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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 침묵의 깊은 뜻을 마음으로 보게나

Casey,Riley 2023. 5. 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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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의 깊은 뜻을 마음으로 보게나
 원정



  <서문>
  그리운 스님
  꿈을 꾸었다.
  
  눈 내리는 백련암 뜨락
  잔잔한 미소 머금고 말없이 서성이던 스님
  
  해인사 어귀 홍류동 골짜기
  기다린 주장자 짚고 오르내리시던 스님.
  
  내가 힘겨운 세상살이에
  마음 다쳐 앓을 때마다
  스님은 생시의 모습으로 다가오시고
  그 모습 그대로 혼탁한 사바의 등불이 되시고
  
  그러나 이제
  스님의 모습은 손에
  잡히지 않아 안타까운 이웃들과
  그분과 함께 한 추억들을
  나누련다.
  
  이 봄
  수줍은 봉오리 드러내는 장미꽃과
  이 땅을 떠나신 스님의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를...

  “옴 아비라 훔카스바하”

  원정 합장

  <추천의 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차대완 씨를 만난 것은 내가 성철 스님의 소설을 쓰기 위해 자료를 구하러 다닐 때였다.
  성철 스님을 40여 년 동안 모신 천제 스님이 차대완 씨를 소개시켜  준 것이었다. 차대완 씨 또
한 성철 스님을 모시던 시절이 있었고, 그때 그의 법명은 원정이었다고 한다.
  그가 먼저 천제  스님의 권유에 의해 나를 찾아 서울로  왔었고, 그 후 내가 여주  신륵사 가는 
길에 그의 도예 작업실을 찾아갔었다.
  한눈에도 도인다운 여유로움과 예술가적 낭만이  그윽한 눈빛의 차대완 씨가 나에게 정표로 준 
것은 `통신불퇴`라는 성칠 스님의 복사본 글씨와  그의 도예품, 눈과 귀가 하나밖에 없고 입이 반
쪽인 작품이었다.
  두 작품 다 의미심장한 느낌이었다.
  “이 종신불퇴와 제 작품을 책상 위에 두고 집필하십시오.”
  나는 그가 내미는 것들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생면부지의 그였지만 마치 친구가 된  것처럼 스
스럼없이 그의 마음까지도 받아들였던 것이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나이도 나와 같았고, 가는 길
도 비슷하여 도반이라 해도 좋았다.
  “눈과 귀가 하나밖에 없는 것은 나쁜 것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입이 반쪽인 것은 나쁜 말 
하지 말라는 노장님의 말씀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는 그 도예품을  수백여 점이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성철 스님의 말씀이  그의 
도예품을 통하여 수백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에게 전해진 셈이다.
  그는 여주에서 땅콩밭 한켠의 땅콩 줄기처럼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조금은 외롭
고도 행복해 보였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느낌은 바로 이해가 되었다.  그가 외롭게 보인 것은 비록  절을 떠나 
가정을 꾸려가고 있기는 하지만  가출한 소년 같은 분위기가 느껴져서였고, 그가 행복해  보인 것
은 사랑하는 아내 옆에서 하루 종일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녹차를 몇 잔 마시며 성철  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자신의 출가 동기부터  성철 스
님을 모시던 추억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날 나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간혹 그 일화들이 머릿속에 생생해져 오기도 한다.
  성칠 스님에 관한 소설, 전기, 법문집 등은 이미 많이 나와 있지만 나는 그 어떤 책보다도 차대
완 씨의 글  속에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성철 스님의  진면이 한치의 굴절없이 진솔하게 
펼쳐지고 있다고 믿는다.
  또한 독일에까지 가서 어렵게  닦아온 그의 도예 세계도 기대된다. 성철 스님이라는  위대한 선
승 밑에서 한동안 엄옥한 정신의 담금질을  한 사람이므로 그의 작품 역시 불가의 깊이와 향기를 
지니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수행을 하려면

  성철 스님이 늘쌍 하신 말씀 중 가장 크게 강조하신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음식은 영양실조 안 될 정도로만 먹어라.
  둘째, 옷은 살 안 보일 정도면 된다.
  셋째, 공부는 밤이 새도록 해야 한다.

  큰스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신 그대로 실천하셨다. 그러니 배우는 우리가  어찌 그 말씀을 건성으
로 들을 수 있겠는가.
  스님께서는 밤새워 공부하시다가 혹시 졸음이  오면 추운 겨울이라도 온 산을 헤치고 다니시다
가 새벽 예불 시간에 맞춰 내려오시곤 했다.
  그때마다 모자와 눈썹에 서리가 하얗게 앉아 있는 모습을 뵙곤  했는데, 스님의 그런 모습을 뵐 
때마다 감히 그 경지를 따라갈 수 없을 것만 같아 아득해지곤 했었다.
  스님께서는 평생을 여기저기 기워서,  기운 자국이 오히려 무늬가 돼 버린 분소의(`똥  묻은, 헌 
헝겊을 주워 모아 지은  옷`이란 뜻으로 가사를 일컫는 말. 탐심을  버리고 검소하게 입는 옷임을 
강조하는 말임.) 한 벌로 지내셨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고, 또 원래 기골이 장대한 스님
의 체격에도 불구하고 음식은 꼭 필요한 만큼만 드셨다.
  스님께서는 인간이 태어나서  잠을 자는 것은 삶의  멈춤이요 죽은 시간이라고 강조하였다.  또 
많이 먹으면 졸음이 올 뿐만 아니라  사람이 나른해지기 쉬우니 최소한도의 수면과 적은 양의 식
사는 수행자로서의 기본이고 철칙이라고 역설하셨다.
  그러나 식욕이나 수면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최소한으로 절제한다는 것은 사실 
어렵다.
  늘 잠이 모자라서 수행자 시절에는 틈만 나면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고, 절 고기라고 불리는 두
부라도 부치는 날에는 그 냄새만으로도 신이 났던 기억이 새롭다.
  물론 수행의 연수가 늘어나면서 이런 습성들도 차츰 줄어들기는 하지만 그 유혹은 그야말로 원
초적인 것이라 극복이 쉽지 않다.
  그러나 스님만큼은 그 어려운 것을 철저하게 지키신 몇 안되는 현세의 수도자임에 틀림없다.

  철망 치고 공부하리

  성전암(대구 팔공산 파계사 뒤에  있는 암자) 시절은 성철 스님께서 철조망을  치고 좡좌불와를 
하시던 시절이었다.
  `장좌불와`란 말 그대로 눕지 않고 오랫동안 앉아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어느 누구는 스님의 장좌불와를 흉내냈다가 한  달 만에 이가 몽땅 빠졌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
로 그 수행은 범인으로서는 좀체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다.
  생식과 장좌불와로 용맹정진하시던 그 시기에는 어느 누가 찾아와도 쉽게 만나 주지 않으셨다.
  그리고 세상의 온갖 것들과 인연을 끊었다는 표시로 암자 주위에 철망을 쳐놓기도 하셨다.
  그런데 그때 5.16이 나고 그곳의 계엄사령관이 찾아와서는 스님 만나기를 청했다. 시자가 그 사
실을 말씀드렸더니 스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도 대한민국 국민이니 계엄사령관이 공적인 일로 왔다면 기꺼이 만나겠지만 사적인 호기심
이라면 만날 수 없다.”
  시자가 스님의 말씀을 전하자 계엄사령관은  호기심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라 고명하신 스님
의 법문을 얻어듣고자 찾아 왔노라며 재차 청을 넣었다.
  그의 방문 동기를  전해 들은 성철 스님께서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법문을 들으러 온 초발심자
(처음으로 불문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를 내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 하여 친견을 허락하셨다.
  그날 계엄사령관은 오랜 시간 동안 스님의 법문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고 내려갔다.
  그 후 몇 달이  지나고 정월 초하룻날이었다. 폭설이 내려 성전암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정강이
까지 푹푹 빠질 정도가 되었다.  눈을 치울 수도 없고 해서 한참을 난감해하고 있는데  새하연 그 
눈길을 치우면서 올라오는 한 무리의 군인들이 보였다.
  스님께서 마당에 나와 그들을 맞으셨다.
  “정초부터 웬 군인들이 이렇게 많이 왔는가?”
  눈길을 치우며 올라오느라고 그들의 얼굴과 귓볼은 발갛게 얼어 있었다.
  “네, 우리 대장님이 성전암에 도인 스님이 계시니 새해 아침에  일찍 스님께 가서 세배하고 오
라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하며 암자의 앞마당에 넙죽 엎드려 스님께 세배를 올렸다.
  스님은 그들의 세배를 흐뭇하게 받으시고는 그 계엄사령관의 마음을 기특하게 여기셨다.

  팔만대장경과 점둥이

  해인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명산대찰이다.
  그 중에서도 팔만대장경은  세계적인 보물이 아닐 수  없다. 불란서의 이름난 건축학자가  와서 
보고 혀를 내둘렀을 정도로 건축양식이며 창문의 위치, 그리고 경판고의  현재 위치 등은 현대 과
학이 따를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수준이라고 한다.
  그 옛날 큰스님들과 조상들의 지혜는 감히 상상을 초월하는 경계임에 틀림이 없다.
  현재 팔만대장경판고의  위치는 가야산의 700m 고지.  가야산의 높이가 1,430m이나  바로 산의 
중간 지점이다. 그러니 산위의 찬 공기와  산 아래의 따뜻한 공기가 교차하는 곳인 셈이다. 이 한 
가지만 봐도 더 이상의 사족이 필요 없으리라.
  어느 날 큰스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다.
  해인사에 한 중년 남자가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찾아왔다.
  낯선 방문객의 이야기인즉 이렇다. 자신은 안동에서 왔는데 얼마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단다. 그
런데 그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서 당신이 앞집 김 서방 집의 개로  태어날 것인데, 그 중에 앞가슴
에 검은 점이 있는 강아지가 당신  자신이니 데려다가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한 번만 구경시켜 달
라고 했단다.
  하도 꿈이 이상해서 이튿날 앞집에 가보았더니 과연 어제밤에 누렁이가 새끼를 낳았다고 한다.
  그는 신기하기도 하지만 꿈속에 나타난 어머니 말씀대로 가슴에 검은 점이 있는 강아지를 찾아
내서는 주인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지금  데리고 왔으니 제발 청을 들어달라고 부탁을 해온 것
이다.
  불가에서는 전생을 믿고 현재와  미래를 소중히 생각하는지라 강아지에게 특별히 팔만대장경을 
구경시켜 주었단다. 그러자 그 강아지는 이리저리 날뛰며 몇  바퀴고 팔만대장경을 둘러보고 나서 
사찰 밖 동네 어귀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들은 강아지를 불교식으로  고이 장사 지내 주었단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였
고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한번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생전에 못 이룬 소원을 죽어서 앞
집 강아지로 태어나 이룬 셈이다.
  사람이라면 악한 마음을  멀리하고 선한 마음을 받들어  행하여야 한다. 옛말에 악한  사람과는 
함께 더불어 이야기도 나누지 말라고 했다.
  꿈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었겠지만 그 아들의 효심은 남달리 지극했는지라 허투루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아무렇게나 생각할  수 없는 
깊은 뜻이 담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배춧잎 이야기

  스님은 너나 할 것 없이 음식을 아껴야 한다고 늘쌍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일단 입을 댄 음식은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이 먹어 치워야 한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시주 받은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성철 스님이 젊어서 탁발(손에 발우를 들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먹을 것을 얻는 것. 이는 아집, 
아만을 제거하고, 보시하는  이의 복덕을 길러 주는  공덕이 있으므로 부처님 당시부터  승려들이 
행하던 수행법의 하나임)을 다니실 때의 일이다.
  스님은 일단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주(스님이나 절에 물건을 베풀어 주는  일)하는 물
건이면 주는 대로 모두 고맙게 받으셨다.
  쌀, 보리, 콩, 고추, 심지어는  배추에 이르기까지 신도들이 스님에게 시주하는 물건은 가지가지
였다.
  탁발이 끝난 뒤 스님은 시주 받은 것 모두를 그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집에 주셨다.
  마을을 돌면서 가난한 집을 미리 봐두신다는 거였다.
  그러나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스님이 내놓는 물건은 잘 받으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스님은 그 집 문 앞에 몰래 두고 오셨다고 한다.
  이렇게 성철 스님은 시주 받은 물건을 단 한 가지도 절에 가져오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철 스님의 시주법이셨던 것이다.
  스님은 아무리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귀하게 여기셔서, 함부로 하는 게 없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것을 늘 깨우치도록 하셨다.
  한번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옛날 선지식을 찾아다니는 젊은 스님 두 분이 계셨다.
  그들에게는 선지식을 찾는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었다.
  아무리 도를 높이 깨우친 도인 스님이라 하여도, 시주 물건을  아끼지 않는 스님은 그들이 존경
하는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하루는 깨우침이 크다고 명성이 높은 스님을 찾아 길을 떠났다.
  두 스님이 선지식이 살고 있다는 산의 오르막길을 힘들여 오르고 있을 때였다.
  두 스님이 개울물에 둥실둥실 떠내려오는 배춧잎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선지식이 살고 있다고 해서 찾아왔더니 아니구만. 배춧잎이 저렇게 함부로 버려져서 떠
내려오고 있잖은가.”
  두 스님은 이렇게 말하며 그 자리에서 걸음을 돌렸다.
  그 선지식에게는 배울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바로 그때 누더기를 걸친 노스님이 막 산모퉁이를 돌아 터덜터덜 내려오고 있었다.
  노스님은 짚신을 신고 있었는데, 한쪽  신은 끈이 떨어져나가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스님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에서 발을 떼지 못한 채 질질 끌었다.
  노스님이 그들을 보고 물었다.
  “여보게들, 이 개울물에 배춧잎 하나 떠내려가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네?”
  “난 그 배춧잎을 주우려고 십여 리 길을 걸어 내려왔네. 보았으면 좀 알려주게나.”
  “네, 저쪽으로 떠내려갔습니다.”
  젊은 스님이 손가락으로 배춧잎이 떠내려간 곳을 가리켰다. 
  그러자 노스님은 그쪽으로 가서 지팡이로 배춧잎을 주워 가셨다.
  그것을 본 두 스님은 그러면 그렇지 하고 마주 보았다.
  그리고 곧장 그 노스님의 뒤를 따라갔다.

  가장 큰 보시의 공덕

  사람이 죽음에 이르러서는 누구나 세상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애지중지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더라도  모두 버리고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육신도 병들고 늙으면 영혼이 머물 거처로는 적당치 않게 되는 것이다.
  정신은 갈고 닦으면 빛이 나고 오래 남지만, 육신은 제아무리 갈고 닦아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스님께서는 수도승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마지막 몸까지도 아낌없이 내놓은 옛 도인들의 
행적을 자주 들려주셨다.
  옛 도인 스님들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초연한  모습을 보이셨을 뿐 아니라 평생 동안 그의 영혼
이 머물렀던 육신을 두 가지 방법으로 마감했다.
  한 가지는 깊은 산 속 바위틈에서 최후를 마치는 것이었다.
  죽음이 한 발 한 발 다가옴을 예견하면 스님들은 번거로움을 피하여 아무도 몰래 깊은 산 속으
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맹수들의 주린 배를  채워 주려고 마지막 남은 육체
를 보시(자비심으로 다른  이에게 조건 없이 물건을  준다는 뜻. 지금은 흔히  신도들이 스님들께 
독경을 청하거나 불사를 행하고 보수로 금전이나 물품을 주는 것을 말한다)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조각배에 몸을 싣고 깊은 바다로 나가 주머니에 돌멩이를 잔뜩 집어넣은 채로 바
다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역시 마지막 육체를 물고기에게 던져 보시하는 것이다.

  영암 스님

  해인사에 영암 스님이란 분이 계셨다.
  성철 스님과도 꽤나 가깝게 지내시던 분인데, 매사에 빈틈이 없는 깔끔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찰의 관리와 행정에는 그 스님을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가난했던 해인사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는 데도 그 스님의 공이  크셨던 것으로 안다. 매년 해인
사에서 봉행(교법을  받들어 수행함)되던 팔만대장경 불사(부처님의  능시인 교화를 가르침.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고, 경전을 쓰는 것 등을 모두 불사라 한다.)도 영암 스님의 발상이었다.
  그 영암 스님께서 하루는 백련암에 오셔서 잠시 쉬어 가신 적이 있다.
  그 즈음 유독 백련암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는 하루  종일 밥짓고 찻물 끓이는 일만 
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지만, 나중에는 내
가 이짓 하러 중이 되었나 싶은 생각에 한심해 견딜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 심정을 영암 스님에게 투정 부리듯 털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들으신 영암 스님은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해주셨다.

  영암 스님이 출가하고 얼마  되지 않아 집에서 급보가 날아 왔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
이었다.
  전갈을 받은 영암 스님은 너무 슬퍼서 어찌할 바를 모르셨다.
  속세와 인연을 끊고 출가한 몸이라, 그 슬픔을 속으로만 꽁꽁  삭이다 견디지 못해 다른 스님에
게 의논을 드렸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고.
  하지만 그 스님은 속가의 인연에 연연해선 안 된다고 영암  스님을 타이를 뿐이었다.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서 참고 또 참았는데,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가누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튿날 점심을 싸가지고 아무도 찾지 않는 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목놓아 울었다. 실
컷 울다 보니 배가 고파져서  준비해 온 점심을 먹었다. 그러고도 슬픈 마음이 가시지  않아 다시 
울기 시작해, 서산에 해가 걸릴 때까지 울고 또 운 다음, 절로 돌아왔다.
  그리고 절에 돌아와서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생활을 시작했다.

  “아무리 속세와 인연을 끊은 몸이지만 그래도 사람인데, 사람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초월하기
가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닐 게야. 그러니 나이 많은  사람은 부모님처럼 생각하고, 어린 사람은 
동생이나 형님처럼 생각하면 일하기가 조금 수월해지겠지.”
  영암 스님은 이렇게 말씀을 맺고는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때 내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너무나 황망해서 얼른  눈물을 감추었지만, 지금도 내가 왜 그때 눈물을  흘렸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중 보러 절에 오지 마

  스님을 뵈러 절에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성철 스님은 늘 이런 당부를 하셨다.
  “중 보러는 절에 오지 말고, 부처님 법 보러 절에 와야 합니다.”
  성철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헤아려 보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만약 스님만을 바라고 절에 오게 되면 반드시 실망할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사실 절에 오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부처님을 만나러 오는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스님을 만나
러 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스님도 사람인지라, 실수가 있을 수 있다.
  누구든 완전한 인간이 되기란  성불하기 전에는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그러니 스님이  아닌 부
처님을 보고 절에 온다면, 적어도 실망할 염려는 없을 것이다.
  물론 스님들은 절을 지킬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신도들에게 설법하는 중간  역할을 하
고 있다.
  하지만 결국 불교를 깊이 이해하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면 부처님의 가르침만을 따르는 게 옳
지 않겠는가.
  모든 신도들이 그런 마음으로 절에 온다면 스님에게 실망하거나,  스님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
도 자연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스님의 말씀이 백번 천번 옳다.
  옛말에 `인간 못 된 것이 스님 되고, 스님 못 된 것이 수좌되고, 수좌  못 된 것이 부처 된다`고 
했다.
  이것은 자신을 닦아 성불을 하려면 보통의 노력 가지고는 어렵기 때문에 나온 말인 것 같다.
  자아성찰을 위해서는 피땀 흘려 노력해야 하니, 그 모습이 일반인들의  눈에는 지독히 못 된 것
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따르는 불제자의 삶을  제대로 구현하셨던 성철 스님을 생각하면 저절로 머리
가 숙여지는 게 아닐까.

  책을 모셔오지

  성철 스님은 살아생전 남달리 책읽기를 좋아한 분이셨다.
  스님은 젊었을 때 독서광이라는 별칭을 들을 정도로 많은 책을 읽으셨다.
  그래서 그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다.
  한번은 청담 스님이 성철 스님을 찾아오셨다.
  “스님, 어떤 마을에  평생 동안 불교 서적을 연구하고 모은  처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가 죽을 
때가 되어서 그 책을  누군가에게 물려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처사는 죽어도  스님들에게는 그 
책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 책을 볼만한 스님이 없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스님은 청담 스님을 앞세우고 그 처사를 방문했다.
  “처사님, 불경책을 많이 소장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스님들에게는 절대로 
주지 않겠다고 하셨다면서요?
  처사는 성철 스님을 보고 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그렇습니다만...”
  그러자 성철 스님이 말했다.
  “난, 중이오. 그 책 날 주시오.”
  그 말을 듣고 처사는 그 많은 책을 흔쾌히 성철 스님께 기증했다.

  하루는 성철 스님께서 어떤 집에 귀중한 불경책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셨다.
  스님은 은밀히 청담 스님을 부르셨다.
  “가서 그 책을 가져오시오.”
  청담 스님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니, 저더러 책을 훔쳐오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성철 스님이 되레 큰소리를 치셨다.
  “내가 언제 책을 훔쳐오라고 했소! 모셔오라고 했지.”
  그 말을 듣고도 청담 스님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자,  성철 스님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셨
다.
  “옛말에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라고 했소. 생각을 해보시오. 한 사람의 서고에서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을 책이라  해야 옳은지, 여러 사람이 돌려보며 깨달음을 얻는  것을 책이라고 
해야 옳은지를...”
  그 말씀은 직접 듣지 못한 내 귀에도 지금껏 쟁쟁  울려오는 듯하다. 그토록 책읽기를 좋아하시
던 스님은 마음속에  얼마만큼의 책을 담아서 열반(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진리를 궁구
하며 생사를 초월해서 불생불멸의  법을 체득한 경지. 흔히 큰스님들이 돌아가신 것을 말한다.)하
셨을까.

  진순이의 죽음

  진도의 조그만 어촌에 한 어부가 백구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 이름은 진순이라 불렀다. 암놈인 진순이는 살 올라 보기가 좋았고, 매우 영리하여 주인을 잘 
따랐다. 주인이 볼일  보러 나가면 어김없이 동네 입구까지  따라나왔고, 주인이 돌아올 때쯤이면 
동네 앞 돌다리 입구까지 나와서 기다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겨울이었다. 살을 에는 몹시  추운 날 진순이는 다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그 모
습을 안쓰럽게 여긴 주인은 건넌방에 불을  지피고 추운 겨울 동안 정성껏 새끼들과 진순이를 보
살펴 주었다.
  봄이 되어 주인은 다시 고기잡이를 가기 위해 그물을 손질했다.  그리고 며칠이 걸릴지 모를 고
기잡이를 나가면서 주인은  진순이에게 집 잘 보고 있으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바다로 나갔
다.
  몇 날 며칠 후 어부가  돌아와서 보니 진순이는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주인이  바다로 고
기잡이를 나간 후 진순이는  밤마다 뒷동산에 올라 주인을 생각하는지 구슬피 울었다.  하도 이상
히 여긴 동네 사람들이 사연을 알아본즉 어부의 아낙이 동네 머슴과 바람난 것을 알게 되었다.
  어부는 아무 말 없이 진순이를 뒷동네 양지바른 곳에 정성껏  묻어 주었다. 그리고는 정처 없이 
방랑의 길을 떠났다.
  후일 동네에서는 아낙도 머슴도 행방을 알 수 없었고 밤마다 울어대는 진순이의 소리만 메아리
로 들을 수 있었다.
  흔히 개만도 못한 인간들이라고들 한다. 이 세상에는 명견 진돗개만도 못한, 인간의 탈을 쓴 자
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 주인을 영원히 섬기는 진돗개야말로 인간이 본받아야 할 지조와 절개가 아닐까.
  이 세상에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인간의 탈을 쓴 개가 얼마나 많은가.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산다. 그리고 누에는 뽕잎을 먹음으로써 아름다운 비단실을 만들어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가. 그래서 운명에  역행하는 자가 얼마나 많
은가.
  정의와 올바른 사회가 하루빨리 뿌리를 내릴 때 법이 없이도 살 수 있는 땅이 될 것이다.
  거짓말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성철  스님은 거짓말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셨다.
  세상이 어지럽고 어수선하다. 가슴이 답답하고 울적할 땐 훌쩍 길을  떠나 발길이 머문 곳이 산
촌이든 어촌이든 해질녁 석양을 바라보며 그곳의 누군가와 이야길  나누고 싶다. 이야기의 화제가 
그 누구의 이야기인들 어떠랴. 밤을 세워 세상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가끔 나의 속이야기도 들
려주면서.

  삼천배는 자기와의 싸움

  성철 스님은 사람을 만나는 데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계셨다.
  삼천배를 한 사람만 만난다는 것이 그것이다.
  스님께서는 삼천배를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라고 하셨다.
  삼천배를 하는 고통을 감당할 만큼의 신념과 의지가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만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셨다.
  그리고 스님은 삼천배를 하는 것을 부처님의 말씀에 가까이 하겠다는 굳은 맹세로 이해하셨다.
  그러나 개중에는 스님의 이런 점을 오해하여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삼천배를 하지 않으면 만나지 못한단 말이야?  차라리 안 만나고 말지.

  이렇게 말하며 불쾌한 표정을 짓고 돌아서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웬 낯선 사람이 큰스님을 찾아왔다. 그는 스님을 보자마자 넙죽 엎드려 절부터 하는 것이었다.
  이에 어리둥절해지신 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아니, 지금 뭐하는 거요?”
  그는 대단히 송구스럽다는 듯, 스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스님께서는 삼천배를 해야만 만나 주신다고 해서요.”
  그러자 스님은 껄껄 웃으며 말씀하셨다.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삼천배나 되는 절을  받겠소? 나한테 하라는 말이 아니라,  법당 
안에 계시는 부처님께 절하라는 말이오. 얼른 가서 하고 오시오.”
  스님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은 부끄러운 듯이 웃으며 법당  쪽으로 걸어갔다. 성철 스님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참이나 껄껄 웃으셨다.

