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한수산
나는 전생에 물고기였나 봐
항구의 겨울에는 갈매기만이 살아 있었다. 여객선 사무실 앞에도, 비린내마저
얼어 붙어 있는 선착장에도, 이따금 빈 택시가 들어와 두리번거리듯 서 있다가
마치 잘못된 길을 되돌아가듯 사라지는 거리에도, 언 겨울이 쓸려 가고 있었다.
그 위를 갈매기들이 날았다.
나는 찻집 창 밖으로 내가 타고 가야 할 배를 바라보았다. 그건 마치
누군가가 버리고 간 배처럼 느껴졌다. 찻집 창 밖에까지 날아온 갈매기가 울며
날아갔다. 그 울음 소리가 마치 무언가를 토해 내는 것 같다고 나는 무심히
생각했다. 날개마저도 추위에 얼어서 곧 떨어질 듯 갈매기는 그렇게 주춤주춤
겨울 포구를 날고 있었다.
여기서 우도까지는 얼마나 걸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글세, 한 시간 조금 더. 요즘은 배가 좋아졌으니까.
어떻게 알아. 배가 좋아졌는지를.
그리고 나는 말 끝에, 당신이 ---하고 덧붙였다. 배가 좋아졌는지를 당신이
어떻게 알아. 이 땅에 없는 사람이야, 당신. 땅위의 일은 땅 위에 살아 있는
것들끼리만 아는 거야.
섬은 말이지... 내 가슴 안에서 그녀가 말했다. 섬은 땅 위가 아니라 바다에
있어. 그래서 떠 있다고들 말하지 않니. 섬이 바다에 떠 있다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우스웠어. 물은, 그래 바닷물은 땅을 둘러싸고 있을 뿐인데 왜 사람들은
섬이 바다에 떠 있다고 말하는 걸까. 섬은 흘러가지도 가라앉지도, 그리고
출렁거리지도 않거든. 그런데 떠 있다고 해, 섬이.
여전하군. 당신은.
그럼. 나는 스물일곱에서 서 있는 사람이잖아.
스물일곱. 그것이 그녀가 나에게 남겨 놓고 간 나이였다.
여자가 말했다. 너 사는 걸 바라보면서 그렇게 서 있지. 그래서 네가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할아버지가 될 때도 나는 스물일곱일 수밖에 없는 거야.
그래서 난 늘 생각하지. 네 마흔에는 무엇이 있을까. 너의 오십에는 누가 올까.
네가 예순이 되었을 때 너는 어떻게 그 곳으로 걸어 들어갈까.
아직도 당신은 무언가를 믿고 있군. 늘 그랬어. 당신은 너무 많은 것을 믿어.
또 그 얘기, 우리는 거의 동시에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내가 말하는 그
믿음을, 나는 그녀의 그 서른 마흔 쉰의 나이 세기를, 우리는 잠시 서로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물었다.
지루한가 봐? 시간을 묻는 걸 보니.
살아간다는 건 그런 거라고 자기도 늘 말했잖아. 나그네는 기다리는
사람이야. 기차에서 여관에서 항구에서 배에서 늘 기다려야 하지. 그는
어디엔가 가 닿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그냥...살아 있는
사람은 그러는 거야. 까닭 없이 두리번거리며 시간도 묻고, 차도 마시고.
지나간 4년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의 정물들 같아ㅆ. 휘어서 엿가락처럼
늘어진 시계 같았다. 4년에 걸친 요양 생활은 되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거기에는 떠올려야 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신가 병동이 있는
뒤편으로는 숲이 이어져 있었다. 내 병동은 맨 끝이었다. 그 숲은 서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침이면 제일 늦게 햇빛이 들었다. 그리고 저녁이면
제일 먼저 그림자가 졌다. 그 숲을 바라보고 그 숲을 거닐면서, 나느 그 때
가끔 생각하곤 했었다. 인도엘 가고 싶다고, 인도엘 가서 그 윤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고.
신애가 늘 하곤 하던 말을 그때마다 나는 떠올렸다. 나는 그녀를 신애라고
말하지 않고, 시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녀는 물이 되었었다.
거기 사는 사람들에게는 현재가 없어. 시간이 없어. 무의미해. 그들은 다만
여기를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이야. 사람으로 태어난 현재를 지나가고 있을
뿐이야. 그 다음에 딱정벌레로 태어날지 도마뱀으로 태어날지, 아니면 긴
다리를 한 모기로 태어날지를 그들은 기다려. 고리와 고리로 이어져 있는
시간을 기다려. 브라만, 성직자로 태어날 수도 있겠지. 그러면 그때 그는
성충이 되는 거야. 시간과 시간의 고리 안에서 그느 그렇게 부화하는 거야.
저번에는 벌레였고 이번에는 사람이었고, 다음에는 또 흘러 가는 물이거나 그
위에 너울거리며 비치는 저녁 햇빛으로 태어나는 사람에게, 시간은 무엇일까.
숲길을 걸으면서 나는 끊임없이 시내가 말하던 인도엘 가고 싶었다. 가서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 다음 세상에서 딱정벌레로 태어날 사람을. 다음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울궈 내 마시는 찻잎으로 태어날 사람을.
그리고 나는 원했었다. 이 다음에 다시 이 세상에 나온다면 나무로 오고
싶다고. 나무가 되어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한평생을
살다가 가고 싶다고.
그리고 그 숲 속에서 나는 가을이 갔다는 걸 알았다. 겨울은 짧고 흐린 몇
번의 하늘과 함께 늦가을을 보내고 빠르게 찾아왔다. 추운 겨울의 시작이었다.
