러 대도에 가는 겁니까?"

 주지약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장무기는 그녀의 말뜻을 눈
치채고 그만 얼굴이 빨개졌다.

 "위형을 찾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양좌사,  고두타, 팽화상 등
그들을 만나게 되더라도 좋은 대책을 세워 줄 것이오."

 "대도에 있는 그 여자를 찾아가면 더욱 좋은 대책을 세워 줄 거
예요. 양좌사 그들이 어떻게  그 낭자의 총명한 머리를 따라가겠
어요?"

 장무기는 조민과 만났던  일을 그녀에게 숨기고 있었는데, 막상
그녀가 빈정대며 말을 하자 표정이 몹시 부자연스러워 졌다.

 "당신은 기분만 좋았다 하면 한 번씩 창피를 주는구료."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은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이군요. 제가
당신의 마음을 모르는 줄 알았나요?"

 장무기는 주지약과 백년해로를 약속한  사이라 더 이상 아무 말
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지약,당신에게 꼭 얘기해  줄 일이 있는데, 화내지 않기로 약
속할 수 있겠소?"

 "화내야 할 일은 화내고 화내지 않아야 할 일은 내지 않을 거예
요."

 그러자 장무기는 잠시 생각을 했다. 그 사이 타고 있던 말은 작
은 마을 한 곳 가까워졌다.  이때 이미 해도 저물어서 객점을 찾
아 투숙하기로 했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주지약의 배심(背心)을
다시 한 차례 주물러 주었다.

 "우리 밖으로 산보하러 가요."

 주지약은 객점 안이 더럽고 냄새난다며 장무기에게 말했다.

 "그럽시다."

 그녀와 손을 맞잡고 마을 밖으로 나갔다. 이때 석양은 산등성이
에 걸려 있었고 서쪽  하늘의 놀은 마치 피빛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걷다가 큰 나무 밑에 앉았다. 이윽고 해
는 서산에 지고 사방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장무기는 용기
를 내어 미륵묘에서 조민을  만났던 일이며, 어떻게 막성곡의 시
체를 발견한  것과, 어떻게 송원교를 만난  것과, 어째서 명교의
불길 표시를 따라서 기북(冀北) 일대를 돌았던 일들을 일일이 말
해 주었다. 나중에는 주지약의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지약, 당신은  나의 미혼처요. 부부는  일심동체라 하지 않소?
그러기에 난 당신에게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은 거요. 조낭자
가 의부를 다시  만나려 하는 건 의부에게  물어 볼 중요한 말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소. 난 그 당시도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자꾸만 두려워지는구료."

 "뭘 두려워하는 거죠?"

 "의부에게는 실심풍(失心風)이란 증세가  있기 때문에 발작하게
되면 인사불성되어 버린다오. 그의 두 눈이 장님으로 된 것도 우
리 어머님의 은침을  맞아서 멀게 된 것이오.  내가 출생할 때도
의부는 우리 부모를 살해하려  했소. 그런데 나의 울음소리를 듣
더니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되었소. 난.....난 정말 두려워....."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겁니까?"

 "이 말은 해서는  안 되지만 난 정말  걱정되오. 나의 사촌누이
는..... 바로..... 의부가 살해한 것이오."

 그러자 주지약은 놀라서 펄쩍 뛰며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사대협께서는 우리 후배들을  더없이 사랑으로 대하시는데, 어
찌 은낭자를 죽일 수 있겠어요?"

 "물론 이건  나의 추측에 불과하오.  설령 사촌누이가 의부에게
살해되었다면, 그건 어르신네의  고질병이 갑자기 발작되어서 그
런 것이지 절대로 본의는 아닐 것이오. 아아, 이 모든 잘못은 전
부 성곤 그 악적 때문이오."

 주지약은 한참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우리가  동시에 십향연근산에 중독된  것도 의부 그
어르신네의 짓이란 말인가요?  그는 어디서 독약을 구했죠? 사람
이란 갑자기 정신착란을 일으키면  살인하는 건 있을 수 있지만,
어떻게 음식에다 독을 뿌려 놓겠어요?"

 장무기의 눈앞에는 마치 짙은 안개가 깔려 있는 것처럼 전혀 빛
을 볼 수 없었다. 이윽고 주지약의 싸늘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무기 오빠, 당신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조낭자의 누명을 벗
겨주려 하는군요."

 "만약에 조낭자가 범인이라면  의부를 피하는 것도 시급할 것인
데 뭣 때문에 의부를 만나려 하겠소?"

 그 낭자는 신기묘산(神機妙算)해서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서
는 어떠한 방법도 생각해 낼 겁니다."

 그녀의 말투는 갑자기 부드럽게 변하면서 그의 몸에 안기었다.

 "무기 오빠,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  온후하며 점잖은 사람이에
요. 그러나 총명지모(聰明智謀)를  따진다면 조낭자의 상대는 될
수 없어요."

 장무기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이윽고 그녀의
부드러운 몸매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지약, 세상만사는 번뇌가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구료. 난 달
자들을 몰아내는 대업을  완수하면 당신과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서 조용히 살겠소. 그 때는 속세의 일은 전혀 상관하지 않겠소."

 "당신은 명교의 교주에요. 만약 하늘이 도와서 호로(胡盧)를 정
말 몰아내게 된다면 천하는 당신 명교가 장악하게 될 것인데, 어
떻게 조용히 산단 말인가요?"

 "나의 재간으로는 교주가 과분하며  또 하고 싶지도 않소. 만약
명교가 중권(重權)을 장악하게 되면, 교주의 자리는 더욱 마땅히
영명지철한 사람이 담당해야만 하오."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으며 끝없이 사랑을 속삭였다.

 이때 갑자기 이 장 밖에  있는 큰 나무 뒤에서 흐흐 하며 두 번
냉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깜짝 놀라는 사이에 그림
자 하나가 몇 번  흔들거리더니 멀리 사라졌다. 그러자 주지약은
벌떡 일어나더니 창백한 얼굴을 하며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조민이에요. 그녀는 줄곧 우리를 미행했어요!"

 "그녀가 분명할까? 뭣 때문에 우리를 미행했을까?"

 "그녀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걸  아직도 발뺌할 작정입니까?
당신들은 필시 날 놀라게 하기 위해서 사전에 약속한게 아녜요?"

 주지약이 화를 내며 말을  하자 장무기는 연신 억울하다며 소리
쳤다.

 주지약은 잠시 앞뒤의 경과를 생각하더니 또 눈물을 흘렸다. 그
러자 장무기는 왼손으로 그녀를 끌어안으며 오른손의 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또 눈물을 흘리는 거요? 만약에 내가 조낭자하고 여기서 만
나기로 약속했다면 벼락을 맞아 죽을 것이오."

 "무기 오빠, 제 마음이 자꾸 흔들리는 것 같아요."

 주지약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자 장무기는 그녀를 품안으
로 끌어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의부를  찾게 되면 그 어르신네에게  부탁해서 우리 두
사람의 혼례를 주선해달라고 할  것이오. 그러면 우리 두 사람은
앞으로 헤어지지 않고 백년해로할  게 아니오? 이렇게 하면 되겠
소."

 "제발 오늘의 말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두 사람은  오랫 동안 부둥켜안고 있었다.  새벽이 되자 바람은
점차 강하게 불었다. 두  사람은 그제야 객점으로 들어와서 각기
취침했다.

 다음날 아침 세 사람은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으나 조민의 종적
은 다시 발견하지 못했다.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대도에 도착하
게 되었다. 성 안으로  들어갈 때는 이미 해질 무렵이었으나, 합
성(合城)의 남녀들은 모두 거리를 청소하고 있었다. 큰길과 작은
골목까지 모두 깨끗이 청소해 놓고 집집마다 대문밖에는 향안(香
安)을 설치해 놓았다.

 장무기 일행은 객점에 투숙하면서  안 안에 무슨 큰일이 있는지
종업원에게 물어보았다.

 "손님들께서는 정말 때마침오셨습니다. 내일이 대유황성(大遊
皇城)하는 날입니다."

 "대유황성이라니?"

 "내일은 황상께서 일 년에  한 번 대유황성하는 날입니다. 황상
께서 경수사에  봉향하러 가실 때 수만  명의 남녀들이 반희유행
(拌戱遊行)합니다. 그 행렬의  길이는 자그만치 삼,사십 리는 되
는 실로 장관입니다. 손님들께서  내일 일찍 일어나 서서 옥덕전
문 밖에 가시면 황상, 황후, 귀비, 태자, 공주, 모두 보게 될 겁
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같은 백성들이 경사(京師)에 살고 있
지 않는다면 어떻게 황상을 직접 볼 수 있겠습니까?"

 "도적을 지아비로  섬기는 건  부끄러움을 모르는 한간(漢奸)이
다. 달자의 황제가 뭐 볼게 있느냐?"

 한림아가 화를 내며 호통치자  종업원은 눈을 크게 뜨고 손가락
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당신.....당신이 하는  말은 반역  행위가 아닙니까?
죽는 게 겁나지 않습니까?"

 "나는 한림아다! 달자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었느
냐! 그런데  넌 황상이 어쩌구저쩌구 하다니,  정말 쓸개도 없는
놈이구나!"

 그 종업원은 우락부락한 그를  보자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려 했
다. 그러자 주지약은 얼른 그  자의 등에 있는 혈도를 찍으며 말
했다.

 "이 자가 나가면 필시 입을 놀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관병들이
곧 우리를 잡으러 오겠지요."

 말을 하면서 그를 침대 밑으로 걷어찼다.

 "우선 그를 며칠 굶긴 후 우리가 떠날 때 풀어 줍시다."

 잠시 후 주인장이 밖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아복, 아복! 또 거기서  쓸데없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거냐! 빨
리 3호실에 세숫물 갖다 드려라!"

 그러자 한림아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고  탁자를 치며 소리쳤
다.

 "빨리 술과 음식을 가져오너라!"

 잠시 후 다른 종업원이 음식을 갖고 들어오면서 중얼거렸다.

 "아복, 이  녀석은 아마 황상에 불꽃놀이  구경하러 갔을 거야.
그 녀석은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엉뚱한  짓만 골라서 한단 말이
야."

 다음날 아침 장무기가 깨어나자 밖은 몹시 소란했다. 문 밖으로
나가보니 수  많은 남녀들이 모두 호화스런  옷을 입고 북쪽으로
몰려갔다. 저마다 즐거워하는  모습은 설날을 방불케 했다. 폭죽
소리도 사방에서  끊임없이 터지고 있었다.  주지약도 문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우리도 구경하러 갑시다."

 "난 여양왕부에 있는 무사들과  싸운 적이 있어서 내 얼굴을 알
아볼 것이오. 구경하러 가더라도 우선 변장 좀 해야겠소."

 장무기, 주지약, 한림아 세 사람은 시골남자와 여자로 변장하고
얼굴과 양손은 흙탕물로 노랗게  칠한 다음, 사람들을 따라서 황
성으로 몰려갔다.

 그 때는  겨우 모말진초(卯末辰初)  시각인데도. 황성의 안팎은
이미 인산인해가  되어서 발디딜 곳이  없었다. 그러자 장무기는
양팔을 앞으로 뻗어서 사람들을  살짝 밀어내며 길을 터 주었다.
잠시 후 연춘문 밖에 있는  부잣집 처마 밑에까지왔다. 얼마 후
바로 징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러자 백성들은 일제히 왔다,
왔다! 라고 소리치며 목을 내밀고 쳐다보았다.

 징소리는 점차 가까이  다가올수록 소리가 요란했다. 이윽고 백
팔명의 우람한 남자들이 모두 청색옷을 입고 왼손에는 징을 하나
씩 들고 있었고, 오른손의 징추로 일제히 징을 쳤다. 백 팔개 징
이 동시에 올리는 소리는  실로 고막이 터질 정도였다. 징부대가
지나가자 뒤에는 삼백 육십명의 장고 부대가 따랐고, 그 뒤는 한
인의 고적대, 서역의 비파대, 몽고의 호각(號角)대가 따랐다. 부
대마다 백에서 오백 명은 되었다. 악대가 모두 지나가자 빨간 비
단으로 만든 큰 깃발 두 개가 따라왔다. 하나는 안방호국(安邦護
國)이란 글이 씌어 있고, 하나는 진사복마(鎭邪伏魔) 였다. 옆에
는 금빛 찬란한 범문(梵文)이  많이 씌어 있었다. 깃발의 전후에
는 몽고 정병 이백 명이  호위하고 있었다. 사백 명이 타고 있는
말은 모두 흰 색이었다. 백성들은 이러한 위세를 보게 되자 모두
큰 소리로 환호성을 쳤다.

 큰 깃발 두 개가 지나가는 순간, 갑자기 서쪽에 몰려 있는 사람
숲에서 흰  빛이 연거푸 번뜩거리더니두  줄기 비도(飛刀)가 두
개의 깃대를 향해서 날아갔다. 비도는 한 줄에 일곱 자루씩 연결
시킨 것이다. 일곱 자루 비도는 질서정연하게 깃대에 꽂혔다. 비
록 깃대는 매우 굵었으나  일곱 자루의 비다가 일제히 꽂히자 몇
번 휘청거리면서 바로 부러졌다. 그러자 비명소리가 크게 들리면
서 십여 명이 깃대에 깔리고 말았다.

 이 갑작스런 변고는 장무기의 일행도 예측 못한 일이었다. 한림
아는 너무나  기뻐서 갈채를 보내려는 찰나  갑자기 부드러운 손
한 쪽이 뻗어와서 그의 입을 막았다. 주지약이 때마침 그가 소리
치는 것을 저지시킨 것이다.

 순간 사백 명 몽고병들이 각각  병기를 들고 사람 숲 속에서 범
인을 수색했다.

 장무기는 열 네 자루의  비도를 발사한 수경(手勁)이 매우 예리
한 것을 보고 무림 고수의 소행이란 것을 짐작했다. 그러나 서로
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자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잠
시 후 몽고병들은 칠,팔 명의 남자들을 억지로 끌어냈다. 그들은
모두 억울하다며 소리쳤으나 몽고병들은 일제히 창칼을 휘둘러서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그러자 한림아는 몹시 화를 내며 말했다.

 "비도를 던진 자는 벌써  사라졌는데, 저 멍청한 놈들은 양민을
학살하여 화풀이를 하다니!"

 "한대형, 소리를 낮추세요."

 주지약이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네."

 한림아는 더 이상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한 차례 소란이 끝나자 뒤에는 악기소리가 다시 울렸다. 다가오
는 부대들은 모두  칼을 삼키고 불을 토하는 서역비기(西域秘技)
였다. 그러자 백성들은 다시 갈채를 보냈다. 방금 있었던 유혈참
극은 마치 깨끗이 잊어버린 듯했다. 그 다음은 화려한 마차 행렬
이었다. 마차 위마다 준동미녀(俊童美女)들이 모두 연극 속에 있
는 인물처럼 분장했다.

 장무기 일행은  항상 가난한 벽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이러한
번화기상은 전혀 볼 기회가 없었다. 제각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차 위에는 전부 금기(錦旗)가  꽂혀 있었고, 뒤로 갈수록 마차
는 더욱  화려했다. 이는 모두가  몽고의 왕공대신들이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며, 또 각자가 부(富)를 과시하기 위해서다. 그
래서 한결같이 돈을 아끼지 않고 마차를 장식했다.

 갑자기 깨진 징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비쩍 마른 말 두 필이 채
차(綵車) 한 대를 끌고 들어왔다. 이 마차는 전혀 장식이 달려있
지 않았고 몹시 허름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리
며 빈정거렸다.

 "저런 형편없는  마차로 황성 들러리에  참석했다니, 정말 사람
웃기는군."

 마차는 천천히 가까이 다가왔다. 장무기는 마차를 보는 순간 놀
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차  안에는 한 남자가 노랑머리를 어깨까
지 늘어뜨렸으며, 두 눈을 꼭 감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이건 금
모사왕 사손으로 분장한 게  틀림없었다. 옆에는 파란 옷을 입은
미모의 소녀가 찻잔을 들고  정성껏 모시고 있었다. 용모는 비록
주지약만은 못했지만 치장한 것은 그녀가 만안사의 담 위에 있을
때와 똑같았다.

                                                    계속 ---


#2901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4장 #2/5             03/16 22:47   389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4 장 깨져 버린 혼례식(婚禮式) #2/5

 순간 한림아가 말했다.

 "주낭자, 저 사람은 당신을 꼭 닮았어요."

 그러자 주지약은 콧방귀만 뀌고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장
무기는 그녀가 몹시 화내고 있는 것을 보자, 손을 내밀어서 그녀
의 오른손을 잡아주었다.

 이 마차의 뒤에도 여전히  사손과 주지약으로 분장한 마차가 따
르고 있었다. 그 여자배우가 낄낄거리며 남자 배우의 등 뒤로 가
서 두 손가락으로 갑자기 가짜  사손의 등을 힘껏 한 번 찍었다.
그러자 가짜 사손은 악! 하고 크게 소리치면서 침대 밑으로 떨어
졌다. 그러나  가짜 주지약이 발로  누르면서 검을 들어올리더니
찌르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큰 소리로 외쳤다.

 "잘하다! 잘한다! 빨리 죽여라!"

 세 번째 마차도 역시  가짜 사손과 가짜 주지약이었으나 그들이
육,칠 명의 개방 사람들에게 잡혀있는 장면을 연출했다.

 장무기는 이 마차 세 대가 조민이 연출해낸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녀는 주지약이 대도에 올  줄 미리 예상해서 주지약을 한 차례
놀려주려는 속셈이었다.  이윽고 그는 허리를  굽히더니 작은 돌
몇 개를 집었다. 가운데 손가락으로 살짝 튕겨서 세 번째 마차를
끌고 있던 두  말의 오른쪽 눈을 적중했다.  돌은 뇌로 관통해서
들어갔기 때문에 두 말은  몇 번 애절하게 울부짖더니 바로 쓰러
져 죽었다. 그러자 마차는 뒤집히고 차 안에 있던 남녀 배우들은
모두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순간 거리는 또다시 아수라장이 되었
다.

 "그 요녀가 날 이처럼 모욕하다니 내.....내.....내....."

 주지약이 입술을 깨물고 말을  하자 장무기가 얼른 위로해 주었
다.

 "지약, 그 못된 여자가어떤 해괴망측한 짓을 하더라도 당신은
신경쓰지 말아요.  남이 아무리 당신과  나를 이간질시킨다 해도
난 믿지 않을 것이오."

 그러자 주지약은 잠시 생각하더니 갑자기 말했다.

 "아, 생각났어요. 그날 의부는 평소와 다름없이 잘 있었는데 갑
자기 몸을 한 번  떨더니 바닥에 쓰러지면서 헛소리하게 되었죠.
혹시.....혹시 당시 그 요녀가  객점의 어두운 곳에 숨어서 의부
의 후심에 암기를 발사한 게 아닐까요?"

 "그녀의 무공으로는 의부를 암살한다는 게 그다지 쉽지는  않을
것이고, 혹 현명이로(玄冥二老)가그랬는지도 모르지 않소."

 말하고 있는 사이에 몽고  관병들은 이미 백성들을 탄압해서 죽
은 말을 끌어내자 뒤에  있던 마차들이 다시 끊임없이 다가왔다.
마차 행렬이 지나가자  범창(梵唱) 소리가 들리면서 빨간 가사를
걸친 번승(番僧) 행렬이 걸어  들어왔다. 번승 대의 뒤에는 이천
명의 철갑 어림군(御林軍)이 따랐고,  그 뒤에는 삼천 명의 궁전
수(弓箭手)가 있었다. 궁전수가  모두 지나가자 향연(香煙)이 모
락모락 나면서 신상(神像)을 하나하나 가마에 태운 채 지나갔다.
모두 삼백 육십 존(尊)의  신상이 있었는데, 맨 끝에는 관성제군
(關聖帝君)의 신상이었다. 그러자  백성들은 염불을 외우는 자도
있고, 무릎꿇고 절을 하는 자도 있었다.

 신상이 지나가자  금과금추(金瓜金錘)를 들고  있는 의장대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우선보산(羽扇寶傘) 행렬이  하나씩 지나갔다.
그러자 백성들은 일제히 말했다.

 "황상께서 오신다! 황상께서 오신다!"

 멀리서 황주대교(黃紂大轎 한  대가 삼십 이 명의 금의시위들에
게 들린 채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장무기가 자세히 그 몽
고 황제를 살펴보니, 얼굴은  파리하면서 핼쓱한 것이 몹시 쇠약
하게 보였다. 그러나 말을  타고 있는 황태자는 매우 영기(英氣)
가 있었다. 등에는  금과 옥으로 장식한 긴  활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 영낙없는 몽고 건아의 차림이다.

 한림아가 장무기의 귀에 대고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교주님, 소인이 덮쳐가서 단칼에  저 달자 황제를 죽여 버릴까
요?"

 "안 되오. 달자 황제의 신변에는 필시 많은 고수들이 있을 것이
오. 그러니 내가 가겠소."

 그러자 장무기의 왼쪽에 서 있던 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안 됩니다!"

 장무기, 주지약, 한림아 세 사람은 일제히 깜짝 놀라며 그 자를
쳐다보았다. 이 자는 쉰 살쯤 되는 낭중(郎中)이었다. 등에는 약
자루를 짊어지고  있었으며 오른손에는  호장(虎杖)을 짚고 있었
다. 그 자는 양손의 엄지를  펴서 가슴 앞에 나란히 하더니 명교
의 화염수세(火염手勢)를 해 보이면서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팽영옥, 교주님께 인사드립니다. 교주님의 건강한 모습을 보게
되어서 정말로 매우 기쁩니다."

 그러자 장무기도 매우 기뻐했다.

 "아, 당신은 팽....."

 그 자는 바로 팽영옥이었다. 그의 변장술이 교묘해서 옆에 한참
동안 있었는데도  장무기의 일행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이윽고 팽영옥이 조그만 소리도 다시 말했다.

 "여기는 말할 곳이  못 됩니다. 달자 황제를  죽여서는 안 됩니
다."

 장무기는 전부터 그의 견식이  매우 넓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만 끄덕일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와 황태자가 지나간 후 다시 삼천 명의 철갑 어림군이 있었
고, 그 뒤에는 수천 수만의 백성들이 구경하러 따라갔다. 이윽고
길가에 있던 백성들은 일제히 말했다.

 "황후낭낭과, 공주낭낭을 보러 가자!"

 사람들은 모두 서쪽으로 몰려갔다. 그러자 주지약이 말했다.

 "우리도 구경하러 가요."

 네 사람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옥덕진 밖으로 따라갔다. 거기엔
일곱 채의 화려한 누각이 우뚝 솟아 있었고, 누각 밖에는 어림군
이 등조(藤條)를 들고  외부인이 접근하지 못하게 쫓아내고 있었
다. 비록 백성들이 많이 몰려 있었으나 장무기 일행은 가볍게 누
각 앞으로 다가갔다. 중간에 있는 제일 높은 누각에는 황제가 자
리하고 있었고, 옆에는 황후  두 분이 있었다. 황후들은 모두 뚱
뚱한 중년 부인이었으며, 온  몸은 주옥 보석으로 감싸있어서 휘
황찬란했다. 머리에는 고관(高冠)을 쓰고 있었는데, 매우 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왼쪽 아래에 앉아 있었고, 오른쪽
밑에는 스무 살 가량의  공주가 앉아있었다. 장무기는 두루 살펴
보다가 왼쪽 두번째 누각에  있는 한 소녀의 얼굴에 시선을 멈추
었다. 이 소녀는  초구(招구)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진주목걸이
를 하고  있었다. 바로 조민이었다. 이  누각의 중간에 앉아있는
수염 긴 왕야(王爺)는 조민의 부친인 여양왕 찰한특목이었다. 조
민의 오빠인 고고특목이는  누각 위에서 왔다갔다하며 거닐고 있
었다. 응시호보(鷹視虎步)한 것이 매우 사납고 날카롭게 보였다.
주지약은 조민을 잠시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돌아가요."

 네 사람은 사람  숲을 헤쳐나와서 객점으로 돌아갔다. 팽영옥은
장무기에게 참견(參見)인사를 하고 나서, 그 동안 밀렸던 이야기
를 나누었다. 장무기는  사손에 관한 소식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팽영옥은 금방 회사(淮泗)에서  대도로 왔기 때문에 사손이 중원
에 이미 돌아왔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는 주원장, 서달, 상우춘
등이 전에 없는 전공을  많이 세웠기 때문에 명교의 위성을 더욱
크게 떨쳤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한림아가 말했다.

 "팽대사님, 지금 우리가 채루(綵樓)에 덮쳐서 달자 황제를 단칼
에 죽여 버리면, 일로영일(一勞永逸)하지 않습니까?"

 팽영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황제가 혼용무도(昏庸無道)한다는  건 바로  우리를 크게 돕고
있는 격이 되는데 뭐하러 그를 죽이겠느냐?"

 "달자 황제가 혼용무도하기에  백성들은 몹시 수난을 겪고 있는
데, 어째서 우리를 돕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건 한형제가 모르고 하는  말이다. 달자 황제는 번승을 임용
(任用)하기 때문에 조정 안은  몹시 문란해지고 있으며, 또 가로
(駕魯)에서 황하를 개발하고  명했으니 노민상재(努民傷財) 때문
에 천인공노할 지경이 되었다. 게다가 우리같은 오합지졸이 몽고
정병을 쳐부술 수 있는 건 모두 그 멍청한 황제가 재능있는 관리
를 임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몽고병이 싸움을 잘한다 하
더라도 멍청한 장군들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달자 황제는 바로 우리의 큰 동업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이러한 말을 듣고 있던 장무기는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팽영
옥이 다시 말했다.

 "만약에 우리가 달자  황제를 살해한다면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
게 될 것이다. 그 황태자의 생김새만 보아도 보통내기는 아닐 것
같다. 설사 새 황제도  혼군(昏君)이긴 해도 그의 멍청한 애비보
다는 나을 것이다. 만약  그가 정전(征戰)에 능한 장군들을 기용
해서 우리를 치게 되면 그 때는 큰일이 아니냐?"

 이윽고 장무기가 말했다.

 "대사님께서 때마침 도착하셨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 일을 그
르칠 뻔했습니다."

 그러자 한림아는 자기의 뺨을 때리며 욕지거리로 말했다.

 "죽어도 싸지, 죽어도  싸! 네 이녀석, 나중에  또 이런 멍청한
짓을 하겠느냐?"

 순간 장무기, 주지약, 팽영옥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팽영옥이 다시 말했다.

 "교주님은 천금지체(千金之體)입니다. 게다가 어깨에는 호로(胡
虜)를 몰아내며 나라를 재건하는  중임이 걸려 있어서 무모한 모
험은 절대 금물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황제의 신변에는 많은 고
수가 호위하고 있을 겁니다.  만에 하나라도 실수하게 되시면 큰
일이 아닙니까?"

 그러자 장무기는 포권의 예로 인사하며 말했다.

 "대사님의 가르침을 명심하겠습니다."

 이윽고 주지약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팽대사님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그런데 어찌 당신은 함부로
모험을 하려는 겁니까? 나중에 우리의 큰 뜻이 이뤄지게 되면 채
루의 용의(龍椅)에 앉아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 장교주입니다."

 그러자 한림아는 박수치며 말했다.

 "그 땐  교주님께서는 황제가  되시고 주낭자께서는 황후낭낭이
되시고, 양좌사님과 팽대사님은 바로 좌,우 승상이 될겁니다."

 주지약은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지만 기뻐하는
모습은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장무기는 손을 마구 흔들며 말했
다.

 "한형제, 다시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본교는 오로지 백
성들을 수심화열(水深火熱)에서 구제하는 일만 도모할 뿐입니다.
절대로 부귀영화를 탐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만 광명정대한 대
장부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가 되면  황포(黃袍)를 입게 되시고 뿌리칠 순 없
게 될 겁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그런 생각을 했더라면 하늘
이 용서치 않을 것이오."

 주지약은 결단성 있는  그의 말을 듣자 실망한  얼굴을 하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사람이 식사를 마친 후 장무기가 말했다.

 "나와 팽대사님은 밖에 나가서 의부 소식을 알아보겠소."

 그는 한림아의 성격이 외골수라  불공평한 일을 보게 되면 즉시
주먹을 휘두르기 때문에 화를 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한형제, 당신과  지약은 오늘 밤에는  나가지 마시고 객점에서
푹 쉬십시오."

 "네, 조심하세요, 교주님."

 그러자 장무기와 팽영옥은 이경(二更)전에 객점에서 회합하기로
약속하고 두 사람은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갔다. 장무기
는 서쪽 방향으로 걸어갔다. 도중에는 백성들이 군데군데 모여서
유황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흥미를 느끼지 못해
서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걷고 있는 곳은 갈수록 조용하고 후미
졌다. 불쑥 고개를 들어보니,  그날 조민과 술을 마셨던 작은 주
점 앞에 당도한 것이다. 그는 내심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을 오게 됐구나. 진정 난 조낭자를 잊
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이때 주점의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는 조용하여 술손님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갔
다. 안에는 한 종업원이 카운터 옆에 있는 탁자에 앉아서 꾸벅꾸
벅 졸고 있었다. 내당으로 들어가 보니 구석에 있는 탁자 위에는
꺼질 듯한 촛불이  켜져 있었고, 탁자 옆에는  한 사람이 안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그 탁자는  바로 그와 조민이 두 번씩이나 술
을 마셨던  자리였다. 주점에는 술 손님이  한 사람뿐이었다. 그
사람은 발자국소리를 듣더니 불쑥 일어났다. 그러자 촛불의 빛은
흔들거리며 그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뜻밖에도 조민이었다.
순간 두 사람은 모두 아! 하고 소리를쳤다. 이윽고 조민이 조그
만 소리로 말했다.

 "당신.....당신이 어떻게 왔죠?"

 감정이 몹시 격동되어서  말소리가 떨렸다. 그러자 장무기가 말
했다.

 "지나는 길에 들렸을 뿐이오. 그런데....."

 탁자 옆으로 다가가 보니 그녀의 반대편에는 젓가락 한 쌍이 놓
여 있었다.

 "사람을 기다리고 있소?"

 그러자 조민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뇨, 지난번  두 번씩이나  이 자리에서 당신하고  술을 마실
때, 당신은 나의 반대편에 앉아 있었지요. 그래서.....그래서 제
가 종업원을 시켜서 젓가락 한 쌍을 더 준비하라고 했죠."

 장무기는 내심 감격했다. 탁자에  놓여 있는 안주 네 접시는 첫
번째 조민이  그를 초대해서 술마셨던 안주와  똑같은 것임을 보
자, 그녀의 두 손을 꼭 잡고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조낭자!"

 그러나 조민은 상심하듯 말했다.

 "제가 몽고의 왕가에서 태어난 게 원망스러울 뿐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이때 갑자기 창 밖에서 흐흐하며 두 번 냉소가 들리더니, 한 물
체가 날아들어와서 촛불을 꺼뜨렸다.  순간 방 안은 칠흑처럼 깜
깜했다. 장무기와 조민은 모두  주지약의 짓인 줄 알았기 때문에
일시에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윽고 지붕 위에서 발자
국소리가 들리면서 주지약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조민이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당신과  그녀는 이미  백년해로하기로  약속했다는데 정말입니
까?"

 "그렇소. 당신에게 숨기고 싶지 않소."

 "그날 제가 나무 뒤에서 당신과 그녀가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걸 듣게  되었을 때는 당장 죽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그날
제가 두  번 냉소를  지었더니 오늘 그녀가  복수하는군요. 그러
나.....그러나 당신은 한 마디도  제가 좋아하는 말은 하지 않았
어요."

 장무기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조낭자, 내가  여기에 와서 당신을 만난  게 잘못이오. 당신은
금지옥엽의 몸입니다.  앞으로는 이  산촌야부(山村野夫)를 잊어
버리구료."

 조민은 그의 손을 잡으며 손등에 있는 상처 자국을 만지면서 말
했다.

 "이건 제가 물어서 생긴  자국입니다. 당신의 무공과 의술이 아
무리 뛰어나도 이  자국은 지울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은 손등에
있는 상처 자국도 지울 수 없으면서 제 가슴의 상처 자국을 어떻
게 지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에다 진하게 키스했
다. 그런데 갑자기 조민은  그의 입술을 호되게 물어 버렸다. 그
의 윗입술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밀치면
서 몸을 되돌리더니 창문으로 빠져나가며 소리쳤다.

 "당신이 미워, 당신이 미워!"

 한림아는 장무기와  팽영옥이 객점을 나간  후 주지약에게 말했
다.

 "주낭자, 일찍 쉬시오."

 "한대형, 절 무서워하는 겁니까?"

 그러자 한림아는 얼굴을 붉히며 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러면서 재빨리 자기  방으로 달려가서 방문을 걸어 잠그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서 한참 동안 주지약을 생각하다가 미소를 지으
며 몽롱하게 잠들었다. 갑자기  꽈다당! 하는 소리가 한 번 들렸
다. 마치 동편에 있는 방  안에서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인 것 같
았다. 그 방은 바로 주지약의 방이었다. 그러자 한림아는 재빨리
방을 뛰쳐나갔다. 동편의 방에  있는 창문으로 검은 그림자 하나
가 달빛에 반사되었는데, 마치  공중에 걸려있는 듯 살며시 흔들
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한림아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주낭자, 주낭자?"

 문을 열어  보았으나 방문은 잠겨 있었다.  그러자 그는 어깨로
힘껏 밀어부쳐서  빗장을 부러뜨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급히
부싯돌로 촛불을 밝혀보니  주지약은 대들보에 목매달려 있었다.
순간 그는 기절초풍했다. 얼른  몸을 튕겨서 밧줄을 끊고 주지약
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코에 손을 대어보니 다행히 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주낭자, 주낭자! 당신.....당신이 뭣 때문에....."

 갑자기 문 밖에서 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한형제, 무슨 일이오?"

 한 사람이 걸어들어왔는데,  바로 장무기였다. 장무기도 이러한
광경을 보게 되자  마치 갑자기 벼락을 맞은  듯했다. 떨리는 두
손으로 주지약의 목에 있는 밧줄을 풀어주며 그녀의 가슴을 만져
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그러자 기뻐하며 말했다.

 "괜찮소, 구할 수 있습니다."

 손으로 그녀의 배심(背心)에 있는  소복혈도를 몇 번 주물러 주
자 한 줄기 구양진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갔다. 왕복으로 한 번
부딪치더니 주지약은 와!  하고 소리내며 울어 버렸다. 한림아는
너무나 기뻐서 소리쳤다.

 "됐어요, 됐어요! 주낭자가 살아났어요!"

 주지약은 눈을 뜨고 장무기를 보게 되자 울면서 말했다.

                                                    계속 ---

#2902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4장 #3/5             03/16 22:49   386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4 장 깨져 버린 혼례식(婚禮式) #3/5

 "뭣 때문에 살렸어요? 차라리  죽어 버리게 내버려 두지 그랬어
요?"

 문득 그의 윗입술에 이빨자국이 있는 것을 보더니, 울화가 치밀
어서 그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 순간 한림아는 깜짝 놀랐다.

 '교주를 구타하다니 될 법이란 말인가?'

 그러나 주지약은  그의 마음 속에  마치 천신(天神)같은 존재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갑자기 사람 손이 뻗어오면서 그의 어
깨를 두 번 살짝  두드렸다. 한림아가 뒤돌아보니 바로 팽영옥이
어느새 온 것이다. 그는 몹시 기뻐했다.

 "팽대사님, 돌아오셨군요. 어서 주낭자 좀 타일러 보세요."

 그러자 팽영옥은 웃으며 말했다.

 "뭘 타이르란 말이냐?"

 그러면서 장무기에게 말했다.

 "교주님께 아뢰오. 금모사왕의 소식을 알아오지 못했습니다."

 장무기는 음! 하고 대답했으나 표정이 몹시 부자연스러웠다. 그
러자 팽영옥은 한림아에게 말했다.

 "한형재, 우리는 밖으로 나가지."

 "싫습니다. 두  사람이 싸우게 되면  주낭자는 교주님의 적수가
못 됩니다."

 팽영옥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멍청한 친구,  우리 둘이서 주낭자를  돕는다고 교주님을 이길
것 같으냐? 교주님은 분명히 주낭자에게 지게 돼 있다."

 그러면서 한림아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러자 한림아는 몹시
걱정스런 표정으로 한없이 뒤돌아보았다.

 주지약은 그만 피식 하고  웃더니 바로 침대에 쓰러져서 흐느끼
며 울었다.  장무기는 침대로 다가가서  살며시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지약, 절대로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한 게 아니오. 정말 우연히
만나게 되었소."

 주지약은 발을 동동구르며 울면서말했다.

 "전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이 어떠한 변명을 하더라도 전 앞으로
당신을 믿지 않을 겁니다."

 장무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세상 일이란 본시 오해를 일으키기 아주 쉬운 것이오..... "

 주지약은 불쑥 일어나서 앉았다.

 "당신의 입술 좀 보세요. 이게 무슨 꼴입니까? 창피하지도 않아
요?"

 장무기는 오늘 있었던 일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생
각을 했다. 어차피 자기는  이미 주지약하고 부부가 되기로 결심
했으니, 정으로 그녀를 달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촛불
에 비친 그녀의 불그스름한  얼굴과, 목에는 밧줄자국이 깊게 새
겨져 있었다. 만약 한림아가  제때 구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죽었
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부끄럽기도 하고 애석하기도 했다. 이
윽고 팔을 내밀어서  그녀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하려는데 주지약
은 머리를 돌려서 피하더니 화를 벌컥 냈다.

 "더러운 몸으로 절 건드리지  말아요. 제가 그리도 만만하게 보
입니까?"

 그러자 장무기는 그녀가 꼼짝하지 못하게 양팔을 바짝 조르고는
그녀의 입술에다  진하게 키스했다. 이윽고  그녀의 마음도 점차
누그러졌다.

 다음날 아침, 장무기는  팽영옥에게 대도에 사흘간 더 머물면서
사손의 소식을 알아보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주지약과 한림아를
데리고 남쪽에 있는 회사(淮泗)로 내려갔다.

 막상 산동(山東) 경내에  당도하자 몽고의 패잔병들이 벌떼처럼
밀려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패잔병 중의 한 낙오자를 잡
아서 신문해 보니, 주원장이 회북(淮北) 전쟁에서 연거푸 대승을
몇 번 거뒀기에  원병(元兵)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  사람은 너무나 기뻐서 걸음을  한층 더 재촉해
노완(魯完) 변계에도착했다. 이곳은 이미 명교 의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의군 중에서 한림아를  아는 자가 급히 원수부에 통보했
다.

 세 사람이 호주(濠洲)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한산동이 주원장,
서달, 상우춘, 등유,  탕화 등 정군들을 이끌고  삼십 리 밖까지
영접하러 나왔다. 사람들은 오랜만에 만나게 되어서 모두 굉장히
기뻐했다. 한산동은 교주가 아들을 구해주었다는 말을 듣고 더욱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들은 수많은 병사들의 옹호를 받으며 호주
성으로 들어갔다.

 장무기는 성 안에서 며칠  동안 머물렀다. 양소, 범요, 은천정,
위일소, 은야왕, 철관도인, 설불득, 주전, 오행기의 여러 장기사
등 사람들은 소식을 듣고 각지에서 몰려왔다.

 장무기는 사손이 중원에  돌아온 일이며, 개방에게 잡혀가서 다
시 실종된 여러  가지 사정을 말해 주었다.  양소, 범요, 은천정
등은 여러모로 곰곰이 생각하고 상의해 보았으나, 모두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범요가 말했다.

 "그 황삼(黃杉) 미녀의 내력은 모르겠지만, 사형의 행적을 그녀
한테서 찾게 될지도 모르겠소."

 그러나 군호들은 무림에 그런  황삼 미녀가 있다는 것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장무기는  몹시 초조하고 불안하였으나 당장 어
떻게 할 방도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오행기에 속해 있는 교도
들을 각처에  파견해서 수소문하기로 했다.  다시 하루가 지나자
팽영옥이 대도에서 왔다. 그 역시 사손에 관한 소식은 전혀 알아
내지 못했다.

 명교의 의군이 여러 차례  대승을 거두었으나 피해도 매우 극심
했다. 앞으로 이,삼 개월 동안은 의군의 세력을 재정돈하고 신병
을 모집해야만 원군과 다시 대전을 치를 수 있었다. 군호들은 교
주가 몽고의 군주를 아내로 맞이할까 봐 하루속히 주지약하고 혼
례를 치루도록 권고하였다. 그러자 장무기도 쾌히 승낙했다.

 양소는 삼원 시오 일을 황도길일(黃道吉日)로 택일했다. 그러자
명교의 아래윗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교주의 혼사일에 분주하
기 시작했다.

 이때는 명교의 위성이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동로(東路)에
서는 한산동이  회사 일대의 성(城)을  많이 함락하였고, 서로에
있는 서수휘(徐壽煇)도 약북,  예남 일대에서 원병을 연패시키고
있었다. 교주의 혼사가 밖으로  전해지자 무림 인사의 하례는 마
치 밀물처럼 밀려왔다. 각  문파의 장문인들도 모두 하객과 예물
을 보내왔다. 장삼봉은 손수  쓴 가아가부(佳兒佳婦) 네 자를 임
축하여 태극권경  한 권과 송원교, 유연주,  은이정 삼대 제자를
하객으로 보내왔다.

 장무기는 진우량과 송청서가  흉계를 꾸며서 장삼봉을 해칠까봐
위일소를 사례사(謝禮使)로 무당으로 보냈다. 그러면서 위일소에
게 급히 말했다.

 "진우량 그놈은 위형이  마음대로 처치하세요. 그러나 송청서는
저의 송대사백의 독생자이며  미래의 무당파 장문인이라서, 당분
간 무당파 자신들에게 처리하라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대사
백님의 정을 상하지 않을 겁니다."

 위일소는 대답하고 나서 정중한  예를 올린 다음 무당으로 떠났
다.

 삼월 십일이 되었다.아미의  여러 여협들은 제각기 선물을 갖고
호주에 왔다. 다만 정민군은 직접 오지 않고 선물만 보내왔다.

 드디어 삼월 시오일이  되었다. 명교의 아래윗 사람들은 모두다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배천지(拜天地) 하는 예당은 호주에서 제
일 부자집의 대청에 마련했다.  장삼봉의 <가아가부> 네 자로 된
대입축(大入軸)은 중앙에 걸려 있었다. 은천정은 신랑측 주혼(主
婚)이고, 상우춘은 신부측  주혼이며, 철관도인을 호주총순(濠洲
總巡)으로 임명해서 적의 침입을 막게 하였다. 탕화는 의군을 이
끌고 성 밖에 주둔하면서 적을 막았다. 이날 오전에 소림파와 화
산파도 예물을 보내오며 축하해 주었다.

 신시일각(申時一刻) 길시가 되자  호각과 폭죽소리가 일제히 울
려 퍼졌다.  하객들이 대청에 일제히  들어오자 찬례생이 낭랑한
목청으로 찬례(贊禮)하였다. 그러자 송원교와 은야왕이 장무기를
데리고 나왔다. 사죽(絲竹)소리가 울리자 여덟 명의 아미파 젊은
여협들이 주지약을 데리고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주지약의 몸에
는 빨간색 금포(錦袍)를  입었고, 봉관하피(鳳冠霞被) 하였으며,
얼굴은 빨간 천으로 가려  있었다.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
신랑,신부는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섰다. 그러자 찬례생(사회자)
이 낭랑하게 외쳤다.

 "배천(拜天)!"

 장무기와 주지약이  무릎을 꿇으려는 찰나  갑자기 대문 밖에서
큰 소리의 외침이 들렸다.

 "잠깐 멈추시오!"

 파란 빛이  번뜩거리더니 한 청의(靑衣)  소녀가 웃음을 띄우고
어느새 대청 안에 서 있었다. 바로 조민이었다. 군호들은 그녀가
온 것을 보자 저마다  호통치며 격분했다. 성질이 급한 사람들은
바로 덮쳐가서  출수하려 했다. 그러자  양소는 양팔을 벌리면서
덩달아 한 번 외쳤다.

 "잠깐 멈추시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폐교와  아미파의 장문이  혼례식을 올리는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조낭자가 축하하러 왔으면 바로 우리들의 반가운 손님
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미파와 명교의 체면을 봐서라도 지나간 일
들은 잠시 접어 두시고, 조낭자를 무례하게 대하지 맙시다."

 그는 설불득과 팽영옥에게 눈치를 하자, 두 사람은 즉시 알아차
리고 후원으로 돌아가서  조민이 얼마나 많은 고수들을 데려왔는
지 살펴보았다. 이윽고 양소가 조민에게 말했다.

 "조낭자, 이쪽 상좌로  어셔서 관례하십시오. 나중에 제가 낭자
에게 술 석 잔을 다시 권하겠소."

 "장교주에게 몇 마디 드린  후 바로 물러가겠습니다. 나중에 다
시 와서 폐를 끼치겠습니다."

 "무슨 얘긴지는 모르지만 혼례식이 끝난 다음에 얘기합시다."

 "혼례식이 끝나면 너무 늦습니다."

 "오늘만큼은 조낭자가 지중하길 바라오."

 그는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조민이 만약에 난동을 부린다
면 즉시 출수하여 그녀의  혈도를 찍어서 제압한 다음에 다시 얘
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러자 조민이 장무기에게 말했다.

 "장무기, 당신은 명교의 교주요. 사내 대장부가 약속한 말은 책
임지게 되어 있죠!"

 "내가 한 말들은 모두 책임지오!"

 "그날 당신의 유삼숙과 은육숙의  목숨을 구해줄 때, 당신은 나
의 세 가지 조건을 따르기로 약속했죠? 그렇죠?"

 "틀림없소. 당신은 나한테 도룡보도를 빌려서 구경하자고 했소.
그런데 당신은 이미 구경했을 뿐더러 보도를 훔쳐갔소."

 근래 수십  년 동안강호에 있는  사람들은 이 무림지존(武林至
尊) 도룡도의 행방에 모두 관심이 있었다. 갑자기 조민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자 순간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조민이 말했다.

 "도룡도가 누구의 수중에 있는지는 오직 금모사왕 사대협께서만
알고 있소. 당신은 그에게 직접 물어본 적이 있나요?"

 사손이 이미 중원에 돌아온  일은 무림의 군호들은 대다수가 모
르고 있었다. 그녀가 금모사왕의  말을 꺼내자 대청 안의 소란스
런 소리가 금방 조용해졌다.

 장무기가 말했다.

 "난 의부가 계신 곳을  몰라서 밤낮으로 걱정하고 있소. 낭자가
가르쳐 주시기 바라오."

 "내가 당신한테  하라는 세 가지 일이  절대로 무림의 협의지도
(俠義之道)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당신은 복종하기로 약속했
어요. 도룡도를 빌려 본 일은 비록 잘한 일은 아니지만, 그 보도
는 결국 보게 되었어요. 나중에 보도가 도난당한 것에 당신을 나
무랄 수는 없어요. 그러니 첫 번째 일은 이미 실천된 거지요. 지
금 두 번째 할  일이 기다리고 있어요. 장무기, 천하의 영웅호걸
여러분들 앞에서 당신은 절대로 신용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나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는 것이오?"

 그러자 양소가 얼른 말을 가로챘다.

 "조낭자, 당신이 폐교 교주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은 물론 사전
에 약속이  되어 있지만, 무림도의를  위배하지 않는다면 폐교의
어떤 사람일지라도 진심갈력(盡心竭力)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은 장교주가 새 부인과 친지를 참배하는 좋은 시각이니, 다른 일
은 잠시 옆으로 밀어두고 제발 방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중의 말투는 몹시 엄하고 사나왔다. 그러나 조민은 오히려 아
무렇지도 않은 듯 짜증부리며 말했다.

 "나의 이 일은 더욱 중요합니다. 잠시도 지체할 수 없소."

 갑자기 장무기의 몸 앞으로  다가가서 발 뒤꿈치를 들더니 그의
귀에 대고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두 번째 일은 오늘  당신과 주낭자가 혼례를 치루지 않는 것이
오!"

 "뭐라구?!"

 "그게 바로 두 번째 일예요.  세 번째 일은 나중에 생각나면 다
시 당신에게 얘기해 주겠어요."

 그녀의 이  몇 마디는 비록 조그만  소리로 말했지만, 주지약과
가까이 서 있는 송원교,  유연주, 은이정, 그리고 신부의 들러리
를 하고 있는 아미의 여덟  여자도 모두 들었다. 그들은 모두 아
연실색했다.

 장무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일은 따를 수 없소!"

 "당신은 약속을 어길 작정입니까?"

 "우리가 사전에 분명히  약속한 것은 협의지도를 위배하지 않는
것이오. 나와 주낭자는  부부가 되기를 약속했는데, 만약에 당신
의 뜻대로 한다면 그것이 <의>자를 위배하는 것이오!"

 그러자 조민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당신과 그녀가 혼사를 치루게 되면, 그거야말로 불효불의
(不孝不義)가 되는 것이에요. 대도에서 유황성할 때 당신의 의부
가 남에게 어떠한 암습을 당했는지 보지 못했단 말이에요?"

 장무기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큰 소리로 말했다.

 "조낭자, 오늘 당신은  나의 손님이라 내가 양보하겠소. 만약에
또 허튼소리를 지껄이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두 번째 일은 따르지 않겠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이게 뭔지 한
번 보세요."

 오른손을 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장무기는 깜짝 놀랐
다. 온 몸을 떨면서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이..... 이건 나....."

 조민은 재빨리 손을  오므려서 그 물건을 품  안에 넣으며 말했
다.

 "두 번째 일을 따르든 안 따르든 그건 당신 자유예요."

 말을 하면서 대문 밖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손 안에 무슨  물건이 있었기에 장무기를 이처럼 경황없
게 만들었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주지약의 두 눈은 빨간 천에
가려 있었기에 장무기와 조민의  말소리만 들릴 뿐 전혀 밖을 볼
수 없었다. 장무기가 급히 말했다.

 "조.....조낭자, 잠시 걸음을 멈추시오!"

 "당신이 내 말을 따르겠다면  날 따라오고, 따르지 않겠다면 빨
리 신부와 혼례식을 올리시지요."

 그녀는 낭랑한 소리로 말을 했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고 곧장 대
문 밖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장무기가 얼른 외쳤다.

 "조낭자, 잠깐 멈추시오!"

 그러면서 급히 다가가서 소리쳤다.

 "좋소. 당신의 뜻을 따르겠소. 오늘 혼례식을 치루지 않겠소!"

 조민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렇다면 날 따라 오시죠."

 장무기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주지약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보
게 되자 몹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막상 그녀에게 몇 마디 설
명해 주려는데, 조민이 다시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이자 이를 악
물고 조민의 뒤를 따랐다.

 장무기가 대문 앞까지 쫓아갔을 때 갑자기 몸 옆으로 빨간 그림
자가 번뜩거리더니 한 사람이  조민의 등 뒤에 다가가 빨간 옷자
락 안에서 손을 내밀었다. 다섯 손가락을 조민의 머리 위로 찍어
내렸다. 이처럼 신속하고 민첩하게  출수한 자는 바로 신부 주지
약이었다.

 장무기는 멈칫했다.

 '이 일초는 정말 무섭구나.  지약이 어디에서 이처럼 정묘한 무
공을 배웠을까?'

 그녀의 수장(手掌)은 이미 조민의 정문(頂門)을 감싸고 있었고,
다섯 손가락이  찍어내렸다 하면 즉시 뇌가  깨지는 화를 당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되자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즉시 앞으로 튕겨
가서 주지약의 맥문을 잡으려  했다. 그러자 주지약은 왼손 팔꿈
치로 느닷없이  공격했다. 순간 팍! 하고  가벼운 소리가 나면서
그의 가슴에 정통으로 적중했다. 장무기의 체내에 있는 구양신공
이 즉시 발동되어 이  일격의 경력을 감소시켰지만, 흉복간의 기
혈이 치솟는 것 같으면서 다리가 약간 휘청거렸다.

 이 사이에 조민은 이미 앞으로 반 발자국 나가면서 뇌문 급소를
피했지만 어깨에 심한 통증을  한 차례 느꼈다. 주지약의 오른손
다섯 손가락이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 삽입된 것이다. 그러자 장
무기는 아! 하고 소리를 한 번 지르더니 손을 뻗어서 주지약에게
밀어갔다. 장무기는 그녀와 싸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어서 다
만 막아내고  타이르려 했다. 그러나  주지약은 양손으로 연거푸
위험한 초수로 팔초를  전개하였다. 장무기가 건곤이위심법을 전
개해서야 막아내었다. 팔공(攻) 팔수(守)는 전광석화처럼 눈깜짝
할 사이에 지나갔다. 대청 안에 있는 군호들은 숨을 죽이며 눈여
겨 보고 있었으나 모두 놀라서 멍해졌다.

 조민은 어깨에  중상을 입어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상처 난
다섯 구명에서는 피가 샘처럼  솟아나 입고 있던 옷이 절반은 피
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계속 ---#

#2903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4장 #4/5             03/16 22:51   418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4 장 깨져 버린 혼례식(婚禮式) #4/5

 주지약은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 말했다.

 "장무기, 당신은 저 요녀의 유혹을 받고 날 버리고 그녀를 따라
가려 했습니까?"

 "지약, 나의 괴로운 심정을 이해하기 바라오. 우리의 혼인 약속
은 장무기가 절대로 지킬 것이오. 다만 며칠 뒤로....."

 주지약은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이 꼭 가야 한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마세요!"

 조민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걸어갔다. 바닥에는 온통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로 젖어 있었다.
장무기가 말했다.

 "의부께선 나에게 산처럼 무거운 은혜를 베푸셨소. 지약, 지약,
당신이 이해하기 바라오."

 그러면서 조민을  뒤쫓아 나갔다. 은천정,  양소, 송원교, 유연
주, 은이정 등은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막을 수 없었다. 주지약은 불쑥 손을 내밀더니 얼굴을 가린 빨간
천을 찢어내며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께서 보신 바와  같이 그 자가 날  배신한 것이지, 내가
그 자를 배신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주지약과 장무기는 은
단의절(恩斷義絶)합니다!"

 말을 하면서 머리에 쓰고 있는 봉관을 풀어내리더니, 한 주먹의
진주를 움켜잡고 나서 봉관을  던져 버렸다. 양손에 힘을 가하자
진주는 모드 가루로 변해서 우수수 하며 흘러내렸다.

 "나 주지약이 오늘의 치욕을  씻지 않는다면, 바로 이 진주처럼
될 것이오."

 은천정, 송원교, 양소 등은 그녀를 타이르고 진정시켜서 장무기
가 돌아오면  내막을 자세히 묻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주지약은 양손으로 빨간  장포(長袍)를 두 갈래로
찢어서 바닥에 팽개치면서즉시 몸을 위로 솟구치더니 공중에서
살짝 몸을 꺾어서 지붕 위로 올라갔다.

 양소, 은천정 등이 일제히 따라갔으나 그녀는 마치 둥실둥실 떠
가는 가벼운  빨간 구름처럼 동쪽으로  사라졌다. 경공의 실력은
청익복왕 위일소와  비슷했다. 양소의 일행은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잠시 멍하더니 다시 대청으로 돌아왔다.

 아미파의 여자들은 조그만 소리로  서로 몇 마디 상의하더니 화
난 표정을 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자 은천정은 연신 사과하
면서 장무기가 돌아오면 아미  금정에 가서 사과한 후 다시 혼사
를 주선한다고 말했다. 절대로 양가의 화기를 상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아미파의 여자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즉시 분산
하여 주지약을 찾아나섰다. 남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사내 대장부
가 박행(薄倖)하면 좋지 못하다고 호되게 나무랐다.

 조민이 장무기에게 보인 것은  다름아닌 한 줌의 담황색 머리카
락이었다. 장무기는 금방  사손의 머리카락인 줄 알았다. 사손이
수련한 내공은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중년 이후에는 긴 머리카락
이 담황색으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서역 색목인의 금발과는 아
주 달랐다.

 그가 대문 쪽으로 나가 보니, 조민은 전력 질주하고 있었다. 어
깨의  선혈이 대로에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그는 숨을 한 번 몰
아쉬더니 수 장을 달려가서 그녀를 가로막고 말했다.

 "조낭자, 나를 불의(不義)의 인간으로 몰아세우지 마시오!"

 조민의 어깨는 상처가 몹시  깊었다. 처음엔 한 모금 진기만 믿
고 억지로 지탱하며  달려온 것이다. 막상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진기가 흩어지면서 바로 쓰러졌다.

 장무기는 몸을 굽히며 말했다.

 "우선 나에게 말하시오. 의부는 어디에 계시오?"

 "날 데리고가서 그를 구해야 해요. 내가....내가 당신에게....
안내하겠어요."

 "그 어르신네 생명은 무사하오?"

 "당신의 의부.....의부는 성곤에게 잡혀 있어요."