  옥편 만수 스님

  성철 스님의 제자 가운데 만수 스님이란 분이 계셨다.
  만수 스님은 10년 동안이나 큰스님을 모셨는데, 이 스님도 굉장히 해박하셨다.
  모르는 한자가 거의 없어서 우리는 그 스님을 옥편 스님이라고 불렀다.
  만수 스님은 마음 씀씀이가 비단결처럼 고왔을 뿐 아니라,  아무리 궂은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항상 솔선수범하셨다.
  오랫동안 큰스님의 시자 생활을  해서 정이 깊은 탓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큰스님에  대한 만수 
스님의 보필은 대단한 것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절 근처 실개천에 독사 한 마리가 나타났다.
  우리는 모두 놀라 법석을 떠는데 어느새 만수 스님이 삽과 괭이를 들고 나타났다.
  “모두들 비켜서시오.”
  지켜보던 우리는 우르르 한쪽으로 비켜났다.
  나는 속으로 만수 스님이 뱀을 멀리 쫓으시려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스님은 그 독사의 머리를 댕강 쳐죽인 다음, 그것을 근처 산에 파묻었다.
  독사가 실개천에 나온 것도  놀라운데, 잔인하게 뱀을 죽인 만수 스님의 행동은  더 충격적이었
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절 근처에 뱀만 나타나면,  만수 스님은 무슨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뱀을 잡아죽인다는 거였다.
  참다 못해 어느 날 만수 스님께 여쭈어 보았다.
  “스님, 불가에서는 살생을 금하라고 했는데, 왜 뱀을 그토록 함부로 죽이십니까?”
  그러자 만수 스님은 말씀하셨다.
  “그래, 나도 죽이면  안 되는 줄 알아. 하지만 독사가  혹시 큰스님이라도 물면 어떻게 하겠느
냐? 게다가 독사가 한번  나타나면 사람들이 혼비백산을 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나라도 그것
을 처치해야지. 나는 나중에 벌받을 각오 하고 뱀을 죽이는 것이야.”
  만수 스님의 말을 듣고 나자, 그 깊은 뜻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과연 큰스님 곁에 머무르는 시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이 벌받는 것쯤은 감수하겠다는 만수 스님은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독사가 물을 마시면 그 물에 독을 토해 놓지만, 젖소가 물을 마시면  그 물로 우유를 만드는 법
이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가 젖소만 같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 후 나는 오랫동안 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김만 두고 가거라

  성철 스님께서 철망을 치고 공부하시던 파계사 성전암 시절이 공부에 대한 스님의 열정이 절정
에 달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 시절 스님은 잠도  주무시지 않고 밤새워 산등성이를 걸어다니다 오시는 일이  잦았다. 그렇
게 온밤을 지새고 내려오는 스님의 모습은 마치 나뭇가지에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 것마냥 스님
의 호랑이 눈썹에 서리가 하얗게 쌓여 환생한 도인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고 한다.
  그 무렵에는 친한  도반(함께 불도를 수행하는 벗으로,  도로써 사귄 동무라는 뜻)도,  스님들도 
만나지 않으셨다.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성철 스님의 절친한 도반이신 향곡 스님이 햇김을 가지고 성전암을 찾아왔다.
  “너 좋아하는 김 가지고 왔다.”
  그러자 스님이 문 안에서,
  “그 철조망에 김만 걸어 두고 가거라.”
  하셨다.
  그러나 그 말에 순순히 돌아가실 향곡 스님이 아니었다.
  향곡 스님이 다짜고짜 철조망을 넘어오려고 하자, 성철 스님은  넘어오지 못하도록 사정없이 쫓
아내셨다.
  성철 스님 못지 않게 힘도 세고 몸집이  우람한 향곡 스님이었던 만큼 두 분의 밀고 당김이 볼 
만 했을 것이다.
  생각해서 김을 가지고  왔는데 내침을 당하니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의절을 할 일대의 사건이었
다.
  그러나 향곡 스님 또한 성철 스님의 뜻을  알기에 별 도리없이 김만 걸어 두고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수도자의 겉과 속

  출가하여 수도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수도자를 우러러본다.
  또한 단아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으니 자연히 조금이라도 가까이하려 한다.
  그러나 솔직히 성철 스님의 첫인상을 결코 인자하다거나 온화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차갑
고 냉정하고, 때로는 면도날처럼 매섭게 보였다.
  내가 스님을 처음 만나 뵌 것은 스님께서 부산 범어사 동산 스님의 제사에 참석하시려고 일 년
에 한 번씩 외출을 하실 때였다.
  나는 처음 뵙는 스님의 모습에 경외심으로  공손히 인사를 했건만 본 체도 않고 시자들을 데리
고 그냥 스쳐지나가 버리셨다.
  그때 나는 속으로 무슨 스님이 저렇게 차갑고 냉정할까 생각했었다.
  훗날 내가 성철 스님의 시자가 되고 난 후에  그 일을 여쭤보았다. 그랬더니 스님은 웃으시며 `
수도자란 속은 따뜻해도 겉으로는 그렇게 냉정해야 된다`며 얘기를 하나 들려주셨다.

  옛날 황벽 스님이란 도인이 계셨다.
  외아들인 그는 스님이 되기  위하여 출가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일찍 남편을  사별하고 어려운 
살림을 꾸리느라 이 일 저 일 궂은일도 가리지 않고 하다가 그만  눈이 멀어 봉사가 되었다. 그러
나 출가하긴 했어도 아들이 하도 보고 싶어서 나루터 주막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루 종일 지나가는 나그네의 냄새나는  발을 정성 들여 씻겨 주는 일이었는데, 왜 하필  발 씻
기는 일이냐 하면,  그 이유인즉슨 아들인 황벽 스님의  오른쪽 발등에 어릴 때부터 콩알만한  큰 
사마귀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들을 만날 일념으로  오른쪽 발등에 사마귀 있는 나그네만 기다리고  기다리던 차에 어느 날 
석양 무렵 한 스님이 도착했다.
  그가 발을 씻겨 주는데 그가 한사코 오른쪽 발은 씻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아니, 왜 오른쪽 발은 아니 씻으려 하십니까?”하고 묻자, 그 스님은
  “오른쪽 발은 부스럼이 나서 물에 담글 수가 없습니다.”하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황벽 스님도 인간인질대 어찌 눈먼 어미의 애틋한 심경을 모르겠는가.
  스님은 그 주막에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나루터로 나가  다시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 
버렸다.
  그 모습을 죽 지켜본 주막 주인이,
  “아니, 조금 전에 지나간 스님이 노인이 찾고 있던 그 아들이 아니오?” 라고 했다.
  그때서야 어머니는 아들을 찾아 황급히 뛰어나갔다.
  그러나 눈먼 노인네에게 앞에 가로놓인 강물이 보일 리 만무하였다.
  어머니는 그만 강물에 빠져 돌아가셨고 그 소식을 들은 황벽 스님은,
  “내가 도를 이루지 못하면  불효 자식으로 어찌 저승에서 어머니를 뵐 수  있으리요. 부처께서 
말씀하시길 한 집안에 한 사람이 출가하여 수도자가 되면 삼족이 천상에서 태어난다고 했는데 만
일 그것이 거짓이라면 내 기필코 부처를 때려 죽이련다.”
  라고 했다 한다.

  남자는 일흔이 되어 봐야

  중노릇을 잘하고 못하고는 남자  나이 일흔이 되어 봐야 알고, 여자는 마흔을  넘어서야 비로소 
알 수 있다고 한다.
  혹시 젊은 스님이 열심히  수행한다고 해서, 그가 중노릇을 제대로 할 것이라  칭찬한다면 그것
은 너무 이르다는 말이다.
  그때가 언제인지 뚜렷이 기억은 할 수 없지만,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서울대 법대를 다니고 있다는 두 사람이 해인사로 찾아왔다.
  그들은 각각 3학년과 4학년이었는데, 불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스님이 되겠다는 거였다.
  큰스님은 그들의 뜻이 갸륵하다며 받아들이셨다.
  과연 그들은 명문대생답게 영리했고, 공부 또한 열심히 했다.
  큰스님께서는 그런 두 사람을 무척 대견하게 생각하고 흐뭇해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우연이 그들이 공부하는 책들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불경 옆에 다른 책들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깜짝 놀라 대체 무슨 책일까 하고 살펴보니 법률책과 법전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스님이 되겠다는 젊은이들이 몰래 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
다.
  만약 큰스님께서 아시면 큰일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잘 타일러, 그 일은 그렇게 넘어갔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성철 스님의 심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그들은 처음 해인사에 들어올  때부터 뭔가 어두운 구석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 딴마음
을 먹은 게 아닐까 해서 우리는 온 산을 뒤졌다.
  얼마 뒤 그들이 마을 어귀에서 버스를 타고 해인사를 떠나는 걸 봤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실을 큰스님께 알려 드렸더니 스님은 그제야 안심하셨다.
  어쩌면 그들은 지금쯤 판사가 되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떠난 그들이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 있다 하여도, 성철 스님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
을 것 같다.
  성철 스님은 그 이후 가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자는 일흔이 넘고 여자는 마흔이 넘어야, 비로소 중노릇을 하고  살 수 있을지 없을지 알게 
된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시자가 이렇게 여쭈었다.
  “그럼 스님은 아직 잘 모르시겠군요?”
  그러자 스님은 그 시자를 고요히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그래, 나도 아직 몰라.”

  견물생심인데

  성전암 시절이었다.
  그때 성철 스님을 자주 찾아오는 사람 중에 우리가 배 처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배 처사의 친척 중에는 이름만 대면 금방 알 만한 사람이 있을 만큼, 집안이 괜찮았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스님에게 난초 그림 한 점을 선물하고 갔다.
  스님은 그 그림을 스님이 기거하던 방에 걸어 두셨다.
  우리는 그저 그런 그림이겠거니 여기며,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루는 서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스님을 찾아왔다.
  그는 스님 방에 걸려 있던 난초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이것은 진짜 같은데요. 구한말 대원군이 그렸다는 난초 그림이 분명한데...”
  우리는 그 말을 듣고 그림을 다시 보게 되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돈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값진 물건이 분명했던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그러고 보니 예사 그림 같지가 않았다.
  이튿날, 스님 방에 걸려 잇던 그림이 보이질 않았다.
  그 비싼 그림이 하루 사이에 없어졌으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 그림이 없어졌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는 성철 스님께 여쭈어 보았다.
  “그 그림이 진짜라면 내 방에  있을 필요가 없지. 괜히 그림 때문에 도둑을 불러들여  여러 사
람 시끄럽게 할 필요 없지.”
  스님께서는 그렇게만 말씀하시고 입을 다무셨다.
  그리고 우리도 그 그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여쭙지 않았다.
  훗날 스님께서는 그 그림을 사업이  기운 주인에게 돌려주어서 요긴하게 쓰도록 하셨다는 소문
을 들었다.
  어쨌든 우리는 이 일로 성철 스님께 큰 깨우침을 얻게 되었다.
  남이 탐내는 좋은 물건을 가지고 있어서 괜한 재앙을 부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귀중한 물건이라 하여도 사람만큼 귀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스님의 경책

  성철 스님에 관한 기억 중에 몇 가지 유별난 것들이 있다.
  그 중 가장 생각나는 것이 경책이다.
  경책이란 불가의 용맹정진 기간 중, 이레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참선 수도할 때 `졸음을 쫓아 주
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수행자는 큰 방에서 면벽을 하고 빙 둘러앉아 화두를 생각한다.
  이때 하루 이틀 정도는 그런 대로 참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참으로 견디기가 어렵다.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면벽한  채로 버텨야 한다는 것은 보통의 인내력으로 상상하기 어
려운 일이다.
  수행자도 사람인지라 졸고 앉아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 수행자들이 번갈아  가면서 경책을 서기도 하는데,  경책을 서는 스님은 죽비라고  불리는 
긴 방망이로 졸고 있는 수행자의 잠을 쫓는다.
  가끔씩은 경책하는 사람들과  졸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날카로운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스님들의 경책 방법은 일반적으로 비슷했다.
  수행 중 졸고 있는 수행자를 발견하면, 그에게로 다가서서 어깨 위에 방망이를 올려놓는다.
  그러면 졸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졸았음을 시인하고, 졸음을 깨워 달라는 뜻으로 합장을 한다.
  그러면 경책하는 사람은 졸고 있던 수행자의 등을 죽비로 가볍게 두들겨 졸음을 쫓아 준다.
  이때 수행자는 졸음을 쫓아 주어 고맙다는 뜻으로, 경책하는 사람에게 다시 합장을 한다.
  그런데 큰스님의 경책 방법은 달랐다.
  졸고 앉아 있는 수행자를 발견하면 나무 방망이를 들고 가서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무조건 두
들겨 패는 것이었다.
  “이놈, 밥값도 못하고 졸기만 해!”
  성철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졸고 있던 수행자의 등을  후려쳤는데, 이때 방망이가 부러지
면, 다시 다른 방망이를 구해다가 두들겨 주었다.
  어떤 경우에는 두세 개를 한꺼번에 뭉쳐서 때릴 때도 있었다.
  이 때문에 성철 스님이 경책을 하는 일주일 동안은 참나무 방망이가 오륙십 개씩 필요했다.
  이때가 되면 목수는 목수대로 스님이 필요한 만큼 몽둥이를 장만하느라 애를 먹곤 했다.
  한마디로 성철 스님은 젊은 수좌 스님들에게는 호랑이 스님이셨다.
  이제 해인사 퇴설당의 그 호랑이 스님을 젊은 수좌 스님들은 언제 다시 만날 수나 있을는지.

  봉사 단청 구경

  도를 깨우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흔히 `봉사`와 `눈뜬 사람`에 비유한다.
  또 도를 깨우치지 못한 사람을 두고 `봉사 단청 읽기`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의 뜻은 제아무리 똑똑한 봉사에게 화려하게 장식된 단청을  설명한다 해도, 제 눈으로 직
접 본 것과 같을 수 없다는 뜻이다.
  어찌 단청의 그 현란한 아름다움을 설명만으로 짐작할 수 있겠는가.
  스님이 우리를 나무라실 때 `무명 속을 헤매는 미련한 곰새끼들`이라는 비유를 자주 쓰셨다.
  지금도 우리를 나무라시던 성철 스님의 그 칼칼한 목소리가 귀에 울리는 듯하다.
  “깨치면 맑은 하늘에 햇살과 같은 광명이요, 깨치지 못하면 평생  무명 속을 헤매다 가는 것이
야. 언제까지 봉사가 단청 구경하듯 어림잡아 살 것이냐?”
  그래서 그런 것일까.
  성철 스님께서 말년을 보내신 백련암에는 단청을 하지 않았다.
  스님은 단청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우리에게 무얼 깨닫게 하시려고 백련암에는 굳이 단청을 하지 않으셨을까.
  도한 성철 스님은  백련암에 `칠성탱화(불, 보살, 성현들의  초상을 그린 그림)나 `산신탱화` 등 
무속 신앙에 가까운 탱화를 두지 못하게 하셨다.
  스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수양하는 것 이외의 것은, 단 한  가지라도 용납하려 들지 않으셨던 것
이다.

  여자는 60세라도 안 돼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백련암은 가야산에 있는 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절의 조화인 더위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일찍부터 백련암은 기이한 바위들의 조화와 앞이 탁 트인 전망으로 가야산 제일의 경승지로 손
꼽히는 곳이다. 암자의 양옆으로는 용각대, 절상대, 환적대,  신선대 등의 기암들이 호위하고 있고, 
백련암 뜰에는 한덩어리로 된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부처님의 얼굴 같다고 하여 
불면석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더군다나 이곳에 성철 스님께서 머물고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부터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
려는 사람들 때문에 이만 저만 골치를 앓는 것이 아니었다.
  오후의 햇볕이 한창 뜨거울 때, 한 젊은 스님이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왔다.
  오르막길인 백련암은 서늘한 날씨에도 한번  올라온다는 것이 큰마음을 먹지 않고는 어려운 일
이었다.
  그런데 이 젊은 스님은 혼자가 아니었다. 젊고 예쁘게 생긴 아가씨를 대동하고 온 것이었다.
  그것이 스님의 눈에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웬 젊은 가시나냐?”
  스님께서 물으시자, 그 젊은 스님이
  “예, 스님 친견하러 왔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성철 스님께서,
  “그러면 삼천배를 해야지.” 하셨다.
  그러자 두 사람이 당황하며 머뭇거렸다. 그 모양을 본 스님께서,
  “절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지.” 하고  돌아서자, 그 젊은 스님이 갑자기 엉뚱한 말을 둘러대는 
것이었다.
  “스님, 보통 때는 백련암까지 걸어서 올라오기가 상당히 힘들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여기 있는 
이 젊은 아가씨 보살과 올라와서 그런지 훨씬 힘이 안 드는 것 같은데요.”
  그 젊은 스님 딴에는 돌아서는  성철 스님을 어떻게든 붙잡아야겠다는 조바심에서 엉겁결에 그
런 말을 한 것 같았으나,  그 소리를 들으신 성철 스님께서는 두 눈을 호랑이처럼  부릅뜨며 대갈
일성을 내지르셨다.
  “뭣이 어째, 이놈! 여자가 그렇게 좋으면 당장 내려가 살어!”
  스님 앞에서 당돌한 말을 한 그 젊은 스님은 혼꾸멍이 나고는 쫓기듯이 내려갔다.
  후에도 스님께서는 그 젊은 스님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두고두고 괘씸한 놈이라고 하시면서 다
음과 같은 경계를 주셨다.
  “수행자는 60이 넘은 여자라도 여자와 함께 다니는 것은 금해야  해. 그런 일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니까 너희들 스스로가 항상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야.”

  종신불퇴

  `종신불퇴`란 글씨를 스님께 받았다.
  이 몸이 끝날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말이다.
  정말 서슬이 시퍼런 말이 아닐 수 없다.
  해인사 일주문 뒤에는 `불이문`이란 글씨가 있다.
  두 번 다시 들고 나지 않는 곳이란 말이다.
  한번 들어오면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다시는 문 밖을 나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두말을 돌이켜 보면 자다가도 정신이 번쩍 든다.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우며, 그 중에서도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를 귀 에 더께가 앉도록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수시로 잊고 살아가는 게 이내 생활이기 
때문이다.
  불가에 맹귀우목이란 말이 있다.
  삼천 년을 바다 속에서 잠자던 눈먼  거북이가 바다 위로 올라와서는 정처 없이 떠다니는 나무
토막을 우연히 만나는 것과  같은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가  그렇게 어려움
을 일컫는 말이다.

  스님께서는 기어코 그 종신불퇴를 이루시어 세인들의 가슴속에 큰  빛을 던지고 가셨건만, 남아 
있는 나는 끝내 종신불퇴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지금도 이 종신불퇴란  글귀만 보면 언제나 큰 죄
를 지은 기분이다.

  일체 유심조

  성철 스님께서 봉암사에 계실 때였다.
  스님이 산에 나무를 하러 올라가셨다가, 옻나무에서 옻이 올라 몇  날 며칠을 고생하신 적이 있
었다.
  가려움을 참다 못한 스님이 하루는 근처 계곡으로 가서 웃옷을 벗고 몸을 씻고 계셨다.
  때마침 근처 암자에 살고 계시던 비구니 스님이 그곳을 지나다가  성철 스님을 보게 되엇다. 비
구니 스님은 몸을 씻고 계시던 성철 스님에게 한말씀 하셨다.
  “큰스님이 그까짓 옻  좀 오른 것 가지고  웬 호들갑이시유. 일체가 유심조(일체의  제법은 그 
본성으로 말하면 성의  표현이고, 심성만이 일체의 근원이라  하여 일체의 사물은 모두  심적으로 
변현한 것이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는  뜻이다.)라 했거늘, 그것 하나 
마음으로 다스리지 못하신단 말이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성철 스님은 그 비구니 스님에게로 달려 올라왔다.  그리고는 다짜
고짜로 비구니 스님을 근처 옻나무 숲으로 끌고 가며 말했다.
  “뭐라고? 이 빌어먹을 년, 어디 한번 당해 봐라.”
  성철 스님은 옻나무 가지를 그  비구니 스님의 몸 이곳 저곳에다 문질렀다. 그 이후  비구니 스
님도 옻이 올라 몇 날 며칠을 고생했다.
  얼마 뒤 겨우 옻 오른 것이 나은 비구니 스님이 성철 스님을 찾아와 크게 사죄를 드렸다.
  그러자 성철 스님이 말씀하셨다.
  “일체가 유심조라고 하더니, 너는 왜 옻이 올랐노?”
  이 일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성철 스님은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고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비웃는  나쁜 버릇을 
고쳐 주신 것이다.

  썩은 당근

  도인의 마음은 넓기로 말하면 허공 같고, 좁기로 말하면 바늘구멍과도 같다?!

  내가 성철 스님 시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음식을 장만하다가 당근 뿌리가 썩은 것 같기에 무심코 쓰레기통에 버린 일이 있었다.
  스님께서 지나시다가 쓰레기통을 보고는 호통을 치셨다.
  “이 당근 누가 버렸어?”
  당황한 나는 엉겁결에,
  “썩은 것 같아서 버렸는데요.” 하였다.
  그러자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였다.
  “이 녀석아, 저  당근은 너의 것이 아니라 신도들의 것이여.  밥알 하나가 버려지면 그 밥알이 
다 썩어 흙이 될 때까지 불보살(부처와  보살)이 합장하고 있는 것이여. 당장 썩은 부분만 도려내
고 나머지는 찬으로 쓰도록 해!”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건 분명 푸들푸들하고 꺼무죽죽하게 썩은 당근이었다.
  나는 그만,
  “당근 뿌리 썩은 것 하나 버렸는데 무얼 그리 야단이십니까?” 라고 한마디 대꾸하고 말았다.
  큰스님이 당근 뿌리 하나 가지고 쩨쩨하게 그러시나 하고 말이다.
  그러자 큰스님은 불같이 화를 내셨다.
  “석은 배춧잎 하나도 이리저리 발겨서 쓰는게 불가의 법도인 줄 안즉 몰랐더냐?”
  행자(아직 스님이 되지 않고 절에 있으면서 여러 소임  밑에서 일을 돕는 사람, 또는 여러 성지
를 돌아다니면서 참배하는 사람) 시절에  귀에 목이 박히도록 익히고 익힌 것이었건만 어느새 잊
고 마는 것이 나였다.
  스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만 조아리고 있는 내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시고는 누더기 가사
(승려가 있는 법의)를 접으며 부엌 모퉁이를 돌아가셨다.
  “도인의 마음은 넓기로 하면 허공과  같지만, 좁기로 하면 바늘 하나 꽂을 틈도 없는  것이 도
인의 마음이야.”

  상좌에게 온 사랑의 편지

  큰스님 밑에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스님이 된 사람이 한 분 있었는데 큰스님께서 무척이나 
아끼신 걸로 기억된다.
  스님께서는 그를 수행 비서로 항상 데리고 다니셨다.
  백련암에 오는 우편물은 그 젊은 스님이 매일 수거하여 오곤 했는데 어느 날 그 스님이 며칠간 
외출을 하고 없을 때, 내가 그 일을 대신 맡아 했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받아온 우편물들을 시자  방 책상 위에 올려 두었는데 스님께서 갑자기 들
어오셨다. 스님께서는 책상 위에 있는 우편물들을 이리저리 들춰 보시더니  그 중 그 젊은 스님에
게 온 편지 한 통을 들어 유심히 보셨다.
  그러더니 아무 말씀도 없이 스님 방으로 가져가시는 것이었다.
  한참 후에 편지를 다시 가져오셨는데 봉함이 뜯긴 채로 였다.
  “이 편지, 다시 잘 붙여 두었다가 본인에게 전하여라.”
  나는 표시 안 나게 봉함을 하면서도 왜 젊은 스님 편지를 큰스님이 보셨을까 하고 궁금하게 여
겼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그 편지는 젊은 스님이 대학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여자 친구가 
계속해서 보내 오는 깊은 사연의 편지였다는 것이다.
  얼마 안 있어 젊은  스님은 영장이 나와서 군에 입대했는데 그  후 다시는 절로 돌아오지 않았
다.
  들은 뒷소식이었지만 열심히 편지를 보내 온 그 여인과 결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만일 큰스님께서 그때 그 편지를 보시고 호되게 야단을 치셨다면 그 스님의 인생이 달라졌을지
도 모르겠다.
  그러나 스님은 일이 이미 그렇게 될 줄 알고 계셨던 것이 분명했다.
  `가는 사람 붙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불가의 묵계처럼 그렇게 떠나  보내신 것이
다.
  지금도 큰스님께서 편지를 보시고 잘 붙여 두라고 하셨던 때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너는 안 되겠다 

  서예가 한 분이 있었다.
  내가 알기로 그분은 성철 스님 밑에서 스님이 되려고 여러 번 시도했던 사람이다.
  서예가였던 그는 국전 입선 경력은 여러번  있어도 큰 상의 운은 많지 않아서인지 심혈을 기울
인 역작을 내어도 번번히 입선에  머물고 말았다. 그런 일이 여러 번 계속되자 자신의  실력과 상
에 대한 회의가 왔던가 보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쓴 글씨나  병풍을 지고 스님을 찾아오곤 했는데, 결혼 후 세  번이나 머리를 
깎고 스님 밑에서 시자 생활을 했었다.
  마지막 세번째는 부인이 직접 남편을 찾아 백련암 골자기까지 왔다.
  혼자 올라오기도 어려운 길을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왔는데 하나는  등에 업고, 하나는 안고 찾
아와서는 마루에 걸터얹아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신 큰스님께서는 마음이 흔들리신 것 같았다.
  서예가의 성이 이씨였는데 우리에게,
  “가서 이가를 찾아와.” 하고 말씀하셨다.
  산으로 도망갔던 그 사람을 찾아왔더니 성철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니는 안 되겠다. 마누라  데리고 내려가거라. 추사가 상 받은 일 없고, 한석봉이  대통령상 안 
받았어도 유명하잖냐. 훗날 세상에 남을 훌륭한 예술인이 되면 그만이야.” 하시고는 돌아서셨다.
  스님의 말씀에 눈물을  뿌리던 그 서예가는 스님의 가르침에 힘입어  마침내 뜻을 이룬 것으로 
안다.

