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완] 우리말의 상상력(2)
우리말의 상상력.2
-어머니, 그 거룩한 영혼의 그림자
정 호 완
차 례
1. 강은 우리의 어머니
금강, 그 영원한 어머니
압록강과 오리
낙동강과 가야
연구산의 돌거북
신령한 우물
가장 크고 좋은 강, 한강
한강의 뿌리, 우통수
메밀꽃 필 무렵의 가람과 뫼
두만강과 조선왕조
대동강과 한겨레
영산강과 용
섬진강과 두꺼비
백마강의 뒤안
빛나던 강과 언덕의 성채
어사매, 그 가로지름의 속내
비파처럼 아름다운 금호강
강과 삶
강을 건너며
2. 태양숭배와 곰신앙
어머니와 곰신앙
팔공산은 믿음의 터
임과 해우러름
스승은 거룩한 교황
옛 조선의 맥, 춘천
조선의 소리 보람
아사달과 쇠그릇 문화
마니산과 하늘신
새로움과 관동
치악의 말미암음
말 달리던 선구자
죽령과 모죽지랑가
지리산과 파랑새의 꿈
소리란 무엇인가
해의 소리상징
말하는 남생이
어머니, 아무래도 당신은 멀리 계시옵니다
달홀과 가라홀의 어우름
곰신앙과 땅이름
3. 생명의 말미암음
물과 불의 만남 - 생명의 기원
목숨과 어우르기
밥이 하늘
몸과 묶음
옷이 날개인가
겨레와 하나되기
집과 수풀
금 캐는 마동
울안의 복숭아나무
기다림의 미학
고향의 봄은 어디에
황소 개구리
4. 믿음이 깊은 곳에
금란굴과 지모신(地母神)
마음의 귀
처용의 노래
원왕생(願往生)의 그리움
길 쓸 별의 노래
도솔가의 뒤안
경덕왕과 찬기파랑가
고리 모양의 어우름, 한라산
들온말 쓰기와 말글 한 누리
웃으면 젊어진다고
술과 푸닥거리
꽃 이바지
돌아간 누이를 위한 노래 제망매가
빌면 무쇠도 녹나
믿음의 소리갈
굴살이와 굿
죽음의 소리 상징
나라 사랑의 꽃, 무궁화여
바람의 노래 -- 풍요(風謠)
새와 산, 태양숭배의 고리
1. 강은 우리의 어머니
금강, 그 영원한 어머니
압록강과 오리
낙동강과 가야
연구산의 돌거북
신령한 우물
가장 크고 좋은 강, 한강
한강의 뿌리, 우통수
메밀꽃 필 무렵의 가람과 뫼
두만강과 조선왕조
대동강과 한겨레
영산강과 용
섬진강의 두꺼비
백마강의 뒤안
빛나던 강과 언덕의 성채
어사매, 그 가로지름의 속내
비파처럼 아름다운 금호강
강과 삶
강을 건너며
금강(錦江), 그 영원한 어머니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푸장사 울고 간다.
물밀어 들어오는 외세에 대항하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마지막 덜미를 잡힌 곳이
바로 금강이 북서로 휘돌아 가는 공주의 우금치 고개. 다만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지는 노을에 외로울 뿐이다. 금강가에 살면서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던 신동엽
시인도 곰의 전설과 함께 강물 소리 속에서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물굽이이듯
우리의 땅을 안아 돈다.
금강의 본 이름은 웅천하(熊川河)였다. 공주의 동북 5리 쯤에서 흐르며 그 근원
은 전라도 장수(長水)의 물갈래 고개에서 갈라져 북으로 흘러 진안의 용담, 무주,
금산, 영동, 옥천, 회덕을 거쳐 공주에 이른다. 공주의 북쪽을 고리 모양으로 안고
흘러 정산, 부여에 이르매 여기서는 그 이름을 백마강(白馬江)이라 한다. 다시 석
성, 은진, 임천, 한산, 서천을 지나 진포(鎭浦)로 가서 바다로 든다. 그러니까 전체
모습이 낚시 갈고리처럼 흐른다. 해서 고려조의 왕건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공주 금강 이남의 사람들은 강의 모양처럼 마음이 갈고리져 있으니까 인재 등용
을 삼가하라는 말씀. 아니 강이 뻐드렁니이면 어떻고 용의 모양이듯 뒤틀렸으면
어떤가.
별 수 없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지역 감정을 말뚝 박은 것이다. 한 나라의 지도
자가 이러고서도 나라가 평안하기를 바랐던가. 한심한 일이다.
'금강 -- 웅천 -- 곰내'로 그 걸림을 생각하면 '곰'에서 그 이름들이 지어졌으
며 공주의 공(公)도 곰에서 비롯했음을 알 수가 있다. 본디 곰(고마 구무(굼))은 말
끝에 기역(ㄱ)이 붙는 말이었으니 자음접변을 따라 공이 되었을 것이요, 짐승으로
서의 곰보다는 귀공(公)을 쓰는 것이 훨씬 모양새가 좋아서 공주로 고쳤을 것으로
보인다. 곰이 무슨 까닭으로 땅이름에 끼어 들었을까. 지금은 아득한 옛 일로 우
리의 정서에서 멀어졌으나 본디 곰은 사람의 조상으로 떠받들어졌던 경배의 대상
이었던 까닭에서이리라.
곰에 대한 믿음은 역사 이전의 때로 거슬러 오른다. 믿음의 분포는, 한반도는 물
론이요, 동북아시아, 시베리아를 비롯해서 북미에까지 걸쳐 있다. 동북아시아, 시베
리아 지역의 경우, 곰신앙은 대략 신석기 시대로 미루어 잡는다. 시베리아에서는
곰신앙을 보여 주는 곰의 상(熊像)들이 여기저기에서 출토된 일이 있다. 지금도
흑룡강 둘레의 아무르 강가에서는 나무로 만든 곰상을 숭배한다고 한다. 금강에
얽힌 곰전설은 말할 것 없고, 그 뿌리라고 할 삼국유사 의 고조선조에 나오는
곰계집(熊女)에 대한 이야기도 모두가 곰신앙의 한 거리로 보아 좋을 것이다.
공주의 웅진동에서 나온 돌곰은 무녕왕릉 주위에서 길목의 밭주인 이씨가 처음
으로 보아 갈무리 하던 것을 1972년 공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은 것. 돌곰이 나온
곳은 왕릉이 있는 신성한 곳이다. 부근에 백제의 옛 무덤들이 있음을 고려할 때,
곰상은 백제 때 만들어 제사 드리는 숭배의 상징으로 썼을 것이다. 마치 절에서
불상을 놓고 예배하듯이 말이다.
곰나루에 가면 지금도 솔숲에는 곰을 제사하며 모시던 웅진단(웅진사熊津祠) 터
가 있다. 공주군지 를 따르자면 여기서 웅진의 물신 제사를 제사하였으니 향교
에서 제사 비용으로 매년 베 54자를 이바지하였다는 것이다. 한일합방 이후에 제
사를 지내지 않고 사당도 무너지게 되었다는 것. 지금은 다시 지어져 외로운 영혼
을 달래고 있다.
곰을 '고마'라고도 한다. 한데 신증유합 을 보면 고마(곰)가 경건하게 숭배
해야 할 보람을 풀이하였으니 곰신앙은 역사적으로 끊임없는 하나의 흐름을 이어
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금강은 곧 고마강 또는 곰강이랄 수가 있다. 하면 고마(곰)
의 소리상징은 무엇인가. 뒤의 '어머니와 곰신앙'에서 살펴 보았듯이 고마(곰)는
곰신앙을 드러내며 마침내 소리의 바뀜을 따라서 어머니가 되었다. 수렵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정착하면서 곰의 상징은 다름 아닌 땅과 물 -- 지모신으로 떠 오른다.
결국 곰(고마)의 동물상징이 곰에서 거북(검水神)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물신과 고마(곰 검)
삶의 원초적인 가능성은 물에서 비롯된다. 물이 없는 곳에 생명 현상은 없다.
농업생산이 산업의 중심을 이루던 때는 실로 강물이나 샘이란 신의 축복이요, 그
런 물신이나 땅신은 우러러서 마땅하다. 마침내 물의 신은 임금이 받들어 모시는
가 하면 지방의 벼슬하는 이들도 농사 때에 비를 오게 하는 등의 제사를 모셨다.
해서 임금은 용이 그려진 옷이나 그릇을 쓰는데 여기 용은 바로 물을 다스리는
신으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용과 함께 북방 또는 물을 다스리는 신을 가리키는 짐
승이 거북이다. '거북'이란 말은 '거미(거무)'에서 왔다. 이는 이미 앞서 캐어 본
살핌을 따르기로 한다(박지홍(1952) 구지가연구).
경남 양산지방의 왕거미 노래에서 '거미'가 그러하고 땅이름에서도 그렇다.왕거
미는 거북을 뜻하며 곰(고마)의 또 다른 변이형이다. 한반도의 땅이름 가운데 곰
(고마)계와 검(거미龜)계의 이름이 널리 분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들이
물신임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어 보자.
('곰(고마)'의 이야기)
㉮. 암콤은 고기잡는 어부를 데려 가서 굴 속에서 함께 살았다. 새끼곰 두마리
를 낳고서 별 일 없겠지 하고는 바위문을 열어 놓고 사냥을 갔다 와 보니 어부는
도망치고 새끼들만 있었다. 어미곰은 새끼를 데리고 물 속에 빠져 죽었다는 것.
해서 사람들은 이 나루를 곰나루(고마나루)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로 까닭없는 풍
랑으로 배가 뒤집혀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어 강가에 제단을 모셔 곰을 제사하였
다(충남 공주).
㉯. 섬진강의 동방천에 곰소라는 곳에 물 위로 바위가 솟아 징검다리마냥 놓여
있어 곰의 다리로 불리워 진다(전남 구례).
㉰.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사람의 부녀자를 빼앗은 죄 막심하다. 너
만일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널 잡아다가 구워 먹겠다(수로부인(水路夫人)).
㉱. 왕핑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산으로 겨우 피했다. 이어 암콤에게 붙잡혀
굴속에서 함께 살게 되어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 암콤이 마음 놓고 나간 사이에
왕핑은 배를 타고 굴을 벗어나게 되었으나 곰은 필사적으로 따라 왔다. 왕핑은 바
다의 신에게 기도를 드려 무사히 돌아왔으며 그 뒤로 물신의 사당을 지어 경배하
였다(중국 후민 마을).
중국의 후민 마을의 후민도 '고마(고모)'에서 비롯하였음을 고려하면 보기로 들
은 땅이름은 모두가 곰과 걸림을 둔 이름이다(koma(komo) -- homa(homo) --
oma(omo)). 생각해 보면 곰신앙 중심의 사회에서 벗어나 농경생활로 접어 드는
사회의 특성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한다. 소리는 비슷한 고마(곰) -- 거미(검)이지
만 동물상징이 벌써 거북으로 혹은 용으로 바뀐 것이다. 물이나 곰이 여성으로 드
러남은 선사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낯 익은 모습이다. 만씨족들은 곰을 '숲의 여인
산의 여인'으로, 돌칸족들은 곰이 본디 여성이었다고 본 것이다. 이같은 생각은 시
베리아의 여러 민족들에게서도 널리 퍼져 있다. 물이 생명의 어머니임은 여성이
갖는 속성과 다를 바가 없다.
바슐라르를 따르자면 물은 재생이며 영원한 사랑이요, 죽음의 상징이란 것. 하긴
물과 불(태양)이 어울려 너울대는 삶의 말미암음을 빚지 않는가.
앞서 왕건 태조의 풀이처럼 금강이 갈고리처럼 생겨서 사람들의 마음이 잘못
되었다고 함은 되돌아 볼 아무런 그 무엇도 없다. 오히려 어미닭이 새끼를 품에
안듯 우리의 뭇 가람들은 어머니이듯 우리를 감싸 돌아 흐른다. 그 푸르른 몸짓으
로, 목소리로. 하여 금강은 곰신앙을 드러낸 한국인의 고향이요, 정서적인 샘줄기
인 셈이다.
고려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하여 공주에서 피란을 하였다. 이 때 지은 글을
소개하고 마무리를 하면 어떨까.
일찍이 남쪽에 공주가 있음을 들었노라
신선의 지경이 예나 지금도 영원히 아름다운 것을
여기 당도하니 푸근한 마음이어라
뭇 사람들이 온갖 시름을 놓겠구나.
압록강과 오리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삼수갑산(三水甲山) 가는 길은 고개의 길
(김소월의 '산(山)'에서)
눈 덮인 산과 끝 없는 고갯길을 새들이 힘겨워 울고 넘는다.
삼수갑산(三水甲山). 본 이름은 갑산의 삼수이다. 산이 깊고 험하여, 물 때문에
깊고 깊은 산골의 부름말로 쓰인다. '에라 모르겠다 내일 삼수갑산을 갈망정 오늘
하고 만다는 식'. 삼수(三水)는 백두산 천지에 샘을 둔 압록강의 또 다른 이름이
기도 하다. 오리의 머리처럼 물이 유난스레 푸르다. 해서 압록강이란다(水色似鴨
頭). 하늘도 산도 그 사이를 흐르는 압록강도 푸르다 해서 청하(靑河)가 되었을까.
푸른 산빛에 물든 청산이 어디 압록강뿐이랴.
한자를 글자의 소리로 읽을 수도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중국말로는 압록을
'알루'라 한다. 한강을 달리 아리수(阿利水)라 하거니와 알맹이의 '알'과 같은 뜻
으로 새기기도 한다. 한편 오리압(鴨)의 오리를 따서 읽을 수도 있다. 통감집람
주(註) 에서는 '오라(烏刺)'로 적고 있다. 정인보(1941)는 조선사연구 에서 압
록강과 송화강을 '아리가람'으로 읽었거니와 천소영(1990. 고대국어의 어휘 연구)
에서는 '아래 앞 남쪽'의 공간적 방위로 다시 '아리'는 시간적 개념으로 전의되었
다(멀다 길다 어제)고 풀이한다.
글쓴이는 압록강을 고유한 우리말로 당시의 '오리강'으로 읽었을 것으로 상정
한다. 오리는 중세국어에서 '올히(신증유합 상12)'였다. 이 말을 잘게 쪼가르면
'올(ㅎ)'에 사물 접미사 '-- 이'가 녹아 붙어 이루어진 말이다. 하면 '올(ㅎ)'은
무슨 뜻일까.
높게 솟아 오르는 움직임을 '오르다'라고 한다. 중세국어에서는 오르다를 '올다
(上)(석보상절 6 3)'로 적기도 한다. 이제 '오리 올'이 '위'임을 앞 세워 '오리'
를 풀이해 본다. '올'이 위니까 오리는 '물 위에 떠 있는 새'란 뜻이 되지 않는
가. 그러니까 압록강은 오리강이요, 오리가람은 '위강' 또는 '머리가람'이란 말이
된다. 790키로. 거의 2천리가 되는 한국에서 제일로 긴 강이요, 백두산에서 흐르니
제일 높은 강이 될 밖에.
옛부터 압록강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워 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을 따르
자면, 압록강 압강 청하 용만(龍灣) 마자강 패강의 이름이 적혀 있다. 패강의 경우,
대동강 부분에서 살펴 보았듯이 중국과 경계를 이루는 한국의 내(韓水名)를 속으
로 풀이하였다. 마자강 또한 예외는 아니다. 우리말로 '맏이강 -- 맏강(머리강)'이
아닌가 한다. 한자의 뜻으로 보아도 그러하다. 마자의 '자'가 '한계선'을 뜻하는
것인데 중국과의 경계임을 알 수 있다. 김기빈(1990) 에서는 ‘마'를 남쪽으로 보
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물로 풀이하였다.
그럼 용만(龍灣)의 경우는 어떠한가. 큰 산이나 강이 있으면 그와 걸림을 보이
는 이름이 많이 있다(예> 한강 한양 한양대학교 남한산성 등). 마찬가지로 용
만은 구룡연(九龍淵)의 용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용신앙과 관련한 용계열
의 이름은 흔히 있다. 용만을 그대로 용틀임으로 풀이한 보기도 있음은 재미로운
일이다. 평안도의 의주는 본디 이름이 용만이었다. 물신을 숭배하는 일종의 물신
앙이요, 불교적인 빛깔이 아주 짙게 드리워져 있다.
위화도(威化島)의 회한
나라의 경계 험하기도 하여라
하늘이 내린 천혜의 웅걸함
세 강물 하도 깊어 헤아릴 길이 없는데
이 한길 멀어 통하기 어렵다네
요동을 돌아 중국으로 가자매 압록강을 건너야 한다. 조선조의 권근(權近)이 강
을 건너면서 지은 글이다. 의주의 북쪽에서 강은 세 갈래로 되어 흐르나니 구룡연
서강 소서강이 그것이다. 세 갈래는 다시 어우러져 큰 가람을 이루고 위화도를
에둘러 암림곶 미륵당에 이르러 적강(狄江)과 합하여 대총강이 되어 바다에 든다.
위화도(威化島). 생각만해도 속이 끓는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잘못 돌아 악순환
의 고리들이 끊일 날이 없질 않았는가. 어렵고 힘이 들더라도 위화도에서 요동반
도로 올라서 말만 달리면 되는 그 결정적인 시기에 무슨 놈의 말도 안되는 명나
라 사대주의를 앞 세워 되돌아 서다니. 그 때만 해도 양자강의 남경에서 이제 막
원나라를 몽고로 내몰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요동까지 방비할 충분한 힘이
없었다. 말을 타고 구원병이 요동까지 오자면 한 달 이상 걸리니까.
최영 장군은 새로 일어난 명나라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때야 말
로 잃어버린 민족의 강토를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음은 널리 아는 일이다.
우왕14년(1388)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명을 내려 4만 군사로 요동 정벌을 나서게
된 것이다. 명나라를 치는 게 하늘에 죄가 된다는 둥 무슨 4불가론(不可論). 핑계
없는 무덤이 어디에. 이르러 대권(大權)에 눈이 어두워 민족 앞에 큰 죄를 짓다니.
정말 한스러울 뿐이다. 딱한 일이로고.
금동도(黔同島) 아래 있는 위화도는 45리의 둘레가 된다. 금동도와 위화도의 사
이를 압록강이 흐른다. 금동도를 지나면서 강은 세 갈래로 갈리며 한국과 중국 사
이에 놓여 있어 압록강을 건너는 징검다리의 구실을 한다. 위화 금동 어적 세 섬
은 땅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된다. 농민들이 오랑캐들에게 잡힌 일이 있은 그 뒤
로는 개간과 옮겨 사는 일을 금하기도 하였다.
동명성왕의 덕화에 감화 받아 물고기가 다리를 놓아 준 데가 바로 위화도가 아
닌가. 그래서 위화도라 했을까. 오리강 -- 압록강은 위로 솟아 오른 '가장 길고
큰 가람'이다. 이제 그 가람을 싸고 도는 겨레의 노래는 용틀임처럼 끝이 없다.
하나 될 그 날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낙동강과 가야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계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 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이육사의 '청포도'에서)
내가 바라는 손님과 맺은 칠월의 약속, 분명 약속의 빛이 있다면 그것은 청포도
의 색일 것이다. 무얼 애 태워 기다리며 살아 가는 기다림의 미학은 오늘만을 살
아 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 주는 가르침이 크다. 열린 가슴으로 고달픈 임을 그
리는 시인은 끝내 마흔의 나이로 북경의 차디찬 감옥에서 숨을 거둔다. 임의 '내
고장'과 '푸른 바다'는 낙동강 굽이치는 안동의 원촌(遠村)마을, 벌써 물속의 꿈
꾸는 고장이 됐다.
퇴계를 낳고, 농암의 꿈이 어린, 육사의 전설이 들리는, 훈민정음 원본이 보관돼
세계적인 자료로 손꼽히는 고장을 싸 안은 낙동강. 임진의 난이다, 한국전쟁이다,
멀리는 기록조차 알 길 없는 김해의 가락국 얘기를 알고 증언할 수 있는 역사의
증인이다. 그저 말이 없을 뿐.
김해에서 강원도 태백의 황지에 이르는 1300리의 긴 가람. 태백산맥이 한반도
조국강산의 허리라면, 등뼈라면, 낙동강은 큰 핏줄이다. 해서 배달이 살아 온 자취
마다 낙동의 숨결이 배어 있지 않은 곳이 어디이던가. 하면 낙동가람의 말미암은
샘이라 할 황지는 어떤 곳일까.
황지 하면 구문못 -- 구문소의 전해 오는 옛 이야기가 재미 있다. 연못 안에 용
궁이 있다는 전설. 옛 적 가난한 늙은이가 세상 살기가 싫어져 구문소에 뛰어 들
었다. 용왕이 딱한 사정을 들은 뒤, 금은을 많이 주어 다시 이승으로 살려 보낸다.
해서 늙은이는 큰 부자가 돼서 잘 살았다는 사연. 전설의 고향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찍어 바르면 먹물인 양 결코 여기가 낙동강의 뿌리샘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 이렇게 오염이 되었을까.
삼척부의 서남 150리쯤 태백산의 동쪽 지맥에 샘이 솟아 큰 못을 이루었다(有泉
湧出成大池). 그 물이 남으로 흘러 30여리를 가면 구멍산-천산(穿山)에 이른다. 산
의 남쪽에서 나왔다 해서 구멍내(穿川)라 부르고, 안동과의 경계가 된다. 이 내가
곧 낙동강의 뿌리샘이 되고 있음을 대동지지 에서 김정호 선생은 풀이하고 있
다. 못 위에는 이성계의 조상인 목조(穆祖)가 살았던 활기촌(活耆村)이란 마을이
있다. 목조가 일찍이 적을 피해 황지로 옮겼기 때문에 못을 터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민간어원으로서 황씨 노인의 얘기가 전해 온다. 시내 복판에 20여평 남짓 되는
연못이 있었는데 이 곳에 황노인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스님이 와서 시주를 청하
자 황노인은 시주는커녕 거름을 한 삽 떠 안겼다. 이를 본 며느리가 시아버지 모
르게 쌀을 퍼 주게 된다. 곧 난리가 날 터인즉 빨리 피하시오. 갈 때에는 뒤를 돌
아 보지 말고 가라는 중의 말이었다. 애기를 업고 도망 가다 천둥번개가 치고 하
여 집안 걱정이 되었음인지 뒤를 돌아 보았는데 그 자리에서 돌이 되었다. 얘기는
최상수의 한국민간설화집 에 실려 온다.
뭇강의 어른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ㄱ지 않는고
우리도 이같이 하여 만고상청하리라
(이황의 '도산십이곡'에서)
세월을 두고 늘 푸른 산. 실은 산에도 언제나 변화의 이어짐 위에서 푸른 모습
을 띠고 있다. 그 사이에 흐르는 물은 변하는 바로 덧없는 세상살이를 일컬어 이
른 것이요, 청산은 변함 없는 피안의 누리에 대한 그리움이다.
누구나 자신이 자란 시간과 공간을 중심으로 하여 인식과 존재에 눈을 뜨게 마
련이다. 퇴계가 자란 곳에 도산이 있고 흐르는 퇴계(退溪) 혹은 토계(兎溪)가 있었
다. 그 산과 물에 접하면서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가치를 터득해갔던 게 아니었
을까. 마침내 퇴계는 낙동강을 '여러 강 중의 으뜸이라'(尊爲衆水君)고 풀이한다.
손이 안으로 굽기 마련.
안동은 옛부터 낙동가람을 따라 삶의 ㅁ거지로서 마을이 크게 이루어졌다. 신라
때에는 고타야(古陀耶)군이었는데 경덕왕 때 고창(古昌)군으로, 영가(永嘉)로, 길주
(吉州)로, 복주(福州)로 되었다가 안동으로 불리게 된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화산
(花山), 고창(古昌), 창녕(昌寧), 고녕(古寧)이라 한다.
모두가 물과 관련된 이름으로 보인다. 고타야나 고창은 다 물 사이에 돋아 나온
'곶'의 성격을 드러낸다(장산곶.장기곶의'곶'). 임하쪽에서 오는 물과 황지, 예천
쪽에서 오는 물 사이에 이룩된 고장이 안동이다. 영가의 영(永)도 두 물이 합해서
되었음을 드러내지 않는가(永 - 二 + 水).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山高谷深)한다. 안동이나 황지로 이어 지는 물의 그윽한
샘은 한반도의 허리라 할 태백에서 말미암는다. 태백은 어떤 산인가.
대동지지 의 안동 부분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 북으로 120리에 접해 있어
영월 정선 삼척이 북으로 이어진다. 남으로는 안동 봉화 예안을, 서쪽으로는 소백산
의 죽령으로 산세가 이어진다. 산은 거의 흰 돌로 차 있어 바라보면, 마치 눈이 쌓
인 모습과 같다. 해서 태백이란 것이다. 둘레에는 수삼백리에 산의 바다를 이루어
파도처럼 산봉우리들이 솟아 올라 출렁인다. 산 남쪽으로는 샘물과 돌이 낮은 곳
으로 흘러 모인다. 산허리 이상에는 큰 돌산이 없다. 큰 산임에 틀림이 없지만 멀
리 보매 뾰죽하게 솟은 봉우리가 눈에 띄지 않는다. 마치 하늘에 흐르는 구름인
양 산은 그렇게 말 없이 드리워 있다.
황지의 아름다운 산마루에는 열린 언덕이듯 골짜기가 미더워 땅의 기운을 모아
놓는다. 산이 높아 서리가 일찍 내리고 조 밀을 주로 심어 여름지이를 한다. 산 남
쪽으로 가면 점차 언덕같은 뫼들이 줄을 잇고 그 경치 또한 아름답다. 하얀 모래
와 굳은 땅은 마치 서울의 그것과 비슷하다.
태백은 희고 황지는 누런 곳인가. 빛깔 상징으로라면 누런 황색은 가운데를 가
리킨다. 알의 노른 자위처럼 알맹이는 황금색이 많다. 그러니까 태백산의 많은 샘
이 있지만 황지가 바로 노른 자위에 걸맞는 게 아닌가 한다. 임금의 도포도 따져
보면 주황색의 태양을 본 뜬 것이다. 땅의 그림을 보더라도 태백은 정중앙의 동쪽
에 자리 잡고 있으니 말이다. 이 샘이 황금보다 더 귀한 낙동강의 젖줄이 된다.
거룩한 이 샘이야말로 삼국통일의 일을 해 낸 신라와 가야국의 태어남을, 아니 고
려와 조선조의 태어남을 이끌어 냈던 가람이 아니던가.
도산서원에 이르는 가람의 굽이는 낙동강의 풍치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여
기서 이기(理氣) 철학의 큰 나무가 된 퇴계가, 어부가를 지은 농암 이현보 선생이,
육사 시인이 태어난 것이다. 산과 물이 좋아 그러한가. 교육환경이 좋아 그러했는
가.
강의 굽이는 아홉을 헤아린다. 이르러 구곡(九曲)이라 한다. 오천 코바위 달내 분
천 천사(川沙) 단사(丹砂) 백운동 월명담(月明潭) 박석천(博石川)들이 아홉 굽이다. 이
중 분천과 천사는 안동댐에 파묻혀 본래의 모습은 아예 사라 져 버린 게 아쉽다.
농암이 그다지도 사랑했건만.
안동하면 물굽이가 태극형으로 되돌아 나가는 하회마을이 떠오른다. 이름하여
'물돌굽이'를 하회라 했다. 낙동강의 상류인 망천이 돌아 꺾여서 고리모양을 드러
낸다. 동에서 남으로, 다시 남에서 북으로 구부러져 둥근 태극의 모양을 이룬다.
징비록 의 지은이 유성룡 선생이 이 고장의 사람이다. 풍산 류씨로 대표되는
집성촌인 본보기가 될 만한 양반 마을이다. 한데 별신굿을 할 때, 양반과 선비를
비난 공격하는 모습은 아주 특이하다. 그것도 머슴들이 탈을 쓰고서 말이다. 머슴
으로 보면 하고 싶은 자기 표현의 일단을, 양반으로 봐서는 자기 반성의 계기를
삼아 서로가 어울리는 삶을 살아 보자는 뜻이 있다고 본다. 이 때 하회탈은 상징
성을 갖는다. 일종의 역할극이, 탈을 씀으로써 자연스레 일어난다는 점이다.
탈과 걸림을 둔 이야기가 전해 오니 그것이 허도령 전설이다. 허도령은 신령의
명을 받고 아무도 없는 데서 탈을 만들었다. 사정도 모르고 그를 그리워 하던 처
자가 휘장을 뚫고 뭘 하는가를 들여다 보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허도령은 그 자
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 때문에 마지막 탈인 이매탈은 덜 만든 턱이 없는 모
습을 하게 된다.
필자가 1985년 여름 전수관에 들렀을 때도 턱이 없는 탈을 쓴 사람이 퍽 오래
남는 느낌을 받았다. 약간의 여백이 있는 그림이나 예술품이 갖는 개성이랄까. 오
히려 탈의 두드러진 점으로 일러 좋을 듯하다.
공검지(恭檢池)와 낙동강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연밥 줄밥 내 따 줄께 이 내 품에 잠 자 주소
잠자기는 어렵잖소
연밥따기 늦어가오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큰 아기
연밥 줄밥 다 따줌세 백년 언약 맺어다오.
(낙동강 '모내기 노래'에서)
연밥 따는 처자와 모를 내는 젊은이와의 사랑 이야기를 노래말로 삼은 것이 노
래의 큰 줄기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 에서 공갈못 또는 공검지야말로 여
섯 가야의 유일한 흔적이라고 풀이한다. 풀이대로다. 본디 상주의 딸림고을이었던
함창(咸昌)은 고령가야(古寧加倻)였으니, 고령(古寧)을 어우르면 '공'이, 가야(가
라)를 어우르면 '갈'이라 읽을 수 있다. 함창이란 이름은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기
로서다.
공검지는 상주의 북쪽 27리에 있다. 고려 명종 때 사록 최정분이 못의 옛 터를
보고 그 자리에 못을 만들었다. 둑의 길이는 860보, 둘레가 16647자나 되는 큰 못
이다. 낙동강의 상류에서는 가장 큰 벌인 사벌(沙伐)에 물을 대던 중요한 농업생
산의 열쇠이다. 공갈못의 '못'은 받침의 바뀜으로 보아 '못--ㅁ
--몰'과 같은 낱말의 떼를 이룬다. 결국 '못'이란 많은 물이 모여 있는 곳을 이른
다고 하겠다(衆水娶會).
탐관오리는 언제나 있는 법. 조선왕조 고종 때에 임금의 신임을 받던 이채연이
연못을 터서 논을 만들어 소유하려고 한 뒤 쓸모 없는 못이 되었다. 저 혼자 잘
살려고 많은 사람에게 겨레 앞에 부끄러운 일을 스스롭게 저지르다니. 괘씸한 일
이다. '공검'의 공(恭)은 고령(古寧)의 합한 소리와 걸림이 있고, 검(檢)은 가라(가
야)와 걸림이 있다 하였다. 가라(가야)는 갈래 가람 큰 물을 뜻하기 때문이요, 살피
자면(檢) 갈래를 잘 봐야 하기 때문이다. 뜻 자체로 풀이하면 '늘 공손한 마음으
로 연못을 잘 살피라'는 뜻도 크다. 아니면 그 큰 들에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
으니까 말이다. 사벌(沙伐) 들은 어떤 곳일까.
신라의 땅이름에는 '--벌'에 맞먹는 '벌 불(伐 火)'계가 대부분이다. 상주의 옛
이름이 사벌국이었으니 벌 또한 같은 뜻이 아닌가. 하면 사(沙)는 무엇일까. 대
동지지 의 방언해 문목(門目) -- 차례편을 보면 '새롭다'로 풀이한다. 방언분포
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있다. 하면 '사벌 -- 새로 세운 나라(새로개척한 들)'란
풀이가 옳을 것으로 보인다. 낙동강변에 새로운 나라 -- 사벌이 있고 옛부터 전해
오던 연못을 고쳐 일으킨 마을이다.
사벌이 새로 되기 전에 오래된 옛 고장 중에 공성(功城)현이 있었다. 신라 때에
는 대정부곡(大井部曲) 곧 큰 우물을 관리하는 마을이란 뜻이다. 상주의 북쪽에
있었다. 기원적으로 우물(井)은 '움'에 물이 붙어 된 말이고 '움'은 굼(금 검 곰 /
구무 구멍)에서 비롯한 말이다. '굼'의 기역이 약해지면 /ㄱ ㅎ ㅇ/으로 되기
때문이다. '굼(움)'을 적을 한자가 없으니 공(功)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하긴 공
검지의 은덕으로 농사가 이루어지니까 그럴싸 하기도 하다. 그 맥을 따라 오르면
금관(金官)가야의 '금(검 굼 감)'에 터를 댈 수 있기 때문이며, 이는 곰신앙 곧 땅
과 물을 신으로 섬기는 지모신앙과도 걸맞는 말미암음이 있다.
신토불이라고. 그 땅에 그 사람 아닌가.검(곰 금 굼)은 상징성으로 보아 북쪽을
가리켰다. 북방지향성이 한반도 사람들에게는 줄기찬 의식의 기층인 탓일 것으로
본다. 사벌만 해도 그렇다. '사(沙)'는 새로움이요, 방위로는 동쪽이 된다. 처용가
의 동경(東京)을 서울(ㅅㅂ)로 풀이하거니와 사벌도 '서울'의 또 다른 이름밖에
다른 게 아니다.
더 나아가서 낙동진(洛東津)이나 낙동강도 그런 맥락에서 '고녕가라(古寧加耶)
의 동쪽에 있는 가람'이란 말로 하면 좋을 것으로 보인다.
부족국가의 연합으로 된 6가야는 동으로 낙동강(혹은 황산강이라고도 함), 서남
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으로 경계를 삼았다.삼국시대
에는 황산강(黃山江), 황산하(黃山河), 황산진(黃山津)으로 불리다가 고려 때에는
낙동강, 낙동진으로 섞여 쓰이었다. 하지만 이조 때에 와서는 아예 낙동강으로 머
리를 삼기에 이르렀다. 이 또한 중국의 낙양(洛陽)을 본 떠서 그리했다면 사대주
의적인 생각에서일 수 있다. 하긴 정약용의 아언각비 에서도 낙동강을 황수(黃
水)로 적고 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도산별곡>에서는 낙동강을 낙천(洛川)이
라 적고 있으니 조선조에서도 두루 섞어 쓰긴 한가지이다.
낙동진 -- 낙동나루의 구실은 어떠했던가. 조선왕조의 경우, 세금으로 내는 영남
지방의 세미(稅米)를 낙동나루에서 모아 문경의 새재를 넘어 충주의 가흥창에 옮
긴다. 해서는 다시 한강의 물을 이용, 서울의 삼개(麻浦)로 간다. 어디 물건뿐이겠
는가. 사람이며 말이며 군사들, 도임하여 벼슬하는 이들, 그립고 안타까운 어버이
와의 이별하던 곳, 꿈에도 잊지 못하는 임을 보내고 만나는 곳이 바로 낙동나루였
던 것이다. 지금은 그저 쓸쓸한 강마을의 풍정이 있을 따름이지만.
아랑의 한과 밀양강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를 날 넘겨 주소
언제 들어도 무언가 한 서린 사연이 가슴에 와 닿는다. 아랑낭자에 얽힌 이야기
가 전해와 그럴까.
조선조의 명종 임금 시절에 어느 밀양 부사에게 예쁘고 정숙한 딸이 있었다. 달
밝은 밤, 낭자가 영남루에 올라 아름다운 달 구경을 하는데, 낭자를 늘 그리워 해
오던 머슴종이 낭자를 사랑한다고 했겠다. 놀란 낭자는 한사코 저항을 하자 끝내
머슴은 낭자를 죽여 땅에 묻는다. 딸을 잃은 부사는 벼슬도 그만 두고 낙향을 한
다.
새로 오는 밀양부사들에게 낭자의 한 맺힌 넋이 나타나 복수를 당부하지만 부
사는 모두 죽게 된다. 용기 있는 새 부사 한 사람이 낭자의 한을 풀어 준다. 사람
들은 아랑의 혼을 달래기 위하여 노래를 불렀으니 이 노래가 '아리랑'이 되었다
는 풀이. 그 후 아랑각을 지어 음력 4월 16일 밤에 군수가 제관이 되어 제사를 지
냈다. 광복한 뒤로는 소복한 처자가 제를 모신다.
이 게 바로 '밀양아리랑'의 바탕 이야기. 대략 아리랑은 여러가지로 풀이되지만
한을 노래하는 겨레의 노래가 되었다. 정선 아리랑 평창 아리랑 진도 아리랑 진주
아리랑 실로 많은 지역에서 즐겨 부른다. 글쓴이 보기로는 '아리아리랑 쓰리쓰리
랑'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아리랑의 밑바탕을 알 수 있지 않나 한다. 아리다의 '아
리'와 쓰리다의 '쓰리'에 되풀이를 드러내는 씨끝 '--랑'이 어우러져 만들어졌다
고 볼 수 있다. 아리다의 옛 말은 '알히다'이다. '알히'의 말짜임은 어떠한가.
새알의 '알(ㅎ)'에서 '--이'가 붙은 것으로 보인다. 새가 알을 깰 때 많은 아픔
과 시련의 과정을 지나면서 알에서 병아리가 태어난다. 간추리건대 '아리다'는 시
련과 아픔을 전제로 한다. 밀양강은 농사를 짓게 해 주고 마실 물도 주지만, 홍수
로 넘쳐 흐르면 많은 농경지가 물에 떠내려 가거나 파묻혀 버린다. 조상의 무덤이
그 물에 떠 내려 갈 수도, 살아 있는 사람과 집이, 산 어버이도 자식도 물에 목숨
을 잃기도 하는 것이다. 해서 씻지 못할 한으로 남는다. 때로는 바다 건너 왜인들
의 노략질이 일어나고 했으니.
밀양은 '물(강)의 북'이란 뜻인데, 삼국시대에는 추화(推火)였다. 밀추의 '밀'과
불화의 '불'이 합해서 된 말이다. 여기서 '밀 -- 물'의 맞걸림을 생각하고 그 아
래 '밀 -- 삼(삼랑진 미쓰<일본>)'을 함께 고려하면 밀양강으로 말미암은 삼각주
와 그 주위의 땅이 바로 밀양이다. 일종의 물에 대한 믿음이 삶의 뿌리라는 전제
를 드러낸 것이 땅이름 '밀양'이다.
물에 대한 믿음을 상징하는 것에는 용이 대표적이다. 밀양강에서도 예외는 아니
다. 밀양강의 지류이며 표충사의 주위에 전해 오는 호박소(臼淵)가 그 예이다. 천
화령(穿火嶺) 고개 아래 백여 척이 넘는 폭포가 있다. 그 모양이 바윗돌로서 방아
확처럼 생겨 구연(호박소)이라 한다. 세상에 전해 오기는, 깊이를 알 수 없고 그
안에 용이 있었다. 가뭄이 심하게 들면 호랑이 머리를 못속에 넣고 비오기를 빈
다. 하면 곧 물이 용솟음치고 비가 온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얘기이지만 이는 곧
용신앙 -- 물신에 대한 정성과 받들어 모심을 드러낸 당시 사람들의 심리적 투영
이라 해서 좋을 듯하다. 김해로 이어지는 낙동강을 해양강(海陽江)이라 한다. 김해
와 낙동강의 이야기를 살펴 보자.
김해와 곰신앙
거북아 거북아 네 머리를 내 놓아라
만일 내 놓지 않으면 구워 먹어버리겠다.
('구지가' 에서)
거북을 불러서 으름장을 놓는 까닭이 무엇인가. 도대체 거북은 어떤 짐승일까.
불에다 구워 먹다니. 그러면 그리도 만만한 게 거북이란 말인가. 이 노래는 김수
로(金首露)왕을 맞이하는 실마리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것도 거북맞이봉 -- 구지
봉(龜旨峯)에서 말이다. 가락국의 머리왕인 김수로에게 거북을 통한 신성함을 주
기 위한 의도가 엿보인다.
하늘에서 금궤짝이 내려 왔고 그 속에 금빛 찬란한 알 여섯이 해처럼 둥글고
환하였다. 이르러 천강(天降)의 하늘 내림이란 거스를 수 없는 명령임을 밑으로
한다. 하늘에서 내려 왔으니까 당연히 땅에서는 맞아 들여야 한다. 땅과 물의 상
징인 거북을 통한 다스림의 걸림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김
수로를 지도자로 하고 원주민격인 구간(九干)들은 다스림을 받는 그러한 관계란
말이다. 그럼 어떻게 거북을 '물과 땅의 신'이라 할 수 있을까. 여기 '간(干)'은
거서간의 '간'과 마찬가지로 지도자를 이른다.
본래 거북은 물과 뭍에서 살며 모래 구멍에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른다. 거북점이
라 해서 좋고 나쁨을 점치는 신령한 짐승으로 여겨 왔으니 용 기린 봉황과 함께
아주 상서로운 짐승으로 모셔왔다. 옛말로는 거복 거붑(능엄경언해 1-74)이었다.
거붑에서 '붑'의 끝소리가 기역으로 되어 거북이 된 것이다. '거붑'의 기원형은
무엇일까. 우리말에서 입술소리의 기본은 미음(ㅁ)이다. 결국 '검 + 음 > 거믐 >
거븝 > 거북'의 꼴바뀜이 상정된다. 박지홍(1952. 구지가 연구)에서 양산민요 중
왕거미 노래를 들어 '거미 -- 거북'의 대응성을 풀이한 일이 있다. 거미는 '검 +
이 > 거미'로 짜임새를 풀이할 수 있다. 땅이름에도 보면 '거무(巨武) -- 현무(玄
武) -- 감(咸) 칠(漆)'의 맞걸림이 찾아진다.
여기서 현무는 분명 오늘날의 거북이를 뜻한다. 이는 고구려의 동서남북의 사신
(神)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다. 거북은 북방을 가리키며 검정으로 드러난다. 위에서
든 현무(玄武)는 이두식으로 읽더라도 '검'이 나온다. 금호강 부분에서 풀이할 터
인즉, '검(감 굼 금)'은 곰(고마熊)과 깊은 걸림을 둘 수 있다. 우리말로 신(神)은
'검'이니 암시하는 바가 크다.
물신이며 땅신인 거북(검 거미)은 단군신화에서 보이는 곰신앙의 변이로 보아
좋을 것이다. 수렵생활을 하던 북방에서 따뜻한 남쪽나라에 와서 농경생활로 바뀐
다. 하면 비슷한 소리 '곰 -- 검(감 금 굼)'이지만 동물상징이 물과 뭍에 사는 거
북이로 바뀐 것이다.
지금은 김해로 읽지만 본음은 금해인데 익은 소리로 굳어져 김해가 된 셈. 뜻은
쇠요, 소리는 금이다. 간추리건대 쇠라 함은 청동기문화를 가진 쇠그릇 문화의 들
어 옴을 이르는 것이요, '금'이라 함은 곰신앙의 맥을 그대로 존중하는 원주민의
뿌리 신앙을 아주 자연스레 어울리게 만든 소리상징이라 하겠다. 쇠를 앞 세운 태
양숭배족은 지배를 하는 겨레이며 검(금金)을 앞 세운 겨레들은 지배를 받던 겨레
들인 것이다.
김수로를 그대로 풀이하자면 '금(검 -- 거북)의 머리가 나오므로 지도자가 된
이'로 미루어 볼 수 있다. 방위로 보면 김해는 금바다(검바다)이니까 북에서 남으
로 흘러 바다로 드는 곳이다. 해서 이 지역을 흐르는 낙동강이 해양강이다. 바다
의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이란 말이다.
김해를 가락국 -- 느슨하게 소리 내어 가야(가라)로 읽는다. 김해는 가락의 머
리가 되고 여기서 다섯 가야가 갈라져 나아갔다. 금관가야(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갈래란 말이 된다. 하면 6가야는 한 조상에서 갈라져 나아갔고 그 중심은 금관가
야이다. 여기 금(金)은 검이며, 곰신앙을 밑바탕으로 한다. 그러니까 쇠문화와 곰
신앙을 가진 겨레 -- 배달의 겨레란 뜻이 된다. 한 마디로 곰(검)의 믿음을 기초
로 세운 부족들의 갈래가 된다. 이제 낙동강을 황산강이라 함도 가늠이 간다. 황
금의 빛이 누른 색이요, 땅의 빛 또한 누런 색일 수는 얼마든지 있다.
낙동강은 가락의 동쪽 경계가 되는 강이요, 6가락은 곰(거북 -- 검) 신앙을 바
탕으로 하는 갈래들이다. 일찍이 사라진 가야의 이야기를 읊조리듯 낙동강은 그렇
게 바다로 흐른다.
수로왕릉 앞의 무성한 풀은 예와 같고
봄바람은 일그러진 문으로 불어 온다.
이제 갓 핀 매화는 나그네의 심회를 달래주는 듯.
(주열(朱悅)의 한시에서)
신령한 우물(靈井)
얼마 전에 밀양의 천황산으로 여름 갈닦이 모임이 있다기에 함께 갔다. 그윽한
산골이라고는 하지만 워낙 가무는지라 골짜기의 물도 마르고 그저 바위틈으로 흘
러내리는 물이 있을 뿐. 말 그대로 목이 타오르는 강산이다. 마침 그날 밤 비를
몰던 바람이 멎더니만 이내 반가운 빗줄기가 지붕 위에, 바위에 풀잎에 마음 속에
쏟아져 내린다. 비에 젖고 싶었다. 마음을 씻고 싶었다.
마침 밀양과 관련하여 땅이름에 대하여 이야기할 내 차례가 되었다. 혹시나 하
여 세종실록지리지 의 밀양 부분을 베껴 간 것이 있어 다행이었다. 한자를 뜻
과 소리로 읽던 적에는 밀양을 '밀벌(推火)'이라 했다. 신라 경덕왕 때에는 밀성
(密城)이라고도 했음과 함께 공양왕의 증조 할머니 친정고장이라 해서 밀양부로
올린 후 생산이 넉넉하고 강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해서 조선왕조 태종 때에는 도
호부를 두기도 했다. 산수를 풀이한 부분에서 화악산과 영정산(靈井山)이 나온다.
영정산의 풀이를 하였으되, 밀양부의 동쪽에 있으며 산 아래 바위로 된 연못이
있었는데 그 물속에는 용이 살아 있다는 얘기. 마침 큰 가뭄이 들어 사람들이 기
우제를 드릴 때, 호랑이 머리를 못속에 넣고 빌었더니 문득 용이 응신하여 비를
내렸다는 줄거리이다. 자리를 함께 한 동네 분의 설명으로는 일본 식민지 때에 천
황산(天皇山)이라 했다는 사연. 어디쯤일까, 그 신령한 우물이 있는 곳이. 행여 산
기슭에 자리 잡은 표충사 어름에 있다면 분명 이 산의 이름은 영정산이지 천황
산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밀벌 -- 밀양'으로 돌아가서 기원형으로 보이는 '밀'에 대하여 떠 올려
보기로 한다. 훈몽자회(상) 에 따르면 '미르진(辰) 미르룡(龍)'이 나온다. 미르
진(辰)은 별을 뜻하며 천간지지의 지지로 보아 용에 속한다고 풀이하였다(地支屬
龍). 밤하늘에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어 많은 사람들의 메마른 정서를 적셔주는
'미리내'를 하늘의 용신으로 상정하여 아무 의심 없이 써 온 게 아닌가 한다. 그
럼 '미르 -- 밀'은 어떻게 풀이하면 좋을까. 미르의 끝 음절의 모음이 떨어지면
곧 '밀'이 된다. 이르러 폐음절로 된 셈인데 이러한 보기들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거우르 > 거울, 드르 > 들 등).
'밀'의 바탕은 물이다. 중세어에서는 '믈 믓'(용비어천가 훈몽자회)으로 물이 드
러나기도 하며 '미(매 메)'로도 쓰였다(ㅁ海蔘,미나리,밋그라지). 동음이의어로 '밀
(밋)'은 수로 3을 뜻한다. 밀양과 그 걸림을 풀이하자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장
소가 삼각주로 되어 있다. 강물에 떠내려 온 모래의 쌓임작용으로 말미암은 땅이
요 물 때문에 시련과 함께 번영을 누려 온 고장이 바로 밀양이다. 그렇게 볼 수
있음은 우선 밀양의 양(陽)은 한강의 북쪽을 한양이라 하듯이 낙동강 당시는 해양
강이라고도 하였는데 강물의 북쪽 벌판에 취락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벌(불) --
양'의 걸림은 땅이름의 고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특히 -벌(伐 火 弗)계의
땅이름은 신라지역에서 많이 쓰이는 형태이기도 하다.
강물로 말미암은 기름진 들판이며 풍성한 삶은, 푸른 산허리를 노래하는 작으나
맑고 끊임없는 옹달샘에서 비롯한다. 그 신령스러운 우물. 이름하여 영정이 그리
운 세상이 되었다.
다음 날 안개를 머금은 산자락을 숨쉬며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의 배경이
되었다는 굽이길을 돌아서 물 흐르듯이 피곤한 줄도 모르고 내려 왔다.
혹시나 하여 표충사에 들러 그 신령한 우물을 찾아보기로 마음 먹고 새울음소
리로 가득하고 밤꽃 -- 밤느정이 내음으로 가득찬 절을 이리저리 찾아 보았다. 마
침 절의 내력을 풀이한 글을 읽어 보았다. 신라 흥덕왕의 셋째 아들이 문둥병에
걸려 이곳 영정 약수를 마시면서 요양을 한 뒤로 병고침을 얻었다고 했다. 입맛이
당겼다. 중씰한 보살 할머니 한 분이, 절 마당에 연못이 있었음을 들어 안다고 했
다. 글에는 절의 동쪽에 있다고 했으니 동쪽 어름을 찾을 밖에. 대웅전 서편에 영
정약수라고 돌에 새겨 놓아 지나는 사람들이 마시게 해놓았다. 그렇다. 여기가 호
랑이 머리를 넣은 우물 -- 그 신령스러운 우물이 있었던 장소였구나.
그러면 응당 천황산의 이름은 세종실록의 기록대로 영정산이라 함이 옳을 것이
다. 땅이름을 보면 우리나라 도처에 우물(井 泉 池 川)계의 이름이 많은데 이는 농경
사회에서 물은 절대한 것이며 이 물을 다스리는 상징, 물신이 곧 용이었다. 만주말
로는 '룽'으로 소리를 내었으니 혼령의 영(靈)과 통하는 같은 뜻을 드러냄은 너무
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물이란 말도 '움'에 물을 더하여 이루어진 이름씨로 '움'의 끝소리(ㅁ)가 떨
어져 우물이 된 것이다. 움은 식물의 싹 또는 땅을 파고 구멍처럼 웅덩이를 만들
어 화초나 채소를 넣어 두는 곳을 이른다. 움에서 나무나 채소의 싹이 돋는 것은
스스로운 일이요, 낮은 곳인 움에 물이 고임은 자연의 섭리다. 여성상징으로 보면
생명탄생의 아기집이 다름 아닌 생명의 움물이요 움막이며 평안이 깃드는 보금자
리이다.
우리말의 방언 가운데에는 어머니를 '엄마 움마 오마니 암마 옴'이라 하거니와 필
자가 보기로는 움 -- 어머니와의 걸림이 있지 않나 한다. 움은 '구멍(굼) -- 훔(훔
치다 훔 패다) -- 움'으로 바뀌어 오늘에 쓰인다. 구멍(굼)은 '구마(고마) -- 굼
(곰)'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마(곰)는 단군의 어머니 신이요, 토템으로 섬기던 생산
의 상징이기도 하다.
맑은 물 푸른 산, 푸른 들로 이어지는 생명의 오롯한 가락이 어우러지는 맑은
영혼의 우물이라니. 때에 흘린 땀도 쉬일 겸 신령스러운 우물의 물을 흠뻑 마시니
푸른 산기슭을 부는 대밭의 바람이 더욱 시원하다.
법당 뒤뜰에 핀 꽃나무에 꿀따기가 한창인 벌의 노래, 풍경소리에 어울린 산새
의 울음소리가 한층 멀리 들린다.
연구산의 돌거북
은은하기로는 마치 자라산 같다네
세상에 욕심없는 구름이 드리우듯
이 땅을 다스리는 영령이 보일듯 하이
대자연의 이법을 따라서 단비가 내리는 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봉우리가 동그란 산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미군의 통신부대가 들어서면서 산봉
우리를 깎아 내 오늘의 산 모습이 된 거북산. 달리 자라같다고 하여 자라바위산이
요, 정월 대보름날이면 달구경을 한다 해서 달맞이산(月見山). 더러는 조선왕조가
끝날 무렵 순종 때 점심 때를 알리던 포를 이곳에서 놓았다 해서 오포산으로도
불리웠다는 것이다. 사가(四佳) 서거정 선생이 본 연구산, 거북산은 거북의 영험함
으로써 지역의 번영과 안녕을 빌었으니 거북은 참으로 신과 통하는 데가 있나 보
다. 거북은 뿌리의 상징이니까.
영남전설지 에서는 비슬산, 용두산, 수도산과 함께 연구산은 땅속의 화산띠가
이어지는 곳이라 불이 자주 났다는 것. 그래 고을 원님이 불을 다스린다고 용두산
에는 얼음 창고를 만들었고 연구산 서쪽 기슭에도 석빙고를 설치하였다. 이어 물
신 상징의 돌거북을 만들어 산꼭대기에 올려 놓은 뒤부터는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때인지는 뚜렷하지 않으나 읍을 처음으로 세울 적으로 한 기록도 있다
(동국여지승람). 거북의 머리를 남쪽으로, 꼬리는 북쪽으로 해서 땅에 거북의 신령
스러운 기운이 스며들게 했다는 얘기.
거북은 현무(玄武)라 하거니와 물신이요, 땅신이다. 신(神)은 현무요, '검'이라
한다. 거북의 신령함은 물과 땅신을 섬김으로 이어지나니 조상이 지켜온 우리 땅
과 우리의 강을 소중하게 가꾸어 나아가자는 지향성에의 몸짓이 아닐까.
달구벌을 처음 개척할 때 할 수 있다는 자기확신과 예언을 돌거북으로 옷을 입
힌 것이다. 돌거북은 언제나 말이 없다. 온 몸으로 온 날을 기다릴 뿐이다.
가장 크고 좋은 강, 한강(韓江)
지는 해 쓸쓸히 산을 넘고
맑은 봄을 실은 강은 스스롭게 흘러가는데
바람이 잔잔하여 고기들 입질하고
숲이 어두우니 새들 다투어 돌아 오네
보리 이랑 사이로 익은 길이 눈에 삼삼하네
사립문 바라보고 잠시 서 있노라니
시골 풍경 정말로 맑고 그윽해
(다산시선에서)
한반도의 허리자락을 감도는 겨레의 젖줄. 그리운 금강산에서 말미암은 샘줄기
가 설악산, 오대산 쪽에서 흘러내리는 소양강과 홍천강이 춘천에서 어우러진다. 한
편 소백산과 속리산을 발원지로 하는 냇물이 태기산 쪽에서, 치악산에서 비롯한
남한강이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어우러져 가장 크고 출렁이는 푸른 빛으로 겨레의
삶에 다가 선다. 윗글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한강을 바라보며 당신의 느낌을, 정한
을 글로 옮긴 것이다. 한강을 에두른 삶이 어디 뭇새와 고기뿐이겠으며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은 꽃송이뿐이리오.
우리 겨레가 살아 온 기쁨과 슬픔이며 아픔을 우리의 강, 한강은 알리라. 강물은
서울에 이르러 남산(목멱산)을 휘돌아 흐른다. 옛적 서울을 한산이라 했으니 한강
의 이름도 한산하(漢山河)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소박하게 이름을 풀어 보면
한산(漢山)은 한나라 곧 중국의 산이요, 한나라의 강이란 말이 된다. 참으로 어처
구니 없음 그 자체이다. 이게 어찌하여 한나라 -- 중국의 땅이란 말인가. <용비어
천가>에 보면 한양을 한수북(漢水北)이라 해서 조선왕조에서조차 중국의 속국이
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왕지사 한자를 빌어 쓰는 마당에 마한 진
한 변한의 한(韓)을 두고 한수한(漢)을 쓰다니. 겨레의 젖줄인 강물의 이름까지 어
지럽혀 놓았으니 사대주의가 이 지경에 이르면 가히 일품이라 하겠다.
신라 때는 한강을 북독(北瀆)이라 하였으니 북에서 흘러 내리는 개천이란 뜻으
로 새겨진다. 고려 때는 사평도(沙平渡)요, 세상에서 이르기를 사리진(沙里津)이라
했다. 앞에서 이른 북한강과 남한강은 양수리에서 만나 경기도 광주의 어름으로
흘러 든다. 해서 도미나루(度迷津)를 지나 광나루(廣津)로, 다시 삼전도(三田渡)로,
용산강으로 돌아 흐른다. 하여 서강이 되며 금천(衿川) 북에 이르러 버들곶나루(楊
花津)가, 양천 북쪽에 곰바위나루(孔岩津)가 되어 교하(交河) 서편 내와 함께 임진
강이 한 데 어우러진다. 마침내 통진(通津)에 가서 할아비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든다.
본디 한수북(漢水北)이란 한강 북쪽에 자리한 벌판이란 뜻으로 한양(漢陽)이라
한다. 실로 서울은 한강이 낳은 열매요, 삶의 모꼬지이다. 대동지지 를 따르자
매, 큰 것을 한이라 이른다(大曰漢). 크고 좋은 건 모두가 중국이란 말인데 당시의
중국지향성이 되비쳐진 풀이로 보인다. 우리말로는 한강은 '큰 가람'이란 뜻이다.
강원도 14읍, 충청 12읍, 경기 16읍에 걸쳐 지나면서 고리 모양의 흐름으로 서울을
안아 돈다(水環京都).
백제 때에는 앞에서 이른바, 한산하(漢山河)라 했으며 여기 한산은 금단산(黔丹
山)이라 불렀다. 금단산의 '금'은 단군왕검의 '검(儉)'과 같은 말로서 땅과 물신을
드러내는 지모신 상징이요, 곰토템을 보람으로 한다. 백제 시조 13년에 한산 아래
근초고왕 26년에 강북으로 서울을 옮긴다. 하여 북한산이 되기에 이른다. 북한산
쪽으로 옮기기 전을 남한산 시대라 불러 둔다. 지금도 남한산성이 있음은 이를 뒷
받침 해 준다. 남한산을 일장산(日長山)이라고도 하는데 낮이 길다는 데서 말미
암는다(晝長城). 신라 문무왕 4년에 다시 한산주로 고쳐졌다가 경덕왕 16년(757)에
한주로 된다. 이 모두가 한강을 중심해서 삶의 자리를 가꾸어 나아간 발자취라 할
밖에.
끼고 도는 즐펀한 한가람이 서울의 어머니라면, 불끈 솟아 오른 삼각산은 서울
의 아버지요, 겨레의 기상이요, 멋이다. 자식을 보듬어 안 듯 긴 가람이 꿈 꾸어
흐르면서 끝 없는 삶의 메마른 터를 축여 기름지게 한다. 그러한 애환의 사연을
나르며 바다로 흐른다.
삼각산을 달리 화악(華岳)이라 하며, 애기를 업은 모양과 같다 하여 부아악(負兒
岳)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동명왕 시절 비류와 온조 두 왕자는 한산에 이르러 부
아악 그러니까 삼각산에 올라 서로가 함께 살 만한 곳이라 했다고 전해 온다(相可
居之地).
고려 적 오순(吳洵)의 글에 하였으되, '하늘로 솟은 세 송이 꽃은 푸른 부용이
요, 실비단을 두른 듯 저 노을과 안개는 어디가 끝인가. 문득 옛적 누대에 올랐음
을 생각하는데 해는 지고 어디선가 종소리만 들린다.'라고.
삼각산이 물 위에 뜬 연꽃처럼 고와 보이는가. 그러하다면 큰 가람 한강이 있어
그 위에 뜬 연꽃일 게고, 이는 극락정토의 지향성일 게다. 삼각산의 셋은 삼신사상
에 기초한다고 하겠다. 신앙이라면 삼신 곧 환인 -- 환웅 -- 단군의 믿음을 떠 올
릴 수 있다. 국망봉 인수봉 백운봉의 세 봉우리가 옛부터 내려 오는 겨레의 믿음
처럼 한강 -- 큰 가람의 굽이마다에 그 신비한 홍익인간의 꿈을, 통일 한국의 그
리움을 달래고 있다.
천세 우에 미리 정하신 한수북(漢水北)에
누인개국하시어 복년이 가이 없으시니
성신(聖神) 이으셔도 경천근민(敬天勤民)하여야
더욱 굳으실 것입니다.
('용비어천가' 125장에서)
한강의 뿌리, 우통수(于筒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 좋고 열매 또한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긋지 않아
내를 이루고 바다로 가나니
('용비어천가' 중에서)
시작이 있으매 끝이 있게 마련이다. 뿌리가 깊을수록 삶의 가능성은 두터우며
그 열매 또한 소담스럽지 않으랴.
비유하건대 조선왕조의 나라 세움이야말로 하늘의 뜻을 따른 것이기에 뿌리가
깊어 오래도록 펴 나아갈 것임을 노래했다. 용비어천가의 '용'은 물론 세종의 한
아비 되는 이들을 이른 것이다.
보는 이에 따라 한강의 뿌리샘이 어딘가 하는 데는 서로 다르다. 옛부터 전해
오는 자료를 떠 올려 보도록 한다. 먼저 한강의 말미암음은 오대산의 우통수(于筒
水)라는 주장이다. 동국여지승람 이나 대동지지 등에는 모두 이 샘이 한강
의 뿌리샘이라 적고 있다.
강릉도호부의 서녘 150리 쯤에 오대산이 있다. 산의 서쪽 그러니까 장령(長嶺)
아래에 샘이 솟아 흐르니 이것이 한가람의 말미암음이라는 것. 조선왕조 초기의
학자인 양촌 권근의 기록을 다시 생각해 보자. 산의 서쪽 장령 아래 구덩이 같이
깊숙한 샘[檻泉]이 있었으니 물맛이 다른 데 비할 바 없이 뛰어나고 그 물의 깊이
나 양 또한 그러하여 우통수라고 한다. 서쪽으로 이어 흐르기를 수백리. 마침내
한강이 되고 바다에 이른다.
한강이 많은 갈래의 물을 받아 들이기는 한다. 하지만 우통수가 그 말미암음을
이루는 물줄기가 아닌가. 빛깔이나 맛이 변함이 없기가 마치 중국의 양자강과 비
슷하다. 이어 한(漢)이란 이름으로 이 강물의 부름말을 삼는다(동국여지승람).
같은 오대산 지역에 금강연이 있으니 여기를 한강의 뿌리로 보는 자료도 있다
(세종실록). 잠시 대동지지 의 기록을 되짚어 보면, '강릉의 서쪽 110리 쯤에
월정사가 있다. 그 옆에 우통수가 있는데, 그 아래녘에 사면이 모두 넓적한 바위로
둘러 싸여 있어 못을 이룬다. 물은 폭포수로 쏟아져 내린다.'고 했다. 봄이면 사람
의 키만한 남목어(餘項魚)가 떼를 지어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못에서 고기들이
물 위로 뛰어 오르기를 겨루다가 더러는 벼랑 위로, 더러는 반쯤 오르다가 떨어져
내리는 고기들도 있다는 기록.
금강연(金剛淵)의 경우 우통수의 아래녘이라 하였음을 보면 한강의 제일 위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면 우통수가 한가람의 가장 상류라고 본 것이다. '우통'
이란 어떤 말이며 한강과의 걸림은 어떠한가.
우선 글자대로 풀이하면 '우통 -- 둥그런 모양의 움에 고여 흐르는 샘물'쯤으
로 새길 수가 있을 것이다. 한편 우리말의 소리를 제대로 적을 글자가 없어 한자
의 소리와 뜻을 빌어다가 적는 이두식 읽기를 하면 어떨까 한다. 신라 때만 해도
거센소리가 아직 뿌리내리지 못했음을 생각하면 '우통 -- 우동'이 된다. '동'의
디귿(ㄷ)을 윗말의 받침으로 보면 '우동 ㅇ 웃 울(上)' 됨을 미루어 볼 수 있
다.
해서 우통수란 '맨 윗물' 곧 가장 위에서 흐르는 뿌리샘이란 말이 된다. 비롯됨
은 작고 적지만 그 열매는 무성하다고 한다. 물은 높은 곳 -- 위에서 아래로 흐르
는 게 순리다. 고이면 다시 넘쳐 흐르고 메마른 대지를 적시우고 목숨살이의 어울
림의 고리를 빚어 내면서.
더 멀기는 금대산
근대로 접어 들면서 열 사람 열 소리격으로 한강의 발원지에 대한 주장들이 있
어 왔다. 그 가운데 고목샘 제당궁샘 금대샘을 머리로 해서 한강의 젖줄기를 살펴
본 이야기를 더듬어 본다(이형석, 1990, 한국의 산하).
금대산은 태백산의 한 갈래로서 금대산의 북쪽 골짜기가 한강의 뿌리샘임을 밝
혀낸 것. 이 골짜기에는 3개의 샘과 한 개의 웅덩이가 있어 마르지 않는 깊고 먼
한강의 어머니가 된다. 한강의 하구인 유도산정에서 금대산까지는 497키로. 지금
껏 알려진 길이보다도 7키로쯤 짧은 거리이다.
금대산 꼭대기에서는 북동쪽으로 제당궁샘이요, 북서쪽으로는 고목샘이 흐르기
시작하고 금대샘은 위 두 샘줄기가 어우르는 곳의 약간 윗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제 이 세 줄기의 샘물들은 약 2키로쯤 내려가다가 검룡소 곧 용못에 이른다.
서해에 살던 용이 강줄기를 타고 올라 와서 이 못에 있다가 하늘로 올라 갔다는
얘기. 용은 혼령 -- 물을 다스리는 물신을 드러냄이요, 지모신(地母神)이다. 물은
삶의 밑천이니 신을 모시듯 귀하게 여기고 그 신을 받들어야 한다.
독제(瀆祭)라 하여 냇물신 즉 물신에게 제사를 올렸으니 오늘날에도 제사를 올
린다면 마땅히 금대산에 와서 물신제를 모셔야 옳을 것이다.
흔히 방위로 보아 물신은 북쪽이며 빛깔로는 검은 색 상징을 든다. 이를 샤머니
즘 때까지 거슬러 오르면 우리 선조들이 믿고 바라던 곰신앙에서 비롯하지 않았
을까 한다. 고목(古木) 아래 있다 하여 고목샘이라 했다지만 이를 신라 적의 이두
식으로 읽으면 목(木)의 미음(ㅁ)을 '고'의 받침으로 보면 바로 '곰'이 된다. 소리
마디의 머리에서 기역(ㄱ)이 약해지면 '곰(굼) -- 홈(훔) -- 옴(움)'과 같이 되어
쓰인다. 방언에 따라서는 어머니를 '옴마 암마 움마 오매 어무이'라 하거니와 어머
니는 곧 조상신이자 물신과 땅신으로 섬겨 왔던 생명의 신이다. 곰을 짐승으로만
본 게 아니고 토테미즘에서는 조상신으로 보고 믿기 때문이다. 또 지금도 고목샘
이 있는 골을 곰추나무골 또는 움추나무골이라고 부름은 이러한 방증이 될 것이
다.
제당궁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따지고 보면 금대샘의 '금'도 곰의 변이형이
니 같은 뜻을 드러 내는 다른 곳의 이름으로 보면 어떨까. 땅이름이 바뀌는 과정
에서 '금(金 錦 琴)'과 모(母)의 맞걸림이 보이기 때문이다(금강 -- 熊川 金城 --
母城).
옛 자료의 우통수와 금대산의 샘물은 그 장소가 사뭇 다르다. 하지만 한강의 제
일 윗샘(上泉)이라는 뜻에서라면 다를 게 전혀 없다. 그러니까 옛 어른들이 한강
의 뿌리샘으로 본 오늘날의 우통수는 태백산의 금대산 줄기의 고목샘 곧 곰샘 --
어머니샘이 되는 것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가람과 뫼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
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공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늦여름 장마가 끝나면 한참 피기 시작하는 메밀꽃. 올해도 어김 없이 메밀의 붉
은 대공이 향기같이 애잔하게 피어나건만 효석은 말이 없고 그가 꿈을 키우던 뒷
동산 나무 숲에 바람과 새소리만 스산하다. 이야기 속의 허생원이나 조선달, 동이
같이 고달픈 삶을 사는 이들에게 달빛어린 메밀꽃이 흐뭇할리가. 어쩌면 그이들에
게는 한낱 메밀국수나 메밀적같은 음식을 떠 올리는 먹거리, 돈거리 이상의 그 무
엇이었으리.
장에서 장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강산은 그대로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라 했
다. 차를 타고 지나가기만 해도 온 몸과 마음이 푸르게 물이 드는 듯하다. 명작의
고향 봉평의 땅이름으로 본 그 내력은 어떠한가.
가장 높은 고장 -- 우오(于烏)
신라적에 평창은 울오(鬱烏) 혹은 욱오(郁烏) 더러는 우오(于烏)라고 하였는데
뒤에 백오(白烏)라 하였으니 백오는 경덕왕 때(757년) 고친 이름이다. 이름만 들어
봐도 숲이 우거지고 땅이 기름진 고장임을 가늠케 한다. 강원도하면 감자, 감자 하
면 평창 아닌가. 겨울로 접어 들면 눈의 나라가 된다. 한국 제일의 용평 스키장이
있으니 말 그대로 하얀 나라 백오(白烏)라 일렀을까. 하긴 그 유명한 메밀꽃하며
감자꽃. 겨우 내내 눈꽃이 핀다. 지금은 없지만 겨울 들어 목화밭에 명다래에 피
는 솜꽃은 어떻구.
울오, 우오, 백오의 오(烏)는 땅 또는 부락을 가리키는 씨끝-접미사라고나 할까.
'오'가 땅이름 끝에 붙어 쓰이는 예는 용인(龍仁)에서도 볼 수 있다. 용인의 옛
이름은 구성(駒城) 또는 멸오(滅烏)였으니 '멸-용'과 '성-오'의 맞걸림이 있을 것
으로 본다. 그럼 '멸'이 용이란 말인가. 그렇다. 옛 자료를 보면 용을 '미르(辰)'
라 했음을 알 수 있다(훈몽자회). 성(城)을 '잣'이라 하거니와 한자의 뜻과도 상당
한 걸림을 둔 게 아닌가 한다. 오(烏)는 새(사이)로 읽기도 하기 때문. '잣-새(사
이)'란 사이를 이르는 말에서 갈라져 나아간 말이고 '잣'의 경우도 옛말에서는 지
읒(ㅈ)과 같은 소리가 아직이니까 '잣 삿'의 가능성을 크게 보여 준다.
이제 욱오, 울오, 우오의 '울 우 욱'을 살펴 볼 차례. 이는 모두 위(上)란 뜻
으로 경우에 따라 말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게 쓰인 것 뿐이다. 영서와 영동지방이
사이에서 산성의 구실을 하였으며 지역이 높은 곳에 있음을 밑뜻으로 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럼 우통수(于筒水)의 '우'는 어떠한가.
한강의 말미암음, 우통수(于筒水)
하늘에 맞닿은 산마루
가을 깊어지자 온 밭에 나락이 가득
오랜 서리와 바람에도 벼랑의 소나무는 꿋꿋하기도 해
산길 오르기가 촉나라보다도 어려워
연꽃 곱게 피는 서대암에서 보천(寶川)태자가 살면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우통
수의 샘물을 길어다가 문수보살에게 다(茶)를 다려 공양했다. 자료에 따라서는 우
통수 샘이 한강의 뿌리샘이라 풀이한다(동국여지승람). 다른 물과 달리 우통수의
물은 그 빛이 변하지 않고 다른 냇물과 어울려 흐를 때도 가운데로만 흐른다는
것. 혹시 광천수이기 때문에 물빛이 다른 것 아니었을지.
이름으로 본 우통수의 '우통'은 무슨 뜻인가. 글자대로라면 '대롱과 같이 깊은
물'이다. 한자의 소리를 빌어 우리의 말을 적은 소리 빌림이 아닌가. 글 쓰는 이
의 생각으로는 '우통수 가장 위에 있는 물'의 걸림을 바탕으로 한 풀이가 어떨
까 한다.
우통의 '우'는 위 아래의 위요, 통(筒)은 위에 있는 '물통' 정도로 보면 좋을
것이다. 좀 더 살펴보면 통의 티읕(ㅌ)은 '우'란 말의 받침으로 볼 가능성도 있기
는 하지만. 받침에서는 모두 디귿으로 소리가 나니까 '우통 - ㅇ -ㅇ(웃) 울
우'와 같은 걸림의 고리가 있다는 얘기다. 땅이름의 머리로 돌아가 '우오 - 울오
- 욱오'가 모두 한 뜻 '우(上)'를 밑으로 함을 미루어 볼 수 있지 않은가. 여기
욱오의 욱(郁)은 글자 뜻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시골말에 따라서는 우(上)를 우그
우게 우기라고 함을 떠올리면 바로 '욱'이란 형태가 나옴을 덧붙여 둔다.
믿음의 터 오대산(五台山)
산의 봉우리이며 솟아오른 받침대도 다섯, 이에 따른 암자도 다섯. 오대산과 5와
의 걸림은 예사롭지 않은 듯 하다. 해서 나라안 산 가운데에서 이곳이 가장 좋으
니까 부처의 덕을 기림이 길이 흥할 거라는 일연 스님의 말이 전해 오는가(삼국
유사). 오대산을 청량산(淸凉山)이라고도 한다. 맑고 서늘한 산. 그래 나라안에서
제일 가는 젖소농사와 맥주거리로 쓰는 호프가 자라는 건지. 다섯 봉우리가 고리
모양으로 나란히 어울렸으니 동엔 만월(滿月), 남에는 기린, 서로는 장령(長嶺), 북
에는 상왕(象王)이며 가운데는 지로(指盧)라 했으니 산 봉우리 하나 하나에 부처
를 모신 연화대로 떠올려 오대(五台)라 했을 터.
고산자 김정호 선생은 읊조리듯 오대산을 노래하였다. "나라를 걱정하듯 / 길
게 패인 골짜기며 솟아 웅크린 바위들이 길게 서쪽으로 늘어섰네. /마치 비단폭을
두른 듯하이 / 온 산에 구름과 안개가 끼일 때면 동쪽으로 손에 닿을 듯한 바다의
출렁거림 / 이게 어디 속세의 모습일라고."
한국전쟁으로 월정사는 불에 탔고 상원사(上元寺)만 옛 모습 그대로다. 어떻게
상원사만 살아 남았을까. 중공군의 힘에 밀려 1 4 후퇴를 하던 국군은 오대산의
두 절이 적의 소굴이 된다고 판단, 작전상 모두 불 사르기로 하고서는 스님들 보
고 피하라고 했다. 해서 월정사는 불 살랐는데 상원사는 뜻대로 못했다는 것. 며
칠만 말미를 달라고 한 방 한 암 스님은 나머지 승려를 다 내 보내고 스님만 홀
로 남아 죽음으로써 절을 지켰던 것이다. 약속한 날짜에 국군들이 가 본즉 목숨을
건 스님의 모습에 차마 할 수가 없어 상원사는 남겨둔 채 물러 갔으니 그 스님에
그 군인들이렸다.
자신의 몸을 던져 그것도 제자들을 다 살려 보내고서 보여 준 방한암 스님의
거룩한 믿음이 오대산의 봉우리만큼이나 높아 보인다. 누구나 저 살기에 급급한
세상인데 말이다.
평창강은 평안천(平安川)에서
가람이 흐르는 곳에 마을이 생기고 삶의 둥지를 틀게 된다. 오늘날에는 흔히 평
창강으로 부르지만 김정호 선생의 대동지지 를 보면 사천(沙川)이라 했다. 강
(江)이 쓰인 것은 적어도 김정호선생의 후에 일로 여겨진다. 사천은 어떤 냇물인
가. 물은 계방산에 밑샘을 두고 흘러내린다. 산의 남서쪽으로 흘러 메밀꽃 필 무
렵의 봉평에서 내리는 흥정천을 어우러 오늘의 평창강이 되느니. 다시 대화, 계촌
에서 내리는 물과 합세, 남쪽으로 휘돌아 흘러서는 평창읍을 지난다. 이어 영월땅
서면에서 주천강을 맞아들여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김정호 선생의 자료에서는 사천의 사(沙)가 새로움(新)의 뜻으로 풀이된다. 하면
사천이 새로 생긴 물이거나 아니면 산과 산 또는 물과 물 사이에서 이루어진 내
란 뜻이 된다. 물이 맑고 깨끗하니 모래 또한 그럴 수 밖에. 춘천의 소양강과 함
께 송어 양식장으로는 단연 손 꼽히는 곳이 바로 평창이다. 산 같은 데서 솟아 흐
르는 맑고 깨끗한 물이 아니면 살지 않는 송어떼들. 하긴 그래서인가. 평창의 동
쪽 30리쯤에 참샘이 나오는 굴이 있지 않은가. 본디 정선과 경계를 두는 곳에 용
암못이 있어 연촌강(淵村江)이라고 불렀다는 것. 연촌강까지 이르는 내를 평안천
(平安川)이라 하였다고 전해 온다. 내의 남쪽에 새부리같은 샘이 있어 용틀임인듯
솟아 오르기를 자주 한다는 것이니 오늘의 송어장이 바로 이 샘물을 쓰는 것은
아닌지. 오늘의 평창은 평안천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너브내굴의 전설
메밀꽃 필 무렵의 봉평과 대화의 어름에 너브내굴(廣川窟)이 있다.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자연동굴인데 아주 깊다. 전해 오기로는 검은 강아지가 굴로 들어가 태
기산 서쪽으로 난 갑천쪽으로 빠져 나왔는데 하얀 강아지로 바뀌었다는 거다. 하
기야 흰 돌가루에 희게 보일 법도 하다.
여름부터 늦가을에 이르도록 밭에다 두고 캐는 먹거리 감자. 세상의 먹거리 중
에서 감자처럼 널리 먹는 뿌리 열매가 있을까. 깨끗한 청정채소를 길러 나라 안팎
으로 이바지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 화란 사람들은 그 많은 꽃을 길러 비행기로
다른 나라에 판다는데. 물이라면 으뜸인 걸 잘 추슬러서 살아있는 물을 서울로, 상
해로, 동경으로 낼 수도 있을 법한데. 힘이 있어야 한다. 평창이 이르듯 나라가 평
화롭게 번창할 힘이 있어야 한다. 땅이름 평창에 담긴 선인들의 슬기를 오늘에 되
살려야 한다. 우리 손으로, 우리 머리로. 해서 세상이 놀랄만한 너브내굴의 전설을
꽃 피워야 하지 않을까.
두만강과 조선 왕조
천평이 끝 없는데 홍송 숲 깊어
신시의 옛 터전을 찾는 다리만
동에는 홍단수 서엔 허항령(虛項嶺)
새로워 어제 같은 천왕당 있다.
(최남선의 '조선유람가'에서)
겨레의 영산(靈山) 백두산의 천지못에서 동으로 흐른 물줄기. 이름하여 두만강
이 되었다.
천평(天坪)이라, 단군이 신의 나라를 편 '하늘벌'이다.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소나무의 숲이 파도처럼 끝이 없고 천지에서 흐르는 물은 서쪽의 압록강과 더불
어 두만강의 물줄기가 갈리는 분수령이 된다. 중국과의 경계를 표시한 정계비(定
界碑)가 서 있음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비록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하더라
도.
18세기 초 청나라 측에서는 오라총관 목극등을, 조선에서는 참판 박권과 함경감
사를 앞 세워 나라의 경계를 정하여 정계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고종 때까지 우리
는 토문(土門)이다, 저들은 도문(圖門)이다를 놓고 엇갈린 주장을 하였다. 이 문제
로 간도(間島)에 대한 영토문제가 미해결의 숙제로 떠 오른다.
정계비는 일본의 혜산진 국경수비대가 없애 버렸고 터만 있다. 여진족이 점령한
뒤로 백두산을 청(淸)의 발상지로 보아 마구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대동지
지 를 따르자면 청나라의 목극등이 옮겨 적은 내용은 아래와 같다. 토문(土門)의
뿌리샘은 수십리를 살펴 보아도 물의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流至數十里不見水痕).
화산작용에 따른 돌밑으로 흐르는 물이 백리쯤 가서 갑자기 엄청난 양의 물로 흐
른다. 물이 없음은 어찌된 까닭인가.
밑샘이 시작되는 어름 해서 혹은 흙으로, 돌로, 혹은 나무 울타리로 경계를 삼을
수 있다. 두만강(토문강)이 시작되는 부분의 내를 보다회산천(寶多會山川)이라 한
다. '보물이 많이 모여 있는 산의 내'란 뜻이다. 그렇다. 여기 산은 백두산일 게
분명하고 백두산이니 그 안에 인삼 녹용 불로초며 목재는 물론이요, 나무 열매와
온갖 짐승이 살아 간다. 하면 이 게 바로 보물의 산이 아니겠는가. 냇물의 가장
윗 부분은 대홍단수(大紅丹水)가, 아래 부분은 소홍단수(小紅丹水)가 된다. 대소홍
단수가 동으로 흘러 두만강 일명 어윤강(魚潤江)으로 이어 진다. 짐작컨대 붉은
물(紅丹水)이라 함은 화산현상에 따른 용암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한다.
여진말에 '두만(豆漫)'은 만(萬)을 이른다. 우리 국어의 중세어 자료를 보면 천
(千)으로 쓰인다(월인천강지곡 등). 많은 물이 두만강에 모여서 합하여 흐른다고
해서 천강(千江)이 된 것이다(衆水至此合流故名之). 많은 샘이 한 데 흘러 한꺼번
에 큰 물(巨水)이 되었다는 풀이로 볼 수 있다(용비어천가).
조선왕조와 두만강
이태조의 증조 할아버지 익조(翼祖)가 경흥에서 5천호 벼슬살이를 할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人皆歸心). 다른 벼슬들이 이를 시기하여 익조를 죽이려
고 하였다. 20일 동안 사냥 갔다 온다고 해 놓았으나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물
긷는 할머니한테서 음모가 있었음을 알아 차리고 가족과 함께 배로 두만강을 따
라 적도(赤島)섬에 다다르게 되었다. 뒤를 쫓는 적의 무리 300여 선봉장이 다가
왔다. 익조는 손씨부인과 함께 말을 갈아 타고 섬으로 피하고자 했으나 말로는 건
널 수가 없었다. 홀연히 물이 빠져 백마를 타고 건너자 적들이 뒤쫓아 왔다. 어찌
된 일인지 물이 다시 밀어 닥쳐 익조만 무사히 불근섬으로 피하게 되었는바, 이는
모두가 하늘의 뜻이었다는 것. 거기서 구덩이를 파고 움막살이를 하였다고 전해
온다. 뒤에 덕원으로 옮아 가 자리를 잡고 살면서 조선왕조 세움의 터를 닦는다.
민족시인 윤동주의 고향으로 이름 난 간도는 만주 길림성의 북간도와 서간도를
싸 안은 두만강가의 일대를 일컫는다. 송화 우수리 두만강 사이에 있다 하여 간도
(間島)가 된 섬. 19세기 이후 많은 한국인들이 들어 가 살고 있으며 일제 때에는
독립군이 활약하던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말할 것 없이 간도는 우리의 영토이다.
중국자료(1979)에 따르면 사는 사람의 6할이 조선족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중국에
서는 한국인을 흔히 조선족이라고 부른다.
을사조약 뒤로 만주지방을 개발하는 데 따른 이권을 노린 일본은 간도를 중국
(청)에게 넘겨 주는 조건을 내 세웠다. 참말로 희한한 일이다. 제 땅도 아닌데 누
구 마음대로 넘겨 주고 받았단 말인가. 그게 모두 겨레의 힘 없음을 탓할 수 밖
에.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윤동주의 '참회록'에서)
대동강과 한(韓)겨레
임이시여 물을 건너지 마시오
임께서는 물을 건너시는구려
임은 그예 물에 빠져 죽었다네
임아 이 일을 어이 할거나
(백수광부의 아내 지은 '공후인'에서)
고조선 때의 일이다. 술병을 차고 흰 머리의 백수광부(白首狂夫)가 강을 건너다
이내 빠져 죽는다. 그를 뒤 따르던 아내는 비파와 같은 공후인을 끌어 안고 따라
가면서 백수광부에게 가지 말라고 애타게 말린다. 쓸데가 없다. 무슨 생각일까. 공
후인으로 애절한 사연을 노래한 뒤 백수광부를 따라 물 속에 몸을 던졌다는 것이
다. 푸른 강물엔 새벽 노을만 붉게 타고 있을 뿐.
이 광경을 지켜 본 나루의 뱃사공 곽리자고가 집에 돌아 와 아내 여옥(麗玉)에
게 그 사연을 얘기하자, 여옥은 공후인의 곡조를 본 받아 타니 듣는 이마다 울지
않는 사람이 없더라(聞者莫不墮淚而掩泣焉).
서러운 사랑의 이야기는 중국으로 옮겨져 이백을 비롯한 많은 시인들이 노래로
읊었다. 이 노래가 지어진 문학의 현장이 대동강이다. 대동이라, 모두가 하나로 된
다는 게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 1700남짓 크고 작은 시냇물이 모여 이루어졌다 해
서 대동강인가.
고구려 중천왕(中川王) 때 대동(大同)이란 미인이 있었다. 왕은 대동을 후궁으로
삼아 끔찍이도 아꼈다. 시앗을 본 왕비 연씨는 대동을 서위(西魏)나라의 임금에게
보내려고 애를 썼으나 임금이 듣질 않았다. 이를 안 대동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믿
고 교만해지기 시작했다. 왕비 연씨를 내 쫓으려는 궁리를 하였다. 마침 왕은 며
칠 째 신하들과 함께 사냥을 갔다가 돌아 왔다. 왕비가 대동을 미워한 나머지 가
죽부대에 자신을 넣어 물에 던져 버리려 했다고 일러 바쳤다. 중천왕은 대동의 말
이 거짓임을 알고 대동을 가죽부대에 넣어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이 사연으로 대동
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럴 싸하다. 분수를 알아야지, 분수를.
그러면 대동강을 본래 패수(浿水)라 하였음은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 신증
동국여지승람 의 자료를 본 삼아 대동강의 내력을 더듬어 본다.
패수(浿水)는 겨레의 상징
평양부 동쪽 1리쯤에 있으며 패강(浿江) 혹은 왕성강(王城江)이라 한다. 강의 뿌
리샘은 둘이다. 하나는 영원군 가막동(加幕洞)에서 비롯된다. 가막동은 우리말로
'가마골(감골)'인데, '감(가마 검 금 굼)'은 '가운데 신(神) 가마(釜)'란 말이다.
'감(검)'은 단군왕검의 '검(儉)'과 같은데 바탕은 곰신앙에 터한 것이며 나중에는
지모신 곧 물신과 땅신 우러름으로 바뀌어 간다.
덕천군의 경계에 이르러 삼탄(三灘)과 어우러지고, 개천군 경계에 이르러서는
순천강(順川江)이 되고 다시 성암진 나루를 지난다.
자산군 경계에 들면서 우가연(禹家淵)을 이루고 이로부터 동으로 흐르면 강동군
경계에 들면서 잡파탄(雜派灘) 여울이 된다.