 장무기는 <성곤> 두 글자를 듣게 되자 그 놀라움은 실로 오장육
부가 모두 터지 듯했다. 이  자는 무공이 고강할 뿐 아니라 계략
또한 풍부하고 사손과는  철천지 원수지간이라, 그에게 잡혔다면
위험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조민이 말했다.

 "당신 혼자서는 안 되어요.  어서..... 양소, 그들을 불러서 같
이....."

 그러면서 손으로 서쪽을 가리키더니갑자기 머리가 뒤로 젖혀지
면서 기절했다. 장무기는 의부가  지금쯤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
을 상상하자 오장육부가 불에  타는 듯했다. 얼른 조민을 안아들
고 옷자락을 찢어서 그녀의  상처를 동여매고 길가에 있는 한 명
교 교도를 불러 분부했다.

 "빨리 양좌사에게 통보해서  급히 사람을 데리고 서쪽으로 달려
오라고 명하여라. 내가 분부할 일이 있다고 전해라!"

 그 교도는 대답하고 나서 날 듯이 뛰어가서 통보하러 갔다.

 장무기는 한시라도 지체하면  의부에게 불리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얼른 조민을안아들고 성문 옆으로 달려갔다. 수문사졸에
게 명해서 건마(健馬) 한 필을 끌어오라 했다. 몸을 날려서 올라
타더니 서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수 리를 달려가더니 품안에 있
는 조민의 몸이 점점 차가운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맥박을 재
어보니 몹시 약하게 뛰고 있었다. 순간 그는 놀라서 몹시 다급했
다. 얼른 상처를  살펴보니 깊이는 뼈가 보일  정도며 상처 옆의
근육은 모두 흑자색으로 변해 필시 극독에 중독된 것이 틀림없었
다. 그는 몹시 경이했다.

 '지약은 아미의  제자인데, 어찌 이토록  음독한 무공을 사용할
수 있을까? 그녀의  수법은 멸절사태보다 더 예리하고 악랄하다.
그건 무슨 연유일까?'

 당장은 조민을 급히  구하지 않으면 독이 퍼져서  죽게 될 것이
다. 그는 신랑 복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독을 치료하는 약품을
휴대했을 리는 만무했다. 잠시 생각하더니 즉시 말에서 뛰어내렸
다. 이윽고 그녀의 몸을 안아들더니 몸을 튕겨서 왼쪽에 있는 산
속으로 달려갔다. 사방을 둘러보면서 독을 제거하는 약초를 찾아
보았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는 흔해 빠진 약초  한 뿌리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는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사방을 찾아보았다. 갑
자기 눈이 밝아지면서 오른쪽 전방에 있는 작은 폭포 옆에 사,오
송이의 빨간 작은  꽃을 발견했다. 이건 불좌소홍연(佛座小紅蓮)
이란 꽃인데 독을 제거하는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매우 기
뻤다. 얼른 조민을 안아들고  골짜기 개울을 지나가서 빨간 꽃을
꺾었다. 꽃을 입으로 씹어서  반은 조민에게 먹이고 반은 그녀의
어깨에다 붙여  주었다. 그리고 조민을  안아들고 서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삼십여 리쯤 달려가니 조민이 깨어나서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제.....제가 아직살아있나요?"

 그러자 장무기는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어때요?"

 "어깨가 몹시 가려워요. 아아, 주낭자의 그 일수무공(一手武功)
은 정말 무섭군요."

 장무기는 그녀를  살며시 내려놓고 그녀의  어깨를 다시 살펴보
니, 흑기(黑氣)는 전혀 가시지  않고 다만 맥박이 전처럼 미약하
지 않았다. 장무기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으로 그녀의 어깨를 빨
아주었다. 한 모금씩 당에 뱉어  낼 때마다 그 비린내는 코를 진
동시켰다. 조민은 그의 머리를 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장공자, 이 중간의 곡절을 아직도 생각해 내지 못했나요?"

 장무기는 더러운 피를 전부  빨아낸 후 개울에 가서 입가심하고
그녀의 옆으로 돌아와서 앉으며 말했다.

 "곡절이라니?"

 "주낭자는 명문정파의 제자인데,  어찌 이런 음독한 사문무공을
할 줄 압니까?"

 "나도 이상한  생각이 드오. 도대체  누가 그녀에게 가르쳤을까
요?"

 조민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필시 마교 사파의 작은 도적이 가르쳤을 거예요."

 그러자 장무기는 웃으며 말했다.

 "마교에는 많은 마두가 있지만, 아무도 이런 무공은 할 줄 모르
오. 다만 청익복왕이  사람 목의 피를 빨고  장무기는 어깨 피를
빨아 댈 뿐이오."

 이윽고 바로 되물었다.

 "나의 의부는  어째서 성곤에게 잡혔소?  도대체 지금은 어디에
있소?"

 "내가 당신을 데리고 가서  구해낼 방법을 강구할 거예요. 어디
에 있는지는 말해 줄 수 없어요. 내가 말을 하게 되면 당신은 즉
시 달려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날 버려둘 게 아닙니까?"

 그러자 장무기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그토록 정도 의리도 없는 줄 알았소?"

 "당신은 의부를 위해서 꽃다운 새색시도 버렸는데, 나쯤이야..
..."

 말을 하면서 천천히 그의 몸에 기대면서 다시 말했다.

 "오늘 당신의 첫날밤을 늦추어 놓았는데 날 원망할 건가요?"

 어찌된 일인지 장무기의 지금 심정은 몹시 즐거웠다. 도대체 무
슨 까닭인지 자신도 말할 수 없었다. 장무기가 말했다.

 "물론 당신을 원망하오.  나중에 당신이 그 준수한 군마야(郡馬
爺)라는 분하고 혼례식을 올릴  때, 나는 한바탕 소란을 피울 것
이오. 절대로 새색시를 편하게 할 수는 없소."

 조민의 창백한 얼굴이 빨개지면서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소란피우면 단칼에 죽여 버릴 거예요."

 장무기는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웬 한숨입니까?"

 "그 군마야라는  분은 전생에 무슨 선행을  했기에 이처럼 복을
타고났을까?"

 조민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지금도 늦지 않아요."

 "뭐요?"

 조민은 얼굴이 빨개졌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쯤
얘기했으니 두 사람은 모두  부끄러워서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장무기는 다시 그녀의 상처에 약
을 발라 주고 나서 그녀를 안아들고 다시 서쪽으로 달렸다. 조민
이 그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기에 얼굴을 서로 맞대고 있었다. 장
무기는 그녀의 얼굴에서 풍기는 분향과 지향(脂香)을 코로 맡고,
손에는 부드러운 몸매를 안고 있으니, 끓어오르는 욕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만약 의부를  구해내는 일이 시급하지 않았다면 이
산골짜기에서 평생 동안 걷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 사람은  호주(濠洲) 서쪽의 교외에  있는 야산에서 하룻밤을
노숙했다. 다음날 그들은 작은 마을  한 곳에 가서 건강한 말 두
필을 구입했다. 조민의 독상(毒傷)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고 게
다가 몸까지 허약해서  하는 수 없이 장무기와  말을 같이 탔다.
이렇게 닷새 동안을 달려서 하남 경내에 도착했다. 이날 두 사람
이 한참 말을  타고 가는 도중에 갑자기  백여 명의 말탄 자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앞으로  다가왔다. 바로 몽고의 기병이었다. 그
러자 장무기는 말을 길 옆으로 몰아서 길을 비켜주었다. 몽고 기
병들이 쏜살처럼 지나가자 수십  장 뒤에는 또 한패의 말탄 자들
이 있었다. 장무기가  바라보니 그들 중에는 신전팔웅(神箭八雄)
이 끼어 있었다. 그러자 속으로 걱정하며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 자들은 두 사람의 얼굴이 길 옆으로 향해 있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신전팔웅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이 자들이 모두 지나가고  나서 장무기는 말머리를 다시 돌려 앞
으로 달리려는 찰나, 갑자기 가볍고 민첩한 말굽소리가 들리면서
말 세 필이 쏜살처럼 달려왔다.  중간은 백마였고 말 위에 탄 자
는 비단으로 된  도포에 금관을 쓰고 있었다.  옆에는 각각 밤색
말이었다. 안장에는 녹장객과  학필옹, 즉 현명이로가 타고 있었
다.

 장무기는 순간적으로 몸을 돌리려는데 녹장객이 이미 두 사람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군주낭낭께서는 당황하지 마시오. 구원 부대가 왔습니다."

 그러자 학필옹은 즉시 소리 높여서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신전
팔웅 등이 휘파람소리를 듣더니 즉시 달려와서 두 사람을 중간에
놓고 포위했다. 그러자 조민이 말했다.

 "오빠, 여기서 오빠를 만날 줄은 정말 뜻밖이군요. 아버님은 안
녕하세요?"

 장무기는 그녀가 <오빠>라고 부르자, 비로소 그 백마를 타고 있
는자가 바로 조민의 오빠인 고고특목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한
나라 이름은 왕보보(王保保)다.

 왕보보는 뜻밖에도  누이를 보게 되어  놀라워하면서도 기뻐했
다. 하지만  그는 장무기를 알지 못했다.  이윽고 이마를 찌푸리
며,

 "누이, 너.....너.....!"

 "오빠, 전  적에게 암습을 당해서 몸에  심한 독상을 입었는데,
다행히 이분 장공자께서 구해  주셨어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 오
빠를 보지 못했을 거예요."

 녹장객은 왕보보의 귓가에 입을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소왕야(小王爺), 저 자가 바로 마교의 교주 장무기입니다."

 왕보보는 오래 전부터 장무기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조민
이 그에게 협박당해서 하는  말인 줄 알고 오른손을 한번 휘두르
자, 현명이로는 장무기의 좌우에 다섯 치 정도 떨어진 곳에 다가
갔으며, 아울러 신전팔웅 중의  사웅도 각각 화살을 장진하여 그
의 후심에 조준했다.

 왕보보가 말했다.

 "장교주, 각하는 일교의 주인이며 무림에서 이름나 있는 호걸인
데, 연약한 나의 누이를 괴롭히다니 남들이 비웃을 게 두렵지 않
소? 빨리 그녀를 놓아주시오. 목숨만은 살려 주겠소."

 "오빠,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장공자는 나에게 분명히 은혜
를 베풀었는데 어째서 괴롭힌다는 겁니까?"

 왕보보는 낭랑한 어조로 말했다.

 "장교주, 당신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해도 두 주먹으로는 네 사
람을 상대할 수 없소. 나의 누이를 살려준다면 오늘 우리도 당신
을 살려 주겠소. 나 왕보보가 한 말은 절대적이오."

 장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조낭자의 독상은 몹시 심하다.  날 다라서 천리길을 달리게 되
면 상처가 쉽사리 낮게 되지 않는다. 이왕에 그녀의 오빠와 만나
게 됐으니, 아무래도 그녀의  오빠를 따라서 왕부의 명의에게 치
료받는 것이 그녀의 몸에 좋을 것이다.'

 "조낭자, 오빠께서 당신을 모셔간다 하니 우리는 여기서 작별합
시다. 다만 나의 의부가 있는  곳을 말해 준다면 내가 가서 구출
해 낼 방법을 생각하겠소. 우리는 나중에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
오."

 "내가 끝까지 사대협이 있는  곳을 알리지 않는 것은 그만한 깊
은 까닭이 있어요. 난 다만 당신을 데려가서 그를 찾는다고 대답
할 뿐 장소를 알려줄 수는 없어요."

 "당신은 중상을 입어서  먼 길을 간다는 건  너무 무리가 되오.
그러니 오빠하고 같이 돌아가는 게 좋겠소."

 그러자 조민은 몹시 화나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당신이 날 떼어놓고 간다면 사대협이 있는곳을 알 수 없을 거
예요. 나의  몸은 하루하루 좋아지고  있어서 걸어다니면 오히려
더 빨리 나을 수 있어요.  왕부에 돌아가면 난 답답해서 죽을 거
예요."

 장무기가 왕보보에게 말했다.

 "소왕야, 당신의 누이를 타일러 보구료."

 왕보보는 몹시 이상했다.  순간 마음을 고쳐먹고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흐흐!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너의 손이  내 누이의 사혈(死
穴)을 누르고 있으니 당연히 네가 시킨 대로 헛소리를 하지 않느
냐?"

 그러자 장무기는 몸을 위로 솟구치며 말에서 내렸다.

 신전팔웅 중의  두 사람은 그가  출수하여 왕보보를 기습하려는
줄 알고 획획 화살 두 자루를 그에게 발사하였다. 그러자 장무기
는 왼손으로 건곤이위심법을  전개해서 낭아전(狼牙箭)두 자루를
거꾸로 되돌아가게 하자, 경풍이  더욱 강했다. 순간 팍! 팍! 하
며 두 번 소리가 나더니 활을 쏜 두 사람 수중에 있던 장궁이 쪼
개지면서 부러졌다. 그 두  사람이 빨리 피하지 않았으면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장무기는 조민에게 멀리 떨어지며 말했다.

 "조낭자, 먼저 왕부로  돌아가서 상처를 치료하시오. 나중에 다
시 만납시다."

 조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왕부에 있는  의사가 어찌 당신의  의술을 따르겠어요? 당신이
끝까지 책임지세요."

 왕보보는 장무기가 누이에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누이가 여전히
동행하기로 고집하는 것을 보자, 그만 놀라면서도 울화가 치밀었
다. 그러자 현명이로에게 말했다.

 "수고스럽지만, 두 분이 제 누이를 보호하세요. 그럼 우리는 가
자!"

 "네!"

 현명이로는 대답하고 나서  조민의 말 옆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조민이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녹,학 두 분 선생님,  제게 급한 볼일이 있어서 장교주를 따라
가고 있는 참이오.  마침 손이 부족해 하고  있는데 두 분께서도
절 따라서 같이 갑시다."

 그러자 현명이로는 왕보보의 눈치를 바라보았다. 녹장객이 말했
다.

 "마교의 대마두는  괴팍한 일을 행하니,  군주께서는 그와 자주
만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소왕야와  함께 왕부로 돌아가십시
오."

 조민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두 분은 지금  제 오빠의 말만 듣고  제 말은 듣지도 않는겁니
까?"

 녹장객이 억지웃음을 하며 말했다.

 "소왕야께서는 군주님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조민은 코웃음을 치며 왕보보에게 말했다.

 "오빠, 제가 강호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벌써 아버님에게 허락을
받았어요. 오빠는 날 걱정하지 않아도 나 자신이 조심할 거예요.
아버님을 뵈면 안부나 전해 주세요."

 왕보보는 아버지가 딸을 몹시 총애하고 있는 줄 알고 있어서 감
히 지나치게 위협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홀로 마교의 교
주를 따라가게  되었는데, 어찌 두고만 볼  수 있겠는가. 그러자
그녀가 말에  올라타는 것을 보더니 즉시  팔을 양쪽으로 벌리며
말했다.

 "착한 동생아, 아버님께서 지금  이리로 오고 계시니 잠깐 기다
려서 아버님을 만나 뵈어라."

 그러자 조민이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오신다면 난 갈  수 없게 됩니다. 오빠, 난 오빠의
일을 간섭하지 않으니 오빠도 제 일을 간섭하지 마세요."

 왕보보는 다시 장무기를 훑어보니  그는 훤칠한 키에 얼굴은 준
수하게 생겼다. 자기 누이의  말투를 들어보면 이미 그에게 반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명교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크나큰
반역행위를 했다는 생각이 들자, 즉시 왼손을 한번 흔들면서 소
리쳤다.

 "우선 이 마두를 잡아라!"

                                                    계속 ---


#2904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4장 #5/5             03/16 22:53   398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4 장 깨져 버린 혼례식(婚禮式) #5/5

 그러나 녹장객은 녹장을  휘두르고 학필옹은 학필을 휘두르면서
일제히 장무기에게 공격했다.  조민은 현명이로의 무서움을 너무
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행여나 그가  다칠까 봐 소리치며 말했
다.

 "현명이로, 당신들이 장교주를 다치게 한다면 난 아버님에게 알
려서 가만히 두지 않을 거예요!"

 왕보보가 화를 내며 말했다.

 "현명이로, 당신들이 이 마두를 살해할 수 있다면 부왕과 난 모
두 후한 상을 하사할 것이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다.

 "녹선생, 소왕(小王)은  미녀 네 명을  추가로 선물해서 당신을
즐겁게 해주겠소!"

 그들 남매 두 사람은, 하나는 죽이라고 명령하고 하나는 다치지
못하게 명령하니, 현명이로는 진퇴양난에 놓여서 어찌할 바를 몰
랐다. 그러자 녹장객이 사제에게  눈치를 하며 조그만 소리로 말
했다.

 "사로잡아라!"

 장무기는 갑자기 성화령에 적혀 있는 무공을 전개했더니 팍! 하
는 소리가 나면서 녹장객의 따귀를 힘차게 한 대 때렸다.

 "사로잡아 보아라!"

 녹장객은 갑자기 얻어맞자 놀라면서도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역시 그는 일류 고수였다.  심신을 어지럽히지 않고 녹장을 빈틈
없이 휘둘렀다. 장무기는 다시  도습을 가하려 했으나 전혀 빈틈
이 보이지 않았다.

 조민은 말고삐를 한 번 당겨서 급히 말을 몰고 갔다. 그러자 왕
보보는 말채찍을 휘둘러서 그녀가 타고 있는 말의 왼눈을 적중시
켰다. 순간 그 말은  길게 비명을 지르며 앞발을 들어올렸다. 조
민은 상처를 입어서 몸이 몹시 허약했기 때문에 하마터면 안장에
서 떨어질 뻔했다. 그러자 화를 내며 말했다.

 "오빠, 꼭 저를 막아야 합니까?"

 "누이야, 내 말을 들어라. 집에 돌아간 후 너에게 사과하마."

 "오빠, 제가 가지 못하면  한 사람이 비명에 죽게 됩니다. 그럼
장교주는 앞으로 뼈 속 깊이  절 원망할 겁니다. 당신 누이도 살
수 없을 겁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여양왕부에는  고수가 구름처럼 많아서
널 안전하게 보호해 줄 것이다. 이 마두가 출수하여 널 해치기는
커녕 만나보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자 조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바로 그걸 두려워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난..... 죽게 될거
예요."

 그들 남매 두  사람은 정의가 몹시 두텁기  때문에 서로가 못할
말이 없었다. 조민은 다급한 나머지 장무기에게 기울어진 자기의
마음을 숨김없이 고백한 것이다.  그러자 왕보보는 화를 내며 말
했다.

 "넌 몽고의 왕족인데 어찌 오랑캐에게 정을 쏟을 수 있느냐? 만
약 아버님이 아시게 되면 그 어르신네는 홧병으로 돌아가실 것이
다!"

 왼손을 한 번  휘두르자 다시 세 명의  호수가 앞으로 다가가서
협공했다. 그러자 조민이 소리쳤다.

 "장공자, 당신이 의부를 구출하고  싶으면 먼저 날 구해줘야해
요!"

 왕보보는 누이의 마음이 돌아서지  않는 것을 보자 몹시 초조했
다. 즉시 그녀를 자기  팔로 안아와서 말을 몰고 달려갔다. 조민
의 무공은  원래 자기 오빠보다 뛰어났으나  중상을 입어서 전혀
힘을 쓸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크게 소리쳤다.

 "장공자! 구해줘요! 구해줘요! 장공자!....."

 장무기는 십성(成)의 경력으로 후려쳐서 현명이로가 뒤로 삼 보
(步) 물러가게 하고 나서,  경공을 전개하여 왕보보의 말을 뒤쫓
았다. 그러자 현명이로와 나머지 세 명의 호수도 얼른 쫓아왔다.
장무기는 다섯명이 가깝게  쫓아올 때마다 뒤로 몇 장씩 후려쳤
다. 구양신공의 위력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현명이로도 감히 정
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옆으로 피하고 했다. 이렇게 세 번이나 반
복하자 장무기는 드디어 왕보보의 말을 따라잡았다. 이윽고 몸을
위로 솟구치면서 왕보보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이 일조(一爪)
에는 나혈수법(拿穴手法)이 암장되어  있기 때문에[ 왕보보의 상
반신은 즉시 마비가  되었다. 이윽고 조민을 안고  있는 두 팔이
풀어졌다. 그러나 몸은  이미 장무기에게 들어올려져 녹장객에게
던져졌다. 녹장객은 얼른 받았다. 이때 장무기는 이미 조민을 안
고 말에서 뛰어내린 후 좌측에 있는 산언덕 쪽으로 달려갔다. 그
러자 학필옹과  나머지 호수들이 큰  소리로 외치며 뒤쫓아왔다.
그러나 이 산은 수백 장 높이에 달하고 있기에 경공이 뛰어난 자
에게는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비록 현명이로의 내력이 막강했으
나 경공은 일류에 속하지 못해서 오히려 나머지 사,오 명이 학필
옹을 앞질러  쫓아오고 있었다. 왕보보는  장무기가 조민을 안고
점점 높은 곳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자 발을 동동 구르며 욕을 마
구 퍼부으며 소리쳤다.

 "활을 쏘아라! 활을 쏘아라!"

 그러나 너무나 멀리 떨어졌기 때문에 장무기에게 화살이 미치지
못했다.

 장무기가 조민을 안고 한참 산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한 사람이 낭랑한 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군주낭낭, 소승은 여기서 오랫 동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산 뒤에서 빨간 도포를 입은 번승 이십여 명이 돌아나왔
다. 장무기는 이 번승들의 옷차림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무공이
대단한 것도 지난번 만안사에서  경험한 바가 있었다. 이윽고 맨
앞에 있는 번승 한 명이 합장을 하고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소승은 왕야의 명령을 받아 군주를 왕부로 모셔가야 합니다."

 그러자 조민이 되물었다.

 "너희들은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

 "군주께서 부상당해서 왕야가  몹시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소승에게 분부하셔서 군주 방가(芳駕)를 영접하는 중입니다."

 그러면서 수중에  들고 있는 흰비둘기 한  마리를 들어 보였다.
그러나 조민이 다시 물었다.

 "아버님은 어디에 계시죠?"

 "왕야께서는 산 밑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군주의 상처가 어떠
한지 급히 보고 싶어합니다."

 장무기는 더 이상  얘기를 들어봐야 좋은 결론이  나올 것 같지
않아서 앞으로 돌진해가며 소리쳤다.

 "살고 싶으면 빨리 물러서라!"

 그러자 번승 두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앞으로 일 부씩 내
딛으며 일 장씩 후려쳤다. 장무기는 좌장을 후려쳐서 양승(兩僧)
의 장력을 되돌려 보냈다.

 번승 둘은 일제히 소리쳤다.

 "아미아미공(阿未阿未供)! 아미아미공!"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 같기도 하고 욕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자 조민은 손해보기 싫어서 같이 소리쳤다.

 "네가 아미아미공이다."

 두 번승은 삼 보씩 뒷걸음질치자, 뒤에 있던 두 번승이 각각 일
장을 뻗어서 밀려오는 승려의 배심을 밀더니 다시 그들을 밀어왔
다. 두 번승은 초식을 변화시키지 않고 다시 배산장(背山掌)으로
공격해 왔다. 장무기는  그들한테 진력(眞力)을 허비하기 싫어서
바로 건곤이위심법으로 두 번승의 경력을 분산시키려 했다. 그러
나 손가락이  두 승려의 장연(掌緣)에 닿는  순간 갑자기 그들의
장연에 찰싹 들러붙었다. 마치  쇠붙이가 자석에 붙어 보린 듯했
다. 그러자 두 번승은 크게 소리쳤다.

 '아미아미공, 아미아미공!"

 장무기는 두 번이나 끌어당겨 보았지만 전혀 뿌리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구양신공을  운용하여 반격해 갔다. 그러나 이번에
는 두 번승을 밀어내지 못했다.  이때 그들의 뒤에 있던 이십 이
명의 번승은 이미 두 줄로 나란히 서서 각각 우장으로 앞 사람의
후심(後心)을 밀고 있었다. 그러자 장무기는 번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태사부님의 말로는 천축(天竺)의 무공 중에 병체연공법(倂體連
功法)이란 것이 있다고 하셨다. 이 이십 사명의 번승이 합력하여
나와 대장(對掌)한다면 나의  내력이 아무리 강해도 이십 사명이
합력한 힘을 막아내지 못한다.'

 그는 쫓아오는 자가 또 있을까 봐 걱정했다. 순간 대갈일성하면
서 손에다 공력을 삼성(成) 더 끌어올리더니 갑자기 비스듬히 공
격하면서 왼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이십 사명의 번승의 경
력은 이미 일직선으로 연성(連成)할  수 없었다. 순간 앞에 있던
육 명은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곧장 앞으로 돌진해왔다. 장무기
는 양손을  마주 휘둘러서  그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순간 팍
팍.....하며 여섯 번 소리가 들리더니 번승 육 명이 차례로 쓰러
지면서 피를 토해냈다. 그러자  뒤에 받쳐 있던 일곱, 여덟 번째
번승이 바로 돌진하면서  공격해왔다. 장무기는 우장으로 후려치
면서 약간 경력을 더  가해서 옆으로 밀어 버리려 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가볍게 들려왔다. 그를 공격해오는 자
가 있었다. 그는 좌장을  뒤로 후려치면서 그 일장을 분산시키려
했는데, 갑자기 한 줄기 음한지기(陰寒之氣)가 장중에서 곧장 전
해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윽고 몸이
한 번 휘청하더니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바로 녹장객이 현명
신장으로 갑자기 도습한 것이다.

 "녹선생, 멈추시오!"

 조민은 놀래서 소리쳤다.  바로 장무기에게 덮쳐가서 그의 몸을
가로막고 호통쳤다.

 "감히 누가 또 출수하겠느냐?"

 녹장객의 생각 같아선 일장을  더 후려쳐서 생애에 제일 강적을
이대로 없애 버리고 싶었지만, 군주가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자,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는 휘파람을 길게 불어서
동료들에게 알리며 말했다.

 "군주낭낭, 왕야께서는 오직  군주께서 왕부로 돌아가시기를 바
랄 뿐 딴 뜻은 없습니다.  이 자는 대역무도한 반역인데 뭣 때문
에 군주께서 이러시는 겁니까?"

 조민의 심정 같아선 그에게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잘
못했다간 장무기의  생명에 지장이 있을까  봐 생각을 달리했다.
이윽고 터져나오는 말문을 억제하면서 장무기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잠시 후 란령(鸞鈴)  소리가 울리면서 말 세  필이 산길을 따라
쏜살처럼 달려왔다. 하나는 학필옹이고 하나는 왕보보고, 마지막
한 사람은 다름아닌 여양왕이 친히 온 것이다. 세 사람은 가까이
달려오자 모두 말에서 뛰어내렸다. 이윽고 여양왕이 이마를 찌푸
리며 말했다.

 "민민, 왜 그러느냐? 뭣  때문에 오빠의 말을 듣지 않고 여기서
말썽을 부리는 것이냐?"

 여양왕은 앞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하자 조민이 갑
자기 품에서 비수 한 자루를 꺼내들고 자기의 가슴에 들이대면서
소리쳤다.

 "아버님, 소녀의 뜻을 따라주지 않는다면 오늘 아버님의 면전에
서 죽어 버릴 겁니다."

 여양왕은 너무나 놀래서 뒷걸음질치며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할말 있으면 좋게 말로 해라. 네가.....네가 원하는 게 뭐냐?"

 그러자 조민은 어깨의 상처를 여양왕에게 보이면서 녹장객을 가
리키며 말했다.

 "이 자는 엉뚱한 생각으로  소녀를 겁탈하려 했습니다. 제가 죽
을 각오로  반항하자 그가.....그가  이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아버님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십시오."

 녹장객은 놀래서 어쩔 줄 몰랐다.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여양왕은 그를 무섭게 노려보면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네놈이 감히..... 지난번 한희의 일도 내 더 이상 추궁하지 않
고 덮어놓았는데,  다시 나의 딸을 범하려  하다니, 저놈을 잡아
라!"

 이때 그를 따르던  무사들도 이미 당도하였다. 왕야가 호령하는
소리를 듣자 비록 녹장객의  무공이 뛰어난 줄 알지만 그래도 무
사 네 명이 녹장객에게  다가갔다. 녹장객은 놀라면서도 화가 났
다. 즉시 일장을 후려쳐서  무사들이 접근 못하게 해놓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제, 가자!"

 학필옹이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조민이 소리쳤다.

 "학선생,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 당신 사형처럼 호색한이 아닙니
다. 당신이 사형을 잡아준다면  우리 아버님께서 큰 벼슬을 내리
고, 또 후한 상을 줄 것입니다."

 현명이로의 무공은 몹시 탁월했지만 공명이록(功名利祿)을 탐하
기 때문에 왕부에 투신하게  된 것이다. 학필옹은 평소에 사형이
호색탐음(好色貪淫)한 줄 알기 때문에 조민의 말을 듣고 거의 부
인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벼슬과 상을 준다는 말에 그는 또 귀가
솔깃했다. 다만  그와 녹장객은 동문에다  막연한 사이라 일시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자 녹장객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사제, 네가 벼슬과 부를 누리고 싶으면 날 잡아라."

 그러자 학필옹이 한숨을내쉬며 말했다.

 "사형 갑시다!"

 이윽고 녹장객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떠났다. 여양왕부의 무사
들은 그들을 신처럼 받들고 있었다. 그러니 누가 감히 나서서 그
들을 가로막겠는가? 여양왕이 연신 호령을 했으나 무사들은 잡는
척만 하고 실제로 나서는 자가 없었다.

 여양왕이 말했다.

 "민민, 부상을 입었으니 돌아가서 상처부터 치료하라."

 그러자 조민은 장무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 장공자께서는  녹장객이 절 범하려는 걸  때마침 구해 준
겁니다. 그런데 오빠는 그것도  모르면서 도리어 그가 무슨 역반
반적(逆반反賊)이라고 오해하며 얘기한  겁니다. 아버님, 소녀에
게 급한 볼일이 한  가지 있어서 필히 장공자하고 같이 처리하러
가야 합니다. 일이  성사된 후에 다시 그와  함께 와서 아버님을
뵙겠습니다."

 "네 오빠의 말로는 이 자가 마교의 교주라는데 틀림없으렸다!"

 "오빠는 농담도 잘 하는군요.  아버님이 보기에 그가 반역의 우
두머리 같습니까?"

 여양왕이 장무기를 살펴보니  나이는 스물 한두 살에 불과했고,
상처를 입은  후 안색이  초췌해서 영정수발(英挺秀拔)한 기질이
상실되어 수십 만 대군을  통솔하는 우두머리 같지는 않았다. 그
러나 설령 교주가 아니더라도  필시 마교 중의 중요한 인물로 단
정하면서 조민에게 말했다.

 "그를 성 안으로 데려가서  자세히 신문해 보자. 만약에 마교의
사람이 아니라면 내 그에게 상을 내릴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을 할때는  이미 딸의 체면을 생각해 준 것이다.
이윽고 네 명의 무사가  왕야의 명령을 받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조민이 울면서 말했다.

 "아버님, 소녀가 죽는 꼴을 보셔야 하겠습니까?"

 그러면서 비수를 가슴에다 반  치쯤 찌르자 선혈이 삽시간에 옷
을 빨갛게 물들었다. 여양왕이 놀라서 소리쳤다.

 "민민, 절대로 허튼짓해서는 안 된다."

 조민은 울면서 말했다.

 "아버님, 불효 소녀는  이미 장공자와 몰래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 딸을 없는  셈치고 소녀를 놓아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장
아버님 면전에서 죽겠습니다."

 여양왕은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왼손으로 자기의 수염을 연
신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는 장병을 호령할 때나 적과 전쟁을 할
때는 모두 한  마디로 결정을 했지만, 오늘  이러한 난감한 일을
닥치게 되자 실로 손발이 묶인 듯했다. 그러자 왕보보가 말했다.

 "누이, 너와 장공자는  모두 부상을 입었으니, 잠시 아버님하고
함께 돌아가서 명의에게  상처를 치료한 다음에 아버님에게 부탁
해서 혼례식을 주선해 달라고 해라. 그러면 아버님께서는 승용쾌
서(乘龍快서)를 얻게 되시고, 나에게는 영웅매부가 한 분 생기게
된다.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조민은 그가 완병지계(緩兵之計)를  쓰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장무기가 일단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면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조만간에 그를 사형시킬 게 뻔한 일이다.

 "아버님, 일이 이쯤 되었으니  소녀는 죽든 살든 장공자를 따르
기로 결정했습니다.아버님과 오빠가  어떠한 계략을 쓰더라도 제
눈을 속일 수 없습니다. 지금은 오직 두 갈래 길 뿐입니다. 소녀
를 살려주신다면 이대로 물러나시고, 그렇지 않으면 소녀를 죽여
버리십시오."

 여양왕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민민, 분명히 알아 두어라! 네가 이 반적(反賊)을 따르게 되면
넌 앞으로 나의 딸이 될 수 없다!"

 "아버님, 오빠, 모두가  민민이 잘못한 겁니다. 그러니..... 그
러니 절 용서해주십시오."

 여양왕은 딸아이의 마음이 끝내  돌아서지 않자 길게 한숨을 내
쉬더니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민민, 부디 몸조심하거라 아버지는 가겠다..... 부디.....부디
조심하거라."

 조민은 고개를 끄덕거릴 뿐  감히 아버님을 다시 쳐다보지 못했
다.

 여양왕은 천천히  산 아래로 내려가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말했
다.

 "민민, 네 상처는 견딜만 하냐? 돈은 지니고 있느냐?"

 조민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윽고 여양왕은
좌우의 수하에게 말했다.

 "나의 말 두 필을 군주에게 갖다 주거라."

 좌우의 위사는 대답하고 나서 말을 조민에게 갖다 준 다음 여양
왕을 옹호하며 산 밑으로 내려갔다. 여섯 명의 번승은 땅에 쭈그
리고 있었지만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러자 나머지 번승들은 두 사
람이 한 명씩 부축해서 곧 뒤따라서 내려갔다.

 잠시 후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 버렸다. 오직 장무기와 조민 두
사람만 남겨 놓았다.

                                   ----- 제 6권 4장 끝 -----


   덧말 : 요즘 글 올리는 속도가 많이 늦어 졌습니다.
          2월달에 대학교 졸업하고 취업을 하는 바람에
          직장생활을 해서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의천도룡기는 끝까지 올리겠습니다.




#2917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5장 #1/3             03/21 20:47   377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5 장 단양절(端陽節)의 도사대회(屠獅大會) #1/3

 장무기는 녹장객이  도습한 일장을 얻어맞고  중상을 입게 되었
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구양진기를 체내에서 세 번 회
전시키자, 어혈(瘀血) 두  모금을 토해냈다. 비로소 막힌 흉구가
뚫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눈을 떠보니 조민의 얼굴은 온통 근심
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낭자,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했죠?"

 "아직도 날 '조낭자'라고 부릅니까?  이젠 난 조정의 사람도 아
니고 군주도 아닙니다.  당신.....당신은 아직도 날 소요녀(小妖
女)로 취급하고 있습니까?"

 장무기는 천천히 일어서면서 말했다.

 "당신에게 한 가지 물어  볼 게 있는데, 사실대로 말해 주시오.
내 사촌누이 주아 얼굴의  검상은 도대체 당신의 짓입니까? 아닙
니까?"

 "아닙니다."

 "그럼 누구의 독수란 말이오?"

 "난 당신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당신이 사대협을 만나면
그분이 당신에게 자세한 내막을 말해 줄 것입니다."

 장무기는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내 의부가 알고 있다니?"

 "내상이 채 완쾌되지 않아서  말을 많이 하면 몸에 해롭습니다.
이것만은 분명히 당신에게 말하겠어요. 만약에 은 낭자를 살해한
범인이 나라고 한다면, 내 스스로 자결하여 사죄할 겁니다."

 장무기는 그녀의 단호한 말투를  듣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잠
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필시 파사국 명교가 그 배 안에 고수를 매복시켜 놓
고 사법(邪法)으로 한밤중에 우리를 기절시킨 후, 주아를 살해하
고 의천검과 도룡도를 훔쳐간  것이오? 나중에 우리가 의부를 구
출해 놓고 필히 파사국에 한번 들려서 소조에게 분명히 알아봐야
겠소."

 조민은 입을 삐죽거리며 한 번 웃었다.

 "당신은 소조를 만나려고 온갖 핑계를 둘러대는군요. 제발 엉뚱
한 생각일랑 말고, 하루속히  공력을 회복해서 소림사에 가는 일
이 시급합니다."

 "뭐하러 소림사에 간단 말이오?"

 "사대협을 구해야 할 게 아닙니까?"

 장무기는 더욱 이상하게 느껴져 되물었다.

 "의부가 소림사에 있단 말이오? 어째서 거기에 있는 겁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대협께서
소림사에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이윽고 조민은 자기  수하 중에 있는 한  명이 소림사에 출가를
했는데, 사손이 확실히 소림사에  있다는 걸 증명해 주기 위해서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왔다는 일이며, 또 결국은 양장을 얻어맞고
죽었다는 얘기를 장무기에게 말해 주었다. 그러자 장무기가 말했
다.

 "흠, 정말 지독하군."

 그의 마음이 괴롭기  때문에 내식(內息)을 건드리게 되었다. 참
다못해 다시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냈다.  그러자 조민이 급히
말했다.

 "진작 당신의 내상이 이처럼  심하고 또 참을성이 없는 줄 알았
다면, 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장무기는 땅에 주저앉으며  바위에 기대서 운기조식을 하려했지
만,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소림신승 공견은  나의 의부가  칠상권으로 타사(打死)한 것이
오. 소림의 승속들은 이 십여  년 동안 원수를 갚으려고 칼을 갈
았소. 더구나 성곤이 바로 소림사에 출가했으니, 의부는 살아 남
을 수가 없지 않소?"

 "너무 조급할 것 없습니다. 사대협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물건
이 딱 한 가지 있으니까요."

 "무슨 물건이오?"

 "도룡보도!"

 장무기도 그녀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도룡도는 <무림지존>이
라고 호칭한다. 소림파가 수백  년 동안 무림의 우두머리 격으로
있었으며 이 보도에 대한 애착심은 어느 문파보다 더 강했다. 그
들은 보도를 얻기 위해서도  사손을 쉽게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조민이 다시 말했다.

 "사대협을 구출하는  일은 아무래도 우리 둘이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에 명교의  군웅들을 모집하여 소림을 대거 침
습하다면 쌍방이 많은 피해를  면치 못해요. 소림파가 만약에 명
교의 진공을 막아내지 못할  땐, 오히려 사대협의 생명에 지장이
있게 됩니다."

 장무기는 그녀의 세심한 생각을 듣게 되자 내심 감동되었다.

 "민매(敏妹), 당신 말이 모두 옳소."

 조민은 처음으로 그가 <민매>라고 부르는 걸 듣자 말할 수 없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막상 부모의  은혜와 오빠의 정의를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장무기는 그녀의 마음을
알면서도 어떻게 위로해 줄지  몰랐다. 순간 억지로 일어나서 말
했다.

 "우리도 떠납시다."

 조민은 그의 안색이 창백한 걸  보자 상처가 몹시 심한 줄 알았
다.

 "우리는 속히 이 위험한 떠나야 합니다. 산 아래로 내려간 다음
에 다시 머물 곳을 정합시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비틀거리며 말을 끌고왔다. 막 말
에 올라타려는데 흉구에 한  차례 극렬한 통증을 느껴 올라갈 수
가 없었다. 그러자 조민이 이를 악물고 오른팔로 밀어서 그를 말
등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막상  힘을 가하자 비수에 찔린 가슴의
상처에서 다시 많은 피가  쏟아졌다. 그녀도 억지로 올라타서 그
의 뒤에 앉았다.  처음에는 장무기가 그녀를 부축했는데, 지금은
반대로 그녀의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잠시 숨을 헐
떡거리더니 천천히 말을 몰고 전진했다. 나머지 말 한 필은 뒤에
서 따라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하산한 후 아예 큰길을 택해서 갔다. 얼마 동안 가다
가 바로 작은 샛길로 접어들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약간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무리  왕보보가 사람을 시켜서  잡으려 온다 해도
이러한 후미진 샛길은 찾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 길에는 온통 난석(亂石)과  가시밭으로 되어 있어서 말 두 필
의 다리는 가시에 찔려서  피투성이가 되었다. 절룩거리며 한 시
간쯤 걸었는데, 겨우 이십  리 정도밖에 가지 못했다. 날이 어두
워지자 갑자기  산 속에서 가느다란 연기  한 줄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았다. 그러자 장무기는 기뻐하며 말했다.

 "앞에 인가가 있으니, 거기서 하룻밤 신세집시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곳은 인가가 아니라 절간이었다. 조민은
장무기를 부축하여 말에서  내렸다. 말머리를 서쪽으로 돌려놓고
나뭇 가지를 하나 주워서 말엉덩이를 몇 번 후려쳤다. 그러자 말
들은 울부짖으며 쏜살처럼  달려갔다. 그녀는 도처에 의진(疑陣)
을 펼쳐 놓아  왕보보의 추병(追兵)을 따돌리기만을 바라고 있었
다. 막상 말을  잃게 되면 도피하는데 더욱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것저것 가릴 겨를이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부축하며  절간 앞으로 다가갔다. 대문 위에 있
는 현판에는  <중악신묘>라고 씌어 있었다.  조민이 문고리로 세
번 두드렸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다. 다시 세 번을 두드리자 갑자
기 안에서 음산한 소리로 말하는 게 들려왔다.

 "사람이냐, 귀신이냐? 죽으러 왔느냐?"

 삐그덕 하면서 대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문 뒤에서 인영(人影)
하나가 나타났다. 그 자의  얼굴은 똑똑히 불 수 없었으나, 대머
리에 승복을 입은 걸  보아서는 중이 틀림없었다. 장무기가 말했
다.

 "우리 남매는  도중에 강도를 만나서  몸에 중상을 입었습니다.
부디 보찰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도록 대사께서 자비를 베푸시기
바랍니다."

 그 자는 코웃음을 치며 냉랭하게 말했다.

 "출가한 사람은 남의 편리를  봐주지 않는 법이오. 그러니 다른
데로 가보시오."

 문을 닫으려 하자 조민이 급히 말했다.

 "남의 편리를 봐주게 되면 자신한테 그 만큼 덕이 옵니다."

 "무슨 덕이냐?"

 조민은 귀걸이 한 쌍을 떼어서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 화상
은 귀걸이에 모두 진주가 박혀  있는 걸 보자 두 사람을 다시 훑
어보면서 말했다.

 "좋소. 들어오시오."

 조민은 장무기를 부축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 화상은 두 사람
을 데리고 대전과 원자를 지나서 동쪽에 있는 행랑채로 왔다.

 "여기서 묵도록 하시오."

 방 안에는 등불이 없어서  몹시 캄캄했다. 조민이 침상을 한 번
더듬어보니, 침상에는 초석 한 장만 있을 뿐 다른 물건은 아무것
도 없었다. 이때 밖에서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학사제(학四弟), 누굴 데리고 들어왔느냐?"

 "지나가는 과객 두 사람이오."

 그러면서 문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조민이 말했다.

 "시주, 밥 두 그릇과 나물 한 접시 좀 부탁합니다."

 "출가인은 남에게 적선하지 않는 법이오."

 말을 하면서 유유히 사라졌다.

 "저 중은 정말  못된 놈이군. 무기 오빠,  시장하시죠? 먹을 것
좀 구해야 할 텐데....."

 순간 갑자기 발자국소리가 나면서  칠,팔 명이 걸어왔다. 그 중
두 명이 방문을  열면서 촛대를 높이 들고  두 사람을 비춰 보았
다. 장무기가 한 번 흘낏 보니 모두 필 명의 승인이었다. 모두가
우락부락하게 생긴자들 뿐이었다. 이윽고 주름살투성이의 노승이
말했다.

 "당신들 몸에 지니고 있는 재물은 모두 내놓으시오!"

 그러자 조민이 말했다.

 "왜 그러시죠?"

 "두 분 시주께서는 마침  이 절을 보수 공사하려는데 찾아 오신
겁니다. 그러니 두 분  몸에 지닌 재물은 모두 시주하시지요. 만
약에 인색하여 응하지  않으셔서 보살님이 화를 내시면 야단입니
다."

 조민은 화를 내면서 말했다.

 "그건 강도의 소행이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우리  팔 형제는 원래 강도짓을 했는
데, 최근에 개과천선해서 엉터리  중이 된 것이오. 아유, 이거야
말로 우리 출가인의 육근(六根)이 또 더럽히게 되는구료."

 장무기와 조민은 몹시 놀랐다.  이 팔 명의 화상이 강도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더구나 이 노승의 말투를 들어보면, 어떠
한 일도 능히 해낼 수 있는 작자들이었다.

 조민은 품안에서 칠,팔  덩어리의 황금과 진주 목걸이를 꺼내어
탁자에 놓으며 말했다.

 "재물은 모두 여기 있습니다.  우리 남매도 무림의 사람이니 여
러분은 강호의 의기를 필히 고려해야 하오."

 그러자 그 노승은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이 무림 사람이라니, 그거 잘됐군요. 어느 파의 문하죠?"

 "우리는 소림의 제자요."

 그 노승은 멈칫하더니, 바로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며 말했다.

 "소림의 제자라, 정말 잘 만났다!"

 손을 내밀어서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려 했다. 그러자 조민은 손
을 움추려서  노승의 공격을 피했다.  이윽고 장무기가 조민에게
말했다.

 "민매, 내 등 뒤로 오시오.  내가 이 팔 명의 도적놈을 요리 하
겠소!"

 족지다모(足智多謀)한 조민도 이때만은 속수무책이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그 노승이 말했다.

 "우리는소림사에서 쫓겨난 반도다.  다른 파의 강호 사람을 만
나면 살려줄 수  있지만, 소림의 제자들은 절대로  살려줄 수 없
다! 꼬마 아가씨,  네가 소림의 문하란 걸  알았으니, 우리는 할
수 없이 선간후살(先姦後殺)하겠다! 절대로 살려줄 수 없다!"

 그러자 장무기는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옳거니, 당신들은 원진의 문하구료. 그렇죠?"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네가 어떻게 알았느냐?"

 그러자 조민이 말을 가로챘다.

 "마침 우리는 소림사에 가서 진우량 큰 형님을 만나서 원진대사
님을 소림사의 방장으로 추거(推擧)하려던 참이오."

 "잘됐구료. 아불여래 보도중생(我佛如來 普渡衆生)."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음과 힘을 합해서  좋은 결과를 얻어야
죠."

 그녀가 이같은 말을 하자,  팔 명의 승인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
렸다. 이들 팔 명의  화상은 정말로 원진과 진우량의 일당이었으
며, 모두가 진우량의 소개로 원진의 문하로 들어간 것이다. 방금
그 노승이  <아불여래, 보도중생>이란 말은  그들 일당들이 만날
때 쓰는 암호였다. 만약에 본당의 사람이라면, <화개견불 심즉영
산(花開見佛 心卽靈山)>이라고 대답하면  서로가 알게 되는 것이
다. 조민은 그 노승의  말투에서 원진의 제자란 걸 알았으며, 아
울러 원진이 방장의 자리를 넘보고 있는 속셈을 알게 되었다. 그
러나 그들이 약정한 암호는 어찌 알겠는가!

 키가 작고 뚱뚱한 승인 한 명이 말했다.

 "부대형, 이 계집이 우리 사부님을 소림사의 방장으로 추거한다
는 말을 했는데, 도대체  어디서 이런 소식을 얻었을까요? 이 일
은 중대한 일이라 필히 자세하게 물어봐야 되겠소."

 이 여덟  사람은 비록 삭발하여 중이  됐지만, 상호간에 아직도
큰형님, 둘째형님으로 칭하는 걸  보면 옛날에 녹림의 습관을 탈
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들이 웃음을 터뜨리자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았다. 그러나 몸에 중상을 입은 후라 진기를 끌어모을 수가 없었
다. 이를 악물고 모아 보았으나, 시종 맥락(脈絡)을 따라서 운행
해 주지 않았다. 순간 그  노승은 다섯 손가락을 마치 독수리 발
톱처럼 세워서 조민에게  찍어갔다. 조민은 막아낼 힘이 없었다.
그러자 장무기는 몹시  다급했다. 그로서는 지금이라도 운기조식
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삼  성(成)의 공력을 회복해서
이 팔 명의 악적을 처치할 수 있기만 바랄 뿐이었다.

 그 키가 작고 뚱뚱한  승인은 이 시점에서도 노골적으로 운기조
식하는 걸 보자 화를 내며 호통쳤다.

 "대단한  녀석이군. 노자(老子)가  우선 너부터  하늘로 보내주
마."

 말을 하더니, 오른팔을 쳐들고  부드득! 하며 소리를 내면서 장
무기의 가슴으로 맹렬하게  후려쳤다. 조민은 상황이 위급해지자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그 자는 일권을 후려치더니, 오른팔이 힘
없이 밑으로 떨구면서 두  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노승은 깜짝 놀랐다. 그가  한번 잡아당겨 보았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미 그는 죽어 있었다. 그러자 나머지
승인들은 제각기 격노하며 소리쳤다.

 "이 녀석에게 사법(邪法)이 있다! 사술(邪術)이 있다!"

 그 뚱뚱한 승인은 팔에 운경(運勁)하며 장무기의 흉구에 맹렬하
게 공격한 것이,  바로 담중혈(膽中穴)에 정통으로 맞았다. 장무
기의 구양신공은 적을  공격하기에는 부족했으나, 몸을 보호하기
에는 충분했다. 구양신공은 적이  가격해 온 권경을 되돌려 보냈
을 뿐만 아니라,  상대가 일격을 가해 그로서  그의 체내에 있는
구양진기를 인동(引動)시켰다.  경상가경, 역중관력(勁上加勁 力
中貫力)되어서 그 방승이 즉시 죽게 된 것이다.

 그 노승은 장무기의 흉구에 독침 같은 물건이 있어서 그 방승을
죽게 만들었다면서, 즉시  출장하여 오른팔을 후려쳤다. 우선 그
의 팔을 부러뜨린 다음에  천천히 요리할 속셈이었다. 이 일초의
맹렬한 장력이 장무기의 팔에 부딪쳐 오자, 그의 체내에 있는 구
양진기가 인동하는 바람에 도리어  반격해 갔다. 그러자 그 노승
은 즉시 반격해 오는 힘에 밀려서 마치 화살처럼 창문을 뚫고 밖
에 있는 괴나무에 박혀 머리통이 깨지며 그대로 숨지고 말았다.

 나머지 승인들은 모두 큰  소리로 외치면서 일제히 장무기의 앞
뒤 좌우로 공격을 퍼부었다.  순간 펑펑, 아이구! 푹푹.....! 하
는 소리가 울리면서 모두  차례로 진사(盡死)되었다. 이때 두 사
람은 지칠대로 지쳐서  전혀 움직일 힘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시체더미에 누워서 기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장무기
와 조민은 모두 잠이 들었다.

 두 사람은 중악신묘에서 며칠을 지냈다. 그 동안 편안하게 지냈
으며 더구나 소림사에서 연락하러  온사람도 없었다. 팔 일째가
되자 조민의 상처는 거의  완쾌되었다. 장무기의 체내 진기도 차
츰 관통되면서 사지에 힘이 생겨났다. 만약에 적이 온다 해도 능
히 도망갈 수 있을 정도였다.  다시 십여 일이 지나자 두 사람의
체력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장무기는 즉시 조민과 사손을 구출하
는 방법을 상의하였다. 이윽고 조민이 말했다.

 "우선 소실산  밑으로 내려간 다음에,  기회를 엿봐서 행동하는
게 좋아요."

 장무기와 조민은 절간에서 거주했던 모든 흔적을 조심스럽게 지
우고 나서,  이 십여 리 밖으로  걸어나왔다. 농가에서 옷가지를
구입한 후 후미진 곳으로  가서 갈아입었다. 원래 입었던 옷가지
는 구덩이를 파서 모두  묻어 버리고 천천히 소실산 밑으로 내려
갔다.

                                                    계속 ---


#2918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5장 #2/3             03/21 20:49   412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5 장 단양절(端陽節)의 도사대회(屠獅大會) #2/3

 소림사에서 칠,팔 리쯤 떨어진 곳에 올 때까지 도중에 사중승인
(寺中僧人)을 세 번이나 만났었다. 그러자 조민이 말했다.

 "더 이상 앞으로 가면 안 되겠어요."

 그들은 산길 옆에 있는  초가집 두 채를 발견하였다. 문 앞에는
채소밭이 있었고, 마침 한 농부가 채소에 거름을 주고 있었다.

 "그에게 하룻밤 신세지러 가지요."

 그러자 장무기가 앞으로 다가가서 인사를 하며 말했다.

 "노인장, 물 좀 얻어 마실 수 있습니까?"

 그 농부는 마치 듣지  못한 듯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장무기가
다시 한 번  말했으나 그 농부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갑자기
삐그덕! 하며 소리가 한 번 나더니 문이 열리면서, 한 백발의 할
머니가 걸어나오며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집 양반은 귀머거리에다 벙어리예요. 손님들, 무슨 볼일입
니까?"

 "제 누이가 목이 말라서 물 좀 얻어 마시려 합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두 사람은 할머니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몹시 청
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탁자와 의자도  모두 깨끗이 청소되어
있고 할머니의 옷가지도  몹시 청결했다. 조민은 내심 기뻐했다.
물을 마시고나서 은자를 한 덩이 내놓으며 웃으면서 말했다.

 "할머님, 제 오빠가 절 데리고 외가로 가는 길인데 도중에서 발
목을 겹질려서 걸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밤 할머님 집에서 하룻
밤 신세를 질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하룻밤 묵는 거야 무방하지만  우리에겐 방 한 칸과 침대 하나
밖에 없소. 설사  우리 두 늙은이가 방을  비워 준다 해도, 남녀
두 사람이 한 침상에서 같이 잘 수는 없지 않소? 호호..... 꼬마
아가씨, 이 할머니에게  이실직고 하시지? 댁은 아버지를 등지고
몰래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서 도망나온 것이지?"

 조민은 그녀가 자신의 내막을 말해 버리자, 그만 얼굴이 빨개졌
다. 이  할머니의 날카로운 안력에 깜짝  놀랐다. 더구나 그녀의
말투를 들어보니  보통 농가의 노부(老婦)  같지는 않았다. 새삼
그녀를 몇 번 더 쳐다보게 되었다. 조민의 눈에도 장무기는 그런
데로 보통 농부 같았지만,  자기의 용모나 행동거지는 절대로 농
녀 같지 않았다. 이윽고 맥없이 입을 열었다.

 "할머님께서 알아버렸으니 더 이상 숨기지 않겠어요. 이 오빠는
제가 어려서부터 좋아해 온  사람입니다. 제 아버님은 그의 집안
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혼사를 반대했어요. 다행히 어머님의 도움
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할머님께서는 절대로 이 얘기를
남에게 알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노파는 껄껄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젊었을 때는  풍류인물이었다우. 안심해요. 나의 방을 당
신 부부에게 비워  주겠수. 이곳은 몹시 외진  데라서 당신 집안
사람들이 찾지 못할 거유.  만약에 어떤 자가 당신들에게 난처하
게 굴면 이 노파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우."

 조민은 그녀의 이같은 말을 듣자, 그녀가 무림의 인물이라는 걸
더욱 확신했다. 이곳은 소림사와  무척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녀
와 성곤이 친구인지 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각별히 조심해서 빈
틈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무릎을 꿇고
말했다.

 "할머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아우 오빠, 빨리 와서 할머님
에게 고맙다고 인사하세요."

 그러자 장무기는 다가가서 읍례로 감사를 표했다. 그 노파는 웃
으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이윽고 자기 방을 즉시 비워 주더니,
대청에다 침대 하나를 새로  만들었다. 밑에는 볏짚을 깔고 위에
는 초석을 한 장 덮었다.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장무기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채소에 거름을 뿌렸던 그  농부의 재주가 더욱 대단하던데, 당
신은 눈여겨보지 않았소?"

 "그래요? 난 모르겠는데....."

 "그는 어깨에 분수(糞水)를 지고 아주 느리게 걸었는데도, 분수
두 통이 전혀 흔들림이 없었소.  그건 내력이 깊어야만 할 수 있
는 일이오."

 "당신하고 비교하면 어떨까요?"

 장무기는 웃으며 말했다.

 "시험해 볼까?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소."

 그러면서 조민을 안아들고  어깨에 짊어졌다. 마치 지게를 지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조민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어머! 나를 분통(糞桶)으로 취급하는 거예요?"

 그 노파는 밖에서 그들  두 사람이 장난치며 희희낙락하는 소리
를 듣자 좀전에 약간 의심했던 생각은 모두 사라졌다.

 그날 밤, 장무기는  의자에 누워서 구양진기로 십이 주천(周天)
을 운기시키자  곧바로 잠에 떨어졌다.  그러나 조민은 침대에서
뒤척거리며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새벽 무렵에서야 그녀가 몽롱
하게 잠들려는 찰나  갑자기 발자국소리가 멀리서부터 차츰 가까
이 다가오는 것을 들었다. 매우 신속한 걸음으로 문 앞에 다가왔
다. 조민은 손을 내밀어 장무기를 밀었다. 마침 장무기도 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순간 문 밖에서 맑은 음성으로 말하는 소리가 들
렸다.

