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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00년', 대표적인 영화평론가 5인이 뽑은 세계 영화 100

Casey,Riley 2023. 5. 5.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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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100년', 대표적인 영화평론가 5인이 뽑은 세계 영화 100

안병섭 외
        차례

  들어가는 말

  인톨러런스:데이비드 그리피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로베르트 비네
  북극의 나누크:로버트 플라어티
  마지막 웃음:프리드리히 무르나우
  황금광시대:찰리 채플린
  전함 포템킨: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어머니:프세볼로트 푸도프킨
  장군:버스터 키턴
  메트로폴리스:프리츠 랑
  잔 다르크의 수난:카를 테오도르 드레이어
  황금시대:루이스 부뉴엘
  대지:알렉산드르 도브젠코
  엠:프리츠 랑
  품행 제로:장 비고
  모던 타임스:찰리 채플린
  커다란 환상:장 르누아르
  올림피아:레니 리펜슈탈
  게임의 규칙:장 르누아르
  판타지아:월트 디즈니
  시민 케인:오슨 웰스
  말타의 매:존 휴스턴
  폭군 이반: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인생 유전:마르셀 카르네
  무방비 도시:로베르토 로셀리니
  파이자:로베르토 로셀리니
  흔들리는 대지:루키노 비스콘티
  자전거 도둑:비토리오 데 시카
  제3의 사나이:캐럴 리드
  라쇼몬:구로사와 아키라
  사랑은 비를 타고:진 켈리, 스탠리 도넌
  오하루의 일생:미조구치 겐지
  도쿄 이야기:오즈 야스지로
  7인의 사무라이:구로사와 아키라
  길:페데리코 펠리니
  바람에 쓰다:더글러스 서크
  추적자:존 포드
  파테르 판찰리:쇼티아지트 레이
  제7의 봉인:잉마르 베리만
  현기증:앨프레드 히치콕
  재와 다이아몬드:인제이 바이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앨프레드 히치콕
  히로시마 내 사랑:알랭 레네
  정사: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네 멋대로 해라:장 뤼크 고다르
  오발탄:유현목
  쥘과 짐:프랑수아 트뤼포
  8과 2분의 1:페데리코 펠리니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세르게이 파라자노프
  알제리 전투:질로 폰테코르보
  페르소나:잉마르 베리만
  무셰트:으로베르 브레송
  적과 백:미클로시 얀초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아서 펜
  저개발의 기억: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
  만다비:우스만 셈벤
  만약에...:린제이 앤더슨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스탠리 큐브릭
  테오레마:피에로 파올로 파솔로니
  루시아:움베르토 솔라스
  죽음의 안토니오:글라우베르 로차
  콘돌의 피:호르해 산히네스
  이지 라이더:데니스 호퍼
  순응주의자: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대부 1, 2, 3: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아기레, 신의 분노:베르너 헤르초크
  내슈빌:로버트 앨트먼
  칠레 전투:파트리시오 구스만
  길의 왕:빔 벤더스
  택시 드라이버:마틴 스코시즈
  애니 홀:우디 앨런
  파드레 파드로네:타비아니 형제
  이레이저 헤드:데이비드 린치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지옥의 묵시록:프랜시스 포드 코풀라
  양철북:폴커 슐뢴도르프
  성난 황소:마틴 스코시즈
  메티스토:이슈트반 서보
  욜:일마즈 귀니
  블레이드 러너:리들리 스콧
  향수: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황토지:첸 카이거
  천국보다 낯선:짐 자무쉬
  마기노 마을의 이야기:오가와 신스케
  녹색 광선:에릭 로메르
  메이트원:존 세일즈
  십계: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붉은 수수밭:장 이머우
  안개 속의 풍경:테오도로스 앙겔로풀로스
  똑바로 살아라:스파이크 리
  비정성시:허우 샤오시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배용균
  바톤 핑크:코엔 형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올란도:샐리 포터
  용서받지 못한 자:클린터 이스터우드
  패왕별희:첸 카이거
  서편제:임권택
  피아노:제인 캠피온
  스모크:웨인 왕
  언더그라운드:에미르 쿠스투리차

  부록1:세계 영화사 연표
  부록2:세계 영화기술 발달사

    들어가는 말

  장 뤼크 고다르 감독이 1967년에 만든 프랑스 영화 "중국 여인"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방학중인 낭테르 대학의 한 강의실. 한 떼의 진보적인 대학생들이 예술과 
미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인류가 배출한 위대한 예술가들의 이름이 
칠판을 가득 메운다. 학생들은 특정 예술가의 이름을 예술사에서 지우느냐 
남기느냐를 놓고 약간 현학적이면서도 진지한 토론을 벌인다. 그들은 한 사람씩 
준엄하게 심판한다. 마지막에는 몇 사람 남지 않는다.
  토론이 무르익는다. 이윽고 영화 예술가의 차례다. 칠판에는 영화사 초창기의 
대표적인 감독인 뤼미에르 형제와 조르주 멜리에스의 이름이 쓰여 있다.
  뤼미에르 형제는 실제 사건을 곧이곧대로 화면에 기록한 "열차의 도착"과 
같은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마술사 출신이었던 조르주 멜리에스는 당대의 
'스티븐 스틸버그'. "달세계 여행", "해저 2만리" 같은 환상영화로 큰 인기를 
끌었던 감독이다.
  그럼, 학생들은 누구를 선택했을까? 굳이 따지자면 뤼미에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사실주의자 편이며, 멜리에스는 세상을 자기식대로 바꾸는 
환상주의자 편이다. "중국여인"에 등장하는 학생들은 모택동 주의를 추종하는 
극좌파이다. 답은 당연히 그래도 사실주의 쪽에 가까운 뤼미에르 형제일 것 
같다. 그러나 뜻밖에도 뤼미에르 대신 멜리에스를 택한다. 학생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뤼미에르는 세상을 수동적으로 기록했지만, 멜리에스는 세상을 해석했다."
  '영화'라는 매체는 신기한 발명품으로 나타나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나아가 이 세상을 보는 방법을 바꾸어 버렸다. '세계 영화 100'에 실린 걸작들은 
'영화'라는 매체가 겪었던 무수한 '해석의 춘추 전국시대'를 한 번에 펼쳐보일 
것이다. 이 글에는 진기하고 낯설며 흥미진진한 역사가 있다.
  영화는 유럽에서 귀족들의 예술로 시작됐고, 미국에서는 기업가들의 장사 
밑천이었다. 문학, 회화, 음악, 사진의 유산을 고루 물려받는 시청각 매체로서의 
가능성과 할리우드식 이야기체와 스타의 매력이 풍부하게 얽혀 있는 역사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영화 100년 행사가 떠들썩할 동안 한국 영화는 명함도 내밀지 못했고, 
100년 동안의 역사에서 우리는 고독만 지키고 있었다. 남들이 걸작이라고 
치켜세우는 수많은 영화들을 그저 이름만 확인할 뿐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애수", 또는 "닥터 지바고"가 명작의 전부라고 알고 있던 사람에게 
그건 충격이거나 아니면 불쾌한 사실이다. 영화 100년을 보낸 시점에 확인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영화 101년을 맞으면서 이제 뒤늦게 미처 누리지 못한 걸작을 문자로 
감상한다. 영화가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우리가 영화와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라는 작은 깨달음을 얻으면서 말이다.
  끝으로 '세계 영화 100'은 '한겨레신문'에 인기리에 연재되었던 '영화 100년 
영화 100편' 시리즈의 글을 다듬고 새로운 명장면들을 추가하여 내놓을 것임을 
밝혀둔다.

  1996년 6월

    인톨러런스(Intolerance 1916)
    흑인운동 비판의 자기방어
    데이비드 그리피스(David W. Griffith)

  왜 데이비드 그리피스인가?
  우리는 이 글이 왜 미국 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리피스에서 시작하는 
지부터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그의 영화 "국가의 탄생"(1915)은 국가의 
탄생 과정을 통하여 미국의 지배적 신화를 그린 작품이다. 이후 서부극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장르 영화들이 이 신화를 재 구축해 나갔고, 할리우드가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화가 미국을 만들어 나갔다는 역설도 
그리피스에서 시작되었다. 더욱이 그리피스는 할리우드가 전세계 영화시장을 
헤게모니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감독이다.
  켄터키 주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책 외판원으로 
인생을 시작해,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 된 그리피스는 월트 휘트먼의 
애독자였다. 그는 특히 휘트먼의 시집 "풀잎"에 나오는 '역사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된다' 는 구절을 늘 외우고 다녔다.
  그런데 드디어 그 구절을 영화화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에게 엄청난 부와 
명예를 안겨준 "국가의 탄생"이 그 인종차별적 색채로 말미암아 흑인 
인권운동가들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큐클럭스클랜(KKK)단을 
옹호하다가 궁지에 몰린 그리피스는 오히려 흑인들이 자신에게 보이는 이러한 
무자비한 불관용이 인류사를 통해 반복되었으며, 그래서 역사가 그 목적을 잃게 
되었다는 자기 방어적인 작품을 들고 나왔다. 그것이 바로 
"인톨러런스(불관용)"이다.
  네 가지 이야기가 평행 몽타주(montage)로 전개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작품인 "인톨러런스"에는 20세기 초 미국의 한 젊은 연인들의 고난과 
1572년에 일어난 위그노 학살, 예수의 삶에 대한 에피소드, 페르시아 왕에게 
함락되는 바빌론에 동시에 등장한다. 즉, 시간적으로 고대의 이도교들과 
유대--기독교 시기, 르레상스와 현대가 한꺼번에 다루어지고, 공간적으로는 
오리엔트에서 시작해 지중해와 서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이동하는 제국들의 
역사가 펼쳐진다.
  더 놀라운 점은 각각의 에피소드가 그 당시 미국 관객들에게 이미 친숙한 여러 
가지 영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필름 다르'(예술영화)와 
고몽사의 작품들, 이탈리아의 스펙터클 등이 각 에피소드마다 적절하게 인용된 
이 영화는 유럽 영화를 미국식으로 길들이려는 그리피스의 야심에 찬 
스펙터클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둥근 기둥에 코끼리들이 늘어선 거대한 바빌론 
세트 장면은 이후 '할리우드 바빌론(탐욕과 악이 상징)'이라는 미국 영화 산업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이 바빌론에서 그리피스는 바벨탑의 붕괴 이후 잃어버린 보편적 언어의 복권을 
열망했고, 그것이 바로 미국 영화의 언어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의 세계 
영화시장은, 그의 이러한 요구에 충분히 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소영 국립영상원 교수, 영화 평론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Das kabinett des Dr. Caligari 1920)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모태
    로베르트 비네(Robert Wiene)

  영화사를 통틀어 1920년대만큼 영화매체의 독자성을 밝히기 위한 실험이 
활발했던 시기는 없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러시아의 형식주의, 독일의 
표현주의가 그 시기 영화의 대표적인 경향들인데, 그들의 공통 분모는 현실을 
재현한다는 영화매체의 속성에 도전해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낯설게 
바라보도록 영상의 내재적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 점이다.
  1919년에 제작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모태가 된 
작품으로서 그 서사와 시각적 특성은 당대의 가장 실험적 양상의 하나로 꼽힐 뿐 
아니라 이후 수년간 지속된 표현주의 영화 경향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주인공이 칼리가리라는 연쇄 살인범을 회상하면서 얘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에 따르면, 칼리가리는 몽유병자에게 최면을 걸어 자신의 친구를 
죽이고 여자 친구를 유괴한다. 그의 추적으로 칼리가리는 18세기에 있었던 대리 
살인을 재현하고자 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정신병원의 원장임이 밝혀진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지금까지의 이 이야기를 해준 주인공이 사실은 
정신병원의 환자이며, 칼리가리는 그를 담당한 의사라는 것이 드러난다. 
주인공은 병실로 끌려가며 소리치고, 의사 칼리가리는 그제야 그의 병증을 
이해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이 관객의 의구심을 누른다.
  영화의 정면은 현실감과는 거리가 멀다. 형태와 색채를 통한 왜곡, 구성의 
부조화 같은 당대 표현주의 회화의 특성이 세트 곳곳에 그대로 살아 있다. 
평면적으로 그려진 세트에는 원근감이 과장되어 있고, 사물의 형태는 각지거나 
왜곡되어 있다. 인물 또한 분장이나 의상을 통해 그 세트의 일부처럼 기능한다. 
조명은 명암의 대조가 극단적으로 드러나도록 조절되고 있으며, 연기도 극히 
기교화되어 있다.
  이런 극히 양식화된 장면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환상 세계를 창조한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서 공간의 표현이란 곧 정신의 표현이다. 즉, 영화 속의 공간에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과대망상으로 가득 찬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 광인의 이야기가 시각화되어 표현주의 영화의 모태가 된 데는 헤르만 바름 
같은 세트 디자이너의 역할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도 제작자 에히리 포머의 
역할이 컸다. 칼리가리가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미친 악당이던 원래 각본을 
뒤집어 주인공을 광인으로 설정한 것도 그였으며,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미국 영화와 경쟁하기 위해 표현주의 회화기법을 영화에 끌어들인 것도 그의 
결정이었다.
  포머의 그런 결정은 이 영화를 해석하는 데 흥미 있는 변수가 된다. 원래 
각본의 의도는 개인이 폭정적 권력을 등에 업고 자유를 남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완성된 영화는 폭정적 권력이 어쩌면 개인들에게 
유익할지도 모른다고 시사한다. 이는 당시 독일인들의 의식 저편에 있는 불안과 
공포심을 암시한 것이며, 칼리가리라는 인물을 통해서 히틀러의 등극을 
예시했다는, 이 영화의 의미를 명확히 해준다.
  "주진숙, 중앙대 교수, 영화 평론가"

    북극의 나누크(Nanook of the North 1922)
    극영화 기법 도입한 '장편 다큐멘터리'
    로버트 플라어티(Robert Flaherty)

  "북극의 나누크"는 로버트 조지프 플라어티(1884__1951)가 1922년에 만든 
'기념비적' 다큐멘터리이다. 설원에 사는 에스키모인 나누크와 그의 가족의 
생활을 그린 이 영화는 당시 파테 영화사가 미국과 캐나다 전국에 배급하여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유럽과 러시아,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상영되었다.
  "북극의 나누크"는 흥행을 목적으로 일반 극장에 배급된 최초의 장편 
기록영화였고, 에이젠슈테인을 비롯한 당대의 러시아 영화인에서 1960년대의 
다큐멘터리 감독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북극의 나누크"가 1920년대 관객들의 관심과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 영화는 낯선 풍물과 이국적인 삶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였다. 1895년에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한 그 순간부터 
카메라는 '구경거리'를 찾아 전세계 곳곳을 누볐고, 1920년대까지는 관객들도 
'미개인의 기이한 풍습'류의 짤막한 영화를 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아직 
'다큐멘터리'라는 용어와 개념이 나타나기 전이었지만, 카메라가 잡은 생생한 
현실을 보고 즐기는 관객ㅍ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객들에게 "북극의 
나누크"는 익숙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영화였다. 이전의 기록영화들이 모두 20분 
미만의 짧은 길이에 춤, 제의, 전투 따위의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다룬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영화에서는 1910년대에 이미 장편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촬영과 
편집, 극적 구성 등에서 많은 테크닉이 개발돼 일반화되고 있었다. "북극의 
나누크"는 바로 이런 극영화 기법을 기록영화에 적용하여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영화에는 관객들의 관심을 끌고 가는 주인공이 있고(순박하고 
유능한 에스키모인 나누크),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주제가 있으며(혹독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투쟁), 유머러스한 장면과 긴박한 장면을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줄거리의 전개가 있다.
  측량기사 출신인 플라어티는 광물 탐사를 목적으로 캐나다 북부지방을 
여행하면서 에스키모들의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탐사작업 틈틈이 
에스키모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던 그는 그들의 삶을 영화로 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플라어티 연구가들에 따르면, 그는 처음부터 이 영화를 장편으로 
만들어 극장에 배급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점에서 플라어티는 
오늘날 독립영화 작가들의 원형을 보여준다.
  "북극의 나누크"는 플라어티에게 그가 바라던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예술가로서 영웅 대접을 받았으며, 그의 명성은 
"모아나"와 "아란의 사람들"같은 이후의 작품을 통해 더욱 확고해졌다.
  그의 영화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장기간의 현지조사를 
통한 사전작업은 다큐멘터리 영화작가들에게 모범을 보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반면 체계적인 방법론의 구축보다는 주관적이며 감성적인 문화의 이해에 
의존한 점, 살아 있는 문화를 필름에 담기보다는 이미 사라져버린 원형의 복원에 
집착한 점은 많은 비판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김홍준 영화감독"

    마지막 웃음(Der Letzte Mann 1924)
    호텔 도어맨의 몰락이 보여주는 1920년대 독일의 사회상
    프리드리히 무르나우(Friedrich W. Murnau)

  표현주의로 불리는 1919__25년 시기의 독일 영화들은 대략 세 가지의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는 프리츠 랑의 "숙명"(1921)에서 볼 수 있듯이 신화로 
남아 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재구성하는 역사물들이다. 둘째는 표현주의 연극의 
무대장치와 연출이 영향을 준 괴기스럽고 신비한 분위기의 영화들로, 이 부류의 
대표작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들 수 있다. 마지막 셋째 부류는 막스 
라인하르트의 연극에서 비롯된 이른바 '실내극영화'들이다.
  실내극영화의 특징은 다른 표현주의 영화들과 달리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대개 중간계층 이하인 인물들의 행위와 심리를 단순한 
내러티브(narrative)로 전달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실내극영화의 부류에 
포함되는 '거리영화'들은 극대화 바람에 편승해 헛된 꿈을 좇는 남자들에게 
버림받은 비극적인 여자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며,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의 종래적인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무르나우의 1924년작 "마지막 웃음"은 폴 레니의 "뒷 계단"(1920), 루푸픽의 
"파편"(1921)과 함께 실내극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다른 두 편과 마찬가지로 
카를 마이어가 시나리오를 쓴 "마지막 웃음"은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호텔 도어맨(에밀 야닝스 연기)이 나이가 들어 화장실 조수로 밀려나면서 
주위의 조롱과 멸시를 받게 되지만, 화장실을 사용한 미국인 백만장자의 뜻하지 
않는 유언(화장실에서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자신을 지켜본 사람에게 유산을 
남겼다)으로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해피엔딩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웃음"은 관객들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영화의 마지막을 지켜보게 만든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들이 늙은 
도어맨의 좌절과 비참함을 공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감독은 그가 유니폼을 벗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사용한 자막을 통해 "그를 
불쌍히 여긴다"고 말하는데, 이 자막은 부를 얻게 되었지만 사회적으로 지위가 
하락하게 되는 중산층에 대한 감독의 연민을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웃음"이 영화사에서 자리매김되는 이유는 1920년대 독일 사회가 
직면하게 된 중산층의 부상을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서 관객들에게 설명함과 
동시에 뛰어난 카메라 테크닉과 주인공의 심리 묘사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마지막 웃음"은 영화에 대한 가장 일상적인 
질문인 주제와 형식의 일치가 갖는 중요성에 대한 하나의 모범 답안일 수도 
있다.
  영화는 자전거에 장치한 카메라가 호텔의 엘리베이터와 회전문, 사람들로 
북적이는 화려한 로비 등을 자유롭게 다니며 도시화, 근대화가 대두되는 
당시 사회상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카를 프로인트가 촬영한 이 도입부는 
도어맨이 처하게 된, 피할 수 없는 어두운 운명을 예시하고 있다. 영화사에서 
유명한, 도어맨이 술에 취한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도어맨의 심리적 불안과 함께 
당시 중산계층의 불안정한 위치를 암시한다.
  "마지막 웃음"은 감독 무르나우, 카메라맨 프로인트, 작가 마이어가 고안한 
영화적 테크닉으로 내러티브를 성공적으로 재현했다는 찬사를 받고 있고, 
영화사가들은 이 영화가 그리피스의 카메라 트래킹과 시점 편집을 발전시켜 더욱 
정제된 영화 문법으로 정착시키는 데 공헌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문혜주 영화평론가"

    황금광 시대(The Gold Rush 1925)
    황금 좇아 헤매는 '인간 자화상'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

  찰리 채플린은 1889년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1977년에 여든 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열두 살 때 극단의 아역 배우를 시작으로 유리공, 
이발사, 팬터마임 배우 등을 전전했으며, 네 번 결혼하고 한 번 약혼하는 동안 
열 명의 자녀를 낳았다. 1910년에 팬터마임 배우로 미국에 발을 디딘 그는 이후 
40여 년간 미국에서 살았지만, 1947년부터 시작된 할리우드의 '빨갱이 사냥'에 
걸려 1952년에 추방당했다. 그는 평생 81편의 작품에 관여했는데, 이 가운데 
70여 편에서 직접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
  "황금광 시대"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고 지금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화다. "시티 라이트"(1931)가 자본주의가 이미 자리를 잡은 도시의 쓸쓸한 
풍경이자 돈과 인격에 관한 수채화라면, "황금광 시대"는 환금을 좇아 
불나방처럼 헤매는 인간들을 그린 흑백사진이다. "모던 타임스"(1936)가 자본과 
권력에 대한 비판의 시작이라면, "황금광 시대"는 공격을 위한 몸풀이다. 
채플린의 5대 희극 안에는 이 세 편 외에 "독재자"와 "무슈 베르두"가 추가된다. 
그리고 이 다섯 편의 희극은 채플린 최고의 영화들 속에 포함된다.
  채플린을 삶과 사회에 대해 지극히 비관적이었던 대신에 그것을 묘사하는 
무기로 웃음을 선택한 셈이었다.  물론 그가 웃음을 택한 것은 불우했던 시절을 
되돌아 보지 않으려는 심리와 철벽 같은 세상에 대한 전술이었겠지만, 이 곳에 
상업주의적 타협이 없었다고는 볼 수 없다. 밝은 화면과 또렷한 사물들, 사건 
위주의 단순한 이야기 구조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영화는 당시 할리우드의 
모두가 그랬듯 예술보다는 상품에 가까웠다. 하지만 채플린의 영화들, 특히 
"황금광 시대"가 세상을 향해 내쏘았던 질타는 사회비평적 모범으로서 이후의 
영화에 끊임없이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정신적인 부분과 더불어 우리는 어두운 
도시를 배경으로 영화에서 채플린 영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찰리는 지독한 굶주림 때문에 구두를 삶아 먹으며 구두창의 못을 뼈다귀처럼 
핥고, 찰리의 옆에 있던 사람은 찰리를 닭으로 착각하고 덤벼든다. 한편 금광을 
발견한 사람들은 서로 금광을 차지하겠다며 자기들끼리 싸우지만, 
현실(눈사태)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고, 현실은 언제나 초라했으며, 욕망은 항상 아귀처럼 
달려들었다. 그래서 찰리로 나온 채플린은 웃음으로, 엉뚱한 댄스 스탭으로 , 
초라함과 낭만이 가득 찬 풍경으로 그것에 대항했다. 하지만 영화는 채플린이 
금광을 발견한 사람의 동료가 되고, 게다가 아름다운 주점 무용수를 품에 안고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키스를 나누려는 장면으로 끝난다. 원래 우수와 비애로 
가득한 사회비판적 영화였으나, 채플린 역시 할리우드 사람답게 할리우드의 
고색창연한 행복한 결말의 관습을 이어받은 것이다. 상업주의와 야비하게 타협한 
셈이었다.
  이어 "시티 라이트"에서 서정적으로 현대의 모습을 그린 채플린은 "모던 
타임스"에 가서야 구체적인 비판을 시작한다. 이것은 "독재자"(1940)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짧은 콧수염의 히틀러와 찰리. 찰리는 꽉 죄는 
윗도리와 헐렁한 바지, 군함만한 구두와 대나무 지팡이로 히틀러에 대항했다. 
남들은 현실에 안주할 나이인 쉰 살 때의 일이었다.
  이런 채플린이 두 번째 부인인 리타 그레이와 몰래 결혼하고 "황금광 시대"를 
만들 즈음, 절망한 독일의 예술영화가들은 "마지막 웃음"(1924)을 만들거나 필름 
누아르(film noir)의 원조격인 "활기 없는 거리"를 만들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나운규가 "아리랑"(1926)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두가 이제 막 근대 영화로 
진입하던 시기의 일이었고, 그 뒤 각 나라의 영화 역사는 그 나라의 사정에 따라 
걸음을 달리했다. "황금광 시대"는 이러한 영화사의 비극성과 현대의 비극성 
모두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효인 영화평론가"

    전함 포템킨(Bronenosets Potemkin 1925)
    러시아 혁명, 학살과 승리의 서사시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Sergei Eisenstein)

  장 르누아르와 그리피스, 에이젠슈테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서양영화 초창기의 
맥락과 영화이론을 이해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 서양영화가 동양영화에 끼친 
영향을 생각할 때, 비록 그 영향이 때로 강압적이었다 하더라도, 이 세 감독은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과제이다. 특히 에이젠슈테인이 사회주의 영화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한, 타락한 영화세상에서 사회주의 영화를 
통해 어떤 희망적 단서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찾아가곤 했다. 그 
대표작이 바로 "전함 포템킨"이다. 포템킨 호의 수병 반란과 오데사 계단에서 
벌어진 대학살극이 "전함 포템킨"을 이루고 있는 핵심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화도 무기가 될 수 있으며, 뛰어난 대중교육책이자 
선동임을 확인하게 된다. 억누르는 전함의 장교와 억눌리는 수병들, 압살하는 
코사크 군대와 피 흘리는 인민들, 이 모든 것이 극단적인 대조를 통하여 
표현된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즐겨 그렸고 극장의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던 에이젠슈테인에게 그러한 서술상의 대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정작 에이젠슈테인을 에이젠슈테인으로 만든 것은 몽타주로 알려진 그의 
화법이었다. 그의 선배 푸도프킨이 필름의 결합을 통해 서술적 의미의 확대와 
강조를 꾀했다면, 에이젠슈테인은 두 개의 대조적인 숏을 통합해 새로운 개념을 
창조했다. 코사크 병사가 내리치는 칼, 깨어져 뒹구는 안경, 클로즈업된 피 
흘리는 여인의 얼굴.... 이런 편집을 통해 에이젠슈테인은 상황 묘사라든가 
감정의 고조를 넘어서서 관객들에게 단호한 정치적 입장을 요구하는 논리로 
떨쳐나갔다. 물론 그는 이 오데사 계단 장면만이 아니라 많은 장면에서 여러 
대의 카메라를 설치해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크기로 숏들을 찍었다. 그는 찍은 
것을 어떻게 편집하느냐가 영화 창작의 처음이자 출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함 포템킨"은 이렇게 포템킨 호의 선상 반란에서 시작하여 오데사 계단을 
거쳐 마지막 승리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숏도 낭비하지 않으면서 영화를 
끌어간다. 서구 무성영화 특유의 지루하고 나른한 느낌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몽타주론에 대한 비판 역시 만만찮았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1929)을 비롯한 그의 작품에 대한 비판은 끝없이 이어졌고, 그는 자신의 
몽타주론을 완성하기 위해 낮에는 소련 영화학교의 강단에서, 밤에는 연구실에서 
일했다. 급기야 그는 형식주의자로 매도당했고, 어떤 영화는 정부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결국 "전함 포템킨"은 소련 영화의 명예로 남아 있을 뿐, 자신의 조국에서는 
이어지지 않았다. 또 인물 전형화론 같은 그의 독특한 이론 역시 후학들의 
과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역설적으로 그의 몽타주 기법과 사회의식은 1930년대 
영국의 사회적 다큐멘터리로 이어졌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제 거의 모든 
할리우드 영화가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그의 편집 기법을 써먹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몽타주론은 이 타락한 영화세상만큼이나 통속화되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흥행작들이 영화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다시 "전함 포템킨"을 읽어야 한다. 
고전이어서가 아니라 영화를 통해 세상과 아이들의 미래를 다시 생각해 보자는 
뜻에서다. 
  "이효인"

    어머니(Mat 1926)
    '혁명의 길' 그린 무성영화의 걸작
    프세볼로트 푸도프킨(Vservolo I. Pudovkin)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는 러시아 혁명문학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일 것이다. 프세볼로트 푸도프킨(1893__1953)의 "어머니"는 바로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무성영화의 걸작이다. "전함 포템킨"이 시종 망치로 때리는 
듯한 충격을 주는 숨가쁜 영화라면, "어머니"는 서정을 통해 격정을 쌓아가는 
질긴 밧줄과 같은 영화이다.
  푸도프킨과 시나리오 작가 자르히는 고리키를 영화로 옮기면서 원작의 
이차적인 이야기는 과감히 버리고 등장인물의 수를 줄이는 대신 날카로운 갈등을 
중심으로 한 극적 구조를 부각시켰다. 그들의 목적은 가난하고 무식한 노동자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혁명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고리키의 깊이와 넓이를 희생시키는 것이었지만 무성영화로서 극적, 혁명적 
효과를 달성하는 데는 최선의 방법이었는지 모른다.
  영화는 의식적으로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술집과 집, 공장의 파업을 
오가는 도입부의 알레그로와 아버지 장례식의 아다지오, 
수색, 배반, 체포, 재판, 감옥생활을 그리는 알레그로와 
해방, 시위, 폭동, 아들과 어머니의 죽음을 그려나가는 격렬한 
프레스토가 차례로 연주된다. 이 계산에 따라 푸도프킨의 "어머니"는 보는 이의 
감정곡선을 정확하게 조절하는 뛰어난 운율의 영화로, 성격과 사건, 극을 하나로 
엮어나가는 탁월한 비극으로 태어나게 된다.
  에이젠슈테인, 도브젠코와 더불어 소련 무성영화시대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푸도프킨은 물리학과 화학을 공부한 과학도였으며, 
시, 회화, 연극, 연출 등 여러 분야를 두루 섭렵한 재기 넘치는 
예술가였다. 그는 러시아 몽타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쿨레쇼프의 수제자로 소련 
영화의 중심으로 진입했는데, 엑센트릭한 단편 "체스 열기"와 과학영화 "뇌의 
역학"에 이어 만든 "어머니"는 사실상 그의 첫 장편이었다.
  "어머니"에는 이런 그의 예술적 역정이 창조적으로 담겨 있다. 예컨대 
재판장면은 톨스토이의 "부활"의 한 장면을 재창조한 것이며, 감옥에서 
원운동을 하는 장면은 반 고흐의 '감옥 안마당'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타마리나가 연기한 어머니의 형상에는 드가와 청색시대의 피카소와 
콜비츠의 판화가 응축되어 있다. 그 자신 배우이기도 했던 푸도프킨은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사실주의 연기 전통을 고스란히 영화로 옮겨옴으로써 뛰어난 
심리적, 서정적 효과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어머니"를 세계 영화사의 걸작으로 만든 기본 요인은 탁월한 
몽타주에 있다. 서정과 서사, 배우의 연기와 편집, 세부와 전체, 심리와 카메라의 
시선, 긴 흐름과 짧은 단절을 적절히 교차, 병치, 조합하는 그의 
몽타주는 에이젠슈테인의 그것과는 또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흔히 그의 몽타주이론을 연계의 몽타주라고 단순화하는데, 이는 옳지 않다. 
"어머니"의 마지막 부분인 시위와 학살, 투쟁의 장면은 '오데사 계단' 못지않게 
충격적이다. 사실 그와 에이젠슈테인의 본질적 차이는 후자가 몽타주를 영화의 
방법론으로 접근했다면, 그는 서술의 기술로 간주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차이가 결과적으로 세계 영화사의 평가를 가르고 말았다. 그의 
영화는 1903년대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 영화의 전범으로 평가받았으나, 정작 
그 자신은 발성영화가 도입된 뒤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이 
아이러니는 물론 스탈린주의의 억압 탓도 있지만 기술적 실험과 타협을 
맞바꾸고자 했던 그의 쇠약한 예술혼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이정하 영화평론가"

    장군(The Genetal 1926)
    현대적인 맛의 1920년대 코미디
    버스터 키턴(Buster Keaton)

  버스터 키턴은 1895년에 태어나 보드빌(노래, 춤, 곡예 따위를 곁들인 
소희극)의 연주자이던 부모와 함께 세 살 때부터 무대에 섰다. 슬랩스틱 
코미디(slapstick comedy, 배우가 치고 받고 하면서 연기와 동작을 과장하는 
희극)가 한창 주가를 올리던 1917년에 영화 연기를 시작한 그는 1920년대에는 
자신의 영화사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연출과 연기를 겸하기 시작했다. 1928년에 
그의 영화사가 MGM으로 넘어가기까지 키턴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열두 편의 장편 희극영화를 만들었다. "우리의 환대", "셜록 2세", 
"조동사", "장군"이 그 시기에 만든 대표작들이다.
  "장군"은 어수룩한 낙오자가 사내다운 용기를 증명하여 사랑하는 여자를 얻게 
되는 이야기이다. 흔해빠진 이야기이지만 몇 번을 보아도 신선하다. 정치성도, 
사회에 대한 풍자도 없다. 단지 키턴의 독창적인 희극적 효과가 있을 뿐이다. 
백치 같음과 철학적인 것이 엿보이는 키턴 특유의 무표정과 절제된 신체의 
움직임, 주인공이 싸워야 할 상대가 한 소대가 타고 있는 기차나 한 부대가 
주둔해 있는 적지라는 것, 기관차라는 거대한 기계덩어리에서 무한한 효과를 
끌어내는 규모 등은 당대의 코미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동시대의 슬랩스틱 코미디와 채플린의 영화가 연기자의 움직임과 표정을 
중시하고 단지 그것을 기록한 데 비해, 키턴은 특정한 카메라 위치와 시각적 
효과, 정확한 타이밍과 편집 리듬을 중요하게 여긴다. 주인공 자니가 실연당한 
뒤의 장면은 그런 요소들의 묘미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자니는 '장군호' 바퀴의 빗장 위에 힘없이 앉아 있다. 잠시 후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고 자니의 몸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니의 몸은 그가 지닌 실연과 고뇌의 
무게에 비해 너무나 가볍게 빗장 위에서 원을 그린다. 두 바퀴를 돈 뒤, 화면 
오른쪽으로 사라지기 직전에야 그는 상황을 깨닫는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운명의 힘, 그 주변을 따라 고는 자니.... 이 희비극이 공존하는 순간의 
고정된 카메라, 거리를 둔 카메라의 위치, 인물의 미세한 움직임 직후에 곧바로 
페이드아웃 되는 편집 등이 그 맛을 더욱 풍부하게 한 것이리라.
  "장군"을 영화사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 현대적 면모 때문일 것이다. 
카메라는  관객이 거리를 두고 곤경에 빠진 주인공을 관찰하게 하며, 그 곤경을 
즐기게 한다. 그래서 관객은 주인공과 감정의 동화를 이루지 못한다. 또한 
상황에 대한 불가피한 절망감을 보여주는 키턴 특유의 냉철한 무표정이 그러한 
이화작용을 더욱 강화한다. 
  또 하나의 현대적 맛은 빅토리아 시대의 전통적인 신사도를 물려받아 여성을 
영화에서 곱게 다루던 시기에 여성을 세상 안으로 끌어낸 점이다. 자루에 넣어 
화물칸에 던지고, 그 자루를 발로 무자비하게 밟는가 하면, 몸이 쓸려버릴 
정도로 펌프물을 퍼붓고, 목숨을 건 탈주에 어리석게 행동하는 여자의 목을 
조르기도 한다. 물론 할 수 없어 입맞춤을 하긴 하지만, 당대로서는 진지한 
소재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이 남북전쟁 때의 로맨스는 이러한 현대적 면모들로 
패러디가 되고, 이것을 통해 그의 영화에서 감상은 모두 씻겨버린다. 
  1930년대 메이저 스튜디오 아래서 재능을 잠식당한 키턴은 다시는 "장군"과 
같은 독창적인 코미디를 만들지 못했다.
  키턴은 채플린에 버금가는 유일한 희극영화인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채플린과는 아주 다른 현대적 감성으로 죽은 뒤에 더욱 유명해진 인물이다. 특히 
부조리극이 성행하고 브레히트가 영화에 수용되던 시기에 죽음으로써 수십 년 
전에 그의 영화가 보여준 현대적 감성을 되씹게 했는지도 모른다.
  "주진숙"

    메트로폴리스(Metropolis 1927)
    계급투쟁 그린 표현주의 '얼굴'
    프리츠 랑(Fritz Lang)

  영화가 역사 바깥에서 만들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만일 볼셰비키 혁명이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을 만들었다면,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는 
나치즘을 '예언'하는 것이었다.
  브레히트의 친구였으며, 루카치가 증오하는 예술가였고, 벤야민이 찬미했으며, 
아도르노가 비난했던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대가 프리츠 랑(1890__1976)은 
건축학과 미술을 공부한, 괴테와 말러의 찬미론자였다.
  그는 원래 화가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1차 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고 
후송된 병원에서 시나리오를 쓰면서 독일 영화의 거물 프리드리히 무르나우와 
함께 독일 무성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러나 무르나우와 함께 독일 
무성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러나 무르나우가 회화적인 표현주의를 
추구했다면, 랑은 건축적인 표현주의 양식을 완성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촬영감독 카를 프로인트와 귄터 리타우, 미술감독 오토 훈테와 
에리히 케텔후트, 카를 볼프레히트 같은 표현주의 영화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독일 최대의 촬영소인 우파 스튜디오에서 310일에 이르는 대작 
"메트로폴리스"의 촬영에 들어갔다.
  미래 고시 메트로폴리스는 두 개의 세계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행복하고 
안락한 부르주아들의 지상낙원이고, 또 하나는 온통 기계로 둘러싸인 노동자들의 
지하감옥이다. 지상의 가진 자들은 지하의 빼앗긴 자들의 노동의 대가로 천국을 
소유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지상세계를 움직이는 자본가의 아들 프레더가 우연히 비밀의 
문을 통해 그 끔찍한 지하세계로 내려가 천사 같은 소녀 마리아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노동자들의 유일한, 성녀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과학자가 음모를 꾸민다. 그는 마리아를 납치한 뒤 마리아와 똑같이 
생간 로봇을 지하세계로 내려보낸다. 가짜 마리아는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지하세계의 노동자들은 계급투쟁을 향해 전진한다.
  랑이 만들어내는, 이 어둡고 음침하면서도 무섭도록 열광적이고 흥분을 
자아내는 계급투쟁의 우화는 공상과학영화라는 형식 속에서 무성영화 특유의 
압도적인 시각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그는 독일 영화의 새로운 전통을 위해 당대 러시아 영화의 몽타주나 프랑스 
영화의 아방가르드 전통을 모두 무시했다. 그 대신 영화 전체를 거대한 건축적인 
유기체처럼 설계하고, 그 속에서 집단적 움직임과 기하학적 구도, 빛과 그림자의 
날카로운 대비와 그 사이로 늘어선 기형적인 세트, 기계적인 카메라의 이동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아마 표현주의 정신을 이렇듯 탁월하게 구현한 작품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랑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메트로폴리스"는 위험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선동과 집단 봉기하는 
계급투쟁의 결과를 공상과학영화라는 모호한 변명 속에서 이상적이고 낭만적으로 
변질시켰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는 자본가와 자본가 아들 사이의 
화해로 변질된다. 결국 혁명은 폭동이 되고, 영화는 노동자계급의 패배와 
부르주아 휴머니즘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메트로폴리스"는 무시무시한 인플레가 독일 전역을 휩쓸던 1927년 1월 10일 
베를린에서 개봉되었다. 두 사람이 이 영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 사람은 아돌프 히틀러였고, 또 한 사람은 할리우드의 제작자 월터 
윈저였다.
  13년 뒤, 프리츠 랑은 나치 선전영화를 만들어달라는 괴벨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할리우드로 가 필름 누아르 영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아도르노의 
말처럼 그는 '실패한' 독일 영화의 바그너였다.
  "정성일 영화평론가"

    잔 다르크의 수난(La Passion de Jeanne d`Arc 1928)
    클로즈업 중심의 형식미 탁월
    카를 테오도르 드레이어(Carl Theodor Dreyer)

  "잔 다르크의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을 상자 속에 간직하고 싶다."
  루이스 부뉴엘이 이 영화에 대해 한 말이다. 하지만 에릭 로드 같은 
영화사가는 카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을 고통에 빠진 여성들(이 영화와 
"분노의 날"(1943), "오데트"(1955), "게르트루트"(1964) 같은 작품)을 
가학적으로 재현해내는 남성우월주의자라고 평가했다.
  반면 질 들뢰즈의 견해는 달랐다. 그는 드레이어야말로 관객에게 최고의 
정서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만든다고 평했다. 또 혹자는 '절규하는 
소리가 나는 무성영화"라고 이 영화를 정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떠한 관점에서 보건 부정할 수 없는 점은 그가 매우 특이한 형식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카메라 움직임과 미니멀리즘으로 관객들의 
정서를 이끌어내는 드레이어는 사실 일본의 오즈야스지로 감독이나 프랑스의 
브레송과 더불어 세계 영화사에서 독특한 전통을 이루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느낌표나 의문부호보다는 말줄임표를 즐겨 사용하며, 오히려 데스마스크에서 
가장 강렬한 삶의 표현을 포착한다.
  1920년대 후반, 르네 클레르와 페르낭 레제, 루이스 부뉴엘이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영화에 관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을 때, 덴마크에서 프랑스로 옮겨온 
드레이어는 작품을 만들어 달라는 프랑스 영화사의 제안을 받는다.
  역사상 흥미로운 세 명의 여성들, 즉 카트린 드 메디치와 마리 앙투아네트, 잔 
다르크 가운데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생각하던 그는 드디어 마지막 
인물로 낙점한 뒤, 중세의 일상을 재현하기 위해 꼼꼼하게 자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잔 다르크 역을 맡을 배우로는 순박한 시골 처녀 같으면서도 순교자의 
열정과 고통을 간직한 지방 연극배우 마리아 팔코네티를 선정한다.
  모든 사람들을 놀라운 시각 경험에 빠지게 한 섬세한 클로즈업 중심의 이 
영화는 다양한 톤에 반응하는 팬크로매틱 흑백 필름을 사용했고,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서술구조에 적합한 짧은 길이의 '숏'들로 이루어진 평행 
편집을 채택했다.
  전체적으로는 잔 다르크를 마녀로 몰기 위한 재판과정과 화형장면으로 나뉘어 
있으며,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들(주교, 영국인, 판사 그리고 군중)이 각기 
다른 종교적 신념과 분노를 가지고 이 전쟁터에 뛰어든다.
  '숏'과 거기에 대응하는 '뒤집힌 숏'의 관습적인 사용을 피해가면서 흐르듯 
이어지는 클로즈업을 채택한 이 영화의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것은 잔 다르크의 
고통에 찬 얼굴과 뒤편으로 보이는 하얀색의 텅빈 실내 공간이다. 말하자면 
원근법에 따른 공간적 깊이가 부재하다는 것인데, 이것을 대체하는 것이 바로 
정신적 깊이이며, 이때 잔 다르크 역을 맡은 팔코네티의 얼굴은 마치 중세의 
종교적 도상화처럼 정신적 형상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 영화의 후반부는 종교적 구원의 영원성보다는 잔 다르크의 삶에 
대한 열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삭발당한 채 화형대에 올라 "오늘밤 나는 
어디에 있을까"하고 독백할 때, 그리고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과 하늘을 나는 
비둘기들, 어머니의 품에 편안히 안긴 아기의 이미지들이 나타날 때, 천상의 
세계는 멀어 보이고 지상은 그보다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이런 문제제기는 이제 정말 고전적으로, 즉 진부하게 보인다. 따라서 
이 영화가 영화사 100년사에서 갖는 의미는 형식미의 탁월함 정도에 머무를 것 
같다.
  그러나 들뢰즈의 의견은 또 다르다. 이 영화는 오히려 세상이 저질 영화처럼 
보이는 20세기에 태어난 서정적 영화이며, 바로 그 정서적 효과를 통해 
관객들에게 잃어버린 것을 복원할 수 있다는 꿈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복원한단 말인가?
  "김소영"

    황금시대(L`Age d`or 1930)
    종교와 계급을 향해 쏜 '영상 화살'
    루이스 부뉴엘(Luis Bu uel)

  루이스 부뉴엘(1900__1983), 20세기와 함께 스페인에서 태어나 프랑스와 미국, 
멕시코를 거쳐 프랑스에서 긴 영화 역정을 마감한 이 거장은 생애의 대부분을 
상업영화를 만들며 보냈으면서도, 당대의 주류문화를 거스르는 '스캔들'로서의 
영화를 꾸준히 만든 특이한 존재이다.
  그는 첫 작품인 "안달루시아의 개"(1928)에서 마지막 작품인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영화에 일관된 세계관이 초현실주의였다고 
주장한다. 부뉴엘은 인간이 자신의 본능과 비이성적인 면을 제도와 문명이라는 
틀을 가지고 다스리려는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고 무의미한 일인가를 끈질기게 
보여주려 하였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종교--그의 성장 
배경인 카톨릭 교회--를 향한 공격, 유럽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야유와 경멸, 
그리고 무의식과 본능의 영역인 성에 대한 탐구가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음흉하리만큼 우회적으로 들어가 있다.
  이러한 부뉴엘 영화의 특징은 그의 두 번째 영화 "황금시대"에 가장 잘 
압축되어 있다. 상영시간 1시간인 이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전갈의 생태를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그런 다음 산적들, 사제, 군인, 관료가 차례로 등장하고, 영화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사랑을 벌인다. 이들의 사랑을 부르주아들이 
끊임없이 방해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기둥 줄거리인 셈인데,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엉뚱하게도 사드의 "소돔의 120일"이라는 소설의 후일담으로 넘어간다. 
더욱이 여기에 등장하는 네 명의 '패륜아' 가운데 한 명이 예수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다가 영화의 마지막 이미지도 사막에 버려진 십자가이다. 이러한 이야기 
사이사이에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부르주아의 삶의 단편들이 끼여드는데, 자막과 
대사와 음악("황금시대"는 최초의 발성영화 가운데 하나이다)은 이 영화의 
공격대상이 무엇인지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부뉴엘이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만든 첫 작품 "안달루시아의 개"는, 당시 
파리 문화계에서 유행하고 있던 예술지상주의적 전위영화에 대한 공격이라는 
만든 이들의 의도와는 달리, '예술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품이라는 
오해(?)와 함께 부르주아 문화인들의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부뉴엘이 
"안달루시아의 개"의 성공에 힘입어 만든 "황금시대"는 일부 좌파 지식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격렬한 분노와 항의를 불러 일으켰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예수를 사드 소설의 주인공으로 묘사한 '신성 모독' 부분이었다. 상영관으로 
몰려온 극우 단체 회원들은 영사막을 찢었고, 영화는 찢어진 영사막 위에서 
며칠간 계속 상영되었다. 그러나 들끓는 여론과 카톨릭 교회의 압력을 견디다 
못한 파리 시 당국은 결국 상영을 금지하고 프린트를 압수하고 만다.
  1950년대에 "잊혀진 사람들"로 유럽 영화에 복귀하기까지 부뉴엘에게는 '악명 
높은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고, "황금시대"의 오리지널 
네가는 1993년에야 원래의 형태로 복원되었다. "안달루시아의 개"가 '고전'으로 
인정받아 가는 동안, "황금시대"는 여전히 '스캔들'로 남아 있었던 셈이다.
  "김홍준"

    대지(Zemlya 1930)
    '혁명 선동' 탈피, 민족영화 개척
    아렉산드르 도브젠코(Alexamder Dovzenko)

  알렉산드르 도브젠코(1894__1956)의 "대지"는 소련 영화의 발달사에서 
다민족국가 영화가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볼셰비키 혁명 후 소련 영화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발달했으나 그 동력은 곧이어 각 민족국가로 확산되었다.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러나 "대지"의 영화사적 가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혁명의 
선전, 선동과는 궤를 달리하여 인간과 대지의 하나됨이라는 영원성의 테마를 
추구한 것이었으며, 형식상으로는 당대 소련 영화의 거대한 흐름이었던 몽타주 
영화와 달리 시적 영상으로 형상화된 작품이었다.
  도브젠코는 우크라이나의 체르니코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교사, 공산당 지하요원, 외교관 등을 거치며 다양한 
경력을 쌓게 되는데, 사실 그를 매료시킨 것은 예술이었다. 베를린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귀국과 
함께 풍자화가로 나섰다가 1926년에 영화에 몸을 던졌다. 처음 도브젠코는 
엑센트릭한 코미디 장르를 다루었으나 그다지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영화감독으로서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해준 것은 네 번째 영화인 
"즈베니고라"(1928)였다. 여기서부터 그의 영화는 고향 우크라이나의 자연과 삶, 
빈곤과 혁명을 담기 시작했다. 앞의 영화와 "무기고"(1929), "대지", 발성영화 
"이반"(1932)은 이 계열의 4부작이라 해도 좋은 영화이다.
  "대지"는 우크라이나의 한 농촌 마을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사회변동을 새 
것과 낡은 것, 콜호스 농민과 지주, 사람에 대한 신뢰와 산에 대한 신앙 
사이에서 생기는 비극적 충돌을 통해 응시하고 있다. 
  도브젠코는 "나는 농촌에서 새 생활의 새벽을 예고하는 작품으로서 "대지"를 
기획했다"고 말했으나 결과는 그 이상이었다. 왜냐하면 완성된 영화는 
농촌사회의 계급투쟁을 담고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 땅을 경작하는 농민들의 
영원한 세계인 노동과 대지의 친화, 자연의 순환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인간 
생명의 순환, 그리고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지방의 토속적 서정으로 가득찬 
영상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대지"는 인간의 노동으로 기름지게 변한 자연에 대한 찬가로 시작한다. 
휘늘어지게 열매를 맺은 사과나무 아래서 한 노인이 사과를 씹으며 죽어간다. 
그의 곁에는 노인의 생명을 이어가기라도 하듯 한 어린애가 역시 사과를 먹고 
있다. 느리게, 시적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농업의 집단화를 둘러싼 지주와 
빈농의 갈등으로 긴장을 더해가다 바실 리가 이 마을에 트랙터를 들여와 수세기 
동안 이어져온 낡은 소유의 상징인 밭두렁을 허무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마지막 장면은 지주에게 살해된 콜호스의 농민 지도자 바실리의 장례식이다. 
친구가 등, 그의 미소짓는 초상이 사과나무 가지를 스친다. 이어 바실리의 
어머니가 또 하나의 생명을 낳고 비가 대지를 적시는 시적인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도브젠코는 이 영화에서 서술을 위해서든 충돌을 위해서든 당대 소련 영화의 
화려한 몽타주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미지와 이미지, 장면과 장면의 
연결과 병치와 상승작용을 더 중시했다. 
  그의 숏들은 대체로 느릿하고 길며, 종종 극도의 광각으로 촬영되었다. 그것은 
대지의 광대함과 자연의 영원성을 드러내는 데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요소 때문에 단세포적인 혁명론자들에게 골격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것은 영화사가 "대지"를 도브젠코의 오랜 화가의 꿈이 
스크린에서 성취된 걸작으로 기록하게 한 요소였다. 
  "이정하"