대동강의 또 다른 뿌리샘 하나는 양덕 문음산(文音山)에서 발원, 서남으로 흘러
성천지역에서는 비류강(沸流江)이 된다. 비류는 온조와 함께 고구려에 나아가 백
제를 일으킨 사람이다. 미루어 보건대, 비류강에서부터 바다를 따라 백제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한다. 강은 꺾이어 흐르면서 서강진(西江津) 나루에서 잡파탄내와 만
나 함께 흐른다. 마침내 두 줄기의 가람이 큰 가람을 이룬다는 뜻으로 마탄(馬灘)
이라 이른다. 평양의 동쪽으로 흐르면서 백은탄(白銀灘) 여울이 되었다가 바야흐
로 큰 하나됨의 대동강을 이룬다. 다시 서쪽으로 흘러 구진익수(九盡溺水)가 되는
데 다른 이름으로는 마둔진(麻屯津)나루라고도 한다. 이는 맏나루 곧 나루 중에서
제일 큰 나루란 말이다. 이어 순안 쪽에서 흘러 내린 평양강과 합쳐서 중화현의
배나루강(梨津江)이 되며, 물의 흐름은 쌍용총으로 알려진 용강의 급수문(急水門)
을 나와 바다로 든다.
대동강은 패강(浿江) 또는 패수(浿水)라고 했다. 본래의 이름인 패수의 물이름은
주로 한(韓)겨레들이 사는 지역의 물이름으로 쓰였다(韓水名). 또는 물가패로 하여
'물가(水涯)'의 뜻이 중심을 이루기도 한다.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열전(列傳) 을 보면 패수의 풀이는 이러하다. 중국
(漢)이 요동땅의 옛 요새를 다시 쌓고 경계를 패수로 하였다(浿水爲界)는 것이다.
위만이 망명하여 동으로 가서 패수를 건너 왕검성에 서울을 정하고 압록강으로써
패수를 삼았다고 풀이한다.
당서(唐書) 에 이르기를, 평양은 본시 중국의 낙랑군이라 했다. 산으로 둘러
싸여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남으로는 패수를 변경으로 한다. 여기가 지금의 대동
강이다. 또 고려사(高麗史) 에서는 평산지방의 저탄(猪灘)을 패강으로 적고 있
는 바, 백제의 시조는 패강을 북쪽의 경계로 삼게 했다는 것이다.
앞의 흐름으로 보면 패강 혹은 패수는 어느 강이름이나 한(韓)겨레가 사는 지역
의 물이름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라고 할 수 있다. 패강이 압록강 대동강 저탄 요동
의 패수 등으로 널리 쓰이기 때문이다. 두루 알려진 공통의 이름은 대동강뿐이다.
말 그대로를 풀이하면 '크게는 같다'의 뜻이 된다.
대동(大同) -- 크게 하나됨의 바탕은 무엇일까. 한 핏줄을 타고 나와 살아 가는
겨레의식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한다. 패수의 '패(浿)'를 겨레와 걸림을 둔다면
어떨까. 겨레란 본디 '한 몸에서 갈라져 나온 것'을 이른다. 대동강의 큰 흐름은
하나이나 그 큰 가람을 이루는 시내는 1700여개의 작은 물이 모여 이룬 것이다.
우리말로 강을 '가람'이라 한다. 가람은 '가르다'에서 말미암은 이름이다. 가람
이 흐르는 곳에 문화가 발생하고 마을이 이루어진다. 고을과 고을, 나라와 나라가
갈리는 경계선이 된다. 마치 낙동강이 신라와 가락국의 경계선이 된 것처럼 말이
다. 앞서 이른 잡파탄(雜派灘)의 '파(派)'가 암시하는 바가 크다. 파(派)를 갈래 파
로도 읽기 때문이다. '패' 또는 '파'는 갈래 곧 가람이요, 더 나아가서는 겨레가
된다. 이를테면 파(派)의 뜻을 따라 쓴 훈차(訓借)식 이름이란 말이다. 강은 모두
가 패수요, 가람이니까. 대동지지(大東地志) 에는 대동강이 대통강(大通江)으로
나온다. 크게 통하는 강이란 말인가. 대동의 동(同)을 중국 사람들은 통(tong)으로
읽는 까닭에 그리 썼는지도 모른다.
못 다 한 묘청의 한(恨)
저 넓은 들 동쪽엔 점 찍은 듯한 산이 있어
긴 성을 끼고 도는 도도한 강물이여
(大野東頭點點山 長城一面溶溶水)
(김황원의 글에서)
동인시화(東人詩話) 를 따르면, 김황원(金黃元)은 고려 때 이름 난 선비로서
부벽루에 올라 앞서 지은 글이 불만스러워 글 써 붙인 누각의 현판을 불살라 버
렸다. 하루가 다 하도록 난간에 기대어 애써 얻어 지은 것이 머리의 글이다. 글이
풀리지 않았음인지 심히 울고 갔다는 것.
역사로 보면 고조선에서 고구려, 고려 때까지 서울과 같은 머릿고을이 되게 한
것이 대동강이다. 어찌 오늘의 서울에 비길 수가 있으랴. 잘 알려진 바로 대동강
을 징검다리로 해서 잃어버린 왕도의 권위를 찾고자 한 묘청의 일을 더듬어 본다.
이른바 서경 천도의 일이다.
고려 인종이 서경을 돌아 보게 되었다. 묘청(妙淸)과 백수한(白壽翰) 등이 큰 떡
덩어리를 만들어 가운데에다 큰 구멍 하나를 낸 뒤 끓는 기름을 넣어 가지고 대
동강 물에 집어 넣었다. 마침내 기름이 물위로 떠 올랐다. 보기에는 마치 오색의
안개구름으로 보였다. 백수한 등이 인종에게 상황을 알리었다.
'신룡(神龍)이 토해 낸 오색구름인 듯합니다. 참으로 놀랍고 좋은 일이 있을 징
조입니다(非常之嘉瑞也). 많은 신하와 함께 축하례 드리기를 청하옵니다.'
이에 왕은 문공인(文公仁) 등을 보내어 현장을 잘 살피라 했다. 살펴보매 기름
덩어리 때문임을 알게 되어 임금에게 아뢰었다.
'기름이 물 위로 떠 오른 것인즉 이상합니다.'
바로 헤엄 잘 하는 이로 하여금 떡덩어리를 찾아내어 이들의 말이 거짓임을 알
았다. 해서 묘청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해 죽임을 당하였고 평양으로
서울을 옮기자는 서경천도설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음을 강은 알고 있다.
차라리 삼국통일이 대동강 중심으로 되었더라면, 더 나아가 만주 중심의 일이었
더라면 우리 배달의 겨레에게 오늘날 남북 분단의 아픔은 없었을 것을. 그 부끄러
움의 몽고침입, 임진 정유의 난리며 경술의 침략이란 있을 법이나 한 노릇인가. 그
건 바로 온 겨레가 하나 되는 대동의 큰 맥이 약해지므로서다. 하지만 역사의 수
레바퀴는 돌아 가는 법.
대동의 하나되는 겨레의 슬기가 굽이쳐 흐르는, 그래서 인류평화라는 바다로 가
는 큰 뜻이 이루어 질 날을 우리 모두는 빌어 본다. 한 맺힌 대동강에의 다시 만
남을 기다리면서.
비 갠 언덕에 풀빛 더 푸르네
남포로 그대를 보내려 하니 슬픈 노래가 앞을 서고
어느 날에 대동강이 마르겠소
세월 두고 헤어짐의 눈물이 더해 갈 것을.
(정지상의 '친구를 보내며')
영산강과 용
세곡 나르는 선주(船主) 어찌나 교활한지
쌀로는 받지 않고 돈으로만 챙기는구려
서울에선 쌀값이 4백냥이나 눅다니
이번 행차 한번에 논밭을 살테지
(김려의 '황성리곡'에서)
혹심한 가뭄이 든 영산강. 쌀값이 서울보다 사백냥이나 비싸기 때문에 배삯을
돈으로만 받아 선주는 서울 가서 싼 세곡을 사서 바치고 남는 돈으로 논밭을 산
다. 하긴 탐관오리란 언제나 있었다. 맹자 에 사람 고기 먹는 양혜왕이나 뭐
다른 게 있을까. 민초들은 죽겠다고 걱정이 태산 같은데 한편에선 벼슬하는 이들
이 장사하는 이와 짜고서 딴 주머니를 찬다. 참으로 속이 뒤집히는 얘기다.
길잖은 물줄기일망정 말 없는 영산강은 흘러 바다로 든다. 사람들의 기쁨과 서
러움을 함께 섞어서 씻어 버리듯이. 그 피어린 민초들의 한을 싣고서.
담양(潭陽)의 용고개 혹은 용못에서 흘러 광주 나주 함평 무안을 지나 목포에 이
르러 바다로 흐른다. 길이는 115키로. 그러니까 삼백리 정도다. 호남의 뜰에 생명
의 젖줄을 대는 조국의 어머니요, 오아시스다.
조선왕조 중종 7년(1514) 무렵에는 영산포가 강에서 으뜸가는 항구도시였다. 오
히려 목포보다도 말이다. 영산강 유역에서 거두어 들이는 곡식이나 세금으로 바치
는 세곡들을 여기서 모은다. 해서 서울로 보냈으니 이 때 물건을 관리하던 곳이
영산창(榮山倉). 그러면 영산강은 영산포 혹은 영산창에서 따온 이름일까. 일단 의
심해 볼 수는 있겠다. 영산강의 내력을 더듬어 볼 차례.
가람의 큰 샘줄기는 담양에 있는 추월산(秋月山)의 용연분소(龍淵噴所)에서 비
롯된다. 산의 동쪽엔 두 개의 큰 방아확처럼 생긴 바위못이 있다. 못 아래로 커다
란 바위가 있는데 바위에는 굴같은 구멍이 있으니 이 바윗굴에서 샘이 흘러 공중
에서 내리는 폭포를 이룬다. 그러니까 못 밑에서 물이 솟아 폭포처럼 흩뿌림은 우
연한 일이 아니다. 여기가 용연분소가 된다. 사람들은 바위구멍(岩穴)을 용이 뚫어
놓은 것이라 말한다. 혹 용암시대에 공룡이라도 헛디뎌 난 구멍인가는 알 수 없는
일. 용이 기어 다닌 자욱이 바위에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게다.
옛 적 벼슬하는 이가 용연분소에 와서 용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를 내민 용의 빛나는 눈을 보고 벼슬하는 이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놀라 죽었으니 지금도 용연분소 아래에 안렴사와 따라온 기관(記官)의 무덤 자리
가 있다고 전한다.
해서인지 용연의 주위에 용연에 제사하는 곳을 만들어 봄 가을로 용에게 정성
껏 제사를 드린다. 특히 가물면 여기 와서 비를 오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면 비가
오곤 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
비는 우리 몸의 피와 다를 바 없다. 땅에서 수증기가 하늘의 구름으로 모여 다
시 땅으로 떨어져 도는 흐름이나 피의 그것과 같지 않은가. 소리상징으로 보아 비
보다 피는 거센 파열음이 될 뿐. 기원적으로 비와 피는 물을 가리키는 '미'에서
말미암는다(미추흘 내미의 '미'). 생명현상을 있게 하는 게 바로 물이며 불이 아닌
가. 그러니까 미 -- 비 -- 피는 한 낱말의 겨레로서 '미'의 또 다른 말들이다. 가
장 바탕이 되는 소리상징이 '미'이기 때문이다.
용못에서 나온 물이 흘러 북으로 담양을 싸고 돌아 창평현의 죽록천과 만나 광
산(光山)의 굼개(구멍개穴浦)에서 어우러져 여울진다. 담양의 북으로 흐르는 내가
원율천(原栗川)이다. 대동지지 에도 없어진 고을(縣)로 드러났지만 담양의 옛고
장인 것으로 보인다. 본디는 밤마을(栗支)이었는데 뒤에 밤언덕(栗原)으로 바뀌었
고 담양의 옛 이름인 가시개 혹은 갓개(秋子兮)에 속하는 오래된 마을.
가시가 있는 열매가 밤이니까 추자혜(개) -- 율지 -- 원율 -- 원율천으로 이어
지는 걸까. 흔히 밤하면 사과 배 감 밤의 밤만을 떠올린다. 말의 밑을 캐어보면
'벗다 -- 벗음(밧음) -- 바암 -- 밤'으로 되어 껍질을 벗겨 먹는 것을 '밤'으로
일컬었다(훈몽자회). 하면 밤은 당시에 여섯 곡식(六米)에 드는 먹거리였으니 원관
념은 '양식'으로 풀이하여 지나침이 없다. 밤과 걸림을 둔 땅이름은 어디서나 찾
아 볼 수 있다. 결국 담양의 담(潭)은 용못을 이르며 먹거리 생산의 주요한 땅이
란 말이 된다. '양'은 물의 북쪽이니 담양은 용못의 북쪽에 발달된 들판이란 속내
가 되지 않을까.
영산은 용천산(龍泉山)에서
용천에서 나온 내를 원율천이라 한다. 대동지지 를 보면 용천산의 용천에서
나와 남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여기 용천산에는 용추 곧 용못이 있다. 함께 동아
리 지으면 추월산의 용연분소나 용천산의 용추나 모두가 용이 뚫었다는 바윗굴에
서 나온 샘줄기에 그 말미암음을 두고 있다. 만주말로 용은 륑(Rung)이라 하고 한
자로는 영(靈)이라고 적는다. 따지고 보면 용은 물을 다스리는 절대 능력의 소유
자이니 신령할 수밖에. 한마디로 농업생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용
을 두려워 하고 숭배하는 것이다. 이르자면 물신으로서 용이 우리의 의식 속에 자
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때에 알맞게 비가 와야 곡식이 넉넉하고 삶의 꽃이 핀다.
그래야 온갖 문화의 열매가 달리지 않겠는가. 먹는 게 하늘이라고 먹거리가 우선
이고 다음에 집과 옷이 아닐까. 참으로 물신은 위대하며 숭배 받아 마땅하다. 물
과 땅은 우리 목슴살이들의 뿌리며 고향이니까 그러하다.
영산강의 영산은 용산이며 영산의 또 다른 땅이름에 지나지 않고 본뜻은 같다
고나 할까.
추월산(秋月山)이 담양의 바람막이 진산(鎭山)이라면 삶의 울을 두른 게 금성산
성(金城山城)이다. 담양부의 북쪽 약 20리쯤에 있는 돌성이다. 조선의 선조임금 30
년에 다시 성을 쌓고 산에 기대어 성을 만들었다. 효종 4년 다시 내성을 쌓았으니
둘레는 610걸음이요, 밖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940걸음이더라. 성에는 지키는
참호가 72소나 되고 못이 5개며 우물이 27개곳이나 된다. 성을 지키는 이가 부사
를 겸하여 지냈으니 성의 중요함을 보여 준다. 금성(金城)이라, 쇠잣으로 읽기도
한다. 아니면 금은동의 금으로 봐야 할까. 필자 보기로는 용천은 용이 뚫어 놓은
바위굴의 '구멍'과 걸림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옛말로 구멍은 '구무(굼)'였는
데 '굼'을 적을 한자가 없으니 금(金)으로 적은 것이다.
용에 대하여 잠시 떠 올려 보자. 용은 생각으로 그려 낸 파충류의 동물. 인도와
중국에서 옛 적에 있었다고 하는데 몸뚱이는 뱀과 비슷하며 억센 비늘에 발이 넷
이라 한다. 뿔은 사슴에, 눈은 귀신에, 귀는 소에 비슷하다고 했다. 날개가 있어 하
늘을 나는 비룡도 있다. 바람과 비를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봉황 기린 거북과 함께
아주 상서로운 짐승으로 의미가 부여된다. 개천에서 용 난다고 하거니와 용을 훌
륭한 사람에 비유함을 보아도 용의 상징성을 짐작할 수 있다. 임금과 관련한 말에
용이 많이 있으니 '용안 용발 곤룡포 용상' 등이 모두 그러하다. 임금이 거처하는
궁전이나 절간을 보라. 거의 용의 모습을 담지 않은 건축물이 얼마나 될까. 땅이
름만 해도 용과 걸림을 둔 곳이 아주 많이 있음을.
용강 용담 용산 미륵이 미륵고개 등 실로 많은 이름들이 우리의 땅을 가리키며
용소 또는 용못이라 하는 곳은 우리나라 온 누리에 많다. 이 모두가 용신앙이요,
물신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을 드러냄에서다.
영산창, 영산포도 따지고 보면 금강진(錦江津) 나루에 자리잡은 갯목이다. 달리
금강을 금천(錦川) 혹은 목개(木浦), 남개(南浦)로 부른다. 미루어 보건대, 용이 뚫
어 놓은 바윗굴에서 말미암은 강이다. 좋게 미화하여 비단강이 되었다. 겨레의 전
통신앙으로 보면 곰신앙의 또 다른 이름으로 보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곰 -- 검
-- 금 -- 감'이 땅이름에 되비친 것이 아닐까. 짐승으로서 곰이라면 그뿐이지만
조상신, 그것도 어머니신으로서 뒤에 물과 땅의 신이 되었으니 결국 곰신앙과 용
신앙이 서로 녹아 붙은 것이다. 본디 용신앙은 불교에서, 유교에서 수호신으로 삼
았지만 농경사회에서는 물신이 되기에 이른다.
오늘날 목포로 불리우는 목개와 남포는 어떤 걸림이 있는가. 나무목을 쓰기는
했지만 바다에서 강으로, 벌로 들어오는 '목'에 그 본뜻을 둔 것으로 보인다. 나무
는 나모(남(ㄱ))라고 옛글에 하였으니 그 소리를 따오면서 영산강의 제일 남쪽의
갯목이 되니 남녁남을 썼던 것으로 보면 어떨까.
세월 두고 흐르는 용샘에서 나온 영산강은 오늘도 내일도 호남의 삶터를 축여
준다. 우린 살다 오래고, 먼 고향으로 돌아 간다. 한 줌의 흙이 되어서라도 영산강
의 온 소리를 진혼가 삼아 서러운 역사의 한을 씻고 달래며 이를 거름 삼아 탐스
러운 꽃으로 열매로 되살아 날 것을 믿는다. 저 영산의 믿음으로. 그 영험함으로.
섬진강과 두꺼비
전라도 광양땅에는 옛부터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름하여 두꺼비 전
설.
섬거(蟾居)에 살고 있던 수만 마리의 두꺼비가 떼를 지어 섬진나루로 15리 길을
들어 갔다. 해서 두꺼비 섬자 섬진강이 된 것이다. 한 때는 모래 가람 모래내 다사
강 대사강으로 불리웠다. 왜 하필이면 섬진강에만 두꺼비가 그렇게 많이 떼지어
살았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섬진나루의 내력을 다음처럼 풀이하고 있다. 남원부
의 잔물나루에서 남으로 흘러 진주 화개현에 이른다. 서쪽으로 가면 용왕연(龍王
淵)이 되고 바닷물이 들어 온다. 화개현의 남쪽 59리쯤에 섬진(蟾津)이 있는데 나
루의 동쪽이 진주 악양현의 어름이 된다.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든다. 고려 때
에는 섬진강 물이 바다의 조수에 밀려 거꾸로 흘러 어려움을 겪었다(以此水爲背
流).
두꺼비와 걸림을 보이는 강원도 원주의 섬강(蟾江) 부분을 보자. 근원은 홍천
공작산에서 나와 남으로 흘러 횡성 서쪽이면서 외로 흐른다. 남천을 지나 관어대
에 이른다. 화사천(花似川)을 지나 달내강이 되고 안창역을 지난다. 서남으로 원주
에서 50리쯤에 섬강이 된다. 앙암진(仰岩津)에 드는데 강변에 두껍바위(蟾岩)가 있
어 강이름을 섬강이라 했다는 줄거리.
바위나 바다에 잇다은 바위 모양이 두꺼비처럼 생겨서 그렇게 부를 수도 있고
두꺼비의 이야기 때문에 그리 부를 수도 있다.
글 쓰는 이는 '섬'의 소리에 주목하여 섬진강을 떠 올려 보고자 한다. 네 면이
물로 싸인 육지를 '섬'이라 한다. 옛말에서는 '셤(용가 53)'이었다. 미루어 보건대
'셤'은 '셔다(셰다)(<석보상절 9-13>)'의 파생명사가 아닌가 한다. '셔다(셰다)'
는 '사이'를 뜻하는 '셰(셔 세 새 시 혀 헤 해 히)'에 동사접미사 '-- 다'가 어울
려 이루어진 움직임말이다. 섬이 되려면 물 사이로 솟아 올라야 한다. 마찬가지로
두꺼비로 치면 물과 뭍의 사이에서 언제든지 적응할 수 있다. 섬진나루도 예외는
아니다. 강과 바다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뭍으로 갈수록 경상도(하동)와
전라도(광양)의 '사이'가 되지 않는가. 더 위로 거슬러 오르면 구례에서 두 갈래
로 크게 갈라진다.
서쪽으로는 보성이요, 북쪽으로 흐르면 전북의 순창 진안에 이른다. 섬진강의 줄
기를 중심으로 하여 산줄기가 울타리 같이 둘러 싸여 있다. 결국 강으로 둘러 싸
인 곳이 광양 순천 낙안 보성이다. 곧 섬이 되는 셈이다. 앞에서 두꺼비 바위는 곧
섬바위로도 불러 마땅할 것이다.
이형석(1990. 한국의 산하)에 따르자면 섬진강의 뿌리샘은 전라북도 진안군 백
운면 신암리에 있는 봉황산의 상추막이골 테미샘이라는 것이다.
영산강과 함께 호남의 벌을 적시며 흘러 나린 섬진강은 임진 정유의 왜란 때에
죽창으로 맞서 조국을 지키던 우리 역사의 현장이다. 어디나 그렇지만 섬진강을
사이해 호남과 영남의 삶이 더불어 건강해 질 것을 기다려 본다. 모든 사람의 삶
은 바로 서로의 걸림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백마강(白馬江)의 뒤안
돌팔매를 던져도
닿을 수 있는 거리
강을 사이에 두고 나는 여기에
너는 거기에 있다.
언제나 건널 수 있던 강이
오늘은 왠지 건널 수가 없구나.
(남락현의 '강을 사이에 두고'에서)
말 없는 강물이 흐른다. 그것도 흰 말의 기상으로 모래톱에 물자국을 남기면서
말이다. 한 시대의 삶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백마를 탄 거룩한 지도자가 나타나
서 어두움을 밝히는 횃불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벗어남이랄까. 어지러운 현실을
뛰어 넘는 초월주의와 같은 것일 게다. 푸른 삶, 푸른 하늘에 대한 그리움이 있기
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백제의 하늘가에 저녁놀이 물들고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진군의 나팔 소리
와 함께 깃발을 펄럭이던 때. 망한 나라의 겨레를 이끌고 도침 스님, 흑치상지 장
군과 함께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백마의 기세를 드높이고자 했던 복신(福信)
은 의자왕의 아들 풍장을 왕으로 내세우는 한편 일본에 구원병을 보내달라고 한
다.
일만여명의 일본인 구원병은 백강(白江) 어귀에 이르렀고 이를 맞이한 백제의
군인들은 나당 연합군에 맞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대세는 기울었는지라 다른
길이 없었다. 백제와 일본군은 싸우다 물에 빠져 죽는 길 밖에는. 여기 백강의 자
리가 정확하게 어디인가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주장들이 있다.
백강을 백마강(白馬江)이라 부른 건 무슨 까닭인가.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성을 칠 때다. 마침 강에는 안개와 구름이 비바람으로 뒤덮여 건널 수가 없었
다. 때에 한 늙은이가 나타나서 이르기를 '백제의 의자왕이 밤에는 용이 되고 낮
에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싸움 때라 왕이 사람으로 바뀌지 않아 그렇다.'
고 하였다.
이야기를 들은 소정방은 백마의 머리를 베어 미끼 삼아 물속에 잠긴 용을 낚아
올렸다. 이윽고 안개와 구름이 걷히게 되어 강을 건너서 백제성을 빼앗았다. 지금
도 고란사 맞은 편에, 용을 낚았다 해서 조룡대(釣龍臺)가 있다. 무슨 낚시가 백마
를 미끼로 할 만큼 크며 나라는 바람 앞에 등불인데 백말 머리 하나 먹고 그리도
쉽게 의자왕이 손을 들었단 말인가. 용은 왕을 떠 올린다. 왕이 입는 옷을 곤룡포
라 하거니와 용이 그려져 있다. 앉는 의자를 용상(龍床), 그의 얼굴을 용안(龍顔)
이라 하는바, 어지러운 이야기를 퍼뜨려 민심을 당나라 쪽으로 기울게 하려는 얘
기가 아니었던가.
삼국사기 등의 거리를 보면 백강(백마강)의 자리는 전라도의 내포, 더러는
전북의 동진강, 더러는 충청도의 웅진강일 거라는 가설이 있다. 주로 일본 사람들
이 내세운 것으로 백제와 신라군이 싸운 곳을 중심으로 한 생각들이었다. 이와는
달리 도수희(1983)님은 부여의 소비포 옛 소부리, 사비성, 사불성이라 불리우는
'사비'계의 분포로 보아 백강은 사비하와 같은 이름이라고 풀이하였다. 또 백강은
지금의 부여에서 군산포에 이르는 강을 통틀어 백강이라 했을 가능성을 들고 있
다는 것이다. 하면 '사비 백강(백촌강白村江 백마강) 기벌포 장암'의 맞걸림이
이루어지게 된다.
조선왕조 중기의 시인 이승소의 '부여회고'란 글에도 백강(白江)이 나온다. 한
자의 뜻으로 보면 백(白)은 '희다'는 말이다. 희다의 '희'는 ㅎ(日)에서 비롯한 형
태로 보아 'ㅎ 희, ㅅ ㅅ'와 같은 맞걸림이 있음을 알겠다. 이는 일종의 소리의
넘나듦으로써 마찰음끼리의 닮음이라 할 것이다. 흔히 입천장소리되기로도 풀이한
다. 지금도 사투리말에서는 희다(ㅎ다)는 '시다(새다)'로 말하지 않는가.
이두말로 보면 백(白)은 'ㅅ'과 같다(유서필지 이두편람 나려이두 등 참조). 그럼
백강의 백과 'ㅅ(새) 시'와는 어떤 걸림이 있을까. 시대와 지역을 달리 하면서 말
도 그 소리가 다르게 쓰이기 마련. 이는 또 '새(시)'와는 어떤 걸림이 없는지. 하
나의 형태를 이루는 낱말이 쓰이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 걸 변이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ㅅ'은 'ㅅ(새 시)'의 변이형이란 말이 된다. 백강은 새마을 곧 초
촌(草村)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소부리 곧 부여의 본디 이름인 새마을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성주탁 1982). 국립박물관의 조사자료에 힘 입
은 바가 크다. 이르자면 초촌면의 송국리에서 옛 선사시대의 유물이 상당수 발견
되었다는 거다. 새마을은 소부리로부터 동남쪽으로 30여리쯤 떨어진 곳이다. 옛
사람들이 백마강쪽으로 자리를 옮겨 삶의 뿌리를 내린다. 새로이 이사한 곳에 이
름을 부친 곳을 소부리로 볼 수 있다. 새마을의 '새'의 방사형이 소부리이며 백강
(ㅅ강)이라고 보면 좋을 듯하다. 향약구급방 같은 옛 자료를 보면 초촌의 초
(草)는 모두 '새'로 나오며 당시의 소리값은 '사이'가 된다. 중세기에는 '새'의
소리가 두 홀소리인 '사이'로 났기에 그러하다(속새 박새 등). 따지고 보면 'ㅅ'
또한 '사이'임에 틀림이 없다. 지금도 사이나 경계를 '살피'라 함을 떠 올리면 그
런 가능성이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말이 문화의 되비침이라면 '새 -- 사이'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방위로는 동쪽이요, 삶의 터전으로는 강과 산의 사이 또는 강과 강, 산
과 산의 사이에 삶터가 새로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면 백강(白江)은 '사
이(살비 사비)강'이란 뜻이 된다. 살비(사비)에서는 울림소리 가운데에서 비읍(ㅂ)
이 약해져서 떨어져 이루어졌다면 어떠할까. 경우에 따라서 백강은 마한과 진한의
경계 -- 사이가 될 수도, 고구려와 백제의 사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소리로 보아
비슷한 음절과 값을 드러내는 말이 쇠다. 지역에 따라서는 쇠가 '새(쎄) 시(씨)'로
도 쓰이는데 이는 청동기 곧 쇠그릇 문화가 들어 오면서 붙여진 이름들이다. 쇠붙
이로 된 농기구로 여름지이를 하니 말 그대로 농업생산이 크게 늘어 나고 새로운
삶에의 힘이 생긴다. 우선 먹거리이며 옷가지, 집 따위의 모든 것이 아주 손쉽게
풀린다. 하니 산에서 가람으로 벌판으로 사람들은 옮겨살이를 하게 되고 새로운
마을을 이루게 되었던 것.
아니면 흐르는 물이 넘쳐 흐르다가 떠 밀려 온 흙이 쌓여 새로운 물줄기가 골
을 터 흐르나니 이르러 새로운 강 -- 백강이 될 법도 하다. 부여의 옛 이름인 소
부리의 '소'와 사비의 '사'와 함께 '사이'란 뜻으로 쓰일 수도 있는 법.
방위 상징이라면 백강의 백(白)은 서쪽이 된다. 그러니까 초촌 -- 새마을의 서
편을 흐르는 가람이 된다는 겐가. 불가에서 서쪽은 특별한 뜻이 있덜 아니한가.
극락왕생하는 깨끗한 나라 -- 정토(淨土)를 떠올릴 수도 있긴 하다. 이승에서 저
승으로 가는 길목의 밤을, 수 없는 밤을 별빛으로 더러는 달빛으로 밝히면서 끊임
없는 수도자의 굽이를 돌아 흐르는 강은 아닐런지.
망한 나라 백제의 겨레가 되었을망정 왕생극락에의 꿈을 안아 자지 않고 깨어
흐르는 물처럼 오래고 먼 그리움을 주는 지를 그 누구라서 알리오. 물속으로 떨어
진 꽃다운 이들이 다시 연꽃으로 피어 올라 강물에 비치는 달빛으로 어린 제 모
습을 들여다 보며 하나 둘씩 바람에 제 몸을 떨구는 것을 어이 하랴. 그 맑은 별
님의 노래를 따라서 지는 것을.
빛나던 강과 언덕의 성채, 강릉
거북아 거북아 수로(水路)를 내 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죄가 얼마나 크냐
네 만일 따르지 않고 내 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
('해가(海歌)'에서)
순정공의 아내 수로는 얼굴이며 모습이 빼어나 큰 산이나 못 또는 강이나 바다
를 지날 때면 언제나 귀신들에게 붙들려 가곤 했다. 해가는 신라 성덕왕 때, 강릉
태수의 벼슬길에 오른 순정공의 아내인 수로가 바다의 용에게 이끌려 간 것을 되
찾아 내기 위하여 노인의 말대로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부른 노래이다. 이어 바
다의 용은 수로부인을 모시고 나와 순정공에게 되돌려 준다. 해서 평화로이 강릉
태수의 자리에 앉게 된다. 통과제의라 할까.
필시 바다의 용은 바다의 해적이 쳐들어 온 것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여럿이
마음과 힘을 합하여 되찾은 것이니 여기 수로는 빼앗긴 영토 또는 사람이 아닌가
한다. 이런 풀이의 가능성은 <처용가>나 <구지가>에서도 드러난다.
강릉엔 옛부터 바닷가에 예(濊)라는 겨레가 살고 있었다. 또 달리는 철국(鐵國)
하서랑(河西良) 하슬라(何瑟羅)라 한다. 신라 경덕왕 때 와서 명주(溟州)로 고쳤다
가 고려 충렬왕 때 와서 강릉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
'예'의 소리상징은 무엇인가. 당시 말소리가 없어 한자를 빌어 썼을 뿐 본디 우
리말이다. 한자의 뜻과 소리를 빌어 쓰는 수가 있으니 앞의 것은 훈차라 하며 뒤
의 것은 음차라고 한다. '예'는 한자의 소리를 빌린 음차로 볼 수 있다. 소리의
바뀜을 함께 고려하면 예는 셰(歲羽切)에서 비롯된다. '셰'에서 시옷의 소리가 약
해지고 떨어지면 '셰 예'가 되니 말이다. 여기 '셰'는 중세시대만 해도 겹홀소리
'서이'로 읽었을 것이다. 하면 신라이전이니 분명 '예 - 셰 - 세 - 서이'의 걸림
에서 '서이'로 읽을 게 뻔하다.
사투리말의 분포로 보면 '세(새)'는 '새(쌔) 세(쎄) 시(씨)'라고 한다. 쇠의 경우
도 거의 비슷한 소리임은 물론이다. 그러니까 예나라나 철국(鐵國)이나 같은 뜻을
드러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쇠 - 세(쎄) 새(쌔) 씨 시 등).
말은 그 말을 쓰는 겨레들의 문화를 되비친다. 그것은 말을 가지고 그들의 사회
와 역사를 이루어 가기 때문이다. 문화사적으로 보면 태양숭배를 하는 겨레가 쇠
그릇문화를 가지고 돌그릇문화를 누리던 겨레들을 다스리게 된다. 해우러름에 관
한 자료들은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믿음이자 삶의 모습이었다.
태양을 본디 우리말로는 '해'라고 한다. 해는 사투리말이나 중근세기의 자료로
보아 새 쇄 세 시(씨)로도 쓰인다. 그럼 '예 - 철 - 해'는 사이를 바탕으로 하는
낱말의 겨레라는 말이 되는데 뜻으로 본 이 말들의 걸림은 어떻게 되는 걸까.
사이와 말겨레들의 고리
겨레를 이름은 물론이요 나라이름으로 불리우는 '예'는 셰(세)에서 비롯된다.
사투리에서 쓰이는 소리를 보면 태양이 새(쇄)로 나는 것이나 쇠붙이가 새(쌔)로
나는 것이나 하늘을 나는 새의 음상은 같은 소리로 나는 말겨레라고 하겠다. 이들
말 사이에서 드러나는 뜻바탕의 걸림은 무엇일까.
이 말들은 모두 사이를 바탕으로 하는 말이라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쇠의 경우
나무도 돌도 아니면서 때로는 돌보다도 더 강하며 때로는 나무보다도 더 부드러
운 물체가 쇠붙이 아니던가. 한마디로 나무와 돌의 사이쯤 되는 속성을 보임은 물
론이요, 돌을 쓰던 돌그릇문화 사회에서 일대 혁명과도 같은 문화의 태양 - 해와
같은 영향을 미쳤으니 가히 신기원을 이루었다 할 것이다. 해 또한 그 다름이 아
니다. 해는 앞서 이른 것처럼 '새'라고 하는바, 이 또한 '사이'라 읽는 것이 당시
의 소리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떠 올랐다가 다시 그 사이로 모습을 감춘다. 해
가 떠서 지는 것은 예외 없이 되풀이 된다. 해서 날과 달 그리고 한 해를 헤아리
는 셈단위의 동작을 뜻하는 '헤아리다(세아리다 - 헴(셈)'의 밑바탕이 된다. 사이
란 말만해도 그러하다. 아래아로 쓰는 'ㅅ'에서 비롯 '사이'가 되기에 이르렀음은
이미 밝혀진 일이다.
하늘을 날으는 새의 경우, 중세어 자료는 사투리말을 보더라도 '사이(시 새)'와
같은 말로 쓰였음을 알게 된다. 길짐승도 뛸 짐승도 아니고 하늘과 땅 사이를 자
유롭게 날으면서 삶의 보금자리를 찾아 다닌다.
하긴 사람도 분명 동물이면서 신도 인간도 아닌 그 사이쯤 되는 존재들이다. 자
신을 가르쳐 준 이를 높이어 부르는 말에 '스승'이 있다. 본디는 무당이란 말로서
제정일치 시기에는 거룩한 대제사장을 뜻하였다. 오늘날에는 선생을 높여 부르는
말로만 쓰이지만.
말의 짜임새를 보면 사이를 드러내는 '슷(間)'에 씨끝 ' 응'이 녹아 붙어 이루
어진 말임을 알 수 있다( 훈몽자회 참조). 사이라면 무슨 사이일까. 이른바 신
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사이일 것인즉 앞에서는 제사장으로, 뒤에서는 행정의 머
리로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미 삼국유사 의 환인천제가 바람 비 구름 스
승(師)을 데리고 내려 왔다고 했으니 스승의 부름말이 쓰이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
었다.
옛적 우리들의 거룩한 스승들의 눈에 비치는 자연물에는 이미 태양 - 해(새)에
대한 믿음으로 '새(사이)'라는 의미가 흘러 녹아 신격이 부여되었을 것이다. 미루
어 생각해 보면 강릉의 경우도 큰 예외는 아니다. 고려 충렬왕 이후로 불리워진
이름이다. 말 그대로 강과 언덕 - 강언덕(江陵)이다. 여기 강은 개울이 될 수도 있
고 바다일 수도 있다. 반면에 언덕은 물의 북쪽이라 할 산자락으로 풀이 되기도
한다. 대관령으로 이어지는 태백산맥의 줄기라고나 할까. 신라 경덕왕 때 강릉을
일러 바다명(溟)의 명주라 하였음을 보더라도 강릉의 강은 바다가 주요한 대상이
라고 미루어 보는 것이다. 바다 곧 물을 중시하였던 해양국다운 이름이다. 뒤로는
큰 산으로 둘러 싸여 천연의 성으로 이루어진 나라였으니 바다로부터 침략만 막
아낸다면 별 시름이 없는 부족국가였음을 짐작케 한다.
신라 이전에는 강릉을 하슬라(何瑟羅), 하서랑(河西良)이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바닷가의 입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한자에 대한 칼그렌(Karlgren)의
자료를 살펴 보면 '하 - 가(何)'의 걸림을 찾을 수 있다. 하면 '하슬라(하서랑)은
가슬라(가서랑)'의 소리로 읽었음을 알겠다. 그럼 가슬라(가서랑)가 바닷가란 말인
가.
가장자리를 뜻하는 '가(邊)'의 사투리말을 보면 '갓 가 가생이 가상 가싱이 가서
리 가상다리 가상사리'와 같은 여러가지의 변이형들이 쓰인다. 여기서 가슬(가서)
과 걸림이 있는 말은 '가서리 갓'이라고 하겠다. 가령 '가서라'의 '가서'가 가장
자리라면 나머지 '- 라'는 무엇인가. 신라의 '- 라'가 땅 혹은 국가를 말하듯이
가서라의 '라'도 땅이나 나라를 뜻하는 말로 보면 된다. 그러니까 큰 산 태백산맥
의 가장자리이자 동해 바다의 가장자리란 말이다( 대동지지 참조).
이 곳은 신라 무열왕 때만 해도 군사 요충지로서 상당히 주목을 받았던 공간이
다. 해서 군제(軍制)로 보아 지금의 서울인 한산정(漢山停)과 함께 하서정(河西停)
이라 했다. 흔히 큰 진영이 있는 곳을 정(停)이라 한다. 정은 군대의 주둔지를 이
름이요, 지킴의 터전이 된다. 강릉은 본디 세 읍을 어우러서 하나의 큰 마을을 이
룬 것으로 보인다.
시련의 강언덕을 넘어
강릉대도호 풍속이 좋을시고
절효정문이 골골이 벌였으니
비옥가봉(比屋可封)이 이제도 있다 할까
('관동별곡'에서)
충효열은 유교사회에서 으뜸가는 덕목이다. 충신 효자 열녀가 많이 있어 이를
드러내기 위하여 정문을 세웠다는 얘기. 이 글은 조선왕조 선조 때 송강 정철이
강릉을 노래한 관동별곡의 한 부분이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슬기로운 선비를 필요로 하고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를
생각한다. 그렇다면 충신 효자 열녀가 그리도 많을 정도로 강릉엔 옛부터 많은 시
련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동쪽 바다에서 쳐들어 오는 왜적이며 북으로 여진이나 말갈족의 끊임없는 침략
에 우리의 조국이 어려움을 겪을 때 언제나 강릉은 그 시련의 현장이었던 터. 해
서 신사임당같은 어진 지어미가 있어 율곡 이이 선생을 길러 겨레의 스승되기에
이르지 않았던가.
대동지지 에 따르면 강릉은 옛부터 있어 왔던 세 고을 - 연곡(連谷) 우계(羽
溪) 동제(棟堤)가 어우러서 이루어진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예 곧 셰
(세) 나라는 작은 세 고을의 부족들이 합하여 이룬 나라란 풀이도 된다. '사이'를
바탕으로 함에는 셋의 '세'도 다를 바 없다. 가령 하늘이 첫째(하나)이고, 땅이 둘
째(둘)이라면 그 사이에 으뜸가는 사람이 셋째(세)가 되는 셈이 아닌가. 물론 이
것은 하나의 미루어 본 짐작이지만.
연곡은 도호부의 북쪽 30리에 있으며 본디 그 이름은 볕양자 양곡(陽谷)이었다.
경덕왕에 이르러 다시 지산(支山)으로 고쳐 불렀다. 뒤에 다시 고려 현종 9년에
명주가 다스리는 영현에 들게 된다. <용비어천가>에 하였듯이 물의 북쪽을 양이
라 한다(水之北曰陽). 강릉의 남쪽을 지나면서 가장 중심이 되는 남천의 북쪽 땅
이라면 어떨까. 연곡의 연(連)은 이을 연이요, 양곡의 양(陽)은 볕인데 무슨 걸림
이 없을까. 땅이름이나 비교언어학으로 보아 태양을 해(새)라고 하기 전에는 '니
(님)'가 아니었나 한다. 가령 '일(日) - 니(泥) - 열(熱) / 일(日) - 니(日本)' 등의
자료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연곡이나 양곡은 모두 태양을 뜻
하는 '니'와 걸림이 있다 치자. 하면 지산(支山)과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태양을 가리키는 말은 고유어에서 두 계열이 있으니 하나는 '새(해)'요, 다른
하나는 '니(낮 - 날)'가 그것이다. 새(해)는 앞서 풀이한 듯이 철기문화 곧 쇠그릇
문화를 가리킴이며 '니(날 - 낮)'는 돌그릇문화 곧 고인돌과 같은 거석문화를 드
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새(해)의 변이형이 '새(쌔) 세(쎄) 시(씨)'임을 떠올리고,
지산의 '지'가 당시 이런 파찰음소가 자리잡지 못했을 거라는 풀이를 받아 들이
면 '지산 시산'이 되어 곧 '해돋이 산' 혹은 '해맞이 산' 또는 다른 지역과 경
계를 둔 산이란 말이 되지 않을까.
한편 우계(羽溪)는 어떠한가.
강릉의 남쪽 60리에 있으며 본디의 부름말은 우곡(羽谷)에서 말미암았다는 것.
또 다른 이름으로는 옥당(玉堂)으로 불리운다. 그러다가 경덕왕에 와서 당나라의
주군현식 지명을 고치는 중국화의 과정에서 우계현으로 바꾸면서 삼척군의 영현
을 삼았다. 우곡은 우리말로 '우골'이 된다. 맨 위 쪽에 있는 골짜기이니 높을 수
밖에. 고려 우왕(禑王) 8년 왜적이 우계로 침입한 것을 보더라도 군사적인 요새지
임에 틀림 없다. 이 때 강릉도원수 조인벽을 중심으로 해 30여급의 왜적을 목베인
일이 있었음은 널리 아는 일이다.
연곡 우계와 함께 동제(棟堤)현은 어떤 곳인가. 강릉 서남 65리의 임계(臨溪)역
자리에 있던 옛 고을이다. 원래의 이름은 동토(東土)현으로 부른다. 그러다가 경덕
왕에 이르러 동제로 고쳐 쓰게 된 것이다. 한자의 뜻 풀이로는 대들보의 구실을
하는 언덕이 된다. 한편 동토라 함은 동쪽의 터전 곧 새터 - 동토가 된 것이다.
옛 것이 새 것으로 바뀌어 져 나아가듯 연곡 우곡 동제의 세 고을이 강릉으로
어우러 큰 부족국가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강릉은 강언덕이다. 바다에서는 왜적
이, 북방에서는 여진과 거란이 쳐들어오므로 강릉의 강과 언덕은 시련을 겪어 왔
다. 고려 현종 20년 이후로 여진과 거란의 침략이며, 공민왕 21년 이후 조선왕조
태종 때까지 6번에 걸친 왜적과의 싸움이 있었다. 한반도의 허리쯤에서 조국강산
을 지키는 성이요, 굳건한 문지기 구실을 한 곳이 강릉이다. 기실 따지고 보면 강
원도의 강원(江原)은 강릉 원주의 줄임으로도 볼 수 있으나 이는 강릉의 또 다른
별칭이라 해서 지나칠 게 없다. 둘 다 물이요, 언덕이 아닌가.
공양왕 기사년 12월 왜적이 강원도에 쳐들어 왔을 적에 이를 물리친 신유정(申
有定)이란 이를 바로 강릉부사로 삼았음은 이러한 방증이 되기에 충분하다.
시련을 겪으므로 개인이나 한 단체는 성장하게 마련. 통일된 조국의 봄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푸른 바다의 갈매기며 파도가 우리들의 가슴으로 다가선다. 높게
드리운 산과 거칠 것 없이 출렁이는 바다의 그 기상으로 말이요.
어사매, 그 가로지름의 속내
무르녹는 봄언덕을 말 놓아 동쪽 들녁 가네
여름지이를 재촉하는구나. 열성으로 지어보세
올해 남쪽 들은 얼마나 농사가 되려노
간밤에 흠씬 내린 비는 나라님의 은덕일레
(홍귀달의 한시에서)
산이 있는 곳에 언덕이 있고 물이 흐른다. 때로 내는 굽돌아 흐르며 고이다가
곧게 내려 크고 작은 사람의 삶터를 빚어 낸다. 남으로는 치악산이 구름처럼 드리
워 있고 동으로는 태기산이, 북으로는 어답산이 병풍을 치듯 둘러 있는 곳, 이 중
에 벌을 가로 지르는 남천을 따라 꽃 피듯 펼쳐진 데가 횡성이다.
역사란 사람과 자연환경의 걸림이요, 사람과 사람의 걸림에 뿌리 내린 내력이질
않는가. 본디는 고구려의 땅으로 어사매(於斯買)라 하였으며 신라의 35대 경덕왕
16년에 황천(潢川)으로 고쳐 부르게 된다. 고려 현종 9년 춘천에 속했다가 뒤에
원주로 바뀐다. 공양왕 원년에 현감을 두었으며 조선왕조 태종 때에 이르러 횡성
이라 했다. 까닭인즉 홍천(洪川)과 횡천은 소리가 너무 가깝다는 것. 이를테면 같
은 소리로 이어 있는 곳을 부르는 것은 변별력이 떨어진다고 본 것이다. 땅이름으
로 보아 천(川) 계열의 땅이름은 거의가 고구려계로 보면 된다. 물론 고구려 이전,
삼한 적에는 진한의 땅이었지만.
조선조 태종은 친히 횡성을 찾아 군사훈련(講武)을 가진 바 있어 지금도 치악산
쪽에는 태종대라 불리는 곳이 있다. 대동지지 전고 부분을 보면 나라가 어지
러운 때 정의를 부르짖고 민중봉기를 꾀한 기록이 나온다.
인조 5년 병자호란(1627)이 일어난 때이다. 인조가 왕의 자리에 올라 서인이 정
권을 장악해서 청나라를 배척한 결과 빚어진 난리. 임진왜란의 포성이 멎은 지 얼
마 되지 않았는데 또 전쟁이 나니 백성들은 살 길이 묘연했다. 생불여사라, 죽지못
해 사는 게 아니었을까.
때에 횡성 땅의 이인거(李仁居)는 스스로 의로움을 내세워 사회개혁을 부르짖었
으나 받아 들여 지지 않았다. 벌이 내리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
인거는 뜻을 함께 하는 수백명의 동지를 모아 동헌을 쳐들어 갔다. 현감 이탁남
(李擢男)을 묶은 채 무기를 빼앗고 군사들의 진을 치고 높은 언덕에서 서울로 쳐
들어 갈 꾀를 내고 있었다. 임금은 계엄의 명을 내리고 주위에 있는 군사들로 하
여금 군사 요충지를 지키게 하였다. 한편 삼남의 병사들로 횡성 주위에 대기를 명
하고 때를 기다렸다. 마침 원주목사 홍보라는 이가 군사를 이끌고 이인거를 붙잡
아 난리를 가라 앉혔다. 왜 문제가 일어 났는지는 안따져 보고 사람만 족치면 뭐
가 되는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닌가.
'어사매'와 횡천(橫川)
횡천은 본디 어사매(於斯買)라 했다. 고구려 계열의 땅이름에 매홀(買忽) 등과
같이 '매'가 나오는데 이는 모두 물(川 水 江)을 이른다. 하면 '어사'는 무엇인가.
'엇간다 비껴 간다'는 뜻의 한자소리를 빌려 쓴 말쯤으로 풀이하면 된다. 그러니
까 '어사 - 엇(橫)'이란 말로 간추릴 수 있다. 횡성이 남쪽벌을 흐르는 남천(南川)
의 말미암음에서 '횡천 - 엇매'가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현의 남쪽 5리 쯤에 흐
르는데 뿌리샘은 원주 치악산에서 시작된다. 산음(山陰) 즉 산의 북쪽으로 흘러
회현(檜峴)을 지나 우무골(井谷)의 북에 이른다. 갑천의 서류를 지나 흘러 서천과
함께 만나 원주의 섬강으로 든다.
간추리면 치악산을 북쪽으로 해 거꾸로 흘러 다시 꺾어져 현의 남쪽을 가로 지
나는 특성을 떠 올려 '엇매 - 횡천'이라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횡성으로
바뀌었지만 마을이 이루어지는 곳에 물이란 가장 결정적인 알맹이가 되는 법. 하
긴 물과 땅은 먹거리 생산과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니까 말이다. 이르자면 우
리 삶이란 물과 땅의 맞걸림이라 하겠다.
엇먹는다든가 빗나감은 좀 삐딱한 느낌을 준다. 요즈음 텔레비전에도 횡성장이
소개되거니와 왜인들이 강제로 점령, 마구잡이로 빼앗아 갈 때 안성 개성과 함께
횡성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장사를 해 재미 본 일이 없다고 한다. 그건 한국사람들
이 한국사람의 물건을 팔아 줌이 마땅했기 때문. 수입 농산물, 걸핏하면 외제 상품
이 머리를 들고 어린이 옷가지부터 외국말이 버젓이 눈에 띄는 건 참말로 부끄러
워 해야 될 일이다. 일본인의 눈에는 가시처럼 보였을 게 뻔한 노릇.
태기의 못 이룬 꿈
산이 높으면 골짜기 또한 그윽하기 마련. 횡성의 산 하면 태기산이요, 어답산이
다. 한국의 허리뼈 태백의 용틀임이 서남쪽으로 물결치다 오대산(1563)이, 계방산
(1571)이, 다시 태기산(1261)의 서기 어린 매듭으로 솟아 오른다.
진한 무렵 마지막 왕이던 태기왕이 신라의 첫 임금 박혁거세와 삼랑진에서 자
웅을 겨루다 쫓기고 몰리어 마침내 오늘날의 태기산에 배수의 진을 쳤다. 해서 아
예 산이름조차 태기산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한반도의 허리에서 일어나 고조선의
대통이라 할 예와 맥의 얼을 깊이 지키고 마한 변한을 어우러 이르러 삼한 통일의
불같은 꿈이 있었는데.
끝내 박혁거세의 세에 몰려 태기산에 쌓았던 성이며 모든 살림을 던져 버리고
심지어 임금의 신표인 옥쇄도 던지고 도망하여 버린다. 해서 태기산 동쪽에는 옥
산대(玉散台)란 곳이 있기도 하다. 싸움에 쓰던 칼이며 갑옷을 씻었다 하여 산의
서쪽으로 흐르는 내를 갑천(甲川)이라 했다는 거다. 정말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아
직도 갑천내 둘레에는 아기장수 전설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온다.
감내라 하는 곳에 가면 소따배기와 강신터라는 데가 있다. 소따배기 위에서 뛰
어난 장수가 나오므로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하는 일에 큰 구실을 했다는 것. 해서
일본의 강점기에는 소따배기 어름 쯤에 혈맥을 끊는다 해서 큰 쇠말뚝을 박아 놓
았다고 전한다. 그럼 강신터는 무얼 하는 데인가. 다름 아닌 성황터, 흔히 이르는
서낭터라 이르는 곳이다. 옛부터 성황목으로 소나무가 많이 늘어서 숲을 이루었다
가 뒤에 사람들이 베어 내 버리고 지금은 그 자리에 기독교의 교회가 들어서 아
침 저녁으로 영혼의 구원을 받으라는 종을 울린다. 예나 지금이나 귀신을 모시기
는 마찬가지요, 한국귀신이 서양귀신으로 바뀐 것뿐이다.
하필이면 교회뿐이랴. 한다 하는 산의 쓸만한 자리이며 산천에 제사 지내던 곳
엔 거의 절터가 되고 만 것도 그러한 보기요, 절 없애고 백운동 서원 같은 유교의
배움터를 지은 게 다를게 하나도 없다. 절에 가면 크고 오래 된 절간일수록 국사
당(國師堂)이나 칠성각(七星閣)이 있다. 이 모두가 전통신앙의 종교 공간이었으니
여기에 외래 종교가 들어 와 함께 어울리는 믿음의 어울림터를 인정한 셈.
갑천은 중앙을 흐르는 내
횡성 지역에 가뭄이 들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강신터에 와서 태기산의 산
신(山神)에게 이바지를 드렸을 게 분명하다. 그로 말미암아 농사는 뜻대로 풍년이
들고 나라는 평안해질 것이라는 믿음을 키워 나아갔던 것일 게다. 옛적의 여름지
이 시대로 올라가면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으
며 이런 일이 거듭되어 세시풍속이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한마디로 신본위 중심
의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살았던 터. 갑천이란 땅이름도 무슨 걸림이 있는 듯하
다. 본 바탕은 물의 이름이나 땅의 그것으로 아예 굳어진 보기이다.
옛부터 불러오는 갑천의 땅이름은 '갑내'이다. '갑'은 가운데 중앙을 뜻한다.
한가위의 경우만해도 그러하다. 가운데의 '갑'에 접미사 '애'가 붙어 이루어진
'가배'에서 소리가 바뀌어 '가위'가 되며 여기에 '좋다 크다 제일 가다'의 뜻을
보인 '한'이 어울려 '한가위'가 되기에 이른다.
갑내의 '갑'은 신(神)을 뜻하는 감(검)에서 비롯하여 '감(검) - 갑 - 갚'과 같은
말의 겨레들을 이룬다. 신이라면 무슨 신인가. 그건 물신이요, 땅신을 속으로 하는
지모신(地母神)의 개념이다. 갑내 - 갑천은 횡성에만 있는 게 아니다. 금강의 지류
인 대전의 갑천, 강원도 평강에도 갑천이, 지리산에도 갑천이 있는바, 모두는 중앙
천이란 뜻이 된다. 평강의 갑천에 걸림을 둔 얘기는 횡성의 그것과 비슷하다. 후
고구려의 궁예가 갑작스런 침략에 도망할 때, 내 위에 갑옷을 버리고 달아 났기
때문에 갑천이라 불렀다는 것.
사실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말 특히 땅이름에 사회언어학적
인 풀이가 될 수 있다는 볼모에서라면 역시 중앙을 흐르는 큰 내, 더 올라가서 지
모신 숭배의 소리상징이 아닌가를 상정할 수 있다는 줄거리. 우리 삶에 물처럼 중
요한 게 어디 있을까.
태기산에서 흐르기 시작한 갑내는 골에 골물이 어우러져 원주의 섬강으로 들어
남한강의 또 다른 큰 흐름을 만들어 낸다. 이름하여 횡성강 댐의 자리가 갑내의
물로 이루어 진다. 마을 사람들은 말한다. 옛 조상들의 뛰어난 슬기가 있었다고.
잠시 횡성강댐과 관련하여 갑내 주변의 땅이름을 보자.
화전 갑내 금대는 댐을 암시하고
먼저 강물이 모여 담기는 곳에 가마골이 있다. 물이 담기는 가마라면 그처럼 큰
가마솥이 있을까. 물론 땅의 모양이 가마처럼 생길 수도 있다. 이 곳이 갑내 주변
의 들로서는 가장 큰 벌판이다. 이 곳에서 나는 쌀이며 누에고치는 고치와 쌀농사
에 있어 단연코 다른 지역보다 앞서 감은 바로 크고 넓은 분지형 평야 때문이리
라.
횡성의 또 다른 이름을 화전(花田)이라고도 하는 바 이는 바로 가마골에 이르는
물돌굽이에 지금도 화전이 있다. 물에 잠기면 꿈꾸는 전설 속의 마을이 되고 말겠
지만. 꽃화라 꽃송이가 툭 튀어나온 모양으로 물이 돌아 흐르는 곳에 물에 떠 내
려 온 흙이 모이다 보니 코의 모양으로 툭 튀어 나온 논밭이 되었다는 풀이를 하
면 어떨까. 다시 거슬러 오르면 마무리라 하는 물굽이 마을이 있다. 여기에 뜻 있
는 이가 있어 뚝을 막고 논밭을 일구어 많은 쌀을 생산하였다. 가마골에 물이 고
이면 마무리 와서 댐의 물이 마무리 된다는 얘기가 전해 왔던 터라. 댐이 서는 쪽
은 수백(水白)이라는 곳. 물이 희고 잡맛이 없어서인가. 갑내의 물이 물중에 으뜸
이라 갑천으로 불렀다는 이름과 같이 수백의 경우도 그럴지 모른다. 횡성강댐이
막히고 물이 고이면 횡성은 물론이요, 원주시민들이 마시는 물, 경공업 단지에서
쓰이는 물이 모두 이 댐물로 채워진다. 낮이면 낮대로 호수처럼 맑고 푸른 물 위
에 하이얀 낮달이 뜨고 많은 황새며 청둥오리 떼들이, 밤이면 흐르는 별과 달님이
물 위에 떠 올라 잠들었던 태기왕의 전설을 말 없이 미소 짓는 물줄기로 밤을 지
새울 것이다.
갑내는 본디 '감내'라 이르는 이름에서 말미암는다고 했다. 지형으로는 중앙을
흐르는 물이지만 지모신 상징으로라면 물신이요, 땅신이라 할 섬김의 대상이 된다.
농경사회에서는 지모신 이상 가는 주요한 숭배의 대상이 달리 있을까. 결국 땅과
물을 잘 받들고 보존하라는 조상의 숨은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겨레의 번
영이 될테니 말이다.
'금대'는 비파를 연주하는 무대
큰 바람이 불면 많은 곳에 영향이 가듯 땅이름도 그렇다고 본다. '갑내 - 감내'
의 경우 물신(水神)상징의 '감(검)'은 가마골이나 한 지류인 금대(琴台)천 흔히 이
르는 검두마을이 그러하다. 그러니까 '감 - 검 - 금'은 모두 물신이며 조상신을
뜻하는 물신앙에서 말미암는다. 일종의 같은 뜻을 밑으로 하는 표기적인 변이형들
이 되는 셈이다. 금대 하면 글자 그대로 비파를 연주하는 무대란 말. 신에게 제사
를 모시려면 무당의 노래와 기원이 있게 마련. 여기에 바람과 구름의 노래가 어울
린 자연의 교향악이라면 어떠하리.
방위로 보아 '검(감)'의 물신은 북쪽상징으로 드러난다. 갑내(감내)야말로 중앙
천이자 횡성의 동북을 돌아 서북으로 이어 지는 북쪽의 강이 된다. 집단무의식으
로 보면 우리 겨레들은 두고 온 조상들의 땅이 시베리아며 만주 벌판, 더 거스르
면 중앙 아시아의 빛나던 초원(草原)의 영광에 대한 짙은 향수가 있어 그러할지도
모른다. 임금도, 조상신도, 별신앙도 모두가 북녁지향성이 강하다. 고려나 고구려는
보기에 값하는 왕조들이었다. 실제로 뜻을 펴 보진 못했을지라도.
해서 북으로 모진 바람이 막히고 따스한 남쪽 들판 어디쯤에 해 밝은 동녁으로
문을 내고 아들딸 낳아 오손도손 살기를 원하는 흐름이 생겼는가. 어답산이 그러
하고 가장 깊은 산골로 치는 병지방도 그런 이해가 가능하다. 적어도 왕으로서 태
기는 병지방과 어답산에 군사를 놓아 지키게 하고 둔내(屯內)쪽에 병사의 진영을
주둔케 했던 것도 갑내로 빚어지는 농업생산과 싸움할 때 지리상의 긴 점을 샀기
때문일 것이다. 바르고 꼿꼿한 어사매 - 횡성의 정기가 태기산이듯 갑내이듯 굽이
져 길이 흐를 일이다.
비파처럼 아름다운 금호강
맑고 잔잔한 금호강에 배를 띄우네
오가며 하얀 물새를 가까이 하지
자연에 취하여 달이 밝도록 노닐다 배 저어 돌아 가노라
멋으로라면 오호(五湖)의 그것에 비길 수가 없구나
(서거정의 '대구십영'에서)
말의 역사로 보아 가장 잘 바뀌지 않는 게 땅이름이요, 그 중에서도 강의 이름
은 더욱 그러하다. 서울의 경우 한 때 한산주 한주 한성 한양으로 불리웠으며 일제
의 강점기에는 경성으로 쓰였지만 다시 서울로 쓰이지 않던가. 세월의 굽이를 돌
아 끈끈한 그리움처럼 되쓰임을 누구라서 막을 수 있을까. 땅이름이 보수적일수록
오랫동안 알게 모르게 강이름에 역사가 되비칠 수 있다. 금호강의 '금호'에 대하
여 그 속내가 어떠한가를 더듬어 본다.
경북지명총람 을 따르자면 바람이 불 때 갈대밭에서 비파소리가 나기 때문
에 금호라고 했다는 것. 재미있는 풀이다. 갈대는 여러 곳에서 살아간다. 물이 흐
르다 늪이 되는 장소라면 마다 않고 갈대들이 모여 산다. 하필이면 금호뿐일까.
땅이름으로 보더라도 금호는 영천에도 창원 마산에도 있다. 그것도 같은 한자를
써서 말이다. 행여 물신과 땅신 곧 지모신 상징을 드러낸 강이름이 아닌가 한다.
농업생산은 땅과 물에서 말미암는다. 먹거리는 겨레의 번영이며 자기보존을 가
능하게 하는 것이니, 옛적 샤머니즘 시대에는 물과 땅에 신격을 부여하여 온 나라
가, 농사가 시작되고 끝날 때를 가려 제사하였다. 이르자매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
천 부여의 영고 등이 모두 여름지이와 걸림을 보이는 지모신 숭배의 보기들이다.
짐작하건대, 금호강의 '금(琴)'도 지모신을 가리키는 소리상징일 가능성은 없는
걸까.
'금(琴)'과 지모신
금호강의 뿌리샘에 걸림을 둔 대동지지 의 이야기를 떠 올려 보자.
금호강은 청송과 영천의 사이에 솟아 있는 보현산(또는 모자산(母子山))의 남쪽
에서 말미암는다. 물은 흘러 빙천으로 다시 자율아천이 되어 병풍암과 신녕의 서
편을 돌아 영천을 굽이쳐 흐른다. 죽방산의 남쪽에 이르러 남천 범어천 시천 영지
산천을 지나 물띠미 곧 하양의 강을 이룬다. 관란천 황율천 반계 남천이 어우러져
대구의 사수 진탄내가 되며 신천을 왼쪽으로, 해안천을 바른쪽으로 해 여천의 서
편에 들어 금호진에 다다른다. 해서 하빈을 지나 낙동강의 긴 가람을 이루어 한반
도의 남쪽 허리를 휘감아 메마른 벌을 적시운다.
이밖에도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화성지(花城誌-화성=하양) 와 같
은 자료에서 크게는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금호강의 흐름을 타고 떠 내려 온 흙과 모래가 쌓여 경북에서 으뜸 가는 금호
평야 혹은 대구평야가 삶의 터전을 만들어 준다. 강을 둘러 싼 자연부락은 크게 1
직할시 5군 1시 25개의 읍면이나 된다. 물이 있는 곳에 마을이 이루어짐은 자연스
러운 일이요, 자연의 한 섭리이기도 하다.
금호강은 모자산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보현산이나 모자산이 같은 산이기 때문
에 그렇게 본 것이다. 그럼 금호강의 금(琴)과 모자산의 모(母)는 어떤 걸림이 있
단 말인가. 강은 여름지이의 어머니요, 삶의 뿌리에 값한다. 강을 가람이라 하거니
와 가람의 본질은 갈라짐에 있다. 마을과 마을이 갈라지며 넘실거리는 삶의 무늬
로 짜여진 목숨살이들이 깃들인다. 가람은 생명현상의 말미암음이요, 모태라 하여
지나침이 없다. 다스리는 영지이며 거룩한 믿음의 터전이 된다. 금호강의 '금'과
지모신의 '모(母)'가 마주 걸릴 가능성은 다음의 몇 가지 보기로서도 커 진다.
금성(金城)-모성(母城)(대동지지)웅천(熊川)-웅신(熊神)-금주(金洲)
(대동지지)금강(錦江)-웅천하(熊川河)(대동지지)금호-모자(母子)(대동
지지)왕검(王儉)-궁홀(弓忽)-금미(삼국유사)
위의 보기로 보아 '금-어머니'의 서로 맞걸림을 엿볼 수가 있다. 말의 뿌리로
보아'곰(고마)'에서 나온 말임을 알게 되는바 이는 단군왕검의 어머니신이 웅신
(熊神)이요, 웅녀가 되기로서이다. 인류학에서라면 곰 우러름은 짐승을 사람의 조
상으로 여기는 곰토템을 믿는 수조신앙에서 비롯한다. 우리말로는 어떻게 '곰-어
머니'의 대응을 풀이할 수 있을까.
사람의 목에서 피어 나는 소리는 그 바탕이 마찰음으로 곧 갈림소리이다. 그러
니까 갈림소리로 인식되지 않는 다른 소리들은 경우에 따라 약해지면 갈림소리로
되었다가 소리가 더 약해지면 아예 소리값이 없어 진다. 곰(고마)의 경우도 마찬
가지다. 상징성으로 보아 곰(고마)은 굴 북방 뒤 겨울 목소리 물 등을 드러 낸다.
곰을 조상신, 어머니신으로 숭배하자매 당시 사회의 가치지향이 곰의 속성과 멀리
있을 수가 없지 않은가.
곰(고마)의 머리소리가 약해 지면 홈(호마)이 되고 다시 약해 지면 옴(오마)으로
소리 난다. 간추리면 '곰(굼)-홈(훔)-옴(움)'이 된다. 우리말 '어머니'의 사투리말
을 보면 '어머니 엄니 어무이 엄마 어머이 어메 오마니 옴마 오매'와 같이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말을 한다. 이들 가운데 오마(옴마)형은 '곰(고마)-옴(오마)'
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곰을 짐승으로만 보면 그뿐이겠으나 이같이 사람의 조상이라는 의미부여
가 되면 사뭇 달라 진다. 조상신이요, 어머니신이 되는 법. 만주 지방의 에벤키말
에서도 보면 곰을 호모뜨리. 조상신을 호모꼬르(homokkor), 영혼을 호모겐
(homogen)이라 해서 우리와 거의 비슷한 소리모습을 보여 준다. 아직도 아무르
강 유역에는 곰신앙을 갖는 사람들이 2 3만 가량 살고 있다는 것. 이들은 모두가
고아시아족으로 짐작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오백년전의 자료를 보더라도 고마(곰)가 경건하게 숭배하고 흠모
해야 할 대상임을 보여 주는 보기들이 있다(고마敬고마虔고마欽<신증유합>).
눈에 띄이는 것은 같은 말'곰(고마)'이 땅이름 등에서 뒤로 오면 거북으로 바뀌
어 쓰이는 경우이다(熊神 龜山(세종실록)人君以玄武爲神(한서)前朱鳥後玄武(예
기)). 하긴 한반도에서 곰보다는 거북이 많이 살고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사회변동
의 결과라고 하겠다. 유목생활에서 따스한 남쪽으로 정착하면서 농경생활의 사회
로 변동을 하였다. 해서 곰의 숭배보다는 농업생산에 필요한 물과 땅신에 대한 믿
음 곧 지모신 믿음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 동물상징도 물과 뭍에서
함께 살아 가는 거북이 곰의 자리에 들어 간 것이다. 기존의 살핌에 따르면 거북
도 곰과 같은 음절구조를 보이는 '검(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박지홍,1957,구
지가 연구). 그 보기로 양산지방의 민요인 '왕거미노래'를 들고 있다. 하긴 함안지
방의 땅이름인 현무(玄武)나 앞에 든 <예기>의 현무도 이두식으로 읽으면 '검'일
가능성이 엿보인다(玄(검) + 武(ㅁ) 검). 하면 '검 + 음(이) 거믐(거미) 거뭄 >
거붑 > 거북'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오늘에 쓰인다는 풀이를 할 수 있다. 우리
말로 신은 '검'이니까.
한편 곰(고마)이 북쪽 추운 지방에 살았으며 우리의 선조 또한 그러했으니 북방
을 위로 할 수밖에. 선조가 살았던 고향이니까, 두고 온 산하이니까, 마치 월남한
겨레들이 북쪽을 그리워 하고 절을 하듯이 말이다. 곰(검)의 또 다른 변이형이라
할 '감-검-굼-금'으로 적히는 땅이름에서도 같은 상징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를
테면 공주의 금강이 그러하고 대구의 금호강도 예외가 아니다.
굴만해도 그러하다. 삼국유사 의 단군신화에서 굴속에서 호랑이와 곰이 함께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삶을 누린다. 그 곰이 우리의 조상이라면 그 굴 또한 조상
들의 집이었음에 틀림 없다. 기록에 따라서는 여름에 새둥우리 같은 나무 위에 집
을, 겨울에는 굴속에서의 집을 꾸리고 살았다는 것(후한서 삼국지 등). 이 굴속에
서 스무하루의 통과제의를 거쳐 곰이 사람의 몸을 입는다. 더 좁혀 보면 모든 생
명은 굴(구멍)의 모양을 한 보금자리에서 태어 난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의 모태
에서 태어났으니 말이다. 마침내 곰신앙을 지닌 겨레들의 삶이 단군신화에 되비쳐
졌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굴살이 곧 혈거생활은 공주 석장리나 서울의 암사동,춘천
의 굴집 따위에서도 그러한 개연성을 찾아 볼 수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곰은 추운 지방에서 살던 이들에게는 주요한 먹거리이기도 하였다.
리지린(1927)의 조선경제사 에 따르면 곰의 살은 먹거리요, 가죽은 이불과 옷
거리이며, 그 뼈는 짐승을 잡는 도구이며 동시에 집을 짓는 좋은 건축재료였다는
것이다. 곰은 의식주 생활의 참으로 귀한 물질의 샘터가 되었으니. 해서 퉁구스
겨레들은 곰을 사냥할 때도, 먹은 뒤에도 곰제사를 지냈을터.
사회변동이 일어 나면서 농업생산에 주요한 공간이자 뿌리는 땅과 물이었으니
곰(고마)이 드러내는 변이형 가운데에서는 이들 땅과 물에 신격을 부여하기에 이
른다. 오늘날의 말에서 감사하다는 우리말을 본디는 '고맙다'고 한다. 이를 쪼갈
라 보면 '고마'에 접미사( ㅂ다(如))가 붙어 된 것인데 속뜻은 '당신의 은혜가
나의 어머니(고마)와 같다'는 알맹이다.
결국 금호의 '금'은 곰이요, 어머니 즉 지모신 상징의 강이름이 된다. 산이름 팔
공산에서도 풀이하였지만 본디 이름은 공산(公山)으로 금호의 '금'과 더불어 그
뿌리는 곰신앙-지모신 신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금호와 물신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움 튼다. 사람의 역사는 물과의 걸림을 풀어 가는 삶의
과정이라면 어떨까. 넘쳐 흐르는 홍수를 다스리고 이를 삶의 편의로 이끌어 드리
려는 애씀. 가물어 온통 누리가 생기를 잃어 갈 때 어디에 편안한 안식이 있을까.
앗시리아나 이집트에 전해 오는 천지창조는 물과 흙으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말
미암는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 언제나처럼 출렁이는 바다의 파도에서 생명이
비롯된다는 것이며 그리이스 신화에서는 물이 여자요 생명의 어머니란 것. 물은
생명의 뿌리이며 영혼과 육신이 함께 만나는 매개체로 값매김 된다.
단순한 홀세포의 생물일지라도 세포들은 물로 차 있으며 고등생물일수록 조직
의 배합과정은 물분자와 긴밀한 걸림을 보인다. 물과 더불어 농경문화가 정착되었
고 문명의 새벽이 열리기에 이른다. 나일강, 티그리스강, 인더스강, 황하강의 문명
이야말로 물에 따른 삶의 터전이라 할 것이다.
신화학자 바슈라르는 물을 재생과 사랑, 죽음과 영혼의 상징으로 풀이한다. 문학
공간으로서 바다 혹은 강은 더욱 그러하다. '공후인 청산별곡'이 예외일 수는 없
다. 이제 삼국유사 의 고조선조에 나오는 곰의 상징이 농경생활로 접어 들면서
물신의 보람으로 바뀌어 쓰인다. '곰'에 걸림을 둔 이야기의 보기를 더듬어 볼 수
있다('금강' 부분을 참조).
공주의 곰나루 전설이나 구례, 또는 중국의 후민 마을의 곰사당 이야기, 대구의
연구산 이야기의 자료에서 곰이 물과 깊은 걸림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도
풀이하였듯이 유목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바뀌면 곰의 상징성은 그 속내를 달리 하
기에 이른다. 물신과 땅신-지모신 상징을 떠 올리는 구실을 '곰'이 맡게 된다. 같
은 말이라도 쓰임이 달라지면 뜻이 달라지니까 말이다.
거북과 걸림을 둠에 있어 먼저 거북의 생태를 보자. 거북은 물과 뭍을 고루 다
니며 배고픔에 오래 견딘다. 물가의 모래땅에 구멍을 파서 알을 낳고 굴안에서 새
끼를 기른다. 마치 곰이 굴안에서 사는 모습과 비슷하다. 민요나 땅이름 자료에서
'거북'의 또 다른 말인'검(거무 거미)'은 곰(고마)의 소리마디틀과 같은 것으로 보
이며 암시하는 바가 크다.
민간신앙에서의 물신앙 분포는 아주 폭이 넓으며 모습이 다양하다. 반드시 신령
한 '거북-검(곰)'으로만 드러 나는 건 아니며 직접 무당이 물신굿을 정성스레 올
린다. 예컨대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물신굿의 분포는 어떠한가.
(물신앙의 분포)
용당별신굿(문경호계)동해안별신굿(울진)무지개샘제사(경산용성)칠성바우
제(경산용산)용담제(경주현곡)하회별신굿(안동하회)청송약수제(청송진보)
조왕신굿(영일군죽장)
참으로 물에 대한 믿음은 깊고 넓다. 마치 샘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바다에 이
르듯이 말이다. 그뿐인가. 삼국유사 의 박혁거세 부분에 나오는 신비스러운 우
물 '나정'과 그의 부인 알영과 걸림을 보이는 '알영정'의 경우도 물의 신앙과 깊
은 걸림을 보여 준다.
물이 있으매 온갖 삶이 보금자리를 튼다. 풀이한 바와 같이 금호강의 '금'은 소
리상징으로 보아 물이요, 구멍이요, 뭇목숨을 거느리는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닌가.
금호강은 어머니 강이요, 겨레 만대로 이어 살 삶의 터전. 한데 이게 웬일인가.
먹다 버린 쓰레기로, 공장이나 농장의 폐수로 오염되어 작은 피라미조차 살 수 없
게 되어 가다니. 우리가 우리의 젖줄이요, 어머니를 못 살게 하고 있다니 말이 되
는가. 안된다, 안돼.
'금'과 땅이름의 걸림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따르듯이 강이 흐르는 데면 자연스레 사람 사는 마을
이 이루어 지고 여름지이가 일어 나는 법. 118키로나 되는 금호강이 조상신 숭배
를 뜻하는 어머니강이라면, 그 물줄기를 따라 만들어 진 둘레에 '금'과 같은 뜻을
보람으로 하는 공간들이 생기게 마련. 방언으로는 이들 가장 영향력이 있는 말의
영향을 물결에 기대어 개신파(改新派)라고 이른다.
금(곰 고마)의 소리마디 틀은 '자음-모음-자음-모음'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이 틀에 맞추어 이르는 땅이름은 크게 두가지로 나눈다. 우리 글자가 없어 한자를
빌어다 땅이름을 적었던 때가 있다. 이르러 글자 빌림 시기라고나 할까. 한자의
뜻을 빌면 훈차(訓借)요, 소리를 빌면 음차(音借)가 된다. 말은 있으되 이를 적을
글이 없었으니 달리 할 길이 없었기 때문.
뜻빌림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땅이름엔 웅(熊) 부(釜) 구(龜) 현(玄) 흑(黑) 음
(陰) 칠(漆) 계열의 땅이름이 있다. 각 계열에 따른 땅이름 지도를 그려야 할 것이
나 몇 가지 보기로 대신한다.
(뜻 빌림의 땅이름들)
웅진(공주)웅천성(창원)웅암(음성)웅곡(선산)웅고산(의주)웅산(창원)
웅남(순천)웅도(영흥)웅령(진안)웅림(회양)웅양(거창)웅이(갑산)웅지
(여산)웅현(전주)웅포(함열)
구미(선산)구포(부산)구성(김해)구산령(안동)구산포(칠곡)구호(하양)
부곡(창녕)부산(부산)부곡포(웅천)
음죽(음성)현풍(현풍)현성왕(玄聖王)(신라)
물신앙을 드러내는 땅이름은 예서 멈추지 않고 용(龍-미르辰 훈몽자회 )으로
벌어져 나아 간다. 이는 용이 물을 다스리는 물신상징의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불교가, 유교가 들어 오면서 수호신으로서 용을 받들어 모셨기에 더욱 강
력한 신앙으로 승화되었으며 권위는 물론 많은 땅이름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용성 용천 구룡 용전(경산)용계 화룡 용호 용화 용신 회룡 용전 오룡 용소 용계(영
천지역)용수 용계(달성)등).
한편 소리빌림은 어떠한가. 주로 금(金 琴 錦 今)계열이 땅이름에 가장 많이 있
고 감(검) 공(궁)계열의 땅이름도 보인다(금호 금물 김천 김해 금성 금락/감천( 외
감 중감 내감 가물 거물)/고모령(경산)공산(달성)공주(공주)공암(공주)궁동(대덕)
등).
나무의 큰 줄기에 작은 가지가 벋고 많은 꽃잎과 잎새를 거느리듯 금호강은 자
애롭고 정갈한 어머니의 그 모습을 그리면서 낙동강으로 든다. 그래도 그 물위에
푸른 하늘이 되비친다. 비록 오염으로 찌들었을지라도.
강과 삶
산이 있는 곳에 물이 있듯 강이 흐르는 곳에 삶이 깃든다. 목숨살이의 말미암음
이요, 여름지이의 어머니가 강이다.
강이란 무엇인가. 한자로 보면 강은 샘물이 모인 내가 이루어 낸 것이요, 본디
말로는 가람이 된다. 이름하여 가람이란 갈라 놓은 가름.
가람이 흐르는 곳이면 반드시 이 마을 저 마을이 나누어 지고 이런 저런 겨레
들의 갈래가 이루어 진다. 사람의 삶이 처음 열리던 문명의 새벽은 모두 강에서
비롯했다. 하루로 치면 분명 새벽이요, 계보로 따지자면 어머니에 값한다. 마침내
문화와 문명이 펴어 나아가는 삶의 모꼬지요, 옹달샘이 된다.
우리의 경우 한강, 낙동강, 대동강을 비롯한 5대강 유역에 6대 도시가 형성되었
으며 그 물을 쓰면서 오늘의 문명을 열어 왔던 게 사실이다. 이제 인류 문명의 새
벽을 연 강물에 얽힌 이야기를 더듬어 보자.
메소포타미아와 서남 아시아 그리고 이집트로 이어지는 오리엔트 문명을 먼저
살펴 본다. 늦 여름이나 이른 가을이면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비가 내려 홍수가 진
다. 나일강의 상류 지방은 우리보다도 훨씬 많은 비가 내린다. 하여 큰 피해도 입
지만 동시에 중류 하류 지역으로 가면 기름진 들판이 만들어져 말 그대로 엄청난
생산의 보금자리를 이루게 된다.
해서 그리이스의 유명한 역사가인 헤로도투스(Herodotus 기원전 484-425)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고까지 하였다. 참으로 나일강 없이 이집트 문명이
란 생각할 수조차 없지 않은가. 때때로 밀어 닥치는 홍수가 주는 어려움을 막기
위하여 둑을 쌓아야 했으며 여름지이에 물을 쓰기 위하여 저수지와 많은 도랑도
만들어야 했다. 중하류의 나일강 유역에는 일년 중 거의 비가 오지 않으니 홍수가
났을 때 물을 가두기 위한 저수지가 필요했다. 엄청난 노력이 들었다. 둑과 저수
지를 만드는 물 다스리기 -- 치수의 일은 도저히 한 마을의 힘으로는 해 낼 수가
없었다. 해서 여러 마을이 어우러 힘을 합했으니 이에 큰 마을이 생겨 났고 이른
시기에 힘 센 나라가 만들어 졌던 것이다. 이집트를 다스리는 임금의 권위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힘 든 일을 슬기롭게 해 나가기 위해서는 억센 정치력이 있어야
만 했다.
서력 기원전 삼천년 경에 앞 선 이집트와 뒤 선 이집트가 힘을 합해서 통일된
이집트를 이룬다. 고왕국 -- 중왕국 -- 신왕국시대를 지나 약 이천오백년의 역사
를 누린다.
겨레를 다스리는 사람과 신에게 제사하는 종교직능자가 같은 사람의 시대 곧
제정일치 시대가 옛 문명의 새벽적에 공통된 특징이다. 이집트 경우도 그 예외는
아니었으니 파라오(Paraoh)가 바로 교황에 맞먹는 통치자였다.
파라오는 태양신 라의 아들이었으며 파라오가 제사를 모시는 것은 다름 아닌
태양신 라(Ra)였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신으로 우러름을 받았으니 그의 권위는
'신 -- 태양신'이 내린 만큼 절대적이었다.
권력의 상징물 가운데 하나가 피라미드로서 죽어서도 사는 권위의 화신이 아닌
가.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높이 146미터 밑변의 한쪽 길이가 230미터 평균 1.5톤
의 돌 230만개를 쌓아올렸다 하니 놀랄 만하다. 매년 10만명씩 일을 하였고 30년
이나 걸렸다는 얘기. 영혼불멸이라 해서 육체를 남겨 두면 죽은 뒤에도 저승에 가
서 이어 산다고 믿었던 것이다. 시체에 약을 바르고 천을 감아서 썩지 않게 미이
라로 만들어 피라미드 안에 넣어 두는 것으로 본을 삼는다. 일종의 부활 -- 다시
태어나는 삶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은 부활인가.
다시 사는 부활신앙도 그 뿌리는 나일강이라 한다. 나일강과 관련해서 옛부터
전해 오는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신화가 있었다. 오시리스(osiris)와 이시스(Isis)의
이야기다. 같은 어머니 몸에서 태어나 부부가 된 것이다. 이는 모르간(Morgan)의
고대사회(하) 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형제들끼리의 혈족혼이 옛적에는 행하여
졌을 가능성을 드러낸다. 죽은 뒤에 모두가 신이 된다.
오시리스는 이집트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고, 쇠붙이로 농기구를 만
들어 쓰게 했으며 법률을 널리 알려 사회 질서를 바르게 하는 등의 거룩한 임금
이며 신으로 숭배를 받았다. 이집트는 물론이요, 그의 가르침은 나라 밖에까지 미
쳐 많은 겨레들에게 빛을 남겨 주었다.
그러다가 동생인 세트(Set)신은 질투와 노여움으로 에티오피아의 여왕과 함께
짜 가지고 오시리스를 죽여서 시체를 나일강에 던져 버린다. 그의 아내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주검을 찾아 내었지만 세트는 다시 빼앗아 오시리스의 주검을 14개로
잘라 여러 곳에 흩어 버린다. 이시스는 여러 곳에 흩어진 주검을 거두어 베로 온
몸을 감아 약을 뿌리고는 미이라로 만들었다(비옥근안정 애굽종교문화사 174
면). 기쁨에 넘친 나머지 이시스(Isis)는 새가 되어 오시리스의 둘레를 이리저리 날
았는데 날개 바람이 오시리스의 코에 들어가 다시 숨을 쉬게 된다. 오시리스는 이
미 저승에 가서 그곳에서 임금이 되어 있었다는 것.
그의 아들 호루스(Horus)는 자라서 세트를 죽임으로써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
호루스는 본디 남쪽의 신이었는데 옛 이집트에서는 독수리의 신으로 떠받들기도
하였다. 뒤에 여신 하톨(Hathor)의 아들이 되었다가 오시리스신 숭배와 어우러짐
으로써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로 다시 바뀐다. 마침내 태양신 라(Ra)의 숭배와
결합해 태양신의 자리로 오른다. 사납고 못된 신 세트(Set)를 물리침으로써 이집
트 왕들의 할아비가 되어 임금들은 자신들이 '호루스의 아들'임을 스스로 일컬었
다.
영어로 강을 리버(River)라 한다. 말의 뿌리를 캐어 보면 라틴말로 리파리우스
(Riparius) 곧 '둑'-- 물을 막기 위하여 쌓아 놓은 흙더미란 말이다. 또 리버는
'죽사리의 갈림길'이란 뜻으로도 쓰였으니 강이란 참으로 삶의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역사의 뿌리 깊은 의미를 드러낸다. 이와 같이 말이란 사회생활의 쟁기가 됨
은 물론이요, 사람들의 문화를 알게 하는 까닭에서 비롯한다.
이집트 신화 또는 벽화에서 이시스가 그의 아들 호루스를 팔에 안고 젖을 먹이
는 모습을 아주 좋아 하여 많은 돌그림이나 조각에 이들 모자의 모습을 그려 넣
는다. 상징적으로 보아 이는 무엇을 드러내고 있을까.
호루스의 어머니 이시스는 나일강이며 강의 여신이다. 아들 호루스는 이집트 겨
레들이며 사람들은 나일강의 젖줄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강은 생명인 동시
에 죽고 사는 갈림길의 상징임에 틀림 없다. 또한 부활의 말미암음이다.
힘은 힘을 부른다. 강력한 생산력과 공격의 힘을 갖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더
많이 다스리고 싶어 하고 더 많은 땅을 갖고자 싸워 댔다. 빛이 있는 곳에 그늘이
따라 가게 마련. 하지만 쇠붙이로 말미암아 먹고 입고 살아 가는 집의 모양이 아
주 달라졌으니 큰 개혁이 일어난 셈이라고 할까. 강이 흐르는 곳에 삶이 있고 삶
이 깃드는 곳에 문화는 꽃 피어 그 열매를 거둔다. 마치 봄이면 나일강 가에 씨앗
을 넣고 가을 되면 열매를 거두어 들였다가 이듬 해 다시 씨앗을 내어 놓는 오시
리스와 이시스의 신화인 것처럼.
강의 질서와 인간
이집트와 때를 같이 하여 오늘날의 이라크 땅인 메소포타미아의 벌판에서도 강
을 따라 문명의 강은 흐르기 시작. 본래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란 '두 강 사
이에 있는 땅'을 뜻한다. 이르자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서 생겨난 삶
의 터전이란 말이 된다. 홍수 때문에 물난리를 겪어야 했던 일은 나일강에서와 마
찬가지이다. 벌판을 일구고 여름지이를 하자매 강물을 쓰는 건 당연한 과정이었으
니 여러 마을이 합하여 도시국가를 이루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강력한 힘의 통제
와 다스림이 필요했다. 큰 강물의 홍수에 맞서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주로 슈메르
족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신전을 세우고 청동기와 글자도 만들어 썼으니 옛 문명
의 새벽길을 활짝 열어 젖힌 셈이라고 할까. 이른바 쐐기 모양의 설형문자가 그것
이다.