 "두(杜)씨 현항려(賢伉儷) 계십니까?  야밤에 불쑥 찾아와서 실
례가 될지 모르 군요."

 잠시 지나자 그 노파가 말했다.

 "청해삼검(靑海三劍)입니까? 우리 부부가 먼 천서(川西)에서 여
기까지 피해 온  것은 당신 옥진관(玉眞觀)이 두려워서 그랬다고
치더라도 우리의 일은 한낱  사소한 마찰에 불과한데, 구태여 이
처럼 핍박할 건 없지 않소?"

 그러자 문 밖에 있던 그 자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이 정녕 겁에 질렸다면, 우리에게 정중하게 절을 세번 하
시오. 그러면 이 옥진관은 전에 있었던 허물을 모두 없었던 일로
하겠소."

 순간 삐그덕! 하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이윽고 그 노파
가 말했다.

 "당신들의 소식통에 정말 놀랐소.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이때는 만월(滿月)이라  달빛이 환하게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장무기와 조민은 벽  틈으로 밖을 내다보니, 문  밖에는 세 명의
황관도인(黃冠道人)이 서 있었다. 중간에 있는 짧은 수염이 달린
자가 말했다.

 "두 분께서는 절을 하여  사죄할 겁니까? 아니면 쌍구 연자창으
로 사생결단을 낼 겁니까?"

 그 노파가 미처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 벙어리 노인은 이미 큰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더니 두  손을 양허리에 짚고 무섭게 세 도
인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노파도 따라나와서 남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 짧은 수염의 도인이 말했다.

 "두선생은 어찌 한 마디도  하지않습니까? 이 청해삼검하고 말
도 하기 싫은 겁니까?"

 "제 부군은 귀머거리라서 세 분의 말을 듣지 못합니다."

 "두선생은 바람소리를 듣고 무기를 식별할 수 있는 기술로 무림
에 유명한데, 어찌 귀머거리가 되었소? 정말 애석하게 되었소."

 수염이 짧은 도인의 옆에 있던 뚱뚱한 도인이 장검을 뽑아 들고
말했다.

 "두백당(杜百當), 역삼랑(易三浪), 그대들은  어찌 병기를 사용
하지 않는 겁니까?"

 그 노파 역삼랑이 말했다.

 "마도장(馬道長), 당신은 여전히  성격이 급하시군요. 두 분 소
도장(邵道長)께서도 몇  년 사이에  머리가 많이  하얗게 시셨구
료."

 순간 갑자기 양손을  들어올리자, 파란 빛이 번뜩거리면서 양손
에 각각 반 치 정도  길이의 단도가 세 자루씩 있었다. 농아노인
두백당도 덩달아 손을 쳐들자, 역시 같은 단도 여섯 자루가 쌍장
에 나눠져 있었다. 이윽고 그의 왼손에 있던 칼이 오른손으로 굴
러오고, 오른손에 있던 칼이 왼손으로 굴러가면서 마치 손가락을
교차하는 것처럼 무척 숙달되고 정확했다.

 세 도인은 모두 놀랐다.  그들은 무림에서 이러한 병기를 본 일
이 전혀 없었다. 크기와 모양은 비도와 비슷했지만, 사용하는 방
법이 전혀 달랐다. 두백당은  원래 쌍구로 천서에서 위력을 떨쳤
고, 그의 아내인 역삼랑은 연자창을 즐겨 사용했다. 그런데 지금
은 부부 두 사람이 모두 수십 년 동안 사용했던 병기를 사용하지
않고 이 열 두 자루 단도를 사용하는 걸 보면, 필시 매우 매섭고
또 몹시 괴이한 초수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그 뚱뚱한 마법통이 장검을 한 번 휘두르며 숙연하게 읊
었다.

 "삼재검진천지인(三才劍陣天地人)!"

 그러자 수염이 짧은 도인 소학이 말을 이었다.

 "전축성치출옥진(專逐星馳出玉陣)!"

 순간 도인 세 명은 걸음을 옮기면서 두씨 이로를 중간에 몰아넣
고 포위했다. 그러자  두씨 부부는 서로 등을  맞대고 네 손에는
은빛을 반짝거리면서  두 자루 단도를  교환하며 춤추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양손에 있는  단도가 서로 돌아가며 왔다갔다 할 뿐만
아니라, 두백당의 단도가 역삼랑의 손으로 옮겨가고 역삼랑의 단
도가 두백당의 손으로 옮겨졌다. 그러자 조민이 이상하다는 듯이
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그들이 뭐하고 있는 겁니까?"

 장무기는 이마를 찌푸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더 쳐다보더
니 갑자기 말했다.

 "아, 알겠소! 그는 내 의부의 사자후(獅子吼)를 겁내고 있는 거
라오."

 "사자후라뇨?"

 그러자 장무기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느닷없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흥! 저따위 무공을 믿고 도사복호(屠獅伏虎)하려 들다니!"

 조민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혼자서 중얼거리니깐 답답해 죽겠어요."

 그러자 장무기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저 다섯 놈은 모두 내 의부의 원수들이오. 저 늙은이는 의부의
사자후가 무서워서 일부러 자기 귀를 멀게 만든 것이오....."

 순간 탕탕.....!  소리가 들리면서 다섯  사람은 접전에 들어갔
다.

 청해삼검이 연거푸 다섯  차례를 공격했으나, 두씨 부부가 모두
막아냈다. 두 사람 수중에 열 두 자루 단도는 돌아가며 왔다갔다
했다. 달빛 아래서 삼도광환(三道光環)을 연결하더니, 몸 부위를
둘러싸면서 매우 엄밀하게 수비했다. 청해삼검은 오랫 동안 공격
해도 별 성과를 얻지 못하자 즉시 수비태세로 돌렸다. 그러자 두
백당은 몸을 비비고 들어가서 단도로 그 왜소한 도인의 하복부로
찔러갔다. 그러자 마법통과소학은 장검으로 그의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모두 역삼랑의  단두에 저지당했다. 그제서야 그들 부부
가 연마한 도법이 일공일수(一攻一守)  라는 걸 알았다. 즉 공격
자는 공격만 전담하는 것이다.  소연은 그의 단도가 다가오자 뒤
로 물러서면서 피해 버렸다.  두백당은 즉시 그의 품안으로 덮쳐
가면서 그의 급소를 노리자 점점 더 위험하게 되었다. 그러자 소
학이 대갈일성하며 마법통과 옆에서 파고들며 일도(一道)의 검망
을 조성하여 두백당을 세 치 밖으로 밀어냈다. 세 검이 연방하게
되자 실로 물샐 틈이 없었다.

 장무기는 다시 살며시 냉소하며 조민의 귀에 대고 말했다.

 "저 두 가지 도법과  검법은 모두 우리 의부를 상대하기 위해서
연마한 것이오. 그들은 수비가  많은데 비해서 공격은 아주 적으
며, 게다가 수비를 오래하다가  다시 공격하게 되니 그들이 다시
하루 밤낮을 더 싸우더라도 승부를 가리지 못할 것이오."

 과연 두백당이 여러 번 공격했으나, 파고들지 못하자 다시 수비
태세로 돌렸다.

 조민이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금모사왕은 무공이 탁월한데, 저 다섯 녀석은 수비만 의지하면
서 어떻게 그를 이길 수 있죠?"

 이때 마법통이 갑자기 소리쳤다.

 "멈추시오!"

 그러자 모두 뒤로 물러섰다. 마법통이 말했다.

 "현항려가 연마한 도법은 도사(屠獅)에게 사용할 겁니까?"

 그러자 역삼랑은 놀라워하며 말했다.

 "당신의 안력은 정말 매섭군요."

 "현항려는 사손에게  원한이 있기에 원수를  꼭 갚아야 합니다.
이미 그 작자가 소림사에 있다는 걸 알아냈는데, 뭣 때문에 주저
하고 있는 겁니까?"

 역삼랑은 곁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건 우리 부부의 일이오. 도장께서 심려할 것 없습니다."

 "옥진관과 현 부부지간에  있었던 마찰은 역삼랑의 말대로 사소
한 일에 불과한데, 구태여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가 있겠습
니까? 차라리 서로  친구가 되어서 같이 사손을  찾는 게 어떠한
지.....?"

 "옥진관도 사손과 마찰이 있었소?"

 "그런 건 없지만..... 흐흐!"

 "사손과 아무런 원한도  없으면서 어찌 고심고예(苦心苦詣)하게
그 검법을 연마했습니까? 우리  쌍방의 초수는 모두 칠상권을 극
제(剋制)하기 위한 겁니다."

 "역삼랑의 안력은 아주 훌륭합니다. 옥진관은 단지 도룡도를 한
번 구경하고 싶은 것뿐이오."

 역삼랑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윽고 손가락으로 두백당의 장심
(掌心)에 재빨리 몇 자 적었다. 두백당도 그녀의 장심에 글을 썼
다. 부부들은 손가락을 혀를 대신해서 잠시 대화를 나눴다. 역삼
랑이 말했다.

 "우리 부부는 오직 복수만 할 뿐, 도룡도에는 관심이 없소!"

 마법통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것 참 잘되었군요. 우리 사람 다섯이 연수(聯手)해서 소림에
쳐들어갑시다. 현 부부는 복수를  하고 옥진관은 보도 한 자루를
얻게 되니, 쌍방이 각각 소원 성취하면 화기를 상하지 않을 것이
오."

 이윽고 다섯  사람은 동맹을 맺고 맹세하였다.  두씨 부부는 세
도인을 안으로 모셔서 복수와 탈도(奪刀)의 계획을 논의했다.

 청해삼검은 집 안으로  들어가서 좌정했다. 그러나 방문이 굳게
닫혀 있는 걸  보자 몇 번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역삼랑이
웃으며 말했다.

 "세 분은 신경쓸  것 없습니다. 저 안에는  대도에서 온 한쌍의
젊은 부부가 있는데, 전혀 무공을 할 줄 모릅니다."

 그러자 마법통이 말했다.

 "제가 현 부부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도모한 일이  실로 엄청난 일이라 자칫  잘못하면 천하 호걸들의
지탄을 받게 됩니다."

 역삼랑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반나절이나 접전을 했는데,  그들 두 식구는 아직도 송
장처럼 자고 있습니다. 마도장께서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면
직접 보시는 게 좋겠군요."

 말을 하면서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
다.

 장무기는 마침 이 다섯  사람에게서 의부를 찾아서 구출하는 단
서를 얻어낼 참이라, 당분간  그들을 처치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
다. 그래서 즉시 조민을 안아들고 옷을 입은 채 침대에 올라가서
자고 있는 척했다.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신발만 벗고 솜이불을
몸에다 덮었다.  이윽고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빗장은 소학의
내경에 의해서 진단되었다. 역삼랑이 촛불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
자 청해삼검도 따라서 들어갔다.

 장무기는 촛불의 불빛을 보자  잠에 취해 있는 눈으로 역삼랑을
바라보았다. 얼굴엔 온통  망연한 빛이었다. 마법통은 검을 뽑아
그의 목으로 찔러갔다.  몹시 매섭고도 신속한 초수였다. 그러자
장무기는 아! 하고 비명을  지르며 상반신을 앞으로 당기면서 오
히려 검끝에다 목을 갖다 댔다. 순간 마법통은 검을 거두며 역삼
랑에게 말했다.

 "역삼랑의 말이 옳았소. 자, 나갑시다."

 다섯 사람은 방문을 닫고 다시 대청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마법
통이 말했다.

 "사손이 소림사에 있다는 게 틀림없습니까?"

 "그렇소. 소림사에는 이미  영웅첩(英雄帖)을 밖으로 살포했소.
그 영웅첩에 의하면 단양절(端陽節)에 소림사에서 도사대회(屠獅
大會)를 개최하기로 되어 있소. 만약에 그들이 사손을 잡지 못했
다면, 온 천하의 영웅들 면전에서 얼마나 큰 창피를 당하겠소?"

 그러자 마법통이 다시 말했다.

 "소림파의 공견신승은 사손의  권하에 죽어서 소림의 승속 제자
들은 당연히 복수를 해야  되겠군. 그러니 현항려는 단양절에 소
림사로 들어가서  가만히 원수가 죽어가는 걸  보기만 하면 됩니
다. 전혀 힘들이지 않고  피맺힌 원한을 갚게 되는 것이오. 그런
데 두 노선생님은 뭣 때문에  귀를 못 쓰게 됐으며, 또 소림파를
자진해서 적대 관계로 만들려 했습니까?"

 역삼랑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부군의 귀가 먼 것은  이미 오년 전의 일입니다. 우리는 그
사손이란 악적을 만나자마자 이  노파가 제일 먼저 그의 두 귀를
찔러서 멀게  할 것이오. 우리  부부는 그와 동귀여진(同歸旅盡)
되기만 바랄 뿐이오. 흐흐..... 제 사랑하는 아들이 그에게 살해
된 후부터 우리 노부부는  이승과 아무런 미련도 없습니다. 소림
파에게 잘못 보여도 좋습니다.  최악의 경우는 우리 부부가 죽기
밖에 더하겠습니까?"

 장무기는 그녀가 말하는 걸 듣자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의부가 옛날에 성곤한테  당한 원기(怨氣)를 너무나 많은 무고
한 사람들에게 발산했구나. 이  두씨 부부는 그다지 나쁜 사람같
이 보이지 않는데, 다만  사랑하는 아들의 참사에 상심해서 의부
를 죽이고 아들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원한 관계는 절
대로 조처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의부를 구출하면 멀리 피하는
길밖에 없다. 그래야만 죄악을 더 짓지 않는 길이다.'

 이때 옆 방에  있는 다섯 사람에게서 전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벽 틈으로  내다보니, 두씨 부부와 마법통 세 사
람은 손가락으로 찻 물을 찍어서 탁자 위에 글을 쓰고 있었다.

 '이 다섯 사람은 정말 조심하는군. 비록 나와 민매가 강호의 인
물이 아니라는 걸 믿고 있어도, 여전히 기밀이 누설되는 걸 두려
워한다. 아아! 내 의부는 강호에 너무나 많은 원가(怨家)가 있으
며 또 도룡도를 노리는 사람은 더욱 많다. 그러니 소림사에서 조
금만 소홀해도 단양절이 되기도  전에 화를 당할지 모른다. 아무
래도 하루속히 의부를 구출하는 게 상책이다.'

 이 다섯 사람은  손가락으로 글을 써 가며  계속 밀담을 나누었
다. 장무기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고 의자에서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보니,  청해삼검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장무기가
역삼랑에게 말했다.

 "할머님, 어젯밤에 세 분 도야께서 손에 반짝이는 칼을 들었던
데 왜 왔습니까? 전 처음엔 우리를 잡으러 왔는 줄 알고 몹시 놀
랐습니다. 나중에서야 아닌 줄 알았습니다."

                                                    계속 ---


#2919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5장 #3/3             03/21 20:51   400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5 장 단양절(端陽節)의 도사대회(屠獅大會) #3/3

 역삼랑은 그가  장검을 칼이라고 부르는 걸  듣자, 속으로 매우
우스웠다. 이윽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들은 길을 잘못  찾은 것이우. 차 한  잔 마시고 바로 갔수.
점심 먹고 나서 우리는 나무 세 짐을 소림사에 갖고 가서 팔려고
하는데, 젊은이가 한 짐 좀  거들어 줄 수 있겠수? 절에 있는 중
이 물으면 우리 아들이라고  말하겠수. 이건 젊은이 도움을 얻으
려는 것이 아니고 절에서  의심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유. 색시
는 꽃처럼 예쁜 위인이라 밖으로 나가면 안 되우."

 비록 듣기에는 그녀가  장무기와 상의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명령을 내려서  그가 거절하지 못하게  했다. 장무기도 듣자마자
이미 알아차렸다.

 "할머님이 말한 대로 하겠습니다. 다만 우리 두 식구가 머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사방으로 도망다니며 하
루라도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오후가 되자, 장무기는 두씨  부부를 따라서 각자 나무 한 짐을
지고 소림사로  갔다. 그는 머리에  죽립(竹笠)을 썼고 허리춤엔
짧은 도끼를 찼고 맨발에 짚신을  신었다. 세 사람 중에 유독 그
가 짊어진 나무가 제일 많았다.  조민은 문 밖에 서서 미소를 지
으며 그를 전송했다.

 두씨 부부는 일부러  아주 느리게 걸어가면서 숨을 헐떡거렸다.
소림사의 밖에 있는 산정에 오자 나뭇단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했
다. 산정에는 중 두 명이 앉아서 잡담을 하고 있었다. 세 사람을
보았는데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역삼랑은 머리를 싸맨 거칠은 헝겊을 풀어서 땀을 닦았다. 다시
손을 내밀어서 장무기의 땀을 닦아 주며 말했다.

 "얘야, 힘들지?"

 "전 괜찮습니다. 어머님이 힘드시겠어요?"

 그는 어머니라고 부르자,  문득 자신의 모친이 생각나서 가슴이
몹시 아팠다. 역삼랑도 그가  어머니라고 부르자 그만 눈물을 흘
리고 말았다. 얼른 머리띠로  땀을 닦는 척하면서 사실은 눈물을
닦고 있었다.

 두백당은 일어나서 나뭇짐을 지고 왼손을 한번 휘두르더니 산정
밖으로 나갔다. 비록 그는 두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해도 늙은 마
누라가 죽은 아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승인에게 빈틈이 노출될까 봐 얼른 자리를 떠난 것이다.

 장무기는 역삼랑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나뭇짐에서 두 묶음을 꺼
내어 자기의 짐더미에 올려놓고 말했다.

 "어머님, 가시죠."

 역삼랑은 그가 이처럼 다정한 걸 보자 잠시 생각했다.

 '내 아들이 살아 있었다면 이 소년보다 나이가 더 많을 것이다.
난 손자도 몇 안았을 것이다.'

 그녀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장무기가 짐을 지고 산정 밖
으로 나가는 걸 보자  그제서야 따라서 나갔다. 심정이 격동되어
서 걸음을 약간 산만하였다.  장무기는 뒤로 돌아서 부축해 주며
생각했다.

 '만약 우리 어머님이 아직도  살아 계셨다면, 내가 이렇게 부축
해서.....'

 한 승인이 말했다.

 "이 소년은 효심이 지극하군. 정말 보기 드물다."

 다른 승인이 말했다.

 "할머님, 이 장작은 절 안에 갖고 가서 파실 겁니까? 요 며칠은
방장께서 법지(法旨)를  내려서 외인의  출입을 못하도록 했습니
다. 들어가지 마십시오."

 역삼랑은 몹시 실망했다.

 '과연 소림사의 방어 태세가 엄밀하구나. 정말 들어가기 힘들게
됐구나.'

 두백당은 수 장을 걸어갔는데, 두 사람이 즉시 따라오지 않는걸
보자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다른 한 승인이 말했다.

 "이 시골 사람  일가는 모자자효(母慈子孝)하니, 우리가 편리를
봐 줍시다. 사제, 네가 그들을 데리고 후문으로 들어가서 향적주
(香積廚)로 가라. 감사가 만약에  알게 되면, 자주 오는 장작 장
수라고 말해라. 그럼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네. 감사(監査)가 외인 출입을  못하게 하는 건 잡인들을 방비
하는 겁니다. 이런 충실한 시골 사람들의 생계를 구태여 끊을 필
요가 없죠."

 이윽고 두씨 부부와 장무기를  데리고 후문으로 돌아가서 절 안
으로 들어갔다. 세 짐의 장작을 채방(菜房)으로 갖고 가자, 향적
주를 관리하는 승인이 장작 값을 계산해 주었다.

 역삼랑이 말했다.

 "우리에겐 아주 좋은 배추가  있습니다. 내가 아우를 시켜서 내
일 몇 근 갖다 드리겠소. 그건 그냥 드리는 겁니다."

 그녀를 데려온 승인이 웃으며 말했다.

 "내일부터는 다시 올 수 없습니다. 감사가 알게 되면 정말 큰일
입니다."

 향적주를 관리하는  승인이 장무기를 몇  번 쳐다보더니 갑자기
말했다.

 "단양절 전후에 절엔 수천 명의 손님이 찾아올 겁니다. 물을 긷
고 장작을 쪼개며 모든 일이  분주할 겁니다. 내가 보기엔 이 젊
은 친구가 몹시 건장한 것 같은데, 두 달만 도와 줄 수 있겠습니
까? 한 달에 다섯 전씩 월급을 주면 어떠하겠소?"

 역삼랑은 대단히 기뻐하며 얼른 말했다.

 "그것 참  잘 되었군요. 아들도 집에서  별다른 할일이 없는데,
절에서 사부님들의 심부름을 하면서 몇 푼 벌어들이면 정말 좋겠
군요."

 장무기는 곤란한 입장이 되었다.

 '소림사에서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데, 두 달 동안 있게
되면 그들에게 발각될 것이다.'

 "어머님, 제 색시는....."

 역삼랑은이처럼 좋은 기회가 없다는 생각을 하자 얼른 말했다.

 "네 색시는 집에 잘 있을 거다. 넌 이 애미가 그 애를 서운하게
대할까 봐 그러느냐? 넌 여기에 있으면서 사부님들 말씀을 잘 들
어라. 절대로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된다. 애미와 색시는 며칠 후
에 널 보러 오마."

 말을 하면서 그의 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눈에는 자상하고 사랑
하는 빛이 충만되어 있었다.

 그 향적주를 관리하는 승인은  단양대회의 일 때문에 여러날 골
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는 장무기가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보여서
간곡히 그에게 권하였다. 장무기는 잠시 생각을 했다.

 '내가 낮엔 주방에만 있으면  고수들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밤
엔 기회를 봐서 의부의 행방을 알아보는 것도 괜찮겠구나.'

 그러나 일부러 내키지 않는 척했다. 나중에 그를 데려온 승인이
옆에서 재차 권하자, 그제서야 억지로 승낙하며 말했다.

 "사부님, 될 수  있으면 한 달에 여섯  전 은자를 주세요. 다섯
전은 제 어머님께 드리고 일전은 제 색시에게....."

 그러자 향적주를 관리하는 승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좋다. 여섯 전을 주마!"

 역삼랑은 다시 몇 마디 당부하고 나서 두백당과 함께 천천히 하
산했다. 장무기는 쫓아가서 말했다.

 "어머님, 제 색시를 부탁합니다."

 "알았다. 안심해라."

 장무기는 주방에서 장작을 쪼개고, 석탄을 운반하고, 불을 지피
고, 물을 기르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는 석탄을 운반할 때 일
부러 얼굴을  새까맣게 칠했다. 게다가  머리까지 산발해서 실로
아무도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 밤이 되자 그는 화공(火工)들과
함께 향적주의 작은  방에서 잤다. 그는 소림사가 와룡장호(臥龍
藏虎)한 걸 알고 더구나 화공 중에서도 간간이 절기를 지니고 있
는 자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각별히 조심을 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렇게 칠,팔  일을 지내는 동안 역삼랑은  조민을 데리고 그를
두 번 찾아왔다. 그는 아침부터 밤까지 어떠한 거칠은 일도 부지
런하게 해서 향적주를 관리하는 승인이 몹시 즐거워했다. 게다가
다른 화공들도  그와 매우 화목하게 지냈다.  그는 감히 탐문(探
問)하지 못하고 다만 귀를  바짝 세워서 다른 사람들의 잡담에서
단서를 찾고 있었다.

 구 일째 되던 날 밤, 장무기는 잠결에 반 리(里)쯤 떨어진 곳에
서 호갈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래서 살며시 일어나 즉
시 경공을 전개하여 소리를 따라 달려갔다. 소리가 나는 걸 들어
보면 절의 왼쪽에  있는 숲 속이었다. 이윽고  몸을 솟구쳐서 한
그루 큰 나무 위로 올라갔다.  나무 뒤와 풀속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그제서야 이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날아가며 차츰 가
까이 다가갔다.

 이때 숲 속에선 이미 병기가 교차되면서 여러 사람이 접전을 벌
이고 있었다. 그는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도광(刀光)이 종횡하
고 검영(劍影)이  번뜩거리면서, 여섯 사람이  두 군데로 나눠서
서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검을 사용하는 셋은 바로 청해삼
검이었다. 그들은 정반오행의 가삼재진(假三才陣)을 포진하여 매
우 긴밀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옆에서 공격하는 세 명의 승인은
각각 계도를 사용해서 파진하여 곧바로 공격했다. 이,삼 십 초가
지나자 푹! 하는  소리가 나면서 청해삼검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맞고 쓰러졌다. 가삼재진이 돌파되자  나머지 두 사람은 더욱 적
수가 못 됐다. 다시 몇 초가 지나자 한 사람이 외마디 비명을 지
르면서 칼에 맞고 죽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뚱뚱하고 키가 작
은 마법통이였다. 나머지  한 사람은 오른팔에 부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그러자 한 승인이 조그만 소리
로 호통쳤다.

 "잠깐 멈춰라!"

 세 자루 계도는 그를 겹겹으로 포위할 뿐 공격을 하지 않았다.

 "너희 청해옥진관과  우리 소림파는 전혀  원한 관계가 없는데,
뭣 때문에 야밤을 틈타서 기습해 온 것이냐?"

 청해삼검 중에 남은 한 사람은 소학이었다.

 "우리 사형제가 너희들에게  패전(敗戰)한 건 오직 우리들이 배
운 무예가 뛰어나지 못한 것이니,  더 이상무슨 할 말이 있겠느
냐?"

 "너희들은 사손 때문에 온  것이냐? 아니면 도룡도를 얻을 생각
으로 온 것이냐? 흐흐.....! 난 사손이 옥진관에 있는 사람을 죽
였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으니  필시 보도 때문에 온 게로군. 네
놈들은 이따위  재주로 소림사를 넘보려  하느냐? 소림사는 천여
년 동안 무림을  이끌어 왔는데, 이처럼 과소  평가하는 건 정말
뜻밖이다."

 소학은 그가 한참  얘기하는 걸 틈타서 일검을  곧바로 찔러 갔
다. 그 승인은 황급히 피했으나  결국 한 발이 늦어서 왼쪽 어깨
를 찔리고 말았다.그러자 옆에 있던 양승이 일제히 쌍도를 후려
치자 소학은 즉시 목과 몸통이 두 동강으로 변했다.

 세 승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청해삼검의 시신을 들고 재빨리
절 안으로  달려갔다. 장무기가 막  뒤따라서 결과를 구경하려는
데, 갑자기 우측 전방의  풀밭에서 살며시 호흡하는 소리가 들렸
다. 그러더니 재빨리 조용히 엎드려서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지
나자 풀밭에서 박수를 두  번 살짝 치더니 멀리서도 박수를 치며
응수했다. 이윽고 전후좌우에서 여섯명 승인이 일어섰다. 손에는
장창과 도검을  각각 들고 부채꼴로 흩어져서  절 안으로 돌아갔
다.

 장무기는 그 여섯  승인이 멀리 가 버리자  작은 방으로 돌아왔
다. 같이 자고 있던 화공들은 여전히 갚은 잠에 빠져 있었다.

 사흘이 또 지났다. 이날 밤은 천둥번개가 치며 큰 비가 내렸다.
장무기는 즉시 기뻐했다.

 "하늘이 날 돕는군."

 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렸고 사방은  칠흑같이 캄캄했다. 그는
재빠르게 앞에 있는 대전으로 다가갔다.

 '나한당, 달마당, 반약원, 방장정사 네 곳은 소림사의 으뜸가는
근본 요지다. 내가 꼭 한 번 가봐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소림사에는 집채가  겹겹으로 되어 있어서. 도대체 어디
가 나한당이며 어디가 반약원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요리
조리 피하며  발길따라 걸어가자 한  대나무밭까지 오게 되었다.
앞에 작은 집이 한  칸 있었고,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나왔다. 이
때 그의 온몸은 벌써 젖어  있었다. 그는 살며시 창문 밑으로 다
가가자 안에서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방장 공문대
사의 음성이었다.

 공문대사가 말했다.

 "금모사왕 때문에 소림파는 한 달 동안 이미 이십 삼 명이 살해
됐다. 죄악을 많이 쌓게 하는 건 절대로 우리 부처님의 자비로운
뜻이 아니다. 명교의 광명좌사  양소, 우사 범요, 백미응왕 은천
정, 청익복왕 위일소는 차례로  사자를 파견해서 사손을 놓아 주
라고 나에게 빌었지만....."

 장무기는 이곳까지 듣자 내심 기뻐하면서도 위안이 되었다.

 '내 외할아버지와 양좌사 등이 이미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왔
었구나.'

 공문은 다시 말을 이었다.

 "비록 본사가 여러번  미뤄왔지만 명교가 이대로 호락호락 물러
나겠느냐? 그  장교주는 무공이  출신입화(出神入化)하며 끝까지
나타나지않는 걸 보면 필시 뒤에서 계략을 꾸미고 있을 것이다.
나와 공지 사제 등은 그의 도움을 받았으니 은정을 빚지고 있다.
만약에 그가 직접 와서 빌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느냐? 이
일은 실로 어렵구나.  사제, 사질, 너희 두  사람에게 무슨 좋은
생각이 없느냐?"

 창로음침(蒼老陰沈)한 음성이 살짝  기침을 한 번 했다. 장무기
는 그 소리를 듣자 마음이 크게 진동되었다. 바로 원진으로 이름
을 바꾼 성곤이란 걸 금방  알았다. 장무기는 한 번도 그와 대면
하여 대화를 나눈 적이  없지만, 그날 광명정에서 자루를 사이에
두고 그가 옛일을  말하는 걸 들었고, 암석을  사이에 두고 그가
호통치는 소리를 들었었다. 그러니  그의 음성은 몹시 귀에 익었
다.

 "사손은 태사숙 세 분께서  지키고 계시니 절대로 걱정할 것 없
습니다. 이번 영웅대회는 우리 소림파 천백 년의 흥망이 걸려 있
습니다. 마교의 사소한  은원들은 방장사숙님께선 걱정하지 않아
도 됩니다. 다구나 만안사에 있었던 일은 마교가 몰래 조정과 내
통하여 육대문파들을  괴롭힌 것입니다.  방장사숙께서는 모르고
계셨단 말입니까?"

 공문은 이상하다는듯이 되물었다.

 "어째서 명교가 조정과 내통하였지?"

 "명교의 장교주는 원래 아미파의 장문인 주 낭자와 혼인을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혼인하던 날  여양왕의 군주가 갑자기 그 장가
란 녀석을 데리고 떠나 버렸습니다. 이 일은 강호를 진동했으니,
방장사숙께서도 들었을 겁니다."

 "그렇다. 그 일은 들었다."

 "그 군주의 수하에는 아주  유능한 부하가 하나 있는데, 이름이
고두타라 합니다. 두 분 사숙님도 만안사에서 본 적이 있을 거라
고 생각됩니다."

 공지는 만안사의 고탑(高塔)에서 조민에게는 무공을 선보이라고
핍박당하였고, 고두타에게는 몹시  수모를 당했다. 그 당시는 내
력을 전부 상실하여 전혀  반항하지 못했다. 지금도 아직 잔분이
남아 있었다.

 "흥, 이번 큰일을  치루고 나면 난 다시  대도로 가서 고두타를
찾아 겨뤄 보겠다."

 "두 분 사숙님께선 그 고두타가 누군지 알고 계십니까?"

 "고두타는 아는 게 몹시 광범하다. 마치 각파의 무공을 모두 섭
렵한 것 같아서 그의 문도를 알 수 없었다."

 "고두타는 바로 마교의 광명우사 범요입니다."

 그러자 공문과 공지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정말이냐?"

 몹시 경악하는 듯했다.

 "원진이 감히 사숙님을  기만하겠습니까? 단양절에 그가 만약에
본사에 온다면, 두 분 사숙님은 즉시 알게 될 겁니다."

 그러자 공지는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장무기와 그 군주는  확실히 몰래 내통한 것이다. 군
주로 하여금 육대문파의 수령  인물을 잡고, 다시 장무기로 하여
금 사람을 구해서 인정을 베푸는 것이군."

 "십중팔구는 그럴 겁니다."

 그러나 공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그 장교주는  충후협의한 게 그런 사람 같지 않
았다. 우리는 좋은 사람을 오해하면 안 된다."

 "방장사숙님, 옛말에도 사람의 얼굴은  알 수 있어도 마음은 알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사손은 장무기의 의부이며 또 마교
의 사대호교법왕 중의 한  사람입니다. 마교는 필시 만사를 제쳐
놓고 구하려 할 겁니다. 도사대회가 열리게 되면 모든 일은 자연
히 알게 됩니다."

 이윽고 세  사람은 어떻게 손님을 접대할  것이며, 어떻게 적이
사손을 강탈하는 걸  막을 것이며, 또 각  문파에 얼마나 호수가
있는가를 계산했다. 원진의  주장은 각파를 이간질시켜서 상호간
에 싸움을 붙이자는 것이었다.  소림파는 그들 중 몇몇이 패배하
고 또 부상을 입게 되면,  그 때 나가서 도룡도를 장관하고 사손
을 죽여서  공견에게 제물로 바치자고  의논했다. 그러나 공문은
정중하기를 주장하며,  또 인명을 많이 상하는  걸 원치 않으며,
또 마치 명교를 감히 얕잡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공지는 두 사람의 주장을 모두 찬성하며 말했다.

 "제일 중요한 일은 아무래도 사손이 단양절 전에 도룡도가 있는
곳을 말하게끔  만드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도사대회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도리어 본파의 위명만 꺾이게 됩니다."

 "사제의 말이  틀림없다. 우리는 필히  대회 중에 양도입위해야
된다. 이 무림지존의 도룡보도가 이미 본파로 돌아와서 보관하게
되었으니, 그 땐 본파가  천하를 호령하면 어느 누구도 복종하게
될 것이다."

 "좋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원진, 네가  다시 사손에게 말해서
보도를 내놓으라고 타일러 보아라. 만약에 내놓는다면 우리는 그
의 목숨을 살려 줄 것이다."

 "네, 두 분 사숙님의 분부를 명심하겠습니다."

 발자국소리가 가볍게 나면서 원진이 밖으로 걸어나갔다.

 장무기는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이 세 분 소림승은 무공이 아
주 고강해서  약간의 소리가 나기만 하면  즉시 그들에게 발각된
다. 만약에 세 사람이  일제히 출수하면 자기에겐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 가서 의부를 구하려면 실로 천난만난하게 될 것
이다. 이윽고 호흡을 중단하고 꼼짝하지 않았다.

 원진의 마르고 긴  신형(身形)이 북쪽으로 걸어갔다. 수중에 들
고 있는 기름종이 우산은  빗방울을 맞자 요란하게 소리가 났다.
장무기는 그가 십여 장 밖으로 걸어가는 걸 보자, 그제서야 살며
시 걸음을 옮기며 뒤를 쫓아갔다.

                                   ----- 제 6권 5장 끝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6장 #1/5             03/21 20:52   388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6 장 세 고승(高僧)과 사손의 행방(行方) #1/5

 소낙비가 내리자 사원  지붕과 각처의 순찰은 한층 허술해졌다.
장무기는 담 밑이나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그들을 미행했다.

 원진이 사원 뒷담을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의부께서 사원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그래서 사원
안에서 아무런 행적을 찾아낼 수 없었군.'

 장무기는 대담하게 담을 넘지  못하고 담 밑으로 천천히 숨어서
걷다가 순찰하는  스님이 지나가자 그제서야  담을 뛰어 넘었다.
원진은 사원에서 백  장이나 떨어진 곳에서 왼쪽으로 꺾어지더니
한 작은 산봉우리 밑에 오자, 재빨리 산 위로 오르고 있었다. 원
진의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동작은 민첩
했다. 그가 들고 있는 우산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유유
히 뛰어올라가고 있었다.

 장무기가 재빨리 산 밑까지 달려가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길 옆에서 흰  빛이 번쩍이며 누군가 병기를 들고 매복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재빨리 몸을 숨기고 잠시 지나자 나무 숲에
서 네 사람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앞에 셋, 뒤에 한
명이 줄지어 산 위로 달리는 것이었다.

 산 위에는 집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다만 소나무 몇 그루만 보
였다. 장무기는 사손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몰라, 사방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도 산 위로 향했다.

 앞에 가는 네 명의  경공은 대단했지만 장무기는 발걸음을 재촉
하여, 잠깐 사이에 그들과의 거리는 불과 이십여 장밖에 되지 않
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는 희미하게 넷 가운데에서 한 사람은 여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 남자는 평범한 차림새였다.

 '아마 저 네 사람도필시 의부님을 괴롭히러 온 자들일 것이다.
저들이 먼저 원진과 지칠  대로 싸울 때까지 내가 끼여들 필요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네  사람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지고 있
었다.

 순간 장무기는 그들 중 두 명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앗! 저 둘은 곤륜파의 하태충, 반숙한 부부가 아닌가!'

 그러자 갑자기 원진이 긴 휘파람을 불며 갑자기 방향을 바꿔 산
밑으로 쏜살같이 뛰어내려오는 것이었다.

 장무기는 재빨리 길  옆 풀 숲에 몸을  낮추고 기어서 왼쪽으로
몇 장 이동하자, 병기가 서로 부딪치는소리가 들려왔다. 원진과
그들이 벌써  싸움이 붙은 것이었다.  병기가 맞부딪치는 소리를
들어 보니, 두 사람이 원진을 상대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네 사람이 아니라면,  분명 나머지 두 명은 의부님을 찾
으려 산 위로 올라갔을 것이다.'

 장무기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풀 숲 속에서  산 위로 쏜살같이
올라갔다. 산 위에 오르자  허허 벌판인 평지에는 아무것도 없었
고, 다만 세  그루의 높은 소나무가 품(品)자  모양으로 서 있었
다. 나뭇 가지는 하늘을 향해 찌를 듯 솟아있었고, 그 모양은 꼭
용이 승천하는 모양처럼 보였다.

 '아니, 그렇다면 의부님께서  여기에 감금당하지 않았다는 것인
가?'

 그러자 오른쪽  끝의 풀 숲에서 바스락!  하고 사람이 기어가는
소리가 들리며, 뒤따라 반숙한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빨리 행동을 해요. 두 사제가  그 늙은 소림 승려와 오래 끌지
못할 거예요!"

 "알았소!"

 하태충의 대답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두 사람은 일어나 세 그루
의 소나무를 향해 덮치는 것이었다.

 장무기는 혹시나 사손이 이  근처에 있을까 하고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풀 숲에  숨어 앞으로 기어갔다. 순간 하태충이 상
처를 입은 듯 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하
태충은 이미 세 나무  사이에 서서 장검을 휘두르며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누구와 싸우는지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다
만 순간 순간 하태충의  장검이 무슨 이상한 병기와 부딪치는 소
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장무기는 호기심이  생겨 앞으로 기어가
자세히 바라보더니, 그만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소나무에 구멍을 파서 딱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게 해
놓고, 각각의 나무 안에 노승이 한 명씩 들어가 있고, 손에는 모
두 긴 검은색 밧줄을  들고 하태충 부부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었
다.

 어두컴컴한 야밤에 검은  밧줄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
태충 부부는 방어자세를 취하고 정신 없이 장검을 휘두르고 있었
으나, 불행하게도 상대의 무기를 자세히 볼 수가 없어 반격할 여
지가 없었다. 세  개의 밧줄은 느릿느릿한 것  같으나 실은 매우
날카로웠다. 그러나 조금도  소리를 내지를 않았다. 비오는 야밤
에 조용한 산봉우리에서 세  개의 밧줄은 마치 귀신과도 같았다.
정말 말할 수 없이 그 모습은 무척 괴이해 보였다.

 하씨 부부는 소리를 지르며 마음이 급해 품자 모양으로 포위 당
한 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여전히 긴 밧줄에 진
로가 막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장무기는 내심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검은 밧줄을 사
용하는 자들의 내력은 심후하고 공력이 정순하여 자신도 감히 그
들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음! 원진이 말하기를, 의부님을 자신의 태사숙 세 명이 지키고
있다고 했는데, 아마 이  세 노승인 모양이군. 정말 공력이 극치
에 도달했구나.'

 그러자 앗!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하태충은 이미 등에 밧줄을
맞고 포위망  속에서 밖으로 나뒹굴며  쓰러졌다. 보아하니 살아
남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 광경을 본 반숙한은 당황하다가 가까
스로 잠깐 정신을 돌린 사이에 그만 세 개의 밧줄이 동시에 그를
후려치자 비명소리와 함께  그녀도 머리통이 깨지고 사지가 떨어
져 나가서, 도대체  사람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형체로 포위망
밖으로 튕겨져 나오고 있었다.

 원진은 싸우면서도 서서히 산 위로 걸어오고 있었다.

 "자, 용기가 있으면 따라와 보거라."

 원진과 상대하고 있는 두  대한은 모두 곤륜파의 상당한 고수인
지라, 무공이 고강한 원진일지언정  두 명을 한꺼번에 해치울 수
는 없었다. 한 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사이에 나머지 한 명은 도
망갈지도 모르므로  두 사람을 산 위까지  유인하고 있는 중이었
다.

 두 사람은 산 위 소나무에서  몇 장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지
만, 갑자기 하태충의 시신을  보자 순간 똑같이 발걸음을 멈추었
다. 그런데 어느새  두 개의 밧줄이 소리도  없이 그들의 허리를
감아버렸다. 그런 후 밧줄을  당기더니 갑자기 밧줄을 흔들자 두
사람은 밧줄에서 풀려나 허공을 향해 몸이 날렸다. 두 사람은 백
여 장이나 되는 산 밑으로  던져진 것이다. 잠깐 사이에 두 사람
은 산 밑에 떨어져 즉사하였다. 그러나 산 밑으로 떨어지면서 외
친 비명소리는 아직도 메아리치고 있었다.

 세 명의 노승이  순식간에 네 명의 곤륜파  고수를 해치운 것을
본 장무기는, 그들의  심후한 무공에 혀를 내둘렀다. 녹장객이나
학필옹보다도 한 수 위인  것만 같았다. 태사부 장삼봉만은 못한
것 같았지만, 그러나 이미 신통한 경지에 도달한 것은 분명했다.

 '소림사에 아직 이런 원로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마 태사부님
과 양소도 모르고 있을 거다.'

 그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 풀 숲에 엎드려 감히 꼼짝도 하지를
못했다.

 원진은 하태충 부부의 시체를 산 밑으로 걷어차 버렸다. 그러자
한참 지나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무기는 내심 생각
했다.

 '하태충 부부가  나한테 입은 덕을  원한으로 갚으려고 하더니,
오늘 또 여기까지 와 보도(寶刀)를 탐해 의부님을 괴롭히려고 했
구나. 그들의 인품은 정말 비열하지만 무공은 훌륭하다. 한 무학
의 일파를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인데, 오늘  이런 최후를 당하다
니.....'

 그 때 원진이 공손한 태도로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세 분 태사숙의  신공은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네 명의 곤륜파  고수를 해치우시다니, 원진은 정말 탄
복하여 뭐라고 형용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 가운데 한 명이 다만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원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원진이 방장 사숙의 명을  받아 세 분 사숙께 문안드리옵니다.
그리고 그 포로에게 할 말이 좀 있습니다."

 메마른 음성이 들려왔다.

 "공견 사질의 덕과 예가 깊어 우리 셋이 제일 좋아했었지. 원래
그가 소림일파의 무학을 높이  빛냈는데, 불행하기도 이 못된 놈
의 손에 죽어 우리 셋은  수십 년 동안을 이미 세상 일에 나서지
않아 왔는데, 이번에 공견 사질을 위해 이 산으로 온 것이네. 이
놈은 죽어  마땅하니, 단칼에 베어 버리면  그만인데, 귀찮게 또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것이냐? 조용히 지내고 있는 우리를 시끄럽
게 할 셈이냐?"

 "태사숙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방장 사숙의 말씀이, 저
의 은사님도 그 자에게  목숨을 잃었지만, 은사님의 무공이 실로
얼마나 훌륭했습니까? 그러니 그  자 혼자서의 힘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자를 여기에 잡아두고  세 분 사숙께서
지키게 수고를 끼친 것은,  저 자의 패거리들이 구출하러 오게끔
하여 당년에 은사를  죽인 원수들을 일망타진하려고 하는 것이었
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도룡도를 다른 놈들의 손에 들어가
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누군가 그 보도
를 갖고  무림지존의 이름으로, 천년이나  내려온 우리 소림사의
성세를 깎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말에 장무기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원진, 이 악적아! 너는 천  갈래 만 갈래 찢겨도 네가 지은 죄
를 다 씻지 못할 것이다. 네놈이 입에 침도 안 바른 거짓말로 수
십 년이나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던 고승들을 끌어내, 그들의 힘
을 빌어 무림의 고수들을 모조리 없애려고 하다니!'

 "그래, 얘기해 보거라."

 한 노승의 음성이 들렸다.

 내리는 비는 아직 그치지  않고 천둥 번개소리가 요란스럽게 울
렸다.

 원진이 세 나무 사이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땅바닥을 보며 말을
하였다.

 "사손, 생각해 보았느냐?  네가 지금이라도 도룡도가 있는 곳을
마하면 즉시 너를 여기서 보내 주겠다."

 장무기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아니, 어째서 땅을 보고  말을 하는 것일까? 거기에 무슨 지하
감옥이라도 있어 의부님께서 거기에 갇혀 있다는 것인가?'

 그러자 찌렁찌렁한 한 노승의 음성이 들려왔다.

 "원진, 우리  출가인들은 거짓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데, 왜 저
자한테 거짓말을 하느냐?  만일 저 자가 정말  보도를 감춘 곳을
말하면 저 자를 풀어 주려는 것이냐?"

 "태사숙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깊이 생각한 바, 은사님을
죽인 원한이 아무리 깊다 해도 본파의 성망을 좌지우지하는 일보
다 더 중하겠습니까? 만약  보도를 내놓는다면 제가 즉시 풀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삼  년 후 제자가 다시  은사님을 죽인 원수를
갚으려고 합니다."

 "좋다! 무림에는 신의가 제일 중하여 한번 꺼낸 말을 다시 줏어
담을 수가 없으니, 아무리  간악한 놈이라 할지라도 소림 제자는
절대로 신의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네, 잘 알았습니다!"

 '이 세 소림  노승은 무공만 절륜한 것이  아니라, 덕의 소양도
높은 노승들이구나. 단지 원진의  간계에 속은 것을 모르고 있구
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원진의 말소리가 또 들렸다.

 "사손, 내 태사숙의 말씀을 들었느냐? 세 분께서 너를 풀어주시
겠다는 말씀을?"

 그러자 땅 속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성곤, 네가 아직 나를 볼 면목이 있느냐?!"

 그 말소리는 분명  의부님이 틀림없었다. 장무기는 정신이 번쩍
들어 당장이라도 뛰어가 단번에  성곤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
렇게 되면 세 노승의 긴  밧줄이 즉시 자기를 향해 공격해 올 것
이다. 혹시 성곤이 덤벼들지 않는다해도 자기는 세 노승의 연합
공격에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장무기는 자신의 심정을 억제하고
침착하게 생각을 굴렸다.

 '원진이 돌아간 후 세 노승을 찾아가 절을 하고 우여 곡절을 얘
기하면 불법이 깊은 세  노승이 시비를 잘 가려줄지도 모를 것이
다.'

 다시 원진의 겸손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손, 내 나이가 칠십이 넘었는데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 버려
라. 많아야 이십 년 후면  우리 두 사람 모두 땅 속에 묻힐 것인
데, 네가 너한테 잘못한 점도  많지만 너한테 잘 대해준 적도 많
았지. 옛날 일은 모두 잊어 버리자."

 "성곤아, 네가 아직 나한테 할 말이 있느냐?"

 원진이 똑같은 말로  반 시진을 허비해도 사손은  여전히 그 한
마디 뿐이었다.

 원진은 다시 냉랭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좋다. 사흘의 여유를 주마.  사흘 후 네가 여전히 보도의 소재
를 털어놓지 않으면 내가  무슨 수단으로 너를 대할 것인지 네가
더 잘 알 것이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세  노승에게 절을 한 후  산 밑으로 내려가
버렸다.

 장무기는 그가 멀리 간 것을  확인한 뒤 막 일어나서 세 노승에
게 호소를 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온몸의 기류에 이상이 있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자신을 습격한 것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 것
에 그만 깜짝 놀라 재빨리  옆으로 몸을 굴려 피하자, 순간 자신
의 얼굴 위로 무엇인가 두 개의 물체가 스쳐 지나갔다. 바람소리
조차 내지를 않은 두 개의  긴 밧줄이었다. 그는 일 장여를 굴러
피하자 다시 또 하나의  검은 밧줄이 자기의 가슴을 향해 공격해
왔다. 그 검은 밧줄은 일직선으로 바꾸어 예리한 검과 같이 쏜살
처럼 자기의 가슴을 향해 찔러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다
른 두 개의 밧줄은 장무기의 등뒤에서 공격해 오고 있었다.

 조금 전에 곤륜파의 네 고수가 죽은 것을 본 장무기는 이 세 개
의 이상한 무기에 대한 두려움을 알고 있으므로, 지금 위급한 상
황에 처하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무기는 왼손으로  앞에서 오는 밧줄을  잡아 옆으로 제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그것이 휘청거리더니  순간 산사태와도 같은
위력을 지닌 경력이 자기의 가슴을 향해 덮쳐 왔다. 만약 그것에
제대로 맞는다면  장무기는 즉시  갈비뼈가 부러지고 오장육부가
터질 것이 분명했다.

 바로 이 전광석화의 순간, 그는 재빨리 오른손으로 뒤에서 공격
해오는 두 개의 검은 밧줄을 제치고 왼손으로 건곤이위심법과 구
양신공을 섞어 앞에서 오는  경력을 흘려 보내고, 동시에 획! 몸
을 공중으로 솟구쳤다.

 바로 그 때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 하며 세,네 번이나 밝은 빛
이 비쳤다. 그리고 엇! 하고  두 노승이 놀라운 듯 소리를 냈다.
그것은 상대의 높은 무공에  무척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다시 몇
번의 번개가  장무기의 모습을 환하게 비치자  세 노승은 나란히
위를 쳐다보다니, 그만  이 절정에 달한 신공을  지닌 자가 바로
얼굴에 때가  묻어 지저분하게 생긴 시골뜨기  소년인 것을 알고
더욱 놀라는 것이었다.

 세 마리의 흑룡과 같은 세 개의 흑색(黑色)은 세 방향에서 쏜살
같이 그를 향해  덮쳐 가고 있었다. 장무기는  번쩍 하는 번개에
순간 세 노승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동북쪽 소나무에 앉아 있는  노승은 얼굴이 칠흑같이 검은 것이
쇠붙이 같았다.  그리고 서북쪽의 소나무에  있는 노승은 얼굴이
깡마르고 누런 색이고,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노승은 얼굴이 오
히려 백지장과 같이 창백했다. 세 노승이 모두 얼굴이 말라 살이
라고는 붙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누런 얼굴의 노승은 한쪽 눈이
먼 애꾸눈이었다. 다섯 개의 눈초리가 자기를 노려보자, 번개 빛
에 눈매가 더욱 날카로왔다.

 세 개의 검은 밧줄이  눈앞에 다가온 것을 느낀 장무기는, 순간
양팔로 휘어감아 세 노승의 경력을 밀어 세 개를 하나로 묶어 버
렸다. 이  초식은 바로 장삼봉이  전수한 무당파의 태극심법이었
다. 세 개의 밧줄에 담긴 경력을 하나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
때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요란한 소리를  내자 간담이 써늘했
다. 장무기는  공중에서 제비넘기를 하여  왼발을 소나무 가지에
대고 몸을 나뭇 가지 위에 세우고 있었다.

 그런 후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명교 교주인 장무기라는 후배가 세 노승에게 인사드립니다."

 그러면서 왼발만 가지를 밟고  오른발은 허공을 딛은 채로 꾸벅
절을 하자, 그의 동작에 따라 나뭇 가지도 휘청거렸다.

 세 고승은 자기들의 밧줄이  장무기에 의해 한데 엉키자 밧줄을
털어 즉시 각각 떨어뜨렸다. 세 노승이 조금 전에 보인 삼초구식
(三招九式)은 매식마다 수십 초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
고 그 수십 초식 살수에도  상대는 모두 그것을 피했고, 또 매번
마다 아슬아슬하여 잠시라도  지체했다면 그것은 즉시 목숨을 잃
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무기는 그것을  피하고도 여전히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태연자약하니, 세 노승은 평생 이런 상대랄 만
난 적이 없었다. 모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장무기가 젖먹던  힘을 다 들여 삼초구식을 피한
것인 줄은 몰랐다. 장무기는  휘청거리는 나뭇 거지의 힘을 이용
해 흐트러진 단전의 진기를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장무기가 조금 전에 보인 무공엔 구양신공, 건곤이위신공, 태극
권 등 삼대  신공이 내포해 있었고, 맨  나중의 제비넘기는 바로
성화령에 새겨 있던 심법이었다.

 세 노승의 무공이 아무리 절기에 도달했다 해도 그들은 이미 여
기서 수십 년을 지내면서 세상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아, 장무기의
이 네 가지 무공을 어느 한 가지도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어딘가
은연중에 구양신공이 자기네와 같은 줄기라는 것을 느꼈으나, 그
깊고 정묘한 것은 소림파  신공보다는 훨씬 앞서 있는 것이 틀림
없다고 느꼈다.

 장무기가 자신이 명교 교주라고 신분을 밝히자, 세 노승은 내심
탄복했던 마음이 금새 사라지고 노기로 바뀌었다. 얼굴이 창백한
노승의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느 곳의 고인이 왕림했는가 했더니 바로 마교의 대마두였군.
우리 세 사형제가 수십  년이나 은둔하여 속무에 신경을 쓰지 않
고, 본사의 대사마저도 한 번도 간여하지 않았는데, 오늘 여기서
명교 교주를 만나게 되다니 정말 일생의 행운이 아닐 수 없군."

 장무기는 상대가 말끝마다 마두라고 하자, 명교와 무슨 깊은 원
한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만 망설이며 어떻게 말을 해
야 할지 몰랐다.

 그러자 애꾸눈 노승이 다시 말했다.

 "아니, 마교 교주는 양정천(陽頂天)이 아닌가? 어째서 각하께서
명교 교주이시요?"

 "양교주께선 돌아가신 지 이미 삼십 년이 됩니다."

                                                    계속 ---


#2921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6장 #2/5             03/21 20:54   411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6 장 세 고승(高僧)과 사손의 행방(行方) #2/5

 애꾸눈 노승은 놀라며 그의  표정엔 무한한 상심과 실망이 담겨
져 있는 것 같았다. 장무기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양교주가 죽었다는 말에 저렇게  상심하는 것을 보아, 아마 왕
년에 양교주와 매우 깊은  우정을 나눈 모양이다. 의부께서 양교
주의 부하였으니 우정을  이용해서 원진이 어떻게 양교주를 죽였
는지 그 진상을 밝히고 나면 좀 달라지겠구나.'

 "대사님께서 양교주님을 잘 아십니까?"

 "물론, 양교주를 모른다면  내가 어떻게 애꾸눈이 됐겠소? 또한
우리 세  사형제가 뭣하러 여기서 삼십  년이나 좌선하며 세월을
보냈겠소?"

 그의 이 몇 마디 말투는 조용했으나 거기에는 무척 깊은 상심과
실망이 서려 있었다.

 '큰일났구나.'

 장무기는 내심 실망을 했다. 그리고 노승의 말투로 보아 양정천
이 그를 애꾸눈으로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세 사형제가
여기서 삼십 년이나 공부를  들인것은, 그 원한을 갚으려고 벼르
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정천이 죽었다는 말에
크게 실망을 한것이었다.

 다시 애꾸눈 노승이 자신들의 신분을 소개했다.

 "장교주, 이 늙은이의  법명은 도액(渡厄)이고, 이 얼굴이 하얀
사제는 법명이  도겁(渡劫)이고, 검은 얼굴을  한 소제의 법명은
도난(渡難)이라고 하오. 양정천이 이미 죽었다니 우리 셋의 원한
은 별수없이 지금의 교주가 감당해야겠소. 우리의 사질 공견, 공
성이 모두 명교에 의해 목숨을 빼앗겼으니, 여기에 온 이상 물론
피하지는 못할 것이니, 수십  년의 원한을 오늘 무공으로 결단을
내 버려야겠소!"

 "후배는 귀파와 아무런 원한이 없고, 또한 오늘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나의 의부 금모사왕 사대협을 구하러 온 것입니다. 공견 신
승은 나의 의부님께서 잘못하여 죽였지만, 거기엔 많은 우여곡절
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성  신승의 죽음은 폐파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세  분께서는 한쪽 말만 들으셔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자세히 알고 시비를 가리셔야 합니다."