    엠(M 1931)
    은유적 음향 기법 뛰어난 걸작
    프리츠 랑(Fritz Lang)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 가운데는 대중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거나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은 경우가 많지만, 그와 더불어 다음 세대의 영화에 끼친 영향력이 더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프리츠 랑의 "M"도 그러한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작품이다. 1930__40년대의 
필름 누아르 감독들에게 "M"은 교과서였고, 1920년대 말에 갓 태어난 유성영화 
속에 어떻게 사운드를 삽입할 것인가를 놓고 우왕좌왕하고 있던 영화인들에게 
"M"은 역시 모범적인 교본이였다.
  1920년대와 30년대의 독일 사회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권위주의를 
지향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작품이 바로 
"M"이다.
  뒤셀도르프의 어린이 살해사건을 모델로 한 이 작품은 어린이 살해범 
베케르트를 쫓는 경찰과 지하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랑은 이러한 
이야기를 통하여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모색한다. 근대적 의미의 공동체는 
자손을 통해 영속되며 법과 같은 권위적 관리체제에 의해 유지되는데, 그러한 
권위는 개인의 권리를 제한함으로써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끝없이 자유를 
원하는 개인의 본능은 공동체와 권위에 심대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살인범 베케르트는 바로 그러한 위협의 상징적 존재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베케르트가 드러내는 정체성의 
혼란, 즉 또 다른 자아를 구현한 랑의 기법들은 필름 누아르의 시각적 스타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베케르트의 또다른 자아는 그림자나 거울, 유리창에 비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림자나 거울은 필름 누아르의 가장 지배적인 시각적 모티브 가운데 하나다.
  또한 랑은 베케르트의 개인적 혼란과 더불어 사회적 혼란도 이야기 한다. 즉, 
베케르트의 개인적 혼란과 더불어 사회적 혼란도 이야기한다. 즉, 베케르트를 
추적하는 사회세력이 경찰과 지하세계로 이원화 되어 있는 것이다. 랑은 이러한 
두 집단의 모습을 완벽한 대칭구조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두 집단이 베케르트를 
추적하기 위해 회의하는 장면은 교차 편집의 전형으로 꼽힌다.
  사운드 기법은 오늘날에도 그 탁월함이 빛을 잃지 않고 있다. 랑은 사운드를 
단순히 영상에 종속적인 것이 아닌, 대위법적인 관계로 파악했다. 특히 유사한 
구도를 가지고 있는 경찰과 지하세계의 장면에서는 사운드를 통해 대립적 관계를 
부각시키고 있다. 즉, 두 집단이 살인범을 쫓는 과정에서 경찰은 시각적인 
것(지도, 필적 등)에 치중하는 반면, 지하세계는 소리를 통해 베케르트를 
붙잡는다. 맹인 거지가 기억해낸 베케르트의 '페르귄트 조곡'의 휘파람소리는 
청각적인 모티브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러나 랑의 가장 탁월한 사운드 기법은 은유적 기법이다. 소녀 엘시가 
납치되었음을 알리는 장면은 엘시를 애타게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음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처럼 랑은 사운드를 영상과 결합시켰을 때 그것이 만들어내는 은유적 효과에 
대해 누구보다도 앞선 생각을 가진 감독이었다.
  이 작품이 지닌 또 하나의 가치는 표현주의의 그림자를 안고 심리적 사실주의의 
문을 열었다는 점이다. "M"을 영화사의 전환기에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기억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지석 부산예술학교 교수"

    품행 제로(Z`ero de conduite 1933)
    교육과 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 실험영화
    장 비고(Jean Vigo)

  1929년에 최초의 사운드 영화라는 "재즈 싱어"가 프랑스에서 개봉되면서 아벨 
강스와 마르셀 레르비에가 이끌던 1920년대 프랑스 무성영화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할리우드와 경쟁할 만한 음향기술 시스템을 미처 갖추지 못한 프랑스 영화계가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동안 "재즈 싱어"는 그 당시 5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불러 모았다.
  즉시 미국과 독일의 음향기술이 프랑스 영화계에 도입되었고, 제작비가 세 
배로 치솟았다. 경쟁은 치열해졌고, 아벨 강스는 자신의 성공작인 "나폴레옹"에 
음향을 입혀 다시 제작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이제 무성영화의 대감독들은 
연이어 몇 편의 실패작을 남긴 채 황혼의 전사로 사라져갔다.
  1930년대 초의 프랑스 영화계는 "파리의 지붕 밑"(1930)이라는 영화를 만든 
르네 클레르와 함께 "품행 제로"의 감독 장 비고의 시대였다. 장 비고는 전기 
작가들이 군침을 흘리며 달려들 만한 모든 요소를 갖춘 예술가였다. 우선 
아버지는 당대의 이름난 무정부주의자여서 감옥을 빈번하게 드나들었고, 자신의 
이름마저도 '똥이나 먹어라'식으로 개명할 만큼 파격적인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 열두 살의 병약하고 조숙한 
소년이었던 비고는 이미 반카톨릭적인 자유주의자였다. '반역자'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이 소년은 학교 기숙사에서 영화 "품행 제로"에 실명 그대로 
등장하는 문제아들을 만나 그야말로 성적표의 품행란에 영점을 기록하며 십대를 
보낸다.
  결핵을 앓기도 하던 이십 대, 그는 마침내 소련 다큐멘터리의 전설적인 거장 
지가 베르토프의 아우인 보리스 카프만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도시 
다큐멘터리인 "니스에 관하여"라는 걸작이다.
  1932__1933년 사이에 만든 "품행 제로"는 여름 방학을 집에서 보낸 코사와 
브루엘이라는 두 소년이 학교 기숙사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시작한다.
  담배 연기와 증기기차의 수증기가 어우러진 기차 안은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아이들은 악몽으로 끌려 들어가듯 학교로 돌아온다. 곧 
그들은 '마른 방귀'라는 별명을 가진 기숙사 사감에게 벌을 받는데, 이 영화에서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은 작은 폭군의 모습으로 희화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위게라는 젊은 교사는 찰리 채플린의 흉내를 내고 만화를 그려주기도 
하면서 학생들의 숨통을 터준다. 이 선량한 선생님과 아이들이 마을로 소풍을 가 
떼지어 한 숙녀를 따라가는 장면과 교차되는, 난쟁이 교장이 음모를 꾸미는 
장면은 슬랩스틱 코미디와 다큐멘터리를 혼합한 것 같은 이 영화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
  교장과 교사들의 규율과 처벌에 맞서 코사 일행은 일대 소동을 일으키는데, 
바로 이때 베개와 침대보에서 터져나온 하얀 오리털이 폭설처럼 방안을 가득 
채우는, 세계 영화사의 환상적인 명장면 하나가 탄생한다. 느린 속도로 촬영된 
이 부분은 사실 미적이면서 가치전복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이다.
  마침내 마지막 시퀀스. 학교 축재를 맞아 국가, 종교, 군대를 대변하는 세 명의 
손님이 도착하자, 코사 일당은 지붕 위에서 책과 돌, 신발 따위를 던지며 이들을 
마음껏 조롱한다. 그리고 학생들은 마침내 프랑스 국기를 내려버리고 자신들의 
혁명기를 올린다. 그리고 지붕 위를 걸어가며 하늘을 향해 노래한다.
  "품행 제로"는 종교와 교육제도에 대한 신랄한 조롱 때문에 '사회질서를 
교란시킨다'는 이유로 당시에는 상영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적인 
요소와 풍자 코미디,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보이는 이 실험성 높은 영화는 오히려 
미래를 위해 만들어진 듯 보인다. 프랑스 누벨 바그의 악동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나 영국 프리 시네마의 기수인 린제이 앤더슨의 "만약에..."처럼 제도 
교육의 모순을 다룬 영화들은 사실 모두 이 영화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소영"

    모던 타임스(Mordern Times 1936)
    산업사회의 인간 소외 고발한 채플린의 마지막 무성영화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

  헐렁헐렁한 바지에 꽉 끼는 윗도리, 작은 중산모에 크고 낡아빠진 구두, 짧은 
콧수염에 특유의 마당발 걸음, 그리고 옆구리에 지팡이를 낀 구시대의 신사. 
서울의 수많은 레스토랑 간판에 새겨져 있어 이제는 그 분장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의미도 다 바래버린 형상. 이 형상은 찰리 채플린이 지금부터 80년 전, 
처음 영화에 출연하면서 창조한 방랑자의 모습이다. 시대를 거슬러 가는 이 
방랑자의 분장은 모든 채플린의 무성영화에서 산업화를 향해 치닫는 미국 사회의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대항하는 존재의 상징이었으며, 빅토리아 시대의 신사도와 
자부심으로 전통을 고수하며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인물의 표상이었다, 
  1936년도 영화 "모던 타임스"는 채플린이 방랑자로 분장하고 등장한 마지막 
영화이자 그의 마지막 무성영화이다. 방랑자는 발레와 같은 슬랩스틱 제스처를 
통해 기계 만능의 현대를 풍자하는 한편 감상적 로맨스와 함께 그 사회를 
떠남으로써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 채플린에게 말하는 방랑자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이 마지막 무성영화에서는 무국적의 묘한 언어로 노래하게 
함으로써 무성과 유성의 경계를 넘어버린다.
  "모던 타임스"에서 채플린이 그리는 현대는 냉혹하다. 노동자들은 축사로 
끌려가는 양떼처럼 공장으로 몰려 들어가고, 자본가는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노동자들을 감시한다. 최소의 시간으로 최대의 생산을 얻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숨쉴 틈도 없으며 화장실 가는 시간도 체크당한다. 화장실에서 담배라도 한 대 
피우려 하면 한쪽 벽의 대형 스크린에서 자본가가 불호령을 내린다. 점심 시간도 
아까워 자본가는 작업 중에 급식할 수 있는 자동급식기계를 설치한다. 자동화된 
일터는 실직자를 대량 생산하고, 그들은 거리에서 시위를 벌인다. 굶주림 때문에 
빵 하나를 훔치는 사람도 있고, 시위를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 이도 있다. 
그러한 이들 때문에 거리에는 경찰관들이 가득하다.
  주인공 방랑자는 현대의 노동자이다. 그는 무엇을 생산하는지 알 수 없는 
작업대에서 볼트를 조인다. 그의 손이 반의 반초만 늦어도 일관작업체제는 
엉망이 되고, 쉴 새 없이 볼트를 조이는 그의 두 손은 작업대를 떠나도 자동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여자의 엉덩이에 달린 단추도 조이려고 달려든다. 그는 
자동급식기계를 시험하는 대상으로 뽑히지만, 고장이나 광포해진 기계는 그에게 
음식물을 던지고, 그를 폭행하고, 미치게 하고, 거대한 기계의 흐름 속으로 
삼켜버린다. 거리에서 그는 트럭의 꼬리에서 떨어진 붉은 깃발을 들고 뛰다가 
시위대열에 앞장서기도 하며, 고아 소녀를 만나 가정을 꿈꾸고 직업을 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방랑자는 현대의 작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소녀와 함께 
지평선을 향해 떠난다.
  대중사회에서 소멸되어가는 인간성에 대한 고발과 물질문명이 가져온 
비인간성에 대한 비판을 담은 "모던 타임스"는 공산주의적 경향을 지녔다는 
이유로 물의를 일으켰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으며, 오스트리아에서는 붉은 깃발을 
들고 뛰는 장면이 검열에서 잘렸다 한다. 그리고 이 영화와 뒤이어 만들어진 
"위대한 독재자", "무슈 베르두"에서 보여준 비판적이며 좌파적인 색채는 훗날 
매카시 선풍이 할리우드를 뒤흔들 때 채플린이 미국에서 추방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담긴 비판의 소리가 아직도 또 앞으로도 유효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진숙"

    커다란 환상(La Grande Illusion 1937)
    전투 장면 없는 전쟁영화
    장 르누아르(Jean Renoir)

  만일 영화가 리얼리즘과 형식주의 사이에 놓여 있다면, 그건 
미장센(mise-en-sce`ne)과 몽타주의 역사로 다시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미장센은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크다는 변증법적인 몽타주와 반대로 시간과 
공간의 현실적 반영 위에 놓인 전체의 시스템이 부분의 합보다 크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리얼리즘은 카메라가 현실을 기계 복제할 때 어떻게 모순을 보존하고 
반영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믿어져 왔다.
  장 르누아르 (1894__1979)는 미장센이라는 영화 수사학과 리얼리즘이라는 
미학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구현해낸 감독이다.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는 회화보다는 모차르트의 오페라와 
보마르셰의 연극, 좌파 인민전선의 활동에 더 많은 정열을 바쳤다. 르누아르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인 적은 없었으나, 노동자와 인민의 편에서 벗어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세계관이 때로는 모순되고, 때로는 모호한 상태로 머물면서도 
그의 영화 속에서 사해동포주의적 휴머니즘을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르누아르의 믿음이 담긴 영화가 "커다란 환상"이다.
  영화의 무대는 1차 세계대전 말이고, 프랑스 공군 마레샬(장 가방)과 장교 
보엘디외는 비행기가 추락하여 그만 독일군의 포로가 된다. 이 포로수용소에는 
여러 나라의 군인들이 잡혀 있었고, 수용소장은 귀족 출신인 폰 
라우펜슈타인("그리이드"의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 감독)이다. 그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신사적으로 포로를 대하지만, 포로들은 탈출을 계획한다. 그리고 
프랑스 장교 보엘디외의 희생 덕분에 마레샬과 유대인 로장탈은 탈출에 
성공한다. 두 사람은 천신만고 끝에 영구 중립국인 스위스 국경을 넘는다.
  장 르누아르는 이 영화를 '전쟁 장면이 하나도 없는 전쟁영화'라는 전무후무한 
원칙을 갖고 연출한다. 그것은 평화에 대한 그의 희망이자 신념이었다. 하지만 
포로수용소에 모인 수많은 인간들의 모순에 찬 모습은 그러한 꿈을 또 다른 
전쟁으로 이끈다. 고기에는 귀족과 노동자 또는 자본가 사이의 계급 모순, 
유대인의 민족 모순, 국가간의 모순, 종교 모순이 서로 충돌하고, 편견에 차서 
증오를 드러내고, 미워하고 맞선다. 그것을 르누아르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장시간의 이동 카메라와 편집 없는 롱 테이크, 그리고 딥 포커스를 이용한 
공간적 깊이를 통해 고전적인 현실 모순의 리얼리즘으로 담아낸다. 르누아르는 
전쟁 아래서의 자유와 평등, 전쟁과 박애의 관계를 준엄하게 묻고 있는데, 그의 
질문은 주제와 형식의 일치를 통해서 보기 드문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사에서 유명한 마지막 장면.
  "이제 곧 전쟁이 끝나겠지. 그러면 다시는 전쟁이 없을 거야."
  인터내셔널한 단결을 꿈꾸는 노동자 출신의 마레샬이 이렇게 말하자 유대인 
은행가 로장탈이 대답한다.
  "그건 자네의 커다란 환상일세."
  그리고 두 사람은 눈 덮인 스위스 국경을 넘는다. 이 영화는 1937년 6월 4일 
개봉되었고, 그로부터 2년 뒤에 예언대로(!) 2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는 "커다란 환상"을 '영화의 적 1위'라고 부르며 모든 
프린트를 소각하라고 지시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전후 이 영화의 프린트가 
발견된 곳은 1946년의 뮌헨이었다. 그 뒤 수많은 시네마데크의 노력으로 
1972년에야 비로소 우리가 볼 수 있는 '완전판'이 복원되었다.
  "정성일"

    올림피아(Olympia 1938)
    베를린 올림픽 담은 '서사시'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

  레니 리펜슈탈이 파시스트의 어용작가라는 치욕스러운 오명을 얻게 된 것은 
1934년의 나치 전당대회를 기록한 "의지의 승리"를 만들면서부터였다.
  히틀러를 천상에서 내려온 구세주로 표현하면서도 지루한 정치적 이벤트를 
웅대한 드라마로 탈바꿈시킴으로써, 그는 베니스 영화제의 그랑프리를 거머쥠과 
동시에 대표적인 관변작가의 대열에 올라섰다.
  그러나 다음 작품인 "올림피아"는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나치당의 공식 
선전영화라고 하기에는 힘든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인간 육체의 미적 가치에 
매혹당한 리펜슈탈은 국제올림픽위원회와 직접 교섭하여 촬영 허가를 받아내는 
데 몇 개월을 소진해야 했고, 자신과 애증 관계에 있던 선전상 괴벨스의 방해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만천하에 알리고 파시즘의 도도한 흐름을 전파할 절호의 기회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의지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나치당에게 그리 매력적인 
매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도 '느린' 매체였으며, 선전의 효율성에서 
보더라도 영화보다는 라디오가 확실한 투자대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오락적 기능에 초점을 맞춘 우민화의 도구로 정의 죄었다. 기념비적인 행사에 
걸맞는 예술작품을 후세에 남기고 싶어하던 히틀러의 독단이 없었다면, 
리펜슈탈은 엄청난 제작비를 끌어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개회식 장면을 성대하게 묘사하기 위해 비행선에까지 카메라를 장치하고, 
다이빙 장면을 연속적으로 찍기 위해 촬영기사들은 몇 개월 동안 수중 촬영 
훈련에 매달려야 했다. 그런 치밀한 사전준비 결과 2주간의 운동경기는 225분의 
서사시로 새롭게 탄생했다. 바그너풍의 음악을 배경으로 안개에 싸인 고대 
그리스애서 채화된 성화가 독일로 전해지고, 히틀러는 천상의 신전에서 이를 
내려다본다. 프로파간다가 기조에 깔려 있지만, 이것만은 아니다. 내레이션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인간의 육체와 음악을 절묘하게 조화시킴으로써 리펜슈탈은 
전혀 새로운 예술적 성과를 창조한다.
  그러나 가장 역동적인 시각적 이미지가 넘쳐흐르는 육상경기를 미국의 흑인 
선수들이 휩쓸어버리는 바람에 영화는 당초 계획했던 선전의 목표를 달성하기 
힘들어졌고, 이러한 장면을 삭제하라는 나치 관료들의 요구를 리펜슈탈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정치적 구호의 거세도 프로파간다라는 멍에를 완전히 벗겨주지는 
못했다. 인간의 육체를 시종일관 찬양하고, 준군사적이며 독특한 
양식으로 패턴화된 시각적 모티브들이 반복해서 등장함으로써 파시스트의 
미학과 시각적 상상력의 정수가 드러난다. 그 점에서, 히틀러에게는 매력을 
느꼈지만 나치의 이데올로기에는 반대했다는 리텐슈탈의 항변은 별다른 힘을 
지니지 못한다. 그는 파시즘의 매혹적인 시대정신을 무의식적으로 담아낸 
셈이다.
  "올림피아"가 이후 대중 세뇌의 주요 수단으로 등장한 텔레비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장르의 원초적 형태로 남아 있다는 것은 그러한 역사적 
평가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이다.
  객관성을 가장한 물신주의는 언제라도 파시즘과 만나게 마련이다. 
"올림피아"가 남긴 교훈은 하나의 이벤트를 객관적으로 기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대 현실의 왜곡과 등치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국가의 정책적 개입 때문이든, 아니면 개인의 작가적 소신 때문이든 
어떤 '기록'도 역사적 책임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김명준 영화평론가"

    게임의 규칙(La Re`gle du jeu 1939)
    상징적 기법으로 계층 다양성 담아
    장 르누아르(Jean Renoir)

  1956년, 파리에서 시네클럽을 운영하던 장 가보리와 자크 미르샬이 창고 속에 
처박혀 있던 "게임의 규칙"의 필름을 발견한다. 이 필름은 그 뒤 3년이 지난 
1959년에 1939년의 원판에 가까운 상태로 복원되어 다시 공개됐다. 이 작품의 
전면적인 재분석에 들어간 영화평론가와 학자들은 영화사상 가장 복잡한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와 풍부하고도 상징적인 영상기법에 놀랐다.
  후작 로베르의 성에서 열리는 사냥파티에 참가한 상류계급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하층민들의 갈등, 그리고 이들 두 부류 사이의 얽히고 설킨 갈등이 
마지막에 가서 만나는 플롯을 통해 장 르누아르는 '사회의 각 계층'에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관계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여러 번 이 작품을 
보지 않고서는 그 관계를 이해하기 힘들다. 
  상류계급의 경우, 후작 부인 크리스틴은 젊은 비행사 앙드레, 앙드레의 
친구이자 아버지의 친구였던 옥타브, 생오뱅과 미묘한 관계에 빠진다. 그리고 
로베르는 주느비에브와 연인 사이인데, 옥타브는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으며, 
크리스틴도 알게 된다. 한편 하녀 리제르는 남편 슈마허와 새로운 하인 마르소 
사이에서 삼각관계에 빠지고, 이들의 관계가 엉뚱하게 앙드레의 죽음을 부른다.
  르누아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모든 게임이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규칙을 
깨뜨리는 이는 개임에서 지는 것이다."
  여기서 게임은 상류사회의 결혼, 간통, 사냥과 함께 하인 계급의 유희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게임은 궁극적으로는 성의 게임이며, 또 서로 얽히고 
깨지지만 상류사회의 그것이 더 '위선'적이다. 앙드레는 이러한 규칙을 깨뜨리기 
때문에 죽음을 당한다.
  르누아르는 직접 옥타브로 출연하여 이들의 성적 게임의 매개자이자 참여자가 
된다. 그래서 유려한 카메라 워크는 옥타브를 중심축으로 이동한다. 카메라는 
그를 따라다니며 귀족계급과 하인계급의 사회를 자연스럽게 대비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1941)이 보여준 딥 포커스 
촬영이 이미 여기서 확고한 미학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영화적 공간개념을 
확장시킨 것이다. 전심초점 공간의 표현으로 깊이감을 강조하였을 뿐 아미라 
등장인물들이 프레임의 경계를 계속 드나들게 함으로써 훗날 영화학자 노엘 
비루시가 체계적으로 분석한 외화면공간(오프스크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르누아르의 탁월한 연출기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클로즈업이 거의 
배제된 풀 숏 화면의 배경이 되는 세팅과 의상 코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다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 우아함과 천박함, 전통과 
현대, 도시와 시골, 상류와 하류 계층 등등.
  이 작품에서 르누아르가 20세기 초 프랑스 사회의 모든 계층을 들여다보는 
영화적 형식은 독창적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의 방대한 문화적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 18세기 프랑스 코미디 야외극의 전통과 뮤세, 보마르세, 마리보의 영향에서 
낭만주의 회화의 전통에 이르기까지 "게임의 규칙"에 세세하게 스며 있는 
문화적 전통은 왜 르누아르의 영화가 프랑스인에게 그토록 사랑을 받았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김지석"

    판타지아(Fantasia 1940)
    클래식과 영상의 '환상적인 만남'
    월트 디즈니(Walt Disney)

  월트 디즈니는 1937년 겨울에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개봉했고, 이 
작품의 엄청난 성공은 디즈니에게 해마다 장편 만화영화를 한 편씩 공개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는 곧 "피노키오"와 "밤비", "판타지아" 등 세 
편의 장편 만화영화를 동시에 제작한다는 계획에 착수했다.
  해를 넘기면서도 승승장구하는 "백설공주..."에서 얻은 세계적인 명성과 
결벽증에 가까운 완성도를 이어가기 위해 디즈니는 늘 그래왔듯이 "피노키오"의 
줄거리를 완전히 개작하는 한편,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였던 
레오폴드 스토코프키와 교류하며 "판타지아"의 명장면들을 구상해갔다.
  "판타지아"는 1940년에 처음 발표되었지ㅁ,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장면들은 
1990년에 영화 발표 50주년을 맞아 현대적인 영상기술과 과학에 함입어 
원작보다 세련되게 복원한 작품이다.
  이 장편 만화영화는 당대의 유명 예술가들(디즈니 프로덕션의 화가들을 
포함한)이 만들었음을 애써 강조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화면 중심에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뒷모습이 실루엣으로 우뚝 서고, 간혹 반사된 그림자로 
처리되는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들려주는 클래식 명곡이 도입부를 장식한다. 그 
첫 삽입곡은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라단조'다. 이때의 화면은 디즈니의 작품 
스타일로서는 의외라고 여겨지는 실험적 영상들로 꾸며져 있다. 
  음악과 어우러지는 선과 면의 움직임, 속도감과 중첩되는 이미지, 인류가 
이루어온 음악의 성과와 새로운 영상인 애니메이션의 조화는 제목 그대로 
관객들을 판타지아의 세계로 끌어간다. 그리고 독일의 표현주의 전위미술가 
오스카 휘싱거의 추상 애니메이션이 이를 뒷받침한다.
  다음 곡은 디즈니의 전형으로 굳어진, 금빛 가루 뿌리는 요정 팅커벨이 
유도하는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인형 조곡'이다. 이 부분을 구성하는 음악과 
춤추는 장면들이 사실은 "미녀와 야수"의 황홀한 댄스 장면을 비롯해 이후에 
제작된 거의 모든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화면 구성에 정형적인 모범으로 
재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디즈니의 미키마우스에 대한 집착은 이어지는 삽입곡을 담은 세 번째 장면에서 
드러난다. '마법사의 도제'(폴 듀카스 작곡)라는 표제 음악이 선행하는 이 
부분에서 디즈니는 미키가 첫 곡인 바흐의 삽입곡이 흐를 때와 똑같이 
행동하도록 꾸며 자신이 공들여 창조한 만화영화의 주인공에게 인간의 예술을 
향유하도록 한다.
  클래식 예술을 향한 디즈니의 허영은 이어지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장면에서 우주의 창조와 지구의 탄생을 연대기적으로 구성하면서 진가가 
드러난다.
  완전 수공으로 제작되었을 당시의 작업 환경에서 이러한 교만에 가까운 작품을 
지휘할 수 있었던 디즈니의 집착은 그의 감추어졌던 생의 진면목이 일부분 
드러나면서야 차츰 이해를 구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판타지아"의 이러한 예술적 방황은 베토벤 6번 교향곡 '전원'을 삽입곡으로 
하는 부분에 이르러 그리스 신화와 만화영화의 접맥을 시도하면서 나른한 
로맨스를 표현한 뒤, 이윽고 발레 오페라인 '시간의 춤' 장면에서 코끼리, 악어, 
하마 등이 벌이는 잡탕적 무희로 이어지면서 한숨을 돌리게 한다.
  그러나 영화는 러시아의 작곡가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이 
이어지면서 이 모든 것을 일거에 거부하는 듯 죽음을 부르는 악마의 흉칙한 
몸짓으로 비틀린다. 움추린 악마의 몸뚱이가 험한 산봉우리에 교교하게 몸을 
숨기면 카메라는 서서히 빠져나와 어느덧 신을 경배하는 길고긴 촛불 행렬로 
이어지며, 슈베르트 곡 '아베마리아'의 선율만 남긴 채 '역사상 등장했던 더없이 
기묘하고 아름다운 작품 하나'가 끝이 난다.
  "이용배 만화영화 감독"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
    고전주의에 반기들고 모더니즘 개척한 실험영화
    오슨 웰스(Orson Welles)

  영화의 역사는 1941년 5월 1일에 개봉한 "시민 케인"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어떤 영화도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영화의 모든 
사고가 새롭게 배치되었으며, 역사는 갑자기 인식론적 단절을 경험하고, 
고전주의 영화의 시대는 그 막을 내렸다. 그리고 "시민 케인"은 모더니즘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오슨 웰슨(1916__1985)는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며, 체흡과 입센에 
정통한 연극 연출자였다. 그는 스물 두 살에 머큐리 극단을 결성하여 실험극을 
시도했지만 후원자가 나서지 않자 먹고 살기 위하여(!)라디오 드라마의 연출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1938년 10월 30일, CBS라디오에서 "임시뉴스를 알려 
드립니다"로 시작하는 가상 화성인 침입 드라마 "우주 전쟁"을 연출하여 라디오 
역사상 유례없는 소동을 일으켰다.
  오슨 웰스는 그 해의 인물이 되었으며, PKO영화사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그에게 영화 연출을 제안했다.
  오슨 웰스는 머큐리 극단을 이끌고 할리우드에 입성했다. 그리고 그는 영화에 
전권을 갖는다는 조건으로 허만 맨키비츠와 공동으로 쓴 시나리오를 가지고 
'비밀리에' 촬영에 들어갔다.
  영화는 거대한 성 제나두에서 신문왕 찰스 포스터 케인이 '장미꽃 봉오리'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죽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에 관한 기록 영화가 만들어지는데 
아무래도 그 한마디가 걸린다. 그래서 기자 톰슨은 살아 생전 친했던 네 사람을 
만나 그에 관한 이야기를 취재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비밀을 알지 못한다.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어린 시절 썰매에 쓰인 이름인 줄은.
  오슨 웰스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기자를 따라가며 네 사람을 
만나 플래시백 구조로 케인의 주변에 있던 다섯 사람의 눈을 통해 케인을 본다. 
잘 짜여진 19세기 소설의 19세기 소설의 기승전결 이야기구조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그 속에서 같은 사건과 같은 인물은 서로 상이한 진술에 따라 반복과 
차이를 경험한다. 그것은 영화에서 이중화법을 통하여 영화적 시간으로 이야기를 
다시 배열하고 거기서 생겨나는 모순을 드러내, 질서정연하다고 믿었던 고전적 
세계를 비판적으로 다시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슨 웰스는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만남을 담으면서 촬영감독 그레그 톨란드의 
'혁명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는 초점거리가 깊은 딥 포커스와 정지할 줄 모르는 
이동 카메라, 그리고 장시간 촬영과 경사 구도로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공간과 
소련 몽타주 기법에서 끌어낸 화면과 사운드의 충돌, 그리고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의 미장센을 할리우드의 거대한 기술적 토대 위에서 전적으로 새롭게 
배치할 수 있었다. 이것은 영화의 백과사전이며, 전례가 없는 대규모의 
실험영화였다.
  그러나 당시 언론 재벌이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자신의 스캔들을 소재로 
삼았다는 구실로 이 영화를 매장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영화는 흥행에서 참패했고, 오슨 웰스는 평생 빚에 허덕이며 그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마침내 복권한 "시민 케인"은 모든 
영화평론가들의 열광이자 영화감독들의 절망이 되기도 했지만, 오슨 웰스 
자신에게는 지옥이었다.
  "정성일"

    말타의 매(The Maltese Falcon 1941)
    '필름 누아르'의 개척자
    존 휴스턴(John Huston)

  필름 누아르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던 1951년에 존 휴스턴 감독의 "말타의 
매"와 함께 태어났다.
  프랑스의 범죄 소설을 가리키는 세리 누아르에서 이름을 따온 필름 누아르는 
하드보일드풍의 펄프 픽션 이야기 구조와 사립탐정, 어두운 세트 공간에서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범죄를 그리면서 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에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분명했던 기승전결은 범죄의 욕망 속에서 
헝클어지기 시작했고, 얌전했던 여주인공들은 요부로 변했으며, 남자 주인공은 
사방이 악으로 둘러싸인 함정 속에서 배신당하며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필름 누아르는 할리우드의 모든 장르 가운데 가장 음울하고 비관적인 기분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지키는 파수병이었다. 그리고 "말타의 매"에는 그 모든 것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존 휴스턴(1906__1987)은 윌리엄 와일러와 하워드 혹스 밑에서 연출 수업을 
받았으며, 그 스스로 고백하듯 평생 제임스 조이스의 열렬한 독자였다. 그는 
여러 장르의 영화를 찍었으나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필름 누아르로의 복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빔 벤더스와 존 밀리어스, 로만 폴란스키와 오우삼, 쿠엔틴 타란티노의 
우상이었으며, 또한 프랑스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이 이류 감독(!)으로 
낙인 찍은 연출자이기도 했다.
  "말타의 매"는 하드보일드 소설가인 새뮤얼 대시엘 해밋의 작품을 세 번째로 
영화화한 것이다.
  사립탐정 샘 스페이드(험프리 보가트)는 브리지드라는 베일에 싸인 여성의 
방문을 받는다. 그리고 때맞춰 동료가 살해된다. 그는 사건을 뒤쫓으면서 
사방에서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음험한 
사내 카이로(페테 로레)와 그 뒤에 있는 '뚱보' 굿맨은 그에게 '말타의 매'라는 
조각을 요구한다. 그 속에 보석이 들어 있다는 단서와 함께.
  음모와 허무로 가득 찬 하드보일드 소설을 어둠과 욕망의 영화로 옮겨놓은 
것은 전적으로 존 휴스턴의 뛰어난 각색과 연출 덕이었다.
  그는 영화 전편을 세트에서 촬영하면서 실내 공간의 밀폐공포증의 
노이로제와도 같은 상황으로 만들어 놓았다. 등장 인물들은 예외없이 운명의 
덫에 빠져든 것처럼 꼼짝 못하고, 영화는 이야기가 한 단계 나아 갈 때마다 매번 
같은 공간으로 돌아와 이야기구조 속에서 플롯을 발전시킨다. 그것은 
반복이었지만, 그 속에서 차이의 효과를 만들어냄으로써 프레임과 사운드의 
관계를 새롭게 발전시켰다. 그 관계는 끝이 없을 것 같은 숏과 상대 숏의 반복 
속에서 두 사람만 있는 미디엄 숏(프랑스어에서 '아메리칸 숏'이라고 
번역하는!)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으며, 거기서 할리우드는 고전적인 
프레임 공간을 완성했다.
  웨스턴의 올 숏, 뮤지컬의 풀 숏, 갱스터 영화의 편집, 멜로드라마의 
클로즈업에 이어 필름 누아르는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새로운 신화적 공간을 
만들어냈으며, "말타의 매"는 바로 그 입구이다.
  "정성일"

    폭군 이반(Ivan the Terrible 1944__1946)
    완벽한 영상에 담은 정치적 은유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Sergei Eisenstein)

  이반 4세(1530__1684)는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통일 러시아를 건설한 
최초의 차르로 뒤에 폭군 이반으로 불린다. 이 인물의 성격과 역사적 역할은 이 
후 러시아 예술의 주요한 테마로 등장했다. 에이젠슈테인이 제정 러시아에 대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테마로 한 "파업"으로 영화 활동을 시작하여 제정 러시아의 
기초를 놓은 폭군 이반에 관한 영화로 이를 마감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에이젠슈테인은 "공포와 피로 얼룩진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국가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의외성과 비밀, 조폭성과 공포, 모스크바 공국을 위한 
이반의 활동과 투쟁을 전면적으로 그리"려고 했다. 그러나 모든 전체주의 
국가에서 그러하듯 역사영화는 고도의 정치적 은유를 띠게 마련이다. 여기서 
이반이 곧 스탈린을 의미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마지막 
영화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에 앞서 수백 쪽에 이르는 등장인물의 영화적 
전기를 만들고, 모든 인물의 성격과 무대의 장면과 숏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의 
작업 방법은 이전과는 달리 극히 독선적이고 광적이었다고 한다.
  1944년에 3부작 가운데 1부가 완성되었다. 영화는 찢어진 러시아를 통일하는 
이반의 투쟁을 그린 것으로서 기본적으로 낙관적 정서로 차 있었다. 당은 이를 
환영했다. 그러나 그의 진짜 의도는 1946년에 2부가 완성되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결국 3부의 편집이 거의 끝나가던 시점인 1946년 8월부터 당국은 "폭군 이반" 
2부를 신랄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진보적 군대였던 이반의 
오프리치니키(친위대)를 미국의 KKK단을 연상케하는 타락한 무리로 그렸으며, 
강력한 의지와 성격의 소유자였던 이반을 나약하고 의지가 여린 햄릿과 같은 
성격으로 그린 무가치한 영화"라는 당 중앙위원회의 비난은 2부의 상영을 
1958년까지 금지하고, 3부의 네가와 편집 필름 모두를 불살랐으며, 결국 
에이젠슈테인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결과를 빚었다.
  미완성 영화 "폭군 이반"은 이상한 아름다움과 전율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전함 포템킨"과 영화적 방법은 다를지라도 영화의 사상은 참된 인간주의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극적으로 증명하는 작품임과 동시에 색채와 음악, 화면 
구성과 몽타주 같은 모든 영화적 요소의 유기체적 통일을 지향한 그에게 제2의 
정점을 의미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역사와 관련하여 이 영화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 있는가는 동료 감독이었던 미하일 롬의 다음과 같은 증언이 말해준다. 
  "1부와 2부를 확연히 구별하는 것은 제작기술의 관현악적 완벽성도, 각 
에피소드의 놀라운 완성도도, 액션의 압도적인 표현력도, 편집도, 열광적인 
리듬도, 영상과 소리의 대위법도 아니다. 이 모든 면에서 2부가 1부에 비해 더욱 
완벽하긴 했지만, 두 영화의 차이점은 내적 주제에 있다. 광기에 가까운 불쾌감.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의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 에이젠슈테인은 2부에서 
감히 그 개인 숭배에 반대하여 손을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공공연한 
역사적 등가물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으나 영화의 전체 구조가 그것을 시사하며, 
실제로 모든 장면의 문맥(컨텍스트)을 형성하고 있다. 영화의 표현력은 거의 
피부에 닿을 듯이 풍부하다. 그래서 살인, 처형, 혼란, 고뇌, 잔혹, 의심, 책략, 
배신 등의 분위기는 이 영화의 첫 관객들에게 광기에 가까운 불쾌감을 주었고, 
그들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감히 입밖에 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정하"

    인생 유전(Les Enfants du Paradis 1945)
    반나치의식 짙게 밴 시적 사실주의
    마르셀 카르네(Marcel Carn )

  2차 대전이 발발하자 1930년대에 프랑스의 시적 사실주의를 주도하던 중요한 
작가들은 프랑스를 떠났다. 장 르누아르와 줄리앙 뒤비비에는 미국으로 
건너갔고, 자크 페데는 스위스로 피란갔다. 이미 "안개 낀 부두"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마르셀 카르네만이 그들이 자리를 비운 파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 
평론가는 "비시 정권이 패배한다면 그것은 "안개 낀 부두"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그 염세적이며 패배감에 찬 성향 탓이었다. 
  카르네는 1840년대 루이 필립 치하의 파리 극장가 블르바르 뒤탕플을 무대로 
인간극을 연출했다. 극장과 나이트클럽이 줄지어 서 있던 환락가이자 범죄의 
거리인 이곳에서 팬터마임 연기자 바티스트 뒤브로아주와 무대에서 나체춤을 
추는 가랑스의 애정을 축으로 장장 3시간 35분의 인간 드라마를 만들어낸 
것이다. 가랑스를 둘러싼 뒤브로, 극작가 피에르 라스네르, 연극배우 프레데리크 
르메트르 등은 실존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낭만적인 사랑은 가상적인 
것이었다.
  우리에겐 샹송 '고엽'의 작사자로 더 알려진 시인 자크 프레베르가 시나리오와 
대사를 담당했다. 나치가 점령하고 있던 파리에서 3년 3개월간의 제작 끝에 
탄생한 작품이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서민들의 기질과 사랑의 끈질긴 근성을 보여줌으로써 나치에 
저항한 것으로 평가되는 "인생 유전"은 수많은 프랑스인의 갈채를 받았다. 
카르네는 프랑스가 해방되고 이 영화를 다시 상영하게 되자, 의상 제작자 제리코 
역의 로베르 비강을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피에르 르누아르로 교체했다.
  이 작품은 1부 "범죄의 거리"와 2부 "하얀 남자"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는 장 루이 바로의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사랑과 팬터마임 연기, 당대의 
명배우 피에르 브라쇠르와 마르셀 에를랑, 마리아 카자레스와 여주인공인 
아를레티의 불꽃 튀는 열연으로 발자크의 "인간 극장"을 연상케 한다.
  "세계 양화 전사"를 쓴 프랑스의 영화사가 조르주 사들은 이 작품을 
카르네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뒤브로의 사랑과 팬터마임, 발자크적인 여인 아를레티와 정숙한 아내 마리아 
카자레스의 대비, 보헤미안적인 배우 브라쇠르와 무정부주의적인 암살자 에를랑, 
그리고 대중 연극과 범죄의 거리의 풍속도.... "인생유전"은 예술과 현실 사이를 
넘나드는 걸작아다. 멜로드라마와 비극, 팬터마임의 묘미가 섞여 있다. 이 작품이 
나치 치하의 파리에서 상영되기 시작했을 때, 연합군은 이미 이탈리아의 
제노아에 상륙해 있었다. 또한 프랑스 정부는 한 편에 2,750미터나 되는 필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모든 제작사에 명령했지만, 이 작품은 5,000미터나 되는 필름을 
사용했다."
  원제목을 직역하면 "천국의 아이들"이지만, 'paradis'는 극장 3층의 가장 값이 
싼 자리를 일컫기도 한다. 프레베르는 서민과 연극배우를 통틀어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인생 유전"은 나치에 저항하는 프랑스 서민들의 예술적 기질과 사랑의 
대서사시이다. 즉, 프랑스 서민과 민중을 대변하는 민족적인 영화인 것이다.
  "안병섭 단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무방비 도시(Roma, Citt Aperta 1945)
    네오리얼리즘 시대 서막 장식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사회 현실과 역사를 충실히 기록하여 관객의 의식을 변화시키려는 영화의 
시작은 아마도 네오리얼리즘부터이리라. 이야기 속에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고, 
열린 결말을 추구하는 모더니즘 영화였다. "무방비 도시"는 네오리얼리즘의 
서장을 장식한 영화이며, 그 방법론과 실제를 구체화한 로셀리니의 전쟁 3부작 
가운데 하나다.
  2차 대전 동안 독일 점령하에서 비밀리에 기획된 이 영화는 연합군이 상륙한 
직후에 촬영하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기록영화의 제작만을 허가했으나, 
로셀리니는 이를 장편 극영화로 만들어 종전 직후에 완성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동시 녹음을 위한 필름과 기자재는 엄두도 못낼 만큼 
비쌌고 촬영할 스튜디오도 구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무방비 도시"는 각기 다른 
종류의 자투리 필름으로 찍혀 화면의 질감이 오히려 다양해졌고, 로케이션 
촬영이 돋보이는 기록영화적 분위기를 한껏 자아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느슨한 플롯과 열린 결말의 이야기에 가미된 감상적 멜로드라마는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독일군에게 살해된 한 신부의 실화를 근거로 만든 "무방비 도시"는 이야기의 
전개가 매우 완만하다. 시종 영화를 이끄는 인물은 레지스탕스 요원인 
맨프레디이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그가 피신하는 행로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람들이다. 
  먼저 동료의 약혼녀 피나가 있다. 이미 아들이 하나 있는 피나는 약혼자가 
독일군에게 붙잡혀가는 것을 뒤따르다 결혼식 날 무참하게 총살 당한다. 피나의 
결혼식 주례를 맡은 돈 피에트로 신부는 레지스탕스의 자금을 운반해주고 
맨프레디와 동료를 수도원에 숨기려다 체포된다.
  이때 맨프레디의 옛 정부가 그를 하룻밤 피신시킨다. 그러나 맨프레디는 
그녀를 경멸할 뿐이다. 결국 그녀는 마약과 사치품, 변태적인 애정행위에 팔려 
그를 독일군에게 밀고한다. 맨프레디는 모진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고 영웅적인 
죽음을 맞으며, 같이 체포된 신부도 결국 총살당한다. 
  그 밖에도 전쟁이 싫어 탈주했다가 체포되어 감방에서 목을 매는 오스트리아 
군인과 게슈타포지만 나치 이념에 냉소적이고 결국은 그 이념이 실패하리라고 
확신하는 술취한 장교가 이야기에 양념을 얹어 준다.
  로셀리니는 이들을 공평하면서도 자유롭게, 그러나 아주 강렬하게 그린다. 
주인공은 하나가 아니며 중심이 되는 사건도 없다. 억압적인 나치, 파시즘 
아래서 모든 인물이 겪는 사건들 자체가 강렬하다. 로셀리니는 이들을 통해 독일 
점령하의 이탈리아에서, 로마의 골목길에서 벌어졌을 일들,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는 레지스탕스 정신 또는 그에 반하는 타락의 모습을 훑어줄 뿐이다. 그 
모습들은 하나하나가 멜로드라마다. 그래서 영화는 여러 겹의 멜로드라마가 
된다. 
  이 감상적인 비극에 희극적 요소들을 삽입하는 로셀리니는 관조적이고 
희망적이다. 맨프레디를 쫓던 독일군들이 여자들의 치마 밑 풍경을 보느라 그를 
놓치는가 하면, 동네아이들이 어디엔가 폭약을 설치하고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부모에게 야단맞으며 끌려가기도 한다. 그리고 신부는 병자 성사로 위장하기 
위해 멀쩡한 노인을 프라이팬으로 때려눕히기도 한다. 로셀리니는 그 신부가 
총살당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에게 레지스탕스의 휘파람을 불게 함으로써 
희망을 준다.
  전후 이탈리아인들의 도덕성과 심리적 분위기를 즉각적으로 표출한 이 영화는 
당시 이탈리아 영화가 지향해야 할 바를 보여주고 있었다. 현실도피적 환상을 
부추겨온 전쟁 전의 부르주아 영화에서 벗어나, 세계를 왜곡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로셀리니를 세계적 감독으로 만든 이 
영화는 영화의 사회변혁기능을 실천한 영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진숙"

    파이자(Paisa` 1946)
    가공 미학 탈피 '새로운 리얼리즘' 추구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ini)

  이탈리아는 2차 대전에서 패배한 나라다. 그러나 영화로 세계를 제패했다. 
낡은 카메라와 자투리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어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비롯하여 비토리오 데 시카, 알베르토 라투아다, 주세페 데 
산티스, 루이지 잠파 등 수많은 영화인들이 내놓은 작품들은 분명히 새로웠다.
  평론가 피아트란젤리는 그것을 '새로운 사실주의'라는 뜻의 
'네오레알리즈모'라고 이름지었다. 카메라를 현실 속에 놓고 상황과 작가 
사이에서 새로운 리얼리티를 찾아낸 것이다. 이로써 샤를 스파크나 앙리 장송, 
자크 프레베르, 더들리 니콜스, 로널드 리스킨 등의 극적인 시나리오가 중심이 
되어 인간을 글의 틀 속에서 파악하던 1930년대의 가공된 미학에서 벗어나 현실 
속에서 인간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내게 되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는 "무방비 도시"로 그 선두주자가 되었다.
  그의 두 번째 작품 "파이자"는 놀라운 충격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로셀리니를 비롯하여 나중에 대가가 되는 페데리코 펠리니와 세르지오 아미데이 
등 여섯 명이 시나리오를 썼다. 이 영화는 2차 대전 당시 미곡과 영국의 
연합군이 시칠리아에서 이탈리아 본토로 상륙하여 북상하면서 각 지역을 
해방시킬 때까지 벌어지는 여섯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제1화는 1943년 7월 10일,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했을 때의 이야기다. 
미군 병사는 카르멜라라는 이탈리아 소녀를 알게 된다. 하지만 둘은 차례로 
총살된다.
  제2화는 10월 1일의 나폴리다. 흑인 미군과 그의 군화를 훔친 이탈리아 
소년의 이야기다. 미군은 소년을 집으로 데리고 가지만, 그에겐 집도 부모도 
없다. 전쟁 중에 폭격으로 부모가 모두 사망한 것이다. 소년의 유머러스한 
모습이 재치있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로마다. 한 미둔 병사가 거리의 여자를 따라가면서도 몇 
달 전에 사귄 프란체스카를 잊지 못한다. 여자는 주소를 가르쳐주고 문 앞에서 
기다린다. 
  네 번째 에피소드는 피렌체다. 레지스탕스의 영웅 루포를 찾아 나서는 여자와 
남자는 살해된다.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전쟁 중에 휴식을 취하는 듯한 삽화다. 어느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찾은 미군 군목 세 사람과 수도승의 하룻밤이다. 수도승은 군목 가운데 
유대교인이 한 명 있다고 놀란다. 군목들은 비참과 가난의 전쟁터에서 모처럼의 
안정과 평화를 즐긴다.
  여섯 번째 에피소드는 미국의 OSS(CIA의 전신)와 영국군, 빨치산이 포 
강에서 저항하는 이야기이다. 결국 이들은 모두 독일군에게 잡혀 배에서 강물 
속으로 차례차례 밀려 떨어진다. 충격적이다. 세 가지 에피소드가 레지스탕스와 
관련이 있다. 
  앙드레 바쟁은 이 작품이 미국 소설가 사로얀을 비롯하여 도스 패소스, 
포크너, 헤밍웨이 등의 중편소설과 구성이 같다고 지적했다. 여섯 가지 
에피소드는 각각 분리되어 있지만 미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한 뒤 있음직했던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파이자'는 이탈라아계 미군이 이탈리아 사람을 일컫는 말로 영어로는 
'파이자'이다. 일본에서는 이 작품을 "전화의 건너편"이라고 번역했다.
  "안병섭"

    흔들리는 대지(La Terra Trema 1947)
    네오리얼리즘 미학의 정수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

  인간의 정신적, 심리적 갈등은 항상 사회적, 경제적 갈등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신념을 영화로 구체화하기 위해 1947년, 루키노 
비스콘티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자금 지원을 받아 시칠리아로 갔다. 전후 
시칠리아의 경제적 문제들을 짧은 기록영화에 담기 위해서였다.
  그가 기획한 것은 중간상인들에게 착취당하는 어부들, 폐광으로 일자리를 잃은 
광부들, 마피아라는 준봉건적 제도에 대항하는 농부들에 대한 3부작이었다. 
비스콘티가 구상했던 마지막 장면은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들리면서 수백 명의 
농부들이 지평선 위로 나타나고, 그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대지가 진동하는 
사운데 농부들이 붉은 기장과 삼색기를 휘날리며 경작할 대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스콘티가 대면한 시칠리아 노동자에게는 착취와 억압에 대항해 
혁명을 일으킬 의지도, 그 혁명적인 '진동하는 대지'의 마지막을 그릴 만한 
상황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 마지막 장면에서 제목을 딴 "흔들리는 
대지"는 바다를 삶의 원천으로 삼고 있는 어부들을 그린 한 편의 허구적 영화가 
되었다.
  "흔들리는 대지"는 네오리얼리즘 미학의 정수를 가장 잘 뽑아낸 작품으로 
꼽한다. 영화는 아치트레차라는 어촌을 배경으로 그 마을 주민들을 연기자로 
등장시키고 있으며, 대다수의 이탈리아 사람도 알아듣기 어려운 그들만의 
사투리를 그대로 대사로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몇몇 밤장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연 조명을 이용하고 있다. 또한 대지와 바다를 이어주는 긴 카메라의 움직임, 
실내와 외부를 연결하는 심도 깊은 공간 표현은 이 영화의 사실성을 한껏 높이는 
기능을 한다.
  비스콘티가 이 사실주의적 영상 속에 담아낸 이야기는 무척 비극적이고 
강렬하다.
  어부들의 고된 노동은 중간상인들의 손에서 나날이 가치가 떨어진다. 주인공 
토니는 바다에서 죽은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 남동생과 함께 어머니와 세 
여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처지이다. 토니는 중간상인들의 횡포에 대항해 
어부들끼리 힘을 합치자고 주장하지만 아무도 동조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직접 
생선을 팔기 위해 집을 담보 삼아 배를 산다.
  한동안은 생활이 나아지지만, 엄청난 폭풍으로 배를 잃고 토니는 겨우 목숨만 
건지게 된다. 남동생은 낯선 이방인에 이끌려 집을 떠나고 할아버지는 죽는다. 
집까지 잃은 토니의 가족은 다시 빈곤과 굶주림에 허덕인다. 토니는 애인에게 
버림받고, 토니의 여동생은 목걸이 같은 물건에 팔려 유혹에 넘어간다. 
도매상인들은 번성하고 어촌의 경제는 그들이 장악한다.
  마지막에 누더기 차림의 토니는 동생들을 이끌고 중간상인을 찾아가 일을 
구걸하여 바다로 나간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힘을 합치는 것을 배우게 될 
좋은 세상이 오길 희망하면서.
  "흔들리는 대지"가 처음 상영되었을 때 중류계층 관객들은 휘파람을 불며 
야유했다. 귀족출신의 감독이 자신의 계층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한편 
좌익 비평가들은 '누더기의 형식주의'라고 비난했다. 혁명적 기록영화가 아닌 
비관적인 결말을 담은 과장된 멜로드라마가 그들에게는 역겨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흔들리는 대지"의 화면은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나 "파이자"의 거친 
화면에 비해 너무나 우아하고 장중하면서도 엄숙하다. 또, 데 시카가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인물들을 열린 태도로 관조하게 하는 데 비해 비스콘티는 인물들을 
운명론적으로 그린다. 풍부한 문예 교육을 받고 자란 귀족, 2차 대전 중엔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마르크스주의자 비스콘티의 미학적 모순 혹은 갈등의 
흔적이 이 영화 전체에 남아 있다.
  "주진숙"