기름진 메소포타미아는 주위 여러 겨레들이 눈독을 들이던 터전이었다. 마침내
기원전 이천년 경에 바빌로니아 왕국이 서게 되었고, 그 가운데 함무라비 왕은 많
은 백성을 강력하게 다스리기 위하여 법률을 만들었으니 이가 곧 '함무라비 법
전'인 것이다. 죄인은 지은 죄만큼 벌을 받게 하는 대응처벌이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뼈에는 뼈'와 같이 그대로 갚아 주는 법이 중심을 이루었다는 속내.
기원전 1500년 경 세계에서 가장 먼저 쇠를 썼던 힛타이트 사람들에게 무너졌
다. 어쨌든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가에서 나일강의 이집트와 더불어 옛 문명의
길을 열고 닦은 일은 우연의 일치라고는 할 수 없다. 농사를 짓느라고 이에 필요
한 달력.셈.하늘 보고 점치는 천문학이 비롯하였다. 이집트 사람들이 태양력을 썼
다면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태음력을 썼던 것이다. 뒤에 페르시아 제국으로 이어졌
으며(기원전 525년), 힘이 센 중앙 집권의 정치를 행한 터전이 되었다. 믿음으로
보면 이들은 색 다른 점이 있었으니 배화교(拜火敎)로 불리우는 조로아스터교가
그것이다. 세상을 선과 악의 두 신이 싸우는 마당으로 보아 광명의 신 아후라마즈
다 곧 착한 신과 함께 하면 죽어 천당에 가고 나쁜 신인 암흑의 아리만과 함께
하면 지옥으로 떨어진다. 이 같은 생각은 뒤에 유다교나 그리스도교에 큰 그림자
를 드리운다. 이어 기독교의 처음이라 할 유다의 왕국이 뒤를 잇는다. 이들의 조
상은 말할 것 없이 헤브라이인들이었다. 헤브라이는 히브루(Hebrew)라고도 하는
데 '강을 건넌 사람'이란 뜻으로 이집트에서 학대에 못 이겨 요단강을 건넌 사람
들이란 말로 간추려 진다.
그럼 인도와 중국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성자의 강이라고 불리우는 갠지스와 인
더스 강의 가장자리에 빛나는 문명의 보금자리를 튼 것이다. 인더스 문명은 모래
속에 파묻혀 있던 나머지 물건들이 드러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유물로서
구리로 만든 그릇과 아름다운 흙그릇들, 갖가지 금은으로 된 장식품들이 나왔으니
당시에도 상당한 수준의 문명이 있었음을 보이고 있다. 까닭은 자세히 알 수 없으
나 기원전 1500년 전후에 무너졌으니 지금의 드라비다족의 조상들이 아닌가 한다.
중국의 경우는 어떤가. 황하와 양자강이 곧 중국의 옛 적 문명의 터전이었으며
특히 황하 유역인 화북지방이었다. 기름진 황토 벌판은 농업생산에 알맞은 보금자
리라. 기원전 2000년 경에는 흙으로 이루어진 토성으로 둘러 싸인 자연부락 -- 도
시들이 생겨났고 작은 마을을 한데 어울러서 점차 큰 도시국가로 펴 나아갔다. 한
자로 나라국자의 네모는 바로 토성으로 둘러 싸인 도시 모양을 본 뜬 것. 네모
(口) -- 큰 입구 안에 창과 사람이 하나의 통치자를 중심으로 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國). 이는 바로 농업생산과 마을의 번영을 지키기 위하여 함께 힘을 모은 공
동체가 나라란 뜻이 아니던가.
끊임 없이 쳐 내려 오는 흉노족들의 공격을 막으려고 쌓은 만리장성도 나라를
지키고 중국의 전 국토를 하나로 묶어 보려는 상징물이다. 특히 중국에는 땅이 커
서 그런지 가뭄과 홍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 온다. 우(禹)임금의 물 다스림
이 바로 그 대표이다. 서경(書經) 에 따르면 강물이 넘쳐 흘러 아픔을 겪었다.
해서 순 임금은 곤 임금에게 물을 잘 다스리도록 하였으나 잘 안 되었으므로 우
임금에게 10년 동안 물을 다스리게 해서 뜻을 이루었다. 따라서 순 임금은 우 임
금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 주었으니 그만큼 강물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게 아니었
을까.
삼황오제에서 하 왕조로 다시 은 왕조로 이어지면서 강과의 삶이 펼쳐 진다.
은나라의 도읍을 은허라 하는데 이 곳에서는 제사 그릇, 무기 등 청동기 제품과
글자가 새겨진 거북의 껍데기 -- 귀갑(龜甲)과 짐승의 뼈가 나왔다. 이르러 갑골
(甲骨)문자라 한다. 갑골문자는 귀갑점이라 해서 은나라의 왕들이 전쟁이나 물로
말미암은 큰 어려움이 있을 때 점을 치는 데 썼던 글자이다. 불에 태운 거북의 껍
데기나 짐승의 뼈 안쪽에 간 금을 보고 좋고 나쁜 걸 점쳤다는 얘기. 하지만 일종
의 물신앙이요, 토템이기는 하지만 어찌 보면 유사시에 발뺌을 할 구실을 미리 만
들어 놓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거북이는 주로 물신의 상징으로, 짐승의 뼈는 소
나 곰과 같은 짐승을 숭배하는 수조신앙(獸祖信仰)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해서, 임금이 정치는 물론이요, 신에 대한 제사도 아울러 맡았으니 이런 때를 제
정일치 시대라고 한다. 황제들의 옷에 용을 그린 것은 바로 물신 숭배요, 황금빛은
하늘의 태양을 섬기는 제사장의 옷을 드러내는 보람이 된다.
강은 겨레의 어머니
태양숭배나 짐승을 숭배하는 제정일치의 문화는 우리 겨레에게도 있었다. 삼
국유사 에 따르자면 '단군'은 곰부인과 하늘에서 내려 온 환웅 사이에서 태어난
다. 여기 곰(혹은 고마 <용비어천가>)은 바로 사람의 조상으로 섬겨지는 토템이기
도 했다. 조선왕조의 옛 말 자료에서 곰(고마)은 경건하게 그리워 해야 할 대상으
로 풀이된다(고마敬 고마虔 고마欽 <신증유합>). 같은 계통의 말인 퉁그스어에서
는 '곰(고마)-- 영혼 -- 조상신'과 같은 뜻으로 그 걸림을 보이고 있다.
나머지 태양숭배는 어떻게 풀이하면 좋은가. 단군왕검에서 왕검은 '님금(임금)'
으로 읽고 이는 다시 니마(님)와 고마(곰)로 가를 수 있다. 이 때 니마(님)가 태양
신을 드러낸다. 본시 단군이란 오늘 무당을 뜻하는 전라방언의 당골.당골레미.당굴
레와 같은 뜻으로서 제사장을 이른다. 하면 제사하는 그 대상이 바로 태양신 '니
마(님)'와 태음신 '고마(곰)'가 된다. 부모에 비긴다면 단군에게는 태양신계의 환
웅이 아버지요, 태음신계의 고마(곰)가 어머니이다. '어머니'의 사투리말이 지역에
따라서는 '오마 옴마 암마 엄마 어무이 어매 어머이 어머니'와 같이 여러 가지 모습으
로 드러난다. 우리는 이런 여러 가지 형태들을 변이형이라고 한다.
우리말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소리도 바뀌고 그 뜻도 바뀌었다. 이르자면 '새
비 -- 새우 개금 -- 개암 누비 -- 누에 가슬 -- 가을 겨슬 -- 겨울' 등과 같은 보기
들이 그러한 경우다. 옛 적에는 마누라 영감이 모두 벼슬에 대한 부름말이며 가리
킴말이기도 하였으니까.
마찬가지로 겨레들의 조상신이요, 영혼으로 떠 받들던 숭배의 대상 고마(곰)의
'곰'에서 곰(굼 검 금 감) -- 홈(훔 험 흠) -- 옴(움 음 엄 암)으로 바뀌고 말조각이 덧
붙어 오늘의 '어머니'가 되었다. 옛날 신화의 표현이나 대표적인 말은 겨레의 뿌
리됨을 드러내는 일이 많았다. 우리는 이를 일러 뿌리상징이라 한다. 수렵생활에
서 농경생활로 뿌리 내리면서 고마(곰) 신앙은 그 내용이 물과 땅, 그러니까 지모
신 숭배로 그 속내가 바뀐다. 물과 땅은 농사의 어머니요, 젖줄이며 밑바탕이니까
말이다.
땅이름 가운데에서 강의 이름이 아주 오래동안 변하지 않고 쓰인다고 한다. 가
령 경북 제일의 큰 평야요 농업생산의 터전인 금호평야의 금호 -- 금호강이 그러
하고 충청도의 금강(錦江) 또한 이러한 어머니의 신앙이요, 고마(곰) 숭배신앙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한다. 지금도 금강가 곰나루엔 곰사당이 있으며, 금호강의 말
미암음인 영천의 보현산을 대동지지 에는 모자산(母子山 -- 어머니산)이라고도
함을 보고 이는 다시 검단산(儉丹山)으로 이어짐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쓰이는
한자는 다르더라도 드러내는 소리상징은 같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방위로 보
면 이들 고마(곰)계의 강이나 산은 거의가 북쪽인데 이는 우리 겨레의 뿌리가 북
방지향에서 말미암은 탓. 이르자매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는 별에 대한 믿음 따위
가 그러한 보기들이다.
굽이쳐 흐르는 강은 언제나처럼 우리들의 몸과 마음의 고향이다. 하지만 산업사
회의 공해, 사람들이 쓰다 버리는 나쁜 물로 강물은 더 이상 우리들에게 젖과 꿀
이 아니며 아예 해독을 주는 독약이 되어 간다. 강이 죽어 가고 있다. 우리 삶의
어머니가 점점 시들어 가지를 않는가. 금수강산이 공해의 강산으로 바뀌고 있음은
실로 안타까움이요, 통탄스러운 일이다.
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하늘로부터 받은 우리들의 강은 우리의 얼이 담기는 삶
의 공간, 안식과 정서가 깃들이는 온누리 문화의 옹달샘이어야 한다. 어머니의 젖
을 빨던 어릴 적의 마음으로 물을 다루고 강과 우리의 자연을 가꿀 일이다.
강을 건너며
노을은 지고 어두운 밤의 어스름. 봄가물로 메말라 가릴 것 없이 드러난 강바닥
을 철벙거리며 건너고 있다. 언제나처럼 금호강은 높낮이를 따라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리면서 스스롭게 밤의 세상을 안아 돈다.
오염이 심하다고, 강이 죽어 간다고 아우성들이건만 말없는 강은 뭇 시름을 나
르고 있을까. 물새들만 찾아오는 밤을 홀로 깨어 흐르는듯 술렁이며 흐르는 강이
어쩐지 외로워 보인다.
연암이 건너던 강물도 이러했을까. 거룻배 하나 없는 강언덕을 굽이쳐 능금꽃
향내음을 머금어 늘 그 양으로 가는 곳은 낙동강. 그리운 영혼이듯 초승달이 오르
면 강은 마음을 열고 눈을 두리번 거린다. 내 별은 어디 있을까를 헤아리면서. 언
제나 미리내 고운 흐름으로 그 먼 나라 두고온 영혼의 강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
음을 설레이는 건 아닐지. 이내 낙동강이 강어구에서 손짓을 한다. 어서 따라 오
라고 저 구름 흘러 가는 곳으로 가자고.
밤강이 새를 부르는가. 바람의 노래를 부르는가. 갈대밭 향내로운 언덕에 꺼웍
이며 물오리들의 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더러 달밝은 밤이면 달님은 도처에 저승
에의 꿈을 뿌린다. 저리고 아픈 강의 가슴과 허리를 감싸 안는다. 좀 쉬라고. 너무
지쳤다고. 다시 온 누리에 우리네 사람들을 보고 타 이른다. 여기 당신들의 젖줄
이 흐르고 그 영혼이 사위어 간다고.
옛말로 강은 가람이었다. 이 마을과 저 마을이 갈리고 이 겨레와 저 겨레가 갈
리던 가늠자. 애틋한 마음으로 못 잊을 임을 강건너 보내고 출렁이는 강물만. 그
속의 푸른 하늘만 물끄러미 보던 남정네와 아낙네들.
때로 갈라짐이란 새로운 삶에의 비롯됨으로도 떠 오른다. 불타오르던 꽃잎이 갈
라져 떨어진 그 자리에 하늘과 땅이 만나는 목숨살이의 말미암음이 있듯이. 세월
속에 묻혀 버린 가야와 신라의 사이가 곧 낙동강이었으니 말이다. 가까이 북녘으
로 팔공산을 바라보며 왕건과 견훤의 이야기며 연구산의 돌거북 이야기를 들려
준다. 바람에 서걱이는 묵은 갈대의 소리와 물굽이에 부딪는 바람소리로.
밤만 되면 낙화암 아래 보로 생긴 못물 위에 전설같은 별꽃이 피어 오른다. 두
고온 영천의 어머니산을 그리는 설레임으로. 전혀 흐르는 물소리조차 멎어 버린
다.
어둠침침하게 구름에 가린 달그림자 사이로 물비린내가 바람결에 묻어 온다. 때
로 독한 시궁창 냄새와 같이. 참으로 야단이구려.
이제 초승달은 지고 더욱 어두워 온다. 이 어두운 밤을 나르는 밤새들의 울음소
리가 멀리서 가까이서 들린다. 자갈밭을 걷는 내 발자욱 소리에 놀랐음인가. 솨-
악 퍼드득 거리며 밤의 허공을 새들이 날아 오른다. 소나기 내린 뒤 부는 바람에
떨어지는 나무숲의 빗소리 같다. 그 가난한 강의 어름쯤에서 새들은 무얼하고 있
었단 말인가. 먹거리를 찾는 너희들이나 일 마치고 이 밤을 따라 강물을 건너는
나나 다를 게 없구나. 먹이사슬의 고리들로 강물은 어둠만큼이나 짙게 드리워져
있다.
살다 되돌아 갈 고리처럼. 강은 이 밤도 말없이 뭇 목숨을 갈라 놓으며 엄청난
목숨살이들의 뜨락에 물을 댄다. 불을 지핀다. 생명의 불꽃. 강물이 여러 갈래의
시내를 어우르듯이 큰 어울림의 가락으로 흐른다.
맑고 푸른 금호강의 꿈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보리삼단 같은 그 치렁치렁한
어머니의 머리결로 말이다.
2. 태양숭배와 곰신앙
어머니와 곰신앙
팔공산은 믿음의 터
임과 해우러름
스승은 거룩한 교황
옛조선의 맥, 춘천
조선의 소리 보람
아사달과 쇠그릇 문화
마니산과 하늘신
새로움과 관동
치악의 말미암음
말 달리던 선구자
죽령과 모죽지랑가
지리산과 파랑새의 꿈
소리란 무엇인가
해의 소리상징
말하는 남생이
어머니,당신은 아무래도 멀리 계시옵니다
달홀과 가라홀의 어우름
곰신앙과 땅이름
어머니와 곰신앙
있으렴 부디 갈다 아니 가든 못할쏘냐
무단히 네 싫더냐 남의 말을 들었는다
그래도 하 애닳구나 가는 뜻을 일러라
세상에서 어머니처럼 그립고 정겨운 말이 그리 많이 있을까. 우리 삶의 말미암
음이요, 고향이며 가람이 곧 어머니이다. 가람이 흘러 뭇 목숨을 살리듯이 우린 그
품에서 태어나 삶을 누린다. 위의 노래는 조선조의 성종 임금이 유호인(兪好仁)의
귀향을 말리는 가락을 읊고 있다. 늙으신 어머니를 받들어 모시기 위하여 선비는
벼슬을 내 놓고 고향마을인 선산(善山)으로 가야만 한다. 마음으로 가까운 이들의
헤어지기 서운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이나 그리움은 말로 드러내기 이전의 그 무엇이다. 나를
낳아 오늘이 있게 한 임이야말로 내 목숨의 보금자리요, 거룩한 성모가 아닌가. 저
승으로 가신 어머니를 그리고 아쉬워 하는 애틋한 마음이 없는 이가 누구일까. 해
서 돌아가신 날이 되면 영혼 앞에 흐느끼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샘물처럼 솟구
치는 울음을 멈출 길이 없음은 누구 혼자만의 정서는 아닐 것이다.
자기를 낳은 여성 혹은 아들 딸을 둔 여성을 자식에 대한 부름말 또는 가리킴
말로 쓰는 게 어머니이다. 어머니의 사랑과 고마움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5월 8일
을 어버이날로 고쳐 부르게 되었던 터.
가람이 있으매 샘이 있고 나무가 있을진대 그 뿌리가 있다. 우리말 '어머니'의
말미암음은 무엇인가. 살피건대 고조선 시대 단군의 어머니는 곰(고마)부인 곧 웅
녀(熊女)였으니 그게 사실이라면 곰(혹은 고마)과 어머니와는 무슨 걸림이 없는걸
까. 그 언어적 질서는 어떻게 풀이 할 수 있을 것인가.
말이란 겨레들의 얼과 이로 빚어지는 문화를 드러낸 소리상징이다. 문화는 사회
성과 역사성을 기본 틀로 한다. 소리 상징에 깃들이는 정서와 상징은 사람을 언어
사회 역사적인 존재로서의 자리를 굳건하게 만들어 준다. 시대와 사회를 따라
말에 되비치는 존재와 인식은 다시 그 본래의 존재와 인식이 사람의 생각속에서
재구성된다. 이른바 언어적인 중간세계가 만들어지며 여기서 말의 차별성이 드러
난다. 같은 능금이라도 같은 머루 다래를 놓고도 나라마다 종족에 따라서 다른 소
리로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간추리건대 문화를 삶의 전체적인 모습
으로 풀이하거니와 말은 문화를 되비친다. 글쓴이는 이를 말의 문화투영이라 한
다.
예를 들면 산속의 '절'이란 말의 경우 그 말이 쓰인 때부터 이미 불교문화의
존재가 옮겨왔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않은가. 일본에서 아직도 절(寺)을 '데
라'라고 한다. 하면 우리말의 절은 구개음화를 겪고 파찰음소가 자리 잡은 이후에
널리 쓰였음을 알아 차리기에 어렵지 않다.
말은 소리로 이루어 지는 약속이어서 어느 개인이 마음대로 고칠 수가 없다. 겨
레들의 말에는 오랜 시간을 두고 이룩된 사회와 역사가 갈무리되어 푸른 강물처
럼 넘쳐 흐른다.
누구에겐가 은혜를 입어 마음이 뜨겁고 즐거운 상태를 '고맙다'고 한다. 이 말
을 더 잘게 쪼개 보면 이름씨 고마(용비어천가3.15熊)와 씨끝 '-ㅂ다(如)'로 나누
어 진다. 고마는 용비어천가에서 볼 수 있듯 오늘날 '곰'의 또 다른 말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고맙다'의 풀이는 '당신의 은혜가 고마의 은혜와 같다'와 같이 할
수 있다. 이 풀이는 다시 바뀌어 '당신은 고마와 같다'로 다시 '고맙다'로 바뀌어
쓰인 것으로 보인다. 하면 '고마'란 무엇이고 앞에서 이른 역사성이나 사회성은
어떤 것인지.
고마(熊)는 끝소리가 줄면 곰이 된다. 다름 아닌 단군신화의 웅녀 - 곰부인이요,
단군의 어머니란 데에 그 터를 대일 수 있다. 부족의 머리이자 제사장이던 단군은
분명 조상신이자 어머니신인 곰(고마)부인에게 경배를 드려 제사를 모셨음은 상식
에 속하는 일이다. 지금도 돌아가신 어버이에게 제사를 모시나니 하물며 제정일치
시대야 말해 무엇하리오. 오늘날의 한자 자전격인 중세국어 시기에 신증유합(新增
類合)이란 자료를 보면 고마는 경건하게 흠모해 마지 않을 속성을 보이고 있다(고
마敬고마虔고마欽).
본디 '고맙다'는 중세어에서 '존귀하다 높이다 아끼다'의 뜻으로 쓰였다(명종
판<소학언해>등).
곰(고마)은 조상신이요 영혼이다.
.
그저 단순하게 곰(고마)을 짐승으로만 보면 그뿐이겠으나 곰이 겨레들의 조상신
으로 믿고 바라는 수조신앙(獸祖信仰 totemism)의 대상이 되면 그 의미가 달라진
다. 곰신앙은 지역으로 보아 중국의 동북방을 포함하여 시베리아와 내외몽고 지역
과 북구까지도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한반도가 여기에 포함됨은 이를 여지가
없다. 지금도 흑룡강 주위의 아무르강 유역에는 2만여 사람들이 곰신앙을 갖고 조
상신 숭배와 문화를 누리고 산다는 것이다. 우리말과 같은 계통의 퉁그스말에서는
곰(고마)을 '호모뜨이(곰) - 호모꼬르(조상신) - 호모겐(영혼)'이라 하여 곰신앙의
흔적을 언어적으로 보이고 있다. 이르자면 근원상징으로서 곰(고마)신앙이 겨레
삶의 빛을 던졌던 것. 토템(totem)이란 말의 뿌리가 브라질의 오토템(ototem)에 바
탕을 둔다고 한다. 본디 형제란 뜻으로 자연물 숭배는 물론이요, 자연과 벗하려는
믿음이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짐작된다. 짐승을 사람의 조상으로 여기는 것은
곰뿐이 아니고 소나 원숭이 그 밖에 새(鳥)나 식물이 등장하는 수도 있다.
그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던 구전문학 자료에서도 곰신앙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는가. 충남 공주의 곰나루 설화는 그 얼굴에 값하는 경우요, 전남 구례지방의 곰
소 이야기, 중국 후민 마을의 왕핑 이야기는 손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곰나
루에 대한 이야기의 줄거리를 떠올리자면 아래와 같다.
"백제시대 곰냇골 산허리 동굴에 암콤 한 마리가 홀로 살았다. 그런데 고
기 잡는 어부를 데려다가 함께 살아 새끼곰 둘을 낳아 길렀다. 곰이 생각하
기를 새끼도 낳고 하였으니 어부는 더 이상 집으로 갈 생각이 없을 것이라
고 판단한 것이다. 해서 어느 날 바윗굴의 문을 열어 놓은 채 사냥을 갔다. 돌아
왔다. .상황은 전혀 달랐다. 새끼만 놔 두고 열려진 문으로 도망쳐 버린 게 아닌가.
뒤에 어미곰은 새끼곰을 데리고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한데 웬 일인가.
당시만 해도 호남사람들이 거의 곰나루를 건너 서울로 다녔는데 타고 건너는 배
가 까닭 없이 갑작스런 바람으로 뒤집혀 빠져 죽곤 했다. 이로 말미암아 나루터
숲속에 곰사당을 짓고 봄가을로 제사를 드린 후로는 탈 없이 나루를 잘 이용하면
서 살았다."
설화 속에서 사람이 곰과 더불어 사는 것은 물론이요, 아이도 낳아 기르는바, 둘
이 아닌 한 종족으로 드러난 셈.
이러한 곰이야기는 삼국유사 에 실려 전해 오는 단군왕검의 그것과 줄이 닿
는다. 여기서는 아다시피 곰의 몸에서 사람이 태어나 세상을 다스리고 곰을 어머
니신으로 예배한다. 곰나루로 오면 곰이 사람과 어우러져 새끼곰을 낳는 것으로
크게는 같은 종류의 이야기로 판단된다.
고마(곰)는 음절이 바뀌고 모음이 넘나들어 굴의 공간상징으로 떠 오른다. '구
무(구먹 구멍) 굼'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살아가는 생활의 공간임은 말할 게
없지만 미루어 보면 생명이 자라나는 어머니의 태가 바로 굴이요, 구멍임을 우리
는 잘 알고 있다. 그것도 양수(羊水)에서 자라나 밖으로 나오니 물에서 뭍으로 삶
터를 바꾸는 것이다. 흔히 물과 땅의 신을 지모신(地母神)이라 함도 어머니는 땅
과 물의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곰은 본성이 땅을 잘 파며 굴에서 겨울을 난다. 몸집에 걸맞지 않게 나무에 잘
기어 오르며 검은 털에 고기를 주식으로 하며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특히 불곰
은 사나워 호랑이도 범하질 못한다는 것.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27) 에
따르면 곰의 고기는 먹거리로, 털은 이부자리로, 가죽은 옷감으로, 그의 뼈는 농기
구...나 사냥도구로 쓰여 거의 버릴 것이 없다고 한다. 하긴 그렇다. 얼마전만 해도
곰 발바닥을 재료로 한 요리가 말썽이요, 곰의 담 - 웅담에 관한 것은 이름난 약
재로서 밀수입 등 항상 말썽이 많다. 곰이 사는 방위는 북쪽이요, 계절로는 추운
겨울이다. 큰곰, 작은곰 자리라 하여 북극의 별 이름이 된 것이 아닌가. 특히 큰곰
자리별은 계절 시간 방위를 드러내기에 이른다. 영혼을 별에 빗대어 씀도 곰신
앙과 무관하지가 아니하다.
곰과 어머니의 걸림 고리
사회문화적인 볼모에서 어머니와 곰(고마)의 사연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하면
언어적인 질서의 고리들은 어떠한 것일까.
한국어와 같은 말의 계열을 살핀 알타이어학자 람스테트(Ramstedt 1873 -
1950)는 무성파열음 기역(ㄱ)이 약해져서 나아간 발자취를 [ ㄱ ㅎ ㅇ]으로 풀
이한 바 있다(알토1957, 알타이어학 입문). 곰(고마)과 어머니의 걸림에서도 이렇
게 될 가능성은 없을까.
먼저 한자말의 보기를 보면 쇽(俗) - ㅅ - 쇼 - 소 ㄷ(笛) - ㄷ - 뎌 - 져 -
저 견(見) - 현 개(解) - 해 등에서 기역이 약해져서 히읗으로 될 기미가 보인
다. 만일 같은 한자말인데 일본어의 그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분포를 알 수 있다
(학교 - 가꼬 화학 - 가가꾸 학문 - 가꾸몬 해결 - 가이게쓰 헌병 - 겐뻬이).
만주말과는 어떤가 하면, 이 또한 예외가 아님을 알게 된다(가시개 - 하사하 가
루 - 하루 골(谷) - 호로 구유 - 후유 곤(gon<만주> - 혼(흔:일흔 마..흔) -
온(은:쉰 예순)등).
곰(고마)이 '곰 구멍'의 뜻을 가리키는 경우 위의 소리바뀜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먼저 '구멍'의 경우를 살피면, 고마(곰)(구무 굼(穴) - 홈(훔 험 흠;호
미 허물 홈 패다 훔치다 흠집) - 옴(옴;옴팍하다 오막하다 / 움;우물 우묵하
다)와 같은 보기들이 눈에 뜨인다. 다시 곰(고마)이 단군의 조상신이요, 어머니임
을 떠 올려 보자. 구멍으로서의 옴(움)과 어머니의 사투리말과 크게 다르지 않음
은 상당한 암시를 주는 것으로 보인다('어머니'의 방언 - 옴마 옴매 오마니 오
메 오매 / 움마 암마 어무이 어매 어머이 어머니 엄마<최학근(1978)한국방
언사전)>).
그럼 방언형과 어머니의 걸림은 어떻게 풀이되는지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한다.
방언형을 자세히 보면 제주에서는 어망, 강원 경상 전라 일부 말에서는 어멍이,
어망이, 어뭉이로 쓰인다. 미루어 볼 수 있는 건 '어망'과 '이'의 이가 바뀌어 '-
니'가 되었지 않나 하는 점이다. 콩잎이 '콩닢'으로 땅일이 '땅닐'로 되듯이 어망
(어멍 어뭉)과 사람(사물)을 가리키는 씨끝 '-이'에 니은(ㄴ)이 덧붙어 '-니'가
되었다 하면 어떨까 한다. 하면 앞의 엄(암 옴)은 곰(고마 검 감)에서 나온 것
이란 말이 된다. 물론 엄마의 '-마'는 사람이나 자연물에 경칭을 쓸 때에 붙이는
씨끝이다. 연변에서 나온 주장 가운데에는 '엄아'에서 처럼 사람이나 상대를 부르
는 부름씨끝으로 보려는 생각들도 있기는 하다(한진건(1990)조선어원사탐고).
간추리건대, 단군의 조상신 곧 어머니신인 곰(고마)에서 오늘날의 어머니가 말
미암았다는 것이다.덧붙여 둘 건 고마와 곰의 걸림이다. 열린 소리마디 '고마'가
닫힌 소리마디로 되면 '곰'의 소리꼴이 나 온다. 오늘날의 일본어에서도 곰은 '구
마(고마)'로써 읽혀 진다. 소리마디의 펴나아감은 열린 데에서 닫힌 꼴로 되었을
우리말의 흐름도 점 쳐 볼 수 있을 것이다.
곰(고마)이란 말은 제정일치 시대의 제의문화를 되비치는 소리상징이요, 어머니
의 뿌리요, 샘임을 상정하였다. 어머니는 나와 배달겨레를 있게 한 말미암음이요,
생명의 고향이다. 우리 모두는 그 품에서 태어나 자연의 어머니인 흙으로 되돌아
가는 것을.
서로에게 고마워 하며 겨레의 일을 염려할 때 우리들의 천국이 가까워 올 것이
다. 어머니는 우리들의 영혼이요, 안식이다.
팔공산은 믿음의 터
임을 온전하게 아뢴 그 마음이 하늘에 닿아
넋은 가고 없되 삼으온 벼슬일랑 받으시구려
바람을 알리라 그대 두 공신이여
오래도록 곧은 자취 나타내오시라
. (예종의 "도이장가")
어느 일을 정진함에 있어 목숨을 거는 것보다 더함이 있을까. 동화사 싸움에서
죽음의 자리에 놓인 왕건(王建)을 대신하여 싸우다 돌아 간 신숭겸과 김락 장군.
두 장군의 덕업을 노래한 고려 16대 예종의 도이장가(悼二將歌)가 절절하다. 장절
공 신숭겸은 특히 왕건의 모습과 비슷하여 견훤의 군대가 보기로는 얼굴도 비슷
하고 차린 옷이며 행동거지가 틀림 없는 왕건이었다. 베임을 당한 신숭겸의 목은
없어졌지만 이미 왕건은 달아나 피하고 없었다. 명산(明山)이라고 부르는 지금의
안심(安心)에서 겨우 정신을 차려 군사를 다시 거느리고 재진격, 싸움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다는 것. 이 때 왕건이 싸움에서 피하도록 강력하게 권한 사람이 신숭
겸이다. 숱한 안개와 구름을 거느리고 조국의 어려움을 걱정하는 듯, 하늘 닿을 듯
이 솟아 오른 팔공산은 막 날아 오를 용이요, 웅크린 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참담
했던 전쟁터로 그 증인으로서 예나 오늘이나 의연하게 서 있다.
옛부터 전해 오는 산의 본디 이름은 공산(公山)이었다. 해안(解顔)고현의 북쪽
17리쯤에 있고 대구부에서는 35리 쯤에 놓여 있다. 대구 인동 신령 하양의 경
계를 이루는 터전이 된다. 산봉우리는 연이어 기세 당당하다(대동지지 참조).
고려의 건국초기에 동화사 싸움에서 빛을 남기고 죽은 신숭겸 김락 전의갑
등의 8공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덟 팔을 덧붙여 8공산이 된 것이다. 산의 또 다
른 이름으로는 동수산(桐藪山)이라고도 했으나 확실하지 않다. 그럼 옛부터 전해
왔다는 산이름 공산(公山)은 어떤 소리상징을 보이고 있을까. 무엇이 그리도 귀한
산이란 말인가. 앞서 일러 둘 것은 금호강(琴湖江)의 이름과 어떤 걸림이 있지 않
나 한다.
미.루어 보건대 공산의 '공'과 금호의 '금'이 다 같이 땅과 물을 다스린다는 지
모신(地母神)과 걸림을 둔 이름으로 미루어 잡는다.
충청도 공주(公州)의 보기를 먼저 들어 보기로 한다. 용비어천가에 따르면 공주
는 '고마나루(熊津)'가 본 이름이었다. 고마(곰)내는 웅천하(熊川河)로 다시 금강
(錦江)으로 바뀌었고 웅진(熊津)은 달리 공주(公州)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러 쓰인
다. 이를 간추리면 '곰 - 웅(熊) - 금 - 공'의 맞걸림이 드러난다. 하면 원천적으
로 곰 - 공(公)의 걸림을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 한자로 곰이란 글자는 없으니
까 공으로 쓴 것이다. 고마(곰)에 대한 속성은 '경건한 흠모의 대상'으로 떠 오른
다(고마敬고마虔고마欽(신증유합)).
여기 고마(곰)는 어떤 내력을 갖고 있는가.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에 나타나는 단
군신화에 그 뿌리가 벋어 있다. 곰을 짐승으로만 보면 그뿐이지만 조상신이라는
토템의 대상으로 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러한 곰신앙 - 곰토템은 한반도뿐만 아
니라 시베리아 전역에 주로 북쪽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한마디로 곰(고마)은 어머
니 신이요,조상신이 된다. 그러니 귀하게 받들어 모실 밖에. 게다가 고마(곰)는 수
렵생활에서 농경생활의 정착을 따라 물신과 땅신의 상징 곧 지모신(地母神)의 믿
음으로 바뀐다. 한편 동물상징도 물이나 뭍에서 사는 거북이로 곰이 바뀌게 된다.
본시 거북은 '검(거ㅁ)'이었으니 단군왕검의 '검'이 곰 거북(검)의 소리상징과
비슷함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하면 어쨌든 곰(검 금 감 굼)이 얼마나 드높은
존재인가.
그러면 이제 '곰 - 공(公)'은 소리의 질서로 어떻게 풀이 되는가. 곰(굼)은 아래
조사가 붙을 때 기역(ㄱ)이 끼어들어 변하는 형태상의 특징이 있다(곪기다 공글
다 궁기다 등의 기역(ㄱ)). 마침내 미음(ㅁ)앞에 기역(ㄱ)이 자음접변의 소리 .닮
음에 따라 공(公 孔)이 될 수 있다.
정말 거북의 옛말이 '검(굼 금)'이었을까. 흔히 사방에 4신(神)의 그림을 그릴
때 북쪽에 거북과 뱀을 형상한다. 거북을 현무(玄武)로 적는다. 이두식으로 읽으면
현무는 검(玄)에 무(武)를 붙여 쓰는 것으로 '무(武)'는 앞의 글자 현(玄)을 뜻 -
검으로 읽으라는 끝소리 가리킴이라 할 수 있다. 땅이름에서도 이러한 가능성은
보인다. '검(거북)'은 색깔로 보아 검은 색이며 방위로는 북쪽지향을 드러낸다. 가
령 함안(咸安)의 현무(玄武)에서 함(咸)의 옛소리가 감이니까 '감 - 현무(玄武 -
검)'의 걸림을 보이는 경우가 그런 보기이다. 칠곡의 거무산(巨武山)이 그러하며
구미(龜尾)의 금오산(金烏山)에서 '굼 - 금'도 같은 계열의 보기들이다. 박지홍
(1957.구지가연구)에서는 양산지방의 민요 가운데 '왕거미' 노래가 있는데 이 때
'거미 - 거북'이라는 대응이 가능하다고 보았다(神검(신자전)).
'검 - 거북'의 걸림을 고리 짓기란 어렵지 않다. 거북의 옛말은 거붑(두시언해
(초)8-58)이었다. 그러니까 '검다'에 명사형(음)이 붙으면 거믐 - 거뭄이 되고 둘
째 음절에서 미음(ㅁ)이 파열음(ㅂ)으로 되고 끝소리가 기역(ㄱ)으로 자음이화가
일어나면 '거뭄 - 거붑 - 거북'이 되니 말이다.
곰산과 금호강
대구부의 남쪽 3리쯤에 연구산(連龜山)이 있다. 자료에 따르면 대구가 처음으로
마을이 생길 때 돌로 거북을 만들어 이 산자락에 묻었다는 거다. 머리를 남쪽.으
로, 꼬리를 북으로 해서 묻었는데 거북의 기운이 산전체에 통하게 하고자했던 까
닭에서다. 해서 연구산으로 부르게 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대구) 당시만 해도
신천(新川)이 굽이돌아 흘러 연구산 자락으로 지나 물의 북쪽이 된다. 마찬가지로
금호강은 대구의 서북쪽으로 흐르며 금호의 북쪽에 있어 대구를 지키는 터산이
곧 팔공산-공산(公山)이 되지 않는가. 곰이 단군의 어머니신이라고 했는데 금호강
또한 금호평야의 어머니요, 대구평야야말로 금호강이 낳은 자식이라 해서 지나침
이 있을까. 대동지지 를 따르면 금호강의 뿌리샘은 모자산(母子山) 일명 보현
산에서 말미암았다고 하니 금호강이 대구평야의 어머니가 됨은 너무도 당연하다.
'금 - 모(어머니)'의 걸림은 '금'의 기역(ㄱ)소리가 약해져서 떨어지면 음(옴 엄
암)이 된다(金泉 - 今勿 - 禦侮 - 金城(대동지지)). 한 맺힌 고모령의 사연도 공
산 - 금호와 걸림에 있을 것으로 본다.
고모령(顧母嶺)이라, 말 그대로 풀이하면 '어머니를 돌아 보며 생각하는 고개'
란 뜻. 언제나 생각해도 어머니의 품은 따사롭다. 이두식으로 다시 보면 '고모 -
곰(고마)'의 걸림으로 풀이가 된다. 우리말로 곰고개 혹은 곰치가 된다. 이와 같이
물과 땅을 다스리는 지모신에의 그리움은 우리가 늘 가까이 하고 살아 가는 공간
에 되비쳐 드리운다.
공산의 머리맡에 솟은 비로봉(1192미터) 또한 이러한 믿음의 상징이 어려 있다.
불가에서는 광명의 부처를 비로자나불이라 한다. 하지만 우리말로는 별을 방언에
따라 '빌'이라고 하는데 이 '빌'에 말조각이 더 붙어 '비로봉 - 별봉우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북방에 가장 뚜렷한 것은 북극성 모든 별이 이 별을 중심으로 해
동그라미를 그리며 자리를 잡고 있다. 이르자면 비로봉은 별신 - 곰신에게 제사와
정성을 드리는 상징으로 저리 높게 드리워 있어 우리를 경건하게 한.다. 별 중에
도 큰 곰자리 별이 으뜸으로 가는 게 아니던가.
별이 쏟아져 빛나는 금호강은 나날이 죽어 간다. 우리들이 빚어낸 숨 막히는 공
기와 물로 말이다. 우린 자식으로서 어버이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는 건 아닐까.
임과 해우러름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
정이 들어 애틋하게 생각하고 그리워 하는 사람을 '임'이라고 한다. 임을 향한
그리움은 늘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봄의 향내음 같은 정서를 불러 일으킨
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님'이 그러하듯 임은 종교적인 대상이 될 수도 있으며
때론 참다운 가치의 표상, 잃어버린 조국일 수도 있지 않은가. 오늘의 '임'은 서
로 다른 이성간에 가리킴말로 쓰인다.
중세국어의 자료인 훈몽자회 에서는 '님'으로 적혀 있어 머리의 소리를 제
한하는 두음현상을 벗어나고 있다. 주로 임금.주인의 뜻으로 적힌다. 하면 님 - 임
금의 맞걸림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님'은 '니마'에서 비롯되었으며 소리마디가
줄어 '니마 님'으로 된 게 아닌가 한다.
삼국사기 를 따르면, 왕이란 부름말을 쓰기 이전에는 왕이 아니고 '니사금
거서간 자충(慈充)'이란 부름말이 쓰였다. 이들은 하나 같이 행정의 머리이자 종
교지도자를 겸한 제정일치 시대의 지도자들이었다. 예컨대 자충은 스승이요, 무당
이라 했다(慈充 方言謂巫也). 조선왕조 때만 하더라도 왕이 정치의 머리였음은
물론이요, 종묘제악을 다스리던 종교적 행위를 하던 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받들어 모시던 제의대상은 무엇이었을까. 상정하건대, 불신이자
하늘의 신인 태양신이 그 처음이며 물신이자 땅의 신이라 할 태음신 곧 곰신이
그 다음이 아닌가 한다. 모든 정성을 다해서 온 겨레의 정성을 모아 제사를 봄 가
을로 모셨으니, 그 때를 상달이라 하며 그 곳을 소도(蘇塗)라 하지 않았던가.
소리 상징으로 드러낼 때 하늘신은 '니마(님)'로, 땅신은 '고마(곰)'로 나타난
다. 앞의 것은 천부신의 믿음이라면, 뒤의 것은 지모신의 믿음이라고 하겠다.
기원적으로 우리의 삶이란 하늘과 땅을 떠나선 그 의미를 잃고 말기 때문이다.
자연현상이나 자연물에 대한 두려움이 많던 그 때에 태양과 땅 물이 크낙한 신
의.. 의미로 떠 올랐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긴 모든 종교란 발생학적으로
경배하며 두려워 하는 외경(畏敬)에서 비롯하였으니까 말이다.
태양신을 우러르는 믿음은 이곳저곳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아주 보편적인 것이
다. 우리의 경우 환인 - 환웅 - 단군으로 이어지는 환인 중심의 이야기나 연오랑
세오녀. 이 밖에도 남방계의 신라건국이나 가야 건국에 나오는 새의 알 또는 하늘
의 말 이야기 등이 천신계의 하늘숭배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결정적인 것은'빗살무늬'의 빗살이 아닐까. 이는 다름 아닌 태양빛이요 원관념
은 태양 곧 하늘인 것이다. 고조선 적의 고인돌 동쪽으로 머리를 삼아 장례하는
동침제 솟대 신앙이 그런 보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태양신의 부름말이자 가리킴말이 '니마(님)'라 하였다. 하면 태양신과 왕(임금)
이 같다는 말이 된다. 그 걸림은 어떻게 풀이해야 되는가. 말은 쓰이는 시간과 공
간을 따라서 뜻도 바뀌고 형태도 바뀐다. 예를 들면 영감(令監)의 경우, 조선왕조
때에는 종4품 이상의 벼슬하는 사대부를 통틀어 이른 호칭이었는데 오늘에 와서
는 어떤가. 잘 쓰이지 않음은 물론이요, 욕설에까지 쓰인다(저 놈의 영감텡이, 이
놈의 영감 등). 마누라만해도 그러하다. 신라 백제 때에는 왕비요, 조선조에 이르
면 사대부의 아내로, 지금은 그냥 쓰이거나 임의로운 부름말로 쓰이지를 않는가
(마누라 나 좀 봅시다. 마누라쟁이 등).
태양신을 가리키는 '니마(님)'의 경우도 같은 얼안에 드는 것으로 본다. 처음에
는 '니마(님)'가 절대신인 태양을 가리키다가 뒤로 오면서 종교직능자인 군왕의
가리킴말 '임금'으로 바뀌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리워 하고 좋아 하는 사람'으
로 바뀌어 쓰인다. 이를 간추리면 '니마 태양신 군왕 그리워 하고 좋아 하는
사람'이 된다. 이를테면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뜻으로 바뀌어졌다고나 할까.
홍익인간이란 게 그 뿌리는 하늘신에 닿아 있음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하늘 -
태양신의 권위에 힘 입어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이었으니 군왕의 권력은 곧 하늘
이 주었다는 왕권신수의 논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제 '니마(님)'가 태양신 곧 하늘신을 드러낸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그 언어적
인 질서는 어떠한 지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한다.
'니'는 태양이다.
님(임)은 '니마'에서 소리마디가 줄어짐에 따라서 굳어진 말이다. 말의 됨됨이
로 보아 니마는 '니(日)'에 존경을 드러내는 경칭접미사 '-마'가 녹아 붙어 이루
어 진다.
땅이름이 바뀌는 과정에서 한자의 맞걸림을 보면 '니'가 태양임을 떠 올릴 수
있다.(日 - 熱 - 泥 - 尼). 이는 일본어나 만주말에서도 예외는 아닌 것으로 보인
다(日(니 히) - 日本 尼公(니고우) 丹色(니이로) / 닝구<만주>닌(영웅)<퉁그
스>).
해마다 전국체전 때가 되면 하늘 제사를 모시고 불 곧 성화를 가져 오는 마니
산의 경우도 '니 - 태양'을 뜻하는 좋은 보기라 할 것이다. 마니산은 강화도는 물
론이요, 충청도 옥천에도 강원도 회양에도 있다. 옥천의 경우, 마니산의 영향을 받
아 이름 붙여진 방사형을 고려하면 마니산의 '마'는 '걸'로 읽어야 옳다고 본다
(摩 : 聖 : 沃 : 馬<대동지지>).
하면 '마니-거룩한 태양신'의 뜻풀이가 가능하다. 니마의 '마'도 '거룩하다'의
뜻을 보이는 말이 제 뜻을 잃고 경칭접미사로 쓰이게 된 걸로 볼 수 있다. 그러
니까 '니'는 태양이란 말이 된다.
. 세월이 가면 모든 게 바뀐다. 말 또한 그러하다. 태양을 뜻하던 '니'는 시간을
따라서 어떤 갈래들로 퍼져 나아갔을까. 낱말변화의 보람으로 보아 '니'는 기역
또는 히읗이 끝소리로 달라 붙는 특수변화를 하는 말이다. 이로 말미암은 '니'의
낱말겨레로는 '닉다 니기다 닛다 닐다 익다 이기다 잇다 일다'를 들겠다.
' 니'의 낱말겨레는 이에서 멈추지 않는다. 중성모음계인 '니'에서 모음이 양성
과 음성으로 바뀌면서 더 많은 말의 겨레들이 생겨 나 쓰이게 된다. 양성모음계열
의 것으로는 '낫 - 낮 - 낯 낟(日) - 낱다(現) - 날'등으로 대표되고, 음성모음
계열로는 '녀다(行) - 닛다 - 닐다 / 니마(임) 님자(임자)'와 같은 말들이 쓰인
다.
간추리건대, 임은 태양신을 가리킴에서 비롯한다. 여기서 다시 군왕의 뜻으로 바
뀌어 쓰이며, 뒤로 와서는 그리워 하고 좋아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쓰인다.
부모님, 스승님의 '님'은 말의 내력으로 보아 '당신은 나의 태양이요, 임금이다'
라는 뜻으로 새겨 진다. 상대를 부를 때에 아무개 씨보다는 아무개 님으로 불러
줌이 우리의 정서상 어떨까 한다. 상대편에서 나를 대접하기에 앞서 서로가 먼저
다른 이를 섬기는 생활이 우리의 한 아비들의 문화전통을 이어가는 일이기도 하
니까.
서로를 태양신으로 섬기는 누리라면 이는 참다운 홍익인간에의 발돋움이 아니
고 무엇이랴.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임은 바로 우리 마음에, 곁에 있는 가도 모를 일이다. 하늘에 빛나는 태양처럼.
.
스승은 거룩한 교황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라.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참된 스승을 그리워 함은 예나 오늘 없이 매양 한가지이다. 인류의 역사에 빛을
남긴 이들은 대부분이 거룩한 스승, 영혼의 스승들이었다.
참과 거짓이 무엇이며 앎과 삶에 대한 따스한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이. 쌓아
온 인류의 문명과 문화 유산을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옮겨 주는 이. 이들이 다름
아닌 우리 삶의 스승인 것이다.
말은 삶의 양식 곧 문화를 되비친다고 했다. 문화가 달라지면 말도 달라지며, 말
이 있는 곳에 사람의 생각과 느낌이 만나 넉넉한 사회생활을 이루어 가게 마련.
옛적으로 거슬러 오르면 문화의 모습은 단순해진다. 수렵과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제의문화 사회가 그 중심을 이룬다. 제의문화란 무엇인가. 종교와 정치가 둘 아
닌 하나의 형태로 한 지도자에 따라서 다스려 진다.
하면 '스승'이란 말의 내력으로 보아 과연 하늘신과 땅신에 제사하는 제의문화
와는 어떤 걸림이 있는걸까. 세월이 흐르면 삶도 죽음도 많은 변화를 입게 된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을까. '스승'의 경우도 예서 멀리 있지 아
니하다.
지금도 일부 방언에서 스승은 선생 또는 무당의 뜻으로 쓰인다. 그럼 중세어의
경우는 어떠한가. 두시언해 와 같은 자료들을 보면 '승려 왕 무당 선생'등
의 여러가지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시대를 거슬러 신라 초기로 가면 '스승'은
왕(王)의 뜻으로 쓰인다. 가령 삼국사기 의 '자충(慈充)'이 그러한 보기이다.
당시의 한자음으로는 자충이 즈증(즈중)이었으며, 당시 우리말에는 ㅈ- ㅊ(ㅉ)같은
터짐갈이소리(파찰음)들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찰음 ㅅ- ㅆ으로 소
리가 난다. 결국 '즈증'은 스승으로 소리가 나게 된다. 삼국유사 의 단군조선
시기에는 비 구름 바람스승이 있었으니 이들이야말로 행정과 종교를 함께 이끌
어간 이들이었다. 유럽으로 치자면 로마의 교황에 맞먹는 그러한 구실을 했다.
참고로 삼국사기(권1) 의 경우를 들어 보자. 남해차차웅 혹은 자충에 대하여
김대문(金大問)은 풀이하기를, 자충이란 당시 한국말로 '무당'의 뜻이다. 세상 사
람들은 무당 곧 자충을 통하여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어 모셨다. 해서 자충을
두려워 했으며 마침내 사람들은 존귀한 어른을 '자충'이라 하였다.
신라 22대 지증왕 이전에는 왕에 대한 부름말을 '니사금 - 마립간 - 거서간 -
스승'이라 불렀다 했다. 스승은 '사이(間)'를 뜻하는 슷(훈몽자회)에 접미사 '-응'
이 녹아붙어 쓰이는 말로 보인다(슷 + -응 > 스승). 이렇게 스승이 '사이'에서 말
미암았다면 무슨 사이에서 종교와 행정의 지도자 구실을 하였단 말인가.
제정일치 시대였으니 부족의 머리이자 종교직능자로서 스승은 종족의 번영과
안녕을 신에게 빌었을 것이다. 그러니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스승의 구실이 이루
어졌음을 무리 없이 미루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종족과 종족은 물론이요, 사람들
과 사람들 사이에서 나라 안팎으로 사제의 일을 풀어 나아갔다. 결국 인간과 신
사이와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서 다스리는 몫을 해냈던 것이다. 이를테면 징검다리
의 구실을 한 중간자 - 사이였다고나 할까. 마침내 거룩한 영혼의 스승들은 하늘
의 태양신과 땅의 지모신으로부터 다스림의 권능을 얻어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 마치 태양이 비치는 누리에서는 태양이 가장 센 존재로 영향
력을 휘두르듯이 말이다.
그럼 비는 대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라 하였는가. 삼국유사 의 단군신화를
보면 단군왕검의 아버지는 환웅이요, 어머니신은 곰이었다. 이르자면 환웅(桓雄)은
환인으로 이어지는 하늘님이요, 곰 - 웅녀(熊女)는 물이요, 땅 혹은 굴(구멍)이라
할 지모신이라 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의 만남이요, 물과 불의 어우름이 아닌가. 배
달겨레는 단군의 아들딸이니까 우린 하늘의 백성이요, 거룩한 스승의 제자들이다.
한데 이게 웬 일인가. 깨어지고 넘어져 도저히 넓고 큰 기맥을 펴지 못하고 살아
온 쭈글스런 나날들. 말이 안된다. 긴 여행의 길목에서 정녕 시련의 큰 고비를 오
르고 내렸으니 지금도 시련은 멈추지 않고 있다.
고조선은 스승문화
사이와 관련하여 고조선의 짜임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유엠부찐이 지은 고조
선 (1990)에 따르면 우수리강에서 내몽고 황하의 동북방에 이르는 지역에 예
(濊)족과 맥(貊)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 두 종족이 합하여 고조선을 이루었다는 것
이다. 한반도의 영역이 이에 포함됨은 물론이다. 마찬가지로 환웅은 환인 - 단군
의 사이에서 신성(神聖)과 인성(人性)을 함께 갖춘 통치자였고 단군은 환웅 - 웅
녀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말이다. 세상살이란 게 본시 인간관계 속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살아 가는 게 우리의 일상이다.
사이란 말은 흔히 시간과 공간을 함께 안는 관계의 속내로 풀이된다. 관계라 함
은 사물과 사물의 상호작용이 아니던가. 이러한 서로의 상호작용이 없이 이루어지
는 일이란 없는 법. 우리 사람의 인식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둘레의 사물이
나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 따른 객관의 주관화요, 정신활동으로 말미암는 되만듦
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사이'가 어우러져 녹으면 '새'가 된다. '새'와 같은 소리로 나는 동음이의어를
사투리말에서 찾아 보면 하늘나는 새, 쇠붙이, 새로움, 풀, 날짜를 헤아릴 때의 새
따위가 있다. 새 쇠 세는 모두 중세국어에서 겹소리 사이로 읽어야 한다. 행여
이들 말들은 함께 갖고 있는 뜻은 없을까. 먼저 날짜를 헤아릴 때의 경우 흔히 닷
새(쌔)엿새라 한다. 분명 태양 곧 해를 이른다. 옛적에는 해가 지구를 중심으로 해
서 하늘과 땅의 사이에서 뜨고 진다고 보았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
하기로는 해가 떴다 지는 것으로 보이니까. 그럼 하늘을 나는 새도 마찬가지인가.
쇠붙이는 어떠한가. 쇠 또한 나무와 돌 사이의 특성을 가진 것으로 인류문화에 해
와 같이 큰 영향력을 가졌으므로. 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본디 혀는 방언에
서 '세(쎄 쌔)'라 한다. 짐작하건대 윗턱과 아래턱 사이에 만들어진 근육조직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시옷(ㅅ)이 시옷과 히읗으로 나누어져 동음이의어로서의 맞
부딪힘을 피해 간 것으로 보인다.
실로 공간이나 시간의 바탕이 없다면 무엇으로 사물의 존재를 파악하겠는가. 이
모두가 '사이'의 뜻 얼개에 드는 큰 갈래들임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따지고 보면 스승은 신과 사람의 사이에서 예언하는 구실과 푸닥거리 곧 사람
사이에서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맺힘을 풀고 닦는 구실을 하지 않았던가. 이를테
면 신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풀고 닦는 기능을 한 겨레의 꿈
이요, 이정표였다. 달리 영험하고 거룩한 대제사장이었던 것을 누가 부인하리오.
제정일치 사회에서 스승들은 모두가 위대한 선구자들이었으니 단군이나 환웅이
모두 이러한 둘레에 든다 하겠다. 단군도 기실 무당을 드러내는 말로 쓰인다. 전
라도말에서는 당골 단골레미 당굴과 같이 쓰이니 함경도 지역에서 무당을 스승
이라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환웅(桓雄)은 어떠한가. 환웅의 웅(雄)은 스승의
슷과 상당한 걸림을 보여준다. 문헌에 따라서는 수웅(雄)이라 해 '수(ㅎ) - 숫 -
슷'이 어울려 한 겨레의 말임을 알 수 있다. 하면 환웅의 환은 무엇인가. 다름 아
닌 한겨레의 소리상징이요, 꾸미는 말로라면 크고 위대하다는 뜻풀이가 가능하다.
그러니까 환웅이란 '위대한 스승'이요, 한민족의 머리란 말이 된다.
스승문화의 그리움은 홍익인간
한민족의 역사는 스승문화에서 말미암는다. 우리네 한아비들은 일찌기 사람의
사이를 소중하게 여겨 개인과 개인, 부족과 부족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뒤틀린 갈등을 풀어냈던 슬기를 지녔다. 아울러 신과의 오고감을 도맡아 다스렸으
니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라 해서 지나침이 있을까.
빛과 그림자를 따라 모든 것은 바뀌어 간다. 바람에 구름이 몰리듯이, 파도가 일
듯이 말이다. 한데 지금의 우리 정황은 어떠한가. 역사의 능선을 타고 뒤로 올수
록 쪼갈라지고 줄어만 들어 남과 북으로, 동과 서로, 뒤엉킨 난기류가 있으매 이를
당장 어찌 한단 말인가. 참으로 뼈저림이요, 절통한 일이다.
밖에서 몰려 드는 많은 세력에 배달겨레의 스승문화는 마침내 깨어져 동강이
나고 말았다. 어찌됐든 우리 것을 잃어 버리고 석가모니 공자 예수의 가르침을
둘러싼 스승들이 판을 쳤으니.
그러나 어찌할거나. 우리 혼자서만 사는 세상이 아닌 바에 밖에서 들어 온 문화
를 되새김질하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교육법에도 드러났듯이 우리 한겨
레는 스승문화의 그리움을 홍익인간(弘益人間)에 두었다. 잃어버린 옛 문화의 영
토를 되살려 오늘을 사는 새롭고 힘 있는 스승문화를 일으켜야 한다.
참스승이란 어떤 것일까. 참과 거짓, 선과 악, 더럽고 아름다움에 대한 올바른
가늠을 하고 인간적인 사랑으로 겨레의 홀로섬에 슬기 있고 용감하게 앞 서가는
사람들이다.
임의 노래는 언제나 우리 곁에 들리지만 그 느껴움은 우리를 감동시키지만, 마
음의 문을 닫으면 하늘의 소리는 한 마디도 들리지 않는다. 거룩한 영혼의 스승의
시대가 그립다. 위대한 겨레의 스승되기를 우린 모두 힘 써야 한다. 적은 수의 사
람일지라도 참을 사랑하는 이들은 외롭지 않다. 신이 진실을 보는 까닭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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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조선의 맥, 춘천
소양강 나린 물이 어디로 흐른단 말인가.
외로운 신하 서울을 떠나고자 하니
흰 머리칼이 많기도 하여라.
('관동별곡' 중에서)
강은 말 없이 흐른다. 세월 따라서 사람을 따라서 높낮이를 달리 하여 산을 휘
감고, 때로는 그 도도한 모습으로 들판을 지나 바다에 이른다. 소양강은 흘러서 서
울로 다시 황해로 든다. 마음은 임금의 곁에 있는데 몸은 멀리 떨어져 강원도 시
골로 왔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머리의 글은 조선왕조의 선조 무렵 정철이 지
은 송강가사의 한 대목이다. 참말로 강원도는 그리도 험한 산골일 뿐,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었던가. 더욱이 춘천을 포함해서 말이다. 짐승에게도 족보가 있는
법, 춘천의 역사를 알고 보면 옛적 예맥(濊貊)나라, 특히 맥나라의 본고장이요, 그
서울이 춘천이 아니었던가. 하긴 송강이 춘천의 속내 깊음을 알았더라도 별 관심
은 없었을 것이다. 사라진 옛 문명의 보금자리였으니까.
맥(貊)이란 무엇인가. 맥은 나라의 이름이자, 겨레의 이름이기도 했다. 같은 이
름의 맥은 상고시대에 강원도 춘천지역을 이름은 물론이고, 요하(遼河)부근에도
있었던 나라요, 겨레였다. 예와는 늘 가까이 있어 마침내 예와 맥은 둘이면서 하나
였다. 하면 두 개의 맥나라가 있었을까. 지금이니까 중국의 요하이지 당시에는 우
리의 옛적 한아비들이 살았던 고조선이었을 것으로 미루어 본다. 유엠부찐(1990.고
조선)은 예와 맥이 어우러 고조선을 이루었다고 상정한다. 근거는 유적 유물에
따른 실증사학적인 풀이에다 두고 있다.비교적 소련의 살핌들은 믿음을 주는 것들
이었다.
본디 요하 중심의 맥과 예를 뿌리로 볼 수 있다. 중국 동북부 지역을 주름 잡던
이들은 합하여 고조선을 이루었다고 했다. 뒤로 오면서 자연환경에 살아 남고 중
국 사람들의 끈질긴 침략을 피하기 위하여, 추운 지역의 수렵생활에서 벗어 나려
고 남쪽으로 내려와 한반도에 정착을 했던 게 아닌가 한다.
마침 뒤 늦게 나라를 세운 위만 기자 조선은 말할 것 없고, 고구려에 떠밀려 권
세가 줄어져 맥은 춘천 중심에서, 예는 강릉을 중심으로하여 나라를 이끌어 갔다
면 그 설명이 어떨까.
맥(貊)은 시경(詩經) 에 겨레의 이름으로 나온다. 험윤족(族)에게 침입을 받
아 산서성으로 옮겼고 다시 요하지방으로 이동 한다. 사기(史記) 에서는 팽나
라와 오나라가 예맥을 덮쳐 조선을 없애고 그 자리에 창해군(蒼海郡)을 두었다고
했다. 일본말로 맥족을 '파쿠하쿠'라 한다. 이 말은 백제의 음과 서로 걸린다(도변
광민1991). 백제는 '맥의 땅'이란 말로 뒤칠 수 있으며 뒤에 '구다라'로 불렀다.
중국말로는 곰웅(熊)을 '큐 - 쿠 - 다이 - 나이'라고도 하는데 다르게는 '우(優)'
또는 '구(久)'로 중국인들이 기록해 놓기도 했다. 구다라의 '다라'는 터어키 말에
서 강 혹은 나루의 뜻으로 쓰였음을 생각하면 마침내 [구다라 - 웅진(熊津)]이란
맞걸림이 가능하다. 금강만 해도 그렇다. 본디는 웅천하(熊川河)인데 곰나루 또는
금강으로 바뀌어 불린다. 곰은 한자로 웅(熊) 또는 맥(貊)으로 적힌다. 물론 금강
의 '금'은 한자의 소리를 빌어 적은 음독에 값한다. 백제와 관련, 맥에서 가진 돼
지시(豕)를 빼어 버리면 백(百)이 남는다. 결국 백제는 맥족이 세운 고조선의 대통
이란 풀이가 가능하다. 흔히 백제는 많은(百) 부족국가가 어우러져 이룬 나라라고
하지만 곰신앙을 갖고 있는 맥족이 세운 영토라는 말이 된다. 고구려만 해도 그렇
다. 달리 고려(高麗)라고도 적히는데 지금도 일본에서는 '고마'로 읽는 것을 보면
적어도 고구려 백제는 언어적 맥락에 터하여 곰신앙을 드러낸 소리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글자 풀이로도 '맥 - 곰'의 걸림이 상정된다. 맥(貊)은 맥(莫)과 서로 같은 속뜻
으로 쓰인다. 쇠를 먹으며 곰과 비슷한 게 뒤의 맥이다. 특히 중국에서는 맥의 겉
모습은 곰, 코는 코끼리, 눈은 물소, 꼬리는 소, 발은 범과 흡사하다고 전해 온다.
아울러 맥은 나쁜 꿈을 먹어치운다는 전설이 있다. 근대문학기의 시문학 동인지로
서 맥(貊)이 있음도 큰 지향성은 같다고나 할까. 간추리건대 춘천이 맥나라의 터
전이라 함은 고조선의 곰신앙을 가졌던 우리 겨레의 보금자리, 그 가운데에서 으
뜸이 되는 겨레의 고향이 아니었을까 한다.
문헌자료에서도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이나 삼국사기 가운데 나오는 가탐(賈
耽)의 고금군국지 에 춘천이 맥나라의 서울이었음이 드러난다. 앞의 자료에서
는 지금의 춘천 북쪽 13리쯤에 맥의 서울이 있었다는 것이요, 뒤의 자료에서는 고
구려의 동남쪽이며 예의 서녘인 맥의 옛 땅이라 하였으니 그럴 가능성이 있을 것
으로 보인다. 춘천을 일러 호반의 도시라 한다. 그럴만도 하지 않은가. 서북쪽으로
는 춘천호, 서쪽으로는 의암호, 동북쪽으로는 소양호로 세면이 아름다운 꿈을 꾸는
호반으로 둘러 싸였으니 말이다.
춘천이 맥나라의 서울이었으니 겨레들이 많이 살았던 터다. 해서 의암호 가운데
의 호수섬에서 무문토기와 같은 쇠그릇 문화시대의 흔적이 80년대 중앙박물관의
조사에 따라 밝혀졌음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강이름과 같이 땅이름들은 아
주 보수적이다. 행여 춘천의 땅이름에는 이들 곰신앙과 같은 당시의 사회문화적인
소리상징은 없는 것일까.
오근내(烏根乃)와 삶의 뿌리
자료에 따르면 옛적 춘천은 오근내(烏根乃)였다(대동지지). 보기에 따라서는 우
리말의 안으로 굽은 '옥다'에 '내(乃-川)'가 합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풀 수 있다.
강 사이에 끼었으니 '오그라진 물' 이라고 할 법하다. 글쓴이가 보기로는 오근내
가 강의 모습을 그려 붙여진 이름일 수도 있지만 나라이름 맥(貊), 그러니까 곰신
앙이 원관념으로 드러난 것이 아닌가 한다. 오근(烏根)의 오(烏)를 뜻으로 읽으면
'검'이 된다. 단군왕검의 '검'이 곰신앙을 나타내듯이 오(烏) - 검(곰)의 맞걸림이
된다고 본다. 이르자면 '검내(곰내)'가 된다. 한자의 뜻을 따다 이른 강이름이 웅
진, 웅천(熊川)이요, 소리를 따다 이르는게 금강, 금호, 금천, 감내(甘川-甲川) 계열
의 냇물 이름이다. 곰은 여기서 짐승으로서보다는 땅과 물의 신이요 조상신이 된
다. 방위로는 북쪽지향을 지닌다. 춘천 평야의 북쪽에서 서쪽으로 다시 남으로 흐
르니 곰내 곧 북천이 된다. 두고 온 고향을 잊을 수는 없는 것이고, 겨레의 뿌리인
조상신으로서의 곰신앙은 더 없이 존귀하고 경배해야 할 대상이 된다. 농경문화에
서 땅과 물은 숭배의 대상이듯 더 없이 큰 몫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수렵생활의
유목문화에서 농경문화로 옮겨져 '곰에서 땅과 물'로 경배의 대상이 바뀐 것이다.
하면, '오근내'의 근(根)은 무엇인가. 앞서 풀이하였듯 '오근'의 '근'을 적은 것
이며, 또 하나는 곰신앙의 '곰(검 금)'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곰과 뿌리는
무슨 걸림이 있단 말인가. 구멍을 사투리 말로 '궁기'라고도 한다. '공글다(궁글
다)'도 기역(ㄱ)이 끼어들어 말이 이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심다'를 '심구다'로
할 때 기역이 덧나는 것과 같은 흐름이다. 곰(고마)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곰은
어머니, 굴(구멍), 북두칠성의 상징이며, 땅과 물의 신상징이라 했는바, 여기 굴 -
구멍(구무 - 구멍 / 굼(곰))이 바로 기역(ㄱ)이 덧붙는 특수곡용이 된다.
두가지 풀이는 같은 상징으로 보인다. '옥다'와 '곰'을 함께 떠올리면 춘천평야
를 서북쪽으로 싸안아 돌아 흐르는 냇물이요, 우두(牛頭)벌의 삶터를 기름지게 하
는 젖줄이 바로 '오근내(烏根乃)'인 것이다.
우두(牛頭)는 소슬뫼
대동지지 에 따르자면 우두벌판에는 옛부터 성(城)이 있었으니 춘천에서 북
으로 13리쯤에 있으며 이는 맥 나라 때의 성으로 전해 온다. 소양강과 신연(新淵)
내 사이에 발달한 것이 우두벌판이다. 강에 잇대어 큰 바위가 있었고, 바위 아래에
는 강이요, 강 밖에는 산이 있었다해서 산골짜기로 동서남북이 둘러 싸여 있으면
서도 탁 트여 상쾌한 바가 있다. 바람은 잔잔한 듯 맑으며 평야는 넓고 기름져 가
히 사람이 살 만하더라. 흐르는 강에 배를놓아 물과 뭍으로의 교통이 아주 뛰어
났다. 우두(牛頭) 마을의 북쪽 15리쯤에 외로운 섬인듯 고산(孤山)이 솟아 있다.
보기에 따라 다르겠으나 글쓴이는 한글학회의 땅이름 사전 의 '솟을 뫼'가
여기 고산이라고 본다. '솟을 뫼'는 '소슬마루'로도 불리워진다. 산마루의 마루가
바로 '머리'요 그 본질은 뫼(山)가 된다. 따지고 보면 '뫼'도 '모리'에서 말미암
은 것으로 상정된다. 홀소리 사이에서 리을이 떨어지면 '모리 모이 뫼'가 되지
않는가. 경상도에서는 산봉우리를 '마랭이 말랭이'로, 전라도에서는 '몰랭이'로,
충남(연기)에서는 '마루'라 한다. 그럼 소슬마루(머리산) - 우두(牛頭 牛首)의 걸
림은 어떻게 고리지을 수 있을까.
땅의 모습을 따르자매 우두산(牛頭山)이 소머리와 같아서인가. 아니면 '소슬뫼'
의 '솟음'의식이 문제인가. 솟음은 종교의식으로 맞걸리며 하늘과 땅신에게 거룩
한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곰 - 맥'의 풀이를 하였는데 '곰 -
소'의 걸림은 어떠한가.
토템신앙의 바뀜으로 보면 수렵생활을 하던 곰 중심의 믿음이 농경생활로 접어
들면서 '소'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삶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보다 원
형적인 문화의 밑바탕으로라면 이는 힌두교의 소신앙이 접합되는 외래문화의 받
아들임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벼농사가 인도쪽에서 들어 온 것이고 보면 힌두교
와 소의 관계는 물과 고기의 어울림이라고나 할지.
다음으로는 소우(牛)의 '소'가 그 소리상징으로 보아 '사이'를 뜻하는 '쇠 수
새 세 시'의 또 다른 소리 적기일 수도 있다. 이르자면 소양강과 신연(新淵)
내의 사이에 새로이 생겨난 퇴적평야쯤으로 새길 수도 있다. 한양(漢陽)의 양이
한강의 북쪽 땅인 것처럼 소양강도 소(昭-牛)란 냇물의 북쪽에 이루어진 땅을 흐
르는 가람.
두 강이 흐르는 곳에 퇴적평야를 이루고 삶의 ㅁ거지를 이루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예컨대 밀양만해도 그렇다. 본시 밀양강은 해양강(海陽江)이라 하는데
남해 바다로 흐르는 북쪽의 강이란 말이요, 그 강의 북쪽에 발달한 땅이 밀양이란
것이다. 물의 북쪽을 흔히 볕양의 양이라 한다(水之北曰陽).
시대의 흐름을 짚어 생각하면 돌그릇문화기에 쇠그릇을 쓰는 맥족이 새롭게 들
어와 농경문화에 일대 전환기를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단기 1천년대를 전
후한 때로 가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쇠그릇의 '쇠'는 사투리말로 '새 세 시
쇠 사'요 짐승으로서 '소'는 사투리로 '소 쇠 쉐 세'로 쓰였으니 소리상징이
아주 비슷하다. 고구려 때에는 춘천의 옛적 보금자리였던 석달(昔達)이 있었다. 뒤
에 난산현(蘭山縣)으로 바뀌었지만. 석달의 석도 <집운(集韻)>이란 중국소리사전
을 보면 '시(hsi思積切)로 나온다. 가령 석달을 '시달'로 읽었다고 하면 '사이'의
사투리말 가운데 '시'가 있음을 금새 떠올릴 수가 있게 된다.
'수약'은 서울
춘천의 또 다른 이름들로는 우수(牛首 - 牛頭) 혹은 수약(首若 首次若)을 들
수 있다. 우수 - 우두는 같은 소머리(소슬뫼牛頭山)로 풀이되지만 수약 수차약
(若)은 그 풀이가 어떤가. 수약의 약(若)을 빼면 '수 - 수차'의 등식이 이루어진
다. 간추려 보건대 '수 - 수(ㅎ) - 슷'의 낱말겨레로 볼 ㄸ '사이'란 뜻이 된다.
그럼 약(若)은 무엇일까. 땅이름이 고쳐지는 과정에서 맞걸림을 보이는 예가 있는
데 약(若)은 '마을.읍'등의 뜻으로 쓰인 것으로 짐작된다(滿若縣 - 兮 - 滿卿 -
滿鄕.유창균(1991)삼국시대의 한자음).
머리수(首)란 한자의 뜻으로만 보면 '수 - 머리 / 약 - 마을'이니까 수약(首若)
은 '으뜸 가는 마을' 즉 서울이란 말이 된다. 모든 마을은 서울의 영향을 받는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뭐 하나 큰 예외가 없다. 뒤에 '우수(우두 수약)'가
삭주(朔州)로 바뀐다. 먼저 삭(朔)은 초하루 삭의 으뜸 고을이란 말이요, 이는 중
국의 소리사전에서도 소리의 같음이 '수'로 드러난다(朔 - 色角切<집운>). 반절
식으로 '수약'을 읽으면 '샥 삭'의 소리꼴이 나옴은 흥미로운 일이다. 달리 수춘
(壽春)이라고도 했으니 오늘날의 춘천은 수춘의 춘(春)을 따고 주(州)를 붙여 춘주
- 춘천으로 된 것으로 보인다.
봄춘이라, 새싹이 트고 죽었던 목숨살이에 생명의 물결이 너울댄다. 네 계절 중
의 으뜸이요, 시작인 것을. 춘천을 달리 광해(光海)로도 불렀다. 빛의 바다, 그 빛
의 뿌리는 태양 - 해이며 온 힘의 말미암음이다. 해를 사투리말로 새(엿새 닷새
의 '새')라고 하거니와 이들의 문화적 원형은 쇠그릇 문화를 지닌 태양숭배의 배
달겨레가 그 마지막 빛을 남긴 곳이 춘천이라 해도 지나칠까.
하나될 겨레의 홀로 설 빛어린 힘이 그립다. 늘 푸른 소양강은 겨레의 뿌리샘이
요, 젖줄이니까.
조선의 소리 보람
언제나 그리는 임 배달 겨레 삶의 햇살
어둠을 불사르고 살아 타는 생명의 신(神)
겨레는 해님을 바라 목숨됨을 기린다.
('배달의 노래'에서)
하늘의 해는 언제나처럼 불 타오르며 제 몸을 살라 누리를 밝혀 든다. 얼어붙는
엄동의 눈보라 속 검은 구름 사이로 내려 오는 한 줄기 빛을 생각해 보라. 해로부
터 받는 혜택이랄까. 충족감은 더할 수 없는 고마움으로 맞아 들이게 된다. 윗글
은 글쓴이의 서사시조집의 한 마디 글이다.
우리의 한아비들은 존경의 대상으로 모든 힘의 뿌리로 해를 생각하였다. 지역에
따른 사투리말에서 힘을 '심'이라고 한다. 말의 됨됨이로 보아 '심'은 '시다'에서,
시다는 '세다'에서 말미암는다. 세다의 세는 '세(새) 헤(해)'와 같은 맞걸림을 보
인다. 마침내 힘은 그 소리의 상징이 태양에서 비롯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나라를 일러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일컫는다. 어두운 새벽
의 시간과 공간의 사이를 뚫고 태양이 솟아 오른다. 우리 겨레도 마찬가지다 . 태
양숭배의 알타이말 계통의 겨레와 곰신앙을 하던 겨레 사이의 어둠을 헤치고 단
군조선을 일으킨 것이다. 하늘의 나라를 일구어 태양신과 곰신을, 특히 곰신을 조
상신으로 받들어 모셔 아사달 터에 나라를 세웠음이요, 거룩한 제단 - 소도(蘇塗)
에 나아가 정성스러운 제의를 갖추었다. 신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 그들은 분명 하
늘의 겨레들이요, 신의 백성들이었다.
이름하여 배달겨레. 배달이란 밝음의 터전, 하늘의 땅으로 바꿈질 된다. 거꾸로
밝음 지향의 겨레들이 살았으니 땅이름 또한 아사달이요, 배달이라 한 것이다. 박
달 또는 배달은 뜻으로 볼 때, 한 줄기에서 뻗어 나온다. 이제 옛부터 우리 조상들
이 살았던 나라를 조선이라 하였으니, 하면 조선과 태양의 걸림은 어떠한가.
조선에 대한 중국의 옛 기록들이 더러 보인다. 황하의 북동쪽에 퍼져 살았던 북
방의 여러 겨레를 이르는 것(관자 전국책), 요동반도 중심의 땅을 가리킨다는 설
(상서대전 산해경), 서북한 지역이나 하북성 또는 요녕성 지방으로 뒤섞인 뜻이
란 자료(사기), 서기 82년 경에 쓰여진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에서는 한반도
의 서북쪽 정도로 자리매김을 해야 된다는 설들이 있다. 실로 다양하다.
나라의 힘이 약해 지고, 겨레정신이 움츠려 들면 자기들에게 좋은 대로, 입맛대
로 적어 버리면 그 뿐.
한편 우리의 자료 몇 군데를 살펴 본다. 먼저 동국여지승람 의 경우, 조선은
동쪽에서 해가 뜨는 모습(居東表日出)과 걸림이 있다. 이익의 성호사설 에서는
조(朝) - 동방, 선(鮮) - 선비산이라 하여 '선비산 동쪽의 나라'로 풀이해야 옳다
는 거다. 다시 근대사로 와서 육당 최남선은 '첫 새벽'으로, 이병도는 '해가 뜨는
곳'으로 풀이한다.
조선에 대한 글 가운데에서 상당한 길잡이가 되는 것은 강길운(1990.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에서다. 조선은 나라의 이름이기보다는 기원적으로 겨레의 이
름이라는 풀이. 조선을 화북성 지역으로, 요녕성 지역으로, 서북한으로 이르는 것
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보통명사이기때문. 땅의 이름이라면 하나의 이름으로 여러
군데를 이름은 변별력이 없다는 것이다.
하니까 지역에 관계 없이 동아리 지어 중국의 동북 지방을 중심으로 산 사람들
이 조선이란 겨레들로 본 것이다. 그러다가 부족국가 사회로 되면서 조선이란 겨
레 이름이 나라 이름으로 쓰이게 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럴 듯하다. 이를테
면 원시 씨족공동체 사회에서는 짐승을 조상신으로 하는 이름들이 나라 이름 그
대로 쓰이는 일이 종종 있다. 예맥의 '맥'이 그러하고, 고구려 고려를 '고마'로
읽는 것은 '곰'겨레가 다시 나라의 이름으로 된 보기 따위이다. 흔히 고조선의 형
성기반을 예맥에서 찾는다. 이 때 맥 또한 곰의 내용을 드러낸 것으로 보여 진다.
만주말로 조선이 주선(jusen), 여진말로는 죠션(zyocyen)으로 맞걸린다. 변한국
의 주선국(州鮮國)과 더불어 같은 말의 소리를 썼을 것인데 겨레의 이름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조선은 솟음이요,태양이다.
강길운(1990)에서 또 이르기를 기왕에 소리를 따다 쓸 바에는 태양숭배와 겨레
들의 앞날이 아침과 같이 환하게 되기를 비는 것으로 적었을 거라는 가정을 하고
있다.
한편 조선은 숙신(肅愼)과 같은 말이며 겨레의 이름으로 보인다고 풀이. 글자
그대로를 살피자면 '정숙하고 삼가함'이 있는 겨레란 뜻이다. 삼가함은 여기서 경
건하게 제사를 모시고 그렇게 사람을 대하는 종교적인 의식들이 바닥에 깔려 있
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곰토템의 투영이라고 할 자료에서도 곰에 대한 경건하고 삼
가함이 드러난다(고마熊고마敬 고마欽(신증유합)juketehen jukten sukji<만주
어>).
보인 비교자료(sukji)에서 '숙신 - 제단'의 대응은 상당한 암시를 주고 있다.
삼국유사 에서 아사달에 제단을 모신 거룩한 장소를 소도(蘇塗)라 하였으니 '소
도'와 숙신, 그리고 조선은 같은 뜻바탕을 갖는 변이형이 아닌가 한다.
이두식으로 읽으면 'ㅅ(솟) - 숫'이 되고 조선 또한 예외가 아니다. 당시만해도
이른바 터짐 갈이소리 - 파찰음이 아직 발달하지 않고 뜻의 변별이 어려우므로
'조선 소선 솟(숫)'으로 읽게 된다. 하면 '소도'와 조선은 다를 바가 없다.
민속 가운데 솟대는 지금도 강원도와 전라 경상도의 일부 바닷가에서 행하여
진다. 강한 전통과 신앙, 초월성을 지닌 마을의 신앙으로 떠올려 '짐대서낭님 짐
대당산 별신대 용대 추악대'등으로 불려진다.
'솟아 있는 대'로 풀이되는 솟대는 장대와 새로 이루어지는 복합물이다. 여기
장대는 소도의 큰 나무로서 우주의 나무 또는 세계수(world tree) 상징을 드러낸
다. 우주나무란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나 길의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새는 하늘
의 새 혹은 천둥새로 보는 이도 있다. 대략 새의 모양은 기러기 오리 모양이며
이 밖에도 까마귀 따오기 갈매기 원앙새 등의 모습이 종을 이룬다.
굿판에 가 보면 무당들이 '대'를 잡는다. 그 대로 신이 내린다는 것이다. 이로
보면 솟대로 신이 내리고 소도는 솟대가 있는 제의 공간으로 거룩한 장소였다. 이
곳에 들어 가면 사람 죽인 이라도 우선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전해
온다.
결국 '조선 - 소선 - 솟'으로 간추릴 수 있다. '솟'은 '솟 - ㅅ(솥) - 솔 / 섯
- 섣 - 설 / 숫 - 숟 - 술 / 싯 - 싣 - 실'의 낱말겨레를 이루어 낱말의 밭을 만
든다. 뿌리가 되는 뜻은 '사이(間)'이다. 아침 동산에 하늘과 땅 사이로 솟아 오르
는 게 무엇인가. 해 바로 태양이다. 태양은 하늘을 대표하는 신이요, 거룩하게 모
셔 받들 위대한 자연물 이상의 그 무엇이다.
신에게 빌고 제사를 주관하던 제사장을 스승(巫)이라 하였다. 함경도 지역에서
는 지금도 무당을 스승이라 한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때의 임금을 삼
국사기 에서 김대문은 자충(慈充)이라 풀이한다. 자충도 마찰음으로 바꾸면 자충
- 스승이 된다. 스승은 '사이(間)'를 뜻하는 '슷'에 접미사'응'이 녹아 붙어 이루
어진 말이다. 신과 인간.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종교와 정치의 지도자로서 인간
과 신의 걸림을 풀어 나아 갔던 이가 스승이었다. 지금은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을
이르지만.
옛말에 해는 '새(쇄)'였다. 이르자면 <박통사>의 닷쇄(五日)의 '쇄(日)'도 해를
가리키며 지역에 따라서 '새.쇄.쌔.씨.세'라 한다. 여기서 시옷(ㅅ)과 히읗(ㅎ)이 같
은 마찰음으로 시옷이 약해지면 히읗이 되는 법. '새'는 중세말로 복모음이었으니
까 '사이[sai]'라 읽는다. 사이는 '삿'에서 비롯한 것으로 '삿-솟-섯-슷-싯'계열
의 낱말들이 같은 뜻을 드러낸다.
'새(해)'는 쇠문화와 걸림을 보이기도 한다. 쇠그릇을 쓰게 된 이후 돌그릇을
쓰던 석기문화를 혁신한 문명의 태양과 같은 것이 '쇠'였다. 쇠도 말하는 지역에
따라서는 '새(쌔) 쐬 씨'였으니 같은 소리 다른 뜻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
긴 '쇠'란 나무도 돌도 아니면서 그 사이쯤 되는 물체이니까 말이다.
우리말은 계통으로 보아 알타이(Altai)말이다. '알타이'도 만주말로는 아이신
(Aisin)이라 하는데 이는 쇠(金)를 뜻한다. 결국 '새(해) - 쇠(청동기)'가 맞물려
소리상징으로 드러낸 것이다.
조선은 태양신 숭배, 태양신을 이른다. 우리겨레는 태양을 위로 하고 곰신을 아
래로 하는 그 사이에서 말미암은 거룩한 하늘의 백성이다. 그 거룩한 초원의 빛을
되찾아 가기에는 많은 시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가야만 한다. 고지가 바
로 저기이니까.
아사달과 쇠그릇 문화
역사학계에서는 단군조선의 시대를 청동기 문화 곧 쇠그릇 문화의 시기로 추정
한다. 쇠의 나타남은 과학사에서 제3의 불을 일으키는 우라늄의 발견에 비유된다.
주로 돌을 쓰던 석기시대에 한 바탕의 큰 변화가 몰아닥친 것이다. 청동기를 비롯
한 쇠그릇으로 말미암아 떠돌이 채집생활에서 보다 많은 생산이 보장되는 여름지
이가 비롯된다. 차츰 적과 사나운 짐승에 대한 공격과 방어가 손 쉬워 지고 일상
의 삶이 큰 안정을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유엠부찐1982.고조선103면 참조).
우리 겨레의 역사로 보면 원주민격인 곰토템의 '고마'겨레와 태양숭배를 하던
'니마'겨레의 대통합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으니, 새로운 나라가 일어난 셈이 아닌
가.
말이 문화를 되비친다고 하였다. 하면 앞에서 풀이한 단군조선의 문화적인 특징
이 나라 세움의 상징이었던 터 - 아사달과는 어떠한 걸림이 있을까.
역사학계는 물론이요, 국어학계에서 이미 아사달에 대한 상당한 살핌들이 있어
왔다. 이병도(1959, 한국사 고대편)에서는 '아사달 - 아침(朝)'의 맞걸림으로 풀이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강길운(1990,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에서는 '아사 - 아
ㅊ'의 소리가 서로 걸맞지 않고 땅이름의 보편성이 없다 하였다. 논의의 바탕은
비교언어학에 따른 외적 재구였으며 특히 '아시 - 아ㅈ 아ㅊ'과 같은 소리의 발
달이 국어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땅이름의 대응과 알타이말과의 견줌
으로 보아 '아사달 - 궁전이 있는 산'이란 풀이를 하였다.
한편 이병선(1988, 한국고대국명지명 연구)에서는 '아사달 - 큰 읍 왕읍 모읍
(母邑)'으로 상정한 바 있다. 아사달을 아사(阿斯)와 달(達)로 갈라서 '아사 왕
(王)대(大)모(母) / 달 읍(邑)'으로 그 뜻을 동아리 지었다. 천소영(1990, 고대국어
의 어휘연구)에서도 '아사달'을 우리말의 한자 차음 표기로 보고 '아사 / 달'로
나누어 '모성(母城)'혹은 '대읍(大邑)'을 드러내는 보통명사의 땅이름으로 상정하
기도 하였다. 따라서 조선 또한 '아사'와 맞걸림을 두어 한자로 뒤친 것으로 보았
다.
자료의 대응관계나 재구성의 방법을 통하여 본 것이니만큼 그 나름의 상당한
근거를 갖고 있다. 크게 몇 가지로 간추려 보면, ①아침 ②궁전이 있는 산 ③대읍
(大邑) 모읍(母邑) 왕읍(王邑) ④쇠산(金山) 등으로 가설을 갈래 지을 수 있다.
짐작하건대 첫 시작을 한 도읍터인지라, 시간으로 보면 첫 새벽(①)일 것이요,
제정일치 시대이니 마땅히 부족의 지도자가 있는 곳에 제단을 모신 궁전이 있어
야 마땅하다(②). 왕이 사니 왕읍이요, 자연부락의 크기로 보매 스스롭게 가장 큰
대읍(大邑)이 될 밖에. 이로부터 모든 종족의 번영이 비롯했으니 모읍(母邑)이 되
어야만 한다(③). 이 시기가 바로 청동기 문화가 말미암았으니 쇠를 중시하는 쇠
문화 상징이 됨도 있음직하다(④). 하면 모두가 다 옳다면 참값이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아니하다.
유연성으로 보면 모든 가설들이 다 그럴싸 하다. 문제는 무엇이 중심의미가 되
며 다른 것이 주변적인 상징이 되는가 하는 점이다. 한 마디로 쇠문화를 드러내는
'쇠(金)'상징의 이야기가 중심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마침내 '쇠(새 세 ㅅ
쌔 씨 셰<방언>)'와 같은 뜻을 보이는 '아침'도 중심의미 '쇠(金)'를 뒷받침
해 주는 큰 바탕이 된다.