 흰 얼굴인 도겁 노승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공성은 누가 죽였다는 거냐?"

 "후배가 알기로는 조정의  여양왕부 무사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걸로 압니다."

 "여양왕부의 무사들은 인솔자가 누구냐?"

 "여양왕부의 딸 이름은 조민이라고 합니다."

 "원진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이미 자기의 군주와 아버지를 배
반하고 명교에 투신했다는데, 그게 정말이냐?"

 장무기는 별도리가 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녀는 지금 이미 모든 것을 뉘우치고 명교에
입교했습니다."

 도겁은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공견을 죽인 자는 마교의  금모사왕 사손이고, 공성을 죽인 자
는 마교의 조민이 아닌가!  그리고 조민은 소림사를 공격해서 우
리의 제자들을 모조리 잡아갔고, 제일 용서 못할 것은 감히소림
사의 십육존 나한상의 등에다  모욕의 말을 새긴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형의 한쪽 눈이다! 우리  세 사람이 합쳐서 백 년이나 여
기서 좌선을 했는데 이  빚은 너한테 따지지 않고 누구한테 따진
다는 것이냐?"

 장무기는 긴 탄식을 토했다. 자신이 이미 조민을 받아들인 것을
인정했으니 그 책임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순간 아버님
이 사랑하는 자기 부인의 과거 죄값 때문에 끝내 자살을 한 심정
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양교주와 의부님이 맺은 원한
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그것을
짊어지지 않으면 누가 감당할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장무기가 꼿꼿이 서서 모든 경력을 발 끝에 주입하자, 휘청거리
던 나뭇 가지는 돌연 흔들림을 멈추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세분 노승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후배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군요. 모든 죄값은  후배 혼자서 감당하겠습니다. 그러나 저의
의부님께서 공견 신승을 죽인  것에 대해선 그 속에 많은 고충과
우여곡절이 있으니 세 분께서  그 점에 대해 용서해 주시기 바랍
니다."

 도액이 입을 열었다.

 "네가 뭘 믿고사손을 위해  대신 사정을 하는 거냐? 우리 사형
제 셋이서 너를 못 죽일 것 같으냐?"

 장무기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맞부딪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
다.

 "후배 혼자서 세 분을  상대한다면 절대로 적수가 될 수 없습니
다. 그러니 어느 분이 저한테 몇 수의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도겁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일 대 일로 하면  너를 이길 자신이 없다. 그리고 이런
원한을 갚는 일에 강호 규칙을  지킬 수도 없다! 자, 마두야! 어
서 내려와 목숨을 바쳐라!"

 그리고 나서 그는 나무아미타불하고 염불을 외자 도액과 도겁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부처님의 자비심이 있기를!"

 세 개의 검은  밧줄이 위로 치솟으며 장무기를  향해 휘감아 왔
다.

 장무기는 몸을 낮춰 밧줄  사이를 피해 밑으로 뛰어내리면서 발
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공중에서 자세를  바꾸어 도난을 향해
덮쳤다. 도난은 즉시 손을 뻗어 맹렬하게 장풍을 뻗자 강한 경풍
이 장무기의 아랫배를 향해 공격해 갔다. 장무기는 몸을 돌려 경
력을 모아 건곤이위심법으로 장력을 무산시키자, 비로 이때 도액
과 도겁의 검은 밧줄이  동시에 장무기를 휘어감는 것이었다. 장
무기가 몸을 조금 돌려  피하자 도겁이 소리도 없이 왼손으로 장
무기를 공격했다. 장무기는 세  그루의 나무 사이에서 공격해 오
는 초식을 모두 풀어 버리고,  순간 갑자기 일장을 뻗자 수백 줄
기의 빗줄기와 경풍이 더불어  도액을 향해 날아갔다. 도액 노승
이 재빨리 머리를 피했지만  이미 수십 줄기의 빗줄기가 그의 얼
굴에 부딪쳤다. 매우 심한 통증을 느꼈다.

 "대단한 놈이군!"

 도액 노승이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의 검은 밧줄은 갑자기 둥근 원을 그리며 공중에서 밑
으로 장무기의 머리를 향해  씌워 오는 것이었다. 장무기의 몸은
쏜살과 같이 그것을 피하며  도겁을 향해 공격했다. 장무기는 싸
울수록 내심 놀라며  의아해 했다. 자신의 전신  기류가 세 개의
밧줄과 세 줄기의 장풍의  일렁거림 속에 갇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점점 자기를 조여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이런 고수를 상대한  적은 없었다. 세 노승의 초식이 정묘
할 뿐 아니라 내력도  심후 무쌍하였다. 장무기는 처음의 칠성은
방어 자세를 취하고 삼성은  공세를 취했었다. 그러나 이백여 초
가 넘자  점점 체내의 진기가불순해지는  것을 느끼며 별수없이
공세를 거두고 완전 방어에만 몰두했다.

 장무기의 구양신공은 원래 끝이  없어서 쓰면 쓸수록 더욱 강력
해지는 것인데, 지금은 매 초식마다  모든 힘을 다 쏟아 점점 힘
이 달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 또한 신공을 연마한 후로 처
음 겪는 경험이었다.

 수십 초를 다시 넘기자 그는 생각을 굴렸다.

 '이대로 끌다간 나중에는 목숨을  잃을 것이 뻔하다. 오늘은 잠
시 여기서 빠져나가 외할아버지와 양좌사, 범우사, 위복왕 네 사
람을 만나 만나, 다섯이 힘을 합치면 세 노승을 이길 수 있을 것
이다. 그 때 다시 의부님을 구출해 낼 수밖에 없겠다.'

 그는 즉시 도액을 향해 삼 초를 공격하고 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했지만, 뜻밖에도 세 개의  밧줄이 그린 원은 철벽과 같았다. 몇
번이나 뚫고 나가려고 해도 다시 막혀, 뒤로 후퇴하려 해도 이미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 크게 당황했다.  세 사람의 연결이 한 몸이나 다름없
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듯  서로 마음을 통하는 무공이 세상에
정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이 세 노승이 여기서 삼십 년이
나 앉아 좌선한 최대의 정성은,  바로 이 셋의 마음을 통하게 하
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한 사람이 움직이면 나머지 두 사람은 즉시 그 뜻을 깨닫는 것
이구나. 이런 심령 감응은  매우 오묘한 것이지만, 세 사람이 이
좁은 데에 같이 앉아 삼십 년이나 수련한 것이니 신기한 것은 당
연하다. 그렇다면 내가 다른  사람들을 데려와 같이 공격해도 이
세 사람이 이룬 심령 감응의 철벽은 뚫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끝내 의부님을 구출해  내지 못하고 여기서 죽을 것이란 말
인가?'

 그는 마음을 조급하게 쓰자 정신이 분산되어 그 틈에 그만 도겁
의 다섯 손가락에 어깨를 맞아 골수까지 고통이 스며들었다.

 '내가 죽는  것은 안타까운 것이 없지만  의부님의 억울함은 꼭
밝혀야 한다. 의부님은 평생 고집스럽고 오만하여 아무리 목숨의
위험이 닥쳐도 자기를 위해 절대 변명을 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세분 선사께 한 가지 밝힐 일이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또 검은 밧줄이 좌우로 그를 공격했다.

 장무기는 좌충우돌하며 덮쳐오는 경력을 풀고 계속 떠들었다.

 "원진의 속세 이름은  성곤이라 합니다. 별명은혼원벽력수이고
바로 나의 의부이신 사손의 사부입니다....."

 세 명의 쇰 고승은  장무기가 경력을 무산시키면서 동시에 말을
할 수 있자, 이런 내공은 자신들이 절대로 해 낼 수 없기에 내심
점점 두려움에 싸였다. 그러나  한편, 세 노승은 명교가 모든 나
쁜 짓만 하는 마교라고  인정하고 있는데, 교주의 무공이 높을수
록 세상에 해를  더 끼칠 것이라고 생각하며,  지금 그가 위험에
처해 빠져 나가지 못하니, 이  기회에 그를 제거하는 것이 큰 공
덕을 쌓는 것이라 여기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더욱 맹렬하
게 공격했다.

 장무기는 더욱 떠들어댔다.

 "세 분께서는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 성곤의 사매가 바로 명
교 교주  양정천의 부인입니다! 성곤이  끝까지 자기의 사매에게
정을 두고 그 정으로 인해서 질투가 생겨 끝내 명교와 깊은 원한
을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덮쳐오는 세 노승의 초식을 무산시키며 입으로는 성곤
이 어떻게  명교를 멸망시키려 하였고,  어떻게 양부인과 밀회를
하여 양정천을 죽게끔 만든 것, 어떻게 취한 척하고 사손의 처를
농락하고, 그의 온 집안을 살해하고, 그로 인해서 사손이 어떻게
무림지사들을 무고하게 죽이고, 어떻게 해서 공견 신승을 사부님
으로 모시고, 그로 인해  공견이 사손의 십삼 장을 받았으며, 어
떻게 해서 신의를 못  지켜 공견이 한을 머금고 마지막을 맞이했
는지에 대하여 털어놓았다.

 도액 등  삼승은 들을수록 기가 막혔다.  지금까지 들은 얘기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얘기는 틀림없었다.
도액의 손에 쥔 검은 밧줄이 제일 먼저 점점 힘이 빠져갔다.

 장무기는 다시 입을 열었다.

 "후배는 양교주께서 어떻게 도액 대사와 원한을 맺게 됐는지 모
르겠습니다. 아마 그 중간에 어떤 간악한 놈의 모략이 있었을 겁
니다. 아마 그 자는 바로 원진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액 대사께서
자세히 옛날 일을 생각하여  이 후배가 한 말이 틀림없는지 짐작
해 보십시오."

 으음! 소리를 낸 도액은 아무 말 없이 한참 생각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것도 일리가 있군. 내가 양정천과 원한이 생기게 된 것은 원
진이 많은 작용을 했지. 그리고  그 후 나를 자기의 사부로 삼으
려고 했지만, 난 언제든지 항상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았지. 그래
서 그를 공견 사질의 문하에 들어가게 했던 것이지. 그렇게 보면
그 때 그는 모든 계획을  세우고 행동을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
겠군."

 "그것뿐이 아닙니다. 지금은 그가  소림 방장의 이름을 빌어 많
은 도당들을  끌어모아 음모를 꾸며 공문  신승을 해치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르릉 하고 소리를 내며 왼쪽끝 비탈
위에서 큰 바위덩어리가 세  그루의 소나무를 향해 굴러 오고 있
었다.

 "누구냐?"

 하고 도액 노승이 크게 외쳤다.

 그러면서 굴러오는 바위를 향해 밧줄을 흔들자 팍! 팍! 하는 소
리와 함께 바위덩어리가 깨지며  깨진 돌 부스러기가 날렸다. 그
러자 갑자기 바위덩어리 뒤에서 한 그림자가 튀어 나오며, 흰 빛
이 번쩍이는 단도를 들고 장무기의 목을 향해 찔러 오는 것이 아
닌가!

 장무기는 전력을 다해 도겁과  도난의 밧줄과 권장을 막아 내는
데 정신이 없어 누가 기습해 오는지 꿈에도 몰랐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의 찬바람이 그의 목에 다가오고
있었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 장무기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날렸다. 그러자 찍! 하고  단도는 그의 앞가슴의 옷을 찢고 지나
간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위급을 모면한 것이다.

 일격에 명중을 못시키자 그  자는 바위덩어리로 몸을 막고 재빨
리 세 노승의 검은 밧줄의 범위에서 벗어나 빠져나가 버렸다.

 장무기는 진땀을 흘리며 크게 외쳤다.

 "악적 성곤아! 나를 죽이고 내 입을 막으려고 하느냐?!"

 조금 전에 단도로 찌를  때 사람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그
재빠른 신법과 잔인한 출수,  그리고 강력한 내경, 또한 그 자의
무공이 완전히 사손과 똑같았으므로, 그 자는 성곤임에 틀림없었
다.

 소림 삼승의 검은 밧줄은 세  개의큰 손과도 같았다. 그 천 근
이나 넘는 바위덩어리를 휘어감아 들어올리며 날렸다. 그러나 성
곤은 이미 산 밑으로 멀리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도액이 말했다.

 "정녕 원진이 틀림없느냐?"

 도난이 먼저 대답을 했다.

 "틀림없이 원진이야."

 "도둑이 제발 저려서 도망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순간 사면 팔방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며 칠,팔 명의 그림자가
앞으로 덮쳐 오며 맨 앞에 선 자가 크게 외쳤다.

 "소림 화상이 불도로서 어찌  이렇게 많은 인명을 죽이는 거냐?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자, 모두 공격해라!"

 여덟 명은 각기 병기를 들고  소나무 사이의 세 노승을 향해 공
격했다.

 장무기는 세 노승  중간에 서 있으면서 공격해  오는 여덟 명의
무기를 보니 세 명만 검을 들고 있었고, 나머지 다섯명은 칼이나
채찍을 들고 있었다. 모두 무공이 뛰어나 삽시간에 세 노승의 밧
줄과 엉켜 싸움이 벌어졌다.

 잠시 쳐다보니 검을 사용하는 세 명의 검초는 모두 며칠전 소림
승에게 목숨을 잃은 청해 삼검과 같은 검법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정묘한 변화와 깊은 경력은 모두 청해 삼검 보다
는 한 수 위가 틀림없었다. 아마 청해파 중에 쟁쟁한 인물들임이
틀림없었다.

 이 세 사람은 도액  노승을 협공하였고, 나머지 다섯 중에 셋은
도난을, 그리고  남은 두 명은 도겁을  상대하고 있었다. 도겁을
상대하는 사람은 겨우  두 명이었지만, 이 두  사람은 다른 여섯
명에 비해 무공이 한 수 위였다.

 한참 동안이 지나자 도겁  노승은 점점 약세로 몰렸고, 도액 노
승은 세 명이 공격하고  있지만 선수를 잡고 오히려 여유가 있어
보였다.

 다시 십여 초식을  겨루고 나자 도액 노승은  도겁 노승이 점점
지탱하기 어려운  것을 보고 밧줄을 흔들어  도겁 노승과 싸우는
두 명을 향해 공격했다.

 두 사람의 몸집은 모두 매우 건장했고 검은 수염을 펄럭이며 몸
놀림이 매우 날렵했다. 한  명은 손에 한쌍의 판관필을 사용하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작은 몽둥이 같은 나무막대기를 사용하
고 있었다. 도액과 도겁은 이 두 사람의 무기에서 뻗어나오는 경
력이 만약 자기 몸에  부딪치면 오히려 칼날보다 더 무서운 상처
를 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청해파 삼인은 점점 열세에 몰렸고
이렇게 되니, 도난 노승이 혼자 셋을 상대하고 도액과 도겁 둘이
서 다섯을 상대하는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강세를 보
이지 못했다.

 장무기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 여덟 명의 무공은 정말 놀랍구나! 절대 하태충 부부에 뒤지
지 않는군. 청해파 세 명을  빼고 다섯 명의 내력은 전혀 알아낼
수가 없는데. 정말  세상은 넓구나! 도처에 이름없는 영웅호걸이
없는 곳이 없구나!'

 열 한 명이 모두 백여  초식을 겨루고 나자 소림 삼승의 밧줄은
점점 조금씩 짧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사용할 때 조금이라도 내
력의 소비를 줄이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연히 위력도 줄
어들었다. 다시 수십  초식이 지나자 세 노승의  검은 밧줄은 또
일곱, 여섯 자나 줄어들었다.  검은 수염의 두 노인도 점점 접근
하여 온 힘을 다해 세 노승에게 접근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세 노승의 밧줄은  아주 짧아졌으나 빈틈없는 방어 자세
였고, 세 밧줄이 형성한  원에는 무한한 탄력이 있어 보였다. 두
검은 수염의 노인은 수시로 초식을 변화하며 맹공을 했지만 밧줄
의 탄력에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이미 세 노승
이 한데 뭉쳐 삼 대 팔의 형세가 되어 버렸다.

 소림 삼승은 온 힘을  다해 방어하며 속으로는 무척 고통스러웠
지만, 이 여덟 명과 더  지체해도 그들이 수세에 몰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자 검은 밧줄은 다시 여덟 자나 거둬들여 하나의 금
강복마권(金剛伏魔圈)을 형성하니, 여덟 명이 아니라 열 여섯 명
일지라도 공격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큰 심복
지환의 약점이 있었다. 만약  장무기가 손을 뻗어 안팎에서 공격
한다면 즉시 세 노승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세 노승은  장무기가 조용히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필시 기회를  노려 그들이 서로 싸워  기진맥진할 때 어부지리를
노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세 노승의 내력은 이미 말라 버릴 정도였다. 그들은 산 밑
의 소림사에 구원을 요청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절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말 한 마디만 해도 심한
내상을 입고 폐인이 될지 몰랐다. 세 노승은 마음 속으로 자신들
의 실력을 너무 과신한  것을 질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강적이
처음 왔을 그 때에 본사에 통지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통지만 했었다면 달마당과  나한당에서 몇 명의 고수들이 후원하
면 적을 물리치기는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장무기도 지금은 자기가 세  노승을 죽이려면 조금도 힘들일 필
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아 대장부가 어찌 위급
에 처해 있는 사람의 틈을  노려 그들을 죽일 수 있겠는가? 또한
이 세 노승은 원진에게 속은 것이지 달리 죽일 이유가 없지 않은
가. 그리고 또한 이 세 노승을 죽이고 나면 이 여덟 명을 물리치
는 일도 역시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쌍방의 승부가 지금
당장 결정날 것 같지도 않았다.

 장무기가 고개를  숙여 밑을 보니, 큰  바위덩어리 하나가 지하
감방의 입구를 막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틈을 내서 사손이 숨을
쉬게 하고 그 틈으로 음식을 넣어 주는 통로로 사용하는 것 같았
다.

 장무기는 쌍방이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 바로 의부
님을 구출하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바위 옆에 무릎을 꿇고 앉
아 두 팔을 뻗어  건곤이위심법을 전개하자, 큰 바위덩어리는 조
금씩 움직였다.

 한 자도 채  움직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강한 경풍이
밀어닥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도난 노승이 그의 등을 향해
일장을 뻗은 것이었다. 장무기는 상대의 경력을 이용하는 차력술
로서 일장을 막자 팍! 하는  소리와 동시에 등 뒤의 옷이 터져나
가, 광풍폭우 속에  찢겨진 옷자락들이 휘날렸다. 그러나 도난의
장력은 오히려 장무기의 차력술로 인해 바위덩어리에 부딪쳐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또 몇 자를 움직여  놓았다. 장무기는 내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처음  경력이 와 닿았을 때는 장무기가
온 힘을 다해 바위를 밀고 있던 때이므로 등줄기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스며들었다.

      계속 ---


#2922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6장 #3/5             03/21 20:56   402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6 장 세 고승(高僧)과 사손의 행방(行方) #3/5

 도난이 일장을 헛소비하는 순간  잠시 방어하고 있던 밧줄에 약
점이 노출되자, 그 검은 수염의  한 노인이 그 틈을 노려 안으로
덮쳐 오른손으로 도난의 왼쪽 가슴을 후려쳤다.

 소림 삼승의 검은 밧줄은 먼 곳을 공격하는데 유리하지, 접근한
적을 격퇴하는  데엔 불리했다. 도난은  재빨리 왼손으로 상대의
타혈궐(打穴獗)을 막자 검은  수염의 노인은 갑자기 왼쪽 손가락
으로 도난의 담중혈을 찔렀다.

 '앗! 위험하구나!'

 도난이 속으로 외쳤다. 상대의 일지탄(一指彈) 점혈무공이 타혈
궐의 무공보다 더 위력이 있는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이 위급한  상황에서 밧줄을 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자기의 가슴을  방어하며 뒤따라 세 손가락으로 즉시
역공을 했다.

 그가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긴  했지만 밧줄을 놓아 버리자 판관
필을 쓰는 노인이 재빨리 앞으로 접근했다. 소림 삼승의 세 밧줄
에서 하나가 빠지자 그들의 금강복마권은 이미 무너지고 만 것이
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땅에  떨어진 밧줄이 죽은 척하고 있던 뱀
이 갑자기 일어나 사람을  깨무는 것같이 밧줄 끝이 판관필의 노
인 얼굴을 향해  찌르는 것이 아닌가! 밧줄  끝이 얼굴에 닿기도
전에 그에 딸린 경풍은 이미 상대로 하여금 잠시 숨을 쉬지 못하
게 할 정도였다. 그  노인이 재빨리 판관필로 가로막으니, 두 무
기가 서로 부딪치자  어깨가 마비되는 느낌에 하마터면 판관필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러나 오른쪽  손에 들은 판관필은 그만 떨어
뜨려, 한곳으로  날아가더니 돌에 부딪쳐  돌이 깨지며 사방으로
날렸다.

 세 노승이 다시 밧줄로 초식을 전개하자 청해파 세 검수는 다시
일장여 뒤로 밀려났다. 금강복마권이 다시 원상으로 회복한 것이
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더 위력이 강해진 것이다. 소림 삼승은
기쁨과 놀라움이  동시에 교차했다. 땅에  떨어졌던 밧줄을 바로
장무기가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장무기는 금강복마권의 무공을 연마하지 않아 그들과 마음을 상
통하지 못해  그들과 빈틈없이  완전무결하게 배합하지는 못했지
만, 그의 강맹한 내력은  당해낼 사람이 없지 않는가? 그가 들고
있는 밧줄에서 나오는  내력은 거대한 파도와같이 사면팔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도액과 도겁이 옆에서 도와, 그들과 싸우고
있는 일곱 명을 순식간에 거듭 뒤로 물러나게 했다.

 도난 노승은 혼자서 전적으로 검은 수염의 노인을 상대했다. 원
래 무공이나  내력으로도 상대보다 한 수  위이므로 소나무 안에
앉아서 몸을 일으키지 않고도 열 손가락으로 찍고 튕기고 낚아채
며 몇 초식만에 검은 수염의 노인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었다. 나
머지 일곱 명도 전세가  불리해지자 소리를 지르며 밧줄 범위 밖
으로 뛰쳐나갔다.

 장무기는 밧줄을 다시 도난의 손에쥐어주고 몸을 숙여 다시 건
곤이위심법으로 입구를 막은 바위를  또 몇 자 밀어냈다. 그리고
바위가 밀려난 틈으로 크게 외쳤다.

 "의부님! 무기가 왔습니다! 나올 수 있습니까?"

 "난 나가지 않는다! 무기야, 어서 빨리 여기를 떠나거라!"

 그 말에 장무기는 몹시 의아해 했다.

 "의부님, 왜 그러십니까? 누가 봉혈을 했습니까? 아니면 쇠사슬
에 묶여 있습니까?"

 장무기는 사손이 대답하기도 전에 밑으로 뛰어내렸다. 철썩! 하
고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몇시간이나 내린 비로  땅 속에 물이
차 사손의 하반신이 물 속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장무기는 사손을 끌어안고 그의  손과 발을 만져 보니 쇠사슬에
묶이지는 않았다. 또다시 그의 급소 몇 군데를 만져봐도 누가 무
슨 손을 쓰지는 않은 것 같아, 사손을 끌어 안고 땅 속에서 뛰어
올라와 큰 바위 위에 앉혔다.

 "지금이 도망 갈 제일 좋은 기회니, 의부님 어서 여기서 떠나시
지요?"

 그러면서 그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런데 사손은 바위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양손을 무릎에 짚
고 입을 열었다.

 "애야, 내가 일생에 제일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바로 공견 대
사를 죽인 일이다.  네 의부가 만약 오늘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면 끝까지 분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난 지금 소
림사에 잡혀 있는 거다. 그래서  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공견 대
사를 죽인 죄값을 내 목숨으로 갚을까 한다."

 "의부님께서 실수로 공견 대사를 죽이게 된 것은 순전히 성곤의
간계에 걸려 들었던 것입니다. 더욱 의부님께서는 집안의 원수를
갚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성곤의 손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말씀이
십니까?"

 사손은 장탄식을 뿜었다.

 "난 한 달 동안 이 지하에 감금당하여 매일 세 노승이 염불외는
소리를 듣고 산 밑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옛날일을 회상
해 보았다. 난  너무나 많은 무고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했다고
생각했지. 정말 내가 백 번 죽는다 해도 그 죄값을 치를 수 없을
거다. 난 성곤보다 더 많은  죄를 저질렀어. 자, 무기야 이제 나
를 상관말고 어서 내려가거라."

 장무기는 마음이 조급해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의부님께서 안 가시겠다면 무기가 강제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장무기는 사손의 두 팔을 잡고 자기의 등에다 업혔다.

 산길에 갑자기 사람들이 떠드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놈들이 감히 소림사에 와서 소란을 피우는 거냐?"

 물 위로 뛰는 소리가 들리며  십여 명이 산 위로 달려오고 있었
다.

 장무기는 사손의 두 다리를 잡고 막 떠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등
뒤의 대추혈이 마비되었다. 사손이 혈도를 찍어 두 팔에 힘이 빠
져 사손을 내려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장무기는 어찌 할 바를 몰라 조급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의부님, 어째서 꼭 이러십니까?"

 "얘야, 나의  억울함은 네가 이미 세  노승에게 설명했고,나의
죄값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네가 빨리 여기서 떠나지 않으면 나
의 원한을 누가 갚아 주겠느냐?"

 장무기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십여 명의 소림승들이 각기 선장
(禪杖)과 계도(戒刀)를 들고 여덟 명을 공격하고 있었다.

 몇 회합이  지나자 판관필을 들은 노인은,  이대로 시간을 끌고
싸우다가는 오늘을 제대로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오늘 성공할 것을 한 무명 소년에 의해 실패로 돌아간 것이 생각
할수록 화가 치밀어 크게 외쳤다.

 "소나무 중간에 서 있던  소년의 이름을 알고 싶소! 하간(河間)
혁밀과 복태(卜泰)가 어느 곳의 고인이 우리 일을 간섭하는지 알
고 싶소!"

 도액 노승이 검은 밧줄을 흔들며 대답했다.

 "천하 제일 고수인 명교의 장교주를 하간쌍살(河間雙薩)이 어찌
못 알아보느냐?"

 판관필의 혁밀은 쌍필을  휘두르며 포위망을 뚫자, 나머지 일곱
명도 그의 뒤를 따라 달아났다. 소림승들이 그들을 가로막으려고
했지만 여덟 명의 무공은 실로 대단하여 어깨를 나란히하고 그들
을 뚫고 산 밑으로 달아나 버렸다.

 세 명의 노승은 사손과 장무기의 대화를 모두 자세히 듣고 있었
다. 그리고 조금 전에 자기들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그가 그 틈
을 노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자기들을 돕지를 않았다면, 복태
가 금강복마권을 무너뜨렸을  때 하간쌍살의 잔인성으로 보아 세
노승은 지금쯤 이미 세상에 살아 있지를 못했을 것이다.

 세 노승은 밧줄을 놓고 일어나 합장을 하고 말했다.

 "장교주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장무기는 얼른 답례를 하며 말했다.

 "의당히 해야할 일인데 은혜라고 말씀하실 것까지 있습니까?"

 도액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의 일로  보아 이 늙은이가 의당히  사손을 장교주와 함께
여기를 떠나게 해야 하며, 또한 조금 전에 장교주께서 정작 구출
하려고 하면 우리도 막을 힘이 없었을 겁니다. 다만 우리 늙은이
사형제 삼인은 본사의 방장 법지에 따라 사손을 지키겠다고 부처
님 앞에서 맹세를  한 것이라 우리 세  사람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사손을 보낼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본파의 천년 백년
의 영욕게 관한 사건이니, 장교주께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무기는 흥! 하고 소리를 냈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늙은이의 한쪽 눈을  잃은 원한은 오늘 그냥 넘겨 버린다고
해도, 장교주께서 사손을 구출하시겠다면 언제든 우리 세 사람의
금강복마권을 무너뜨리고 금모사왕을  데리고 떠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교주께서 누구든 몇  명이든 불러와, 차례 차례로 공격
하든 한꺼번에 공격하든 마음대로 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우리 셋이 상대할 겁니다.  그리고 장교주께서 다시 여기에 찾아
올 때까지  절대로 사손의 안전을  보장하겠습니다. 절대로 그를
모욕하거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드립니
다."

 장무기는 어둠 속에서  사손을 쳐다보니, 고개를 숙이고 오로지
왕년의 자기의 죄과를 뉘우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왕년의 그
기세 당당한 위풍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장무기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오늘은 이 노승들을 이겨 낼 수 없다. 그리고 의부님이 절대로
떠나려고 하지 않으니 별  수 없이 외할아버지와 양좌사, 범우사
등과 다시 싸우러 와야겠구나. 이 세 개의 밧줄이 서로 단합하면
철벽과 같아, 조금  전에 도난 대사가 나의  등에 일장을 뻗지만
않았다면 그 복태라는 노인이 절대로 세 노승에게 접근하지 못했
을 것이다. 아마 다음에 외할아버지와 좌우광명사가 나를 돕는다
해도 격파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갈 데까지 가보자.'

 그렇게 생각을 굴리던 장무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시다면 다음 기회에 다시  찾아뵙고 세 분 대사에게 한 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그리고 난  후, 장무기는 사손의 허리를  끌어안고 낮은 소리로
작별을 고했다.

 "의부님, 무기는 이만 여기를 떠나겠습니다."

 사손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라. 나는 절대로 여기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넌 착한 녀석이라  나쁜 일도 모두 좋게 해결할 수
있을거다. 절대 너의 부모님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라. 네 아버
지를 배우되 이 의부는 배우지 말아라!"

 "아버님과 의부님은 모두 영웅 호걸입니다. 두 분 다 모든 점이
무기의 모범입니다."

 말을 끝낸 장무기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난 후, 몸을 번쩍
하고 움직이자 어느새 세  그루의 소나무 사이에서 벗어났다. 그
리고 소림 세 노승에게 손을 흔들며 경공을 전개하자, 어느새 그
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순식간에 벌써  몇 리 밖에
떨어져 있었다.

 산 위의 한쪽에 있던 소림 승려들은 모두 서로 쳐다보며 믿으려
고 하지를 않았다. 명교  장교주의 무공이 탁월하다는 소문은 이
미 들어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신기한 경지에 도달해 있을 줄
은 정말 예상밖이었다.

 장무기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자 일부러 한 수 보인 것이었다.
그러면 소림 승려들이 겁을 먹고 사손을 잘 대해 줄 것이라고 생
각했던 것이다.

 장무기가 내기를  끌어모아 휘파람을 불자  소리는 그치지 않았
다. 천둥 번개가 치는  가운데에서 울리는 휘파람소리는 용이 승
천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달리자 점점 속도가
빨라졌고, 휘파람소리도 점점 크게 퍼졌다.

 소림사의 천여 승려들은 모두 그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휘파람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자 그제서야 자기들끼리 수근대며 의론이
분분했다. 공문, 공지 두 노승도 장무기가 온 것을 알고 한 가지
걱정이 더 늘어 수심에 잠겼다.

 장무기는 쏜살같이 몇 리길을  달려왔는데 갑자기 길 옆 버드나
무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부르며 나무 뒤에서 튀어나왔다.

 "여보세요?"

 그것은 바로  조민이었다. 장무기는  휘파람과 발걸음을 동시에
멈추고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온몸이 비에 젖어 머리와 얼
굴에서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림사의 중들과 싸웠어요?"

 "음!"

 "사대협은 어떻게 됐어요? 만나 봤어요?"

 장무기는 그녀의 팔을  잡고 빗 속을 걸으며  조금 전의 일들을
모두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 무슨 실수를 저질렀기에 그들에게 잡히게 되었대요?"

 "오로지 구출해 낼 생각뿐이어서 그런 것은 물어 보지 못했소."

 조민은 탄식을 하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왜 기분이 좋지 않소?"

 "당신한테는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나한테는 중요하지만, 됐어
요. 사대협을 구출한 후 물어도 늦지 않아요. 난 단지....."

 "뭘 걱정하는 거요? 의부님을 구출하지 못할까봐 그렇소?"

 "명교의 세력이 소림파보다는 훨씬 강하니 사대협을 구출해내지
못하지는 않지만,  난 다만 사대협께서  잘못 생각하고 자살로서
공견 신승의 죄값을 치를까봐 걱정이 되어요."

 장무기도 바로 그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실까?"

 "그렇지 않기를 원해야지요."

 두 사람은 어느새 두씨 부부 집 앞에 당도하였다.

 조민이 웃으며 장무기에게 말했다.

 "당신의 신분이 노출됐으니  이젠 더 이상 이  두 분을 속일 수
없어요."

 문이 반쯤 열린  것을 본 장무기는 문을  밀어 열고, 옷에 묻은
빗물을 털고 난 후에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피비
린내가 풍기는 것이었다. 장무기는  깜짝 놀라 조민을 문 밖으로
밀어내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손을 뻗어 자기를 잡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민첩한 동작이라 조금도 기척을 내지 않았다. 장
무기가 그것을 눈치챘을 땐 이미 그 손이 자기의 얼굴에 와 닿았
을 때였다.

 장무기는 이미 피할 여유가 없어 왼쪽 발로 상대의 가슴을 걷어
차자, 상대는 재빨리 손을 내려 장무기 다리의 환도혈(環跳穴)을
찍는 것이었다. 정말 잔인한 초식이었다.

 만약 장무기가  다리를 거둔다면 상대의  왼손은 자기의 눈알을
뽑을 것이  틀림없었다. 장무기는 그렇게  판단하고 손으로 대강
짐작하고 상대의 손을 막자 다행히도 짐작대로 상대의 왼손이 그
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바로 이때 환도혈이  마비되어 서 있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장무기는 상대의 손을 부러뜨리려고
하는 순간,  부드러운 감촉을 인지하고는  상대가 여자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잔인하게 손목을 부러뜨리지 못하고 밖으로 내
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 순간에 어깨에 통증이 스며들며 이미 칼
에 맞고 말았다.

 상대는 밖으로 몸을 날리며 조민의 얼굴을 향해 장풍을 뻗었다.
장무기는 조민이 절대로 이  일장을 받아낼 실력이 못되므로, 장
풍을 맞고 즉사할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고통을 참고 일어나 그
도 상대를 향해 장풍을 뻗었다. 쌍장이 서로 부딪치자 그녀의 몸
집이 휘청거리며 쌍장이 부딪치는  힘을 빌어 수 장 밖으로 몸을
날려 어느새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조민은 깜짝 놀랐다.

 "누구냐?"

 그러자 장무기가 윽! 하며 대답했다.

 어깨에 꽂혀 있는  단도가 혹시 독이 있을까봐  금방 뽑지 않았
다.

 "우선 불을 켜시오."

 조민은 부엌으로 내려가서 화도화석(火刀火石)을 찾아와 등잔불
을 밝혔다. 그의 어깨에 꽂혀 있는 단도를 보자 몹시 놀랐다. 그
러나 장무기는 칼날에 독이 없는 것을 보자 웃으며 말했다.

 "외상에 불과하니 걱정할 것 없소."

 그러더니 바로 칼을 뽑아냈다. 고개를 돌려보니, 두백당과 역삼
랑은 한쪽 구석에 움추리고  있었다. 순간 상처에 지혈하는 것도
잊은 채 급히 다가갔으나 두 사람은 이미 죽은 지 오래 되었다.

 조민은 놀라며 말했다.

 "내가 나갈 때 그들 두 사람은 무사했는데....."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민이 상처를 감싸주자 그는 단
도를 집어  보았다. 바로 두씨 부부가  사영하던 병기였다. 순간
방 안에 온통 단도가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필시 적과 두씨 부
부는 한 차례 격렬한  격투를 벌이면서 그들 부부의 단도를 하나
하나 날려보낸 다음에 살해한 것 같았다.

 조민이 말했다.

 "그 자의 무공은 정말 무섭군요."

 방금 암흑 속에서 서로 격투할 때 만약 장무기가 재빨리 피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장님이 될 뿐만 아니라  자기와 조민은 이미
벌써 죽었을 것이다. 다시 두백당 부부의 시신을 보니, 갈비뼈가
전부 부러져 있었다. 등 뒤의 늑골마저도 똑같이 부러져 있었다.
몹시 악랄하고 무서운 장력에  상한 것 같았다. 장무기는 수많은
강적을 만났었고,  또 수많은 위험을  당했었지만 방금 암실에서
그 세 차례의 접전을 회상해보니 생각할수록 놀라워서 어찌할 바
를 몰랐다.

 조민이 다시 물었다.

 "그게 누구예요?"

 장무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조민은 갑자기 알아
차린 듯 겁에 질린 눈  빛을 나타냈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장무
기의 품 안으로 안기더니  놀래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장무
기는 그녀의 등을  살며시 토닥거리며 부드럽게 타이르며 위로해
주었다.

 조민이 말했다.

 "그 자가 노린 건 나예요.  먼저 두씨 부부를 죽이고 나서 여기
에 숨어 있다가  날 암습하려 했어요. 당신을  상하게 할 생각은
절대로 아닙니다."

"앞으로 며칠 동안 당신은 절대로 내 곁을 떨어져선 안 되오!"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다.

 "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어떻게 내력과 무공이 그처럼 발리 진
전될 수 있을까? 어쩌면 당세에 나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을 것 같소!"

 다음날 아침  장무기는 두백당이 쓰던  곡괭이로 깊은 구덩이를
하나 팠다. 두씨 부부를 매장하고 나서 조민과 함께 꿇어앉아 절
을 몇 번 했다. 막상  역삼랑이 자기들한테 따뜻하게 대해 준 것
을 생각하니 모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계속 ---


#2923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6장 #4/5             03/21 20:58   405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6 장 세 고승(高僧)과 사손의 행방(行方) #4/5

 순간 갑자기 소림사의  종소리가 댕댕..... 하며 끊임없이 울리
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몹시 다급한  소리였다. 그러자 바로
동쪽에서 청색 연기 한  줄기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남쪽에선 홍
색, 서쪽에선 백색, 북쪽에선 검정색이고, 몇 리 밖에는 황색 연
기가 솟아올랐다. 그러자 장무기가 소리쳤다.

 "명교의 오행기가 전부  당도해서 소림파와 정면으로 싸우고 있
군. 우리도 빨리 갑시다."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세수한 다음에  빠른 걸음으로 소림사를
향해서 달려갔다. 몇 리쯤 달려가니 흰 옷을 입은 명교의 교도들
이 손에 작은 황색 깃발을 들고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장무기는 소리쳤다.

 "안기사(顔棋使), 거기 있소?"

 후토기 장기사 안원이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니 바로 교주가
보였다. 너무나  반가워서 얼른 앞으로  다가가서 인사하며 참견
(參見)했다. 그러자 휘하의 교도들은 환호성을 외치며 일제히 땅
에 엎드렸다.

 교도들은 호각을 울려서 교주가 온 것을 알렸다. 잠시 후 양소,
범요, 은천정, 위일소, 은야왕, 주전, 팽영옥, 설불득, 철관도인
등이 차례로 각처에서 달려왔다. 예금, 거목, 홍수, 열화 사기의
교도들은 사방으로 나뉘어 소림사를 포위했다. 각자 서로 만나게
되자 모두 대단히 기뻐했다.  양소와 범요는 제멋대로 일을 결단
한 죄를 사과했다.

 장무기가 말했다.

 "여러분께서 너무 지나치게  겸손하지 마세요. 여러분께서 일제
히 합력하여  사법왕을 구하러 온 것은  본교의 형제분들의 의기
(義氣)가 아닙니까?  본인은 고마움을 느낄  뿐인데 어찌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이윽고 자기가 소림사에 잠입했던  일과 어젯밤에 도액 등 삼승
과 싸웠던 일들을 간략하데  말해주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성
곤의 간계란 말을  듣더니, 한결같이 분노했다. 주전과 철관도인
은 더욱 욕설을 퍼부었다.

 장무기가 말했다.

 "오늘 본교는 정정당당하게  소림 방장한테 의부를 달랠 것이니
될 수  있으면 서로의 화기(和氣)가 상하지  않도록 하기 바랍니
다. 정히 할  수 없이 싸우게 되더라도  우리는 첫째는 사법왕을
구하고, 둘째는 성곤을 잡아야 합니다. 그 외에 무고한 인명피해
는 절대로 있어선 안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일제히 응답했다.

 장무기는 조민에게 말했다.

 "민매, 당신은  아무래도 변장하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래야만
소림사의 승려들이 당신 신분을 알아내지 못할 것이고 또 미연에
사고를 방지할 수 있소."

 지난번 그녀는 소림의 승려들을 잡아서 대도에 감금하였기에 소
림파와 깊은 원한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민은 웃으며 말했다.

 "안대형, 전 당신 휘하에 있는 형제로 변장하겠어요."

 안원은 즉시 명령을 하달하여  한 형제의 외투를 벗겨서 조민에
게 걸쳐 주었다. 조민은 뒷산으로 달려가서 급히 화장을 고쳤다.
잠시 후 숲  속에서 나올 때는 이미  얼굴은 검고 사나운 남자로
변했다.

 호각이 다시 울리자 명교의  군웅은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산
으로 올라갔다.  소림사에는 벌써  명교의 배산첩자(拜山帖子)를
받았기에 공지대사는 승려들을  대동하여 산정(山亭)에서 기다리
고 있었다. 공지는 원진의 말을 깊이 믿고있는 터라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합장하며 인사만 할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장무기는 포권하며 말했다.

 "폐교는 귀파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방장신승님을 뵈오러 왔
습니다."

 그러자 공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듭시지요."

 이윽고 명교의 군호를 안내하며 산문(山門)쪽으로 갔다. 공문방
장은 달마당, 나한당, 반약당,  계율원 각처의 수좌 고승을 대동
하여 산문 밖에서 영접했다. 군호를 대웅전으로 모시자, 빈주(賓
主)로 나눠서 자리에 앉았다.

 공문은 장무기, 양소, 은천정 등 사람들과 인사말만 몇 마디 나
누고 나서 곧 침묵을 지켰다. 장무기가 말했다.

 "방장신승님, 우리가 여기에 온 목적은 방장께서도 같은 무림의
일맥(一脈)으로서 폐교의 사법왕을 놓아 주십사하고 간곡히 부탁
하러 왔습니다.  그 대은대덕은 훗날  기필코 보답해 드리겠습니
다."

 "아미타불, 출가인은  자비가 근본이라 계진계살(戒嗔戒殺)하기
때문에 사시주에게  대한 것은 부당한 줄  알고 있지만, 노납(老
衲)의 사형인 공견께서  사시주의 손에 목숨을 잃었소. 장교주께
서는 일교의 주인이시니 무림의 규칙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 중간에는 다른 까닭이 있었기에 사법왕만 나무랄 수 없습니
다."

 그리고는 공견이 자의로 주먹을  맞으며 무림의 일대 원업을 무
마시키려했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공문  등은 미처 아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일제히 염불을 외우며 공손하게 일어섰다.

 공문은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공견사형께서 그런 크나큰 선행을 대원력행(大願力行)하셨으니
그 공덕은 실로 예사로운 게 아닙니다."

 승려들은 작은  소리로 염불을  외우며 공견의 인협고의(仁俠高
義)에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자 명교의 군호도 일제히 일어
나며 존경의 뜻을 치하했다.

 장무기는 그날 있었던  일을 상세히 말해 주고  나서 다시 말했
다.

 "사법왕께서는 실수하여 공견신승을  상한 걸 매우 후회하고 있
습니다. 한데 사건이 있은 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일의 괴수는
바로 원진대사란 걸 알았습니다."

 그는 대전 안에 원진이 안 보이자 다시 말했다.

 "원진대사님을 불러내서 대질하면  즉시 시비를 가리게 될 겁니
다."

 주전이 가로채서 말했다.

 "맞습니다. 광명정에서 그 독려(禿驢)는 죽은 걸로 가장했다 다
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니 어찌 좋은 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빨리 그놈한테 굴러 나오라고 하시오!"

 그날 주전은 광명정에서 원진에게  몹시 당해서 줄곧 한을 품고
있었다. 그러자 장무기가 얼른 말했다.

 "주 선생님, 방장대사님 앞에서 무례하면 안 됩니다."

 "난 원진 그 독려를 욕한 겁니다. 절대로 방장, 그 독....."

 그는 실언했다는 것을 알고 얼른 자기 입을 손으로 막았다.

 공지는 주전의 말이 무례하자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그렇다면 우리 공성사제의  죽음은 장교주께선 또 어떻게 설명
합니까?"

 "공성대사님께서 뜻밖에  당하신 사고는  본인도 몹시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그 일은 간인(奸人)의 암습이지 폐교와는 실로 무관
합니다."

 공지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교주께서 아주 깨끗이  부인하는구료. 그렇다면 여양왕의 군
주와 명교가 연수(聯手)한 일도 거짓이란 말이오?"

 "여양왕부 군주와 그녀의 부형(父兄)간에 사이가 윤택하지 못해
서 폐교에 투신한 겁니다. 지난 날 군주가 귀사에게 많은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 본인은  꼭 그녀에게 명하여 정중히 사과 올
릴 겁니다."

 공지가 소리쳤다.

 "장교주께서 그처럼  사탕발림 말을 해도  되는 겁니까! 일교의
주인인 당신이 그처럼 망발을 하면 천하의 영웅들이 얼마나 당신
을 비웃을지 모르십니까?"

 공성을 상해하고 승려들을  감금했던 일을 생각하니, 그건 확실
히 조민이  대단히 잘못한 것이었다.  비록 명교와 무관하다지만
그녀는 목하 자기에게  투신돼 있기 때문에 깨끗이 밀어버리지는
못하는 일이다. 마침 난처해  있을 때 철관도인이 무서운 소리로
말했다.

 "공지대사, 우리 명교가 당신을 선배 고승으로 존경하여 체면을
충분히 고려해 주었으니 당신도  자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교주님께서는 신의를  중요시 여기시는데  어찌 거짓말을 하시겠
소? 당신이 우리 교주님을 모욕하는 것은 바로 우리 명교의 백만
교도를 모욕하는 것이오! 설령  우리 교주님이 도량이 커서 따지
지 않는다 해도 우리 같은 부하들은 절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습
니다!"

 그러자 공지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만의 교도가 어찌하겠단  말인가? 소림사를 평지처럼 짓밟아
버리겠단 말인가? 마교가 우리  소림을 모욕하는건 어제 오늘 일
이 아니다. 우리가 실수하여  만안사에 감금되었던 것은 단지 자
신이 소홀한  걸 나무라고 있다.  옛부터 정사(正邪)는 양립하지
않아서 그것도 별거 아니다.  너희들은우리 소림사에 와서 십육
존 나한상의 등에 열 여섯 자의 큰 글씨를 새겨 놓았다. <선주소
림(先誅小林) 재멸무당(再滅武當)  유아명교(維我明敎) 무림칭왕
(武林稱王)> 실로 위풍당당하고 살기등등하다!"

 이 열 여섯  자의 글씨는 바로 조민의  수하 무사들이 소림상을
잡아간 뒤에 예리한 칼로 십육존 나한의 등에 새긴 것이다. 범요
는 그들이 소림사를 나가자마자 바로 몸을 날려서 나한상으로 돌
아가서 십육존 나한상의 등을  벽으로 향하게 돌려 놓았었다. 그
래야만 조민이 저지른 화를 명교가 뒤집어 쓰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중에 양소  등도 발견했지만 보고 나서 나한상들
을 여전히 똑바로 옮겨  놓았다. 그런데도 소림승들이 알아낸 것
이다. 장무기는 말재주가 없었고, 또 그것은 조민이 저지른 것을
생각하니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답변할 말이 없었다.

 양소가 말했다.

 "공지대사님의 말씀은 우리는  알아듣지 못하겠구료. 폐교의 장
교주께서는 무당제자 장오협의  공자란 걸 강호에서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만 배 더 광망해도 감히 교주님의 선
인들을 모욕하지 못합니다. 장교주 자신이 어찌 재멸무당(再滅武
當)이란 글을 새기겠습니까? 본인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믿
습니다!"

 그러자 공문이 말했다.

 "여러분께서는 여기서  논쟁해봐야 아무  이익도 없으니 노납을
따라 나한당에 가서 나한법상을  직접 보기로 합시다. 그러면 누
가 옳고 누가 잘못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장무기는 일단  나한당에 들어가게 되면  당장 진상이 밝혀지게
될까봐 몹시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 양소가 말했다.

 "그것 아주 좋습니다!"

 장무기는 어리둥했다. 그러나  조민은 후토기에 섞여 있어서 소
림사에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소림승이 발견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자 그다지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윽고 지객승의 안내로  사람들은 나한당으로 갔다. 공문은 나
한상에 무릎꿇고 말했다.

 "제자가 나한존자법상을 놀라게 하더라도 용서하십시오."

 절을 하고 나서 여섯 명의 제자에게 명해서 법신을 공손하게 이
전하라 했다. 그러자 여섯  명의 제자는 분부대로 다가가서 합장
하며 몇 마디 묵축(默祝)했다. 그러한 뒤에 세 사람이 한쪽을 맡
아 양쪽 옆으로 서서 첫  번째 나한상을 돌렸다. 그러나 그 나한
상의 등은 이미 판판하게 깎이고 금칠이 칠해져 있었다. 원래 있
었던 그 큰 선(先)자는 전혀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공문, 공지 등만 깜짝 놀란 게 아니라 장무기도 너무나 뜻밖이었
다.

 소림의 제자들은 일제히  다른 나한상도 일일이 돌려 보았으나,
등에는 전혀 글을 새겼던  흔적이 없었다. 순간 승려들은 얼굴만
서로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나한상의 등에
큰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었다. 그걸 합치면 바로
<선주소림 재멸무당 유아명교  무림칭왕> 등 열 여섯 글자였는데
어찌 갑자기 사라졌단 말인가!  나한상의 등에 칠한 금칠은 아주
새 것인 점으로 보아서 칠한 지 얼마되지 않았다. 그러나 소림사
는 근 수 개월 동안에 수비를 얼마나 엄밀하게 했는가. 그 열 여
섯 글자를 깎아내고 다시  금칠을 입히려면 실로 쉬운 일이 아니
었다. 그런데 어찌 사내의 승려들이 전혀 모르고 있단 말인가?

 장무기가 고개를  돌리자 위일소와 범요가  마침 서로 바라보며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본교의 형제들이 처리한 것을 깨
닫게 되었다.

 양소는 승려들이 경악하는 것을 보더니 바로 말했다.

 "귀사는  복택심후(福澤深厚) 공덕무량(功德無量)해서  열 여섯
분 존자의 금신은 완전 무결합니다. 어쩌면 공지대사님의 말씀대
로 좀전에는  간인에게 훼손당했는데  십육존 나한께서 현령하여
즉시 자신들이 보완했을 겁니다. 실로 기쁘고 축하해야 할일입니
다."

 말을 하면서 나한상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그러자 장무기
등도 따라서 일제히 절을 했다.

 공문, 공지 등은 물론 그의  말을 믿지 않았고, 또 명교가 몰래
한 짓이라고 단정했지만, 어찌 되었던간에 본사에게 사과하는 뜻
으로 보완시켰으니, 그들의  분노도 많이 풀렸다. 하지만 마두들
의 신출귀몰한 수단에 몹시 탄복하면서도 놀래서 겁을 먹고 있었
다.

 공문이 말했다.

 "나한상은 원상태로 되었으니 이 일은 다시 거론하지 맙시다."

 이윽고 손을 휘둘러서  나한상을 돌려 놓으라고 명령하였다. 그
리고 나서 다시 말했다.

 "어젯밤 장교주께서 왕림하셔서 이미 노납의 세 분 사숙님을 뵈
었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도액  사숙님과 장교주님이 약정을
하셨다지요? 만약 장교주께서 우리 세 분 사숙님의 금강복마권을
돌파하면 사시주를 데려가라고 했다고요?"

 장무기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도액 대사님께서  분명히 그 말을 하셨습니다. 그
러나 세  분 고승의 무공은 너무나  고심(高深)하셔서 적수가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어젯밤은 세 분 고승의 손에 패했
습니다. 패군지장이 어찌 용감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미타불, 장교주께서 과분한 말씀을 하시는구료. 어젯밤은 승
부를 가리지 못했고. 게다가  교주께서 출수하여 도와준 것에 대
해서 세 분 사숙님은 깊은 사의를 표하십니다."

 양소, 범요 등은 장무기에게  도액 등 삼승의 정묘한 무공에 대
해서 들었기에 모두 한번 만나고 싶었다.

 은천정이 말했다.

 "소림의 고승들께서  무학의 고저(高低)를  갈기 고집하시는 것
같은데, 교주님, 우리의  미천한 힘이나마 소림파의 절학을 가르
침 받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사형제를 구출하러
왔으니 실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무림을 이끌
고 있는 소림사에 와서 무례를 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장무기는 외조부의 말을 항상 존중하였다. 또 별다른 좋은 방법
도 없는 것 같았다.

 "비록 형제 여러분께서 제가 세 분 고승의 개세신공을 찬양하는
걸 들었지만, 그 세 분 고승께서는 수십 년 동안 좌관(坐關)하셔
서 무림에는 그들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운
이 있어서 뵙게 된 것을 평생의 행운이라 생각하십시오."

 그러자 공지는 손을 들며 말했다.

 "가시지요."

 이윽고 군호를 데리고 뒤에 있는 산봉우리로 갔다.

 명교의 홍수기 교도들은 장기사 당양의 분부대로 산봉우리 밑에
진을 치고 있었다. 매우  장엄한 성세였다. 공문 등은 마치 보지
못한 것처럼 지나치면서  산봉우리로 올라갔다. 공문, 공지는 합
장하여 소나무 옆으로 다가가서 몸을 굽히며 보고했다.

 도액이 말했다.

 "양정천의 원한은 이미  어젯밤에 마무리지었고, 나한상의 일도
오늘 해결했다니 정말 잘 했다. 장교주, 당신들은 몇분이 나와서
싸울 거요?"

 양소 등은 세 스님의 왜소한  몸이 소나무 줄기에 끼워 있는 것
을 보더니, 마치 비쩍마른  시체 세 구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말
소리가 계곡을  울리게 하는 것을 보면  내력이 엄청나게 심후한
것으로 여겼다.

 장무기는 잠시 생각했다.

 '어젯밤은 나 혼자라서 그들  셋을 이기지 못했다. 오늘은 많은
사람이 있다. 만약에 한꺼번에  덮쳐가면 장소가 너무 좁을 뿐더
러 의다위승(倚多爲勝)하기 때문에  본교의 위풍을 꺾는 일이다.
많아도 나쁘고 적어도 안  되니 우리쪽에서 세 사람이 나와서 그
들 셋을 상대하면 제일 공평하겠다.'

 "어젯밤 제가 세 분  고승의 신공을 견식하고 나서 진심으로 탄
복했습니다. 그러나 사법왕께서는  저와 부자의 은혜가 있고, 여
러 형제들과는  친구의 신의가 있기에 설령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를 꼭 구해야 합니다. 저는 교중의 두 분 형제에게
도움을 청해서 삼 대 삼으로 싸울까 하는데, 어떠시겠습니까?"

 도액이 담담하게 말했다.

 "장교주께서 지나치게 겸손할 거 없습니다. 만약에 귀교에서 또
한 분의 무공이 교주와 같은 분이 있다면 단지 두 분만 연수하게
되면 우리 세 늙은 대머리를  죽일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노납
의 생각으로는 교주와 같은  무공을 지닌 사람은 이 세상에 또다
시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나오
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주전, 철관도인 등은 서로  쳐다보며, 이 중놈이 너무나 광망하
여 천하의 영웅들이 안중에  없다는 듯이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말투에는 그래도 자신이 장교주를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인
정하였기에 그런대로 겸손하다고 할  수 있었다. 주전이 입을 벌
려 말을 하려는데 설불득이 재빨리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비록 폐교가 방문좌도(蒡門左道)라서  귀파같은 명문과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수백 년의 본바탕이 있기 때문에 많은 인재
가 있습니다. 소인은 기회가  있어서 잠시 교주의 직책을 대행하
고 있습니다. 사실 학식과  무공을 논한다면 폐교 중에도 소인을
능가한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위복왕님, 수고스럽지만 이 명
첩(明帖)을 세 분 고승에게 돌리십시오."

 말을 하면서 명첩 한 장을 꺼냈다. 위에는 장무기, 양소, 범요,
은천정, 위일소 등등 이번 배산하러 온 군호의 이름이 적혀 있었
다.

 위일소는 교주가 자기의 당세 무쌍한 경공을 과시하려는 의도를
알았다. 즉시  몸을 굽히며 대답하고 나서  명첩을 받아 들었다.
몸이 채 똑바로  서기 전에 몸을 돌리지  않고 즉시 거꾸로 튕겨
나갔다. 마치 한 줄기 가벼운  연기처럼 수십 장 떨어진 세 그루
소나무 사이에 표연히 날아갔다.  이윽고 쌍장을 한 바퀴 둘려서
명첩을 도액에게 넘겨 주었다.

 도액 등 세  승려는 눈깜짝할 사이에 바로  자기들 앞에 다가온
경공을 실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더구나 그는 거꾸로 튕겨 왔
으니 그야말로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만 자신도 모르게
칭찬을 했다.