    자전거 도둑(Ladri di biciclette 1948)
    미학적 형식을 깬 노동의 역설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네오리얼리즘 영화 가운데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만큼 널리 
성공한 작품도 드물다. 영화사의 10대 걸작을 꼽을 때면 으레 뽑히곤 한다. 
네오리얼리즘의 이론적 기수인 체자레 자바티니가 루이지 바르톨리니의 원작을 
시나리오로 각색했다. 
  데 시카 없는 자바티니는 생각할 수 있지만, 자바티니 없는 데 시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데 시카는 자바티니에게서 많은 것을 얻어왔다. 이 
둘은 네오리얼리즘의 환상적인 명콤비였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폐허가 된 로마에서 오랫동안 직업 없이 떠돌던 안토니오 
리치는 어느 날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포스터를 붙이는 일이다. 그 일에는 
자전거가 필요하다. 아내 마리아에게 말해 헌 옷가지를 전당포에 맡기고 
자전거를 구한다. 어린 아들 브루노도 따라나선다.
  그러나 어느 모퉁이에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가 자전거를 훔쳐 타고 
달아난다. 안토니오는 쫓아가 보지만 허사다. 경찰에 신고해도 경찰은 하찮은 
일이라는 듯 반응이 없다. 허탈해진 안토니오는 자전거포를 뒤지다 한 젊은이가 
자기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것을 본다. 쫓아가지만 또 허사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그 젊은이의 집을 찾는다. 안토니오는 빈민가의 그 집을 보고 절망에 
빠진다. 자기처럼 가난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젊은이는 간질을 일으키며 길가에 
쓰러진다. 경찰이 오지만 증거도 없다. 그러던 중 아들과 다투고 아들이 
없어진다. 안토니오는 어린애가 강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아들은 축구장 계단 위에서 나타난다.
  경기장에서는 축구시합이 한창이다. 밖에는 자전거들이 즐비하다. 안토니오는 
아들에게 먼저 집에 가 있으라고 하고는 자전거 한 대를 훔쳐 달아나다 주인에게 
붙잡힌다. 경찰이 온다. 그는 자전거 주인의 선처로 풀려난다. 안토니오는 석양의 
거리를 허탈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아들이 뒤를 따른다.
  자전거를 도둑맞은 노동자가 결국 자전거 도둑이 된다는 전후 로마의 이야기는 
참으로 역설적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은 프롤레타리아 영화이다.
  데 시카는 1955년 3월 4일 "르몽드"지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작품을 영화화하려고 몇 달째 제작자를 찾았으나 구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한 미국 제작자가 나섰다. 단, 주인공으로 케리 그랜트를 써달라는 
조건이었다. 나는 거절했다."
  바로 여기에 이 작품이 성공하게 된 열쇠가 숨어 있다. 그는 미남인 케리 
그랜트 대신 무명의 공장 노동자 람베르토 마지오라니를 대담하게 주인공으로 
기용했다. 아들 브루노에는 거리를 쏘다니던 부랑아 엔조 스타이올라, 그리고 
아내에는 기자 리아넬라 카렐을 기용하는 등 모두 비직업적인 무명 배우를 썼다.
  "자전거 도둑"은 스튜디오 촬영이 없다. 모두 거리에서 촬영한, 현실에 가까운 
가장 사실적인 작품이다. 앙드레 바쟁은 말했다.
  "이는 순수 영화의 첫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배우도 없고 
이야기도 없고 연출도 없다. 이것은 영화가 이제 더 이상 완벽한 미학적 환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에 앞서 그는 "확실히 (지난) 10년 동안 제작된 공산주의적 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가치 있는 공산주의적 영화이다. 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그 사회적 
의미를 추상화시키더라도 그 뜻을 간직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고 
비평했다.
  "안병섭"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 1949)
    자본과 예술성의 희귀한 만남
    캐럴 리드(Carol Reed)

  캐럴 리드 감독의 "제3의 사나이"는 참으로 '이상한' 영화이다. 아마도 세련된 
상업영화 스타일과 다양한 예술영화의 전통이 이처럼 행복하게(!) 만난 예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올드 팬들에게는 향수가 되었고, 시네마데크가 오랫동안 
사랑해 온 리스트이자, 젊은 영화광들의 고전이면서 영화이론의 논쟁적 장소를 
마련하였다.
  무대는 종전 직후 연합군의 공동 관리체제 아래 놓인 빈. 여기에 미국인 
소설가 홀리 마틴스(조지프 코튼)가 친구 해리 라임(오슨 웰스)을 찾아온다. 
그러나 친구는 이미 교통사고로 죽은 뒤이다., 홀리는 친구의 애인 안나(아리다 
발리)를 만난 다음 이곳을 떠나려 한다. 이때 영국군 소령 캘로웨이(트레버 
하워드)가 홀리에게 친구 해리가 가짜 페니실린을 유통시킨 혐의로 연합군의 
추적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게다가 해리는 죽은 것이 아니었으며, 
홀연히 홀리 앞에 나타나 전망차 앞에서 명대사를 한다.
  "칠백 년 평화로운 스위스에서는 뻐꾸기 시계 하나를 만들었지만, 전쟁이 
이어지던 이탈리아에서는 미켈란젤로와 다빈치가 있었지."
  그러나 홀리는 가짜 페니실린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고 해리를 
고발하기로 결심한다. 함정에 '빠진 해리는 홀리의 손에 죽고, 안나는 그의 
곁을 떠난다. 
  낙엽 지는 초겨울에 빈에서 촬영한 "제3의 사나이"는 원작자 그레이엄 그린 
자신이 각색한 시나리오로 만들었다. '결코' 위대한 영화감독은 아니었지만, 캐럴 
리드는 단 한 편의 걸작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선 영화의 백과사전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선 무엇보다도 종전 직후의 황폐한 빈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보인다. 로버트 크래스커의 흑백 촬영은 존 그리어슨에서 
시작하는 영국 기록영화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거리에서 미학을 
완성시킨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과도 정신적 연대를 함께 하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대부분의 장면이 밤에 촬영되면서 동원된 조명과 세트는 전후 빈을 
마치 독일 표현주의 영화와도 유사한 빛과 그림자의 세계로 바꿔놓는다. 
의도적으로 경사 구도의 카메라 앵글로 화면을 만들었으며, 인물들은 그사이를 
떠도는 유령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리얼리즘과 표현주의 영화의 전통이 
서로 뒤섞여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의 자본이었다. 그는 기꺼이 이 유럽 영화에 투자했으며, "제3의 
사나이"가 유럽에서 만든 필름 누아르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제3의 사나이"는 1949년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으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비록 영화적 깊이나 미학적 실험은 없지만, 마치 홀린 듯이 안톤 
카라스가 연주하는 민속악기 지타의 선율을 따라 빈에서 펼쳐지는 이 영화는 
수많은 명장면과 전율할 만한 이미지를 낳았다. 특히 무표정한 얼굴의 안나가 
낙엽이 지는 빈의 가로수 저편에서 걸어와 기다리고 있던 홀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기나긴 마지막 이별 장면은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장면의 
하나이다. 영화는 때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주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명장면의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다. "제3의 사나이"는 추억과 감상주의 사이에 
선 아슬아슬한 기억이다. 
  "정성일"

    라쇼몬(1950)
    강렬한 주제의식과 간결미 압권
    구로사와 아키라

  일본 영화가 국제무대에서 처음으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몬(1950년 8월 개봉)이 1951년에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고부터였다. 이후 일본 영화는 미조구치 겐지,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등이 
잇따라 세계영화제를 석권하면서 패전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일본인들에게 
문화적 자긍심을 심어 주었다.
  완성 당시만 해도 일본 안에선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채 지나쳤던 "라쇼몬"이 
서구인들에게 높이 평가받은 이유는 색다른 동양문화였기 때문이 아니라, 보편적 
주제의식과 영화적 미학의 뛰어남 때문이었다. 이는 지난 1982년에 베니스 
영화제 역대 대상(황금사자상) 수상작 가운데 최고 작품으로 선정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지금까지도 이 작품은 강렬한 주제의식과 뛰어난 형식미 때문에 
영화학도들에게 교과서적인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라쇼몬"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라쇼몬"(1915)과 "숲 
속에서"(1921) 두 편을 묶어 각색한 영화다. 작품의 배경은 내전으로 피폐한 
12세기 헤이안조 시대다. 숲 속에서 한 무사가 살해되고 그의 아내가 산적에게 
강간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절반쯤 쓰러져가는 라쇼몬에서 승려와 나무꾼, 
행인이 그 사건을 회상한다. 법정에서 무사의 아내, 살인 강간 혐의로 잡혀 온 
산적(미후네 도시로), 무당을 통해 증언하는 죽은 무사의 혼령, 목격자 나무꾼이 
증언하는데, 그들은 그 사건을 서로 다르게 이야기한다. 모두가 자기 말이 
진실인 듯 말하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끝까지 알 수 없다. 
  영화는 '살인범은 누구인가?'라는 미스터리 모티브로 시작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사건은 분명 하나인데 
사람에 따라 자기 중심적 입장에서 다르게 증언한다. 바로 여기에서 핵심 주제인 
인간의 이기주의와 진실의 상대성을 읽을 수 있다. 구로사와는 각색 과정에서 
원작에 나타난 허무주의와 인간에 대한 냉소적인 관점을 휴머니즘으로 
변화시키고자 후반부에 (원작에 없는) 어린아이를 등장시켜 인간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제시한다. 휴머니즘, 인간에 대한 탐구와 따뜻한 애정은 구로사와 영화 
전반에 나타나는 주제의식이다. 그는 카메라로 해를 직접 찍는 것을 금하던 
당시의 틀을 깨고 숲 사이로 비친 해를 과감히 찍음으로써 조명의 새로운 미학적 
효과를 창출했을 뿐 아니라 몽타주의 적절한 사용, 정교한 카메라 움직임, 
고전적인 일본 연극의 인물 배치에서 착안한 화면 구도, 서양음악을 재해석한 
음악과 음향 효과의 적절한 사용을 통해 영화 미학을 진일보시키는 데 공헌했다.
  "라쇼몬"은 당대 일본 영화의 대가들인 오즈나 미조구치의 영화와 비교해 
서구적 스타일의 영화로 자주 언급된다. 물론 카메라 움직임이나 복합적인 
스토리 구성, 음악 등에서 서구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긴 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 
숨어 있는 일본적인 구도나 이미지를 간과해선 안된다. 특히 재판관을 생략한 채 
증언자들만 보여주면서 그들을 양식화된 화면 구도로 잡아내는 법정 장면이나 
일부 정적인 분위기들은 순수하게 일본적이다. 구로사와에게는 서구적 기법을 
자신의 일본적 이미지 속에 융화시키는 재주가 있다. 
  그는 또 '단순화는 현대 예술의 중요한 미학적 테크닉의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최소한의 등장인물(엑스트라 포함 9명)과 단 몇 군데의 공간(라쇼몬, 법정, 숲 
속, 강가)만으로 경제적인 화면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정국 영화감독"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 in the Rain 1952)
    '사랑의 기쁨, 즐거운 인생' 춤과 노래로 표현한 낙관주의
    진 켈리, 스탠리 도넌(Gene Kelly, Stanley Donen)

  뮤지컬은 지나치게 할리우드적인 영화 장르다. 서부영화가 미국의 
건국신화라면 공상과학영화는 미국의 미래 국가전략을 영상으로 실험하는 일종의 
전략적 도상 게임이라 할 수 있다. 
  미국--할리우드만이 만들 수 있는 이 세 가지 장르 영화 가운데서도 뮤지컬 
영화는 그 화려함과 환상적 성격 때문에 할리우드적인 영화의 전형으로 꼽힌다.
  할리우드에서도 뮤지컬 영화의 명문은 포효하는 사자의 로고로 유명한 
MGM사다. 그리고 그 '꿈의 공장'의 좌우명은 사자 위에 라틴어로 쓰여 있다. 
'ARTS GRATIA ARTIS'. 이 말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 일이다. 이것은 무슨 심각하고 고상한 예술영화를 만들겠다는 
다짐이 아니다. 현실의 복잡함과 고통 대신 영상의 환상세계를  관객에게 
선사하겠다는 할리우드식 영화 프로페셔널리즘의 '탈현실 선언'이다.
  1952년, 사자가 다시 으르렁거리면서 멋진 쇼가 시작된다. 노란 비옷에 검은 
우산을 쓴 세 사람, 즉 진 켈리, 데비 레아놀즈, 도널드 오코너가 등을 보이며 서 
있다. 그러고는 뒤돌아서며 주제곡을 부르기 시작한다.
  "빗속에 노래하면...얼마나 빛나는 순간인가요. 나는 다시 행복을 
찾았어요...태양은 내 가슴에 사랑을 준비하고 있어요."
  이 노래부터 켈리와 레이놀즈가 사랑을 맹세하는 마지막 장면으로 이어지는 
103분은 영화적 재미의 모범 답안이자 뮤지컬 영화의 최정점을 보여주는 
시간이다. 
  장르 영화를 재평가하고 있는 요즘, 영화사상 10대 걸작의 하나로 꼽히는 
"사랑은 비를 타고"는 우선 경이로운 영화다. 볼 때마다 춤과 노래, 세트와 
강렬한 색채에 매혹당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산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일깨위준다.
  '그들을 웃겨라'라는 노래를 부르며 춤추는 오코너의 모습에서 인생은 제목 
그대로 웃음이다. 그것도 정신 차릴 수 없는 폭소 연발이다. 그리고 사랑의 발견 
뒤에 정말 비를 흠뻑 맞으며 주제곡을 부르는 켈리를 보면서 가슴 충만한 사랑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게다가 켈리가 뇌쇄적인 여배우 시드 채리스와 함께 '브로드웨이 리듬' 발레를 
추는 장면은 황홀한 인생의 절정을 보여준다.
  개념으로 세상을 보게 마련인 '불행한' 영화비평가들은 뮤지컬 영화를 영화의 
현실도피적 성격이 극대화한 장르라고 설명한다. 즉, 뮤지컬 영화는 영상이라는 
환상 속에서 사랑--증오, 성공--실패, 부유함--빈곤함, 그리고 남자--여자와 같은 
현실의 대립항들을 거세시키면서 관객들을 유토피아의 축제로 초대한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다. 게다가 이런 주장들은 역사적 증거까지 제시한다. 
그러나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면서 이런 주장을 편다면 그건 멋대가리 없는 
똑똑함이다. 걸작 영화에는 몇 가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함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비를 타고"는 뮤지컬 영화의 대표작 그 이상이다. 이 
작품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발전하는 시대를 드라마의 배경으로 설정하면서 
영화의 역사에 대한 영화로 발전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생과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한 세기를 살아온 대중적 낙관주의의 대표작으로 남아 있다.
  "강한섭 서울예전 교수, 영화평론가"

    오하루의 일생(1952)
    남성 지배 사회에서 짓밟힌 여인의 삶
    미조구치 겐지

  구로사와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라쇼몬"으로 대상을 받았을 때 가장 자극받은 
사람은 당시 일본에서 최고로 대접받던 미조구치 겐지였다. 자존심 강한 그는 
한참 후배인 구로사와가 먼저 국제적인 평가를 받자 그 자신도 국제무대를 향해 
포문을 열기 시작했는데, 그 첫 작품이 "오하루의 일생"이다.
  미조구치는 그 작품과 이후 연작 형식으로 만든 "우게쓰 이야기"(1953)와 
"산쇼다이후"(1954)로 특유의 탐미적 리얼리즘과 롱 테이크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어 서구 평론가들의 극찬 속에 3년 연속 베니스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특히 앙드레 바쟁을 비롯한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가들은 미조구치가 
사용한 '원 신 원 숏'에 의한 롱 테이크 카메라 스타일을 진정한 리얼리즘 
미학의 모범으로 높이 평가했다.
  미조구치의 작품 대부분이 그렇듯이 "오하루의 일생"도 남성 본위 사회의 
여성이 겪는 비참함과 다기 희생을 신비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영상으로 그리고 
있다.
  사이가쿠 이하라의 원작을 각본 작업에서 줄곧 콤비를 이로어온 요다 
요시카다와 공동 각색한 작품의 배경은 17세기 봉건시대의 일본이다. 
  이야기는 '오하루'라는 늙은 창녀의 회상에서 시작된다. 교토의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신분이 낮은 하인과 사랑에 빠졌다가 영주에게 들켜 
쫓겨나고, 그의 애인은 처형당한다. 그 뒤 그는 다른 영주의 씨받이로 
팔려가는데, 아들을 낳자마자 쫓겨나 고급 기생으로 팔린다. 거기서 다시 부유한 
상인에게 팔리고, 마침내는 떠돌다가 하류 사창가에서 창녀가 되어 늙어간다. 
자기가 낳은 아들이 영주가 되지만 신분이 달라 직접 만나지도 못하고 멀리서 
바라볼 뿐이다.
  결국 불교에 귀의해 비구니가 된 그는 자신에게 닥쳐왔던 불행을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일본판 "여자의 일생"이라 할 수 있는 "오하루의 일생"은 봉건제 
아래서 남자들에게 떠밀려 인생 유전하던 한 창녀가 점차 성녀처럼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 종교적인 숙연함까지 느끼게 한다. 
  이 작품에는 어린시절 기생인 누나의 손에서 자란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여성에 대한 시각과 관심의 일면이 매우 잘 표현되어 있다. 
  "오하루의 일생"을 비롯한 미조구치의 영화 대부분이 남성보다는 여성의 
강인함과 끈질긴 생명력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묘사는 매우 이중적이다. 
즉, 여성들의 인생 역정은 매우 비극적이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형식은 지극히 
탐미적이다. 
  그는 사회의 제도적 모순을 비판하는 시각에서 여성들의 역경과 비참함을 
그리는 듯하면서도 그들의 자기 희생을 관조하는 미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는 강렬한 비극성이 만들어내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철저한 시대 고증과 미장센으로 진정한 리얼리즘을 추구한 미조구치는 
구로사와에게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의 영화 형식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몽타주를 거부한 일관된 카메라 
스타일이다. 그는 클로즈업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주로 롱 숏과 롱 테이크, 
느리게 움직이는 카메라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제시하여 주인공 오하루의 인생을 
관조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러한 미학은 서구의 젊은 영화인, 특히 
1950년대 말에 등장한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자크 
리베트 같은 감독은 자신의 작품"수녀"(1965)를 "오하루의 일생"의 의도적인 
모방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을 정도다.
  "이정국"

    도쿄 이야기(1953)
    서구인을 매료시킨 절제 미학의 일본 정서
    오즈 야스지로

  오늘날 서구의 영화학자와 평론가들에게 뒤늦게 진가를 인정받으며, 마치 
아시아 영화의 정신적 지주인 듯한 이미지로 신화화하고 있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과연 얼마나 동양적인가?
  우리가 이러한 신화화에 무작정 동참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그의 대표작 
"도쿄 이야기"에는 우리와 비슷한 정서적 측면과 오즈 나름의 독특한 영화적 
스타일(물론 그것이 반드시 동양적이라고 못박기는 어렵다)이 농축되어 있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남부 일본의 오노미치에 사는 한 노부부가 도쿄에 사는 아들과 딸 내외를 
만나러 간다. 하지만 그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를 온천 관광지인 아타미로 
보내는 등 소홀히 대한다. 전쟁통에 남편을 잃어버린 며느리 노리코만이 그들을 
정성껏 모신다. 오노미치로 돌아온 뒤, 어머니는 병을 얻어 숨을 거둔다. 아들과 
딸 내외는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도쿄로 돌아가버리고 노리코가 남아 시아버지를 
위로하고 떠난다. 
  "드라마게임"에서 흔히 보았음직한 이 '가정 드라마'에서 오즈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또 명료하다. 그는 "부모와 성장한 자식들을 통해 
붕괴되어가는 일본의 가족제도를 그리려 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가족간의 
갈등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재이다. 단지 오즈는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과 이별, 부부간의 갈등을 일관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할 뿐이다. 
그리고 절제된 형식적 미학의 완성이 "도쿄 이야기"에 있다. 즉, 연기자와 
카메라의 움직임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마치 고요히 강이 흐르듯 노부부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차분히 그려나간다. 감정의 절제를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일본인의 정서와 미학관이 절정을 이룬다. 아마도 서구의 영화학자와 평론가들은 
이러한 절제의 미학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쿄 이야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확실히 "도쿄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우리의 영화를 돌이켜보게 한다. "도쿄 
이야기"의 정서적 측면에는 얼핏 보면 우리와 비슷한 부분이 많은 듯하면서도 
다른 점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내가 죽고 난 새벽, 슈치키 노인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아, 아름다운 새벽이구나"하고 읊조린다. 그리고 가족들은 눈물만 
찔끔찔끔 흘릴 뿐이다. 우리는 다정다감한 대화를 생각할 때면 마주앉은 
술좌석을 떠올린다. 반면 "도쿄 이야기"에서 그런 대화는 서로 마주보지 않고 
한쪽 방향을 바라보면서 이루어진다. 마치 낚시터에서 낚시찌를 바라보고 있는 
두 낚시꾼을 보는 듯한 이 장면은 빔 벤더스가 흠모해 마지않았던 것과 달리 
우리에게는 낯설게 보인다.
  다다미와 온돌방이 좌식 문화라는 점에서는 유사한데, 왜 우리에게는 다다미 
숏과 같은 독특한 구도가 생기지 않았는가. 
  그것은 평범한 소시민의 생활 속에서 따뜻한 인정을 발견한다는 "도쿄 
이야기"도 실은 극도로 양식화한 일본 문화의 전형(예를 들면 템포를 중요하게 
여기는 오즈가 자신의 영화에서 연기자들에게 걸음의 숫자마저도 꼼꼼하게 
지시할 만큼 형식미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이지, 
그것이 곧 동양 문화의 전형은 아닌 탓이다. 아시아의 영화감독들이 오즈에게 
경도된 것도 아마 형식미보다는 그의 영화 속에 녹아 있는 인간애 때문일 
것이다.
  "김지석"

    7인의 사무라이(1954)
    탁월한 휴머니즘으로 대중성과 예술성을 낚다
    구로사와 아키라

  현대 일본 영화사는 1960년대 이전의 막강한 거장인 구로사와, 오즈, 미조구치 
등을 극복하려고 발버둥치다 실패한 역사와 같다. 살아 있는 유일한 거장이라는 
구로사와 아키라조차도 전성기였던 1950년대의 자신을 극복하려다 실패했다. 
그는 이미 1950년대에 "라쇼몬", "산다", "7인의 사무라이" 등으로 대표작으로 
친다. 그 작품은 지금도 일본뿐 아니라 세계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구로사와의 작품 대부분이 그렇듯이 "7인의 사무라이"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절묘하게  배합하는 
데 성공한 영화다. 그의 영상 언어는 일본이라는 경계를 
뛰어넘어 서구까지 미칠 정도로 세계성과 보편성을 담고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구로사와가 누구보다도 서구 영화, 특히 미국 영화의 영상 미학을 
긍정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7인의 사무라이"는 내전으로 혼란해진 16세기 중반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산적들의 빈번한 침입에 시달리던 한 마을의 농부들이 자신들을 지켜줄 
의로운 사무라이를 찾아나선다. 간베이라는 한 중년 사무라이는 농부들의 요청을 
받고, 칼솜씨가 뛰어나고 개성이 뚜렷한 사무라이들을 하나씩 모아 일곱 명이 
되자 마을로 들어가 산적들과 싸운다. 농부들에게 고용된 사무라이들은 오히려 
보호자 입장이 되어 농부들을 훈련시키고 지도하여 산적들을 모드 해치운다. 
살아남은 사무라이들은 평화를 되찾은 마을을 뒤로하고 정처없이 길을 떠난다.
  "7인의 사무라이"는 농민과 사무라이, 산적이라는 세 집단 사이의 미묘한 
갈등과 싸움을 다루고 있지만, 구로사와가 최종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집단은 
결국 사무라이들이다. 그는 정의로운 사무라이들을 통해 자신의 휴머니즘을 
실현하고자 한다. 스토리 구성과 인물 설정의 기본 모티브는 중국의 고전 
"수호지"에서 따왔지만, 한 영웅이 혼란스럽고 무정부적인 마을에 들어가 악을 
물리치고 정의를 실현한 뒤 떠난다는 신화적인 구조 설정은 미국 서부영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사무라이에 대한 짙은 향수'라는 일본적인 의식을 주제로 
삼되 그것을 풀어가는 미학적인 틀은 서부영화의 거장 존 포드 감독의 "황야의 
결투"(1946)에서 차용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카메라를 다루는 기법이나 일부 
에피소드가 눈에 띄게 유사하다. 
  그러나 구로사와는 단순한 모방으로 끝내지 않고, 오히려 한 단계 발전시키는 
창조적인 모방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그런 재능 때문에 
그는 미국 영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으면서도 나중에 오히려 미국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감독으로 기록된다. 코폴라, 스필버그, 루카스 같은 
현대 미국 영화의 거장들이 각각 "대부", "대추적", "스타워스" 등을 만들면서 
구로사와의 영향을 숨기지 않는 걸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7인의 사무라이"에는 존 포드적인 역동적인 카메라와 프랭크 캐프라적인 
유머, 미조구치 겐지적인 리얼리즘과 오즈 야스지로적인 양식화된 구도가 잘 
어우러져 있다. 특히 각 집단이나 주요 인물마다 테마음악을 설정하여 사용한 
사운드, 당시에는 별로 사용하지 않던 망원렌즈의 대담하고 효과적인 사용과 
극대 클로즈업, 극적인 슬로 모션과 함축적이고 빠른 편집, 원형 모티브를 
이용한 화면 구성 등, 형식과 내용을 조화시킨 총체적인 미학의 완성도는 
베토벤의 교향곡 '합창'을 연상시킨다.
  "라쇼몬", "요진보"가 그랬듯이 "7인의 사무라이"도 미국판으로 번안되어 
만들어졌는데, 존 스타제스의 "황야의 7인"(1960)이 마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 
작품 역시 "라쇼몬"의 번안작 "폭행"처럼 흥행에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미학적 퇴보를 보여주었을 뿐니다.
  "이정국"

    길(La Strada 1954)
    사랑 통한 구원, 길 위의 삶에 담아
    페데리코 펠리니(Feferico Fellini)

  페데리코 펠리니(1920__1993)는 네오리얼리즘에서 출발해서 자기 환상을 
탐닉하다가 영화 인생을 끝마친 인물이다. 그는 영화가 곧 삶이고 삶이 곧 
영화인 그런 삶을 살았는데, 이 점에서 그의 영화는 내적 경험을 중시하는 
주관주의의 범주로 틀지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비평적 입장이라 하더라도 그 
격정성과 인간 내면에 대한 관심이 뿜는 그의 영화의 매력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길"은 펠리니의 명성을 국제적인 것으로 만든 초기 대표작의 하나다. 이 
영화는 명백히 네오리얼리즘의 틀 안에 있던 자신의 영화를 시적이고 주관적인 
세계로 열어놓은 전환점이며, 동시에 이탈리아 영화가 네오리얼리즘의 외적 
현실에서 인간관계의 내적 현실로 초점을 이동하는 과도기의 징후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펠리니는 네오리얼리즘의 대표자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 
"파이자" 등의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 이력을 시작하여 1952년에 "백인 
우두머리"로 감독이 되었다. 이 영화는 다음 작품 "이비텔로니"와 더불어 
네오리얼리즘 계열로 분류되지만, "길"에서 볼 수 있는 주관성 또는 내적 접근의 
특성은 이미 여기서부터 드러나 있었다고들 말한다.
  펠리니는 떠돌이 서커스단과 대중적인 뮤직홀의 배우였고, 또 열렬한 
칭송자였다. "길"에는 펠리니 영화의 주요한 모티브인 서커스와 사랑을 통한 
구원이라는 두 가지 주제가 얽혀 있다. "길"은 떠돌이 광대 잠파노와 백치 소녀 
젤소미나, 줄광대 일 마토 사이의 단순한 이야기를 통해 바로 사랑을 통한 
구원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한다. 주제는 길에 놓여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제목대로 세 떠돌이의 삶의 여행에 관한 기록이다.
  잠파노(앤터니 퀸)는 삼륜차를 몰고 마을을 떠돌며 쇠사슬을 끊는 재주를 
선보이는 광대이다. 젤소미나(주리에타 마시나)는 잠파노의 조수였던 언니가 
길에서 죽은 뒤, 그 자리를 대신 채우기 위해 팔려온 백치 소녀이다. 그는 북을 
치고 트럼펫을 불며 잠파노가 묘기를 부릴 때 조수 역할을 하는데, 사실은 
우악스런 잠파노가 성욕을 배설하는 소유물이다. 그러나 그의 
천진성과 헌신성은 서커스단에서 줄광대 일 마토(리처드 제이스하트)를 만나면서 
인간적 가치를 드러낸다. 그는 잠파노와 젤소미나 사이의 촉매자가 되려 하지만, 
야수성과 천진성이라는 운명적 비극의 관계는 그것을 거부한다. 그들의 길은 
서로 결정적으로 어긋난다. 잠파노는 젤소미나를 버린다. 5년 뒤, 잠파노는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서야 잠파노는 그의 부재를 통해서 스스로의 
고독을 깨닫는다. 
  "길"은 하층계급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만, 가난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내부와 
운명과 시간 사이의 비극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길"이 보여주는 
예술성의 바닥에는 리얼리즘과 환상과 정신적 가치에 대한 추구가 한꺼번에 고여 
있다. 동시에 이 영화에는 뜨내기로 추락한 미녀와 야수의 패러디가 있으며, 
예수의 이미지인 '바보'와 성녀의 이미지인 '백치' 소녀라는 종교적 알레고리가 
숨어 있다. 
  오텔로 마르텔리의 카메라와 니노 로타의 음악은 이 영화가 고전이 되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만약 앤터니 퀸과 줄리에타 마시나의 역을 제작자의 고집대로 
실바나 망가노와 버트 랭커스터가 했더라면 결과는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펠리니가 이 영화를 그의 '영감의 원천'인 아내 마시나를 위해 
만들었다는 말은 기억할 만하다. 동시에 펠리니가 말하는 사랑을 통한 구원이 
사실은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주관주의와 리얼리즘을 잇는 통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정하"

    바람에 쓰다(Written on the Wind 1956)
    멜로 형식 빌려 소비자본주의 비판
    더글러스 서크(Douglas Sirk)

  더글러스 서크의 "바람에 쓰다"가 '세계 영화 100편'에 선정되었다는 것을 좀 
뜻밖의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국 영화사를 뒤적여보아도 
서크의 존재는 미미하다. 
  실제로 더글러스 서크는 영화사에서 재발견된 사람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멜로드라마 장르에 관심을 가진 영국의 문화이론가들이 서크의 영화에 
주목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정열적으로 할리우드와 브레히트적인 
영화의 행복한 결혼을 꿈꾸던 파스빈더가 서크의 "하늘이 허용하는 모든 
것"(1955)을 전범으로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만들고 서크의 단편영화 "버번스트리트 블루스"(1978)에 배우로 출연하자, 
사람들은 그의 영화를 꼼꼼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대안적 
영화를 생각하고 만들고자 하는 영화이론가들과 필름메이커들의 텍스트가 
되었고, 영화사의 중요한 한 장이 그에게 헌정된다.
  덴마크에서 태어나 독일로 건너가 좌파 지식인으로 연극, 영화 연출가가 
된 더글러스 서크는 파시즘이 등장하자 할리우드로 망명했다. 그러나 할리우드는 
그에게 싸구려 스릴러나 멜로드라마의 시나리오를 던져주며 돈은 많이 못 주지만 
잘해보자고 당부했고, 그래서 만든 작품이 "히틀러의 미치광이"(1943), 
"수수께끼 잠수함"(1950) 같은 저예산 장르 영화들이었다. 브레히트의 
할리우드에 관한 시 "아침마다 밥벌이 하러 거짓을 사주는 시장으로 가지/희망에 
부풀어올라 나는 장사꾼들 틈에 끼지"는 서크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편의 시나리오를 팔고 할리우드를 떠나야 했던 브레히트와는 
달리 서크는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생존했고, 장르 영화의 컨벤션을 전복하여 
아이젠하워 시대의 소비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능력 있는 감독으로 성장했다.
  1956년에 만든 "바람에 쓰다" 역시 시나리오만 보면 전형적인 멜로드라마다. 
석유 재벌인 해들리가의 장손인 방탕한 카일(로버트 스택)은 여비서 루시(로렌 
바콜)와 충동적으로 결혼한다. 친구 미치(록 허드슨)와 아버지는 이들의 결혼을 
축복하지만 동생 메리리는 루시를 증오한다. 결국 메리리는 루시와 미치가 
부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오빠에게 거짓말을 하고,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카일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며 아내를 구타한다. 점차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 
카일은 미치와 결투 끝에 권총 사고로 죽게 되고, 영화는 미치와 루시가 새로운 
삶을 찾아 집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재벌의 아들, 그의 가난한 친구, 여비서의 삼각관계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주 모티브인 이 영화를 의미 있는 텍스트로 전환시킨 것은 전적으로 서크의 
몫이었다. 사람들이 멜로드라마에서 기대하는 것이 감정의 분출이라는 점을 
서크는 잘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비극적 주인공을 설정하고, 바로 그 
주인공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 자아 성취라는 강력한 미국의 이데올로기임을 
드러낸다.
  1950년대 미국 사회의 비극은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을 채우지 못해 
모순덩어리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는 것이 서크가 멜로드라마 장르를 
우회해 건넨 이야기가. 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그는 신경질적인 노란색을 
부각시켰으며, 로버트 스택에게는 청각적으로 고통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나 
서크는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관객을 만나기 위해 독일로 돌아가 10여 년 
남짓 기다려야 했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어두운 노래를 불렀던 그의 
영화들은 이제 그 어두운 시대의 지혜로운 기념비로 영화사에 서 있다.
  "김소영"

    추적자(The Searchers 1956)
    백인의 눈으로 본 낭만적 서부극의 정점
    존 포드(John Ford)

  가장 미국적인 영화감독을 꼽으라면 아마도 존 포드가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그는 미국 영화의 역사와 함께 성장했고, 미국인의 이상과 정서를 가장 
잘 그린 감독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주로 이민, 카톨릭, 공화주의, 개척사에 
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관객들은 '존 포드' 하면 서부극은 3분의 
1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존 포드의 작품은 서부극만이 기억된다. 
  그의 서부극은 무엇보다도 미국적 신화와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추적자"는 그 전점에 서 있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낭만적 서부극의 마지막 
고별작품이기도 하다. 
  남북전쟁이 끝난 몇 년 뒤에 이던 에드워즈는 형의 집을 찾아온다. 그리고 
얼마 뒤, 형의 가족이 인디언에게 몰살당하고 막내 조카딸 데비가 추장 스카에게 
납치되자 5년에 걸친 추적 끝에 그를 찾아 돌아온다. 존 포드의 서부극이 흔히 
그렇듯이 이 작품의 낭만적 성격은 미국인의 가슴에 전설처럼 남아 있는 '고독한 
서부의 사나이' 이던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의 과거 행적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그토록 애타게 데비를 찾아 다니는 동기를 제공한 형수 
마타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데비를 귀환시키고는 다시 어디론가 떠나는 이던의 
모습에서 서부극의 낭만적 인물 유형의 전형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고독한 인물 유형은 서부의 개척과 더불어 역사 속에서 전설처럼 사라져가며, 존 
포드는 특유의 롱 숏을 통해 이러한 전설을 서정적으로 담아낸다. 광야를 
배경으로 데비와 추장 스카를 끝없이 찾아 헤매는 이던 일행의 롱 숏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구도지만 사라져가는 서부의 낭만적 시대에 대한 아쉬움과 
추억을 담는 도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낭만적 성격 이상의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인종, 결혼, 혈족, 종족과 같은 인류학적 이슈는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문제들을 
안고 있다. 데비는 프롬의 신화 분석학의 관점에서 보면 영웅과 악한의 싸움을 
유도하는 중개인의 역할을 하는데. 포드의 선악구별은 명확하고 또 단순하다. 
백인 문명은 선이고, 인디언 문명은 악이라는 식이다. 이던이 백인과 인디언의 
혼혈인 마틴을 싫어한다거나, 어렵게 찾아낸 데비가 이미 코만치 여자로 성장한 
것을 보고 죽이려 하는 데서도 그러한 시각은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마사나 큰 
조카딸 토리의 시체는 보여주지 않는 반면 마틴을 따라 다니는 인디언 여자 
루크의 시체는 전혀 주저함 없이 드러내는 사소한 연출기법도 이러한 존 포드의 
문명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작품이 만들어진 1956년의 미국은 
흑백 갈등이 심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작품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당시의 흑백 갈등을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또 다른 인종 갈등의 문제로 
대체하거나 무마하는 역할을 하였으리라는 짐작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추적자"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 그 서정성과 잘 짜인 내러티브 구조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많은 
영화감독들에게 숭배받는 '감독들의 컬트 영화'로 남아 있다.
  "김지석"

    파테르 판찰리(Pather Panchali 1956)
    인도의 빈곤한 소년이 펼치는 장중한 인간 다큐멘터리
    쇼티아지트 레이(Satyajit Ray)

  인도의 영화작가 쇼티아지트 레이는 1950년에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와 
더불어 아시아 영화를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동양의 거장이다. 레이는 비부티 
바네르지의 베스트셀러 소설 "파테르 판찰리"를 영화로 옮겨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레이는 프랑스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작가 장 르누아르가 1949년에 첫 
색채 영화 "강"을 인도에서 촬영할 때 그와 만났다. 훗날 레이는 비토리오 데 
시카와 장 르누아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술회했다. 좋은 집안의 후손으로 
선조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레이는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가끔 집에 
드나들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레이의 첫 번째 작품인 "파테르 판찰리"는 1956년에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 
인간 다큐멘트상을 수상했다. 뒤이어 2부 "아파르지토(정복되지 않은 사람)"도 
베니스 영화제의 최우수 작품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올라섰다. 1952년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파테르 판찰리"는 나중에 
제작비가 달려 인도 정부의 지원금을 얻어 서부 벵골 영화개발공사에서 제작을 
끝냈다고 한다.
  아푸라는 소년의 성장과정을 그린 이 '아푸 3부작'(3부는 "아푸의 세게")의 
1부인 "파테르 판찰리"는 벵골 지방의 농촌에서 아푸 소년이 부모와 누나 
두르가, 친척 아주머니 인디르와 함께 살면서 겪는 이야기이다.
  무능력한 성직자인 아버지는 일찍이 집을 떠났고, 보통 여자인 어머니가 
어렵게 생활을 꾸려나간다. 계절풍 몬순이 몰아치는 벵골 지방의 찢어지게 
가난한 삶에서 즐거움이라면 인디르 아주머니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어느 날 남매는 동구밖에 나갔다가 검은 연기를 뿜으며 달려가는 기차를 보고 
풍요로운 도시에 대한 동경과 설렘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아푸는 숲에서 인디르 
아주머니의 죽음을 목격하고, 이어 누나 두르가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죽는 
비운을 겪는다. 두 사건으로 아푸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이때 집을 나갔던 아버지가 참담한 실패 끝에 돌아와 가족을 갠지스 강가에 
있는 바라나 시로 데려가겠다고 한다. 세 식구는 소달구지에 실려 마을을 
빠져나간다.
  레이는 시도 썼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화가이며 시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포스터나 책표지, 만화 그리기 같은 데도 소질을 
보였다. "파테르 판찰리"의 음악은 인도가 자랑하는 시타르 연주자 라비 
샹카르가 담당했다. 레이는 한국에도 연주차 다녀간 샹카르와 여러 작품에서 
함께 작업했다. 
  영화는 농촌의 빈곤, 그 속에서 자라나는 꿈 많은 소년 아푸가 도시로 나와 
결국은 소설가가 될 때까지 겪는 장중한 인간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3부작 
가운데 1부는 "자전거 도둑"처럼 직업 배우를 쓰지 않았다. 느린 템포의 음영 
짙은 흑백 촬영과 음악, 그리고 레이의 시적 상상력은 빈곤이 배경인 사실적인 
이 작품을 본 세계인들에게 새로운 영화적 체험을 느끼게 했다.
  "파테르 판찰리"는 '길의 노래'라는 뜻의 인도 말이다. 또한 이제까지 
사티아지트 레이로 알려진 그의 이름의 정확한 벵골 발음은 쇼티아지트 
레이이다.
  "안병섭"

    제7의 봉인(Det Sjunde Inseglet 1956)
    신과 대결하며 묻는 존재의 의미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은 1957년에 세상에 나왔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은 이미 쇠퇴기를 지나고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한 무리의 청년 
비평가들이 누벨 바그의 전조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영국에서는 프리시네마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무도 더 이상 신을 말하지 않았고, 유럽인은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대중문화의 중심은 고통의 세대에서 전후 세대로 
옮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물결처럼 보였다. 그때 베리만은 전혀 
뜻밖에도 신의 존재와 부재에 대해서 질문한다. 그것은 마치 "제7의 봉인"의 
시대배경이 중세인 것만큼이나 중세적인 질문으로 보였다.
  "제7의 봉인"은 14세기 중엽 십자군전쟁에서 돌아온 기사 안토니우스 블록의 
귀향기이다. 그는 청년 시절을 무의미한 전쟁에 흘려보내고 스웨덴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의 귀향길은 '삶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공포'에 짓눌려 있다. 
영화의 서막을 여는 바닷가 장면에서 체스판을 뒤로 한 채 비스듬히 상체를 
일으키는 블록의 표정은 이미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그에게 사신이 찾아온다. 그는 체스 게임을 제안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의미를 찾기 위한 시간을 얻기 위해서이다. 
마을은 페스트와 마녀 사냥의 집단적 광기가 휩쓸고 있다. 도처에 삶의 공포가 
만연해 있으나, 신은 아무 대답이 없다. 그가 체스 게임으로 유예받은 삶의 
마지막 목표는 신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고해성사에서, 감각으로 신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신은 왜 불안전한 약속 뒤로 숨어버렸는지를 
격하게 묻는다. 그러나 '신은 침묵을 지킨다'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마을에서 
벌인 두 번째 체스판에서도 그는 이긴다. 그러나 그가 절망 속에서 찾는 신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집으로 향하기 전에 한 무리의 마을 사람들과 숲을 
지나면서 그는 다시 사신과 마지막 체스 게임을 벌이지만, 그것은 그가 유예된 
시간을 반납하기로 결심한 뒤의 일이었다. 신은 아예 부재하든가 아니면 부재와 
다름없는 침묵에 빠져 있는 것이다.
  잉마르 베리만이 이 절망적인 귀향기에 "요한 계시록"의 이야기를 따서 '제7의 
봉인'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다시피 그것은 종말을 상징하는 
7개의 봉인 가운데 마지막 봉인을 가리킨다. 그는 중세를 빌어 현재의 인류가 
'제7의 봉인' 앞에 서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극단의 
비관주의를 표출했거나 감히 다룰 수 없는 주제를 건드린 셈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인간은 그 봉인을 그대로 덮어둘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가지지 못한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제7이 봉인"은 교리 문답에 관한 것도, 신학 
논쟁에 관한 영화도 아니다. 결국 베리만이 강조점을 찍은 것은 사람들 사이의 
단절이다, 그것이야말로 삶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공포를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고, 신을 부정하며 신을 침묵하게 만드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체스 말을 쓰러뜨리며 광대 요프 일가를 구하는 영화의 마지막은 매우 
역설적이다. 이 장면은 베리만의 예슬가로서의 자리 존재와 인간에 대해 마지막 
믿음의 끈을 잡으려는 몸부림에 가까운 절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요컨대 
"제7의 봉인"은 중세적 주제가 아니라 현대의 삶의 공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정하"

    현기증(Vertigo 1958)
    히치콕의 특허, 훔쳐보기와 환상
    앨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활용했던 히치콕 특유의 버릇인 
'훔쳐보기'는 "현기증"에 이르러 마침내 관음주의자의 한계를 벗어나 창조자의 
도구 구실을 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연구의 대상이 되는 "현기증"은 자기 때문에 
동료 경관이 사망한 과거의 사건이 원인이 되어 고소공포증이라는 도덕적 
마조히즘에 빠진 전직 형사 스카티의 '자기 치료' 과정과 함께 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살인사건의 범인을 밝혀나가는 과정을 다룬 전형적인 이중 플롯의 
작품으로 히치콕의 관음주의와 환상주의가 낳은 지극히 남성적인 시각의 
작품이다.
  친구의 부탁으로 그의 아내 마들린을 쫓는 스카티는 언제나 마들린을 
훔쳐본다. 이때 관객도 마들린을 훔쳐보게 된다(이러한 훔쳐보기의 배후 
조종자는 물론 히치콕이다). 그것은 스카티에게는 환상이다. 스카티는 마들린이 
죽고 난 뒤, 그를 꼭 닮은 주디를 발견하고는 그를 마들린으로 만들려 한다. 
물론 그 모든 시도는 주디가 마들린의 역할을 한 사람이었음이 밝혀지고, 주디가 
죽음으로써 끝을 맺는다. 그리고 스카티는 고소공포증에서 벗어나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히치콕이 이 과정에서 보여주는 남성적 시각은 너무도 뚜렷하다. 스카티의 
시점은 분명히 제시하는 반면, 주디와 마들린, 마들린의 선조인 카를로타의 
시점은 애매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물론 그것은 히치콕이 노린 함정이다. 
이를테면 주디가 연기하는 마들린은 그의 역할이 끝날 때까지 딱 한 번의 분명한 
자기 시점만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 시점마저 마들린이 아닌 주디의 
시점이었다. 물론 이 사실은 영화를 결말 부분까지 본 다음 다시 그 장면으로 
피드백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마들린의 남편인 엘스터와 스카티가 
주디를 마들린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히치콕이 킴 노박을 주디로, 또 
마들린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히치콕의 이런 반 페미니스트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인간의 근원적 
욕망, 곧 죽음의 충동에 대한 이야기를 은밀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깊이 있는 
이해와 통찰을 요구한다. 카를로타와 마들린으로 대변되는 죽음의 욕망은 그에게 
이끌리는 스카티의 심리 상태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욕망을 이처럼 은유적이고 우회적으로 묘사한 영화는 찾기 힘들다(물론 여성을 
환상과 죽음의 이미지로 묘사한다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의 또 다른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이 관음주의와 환상주의, 그리고 죽음의 충동을 짜맞추어 나가는 '할리우드의 
프로이트' 히치콕의 세밀한 연출기법은 범접하기 힘든 개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영화적 형식의 탁월함은 두고두고 논의의 대상이 된다. 이를테면 네 번에 걸쳐 
사용된 줌과 트랙의 결합 장면은 주인공 스카티의 고소공포증을 묘사하는 데 
매우 효율적이었고, 스카티의 시점에 관객을 동일화하기 위해 사용한 주관적 
트래킹 숏은 이제는 영화 문법의 고전처럼 이야기된다.
  히치콕에게 영화는 환상의 실현 수단이자 관객과 게임을 하는 도구다. 그래서 
그는 늘 지적 우월감을 만끽한다. 그 중에서도 "현기증"에 감추어진 비밀들은 
관객들에게 고난도의 지적 게임을 요구한다. 어차피 게임의 승자는 늘 
히치콕이겠지만 관객은 패배를 기분좋게 받아들인다. "현기증"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김지석"

    재와 다이아몬드(Popiol i Diament 1958)
    이성적 미래와 맹목적 반항의 대결
    안제이 바이다(Andrzej Wajda)