'아침'을 중세어에서 '새박(원각경 서46) 새배(두시 초7.14)새볘(첩해신어6.16)'
라 한다.‘닷새(五日)(구급간이방 6.77).닷쐐(번역소학8.35)엿새(두창경험방)엿쇄(내
훈 서5)'에서 '새(쇄 쐐 쌔)-해(日)'의 맞걸림은 '새'의 본질이 '태양[日]'임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강길운(1990-56)에서는 '아시 - 아ㅈ 아ㅊ'과 같은 / ㅅ ㅈ(ㅊ) /의 발달이 불
가능하기 때문에 고조선 지역에서 '아ㅊ(아침)'계가 쓰이지 않았다고 상정한 바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마찰음에서 파찰음으로 소리가 발달하는 것은 아주 스스
로운 일이다(이병선1988-44 참조).
(마찰음에서 파찰음으로 발달)
(1) 比自火郡一云比斯伐(삼국사기지리1)
完山一云比斯伐一云比自火(삼국사기지리4)
嘉壽縣本加主火縣(삼국사기지리1)
/ 自[즈](Karlgren) 斯[스](Karlgren) / 적 - (少) suko(일본)
잣(城) sasi(일본) 져(彼) so (其)(일본) 좁 - (狹) seba
(일본)
(2) 낯이[나시] 빚이[비시] 꽃이[꼬시] 빛이[비시] 젖이[저시]
(3) 東 - higasi(hi - 日 / gasi - 東)
곰(굼 검 금) - 홈(훔 험 흠) - 옴(움 엄 음) / - gon >
- hon > - on / 가시(gasi) - 하시(初) - 아시(東 金 朝)
* asi - 쇠(金) / aisin(金)<만주> alta(금)<몽고> altin(금)
<터키> / 益城郡本高句麗母城郡今金城郡(삼국사기 지리2) 阿沙
아샤卽今利城縣也(용가 7.23) / 錢 - asi(일본)(*益 - aisi(만
주) asig(몽고))
위의 자료로 보아 마찰음(ㅅ)과 파찰음(ㅈ ㅊ)이 넘나들어 쓰였음을 알 수 있
다. 조음방법을 떠올리면 공기의 갈림이 큰 마찰음에서 차츰 조음공간이 좁아져
닿았다가 순간적으로 터지면 파찰음이 된다. 파찰음은 파열성과 마찰성이 합하여
소리의 특징을 이룬 것이니 마찰음에서 파찰음이 비롯했다 함은 자연스러운 바
있다. 자료(2)를 살펴 보면, 오늘날에도 쓰기는 파찰음(ㅈ ㅊ)으로 적지만 읽기는
모두 마찰음(ㅅ)으로 읽음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마찰음에서 파찰음으로 발달한
산 증거라 해서 좋을 것이다.
아울러 자료(3)에서 동쪽은 가시(gasi)라 하였는데 말머리에서 기역의 약화탈락
으로 '가시 - 하시 - 아시'가 되었고, 비교언어학의 관점에서 보면 '아시 - 쇠
(金)'의 맞걸림을 알게 된다. 이제 청동기 문화 상징의 '쇠'와 알타이, 그리고 태
양숭배의 샤머니즘에서 '태양 - 새(세 쇠 쇄 쐐 쌔 ㅅ > ㅎ(해))'를 어떤 걸
림으로 풀이할 수 있을까.
아사는 쇠요, 문명의 씨앗
돌그릇 문화에서 청동기의 나타남은 문화의 혁신을 뜻한다. 어둠 속의 빛에 비
유하여 지나침이 없다. 석기 시대가 밤이라면 청동기 시대는 새벽이요, 아침이며
새로운 삶의 어머니에 걸맞는 상징이 되었다. 마침내 쇠(새 - 해金)가 '니마'의
'니-'계를 밀치고 태양을 뜻하는 형태로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쇠(새 -
해)는 모두 '사이'란 뜻을 바탕으로 한다. 쇠는 나무와 돌의 중간 쯤으로 보았음
이요, 해(새)는 하늘과 땅의 '사이' 쯤으로 그 유연성을 부여한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청동구리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굳기 정도에서도 그러하며 빛깔도 붉은
해(새)와 같아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단군왕검의 단군이 제사장으로 '스승'이라 했다. 스승은 '사이'를 가리키는 '슷
(間훈몽자회)'에 접미사 '-응'이 엉겨 붙어 '슷 + 응 > 스승' 으로 굳어진 말
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예족과 맥족을 통합해서 누리
를 다스려 간 제정일치 때의 종교직능자가 바로 스승이다. 새로운 청동기 문화 시
대에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서 배달의 겨레를 이끌어 간 것이다. 나머지는 아사
달의 '달(達) 산(山)읍(邑 梁 珍 靈 突)고(高)' 등의 뜻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것이 산이든 읍이든 문제는 제일 먼저 새롭게 도읍을 한 새로운 땅이요,
신시의 터전이라 할 것이다.
청동기 문화와 태양숭배를 함께 드러내는 '아사(아시 아스)'는 당시의 시대상
황을 드러낸다고 했다. 처음이자 생명의 말미암음으로 풀이할 '아사(아시 아스)'
는 폐음절이 되면서 '앗'의 형태가 된다(아시벌 논김 매기 아이 논매기의 '아시
- 처음(初)).
말은 시간과 공간을 달리 하면서 그 모양이나 뜻이 갈라져 이른바 말의 겨레
곧 단어족을 이루어 간다. 하면 '아사(앗)'의 경우는 어떠할까. '앗(아사)'의 의미
특징은 위에서 보인 쇠(金) 처음 아침 어머니 크다 왕과 같은 요소들로 이루
어 진다.
'앗'은 받침에서 같은 계열의 소리로 바뀌어 더 많은 낱말로 늘어나고, 모음이
바뀌어 '엇-'계의 말로 번져 간다. 먼저 '앗-'계의 경우를 보자.
('앗-'계의 낱말 겨레)
(4) (앗-) 앗(아우) (내훈3.21) 아 (앗+이>아시>아 >아이(애))
(훈몽자회 하12) / (ㅇ-) 아ㅈ마님(석상6.1)아ㅈ(노걸대 상23)
아ㅈ(아침)(송강가사1.18)아조(신증유합 하61)아지(새끼)(훈몽자
회 상18) / (ㅇ-) ㅇ(까닭)(금삼2.8)ㅇ다(적다)(내훈1.33)아침
(처음)(여사서언해3.9)
(5) (ㅇ-) 아ㄷ(훈몽자회 상31)아득ㅎ다(석봉천자문 26)아듭다(두시
중14.4)
(6)(알-) 알(석상3.10)알등(알같이 생긴 등)(해동가요116)
결국 말의 끝소리에서 'ㅅ(ㅈ ㅊ) - ㄷ- ㄹ'로 된 셈이다. 예서 다시 모음이
바뀌면 [엇-]계가 드러난다. '앗'과 함께 낱말의 갈래를 알아 보자.
('엇-'계의 낱말 겨레)
(7) (엇-) 어시(짐승의 어미<함경방언>)어이 없다(터무니가 없다)어
이아들(母子) / 엇막다(용가44)엇먹다(청구영언)어슬음(역어 유
해 보1)
(8) (얻-) 얻다(찾다 결혼하다)(원각경언해 서46)얻니다(삼강행실도
효24)어듭다(용가30)어두이다(능엄경해4.118)
(9) (얼-) 어렵다(얼이 없다)(두시 초22.47)어론(해동가요)어론님(청
구영언)어리다(능엄경2.16)어름(용가30)얼다(얻다)(두시초1.36)얼
다(교배하다)(박통사 초상34) 얼운(두시 초21.6)
'앗- 엇-'계는 홀소리가 바뀌어 갈라진 모음교체에 따른 낱말의 겨레들로 보인
다. '엇-'계는 음성모음에 따른 형태들인데 생산을 드러내는 것과 방어를 드러내
는 경우(7)가 있다. 이를테면 청동기로 된 쇠문화의 보급은 엄청난 농업생산을 가
져 왔을 뿐 아니라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를 손쉽게 할 수 있었다. 쇠 금(金)의
상징성은 아주 복합적이다. 이두식으로 읽어 그 뜻(訓)은 '쇠'이지만 소리(音)는
'금'으로 고마(곰)의 표기적인 변이형인 '검(감 굼 금)'과 같다. 본 바탕은 곰토
템의 신앙이로되 거기에 청동기 문화를 지닌 태양숭배의 샤머니즘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益城 - 母城 - 金城 - 也次(어시)<삼국사기>).
'엇'이 어머니라면 거기서 비롯한 것이 '앗'이다 '앗(ㅇ)'은 비롯됨이요, 말미
암음이니 어버이에서 나온 알이며 아기이다. '얼 - 알'에서 얼이 알의 생명이라면
알은 그 얼이 담긴 드러남이다. 기원적으로 '아시(asi altai)'가 쇠붙이임을 떠올
리면 청동기 문화를 가진 예족과 맥족(곰 겨레)의 어울림이 고조선 형성의 큰 흐
름이었음을 가늠하게 한다(濊 - 歲羽切(슈-쇠-새)).
'얻다'의 경우도 그 예외는 아니다. '결혼하다 찾아내다'의 뜻으로 쓰임은 생
산과 어울림에 바탕을 둔다.
하면 '알'은 어떠한가. '앗 - ㅇ - 알'과 같이 끝소리가 바뀌어 일어난 말로서,
'얼'과 맞걸림이 있다. 김알지, 석탈해, 박혁거세, 김수로의 이야기가 모두 알에서
비롯한다. 알을 낳는 어미는 대략 '새'라 일컫는다(飛禽總名새됴(鳥)<훈몽자회 하
2>). 방언형으로 보면 새는 '세(새 씨 쇠 사이)'로 쇠와 서로 어울림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알-'계에 드는 말겨레에는 '알 알나리 알뚝배기 알땅'등이 있고
이에 맞먹는 한자어를 합하면 더 많아짐은 물론이다.
알과 아이(아시初)는 시작이며 생명이 자라는 몸집이다. 기본적인 뜻 바탕은 쇠
붙이인 동시에 태양을 원관념으로 한다. 태양이 환하며 둥글고 주황색인 것처럼
알 또한 예서 멀리 있지 아니하다.
간추리건대, 아사달은 곰토템과 청동기 문화를 지닌 태양 숭배를 하던 겨레들이
어울려 '새롭게 일으킨 쇠문화의 터전'으로 상정할 수 있다.
마니산과 하늘신
만길이나 높은 단에 밤기운이 오히려 맑네
출렁이는 파도는 세상 시름을 떠난듯 하이
임께 절하여 바치오니 태평세월을 주소서
(참성단 시에서)
마니산의 꼭대기에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믿음의 자리, 그게 바로 참성
단이다. 위는 네모가 나고 아래는 둥글어 하늘과 땅의 어울림이 깃들어 있는 듯.
옛부터 전해 오기로는 단군임금께서 하늘에 제사를 모시던 곳이라 한다. 조선왕조
에 들어 와서도 앞 서의 별제사를 이어 지내게 되었으니 겨레의 앞날을 비는 정
성은 변함이 없던 터. 조선왕조의 태종이 세자 시절에 임금을 대신하여 이 곳에서
자면서 재를 올린 일이 있다.
이같이 옛부터 하늘을 제사하던 기록들이 보이는데 하늘 제사의 대상은 별,곧
불이요, 불의 원천은 해였으니 이르러 태양이 아니던가. 글자 풀이로 보면 가장 큰
불덩이가 태양인 셈. 태양은 그 엄청난 빛과 열을 발함으로써 온 누리에 생명의
씨앗을 뿌리며 섭리의 공간을 이루어 간다. 빛 또한 불의 다른 말일 뿐 밑뜻은 같
은 말이다. 태양을 신(神)으로 믿고 바라던 자취는 여러 가지다. 땅이름으로 신라
지역의 ' 벌(불)'이며 백제지역의 ' 부리(비리)'계는 물론이요, 한자어계열의
' 양(陽)' 또한 예외가 아니다.
소리마디의 틀은 'ㅂ- 모음 - ㄹ- (모음)'으로 개음절이냐 폐음절이냐의 차이
가 있을 뿐이다. 짐작하건대, 벌판은 하늘의 빛살이 퍼지듯이 시야가 탁 트인 곳을
이른다.
민속으로 보아도 그러하다. 흔히 솟대라 하는바, 농어촌의 풍년을 빈다든지, 과
거급제를 한 사람을 축복하기 위하여 동네 어귀에 높은 장대 끝에 새를 올려 놓
음은 일종의 태양숭배라 할 것이다. 머리를 동으로 하는 동침제(東寢制)이며, 빗살
무늬의 즐문토기, 고인돌 등은 모두가 태양신 숭배의 흔적이라 할 것이다. 특히 땅
이름 가운데에는 '해(새)'와 걸림을 보이는 분포가 눈에 뜨인다(新 赤 昌 金
東 鳥 草 雉 鷄 등). 이제 마니산의 마니를 마(摩)와 니(尼)로 나누어 살펴 보
도록 한다.
'마(摩)'는 거룩함을 드러낸다.
땅이름(馬 - 沃 - 代 - 會)의 대응으로 봐서 '마'는 말과 걸림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말은 거룩함의 걸(聖 沃 代)과 걸림을 드러낸다. 하늘의 태양신을 믿
고 잘 따르면 풍년이 든다. 특히 땅이름 중 회(會)는 그 뜻이 '모을 - 몰 - 말'과
의 걸림이 있기에, 또 말은 모여 떼로 살아 가기에 훈독 - 뜻을 따서 한자로 쓰는
쪽을 취한 것이 아닌가 한다. 대(代)의 경우, 타고 간 말이 일정한 곳에 이르면 말
을 갈아야 한다. 기실 따져 보면 기차역의 '역'도 말(馬)과 갈아 탐[驛]을 어우른
말이라 할 때 '대(代) - 갈아 탐'을 드러낸다 할 것이다. 하면 여기 '갈(걸)'이 타
는 말을 뜻하지 않겠는가.
삼국유사 의 설화 중 혁거세는 가장 신비한 정보를 옮겨주는 구실을 하는
경우라고 하겠다. 흰말이 혁거세의 탄생을 울음으로 알려 준다는 사실이다. 말은
귀중한 교통수단이자 전쟁의 승리를 가져 왔던 짐승이다. 농경문화 적에는 논밭갈
이의 주요한 동력을 제공하였지를 않았던가. 어느 마력(馬力)이라니. 아직도 자동
차나 큰 기관의 힘을 마력이라 함은 단적으로 말의 쓰임새를 드러내는 보기라고
할 것이다.
위대한 지도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를 따라 붙는 말이 있었다. 그것도 흰말이 대
부분이다. 우리말의 '희다(하얗다)'는 '해'에서 비롯한 낱말의 떼들이다. 이 또한
태양숭배를 전제하는 광명사상의 한 가지로 보아 좋을 것이다.
입으로 하는 말(語)의 경우, ㅁ(馬) - 말과 같이 표기상 서로 다를 뿐이지 소리
상징은 아주 비슷하다. 경우에 따라서 마경(馬經) 과 같은 글에서는 말의 조상
을 용으로 보아 하늘과 땅을 휩쓸고, 불과 물을 다스리는 신격을 부여하는 일도
있었다. 입으로 하는 말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믿는 언령설의 경우, 말은 신이
사람에게, 사람이 신께로 옮기는 주요한 접신(接神)의 통로라고 믿었으니 말이다.
땅이름을 보노라면 말 혹은 마(馬)의 분포가 많이 보인다. 말과 사람의 삶이 얼
마나 가까이 있었나를 알기에 족하다(馬西良 金馬 馬川 馬山 馬項 馬岩 馬
次 馬峴 五馬 馬首 馬場 馬田 馬津 馬韓). 하긴 임금의 표시로 말 매어 두
는 말(말뚝) 또한 이와 멀지 않음이니 말을 중시하고 거룩한 짐승으로 생각했던
걸로 보인다.
하면 마니산의 마(摩)는 '거룩하다'는 뜻이요, 토템으로 보면 본디의 주체는 말
(馬)이다. 이는 또 엄마, 마마의 '∼마'와 같이 경칭 접미사로도 쓰인다.
'니(尼)'는 태양이라
마니산의 '니(尼)'는 '리'이며 마니산을 마리산으로 해야 옳다는 주장도 있다.
기록으로 보아 고려조 이후 이전이 그러하고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마니산으로 정
착이 되었으나 소리는 여전히 마리산으로 해야 한다는 것.
그럼 신라조의 초기에 니사금의 '니'나 옥천의 마니, 강원도 평강 땅의 마니령
도 모두 마리로 했단 말인가. 글 쓰는 이의 생각으로는 읽는 소리야 '리'로 읽을
수 있다 하더라도 본디의 형태는 우리 자료로 보나 비교언어적인 바탕으로 보아
'니'로 봄이 옳다고 생각한다(日谿 - 泥兮(熱也) 尼山 - 熱也 摩尼 - 陽山 / 日
本(nihon) 尼公(nigou) ningu(上 頭)<만주> / 尼師今).
이야기로 보아도 단군신화의 '단군왕검'이나 연오랑세오녀, <고사기>의 여인과
해이야기가 그러하다. 특히 왕검의 왕(王)은 '니마(님 임)'로 읽어야 되는바, 여
기 '니'는 태양신이요, '마'는 존경의 뜻을 보이는 씨끝이 된다. 행여 완벽을 기하
기 위하여 땅이름의 니(尼) -노 (魯)의 불일치를 의심해 볼 수도 있다(尼山 - 熱
也山 - 魯城). 땅이름을 고칠 적에 저어한 글자 가령 공자의 이름이나 자를 따다
쓴 것 등은 피하여 고치려는 경향이 있었다(大丘 - 大邱 加害 - 嘉善 坡害坪 -
坡平 尼山 - 魯城). 결국 니산 - 노성도 공자의 자인 니(尼)를 피하여 씀으로 해
노성(魯城)이 되기에 이른다.
조금 양보를 한다면 읽기로 보아 '마니 - 마리'로 읽는 건 가능하다. 모음 사이
에서 이러한 흘림소리되기는 왕왕 일어나기 때문이다(아늠 - 아름 아나가야 -
아라가야 서나벌 - 서라벌 허낙 - 허락 등). 그렇다고 해서 태양을 뜻하는 '니'
가 근본적으로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니사금 또는 님금(임금)은 제정일치 시대에 태양신을 제사하는 제사장이요, 교
황이었다. 같은 계열의 부름말로 니사금을 달리 자충(慈充)이라 한다. 고대 한자음
으로 자충은 '즈증'이었고, 이 때 우리말에 파찰음소가 자리 잡지 못하였음을 떠
올리면 '즈증 - 스승'의 맞걸림이 가능하다. 스승은 더 작게 쪼갈라 보아 '사이'
를 뜻하는 '슷'에 씨끝 ' 응'이 녹아 붙은 말이다. 사이라면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종교와 행정의 머리구실을 하던 지도자가 '스승'이란 말이 된다.
지금도 함경도 지역의 말에서는 무당을 스승이라 일컬음을 보면 믿음을 더 해 주
는 보기라고 하겠다.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신(神)은 다름 아닌 '태양신'일지니
'니 - 태양신'이란 대응을 미덥게 한다.
마니산은 마리산이 아니며 '거룩한 태양신을 제사하는 장소'의 뜻을 드러 내는
겨레문화의 상징이자, 표상이다. 이글거리는 태양의 기상으로 배달의 삶을 가꾸어
야 할 일이로다.
새로움과 관동(關東)
산수간에 병이 깊어 초야에 살았더니
관동 팔백리에 다스림을 맡고 보매
거룩한 임의 고마움이 갈수록 끝이 없네
강산이 우리 삶의 젖줄이요, 뿌리됨에 예와 오늘이 다르랴. 윗 글은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의 첫 머리이다. 관동 하면 강과 산이 떠 올라 그 어떤 가능성에의 그
윽한 정서가 어린다. 파도처럼 몰밀리는 산맥들의 어두움과 밝음의 가락인 양 빛
과 그림자의 뒤안길에서 오랜 시련에 견디어 온 겨레들에게 큰 격려와 용기로서
인내로 다가서는 봉우리와 힘차게 뻗어내린 산줄기들.
옛글에 하였으되 관동이란 중국의 경우 역대의 왕권이 못 미치는 산해관 이북
을 이르며 우리의 경우, 흔히 대관령의 동쪽 지방을 일컫는다. 태백산맥의 허리 대
관령의 동녁과 서녁을 통틀어 부르는 고장이다. 강원도의 또 다른 부름말을 관동
이라고도 했다(대동지지).
본디 예와 맥의 땅으로 고구려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가 함께 나누어 사이하여
다스리던 고장. 신라가 한 나라를 이루매 가즈런한 모습을 갖추게 된 곳이 바로
강원도다. 한 때는 동주도(東洲道)라 하여 큰 산 태백의 동북방을 이르지 않았는
가. 다시 북쪽으로는 삭방도요, 동쪽으로는 바다에 잇닿은 강릉도로 갈라졌다. 조
선조의 태조 4년에 둘을 어울러 강원도라 하였다. 쪼가름과 어우름의 긴 동굴을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 한데 웬 일인가. 뜻하지 않은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우리
의 강산은 다시금 남과 북으로 흩어져 살게 되다니. 날이 좋으면 통일전망대에서
꿈속의 금강이 눈 앞에 보인다. 고지가, 금강이 바로 저긴데 나눔과 뒤틀림의 시련
을 우리는 뛰어 넘어야 한다.
속성으로 보아 말은 사회성과 역사성을 갖는다. 사회와 역사는 삶의 발자취요
문화의 텃밭이 된다. 해서 말은 문화를 되비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일러 언어의
문화투영이라 한다. 사회성과 역사성을 드러내는 소리상징으로서 가장 오랜 생명
을 누리는 것이 땅이름이다. 해서 땅이름을 문화의 화석이라고까지 하지 않는가.
사람에 따라서는 말이 곧 무형문화라 하거니와 그 가운데에서도 땅이름은 보수성
이 가장 강하다.
앞에서 강원도의 땅이름을 풀이했다. 이 가운데에서 '동쪽'의 뜻을 이르는 말이
나오는데 본래의 이름이었던 예맥은 물론이요. 가장 핵심적인 뜻으로 쓰인 '동쪽'
의 낱말바탕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땅이름의 분포와 그 영향관계는 어떠한가를 더
듬어 보기로 한다.
예(濊)와 사이
강원도는 본시 예맥의 고장이라 했는데 '예'의 본 바탕은 무엇인가. 강릉대도호
부가 만들어진 내력을 보면 강릉은 본래 '예'나라인데 또 다른 이름으로는 쇠철
자 철국(鐵國)이라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이와 걸림이 있는 강릉의 다른 부름
말로는 동원(東原) 동온(東溫)이 있음을 알겠다. 단적으로 '예'는 동쪽을 이르는
말이요 그 소리를 향찰식으로 읽으면 '새(쇠)'가 된다. 쇠붙이를 모두 일컬어
'쇠'라 하거니와 이 말과 걸림을 보이는 사투리말을 보면 어떠한가 . 대부분의 시
골에서는 '쇠(쐬)'가 쓰이지만 경상 전라도의 고장에서는 새(쌔) 더러는 세(쎄)
(전라 경상)가 더러는 씨(김천 고령 합천)와 쉬(쒸)(포항 칠곡 청도 상주
군위)가 쓰이기도 한다. 이와 함께 한자음 동(東)이 우리말로는 주로 '새'로 쓰인
다. 가령 동쪽의 바람을 동풍이라 하지만 흔히 사투리 말에서 새파람(양구 화천
춘천 춘성 횡성 정선 평창 영월 원주)으로, 더러는 들바람(고성 속초
양양 강릉)이라 하며 삼척에서는 새풍이라고 한다.
사투리로 보면 쇠를 '새'라 하고 동풍의 동도 새라 하니 같은 '새'의 소리로
풀이할 수 있다. 새는 지금이니까 단모음 새로 읽지만 오백년전 중세기 한국어에
서는 두 개의 소리값을 지닌 복모음 [사이]로 읽었던 것이다. 글쓴이가 보기로는
쇠나 새나 모두가 '사이'의 뜻을 드러내는 말이 아닌가 한다. 사이의 말뿌리는 무
엇일까. 한 집안에 내력은 족보로 알듯이 말 또한 그 내력이 있으며 말이 바뀌는
질서를 따라서 그 소리와 모습이 달라진다. 달라지는 말의 모습이 곧 족보에 값한
다면 어떠할지. 삿자리 ,삿갓, 삿기라 할 때의 '삿'이 곧 사이의 바탕말이요, 뿌리
가 된다. '삿'에 접미사 '-이'가 달라 붙어 사시 - 사 - 사이 - 새로 바뀌어
오늘에 쓰이고 있다.
흔히 사이는 장소와 장소, 사물과 사물의 거리, 시간과 시간의 동안, 사람의 관
계나 정분으로 뜻매김을 한다. 쇠붙이와 동쪽과 관련하여 사이는 어떠한 걸림으로
풀이되는가. 쇠붙이는 사물과 사물의 사이요, 동풍 또는 새파람의 '새'는 장소와
장소의 사이로 그 걸림을 살필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쇠붙이의 경우, 과학사에 따
르면 인류문명에서 쇠붙이의 쓰임은 근대 과학사에서 우라늄의 발견에 비유되기
도 한다. 나무와 흙, 돌을 가지고 자연에 적응하던 사람들에게 쇠붙이란 실로 엄청
난 변혁을 가져 왔다. 나무도 돌도 아니면서 농경생활에 더 많은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사나운 짐승과 외적으로부터의 수비는 물론이요, 더 나아가서 영토확장
의 가능성을 늘려 놓았으니. 짐작컨대 돌과 나무의 사이쯤 되는 물체로 받아 들였
을 것이다. 뒤의 경우 새 - 동(東)은 하늘과 땅 사이에 밝은 태양이 솟는 공간에
서 말미암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엿새 닷새에서의 '-새'는 태양을 뜻하지 않는
가. 생각해 보면 태양 곧 새(해)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떠 올라 다시 그 사이로
져 간다. 해서 밤과 낮의 가락이 일어나 삶의 무늬를 짜낸다. 그러니까 '새-동'은
해와 관련해서 해가 뜨는 장소를 뜻하는 것으로 터를 대일 수 있다.
'예(濊)'로 돌아가서 그 뜻이 '사이'라 했는데 분명 오늘날의 한자로는 '예'이
다. 하면 말의 본 바탕은 소리인데 '사이 - 예'의 걸림을 한자음으로는 풀이할 수
없을까. 세월이 가면 사람도 바뀌고 강산도 그 모습을 달리한다. 소리도 마찬가지
다. 중문대사전에서는 '예'를 세우(歲羽)에서 바뀐 말로 적고 있는데 반절식으로
읽으면 '수 - 쉬 - 셰'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 기록을 단계적으로 재구성하면 예
(濊)는 [셰 - 훼 - 예]로 바뀌어 오늘날의 한자음 '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소리상징으로 보아 '예 - 사이'를 떠올리자면 마한과 변한의 사이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의 사이로 '예'는 값매김을 할 수 있다. 안으로는 태백산과 철령(鐵嶺)
을 사이로 하여 동과 서, 동과 북에 자리 잡은 삶의 고장이 바로 관동이며 본래의
'예'란 말이 되지 않았는지.
쇠붙이로 열쇠와 빗장을 만들어 쓴다. 관동은 역사적으로 열쇠였으며 지금도 그
러하다. 겨레가 하나됨에 있어 열쇠의 구실이 이 고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
의 정신은 갈라진 동과 서, 남과 북을 한 몸이게 하는 새로움의 발판이요, 요람인
것을.
하면 '사이'를 드러내는 땅이름과 관동의 걸림은 어떠한지를 살펴 보자.
관동은 쇠재[鐵嶺]에서
철령 높은 재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를 비 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관동은 강원도의 또 다른 이름이라 했고 흔히 대관령을 중심으로 산줄기의 동
쪽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옛 글을 보고 그 뿌리를 찾아 보면 철령에서 비롯한 것
이 아닌가 한다. 위 시조는 백사 이항복 선생이 유배길에 철령을 넘으면서 지은
글. 그럼 먼저 철령의 내력을 더듬어 본다.
강원도와 함경도가 나누이는 분수령이 곧 철령이다. 본디 회양 땅의 북쪽에 자
리를 하였는 바 지금도 돌로 쌓은 석성의 자리가 남아 있다고 전해 온다. 고려 고
종 9년 무렵 철령에 성을 쌓고 드나드는 사람을 다스리는 관문을 설치하였으니
'철령관'이라 일컫게 되었다. 좌우의 산과 잇대어 굳게 지은 관문은 요새의 상징
임을 잘 드러낸다. 이곳은 예로부터 북방으로 통하는 인후부 - 목과 같은 부분이
라 거란과 여진의 군사들이 한반도로 쳐들어 오는 동북방의 외길목이었다고나 할
까. 거의 편할 날이 없어 잠시도 경계를 소홀할 수가 없는 요새였다.
이곡(李穀)선생의 기록을 따르면 철령은 나라 동녘에서, 가장 중요한 관문(要害)
이란 것이다. 해서 한 사람만 관문을 단단히 막으면 만 사람이 와도 열지 못한다
는 것. 이로 말미암아 이 고개의 동쪽 강릉을 둘러 싼 여러 고을을 관동으로 불렀
다는 거다(故嶺以東江陵諸州謂之關東). 외적이 침입하면 처음 공격 대상인 함흥을
공략한다. 함흥이 무너지면 안변을 거쳐 하루 아침에 대나무가 쪼개지듯 바로 철
령에 이른다. 만일 철령을 지키지 못하면 이는 마치 전쟁에서 촉나라가 칼을 둔
병기고를 잃은 것에 비유될 수 있다고 했으니 철령관의 구실이 예사롭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관문을 막으면 산허리가 바다에까지 이르렀으니 여기에 나무숲
을 잘 기르면 남과 북이 완전하게 가리워져 자연의 요새가 이루어지는 법. 감히
외적의 무리가 범접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게다. 이를테면 철령은 동북을 지키는 결
정적인 성채가 된다고나 할까.
앞서 풀이한 바와 같이 강원도는 삭방도(朔方道)라 하여 화주(和州-영흥) 등주
(登州-안변) 교주(交州-회양) 춘주(春州-춘천) 명주(溟州-강릉)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통틀어 일렀다. 행정구역이 바뀌는 과정에서 먼저 회양(교주) 동주(철원)
춘주(춘천)를 쪼개었으니 한 때는 이들 지역을 동주 혹은 교주 또는 춘주라 하였
다. 결국 함경남도 일원의 땅을 쪼개어 내서 강릉과 춘천 원주 회양 철원 중심의
구역으로 조정한 셈이다. 그러니까 삭방도로 있을 때는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의
분수령이 철령(鐵嶺)이 된다.
철령, 그 이름의 뒤안길
고려사 의 기록을 보면 철령이야말로 주요한 영토 싸움의 경계선이었다. 우
왕 14년(1388)에 명나라는 철령이북이 원래 원나라의 것이니 다시 요동에 되돌리
라는 생떼를 쓴다. 이에 우왕은 박의중(朴宜中)을 시켜 보낸 글에서 황제의 넓은
도량으로써 몇 안 되는 주의 땅을 고려의 것으로 인정해 달라는 뜻을 전달한다.
하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결과 최영을 앞 세운 대요동정벌의 싸움이 일어
난다. 이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요동정벌의 푸른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
지만. 참으로 사연이 많은 고개요 빼앗기고 빼앗는 싸움의 갈래길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땅이름이 바뀌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한자의 대응관계로 보아 우리말로는 철령
을 '쇠재'혹은'쇠고개(새고개)'로 읽혔을 가능성이 있다. 강릉 - 철국 - 동주에서
철 - 동이 모두 '새(쇠)[사이(소이)]'로 읽혔음은 앞에서도 이른 바 있다. 이같은
예를 보이는 것으로는 철원의 보기를 들 수 있다. 고구려 때에는 철원(鐵圓), 신라
경덕왕 때에는 철성(鐵城), 고려 태조 때에는 동주(東州)로 그 이름이 바뀌었으니
'철 - 동 - 새(쇠)'의 맞걸림이 어렵지 않다.
이씨조선 세종16년에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된 철원들은 강원 경기의 사이에서
풍부한 농업생산을 가져다준 터전이 되기에 충분했다. 지금도 강원도 지리지에서
는 철원들이 가장 넓은 것으로 나타난다. 철 - 동 - 새의 새(쇠)를 떠올릴 수 있
음은 철원의 봉화대 중의 하나가 소이산(所伊山)의 경우이다. 그 한자의 소리를
따서 읽으면, '소이(쇠)'가 드러남이니 동으로는 진촌산의 봉화가, 남으로는 적골
산의 봉화가 맥을 잇고 있다.
글자는 다르지만 철 - 새(쇠)가 맞걸릴 가능성을 보이는 근거로는 통천의 땅이
름을 들 수 있다. 본시 고구려 때의 이름은 휴양(休壤)이었는데 또 달리는 금뇌(金
惱)로 적고 있으며 또 다른 부름말로는 금양 금란(金壤 金蘭)으로 부른다(대동
지지). 여기서 금 - 새(쇠)와 뇌 - 나와의 걸림은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결국 철령의 '철'은 사이요, 새로움이며 무쇠와 같이 굳건한 철옹성이란 뜻
이 된다.
예로부터 강원도 사람은 감자바위로 이름이 나 있다. 산이 좋고 물이 좋아서 그
런 걸까. 그렇지만은 않다. 좋은 사람이 살면 그 곳이 바로 명당이란 옛글이 있다.
너무 모나게 사는 삶이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우러나온
것일게다.
때는 우리 모두가 한 몸이 되어 남과 북이 하나로 홀로 서기를 할 상황이다. 한
뿌리에서 많은 가지들과 잎새들이 살아 숨 쉬고 꽃과 열매로 숲을 이루듯 철령의
관문처럼 곧고 굳은 인간관계를 세워 나가야 한다.
한반도에 새로운 희망의 등불이 되는 고장. 뒤얽힌 겨레의 삶을 사이 좋게 풀어
가야 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우리 역사의 어려운 물음을 풀이할 수 있는 열쇠
가, 인재가 만들어 지는 겨레의 고장.
관동의 정신은 새로움을 여는 피어남의 지향이다.
치악의 말미암음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손이 눈물겨워 하노라
빛과 그림자의 순환이란 덧 없음 그 자체이다. 힘 없이 사라져 간 고려왕조에
대한 씁쓸한 그리움을 읊고 있다. 여말의 충신이었던 운곡 원천석(元天錫)이 지은
노래. 망한 왕조의 유신으로 산에 들어가 숨어 사는 삶을 누린다. 이조 태종이 친
히 찾아가서 함께 일할 것을 권하였으나 이내 산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대동지지≫에 따르자면 치악산(雉岳山)은 다른 이름으로 적악(赤岳)이라고도
한다. 동쪽으로 25리쯤에 높고 큰 바위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며 샘물이나 바위 또
한 정갈하였다. 이조의 태종이 임금 자리에 오르던 첫 해에 고려 진사 원천석을
운곡에서 친히 방문하였다. 때에 사람들은 임금의 행차가 머물렀던 바위를 일러
태종대(太宗台)라고 하였다. 산의 동쪽에는 또 각림사(覺林寺)가 있는데 뒤에 태종
이 된 이방원이 왕자 시절에 이 곳에서 글 공부를 했다고 한다. 아울러 횡성에서
무예를 닦을 때에도 이 절에서 머물렀다는 얘기.
산의 높이는 1288미터로 원주 영월 횡성 제천의 경계가 된다. 가장 높은 봉
우리는 비로봉(毘盧峯)이다. 이름만 들어도 따뜻한 자애로움이 넘친다. 연화장 누
리에 살면서 어두운 세상을 두루 비추는 부처가 비로자나불이 아닌가. 적는 한자
는 조금씩 다르지만 비로봉이란 산봉우리가 상당수에 이른다. 금강산을 비롯한 묘
향산 속리산 치악산 팔공산 지리산 등의 비로봉은 늘 자애로운 몸짓으로 온
누리에 환한 빛을 던지는 것일까.
불가에서는 비로자나부처의 상징으로 그 의미를 부여했는데 소리 상징은 어떠
한 것인가. 본디 비로자나불은 바이로자나(vairocana)였으나 우리말로 뿌리를 내리
는 길목에서 '비로'로 소리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소리상징으로라면 '비로'는
'빌'이며 빌은 별의 또 다른 꼴 곧 변이형이 아닌가 한다. 별의 사투리를 보면 길
게 소리가 나는 '빌:'이 경상 충청권은 물론이요, 강원도의 삼척 통천 고성
양양 주문진 영월 평창 원주 횡성 흥천 인제 평강의 지역에서 쓰인다.
이르자면 북두칠성과 같은 별에 빌어서 자신은 말할 것 없고 겨레의 안녕과 번
영을 꾀하였던 전통신앙을 드러낸 걸로 보인다. 따지자면 '빌다'는 움직임말로 별
의 변이형인 '빌'에 동사화 접미사 ' 다'를 붙여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대
상에 빈다는 건 기원적으로 별신앙에서 말미암았다고나 할까. 그 낱말의 겨레를
들어 보면 '빌 - ㅂ - 빗 - 빛'의 형태가 있다. 별도 마찬가지임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 별에서 받침소리가 같은 줄기로 바뀌면 '별 - ㅂ - 볕 - 볏 - ㅂ'이 된
다. 물론 이 가운데에는 현재 쓰이지 않는 형태들도 있으니 일종의 죽은 말이라고
하겠다.
별은 광명이요, 태양의 밝은 빛을 그 밑으로 한다. 이르러 광명사상이며 태양숭
배의 믿음에 터를 삼고 있다고나 할까. 그럼 별신앙과 불가의 광명불 신앙은 어떻
게 고리 지을 수 있을까.
믿음이 움 터온 차례를 보면 우리 배달겨레의 경우 별 신앙이 먼저요 비로자나
불 신앙은 뒤이다. 하면 믿음의 대상이 별에서 부처로 바뀌었을 뿐 밝음지향의 속
내는 같다. 소리상징으로 보더라도 그렇다. '빌 - 비로'는 음절짜임이 앞의 것은
초중종성이 한 소리마디를 이루는 폐음절이요, 뒤의 것은 그렇지 않은 열린 소리
마디의 짜임이 다를 뿐이다. '비로'에서 소리마디의 끝소리를 빼면 '빌'이 됨을
알겠다. 이러한 적기들은 향가를 적는 과정에서 찾아보기가 그리 어렵지 아니하다
(길(道尸)쓸(掃尸)<혜성가> 등).
원주는 치악(雉岳)에서
비로봉을 꼭대기로 하는 치악산은 강원도 감영이 있어 행정의 중심이 되었던
원주(原州)의 보금자리이다. 같은 자료(대동지지)를 보면 본래는 치악성에서 평원
군(平原郡)으로, 신라 경덕왕 16년에 북원경으로 고쳐졌다가 고려 태조 23년에 원
주로 부르게 되었다. 고려 충렬왕에 이르면 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로 되었는데
이는 몽고의 하란(哈丹)을 물리친 공적에 터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하란은
충렬왕 17년에 치악성 아래 진을 치고 북원성을 여러 차례 손아귀에 넣었다. 때에
향리의 진사이며 원주별초에 속해 있던 원충갑(元沖甲)이 지역 사람들과 함께 힘
을 합하여 하란의 침입을 막아내었다. 앞뒤로 10여회에 걸쳐 무찌르니 이로부터
하란군대의 예봉은 꺾이어 여러 성을 감히 넘보지 못하게 되었던 일.
몽고군대의 침략은 고려 고종 때에도 원주를 빼놓지 않았다. 고종 4년에 거란의
군대가 원주에 쳐들어 왔는데 지역 사람들이 힘써 싸워 물리친 적이 있다(力戰却
之). 한데 거란군은 횡성쪽으로 물러나 있다가 다시 침략, 원주성을 무너뜨리고 말
았다. 고종 40년에도 몽고병은 원주에 침입했고 이내 풀고 되돌아 갔다(解圍去).
어디 그뿐인가. 역사가 흐르는 전환점에서 얼룩진 일들이 천연의 요새였던 치악산
을 둘러 싸고 일어났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후고구려의 궁예(弓裔)가 양길을
도와 원주성에서 일어난 것이나 고려왕조가 끝날 무렵 공양왕이 도망하여 숨은
곳이 원주가 아니던가(遜于原州). 이조에 들어 와서 임진왜란 때 일이다. 선조 25
년 왜장 길성중륭(吉盛重隆)이 철령에서부터 나누어 관동의 여러 읍을 짓밟았을
적, 신라 신문왕 때 쌓은 치악산의 남성인 영원산성을 지키는 싸움에서 원주목사
김제갑(金悌甲)은 성을 지키지 못하고 패하자 그의 처자식과 함께 순절하고 말았
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한다. 원주(原州)의 언덕(原)은 치악성을 이름이
요, 싸움에서 말하는 요새인 것이다. 이름하여 원주의 진산(鎭山), 바람막이 구실
을 해 주는 중요한 성채라 하겠다.
원주와 술샘[酒泉]
산속에 오랜 나무의 세월을 누가 알리오
벼랑위에 한가로운 듯 핀 꽃은 이름조차 알 길 없어라
(山中老木誰知歲 岸上閑花不記名)
삶은 짧으나 그들이 남긴 예술은 길다. 모두가 다 역사의 수레와 함께 사라져
갔지만 남겨놓은 기록은 세월을 넘어 전해오는 법. 삶의 무상함을 읊은 강효문(康
孝文)의 글을 풀어 옮겨 보았다. 원주성의 오래된 고읍으로 주천(酒泉)이 있었다.
지금은 영월의 행정구역이 되기는 했지만 원주의 동쪽 80여리쯤에 주천 마을이
있었는데 본래는 신라땅으로 주연술모(酒淵述慕)였다. 이어 현으로 삼아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면 주천(酒泉)으로 바뀐다. 뒤에 내성군(영월)의 현이 되었다가
다시 고려 현종때 원주의 행정구역인 속현이 된다. 또 달리는 학성(鶴城)이라 하
였는데 지금도 원주에는 학성동(鶴城洞)이 그 발자취를 보이고 있었다.
간단하지만 주천에 얽힌 바위 이야기가 전해 온다(신증동국여지승람). 이르러
주천석(酒泉石)이라 한다. 주천현의 남쪽길 옆에 소구유의 모양을 한 반쯤 깨뜨러
진 주천석이 있었다. 세상에 전해 오기로는, 본래 술샘 바위가 서천가에 있었다 한
다. 술샘 바위에 가서 물을 마시는 사람은 언제나 부족함이 없었다. 읍의 한 관리
가 바위에 오가는 게 귀찮아서 읍쪽으로 옮겨다 두려고 해서 많은 사람을 시켜
이 술샘 바위를 옮겨 놓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갑자기 하늘의 우뢰가 일어 바윗
돌을 셋으로 쪼개 버렸다. 하나는 연못 속에, 하나는 어디에 있는 지를 알 수 없
고, 하나는 지금 남아 있는 바위가 된다. 강희맹의 글에 하였으되, "별신(星君)께
서 술로써 하늘 땅에 이름을 삼았고, 신령스러운 술이 이 샘에 흐르니 세상에 찌
든 사람들이 이상하리만큼의 속내를 어찌 알 수 있으랴"는 한시가 전해 온다.
대동지지 에 주천을 주연술모(酒淵述慕)라 함은 어떠한 내용인가. 보기에 따
라서 다른 풀이가 있겠으나 술모(述慕)는 바로 '주연'의 풀이말로 보인다. 술주,
못연이니까 한자의 뜻으로 읽는 훈독(訓讀)의 경우로 보면 좋을 것이다. 하면 주
연, 주천은 한자의 소리로 읽는 술못이 된다는 줄거리로 간추려 진다.
치악은 사이산
치악산을 달리 적악(赤岳)이라고도 하였고 옛 마을이 주천(酒泉)이요, 다른 이름
으로는 학성(鶴城)이라 하였다. 이들 이름을 함께 고리 지을 수 있는 언어표상의
질서는 없을까. 먼저 치악의 '치(雉)'와 학성의 '학(鶴)'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앞은 꿩이요, 뒤는 할미새 계의 새다. 둘 다 새의 한 무리로 묶이기는 같다.
글쓴이가 보기로는 같은 소리상징인 '새'의 적기에 따른 땅이름이라고 본다.
훈몽자회 아래 편을 보면 날아다니는 모든 조류를 통틀어 '새조(鳥)'의 '새'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당시는 두 개의 홀소리로 읽었으니까 '새 - 사이'로 해야 옳
다. 그럼 새(鳥)와 오늘날의 사이(間)와 무슨 걸림은 없을까. 같은 소리이면서 다
른 뜻을 드러냄에 있어서는 걸림이 있을 수가 있다. 일러서 유연성(有緣性)이라
하는데 사이 - 새의 경우는 어떠한가.
날아다니는 새는 하늘과 땅의 '사이'를 날아 오르고 내린다. 또한 길 짐승과 네
발 짐승의 사이쯤 되는 동물이기도 하질 않는가. 학성의 학(鶴)과 치악의 치(雉)는
그렇다 치고 주천 주연의 주(酒)와는 무슨 고리로 걸림을 풀이한단 말인가. 자료
에 따라서는 술이 수블(禾醱)로 적히기도 한다(계림유사). 하지만 이는 고려시대에
중국의 손목(孫穆)이란 외국인이 듣기를 바탕으로 적은 것이며 지금 우리가 '술병
속 세계'(이광수의 <흙>)라 할 때 술과 큰 차이가 있지 않다고 본다. 한 마디로
술도 '사이'와 깊은 걸림이 있다. 아주 날 것도 아니면서 썩은 물질도 아니다. 일
종의 발효식품으로서 음식의 맛을 가다루는 구실을 한다. 음식에 넣어 먹는 식초
가 그 바로 좋은 보기라고 할 것이다.
마시는 것도 술이지만 밥 한 술의 '술'도 술로, 같은 소리로 쓰인다. 다시 숟가
락의 '숟'도 같은 말이다. 끝소리가 바뀌어 이루어 지는 말들을 함께 떠올리면
'술 - 숟 - 숫 - 숯'이 된다. 가령 '숯'의 경우, 재도 아니고 멀쩡한 땔감도 아니
면서 다시 타오를 수 있는 가연물질이 숯으로 숫에서 끝소리가 터짐갈이 소리로
되면서 생겨 난 형태로 본다. 그럼 숫은 어떠한가. 숟 - 숫에서 흔히 끝소리규칙
이라 하여 시옷과 디귿은 끝소리에서 같은 소리 디귿으로 난다. 보통은 말음법칙
으로 풀이하지만 암수의 '수(ㅎ)'가 바뀌어 '숫'으로 되었는데 주로 남자의 성
(性)이 밖으로 튀어 나온다. 대개는 근육 조직의 '사이'에서 솟아나게 마련이다.
이제 숟 - 술의 풀이를 할 차례이다. 말할 것 없이 이는 디귿이 리을(ㄹ)로 바뀌
는 흘림소리되기에 따른 소리의 달라짐이다.
치악산 남쪽 기슭에 있다가 지금은 없어진 영원성의 '영'도 사이를 드러내는
치(雉)의 또 다른 적기로 보아 큰 무리는 아니다. 돌로 성 쌓기를 3749자나 하였
으며 성 안에는 우물이 하나요, 샘이 5개나 된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숭람). 삼국
의 역사를 보면 후고구려의 궁예가 북원의 양길(梁吉)에게 투항하였으며 양길은
궁예에게 이 곳을 맡겨 장수로 삼아 동쪽의 지역을 공략하기에 이른다. 이 때 치
악산 석남사(石南寺)에서 기거하면서 주천 내성 등지의 습격을 행하여 영토를 넓
힌 일이 있다. 세상에 전해 오기로는 양길의 군대가 영원성을 거점으로 했다 하며
뒤에 원충갑(元沖甲)이 여기서 거란의 군대를 무찔렀다는 거다.
아울러 치악 - 적악(赤岳)의 경우를 더듬어 보면, 치악의 '치'가 '새(사이)'라
하였는데 적악의 적(赤) 또한 마찬가지로 보인다. 새는 방위로 동쪽이며 인지상으
로는 두 곳의 사이, 두 물체의 사이를 이른다. 날이 새다에서와 같이 '적 - 붉다
- 새다'로 그 뜻이 하나의 동아리로 묶일 수 있다. 새벽이 옛글에서는 새배(훈몽
자회상1)이며 사투리말로는 새박 새벽 새북이라 한다. 자연물로 보아 새는 '태
양'이요, 배(벽 북 박)는 '밝음'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벽을 뜻하는 벽성과 같은
별이름도 있기는 하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적(赤)을 '치'라 읽기도 한다(달로화치
- 達魯花赤). 하면 치(雉)의 또 다른 표기 이상으로 볼 수 없는 줄거리가 되기도
한다.
까치와 구렁이, 과거 보러 가는 선비의 이야기로 치악산은 널리 잘 아는 전설의
산이다. 그럴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지만 땅이름과 걸림을 둘 때에는 새와 치악산
의 '치(雉 鶴)'와의 어울림을 머리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새처럼 드높이
솟아있는 치악영봉에 대한 믿음을 생생하게 그린 잠재의식의 드러냄인 것이다.
비로봉이 하늘 땅 사이에 높이 솟아 있듯 치악은 여러 지역에 걸치는 사이 -
경계 공간이 된다. 마치 이정표라도 되듯이 말이다.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앗을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의 '광야' 중에서)
외롭고 추운 계절을 피는 매화꽃에 어울리게 흰 말을 타고 거침 없이 광야를
달리던 선구자. 이름하여 초인이라 했다. 진정 우리의 삶에, 거북등처럼 갈라진 겨
레의 운명을 돌려 놓을은 흰 말을 탄 선구자는 누구란 말인가. 우리 모두가 선구
자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겨레의 일을 함께 염려해야 한다.
백마(白馬)는 늘 상서로운 상징으로서 우리의 지나온 역사 속에서 떠오르곤 하
였다. 삼국유사 를 보면 신라의 첫 임금인 박혁거세의 시대는 백마의 울음소리
로 시작하였으니 예사롭지가 아니하다. 겨레의 지나온 자취를 거슬러 오르면 황량
하고 끝 없이 푸른 벌판을 말 타고 누비던 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아시아
에서 역사의 새벽은 트고 시베리아의 곰신앙을 지닌 북극의 정서로부터 한민족의
강물은 비롯된다. 흔히 배달겨레를 기마민족(騎馬民族)이라고 한다. 우리 삶에 말
은 육지의 배요, 싸움터에서는 전차였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을 모는 옛 한아비
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거칠 게 없다.
중앙아시아의 알타이산맥을 넘어 중국의 동북쪽으로 민족의 이동을 한 게 기원
전 이천여년 전. 초원의 빛은 이제 사라졌으나 그 넋은 겨레의 맥박속에 깃들여
숨 쉬고 있다. 겨레의 전통 풍악 가운데 하나인 북 장구 소리도 듣기에 따라서는
말이 달리는 리듬이요, 소리상징이라는 풀이도 있다. 있음직한 풀이다.
언어의 계통으로 보아 한국 몽고 토이기 퉁그스 말은 원시 알타이 공통어에
서 갈라져 나온 갈래들이다. 중국의 북부, 시베리아의 남부, 만주전역에 걸쳐 사는
사람들을 이르러 몽고족이라 한다. 따지고 보면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흉노(Hun)
족도 몽고족이다. 이 겨레들이 우리와 다름 아닌 한 줄기의 겨레붙이들이지를 않
는가. 몽고족이 두려워 만리장성을 쌓게 되었으며 게르만의 대이동이 일어나 온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말이 용의 자손인가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윤혜영의 '선구자'에서)
말과 선구자. 본디 선구자란 말 자체가 제일 앞에서 말을 타고 겨레붙이를 이끄
는 사람이 선구자가 아닌가. 거룩한 분이 태어 나면 좋은 말이 생겨 나는 법. 말
을 타지 않은 영웅이나 무사(武士)를 생각할 수 있을까. 삼국사기 를 보면 임
금의 상징을 '말뚝'으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른바 마립간의 마립(麻立)이 그러
하다. 말뚝은 '말'에서 갈라져 나온 파생어로 원관념은 바로 타고 다니는 말과 걸
림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임금이 타는 말과 그 수는 신하의 그것과 같을 수가 없
다. 마리 - 말은 제일 높은 곳, 높은 부분을 이른다. 원래 짐승으로서 말은 머리
부분 갈기로서 상징되기도 하니깐. 우리말로는 말(馬)이고 토이기말에서는 모린
(morin)이라 한다. 만주말에서도 모린(morin)이요, 퉁그스말에서는 무린(murin), 독
일말에서는 마레(mahre), 영국말에서도 매어(mare)임은 모두가 우리말의 말과 서
로 걸림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의 영조 무렵 이서(李署)의 마경초집언해(馬經抄集諺解)(상) 에는 말
의 내력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말의 부모에 대하여 동계(東溪)가 물었다. 하니 곡천(曲川)선생이 이르기를 물론
말도 조상이 있다. 용의 아들이요(龍之生也), 개벽의 시기에 처음 동해바다에 두
용이 있었으니 산을 폈다 놓았다 해서 그 이름을 굴강(屈强)과 굴여자(屈女子)라
하였다. 다시 굴여자는 나르는 토끼를 낳았으며 나르는 토끼는 기린을 낳았다. 이
어 기린이 말을 낳았는데 천황의 이름도 용구(龍駒)라 했음을 보면 임금과 용과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하긴 용은 바로 힘의 상징이며 물불을 다스리는
통치기능의 이정표가 아니었던가. 말은 바로 먹거리 싸움에서, 또는 말의 고기와
젖을 이용하였고, 밭갈이의 큰 도움을 주었으니 이래 저래 말의 쓸모란 엄청난 것
이었다. 좋은 말을 가졌음은 오늘날의 날쌘 전차부대를 가진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마경언해 로 이어 보자. 뒤에 말이 사람을 물고 뜯어 먹음으로 말미암
아 동중선이란 이가 말의 쓸개즙을 따버린 후에는 물고 차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
다. 다시 이름하여 말이라 하였다는 것.
왕의 이름을 용과 말로 드러냄은 적어도 당시에 용이나 말에 대한 인식이 어떠
했나를 엿보게 한다. 그러면 우리의 경우 말이 땅이름에는 어떻게 되비쳐졌을까.
먼저 마한(馬韓)의 경우를 떠 올릴 수 있다. 풀이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말마(馬)의 뜻과 무슨 걸림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말이 주요한 값을 지닌 것처럼,
으뜸 가는 짐승이듯이, 마한도 제일 가는 '머리에 값하는 한(韓)'이라 하면 어떨
는지. 기실 삼한 가운데 가장 먹고 살 게 넉넉 하게 나는 곳이 마한이었음은 널리
아는 사실이다.
고을마다 말무덤과 걸림이 있는 경우도 있거니와 마산리(馬山里)란 동네 이름을
쉽게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이 경남의 마산(馬山)임은 물론이다. 부족의 왕이 있
었던 곳을 금마(金馬)라 해서 말과의 상관을 보여 주는 데는 오늘날 전북의 익산
이다. 본디는 금마(今馬) - 금마(金馬)라 했으며 그 영현에 셋이 있었는데 옥야(沃
野)란 데가 있다. 충청도 옥천도 마찬가지지만 '옥(沃) - 성(聖) - 마(馬 摩)'의
대응을 보여 준다. 뜻으로 읽어 '걸'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도개걸의 걸이나 같
은 뜻이다. 거룩한 사람, 건 땅이 모두 말과 무관하지가 않다. 익산의 읍이름을 마
주(馬州)라고도 하나니 왕궁터가 있다. 익산에는 마용지(馬龍池), 용화산(龍華山)이
있어 말과 용의 상징이 곧 임금으로 이어진다.
일억년이나 지구를 뒤흔들던 공룡의 변종으로서 말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
찌하였든 용이 하지 못할 게 없는 물체이듯 말의 위력 또한 그러하며 임금의 권
위도 같은 선상에서 받아들이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말 때문에 일어난 싸움
말은 가려 울고 님은 잡고 아니 놋네
석양(夕陽)은 재를 넘고 갈길은 천리(千里)로다.
저 님아 가는 날 잡지 말고 지는 ㅎ를 잡아라
말 때문에 일어난 싸움으로는 말 생산으로 이름 난 제주도를 들 수 있다. ≪고
려사≫를 보면 충렬왕 때의 일이다. 왕3년에 원나라는 제주도를 목마장(牧馬場)으
로 삼았는데 왕20년에 간청하여 탐라도(지금의 제주)를 되돌려 받는다. 왕26년에
는 다시 원의 왕비가 말을 놓을 목마장으로 삼는다. 그 뒤 왕21년엔 원의 비서 유
원경으로 말을 가려 원의 궁중에 보내는 간선어마사(揀選御馬使)를 삼아 제주에
보냈는데 제주 사람들이 어마사와 목사를 죽였다. 이 난을 평정한 이가 저 유명한
최영 장군이었으며 우왕 때 이르러서는 제주만호(萬戶) 김중광이 마침내 원나라
관리의 목을 치는 일이 일어 난다.
조선 왕조 때에 궁중에서 필요한 수레와 말을 관리하던 관청이 사복시(司僕侍)
였다. 사복시의 말을 사복마라 했으니 오늘날 교통체신의 구실을 했던 것이다. 서
울역의 역(驛)도 '말을 갈아 탄다'는 뜻이요, 공무 수행으로 다니는 말을 파발마
라 하여 서울에서 신의주에 이르는 사이에 곳곳에 역을 두었다. 말잡이를 마정(馬
丁)으로, 말먹이통을 말구시, 말의 병 고치는 이를 마의(馬醫), 콩이나 겨로 여물을
섞어 쑤어 주던 죽을 말죽(지금의 말죽거리가 그 보기임), 역마를 관리하기 위한
전답을 마전(馬田)등으로 썼던 기록자료들이 있다. 하기야 말이 기관차 곧 쇠말로
바뀌었을 뿐 본 바탕은 하나도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암행어사의 징표로서 쓰는
패에는 반드시 말이 그려져 있으니 말은 곧 군사작전의 상징으로 쓰이었다.
길고 짧은 점만 뺀다면, 입으로 하는 말(言)이나 타는 말(馬)이 구실로 보면 같
다.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소리로 옮기는 게 말이요, 짐이나 사람을 태워 옮기는
짐승이 말(馬)이다. 말이 없으면 사람이 올바른 사회생활을 할 길이 없다.
타는 말에도 좋은 말(良馬)이 있고, 못쓸 말(駑馬) 사람을 해치는 말(凶馬)이
있다고 했다(이서<마경초집언해>). 우리 입으로 하는 말도 그러하다. 나와 다른
이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 말, 아름다운 정서가 담기는 말, 겨레의 얼이 담기는 말
을 쓸 수 있다면, 올바른 말이 받아들여 지는 세상이 된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세상이 꼭 그렇지만은 아니하다. 겉다르고 속이 다름을 마각(馬脚)이라 하
거니와 우리 모두 같이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런 힘 - 마력(馬力)을 길러야 한다.
이제 타는 말이 권위의 상징인 때는 갔고, 모두가 함께 입으로 하는 말은 하루
도 끊임 없이 한다. 말은 슬기요, 인간의 정신이다. 해서 모든 종교의 경전이 말로
적힌다. 큰 뜻을 위해서 말 달리던 선구자들의 얼을 키워 갈 일이다. 평화를 이끄
는 말이 열매를 맺도록 말이다.
죽령(竹嶺)과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간 봄 그리워 하니 모든 것이 시름일세
아담한 얼굴 주름살 지시려 하니
눈 돌릴 사이에나마 만나 뵙도록 겨를 지으니
낭이여, 그리운 마음에 오고 가는 길
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
(득오의 '모죽지랑가'에서)
죽지랑(竹旨郞)은 어떤 사람일까. 그렇게도 사무치도록 그리운 사람이었던가. 우
거진 쑥대밭일망정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며 별밤의 평안함을 누리고 싶어 하
다니. 화랑 사이에 느끼는 믿음과 애틋함이 이러할진대 그 마음으로 무슨 일인들
힘써 보지 않았을까.
때는 신라 28대 진덕여왕 시절. 술종공(述宗公)이란 이가 춘천지방 - 당시에는
삭주(朔州)의 도독이란 벼슬을 하게 되어 길을 떠났다. 삼한의 난리가 어지러워
수행하는 군사 3천을 데리고 부임을 하러 가고 있었다. 일종의 정복군과 비슷한
큰 세력일 것이다. 그것도 말을 탄 군사가 3천이라면 웬만한 고장은 휩쓸어 버릴
만하지 않은가.
이제 일행이 죽지령(竹旨嶺) 지금의 죽령쯤에서 길을 닦고 있는 한 도사를 만나
게 된다. 첫 눈에 마음이 통하여 술종공과 도사는 아주 가깝게 느꼈다.
삭주도독이 되어 일한 지 한 달쯤 되는 때 홀연 공(公)은 꿈에 그 반가운 도사
를 만나게 된다. 그의 아내 또한 같은 꿈을 꾸게 되니 정성이 지극해서 무언가 어
떤 오고 감이 있었음인가. 이상하게 여긴 공은 사람을 보내 알아본즉, 꿈 속에 도
사는 꿈을 꾸던 무렵에 저승으로 갔다는 얘기. 다시 사람을 보내 산의 북쪽에 무
덤을 만들고 미륵불상을 그 앞에 세워 주게 된다.
술종공은 생각하였다. 틀림 없이 도사가 되살아 우리집에 태어 날 것이라고. 마
침 부인이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의 이름을 죽지(竹旨)라 했다. 죽지령 혹
은 죽령에서 만났던 그 도사를 떠올리면서 지은 이름으로 보인다. 화랑이 된 죽지
랑은 뒤에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이라는 큰 일을 하게 된다. 해서 지덕 태종
문무 신문왕에 걸쳐 벼슬살이를 하게 된다.
죽령 고개만큼이나 삼국통일의 길은 험하고 멀었다. 죽령재는 마한 진한 변한의
국경으로 뒤에 신라와 고구려가 나라의 경계 싸움으로 편안한 날이 없었다. 뺏고
빼앗기는 천연의 군사요새가 바로 죽령재였다. 저 유명한 온달장군도 결국은 죽령
싸움에서 최후를 마치게 되지 않았던가.
어떻게 해서라도 죽령재를 넘어 고구려의 땅을 차지하고 삼국통일을 할까 하는
게 신라 사람들의 꿈이요, 희망사항이었으니 말이다.
대동지지 를 보면 죽령(竹嶺)은 단양의 동남 30리쯤에 있어 순흥과 경계가
된다는 풀이다. 경상좌도로 가는 큰 길목으로 갈림길의 뿌리가 되는 곳이었다. 옛
부터 전해 오는 죽령재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신라 8대 임금인 아달라(阿達羅)왕 때의 일이다. 왕이 일을 한 지 5년 되던 해
죽죽(竹竹)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길을 내었다는 것. 이 때부터 죽령이 되었다고
한다. 고개 서쪽에 죽죽 사당이 있어 제사를 올리고 그를 기념하였다. 옛 적의 성
터가 있던 것을 신라가 다시 쌓아 썼다는 사연이 있다.
죽죽(竹竹)과 죽령과 죽지.
물론 사람의 이름이요, 고개 이름이기도 하지만 고개를 넘어 삼국통일을 하려는
흐름을 스스롭게 심은 것은 아닌가 한다. 하면 그러한 소리상징의 질서는 어떠한
것인가.
양주동(1972.고가연구)에서는 '죽지'를 '다ㅂ마루'로 풀이한다.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사람은 마을 사람 나라의 걸림을 보이는 '사
이'를 밑뜻으로 보고자 한다. 미루어 보건대, '죽죽 - 죽지'는 '숫(ㄱ) - 숙 - 쑥'
으로 풀이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삼국시대의 전반기에는 소리의 낱내로서 터짐갈이 소리 - 파찰음(ㅈ ㅊ ㅉ)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하면 파찰음은 모두 마찰음(ㅅ ㅆ)으로 읽어야
한다는 풀이가 된다. 그러니까 '죽죽 - 숙숙 / 죽지 - 숙시'의 맞걸림이 일어 난
다. '숙'에 머리글자인 시옷(ㅅ)만을 따서 쓰게 되니 결국 '숙숙 숫(ㄱ)'의 어울
림을 찾아 낼 수 있다. 죽지 또한 마찬가지이다. '죽지 숙시'가 되어 숙시를 이
두식으로 반절해서 읽으면 '숫(ㄱ)'이 된다. 땅이름에는 쑥(쑥고개 숫고개)이 들
어가 부르는 경우가 있다. 하필이면 산골에 쑥이나 숯뿐일까. '숫(ㄱ)'은 사이를
뜻하는 '슷(間<훈몽자회>)'계열의 낱말로서 받침의 소리가 같은 계열로 바뀌어
'숫 - 숟 - 술 / 슷 - 슬 / 삿 - 살 - 삳'의 낱말겨레가 생긴다(필자1991.우리말
의 상상력). 술종공의 '술'도 소리로만 보면 '숫'과 같은 바탕 뜻을 드러내는 말
로 보인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쑥 또한 그러하다. 겉 보기로는 대나무 비슷하고 풀도 나무도 아니다. 그 '사이'
쯤 되는 풀이라 해야 할 것이다.
마침내 북방정책을 잘 해서 삼국통일을 하려는 믿음이 짙게 깔린 것은 아닌가
한다. 이를 뒷 받침하는 건 길 닦던 도사와의 만남이다. 상징으로라면 길닦이는
삼국통일의 길이요, 올바른 벼슬살이의 대도(大道)라 할 것이다.
꿈에 도사가 나타난 것은 물론이지만 꿈이란 잠재의식을 통하여 도사와의 영적
교감이 일어 난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죽지(竹旨)란 아들을 얻게 되고 도사의 무
덤에 돌로 만든 미륵부처를 세운다는 것. 이는 호국불교의 대승(大乘)정신으로서
자신이 통일의 주역이라는 통과제의 같다면 어떨까. 본시 미륵불은 미래불이다.
이 세상의 중생들을 다 극락으로 보낸 뒤에 나중에 극락으로 간다는 신념에 찬
멀고 큰 그리움을 지닌 부처. 술종공이 먼저 길을 닦고 죽지(竹旨)가 큰 일을 이
룬다는 북방정책의 이상을 실현 하는 정신적인 흙으로서 미륵불이 작용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상징동물로서 용을 떠 올린다. 이 경우도 그 예외는 아니다. 소백산
서쪽에 용못이 있다. 달리 3층담(三層潭)으로도 불리워 진다. 미루어 보면 용은 신
앙이요, 큰 힘이며 3층담의 3은 삼국이 아닌가 한다. 원뜻은 삼국통일의 그리움을
심고 기르는 줄기찬 국민정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도사의 무덤 앞에 미륵불을
세운 건 자기 암시요 스스롭게 그러한 지향성을 나그네들에게 높이 들리워 보인
것이리라. 물론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것은 배달겨레로 보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 놓은 가슴 아픈 일이긴 했지만, 빛이 있는 곳에 그늘이 지게 마련.
'죽지 - 죽죽 - 죽령'의 '사이(숫 - 슷)'가 되비쳐 된 것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
'슷'이 사이요, '응'은 접미사인 바, 스승이란 본디 제사장 - 교황을 뜻하는 말이
다. 도사가 그러하고 술종공이나 죽지랑 모두가 인간과 인간의 사이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다스리는 다리와 디딤돌의 구실을 하였으니 이들이 바로 참 스승이 아
닌가.
같은 소백산 줄기에서 큰 재로 불리우는 문경새재 - 조령(鳥領)이, 소백산의 봉
화를 올렸다는 소이산(所伊山)이, 계두산(鷄頭山) - 일명 작성(鵲城) 금의곡(錦衣
谷 - 쇠골), 적성(赤城)이 그러한 보기들이라고 할 것이다. 소리꼴은 모두 '사이'
의 또 다른 모습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섬김으로 다스린다
죽지랑이 이끄는 화랑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라는 이가 있었다. 날마다 화랑
으로서의 길을 닦으러 나오더니 갑자기 열흘이 넘도록 나오지를 않는다. 득오의
어머니는 당전이란 군대의 벼슬을 하는 익선(益宣)이란 사람이 득오를 급하게 불
러 가 부산성의 창고지기로 삼았다고 했다.
나라의 일로 갔으니 그 또한 찾아 가 격려해야 할 일로 생각한 죽지랑은 일백
여명의 낭도와 함께 술 한 병, 떡 한그릇을 갖고 득오를 찾아 갔다. 이를테면 부대
에 면회를 간 셈이라고나 할까.
알고 보니 득오는 익선의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사사로운 일에 화랑이 될
사람을 부리다니(...). 죽지랑은 득오에게 쉴 틈을 주도록 익선에게 청하였으나 헛
수고였다. 마침 밀양(당시는 추화(推火))에서 오는 군량미 30석을 빌어 익선에게
주면서 화랑의 일을 돕도록 청하였으나 마찬가지로 거절. 벼슬이 17등급이 있는데
죽지랑은 13등급에 해당하였든지 그가 쓰던 말 안장을 내 놓으니 그제서 득오에
게 말미를 주었다. 익선은 직권을 이용한 뇌물을 받았으니 분명 사정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사연을 알게 된 화랑의 총책임자가 익선을 잡아 가두기로 했다. 이를 안 익선은
숨어 버리게 되니 그의 맏 아들이 대신 붙잡혔다. 엄동설한 추위에 연못에 들어
가 목욕을 시키니 곧 얼어 죽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동태가 될 수밖에.
이를 알게 된 효소왕은 명령을 내려 모량리 사람들은 모두 벼슬을 주지 않을뿐
더러 있던 사람도 다 뺏아 버렸다. 통일을 하자매 몸과 마음으로 홀로 서기를 해
야 할 화랑에게 함부로 했다는 죄목일 시 분명하다. 승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익
선이 살던 모량리 출신의 사람들은 정식으로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아 버렸다. 당시
승려는 지식인이요, 나라의 큰 지도자 계층을 이루고 있었다. 심지어 왕자들도 승
려가 되는 형편이었으니 더 풀이를 할 필요가 없다.
이름이 높았던 당시의 원측법사(圓測法師)도 모량리 사람이었기에 전혀 책임을
맡기지 않았다. 이르자매 연좌제를 적용하여 연대책임을 물은 것이다.
득오는 죽지랑의 마음을 잘 아는 화랑으로 죽지랑의 걱정이 곧 자신의 고뇌가
된다고 믿었기에 그러한 충정으로 죽지랑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로 부른 것이
다. 그 사연과 마디가락이 걸맞아 많은 화랑은 물론이요, 사람들이 즐겨 노래를 부
르게 되었던 터. 그 정성으로 삼국통일을 이루어 낸 것이다. 죽령을 넘어 더 큰
나라 세움의 통일을 말이다.
앞으로 나아가자매 아리랑 고개를 하나의 운명이듯 사랑을 가지고 넘을 일이다.
기다림으로 우린 겨레의 고지를 기어이 올라야 한다. 겨레의 하나됨을 위하여.
지리산과 파랑새 꿈
살으리 살으리랏다 청산에 살으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으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청산별곡'에서)
머루와 다래를 먹고 살망정 시끄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음을 노래한다.오죽
하면 세상이 그리도 싫었을까. 풀이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위 노래는 고려조 몽고
의 침입을 입어 일백여년 간을 어둡게 살던 때에 헤어진 가족을 찾아 다니면서
지었을 거라는 설도 있다.
푸른 산은 우리에게 평안과 정서적인 해방감을 안겨 준다. 하지만 당시는 사정
이 사뭇 달랐다. 20년 동안에 70만이 넘는 사람들은 몽고로 끌려 가고 정동행서성
(征東行書省)이라 해서 일본을 치기 위한 군사기관에서 전쟁에 필요한 사람은 말
할 것 없고 일체의 모든 물자를 고려에서 마련해 내라고 억지를 쓴다. 원감국사
(圓鑑國師)의 <영남민간고상24운>을 볼라치면 주로 영남지역에서 그 엄청난 희생
을 치러내야 했던 비참상이 잘 드러나 있다.
말 그대로 한반도는 쑥대밭이 된 셈. 일본의 36년 식민통치와 같은 게 137년이
나 행해졌으니 한 입으로 어찌 다 이를 수가 있으리오. 최기호(1993,청산별곡의 몽
고어 영향)에서는 원감국사의 <영남민간고상24운>을 바탕으로 한 노래가 민요화
과정을 거쳐 <청산별곡>이 만들어져 불리웠을 거라는 풀이다. 청산(청산)은 바로
지리산이었다고 같은 글에서 이르고 있다.
하여간 확고한 증거가 없는게 흠이기는 하지만 있음직한 생각이라 여겨진다. 후
렴구의 '얄라'는 본디 몽고말인데 '서럽다 슬프다'의 뜻으로써 청산별곡의 시대
적 상황을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현실도피 곧 데가쥬망의 한 서린 사연을
노래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스개 말로 엉덩이 뚱뚱한 이를 엉뚱이라 한다. 지리산이야말로 경상 전라도
를 걸치고 구례 남원 산청 하동의 4개군을 싸 안는다. 산의 둘레가 8백여리, 넓
이는 미루어 1억 3천만평이라 하니 참으로 큰 엉뚱이산이다. 휴전선 이남의 내륙
에서는 단연 제일 높은 머리산이다.
대동지지 에 따르면 지리산은 여러개의 이름으로 불린다. '지리(地理)'는 때
때로 두류(頭流), 더러는 방장(方丈)이라 한다. 동으로는 천왕봉이, 서로는 반야봉
이 솟아 있어 그 능선의 길이는 백리가 넘는다.
큰 어려움이 있을 때면 예외 없이 지리산이 한 많은 사연의 터가 되곤 한다. 피
어린 한국전쟁 때 피아골의 싸움이며 임진란 몽고병란 등 크고 작은 싸움에서
때로 아군의 요새로, 때로는 적들의 거점 지역으로 쓰였으니 지리산이 생각하는
이라면, 정말로 골치 아프고 가슴 메어지는 일을 당하면서도 오늘의 하늘을 이고
버티며 의연하게 솟아 있다. 무슨 성자라도 되듯이 말이다.
방장 지리산이라는 이름이 쓰이지만, 글쓴이 보기로는 두류산(頭流山)이 가장
오랜 이름이 아닌가 한다. 정여창과 함께 산을 올랐다가 두류록(頭流錄)을 쓴 김
일손의 기행문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하면 '두류'란 산이름의 뜻 바탕은 무엇일
까.
두류산이란 이름은 대구와 해남 등지에서도 쓰인다. 이두식 향찰로 읽으면 머리
두의 '머리'로 읽는 게 어떨까 한다. 하면 두류산은 '머리산 - 마리산(말산)'이란
속내가 드러난다. 머리는 옛글에 '마리(말)'라 했으니까(마리頭(훈몽자회(상)24
등)).
머리가 사람의 몸에서 제일 높은 부분이듯 지리산은 높은 산이요, 명당이며 하
늘에 제사하는 공간이 있는 '거룩한 산' 아니 거룩한 제단이었다. 그뿐인가. 골치
아픈 머리를 씻어 영혼을 맑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산이 높고 골짜기가 그윽하
니 뭇새와 짐승이 깃들이고 흐르는 물은 모여 호남과 영남 벌판에 젖줄이 되어
많은 씨알을 낳는다. 씨 암탉이 알을 낳아 병아리를 까서 품에 안아 기르듯이 말
이요.
이형석(1990, 한국의 산하)에 따르면 지리산은 신라 42대 흥덕왕 이후로 당나라
의 차를 옮겨 심어 기른 다(茶)재배의 말미암음의 터라는 것.
숨어 사는 이들의 고향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보니
도화 뜬 물 위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세라
아이야 무릉이 어디냐 나는 옌가 하노라
(조식)
마음에서 찾는 무릉도원이 어디 있으리오마는 정녕 두류산 - 지리산은 우리네
조상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요, 그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은 삶터였다. 세상에서의
쓰라린 아픔도 두류산에서 다 잊어 버리고 청산에 살으리라를 노래할 수 밖에 없
었으리라(특히나 남명 조식 선생이 보기로는).
고려 적 학문과 덕이 있는 한 선비가 두류산에 살면서 세상의 어지러움을 떠나
살고 있었다(不涉人間). 임금은 사람을 보내 벼슬을 주어 함께 하기를 권했으나
한유한(韓維漢)은 마다 하였다. 이에 사신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글 한 구절만
남겨 놓고 북창으로 나가 버린 게 아닌가. 글의 내용인즉 '내 빈 손으로 이 산에
들어와 이제 비로소 이름자나 알렸더니 세상일로 떨어지겠구나'하는 속사정이었
다는 줄거리.
고려사 에 따르면 유한의 집은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다는데 벼슬살이를 하
지 않았다. 최충헌이 벼슬자리를 팔고 제멋대로 나라 다스림을 보고 일렀으되 앞
날을 기약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어 가족을 이끌고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고
생스러우나 충절을 지키고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살았다. 조정에서 사람됨을 보고
서대비원(西大悲院)의 녹사(錄事)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음이라. 다시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 가 이내 되돌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지리산에는 청학동 사람들이 산다. 이상향으로 이르러 푸른 학마을 곧
청학동이다. 오늘의 정서로 이르자면 파랑새의 꿈이 이루어지는 하늘의 나라요, 신
시(神市)가 아닌가. 진주 대아고등의 박물관에 청학동도(靑鶴洞圖)가 있으니 지리
산의 파랑새 마을은 7군데가 있다. 천왕봉 세석평전 반야봉 화개 연곡 악양
하동 묵계 백운산이 바로 청학동 마을이라는 게다.
정감록을 따르자면 우리나라에서 살기 좋은 곳이 10군데가 있는데 지리산이 나
온다. 이 곳은 오래도록 살만한 곳이니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가 이어 날 것이
라는 예언이다.
흔히 나라가 어지러우면 슬기로운 선비를 생각하고 집안이 어려우면 어진 아내
를 필요로 한다고 했다. 거꾸로 나라가 어지러울 것임을 미리 알고 안식의 땅으로
서 청학동을 마련한 것인가.
세상은 살기 힘 드는데 글이 쉽게 쓰여짐을 뉘우친 윤동주 시인처럼. 지금의 우
리네 삶도 참으로 힘겨운 일이 많다. 넘어야 할 고개가 그리도 많이 있다. 하지만
자유와 평등 통일과 인류의 평화를 꿈꾸는 파랑새는 그저 날아 들지 않는다. 정
의와 진실의 숲이 있고 더불어 사는 홍익인간의 숲살이가 있어야 보금자리를 트
니까 말이다.
소리란 무엇인가
수풀에 우는 새는 봄을 못 이기어 소리마다 교태롭다.
물아일체러니 봄 흥취가 다르랴.
사립문에 서성이고 정자에도 앉아 보네.
천천히 거닐며 글을 읊는구나.
사람과 자연이 하나 되어 어울리는 삶. 그 즐거움이야 예와 오늘이 다를 리가.
아무래도 머리의 <상춘곡>을 쓴 정극인(丁克仁 1401-1481) 선생만이 누릴 수 있
는 경지는 아닌 것이다.
봄 내음이 녹아 흐름이 어디 숲 속뿐이랴. 깊고 그윽한 산골을 흐르는 냇물소리
이며 이에 질세라 노을 든 아침 저녁으로 울어 예는 작은 새들의 노래. 참으로 소
리의 갈래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드러난다. 앞에서도 하였듯이 나즈막한 소리로
읽는 글소리, 짐승들의 울음소리 등 얼마나 다양한가. 소리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쉽게 들을 수 있는가 하면 듣지 못 하는 소리들도 있다. 빗방울 끼리 부딪는 소리
며 벌레들이 잠드는 소리, 꽃이 피어 오르다 이내 져버리는 소리. 아니면 지구가,
온 하늘의 별들이 도는 소리, 해가 타오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말이다.
사람을 일러 언어적인 존재라고 한다. 말에는 입말이 있고 글말이 있다. 약속된
글자로 입말을 옮겨 적으면 곧 글말이 된다. 분명 사람의 무리 사이에서 쓰이는
말소리와 다른 존재들의 소리와는 다르다. 사람의 소리에는 닿소리와 홀소리가 어
우러져 일정한 틀모양을 바탕으로 해서 그 구실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다른 소리
들은 반드시 그렇지는 아니하다. 새는 짝을 찾을 때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울며
죽음에 가까웠을 때 아주 선한 소리로 운다고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
라도 사람의 그것과는 달라 닿소리 - 홀소리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하나로
어우러진 소리여서 서로 다른 변별성을 띠지 못한다. 흔히 모든 자연의 소리를 음
향이라 하고 사람의 소리를 음성이라 함도 이러한 변별성이 있고 없음에 따른 것
이다.
대체로 개인의 언어활동은 크게 호흡기관 - 발성기관 -조음기관으로 나누어
풀이된다. 조음기관의 구실이 달라서 그렇지 짐승이나 사람이 소리를 냄에 있어
발동기관의 호흡작용과 발성기관의 발성작용이 그 터를 이룸에는 아주 비슷한 바
가 있다. 그럼 언어 활동의 말미암음이라 할 호흡작용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최현배(1980, 우리말본)에서는 호흡을 나누어 날숨과 들숨으로 풀이한다. 들숨이
울대로 말미암아 새로운 공기를 빨아 들인다면, 날숨은 필요 없어서 몸밖으로 나
온 것이다. 이 때 허파라 하는 숨틀의 얼안에서 들고 나는 숨의 되풀이를 따라서
필요한 공기를 취함은 물론이다. 이어서 숨틀을 나온 날숨은 울대를 울게 하여 소
리를 내게 하여 소리를 고루는 혀와 입안에서 생각과 느낌을 상징화하는 홀닿소
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소리는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움직임만으로는 일지 않는다. 반드
시 두 개 이상의 물체나 특정한 상황과 상황의 '사이'란 틀 위에서만 소리는 가
능하다. 가령 냇물의 경우를 들어보기로 한다. 싣달타는 흐르는 밤의 강물 소리에
서 인간의 희로애락을 깨달았다고 하거니와, 흐르지 않는 연못의 상태에서는 우리
가 느낄 만큼의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하질 않는가.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터. 이는 만고에 변하지 않는 자연현상이다. 아래로 흐르는 물은 물의 갈
래와 갈래가 부딪히기도 하며 돌부리에 더러는 나무나 갈대의 늪을 빠져 나가면
서 물이 흐르는 소리를 낸다.
물리학에서는 소리를 물체의 떨림에서 비롯됨을 찾는다. 물체가 떨어 난 소리는
다시 귀청을 울려 청각기관을 자극한다. 말소리도 날숨이 성대를 떨게 하여 일어
난다. 그러니까 소리는 어떤 둘 이상의 물체나 현상들이 서로 마주 부딪거나 어울
려 일으키는 공명작용(共鳴作用)임에 틀림 없다.
듣는 이에 따라서 같은 소리라도 음악이 되기도 하며 시끄러운 소리가 되기도
한다. 판소리나 시조창, 타령, 서양 음악의 소나타나 심포니가 앞의 경우요, 망치소
리나 돌이 부딪치는 소리, 악을 쓰는 사람의 소리가 뒤의 경우에 따라 붙는다. 역
사적으로 보아서 역대 임금들은 음악의 어울림을 정치의 그 것과 비유하여 소중
한 가치를 부여했다. 예기(禮記 에서 '누리를 다스리는 소리는 평안하고 즐거
워야 정사 또한 화락해 진다. 한편 세상을 어지럽히는 소리는 원망스러움과 분노
로 가득하여 정사가 어긋나게 된다. 아예 나라를 망하게 하는 소리는 슬픔을 생각
하게 함이니 그 백성이 곤해 진다. 해서 소리의 도리 곧 음악의 길은 정사와 맞물
려 통하는 것이다(聲音之道與政通矣).'라 함은 바른 소리의 값 있음을 힘 주어 풀
이하는 표현이다.
아무리 훌륭한 생각이나 정서를 갖춘 사람이라도 말이나 글로 드러나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조상 대대로 모든 역사나 문화의 유산을 글로 적어 뒷 사람들에게
옮겨 준다. 정말 사람들은 언어적인 존재일 시 분명하다.
소리란 떨림이며 서로 부딪혀 스침이요, 갈라짐의 현상이다. 사람이나 짐승의 몸
안에서는 철저히 나오는 날숨을 따라 울대에 부딪혀 떨림으로 말미암는다. 다시
혀와 입안에서 갈라져 홀닿소리로 굳어져 언제나 같은 소리로 떠올린다. 실제 소
리를 냄에 있어서는 계속 이어져 한 소리마디나 낱말을 말하는 것이언마는.
소리는 솟아남이라
'소리'란 낱말의 형태는 어떻게 이루어진 걸까. 더 이상 쪼가를 수는 없는 것인
가. 글쓴이가 보기로는 소리는 '소리 솔 + 이 > 솔이 > 소리( = 솟아 나온
것)'로 나누어진다. 그러니까 숨틀에서 나온 공기가 성대(울대)에 부딪혀 떨림 -
울림으로써 생겨난 게 '소리'란 논리가 된다. 여기서 ' 이'는 사물이나 사실을
가리키는 접미사 - 씨끝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요, '솔'은 [솟음]을 뜻하는 말조
각으로 보면 된다. 하면 무슨 까닭으로 '솔'을 솟아나옴의 뜻으로 볼 수 있단 말
인가.
한 개인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는 그 집안의 내력이 담긴 가족의 족보를 찾게
된다. 그 뒤에 개인의 성격과 성장 과정 및 그 사람의 능력에 대하여 살피게 되는
게 일반적이다.
소나무를 '솔'이라고도 한다. 풀 뿌리나 털 또는 나무 뿌리, 가는 철사 등으로
만들어 옷이나 먼지를 터는 데 쓰는 도구 또한 '솔'이라 이른다. 바늘처럼 솟아
있는 모양을 한 물체가 바로 '솔'이 아닌가. 더러 솔은 '솟'으로 쓰이니 '솔대 -
솟대'와 같이 쓰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민속의 한 행사로서 농가에서 세안에 다음
해의 풍년을 바라는 뜻으로 볍씨를 주머니에 넣어 높은 장대에 달아 놓는다. 이
때 장대를 '솟대'라 함은 널리 아는 일이다. 더러는 과거에 오른 사람을 기리기
위하여 마을 어귀에 높이 세우는 장대가 곧 솟대다. 결국 '솔'이란 바늘처럼 뾰족
하게 솟아 있는 모습을 한 물체이다. '솔'에 접미사 ' 다'가 붙으면 '솔다'가 되
는데, 이는 아주 빨리 흐르는 물결이 용솟음쳐 오르는 모양을 드러낸다. 솔옷(=송
곳) 또한 이 얼안에 든다.
'솔 - 솟'의 낱말 겨레는 다시 'ㅅ(솥)'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솟'의 끝소리
시옷(ㅅ)이 디귿(ㄷ)으로 소리 난다. 흔히 일러 끝소리 규칙 또는 말음법칙이라 한
다. 훈몽자회 와 같은 중세어 자료에서는 솥을 'ㅅ'이라 했다(ㅅ뎡鼎<훈회 중
10>). 뒤로 오면서 거센소리되기를 따라서 솥으로 바뀌어 쓰인다. 솥은 이바지를
위하여 음식을 만드는 그릇이다. 대략 네 귀가 달려 있고 돌이나, 부엌에서 좀더
높은 곳에 자리해서 낮은 곳에다 불을 지핀다. 땅이름에서도 솥 모양으로 된 곳에
서 흔적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전라북도 남원 땅의 ㅅ뫼(용비어천가)가 그러한
보기들이다.
말은 역사와 사회를 되비치는 소리상징이다. '솔 - ㅅ - 솟'의 낱말들이 드러내
는 문화의 상징들은 삼국유사 에 보이는 소도(蘇塗) - 솟대가 태양숭배를 가리
킨다. 솔 또한 마찬가지인데 빗살무늬 토기에서 빗살이 바로 소나무의 솔과 같은
뜻으로 바꾸어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낱말들은 모두가 청동기 문화 즉 쇠문
화가 시대의 획을 그으면서 일어난 문화의 상징들이라 하겠다.