 "정말 대단한 경공이오!"

 소림승들은 모두 무공을 볼  줄 알았기에 즉시 우뢰같은 갈채를
보냈다. 명교의 군호들은 비록  위일소의 경공이 대단한 줄 알고
있지만, 이처럼 뒤로 거꾸로 튕기는 신법은 그들도 처음 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각자는 자기편  사람을 칭찬하기 뭣해서 내심 탄
복하여도 모두 소리를 내지 않았다. 유독 주전 한 사람만 박수치
며 칭찬했다.

                                                    계속 ---


#2924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제6권 6장 #5/5 6권끝       03/21 21:00   402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6 장 세 고승(高僧)과 사손의 행방(行方) #5/5

 도액이 살짝  몸을 굽혀서 명첩을 받았다.  그이 다섯 손가락이
명첩에 닿는 순간 위일소의 전신은 한 차례 마비되었다. 마치 천
둥에 놀란 것처럼 흉구가 뜨거워지며 하마터면 몸이 쓰러질 뻔했
다. 그는 몹시 놀랬다.  얼른 운공하여 몸을 지탱하였다. 도액이
명첩을 받아가자 명첩에서  전해오던 한줄기 내경도 바로 사라졌
다. 위일소는 안색이 변하며 이 노승의 내력이 정말 너무 깊어서
예측할 수 없을 정도라고 생각되었다. 감히 더 머물지 못하고 몸
을 옆으로 비스듬히 해서  긴 풀 위로 미끄러지면서 장무기의 곁
으로 돌아왔다.  이 초상비(草上飛)의 경공은  비록 특이한 것은
없지만 이처럼 마치 허공에서 날아다닐 정도로 연마하는 것도 신
기에 가까운 것이다.

 공문, 공지 등은 모두 생각했다.

 '이 자의 경공 조예가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물
론 고인의 전수를 받았겠지만 그래도 천부적으로 타고 나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연마해도 절대로 이러한 경지에 도
달하지 못할 것이다!'

도액이 말했다.

 "징교주께서는 귀교에서  세 분이  출전하신다더니 교주와 이분
위복왕 외 어느 분께서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위복왕께서는 이미 대사님의 내경신공을 가르침 받았으니 소인
은 명교의 좌우 광명사자가 돕게 할 것입니다."

 도액은 내심 놀랐다.

 '저 소년의 안력은 대단히  예리하구나. 방금 내가 슬며시 떨친
내공은 단지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인데 그가 간파하였구나. 좌우
광명사자라니, 그렇다면 이 위가란  자보다 무공이 더 높단 말인
가?'

 그는 오랫 동안 좌관하였기에 양소의 명성을 전혀 들은 바가 없
었다. 더구나  범요는 나이가 많아지고부터  이름을 숨겨 왔으니
다른 사람은 당연히 그를 몰랐다.

 양,범 두  사람은 교주가 자기들 이름을  들먹이자 즉시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서 몸을 굽히며 말했다.

 "교주님의 호령을 삼가 받들겠습니다."

 "세 분  고승께서는 부드러운 병기를  사용하는데, 우리는 무슨
병기를 사용할까요?"

 장,양,범 셋은 평소에 적을 맞이할 때 모두 빈손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강적을 대하게 되어서  병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셋은 일법통(一法通) 만법통(萬法通)해서 무슨 병기든지 모두 사
용할 수 있었다. 장무기의 그  말은 두 사람에게 편리한 것을 따
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양소가 말했다.

 "교주님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장무기는 잠시 생각했다.

 '어젯밤에 하간쌍살에 짧은  것으로 긴 것을 공격하는데도 그런
대로 덕을 보는 것 같았다.'

 즉시 품안에서 성화령 여섯개를 꺼내더니 네개는 양,범 두 사람
에게 나눠주며 말했다.

 "우리가 소림사에  배산하러 왔기에  병기를 소지하지 못했습니
다. 이건 본교의  진교보물이니 여러분들께서 알아서 사용하십시
오."

 양,범 두 사람은 몸을 굽혀서 받아들고 간략하게 사용법을 물어
보았다.

 공지가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고두타, 우리가  만안사에서 있었던 일을  어찌 이대로 지나칠
수 있겠소. 오늘 십향연근산을  복용하지 않았으니 각자 제 실력
을 발휘해 봅시다!"

 그는 만안사에 감금되었던 원기(怨氣)를 발산하지 못했다. 오늘
범요를 보는 순간부터  줄곧 울화를 참아왔는데, 이  때 더 이상
참지 못한 것이다.

 범요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인은 교주님의 호령을 받들어 세 분 노승께 가르침을 받으려
합니다. 대사님께서 지난 날의 원수를 갚으려 하거든 이 일이 끝
나는 대로 다시 상대해 주겠소."

 공지는 곁에 있는 제자의 수중에서 장검을 받아들고 소리쳤다.

 "네 실력으로 우리 세  분 사숙님과 싸우면 설령 죽지 않더라도
중상을 입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 원수는 갚지 못하게 될 것
이다!"

 범요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당신 사숙님 손에 죽더라도 마찬가지다!"

 공지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명교에는 각하 말고 또 다른 분의 고수가 안 계십니까?"

 그의 이 말이 격장법이라는  것을 명교의 군호가 어찌 모르겠는
가? 그러나 만약에 이 말을 그냥 지나쳐 버리면 도리어 소림파가
본교를 얕잡아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열로 따지자면 범요의
밑에는 바로 백미응왕 은천정이 있다. 장무기는 외조부의 나이가
많아서 외사촌인 은야왕을 출마하려 했는데 은천정이 한 걸음 내
딛으면서 말했다.

 "교주, 속하(屬下) 은천정이 나가겠소."

 "외조부님께서는 연로하시기에 외삼촌을....."

 "내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세 분 고승보다는 적습니다. 소림파
에 석덕기숙(碩德耆淑)이 있는데  우리 명교에는 노장이 없을 수
있습니까?"

 장무기는 외조부의 무공이 심담(深湛)하여 양소, 범요에 버금가
고 외삼촌보다 훨씬 고강한 줄 알고 있었다. 만약에 그가 출전하
면 몇 푼의 자신이 더 많았다.

 "좋습니다. 범우사께서는  힘을 아끼셔서  나중에 공지신승에게
가르침을 받으십시오.  그렇다면 외조부님께  구원을 청하겠습니
다."

 "알겠습니다."

 은천정은 대답하고 나서 범요에게 성화령을 받아들었다.

 공문 법장이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세 분  사숙님. 이분 은  노영웅께서는 사람들이 백미응왕으로
칭합니다. 왕년에 자신이 천응교를 창설하여 혼자 힘으로 육대문
파와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실로 대단한 영웅호한입니다. 이
분 양 선생님께서는 내공과 외공이 겸비한 명교의 일류급 인물입
니다. 곤륜, 아미 양파의 고수들도 그의 손에 많이 패했습니다."

 도겁이 몇 번 웃으며 말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잠시 후 소림문파 제자의 무공이 어떠한지
구경하시죠."

 세 스님이 흑색(黑索)을 한 번 휘둘자 마치 세 마리 묵룡(墨龍)
처럼 세 겹의 원을 형성하였다.

 장무기가 어젯밤에 세 스님과  결투할 때는 몹시 어두웠기 때문
에 흑색의 경기(勁氣)로  상대방의 병기가 날아오는 것을 판단했
다. 그러나 지금은 햇빛이 찬란하게 비춰서 세 스님의 얼굴에 있
는 주름살마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성화령을 거꾸로 돌려
서 포권하며 몸을 굽히고 말했다.

 "실례를 범하겠소."

 이윽고 몸을 옆으로 하더니 바로 공격했다. 양소는 몸을 날려서
왼쪽으로 갔다.  은천정은 대갈일성하더니  오른손으로 성화령을
쳐들고 도난의  흑색 위로 후려쳤다. 그러자  당궁! 하며 소리가
나면서 색과 령이  맞부딪쳤다. 이 두 가지  괴상한 병기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도 매우 괴이했다.  두 사람의 팔목이 모두 심하게
한 번 울렸다.

 '정말 대단하다!'

 장무기는 잠시 생각을 굴렸다.

 '세 스님의 흑색이 원을  형성하니 초수가 매우 엄밀하군. 비록
우리 세 사람이 연수하게 되더라도 사,오백 초 안에는 절대로 격
파할 수 없겠다. 그러니 우선 세 스님의 내력을 소비시킨 다음에
천천히 빈틈을 노려야 되겠구나.'

 순간 흑색이 감겨오자 즉시 성화령으로 맞부딪치면서 상대를 공
격하였다. 격투가 한끼 식사 시간 정도 지나자 장무기등 세 사람
은 이미 색권(索圈)을 직경  일장 정도로 축소시켰다. 그러나 세
스님의 색권이  작아질수록 저항력은 더욱  강해졌다. 세 사람은
한 발 앞으로 공격할 때마다 전보다 몇 배의 힘이 더 들었다. 양
소와 은천정은 싸울수록 더욱 경악했다. 처음엔 삼 대 삼으로 격
투를 벌였는데, 반 시간이  지나자 양,은 두 사람은 점점 지탱하
지 못하고 두 사람이 한께 도난에게 공격하는 양상이 되었다. 그
러니 장무기는 혼자서 도액, 도겁 두 스님을 상대하며 격투했다.

 은천정의 공격은 모두 강맹하였고, 양소는 갑자기 부드러웠다가
도 갑자기 강맹하면서 변화무쌍하였다. 이 여섯 사람중에 양소의
무공이 제일 보기 좋았다. 성화령  두 개는 그의 손 안에서 돌면
서 춤추었다. 갑자기 검이 되었다가 갑자기 칼로 사용하고, 갑자
기 짧은 창으로  변해서 자(刺),타(打),전(輾),박(拍) 하더니 갑
자기 판관필로 사용했다. 게다가 어떤 때는 왼손에 비수로, 오른
손에는 강편으로 변하고, 왼손에는 철척(鐵尺)으로 변했다. 그렇
게 바쁜 와중에도 서로  부딪쳐서 당궁당궁! 하는 소리를 내가며
적의 심신을 교란시켰다.서로 격투한 지 사백초도 채 되기도 전
에 이미 스물  두가지 병기로 변했다. 병기마다  두 가지 초식을
사용했기에 모두 마흔 네가지 초식을 사용했던 것이다.

 공지는 소림파의 칠십 이 절예 중에서 열 한가지를 터득하였고,
범요는 천하의  무학을 훔쳐보지 못한 게  없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  양소의 신기를 막상 보게  되자 속으로 탄복하였
다. 주전과 양소는 평소에 갈등이 있어서 여러번 그와 쟁투한 적
이 있었다. 지금 그는 쳐다볼수록 더욱 부끄러워했다.

 '양소 저 자라새끼는 줄곧  나에게 양보했었구나. 전에는 난 그
의 무공이 나보다 약간 높은 줄만 알아서 싸움할 때마다 운이 좋
아서 나에게 일초 반식을 이겼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 나 주전은
그 자라새끼의 적수가 아니었구나.'

 양소가 어떠한  초식으로 변하더라도 도난의  흑색은 두 사람을
상대해도 여전히 위세가 꺾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은천정의 머리
에 흰 안개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자 그의 내력이 극치에 달했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흰  천으로 된 긴 도포가 천천히 부풀어오
르며 옷 안에는 기류가 충만되었다. 그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땅에는 죽인 하나씩 남겼다. 한 시간쯤 격투를 벌이자 세 그루의
소나무 둘레에는 그의 족인이 한바퀴 만들어졌다.

 순간 은천정은 느닷없이  오른손의 성화령을 왼손으로 옮기더니
도난의 흑색을 한번 누르고 나서 오른손으로 일초의 벽공장(碧空
掌)을 후려쳐서 그에게  공격했다. 그러자 도난은 왼손을 쳐들고
다섯 손가락을 허조(虛爪)하더니  다시 주먹으로 쥐어 같이 일장
을 후려쳤다.

 공지, 공문 등은 일제히 으응 하며 소리를 질렀다. 소리에는 경
악과 탄복이 동시에 충만되어  있었다. 원래 도난이 그에게 되돌
려 친 일장이 바로 소림  칠십 이 절예 중의 하나인 수미산장(須
彌山掌)이었다. 이 장력은 연성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뿐만 아
니라 설령 연성했더라도 출장할 때마다 필히 좌마운기(坐馬運氣)
하여 오랫 동안 정신을  집중시켜야만 내경을 단전에 모을 수 있
게 된다. 그런데 도난은 자유자재로 출장하였고, 바로 따라서 흑
색을 한번 휘둘더니 다시 양소에게 덮쳐가며 공격했다.

 그러나 도난이 수미산장으로 은천정과 대장(對掌)하더니 흑색의
경력이 절반 이상 감소되었다.  그는 즉시 교묘한 수법으로 감소
된 경력을 보충했다. 그러자 흑색의 놀림은 마치 예민한 뱀이 요
란스럽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양소의 성화령 두 개도 덩달아 변
화무쌍하였다. 방관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그들 두 사람의 격투
를 지켜보고  있었다. 은천정은 정신  통일하여 기를 끌어올려서
일장씩 후려치며 갑자기 앞으로  두 걸음을 전진하더니, 또 갑자
기 두 걸음  후퇴했다. 저쪽에서는 장무기가 일  대 이로 싸우고
있었다. 세 사람의 초식은  모두 괴이한 것이 없었고, 무도 내력
으로 전개하여 결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처럼 결투한 것은 은천
정의 투력과 양소의 투교보다  사실은 더욱 위험한 것이다. 만일
내력이 상대방에게  눌려서 잘못 들게 되면  즉시 죽지 않더라도
주화입마(走火入魔)하게 되어  미쳐버리는 일은  보통이다. 다만
이처럼 결투를 벌이면  오직 당사자만이 고통을 알지 방관자들은
아무리 무공이 높다해도 그들  세 사람의 초식에서 식별할 수 없
는 것이다.

 태양이 차츰 서쪽으로 기울어지자 공문, 공지, 범요, 위일소 등
고수들은 이때 승부의 실마리를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은천정의
머리 위의 하얀 연기가  점점 더 짙어지면서 도액이 앉아있던 그
소나무의 솔잎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도액과 도겁
이승의 공력도 전보다 상당한  차이가 생겼다. 이쯤 되자 도액은
소나무에 등을 기대어  나무의 힘을 빌어서야 장무기의 구양신공
을 상대할 수 있었다. 만약 은천정이 지탱하지 못하면 그는 바로
명교가 진 것이다. 만약 도액이 먼저 막아내지 못한다면 바로 소
림파의 패배다.

 출수하며 서로 결투를 하는 여섯 사람은 이런 사실을 더욱 명백
히 알고 있었다. 은천정은 도난과  서로 장력을 겨룬 지 삼십 여
장이 지나자, 이미 자기가 그의 적수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오늘의 목적은 사형제를 구하는 일이다. 나 개인의 승부영욕에
무슨 상관있단 말인가. 더구나 소림파의 선배고수의 손에 패하는
것이므로 내가 패하더라도  백미응왕의 위명이 손상된다고 할 수
없다.'

 이윽고 일장을 겨루고 나서  바로 뒤로 반 발자국 후퇴했다. 십
여 장을 겨루게 되자 이미 일장 밖으로 후퇴하여 있었다.

 수미산장은 소림파의  칠십 이 절예 중의  하나이며, 도난은 이
장법을 수십 년 동안 연마하였기에 그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은
천정이 한 걸음 물러날 때마다 도난의 장력은 바로 한 걸음 진격
했다. 경력은 거리를 멀리 끌어내도 전혀 감소되지 않았다.

 양소가 잠시 생각했다.

 '이 소림승은 과연 대단하구나.  내 성화령의 초수를 아무리 변
화시켜도 끝내 그를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백미응왕께서 혼자
내경을 감수하고 있으니 시간이 길어지면 아마 지탱하지 못할 것
이다.'

 이윽고 성화령 두 개를  합치면서 흑색을 휘어잡아 그와 똑같이
힘으로 맞서서 은천정의 무거운  짐을 나눠주려 했다. 그러나 뜻
밖에 흑색을 휘어잡는 순간, 도난이 손목을 한 번 휘두르자 흑색
은 곧장 위로 올라오며  양소의 면문으로 공격해왔다. 그러자 양
소는 재빨리 성화령을 도난의 흉구로 던지며 쌍장을 한번 돌려서
색두(索斗)를 휘어잡았다.  일초의 도예구우미(倒曳九牛尾)를 전
개해서 힘껏 밖으로 끌어당겼다.

 도난은 그의 병기가 출수하여 암기처럼 날아오는 것을 보자, 즉
시 왼쪽 팔꿈치를 살짝 내려서 왼쪽 가슴으로 날아오는 성화령을
눌러갔다. 그러자 다른 한  개는 중간에서 갑자기 방향을 돌리더
니 휫 하는 소리를 내면서  옆으로 도겁에게 날아갔다. 그 두 개
의 성화령 중 도난에게 공격한 것은 허(虛)였고 도겁에게 공격한
것은 온몸의 내력으로 발사한 것이다.

 도겁은 마침 장무기와  전력으로 대항하고 있었다. 게다가 도난
이 이미 양,은 두 사람에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을 보았지
만, 양소가 갑자기 괴상한 초수로 도습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
했다. 깜짝 놀라는 사이에 성화령은 이미 면문에 다가왔다. 도겁
은 심신이 약간 혼란되면서 살며시 손가락 두 개를 뻗어 그 성화
령을 집어 버렸다. 그러나 그 때 그는 장무기와 전력으로 내경을
겨루고 있던 터라 어찌 이처럼 삼신이 나눠지는 것을 용납하겠는
가. 순간 까 몸 담고  있던 큰 소나무는 끊임없이 휘청거리며 솔
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마치 한차례 쏟아지는 소낙비 같았다. 장
무기는 상대방의 빈틈을 포착하자 즉시 건곤이위심법으로 그에게
맹렬히 공격했다. 잠시 후  팍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도겁의 그
소나무 위에 있는 작은 가지들이 하나하나 울려서 떨어졌다.

 도액은 위급한 형세를 보게 되자 벌떡 일어나서, 몸을 한 번 흔
들더니 이미  도겁의 곁에 다가가서 왼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도겁은 사형 도액의  도움을 받고서야 몸을 다시 진
정시킬 수 있었다.

 저쪽에서는 도난과 은천정,  양소가 이미 각자의 진력으로 겨루
는 상태가 되어서 생사가 순간적으로 결정되는 상태에 돌입했다.
양소는 흑색의 한쪽 끝을 잡고 밖으로 끌어내려 하고 있으며, 은
천정은 파산쇄비(破山碎碑)의 웅혼한  장력으로 끊임없이 도난에
게 공격했다. 양대 고수가  하나는 끌고 하나는 밀고 있었다. 두
줄기 경력은 정반대였다. 도난의 몸이 그 사이에 있어서 비록 힘
은 몹시 들었으나 여전히 패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방관하는 명교의  군호와 소림승들은 이러한  광경을 보게 되자
모두 전전긍긍하며 자기편 사람을 걱정했다.

 바로 이때 갑자기 세 그루 소나무 사이의 지하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양좌사, 은대형, 무기야, 나  사손은 양손에 온통 피로 물들어
있어서 벌써 죽었어도 여한이  없소. 오늘 당신들이 나를 구하기
위해서 소림의 세 분 고승과 쟁투를 하고 있는데, 만약에 쌍방에
서 누군가 다시 손상된다면  사손의 죄는 더욱 무거워질 뿐이오.
무기야, 넌 빨리  본교의 형제들을 이끌고 소림사에서 물러가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즉시 자절경맥하여 죄악의 증가를 막
을 것이다!"

 바로 사손이 사자후 신공으로 지하 감옥에서 말한 것이다. 왕년
에 그는 왕반산도에서  사자후로 각방 각파의 수많은 호사(豪士)
들을 진사(震死) 진혼(震昏)하였다. 비록 지금은 이 신공으로 사
람을 해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고막은 여전히 윙윙거리며
울렸다. 그만 서로 마주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장무기는 의부의 말을 듣자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자 사손이 큰
소리로 외쳤다.

 "무기야! 아직도 안 갔느냐!"

 "알겠습니다. 삼가의부님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그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세 분 고승의 무공은  과연 신묘합니다. 오늘 명교가 격파하지
못해서 훗날 다시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외공, 양좌사 그만 손을
거두시오."

 말을 하면서 경기를 거두며 도액, 도겁 이승의 흑색에서 발출한
내경을 튕겨서 되돌려 보냈다.

 양소와 은천정은 그의  호령을 들었지만, 마침 전력으로 도난과
겨루고 있기 때문에 손을 거둘 수 없었다. 그러자 장무기는 은천
정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쌍장을 휘둘러서 도난과 은천정이 좌우
에서 기습하는  장력을 막아냈다. 바로  따라서 성화령을 내밀어
도난의 흑색 중단에 올려 놓았다. 마침 흑색은 도난과 양소가 서
로 당기고 있어서 마치 힘껏 당긴 활시위 같았다. 장무기의 성화
령이 위에 올려지자  건곤이위심법의 신공이 즉시 양단에서 전해
지는 맹경을 분산시켰다. 흑색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지자 양소가
재빨리 줏어들었다.

 도난의 안색이 변하며 말을 하려는 찰나 양소는 두 손으로 흑색
을 들고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대사님의 병기를 돌려드리겠습니다."

 도겁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곁에 있는 두 개의 성화령을 주워
그에게 돌려주었다.

 조금 전에 치른  일전으로 인해 소림 고승들은  더 이상 오만한
마음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도액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폐관한 지 수십 년만에 당세 영걸을 만나게 된 것을 무
한한 기쁨으로  생각하오. 장교주, 앞으로 무림을  위해 큰 별이
되어주길 바라오."

 장무기는 공손하게 몸을 숙였다.

 "대사님의 분부를 항시 명심하겠습니다."

 도액이 다시 말했다.

 "우리 세  사람은 이곳에서 장교주의 세  번째 왕림을 기다리겠
소."

 장무기는 정색을 했다.

 "물론 다시  찾아뵈올 겁니다. 사법왕은  바로 저의 의부님이며
태산 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신 은인이기도 합니다."

 도액은 장탄식을 하며  눈을 지긋이 감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제 6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권 끝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7 권


     제 1 장  영웅대회(英雄大會) 


 장무기는 양소 등을 이끌고 공문, 공지 등에게 작별을 고하고는
하산했다. 팽화상은 오행기를 철수시켰다. 거목기와 후토기는 소
림사로부터 약 오 리쯤 떨어진 곳에 십여 개의 천막을 치고 중인
이 편히 휴식을 취하게끔 했다.

 장무기는 마음이 무거웠다. 명교에는 양소와 외조부보다 무공이
더 고강한 사람이 없으니, 설령 범요와 위일소가 나선다 해도 오
늘과 비슷한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금강복마권을 파괴할 수 있는  고수를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
가능한 일이었다.

 팽화상이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넌지시 입을 열었다.

 "교주, 장진인을 모셔오면 어떨까요?"

 장무기는 망설였다.

 "만약 태사부님이 하산하여 나를 도와주신다면 금강복마권을 파
괴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태사부님이 나서게 되면 자연히 무
당과 소림 사이에 금이  갈 테니 태사부님께서 윤허를 하지 않을
것이오. 게다가  태사부님은 비록  무학이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워낙  고령이신지라 만에 하나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천정이 벌떡 일어나 광소를 터뜨렸
다.

 "하하핫.....! 장진인이 하산한다면  틀림없이 성공할 거야! 좋
은 생각이군. 아주 좋은 생각이야!"

 그는 입을 크게 벌린 채 갑자기 굳어졌다.

 군호들은 그가 갑자기 광소를 날리며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치는
것을 보자 모두들 이상하게 여겼다. 양소가 얼른 입을 열었다.

 "은형, 장진인께서 하산하실 것이라 생각하오?"

 그는 거듭 물었으나 은천정은 돌처럼 굳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장무기가 흠칫 놀라  그의 맥을 짚어보니 뜻밖에도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알고보니, 그날 광명정에서  육대문파의 고수들과 고군분투하여
이미 원기가  크게 손상된 데다가 조금  전에 도난을 상대하느라
다시 모든 기력을 쏟았기 때문에, 나이가 많은 그는 진기가 고갈
되는 극한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장무기는 그의 시신을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은야왕도 달려와
하늘이 무너져라 통곡을 했다.  군호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
가 없었다. 주위는 삽시간에 울음바다로 변했다.

 며칠 동안 군호들은 은천정의 장례를 치르느라 분주했다. 각 문
파와 각 방회에서도 소식을  전해 듣고 조문객이 쇄도했다. 공문
과 공지 등도 직접 찾아와  제를 올렸으며, 이어 서른 여섯 명의
승인을 보내 은천정을  위해 초도법사(超渡法事)를 하게끔 했다.
그러나 서른 여섯 명의 승려가 염불의 몇 귀절을 읊기도 전에 은
야왕이 곡상봉(哭喪棒)을 휘둘러 그들을 몰아내 버렸다.

 주전도 한쪽에서 욕설을 터뜨렸다.

 "소림의 땡중들아, 언젠가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장무기는 마음이 더욱 착잡해졌다. 그는 양소, 팽화상, 조민 등
과 수차에  걸쳐 대책을 모색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
다.

 조민은 도액 삼승에게 십향연근산을 전개하자고 제의했으며, 녹
장객과 학필옹을 불러와 장무기를 돕겠다고 자처했지만 장무기와
양소는 그 방법을 채택할 수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월이 흘러 단오절이 되자, 장무기는 교중들
을 이끌고 소림사에 당도했다. 소림사 후전에는 각처의 영웅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각처의 무림  인물 중엔 진짜 사손과 원한이
있어 순전히 사손을 죽이고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자도 있었고,
혹은 오로지 도룡도에 욕심이 있어 보도를 손에 넣고 무림지존이
되고 싶어하는 자들도 많았다.  또한 어떠한 자들은 누구와 원한
이 있어서 이  기회에 결판을 내려고 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구경하러 온 사람이 가장 많았다.

 소림사에서는 백여 명이나 되는 사미승으로 하여금 참석하는 무
림 인물들을 접대케 했다.

 무당파에서는 단지 유연주와  은이정 두 사람만 보내왔다. 장무
기는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하고 장삼봉의 안부를 물었다.

 "송청서와 진우량의 소식은 모르느냐?"

 유연주가 낮은 소리로 장무기에게 묻자, 장무기는 그 동안의 사
정들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장무기는 이번에 송원교와 장송
계가 오지 않은 것은, 송청서와 진우량이 찾아와 또 무슨 간계를
쓸지 그것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연주는 송원교가  직접 자기의 독자  송청서가 역모에 가담한
사실을 듣고  상심을 하며 식음을 전폐하여  몸이 무척 허약해졌
고, 또한 사부님께  심려를 끼칠까 봐 보고도  못 드리고 혼자서
끙끙 앓는다는 얘기까지 해주었다.

 장무기는 걱정이 되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송사형께서 참회를 하고, 어서 발리 송사백님의 곁으로 돌아가
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유연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놈이 막칠제를 살해했으니 절대로 용서할 수
는 없는 노릇이야."

 그는 분에 못 이겨 이를 갈았다.

 점점 더 많은 무림 인물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날 금강복마
권을 공격하던 하간쌍살과 청해파 검객들도 모두 참석했다. 화산
파, 공동파, 곤륜파에서도 모든 고수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아미
파에서는 한 사람도 오지를 않았다.

 장무기는 내심  주지약을 볼 수 있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면 그날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싶었
다.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자 장무기는  가슴이 두근거리며 무척
후회스러웠다.

 명교의 교중들은 서쪽의 한 편전에 안내되어 있었다. 그들은 다
른 무림 인물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명교 교중들이 무림
영웅들과 원한  관계가 많아 대회가 열리기도  전에 싸움이 붙어
대회를 열지 못할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정오 무렵, 소림사의 사미승들은 군웅들을 모두 산 오른쪽에 있
는 광장으로 안내했다. 이  광장은 원래 소림사 승려들이 채소를
심는 밭이었으나 지금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천막이 쳐져 있었
다.

 군호들은 사미승을 따라 각자 자기의 자리에 앉았다. 각파의 인
원수에 따라 크고 작은 천막에 안내된 것이다.

 팽영옥은 광장에  모인 무림 영웅들  중에서도 걸출한 인물들의
내력을 장무기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대회는 성황을 이루었
다. 평소 강호에 나타나지 않고 은거 생활을 하던 사람들도 한둘
씩 모두 나타났다.

 팽영옥이 숫자를 헤아려  보니, 명교의 교중들을 제외하고도 사
천 육백 명이  넘는 것 같았다. 장무기와  양소는 대회에 참석한
자들이 친구보다는 적이 더 많자 매우 걱정이 되었다.

 손님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소림승들이 차례로 나와 원(園), 혜
(慧), 상(相), 장(莊) 글자의 서열대로 군웅쪽을 향해 인사를 했
다. 맨 나중에 공지신승이  나타났고, 그의 뒤에 아홉 명의 달마
당의 노승들이 따라나왔다.

 공지신승은 광장의 중앙으로 걸어나와 합장을 하고는 염불을 외
우고 나서 큰 소리로 말했다.

 "오늘 많은 천하 영웅들께서  참석해 주신 것은 소림사의 큰 영
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폐사의  방장사형께서 갑작스럽게
병이 나셔서 여러 영웅호걸들과  만나 뵙지 못하는 것을 대신 정
중히 사과드립니다."

 장무기는 내심 무엇인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날 공문대사께서 외할아버지  영전에 조의를 표할 때만 해도
얼굴에 조금도  병색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렇게 내력이 심후한
노승이 갑자기 병을 앓다니 혹시 부상을 입은 것이 아닌가!'

 사방을 살펴봐도 원진과 진우량은 보이지 않았다.

 장무기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날 내가 세 노승에게  원진의 간계를 폭로한 것에 대해 소림
사에서 무슨 조치가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공문대사가 갑자기 병
이 생겼다는 것이 그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 대회는 남송 말기에 곽정과 황용 부부가 차례로 대승관과 양
양에서 천하 군호들을 초청하여 몽고의 침략에 대해 상의를 하기
위해 대회를 연 이후로, 근  백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처음으
로 이런 영웅대회가  열린 것이다. 사실 강호의  일대 성사라 할
수 있는데 주최자인 주인공이  갑자기 병이 생겼다니, 참석한 무
림 인물들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공지신승이 다시 말했다.

 "오늘 여기 모인 것은 금모사왕 사손이 무림에 화를 몰고 와 많
은 죄를  저질렀는데, 다행히 폐파에  붙잡혀 소림사에서는 감히
마음대로 처단하지 못하고 각계의 무림 지사와 의논을 하기 위해
서입니다."

 그는 본시 생기기를 우수에  찬 얼굴인데, 지금은 더 맥없이 말
을 하고 나서는 곧바로 합장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동남쪽에서 몸집이 건장하고 수염이  많이 난 한 사람이 일어나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의 부리부리한 눈매는  매우 위엄이 있어
보였다.

 팽영옥은 이 사람이  바로 산동의 노권사(老拳師) 하주(夏胄)라
고 장무기에게 얘기해 주었다.

 이윽고 그 자의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사손 같은 나쁜 자를  귀사에서 체포했다니 무림에 큰 복을 내
리셨소. 그런데 공문, 공지신승께서는 너무 겸손한 것이 아니오?
그런 악인을 잡았으면 그  자리에서 단칼에 죽여 없앨 것이지 다
른 사람들과 상의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영웅
호걸들이 모두 모였으니,  이 대회를 도사대회(屠獅大會)라고 칭
하고 사손의 살을 찢어 모두  한 입씩 뜯어 먹읍시다. 그리고 그
의 피를  마시며 무고하게 그에게 당한  친구들의 원수를 갚읍시
다."

 하주도 그의 친형이 사손의  손에 죽었다. 그래서 그는 수십 년
동안을 오직 사손을 찾아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사람
이었다.

 그의 제의가 나오자 여러 곳에서 수백 명이 그의 뜻에 찬성하며
빨리 죽이라고 아우성을 쳤다.

 이 혼란 속에서 어디선가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손은 명교의 호교법왕인데  소림에서 만약 명교가 두렵지 않
았다면 벌써 그를 죽였을  것이오. 뭣하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겠소? 내가 보니 하형은 정말 멍청한 것 같소. 내가 한 마
디 권하겠는데 일찌감치 몸조심이나 하시게."

 컸다 작았다 괴기한  말투였으나 모두의 귀에는 자세히 들렸다.
모두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지만 도대체 누구인지 그림자조
차 보이지 않았다.

 하주는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취불사(醉不死) 사도(司徒) 친구요? 사손은 나의 형을 죽인 원
수요. 대장부란  자기가 한 일을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오. 소림
고승들은 어서 사손을 끌어내시오!  노부가 단칼에 그를 죽일 것
이오. 마교 교중들은 얼마든지 나 산동 하씨를 찾아오시오!"

 사람들 숲에서 다시 그 자의 음산한 웃음과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형, 무림지존이라는 도룡도가 사손의 손에 들어 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오.  소림파에서 사손을 잡았으니 그 보도
를 뺏지 않을 리가  있었겠소? 소림파에서는 사손을 죽이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보도를 얻고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
겠소? 여보시요, 공지대사! 더 이상 어물쩡하지 말고 시원스럽게
도룡도나 꺼내 놓고  모두 한 번 구경이나  하게 하는 것이 어떻
소? 소림파는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무림의 우두머리였는데, 그
보도가 있고 없고 무슨  상관이오? 무림의 지존은 여전히 소림사
가 아니오!"

 팽영옥이 낮은 소리로 장무기에게 설명해 주었다.

 "지금 말하는 사람은  취불사 사도 천종(醉不死 司徒 千鍾)이라
는 자입니다. 저 사람은 성격이 괴팍하여 사부도 없고 제자도 두
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방파에도 속하지 않아요. 그리고 평생
누구와도 별로 싸우지 않아  누구도 그의 진짜 무공 실력을 모릅
니다. 항상 비꼬아 가면서 말하지만 그러나 말에는 꽤 일리가 있
습니다."

 그러자 몇 명이 따라서 외쳤다.

 "일리가 있습니다. 도룡도를 꺼내 오시오! 구경이나 한 번 합시
다."

 공지는 느릿느릿하게 해명을 했다.

 "소림사에는 도룡도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노승도 평생 한
번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진짜 이 세상에 그런 칼이 있는지도 모
릅니다."

 그 말이 나오자 대회장은  갑자기 술렁이며 소란이 일기 시작했
다. 이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이  대회가 도룡도와 관련
있다고 짐작했는데, 공지신승이 없다고 부인하자 모두 천만 뜻밖
이 아닐 수가 없었다.

 공지신승 뒤에 선 아홉 명의 노승들은 모두 빨간색 가사를 걸치
고 있었다.

 군웅들이 다시 조용해지자 그 중  한 노승이 앞으로 두 걸음 걸
어나와 큰 소리로 외쳤다.

 "도룡도는 원래  사손이 갖고 있었지만,  폐파에서 그를 잡았을
때는 이미 그 칼을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았소. 본사 방장께서 그
칼의 행방이 무림의 대사라 생각하시고 알아내려고 무척 애를 썼
으나, 사손은 끝내 고집을 피우며 사실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오
늘 이 대회를  연 것은 첫째, 사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의논할
목적이었고, 둘째는 바로  여러 영웅호걸들에게 도룡도의 행방을
알아보려고 한 것입니다. 어느  분이든 행방을 알고 계시는 분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군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취불사 사도 천종이 또다시 이상한 말을 꺼냈다.

 "무림에 백 년 동안 전해내려 온 말 중에, 무림지존인 도룡도가
천하를 호령하면  어느 누가 감히  거역하겠느냐고 했소. 그러나
의천이 없는데 또 누가 감히 그와 맞서겠느냐고 했소. 도룡도 외
에 의천이 있다는 얘긴데,  이 의천보검은 듣기로는 원래 아미파
에서 갖고  있었다고 했소. 그런데  서역의 광명정에서의 일전을
치른 후 그만 행방이 묘연해졌다는데 오늘 이 영웅대회에 아미파
사람들은 왜 아직까지 참석하지 못했단 말이오?"

 그러자 만장에 폭소가 터져 나왔다.

 바로 그 때 한 사미승의 외침이 들려왔다.

 "개방의 사방주께서 개방의 장로들을 인솔하고 도착했습니다."

 장무기는 사방주란 세 글자에 어리둥절해 했다.

 '아니 개방의 사방주는 이미  원진의 손에 죽은 지 오래전 일인
데, 또 누가 사방주라는 건가?'

 "어서 모셔라."

 공지신승은 개방이 강호의 제일 큰 방화라 직접 나가 영접을 했
다.

 곧이어 한  패거리가 광장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
행색이 남루한  남자들이었다. 근래에 개방의  세력이 전과 같이
그렇게 흥왕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강호에서 거대한 잠
재력을 지니고  있어 군호들은 감히  그들을 경시하지를 못했다.
대부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했다.

 장무기는 맨 앞에서  걸어오는 두 늙은 거지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전공장로와  집법장로였다. 그 뒤에는 뜻밖에도 열
두세 살쯤으로 보이는 못 생긴 여자 아이가 뒤따랐다. 하늘로 치
솟은 콧구멍, 그리고 큰 입에  두 개의 덧니가 튀어나온 바로 사
화룡의 딸 사홍석이었다.

 그녀는 손에 개방 방주의  신물인 타구봉을 들고 있었다. 그 뒤
엔 장봉용두, 장발용두가 있었고  그 뒤에는 서열에 따라 팔대장
로, 칠대제자, 육대제자가  줄줄이 걸어들어왔다. 이번에 참석한
개방 제자들 중에서 서열이 제일 낮은 자는 육대제자들이었다.

 공지신승은 어린 여자 아이가  타구봉을 들고 있자 도대체 누가
방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합장을 하며 인사를 올렸다.

 "개방 군웅들의 왕림을  소림승 모두를 대표해서 환영하는 바입
니다."

 군웅들이 모두  일어나 답례를 하고  나자 이번에는 전공장로가
일어섰다.

 "사 전방주께서 불행하게도  그만 돌아가셔서 여러 장로들이 의
논한 바, 사방주님의  딸인 사홍석 소녀를 방주로 추대했습니다.
이분이 바로 개방의 새로운 방주이십니다."

 그러면서 그는 손으로 사홍석을 가리켰다. 공지신승과 군웅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강호에서 말하기를 명교,  개방, 소림파를 따질 때, 교문으로서
는 명교를 첫째로  꼽고 방회로는 개방이 으뜸이고 무학문파로서
는 소림을 첫째로  꼽았다. 명교에서는 스물 몇  살밖에 안 되는
장무기라는 소년을 교주로  앉혀 모두가 신기해서 혀를 내둘렀는
데, 또다시 개방에서  이런 어린 계집아이를 방주로 추대했다니,
개방장로가 직접  말하지 않았다면 정말 그  누구도 이런 사실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왕년에 황용이 어린 소녀 적에 개방 방주가 된 선례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지금 사홍석보다는 나이가 많았었다.

 공지신승은 어리둥절해 하면서 그래도  결례를 할 수 없어서 합
장을 하며 인사를 했다.

 "소림문하 공지, 사방주께 인사올립니다."

 사홍석도 간단하게 읍을 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
라 망설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폐방 방주께서 아직 나이가 어려 모든 방무(幇務)는 잠시 저와
집법장로 두 사람이 대리로 하고 있습니다. 대선배이신 공지신승
께서 이렇게 예를 갖춰 주시니 정말 부끄럽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겸양의 말을 마치자 사미승이 개방 일행들을 한
천막으로 안내하여  자리에 앉혔다. 개방의  인원수가 많아 한참
지나서야 모두 착석을 했다.

 장무기가 그들을  보니, 개방 제자들은 모두  검은 리본을 달고
매우 비분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 중  어떤 제자들은 뒤에
매단 포대자루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개방에서는
무슨 큰 결심을 하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장무기는 내심 한결 마음이 놓였다.

 양좌사가 장무기에게 속삭이며 말했다.

 "우리의 든든한 호수들이 왔군요."

 그러자 전공,  집법 두 장로는 사홍석을  데리고 명교 교주들이
모인 천막으로 걸어왔다.

 전공장로는 포권의 예를 갖추고 말했다.

 "장교주, 금모사왕이 모함에 빠지게  된 것은 우리 개방과도 많
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린 오늘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의 죄값을  치루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돌아가신 우리 사방주의
원수도 갚을 것입니다. 우리  개방 전체는 모두 장교주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장무기는 황급하게 일어나 답례를 했다.

 전공장로의 음성은 매우 우렁찼는데, 대회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들리게 하려고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이 끝나자  개방 제자들은 모두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
다.

 "명교 장교주의 호령이라면 어떠한 위험이 닥치더라도 감수하겠
습니다."

 군웅들은 모두 크게 놀라워했다.

 "아니 언제부터 개방이 명교와 한통속이 됐지?"

 강호에 별로 나타나지 않던 극소수 외엔 모두 명교와 개방이 지
금까지 서로 대립하며 싸워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얼
마 전에 개방은 광명정  싸움에도 참여하여 쌍방 모두 큰 피해를
입었었고, 맨 나중에 광명정을  공격한 개방 제자들은 모두 전사
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전공장로가  공공연하게 장교주의 호령을 따르겠다
느니, 사방주의 원한을 갚겠다느니 운운하자 군웅들은 모두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전공장로는 다시 뒤로 돌아서서 크게 외쳤다.

 "개방은 소림파와 지금까지  아무런 원한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개방은 항상 소림을 존중해 왔습니다. 물론 작은 시비는 있
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개방에서는 언제나  참고 양보를 하며
절대로 소림파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화룡 방주
이하 모두는 소림 사대신승의  높으신 덕망을 존경해 왔고, 사대
신승께서는 무학을 연마하는 모든 무림지사들의 모범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그리고  사방주께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휴양을 겸한
은둔생활을 하며  수십 년 동안을  강호에 나타나지 않으셨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소림고승이 그분을 살해했는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회장에서는  어! 하고 놀라움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공지신승마저도 금시초문이었다.

 전공장로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우리가 이 대회에 참석한 것은 여러 영웅호걸들이 지켜보
는 가운데  공지신승에게서 모든 사실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방주께서 도대체  무슨 원한을 사서 소림고승에게 사방주
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부인과 딸까지도 모두 죽이려고 했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소림파는 지금까지 무림의 태산북두로 군림해 왔다고 할 수 있
습니다. 우리가 어찌  감히 어거지를 쓰겠습니까? 그러니 귀사의
고승 한 분과 속가제자 한 명만 대질해 주기를 바랍니다."

 "분부대로 따르겠소.  그런데 두 사람이  누구인지 말씀해 주시
오."

 "좋소."

 순간 전공장로는 입을  딱 벌리고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못했
다.

 공지신승은 깜짝 놀라 그의 오른팔을 잡아 보니 이미 맥박이 멈
춰 있는 것이 아닌가!

 "장로! 장로!"

 공지신승은 당황하여 큰 소리로 외치며 전공장로의 얼굴을 쳐다
보니, 두 눈썹  중간에 극독이 담긴 암기로  보이는 검은 반점이
박혀 있었다.

 "여러분 모두는 똑똑히  보셨을 겁니다. 불행하게도 개방장로께
서 극독의  암기에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소림파에서 이런
악랄한 암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알 것이
오."

 개방에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수십 명이 전공
장로 쪽으로 달려갔다. 장발용두가  품 속에서 자석을 꺼내 전공
의 눈썹 사이에 갖다  대자 쇠털처럼 가느다란 강침이 딸려 나왔
다.

 공지신승의 말대로 소림이 암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
이 아니라는 것을 개방에서도  인정했다. 그러나 이 밝은 대낮에
이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히 누가 이런 암기로 기습
했고, 또한 아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니,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집법장로를 비롯한 개방 제자들은 모두 이렇게 짐작했다.

 '전공장로가 남쪽을 향해 서 있었으니 암기는 분명 남쪽에서 날
아온 것이  틀림없고, 때마침 햇빛에  눈이 부시고 전공장로께서
너무 격분하였었기 때문에  가느다란 암기가 날아오는 것을 발견
하지 못한 것이다.'

 장로들의 노기띤 매서운  눈초리가 공지신승의 뒤로 쏠렸다. 그
의 뒤에 있던 아홉 명의 빨간색 가사를 걸친 노승들은 맥이 풀린
채 서 있었고, 그  뒤로는 황의 승려들이 나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엔 회색 승복을  입은 승려들이 나열해 있었는데 어느 누가
암기를 발사했는지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범인은 분명 소
림승이라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집법장로는 갑자기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눈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래도 공지대사께서는 오해라고  하시겠소? 지금 똑똑히 봤으
니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소?"

 성격이 급한 장발용두는 철봉을 쳐들며 외쳤다.

 "오늘 이 자리에서 소림파와 끝장을 내고 말 것이다!"

 요란한 병기소리와  함께 개방  방중들은 대회장으로 몰려갔다.
그러자 공지신승은 안색이 창백해져서 뒤를 돌아보며 소림승들을
향해 물었다.

 "달마 노조께서 서쪽에서  여기에 오셔서 본파를 창업하신 후로
천여 년을 내려오면서  역대의 승려들께서는 모두 계율을 지키고
불도를 닦았소. 물론 호신용으로 무학을 연마했지만 강호의 영웅
호걸들과 내왕을 하면서 절대로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행동을 하
지 않았는데, 방장사형과 나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 돌아가는 것
을 간파하고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소림승들을 일일이
노려보았다.

 "이 독침을  누가 발사했는지 어서  자백해라. 대장부는 자기가
저지른 것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느니라."

 그러나 수백 명이나 되는 소림 승려들 중에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개중에는 나무아미타불!  하고 염불을 외는 승려도 있었
다.

 장무기는 갑자기 한 가지 지나간 일이 떠올랐다. 옛날에 어머니
은소소가 아버지 장취산의  차림새를 하고 독침으로 소림승을 살
해하여 아버님이 누명을 썼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천응교의 은
침은 이 강침과 모양이 완전히 틀리고 독성도 전혀 달랐다.

 전공장로의 죽은 모습으로 보아  그 독은 서역에서 나는 심일도
(心一跳)라는 독충인  것 같았다. 심일도란  독충은 독이 사람의
피와 섞일 때  중독자의 심장이 몇 번  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린다.

 장무기는 이미  사화룡이 원진의 손에 죽은  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소림사에 원진의 패거리가 매복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
는 터라  전공장로를 죽인 것은 원진이라고  밝히지 못하게 막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모두들 전공장로를 쳐다보
느라 암기를 발사한 자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장봉용두가 크게 외쳤다.

 "사방주를 죽인 범인이 누구라는  것은 개방의 수만 명 되는 제
자들 중에 모르는 제자가 없는데, 너희들이 수만 명을 모조리 죽
일 수 있겠느냐? 사화룡 방주를 죽인 화상놈은 바로 원진이다...
..."

 갑자기 장발용두가 철봉을 쳐들고 뛰어나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
다. 순간 탱! 탱!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두 개의 강침을 막아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어디서 강침이 날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장발용두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터라 햇빛에 파란
빛이 번쩍이자 재빨리 그것을  막아냈던 것이다. 한 발만 늦었어
도 장봉용두는 필경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어느새 공지신승은  달마당 노승들의 뒤로  달려갔다. 팍! 하는
소리가 나더니  공지신승은 왼쪽에서 네 번째에  서 있는 노승을
걷어차며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공여(空如), 너였구나! 너도 원진과 한통속이 되어 버렸느냐?"

 공지신승이 오른손으로 공여의 승의를 찢자 옷이 찢겨지면서 그
속에 강철로 만든 작은 원통이 숨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원통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놀랍게도 그 속에는 탄력 장
치가 되어 있었다. 그제서야 모두는 깜짝 놀라며 그 자의 짓이었
다는 것을 알았다.

 강철로 만든 통에는 탄력 장치가 되어 있으니 발사하는 자는 손
도 들 필요없이 품 속에서 기관만 누르면 독이 묻은 강침을 발사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서로 가까이 서  있었다 하더라도 상대가
암기를 발사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교
했다. 장봉용두는 비분이 치솟아 철봉으로 공여의 머리통을 마구
후려쳐서 즉사시켜 버렸다.

 공여의 신분은  사대신승과 동배인 터라  배분이나 무공이 모두
높은 노승이지만, 공지대사에게  뒷덜미를 잡혀 움쭉달쭉 못하는
상태에서 철봉이 덮쳐오는 것을 두 눈뜨고 보면서도 피하지 못하
고 작살당한 것이다. 또 한번 군웅들의 놀라움이 터져 나왔다.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지도 않고 죽이다니,  정말 성미도 급한
사람이군!'

 공지대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 보았
다.

 바로 이 혼란한 때에 갑자기  장외에서 네 명의 여승이 손에 불
진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들어왔다.

 "아미파 주지약 장문인께서  문하제자들을 이끌고 소림 방장 공
문대사를 참견하러 왔소"

 공지대사는 공여의 시신을 내려놓고  아무 소리도 않고 그를 마
중 나갔다. 남은  달마당의 여덟 명의 노승들도  그의 뒤를 따라
걸어나갔다. 그들은 마치  조금 전의 참극을 본  적이 없다는 듯
침착한 표정들이었다.

 네 명의 여승은  먼저 인사를 하고 난  후 다시 뒤로 돌아갔다.
표연히 들어왔다가는  어느새 물러나 버렸다.  네 여승의 동작은
하나로 묶은 듯이 통일되어  있었다. 더구나 그들의 발걸음은 흐
르는 물과도 같았고 하늘의 구름과 같이 경쾌했다.

 장무기는 주지약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슬쩍 조민을 쳐다보니  마침 조민도 자기를 보고 있었
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치자 그녀는 입을 삐쭉거리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이 꼭  자기를 경멸하는 인상처럼 느껴졌다. 장무
기를 조소하는 것인지  주지약의 허세를 경멸하는 것인지 도무지
그 진의를 알 수 없었다.

 아미파 여협들은 개방과  같이 무질서하게 대회장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공지대사가 군승들을  이끌고 마중나오자 그제서야 대열
을 지키고 들어왔다. 팔구십  명이나 되는 여승들은 모두 일률적
으로 노란색 승복을 입고 있었고,  그 중 태반은 머리를 완전 삭
발한 여승들이었다. 일부분의 소수만 노년에 중년 그리고 묘령의
여자들이었다.

 여제자들이 모두  걸어들어오자 일장여 거리나  되는 뒤에 청색
장삼을 입은 절세 미인이  천천히 걸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바
로 다름아닌 아미파 장문 주지약이었다.

 장무기는 핼쓱해진 그녀의  초췌한 모습을 보자 안타까우면서도
부끄러웠다. 장무기의 뒤에는 이십여 장이나 뒤떨어져 이십여 명
의 남제자들이  노란색 장포를 입고  매우 점잖게 걸어들어왔다.
어느 문파 어느 무림  인물도 이렇게 질서 있고 웅장하지는 못했
다.

 남제자들의 손엔 모두 크고 작은 나무상자들이 들려 있었다. 백
여 명의 아미파 제자들 중에 병기를 든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무기를 모두 이 나무상자에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군웅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아미파에게 내심 칭찬을 아끼지 않
았다.

 "아미파는 소림파에 대한 예절이 상당하군."

 무기를 보이지 않는 것은 소림파를 그만큼 존중한다는 표현이었
다.

 아미파 제자들이 모두 천막에 들어가 자리에 앉고 나자, 장무기
는 그들 앞으로 걸어가 주지약을 향해 길게 읍을 하며 수줍은 듯
이 말했다.

 "주사매에게 사과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십여  명의 아미 제자들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노기 찬 얼굴로 장무기를 노려보았다.

 잠시 후, 주지약은 장무기에게 가볍게 답례를 하며 말했다.

 "천만의 말씀, 그 동안 별일 없으셨는지요?"

 아무런 표정도 없는 그녀의  얼굴로 보아 기뻐하는지 노기를 띠
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무기는 도무지 그녀의 심중을
헤아릴 수 없어 몹시 난처해 했다.

 "지약, 그날은 의부님을 구출하려는 마음이 조급해 그만 대례를
치루지 못했소. 정말  마음이 아프고 미안한 마음  어쩔 줄 몰랐
소."

 "듣자 하니 사대협께서는 소림사에 감금당하셨다는데, 훌륭하신
무공을 지닌 장교주께서 이미 구출해 내셨겠지요?"

 그 말에 장무기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소림사 고승들의 무공이  심후해 그들과 겨뤘지만 명교에서 벌
써 일장을  졌습니다. 그 싸움에서  불행하게도 나의 외조부님을
잃었습니다."

 "일세의 영웅이신 은노인 어른을 잃으셨다니 안타깝군요."

 그녀는 조금도 희노의  빛을 내색하지 않았다. 장무기는 그녀가
말할 때마다 웬지 무안을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녀의 의
중을 알 수가 없어서 이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결혼식 날에 자기가 많은 하객들이 보는 앞
에서 조민을 따라가 버렸으니, 그 때의 주지약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오늘 자기가 당하는  무안은 그날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
었다.

 "잠시 후에 의부님을 구출할  때, 왕년의 정을 생각해서 도와주
셨으면 합니다."

 그녀는 반 년 동안 무공에 있어서 큰 진보가 있었다. 그날 결혼
식장에서 훌륭한 무공을 지닌 범우사마저도 주지약의 단 일 초식
에 뒤로 밀려났고, 하마터면  각파의 장기를 고루 익힌 주지약에
게 목숨마저 잃을 뻔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두백당, 역삼랑 부부
를 살해한  날도 그랬었고..... 아무튼  아미파 장문직에 오르는
인물에게는 어느 누구도  모르게 내려온 무공비급이 있는 모양이
었다.

 '주지약은 총명해서 멸절사태보다도 더 무공이 훌륭해. 만약 주
지약이 나와  합심을 한다면 금강복마권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
다.'

 그런 생각을 한 장무기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지약,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소."

 주지약이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장교주, 말씀 삼가세요. 앞으로는 절대로 부르지 마세요."

 그러면서 뒤로 손짓을 하면서 다시 말했다.

 "당신 이리로 와서 우리 사이를 장교주에게 설명해 줘요."

 그러자 뒤에서 한 털보가 걸어와 포권의 예를 올리며 인사를 하
는 것이었다.

 "장교주, 그 동안 안녕하셨소?"

 목소리를 들으니 송청서인  것 같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송청서
가 틀림없었다. 늙고 추한  모습으로 자기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변장한 사나이는 송청서가 틀림없었다.

 "송사형님이셨군요. 그 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송청서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면  모두 장교주의 덕입니다.  결혼식 날 장교주께서
갑자기 후회하고 파혼하지만 않았다면....."

 "파혼이라구요?"

 장무기는 깜짝 놀라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이 아름다운 인연은  모두 장교주의 덕택이었
소."

 순간 장무기는 벼락을 맞은  듯이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그는
앞이 캄캄해지며  시끄러운 소리가 귓전을  마구 울리고 있었다.
그는 무슨 말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 자기의 팔을 잡으며
말하는 것이 들려오고 있었다.

 "교주님, 어서 돌아가시지요."

 장무기가 정신을 차리고 옆을 보니, 한림아가 자기의 팔을 잡고
있었다. 한림아는 비분에 찬 얼굴로 주지약에게 말했다.

 "주낭자, 우리 교주께서는 대인대의한 영웅입니다. 그날의 조그
마한 오해로 이런 놈에게 시집을 가다니 흥.....!"

 한림아는 송청서에게 마음껏 욕설을 퍼부으려고 했지만, 주지약
의 체면을 봐서 꾹 참고 말았다.

 장무기는 물론 조민에게 깊은 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주지약
과 혼인을 약속한 사이라 그날 의부님을 구출하기 위해 부득이하
게 조민을 따라나서긴 했지만, 그래도 주지약의 성격이 온순하므
로 솔직하게 그녀에게  사실대로 사정을 고백하면 그녀가 용서해
줄 것으로 믿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지약이 홧김에 송청서와
결혼을 하리라곤 정말 몰랐다. 지금 장무기의 신정은 광명정에서
그녀에게 일검을 찔린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장무기가 뒤돌아보니 주지약이  손을 흔들자 송청서가 득의양양
해 하며 그녀의  옆에 걸어와 앉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웃는
듯 말 듯하면서 장무기에게 말했다.

 "결혼식 때 모두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청첩장을 많이 돌리지
못했는데, 언제고 찾아오셔서 술이나 한 잔씩 나눕시다."

 "고맙소."

 그러나 장무기는 목이 메여 이 세 마디도 제대로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한림아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교주님, 이런 사람과는 말대꾸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 하! 하!"

 "한형, 그날 같이 오십시오."

 한림아는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말 오줌을 마시면 마셨지 너  같이 재수 없는 놈의 술은 안 마
신다!"