  폴란드 영화는 1956년부터 1959년 사이에 르네상스기를 맞았다. 현대 폴란드 
영화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스탈린이 죽은 직후 동구권에 불어닥친 해빙 
분위기가 폴란드 영화인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자극했던 것이다. 당시 폴란드 
영화의 내용과 형식이 하도 출중해서 서구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폴란드 
유파'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그리고 안제이 바이다는 폴란드 유파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받는 감독이었다. 바이다가 1958년에 발표한 "재와 다이아몬드"는 곧 
당시 폴란드의 영화 수준을 대변하는 작품이 됐다.
  "재와 다이아몬드"는 1948년에 출간된 예지 안제르예프스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해방 첫날부터 복잡다단한 
정치적 사건이 벌어지고 있던 폴란드 사회를 묘사한 이 소설을 바이다는 하룻밤 
하루 낮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로 축약했다. 배경도 자잘한 에피소드를 빼면 주로 
호텔이라는 하나의 공간으로 좁혀놓았다. 그러나 단일한 시, 공간으로 좁힌 
내용의 상징적 의미는 폭이 넓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해방을 맞이한 날, 전쟁은 끝났지만 폴란드에는 좌우 
이데올로기 투쟁이라는 또 하나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체크와 안제이는 
우파 민족주의 진영의 레지스탕스 대원이다. 두 사람은 공산주의자 슈추카를 
암살하는 임무를 받는다. 그러나 테러는 실패하고, 두 사람은 호텔로 피신한다. 
이데올로기에 관심이 없는 마체크는 호텔 여급 크리스티나에게 수작 걸기 
바쁘고, 다시 지시를 받으러 간 안제이는 상부의 테러 명령에 회의를 느낀다. 
그러나 역사는 이미 개인의 손을 떠나 있다. 크리스티나와 하룻밤을 보낸 
마체크는 투쟁보다는 연인을 택하고 싶어하나 안제이의 설득에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심한다. 마체크는 새벽에 호텔을 나서는 슈추카를 암살하고 
도망치다가 쓰레기장에서 비참하게 죽는다. 
  "재와 다이아몬드"는 정치영화이면서도 대단히 낭만적인 분위기로 포장돼 
있다. 호텔 방과 폐허의 교회에서 두 주인공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라든지 
쇼팽 음악을 불협화음으로 사용한 결말 부분은 특히 애상적이다. 그러나 이는 
감상으로 흐르지 않고 전체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바이다는 슈추카와 마체크를 모두 공감이 가게 묘사하고 있다. 슈추카는 
폴란드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지닌 사려 깊은 지도자다. 그러나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충동적으로 싸우고 있는 폴란드의 이유없는 반항 세대인 
마체크 역시 관객에게 공간을 둔다. 바이다는 폴란드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슈추카와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린 마체크를 다 같은 희생자로 
묘사하는 독특한 결론을 내린다. 다분히 회의적인 관점이라고 해야겠지만, 
거기에는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한 폴란드의 역사가 녹아 있다. 
  선 굵은 조명과 딥 포커스로 짜임새를 갖춘 바이다의 화면 설계는 오슨 웰스 
감독의 영향을 암시하고 있다. 
  제목 "재와 다이아몬드"는 폴란드 낭만주의 시인인 노르비트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횃불과 같이 네 몸에서 불꽃이 퍼질 때, 넌 아는가. 자기 몸을 태워가며 
자유의 몸이 되어감을.... 영원한 승리의 여명에, 재 속 깊은 곳에 찬란한 
다이아몬드만이 남으리."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재가 될지 다이아몬드가 될지 알지 못한다. 
바이다 역시 한때의 역사적 순간에 대해 어떤 해답을 쥐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남는 것은 그저 역사와 인생의 부조리함뿐이다.
  "김영진 씨네 21 기자, 영화평론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North by Northwest 1959)
    가공 인물 뒤쫓는 급박한 서스펜스
    앨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영국에서 앨프리드 히치콕의 대표작이 "39계단"이라면 미국에서는 MGM사가 
제작한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일 것이다. 많은 평론가들은 "현기증"을 최고 
걸작으로 꼽지만, "북북서..."가 극적 구성이나 형식, 서스펜스에서 더 세련되고 
잘 짜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CIA가 실존하지 않는 인물을 내세워 사건을 해결하는 예가 있다는 것이 
뉴욕의 한 신문기자를 통해 알려지자, 여기서 영감을 얻은 히치콕은 어니스트 
리먼에게 시나리오를 의뢰했다. 상영시간이 136분이나 되자 MGM 쪽에서 
뒷부분을 줄이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양보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뉴욕의 광고업자 로저 손힐은 비서에게 일정을 알려주고 
택시에서 내리다 두 명의 괴한에게 납치된다. 그는 글레코브의 어느 저택에서 
강제로 술을 마신 뒤 버려져 음주 운전으로 체포된다. 다음날 홀어머니와 함께 
현장으로 가부지만 그곳은 전날 밤의 내부가 아니다. 그 저택 주인이 유엔에 
나가는 타운젠드라는 이야기를 듣고 유엔본부 로비에서 그에게 면회를 
신청하지만 엉뚱한 사람이 나왔다가 현장에서 등에 칼을 맞고 쓰러진다. 
삽시간에 살인범 누명을 쓰게 된 손힐은 괴한들이 그를 조지 캐플런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고 놀란다. 
  여기서부터 사건은 복잡한 미궁으로 빠져들어간다. 결국 손힐은 조지 
캐플런이라는 인물의 정체를 밝혀 누명을 벗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추적에 나선다. 
그는 시카고행 열차에서 이브 켄들이라는 금발의 미녀 산업디자이너를 만나 
사랑을 속삭인다. 켄들의 제보로 손힐은 캐플런을 만나기 위해 41번 국도변으로 
나가지만 헬리콥터의 습격을 받는다. 켄들에게 속은 것이다. 손힐은 미술품 
경매장에서 납치범의 두목 격인 밴덤과 함께 나타나는 켄들을 본다. 그들이 
조각품을 사가지고 사라지자 손힐은 일부러 소란을 피워 경찰에게 끌려가 위기를 
모면한다. 그리고 사우스 다코타 주 라피트 시티의 커다란 대통령 얼굴 석상이 
있는 러시모어 산 아래 카페에서 다시 밴덤과 함께 나타난 켄들을 만나게 된다. 
켄들은 권총 두 발로 손힐을 쓰러뜨리고 사라진다. 이때 한 대학교수가 손힐을 
구출해 차에 싣고 숲으로 온다. 그러나 켄들이 쏜 총알은 공탄이었다. 
대학교수는 자신이 CIA 고문이며, 켄들은 밴덤의 정부라고 말한다. 밴덤은 
경매장에서 구입한 조각품 속에 국가 기밀이 담긴 마이크로필름을 넣어 그날 밤 
함께 비행기로 탈출한다.
  그러나 켄들도 CIA 요원이며, 조지 캐플런은 CIA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었다. 손힐의 기지로 조각품을 빼앗아 도망치게 된 켄들은 대통령 얼굴 
석상 밑으로 내려오다 CIA 요원들의 구조로 살아난다. 뉴욕으로 돌아오는 
열차에서 둘은 결합한다. 
  조지 캐플런이 누구인가 하는 의문 속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사건과 반전은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냉전시대 첩보전의 비정한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유엔 빌딩 내부 촬영은 하마슐드 사무총장이 금지시켜 몰래카메라로 복도를 
찍고 로비는 재현했다고 한다. 커다란 대통령 얼굴 조각상도 재현한 것이고, 
밴덤의 별장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물이다. 켄들 역의 에바 마리 
세인트가 손힐 역의 미남 케리 그랜트를 유혹하는 침대차의 시퀀스는 미국 
영화사상 가장 감미로운 러브신의 하나이다.
  히치콕은 일찍이 말했다.
  "내가 신데렐라를 만든다면 마차 속에 시체를 넣겠다. ...나는 스토리보다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더 관심이 있다."
  히치콕과 인터뷰한 프랑수아 트뤼포는 그의 죽음에 즈음하여 그의 작품 세계를 
이렇게 요약했다.
  "히치콕에게 형식은 내용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다. 형식 자체가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안병섭"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 1959)
    몸과 영혼에 맺힌 전쟁의 상처
    알랭 레네(Alain Resnais)

  사운드가 사라진 뒤의 낯선 침묵, 이미지의 이상한 유혹, 사운드와 이미지의 
새로운 만남. 영화는 이렇게 늘 실험 중이었다. 적어도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는 그랬다. 1920년대의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실험 이후 
두 번째로 맞은 르네상스 시기의 영화들은 새로움이라는 뜻의 '누벨'(프랑스), 
'노이에'(독일), '노보'(브라질)라는 이름으로 영화매체를 재구성한다. 영화의 
네오모더니즘 시대가 된 것이다.
  "히로시마 내 사랑"의 감독인 알랭 레네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장 뤼크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를 내 놓은 바로 그 해에 그들의 첫 번째 공동 
작업을 완성한다. 그들은 시간과 공간, 사운드와 이미지의 매체인 영화로 2차 
대전이 남긴 기억의 흔적을 텍스트화한다. 무대는 개개인의 육체 속에 원폭의 
악몽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히로시마라는 도시. 그 히로시마에서 에로티시즘과 
역사적 기억이 만난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벗은 몸 위로, 
애무의 손길 위로 원폭 피해자의 상혼을 연상시키는 거친 모래 입자 같은 것이 
오버랩된다.
  전쟁이 끝난 지 10여 년, 히로시마의 강가 카페들은 네온으로 눈부시고, 
원폭의 공포는 전쟁 기념관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듯이 보이며, 프랑스 
여배우(에마뉴엘 리바)는 일본인 건축가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히로시마는 과거의 박제화에 완강하게 반대한다.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는 바로 
그 박제화에 대항하는 형식이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제작된다는 영화 속에서 
히로시마의 거리는 피해자들의 시위로 뒤덮이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원폭으로 
으깨진 손과 몸이 클로즈업된다. 그리고 여주인공은 히로시마에서 자신의 
전장이던 느베르를 기억한다.
  독일군 점령 당시 여주인공은 프랑스의 느베르에서 독일군 
병사와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은 마을 사람들의 분노 속에서 죽어갔다. 그 
죽음과도 같은 고통 때문에 그는 자신이 히로시마의 모든 고통을 보았고 
이해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일본인은 그의 기억과 보는 방식을 거부한다. 그래서 
여자가 "나는 히로시마에서 모든 것을 보았어요"라고 말하자, 남자는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라고 되받는다.
  사실 히로시마와 느베르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플래시백과 
오버랩을 반복하며 그 두 공간을 잇는다. 플래시백을 통해 느베르는 히로시마의 
공간 속에서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솟아오르고, 오버랩은 일본인 연인과 독일 
연인을 환유의 관계로 만든다. 그러나 일본인 남자는 영화 이미지의 이러한 
비역사적 마술에 사운드로 저항한다. 그는 오히려 "당신에겐 히로시마가 전쟁의 
끝을 알리는 기쁨이었지만, 우리에겐 고통의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이미지와 사운드는 프랑스 여성과 일본인 남성으로 주체화되어 서로 불화하며, 
역사 역시 그들을 통과하면서 그 의미에 대해 싸움을 벌인다. 
  마지막 장면, 여자가 남자에게 바로 당신이 히로시마였다고 말함으로써 개인적 
층위의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정치적 입장은 모호하다. 영화는 
실험이라고 뒤라스와 레네가 말했을 때 그것은 일차적으로 이미지와 사운드의 
복합성에 관한 진술이었고, 그 의미로만 한정한다면 
"히로시마 내 사랑"은 영화라고 이름 붙여진 작은 실험실 안에서는 성공적이다.
  "김소영"

    정사(L`Avventura 1959)
    예술적 화면 너머 가득한 공허와 권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

  "도둑맞은 자전거 문제도 없어진 이제, 중요한 것은 자전거를 도둑맞은 적이 
있는 사람의 마음과 머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 그는 어떻게 적응하고 사는지, 
그의 과거 경험, 전쟁과 전후의 시기, 전쟁을 치른 이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모든 
것이 그에게 무엇으로 남아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는 네오리얼리즘 시기에 각본 쓰기, 단편영화 만들기로 습작기간을 거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그 전통에서 빠져나오면서 던진 말이다. 안토니오니는 
그 사람의 내면을 "어느 사랑의 이야기"(1950)에서 치정 살인을 둘러싼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통해, "외침"(1952)에서는 여인에게 버림받은 남자의 황폐한 
여정을 통해 탐구하고자 했다. 그리고 "정사"에서부터 그는 산업사회로 급격히 
진입하고 있는 이탈리아 현대인의 내면을 그린다. 안토니오니에 따르면, 그 
현대인은 기술의 진보보다 한걸음 처지는 도덕적 수단으로 세계를 산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 인간들, 사물들과 진솔한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 그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도덕적 갈등에 대응하기 위해 그는 성이나 사랑을 
찾는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모험을 생성해낼 정서로 새로운 환경에 대응해야 한다.
  여기서 '모험'은 바로 "정사"의 원제목이며, 영화는 그 모험이 필요한 현대인을 
다룬다. 이야기는 너무 간단하다. 요트 여행을 하던 안나라는 여자가 실종되고, 
친구 클라우디아와 애인 산드로가 그녀를 찾아 나선다. 소문을 따라 안나를 
찾아다니던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그런데 산드로가 매춘부와 하룻밤을 지낸다. 
클라우디아는 절망 속에서도 연민으로 그를 감싸 안는다. 연민이 새로운 모험의 
첫걸음인 듯 세 사람 외에도 영화는 다양한 인물들을 그 이야기와 필연적인 
관계가 없는 배경으로, 어쩌면 잘못 연출된 섹스 풍자극의 인물들처럼 
간헐적으로 등장시킨다. 
  하지만 2시간 20분 가량 아주 느슨하게 방황하는 영화의 흐름은 안나의 
실종을 대수롭지 않게 다룬다. 영화는 실종에 대한 답으로 향하지도 않으며, 그 
실종이 친구와 애인에게 던진 정신적 여파에도 별 관심이 없다. 
  꽉 짜인 이야기구조를 지닌 영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영화가 칸에서 
상영되었을 때 호된 야유를 보낸 관객들처럼 이 영화를 보고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구차한 삶에는 적용할 만한 부분이 눈곱만큼도 없는, 
정말 하릴없는 부유층의 권태와 나른함과 거짓 욕망들을 바라보는 것도 참기 
힘든 것이리라.
  그러나 보통 영화에서 생략해버리는 우리 일상의 진실한 순간들, 인과의 고리 
없이도 생겨나는 무수한 순간들, 너무나 일상적이라 존재하지 않는 듯한 순간들 
속의 현대인을 이 영화처럼 잘 묘사한 작품도 없다. 그들의 말 없음, 미세한 
움직임, 공허한 표정, 방향 잃은 자태들은 완벽한 화면 구성과 길고 짧음이 
되풀이되는 리드미컬한 촬영과 편집 속에서 스스로 많은 이야기를 한다. 플롯이 
이야기를 한다기보다 관객 스스로가 빈 듯한 화면, 무표정한 인물들, 배경이 
되는 지형과 인물 간의 관계를 읽으며 그 너머의 이야기를 쌓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와 시각적 특성이 당대 이탈리아를 예술영화의 보고로 이끈 
펠리니의 투명한 자기 반영적 기법과도 다른, 바로크적 미학으로 성과 정치를 
충분히 미학적 가치를 갖는, 오랜 시간을 견디는 미적 대상으로 만드는 데 
안토니오니가 기여한 바일 것이다.
  "주진숙"

    네 멋대로 해라(A Bout de souffle 1959)
    영화는 이론이 없다. 멋대로 해라!
    장 뤼크 고다르(Jean-Luc Godard)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자. 
  장 뤼크 고다르의 이 선언은 '새로운 영화'의 명제가 되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은 고전적 양식을 완성하였고(앨프레드 히치콕, 존 포드, 장르 
영화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은 부패하기 시작했으며(펠리니, 안토니오니, 
비스콘티), 프랑스 영화는 문학의 진부한 재각색(르네 클레망, 앙리 조르주 
클루조에서 알랭 레네까지)에 사로잡혔다. 영화는 진퇴양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이제 영화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결별(!)이 필요했다.
  장 뤼크 고다르(1930__)는 바로 이때 수호천사처럼 등장했다. 프랑스의 
영화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영화평을 쓰던 고다르는 하워드 혹스와 
험프리 보가트, 뮤지컬과 할리우드 B급 영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와 앙드레 바쟁의 미장센을 변증법적으로 통일시킬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그가 비평가 시절에 쓴 "몽타주, 나의 멋진 근심"은 
영화감독 고다르를 예고하고 있었다.
  고다르는 여덟 편의 단편영화 수업을 거쳐 "카이에 뒤 시네마" 동료이자 
영화감독인 프랑수아 트뤼포가 쓴 시나리오 "네 멋대로 해라"로 데뷔했다. 그는 
스스로 이 영화를 '오토 플레밍거의 "슬픔이여 안녕"에 대한 속편'으로 부르기를 
좋아했으며, 또 한편으로 험프리 보가트에게 바치는 연애 편지(!)라고 불렀다. 
고다르는 "네 멋대로 해라"에서 영화에 대한 자신의 광적인 애정으로, 영화에 
바치는 존경심과 함께 모든 영화에 대한 부정을 시도하고 있다. 영화는 마치 
B급 갱스터 영화의 멜로드라마처럼 보인다. 주인공 미셸(장 폴 벨몽도)은 별다른 
이유 없이 차를 훔치고, 여자들을 울리고, 경찰을 총으로 쏘고, 미국에서 온 애인 
패트리샤(진 세버그)를 설득해 도망치자고 유혹한다. 그러나 패트리샤는 경찰에 
고발하고, 미셸은 거리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다.
  고다르는 미셸과 함께 1959년의 파리를 달린다. 알제리가 프랑스 대혁명 
정신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실존주의가 구조주의에 자리를 양보하고, 드골 
정권이 보수반동주의로 변질하고 있는 파리에서 '새로운 세대'의 공기와 
시대정신이 무엇인가를 영화는 스스로 질문한다. 고다르는 영화사상 최초로 
'영화에 관한 영화'를 창조한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는 자의식을 갖고 주인공과 
이야기와 작가 사이에서 영화를 향해 질문을 더진다. 주인공은 갑자기 카메라를 
향해 말을 걸고, 화면은 점프 컷과 롱 테이크의 수사학으로 영화의 불문율을 
차례로 돌파한다. 영화는 지켜야 할 문법을 갖고 있지 않은 담론이며, 고다르는 
영화란 '네 멋대로' 만드는 것이라고 선동한다.
  고다르는 단호하게 말한다. 영화에서 이론이란 불가능하다고. 그래서 영화에 
관한 이론이란 영화(들)뿐이라고 대답한다. 만일 그러하다면 고다르는 여전히 
영화로 영화를 말하는 영화평론가인 셈이다. 그는 "네 멋대로 해라"를 통해서 
미래의 영화를 발명한 것이며, 고다르를 통해서 영화는 무한히 다양한 상상력의 
이미지를 타고 도주하는 복화술사가 되었다.
  "고다르 이전에 고다르 없고, 고다르 이후에 고다르 없다."
  평생 고다르가 싫어했던 미셸 푸코의 찬사다.
  "정성일"

    오발탄(1961)
    전쟁이 할퀸 사회와 심성에 대한 날선 묘사
    유현목

  "오발탄"은 1960년에 만들어져 1961년에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5, 16 
쿠데타 세력에 의해 상영이 중단되었다가 1963년에 다시 상영되는데, 이후 
20여년이 지나 다시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복권 아닌 복권은 한극 영화의 
굴곡과 비슷한 그래프를 따라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즉, "오발탄"은 '80년대 
세대'의 손으로 다시 대중들 앞에 나타났고, 이제는 비디오 가게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틈만 나면 "가자"고 외치는 늙은 어머니, 상이 군인인 동생 영호, 만삭인 
아내와 어른을 믿지 않는 딸, 양공주가 된 여동생, 신문팔이를 하는 막내동생, 
그리고 주인공 철호는 언덕빼기에 있는, 마치 영화 세트 같은 판잣집에서 살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꿰뚫고 있는 것은 바로 '전쟁'이다. 환경과 심성의 뒤틀림은 
전쟁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없다. 1960년대 한국 
영화의 놀라운 포착이다.
  비록 이범선의 원작에 기대고 있긴 하지만, 유현목이 자기 작품에서 포착한 
것은 문학적 서술이 아니라 영화적 표현, 에이젠슈테인에 기대서 말하자면 
유기성과 파토스(정념)였던 셈이다. 유현목은 전쟁이 휩쓸고 간 서울의 바지런함 
속의 공허, 공허 속의 실낱 같은 희망, 희망의 좌절을 차례차례 그려가고 있다. 
이런 순차적 배열은 계획적인 주제 전달을 통해 유기성을 획득하고, 그 결과 
치열한 정서가 폭발한다.
  멀쩡하게 신사복을 입은 사내가 치통이 있으면서도 병원에 가지 않는 이유를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동생이 양공주가 된 사연과 동생 영호의 
은행 강도짓이라든가 딸의 불신 따위를 이해하는 것 또한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주요 배경인 집 안을 비춘 화면 구도와 빛의 명암, 배우들의 
동선과 그것을 잡은 카메라 렌즈의 깊이 같은 것을 눈치채기 위해서는 공을 좀 
들여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불협화음이 일어난다. 반항아 영호(최무룡)가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배경과 몸짓, 실내 배경의 서구적 구도 따위는 미학적으로는 완결성을 
갖추고 있지만 낯설게 보인다. 이 낯설음은 서구 영화를 기준으로 하면 낯익은 
것이고, 우리 상황으로 보면 낯선 것이다. 유현목은 안의 고민을 바깥 것을 
동원하여 드러내려 하였고, 그럼으로써 '근대 영화'에 다가섰던 것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유현목의 발걸음은 갈팡질팡한다. 죽은 아내가 있는 병원? 
동생이 갇힌 경찰서? 어머니가 있는 집? 꼭 그만큼 그는 방황한다. 감정의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 영화? 네오리얼리즘? 몽타주? 할리우드 또는 유럽의 
대중영화? 결국 유현목은 결정하지 못한다. 단지 택시 기사가 "나참,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군..." 하고 불평할 뿐이다. 이렇게 유현목은 단역의 입을 
빌려서 영화를 마감한다. 꼭 그만큼 유현목은 전쟁과 서울을 놀랍도록 날카롭게 
묘사한다. 하지만 그 고민 방식은 어딘가에 기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오발탄"의 좌표는 한국적 현실이라는 수직선과 '빌려온 근대 영화적 
고민'이라는 수평선 위에서 찍한다. 수직으로는 한없이 올라간 지점이며, 
수평으로도 멀리 나아간 지점. 물론 수평의 마이너스 영역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추앙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 될 때, "오발탄"은 다시 부활할 
것이고 당분간 혹은 오랫동안 한국 최고의 영화라는 영예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효인"

    쥘과 짐(Jules et Jim 1961)
    '성의 정치'에 항거한 여성의 자유선언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Truffaut)

  1953년, 73살의 앙리 피에르 로셰가 고령에도 불구하고 첫 소설 쥘과 짐을 
발표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당시 21살. 랑글루아가 만든 시네마테크의 
악동이자 앙드레 바쟁의 "카이에 뒤 시네마"로 평단에 입문한 그는 언젠가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61년, 트뤼포는 
기어코 그 꿈을 이루게 된다.
  "쥘과 짐"은 두 남자와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 상투적인 
멜로드라마에서 닳고닳도록 써먹은 소재다. 그러나 트뤼포는 진부한 삼각관계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는 여성의 자유와 그에 대한 남성의 반응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중심 인물은 "쥘과 짐"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쥘이나 
짐이 아니라 카트린이다. 두 남자와 친구이자 부부, 연인의 관계를 유지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카트린은 이상주의자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누구에게 이해를 
바라기보다는 행동으로 여성의 '해방'을 쟁취하려 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문화적 순수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불안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유럽의 사회적 배경은 그가 설 공간을 남겨두지 않는다. 사실 카트린이 이루려고 
했던 자유는 쥘과 짐이 스스로에게 던진 과제이기도 했다. 그 과제를 카트린만이 
목숨을 던져가며 쟁취하는 것이다. "쥘과 짐"에서 가장 강력한 나름대로의 자기 
해방이기도 하다. 그래서 카트린은 쥘과 짐에게, 아니 트뤼포에게 아나키스트인 
동시에 대지의 어머니다.
  이처럼 1960년대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매우 지적이며, 또 남성들에 
비해 당당하고 진취적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여성을 이해하는 척하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할 뿐이다.
  트뤼포의 관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삼각관계는 필연적으로 소외를 
야기하는데, 트뤼포는 이를 언어의 문제로 파악한다. 쥘의 독일식 엑센트는 그를 
타자와 분리시킨다. 쥘과 짐은 다른 트뤼포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언어가 가장 
중요한 작가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카트린의 문제는 언어로는 풀리지 
않는다.
  확실히 트뤼포는 같은 랑글루아와 바쟁의 아이이면서도 고다르처럼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성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쥘과 짐, 카트린 세 사람 사이의 관계는 가장 기초적인 정치집단, 즉 
가정에 대한 관심의 일면이기도 하다. 정치란 가정에서 시작되며, 따라서 
사랑이야기는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결혼이 불완전한 제도임을 
인정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굳이 부인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카트린의 죽음은 '성의 정치'에 관한 항거다.
  르누아르에게는 일상적 삶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열정을, 
히치콕에게는 영상의 힘과 감각을 배운 호모--시네마티쿠스 트뤼포는 이러한 
그의 주제의식을 때로는 서정적 스타일로, 또 때로는 낯선 사진 효과와 편집 
효과(스톱 프레임, 스위시 팬, 점프 컷 등)로 엮어나간다. 말하자면 대중성을 
충분히 갖추면서도 누벨 바그의 실험정신을 잃지 않는 조화로움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쥘과 짐"은 누벨 바그 영화를 따분하게 생각하는 
대중들에게조차 끊임없이 사랑받고 있다.
  "김지석"

  8과 2분의 1(Ott e Mezzo 1963)
  내면의 혼란과 불확실성 담은 독백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

  이탈리아 영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네오리얼리즘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8과 2분의 1"은 "무방비 도시"를 비롯하여 네오리얼리즘의 걸작 대본을 도맡아 
쓴 페데리코 펠리니가 네오리얼리즘과 결별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펠리니의 "8편 반째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크리스티앙 메츠)다. 
그리고 "달콤한 인생"에서 로마의 퇴폐적이고 나태한 부자들의 생활을 보도하는 
기자로 나온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주인공이다. 그는 신경 쇠약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장에 온 유명한 영화감독 '구이도'로 출연했다.
  구이도는 우주로 도피하려는 제3차 대전 생존자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그는 항상 동업자들과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와 배우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들은 그에게 영화에
대한 의견과 생각을 쉴 새 없이 요구하고 질문을 해대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침내 그는 현실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인류를 위한 메시지를 
담은 거창한 영화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며, 그 대신 자신의 혼란, 불확실성, 
타협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깨닫고 나서야 예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8과 2분의 1"은 흔히 모더니스트의 전통에 놓인 '의식의 흐름' 혹은 내적 독백의 
영화로 분류되는데, 여기서 펠리니는 주, 객관적 시각을 교차시켜가며 
관점의 복잡한 변화를 아주 기술적으로 구사한다. 구이도의 백일몽과 플래시백, 
악몽을 돋보이게 하는 건 '객관적' 장면들이다. 예를 들어 앞뒤로 꽉 막힌 상태를 
암시하는 시작 부분의 교통마비 장면은 구이도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도 그가 
느끼는 폐쇄공포증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또한 그가 자동차에서 
탈출하여 해방감을 느끼는 순간, 그의 발이 밧줄에 매달려 땅으로 당겨지는 
장면을 통해 자유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것 또한 구이도의 악몽임이 드러난다. 
  현실세계에 구이도가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의 성적 무능과 여성관계에서 
드러난다. 그는 두 가지 여성상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어린 시절 기억의 한 
자락을 차지하는 라 사라기나는 성욕과 순진함, 악마와 강력하고 두려운 
생명력의 상징이다. 그의 뮤즈, 클라우디아는 환상 속에서 항상 그에게 
무엇인가를 베푸는 이상적 여성이며 영원한 어머니 마돈나와 같다. 그리고 
현실의 그는 자신의 정부를 창녀처럼 분장시키려는 욕구를 느낄 정도로 억압되어 
있다.
  "8과 2분의 1"의 135분(시중에는 두 개의 비디오테이프로 나와 있다) 동안 
관객들이 보는 것은 구이도가 만들려고 하는, 또는 만들어놓은 영화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의 제작과정을 담은 영화라기보다는 영화가 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한 여행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구이도는 "정말 예술가로 불릴 
가치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의 창조적 생활에서 한 가지 것, 침묵에 대한 
헌신을 맹세해야 한다"는 말에서 힘을 얻어 원무를 연출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예술적 아이디어의 
고갈에 대한 작가의 두려움을 이 영화를 통해 그린 펠리니 자신의 미래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후 그가 스펙터클과 기억의 환상에 더욱 매달렸고, 단순한 
배경과 향수로 격하된 역사의 묘사와 자전적 표현주의 양식에 너무 깊이 빠졌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가의 삶과 상상력의 산물에는 예술가의 영감이 서려 있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낭만주의로 회귀하였다.
  "변재란 영화평론가"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Teni zabytykh Predkov 1964)
    시제도 구조도 없다. 기존 영화 형식을 팽개친 야심작
    세르게이 파라자노프(Sergei Paradzhanov)

  1964년, 서방세계의 영화는 '실험주의시대'라고 불릴 만큼 모더니즘과 
컬트주의에 휩싸였다. 누벨 '카이에' 바그 악동들(고다르, 트뤼포, 리베트, 
샤바를)은 막다른 영화로 치달렸으며, 돌아온 거장들(부뉴엘, 브레송, 펠리니, 
베리만)은 형이상학적인 주제에 매달렸다. 뉴욕에는 앤디 워홀 공장이 생겼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1960년대 이미지의 계몽주의 프로젝트 속에서 가장 
야심적이고 놀라운 성공을 거둔 이는 두 사람의 러시아인이었다. 한 사람은 
"안드레이 루블례프"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였고, 또 한 사람은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의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였다.
  파라자노프(1924__1990)는 평생 '저주받은 작가'의 길을 걸었다. 그는 
그루지야에서 태어나 아르메니아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언제나 변방의 
영화작가였다. 감옥과 감시 속에서 20년을 보낸 파라자노프는 옥중에서 800점의 
공예품을 만들고, 231편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23편의 구체적인 영화계획을 
세웠으나, 영화는 7편만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력에서뿐만 아니라 
영화 수사학적으로도 변방의 영화, 바깥의 영화, 예외의 영화를 만들었다.
  서방세계에는 "불타는 말"로도 알려진 세 번째 영화 "잊혀진..."은 그 이후의 
모든 영화감독들(파솔리니, 고다르, 펠리니, 헤르초크, 레네, 데릭 자만, 
배용균)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언제나 그들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모스 필름에서 영화를 만들던 파라자노프는 평생 동료였던 촬영감독 유리 
일리옌코와 함께 모스크바를 떠나 키예프의 도브젠코 스튜디오로 옮겼다. 거기서 
우크라이나 지방의 소설가 코치유빈스키의 원작과 카르파티나 지방의 민담을 
각색해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키는 비극을 만들었다. 그는 이 영화를 
12개의 에피소드로 나누어 촬영했다.
  서로 반목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이반과 마르치카는 사랑에 빠진다. 이반은 
마을을 떠나고, 마르치카는 기다린다. 기다리던 마르치카는 죽고, 이반이 돌아온다. 
새 아내 파라냐와 결혼하지만, 아내는 부정을 저지른다. 이반은 고통 속에서 죽는다.
  파라자노프는 우리 시대에 태어난 민담 소리꾼처럼 보인다. 그는 빅토리아 
왕조 이후의 대중소설이 보여주는 이야기구조나 조이스 또는 프루스트 이후의 
모더니즘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흐름' 모두를 부정한다. 또한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나 앙드레 바쟁이 정식화한 미장센도 거절한다. 파라자노프는 일시에 모든 
영화의 수사학 바깥으로 나와 문어체 영화의 상상력에서 구어체 영화의 
직관력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에 관한 모든 사고를 교란시킨다!
  파라자노프는 마치 멜리에스 이후의 모든 영화가 없었던 것처럼 자유자재로 
영화를 만든다. 영화는 시제를 잃고, 구조도 없으며, 형식도 없이 융단처럼 
직조된 콜라주의 만담이 된다. 드는 중국 국경에서 흑해 연안에 이르는 민담을 
끌어모아 그 이야기의 방식에 따라 스스로 말하게 만든다. 그 속에는 여러 개의 
목소리가 울려나오는 민속박물관의 창연함이 있으며, 잊혀진 민중들의 세상이 
살아나 벌이는 축제가 있다. 파라자노프의 영화는 이야기하는 자의 언어로 
노래하는 영화이며, 공식 문화에 저항하는 방언과 상소리와 속된 것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민중들의 다채로운 노래를 예술가의 영혼으로 듣는다. 이것이야말로 
아래에서부터 생각하는 영화이다.
  그러나 이 단 한 편의 영화로 파라자노프는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1960년대 
내내 침묵을 강요당한다. 그것은 "인민들 자신의 예술로 말하게 하라"는 레닌의 
교훈과도 다른 것이었다. 당 지도부는 틀린 것이며, 후루시초프는 사회주의 
영화를 죽인 것이다. 시간은 언제나 예술가의 편이 아니다. 파라자노프의 
유언이다.
  "정성일"

    알제리 전투(La Battaglia di Algeri 1965)
    생생히 되살아난 민족해방투쟁사
    질로 폰테코르보(Gillo Pontecorvo)

  역동적인 시네마 베리테의 스타일로 알제리의 혁명을 재연한다. 1965년에 
만들어진 질로 폰테코르보의 "알제리 전투"는 다큐멘터리와 드라마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알제리의 민족해방투쟁을 세부 묘사한 서사극이다. 식민주의의 
몰락을 염원하던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 열광했고, 영화의 선언을 과대 해석한 
우파 평론가들은 "사적 유물론의 메시지가 당신의 뼈 속 깊숙이 스며들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으며, 프랑스 정부는 영화의 배급을 금지시켰다.
  "알제리의 전투를 드라마로 재연한 이 영화에는 뉴스릴이나 다큐멘터리 
장면이 단 한 피트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이 자막이 없다면,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와 구분할 
화면상의 근거는 그리 많지 않다. 무대는 1957년의 알제리. 
민족해방전선(NLF)의 비밀 아지트를 포위한 프랑스 공수부대는 항복할 것을 
요구한다. 포위된 게릴라들 속에 앉아 있던 오마르 알리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상념에 잠기고, 무대는 시간을 거슬러 NLF가 재건되던 1954년으로 옮겨간다. 
  거리에서 야바위꾼 노릇을 하다 체포된 알리는 감옥에서 우연히 게릴라의 처형 
정면을 목격한다. 생명을 건 테스트를 거친 뒤에 게릴라 활동가로 변모한 그는 
암살과 파괴의 임무를 수행한다. 1956년 6월을 기점으로 투쟁이 본격화하자, 
이듬해 프랑스 정부는 공수부대의 함을 빌려 무력진압에 나서게 된다. 
레지스탕스 출신의 지휘관 마튜 대령은 체계적으로 NLF의 하부 세포조직을 
파괴하고, 오마르 알리는 항복을 거부한 채 폭사한다. 알리가 죽은 지 2년 뒤인 
1960년, 갑작스럽게 알제리 민중의 시위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오고 알제리는 7월 
2일 독립을 쟁취한다.
  1960년대 초반에 요리스 이벤스의 영향 아래 몇 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은 자신의 경험을 드라마 깊숙이 끌어들인다. 시위와 
총격전의 한복판을 마치 종군기자처럼 흔들거리면서도 집요하게 누비는 카메라, 
인공적인 조명을 배제한 자연 상태의 촬영은 마치 뉴스릴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강력한 현실성이 '보이는' 촬영 스타일이 전부가 아니다. 알제리 전부의 
지원 아래 만들어진 이 영화는 모두 알제리의 실제 장소에서 촬영되었으며, 촬영 
현장에 동원된 알제리 민중은 전투의 기억을 되살리며 울부짖었다. 엑스트라의 
표정이 살아 있다는 말이 이 영화만큼 적절한 경우도 흔치 않으며, 엔니오 
모리코네의 격정적인 음악에 실린 배우들의 진지함과 농축된 대사는 영화의 
차갑고 건조한 기조를 보상해준다.
  그 결과 "알제리 전투"는 스타일과 내러티브에서 이후 1970년대를 풍미한 
정치영화의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질로 폰테코르보 자신은 그 이후 다시는 
"알제리 전투"로 돌아오지 않았다. 1969년,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드러난 미국과 
프랑스의 위상을 우화처럼 다룬 "불살라라!"를 통해서 '전통적인' 영화도 
모더니스트만큼이나 저항적일 수 있음을 입증하려 했다.
  30년이 지난 오늘, 감독은 베니스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되었고, 그가 
출발점으로 삼았던 시네마 베리테는 캠코더의 보급에 힘입어 이제는 세계 
곳곳에서 민중들의 손으로 날마다 수없이 재탄생하고 있다. 그리고 "알제리 
전투"의 영광을 뒤로한 채 알제리는 혼란에 빠져 있다. 영화 속에 스쳐 
지나가는, 체포된 지도자의 대사 한마디가 이토록 뼈아플 줄은 감독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혁명은 일으키기도 어렵고, 지속해 가기도 어려우며, 승리로 이끌기는 더욱 
힘들다. 그러나 진정 힘든 문제들은 승리 이후에 닥쳐올 것이다."
  "김명준"

    페르소나(Persona 1966)
    예술영화 '묘지기'의 수사학적 과장
    잉마르 베리만(Ingma Bergman)

  펠리니는 그를 '중세의 음유시인'이라고 불렀고, 고다르는 낭만적이라고 했다. 
나라면 그를 낡은 예술영화의 묘지기라고 부르겠다. 잉마르 베리만이 스웨덴에서 
영화를 시작한 1946년은 정신분석학과 결합한 실존주의가 전후의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던 시대였다. 영화사적으로 보자면 네오리얼리즘이 그 새로움을 
천명하던 시기였고, 안토니오니와 고다르의 모더니즘 영화가 나오기 이전이었다. 
  "제7의 봉인"과 "처녀의 샘"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베리만은 말 그대로 
예술영화의 대부가 되었다. 그의 종교적 색채를 쏟아붓는 존재에 대한 사색과, 
특히 여성에 대한 '심오한' 정신분석, 영화 안에서 영화매체에 대해 언급하는 
성찰적 태도 따위는 영화의 예술성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후에도 
영화의 예술성은 종종 베리만식 형식과 내용에 견주어 논의되었다는 이야기다. 
타르코프스키가 그 좋은 예이다. 
  하지만 국제적 명성과 달리 그 당시 스웨덴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베리만을 
그리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그가 스웨덴식 사회주의의 집단성에 대한 고민과는 
달리 개인의 심리나 종교적 문제에 매달렸고, 이런 것들은 그 당시에도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완벽하게 고립시킬 수 있는 개인 소유의 섬에서 베리만은 
흔들리지 않고 영화를 만들어나갔다. "페르소나"는 "어두운 유리를 통해", 
"겨울빛", "침묵" 이후에 내놓은 두 번째 3부작 가운데 한 편이다.
  "페르소나"는 제목 그대로 가면과 그 가면 뒤에 있다고 추정되는 본질에 관해 
복잡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가 시작되면 제물로 올리기 위해 양을 죽이는 장면과 
못이 박힌 손 같은 기독교적 이미지와 함께 죽음과 악이 등장하는 스웨덴의 
초창기 영화, 클로즈업으로 확대된 커다란 거미, 영화 카메라와 스크린 따위가 
보인다. 그리고 침상에 누운 아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주인공 엘리자베스(리브 
울만)와 알마(비비 앤더슨)의 이미지가 중첩된다. 영화의 서두에서 "페르소나"는 
이처럼 꿈과 같은 형식으로 복제 예술과 공연 예술이 현실과 맺고 있는 관계, 
모성과 죄의식, 인간의 이중성 같은 문제들을 함축적으로 제시한다.
  이 영화에는 세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가 나온다. 남자들은 피상적으로 
등장하는 반면 여자들은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재현된다. 결코 사회적 가면을 
벗지 않는 여자 의사와 달리 여배우인 엘리자베스와 간호원인 알마는 그 가면을 
벗는 순간 정체성의 위기를 맞는다. 알마는 연극 "엘렉트라" 공연 도중에 언어를 
거부하게 되면서 예술과 남편, 아이를 포기하게 되는 엘리자베스를 돌보기 위해 
함께 섬으로 떠난다. 곧 결혼해 안정된 삶을 살고 싶어하던 알마는 위기에 빠짐 
엘리자베스에 동일화되면서 임신중절 수술이나 난교 같은 과거의 죄의식이 
여전히 자신을 억압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알마를 관찰하며 
가학적 쾌락을 즐기던 엘리자베스 역시 점차 그녀의 어두움의 세계로 끌려간다. 
그리고 자신 안에 숨어 있던 공포스런 죄의식과 조우한다. 
  영화는 이렇게 제어할 수 없는 공포를 가시화하기 위해 유대인 학살을 기록한 
필름과 베트남 전쟁의 분신 장면을 차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좀 자의식적인 
듯하다. 그러고 보면 위에서 이야기한 양과 거미라든지 못박힌 손, 정체성의 
융합과 분리, 그에 따른 혼란 같은 것들이 실제로는 어딘지 예술연하는 수사학적 
과장으로 보인다. 돌아보건대 베리만의 영화적 실험은 이제 그 시효를 다한 듯이 
보인다. 시간은 상징과 상투성의 차이를 급히 무화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아마도 
베리만이 이즈음의 영화사나 영화 연구에서 잊혀진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김소영" 

    무셰트(Mouchette 1967)
    영상, 소리를 몽타주한 새로운 지평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

  "무셰트"는 조르주 베르나노스가 1936년에 발표한 소설 "무셰트의 새로운 
이야기"를 로베르 브레송이 각색하고 연출한 영화다. 브레송은 '파편화'와 
'벗김'의 개념, 몽타주를 통해 영상과 소리를 결합하는 독특한 문체를 구상한 
영화작가다. 이 영화에서 브레송은 영화의 시각적 기능을 넘어서 해독적 기능을 
채용하여 시각적 이미지의 또 다른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무셰트는 아주 가난한 마을에 사는 열네 살짜리 소녀다. 그는 가슴을 
앓고 있는 어머니와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오빠와 6개월 된 남동생을 
돌보아야만 한다. 어느 날, 무셰트는 학교를 마치고 숲 속을 방황하다가 비를 
만나 길을 잃는다. 어둠 속에서 비를 피하던 무셰트는 밤 사냥을 마치고 통나무 
집으로 돌아가던 밀렵꾼 아르젠느를 만나게 되는데, 아르젠느가 "술김에 
삼림감시원 마티유를 죽였다"고 고백하자 무셰트는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겠다"고 제의한다.
  그러나 그날 밤 무셰트는 간질 발작에서 깨어난 아르젠느에게 강간당한다. 그 
후 아르젠느에게서 도망쳐 집으로 돌아온 그는 어머니에게 그날 밤에 겪은 
고통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어머니는 숨을 거둔다. 다음 날 아침, 식품가게 주인 
여자에게 지난 밤의 일이 발각되고, 아르젠느가 죽였다는 삼림감시원을 그의 
집에서 맞닥뜨리게 된다. 아르젠느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무셰트는 큰 
충격을 받는다. 무셰트는 어머니의 염을 맡은 노파에게서 어머니의 시신에 입힐 
모슬린을 받아 걸친 채 마을 어귀의 작은 연못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이 영화에서는 동양화의 여백 같은, 여운을 주는 침묵의 사용이 돋보인다. 
엄마가 죽고 난 뒤의 침묵, 자살하러 가는 길 위로 마치 다른 세계에서인 듯 
들려오던 사냥꾼들의 총소리와 성당의 먼 종소리가 멎은 후의 침묵, 무셰트가 
물에 빠질 때 나는 둔탁한 음향 뒤에 오는 침묵 따위가 그것이다.
  가벼운 부감 촬영은 브레송의 거의 모든 숏에 순환적으로 나타난다. 
"무셰트"에서도 그렇다.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이러한 카메라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 속에 항상 존재하는 억압상태를 느끼게 한다. 그가 수업을 마치고 교실에서 
나와 항상 적대감을 느껴온 급우들에게 진흙덩이를 던지기 위해 낮은 웅덩이 
비탈에 숨는 장면에서 특히 그렇다. 그러나 아르젠느가 그에게 죄를 고백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그를 앙각으로 우러러보게 된다. 이 순간만큼은 연약한 소녀가 
아니다. 고백을 듣는다는 사실이 그에게 어떤 힘(모성애)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짧은 앙각 촬영에 이어 카메라의 위치가 다시 높아지면 그의 사회문화적 
핸디캡(연약한 소녀)도 다시 나타난다.
  브레송은 이 영화에서 소음으로 음악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무셰트가 
식료품가게에 들르는 장면을 보자. 우선 가게에 들어가기 전에는 트럭에서 나는 
소음이 트레블링된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갈 때는 문에서 들리는 작은 종소리와 
커피잔에 설탕을 넣을 때 나는 소리가 클로즈업되고, 이어서 다른 손님이 들어올 
때는 작은 종소리가 들리면서 커피 마시는 소리가 클로즈업된다. 그러고는 
길가에서 들려오는 트럭 소리를 줌인하면서 무셰트가 떨어뜨린 커피잔 깨지는 
소리를 클로즈업한다. 여기에 무셰트가 나갈 때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어우러져 훌륭한 음악을 만든다. 
  브레송은 직업배우를 거부하고 모델이나 아마추어 배우를 선택한다. 그의 
배우는 초상화가의 모델 같다. 그는 이 모델에 등장인물이 투사되거나 
외형화하는 것을 막는다. 그래서 '모델'들의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도 원치 
않는데, 이 영화에서 무셰트는 두 번 웃는다. 하나는 무셰트가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는 여인의 웃음이고, 하나는 어머니 같은 웃음이다.
  자살하기 전에 무셰트는 연못가에 난 길로 트랙터를 몰고 가는 농부에게 의미 
모를 손짓을 한다. 죽기 전까지 그는 새로운 어떤 것의 계시를 기다린다. 그의 
자살은 끝나지 않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다. 마지막 부분의 클로드 
몽테베르디의 '성모마리아의 찬가'는 그가 구원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믿게 
한다.
  "지명혁 공륜새매체 부장"

    적과 백(Csillagosok Katona`k 1967)
    역동성이 암시하는 낙관적 세계관
    미클로시 얀초(Miklo`s Jancso`)

  미클로시 얀초의 영화는 안무가 잘된 춤과 같다. 카메라는 항상 이동하고, 
등장하는 사람들도 이리저리 움직인다. 카메라로 찍은 집단의식, 또는 총체극을 
보는 느낌을 주는데, 혁명과 반혁명, 억압과 해방이라는 주제를 추구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인 영화감독의 화면에서 이만큼 형식주의적인 성향을 발견하는 
것도 보기 드문 일이다.
  얀초는 헝가리 민속예술의 집단 군무와 그의 마르크시즘을 합칠 수 있는 
지점에 그의 영화세계를 세우고자 했다. 매너리즘이 없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이런 스타일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어떤 이혼으로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풍부한 힘이 그의 영화에는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세계는 흔히 '얀초의 
나라'라는 명칭으로 정의된다.
  "적과 백"은 "귀향"(1964), "검거"(1965)와 더불어 얀초의 초기 영화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옛 소련의 혁명 50주년을 맞아 헝가리와 소련이 
공동으로 제작한 이 영화에서 얀초는 혁명 축하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진술을 
하고 있다. 1만여 명의 헝가리 군 장교와 병사가 적군과 백군 사이의 내전에 
가담해서 소련과 세계혁명을 위해 싸우는 내용이지만, 영화는 승리를 향한 
영웅적인 투쟁기라기보다는 처형과 학살을 시각화한 발레 같다는 인상을 준다.
  흑백 필름으로 찍은 이 영화에서 흰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은 등장인물들은 
서로 구분이 가지 않는다. 말을 들어보지 않으면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서로 죽이고 체포하고 죽임을 당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적군의 
도덕적 우월성이 암시된다면, 그것은 그들이 백군보다 조금 더 엄격하고 
선택적으로 처형한다는 사실뿐이다.
  처형과 학살과 전투의 풍경을 따라가기 숏으로 묘사하면서, 얀초는 서로 
이기고 지는 힘의 부침현상을 하나의 롱 숏으로 보여준다.
  억압과 폭력의 종식을 향한 싸움은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갈등과 대립을 
낳는다. 반복하여 순환하는 화면 움직임은 쉽게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현실과 
역사를 가리키지만, 이 순환을 담는 스타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스타일은 
역동적이다.
  얀초는 결과보다는 '과정'에 방점을 찍는다. 얀초의 화면 스타일은 멈추지 않는 
힘만이 새로운 질서를 향해 갈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얀초의 1970년대 이후 
작품은 바로 이 역동적인 스타일에 기초하여 원숙하고 낙관적인 세계관을 
보여준다. "붉은 시편", "헝가리 광시곡"과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얀초는 한국에 온 적이 있다. 1988년에 서울 올림픽을 기념하는 문화행사의 
하나로 한국방송공사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찍었던 얀초는 그 때 어느 대학 
영화과 학생들과 가진 비공개 대화 석상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한다.
  "지난 시기의 우리 선배들은 현실에 지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싸웠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고 그럴 필요도 없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참을성 있게 웃으며 혁명하자."
  "김영진"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 1967)
    부부 은행강도가 '뉴시네마' 열다
    아서 펜(Arthur Penn)

  보니 파커와 클라이드 배로는 1930년대의 부부 갱이다. 금주령 
시대(Depression)의 인물인 이들은 감옥에서 나온 클라이드가 카페 여급 보니를 
만나면서 강도 행각을 벌이기 시작한다. 
  여기에 떠돌이 모스가 가담하고, 나중에 형 벅과 형수 블랑슈가 합세해 모두 
다섯 명이 한 차에 타고 차례로 은행을 턴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를 보고 
싶어하던 보니가 초원에서 어머니와 친척들을 만나는 장면은 참으로 시적이다.
  보니와 클라이드의 실제 사진을 보여주면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미국 '새로운 
영화(뉴시네마)'의 효시 같은 작품이다.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 된 이 영화는 에 주목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스"는 1967년 12월 8일자 
커버스토리로 이 작품을 대서 특필하기도 했다.
  아메리칸 뉴시네마는 베트남 전쟁이 기폭제가 되어 태동했다. 미군이 
베트남에서 자행한 폭력을 지켜본 젊은 영화인들 사이에서 이제까지의 미국을 
되돌아보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이지 라이더"는 이런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정점을 이루는 작품이다. 소자본으로 큰 돈을 번 이 작품부터 미국의 '새로운 
영화'가 번지기 시작한다.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보니와 클라이드의 전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클라이드의 형 벅과 형수 블랑슈는 도중에 부상을 입고 떨어져나가고, 모스마저 
아버지에게 잡혀 돌아감으로써 결국 보니와 클라이드만이 벌집 같은 기총소사 
앞에서 최후를 맞이한다(보니는 사실 전기의자에 앉아 죽어갔다). 이 기총소사의 
처절한 마지막 장면에서 보니가 성적 오르가슴을 느꼈을 것이라는 평이 있다. 
클라이드가 성 불구자여서 잠자리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평론가는 
1930년대의 은행은 서민을 착취하는 기관이었으며, 클라이드의 갱단은 이를 
공격함으로써 권위와 질서에 도전한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보니는 시를 썼다. 그들의 행각을 쓴 이 시는 일종의 발라드다. 그 마지막 
연은 이렇다. 
  "어느 날 그들은 함께 내려갈 것이다/아주 적은 사람들에겐 슬픔--/그리고 
법에게는 구원이리라/그러나 그것은 보니와 클라이드를 위한 죽음일 뿐."
  데이비드 뉴먼과 로버트 벤튼이 쓴 시나리오는 프랑수아 트뤼포에게서 영감을 
얻은 아서펜이 트뤼포의 "피아니스트를 쏴라"를 생각하며 지시한 것이라고 
평론가 폴린 킬은 적고 있다. 제작은 클라이드 역의 워렌 비티가 맡았다.
  폭력과 시정, 1930년대에 대한 향수를 발라드풍으로 구성한 이 작품에서 
폭력은 베트남 전쟁과 무관하지 않다.
  아서 펜은 이 작품의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내가 이 영화에서 묘사한 것은 베트남에서 벌어진 폭력과 관계가 있다는 
말을 덧붙일 수 있다. 또 클라이드가 죽는 장면을 촬영할 때 나는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을 생각했다."
  보니 역의 페이 더너웨이는 모자와 시거로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일본에서 붙인 제목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고, 원제는 
"보니와 클라이드"이다.
  "안병섭"

    저개발의 기억(Memorias del subdesarollo 1968)
    쿠바 혁명 뒤, 한 부르주아의 불확실한 미래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Toma`s Gutie`rrez Alea)