  맏상좌 천제 스님

  스님이 아끼시던 제자 중에 제일 먼저 스님의 상좌가 된 분이 `천제 스님`이다.
  상좌라는 말에 단순히  불도를 수행하는 행자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큰스님의 대를  이을 
제자 가운데 가장 윗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인자한 그 스님을 보면 나는 가끔 큰스님과 천제 스님을 비교하게 된다.
  큰스님은 칼날같이 매섭고  날카롭게 보인다. 그러나 천제 스님은 큰스님께  단련이 되어서인지 
빈틈은 없지만 부드럽고 인자하게 느껴진다.
  천제 스님은 업무상 운전을 배워 차를 타고 일을 보신곤 했다.
  큰스님이 그것을 아시고는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다.
  큰스님은 천제 스님을 훌륭하게 키워 스님의 수제자로 삼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큰스님은 천제 스님을 볼 때마다,
  “뭐하러 차를 타고 다녀. 그 위험한 것을.” 하며 핀잔을 주곤 하셨다.
  큰스님의 말씀에도 천제 스님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그대로 차를 타고 다녔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그 걱정을 우리들에게까지 늘어놓으셨다.
  “네가 그 차 열쇠를 뺏어 오너라.”  “차를 아예 부숴 버려라.” “가만히 있으면 더 좋은 일
이 있을 텐데.”라고 무척이나 아쉬워하시며.

  사실 천제 스님은 성철 스님의 손발이나 다름없었다.
  당시만 해도 천제 스님 없는 성철 스님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스님과 맏상좌
의 사이는 각별했었다. 또 그만큼 천제 스님이 큰스님의 뜻을 잘 받들고 잘 모신 것으로 안다.
  뒷날 천제 스님은 종정 스님의 비서실장으로 스님을 보필했다.
  천제 스님은 그 일을 두고 `이 자리는 내 뜻 이전에 성철 스님을 위한 자리이기에 내가 이곳을 
지키고 있는 거시다.`라고 하셨다.
  아무튼 두 분의 사이는 누가 봐도 부러운, 신뢰와 사랑이  오고 가는 스승과 제자였음에 틀림이 
없었다.

  상좌인지 깻묵덩어리인지

  성철 스님은 상좌 두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절에서는 간혹 스님이 되기  위하여 절에 입산하여 행자 수행을 하는  중에 벌써 너는 내 상좌
니, 너는 누구 제자니 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상좌 쟁탈전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모두가 부처님의 법을 배우러 오는 자일진대, 모두가 부처님의 제자일 뿐이지, 특정한 누구누구 
개인의 제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절집도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인지라 은연중에 문중이 생기고 파벌이 생기고,  네가 옳으
니 내가 옳으니 시비가 생기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행자들은 스님께 제자 되기를 간청했고 스님은  그때마다 `상좌, 필요 
없다`를 고수하셨다.
  그러나 결국은 십 년 가까이 스님의 제자 되기를 고집한 천제 스님이 그 첫째 상좌가 되었다.
  말이 십 년이지 정식 스님이 되는 계를 받지 않고 십년 동안 행자 생활을 한다는 것도 쉬운 일
이 아니었다.
  그 후로 스님은 여러 제자를 두시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한탄조로 이런 말씀을 하시곤 하였다.
  “상좌인지 깻묵덩이인지 하나가 더 생기면 지옥이 하나 더 생기는 법이여.”
  큰스님은 그렇게 가르치는 자의 어려움을 경계하셨던 것이다.
  “어린 상좌를 잘못 지도하여  그가 사리사욕에 흘러들게 되면 그 죄가 스승에게  있는 법이야. 
상좌 잘못 가르친 죄로 살아서는 스승을 욕되게 하고, 죽어서는  스승이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란 
말이지.”

  스님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신 것은 `너희들 상좌 노릇 똑바로 하라`는 뜻이었음을 안다.
  상좌 노릇 똑바로 못하면 스승이 지옥에 떨어진다는데, 스님의  상좌 노릇을 똑바로는 고사하고 
끝까지도 못하고 나온 이내 몸의 허물을 어찌 갚을까 싶다.
  비록 세간으로 다시 나온 몸이지만 사는 동안만이라도 똑바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새삼스럽게 
다지는 요즘이다.

  곰새끼들

  성철 스님은 우리를 두고 늘쌍 `아이구, 곰새끼들...`이라고 하셨다.
  대개 행동이 굼뜨거나 머리가 아둔한 사람을 일컬어 `곰`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우리는 스님
의 그 말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스님이 우리를 꼭 하대해서  하신 말씀일 리가 없다는 믿음이 있었고, 설혹  그렇게 생각하신다
고 해도 그것은 우리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간혹 그 소리가 스님의 정이 듬뿍 담긴 애칭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루는 스님을 가까이서 모시는 시자에게 성철 스님이 평소처럼 `아이구, 곰새끼...`라고 했다.
  이에 그 스님은 말대꾸를  했다. 그날따라 그 소리가 시자에게는 영 불쾌하게만  들렸던 모양이
다.
  “스님, 스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자꾸  곰새끼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곰새끼면 스님은 서커스 단
장이십니까?”
  그 말에 성철 스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스님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셨다.
  성철 스님이 어린 시자에게 한 방 맞으셨나 보다 생각하며, 나는 잠자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성철 스님이 아무 말씀 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그 스님은 재차 물었다.
  “그게 아니면 스님께서는 어른 곰이십니까?”
  그제야 성철 스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못난 곰이야.”
  스님의 말씀을 들은 어린 시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스님이 말씀하신 뜻을 깨달은 것일까.
  그런데 정말 미련스럽게도 나는 아직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성철 스님에게는 정말로 어린 우리들이 미련한 곰새끼처럼만 보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야말로 정말 스님이 말씀하신 `미련한 곰새끼`인지도 모르겠다.

  향로 발로 차

  불가에서는 덕이 높은 스님들을 선지식(부처님이 말씀하신 교법을 말하며 다른 이로 하여금 고
통 세계를 벗어나 이상경에 이르게 하는 이)이라 해서 그분들께 가르침을 받는다.
  선지식도인 스님들은 때때로 공부하는 젊은 스님들을 몽둥이로 때리기도  하고, 고함을 쳐서 정
신을 차리게도 하고, 공부가 정도가 아닌 사잇길로 흘러가면 바로잡아 주기도 한다.
  한번은 수십 리 밖에서 한 스님인 선승(참선하는 스님)으로 이름난 성철 스님을 찾아왔다.
  그 스님은 다짜고짜로 향로와 촛대롤 들고  성철 스님 방으로 들어서더니 성철 스님 앞에 촛불
과 향을 피우고는 삼배를 올렸다.
  “나, 이제 도통했으니 인가를 해주시오.”
  선가(참선하는 집)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수하고 제자가 그 법을  얻어 깨달은 것을 증명
하는 것을 인가라고 한다.
  그러나 세번째 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철 스님은 발길로 앞에 있는 향로를 냅다 걷어찼다.
  향로의 재를 머리에 흠뻑 뒤집어쓴 젊은 스님은 그때서야 제정신이 들었다고 한다.
  그 스님 같은 경우는 조용한 말로,
  “너, 아직 공부가 덜 되었다.” 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같은 일은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했다.

  한번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 엄동설한이었다.
  그때도 역시 어느 젊은 스님 한 분이 성철 스님 방 앞마당에서 합장을 하고 몇 시간을 서 있었
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사정없이  젊은 스님의 가슴을 쥐어박았고, 영하의 기온 속에  꽁꽁 얼어붙
어 있던 젊은 스님은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세인들이 보기에는 너무  가혹하다 싶기도 하겠지만, 섣부르게  알아 가지고 흉내나 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신 스님의 곧은 성정이 가져온 스님 나름의 교화 방법이었다.

  해인사의 키 작은 도인 지월 스님

  성철 스님과 친하게 지내시던 지월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지월 스님은 키가 자그마한  분이셨는데, 그 얼굴에는 항상 관세음보살 같은 온화한  미소가 어
리어 있었다.
  두 분은 외양상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도 지내시는  모습을 뵈면 그보다 다정한 
모습을 없을 것 같았다.
  두 분은 나들이도 함께 자주 하신  편인데 봄이 되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인사 홍류동 계곡으
로 벚꽃 구경을 가곤 하셨다.
  그러던 지월 스님께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몇 달을 자리에 누워 계시게 되었다.
  어느 날 성철 스님께서 갑자기 나를 불러서 스님 병문안을 가자고 하셨다.
  두 분은 관음전 옆에 있는, 자그마한 지월 스님의 방에서 마주하셨다.
  그런데 그 때 두 분이 나누신 대화는 나로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선문답이었다.
  성철 스님께서,
  “성성합니까?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잘 되지요?” 하시자, 지월 스님은,
  “네.”
  보통 사람 같으면 병문안을 갔으니  식사는 좀 드십니까, 어디가 어떻게 편찮으십니까, 빨리 나
으셔야죠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분의 대화는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두 분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어떤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것
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성철 스님은
  “화두만 끊어지지 않고 잘 되면 됐심다.” 하시고는 지월 스님의 방을 나왔다.
  그리고 그날 밤, 지월 스님은 열반에 드셨다.
  지월 스님이 그날 입적하실 것을 성철 스님은 미리 아시고 문안을 드린 것일까?

  두 전라도 도인

  성철 스님께선 가끔 전라도에서 태어나신 송만공 스님과 백용성 스님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성철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가만히 스님의 젊은 시절을 상상해 보곤 했다.
  아마도 스님이 젊어서는  당돌하게 큰스님들에게 말대답도 하시고, 어떤 경우는  시시비비를 가
리기 위하여 대들기까지 하셨던 것 같다.
  하긴 사리를 분명히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철 스님의 성격을 보면 그럴 만도 했다.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짖궂은 장난도 가끔 치셨던 것 같다.
  아무튼 성철 스님께서 말씀하시던 백용성 스님은 민족 대표인 33인  중의 한 분이실 뿐 아니라, 
절집으로는 스님의 할아버지뻘이 되는 분이셨다.
  그런데 하루는 성철 스님이 스님 특유의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전라도 출신의 스님인 그 백용성 
스님을 찾아가셨다.
  스님은 백용성 스님에게 전라도 사람들은 다 나쁘다고 흉을 실컷 보았다.
  그러자 잠자코 성철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노스님이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큰스님들은 전라도에서 많이 태어나셨어.”
  성철 스님도 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노스님의 말에 반박했다.
  스님은 자신이 알고 있던 큰스님들의 법명을 하나하나 들어가며 따지듯이 물었다.
  “해월 스님이 전라도입니까, 수월 스님이 전라도입니까, 사명 스님이 전라도입니까?”
  이에 용성 스님도 질세라, 누구도 전라도, 누구도 전라도,  그리고 나도 전라도이지 하며 웃으셨
다고 한다.
  성철 스님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만공 스님을 찾아갔다.
  가서는 또 전라도 사람들은 나쁘다고 흉을 보았다.
  그러자 만공 스님은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네 말이  맞어. 내 스승이시던 스님도  전라도 출신이셨다. 그 스님이  하루는 시장에서 
명주 수건을 사오셨단다. 그런데  시장에서 10원 주고 사오신 것을 내게는 20원이나  주고 팔았다
구.”
  그 말을 듣고 성철 스님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만공 스님이 되레 전라도 욕을  하자, 성철 스님은 그 앞에서 더 이상 욕을 하실 수  없었던 것
이다.

  “당대의 두 큰스님의 성격이 이렇게 달랐어.”
  성철 스님은 이야기를 마치신 뒤, 이렇게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깨달음을 주는 방법이 스님들의 성향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게 되었다.

  큰스님과 작은스님

  성철 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어린아이를 잘 받들어야  하고, 어린 중을 잘 모셔야 하고,  작은 불씨를 조심히 다루어야 한
다.”
  사실 절에 오는 신도들 중에는 기를 쓰고 큰스님만 찾는  분들이 있다. 작은스님은 그들의 안중
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작은스님이 나중에 큰스님이 된다는 평범한 이치를 모르는 것 같다.
  어떤 신도들은 집에서 밥이  끓는지 죽이 끓는지, 아이들이 때가 되어서 집에  들어왔는지 길거
리를 헤매는지, 남편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신경도 안 쓰고, 정신 없이 절에만 쫓아
다니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성철 스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짜 부처는 집에 있는 남편이야. 남편을 잘 받들어야 집안이 잘되는 법이야.”
  성철 스님은 주변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성불할 수 
있다고 하셨다.
  또한 스님께서는 이런 말도 잊지 않고 덧붙이셨다.
  “태조 이성계가 무학 대사를 보고, 대사는 꼭 도둑처럼 생겼다고 말을 했더란다. 그러나 이 말
을 듣고도 무학 대사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임금님은 꼭 부처님같이 생겼소  라고 응수
했다는 거지. 이에 의아해진 이성계가 나는 그렇게 나쁜 말을  했거늘 어찌 대사는 나를 부처님에 
비유한단 말이오 하고 물었단다. 그러자 무학 대사는, 부처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고, 도둑의 눈
에는 도둑놈만 보이는 법이지요 했더란다. 이 말이 무슨 뜻인 줄 알겠느냐?  모든 일은 마음에 달
려 있다는 뜻이야. 절집을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큰스님만 만난다고 공덕이 쌓이는 게 아니야. 다 
부질없는 짓이지. 모든 것은 자기의 마음에 달린 것이야.”
  나는 그때 성철 스님 앞에 합장을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내심 큰스님만 찾는 신도들에게 불평한 것이 부끄러웠다.
  신도들이 큰스님을 찾건 작은스님을 찾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성불하는 것은 모두 다 
내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을...
  우리 모두 부처님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자.
  그러면 세상엔 부처님만 살고 있을 것이니...

  아이를 좋아해

  정월 초하루가 되면 동네 암자에서 지내고 있던 아이들이 성철 스님께 세배하러 왔다.
  스님은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셨기 때문에, 시자에게 새 돈을 준비하라고 이르신 다음, 아이들에
게 빳빳한 세뱃돈을 주셨다.
  한번은 개구쟁이 꼬마 녀석이 성철 스님께 세배를 하겠다며 찾아왔다.
  스님은 꼬마의 세배를 받으셨다.
  그 꼬마는 스님께 세배를 할 때도 장난스럽게 웃으셨다.
  그러나 스님은 그것이 귀여우셨는지 꼬마를 무릎에 앉히고 쓰다듬어 주셨다.
  이때 개구쟁이 꼬마 녀석이 스님의 귀에다 대고 고함을 질러 버렸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성철 스님의 고막에 이상이 생겨서, 우리들이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스님도 꽤나 놀라신 모양이었다.
  스님께서는 결국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되셨다.
  스님은 일이 그 지경까지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어허, 참 하시며 껄껄 웃으실 뿐이었다.
  스님이 아이들을 좋아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으셨던 것이다.

  고놈, 귀여워했더니

  스님이 큰절에 계실 때 이야기다.
  그 절에 갑주라는 똘똘하게 생긴 동자승이 하나 있었다. 동자승은 꽤나 영리했다.
  어떤 인연으로 어린아이가 스님이 되겠다고 절집에 들어왔는지는 모르겠다.
  나이로 보자면 한창 부모님 품에서 재롱이나 부릴 그런 나이인데 말이다.
  그런 꼬마가 성불해서 부처가  되겠다니, 어떻게 보면 대견하고 또 어떻게 보면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그 꼬마 동자승은 큰스님의 말동무였다.
  속세의 인연으로 치자면 할아버지와 손자뻘이 되는 스님과 동자승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는 다
정한 친구 같았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꼬마는 얼마 후 다른 스님에게 수계를 하고 스님이 되었다.
  우리는 당연히 성철 스님에게 계를 받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 의아스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동자승 이야기를 하셨다.
  “손자를 너무 귀여워하면 할애비 수염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니야. 하루는 내
가 방에 누워 잠시 쉬고 있는데, 아 고 맹랑한 놈이 슬그머니 내 옆으로 와서 눕더니, 내 팔을 빼
서 자기 팔베개를 하더란 말이야. 버릇없는 놈 같으니라고...”
  그러나 나는 그때 그것이, 스님이 그냥 하시는 말씀이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에게 특별한 정을 주어서 인연을 만들지  않으려는 스님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었기 때
문이다.
  그것은 불가에서 금하는 일이었다.
  만약 그 동자승이 성철 스님에게 수계까지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큰스님의 막강한 후광을  입은 것으로 생각하고, 자칫  방만해져서 도를 깨우치는 일에  게으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성철 스님의 큰 뜻에 지금도 머리를 조아린다.
  그리고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본다.
  해인사 방장 스님 방에서 큰스님과 꼬마 동자승이 함께 뒹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
누는 모습을...

  포대 화상

  이미 세간에도 널리  알려진 바이지만 스님은 무소유를 철저하게 실천하신  분이셨다. 불필요한 
일체의 것을 마다하셨던 스님의 방에는 귀퉁이에 놓인 책상이 세간의 전부였다.
  스님의 책상 위로는  향로 하나와 어린아이 한 뼘 정도  크기의 작은 포대 화상(본래 아사리와 
함께 수계사인 스님을 말한 것이나, 후세에는 덕이 높은 스님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조각품이 
하나 있었다. 밑으로 축 늘어진  배에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작고 뚱뚱한 모습의  그것은 스님이 
즐겨 보시는 유일한 조각품이었다.
  미륵불(미륵보살. 도솔천에 살며 56억 7척만 년 후에  성불하여 이 세상에 내려와 제2의 석가로
서 모든 중생을 권도한다는 보살.)의 화신이라고 하는 포대 화상은 당나라 시대 명주 봉화현 사람
으로 법명이 계차였다.
  그는 뚱뚱한 몸집에  누더기를 걸치고 항상 커다란 자루를 둘러메고  다니며 아무 데서나 눕고 
자고 하였다.
  거리를 다니면서 무엇이든 보기만  하면 달라고 하여 자기가 메고 있는 자루  속에 집어넣었다. 
또한, 먹을 것을 주면 조금씩  나누어 그 자루에 집어넣곤 하였으므로 그의 자루 속에는  없는 것
이 없었다.
  그는 자루 속에 있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나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아낌없이 나눠
주었으므로 그의 뒤에는 늘 꼬마들이 길게 줄을 지어 따라다녔다.
  말하자면 불교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인 셈인데, 사람들은 그가 포대를 지고 다닌다고 하여 `포
대 화상`이란 별호를 불렀다.
  그는 또한 사람들의 길흉화복이나 날씨 등을 미리 말하곤 했는데 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
  아무리 궂은 날이라도 그가 짚신을 신고 나오면 날씨가 개고  해가 났으며, 아무리 청명한 날이
라도 그가 나막신을 신고 나오면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영락없이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가 반석에 단정히 앉아서 입적(입멸, 시적. 승려의 죽음을 경칭.)할 때 읊은 게송(외우기 쉽게 
게구로 지어 부처의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 또한 미륵불의 화신이라는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데 손색이 없다.

  천백억으로 몸을 나누어도
  그 하나하나가 참 미륵일세
  항상 세인에게 나누어 보이건만
  아무도 미륵임을 아는 이 없네

  성철 스님의 시자(장로를 곁에서 친히 모시면서  그 시중을 도는 소임을 맡은 자.) 노릇을 하던 
나는 스님의 방에  들를 때마다 앉은뱅이책상에 덩그마니 놓여 있는  포대 화상의 초라한 모습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대구에  나가는 길에 좌대를 하나 사가지고 와서 그 위에  포대 화상
을 올려놓았다.
  그것을 본 스님께서는 한편으로는 흐뭇해하시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포대 스님은 그런 높은 곳을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사람은  그릇이 클수록 높은 곳보다는 낮
은 곳을 취하는 법이지. 사람은 물을 닮아야 돼. 물은 아무리 높은 곳에 놓아도 낮은 곳으로 내려
오지, 높은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법은 없거든.”
  스님의 말씀 이후  한동안 나는 물을 화두(종장의  말에서 이루어진, 참선자가 연구해야  할 문
제.)로 삼고 정진(세속의 인연을 끊고 구도에 힘씀.)하기도 했지만, 스님이 가신 지금껏, 자기 몸을 
낮추면서도 바다 가장 깊은 곳까지 이르는 물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가고 있는 형편이다.

  환적 스님 영정

  성철 스님이 계시던 백련암은 훌륭한 스님이 많이 수도하신 곳으로 유명하다.
  그 중에 환적 스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그 분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환적 스님은 호랑이를 타고 다니셨다.
  환적 스님께서 양식을  구하러 절을 내려가셨을 때였다.  데리고 있던 동자승이 저녁때가  되자 
스님을 위하여 저녁 찬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손가락을 베어서 피가  나자 환적 스님이 데리고 다니던 호랑이 입에다 가
져다 대었는데, 호랑이가 피를 핥아 보더니 그 맛이 괜찮았던 모양이었다.
  호랑이는 그만 그 자리에서 동자승을 잡아먹어 버렸다.
  호랑이는 얼결에 동자승을 잡아먹었지만 일을 저질로 놓고 보니 후회가 되기도 하고 환적 스님 
뵐 면목이 없었다.
  궁리 끝에 호랑이는 일찌감치 마을 입구까지 환적 스님을 마중 가서 사실을 말씀드리고 잘못을 
용서해 주실 적을 간청했다.
  그러나 스님은 그 자리에서 호랑이를 호되게 야단치시고 멀리 쫓아내 버렸다.
  그 후로 가야산에는 호랑이가 사람을 해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만 그런 환적 스님의 영정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동짓날, 팥죽을 쑤어서  부처님과 각 영정에 공양(음식, 옷 따위를  삼보, 즉 부모, 스승, 
죽은 이에게 공급하여 자양하는 것)을  올리러 갔다가 예리한 면도칼로 도려낸 자국을 발견한 것
이다.
  깜짝 놀라 성철 스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스님의 상심이 대단하셨다. 꼭  찾도록 하라는 
스님의 분부에 파촐소에 신고를  하는 한편, 도난당한 미술품이 유출될 수 있는  경로를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환적 스님의 영정 찾는 일을 거의  포기하고 있을 즈음에 진주에 있는 모 고등학교 박물관에서 
환적 스님의 영정을 발견했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는 한달음에 달려가  교장 선생님께 그간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다시 모셔가도록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비싸게 산 물건이지만 백련암에서 제자리를 찾는 것이 훨씬 빛날 것이라면서.
  그 후 환적 스님의 영정은 다시 표구를 하여 백련암으로  되돌아와 자리를 지키게 되었고, 스님
은 그것을 보실 때마다 무척 흐뭇해하셨다.

  성당 법문은 녹음기와 함께

  스님들은 일정한 기간 동안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한데 모여 수행을 하는데 그 같은 일을 안
거라고 한다.
  안거에는 여름에 하는 하안거와 겨울에 하는 동안거가 있는데,  안거가 시작되는 첫날에 행하는 
의식을 결제라 하고 마지막 날에 행하는 의식을 해제라 한다.

  성철 스님의 결제와 해제 때, 그리고 법당에서  설법하시는 상당 법회(선종의 장로나 주지가 법
당 강단에 올라가 설법하는 것.) 때에는 해인사  대적광전 그 넓은 곳이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메
워진다.
  몇백 명의 대중이 성철 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모여들곤 했으나, 스님의 법문(부처님의 교
법은 중생으로 하여금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이상경인 열반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부
름.) 내용은 무척 난해하였으니 그 수많은 사람 중에 몇 사람이나 스님의 법문을 제대로 이해했을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설법 도중 스님께  의문을 여쭙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듣는다는 표현을 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던 것이다.
  글쎄...
  `평생에 스승의 법문을 이해할 수  있는 제자 한 사람만 두고 가도 그것은 제자를 훌륭히 가르
친 것이다`라는 옛말이 있는데 스님은 거기에 대해서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일까.
  어느 날 스님께 여쭈어 보았다.
  “스님, 스님의 법문을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스님께서 내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리셨는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는 법문할 때 녹음기와 법문하지.”

  실제로 매번 스님의 법문 때면 예닐곱  개의 녹음기가 스님 주위에서 녹음 경쟁을 벌이고 스님
은 녹음기에 둘러싸여 법문을 하시곤 한다.
  그러나 녹음기의 속성이라는 것이 소리를 그대로 옮겨 놓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한
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스님의 말씀은, 스님  주위에 포진하고 있는 녹음기나 법당 안에 모인  수많은 대중들
이나 스님의 법문을 그대로 되뇌기만 하니 그런 점에서 같다는 뜻이었을까.

  큰마누라 작은마누라

  스님은 모든 약 종류를 잘 드시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건강한 체질은  아니었고 보통 정도의 체질은 되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한겨
울에는 좀처럼 내복을 입지 않으셔서 우리 젊은 시자들을 놀라게 하시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겨울에 된통 감기가 들어서 고생을 하시기에 대구에서 한약을 지어와 달여 드
렸다.
  그러자 스님께서 그 큰 몸을 일으켜 앉으시며,
  “너는 큰마누라 식으로 약을 달여 왔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이었다.
  무슨 말씀인가 하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스님께서 천천히 말씀해 주셨다.