살아 가는 동안에 우리들은 많은 말을 한다. 참으로 이 세상에서 입말과 글말이
많다. 하필이면 다른 이를, 겨레를 망치는 말을 할 것인가. 하나됨의 꿈을 실은 밝
고 고운 소리로 짜여진 말을 할 일이다. 그 것이 바로 실현되지 않을지라도 세상
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온 겨레가 '나누며' 사는 소리이다.
'해'의 소리 상징
신라성대 소성대 아달라의 임금 때
해는 연오의 아내 세오의 베틀에 가
매달려서 살았다.
(서정주의 '해'에서)
옛적 동해가에 연오랑과 세오녀가 부부 되어 살았더니, 하루는 연오랑이 미역을
따러 바다에 나갔다 파도에 떠 밀려 일본의 소도(小島)에 가 왕이 되었다. 낭군을
잃은 세오녀는 찾아 나서 마침내 왕비가 되었다. 때에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제
빛을 잃고 말았으니 이를 어찌 하리오. 하늘을 보고 점을 치는 일관(日官)이 이르
기를 연오와 세오는 해와 달의 신이기에 이런 변괴가 일어났다고. 아달라 왕은 사
신을 보내 두 사람을 돌아 오도록 하였다. 사정은 뜻같지 않았다. 연오는 하늘의
뜻으로 이 곳에 왔으니 세오녀가 짠 비단을 갖고 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라고 한
다. 사신이 돌아와 왕께 알리고 못 위에 그대로 하늘 제사를 올리니 해와 달은 그
빛을 다시 찾게 되었다는 이야기다(동국여지승람 참조).
해가 없는 곳에 삶의 빛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어두움의 혼돈을 깨는 그 환한
빛이며 따뜻함이란 실로 우리 목숨살이들의 뿌리요, 말미암음이 아니던가. 해서 옛
부터 태양신을 우러르는 믿음이 있었고 이에 터하여 겨레를 다스려 간 것이다.
말은 문화를 되비친다. 어떤 사물이나 사실 자체가 아닐 뿐 이를 알맹이로 하는
소리 보람인 것이다. 그럼 '해'는 어떤 소리상징이요, 문화적인 속내를 드러내는
걸까. 소리 나는 자리나 방법이 같거나 비슷하면 서로가 닮거나 영향력이 큰 쪽으
로 바뀌어 간다. 시간이 흐르고 지역이 달라지면 그 소리는 약해지거나 강해지기
도 한다. '힘 - 심 형 - 성 혀 - 세 형편 - 셍편'과 같이 '해'는 같은 갈림소
리인 '새'와 넘나들어 쓰여 왔다(닷새(五日)<어제소학언해>). 소리값으로 보아 중
세국어 시기에 '새(日)'는 '사이'와 같이 겹홀소리로 냈던 터. 그러니까 '새 사
이'라는 뜻으로 가늠할 수 있겠다. 이제 해와 '사이'는 무슨 걸림이 있는가에 대
하여 더듬어 보자. 또 '해'의 문화적인 소리상징은 무엇인지를.
영원히 늙지 않는 해는 하늘 땅, 바다와 하늘의 지평과 수평의 '사이'를 뚫고
솟아 오르는 거룩한 모습으로 온 누리에 빛을 드리운다. 그 눈부신 모습으로. 다
시 그 사이로 지면 하루가, 한 달이, 한 해가 간다. 셈을 할 때의 '세다'도 해의
소리 '새(세)'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세다 - 헤아리다(헤다)'가 바로 그런
움직임을 드러낸 낱말겨레에 들지 않는가. 해 뜨는 동녁을 '새'라 함도 바로 해와
멀리 있지 아니하다. 예서 벌어져 나아간 말의 겨레 또한 적지 않음은 다 잘 아는
일.
한편 문화적인 소리상징으로서 해는 무슨 속내를 드러내는 걸까. 태양숭배와 철
기 곧 쇠그릇문화를 속으로 하는 상징이 뼈대가 아닐까 한다. 빗살무늬 소도(蘇
塗) 고인돌같은 거석문화 동침제(東寢制) 솟대신앙 등이 태양숭배요, 쇠그릇 문
화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이르자매 제정일치의 제의문화를 이끌어 간 스승문화
시대만 해도 그렇다. 남해자충과 같이 신라 초기에는 임금을 자충(慈充)이라고도
일렀다. 당시의 소리로 보아 '자충 즈증 스승'의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지읒
(ㅈ)과 같은 파찰의 소리들이 아직 우리말에서는 자리를 잡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스승 또한 사이를 뜻하는 '슷(間)'(훈몽자회)에 씨끝 '-응'이 붙어
이루어진 말이다.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정치와 종교의 직능을 함께
이끌어 갔으니 말이다. 여기 신은 하늘신 곧 태양신이었음은 앞 서 든 연오랑세오
녀의 이야기나 단군신화에서도 고주몽 김수로 박혁거세의 말미암음에서 또한
그러한 암시와 개연성이 드러나 있다. 철기문화의 '쇠'와 태양숭배의 '새'는 사투
리말로 보아 같은 낱말의 맥으로 이어진다. 지방에 따라서 쇠(鐵)는 '새(쌔) 시
(씨) 소이'로 쓰나니 모두 '사이'를 뿌리로 하는 말이다. 돌도 아니요, 나무도 아
니면서 두 쪽의 좋은 점을 가졌으니 사람의 삶에 큰 빛을 던져 준 것이 아닌가.
하긴 영오(迎烏)와 세오(細烏)의 오(烏)또한 '새'이니 맏새는 해요, 잔새는 달이
아니겠는가. 오늘 새벽의 초승달이 포항의 거리를 누빈다. 세오녀의 비단처럼.
말하는 남생이
말 없는 청산이요 태 없는 유수로다
값 없는 청풍이오 임자 없는 명월이라
이 중에 병 없는 이 몸 분별없이 늙으리라
흔히 말 때문에 말 다툼이 일어 나고 이래저래 말이 많다. 해서인지 우계(牛溪)
성혼(1535-1584)선생은 차라리 말이 없는 푸른 산의 덕성을 기려 노래하고 있다.
말의 가치가 아닌 말 없음의 가치를 읊은 것이다.
물과 불에 온 누리가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해서 그 물과 불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말 또한 그러하다. 하루라도 말을 하지 않고 사람의 모듬살이에 하루라
도 생각을 나누면서 살 수 있으리오. 설령 하루 종일 책을 읽거나 생각을 하는 이
라도 말의 질서를 거치지 않고는 통일된 생각과 느낌을 지닐 수 없게 된다.
남생이란 이가 토끼를 속여서 용궁으로 꾀어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
도 그가 하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는 우화라고나 할까.
본디 말을 하는 우리네 입의 구실이란 제일 으뜸 가는 게 먹음구실에 있다고
할 것이다. 입으로 물어 뜯어 공격하고 상대의 공격을 막는, 그래서 먹거리를 결정
적으로 내 소유로 하는 먹그릇이 된 것. 먹음구실에 못지 않은 구실이 있다면 이
는 바로 숨을 쉬는 것이다.
코나 입으로 들어 간 공기는 반드시 되돌아 나온다. 이르러 들숨과 날숨의 주기
적인 운동이 입으로 이루어진다. 못난 자식이 효도한다고 필요없어 내어버리는 날
숨이 말의 밑천인 울대를 울려 피리작용을 일으킨다. 여기서 피어 나온 소리는 우
리의 입속에서 혀가 닿는 자리나 그 열림의 정도에 따라서 다른 느낌과 생각을
다른 이에게 옮겨 간다. 이른바 공명현상과 분절 - 소리나눔에 힘 입어 언어적 존
재로서 우리들은 홀로 만물의 신령스러운 어른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숨을 쉬듯 언제나처럼 입으로 하는 말은 생각이나 느낌을 들을 이에게 옮기는
데 머리를 둔다. 같은 소리이면서도 다른 뜻으로 쓰이는 말(馬 言 斗)을 떠 올
려 보자. 경상도말에서는 짐승인 '말'은 입으로 하는 말(言)보다 소리가 높게 들
린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고 할 때 말(斗)은 가운데쯤의 높이로 낸다.
하면 뜻은 다르면서 소리는 같은 이들 세 낱말이 함께 지니고 있는 공통된 점
은 무엇일까. 모두가 '전달성'에 보람을 둔다고 상정할 수 있다. 입으로 하는 말
의 경우, 말하는 이에게서 듣는 이에게로 생각과 느낌을 전달한다. 짐승인 말은 어
떤가. 마찬가지이다. 짐이나 사람을 싣고 일정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가지
않는가. 한편 되 말의 말(斗) 또한 그렇다. 뭔가 말질을 할 쌀이나 그 밖의 곡식을
일정하게 담아 팔고 사는 이에게 주고 받음의 활동을 도와 준다. 한마디로 곡식을
담아 옮겨준다는 말이다.
말 한 마디에 천량 빚을 갚는다고 한다. 듣는 이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면서 용
기를 북돋울 수 있는 말이란 참으로 귀한 것이다. 성경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
다고 한다. 여기서의 말씀은 하늘이 사람에게 주는 말씀이요, 명령이 아니겠는가.
그럼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신(神)의 말을 하는 존재는 바로 사람이다. 이름
하여 선지자요, 선각자들인 것이니 어둠을 헤매는 겨레들에게 길이며 빛으로서의
구실을 했던 이들이다.
사람은 참으로 말하는 존재들이다. 말에는 맛이 있다. 이게 말의 정서적인 기능
이며 상징적 기능이다. 상징의 경우 특히 어떤 생각을 뭉뚱그려 옮기는 것이니
거짓말이나 과장된 말은 사실로서의 행위와는 거리가 있으므로 참값을 부여하기
가 어렵다.
말에는 여러 갈래가 있다. 다른 이를 비난하거나 저주하는 따위의 부정적인데서
부터 하늘의 신께, 조상의 신에게 바치는 거룩한 말들이 있다. 글로 쓰면 글말이
요, 입으로 하면 입말이 된다. 꽃이 피었다 지는 의미, 바람에 구름이 흐르는 뜻,
봄이 되면 잎이 피어 새들이 우짖는 말의 소리. 싣달타가 깨달은 밤강물의 소리
등 사람의 말이 아닐 뿐.
살아 가는 동안에 말을 많이 한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말은 어떻게 써야 하나
말하면 잡류라 하고 아니하면 어리다네
빈한을 남이 웃고 부귀를 새오나니
아마도 이 하늘 아래 사롤 일이 어려웨라
(김 상 용)
옛 어른들은 말의 쓰임에 대한 상당한 조심스러움을 강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체 많은 선비들의 떼 죽음이며 불행한 일을 많이 보고 살았기에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은 어떤가. 대중매체에 토크쇼라 해서 말로 공연을 해서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참으로 자유롭게 말을 하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말이나 허용이 되는 건 아니다. 같은 겨레끼리 나누어져 있는 적대
상황 아래에서 무단히 상대를 이롭게 하는 말은 할 수가 없는 것. 아니한 술 더
떠서 권위주의 시대에 반체제스런 생각이나 말을 하는 이들에게 돌아 오는 건 가
시관이 있을 따름이었다. 지금은 옛 일이 되었지만 .
예(禮) 아니면 말을 듣도, 움직이지도 말라. 그저 도덕과 맞지 않는 말은 더 이
상 존중할 값이 없다고 본 봉건주의 시대의 언어관. 마침내 군왕이나 웃 사람에게
는 조건 없는 충성스러움이 있을 따름이었다. 얼이 살아 있는 말, 정의로운 말을
하는 이는 역적이요, 귀양을 보낼 사람이었으니. 그래 나라꼴이 이 지경에 이르렀
다고 하면 무슨 답을 할 것인가.
말은 무섭고 실수하기 쉬운 것. 믿을 게 아니란 것이 우리 옛 문학작품에 드러
난 언어의 관점이었다(최정호,1984.한국사람의 전통적인 언어관 연구).
사람됨의 저울질은 말이 많고 적음에 두기까지 하였다. 고전소설의 경우, 심청전
의 뺑덕어미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일년 삼백육십일을 입 잠시 안 놀리고는
못 견디어 집안의 살림살이를 홍시감 빨듯 ...'에서 말 많음을 덕이 모자란 모습으
로 그리고 있다. 율곡선생의 <격몽요결>에 이르면 당시대의 언어관을 엿 볼 수
있다. '친구와 함께 있을 때...문자와 의리만을 말할 뿐이지... 세속의 비루한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입말을 가볍게 여기고 글말을 좋게 여겼던 것. 물론 좋은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살얼음을 밟듯 눈치나 보는 게, 순종이나 하는 게 아름다움으로 받아
들여졌으니 몇 사람 손에 갈팡질팡한 역사의 능선을 달려 온 것이 아닌가. 하면
표현의 욕구, 표현의 자유는 말이든 글이든 무시되었다는 얘기다. 서양의 아리스
토파네스(Aristophanes)는 그리스의 아테네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말을 통해 마음
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고, 모든 사람들은 날개를 얻는다고.
말의 민주주의, 이는 곧 정치와 언론문화를 꽃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한다. 사람은
가도 글은 남는다. 글 또한 말이 아닌가. 살아 남은 위대한 작품들은 사람의 마음
에 상상의 자유를 누리게 하며 좋은 말, 진실과 양심의 편에 서서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슬기를 더 해 주고 북돋운다.
참으로 바르고 참된 말을 힘쓰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존경해야 할 스승이
다. 그 말속에는 우리 조상의 얼과 문화가, 영혼이 서리어 있으므로.
어머니,당신은 아무래도 멀리 계시옵니다
밤으로 가득한 강물은 물새 소리며 흩어지는 별빛을 안고 먼 그리움을 꿈꾸며
세상을 안아 흐릅니다.
저 먼 나라로 가신 지 벌써 이십여 년. 세상살이로 지친 마음 탓인가, 모습도 아
련해 가고 자꾸만 멀어감을 어이 하올지요, 탓이라면 정성이 모자란 까닭일 밖에
요.
그날밤도 봄이었더랬습니다. 검푸른 금강물, 하얀 백사장에 희미한 별빛을 받고
난 살기 싫다고 못 살겠다고 물 속으로 뛰어 들었던 당신. 병에 얼마나 시달렸으
면,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러셨겠습니까. 평생을 심장병으로 온 몸이 뒤틀리
는 고통으로 사셨으니 말입니다. 당신 어머니냐고, 이 할머니의 아들이냐고 젊은
경찰이 물었을 때, 그렇다고 했습니다. 아주 겸연쩍고 마지 못한 모습으로요. 말이
됩니까. 정말 그럴 수는 없는 건데요.
얼마 전 몹시 춥던 겨울날 갑자기 내린 혈압으로 한 이레 동안 몸져 누웠더랬
어요. 다시 깨어나 일어났을 때 빛바랜 당신의 사진을 안고 마냥 울었습니다. 그
냥요. 우리 아무개 내 새끼 하고 품에 안아 길렀던 당신의 아들이라 하기에는......
사진으로라도 뵙고 싶었습니다. 어머니.
엊그제 팔공산 뒤편에 있는 인각사 절에 갔습니다.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삼국
유사를 지으신 일연스님이 계셨다기에, 알고 보니 늙고 병드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그리 사람도 없는 외로운 산촌에서 세상의 보통 사람처럼 사셨다는 겁니다.
모르긴 해도 세상에서 멀리 하는 문둥이 같은 나쁜 병 때문에 스님의 몸으로 노
모를 모시자매 그리 외딴 곳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니 당신에 대한 죄
스러움이 먹구름 하늘로 가슴을 뒤덮더이다. 그날 따라 비가 내렸어요. 걸었습니
다.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뿐. 밤새 내린 비로 불은 도랑물이 벼랑에 메아리
지고 그날 따라 공산은 저 멀리 아주 멀리 보였습니다.
밤 뻐꾸기가 강 건너 산에서 울고 있습니다. 밤도 깊고요. 비가 오려나 봅니다.
짙은 달무리를 한 달이 늦게 돋아선 막 서녘으로 지고 있습니다.세월이 흐르다 보
면 저도 당신 계신 곳으로 가겠지요. 무엇이 되어 뵈올지, 한 줌의 흙이 되고 풀꽃
이 되어. 아니 돌이 되어 당신은 어미 돌 저는 그 아래 귀여운 아기 조약돌이 되
어 응석을 떨어 볼런지요.
희미한 달빛으로 그림자 지는 강물. 갸름한 당신의 모습이 물 위에 여기저기 흩
어져 간간히 부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한창 어우러진 아카시아 꽃 숲에는
당신의 젖비린내가 흔건히 배어 옵니다. 몸에 저리게 말입니다.
아픈 몸으로 저를 낳아 기르신 당신. 어떤 이들은 당신을 천치병신이라고, 반푼
이라 합니다. 셈수도 모르고 잘잘못을 가리지 못하니까요. 당신 몸 하나 추단을
못했으니까. 저에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뭐가 문제입니까. 당신은 제 목숨의 샘물
인걸요. 아이들을 낳아 기르면서 어렴풋이 알 듯합니다. 당신의 마음을요.
언제부터인가 흐르는 저 강물이, 밟고 다니는 이 부드러운 흙이 당신의 영혼 깃
든 몸일 거라는, 저 하늘의 별이 당신의 넋일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산과 들에
나오면 흙을 만지고 일을 하노라면 당신의 품에 안겨 있다는 생각에 빠집니다. 발
빼고 강을 건너면서 당신의 사랑을 느끼곤 했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당신은 제 목숨의 텃밭이요, 둥지입니다.
작년에 여기 강물이 바라 보이는 강마을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웃과 함께 슬픔
과 기쁨을 나누면서 당신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당신을 대하듯
이 어두운 곳에 사는, 저보다도 못한 이들과 더불어 살아 보렵니다.
막 달이 지고 있습니다. 야윈 찔레꽃 송이마다 별빛이 내려 앉은 듯 합니다. 이
제 꿈을 꾸렵니다. 아무래도 당신은 멀리 계시지만 가까이서 당신 품에 안기는 꿈
을요.
달홀(達忽)과 가라홀(加羅忽)의 어우름
금강에 살으리랏다 금강에 살으리랏다/ 운무
더리고 금강에 살으리랏다/ 홍진에 썩은 명리야
아는 체나 하리오
(이은상의 '금강에 살으리랏다'에서)
금강산. 말만 들어도 어쩐지 가슴이 설레인다. 하늘이 내려 준 천의무봉(天衣
無縫)의 모습을 안개와 구름 속에 부끄러운 듯 감추임을 보고 얄팍한 세상살이
에 울고 웃는 우리네 삶을 되돌아 보게 하는 노산 시인의 글이 제 격이다. 그런
데 지금은 어떤가. 아픔으로 시련의 안개요, 구름으로 뒤덮인 인고의 나날들. 우
리의 힘 없음밖에 다른 이들을 탓해 보았자 무엇에 쓰리오.
가 보고 싶은 그리움의 산이련만 날씨 좋은 날 고성의 통일전망대에서 멀리
바라만 보고 있다. 산과 내가, 나와 산이 멀기는 마찬가지. 오죽했으면 중국 사람
의 글에 고려에 태어나 금강산 구경을 해봤으면 하였을까(願生高麗國欲見金剛
山). 금강산은 비로봉을 가운데로 하여 서쪽은 내금강이요, 동쪽은 외금강, 바다
쪽은 해금강이 된다. 고성(高城)은 금강의 동쪽이자 바다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고성군의 군청 소재지는 원래 장전읍에 있었으며 외금강면과 서면과 함께 김일
성의 다스림을 따라 가 볼 수 없는 땅이 되고 말았다. 해서 간성읍으로 군소재
지를 옮겨 거진읍이며 현내면, 토성, 죽왕, 수동면을 싸 안아 의연한 모습으로 예
국의 변방고을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성현과 간성현이 어울어 오늘의 고
성군이 된 셈.
고성현은 달홀에서
본디 고성현은 고구려 땅으로 달홀(達忽)이라 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하면
서 달홀주라 하여 군주(軍主)를 두어 다스리게 한다. 해서인지 군사들의 주둔지
임을 알리는 정(停)을 붙여 문헌에 따라서는 '달홀정'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벌
력천정·한산정·현효정 등) 신라 35대 임금인 경덕왕 16년(757) 고성군(高城郡)
으로 바뀐다. 땅이름이 바뀌는 과정에서 그 걸림을 보면 달홀처럼 '달'이 땅이름
앞에 오면 높다·크다·넓다의 뜻으로 쓰이고, 땅이름 끝에 오면 군현읍성에 맞
먹는 뜻이 되는 경우가 많다(高木-達乙·達句-大邱/阿斯達-平壤·烏斯含達-兎
山). 해서일까. 고성에는 높을 고(高)의 영향으로 보이는 고잠(高岑)·양진(養珍)
·대강(大康) 등의 땅이름들이 눈에 뜨인다. 여기 양진의 진(珍)은 '달'로 읽는
뜻을 보이기에 그리 넣은 것이다.
고성현의 옛마을은 양가현과 안창현이 있었는데 뒤에 이를 어우러 없애고 달
홀로 다시 고성으로 고쳐 부르게 된다. 양가(養가)마을은 고성의 북쪽 27리쯤에,
안창(安昌) 마을은 남쪽으로 27리쯤에 자리잡고 있어 남북으로 좋은 대조를 이
루었다. 먼저 양가마을의 경우를 살펴보자.
양가 마을의 본디 이름은 돼지저자 저수혈(猪狩穴)로 또 달리 오사갑(烏斯岬)
이라 하였다. 신라 경덕왕 때 이르러 양가현으로하여 옛 고자 고성군(古城郡)에
속하게 한다. 저수혈-오사갑에서 먼저 혈(穴)-갑(岬)은 같은 '곶'을 드러낸 말이
아닌가 한다. 저수의 '저'는 마찰음 '서'를 표기한 것으로 보이며 수의 시옷을 윗
말의 받침으로 쓰면 '섯굴(섯궂)'이 되고 오사의 오(烏)는 '새'를 드러냄이니 이
또한 '삿갑(삿곶)'으로 보면 섯-삿이 모두 사이를 뜻하는 게 아닌가 한다. 그러니
까 산봉우리 사이에 형성된 고장으로 보면 좋을 듯하다. 우리말을 한자로 적는
과정에서 갑(岬)은 뫼산이 변으로 붙은 갑(岬)으로 적음이 온당한 것으로 보인
다. 자칫 갑(岬)이 누른다는 압으로도 읽힐 오해의 소지가 있음으로 보아 더욱
그러하다. 이를 돼지-돗(猪) 쪽으로 본다면 오(烏)를 됴(鳥)로 보아야 걸맞는 소
리의 대응이 이루어진다. 이르자면 두드러진 높은 지역임을 상징하고 까마귀나
새로 보더라도 모두가 드높은 고장을 드러냄에는 다름이 없다고 하겠다.
그럼 경덕 임금 때 양가(養假)로 고쳐진 근거는 무엇이고 이를 고성(古城)에
넣게 된 건 무슨 까닭인가. 땅이름의 대응이란 걸림으로 보면 누르고 흰 곰 가
의 '곰'과 저수혈(穴)의 혈-굼(구멍)과의 걸림이라고 하겠다. '곰-굼'은 모음이 바
뀌었을 뿐 같은 뜻을 드러내고 있다. 또 고성(古城)은 무언가. 본디 고(古)는 조
상의 무덤이요, 굴을 드러내는 글자로서 굴(구멍)과 서로 함께 어울리는 글자로
보이며 나중에 높다는 고성(高城)으로 바뀐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상의 무덤이
있는 장소는 산지이니 높을 것이요 자손이 그 부모를 받들어 모심은 마땅한 것
이다. 아마도 예국의 선조들이 여기를 기점으로 해 강릉으로 옮아갔을 가능성이
짙다.
이제 양가현과 함께 고성현의 옛 고장인 안창(安昌)의 경우는 어떠한가에 대
하여 살펴 보도록 한다. 고성현의 남쪽 27리쯤에 자리한 안창현의 본디 이름은
막이(莫伊)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안창으로 바뀌었다가 뒤에 고성으로 들어 간
다. 간성의 옛 고장이던 마기라(麻耆羅)에서와 같이 막이(莫伊) 또한 같은 드러
냄으로 보인다. 곧 막음기능을 중심으로 한 것이니 여진과 일본군의 침략을 막
는 고장이어야함을 강조한 듯하다. 이름만큼이나 외세의 침략으로 큰 시련에 직
면한다. 고려 현종19년 전함 15척을 이끌고 용진 나루에 쳐들어 와 중랑장 박흥
언 및 70여인을 포로로 하여 물러간다. 문종 2년에는 양가현에 동번적이 쳐들어
와 갑자기 100여인을 쳐 죽이고는 달아나 버린다. 고종 36년에 이르러 고려의
별초군과 동여진의 군사가 고성 싸움에서 이를 물리친 바 있다. 이에 앙심을 품
은 동여진은 고종 45년 고성현의 솔섬을 둘러 싸서는 우리의 전함을 불지르고
분탕질을 놓는다. 이뿐인가. 충렬왕 16년이 되자 적극적으로 우리 쪽에서 우군만
호 김흔이 양가현에 주둔해 있으면서 하란의 몽고병을 대비하여 막아낸다(암, 그
래야지).
공양왕 9년에 이르러는 왜적이 고성포구로 쳐들어 온다. 낮에는 배를 타고 밤
에는 언덕을 기습하여 노략질을 한다. 참으로 편히 쉴 날이 없다. 드센 바람에
이는 밤바다의 파도이듯 말이다.
몽둥이처럼 억센 국방의 요새, 간성
금강산처럼 우뚝 솟아 외세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던 아니 막아내
야 했던 간성, 방패요 몽둥이었으니. 본디 고구려의 땅으로 가라홀(加羅忽)이었
다. 뒤에 갓변자 변(邊城)으로 다시 경덕왕 16년에 수성군(守城郡)으로 고쳐 부
르게 된다. 많은 풀이가 있긴 하지만 여기 가라홀의 '가라'는 가름 기능을 중심으
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강릉을 중심으로 한 예나라(穢國)의 변방이면서 외세
를 막는 국경수비대가 있었으니. '가라-변-수'에서 변·수에서도 나라의 경계를
가름하는 지역이니 변방의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함을 깨우친 듯하기도 하
다.
또 다른 이름으로 물수자 수성(水城)이라 했다. 소리로는 지킬 수자 수성이나
다른 게 없지만 내용상으로는 물로 둘러싸여 바다의 경계를 환기하려는 의도가
바탕에 깔린 것은 아닐까
사라진 폐현이 되기는 했으나 간성의 옛 고장은 열산(烈山)이었다. 열산은 본
디 마기라(麻耆羅)였으며 달리 소물달(所勿達)이라고도 하였으며 경덕왕 16년에
아이동자 동산으로 부르다가 수성군의 속현이 된다. 동산은 그 전에 중승자 승
산(僧山)으로도 불리워졌으니 아주 다양한 바 있다. 고려 태조 23년에 오면 다시
열산(烈山)으로 고쳐 부르기도 하였고 별도로 봉산(鳳山)이라고도 한다.
이를 간추려 보면 '마기라(소물달)-승산-동산-열산'의 걸림이 이루어진다. 먼저
소리를 따라서 생각하면 마기라-막으라(막을 곳)의 경비를 강조한 게 아닌가 한
다. 앞 글에서 안창의 옛 지명이 막이(莫伊)라 했는데 같은 흐름이라면 어떨까.
달리 소물달이라 함은 함부로 하지 말라는 뜻인 듯하다. 본디 소(所)란 장소가
중심이지만 병영을 뜻하기도 한다.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국방을 튼튼히 하려고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병영이니 사람의 통행
이 자유스러울 수 없고 게다가 머리를 깎은 중의 모습을 한 금강산이며 천진스
러운 어린이의 정서를 일으켜서 그러했을까. 목숨을 바쳐 수자리, 간성을 지켜야
하니 매울 열자 열산이라 했다면 어떨까. 여기 어린아이 '동'은 듕-ㅈ-중으로 이
어지는 소리의 연상도 가능하니 옛 선인들의 슬기로움을 새삼 느낀다.
고성현 못지 않게 간성현도 많은 시련의 세월을 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
려조 덕종 시절(2년) 해적들이 간성의 백석포(白石浦)로 쳐들어 와서는 50여명의
포로를 데리고 물러 갔다. 다시 정종 8년 열산현 영파수(寧波戍)의 지휘관인 대
정 간홍(簡弘)은 적에 맞서 싸웠지만 활도 떨어지고 힘에 부쳐 끝내 전사하기에
이른다. 이어 문종 4년 무렵 중국 동번의 해적들이 열산현 영파수 자리로 공격
해 온다. 그 때 18 사람의 포로를 잡아간다. 조선왕조에 들어서서는 원주에서 떨
어져 간성군으로 독립하고 공양왕이 군(君)으로 강봉된 뒤로 다시 삼척부로 행
정구역의 조직이 바뀐다.
늘 그러하듯이 옛부터 나라의 국경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잡혀 가고
죽임을 당했지만 끝내 그 자리를 지켰으니 따지고 보면 몇 사람의 지휘책임자는
말할 것 없고 이름 없는 이들 모두가 열렬한 충신이요, 열사들이었으니 과시 열
산(烈山)이라고 할 만하다.
양간지풍 통고지설의 속내
말을 매어두고 한가로이 바닷가를
걸어 본다/ 차디찬 모래 울리는 소리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구나/ 느낌이
깊어 사람과 모래는 하나이 되었나/
슬기 많안 그대이련만 무슨 까닭으로
불평하려오.
(捨馬閑行海上汀寒步策策人鳴感傷
肯到無情物怜汝何由亦不平)
(-김극기의 한시에서)
양양과 간성에는 바람이 많고 통천 고성에는 눈이 많다는 얘기. 고성의 실개천
들은 거의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고 했다. 대략 서쪽이 동쪽보다 높음으로서다.
영동지방으로서는 가장 북쪽에 자리하여 향로봉(1,293미터)을 중심한 건봉, 까치,
동굴, 칠철,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태백의 줄기들이 힘찬 기운으로 바다를 굽어
보며 하늘을 이고 산다. 바라다 보이는 산에는 눈이 허연데 바닷가 모래 벌에는
곱게 해당화가 핀다. 해서인가. 당시에 이곳 현감을 지낸 이식(李植)선생은 읊기
를 "산에는 눈이 희끗희끗한데 바닷가 모래밭엔 해당화꽃이 벌써 지기 시작하
네"라 했다. 물 맑고 바람이 좋은 곳, 특히나 밟으면 모래소리가 종소리와 같다
는 명사(鳴沙)는 어떻구. 둘이 있는데 하나는 간성의 남쪽 18리에 다른 하나는
북쪽 60리쯤에 있다는 것. <대동지지>에서는 모래가 눈 같고 참으로 깨끗하며
쇠종소리와 같다고 했다. 꽤나 풍광이 빼어난 고장으로 금강이 통행만 되면 관
광산업의 앞날이 아주 밝은 곳이다.
아울러 열산(烈山)호의 이야기 또한 자못 눈에 선하다. 본래 호수의 바닥에는
옛 마을이 있었다. 큰 물이 열산의 고을을 싸 안아 버려 산기슭 쪽으로 새로이
현을 만들어 옮겼던 터. 물속의 꿈꾸는 고장이 되었다. 날씨가 맑고 파도 잠잠한
날이면 옛 고을의 집이며 담장들이 보인다는 거다. 수족관이 아니라 물속의 고
향 용궁의 나라가 되고 말았다. 그 마을을 보는 후손들의 마음이 어떠했으리. 참
으로 열 받을만 하다. 이래 죽고 저래 죽고 남는 건 한뿐일 걸. 마음을 비우라고
씻으라고 밤바다의 파도만 일렁인다.
화진포의 부자
더운 여름이면 예외 없이 화진포 해수욕터에는 많은 이들이 북새통을 이룬다.
옛날에는 열산호와는 달리 이 자리에 뭍이 있는 마을이었다는 이야기. 이화진이
란 잘 사는 부자가 있었다. 하루는 지나는 화주승이 시주를 하라고 하자 어뿔사
바가지로 똥을 퍼부어 쫓게 된다. 이를 본 이 부자집 며느리는 시어른 몰래 화
주승에게 쌀을 시주한다. 며느리 보고서 이 마을이 물속에 잠길 터인 즉 빨리
몸을 피하라고 화주승은 일러준다. 마침내 화주승은 도술을 써서 온 마을이 바
닷물 속으로 가라앉게 하였으니 엄청난 재앙을 일으켰다. 해서 그 자리는 연못
이 되었고 이 화진이라는 이름을 따서 화진포(花津浦)라 했다는 것. 끝내 며느리
는 스스로 자진하여 목슴을 끊는다. 그 한 많은 영혼은 이 마을의 서낭신이 된
다.
땅이름처럼 모래가 향기로워 그 곳에서 피는 꽃잎은 모두 향료로 쓰기도 했다
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화진포 전설의 유형은 태백의 구문소 전설 등 적지 않
은 분포를 보이는바, 꽃 화자 땅이름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화진이라, 꽃나루
라 했을 터. 중세말로는 꽃을 곶이라 했다. 장기곶·장산곶에서처럼 눈에 띄이는
아름다운 모습에 대하여 꽃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름도 드높은 꽃나루에 금강산의 반가운 봄소식. 기다리던 실향한 이들의 봄
소식이 곧 올거라는 다짐을 두면서 조금은 참고 기다리면서 버티어 볼 일이다.
곰신앙과 땅이름
곰사냥을 할 때 치러지는 제례를 통틀어 곰제의라고 이른다. 곰을 제의 대상으
로 하는 지역은 폭 넓은 분포를 보인다. 북아메리카에서 유러시아를 싸 안는 범북
반구에 걸친 뿌리 깊은 수조신앙이라고 하겠다. 수조신앙, 이는 곰을 사람의 조상
으로 보는 곰토템인 것이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은 물론이요, 일본 북해도의 아이누
(Ainu) 사람들에서는 아주 두드러지는 보람을 드러낸다.
먼저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졌던 곰제의의 공통된 점을 몇가지로 간추려 볼 수
있다. 곰이 들짐승이나 숲속의 주인 또는 사명을 지닌 짐승이란 점. 본디는 사람
인데 곰의 모습을 했기에 사냥이 있을 때마다 곰은 곰가죽을 벗고 사람의 모습으
로 되돌아 가기를 열렬히 바란다(글쎄 곰이 무슨 의견이 있을라구). 놀랍게도 곰
은 사람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곰을 보고 나쁜 욕설이나 손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다음으로 곰을 부를 때면 직접 곰을 부르지 않고 친족을 부르는 말 곧 할아버
지, 누나, 어머니와 같이 부른다. 일종의 금기랄까, 은어랄까. 또한 사냥으로 잡은
곰의 고기는 사냥하는 현장에서 먹어 치운다. 아예 제의에도 직접 참여하지 못하
지만 여성은 곰의 고기를 먹지 않도록 금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곰의 뼈는 마구 버리거나 부러뜨리지 않는다. 더욱이 머리 부분은 소중하
게 다룬다.
곰의 고기를 먹고 난 뒤, 곰의 뼈를 마구 버리거나 다치게 함은 조상을 해치는
일이 된다. 그 가운데에서도 머리뼈는 소중하게 다루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왜 그랬을까. 퉁그스들의 곰숭배에서도 나오지만 뼈는 흙 속에서도 오랫동안 썩지
않듯 뼈는 죽은 이들의 영생으로 보는 까닭에서다.
풀이하는 이에 따라서는 구석기 시대에 곰을 매장한 보기라든가 동굴의 벽그림
에 드러난 곰의 모습을 보고 이미 이른 시기에 곰을 숭배하는 제의가 있었으리라
고 상정한다. 스위스의 드라헨록(Drachenloch) 동굴의 경우가 그러한 보기라고 할
것이다. 이들 곰제의는 공간과 시간의 물결을 타고 여러가지 모양으로 변모하였을
것으로 상정, 핀란드 민속의 혼인예식이라든가, 위굴겨레들의 가면극이, 퉁그스겨
레들의 신화의 재현이 곰제의의 변형으로 보는 경우라 할 것이다. 매년 때만 되면
곰 제사를 주기적으로 행함으로써 문화의 맥을 이어준 것이라고나 할까.
퉁그스들의 곰 숭배
곰은 큰 사슴, 야생 사슴, 산양, 고라니와 함께 퉁그스들이 숭배하던 대상이었다.
이들 짐승을 사냥을 했을 때, 큰 사슴의 머리는 천막 속에 모셔둔다. 그리고서는
천막 안에 사는 이들이 짐승, 특히 곰의 머리를 향하여 화해의 노래를 부른다. 이
른바 화해굿이 끝나면 곰의 고기를 먹는다. 먹고 남은 뼈는 광속에 넣어두든가 아
니면 나무에 매어 달아 둠으로써 다른 이들이나 짐승들이 해치지 못하도록 한다.
이는 곧 곰에 대한 사람들의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풀이하는 이들도 있
다. 퉁그스의 한 겨레인 에벤키((evenki)들의 곰 축제에서 그런 징후가 보인다는
것.
사할린에 살고 있는 에벤키족인 나데인(nadein)들은 곰을 부를 때 다른 퉁그스
의 겨레들이 부르는 것처럼 나키다(nakida)라고 하지 않는다. 곰을 특별히 에게케
(egeke-할아버지), 바카야(bakaja-엉덩이)라고 하며, 한편 퉁그스의 일파인 에벤스
들도 곰을 아미카(amika-아버지), 메메케(memeke-끔직스러운), 케키(keki-노인)라
부름은 흥미로운 보기들이다.
곰이 숭배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고기와 가죽, 약으로 쓰는 웅담을 얻기 위하여
종종 곰을 사냥하는 일이 생긴다. 사냥을 할 때, 몇 가지 규칙을 지키기만 하면 곰
에 대한 경배심을 허물지는 않는다고 믿었던 터.
곰의 숭배는 시간을 넘어 영원성을 띠기도 한다. 오호츠크 바닷가에 살고 있는
퉁그스들은 죽은 곰의 목숨이 다른 곰에게로 옮겨 가기 때문에 곰의 생명은 영원
하다고 믿는다. 이른바 영혼 불멸과 함게 조상신 숭배 신앙의 ㅁ거지를 이루게 된
다. 부분적으로 사냥의 대상이 되긴 하지만 마침내 곰의 종족은 번성하게 되며 더
욱 사람들과 가깝게 된다. 쓰러진 짐승과 성 접촉을 하는 것도 주술의식으로 종족
의 끝없는 번영을 비는 행위로써 에벤키(Evenki)들은 오래도록 민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는 마치 우리 배달 겨레들의 민속의 하나인 하회별신굿 등에서 보
이는 성적인 동작을 풍년 혹은 자손의 번창을 비는 기원행위로 봄과 비슷하다.
곰 사냥에 따른 제사의식
곰을 사냥할 때 벌어지는 제사의식은 특히 아무르강 유역에 살고 있는 고아시
아족, 일본의 북해도 지역에 사는 아이누(Ainu) 겨레들에서 두드러진다.
일본말로는 구마마즈리(熊祭), 아이누 말로는 이요만떼(iomantte)라 한다. 아이누
들이 곰을 사냥할 때 곰 새끼를 산 채로 붙들어다가 일정한 기간 동안 기른다. 어
느 정도 곰이 자라 잡아 먹을 정도에 이르면 친족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을 불
러 모아 놓고 축제를 벌인다. 신의 나라를 향하여 '그것을 보낸다'고 하면서 제의
를 치르고 곰을 죽여 고기를 나누어 먹는다. 아이누어에서 오만떼는 '보낸다'는
뜻으로 풀이되니 신의 나라로 보낸다는 정도의 뜻으로 보인다. 아이누 말에 곰을
'가무이'라 하는데 신(神)이란 말로도 쓰이니 경건한 축제를 올릴 만도 하지 않은
가.
이요만떼 곧 곰축제는 아이누 문화의 뼈대가 된다. 시기는 대략 음력 11월 13일
전후로 추정된다. 이는 이즈모(出雲) 지역에서 행하여졌던 웅신대사(熊野大神社)의
어수제(御狩祭)가 이 때 행하여진 것으로 보아 그렇게 잡아 본 것이다. 어수제란
임금이 친히 곰 사냥을 위한 제사의식에 참여하여 이루어지는 행사를 이른다. 그
리이스의 신화에서 양(trago)을 잡아 번제를 지냄과 비슷한 점이 있다. 오늘날에도
일본에서는 영상자료로써 곰제의를 보관한 것이 있으며 민속 행사로서 왕왕이 치
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곰의 새끼를 잡아다 산 채로 길렀다는 건 암시하는 바가 크다. 그러니까 곰 축
제를 하던 때가 언제인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 때를 전후한 시기에 이미 들짐승
을 길들여 집짐승으로 삼았다고 풀이하여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퉁그스족들의 곰사냥과 관련한 제의는 두드러진 바 있다. 곰사냥을 할 때, 그들
은 곰과의 화해를 위하여 애정어린 노래를 부르고 주문을 외운다. 이런 의식은 사
냥을 한 곰을 집으로 옮기거나 곰 가죽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무두질을 할 때, 또
는 고기로 음식을 만들거나 광이나 일정한 장소에 갈무리할 때도 정해진 그들만
의 의식을 갖는다. 마가단라무츠(Magadan lamuts)같은 퉁그스들은 암콤의 머리를
베어 낼 때 '에메게지디군 에킹굴(emekeciddikun ekingur)'라는 주문을 외운다.
이는 '우리 공동의 맏누이를 너의 누이로 생각하라'라는 뜻으로 곰과의 화해를
위한 제의의 표현.
무두질을 맡은 무당 니마크(nimak)는 곰의 고기로 만든 먹거리를 둘레에 모인
겨레들에게 모두 나누어 준다. 이 고기국은 데게문(tekemun)이라고 한다. 특히
곰의 심장 눈 목부분의 단단한 고기 관자놀이 부분의 둥근 고기를 나누어 먹
을 때 무당은 이런 말을 한다.
"자, 그가 가진 것과 같은 두려움 없는 심장을 너도 가지기를.
자, 그가 가진 것과 같은 똑 같은 시선을 가지기르.
눈을 깜박거리지 마.
자, 내가 사냥할 때 그의 목을 찔러라.
자, 굴을 둘러싸고 주의를 기울여라.
(나무 위에서...)"
곰과의 대화를 주고 받음으로써 곰을 더욱 가까이 하고 곰을 숭배하는, 곰을
닮아 가려는 지향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주고 있다.
곰을 파 묻을 때의 제의
곰을 사냥할 때와 함께 매장할 때의 의식은 곰 제의의 주요한 절차를 이룬다.
사람의 의례 가운데에도 으뜸이 상례와 제례이니, 가장 조심스럽고 경건한 의식
을 치른다. 곰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매장하는 부분은 곰의 뼈가 된다. 서
로 가까이 세워 놓은 나무 사이에 준비한 널판을 놓아 둔다. 직접 사람의 손을
써 사냥으로 조각 난 곰의 뼈를 모아서 해부학적인 순서를 따라서 정성스레 가
즈런히 배열한다. 죽은 곰의 귀 부분에는 귀걸이, 손목에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팔찌, 목 뒤로는 풀로 땋은 변발-땋아 올린 머리로 곰의 모양을 꾸민다. 마치 사
람의 영구를 모시듯이 말이다.
곰의 눈은 특별하게 따로 다룬다. 나무 둥지의 뚫어 놓은 구멍에 넣어 두든가
아니면 나무 가지에 달아 놓는다. 눈시선의 방향은 일정하게 고정시켜 놓은 뒤
무당이 주문을 외우고 의식을 행한다.
"나는 여기에 너를 두노라. 너는 늘 그리했던 것처럼 자연을 바라 보라.
나를 쳐다보지 마라."
주문을 외우는 일이 끝나면 곧 흙으로 파 묻는다. 퉁그스 겨레들은 전통적으로
죽음은 아무 것도 없는 세계로 보지 않는다. 이르자면 곰은 뼈와 함께 영원하게
산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이승의 끝이 나면 저승의 삶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혼불멸을 굳게 믿는 것은 바로 곰의 영생이 가능한 때문이며 곰은 또 겨레삶
의 상징이라 풀이하고 숭배한 탓이라 하겠다. 에벤키같은 퉁그스들은 곰을 호모
뜨리(homottiri), 조상신을 호모꼬르(homokkor), 영혼을 호모겐(homogen)이라 함
을 보면 곰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엿보게 해 준다.
배달겨레의 거룩한 어머니, 곰부인
비 스승, 바람 스승, 구름 스승을 거느리고 환웅께서 아사달에 신의 나라를 세
우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심이라.
하여 사람의 몸을 입은, 그것도 21일의 엄청난 시련의 늪을 지나 통과 제의를
거쳐 이룬 거룩한 곰부인과 만나서 단군 왕검을 낳기에 이른다. 하늘과 땅이요,
물과 불의 만남이 아니고 무엇이랴. 어둡고 그 힘든 굴 속의 시련을 겪은 성처녀,
곰여인은 정녕 겨레의 어머니요, 겨레삶의 말미암음 자체였던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퉁그스 겨레들이 곰은 조상신이며 영혼이라 하였듯이 배달겨레의 어
머니 곰부인은 영생불멸의 민족혼이요, 겨레가 그리는 오래고 먼 그리움의 대상
이 아닌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 에 처음으로 곰을 숭배하며 조상신으로 모셔 나라를
이룬 내력이 전해 온다. 시대와 지역이 달라지면 소리도 뜻도 달라지는 게 모든
언어에 두루 통하는 특징이다. 고조선 부분에 대한 곰 이야기는 충청도 공주의
곰나루 이야기가 가장 가까운 변형이라고 하겠다. '곰과 어머니 신앙' 부분에서
풀이한 걸로 대신 하기로 한다. 곰신을 모시는 경우는 우리나 퉁그스 밖에도 일
본의 이즈모(出雲)지역의 구마노대신사(熊野大神社)를 들 수 있다. 땅이름으로라
면 일본에도 곰-구마(kuma)를 바탕으로 하는 지역이 상당하다(熊本 熊山 등).
옛 자료인 신증유합 을 보면 '곰-고마'가 얼마나 경건하게 숭배해야 할 대
상인가를 풀이하고 있다(고마敬 고마虔 고마欽). 본디 우리말인 '고맙다'의 경우
가 가장 대표적인 보기라 할 것이다. 이름씨 '고마'에 접미사가 붙어 이루어진
말인데 '고마'는 곧 곰(용비어천가 3 15)이니 '고맙다-어머니(곰)'의 등식이 이
루어진다. 참으로 말과 문화의 걸림이란 놀라운 바가 있다. 조상신이며 어머니는
누구인가. 말할 것도 없이 단군의 어머니요. 우리 겨레의 할머니인 것이다. 지금
이니까 그렇지 중세어 시기만 해도 '고맙다'가 '아끼다 공경하다 높이다'는
말로 두루 쓰였음을 보면 고마(곰)가 경건하게 예배할 대상인가를 가늠케 해 준
다.
앞(곰과 어머니)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곰(고마)은 더 이상 단순한 짐승이 아니
고 신격의 의미를 띄고 있다. 백남운이 지은 조선경제사회사 의 지적처럼 추
운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게 있어 곰이란 아주 중요한 먹거리요, 옷감의 원천이
되고 뼈로 만든 무기 생산의 보고 역할을 했으니 그렇게 떠받들만도 하다. 끝없
이 주는 원천을 곰으로 여긴 것이다.
곰을 많이 갖고 있으면 그만큼 삶의 가능성이 견고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사투
리 말로 보면 어머니는 '엄마, 옴마, 암마, 움마, 오마니, 오매, 오메, 어메, 어무
이, 어매, 어망'등으로 쓰인다. 앞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단군의 어머니이신 곰(고
마)의 소리가 약해진 것이 '옴(오마)-옴마 오매 오메'등으로 이어지는데 오늘
날의 어머니와 그 원형이 곰(고마)신인 것이니 곰이 우리의 내력인 줄을 알겠다.
하니까 곰이 숭배와 경건한 예배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지를 아니한가.
별이름만해도 그렇다. 큰곰자리니, 작은곰자리니 하여 곰을 별이름의 부름말로
삼은 건 무슨 사연일까. 별자리와 관련하여 짐승의 이름을 붙인 것이긴 하다. 북
두칠성의 손잡이 부분과 북극성 자리를 큰곰 작은곰으로 자리매김함은 곰과 북
쪽을 고리지은 것이다. 곰은 추운 지방에 살면서 일생을 살다가 간다. 조상신과
영혼의 숭배대상이었던 곰이 영원히 살아 밤하늘의 별자리로 빛나는 것이라는
믿음때문인가. 물론 그리스 신화에서는 본디 별의 요정이었던 칼리토스가 여신
헬라의 미움을 받아 큰곰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줄거리다.
북극성은 지는 법이 없다. 해서 언제나처럼 밤하늘에 빛나는 모습으로 우리들
의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 될 저승의 누리를 손짓해 준다. 우리말로 별의 바탕
이 빛이요, 불이듯이 곰별은 우리들 마음 속에 늘 빛을 뿌린다. 해서인지 북두칠
성은 자손과 우리삶의 모든 행불행을 쥐고 있다고 믿으며 오랫동안 우러름의 표
적이 되어 왔으니 이가 곧 칠성신앙이 아니겠는가. 죽은 사람의 등뒤에 칠성의
별을 그린 널판을 지게 하고 다시 묻는다. 몸은 썩어 흙으로 돌아가나 그의 영혼
은, 그의 생명은 온 하늘을 돌아 칠성님의 곰세계로 아니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
간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뭔가 잘 안 되면 '칠성님이 앵 돌아졌다'고
한다. 별의 본바탕이 불이라면 그 비롯은 해 곧 태양이 되기에 이른다. 마침내
모든 별은 태양의 한 변종이라고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땅이름속에 곰 신앙
곰이 조상신이요, 생명의 젖줄인 겨레의 어머니라 했다. 옛부터 한 번 불리면
잘 바뀌지 않은 우리의 땅이름에는 어떻게 되비쳐 있을까.
세월이 가면 모든 게 바뀌게 마련. 살아가는 문화의 모습이 달라지면서 사회생
활의 의사교환의 거멀못이라 할 말의 소리도 뜻도 바뀌어 간다. 곰(고마)의 경우
도 마찬가지. 수렵문화를 지나면서 청동기 문화의 발달과 함께 농경생활로 접어
든다. 조상신이요, 영혼의 상징물인 '곰'은 농업생산의 어머니라 할 땅과 물을 다
스리는 신의 뜻으로 바뀐 것으로 본다. 따뜻한 남쪽지역으로 와서 뿌리 내려 살
면서도 겨레 신앙의 뿌리샘인 곰 신앙은 여전하여 우리 둘레의 산이며 강, 또는
땅이름에 조상신 숭배의 곰우러름을 떠올려 놓은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말은 있으되 글자가 없었던 시절, 한자를 빌려 썼다.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빌렸으니 하나는 한자의 뜻빌림이요, 다른 하나는 한자의 소리 빌림이라고 하겠
다. 먼저 한자의 뜻을 빌린 보기들을 풀이해 보기로 한다.
중세어 자료를 보면 곰은 '곰-고마'로 적히기도 하였다(고마ㄴㄹ 熊津 (용가3
15) 곰熊 (훈몽자회 상19)). 일본말에서는 지금도 곰을 구마(kuma)라 하며 고
맙다는 인사말의 '고마'가 아직도 쓰이고 있음을 보아 '고마-곰'은 분명 같은
말이었다. 소리마디로 보면 열린 소리마디 '고마'에서 끝 홀소리가 떨어지면
'곰'이 된다. 일본말의 '구마' 역시 우리말 '고마'에서 첫소리 마디의 홀소리가
바뀌어 쓰인 결과라고 하겠다.
한자의 뜻빌림에서는 가장 두드러진 곰 웅(熊)을 비롯한 땅이름이라 할 수 있
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드러난 이름만해도 40여 곳 이상의 분포를 보여준
다.
(웅-계 땅이름의 분포)
웅구 웅기 웅신 웅산 웅천(창원)웅양 웅곡지(거창)웅곡 웅현(선산)웅저현(
김해)웅촌(울산)웅림소 웅림 웅시원 웅령 웅양역(회양)웅전산(정선)웅천 웅
진(공주)웅이 웅이령 웅이역 웅이천(갑산)웅화산(의주)웅곡악(안변)웅천(개성)
웅치 웅첨소(장흥) 신증동국여지승람
쓰이는 자리에 따서 곰(고마)이 반드시 짐승으로서 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앞선 여러 풀이에서 고마(곰)는 '신(神) 크다 북쪽 북두칠성 뒤 굽다'등의
여러 뜻으로 쓰이게 되며 농경문화로 접어들면서 소리는 같으나 '곰'이 검(거북)
더나아가서 용(龍)의 뜻으로까지 확산되어 쓰인다. 우리말의 '검'이 신(神)을 이
르거니와 물신과 땅신의 동물상징으로 거북을 가리키기도 한다. 양산민요의 '왕
거미'노래나 신자전 의 자료를 보면, 함안지역의 땅이름 현무(玄武)를 이두식
으로 읽으면 '검'이 나오기 때문이다(정호완(1992) '곰'의 언어적 상징). 일본말
에서 거북을 가메(kame)라 하는데 이는 양산민요나 땅이름 현무(玄武)를 비교한
우리말 '거미'와 같은 계열의 형태로 보인다. '웅 계'의 땅이름은 강이나 산, 섬
고개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굽으러져 둥그런 모습을 한 곳이 곰(고마), 일본말
에서도 파마(구마 가마 파마)이니 '곰-웅'계 땅이름은 굽으러진 곳을 이른다고
풀이한 논의도 있다(강헌규(1992) 공주지명에 나타난 '고마 웅 회 공 금'의
어원). 따지고 보면 '굽다'의 '굽-'도 구멍을 뜻하는 '굼'에서 비롯한 말이니
'곰'의 홀소리가 바뀐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경남 동해안 방언에서 '없다'를
'움다'로, 향가에서 '움는'으로 적음도 한 방증이 된다.
마침내 가장 바탕이 되는 곰(고마)의 뜻은 중심이고 여기서 갈라져 나아간 주
변적인 뜻이 아닌가 한다.
동물상징에서 곰이 수렵문화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거북(검)은 농경문화를 가
리키는 소리 보람이라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검-거북'을 밑으로 하는 구(龜)계
열의 땅이름은 어떤 보기들이 있는가를 살펴본다.
('구(龜)-'계열 땅이름)
구녕원(평산)구담(담양)구석(보은)구도(창원)구복(웅남)구성(영주 지례 단성)구
지진(김해)구산포(칠원)구산(홍산)구암봉(김해)구산령(안동)구봉산(부산)구포(동래)
구미(선산)거미야 거미야 왕거미야 진산덕산 왕거미야(양산지방 민요 왕거미 노
래)/현무(玄武)(함안)(검(玄)+ㅁ(武)) (대동지지)
거북의 상징성은 많은 자료에 드러나는 바, 벽화그림의 거북은 북쪽의 물기운
을 맡고 다스리는 신, 북쪽의 일곱별(斗牛女虛危室璧), 대오방기의 하나
인 현무기(玄武旗), 군영의 후군을 가리키는 경우에도 많이 쓰인다. 가락국의 김
수로왕을 맞은 곳이 구지봉이었으니 이는 거북의 신령함을 통하여 가야국의 첫
임금을 맞이한다. 가락의 가(駕)도 글자를 풀어보면 감(加+馬 감)으로 소리가 날
가능성이 있다.
웅 구- 계열의 땅이름과 함께 동음이의어로서 폭넓은 분포를 보이는 게 부
(釜)-계의 땅이름이다. 훈몽자회 등의 자료에서 '부'는 가마(釜)로 나온다. 거
북을 드러내는 거미 가메와 그 소리가 비슷하여, 그 모양이 거북 모양과 같다고
하여 그리 적은 것은 아닐까.
(부(釜)-계의 땅이름)
부곡(창녕 영천)부산(동래)부곡포(웅천)부동(횡성)부항(김천)(대동지지)/감골(태안
)외감 내감 중감(김천)가마골(태안 공주 갑천)가막골(태안)
이 밖에도 곰(고마)의 뜻을 밑으로 하고 지역을 달리 적는 땅이름들이 있음은
일종의 강한 메아리 현상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음죽-흑석리(黑石里) 음성-
감비(甘味) 칠곡-거무산(巨武山) 감산(加木山-架山) 현풍-부동 음동 금동).
보기에서 주로 쓰인 한자는 칠 흑 현 음(漆黑玄陰)으로 그 뜻은 모두가 검
(감)과 같은 곰(고마)의 홀소리 바꾼 꼴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한자의 뜻을 빌어 적은 보기들에 대하여 이제까지 알아 보았다. 그럼 소리를
빈 음독(音讀)의 경우는 어떠한가. 기원적으로 한자 가운데에서 '곰'으로 소리나
는 글자는 없기 때문에 이와 비슷한 소리꼴을 지닌 금(金琴今) 검(儉) 감(甘)과
같은 한 소리마디의 보기들이 있고 '고마'에서처럼 두 소리마디로 적어 열린 소
리마디가 되는 갈래를 살펴 볼 수 있다. 땅이름의 보기들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
다.
(금(검 감)-계열 땅이름)
감물(甘勿) 금물(今勿)-음달(陰澾)-감천(甘川)-어모(禦侮)<대동지지 김천>감물
아(甘勿阿)-감라(甘羅)-감열(甘悅)(대동지지 熊津浦) 공주(公州)-웅천(熊川) 금
강(錦江)-웅천하(熊川河) 검단(儉丹) 玄(黑赤色 신자전 )
마침내 한반도 서남부의 허리를 감아도는 금강의 뿌리가 곰강이란 말이 되고,
3산5악의 중악이 되었던 대구의 공산(公山)도, 금호강(琴湖江)도 모두가 조상신이
자 겨레의 말미암음이라 할 곰신앙을 되비친 땅이름이란 말이 된다. 이쯤 되고
보면 벌써 짐승으로서 곰은 사라지고 조상의 꿈과 믿음이 서린 생산신의 상징으
로 떠오른다.
세월의 깊이를 더하고 문화가 발달해서 곰신앙같은 샤머니즘이나 토템이 약해
지고 없어졌지만 여전하게도 아주 잘 쓰는 '고맙다'와 같은 인사말에 살아 남아
쓰이질 않는가.
쓰인 한자는 상당히 다양하다. 곰에서 '검-금-공-굼(궁)-감'으로 번져 나아간
다. 한자의 뜻과 곰의 속성을 따져 보더라도 상당한 암시를 받을 수 있다. 먼저
검(儉)의 경우, '사람의 으뜸으로 모심'으로 풀이되며 우리말에서 신(神)의 뜻이
됨은 더욱 곰과의 걸림을 미덥게 한다(神검也<신자전>). 하면 공(公)은 어떠한
가. 귀공의 '귀'는 벼슬하는 이가 사는 관청 '구의(公<훈몽자회>)'를 뜻하는 말
이다. 제정일치 때의 벼슬하는 이란 흔히 종교와 정치의 지도자를 겸하였으니 부
족으로 보아서는 귀한 사람일 밖에 달리 볼 수가. 귀의 본디말은 '굿이-구시-구
이-귀'에서 온 것으로 '굿'은 정치와 종교 직능을 하는 공간 즉 굴(窟)인 것이었
다. 굴살이를 하던 때에 굴이 바로 관청이요, 종교 공간이 아니었을까.
금(琴 錦)의 경우, 음악적이며 좋은 옷감을 떠 올린다. 땅과 물신에게 잘 빌고
순리를 따라 여름지이를 하면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하게 된다. 의식이 족해야 예
절을 안다고. 맞다. 배고픈 이에게 아름다운 소리가락이나 옷이 무슨 의미가 있
겠는가.
아울러 지적해 둘 것은 2음절형의 '고마'를 적은 경우인데, 분포의 보기가 많
지는 않다.
('고마'계의 땅이름)
고마(固麻 格門)<만주원류고> 고마지(古麻只) 고마미지(古麻彌知)<삼국사기>
구마노리(久麻怒利)<일본서기> 개마(盖馬)<후한서> / 獸之初生之謂鼻(대한한사
전) / 고히平코(석보상절19.7) / 가무이(神)<Ainu>
곰과 함께 고마가 널리 쓰였는데 곰은 고마의 소리마디가 줄어든 형태이고 고
마는 기본형이 '고'이다. 하면 '-마'는 마니산의 '마'와 같이 높임을 드러내는
경칭접미사로 쓰였을 뿐인데 함게 늘 쓰이다 보니 한 단어처럼 굳어지고 줄어
'곰'이 된 것으로 보인다. '고'는 코의 뜻으로서 태반에서 짐승의 모습이 제일
먼저 생겨난 조직이라 풀이된다. 호흡이 이루어지는 부분도 코이며 가장 생명적
인 부위가 아닌가.
모계사회에서 조상신이요, 영혼으로 우러르는 곰이야말로 겨레들의 말미암음인
생명의 씨알이라고 하면 상당한 걸림의 가능성이 있음을 상정할 수 있다. 오늘날
에 이르면 '고 코'가 된다. '고(ㅎ)'와 같이 코는 히읗(ㅎ)말음특수명사이다. 소
리의 바뀜으로 보아 아예 (ㅎ)이 윗말에 녹아 붙어 '곳-곶-곧-골'과 같은 낱말
의 떼를 이룬다. 흔히 겉으로 불쑥 튀어 나온 부분을 '곶'(장산곶 장기곶)이라
하거니와 식물의 가장 중요한 조직을 '곶'이라 하며 뒤에 꽃이 되었다. 꽃으로
말미암아 씨앗이 생겨나 온 누리에 그 씨앗 퍼뜨림을 보면 분명 생명과 직접 걸
림을 둔 주요한 두드러짐의 한 부분임을 알만한 일.
옛 조상들은 '곰'에서 겨레들이 움트기 시작해서 그 가지에 꽃을 피워 열매를
맺었음을 떠올려 그렇게 의미부여를 한 것일까. 곰의 변이형인 '굼'은 구멍을 뜻
하며, 이 말이 바뀌면 소리가 약해져서 '굼 훔 움'이 되기에 이른다(람스테트,
1945, 알타이어학입문 참조). '움'도 따지고 보면 생명의 뿌리란 말 '굼(곰)'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곰의 낱말겨레
태풍의 정도가 심할수록 중심에서 더욱 멀리 영향을 미친다. 말 또한 그러하
다. 특정한 언어사회에서 상징성이 강한 말이 있다면 소리나 뜻으로 보아 이에서
갈라져 나온 말이 더 큰 낱말의 떼를 이루게 될 것이다. 곰(고마)의 경우 배달겨
레의 조상신이자 가장 경배하는 대상신이자 믿음의 존재였으니 많은 메아리로
우리말에 퍼져 쓰였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먼저 형태의 갈라짐을 보면 곰의 소리가 바뀌어 새끼를 친 낱말의 떼가 있고
뜻을 중심으로 갈라져 나아간 낱말의 떼가 있다. 곰(고마)에서 홀소리가 바뀌어
이루어진 말들의 보기를 더듬어 본다.
곰-감 계열이 밝은 홀소리의 경우이며, 굼-검-금 계열의 어두운 홀소리의 보기
라고 할 것이다. 앞에서 풀이한 것처럼 머리의 닿소리가 약해지면 '홈-함 / 훔-
험-흠'이 되고 다시 소리가 약해져 떨어져 가면 '옴-암 / 움-엄-음'이 됨을 알
수 있다. 순서에 따라서 '곰-감 / 굼-검-금'의 경우를 먼저 들어보기로 한다. 이
때 드러내는 뜻으로는 짐승으로서 곰은 물론이요, 검정색, 구멍, 신, 어머니 등과
같은 여러가지의 복합성을 띤다. 익은 말이나 속담도 함께 고려한다.
(곰- 계의 낱말)
가) 곰(熊) 곰거리 곰곰이 곰나루(공주) 곰취 곰방대 곰팡이 곰보 곰
실거리다 곰실곰실 곰작곰작 곰지락거리다 곰틀곰틀 곰 앞잡이 /
곰 가재 뒤지듯 / 고맙다 고마도(古馬島 전남 완도)고마(妾<훈몽자회
상 31>) 고마이 고마ㅎ다(내훈1.27) 고막(=귀청) / 공그르다 공글차
다 공글리다
나) 감(枾 열매 중에 으뜸) 감노랗다(검은듯 노랗다) 감다(머리를 ) 감
돌다 가마솥 가마니 가마귀 가마노르께하다 가마득하다 가마푸르
레하다 가마채 까막눈 가만가만 가만하다 가맣다 감감-캄캄-깜깜
하다 가매지다 가무댕댕 까무댕댕하다 가무러지다 까무러지다 가
무레하다 가무잡잡하다 가물 가물다 가물거리다 가물에 돌 친다
가물 타다 가뭄 깜작하다
다) 검(神<신자전>) 검다 검기다 검기울다 검누르다 껌껌하다 검둥이
컴컴하다 검실검실 거문고 거문성(巨文星 큰곰 자리에 있는 별이
름) 거문도(巨文島) 껌적껌적 검정 껌정이 검 질기다 검 접하다
껌정 검칙하다 검푸르다 겁나다(검(神)이 나오다)
라) (굼-)구멍 구멍을 보아 말뚝 깎는다 구멍가게 구멍밥 구멍새(구먹)
구메구메 구메농사 구메혼인 굼벵이 굼뜨다 굼실거리다 굼적거
리다 굼지럭 굼지럭 굼튼튼하다 굼틀굼틀 구물거리다 구문소(태백)
궁글다 궁글리다
마) 끄먹거리다 끄무러지다 그물(함정 곧 구멍) 끄물거리다 그믐 그믐
밤 끔벅이다 금쇠
주로 '검다 구멍 곰 신'의 뜻을 바탕으로 하는 낱말들이 떼를 이루어 쓰이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곰-계열의 말에서 첫소리가 약해지면 목구멍 마찰음(ㅎ)
이 되어 쓰이는데 함께 뭉뚱거려 낱말의 보기를 찾아 보도록 한다.
(홈- 계열의 낱말 겨레)
가) 홈(오목하고 길게 파낸 고랑의 줄)홈끌 홈질 홈치다 홈치작거리다
홈켜잡다 홈켜쥐다 홈키다 홈통 홈파다 호물때기 호물거리다 호
미(홈+이 호미)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 호미 씻이 호미자
락
나) 하물하물 함지박 함빡 / 허물 허물다 허물어뜨리다 허물어지다 허
물없다 허물하다 험집 / 후미지다 후미 후무리다 / 훔쳐내다 훔치
다 훔쳐때리다 훔켜잡다 훔켜쥐다 훔 파다 훔 패다 훔척거리다 /
흐뭇하다(흠 ) 흐물흐물 흐무러지다 흠 흠뻑 흠실흠실 흠잡다
흠집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리가 약해져 떨어지면 소리값이 없는 말이 이루
어진다. 그 대표적인 말이 어머니의 방언 형성 옴(엄 암 움)- 형이라고 하겠다.
낱말의 떼를 찾아보도록 한다.
(옴- 계열의 낱말)
가) 옴 옴나위( 없다) 옴딱지 옴막집 옴쏙옴쏙 옴실옴실 옴쏙거리다
옴직옴직 옴실대다 옴츠러뜨리다 옴츠러지다 옴츠리다 옴크리다
옴키다 옴파리 옴 파다 옴 패다 옴 피우다 옴폭옴폭 옴포동이
같다 오물거리다 오막살이 오매(어머니) 오목눈이 오목오목 오목
조목하다 오목하다 오무래미 오물거리다 오물대다 오물할미 오므
리다 오미(늪과 같이 물이 고여 있는 곳) 오밀조밀하다 옹글다 옹그
리다(옴(ㄱ)으리다)
나) 우무러뜨리다 우무리다 우묵우묵 우묵하다 우물(웅굴<함경 강원>)
우물대다 우물쩍우물쩍 우물쭈물 우무러들다 우무러지다 움(움안
에 간장) 움돋이 움따기 움누이 움딸 움막 움집 움버들 움막살
이 움베 움불 움뿅 움싹 움씰거리다 움쑥 움직이다 움직씨 움
질거리다 움키다 움켜잡다 움켜쥐다 움 파다(움 패다) 움퍽 움펑
눈 움푹 움쌀 움푹움푹 웅글다 웅둥그려지다 웅숭 깊다 웅크리다
다) 으물거리다 으물으물 으뭉스럽다 응그리다 응등그리다 / 어마(어머
나)
라) (어머니의 방언) 니미(창원 진양) 아매(경원 온성) 애미(부산 김해)
엄니(충청 전라) 어마(영주 봉화) 어마니(강진 화순 보성 해남) 어
마님(포항 화순 담양) 어마씨(김천) 어마이(남해 양산 안동 길주
명천) 어만(황해 평남) 어매(영주 안동 봉화 영양 상주 김천) 어
머니(충청 경기 전북) 어머이(울진 포항 거창 산청 단양 영동)
어멍(제주) 어메(경북 경남 전라) 어무(울주) 엄냐(남해) 엄마(전국)
엄마이(황해) 엄머이(의령) 에미(경남 평안남북 함경 강원) 오마(함
안) 오마니(김천 평안남북) 옴마(경상 진안 장계 온천) 이미(창녕)
움마(남해) 제미(온성 경성) 제에미(경원) / 어무(어모) 禦侮(金泉 甘
川) <대동지지>
위의 낱말들의 보기에서 눈에 뜨이는 건 '어머니'의 사투리말이다. 곰의 변한
말이라 할 곰(검-감-굼-금)에서 홈(험-함-훔-흠)을 거쳐 옴(엄-암-움-음)이 되었
음을 고려하면 어머니의 사투리말에 곰의 변이형이 모두 들어 있다는 것 알 수
있다. 겨레의 조상신이자 단군의 어머니신이 곰이니 세월이 지나면서 소리가 바
뀌어 오늘날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줄거리가 되기에 이른다. 아울러 곰(감 검
굼 금)이 토씨와의 결합에서 까닭없이 기역(ㄱ)이 끼어 드는 기역특수곡용명사
이고 그 소리가 바뀐 형들도 옴(암-엄-움-음)이 기역 앞에서 자음이 동화되어
옹(앙-엉-웅-응)으로 바뀐 것도 같은 맥락임을 한 터무니로 댈 수 있을 것이다.
공간으로 보면 구멍이요, 땅이요, 물이 곧 곰(고마)이다. 물이 있는 곳에 농업 생
산이 가능하고 모든 목숨살이의 삶이 가능한 건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말이 구
멍이지 좀 더 확대하면 굴이 된다. 이는 옛 조상들이 굴살이 - 혈거생활을 하였
음을 떠 올리면 사회언어학적인 의미 부여가 어렵지 아니하다. 그러니까 어머니
- 고마(곰)는 우리 겨레의 생명이요, 그 생명이 깃들이는 안식처이자 영원한 그
리움의 언덕이 되는 것이다.
3. 생명의 말미암음
물과 불의 만남 - 생명의 기원
목숨과 어우르기
밥이 하늘
몸과 묶음
옷이 날개인가
겨레와 하나되기
집과 수풀
금 캐는 마동
울안의 복숭아나무
기다림의 미학
고향의 봄은 어디에
황소 개구리
물과 불의 만남 - 생명의 기원
물결의 한 끝은 하늘을 치고
다른 물결의 한 끝은 땅을 치는
무서운 바다에 배질합니다.
(한용운의 '생명'에서)
마음에 둔 그리운 임에게 애틋한 사랑이 쏠리거나 바라던 바를 이룸으로써
우쭐거리며 뽐냄을 이르러 '물 본 기러기 꽃 본 나비'라고 한다.
우리의 삶에 있어 물이란 불과 함께 늘 필요한 물질이다. 물이 없는 곳에
살아있는 존재를 생각할 수 있을까. 물에 어른이 빠져 돌아가셨더라도 우리는
그 물을 마셔야 하고, 온 집안이 불에 타버렸더라도 그 불을 쓰지 않고는 하
루도 살 수 없다. 요컨대 물과 불은 삶의 원초적인 요소가 됨은 물론이려니와
생명현상이 일어나고 이어감에 있어 빼 놓을 수 없는 말미암음인 것이다. 불
의 비롯됨은 태양으로 이어지며 이는 다름 아닌 하늘의 얼안을 대표하는 보람
이 되었다.
그럼 물은 어떠한가. 물이 존재하는 얼안은 땅이요 우리들 삶의 터전이 된
다. 해서 옛적 자연물 숭배를 바탕으로 하는 제정일치 시대에는 부족을 다스
리는 지도자가 불신과 물신을 섬김은 물론이요, 여기서부터 부족장의 절대적
인 권위가 생겼다. 삼국유사 와 같은 옛글에서 살펴보았듯이 불신과 물신
에 대한 숭배는 우리 배달겨레의 한아비이신 '단군왕검'과 바로 맞걸려있다.
필자의 글에서 '단군→제사장, 왕검→불신(태양신 하늘신)=임(니마)/물신(태
음신 땅신)=곰(고마)'으로 풀이한 바 있다. 그러니까 본디 태양신이요 하늘
의 신 '니마(님>임)'는 단군(제사장)의 밖부모인 환인→환웅으로 이어지며, 태
음신이요 땅신·물신인 '고마(곰)'는 웅녀 곧 안부모인 어머니신으로 이어지
는 것이다. 해서 '곰(굼)→흠(흠)→음(움)'으로 말의 소리와 형태가 바뀌면서
오늘날 '어머니'로 되었으니 단군조선 때의 제의문화는 실존해 있었던 우리들
의 실증적인 겨레의 역사가 된다고 하였다. 이는 오늘날 많은 실증주의적인
고고학자들의 살핌에서 밝혀진 바 있다([단군신화의 신연구](1974), 김재원·
[한국사논문선집](1978),손보기).
태양 곧 불은 빛의 샘이요 뿌리됨이니 모든 힘-에너지의 바탕이다. 참으로
위대한 가능성이며 희망이요 밝음지향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전깃불이 없는
세상에서 떠올랐다가 지기는 하지만 이글거리는 저 태양이 없는 누리에 삶의
가능성이란 도무지 그 뜻을 찾아 볼 길이 없다. 해우러름을 문화적인 보람으
로 하는 보기는 아주 보편적이다.
돌그릇문화시대에 우리 겨레를 상징할 만한 빗살무늬토기의 빗살이라든가
고인돌로 일컬어지는 큰돌세우기, 겨레 공동체에서 정착된 농경사회로 바뀌는
길목에서 바뀐 땅이름인 서라벌 사벌 달구벌의 '벌', 거룩한 성소로 불리우
는 '소도(솟대)'등은 모두가 태양신 곧 불신을 우러르는 믿음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오늘날의 인류문명이 있기까지의 에너지 뿌리는 바로 불이다. 옛부터 나무
·불·흙·쇠·물을 오행이라 하여 이른바 동양적인 물질구조의 알맹이로 생
각하여 왔다. 희랍신화에서도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옮겨 사람에게 넘겨준 죄
값으로 벌을 받다가 헤라클레스에게 구원의 손길을 받는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다른 짐승과는 달리 사람은 만물의 으뜸으로 그 자리를 굳혔으니
참으로 불의 힘이란 위대한 것이다. 핵분열반응에서 얻어진 방사성원소 이름
이 '프로메트륨'임은 프로메테우스 불신 곧 태양신과 무관하지 않다.
태양 곧 불은 높은 열과 빛 그리고 에너지를 갖고 있다. 에너지는 흔히 힘
이라고 이른다.
우리말 '힘'은 시골말에서 '심'이라 하거니와 이는 해-태양이란 말의 형태
와 의미의 걸림을 둔다. '심←세다(시다)'와 같이 '세다(시다)'에서 비롯한 말
이라 볼 수 있다. 이남덕의 한국어원 연구(1985∼1986) 에서 풀이한 바와
같이 엿쇄(>엿새) 닷새의 '새(쇄·쌔∼세·쎄∼시·씨)'는 모두가 해를 가리
키는 말이다. 소리의 틀로 보아 맞걸림을 함께 공유하는 탓으로 'ㅎ↔ㅅ'은
많은 넘나듦을 보여준다(형-성·힘-새·희다--시다·헤아리다-세아리다 등).
삼국사기 의 지리지를 중심으로 한 땅이름의 바뀐 과정을 보면 불과 관
계된 땅이름이 신라·백제 지역에서 쉽게 찾아진다. 가령 '-벌'계가 그러한
보기라 하겠다(達句火·推火-達句伐·密伐(密陽)/-夫里(卑離)). 그러니까 '-
벌'의 뿌리는 태양의 빛처럼 환하고 탁 트여 있는 얼안이다.
힘과 함께 '빛'이란 우리말도 '불'에서 갈라져 나온 소리다. 옛말감을 통해
볼 때 '밝(발)-/붉(별)-/빌(빗-빛-ㅂ)'과 같은 낱말겨레들이 있음에서도 알 수
있다. 아울러 온도의 높낮이를 불러 일으키는 '열'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따스
함을 드러내는 옛말은 아래아로 표기되는 '닷다'(향약구급방 상8)인데 말밑으
로 보아 갈림성에 터를 두고 있다. 곧 땅을 말하는 '다(ㅎ)>닷+∼다>닷다'로
만들어진 형태의 짜임으로 풀이할 수가 있다. 마찰을 하면 그 세기에 따라서
높은 열과 빛을 내기도 하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한마디로 빛과 열 그리
고 에너지, 힘은 해로부터 말미암은 소리 보람들이다.
'임'은 해보다 앞서
하면 태양을 뜻하던 '임'은 '해'보다 앞선다. '임(님)'과 '해'의 관계는 어
떻게 풀이하면 좋을까. 같은 태양을 뜻하기는 마찬가지이나 말을 쓰는 겨레중
심으로 볼 때 임(님)계는 원주민격인 한반도와 중국의 동북부에 이르는 곰토
템을 믿는 맥족의 말로 보인다. 이는 사회변동의 요인으로 짐작한 것인바 실
증사학의 동구권 학자들에 따라서 이미 학계에 알려진 적이 있다(고조선
(1990), 유엠부찐 등). 한편 '해(새)'는 알타이 산맥에서 시베리아쪽에 이르는
쇠그릇문화의 지배족인 예족의 말이다. 그러니까 예족이 맥족을 다스리게 되
면서 '님(임)·새(해)'가 같이 쓰이다가 차츰 '해(새)'계로 옮아간 것으로 보
인다.
한국을 드러내는 푯대는 태극기인데 이때 태극은 성리학에서 이르는 물과
불을 상징하는바 흔히 음양으로 풀이한다. 음양이 모든 물체를 빚어내는 뿌리
임을 인식하는 게 성리학의 기초요 [훈민정음]제자해의 밑바탕이다. 보통 목
숨-생명을 풀빛으로 표시한다.단적으로 풀은 모든 목숨들의 보람으로 이해되
기에 이른다. 모름지기 살아있는 목숨살이들은 물 불과 함께 파란 생물이 있
음으로써 살아간다. 빛깔의 어울림과정을 보면 불색으로 보이는 주황과 물의
푸른색을 어우르면 초록이 된다. 꿈과 희망을 불러 일으키는 무지개를 보라.
가장 가운데의 색깔이 초록색이 됨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거의 대칭관
계에 있는 불색과 해의 주황색이 빚어낸 색채의 어울림 가락이라고 할까.
그럼 물과 불이 합하여 풀이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우리말로 본 이 세 가지
요소의 서로 맞걸림은 어떻게 볼 것인가. 물-불-풀에서 같은 소리인 중성과
종성을 빼버리면 결국'ㅁ-ㅂ-ㅍ'이 남는다 이 세 소리는 두입술에서 나는 두
입술소리로 소리냄틀이 서로 다를뿐 그 밑이 되는 소리상징은 같다. 소리의
발달단계로 보면 'ㅁ- ㅂ- ㅍ'으로 그 기초가 되는 소리는 'ㅁ'이다 여기에
무성파열을 더한 것이 'ㅂ'이요, 터짐소리와 거센 소리를 더한 게 'ㅍ'이다.
거센 소리는 일종의 갈림성을 밑으로 하는바 물과 불이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생겨난 것이 바로 '풀'이다.
우리말로 본 목숨살이의 말미암음은 물론 물과 불의 서로 만남에 터한 그
보람이며 물과 불에서 풀로 가는 맞걸림의 논리다.
목숨과 어우르기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떨어지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아예 눈을 감네
한 목숨이 열리고 닫히는 생명의 미학을 노래한 이호우님의 글이다. 하늘
과 땅이 어우러지고 보이지 않는 손이 있으므로 태어나는, 더불어 하나가 되
는 상징이 피는 꽃으로 옷을 입는다. 살아있음은 분명 큰 축복이요 즐거움인
것이다. 무릇 모든 목숨살이들은 숨이 붙어 있어 살아간다.
대체 숨이란 무엇이며 숨이란 말에 드러난 겨레들의 소리보람은 어떠한가.
흔히 사람이나 짐승이 코나 입으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기운 혹은 그렇
게 하는 일을 숨으로 풀이한다. 호흡이라 하거니와 들이마시는 숨을 들숨이라
하고 내쉬는 것을 날숨이라고도 이른다. 들숨-날숨의 되풀이가 호흡의 바탕이
요, 이로 말미암아 호흡작용의 가락이 일어난다.
요즈음 쓰레기 줄이는 운동이 한창이다. 어떻게 하면 재활용을 할까를 놓고
걱정이 많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의 부아-폐에서 나오는 쓸모없는 남은 숨은
못 쓰게 된 공기가 아니라 사회생활의 결정적인 도구이자 사람이 말을 하는
존재로 서게하는 바, 말글살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날숨은 2센티 전후의
성대를 울리면서 빠져나와 입과 콧구멍 사이를 거쳐 혀와 더불어 홀소리와 닿
소리를 만들어 낸다. 이 소리로 사람의 슬픔과 기쁨 같은 느낌과 생각을 드러
내기에 이른다. 들숨이 있으면 날숨이 있게 마련. 하면 숨이란 말의 밑바탕은
어떠하다는 말인가.
코를 곤다고 할 때 코의 바탕을 '골'에서 찾을 수 있듯이 '숨을 쉬다'에서
숨의 바탕은 '쉬다'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움직씨 '쉬다'는 이
름씨 '쉬'에 접미사'-다'가 어우러져 이루어진 형태다. 중세어에서는 '쉬'의
모음이 복모음이었으므로 '수이'로 읽어야 된다. 그러니까 '수이→쉬'로 발달
해 온 것이다. 하면 '수이'란 바뀐 과정으로 보아서 무엇인가. 소리가 바뀐 과
정으로 보아서 '숫(슷)+-이>수시>수 >수이>쉬'로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숫-슷'은 표기상 서로가 같은 뜻을 보여 주며 '사이·구멍(훈몽자회-
슷間)'을 뜻하는 말로 떠오른다.
'숨'은 '사이'
'숨-사이'의 걸림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바탕으로 시골말을 또다른 보기
로 들 수 있다. 정수리가 채 굳지 않아서 숨을 쉴 적마다 팔딱거리고 뛰는 곳
을 '숨구멍'이라 하지만 평안도 지역에서는 '숫구녕' 혹은 '숫구멍'이라고 하
며 함경도에서는 '숫궁기'라 이른다. 해서 '숨-숫'의 서로 맞걸림을 알아차리
게 된다. 한편 옛 글에서는 숫구무(두창집언해) 숫굼(분문온역방) 쉬구멍(물
보) 쉬궁(훈몽자회)으로 드러나 보이는데 모두가 '숨-숫(쉬)'의 대응성을 보이
고 있다. 심증이 간다고는 하나 숫을 '사이'로 볼 수 있는 더 확실한 보기는
없는 걸까. 글쓴이가 보기로는 '숫'과 '슷'의 걸림이라 하겠다. 먹는 무의 일
종으로 순무를 유씨물명 에서는 '숫무우'라고 하며 분문온역방 에서는
'숫무수'라 한다. 그럼 '숫-슷'이 표기상 서로 모음만 다른 형태라 하겠다.
한데 훈몽자회 에서는 '슷間'으로 풀이하였으니 마침내 숫(슷)이 '사이'를
뜻하는 말들임을 알게 된다.
외롭고 힘들 때면 휘파람이라도 불어 보자고 한다. 휘파람도 두 입술 사이
에서 날숨에 따른 바람이 서로 갈리면서 입술을 울려 소리를 낸다. 사투리로
휘파람을 쉬파람이라 하거니와 이같이 소리 나는 이치가 달라도 소리를 내는
방법이 같으면 들리는 소리의 느낌은 같은 갈림소리로 느껴지게 된다. 모든
언어에서 시옷(ㅅ)소리는 시끄러운 마찰음으로 나거니와 이는 바로 조직이나
물체 사이에서 서로 갈려서 나는 두드러진 소리의 보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 뿌리에서 많은 가지들과 잎새들이 돋아나 살아가듯이 말 또한 예서 크게
다르지 않다. '사이'라는 뜻 바탕에서 풀이할 수 있는 숫(슷)에서 비롯되는 말
의 겨레로는 어떠한 형태들이 있을까. 모음이나 받침의 자음들이 바뀌어 말들
의 겨레들이 움 솟아 갈라져 나간 것들이 있다. 예컨대 '숫(숯)-숟(숱)-술/슷
(숯)-슬' 등이 그 뼈대를 이룬다 하겠다. 먼저 '숫(숯)'의 경우를 들어보자.
'숫'이 드러내는 뜻 바탕으로는 ①깨끗하고 순진하다 ②수컷 등으로 풀이하는
데, 앞의 경우, 나무나 풀의 가지 또는 뿌리 사이에서 처음으로 돋아나온 부분
을 싹이라 할 때 이 싹의 상태를 이른 걸로 보이는데 이는 싹의 옛말로 '사
이'를 드러내는 '삿'에서 갈라져 나온 형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수컷으로
본 것은 몸에서 밖으로 솟아나온 수컷의 성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가령
'숫'에서 모음이 바뀌고 다시 말의 머리에서 터짐갈이소리로 되면 '숫-솟-
좃'이 한 겨레로 묶일 수 있는 갈래말들이 되지 않는가.
그럼 '숫-숯'의 걸림은 어떠한가. 먼저 소리로 보면 '숫'의 받침이 갈이소
리로부터 바뀌었으니 자연스러운 소리의 피어남이라 할 것이다. 소리를 내는
사람에 따라서 '숫이 좋다, 숫이 잘 탄다'라 함을 보면 시옷(ㅅ)에서 치읓(ㅊ)
이 갈라져 나왔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뜻으로 보면 '숯'은 완전히 생나무도
아니며 그렇다고 모두가 재가 되어버린것도 아니질 않는가. 그 '사이'쯤 되어
언제든지 여건만 되면 다시 탈 수 있는 땔감이 바로 숯인 것이다. 이런 까닭
에 땅이름에도 숯고개·숯재·숯뫼 등의 이름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현
실적으로 숯의 생산과 직간접으로 걸림이 있을 수도 있긴 하겠지만.
아울러 숯은 물기를 빨아들이거나 독성을 중화시키기 때문에 가볍게 물을
거르거나 간장을 만들 때 장독에 넣는다. 상징적으로 나쁜 기운을 미리 막아
내기 위하여 애기 낳은 집 대문에 금줄을 맬 때 반드시 숯을 넣어 맨다는 것
도 그럴듯함이 있는 습속이라 여겨진다. 숫가락·숫가마·숫간(몸채 뒤에 자
그맣고 낮게 지은 땅이나 객실)·숫구(경상)·숫구뎅이(제주)·숫기(숯-함경)
·숫나사·숫놈·숫눈(쌓인 대로의 눈)·숫밥(손대지 않은 밥)·숫사람·숫색
시·숫증(부위 사이에 물이 고이고 붓는 증세)등이'숫-'계열의 말들이고, 숯
가루·숯가마·숯구이·숯막(숯 굽는 사람들이 쓰는 집)·숯 자동차·숯장이
들은 '숯-'계열에 드는 낱말겨레들이다. 여기에 같은 뜻의 한자말을 넣는다면
더 많은 말들의 겨레를 들 수 있음은 물론이다.