  쿠바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부르주아에게 그 
승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의미할 뿐이다. 그래서 부모와 아내, 또 친한 친구들이 
쿠바를 떠난다. 약 144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미국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택한다. 그 이별에 한 남자는 결코 슬프지도 고통스럽지도 
않다. 그렇다고 그가 혁명을 열렬히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지식인이며 
혁명 전까지는 부모에게 물려 받은 가구점을 경영하다가 이젠 아파트 임대로 
먹고 사는 브루주아다. 그는 홀로 하바나에 남는다.
  "저개발의 기억"은 세르지오라는 이 남자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현실과 
몽상을, 그리고 픽션과 기록(?)을 넘나들며 쿠바를 말한다. 그것은 
불연속선이고 산발적이며 변덕스러운 영상의 흐름으로 다가온다. 더욱이 그 
영상들은 세르지오의 끊임없는 내적 독백으로 강화되고, 또 어긋나기도 한다.
  세르지오는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떠난 만큼이나 멀리서 쿠바의 정치적 현실을 
관찰한다. 아내의 물건들이 남아 있는, 또 이미 소원해진 싸우던 소리가 생생히 
녹음돼 과거를 되살리는 아파트에서 그는 망원경으로 하바나를 둘러본다. 거기엔 
미국이 쿠바 개입 초기에 세웠다가 혁명 후에 제거된 거대한 독수리상의 모습이, 
하바나 항을 지키는 수비대의 모습이, 미국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준비한 
탱크의 모습이 보인다.
  이 먼거리 관찰과 변증법적으로 조우하는 것은 영화의 주축을 이루는 
세르지오와 여인들의 관계다. 그는 과거와 현재의 여인들을 통해서 쿠바를 
말하고 혼란스런 자신의 정체성을 읽는다. 그에게는 십대에 경험한 창녀촌의 
여자들, 그를 지겨워하며 떠나버린 아내, 성적 몽상의 대상인 청소년, 거리에서 
유혹한 엘레나, 심지어는 그의 어머니까지도 하나의 감정이나 관념을 지속지키지 
못하고 전체를 보는 눈이 결여된 열등한 존재다. 나아가 그들은 저개발의 
상징이다.
  그가 유일하게 만족한 여성은 독일인의 피를 이은 한나였다. 쿠바처럼 
후진하는 곳이 아닌, 무언가 진정한 일들이 벌어지는 유럽에서 유럽인처럼 살고 
싶어하는 세르지오에게 한나는 그 모든 것을 표상한다. 그러나 현재의 그가 
관계를 맺고 있는 엘레나는 모든 면에서 저개발을 느끼게 할 뿐이다. 엘레나가 
지니는 저개발을 아내의 옷으로 갈아입히고 성적으로 이용하지만, 그는 참을 수 
업는 경멸감을 느낄 뿐이다. 결국 그 경멸의 대상에게 성폭행자로 고소당하지만.
  순간적이고 산발적인 회상들, 정지되고 파편화하는 움직임들, 쿠바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보여주는 뉴스 영화와 사진들, 그리고 영상에 질의하고 
또 그와 어긋나는 세르지오의 내적 독백은 이 영화를 혁명이 한 개인에 미치는 
영향을 변증법적 형식으로 그려낸 강도 높은 보고서로 만들었다. 그렇다고 이 
영화는 우리를 설득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끊임없이 질문을 받을 뿐이다.
  혁명 이후 지금까지 쿠바 영화산업기구의 요직을 맡고 있는 구티에레스 
알레아는 이 영화를 통해 사회변혁을 위한 영화의 미학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으며, 라틴아메리카의 제3영화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쿠바의 사회주의나 거기서 꽃피웠던 영화 문화가 이제는 분명히 쇠퇴의 길로 
들어섰지만, 아직도 그는 영화를 통해 그 사회의 모순과 딜레마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최근의 "딸기와 초콜릿"(1993)이 그 예다.
  "추진숙"

    만다비(Mandabi 1968)
    아프리카가 그린 아프리카 영화
    우스만 셈벤(Ousmane Sembe`ne)

  아프리카 세네갈의 탁월한 영화감독인 우스만 셈벤은 제 3세계 
지식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민지 본국 유학이라는 경로를 밟지 않았다. 
그는 십대에 이미 자동차 수리공과 벽돌공을 거쳤고, 단지 배고픔 때문에 군대에 
지원했는가 하면, 고향에 돌아와선 철도 대파업에 참가하고, 파리의 공장과 
마르세이유의 부두노동자로 노동조합 활동에 몰두했던 노동자 출신 지식인이다.
  그는 이런 경험을 소설로 쓰게 되는데, 결국 프랑스어로 써야 하는 현실 
앞에서 마르크시즘과 아프리카 민족주의를 대중에게 전파하고 검증하는 수단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특히 문자화된 예술형식으로는 대부분이 문맹인 동포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없다는 깨달음은 그가 기꺼이 영화로 관심을 돌리는 
배경이 되었다.
  늦깎이 영화감독이 된 셈벤은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여덟 편의 영화를 
만든다. '우편환'이란 뜻의 "만다비"는 같은 이름의 소설을 각색한 그의 네 번째 
영화이자 첫 컬러 영화이다. 프랑스어와 울로프어판이 있는 이 영화는 
국립프랑스영화센터(the Centre National de la Cinematographie Francaise)의  
부분적인 자금 지원에 힘입어 만들었다. 훌륭한 영화감독이라도 아프리카에서는 
영화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다비"는 문화적, 경제적 '저발전'에 대한 드라마다.
  두 아내를 거느린 남편의 실업은, 그가 프랑스어나 울로프어를 읽고 쓸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교육의 부재를 암시한다. 더욱이 그는 주민등록증이 없어서 
파리에서 청소부 일을 하는 조카가 보낸 우편환을 현금으로 바꾸지 못한다. 그의 
보든 재난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우리는 여기서 대부분의 동포들처럼 
지금까지 주민등록증 없이 살아온, 그리고 그에 따른 불이익에 대한 정보 없이 
살아온 50대 남자를 볼 수 있다. 동시에 현대적인 삶의 욕구들이 전혀 의지할 데 
없는 한 남자에게 갑자기 가하는 폭력을 불 수 있다.
  그의 이후 작품들에 비하면 소박하지만 이 영화에는 세네갈 사회의 모순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통찰이 배어 있다. 주인공 디엥은 허풍선이에다 보수적이고 
권위적이다. 그는 두 아내만큼의 지혜도 없다. 영화는 그가 살고 있는 작은 
세계의 사소한 탐욕과 질투뿐만 아니라 이 남자를 주변의 악덕 고리대금업자의 
자비에 맡겨버린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관료들과 탐욕스런 사업가를 비판한다.
  영화는 이런 모든 과정을 배우들의 연기, 특히 주인공의 몸짓과 트림, 
불평하는 소리로 채워간다. 이 영화에는 셈벤의 작품에서 계속 나타나는 
연출상의 특징이 있다. 그는 어떤 특수 효과도 거부한다. 야외 촬영과 
비직업배우의 등잔도 또 다른 특징이다. 연기는 자연스럽고, 카메라는 예술적 
기교나 형식적 탐색에 집착하지 않는다.
  널리 배급되어 세네갈 영화, 나아가 아프리카 영화에 주목하게 만든, 최초의 
세네갈 영화인 "만다비"를 통해 우리는 관료주의와 고립된 전통주의자 사이의 
갈등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적, 사회적 차원의 변화를 
통해서만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는, 풍부하게 채색된 아프리카 사회의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변재란"
 
    만약에...(If... 1968)
    기존 체제 거부하는 '학생'들의 반란
    린제이 앤더슨(Lindsay Anderson)

  "언제나 마음은 태양"에서 "위험한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문제학생들에게는 
'좋은' 선생이 있었고, 그 덕분에 학생들은 곧 평정을 찾았다. 하지만 '혁명의 
해'인 1968년에 만들어진 "만약에..."는 이런 화해를 거부한다. 
  이 도전적인 영화는 제목이 같은 키플링의 시와 장 비고의 "품행 제로", 
데이비드 셔윈과 존 홀리트의 '십자군들'이라는 대본에 힘입은 린제이 앤더슨의 
특별한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의 힘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찾아야 한다. 1950년대 중반에 일어난 영국의 변화, 다시 말해서 신좌파의 
등장과 프리시네마의 탄생, 브레히트의 재발견과 존 오스본 같은 연극계의 '성난 
젊은이'들의 활약뿐만 아니라 린제이 앤더슨을 주축으로 "사이트 앤 사운드"를 
통해 펼쳐진 비평활동이 두드러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다큐멘터리 리얼리즘'(존 오스본), 놀랄 만큼 초현실주의적인 
사건들(프리시네마), 권위를 전복하고자 하는 충동들(신좌파), 그리고 자기 성찰 
장치를 사용한(브레히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영화란 감독 개인의 다기 
진술의 장이고, 그것이 동시대 사회에 대한 주석으로 기능해야 하며, 영화감독이 
도전하고자 하는 기본 가치에 대한 견해가 반영돼야 한다는 앤더슨의 견해는 
여기서 참여가 결여된 자유주의의 허약함에 대한 주석으로 바뀐다.
  영화는 영국의 한 공립학교를 배경으로 권위주의적인 제도 안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변화를 추구하려는 학생들의 작고 큰 반란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물리적 환경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영화의 핵심은 아니다. 그것은 
권위에 의한 개인의 억압을 보여주기 위한 사회의 축도다. 동시에 지성과 
상상력이 분리돼 있는 체제에 대한 은유다. 공립학교의 환경은 개인의 창조적인 
발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아의 분열과 파편화를 초래할 뿐이라는 게 
앤더슨의 생각이다. 
  "만약에..."는 고전적 극영화에 전형적인 일종의 리얼리즘의 경계 안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브레히트적 장치와 초현실주의적 영상의 방해를 받는다. 
브레히트적 장치는 여덟 개의 시퀀스를 대표하는 여덟 개의 소제목과 함께 컬러 
장면 안에 흑백 장면을 집어넣은 것과 관련된다. 연대기적으로 배치된 '학교 
기숙사--신학기', '학교--한 번 다시 모이다', '십자군'이라는 자막은 색채와 흑백 
장면이 교차하는 편집과 더불어 관객이 영화매체에 대해 깨닫게 하는 '거리 
두기' 장치로 기능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환상일 수도 있는 일들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환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앤더슨은 언젠가 "그것 모두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서 
알 수 있듯 환상 장면(총 맞은 교목이 서랍 안에서 부활하는 장면, 주인공들이 
카페에서 나체가 되어 뒹구는 장면, 복도에서 교장 부인이 벌거벗고 달려가는 
모습, 학생들이 학부모와 교사들과 전투를 벌이는 마지막 장면)은 사실과 환상을 
구별하기보다는 그것이 섞이고 침투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힘은 무엇보다도 체제(?)에서 해방된 믹(말콤 맥도웰)이 
기존 질서의 파괴라는 최종적 행동에 돌입해 행동의 주체이자 창조자가 된 데 
있다. "만약에..."의 미덕은 결국 기존 체제에 순응하고만 다른 대중적 장르 
영화들을 초월했다는 사실이다.
  "변재란"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 1968)
    모든 공상과학영화의 '아버지'
    스텐리 큐브릭(Stanley Kubrick)

  스탠리 큐브릭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영화가 철학이고 종교일 수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600만 달러로 시작한 대작 
SF영화가 1000만 달러짜리 언더그라운드 영화로 탈바꿈한 것도 
기적이지만(메이저 영화사가 멋지게 당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메이저 
스튜디오가 만든 사상 최고의 실험영화인 셈이다), SF영화가 이처럼 진지하게 
문명을 비판하고 철학적, 종교적 주제를 심오하게 구현했다는 것도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다.
  큐브릭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완벽한 독립영화 작가이다. 메이저의 돈을 
끌어다 쓰면서도 그의 영화는 수시로 메이저 영화의 관습에서 벗어난다. 이 
작품에서도 그는 내러티브의 관습적 전개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경이로운 우주의 
공간과 우주선의 기하학적 구도가 영화 전반부에 걸쳐 플롯보다 더 중요하게 
제시되는 것이다. 특히 '푸른 다뉴브'의 멜로디와 함께 하는 우주선의 '기계 
발레'는 데이비드 린의 "사막"과 더불어 영화사에서 전혀 뜻밖이면서도 가장 
아름답고 놀라운 장면일 것이다. 
  이 작품의 궁극적인 주제는 '신'의 문제와 '기술의 진보에 따른 인간의 
비인간화'이다. '인류의 기원'편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진보는 도구와 무기를 
발견하고 만드는 과정과 일치한다. 그러나 기술의 진보는 곧 인간의 비인간화를 
낳고, 마침내 2001년에 이르면 컴퓨터가 더 인간적인 감성을 지니게 된다. 
우주선 디스커버리 호의 통제 컴퓨터 핼(철자로는 HAL이지만 발음은 마치 
'지옥'처럼 들린다)은 자신의 기능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고 조그만 실수도 수치로 
생각한다. 그리고 마침내 우주 비행사 데이브가 자신을 해체한 때 핼은 
'데이지'를 부르며 죽어간다. 그는 일면 빅 브라더이면서도 프랑켄슈타인이었던 
것이다.(HAL의 철자를 하나씩을 뒤로 넘기면 IBM이 된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또한 과학문명의 발달은 '커뮤니케이션'의 발달과 맥을 같이하는데, 
'커뮤니케이션'은 기술이 발달할수록 '간접적'으로 되며, 그에 대한 신뢰가 
커질수록 진실이 왜곡되기 쉽다고 본다. 여기서 21세기의 많은 사람들은 
통신수단을 통한 간접적인 커뮤니케이션만을 행하며, 또한 핼은 절대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완벽한 컴퓨터라는 절대적인 신뢰가 커뮤니케이션의 왜곡을 낳고 
불행한 사고를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점차 간접적으로 변해가는 커뮤니케이션 
때문에 인간적 유대관계도 점차 상실되어 가는 것이다.
  목성으로 향하던 데이브는 바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자신의 늙은 모습, 
임종, 그리고 새로 태어나는 아기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탄생'의 
의미에 이르러 큐브릭은 비로소 '신'의 존재를 묻는다. 영화의 시작('인류의 
기원')에서부터 플로이드 박사의 딸의 생일, 우주 비행사 프랭크의 생일, 그리고 
마지막 장면인 데이브의 재탄생에 이르기까지 '탄생'은 곧 생명의 존귀함과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신비를 신에게 물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미미함을 의미한다(이를테면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이 신의 존재에 비하면 
부처님 손바닥에서 노는 손오공 같다고나 할까). 그런 면에서 데이브는 예수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는 예수가 때때로 다윗(David)의 
아들로 일컬어진다는 점(마태복음 1:1)에서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큐브릭은 이 모든 주제를 논리적으로 제시하기보다는 관객 
스스로 경험하고 느끼게 만든다. 음악과 구도, 특수 효과 등은 이를 위해 
세심하게 배려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SF영화는 이러한 "2001년: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주선과 공간, 스타게이트의 이미지 같은 독창적인 
세트 디자인과 막스 오필스에 비견될 만한 카메라 움직임,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학적인 주제에 이르기까지 이 '우주의 대 서사시'는 이제 신화가 되었다.
  "김지석"

    테오레마(Teorema 1968)
    성 향연 끝에 몰락하는 가족
    피에로 파올로 파솔리니(Piero Paolo Pasolini)

  당신들을 지옥과 천국이 마주보는 문으로 안내하겠다. 파솔리니의 영화 가운데 
카톨릭 보수파들에게 가장 많이 비난받았던 작품인 "테오레마"에서 부르주아 
가족은 그리스도 같기도 하고, 때로는 악마 같기도 한 신비한 인물 테렌스 
스탬프의 성의 향연에 초대받는다. 그것은 지옥으로 가는 길일까, 아니면 
천국일까.
  1961년에 "아카토네"로 이탈리아의 가장 논쟁적인 감독으로 국제영화계에 
알려지게 되는 피에로 파올로 파솔리니. 그 당시 이탈리아 영화계는 
네오리얼리즘의 시대를 끝내고 펠리니와 안토니오니를 중심으로 한 모더니스트 
시네마의 새 장을 열고 있었다. 그 두 거장에 비하면 파솔리니는 오히려 
주변부의 아방가르드였지만, 바로 그 주변성이 그의 영화를 오늘날에도 여전히 
날카로운 칼처럼 휘번득이게 한다.
  이미 1950년대에 시인이며 소설가로서 몇 편의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던 
파솔리니는 이탈리아 지식인의 두 가지 짐, 카톨릭과 그람시의 마르크시즘을 
그의 영화 속으로 끌어들였다. 도시 빈민에 대한 그의 애정과 카톨릭에 대한 
재해석은 "마마 로마"(1962)와 "성마태복음"(1964) 등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비기독교적 신화에 대한 매혹과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한 비판 때문에, 
카톨릭계는 물론 좌파 역시 그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 신비주의에 대한 
경도와 마르크시즘적 태도 사이의 화해 불가능한 모순은 파솔리니 영화의 특징이 
됐고, 그는 회화와 르포르타주, 연극과 비평을 넘나들며 그 모순들을 더욱 
다면화했다. 따라서 더 많은 적들이 생겨났다. 거기다 그의 육체 자체가 일종의 
실험실이자 논쟁의 장이었다. 뿌리 깊은 카톨릭 사회에서 파솔리니의 동성애 
성향은 스캔들 이상의 파문이었기 때문이다. "캔터베리 이야기"(1972), 
"살로--소돔의 120일"(1975) 따위의 영화에서 그는 과잉적 성과 폭력, 신성 
모독을 다뤘으나, 오히려 죽음 자체가 역설적으로 자신의 영화를 재연하는 무대 
혹은 장이 됐다.
  "테오레마"에서 테렌스 스탬프는 부유한 이탈리아 가정에 머물면서 가족들을 
차례로 유혹하는 역을 맡는다. 그가 하인과 아들, 어머니와 딸,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성관계를 갖고 떠나자 이들은 모두 서서히 자기 파괴의 
길로 들어선다. 다양한 현상을 주재하는 추상적 법칙이라는 뜻의 영화 제목 
"테오레마"는 바로 이 신비한 손님을 가리키며, 다섯 가족의 운명은 바로 그의 
손에서 결정된다. 이 영화에서 성애는 신과 인간의 충일한 관계에 대한 
은유이지만, 그 관계는 테렌스 스탬프가 갑작스레 떠남으로써 파괴된다. 랭보를 
읽는 테렌스와 함께 보낸 천국의 나날들이 지옥의 한철로 바뀌는 수난은, 사실 
신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순간이기도 한 셈이다.
  실현되지 않은 약속의 땅을 기다리며 사막과 같은 밀라노에서 몰락하는 한 
가족의 우화는 사실 종교와 마르크시즘 사이에서, 네오리얼리즘의 유산과 자신의 
'신비적 리얼리즘' 스타일 사이에서 동요하는 파솔리니 자신에 대한 영화적 
성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동요는 노상의 비극적 죽음으로 끝난다. 1975영, 
파솔리니를 살해한 열 일곱 살의 청년은 그가 자신을 유혹했기 때문에 죽였다고 
진술했다.
  "김소영"

    루시아(Lucia 1969)
    쿠바 혁명, 그 장밋빛 희망의 메시지
    움베르토 솔라스(Humberto Sola`s)

  "루시아"는 움베르토 솔라스가 스물 여섯 살에 만든 대작이다. 그는 열네 살에 
이미 카스트로가 이끄는 반란군의 도시 게릴라였으며,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섯 번째 작품인 "루시아"는 구티에레스 알레아의 
"저개발의 기억"과 더불어 국제적으로 찬사를 받은 쿠바의 혁명영화다.
  솔라스는 영화의 소재를 역사적 사실에서 끌어온다. 역사란 현재를 바로 보기 
위한 대화를 열어줄 뿐 아니라 인간의 경험은 모두 역사성을 간직하기 때문이다. 
"루시아"는 쿠바 근세사의 중요한 시기를 여성들의 사랑이야기로 전환시켜 
탐구한다. 영화는 세 개의 드라마로 나뉘는데, 그 주인공들의 이름은 모두 
루시아다.
  첫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루시아는 1895년, 그러니까 스페인 식민시대의 
귀족이다. 거리에는 반란군의 시체가 나뒹굴고 그의 남동생도 농민들과 연대해 
싸우지만, 루시아는 친구들과 한담을 즐기거나 놀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루시아는 그에게 접근하는 스페인 군의 앞잡이 라파엘과 사랑에 빠지고, 
그것은 곧 동생의 죽음을 가져오는 배신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는 라파엘을 
찔러 죽임으로써 복수한다. 끌려가던 거리에서 루시아는 한 미친 여자의 위로를 
받게 되는데, 그 여자는 전장에서 스페인 군에게 강간당한 뒤 "쿠바여 
깨어나라!"고 절규하며 거리를 헤매는 수녀다. 
  두 번째 이야기는 마카도의 독재가 바티스타의 독재로 바뀌던 1930년대 
정치투쟁 속의 루시아를 다룬다. 그는 담배 공장에서 기계적인 일을 하면서, 
혁명운동가인 알도와 나누었던 사랑을 회상한다. 그와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도 
행동가가 되어 시위에 참여했던 일, 알도의 경찰 습격, 마카도를 타도했을 때 
그들이 잠시 누린 행복, 그리고 알도를 죽게 한 폭력적인 정치활동 등이 
루시아의 내레이션과 함께 재생된다. 이야기는 알도의 아이를 가진 채 홀로 남은 
루시아가 카메라를 직시하는 것으로 끝난다.
  마지막 이야기에 등장하는 루시아는 혁명 후의 농촌 노동자다. 질투심 많은 
남편 토마스는 루시아를 집 안에 가두어 두려고만 한다. 때문에 루시아는 일하러 
가는 것은 고사하고밖에 나가는 일조차 조심스럽다.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의 
말을 따르지만 루시아의 불만은 커져만 간다. 그러다 루시아는 문맹 퇴치를 위해 
아바나에서 온 혁명군에게 글을 배운다. 그가 쓴 첫 글은 남편에게 남긴 "난 
떠나요. 난 노예가 아니에요"다. 그러나 루시아는 토마스에게 돌아온다. 일도 
하고 사랑도 할 것이라면서. 이야기는 루시아와 토마스가 바닷가에서 엉켜 
싸우는 것으로 끝난다.
  이 세 이야기는 모두 형식을 달리하고 있다. 각 형식은 그것이 다루는 역사적 
시기와 계층을 가장 정확하고 자세하게 제시하는 전략이 된다. 식민시대 
귀족계급의 파괴적 열정은 서사적 멜로드라마로, 혁명가와의 사랑에 대한 
중산층의 회고는 관습적인 드라마로, 쿠바의 뿌리 깊은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노동계급의 투쟁은 경쾌한 코미디로 그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지배적 
형식들을 그 속에서 사용한 다양한 양식을 통해 전복하기도 한다. 특히 들고 
찍은 카메라로 현실감을 증폭시켜 지배적인 형식의 신비를 벗겨버림으로써 
장중하고도 우아한 서사 멜로드라마나 서정적인 사랑의 회고,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익살의 차원을 변환시킨다.
  솔라스의 이 형식적 전략은 여성을 중심 인물로 택한 전략과 일치한다. 그에게 
여성의 이야기는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변혁의 필요성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이중적 억압을 다룸으로써 혁명영화의 극적 잠재성을 
배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이야기들을 장엄한 비극으로 혹은 모호한 
슬픔으로 전하던 솔라스는 마지막 이야기에서 낙관적인 결론을 내린다. 혁명이 
여성--인간--사회가 갖는 모순을 모두 풀어줄 수 있다는 듯이.
  "주진숙"

    죽음의 안토니오(Antonio das Mortes 1969)
    브라질 민족영화운동의 결정체
    글라우베르 로차(Glauber Rocha)

  쿠바 혁명의 승리는 라틴아메리카의 민족주의 운동에 불을 붙였으며, 영화를 
통한 민족주의와 탈식민화의 구현도 1960년대 말에 정점에 달했다. 시네마 
노보는 쿠바의 혁명영화와 더불어 진보적 영화미학의 정수를 국제무대에 알린 
브라질의 민족영화운동을 일컫는다.
  글라우베르 로차는 브라질 영화사 시네마 노보의 핵심적인 이혼가이자 
실천가이다. 그는 브라질 영화사나 시네마 노보의 이론을 담은 책과 글을 통해 
브라질, 나아가서는 라틴아메리카 구유의 영상언어를 탐색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지배적인 영화에 대한 반역이면서도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아우르는 
것이어야 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굶주림과 폭력의 미학이 바로 현실의 핵심을 
올바르게 설명하는 방법이었다. 굶주림은 브라질 사회의 본질이며, 그것을 가장 
당당하게 표명하는 실이 폭력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미학의 성취를 위해 로차는 브라질의 다양한 민중문화적 
요소들--민중종교, 신화, 전설, 음악--을 영화로 끌어들인다. 억압에 대한 영원한 
반항인 동시에 현실 도피라는 양면성을 가진 민중문화에서 로차는 진보적인 힘을 
끌어내고자 시도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죽음의 안토니오"다. 영화의 배경은 가뭄과 빈곤의 땅인 
브라질 북동부의 황야다. 거기에는 억압받고 무력한 민중이 있고, 그들의 편에는 
천년 도래를 전파하는 성녀와 의적의 무리가 있다. 그들의 반대편에는 
농지개혁을 반대하며 농민을 착취하는 눈먼 지주가 있고, 그의 정부가 있고, 
그를 보좌하면서 황야를 산업화하고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자고 주장하는 
하수인이 있다. 그리고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인물로 알코올에 찌들어 현실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교수가 있다.  
  이곳에 '죽음의' 안토니오가 나타난다. 그는 의적 대장 코이라나를 죽이기 위해 
지주가 고용한 킬러다. 코이라나에게 치명적인 상해를 입히는 데 성공한 
안토니오에게 성녀는 민중들은 형제이며, 형제를 죽이는 자는 심해로 떨어질 
것이며, 코이라나가 죽게 되면 민중도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녀는 
그에게 '끝없는 전투' 혹은 '끝없는 불길 속을 걷기'를 촉구한다.
  코이라나의 죽음은 안토니오와 교수를 혁명적인 투사로 만들고, 또한 아프리카 
토속종교를 대표하는 안타오라는 수동적인 흑인을 전사로 만든다. 그러나 다시 
고용된 킬러들에게 민중들이 모두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에 안토니오와 
교수가 나서 킬러들을 죽이고, 성녀를 말 뒤에 태운 안타오는 지주를 죽인다. 
이제 교수는 코이라나의 칼과 총으로 무장하고, 안토니오는 마을을 떠난다. 
마지막으로 안토니오는 셸 석유회사의 간판이 걸려 있는 현대적인 거리를 
걷는다. 그 간판이 표상하는 새로운 식민주의가 그에게 주어진 끝없는 전투의 
새로운 장이라는 듯이.
  서부극의 틀과 주인공을 패러디한 듯한 이 이야기의 의미를 로차는 브라질의 
전설과 신화를 이용해 확장한다. 전설적인 실제 의적의 이야기를 빌려와 그 
혁명적 부활의 의미를 말하며, 악을 상징하는 드래곤을 찔러 죽인다는 게오르그 
성인의 신화로 흑인 혁명역량의 토대를 마련한다. 
  또한 로차는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담은 인물 유형들의 갈등과 투쟁을 
결코 편안히 보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수평적이고도 깊이 있는 공간을 창출하는 
카메라, 원사와 길게 찍기로 보여주는 지형과 인물들의 움직임, 브라질 고유의 
색채를 재현한 의상과 세팅, 양식화한 연극적 연기, 칼싸움, 영상에 동반하는 
음유시적인 노래 같은 양식적 요소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일깨우고 비판적으로 
참여하게 한다.
  저개발 사회에 공명을 일으킨 이 우화적인 영화를 만든 뒤, 로차는 정부의 
탄압을 피해 브라질을 떠났다. 망명 준 기록영화 같은 소수의 작품을 만들긴 
했지만, 이 영화나 "검은 신 하얀 악마"에서 보여준 브라질적 미학의 성취를 
다시는 재현하지 못한 채 1980년에 마흔 셋의 나이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주진숙"

    콘돌의 피(El Sangre de Condor 1969)
    볼리비아 인디오의 삶에 대한 탁월한 묘사
    호르헤 산히네스(Jorge Sanjins)

  잉카족의 성스러운 호수 티티카카 호에서 찍은 "우카마우"는 볼리비아 최초의 
장편 극영화로 기록돼 있다. 볼리비아 영화협회가 제작하고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던 호르헤 산히네스(1936__)가 연출한 이 영화는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인디오의 모습을 개인적이면서도 다소 탐미적으로 담았다.
  그러나 '우카마우'는 영화 제목이 아니라 제3세계 민중영화운동의 상징적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쿠데타로 등장한 군부정권이 정부 차원에서 제작한 이 
영화의 상영을 금지하자, 호르헤 산히네스는 "우카마우"의 대중적 명성을 살려 
자신의 영화 그룹에 '우카마우 집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카마우는 
아이마라어로 '올바른 길'을 뜻한다. "우카마우"에서 그것이 아내를 잃은 
인디오가 메스티조 상인에게 복수하는 민중투쟁의 길을 뜻하게 된다. 우카마우 
집단은 그 '올바른 길'을 "민중영화는 민중 속에서 탄생하고, 민중적 미학을 
담으며, 민중에게 보여져 그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민중노선'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콘돌의 피"는 '우카마우 집단'의 첫 영화다.
  안데스 산지의 칸타 마을. 인디오인 이그나시오는 술에 취해 아내 파울리나를 
괴롭힌다. 하나뿐인 자식을 전염병으로 잃었기 때문이다. 이그나시오는 
파울리나를 때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파울리나는 남편이 자기 자신을 때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다. 그 원인을 밝혀나가던 이그나시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바로 
마을에 들어온 미국 평화봉사단(볼리비아에서는 '진보부대'라고 불렀다)이 
자신들이 개설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은밀하게 불임시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농민들을 조직하여 '여성의 배에 죽음을 뿌리는' 선교사와 병원과 
평화봉사단을 습격한다. 
  곧이어 닥친 탄압. 간신히 생명을 건진 그는 도시에 나가 노동자가 된 동생 
시스토를 찾아간다. 시스토는 자신의 뿌리를 떠나 메스티조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다. 의사는 이그나시오의 출혈이 심하기 때문에 급히 수혈을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말한다. 시스토는 피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지만 헛수고다. 
혈액을 가진 백인 의사들이 인디오 때문에 자신들의 사교모임을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그나시오는 죽는다. 시스토는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을 깨닫고 인디오로서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마지막 장면은 하늘로 치솟은 
총구들을 긴 정지화면으로 잡고 있다.
  "콘돌의 피"는 물론 칸타 현지에서 촬영됐다. 이 영화는 비록 출연자 모두가 
비전문배우인 농민이고 거의 자연광과 들고 찍기에 의존하고는 있지만, 민중적 
삶의 양태를 탁월하게 담아내고 있으며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에 강렬한 동의를 
표시하고 있다. 영화는 극적 맥락, 인물 구성, 음악, 리듬 등 모든 면에서 
대립적인 구조로 짜여져 있다. 아이들이 뛰노는 마을 잔치와 아이들의 인형을 
땅에 묻는 장면, 푸쿠나(피리)를 부는 인디오 농민과 로큰롤에 맞추어 춤추는 
평화봉사단, 전투적인 이그나시오와 백인 여배우의 사진을 벽에 붙여놓은 도시의 
시스토와 고상한 의사들의 사교모임을 대조시키는 호르헤 산히네스의 관점은 
매우 분명하다.
  이야기 구성은 파울리나가 시스토에게 들려주는 회상 형식을 취한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플래시백을 자주 사용하는데, 그것이 농민들의 이해를 
가로막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또한 영화는 지나치게 개인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농민들에게 왜 미국의 평화봉사단이 불임시술을 
하는지 밝히지 않는다.
  이런 부분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콘돌의 피"는 제3세계 전투적 
민중영화운동의 이정표와 같은 작품이다. 볼리비아 정부는 1971년에 미국의 
평화봉사단을 추방하는데, 이때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콘돌의 피"다. 
우카마우 집단은 이후 더욱 집단적이고 전투적인 "민중의 용기"(1971), "제1의 
적"(1974) 등을 발표한다. 비록 1980년대 이후의 활동은 미약해졌지만 우카마우 
집단의 믿음과 실천을 간단히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정하"

    이지 라이다(Easy Rider 1969)
    파국 예정된 자유와 평등을 향한 질주
    데이스 호퍼(Dennis Hopper)

  1960년대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원자폭탄으로 얼룩진 20세기에 대한 
비판의식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매카시즘으로 얼어붙었던 1950년대를 지나 
60년대에 도착한 미국은 좌파 경향의 사회운동(흑인, 여성의 권리운동과 
반전운동)과 보수주의자들의 반격으로 흥분과 혼돈이 교차하고 있었다. 
사회운동은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날로 심각해져 가는 베트남 전쟁과 
거듭되는 암살사건(케네디 형제, 마틴 루터 킹과 말콤 X)은 1970년대의 패배를 
암시하고 있었다.
  장르--스타--스튜디오 시스템의 공식으로 운영되던 할리우드 영화는 급격한 
사회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가 
발표된 1967년은 '혁명의 해'로 불릴 만큼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아메리칸 뉴시네마는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1960년대 젊은이들의 복잡한 감정을 영화로 담아낸 결과였다.
  데니스 호퍼의 1969년작 "이지 라이더"는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결정판이었다. 
빌리(데니스 호퍼)와 캡틴 아메리카(피터 폰다)는 모터 사이클을 타고 '미국을 
찾아서'(캡틴 아메리카의 가죽 점퍼와 헬멧과 모터사이클에는 성주기가 그려져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뉴올리언스까지 여행을 떠난다. 돈은 마약 밀매로 
마련했고, 일용할 양식은 마약과 마리화나이다. 그들의 여정에 히피들과 변호사 
조지 핸슨(잭 니콜슨)이 스쳐지나간다. 히피들은 문명을 거부하고 기존의 질서를 
비판하면서 무한한 '자유'가 허용되는 새로운 삶과 기독교의 원시공동체를 
꿈꾸고, 조지(조지 워싱턴?)는 전쟁과 빈곤, 지도자와 모든 인생고가 사라져버린 
'평등'한 사회를 이야기한다.
  영화는 자유와 평등을 명시한 미국 독립선언의 실현 불가능성, 아메리칸 
드림과 미국 역사에 대한 회의로 빠져들어간다. 모래 땅에 씨를 뿌리는 히피들은 
이상주의자들이며, 알코올 중독에 빠진 조지는 허무주의자일 뿐이다. 빌리와 
캡틴 아메리카는 뉴올리언스에서 열리는 마르디그라(사육제의 마지막 날)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하지만, 축제의 제물로 바쳐진 것은 기성 세대(또는 
보수주의자들)의 총에 맞아 죽는 그들 자신이었고, 남은 것은 아메리칸 드림의 
파산이었다. 노예시장으로 악명 높았던 뉴올리어스에서, 실패했다고 고백하는 두 
사람은 미국 역사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에 할리우드식 영화 만들기에서 벗어난 방법이 영화의 주제를 뒷받침한다. 
스타를 배제하고, 카메라를 스튜디오에서 야외로 옮기고, 장르를 패러디하는 
저예산의 독립영화. 서부영화의 와이어트 어프와 빌리 더 키드는 캡틴 
아메리카와 빌리가 되고, 서부에서 동쪽으로 무대를 옮긴 그들은 영웅이 아니라 
패배자가 된다. 동성애를 암시하는 버디 무비와 가정이 없는 로드 무비의 형식, 
록 다큐멘터리와 뮤직 비디오를 예견하게 하는 반전 무드의 록 음악 사용.... 
고전적 영화문법에 정면으로 도전한 장 뤼크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와 미국 
언더그라운드 운동의 기수 케네스 앵거의 "떠오르는 전갈궁"은 참고서가 되었다.
  "위대한 영화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게 되었을 때 오류가 발생한다"는 
고다르의 예언처럼 데니스 호퍼와 아메리칸 뉴시네마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1970년대의 보수주의 물결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모두 빼앗기고 
덧없이 시들어갔다.
  "김경욱 영화평론가"

    순응주의자(II Conformista 1970)
    동성애를 미끼로 파헤친 파시즘의 심리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초기 영화는 등장인물의 '분열'에 주목한다. 
머리는 혁명가인데, 가슴은 퇴폐적인 부르주아. "혁명 전야"의 주인공 
아고스티노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여자 주인공 잔느는 모두 그런 
인물이다. 마르크시즘과 파시즘, 부르주아식 결혼과 성 해방의 욕구 사이에서 
망설이는 그들은 보수적인 순응주의를 택한다. 아마 그것은 베르톨루치의 
무의식을 반영했던 것 같다.
  "순응주의자"의 주인공 마르첼로 클레리치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어린 시절 
자기를 유혹하는 게이를 권총으로 쏜 기억에 시달린다. 그는 자신의 동성애 
기질을 부정하기 위해 부르주아 여성과 결혼하고 이탈로라는 파시스트를 
스승으로 모신다. 그리고 대학 시절의 은사이자 지금은 반파시즘 진영에서 
싸우는 콰드리 교수를 암살하기 위해 파리로 간다.
  자신의 '정상설'을 증명하기 위한 마르첼로의 노력은 그를 파시즘과 
부르주아식 결혼으로 이끈다. 그러나 "순응주의자"의 매력은 성과 정치에 대한 
이런 식의 해석만이 아니다.
  베르톨루치는 당시까지 서구 영화가 개발해낸 모든 표현 수사를 총동원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마르첼로가 파리로 가는 도중에 불쑥불쑥 끼여드는 
마르첼로의 회상 장면은 잘못된 기억과 믿음으로 고통받는 한 남자의 분열된 
의식을 아주 화려하게 펼쳐놓는다. 이 스타일의 뿌리에는 오슨 웰스와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와 막스 오퓔스의 영향이 보인다.
  "순응주의자"의 주제는 성 정치학에 기초해 파시즘의 심리적 기원을 캐는 
것이지만, 한편에서는 베르톨루치의 '부친 살해' 욕망도 보인다. 당시 
베르톨루치는 장 뤼크 고다르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고다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일어난 1968년 5월 혁명을 계기로 두 사람은 결별한다. 
고다르는 점점 과격해졌고, 한때 이탈리아 공산당원이었던 베르톨루치는 오히려 
온건해졌다. "순응주의자"는 과거의 '적' 파라마운트 영화사와 손잡고 만든 
영화다. 그러나 이 당시에 고다르는 모든 상업배급망과 절연하고 노동자들과 
실험영화를 찍고 있었다.
  "순응주의자"에서 콰드리와 고다르의 이름이 비슷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콰드리 교수가 사는 파리 주소는 실제 고다르가 살았던 집 주소다. 콰드리 
교수가 숲 속에서 암살당하는 장면은 장관이다. 아마 영화 사상 가장 잔인하고 
장엄한 살인 장면일 것이다.
  베르톨루치는 "난 마르첼로이며 파시스트 영화를 만든다. 혁명적인 영화를 
만드는 과거의 선생 고다르를 죽이고 싶다."고 스스로 자문자답했다.
  사실 좌파 정치학을 표방하는 화려한 외피에도 불구하고 "순응주의자"의 
속내는 그다지 진보적이지 않다. 콰드리 교수의 부인인 안나는 자유주의자이며 
해방된 여성이지만, 부르주아적인 퇴폐미를 물씬 풍기고 동성애자에 대한 관점도 
모호하다. 동성애에 대한 억압된 심리를 파시즘과 연관시키는 대목도 그리 
명확하지는 않다.
  그 모든 것을 제치고 이 영화를 대하면 남는 것은 거듭 봐도 찬탄하게 되는 
스타일의 매혹뿐이다.
  "김영진"

    대부 1, 2, 3(The Godfather 1, 2, 3 1972__1990)
    '일그러진 영웅'의 몰락으로 드러나는 미국의 치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신천지, 약속의 땅이었던 미국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가. 미국의 
1970년대는 집단적 나르시시즘의 시대였고, 코폴라는 미국의 번영 뒤에 가려 
있던 치부를 갱스터 영화의 양식을 빌려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1972년에 
시작된 대부 시리즈는 1990년대에 와서야 3부작이 완성됐다. 제1부는 비토 
코를레오네의 쇠락과 마이클의 성장, 제2부는 비토의 젊은 시절과 마이클 가족의 
해체, 제3부는 마이클의 사회적 성공과 쓸쓸한 죽음을 그리고 있지만, 사실 세 
편의 이야기 구조는 모두 같다. 화려한 파티와 은밀한 거래에서 시작해 음모와 
살인, 갈등이 빚어진 다음 혼자 남은 마이클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코폴라는 마이클을 순수 악이자 미국적 부패의 총체적 상징으로 그리려고 
했다. 그러나 1편에서는 관객이 마이클에 은근히 동조하는 현상이 빚어졌다. 
이는 권력에 대한 관객의 환상과 욕망을 마이클이라는 인물이 충족시켜 준 
탓이기도 하지만, 이야기 구조 차체가 신화나 전설의 서사적 구조를 닮았기 
때문이다. 갱스터 영화의 보편적 특성 가운데 하나인 고독한 영웅(마이클)과 그 
적들, 그리고 영웅을 돕는 후원자(비토)의 이야기가 관객들에게 친숙한 느낌을 
주면서 동시에 마이클을 동정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 2편에서 
코폴라는 마이클을 좀더 고통스런 인물로 묘사하기로 했고, 그와 더불어 
아메리칸 드림의 악몽을 좀더 깊이 그리고자 했다.
  시칠리아에서 피살의 위험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비토는 성공의 기회를 
잡는다. 하지만 그것은 살인과 범죄의 대가로 이룬 것이었다. 그가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것은 가족의 안전과 패밀리(조직)의 영화였다. 때문에 그러한 
가치와 사회적 가치는 늘 대립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이클은 이러한 아버지의 뒤를 이으면서 음지에서 양지로, 암흑가의 보스에서 
존경받는 기업가로 끊임없는 변신을 꾀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노력은 
그를 암흑의 세계로 더 깊숙이 빠져들게 하고, 가족과도 멀어지게 만들며, 
마침내 혈육인 형까지도 죽이게 한다. 아버지 대에서 시작된 원죄는, 마이클이 
아무리 씻으려 해도 씻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어만 간다.
  3편에서 마이클은 그 죄의 대가를 가장 처절하게 치른다. 1편과 2편에서 
소외돼 가는 모습으로만 비치던 마이클이 3편에서는 목숨과도 같은 딸을 잃고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코폴라는 미국적 악몽의 상징인 
마이클을 처단한다. 그러나 이러한 단죄에도 불구하고 코폴라는 미래에 대해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하다. 코를레오네 패밀리는 마이클 이후에도 그가 평생 
소원했던 합법적 기업의 탈을 쓰고, 한층 더 냉혹한 조카 빈센트를 통해 사업을 
계속 확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선과 악의 구분은 무엇인가. 미국적 가치의 숭고함은 어디에 있는가. 
낙원을 만들고자 했던 이민세대의 꿈과 희망은 처절한 악몽이 되어 후세대에 
이어지고 있지만, 그 악몽이 깨어질 가능성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코폴라의 
미국 묵시록, 이 비극의 대서사시는 그래서 너무나 암울하다.
  "김지석"

    아기레, 신의 분노(Aguirre, der Zorn Gottes 1972)
    황금의 이상향, 엘도라도 탐험기
    베르너 헤르초크(Werner Herzog)

  승려 카스파르 데 카르바할의 일기 형식으로 엮은 스페인의 페루 탐험기 
"아기레, 신의 분노"는 황금의 이상향 엘도라도를 찾아가는 정복자들의 
이야기다.
  1560년 크리스마스에 시작해 뗏목에 탄 모든 스페인 사람들이 죽고, 반란을 
주도한 돈 로페 아기레만이 남는다. 자신이 "신의 분노"라고 외치며 미쳐 날뛰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원숭이떼가 뗏목을 온통 뒤덮는다. 진화론과 인류의 종말을 
연상시킨다. 아기레의 저주받은 광기 속에서 세계 정복을 꿈꾸던 나치 히틀러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우화가 강력한 메시지로 전해진다.
  2차 대전 뒤, 독일에서는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스웨덴에 비해 뒤떨어진 
상업영화만이 판쳤다.
  1956년, 독일의 젊은 영화인들은 '오버하우젠 선언'을 통해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고 외친다. 그리고 곧 의회는 독일 영화의 부흥을 위한 지원 법안을 
통과시킨다. 뮌헨을 중심으로 젊은 영화인들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1970년대에 들어서 독일 영화는 새로워진다. 그 새로운 변모를 영국 평론가들이 
먼저 발견해 '새로운 독일 영화', 즉 뉴저먼 시네마라고 불렀는데, 독일 
국내에서는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의 '노이에 벨레'라고 했다. 이렇게 독일 영화는 
부활했다.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를 찬란하게 수놓았던 표현주의의 영광이 
1970년대에 와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 대표 주자의 한 사람이 베르너 
헤르초크이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독일 영화의 르네상스'라는 커버스토리로 
새로운 독일 영화 특집을 마련하여 새로운 독일 영화에는 표현주의의 맥이 
보인다고 했다. 헤르초크에세는 "최후의 인간"의 프리드리히 무르나우의 영향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르초크는 지나간 시대의 표현주의 영화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독일인의 피 속에 흘러내려오는 표현주의적 국민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기레, 신의 분노"는 남미의 자연을 배경으로 급류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정복자들의 모습과 뗏목과 함께 숲 속에서 겪는 권력과 이에 반항하는 아기레의 
집요한 대결이 잠시의 숨돌림도 없는 긴장 속에 전개된다. 파스빈더도 그렇지만 
새로운 독일 영화에는 유머가 없다.
  인디언의 화살이 날아오고 하나씩 죽어가는 뗏목 위에서 혼자 남은 아기레는 
이렇게 외친다.
  "나는 신의 분노이다. 우리는 멕시코를 코르테스에게서 되찾고, 역사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내 딸과 결혼해, 함께 순수한 왕국을 건설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대륙을 지배할 것이다. 우리는 참고 견뎌나갈 것이다. 나 말고 
무가 있겠는가. 나는 신의 분노이다."
  신의 저주받은 정복자를 자처하는 아기레 역의 클라우스 킨스키의 연기가 
일품이다. 마치 세계 정복이라는 망령에 휩싸였던 히틀러와 나치, 그리고 모든 
독재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헤르초크가 시나리오와 연출을 겸했다. 영화는 카스파르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데, 중간에 누군가가 잉크를 마셔버려 일기가 중단된다. 그 뒤는 
아기레의 독백으로 내레이션이 계속된다.
  "안병섭"

    내슈빌(Nashville 1975)
    1970년대의 미영화계 살찌운 풍자극
    로버트 앨트먼(Robert Altman)

  "내슈빌"은 1970년대 미국 영화의 성취를 얘기할 때면 맨먼저 거론되는 
작품이다. 제임스 모나코의 "미국 영화는 지금"이란 책의 말미에 실린 
1968년에서 1977년까지 미국 영화의 수작 목록을 보면 "내슈빌"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1, 2편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설문에 응한 20여 
명의 미국 평론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내슈빌"을 추천작 10편 안에 넣었다. 
"내슈빌"은 미국 영화가 앞으로도 좀처럼 도달하기 힘들 것 같은, 아주 
수선스러우면서도 날카롭기 그지없는 사회 풍자극이다.
  미국 컨트리 음악의 총본산인 내슈빌. 이곳에서 열리는 음악제에 참석하기 
위해 각지에서 대중음악인들과 구경꾼들이 몰려온다. 그리고 유명한 컨트리 
가수, 야심에 불타는 무명 가수, 포크 음악 그룹, BBC의 리포터, 정치 유세꾼 등 
24명의 인물이 등장해 한바탕 떠들썩한 일화들을 꾸린다.
  감독 로버트 앨트먼은 누구 한 사람에게도 초점을 맞추지 않고 집단이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 구조로 2시간 40분을 끌고 간다. 영화 초반에 묘사되는 
교통체증 장면부터 장관이다. 공항에서 내슈빌까지 오는 도로가 차로 꽉 막히고, 
이 사태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앨트먼은 한 사람씩 차근차근 소개한다. 그 
사람들이 모두 영화의 주인공이다. 
  이 영화는 에피소드식 구성으로 돼 있기 때문에 줄거리가 한 가닥으로 
이어지지 않고 따로따로 노는 듯한 느낌을 준다. 클로즈업이나 반응 숏도 별로 
없다. 미디엄 롱 숏이나 풀 숏 위주로 화면을 짠 연출은 어느 등장인물에 특별히 
주목하지 않고 그저 전체를 담담히 보게끔 유도한다. 따라서 이런 스타일과 
이야기 구조에서는 누가 성공하고 누가 사랑을 맺느냐 하는 극적 장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앨트먼의 연출 의도는 효과가 있었다. 음악인과 관객 사이에 오고가는 공감이 
감동을 주는 사이에 슬그머니 이 영화의 진짜 주제가 드러난다. 가수들은 사랑과 
가족을 노래하지만 그들이 실제 모습은 그런 메시지와는 관계가 없다. 망가진 
인간관계와 음반업계의 착취가 그들의 사생활을 멍들게 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화면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스피커를 통해 자주 방송되는 대통령 입후보자의 
연설도 같은 맥락에 있다.
  앨트먼은 떠들썩한 집단 축제의 끝에서 속빈 강정과 같은 미국 대중문화와 
미국인의 허상을 본다. 미국인들을 기만적인 정치와 문화산업의 책략에 장단 
맞추는 희생자로 그려내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키스 캐러딘이 불러서 유명해진 
노래, '그건 걱정이 안 돼(It Don't Worry Me)'도 이 주제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이 영화에 담긴 노래는 모두 출연 배우들이 직접 불렀다).
  "그건 걱정이 안 돼. 그건 걱정이 안 돼. 당신은 내가 자유롭지 않다고 
말하겠지. 하지만 그건 걱정이 안 돼."
  그러나 앨트먼은 걱정이 많았던 것 같다. 내슈빌이라는 마을 자체는 미국을 
표상하는 하나의 이미지다. 많은 등장인물과 다층적인 이야기 구조로 앨트먼은 
미국 사회의 겉으로 보이지 않는 재앙을 그리고 있다. 영화 "내슈빌"이 없었다면 
1970년대 미국의 영화사는 아주 허전할 뻔 했다.
  "김영진"

    칠레 전투(La Batalla de Chile 1975__1979)
    칠레 민중정부의 좌절과 희망을 단은 다큐멘터리
    파트리시오 구스만(Patricio Guzma`n)

  1973년 9월 11일,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 선거를 통해 입성한 칠레의 사회주의 
민중연합정부의 지도자 살바도르 아옌데가 반동적 쿠데타 세력에게 살해된다. 
그리고 비극적 다큐멘터리 "칠레 전투, 비무장 민중의 투쟁" 3부작은 바로 
거기서 끝나고, 다시 시작했다.
  라틴아메리카의 해방과 독립, 투쟁과 전투의 진보운동 속에서 칠레는 20세기의 
파리 코뮌이었다. 말 그대로 '마르크스가 "프란스 내란"에서 문제제기하고,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정식화한' 모든 일들이 민중들의 힘으로 눈앞에서 
펼쳐졌다. 이것은 책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스펙터클이었다.
  1972년 11월 2일, 아옌데 정부의 출범과 함께 진보적인 젊은 영화인들은 이 
'위대한 사건'을 기록하기로 했다. 그들은 영화를 만들어 본 경험이 전혀 
없었으며, 기자재도 부족했다. 하지만 파트리시오 구스만(연출), 페데리코 
엘톤(기획), 호르헤 뮬러(촬영), 베르나르도 멘스(사운드), 호세 피노(조명)는 
16mm 에클레어 카메라와 나그라 녹음기 한 대, 코닥 흑백 필름만으로 무장하고 
'새로운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경이로운 체험과의 만남이었다. 그들은 
작업일지에 "이 영화는 새로운 역사의 첫 번째 영화가 될 것"이라고 써넣었다. 
대부분의 장면은 롱 테이크로 촬영되었으며, 수많은 민중들은 인터뷰했다. 
그리고 부족한 조명시설 때문에 많은 장면들을 자연광 아래서 '생생하게' 찍어야 
했다.
  그러나 희망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옌데 정부는 쿠데타로 무너졌고, 촬영은 
중단되었다. 파트리시오 구스만과 그의 동료들은 필름과 녹음 테이프를 들고 
6개월에 걸친 밀반출 끝에 쿠바로 망명했다. 그리고 아옌데 민중정부 아래서 
체험한 8개월에 걸친 삶과 희망을 담은 필름은 곧바로 편집을 거쳐 후반 작업에 
들어갔다.
  6년에 걸친 편집과정에서 이 영화는 제1부 "부르주아지의 봉기", 제2부 
"쿠데타", 제3부 "민중의 힘"으로 구성된 3부작으로 다시 태어났다. 선거를 통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전례 없는 정치적 실험과, 사회주의에 
대한 제국주의와 매판 부르주아지들의 반동적 폭력에 대한 4시간 30분에 걸친 
이 장대한 진술은 영화에 담겨 있는 '좋은 세상에 대한 희망'과 비극적으로 끝난 
아옌데 정부에 대한 냉철하고도 분석적인 시도가 서로 변증법적으로 보여주고 
대답하고, 질문하고도 다시 보여주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다큐멘터리는 선동적이라기보다는 분석적이며, 
예언적이라기보다는 희망적이다. 부르주아 국가의 억압적 기구들을 파괴하지 
않고 사회주의로 평화적으로 이행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더 나아가 
부르주아지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바꾸는 계급투쟁의 진정한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파트리시오 구스만과 그의 동료들은 "칠레 전투"가 영화에서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과 같은 의미가 되기를 원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아옌데 정부에 관한 연민과 향수에 찬 기록을 넘어서서 바로 영화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다시 묻는 망치가 되었다.
  파트리시오 구스만은 이 영화가 "세계사의 맥락에서 과도기적인 필름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일보 전진, 이보 후퇴!
  "정성일"