  옛날 어느 대감이 예쁜 소실을 두었는데 한번은 소실에게 보약을 달여 오라 했다.
  그런데 항상 약그릇에 담겨져 나오는 약의 분량이 꼭 같았다.  그것을 본 대감은 약사발을 받아
들 때마다 `아니, 어쩌면 이리도 분량을 정확히 맞추어 올 수 있을까.` 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대감은 정성이 지극한 소실의 행동에 무척 흐뭇해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큰마누라를 한번 시험해  봐야지.` 하는 생각에 큰마누라에게 약을 달여 오
도록 했는데 이번엔 그 분량이 제멋대로였다.
  어느 땐 한 그릇 가득이다가도 또 어느  땐 그릇 맨바닥에 깔릴 정도로 담아 가지고 오는 것이
었다.
  대감은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큰마누라를 나무라고 친정으로 쫓아 버렸다.
  그러고 난 대감은 애첩의 약 달여 오는 솜씨가 하도 궁금해서 한번은 슬그머니 부엌에 나가 몰
래 엿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작은마누라가 물을 붓고 약을  달이다가 좀이 쑤시는지 대충  달여서는 
반 사발 정도만 그릇에 담아서 내오는 것이었다. 한번은 그럴  수 있겠지 싶어 지켜봤더니 이튿날
에는 또 너무 달여서 졸아들자 물을 반 사발 정도 부어서 가져와서는 애교를 부리는 것이었다.
  양이 많으면 나머지를 버리고 적으면 물을  부어서 적당히 맞추는 그 태도가 기가 막히고 괘씸
하여 대감은 애첩을 당장에 내쫓아 버렸다.
  다시 큰마누라를 불러들인 대감은 큰마누라에게 약을 달여오도록 하고는 살그머니 숨어서 지켜
보았는데, 큰마누라는 약의 양이 많으나 적으나 있는 그대로를 가져오더라는 것이다.

  스님은 약사발 한 그릇을 통해서도 많은 얘기를 하시는 분이셨다.
  사람도 사물도 있는 그대로의 본연의 모습을  가식 없이 보여 준다면 서로를 신뢰하게 되고 그 
사이에 사랑이 싹트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걸로 알아들은 나는 그 다음부터 더 정성스럽게 
약을 달였다.

  떡경 국수경

  저녁 예불이 끝나면 절집에서는 차를 마시는 시간이 있다.
  그날 일어난 일을 반성하는가  하면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하는 시간이다. 이때면  성철 스님은 
가끔씩 큰방에 들르셔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공부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선생님이 과외로 들려주신 재
미난 이야기만 기억하는  것처럼 우리들이 꼭 그랬다.  그러나 스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그냥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도를 닦는다 해도 좁은 공간에서  여럿이 모여 살다 보니 인간적으로 갈등을 겪는 일도 
적지 않았다.
  공동 생활에서 사소한 문제들이 마음을 어지럽혀 수도에 장애가 되는 일이 허다함을 아시는 스
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심으로써 그런 장애를 극복해  나갈 방도를 일러주시곤 했던 
것이다.
  아래 얘기도 스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옛날 어느 절에 나이 든 노선사가 있었는데, 젊은 두 스님이 어떤  문제로 서로 자기 주장이 옳
다고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주장이 막상막하라 서로 옳고 그름을  가릴 수가 없게 되자 노스님께 
가서 시비를 가리기로 했다.
  다음날, 두 스님은 저녁에  노스님께 찾아가서는 서로 자기의 뜻이 옮음을 주장하였는데  그 과
정이 가관이었다.
  한 스님은 국수를  한 그릇 잘 말아 가지고  가서 노스님께 공양을 올리며 요즘 말로  `로비`를 
했다.
  그러자 또 한 스님은 떡을 한 접시 맛나게 만들어 노스님께 공양을 올리고는 자기 주장이 옳음
을 이야기하면서 자기편을 들어줄 것을 간청하였다.
  노스님은 그 모든 것을 환히 아시면서도 잠자코 두 사람의 공양을 맛나게 받으셨다.
  이튿날 아침 두 스님은 조실 스님 방으로 노스님을 찾아가 어제 일어난 일과 각자 자신의 뜻을 
아뢰고는 눈치를 보며 노스님의 판정을 기다렸다.
  노스님께서는 두 사람에게 과연 어떤 대답을 주셨을까.
  스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요즘 말로 두 사람에게서 모두 뇌물을 수수한 것이었다.
  노스님은 대답 대신 방석  밑에서 슬며시 경전 한 권을 끄집어내셨다. 그리고는  뒤적뒤적 무언
가를 찾는 척하시더니 떡을 가지고 왔던 스님을 향해 말씀하셨다.
  “떡경에는 자네 말이 옳은 것으로 쓰여 있네.”
  그러자 떡을 갖다 바친 스님은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손뼉을 쳤다.
  그때 노스님께서,
  “잠깐, 그런데...” 하시며 또  다른 경전을 펼치시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국수를 가지고 왔
던 스님을 향해 말씀하셨다.
  “아니, 이 국수경에는 자네 말이 옳다고 나와 있구만.” 하시면서 껄껄 웃으시는 것이었다.
  아연실색한 두 스님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가 노스님과 같이  박장대소를 했고, 자신들의 잘못
을 뉘우쳤다고 한다.

  눈 속에 찾아온 대통령 장모

  1977년 추운 겨울의 어느 날로 기억된다. 해인사의 설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눈이 많이 올 때는 발목이 푹푹  빠지도록 쌓이기 때문에 길을 찾기도 좀처럼 쉽지 않을뿐더러 
눈을 치우고 길을 내기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눈 쌓인 길을 큰절에 있는 젊은 수좌(선종의  승당에서 한 대중의 우두머리 되는 이. 우
리나라에서는 선원에서 참선하는 스님들을  수좌라 한다) 스님들이 백련암까지 눈을 치우며 올라
오곤 했다.
  성철 스님께서 큰절로 내려가시는 길이 미끄럽지 않을까 해서 젊은 스님들이 수고를 하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눈이 많이  내린 어느 날, 스님을 친견하고자  찾아온 낯설 할머니를 모시고 온  일행이 
있었다. 큰절에 도착한 그 일행은 한눈에도 보통 사람들과 좀 달라 보였다.
  알고 보니 그 할머니가 박 대통령의 장모라는 것이 아닌가.
  육영수 여사가 불교신자인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의 어머니도 독실한 불자
이셨던 모양이다.
  해인사 대웅전인 대적광전과 팔만대장경을 참배한  대통령의 장모 일행은 성철 스님 뵙기를 간
청했다. 멀리서 성철 스님의 고명을 듣고 눈 내린 해인사를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온 것이라 했다.
  당대 최고 권력자의 장모였던 그가 무엇이 부러웠겠는가. 딸이  대통령의 아내이고 사위는 나라
를 움켜쥐고 있는 절대 권력자이니...
  모든 사람이 그 할머니와 끈이라도 한번 대어 봤으면 하던 시절이었다.
  성철 스님 친견을 원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  할머니가 관절염으로 걸음을 마음대로 
옮길 수가 없는 불편한 몸이었던 것이다.
  그 몸으로 눈 쌓인 백련암까지 올라간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그 할머니를 모시고 온 일행들은 웬만하면 스님께서 내려오셔서 한 번쯤 만나주었으면 하는 눈
치였다.
  그러나 스님의 뜻은 완고했다.
  웬만하면 대통령 장모의 친견을 하락하시라는 권유에,
  “만날 일 없다.”
  이 한 말씀뿐이셨다.
  그러나 할머니의 고집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엄동설한에 큰스님을 한번 뵙겠다고 눈  쌓인 천
릿길을 멀다 않고 찾아왔는데 그냥 갈 리 만무했다.
  그러자 일행들은 임시 가마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네 사람이 들 수 있는 들것 모양으로 가마를 만들어 할머니를 모시고 백련암까지 올라가겠다는 
것이다.
  간혹 세간의 높은  분들이 해인사에 들를 때면 자신의 세속적인  권위를 내세워서 성철 스님을 
뵙고자 해인사측에 무리한 청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철 스님 당신이 제일 
싫어하는 일이기도 하였거니와, 절측에서 보더라도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스님께 말씀드렸고, 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놈들이 미쳤나! 아니, 이 눈발에 그 늙은이를 메고 오다니.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나  굴러 버
리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진단 말이냐. 그렇게  온다면 올라와도 절대로 만나 주지  않을 
것이야!”
  이 같은 불호령을 전해 들은 그 할머니는 그냥 쓸쓸히 해인사를 뒤로 하고 말았다.
  당대 최고 권력자의  위세가 천지를 뒤덮던 그 시절,  한번 보고 가겠다는 대통령 장모의  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할 수 있었고, 그럼에도 뒤탈이 없었던  것은 오로지 성철 스님의 법력(법의 공덕
력. 불법의 위력)때문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청담 스님과 레슬링

  성철 스님께선 김일 선수의 레슬링 경기를 즐겨 보셨다.
  레슬링 경기 하면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분이 바로 청담스님이셨다.
  조계종 총무원장이시면서  돌아가실 때까지 불교의  정화에 진력하셨고, 경허 스님의  제자였던 
만공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것으로도 유명한 청담 스님.
  청담 스님이 불교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셨다면, 성철  스님은 참된 수도자의 정립을  위하여 
애쓰셨다.
  언뜻 보면 한 분은 외적인  일에, 한 분은 내적인 일에 치중하신 것 같지만 그 둘이  만나서 온
전한 불교가 서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성철 스님과 청담 스님은 아주 허물없는 사이로 친하게 지내셨다.
  나이로 치면 성철 스님이 청담  스님보다는 아래였지만 불가에서는 세속의 나이를 가지고 따지
지 않기에 두 분 사이에서 그런 것이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성철 스님과 청담 스님은 서로  닮은 점이 몇 가지 있는데, 두 분 모두 고향이 경남  진주 근방
이었고, 세속에 있을 때 여식을 하나씩 두었다는 것이다.

  성철 스님과 청담 스님, 두 분이 만나면 가끔 어린아이처럼 지내셨다.
  한번은 어느 신도 집에 초대받아 그곳에서 묵으신 일이 있었다.
  두 분 스님은 그곳에서 레슬링 경기를 정신 없이 보시다가 갑자기,
  “우리도 레슬링 한 번 하자.” 하시며 서로 목을 끌어안고 뒹굴기 시작했다.
  이층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아래층까지 들렸으니 안주인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두 큰스님이 
갑자기 왜 저리 소란스러울까  하고 올라가 방문을 두드려 보았으나 소식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안에서는 계속 우당탕  퉁탕 하는 소리가 났다. 필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한 안주인이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거기에는 기상천외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레슬링에 열중한 두 스님은 안주인이 방문을 연 것도 모른채 서로 멱살을 잡고 뒹굴고 있는 것
이었다.
  한참 후에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안주인을 발견한 성철 스님께서,
  “우리 지금 레슬링하고 있는 거야.” 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단다.

  그 후 두 스님은 만날 때마다 그 레슬링 얘기를 하셨다.
  심지어 차 안에서도 `이놈의 영감, 레슬링 한번 하자.`고 서로 멱살을 잡곤 하셨다.
  어느 날인가는 자꾸 한판 붙어 보자고 하는 청담 스님을 떼어 놓을 요량으로 성철 스님께서,
  “향곡이도 내가 이긴다구.”하시며 엄포를 놓으셨다.
  향곡 스님이란 분은 성철 스님과 친하게 지내신 또 한  스님이셨는데, 몸집이 크고 남달리 힘이 
세셨기 때문에 스님께는 좀 버거우셨던 모양이었다.
  그 후 청담 스님께서 돌아가시자 우이동 도선사에서 치러진 다비(불에 태운다는 뜻으로 화장을 
이름.)식에 참석하고 돌아오셔서는,
  “청담 스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마음이 안 좋네.” 하시며 무척 우울해하셨다.
  청담 스님이 입관될 때 스님께서는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며 청담 스님이 눈앞에 계
실 때처럼 말씀하셨다.
  “이놈의 노장! 어서 일어나 우리 레슬링 한번 해야지!”

  끝내 만나주지 않으셨으니

  누구에게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기가 있게 마련이다. 나에게는 그해가 바로 그런 시기다.
  설악산 신흥사에서 주지 자리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져 칼부림이 나고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칼
에 찔려 죽은 사건이 있었다.
  신문지상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나고 세상은 이 문제로 한참을 시끌벅적하였다.  도대체 자비
와 무소유의 종교인 불교계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어느 시정 잡배들보다도 더 무지막지
한 행동이라는 둥 난리가 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솔직히 성철 스님이 원망스러웠다.
  불교계가 한바탕  파벌싸움으로 무간지옥(팔열지옥의 하나.  사바세계의 아래로  지독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무간나락. 아비지옥.)을 헤매고 있는 이때, 종정이신 성철 스님께서  나서
서 한마디 하셔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중생 제도의 문을 활짝 열고 있어야 할 때 성철 스님은 백련암 골짜기에서 도대체 일반 대중은 
알아듣지도 못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란 말만 내려보내면 어찌하란 말인가?
  모르긴 해도 스님의 상심도 대단하셨으리라.
  하지만 나는 불교계가 온갖 지탄을 받고 있던 그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법력이 높고 도가 통했으면 뭐하는가.
  위로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는 상구보리(보리의 지혜를 구하여 닦는 일)를 했다면, 마땅히 그 깨
달음과 지혜로 중생들을 일깨우는  하화중생(아래로 중생을 교화 제도함)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
가. 상구보리만 한다면 도대체 불교라는 게 지극히 이기적인 종교 이외에 무엇이 될 것인가.
  그때는 곁에서 다른 사람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내 마음이 어지러웠다.
  밖에만 나오면 승복을 입은 나를 보고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다.
  큰스님과 떨어져서 다른 절의 일을 보고 있던 나는 큰스님을 찾아가 직접 뵙고 모든 것을 털어
놓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퇴설당으로 스님을 찾아갔는데 스님께서는 몸이 아프시다는 이유로 만나주지 않으셨다.
  그러자 스님을 모시던 시자가 아무개 스님도  서울서 성철 스님을 뵈러 일부러 왔는데 끝내 만
나주지 않아서 그냥 돌아갔다고 전해 주었다.
  결국 나는 힘없이 발길을 돌리고  말았지만, 정말 그땐 버티고 설 수가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
팠다.
  그 길로 나는 독일로 떠나고 말았지만...
  1980년 광주 일이나  신흥사 사건, 봉은사 사건 등  심각한 일이 터질 때마다 성철  스님께서는 
어김없이 침묵하셨다. 불민한 나로서는  그 침묵의 깊은 뜻을 알 길이 없거니와  스님께서는 당신 
나름의 방법으로 불법을 설하신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삼서근이니라

  나는 백련암 천태전에서 삼천배를 했다.
  그리고는 `삼서근`이란 화두를 스님께 받았다.

  부처의 지혜를 목말라하는 어떤 스님이 선지식을 찾아갔다.
  그는 다짜고짜 그 앞에 무릎을 굻어 엎드리고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님의 진면목입니까?”
  그랬더니 그 선지식 스님이 대답하기를,
  “삼서근이니라.”
  하고는 돌아앉았다.

  그렇게 해서 전해 내려오는 화두를 깨지 못했다.
  벙어리, 봉사, 곰새끼...
  화두를 받고도 깨지 못한 자에게 붙어 다니는 듣기 거북한 이 같은 별명들을 듣지 않기 위해서
라도 열심히 궁구했으나 진자 봉사이고 곰새끼인지 도무지 트이질 않았다.

  옛날 한 도인이 높디높은 소나무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그 매달려 있는 모습이 좀  특이했다. 이로 소나무 가지를 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밑에
서는 한 스님이 그 도인이 진짜로 깨달은 자인지 흉내만 내고 있는 자인지 시험을 하고 있었다.
  스님이 도인에게 물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오?”
  자, 도인이 무어라고 대답했을 것인가?
  이름을 말하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  떨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그것은 살아 있지만 또한 죽은 자나 다름없는 것이다.
  수십 길 나무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면서, 또한 살아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 것인가?

  이 얘기는 비록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세상살이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각자에
게 닥친 이와 같은 문제를 지혜롭게 화두를 깨는 것이라 생각하면 생활에 진전이 있을 것이다.

  스님은 카메라맨

  칠십년대 초반에 성철 스님 곁에는 영태라는 어린 동자승 시자가 있었다.
  스님의 밥도 짓고, 반찬도 만들고, 스님의 방 청소도 했던 그 꼬마승은 늘 스님 곁에 붙어 있어
서 그랬던지 스님의 말씨며 몸짓 등을 곧잘 흉내내곤 하였다.
  스님께서 등산을 가실 때면  항상 따라가던 그가, 어느 날부터인가는 등산도 잘  따라가지 않고 
말수도 줄었으며 기분도 영 안 좋아 보였다.
  내가 이상히 여겨 이유를 물어 보았더니, 고향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절에 들어와서 그런지 여러 가지  생각에 시달리기도 하고 집과 
부모님이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달리 말씀은 안 드렸지만 스님도 그것을 느끼셨던가 보다.
  따뜻한 봄날 우리 둘이 양지쪽에 앉아서 쑥을 캐고 있는데,  스님이 갑자기 카메라를 메고 나타
나셨다.
  스님은 진짜 카메라맨인 양 폼을 잡으며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이리 오너라. 오늘은 내가 사진을 찍어 주마.”
  그러시고는 우리를 이곳 저곳으로 데리고  다니시며 “이 녀석아, 좀 웃어봐.” “영태 너는 좀 
누워 봐라.” 하시며 필름 한 통이 다 되도록 찍어 주셨다.
  영태가 집에 가고 싶어하는 것을 눈치채진  것일까? 그래서 가기 전에 기념으로 사진이나 찍어 
주신 것일까?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였지만 그 꼬마승에게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자기는 성철 스님의 제자보다는, 성철 스님의 상좌인 천제 스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꼬마승이 천제 스님께 그러한 말씀을 드리자,
  “큰스님이 아직 정정하신데 내가 상좌를 둘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상심해 있었던 것이다.
  그 꼬마승의 이야기는 나이 많으신 스님보다는 젊은 천제 스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좋을 것 같
아서 그랬다는 것이었다.
  다 큰 사람이 들으면 우스운 이야기  같겠지만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꼬마승에게는 그 일이 그
렇게도 심각한 일이었던가 보다.

  사람을 꿰뚫어 보시는  성철 스님께서 그것을 모르실 리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러 그  귀한 
시간을 내셔서 영태에게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해주려고 카메라맨 연출을 하신 것을 생각하니 새
삼 스님의 사랑에 머리가 조아려진다.

  사표 수리

  성철 스님은 오랫동안 산에서 사셔서  그런지 산이나, 물, 길가의 돌멩이 같은 자연물에도 남다
른 애정을 보이시곤 했다.
  해인사 입구에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그 뒷산을 밀고 청소년  수련장을 짓는 사건이 있었
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해인사에서 허락한 일이었다.

  스님께서는 본시 절의 행정에는 관심이 없어서 집을 짓든 무엇을 하든 상관을 않으셨다.
  그날은 마침 스님이 등산을 하기 위해 백련암 뒷산을 오르고 계실 때였다.
  멀리서 요란한 기계 소리가 들려오자,
  “저게 무슨 소리냐?” 하고 물으셨다.
  청소년 수련장을 짓기 위해 지금 산을 깎고 있다고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뭐야? 절 입구에 그런 것을 허락했단 말이야? 당장 주지를 불러와!”
  스님의 진노를 전해 들은 주지 스님은 입장이 난처하게 되자 다른 절로 피신을 하고 말았다.
  스님들의 참선 도량(불보살이  성도를 얻었거나, 얻으려고 수행하는  곳. 또는 불교를 말하거나 
불도를 수행하는 장소)인 해인사 코앞에 그런 번잡스러운 것을 짓는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멀쩡한 
산을 깎아내고 그 안에 있는  생물들을 죽여 가면서까지 수련장인가 뭔가를 만든다는데 무척이나 
화를 내셨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도 그 이튿날 낯선 헬리콥터 한  대가 해인사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대통
령의 사정 담당 보좌관들이라면서 문제가 됐던 예의 그 장소를  둘러보고 올라갔다. 그 뒤로 작업
은 당장 중지되었고 이후로 다시는 해인사 근처에 기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일이 그렇게 마무리되었건만 성철 스님은 기어코 주지 스님의 사표를 받아내고야 말았다.
  주지 스님은 관청의 압력에 못 이겨 도장을 찍어 주었다고 해명했으나 성철 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일침을 놓으셨다.
  “옳은 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킬 수 있어야 책임자인  것이야. 그렇지 못하다면 그 자리를 
내놔야 하는 것이고.”

  중은 재주가 없어야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손재주가 좀 있는 편인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소리를 많이 들어왔고 아닌게아니라,  내가 생각해도 손으로 하는  일들이 
재미가 있었다.
  절집에 들어와 내가 처음 손장난으로 만든 것이 목불의 손이었다.
  그 목불은 나한전(식육 나한이나 오백 나한을 모신  집. 나한이란 소승불교에서 온갖 번뇌를 끊
고 사체의 이치를 밝히어 얻어서  세상 사람들의 공양을 받을 만한 공덕을 갖춘 성자)에 있는 나
한의 두 손이었다.
  나한전에 있는 나한의  두 손을 어느 개구쟁이들이  뽑아갔는지 없어져서, 나한상은 손이  없는 
흉측한 모양으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다.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
  하루는 마음을 먹고 근처 산에서 쓸 만한 나무 두 개를 구했다.
  그리고는 톱이나 부엌칼을 써서  아무도 몰래 나한의 두 손을 만들었다. 눈대중으로  대강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결코 잘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 내 눈에는 썩 그럴싸하게 보였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한상의 두 손을 끼워 주고 나서 나는  퍽이나 만족했다. 대단한 일을 했다는 
자부심마저 생겼다.
  게다가 함께 있던 다른 스님들의 칭찬까지 들으니 흐뭇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모습에 성철 스님은 뜻밖에도 이런 걱정을 하셨다.
  “중은 재주가 없어야 하는데...”
  그때 나는 스님의 그 말씀을 오랫동안 새겼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무엇인가 남
보다 잘하는 것이  있다는 자랑이 중노릇하기엔 오히려 방해가 된다니  그 당시엔 당연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인연은 어찌 보면 잔재주로 인해 얽히고 설키게  된다. 그러다 보면 속세의 이런저
런 사람들과 만남이 생기고, 자연 중노릇은 하기 힘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님은 그때부터 나를 정확히 꿰뚫어 보신 게 아닌가.

  바가지 밟아라

  1979년 여름이었다.
  나는 청량사라는 절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절은 말할 수 없이 낡은 것이었다.
  장마가 시작되자, 법당  천장에서는 빗물이 술술 새들어  와서 바닥에다가 그릇을 받쳐  놓아야 
했다.
  그릇에서 튀어나온 물방울로 법당 바닥은 흥건했다.
  아무리 걸레질을 해도 그때뿐이었다.
  장마가 끝나고 법당 천장을 올려다보니 장맛비 때문에 커진 구멍으로 별이 바라보였다.
  나는 법당을 수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 돈을 마련하면 좋을까 궁리 끝에 바가지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마침 시골을 돌아다니며 주워 모은 바가지가 있었다.
  나는 그 바가지 위에다가 정성을 다해, 그 동안 내가 얻은 글씨와 그림을 조각했다.
  그렇게 만든 바가지가 육십여 점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마침 전시회 기간 중, 성철 스님께서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오시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스님이 혹시 전시회에 와주시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성철 스님은 전시회에 오시는 대신, 묵고 계시던 방배동의 한  신도 집으로 나를 급히 호출하셨
다. 그리고 스님이 내게 써준 `무량공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가지도 함께 가져오라고 하셨다.
  이튿날 아침, 나는 그 바가지를 곱게 포장했다.
  스님이 전시회에 오시지  못하는 대신 그것을 비싼 값으로 신도에게  팔아 주시려나 보다 하는 
기대를 가진 채였다.
  뿐만 아니라 낡은 절을 고치기 위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치하하시고 격려하실 것이라 믿었
다.
  나는 방배동 신자 집으로 가서 스님에게 공손이 인사를 올렸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스님이 말씀하셨다.
  “이놈아, 그 바가지 가지고 왔어?”
  “예.”
  내가 대답했다.
  “그러면 그것을 이리로 가져오너라.”
  나는 예쁘게 한 포장을 풀어, 그 바가지를 스님 앞에 내밀었다.
  그런데 스님이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닌가.
  “그것을 네가 밟아라.”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공들여 만든 것을 내 발로 밟아 깨뜨리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스님의 입에서 한번 떨어진 말이라면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억누르고 그것을 지그시 밟았다.
  “이놈아, 세게 밟아!”
  스님이 호통을 치셨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바가지를 밟았다.
  `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바가지는 내 발 밑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내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나왔다.
  스님께서는 그런 나를 담담히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이놈아, 바가지 팔아서 뭐가 되냐? 중은 신심이 있어야 돼.  열심히 기도나 해. 그것이 제일이
야.”
  그러나 나는 속으로 `보태주지는 못할망정 쪽박은 왜 깨실까.`하며,  스님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
지고 있었다.
  성철 스님은 그런 내 맘을 헤아리신 듯 말씀하셨다.
  “이놈아, 잔재주가 많으면 중노릇하기 힘들어!”
  그때 나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세월이  흐른 뒤, 그때를 더듬어 생각해  보면 스님의 혜안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녹차 이야기

  `다선일미(다도와 참선은 그 본지가 동일하다는 뜻)`라는 말이 있다.
  차를 마시는 일과 참선을 하는 것은 그 수준이 같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선가에서는 차를 즐겨 마시는데, 성철 스님께서는 유독 녹차를 마시지 않으셨다.
  하루는 일본의 승려 몇 분이 성철 스님을 찾아왔다.
  그들은 다도의 대가들이라며 자신들을 소개했다.
  일본의 승려들은 차를 직접 달여서 스님께 올리고 싶다고 청했다.
  스님께서도 허락을 하셨다.
  그들은 곧 차를 달이기 시작했는데,  그 형식과 절차는 일일히 기억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
다.
  그들은 대단히 엄숙한 얼굴을 하고, 예를 갖추어 차를 달였다.
  잠시 후 차가 다 달여지자, 그들은 정성을 다해 차 한 잔을 성철 스님께 올렸다.
  성철 스님의 찻상에는 보기에도 작고 앙증맞은 찻잔이 올려져 있었다.
  스님은 천천히 찻잔을 손에 드셨다.
  일본에서 왔다는 승려들은 기대에 찬 얼굴로 성철 스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성철 스님은 차 한 잔을 단숨에 꿀꺽 마셔 버리는 것이었다.
  순간 일본 승려들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성철 스님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다도는 바둑에서처럼 몇 단에서 몇  급까지 급수가 정해져 있는 모양이었
다.
  다도에서는 차를 마실 때, 한 모금을 입 안에 넣고 그 향기를  천천히 음미해 가면서 마셔야 한
다.
  `끽다`라고 해서, 조금씩 차맛을 음미하면서 마시는 것은 차를 마시는 사람의 너무나 당연한 예
절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과 정담도 나누어 가며 천천히 마셔야 했다.
  그런데 성철 스님께서는 냉수를  마시듯이 차 한 잔을 단숨에 마셔 버렸으니,  그들이 당황하는 
것도 일견 이해가 가는 일이긴 했다.
  그 자리에서 당황한 사람은 일본 승려들만이 아니었다.
  함께 있던 우리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스님은 너무 당당한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봐라, 이것이 내가 차를 마시는 다도식이다`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순간 웃음이 터져나와 나는 머리를 숙인 채 숨죽여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일본 승려들은 성철 스님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다도를 모르는 무식한 스님`이라고 했을까, 아니면 `과연 대단한  다도의 소유자인 큰스님`이라
고 했을까?