발효시켜 마시는 게 술
가다보니 배 부른 독에 설진 강술을 빚는구나
조롱곳 누룩이 매와 잡사오니
내 이를 어찌 하리오
('청산별곡'에서)
이와 함께 '숟-술'의 경우는 어찌되는가를 생각해 보자. 흔히 밥이나 국물
따위를 떠먹는 기구를 일러 숟가락이라고 한다. 음식물 사이에 숟가락을 넣어
필요한 만큼의 먹거리를 마시거나 먹는다. 약이나 조미료의 경우도 숟가락 혹
은 술 단위로 저울질하여 쓰는 수가 종종 있다. 자리잡고 살 때 그 사람 밥술
깨나 먹는다고 하며 거지가 동냥할 때 밥 한술 주슈 한다. 하면 '숟-술'은 같
은 뜻으로 쓰이는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받침에서 디귿(ㄷ)이 리을(ㄹ)로 바
뀌었는데 이는 우리말에서 흘림소리되기라 하여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럼 마
시는 술은 어떠한가. 우선 보기로는 도구로서의 '술'하고 동음이의어로 보인
다. 기록으로 본 술의 역사는 오래다.[삼국지]를 보면 하늘제사를 모실 때 술
이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다(連日飮酒歌舞聲不絶). 술은 날 것도 썩은 것도 아
니면서 곡식을 뜸팡이로 처리 보존한 것이다.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종교와
행정을 함께 다스려 간 지도자-스승의 시대였으니 제사 음식에도 그러한 가
운데라는 의미 부여가 있음직하지 않은가.
술에 취한 이를 송강은 [관동별곡]에서 취선이라 하였거니와 술은 신과 인
간이 하나되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하나이게 하는 촉매제로 쓰일 법
하다.
사람을 사회적 존재로 풀이한다. 혼자는 살 수 없듯이 숨을 쉬면서 살아 있
음도 들숨과 날숨의 상호작용이며 부분과 부분 '사이'에서 일어나는 어울림의
하나됨인 것이다.
밥이 하늘
덜커덩 방아를 찧어서
거친 밥일망정 맛있게 지어 보세.
부모님께 드린후에 행여 남는 밥이 있으면 내 먹어 볼꺼나.
지은 때나 지은이를 알지 못하는 고려시대의 방아 찧는 노래(相杵歌)다. 열
성으로 일을 해서 방아를 찧어 밥을 지어도 자신이 먹을 밥이 넉넉지 않음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다.
밥을 하늘이라 한다. 금강산 구경이 좋기는 하지만 밥을 먹은 후라야 제 맛
이 나는 법. 오늘의 세상살이와는 참으로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 먹다 남
은 음식 찌꺼기 때문에, 남아도는 오래된 쌀 관리 때문에 일천억원을 웃도는
돈을 써야 하지 않는가. 지금도 우리가 사는 지구 어디에선가는 먹거리가 없
어 굶어 병들어 죽는 사람들 소식이 자주 신문에 오르내린다. 우리가 먹거리
를 스스로 해결한 것은 겨우 이십여 년.
따지고 보면 쌀은 남아 도는데 남의 나라에서 많은 양의 먹거리를 사들여
야 하니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정말 잘못이지.
시간을 거슬러 고려 중엽때의 문헌인 계림유사 를 볼라치면 방아노래에
서처럼 엄청나게 먹거리 곧 밥거리가 모자란 것으로 보인다. 논에서 벼와 함
께 자라지만 잡초로 여겨 뽑아버리는 풀을 '피'라고 한다. 이 피로 물건 값을
정해 물건을 서로 바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옛날에는 옥수수 피 벼 수수 호밀 콩을 통틀어서 여섯가지 쌀이라 하
였거니와 곡식의 낟알을 모두 쌀이라 하다가 지금은 벼의 열매껍질을 벗긴 알
맹이만을 이른다. 이것만으로는 먹거리가 충족되지 않았을 뿐더러 정착하여
여름지이를 한 뒤에도 나무열매나 풀뿌리로 모자란 부분을 때워 나갔던 것이
다. 나무열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밤'이라 하겠다.
삼국유사 권4에 전해오는 밤나무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 원효의 어머니
가 해산기가 있을 즈음 지금의 경산땅 불지촌이란 마을의 밤나무 밑을 지나다
가 미처 집에 닿기도 전에 아기를 낳게 되었다. 남편이 밤나무에 옷을 걸어
막아주었다 하여 이 나무를 사라수(詐羅樹)라 했으며 열매 또한 이상하여 '사
라밤'이라 불렀다. 이곳에 있던 절을 주관하는 사람이 절머슴에게 저녁 끼니
로 밤 두개씩을 주었다. 절 머슴이 그 양이 적음을 관청에 알리자 관원이 이
를 이상하게 여겨 그 밤을 가져다가 알아보았다. 밤 한개가 바릿대에 하나 가
득 차므로 오히려 밤 한개씩만 주라고 판결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율곡(栗谷)
곧 밤골이라 하였으며, 원효가 집을 나온 후 그 집을 절로 삼아 초개사(初開
寺)라 하고 사라밤나무 곁에 절을 지어 '사라사'로 부르게 되었다.
옛 사람들은 밤과 대추 복숭아 오얏 살구를 5과라고 불렀으며, [청산별
곡]에서는 머루·다래를 먹고 살아가는 산 속의 삶을 부분적으로나마 드러낸
다. 이 밖에 풀의 열매로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물론 여기서는 피와 벼를
빼 놓고 나무열매에 맞먹는 경우를 살펴보자.
삼국유사 권2에 보이는바, 저 유명한 [서동요]의 바탕글을 생각해 보기
로 한다.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서동은 늘 '마(저)'를 캐어다가 팔아서 생
계를 이었다. 선화 공주를 사모한 나머지 머리를 깎고 서울로 와서 마을 아이
들에게 '마'를 준 대가로 자신이 지은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하였으니 이 노래
가 바로 [서동요]다.
'마'는 덩이뿌리로서 약용으로 쓰이며 뿌리에서 나는 싹을 먹기도 한다. 지
금은 약용으로만 쓰이지만 옛 기록으로 보아 식용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물 속에서 자라는 풀로서 '마름'이라고도 하며, '말'이라 하는 경우는
어떤가. 훈몽자회 를 따르자면 민물 또는 바닷물에서 자라는 풀을 '말[m
l]'이라 한다. 문종 임금이 풀이해 적기로는 '말왐'이라 하였으니 '머구리밥
빈(頻)'을 '말왐 빈'으로 드러내었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지금도 마름을 '말
밤'이라 이르니 '말밤→말왐(말암)'으로 바뀌어 간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글
에 이르기를 물에 잎이 뜨는 말은 조(藻)요, 가라앉는 것은 빈이라 하였다.
유씨물명고 에서는 마름 또는 말밤을 '물밤(水栗)'이라 하였으니, 그럼'머구
리밥'의 '밥'과 말밤의 '밤' 사이의 걸림은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
끼니로 먹는 모든 음식을 '밥'이라 한다. 더러는 동물의 먹이(미끼)로 풀이
하기도 하며, 좁혀서 쌀·보리·좁쌀 따위의 곡식을 씻어서 솥 같은 것에 안
치고 물을 부어 낟알이 풀어지지 않도록 끓인 음식을 일컫기도 한다. 그러니
까 크게 보아 개구리 곧 머구리밥이나 사람이 먹는 말밤이나 모두가 밥이 되
기에 충분하다.
'밥'은 '밤'에서
밥을 만드는 게 심
그게 진짜 심이지
(조재훈의 '물로 불'에서)
글쓴이가 보기로는 '밥'이란 말은 '밤'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고대
사의 비교언어학적연구 (강길운,1990)에서는 지리지의 마주걸림(栗木→冬斯
)을 떠 올려, 터키어 계통의 밤나무-거스다네(kestane)가 쓰이고 있음을 보이
면서 지금의 밤과는 거리가 있을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방언에 따라서 겨울
을 일러 '겨슬·거실·겨실·기실'로 함을 보면 그럴듯한 대응이 보인다. 밤
송이에 가시가 돋히듯이 생긴 말밤(마름)을 '거ㅅ연밥 검( )이라 함은 더욱 그
러한 믿음을 갖게 한다. 우리말을 중심으로 하면 밤송이에 가시가 많이 돋혀
찔리면 아픈 것처럼 겨울은 춥고 지내기가 어려움을 뜻하는 걸림을 찾아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겨슬(거슬)이라고는 하지도 않으며 모두 밤이라 부른다. 나무열
매로서 밤이나 물풀 열매로서 말암(말밤·마름)은 모두 딱딱한 껍질을 벗겨내
고 그 알맹이를 요리하거나 날것으로도 먹게 된다. 물론 유씨명물고 에서
도 그렇게 풀이하고 있다.
그럼 밤이란 말은 무엇을 벗겨낸다는 말에서 온 것은 아닐까. 우선 '밤'은
밤나무열매·놋그릇을 부어 만드는 틀, 어린 송치가 어미 뱃속에서 먹고 자라
는 물결이란 뜻 등으로 두루 쓰였다. 우리말 방언을 보면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길게 소리나는 '바암(대구), 바:ㅁ(경상도)'과 같은 소리꼴들이
눈에 띈다. 벼나 보리가 채 익기도 전에 이삭을 훑는 일을 '풋바심'이라 한다.
본디 바심이란 집 지을 재목을 연장으로 깎고 파고 하는 일을 말한다. 방언에
따라서는 '바슴·바심'이라 한다. 신증유합 같은 옛말글 자료에서는 '부수
다(碎)'는 뜻으로 자주 쓰였다. 결국 불필요한 부분만 들어내는 것이다. '바스
러지다'나 '바심'은 말의 됨됨이로 보아 겉(表·外)을 뜻하는 '밧(벗)' 동사파
생접미사 '∼다'가 붙어 된 말들이다. 한마디로 '벗겨냄 떨어냄 어떤 틀에
서 벗어남'으로 뜻의 보람을 풀이할 수 있다고 본다. 하면 고대사의 비교언
어학적 연구 의 풀이와도 크게는 같은 흐름에서 그 쓰임을 간추릴 수 있다.
이제 '밤→밥'이 된 과정을 따져 보자. 형태가 갈라져 쓰이는 틀 가운데 모
음이나 자음이 바뀌는 것이 으뜸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ㅁ→ㅂ'으로
바뀌어 형태가 달라진 것이다.
그럼 낮과 밤의 '밤'은 어떠한가. 먹는 밤의 소리가 더 길다. 바탕은 같을것
으로 보인다. 낮의 모습에서 벗어나면 밤이 되고 밤에서 낮이 비롯된다. 이러
한 밤의 어두운 틀 속에서 빛을 인식하게 되며, 비로소 세상에 눈을 뜨게 된
다. 그 빛깔도 먹는 밤과 크게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검은 색은 신의 영지요,
큰 가능성이기도 하다.
나무열매로서 밤의 생산이 중시된 것은 땅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가장
많은 예는 밤골 밤고개 밤나무 밤밭 밤실 밤가지 등이다.
'마-말'과 '벼-피'의 풀이를 덧붙이자면 '마'는 ㅎ끝소리명사로 아예 윗말
에 붙어 '마(ㅎ)-맣-맛-맏-말'로 발달한 것이요, '벼-피'는 같은 '비'에서 비
롯한 것이다. 경상도에서는 벼를 '비'라고 함이니, 거센소리가 없던 때에는 피
를 '비'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밥 한알이 귀신 열을 쫓는다 했거니와 음식을 소중하게 여길 일이다.
몸과 묶음
이 몸이 생겨날 적 하늘의 뜻을 따랐으니
일평생의 일을 하늘이 모를까
이내 몸이 젊어 있고 임께서 날 아껴주시니
이 사랑과 애틋한 마음을 어디에다 비길까.
참으로 찐더운 사랑의 마음이 드러나 있다. 신하로서 임금에 대한 그리움이
이에 이르면 가히 정겨운 그 무엇이 있을 듯하다. 널리 읽히는 송강이 지은
<사미인곡>의 머리글이다. 글의 끝부분에 가면 몸이 죽어 벌나비가 되어 임
의 옷에 옮아 다니면서 꽃 향기를 전한다는 마무리를 하고 있다.
신외무물(身外無物)이라. 제 몸을 잃을진대 온 누리의 물질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한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충성을 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흔히 왜 사느냐고 묻는다. 여러가지의 대답이 있을 수 있다. 살아 있
는 존재로서의 생물은 제몸보존과 씨알보전의 목적으로 살아간다고 한다.여기
보존의 중심은 '몸'이다.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 주는 이를 몸알리-지기(知
己)라고 하거니와 몸이란 여러가지 복합적인 쓰임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옛부
터 몸의 관리를 중요하게 다루었으며 신(身)·언(言)·서(書)·판(判)이라 하
여 몸의 생김새를 사람 저울질의 큰 자로 삼아 왔지 않은가.
살아가는 우리네 둘레와 몸을 고리지어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좋은 음식을 찾기도 하며 온갖 옷감이나 집 지을 재료들을
마련하기에 매우 바쁘다. 하루도 걸름이 없이 먹는 먹거리도 그 뿌리는 모두
가 목숨이 담기는 몸들이다. 쌀이 그렇고 맛있게 먹는 고기들이 그러하다. 본
시 사람 때문에 태어나 일생을 마치는 목숨살이들이 몇이나 될 것인가.
사람의 목숨이, 몸이 값진 것이라면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먹고
살아 감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양만큼의 물질은 있어야지. 다른 생물의 몸이
나 목숨을 어떤 즐김의 대상으로 함은 분명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죄업이지).
'몸'이란 무엇인가. 짐승이나 사람의 머리로부터 발까지 그에 딸린 모든 부
분을 일컬어 몸이라 풀이한다. 우리말 '몸'에 드러난 겨레들의 깨달음 바탕은
무엇이며 예서 비롯하는 말들의 겨레로는 어떤 형태들이 있을까.
몸을 이루는 부분으로는 제각기 다른 구실을 하는 많은 기관들이 있다. 눈
코 귀 입이며 머리로 이루어지는 얼굴,목 가슴 배 허리 궁둥이 등의 몸체부분
이 있으며 여기에 나뭇가지처럼 달려 있는 팔 다리며 이에 붙어 있는 손 발은
말할 것 없고 다시 이에 딸린 손발의 가락들이 있다. 사람의 몸을 일러 작은
우주라고도 한다. 침뜸을 주로 하는 한의학에서는 침 놓는 자리를 경혈(經穴)
이라 이른다. 그 수는 지구가 자전하는 삼백육십여개로 본다. 우연으로 보기에
는 상당한 마주걸림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니까 우리 몸은 크고 작은 부분
들이 모여 유기적인 걸림을 조화있게 이룸으로써 목숨 보전에 필요한 에너지
의 공급과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뼈만 해도 그렇다. 해부학에서는 우리 사람의 몸에는 약 200개 가량의 뼈가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뼈는 석회질과 아교와 같은 교질이 단단하게 엉겨 붙
어 소화기 등의 내장을 보호하고 운동의 거멀못 노릇을 한다. 쇠로 만들어진
못을 박아 두 개 이상의 물질을 결합시킨다. 이를테면 몸의 뼈가 못과 같은
구실을 한다고나 할까. 한마디로 몸은 여러 부분들이 질서 있게 모인 아주 정
교한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이란 모인 것
그러면 작은 부분들을 모아만 놓으면 목숨살이가 가능할까. 그렇지는 않다.
가령 집의 경우를 더듬어 보자. 나무와 벽돌과 기와 등 필요로 하는 물질이
있다고 해서 집의 기능이 살아 오르지 않는다. 요컨대 몸도 보다 작은 부분들
이 일정한 질서의 흐름을 따라 결합되고 해체되며 이러한 신진대사가 되풀이
될 때에만 삶의 교향악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되지 않겠는가. 하면 '몸'이
란 말이 한데 어울려 이루어진 '결합체'란 말인가. 그러한 말의 발전과정과
속사정은 어떠한가.
우선 '몸'이 쓰이는 시골에 따라서 조금씩은 다른 경우를 들어보기로 한다.
예천·문경 등지에서는 몸떵어리, 경상 전라 강원도의 일부에서는 몸뚱아리,
전남 영광에서는 모뚜이, 양산에서는 몸디, 남원·임실·예천 등지에서는 몸떼
이, 산청 등지에서는 몸띠이라고 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풀이가 다르겠으나 몸
떵어리가 상당한 실마리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이르자면 몸떵어리는 몸과 덩
어리가 어우러져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덩어리는 덩이라고도 하는바 작은 부
분들이 모여 이룬 떼를 가리킨다. 몸데이란 것은 몸덩이의 덩이에서 모음이
바뀌어 일어남이요, 몸띠이(몸띠)는 데이→디이(디·띠)와 같이 모음이 쉽고
편한 전설모음으로 된 결과로 풀이할 수 있다.
'몸'이 '모으다'에서 비롯되었다면 어떨까. 여럿을 한 곳으로 오게 하거나
돈이나 물건을 저축하는 일, 또는 담 등을 쌓아 올리거나 나무의 여러 쪽을
짜맞추어 배를 만드는 움직임을 통틀어 '모으다(모다)'라 이른다. 하면 움직임
을 드러내는 동사의 어간 '모으∼'에 명사형 어미(ㅁ)이 붙어 음절이 줄어지
면 '모음→몸'이 되어 긴 소리로 내게 된다.
'모으다'는 기원적으로 같은 뜻을 드러내며 이륜행실도·노걸대언해 등
에 보이는 '못다'에서 발달해 온 낱말겨레가 아닌가 한다. 짐작하건대 '못'에
조음소 '으'와 동사화어미(-다)가 붙으면 '못으다→모스다→모 다→모으다'
로 된다. 그럼 여기 '못'은 무엇을 드러내며 '모으다-모음-몸'의 몸과는 어떤
걸림이 있는 걸까. 훈민정음해례·아언각비 등의 자료를 보면 연못의 못
(池)과 쇠로 만드는 못(釘)과 같은 뜻이라 적고 있다. 앞의 경우 넓고 깊게 팬
땅에 늘 물이 괴어 있는 곳이다. 못은 다른 곳보다 낮으니까 늘 다른 곳에서
물이 흘러 들어온다. 곧 여러 줄기의 물들이 함께 모이어 이루어진다. 뒤의 경
우는 두 물건을 하나로 결합시켜 모이게 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옛글에서는 못이 'ㅁ'으로도 적힌다( 왜어유해·훈몽자회 ). 오늘날의 '모
두·모든·ㅁ다(제주도)'와 같은 말은 예서 비롯한 말의 겨레들임을 알 수 있
다. 홍명희의 임꺽정 에서 '한 달이 채 못 되어서 육천명이 ㅁ이었다'의
'ㅁ이다'도 같은 경우라 하겠다. 지역에 따라 같은 말이라도 조금씩 다를 수
있다. '모이다'의 경우 '모둔다(상주·산청·광양) 못다(정선·제천) 모당께
(마산·함안·창녕) 모단다(부산·마산·함안)'의 말들이 쓰이는데 'ㅁ-'계가
중심을 이루는바 상당히 미더운 보기들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못-ㅁ은 어말자
음의 바뀜에 따른 것이요 뒤로 오면서 갈래져 별개의 말로 굳어지기에 이른
다.
'못'이 모음 곧 모여서 이룸이란 뜻을 드러냄과 관련하여 모음이 바뀌면 못
은 뭇이 된다. 지금도 장작이나 잎나무를 한 묶음씩 작게 추스려 놓은 셈의
단위를 '뭇(束)'이라 하지를 않는가. 혹은 세금을 받을 때 계산하기 위한 땅
넓이의 단위도 뭇이라 하며 수효가 많음을 드러낼 때에도 '뭇-'이란 말조각
을 쓴다. 잇몸을 왜어유해 같은 말에서는 '닛무윰·닛므음'이라 적고 있다.
여기 '무윰(므음)'의 소리마디가 줄어지면 '뮴(믐)'이 되는데 모두가 '몸'의
또 다른 변이형이라 보면 좋을 듯하다.
'무우'도 묶음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부른다
('사우'에서)
부는 봄바람에 흐드러진 야생 무꽃 - 청라꽃을 보노라면 벌써 내 지나쳐
버린 유년의 뜨락이 눈에 선하다.
일상으로 우리는 밥과 함께 배추와 무우김치를 먹는다. 이 때 '무우'도
'뭇'과 걸림이 있는 말로 보인다. 시골말의 쓰임을 보면 흔히 무시·무수·무
꾸와 같은 말이 많이 사용됨을 알 수 있다. 500년전 무렵의 두시언해 를
보더라도 무우를 '무 '라 하였으니 이를 한데 간추리면 '무수(무시)-무 -무
우'와 같이 됨을 알겠다. '뭇'과 무우는 어떤 걸림이 있을까. 본디 무우는 겨
자과에 딸린 한 해 또는 두 해살이 풀로서 잎은 뿌리에서 무더기로 모여 나고
자줏빛 혹은 흰빛의 네잎 꽃이 '무더기'로 피어 올랐다간 지고 그 자리에 열
매들이 무더기로 꼬투리 안에 열린다. 시골말에서 무우를 '무꾸'라 했거니와
이는 '뭇(못)'이 이른바 기역(ㄱ)으로 끝이 나는 말조각과 같이 쓰이어 특수변
화를 하는 명사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흔히 기역 종성체언이라 하는바, 때로는
위엣 말의 받침이 되어 아예 굳어져 녹아붙기도 한다. 가령 '뭇(ㄱ)다>ㅋ>묶
다(묶음)'도 그러한 보기라 할 것이다. 시옷이 기역에 거꾸로 닮아 완전하게
같은 소리로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우리의 몸이 여러 부분을 한데 얼려 한 인간의 영혼을 기르듯이 우리가 살
아가는 거룩한 자연도 하나의 몸-곧 공동체인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이웃이
나 배달겨레로서 같은 핏줄을 나눈 남과 북의 말미암음은 같은 한아비의 몸에
서 갈라져 나왔으매 우리의 몸, 우리 겨레는 하늘이 섭리하는 한 묶음이다.
세상살이란 게 작은 묶음에서 큰 묶음으로 이어지는 고리들이 모여 이루어
지는 어울림. 때로는 삶과 죽음의 모습으로 달라지기는 하나 본디 그 또한 한
몸에서 비롯한 것을. 나 혼자만이 어떻게 해 보겠다 함은 마침내 해 볼 수 없
다는 물음과 고뇌에 부딪히고 마는 것을. 그래 세상은 한 몸이야, 한몸.
옷이 날개인가
차라리 죽은 뒤에 범나비나 되오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가는 데 족족 앉았다가
향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임께서 날인 줄 모르셔도 내 임 좇으려 하노라
('사미인곡'에서)
애틋한 임의 옷에 들꽃같은 향내음을 드리워 주고 싶은 마음. 그것도 살아
서는 안 되니까 죽어 벌나비가 되어서까지도 말이다. 이는 분명 삶과 죽음을
뛰어 넘는 속내 깊은 사랑의 살핌이다. 좋은 음식을 그럴싸 한 그릇에 담아
먹음은 있음직한 일이다. 무릇 모든 내용이란 특정한 형식에 담기게 마련. 윗
글에서 임의 옷은 임의 한 부분이다. 임 자체는 아닐지라도 임을 떠올림에 뺄
수 없는 상징물이 되기에 넉넉하다. 실용 이상의 정서를 일으킴은 물론이요,
사회생활의 한 도구처럼 쓰이는 게 옷이다. 전통적으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
에서 벌거벗은 일을 생각할 수 있을까. 가령 논개나 춘향의 모습에서 단아하
게 차려 입은 치마 저고리며 점잖은 선비에게서 의관을 빼어버린다면 이미 이
야기가 되질 않는다. 말 그대로 옷이 날개인가 보다. 옷의 모양이나 빛깔에 따
라서 사회적인 신분이 다르고 나이나 성의 구별이 뚜렷해 지질 않던가. 군인
은 군복, 학생은 학생복,무당은 활옷, 사제들은 사제복, 승려들은 가사장삼의
승복, 옛적 임금은 곤룡포 등 옷은 바로 그 옷을 입는 사람들의 신분과 취향
이나 같은 집단의식의 상징으로서 쓰여 왔다.
옷이란 무엇인가. 옷이란 말의 뜻바탕과 그 말의 겨레들에는 어떠한 형태들
이 있는지를 더듬어 보도록 한다.
중국의 자료이긴 하지만 우리의 옷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 것은 꽤 오래다.
삼국지 에 이르되 '공식적인 모임에 입는 옷은 금과 은으로 장식하였다.'
고 하여 고구려의 복식에 관한 풀이를 하고 있다. 흔히 금관조복이라고 하거
니와 제도적으로 품계에 따라서 그 빛깔은 물론이요, 장식품이 달랐다. 이를테
면 사대부의 대표라 할 문관은 학의 무늬를 놓은 띠를 했으며 싸움을 지휘하
는 무관은 호랑이 그림을 놓은 호대(虎帶)를 띠었다. 또한 양서(梁書) 에서
는 백제의 말에 대하여 적고 있다. 백제의 말은 거의 고구려와 같았으니 모자
는 관(冠)이라 했고 소매는 복삼(複衫)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신라에 대
하여는 같은 책(양서)에서 몇 개의 말을 들어 보인다. 신라의 말은 백제와 비
슷하다. 모자를 고깔(遣子禮)로, 소매를 우개(尉解)로 적었다.
소개한 자료로 볼 때 오늘날의 '옷'은 우선 신라어 계통의 우개(尉解)에서
비롯하지 않았나 한다. 이렇게 볼 수 있는 바탕은 무엇일까.
문헌자료가 없는 때의 말의 형태는 시골말을 통하여 재구성을 하는 일이 있
다. 이를 일러 내적 재구성이라 한다. 그 대립 개념으로서는 같은 친족어로 보
이는 말들과의 맞걸림을 통하여 알아봄이니 흔히 외적 재구성이라 이른다.
'옷-우개'의 경우 내적 재구성의 방법으로 우리말에서 그 속사정을 따져 보
기로 한다. 같은 말이라도 쓰이는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소리가 다
를 수도 있으며 심하면 뜻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옷'의 경우는 어떤가.
김형규(1986)의 한국방언연구 를 보면 '옷'의 사투리말은 아주 다양하다.
'옷'은 전 지역에서 쓰인다. 그 밖의 우티(경기·강원·평남) 우테(황해·평
님) 오트이(황해·연안·해주) 우트이(함경·황해·경기 일부·강원일부)와 같
은 시골말들이 쓰여 왔다. 그럼 이 말들과 '옷'은 어떻게 맞걸리는 걸까. 중세
국어에서 위·아래의 '위'는 '우'였으며, ㅎ종성명사의 특징을 드러낸다( 석
보상절 등). 하면 우테의 경우, '우(ㅎ)'에 '데'가 붙어 거센소리되기가 일
어 났으니 우(ㅎ)데→우테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테'가 혀앞소리가 되면
'티'가 되어 결국 '우티'가 되지 않겠는가. '옷'의 방언형태 가운데 '우티'가
쓰였는데, 하면 '옷-우티-우개' 같은 말을 뜻한단 것일까. 그렇다면 그리 상
정할 수 있는 말의 질서는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위(上)의 옛말 '우(ㅎ)'에 대한 방언의 형태는 어떠한지 또 이들 형
태 중에서 '우개'와의 걸림은 어떤가에 관하여 더듬어 보기로 한다.
지역에 따른 말의 분포를 보면 위(전지역) 우(전지역) 우이(김포) 우그(익산
·부안·고창·정읍)우구(전주) 우게(전라도)의 말들이 쓰임을 알 수 있다. 여
기서 '우그-우게' 특히 '우게'는 옷의 글말인 우개(위개)와 같은 형태라는 암
시를 얻기에 충분하다. 우개의 '개'에서 모음이 바뀌면 바로 '우게-우그(우
구)'와 같은 형태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해서 우-우개(우게·우그·우구)-옷이
맞걸리니 마침내 '옷'이란 말은 '위(우)'란 등식이 이루어진다. 먼저 우-옷의
형태가 다른 것은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따져 보자. ㅎ종성명사
의 ㅎ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변해가는 과정을 보면 여러 형의 소리(ㅎ-ㅅ-
ㄱ-ㅇ)로 바뀌어 윗말의 받침으로 녹아 붙어 쓰이기도 한다(살코기-셋·웃-바
둑(바돌(ㅎ)→바ㄷ→바독→바둑)-땅·지붕(집우(ㅎ)→지부(ㅎ)→지붕)·요컨대
'우(ㅎ)→웃'이 되고 다시 모음이 바뀌게 되면 웃-옷의 형태가 서로 같은 '우
(위(上))'를 뜻하는 말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일본말에서
옷을 오스히(褶)라 하는데 우리말의 옷이 건너가 쓰인 가지말에 드는 것이 아
닌가 한다.
옷은 피륙과 천 따위를 몸에 걸침으로써 추위와 더위를 다스리고 몸뚱이를
가리기 위하여 사람이 입는 물건으로 풀이된다. 한마디로 옷은 몸'위'에 걸치
는 것. 몸이 주인이라면 옷은 그에 딸린 따름붙이다. 옷 없이 살 수는 도저히
없겠지만 실로 거추장스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옷은 살아감에 있어 사회적인
물리적인, 심미적인 바람의 주요한 부분을 메워 준다.
뿌리가 있으면 그 곳에서 말미암는 많은 가지와 잎새가 있기 마련. 위를 뜻
바탕으로 하는 '옷'을 뿌리로 하여 갈라져 나온 말의 겨레로는 어떤 낱말이
있을까.
'옷'의 낱말 겨레들
말이 갈라져 발달해 가는 틀로서 소리의 바뀜과 소리의 덧붙임과 줄이기 등
이 있다. '옷'의 경우 어말자음 시옷(ㅅ)이 터짐갈이 소리 'ㅊ'으로 바뀌면 곧
'옻'이 된다. 칠하는 칠감 또는 살이 닿아서 가렵고 부어 오르는 피부중독을
이르는게 옻이다. 한데 중세어 자료를 보면 입는 옷이나 칠로 쓰는 옻이나
모두가 '옷'으로 적힌다(법화경언해·석보상절등). 같은 형태로 쓰이다가 칠이
란 뜻으로 쓰이는 '옻'으로 새끼를 친 셈. 옻나무의 진은 검고, 옻칠을 해서
장식의 값어치를 더한다.
생각해 보면 장농에 입히는 옻칠도 끝내는 가구 붙이의 나무 '위'에다 입힌
다. 마치 우리 몸 위에 옷을 걸치듯이 말이다. 볼거리로서 겉모양은 물론이요,
그 향긋함이며 옻의 독성으로 벌레가 장농을 해치지 않게 함은 우리 옛 선인
들의 슬기라 하기에 넉넉하다. 피부병으로 '옻이 올랐다'고 할 때에도 옻이
옮음으로써 살갗의 위가 가렵고 부어 오르니 어떤 물체의 윗부분에 걸림을 둔
모습에 틀림이 없지 않은가.
옷과 걸림을 보이는 말겨레로는 '옷깃·옷고름·옷걸이·옷가슴(옷이 가슴
에 닿는 부분) 옷매무시 ·옷감·옷공젱이(옷걸이의 한 갈래) 옷끈·옷단·옷
섶·옷자락·옷잔치(패션쇼)옷주제(차림새)옷치레'와 같은 낱말들이 있는데 한
자어로 이루어진 의(衣)∼계의 말까지 합하면 그 수는 훨씬 더 늘어 난다. 한
편 '옻'을 중심으로 하는 말에는 어떠한 낱말들이 있을까. 주로 옻이 앞에 오
는 복합어의 보기가 많다. 예컨대 '옻기장(검은 기장) 옻그릇(옷칠을 한 그릇)
옻나무·옻병·옻빛(검붉은 옻의 빛깔) 옻칠·옻칠하다·옻타다'와 같은 낱말
들이 옻의 계열에 든다.
옷-옻과 함께 같은 말의 겨레에 드는 형태로는 '올'을 들 수 있다. 소리마
디의 끝에서 '옷-ㅇ-올'과 같이 닿소리받침이 바뀐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ㅇ
칠(구급방언해)옷칠(번역소학)올다(上)석보상절)).
동음이의어로서 실·열매·자람이나 익는 정도가 빠를 때 올벼에서처럼
'올'이 쓰인다. 실의 경우, 몸 위에 걸치는 게 옷이고 그 옷을 올로 짜는 것이
니 모두가 몸 위에 걸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올벼에서와 같이 상대적으로
다른 풀이나 열매보다 앞서는 차례 곧 윗 단계라는 말이 된다.올다의 '올(上)'
은 낮은 데에서 높은 곳으로 옮기는 웃자리 지향의 움직임을 드러낸다.
옷은 위요, 드러남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옷이 다 보이는 것만은 아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마음의 옷이므로.
겨레와 한 몸 되기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 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고지에 대한 그리움. 어느 날에 배달겨레의 그리움이 충족이 될 것인가. 머
리의 글은 노산 선생의 '고지가 바로 저긴 데'라는 시조의 앞 부분이다. 겨레
들은 한 조상에서 말미암는다. 해서 같은 피와 같은 먹거리와 믿음과 그리움
을 운명이듯 이고 살아 온 무리들이다.
목숨살이의 과정에서 씨알보존은 하나에서 여러 갈래로 나누어 이루나니,
거꾸로 이르자면 갈래에 값하는 부분-개체들이 모여서 한 덩이, 한 몸을 이루
었다고 하겠다. 씨족이라고 하는데 이는 같은 성씨를 가진 피붙이 무리를 이
른다. 배달겨레-한민족은 단군에서 비롯하는 한아비의 핏줄을 이은 운명공동
체로서 문화를 함께 누리고 끈질기게 살아 왔다. 역사의 능선을 넘어서 말이
다.
겨레의 밑바탕은 갈라짐 곧 갈래에서 찾을 수 있다. 마치 산봉우리는 하나
인데 물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 뭇가람을 이루듯이 한아비의 같은 핏줄이 많은
사람의 씨앗을 싹 틔워 낸다. 한아비에 값하는 게 몸이다. 몸을 '모으다(集)'
의 파생명사라고 하였는바, 여러 개의 부분 조직들이 모이어서 이루어지는 것
이 몸이 아닌가. 결국 몸이란 겨레에서 겨레로 이어지는 겨레의 모음이 된다.
예술이 발달해 온 모습을 보더라도 종합예술에서 단일예술로 갈라져 나아간
다. 이르러 민송무용(ballad dance)이라 함은 음악·미술·문학·무용이 한데
어우른 미분화 상태의 예술을 가리키는 것이다.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시대를
거슬러 오르면 종합문화의 성격을 띤다. 조금씩 다르긴 하나 부여계나 한계
모두가 비는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나라가 이끌어진다. 부여에는 영고, 고구려
에는 동맹, 예에서는 무천. 이름은 없으나 마한에서도 농사가 시작되고 마쳐질
때에 제의를 통한 생활의 가락을 매듭으로 하여 다스림이 이루어졌던 것. 이
름하여 제정일치의 거룩한 스승문화 시대라고나 할까.
한 민족의 언어와 역사, 학문과 예술은 하나의 원형으로 풀이할 수 있다. 나
중에 갈라져 나오긴 했으나 다른 겨레의 문화와 견주어 볼 때에는 같은 보람
을 지닌 하나의 끈으로 묶임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도 민법에서는
같은 성씨 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민법 809조). 물론 아이를 낳음에
못난이가 출생할 확률이 있음도 한 원인이 되겠으나 그보다도 다른 씨족의 사
람들과 혼인함으로써 더불어 하나되는 삶의 슬기를 제도화한 몸살이 구실에
중심을 두지 않았을까.
고조선의 단군신화에서 보여주듯이 곰신앙을 밑으로 하는 제의문화가 있었
음은 널리 아는 일이다. 이른바 곰 토템의 삶이 오늘에 이르도록 소리상징에
되비치어 쓰이고 있다. 중세만해도 고마-곰은 경건하게 예배해야 할 흠모의
대상이었다. 삼국유사 에서 보여주듯 한 굴에서 호랑이와 곰이 같이 살았
으니 모듬살이로 보면 호랑이 토템의 겨레와 곰 토템의 겨레가 함께 살았으리
라고 상정할 수 있다. 이 때 하늘로부터 환웅이라는 해우러름의 청동기문화를
지닌 강력한 세력이 나타난다. 마침내 사람이 된 곰은 환웅과 혼인을 한다는
것이니 이는 겨레 사이의 큰어우름이요, 더불어 섬에의 몸짓이 아닌가 한다.
한국 사람 성씨 가운데 가장 많은 겨레가 김(金)씨다. 김의 본디 소리는 금
(金)으로 땅이름의 한자 대응관계를 보면 '금-검-감-어머니(母)'의 걸림이 드
러난다. 하면 김씨가 곰 겨레의 정통을 이은 음상징의 거울이라고 하면 어떨
까. 한 겨레가 다른 겨레와의 어울림을 마치 여러가지 영양을 골고루 받아 들
여야 우람한 나무가 되는 것에 비길 수가 있을 것이다. 김(金)자를 한자의 뜻
으로 보면 이는 쇠붙이 곧 청동기 문화를 지닌 해우러름의 알타이 겨레를 드
러낸다. 본디 알타이(Altai)란 말이 쇠붙이를 뜻한다고 한다(aisin(金)(만주)).
방언형으로 보면 '쇠-새-세(쎄)'가 같은 쇠붙이를 뜻하는바, 나중에 새-해(日)
의 형태로 바뀌어 쓰임은 암시하는 바가 크다. 앞에서 일렀듯이 '금'의 소리
는 곰(검-금-감-굼)의 변이형 중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다.
여진족이 세운 12세기의 금(金)나라도 따지고 보면 백두산을 사이해서 북방
의 곰 신앙을 시작으로 하는 곰 겨레가 아닐까.
이러한 풀이를 받아들인다면 한국인의 가장 많은 김(金)씨는 '금'씨로서 결
국 곰겨레의 내림을 이은 겨레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면 단군신화의 곰(검-
금) 토템겨레와 환웅계의 청동기 문화가 서로 녹아붙어 일군 자손들이라 하여
지나침이 있을까.
'겨레'는 가지됨이니
낱말의 짜임을 보면 '겨레'는 '결'에 '-에(애)'가 녹아 붙어 되는데 이 때
기본은 '결'이다. '결'은 음절의 끝소리가 바뀐 열매로서 '겯-결-겻(ㄱ·ㄱ)'
을 기본으로 하는 잔말겨레들임을 알면 '결'의 속뜻을 이해함에 있어 큰 도움
이 될 것이다. 이는 받침의 바뀜을 따라 이루어진 형태들로서 받침에서 말음
규칙을 따라 디귿(ㄷ)에서 발달했다. 밑소리되기를 떠올리면 [겯]이 기본형이
될 것이다. 오늘의 말에서는 거센소리를 거쳐 겯-곁이 되어 쓰인다. '어느 한
군데에 딸린 쪽 혹은 옆'으로 풀이되는바, 이를 바탕으로 하는 말에는 곁가닥
(원가닥에서 갈라진 가닥)·곁가리(갈빗대 아랫쪽에 붙은 가늘고 짧은 뼈)·곁
고름·곁간·곁군(일을 도와 주는 사람)곁길·곁눈·곁 따르다·곁두리(일 할
때 사이 참으로 먹는 음식)·곁말·곁매(제삼자가 싸움판에서 덩달아 치는
매)·곁붙이(촌수가 먼 일가)·곁사돈(친척의 사돈)·곁쇠(대용 열쇠)·곁쪽
(가까운 일가)·곁콩팥 등의 말들이 있다.
중세어로 가면 겯권당(친척)(소학언해)·겯방(소학언해)·겯아래(겨드랑이 아
래)(월인석보)와 같은 낱말들이 보인다. 날개 에서 '겨드랑이가 가렵다'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 겨드랑이도 팔 밑의 오목한 부분을 이르는데 몸에서 갈
라져 나간 부분이란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말밑 '겯(傍)'에
접미가 '-으랑이'가 붙어 된 말이며 시골말로는 흔히 저드랑이로 소리를 낸
다. 해서 혹 젖 옆에 붙어 있는 무엇인가 하는 재미스러운 생각을 할 수도 있
을 터.
'겯-결'의 걸림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받침에서 디귿(ㄷ)이 흘림소리되기를
따라서 이루어진 말의 갈래들이다. '곁'에는 여러가지 쓰임이 있다. 가령 나무
결이라든가 때나 사이의 뜻을, 더러는 물결의 경우가 그러한 보기라고 하겠다.
이들 사이에는 어떤 맞걸림이 있는 것일까. 나무결의 경우,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이루는 상태나 무늬를 이른다. 알맹이는 굳거나 무른 조직이다. 그 조직
체들이 몸이라면 무늬나 상태는 따라 붙는 더움 곧 곁이 아닌가. 겨를이 없다
고 한다의 '겨를'도 마찬가지다. '결'에서 갈라진 말로 하는 일이 본이라면
나머지 부분이나 시간은 곁가지가 되는 것으로 보아 그 뜻의 걸림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럼 물결의 '결'은 어떤가. 마찬가지다. 파도의 높은 부분과 부분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니 물이 몸이요, 그 움직임이 몸이라면 나머지는 따라
붙는 한 겨레에 지나지 않음에서다.
그럼 같은 계열의 겯-겻(ㄱ)에서 '겻(ㄱ)'의 겅우는 어떻게 풀이 할 수 있
을 것인가. 겻(ㄱ) 역시 '겯'에서 갈라져 나아간 형태로 보인다. 중세어의 경
우, 겻(ㄱ)과 함께 어울리어 쓰이는 말 가운데에는 '겯(곁)'과 서로 넘나 들어
쓰인 보기들이 상당수 있다 예컨대, 겻눈질(한청문감) 겻도라이(곁달아)(한중
록) 겻조치일(곁 따른 일)(한청문감) 겻칼(장도)(청구영언) 겻셔다(角立하다)
(법화경) 겻자리(옆자리)(청구영언)와 같은 말들이 그러한 보기들이다. 말의
받침에서 시옷이 말음법칙에 따라서 안으로 터지는 내파음 디귿으로 인식되기
에 이른다. 한편 받침에서 시옷이 터짐갈이를 겪으면 지읒(ㅈ)이 되어 입ㄱ의
'ㄱ'이 된다. 입ㄱ은 입ㄱ 또는 입ㄱ이라고도 적힌다. 한문의 글월을 오해 없
이 읽게 하기 위하여 한문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 붙이는 이음새 부분이다. 한
문의 글이 몸이라면 몸에 달라 붙는 종속물이란 뜻이 아닌가. 이르러 조사나
어미에 값하는 이어감말들이 입ㄱ이다.
겨레는 한아비 곧 한 몸에서 갈라져 나와 이루어진 갈래를 밑바탕으로 한
다. 흔히 말은 기본형에서 일정한 틀을 거쳐 더 많은 낱말겨레를 이룬다. 이르
러 낱말의 가족이라고 한다. 조상의 얼은 겨레들의 핏줄 속에서 가지를 치고
꽃과 열매를 빚는다. 그 열매는 다시 한아비가 묻힌 이 땅 위에 떨어져 다시
태어난다. 고지에의 그리움을 안고서.
나뭇잎이 떨어져 그 뿌리로 돌아 가는 건 예나 오늘이나 같은 거지 뭐(落葉
歸根). 뿌리를 알아야 한다. 겨레의 뿌리를.
집과 수풀
집도 절도 없나. 거처하는 집이나 재산도 없이 이리저리로 떠돌아 다니는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다. 목숨살이 모두에게 집이란 늘 안식과 희망의 샘터
가 된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나 짐승들의 보금자리 혹은 겨레붙이의 한 떼나 물건
을 담아 두거나 끼워 두는 그릇을 싸잡아 이른다.
보금자리는 특히 새들이 깃들이는 둥우리를 가리키며 지내기가 매우 포근하
고 아늑한 장소를 뜻하기도 한다. 옛 적에는 우리들의 한아비들이 바윗굴이나
나무숲 같은 데에서 살았다고 한다.마치 여우나 새가 굴 또는 둥지에서 살아
가듯 말이다.
중국의 자료에서 한민족-동이들은 여름에 둥우리 살이, 겨울에는 굴살이를
했다고 적고 있다(진서(辰書)등). 거리에 따라서는 조금씩 다르기는 하다. 심지
어 굴의 깊이가 아홉개의 사다리가 들어 갈 만큼의 깊고 큰 무덤과 같은 집이
있었다고 한다(삼국지).
여기서 잠시 새들이 사는 둥지와 같은 보금자리에서 살았다는 데 유념해 보
자. 하긴 숲속에서 먹거리로서 열매며 옷감으로서 실오라기는 물론이요, 집 삼
아 나무 위에서 살며 살아있음의 가능성을 키워 나아갔을 법하다.
소리상징으로 보아 집과 숲의 걸림은 없는 것일까. 있다면 소리의 질서는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흔히 밭에 풀을 맬 때 '김'을 맨다고 하며 밥상에 놓는 바다풀은 '김'이라
한다. 먹는 것이나 매서 뽑아 버리는 것이나 모두 풀이 되기는 한 가지이다.
'김'은 '기음'의 줄임말이다 그럼 '기음'은 어떤 소리에서 바뀌어 온 것일까.
'김(草)'을 사투리말로 '기음·기임·기심·지슴·지섬·지심·짐'으로 소
리 내는 일이 있다(최학근(1987) 한국방언사전 참조).
사투리말의 보기 가운데에서 '기심'이 상당한 실마리를 준다고 본다. 시옷
이 모음 사이에서 약해져 떨어지면 '기임'이 되고 한 소리마디로 되면 '김'이
된다. 이 때 모음이 길어지는 기움현상이 일어남은 보편적이다.'기심'의 경우
'깃'에서 갈라져 나온 갈래말이 아닌가 한다. 하면 '깃'은 무얼 가리키는가.
새가 깃들인다고 할 때의 '깃'은 곧 보금자리이다. '깃'은 '굿-곳'의 또 다른
형태로 같은 낱말의 겨레들이다. 더 좁혀서 살피자면 '깃-긷-길'은 같은 계열
에 따라 붙는 말임은 물론이요, 소리와 뜻이 함께 걸림을 보이는 보기들이다.
옛말글 자료를 보면 '긷(내훈(서)4)'은 오늘날의 기둥을 드러낸다. 아울러
'깃'이 기둥 위의 어느 곳에 만들어 놓은 둥우리-보금자리라 하면, '길'은
보금자리로 통하는 통로를 이른다.
사람의 말을 잘 듣도록 짐승을 가르치는 일을 '길 들인다'고 한다. 보금자
리로 들자매 오고 가게 마련이요, 오고 가니까 낯이 익게 되어 있다. 하기야
나쁜 일도 한두 번 길이 들면 자꾸 하게 되니까 말이요.
지렁이도 그 나름의 길이 있듯이 겨레들만이 잘 알고 눈에 익은 길이 있다.
서로가 사는 길이 다르면 공동체가 아니듯이 생존을 위한 수단이나 그릇으로
서의 길이 없으면 살아 남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김-집'의 걸림을 떠 올려 본다. 집은 '김'에서 말미암음은 것으로 보
인다. '김'이 입천장소리되기를 따라 '짐'이 되며 이는 다시 받침이 바뀌어
터지는 입술소리로 되면 '집'이 되지 않는가. 중세말에서 '집'은 '사는 집·
풀짚'의 뜻으로 쓰이다가 뒤로 오면서 서로 독립된 말 '집(家)-짚(지푸라기·
볏집등)'으로 쓰이게 된다.
집은 숲이 뿌리
마침내 '짐-집-짚'은 '깃'에서 비롯한 낱말들의 겨레로서 숲-풀에다 뿌리
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새가 깃들이다'뿐만 아니라 '집을 짓다'에
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깃'이 입천장소리로 되면 '짓'이 되니 모두가 나무와
숲을 전제로하는 숨은 뜻이 있음을 알아 차릴 수 있다.
중세어에서 '깃깃다(둥지를 틀고 살다)·깃다(풀이 무성하다)'가 되는데 이
또한 '집'과의 걸림을 보이는 경우들이다. '김'은 짐-집-짚으로 발달한 한편,
'김-깁-깊'으로도 새끼를 쳐 나아간 것으로 짐작이 간다. 비단으로, 집 지을
때 쓴 재료를 일러 '깁'이라 한다. 한자어로 급(級)이 있기는 하다. 본래 우리
말 '깁'과는 구분해서 써야 된다. 형용사 '깊다'의 '깊'도 나무와 숲에서 멀
리 있는 말이 아니다.
숲은 생명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희랍신화의 숲 이야기들은 거의 그러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그리
수고하지 않아도 살아 갈 수 있는 자연의 어우러짐이 깃든 곳. 이름하여 낙원
이라 한 것이다. 먹고 입고 쉴 안식처가 있으매 더 무얼 바라랴. 그래도 일이
있어야 할텐데. 일하지 않는 이는 먹지도 말라 했으니까.
그건 우리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삼국유사 의 단군신화에서도 '소도
(솟대)'가 그 좋은 보기라고 할 것이다.박달나무가 있는 숲속의 제단-소도. 해
서 거룩한 얼안이요, 사람과 하늘 땅이 함께 교통하는 장소가 아니던가. 이름
하여 신단수(神壇樹). 배달겨레가 말미암은 거룩한 숲이요, 나무이며, 겨레의
얼이 깃든 솟음터인 것이다.
먹거리의 샘은 숲속에서 풀의 열매로부터 비롯된다. 나무와 숲으로 뒤덮힌
공간은 목숨살이들의 깃들임이 있다.
풀을 먹는 짐승은 말할 것도 없으며, 고기를 먹는 짐승 또한 같은 무리에
든다. 고기를 먹는 짐승도 근본적으로 풀 먹는 짐승을 먹이로 하는 고리사슬
이 있으니까. 그 곳에는 흔히 얘기 하는 낭만이 있는 것만은 결코 아니다.
먹고 먹히는, 숨막히는 살아 남기의 싸움이 줄곧 일어 난다. 같은 나무 가지
도 해를 받지 못하는 가지는 말라 죽듯이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들은 그 빛을
잃고 죽음의 누리로 갈래를 달리 하기 마련.
숲을 목숨이 깃드는 집이라면, 집은 우리의 몸과 얼이 함께 더불어 사는 보
금자리요. 삶의 터전이 된다.
금 캐는 마동(薯童)
선화공주(善化公主)님은
남 몰래 얼어 두고
마동방을 밤마다 안고가다
(백제 무왕의 '서동요'에서)
이상한 일이다. 전혀 터무니도 없는 거짓말로 다른 사람의 신세를 그르치다
니. 얼굴도 없는 머리의 노래말로 허물 없는 선화공주는 마침내 귀양을 가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마동(童)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이야기의 알맹이인
'마동'은 어떤 사람인가.
먹거리로서 '마'를 캔다고 마동으로 불렀다는 것. 그의 어머니는 서울-지금
의 경주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홀로 살았다.어느 때엔가 못속에 사는 용과
가까이 해서 마동을 얻게 된다.이르자면 마동은 용의 아들인 셈이다. 흔히 향
가에서 서동요라 하지만 마동의 노래로 읽음이 옳다. 마동이 하는 일은 마를
캐어다가 장에 팔아 어머니의 살림을 도우는 것이었다 '마'는 다년생의 덩굴
풀로 자색꽃이 피어 산과 들에 폭넓게 스스로 살아 간다. 싹과 뿌리는 먹거리
나 약거리로 모두 쓰인다. 뿌리는 특히 덩이 모양을 한다. 계림유사 에서
흰 쌀의 일년 소비량이 한 집 단위로 제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먹거리의
절대 생산이 모자라는 것이다. 지금은 쌀이 남아 이를 관리하기에 정부살림의
일천억을 웃도는 돈을 쓴다고 하니 예와 오늘이 너무도 다른 느낌이 있다. 타
임머신이 있다면 옛 어른들을 다 나누어 드려 먹거리 걱정을 쉽게 풀 수 있으
련만.
때에 신라 26대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있었으니 모습이 남 다르게
아름다웠다. 소문을 들은 마동은 아이들처럼 머리를 깎고 아이들에게 '마'를
주면서 머리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효과는 생각 이상이었다. 성난 왕은 끝내 바람 난 선화공주를 귀양길로 내
쫓는다. 어머니 왕비는 공주에게 금 한 말을 남 몰래 주어 보낸다. 귀양 길에
나타난 마동은 자신이 일을 꾸민 사람임을 밝히고 서로는 사랑을 나누게 된
다. 둘이는 백제로 간다.
왕비가 준 금 이야기로 공주는 앞날의 꿈을 말한다. 한데 이게 웬 일인가.
마동은 기뻐하는 모습도 없이. 금이라면 자신이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많은 금을 캐어 놓았다고 한다. 마를 캐서 판 것은 물론, 금(金)을 캔 것이다.
공주는 금이 있는 곳을 알아 아버지의 궁전으로 보내자고 한다. 그러마고 마
동이 대답한다. 따지고 보면 보통의 먹거리로서의 '마'가 아닌 '금마'를 캔
것이요, 삼국통일의 힘을 기르는 국부(國富)를 이룬 것이 아닌가.
마침내 마동은 용화산, 다른 이름으로는 미륵산이라 하는 곳에 사자사의 지
명법사에게 이야기 해서 그의 힘을 빌어 금을 신라궁으로 하룻밤 사이에 보낸
다. 이 때 공주는 편지를 어버이에게 함께 보낸다.
마동은 백제로 가서 그 곳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게 되고 마침내 백제의 30
대 무왕(武王)이 된다. 선화부인과 함께 용화산 절에 가려고 연못을 지나게 되
었다. 난데없는 미륵불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부인이 미륵불을 보고 이 연못
자리에 절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마동이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이러
한 이야기를 한즉 대사는 하룻밤에 산을 헐어 연못을 메워 절터를 만들어 놓
는다.
사랑과 금을 캔 사람, 마동
이름하여 미륵사라고 하였으며 지금은 절터만 전해 온다. 용의 옛말로는
'미르'(훈몽자회)라 읽는다. 미륵에서 받침소리를 읽지 않으면 '미르'가 되니
결국 미륵사는 용절의 뜻을 드러낸다. 아울러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모두
가 불교의 지킴인 용신앙의 나머지 부처의 가르침과 미륵신앙을 소중히 하는
집단의식의 드러냄이라 할 것이다.
'미르'에서 한 음절이 줄면 '밀'이 된다. '밀-믿-밑'은 한 낱말의 겨레로서
땅신과 물신의 지모신(地母神)에 대한 믿음이 불교신앙과의 만남이라고 하겠
다. 다시 '밀-물'의 관계를 보면 3을 드러내는 것으로 체(體)·상(相)·용
(用)의 불교적 깨달음에 터한 것이 아닌가 한다.땅이름에도 3이 '밀'로 적힌다
(밀양-삼량진 등).
이는 우리의 삼신(三神)에 대한 믿음과도 걸림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곧 환
인 -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삼신의 신앙이 겨레의 뿌리 깊은 믿음이기도 하
다. 하면 우리의 뿌리 깊은 전통신앙의 터전위에 불교의 미륵신앙이 접목되
어 신라를 부처의 낙원으로 만들어 보고자 했던 이상으로 승화된 것이 아닐
까.
마동의 '마'는 몇 가지의 살펴 볼 거리가 있다. 소리로 본 마는 말마(馬)로
도 적는다.익산의 옛이름이 금마(金馬)인것을 보면 여기 마와도 무슨 걸림이
있지 않나 한다. 본디 금마는 '금으로 만든 말'이 아니라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신앙의 '곰'을 적은 것이다. 곰이란 말을 한자로는 적을 수 없으니 여기에
여러 가지 뜻을 부여해서 적은 것으로 보인다. 유목생활을 마무리한 농경생활
의 겨레들은 곰신앙의 동물상징을 거북(검)·말·용 등으로 확대 변이해서 받
아 들이고 이를 떠 받친 걸로 짐작된다.
마경(馬經) 에 따르자면 말의 조상이 용이니 용·말은 결코 다름이 아니
다. 먹거리로서 '마'가 아닌 '금마'를 캔 마동은 그 뿌리 위에 신라와 백제를
함께 어우른 지도자였다.
마동은 먹거리로 마를 캠은 물론이요, 금을 얻었고 그 보다 더 귀한 선화공
주의 사랑을 얻은 것이다. 노래 한 수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니 말 그
대로 말속에 사람의 영혼이 들어 있음인가.
울 안의 복숭아나무
엊그제 겨울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도리행화는 석양리에 피어 있고
녹양방초는 세우(細雨)중에 푸르도다
(정극인의 '상춘곡'에서)
움츠렸던 겨울을 보내고 봄이 어울어진 한 폭의 그림이라 하면 어떨까. 복
숭아꽃은 옛부터 우리의 산과 들에 스스롭게 자라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울안의 도화나무라. 다른 집이나 문 밖의 복숭아 나무가 울타리 안으로 들
어오면 그 집에 사는 처자들이 바람이 남을 경계한 것이다. 하필이면 복숭아
꽃뿐이랴. 환경에 따른 유혹이나 충동에 휩싸이지 말라 함이 아니겠는가.
담 대신 나무나 풀 따위를 얽어서 집을 둘러 막거나 어름을 가르는 걸 울
또는 울타리라고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우타리(하동·장성·나주) 우따리(거
창·양신) 울다리(함안·창녕) 울딸(안동·영천)이라고 한다. 울과 우리는 같
은 뜻으로 쓰인다. 우리 안에 짐승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소·염소·돼지·닭
울이 된다.
얼안의 크기로 본다면 울과 우리는 다르지만 한정된 공간을 드러냄에는 다
를 바가 없다. '우리'의 경우, 너와 나를 함께 이를 때 쓰는 우리와는 어떻게
되는가. 더러 얼안을 가리키는 말이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이는 일이
왕왕 있다. 당호(當號)를 쓴다. 신사임당이 그렇고 택당이 그러하다. 그러니까
일정한 얼안이 곧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경우다. '그대 있으매'의
그대도 마찬가지. 본디는 '그 곳'의 뜻이지만 '그대'는 오늘날 아름다운 운치
까지도 드러내는 대명사로 쓰인다.
일정하게 한정된 우리 안에 짐승들이 새끼를 치고 살듯이 너와 나를 함께
이르는 '우리'는 사람을 이를 경우 공동운명체요, 겹셈개념이 된다. 흔히 언어
의 역사에서는 인칭대명사의 빈 자리에 들어가는 말을 일러 기움법에 따른 말
이라 한다.
일정한 얼안에 사는 이들, 더욱이 혈연·지연·학연으로 얽혀진 사람들을
종종 '우리'라 한다. 마치 당호나 택호(수원댁등)가 그 사람을 부르는 말이 되
듯이 말이다.
그럼 우리 또는 울의 바탕뜻은 무엇일까. '우리'에서 음절이 줄면 '우리→
울'이 되니까 소리의 마디 짜임은 '울'이나 '우리'모두가 같다. 음절의 끝소
리가 바뀌면 '울-ㅇ-웃'이 되는 데는 옛말의 우(ㅎ)(석보상절6.17)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끝소리 (ㅎ)은 말이 변하는 길목에서 여러갈래의 소리로 바뀌
어 쓰이는 경우가 있으니 '울-웃-ㅇ-우(ㅎ)'이 모두 하나의 마디에서 새끼를
친 것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특정한 곳에 사는 이들이나 안채가 몸이라면 그 몸 위에 옷처럼 걸쳐 두른
게 우리(울-웃-우(ㅎ))란 걸림이 된다고 보면 어떨까.
우리(울)와 걸림을 보이는 말의 겨레로는 논물이 빠지도록 뚫은 '우리구멍
·우리네·우리다·우릿간' 등의 말들이 쓰이며 한자말까지 한다면 더 많은
낱말의 겨레들이 있다.
기다림의 미학(美學)
달하 노피곰 돋으샤
어기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기야 어강됴리
('정읍사'에서)
기다림은 때로 무지개처럼 피어 오른다. 기다리는 그 순간이나 마음은 기다
림이 없는 삶보다는 아름답다. 멀리 떠난 임을 생각하는 처자가 밝은 달을 쳐
다 보면서 임에게 행여 무슨 어려움이 없을까 노심초사 애틋한 그리움과 함께
기다림의 미학을 꽃 피운 <정읍사(井邑詞)>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얼마를 기
다리다 못해 망부석이 되었을까(登山石而望之). 고려사 에 따르면 장사하러
나간 남정네가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는 밖에서 남편이 무사하기를 달에 빌
었다고 한다.
기다림은 믿음을 그 바탕으로 한다. <서경별곡>에서는 변함없는 믿음은 마
치 구슬이 떨어져 깨어져도 끊어지지 않는 끈에 비유되고 있다. 구운 밤에 움
이 터 오르도록, 옥으로 지은 연꽃 세 묶음이 피도록 비는 그 애틋함과 기다
림.
어디 그뿐이랴, 죽음 뒤에 이르는 곳이 어딘지는 잘 알 수 없으나 믿고서
바라는 신앙이 추구하고 찬송하는 공간과 영원무궁한 시간에 대한 기다림이
없다면 어떨까. 적어도 믿는 이들에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언어는 문화를 되비친다 하였거니와 기다림이란 말이 우리 선조들이 살아온
삶과는 어떠한 걸림이 있는 지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한다.
사람의 슬기가 그리 펴나지 못했던 때를 떠올려 보자. 밖에서 일 하다가 사
나운 짐승에게 시달리면서 먹거리를 마련하여 집으로 돌아간다. 더러는 모진
짐승의 밥이 되거나 이해를 달리 하는 겨레들에게 잡혀서 죽기도 하였겠지만.
부모와 어린 자식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하다가 불운의 삶을
마무리한 사람들. 그것도 모르고 남편이 탈 없이 돌아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
리는 아내며 어버이의 초조함이 어떻겠는가. 옛 적 우리 선조들은 굴살이와
나무위에 둥우리살이를 했으니 나무기둥이나 굴의 어귀에서 일 나간 사람을
애타게 기다렸을 것이다.
두시언해 와 같은 자료에서는 오늘날 말의 기다리다를 '기들오다'로 적
는다. 이 말은, 바탕이 되는 더 작은 단위의 말로 나누어 보면 굴살이문화와의
걸림이 있음을 암시해 준다.'기들오다'는 말의 짜임새로 볼 때 '긷다'와 '오
다'가 어우러진 낱말이다. 두 개의 낱말 가운데 '긷다'가 알맹이로 보인다.'긷
다'는 우물이나 냇물 같은 데서 물을 퍼다가 그릇에 담는 동작을 이른다.이를
다시 쪼개어 보면 '긷다'는 명사 '긷'에 동사의 씨끝인 '-다'가 얼러 붙어서
이루어진다. 그럼 '긷'이란 무엇인가. 훈민정음해례 등의 자료를 보면 기둥
의 뜻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긷爲柱). 그러니까 숲을 이루는 나무들의 줄
기-집으로 이르자면 기둥에 값한다고 하겠다. 기둥도 따지고 보면 긷에다가
접미사(옹∼웅)가 붙어 이루어진 말이니 모두가 '긷'에서 비롯한 말들의 겨레
에 든다.
말이 갈라져 쓰이는 데에는 한 음절의 첫소리와 끝소리가 바뀌어 이루는 경
우가 있으며 가운데의 모음이 바뀌어 낱말이 갈라지는 일이 있다. 긷의 경우
말의 끝소리 자음이 바뀌어 이루어진 형태로는 긷을 포함하여 '긷-깃-길'이
함께 갖는 의미상의 걸림은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
기다림과 보금자리
모든 사람에게는 그 나름의 개성이 있듯이 소리마다 느낌의 모양 곧 음상
(音相)이란 게 있다. 디귿(ㄷ)은 리을(ㄹ)에 견주어 안으로 굳어지는 느낌을
주고, 리을은 흘러 가는 물과 같은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한편 시옷(ㅅ)은 시
끄러우며 이의 모양처럼 솟아 오른 느낌을 준다. 이와 걸림을 지어 긷-깃-길
을 풀어보자. 긷(柱)은 보금자리-둥우리가 앉을 수 있는 굳건한 나무기둥이요,
받침이 된다. 받침은 반드시 흙이나 돌 위에 고정되면 될수록 단단해진다. 기
둥 뿌리를 뺀다고 하거니와 기둥은 삶의 서식처인 보금자리의 뿌리요, 바탕인
것이다.
길(道)의 경우 중세국어에서는 길이·이자·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
높이·구덩이의 통로·옷섶·따위의 폭 등과 같이 여러가지 뜻으로 쓰이었다.
본디 길은 사람이 다니는 통로·길이가 밑바탕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광산구덩이 안의 통하는 길을 길갈래, 물건이 높이 쌓인 모양을 길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보금자리인 굴이나 나무기둥 위에 자리잡은 새둥우리 같은 깃
으로 통하는 얼안이 바로 길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흔히 길 가는 나그네에 비유한다. 그렇다. 아침에 집을 나와 이런저
런 모양으로 일을 보고는 다시 자신들의 천국으로 돌아간다. 해서 같은 길을
걷노라면 삶의 조건을 풀어가기 위하여 우린 다투며 때로는 엄청난 갈등이나
선택의 길 앞에 선 자신을 발견해 내기도 한다. 마치 그 길에서 아주 오래도
록 홀로 온 차지라도 할 듯한 모습으로 . 하루길 가노라면 돌부리를 차기도
하며 웅덩이에 빠져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때로
는 필요도 없는 남의 짐을 지고 때로는 남의 등에 엎혀서 하루의 해가 지도록
길을 가야 한다. 자기 앞에 놓여진 삶의 길을 제쳐 놓고서 말이다.
이 길을 따라서 오가며 사람을 만나고 헤어진다. 오늘날의 생기는 문제가
참으로 심각하듯 사람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심리·물리·생물적인 길에의 탐
색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현대를 정보의 시대요, 전자시대라고 한다. 정보
망의 오고감이며 전자회로의 모두가 다 길의 개념이 터를 내린 열매들이라고
할 것이다. 저승으로 감에 있어 그 곳이 지옥이든 극락이든 정해진 자신들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 우리들의 선조들이 살아온 삶의 긴 여
로이기도 하지 않은가. 옳은 길을 바르게 가야 한다. 제갈 길을 바로 걷지 않
으매 우리의 삶터는 차츰 병 들어 가고 공동 선(善)은 그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마치 자신이 걷는 길이 신의 부름을 받은 길인 것 같이 우리는 밝고
참된, 아름다운 길이 무엇인가를 고뇌하면서 걸어 가는 거다.
길을 중심으로 하는 낱말의 겨레붙이로는 길동무 길갈림 길길이 길갈래 길
들다(같은 길에 들어서듯 친숙해지고 잘 따르다) 길속(특정한 공간이나 영역)
등의 보기를 들 수 있다.
그럼 깃(巢)의 경우는 어떠한가. 훈몽자회 등에서는 새들의 집을 뜻하고
있지만 여러가지의 뜻으로 쓰이었다. 예컨대 짚이나 대싸리로 만든 둥우리·
새 날개에 달린 털·짐승 우리에 까는 짚이나 마른 풀·차지할 자신의 몫 등
이 다양한 쓰임을 보이고 있다. 분명 옛말글에서는 새의 집을 가리켰다. 새의
집은 나무가지나 숲속의 어느 부분에 둥지와 같은 모양으로 보금자리를 튼다.
진서(晉書) 의 기록을 따르자면 우리의 옛 조상들인 동이족들은 여름에 나
무 위에서 살았다(夏則巢居)고 한다. 즉 소거(巢居)살이를 하였으니 둥우리에
가까운 새집과 같은 '깃'이었다는 말이 된다. 오늘날의 아파트들도 새집 같다
면 어떨까. 아마 사람들에게는 하늘을 날고 싶은 그리움이 늘 있었을 거요.
결국 새집이나 사람이 사는 나무 위의 집이나 모두 '깃'으로 드러낸 셈이
된다. 하면 오늘날 우리가 쓰고 사는 집이란 말과 깃은 어떤 걸림이 있는걸까.
집은 깃에서
옛말글에서는 명사에 동사화접미사(-다)가 붙어 동사가 되는 일이 많은데
'깃다'도 그렇게 볼 수 있다. 깃다는 본디 풀이 무성하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 말에서 갈라진 명사형이 '기슴'인데 보기에 따라서는 기슴, 기심이 되고
지역에 따라서는 입천장소리되기를 입어 지슴 지심이라고도 한다. 다시 이
말이 모음 사이에서 시옷(ㅅ)이 소리가 약해져 떨어지면 기음 김 짐의 형태
로 말의 모습이 달라진다. 지금도 농촌에서는 논이나 밭의 잡초를 매는 일을
김매기(짐매기)라 하는 걸 보면 본 바탕이 모두 풀에서 나왔음을 알기란 어렵
지 않다.
집과 고리 지어 김 짐을 좀 더 살펴 보자. 말의 끝소리 자음이 바뀔 경우,
같은 계열의 소리로 교체되는 것이 일반적이다.김(짐)의 미음(ㅁ)이 'ㅁ-ㅂ-
ㅍ'으로 바뀌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다.하면 '김(짐∼집∼(집:짚))'으
로 말의 소리가 달라지면 곧 오늘날 우리가 쓴 '집'의 말꼴이 이루어짐을 알
게 된다. '집을 짓다'고 할 때 구개음화 이전의 상태로 돌리면 '깁∼깃'이 되
는 것이다.'집'은 나무와 풀로써 만들어 놓은 완성의 상태요 그 말미암음은
풀이거나 나무임을 알아 차리게 된다.
그 풀의 열매는 먹거리요, 그 잎이나 실감은 우리가 걸치고 다니는 옷감이
된다. 그 줄기인 나무기둥-목재들은 우리들의 집을 짓는 중요한 재료가 된다.
풀숲은 생존의 터전이요 바탕이다. 이를 가꾸고 기르지 않을 때 묵숨살이들이
편히 쉴 곳이 어디인가. 삶의 보금자리인 영원한 피안의 집을 그리워 함은 기
다림을 텃밭으로 한다.
고향의 봄은 어디에
봄은 왔는데 꽃은 피는데. 이 좋은 계절에 우리들의 고향이 시들어 가고 있
다니, 한 해가 다르게 빈 집이 늘어 나고 정들여 살던 마을은 한산해 선생님
의 학교종도 들을 수가 없게 된 실정.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게 마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회지의 뿌
리는 곧 시골 마을이다. 그 뿌리가 메말라 죽어 간다면 무성한 잎새나 소담스
러운 꽃이며 열매란 애시당초 바라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 농촌 마을에는 검은 구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나이 많은 어
른들께는 아주 귀에 설은 우르과이라운드니, 그린라운드니. 분명한 것은 생산
비에도 미칠까 말까 하는 쌀값이며 봄만되면 어김 없이 뛰어 오르는 공산품
값이며 공공요금. 영농규모가 클수록 별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이럴 바에야 농사 그만 두고 도회지로나 나가보자. 산 입에 거미줄 치랴. 해서
때로는 마을 전체가 비기도 한다는 소식도 들려 온다.
그럼에도 도회생활에 오랜 경험을 한 이들이라면 시골의 풋풋한 흙내음과
사람들의 순박한 인심을 그리워 한다. 벗어 나고 싶어 한다. 저 얽히고 설킨
도회지의 생활을. 마음의 고향이 늘 푸른 모습으로 있어 주기를 바란다.
본시 농촌과 도시가 다르지 않다. 작은 마을이 자꾸 모이면 도회지가 아닌
가. 촌도(村都)가 한 몸이라. 몸이란 '모음'의 줄임말이다. 몸은 여러 부분이
모여 들어 살아 간다. 마찬가지다. 자연부락 단위로 하든 협의 기구별로 하든
서로가 고리를 지어 믿고 마시며 먹을 수 있는 먹거리와 삶의 터전을 가꾸어
보면 어떨까. 반상회 모임에서 일터에서 시골마을의 생활 정보를 알리고 도회
마을의 정보를 알고. 해서 우리가 그리는 고향의 봄을 되찾는다면 얼마나 좋
으리.
황소 개구리
뱀 잡아 먹는 개구리라. 어디 그럴 수가 있을까. 물이나 뭍에서 스스롭게 살
고 있는 황소 개구리에 대하여 얼마전 방송 한 일이 있다. 마치 큰 고구마만
한 개구리의 뱃속에는 잡풀들이며 물고기가 들어 있고 보통의 개구리가 아직
산 채로 있었다. 놀랍게도 크지 않은 뱀이 들어 있음은 참으로 드물게 보는
일.
흔히 뱀들은 쥐, 개구리며 새를 먹이 삼아 살아 간다.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황소 개구리는 대체 어디서 난 걸까. 멀리 바다 건너서 온 것인가. 그러하단
다. 길러서 먹을 양식용으로 수입해 온 개구리란 풀이다. 막상 수입해 놓고 보
니 사업성이 없어 그냥 내버려 두었던 결과, 황소들은 우리의 산과 들을 마구
뛰어 돌아 간 게 아닌가. 아직 그 수가 많은 건 아니지만.
농사철에 마을의 들을 가노라니 개구리의 울음 소리가 요란하다. 아들 손자
며느리가 다 모여 들었겠지. 한데 분명 개구리의 울음소리는 같은데 꼭 황소
의 울음소리 같은 게 논에서 난다. 이상하다 싶어 어느 날 해 질 어스름 해서
자세히 살펴본즉 바로 그 황소 개구리였다. 얼핏 보기에도 개구리라고 하기에
는 좀 위풍이 있어 보인다.
개굴개굴 운다고 개구리라 했을 터. 울음소리로만은 개구리로 가늠 하기엔
어려울 듯하다. 잘못하다간 저 놈의 황소 개구리가 우리 마을의 개구리며 물
고기, 그것도 모자라 뱀까지 다 먹어 버릴 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개구리는 왜
그리도 힘이 없단 말인가. 작은 고추가 맵다던데. 슬며시 약이 올랐다. 나도
모르게 돌을 집어 던지니 그자리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 간다. 왠지 애처로운
느낌이 든다. 그도 살려고 태어 났을텐데 말야. 씁쓸하다. 마침 시주하라는 스
님의 독경소리가 들린다.
신토불이(身土不二). 그렇다. 아무렴, 빼앗긴 들이 될 수는 없다. 먹거리며
옷가지며 자칫 우리의 얼까지 앗길까 걱정이 됨은 나 혼자만의 몫일런지.
4. 믿음이 깊은 곳에
금란굴과 지모신(地母神)
마음의 귀
처용의 노래
원왕생(願往生)의 그리움
길 쓸 별의 노래
도솔가의 뒤안
경덕왕과 찬기파랑가
돌아간 누이를 위한 노래, 제망매가
고리 모양의 어우름, 한라산
들온말 쓰기와 말글 한 누리
웃으면 젊어진다고
술과 푸닥거리
꽃 이바지
빌면 무쇠도 녹나
믿음의 소리갈
굴살이와 굿
죽음의 소리 상징
나라 사랑의 꽃, 무궁화여
바람의 노래 -- 풍요(風謠)
새와 산, 태양숭배의 고리
금란굴과 지모신(地母神)
금란굴 돌아 들어 총석정에 오르니
백옥루의 남은 기둥 다만 넷이 서 있구나.
공수의 솜씨인가 귀신이 만들었을까.
알 수 없는 육면상은 무엇을 형상했나.
사람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빼어난 통천(通川)의 금란굴이며 총석정을 그리
고 있다. 이쯤의 경치이고 보면 말로 표현하기 이전의 상태임을 짐작할 수 있
다. 이 글은 송강 정철이 관동의 뛰어난 경치를 읊은 '관동별곡'의 한 마디이
다.
금란(金欄)이라, 말 그대로 금으로 만든 치마 저고리를 걸친 하늘 나라의 선
녀들이 사는 데라고나 할까.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통천 부분을 보면 금란
굴에 관한 안축(安軸)의 글이 소개되어 있다.
"통주(통천)의 남쪽에 민둥산 봉우리가 하늘의 모습처럼 둥글게 드리웠구나.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아 있으며 봉우리의 절벽엔 한 굴이 있다. 넓이는 가히
칠팔척이 되며 그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구나(深不可測). 안개가 어린 듯하여
늘 어둡도다. 바람이 불면 놀란 듯 파도는 일어 진실로 가까이 갈 길이 없어
라."
이야말로 관음보살이 사시는 곳이 아닌가. 지성으로 빌면 관음의 진면목이
나타나 벽면에 삼삼하고 푸른 새는 날아 신령하기 그지 없어라.(작은 배로 다
행히도 굴속에 이르러 보니) 바위에 그려진 모습들이 황금색이어서 마치 가사
장삼을 금으로 만들어 입은 관음보살이 웃는 듯 앉아 있나니 연화대가 예가
아닌가. 그렇다. 이는 진실로 부처님의 나타나심이니 존귀하게 받들어 마땅하
도다(尊敬則可矣).
마침 내가 굴에 갔을 적 푸른 새가 굴속으로 나명들명 하였다. 뱃사람이 이
르기를 이는 바다새라 하였으나 이는 필시 관세음이 응하신 드러냄이라. 굴도
굴이려니와 푸른 새가 내 마음을 흔드는구나. 세상 사람들이 벼랑의 무늬를
아름답다 하여 이를 관음의 모습이라 함은 잘못된 의혹에 빠졌음이라.
어떤 이는 글로 하였으되 바닷가 절벽에는 굴이 깊어 사람들은 이 굴이 관
세음의 나타남이라. 나르는 푸른 새의 깃은 비단(錦)과 같다. 게다가 보일 듯
안 보일 듯한 바위 색은 금빛이어라. 이를 보는 이들은 다 관음이 나타남이라
고 말 한다. 지금도 어리석은 이들은 헛되이 관음을 찾는구나. 물색에 어리는
모습을 보고자 하나 오히려 밝은 달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비추나니."
흔히 땅의 모습이나 보람을 들어 거기에 음양에 따라 성(性)을 부여한다. 이
르러 음양구조라 한다. 생김새로나 분위기로 보아 금란굴은 여성이요 태음의
신이 다스리는 어둡고 신비한 공간이다. 한데 머리글에서 '총석정'은 바다 가
운데 솟아버렸으니 이는 분명 남성이요 밝고 억센 양(陽)의 얼안이라고나 해
둘까.
다시 같은 책(동국여지승람)을 보면서 줄거리가 되는 몇 부분을 떠올려 본
다. 총석정은 통천군의 북쪽 18리쯤에 자리하고 있다. 수십개의 돌기둥이 떨기
처럼 바다 가운데 솟아 모두가 6면인데 그 모양이 마치 옥을 다듬어 놓음과
같다. 4개의 정자가 바닷가에 있으며 총석(叢石)에 가까우므로 총석정이라 하
였다. 세간에 전해 오기로는 신라 때 화랑도였던 술랑·남랑·영랑·안상 등
이 이 곳에 와 풍류를 즐겼으매 4선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짐작하건대 금란굴의 굴상징으로 말미암아 통할 통자 통천(通川)이 된 게
아닌가 한다. 별도로 부르는 이름에 금양(金壤) 금란 금뇌(金惱) 통주 휴
양(休壤)이라 함도 어떤 걸림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신증동국여지승람). 흔히
땅이름에서 굴 곧 구멍은 여성신으로, 물신으로 표상되기에 이른다. 이를테면
농수산의 생산을 맡고 있는 지모신이란 말이 된다.이와 관련한 보기로는 어떤
곳이 있을까.
금성(金城)과 어머니
금성에 가을이 드니 수 놓은 비단보다 좋다네
돌자갈밭에도 곡식은 끝 없어
행정구역이 바뀌어 지금은 김화에 합해졌지만 고구려 때만 하여도 어엿한
군(郡)이었다. 물론 뒤로 오면 현(縣)이 되고 다시 금성면이 되었지만.
금성은 본디 고구려 적에는 모성군(母城郡) 혹은 야차홀(也次忽)이었다. 같
은 땅이면서 그 이름이 달라졌을 때 한자 또는 한글의 맞걸림- 대응을 찾아
땅이름의 내력을 찾는 일이 흔히 있다. 여기서 금(金)-모(母)의 걸림은 야차
(也次)에서도 찾아진다. 그것은 야차-어시(母)의 풀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당
시만 해도 터짐갈이 소리인 치읓이 마찰음(ㅅ)으로 파악되는바 야-여(어)의
'어'를 합하면 '어시(母)'가 됨을 알 수 있다.
쓰이는 글자가 다를 뿐 소리값으로 보아 '금-어머니'의 보기들은 다른 곳
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가령 금호(琴湖)와 금물(김천)이 그러한 경우이다.
대동지지 를 따르면 금호강의 뿌리는 영천의 모자산(母子山) 일명 보현
산에서 비롯한다. 자료에 따라서는 금호강의 '금호'는 바람이 불 때 갈대에서
비파소리가 난다고 하여 금호라고 풀이한다(경북지명유래총람). 하지만 금호가
어디 대구뿐인가. 진주의 금산면에도 창원의 동면에도 그 밖의 고장에서도 금
호가 있음은 땅이름 풀이에 의심을 품게 한다.
한자의 옛 소리를 칼그렌의 <중국고음사전>에서 보면 '금 검 감(錦 金
今 琴 儉 甘)'은 거의 같은 소리로 난다. 한자로 우리말을 적음에 있어 한
자의 뜻과 소리를 빌어 적었으니 앞의 것은 뜻빌림(訓借)이요, 뒤의 것은 소리
빌림(音借)이라 했다. 하면 금호의 '금'은 금성의 '금(金)'과 마찬가지로 땅
구멍(굴) 어머니신-지모신 믿음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한다.
다음으로 금산(김천)의 경우를 살펴보자. 금산의 옛 고을은 어모(禦侮)현이
라 부른다. 또 달리 금물(今勿) 감물(甘勿) 혹은 음달(陰達)이라 했다(대동지
지). 이를 간추리면 '금-어머니(禦侮)'의 서로 같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사
투리로 보면 어머니(전지역) 어무이(예천 의성 선산 칠곡 고령) 어머이(횡
성 원주 홍천) 엄마(강원 전남북 예천 포항) 어메(군위 김천 금릉) 옴
마(칠곡 대구 달성 경산 함안) 옴매(통영 충무) 오매(진안 무안 김천
정읍) 오메(군위 김천 고령)와 같은 말이 쓰인다.
지모신 곧 어머니와 같은 생산신 숭배는 고조선으로 거슬러 오르면 곰토템
즉 곰신앙에서 그 밑바탕이 있음을 알게 된다. 중세어 자료를 보더라도 그러
하다. <용비어천가>에서는 '곰'이 고마로 드러난다(熊津고마나루). 고마는 그
속성으로 보아 아주 경건하게 흠모해야 할 대상으로 떠오른다(고마敬고마虔고
마欽<신증유합>).곰신앙은 우리나라뿐이 아니고 몽고와 시베리아를 에워싼
북쪽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던 원시 신앙이었다. 일부 알타이 말에서는 지금
도 '곰신-조상신-영혼'의 뜻으로 쓰이고 있음은 물론 곰신앙의 문화적 실증
을 보여 주는 셈이라고 하겠다. 곰과 우리의 역사는 어떤 걸림이 있는가.
아다시피 삼국유사 에 따르면 고조선 시대에 곰과 호랑이가 다투어 사람
되기를 힘쓰다가 마침내 곰은 사람의 몸을 입어 환웅을 만나 단군을 낳게 된
다. 단군왕검의 '검(儉)'은 고대 한자음으로는 '금'이라 하거니와 결국 '금-'
계통의 땅이름은 새롭게 개척한 청동기 문화를 드러낼 뿐 아니라 원시신앙이
었던 곰신앙을 표상한 것으로 보인다. '곰(금)'의 어머니신 상징을 찾아보기란
그리 어렵지 아니하다. 경상도의 웅천(熊川)은 웅기(熊只)에서 비롯하였으며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웅신(熊神)으로 이어지며 이는 본디 금주(金州)에
속하는 고장이었다. 마주걸림을 간추리면 '금(金)-웅(熊)[神]'으로 뭉뚱그릴
수 있다. 이는 충남의 공주도 그러하다(금강(錦江)-웅천(熊川)(고마나루)-공주
(公州)<대동지지>).
이제 남은 건 '금-엄(어머니)'의 관계다. 알타이말에서 기역(ㄱ)이 말의 첫
소리 혹은 끝소리에서 약해져 떨어지는 현상을 참고로 하면 '금(곰)→흠(홈)→
음(옴)/검(굼)→험(훔)→엄(움)'으로 그 소리가 바뀌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의 시골말 '옴마 오마니 엄마 움마'는 바로 같은 말들이다. 어머니
는 생산의 바탕으로 굴이요, 물이다. 땅과 물을 잘 가꾸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
연의 축복을 누린다.
금성을 달리 통구(通溝 通口)라 하며 물들이 고장이라 하였다. 물과 땅을
경건하게 믿고 이용하며 살아 갈 때 역사의 능선을 타고 시련을 겪는 우리들
에게 지모신은 늘 함께 하시리라.
마음의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
대숲에 바람이 일 때면 도림사(道林寺)의 뒤뜰에서 들리는 소리다. 무슨 일
이 있기로서니 대나무 밭에서 사람의 소리가 난다는 말인가.
삼국유사 에 따르면 신라 48대 경문왕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왕의 귀
가 갑자기 길어진 것이다. 마치 나귀의 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
다. 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는데 임금의 머리를 만지는 이만이 현장을 보았
다.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면 기어이 살아 남을 수가 없음을 눈치 챈
복두장은 속으로만 끙끙거리다가 나이 들어 죽기 전에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의 비밀을 털어 놓은 것이다.
흔히 일러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충동에서 말을 아니 하고서는 견딜 수가 없
었으므로 일어난 일.
왕은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마침내 대나무를 다 베어 내었다. 그 자리에
산수유를 심었더니 소리가 달라졌다. '임금님의 귀는 길다'고.
말을 하는 존재로서의 상징적인 부분이 입과 귀이다. 입으로는 말을 하고
귀로는 말을 듣는다. 행동주의자들의 말대로라면 말은 대용자극이요, 대용반응
이어서 행동을 불러 일으키는 행위 개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소리상징으로 볼 때 '귀'란 무엇일까.
중세 문헌에서 '귀'는 복모음이었기에 '구이'로 발음이 된다. 구이는 '굿이
→구시→구이'의 과정을 거쳐서 쓰이게 된다. 말의 짜임새로 보아 '굿이'는
구덩이나 굴을 뜻하는 '굿'(증수무원록1.42)에 사물이나 사실을 드러 내는 접
미사 '이'가 어우러져 된 말이다. 하면 귀란 무슨 굴이며 구멍이라면 어떤 구
멍인가.
다름 아닌 소리가 담기는 구멍이란 뜻이다. 사람의 생각과 느낌이 담기는
구멍. 아무 것도 아니면서 이 땅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귀불알과 귀바퀴, 귓구멍이 합하여 귀라 이른다. 우리 몸에는 많은 구멍이 있
다. 땀구멍에서부터 코구멍, 눈구멍, 목구멍, 똥구멍 등 실로 많은 구멍이 있어
이를 통하여 드나드는 물질이 있으므로 우리의 목숨살이가 가능하지 않은가.
고려수지침술학에서는 우리 몸에 바늘을 꽂는 구멍을 경혈이라 해서 360여
의 구멍을 보기로 모임 들고 있으니 땅덩어리가 자전하는 횟수와 다르지 않음
도 우연한 일이 결코 아니다. 일러 환경결정론이라 하여 환경과 사람의 걸림
을 중시하기도 한다.
지구 위에서 사니까 돌아 가는 지구의 리듬에 맞추어 우리의 몸은 숨을 쉬
고 있다. 사람의 마음에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소리가 담기는 소리 구멍. 그
래서 바른 말을 떳떳하게 하면서 살 수 있는 누리. 하면 자유와 평화가 꽃피
는 홍익인간의 마을이 될 것이다. 참으로 좋은 세상이 될 것이구먼.