    길의 왕(Im Lauf der Zeit 1976)
    독일 전후 세대의 미국 문화에 대한 애증어린 성찰
    빔 벤더스(Wim Wenders)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1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빔 벤더스의 초기작 "길의 
왕"(원제:시간의 흐름 속에서)을 만나게 된다. 
  로드 무비의 왕으로 불리는 이 영화에서 브루노 빈터와 로베르트 란더라는 두 
남자는 몰락해가는 동독 접경지대를 여행한다. 젊은 관객들에게 이 영화가 
특별한 종류의 로드 무비로 남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주인공 브루노 빈터가 
영사기 수리기사이자 영화광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길의 왕"은 그 장르의 
영화들이 그렇듯 젊은 시절의 고뇌에 관한 기록이면서 동시에 영화에 관한 
영화가 되었다. 1970년대 미국 배급업자들의 횡포로 값싼 포르노를 강매당하던 
시골 극장들의 이야기가 에피소드로 삽입된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영화와 록에 경도되어 자라난 세대의 대변자로서 로베르트가 내뱉는 대사, 
"양키들이 우리의 의식을 식민화했어"가 암시하듯이 미국 문화에 대한 애증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아내와 헤어진 뒤, 엘베 강에 차를 처박아 자살하려다가 실패한 로베르트는 
브루노의 밴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그의 영사기 수리 여행에 동참한다. 둘은 
서로에게 기묘한 우정을 느끼면서 여자하고는 화해로운 관계를 만들 수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 이것은 고독하고 금욕적인 영웅이 등장하는 서부영화의 
주인공들과 동일화하면서 여성 없는 세계에 머물게 된 영화광의 고백이라는 
성격을 띠기 때문에 개인사의 차원을 넘어선다.
  영화의 마지막. 여자와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브루노를 설득한 뒤, 
로베르트는 그들이 함께 밤을 지낸 미군용 오두막 문 위에 "모든 것이 변해야만 
해"라는 쪽지를 남기고 떠난다.
  미국 대중문화의 집중적인 세례를 받고 자라난 벤더스는 미국 영화와 록 
음악이 자기 삶의 구명대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어떻게 그 영향에서 
벗어나 할리우드 영화와 유럽 영화를 새롭게 결합하여 재창조할 것인가가 벤더스 
영화의 이정표였다면, "미국 친구"화 "파리 텍사스"는 바로 그 기착지들이다.
  "길의 왕"에는 미국 문화에 대한 이런 애증어린 성찰뿐만 아니라 독일 사회에 
남아 있는 나치즘도 명시하고 있다. 히틀러는 늙은 극장주의 모습으로, 촛대의 
장식으로 망령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로베르트와 아버지가 만날 때, 그 아버지와 
교차되는 히틀러 모양의 촛대는 나치 세대인 아버지와 교통할 수 없는 젊은 
세대의 딜레마를 암시한다.
  할리우드 영화에 대항해 '자전거를 만들 만한 돈으로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만들려고 시도'했던 알렉산더 클루게와 빔 벤더스를 포함한 신독일 영화감독들의 
고민은 사실 오늘날 한국 영화산업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서독은 적극적인 국가 지원이 있었고, 그 결과 신독일 영화는 1970년대 
롤스로이스처럼 서구 영화제와 영화시장을 질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영화감독이 되기 전에는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독특한 문체를 지닌 
영화비평가이기도 했던 벤더스는 짐 모리슨의 노래와 하워드 혹스, 존 포드를 
오가며 '순간적인 몰아'의 이미지를 남기는 어떤 순간에 대해 글을 쓰기도 
했는데, 흔히 '감각주의'라고 부르는 그의 영화세계는 이미 비평가 시절부터 
마련되었던 셈이다.
  그는 영화를 이미지가 야기한 감정의 움직임 '(E)motion'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문자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미지에 몰입하는 독일 신세대의 
감수성으로 영화를 재정의 한 것인데, 그의 영화가 특히 젊은 관객들을 사로잡는 
근거가 된다.
  "김소영"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 1976)
    1970년대 미국의 혼란 그린 '혼란스런 영화'
    마틴 스코시즈(Martin Scorsese)

  1970년대의 미국 영화를 베트남 전쟁과 떼어내 살피는 것은 불가능하다. 
베트남 전쟁은 1960년대 이래 발전해 온 급진적 사회 운동, 청년 문화, 
페미니즘, 흑인 인권운동, 동성애자들의 투쟁 등을 폭발시키는 뇌관 같은 역할을 
했다. 미국 사회는 전면적인 위기에 빠진 듯이 보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이 
위기를 더 부추겼다. 지배층은 대처할 능력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대안적 사회개혁 프로그램이 작동한 것도 아니었다. 미국을 지탱하고 
있는 거대한 보수와 냉전의 기반이 그만큼 두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1970년대의 미국의 위기는 혁명이 아니라 혼란의 양상을 보였다. 1970년대에 
만들어진 '새로운 미국 영화'는 베트남 전쟁을 결코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로 그리는 법이 없다. 그들에게 그 전쟁은 자신들의 혼란을 증폭시킨 
계기일 뿐이었다. 문제의식의 초점은 늘 자신들의 붕괴증후군에 모아져 있었다. 
우리의 관점에서 "디어 헌터"나 "지옥의 묵시록"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들 또한 항변의 근거를 가진 셈이다.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는 바로 이 혼란에 관한 혼란스런 영화다. 
여기서도 주인공 트래비스 비클(로버트 드 니로)은 베트남에서 귀향한 제대 
군인으로 등장하지만, 그는 베트남 전쟁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그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결단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그도 모른다. 트래비스는 
택시를 몰고 뉴욕의 밤거리를 헤매고 다닌다. 의사 소통이 단절된 채 
몽유병자처럼 현실에 발을 대고 있지 못한 그에게 도시는 형태를 잃고 떠다니는 
이미지일 뿐이다.
  뉴욕의 뒷골목은 쓰레기로 가득하다. 그의 결단은 이 쓰레기들과 연관되어 
있다. 물론 이 속에는 창녀, 포주, 마약꾼, 구역질나는 검둥이들, 호모와 레스비언 
같은 '인간 쓰레기'가 포함된다. 그는 거리를 청소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이때 대통령선거 홍보전을 치르는 베티를 만나지만, 그 관계는 '어떤 결단'을 
재촉하는 장치이자 허구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거리에서 십대의 창녀 
아이리스(조디 포스터)를 만나면서 드리어 어떤 결단을 내린다. 그것은 인간 
쓰레기들을 피로써 씻어내는 일이다. 
  트래비스는 사회의 정상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정신병자이지만, 
미국 영화의 전통에서 보면 도시에 나타난 마을의 청소부, 곧 보안관이다. 
이러한 성격 부여는 공포영화와 서부극의 영향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그가 
결단에 이르기까지 내보이는 극심한 도덕적, 정치적 혼란은 이러한 성격화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는 대통령 후보 팰런타인을 암살하려고 주변을 맴돌지만, 
결국은 아이리스의 포주 스폿(하비 케이텔)을 살해하고 만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빠져 있던 혼란의 터널에서 벗어나고 도시의 영웅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애매하기 짝이 없다. 그는 과연 존재의 혼란에서 벗어난 것일까? 그는 
영웅으로 불러 합당한 인물일까? 그는 과연 아이리스를 사랑하기나 한 것일까?
  "택시 드라이버"는 이러한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미학적 
견지에서 진보적이었던 스코시즈와 정치적으로 신파시스트였던 폴 슈레이더의 
기묘한 결합은 이 모든 혼란의 근원이다. 초월로서의 어떤 결단, 영웅주의, 
인간 쓰레기에 대한 경멸 따위가 슈레이더의 세계라면 뉴욕의 뒷골목, 
트래비스의 소외, 존재의 혼란은 스코시즈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영화 막바지에 
트래비스가 모호크족의 머리 모양을 하고 아파치족을 흉내낸 스폿을 쏘는 장면은 
그러한 작가적 모순의 첨예한 돌출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정하"

    애니 홀(Annie Hall 1977)
    대사 중심의 개그로 코미디의 품격을 높이다 
    우디 앨런(Woody Allen)

  우디 앨런이 감독, 각본, 주연을 겸한 "애니 홀"은 프랜시스 코폴라의 
"대부", 로버트 앨트먼의 "내슈빌"과 함께 1970년대 미국 영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무엇보다도 "애니 홀"은 장르의 코미디를 스타일의 코미디로 승화시킨 
감독의 재능이 십분 발휘된 전환기적 작품으로, 이전의 슬랩스틱 코미디나 
시각적인 개그가 주류를 이뤘던 "돈을 갖고 튀어라", "바나나" 같은 초기 
작품과는 달리 이후 우디 앨런의 일관된 스타일을 이루는 대사 중심의 개그와 
담론이 코미디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우디 앨런은 주로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자전적 정신세계를 프로이트적인 
정신분석 코미디에 가까운 영화로 만들어내곤 했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애니 
홀"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뉴욕에 대한 사랑과 쇼비즈니스 세계에 대한 환멸, 
사랑과 죽음, 우울과 강박관념, 가족관계와 여자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심각하게 
탐구하고 있다. "애니 홀"은 주인공인 앨비 싱어가 사랑하던 여자 애니 홀과 
헤어지고 나서 왜 그렇게 되었나를 회상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애니 
홀과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이야기, 그리고 그의 가족과 그가 이전에 사귄 
여러 여자들의 관계가 나오는데, 이것들이 마치 앨비의 독특한 성격을 분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앨비는 애니 홀과 헤어졌지만, 자신이 쓴 희곡에서 
허구의 인물을 통해 그와의 사랑을 이룬다. 
  앨런의 코미디는 주로 고통이나 강박증에서 나오는데, 그는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이나 현재의 괴로움, 자신의 열등감 따위를 중요한 코믹 요소로 승화시켜 
항상 웃음 뒤에 페이소스를 느끼게 만든다. "애니 홀"에서 앨비의 냉소적이고 
신경증적이며 탐욕스러운 성격은 실제 우디 앨런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한다. 
무성영화 코미디언 해럴드 로이드처럼 안경을 쓴 앨비는 앤티 히어로로서 현대 
미국 사회의 관찰자, 기록자 노릇을 했던 채플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채플린이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면, 앨런은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코미디에 접근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애니 홀"은 무엇보다도 진지한 주제의식과 파격적인 구성, 신선한 형식미가 
돋보이는데, 그것은 앨런이 초기에 많은 영향을 받은 바 있는 필스와 막스 
브러더스, 채플린보다는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와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의 
영향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주인공의 정신분석에 
대한 의존도, 섹스를 삶의 중요한 모티브로 이용하고 있는 점은 프로이트와 
관련이 있고, 삶의 의미와 신의 경험, 사랑과 죽음에 대한 고통스러우면서도 
고독한 집착은 지극히 베리만적이다.
  "애니 홀"의 형식은 무척 파격적이다. 때문에 어떻게 보면 진부할 수도 있는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주 근사하게 보이는데, 알고 보면 그 새로운 
형식요소들은 대부분 과거의 걸작에서 응용해 집대성한 것이다. 과거를 현재 
인물이 방문하는 모습은 베리만의 "산딸기"에서, 주인공이 관객을 향해 말하는 
것과 속마음을 자막으로 처리하는 것은 고다르 영화에서, 이중 노출에 의해 
애니의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는 이미지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술취한 전사"에서 
그 영향을 받아 웅용,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형식요소들을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새로운 재해석을 통해 시각화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디 앨런의 특별한 재능은 그 모든 것을 
내용과 조화시키며 철저히 코미디로 승화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정국"

    파드레 파드로네(Padre Padrone 1977)
    몽타주 기법을 사용한 양치기였던 교수의 자서전
    타비아니 형제(Paolo Taviani, Vittorio Taviani)

  타비아니 형제는 로셀리니와 각별한 관계에 있다. 우선 이 형제가 영화를 
시작한 것은 로셀리니의 "파이자"를 보고 난 뒤였으며, 이들이 "파드레 
파드로네"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도 로셀리니 덕이었다. 또 
마르크시스트 영화인이라 불렸던 이들의 작품에서 우리는 로셀리니적인 인물을 
만날 수 있는데, 다만 유토피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더 강하다는 차이가 
있다. 이는 네오리얼리즘의 영향 아래 좀더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를 수용한 
타비아니 형제에게는 당연한 결과였다.
  타비아니 형제는 그들의 모든 작품을 공동으로 연출한다. 그것도 거의 작업을 
분담하지 않은 채 시나리오, 음악, 촬영, 편집까지 함께 하고 있다. 비토리오는 
1929년, 파올로는 1931년에 이탈리아 신 미너이토에서 태어난다. 1950년께 
피사의 시네클럽을 주도하면서 영화 경력을 시작한 이들은 1954년에 자바티니와 
공동으로 나치즘에 관한 단편영화를 만들고, 이후 많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 
"전복자들"(1964)은 이들 형제의 첫 장편영화였고, 그 뒤 3__4년마다 한 편씩 
꾸준하게 수작을 발표해 왔다. 톨스토이의 "신과 인간"을 각색한 "성인 미셸은 
수탉을 가졌다"(1971)에서 "알몽장팡"(1975), "카오스"(1984), "굿모닝 
바빌로니아"(1987), "밤에도 태양이"(1990)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은 당당한 
자존심, 사회적 신분의 변화, 본원으로의 귀환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아버지, 주인"으로 옮길 수 있는 "파드레 파드로네"는 양치기에서 대학교수로 
성장한 한 사르디니아인의 베스트셀러 자서전을 각색한 것이다. 이야기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사르디니아의 방언학자 가비노의 시점에서 플래시백으로 
서술된다. 어린 가비노는 주인으로 군림하는 난폭한 아버지에게 교실에서 
끌려나온 뒤 양치기로 일자무식의 생활을 하다가 군에 들어간다. 군에서 
이탈리아 본토의 표준어와 사르지니아 지역의 방언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 
방면의 권위자가 되지만, 결국 모든 것이 세련된 본토에서는 양치기들의 방언이 
이데올로기적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타비아니 형제는 이 영화를 통해 두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사르디니아 
섬 양치기들의 원시적인 생활을 그리는 객관적인 세계는 화면으로 직접 
전달되는데, 탁월한 카메라 움직임이 양치기들의 삶과 광활한 사르디니아의 
대지를 생생하게 훑고 있다. 또 다른 세계는 사운드 몽타주로 전해지는 주관적인 
세계다. 타이틀 자막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합창, 영화 도입부에서 가비노가 
끌려나간 뒤에 들려오는 아이들의 내면의 소리, 그리고 나무와 시냇물 소리, 
양치기들의 외침 같은 청각적 요소는 그 자체의 독립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갖고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갈등, "아버지, 주인"의 극복이라는 주제를 그려내고 
있다.
  "파드레 파드로네"에서 구사된 타비아니 형제의 이러한 연출력은 이후 
"굿모닝 바빌로니아"에서는 주인공의 사회적 지위와 정신적 고양을 표현하기 
위한 수직적인 카메라 움직임으로, 그리고 "밤에도 태양이"에선 자기 성찰을 
위해 은둔과 병상을 택한 주인공을 묵상의 나무로 이끄는 수평적 카메라 
움직임과 내면의 갈등을 그리는 주관적 사운드 몽타주로 이어진다.
  "조인숙 영화평론가"

    이레이저 헤드(Eraser Head 1978)
    1970년대 컬트 영화의 대명사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1970년대의 가장 흥미진진한 영화 현상은 컬트 영화의 등장이다. 심야극장의 
영화광들은 "럭키 호러 픽쳐 쇼"를 계기로 해서 컬트 영화 신드롬을 만들어 
냈으며, 세상에서 가장 기괴하고 이상한 영화들을 차례로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8년에 드리어 자기 세대의 컬트 영화 감독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데이비드 린치였다.
  미술을 공부하고 애니메이터로 일하던 데이비드 린치는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살려서 장편영화인 데뷔작 "이레이저 헤드"를 찍었고, 그 결과 초현실주의 
회화와 실험영화가 결합한 악몽 그 자체의 영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단숨에 컬트 영화의 명단에 올라간 이 영화는 꿈과 현실, 천국과 지옥이 모두 
끔찍하게 뒤틀린 세상의 풍경을 보여준다. 방전된 것처럼 머리털이 곤두선 
헨리는 움직이는 닭요리를 먹고, 운행에 문제가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해초 
더미가 자라나는 방에서 산다.
  헨리는 강경증에 걸린 여자 매리(그의 할머니는 살아 있는 시체 같고, 
아버지는 한 쪽 팔이 마비되어 있다)와 결혼하여 기형아를 키우게 된다. 매리의 
주변에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하나는 온 몸에 화상을 입고 창 밖을 바라보는 
남자의 세계인데, 그는 헨리에게서 정충처럼 보이는 것을 빼내어 기형아를 
만들어 낸다. 다른 하나는 라디에이터 속에 살고 있는 소녀의 세계이다. 
"천국에서는 모든 일이 잘 된다"고 노래하는 소녀는 춤을 추면서 정충처럼 
보이는 것을 발로 밟아 터뜨려버린다. 라디에이터를 바라보며 마음의 안식을 
얻던 헨리는 아내가 버린 기형아를 가위로 찔러 죽이고, 그 세계로 들어가서 
소녀의 품에 안긴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매리라는 이름을 성모 마리아로 
생각하고, 기형아의 모습에서 털을 벗겨낸 어린 양을 떠올린다면(매리의 
어머니가 헨리에게 매리와 성관계가 있었느냐고 추궁할 때, 그는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화상을 입은 남자는 신으로 해석된다. 그는 원자 폭탄과 공해에 찌들어 
기형아를 만들어내고, 낙태로 무수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세상의 신으로서 
침묵으로 일관한다. 폐허같은 건물들과 썩은 물이 고여 있는 거리,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음은 또한 산업사회의 악몽이다(헨리의 직업은 인쇄공이다).
  헨리의 가족은 오이디푸스 가족 내부의 콤플렉스를 드러낸다. 끊임없이 
울어대며 부모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 아이는 가정의 행복이 언제라도 불행의 
씨앗으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매리는 헨리의 손길을 피하고, 헨리는 
매리의 배에서 탯줄 같은 것을 꺼내 벽에 던진다. 그들의 절망적인 몸짓에는 
성관계의 공포와 아버지가 되는 두려움이 배어 있다. 그러나 무수한 퍼즐 
조각으로 가득 찬 수수께끼 같은 영화는 이 모든 해석을 무색하게 만든다.
  데이비드 린치는 "엘리펀트 맨"과 "블루 벨벳"으로 아카데미 영화제의 감독상 
후보에 지명되었고, 곧장 제도권으로 진입했다. 그는 텔레비전 시리즈 "트윈픽스"를 
제작하면서 컬트 영화의 감수성을 일반 대중에게 확산시켰으며,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받은 "광란의 사랑"으로 그것이 포스트 모던 시대의 
작가주의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레이저 헤드"에서 "광란의 사랑"까지, 
데이비드 린치가 걸어간 길은 또한 영화 신드롬의 운명이 되었다.
  "김경욱"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Die Ehe der Maria Braun 1978)
    파시즘의 잔영을 꼬집은 전후 독일 '뉴저먼시네마'의 꽃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Rainer Werner Fasswinder)

  파스빈더의 영화에서는 죽음의 전조와도 같은 이상한 흥분을 발견할 수 있다. 
폭발을 기다리는 억눌린 광기, 무정부주의적 페시미즘, 데카당스한 탐미적 
경향들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를 1960년대 이후 독일 반문화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뉴저먼 시네마는 사실 그의 존재와 더불어 국제화했고, 또 독일화했다. 
하지만 1982년, 서른 여섯 살의 파스빈더는 과다한 마약복용과 일 년에 다섯 
편에 이르렀던 영화 생산으로 때 이른 죽음을 맞는다. 실제로 그의 죽음은 
뉴저먼 시네마에 조종을 울린 사건이었다.
  "베로니카 포스의 갈망"(1981), "롤라"(1981)와 더불어 3부작인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1979)의 원제는 "우리 부모의 결혼"이다. 영화는 전후 독일 
중산층의 성장을 자본주의와  가부장적 착취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마리아(한나 쉬굴라)라는 한 여성의 삶에서 읽어낸다.
  1943년, 마리아와 헤르만 브라운의 결혼식은 공습으로 엉망이 된다. 전쟁에 
끌려간 헤르만이 러시아에서 실종되자 마리아는 흑인인 미군 빌에게 매춘해 삶을 
이어간다. 그 와중에 남편 헤르만이 돌아오고, 마리아는 빌을 살해한다. 그러나 
헤르만이 마리아 대신 감옥에 들어가고, 빌에게 익힌 능숙한 영어 덕에 마리아는 
오스발트의 경제적, 성적 파트너가 된다. 하지만 마리아는 남편에겐 사랑을, 
오스발트에겐 섹스만을 제공한다고 믿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부르주아적 가정을 마련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스발트가 남긴 유언은 그를 
뒤흔들어 놓는다. 마리아는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실제로 그의 
삶은 오스발트와 헤르만의 계약에 의해 설계된 것이었다. 사실 문과 창문, 
계단을 따라 계속 프레이밍되는 마리아의 이미지와 급하게 움직이는 카메라는 
관객들에게 그의 인식 이전에 이미 그가 누군가에 의해 프레임화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마리아가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 부주의하게 켜둔 
가스가 폭발해 집은 삽시간에 폐허로 변하고, 그 순간 1954년의 독일과 
헝가리의 축구경기를 중계하고 있던 라디오에서 '독일은 세계의 주인'이라는 
멘트가 흘러나온다.
  우연성에 지배받는 여주인공을 등장시키는 멜로드라마의 관행을 따르고 있는 
이 영화를 그 세계에서 구출한 것은 전후 독일사에 대한 파스빈더의 
역사의식이다. 마리아 브라운이 남편 헤르만과의 관계에서 표현하는 개인적 
희생이라는 덕목은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의 저급한 형태이면서 파시즘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영화의 후기에 아데나워에서 헬무트 슈미트에 
이르는 수상들의 초상화 몽타주가 음화로 재현되고, 이것은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히틀러의 초상화와 맞물려 역사의 악순환을 암시한다. 이 장면들은 
파시즘적인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마리아 브라운이라는 한 여성의 삶을 
멜로드라마의 예정된 해피엔딩이 아닌 비극으로 몰아간 것임을 명시하면서, 
'독일은 세계의 주인'이라는 공언 또한 파시즘의 연장선상에서 구축된 것임을 
시사한다.
  실제로 이 영화를 만들기 2년 전에 일어났던 모가디쉬 하이재킹과 
바더, 마인호프 테러리스트 살해사건 등은 파스빈더가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을 우회하며 펼쳐보이는 독일 현대사 읽기가 멜로드라마적 과장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신독일 영화의 기수인 파스빈더는 1945년 이후를 신독일 
사회의 시작이 아니라 옛 독일의 연장으로 간주했던 셈이며, 우파는 물론 
좌파에게도 지지받지 못했던 그의 페시미즘은 아직도 그 깊이를 짐작하기 힘든 
심연으로 동시대 영화 속에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소영"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79)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인간의 광기를 형상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계보에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이름이 없었다면, 
그것은 허망한 신기루로 남았을 것이다. 코폴라는 1960년대 말 이후의 할리우드 
영화에 개혁 바람을 일으킨 세대 가운데서 가장 선배축에 속하는 세대이며, 
영화과를 졸업한 뒤 누구보다도 먼저 '타락한' 상업영화체제에 도전을 시도했던 
감독이다. 그리고 그의 1970년대는 빛나는 영화적 성취를 거둔 시기였다.
  "대부" 1, 2편으로 비평과 흥행에서 모두 대성공을 거둔 코폴라는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암시를 얻은 소품 규모의 문제작 "도청"으로 1974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뒤, 자신의 영화세계를 중간 결산할 작품을 궁리하게 된다. 바로 
베트남 전쟁을 다룬 대작 "지옥의 묵시록"이다. 코폴라는 패기만만했지만 영화 
제작은 숱한 난관을 겪었다. 주연 배우의 교체, 미군의 비협조, 때마침 
촬영지였던 필리핀을 덮친 태풍 등. 결국 이 영화는 1979년에 다서야 세상에 
공개됐다.
  "지옥의 묵시록"은 잘 알려진 대로 조셉 콘라드의 소설 "어둠의 심장"을 
베트남 전쟁의 상황에 맞게 각색한 것이다. 원작의 제목처럼 이 영화는 어둠의 
심장을 향하고 있다. 영화가 전개될수록 점점 화면의 명도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학살의 쾌감, 죽음과 인접해 있는 게임의 스릴을 만끽하게 하는 
초반의 전투 장면에서 오감을 자극하는 영화의 시청각적 공명 효과는 미치광이 
쿠르츠 대령이 등장하는 후반부 장면에서는 공격성을 감춘 인간 광기의 근원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바뀌어간다. 
  말론 브랜도가 연기하는 쿠르츠 대령은 코폴라의 주제의식을 집약하고 있다. 
그는 바이런의 시구를 읊조리면서도 사람의 목을 태연히 따는 이중적은 
인물이다. 전쟁에서 공포를 느끼지만, 동시에 그 전쟁에 매혹당해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베트남 전쟁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보편적으로 형상화한 
점에서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이룩하고 있다. 현대의 가장 끔찍한 점에서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이룩하고 있다. 현대의 가장 끔찍한 재난인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이 전쟁에 대해 느끼는 공포를 가장 추상적인 형태로 재현한 
스텍터클인 셈이다.
  코폴라 감독은 괴물 같은 사람이다. 미국적 토양에서 그는 좀처럼 보기 드문 
예술가다. 동시에 베트남 전쟁을 미군들이 즐겼던 일종의 쇼, 로큰롤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다분히 미국적인 감각을 지녔다. 쇼처럼 즐거운 것은 없다. 
그러나 예술적인 영화도 만들고 싶다. 그 이중적인 욕망이 충돌하면서 영화사상 
가장 심오하고 복잡하면서도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전쟁영화가 만들어졌다.
  코폴라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전쟁을 치를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다. 
우리의 인원은 너무 많았고, 돈과 장비도 너무 많이 낭비됐으며, 우리는 조금씩 
미쳐갔다."
  마약과 히스테리에 싸인 베트남 전쟁이라는 쇼처럼 "지옥의 묵시록"이라는 
영화 그 자체도, 영화 스태프들도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다. "지옥의 묵시록"은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레퀴엠이었다.
  "김영진"

    양철북(Der Blechtrommel 1979)
    성장 멈춘 아이 통해 들춰낸 독일 역사
    풀커 슐뢴도르프(Volker Schlo`ndorff)

  "양철북"을 본 사람은 누구나 떠올릴 만한 것들이 있다. 어린아이의 장난스런 
목소리이지만 반음조쯤 높아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유리를 
깰 수 있는 주인공 아이의 높은 기성, 바다에서 건져 올린 말의 머리에서 
꾸역꾸역 나오는 뱀장어들, 연민을 느끼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로테스트한 
난쟁이 연기자들.
  자극적인 기억으로 남는 이 영화의 시작은 동화 같다. 황량하고 드넓은 
감자밭에서 촌부가 구운 감자를 호호 불며 먹고 있다. 경찰을 피해 달려오던 한 
남자가 여자의 네겹 치마 속에서 바지 앞춤을 여미며 나온다. 그렇게 잉태된 이가 
주인공 오스카의 엄마다. 오스카는 자신이 태어나게 된 유래를 아주 자랑스럽고 
기고만장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영화는 동화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자궁 속에서부터 엄마를 동시에 
사랑하는 두 남자 가운데 어떤 이다 자신의 아버지인지 혼동하면서, 또한 
그때부터 너무나 섬뜩한 어른의 눈빛을 한 아이로 오스카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기이해져 간다. 아이의 목소리도 이제는 히스테리컬하게 들려온다. 그 아이는 세 
살이 되던 날, 자신의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습, 특히 아버지의 눈을 교묘히 
피해 성관계를 끈질기게 이어가는 얀 아저씨와 엄마,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방조하는 아버지의 행태에 실망하고는 더 이상 자라지 않기로 맹세하고 계단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그는 스물 한 살이 될 때까지 세 살의 크기로 남아 있게 
된다. 얀 아저씨가 준 양철북을 분신처럼 메고 다니며.
  그가 성장을 멈춘 동안, 마을에서는 나치가 등극하고 위세를 떨치다가 
패배한다. 엄마는 얀의 아이를 잉태한 채 자살하고, 아버지는 나치당원이 되며, 
얀 아저씨는 폴란드인이란 이유로 나치에게 죽음을 당한다. 오스카가 사랑한 
동갑의 마리아는 아버지의 정부가 된다. 또 독일군 위문공연에 나서는 
서커스단에서 만난 난쟁이 여자를 사랑하고 그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리고 패전 
뒤에는 나치 배지를 다시 삼키게 함으로써 아버지를 죽음으로 밀어넣는다.
  오스카는 양철북을 두드리고 기성을 질러 유리를 깨는 것을 통해 세상에 
개입한다. 엄마의 간통행위가 절정에 이르자 온 동네의 유리를 깨뜨림으로써 
망치고, 나치 전당대회를 왈츠를 추는 무도장으로 바꾼다. 성적 열정과 정치적 
엄숙함은 파괴되고 희화화된다.
  귄터 그라스의 1959년도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독일 역사에 대한 일종의 
학습이다. 영화는 오스카라는 비정상적인 아이의 시각이라는 우회도로를 통해 이 
학습에 이르게 한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인류에 대해 최대의 죄악을 범한 이 
역사에 대한 접근을 아주 기이하고 변태적인 것으로 만든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과거 독일을 죽이고, 아버지가 남긴 정부와 자신의 
아이일지도 모르는 동생, 즉 아버지의 짐을 지고 어딘지 모를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오스카는 어쩌면 독일 전후 세대의 자화상이자 새로운 독일 영화의 자기 
선언일지도 모른다.
  폴커 슐뢴도르프가 새로운 독일 영화의 대표적 감독들과 공유하는 감성은 바로 
이러한 역사에 대한 해석에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벤더스나 파스빈더, 헤르초크가 보여주는 개성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독일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추구하되 
그 원천을 문학작품에서 찾는다. 사회비판적이고 정치적인 소재를 다루는 데서 
이야기는 자극적이되 스타일은 그에 흡족한 것이 못 된다. 하지만 "양철북"은 
칸에서도 수상하고, 아카데미에서도 외국영화상을 받았으며, 새로운 독일 영화 
가운데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드문 작품이다.
  "주진숙"

    성난 황소(Rasing Bull 1980)
    폭력을 통한 폭력 비판
    마틴 스코시즈(Martin Scorsese)

  "성난 황소"는 마틴 스코시즈와 로버트 드 니로 짝이 만든 흑백 권투영화이자 
뉴욕의 뒷골목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보통 권투영화가 아니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는 1970년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권투영화 "록키" 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노동계급 출신인 영웅의 성공을 위한 무대로서의, 영웅주의자의 무대로서의 
링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코시즈는 권투영화와 전기영화를 결합시켜 
관객의 전통적인 기대를 당황스러울 정도로 뒤집음으로써 할리우드 장르들의 
모순을 두드러지게 하고, 그것들을 철저하게 재고찰한다.
  거의 항상 그의 영화의 배경이 되는 뉴욕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분명 
걷고 대화하기에 좋은 우디 앨런의 뉴욕 거리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폐점 후"처럼 "성난 황소"의 뉴욕은 거친 사람들, 
복잡한 거리, 끊임없이 이어지는 싸움, 창녀들의 장소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롤랑 바르트의 개념을 빌려온다면 '뉴욕적임'으로써 도시 그 자체와 거의 
관계가 없고, 오히려 거기 사는 많은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뉴욕에 
대한 공유된 이미지이며 집단적인 기표이다. "성난 황소"의 뉴욕은 한때 미들급 
챔피언이었던 제이크 라 모타의 힘의 반영이며 혼란스러운 폭력의 장소이다.
  폭력은 미국 영화에서 널리 사용되며, 종종 오락의 기본 토대가 된다. "성난 
황소"는 난폭한 권투시합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까지도 가혹한 싸움으로 
그려냄으로써 폭력을 전경화한다. 하지만 그 폭력은 매력적이면서도 혼란스럽게 
묘사되고 있다. 오히려 서사구조나 사실주의 양식의 관습적 사용과 주인공 라 
모타의 마음의 풍경을 보여주는 표현주의적 현실을 통해 링 위와 가정 모두에 
걸쳐 있는 미국 생활의 폭력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주로 제이크 라 모타의 실제 삶에 기초하고 있는 이 영화는 제이크의 삶을 
지배하는 폭력의 상징으로써 권투시합 장면을 사용한다. 그는 권투시합이 없을 
때도 말다툼과 협박, 구타가 아니면 어느 누구와도 교제할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특히 두 번의 결혼생활이나 사실상 매니저 역할을 하는 동생 조이와의 
관계에서 보이는 질투와 폭력은 타인들에게 상처를 주는 동시에 그 자신에게도 
파멸만을 안겨준다. 이런 행위들은 사랑하던 모든 사람들을 몰아내고 마침내는 
비만한 몸으로 마이크 앞에서 관객을 웃기는 삼류 배우로 전락한 그가 행사하는 
자학적 폭력으로 귀결된다. 이 영화에서 '오락'은 폭력 못지않은 처벌이고 
희생이다. 그것은 고통을 주고받기 위해 사용하는 육체에서 해방되기 위한 
출구이며, 상처를 입히기 위한 사적인 욕구를 공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이는 "한때 눈이 멀었지만 지금은 볼 수 있다."는 
성경 인용구에서 알 수 있듯이 제이크는 비판받을 인물이긴 하지만 동정어린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다. 
  젊은 제이크 라 모타와 늙은 제이크 라 모타, 긴장된 챔피언 제이크와 몰락한 
삼류 배우 제이크는 모두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에 기대고 있다. 그것은 
단순하거나 편안한 성격의 창조를 거부하고, 자신이나 타인이 이해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인물의 슈도(의사) 마조히즘에 대한 심리 연구로서 탁월한 의미를 
가진다.
  "변재란"

    메피스토(Mephisto 1980)
    나치에 부역한 연극인의 반생
    이슈트반 서보(Istva`n Szabo`)

  이슈트반 서보(1938__)는 1957년의 반소 봉기 이후 탄생한 새로운 헝가리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그는 당시 동서 유럽을 휩쓸던 모더니즘과 
작가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단편시대를 거쳐 1961년에 "백일몽의 시대"로 장편영화 감독이 된 서보의 
초기 영화들은 명백히 트뤼포와 고다르를 반영하고 있으며, 레네의 시간에 대한 
실험을 적극 수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부다페스트 
이야기"(1976)를 기점으로 크게 전환한다. 그때까지의 영화가 시간과 몽타주, 
현실과 환상에 대한 파격적인 형식 실험에 치우쳤다면, "신뢰"(1979) 이후의 
영화는 리얼리즘 양식을 주된 서사구조로 채택하고 있다. 그는 늘 시대의 전형인 
개인에 초점을 두는데, 초기 영화가 비극적 상황조차 낙관의 시선으로 감싸고 
있다면, 후기의 그는 시대에 희생당한 인물들의 비극적 파멸에 동정어린 눈길을 
보낸다. 서독과 합작한 "메피스토"(1980)는 서보의 후기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서방의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이다.
  클라우스 만이 1936년에 쓴 동명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브레히트의 혁명적 
연극에서 출발해 나치즘의 선전원으로 전락하는 한 극예술가의 반생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회프겐의 모델은 독일 현대연극사의 한쪽을 차지하는 구스타프 
그륀트겐스(1899__1963)다. 함부르크 지젤 극단에서 연기 경력을 쌓기 시작해 
나치 아래서 베를린 국립극장장을 지낸 그륀트겐스는 1932년에 상연된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텔레스역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프리츠 랑의 
"M"에서 지하세계의 음흉한 두목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사실 토마스 만의 
아들인 클라우스 만이 소설 "메피스토"를 쓴 것은 구스타프 그륀트겐스의 죄악을 
고발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는 사적 감정이 개입되어 있었다. 그의 여동생 
에리카만이 바로 1920년대 그륀트겐스의 동료이자 애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보는 그를 매도하지 않는다. 그는 회프겐이라는 인물에 내재된 
욕망과 결핍, 두려움 따위를 복합적인 관점에서 조명한다. 회프겐은 출세를 위해 
베를린 극장장의 딸과 결혼하고, 나치 장군의 애인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그는 정부를 해외로 도피시키고, 동료를 밀고하면서도 반나치 활동으로 
체포당한 친구 오토의 석방을 탄원하기도 하며, 나치에 협력하면 할수록 무대에 
더욱 광적으로 몰두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서보는 그를 연민한다. 이 점은 끝 장면에서 분명해진다. 회프겐은 사방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들으며 그는 자신을 뒤쫓는 스포트라이트를 피해 달아나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한테 뭘 원하는 거지.... 난 단시 배우일 뿐인데...."
  서보에 따르면, 회프겐은 끝없이 스포트라이트(출세, 갈채, 명성)만 동경했다. 
그는 그것에 모든 것을 종속시켰지만, 결국 바로 그것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물론 그는 예술적 지성을 결여한 인물이며, 천박한 인격의 소유자다. 하지만 
서보는 그가 특수한 개인이 아니라 시대 속에 놓인 보편적 개인이라고 말한다. 
이 인물상은 "레들 대령"으로 이어지지만 "레들 대령"과 비교하면 서보의 
관점은 분열돼 있다.
  서보는 외적 상황은 리얼리즘으로, 내면세계는 표현주의적 미장센으로 
잡아내고 있다. 전자가 교훈극을 낳는다면, 후자는 비극을 예고한다. 서보가 
화려한 기법으로 부각한 회프겐(클라우스 마리아 브란다우어)의 자기 도취적 
무대 연기는 "천국의 아이들"의 장 루이 바로처럼 관객을 빨아들인다. 비극이 
너무 생생해지면서 상투적인 교훈극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영화는 2차 대전 이전의 상황에서 끝나지만, 그륀트겐스는 전후에도 계속 
활동했다. 그는 뒤셀도르프와 함부르크 시립극장장을 지냈으며, 뒤렌마트 같은 
현대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다시 "파우스트"를 올렸는지는 알 수 
없다. 서보의 해석대로라면 그는 다시는 메피스토텔레스를 맡지 않았을 것이다.
  "이정하"

    욜(Yol 1982)
    터키의 억압 상황에 맞서 감욱에서 연출한 영화
    일마즈 귀니(Yilmaz Gu`ney)

  일마즈 귀니의 삶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지난했다. 터키의 군사정권 아래서 
불온서적을 발행한 죄로, 수배학생을 은닉한 죄로, 반공주의자인 판사를 저격 
살해한 혐의로 그는 10년 이상을 감옥에서 보냈다. 1960년의 첫 번째 감옥행은 
배우 생활의 시작을 갉아버렸고, 1970년대 초의 두 번째 감옥행은 연출가로서 
한창 활동하는 그를 옭아매었다. 그리고 곧이어 18년 형을 받은 세 번째 
감옥행은 그로 하여금 감독으로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게 했다. 감옥에서 
지속적으로 사나리오를 집필한 뒤, 조연출이나 다른 사람을 통해 연출하게 하는 
작업을 계속한 것이다. 1980년, 군사정부가 그의 작품을 상영 금지시켜 더 
이상의 작업이 불가능해지자 그는 감옥을 탈출해 스위스로 망명했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인 "벽"(1982)을 남기고 1984년, 47살의 나이에 암으로 숨졌다.
  "욜"도 그가 감옥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세리프 괴렌을 내세워 원격 조정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망명지인 스위스에서 그가 직접 편집한 이 영화가 1982년 
칸의 대상을 받은 것은 어쩌면 작품 자체보다는 귀니의 생명을 건 영화에 대한 
열정과 정치적 폭력과 억압에 맞선 영화의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실제로 귀니가 장기간 수감됐던 감옥에서 시작한다. 그는 모범수로 
일주일의 휴가를 받은 다섯 명의 인물에 초첨을 맞추어 터키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고대하던 고향길이었지만 귀휴증을 잃어버려 다시 구치소에, 그것도 
그가 있던 곳보다 더욱 자유가 억압된 공간에 갇히는 인물, 짧을 휴가 동안 
친척들의 집요한 감시 아래서만 약혼녀와 데이트를 해야 하는 청년, 처남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죄로 처가에서 처와 자식들을 내주지 않아 결국은 함께 
도망치다가 처가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하는 남자, 쿠르드족이란 이유로 밤이면 
총성이 그치지 않는 고향에서 형의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인물, 그리고 자신이 
없는 동안 간통한 죄로 사슬에 묶인 채 살고 있는 아내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스스로 단죄해야 하는 인물이 그들이다.
  이들을 통해 본 터키의 현실은 너무도 암담하고 희망 없고 처연하기까지 하다. 
군인들이 총을 든 채 차에 탄 남자들을 수색하고 신분증을 확인하지만 민중들은 
당연한 듯이 명령에 따른다. 기차 안 화장실에서 부부 사이의 성적 욕구를 
해소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승객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부부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하다. 자신이 단죄해야 할 아내가 지쳐 죽기를 바라며 허허로운 
눈밭을 아들과 함께 걸어가는 사내의 모습도 있다. 또한 가족의 몰살을 피하기 
위해 형의 주검을 보고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는, 그리고 형수에게 관습에 
따라 형수의 남편이 됐다고 말하는 인물도 있다.
  이들을 억압하는 것은 현대 터키 속에 남아 있는 봉건과 전통, 관습, 그리고 
군사정권이다. 그 억압에서 자유로운 개인은 영화 어디에도 없다. 아니, 자유란 
것은 이 터키라는 곳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로 보인다. 이 영화에는 영웅이 없다. 
오직 운명에 순응하는 무기력한 민중들이 있을  뿐이다. 여자들 또한 전통과 
관습, 남성의 명분을 위해 존재하는 듯 그저 수동적이다. 영화는 그저 그들을 
보여주고, 그들의 상황을 묘사한다. 그들의 조건은 정치적 목표의 좌절이나 
절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자관계나 소수 인종 문제가 인물들의 
역경을 만든다. 
  이런 점에서 "욜"은 네오리얼리즘의 새로운 작품 같기도 하다. 인물의 
성격보다는 상황의 불가피함이 극을 이끌고, 그에 대한 비판보다는 묘사로 
그치면서 열려진 결말로 이끄는 점이 특히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가까운 과거를 엿본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영화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직접적인 묘사는커녕 매춘의 영화를 만들던 시절을 부끄럽게 한다.
  "주진숙"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
    복제 인간 통해 휴머니즘 해부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1982년, 리드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E, T"와 
동시에 개봉돼 흥행 경쟁을 벌이다가 일주일 만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관객들은 
현실도피적인 "E, T"의 유토피아를 어둡고 비관적인 "블레이드 러너"의 
디스토피아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 이 영화를 '저주받은 걸작'의 명단에 올려놓은 
이들은 컬트 영화광들과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었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에게 
이 영화는 공간의 혼성 모방(pastiche)과 시간의 정신분열증(schizoph renia)으로 
특징되는 포스트 모던 사회의 징후를 보여주는 일종의 교과서였다.
  2019년, 3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검은 비가 내리는 로스앤젤레스의 
이미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혼성 모방으로 채워져 있다. 세계 도처에서 
이주해 온 다양한 인종들, 코카콜라와 일본 여자의 광고판, 용의 형상을 한 
네온사인, 그리스, 으로마 시대와 바로크 시대의 건물, 마천루 위에 자리잡은 
고대 이집트의 피라밋.
  로스앤젤레스는 또한 후기 산업사회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햇빛이 없는 
지상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과 지상에서 벗어나 맑은 공기를 마시는 
부르주아들, 편리한 문명의 이기 옆에 널려 있는 쓰레기...!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주의는 모든 것을 소모하고 황폐화시켜 버린다. 스물 다섯 살에 늙은이가 
되어버린 세바스티안은 발전의 속도가 가속화해 시간과 공간의 압축현상이 
일어나는 후기 산업사회와 닮아 있다.
  복제인간 레플리컨트의 시간은 과거도 미래도 없다.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 
시간의 연속성을 경험할 수 없고, 따라서 '나'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없는 
레플리컨트의 상태는 정신분열증이다. 그들은 자신의 기원을 찾아 지구로 온다. 
과거의 기억과 역사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단서는 사진과 어머니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라는 슬로건으로 만들어진 레플리컨트는 진짜와 가짜, 
현실과 상상, 원본과 카피의 구분이 없어지는 단계로 진입하는데, 이것은 장 
보드리야르의 모조품(simulacra)과 원본 없는 복제(simulation)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해석에 성서에 대한 패러디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더하면, "블레이드 러너"는 더욱 복잡한 텍스트가 된다. '자본가이자 과학자인 
타이렐이 레플리컨트를 만들고 4년의 수명을 주었다'는 내러티브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일정한 수명을 주었다'는 메타 내러티브에서 온 것이다. 
레플리컨트 로이는 아버지 타이렐을 찾아서 수명을 연장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섭리는 변경될 수 없는 것'이라는 대답에, 로이는 타이렐의 
눈(오이디푸스처럼)을 찔러 죽인다. 로이는 레플리컨트를 제거하는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를 살려주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이미지로 죽어간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복제인간은 '인간은 무엇이며,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라는 르네상스 
이후부터 계속된 논의를 확신에서 의문으로 바꾸어놓는다. 
  1992년, "블레이드 러너"는 감독판으로 다시 개봉되었다. 1982년판과의 
차이는 데커드를 레플리컨트라고 암시하는 부분이다. 그 결과, 낯선 공간에 
타자를 던져놓고 그들이 악전고투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그려온 리들리 스콧의 
영화 계보에 따라 영화를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더 많아졌다. 
  타자 레플리컨트가 낯선 지구에 찾아와서 패배하는 이야기로 영화를 읽는 것은 
포스트 식민주의를 논의하는 1990년대에 더욱 적합한 해석처럼 보인다.
  "김경욱"

    향수(Nostalghia 1983)
    러시아 예술가의 향수병이 물씬한 고독 이야기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고향이나 조국을 떠난 예술가는 어떤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특히 
러시아인들에게는 좀 유별나 보인다. "향수"에서 볼 수 있는 러시아 예술가의 
향수병은 과거와 현재, 미래에 이르기까지 처절하며, 또 전혀 변함이 없다. 
18세기에 실존했던 러시아의 음악가 파벨 소스노프스키는 농노의 신분으로 
지주의 후원을 받아 이탈리아로 음악 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향수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귀향한 뒤, 술에 절어 살다가 결국 자살하고 만다. 이 소스노프스키의 
발자취를 따르던 소련의 시인 고르차코프는 낯선 이탈리아 땅에서 고향과 고향에 
두고 온 아내, 자식들을 끊임없이 떠올린다. 여기까지가 영화 속의 과거와 
현재다. 그렇다면 미래는? 바로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삶이다. "향수"를 만든 
직후 서방세계로 망명한 그는 이후 "희생"을 만든 뒤 암으로 사망하고 만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소스노프스키), 현재의 영화 속 현실(고르차코프), 미래의 
현실(타르코프스키)이 모두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즉, 소스노프스키가 
곧 고르차코프이며, 고르차코프가 또한 타르코프스키이다.
  영화는 '관찰'이라는, 평범하지만 잊고 있던 진리를 깨우치며 인간의 근원적 
고독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타르코프스키는 "향수"에서 시간을 자신의 영화 속에 
가두고 공간을 재구성한다. 그래서 결코 어떤 상징적 의미로도 해석되기를 
거부했던, 그의 영화 속의 미장센은 가장 강렬한 영상언어이자 
'타르코프스키풍의 영화'(Tarkovskian film)를 규정하는 절대 요인이 된다.
  "향수"에서는 물과 불로 상징되는 '향수'와 '희생'의 의미화가 두드러진다. 
타르코프스키의 뇌리 속에 고향은 비가 자주 구성지게 내리는 곳으로 각인돼 
있다. 그래서 "향수"에서도 비나 물은 고르차코프의 향수를 일깨우는 중요 
모티브로 기능한다. 그런데 이물은 불과 만나면서 인간의 이기주의를 꾸짖는 
고귀한 희생정신의 모티브로 발전한다. 고르차코브가 투스카나 언덕에서 만난 
광인(그리고 성인인) 도메니코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로마의 광장에서 스스로를 불사르며, 이 순간 고르차코프는 도메니코와 
약속한 대로 말라버린 야외 온천탕에서 촛불을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나른다. 그리고 영화는 이탈리아식 성당에 둘러싸인 러시아의 농가(집 앞에 
조그만 웅덩이가 있는)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것은 고르차코프와 
타르코프스키가 타국에서 느끼는 향수임과 동시에 고르차코프와 도메니코의 
연대의식을 의미한다.
  이처럼 불로 상징되는 '회생'과 '구원의식'은 그의 다음 작품이자 유작인 
"희생"으로 이어진다. 이 고르차코프와 도메니코의 연대는 비범한 첫 만남에서 
비롯되는데, 고르차코프가 도메니코의 집 안에 처음 들어설 때 물이 고여 있는, 
빈 창고 같은 공간에서 그는 갑자기 고향의 산하를 본다. 이 독창적인 공간 
구성방식은 '시간의 개인적 흐름'과 일상적 삶에서 비롯된 꿈과 환상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데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즉, 그의 공간 구성은 
그의 영화 속에서 언제나 중요한 배경이 되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세계와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가슴과 머리 속에 각인돼 있는 기억과 환상의 공간이 
혼합되는 독특한 세계인 것이다.
  영화사상 이렇게 독특한 시공간을 보여준 감독은 없었다. 이러한 그의 
영화세계는 그 동안 널리 알려지지 못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영향을 
받은 다른 감독들의 작품을 통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덴마크의 라스 폰 
트리에, 뉴질랜드의 빈센트 워드, 영국의 마이클 래드퍼드, 그리고 러시아의 
콘스탄틴 로푸샨스키, 알렉산드로 카이다노프스키, 알렉산드로 소쿠로프에서 
한국의 배용균에 이르기까지 1980년대 이후의 세계 영화를 이끄는 주요 
감독들의 면면을 보면 타르코프스키는 분명 1980년대 이후 새로운 영화의 
스승으로 기록될 것이다.
  "김지석"