  초파일 등불

  해인사 주변에는 열네 개의 암자가 있다.
  그 중 해인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암자가 청량암이다.
  이 암자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는데,  청량암에 있는 불상, 석탑, 석등이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청량암을 빙 둘러싸고 있는 산세나 경치는  가야산 어느 곳과 비유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
다웠다.
  하지만 워낙 외져 있는 탓에 찾는 이가 드물었다.
  나는 백련암을 떠나  청량암에서 얼마 정도 보낸 일이 있는데  내가 청량암에 머무르는 동안에 
초파일이 있었다.
  청량암에서 맞은 초파일은 백련암에서와는 달리 꽤나 분주했다.
  우선 초파일에 달 연등을 만들어야 했다.
  백련암에서는 등을 달지 않았다. 따라서 등을 만들어 신도들에게 팔지도 않았다.
  꼿꼿한 성철 스님의 성격만  보더라도, 신도들에게 등을 파는 것을 달가워하실 리가  없었던 것
이다.
  그러나 청량암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절이 가난한 탓도  있었지만, 연등을 달기 위해 그  먼 길을 힘들여 올라오시는 시골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등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등을 만들기 위해 나는 철사를 자르고, 풀을 끓이고, 종이를 자르고, 색종이도 오려 붙였다.
  그 일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한참을 하고 나니 어깨도 결리고,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저렸다.
  그래서 나는 휴식 시간을 이용해 잠시 눈을 붙였다.
  “이놈의 자식, 웬 낮잠이냐!”
  난데없는 성철 스님의 벽력 같은 목소리에 깜짝 눈을 떴다.
  언제 오셨는지 스님께서 마루에 걸터앉아 계셨다.
  “잠이 깼거든 냉수 한 그릇 가지고 오너라.”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냉수 한 그릇을 공손히 떠다 바쳤다.
  철없는 상좌놈이 외딴 암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셔서, 그 먼 길을 오셨던 모양이다.
  스님은 냉수 한 그릇을 달게 마시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백련암으로 돌아가셨다.
  백련암에서 청량암까지는 젊은  사람도 힘에 부치는 먼  길이었다. 어느새 내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돌았다.
  청량암을 뒤로하고 훠이훠이 내려가시는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깊이 합장을 하였다.

  스님의 글씨

  십수년 전 명동 엘칸토 화랑에서 전시회를 할 때였다.
  내가 전시회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얼굴이 해사한 비구니 스님이 나를 찾아왔다.
  “스님께서 절을 수리 보수할 기금을 모으기 위해 전시회를  하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
서 이걸 가지고 왔습니다.”
  비구니 스님은 내 앞에 곱게 싼 보자기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나는 보자기와 스님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제가 소중히 간직하던 액자입니다.”
  나는 그것을 풀어 보았다.
  순금분으로 정성 들여 쓴 글씨를  액자로 만든 것이었는데, `광명진언`이라는 법어가 씌어 있는
데다가, 한글로 토막까지 달아 놓았다.
  매우 귀한 것이 틀림없었다. 비구니 스님께 어디서 난 물건인지 여쭈어 보았다.
  비구니 스님은 그 글씨를 얻게 된 경우를 설명했다.

  스님이 어렸을 적에 열병이 나서 몹시 앓은 적이 있었다.
  그때 속가의 아버지가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 스님께 직접 이 글씨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은 깨끗이 나았다.
  비구니 스님의 아버지는 성철 스님의 글씨에 도력이 있나 보다  하시며, 그 글씨를 잘 간직하라
고 이르셨다.
  나이가 들어 출가한 다음에도 비구니 스님은 이 글씨를 항상 소중히 간직해 왔다고 했다.

  “이런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시고, 스님만 알고 계십시오. 이것을 처분하셔서 불사에 보
태 쓰시면 제게는 큰 기쁨이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이것을 원하는  사람이 없으면 꼭 저에게 돌려
주십시오.”
  비구니 스님은 말을 마친 뒤, 총총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그 글씨는 곧 원하는 신자가 가지고 갔다.
  뒷날 생각하니 그 소중한 글씨를 차라리 비구니 스님께 돌려줄 것을 하고 후회가 되었다.
  아무리 좋은 글씨나  작품이라 하여도, 그 뜻을 알고  소중히 간직할 때 비로소 값어치가  있는 
게 아니던가.
  그 글씨를 가져간 신도가 글씨의 뜻을 알고, 소중히 간직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스스
로를 위안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스님께 여쭈어 본 적이 있다.
  스님께서도 글씨를 써준 기억이 난다고 말씀하셨다.
  흔히들 서예가가 쓴 글씨를 명필이라고 하도, 도인이나 스님들이 쓴 글씨는 도필이라고 말한다.
  해인사 입구에는 성철 스님이 쓰신 `해인성지`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아무리 봐도 도필이 틀림
없다.
  스님께서도 내게도 글씨를 몇 점 남겨 주셨다.
  그런데 스님은 낙관을 찍지 않으셨다.
  그것이 궁금해서 내가 여쭈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글씨 써주었으면 됐지, 낙관은 뭐하게? 받은  자는 그 뜻을 잘 이해하고, 소중히 간직하면 된 
거야.”
  혹시 나중에라도 누구의 글씨 값이 얼마라며 이리저리 팔리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일까.

  리어카 끌다가

  해인사 말사 중에 보현암이란  암자가 있다. 그곳은 절터만 남아 있는 곳이었는데  나중에 비구
니 스님들이 암자를 새로 짓게 되었다.
  회춘 스님이라는 비구니 스님이  처음 암자터의 땅을 다지고 할 초창기였다. 비구니  스님이 울
퉁불퉁한 땅을 고르고 흙을  져나르고 하는 것이 보기에 안쓰러웠다. 나는 그곳에  가서 리어카로 
흙을 날라주고 땅을 고르는 작업을 좀 도와준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스님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스님의 진노는 대단했다.
  “빌어먹을 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비구니 절 짓는데 가서 일이나 하고 있어?  당장 내려오
지 못해!”
  그 일로 나는 백련암에서 며칠간 쫓겨난 일이 있었다.
  스님은 우리가 비구니 절에 얼쩡거리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아무래도 비구니 스님들 
때문에 수도하는 마음이 산란해질 것을 우려하신 거였다.
  그 후로 나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혹독한 참회를 했는데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그 서릿
발 같은 호통이 귀에 쟁쟁하여 모골이 송연해지곤 한다.

  검정 고무신

  언제부터인가 스님은 검정 고무신을 즐겨 신으셨다.
  한때는 그 검정  고무신이 유행한 때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검정 고무신 구하기가  힘들어져서 
검정 고무신을 신는다는 것이 오히려 사치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스님께 흰 고무신 신으
실 것을 권해 본 일도 있었지만 스님의 고집은 꺾기가 어려웠다.
  스님께서 그렇게 검정 고무신을 고집하신 이유는 늘 깨끗하게 닦아야 보기가 좋은 흰 고무신보
다, 상대적으로 간수가 쉽고 질겨  검정 고무신을 택하신 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을 뿐
이다.
  이번 스님의 유품 중에 검정 고무신 한  켤레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새삼 스님의 모습이 다시 
일깨워졌다.
  달마 대사가 짚신 한 짝을 두고 떠난 것처럼 죽음을 헌신짝 하나쯤 버리고 떠나는 정도로 가볍
게 생각하신 것일까.
  양무제가 달마를 모시려 했지만 거절한 것처럼.
  전제군주시대에 임금의 요청도 싫다고 거절할 수 있었던 달마처럼 스님도 검정 고무신 한 켤레
만 벗어두고 떠나신 것일까.

  장미꽃을 좋아한 스님

  백련암 화단엔 한때 색색가지의 장미꽃이 만개한 일이 있었다.
  우람한 법체(부처나 보살의 법신을 이르는 말. 여기서는 성철 스님의 몸체를 뜻함)와는 달리 스
님께서는 장미꽃을 무척 좋아하셨다. 그 사실을 안 우리는 장미  모종을 수십 그루 사다가 백련암 
앞뜰에 심었다.
  그것을 본 스님의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미소가 번졌다.
  장미꽃을 기르기 위한 스님의 성의 또한 대단하셨다. 장미 기르는  법이 담긴 책자를 사오자 전
지 가위를 가져오라 하셨다.  봄이면 스님께서 장미를 직접 다듬곤 하셨는데 장미에  꼬이는 잔딧
물을 보시고는 무척 난처해하셨다.
  보다 못한 우리가 진딧물 약을 사와서 뿌려댔다.
  우리가 장미밭에 약을  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스님께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마디 
하셨다.
  “그럴 것 없다. 장미나무를 모두 파버리거라.”
  필경, 살아 있는 생명체인 진딧물을 죽여 가면서까지 아름다운  장미꽃을 본다는 것이 수도승으
로서 너무나 사치스럽다고 생각하신 거였다.

  백련암 문고리

  스님의 상당 법문을 마치고 시자인 우리가 먼저 올라오는 길이었다.
  백련암 가까이에 왔을  때 할머니 몇 분이 백련암 문고리를  잡고는 계속해서 만지고 쓰다듬고 
하는 것이 보였다.
  도대체 어인 일로 할머니들이 저렇게  절집 문고리를 부둥켜 잡고 애걸복걸하는가 싶어서 내가 
성큼 다가가 물었다.
  “보살님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할머니들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이곳에 도인 스님이 계시다고 들었는데  만날 수가 없다니깐두루 그 스님이 드나드는 대문의 
문고리나 좀 만지고 갈까 해서 그런다우.”
  옛날에 궁궐에서 임금님 손을 한번 잡으면 그 손을 씻지도 않고 비단 천으로 감싸 오래오래 간
직한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저렇게 문고리를 붙들고 통사정하는 사람들은 처음이다 싶었다.
  그러나 큰스님을 만나  뵙고 그 말씀을 듣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랬을까 싶으니 
할머니들의 행동이 이해도 안 가는 바도 아니었다.
  어떤 스님에게 이  이야기를 해드렸더니 그 스님이 말하기를 참선  수도자의 절 문고리를 잡고 
가면 그 수도자의 손을 잡은 것과 같다고 한다. 저승 갈 때 염라대왕이 `선방 문고리를 잡아 봤느
냐`고 물을 때 대답할 요량으로 그리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뒷날 어느 한적한 시간에 그  할머니들의 얘기를 해드렸더니 스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기만 할 
뿐 묵묵부답이셨다.

  비둘기 목에 진주 목걸이

  성철 스님께서 성전암에 계실 때였다.
  기도하러 오는 여신도 중에는 가끔  자신의 신분이나 모습을 과시하려고 요란하게 화장을 하거
나 화려한 옷차림에 값진 패물들을 걸치고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을 뵙고자 찾아온 여신도를 바라보던 스님께서 돈 많은 그 여신도의 목에 걸려 있
는 진주 목걸이를 보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얼마냐? 비싼 것이냐?” 라고 물으시더니,
  “이리 가져와 봐라.” 하셨다.
  여신도는 영문을 몰라하며 진주 목걸이를 스님께 드렸다.
  그즈음 암자에서는 비둘기를 기르고 있었는데, 때마침 스님의 손 위에 비둘기가 날아왔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이 비싼 물건을  네놈 목에도 한번 걸어볼  테냐? 얼마나 멋있나 보자꾸나.” 하시더니  진주 
목걸이를 비둘기 목에 걸어 주셨다.
  그러자 비둘기는 눈 깜짝할 새 스님의 손바닥을 벗어나 산등성이로 날아가 버렸다.
  한참 후 그  비둘기가 돌아왔으나 진주 목걸이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제자들이 그  목걸이를 
찾으려고 온 산을 뒤졌으나 끝내 목걸이는 찾지 못하고 말았다.
  이 일이 신도들 사이에 파다하게 소문이  난 후에 스님을 찾아오는 신도들은 비싼 패물이나 화
려한 옷차림을 금했다. 혹 화려한 옷을 입고 온 신도들은 스님께 혼구멍이 나기 일쑤였다.
  “빌어먹을 년들, 절에 옷자랑 하러 왔어?” 하시며 대번에 옷을 망쳐 놓았던 것이다.
  만일 나중에 가난한 나무꾼이나 약초꾼이 그 진주 목걸이를 주웠다면 스님은 돈 많은 여신도에
게 보시의 공덕을 쌓게 한 것이 아닐까?

  딸의 이름은 불필

  석가모니 부처님은 출가하기 전에는 가비라 성의 태자이셨다.
  그 시절에 그에게는  야수다라비라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석가모니께서 출가하셨을  때 야
수다라비는 수태 중이었다. 출가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룬 부처가  되어서 다시 가비라성에 들
르셨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아들을 볼 수 있었다.
  부처님 아들의 이름은  `라훌라`였다. 라훌라는 장애라는 뜻이다. 성도를 이루신  석가모니 부처
님의 설법을 들은  부인과 아들은 나란히 부처님께  귀의했다. 부처님께 귀의한 그들은  부처님의 
법을 따라야 했기  때문에 거친 음식과 거친 옷을  견뎌내야 했다. 그러나 풍족한 왕궁  생활만을 
하던 라훌라에게 그런 생활이 쉬울 리 없었다.
  인도에서는 원래 일종식이라고 해서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다.  그런데 부처님의 아들인 라훌라가 
하도 배고프다고 보채며 우니까, 아침과 저녁을 더 만들어 먹이도록 제자들에게 일렀다고 한다.
  부처님도 역시 인간이셨나 보다.  자식의 배고픔을 안타까이 여긴 그 모습이 인간미가  있지 않
은가!
  스님에게도 불필이란 이름의 여식이 있다.
  스님과 너무나 닮은 모습이라 한번 보면  대번에 성철 스님의 혈육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
다.
  의도적으로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만 부처님의 가족들이 부처님을  따라 출가했던 것처럼 성철 
스님의 여식도 스님을 따라 출가했고, 부인도 석남사란 절로 출가했다고 들었다.
  스님은 따님의 법명을 지을 때도 `너의 법명은 필요 없다.`라는 뜻으로 `불필`이라고 했다.
  그러나 스님도 불필 스님에게는 남다른 정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뒷날 불필 스님이 해인사  근처에 암자를 짓도록 허락하셨고, 스님은 가끔 백련암에서  멀리 보
이는 곳에 있는 그 암자를 바라보시곤 하셨다.
  가끔 목을 내밀고 그쪽을 바라보시며 이것저것 집의 구조와 방향 등을 물으시곤 하시는 모습은 
정녕 딸을 걱정하는 다정한 친정아버지셨다.
  얼마나 가보고 싶으셨을까?

  일찍 올 것이지

  백련암 시절 갑자기 배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었다.
  사람이 몸이 아프면 마음까지 약해진다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았다. 그때처럼 마음이 
착찹했던 적은 없었다.
  급성 맹장염이었다.
  수술은 경과가 좋아서 일주일 만에 퇴원했다. 병원에서 나온  나는 하루빨리 백련암으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해인사로 들어가는 동네 어귀에 도착하고 보니 겨울이라 그런지  벌써 해가 기울어서 어두웠다. 
병원에서부터 동행한 천제 스님이 이미 날도 저물었고 날씨도 쌀쌀하니 해인사 어귀에 있는 따뜻
한 여관방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일찍 올라가자고 의견을 내었다.
  퇴원은 했지만 먼길을 나다니기엔 아직 무리였는지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이 다리에 힘이 빠
져 있었던 나도 천제 스님의 그 말에 앞뒤 재볼 것 없이 응낙을 하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스님을 찾아뵙는 순간 불호령이 내 정수리로 떨어졌다.
  “이놈아, 코앞에까지 왔으면 들어와야지, 무슨 죽을병이 걸렸다고 자고 오냐!”
  아픈 사람은 서럽고 섭섭한 것이 많아진다고 하던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무척이나 서운했다.
  그러나 선방(시끄러운 속세를 떠나 조용히 불도를 닦는 선실. 참선하는 방)에 들어앉아 곰곰 생
각해 보니 그러한 꾸짖음이 아마 스님의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던 것 같았다.
  듣자 하니 스님께서는 그날, 내가 퇴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밤늦도록 나를 기다리셨다고 한다.
  관심이 없었다면 그런 불호령도 없었으리라.
  그 사랑을 깨닫는 순간 나는 나의 미욱함과 좁은 소견을 탓하여 한편으로는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네 세상살이에서도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할 것이다.
  어느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는 사람은 그만큼 외로운 법이고,  누군가의 관심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바로 가장 행복한 순간일 것이다.

  인간 성철

  성철 스님만큼 인간적인 면모를 잘 갖추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인간의 아기로 태어나서, 결혼하고, 예쁜 딸도 하나 낳았다.
  그리고 더욱 진지하고 치열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 출가해 스님이 되셨다. 그래서  나는 `고승`, 
`큰스님`, `대선사`라는 거창한 존칭보다는 소박하게 인간 성철 스님으로 이해하고 싶다.
  성철 스님은 신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도를 닦으신 분이다.
  간혹 수도승들은 속가의 부모나 형제들을  멀리하고 자신은 꼭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생각하
는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부모 없는 자식이 어디 있으며,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 없이 어
떻게 올바른 수도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겠는가.
  예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였다.
  나는 그때 김수환 추기경이 한 추모사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 인간 박정희를 용서하시고 받아 주십시오.”
  `인간 박정희`라는 말은 미려한 문장으로 꾸민 그 어떤 추도사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었다.
  그렇다. 죽음 앞에서는 우리 모두 하나의 인간일 뿐인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계신  분이 성철 스님이셨던 것 같다.  그래서 스님은 죽음 앞에 그토록  의연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어느 날 죽음의 사자가 우리 앞에 찾아와,
  “자네를 데리러 왔네.” 라고 말했다고 하자.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둥지둥 도망가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습을 구현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일생을 살았다면,
  “오, 자네 왔는가.” 하며 당당하고 의연하게 맞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도를 얻기 위해 정진하다가  병들고 죽은 부처님의 모습이,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뿌리내
리게 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본연에 가까워지기 위한 정진... 그리고 이것이 불교의 기본 진리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도자기를 빚거나  그림을 그릴 때, 아니 잠을 자거나 무심코 길을  걸을 때
도, 가장 인간다운 삶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것은 성철 스님이 내게 남기신 영원한 화두가 될 것 같다.

  왜관에서 온 진 신부님

  스님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은 연령에서부터 직업까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을 들라면 왜관에서 오신 진 신부님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날 신부님 두 분이 성철 스님을 찾아왔다.
  그 중 한 분은 파란 눈의 독일 신부님이었는데, 한국땅에 사신 지가 꽤나 오래 되어서 성도 `진
씨`로 바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진 신부님이라고 불렀다.
  바로 그 진 신부님이 스님께 참선(선법을 참구함. 스스로 참선하거나, 또는 자기가 모범으로 양
모하는 선지식에게 가서 선을 참학하는 것)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간청했다.
  그분의 청을 받아들이기 전에 스님께서 한 말씀 하셨다.
  “당신은 신부이고 나는 중이지만 당신이  나에게 배우러 왔으니 종교를 떠나서 나는 이제부터 
당신의 스승이오. 그러니 스승에게 갖춰야 할 예의를 갖추시오.”
  진 신부님이 무슨 말인지 몰라 머뭇거리자 스님께서 재차 말씀하셨다.
  “제자는 스승에게 인사를 올릴  줄 알아야 하는 법이오.” 하면서 절을 삼배  올리라고 이르셨
다.
  그러자 신부님은 성큼 일어나 스님께 큰절을 세 번 올렸다.
  종교인으로서 다른 종교인에게  큰절을 올린다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외국 
신부님의 생각은 한 수 위인 것 같았다.
  그 신부님을 보면서 진정한 종교인이란  타종교를 비방하기 이전에 성당이나 교회를 찾을 경우
에는 예수님께 조용히 참배하고 절을 찾을 경우에는 부처님께 큰절을 올릴 수 있어야 참종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너와 나의 구별이 없고 싸우는 마음이 없어지면 그것이 곧 극락이요 천당일 것이다.
  진 신부님은 큰스님께 절을 드리자마자 대뜸 청을 하나 넣었다.
  “스님, 배가 아파서 설사가 나요. 올라오면서 어찌나 혼났는지  몰라요. 곶감 있으면 하나만 주
세요.”
  그 얘기에 방에 있던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곶감이 설사에 좋은 줄도 아는  것을 보면, 파란 눈과 코만 높았지 우리 나라 사람이 다  된 것 
같았다.
  비록 종교는 달랐지만 도를 닦는 수도자로서 친근감이 가는 신부님이었다.

  중이 웬 생선을

  십여 년 전 나는 KBS에서 했던 <산따라 강따라>라는 프로에 출연한 일이 있었다.
  가야산과 해인사, 그리고 백련암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내용 중에는 내가 시장에 내려가 어물전에서 동태 한 마리를 사가지고 가난한 시골 할머니에게 
전해 주는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스님께서 이 프로를 보신 모양이었다.
  갑자기 부르심을 받은 내가 스님 방에 들어서자마자 불호령이 떨어졌다.
  “중놈이 웬 생선꾸러미를 들고 어슬렁거리냐?”
  사실 내 의도는 생선을 싼 그  종이를 가지고 할머니에게 불법을 전하려 한 것이었기에 그대로 
말씀드렸다.
  “생선을 싼 종이에서 비린내가  나고,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음이 난다는 부처님  말씀을 전
하려고 그러한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그제야 화를 푸시면서 사뭇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래? 그래도 고기꾸러미를 들고 어슬렁거리는 모습은 안 좋더라.”
  스님께서는 이렇듯 수행승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도 세인들의 눈에 어긋남이 없도록 단단히 단
속을 하셨다.
  그 같은 스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자식 잘되길 바라는  어버이의 마음과, 갓 시집온 며느리에
게 집안의 법도를 자상하게 가르치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느끼곤 했다.

  공 채 밟아라

  결제(한여름과 한겨울에 승려들이 모여 집단 수행인 안거를 시작하는  곳)철이 되면 스님께서는 
해인사 퇴설당에 머무르시면서, 하루 한 번씩 백련암까지 등산을 하셨다.
  스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우리는 좀 자유로웠다.
  스님이 계시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축구며 배드민턴  등을 하며, 나른한 오후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얼마나 정신 없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는지, 우리는 스님이 오시는 것도 몰랐다. 스님이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제야 황망하게 가지고 놀던 것들을 수습했다.
  스님은 역정을 버럭 내시며 말씀하셨다.
  “공 채 가져와.”
  나는 들고 있던 배드민턴 채를 내밀었다.
  “그것을 땅에 놓아라.”
  대체 어쩌려고 저러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것을  바닥에 놓았다. 배드민턴 채를  바닥에 
놓는 것을 보고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을 밟아라, 밟아.”
  우리들 몇은 스님의 말씀을 좇아 배드민턴 채를 밟았다. 채는 부러졌고, 결국 부엌 아궁이 속으
로 들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는 또 몰래 그것을 다시 사오곤 했다.
  어떠한 경우든 성철 스님께서는 절대 놀이를 위한 운동을 금하셨다.
  운동은 생산적인 것만을 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셨다.
  가끔 우리들은 산에 나무를 하러  올라가서는, 누가 더 많이 지고 일어날 수 잇는지  시합을 벌
이곤 했다.
  그럴 때면 스님께서도 우리 놀이에 끼여드셨다.
  스님은 우리가 지려는 지게를 빼앗아,
  “나도 한번 해보자.” 하시며 지게를 지고 일어서기도 하였다.
 스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다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였다.
  “놀고먹지 말아라. 일하지 않고는 먹지 마라.”
  스님께서는 백장청규(선종의 법규를 정한 것으로 백장  덕휘가 지음. 법당, 승당, 방장의 제도를 
마련, 승려에게 동서, 요원, 당주, 화주 따위의 각 직책을 분담시켜 승당에 있게 하고 백장은 방장
에 있으면서 법당에 나와 상당 등을 한다.)에 나오는 그 계율을, 우리들 앞에서 몸소 실천해 보이
셨던 것이다.