파우스트는 눈이 멀고 귀가 멀면서부터 하늘의 소리를 듣게 되고 하늘의 빛
을 보게 된다. 어버이에게서 자연의 귀를 물려 받았는데 이제 하늘과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우리는 갖도록 해야 한다. 같은 소리이면 같은 뜻
으로 받아 들을 수 있는 한 겨레의 듣기 훈련을 갈고 닦아야 한다.
저 높은 곳에의 바람과 믿음을 가지고 귀를 열자. 열린 누리를 만들어 봅시
다.
처용의 노래
서울 밝은 달 아래
밤드리 노니다가
들어와서 자리 보니 가랑이가 넷이구나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해이지만 빼앗아 감을 어찌 하리오
(처용가)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세상에 그래 어느 사내가 눈 앞에서 제 여편네가 다
른 이에게 능욕 당하는 꼴을 보면서 한탄만 하고 있담. 그것도 노래를 부른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쯧쯧). 마음이 착한 탓에 끝 없이 용서하기 때문만은
아닐 터. 왜 그랬을까. 그럼 안 되는 줄 알면서.
얘기인즉슨 이러하다. 산과 땅의 신(神)이 장차 나라에 큰 어려움이 있어 망
할 걸 미리 알고 이를 춤으로써 왕에게 알리었으나 사람들은 이에 별로 마음
씀이 없었다. 오히려 깨닫기는커녕 이는 아주 좋은 징조라 하면서 먹고 마시
며 즐기는 일에만 빠졌으므로 드디어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것.
연극은 인생의 거울이라 한다. 시대는 달라도 연극의 겉모양이 조금씩 다른
듯이 보인다. 옛적에는 노래와 춤, 문학이 한테 어울려 이루어지는 종합예술이
었다. 하면, 처용이 추었던 춤은 당시의 어지럽고 힘든 상황들을 노래에 담긴
가락으로 그리 하면 안된다는 속내로, 미쳐 날뛰는 많은 이들에게 다가 선 것
은 아닐까.
헌강왕(憲康王)이 개운포(開雲浦)에 갔을 때, 산신과 땅신은 물론이요, 용이
나타났다. 용은 곧 바다의 신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옛말로 용은 '미르·미르
기'(훈몽자회)로 불리워진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는 이들을 일
컬어서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 적고 있음을 보아 용은 물을 다스리는 위대한
지배자였다. 이렇게 용에 대한 숭배는 농경문화에서 물이 아주 중요한 대상으
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점치는 일관(日官)의 예언
산신과 땅신은, 바다의 신은 춤을 추는데 왜 사람들은 보도 알도 못하고 점
치는 일관만이 춤을 보면서 그 뜻을 알아차렸을까.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
이지 않거니와(視而不見) 신이 주는 계시를 아무나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나
보다. 눈이 먼 이가 앞을 볼 수 없듯이 향락에만 빠진 이들이 앞으로 다가올
겨레와 나라의 어려움에 관심이 없을 건 뻔한 일이요, 무얼 들어도 들릴 까닭
이 없다(聽而不聞). 헌강왕은 몹시 애가 탔다. 동해의 용신이며 땅신, 산신에게
가까이 가고자 했으나 힘이 미치지 않았다. 단 몇 사람의 옳은 생각과 움직임
이 없어 나라가 기울어진 것은 동서고금에 왕왕이 있던 일. 이 어찌 헌강의
시대뿐이었겠는가.
왕은 생각했다. 이다지도 나라가 어지럽고 왜적의 군침 넘김이 심한 것은
모두가 자신의 탓이라고. 이윽고 왕은 오늘의 대학에 맞먹는 국학(國學)에 나
아가서 박사들에게 경전 풀이를 들으며 함께 토론하기도 한다. 관심의 주요
대상은 올바른 나라 다스림의 길이었을 게 뻔하다.한편 부처님의 힘을 빌어
나라의 안녕과 겨레의 번영을 위하는 믿음으로 황룡사에 나아가 불경을 듣기
도 하였다.때로는 만백성의 소리를 듣고자 하여 멀리까지 시골 나들이를 하였
으니 울산 개운포(開雲浦)에 간 것도 흩어진 사람들의 민심을 모으고 무엇인
가 나라의 힘을 기르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더러는 농사철을 맞이하여 여름지이를 북돋우기 위하여 여러가지 민속놀이
에 자리를 함께 하여 관심을 보이는 헌강왕. 어느 신하 아뢰기를 '백성들이
먹고 입을 게 족한 것이 모두 임금님의 덕'이라고 한다. 왕은 이에 대하여
'그건 당신들의 덕이지 어찌 내 덕이겠소'라 한다. 기울어진 나라의 흐름을
되살리기에 있어 헌강의 정성과 힘이 채 미치지를 못하였다. 그림의 떡이라고
나 할까. 나라의 꼴이란 그야말로 울리는 꽹과리요, 십여 걸음의 앞을 못 보고
사냥꾼 쪽으로 달려가는 코뿔소들의 행진 바로 그것이었다.
처용이 춤을 춘 것이나 왕이 몸소 땅과 바다신에게 제사를 올린 건 모두가
나라와 겨레의 평안함을 빌었던 일. 그러니까 노래와 춤으로 신을 즐겁게 해
서(樂神) 복을 받고자 하였다(장진호, 1989, 신라가요의 주원성 연구 참조). 인
구어에서도 페스티발(festival)은 '신을 즐겁게 한다'는 데에서 말의 뿌리를
찾는다. 어찌 노래와 춤뿐이리오. 때로는 꽃다운 처자가 이바지의 속내가 되기
에 이른다. 이바지를 드릴 때는 반드시 주술적인 말을 한다. 말 속에는 신과
서로 통하는 거룩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말을 함부로 할 수도 없으며
마구 바꾸기도 어렵게 된다. 이르러 말은 곧 영혼-언령설(言靈說)이라 한다.
그러니 홍수가 난 뒤에 가래로 보를 막아 보니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 예고된 시련
헌강왕이 개운포에 갔을 때 동해 용왕에게 제사를 드렸다. 어찌 된 일인가.
동해의 용은 구름과 안개를 일으켜 헌강으로 하여금 길을 잃게 만든다. 이 게
헌강이 겪어야 할 시련의 징조가 아니던가. 한편 춤과 노래로서 산신(山神)들
이 예언한다. 마치 맥베스의 세 마녀처럼 말이다.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
都波)'라고. 슬기로운 이들은 있으나 다 도망치고 없으므로 나라는 마침내 큰
시련을 겪을 것이라는 얘기다.
굿판에 구경 간 사람이 굿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눈독 드린다고 산신의
춤과 노래에만 정신이 팔려 사람들은 흥겹기만 했다. 망할려면 무슨 일이 없
겠는가.
자신의 아내를 범한 역신을 용서하는 처용(處容)은 얼굴을 숨기기가 일쑤였
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진정한 지도자가 안 보이는 일이 종종 있다. 처용은
어찌 보면 신과 교통하는 일종의 무당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이에
미치지 못함은 어쩔 수가 없었으니.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어떠한가. 물질만능이라. 덮어 놓고 돈만 생기면 그
무슨 짓거리라도 다 하려는 세상 아닌가. 가야 할 사람의 길을 벗어나 오로지
저 하나만 먹고 살겠다고 눈이 뒤짚힌 세월이 되고 말았다. 벼슬의 자리에 있
는 이들이 돈 받아 챙기고 심지어는 나라의 국방이 걸려 있는 무기까지도 속
임수가 끼어 들어선 검은 손들과 짜고 온갖 더러운 돈벌이를 하는 터. 이러고
서야 무슨 통일을 한다고 사설을 풀어 댄단 말인가. 마음이 없으면 올바른 부
처의, 예수의, 공자의 말씀이 제대로 들어 올 까닭이 없다.
산은 산, 물은 물이라고 일렀으나 문제는 사람의 마음과 행위가 바르지 못
한 곳에 그 무슨 더불어 사는 홍익인간의 꿈이 이루어질까.
우리 겨레는 운명지워진 한 핏줄의 목숨살이들이다. 홍익인간이란 멀고 큰
그리움을 위하여 함께 서는 길밖에.
원왕생(願往生)의 그리움
달님 이시어
이제 서쪽 나라로 가시나이까
무량수 부처님 앞에 두 손 모아 맹세하나이다
원왕생 원왕생
그리워 하는 이 있다고 아뢰소서
아아
이몸 버려 두고 48원을 이루실까
한평생 살아가는 게 너무 짧아서인가. 아니면 세상살이가 더럽고 욕되어 그
러함인가. 누구에게나 살아서나 죽어서 그리는 누리가 있는 법. 어찌 광덕의
아내만 그럴 수가 있을까.
원왕생(願往生)은 원왕생극락의 준말로서 '극락에 가서 살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이 노래는 사연 깊은 옛적으로 거슬러 오른다. 신라 문무왕 때의 일이
다. 삼국유사 에 따르면 이 때에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란 이들이 함께
불도를 닦고 있었다. 둘 사이는 서로 친하여 약속하기를 '먼저 극락세계로 가
는 사람은 반드시 알리도록 하자(先歸安養者須告之)'고 했다. 광덕은 아내와
함께 분황사 서리에서 신을 삼아 팔아서 살았고, 엄장은 남산의 한 암자에서
나무를 베고 밭갈이를 힘 쓰면서 살았던 터.
어느 날인가 해 어스름에 소나무 그늘이 고요히 드리워 졌는데 창밖에서
'나는 이미 서녘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 오라(某已西往矣
惟君好住速從我來)'고 하여 엄장이 창을 열고 내어다 보니 구름 밖에서 하늘
의 노래 소리가 나면서 밝은 빛이 땅에까지 비추는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나
머지 광덕을 찾아 가 보니 과연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해서 장사를
지내고는 광덕의 아내에게 함께 살자고 제의를 하니 그러자고 하였다.
잠자리를 함께 하여 엄장은 친구의 아내에게 한 몸이 되고자 하였다. 한데
이게 웬 일인가. 광덕의 아내는,
"스님께서 극락에 가고자 함은 마치 나무에 올라 가서 물고기를 찾는 것이
나 같습니다."고 하면서 크게 나무랐다.
엄장은 기가 막혀 '광덕도 함께 살면서 잠자리를 같이 했거늘 이게 무슨 큰
일인가.'고 다그쳐 물었다. 여인이 이르기를 '남편은 나와 함께 10년을 살았지
만 한번도 잠자리를 같이 하질 않았는데 음란한 짓을 했겠습니까.' 눈에는 단
호한 빛이 서려 있었다. 또 '남편은 밤마다 단정한 모습으로 염불을 하고 진
리를 얻고자 하였으며 달 밝은 밤이면 부처님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정성이 이같으니 극락으로 안 가고 어디로 갔겠습니까. 이제 보니 스님께서는
극락왕생하기는 싹수가 노랗습니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 뒤로 엄장은 크게 뉘우치고 몸을 깨끗이 하면서 원효법사에게 깨달음을
구했다. 마침내 도(道)를 얻고 극락으로 든다.
엄장(嚴莊)은 스님의 이름으로서 그 속에 담긴 불교적 그리움이 짙게 드리
워 있다. 운허 스님의 불교사전 을 보면 '장엄'이 나온다. 하면 '엄장-장
엄'으로 바뀌어 쓰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장엄'이란 '좋고 아름
다운 것으로 국토를 꾸미고 향이나 꽃으로 장식하거나 나쁜 일로부터 자기의
몸을 삼가하여 공덕을 쌓는 것'으로 풀이된다.
있는 이들에게 소외 당하고 억눌려 사는 삶에서 누구든지 불도를 닦아 극락
으로 갈 수 있다는 미륵불의 극락정토 신앙은 당시의 보통사람들에게는 큰 꿈
이요, 희망이었으니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이 노래에 은은히 배어 있음은 아닐
까. 그 단적인 표현이 '원왕생극락'이요, 현실에서는 도달할 길 없는 저승의
언덕이니 원왕생이야말로 황홀 장엄한 곳에 대한 몸짓이며 바람이다.
죽살이를 통틀어 그리는 극락(極樂)은 '달'로 드러난다. 우리들에게 달이란
고향의 어머니처럼 그리운 영혼이요, 위안임을 느끼면서 살아 간다. 초승달과
보름달에서 얻는 정서가 다를 때도 많다.
조지훈의 <승무>에서 오동나무 잎새로 지는 달빛이며, <사미인곡>에서의
달 또한 임의 영상이 담긴 상징으로 떠 오른다. <원왕생가>에서는 극락으로
가는 길잡이가 아닌가. <정읍사>에서는 어떠한가. 멀리 간 임의 둘레를 지키
는 수호신으로 우리들 의식 밑바탕에서 늘 우리의 영혼에 등불이 되어 잊혀지
질 않는다.
'달'이란 땅덩어리란 뜻도 되며 높고 크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지구의 또
다른 모습이며 해의 되비침판이 되기도 한다. 기실 따져 보면 달은 지구에 달
린 한 별덩이일 뿐인데. 벽에 물체를 '달다(懸)'의 '달'은 하늘에 뜬 달과 같
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엄장-장엄'을 풀이하였거니와 <원왕생가>의 지은이는 광덕이나 그의
처가 아니라 엄장(嚴莊)이 아닌가 한다. 삼국유사 에 실려 전하는바, 무애
가를 지은 원효, 무량수불이 된 박박(朴朴)의 경우는 하나 같이 뒤에 깨달은
이가 앞에 깨달은 의상(義湘)이나 부득(夫得)보다 뉘우치면서 절실하게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것이다. 결국<원왕생가>의 지은이는 엄장이란 유추가 가능하
다.
하면 광덕(廣德)에 드리우는 뜻은 무얼까. 덕을 널리 베풀라고 풀이하면 어
떠할런지. 나막신이든 짚신이든 신이나 만들어 팔면서 넉넉지 않은 살림에 부
처님의 길을 지극정성으로 닦아 극락으로 갔다는 것이다. 짐작컨대, 신발이 없
고 자기보다도 어렵게 사는 이들에게 먹거리나 입을 거리를 나누면서, 부처님
의 진리를 행함에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바친 것이다. 먼저 그의 가족
사항을 보면 아이를 낳지 않고 정상적인 부부살이를 하지 않은 점이다. 타고
난 저마다의 본능이 다 있는데 종교적인 믿음 때문에 삼가하고 정진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원초적인 본능을 삼가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끝 없
이 먹고 마시며 성적인 충동에 이끌리어 가고자 하는 충동이 있지 않은가 우
리는.
이러한 광덕의 거룩한 생각을 이해하고 함께 선 이가 바로 그의 아내였으니
참으로 그 남편에 그 아내가 아닌가. '베풀다'는 우리말은 엄청난 속내를 갖
고 있다. '베를 풀다'가 굳어진 말이다. 여기 '베'란 무엇인가. 말할 것 없이
입을 옷이며 먹거리가 됨이 아니던가.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과 함께 나누며
사는 이른바 덕(德)을 베푸는 것이다. 목 마른 이에게 물 한모금, 배 고픈 이
에게 한 그릇의 밥이 갖는 의미는 괜찮게 사는 이들에겐 하찮은 일일 수도 있
다. 그건 그렇지 않다. 피가 모자라 죽어 가는 이들에게 피 한 방울은 꺼져 가
는 등불의 기름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살기에 바빠서 관심이 무관심일 뿐이다. 이 세상에 사람이 필요로 하는 물
건이란 한정되어 있기 마련. 그래서 신(神)은 누구에게나 빛을 던져 주신다.
빈부를 가리지 않고 말이다.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저 푸른 하늘에 해님과 달님은, 별님은 정답게 살라 한다. 나누며 함께 서라
고 하신다. 광덕이면 엄장이니까.
길 쓸 별의 노래
옛날 동쪽 물가에 건달파(乾達婆)의
논 성으로 바라보고
왜군이 왔다고 봉화불 사른 모양이야
세 화랑이 산구경한다는 말 듣고
달도 바삐 불 켜는 터에
길쓸 별 바라보고
혜성이야 말한 이가 있다.
아아
길잡이 하러 떠갔더라
이에 벗들 궂히는 빗자락 별이 있을고
('삼국유사'에서)
가까우면서도 먼 이웃 나라 일본. 왜군이 쳐 들어 옴을 노래로써 경계하고
있다. 이 노래에서 혜성을 길쓸이별이라 하고 세 화랑이 산구경하러 감은 무
슨 뜻인가. 그 중요한 때에 산구경이라니. 또 건달파가 노래와 춤을 추던 사람
인데 왜군이 침입했는데 무슨 건달파가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 참으로 해괴한
일이지를 아니한가.
해를 초점으로 하여 타원으로 돌아 가는 별이 혜성이다. 흔히 살별, 꼬리별
이라 하며 오늘날 가끔 64년만에 찾아 온다는 헬리 혜성이 가장 두드러진다.
행여 혜성이 지구와 충돌한다면 그 건 곧 이 땅의 끝이 나고 만다는 엄청난
사실인바, 왜적을 이에 비유하다니. 그 제나 이 적이나 일본 사람들은 언제나
힘겨운 사람들이었다. 얼핏 보아서는 빗자루처럼 보이니까 빗자루 별로 불러
서 이상할 건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비로 쓴다면 길을 가로막는 왜군을 쓸
어 버린단 말인가. 그렇다. 왜군의 앗음을 물리침으로 평화를 되찾고 우리의
길을 걸을 수가 있었던 정황.
융천스님은 마침내 '길을 쓸어 내기를 별에게 기도했던' 것은 아닐런지. 옛
부터 별님에게 행복을 빌었음은 우리 민속에서도 드러난다. 혼인할 때 초례청
에 든다고 하는데, 여기 초례의 초(醮)가 별을 보고 점을 치고 복을 빈다는 뜻
이니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도 같은 뜻으로 쓰인 경우이다.
사람이 다니는 길뿐만이 아니고 군인의 길, 학도의 길, 물길, 불길과 같이
길은 참으로 다양하다. 길이란 '긷-깃'에서 갈라져 나온 말로서 보금자리로,
일터로 통하는 공간을 이른다. 새가 깃 들인다에서 '깃'은 집이요, 보금자리이
니까 말이다. 한데, 왜군이 우리들의 길을 막았으니 그 집안이며 나라가 편할
턱이 있을까.
길이 막혔는데 세 화랑인들 어떻게 산구경을 갈 수가. 또 무슨 놈의 산구경
이라니. 이거야 말이 되질 않는다. (허.참). 하필이면 또 셋일까. 하늘, 땅, 사람
일까. 아니면 임금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일까. 아니면 신(神)과 인간, 그리고
대자연일까. 상황으로 보아 왜군과 싸우려는 우리 모든 이들일게다. 거기에 임
금이, 신하가, 백성이 따로 있을 수가 없는 것을.
혜성 곧 왜군이 쳐들어 옴을 횃불로 알렸던 것이다. 정신 없이 건달파의 노
래와 춤을 즐기는 이들을 향해서. 횃불로 잘 안되니까 밝은 달에게 알려 달라
는 기원을 겸하여서, 달은 극락으로 오가는 석가세존의 사자이니까 부처님의
법력(法力)을 빌어 보려는 애씀은 아니었을까.
산구경의 본 바탕은 무엇일까. 흔히 사냥이라고 하지만 기실 헤치고 보면
전쟁 훈련을 하기 위한 산행(山行)이었던 것이다. 용비어천가 에서는 임금
이 직접 산행하였음을 예로 보이거니와 소리가 바뀌는 과정에서 '산행-사냥'
이 된 걸로 보인다. 이르자면 짐승을 적으로 보고 전술을 갈고 닦는 싸움마당
이 곧 사냥터란 말이다. 이제 화랑이 군사를 이끌고 전쟁 훈련을 하려는데 느
닷없이 혜성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왜군이 갑자기 쳐 들어 온 것이
다. 싸움을 알리는 횃불도 필요했지만 그럴 겨를도 없이 달을 횃불 삼아서 바
쁘게 싸움터로 나아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 길잡이는 곧 화랑이란 생각을 할 수 있다. 막느냐 못 막느냐 하는 기
로에서 길잡이란 흥망성쇠를 가늠하는 주요한 구실을 한다.목숨을 걸고 왜군
을 물리침으로써 마침내 건달파와 같이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과 평안을 안겨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이 노래에 담겨 있다고 본다.
길쓸별의 별은 소리 상징으로 보아 '불'이 된다. 역사로 보면 광명을 숭배
하는 태양숭배요, 어두운 밤을 밝히는 하늘에 비친 또 하나의 횃불일 수도 있
다. 위험신호임과 아울러 어려움에 대비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기 때문에 별
은 아주 상징적이요, 암시하는 바가 크다.
나라와 겨레의 평안을 비는 융천 스님의 절절한 소원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높고 빛난다. 노래의 가락과 함께.
도솔가의 뒤안
오늘 여기에서 꽃이바지 노래 불러
뿌린 꽃이여 너는
곧은 마음의 명으로 받자오니
미륵좌주(彌勒座主)를 모셔 맞으라
('삼국유사'에서)
정성이 지극한 노래는 하늘과 땅의 귀신도 감동시킨다. 일연(一然)스님은 신
라의 향가가 특히 그러하다고 했다. 누구를 위해 부르는 노래이며 무엇 때문
에 그리도 간절하게 부르는가. 말이 노래이지 실은 부처님을 향한 기도요 염
원이며 신통력(神通力)을 지닌 노래말이다.
때는 신라 35대 경덕왕 19년(760) 사월 초하루 한꺼번에 해 둘이 하늘에 떠
서는 열흘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는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二日竝現). 당
황한 임금은 날씨를 보는 일관(日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원래의 모습대
로 될 수 있는가를. 먼저 인연이 닿은 중으로 하여금 꽃을 뿌리며 하늘에 정
성을 드리면 재앙이 물러 갈 거라고 일관이 일러 준다.
제사를 모시는 조원전 (朝元殿)에 깨끗하게 단을 차려 놓고 왕이 몸소 청양
루(靑陽樓)란 곳에 나아가 인연이 먼저 닿는 중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
침 월명(月明) 스님이 밭두둑 길을 걷고 있었으니 인연이 먼저 닿을 밖에. 스
님을 모셔서 하늘의 재앙을 없애도록 기도글을 짓도록 하였으나 향가는 좀
알 뿐 다른 인도의 범패는 모른다고 사양하질 않는가. 임금은 좋다고 승락하
니 월명이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이 게 바로 도솔가. 일관의 말대로 하늘의
재앙이 없어지고 해는 다시 하나로 전과 같은 평온을 되찾는다.
임금은 고맙다는 정표로써 차 한 봉지와 수정으로 만든 염주 108개를 주었
다. 이상한 일은 어린 아이가 갑자기 나타나 차와 수정염주를 챙겨 가지고는
이내 내원탑 안으로 숨어 버린다. 뒤에 보니 차와 수정염주는 내원탑 남쪽의
벽화에 그린 미륵상 앞에 놓여 있었으니 귀신이 곡할 일이로다. 월명 스님의
간절한 기도가 받아 들여져 미륵보살을 움직인 것이다. 소식은 퍼져 서라벌
장안의 사람들은 다 알게 되었고 민심은 다시 수습되고 오히려 임금의 덕화를
존경하게 되었으니 이야말로 전화위복(轉禍爲福).
'도솔(兜率)'은 덮어줌이라
도솔가의 '도솔'은 무엇을 이르는가. 불가에서는 욕계육천(慾界六天)의 넷째
하늘을 도솔천이라 하니 미륵부처가 사는 극락정토(極樂淨土)라 한다. 땅에서
부터 33만 유순(由旬의 거리에 있으며 어리석은 세상 사람 모두를 건져 주는
부처가 미륵불이라는 것.
두개의 해가 열흘 동안 떠서는 지지 않으니 이를 풀기 위한 임금과 사람들
을 위하여 월명 스님이 대신 미륵부처님께 빌려고 부른 노래가 도솔가이다.
어떤 일을 이루려고 마음을 긴장되게 가지는걸 '도스르다'고 한다. 여기서 갈
라져 나아가 어떤 물건이나 일을 추스를 양으로 감싸다. 혹은 덮다 정도의 뜻
으로 쓰인다. 이르자면 도시락도 '도스르다'에서 갈라져나온 갈래말이다. 음식
을 가지런하게 흐트러지지 않도록 보자기나 끈으로 만든 망태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도 있고 놓아 두는 게 도시락이 아닌가.
짐작하건대, 왜군이 쳐들어 와 세상은 어지럽고 백성들의 불안과 초조함이
온 나라에 가득한 때 흐트러진 민심을 모음은 왜군의 침략을 물리치는데 주요
한 몫을 했을테니 이상향으로서 도솔천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했을 법하다. 거
기에는 빛과 평화가 영원히 있을테니까 말이다. 부스럭대고 좀 야단스러운 상
태를 '두스럭 피운다'고 함도 같은 말에 뿌리를 둔다고 하겠다.
간추리면 우리말 '도스르다·두스럭 핀다'와 도솔가의 '도솔'은 같은 뜻을
드러내는 낱말겨레에 든다. 이같은 낱말겨레의 기본은 '돗'으로 '돗-돋-돌/둣
-ㄷ-둘'의 자음교체와 모음이 바뀜으로써 더 많은 말의 겨레들을 거느린다.
지금도 '도르다·두르다'는 말이 어떠한 사물을 감싼다는 뜻으로 쓰임을 보면
도솔(두솔)의 '돗(둣)과 상당한 유연성이 있지 않나 한다.
예부터 신라에서는 입추(立秋)가 지난 뒤 진일(辰日)에 별제사를 지낸다. 문
열(文熱)이란 숲에서는 해와 달에 대한 제사를, 영묘사(靈妙寺) 남쪽에서는 동
서남북과 중앙의 5방(方)에 별제사를 지냈으니 이는 사람의 일을 별과의 관계
속에서 풀어 보려던 믿음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겠다. 별은 기원적으로 빛이며
불이라 할 수 있다. 그 낱말의 겨레를 보면'별-볕-볏/빌-빛-빗/불-붇-붙-붓'
의 형태로 간추려 진다.
혜성가에서도 별이 문제가 된다. 갑자기 길쓸별이 나타나 참으로 위험한 나
라의 정황을 드러낸다. 빛이 어둠을 밝히듯이 길쓸별이. 어두운 나라의 재난을
밝게 쓸어 주는 횃불이 될 수도 있는 것. 두 해에 대한 풀이는 여러가지이다.
해 하나는 개혁세력과의 싸움으로 보는 이(김승찬, 1986, 향가문학론), 하나의
해는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보는 이(최철, 1983, 향가의 본질과 시적 상상
력), 풍년을 빌기 위하여 해에다가 활을 쏘는 사양제의(射陽祭儀)로 보는 이
(현용준, 1977, 월명사 도솔가의 배경설화고) 등 실로 많은 논의들이 있어 왔
다. 비유와 상징으로 보아 혜성가와 도솔가의 배경설화에 드러난 구조를 비교
분석한 논의(장진호, 1989, 신라향가의 주원성 연구)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다고 하겠다.
두 노래가 모두 하늘의 해와 별을 향해 비는 노래요, 지은이는 다 불교 승
려이면서 나라의 번영을 걱정하는 화랑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지 않은가.
미륵좌주(彌勒座主)만 해도 그렇다.하늘의 저승에 있는 미래의 부처가 아니고
미륵선화(仙花) 곧 화랑으로 드러내 보인 현실의 부처인 것이다. 이일병현(二
日竝現)에서 일본군의 일(日)과 하늘의 해를 가리키는 상징을 바탕으로 월명
스님이 노래한 두 해는 사라지고 미륵좌주가 어린 아이의 몸을 입고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편 융천스님이 지은 혜성가에서도 마찬가지다. 노
래를 부르자 문제의 꼬리별-혜성이 없어지고 끝내는 일본군대가 물러나 되돌
아 가는 두 일을 두 해로 나타낸 경우니 도솔가나 혜성가가 같은 맥락으로 풀
수 있다. 시련을 딛고 불국토(佛國土)에 대한 그리움을 펴 보자 하였으니 모두
다 거룩하고 영검있는 노래들이다.
땅에서 매인 매듭을 하늘에서 풀고 하늘에서의 문제를 땅의 노래로 한 셈이
라고나 할까. 임금도 스님도 위대한 스승들의 대통을 이어 받은 것으로 보인
다.
스승이란 사이를 뜻하는 '슷(間<훈몽자회>)'에 접미사 '∼응'이 어우러져
된 말이다. 여기 사이라면 신과 인간, 하늘과 땅의 신이요, 인간과 인간의 사
이가 된다. 기(氣)의 논리로 보면 스님의 염력(念力) 곧 생각의 기가 하늘의
기와 동기감응(同氣感應)을 일으킨 셈. 두 스님의 노래를 통한 사람의 기가 하
늘의 그것에 미쳤다고나 할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해괴한 일을 풀어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거룩한 성자(聖者)들이 물위를 걷는 것이나 산에서 산으로
날아 다님은 모두 기(氣)의 말미암음으로 일어나는 열매들이다.
어느 날 누구인가 우리 겨레의 하나됨을 이룸에 있어 동기감응을 일으킬 수
는 없는가. 아마도 이는 남과 북의 겨레들이 갖는, 하나됨을 향한 꿈으로부터
피어 나는 영혼의 기가 맞부딛침으로써 가능한 경지가 될 일. 공동체의 문
제를 풀이하기 위한 우리들의 기가 약한 탓이다.
오늘날의 월명이나 융천스님이 따로 없다. 우리 모두가 거룩한 스승의 마음
으로 돌아 갈 때 매듭이 하나 둘씩 풀릴 걸 가지고.
경덕왕과 찬기파랑가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 좇아 떠가는 것 아닌가
새파란 나릿가에
기파랑의 모습이 잠겼어라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신 마음 좇으려 하네
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 모를 그 씩씩한 모습이여
('삼국유사'에서)
기파랑은 누구였을까. 구름에 달이 가듯 아주 스스로운 사람. 하얀 모래와
조약돌이 달빛에 어리는 일오천 냇가에 외로이 서 있는 듯. 추운 서리 내리는
늦가을 들판에 잣나무처럼 그렇게 찬양받아 마땅한 사람. 무엇이 기파랑으로
하여금 그리도 우러르게 했을지.
기파랑은 화랑이라는 풀이가 중심을 이룬다. 단적으로 화랑의 '랑(郞)'자가
붙어 있음으로 해서 그리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록에 오를 만한 사람
가운데에서는 반드시 화랑에게만 붙여지는 씨끝은 아니다. 처용랑이라든가 문
무왕을 도와 당의 군사를 물리친 명랑(明郞), 일본으로 건너간 연오랑(延烏郞),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은 비형랑, 동명왕 때의 천왕랑(天王郞)의 보기가
모두 화랑이 아닌 게 분명하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바, 병을 고치는 의원이자 충신이며 불도인 기파(耆婆
Jiva)가 아닌가 한다. 기파는 어떤 사람이고 경덕왕의 어떤 일로 그를 찬양하
는 노래를 지어 불렀을까.
기파는 인도의 토쿠사시라 나라의 사람으로 성은 아다일러요, 이름은 힝카
라는 스승에게 의술을 배웠다. 7년 배움 끝에 마갈타 나라의 왕사성(王舍城)으
로 돌아 와서 여러 사람들의 병을 고쳤다. 마침내 왕의 병을 고치는 시의(侍
醫)가 되었으며 고치기 어려운 왕의 병을 다스려 이름 높은 의원이 된 이. 특
별히 눈에 뜨이는 건 아버지인 왕을 죽인 천하의 불효 아도세왕의 고질병을
고쳐 준 나머지 끝내 아도세왕을 불도에 귀의하도록 한다. 석가세존까지도 기
파를 찬양할 정도의 훌륭한 사람이 된 것이다.
경덕왕의 아들 얻기
당대의 충신이요, 덕망이 높은 충담스님은 저 이름 난 기파의 의술과 덕망
을 기림으로써 경덕왕의 성적인 불구를 고쳐 아들을 원하는 염원을 노래한 것
으로 보여진다. 그러니까 기파의 덕을 찬양하면서 부처님께 경덕왕의 소원 성
취를 빌었던 것은 아닐까.
경덕왕의 성(性)은 길이가 8치가 되었는데 어쩐 일인지 자식이 없었다. 해서
사량부인(沙梁夫人)을 폐하고 만월부인(滿月夫人)을 왕비로 삼았다. 이가 뒤에
경수태후가 된다. 어느 날 임금은 표훈대덕(表訓大德)으로 하여금 하늘의 상제
(上帝)께 빌어 아들을 얻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표훈스님이 상제께 알아 보
니 딸은 얻을 수 있다는 게 아닌가. 임금은 다시 청하기를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로 바꿔 달라고 한다. 하늘 상제는 말하였다. 딸이 아들로 되면 나라가 어
렵게 된다고. 임금은 무슨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들 얻기를 바랐으니 큰 일이
아닌가.
마침 만월 왕비에게 애기가 들어 서니 임금은 기뻐하였으며 아들을 얻기에
이른다. 한데 이게 웬 일. 왕자가 8살 때에 임금이 죽고 임금 자리에 나아가니
이가 곧 혜공왕이다.
혜공 임금은 어릴 때부터 임금이 될 때까지 여자의 놀이를 했고, 도사(道士)
들을 가까이 했다. 급기야 김양상과 선덕왕에게 죽임을 당하니 불행한 최후를
맞는다.
아들은 얻지 못하더라도 겨레와 나라가 평안해야 옳은 법. 이를 위해 표훈
스님으로 기파랑을 찬양하여 노래 공양을 하다니. 나라 이름이며 벼슬 이름,
땅 이름도 모두 당나라식으로 만들어 놓더니 그예 나라를 어렵게 만들고 뉘우
칠 줄을 몰랐으니 이거야 원 참. 말이 되는가.
멍들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하여 빌었더라면 얼마나 높아 보였을
까 말이다.
잣가지는 성 상징
'잣가지 높아 서리 모를 씩씩한 모습'에서 잣가지의 '잣'은 남성의 성(性)
과 걸림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 모양이 툭 솟은 게 마치 남자들의 뿌
리와 비슷하다. 짐작하건대 경덕왕의 성은 물건만 쓸데 없이 컸지 힘이 없어
애기를 생산할 수 없었던 게 아닌가 한다. '잣'이란 잣나무의 열매이기도 하
지만 같은 소리로서 '잣'은 고개를 가리킨다(훈몽자회 중8). 모두가 '사이'를
밑뜻으로 한다고 상정된다. 모음이 바뀌면 '잣 -- 젓 -- 좃'이 되는데 고대국
어에서는 파찰음소(ㅈ ㅉ ㅊ)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하였으니 마찰음(ㅅ)으로 읽
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면 '잣 -- 삿'이 되니 여기 '삿'은 바로 사이(間 <내
훈 1.3>)가 된다. '삿'에서 갈라져 나온 말 가운데에는 싹 새끼 등이 있음을
보면 노래말의 '잣'은 그 자체가 열매이기도 하지만 낱말 겨레와 음소들의 기
원으로 보더라도 성 상징이 짙음을 가늠하게 된다. 어쩌면 잣을 많이 들게 하
여 임금의 뿌리를 힘 있게 했을지도 모르는 일.
종족 보존이나 생명 보존의 본능은 예나 지금없이 같은 것. 임금이라고 해
서 원초적인 본능이 없다면 말이 안된다.
솟대 혹은 솔대나무의 솟(솔)이 태양을 향한 발돋움이요, 믿음이지만 남자의
뿌리를 숭배하는, 그러면서도 청동기(쇠) 문화의 상징이듯이 '잣' 또한 이에서
멀리 있지 아니하다. 조직의 자리로 보아 두 다리 사이에 솟아 있음은 잣나무
의 모양과 뭐 그리 다른가.
'사이'란 개념은 스승과 바로 이어진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임금이 신과
인간의 사이,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종교와 정치의 지도자가 되었으니 어찌
거룩하지 않으리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음은 크게 뉘우쳐 깨달
을 일이었다.
표훈 스님 뒤로는 그 이만한 대사가 없었다 함은 일연(一然)의 반도교적인
불제자의 정서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일연 스스로가 바로 기면서 말야.
'아아(阿耶)'의 드높은 경지
말이란 사물이나 사실 자체가 아님은 잘 아는 일. 그 밑 뿌리는 소리 상징
이다. 아무리 더럽거나 나쁜 것일지라도 입말 특히 글로 할 때 그것은 추상화
되고 미화되기도 하여 인식의 대상이 된다.
중간세계란 결국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과 특정한 대상 사이를 넘나드는 소
리 안의 인식 공간이라 해서 지나침이 있을까. 구름에 가리운 달이 새파란 강
물이 출렁이는 강가 모래밭을 걷고 있는 기파랑의 모습을 비춘다. 다시 둘레
를 보면 잣가지 높은 나무 숲들이 생명의 바다를 이루고 있음에.
할 말은 다 해도 그 뜻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이 있다. 노래의 말미
암음은 경덕왕의 병을 고쳐 아들 얻게 하는 것이지만 '아아(阿耶)'하는 감탄
의 경지에 이르면 그저 무념무상(無念無想). 푸른 강물은 이미 충담의 영혼이
어린 불심이 되고 서녁으로 가는 극락의 사자 달님은 영혼 가운데 들어와 있
는 것이다. 이르자면 달의 빛과 강물의 물이 어우러져 새로운 영혼의 움을 틔
우는, 거듭나는 삶의 교향곡을 연주하기에 이른다고나 할런지.
거기 무슨 긴 드러냄말이 있을까. 그건 해탈 -- 벗어남이며 삶 본래의 모습
으로 가고자 하는 발돋움이 어린 것이다. 마침내 광기(狂氣) 어린 느낌말 '아
아'가 있을 뿐. 흐름으로 보아 무슨 잣나무라든가 화판이라든가 함은 정녕 뱀
그림에 다리요 사마귀에 지나지 않는다. 허나 있는 걸 없다고 할 수야.
하늘과 땅이 만나는 어우러짐. 성(性)의 같고 다름이 하나 되는 법열(法悅)
이요, 암수가 어우러짐의 숨 가쁜 녹아 흐름일 것이다.
풀이하는 이에 따라서는 인도 불교의 경전인 베다경에 나오는 옴(om)과 같
은 거룩한 말이 '아아'라는 거다(이재선, 1972. 신라향가의 어법과 수사).
'아(阿)'라는 옴은 산스크리트 글자의 처음이기도 하지만 모든 산스크리트
소리는 '아'를 바탕으로 소리마디를 이룬다. 상징적으로 보아 '아'는 영원하
고도 보편적인 진리를 바로 떠 올린다. '아'는 우주의 진리이라, 갈고 닦음에
따라 덧없는 삶을 누리는 인간이 무한광대한 절대자와 함께 어우러져 하나가
된다. 해서 사람을 소우주(小宇宙)라 했을 지 모르겠다(조형호, 1993. 찬기파랑
가의 미학적 우주론 참조).
말이 없는 말 --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가장 진솔한 표현이 '아아'였을까.
결국 그 절대자의 자리에서 병 잘고치는 기파(耆婆Jiva)를 불러 경덕왕의 병
을 고치고 더 나아가서는 병든 나라 사람들의 고침을 기원하였다면 어떨까 싶
다. 하지만 절대자의 참된 경지를 말로 할 수 없어 겨우 감탄에 그친 것뿐. 불
가에서는 이를 과분불가설(果分不可說)이라 한다. 과분(果分)은, 현상세계인 인
분(因分)과 짝을 이루는데 절대 진리의 세계를 가리키며 이는 말로 할 수 없
다는 것이다.
병 고침을 간절하게 기원하는 경덕왕을 위하여 절대 자비한 부처의 힘을 입
은 기파에게 빌었던 일. 이게 사실일진대 현실과 이상은 늘 거리가 있나 보다.
그 거리를 좁힘에 있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으니.
충담의 기원을 넘어 달은 지고 강물은 흘렀을 것이며 삶의 생로병사를 벗고
자 뭇 사람들은 다시 떠 오르는 해나 밝은 달을 향하여 마음을 기울일 것이
다. 세월이 흐르니 묻혀진 옛날은 그립고 아쉬워서인가.
믿음의 뿌리는 우리의 땅 겨레들의 스승이요, 어버이임을 길이 새겨야 한다.
돌아 간 누이를 위한 노래, 제망매가
죽고 사는 길이
여기 있어 두려웠는지
나는 가네 말도 못 하고 가버렸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가지에 나고도
간 곳을 모르누나
아아
미타찰에서 만나 볼 나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련다.
(월명사의 '제망매가')
태어 났으매 살아 가는 것이고 하여 다시 죽음에 이른다. 내가 있으므로 해
서 다시 사라져 가는 게 스스로운 대자연의 질서요, 길인 것이다. 호머의 글에
서처럼 우리는 나무의 잎새처럼 봄·여름을 살다 가을이 되면 대지의 품으로
돌아 간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란 언덕에 서서 만나고 헤어지는 아픔은 언제
나 강물같은 서러움으로 얼룩져 영혼을 적시우고 어느 새 허허로운 벌판을 가
는 나그네가 되곤 한다.
불도에 넓고 깊게 나아 간 월명(月明)스님도 그러하거늘 우리네 먹고 마시
는 일에 빠진 이들이야 일러 무엇 하리오.
일찌기 저승으로 간 누이 동생을 위하여 월명 스님은 정성스레 재를 올리고
다짐 깊은 인간적 고뇌와 불제자로서의 마음을 노래로써 부처님 앞에 이바지
한다. 스산하게 부는 가을 바람에 지는 잎새가 뒹구는 밤에 촛불을 밝혀 놓고
속세의 남매된 인연에 목메여 울먹이면서.
죽는 사람이 어디 작별 인사하는 것을 보았는가. 그저 살아 있는 오빠의 애
끊는 마음일 뿐. 한 가지는 같은 부모요, 핏줄이다. 잎새 또한 같은 가지에서
피어 나고 짐이니 삶의 덧 없음은 물론이요, 형제간의 걸림을 드러낸 부분이
다. '잎'은 입(口)에서 받침이 파열성을 더하면서 갈라진 말이다. 보통 입이라
면 먹거리를 먹고 숨살이를 이어 가는 첫 관문이요, 말을 하는 언어적 존재의
표상이 되는 조직이다.중세어로는 닙(염불보권문32)인데 이는 앞을 뜻하는
'님'에서 비롯한다. 지금도 경상도 지역에서는 '이말·임'이라 하는바 중세기
로 치면 모두 니말·님이 됨으로서다. 그러니까 먹거리로 보면 제일 앞에 있
는 신체조직이요, 주요한 목거지가 된다. 먹는 것만큼 좋은 것은 많지 않으니
까 말이다. 기원적으로 '님'은 '니' 혹은 '니마'에서 오는데 여기 '니'는 태
양을 뜻하는 기초어휘에서 비롯되며 태양숭배의 제의문화 시대에는 부족의 머
리가 태양신에게 제의를 올렸던 것(필자,1990, '님'의 형태와 의미).
세월이 흐르고 삶의 모습이 달라지면 같은 말이라도 그 뜻이 달라진다. 물
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해서 '니마(님)-닙-닢'으로 펴 나아갔는데 뜻이 태
양에서 상당히 멀어졌다. 태양이 모든 만물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빛과 열의
샘이고 입이 먹거리를 대는, 탄소동화작용을 일으키는 부분이란 점에서는 맥
을 같이 하고 있긴 하다. 입(口)으로 사람의 수를 헤아릴 적에 인구(人口)란
말을 쓴다. 입이 몇 개냐는 말이 된다.
나무의 잎도 태양의 에너지-힘을 받아 광합성을 이루는 부분이고 보니 잎
이 얼마나 튼튼한가에 따라 나무나 풀의 삶이 좌우된다. 뿌리가 튼튼하면 잎
이 무성하다(根固葉茂)함은 잎이 무성해야 뿌리가 튼튼하다는 말도 되므로 그
러하다.
영원한 즐거움이 있는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노래 이바지를 한 월명 스님은
어떤 분인가.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살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한번은 큰 길을
지나면서 피리를 부니 달님은 스님을 위하여 그 자리에 멈추었다고 한다. 때
문에 그 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다는 얘기. 이로부터 법사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돌아간 누이를 위하여 법당에서 재를 올렸으니, 없는 종이돈을 마련하여 노
래와 함께 이바지를 하니 갑자기 바람이 불어 종이돈은 서쪽으로 날아 가고
없어지게 됐다. 극락-미타찰로 가는 길에도 돈이 필요했음인가. 아니면 돈 따
위는 필요 없어 바람에 날렸음인가.
이 노래는 불가에서 이르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4제(四諦)를 바탕으로 하
여 만들어진 짜임을 보인다.(이어령, 1985, 고전을 읽는 법 참조). 사제란 영원
히 변함이 없는 불교의 법리 중의 하나다. 나고 죽고 병들어 늙음이 모두 괴
로운 인생 길이라 이르러 고제(苦諦)요, 이들 괴로움의 뿌리가 소유라든가 애
정욕과 같은 고제의 말미암음이 되나니 이가 곧 집제(集諦)이다. 한편 이러한
괴로움을 훌훌 벗어 던져 버린 상태가 멸제(滅諦)인데 해탈 또는 열반의 경지
를 이른다. 나머지 도성제(道聖諦)는 무엇인가. 이는 열반에 이르는 수행과정
을 뜻하는데 바르게 보고 생각하는 등의 팔정도(八正道)가 그것이다. 이렇게
되면, 석가세존이 진리를 깨친 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비구에게 풀이해
준 그 길이 도성제다. 흔히 말하는 무소유의 소유가 아닐런지. 없음과 있음이
하나 되는 논리 이전의, 소유 이전의 자연의 세계라 해서 좋을 것이다.
노래 속에는 4제를 깨우치고 힘 써 길을 닦노라면 극락에 들 날이 온다는
기다림의 미학(美學)이 배어 있다.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이다. 때로는 실망스
럽고 지루한 것이나 본디 기다리다는 '집으로 돌아 온다'는 뜻이다. 그 것도
영원한 우리들의 천국으로. 중세기말에서는 기다리다가 '기들오다'(두시언해
등)로서 이를 가르면 긷(家보금자리)에 오다가 덧붙어 이루어진 말로 미루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기다림. 그건 우리 모두의 안식이며 꿈이기에 소중한 것이다. 조금은
기다리면서 살 일인 것을.
원망(怨望)의 노래와 잣나무
물색 좋게 잣나무는
가을에도 그릇되이 아니 지매
(잣나무) 너처럼 (살아) 가자고 하였는데
우러르던 (그 때 그) 얼굴이 (지금) 가신 줄에야
달이 비치고 잠잠한 못엣
지나가는 물결(이) 언덕을 할퀴듯이
(임)의 모습이야 바라 볼 수 있다 해도
세월 (세상 인심) 인즉 마저 함부로 달아난 것이로구나
('삼국유사 - 원가(怨歌)'에서)
약속은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믿음이 깨어지고 없는 곳에 사랑의 움이 돋
을 리가 있을까. 거기에는 어떤 열매도 바라 볼 수도 없는 일. 그것도 임금과
신하 사이에 있었던 굳건한 약속이었기에 더 절실했는지도 모른다. 나라는 어
지러워 흔들리는데 이를 아물여 가기 위하여는, 앞 일을 꾀하기 위하여는 뼈
를 깎는 발돋움이 요구되었던 터.한데 신충(信忠)과 경덕 임금 사이에 있었던
약속은 사라지고 속은 상하고 해서 임금과 함께 있었던 자리의 잣나무에 원망
이 담긴 글을 적어 매어 달자 나무가 말라 죽는 이상스러운 변괴가 일어나 많
은 사람들의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 에는 효성왕 때의 이야기로 나온다. 효성왕
이 세자 시절에 신충과 함께 바둑을 두면서 한 효성왕(孝成王)의 말이 있었다.
"뒷날에 내가 만일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얼마뒤 효성은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며 공을 세운 신하들에세 상을 주었다.
하지만 신충은 벼슬이 없었다. 이에 원망을 품은 신충(信忠)은 임금을 원망하
는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는데 이게 웬 일인가. 나무가 말라 버리는 괴변
이 일어났다는 것.
이를 안 임금은 진상을 조사해서 다시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매 잣나무가
다시 살아 나게 되었으니 그 때 신충이 지은 노래가 원망의 노래 - 원가(怨
歌)라는 것이다.
여기 효성임금을 경덕임금으로 본 실마리는 무엇인가. 문제의 풀이는 신충
이 벼슬을 그만 둔 시기로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 를 보면 신
충은 경덕왕 16년(757)에 김사인(金思仁) 대신에 상대등(上大等)이란 벼슬에
오른다. 경덕왕이 우리나라의 땅이름을 당나라식으로 '-주(州) 군(郡) 현
(縣)'을 붙여 쓰게 하는 등 중국화 정책을 실시하였던 시기가 바로 신충과 함
깨 정사를 보던 때이다. 신충은 김옹과 더불어 경덕왕 22년(763)에 벼슬 자리
에서 물러 난다. 이는 같은 정당이면서도 생각을 달리한 이순(李純)의 상소사
건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실인즉 경덕왕의 정치가 잘못되었음을 바로 이
르는 내용이었으니, 이들 대신에 만종(萬宗)과 양상(良相)이 등용된다. 뒷날 양
상은 신라 36대 임금인 혜공을 죽이고 스스로가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
신충은 개혁정치에 앞장 서 일하다가 반대파들에게 몰려서 그만 두게 되니
임금과의 약속이 깨어졌던 터. 차려 놓은 밥상에 재 뿌리기가 된 것이다. 나름
대로 얼마나 야속하고 배신감을 느꼈겠는가.
한데 일연(一然)스님은 신충 김옹 이순이 모두 왕의 사랑을 받은 신하로
서 함께 벼슬을 그만 두고 남산에 들어갔다고 적고 있다. 까닭인즉 삼국사
기 의 '신충 김옹을 면하고'의 '면(免)'을 그냥 지나쳐 버렸으니 신충이 다
른 두 벗과 약속을 하고 갓을 벗어 걸고 산으로 갔다는 풀이를 하였기 때문이
다(양주동, 1977, 고가연구, 참조).
다시 신충이 벼슬을 그만 두고 단속사(斷俗寺)란 절을 지은 기록만 보아도
미심쩍다. 절을 지은 해가 일연스님의 기록으로는 경덕왕 22년(763)인데 배경
설화에 대한 별도 기록인 별기(別記)에서는 이순이 왕 7년(748)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일로 보아 '원가(怨歌)'를 지은 창작 시기나 동기
가 삼국유사 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저 잣나무처럼 살자더니
세자는 바둑을 두면서 잣나무를 두고 변함없이 잘 해 보자는 약속을 한다.
너를 잊지 않겠다(不忘汝)함은 특정 개인인 신충 뿐 아니라 신충과 함께 나눈
나라 다스림과 삶의 바른 길에 대한 서로간의 믿음이었을 것이다. 이에 감복
한 신충은 일어나 절을 했다는 것(興拜).
세월이 흐르고 자리가 달라지면 마음이 바뀌기 쉽다. 경덕왕도 세자 때 먹
었던 마음이 바뀌고 신충과의 언약을 저버렸으니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걸어
놓고 원망하는 노래로 부를 밖에 다른 길이 없지 않은가.
반대파의 말만 듣고 신충과 김옹을 벼슬 자리에서 쫓아낸 것이니 바로 '우
러르던 (그 때 그) 얼굴이 (지금) 가신 줄이야'하고 원망을 한다. 우러르던 얼
굴은 곧 경덕왕이요, 변한 것 - 가신 것은 약속이요, 서로의 믿음임에 분명하
다.
"달이 비치고 잠잠한 못엣 / 지나가는 물결이 언덕을 할퀴듯이"라.
달빛이 환하고 아주 평화로운 연못에 바람이 불고 해서 그런 평화는 깨어진
다. 못에 담기는 물은 나라 다스림으로 볼 수도, 많은 나라의 백성일 수도 있
다. 본디 '못'이란 '못 - ㅁ - 몰'과 같은 낱말 겨레를 이루며 작은 물체들이
모여 드는 곳을 이른다. 하늘에서 내리는 빛은 달이니, 임금이 달로서 비유된
다. 잔잔한 못은 평온한 세월인바, 여기에 바람이 불어 닥친다. 큰 시련이 다
가 선 것이다.
신충과 임금의 약속은 무너지고 정세는 험난해져서 세상이 살얼음판으로 바
뀌게 된 걸 이른다. 할퀴면 상처가 나는 법. 심하면 목숨을 잃는다. 해서 신충
은 산속으로 든다.
노래의 흐름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험한 세상을 원망하고 탄식하기에 이
른다.
"임의 모습이야 바라볼 수 있다 해도 / 세월(세상 인심)인즉 마저 함부로
달아난 것이로구나."
임금은 같은 사람인데 간신의 무리들로 하여금 세상 인심이 고약해지고 평
화는 사라지고. 신충 자신의 무능력함과 아울러 임금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고
있는 드러냄이다. 노래의 줄거리로 보아서 정과정곡의 마지막 글과 같이 임금
이 마음을 돌리어 옛 약속을 지킴을 애원하는 부분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
다(장진호, 1989, 앞의 논문).
애 어른 할 것 없이 약속을 지킨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약속은 약
속이기에 믿음을 이루어 내야 한다. 믿음은 '믿다'에서 갈라져 나온 이름씨이
다. 여기 '믿'은 바탕 곧 땅을 가리킨다. 땅을 딛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가 신하이든 임금이든 마찬가지. 흙에서 모든 목숨살이가 태어나서 다
시 그 흙으로 돌아감이니 가장 변함이 없는 건 흙이다. 흙은 어머니요, 삶의
뿌리이니 진실로 믿음이란 우리의 영혼이 깃드는 영역이기에 믿음을 저버리면
거기에는 깨어져 부서짐만이 있을 것이로다. 믿음이여. 사랑이여.
먼 눈 뜨기와 천수관음(千手觀音)
무릎 세우고 두 손 모아
천수 관음 앞에 비옵나이다
일천 손과 일천 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기를
두 눈 다 없는 이 몸이오니
하나라도 주시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오시면
그 자비가 얼마나 클 것입니까
('도천수관음가'에서)
눈이 먼 아이를 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차라리 어머니 자신의 눈
이 먼 게 낫지. 신라 경덕왕 무렵,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희명(希明)부인은 태
어나 다섯살 된 아이가 갑자기 소경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행여 어떨
까 하여 아이를 안고 분황사 왼쪽 집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관음 앞에 나아갔
다. 끓어 오르는 답답함과 간절한 소원이 온몸을 휩싸 안는다.
아이를 시켜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관음(觀音)부처님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웬일인가. 아이의 먼 눈이 갑자기 보이는 게 아닌가.
희명부인의 기도소리를 바르게 들었을까. 관음부처의 일천 손과 일천 눈이.
부인의 이름이 드러내는 듯이 상당한 암시를 준다고 하겠다. 바랄 희, 밝을
명. 그러니까 눈이 밝게 되기를 빌고 바라서 소원을 성취한다는 얘기다. 그 간
절한 기도의 소리를 눈으로 보듯 알아차린 관음(觀音)부처의 신통한 병고침.
앞뒤가 서로 걸맞는 줄거리다. 지극한 정성이면 먼 눈이라도 뜰 수 있다는 가
능성을 보여 준 것이다.
눈이 멀다의 '멀다'는 어떠한 뜻바탕을 갖는가. 눈이 좋은 사람이라도 멀리
있는 하늘이나 산 혹은 바다를 보면 그 형체가 확연하게 보이지 않을 터. 멀
어서 안 보이는 보통사람이나 맹인이나 멀리 있는 물체를 보지 못하기는 한
가지다. 마침내 '멀다'는 말은 '멀리 있다' 곧 보이지 않음을 우회적으로 에
둘러 이르는 그림씨이다. 거꾸로 눈이 잘 보인다는 건 보아야 할 물체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어 확실하게 드러남을 이른다.
눈이 먼 아이의 안스러운 처지를 바라다 본 관음부처의 눈과 귀가 희명부인
의 간절한 소원의 모습과 목소리를 보고 들었을 것인즉. 아니라면 어떻게 천
수관음부처에게 올리는 노래를 마치자 먼 눈이 잘 보였단 말인가. 참으로 어
려운 일이다.
지은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장이 있어 온 게 사실. '아이로 하여 노래를
지어 부르게 했다(令兒作歌禱之)'는 삼국유사 의 글을 어떻게 풀이하는가
에 따라서 전혀 다른 지은이가 된다. 우선 '아이로 하여금 노래를 지어 기도
하도록 했다'는 풀이와 '아이로 하여금 (희명이) 노래를 지어 그대로 빌게 했
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앞의 경우라면 노래를 지은이도, 빈 사람도 아이가 되
지만, 뒤의 경우에는 희명부인이 노래를 짓고 아이가 그 어머니의 말씀을 따
라 빌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앞에서 희명부인이 지은 노래임을 풀이하였거니와 이제 노래의 내용을 떠
올리면서 그러한 가능성을 되짚어 보기로 한다.
노래의 속내와 어머니의 기원
무릎을 곧추하고 두 손바닥을 모음은 관음부처를 향한 경건한 기도의 자세
를 드러낸다. 아이도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기도하는 모습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짐 깊은 경건한 기도의 모습은 원왕생가(願往生歌)나 청전법륜가
나 청불주세가(請佛住世歌)에서도 보인다. 두 손을 모으고 비는 원왕생의 노
래, 법우(法友)를 빌기 위하여 부처님에게 나아가고 더 가까이 나아가는 청전
법륜(請轉法輪)의 노래며 손을 부비어 아뢰는 청불주세(請佛住世)의 노래는 모
두 간절한 사람들의 소망을 비는 모습임에 틀림없다(장진호,1989, 앞 논문 참
조).
대상이 누구라도 좋다. 아이의 눈만 뜨게 해 준다면 하는 어머니의 샤마니
즘에 가까운 생각은 분명 보통 사람의 생각을 넘는 초능력한 파장을 일으켜
관음부처의 마음에 전함으로써 같은 기가 만나는 동기감응(同氣感應)을 불러
낸 것은 아닐런지. 지성이면 감천이라 함도 이러한 동기감응의 이어짐으로 말
미암는 것이라고 본다.
무릎을 꿇는다 함은 모든 걸 던져 버린 상태다. 희명부인과 아이는 부처님
의 은총을 기다린 것이다. 많은 사람의 간절한 말은 쇠붙이라도 녹인다고 했
는바, 여기에 희명부인 말고 다른 사람의 정성이 끼어 들어 보았자 별 볼 일
이 있겠는가. 또 다섯살의 아이가 그렇게 간절한 소원을 빌 수가 있을까도 의
심스럽다.
이러한 희명부인의 절절한 기원은 둘째 연에서도 드러난다. 천수관음의 일
천손 가운데 하나를 놓아서 손 끝에 달린 눈 하나를 빼어 아이에게 달라는 기
원이다. 그 손과 눈은 어리석은 뭇중생을 위한 손이며 눈이었으나 저다지도
간절하게 비는 마음을 어찌하랴. 만일 승려가 이 노래를 지었을 경우라면 눈
을 빼 달라는 교리에 벗어난 애원을 하기란 어려운 일. 아이의 눈을 고치게
하기 위하여는 염치도 온갖 명예도 다 던져 버리는 어머니의 피눈물 어린 정
성이 노래에 배어 있는 것이다. 꼭히 승려가 지었고 빌었다면 눈을 뺄 게 아
니고 다라니 주문과 같은 '다라니경(陀羅尼經)'을 읽으면서 빌었을 것이다. 아
무래도 천수관음에 비는 노래를 지은 이는 희명부인 밖의 다른 사람일 가능성
은 약한 것이다.
마치 부처님의 힘으로 눈을 뜨게 되는 심청의 아비 심봉사처럼 도천수관음
가에 눈을 뜬 아이도 관음신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할 것이다. 희명 즉
부처의 광명한 세상에 눈을 뜸과 동시에 아이도 눈을 뜬다는 겹치기 효과가
있어 영험하고 신이한 부처의 누리를 깨닫게 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 것은 아
닌가 한다.
눈이 육신의 등불이라면 믿음은 영혼의 누리를 밝히는 정신의 횃불이라 할
수 있다. 종교는 시대를 따라 바뀌지만 생노병사에 시달리는 삶이란 갈대는
지나친 욕심으로 점차 눈이 멀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고리모양의 어우름, 한라산
물 맑고 별이 아름다운 밤이면 하늘의 선녀는 달빛을 타고 연못에 내려온
다. 몸과 머리를 깨끗이 하고 하늘이 그리운 마음에 달빛을 타고 다시 하늘에
오르곤 한다.
어느 새 선녀의 벗님이 된 사슴은 시나브로 예쁘고 나이 어린 선녀에게 정
이 들고 둘이는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야기. 부족함이 없이 둘은 하늘과
땅, 풀꽃과 짐승, 새들의 축복 속에서 복된 삶을 누리며 달 밝은 밤이면 뭇 사
슴들의 부름을 받고 이바지 음식을 대접 받기도 하였다.
한데 이게 웬 일입니까. 용왕의 부름을 입고 선녀는 사슴도 모르게 용이 되
어 구름을 타고 하늘로 되돌아 간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운 임을 찾아 헤매었
으나 사슴은 찾지를 못하였고 별이 내리는 못물 위에 선녀의 환상이 흐느끼는
듯 부는 바람에 물결만 드높을 뿐.
먹이도 물도 잃어 버린 채 밤과 낮으로 선녀를 그리워 하다가 물 위에 어린
선녀를 찾아 물속으로 들어 갔다가 아예 물속에서 죽게 된 슬픈 사연이 전해
온다. 해서 백록담-흰 사슴못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라산은 깨달음의 원산이라
한라산, 이는 곧 제주를 뜻한다. 그 한라의 기슭에 뭇 목숨들이 보금자리를
틀고 살아 간다. 끊임 없는 바람이 불어 산을 넘듯 역사의 수레바퀴는 숱한
아픔의 발자취를 남겨 놓았다. 그것도 섬 아닌 육지 사람들이 들어 오면서부
터 말이다.
산은 제주섬의 남쪽 20리에 있으며 섬의 바람막이이자 울타리가 되는 진산
(鎭山)이다. 한라(漢拏)라. 은하수나 구름을 손으로 잡을 만큼 높고 아름다운
곳이 아닌가. 산은 달리 머리가 없다는 뜻의 두무산(頭無山) 또는 머릿부분이
둥글다고 원산(圓山)이라고도 한다(대동지지 참조).
막상 산 위에 올라 보면 백록담이 꼭대기에 있으며 이렇다 할 봉우리가 없
다. 거의 둥근 모습을 한 백록담은 물론이요, 산아래로 펼쳐 진 바다로 둘러
싸인 큰 산이란 느낌을 준다. 하긴 산 중턱에서 올라다 보아도 반쯤 둥그스레
한 산의 머리통을 알아 차릴 수 있다. 이름으로 보면 '한라-두무산-원산'이
같은 산을 가리킨다. 먼저 두무산은 어떤 내용인가. 글자대로라면 머리가 없는
산이니 우선 머리가 평평하고 둥그니까 그렇게 이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상당한 암시가 될 수 있다. 마을 이름으로 두무실이 있듯이 '두무(둠)'
는 그 보기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모음이 바뀌면 '둠-담-돔'과 같은 말들
이 한 낱말의 겨레를 이루는 걸로 보인다. 기역을 말 끝으로 취하는 특별한
형태변화를 하여 곧 '둠(ㄱ)-둥/돔(ㄱ)-동/담(ㄱ)-당'과 같은 변이형들로 퍼져
나아 간다. 둥그미·동그라미·당그러하다와 같은 말이 같은 뜻 '둥그러함'을
드러 내는 말들이다.
탐라만 해도 그렇다. 옛말에는 아직 거센 소리가 자리잡지 못하였음을 떠
올리면 탐라-담라의 맞걸림을 생각할 수 있다. 하면 탐(담)은 원(圓)이지만 '-
라(羅)'는 무엇인가. 신라의 '-라'와 같이 '땅'을 아니면 큰 마을을 드러낸다.
제주가 바다에 둥그렇게 둘러 싸였음에 터한 지도 알 수 없다. 바다와 구름과
안개 속에 둘러 싸여 보는 이로 하여금 느낌의 숲을 이루게 한다.
지구가 둥글게 돌아 가니까, 우주는 원의 모습으로 움직여 나가니깐 이 땅
위에 실존하는 모든 존재들은 원형성 지향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동그란 귤
나무의 꽃들이 아픈 세월의 한라산을 이야기하듯 계절을 두고 피다가 열매로
접어든다. 한라에 대하여 덧붙여 둘 것은 크고 좋다는 뜻의 '한'에 땅을 가
리키는 '-라'가 본디의 속내가 아닌가 한다. 한라산(두무산 ·원산)은 둥글
고 크고 좋은 산이란 의미로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남한에서는 가장 높은 산(1915미터)이요, 보기 드문 풀과 새들이 떼지어 사
는 곳. 겨레의 하나 될 동그라미를 진작부터 말 없는 외침으로 우리를 손짓해
준다. 어서 빨리 뭉치라고. 해서 잘 굴러 가라고. 산은 깨달음의 성자인가.
조선왕조초 권람의 글을 옮겨 놓으며 글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푸른 하늘 아래 한갓 한라산이라네
멀리 보이는 저 큰 바다는 끝 없이 넓기도 하여라
사람이 하늘별을 타고 바다의 나라에 왔는가.
말인듯 용인듯 바다와 산이 한가롭구나
땅은 사람들에게 보금자리를 주었나니 배는 바람을 타고 갔다간 되
돌아 온다.
태평세월에 벼슬 하는 이 고을의 그림만 만지작거려
이 고을이 비록 별수 없어 보인다 해도 그림에서 베어내면 어떡할려
고."
들온 말 쓰기와 말글 한 누리
오늘의 시대를 일러 지구촌 시대로 규정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둘레에
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과 인간관계에서 말미암은 말과 글자살이에서 적지
않은 문제들이 일고 있다. 때로는 우리 말과 글이 참으로 우리 것인가를 되돌
아 보아야 할 만큼 우리말은 비속어나 은어 또는 외국에서 들어온 외래어 곧
들어온 말로 크게 멍들고 마침내 병이 들어 가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낌은 글
쓰는 사람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말이란 사람이 사람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길에 하나의 규범이요 제도이며,
일종의 약속이다. 특정한 말소리와 그 소리가 가리키는 속내와의 관계는 필연
성이 없다. 하지만 일단 감정과 사고판단의 도구로서 약속이 된 것은 분명 하
나의 약속이기 때문에 구속성을 갖는다. 그러면서도 말 속에는 그 말을 쓴 겨
레들만이 누려온, 누릴 수 있는 문화가 반영되게 마련이다. 문화가 인간이 벌
여 온 정신활동이라고 볼 때에 말글은 온 겨레가 함께 다듬어 가야 한다. 정
책적으로 우리의 약속을 관리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우리는 한글로 우리의 문
화적인 유산을 옮겨 살아간다.
나라말이 한민족의 의사전달의 그릇일 때만이 쓰여야 할 있음과 필연성이
발생한다. 따라서 한국사람이면 누구나가 쉽고 바르게 알아 들을 수가 있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한 소리는 한 글자로 규정하여 흔들림이 없이 쓸 수 있음
은 우리가 바라는 글자살이의 커다란 꿈이다. 이러한 꿈을 우리의 현실로 만
들기 위하여 외국어를 받아들여 쓰고 말하기에 본이 되어야 할 규정들을 놓고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가 있지 않은가. 어떤이는 외국의 원주민이 발음하는
소리대로 적자고 한다.이름하여 원음주의라고 한다.반면에 다른 이들은 말은
쓴 사람이 주인이니까 외국어를 빌어다 쓰는 사람에게 익숙한 말로 되옮겨서
적거나 말을 함이 옳다고 한다. 흔히 우리는 이를 일러 현실음주의라고 한다.
이 두 가지의 생각과는 달리 원음과 현실음을 벗어나 철자발음을 따라 적고
읽는 철자발음주의가 있다. 이를테면 [gas-가스]로 적어 읽는 방법이다. 받아
들인 대부분의 들어온 말은 영어 계통의 낱말들이다. 상당수가 철자발음주의
를 따라서 받아들여 우리말의 소리에 맞추어 적는다.
현실음이냐 아니면 원음주의냐 혹은 철자식 발음 위주로 하느냐 하는 문제
는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기도 하다. 결국 모든 방식들이 우리말에서의 들온말
을 어떻게 받아들여 사용하는 것이 우리말의 언어능력과 수행을 늘려가는 방
법이냐의 물음으로 간추릴 수 있다고 본다. 모두가 길고 짧은 점이 있다. 말하
는 이의 언어감각은 그렇게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보기에 따라서 다르
겠지만 현실음과 철자식 발음에 익숙한 우리의 현실은 원음주의만을 좋은 것
이라고 하여 얼핏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우리 말에는 우리말대로의 새로운
말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조어법이 있다. 일단 들어온 들온말은 그에 걸맞는
우리말이 있으면 좋고, 아닐 때에는 우리에게 익은 철자식 발음을 중심으로
씀이 어떨까 한다. 철자식 발음은 여기서 현실음주의와 크게는 한가지 방법으
로 보아 이르고 있음을 짚어 놓아야겠다.
이제까지 외국에서 들어온 말들을 어떻게 적어야 하느냐. 우리말 조어법에
맞는 말들로 바꾸어 쓸 수 있으면 모두의 관심사로 다루어 어떻게 써야할까를
따져 본 셈이다. 과학문명과 더불어 밀려 들어 오는 엄청난 들온말을 일일이
따져서 씀도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말에 대한 규정들을 때때로 사람
마다 쓰는 발음이 각자 다른 것을 하나하나 다 규범화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
닌가.
이는 원음을 취하거나, 현실음을 취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
다. 주로 들온말을 어떻게 적고 말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조금
생각을 돌려보면 분명히 우리말로도 다 두루 통해 쓸 수 있는 것도 별 생각없
이 들온말을 마구 쓰는 문제가 앞의 문제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일이라고 보
여진다. 실제의 우리 둘레에서 우리말이 시들어 병들고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홀로서는 말글살이
일상의 생활에서 쓰이고 있는 보기들을 간략하게나마 더듬어 봄으로써 앞서
말한 것들과 고리지어 보면 그래도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옳을 것이냐에 대한
되돌아봄에의 조그만 실마리가 될 줄로 생각한다. 남과 북이 하나됨에 있어
언어공동체를 이루어야 할 우리로서는 참으로 되돌아 봐야 한다.
하나하나의 낱말은 언어생활의 바탕이 되며 결정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그릇
이다. 이른바 기생체계(parasite system)란 말을 쓰거니와 우리의 최근세사는
다른 겨레들에 힘입어 주객이 바뀐 삶을 살아 왔다.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중
국, 러시아, 일본, 미국, 프랑스와 같은 힘에 기대어 살아온 역사가 아니었던
가.
우리말에는 한자, 일본어, 서구의 여러나라의 말들이 뒤섞이어 쓰이고 있다.
오랜 역사의 격랑 속에서 문화, 정치, 경제, 종교, 교육 등이 넘나들어 그 결과
로 우리말처럼 뿌리를 내려 부족한 부분의 우리말을 기워주는 구실을 한 생산
적인 측면도 많이 있다. 논리적인 어휘라든가, 수리적인 말에서는 절대적이며
현대로 오면서 근대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서양의 문명·문화어들이 자연
스레 우리말로 들어와 쓰이게 되었다. 일본이 겨레의 땅을 강제로 빼앗은 뒤
여러가지 많은 탄압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말과 고리지어 보면, 일본어를
쓰게 하고 조선말을 전혀 쓰지 못하게 했다. 이를테면 언어의 말살정책이 전
가의 보검인 양 춤을 추어댔다.
오늘날에 와서 1960년 이후 일본을 통하여 들어오던 외국어가 직접 쏟아져
들어왔다. 처음엔 산업분야나 운동, 오락 등의 중심을 이루었지만 지금은 먹
고, 입고, 자는 집의 이름에도 외국어의 사용이 부쩍 늘어났다. 가히 우리말의
국제어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우선 손 쉬운 보기로서 신문·방송에 쓰인
들온말 사용의 범람을 들어본다.(이종재(1987) 참조)
(영어의 경우)
마이카시대에 맞추어 날로 늘어가는 여성 자가 운전자들, 선글라스에 휘날
리는 스커프의 조금은 희귀하던 이미지에서 이제는 높아진 우먼파워의 상징이
기라도 하듯 어디서고 쉽사리 마주치게 되는 모습들이다.(매일신문 1984.
11.13) 심플한 디자인에 V네크 스타일은 주니어들에게 어필하는 캐주얼복이다
(매일신문 1985. 7. 5). '88올림픽 59일간 종합리허설(조선일보 1987. 8. 13) 경
북대학교가 첫 케이스이다(KBS 1984. 3. 6 9시 뉴스) 오 삼계탕 스태미너 넘
버원(KBS 1987. .8. 23)
(일본말의 경우) 노모를 단까에 태우고 피난 간다. 아나고 한 사라 하고 와
리바시 두개 주시오, 요오지 있습니까. 당신 옷 가라가 좋구려.
위의 보기에 드러난 들온말은 이에 값하는 우리말로 얼마든지 쓸 수 있음에
도 그렇게 쓴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말글살이의 이상이 '말 따로 글 따로
사람 따로' 하지말고 이른바 '언문일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
기 때문이다. 이들 들온말을 우리말로 모두 바꾸어 쓸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쉽게 말이요.
(영어)
마이카→자가용, 자가운전, 선그라스→색안경, 스카프→목도리, 이미지→모
습, 상, 우먼파워→여성의 세력(힘), 심플→단순한, 산뜻한, 네크, 스타일→옷깃,
유행(양식), 어필하다→마음에 들다, 주니어→젊은이, 리허설→예행연습, 케주
얼→평상, 케이스→사례, 경우, 스태미너, 넘버원→정력최고
(일본어)
단가→들것, 아나고→붕장어, 사라→쟁반(접시), 요오지→이쑤시게, 와리바시
→짜개 젓가락, 가라→무늬
쓰는 사람에 따라서는 새롭고 호기심도 일고 하여 들온말을 쓸 수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제 나라 말을 두고, 조상대대로 써 내려온 겨레말을 놓아두
고 다른 나라의 말을 씀은 참으로 되돌아 봐야 할 일이다. 말이란 그 말을 쓰
는 사람들의 정신 곧 민족정서 혹은 민족의식이 깃들어 있음이요, 문화의 상
징임을 돌이켜 보면 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어 감사하다는 인사말로 '고맙다'
는 말을 한다. 이 때 고맙다(고마+ㅂ다>고맙다)의 고마는 <용비어천가>의 고
마나루(熊津)의 고마(→곰熊)이며 이 형태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서 삼국유사
고조선에 나오는 단군왕검의 어머니 신격인 고마(곰)와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고맙다는 역사적인 맥락으로 보아 [당신의 은혜가 단군왕검의 어머
니신인 웅녀-곰신이 단군을 낳아 길러준 은혜와 같다→고마와 같다→고맙다]
와 같이 모습이 심층에서 변형되어 쓰이고 있음을 알기에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단순비교이기는 하지만 영어를 비롯한 다른 말에는 '감사하다'는 인사말
에 그 겨레들의 종교와 역사적인 내력이 드러나는 말은 많지 않다.
(우리말과 다른 말에서 '감사하다'의 비교)
고맙다(국어) thank(영어) danken(독어) merci(불어) 謝謝(중국어) 有リ難ウ
(일본어) (고맙다→(형태분석) 고마(熊)+ㅂ다(如) 고맙다 (뜻) 당신의 은혜가
단군의 어머니이신 고마(熊女)와 같다)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이니까 우리말 갖고는 도저히 풀이할 수 없고 실용적
이지 못한 경우에까지 들온말을 쓰지 말자는 이야기는 분명 아니다. 위의 보
기들에서처럼 얼마든지 역사와 문화전통에 뿌리박은 우리말을 놓아두고 새로
움만 추구하려는 듯한 들온말의 사용은 피하자는 것이다.
이종재(1987-15)에서 보여주듯이 들온말을 쓰게 되도록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것은 텔레비전과 라디오로서 조사항목을 100으로 볼 때 4할의 기울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 다음이 잡지(21%) 친구(17%)의 순위로 드러나고 있다.
공영방송이나 신문에 쓰이는 말이나 문자표현은 규범성을 띤 표준성을 갖는
다. 굳이 들온말을 써서 우리말을 뒷전으로 세우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
가. 좀더 우리말에 애정을 가지고 남 다른 관심으로 겨레의 얼이 담긴 우리말
을 써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 조사보고에 따르면, 상품 이름 중에 서양말 이
름이 차지하는 비율은 신발류 86% 자동차 86% 학용품 60% 학생잡지 70%가
넘으며 조사대상 2천여 상품에서도 순수한 우리말은 10%정도였다(박정숙
1987. 상품명에 순 우리말 10%뿐).
글쓴이가 1990년도 어느시의 전화번호부에 실린 몇가지 분야의 상점, 음식
점 이름을 살펴본 일이 있다. 음식점 이름은 들온말로 된 이름이 66% 의류는
72%로 조사하였다. 여러지역에 있는 집합주택(아파트 1989)의 이름은 20%가
넘게 외래어와의 혼용으로 쓰이고 있으니 이로 미루어 볼 때 가히 한국어의
국제화시대가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일종의 언어적인 사대주의에 빠질 염려
조차 없지 않다. 외국인이 와서 살 집도, 옷도, 상품도 아닌 것이 분명한 데
도대체 우리말을 제치고 외래어를 마구 써서 얻어지는 것이 무얼까. 어떻게
생각하노라면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답답할 지경이다. '호랑이한테 물려가
도 정신을 차리라'란 속담이 있다. 생존경쟁의 현장에서 각기 겨레들이 돌아
가야 할 기항지는 겨레얼이요, 겨레주의인 것이다. 오늘날 국제무대에서 일어
나고 있는 일들이 바로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지 아니한가. 발트삼국의
독립선언이 그러하고 중국의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 배려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안 그래도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
말로 토착하여 버린 중국어(한자)가 한글학회의 큰사전 에 따르면 55%나
된다. 알게 모르게 참다운 우리말은 외래어에 떠밀리어 국적이 없는 겨레말로
표류하게 되지 않을까.
우리 겨레는 지금 남과 북이 하나됨으로 가기 위하여 1991년 9월17일에 유
엔의 회원국이 되었다. 어떠한 값을 치르더라도 하나되는 겨레공동체를 이루
어야 한다. 현재 남북한이 보여주는 말의 이질화가 상당히 진전되었다고 하는
지적은 이미 상식의 수준에 이르고 있다. 북에서는 주체사상이라 하여 거의
영어를 비롯한 외래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네들의 조어법을 따라 새롭게 뒤
치어서 외래어를 쓰고 산다. 한편 남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외래어를 많이 사
용하고 있다.
통일을 하자면 전제되어야 할 중요한 일들이 있을 터인데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말글의 남되기를 넘어서 겨레의 말글한누리를 이루는 것이다. 한
글학회에서 연 세종날 529돌 학술발표모임(1991. 5. 18)에서 모스크바대학의
마주르 교수는 북에서 1980년 이후 처음으로 한자계통의 접미사를 허용 했다
고 조사, 보고한 바 있다. 하물며 들온말의 범람이란 주체사상을 실현함에 있
어 배타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언어정책도 이쯤 되고 보면 닫힘구조라
고 하겠는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에서는 너무도 외래문화 내지는 말을 받아
들임이 지나치게 개방적이다.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하냐를 따지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해 보건대, 말이나 글살이는 우리 것에 중심을 두고 우리 생활에 꼭 받
아들여야 할 들온말을 신중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좋을 것이다. 들온말을 적
는 문제만 해도 그러하다. 들온말 받아들이기와 그 맥을 함께 한다면 대답은
바른 가늠이 잡힐 것인데, 이제까지의 현실음을 바탕으로 하면서 필요한 부분
만큼 원음에 가까운 말을 살려서 적는다면 앞뒤가 맞을 것으로 짐작된다.
들온말의 낱말 받아들이기나 낱말을 적는 문제 모두는 우리말을 살리어 나
아가는 말본과 맞춤법의 큰벼리-표준말을 소리나는 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에 따라서 이에 맞도록 이끌어 가면 통일지향의 언어 공
동체를 이룸에 이바지가 될 것이고 우리말에 드러난 우리의 얼을 지켜가는 길
이 될 것이다.
나라의 부강을 이루려면 겨레와 나라의 땅과 겨레의 말이 어우러져 삼위일
체가 되어야 한다는 주시경 스승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웃으면 젊어진다고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성내면 한 번 늙어간다
(一笑一少一怒一老)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한다. 같은 값이면 웃으면서 상대방을 대함이
낫지 않겠는가. 다른 이에게 창피와 모멸감을 주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마음 속에 기쁨이나 즐거움 또는 기가 막힐 때, 느낌의 변화나 상태에 어울
리게 밖으로 드러내는 생리적인 움직임을 일러 '웃는다(웃다)'고 한다. 겉으로
는 입을 벌리고 소리를 내고 기뻐하면서 웃는다. 사람을 같잖이 여기거나 비
웃을 경우도 있다. 흔히 마음은 움직임으로 드러나게 마련. 해서 행동과학이라
는 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 차려 알맞게 처
리를 한다.
마음 속에 쌓인 긴장이 풀어질 적에 그러한 반응으로서 해학이 일어난다는
생각도 있다(서라사, 1971, 문학에 있어서의 웃음의 개념, 국어국문학51). 때때
로 우리들은 삶의 과정에서 어떤 불안이나 불만족을 겪으면서 살아 간다. 검
은 구름같은 불안이 풀어 지고 평안한 느낌을 갖게 될 때 여기에 웃음이 따라
붙는다.
간추리건대, 웃음은 안에서 일어 나는 마음의 드러남에서 움직임의 보람을
찾을 수 있다.
말의 됨됨이를 보면 '웃다'는 말의 줄기가 되는 '웃'에 움직임 접미사 '-
다'가 녹아 붙어 이루어 진다. 여기 말의 줄기인 '웃'은 어떤 뜻을 드러내는
걸까. '웃'은 위 아래의 '위(上)'에 값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웃음은 보이지
않는 여러가지 마음의 느낌이나 생각을 위로 드러낸다는 데 터를 댄다. 마침
내 얼굴의 모양이나 입으로 소리를 내서 귀로 그 소리를 듣거나 눈으로 웃는
모습을 보게 된다. 친절하고 상냥한 웃음 띤 얼굴이 우리의 일상에 들꽃같이
느껴운 때가 있다. 그 게 딱히 베아트리체나 모나리자의 미소일 필요는 없다.
단군시대의 곰부인-웅녀가 주는 웃음이 아닐지라도 우는 모습보다는 웃는 모
습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마음의 건강을 꽃 피운다.
한 집안에는 겨레붙이들의 족보가 있다. 마찬가지로 말도 그러하다. 하면 웃
을 때, 내는 소리나 얼굴의 모습 또는 신체의 변화와 걸림을 보이는 웃음의
낱말겨레로는 어떠한 형태들이 있을까.
먼저 소리에 따른 웃음의 표현에 대하여 더듬어 본다. 웃음의 소리가 기냐
짧으냐에 따라서, 아니면 작으냐 크냐에 따라서 몇 가지로 갈래 지워 진다.
길게 웃다는 장소(長笑)하다, 그 반대인 경우는 단소(短笑)한다고 이른다. 아
울러 크게 웃을 때는 대소하다·굉소하다·폭소하다로 드러낸다. 폭발적인 웃
음의 효과를 보이는 '폭소하다'가 가장 큰 웃음소리를 가리킨다. 대소-굉소-
폭소는 단계적으로 소리의 크기에 따른 변별력을 갖는다. 입을 크게 벌린 모
습으로 웃는 경우, 홍연대소한다고 하며, 아주 즐거운 표정을 함께 드러낼 때,
간간대소한다고 한다. 참으로 웃는 모습도 가지가지이다.
하늘 보고 너털웃음을 웃는 일이 있는데 이를 두고 앙천대소하다로, 손뼉을
치면서 웃는 걸 박장대소하다로 표현. 깔깔대며 웃는 건 뭐라 하는가. 가가대
소라 한다. 방자하게 웃는 건 방소(放笑)하다로, 그냥 웃어 넘기는 것은 '소쇄
하다'로 이른다. 주로 한자어에 힘 입어 웃음의 개념이 표현되는 게 좀 이상
할 정도로 많다. 소리의 크기로 보아 거의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입을 약간
벌리고 웃는 모양을 '빙그레'라 한다. 이에 따른 말겨레가 전혀 없는 것은 아
니다. 가령 '방글방글-벙글벙글/방긋방긋-벙긋벙긋'은 빙그레와 같은 뜻이면
서 소리느낌만 다를 뿐이다.
이제 소리와는 달리 웃는 모습에 따른 웃음표현의 낱말겨레를 살펴 본다.
우선 얼굴의 모양을 중심으로 했을 때 어떤 말의 겨레들이 있는가.
즐겁게 웃는 것은 환소하다로, 이야기하면서 즐겁게 웃는 건 담소하다, 언소
(言笑)하다로 드러 낸다. 이 밖에도 얼굴 모습이 변하는 것과 걸림을 보이는
것으로는 요염하게 웃다(교소하다), 사랑스레 웃다(교소하다)와 같은 말꼴들이
있다.
아울러 입술의 모양이 변하면서 웃는 말에는 어떤 게 있을까. 약간 입을 벌
려 웃는다(신소하다). 소리없이 웃는다(미소하다)와 같이 한자어 계통의 말이
중심을 이룬다. 고유어계에서는 한 번 웃고 지날 때는 방긋하다로, 되풀이되는
경우는 방글거리다로 드러 낸다.
입 모양의 변화는 물론이요, 눈 모양이 함께 달라 질 경우는 어떠한가. 한
번 웃을 때 상긋하다, 되풀이할 때는 상글거리다로 표현된다. 이 밖에도 상긋
방긋하다(일회성), 상글방글하다(반복성)와 같은 드러냄말들이 있음은 널리 아
는 일이다. 참으로 웃음도 가지가지.
웃음의 정도가 심해 지면 몸의 특정한 부분이 달라 지기도 한다. 이 때에
쓰이는 말로는, 자지러 지게 웃다(절소하다) 배가 아픔을 느낄 정도로 웃다
(배꼽잡다) 허리가 구부러 진 양으로 웃다(요절복통하다)가 있다. 얼마나 웃
으면 배에 아픔을 느낄 정도로 웃는 것인가. 하긴 처녀 때에는 소똥 말똥이
구르는 것만 보아도 웃는다고 하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앞에서의 웃는 동작은 자연발생적으로 솟아 나는 웃음이다. 한데 그렇지 않
은 수가 있다. 뭔가 겉과 속이 어긋남으로 일어 나는 일이 있다(배해수, 1982,
웃음동작의 낱말밭). 이를 동아리 지어 알아 보도록 한다. 이 얼안에 드는 웃
음은 분명 자연스러움이 없는 경우라고 할 것이요, 정상적인 웃음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해서 객관성도 없을 수가 있다.
웃지 않아야 할 적에 자신도 모르게 웃는 경우, 실소(失笑)한다고 한다. 거짓
으로 웃을 때는 가소하다, 어쩔 수 없이 웃을 때는 습소(濕笑)하다, 겉으로만
웃을 때 헛웃음 치다 등의 말이 쓰인다.
웃는 소리나 모습이 두드러진 경우에 쓰이는 말이 있다. 아주 괴상하게 웃
을 때 괴소하다, 미친듯이 웃을 때 광소하다, 바보처럼 웃을 때 치소(痴笑)하
다, 찡그려 웃을 때 빈소하다로 드러 낸다. 가끔 미친듯이 웃어주고 싶은 때가
있기는 하다.
잘 찡그려 웃는 이가 미인이라니
중국의 월나라 적 서시(西施)란 미녀가 살았다. 그는 월나라 임금 구천의 사
랑을 온차지하여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가 된다.