    황토지(1984)
    중국 영화 5세대를 열어제친 압도적 구도
    첸 카이거

  "황토지"는 현대 중국 영화의 분기점을 이루는 '시대의 영화'이다. 
1930년대부터 문화혁명 직전까지 중국 영화계의 지도적 존재였던 문예 활동가 
시아옌은 문혁기의 영화를 한마디로 '무'라고 표현했다. 중국 영화가 문혁의 
상처에서 벗어나 정상 궤도에 진입한 것은 1978년 무렵이다. 이 때의 흐름은 
숱한 정치투쟁의 상처와 회한은 고발한 감상적인 상흔 영화들이 주도하였는데, 
셰친의 "천운산 이야기"가 대표작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쪽에서는 "셰친의 영화를 타도하자"는 외침이 나오고 있었다. 
그 주인공들인 첸 카이거와 장 이머우는 1978년에 다시 문을 연 베이징 
영화학교에서 셰친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이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셰친은 
진정 중국 영화의 탄생을 위한 변증법적 부정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황토지"는 그들의 슬로건이 치기가 아니었음을 입증했다. 1984년의 로카르노 
영화제와 이듬해 홍콩 영화제에서 "황토지"를 본 사람은 그 압도적인 땅의 구도 
앞에서 경악했다. 그것은 중국 영화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지금 중국의 제 5세대 영화라고 부르는 것이 탄생했다. 열 서너 살에 
문혁을 만나 난폭한 홍위병이 되었던 세대, 이윽고 믿었던 혁명에서 배반당한 채 
도시에서 농촌으로 하방되었던 세대, 그러나 온몸으로 중국의 현실을 체험했던 
세대, 그럼으로써 혹독한 현실 체험을 통해 강인한 생명력을 획득한 세대가 
그들이다. 아버지를 고발했던 홍위병 첸 카이거가 "황토지"를 만들기까지의 
역정은 인생의 장정으로 표현할 만한 드라마로 차 있다.
  그렇지만 정작 "황토지"에는 그러한 드라마가 없다. 1930년대 항일 전 시기와 
황화 주변 고원지대를 무대로, 민요 채집을 위해 온 팔로군 병사와 농민 소녀의 
교차점을 그린 이 영화는 전통적인 사회주의 중국 영화의 경계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병사는 와서 얼마간 머물고 떠난다. 소녀는 병사에게 옌안의 해방된 생활에 
대해 듣지만, 곧 돈에 팔려 시집을 간다. 병사가 다시 왔을 때는 이미 소녀가 
떠나고 난 뒤였다. 그는 소녀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그것을 현실화시켜 주지는 
못했다. 소녀는 시집살이를 견디다 못해 옌안으로 도망가기 위해 강을 건넌다. 
그러나 첸 카이거는 소녀가 무사히 강을 건넜는지 빠져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팔로군 병사가 마을을 떠날 때, 소녀는 자신도 
옌안으로 데려가 달라고 한다. 병사는 군에는 규율이 있기 때문에 규율에 따라 
허락을 받은 다음에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말한다. 소녀는 이렇게 되묻는다. 그 
규율을 바꿀 수 없느냐고. "황토지"는 전통적인 사회주의 중국 영화의 미학과 
내용이라는 두 측면에서 바로 이 규율을 바꾸려 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점은 형식적 측면에서 탁월하게 표현되었다. 첸 카이거와 촬영기사 장 
이머우는 전통적인 농민의 삶과 인민해방군의 접점, 민족해방과 여성해방의 
모순을 광대하고 원근감이 깊은 화폭, 지루하리만치 호흡이 긴 화면, 토속 
민요가 어우러진 강렬하고 독특한 시적 방법으로 담아냈다. "황토지"는 온갖 
종류의 모호함으로 가득 찬 작품이다. 첸 카이거는 그것이 현실의 모습이자 
인간의 삶이며, 최종적으로는 인간의 주체적 선택이라는 문제가 남는다고 
답변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무책임하고 지식인적이라기보다는 민중의 
생명력에 대한 체험적 믿음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정하"

  천국보다 낮선(Stranger than Paradise 1984)
  스산한 미국을 유럽식으로 구성
  짐 자무쉬(Jim Jarmusch)

  헝가리 아가씨 에바가 뉴욕에 사는 건달 친척 윌리의 집에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되는 "천국보다 낯선"은 착상부터 도전적이다.
  이 영화에 담긴 미국 사회의 풍경은 아메리칸 드림, 모든 것이 넘쳐나는 
풍요의 천국과는 거리가 멀다. 이 흑백 장편영화는 삭막하고 스산하기조차 한 
미국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영화로 청년 감독 짐 자무쉬는 1984년의 칸 
영화제 신인감독상과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표범상을 받았고, 그는 단숨에 뉴욕 
독립영화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천국보다 낯선"은 미국 영화지만 사실 미국 영화라기보다는 미국을 배경으로 
한 유럽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 화면이 한 장면을 이루는 길게 
찍기, 시선의 비상한 집중을 요구하는 고정된 카메라 스타일, 서로 진정한 의사 
소통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관계, 여기저기 떠돌지만 정신적으로 건조한 삶의 
조건, 긴 페이드아웃의 화면 전환이 주는 형식의 단절감 따위는 무엇보다 대리 
만족을 주는 이야기체 영화를 중시했던 미국 영화의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자무쉬는 빔 벤더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로베르 브레송 같은 유럽 
영화감독과 일본 영화감독과 일본 영화의 대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영감을 
빌려와 황폐한 미국 생활의 이미지를 재구성했다. 영화 표현의 뿌리를 여러 
혈통에서 빌려온 셈이다. 그래서 곧잘 '포스트 모던'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나 자무쉬 영화의 새로움은 유럽 영화에서는 이미 상투화한 진술을 미국의 
상황으로 옮겨놓은 낯설음에서 온다. 예를 들면 에바와 에바의 사촌 오빠 윌리가 
식탁에서 TV 디너에 관해 대화하는 장면 같은 것이다.
  "티브이 디너 안 먹을래?"
  "안 먹어, 배 고프지 않아."
  "왜 티브이 디너라고 부르지?"
  "그냥... 티브이를 보면서 먹으니까... 텔레비전 말이야."
  "텔레비전이 뭔지는 나도 알아."
  "그 고기는 어디서 난 거야?"
  "뭐?"
  "그 고기는 어디서 난 거야?"
  "쇠고기지 뭐."
  "쇠고기야? 고기같이 보이지 않는데."
  "휴... 상관하지 마. 어쨌든 여기선 이런 걸 먹는다구. 고기, 야채, 디저트.... 
그리고 설거지할 필요도 없어."
  이런 식의 대화가 계속되는 단조로운 양식은 황폐한 미국 생활을 암시하는 
놀라운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자무쉬는 원래 이 영화의 1부인 "신세계"를 단편영화로 발표했는데, 평판이 
좋자 두 단락을 더 붙여서 장편영화로 공개했다. 그러나 1부 "신세계"에 이어 
추가된 "일 년 후"와 "천국"은 1부의 부연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뉴욕에서 클리블랜드와 플로리다로 옮겨 다닌다. 이 여정은 서부영화의 
주인공들이 야만의 땅에 문명을 심으며 걷던 신화적인 여정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장소이동 모티브에는 더 이상 상징적인 의미가 없다. 클리블랜드로 
가는 차 안에서 주인공들은 어딜 가나 다 똑같다고 중얼거린다. 어디나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저 천국보다 낯선 곳일 뿐이다. 
  그러나 자무쉬는 이후에 만든 영화에서 "천국보다 낯선"의 신선함에 맞먹는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형식이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는 종래의 미국적인 이미지를 뒤집는 데 꾸준한 관심을 
보여왔다. 재미있는 것은 이 관심이 모방과 짜깁기와 재구성이라는 1980년대 
이후의 양식적 경향 속에서 추구된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아주 미국적인 
감독이다.
  "김영진"

    마기노 마을의 이야기(Magino Village-A Tale 1985)
    농민에게 보내는 러브 레터
    오가와 신스케

  영화가 민중의 삶 깊숙이 침투하여 일상을 함께 하고, 희망과 미래, 투쟁의 
현실을 화면 가득 담아내는 그런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누구일까?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영화 100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그 전형적인 인물들을 
가끔 만날 수 있다. "나는 네덜란드인"의 요리스 이벤스는 카메라와 한 몸이 되어 
세상을 대상으로 이를 실천했고, 장 뤼크 고다르는 그 이론을 발명했다. 그리고 
이들과 지구 반대편에 살던 한 동양인이 이들의 양분을 섭취하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오가와 신스케. 수은 중독이 몰고 온 대표적인 공해병인 미나마타 병에 관한 
다큐멘터리 연작을 20여 년에 걸쳐 제작한 것으로 유명한 노리아키 스치모토 
감독과 함께 1970년대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를 이끈 오가와 신스케 감독은 흔히 
일본 농민의 영화 동지라고 불린다. 1970년대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의 부흥과 
성장은 1960년대 이후 일본 좌파 운동의 성장과 그 맥을 같이한다.
  오가와 신스케 감독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1969년에 통신대학생들의 대학 
자주화투쟁에 관한 기록영화 "청년의 바다"와 학생운동권 지도부의 1년간의 
투쟁과 패배를 기록한 "압살의 숲"을 통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1967년, 오가와 감독에게 새로운 소식이 전해진다. 도쿄 근처의 조용한 농촌인 
나리타에 새 공항을 세운다는 정부의 방침을 그 지역 농민들이 반대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새로운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나리타로 자신의 무기인 
카메라를 들고 간 오가와 감독은 투쟁하는 농민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흔히 오가와 감독의 대표작이자 "산리주카 7부작"이라고 부르는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투쟁의 기록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1968년에 시작해 
1977년에 시리즈를 완성한 오가와 감독은 그 마지막 편이라고 할 수 있는 "헤타 
부락"편에서 자신의 고민을 더욱 심화시킨다.
  "이제 투쟁이 있는 곳에 카메라가 가는 것만이 올바른 방법은 아니다. 일상 
속에 카메라가 침투해 함께 시간을 기록해야 한다."
  오가와 감독은 투쟁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왜 그들이 농사짓는 것을 
사랑하며, 자연의 섭리를 중요시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1977년, 오가와 신스케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농촌으로 가자.' 조감독 
한 명에게 그때까지도 끝나지 않은 나리타 투쟁에 관한 작품을 계속 만들라고 
지시한 뒤, 오가와 신스케 감독은 야마가타 지역의 마기노라는 마을로 가 집을 
짓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영화, 100년의 역사 속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영화 "천 년을 새기는 해시계--마기노 마을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마기노 마을의 이야기"는 오가와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나는 오가와 감독입니다. 이곳은 마기노 마을이고, 우린 이곳에서 살면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화면 가득 논이 보인다. 해가 뜨고 벼가 자란다. 오가와 감독은 농민의 
삶 속에 자연과 과학이 함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농민을 사랑했고, 
스스로 농민이기를 원했으며, 그래서 벼가 자라는 과정까지도 중요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는 과학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벼가 자라는 
과정을 현미경 카메라와 저속 촬영으로 기록했다. 그의 영원한 동지였던 
촬영감독 다무라는 1년간 같은 장소에서 저속 촬영으로 벼가 자라는 과정을 
매일 15분 간격으로 촬영했다. 자연과 싸우며 벼를 생산하는 노동의 시간과 
공간을 기록한 영화 "마기노 마을의 이야기"는 영화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민중의 일상 속에 영화가 어느 정도까지 침투할 수 있는가를, 그리고 관객에게는 
생산하는 농민의 시선을 일깨워준다.
  "나에게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일본의 농민들에게 보내는 러브 레터를 쓰는 
것입니다."
  오가와 감독의 마이다.
  "변영주"

    녹색 광선(Le Rayon Vert 1986)
    '문학적 영상미'가 돋보이는 무겁지 않은 예술영화
    에릭 로메르(Eric Rohmer)

  이 영화에서는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중년의 여자도, 주인공인 이십 대 여성 
델핀도 녹색 광선에 대해 말하고 생각한다. 태양의 적광이 수평선 아래로 잠기면 
하늘과 바다에 잠깐 녹색 띠가 나타나는데, 이 녹색 광선이 빚어내는 순간은 
부지불식간에 삶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 된다. 물론 살면서 이 녹색 광선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진실의 아름다움과 만나기 위해 델핀은 바캉스 기간 동안 내내 해변을 따라 
우울한 소요를 거듭한다. 하지만 에릭 로메르의 다른 영화들이 그렇듯 "녹색 
광선"에는 과잉이 없다. 델핀의 우울은 정신병에 걸리지 않을 만큼의 무게이고, 
마지막 진실을 확인하는 순간도 드라마틱하지 않다. 삶의 표면을 이야기하다가도 
얼핏 그 심층을 한 번 돌아보게 하고, 또 불확정적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 사건을 만든 필연적 계기들을 영화 속 인물들의 정서와 감정에서 찾게 만드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들은 '문학적'이다.
  사실 그의 배우들은 문어체의 말을 많이 하며, 또 철학개론이나 문학개론 시간 
외에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내용의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게다가 영화 
속에서는 주로 문학작품이나 철학책이 언급된다. "녹색 광선"역시 랭보의 시로 
시작해 쥘 베른을 거쳐가며, 델핀은 소설을 읽다가 마침내 자신이 꿈꿔오던 
연인을 만난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화에서 프루스트와 파스칼, 발자크와 헨리 
제임스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문학적인 것만큼 또 영화적이다. 빛의 움직임, 특히 
일광과 석양을 인물의 심상에 맞추어 잡아내는 솜씨나, 배우들의 감탄할 만한 
즉흥 연기, 프랑스 도시들과 해안지방의 풍광을 풍요롭게 활용하는 것 따위는 
분명 문학적인 경지를 넘어선다. 또한 그의 영화는 무거운 듯하면서도 가볍고, 
속물적인 듯하면서도 절박해서 주인공들의 지적 허영은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일상의 지혜를 이기지 못한다.
  에릭 로메르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로 시작해 흔히 '도덕 이야기'로 
묶이는 여섯 편의 영화 "모의 집에서의 하룻밤"(1696), "클레르의 무릎"(1970), 
"오후의 클로에"(1972)의 사이클이 끝난 뒤, 클라이스트의 소설과 중세에 쓰여진 
글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후 로메르는 1980년에 "비행사의 아내"라는 영화로 
'코미디와 격언' 시리즈를 시작하는데, "녹색 광선"(1986)은 그 시리즈의 한 
편이다.
  파리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는 델핀은 바캉스를 맞아 당황한다. 남자 친구가 
있긴 하지만 소원해진 데다 가족들은 그리스 등으로 떠나고 친구의 빈 별장으로 
휴가를 가보지만 휴양지의 지나친 가벼움에 점점 소외감만 느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우연히 녹색 광선에 대해 듣게 되고, 또 거리에서 자신의 운명을 알려주는 
듯한 카드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녹색 광선을 함께 볼 남자를 기다리게 
되는데, 프롤로그에 인용된 랭보의 시처럼 마침내 그 시간이 오고 관객들은 
델핀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가슴 설레는 과정을 함께 하게 된다.
  이미 몇 가지로 우상화된 영화라는 매체의 성격을, 심각하고 무거운 스타일을 
동원하기보다 이렇게 깜찍하고 귀여운 영화를 이용해 바꾸는 작업은 한층 더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에릭 로메르는 1960__70년대 영화사에 '영화적 
문학성'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을 소개했고, 그곳에서 18세기와 20세기는 매우 
역설적이고 희극적인 방식으로 만났다. 그 만남 속에서 유럽 영화의 우상적 
얼굴, 즉 고급 예술로서의 문예영화는 매우 명랑한 모습을 띠게 됐다. 그래서 
예술영화관을 나오며 반드시 철학자의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게 됐던 것이다.
  "김소영"

    메이트원(Matewan 1987)
    1920년대의 미국판 "파업 전야"
    존 세일즈(John Sayles)

  1980년대에 미국 독립영화의 대표 주자로 떠오른 존 세일즈. 소설가이자 
저예산 상업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이며, 1980년에 "세코서스 7인의 귀환"이라는 
영화로 미국 영화사에 등장했다. 그러나 1987년에 "메이트원"을 만들 때까지 
그는 독창성은 있지만 영화적 수완은 뛰어나지 못한 감독쯤으로 평가받았다.
  "메이트원"은 1920년대에 웨스트 버지니아의 탄광 마을 메이트원에서 실제로 
일어난 학살사건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미국판 "파업 전야"라 부를 만하다. 
레이건과 람보가 판을 치던 1980년대에 이건 꽤 높이 평가할 만한 작업이었다.
  아직 광산 노조가 결성되지 않은 1920년대. 메이트원에서 파업이 일어난다. 
광산의 사장은 이탈리아 이민과 흑인들을 모집해 구멍난 노동력을 메우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메이트원에 흘러들어온 비조합원 노동자 가운데에는 쿠퍼도 
끼여 있다. 그러나 그는 사실 세계 산업노조에서 파견한 노동운동가다. 쿠펴는 
메이트원의 노동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독려한다.
  쿠퍼는 사용자측에 매수된 다른 노조원의 모함을 받기도 하고 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 다른 조합원들의 노력으로 노조는 점점 강해지고 파업은 
최고조에 달한다. 이 와중에 조합원 힐라드가 석탄을 훔치려다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용자측은 볼드윈 탐정사무소를 통해 사람을 사들이고, 
다음날 마을에는 피비린내 나는 총격전과 학살이 벌어진다.
  "메이트원"은 노조 결성을 위한 투쟁기에 사람들이 품고 있던 완벽한 
공동체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이 잘 포착돼 있는 영화다. 그러나 감독 세일즈의 
의도는 너무 눈에 보이게 드러난다. 낭만적인 분위기로 미화된 등장인물의 
성격화나 멜로드라마적인 과장이 때로는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이 영화가 실제 
역사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는 수많은 굴곡을 
겪으며 변질된 20세기 미국 노동조합의 역사를 직설 화법으로 담았다. 노조가 
결성되고, 투쟁이 시작되고, 많은 사람이 죽어가지만, "메이트원"에는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던 노동자들의 유토피아가 이룩되지 않는다.
  "메이트원"의 촬영은 베테랑이었던 하스켈 웩슬러가 맡고 있다. 탄광촌 마을을 
잡아낸 풍경 가운데 웩슬러가 찍은 화면의 아름다움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잔인한 현실과 아름다운 풍경의 부조화는 영화의 비판적 진술에 묘한 
무게를 싣는다. 세일즈는 웩슬러의 촬영술에 힘입어 공동체를 향한 
감상적이면서도 이상화된 동경을 담아냈다. 공동체 정서를 곧잘 화면에 담아냈던 
존 포드 감독의 서부영화에서 세일즈가 많이 배웠음을 알 수 있는데, 포드의 
서부영화와 비교해도 처지지 않는다.
  세일즈가 메이트원과 인연을 맺은 사연은 오래 전부터이다. 세일즈는 웨스트 
버지니아 지방을 무전 여행하던 1960년대에 이 지방 사람들에게 광산전쟁과 
메이트원 학살사건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나중에 좀더 자료를 조사한 
뒤에 세일즈는 "노조의 권리"라는 소설을 썼고, 거기에 담지 못한 부분을 영화로 
만들었다. 이 영화는 8년 동안 준비해서 400만 달러의 예산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결실을 톡톡히 맺었다. 평자에 따라서는 "메이트원"을 1980년대 미국 
독립영화계의 최고작으로 치기도 한다. 그리고 바다 건너 우리 나라에서도 
"메이트원"은 노동운동 현장이나 대학가에서 심심찮게 비디오로 상영하는 
'컬트'가 됐다.
  "김영진"

    십계(Dekalog 1987__1988)
    인생의 딜레마를 다룬 영상 윤리학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Krzysztof Kieslowski)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는 1941년에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한때는 신부를 꿈꾸다 폴란드 국립영화학교에서 다큐멘터리를 
배우면서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1988년에 칸 영화제에서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이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면서부터이다. 살인자와 
애숭이 변호사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에서 키에슬로프스키는 인간의 윤리적 
결단이 법적, 관습적 판단기준에 선행하며, 또한 높은 차원에 있음을 말한다. 
그는 자신을 영상의 윤리학자로 드러낸 셈인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10부 연작인 "십계"의 한 편이기 때문이다.
  "십계"는 폴란드 텔레비전과 자유베를린 방송사가 같이 만든 텔레비전용 
영화이다. 여섯 번째 연작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라는 제목으로 역시 
극장용으로 재편집된 바 있다. "십계"에는 영화작가 키에슬로프스키의 특질과 
미덕이 원형 그대로 녹아 있다. 제목만 보고 종교적 우화를 연상할지 모르나 
전혀 그렇지 않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십계"를 현대 폴란드 사회를 건져 올리는 
그물로만 사용한다. 그 그물에 올라온 열 장의 실존적 지도, 그것이 영화 
"십계"이다.
  한 첼로 주자가 있다. 그녀에게는 중병에 걸린 남편이 있고, 애인이 있다. 
그녀와 남편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임신 중이다. 애인의 
아이를 가진 것이다. 이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 지워야 하는가. 그녀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노의사를 찾아간다. 그녀는 의사에게 남편이 살 수 있는지 
말해 달라고 한다. 의사는 모른다고 말할 뿐이다. 그녀는 다시 말한다. 남편이 
살아나면 이 아이는 지워야 한다고. 그러나 만약 아이를 지웠는데 남편마저 
죽어버린다면,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그러면 자기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그러니 살아날 확률을 말해 달라고 한다. 그러나 의사는 의학상 
죽음의 확률이 높았던 경우에 느닷없이 죽어버리는 경우를 숱하게 보아왔다. 
생명은 의학의 범주밖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의사는 딜레마에 빠진다.
  연작 중 두 번째 영화의 도입부이다. "십계"연작은 아버지를 사랑한 나머지 
차라리 의붓아버지이기를 바라는 소녀의 얘기, 수학적 원리로 세상을 재단하는 
대학교수가 날씨를 잘못 예상한 탓에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다 얼음이 녹아 
빠져 죽는 아들의 얘기, 늘 훔쳐보기를 하던 소년이 잃은 여인이 거꾸로 소년을 
사랑하게 된 얘기 같은, 실존의 수수께끼와 맞닥뜨려 본 사람들을 순식간에 
사로잡는 힘을 가진 에피소드들로 채워져 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이 연작에서 
인간사의 어떤 근본적 딜레마, 일상 속의 비일상, 고뇌와 결단의 순간을 다룬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러한 순간에 인간 삶의 본질과 존재의 불가해성이 더 
없이 날카롭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드러낼 뿐 그 이상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열 편의 연작은 각기 미완성인 채로 관객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
  "십계"에서 키에슬로프스키는 오히려 텔레비전 영화라는 한계를 조건 삼아 
독자적인 형식 미학을 추구한다. 이 미학의 기초에는 빛과 소리와 음악으로 
유기적 전체를 구성하는 견고한 리얼리즘이 놓여 있다. 하지만 거기에서 피어난 
것은 예의 영상의 윤리학이다. 그것은 특히 빛으로 표현된다. 한 화면 안에서 
푸른빛과 흰빛과 붉은빛을 변화무쌍하게 나누고 모으는 빛의 미학은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블루", "화이트", "레드"라는 색채 삼부작이 우연은 아닌 
것이다.
  "이정하"

    붉은 수수밭(1988)
    전 세계를 매료시킨 새로운 중국영화
    장 이머우

  1985년에 첸 카이거의 "황토지"가 신중국 영화의 탄생을 처음으로 외부 
세계에 알린 이후, 장 이머우의 1988년작 "붉은 수수밭"은 전세계가 신중국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기폭제가 됐다. 서구의 관객들은 이국적이면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구성에 매료됐다. 장 이머우는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를 허물려 했고, "붉은 수수밭"은 그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붉은 수수밭"은 화면에 등장하지 않은 손자의 내레이션을 통해 20세기 
초에서 일본의 침략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한 벽지 마을에 살던 조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도입부부터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준다. 쉰 살이 넘은 양조장집 주인인 문둥이에게 팔려가는 주얼(공리)의 
붉은 가마와 웃옷을 벗어제친 건장한 가마꾼들의 춤과 노래는 시청각적으로 
이국적인 느낌을 전달함과 함께 가련한 여인의 운명, 건장한 남성에 대한 주얼의 
은근한 눈길, 중국의 봉건적 폐습 등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프롤로그로서 
확실한 인상을 남긴다.
  중국적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것, 이것이 장 이머우 영화의 성공 비결이다. 
이를테면 술은 중국인들에게 흔히 시적이며 낭만적인 이미지로 비친다. 이 
작품에서도 고량주는 조부의 낭만적이고 남성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모티브로 
작용하는데, 이와 함께 병균을 물리치는 약의 역할과 일본군에 맞서는 폭탄의 
역할까지 한다. 즉, 고량주는 정열과 낭만, 생산과 활력, 단결과 의리의 상징이다. 
서구인들은 여기서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인간 정신의 재현이나 바흐친의 
'카니발'을 떠올렸을 것이다. 특히 사흘간이나 술독에 빠져 노래를 부르는 조부의 
모습에서 낭만과, 관습적이고, 억압적인 도덕적 굴레에서의 탈출을 보았을 
것이다.
  "붉은 수수밭"은 분명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일면 1930년대 중국의 
좌파 영화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1930년대 
중국의 좌파 영화가 그랬듯이 이 작품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가부장제, 
여성 해방과 육체의 해방을 이야기한다. 반일 항쟁에 관한 이야기는 다소 
도식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여성 주얼의 정체성과 연관지어 보면 달리 읽을 
수도 있다. 주얼은 전래의 전통적 여인상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양조장 주인이 
살해된 뒤에는 양조장의 운영을 책임지는 반모계사회의 가장이 되며, 일본군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라오한의 복수를 이끄는 지도자이기도 하다. 장 이머우는 이런 
개척적이고 능동적인 여인상과 함께 건장하고 낭만적인 남성상을 제시한다. 
대부분 웃옷을 벗고 등장하는 조부와 양조장 일꾼들은 도덕적 틀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하늘과 땅의 도리를 알고 있으며, 또 자유롭다. 이들의 
모습은 일본군의 제복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이들의 건장한 신체는 오늘날 
갈수록 은밀해지고 심리적 문제로 치부되는 '육체'를 과거의 자유로운 집단의 
영역으로 끌어내는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조부모의 개인적 경험은 곧 집단이 되고, 동시에 중국 역사의 
알레고리가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비정치적이면서도 역사의 흔적이 배어 있고, 
전통적이면서도 동시에 비전통적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장 이머우의 연출 능력과 
의도 덕분이다. 전통과 새로움의 조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붉은 
수수밭"은 더욱 돋보인다.
  "김지석"

    안개 속의 풍경(Topio stin Omichli 1988)
    오누이의 여정에 담은 공허한 그리스
    테오도로스 앙겔풀로스(Theodoros Angelpouos)

  지난해 "율리시즈의 시선"이 칸 영화제의 강력한 대상 후보로 언급되기 
전까지 앙겔풀로스는 우리에게 낯선 감독이었다. 백두대간의 예술영화관 개막 
프로그램으로 "안개 속의 풍경"이 한 회 상영된 것이 지금까지 유일한 공식적 
소개였다.
  앙겔로풀로스는 프랑스의 영화학교 이덱에서 수업했고, 시네마 베이테의 
선구자인 장 루쉬의 조수로 일했다. 그러다가 1964년에 그리스로 돌아와 좌익 
신문의 영화평을 쓰기도 했는데, 그의 첫 영화작업은 시네마 베리테 양식의 
기록영화였다. 
  이후 결코 다작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작품에 비평적 찬사가 쏟아지면서 
그리스의 그리스의 대표적인 감독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하게 된다. 특히 
"1936년의 나날들"(1972), "유랑극단"(1975), "알렉산더 대왕"(1980), "키테라 
섬으로의 여행"(1984) 등을 통해 그는 격랑의 그리스 근대사와 사회상을 
시적이며 우화적으로 그려왔다.
  그는 고향에서는 버림받았으나, 그래도 고향을 향한 길 위에 선 이들의 모습을 
드라마의 중심에 둔다. "안개 속의 풍경"도 그 여정이란 소재의 연장이다. 그가 
선호하던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상황보다 여기서는 공허하고 스산한 현대의 
그리스를 나이 어린 오누이의 절망적이고 고통스런 여정을 통해 보여준다.
  긴 호흡으로 찍은 현대 그리스의 풍경은 비어 있고 비가 내리며 어둡고 
삭막하다. 거기서 오누이는 아버지를 찾아 길 위에 선다. 아버지가 돈 벌러 
갔다는 독일을 향해 북으로 나서는 것이다. 그들은 사생아이며, 독일에 있다는 
아버지도 모두 바람난 어머니가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이 초반에 드러나지만, 
영화는 그래도 그 막막한 여정에 매달린다. 
  그들은 아버지에 대해 알게 되면 돌아오겠다고 상상 속의 아버지에게 말한다.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고 두렵기는 해도 길을 떠나게 돼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닥친 삶의 여러 양태는 결코 닿지 못할 곳을 향하고 있다는 
느낌을 안겨주고, 그들을 무너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이 그저 빛과 
어두움뿐인 곳임을 깨닫는다. 그 깨달음은 그들 자신의 경험과 함께 감독이 
여정에 개입시킨 다양하고도 모순된 삽화들을 통해서 일어난다. 모든 것을 
중단하고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군상, 결혼축제 전경에서 죽어 넘어지는 말, 
공연장조차 얻지 못하고 헤매는 유랑극단("유랑극단"의 재등장), 사소한 질투와 
순간적인 욕정으로 소녀를 범하는 트럭 운전사, 헬리콥터가 물 속에서 끌어내 
달고 가는 거대한 손 따위는 그들에게 삶의 무력함과 절망만을 안겨준다.
  그들은 아버지를, 아니 아버지의 대리인을 만난다. 유쾌함과 다정함과 따스함, 
그리고 소녀에게 느끼는 첫사랑을 주는 청년이 그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 만남은 
순간일 뿐, 하나의 가족을 구성할 수는 없다. 그는 입대를 며칠 앞두고 불안 
속에 삶의 의미를 의심하는 청년이다. 또한 은밀히 보여주듯 동성애자다.
  통과의례를 다룬 영화, 아버지라는 사회질서로 편입하기 위한 고통스런 행로의 
영화, 그러면서도 현대 그리스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인 "안개 속의 
풍경"은 시적이고 아름다우며 잔인하다. 그것은 미조구치 겐지의 극적인 
경제성보다는 안토니오의 공간을 향한, 투시에 가까운 길고도 긴 촬영이 주는 
사색에 기인한다.
  청년은 소녀에게 아무 것도 찍히지 않은 텅 빈 필름 조각을 보여준다. 그는 
거기서 안개 속에 멀리 서 있는 나무를 본다. 대상에 대한 카메라의 냉정한 
움직임과 죽은 듯한 공간에 대한 앙겔로풀로스의 오랜 응시, 그것은 아마도 그 
텅 빈 필름인지도 모른다. 그 안개 속의 풍경을 우리도 보게 하려는 오랜 
응시일지도.
  "주진숙"

  똑바로 살아라(Do the Right Thing)
  현장을 역동적으로 재현한 브루클린의 '인종 전쟁' 24시간
  스파이크 리(Spike Lee)

  뉴욕의 하워드 비치에서 한 흑인 청년이 살해된다. 범인은 젊은 백인 청년들. 
인종이 다른 것을 문제삼아 살인한 '증오범죄'의 전형적인 경우였다. 이미 "그 
여잔 그걸 가져야만 해"라는 영화로 블랙 아메리칸 시네마의 새장을 열었던 
스파이크 리는 "똑바로 살아라"라는 논쟁적 영화로 이 사건에 즉각 개입했다.
 이탈리아계, 푸에르토리코계, 한국계, 유대계들이 모여 사는 브루클린의 
베드퍼드 스타이베산트 지역.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이탈리아계 미국인이 살이 
경영하는 피자가게와 한국계가 주인인 식료품점 주변 동네에 살고 있는, 각기 
다른 인종적 배경을 가진 주민들이 24시간 동안 벌어지는 인종전쟁에 말려든다.
  영화는 일거리를 찾지 못한 채 무리를 지어 거리를 배회하는 흑인 청년들과 
푸에르토리코인들, 역시 하릴없이 술만 마시는 노인들을 통해 어수선한 거리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거기서 인종문제를 제기하는 영화적 형식이 
새롭다. 기울어진 카메라 앵글과 도발적인 원색, 역동적으로 사용된 랩과 팝송에 
일종의 펑크 스타일이 부분적으로 가미된다. 다큐멘타리적 스타일과 펑크적인 
것이 결합된 이 새로운 형식은 젊은 관객들에게 인종문제를 전달하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로 보인다.
  피자가게 종업원 무크로 출연한 이 영화의 감독 스파이크 리는 일종의 
메신저처럼 각기 다른 인종의 입장을 피자를 배달하듯 관객들에게 전한다. 그 
전언에 따르면, 증오범죄적 태도에서 자유로운 인종은 없다. 백인 경찰, 흑인계, 
이탈리아계, 한국계 모두가 서로를 경멸하고 저주한다.
  저중산층 유색 인종들이 백인 중심주의가 만들어낸 인종 차별이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피라미드식으로 재생산하는 셈인데, "똑바로 살아라"에서 흑인과 
이탈리아계의 대립은 결국 방화, 구타, 살인으로 치닫는다. 물론 이 사건은 
누적된 인종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미지'가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살의 피자가게에 붙어 있는 사진들이 알 파치노 등 
이탈리아계뿐임을 발견한 흑인 청년 고객은 살에게 말콤 엑스나 마틴 루터 킹 
같은 흑인 영웅의 사진으로 바꿔 붙이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이 요구를 살이 
거절하자 곧바로 피자가게를 보이콧하고 파괴하기 시작한다. 영화의 종반부, 
타버린 벽 위에 나붙은 말콤 엑스와 킹의 사진은 이제 이미지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흑인들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이후 대서사극 "말콤 X"(1992)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 영화는 사실 이중적 
효과를 노리고 있다. 즉, 인종 갈등의 현장을 역동적으로 재현함과 동시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도 이제 영화나 사진과 같은 재현 양식을 조종하고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갖추어야 한다는 영화감독다운 제안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결국 이미지 재현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짓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싸움이기도 하다.
  실제로 스파이크 리의 작업 이후에 존 싱글턴, 마리오 반 피블스, 어네스트 
디커슨과 같은 흑인 감독들은 인종들 사이의, 그리고 흑인들 내부의 갈등을 
아프리카계 미국 젊은이들의 하위 문화적 코드들을 통해 강력하게 재현하고 
있다. 또 레슬리 해리스, 줄리 대시와 같은 흑인 여성 감독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인종문제와 여성문제를 동시에 제기하고 있다.
  "김소영"

  비정성시(1989)
  비극의 가족사가 보여주는 현대사의 굴곡
  허우 샤오시엔

  지금은 1996년, 1989년작 대만 영화 "비정성시"를 다시 본다.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2천년대 거장의 하나인 허우 샤오시엔 감독? 세계 최고의 
영화 가운데 하나? 줄거리조차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지금 이 영화에 
쏟아지는 기존의 찬사나 몰이해는 중요하지 않다. 자잘한 분석은 이제 그만, 
시간이 없다. "비정성시"가 주는 마음의 칼을 찾아라!
  이 작품은 1945년에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는 자막으로 문을 연다. 
그리고 1948년에 중국에서 패한 장개석이 대만에 정부를 세웠다는 자막으로 
문을 닫는다. 그렇다, 이 영화는 역사로 문을 연다. 우리 역사를 연상시키는 대만 
현대사가, 제주 4, 3항쟁을 연상시키는 2, 28항쟁의 추이가 배경에 깔려 
있다. 깔려 있다고? "비정성시"는 가족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이다.
  영화의 문 안에는 인간의, 한 가족의 삶이 도도하게 훌러간다. 드라마의 
중심에는 문씨 집안 형제의 3대에 걸친 슬프고도 꿋꿋한 가족사가 서 있다. 
"비정성시"의 역사성과 생명력은 역사에서 출발하여 인간을 그리지 않고, 먼저 
인간을 묘사하면서 그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이 드러나게 하는 과정에 있다. 감독 
특유의 서정적이고도 호흡이 긴 카메라 리듬, 생략을 활용한 심리 묘사와 사건 
전개, 음향 방식은 자신이 체험한 대지의 인간을 온몸으로 기록하려는 감독의 
시선에서 자연스럽게 분출된다. 진정한 인간주의는 역사성, 서정성과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것, "비정성시"의 자궁 속에서 잉태된 감동이요 가르침이다.
  필자와 "비정성시"의 인연은 깊은 셈이다. 영화를 본 감동 때문에 대만을 
여행했고, 허우 샤오시엔을 인터뷰했으며, 급기야 대만 영화에 관한 방송 
다큐멘터리까지 만들게 되다니.... 대만 영화인들 가운데에는 허우 샤오이엔과 
비슷한 '붕어빵'이 많다. 그 사람들은 틈만 나면 가족을, 사람을, 역사를 말한다. 
게다가 그들의 대표작들도 어딘가 허우 샤오시엔과 비슷하다. 주제는 물론 긴 
호흡에 관조적인 카메라 시선 등 스타일까지 닮았다. 그래서 '장사'가 안 된다는 
점까지도.
  하지만 그들은 허우 샤오시엔의 붕어빵이 아니었다. 허우 샤오시엔이야말로 
대만인들의 삶과 역사 때문에 생겨난 붕어빵인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풀지 
못한 과거의 숙제, 평생 끌고 가야 할 희망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힘이 
있다. 서구의 고전적 영화형식과 대등하게 보편적 영화문법의 하나로 자리잡은 
"비정성시"의 영화언어로 허우 샤오시엔과는 다른 개인들의 삶을 담아냈다. 
그들은 "비정성시"를 넘어선 것이다.
  그래, 우리도 이제는 허우 샤오시엔을 만날 필요가 없다! "비정성시"하는 
성배를 찾아 떠날 이유도 없다. 이 땅 안에, 우리 마음 안에 허우 샤오시엔이 
있고, "비정성시"가 있다! "비정성시"는 바로 시선의 에너지요 힘이다. 
자기가 선 땅을, 가족을, 자연을, 
역사를 어떻게 제대로 응시하느냐가 미학이다. 자기가 살고 보고 느낀 것만큼만 
보고 느끼고 만들 수 있다던가.... "비정성시"는 우리에게 절규한다. 두 발로 
대지를 굳게 밟고, 두 눈을 부릅뜬 채 당신의 삶과 역사를 응시하라고. 안이한 
영화 습관, 잘못된 인생관을 잘라버릴 자객의 칼이 없이 영화를 보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비수처럼 박히는 불가의 화두, 마음이 거세된 모든 것은 허상이다. 허우 
샤오시엔을 만나면 허우 샤오시엔을 죽이리라. "비정성시"를 만나면 
"비정성시"를 죽이리라. 아니... 영화를 만나면 영화를 죽여라!
  "조재홍"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
    세상과 인간 사이의 찰나의 번뇌
    배용균

  1989년, 로카르노 영화제는 세 사람의 신인 감독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해 
그랑프리는 배용군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은표범상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에", 동표범상은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에 돌아갔다. 그 뒤 세 감독은 서로의 길을 향해 나아갔다. 아마 앞으로도 
서로의 길이 교차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만든 배용균은 한국 영화사에서 UFO같은 
존재다. 그는 인터뷰하지 않으며, 제도권 영화와도 거의 교류가 없을 뿐 아니라 
5년에 한 번씩 자신의 영화를 갖고 느닷없이 돌아온다. 그는 앙드레 바쟁의 
표현을 빌리면 '완전 작가'다. 언제나 감독과 각본, 촬영, 편집, 기획을 혼자서 
해낸다. 유머라고는 거의 없는데다가 형이상학적인 주제와 관념적인 대사들, 
영화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진지한 믿음은 거의 노이로제처럼 보인다. 바로 
이러한 강박관념은 그의 영화정신이 흔히 알려진 것과는 반대로 신비주의가 
아니라 리얼리즘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진심으로 영화가 리얼리즘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배용균의 영화적 계보는 로베르토 로셀리니(또는 오즈 
야스지로의 일상생활의 리얼리즘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시적 리얼리즘)에 
닿아 있다. 
  배용균은 (필자와의 매우 개인적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세계를 '일요일의 
리얼리즘'이라고 이름지었다. 모두가 평일의 리얼리즘을 다룬다면, 자신은 모든 
규칙이 하루쯤 쉬는 일상생활을 다루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것은 자신의 영화 
속에서 다루는 자연의 풍경에 그 어떤 다른 변형도 가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아마추어 연기자들의 표정 속에서 생활을 끌어내려는 마음에서 
그의 영화가 시작한다는 점에서 정말 그러하다. 그래서 배용균의 영화는 풍경과 
표정 사이의 자기 성찰로 이루어져 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산사에서 수도 생활하는 세 사람의 스님에 
대한 영화다. 노스님 혜곡은 자신이 입적을 앞두고 있음을 알고 있다. 젊은 스님 
기봉은 사바세계에 두고 온 눈먼 어머니가 주는 번민으로 괴로워하면서도 도를 
깨치기를 갈망한다. 동자승 해진은 고아로 태어나 산사에서 자라난다.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모른다. 혜곡 스님이 이 세상을 떠나자, 거기서 얻은 작은 
깨달음을 안고 두 사람은 서로의 길을 간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은 화두로 
남는다. 계속 질문하고 의심하고, 대답하고, 번민하고, 다시 질문하는 독백과 
방백의 화법이 이어지면서 영화 전체는 선문답의 삼천 대천 세계로 펼쳐진다.
  배용균은 우주처럼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본다. 그리고 풍경과 표정 사이에서 
번뇌의 입구를 본다. 바로 이 순간, 리얼리즘의 사이사이로 모더니즘의 형식이 
끼여들고, 카메라가 담아내는 광경 속으로 영화의 수사학이 펼쳐진다. 
천변만화하는 세상의 표정은 수도자들의 번뇌가 된다. 이것은 세상을 표상하는 
것과 자기 성찰 사이의 싸움이다. 그래서 이 한편의 영화는 보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의 경계가 빚어내는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분명 수많은 선화에서 
영향받았을 화면들은 그런 의미에서 번뇌이며, 그가 넘어서려고 하는 차안과 
다가서려고 하는 피안의 경계를 타고 물어보는 공과 색의 넌나듦이다.
  중생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그러나 잠깐. 여기서 배용균이 대답하지 
않는다고 그의 질문이 끝난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영화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1995)은 화두에 이어 사바세계의 밤으로 떠나는 산책이다. 그는 우리의 
세계 속으로 비행하고 있으며, 한국 영화는 배용균을 통해서 또 하나의 
리얼리즘의 계보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세 번째 영화까지 다시 5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일이다.
  "정성일"

    바톤 핑크(Barton Fink 1991)
    불로써 정죄되는 묵시록적 현실
    코엔 형제(Joel Coen, Ethan Coen)

  브로드웨이의 젊은 극작가 바톤 핑크는 할리우드의 초청을 받아 
로스엔젤레스에 온다. 바톤은 도착하면서부터 이해할 수 없는 정황들과 
연속적으로 마주친다. 지옥으로 가는 관문 같은 기괴한 분위기의 호텔, 할리우드 
사람들의 미치광이 같은 생활양식, 그곳에서 폐인이 돼버린 대작가 등. 이런 
상황에서 하룻밤 같이 잔 여자는 자신의 침대에서 피투성이로 죽어 있고, 친구로 
여겼던 뚱뚱한 남자가 여자를 죽인 미치광이 살인광임이 밝혀진다.
  "바톤 핑크"는 얼핏 예술가를 질식시키는 할리우드와 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작가의 허위의식, 현실의 불가해함에 관한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형 
조엘이 감독하고 동생 에단이 제작을 맡는 코엔 형제는 그런 주제를 정교한 
농담으로 만들어놓았다. 이들은 영화를 퀴즈처럼 만드는 데 명수다.
  바톤을 초청한 캐피탈(돈) 영화사 사장은 야심에 불타는 바톤을 어린애처럼 
다룬다. 그는 속사포 같은 언변으로 바톤에게 게임의 규칙을 강조한다. 영화는 
연애담이 아니면 액션이나 성공담을 재빨리 조합하여 내놓는 인스턴트 식품과도 
같다. 그의 단순명쾌한 사업가적 기질 앞에서 바톤은 얼이 빠져 듣고만 있다.
  바톤은 불쌍하면서도 어리석은 예술가다. 그는 할리우드 사람들 앞에서는 꼼짝 
못하면서도 보통 사람들 앞에서는 귀담아 듣는 대신 일방적으로 말하려 든다. 
바톤이 어린애 같은 오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멍청이임을 암시하는 대목은 
옆방의 투숙객 찰리와 만나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찰리는 눈을 빛내며 자신의 
진실을 말하려 한다. 그러나 바톤은 자아 도취의 상태에서 숨가쁘게 자기 말만 
이어나간다. 말하고 싶었으나 저지당한 찰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곧 영화의 
절정부다. 찰리는 미치광이 살인광 문트였던 것이다.
  바톤이 묵고 있는 얼(Earle) 호텔은 이름이 암시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소리를 흡수하는 공간으로 존재한다. 바톤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 누른 차임벨 
소리의 한없이 이어짐, 호텔 복도의 윙윙거리는 바람소리, 외부의 소음이 
막힘없이 전달되는 바톤의 방. 바톤은 그 소리들에 유념하기보다는 불평한다. 
창작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큰코다친다.
  얼 호텔은 또한 묵시록적 현실의 상징적 축도이기도 하다. 급사는 지하에서 
올라오고, 엘리베이터를 관리하는 늙은 종업원은 해골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방의 책상에는 엄청난 먼지가 쌓여 있고, 벽지는 내부의 부패로 인한 열로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사람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는데도 복도에는 빈 구두가 
놓여 있다. 내부에서부터 무너져가는 이 호텔의 아리송한 면면은 곧 지옥의 
변방에 다가서 있는 현실의 이미지다. 그것은 논리적 귀결은 불로써 정죄당하는 
묵시록적 현실이다. 호텔로 되돌아온 찰리는 호텔 곳곳에 불을 지른 뒤, 
도망치는 형사를 좇아가며 소리지른다.
  "이 세상의 참모습을 보여주마."
  찰리의 행동에서 영감은 얻은 바톤은 스스로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 
시나리오를 쓰지만 영화사 사장에게 질책만 듣는다. 풀이 죽은 채 바톤은 
해변가로 간다. 거기서 바톤은 호텔 방에서 본 액자 속의 여자가 걸어와 액자 
속에서와 똑같은 자세로 해안을 응시하는 것을 본다. 바톤은 영원히 자신의 말이 
통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런 그에게 이 정경은 
기묘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말로 옮길 수 없는 실제의 아름다움을 목격하는 
순간이다. 바톤은 재현의 대상이 놓여 있는 현실의 복잡성과 그 복잡성을 
도식화할 것을 요구하는 또 다른 현실과 창작자로서의 겸손을 배운다.
  그러나 코엔 형제의 다음 작품 "허드서커 대리인"은 재기에 비해 알맹이가 
없었다. 정작 코엔 형제는 바톤 핑크의 재난을 심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김영진"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Zendegi Edame Darad 1992)
    파격의 충격, 화면 가득한 인간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

  1987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잘못 가져온 친구의 숙제장을 돌려주기 위해 
친구 집을 찾아 헤매다 하루 해를 다 보내는 꼬마의 이야기를 다룬 "내 친구의 
집은 어디에"를 발표해 세계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작품의 
촬영지는 이란 북부의 가난한 마을이었고, 대부분의 출연자도 마을 주민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90년에 이란 북부지역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당시 
뮌헨을 방문 중이던 키아로스타미는 "내 친구..."에 출연했던 꼬마들의 생사가 
염려돼 곧바로 귀국해서는 카메라를 들고 그 마을로 찾아간다. 그 과정을 다룬 
작품이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다.
  이 작품은 분명 극영화다. 하지만 줄거리는 지진으로 폐허가 된 곳을 어렵게 
헤쳐나가며 두 꼬마를 찾는 과정이 전부다. 여기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이는 고다르처럼 이데올로기적이지도 않으며, 요즘 
범람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장르 해체라는 시대조류와도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런 장르 해체보다 더 파격적인 것은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극영화건 다큐멘터리건 그 속에 
담기는 이야기는 대부분 굴곡이 있게 마련이고, 또 다층의 플롯을 지니는 경우가 
보편적이다. 그런데 한 부자가 톨게이트를 지나는 장면에서 시작해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누군가를 찾는 과정만은 91분 동안 담는다는 것이 어떻게 관객의 눈길을 
꼭 붙잡을 수 있는지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힘들다.
  경이로운 것은 이런 영화를 만들겠다는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관이다. 그의 
파격은 조용한 작품 성격에 반비례해 너무나 충격적이다. 영화사에서 파격에 
관한 한 첫손 꼽히는 고다르의 경우는 영화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에서 그 출현의 
개연성이 수긍되는 반면, 키아로스타미의 출현은 돌연변이라는 표현으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그의 영화는 어느 누구의 영화와도 닮지 않았으며, 영화사의 
발전과정과도 무관하다. 단지, 이란 영화가 전통적으로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강세를 보여왔다는 점 정도를 그의 영화가 출연하게 되는 배경으로 언급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돌연변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은 세계 어디서나 공감할 만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이 그렇듯이 여기서도 어린이의 세계에 대한 따뜻한 시각과 
인간의 삶에 대한 경이가 듬뿍 담겨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인간의 삶을 힘든 고갯길을 넘어서는 것에 비유한다. 
영화사에 길을 남을 마지막 장면을 보자.
  주인공 부자가 탄 차가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가다 힘에 부쳐 다시 내려온다. 
이때 조금 전에 태워달라는 요청을 무시당했던, 짐을 진 청년이 차를 밀어 
무사히 내려가게 도와준다. 청년은 다시 짐을 지고 고갯길을 올라가고, 내려갔던 
차는 잠시 후 다시 올라와 마침내 고개를 넘어 그 청년을 태우고 떠난다. 비록 
꼬마들을 찾지는 못했지만 삶에 대한 희망은 여전하다는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그리고 삶은..."이라는 제목에도 딱 맞아떨어지는 라스트 
신이다.
  영화의 장르 구분, 리얼리즘 개념, 내러티브의 개념, 시나리오론, 영화사.... 
이제 이 모든 것을 다시 써야 할지 모른다. 그것은 순전히 변방의 영화로만 
인식돼 왔던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구 
중심의 이른바 '주류 영화'의 흐름을 통째로 뒤엎을 만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키아로스타미로 인해 새로운 영화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김지석"

    올란도(ORLANDO 1992)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샐리 포터(Salley Porter)