  스님의 식사법

  성철 스님의 식사법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소금이나 조미료, 고춧가루 등의 양념을 넣어 만든 음식은 절대 들지 않으셨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간혹 잘못해서, 다른 양념이 묻은 수저로 스님의 찬을 만들었을 경우, 스
님이 그것을 드시고 나면 여지없이 설사를 하셨다.
  그것은 성철 스님이  체질적으로 아주 예민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스님이 채소  자체에 
있는 염분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 같다.
  사실 태초부터 조미료나 이런저런 양념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고,  그것을 넣지 않은 음식을 먹
고도 사람들은 잘 살아왔던 것이다.
  스님은 늘상 있는 그대로를 고집하셨다.
  혹시 우리가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 양념을 과하게 쓰면 깜짝 놀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구, 곰새끼들아. 그것 먹어 좋을 것 하나 없다!”
  그런 성철 스님이 한창 생식을 하실 때에는 이와 이 사이가 무척 벌어져서 주위 사람들이 무척 
걱정을 하였다.
  그러다 원래의 식사법으로 돌아가자, 이도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자극이 없는 음식을 먹
고 소식하면 수도자들이 정신을 맑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릇이 똑같아

  하루는 스님께서 금강산에 있다는 마하연 선방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마하연 선방은 아랫목에  앉은 사람이 윗목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보면 가물가물할 만큼 컸
다. 그리고 겨울에는 어떻게나 눈이 많이 오는지 앉아서 참선하는  시간보다 눈 치우는 시간이 훨
씬 많았지. 눈이 엄청나게 와 겨울 나는 일이 정말 힘들었어.”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나도 그곳에서 한번 참선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쭈어 보
았다.
  “스님, 저희들도 금강산 마하연 선방에서 참선할 날이 있을까요?”
  그러자 스님께서는 혀를 끌끌 차셨다.
  “글쎄다, 둘 다 똑같으니...”
  그 말씀은 남쪽이나 북쪽이나 모두 똑같다는 뜻이었다.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시자가 물었다.
  “스님, 통일은 언제나 될까요?”
  그러자 스님은 평소 생각하신 통일관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서로들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하고 고집을 부리면 통일은 어려워. 서로의  그릇이 똑같아서는 
안 되지. 큰 그릇이 작은 그릇을 담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통일은 가능한 법이야. 서로가 넓게 포
용하는 마음이 없으면 백년이 흘러도 허송세월이야.”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시자가 다시 말했다.
  “스님이 대통령 한번 하시면 어떨까요?”
  “이 자식아,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야.”
  스님은 이렇게 껄껄 웃으셨는데, 그 눈에는 금강산 마하연을 그리는 빛이 역력했다.

  이후락 상대 안해

  해인사 근처에는 홍제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이 암자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가 말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사명대사가 입적하셨을 때, 4만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와서 예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 그 역사적인 절은 퇴락하여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 유서 깊은 곳이 그토록 쇠락한 것이 성철 스님은 대단히 안타까우셨던 모양이다.
  때마침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있던 이후락 씨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성철 스님은 홍제암을 잘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며, 이후락 씨
에게 보수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나라가 어려울 때 승병을 모아 왜적을  물리치신 사명 대사의 업적을 기리는 것이 바로 민족혼
을 기르는 일이며, 이 일은 당연히 나라에서 맡아 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셨다.
  이후락 씨는 흔쾌히 약속을 했다. 스님은 대단히 기뻐하며  보수공사가 시작되기를 손꼽아 기다
리셨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종무소식이었다.
  이 일로 스님은 꽤나 실망하셨으며, 정치하는 사람이 약속을  가볍게 여긴다며 대단히 노여워하
셨다.
  또한 다시는 그런 부탁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실 만큼, 서운한 마음이 크셨던 모양이었다.
  그 후 세월이 좀 지나서 이후락 씨와 큰스님 몇 분이 해인사를 방문하셨다.
  그런데 성철 스님께서는 이후락 씨를 만나려 하지 않으셨다.
  그때 서웅 스님, 향곡 스님,  월산 스님 등도 함께 오셨는데, 성철 스님은 그분들만 상대하시고, 
신도회장 자격으로 온 이후락 씨는 쳐다보지도 않으셨다.
  성철 스님은 그 스님들만 퇴설당으로 들이셔서 한 시간 가량 요담하셨다.
  나는 그때 이야기가  끝나기를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이후락 씨의  화난 옆 얼굴을 기억한
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뒤 성철 스님께 이후락 씨가 대단히 화가 났더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면 언젠가는  뉘우치게 된다. 그런 경우에는 죄
가 작은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한  약속을 까맣게 잊는다면, 자신이 한 거짓말에 대해서 영영 뉘
우칠 기회조차도 없어진다. 그것은 죄를 더욱 크게 하는 일이다.”

  대통령의 해인사 방문

  1978년 늦은 가을로 기억된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난데없이 경찰차 한 대가 해인사에 도착했다. 그 중 간부격인 사
람 한 명이 차에서 내려 경내의 모든 것을 묻고 메모했다.
  그는 스님들은 몇 분 계시느냐, 고급  승용차가 절 입구까지 올라올 수 있느냐 등등, 아주 사소
한 것까지 자세히 묻고 메모했다.
  나는 궁금해서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아실 필요 없습니다.” 라고만 말한 뒤, 곧 떠나 버렸다.
  이튿날 아침 종무회의 때 나는 이 일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그랬더니 한 스님이,
  “박 대통령이 방문하시려는 것 아닐까?” 하셨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부마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하고 대구에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자 해인사에는 비상이 걸렸다. 대통령이 해인사 입구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해인사 참배를 한다는 것이었다.
  오후 1시경에 대통령 일행은 해인사 일주문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현경 주지 스님을 모시고 마중을 나갔다.
  일행은 비로자나불(연화장 세계에 살며, 그 몸은 법계에 두루 차서 큰 광명을 내비춘다는 부처)
을 모신 대적광전을  참배한 뒤, 팔만대장경까지 둘러보았다.  대통령은 곡차 한 잔을  마신 다음, 
사명 대사가 머물던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우리는 해인사 옆에 있는 홍제암까지 일행을 안내했다.
  그 길에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비서들을 시켜 그것들을  줍게 
한 다음 말했다.
  “경건한 곳에서 함부로 담배를 피우는 나쁜 사람들도 있구만...”
  대통령은 홍제암을 둘러본 뒤 말했다.
  “국고를 들여 홍제암을 깨끗하게 보수하시오. 그래서 후손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게 하시오.”
  그런 다음 해인사  밑에 있는 동네 어귀에 내려가서 참배하느라  담배를 피우지 못했다며 담배 
한 대를 피우고 갔다고 했다.
  나는 성철 스님께 이 모든 것을 다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신이 있다는 말을 했느냐고 물으셨다.  아마 스님들
께서는 시자들이 당신과 대통령의 만남을 주선했더라면 한번 만나실 생각이셨던가 보다.
  나는 그때 성철 스님이 대통령에게 뭔가 꼭 하실 말씀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었던 걸까. 혹 이런 말씀은 아니셨을까.
  “박 처사, 이제 그만큼 했으니 좀 쉬시게. 모든 것은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이 해인사 골짜기에 
와서 마음공부나 좀 하시게. 부귀영화가 모든  바람 끝의 이슬과 같은 것, 마음을 닦는 공부가 제
일이야...”

  난 목포의 눈물이 좋더라

  어느 날 성철 스님이 뚱딴지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난 목포의 눈물이 좋더라.”
  나는 스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나 생각해 보았다.
  아마 스님도 가끔씩은 손주들이 재롱떠는 것을 보며 살고 싶기도 하셨던가 보다.
  그러나 스님은 대개 자신을 달련하는 일에 혹독하셨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전라도 여수에 살고 있는  한 젊은 여인이 스님에게 가야금 소리와 창을  들려드리겠다며, 제자 
두 명과 찾아왔다.
  그녀의 가야금을 뜯는 실력이나 창을 하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라고 했다.
  그녀는 성철 스님에게 가야금 공양을 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돼. 중은 원래 노랫소리와 닭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살라고 했거늘, 명색이 산중
의 어른이 가야금과 창 소리를 듣는다면 욕먹을 짓이야. 그러나  이곳까지 왔으니 듣고 싶은 사람
은 조용한 암자로 가서 한 곡씩 듣도록 하여라.”
  젊은 여인 일행은 스님 앞에서 가야금과 창 공양을 하지 못한 채,  하는 수 없이 무거운 가야금
을 메고 다시 산을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스님은 자신이 지키기로 한 계율에는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철저했다.
  어쨌든 세 명의 여인은  삼천배를 하지 않으면 신자들을 만나주지 않는 성철  스님을, 잠시나마 
뵙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만 원짜리에는 도둑놈을

  만원짜리 돈이 새로 나왔을 때의 일이다.
  지금 만 원짜리에는 세종대왕과 경회루가 그려져  있지만 처음 만 원짜리가 나올 무렵에 그 견
본이 신문지상에 발표된 적이 있었다.
  그것을 두고 세간에서는 엄청나게 말이 많았다.
  불교계에서는 `하필이면 부처님을 돈에 새겨넣어 거룩하신 부처님을 욕되게 하느냐.` 하는 거였
고, 개신교에서는 `불상이 왜 하필 만 원짜리 돈에 들어가느냐. 이건 엄연히 종교 불평등이다.` 등
등 말이 많아서 논쟁과 화제가 동시에 일어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일을 두고 스님께 여쭤 보았다.
  “스님께선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스님께서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 원짜리 돈에는 도둑놈을 그려넣어야 돼.”
  그 말씀의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더 여쭙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정직하게 돈을  벌지 않거나 
깨끗하게 쓰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화두는 돈, 돈, 돈

  호텔을 몇 개나 경영하는 여신도 한 분이 스님을 무척이나 따랐다.
  그 신도는 무엇이 어찌  되었든 돈을 많이 벌어서 사업을 계속  넓히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을 찾아온 그 여신도 왈,
  “어떻게 하면 돈을 좀더 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절에 와서도 여신도의 관심은 오로지 돈에만 있었던 것이다.
  불교의 진리를 배우는 수준은 신도에 따라 천태만상이다.
  학력으로 치자면 유치원 수준에서 대학원 수준이라고나 할까.
  불가에 `대기설법`이란 말이 있다.
  가르침을 받을 사람의 성질이나 능력에 따라서 가르침을 준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진리를 설파할  때는 초등학교 수준의 신도에게는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대학원 수준
의 신도에게는 대학 교수의 입장에서 부처님의 진리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에게 부처님의 법을 바르게 전해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을  묻는가 하면, 어떤 이는 부처님의 불경을 질문하고, 또 어떤 
이는 화두를 받으려고 스님을 찾는 이도 있다.
  화두라는 것은 참선하는 사람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몰두하는 문제를 말한다.
  쉽게 말하면 <만다라>라는 소설에 나오는 `병 속에 든 새를 꺼내라`와 같은 것이다.
  아무튼 위에서 얘기한  그 여신도는 화두라는 것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대단히 중요하고 좋은 
것인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돈 많이 버는 방법을 묻는 신도의 말에 스님께서 묵묵부답하시자  그 여신도, 좀이 쑤셨던지 재
차 청을 넣었다.
  “스님, 저두 화두 하나 주세요, 네? 돈 많이 벌 수 있는 화두요.”
  옆에서 잠자코 보고 있던 나는 여신도의  말에 어이가 없었으나 스님께서는 의외로 그 말에 대
꾸를 하셨다.
  “보살은 딴 화두 필요 없어. 돈, 돈, 돈... 하구 화두를 외워.”
  그러자 그 보살은,
  “맞아요, 스님, 저는 돈 화두나 욀게요.” 하고는 희색이 만면해서 돌아갔다.
  그래서 그 신도는 `돈`이란 화두를 처음  받은 사람이 되었는데, 후일담을 들으니 돈 때문에 고
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영주 찾아온 단성 손님

  `이영주`는 성철 스님이 속가에 계실 때의 본명이다.
  햇볕이 좋은 어느 봄날로 기억된다.
  우리가 성철 스님을 모시고 큰절로 출타하기 위해 백련암 문을 나설 때였다.
  “이곳에 혹 이영주라고 있소?”
  백련한 입구에는 이영주를 찾아온 한 촌로가 있었다.
  그는 꾀죄죄한 양복에 갓까지 쓰고 있었다.
  나는 그의 초라한 입성을 살피며 말했다.
  “그런 분은 여기 안 계시는데요.”
  그때만 해도 성철 스님의 속가 본명을 귀담아 들어 두지 않았기 때문에 생소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철 스님은 그 촌로를 눈여겨보며 말했다.
  “어디서 오셨소?”
  “단성서 왔습니다.”
  그러자 성철 스님은 그 노인을 자세히 살폈고, 그 역시 스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니!”
  잠시 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두 사람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 촌로는 성철 스님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불알친구였던 것이다.
  성철 스님은 그 노인을 반갑게 맞아들여 잘 대접하셨다.
  그리고 그 노인이 돌아가실 때에는 노자까지 챙겨드렸다.
  나는 그때 성철 스님이 사람에 대한 정이 꽤 깊은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
  그 노인을 좀더  잘 모시면서, 옛날 스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 두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것이다.
  자신을 다스리고 정진하는 일에 그토록  엄격하셨던 성철 스님의 어린 시절은 과연 어떠했을까 
하고, 나는 지금도 가끔씩 상상해 본다.
  그럴 때면 늘 성철 스님의 그 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가 떠오르곤 한다.

  스님이 남기신 유산

  사자는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를 절벽 위에서 떨어뜨린다.
  그리고 절벽을 기어올라오는 놈은 데려가서 키우지만, 그렇지 못한 놈은 그냥 내버리고 간다.
  험한 숲 속의 왕으로 키우려면 어릴 때부터 이런 단련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냉혹한  것 같지만,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살아남게 하기 위한 어미의  모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 스님들도 자신의 실력을 능가하는 제자를 키우고 싶어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법통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염화 미소로써 마하가섭에게 법을 전했듯이 말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해인사 궁현당 큰방에서 큰스님의 법문이 있던 날이었다.
  그날은 상황이 좀 이상하게 돌아갔다.
  그때 큰스님은 설법 도중, 스님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하셨다.
  스님들이 법을 이을 생각은 하지 않고, 논이나 밭을 이어 받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모시는 스님의 법에는 관심이 없고, 스승이  모아 놓은 재물에만 관심이 크
다는 말이었다.
  이때 지효 스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더 이상 듣기가 언짢으셨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성철 스님이 하셨던 설법은, 어떻게 들으면  한국의 모든 스님들을 싸잡아 비난
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지효 스님은 성철 스님의 스승이신 동산 스님의 상좌 스님이 되는 분이셨다.
  성철 스님은 동산 스님 밑에서 공부를  할 때도, 부처님의 법문에 관한 견해가 다를 때면, 스승
인 동산 스님에게 끝까지 따지고 들었던 모양이다.
  이 때문에 두 분 사이에는 큰 소리가 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법문에 관한 학문적 이해가  달랐기 때문이고, 스승인 동산  스님은 
똑똑한 제자 성철 스님을 무척 아끼셨던 편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다른 상좌들에게는 성철 스님의 이 같은 행동이 버릇없는  것으로 보였고, 이 때문에 성
철 스님은 그들에게 눈총을 받기도 했던 것 같다.
  지효 스님이 설법을 하고  계신 성철 스님의 법상(설법하는 선지식이 올라앉는  상)을 엎으려고 
하신 것도, 어떻게 보면 이런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때 우리는 누구 하나 감히 나서지 못하고 두 분의 하시는 양을 안타까이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두 분 다 워낙 어른들이시라 함부로 나서기가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두 분 사이에 끼여들어 싸움을 말리신 스님이 계셨다.
  그분은 성철 스님의 제자인 원진 스님이셨다.
  원진 스님은 진노하신 지효 스님에게 갖은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두 분의 싸움을 뜯어말리셨다.
  이 일이 있은 후 성철 스님은 한동안 우리에게 냉랭하게 대하셨다.
  옳고 그른 일이 분명히  눈에 보이는데도, 눈치만 보며 쭈뼛거린 우리에게 실망이  크셨던 모양
이었다.
  그러나 원진 스님에게만은 그러지 않으셨다.
  스승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용기 있게 행동한 원진 스님이 가상하게 여겨지셨던 까닭이다.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설법을  하시던 중, 연꽃을 들었을  때 마하가섭만이 부처님의 뜻을  알고 
미소 지었다고 한다.
  큰스님을 가까이 모시면서도,  큰스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나 자신이 못내  미련스럽게만 
느껴진다.
  생각해 보면 성철 스님은  돌아가신 이후에도 내게 남기신 것이 참으로 많으신데,  나는 언제쯤
이면 그 깊은 뜻을 다 헤아릴 수 있을는지.

  국정자문위원

  유신 정권이 무너지고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였다.
  번갯불에 콩을 볶듯이 5공이  탄생하고, 국정자문위원이라는, 나라의 원로들을 간판처럼 등장시
켜 합법성을 가장할 때였다.
  스님도 그 대열에서 한몫을 하게 되신다.
  불교계의 원로로 스님도 그 제리메움에 어쩔 수 없이 이름 석 자가 올라가게 되었다.
  평생을 산 속에서 산 사람이 어떻게 자문위원이 될 수  있냐고 끝까지 거절을 하셨지만, 급기야
는 최고위층에서 왔다면서 스님을 끝까지 설득하려 할 때 스님께서는,  그러면 이름 석 자는 빌려 
줄 터이니 잘 해보시오, 단 그 자리에서까지 나와 달라는 부탁은 끝까지 거절하셨다고 하셨다.
  요즘 명함을 받아보면 앞면이  모자라 뒷면까지 무슨 자문위원이니 등등... 빽빽하게  씌어진 경
우를 보는데 그럴 때면, `명예란  풀잎 끝의 이슬이요, 바람 속의 등불이 감투`라고 하신  스님 말
씀이 떠오른다.

  마태복음 6장 3절

  성경의 마태복음 6장 3절에 보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 있다.
  스님은 한때 성경도 열심히 보신 것으로 안다.
  그리고 가끔 그런 말씀도 우리에게 들려주셨다.
  조그만 일이든 큰일이든 좋은 일은 숨어서 해야 된다는 것이다.
  남이 알도록, 혹은 남에게 잘한  일을 과시하려고 한다면 그 순간 그것은 좋은 일이기  전에 자
기 자랑이 되어 그만큼 공덕은 퇴색되고 마는 것이다.
  어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수야 있을까마는 자신만 알고 하는 일, 아니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만이 없이 하는 일이 진짜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흔히 연말연시나 명절 때가 되면 불우이웃돕기에 누가 얼마,  누가 얼마를 내놓았다고 대문짝만
하게 신문이나 방송에 나오는 경우가 많다.
  스님은 그런 것을 보시면
  “아유, 저 멍청이들.” 하시며 혀를 끌끌 차신다.
  하잘것없는 현금을 가지고 저렇게 많은 칭찬이나 자랑을 일삼는 것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된다
는 것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보시(자비심으로써 다른 이에게 조건 없이 물건을 준다는 뜻), 말없이 숨어
서 하는 좋은 일, 그리고 남을 위해서 몰래 드리는 기도.
  이런 것이 참으로 진정한 공덕이 된다는 말씀이시다.

  출가

  우리는 가끔 가까이에서, 성철 스님에 대한 비난의 소리를 듣는 경우가 있었다.
  비정한 사람, 거만한 중, 가정을 파괴한 가장... 등등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든데, 그것을 스님도 
바람결에 듣기도 하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스님은, 출가를 해서  수도를 하려면 그런 비난의 소리나 욕설쯤은 감수해야  한다는 생
각이셨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하고 말씀하셨다.
  중생 제도라는 대명의 타이틀을 가지고  부처님의 제자가 된 이상 사사로운 소리에 귀기울여서
는 안 된다고 하셨다.
  딸과 부인을 두고 출가한 스님.
  그러나 그의 가족은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하였다.
  그 이유가 단지 아버지와 남편 때문이기만 했을까?
  그렇다면 그렇게 가볍고 즐겁게 출가할 수가 있었을까?
  세속으로 치자면 성철 스님은 불효를  하고 가족에게 못할 일을 했다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을 받았을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와보지 않은 자식에 대해 주위에선 무어라 할까?
  법문을 통하여 불교인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지만, 그의 성불을  위해서 감수한 가족들의 외
로움은 어떠했을 것인가.
  그래서인지 한 가지, 스님이 한없이 너그러울 때가 있었다.
  그것은 영가 천도제 때이다.
  그때만큼은 꼭 참석하셔서 죽은  이를 위하여 불경을 외워주시는 것이다. 죽은 자가  무슨 고마
움의 표시를 할까마는, 그래도  이 인연 공덕으로 다음 생에 태어나서는 불법을  만나서 성불하라
는 끝맺음의 말씀을 꼭 해주셨다.
  출가란 조그만 가정과 가족을 버리고  큰 가족인 온 세상을 위해 사는 것, 스님은  당신을 완전
히 버림으로써,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한국 불교의 기틀을 바로잡은 초석이 되셨다.

  네 동강 난 비석

  우리에게는 참으로 어두웠던 시절, 모멸의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다.
  일보은 조선 침략에서 군사, 외교, 정치적인 것은 물론 일본 불교를 앞세운 종교적 침략도 주도
면밀하게 진행했다.
  일제 통치자들은 조선 사찰을 30본사로 분할하여 그 힘을 분산시키고 30본사와 말사의 주지 임
명권을 총독이 장악함으로써  불교계의 종무행정과 불교재산, 의식 및 교리에까지  간섭하여 구조
적으로 조선 불교를 일제에 예속시켰다.
  이 시절 많은 불교계 인사들의 조선총독부의 시녀 노릇을 했다고 한다.
  물론 만해 한용운 스님이나 백용성  스님같이 항일운동을 하신 분들도 계셔서 불행중 다행이지
만, 해인사의 일제시대 이야길 잠깐  들어보면, 이희광 주지는 총독부와 상당히 가깝게 지냈던 모
양이다.
  조선식산회사로부터 육만 원이란 돈을 빌리기까지 했단다.
  당시 육만 원이란 돈은 어마어마한 거금으로, 그 돈을 그냥  자신의 사비로 대충 써버리고 해인
사를 빚더미 위에 올려놓고는 주지직을 물러났단다.
  그 후 김만용 스님이  주지로 계실 때 좀 갚고, 경하  스님이 주지로 계시면서 또 갚고, 허능산 
스님 때는 빚을 갚지 못했단다.
  다시 고경 스님 때 해인사의 빛을 많이 갚았는데, 이 시기에 성철 스님이 출가하셨단다.
  그때 선방에 계시던 경성  스님께 성철 스님이 소개되었고, 경성 스님은 백련암에  계시던 동산 
스님께 소개하여, 스님은 머리를 깎았다고 들었다.
  일제 1937-39년 변설호 주지 당시 해인사 홍제암에 있던 사명 대사의 비석이 네 쪽으로 동강이 
나고 만 사건이 일어났는데, 변설호 주지도 상당한 친일파였던 모양이다.
  사명 대사의 비석을 보면 사명 대사가  일본에 화해 사신으로 건너가 왜장과 담판을 지으며 나
눈 대화 중에 유명한 일화가 있다. 왜장이
  “조선에서는 어떤 문물을 가장 중요시하는가?” 라고 물었는데 사명 대사는 스스럼없이
  “조선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물은 바로 당신의 목이오.” 라고 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변
설호 주지는 그런 대목이 씌어져 있는 비석을 그냥 세워두면  되겠느냐는 식의 망발을 해서, 합천 
경찰서장 죽포라는 일본인이 사명 대사의 비석을 네 동강 낸 일이 있었다.
  그때 갑자기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천둥이 쳤다고 한다.
  그 후 깨어진 비석을 해인사의 구광루와 명월당 앞에 보란듯이 방치해 두었단다.
  후에 죽포라는 일본은은 충무 경찰서장으로  발령이 나서 가게 되었는데 또다시 충무공의 사당
을 헐고 나서 무슨 병인가로 죽었다고 한다.
  해방 후 변설호 주지는 친일파로 판단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아무튼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불행한 역사였다.

  만공 스님

  스님께서는 만공 스님의 이야기를 가끔 들려주셨다.
  하루는 만공 스님께서 시자 한 명을 데리고 마을로 탁발을 나간 일이 있었단다.
  저녁때가 되었는데, 하루 종일 시주 받은 곡식이 많아서 자루가 제법 무거웠던 모양이다.
  해는 서산에 걸려 뉘엿뉘엿 넘어가고 돌아갈 길은 먼데, 무거운  쌀자루를 등에 진 시자의 발걸
음은 점점 느려져서 앞서 가고 있는 만공 스님과 자꾸만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었다.
  마침 동네 어귀를 지나가고  있는데 젊은 처녀가 물동이에 물을 길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들에서 일을 마친 동네 사람들도 소를 몰고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만공 스님이 물동이를  인 동네 처녀를 와락 끌어안고는 입을 맞추고  말았다. 우물가이
다 보니 동네 사람 여럿이서 이 광경을 보았다. 당연히 큰 소동이 일어났다.
  “저놈 잡아라.”
  동네 사람들은 만공 스님을 뒤쫓고, 뒤따라오던 시자에게도 덤벼들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쌀짐을 지고 따라오던 시자도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스님이 저럴  수가?” 하는 찰나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달려 동네 어귀를  벗어나고 
말았다. 시자승도 잘못하면 동네 사람들에게 잡혀 몰매를 맞게 될 판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만
공 스님의 뒤를 따르는 수밖에.
  그리고 어느덧 절밑 일주문이 바라다보이는 곳까지 오자, 만공 스님은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스님 어쩌려구 그런 짓을 하십니까?” 하고 시자는 스님을 원망하였다.
  만공 스님은 껄껄 웃으시며,
  “이놈아,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절에 도착했겠냐? 아마 밤세워 왔을 거야. 짐도 가볍게 
오지 않았느냐?”
  그러고 보니 그 무거운 쌀짐을 지고 어떻게 그 먼 길을 달려왔는지 자신이 생각해도 신기할 정
도였다.
  그제야 시자는 만공 스님의 참뜻을 알았다고 한다.