 장무기는 탄식을 하며 한림아의  팔에 끌려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바로 그 때 장봉용두는 한 소림승과 격렬한 입씨름을 벌이고 있
었다. 장무기와 주지약, 그리고  송청서, 한림아는 서북쪽 한 귀
퉁이에서 말을 나누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주의하지
못하고, 모두 개방과 소림파의 논쟁만 듣고 있었다.

 명교의 천막에  돌아와 자리에 앉은  장무기는 마음이 산란하여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다. 희미하게 빨간색 가사를 걸친 소림승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원진사형과 진우량이 본사에  없다는 말을 귀방에서는 믿지 않
을 것이고, 귀방의 전공장로께서 불행하게도 목숨을 잃었지만 대
신 폐파의 공여사숙이 죽지 않았소?  그런데 또 무슨 할 말이 있
으시오?"

 "원진과 진우량이 여기에 없다니 우리가 수색해 보기 전엔 절대
믿지 못하겠소!"

 장봉용두가 절대 믿으려고  하지 않자, 소림승은 냉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각하께서 본사를 수색하겠다니  너무 자신을 모르고 하는 얘기
가 아니오? 아마도 개방에는 그런 실력이 없을 줄 아오."

 "흥, 개방을 우습게  보는군. 그럼 내가 먼저  한 수 가르쳐 줄
까?"

 "천여 년  동안 수많은 영웅  호걸들이 소림사엘 찾아왔었지만,
조상들의 자비심  덕택인지는 몰라도  소림사는 여전히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소."

 두 사람의 입씨름이 점점 격렬해지면서 곧 싸움이 벌어질 것 같
았으나, 옆에 앉은 공지대사는 조금도 그들을 말리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갑자기 사도 천종의 음양괴기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 이렇게  많은 영웅들께서 소림에  모였지만, 어떤 분들은
멀리 천리 밖에서까지 오셨는데 개방의 복수극을 구경하러 온 것
이 되어 버렸군."

 그러자 하주가 또 말했다.

 "맞어, 개방과 소림의 원한은  잠시 제쳐놓고 먼저 사손 그놈을
처단하는 일을 결론내야지."

 장봉용두의 노기띤 음성이 튀어나왔다.

 "말조심 하시오!  금모사왕 사대협은 명교의  사대법왕 중의 한
분인데 함부로 부르다니!"

 "흥! 명교를 두려워하는  모양인데 난 두려워하지 않아. 사손같
이 개 돼지만도 못한 놈들을 무슨 영웅 협사라고 부르는가....."

 양소가 대회장으로 들어와 포권의  예를 취하고 나서 입을 열었
다.

 "소인은 명교의 광명좌사올시다.  이 자리에서 천하영웅들께 한
말씀 드릴까 합니다. 폐파의  사사왕께서 왕년에 많은 무고한 사
람을 죽인 것에 많은 잘못이....."

 "흥!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말 몇 마디에 다시 살아날 건가!"

 "강호를 돌아다니는 우리는 항상 칼에 피를 묻히는 나날을 보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어느 누구든 몇 사람의
인명은 살해했을 것이오. 무공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많은 살상
을 했을 것이고, 무공이  보잘것없는 사람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
오. 그런데 사람을 죽였다고  꼭 자기의 목숨으로 속죄해야 한다
면 아마 이 대회장에 모인 수천 명의 영웅 호걸들은  몇 사람 남
지 않고 다 죽었을  겁니다. 하주 영웅께 묻겠는데, 당신은 평생
한 사람이라도 죽인 적이 없소?"

 사실 이때는 천하가 대란하여  사방이 소란해 죽이지 않으면 죽
음을 당하는 세상이었다. 손에  조금도 피를 묻히지 않은 사람은
소림파나 아미파의 극소수의  승려들 외엔 몇몇 사람들만 손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산동의 호걸 하주도  성격이 포악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
을 살해했다. 양소의 말에 그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물론 좋은 사람은 죽여선  안 되고 나쁜 자들은 마땅히 죽여야
지. 그러나 사손은 명교의 다른 마두들과 똑같이 나쁜 짓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에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그놈의 살을 씹어 먹고
싶은 심정이다. 흥! 양가야, 보아하니 너도 별로 좋은 놈이 아닌
것 같구나."

 하주는 명교에 무공이 높은  인물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만, 오늘 이 자리에서 형의 원수를 갚으려면 명교와 일전을 치루
지 않을 수가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말로서도 조금도 양보
를 하지 않았다.

 "하주 네놈이 보기에 나는 어떤 사람인 것 같으냐?"

 갑자기 명교의 천막에서  째지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주가
그곳을 쳐다보니 깡마른 얼굴에 입이 뾰쪽하게 생기고 얼굴이 얼
마나 하얀지 핏기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주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몰라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마교의 마두라면 나쁜 놈이라는 것은 분명
하지 않느냐?"

 옆에 있던 사도 천종이 다시 끼어들었다.

 "하형, 어찌 저분도 못 알아보시오! 저분은 명교의 사대법왕 중
의 한 분인 청익복왕올시다."

 "픽! 흡혈 마귀이군."

 순간 눈앞에  무엇이 번쩍이더니 어느새  위일소는 하주의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십여 장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어느새 위일소가 눈깜짝할  사이에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새 위일소는 이미 하주의 뺨을
네, 다섯 차례나 후려치고  다시 팔꿈치로 하주의 아랫배를 내리
찍은 것이다.

 하주의 무공도 실은 보통이 아니었다. 위일소가 만약 그와 실력
대로 싸운다면 그와 오십여  초식이 지나야 이길 수 있을 정도였
다. 그러나 위일소의 경공은 실로 귀신과 같아 상대가 정신을 차
리기도 전에 이미 그를 제압한 것이다.

 군웅들이 모두 놀라  외치는 사이에 명교의 천막  속에서 또 한
명의 흰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의 신법은 번개와 같은 위일소
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날아가는 화살처럼 빨랐다.

 그는 하주의 앞에 오자 재빨리  포대를 풀어 그 속에 하주를 쳐
넣고 어깨에 메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군웅들은 그가 바로 포대
화상(布袋和尙) 설불득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 하! 그래  너는 좋은 놈이냐? 집에  돌아가서 이 화상이나
삶아 먹어 버려야지!"

 그는 하주를 어깨에 메고 가볍게 천막으로 걸어갔다.

 하주에게도 십여 명의  친구와 제자가 있었지만, 너무나 갑작스
럽게 일어난  사건이었고 두 사람의 몸놀림이  너무나 번개 같아
그를 도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명교의 천막으로 돌
아가 자리에 앉은 후에야, 그들은 무기를 뽑아 들고 천막 앞으로
모여 가 사람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쳤다.

 설불득은 포대자루의 끈을 조금 풀면서 웃으면서 말했다.

 "어서들 자리에  돌아가 앉지 못하겠는가!  대회가 끝나면 풀어
주겠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이 포대자루에다  오줌을 싸 버릴
것이야. 내가 그렇게 못할 것 같으냐?"

 그는 그러면서 허리띠를 푸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십여 명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면서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
었다. 그러나 그들은 명교 인물들이 온갖 나쁜 짓을 다 저지르고
다닌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설불득이 실지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자기들의 무력으로는 절대로 그를 빼앗아
올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만약  설불득이 진짜로 오줌을
싸댄다면 하주는 모욕을 못 참고 자살해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
들은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밖
에 없었다.

 군웅들은 놀라면서도 한편  우습기도 했다. 그들은 사손을 어떻
게 처단할 것인지 구경하러 모인 것인데, 지금 명교의 두 호걸의
실력을 보자 오늘  이 대회에는 흉조가 차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사손을 죽인다 해도 필시  이 대회장은 피로 사방을 물들일 것이
라고 생각하며 모두 겁을 먹고 두려움에 싸였다.

 그러자 사도 천종이 한 손에  술잔을 들고 한 손엔 주호로를 들
고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중앙으로 걸어나왔다.

 "오늘 좋은 구경거리가 생기겠군. 한쪽에선 사손을 죽이자 하고
한쪽에선 살리자 아우성들이지만,  사손이 진짜로 소림사에 있는
지 그것도 사실 모르는 일이야."

 "내 생각엔 공문대사께서  금모사왕 사손을 모시고 나와 모두에
게 구경이나 시켜주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어떻소? 그리고 나서
양쪽이 자기의 실력대로 한번 겨루게 하는 것이 어떻소?"

 그의 제의에 반 이상이 좋다고 외쳐댔다.

 '사사왕의 원수들이 워낙  많아 명교와 개방이 힘을 합친다해도
천하 영웅들과 싸울 처지가 못 된다. 그러니 도룡도로 주의를 돌
리게 해서 서로 다투게 만들어야겠구나.'

 그렇게 생각을 한 양소는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들이 여기 참석한 것은 첫째 금모사왕과 각기 은원이 있
어서 오신 것이고, 둘째는  아마 도룡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
하고 싶어서일  것이오. 만약 사도  선생의 말대로라면 대회장은
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될 것이고, 그럼  도룡도는 누가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오?"

 그 말에 모두는  수긍이 갔다. 이 수천  명 중에서 진짜 사손과
원한이 있는 사람은 불과 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모
두 무림지존이라는 네 자를 듣자 마음이 술렁거렸다.

 이때 검은 수염의 노인 하나가 일어나 물었다.

 "양좌사께서 도룡도가 지금 누구의 손에 들어 있는지 말씀해 주
십시오."

 "저도 그것을 몰라 지금 공지선사에게 물어볼까 합니다."

 공지대사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군웅들은 모두 속으로  불만을 품었다. 대회의 주최자인 공문방
장은 아프다는 핑계로 나오지 않고, 공지신승은 흐리멍텅한 태도
이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갈색 장포를 입은 중년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지신승이야 모른다고 하지만  사사왕은 알고 있을 것이 아니
오? 어서 그를 불러내  그에게 물어봅시다. 그리고 나서 모두 자
기 실력으로 겨루고 나서 누구의 무공이 진짜 천하제일인지 가려
내서 무림지존이 되는 겁니다. 그리하여 그 칼이 누구의 손에 있
든 그 무림지존에게 바치는  겁니다. 그것을 먼저 결정하는 것이
어떻소? 나중에  다른 의견이 나오지 않게  하자는 겁니다. 만약
뒤에 가서  불복하는 자가  생기면 모두 힘을  합쳐 공격합시다.
자, 내 의견이 어떻소?"

 이 자는 바로  그날 밤 금강복마권을 공격하던  청해파 세 고수
중의 한 명이라는 것을 장무기는 알고 있었다.

 사도 천종이 반대하며 나섰다.

 "내가 생각하기엔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소."

 "아니, 무엇이 좋지 않다는 거요? 그래 각하께서는 무술을 겨루
지 말고 주량을 겨루자는 거요? 누구든 술에 쓰러지지 않는 자가
무림지존이 되자는 거요?"

 장내엔 폭소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 괴상한 소리로 비꼬았다.

 "그거야 물론 겨룰 필요도  없이, 무림지존은 취불사 사도 선생
의 것이 되는 게 뻔한 일이지."

 사도 천종은 표주박에서  술 한잔을 따뤄 마신  후 정색을 하며
말했다.

 "천만에 말씀.  주림지존이라면 나 취불사가  어느 정도 희망이
있지만, 무림지존이라면 내가 어찌 감당하겠소?"

 그리고는 청포 대한에게 물었다.

 "각하께서 정 그런 의견이시라면, 무학에 있어서는 물론 입성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일 겁니다.  그런데 소생은 눈이 어두워 아직
까지 각하의 존함을 모르겠습니다."

 "소생은 청해파의 엽장청(葉長靑)이라 하오. 주량이나 광대노릇
이라면 가히 각하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 말은 무공이라면 당신보다 훨씬 높다는 뜻이었다. 사도 천종
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청해파? 들어본  적이 없는데, 엽장청?  그 이름도 금시초문이
군."

 모두는 취불사 노인이 보통 담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엽장청 한 사람만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청해파까지 모욕을 하
다니, 저 노인 뒤에는  무슨 든든한 후원이라도 있는가 보군. 아
니면 청해파와 무슨 철천지  원한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조금
전에 그가 한 그  두 마디만으로도 청해파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 사도 천종이라는 위인을 아는 사람은 그의 뒤에 아
무도 없고 또한 청해파와도  아무런 원한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다만 그는 평소에도 성격이 오만하여 큰소리치기를 좋아하
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물론 그로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여전
히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였다.

 엽장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이미 살기가 차 있었다.

 "청해파와 본인은 본시  이름이 없어서 각하께서 물론 못들으셨
을 겁니다. 그런데 무예를  겨루는 것도 불만이고 술내기도 불만
이니, 도대체 각하의 뜻은 뭣이오?"

 "하! 하!  술이라면 내가 천하무적이라 할  수도 있고 그렇다고
할 수도 없지. 왕년에 내가 제남부(濟南府)에서....."

 그가 계속해서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려고 하자 사람들속에
서 누군가가 외쳤다.

 "취불사, 여기서 술주정하지  마시지! 당신의 엉터리 같은 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네."

 또 누군가가 뒤따라 외쳤다.

 "도대체 사손과 도룡도의 얘기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러자 또 누군가가 외쳤다.

 "공지선사, 당신은 오늘 이 대회의 주최자인데 우리에게 쓸데없
이 여기서 시간을 소비하게 하다니, 어떻게 된 거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한 마디씩 터뜨렸다.

 사방에서 이렇게 불만이 터져  나오자 사도 천종은 엄숙하게 입
을 열었다.

 "강릉부 흑풍채(江陵府  黑風菜) 사두목,  너무 성미가 급하군.
아무리 당신의  흑사장(黑沙掌)이 무섭다  해도 천하의 영웅들을
모조리 눕히진 못할 거야. 그리고 파양호 수저 금오후(水低 金熬
候) 형제, 사사왕께서는 수륙 양쪽 무공이 모두 능하시고 더구나
명교 그쪽엔 자삼용왕까지 계셔, 아직 나타나진 않았지만 악어가
감히 용왕의 상대가 되겠는가? 또 청양산 오삼랑(靑陽山 吳三郞)
당신은 검을 쓰고 있는데, 당신이 도룡도를 얻게 된다 해도 사용
할 줄 모를 텐데 무슨 성미가 그렇게 급한가?"

 사도 천종은 항상 술에 취해 있는 듯하지만 남보다 특출한 데가
있었다. 그는 견문이 넓고 또한  귀도 밝아 그 많은 사람들 숲에
서 한 말을, 그는 일일이 누가 말했고 또 그 자의 이름까지 일일
이 말할 수 있었다.

 그의 이런 재주에 군웅들은 모두 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공지대사 뒤에 앉아 있던 한 노승이 일어나 말했다.

 "소림파에서 이 대회를 주최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공교
롭게도 방장께서 병환이 있어서 참석 못한 것을 여러분께서 용서
하십시오. 사실 사손과 도룡도에  관한 두 사건을 하나로 생각하
고 한꺼번에 처리해도 된다고  봅니다. 노승의 의견은 조금 전에
청해파 엽시주께서 하신 말씀이 옳다고 봅니다. 도룡도를 그분의
처리에 맡기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장무기는 팽영옥에게 지금 말한 자의 이름을 물었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저 노승은 광명정 싸움에 참여하지도 않았
고 만안사에 붙잡혀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공지대사의 말을
항상 가로막는  것을 보니 소림사에서 지위가  매우 높은가 봅니
다."

 조민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십중팔구 원진과 그 일당일 겁니다. 제 생각으로는 공문대사가
이미 원진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공지대사께서는 반도
(叛徒)들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어서 저렇게 맥이 없는 것 같습니
다. 팽대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군주의 추측이 매우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소림
사의 고수들은 구름떼와  같이 많은데 원진이 공공연하게 반란을
일으키다니, 너무 방약무인인 것 같습니다."

 "원진은 이미 오래전부터 음모를 꾸며 왔습니다. 처음엔 명교를
와해시키려고 했고,  다음엔 개방을 손에  넣으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이번엔 아마 소림방장의 자리를 노리는 것 같습니
다."

 조민이 다시 말을 받았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장무기가 다시 말했다.

 "소림파 하면 무림에서 제일가는 문파인데 장문 방장에서 더 이
상 또 뭐가 있소?"

 조민이 다시 받았다.

 "무림지존이 있잖아요?  소림파의 장문 방장보다  더 높지 않아
요?"

 "아니, 그럼 무림지존이 되려고 한다는 거요?"

 "장공자, 주낭자가  다른 사람한테 시집을  가더니 그만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요. 머리가 둔해진 것을 보니....."

 그 말에 장무기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그는 속으로 다짐을 했다.

 '장무기, 절대로 남녀의 사사로운 정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오
늘은 의부님을 구출하러 온 것을 잊어서는 안돼.'

 그는 정신을 바짝 치리고 내심 생각을 굴렸다.

 '오늘 이 대회도 원진이  뒤에서 주최한 것이나 마찬가지야. 필
시 여기에 무슨 음모가 있을 것이다.'

 "민매(敏妹), 원진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소?"

 "원진은 어떤 간계도 짜낼 수 있는....."

 주전은 지금까지 두 사람이 낮은 소리로 주고 받는 대화만 듣고
있다 드디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군주 아씨의 지모도 원진에 비해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군."

 조민은 가볍게 웃었다.

 "과찬의 말씀을....."

 "과찬이 아니라....."

 팽영옥이 주전을 나무랐다.

 "군주 아씨의 말씀을 들어보게 말 좀 막지 마시오."

 주전은 화를 버럭 냈다.

 "팽형이나 먼저 내 말을 막지 마시오."

 팽영옥은 웃으며 더 이상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주전과 입씨름
을 해봤자 하루 온종일 해도 끝이 안 날 것은 뻔한 일이다.

 "왜 또 말하지 않으시오?"

 "나보고 주형의 말을 막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그렇지만 이미 내 말을 막지 않았소?"

 "그럼 다시 말씀하시오."

 "뭐라고 말했는지 잊어 먹었는데....."

 조민이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엔 원진이 오로지 소림방장이 되려고 했다면 천하 영웅
들을 여기까지  초청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대협께서 이미 그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데 뭣하러 무술을 겨루게 하고 내놓겠습니까?
무공이라면 아마 지금 이  세상에 장공자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
을 거예요. 원진도 그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절대로 무예를
겨뤄 당신이 무림지존이 되게끔 선심을 쓸 리가 없을 거예요. 그
리고 사대협과 도룡도를 당신에게 바치겠습니까?"

 장무기, 팽영옥, 주전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소?"

 이때 마침 양소가 장무기 옆으로 걸어왔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마 원진 그놈이 철저하게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니....."

 주전은 참지 못하고 또 말을 가로막았다.

 "원진은 본교의  앙숙이고 군주 아씨도  우리의 앙숙이었소. 두
사람 모두 계략이 뛰어났는데 서로 비슷한 점이 많군요."

 양소가 크게 나무랐다.

 "또 쓸데없는 소리를!"

 "아니에요....."

 조민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주선생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만약  내가 원진이라면 어떤
음모를 꾸몄을까요? 첫째는  공문방장으로 하여금 청첩장을 돌려
군웅들을 소림사로 오게끔  하는 겁니다. 공문방장께서는 불법을
심해한 분이라 본시 자비로운 성품이고 거기다 귀찮은 일이 생기
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게다가  공견, 공성 두 신승의 핑계를 대
면 사형제의 의리로서도 당연히  승낙을 할 것이고, 또한 소림사
에서 사대협을 죽이게 되면  명교의 철천지 원한을 맺게 됩니다.
소림파의 힘으로는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명교를 막아내기 힘드
니 책임을 천하 영웅들에게 전가하여 명교가 천하 영웅들을 일일
이 상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일 겁니다."

 모두 그녀의 말에 수긍이 갔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대회에는 자신이 나타나지 않고, 사대협과 도룡도를 미
끼로 하여 군웅들이 서로  싸움에 말려들게 부추기는 겁니다. 명
교는 필시 군웅들과  적이 되어 결국은 모두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장무기도 그 말에는 수긍이 갔다.

 "바로 그거야. 그  점은 나도 생각했었소. 그렇지만 의부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깊은 은혜, 그리고 여러 형제들과의 깊은 우
정, 어찌 우리가  모른 척하고 그를 구출하지  않고 앉아만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여기에 온  지 며칠도 안 됐는데 벌써 외조
부님을 잃었으니, 원진이 어디엔가  숨어서 기뻐 박수를 치고 있
을 겁니다."

 조민이 다시 말을 이었다.

 "끝까지 싸우다 보면  무공 제일이라는 칭호는 장교주께서 얻게
될 것이고, 그러면 소림파에서는 장교주에게 축하를 보내고 장교
주에게 사대협을 넘겨 주겠다고 하면서 직접 뒷산에 올라가 사대
협을 모셔가라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는 모두 뒷산으로
가서 장교주 혼자서 금강복마권과  맞서게 할 것이고, 만약 우리
가 장교주를 도우려고 하면 원진의 패거리들은 무공 제일의 칭호
를 얻은  것은 장교주이니까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돕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장교주께서는 무공 제일이라는  칭호를 얻기 위해
진력을 다 했으므로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해도 이미 많은 내력과
신공을 소비하고 난 뒤인데, 어떻게 다시 세 노승의 상대가 되겠
습니까? 결국은 사대협을  구출하기는커녕 소나무 사이에서 그만
목숨을 잃게 될 것이 뻔한 일이죠. 그런 뒤에야 무공 제일이라는
칭호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기까지 들은 군웅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조민의 말은 틀림없는 말이었다.

 장무기는 성격이 고집스러워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사손을
구출해 내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자기의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
도 덤벼들 것이 분명하므로  원진은 바로 그런 그의 성격을 간파
하고 장무기를 죽음 속으로 몰아 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조민은 긴 탄식을 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명교는  망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원진은
다시 간계를 부려  공문대사를 혹사시키고 그 누명을 공지대사에
게 덮어씌울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는 그로서는 아주 쉬운 일입
니다. 다만 증거만  꾸며 대면 소림파에서도 그를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 후에는  그의 패거리들이 일어나 그를 추대하면
그는 순조롭게  소림방장이 되는 겁니다.  그리하여 그의 호령에
따라 군웅들은 모두 명교를 협공하여 일거에 명교를 섬멸해 버릴
것이고, 그럼 천하제일의 무공이라는 칭호는 자연히 원진에게 돌
아가고 도룡도가 나타나지 않아도 그만입니다. 또한 나타난다 해
도 천하에 그 사실이 다 알려질 것이고 그 주인은 당연히 소림방
장인 원진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갖고  싶어도 누가 감히
그에게 갖다 바치지 않겠습니까?"

 조민의 음성이 매우 낮아 천막 한쪽에 앉은 사람만들을 수 있었
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주전은 옳거니! 하면서 자기의 넓적다리를
쳤다.

 "옳거니! 바로 그런 큰 음모가 숨어 있었다."

 그의 음성이 너무 커 대회장의 반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이 듣게
되었다. 그들의 눈초리는 모두 명교의 천막 쪽으로 쏠렸다.

 사도 천종이 물었다.

 "무슨 음모라는 거요? 노부가 들어서는 안 되오?"

 주전이 그의 말을 받았다.

 "얘기해 줄 수 없네. 노부가 지금 이간질을 해서 천하 영웅들끼
리 서로 싸움이 붙게 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어찌 폭로하겠는가?"

 사도 천종은 가볍게 웃었다.

 "훌륭한 생각이군. 그런데 어떤 이간질을 꾸미려고 하는지 얘기
해 줄 수 없소?"

 주전은 큰 소리로 외쳤다.

 "어떤 음모인가 하면, 도룡도가 지금 노부의 손아귀에 들어왔는
데 누구든 무공이 제일 높은 자에게 도룡도를 드리겠소!"

 "좋은 계책이군. 그런 뒤에 또 어떻게 할 거요?"

 조민은 장무기와 서로 마주 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하고 아무런 친교도 없는 이 술주정꾼이 우리에게 큰 도움
을 주는군.'

 주전은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도룡도는 무림지존이라는 도호를 갖고 있는데, 누군들 그것
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겠소? 그리하여 이 대회장엔 붉은 피로 물
들 것이 아니오? 그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오."

 이 말을 들은 군웅들은  모두 간담이 써늘했다. 장난기 섞인 말
인 것 같지만 매우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공동파 이로
(二老)인 종유협이 일어나 입을 열었다.

 "주선생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할 말이 있으면 떳떳
하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모두가  도룡도에 욕심이 있는 것은 분
명합니다. 그러나 칼 하나로 인해 목숨을 잃고 심지어는 전 파문
이 섬멸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제 생각엔 무예로 친구를 사귀
고 절대로 살상을 하지 않고 승패를 가리는 것이 서로 원한을 사
지도 않을 테니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소?"

 광명정 싸움에서  장무기는 원한 대신  덕을 베풀어 칠상권으로
당한 종유협의 내상을 치료해 주고 또다시 만안사에 잡혀간 그를
구출해 주었다.  그래서 공동파에서 이번에  소림사에 온 목적은
명교를 돕기 위해서였다.

 사도 천종은 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키도 큰 사람이  겁은 무척 많군. 그래 그런 무예
를 겨루는 방법이 무슨 재미가 있겠소?"

 공동파의 사로 상경지가 노기띤 음성으로 말하였다.

 "너 같은 술주정꾼을 죽일 필요가 있겠느냐?"

 "이 주정꾼이 주정  좀 한 것뿐인데 무슨  화를 그렇게 내시오?
공동파의 칠상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다 알고 있소. 소림 공
견신승이 바로 그 칠상권을 맞고  죽지 않았소? 나 같은 이 늙은
주정꾼은 공견신승의 상대도 안 되는데."

 군웅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주정꾼이 너무 겁없이 좌충우돌이군. 공동파에 시비를 걸더
니 다시 소림파까지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군. 저런 식으로 살면
서 이 나이까지 목숨이 붙어 있었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종유협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큰 소리로 외쳤다.

 "소생의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각 문파에서 두 명의 고수를
대표로 뽑아서 무예를 겨루는 겁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 어느 파
든 제일  무공이 높은 문파에게 사대협과  도룡도를 맡기는 겁니
다."

 군웅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대찬성을 했다.

 장무기는 유심히 공지대사 뒤에 서 있는 소림 승려들을 살폈다.
그들은 모두 인상을 찌푸리며 몹시 불만스러운 표정들이었다. 그
들은 조민이 원진의  간계를 간파하고 군웅들이 자기네들끼리 서
로 살상을 하게끔 하는 계책이 쓸모없이 됐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이다.

 얼굴이 하얗고 수염이  조금 난 한 중년  남자가 일어나 금접선
(金摺扇)을 부채질하며 매우 의젓하게 말하였다."

 "그렇소. 그렇게 합시다."

 군웅들이 그의 말에 찬성을 보냈다.

 다시 사도 천종의 날카로운 음성이 튀어나왔다.

 "노형의 인물은 정말 영준하시군요. 말소리를 들으니 상남 형양
부(湘南 衡陽府)의 구양형(歐陽兄)인 것 같군요."

 그는 부채를 접으며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바로 소생올시다."

 "구양형께서도 나와 같이 어느 방회에도 속하지 않은 외로운 사
람이지요. 난  호주가이지만 당신은 호색가이니  우리 두 사람이
주색파(酒色派)를 만들어 천하 영웅들과 한번 겨뤄 보는 게 어떻
겠소?"

 "하! 하! 하.....!"

 군웅들은 모두 크게 웃고 말았다.

 사도 천종의  순간적인 농담은 대회장을  한결 부드럽게 만들었
다. 그는 대회장의 살벌한 분위기를 많이 해소시켜 주었다.

 팽영옥은 이 백면의 중년 남자를 장무기에게 소개했다.

 "저자는 이름이 구양목지(歐陽牧之)라고 합니다. 첩을 열 두 명
이나 거느리고 있습니다. 무공은  매우 높지만 강호엔 별로 나타
나지 않고 종일 여자들 숲에서 지냅니다."

 구양목지는 웃으며 말했다.

 "만약 당신과 문파를 창립한다면 난 당신에게 그렇게 많은 술을
댈 수 없소. 여러분께서  무예를 겨루시려면 나이가 지긋하고 덕
도 많은 뿐 아니라  모두가 존경하는 한 분을 공증인으로 추대해
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아무런 말썽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천종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졌는지 이겼는지는 자신이 알 텐데, 어찌 그런 어거지를 쓸 사
람이 있겠소?"

 종유협이 다시 일어섰다.

 "그래도 공증인을 추대하는  것이 좋겠소. 소림에서 주최하셨으
니 공지대사는 자연적으로 공증인의 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도 천종이 설불득의 포대자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산동의 대협 하주 노영웅을 천거하겠소."

 설불득은 그 말에 포대자루를 사도 천종을 향해 던졌다.

 "자, 공증인 받아라!"

 사도 천종은  표주박을 떨어뜨리고 포대자루를  받아 안고 끈을
풀었다. 그러나 설불득의 결박은 독특했고, 그리고 그 끈은 금사
와 고래 심줄을 섞어 만든 것이라 사도 천종이 아무리 힘을 써도
풀리지 않았다.

 설불득은 크게  웃으며 앞으로 달려나가  왼손으로 자루를 들어
어깨에 메었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꾸물꾸물 하고 나더니 다시
앞으로 돌려 포대자루를 몇 번  돌리자 끈이 풀렸다. 그가 푼 포
대를 거꾸로 들자 하주가 굴러 떨어졌다. 사도 천종이 얼른 그의
혈도를 풀었다.

 하주는 한참을 어둠 속에서  갇혔다 갑자기 밖으로 나오자 눈이
부셨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자 창피해서 죽
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단검을 뽑아 들고 자기의 목을 찌르려
했다.

 순간 사도 천종이 재빨리 그의 단검을 빼앗아 버렸다.

 "승패는 병가지상사가 아니오? 이러실 필요가 없어요."

 그 때 사람들 숲에서 키가 작고 뚱뚱한 남자가 크게 외쳤다.

 "포대자루에서 나온 저 사람은  공증인의 자격이 없는 것 같소.
나는 장백산의 손 영감을 천거하겠소!"

 그러자 다시 어느 중년 부인이 말했다.

 "절동쌍의(浙東雙義)의 명성이 강남에  떠들썩한데, 그 두 형제
야 말로 정직하고 사심이 없어서 공증인으로서는 안성마춤이요."

 모두 한 마디씩 하자  순식간에 십여 명의 이름이 나왔다. 모두
강호에서 덕망이 높은 호걸들임엔 틀림없었다.

 갑자기 아미파에서 한 늙은 여승이 한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공증인이오! 그런 것은 하나도 필요없소!"

 그의 음성은 우렁차지는 않았지만 모두는 그의 내력이 상당하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도 천종이 또 말을 받았다.

 "어째서 필요없는지 사태(師太)께서 말해 보시오!"

 "두 사람 중에 살아남는 자가 승자고 죽는 자는 패자가 되는 거
요. 공증인은 바로 염라대왕이요."

 그녀의 이 몇 마디 냉랭한 말투에 모두는 간담이 써늘했다.

 "무예로 친구를 사귀는데 서로  무슨 큰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
고, 그런  생사를 걸고 할 필요가  있겠소? 출가인들은 자비심이
바탕이라고 하는데 사태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부처님께서 노
하시지 않을지 모르겠소."

 "다른 사람과 말을  함부로 하는것은 상관없지만 아미파 제자들
앞에서는 좀 예절을 지켜 줘야겠네."

 사도 천종은 다시 술 한 잔을 따뤄 마시면서 말했다.

 "무서운 아미파군.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대장부는 여자와 싸
우지 않고 훌륭한 술꾼은 여승과 싸우지 않는다."

 말을 마친 그는 여전히 술잔을 입가에 갖다 댔다.

 그러자 갑자기 휙!  휙! 하고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두
개의 작은 염주알이 날아와  하나는 술잔을 명중시켰고, 한 알은
표주박을 명중시켰다. 다시 한  알이 날아오더니 그의 가슴을 명
중시켰다. 염주알마다 꽁하는 소리를 내면서 술잔과 표주박은 가
루가 되고, 사도 천종의 가슴에도 큰 구멍을 냈다.

 그는 그 터지는 힘에 뒤로  밀려 넘어졌으며 옷에 불이 붙고 있
었다. 하주가 재빨리 달려가 불을 껏지만 그러나 사도 천종은 이
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얼굴엔 아직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세 알
의 염주가 얼마나 빨리  날아와 터졌는지 사도 천종은 죽기 직전
까지도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청천 벽력과 같은 변화가 생긴 것이다.

 군웅들 중엔 견문이나 경험이  많은 사람들도 많지만 아무도 이
렇게 빠르고 무서운 암기를 본 적이 없었다.

 주전이 외쳤다.

 "아니, 이게 무슨 암기지?"

 양소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듣자 하니, 서역의 대식국(大食國)의 어떤 사람이 중국에서 화
약 만드는 방법을 배워가서  이런 암기를 만들어 냈다는군. 이것
을 벽력뢰화탄(霹靂雷火彈)이라고  하는데, 속에  강력한 화약을
넣고 거기다 강력한 탄력의  장치로 발사하는 것인데, 아마 저것
이 바로 그 벽력뢰화탄일 거야."

 하주는 불에 탄 사도 천종을 안고 크게 외쳤다.

 "이 사도형께서 말은 좀 함부로 해도 마음은 아주 착해 평생 나
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기에 많은 영웅들이 모였으나
누구든 사도형께서 악행을 저지른 일이 있는지 말씀해 보시오!"

 군중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주는 다시 노여승을 향해 비분강개하며 외쳤다.

 "아미파라면 의협이 있는  명문정파인데 이런 잔인한 암기를 사
용하다니, 무림에서  아무리 강자가 승자라  하지만 이런 경우도
있는 거요? 사태의 이름을 알고 싶소."

 "내 이름은 정가(靜迦)요.  자루에서 나온 대협께서는 삿대질하
면서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나 하가의 무예가 정순하지 못해 명교의 모욕을 당했지만 그것
은 나의 재주가 부족한  탓이오. 그러나 평생의 의협심은 누구에
게도 뒤지지 않소. 정가사태, 당신의 이런 잔인한 행동은 귀파의
조사 곽양 곽여협에게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니오?"

 곽양의 이름이 나오자 아미파 제자들은 일제히 일어섰다.

 정가사태는 두 눈을 치켜뜨며 외쳤다.

 "본파 조사의 이름을 감히 네가 함부로 부르는 것이냐?"

 "아미파 제자들이 이런  불의한 행동으로 조사의 이름을 더럽히
다니! 곽여협이 아니라 당년에 그렇게 잔인한 멸절사태도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소. 이렇게 무고한 생명을 함부로 죽였는데
너희 장문은 아무 간섭도 하지 않다니, 이후 아미파가 여전히 강
호에서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또 다시 헛소리하면 저 술주정뱅이와 같이 만들어 주겠다."

 하주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앞으로 세 발짝  나서며 다시 말했
다.

 "아미파에서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천하 영웅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군웅들과 아미파 제자들을 비롯한 수천 명의 눈초리가 주지약에
게 쏠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정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
덕이고 있었다.

 순간 펑!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정가의 손에서 벽력뢰화탄이 날
아가 하주의 가슴과 아랫배에  각기 구멍을 내고 그의 옷에 불이
붙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굴하지 않고 숨이 이미 끊어졌
어도 쓰러지지 않고 사도 천종의 시신을 안고 뻣뻣이 서 있었다.
군웅들은 모두 멍청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잠시 후, 소란이 일기 시작하더니 모두들 아미파의 만행을 나무
랐다.

 위일소와 설불득이 서로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사람
은 하주의 시신 앞으로  달려나가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설불득
이 말하였다.

 "이런 의협심이 강한 하 노영웅을 못 알아보고 조금 전에 큰 죄
를 저질렀습니다. 우리 둘은 정말 후회가 막심합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두 사람이 서로의 뺨을 후려쳤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뺨이 부어올랐다. 그들은 두 구의 시체에 붙은 불을 끄고
명교의 천막으로 안고 들어갔다.

 장무기는 주지약이 갑자기 이렇게 잔인한 사람으로 변한것이 마
음 아팠다. 군웅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는 사이에 주지약이 송청
서의 귀에 대고 뭐라고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자, 송청서는 고개
를 끄덕거리고 나서 천천히 대회장 중앙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는 큰 소리로 말했다.

 "오늘 여기에  모인 것은 풍류대회를  열자는 목적이 아닙니다.
악기를 두드리고 시를 짓자는 대회가 아니고 무예를 겨루는 대회
인 이상 살상자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조금 전에 하 노영웅께서
사도선생이 평생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본파의 정가
사태에게 훈시를 했고, 그리하여 여러분은 본파에게 불만을 터뜨
렸는데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오늘 무예를 겨루기 전에 먼저
상대의 덕행이나 품행을 미리  알아야 합니까? 그리고 나서 착한
사람은 죽이지 않고 나쁜 사람은 아무렇게나 죽여도 된다 그겁니
까?"

 군웅들은 모두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
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도룡도를 덕이 높은 사람만이 차지할 권리가 있다면 우리
는 더 이상  무예를 겨루자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차라리
산동에 있는 공자를 모신 분묘에 가서 도룡도를 그분의 후손에게
바쳐 버립시다. 그러나 지금 무예를 겨루자는 말이 나온 이상 죽
느냐 사느냐  그것뿐이지, 무고한 사람인지  아닌지 그것을 따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옳소, 창칼에는 눈이 달리지 않았소. 그리고 이미 보복하지 말
자고 하지 않았소?"

 유연주와 은이정은 송청서의  말소리를 들을수록 송청서와 똑같
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얼굴에 짧은 수염에다 말끝마다 본
파 본파, 하고 아미파 남제자로 자처하자 두 사람은 의혹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연주가 일어나 그에게 물었다.

 "각하의 성함을 알고 싶소."

 송청서는 이사숙(二師叔)의  위풍에 눌려 그만  겁을 먹고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유이협께서 이 무명 후배의 이름을 알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
니까?"

 유연주는 날카롭게 외쳤다.

 "각하께서 말끝마다 무예라고 하는데, 아마 무학에 조예가 깊은
모양이군요. 나의 사부께서 소시적에 귀파의 곽여협의 은혜를 입
은 적이 있어서 무당 제자들은 절대로 아미파 제자들과 싸워서는
안 된다는 훈시가  있으셨소. 그래서 소생이 다시  한 번 묻겠는
데, 각하께선 진짜 아미파 제자요? 도대체 이름이 뭐요? 사내 대
장부가 감출 필요가 뭐가 있소?"

 주지약이 가볍게 불진을 흔들며 말했다.

 "유이협, 당신을 속이지는 않겠소. 이 사람은 바로 본좌의 부군
이고 이름은  송청서라 하오. 원래는  무당파 출신이지만 지금은
이미 아미파로 전입했소. 유이협께서  무슨 할 말이 있으면 직접
본좌에게 하시오."

 그녀의 음성은 청랑(淸朗)하면서도 얼음과 같이 차가웠다. 거기
다 선녀와  같은 청려한 용모에 대회장의  수천 호걸들은 누구도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하고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송청서가 자기 얼굴에 묻힌 가짜 수염을 떼어 버리자 순간 그는
영준한 청년으로 변했다. 그것을  본 군웅들은 모두 마음 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정말 어울리는 한 쌍이군."

 유연주는 송청서가 막칠제 성곡을 죽인 죄행이 생각나자 비분하
여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는 근래에 와서 나이가 들어 수양
도 그만큼 깊어져, 마음속으로는 울화가 치밀었지만 얼굴은 여전
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의  눈초리 만큼은 번개와 같았고 날카
로운 눈으로 송청서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송청서는 마음 속으로 큰 죄를 저지른 것에 가책을 느끼고 있었
으므로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주지약이 말했다.

 "송청서께서 무당에서 탈퇴하고 아미에 투신한것을 오늘 천하의
영웅들 앞에서 정식으로  선포하겠습니다. 유이협님, 장진인께서
옛정을 생각하여 무당의 제자가 본파의 적으로 맞서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은 그 어르신네의  의기(義氣)라 할 수 있겠지만, 무당파
의 위명을 보전하기 위한 총명한 처사이기도 합니다."

 은이정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뛰쳐나가더니 손으로 주지약
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낭자, 당신이 어렸을 때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우리 사부님
이 구해서 아미의 문하로  천거하였소. 우리 사부님은 은혜를 베
푸셔도 보답하는 걸 바라지 않고 계시지만, 오늘 당신이 말한 건
마치 우리 무당파는 낭득허명(浪得虛名)하여 아미파의 여러 여협
들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 같소. 당신은.....  그렇게 해도 우리
사부님께 미안한 감이 들지 않소?"

 그러자 주지약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당칠협이 위진강호한 건  제각기 진재실학(眞才實學)이 갖추
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송대협께선 제 시아버님이신데 본
좌가 어찌 여러분들에게  감히 낭득허명(浪得虛名)이라 하겠습니
까? 하지만 무당과 아미  양파는 각기 다른 무예를 전수받았기에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하다는  건 분간하기 어려운 일이죠. 옛날에
장진인은 본파의 곽조사님에게 은혜를 입었고, 나중에 본좌가 장
진인에게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걸  서로 비겨 버리면 우린 누구
에게도 빚진 게 없습니다.  유이협님, 은육협님, 무당 제자와 아
미파가 서로 싸우면 안  된다는 규칙은 지금부터 없었던 일로 합
시다."

 광장 주위에 있는 목붕(木棚)에서 군웅들이 서로 수군거리고 있
었다.

 "저 젊은 장문인의 말투는  마치 아미파가 무당파를 꼭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인 것 같군.  유이협의 내공과 외공은 이미 등봉조극
(登峯造極)에 도달해서 당세에 그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은 별로
없다. 그렇다면 아미파는 그  무서운 암기를 믿고 강호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생각이란 말인가!"

 은이정의 감정은 몹시 흥분되어 있었다. 막상 일곱째 아우인 막
성곡의 참사가 떠오르자 그만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
리며 소리쳤다.

 "청서.....청서 넌.....넌 뭣 때문에 너의.....너의 칠숙(七叔)
을 살해....."

 칠숙(七叔)이란 말을 하더니 그는  갑자기 목을 놓아 울고 말았
다. 그러자 군웅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몹시 이상하게 여겼
다.

 '무당육협의 명성으로 어찌  사람들 앞에서 대성통곡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유연주가 다가가서  은이정의 오른팔을 움켜잡고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천하의 영웅 여러분, 불행하게도 송청서란 반역 제자가 생겼습
니다. 본인의 일곱째 아우인 막성곡은 바로 이 반역....."

 순간 갑자기 휙휙! 하며 두 번 소리가 나면서 벽력뢰화탄 두 알
이 매우 무섭게 허공을 가르며 유연주의 흉구로 발사해 갔다.

 장무기는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덮쳐가서 구출하려 했지만, 
그 뢰화탄은 너무나 빠르게  날아갔다. 더구나 그는 사전에 아미
파가 갑자기 도습하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해서 그의 신법이 아무
리 빨라도 이미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이 갑작스러운 공격은 유연주도 몹시 뜻밖이었다. 만약 몸을 기
울여서 피한다면,  그 뢰화탄이 날아와서  많은 개방의 제자들을 
다칠 것 같았다. 그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뢰화탄 두 알은 이
미 차례로 발사해 왔다.

 그러자 유연주는 쌍장을 돌리며 태극권 중의 일초인 운수(雲手)
를 전개했다. 쌍장으로 발사해온 벽력뢰화탄 두 알의 급경(急勁)
을 모두 와해시켜서 살며시  손바닥에 받쳐올렸다. 이때 그의 쌍
장은 위를 향해서  반듯이 가슴 앞에 받쳐져  있었고, 뢰화탄 두 
알은 그의 장심에서 매우 빠르게 회전하였다.

 그러자 군웅은 일제히 일어나면서  수천 개의 눈빛을 일제히 그
의 두 손바닥에 집중시켰다.  사람들의 심장은 마치 전부 멈춰지
면서 이 살아 있는  듯한 뢰화탄이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는 걱정
에 휩싸였다.

 이 태극권 중의 유경(柔勁)은  천하 무학 중에서 제일 부드러운 
무공이다. 유연주는 수년 동안 이 무공을 부지런히 연마하였으므
로 이미 장삼봉의 진전(眞傳)을  깊이 터득하였다. 방금 사도 천
종과 하주가 차례로 이  뢰화탄에 맞아서 죽은 것을 보았기에 이 
탄은 물건에 닿으면 즉시 폭발하면서 위력 또한 굉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에 하는  수 없이 평생의 
절학으로 막아보자는 모험을 한 것이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 유능극강(柔能克剛)했다.  뢰화탄 두 알은 
그의 장심에 있는 유경에 제압되어 마치 한 조각 끈끈한 물건 사
이에 빠진 것처럼단지 급회전만 할 뿐 폭발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휙! 휙! 하며 두 번의 소리가 들리더니 아미파에서 다시 
두 알의 뢰화탄을 그에게 발사했다. 

 은이정은 사형의 곁에 서  있다가 얼른 쌍장을 휘둘러서 뢰화탄
을 받으려 했다. 막상 손과 뢰화탄이 맞닿으려는 순간 태극권 중
의 람작미식(欖雀尾式)을 전개하면서  뢰화탄을 살며시 휘어잡았
다. 발은 금계(金鷄)가  땅에 서 있는 것처럼  왼발은 땅에 딛고 
오른발은 들어올렸다. 그리고  전신을 마치 팽이처럼 급회전시켰
다.

 유연주는 장심으로 경력을  분산했고 은이정은 공중에서 경력을 
분산시켰다. 물론 무공에선 은이정이 뒤졌으나 보기엔 그가 급회
전하는 심법이 훨씬 더 멋지게  보였다. 그가 삼십 여 바퀴를 돌
았을 때 사면팔방에서 우뢰같은 박수와 갈채를 보냈다. 뢰화탄의 
경력도 몹시 약해졌다.

 그런데 뜻밖에도 휙휙!.....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뢰화탄 여
덟 알이  그들에게 날아갔다. 그러자  유연주와 은이정은 일제히 
소리를 외치며 각자 수중에 있던 뢰화탄을 밖으로 던졌다.

 무당의 제자들은  접기타기(接器打器)란 절기를  지니고 있어서 
적의 암기를 받아낸 후 다시 되돌려 발사할 땐 하나로 둘을 맞출 
수 있고 또 둘로 셋을  칠 수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이 던진 뢰화
탄 네 알이 서로  부딪치면서 상대편의 여덟 알의 뢰화탄을 한꺼
번에 적중시켰다. 그러자 광장에서 펑펑!..... 하는 요란한 소리
와 함께 검은  연기가 자욱하더니 초황화약(硝黃火藥) 냄새가 코
를 진동했다.

 유, 은 두 사람은 뢰화탄을 던지고 나서  재빨리 몸을 솟구치더
니 십여 장 뒤로 물러났다. 행여나 아미파에서 다시 공격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자 화산파의 목붕에서 체격이 우람한 자가 일어서면서 낭랑
한 소리로 말했다.

 "아미파는 남과  무공을 겨룰 때  항상 이처럼 의다위승(倚多爲
勝)합니까?"

 이 자는  바로 화산이로의  하나인 고노자(高老者)였다. 왕년에 
광명정에서 하태충  부부와 연수하여  장무기하고 싸웠던 사람이
다.

 아미파의 정가가 말했다.

 "무공지도(武功之道)는 천태만상하기에 강한  자는 승리하게 되
고 약한 자는  패배하게 됩니다. 우리는 책을  읽는 선비도 아닌
데, 매사에 규칙과 도리를  따진다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도리
와 규칙이 있겠습니까?"

 장무기는 마음이 점점  더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그래서 목붕에
서 나오더니 아미파의 앞으로 다가가서 주지약에게 말했다.

 "지약, 여러  가지로 당신에게  미안하오, 송사형이 막칠숙님을 
해친 일은 아무래도 끝을 맺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엔 차라리 송
사형이 유이숙과 은육숙을 따라 무당으로 돌아가서 송대백님에게 
사죄하는 게 옳은 것 같소."

 그러자 주지약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교주, 예전에 난 당신이  호한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비겁
한 소인이구료. 대장부는 자신이 한 일은 자신이 감당해야 하오. 
당신이 막칠협을 해쳤으면서  뭣 때문에 죄를 송청서에게 덮어씌
우려 합니까?"

 장무기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당신..... 당신은 내가  막칠숙님을 해쳤다고 했소? 다.....당
치도 않소."

 "무당 막칠협을 해친 일은 모두 조정의 여양군주가 중간에서 농
간을 부린 것이오. 당신은  왜 그녀를 불러내서 천하의 영웅들하
고 대질하지 않는 것이오?"

 장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민매는 육대문파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 장안에 그녀의 원
수가 어쩌면 우리 의부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 어찌 
그녀를 나타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아, 그날 혼례 중에 내가 
그녀를 버리고 떠난 것이  그렇게 잘못한 일인 줄은 정말 생각지 
못했다.'

 장무기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돌아갔다.  그런데 갑자기 아미파 
중에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말하는 게 들렸다.

 "명교의 장교주가 이렇게 비겁하고 나약한 소인인 줄은 정말 몰
랐다. 우리의 벽력뢰화탄의 무서움을 보더니 꽁무니를 빼려 하는
구나."

 장무기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돌아보지 않았다.

 '나도 구태여 이 말을 누가 했는지 돌아볼 것 없다. 아미파에서 
어떠한 모욕을 하더라도 난 달게 받아야 하다.'

 그러자 등 뒤에서 비웃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렸다. 장무기
는 더이상 신경쓰지 않고 명교의 목붕으로 돌아갔다.

 양소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벽력뢰화탄은 잔재주에 지나지  않는데 뭐 그리 대단하다는 것
이냐? 무당이협을 어찌하지  못했으면 자연히 장교주님도 어찌하
지 못하는  것이다. 너희 아미파에게  우리 명교의 기계(器戒)를 
한 번 구경시켜 주겠다!"

 이윽고 왼손을 흔들자 한  백의 동자가 두 손으로 작은 목가(木
架) 한 개를  바쳤다. 목가 위에는 오색  깃발이 십여 개가 꽂혀 
있었다. 양소는 백기 하나를 뽑아서 밖으로 던지자, 광장 한가운
데로 날아가더니 땅에 꽂혔다.

 바로 이때, 양소의 뒤에  있는 한 사람이 화전(火箭) 한 자루를 
얼른 공중으로 던졌다. 그러자 공중에서 한 줄기 흰 연기가 발산
되었다. 순간 발걸음소리가 들리면서  머리에 흰 띠를 두른 명교
의 교도들이 급히 광장  안으로 달려왔다. 모두 오백명이고 사람
마다 활에 화살을 장진했다.

 휙휙.....! 하며 소리가  나더니 오백자루의 화살은 질서정연하
게 백기의 주위에 꽂히면서  원을 하나 형성했다. 바로 오경초가 
통솔하는 예금기의 사람들이었다.

 군웅들이 미처 갈채를 보내기도  전에 예금기 교도들은 등에 있
는 표창을  뽑아서 앞으로 열 걸음쯤  달려가더니 일제히 표창을 
던졌다. 그러자 오백자루의 표창은 일제히 화살의 원안으로 꽂혔
다. 그들은 바로 또 열  몇 걸음을 달려가더니 허리춤에 있는 짧
은 도끼를 뽑아 들었다.  순간 군웅들의 눈앞에 빛이 번뜩거리면
서 오백자루의 짧은 도끼는 일제히 땅에 찍히며 한 개의 원을 형
성했다. 도끼, 표창, 화살 세 가지  병기는 세 개의 원을 형성하
였고 전혀 뒤섞이지 않았다.  제아무리 무공이 하늘에 달한다 해
도 이 천 오백 개의  길고 짧은 병기가  협공하게 되면 순식간에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양소가 흰 깃발을 들어올리며  뒤로 몇 번 흔들었다. 그러자 예
금기의 오백명 교도는 화살과  표창, 도끼를 뽑아들고 명교의 목
붕 앞으로 달려와서 장무기에게 인사를 하고는 즉시 광장 밖으로 
달려갔다.

 양소가 파란 깃발을 던지니  흰 깃발 옆에 꽂혔다. 그러자 광장 
옆에는 무거운  발걸음소리가 들리면서  오백명 거목기 교도들이 
머리에 파란 띠를 두르고 열 사람마다 거대한 나무토막을 하나씩 
들고 재빨리 달려왔다. 나무 토막의 무게는 하나가 천 근 이상은 
되었고 나무에는 철구(鐵鉤)가 장치되어 있어서 각자 철구 한 짝
을 움켜잡고  매우 질서있는 걸음으로  달려왔다. 갑자기 고함을 
지르더니 오십 개의 거목들은  동시에 손에서 벗어났다. 높은 것
도 있었고 낮은 것도  있고 왼쪽으로 던진 것도 있었고 오른쪽으
로 던진 것도 있었다. 그러나 거목이 날아간 것마다 상대편의 거
목 한 개씩에 정확하게 맞부딪쳤다.

 순간 펑펑.....! 하는 거대한  소리가 끊임없이 나더니 오십 개
의 거목은  스물 두쌍으로 나눠져서  서로 맞부딪쳤다. 거목기의 
이러한 진법은 공성전법(攻城戰法)에서 연화(演化)한 것이다. 성
을 공격하는 자가 거목을  들고 성문을 부딪쳐서 세게 치게 되면 
아무리 견고한  성문이라도 거목에 의해서  부서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살붙이로 된 몸이 이 많은 거목의 충격을 받으면 어찌 살
아 남을 수가 있겠는가!

 양소는 파란 깃발을 흔들어서 거목기에게 물러나라는 명령을 하
달하면서 오른손을 휘두르더니 빨간색 작은 깃발 하나를 광장 안
으로 던졌다.

 그러자 파란 띠를 두른  명교의 교도들은 일제히 물러나더니 머
리에 빨간  띠를 두른 열화기 오백명  교도들이 재빨리 장안으로 
들어갔다. 각자의 손에 있는 분통(噴筒)을 한 차례 분사(噴射)하
자 광장의 중심에는 온통 새까만 주유(綢油)가 살포되었다. 열화
기 장기사가 손을 휘둘러서 유황화탄을 한개 던지자 즉시 불꽃이 
일면서 활활 타올랐다.

 명교총단이 있는 광명정 부근에는 석유가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바위 사이에서  밤낮으로 기름이 뿜어  나왔다. 열화기 사람들은 
등에 쇠상자를 짊어지고 있었으며 상자 안에는 석유가 가득 담겨 
있었다. 기름을 뿜어 내서  연소를 시키니 사람의 힘으론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열화기가 물러가고 나서 양소가  검은 깃발을 다시 던지자 머리
에 검을 띠를 두른 홍수기 휘하에 있는 오백명 교도들이 급히 광
장으로 들어갔다. 이 홍수기가 지닌 물건들은 모두 이십부(部)의 
수룡(水龍)과 분통, 제통(提桶) 같은 물건도  있었다. 앞에 있는 
열 사람은 목차(木車) 열대를  끌고 있었다. 장기사 당양이 명령
을 내리자 목차를 열고  이십마리의 굶주린 늑대를 꺼내었다. 늑
대들은 온갖 사나운 짓을 하며 광장에서 포효하더니 사방으로 흩
어져서 사람을 물으려 했다. 

 군웅들은 몹시 의아했다.  도대체 이 사나운 늑대들과 홍수라는 
두 글자가 무슨 연관성이 있단 말인가? 그러자 당양이 외치는 소
리가 들렸다.

 "물을 뿌려라!"

 순간 도질분통(陶質噴筒)을 들고  있던 백명의 교도가 백줄기의 
수전(水箭)이 사나운 늑대의 몸으로 일제히 발사했다. 그러자 군
웅들은 한 차례 신 냄새를 맡게 되었다. 이십마리 사나운 늑대는 
수전을 맞고 즉시 쓰러지면서 울부짖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가죽
이 파열되며 살이 썩으면서 한 덩어리의 숯탄처럼 변해 버렸다.

 홍수기가 발사한  수전은 몹시 독한 부식  약수였다. 이 약수는 
유황과 초석(硝石) 등 약물에서 뽑아내어 만든 것이다. 

 군웅들은 이러한 광경을 보게 되자 모두 기절초풍했다.

 '저 약수를 만약에 늑대들에게 발사하지 않고 내 몸으로 발사했
다면, 지금쯤 아마.....'

 양소는 검은 깃발을  흔들어서 병사를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다
시 노랑색 작은 깃발을 하나 던졌다. 그러자 머리에 노랑색 띠를 
두른 명교교도들 한 패가  광장안으로 걸어왔다. 각자는 손에 쇠
삽을 들고 있었고 모래와 석회를 한 수레씩 밀고 있었다.

 사람 수는 금, 목, 수, 화 사기보다  훨씬 작은 백 명뿐이었다. 
이 백명은 큰 원을 하나 형성하면서 동시에 삽을 들고 땅으로 힘
껏 후려쳤다. 그러자  갑자기 꽁! 하며 거대한 소리가 나면서 광
장중심이 밑으로 푹 꺼지면서 직경 삼, 사장이나 되는 큰 구멍이 
하나 생겼다.  곧이어 큰 구멍의 주위에 있는 흙이 들썩거리더니 
머리에 철모를 쓰고 손엔  쇠삽을 들고 있는  장정들이 하나하나 
뛰쳐나왔다. 사백명 장정이 갑자기 지하에서 불쑥 나오자 군웅들
은 모두 깜짝 놀라며 일제히 소리를 외쳤다.