  "올란도"는 '빅토리아조의 치마를 두른 게릴라 전사'라는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사람은 영국의 페미니스트 감독 샐리 포터. 여성 
소설의 대모와 1980년대 이후 실험적인 페미니즘 영화를 만들고 있는 여성 
감독의 만남은 매우 흥미로운 결과를 낳았다. 포터는 장난스러울 만큼 기지 
넘치는 울프의 아방가르드 소설을 브레히트적 기법과 만나게 해 그 실험성을 
스크린 위에 성공적으로 옮겨놓았을 뿐만 아니라 영화의 후반부에 20세기를 
덧붙여 19세기에서 끝나는 소설을 동시대화했다. 그것은 모터사이클을 타고 런던 
시내를 달리는 올란도와 그의 딸이 당당한 모습을 여성운동의 현 지점을 알리는 
유쾌한 지표로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올란도"는 400년을 산 그/그녀의 이야기로 양성성의 문제를 알레고리적 
형식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제목 'Orlando' 자체가 영화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암시하고 있는데, '혹은 Or'와 '그리고 and'를 섞어 붙인 주인공의 이름은 남성 
혹은 여성, 또는 남성 그리고 여성인 주인공의 이름으로 매우 적절해 보인다. 
복장 전환과 성적 전도를 통한 양성적 실험을 하면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을 예시하는데,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개들은 
가장무도회에 초대받은 것 같은 즐거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 무도회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기존의 여성성/남성성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이다.
  4세기에 걸친 수명을 누리게 되는 올란도는 귀족의 자제로 태어난다. 때는 
16세기. 성을 정확하게 구별하기 어려운 복장을 한 미소년 올란도는 러시아인 
사샤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가 돌연 러시아로 떠나 버리자 일주일 동안 
죽음과 같은 잠에 빠져든다. 그 후 시를 쓰려고 노력하지만 시인으로서는 
삼류임을 깨닫고 터키 대사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폭동이 일어나는 사이에 올란도는 또다시 깊은 수면에 빠지고 마침내 여성으로 
전환된다.
  이제 그는 발걸음조차 떼기 힘든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18세기의 영국으로 
돌아와 여성으로서 억압적인 제도들과 싸우게 된다. 법적으로 남성 올란도가 
사망했기 때문에 여성으로서 재산소유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재판이 
벌어지고, 그는 귀족으로서 누렸던 모든 특권을 상실하게 된다.
  19세기 빅토리아조의 어둠 속에서 그의 양성적 실험은 중단되고 끝내 결혼을 
하게 되는데, 역설적이게도 모험적인 혁명가와의 결혼은 그에게 상대적인 자유를 
허용하게 된다. 소설과는 달리 여자아이를 잉태한 올란도는 남성이었을 때 
실패했던 글쓰기에 성공하게 되고, 딸은 20세기의 소녀답게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세상을 관찰한다.
  "올란도"에 나타나는 양성성을 남성성/여성성의 유토피아적 통합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이질적인 것이 중첩된 알레고리적 주체성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전자의 경우에는 버지니아 울프를 소박한 낭만주의자로, 후자의 경우에는 그를 
급진적 페미니스트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샐리 포터의 영화적 해석은 
사실 다소 애매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가면들을 보여주면서 여성이 
주체로 설 수 있는 공간을 탐색하는 영화 "올란도"는 1960년대 이후 지속되는 
페미니즘 영화의 귀중한 성과물이다.
  "김소영"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 1992)
    서부영화의 도식 깬 '수정주의 웨스턴'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

  1960년대를 뒤흔든 미국의 사회운동은 보수적인 할리우드를 변화시켰다. 
1967년에 발표된 아서 펜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할리우드 영화의 틀인 
장르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한편 장르 영화 가운데 가장 먼저 틀을 
갖추었고, 가장 오랫동안 만들어진 서부영화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1930년대와 
40년대를 거치면서 탄탄하게 구축됐던 '고전 웨스턴'의 틀을 벗어버리고, 
'수정주의 웨스턴'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의 세르지오 레오네는 1964년부터 '달라 3부작'("황야의 무법자", 
"속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을 차례로 만들었고, 서부영화의 변종격인 
마카로니 웨스턴이 탄생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마카로니 웨스턴의 상업적 
성공과 함께 스타가 됐다. 바로 그가 환갑을 넘긴 지난 1992년에 "용서받지 
못할 자"를 만들었다.
  이스트우드가 연기하는 윌리엄 머니는 과거에는 살아 있는 것을 모두 죽인 
무법자였지만, 지금은 두 아이와 함께 돼지를 기르며 살아가는 평범한 노인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1000달러의 현상금 소식을 들은 머니가 다시 총을 잡고 보안관 
일당을 모두 처치하는 것이 전부다. 본격적인 이스트우드의 관심은 두 가지다. 
자신의 스타 이미지와 장르로서의 서부영화를 노인의 눈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윌리엄 머니가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과거의 모습은 이스트우드가 마카로니 
웨스턴에서 구축했던 무법자의 이미지다. 누더기 망토를 걸치고 시가를 질겅질겅 
씹으며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자랑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말에서 떨어지고 
총알도 번번이 빗나간다. 그는 젊은 카우보이에게 말을 타고 신나게 총을 쏜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무법자와 살인에 관한 대화가 지루할 정도로 계속된 
다음, 마지막 총격전 장면이 시작된다. 머니는 보안관과 그의 부하 네 사람을 
순식간에 해치운다. 서부영화다운 멋진 총격전을 보고도 관객들이 통쾌함을 
느끼지 못하고 거듭 성찰하게 되는 이유는 뇌리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은 대화들 
때문이다. 비가 내리는 밤에 초라하고 쓸쓸하게 떠나가는 머니의 모습은 정의를 
구현하는 당당한 서부영화의 영웅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의 다른 장치들은 이분법으로 구축된 서부영화의 틀을 뒤집는다. 정의를 
구현하는 보안관은 법을 이용해 잔인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인물이고, 명사수로 
명성이 자자하던 잉글리시 밥은 허풍이 심한 비겁자로 밝혀진다. 불의에 
분노하는 장본인은 매춘부들이다.
  1960년대의 젊은이들에게 '서부'는 때묻지 않은 순수의 상징이며 
이상향이었다. 클리트 이스트우드는 이제 그런 서부는 죽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무덤을 파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살인 강도 머니를 그토록 사랑하던 여자 
클라우디아는 이미 죽어 있다. 따라서 그의 진짜 관심은 존 포드의 
"추적자들"이나 세르지오 레오네의 "옛날 옛적 서부에서"처럼 서부영화 장르를 
성찰하고 해체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비춰지는 오염된 세상으로 
현실을 은유하는 것이다. 그의 옛날의 완벽한 세상, '퍼펙트 월드'를 꿈꾸는 
순수한 보수주의자인 셈이다.
  "김경욱"

    패왕별희(1993)
    가장 중국적인 소재에 담은 세계성
    첸 카이거

  경극 "패왕별희"가 처음 창작된 것은 1918년께이다. 경극은 중국의 대표적인 
전통 연극으로 베이징을 중심으로 발달해 일본의 가부키나 노처럼 동양 연극의 
값진 자산이 되었다. 
  경극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사랑받는 이 "패왕별희"를 홍콩에 살고 있는 
소설가 릴리언 리(본명 이백화)가 소설로 쓴다. 그리고 이 소설을 다시 릴리언 
리와 루 웨이가 각색하고, "황토지"로 중국 현대 영화의 새 장을 연 첸 카이거가 
영상으로 옮긴 것이 바로 영화 "패왕별희"다.
  릴리언 리는 "패왕별희"의 두 스타인 살로와 데이의 동성애적인 우정과 그 
사이에 낀 주산의 사랑을 중국 현대사의 격변기 속에서 훑어가면서 예술과 인간, 
그리고 중국의 역사를 살펴본다.1924년의 군벌 시대부터 문화혁명을 거쳐 
1977년까지.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치부를 드러낸 이 소설이나 영화는 
중국에서는 금지되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중화민국시대, 항일전쟁시대, 내전시대, 
중화인민공화국시대, 토지개혁운동, 반우파운동, 문화혁명 그리고 개혁, 개방의 
시대를 거친다. 어린 시절, 매타작을 당하며 혹독한 훈련을 거친 뒤에 경극의 
명성을 잇는 두 남자의 우정이 현란한 영상 속에서 펼쳐진다. 그리고 굴곡 많은 
중국사 속에서 남녀 양성의 사랑을 간직한 주인공이 끝내 경극과 우정의 
순수함을 지키려고 자살하는 끝마무리는 비장하다.
  "패왕별희"가 중국 민중에게 사랑받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초패왕이 사랑과 죽음으로 그 사랑에 화답한 우희의 절개가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춘향전"이나 일본의 "츄신구라"처럼 절개와 지조, 
충절이 동양인에게 으뜸가는 미덕으로 꼽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대목이다.
  특히 이런 충절과 애정을 주축으로 한 패왕과 우희의 사랑을 살로와 데이라는 
두 스타의 우정과 동성애적인 관계 속으로 옮겨와 허구로 만든 것은 원작자 
릴리언 리의 탁월한 상상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첸 카이거는 원작을 요령 있게 요약하면서 그 재미와 경극의 절묘함을 
영상으로 보여주는데 성공한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는 평범한 
진리로 세계적인 평가를 얻은 것이다.
  "패왕별희"가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던 해에 
우리의 "서편제"가 칸 국제영화제에 출품되었으나 아깝게도 예선에서 
탈락하였다. 우리의 민족적인 판소리의 한이 세계성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커다란 교훈을 준다.
  그 교훈은 세계 영화제에서 어깨를 겨누려는, 또는 세계 영화시장에 
뛰어들려는 한국 영화인 모두가 한 번쯤 숙고해 보아야 할 점이다. "패왕별희"가 
영화적 형식과 소재 양쪽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갖춘 작품이었던 데 반해 
"서편제"가 그 둘을 다 결여하고 있었다면, 이제 우리 영화인들이 해야 할 일은 
자명해진다.
  "안병섭"

    서편제(1993)
    우리는 누구인가, '한국 영화'라는 화두에 정면 대응
    임권택

  열광 뒤의 외면, 외면 끝의 반성. 임권택의 "서편제"에 대한 우리 동네의 
풍경이었다. 여하튼, 좌우지간에, 이 영화가 1990년대 한국 영화의 그물에 
걸려든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그물은 대체로 지겹도록 상투적이며 비린내가 
풀풀 나는 것이지만, 때로는 가장 중요하고 정확한 측정이다. 그래서 그물코 
사이의 숭숭 뚫린 구멍을 빠져나간 영화들을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는다). 
"서편제"는 그 교직하는 그물에 포착된 것이고, 그 교직하는 품새를 우리는 
비평적 틀이라고 부른다. 이 틀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이고 역사적이며, 때론 
폭력적이어서 투쟁이라는 한마디로 압축하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앞질러 말한다면, "서편제"는 결코 임권택의 "만다라"를 뛰어넘지 않는다. 
그러나 전자가 후자보다 앞서 보였던 것은 탄생의 시공간적 차이와 헐거운 
비평작업 탓도 있겠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훨씬 투쟁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투쟁은 참으로 정당한 부분도 있었지만 부당한 측면 또한 없지 
않았다. 정당한 부분이란 '도대체 한국 영화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응했다는 
점이며, 부당한 측면이란 '오도된 민족주의 프로젝트'와 조응했다는 점이다. 물론 
어떤 부분도 감독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이 영화는 패러디, 정형적인 내러티브의 파괴, 카메라 시점과 음향의 독특한 
사용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당연히 현대 영화라든가 현대 영화의 탈을 
뒤집어 쓴 키치 영화와는 더욱더 거리가 있다. 사실이 그랬다. 현대 영화처럼 
외면당하지도 않았고, 키치 같은 '대중적 돌파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감독이 "장군의 아들" 연작이라는 짧은 방황 끝에 유봉, 송화 동호라는 소리꾼 
일가를 통해 '소리'와 '우리'에 대해 말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를 두고 
행한 발언의 정당성은 차치하고, 그 얘기가 그다지 왜 그다지도 
위력적이었는가를 먼저 묻는다면 우리는 우선 한국의 영화와 역사를 떠올려야 
한다. 1960년대 초반에 잠깐 해보았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1970__80년대를 
지나면서 잊어버렸다가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다시 그 질문(투쟁)을 하게 된 
것이다. 얄밉게도 여기에 '오도된 민족주의 프로젝트'도 끼여들었지만.
  그 질문은 숏들의 겹쳐짐과 전체의 기를 통해 답해진다. 소리꾼의 내력, 
실명의 내력, 후일담으로 이루어진 내러티브만으로는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다. 
송화가 묻는다. 해가 졌냐고. 유봉은 해가 졌다고 말한다. 그 숏에 걸려든 것은 
붉은 노을이다. 이것을 우리는 '내러티브가 뚝뚝 떨어지는 숏'의 한 예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내려오는 긴 화면 숏 하나(반영)와 
마지막 송화와 봉수의 대결 몽타주 장면(묘사), 이것들은 독립적이라기보다는 
연속됨으로써 빛을 발한다. 이도흠의 '화쟁 기호학'에 따르면 모방상과 굴절상의 
행복한 만남이다.
  마지막, 영화 전체의 기. 유봉과 송화의 삶은 '우리'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이며, 
다원주의적 가치관에 대해 '내'가 택할 수 있는 가치는 어떤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임권택은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의 출발에 초조해 하지 말고, 
벗어나려고 애쓰기보다는 가라앉아서 찾자고 말한다. 그것은 말로 형용하기도, 
눈으로 찾기도 쉽지 않다. 아는 만큼 보일 뿐이다(?).
  물론 예술적 수사와 현실의 대응은 다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당시의 사회적 
질문에 대해 충분히 토로하지 않았다. 아니 벌써, '새로운 것'을 칭송하고 있다. 
"서편제"는 그렇기 때문에 투쟁적이며 외로울 뿐이다. 우리는 정말 '공멸'을 
원하는 것일까?
  "이효인"

    피아노(Piano 1994)
    여성의 억압된 성과 사랑
    제인 캠피온(Jane Campion)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화감독 제인 캠피온이 우리 나라에 
알려지게 된 데는 "피아노"의 위력을 빼놓은 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와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를 통해 세계적인 감독으로 부상했고, 
그 여파로 한국의 극장들은 "내 책상 위의 천사"나 "스위티" 같은 이전 
영화들을 속속 불러들였다.
  그는 이제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라는 영화산업의 지역적 변방성에 
여성이라는 성적 변방성이 지운 이중의 한계를 극복한 대표적인 여성 감독이 
됐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국가의 엄청난 재정 지원에 힘입은 
오스트레일리아 영화의 국제적 부상과 그 안에서 나날이 이루어지는 여성 
영화인구의 증가라는 빼놓을 수 없는 원인이 있었다. "스위티"에서 시나리오, 
촬영, 편집을 여성들과 함께 한 그는 "피아노"역시 여성 제작자인 잔 채프만과 
결합해 만들었다. 여성들로 일단 전선을 구축한 다음, 여성을 주인공으로 해서 
여성의 삶과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그의 작업 스타일인 
셈이다.
  얼핏 보기에 진부한 삼각관계 이야기인 듯 싶은 "피아노"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식민지였던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시대와 공간이 여성에게 주는 억압을 
보여준다. 주인공 아다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새 남편과 아버지의 교환수단이 
된다. 그리고 자기의 표현수단인 피아노는 자신의 허락도 없이 남편과 낯선 남자 
사이에 거래된다.
  여기서 아다는 벙어리다. 이 여성의 침묵과 피아노라는 표현수단의 설정은 
억압적인 가부장제 언어체계 안에서 침묵이 저항수단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의 목소리는 입술을 통하지 않고,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열정적인 피아노 
소리로, 딸에게 보내는 신호로, 종이 위에 연필로 쓰는 글로, 연인의 몸을 
쓰다듬는 손길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의 자기 표현이 남편에게 충분히 
위협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은 남편이 그의 손가락을 
잘라버리는 데서 확실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제인 캠피온은 아다의 성적, 정서적 각성을 왜 빅토리아 
시대라는 이미 지나간 시대 속에 구조화시켰을까? 우선 빅토리아 시대는 여성 
성욕의 억압과 동의어인 시대다. 또한 남성 지배적인 역사에서 여성의 경험은 
거의 완전히 감추어져 왔고, 여성들의 상상력을 해방시키고 현재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는 수단으로 과거는 가장 흔한 공격대상이 된다. "피아노"가 한 여성의 
과거에 대한 단순한 여성영화가 아닌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또한 이 영화는 남성들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고 어떤 것이 여성들의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지를 묻는다. 아다가 구획 짓기에 익숙한 자본주의적 인물이자 
도끼로 상징되는 스튜어트라는 남편을 버리고 원주민과 친한 베인즈를 선택하는 
것은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될 만하다.
  할리우드적 관습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한 이 영화의 접근법은 
분명 아직도 낭만적인 사랑의 각본을 믿고 싶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친근하게 다가가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변재란"

    스모크(Smok 1994)
    쓸쓸함 감싸는 따뜻하고 눈물겨운 세상
    웨인 왕(Wayne Wang)

  세계 영화사를 빛낸 100편의 영화. 왜 "스모크"가 끼여들었을까? 중국계 
미국인 감독의 영화라서가 아니라 색다른 미국 영화, 그것도 무척이나 따뜻하고 
눈물겨워서 웨인 왕이 나눈 다섯 개의 분절 속에서 헤어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비유를 동일성 쯤으로 다루는 허술함을 내비치지 않는다면, 이 영화는 
바로 "성난 황소"와 맞바꿀 수 있다. 아니, 좀더 무리를 하자면 어두운 삶의 
황량함을 그린 "대부"와 살아가는 방법과 답이라곤 도대체 모르겠다고 
구시렁거리는 "비열한 거리"(마틴 스코시즈)를 돌아 나와 굽이굽이 뻗어 있는 
"파리 텍사스"(빔 벤더스)의 쓸쓸함으로 침몰하거나, 또는 "인생"(장 이머우)이 
내비친 중국인 특유의 역사의식인 새옹지마를 뉴욕에서 원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영화적 맥락은 정당하지 않다. 영화 한 편은 자기만의 고유한 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의의 영화적 맥락은 한 작품이 지닌 체계와도 
교통한다.
  그렇다. 오기는 좀도둑 소년의 지갑을 돌려주러 갔다가 카메라를 훔치고, 그 
덕택에 작가인 폴은 비명 횡사한 아내의 사진을 보게 된다. 그리고 흑인 소년 
라시드 덕택에 교통사고를 면한 폴은 라시드가 저지른 일로 봉변을 당하고, 또 
라시드는 오기의 담배가게에서 사고를 치게 되지만 라시드가 내놓은 돈으로 
오기는 과거 애인과 황폐해진 딸에게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된다. 뉴욕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여기에서 인종의 경계는 무너진다. 하지만 그 무너짐은 상투적인 화해가 
아니며 상대에 대한 인정과 관용에서 비롯된다. 라시드는 흑백 구역으로 나뉜 
그곳을 다른 은하계라고 표현하면서 "그것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폴에게 경고한다. 하지만 바로 그 장면에서 폴의 심정은 셔츠를 촉촉하게 적시는 
여름에 하염없이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 같다.
  후경에 자리잡고 돌아가는 선풍기는 이미 등장했던 피사체다. 그것은 선풍기로 
나타나지 않고 라시드가 시침을 뚝 떼고 12년 전에 헤어진 아버지의 자동차 
수리점 앞에서 앉아 있을 때, 차고 앞으로 삐죽 나와 있는, 적당히 낡은 흰 
차 밑에 포진하고 있는, 적당히 낡은 흰 차 밑에 포진하고 있는 그림자로 
나타났다. 그 어둠은 부자의 비밀과 은밀한 삶의 쓸쓸함을 모두 감싸고 있다. 
쨍쨍 내리 쬐는 햇빛 속에 드러난 아버지 사이러스의 황량하고 황당해하는 
표정을 뒤로하고 라시드는 그 풍경을 그린 흑백 그림을 차고 안에 집어넣고 
나온다. 그 흑백 스케치에 의해 풍경이 살아난다. 이후 사이러스는 라시드가 
아들인 것을 알고는 그 큰 주먹으로 친다.
  마지막 분절인 '5.오기' 부분은 성탄절을 앞두고 폴이 이야기를 요청하는 
장면이다. 폴은 담배를 줄였고, 이제 둘만 남았다. "세 명은 성가시지만" 참 
쓸쓸하다. 오기는 카메라에 얽힌 비밀을 털어놓고 창피래 한다. 카메라는 고정 
상태에서 오기를 대상으로 근접 이동한다. 웨인 왕은 이것을 이 영화에서 세 
번째 쓰고 있다. 눈이 촉촉해진 폴은 친구니까 괜찮다, 그것이 인생의 가치라고 
말한다.
  그리고 에필로그 열 여섯 개의 숏으로 구성된 흑백 장면과 속을 뒤집어 놓는 
음악. 대부분이 폴 숏이거나 그보다 크다. 임대주택 단지의 겨울 나무들을 훑는 
롱 숏 한 개를 빼고는. 서로가 속는 체하며 위로를 주고받는 흑인 할머니와 
오기. 마지막, 오기가 카메라를 들고 문을 나설 때 고리를 여는 소리와 문 
여닫는 소리가 살아난다. 질문에서 주장으로, 운문에서 산문으로 이동한다. 
여균동에게서 인용하자면, 인간의 시선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변할 것이고 살 
만하다. 바로 그 얘기다.
  "이효인"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1995)
    세기말의 영화사에 던지는 제언
    에미르 쿠스투리차(Emir Kusturica)

  데이비드 그리피스에서 시작한 영화 기행이 쿠스투리차에서 끝난다. 지난 
100년간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그리고 영화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연히도 "언더그라운드"의 탄생은 영화 탄생 100년과 겹친다. 또한 1995년은 
성공적이라는 디지털 영화 "토이 스토리"가 제작된 해로 그것이 예시하고 있는 
미래의 영화는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래프가 지향했던 사실주의나 멜리에스의 
바이오스코프식 판타지라는 관행적 이분법을 분명 무색하게 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제작된 "언더그라운드"도 영화 속의 인물 마르코가 티토를 만나는 
컴퓨터 합성장면을 삽입해, 말하자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접합시켜 새로운 
영화적 현실감을 구성하고 있다. 상당수의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하고 
격분시키기도 했던 "언더그라운드"에서 가장 오해(혹은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바로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현실을 뒤섞어 이제는 사라진 유고의 과거와 
현재에 개입하는 방식인 듯하다.
  영화는 시간과 장소를 명시하고 시작한다. 독일에게 점령당한 1941년의 
베오그라드 무기 밀매를 하던 블래키와 마르코는 지하실에 무기 생산고를 
만든다. 이로부터 3년 후, 마르코는 독일군에 잡혀 있던 블래키를 구출해 
지하실에 숨게 한다. 하지만 유고가 해방된 후에도 마르코는 지하실 사람들을 
속여 계속 무기를 만들게 하는 한편 블래키가 사랑하는 여자 나탈리아를 빼앗고, 
티토의 측근이 되어 부와 명예를 누린다. 블래키의 아들 요반의 결혼식날에 
언더그라운드는 사고로 파괴되고, 아직도 전쟁이 진행 중인 것으로 믿고 있는 
블래키는 자신의 영웅담을 영화화하고 있는 촬영 현장에 나타나 진짜 총을 
발사한다. 1992년, 다시 전쟁에 휩싸인 베오그라드. 블래키의 지하군은 마르코와 
나탈리아를 살해한다. 마지막, 블래키의 죽음이 잉태한 꿈의 장면. 모든 죽은 
사람들이 햇살 밝은 곳에서 축제를 벌이는데, 그들이 딛고 있는 땅이 육지에서 
떨어져 나간다. 
  이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표현 물질들, 즉, 신파조의 연극, 영화 속에서 
제작되고 있는 영웅주의적 가짜 영화, 실제 뉴스릴 속에 삽입된 가상의 상황과 
인물들은 1941년에서 1992년이라는 명시된 역사적 시간과 베오그라드라는 
구체적 공간과 땅 위 현실세계에서 망각된 언더그라운드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것으로 보이게 한다. 또한 "언더그라운드"는 균질적인 리얼리즘의 언어 
대신 불경스럽게 보이는 이질 언어들을 동원해--한 비평자는 니체적 욕망, 
디오니소스주의의 언어로 파악하며, 쿠스투리차 자신은 집시의 문화, 이교도적 
문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현실과 몽상, 창조와 파괴, 역사와 종말, 진실과 
거짓, 그리고 인간성과 야수성이라는 범주들의 경계를 와해시키고 있으며(하지만 
결코 성차의 문제는 탈경계화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 붕괴의 와중에서 잉태되는 
절망과 희망, 또 그 이후를 그려내고 있다.
  영화가 뤼미에르식으로 발전, 진화해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쿠스투리차의 영화는 분명 이단이다. 또 현실의 자명성과 역사의 텔로스를 믿는 
이들에게 쿠스투리차의 뫼비우스 띠는 필경 재앙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바로 
그러한 이단과 재앙이 일으키는 혼돈 속에서 생성되는 질서를, 즉 종말과 
유토피아가 맞닿아 있음을 에필로그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더그라운드"를 세기말에 대한, 이제 1세기를 막 넘긴 영화라는 매체가 직면한 
위기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어도 과잉 독해는 아닐 것이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건국과정을 인종차별주의를 전혀 숨기지 않은 채 과시했던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부터, 인종 분쟁으로 분화된 옛 유고를 애탄하는 
"언더그라운드"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얼마나 멀고도 가까운 길을 걸어왔는가. 
20세기 그 100년간 영화는 역사와 문화를 재구성해 왔고, 스크린은 컴퓨터의 
윈도 체계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세상과 관객을 잇는 인터페이스로 
기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창이며 거울이라는 것은 은유 이상이다.
  "김소영"

    부록
    1.세계 영화사 연표
    2세계 영화 기술 발달사

    부록 1
    세계 영화사 연표
    변재란(영화평론가)

  1892:요지경 기계인 키네토그래프 카메라 완성하다.
  1893:딕슨, 스튜디오 블랙 마리아 설립하다(미국)/프세볼로트 푸도프킨 
태어나다(러시아).
  1894:키네토스코프(요지경 기계) 보급하다/알렉산드르 도브젠코 
태어나다(러시아)/장 르누아르 태어나다(프랑스).
  1895:뤼미에르 형제, 그랑 카페에서 공공 유료 상영 시작하다(프랑스).
  1896:런던과 뉴욕에서 공개 상영 시작하다/멜리에스, 트릭 영화의 초기 
장르를 열다(프랑스)/샤를 파테 형제, 파테 영화사 세우다(프랑스).
  1897:멜리에스, 프랑스 최초의 상설 영화촬영소 세우다/프랑스 최초의 
영화사인 스타영화사 설립되다.
  1898:세르게이 M. 에이젠슈테인 태어나다(러시아)/고몽 영화사 
설립되다(프랑스).
  1899:앨프레드 히치콕 태어나다(영국).
  1900: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초기 단계의 컬러 유성영화 시스템 공개되다.
  1901:"어느 범죄 이야기", 최초로 상영 금지 처분을 받다.
  1902:멜리에스, 공상과학영화 "달나라 여행" 공개하다(프랑스)/시나리오 
작가이자 비평가인 체자레 자바티니 태어나다(이탈리아)/T.L. 톨리, 
로스엔젤레스에 일렉트릭 공장 건설하다.
  1903:에드윈 포터, "대열차강도"에서 원시적이고 시험적인 편집을 
시작하다(미국).
  1904:촬영기사 그렉 톨린드 태어나다(미국).
  1905:고몽 영화사, 유럽 영화의 중심지로 자리잡다/'5센트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하다.
  1906:모스크바에 최초로 영화회사 설립되다/노르디스크 영화사 
설립되다(덴마크)/로베르토 로셀리니 태어나다(이탈리아)/루키노 비스콘티 
태어나다(이탈리아).
  1907:프랑스와 미국, 영화 배급을 위한 트러스트 결성하다/로베르 브레송 
태어나다(프랑스).
  1908:러시아 최초의 극영화 "강 밑의 도적단"과 "스텐카 라진" 
공개하다(V.로마시코프 감독)/필름 다르 형성하다.
  1909:영국, 영화법 제정하다.
  1910:러시아, 미래파 출현하다/미국 영화 배급회사인 제너럴 영화사 
설립되다.
  1911:니콜라스 레이 태어나다(미국).
  1912:희극영화의 주류를 형성한 키스턴 영화사 설립되다(미국)/아돌프 
쥬커, 파라마운트사 창립하다(미국)/칼라 에물, 유니버설사 
창립하다(미국)/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태어나다(이탈리아).
  1913:1940년대의 네오리얼리즘의 단초인 베리스모 스타일이 이탈리아 
영화에 나타나다.
  1914:최초의 만화 영화 "공룡 거티"(윈저 맥케이)상영하다/찰리 채플린, 
"생계벌이"로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하다(영국).
  1915:인스, 그리피스, 세네트와 함께 트라이앵글 영화사 설립하다(미국)/엄청난 
제작비,3시간 분량의 길이, 인종적 편견 때문에 폭동을 야기하기도 
한 "국가의 탄생" 제작되다.
  1916:'쿨레쇼프 효과'로 불리는 편집 실험에 몰두하기 시작하다/오슨 
웰스 출생하다(미국)/위고 뮌스터버그, "사진:심리학적 연구" 발간하다.
  1917:몽타주 착상에 따라 만들어진 최초의 러시아 영화 "기능공 
프라이트의 계획"(레프 굴레쇼프 감독) 나오다/참전을 지지하는 영화를 
후원하기 위해 정부와 독일 은행, 대기업들이 작은 영화사를 통합하여 
우파(UFA) 영화사 설립하다(독일)/에디슨, 바이오그래프, 바이타그래프 
등의 보수연합인 활동사진 특허회사가 일련의 반트러스트법에 관한 재판을 
거치며 법적으로 무효라는 판결을 받다.
  1918:프랑스에서 인상주의와 초현실주의 영화 등장하다(1918__1930, "마담 
뵈데의 미소" "안달루시아의 개" 등)/잉마르 베리만 태어나다(스웨덴).
  1919:소련, 영화의 국유화를 선언하고, 국립영화기술학교(VGIK) 
개설하다/독일에서 표현주의 영화 등장하다(1919__1930)/채플린과 
그리피스, 픽포드와 페어뱅크스가 공동으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설립하다.
  1920:제9회 소련 공산당대회 결의에서 영화가 계몽, 선동, 선전의 
강력한 수단으로 규정되다. 쿨레쇼프, 실험집단인 '쿨레쇼프 아틀리에' 
결성하다(소련)/미국 영화의 제작 중심지가 뉴욕에서 할리우드로 옮겨지다.
  1921:미국 영화 제작배급협회(MPAA) 설립하다/페데리코 펠리니 
태어나다(이탈리아)/쇼티아지트 레이 태어나다(인도).
  1922:베르토프, 기록영화 시리즈 "키노 프라우다"의 제작에 
착수하다(소련)/레닌, "모든 예술 가운데 우리에겐 영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다/정부의 검열을 막기 위해 헤이즈를 MPAA 소장으로 
추대하다(미국)/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태어나다 (이탈리아).
  1923:에이젠슈테인, "레프"에 "친화의 몽타주" 기고하다(소련)/워너 
4형제, 워너브러더스 설립하다.
  1924:프랑스의 르네 클레르, 가장 중요한 다다이즘 영화인 "막간"을 
만들다/"괴스타베링의 이야기"(스웨덴, 모리츠 스틸러)에 그레타 가르보 
출연하다/칼럼비아사 창립하다(미국)/루이스 메이어, MGM사 
설립하다(미국).
  1925:에이젠슈테인, 소브키노 설립하다(소련)/런던에 영화에 관한 지적 
관심을 표방하는 영화협회가 생기다(영국)/"전함 포템킨" 혁명식장에서 
처음 공개되다(러시아)/월트 디즈니, 디즈니사 창립하다(미국).
  1926:푸도프킨, "영화 시나리오"와 "영화감독과 영화요소" 발간하다(소련).
  1927:대사와 음악, 기타 음향을 합성한 최초의 극영화 "재즈 싱어" 
뉴욕에서 공개되다(미국)/아벨 강스, 영화 "나폴레옹"에서 세 개의 
영사기를 사용하여 상영하다(프랑스)/영화인들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영화예술 과학아카데미 출범하다(미국).
  1928:완벽한 토키 영화 "뉴욕의 불빛" 공개되다(미국)/월트 디즈니 
최초의 대히트작이자 동시 녹음된 만화영화 "윌리의 증기선" 나오다(미국).
  1929:베르토프, "영화 카메라를 든 사나이" 제작하다(소련)/미국의 
'영화예술 과학아카데미', 11개 부문에 걸쳐 아카데미상을 주기 시작하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루이스 부뉴엘 감독) 
소개되다.
  1930:장 뤼크 고다르 태어나다(프랑스)/프랑스 최초의 토키 영화 "파리의 
지붕 밑" 상영하다(르네 클레르 감독).
  1931:에이젠슈테인, "영화형식"출간하다(소련).
  1932:세계 최초의 국제영화제인 베니스 영화제가 열리다(이탈리아)/
디즈니, 3색 테크닉 컬러 방식의 "세 개의 심포니" 소개하다(미국)/
아마추어용으로 가장 폭이 좁은 필름을 사용하는 8mm 영화 소개되다.
  1933:영국 영화연구소(British Film Institute) 설립되다/BFI가 영화잡지 
"QuarterlyReview of Modern Aids"를 창간하다(영국).
  1934:소련,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예술정책 시행하다/미국, 영화 검열 
강화하다.
  1935:프랑스에서 시적 리얼리즘 영화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다/동유럽 
최초의 국제영화제인 모스크바 영화제 개최되다(소련)/윌리엄 폭스, 폭스사 
창립하다(미국)/자연 컬러 촬영이 시작되다(마물리안의 "베키샤프")/
이탈리아, 영화실험센터 설립하다.
  1936:뉴욕 영화비평가상 생기다(미국)/앙리 랑그르와, 장 미트리, 조르주 
프랑주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설립하다(프랑스).
  1937: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지원 아래 치네치타 영화촬영소 설립하다.
  1938:이탈리아, 영화보관소 설립하다/일본, 영화인의 등록과 각본의 사전 
검열을 강화하는 등 영화 행정을 내각정보국이 장악하다.
  1939:소련, 연방영화회의 결성하다/중국, 옌안 영화집단 결성하다.
  1940:에이젠슈테인, 논문 "수직의 몽타주"집필하다(소련)/프랑스 
영화산업, 독일 지배하에 들어가다/베르나르도 메르톨루치 
태어나다(이탈리아).
  1941:영국, 전시 세미다큐멘터리 만들기 시작하다/"말타의 매"를 
시작으로 필름 누아르 장르 나오기 시작하다(미국)/"시민 케인"(오슨 웰스 
감독, 그렉 톨랜드 촬영)에서 딥 포커스를 탁월하게 사용하다.
  1942:최초의 네오리얼리즘인 "강박관념"(루키노 비스콘티 감독) 
만들어지다(이탈리아).
  1943:마르셀 레르비에, 프랑스 영화학교(IDHEC) 설립하다/베르톨트 
브레히트, 프리츠 랑을 위해 영화대본 "교수집행인 또한 
죽는다"쓰다(미국).
  1944:할리우드 테크놀로지의 귀재 조지 루카스 태어나다(미국).
  1945:켈리포니아 대학 등의 지원을 받는 미국 영화잡지 "필름 
쿼털리" 창간되다.
  1946:전후 영화 발전을 위해 칸 영화제 열리다(프랑스)/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태어나다(독일)/빔 벤더스 태어나다(독일).
  1947:허우 샤오시엔 태어나다(대만)/체코, FAMU 영화학교 개설하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영화사회학에 관한 저서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출판하다(독일)/스티븐 스필버그 태어나다(미국)/의회 
반미활동위원회(HUAC)에서 할리우드에서의 공산주의 활동 가능성을 
조사하기 시작하다(미국).
  1948:D.W. 그리피스 사망하다/세르게이 M. 에이젠슈테인 사망하다.
  1949:이탈리아, 국립영화연구소 설립하다/중국, 영화산업을 국유화하다.
  1950:뒷날 누벨바그의 기수가 된 장 뤼크 고다르,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이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다(프랑스)/영국, 영화제작기금 조성하다/"나는 FBI의 
공산주의자였다" 같은 반공영화가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와 국가기관에서 
최고의 영화로 지목되다.
  1951:베를린 영화제 개최되다(독일)/의회 반미활동위원회, 200명 이상의 
영화 관계자들을 공산주의자 혹은 공산주의 지지자로 지명하다(미국)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몬"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일본 영화의 
국제화가 본격화되다.
  1952:이스트만 컬러 소개되다/시네라마 방식 공개되다/비디오 개발되다/
20세기 폭스사가 시네마스코프 특허권 획득하다(미국)/채플린, 
"라임라이트"를 공개하기 위해 영국에 갔다가 공산주의자였다는 혐의로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망명생활 시작하다/첸 카이거 태어나다(중국).
  1954:제 1 회 아시아 영화제 개최되다/프랑수아 트뤼포,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 발표하다(프랑스)/비스타비전 소개되다.
  1955:미국의 실험영화와 독립영화, 작론의 소개가 특징적인 잡지 "필름 
컬쳐" 창간되다/"오클라호마"로 Todd-AO 방식 소개되다.
  1956:안제이 바이다, 국영 영화산업의 재조직에 참가하여 유니트시스템의 
발전에 기여하다(폴란드).
  1957:중국, 필름 보관소 설립하고 영화노동자협회 결성하다.
  1958:런던 쇼, 홍콩에 쇼 브라더스 창립하다.
  1959:유니버설사, MCA로 소유권 넘어가다(미국)/프랑스, 누벨 바그운동 
시작되다/영국의 프리시네마 운동 시작되다/영국의 프리시네마 운동 
시작되다/쿠바, 영화예술산업연구소(ICAIC) 설립하다/누벨 바그의 대표적인 
촬영기사 라울 쿠다르, 고다르와 함께 그의 첫작품"네 멋대로 해라" 
만들다(프랑스)/프랑수와 트뤼포, "400번의 구타"를 시작으로 앙트완느 
드와넬 시리즈 시작하다/일본, 자주제작, 자주배급, 자주상영이라는 
독립프로덕션 제2기가 시작되다.
  1960:뉴아메리칸 시네마그룹 결성되다(미국)/안보투쟁을 다룬 오시마 
나기사의 "일본의 밤과 안개" 개봉과 동시에 상영 중단되다(일본).
  1961:장 루쉬와 에드가 모렝, "여름의 연대기"로 시네마베리테 운동을 
시작하다/언더그라운드 제 1선언 발표되다.
  1962:글라우베르 로차, 첫 장편영화 "바라벤토"를 만들어 '시네마 노보'의 
기수로 각광받다(브라질)/서독, 오버하우젠 선언 발표하다/앙드레 바쟁, 
"영화란 무엇인가" 완간하다(프랑스)/고다르, 12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브레히트적 영화 "그녀의 인생을 살다" 소개하다/일본, 예술국장조합(AGT) 
활동 시작하다.
  1964:크리스티앙 메츠, "영화, 언어체계인가 언어활동인가"라는 논문 
발표하다(프랑스).
  1965:super 8mm 영화 소개되다/프랑스, 시네클럽연합(FFCC) 
결성되다/독일, 청년독일영화관리국 설립되다/고다르, "남성--여성"에서 
실험영화와 극영화, 다큐멘터리를 통합해 '영화적 에세이'의 모델을 
보여주다.
  1966:솔라니스와 베티노, '해방영화집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다(아르헨티나)/중국, 문화대혁명으로 몇 개의 스튜디오 문을 닫다.
  1967:크리스 마르케르,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기 위해 다섯 명의 영화 
감독들과 함께 영화집단 'slon' 결성하다(프랑스)/고다르, "주말"에서 수평 
트래킹 숏과 화면의 평면화로 부르주아적 세계를 탈신비화하려고 하다.
  1968:5월 혁명으로 칸 영화제 취소되다(프랑스)/장 뤼크 고다르와 장 
피에르 고랭, '지가 베르토프 집단' 결성하다(프랑스)/4면의 볼리비아 
영화인이 영화집단 '우카마우 집단' 결성하다(볼리비아)/크리스티앙 메츠, 
"영화 의미작용에 관한 시론" 발표하다(프랑스).
  1969:솔라나스와 케티노의 "제 3영화를 향하여"라는 논문 
발표되다(아르헨티나)/장 루이 코몰리, "영화/이데올로기/비평" 
발표하다(프랑스)/미국, 영화발전연구센터 설립하다/일본, 소시민 희극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 시작하다.
  1970:독일, 뉴저먼 시네마 운동 시작되다/홍콩, 레이몬드 초우가 골든 
하베스트를 세우고 상업적으로 일신하기 시작하다.
  1971:페미니스트 다큐멘터리 첫 세대의 영화들이 속속 등장하다("여자 
키우기", "제니의 제니", "세 가지 삶", "여성 영화")/케이블 TV 소개되다.
  1972:미국, 영화등급제(G, PG, R, X) 실시하다/에딘버그 영화제와 뉴욕 
국제영화제 개최하다(미국)/영화잡지 "여성과 영화" 간행되다(미국)/4중 
입체음향 시스템 도입되다/에딘버그와 뉴욕에서 국제영화제 개최되다.
  1973:토론토와 워싱턴에서 여성영화제 개최되다/마조리 로젠의 영화 속의 
여성에 대한 최초의 저작 "팝콘 비너스" 발간되다(미국)/영국, BFI의 
여성영화이론에 대한 최초의 논문총서 발간되다(클레어 존스톤 
편집)/알제리에서 제 3세계 영화인의 결의가 발표되다/파리에서 제 1회 
super 8mm영화제 개최되다.
  1974:여성의 시각으로 현대 영화를 분석하는 평론지 "점프 컷" 최초로 
간행되다(미국)/칸 영화제에서 호금전(홍콩)의 "협녀"가 공개되어 
비평가들의 격찬 속에 기술대상 받다.
  1975:로베르 브레송, 영화 연출에 대한 책인 "영화에 관한 소론" 
출간하다.
  1976:베르톨루치의 "1900년"을 3개의 미국회사(파라마운트, 폭스, 
유나이트 아티스츠)가 편집하여 배급하다.
  1977:페미니즘 영화이론지인 "카메라 옵스큐라" 발간되다(프랑스).
  1978:빔 벤더스, 프렌시스 코폴라의 초청으로 미국에서 "하메트"의 제작에 
착수하다/대만, 시네마테크, 금마장영화제가 신설되고 정부의 제작비 지원이 
다시 시작되다.
  1979:문화대혁명으로 문을 닫았던 북경의 전영학원 다시 수업을 
시작하다/홍콩 뉴웨이브 개막하다.
  1980:장 자크 베네의 "디바"를 시작으로 '누벨 이마주' 감독들의 영화가 
나오기 시작하다/짐 자무쉬의 "미스터리 트레인", 일본의 JVC의 미국 내 
자회사인 라르고 엔터테인먼트의 첫 번째 작품이 되다/인도, 영화금융공사와 
인도영화수출협회를 설립하여 인도 영화의 부흥을 꾀하다.
  1981:"점프 컷"24, 25호에서 레스비언과 영화에 대한 특별호를 
발행하다(미국)/스티븐 스필버그, "인디애나 존스"만들기 시작하다(이후 
1984년, 89년 제작).
  1982:스티븐 스필버그의 "E, T", 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다(미국).
  1983:코카콜라사, 컬럼비아사를 일본의 소니사에 매각하다(미국)/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향수"로 칸 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
  1984:"터미네이터", 근육질의 우람한 전사 아놀드 슈왈제네거를 스타로 
만들다.
  1985:소수 민족의 애환을 그린 웨인 왕의 "딤섬"소개되다.
  1986:스파이크 리, 첫 번째 장편영화인 "그녀는 그걸 가져야 해"에서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혼합한 참신한 흑인영화를 만들다/코카콜라사의 
자회사인 칼럼비아 영화사, 영국 출신의 데이비드 퍼트냄을 회장으로 
추대하다(곧 밀려나오다).
  1987:SFX의 걸작 "천년유혼", 홍콩 영화를 예술영화의 반열에 
올려놓다/대만, 신영화선언 발표하다.
  1988:서극, 자신의 영화사인 '전영공작실' 설립하다.
  1989:"비정성시"(허우 샤오시엔),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 수상, 대만 
영화가 주목받기 시작하다/"베트멘", 상상을 뒤엎는 흥행성공으로 관련 
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리다/배용균 감독,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으로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대상 받다.
  1991:다분히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에드워드 가위손",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 MTV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도어즈"등 새로운 영화 지형이 나타나다.
  1992:"미녀와 야수", 만화영화로는 최초로 아카데미상 본선에 진출하다.
  1993:"피아노"(제인 캠피온),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아 호주 영화와 여성감독 영화의 가능성을 알리다.
  1994:제47회 칸 영화제, 예상을 뒤엎고 "펄프 픽션"에 황금종려상이 
돌아가다/키에슬로프스키, "레드"를 끝으로 더 이상 연출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다.

    부록 2
    세계 영화기술 발달사
    이충직(중앙대 영화과 교수)

  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대하듯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이 신기한 발명품을 구경했다. 그 무렵 어느 누구도 이것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예술로 성장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는 시대의 
변화와 기술적 발전, 영화미학의 정립에 힘입어 오늘날 어떤 예술적 장르보다 
인간의 삶에 밀접한 문화의 중심부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렇듯 영화가 오늘날의 
위치로 성장하기까지 수많은 과학기술의 발달이 영화기술의 발달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 모든 기술적 진보가 모두 영화의 발전에 긴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서 영화사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결국 영화의 발전에 중요한 전환적 
계기를 제공한 기술적 발달에 국한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술의 발달이 
영화미학의 진보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음향의 등장과 색채의 이용
  뤼미에르 형제는 1895년에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최초의 영화를 상영했다. 
이때 상영된 "공장에서의 퇴근", "기차 도착", "물 뿌리는 정원사" 따위는 
하나의 숏으로 이루어진 길이가 불과 2,3분밖에 안 되는 영화였다. 오늘날의 
영화는 초당 24프레임으로 영사하여 움직임이 자연스럽지만, 이때의 영화는 초당 
16프레임이어서 동작이 다소 부자연스럽다. 물론 소리도, 색채의 재현도 없이 
단순하게 실생활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어색함 외에 
35mm라는 필름의 규격이나 가로:세로가 4:3이라는 화면비율 등은 오늘날까지 
영화의 표준이 되고 있다.
  영화에서 처음으로 음향이 등장한 것은 1926년 "재즈 싱어"라는 
작품부터이다. 실제는 그보다 훨씬 전에 영화에 음향을 덧붙이는 기술이 
개발되었으나, 산업적인 면에서 필요성이 때문에 미루고 있다가 경제공황에 따른 
영화산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영화에 도입되었다. 비록 음향의 도입이 
산업적 필요성에 따라 이뤄졌지만, 그 영향은 뒤에 영화의 사실성에 뿌리를 둔 
예술논쟁으로 이어진다. 이때의 사운드는 마치 레코드의 수록장치와 같이 
디스크에 음향을 녹음하는 방식과 필름에 녹음하는 방식이 함께 쓰였는데, 어느 
것이나 장치의 부피가 커서 스튜디오에서 주로 이용되었다. 음향의 등장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이전까지 통일하지 못했던 필름의 주행속도를 
자연스러운 음향의 재생을 위한 최소한의 속도인 초당 24프레임으로 정했다는 
점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색채의 도입도 영화의 중요한 기술적 발전으로 꼽을 수 
있다. 물론 앞서 수공으로 필름에 채색하는 영화가 있기는 했으나 진정한 의미의 
색채영화는 "레드 스킨 Red Skin"(1972)에서 처음으로 테크닉 컬러를 
사용하면서 나타나게 된다. 이때는 2색 필터를 이용했기 때문에 자연색을 
완벽하게 재생하지 못했으나, 1934년에 프리즘을 이용한 3색 분해의 원리를 
응용하여 테크닉 컬러를 완성한 뒤에는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거의 완벽한 색채의 
도입이 가능해졌다. 카메라 방식의 명칭이기도 한 테크닉 컬러는 하나의 장면을 
프리즘을 이용하여 3장의 필름에 촬영하기 때문에 부피와 무게가 커지고 비용이 
많이 드는 단점이 있었으나, 영화에 처음으로 색채를 일반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음향의 등장과 함께 색채의 이용은 더욱 격렬하게 영화의 
현실 복제성과 그에 따른 예술성에 관한 논쟁을 불러왔고, 이러한 논쟁이 계기가 
되어 영화미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60년대--동시 녹음 카메라의 혁명
  영화기술상으로는 그다지 큰 변화가 아니지만 영화미학적으로 중요한 발전은 
1941년의 렌즈 코팅기술의 개발을 통한 광각렌즈의 활성화를 들 수 있겠다. 
이전에도 프랑스의 아벨 강스가 광각렌즈를 쓰기는 했으나, 렌즈 표면의 반사광 
때문에 빛의 손실이 커 딥 포커스의 효과가 그다지 없었다. 그러나 코팅 기술의 
개발로 빛의 손실을 없앤 광각렌즈의 사용이 가능해짐으로써 f8__f16의 
조리개로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1941)에서와 같은 딥 포커스의 촬영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발견을 통해 "시민 케인"은 앙드레 바쟁이 극찬한 사실주의의 
모델로, 그 뒤 현대 영화이론의 기폭제가 되는 딥 포커스, 몽타주의 논란을 
야기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1950년대 들어 텔레비전이 등장하자 영화산업은 다시 위기를 맞는다. 이러한 
시점에서 영화를 작은 화면의 텔레비전과 차별화하면서 관객을 다시 영화관으로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와이드 스크린과 자기녹음방식의 등장 덕이었다. 한 장면을 
3대의 카메라로 촬영하여 다시 극장에서 3대의 영사기로 웅장한 화면을 
만들어내는 시네라마와 아나모픽 렌즈를 이용하여 종전의 1:1.33의 화면비율을 
1:2.66까지 확장한 시네마스코프의 등장, Todd-AO카메라에 의한 
70mm시스템의 개발은 텔레비전과는 다른 거대한 화면을 무기 삼아 관객을 부를 
수 있었다. 여기에다 광학녹음방식을 훨씬 능가하는 좋은 음질의 자기녹음방식이 
개발되면서 이런 와이드 스크린의 장점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 
70mm시스템에서 이용하는 6개의 자기녹음 트랙은 입체음향을 가능하게 만들어 
와이드 스크린의 효과를 충분히 살릴 수 있게 해주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작은 휴대용 녹음기의 개발과 소형 카메라의 등장인데, 이를 계기로 시네마 
베리테와 다이렉트 시네마 같은 새로운 다큐멘터리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1959년에 스위스의 쿠델스키사에서 만든 나그라(Nagra) 녹음기는 종전의 
녹음기와는 달리 소형이어서 휴대가 용이하고 조작이 간편하여 적은 인원으로도 
동시녹음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미국의 시네 보이스(Cine Voice)와 프랑스의 
엑클레어(Eclair)에서 경량의 16mm 동시녹음 카메라를 개발했고, 이는 나그라와 
함께 현장에서 동시녹음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더욱 쉽게 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이들 기술의 발전은 네오리얼리즘과 누벨 바그를 
통해 이어져오던 리얼리티와 객관성의 문제에 대해 또 하나의 진보적 대안을 
제시했다.

    1970년대--돌비 서라운드 시스템 개발
  1970년대 이후에 나타난 주목할 만한 기술의 발달은 크게 돌비와 THX 같은 
방식을 이용한 입체음향의 발전과 자연광의 이용범위 확대를 들 수 있겠다. 
돌비사는 잡음 제거 시스템인 돌비시스템을 더욱 발전시켜 서라운드 시스템을 
개발했다. 과거에도 70mm를 이용한 입체음향이 있었으나, 이러한 개발을 통해 
35mm에서도 입체음향이 일반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HMI로 대표되는 밀폐형 
아크방전등은 자연광과 같은 5400K의 색온도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것을 통해 
자연광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되자, 영화에서는 자연광을 더욱 
자유롭게 이용하는 조명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조명의 발달은 영화가 스튜디오를 
벗어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물론 그 밖에도 언급되지 않은, 무수히 많은 영화기술이 영화가 등장한 이후 
100년 동안 개발되어 왔다. 이러한 기술의 개발은 영화의 산업적 발달은 
물론이고 직, 간접적으로 영화미학의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해왔으며, 현대 
영화 곳곳에 그러한 발달의 흔적이 배어 있다. 현재 실용화되었거나 개발되는 
디지털 사운드와 HDTV, 멀티미디어 환경은 다시 한 번 영화의 장래를 바꾸어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영화를 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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