한번은 서시가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장거리로 나아 갔다. 해가 눈에 부셨
음인가. 눈을 많이 찡그리고 웃었다는 얘기. 이를 본 다른 여성들은 눈을 잘
찡그려 웃는 것이 미인의 한 모습으로 생각하여 너도 나도 눈을 잘 찡그려 웃
는 연습을 하여 한 바탕의 유행을 낳았다니. 누구나 아름다워 지려는 욕구가
있을 테니깐 하긴 누구라서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리오
망해가는 월나라를 건지기 위하여 서시는 마침내 오나라 부차임금에게 미인
계의 머리로 뽑혀 월나라의 원수를 갚는 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그녀는 가는 데마다 눈을 찡그려 웃음을 띤 얼굴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모았
을까. 그것도 적의 나라에 들어 가서. 참말로 어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억
지로 찡그려 웃어야 할 판이니.
경우에 따라서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에서 웃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서시 같
으면 원한 어리게 웃었을 것이다(검소(劍笑)하다). 다른 이에게 아첨하여 웃는
것(첨소), 간사하게 웃는 것(간소), 아양을 부려 웃는 것(미소(媚笑). 선웃음 치
다·웃음을 팔다. 등을 들 수 있다.
열등감과는 달리 우월감에 차 있으면서 웃는 일이 있다. 가령 실 없이 놀리
는 듯이 웃는 것(회소하다), 비웃다·조소하다·업신 여김의 웃음(비소·고소
하다) 등이 있다.
'웃'의 홀소리가 바뀌면 '옷'이 된다. 옷도 따지고 보면 우리의 몸 위에 걸
치는 날개에 지나지 않는다. 감정의 옷. 생각의 옷 가운데 우린 즐거움과 기쁨
을 드러낼 수 있는 무지개 빛 옷같은 미소-웃음을 잃고 살 수는 없다. 그 게
좀 마음에 안 맞는 옷이라 할지라도 벗고서 거리를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자신의 몸에 맞는 옷. 분수에 맞는 옷은 정말 필요하다. 상대에게 기쁨을 주
고 용기를 일으킬 수 있는 웃음을 웃자. 우리 한 번 마음을 터 놓고 웃고 삽
시다. 그럼 좋지 않겠습니까.
술과 푸닥거리
지나 가노라니 배부른 독에
설진 강술을 빚오라
조롱곳 누룩이 매와 잡사오니 내 이를 어찌 하리잇고
('청산별곡'에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과 서러운 한을 이기지 못하여 술로
달랠 수밖에 없었나 보다. 137년이란 긴 세월 동안 몽고 사람들에게 압박과
설움을 당하면서 굽실거리고 70만이 넘는 사람들은 20년 동안 붙들려 가고 그
것도 모자라 일본을 칠테니 모든 군사용 먹거리며 장비를 대라는 것.
전해 오기는 고려 때 이름 높은 원감국사의 '영남민간고상24운'을 바탕으로
해서 청산별곡이 되었다고 한다. 청산별곡의 후렴구의 '얄라(yala)'는 몽고말
로서 서럽다는 뜻이라고 한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아예 저리 가야만 하던 상
황이라. 그래 저래 술이나 퍼 마실 밖에 다른 길이 없었단 말인가.
술이란 무엇인가.
벌써 이른 때에 신에게 드리는 이바지로 술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
지 의 기록에서처럼 여름지이를 시작할 때와 마칠 때에 풍년과 겨레의 안녕
을 비는 큰 ㅁ거지에서 날마다 며칠씩 먹거리와 술을 먹고 마시면서 노래와
춤을 추었다니 그 열기 또한 대단하였던 모양. 동네마다 노래방이 있으매 노
래의 열기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피속에는 그러한 옛부터의
열기가 내림을 타고 흐르는 듯.
하늘과 땅신에게 이바지로 술을 바쳤다는 사연이 된다. 한 마당의 굿판을
벌려 신과 인간이, 인간과 인간이 하나됨에의 체험을 함으로써 모두는 하늘의
백성이 되고 신명이 지핀 거리, 축제의 거리가 된다. 하긴 서양말로 축제-페스
티발도 '신을 즐겁게 하는' 일에서 말미암는다. 해서 모두는 공동운명체라는
믿음을 굳게 하였다. 뭔가 서로의 마음에 응어리를 풀고 닦아 내는 씻김굿이
며, 푸닥거리를 치렀던 것.
한 마당의 굿판을 이끌어 나아갔던 이는 누구인가. 아사달에 벌린 신의 나
라-신시(神市)에서는 환웅이 비스승, 구름스승, 바람스승을 더불어 사람의 나
라에 내려 왔다는 거다. 이르자면 배달겨레의 위대한 스승들이라 할 수 있다.
스승이란 말은 사이를 뜻하는 슷(間)에 접미사 '응'이 붙어 이루어진 말이
다(훈몽자회 참조). 사이라면 무슨 '사이'일까. 미루어 보건대, 하늘과 땅의,
신과 인간의 사이, 사람과 사람의 사이가 아닐까 한다. 앞의 사이는 종교직능
자로서 교황에 맞먹는 스승의 구실이요, 뒤의 사이는 행정의 정치지도자로서
의 스승이다. 정성 어린 제사를 모시는 이바지로서의 '술-사이'는 어떤 언어
적인 질서로 풀이할 수 있을까. 풀이하는 이에 따라서 다르다. 술이란 다달말
의 실에서, 우갈말의 셀에서, 산스크리트말의 수라에서, 몽고말의 상랑에서 빌
어 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원표, 1947, 술의 어원에 대하여).
거꾸로 우리말 '술'에서 다른 겨레들이 꾸어 갔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마치 서양의 실크(silk)가 우리말의 '실'에서 옮겨 간 것처럼 말이다. 슷-숫을,
같은 '사이'의 뜻을 지니는 낱말겨레로 볼 수 있다. 숫은 다시 숟-술로 이어지
는 가지벋음이 있으므로 해서 술은 곧 사이란 말이 되기에 이른다. 흔히 곡물
에 누룩을 넣어 빚은 것으로 막걸리·청주·맥주가 있고, 증류한 것으로 소주
·고량주가 있다. 그 밖에 화학적으로 만든 합성주, 향료 약거리를 넣어 만든
발효음료를 통틀어 술이라 한다. 문제는 발효에 있다고 본다. 상한 것도 아니
요, 날 것도 아닌 중간쯤 되는 게 발효가 아니던가. 바로 술이 그러하다.
계림유사 의 기록에 따르면 술을 수발(禾醱)이라고 적었다. 글자대로 풀
면 곡식(禾)을 발효(醱)시킨 것으로 본 것이다.
발효라 함은 곡식에 누룩을 넣어 썩은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날 것도 아닌
뜬 상태의 곡식이다. 여기에 여러가지 향료나 약거리를 사이에 끼워 넣기도
한다.
쟁기의 보습을 끼우는 것도 술이요, 먹거리를 퍼 먹는 숟가락도, 책이나 종
이 사이에 놓아 두는 게 모두 술이 아닌가. 지나치면 독이요, 적절하여 알맞으
면 술이 약이다. 혼례를 갓 치른 신랑과 신부는 합환주를 나눈다. 영혼과 육신
으로 보아 이제 둘 사이에 다름이 있을 수 없다. 술로서 하나됨에의 동기유발
을 불러 일으키는 데 큰 구실이 있다.
진실로 화기애애한 세상살이를 위하여 갈라진 겨레의 하나됨을 위하여 흠씬
취할 술을 마련해야 되리라. 하면 우린 한 몸이 되는 게 아닐까. 술의 참뜻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꽃 이바지
진달래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 않으신다면
저 꽃 꺾어 바치오리다.
(수로부인의 '헌화가'에서)
꽃을 보고 더럽다고 하는 이가 있을까. 봄이면 산에 들에 어우러져 피는 진
달래. 어쩐지 아려오는 설레임이 있음은 나 혼자뿐이랴. 삶에 지친 겨레와 함
께 해 온 탓인지. 주리다 못해 진달래라도 뜯어 먹고 두견이 우는 봄밤 이즈
러진 달을 보고 서러움을 달래던 자장가 때문이었을까.
꽃을 꺾어 뿌리며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는 산화가(散花歌)의 사연이 있다.
이를 보면 신에게 사람을 바치는 이바지, 아니면 대신 소나 개같은 짐승을 바
치는 이바지, 보다 한 걸음 승화시켜 꽃을 바치는 꽃 이바지, 노래와 춤을 드
리는 이바지, 실로 그 내력은 가지가지. 이제 꽃노래로 '헌화가'에 대한 사연
을 더듬어 보자.
신라 33대 임금인 성덕왕 시절. 순정공(純貞公)이란 이가 명주-지금의 강릉
땅에 태수의 자리로 부임하는 도중이었다. 길을 가다가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
게 된다. 병풍을 치듯한 바위벼랑이 바다에 이어 있고 천길이나 되는 듯 높은
벼랑 꼭대기에 손짓인양 철쭉꽃이 곱게 피어 있었다.
순정공의 부인 수로(水路)는 꽃을 보고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곁에 있
는 이들에게 저 꽃을 꺾어 나에게 줄 사람이 없겠느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대
답하는 이가 없었다. 극락에 필 만다라화라도 되었을까. 아님 그저 그냥 가까
이 보고 싶어 그랬을까.
때에 암소를 끌고 가던 웬 늙은이가 부인의 말을 들었다. 나의 꽃 이바지를
기꺼이 받아 준다면 꽃을 갖다 주겠단다. 아니나 다를까. 벼랑 위의 꽃을 꺾어
줌은 물론이요 꽃 이바지 노래-헌화가를 지어 바쳤다고 한다. 벼랑 위에 꽃꺾
이를 한 것이 우선 신기한 일인데다가 노래까지 지어 바쳤다.
부임 행차는 계속 이어 진다.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는데 바다의 용
이 갑자기 나타나 수로부인을 이끌고 바다로 들어 간다. 이에 놀란 순정공은
발을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데 이 게 웬일인가. 난데 없는 노인이 나
타나 부인을 구출하는 방법을 일러 주지 않는가.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衆口삭金)고 했으니 바다의 용이라고 해서
뭇 사람의 말을 두렵게 여기지 않겠느냐고. 백성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
서 지팡이로 강언덕을 치면 부인을 만날 수 있을 거라 했다. 말대로 사람들을
모아 '바다의 노래'를 불렀더니 용은 부인을 데리고 나와 순정공에게 되돌렸
다. 불렀던 당시의 노래는 이러하다.
"검(거북)이여 검이여/수로를 내 놓아라 남의 부인을 빼앗은 허물이 얼마나
크냐/만일 네가 부인을 내 놓지 않으면/그물로 잡아 구워 먹으리."
('해가(海歌)'에서)
부인은 너무도 아름다워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면 여러 차례 귀신에
게 잡힌 바 되었다.
수로는 벼랑 위에 핀 철쭉꽃을 갖고 싶어 했다. 사람의 손이라곤 닿지 않는
저 높은 벼랑 위의 꽃을. 알 길 없는 한 노인의 도움으로 꽃과 노래를 얻는다.
이르자면 꽃노래라고나 할까, 꽃 이바지라고 해 둘까.
꽃은 두드러짐이라
사람이 신(神)을 섬기거나 사람을 모실 때에 이바지가 따르기 마련. 때로 꽃
을 신에게 바치기도 하고 양같은 짐승을 이바지로 드리기도 한다. 심한 경우
신은 마침내 인간의 몸. 그것도 처녀를 요구하기도 한다. 부처 앞에 꽃을
뿌리고 공덕을 기리기도 하는바, 이를 산화공덕(散花功德)이라고 했다.
꽃이란 무엇인가. 꽃은 생명이 깃드는 보금자리요, 풀나무의 정수리이다. 그
런데 그 꽃을 꺾어 바친다는건 희생이요, 자기 부정의 다시 태어남이다. 태어
나는 공간은 물이며 바다를 지키는 용과의 하나됨이 아니겠는가. 최소한의 희
생으로 나머지 모두가 산다면 그건 거룩한 일임에 틀림 없다.
꽃이 피고 진 자리에 열매가 자란다. 옛 것은 가고 새 것의 움이 트듯 또
다른 목숨살이의 터밭이 꽃이다. 옛말에 꽃은 곳(월인석보), 곧(두시언해), 곶
(용비어천가)이었다. 그러니까 같은 뜻을 드러내는 같은 소리의 낱말겨레들이
다. 꽃은 '두드러져 솟음'이다. 장산곶 마루에서 '곶'은 바다쪽으로 툭 두드러
져 나온 뭍을 이른다. 꼬챙이처럼 말이다. '곳'은 어떤가.. '곶'에서 받침소리
지읒이 마찰음이 되면 '곳'이 된다. 꽃봉오리가 솟아 나오듯 뭍도 물 보다는
위로 두드러져 솟아 오른 공간일 시 분명하다. 물론 '곧'은 받침 자리에서 얻
어지는 말음현상에 따라 굳어진 말로 보인다.
마침내 '곶'이 거센소리와 된소리로 되어 오늘날의 '꽃'으로 바뀌어 쓰인
다. 옛부터 우리의 산과 들에는 진달래가 피고 진다. 머리의 '헌화가'에서 그
꽃은 진달래로 봄이 옳다. '짙배 바위'의 짙배는 '딜배-달배-달외-달래'의 걸
림을 보이는 말이기 때문이다. 경상도 대구에는 월배(月背)라는 곳이 있다. 월
배를 이두식으로 읽으면 '달배'가 되니 말이다. 이는 또 그 주위의 꽃을 가리
키는 '화원(花園)-달배'와 어울려 맞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실상 진달래는
참꽃이라고도 하며 흔히 두견새의 넋을 떠 올리고 망제(望帝)의 옛일을 함께
고리지어 많은 정서를 우리들에게 안겨 준다. 진달래는 짜임새로 보아 '진
(眞)-짙/달래'의 어우름으로 이루어진 말이다.
꽃노래로 꽃 피는 아침과 달 뜨는 저녁이라 하나 꽃은 식물의 성(性)이요,
씨알보전의 상징이다. 특유의 빛깔과 냄새로 뭇 벌과 나비를 부르고, 지나는
바람에 날려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어렵사리 진달래꽃을 마련한 수로부인은 누구일까. 순정공의 아내임은 물론
이요,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이라 해서 무리가 될까. 수로라, 물수의 '물'을 중
심으로 해서 이두식으로 읽으면 '수로-물'이 된다. 하니까 당연히 바다의 신
(神) 곧 물신과 하나가 된다. 또한 용의 제물이 된다. 훈몽자회 에서 용을
'미르(辰)'라 한다. '밀-물'은 한 가지로 '물(水)'을 바탕으로 한다. '밀'은
미륵신앙으로 이어지며 용으로 상징됨은 흔히 보는 일이다(서동요 참조).
어려운 일이 있기만 하면 도와 주는 노인. 짐작하건대 그 사람은 미륵부처
가 사람의 몸을 입어 나타난 것이 아닐까. '미륵'도 읽기에 따라서는 '미르-
밀'로 읽혀질 가능성이 있기로서다.
틈만 나면 바다를 건너 침노하는 일본의 세력은 떨칠 수 없는 위협이며, 크
낙한 과제였으니 부처의 힘을 빌어 가정을 지키고 나라를 일으키는 호국안민
의 생각을, 노래는 그 바탕으로 한다고 본다. 문무대왕이 죽은 뒤 감포 앞바다
속에 능침을 만들라고 한 걸 보면 당시에 일본과의 국제관계가 얼마나 어려웠
던가를 쉽게 알아 차릴 수 있다.
꽃은 겨레를 지키려는 자기암시의 꽃이며 수로는 물-바다를 잘 지키라는
바다의 안녕 질서를 비는 사다리가 아니던가.
이바지가 없는 누리. 그건 꽃이 펴도 져도 벌나비가 없는, 만들어진 거짓의
꽃일게다. 섬김은 다스리는 슬기요 미덕이기에.
빌면 무쇠도 녹는다
칠성당에 들어 서니 칠성님이 좌정하여
한손에 명줄 잡고 또 한 손에 복끈 들어
칠성단에 좌정하시고 삼신당에 당도하니
삼신(三神)할미 내려 올 때
'빌면 무쇠도 녹는다'는데 정말 그럴까. 사람에게는 잘못이 많다. 그 죄를
빌고 사죄하면 아무리 고집 센 사람이라도 용서해 준다는 말이다. 하지만 세
상엔 그렇지 못한 경우들도 많이 있다. 해서 사람에게 빌지 않고 별신 칠성님
께 빌어 사람의 성공과 번영을 얻고자 하였다. 위의 글은 하느님께 비는 '제
석경'의 한 부분이다. 적어도 옛적은 그러했다.
드높은 하늘을 떠돌아 다니는 별이 하고 많지마는 우리들의 한아비들은 북
두칠성을 머리로 해서 소원을 빌었다. 별의 본질은 무엇인가. 어두운 밤 하늘
에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는 목숨들의 영혼인가. 아니면 저승의 불꽃인가. 어
렸을 적에는 누구든지 마음 속에 아름다운 별나라에의 꿈을 가져 보게 마련이
다. 계절이나 방위를 셈할 때 기준이 되는 별이 큰곰자리별이다. 왜 하필이면
곰으로 떠올렸을까.
우리 겨레는 옛적부터 곰이 조상신이요, 영혼일 거라는 곰신앙 곧 곰토템이
있어 왔다. 단순하게 곰은 북쪽에 사는 짐승일 뿐이라면 그만이다. 하지만 믿
음의 대상이 되면 뿌리에 값하는 문화의 뿌리상징이기에 이른다. 신증유합
등의 자료에서는 곰(고마)을 경건하게 예배하고 그리워 해야 할 그 무엇으
로 적고 있음은 암시하는 바가 크다. 이야기는 바로 삼국유사 의 단군설화
로 이어진다. 우리 겨레의 조상인 단군의 어머니가 곧 곰(고마)부인(熊女)이질
아니한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충남 공주에서는 곰나루에 곰사당을 모셔 놓고 거기에
봄가을로 제사를 드렸던 일은 물론이요, 그 밖에 가장 보수적인 우리들의 땅
이름에는 전국에 걸쳐 곰(고마)과 걸림을 보이는 곳이 많다. 그만큼 한반도에
는 곰이 많이 살았을까. 믿음은 보이지 않은 것들의 실상이라고 한다. 마찬가
지로 추상화된 거룩한 상징이 곧 곰인 것이다. 곰신앙을 가진 겨레는 우리나
라를 비롯한 시베리아 전 지역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러니까 별에 곰의 의미를
부여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하였다는 줄거리로 간추릴 수 있다.
'빌'은 별이라
구름이 가리지 않는 밤이면 우리들의 머리 위로는 늘 별이 뜬다. 그리운 얼
굴이듯이. 별은 빛나는 물체요, 어둠을 밝히는 등대이기도 하다. 별을 보고 점
을 쳤던 페르시아 왕자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별의 속성은 빛이요, 광명
이다. 광명의 밑바탕은 태양이요, 불이다. 옛부터 태양을 신으로 숭배하여 제
사하던 삶을 살아온 건 우리뿐이 아니다. 무덤 속의 벽화라든지 빗살무늬·솟
대 등의 살아온 민속 자료에서도 잘 드러난다. 해우러름은 곧 별신앙으로 이
어지는데 우리말 '빌다'와는 무슨 걸림이 있을까.
자신의 소원대로 되기 바라며 잘못을 뉘우쳐 용서를 원하는 행위를 '빌다'
로 드러낸다. 더러 남의 물건을 우선 갖다 쓰거나 도움에 힘입음을 뜻하기도
한다. 부족을 대신하여 빌었던 사람이 다름 아닌 임금이요, 제사장이었다. 그
대상은 앞에서 이른바 태양신-별신이요,태음신이자 물신인 곰(고마)신이었다.
'빌다'는 움직씨로 명사 '빌'에 접미사 '-다'가 붙어 이루어진다.'빌'이 상
징하는 중심뜻은 무엇일까. 글쓴이가 보기로는 별의 변이형이 아닌가 한다.
먼저 지역별로 조금씩 다르게 쓰는 별의 방언을 찾아보자. 대부분의 지역에
서는 '별'이지만,일부 지역에서는 벨(경기·강원·함경·평안) 빌(강원·충청
·전라·제주·경상) 밸(경남) 베리(함경)로 쓰인다.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빌'의 변이형이다. '빌다'를 중심으로 보면 별의 기본형이 바로 '빌'이 아닐
까 한다. 별은 용신앙과 더불어 물을 다스리는 태음신이자 북방신이다. 중세어
자료를 보면 광주본 천자문 에 미르진(辰)이라 해서 별을 드러내었으니 용
과 별은 같은 소리로 나는 동음이의어로 보인다. 다시 같은 문헌에 미르룡(龍)
이라고 하는 걸 보면 확실히 '별(빌)-밀'의 맞걸림을 알게 된다.
그럼 미르와 별(빌)은 어떻게 그 소리상징의 질서를 풀이할 수 있는가. 본시
미음(ㅁ)과 비읍(ㅂ)은 입술소리로서 같은 계열의 소리이다. 발달단계로 보아
미음이 비읍에 앞서 있었음을 고려하면 소리로는 용-물에 대한 믿음의 뿌리
가 깊었음을 알겠다.
오늘날에도 보면 바위 밑에나 절간 또는 암자에 촛불을 밝혀 놓고 별신에게
빈다. 무당이 빌고 어려움을 당한 많은 사람들이 빈다. 별빛이 무수하게 땅으
로 내리듯 별은 그렇게 많은 복을 갖고 있는지. 칠성은 북두칠성을 이른다. 큰
곰자리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게 이 북두칠성이다. 앞의 네 별을 괴(魁)라
하며 뒤의 세 별을 표(杓)라 해서 만물의 때를 알아 차리는 자가 되었으니 별
신앙은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줄기로 풀이되기도 한다. 무슨 일이 잘못되
기라도 하면 '북두칠성이 앵돌아졌다'고 함도 이들 별신앙이 아주 깊게 우리
삶에 드리워져 있음을 보이고 있다.
어떤일을 처음 시작할 때 '비롯한다'고 한다. 살펴보면 비롯도 별을 뜻하는
'빌'에 접미사 '-옷'이 달라붙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시간의 단위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해서 헤아려지니까 그렇다. 토이기 말에서도 수사 가운데
첫째를 '빌(ㄱ)'이라 하는데 같은 계통의 말로 보인다.
별(빌)을 바탕으로 해서 벌어져 나아간 말들을 보면 '빌미(재앙이나 불행이
생기는 원인) 빌미잡다·빌붙다(남에게 아첨하다)·빌어먹다/벼르다(마음 먹은
것을 이루려고 꾀하다)벼름벼름·별빛·별똥/밝다·보름(밝음>발금>보름)'과
같은 말의 겨레들이 널리 쓰인다.
별을 그리는 마음은 밝음을 좇는 지향을 갖는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어질
겨레들의 영원한 길목을 지키는 큰곰자리의 영혼이 꽃처럼 쏟아지는 우리의
조국은 정녕 별을 바라 정성으로 비는 처음이요, 마지막의 얼안이어야 한다.
처용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할 줄 아는 건 정말 아름다운 한아비들의 모
습. 늘 봄이 오듯 그렇게 별을 바라 빌고 겨레의 하나됨을 애타게 기다릴 일
이다. 저 푸른 바다의 끝을 멀리 보고 서성이면서.
믿음의 소리갈
즈믄 해를 외오곰 녀신들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신(信)잇단 그츠리잇가 나난
('서경별곡'에서)
믿음이 없는 곳에 바람직한 사람의 사이가 이루어 질 것인가. 설령 천 년을
떨어져 살 수도 없지만 그렇게 산다 치자. 하더라도 그대가 나를 믿고 내가
그대를 믿는 믿음은 변할 리가 없다는 사랑의 노래말. 비유로서 바위에 떨어
지는 구슬에 비기었다. 구슬 하나하나는 깨어질 수 있지만 그 끈은 끊어질 수
가 없듯이 세월을 넘어 변할 줄 모르는 사랑은 대동강의 푸르름만큼이나 우리
들 마음에 와 닿는다.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고 여기는 마음을 흔히 '믿음'이라 한다. 믿음은 형식
무형식 간에 하나의 약속으로 드러나는 일이 많다. 말만 해도 그러하다. 아리
스토텔레스가 일렀듯이 말은 약속이요, 상징이란 것이다. 같은 말을 쓰고 사는
겨레들에게 있어 말이란 그 겨레를 묶는 동아리요, 고리이다. 이 약속을 등지
고 마음대로 말을 한다면 본디 말의 기능이라 할 생각과 느낌의 오고감이란
기대할 길이 없어지고 만다.
믿음이란, 말로 드러내지 않는 말 이전의 생활이며 문화를 빚어 낸다. 자연
발생적으로 자연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연물을 받들어 올리게 되고 거기서
나오는 믿음으로 거치른 세상의 목숨살이를 축복으로, 혹은 시련으로 받아 들
인다. 이르러 종교라 하는 게 바로 믿음 그것도 자연발생적인 것에 옷을 입혔
다고나 할까.
정신활동이 가져온 열매를 통틀어 문화라고 한다. 말도 심리-생리-물리적인
과정을 거치는 약속된 소리의 체계들이다. 따라서 말에는 그 말을 쓰는 겨레
들의 문화가 얼비친다. 필자는 이를 언어의 문화투영이라 일컫는다. 그러면
'믿음'이란 소리 상징에는 어떠한 문화가 되비쳐 있단 말인가. 그 말의 짜임
새는 어떠한가에 대하여 살펴 본다.
'믿음'이란 말은 '믿다'란 동사에서 갈라져 나온 형태이다. 말의 줄기 '믿'
에 조음소 '으'와 명사형어미 '-ㅁ'이 녹아 한 형태로 굳어져 아주 널리 쓰
인다. '믿다'는 움직임은 주로 어떤 뜻으로 쓰이는가. 풀이하는 이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뜻으로 본 특징은 '인정·의지·바람·좋아함·(믿고)씀'의 두
드러짐을 보인다.
믿음의 동작이 대상으로 하는 갈래로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사람이
자기자신에 대한 믿음을, 다른 사람, 자연물,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사랑과 소망을 믿음과 함께 한 전제로서 내 세우며, 불가에서
는 법·불·승으로 귀의(歸依) 곧 돌아감으로 표방하기도 한다. 한편 도가(道
家)에서는 꾸밈 없는 무위자연으로 돌아가라고 가르친다. 모든 믿음의 종교행
위는 상당 부분이 말로서 이루어진다. 해서 말 속에는 인간의 영혼이 들어 있
으므로 신에게 인간의 소원을 말하면 그대로 될 것이라 믿었던 것. 이를 일러
언령설(言靈說)이라 한다. 유교에서는 천명 곧 하늘의 명령을 믿고 중하게 여
긴다.
믿음은 땅에서 비롯
말하는 것을 자료에 따라선 '믿다'를 '밋다'로도 적는다. 이는 하나의 또
다른 변이형으로 바탕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움직임을 드러내는 '믿다'는
명사 '믿'에 동사화 접미사 '-다'가 붙어 이루어 진 말이다.
중세어에서 '믿'은 항문·믿둥·밑천 등으로 파악된다(훈몽자회·신증유합
·박통사(초)상).'믿'은 같은 뜻으로 적기에 따라서 '밑-밋-믿'으로 적힌다.
오늘날에와서는 모두 '밑'으로만 쓰인다. 이제 '믿'과 걸림을 보이는 4백여년
전의 말들에 대한 살핌을 둔다. 본래의 나무가지를 믿가지(두시언해)·본처를
믿겨집(삼강행실도)·본고장을 일러 믿곧(법화경)·문장의 본을 일러 믿글월
(노박자)·본나라를 믿나라(법화경)·본디의 흙을 믿흙(분문온역방) 이라 하는
게 그러한 보기가 된다.
원산지를 밋따(박통사)라고 하거니와 '믿'은 오늘날 '밑'으로 적히는바, 기
본적인 뜻은 '땅(地)'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한다. 단적으로 땅과 물이 살아가
는 가장 밑바탕이 되지 않는가 특히 물이 그러하다. 서양말에서도 강(ri ver)
은 뚝방이요, 살고 죽는 줄살이의 갈림길이란 뜻으로 우리 모두에게 주는 의
미가 크다.
낱말의 겨레란 볼모에서 같은 뜻을 드러내는 형태로는 '밋-믿-밀-밑-및'
등을 들 수 있다. 물과 직접 관련을 보이는 것은 '밀'이다. 훈몽자회 에는
용(龍)을 '미르(밀)'라 하였다. 용은 물을 다스리는 물신의 동물상징이다. 땅이
름으로 볼 때 밀양(密陽)의 경우를 보자. 양(陽)은 물의 북쪽이란 뜻이니 나머
지 '밀'은 물 또는 3이란 말이 된다(密陽-推火-三浪津)/彌勒山-龍華山<대동
지지>).
옛부터 내려오는 전통으로 보면 '용-미르(밀)' 이전에는 검(거북이)이, 그전
에는 고마(곰)가 동물상징으로 떠올랐다. 수렵생활의 표징이라 할 곰에서, 유
목생활로 바뀌면서 검(거북이)으로, 용(미르·밀)으로 바뀐 것이다.
용신앙은 곧 물신앙-밀신앙이 된다. 상당한 땅이름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러다가 불교의 수호짐승인 용이 물신앙과 융합이 되어 이른바 미륵신앙이
널리 퍼지게 되었던 것.
'믿-밋-밑-밀-및'에서 모음이 바뀌면 '묻-뭇-뭍-물'의 형태들이 쓰인다.
다시 양성모음이 되면 'ㅁ-못-몰'이 되는데 물의 본질인 '모임'에 뿌리를 내
리고 있다. 물이란 작은 수증기 상태의 분자들이 모여 이루어진 결정체이다.
본시 물체란 작은 부분들이 모인 덩어리가 아니던가.
샘은 흘러 내로 다시 바다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개인과 개인이 어울려 우
리의 사회를 이루고 삶의 보금자리를 가꾸어 나아간다. '밑이 쿠리다'고 할
때 '밑'은 항문 부분을 가리킨다. 모든 음식을 삭이고 난 뒤에 함께 모이는 데
가 '믿'이라 할 때 '모임'과의 걸림을 떠 올리게 된다.
동아리 지으면 '믿'은 물(밀)이요, 작은 것이 모여 이룬 물체의 기본틀이란
말이다. 모이려면 높이가 가장 낮아야 되기 때문에 아래 부분에 값하는 쓰임
이 생기게 마련. 또 물은 모든 생명의 피요, 근원이니까 가장 기본이 되는 것
이다. 말 그대로 바탕이요, 뿌리가 '밑'이 되는 셈이라 해서 지나침이 있을까.
들인 돈이나 노력에 비하여 손해를 보았을 때, 우리는 '밑지다'라고 한다.
근세어에서는 '밑지다'(노걸대)로 적힌다. 그러니까 아주 기본이 되는 물질이
나 터전을 잃었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믿-밑-밋-및'에서 기본형은 말음현
상에 따라 '믿'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의 말에서는 '밑'이 기본으로 쓰이
고 있다.
동작을 드러내는 '믿다'의 대상은 신(神)과 사람이 중심을 이룬다. 머리의
<서경별곡>에서처럼 사람에 대한 믿음의식은 때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략은
인간애-사랑으로써 나타낸다. 믿음은 사랑의 기본이니까 그러한가. 희랍신화
에 나오는 아모레는 '믿음이 없는 곳에 사랑의 신은 살 수 없다'면서 푸시케
를 떠나 버린다. 믿음과 사랑은 고기와 물과 같은 걸림이라 해 두자. 사랑이란
고기는 믿음의 물이 아니면 살 수 없을테니까 말이다.
좋아하다는 뜻으로, 사랑을 표현함에 있어 중세어에서 '닷다(愛)'(능엄경)는
형태가 있다. 여기 '닷'은 땅을 뜻한다. 땅은 물질 개념의 대표적인 것으로 소
유욕을 충족시키는 뿌리가 된다. 요즈음 땅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지 않은가. 그 놈의 땅 때문에.
믿음과 사랑은 근원적으로 땅과 물, 그러니까 지모신(地母神) 신앙에서 흘러
나와 우리의 삶을 기름지게 하고 목이 마른 영혼의 들판에 맑은 물을 대어 준
다. 해서 우리들의 조상들은 물과 땅에서 신격(神格)을 부여해서, 경건하고 조
심스럽게 땅과 물을 다루면서 살라는 삶의 슬기를 주신 것이다. 한데 오늘의
우리는 어떤가. 한시도 쉴 사이 없이 오염으로 공해의 강산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지 않는가.
거룩한 하늘의 백성인 배달겨레는 우리의 물과 땅에 대한 믿음을 꽃 피워
하늘과 땅의 사랑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 그 열매로, 갈등으로 얼룩진 홍익인
간의 그리움을 가꾸어 나아가야 한다.
선물로 받은 빈 자리라 여기며
외롭다 여기며
약손 얻어 가슴 쓸어 내리듯 산다.
사랑을 가진 나는
(김남조의 '아가'에서)
굴살이와 굿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들어라
들지를 않으면
구워서 먹을테다
(삼국유사 '영신가'에서)
신령한 거북이를 통하여 하늘의 신이 내리심을 맞이하는 굿노래. 그것도 김
수로왕을 맞이하는 맞이굿이 아니던가.
무당이 노래나 춤을 추면서 귀신에 치성을 드리는 의식이나 연극처럼 많은
사람이 모여 함께 누리는 구경거리를 일러 '굿'이라고 한다.
대체로 무당의 굿은 기원적으로 하늘신을 섬기는 제천의식에서 비롯한다.
모시는 신의 계통은 하늘의 천신→산신→성황신이거나 천신→산신→특수인격
신→시조신 혹은 천신→시조신으로 떠올려 잡기도 한다. 그러면 제천의식을
드러내는 '굿'은 근원적으로 어떠한 뜻으로 쓰였으며 이 말과 궤를 같이하는
낱말겨레로는 어떤 형태가 있는가.
쓰임에 따라서 '굿'은 '굿(궂)-굳-굴(걸)'같은 말들과 함께 사람이나 짐승이
살던 굴(穴)을 가리킨다. 자료로 보아 굿은 제천의식을 올릴 때 종교적인 공간
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예컨대 삼국유사 에 나오는 단군신화의 곰
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를 빌었던 곳이 바로 굿(굴)이요, 「고구려국본기」에
나오는바, 단군이 기림이란 굴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것도 그러한 보기가 된다
고 볼 수 있다. 고려사 의 삼성혈 이야기도 좋은 보기가 된다. 굴에서 세신
이 나와서 처음으로 사람의 누리를 개척하게 되었다는 줄거리다.
적어도 신석기 이전 사람들의 주거 형태가 굴살이 곧 혈거생활이었음을 생
각하면 굿은 종교공간이면서도 생활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
하는 역사적 유적들이 상당 수 있다 이 때 살던 이들은 정착된 농경살이를 하
였으며 뿔과 돌로 만든 쟁기, 낫, 돌, 맷돌 등을 썼다. 집의 모양은 원추형 또
는 장방형의 굴살이를 하였다는 것이다. 혹은 받침기둥이 있는 민속촌의 오막
살이를 연상케 하는 반쯤이 굴로 된 굴살이를 하였는데 이는 한반도와 요동반
도 남쪽에서 그 유적이 발견되었다(우리나라의 원시 잠자리에 관한 연구, 김
용남 김용간, 1975(평양)).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는 동이들의 주거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수
풀 속에서 늘 굴살이를 하였고, 지도자의 굴은 사다리 아홉 개가 들어갈 정도
였다고 하니 그 깊이가 상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물론 동이족이 바로 한민
족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으나 분명 동이족 가운데 대부분이 한민족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결국 오늘날 무당의 춤과 치성, 구경거리를 가리키는 '굿'은 기원적으로 종
교이자 생활공간을 가리키는 굴(穴)에서 그 뜻이 바뀌어 오늘에 쓰이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종교 공간에서 행위로 바뀐 셈이 된다.
종합문화의 복합성을 바탕으로 하는 제의 문화가 갈라져 종교와 정치는 따
로 그 구실을 해냈다. 하지만 제의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옛말의 쓰임은 그뜻
이 달라졌을 뿐 소리는 그대로 쓰인다.행정관청을 구위 또는 구이(구의)라고
한다(두시언해등). 이 말들이 이루어진 과정을 보면 굴을 뜻하는 '굿'에 접미
사 '의(이)'가 달라 붙어 '구시'로 되었다가 시옷이 반치음으로 되어 소리가
약해져서 '구위(구의, 구이)'로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제정일
치 때 임금이 곧 종교의 지도자를 겸하고 있었고 또 임금-부족장이 제사를
드리거나 행정을 보던 공간이 모두 굴 속이었다고 보면 굿이 관청이라는 등식
이 이루어진다. 이는 바로 말이 문화를 드러내는 보기라 하여 망설임이 없는
바탕이 된다 하겠다.
행정관청의 일을 맡은 벼슬 혹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구실'이라 하거니와
구실도 위에서 풀이한 구위실과 같은 말로 '굿'에 일을 더하여 만들어진 것으
로 보인다. 한마디로 굿이란 공간이 해내던 역할의 분화가 이루어지고 형태는
그대로 있으나 가리키는 내용이 달라진 셈이다. 지금도 여전히 무당의 춤이나
치성드리는 일 따위를 굿이라고 하니까 종교적인 역할을 드러낸다는 것은 크
게 다른 풀이가 있을 수 없다.
굿은 굴이었다.
방언 분포로 보면 말에 따라서 '구석'을 대부분 구석이라 하지만 구숙·구
속·구식·구시라 한다. 이와 함께 소나 말의 먹이를 넣어 주는 것을 소구시
·말구시라 하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구융· 구시·귀영·구이·구세·귀이라
이른다(한국방언연구, 김형규,1982). 이 모두가 굿에서 갈라져 나와 쓰이는 형
태들이다. 어느 모퉁이의 안쪽이나 밖에 드러나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친 곳을
구석이라 하지 않는가. 바위굴이나 구석진 곳에 촛불을 밝혀놓고 치성 올리는
일을 종종 볼 수 있다. 가령 제정일치의 시기였다고 하면 그것은 분명 제의공
간일 것이며 북쪽의 거룩한 굿에 불신과 물신(땅신)-배달의 겨레신을 모셔서
치성을 드렸을 것이다. 강화도 참성단을 생각해 보자. 분화구인 구덩이 안에
들어가서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방위 별신에게 제사를 모시던 곳이 아닌가.
굿이 굴이라는 중거는 이 밖에도 상당히 많다. 우리의 신체조직 가운데 밖
에서 우리 몸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옮겨지는 데가 '귀'다. 귀는 우리 옛말로
올라가면 구이로 발음되며 이는 '굿'에서 비롯한다. 그러니까 귀는 굿 곧 굴
모양을 하여 소리가 담기는 얼안이란 말이다. 형태로 보든 그 기능으로 보든
설득력이 있다. 최현배 선생은 입을 입굴, 목을 목굴, 코를 콧굴로 이름지어
불렀거니와 굿-굴의 모양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긴 굴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둥그런 원형을 바탕으로 한다. 둥그런 땅덩이 위에서 지구와 함께 돌아가며
삶이란 꽃은 피어나고 진다. 그리하여 삶의 고리를 만들고 목숨의 거룩한 씨
알을 지켜나가고 서로는 하나의 목숨에서 말미암았음을 일깨워 살아간다.
날씨가 나쁘거나 언짢은 일이 있는 상태나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정황을
'궂다'라 한다. 또 '굿기다'가 그러한 뜻인데 무덤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말이
다. 죽은 짐승의 고기를 '궂은 고기'라 하지 않는가. 어말자음에서 굿의 시옷
이 파찰음으로 바뀌면 '궂'이 된다. 풀이에 따라서 굿-굴은 삶과 죽음의 공간
이며 종교와 행정의 공간이랄 수가 있다.
글머리에서 보였거니와 굿의 낱말겨레로 어말자음이 바뀐 '굳-굴'의 경우
를 떠올려 보자. 중세국어 자료를 보면 구들방·굳뱀·굳이라 해서 모두가
'굴'의 뜻으로 쓰인다. 지금도 방언에 따라 구덩이·구대이·구데이·구뎅이
라 하여 쓰이고 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음운교체의 일종으로 시옷이 말음
에서 디귿으로 드러난 셈이다.여기서 다시 디귿이 흘림소리로 바뀌어 '굴'이
되기에 이른다.
생각해 보면 굴의 모양과 걸림이 있는 사물이나 사실은 흔히 볼 수 있다.
원한경 선생이 사랑하던 초가지붕에 목화처럼 피어 오르던 연기를 뿜는 굴뚝
과 바다의 돌과 돌 사이에 사는 굴이며 벌이 꽃에서 따다 먹이로 갈무리 해둔
달콤한 꿀도 굴과 걸림이 있다. 앞의 굴은 연기가 나오는 우묵한 공간이며 뒤
의 굴은 움푹하게 들어간 돌 사이에 산다고 하여 아예 그러한 조개류의 이름
으로 굳어졌고, 꿀은 벌이 갈무리한 먹이를 두는 구멍인데 공간이 사물자체를
이르는 말이 된 경우다. 헤르만헷세의 시 「흰구름」의 구름도 마찬가지로 보
인다. '굴-구르'로 이어지는바 여기에서 파생된 동사의 명사형이 다름아닌 구
름인 것이다. 구름 자체도 바람에 밀려 구르는 모양이지만 한용운의 「구름」
에서처럼 구름은 해를 가리고 온 누리를 어둡게 만드는 굴의 효과-굴현상을
가져오게 하니까.
오늘의 누리엔 참다운 사랑과 가르침의 굿이 필요하다. 거룩한 하늘의 뜻과
이 땅 한반도가 어우를 그러한 굿이. 거기에서 겨레의 참삶이 싹터 오를 테니
까.
죽음의 소리 보람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 하여
(유치환의 '바위'에서)
죽음과 삶의 뿌리는 하나일 수 있다는 생각. 이름하여 윤회전생의 풀이다.
몸의 활동기능이 완전히 멈추는 동작과정을 '죽는다'고 한다. 더 나아가 비유
적으로 쓰이면 '스스로 목숨을 끊다·(그림등에)생기가 없다·상대에 잡히다
(경기에서)·불 꺼지다·맛이 가다'의 뜻으로 쓰인다.
대자연의 죽살이길을 누구라서 막을 수 있을까. 죽음처럼 절박한 한계상황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죽음에 대하여 진지한 자세로 아니 가장 중요하게 다
루지 않는 종교는 없다.
죽음을 새로운 다시 삶에의 이정표로 보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가는 시점으
로 본다. 가령 천국이라든가. 극락과 같은 것이 그러한 보기이다.
말은 소리상징이며 소리는 말을 쓰는 겨레들의 문화를 되비친다. 이제 죽음
이란 소리상징이 어떠한 문화터전 위에서 쓰였으며 죽음에 대한 배달겨레의
깨달음은 어떠한 것일까.
돌그릇을 쓰던 신구석기 시대에 우리 한아비들은 혈거 곧 굴살이를 하였으
며 나무 위에서 새의 둥우리 같은 데에서 살기도 하였다. 중국의 진서(辰書)에
는 동이족들의 생활에 대하여 '여름에는 나무 위에서, 겨울에는 굴에서 살았
다'고 풀이한다. 다시 <후한서(後漢書)>에서는 '흙으로 무덤과 같이 둥글게
만든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다. 삼국지 에서 이르기를 부족장
의 경우 사다리 9개가 들어 갈 정도의 깊은 굴속에 자리잡고 살았다는 거다.
사실상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흙집 또는 공통주택들도 옛적의 굴살이의 변
형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지하철도 생각하기에 따라 부족장의 집에서 크게
다를 바가 있겠는가. 태어 나 사는 곳이 흙과 돌로, 나무로 이루어진 데라면
바로 그 자리에 돌아 가 죽음의 누리로 들어 간다. 하긴 우리들이 태어 난 어
머니의 태반도 굴속이라 해서 뭐 이상 할 것이 있을까.
움직임을 드러내는 '죽다(死)'는 말의 짜임으로 보아 어간 '죽'에 어미
'다'가 녹아 붙어 이루어진 말이다. 말의 줄기인 '죽'이 가리키는 속내는 무
엇인가. 서재극(1980,중세국어 단어족 연구)에서 '죽'은 '기운이 떨어지고 앞
으로 기운다'는 '숙다'의 '숙'에 그 뿌리를 둔다고 했다. 뜻이나 소리로 보아
그러할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소리의 경우 옛적에는 파찰음이 없었기 때문에
'숙→죽'의 변천과정이 풀이될 수 있다. 그럼 그 뜻은 어떠한 것인가. 또 '기
운이 줄고 앞으로 기울어 지는' 게 곧 죽음인가 하는 물음이 남는다.
글쓴이는 '죽다'의 '죽'이 우리가 살다 돌아 가는 '땅'과 어떤 걸림이 있지
않을까 한다. 형태로 보면'둑·디'에서 비롯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먼저 '둑'의 경우를 살펴 보자. '둑'은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언덕을 이른
다. '둑'의 원형은 흙으로 만든 무덤과 같은 집이요, 죽은 뒤에 돌아가는 공간
의 모습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사투리말의 쓰임을 보아 '둑→죽'의 가능
성이 있지 않을까(둑→방죽(서천·함양) 뚝(많은 지역).
'둑'의 모음이 바뀌어 이루어 지는 낱말겨레로는 '독(궤·항아리)덕대(시
렁)'를 들 수 있다. 옛 사람들의 무덤에서 나오는 걸 보면 뼈항아리 곧 골호
(骨壺)가 있는데 일종의 '독'에 해당하는 것이다. 항아리이기는 마찬가지이니
까.
'덕'의 경우만 해도 그러하다. 무더운 여름날 나무 위에 덕대를 매어 놓고
꼬 살았음은 필자도 생각이 난다. 덕대는 풍장(風葬)을 지낼 때에도 쓰인다고
한다. 조상이 돌아 가면 나무나 조금 높은 곳에 덕대를 매고 그 위에 시체를
모셔 놓아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뼈만 거두어 다시 장례를 지내는 풍습인
데 진도 같은 일부 섬 지방에선 지금도 풍장이 행하여 진다고 한다.
결국 '둑-덕-독-딕'은 같은 계열의 낱말로서 같은 뜻에서 갈래져 나온 말
이라 하겠다. 이 모두가 '땅'에서 비롯한다.
단적으로 공간명사 'ㄷ(다)'에서 비롯하여 발달한 형태들이다. 본디 '다'는
ㅎ종성체언으로도, ㄱ곡용어로도 쓰이다가 소리들이 윗말에 녹아 붙어 '독-둑
-덕-닥-딕'으로 재구성된 말로 보인다.
이같이 땅을 드러내는 말에는 '디'가 있음을 지적해야 될 것 같다. 중세어
'디다(落)(월인석보 등)'는 '지다'로 바뀌어 쓰인다. 이른바 입천장소리되기를
따라 된 형태인 것이다. 가령 '숨지다·넘어지다·떨어지다'의 '지다'가 그러
한 경우로 보면 된다. 보조용언으로 곧 의존동사로서 아주 널리 쓰이는 분포
를 보인다.
땅을 뿌리로 하는 '죽다'의 '죽'은 방위로 보아 북쪽·뒤를 이른다. 막말로
해서 드러낼 때, '죽다'를 시골말로 '뒈지다'고 한다. 때로는 '뒤지다(강원등
지) 디지다(경상도)'와 같이 말하기도 한다. '뒈지다'는 '두어지다'의 줄임말
이다.
삶의 뒤, 죽음의 그늘
훈향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거룩한 해골의 무리
말 없이 걷는
칠흑의 하늘 주토(朱土)의 거리로 돌아가자
(박종화의 '사의 예찬'에서)
살아가는 동안의 시간과 공간이 삶의 앞이라면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가상
의 시간과 공간은 뒤가 된다. 앞에서 '죽다-뒈지다(뒤지다)-디지다'를 떠올린
바 있다. 중세국어 자료를 보게 되면 '뒈지다'는 '두어지다'의 줄임말인 '두
다'가 '뒷다(석보상절6.2)'로 적힌 것. 여기 '뒷'은 '뒤(ㅎ)-뒷'으로 쪼가를
수 있다.
흔히 '뒤'는 북쪽을 가리키고, 계절로는 겨울을, 짐승으로는 곰·거북이·뱀
을, 소리로는 목구멍소리, 성으로는 여성을 드러내기도 한다(필자(1991) 우리
말의 상상력). 특히 고조선 건국의 모티브가 된다. 단군의 어머니가 되며 우리
말과 같은 계열의 만주어에서는 '조상신-영혼'의 뜻으로도 쓰인다. 곧 곰-조
상신이라는 등식이 이루어 진다. 소리가 바뀌어 오늘의 '어머니'가 되었음은
'어머니와 곰신앙'부분을 보기로 한다.
땅과 걸림을 둘 때, 어머니는 곧 땅이요, 그 품에서 태어나 살다 다시 그 누
리로 돌아 간다.
별상징과 뒤-곰을 더 풀이해 보자. 어느 겨레도 마찬가지이나 우리 조상들
에게서 북두칠성 믿음은 아주 두드러진다. 태어남의 말미암음을 삼신(三神)이
별로 점지함으로써 비롯된다는 것. 어릴 때 궁둥이 쪽의 검푸른 반점을 삼신
할머니가 빨리 나가라고 때려서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이른바 몽고반점이지.
해서인지 별신앙과 관계가 있는 땅이름이 꽤나 된다. 비로봉이 그 대표적인
보기이다. 사실 '비로봉'도 별의 사투리인 '빌(경상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
아 무리가 없다. '빌다'도 마찬가지이다. 별의 바탕은 무엇인가.
광명이요, 빛인 것이다. 결국 빛은 태양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특히 북
두칠성과 맞걸림은 배달겨레가 바이칼호 변두리의 지역-고아시아족의 고향이
우리들의 밑곳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혼례장의 기러기, 임종직후의 복(復)이
라 함은 모두가 죽은 뒤 고향의 나라에서, 다시 돌아 가 태어나기를 바라는
귀향의식의 드러냄이라는것.
말의 형태로 보면 ㄱ-ㅎ종성체언은 서로 넘나 들어 쓰이는 일이 있다. 하면
'뒤(ㄱ)다→ㄷ다→쥑다→죽다'로 변천과정을 풀이할 수 있다. 하니까 '뒈지다
-뒤지다'는 이미 과거 시제요 불타오르는 이 세상이 아니고 저승이 된다. 마
침내 제 고향의 땅으로 가는바, '디다'의 '디'가 땅(다)을 드러냄은 같은 흐름
이라고 할 수 있다.
'죽다'의 말뿌리를 생각해 보았다. 몇 가지 상정한 형태 가운데에서 글쓴이
는 '뒤(ㄱ)다→ㄷ다→쥑다→죽다'로 봄이 옳지 않나 한다. 그것은 '둑→죽'보
다는 소리의 질서가 더욱 그럴듯함이 있기 때문이다.
땅이름에서 '뒤'는 '디'로 드러나는 일이 왕왕 있다. 가령 지례(知禮)·지품
(知品)의 [지-디]가 그 보기요, 경상도말로 '죽인다'를 '지긴다'로 함을 보더
라도 그러하다. 경상도말에서는 '뒤'의 '뒤'가 '이'로 발음이 되기 십상이요,
'뒤-쥐'는 구개음화에 따르는 바탕 풀이가 되기 때문이다. 또 '뒤(ㄱ)→둑(딕)
→죽(직)'으로 풀이 못할 바도 아니다.
낱말밭의 볼모에서라면 죽은 뒤에 영혼의 오름과 내림으로 생각할 수도 있
다(배해수(1982)현대국어의 생명종식어에 대한 연구). 이 모두는 죽은 뒤의 누
리와 관련하여 신앙에 터를 두고 생겨난 말들이다(천당가다-극락 가다-소천하
다-등선(登仙)하다/지옥 가다-축생 되다-황천 가다 등).
분명한 것은 삶이 끝 나면 흙으로 돌아 가는 일이다. 그 건 바로 우리 삶의
뒤뜰이요, 조상이 묻힌 공간이 아닌가. 값 있는 죽음을 맞기 위한 참삶이 절실
하다. 이는 바로 북두칠성의 별이 빛나는 어머니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
기로서이다.
나라 사랑의 꽃, 무궁화여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아려 눈을 감네
(이호우의 ‘개화(開花)’에서)
꽃을 보고 더럽다든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도 온 겨레의 가슴에
와 닿는 나라꽃에서라면 더욱 애틋한 느낌이 있을 법한 일. 무궁화꽃이 비록
뚜렷하게 아름답지는 않은 꽃일지라도 말이다. 무궁화라, 끝없이 피고 지므로
하여 모진 겨울의 추위도 아랑곳없이 그 어디서나 흐드러지게 제 삶을 누리다
가 스스로 사위어 간다.
조선왕조 고종 무렵에 칠곡부사로 나라일을 보던 한서 남궁억 선생이 선친
들의 고향인 흥천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 때의 일이다. 고향마을에 배움터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서면 모곡리, 곧 보리울에 보리울 학교를 세우
게 된다. 이 때 무렵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삼아 나라 사랑의 보람으로 하자는
뜻을 세웠던 것. 해서 보리울 학교에서 무궁화 어린 나무를 길러 온 나라의
학교와 교회, 혹은 사회단체 앞으로 보내어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나라꽃으로
가꾸고 사랑하자는 집념을 편 게 나라꽃의 말미암음이 됐다.
꽃이란 말의 속내는 두드러져 솟아 나온 부분을 이른다. 얼굴의 코도 옛말
은 '고'였으며 때로는 '곳(곶)'으로도 쓰였나니 코의 두드러짐과 같은 맥락에
서 풀이할 수 있다. 씨알 보존의 열쇠이며 자물통이 꽃이요 그에 따라 오는
게 열매라 하겠다. 겨레의 오래고 먼 그리움처럼 홍천에서부터 삼천리 강산에
무궁화의 봄을 지폈던 것이다. 호사다마라고 어찌 시련이 없었을까. 3 1 기미
독립 운동 이후 일본의 사이또 총독은 마침내 무궁화를 없애고 벚나무를 심도
록 명령했다. 보리울 학교인들 예외일 수만은 없었다. 관리들이 찾아 오면 뽕
나무 밭이라고 속여서 어물어물 넘기곤 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제 나
라 땅에 나라꽃 한 그루 맘 놓고 가꾸고 아낄 수 없다니. 그러니 어쩌겠는가.
망한 나라의 백성이 겪는 그 고초야 더 물어 무엇하리. 목숨이 오고가는 마당
에.
"내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무궁화 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 되게 하라"
고 남궁억 선생은 이르셨다. 그래서일까. 800여 동학전쟁 때의 농민군이 마지
막으로 외세에 맞서 싸운 곳도, 6 25 한국전쟁 때 몸으로 돌격, 적의 전차를
맞서 대거리 한 곳도, 월남 파병을 앞두고 훈련 중에 부하들의 안전을 위하여
터지는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산화한 강재구 소령의 고향이 바로 넓은 내, 홍
천이었던 것이다.
벌력천(伐力川)에서 홍천으로
사람마다 부르는 이름이 있듯 땅 또한 그러하다. 한데 땅이름이란 시대에
따라서 바뀌어 가기도 하는 것. 고구려 때에는 홍천을 벌력천(伐力川)이라고
했으며, 통일신라 때에는 벌력천정(停)이라 하여 군인이 상주하는 군영지가 있
었다. 한산정에서와 같이 군인이 주둔하는 곳을 '정'이라 했다. 그 뒤 신라 35
대 임금이었던 경덕왕(757)적에 벌력천이 녹효(綠驍)현으로 바뀐다. 여기 '효'
는 경상도 현풍이 '현효'이듯이 정(停)보다는 좀 약한 예비군 겸 군사용 말을
관리하는 곳을 이른다. 그러나 고려조 태조 때에 접어들면서 오늘날의 홍천
(洪川)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러면 바뀐 이름 사이의 맞걸림은 어떻게 되
는 걸까.
눈에 뜨이는 건 먼저 '벌(버르)-풀(푸르)'의 걸림이다. 소리의 발달로 보면
옛적 우리말에는 거센소리가 없었으니 풀(푸르)이 불(부르)의 소리마디의 꼴이
된다. 하면 홀소리가 달라졌을 뿐 '벌-풀'은 같은 흐름의 소리임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긴 홍천강이 흐르는 넓은 벌판에 푸른 먹거리들의 향기로운
벼 내음이며 계절따라 갈아 입는 철옷을, 보는 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삶에
의 용기를 돋우어 주기에 충분하다. 벌 곧 벌판은 산골짜기에 견주어 볼 때
넓고 크다. 하니까 넓을 홍자, 홍천(洪川)으로 풀이하면 어떠할지.
벌력(伐力)의 글자 풀이를 하자매 치는 힘 곧 국방력을 드러낸 게 아닌가
한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는 아닐지라도 마한 진한 변한과 고구려 사이에서
혹은 성난 이리떼처럼 밀려 들어오는 여진족의 침입을 막자매 힘을 길러야 막
는다는 주요한 군사의 요충지임을 드러낸 것이다.
군사적인 가치는 물론이요, 먹거리 생산의 보금자리이니 이를 잘 지켜야만
했던 것. 게다가 원주와 춘천, 그리고 서울과 속초로 이어지는 활달한 교통의
모꼬지임은 홍천을 지나본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떠 올릴 수 있으리라. 마치
하늘을 스스롭게 날으는 새처럼 어느 쪽으로도 어렵지 않게 여행을 할 수 있
게 된다. '벌-녹'의 맞걸림은 앞의 마디글에도 풀이한바 있는 '보리울(벌울)'
에서도 그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어 재미롭다. 한자로 쓰면 모곡(牟谷)이라
고 했거니와 이 또한 크다는 뜻이고 보면 넓다는 뜻의 홍천과 바로 맞닿는 뜻
의 줄기가 있다. 보리(벌)라 함은 신라의 땅이름 또는 백제의 땅이름의 접미사
로 쓰이는 보기가 상당히 있다. 서라벌 밀벌 소부리 니릉부리가 그런 경우
임은 다 아는 터. 여름지이가 산골에서 물이 있는 벌판으로 비롯됨에 따른 자
연스런 마을 이루기의 한 흔적이라 하겠다.
상서로운 학이 울고 넘는 우령(羽嶺)
산의 모양이 공작처럼 생겨서 공작산일까. 수풀 우거진 산골짝에 속세를 등
진 해탈한 성자처럼 서있는 수타사(水墮寺)가 한겨울 눈 속에 외로워 보인다.
요즘 종문의 개혁 바람과는 아랑곳없이. 응봉산(鷹峰山)에서 흘러 내린 덕치천
냇물이 공작산의 공작골과 함께 어우러져 수타사를 감돌아 이내 홍천강으로
든다. 저승으로 간 소헌왕후 심씨를 잊지 못해 그의 명복을 빌어 주려고 둘째
아들 수양대군에게 시켜 지은 세종임금 적의 '석보상절'이 있다. 이를 바탕으
로 세조 임금이 된 수양은 1458년 '월인천강지곡'을 어우러 '월인석보'를 만
들었는데 '용비어천가'와 함께 수타사의 사천왕상의 뱃속에서 나왔고 이를 갈
무리하고 있다. 물론 절을 고치던 중의 일이었다. 절은 신라 성덕 임금 시절
(708)에 원효 큰스님이 지었는데 본디 이름은 일월사(日月寺)이더니 뒤에 수타
사(水墮寺)로 했다가 다시 취운대사가 조선왕조 고종 무렵에 목숨수자 비얄타
자 수타사(壽陀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니 내력이나 빼어난 경치만큼이나 이
름도 야단스럽다. 수타란 결국 부처님의 만수무강을 빈다는 뜻이렸다. 절에 보
관된 '월인석보(月印釋譜)'의 한 부분을 살펴 보자.
"팔방여래(八方如來)와 함께 내신 소리를 듣자옵고
세상이 모두 진동하나니 다보여래와 함께 한 곳에 앉으신 상(相) 보옵고
모든 나라가 기뻐하나니" ('월인석보' 319에서)
남국을 그리는 공작새이듯 산이 부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듯. 홍천에는
비교적 새와 걸림을 보이는 땅이름이 상당히 있다. 학명루며 학교(鶴橋)가 그
러하며 공작산과 응봉산 또한 그러하다. 어디 그뿐인가. 고개 중에는 깃우자
우령(羽嶺)도 이에 든다. 우령-깃고개에는 옛부터 내려 오는 이야기가 있으니
상당한 암시를 준다. 학이 객관 남쪽에 날아와 모여 있다가는 이 고개를 날아
구름과 함께 날아 넘는다. 그 때마다 고개에는 새깃 털이 많이 떨어졌다 하여
깃고개 우령이 되었다는 것. 다리를 다 만들었을 때 학이 날아들었다 하여 학
다리. 그로 말미암은 학명루(鶴鳴褸). 학은 상서로운 새라고 하거니와 홍천은
그렇게 아름답고 길한 고장인가 보다. 한데 군을 대표하는 새가 '까치'로 되
어 있다. 아마 좋은 소식을 가져다 주니까 상서로운 새로 보아서 그랬는지. 글
쓰는 이의 생각이라면 역사성을 살려서 '학(鶴)'으로 하면 어떨까 한다. <훈
몽자회>에 하였으되 하늘을 나르는 모든 날짐승을 '새'라고 하였다. 응봉산의
'응(鷹)' 또한 다를까. 새가 되긴 마찬가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숨어 든 잠재의식 속에는 많은 새들이 끝없이 날고 있
다는 심리학의 얘기. 우리나라의 땅이름 중에는 새와 걸림을 보이는 곳이 많
다. 공간으로 보면 '사이'지만 민간신앙으로 보면 우리의 영혼을 저승으로 데
리고 가는 저승새의 구실을 한다는 게다. 예서 제서 피다 지는 산유화만큼이
나 많은 새들이 공작산을 날아 절간의 풍경소리와 함께 노래를 부를 것이다.
팔봉산은 본디 감물악(甘勿岳)이었으니
땅이름 자료를 따르면 여덟 봉우리의 팔봉산(八峰山)은 본디 '감물악(甘勿
岳)'이었다. 보리울 벌판을 적시우는 홍천강의 그 모습이 확실해 지기로는 팔
봉천과 구만천이 만나면서부터이다. 산이 '감물악' 혹은 '감악'이라면 팔봉천
또한 감물내 혹은 감내(甘川)가 된다. 한반도에는 감(甘)-계의 냇물이나 산이
름이 상당히 있다. 횡성의 감내가 그렇고 충청도 대전의 갑천, 경상도의 김천
에 감내(甘川)가 그러하다. '감(갑)'은 가운데 신(神)을 이른다고 하였으니 보
리울로서는 뿌리샘 중에 주요한 내가 된다는 뜻으로 풀면 어떨까 한다. 들과
물을 아끼고 간수함은 그게 우리 삶의 가능성이며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벌이나 산을 휘돌아 흐르는 곳의 땅모양이 코처럼 툭 튀어나온 모양이 꽃같
다 하여 홍천을 달리 화산(花山)이라 했다. 홍천에는 새와 함께 꽃과 걸림을
보이는 땅이름이 여럿 있다. 꽃뫼(花山) 꽃마을(花洞) 꽃시내(花溪)가 그러
하다. 그래서 한서 남궁억 선생의 마음 속에 나라꽃을 무궁화로 해 보겠다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일었는가. 그래서 꽃같은 나이에 농민의 목소리를 높이고
군인의 길을 지켜 나라가 어려웠을 때 꽃잎지듯 가버렸을까. 진달래를 군꽃으
로 하였거니와 못다 핀 나라지킴의 넋인 양 온산에 진달래로 활활 타오르는
가.
비가 내린 봄들녁에 보리울에 밭갈이틀의 소리가 요란하다. 때로 산골짝에
는 봄일에 힘 겨운 소를 모는 산유화의 노래가 메아리지고.
"산유화여 산유화여
저 꽃 피어 농사일 시작하여
저 꽃 지도록 필역하게
얼럴럴 상사뒤 어여 뒤여 상사뒤"
바람의 노래 -- 풍요(風謠)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오다 우리들이여
공덕(功德) 닦으러 오다
너도 오고 나도 오고, 나이나 성을 가림이 없이 부처의 모습을 지어 모시는
일에 공덕을 닦으러 모든 이가 모인다. 더러는 물질로, 어떤 이는 몸으로 있으
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부처 바람에 모여 든다. 극락을 그리는 마음
들이 앞을 다투어 모였다는 얘기.
한데 무엇이 그리도 서러웠단 말인가. 나고 죽고 병들어 늙어감이 서러웠을
까. 어떤 이의 풀이처럼 절머슴으로 일하면서 먹거리 방아를 찧어야 하는 자
신들의 신세에 대한 민초(民草)들의 한스러움 때문인가.
신라 선덕여왕 시절 양지(良志)라는 스님이 영묘사에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만들 때에 이 노래가 불리워졌다고 삼국유사 에서 일연 스님은 적고 있다.
양지 스님은 언제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단한 슬기와 솜씨를 드러
낸다. 많은 절에 탑과 불상을 만들어 모심은 물론이요, 그의 글씨 또한 뛰어나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는 터. 특히 그의 지팡이는 신통력을 갖고 있으니, 지팡
이 끝에 자루 하나 걸어 둔다. 지팡이가 날아가 불공하려는 이들의 집에 가서
흔들어 대면서 소리를 낸다. 하면 사람들은 시주를 하였고 자루가 차면 다시
바람을 타고 절로 되돌아 온다. 이 게 부처바람이 아니고 무엇인가. 해서 양지
스님의 지팡이 때문에 절이름도 지팡이절 - 석장사(錫杖寺)라고 일렀던 것.
서라벌의 법림사(法林寺)의 세 부처상과 인왕(仁王)이라 불리우는 금강역사
도 그가 만들어낸 불교예술이었으니 그의 마음씀과 솜씨를 알 만하다. 앞서
이른 영묘사의 장육존상을 지을 때의 일이다. 조용한 가운데 온 마음을 다하
여 부처의 모습을 찾아 애쓴다. 이르러 입정(入定)의 길닦이를 지나면서 바르
고 맑은 마음의 상태 정수(正受)에 든다. 때 안 탄 간절한 그의 불심이 곧 사
람들의 마음 속에 영혼의 감응을 일으킨 것이다. 이르자매 이심전심(以心傳心)
의 통함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켰으니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는가.
바람의 노래 - 풍요에 대하여 일연 스님은 풀이를 덧붙인다. 당시는 고려조
때가 되겠지요.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 방아노래를 불렀으니 바로 바
람의 노래에서 나왔을 거라는 방아노래의 내력에 대하여 그렇게 적고 있으니.
나중에 금으로 부처의 모습을 입힐 때 곡식이 2만 3천 7백 섬이 들어 갔다는
기록. 사람들은 먹고 살기에 바쁜데, 굶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불상(佛像)
하나 하자고 그리도 많은 물질을 쓴다(?). 별로다. 별로야.
터를 닦고 공덕을 닦고
장육존상불 모실 터를 닦기 위하여 남녀노소 가림없이 사람들이 모여 와 터
를 닦는다. 물론 명당터겠지 뭐. 터를 닦으면 집을 짓게 마련. 삶에 지친 이들
은 절을 찾아와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장육존상의 거룩한 모습을 가슴에 새기면
서 집으로 되돌아 갔을까. 해서 절은 마음의 집이요, 부처를 모신 믿음의 집이
되질 않았을까.
무얼 닦는다고 할 때 닦음은 물체 사이의 닿음을 전제로 한다. 더 나아가
밀 보리 벼 같은 곡식을 쓸어서 껍질을 벗겨내는 닦음은 바로 '대이다 닦
이다'이다. 곡식을 방아에 찧는다는 것도 옛말에서는 'ㄷ다'였으니 이 또한
같은 뿌리에서 갈라 나온 '닿음'의 낱말 겨레라고 할 수 있다. 닿음의 알맹이
는 '다(ㅎ)'이니 곧 땅을 이른다. 때로 '다(ㅎ)'는 '닷 - 닻 - 닫 - 달'과 같
이 벌어져 나아가며 모음이 바뀌면 '덧 - 덫 - 덛 - 덜(더럽다) / 딧 - 딛 -
딜'의 말꼴들이 이루어진다.
하니까 뒤에 방아노래나 앞의 공덕 닦음의 바람노래나 흙 곡식을 다루는
'닦음'에서라면 같은 흐름의 이야기일 밖에.
부처의 길을 닦노라면 부처의 마음을 닮아 가는 것이다. 닮는다는 게 무엇
인가. 물체의 어느 부분이 닳아 없어지고 걸림을 둔, 닮고자 하는 본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자기를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서 말이다. 하긴 누구나 마음 비우
기란 그리 쉽지 않음이니 여러가지 잡스럽고 모질고 사나운 걸 버리고 부처에
게 더욱 가까이 가게 만든 것이다. 그 지팡이로 좋은 뜻(良志)을 향한 그리움
을 가르치고 가리킨 것으로 보여 진다.
세상을 부는 바람은 여러 갈래다. 돈바람이며 우쭐대는 자리바람, 불바람이
며 칼바람, 서양바람 등 실로 바람이 많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에게는 통일바람
이 간절하다. 슬기의 바람이 더 값진 것은 사람답게 되어 보고자 하는 사람되
기 바람이다. 온 누리를 튼튼하고 향내나게 하기 위하여는 말이요.
새와 산, 태양 숭배의 고리
아홉이나 남아도는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잊어
야삼경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김소월의 '접동새'에서)
해 지고 밤이 들면 죽은 누나의 흐느낌같은 접동새가 울어 댄다. 자신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아홉 명 남동생들의 서러운 삶을 어이한단 말인가. 표
독한 계모의 시샘에 시달리다가 저승으로 간 누나는 접동새가 되어 그것도
밤마다 뒷 동산에 와 울 적에 듣는 이의 마음은 서러움의 강물로 가득하다.
사람이 죽어 어떻게 새가 될 수 있을까. 돌고 도는 삶의 윤회라면 몰라도. 새
에 대한 옛 어버이들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늘과 땅의 모든 사물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으며 신이 살고 있다고 믿었
던 시절. 하늘로 높이 날아 올라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
는 새는 곧 하늘의 사자이며 영혼의 상징이라고 여겼던 터. 언제나처럼 늙지
않는 저 거룩하고 위대한 해가 떠 올라 우리 삶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해서
'해'는 늘 우리들의 우러름의 표적이 되었던 것. 이른바 태양숭배가 그것이
다. 그럼 해와 새는 소리로 보아 무슨 걸림이 있을까. 해의 히읗(ㅎ)과 새의
시옷(ㅅ)은 소리가 나는 자리만 다를 뿐 마찰에 따른 소리가 되기는 마찬가
지. 시옷의 소리가 약해지면 히읗이 된다. 해를 드러내는 지역에 따라서는
'해-새'의 쓰임이 보인다.
('해'의 쓰임)
닷새(어제소학언해 6.64) 닷쇄(구급간이방 6.77) 엿새(五日 六日) - 해
해거름 ㅎㄷ(금강경삼가해 3.53)
(새(鳥)의 방언) 새(전역) 사이(개성 서흥 수안) 생이(제주) 쌔(경산)
새다 세다 시다 셈 심 해맑다 희다 힘 헴 허옇다 하얗다
지금도 사투리말을 보면 '새-사이'이 맞걸림을 알 수 있다. 날아 다니는
새나 하늘의 해(새)가 다같이 중세국어에서는 두 홀소리로 소리를 냈으니
'사이'가 되는 셈. 하긴 하늘의 해가 하늘 땅 사이에 떠 있음이나 새가 하늘
과 땅의 사이를 나르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그럼 '사이'의 말뿌리는 무엇인가. 그건 말할 것 없이 '삿'에서 비롯한 말
이요, 삿은 '삿 솟 ㅅ 섯 숫 슷 싯'의 낱말겨레를 이루어 의미의 큰
덩이를 이룬다. 'ㅅ'과 관련하여 삼국유사 의 소도(蘇塗)가 바로 거룩한
태양 숭배의 공간이었으니 하늘신 곧 태양신에게 경건한 예배를 올렸던 제의
장소가 아니던가.
달리 말하자면 일종의 솟음현상이랄까. 민속 행사 가운데 솟대 혹은 살대
라 함도 태양 숭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장대 끝에 새의 모습을 만들
어 올려 놓는 일이 암시하는 바 크다. 용강의 사신총이나 쌍영총 무덤에 그
려져 있는 벽화를 보라. 해와 달을 새와 토끼로 드러냄을 말이다. 우리의 민
속이나 상징적인 모습을 좀 더 생각해 보자.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 접어들기 전 옛부터 마지막으로 상여에 실려 간다.
수많은 민초들은 그냥 가마니뙈기에 둘둘 말려 지개 위에 짐이 되어 간 게
사실이기도 하지만. 상여에는 여러가지 그림이나 간단한 나무 조각들이 있음
을 볼 수 있다. 꽃과 물이며 용과 새가 그려져 있거나 조각되어 있다.
여기 새와 사람의 영혼은 무엇으로 드러냄일까. 이승과 저승의 사이를 이
어주는 게 바로 새라고 본 것이다. 이승에서의 삶이 다하는 날 그의 넋은 다
시 살아 꽃으로, 풀로, 더러는 새와 짐승으로, 더러는 흙과 모래로, 구름으로
되돌아 산다고 믿었던 옛 적을 짐작케 해 준다.
고구려에서는 한 때 벼슬하는 이들의 모자에 새깃을 꽂았으며, 백제의 금
관에서도 신라 화랑의 모자에도 새깃이 꽂혀 있다. 무당의 모자에도 새깃이
있음을 보면 이 모두가 새의 신령함을 통한 '새-해(日)'의 우러름을 위한 표
상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니까 태양이 새로 드러난 셈이라면 어떨까. 삼국지 를 보면 큰 새
의 날개를 타고 저승으로 간다는 기록도, 상여의 새도 같은 맥락에서 짚어
볼 수 있다(以大鳥羽送死).
소리 상징으로 본 새는 철기 문화 곧 쇠그릇 문화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사투리로는 날아 다니는 새나 인류 문화에 큰 빛을 던져준 쇠그릇의 쇠나 소
리의 모습이 같다. 모두가 사이 서이 시(씨)로 말을 하는바 뒤로 오면서 동
음이의어가 그 모습을 조금 달리 한 것뿐이다. 생각해 보면 쇠도 나무와 돌
의 사이쯤 되는 물체가 아니던가. 나무와 돌의 장점을 모두 갖춘 걸 바로 쇠
라 불렀던 것. 가장 힘이 있는 태양이 쇠의 강한 특성과 맞떨어진 것이다. 태
양을 가리키는 말이 바뀌어 해를 뜻하는 말에서 갈라져 '세다'가 된 것만 보
아도 그럴 가능성은 있다. 푸른 하늘에 영원히 타 오르는 태양이야말로 누리
의 온 목숨살이를 이끌어가는 뿌리요, 샘인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한데, 하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갈수록 약해져 가니 환경을 어지럽히고 사
람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질 않은가. 정신 차려야 한다.
불 꺼진 창같은 세상이 되기 전에.
기러기와 두고 온 고향
하루밤 서리김에 기러기 울어 옐 제
위루에 혼자 올라 수정렴 걷고 보니
동산에 달이 나고 북극에 별이 뵈니
임이신가 반기니 눈물이 절로 난다.
(정철의 '사미인곡' 중에서)
서리는 내리고 달은 밝은데 울며 나는 기러기의 울음소리. 엄마 기러기를
따라 따뜻한 남쪽으로 왔다가 철이 되면 두고 온 그리운 고향을 찾아 떼지어
하늘을 간다. 풀이하는 이에 따라서는 바이칼 호수 부근이 기러기들의 고향
이라는 이야기. 배달겨레들의 옛 조상들도 이 부근 쯤에서 살다가 차츰 남쪽
으로 내려오면서 중앙아시아 곧 알타이 산맥을 지나 만주와 한반도 중심의
모꼬지를 마련했을 것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밀러. 1984. 일본어의 기원). 그
래서인가, 전통적으로 혼례 때에는 반드시 전안례(奠雁禮)를 올린다. 먼저 신
부집에 가면 신랑은 기러기를 예물로 바친다. 흔히 산 기러기 구하기가 어려
우니까 나무로 만든 기러기 - 목안(木雁)을 쓴다. 이 때 기러기를 드는 이를
기럭아비라 한다. 기럭아비에게서 기러기를 받아든 신랑은 새를 상 위에 올
려 놓고 거드는 이의 도움을 받아 두번 절을 한 뒤 신부의 어머니나 여자 하
님에게 이 기러기를 넘겨 준다. 치마폭에 새를 싸서 안방으로 들어가 예를
올리고 혼례가 모두 끝이 나고 신부를 따라서 신랑네 집으로 가는 후객(後
客)이 시댁으로 가져 온다.
대체 기러기는 어떤 새인가. 많은 형제를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모양에 기
대어 안항(雁行)이라 이른다. 약한 기러기를 가운데에 세워 길을 잃지 않고
따라오도록 난다. 해서 기러기의 나는 모습을 학익진(鶴翼陣)이라 하지 않는
가. 의리와 우애가 있는 새가 바로 기러기인 것이다. 규합총서 에서도 기
러기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날 때 차례가 있다는 것. 앞에서 울면 뒤에서 화
답을 하니 예(禮)스럽고 짝을 잃으면 다시 짝을 찾지 않으니 절(節)이라. 잘
때도 새들은 떼를 지어 잔다. 반드시 새 중에 한마리쯤은 곤히 자는 다른 기
러기들의 망을 보느라 깨어 있으며, 낮이 되면 갈대밭에 깃들여 다른 짐승들
의 공격을 피한다. 이렇게 기러기새는 슬기로우니 혼례의 본을 삼는다고 풀
이한다.
밤하늘에 별이 뜨고 기러기 울어 예는 무렵이면 헤어진 형제가 그립고 저
승으로 가신 어머니의 품이 눈물겹도록 그리운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이겠는
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던 배달의 옛 조상들은 늘 그렇게 새 한마리
에도 그리운 고향 산천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였던 듯하다.
두고 온 고향의 산과 물에 대한 것은 장례의 풍습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가령 '복'을 부르는 경우 흔히 초혼(招魂) 또는 촌이라 한다. 한번, 두번, 세
번을 거듭하여 사람이 죽었을 때 새 옷을 지붕에 던져 올리면서 복을 부를
때면 온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가눌 길 없는 슬픔에 사로잡힌다. 복(復),
그러니까 고향의 나라에 가서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부활의 신앙을 꿈꾸
는 몸부림이 아니겠는가. 육신은 가도 우리의 넋은 오래 살아 저승의 또 다
른 삶과 누리를 오고 간다.
근심걱정 하나도 없는, 우리의 겨레와 나라가 꿈꾸는 영원한 그리움의 정
신적 공간을 향한 영원회귀의 새는 끝없이 오래오래 우리들 잠재 의식 속을
날아 와서는 아름다운 꽃노래를 들려 줄 것이다. 하여 이승을 떠나는 날, 새
의 날개를 타고 푸른 하늘 은하수 건너로 날아 오를 것이 아니겠나.
새와 땅이름
우리 둘레에는 새와 걸림을 보이는 땅이름들이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더
러는 까치, 까마귀, 학, 제비, 닭, 봉황새, 독수리 따위의 많은 새들이 땅이름
에 끼어 아주 스스롭게 쓰임을 알 수 있다.
먼저 간단한 보기를 들어보자. 많은 분포를 보이는 것은 역시 봉(鳳) 계열
이라 할 것이다. 숫놈을 봉, 암놈을 황이라 하여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스스롭
게 볼 수 있는 땅이름. 실제로 봉황은 중국사람들이 생각하는 불사조라 풀이
되기도 하는데 앞에 든 모든 새의 머리가 된다. 보기로는 대봉동, 봉두동, 봉
미동, 봉무동, 봉덕동, 봉곡동, 봉원리, 봉대동, 봉전, 봉정리, 봉강리, 신봉리,
봉황동 등이 있으며 말 머리에도, 말 가운데에도, 말 끝에도 옴을 쉬 알 수
있다.
닭계열은 어떤가. 먼저 신라를 계림(鷄林)이라 함은 바로 닭을 드러내는 나
라 이름으로 풀이할 수 있다. 사투리말로 보면 경상도 지역에서는 닭을 '달'
이라고 한다(달구집 달구통 달집 등). 하면, 계림의 림(林)도 계를 소리로
읽지 말고 뜻인 '달'로 읽으라는 달의 끝소리를 적은 것으로 보인다. 뜻으로
보면 모든 새는 수풀에 깃들이니까, 또는 사람을 숲에 비유하였으니까 림(林)
을 쓴 게 아닌가 한다. 날아다니는 모든 짐승은 다 '새'라고 한다(훈몽자회).
하니까 '계림-신라'의 맞걸림을 둔 게 아닐까. 앞에 든 봉-의 경우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계룡산이 그러하고 치악산도 같은 어름에 든다. 밑바탕은 '새'인데 드러냄
의 변별성을 더하기 위하여 서로 다른 글자를 빌어 쓴 것이다. 신라의 탈해
(脫解)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당시에는 유기음 곧 거센 소리가 없었으니 탈
해-달해일 것이요, 해(解)를 '개'로 읽었으니 '달해 달개'의 등식이 이루어
진다. 닭을 사투리로 '달 달구 달개'로 소리냄을 짚어보면 탈해가 '달구-
달개-새'의 맥락이 흐름을 알게 된다. 석탈해의 석(昔)이 성으로 되기까지는
유래로 보아 까치작에서 새조(鳥)를 떼어 냈으니까, 나무상자를 풀어 헤쳤으
니까 그럴 수는 있는 게 아닐까.
높다 크다의 뜻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땅이름 가운데 달(達)- 계열이 그
러한 보기라 하겠다(달구벌 달성 달천 달내 달동 달비골 월성(月城)
월배 등). 어쩐 일인지 땅이름 가운데 많은 보기를 보이는 건 학(鶴)- 계열이
기도 하다(학산 학성동 학교 학다리 학동 등). 그뿐인가. 새조의 조(鳥)로
시작하는 것도 상당하질 않던가. 조치원 조령 조촌 조곡리 등이 그러한
경우라고 할 것이다.
앞에서 풀이한 바 있거니와 새와 태양은 같은 말이며 뜻이 서로 다를 뿐이
다. 결국 무엇이 알맹이인가. 두 말 할 것도 없이 해를 우러러 믿는 태양숭배
에서 정신문화가 피어났으며 알타이 산맥을 거쳐 일어난 청동기 곧 쇠그릇
문화가 서로 어울어져 이루어진 강력한 신흥 부족국가들의 탄생을 온 누리에
심는 얘기들이다. 소박하게 보면 태양숭배요, 영혼불멸의 영원회귀 지향의 그
리움을 안아 살던 옛 한아비들의 꿈이 어린 파랑새가 바로 새의 전설이 아닌
가 한다.
새와 산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의 '산유화'에서)
무수히 피었다 지는 꽃이 있는 곳에 새가 운다. 새가 있으매 숲이 있고 둥
지를 틀 나무들이 큰 산을 이루어 살아간다. 새와 산은 뗄 수 없다. 삼국사
기 를 보매 3산5악에 산제사를 모신 보기들이 나온다. 산은 솟아 있다. 가장
높이 솟은 것은 빛나는 태양이요, 그 산위를 돌아나는 구름이며 새가 있다.
신라의 경우 큰 제사는 3산 - 나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산에서, 가
운데 제사는 동에 토함산, 서에 계룡산, 남에 지리산, 북에 태백산, 중앙에 팔
공산에서 모셨다. 해서 모두가 지역과 나라를 지켜준다고 믿어 우러름의 대
상이 되었다. 토함산은 석탈해가 스스로 산신이 되어 일본의 침략을 막고자
하였던 일로 알려져 온다. 신라의 화랑들이 명산대천을 두루 찾아 제사를 올
린 것도 산악숭배요, 태양숭배로 이어지는 믿음의 고리들이라 할 것이다. 고
구려, 백제에서는 산신숭배가 어떠했던가. 3월 3일 낙랑에 모여 사냥한 멧돼
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으니 고구려 사람들 또한 산신숭배
를 하였던 것. 몹시 가물었던지 26대 평원왕은 끼니를 줄이고 금식하면서 산
천에 제사를 모셨으며, 부여왕은 산천에 제사를 올려 왕세자를 구하였다. 백
제의 제5대 임금인 초고왕은 산천에 큰 단을 모아 제사를 모셨다.
요즈음도 큰 산 입구에 국사당(國師堂)이 있음을 더러 볼 수 있다. 더러는
서낭당이 있다. 글쓴이의 보기로는 이 국사당이, 서낭이 바로 산신을 모시는
제당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 안에 모신 신위(神位)를 보면 분명 호랑이를 탄
산신이다. 대개의 절간 한 모퉁이에 산신각으로 그 남겨진 모습을 볼 수 있
어 쓸쓸하다. 이두식으로 읽으면 '국사'는 '굿'이 되고 뜻으로 읽으면 나라
의 스승이 제의를 모시는 집이 된다. 지금이니까 그렇지 스승이란 옛말로 무
당 임금 승려 선생의 여러가지 뜻으로 쓰였던 터. 삼국사기 에서는 자
충(慈充)을 무당으로 규정하였으니 암시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다름 아닌 산굿을 하는 곳이 국사당이요, 산신각이다. 옛부터 내림으로 지
켜 온 우리의 믿음이 밖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들에 떠밀려 한 쪽 모서리 그
나마도 아예 없어져 버린 절간이나 산굿의 장소가 많이 있음은 우리 모두가
우리의 종교를 잘 지켜 발전시키지 못한 탓이 아니겠는가. 어차피 모든 것은
변하고 바뀌게 마련이지만, 볼품없이 되어 버린 우리의 정신문화가 너무 초
라하다. 그럼 오늘날은 어떤가. 그냥 무당이라 해서 아예 산제사는 제쳐놓고
병 고치는 푸닥거리나 하고 길흉화복을 예언해 주는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
기는 마찬가지. 서낭마저도 거의 사라져 버린 게 오늘의 현실이다.
어디나 산은 스스롭게 높이 솟아 있어 우러러 보게 된다. 스승이나 솟음이
나 모두 슷(솟)에서 비롯한 소리꼴로서 '사이(間)'를 뜻한다(훈몽자회). 그러
니까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땅과 저 푸른 하늘 사이에 값하는 솟음현상
의 상징물인 것이다. 하여 저 산은 우리들에게 언제나 저 높은 곳을 향한 믿
음과 신비로운 경건함을 배우게 한다. 더러는 바람으로, 때로는 구름으로 손
짓해서 말이다.
아이를 못 낳을 제, 가물어 온 나라라가 타 들어갈 때, 산신을 찾아 산치성
을 드린다. 산(山)은 어머니의 품성으로 산 자나 죽은 이를 싸 안아 준다. 영
원한 쉼터로서 우리들 정서 속에 자리잡고 있다. 단군신화의 하늘나라에도
거룩한 제단이었던 '소도'가 바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현재와 미래, 찰나
와 영원을 이어 주는 공간이 된다. 소도의 밑바탕은 'ㅅ-솟-솔'로 이어지는
사이 곧 새의 낱말 겨레로 고리지어 짐을 생각하면 산과 새는 불가분리의 물
과 고기라고 할 수 있다. 신이 내리는 나무를 주로 솔나무 - 소나무로 한 것
은 이 또한 '솔-ㅅ-솟'의 걸림을 가늠케 하는 보기가 된다.
해서 산이름에도 새의 이름을 부름말로 삼는 일이 왕왕이 있어 왔다(봉황
산 봉의산 응봉 치악산 계족산 계룡산 등). 평면 공간으로 볼라치면 한
지역과 다른 지역의 사이를 가르는 가름이 산으로 일어남이니 산과 새는 상
당한 걸림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한라에서 백두에 이르는 경건한 믿음의 숲이 있기에, 대대로 이어 살아 온
한민족은 기어이 하나가 될 것이며, 홍익인간의 횃불을 산봉우리에 높이 들
어 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