  구정 선사

  `구정`이란 아홉 구자에 솥 정자로, 솥을 아홉 번 건다는 뜻이다.
  옛날에 한 도인 스님이 계셨는데  그에게 찾아와서 공부하기를 간청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
다.
  스님은 그들을 우선 부엌으로  데리고 가서 솥을 걸고 밥을 지어오라고 시킨단다.  그것도 조그
만 솥이 아니라 혼자서는 들기가 힘들 정도의 커다란 가마솥이었다.
  그렇게 큰 가마솥을 보기도 처음  보았을 것이고, 게다가 그 큰 솥을 걸어서 밥을  지어본 경험
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였으나 팔을 걷어붙이고 솥을 건다.
  그리고 구정 스님께 가서
  “스님, 솥을 걸어 놓았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린다.
  스님은 밖으로 나와서 솥을 밀어 버리고 들어가신다.
  다시 정성을 다하여 두 번, 세 번, 네 번... 번번히 퇴짜를 놓으신다.
  제아무리 초보자라 할지라도 여덟 번쯤 걸면 전문가 못지  않게 걸 수 있을 것이다. `또 스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여덟번째는 모든 정성을 다하여 솥을 걸었으리라.
  어느 누가 봐도 완벽하다 싶어 이제는 합격이겠지 하고는 스님께 가서
  “스님, 솥 걸어 놓았어요” 하니, 어김없이 스님이 나오신다.
  “아직 멀었어. 다시 걸어!”
  행자는 생각했단다.
  `이제 떠나면 그만이야.` 하고는 방에 가서 보따리를 챙기고 떠날 준비를 하고는 아홉번째엔 일
부러 솥을 비뚤어지게 걸어 놓았단다.
  “스님, 솥 걸어 놓았어요.”
  이번엔 나와 보시지도 않고,
  “이리 들어와 봐.” 하시고는
  “적어도 아홉 번까지 솥을 걸 수 있는 참을성이 있다면 합격이야.”
  그리하여 그 도인 스님은 구정 스님이라 불리게 되었단다.

  해인총림

  해인사에서 한동안 종무소 일을 보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한  달에 한 번 발간하는 신문을 만들  것을 제안한 일이 있었다. 다행히  그 제안은 
통과되어 `해인총림`이라는 신문을 만들게  되었는데, 말이 신문이지 해인사를 홍보하는 홍보지였
다.
  그래도 의욕적으로 우리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기사도 모으고 글도 받고 큰스님의 법어도 실
었다.
  첫 신문이고 또 당연히 성철 스님의 사진도 필요할 것 같아서 나는 조그마한 카메라를 들고 퇴
설당 스님의 방을 방문했다.
  “스님, 사진 쫌 찍어야겠습니다. 신문에 실릴 사진입니다.” 라고 말씀드렸더니, 스님은 등나무 
의자에 앉으셔서 나의 조그만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하셨다.
  “잘 찍어야 돼!” 라고 웃으시며.
  나는 이리저리 폼을 잡으며 내 나름대로 열심히 찍었다.
  그리고 몇 장의 사진을 뽑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사진이 잘  나왔다. 나의 실력이 좋아서인지 아
니면 카메라가 좋아서인지 몰라도, 스님의 모습이 아주 해맑고 천진스럽게 보였다.
  이번엔 성철 스님이 잘 나왔다는데 한 장 달라고 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 사진을 스님께 가져다 드렸더니,
  “그까짓 사진 잘 찍으면 뭘 해! 공부를  잘해야지!” 하면서도 사진이 맘에 드셨던지 나중에도 
사진 찍을 일이 있으면 늘 나를 부르곤 하셨다.
  그러나 그때 그 사진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좀 아쉽다.

  축구 시합과 단식

  해인사에는 어느 사찰보다 많은 스님이 모여서 살고 있다.
  큰절과 산 내에 있는 암자를 모두 합치면 항상 이벽여 명은 된다.
  해인사 내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스님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하나는 강원이고, 또  하나는 선원이다. 그리고 강원과 선원을  보살펴서 살림을 하는 종무소가 
있다.
  강원에서는 스님들이 처음 절집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는데, 학문을 위주로 배우고, 그곳에
는 강사 스님이 계신다. 선원에서는 주로 강원을 졸업했거나 나이가  좀 지긋한 스님들이 참선 수
도하는 곳으로 선원장이 스님들을 통솔하고 있다.
  스님들은 점심 공양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한 시간 가량 해인사 왼쪽에 있는 커다란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다. 해인사 스님들이 축구를 하게 된 데에는 재미있는 연유가 있다.
  한번은 해인사에서 산불이 난 일이 있었는데 불을 끄려고 스님들이 총출동을 하였다.
  그런데 기동력이 영 아니올시다였다.
  한마디로 운동 부족인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축구를 하기로 한 것이다.
  한번은 선원 스님과 강원 스님이 나뉘어서 축구 시합을 하게 되었는데 조그마한 사건이 벌어졌
다.
  젊은 스님들도 경기에 너무나 열심히 몰입하다 보니 축구를 운동으로 생각하지 않고 승부에 너
무 집착을 했던 것이다.
  선원 스님들과 젊은 강원 스님들이 골인이니 아니니 하고 시비 끝에 급기야는 손찌검까지 하게 
되었다. 그 일로 강원의 젊은 스님들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단식투쟁을 하였다.
  마침내는 성철 스님까지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관음전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놈들아, 문 열어!”
  그러나 안으로 굳게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놈들, 이제 다시는 공 못 차게 할 줄 알어!”
  결국은 성철 스님의  호통에 젊은 스님들은 문을 열었지만 그때  철없던 스님들도 지금은 중진 
스님들이 되어 있으리라.

  성철 스님의 목소리

  나의 73년 여름은 참기 힘든 나날들이었다.
  영장이 나온 것이다.
  스님께 하직 인사를 드렸더니
  “중도 대한민국 국민이니 군대에 가야지.” 하시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야. 부처님 생각 잊지 말고 잘하고 돌아와.”
  나는 논산 훈련소에 입대를 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목탁이란 별명이 붙여졌다. 내무반장은 훈련 중에 가끔
  “목탁, 너 똑바로 해!” 하면서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휴식 시간이면 철모를 두드리며 염불을 
외워 보라구 해서, 목청을 돋우며 반야심경을 외우기도 했다.
  그 힘들었던 훈련소  생활이 끝나고 나는 부대에 배속 되었는데  음식이며 생활이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어느 날 나는 부대로부터 첫 외박을 허락받고, 서울 남산에 있는 `대원정사`란 불교회관을 찾아
갔다. 그곳에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처사가 한 사람 있었는데 나늘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스님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해인사 백련암으로 전화를 해서 스님을 좀 바꾸어 
달라고 했다.
  다행히 스님은 나의 전화를 받아 주셨다.
  “누구냐? 원정이냐? 부처님만 믿고 잘해, 알았지? 좋은 일이 있을 거야.”
  평소엔 냉정하시던 스님의 목소리가 그때엔 마치 막내아들에게 타이르시는 부친의 정을 느끼게 
해서 더욱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비구니 스님의 대나무 그림

  대나무를 잘 그린다는 비구니 스님이 있었다.
  우리가 봐도 그림은 시원히 잘 그리는 것 같았다.
  대나무 그림 병풍을 만들어 성철 스님께 선물을 하기도 했고,  그 대나무 그림을 배경으로 스님
은 사진을 찍은 일도 있었다.
  그런데 그 비구니 스님이 무슨 마음에서인지  자신이 쓰던 붓을 몽땅 가지고 와서 스님께 드렸
다. 한 웅큼이나 되는 수십 자루의 붓을 백련암에서 태워 버렸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참선을 하겠다고 스님께 맹세를 했단다. 스님은  무척 기뻐
하셨다. 누구든지 참선을 하겠다면 일단 좋게 보시는 스님인지라.
  “그래, 참선 수도하는 것이 제일이야. 마음을 닦아서 견성 성불을 해야지!” 하고  비구니 스님
을 격려까지 해주셨다.
  그런데 그 맹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비구니 스님은 다시 대나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그림은 꽤나 비싸게 팔리게 되었다.
  자신의 그림 세계를  아주 포기한다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웠던 모양이다. 아니면 참선을  하고 
나서 다시 새로운 그림세계를 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 성철 스님은 혀를 끌끌 차시며,
  “오른손으로 도둑질한 도둑의 오른손을 자랐더니 나중에 다시 왼손으로 도둑질을 한다더니 그
림 그리는 거 멈추기는 금생에는 힘들걸.”하셨다.

  극락과 지옥

  극락세계와 지옥은 과연 어느 정도의 차이가 날까?
  성철 스님께서는 극락과 지옥은 사실 똑같다고 말씀하신다.
  다만, 착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극락이요, 악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지옥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선하고 다른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곳이 살기 좋은 곳일 
것은 당연한 이치다.
  남을 괴롭히고 남의 처지는 아랑곳없이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과연 어
떠할 것인가.
  어떤 조건에 있다 해도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사느냐에 따라 천국도 되고 지옥도 된다는 것이
다.
  쉽게 예를 든다면 극락과 지옥에서는 일 미터가 넘는 숟가락으로  식사를 해야 하는데, 남은 아
랑곳없이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다면  그 긴 숟가락으로 제 입에 떠 넣기는 불
가능하므로 싸움질만 하고, 서로  숟가락이 부딪쳐 음식은 모두 바닥에 떨어지고 서로  남의 탓만 
하여 난장판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극락에서라면 서로 남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선 상대편에 앉은 사람에게 먹여 주므로 싸
울 일이 없다. 긴  숟가락의 문제도 간단히 해결될 것이다. 금생에서도, 마음을 착하게  쓰면 극락
이요, 마음을 악하게 쓰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 된다는 말씀이시다.

  하느님 뜻으로 구경 잘 했소이다.

  해인사를 법보 종찰이라고  하는 것은 고려대장경, 즉 팔만대장경이라고 불리는  무상법보를 모
시고 있는 까닭이다.
  고려대장경을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까닭은  대장경의 판수가 팔만여 장에 이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교에서 아주 많은 것을 가리킬  때 팔만 사천이라는 숫자를 쓰는데 가없이 많은 부처님
의 가르침을 팔만 사천 법문이라고 하는 데서 비롯된 듯하다.
  대장경은 두 차례에 걸쳐 국가 사업으로 간행되었다.
  처음 간행된 구판  대장경은 1011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려는 발원에서 
시작해서 무려 77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고종 19년 몽고군의 병화로 그만 불타 버리고 말았
다.
  1236년에 다시 본격적으로 대장경 간행불사를  추진하여 16년에 걸친 큰 불사의 결실이 고려대
장경이다.
  완성된 처음엔 강화도에 모셨으나 왜구의 노략질 때문에 서울의 지천사로 옮겼다가 그 뒤 조선
시대 태조임금 때인 1398년 해인사로 옮겨진 것이다.
  대장경판에 쓰인 나무는 섬에서 벌목한  자작나무와 후박나무를 바닷물에 삼 년 동안 담갔다가 
꺼내어 조각을 내고, 다시 소금물에 삶았다가 그늘에 말린 것을 썼다고 한다. 대패로 곱게 다듬은 
나무 위에 붓으로  경문을 쓰고 아름다운 구양순체의 글자를 한치의  어긋남 없이 일정하게 새겼
다.
  대장경을 만들 무렵 고려왕조는  여러 차례에 걸친 오랑캐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
런 시대 상황에서도  임금이나 귀족, 백성이 모두  혼연일체를 이루어 만든 팔만대장경은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중국 최고의 대장경이라 일컬어지는 만력판이나  후세에 만들어진 어떤 대장경도 따라올 수 없
는 독보적인 빼어남을 지닌  것으로 세계의 인쇄술과 출판술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하다. 그래서 
해인사에는 항상 많은 관광객이 다녀간다.
  여러 종단에서, 혹은 타 종교인들도 찾아와서 구경을 하기도 한다.
  한번은 개신교 목사  일행 수십 명이 찾아와서 안내를  부탁해 왔다. 타 종교인인 관계로  더욱 
정성껏  판고와 판각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드리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해인사의 유래  등을 들
려 주었다.
  그런 안내가 끝나고 안녕히 가시라고 합장인사를 하고 헤어지려고 하는데 대표 목사님 한 분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 뜻이고 하느님 뜻으로 구경 잘 했소이다.”
  나는 한동안 어이가 없었다. 적어도 종교 지도자인 그들이 그  정도의 인사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일까?
  내가 섭섭했던 것은 그들이 부처님 대신 하느님을 찾아서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종교란 무엇인
가.
  자신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어떻게든 자신의 종교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는
다면 지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종교 전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종교간의 독선과 배타, 독선적인 종파주의와 종교는 선량한 인간들을 갈라놓는다.

  시장이 반찬

  조선 시대,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임금 노릇을 하게 된 세조는 유달리 절을 많이 찾았다. 말
년엔 불사도 많이 하고, 이곳 저곳 명산을 자주 찾아다녔다고 한다.
  조카인 단종을 쫓아내고 그것도 불안해 어린 단종에게 영월의 청량포에서 사약을 내려 죽게 한 
삼촌, 그도 인간인지라 마음속의 괴로움을 달래고 또 조금이라도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픈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말년엔 온몸에 악성 피부병이 번져 고생을 했다는  얘기도 전해 오는데 그래서 더
욱 그는 이곳 저곳에 기도를 하러 많이 다녔을 것이다.
  한번은 세조가 오대산 월정사로 행차를 했단다.
  기도를 마치고 대중 스님들과 함께 공양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주지 스님의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
  절에 오면 절의 법을  따라야 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나라의 임금이고  보니 공양과 함께 할 때 
어디에다 자리를 잡아 드려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사찰에서는 큰방 가운데  부처님과 마주 보는 자리를  어간이라고 하는데, 중앙을 좌우로  하여 
큰스님들이 자리를 잡고 탁자 바로 앞, 다시 말해 어간  맞은편에는 어린 사미승들이 자리를 잡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임금을  어간에 앉게 할 수도 없고, 또한  탁자 밑 낮은 자리에 앉게 하자니 
임금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식사시간은 다가오고, 주지 스님은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꼬마 동자승이 선뜻 나서서,
  “임금님은 저를 따라오십시오.” 하고는 세조를 제일 낮은 자리로 안내하였다.
  제일 말석의 자리에 앉게 한 것이다.
  나라에서 제일 높은 임금일지라도 절에 와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세조는 아무 말도 못하
고 그 말석에서 대중과 함께 점심 공양을 했단다.
  아무도 감히 말할 수 없는  임금에게 당당히 자리를 잡아준 꼬마 행자. 그는 어떻게  그런 당돌
하고 용기 있는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때묻지 않고 꾸밈이 없는 어린 동자승의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이리라. 이 눈치 저 눈치
를 보던 스님들은 그 때묻지 않은 어린 동자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으리라.
  세조임금은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해가 저물어 어느 가난한 절간에서 하룻밤을 또 묵게 되었
다.
  임금님 일행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몇 분의 스님들은 안절부절못하였다. 양식조차  넉넉지 못한 
가난한 절인지라, 내일 아침을 어떻게 지어서 임금께 올려야 하나 하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원주 스님이 노스님께 아침 걱정을 하였더니 노스님 말씀이
  “내일 아침 걱정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고 하셨다.
  절에서는 원래 아침에 죽을 쑤어서  먹는 일이 많다. 그것은 양식을 아끼는 데 도움이  되고 번
거롭지 않기 때문이다.
  이튿날 임금 일행은 언제 아침을 가져오나  하고 기다리기 시작했는데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
간이 지나도 아침식사 가져올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해가 중천에 떠서 점심때가 다 되었을 때, 임금 앞에 아침상이 올려졌다.
  그런데 상보를 열고 보니 죽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와 숟가락 하나가 전부였다.  임금은 배가 
고팠던지라 그 죽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웠다. 그리고 그는 궁전으로 돌아왔다.
  그 후 그 허름한 절간에서 맛본 흰죽 한 그릇의 맛을 잊을 수가 없었던 임금은 주방에 일러 죽
을 쑤어 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 죽의 맛이 어찌 절간에서 맛본 죽 맛이었을까.
  임금은 주방장을 불러 흰죽 끓이는 비법을 배워 오라고 일렀다.
  이튿날 주방장은 산골 절간으로  죽 끓이는 비법을 배우러 떠났다. 절에 도착한  주방장이 원주 
스님을 찾으니, 원주 스님은 조실 스님께 사실을 말씀드리고 주방장을 노스님 방에 안내했단다.
  노스님의 말씀은 간단했다.
  “시장이 반찬이니라.”
  궁에 돌아온 주방장은  조실 스님의 말씀을 임금께  그대로 전했다. 세조임금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아마 마음속으로 느낀 바가 많았으리라.

  원주의 소임

  해인사에서 원주란 직책을 반 년 남짓 맡아 한 일이 있었다.
  원주란 한마디로 절집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살림을 도맡아서 하는 소임을 말한다.
  봉은사에서 머물고 있던 나에게 천제  스님께서 해인사로 내려와서 살림을 봐달라는 부탁을 하
셨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즈음 나는 대래헌이라는, 법정 스님이 쓰시던 집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한 쌍의 공장비둘기를 
기르고 있었다.
  그 비둘기를 두고 떠나기가 무척 가슴이  아팠는데 후일 내가 떠나고 나서 그 비둘기도 어디론
가 가버렸단다. 거두어 주는 주인이 없으니 그들도 자기 살 도리를 취한 것일 게다.
  아무튼 그날로 송광사  불임암 법정 스님께, 스님의 다래헌을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더니
  “원주 소임이란 잘 살아야 되는 것인데... 오래는 하지 말고 한 철만 잘 지내고 다시 돌아오게.
” 하고 당부하셨다. 나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지만 그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성철 스님께서는 내가  서울 생활을 마치고 원주란 소임을 맡게  된 것을 대견스럽게 생각하시
며,
  “원주 노릇은 잘 해내야 한다. 잘못하면 욕먹는 법이야.” 하시면서, 이런 이야길 들려주셨다.

  옛날 어떤 스님이 원주란 소임을  맡게 되었는데 기름등 두개를 위아래로 준비하고 사용하였다
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로 등불을 켤  때는 위에 있는 등잔을 사용하고 절 일을 볼 때에
는 아래에 있는 등잔에 불을 켜서 사용했단다.
  만약 위의 등잔에  기름을 붓다가 흘리면, 절일로  사용하는 아래의 등잔에 기름이  떨어지도록 
해서, 조금도 개인적인 이익을 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옛 어른 스님들은 공과 사를 구분했다고 하셨다.
  원주의 소임은 매일같이 대구며 근처 시장을 누벼야 하는 장돌뱅이와 같은 생활이어서 때론 무
척 힘이 들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의 보이지 않는 힘이 어려울 때에 커다란 위안이 되어 주어 무사히 맡은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어느 비구니 스님의 출가기

  부산에서 살고 있던 어느 부인이 성철 스님의 법문을 듣고 출가하여 비구니 스님이 된 일이 있
다.
  나도 그 비구니 스님을 잘 알고 있었는데  그 스님 말씀이 자기는 꼭 스님이 되고 싶은 마음에 
어찌하면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될까 하고 궁리를 했단다.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린 두 아들이 두 살  터울로 있고 남편 또한 착실한 
불교신자인지라 부인이 절에 가서 기도하고 오는 것은 좋아했지만 막상 사랑하는 두 어린 아들과 
가정을 버리고 절로 가겠다는 생각에는 반대를 했다.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드디어  결심을 굳히고 남편과 담판 끝에 작은마누라를 얻어주기로 했단
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아이들이 제일 걱정이었다.
  그래서 정을 떼기 위해 마음을 굳게 먹고 매일 자기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매를 들고 때렸
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지만 한번 출가하여 부처님 곁에서 열
심히 공부하겠다는 결심은 아무도 꺾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친엄마라 해도 매일같이  매를 들고 때리는 엄마를 좋아할 아이들이 있겠는가.  결국 차
츰 정이 새엄마에게 쏠리자 이때다 하고 출가를 한 것이다.
  어린 두 자식을 두고 떠나온 엄마의  마음은 아팠겠지만 그의 투철한 구도 정신과 의지는 대단
했다.
  성철 스님은 그 비구니 스님을 두고 그 정도는 되어야 그래도 수도할 정신적 기초는 갖춘 것이
라고 말씀하셨다.
  수도자는 냉정하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굳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다.
  자꾸 뒤를 돌아보거나 이것저것에 마음을 쓰는  것은 도를 닦는 데에는 큰 장애가 된다고 늘쌍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자신의 지혜의  완성이나 깨달음만을 위해서라면 이기적인 집착이 되고 만
다.
  후에, 자신의 가족에게서 비롯된 희생을 이웃에 널리 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닦음이 아니겠는가.

  원효와 의상

  성철 스님은 해외엔 한 번도 나가시지 않는 것으로 안다.
  몇 번 외국에 나갈 불교계의 대표로 추천을 받았지만 스님은 번번히 사양하셨단다.
  어떤 물이 감로수인가?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말이 있다.
  천년 전 신라 시대의 두 선지식의 일화  중, 워낙 잘 알려진 원효와 의상, 두 분의 이야기는 이
러하다.
  신라 시대의 고승으로 유명한 두 스님은 멀리 당나라로 불법을 공부하러 떠나게 되었다.
  국경을 넘어 어느 벌판에서 밤을 만나 잠을 자게 되었는데 캄캄한 밤중에 갈증을 느껴 이곳 저
곳 물을 찾아 헤매었다.
  마침내 물이 담긴 바가지를 발견하여 마시고는 잠이 들었다.
  이튿날 해가 동쪽 들판에 솟아오르고 두 스님은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짐을 챙기다가 문득 눈
앞에 나타난 두 개의 해골을 발견하게 되었다.
  두 스님은 모두 심한 구역질을 느껴 구토를 하게 되었다.
  그때 의상 스님은 당나라로 계속해서 유학길로 떠났지만 원효 스님은 생각하게 되었다.
  그날 밤 그 바가지의 물은 그렇게 꿀처럼 달고 맛이 좋았는데 이튿날 해골에 담겨 있던 빗물이
라는 것을 알고 심한 구역질을 느꼈다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모든 것은 나의 마음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 길로 당나라
로 가려던 결심을 포기하고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참선하는 스님들의 노래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몽중이로다.
  천만고 영웅호걸이 북망산 무덤이요
  부귀 문장 모두 쓸데없다네
  황천객을 면할쏘냐?
  오호라 나의 몸이 풀 끝의 이슬이요
  바람 속의 등불이라 부처님이 이르시되
  마음 깨쳐 성불하여 생사를 벗어나라

  살불살조

  부처도 죽이고 조사(1종, 1파의 선덕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 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도 죽여라

  한 도인 스님이 어느 허름한 절간에서 하루 저녁 쉬어가게  되었다. 때는 엄동설한 추운 겨울이
라 몹시 눈보라가 치고, 모든 것이 얼어붙는 추위였다.
  방에서 참선을 하시던 스님, 밖에 나와 부엌을 살펴보았으니  땔감이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
았다. 문 밖을  둘러보아도 하얗게 쌓인 눈뿐, 온 천지가  설국인지라 어떻게 땔감을 구할 도리가 
없었다.
  밤은 점점 깊어지고 날씨는 더욱더 추워졌다.
  좌선삼매에 둘었던 누더기 차림의 스님은 다시 일어나서 주위를  살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탁
자 위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만든 불상뿐이었다.
  도인 스님은 시선을 그곳에 멈추고 잠시 바라보았다.
  한동안 목불을 응시하던 스님이 슬그머니 일어나 나뭇간으로 갔다.
  그리고는 도끼를 들고 와 나무로 만든 불상을 사정없이 두  동강을 내고서 아궁이 속에 넣었다. 
아궁이에서는 불이 활활 타올랐다.
  “아이구, 따뜻해서 살 것 같구나.”
  스님은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좌선삼매에 들어갔다.

  우리는 보통 눈에 보이는 형상만을 보고 판단한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에 집착한다.
  울긋불긋 보이는 형상에 마음을 두게 되면 중요한 본질은 잊어버리기 쉽다.
  성철 스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리 예쁘게 화장을 한 여인의 얼굴도 몇백 배로 확대시킬 수 있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
면 그 흉한 모습에 놀랄 것이다.”
  임제 선사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바른 견해를 얻고 싶거든 타인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말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성자를 만나면 성
자를 죽여라. 그래야만 비로소  온갖 얽힘에서 벗어나 그 어떤 것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하리
라.”