 이 사백명 교도들은 벌써  먼 곳으로부터 땅굴을 파서 광장중심
으로 와 있었다.  그들은 큰 굴을 파서  판자와 나무로 지탱하며 
그 안에 숨어  있었다. 후토기 장기사 안원이  호령을 하자 사백 
명 교도들이  동시에 나뭇 가지를 끌어내는  바람에 지면 전체가 
밑으로 꺼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지하에 있던 교도들이 바로 흙
을 헤치며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러자 늑대  시체, 석유, 초토 등이  일제히 지하로 떨어졌다. 
백명 교도는 쇠삽을  휘둘러서 큰 구멍의 위를  세 번 후려쳤다. 
만약 사람이 구멍 안으로 바진 후 다시 밖으로 뛰쳐 나오려 하면 
이 백자루의 쇠삽을 맞고 다시 빠져 버릴 것이다.

 그들은 수레에 실었던 석회, 모래, 자갈을 구멍으로 쏟았다. 순
식간에 큰 구멍과 수백 개  작은 구멍을 전부 메꾸어 버렸다. 오
백 자루의 쇠삽이 여기저기서 재빨리 움직이는 모양은 실로 장관
이었다. 장기사가 명령을 하달하자 오백명 교도들은 일제히 장무
기에게 인사를 했다.

 양소는 병사들을 거두어 들이고 나서 작은 깃발이 꽂혀 있는 목
가를 뒤에 있는 동자에게 넘겨 주더니 냉랭하게 주지약을 바라보
면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무언의 뜻은 몹시 명
백했다.

 "너희 아미파에 있는 백여  명쯤 되는 남녀 제자가 어찌 수천이
나 되는 우리 명교의 적수가 될 수 있겠느냐?"

 광장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공지의 뒤에 있던 노
승 한 명이 일어나면서 말했다.

 "방금 명교에서  보였던 진법(陣法)이  도대체 쓸모가 있는지는 
우리가 원수장군이 아니고  또 배운 게 손오병법(孫吳兵法)이 아
니기 때문에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주전이 소리쳤다.

 "쓸모가 있고 없고를 알아보는  건 매우 간단한 일이오, 소림사
에서 승려들을 파견하여 실험해 보면 금방 알게 될 것이오."

 그 노승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기의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 오늘 개최한 것은 천하의 영웅대회라서 각문 각파의 깊
은 무학의 수위(修爲)를 관람하는  겁니다. 그러니 사전에 몇 분 
시주님의 말대로 각자 무공을  겨뤄서 무예가 제일 높은 자가 승
리하는 겁니다. 우리가  강조한 것은 단타독투(單打獨鬪)입니다. 
의다위승(倚多爲勝)이란 규칙이 있다는  말은 무림에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구양목지가 말했다.

 "무림에는 의다위승(倚多爲勝)이란 규칙이 확실히 없습니다. 그
렇다면 벽력뢰화탄, 독화,  독수 같은 물건은 사용해도 괜찮습니
까?"

 그 노승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다.

 "출장하여 무예를  겨루는 사람은  암기를 사용해도 상관없습니
다. 어떤 친구들은 암기에다 독약, 독물을 첨부하는 사람도 있는
데, 그것도 금지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다른 사람에게 
도습을 가하면 그건 대회의 규칙을 어기는 것이라 여러분들은 필
히 한꺼번에 일어나서 그  자를 공격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의
사는 어떻습니까?"

 그러자 군웅 중 반수 이상은 좋다고 외치면서 모두가 당연히 그
래야 한다고 말을 했다.

 공동파의 당문량이 말했다.

 "어떤 사람이든  연거푸 두 번 승리하면  필히 퇴장하여 휴식을 
취해서 내력 원기를 회복해야  합니다. 만약에 계속 싸우게 되면 
아무리 통천의  재주가 있다 해도 단숨에  처음부터 끝까지 이길 
수 없을 것이오. 그리고  각문, 각파, 각방, 각회에서 만약에 이
미 두 사람이 패했으면 다시 사람을 파견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기에 있는 수천 명 영웅이 전부 한 번씩 출전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마 삼개월이 지나도 끝이 나지 않을 것이
오. 소림사에 양식이 아무리 풍부하다 해도 모자랄 것이오. 그러
면 소림사는 백 년이 지나도 원기를 회복하지 못할 것이오."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호응
했다. 그러자 팽영옥이 웃으며 말했다.

 "당노삼(唐老三)의 말투는  오늘 공동파가  우리를 꼭 돕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주님 말고 또 어느 분이 출전하겠습니까?"

 그러자 주전이 말했다.

 "교주님, 주전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무공이 뛰
어나지 못해서 나가봐야 창피만 당할 겁니다."

 장무기는 한 사람 한 사람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양좌사, 범우사,  위복왕, 포대대사,  철관도장 여러분은 각기 
절예(絶藝)를 지니고 있어서 모두 출전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범
우사의 무학이 제일 박대해서 상대의 어떤 가수(家授)든 그는 모
두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범우사를 출전시키는 게 옳은 
것 같다.'

 "여러 형제분들은 어느 누가 나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양
좌사는 절 따라서  금강복마권을 공격하였고, 위복왕과 포대대사
는 하주를 생포하였기에 모두 힘을 허비했습니다. 이번에 본좌는 
범우사를 출전시키겠습니다."

 범요는 몹시 기뻤다. 이윽고 몸을 굽히며 말했다.

 "명령을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명교의 군웅은 범요의 무공이 뛰어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모
두 동의했다. 그러자 조민이 말했다.

 "범대사님, 제가 한 가지만 당신에게 부탁하겠는데 들어 주시겠
습니까?"

 "군주님의 명인데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소림의 공지대사와 당신의 감정은 아직 풀지 못했습니다. 만약
에 당신이 먼저 그 사람하고 싸우게 되면 승패는 실로 예측할 수 
없습니다. 설령 그를 이긴다 해도 당신은 지칠대로 지치게 될 겁
니다."

 그러자 범요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공지
신승은 이름을 떨친  지 수십 년이 되었다.  비록 보기에는 항상 
이마를 찌푸리고 얼굴은 울상이라 단명요절할 상(相)이지만 사실
은 내공과 외공을 모두 겸비하고 있다는 것을 범요도 잘 알고 있
었다.

 조민이 말했다.

 "당신은 될 수 있으면 그와  약속을 미리 하세요. 훗날 다시 대
도의 만안사에 가서 단둘이 승부를 가리기로 말입니다."

 그러자 양소와 범요는 일제히 말했다.

 "묘책입니다. 묘책입니다."

 이때 각처에 있는 목붕에선 각 문파 방회의 군웅들이 서로 수군
거리며 자기 파에서 출전할  사람을 선택하고 있었다. 몇 군데에
서는 큰 소리로 언쟁을 벌이며 의견 일치가 되지 못하는 것 같았
다.

 범요는 주붕(主棚)으로 다가가서  공지에게 포권의 예로 인사하
며 말했다.

 "공지대사, 당신은 만안사에 다시 한 번 갈 담력이 있습니까?"

 공지는 <만안사>란 말을 듣자  얼굴에 있는 주름살이 더욱 깊어
지면서 몹시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뭣 때문이오?"

 "우리 두 사람은  만안사에서 원한을 맺었으니 당연히 만안사에
서 해결해야 할 게 아닙니까? 만약에 대사께서 특별한 일이 없으
시다면 금년 팔월 중추절에 소인이 만안사에서 대사의 절예를 몇 
수 가르침 받을까 합니다."

 공지도 범요의  무공을 몹시 꺼렸다. 더구나  사(寺) 중에 마침 
큰 변고가 있기 때문에 실로 범요와 싸울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자 즉시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좋소. 금년 팔월 중추절에 만안사에서 만납시다."

 범요는 포권의 예로 인사하고 나서 즉시 물러갔다. 그가 칠, 팔
보(步)쯤 걸어가자 공지가 천천히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범시주, 오늘 당신은 금모사왕을 구출하려는 일념으로 나와 싸
우는 것을 꺼리는 것이죠?"

 범요는 멈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속으론 이 화상이 결국은 자
기 마음을 간파했음을 알았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서 껄껄 웃으
며 말했다.

 "난 당신을 이길 자신이 없소이다."

 공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납(老衲)도 시주를 이길 자신이 없소이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갑자기 그들의 마음에
는 모두 영웅중영웅(英雄中英雄) 호한석호한(好漢惜好漢)의 감정
이 생겨났다.


                                 ----- 제 7 권 1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7 권


     제 2 장  장무기와 주지약의 고수정심(고수정심) 


 광장의 사람들이 차츰 조용해지자  공지의 뒤에 있던 그 달마당
노승이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여러 영웅께서  의논하여 약정한 규칙대로 무예를 겨루
게 될 겁니다.  허나 도창권각(刀滄拳脚)에는 눈이 없습니다. 설
령 인명 피해가 나더라도  절대로 탓하지 않고 하늘의 뜻으로 돌
리겠습니다. 어느  문파든 방회든 최후의  승자가 무공이 최고로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여 사손과  도룡도를 모두  차지하는 겁니
다."

 장무기는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저 화상은 행여나 남이 독수를 가하지 않을까 봐 걱정이군. 더
구나 각파가 서로 원한 관계를 깊게 맺지 않을까 봐 안달이니 공
견, 공문 같은 신승들의  자비로운 심성은 전혀 엿보이지 않는구
나.'

 이미 약정한 바에 의하면, 한 사람이 두 번 승리하면 필히 퇴장
하여 휴식을 취해야 하니 먼저 겨루든 늦게 겨루든 별로 큰 차이
는 없다. 그러자 바로  여기저기서 출장하여 도전하는 자가 있었
다. 삽시간에 광장에는 여섯 사람이 세 쌍으로 나눠서 겨루고 있
었다.

 조민은 만안사에서 육대문파의  절예를 습득했지만 아직은 수위
(修爲)가 얕았다. 그러나  식견은 이미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장무기와 범요의  중간에 서서 조그만 소리로  그 육인의 무공을
논의하고 또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한다고 예측했는데, 뜻밖에
도 아주 정확했다.

 차 한잔 끓이는 시간쯤 지나자 세 쌍 중에서 이미 두 쌍은 승부
를 가리고 한 쌍만 여전히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승자에
게 도전하는 자가 있어서  여전히 여섯 사람이 세 쌍으로 나눠서
접전을 벌이는 상황이 되었다.

 새로 출장한 두 쌍은  각각 병기를 사용했다. 이렇게 계속 접전
하게 되자 십중팔구는 피를 흘리고 부상을 당해야만 승패를 가릴
수 있었다. 그러자 장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이처럼 서로  싸우게 되면 각문,  각파들은 필히 화기(和氣)를
상하게 될 것이다. 어느  일파든지 상대방에게 패하게 되면 부상
을 당하거나 죽게  되니 훗날 필히 보복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로 죽이고 죽는 엄청난 재화(災禍)를 불러일으키는 게 아
닌가!'

 순간 장안에는  화산파의 왜로자(矮老者)가  개방의 집법장로의
일장을 얻어맞고 입에서 선혈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자 화산파
의 고로자(高老者)가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구린내나는 거지놈아. 썩은 거지놈아.....!"

 이윽고 그는 몸을  튕겨나오면서 개방의 집법장로에게 도전하려
했다. 그러자 왜로자가 그의  팔을 나꿔채며 조그만 소리로 말했
다.

 "사제, 넌 그의 적수가 못  되니 우린 당분간 이 비분을 참기로
하자."

 고로자는 화를 내며 말했다.

 "적수가 안 돼도 싸우겠습니다."

 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은 사형의 무예와 자기의 초수가
같더라도 수위는 사형이 깊었다. 게다가 사형이 패했으니 자기도
패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마지못해 왜로자에게 끌려가며
쉴새없이 욕을 퍼부었다. 끝내 못 이기는 척 하면서 목붕으로 돌
아갔다.

 이윽고 그 집법장로는 다시 매화도의 장문인을 물리치고 승리했
다. 연거푸 두 번 승리하게 되자 개방 방주들의 우뢰같은 박수를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퇴장했다.

 이처럼 왔다갔다하며 광장에서는 두 시간 정도의 무예가 겨루어
졌다. 해가 서서히 기울어지자  출전하는 사람의 무공도 점점 강
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엔 웅심발발(雄心勃勃)해 했지만 남
들의 무공을 보게 되자 그제서야 자기가 우물안의 개구리라는 것
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고수들은 섣불리 출전하지 못하
게 되었다.

 신패(申牌) 시각이 되자  개방의 장발용두가 출장하여 상서배교
중의 팽사랑에게 도전했는데,  팽사랑은 크게 망신을 당했다. 팽
사랑은 그와의 대결에서  배심이 길게 찢어지자 부끄럽고 창피해
서 재빨리 퇴장했다. 그러자 장발용두는 아미파의 군중을 바라보
며 냉소를 지었다.

 "여자들이 무슨 대단한  재주가 있겠습니까? 한결같이 도검이나
암기에 의지하는 것뿐이죠. 그래도 이분 팽사랑께서 이 정도까지
무공을 연마했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지약이 조그만 소리로 송청서에게  몇 마디 말을 하자 송청서
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느린  걸음으로 출장해서 장발용두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용두대형, 제가 당신의 가르침을 받겠소."

 장발용두는 송청서를 보자 순간 울화가 치밀어서 얼굴이 시퍼렇
게 변했다.

 "이 간적(奸賊) 같은 송가놈아!  네가 진우량의 명을 믿고 우리
개방에 잠입해서 사방주님을  살해한 일은 당연히 네놈도 책임을
한몫 져야 한다. 오늘 네놈은  아직도 나를 쳐다볼 낯이 있는 거
냐?"

 그러자 송청서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호에는 적의 소굴로 잠입하여 기밀을 염탐하는 일은 매우 흔
한 것이오. 다만 너희 거지떼들은 눈이 멀어서 송대야의 본래 면
목을 식별하지 못했다는 것을 탓하거라!"

 "넌 네 친아버지의 무당파까지도 배반했으니 무슨 일인들 못 하
겠느냐? 네놈은 부친에게 불효를 했으니 훗날 처자에게도 불의를
하게 될 것이다. 아미파는 너의 손에 꼭 망조가 들 것이다!"

 송청서는 화가 나서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해 버렸다.

 "이제 다 지껄였느냐?"

 장발용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훗! 하며 일장을 후려쳤다.
송청서는 몸을 돌리며 피하더니  손을 되돌려서 살며시 한 번 휘
둘러 아미파의 금정면장(金頂綿掌)으로 대항했다.

 장발용두는 그가 개방에 잠입하여 많은 사람을 기만했다는 것에
화가 나서 출수한 초수마다 모두 살수를 전개했다. 이미 죽을 각
오로 접전을 벌이고 있으니  보통 무예를 겨루는 것과는 전혀 상
황이 달랐다.

 장발용두가 개방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방주와 전공, 집법 두 장
로의 다음이니 그의 조예는  실로 대단했다. 송청서는 무당파 제
삼 대 제자 중에서도 특출한 인물이었지만 처음으로 아미파의 금
정면장을 맞이하였기에  아무래도 장법  중의 정미오묘한 변화를
숙달되게 전개할 수 없었다.

 그는 사,오십 합의 접전을  벌이고 나자 이미 위험한 처지에 놓
여졌다. 하는 수 없이  무당파의 면장으로 상대방의 초수를 분해
하였다. 이는  그가 어려서부터 배워온  무공이며 게다가 이십여
년 동안 연마하였기에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고 위력 또한 대
단히 강했다. 아미파의 금정면장과 외관상은 비슷한 게 있었으나
운경척초(運勁拓招)하는 법문은 전혀 달랐다. 은이정은 쳐다볼수
록 울화가 치밀어서 끝내 고함을 쳤다.

 "송청서, 네 녀석은 정말 낯도 두껍구나. 넌 무당을 반출(反出)
하였는데 어찌  무당의 무공으로 목숨을  구하려 하느냐? 네놈은
아버지를 배신해  버렸는데 어찌 네 아버지가  전수해 준 무공은
버리지 않았느냐?"

 그러자 송청서는 얼굴이 빨개지며 소리쳤다.

 "무당파의 무공이 뭐가 대단합니까? 자 똑똑히 보시오!"

 왼손을 갑자기 장발용두의 눈앞에서 상권하구(上圈下鉤) 좌선우
전(左旋右轉)하며 연거푸 칠,팔 가지의 모양으로 변하더니, 불쑥
오른손을 내뻗자 푹! 하는  소리가 나면서 다섯 손가락이 장발용
두의 뇌문(腦門)에 똑바로  삽입되었다. 방관하는 군웅들이 멈칫
하는 순간 그가 다섯  손가락을 피범벅이 된 채 들어올리자 장발
용두는 뒤로  나자빠지면서 즉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송청서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당파에 이런 무공이 있소?"

 군웅(群雄)들이 비명을 지르는  사이에 개방에서는 동시에 여덟
명이 달려가더니, 두 명은  장발용두의 시신을 일으켜 세우고 나
머지 여섯 명은 일제히 송청서에게 덤벼들었다. 이 여섯 명은 모
두 개방의 호수였으며 더구나 그 중의 네 명은 병기를 들고 있었
으니 삽시간에 송청서는 다시 위험한 처지에 놓여졌다.

 공지대사의 뒤에 있던 한 비대한 화상이 큰 소리로 호통쳤다.

 "개방 제군(諸君)의 이러한  행동은 오늘 영웅대회의 규칙을 위
배하는 것이오!"

 그러자 집법장로가 소리쳤다.

 "여러분은 잠시 물러나시오. 본좌가 장발용두의 복수를 갚아 주
겠소!"

 개방의 제자들은 뒤로 물러나면서 장발용두의 시신을 들고 목붕
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모두  화난 얼굴로 송청서를 무섭게 노려
보았다.

 '비록 무예를 겨룰 때 살생하게 되어도 탓하지 않는다고 하였지
만, 이 송가란 놈의 출수는 너무나 악랄했다.'

 방관하는 군웅들은 모두 이같은 생각을 했다.

 이때 장무기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직 조민 어깨에 찍
힌 다섯  개 조인(爪印)과 그날 밤  오두막집에서 두백당 부부가
횡사한 장면들이었다. 이윽고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양좌사, 어째서 아미파에 이런 사악한 무공이 있을까요?"

 양소는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속하(屬下)는 이런 무공을 전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
미파의 창파사조인 곽여협의  별명이 <소동사(小東邪)>라 부르니
무공에 약간씩 사기(邪氣)가 서려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
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송청서는 이미 집법장로와 접
전을 벌이고 있었다. 집법장로는 신형이 왜소하였기에 행동이 엄
청나게 민첩했다. 열 손가락이 마치 갈고리와 송곳처럼 변하면서
응조공(應爪功)으로 송청서와 대항했다. 아마 그도 지공(指功)이
전문 분야라 같은 방법으로 송청서의 천령개에다 다섯 구멍을 찍
어서 장발용두의 복수를 갚아 줄 속셈이었다.

 송청서는 처음엔 여전히  금정면장으로 그와 접전을 벌였다. 그
러나 접전이 깊어지게  되자 집법장로는 대갈일성하며 왼손의 다
섯 손가락을 송청서의 뇌문에 걸쳐놓게 운경하여 투입하려 했다.
그러자 송청서는 재빨리 오른손을 뻗었다. 순간 푹! 하는 소리가
나더니 다섯 손가락은 이미 집법장로의 후관(喉管)을 조단(爪斷)
하였다. 집법장로는 앞으로 쓰러지면서 왼손의 다섯 손가락은 땅
에 삽입되었다. 순간 피바다를 이루며 숨이 끊어졌다.

 주지약이 손으로 신호를 보내자  여덟 명의 아미파 여제자가 각
각 장검을 쳐들고 몸을 날려서  나갔다. 두 명이 한 조가 되어서
등을 서로 맞대며  사방을 호위하더니 송청서를 중간으로 몰아넣
었다. 만약 개방이 다시  다가와서 싸우게 되면 즉시 패싸움으로
돌변하려는 상황이었다. 순간 달마당  노승 한 명이 낭랑한 소리
로 말했다.

 "나한당의 삼십 육명 제자들은 듣거라."

 손뼉을 세 번 치자 노란  도포를 걸친 삼십 육명 소림승이 앞으
로 날아나왔다. 십 팔명의 손에는 창장을 들고 있었고 십 팔명의
손에는 계도(戒刀)가 들려있었다.  마치 진법(陣法)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광장의 각처로 흩어지더니 엄밀
하게 주위를 지키고 섰다.

 그 노승이 말했다.

 "공지사숙님의 법지에 따라  나한당의 삼십 육명 제자들은 영웅
대회의 규칙을 감관(監管)할 것이다. 오늘 대회에서 무예를 겨룰
때 만약 시중기과(恃衆欺寡)하는 자가 있으면 그 자가 바로 천하
무림의 공적이다. 우리  소림사는 주인의 입장으로 필히 공도(公
道)를 유지해야만 한다. 삼십 육명 제자들은 정신 바짝차려서 감
시해라! 만약 규율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즉시
사살하여라.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러자 삼십 육명 소림승은  일제히 대답하고 나서 주의깊게 광
장의 중심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되자 개방의 제자들은 비록 모
두 격분되어 있어도 감히 함부로 앞으로 다가가서 출수하지 못했
다. 단지 큰 소리로 욕을 퍼부으면서 집법장로의 시신을 들고 내
려갔다.

 조민은 조그만 소리로 범요에게 말했다.

 "고대사님, 아미파에게 저러한 절초(絶招)가 있을 줄은 정말 뜻
밖입니다. 그날 만안사에서  멸절사태가 죽음을 무릅쓰고 출탑하
여 무예를 겨루지 않았던 것은 아마 바로 이 절초 때문이었을 겁
니다."

 범요는 고개를 흔들며 이 일초의 해결법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
는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장무기에게 말했다.

 "교주님, 속하에게 한 가지 무공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쌍장을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왼손의 식지와 오른손
의 식지를 뻗어서 하나는  앞으로 하나는 뒤로 하며 매우 유연하
게 연속 일곱  번을 움직였다. 이윽고 그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
다.

 "저의 양팔이 이처럼 연거푸  공격하는 것은 오직 그 녀석의 팔
을 나꿔채서 내력을 운출하여 그 녀석의 팔 관절을 진단(震斷)시
키려는 겁니다. 그의 지력이  아무리 무서워도 다시는 그 기술을
전개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자 장무기는 양손의  식지를 뻗어서 좌구(左鉤) 우탑(右搭)
하며 말했다.

 "그가 지력으로 당신의 팔을 찍으려고 하는 것을 조심하시오."

 범요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제가 금나수로 그의  손목을 나꿔채고 십 팔로(路) 원앙연환퇴
(鴛鴦連環腿)로 그의 하반신을 걷어찰 겁니다."

 "팔십 일초의 맹공을 퍼부어서  그가 숨돌릴 틈을 주지 않는 겁
니다."

 그들 두 사람은 네손가락으로 공격하고 후퇴하면서 대단히 빠
른 공수를 펴보였다. 그러자  범요는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교주님의 그 몇 초는 실로 엄청나게 신묘합니다. 저 녀석은 지
력만 강할 뿐 무공은 대수롭지 않아서 이 몇 초는 절대로 전개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자 장무기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가 이  삼초를 전개하지  못한다면 범우사는  승리하게 됩니
다."

 이윽고 장무기는  왼손의 식지로 두 번  원을 그리더니, 갑자기
오른손 식지가 원을  관통하여 범요의 손가락을 끌어잡으며 미소
를 지을뿐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자  범요는 멈칫하면서 매우
기뻐했다.

 "교주님의 가르침,  정말 감사합니다.  속하는 매우 탄복했습니
다. 이 사초는 속하의  막힌 곳을 시원하게 뚫어 주셨습니다. 전
당장이라도 교주님을 스승으로 모셨으면 합니다."

 "이건 제 태사부님께서 전수하신 태극권 중의 <난환결(亂環訣)>
이랍니다. 요지(要旨)는 왼손으로  그린 몇 개의 원에 있습니다.
저 송가란  자가 비록 무당의 출신이지만  이렇듯 정미한 신법은
깨우치지 못했을 겁니다."

 범요에게는 이미 송청서를  제압하는 확신이 생겼지만 송청서는
이미 연속 두 번을 승리하였기에 규칙대로 퇴장하여 휴식을 취해
야 했다. 그러니 필히 그가 다시 출장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다시
그에게 도전해야만 했다.

 조민은 빙그레 웃으며 매우 기쁜 표정으로 옆으로 걸어갔다. 그
러자 무기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소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민매, 무슨 일로 이처럼 유쾌합니까?"

 조민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당신이 범우사에게 전수한 이  몇 초 무공은 단지 송청서의 팔
을 진단(震斷)하도록 했습니다. 뭣  때문에 그에게 그 송가란 자
를 죽일 수 있게끔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까?"

 "비록 송청서가 많은  불의를 행하였으나 그래도 제 대사백님의
사랑하는 외아들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제 대사백님이 직접 처분
하는 게 옳을 것 같소.  내가 만약에 범우사를 시켜서 그의 목숨
을 앗아 버리면 얼마나 대사백님에게 미안한 일입니까?"

 "당신이 그를 죽여 버리면  주낭자는 과부가 됩니다. 당신이 다
시 그녀를 맞이하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장무기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허락해 주겠소?"

 조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당신이 딴 마음을 먹을
때 그녀가 손가락으로 당신의  가슴에 다섯 개 구멍을 찍어낼 거
예요."

 장무기가 범요와 조민하고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송청서는 이미
여덟 명의 아미파 여제자의 호위를 받으며 목붕으로 되돌아갔다.
군웅들은 방금 그가 다섯  손가락으로 살인하는 그 두 판의 광경
을 보게 되자 섬 한 마음을 금치 못하여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
다.

 잠시 후 송청서는 표연히 출장해서 포권을 하며 말했다.

 "소인은 휴식이  끝났습니다. 또 어느  분의 영웅께서 가르침을
베푸시겠습니까?"

 그러자 범요가 소리쳤다.

 "내가 아미파 절학의 가르침을 받겠소!"

 이윽고 몸을 튕겨서 나가려는 찰나 갑자기 한 회색 그림자가 한
번 흔들거리더니  송청서의 앞에 우뚝  섰다. 그러면서 범요에게
말했다.

 "범대사, 나에게 양보해 주시겠소?"

 이 자는 바로 무당이협 유연주였다. 범요는 그가 교주의 사백이
라 다루기가 난처했다.

 "범요는 오늘 운이 좋아서  유이협의 무당 신기를 볼 수 있겠구
료."

 "과찬의 말씀을....."

 송청서는 어려서부터 유사숙을 무서워했다. 더구나 그가 병식운
기(屛息雲氣) 엄진임적(嚴陣臨敵)  태세를 취한  것을 보자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비록 자기는 다른 기문무공(氣門武
功)을 습득하였지만 두려운 생각이 가시지는 않았다.

 유연주는 포권하며 말했다.

 "송소협, 먼저!"

 이처럼 인사를 하며 또 이처럼 칭호하는 것은 자기의 의사를 분
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그는  송청서를 전혀 멸시하지 않을 뿐더
러 반푼의 동정도 없었다. 그러자 송청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몸을 구부리며 인사했다. 순간 유연주는 훗! 하며 일장을 송청서
의 정면을 향해서 후려쳤다.

 유연주가 강호 무림에 이름을 떨친 것은 이미 삽십여 년이 되었
지만, 무림에서  그의 무공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오늘에야 비로소 그가 쌍장의 유경(柔勁)으로 벽력뢰화탄을 제거
하는 것을 보게 됨으로써 자신의 공력을 재확인했다.

 강호에선 무당파  무공의 요지는  이유극강(以柔克剛)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뜻밖에도  유연주의 쌍장은 마치 바람이 스쳐가
는 것처럼 엄청나게 빠른 초식이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송청서는
허리와 다리에 각각 일각(一脚)과 일장을 얻어맞았다.

송청서는 깜짝 놀랐다.

 '태사부님과 아버님은 모두 날 무당파의 제 삼대 장문으로 인정
하셨기에 모든 무공을 나에게 전수했다. 유이숙님의 이 쾌권쾌각
(快拳快脚)의 초식은  내가 모두 배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빠르게 출초(出招)하는 건  본문 무공의 대기(大忌)를 범하는 게
아닌가? 하필이면 또 이처럼 매섭다니.....!'

 이윽고 주지약에게 배운 지상무공(指上武功)을 전개하려 했지만
유연주의 빠른 공격에  눌려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연거푸 뒤로 물러나면서 문호(門戶)만  있는 힘을 다해
수비했다.

 군웅들은 두 사람이 접전을 벌이는 것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비
록 지금은 유연주가 기선을 잡고 있지만 방금 송청서가 개방이로
를 조살(爪殺)한 것은 모두  열세에서 뒤엎은 것이다. 그러니 그
일을 꼭 재현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연주의 공격은 갈수록  빨라졌다. 그러나 그의 일초일식은 빠
른 것에 비해서 너무나 정확했다. 마치 가수가 노래할때 비록 빠
른 음절에 접어 들었으나 박자, 음정, 가사를 청취자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것처럼 정확했다.  그러자 군웅들은 어수선하게 웅성거
리며 일어섰다. 뒤에 서 있던  자들은 아예 탁자나 의자 위로 올
라가서 구경하는 자도 있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한결같이 찬
탄(讚嘆)을 금치 못했다.

 '무당파 유이협의 명성은 과연 뜬소문이 아니구나. 단숨에 수많
은 공격을 퍼부었는데도 초식이 전혀 반복되지 않다니.....'

 다행히 송청서는 무당의 적전제자(嫡傳弟子)이기에 유연주 권각
중의 경미한 변화는 그가 모두 배웠던 것들이다. 다만 이같은 쾌
투(快鬪)는 평생 처음 당한 것이다. 광장에는 황토먼지가 일더니
한 덩어리 짙은 안개로 형성되면서 유,송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
다.

 갑자기 팍!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쌍장이 서로 부딪치더니 유연
주와 송청서는 일제히  뒤로 물러나며 두 덩어리의 황무(黃霧)로
나눠졌다. 유연주는 똑바로 서기도  전에 다시 몸을 비비적 거리
면서 앞으로 다가갔다.

 은이정은 사형의  안위가 걱정되어 자기도  모르게 광장 옆으로
다가갔다. 손은 검의 손잡이를 쥐고 전혀 눈을 돌리지 않고 장중
을 지켜보았다.

 이때 송청서의  생가는 갈림길에 놓여  있어서 전력으로 대항을
하고 있었다. 이미 문파가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전개
하는 권법은 모두 어려서부터 연마해 온 무당파의 무공이었다.

 두 사람의 권각 초식은  은이정도 모두 알고 있었다. 더구나 매
일초마다 모두 치명적인  살수라서 초조하고 걱정하는 마음은 그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  다행히 유연주는 갈수록 유리한 고지
를 점령했다. 만약에 송청서가 갑자기 출수하여 오지천동(五指穿
洞)하는 음독살수를  염려하지 않았다면 벌써  그를 죽였을 것이
다.

 장무기는 몹시 염려되어서 손에는 이미 성화령 두 개를 몰래 쥐
고 있었다. 만약 유연주에게 정말 생명에 위험이 닥치게 되면 대
회 규칙을 무시하고 그를 구해 줄 심산이었다.

 갈수록 흙먼지는 더욱 높이 날렸다. 순간 송청서는 갑자기 다섯
손가락을 뻗어서 유연주의 오른쪽 어깨 쪽으로 찍어갔다. 유연주
는 백 초 전부터 그가  이 일초를 전개할 것을 기다려왔다. 송청
서가 개방이로를 격패하는 광경은 유연주도 똑똑히 보았다. 만약
에 이로가 사전에 당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설사 죽지는 않는
다 해도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선례가 있었기에  그도 대응책을 강구해 놓았다. 송청
서는 이 조법을 연마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변화가 많지 않았다.
그러자 유연주는 오른쪽  어깨를 비스듬히 피하면서 왼손으로 허
공에다 원을 몇 개 그렸다.

 조민과 범요는 그만 으잉!  하며 놀라운 비명을 질렀다. 유연주
가 돌린 이 두 개의 원은 바로 장무기가 범요에게 가르친 태극권
의 난환결이었다.

 순간 조민과 범요는 송청서가 당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과연 으잉!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송청서의 오른손 다섯 손가
락은 유연주의  목줄기로 찍어갔다. 그러자  장무기는 몹시 화를
내며 욕을 했다.

 "죽어도 싸다. 죽어도 싸."

 개방의 집법장로가  바로 이 일조에  목숨을 잃었는데 송청서는
사숙님에게도 이러한 독수를 가하다니, 실로 죽어도 마땅했다.

 이윽고 유연주의  양팔이 하나는 원을  그리고 하나는 돌리면서
육합경(六合勁)중의 찬번(鑽飜),  라선(螺旋), 이경(二勁)을 전
개하여 송청서의 양팔을 나꿔챘다. 순간 부드득! 부드득! 소리가
나더니 송청서의 양팔  골절(骨節)이 절단되었다. 곧이어 유연주
가 소리를 쳤다.

 "오늘 일곱째 아우의 복수를 할 것이다!"

 이윽고 양팔을  합하여 일초의  쌍풍관이(雙風貫耳)를 사용해서
쌍권으로 그의 양쪽 귀를  맹타했다. 이 일초는 면경(綿勁)이 곁
들여 있어서 송청서는 즉시 두개골이 파열되었다.

 그의 몸이 쓰러지기 전에 유연주는  한 번 더 걷어차서 즉시 그
를 죽여 버리려는 찰나 느닷없이 파란 그림자가 번뜩거리더니 긴
채찍 하나가 정면으로 후려쳐  왔다. 유연주는 황급히 뒤로 피했
으나 그 긴 채찍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연거푸 공격했다. 바로
아미파의 장문인 주지약이 남편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다.

 유연주는 급히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주지약의 편법(鞭法)은
매우 괴이했다. 삼초  사이에 이미 그를 권주(圈住)하였다. 그러
자 갑자기 채찍을 거둬들이더니 왼손으로 채찍 끝을 움켜잡고 냉
랭하게 말했다.

 "지금 네 목숨을  앗아 버리면 넌 패배를  불복할 것이다. 검을
뽑아라!"

 그러자 은이정이 장검을 뽑아들더니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내가 주낭자의 고초(高招)를 받아 보겠소!"

 주지약은 그를 무섭게 한  번 노려보더니 몸을 돌려서 송청서의
상세(傷勢)를 바라보았다. 이때 그의 두 눈은 밖으로 튀어나왔고
일곱 구멍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힘없이 땅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니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이윽고 아미파의 남제자
세명이 달려와서 그를 들고 내려갔다.

 주지약은 고개를 되돌리더니 유연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를 먼저 죽이고 다시 은가를 죽여도 늦지 않다!"

 방금 유연주는 전력으로  그녀의 편권(鞭圈)을 벗어나려 했지만
끝내 벗어날 길이 없어서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사제를
아끼는 마음으로 잠시 생각했다.

 '내가 그녀와 한판 겨뤄서 설령 그녀의 채찍에 죽더라도 여섯째
아우는 최소한 그녀 편법의 실마리를 알아낼 것이다.'

 이윽고 손을 내밀어서 은이정 수중의 장검을 받으려 했다. 은이
정도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형제 두 사람의 무공
으로 그녀의 일격을 벗어나가도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와
사형은 똑같은 생각을했다.  차라리 자신이 먼저 모험해서 사형
이 그녀 편법의 요지를  관찰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순간 은이정
은 검을 주지 않으며 말했다.

 "사형, 제가 먼저 출장하겠소."

 유연주는 그를 한번 바라보았다. 수십 년 동안 동문으로서 같이
무예를 배운 정의와, 또  수족처럼 친한 정의가 한꺼번에 복받쳐
올랐다. 뇌리에는 마치 번개처럼 유대암의 불구와 장취산의 자살
그리고 막성곡의 참사가 스쳐갔다.

 더구나 무당칠협  중에 오직 넷만 남았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또 이협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육제(殷六弟)의
무공은 강해도 성격은 아주 연약했다. 만약 자기가 먼저 죽게 되
면 그는 심신이 크게 혼란되어 전의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도 들었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여섯째 아우,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버티어라."

 은이정은 아내  양불회가 임신한 것을  생각하자 지가도 모르게
고개를 양소와 장무기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다시 생각을 달리했
다.

 "내가 죽고 나면 불회와 아이는 자연히 돌봐 줄 사람이 있는데,
구태여 남에게 구걸하며 당부할 것 없다."

 이윽고 장검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장문인, 공격하시오!"

 그의 나이는 주지약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나 주지약은 지금 아
미파의 장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결례를 하지 않은 것이
다.

 유연주는 그가  태극검의 기수식으로 적을  맞이하는 것을 보자
여섯째 아우가 이번에는 사문의 절학으로 강적과 주선(周旋)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주지약이 말했다.

 "당신이 먼저 공격하시죠!"

 은이정은 상대방의  출수가 마치 번개처럼  빠르기 때문에 만약
그녀가 기선을 잡게 되면 뒤엎기 매우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그
래서 왼발을 내딛으면서 검을  왼손으로 전개했다. 제 일검은 허
허실실하며 왼손으로 검을 쥐고 적을 공격했다.

 검 끝은 빛이 반짝거리며 칙칙.....! 하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그러자 방관하는 군웅들은 참다 못해 우뢰같은 박수와 갈채를 보
냈다.

 주지약은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서 재빨리 피했다. 그러자 은이
정도 재빨리 대괴성(大魁星) 연자초수(燕子抄水)로 공격했다.

 장검은 공중에서 큰  원을 그렸고, 오른손은 검결을 연출했는데
도 마치 칙칙.....! 하는 가벼운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주지약
은 허리를 살짝 흔들어서 일일이 피하며 말했다.

 "은육협, 내가 당신에게 삼초를  양보한 것은 옛날 무당산의 옛
정을 보답하는 것이오."

 말이 끝남에 동시에 부드러운  채찍은 마치 민첩한 뱀처럼 꿈틀
거리며 곧바로 은이정의  흉구로 달려들었다. 은이정이 왼쪽으로
재빨리 피했으나 채찍은 도중에서 꺾어지면서 달려들었다.

 그러자 은이정은 풍파하엽(風擺荷葉) 일초로 응수하면서 장검을
삭출(削出)했다. 채찍과  장검이 맞부딪치자  철썩! 하며 가벼운
소리가 한 번 났다.  순간 은이정이 호구(虎九)가 뜨거워지는 것
같으면서 하마터면 장검을  놓칠 뻔했다. 내신 크게  한 번 놀랐
다.

 '난 그녀의 초식만 괴이한  줄 알았는데 내력 또한 나의 적수가
아니구나. 그녀의 내경이 그처럼 기궤(奇詭)하며 예측할 수 없을
줄은 정말 뜻밖이다.'

 이윽고 정신을 통일하여 태극검법을 모두 전개하면서 문호를 엄
밀하게 방어했다.

 주지약 수중의 채찍은 마치 한 가닥 부드러운 실처럼 전혀 아무
런 중량이 없는 것 같았다.  몸이 갑자기 동쪽으로 또 갑자기 서
쪽으로, 갑자기 전진하고 또 갑자기 후퇴하면서 은이정의 주위를
날아다녔다.

 장무기는 바라볼수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이처럼 채찍을 사용하는  것은 도액, 도난, 도겁 세 분
고승과 비교하면 아주 또 다르구나.'

 처음에 그는 아미파에 또 다른 사문 무공이 있는 것으로 알았지
만 지금 그녀의 마치  귀신 같은 신수(身手)를 보게되자 실로 멸
절사태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내심 두려운 생각이 은근히 생
겼다.

 범요가 갑자기 말했다.

 "그녀는 귀신이지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은  장무기의 허를 찌르는 말이었다.  장무기는 그만 몸을
부르르 한 번  떨었다. 만약에 광장에 햇빛이  눈에 부시지 않고
또 사방에 온통 사람들이 서 있지 않았다면, 정말로 주지약은 이
미 죽었고 그 혼백이  채찍을 들고 은이정과 접전을 벌이는 것으
로 알았을 것이다. 그는 평생 수많은 괴이한 무공을 보았지만 주
지약의 이러한 신법과 편법은 마치 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와 흐
르는 물의  부평초 같았다. 실로 인간의  기상은 아니었다. 잠깐
동안 그는 마치 꿈 속에 있는 듯 하면서 내심 섬 했다.

 '진정 그녀에게 요법(妖法)이 있단 말인가. 아니면 무슨 괴물이
몸에 부착되어 있단 말인가?'

 주지약의 신법은 실로  괴이했다. 그러나 태극검법 또한 장삼봉
이 만년에 태극권을 이어서 창작한 것이라 실로 근세에서는 등봉
조극(登峯造極)의 검술이었다.

 은이정은 공경(功勁)을 한꺼번에 끊임없이 전개했다. 비록 상대
방을 상하게 하지는 못했지만 자기를 방어하는 데에는 전혀 빈틈
이 없었다.

 순간 갑자기 한 사람이 괴상한 소리를 외치는 게 들렸다.

 "아이구! 송청서의 숨이 끊어지려고 한다. 주대장문, 당신은 부
군의 임종을 보지 못하면 과부가 되더라도 창피한 일이오."

 사람들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바로 주전이었다. 그는 무
당파 제자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게 양기조식(養氣調息)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적을 맞이하여 접전을 벌일 때 모두
태산이 눈앞에서  붕괴되더라도 전혀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수위(修爲)가 있다. 그가 외친 것은 은이정을 도와주고 주지약의
심신을 교란하기 위한 속셈이었다.

 그는 다시 소리쳤다.

 "이봐요, 아미파의 주지약 낭자, 당신 부군의 숨이 끊어지려 하
네. 당신에게 몇 마디 당부할 말이 있다고 하는군. 그의 말에의
하면 그는 밖에 삼십 이십일,  사칠 이십 팔 명의 사생아가 있는
데, 그가 죽고  나면 당신이 잘 좀 부양해  줘야만 눈을 감을 수
있다는군. 당신은 도대체  승낙하는 건가, 아니면 승낙하지 않는
것인가?"

 군웅들은 그가 멋대로 지껄이는 것을 듣고 어떤 자는 참다 못해
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주지약은  마치 듣지 못한 듯  태연했다. 그러자 주전은
다시 소리쳤다.

 "아이구, 야단났군! 멸절  노사태님, 그래와서 어른신네꼐선 안
녕하십니까? 오랫 동안 뵙지  못했는데 어르신네는 점점 더 경랑
(硬朗)하셨구료. 당신의 혼백이  주낭자 몸에 씌워지더니 채찍의
놀림이 아주 보기 좋구료."

 순간 갑자기 주지약의 몸이 두 번 휘청하더니 재빨리 뒤로 수장
(數丈) 물러나며 긴 채찍을  오른쪽 어깨 위에서 뒤로 급히 던졌
다.

 그러자 채찍의  끝이 주전의  면문(面門)으로 날아갔다. 그녀와
명교의 목붕 사이는 열  장도 더 떨어져 있었는데 그녀의 채찍은
마치 하늘에 날으는 용처럼 곧바로 날아갔다.

 마침 주전은 침을 사방으로 튀기며 즐겁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
데 어찌 주지약이 한창  접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에갑자기 채찍
을 던져서 자기에게 기습할  줄 알았겠는가! 그가 멍하는 사이에
채찍은 이미 면문에 날아왔다.  주지약은 마치 등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채찍의 끝은 그의 콧날을 가리켰다.

 주지약은 채찍을  뒤로 던지면서도  왼손의 식,중 이지(二指)는
은이정에게 연거푸 찍어갔다. 계속해서 일곱 번을 찍었는데 모두
가 그의 머리, 얼굴, 앞가슴 쪽의 중요한 혈도였다. 은이정은 이
어 적을 공격할 틈도  없을 뿐더러 장검을 휘둘러서 그녀의 팔을
후려칠 수도 없었다. 다만 봉점두(鳳點頭)란 초식을 사용하여 몸
을 움추리고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명교의 목붕 안에는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우당당탕! 하
며 요란한 소리가 한 차례  들렸다. 이건 양소가 주전의 옆에 서
있다가 재빠르게 장풍으로 앞에 있는 나무 탁자를 끌어올려서 주
지약의 일편(一鞭)을 막은 것이다.  긴 채찍이 나무 탁자를 후려
치자 즉시 나무 조각이  사방으로 날리면서 탁자 위에 있던 주전
자와 찻잔이 사방으로 날렸다.  군웅들의 몸에는 많은 사기 조각
과 뜨거운 차가 묻어 버렸다.

 주지약은 일격이 명중되지 않자  주전에게 더 이상 공격하지 않
았다. 채찍이 돌아서 되돌아오자 질풍 폭우처럼 은이정에게 공격
했다.

 유연주는 검을  들고 옆에서 한동안  관망하였으나 끝내 그녀의
편법 요지를 알아낼 수 없었다.

 '내가 다시 출수하더라도 이 태극검법은 여섯째 아우보다 더 이
상 좋게 전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랫 동안 접전을 벌이게 되
면 아무래도 여자는  내력이 부족하기에 우리가 승리할지도 모르
는 일이다.'

 그는 은이정의  검법이 탄토개합(呑吐開合) 음양동정(陰陽動靜)
한 것을 보자 실로 은사 장삼봉이 평소에 지적한 절예에 이미 도
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제는 평생 동안 한  번도 이처럼 고명한 검술을 전개하지 않
았다. 오늘 생사의 갈림길에서  검법 중의 최고 정요(精要)한 것
을 모두 아낌없이 발휘하는구나. 무당파의 무공은 싸우면 싸울수
록 강해진다.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패하지 않을 희망은 그만
큼 더 있는 것이다.'

 순간 주지약은 갑자기 긴 채찍을 휘둘더니 크고 작은 원을 수없
이 만들면서 은이정을 그  안으로 감싸 버렸다. 태극권과 태극검
만이 경력을 운용하여 원을  만드는 것인데, 주지약도 긴 채찍을
휘둘러서 원을 만들었다. 게다가  채찍이 원을 그린 방향과 은이
정의 검이 원을 그린 방향은 똑같았다. 다만 몇 배가 더 빨랐다.

 그러자 은이정  검의 경력이 그녀에게 한  번 이끌리더니, 즉시
몸이 자기도 모르게 몇 바퀴 돌면서 파란 빛이 한 번 번뜩거리고
장검이 손에서 벗어나며 위로  날아갔다. 순간 주지약은 긴 채찍
을 반대로 거두어들이면서  채찍의 끝을 은이정의 천령개를 겨냥
해서 내리찍었다.

 그러자 유연주는 몸을 위로 솟구쳐서 오른손으로 채찍을 나꿔챘
다. 순간  주지약은 치마 밑에서 일각을  날려 유연주의 요협(腰
脅)을 걷어찼다.  유연주는 계속  주지약의 괴이한 편법(鞭法)의
정요한 소재를 파악할 수  없었는데, 그녀가 채찍을 휘둘러서 원
을 그리며 은이정의 장검을  빼앗는 순간 즉시 깨우치는 바가 있
었다.

 '그녀의 공력도 저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그녀가 채찍을 휘둘
러서 원을 그리는 건  우리의 태극권에 비교하면 실로 한참 뒤떨
어졌다.'

 채찍을 움켜잡자 허리는  그녀의 일각에 걷어채이면서도 왼손을
뻗어냈다.  바로 호조절호수(虎爪絶戶手)의  일초였다. 유연주는
곧바로 주지약의 하복부로 찍어갔다. 주지약은 막을수가 없었다.
순간 뇌리에는 번개처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오늘 유이숙님의 손에 죽어 버리자.'

 그러자 오른손의 채찍을 놓으면서 다섯 손가락은 유연주의 머리
위를 찍어갔다. 그와  동귀어진(同歸於盡)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유연주는 머리를 옆으로 기울여서 피하려 했지만, 허리가 채이는
바람에 혈도가 봉쇄되어 몸이  굳어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런데 주지약의 왼손은 여전히 무섭게 다가왔다.

 바로 이 천균일발(千鈞一髮)의 순간에 한 사람이 옆에서 달려들
더니, 오른손으로 유연주의  호조절호수를 막아내고 왼손으로 주
지약의 다섯 손가락을 밀어냈다.  바로 장무기가 출수하여 두 사
람을 구한 것이다.

 그러자 주지약은  쌍장으로 재빨리  장무기의 가슴을 후려쳤다.
장무기가 만약  피한다면 이 쌍장의 힘은  마침 은이정의 얼굴에
강타될 것이다. 오직 좌장을 후려쳐서 막는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쌍장이 맞부딪친  순간 장무기는 주지약의 쌍장에 전
혀 경력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몹시 놀랐다.

 '아이구, 야단났다! 그녀와  육숙이 고투(苦鬪) 이백여 초를 하
더니 이미 유진등고(油盡등枯)의 경지에 도달했구나. 나의 이 경
력이 앞으로 뻗게 되면 당장 그녀의 목숨을 상할 게 아닌가!'

 그러자 황급히 수경(手勁)을 거둬들였다.

 그가 처음에 좌장을 후려칠  때 주지약의 무공과 자기의 무공은
이미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고 크나큰 강적으로 간주하여 털
끝 만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게다가 단장(單掌)으로 쌍장을
맞이했으니 이  일장은 곧 십성(十成)의  경력을 발출한 것이다.
그러나 경력을 밖으로 발출하자마자 즉시 상대방이 역진(力盡)한
것을 눈치채고 급히 그대로 거두어 들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무학의 대기(大忌)를 범한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 간발의  차이에서 갑자기 거둬들이니 힘이 더
한층 강맹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내력을 자유자재로 수발(收
發)할 수 있기에  이 강력한 힘이 되돌아와서  부딪쳐 봤자 잠시
숨이 막힐 뿐 절대로 큰 지장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
도 그의 장력이 되돌아오자마자 갑자기 상대방의 장력은 마치 호
수가 방죽을 무너뜨리고 밀려오는 듯했다.

 장무기는 깜짝  놀라면서 이미 상대방의  암계에 결렸다는 것을
알았다. 순간 펑! 하는  소리가 나면서 주지약의 쌍장은 그의 흉
구에 적중되었다. 이건 그  자신의 장력과 주지약의 장력이 합쳐
진 것이다. 그의 호체(護體)하는 구양신공이 제아무리 두텁다 해
도 양대 고수가 합력한 장력은 견딜 수 없었다. 더구나 주지약의
장력은 그가 구력이진(舊力已盡)  신력미생(神力未生)할 때 틈을
타서 후려친 것이다.

 이러한 무공은 바로 아미파의 적전(嫡傳)이다. 옛날에 멸절사태
도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그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게 했던 것이
다. 다만  옛날에는 그가 방비책을 전혀  몰라서 당한 것이지만,
이번에는 오로지  인(仁) 때문에 기만되어  당한 것이다.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몸이 뒤로 제껴지면서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한 모
금의 선혈을 토해 냈다.

 주지약은 도습이 성공되자 바로  왼손을 앞으로 뻗어서 다섯 손
가락으로 그의 흉구로 찍어갔다. 비록 장무기는 중상을 입었어도
심신은 혼란되지 않았다.   그는 이 일조(一爪)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억지로 뒤로 몇 걸음 이동했다. 순간 주지약의 다섯 손가락
에 옷이 찢겨지고 앞가슴이 드러났다.

 주지약의 오른손 다섯 손가락이 바로 잇따라 공격하려 했다. 그
때 유연주는 그녀에게 혈도가 채여서 움직일 수 없었고 은이정도
덮쳐가서 구출하려 했지만 이미 때를 놓쳤다.

 순간 장무기는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졌다. 그러나 주지약이 한
번 흘낏 보는 순간 갑자기 그의 흉구에 있는 상처자국을 보게 되
었다. 바로 전에 광명정  위에서 자기가 의천검으로 찌른 상처자
국이었다. 다섯 손가락이 그의 가슴에서 반치정도 떨어진 곳까지
가자 갑자기 마음이  약해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더 이상
공격을 가하지 못했다.

 그녀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위일소, 은이정,  양소, 범요 네
사람이 이미  일제히 덮쳐갔다. 위일소는  몸을 날려서 장무기의
몸 앞을 막았고  양,범 두 사람은 각각  주지약의 좌우를 공격했
다. 그 사이 은이정은 장무기를 안아들고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그러자 장중은  삽시간에 크게  혼란되었다. 아미파의 제자들과
소림승은 모두 호통치면서 병기를 들고 장중으로 달려들었다. 양
소, 범요와 주지약은 서로 몇 초씩을 주고받자 더 이상 연전하지
않았다. 위일소가 유연주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자 일제히 목붕
으로 되돌아갔다. 아미, 소림 양파의 사람들도 장중의 접전이 끝
난 것을 보고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조민도 달려가서 구조하려 했으나 신법이 위,양 보다 못하기 때
문에 포기했던 것이다. 도중에서 장무기의 입가에 온통 피투성이
가 된 것을 보자 그만 놀라서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러자 장무기는 억지 웃음을 하며 말했다.

 "괜찮소. 잠시 운기조식하면 좋아질 것이오."

 여러 사람들이 그를  부축하여 목붕 안의 땅바닥에 좌정시켰다.
그러자 장무기는 천천히 구양신공을 끌어내며 내상을 조리했다.

 주지약이 외쳤다.

 "어느분 영웅께서 저와 겨루겠습니까?"

 그러자 범요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장무기가 말했다.

 "범우사님, 이건  제 명령입니다.  출전하지 마세요. 우리.....
우리가 패한 것을 인정....."

 한 모금 기(氣)가 엇갈리자  다시 두 모금의 선혈을 토해 냈다.
범요는 교주의 명령을 감히  어기지 못했다. 만약에 출전하길 고
집하면 필시 장무기의 상세가 더욱 악화될 것 같았다. 더구나 출
전하는 건  단지 진심갈력(盡心竭力)해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을
뿐 본교에게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지약은 광장 중심에 서서 다시 두 번 되풀이하여 말했다.

 방금 장무기의 회력자상(廻力自傷)한 일은 오직 그와 주지약 두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방관하는 사람들  눈에는 모두 주지약의
장력이 괴이해서 장무기가 역부족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한낱 젊은  여자로서 은이정, 유연주, 장무기 등
세 분 같은 당세의  일류급 고수를 연패시키는 것을 보자 무공의
괴이함은 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비록 군웅 중에 절학을 지닌 자
들은 많았지만 유,은,장 세 사람에 비하면 절대로 미치지 못하다
는 것을 자신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구태여 출전해서 목숨을
잃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주지약은 잠시 더 기다렸으나 여전히 도전해 오는 자는 없었다.
그러자 그 달마당의 노승이 걸어나오더니 합장하며 말했다.

 "아미파 장문인 송부인께서  무공이 천하 제일입니다. 불복하는
영웅이 계십니까?"

 주전이 외쳤다.

 "나 주전은 불복하오."

 "그렇다면 주영웅께서 겨뤄 보시오."

 "난 그녀에게 이길 수 없는데 뭣 때문에 겨룹니까?"

 "주영웅께선 자신이 적수가 안 된다는 것을 아시면 굴복해야 할
게 아니오!"

 "적수가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불복합니다. 그러면 안
되오?"

 그 노승은 더 이상 그와 시비하지 않고 다시 되물었다.

 "이분 주영웅 말고 또 불복하는 분이 계십니까?"

 이윽고 연거푸 세 번 물었으나  주전만 세 번 대답할 뿐 아무도
불복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겨룰 분이  안 계시면 우리는 영웅대회를 개최하기 전
에 약정한 대로  금모사왕 사손을 아미파의 송부인에게 넘겨드려
서 처치하도록 합시다. 도룡보도는  어느 분의 수중에 있는지 모
르지만 이 자리에 내놓으셔서 송부인께서 수관하도록 합시다. 이
건 군웅들이 공결(公決)한 것이니 어느 누구도 군말해선 안 됩니
다."

 장무기는 마침 내식(內息)을 조절해 놓고 구양진기로 내상을 치
료하면서 차츰 무아지경에 이르는  찰나, 불쑥 그 노승이 금모사
왕 사손을 아미파의  장문인 송부인에게 넘겨서 처치한다는 말을
듣자 충격을 받아서 하마터면 또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할 뻔했다.

 조민은 옆에 앉아서  정성스럽게 돌봐주고 있었는데, 그의 몸이
갑자기 떨리고 안색이 몹시  변하는 것을 보자 그의 마음을 알아
차리고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장교주, 당신의 의부를  주낭자에게 넘겨 주는 건  아주 잘 된
일입니다. 그녀가 방금 당신에게 손을 쓰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
도 당신에게 깊은 정이 남아 있는 겁니다. 그러니 절대로 당신의
의부를 해치지  않은 겁니다. 당신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처나
치료하세요."

 장무기가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러자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 때 태양은 서서히  뒷산으로 지고 있었다. 광장은 점점 어두
워졌다. 그러자 그 노승이 다시 말했다.

 "금모사왕 사손은 뒷산 모처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시간
이 이처럼  늦었으니 여러분들도 시장하실  겁니다. 내일 정오에
우리가 다시 이곳에  모이면 노납(老衲)이 송부인을 인도해서 죄
인을 석방하게 할  것이오. 그 때 가서  우리는 송부인의 신묘한
무공을 다시 보게 될 것이오."

 그러자 양소, 범요 등 명교 사람들은 모두 조민을 바라보았다.

 '과연 당신의  예측대로군. 소림파에겐 또  다른 음모가 있었구
나. 아무리 주지약의 무공이 강해도  절대로 도액 등 세 분 노승
을 이기지 못한다. 어쩌면  그녀는 소실봉에서 목숨을 잃게 되고
결국엔 소림파가 칭웅정강(稱雄정强)할 것이다.'

 이때 주지약은  아미파의 위세를 떨치고  이미 목붕으로 돌아갔
다. 제자들은  장문인이 돌아오는 것을  보더니 한결같이 조용히
일어나서 인사했다. 군웅들은 비록 주지약이 이미 <무공 천하제
일>이란 명칭을 취득한 것을  보았지만 대사가 마무리 지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한 사람도 하산하지 않
았다.

 그 노승이 다시 말을 이었다.

 "여러 영웅분들께서 본사에 오셨으니 모두가 소림파의 귀빈입니
다. 여러분들 상호간에 설사 은원이 있다 해도 폐파의 체면을 봐
서 잠시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소실산(小室山)에서 해결
하려 하면  그건 소림파를 얕잡아보는  겁니다. 여러분께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앞산에는 얼마든지 유람하셔도 좋습니다. 그
러나 뒷산은 폐파의  장경수예(藏經授藝)하는 곳이니 여러분께선
자중하시기 바랍니다."

 이윽고 범요는 장무기를 안아들고 명교 자체에서 만든 목붕으로
돌아갔다. 비록 장무기의 장상이  아주 심했으나 그가 평소에 만
든 영단을 아홉 알  복용하고 다시 구양진기로 악의 힘을 분산시
키자 심야의 이경쯤 되어 세 모금의 어혈(於血)을 토해내면서 내
상이 모두 치료되었다.

 양소, 범요,  유연주, 은이정 등은  모두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모두가 그의 심후한 내공에 찬사를 보냈다. 만약 보통 사람이 이
정도의 중상을 입게 되면 고수가조치해 준다 해도 최소한 일,이
개월 정도 걸려야만 회복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단 몇 시간 만
에 완쾌 되었으니, 만약에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면 정말 믿기 어
려운 일이다. 장무기는 밥 두  그릇을 먹고 잠시 더 휴식을 취하
고 난 후,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잠깐 나갔다 오겠소."

 그는 교주의 신분이라 무슨 일이란 것을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
람이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은이정이 말했다.

 "방금 중상이 완쾌되었으니 각별히 조심해라."

 "네."

 장무기는 대답하고 나서 조민의 얼굴을 바라보니몹시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러자 그녀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안심하라는 뜻이
었다.

 그는 목붕을 나와서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에는 밝은 달과 작은
별이 몇 점 떠 있었다.  깊이 한 모금의 숨을 들여마시자 체내의
진기가 유전되면서 정신이 바짝  났다. 이윽고 소림사 밖으로 가
서 지객승인에게 말했다.

 "아미파의 장문인을 만나고  싶은데, 수고스럽지만 안내해 주겠
소?"

 그 지객승은 그가 명교의 교주라는 것을 알아보고 내심 매우 두
려워했다. 얼른 마주 공손하게 말했다.

 "네, 네. 소승이 인도해 드릴 테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 지객승은  조심스럽게 그를 안내하며 서쪽으로  갔다. 약 일
리(一里)쯤 가더니 손으로 앞에 있는 작은 집 몇 칸을 가리켰다.

 그 지객승이 말했다.

 "아미파는 모두 저기에  있습니다. 승니(僧尼)는 유별해서 소승
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장무기와 주지약이 다시  싸워서 행여나 자기가 옆에 있다
가 다칠까 봐 몹시 두려워했다. 그러자 장무기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돌아가서  이 일을 얘기하면 다른  사람들은 매우 놀랄
것이오. 그러니 내가 당신의 혈도를 찍어놓을 테니 여기서 날 기
다리는 게 어떻겠소?"

 그 지객승이 얼른 말했다.

 "소승은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겁니다. 교주님께서는 안심하십시
오."

 그러면서 황급히 돌아갔다. 장무기는 천천히 작은 집 쪽으로 걸
어갔다. 십여 장쯤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자 비구니 두 명이 몸을
날려서 다가왔다. 장검을 몸 앞에 쳐들고 호통쳤다.

 "누구냐!"

 장무기는 포권하며 말했다.

 "명교의 장무기가 귀파의 장문인 송부인을 뵈러 왔습니다."

 그러자 비구니  두 명은 대경실색했다. 이윽고  나이가 많은 한
비구니가 말했다.

 "장.....장교주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제가 보고하
러 가겠습니다."

 그녀는 억지로 진정해  보았으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서 몇 걸음 걸어가더니 바로 죽소(竹소)를 꺼내어 불었
다. 그러자 사방에서 즉시  이십여 명이 뛰어 나왔다. 검광을 번
뜩거리며 각처에 분산했다. 장무기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뒷짐을
지으며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비구니가 작은 집  안으로 보고하러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나오면서 말했다.

 "폐파의 장문인께서는 남녀가 유별해서 밤에는 만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장교주님은 걸음을 돌리시지요."

 "나는 의술이 매우 정통하여 송청서 소협의 상처를 치료하고 싶
을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 비구니는 멈칫하더니 다시 들어가서 보고했다. 한참 지난 뒤
에 나와서 말했다.

 "장문인께서 들어오시랍니다."

 장무기는 허리 사이를 두드려  보이며 병기가 없다는 것을 보이
며 그 비구니를 따라서 작은 집으로 들어갔다.

 주지약은 손으로 턱을 괸  채 멍하니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가 들어온 것을 들었는데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 비구니
는 청차(淸茶) 한 잔을  따라서 탁자에 올려놓고 바로 물러갔다.
살며시 문을 닫아 버리자 대청 안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

 한 자루 하얀 촛불이 갑자기 밝게 또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주지
약이 입고 있는 담청색 옷을 비추었다. 몹시 처량한 정경이었다.

 장무기는 마음이 찡하여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송사형의 상처가 어떠한지 내가 살펴보아도 괜찮겠소?"

 주지약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냉랭하게 말했다.

 "그는 머리뼈가 부서지는 바람에 상세가 몹시 심해서 살아날 것
같지 않소. 아마 오늘 밤도 넘기지 못할 것 같소."

 "당신은 내 의술을 잘 알지 않소. 내가 힘껏 구해 보겠소."

 그러자 주지약은 되물었다.

 "당신은 뭣 때문에 그를 구하려 하죠?"

 장무기는 멈칫하며 말했다.

 "난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러서  마음이 몹시 괴롭소. 게다가 오
늘 당신이 내 목숨을 살려주지 않았소? 송사형의 상처는 내가 있
는 힘을 다해 보겠소."

 "당신이 먼저 수저류정(手底留情)한  것을 내 어찌 모르겠어요.
당신이 만약에 송대형을  살려낸다면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보답
해야 되겠습니까?"

 "목숨과 목숨을  바꾸는 것이오.  내 의부에게 수하류정(手下留
情)하시오."

 주지약은 손으로 내당 쪽을 가리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안에 있습니다."

 장무기가 방문 앞으로 걸어가 보니 방 안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전혀 불빛이 없었다. 그는 촛대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장무기는 청사(靑紗) 휘장을 열고 촛불을 비춰서 송청서를 보니
두 눈은 돌출되어 있었고  오관이 비뚤어진 게 몹시 무서운 얼굴
이었다. 호흡은 미약하며 벌써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그의 손
목을 눌러보니 맥식(脈息)이  갑자기 빨랐다가 또 갑자기 느리면
서 매우 혼란되어 있었다. 체온도 얼음처럼 차가왔다. 만약에 즉
시 손을 쓰지 않는다면 과연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았다.

 다시 살며시 그의 두개골을  만져 보니 앞이마와 뒷골뼈가 모두
네 개가 부서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는 유이숙의 쌍
권의 힘이 정말 무섭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송청서의 내공이 상
당한 수준이 아니었더라면 쌍풍관이를 십성(十成) 내력으로 후려
친 것을 맞았으니 당장에 즉사했을 것이다.

 그는 휘장을 내려놓고 촛대를 탁자에 올려놓으며 대나무 의자에
앉아서 치료할  방법을 곰곰이 생각했다.  송청서가 당한 상처는
실로 치명적인 중상이라 그의 생명을 구하는 건 삼성(三成)의 자
신밖에 없었다.

 그는 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시간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외실로
나가서 주지약에 말했다.

 "송부인, 송사형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지는 단언(斷言)하기 힘
들지만 내가 한번 시험해 보아도 괜찮겠소?"

 "만약 당신이 구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누가 그를 구할 수
있겠어요?"

 "설사 그의 생명을 구한다 해도 용모와 무공은 옛날처럼 되기가
힘들 것이오. 그의 뇌도 이미 고장나서 아마.....아마 말도 제대
로 할 수 없을 것이오."

 "필경 당신은 신선이 아니에요. 하지만 난 당신이 꼭 있는 힘을
다해서 그를 살려 놓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야만 당신이 아무
런 죄책감없이 조정의 군마(群馬)가 될 게 아닙니까?"

 그러자 장무기는 아찔했다. 그러나  이 일을 당장 논할 것도 없
다는 생각이 들자 즉시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장무기는 송청서가 덮고 있던  얇은 이불을 걷고, 그의 여덟 군
데의 혈도를 찍었다. 그리고  나서 열 손가락을 가볍고 부드럽게
움직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한줄기의 힘으로
그의 부서진  머리뼈를 하나하나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다음에
품에서 금합(金盒) 한 개를  꺼내었다. 세끼 손가락으로 한 덩어
리 검은  고약을 찍어서 양손으로 비벼  대더니 살며시 송청서의
머리뼈가 깨진 곳에 발라  주었다. 이 검은 고약은 바로 <흑옥단
속고(黑玉斷續膏)>였다. 이는 서역 소림파가 상처 치료나 접골에
쓰는 묘약이다. 옛날에 그가 조민에게 구걸하여 얻어서 유대암과
은이정 두 사람을 치료해 주고 남은 것이다.

 그는 장내의 구양진기를 끊임없이 송출하여 약의 힘을 송청서의
부서진 뼈에다 투입시켰다.

 약 한 자루의  향을 태우는 시간이 지나자  장무기는 약의 힘을
모두 투입시켰다.  송청서의 얼굴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것을
보자 몹시 기뻐했다. 그를 살려낼  수 있는 확신이 더 한층 확고
해졌다.

 그는 자신이 부상이 좀전에 완쾌되었는데 이처럼 내경을 운용하
자 그만 다시 가슴이 뛰고  숨을 헐떡거렸다. 잠시 침상 앞에 선
채로 내식(內息)을 고루  조절하고 나서 그제야 대청으로 돌아가
서 촛대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희미한 불빛에 비친  주지약의 안색은 몹시 창백했다. 문밖에서
는 가벼운 발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아미파의 제자들이
순찰하고 있는 중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송사형의 생명을 구해낼지도 모르겠소. 당신은 이제 마음을 놓
으시오."

 "당신이 그를 구할 수  있는 자신이 없다면 나도 사대협을 구할
자신이 없습니다."

 장무기는 잠시 생각을 굴렸다.

 '내일 그녀가 금강복마권을 공격하러 가면 아미파에서 한,두 명
의 고수가 돕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십중팔구 성공할 수 없을 것
이다. 잘못하면 도리어 그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신은 의부가 감금되어 있는 곳의 정세를 알고 있소?"

 "모릅니다. 혹 소림파에서 어떤  무서운 매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자 장무기는 사손이  산정의 지하감옥에 감금되어 있고, 또
소림의 세 노승이 지키고 있으며, 그리고 자기가 두 차례나 공격
했는데 모두  실패하고 게다가 은천정이 그  일 때문에 죽었다는
일들을 간단하게 말해 주었다.

 주지약은 묵묵히 듣고 나서 말했다.

 "당신도 실패했으니 난 더욱 불가능하겠군요."

 장무기는 갑자기 마음이 동요되더니 기뻐하며 말했다.

 "지약, 만약에 우리 두 사람이 손을 잡으면 성공하게 될것이오.
나는 순양지강(純陽至剛)의  힘으로 세  분 고승의 장편(長鞭)을
맡고, 당신은  음유(陰柔)의 힘으로 틈을  타서 안으로 들어가는
거요. 일단 복마권 안에  들어가서 우리가 내외로 협공하면 이길
수 있을 것이오."

 주지약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전에 혼인지약이 있었고,  또 지금은 내 남편이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으며, 오늘  내가 당신의 목숨을 살려줘서 다른
사람들이 필시  내가 아직도 당신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고 말할
것이오. 만약에 다시 당신을  도와주게 되면 천하의 영웅들은 모
두 날 욕하게 될 것이오."

 그러자 장무기가 얼른 말했다.

 "우리가 양심에  가책이 없는데 남들이 뭐라  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지 않소!"

 "만약에 내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 어쩌겠소?"

 장무기는 멍해지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신.... 당신....!"

 "장교주님, 우리 두  사람은 고남과녀(孤男寡女)입니다. 야밤중
에 같이 있게 되면 물의를 빚게 됩니다. 어서 가십시오."

 그러자 장무기는 일어나서 포권의 예로 인사하며 말했다.

 "송부인, 당신은 어려서부터 나에게 아주 잘 대해 주었소. 당신
이 다시 한 번 은덕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장무기가 살아 생전에
그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주지약은 묵묵히 있을  뿐 승낙하지도 않고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장무기는 그녀의
안색을 볼 수 없었다. 다시 머리를 숙여서 구원을 청하려 했는데
주지약이 큰 소리로 말했다.

 "정혜사저, 손님께서 가십니다."

 그러자 방문이 열렸다. 정혜는 문 밖에 서 있었다. 손에는 장검
을 들고 얼굴에는 노기를  띄우며 그를 노려보았다. 장무기는 의
부의 생가가 이 일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하자 앞뒤를 가릴 겨를
이 없었다. 설령 자기의 체면이 깎이게 되더라도 무슨 상관 있겠
는가! 그는 갑자기 땅에 무릎을 꿇고는 주지약에게 절을 네 번하
며 말했다.

 "송부인, 제발 불쌍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주지약은 마치  돌부처처럼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그
러자 정혜가 소리쳤다.

 "장무기, 장문인께서 당신보고 나가라고 하는데 왜 자꾸 귀찮게
하는 거냐? 진정  나야말로 무림의 패류(敗類), 무치지우(無恥之
尤)로다."

 그녀는 송청서가 죽어가는 틈을  타서 장무기가 다시 와서 주지
약에게 청혼을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자 장무기는 한숨을 내
쉬며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그가 명교의 목붕 앞으로 돌아가자 조민이 마중하며 말했다.

 "송청서의 상처는 구할 수 있죠? 그렇죠? 또 나의 흑옥단속고를
사용해서 좋은 사람 노릇을 하셨군요."

 "아니, 당신은  정말 귀신처럼 아는구료. 그의  상세를 구할 수
있을지는 지금 단정할 수 없소."

 그러자 조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신은 송청서의 생명을 구해서 사대협을 바꾸려 했군요. 장공
자, 당신은 남의 속도 모르고 점점 더 멍청해지는군요."

 장무기는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뭣 때문이오? 이거야말로 난정말 모르겠소?"

 "당신이 온 정성으로 송청서를 구하는 건 바로 주낭자가 당신에
게 대한 정의를 하나도 생각지 않는다는 거예요. 당신 생각에 그
녀가 화를 내겠어요, 안 내겠어요?"

 장무기는 깜짝  놀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조민이 다시
말했다.

 "당신은 송청서의 생명을 구해 준 것이 지금 와서 또 후회가 되
죠? 그렇죠?"

 조민은 장무기가 대답도 하기  전에 빙그레 웃더니 옷자락을 펄
럭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장무기는 바위에 앉아서 차거운 초생달을 바라보며 주지약과 처
음 만났던 일부터 이것저것 회상해 보았다. 특히 방금 본 그녀의
말투와 표정은 옛날의 그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월 초 엿새의 아침이 밝아오자 소림사의 종소리는 탕탕.....!
하며 울렸다. 그러자 군웅들은 다시 광장에 집결되었다. 그 달마
당의 노승은 이번엔 공견의  지시를 받지 않고 즉시 일어나서 낭
랑한 소리로 말했다.

 "영웅 여러분들, 밤새 안녕하십니까? 어제 무예를 겨룬 끝에 아
미파의 장문  송부인께서 예관군웅(藝冠群雄)하셨습니다. 그러니
송부인께서는 뒷산에 가셔서 파관(破關)하여 금모사왕 사손을 끌
어낼 겁니다. 자, 노승이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말을 끝나자 즉시 앞장서서 걸어갔다.

 여덟 명의 아미파 비구니 대제자가 그의 뒤를 따랐고, 주지약과
아미의 제자들은 바로 그  뒤를 따라갔다. 수많은 영웅들은 멀찌
감치 뒤를 따라서 일제히 뒷산으로 걸어갔다.

 장무기는 주지약의 옷차림이 어제와 똑같은 것을 보자 송청서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어젯밤을 무사히 넘겼으니 어쩌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산봉우리에 올라가 보니  세 분 노승은 가부좌를 틀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그 달마당 노승이 말했다.

 "금모사왕은 저 세 그루  울창한 소나무 사이의 지하 감옥에 감
금되어 있습니다. 지하  감옥을 지키고 계신 분은  폐파의 세 분
장로님입니다. 송부인께선 무공이  천하무쌍하시니 폐파의 이 세
분 장로님만 이긴다면 즉시  감옥을 부수고 사람을 꺼낼 수 있습
니다. 우리들은 다시 송부인의 신수(身手)를 관전하겠습니다."

 양소는 장무기의  안색이 불안정하게 보이자  그의 귀에다 대고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교주님,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위복왕, 설불득 두 분은 이미
오행기 사람들을 통솔하여  산봉우리 밑에 매복했습니다. 아미파
에서 만약 사사왕을 내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무력
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장무기는 이마를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건 대회의 규칙을 어기고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오."

 "전 다만 송부인이 도검으로 사사왕의 목을 겨누고 있으면 우리
가 싸울  때 투서기기(投鼠忌器)할까 봐  걱정입니다. 신의 같은
건 신경쓸 겨를도 없습니다."

 조민은 나직하게 말했다.

 "사사왕에게 원수를 갚으려 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우리
는 사람 숲에서 암기로 도습하는 자를 방어해야 합니다."

 양소가 말했다.

 "범우사, 철관도장, 주형, 팽대사 등 네 분께선 이미 사방에 나
뉘어 도습하는 자를 방어하고 있습니다."

 조민이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암기를 발사하여  도습하려는 자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우리가 그 틈을  타서 사사왕을 구출하는 겁니다. 그러면
천하의 영웅들도 우리가  신의를 저버렸다고 나무라지 않을 겁니
다. 하지만  모든 게 조용하면.....  오히려..... 음, 양좌사님,
수고스럽지만 몰래 사람을  보내서 사사왕을 습격하는 것처럼 가
장해 주십시오. 혼란한  틈을 이용해 우리는 혼수모어(混水摸魚)
하듯 사사왕을 구출하겠어요."

 그러자 양소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묘책입니다."

 이윽고 즉시 사람을  파견했다. 장무기는 이러한 행동이 정정당
당한 게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의부를 구하기 위해서
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기로  했다. 속으로는 조민에게 매우 고맙
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매와 양좌사는 어떠한  일이 닥쳐도 주저하지 않고 결단하는
큰 재질을 지니고 그들 두사람이 서로 의논하면 잘 통하는구나.
그러나 나에게는 그러한 재주가 없으니.....'

 그러자 주지약의 말소리가 들렸다.

 "세 분 고승이 소림파의  장로라면 무학도 자연히 깊을 것이 아
닙니까? 본좌가 일 대 삼으로  하면 비단 공평하지 않을 뿐만 아
니라 윗사람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그 달마당의 노승이 말했다.

 "송부인께서 한, 두 사람 보태서  돕게 해도 안 되는 것은 아닙
니다."

 "본좌는 천하의  영웅들께서 양보하신  바람에 요행탈괴(僥倖奪
魁)했지만, 모두가 선사 멸절사태께서 비전(秘傳)한 본파의 무공
덕분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삼  대 삼으로 싸워서 이기게 되더라
도 선사께서 옛날에 본좌에게 정성껏 가르치신 것을 과시하지 못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에 일  대 삼으로 싸운다면 그건 또 주
인에게 실례를 범하니.....  그럼 이렇게 합시다. 어제 본좌에게
상처를 입어 미처 완쾌되지 않은 한 녀석을 불러서 연수(聯手)하
겠습니다. 그 녀석은 옛날에  선사에게 세 장을 얻어맞고 입에서
선혈을 토했던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선사
의 위명은 깎이지 않을 겁니다."

 장무기는 그 말을 듣자 내심 매우 기뻤다.

 '천지신명께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과연 내  부탁을 들어주었
군.'

 곧이어 주지약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장무기, 이리 나오너라!"

 명교의 군호 중에 양소  등 극소수 외에는 모두 내막을 몰랐다.
자연히 주지약이 이녀석 저녀석 하며 본교 교주를 모욕하는 언사
를 듣자 한결같이 격분했다.  그런데 장무기는 얼굴에 희색을 띄
우며 앞으로 다가가서 정중히 인사하면서 말했다.

 "어제 송부인께서 수하류정(手下留情)하여 이 녀석의 목숨을 살
려 주셔서 대단히 고마왔습니다."

 그는 이미 속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날 모욕한 것은  아미파의 체면을 살려
주고 또  혼례식날 신랑이 달아난  수치감을 보복하는 것뿐이다.
의부를 위한 일이라면 난 끝까지 참고 견딜 것이다.'

 주지약이 말했다.

 "넌 어제 중상을 입어서 피를 토했기 때문에 지금 난 너를 진짜
원조자라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흉내만 내주기 바란다."

 "네, 모든 것을  명령대로 실행하겠습니다. 절대로 위반하지 않
겠습니다."

 주지약은 연편(軟鞭)을 꺼내서  오른손으로 한 번 휘둘자, 채찍
은 즉시 십여 개의 크고 작은 원이 형성되는 것이 매우 아름다웠
다. 다시 왼손을 뒤집자  파란 빛이 번뜩거리면서 한자루 단도가
손에 쥐어졌다.

 군웅들은 어제 이미 그녀의  연편의 위력을 보았지만 그녀가 왼
손으로 단도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으리라곤 정말 뜻밖이었다.
하나는 길고 하나는 짧은  것이었다. 또 하나는 부드러운 것이고
하나는 강한 것이니, 이 두가지 병기는 분명히 다른 것들이었다.
군웅들은 놀라움과 탄복을 보내며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장무기는 품에서 성화령 두 개를 꺼내어 앞으로 두 발자국 걸어
갔다. 갑자기 다리를 휘청하더니 일부러  또 큰 소리로 몇 번 기
침을 했다. 중상이 아직 완쾌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야만
나중에 만약 소림 삼승을 이기게 되더라도 모두 주지약의 공로라
며 군웅이 말할 게  아니냐는 생각에서였다. 주지약은 그의 곁으
로 다가가서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전에 당신의 사촌누이의 복수를 해준다고 맹세한 바 있
는데, 만약 그녀를 해친  범인이 당신의 의부라면 당신은 그래도
그를 구출할 겁니까?"

 순간 장무기는 놀라며 말했다.

 "의부께선 정신착란을 일으킬 때가 있어서 그  자신이 한 일을
모르고 있소."

 도액이 말했다.

 "장교주께서 오늘 또 오셨군요."

 "세 분 대사님께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별 말씀을.....  이분 아미파의 장문께서  어제 무예로 천하의
군웅을 제압했다는데 그녀의  무공이 장교주의 위에 있단 말입니
까?"

 "틀림 없습니다. 후배는 어제  주장문인의 손에 중상을 입어 피
를 토했습니다."

 도난이 말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

 그러자 세 노승은 긴 채찍을 천천히 앞으로 뻗어 내었다.

 바로 이때였다.  산등성이에서 갑자기  거문고와 퉁소가 뒤섞인
소리가 몇  번 살며시 들렸다. 장무기는  내심 기뻐했다. 이윽고
요금(瑤琴) 소리가 연거푸 세 번 울리더니 백의 소녀 네 명이 옷
자락을 펄럭이며 산봉우리로  올라왔다. 손에는 각각 단금(短琴)
하나씩을 안고  있었다. 곧이어 퉁소소리가  울리더니 흑의 소녀
네 명이 손에 장소(長簫)를  들고 산봉우리로 올라왔다. 흑백 소
녀 여덟 명은 각각 팔개 방위(方位)를 차지하고 거문고와 퉁소를
함께 연주했다. 매우 운치가 있었다. 그러자 담황경사(淡黃經紗)
를 몸에 걸친 한  미녀가 음악소리를 들으며 느린 걸음으로 산봉
우리로 올라왔다.  바로 전에 장무기가  노룡의 개방에서 만났던
여인이었다.

 개방의 여동방주 사홍석이 그녀를 보자마자 달려가서 그녀의 품
에 덥석 안기며 소리쳤다.

 "양언니, 양언니! 우리의 장로와 용두는 모두 남의 손에 죽었어
요."

 말을 하면서 손으로 주지약을 가리켰다.

 "바로 그녀의 아미파와 소림파가 가한 독수예요."

 그 황삼 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다. 흥! 구음백골조(九陰白骨爪)가  천하 최강의 무공이라
장담할 수 없다!"

 이때 군웅의 시선은 모두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
두 마디는 더욱 똑똑히 모두의 귀에 전달되었다.

 '아미파의 그 조법(爪法)이 바로  백 년 전 강호에서 이름을 날
렸던 음독 무공 <구음백골조>란 말인가?'

 그들은 구음백골조란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무공
은 너무나 음독하기에  이미 오래 전부터 실전(失傳)되어서 아무
도 본 적이 없었다.

 황삼 미녀는 사홍석의 손을 잡으며 개방이 몰려 있는 곳으로 걸
어가서 바위 위에 앉았다.  주지약은 안색이 약간 변하면서 조그
만 소리로 물었다.

 "저 여자는 누구죠?"

 "난 그녀를 한 번 만난  적이 있소. 그러나 그녀의 이름과 내력
은 모르오. 단지 개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이오."

 그러자 주지약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싸우겠어요."

 그리고는 긴 채찍을  앞으로 뻗어서 도난의 채찍으로 감아갔다.
이윽고 몸도 덩달아 솟구쳐서  세 그루 늙은 소나무 사이로 내려
앉았다.

 그녀는 제 일초부터 곧장  적의 중앙을 공격했다. 그 초수의 매
서움과 신속함, 그리고 담식(膽識)이 강함은 설령 일류급 강호의
노수(老手)들도 미치지 못했다.  군웅의 눈에는 그녀가 허공에서
마치 한 마리 청학처럼  위로 높이 솟았다가 아래로 덮쳐가며 공
격했다. 신법은 만묘(曼妙)하여  비할 바가 없었다. 그녀의 오른
손의 연편(軟鞭)과 도난의  장편(長鞭)을 서로 얽어 놓고 도난이
병기를 잠시 사용할 수 없게 말들었다. 그러자 도액과 도겁은 쌍
편을 일제히 휘둘러서 각각 좌우를 공격했다.

 장무기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가면서  발을 한 번 헛딛더니 갑자
기 한 번  데굴데굴 굴러서 다가갔다. 그러자  군웅들 사이에 으
잉! 하는 외마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 그가 중상을 입
은 후 제대로 설 수 없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장무기의 이 일초는 바로 성화령 위에 기재되어 있는 옛
파사국의 무공이었다. 신법의  괴이함은 실로 극에 달했다. 그는
마치 앞으로 넘어지는 것 같았지만 양손의 성화령은 이미 도난의
흉구로 후려쳐 갔다. 그 때 도난의 채찍은 마침 주지약의 채찍과
서로 얽혀 있었기 때문에 채찍을 돌려서 막을 수가 없었다. 도액
과 도겁은 도난이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을 보자 즉시 주지
약을 버려두고 두  채찍을 장무기에게 공격해 갔다.  두 개의 긴
채찍의 예민한 움직임과 강맹한 위력은 실로 한 쌍의 오룡(烏龍)
같았다.

 장무기는 열세에 놓여지자 느닷없이  땅에서 한 번 구르더니 몹
시 낭패한 꼴로 도액의  곁으로 굴러갔다. 그러자 도액은 왼손으
로 그의 어깨를 찍어내렸다. 장무기는 좌장을 건곤이위신공의 힘
으로 막으며 몸을 한 번 흔들어 내니 어깨는 이미 도겁에게 박으
러 가는 꼴이 되었다.

 그는 오늘 주지약의 명성을 떨쳐 주겠다는 일념으로 임전하였기
에 소림 세 고승을 격패한 수훈은 모두 아미의 장문에게 돌리고,
자기는 오직 사손만을  구출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사용하는
무공도 전부 옛 파사국의 무공이라, 동쪽으로 한 번 굴렀다가 서
쪽으로 한 번 넘어지는 게 실로 너무나 보기 흉했다.

 물론 방관하는  군웅들 중에는 탁월한  인물을 식별하는 안목은
있었지만, 이 옛 파사국 무공이 너무나 괴상하고 또 아무도 중토
에서 사용했던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어제 장무기가 중상을 입
은 것을  모두들 보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모두 진의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명교의 적들은 모두  속으로 즐거워했고 명교의
친구들은 모두  걱정하면서 혹 그가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수십 초를 서로 주고받자  주지약의 신형(身形)은 갑자기 위 아
래로 날아다니며 더욱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점점
더 막아내지 못하는 듯 수족이 망난하였다. 마치 무공을 처음 배
우는 사람보다 더 어설펐다.  그러나 아무리 위험한 형세에 놓여
있어도 항상 그는 상대방의 무서운 살수를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그러니 방관하는 영웅들 중에 심지(心智)가 남달리 예민
한 사람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사용하는  무공은 어찌 보면  취팔선(醉八仙) 같은 종류의
무공이라 보기엔 뒤죽박죽하며 아주 무질서하지만 사실은 기묘한
변화가 내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정로(正路)의 무공보다 훨씬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들 나름대로 하기도 했다.

 만약에 이 옛 파사국 무공으로  세 고승 중의 아무나 한 사람만
상대했더라면 상대방은  필시 장무기가  풍운삼사를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허둥지둥하며 몹시  낭패한 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
나 이 소림의 세 분 고승은 수십 년 동안 고선(苦禪)하였기에 심
의(心意)가 상통해서  어느 한 승의 초수에  빈틈이 보이게 되면
나머지 이승은 즉시 그 빈틈을 메꿔 주었다.

 그러니 장무기가  어떠한 괴이한 심법을  구사해도 삼승의 솜털
한 가닥도 상하게  할 수 없었다. 막상  백초에 가까와지자 그는
삼승 채찍의 위력이 더욱 강해지고 자기의 심법은 도리어 천천히
둔해지면서 이미 처음 결투할  때의 예민함은 찾을 수 없다는 느
낌이 들었다.

 그는 자기가 사용한 무공이  이미 마도(魔道)에 돌입했고 그 삼
승의 금강마권이  바로 불력복마(佛力伏魔)하는 정묘대법(精妙大
法)인 것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싸울수록
힘이 솟구치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 그의 심령에는 마두(魔頭)
가 점점 자라고 있어서 앞으로  백 초만 더 싸우게 되면 그는 삼
승의 불문상승 무공에  극제(克制)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미쳐 날
뛰게 될 것이다. 세 고승이 출수하지 않아도 그는 자기가 자기를
죽이게 될 것이다.

 명교가 세인들에게 마교라 불리는 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
니었다. 이 옛 파사국 무공의 창시자인 산중노인(山中老人)이 바
로 사람을 죽여도 눈하나 깜짝거리지 않는 대악마였다.

 장무기가 처음에 그 무공을 연마할 때는 별로 느낀 게 없었지만
막상 경적(勁敵)을 만나서 그 무공의 정묘한 곳을 모두 발휘하게
되자 무엇인가가 심령에 차츰  와 닿으면서 느닷없이 하하하! 하
며 앙천대소했다. 웃음소리에는 사악간사(邪惡奸詐)의 뜻이 충만
되어 있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끝나자 갑자기 세 그루 소나무 사이에 있는 지
하 감옥에서 불경을 낭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의부 사손
의 소리였다. 그는 창로(蒼老)한 음성으로 금강경을 천천히 낭송
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싸우면서 듣고 있었다. 그러나 사손이 불
경을 낭송하자 소림 삼승의 긴 채찍의 위력도 즉시 감소되었다.

 사손은 이 몇 개월 동안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있으면서 밤낮으
로 삼승이 낭송하는  금강경을 들어 왔기에 경의(經義)에 대해서
깨달은 바가  많이 있었다. 이때  갑자기 장무기의 궤괴(詭怪)한
웃음소리를 듣게 되자 마치 심마대성(心魔大盛)하여 차츰 위험한
경지에 돌입하는 것 같아서  즉시 금강경을 낭송한 것이다. 그렇
게 함으로써 그의 마음 속의 마두를 파탈(擺脫)하기를 바랬던 것
이다.

 장무기는 사손이 낭송하는  불경을 들으면서도 출수하는 초수는 
전혀 멈추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 경문에 내장된 뜻을 깨닫게 되
자 심마가 즉시 사라졌다. 그러자 이 옛 파사국 무공을 순식간에 
연관시킬 수 없게 되었다.  순간 획! 하며 소리가 나더니 도겁의 
자편이 그의 왼쪽 어깨를 후려쳐 왔다.

 장무기는 재빨리 어깨를 피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건곤이
위심법을 전개하며 구양신공을  배합하여 순식간에 공격해 온 경
력을 물리쳤다.  그는 곁눈으로 주지약을  쳐다보니 그녀도 이미 
패한 기색이 나타나 있었다.

 '오늘의 기세로는 두 가지  일을 성사하기 어렵구나. 내가 만약
에 전력으로 싸우지 않아서  일단 지약이 패하게 되면 의부를 구
출하는 일은 전혀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윽고 대갈일성하며  성화령 두 매를  휘둘러서 맹렬히 공격했
다.

 사손의 독경소리는 이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장무기는 
신경을 곤두세워서  건곤이위심법을 구사했기  때문에 그가 읽고 
있는 경문은 이미 들은 체하지도 않았다. 그는 온갖 방법으로 삼
승의 장편이 자기에게  공격하도록 유인하면서 주지약이 권내(圈
內)로 들어갈 수 있도록 공격을 퍼부었다.

 그가 전력으로  공격을 가하자 삼승은  즉시 채찍에서 전해오는 
압력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는 수 없이 그들도 각자 내력
을 운용하여 상대방에게 대항했다. 장무기가 무공의 초수를 고쳐 
버리자 세 그루 소나무 사이의 쟁투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

 삼승의 머리 위에는 차츰  한 덩어리의 연한 수기(水氣)가 나타
났다. 이건 이마와  정문(頂門)의 땀이 내력에 핍박되어 증기(蒸
氣)로 변한  것이다. 그러니 다섯 사람은  이미 각자의 내력으로 
서로 싸우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장무기의 머리위에도 수기가 
나타났지만 그의 것은  반듯하게 일직선이 되었고 가늘면서도 길
게 모아져서 흩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그의 내력은 삼승보다 더
욱 심후하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어제 군호들은 그가  중상을 입은 것을 모두  보았는데 그는 단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회복될 줄이야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것이
다. 그의 심후한 내력은 실로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주지약은 삼승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고 권외(圈外)에서 유투
(遊鬪)하다가 금강복마권에  빈틈이 엿보이면  바로 몸을 날려서 
앞으로 전진했다. 그러나 막상  채찍의 저지를 받으면 즉시 놀란 
기러기처럼 재빨리 몸을 피했다.

 이렇게 되자  장무기와 그녀의 무공  차이는 순식간에 판명되었
다. 그러자 방관하는 군웅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수군거리
기 시작했다.

 "요 몇 년 동안  무림에서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명교 장교주의 
무공이  당금독보(當今獨步)하다더니, 과연  뜬소문이 아니구나. 
어제 그는 일부러 져  송부인에게 양보한 것이다. 그걸 호남불여
여투(好男不與女鬪)라 하지."

 "그게 아니라 송부인은 본래 장교주의 처자였네. 당신은 그것도 
모르나? 그걸 고척정심(故尺情深)이라 하지."

 "떽! 고검정심(故劍情深)이란  말은 있어도  고척정심이란 말은 
없다네."

 "당신은 장교주가  사용하는 두  자루의 철척(鐵尺)이  안 보이
나?"

 "나중에 송부인도 장교주에게  독수를 가하여 죽이지 않았는데, 
그것이 바로 고수정심(故手情深)이 아니면 무엇이냐?"

 소림 삼승과 장무기의 초수가  점점 느려지면서 변화도 차츰 정
묘해졌다. 이때  장무기와 소림 삼승은  각자 최대한의 실력으로 
싸우고 있는 터라 전혀 잔재주를 부릴 수 없었다. 주지약의 내공
은 유연주, 은이정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녀가 간간
이 앞으로 다가가서 공격해  보았지만, 네 사람의 내경에 부딪치
자마자 즉시 튕겨서 되돌아왔다.  그러니 그녀는 전혀 도움이 되
지 못했다.

 다시 반 시간 정도 지나자 장무기 체내의 구양신공이 급속히 유
동되면서 성화령이 칙칙....!  하며 소리를 발출하였다. 소림 삼
승의 안색은  본래 각각 달랐지만 이때는  모두 피빛처럼 빨갛게 
되면서 승포(僧袍)도  덩달아 부풀어졌다. 마치  바람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장무기의 옷은 전혀  아무 이상도 없었
다.

 만약 그가 일 대 일  혹은 일 대 이로 싸웠으면 이미 벌써 이겼
을 것이다. 그가 연마한 구양진기는 본시 혼후(渾厚)하였으며 또 
장삼봉에게 태극권 중의 연기법(練氣法)을 배웠으니 싸울수록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오래 버틸 수 있기 때문에 다
시 한, 두 시간 싸워서  적이 기진맥진하길 기다릴 수 있을 정도
였다.

 소림 삼승은 지금까지 겨뤄 본 것으로 미루어 오래 접전을 벌이
면 자기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러자 갑자기 일제히 
소리를 외치며 세 채찍을 급속히 휘둘러 대면서 장무기에게 공격
을 퍼부었다. 장무기는 적의 공격을 주시하면서 일일이 막아냈지
만 내심 혼자 초조해 하고 있었다.

 '비록 지약의 무공이 괴이하지만 아무래도 배운 지 오래되지 않
아서 위력이 강하지 않구나.  나 혼자의 힘으로는 버티기 힘드니 
오늘도 역시 패하게 되는구나. 이번에도 의부를 구출하지 못하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는 마음이 조급해지자  즉시 내력이 감소되었다. 그러자 삼승
은 그 틈을 타서 진격했다.  순간 그는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
다.

 장무기의 뇌리에는 옛날 빙화도에서 사손이 자기에게 대해준 애
정이 전광석화처럼 스쳐갔다. 그리고  사손이 장님이 된 후에 온
갖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강호에 돌아온 것은 모두 자기 때문이
니, 만약 오늘 그를 구하지 못하면 자기도 혼자는 정말 살 수 없
다는 생각을 했다.

 이윽고 도난의 장편이  몸 뒤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는 더 
이상 자기의 생사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왼손을 재빨리 들어올려
서 그 채찍에 팔이  적중되도록 했다. 단지 건곤이위심법으로 편
력(鞭力)을 감소시켰다. 오른손은  성화령으로 도액과 도겁의 양
편(兩鞭)이 공격하는 것을 막았고,  몸은 갑자기 큰 새처럼 왼쪽
으로 덮쳐가더니 공중에서 한  번 회전하자 도난의 그 긴 채찍을 
그가 앉아 있던 소나무에 한 바퀴 감아 버렸다.

 이 일초는 실로 눈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장무기는 왼
팔에 힘을 가하여 뒤로  급히 끌어당겨서 긴 채찍을 소나무 줄기
에 깊숙히 끼워서 박아 버렸다. 도난은 깜짝 놀라면서 얼른 뒤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장무기는 재빨리 초수를 변형해서 그가 채찍
을 뽑아가지 못하게 했다.

 소나무의 줄기는 매우 굵었다.  그러나 뿌리 부분에 이미 반 이
상은 삼승이 파내서 비바람을  피하는 피신처로 사용해 왔다. 그
런데 이때 말할  수 없이 견인한 긴  채찍에 장무기와 도난의 두 
줄기 내경이 동시에 작용하자  우지직! 하는 거대한 소리가 들리
더니 소나무의 파헤친  곳이 절단되면서 나무 꼭대기에서부터 쓰
러져 내렸다.

 장무기는 도액, 도겁 이승이  경악하여 어쩔 줄 모르는 틈을 포
착하여 대갈일성하면서 쌍장을 도액이 몸 담고 있던 소나무로 후
려쳤다. 이 쌍 의 장력은 그가 필생의 공력을 모은 것이므로 그 
소나무는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즉시 절단되어 버렸다. 절단
된 두  그루의 소나무는 일제히 도겁이  몸담고 있었던 소나무로 
쓰러져 갔다.

 쌍송(雙松)이 넘어질 때 이미  수천 근에 달하는 무게가 있는데
도 불구하고, 장무기는 몸을 날려서 양팔로 세 번째 소나무를 힘
껏 한 번 후려쳤다. 그러자 그 소나무도 바로 절단되어 공중에서 
몇 번 흔들거리더니 천천히 쓰러지고 말았다.

 그 때 소나무가 부러지는  소리와 군웅이 놀라서 지르는 소리가 
뒤섞여서 몹시  소란스러웠다. 장무기는 손에  쥐고 있던 성화령 
두 매를 힘껏 도액과  도겁에게 던졌다. 그러자 양승(兩僧)은 공
중에서 쓰러져 내리는 소나무도 피해야 하고 또 날아오는 성화령
도 막아야 하니 순시간에 수족이 망난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장무기는 몸을 살짝 낮추더니 미처 땅에 닿지 않은 나무 줄기의 
옆으로 빠져나가서 금강복마권의  중심으로 돌입했다. 이윽고 건
곤이위심법을  전개하여 쌍장을  일추일전(一推一轉)하더니 즉시 
지하 감옥을 덮고 있던 거대한 바위를 밀어내면서 소리쳤다.

 "의부님, 빨리 나오세요!"

 그는 사손이 다시  나오지 않을까 봐 사손의  대답도 듣지 않고 
손을 밑으로 뻗어서  그의 후심(後心)을 움켜잡고 위로 들어올렸
다.

 바로 이때였다. 도액과 도겁의  쌍편이 일제히 공격해 왔다. 그
러자 장무기는 하는 수  없이 사손을 내려놓고 품에서 성화령 두 
매를 꺼내어 이승(二僧)에게  던지며 양손은 번개처럼 두 채찍의 
편초(鞭梢)를 휘어잡았다.

 도액과 도겁은 각각 내력은 운용하여 다시 빼앗으려 했지만, 성
화령이 이미  면문(面門)으로 날아왔다. 그러자  양승은 하는 수 
없이 채찍을 버리고 급히 뒤로 몸을 튕겨서 성화령을 피했다. 그 
때 도난은 이미 좌장을  가슴으로 후려쳐 왔다. 그러자 장무기가 
소리쳤다.

 "지약, 빨리 그를 맡으시오!"

 그러면서 몸을 재빨리  비스듬히 날리며 사손을 안아들었다. 장
무기의 생각은 사손을 세 그루 소나무 사이에서 구출하기만 하면 
소림파에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주지약이 흥! 하며 코웃음을  치며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도난의 
장풍이 바로 연이어  공격해 왔다. 그러자 장무기는  몸을 한 번 
돌려서 배심(背心)의 급소를  피하고 그 일장이 어깨에 적중되게 
하였다.

 그는 사손을 안아들고 부러진  세 그루 소나무 사이에서 나오려 
했다. 그러자 사손이 말했다.

 "무기야, 난  평생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다. 이곳에서 불경을 
들으며 참회하는 것도 퍽 마음이 편안하다. 그런데 넌 뭣 때문에 
날 구출하려 하느냐?"

 말을 하면서 땅으로  다시 내려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장무기는 
의부의 무공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만약에 밖으로 나가기를 
결사 반대하면 그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다.

 "의부님, 소자를 용서하십시오."

 이윽고 오른손의 손가락으로 그의 대퇴부와 흉복간의 혈도를 몇 
군데 재빨리 찍어서  잠시 그가 움직일 수  없게 하였다. 이처럼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소림 삼승은 수장을 동시에 후려치면서 일
제히 소리쳤다.

 "사손은 남겨 놓으시지!"

 장력은 사면팔방으로 장무기를  덮어서 감싸 버렸다. 수장이 와 
닿기도 전에 장풍은 이미  다가와서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자 할 
수 없이 사손을 다시 내려놓고 출장하여 막으며 소리쳤다.

 "지약, 어서 의부님을 안고 밖으로 나가시오!"

 그는 쌍장에 장력을 끌어모아서 원을 그리며 휘둘렀다. 삼승 중 
어느 누구도 주지약에게  다가가서 저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이는 건곤이위심법 중에서 제일 깊은 무공중의 하나다. 장
력의 움직임이 일정치  않아서 허허실실하며 삼승의 장력은 동시
에 찰싹 달라붙고 말았다.

 주지약은 권(圈) 안으로  들어가서 사손의 곁으로 갔다. 그러자 
사손이 호통쳤다.

 "천한 인간이.....!"

 그러자 주지약은  손을 내밀어서 그의  아혈(啞穴)을 찍으며 큰 
소리로 꾸짖기 시작했다.

 "사가야. 난 좋은 뜻으로 널 구하러 왔는데 뭣 때문에 욕지거리
를 하는 것이냐? 네가 지은 죄는 하늘에 닿을 만큼 많으며, 게다
가 목숨이 내 손에 달려  있는 판국에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할 것 
같으냐?"

 이윽고 오른손을 들어올리더니 다섯 손가락을 반듯이 세워서 사
손의 천령개를 찍어내리려고 했다. 그러자 장무기가 급히 소리쳤
다.

 "지약, 아니 되오!"

 이때 그와 삼승은 각자 평생의 공력으로 서로 대항하고 있었다. 
물론 삼승은 그를 죽여 버릴 뜻은 없었다. 그러나 이처럼 생사가 
순식간에 결정되는 시점에선 적이 죽지 않으면 바로 자신이 죽기 
때문에 전혀 양보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장무기는 입을 열어 버리자 진기가 점점 새어나갔다. 그러자 삼
승의 장력은 마치  배산도해(排山倒海)하듯 밀어닥쳤다. 하는 수 
없이 다시 힘을 끌어서 저항했다.  쌍방은 모두 어쩔 수 없는 순
간에 놓여진 것이다. 일단  <점>자결을 운용하게 되면 승패를 가
리지 않고서는 몸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주지약은 수조(手爪)를 공중으로 들어올렸지만 밑으로 공격하지
는 않았다. 그러더니 곁눈으로 장무기를 차갑게 흘겨보면서 냉소
를 지으며 말했다.

 "장무기, 그날 호주성에서 넌  혼례식을 하는 도중에 날 버려두
고 도망갔는데, 어찌 오늘  같은 일이 있으리라고 미처 예측하지 
못했느냐?"

 그러자 장무기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설령 그가 다른 일에 신
경을 쓰지  않고 열심히 삼승을 대항해도  결국은 패하게 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이처럼 심신이 혼란해지자 더욱  그에게 큰 화가 
미치게 되었다. 이윽고 그는  이마에서 식은 땀이 비오듯 쏟아지
더니 삽시간에 앞가슴과 뒷잔등의 옷이 모두 흠뻑 젖어 버렸다.

 양소, 범요, 위일소, 설불득, 유연주, 은이정 등은 이러한 광경
을 보게 되자 모두  대경실색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장무기를 구할 수 있다면 설령 자기의 목숨을 버리
더라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네들의 공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
었다. 설령  자기들이 다가가서 소림  삼승에게 습격을 하더라도 
삼승은 가볍게 외력(外力)을  장무기의 몸으로 옮겨서 그로 하여
금 더욱 중력을 부담하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장무기를 구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공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세 분 사숙님, 장교주는  여러 차례에 본파에게 은혜를 베풀었
습니다. 부디 수하류정(手下留情)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네 사람은  이미 난해난분(難解難分)한 처지에 돌입되었
다. 비록 쌍방이 모두 해치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이미 기호난
하(騎虎難下)의 입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위일소가 몸을 한 번 흔들자  마치 한 줄기 가벼운 연기처럼 잘
라진 소나무의  사이로 번개처럼  들어가면서 주지약에게 덮치려 
했다. 그러나  주지약의 오른손이 자세를  취하여 공중에 쳐들고 
있는 것을 보자, 자기가 만약에 덮쳐가면 그녀의 수조세(手爪勢)
는 즉시 사손의  머리 위를 찍어내릴 것  같았다. 사손이 만약에 
죽어 버리면 장무기는 크게 슬퍼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즉시 삼
승의 장력에 죽게 될 것이다.

 위일소와 주지약이 떨어진 거리는  불과 일 장 정도였지만 감히 
다가가서 출수하지 못하고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잠시 동안 산
봉우리 위에 있는 사람들도 돌부처처럼 굳어 어느 누구도 움직이
지 않고 또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러자 느닷없이 주전이 하하.....! 하며 웃음을 터뜨리면서 앞
으로 다가갔다. 양소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주형, 경거망동해선 안 됩니다."

 주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소림 삼승의 앞으로 다가갔다."

 "대화상 세 분은 개고기를 먹지 않습니까?"

 이윽고 품에서 삶은 개다리를  한 짝 꺼내더니 도액의 면전에다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삼승은 못 본 척하면서 전혀 동요하지 않
았다. 그러자 주전은 개다리를 한 입 뜯어 먹으며 말했다.

 "정말 향기롭고 맛있구나. 대화상 세 분도 한 입씩 잡수시지!"

 그는 삼승이 전혀 동요되지 않는 것을 보자 개다리를 도액의 입
가로 갖다 대며 그의 입 안으로 쑤셔넣으려 했다. 그러자 방관하
던 소림승이 호통쳤다.

 "저런 미친 놈 같으니, 빨리 물러서라!"

 주전이 개다리를 앞으로  내밀자 마침 도액의 입술에 부딪쳤다. 
갑자기 팔목이 한 번  울리면서 상반신이 쑤시고 마비되었다. 순
간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개다리는 땅으로 떨어졌다. 이때 도
액의 온몸은 내력으로  휘감겨 있어서 이미 승충불능락(蠅蟲不能
落)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사지백해(四肢白該)에 외력을 받게 
되자 즉시 튕겨서 되돌려 나온 것이다. 그러자 주전이 소리쳤다.

 "아이구, 정말 대단하구나!  개고기를 안 먹으면 그만이지 구태
여 내 개다리를 땅바닥에 튕겨서  나까지 못 먹게 할 건 없지 않
느냐? 어서 배상해라! 어서 배상해라!"

 그는 손짓 발짓을 해가며  큰 소리로 외쳐 댔다. 그러나 뜻밖에
도 삼승의 수양이 너무나  깊어서 전혀 외마의 간요를 받지 않았
다. 그러자 주전은 품에서 단도 한 자루를 꺼내며 소리쳤다.

 "내 개다리를 배상하지 않는다면, 노자(老子)는 오늘 너하고 사
생결단을 낼 것이다!"

 그러면서 단도로 자기 얼굴에다 한 번 그어대자 즉시 피가 흥건
했다. 군웅들이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사이에 주전은 다시 단도
로 자기의 얼굴에다 한 번  그었다. 순간 그의 얼굴은 피가 범벅
되면서 몹시 무섭게 변했다.  이러한 광경은 어느 누가 보더라도 
놀라서 마음이  동요되기  마련인데,  소림 삼승은 마치 눈, 귀, 
코, 혀 등 모든 기능이 상실한 것 같았다. 그러니 주전이 자해하
는 광경만 보지 못한 게 아니라 그가 자기들 곁에 나타난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주전이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중놈아, 내 개다리를  배상하지 않는다면 난 너의 면전에서 
죽어 버릴 것이다!"

 그러면서 단도를 들어올리더니 자기의 가슴으로 찔러갔다. 그는 
교주의 생명이 위험한 것을  보게 되자 자살을 하여 삼승의 심신
을 교란시켜 보겠다는 결의였다.

 순간 느닷없이 노란 그림자가  번뜩거리더니 한 사람이 몸을 날
려서 다가갔다. 협수(夾手)로 그의  단도를 뺏고 나서 바로 몸을 
비스듬히 하면서 앞으로  다가가더니 다섯 손가락을 반듯이 뻗어 
주지약의 머리 위에서부터  찍어내렸다. 사용한 수법은 송청서가 
개방의 장로를 죽일 때와 똑같았다.

 주지약의 다섯 손가락은 사손의  정문(頂門)에 불과 한 치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상대방의 심법이 실로 너무나  빨라서 하는 수 
없이 손을 위로 되돌려서 이 일초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장무기는 내심 기쁨이 넘치자  내경도 바로 살아나서 삼승이 공
격해 온 경력을 하나 하나 와해시켰다.

 도난은 비록 외계의 사물에  대해서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았지
만, 갑자기 상대방의 내력이  크게 살아났어도 공격하지 않는 것
을 알게 되자 바로  쌍방의 위난을 제거하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
각했다. 삼승의 심의가 상통되자 즉시 내경을 살짝 거두었다. 그
러자 장무기도 따라서 경력을  조금 거두어 들였다. 이렇게 서로 
조금씩 거둬들이자 잠깐  사이에 쌍방의 경력을 모두 거둬들이게 
되었다. 네 사람은 동시에 하하.....! 웃으며 일제히 일어섰다.

 장무기는 땅에  닿을 정도로 길게 읍을 했다.  그러자 도액, 도
겁, 도난 삼승은 합장하며 답례했다.  네 사람은 일제히 말을 했
다.

 "정말 탄복했소! 정말 탄복했소!"

 장무기가 고개를 돌려보니 그  황삼 여자와 주지약은 한참 치열
하게 싸우고 있었다. 황삼  여자는 빈 손이고 주지약은 오른손에 
채찍을 들고  왼손엔 단도를 들었지만 여전히  열세에 몰려 있었
다. 황삼 여인의 무공은  마치 주지약과 일로(一路)에 속해 있는 
듯 했다. 만약 주지약을  귀매(鬼魅)로 비유한다면 그 황삼 여인
은 바로 신선이었다.

 도액이 말했다.

 "장교주님, 당신이 비록 우리 셋을 이길 수 없었지만 우리 셋도 
당신을 이길 수 없었소. 사거사님,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그러면서 앞으로 다가가더니 사손의 혈도를 풀어 주며 말했다.

 "사거사님, 방하도도 입지성불(放下度刀 立地成佛)하시오. 우리 
불문의 문호는 광대하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이든 넘볼 
수 있습니다. 당신과 내가 이 산봉우리에서 여러 날을 같이 지낸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인연입니다."

 그러자 사손은 일어서면서 말했다.

 "아불자비(我佛慈悲), 세 대사님께서 밝은 길로 인도해 주신 것
에 대해서 사손은 평생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겁니다."

 이윽고 그 황삼  여인의 맑은 소리가 한  번 들리더니 왼손으로 
주지약의 수중에 있는 장편(長鞭)을 빼앗으면서 팔꿈치로 그녀의 
흉구 혈도를 찍었다. 그러한 뒤 오른손을 키처럼 뻗어서 다섯 손
가락으로 그녀의 머리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구음백골조(九陰白骨爪)의 맛을 보겠느냐?"

 주지약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눈을 감아 죽음을 기다렸다.

 사손의 두 눈은 비록 사물을 관찰할 수 없었지만 주위에서 일어
나는 모든 일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러자 앞으로 다가가서 
포권의 예로 인사하며 말했다.

 "낭자께서 우리 부자 두 사람의 목숨을 구해 준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만약 이 주낭자가 회개하지 않고 불의(不義)를 많
이 행한다면 언젠가는  보복을 받게 될 날이  있을 겁니다. 제발 
부탁인데 낭자께선  오늘은 잠시  그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
다."

 "금모사왕께선 너무나도 빨리 회개하셨군요."

 그러면서 몸을 한 번 흔들더니 바로 뒤로 물러섰다.


                                 ----- 제 7 권 2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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