  길닦음

  길을 내었다.
  그만큼 땀을 흘리며 힘든  노동을 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돌을 깨고,  흙을 다지고... 백련암에서 
해인사로 오르는 길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좀더 잘 닦을 수 있을까 고심하였다.
  가끔 너무 힘들 때는 천제 스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투정을 부리기도 하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희랑대 근처에서 길 가운데에 일 미터 정도나 깊이 뿌리박혀 있던 돌덩어리를 만나게 되었는데 
길을 돌려 낼 것인가 아니면  그 돌을 깨야 할 것인가 궁리를 거듭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커다란 
쇠망치로 번갈아가며 그 돌을 깨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척이나 힘겨운 일이었다.
  하루, 이틀, 사흘 동안 우리 백련암 식구들은 그 바위를 두들겨서 결국은 길을 만들어 놓았다.
  나는 그때 맏상좌인 천제 스님의 고집과 집념이 역시 성철 스님을 닮았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성철 스님이 오르시는 등산로도 우리는 그렇게 길을 닦았다.
  담을 흘리고 일을 해보면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참으로 편안해진다.
  닦음이란 곧 수행이다.
  스님의 등산길은 백련암  뒷산에서 가야산 정상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끝난다.  그곳에서 스님이 
한동안 가야산을 바라보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산천은 오랜 세월 속에서도  변치 않는데, 그 안에서는 모든 생명이 태어나고  죽으며 한순간의 
정지도 없이 늘 변하고 있다.
  모든 생명은 유한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귀하지 않은 생명은 없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저마다 존재 이유를  갖고 있으므로 누구에게도 다른 생명을 해칠 권리는 없는 
것이다.

  독일에서 만난 원명 스님

  절집에서는 네 개의 그릇이 한 조가 되어 있는 발우라는 그릇을 쓰는데 수계를 하게 되면 은사
로부터 발우를 받게 된다.
  그 중 제일 큰 그릇은 밥그릇이다.  그리고 다음이 국을 담는 국그릇, 세번째가 반찬을 담는 그
릇이요, 그 다음이 천수물이라고 해서 맑은 물을 받아두었다가 공양이  끝나면 그 물로 깨끗이 씻
어서 버리고 밑에 가라앉은 지꺼기는 본인이 다시 마신다.
  그리고 그릇을 씻은 물은 항상 맑고 깨끗해야 한다.
  그만큼 음식을 깨끗이 먹어야 된다는 것이다.
  처음엔 그 물을 마신다는 것이 무척 불쾌했다.
  어느 때는 그릇을 씻은 물에 고춧가루  하나라도 남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윗자리에 앉은 나이 
든 스님들이 조사를 하기도 한다.
  이유인즉, 그릇을 씻고 버린 천수물을 아귀들이 마시고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귀는 목구멍이 
바늘구멍처럼 가늘단다. 만약  조그만 찌꺼기라도 아귀가 마실  경우엔 목에 걸려 고생을  하다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찌꺼기는 조금도 남김없이 깨끗이 먹어야 된단다.

  아는 스님 한 분이 들려준  이야기인데, 자신의 도반(함께 불도를 수행하는 벗. 도로써 사귄 동
무)이었던 어떤 스님이 시절 인연이 다 되었던지 환속하여 마을에서 아들딸을 낳고 잘 살고 있었
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절에 있을 때 발우 공양을  마치고 마시던 그 천수물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참말인지는 몰라도, 다시 절로 돌아왔단다.
  내가 독일 생활 중에 가끔은 뒤를 볼아보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어느 날, 함께 살던 원명 스님이 독일로 찾아왔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우리는 며칠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철 스님께 원정이 독일로 가서  살고 있다고 했더니, 처음엔 믿으려 하지 않으셨단다. 그때까
지도 설마 하셨던 모양이다.
  성철 스님은 가끔 환속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다시 마을로 돌아가더라도 열심히 살아야 돼! 천수물 맛을 못 잊어 다시 들어온 그런  사람처
럼 되지 말고”
  버스를 탔을 때 잘못  탄 것을 발견하면 빨리 내려서 원하는  목적지로 가는 차로 바꾸어 타야 
된다는 것이다.
  가끔 성철 스님을 찾아오는, 절집으로 치면 동생뻘 되는 처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열심히 
살아서인지
  “저 정도는 되어야 마을에 내려가 살아도 떳떳한 법이야.” 라고 말씀하셨다.
  어디에서 살든 자기의 중심을 잃지  않고 바른 자세로 살때, 그것이 곧 올바른 삶의  길이 아니
겠는가?

  일홍이란 호를 가진 아우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나같이 별볼일 없는 사람에게도 형님으로 모시겠다는 친구가 가끔 있다.
  `이종철`이란 친구도 그  중의 하나인데 우연한 인연으로  만나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전화를 
해서 내 마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루는 정중하게 친형님으로 모시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고 커다란 눈을 껌벅이면서 청을 해왔
다.
  솔직히 나는 누구를 형님이라고 불러 본 일도 없거니와 요즈음  사람들이 너무 쉽게 형님, 아우 
하다가 틀어지면 야,  자, 하고 흉보고 헤어지고 하는 것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던 터이라 나에게 
형님 될만한 자격이 없노라고 극구 사양을 했지만 하도 간곡히 이야기하는 것이 진심으로 느껴져
서 눈 큰 동생을 하나 두기로 하였다.
  그는 자동차 세일에는 전문가이다.
  무선전화기와 삐삐를 휴대하고  참으로 열심히 뛰어다니는 모습이, 어느 일에나  몰두하는 그의 
치열함과 성실함이 보기에 좋다.
  그것은 어김없이 나에게도 적용이 되었는데 일  년 동안에 자그마치 세 대의 자동차를 내가 사
도록 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의 공략은 참으로 집요했고 성공한 셈이다.
  그래서 나도 사회생활에서는 그에게  배울 점이 많다. 침이 튀도록 나에게 설교할  때면 귀여운 
동생처럼 친근함이 생긴다. 가끔  그 친구 특유의 세일즈맨 기질이 나오면 나는  사정없이 힐책도 
하고 듣기 싫은 소리도 마구 해주면서 그렇게 가까워졌다.
  그래도 요즘 사람 같지 않게 선배를 깍듯이 모실 줄 안다.
  그가 소처럼 커다란 눈을 껌벅거리면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면 그 천진한 표정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한 점의 붉은 점으로 떠올라 대낮의 태양처럼 빛나라는 뜻으로 일홍이라는 호를 내가 지어주었
다.
  늘쌍 바쁘지만 가끔은 외로움을 느끼는  일홍이 언젠가는 떠오르는 해처럼 자신의 전성기를 맞
이할 것을 기대해 본다.

  곡차와 술

  세상을 살아가면서 술 한두 잔  마셔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술에 얽힌 
사연들은 참으로 많다.
  조선 시대의 스님으로 진묵 스님이란 분이 있다.
  7세에 전주 서방산 봉서사에서  출가하여 내전을 배울 적에 한번 보기만 하면 외웠다  하며, 봉
곡 김동준과 더불어 우의가 좋았다.
  한번은 봉곡이 <통감>한 질을 빌려 주고 동자로 하여금  따라가게 하였다. 스님이 길을 가다가 
한 권씩 빼보고는 길에 던지는  것을 동자가 주워 모았다. 그리하여 절까지 가는 동안에  한 질을 
다 보았다 한다.
  후에 봉곡이 책을 던진 일을 물으니
  “고기를 잡고는 통발은 버리는  것 아닌가!” 하였고, 봉곡이 한 권씩  내어 시험하니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박식하였고, 신기한 기화를 많이 남긴 스님이다.
  그분에게도 술에 얽힌 일화가 있는데 한번 들어 보기로 하자.
  그는 술을 즐겨 마시는 스님이기도 했는데 절대로
  “스님, 술 한잔 하십시오” 하면 들지 않으셨단다.
  “스님, 곡차 한잔 하십시오” 라고 해야만
  “응, 그래” 하고 드셨단다.
  절집에서는 옛날에 곡차를 담아서 일하는 일군에게 중간참으로 내곤 했던 모양이다.
  진묵 스님께서 때를 놓칠세라 공양간에서 곡차 거르고 있는 곳으로 다가오셨다.
  “자네, 하고 있는 일이 뭐야?“ 라고 물어 보셨것다.
  때마침 젊은 스님은 장난기가 발동하여
  “네, 스님. 술을 거르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응, 그래?”
  스님께서는 입맛을 다시면서 되돌아갈 수밖에.
  다시 마당을 한 바퀴 빙 돌고 와서는 젊은 스님에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뭐야?”
  “네, 술을 거르고 있습니다” 하고 시침을 뚝 떼고 대답을 했단다.
  “그래?”
  그리고 또 진묵 스님은 되돌아서 가셨것다.
  그때 옆에서 함께 일하던 다른 스님이 나무라면서
  “아니, 큰스님을 그렇게  놀리시면 됩니까?” 하고 책하였단다.  그제야 젊은 스님은 `내가 좀 
심했구나` 싶어서 미안하던 차에 다시 큰스님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오셨다.
  “여보게, 지금 거르고 있는 게 뭔가?”
  “네, 스님. 지금 곡차를  거르고 있사옵니다” 하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응,  그래?” 하
시면서 곡차를 커다란 바가지에 가득 퍼서  그 자리에서 벌컥벌컥 마시는데 젊은 스님은 턱이 빠
져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단다.
  술과 곡차.
  어떻게 보면 같은 말이다. 그러나 분명 차와 술은 다르다.  진묵 스님은 술을 들지 않으셨다. 차
를 드신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맑아야 한다.
  옛말에 마음은 그 사람의 거울이라고 했다.
  술를 마신 사람과 차를 마신 사람은 분명 다르리라.
  열고 닫음이 분명한 진묵 스님은 술이 아닌 차를 드신 것이리라.

  인연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헤어지곤 한다.
  지구상의 많은 인구에 비해서 어쩌면 우리는 너무 적은 수의 사람을 만나는 것일 수도 있다.
  악연이든 필연이든 여러 종류의 인연이 있다.
  인연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과연 전생의 업이 금생의 인연을 만드는 것인가? 인연에 얽인 옛이야기를 하나 들어보자.
  한 부자가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이 모든 영화를 누리면서 예쁜 부인과 살았단다.
  어느 날 부인이 대문 밖에서 그릇을 팔러 다니는 행상과 눈이 맞아 도망을 가버렸다.
  부자는 너무나 황당했다.
  아니, 내가 그녀를 그렇게 행복하게 해주고 아쉬울 것 없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해주었거늘 
나를 버리고 도망을 가 버리다니! 그것도 나보다 나은 사람도 아니고 행상을 하는 비렁뱅이와  함
께!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났지만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 그것이 화두가 되어 도를 닦게 되었다.
  “어째서? 왜?”
  의심의 깊이가 깊어지자 그만 그는 도를 통하게 되었다. 도을  깨치고 보니 그의 전생이 보이더
란다.
  그리고 그는 놀랐다. 자신의 전생은 열심히 참선 공부를 하던 수도승이었다.
  열심히 수도 정진하던  그 수도승이 한 해 겨울,  누더기 속에서 화두에 잠긴 자신을  방해하던 
이 한 마리를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그것이 그의 부인이었다.
  공부 중 하도 가렵기에 누더기  속을 뒤져서 이를 잡아 밖으로 가지고 나온 수도승.  때마침 하
얗게 내린 눈 속에서 그 이를 살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철만 내 누더기 속에서 보내고, 봄이 되면 그때 너를 놓아주리라.”
  그리고 그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겨울을 보냈다. 봄이 되고 해제를 한 수도승은  만행을 떠나게 
되었다.
  커다란 바위 및 나무 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던 그는 겨드랑이 속에서 꼬물대던 이가 생각
났다. 그래서 누더기 속에서 이를 찾아내어 보니 제법 콩알만한 크기로 자라 있었다.
  그제야 그는
  “너의 갈 길로 가거라!” 하고 이를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길을 떠났다. 때마침 산에서 맷돼지 한 마리가  휴식을 취하러 어슬렁어슬렁 내려와서
는 수도승이 쉬다 간 바위 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 이는 털이 긴 통돼지의 등으로 기어올라갔다. 
그리고 그 맷돼지와 함께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그때서야 부자는 모든 것을 알게 되어
  “아, 그렇구나! 나와는  인연이 끝난 것이구나!” 하고 그  떠돌이 행상을 찾아서 많은 재물을 
나누어주고 그들의 행복을 빌었다고 한다.
  헤어짐도 만남도 인연이라면 우리는 모든 인연을 소중히 여겨야 하리라.

  장암리 아이들

  가을이 물들어 가는 산과 들을 바라보며 나의 작은 네 발 달린 차가 내리막길을 서서히 내려가
고 있었다.
  좁은 길이라 차가 서로 비켜 가려면 속력을 낼 수가 없다.
  길 가운데 초등학교 일학년짜리 계집아이 네 명이 웅크리고 앉아서 무언가를 먹고 있다가 황급
히 치마 뒤로 숨기면서 우르르 길 가장자리로 물러서서 내 차를 바라본다.
  얼굴은 가을날 잔뜩 도토리를 물고 있는 다람쥐모양 양쪽 볼이  부풀어 있고, 입 가장자리는 거
뭇거뭇 흙이 묻어 있었다.
  백 미러로 바라보니  한 손에 하나씩의 무가 치마  뒤에 감춰져 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배들이 출출했었나 보다.
  얼마나 정겨운 모습들인가. 이제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나의 눈은 갑자기 안개가 낀 듯이 뿌옇게 흐려 온다.
  무를 뽑아 먹다 뒤로 감추는 그 동심이 나의 마음을 촉촉히 적신다.
  우리 동네는 장암2리다. 장암리는 1리와 2리로 나뉘어 있다. 1리에는  사십여 호의 집이 있고, 2
리에는 이십여 호의 농가가 있다.
  나는 이곳에서 4년째 살고 있다.
  모든 것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초고속으로  치닫는 현대에, 일류 백화점에  60% 이상의 
매출을 올려주는 주요 고객인 10대들의 과소비의 나라에서, 그래도  아직은 그렇게 순수한 아이들
이 있다는 것이 감동으로 전해 온다.
  그래, 그래도 코카콜라나  햄버거의 외래 문화에 젖은  도시의 아이들보다 건강한 모습의  시골 
아이들의 모습에서 한국인의 순수하고 튼튼한 뿌리가 자라고 있음을 본다.

  내가 만난 만법 스님

  사람은 누구에게나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다. 또 서로 존경하는 선후배가 있다.
  나에게도 많지는 앉지만 아끼는 몇몇 선후배가 있다.
  절집 안에서도 아래위는 분명하다. 오히려 군대 못지 않게 밥그릇 수를 가지고 따질 때도 있다. 
절집의 법도는 냉정하다. 더욱이 나처럼 다시 속가로 환속한 경우엔  그 바라보는 시각이 곱지 않
다.
  여주에 목아 박물관이란 곳이 있다.
  어느 날 볼일이 있어서 그곳을  찾았다. 이층 관장의 방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는 두  명의 스님
이 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 한 스님이 황급히 일어나더니 나에게 넙죽 큰절을 하면서
  “원정 스님 아니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함께 맞절을 나누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그 스님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해인사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하며 예전의 나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주어 생각이 나긴 
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그렇게  서슴없이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훌륭한  수도자의 자
질을 갖추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날로 우리 집에 쫓아오고 그 후로 몇 번의 방문, 가까이 하여  보니 그는 참으로 소탈하고 청
빈한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진정한 자존심의 소유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겸손함이 그에게 배어 있어서 존경스러웠다.
  가끔은 소식을 보내  오더니 지금은 어디에서 정진  중에 있는지. 아무쪼록 세상을  정화시키는 
맑은 수도자가 되길 빈다.

  명당 자리

  날이 가물어 공기가 몹세 메마르고 상추며 쑥갓이 목말라한다.
  논바닥이 바싹 마르고 저수지의 붕어들이 여기저기 산소 부족으로 배를 내놓고 물위에 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북쪽 하늘이 회색으로 짙어지더니 날씨가 심상치 않다.  빗방울이 후두두 떨어지더니 이
내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비가 산천을 두들겨 댄다.
  아! 고마운 비여!
  한동안 쏟아붓던 비가  비포장도로의 길들을 군데군데 파놓고  흙탕물이 이곳 저곳에서 쏟아져 
내려온다.
  꼬불꼬불 산자락을 따라 얼마나 갔을까.
  마침내 네 발 달린 이 시대의 필수품은 더 이상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멈춘다. 하늘과 땅이 
마주 닿을 듯한 착각 속에서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조용히 안개가 굽이굽이 산을  감아 돌
아가고 소나기는 언제 내렸느냐는 듯 조용해지며 실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서니 안개비가 나의 몸을 감싸고 마침내 피부조직들이 한기를 느끼게 한다.
  감촉만으로도 첩첩산중임이 느껴지는 곳.
  이렇게 하늘이 가까이 닿아 있다는 느낌은 처음이다.
  미륵이 솟아나올 것만 같은 땅. 마음이 아득해지는 곳.
  이런 곳을 소위 명당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땅. 땅은 어느  누구의 것도, 그리고 그 누구의  소유여서도 안 된다. 누구든지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는 곳. 떠날 때는  언제고 떠나야 하는 곳이 땅이거늘. 나를 조용히 감싸  안아주는, 내 딸래
미의 품속 같은 땅. “이 땅은 내 땅이다~”라고 아무리 소리쳐 본들 땅은 대꾸도 없다.
  땅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이 순간처럼 영원히 여기 머물 것이다.
  어리석은 인간만이 그  땅을 소유하고자 기를 쓰고 악다구니를 하다가  막상 죽고 나면 한줌의 
흙이 되어 돌아간다.
  소유란 무엇인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백로야! 백로야!

  작년 여름은 수십 년 만에 찾아온 무더위였다.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산과 바다로 피서를 떠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떠나
고 난 자리가 어떠할까 걱정이 앞선다.
  대부분의 피서객들이 떠난 후에 남기는 쓰레기 때문에 우리의 강산은 병들어 가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누리고 있는 우리는 왜 그런 것에 무감
각한 것인가.
  자연을 훼손하고 나면 다시는 순수한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잊는
다.
  우리 집 근처에 신접리라는 마을이 있다.
  그곳은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백로와 왜가리 떼의 서식지이다.
  봄이면 바다 건너 수만 리를  날아와 집을 짓고 알을 품는다. 비바람을 견디고 새끼를  낳아 그
들을 훈련시켜서 모두 함께 가을이 되면 장관을 이루며 떠나는 모습.
  올해는 웬일인지 그 서식지에 그들의 자취가 없다.
  예년에 수없이 많은  백로가 나뭇가지에 가득히 내려앉아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이른 봄 
목련나무에 꽃봉오리가 터지기 전의 모습처럼 아름다웠는데...
  썰렁한 그들의 터전을 보면 우리들 탓이 아닐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작년에 너무 농약을 많이 쳐서 먹이가 없어진 건 아닐지?
  하얗게 하늘을 메우며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날아와 앉아 있던 장관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걱정하고 관심을 가지고 대책을 마련하는 적극성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장마가 다가올 때가 되면 우리는  수많은 개미 떼의 이동을 볼 수가 있다. 그러고  나면 어김없
이 큰비가 내린다.
  백로가 오지 않는 이유가 올 여름은 한국  땅이 유달리 더울 것을 직감으로 미리 알고 임시 다
른 곳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기를, 영영 이곳을 포기한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내년 여름에는 그 아름다운 옛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예감은 아무래도 씁쓸하다.

  두꺼비의 추석 나들이

  추석을 이틀 앞둔 날로 기억된다.
  여주읍에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날 따라 명절을 앞두고 마음이 착찹했었는데 길가의 코스모스는 앞을 다투어 피어 있었다.
  바로 내 앞에는 대형  트럭이 질주하고 있었다. 차도의 무법자로 여겨지는 큰  트럭이 위협적으
로 느껴져서 나는 속도를 늦추어 간격을 두고 달렸다.
  그런데 신륵사 입구를  지나고 다시 오르막길을 올라 S자로 구부러진  내리막길에서 막 속도를 
내어 내려갈 때쯤이었다.
  앞서가던 큰 트럭이 갑자기 중앙선을 침범하더니 다시 제 차선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깜작 놀라 브레이크에  발을 올려놓았다 떼면서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또  한번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차도 오른편의 논에서 왼쪽 산자락으로  커다란 두꺼비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무단횡단을 하
고 있는 것이 아닌가.
  피해 가면서 백 미러로 두꺼비가 무사히 횡단하는 모습을 보자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앞을 보니 대형 트럭은 원주 방면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북내면 쪽으로 계속  달리면서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왔다. 그리고 그 트럭  운전기사의 행
동이 신선한 충격으로 느껴졌다.
  하찮게 보면 별것 아닌 두꺼비 한 마리를 위해서 그렇게 곡예 운전을 했구나 생각하니 그의 생
명에 대한 외경심에 고개가 숙여졌다.
  처음 그 트럭의  곡예 운전에 당황하고 놀랐던 마음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울적했던 내 마음도 
즐거워졌다.
  흔히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개, 고양이, 다람쥐, 들쥐  등 수없이 많은 짐승들이 차도에서 말없
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늘 `광명진언`을 외워 준다.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 무드라 마니 파트마 즈바라프라 바후타야 훔.”
   좋은 인연으로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뜻이다.
  언젠가 나는 동네 강아지가 갑자기 차도로 뛰어들어오는 바람에 사고를 낸 일이 있었다.
  그날은 내내 마음이 아팠었다.
  사람들이 차를 몰고 다니다 보면 본의 아니게 많은 생명들을 해치게 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두꺼비를 피해서 가듯 그 트럭의 운전기사처럼 곡예 운전으로 생명을 살릴 수
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조그만 생명일지라도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마음속으로 광명진언을 외우주자.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 무드라 마니 파트마 즈바라프라 바후타야 훔.”
  죄를 짓고도 죄인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세 번씩만 외워서 억울하게 죽어 간 생명들을 위로해 주자.  모든 것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되
나니.

  검정 고무신 한 켤레

  강을 끼고 얼마나 달렸을까.
  마음이 편치 않을 땐 이렇게 해서 기분을 달래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소나기가 내리고 난 후의 남한강은 싱싱하고 힘이 있어서 좋다.
  다시는 버스가 올 것도, 설 것도 같지 않은 버스 정류장의 표지판, 그 시골의 버스 정류장 표지
판은 언제 만든 것인지 녹이 슬 대로 슬어 있어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이끌린 것인가?
  차를 세우고 한 길이나 넘게 자란 억새풀을 헤치면서 강가로  내려갔다. 강가의 얕은 물 속에서 
이리저리 먹이를 찾아 헤매던 흰 왜가리 한 마리가 점잖게 걸음을 몇 발자국 옮기더니 나를 보고 
긴 날개를 펴고 하늘로 치솟아 날았다가 다시 저만큼에서 강위로 내려앉는다.
  강가에 길게 만들어진 밭에서는 풋토마토가 탐스럽게 열려 있고,  얌전하게 콩밭도 매어져 있었
다.
  말뚝에는 검정 고무신 한 켤레가 얌전하게 놓여 있다.
  그것은 아주 낡은 고무신이었다. 모서리의 해어진 부분은 검은 테이프로 땜질이 되어 있었다.
  저쪽 밭고랑 가운데에서 돋보기를 쓴, 칠십대로 보이는 노인 한  분이 조그리고 앉아 있다가 한 
손에 그린소주병을 들고 일회용 컵에 따라 한 모금 마시고  나를 돋보기 너머로 바라보신다. 비닐 
봉지 속에서 오징어 다리를  찢어 안주로 씹으시면서 다시 나를 유심히 쳐다보신다.  어디서 땅이
나 사러 온 투기군쯤으로 여길까 봐 나는 얼른 “이곳 경치가 좋아서 그냥 구경 좀 하려구요”라
고 말문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그제야 “그러면 소주 한잔 하시겠수?” 하시기에 나도 모르게 소주잔에 오징어 다
리 하나를 얻어서 쥐고 말았다.
  콩밭 매던 그 시골 노인은  경치와 땅과 모든 일에 무관해보였다. 목 좋은 땅도  그 노인에게는 
콩밭일 뿐. 그래, 그래서 이곳이 더욱 평화로워 보이는지 모르겠다.
  날마나 늘어나는 횟집이며 목 좋은 식당, 휴게소가 이 근처에  있었다면 나는 아마 억새풀을 헤
치고 이곳 강가에 내려오지 않았으리라.
  어떤 투기꾼이 욕심을 내어도 그런  순박한 농부들이 이런 곳을 언제까지라도 고집스럽게 지켜
주길 기대하는 것은 욕심일까?

  글을 맺으며

  오늘 새벽엔 이상한 꿈을 꾸었다. 험악한  절벽이 있고 낙엽이 쌓인 깊은 산 속. 그곳에서 나는 
호두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그 호두나무 가지를 흔들었더니 수없이 많은 호두가 땅에 떨어졌다.
  벼랑을 내려가서 호두를 주우려고 하자, 나무에서 떨어진 호두는  온데간데없고 포장이 된 여러 
가지 선물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장난감도 있고, 책도 있고, 붓도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두 권의 책이 오색실로 묶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뻐하며, 그 책을 성철 스
님께 가져다 드리려고 하였다.
  그리고는 잠에서 깨어났다.
  이 두 권의 책을 받아 보시면 성철 스님은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부처님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려 하신 성철  스님의 모습을 통하여 많은 이들이 귀한 교훈을 얻
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미숙한 글쓰기를 마감하려고 한다.

  원정

  1969년 해인사 백련암 입산 성철 스님 곁에서 시자 생활, 해인사 사무장. 청량사 주지
  1983년 환속 독일 카셀 국립 조형 미술대에서 6년간 수학. 디플롬 취득

  개인전
  1979. 엘칸토화랑. 서울
  1980. 덕수미술관. 서울
  1982. 현대미술관. 대구
  1986. 갤러리 M초대전. 독일
  1988. 세 테라세 아우에. 독일
  1990. 출판문화회관. 서울
  1992. 한국문화원. 동경
  1993. 대한민국 총영사관 화랑. 오사카
  1994. 대우자동차 초대전.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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