11월에 이미 얼음이 얼었다. 그 겨울 내내 나는 갇혀서 살았다.
그녀의 묘지에 풀이 얼고, 땅을 들고 일어서며 서릿발이 잘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나는 했다.
다방 여자의 슬리퍼 끄는 소리가 달그닥거리며 들려왔다. 손님의 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래 정비하지 않은 자동차의 엔진이 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너는 지금 어디 와서, 누구 뭐하는 데 보리알 끼듯 끼려 드냐."
"대명수산 사장님 차 한 잔 얻어 먹어 본게 언젠지 모르겠네.
김양, 여기 생강차 하나!"
"생강차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다."
"사장님도 쌍화차 한 잔 더하세요, 추운 덴 그저 따근따근한게 젤이라구요."
"따근따근한 거 좋아하네. 야 엽차나 한 잔 더 가져와."
"아이구 소금 냄새. 누가 젓갈 장사 아니랄까 봐."
"얘가 세금 안 낸다고 말을 그냥 막 허시네잉."
달그락거리며 찻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 벨이 울렸다. 네, 네.
그런데요. 아 장 사장님이요. 아침에 왔다가 가셨어요. 네 그런데 누구세요,
아하 조 상무님이시구나. 정말 이렇게 섭섭하게 전화나 하시기에요. 여기 눈
부운 여자 많아요, 조 상무님 보고 싶어서.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옆자리에 놓아두었던 목도리를 걸치고 코트를 입었다.
찻집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았다. 그것은 내 손목시계보다 조금 빨랐다.
카운터로 걸어가 지갑을 꺼내 드는 내게 여자가 물었다.
"가시게요? 아직 승선시간 멀지 않았나....."
거스름돈을 내어 주며 여자가 말했다.
"또 오세요."
잠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이 아가씨는 내가 또 올 거라고 믿고 있을까.
그녀의 얼굴이 난 아무것도 믿지 않아 하고 속삭이고 있었다. 거스름돈을
받으며, 나는 그녀의 손에 발리워진 은빛 매니큐어를 내려다보았다. 구석구석
지치고 때묻고 구겨진 속에서 그것만이 그녀에게서 힘차게 번쩍이고 있는
듯싶었다.
보랏빛은 청춘에는 이해할 수 없는 색깔이다.
보라빛을 어떻게 청춘이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엷고 희미하고, 그리고 뒷모습
같은 색깔을.
그것은 회상의 색깔이며, 어딘가로 떠나가고 있거나 어딘가에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색깔이다. 멈추어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느리게 느리게
소용돌이치고 있는 빛이다. 보랏빛은 또 어떠헤 바라보아도 그 무엇도 확시하지
않은 새깔이다. 원색의 주장도 없고 찬란한 금빛의 빛남도 없으며,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는 흑백의 완벽성도 없다. 그 무엇도 믿을 만한 확실함이 그에게는
없다. 그 보랏빛. 보랏빛은 그리움의 색깔이며, 상처의 색깔이며 오래 견딘
사람의 가슴팍 같은 색깔이다. 모든 것이 멀리 아주 먼 것으로 느껴지게 하는
색깔이며,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에게 비로소 다가오는 색깔이다. 그것을 어떻게
청춘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청춘...그러나 이제 누구도 청춘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젊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청춘이라고 말할 때의 고아함이 젊음이라는 말에는 없다. 그것은 다만
힘이며 미숙함, 그릭 불안일 뿐이다. 누구도 젊음 속에 있으면서 자신을
고아하다고는 느끼지 못한다. 젊음의 나날은 누구에게나 하루하루가 더럽고
불행하며 기댈 것 없이 혼자고 불안하다. 고기에서 기름기를 빼듯 그렇게
지혜라고 하는 기름을 빼고 난 나날, 아니면 아직 살과 가죽뿐 기름기가 끼지
않은 나날, 그것이 젊은 날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지혜롭게 젊은 날을 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
지혜로웠다면 그는 결코 한 번도 젊지 않았었다.
내 젊은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지난날을 돌아볼 때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말한다. 내 나날은 특별했다고. 그리고 특별했기를 바란다. 그러나 무엇이
그렇게 우리가 서로 달랐다는 건가. 서로가 다 마찬가지인 나날, 그렇게 살아
내는 것이 젊은 날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너의 젊은 날은 특별했다고. 마찬가지였다는
내 말에 고개를 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이 남달랐다는 것일까.
내가 이제 아는 것이 있다면 사랑이라는 말에는 불행이라든가 가치라든가
하는 말들을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불행한 사랑. 가치 없는 사랑. 그런
사랑은 없다. 어떤 형용사도 관형사도 사랑이라는 말 앞에는 씌어질 수 없다.
새 사랑가 헌 사랑이 있을 수 없듯이. 아니 그것이 같은 것이듯이.
그러나 사람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네 사랑은 불행이었다고. 네 사랑은 가치
없는 것이었다고. 그러므로 남달랐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그 사람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저을 수 있다. 아니. 마찬가지였어.
나는 그냥 그 나이를 살았고 지혜롭지 못했고 혼자였다. 늘 그런 날들이었다.
그리고 죽음은 가까이에 있었어.
내 젊은 날. 나 또한 그렇다. 그것이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났는지를 모른다.
또 누군가는 어쩌면 내가 아직도 젊음 속에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안다. 무엇인가가 내 안에서 끝나 버렸음을. 그리고 그 끝에서 비로소
내게 있어 청춘이라는 것이 지나가 버렸음을. 언제 그 곳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이 끝났다는 것, 지나가 버렸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느끼게 하는 것. 젊음이란 그런 것인가.
가을 같다. 겨울 같다. 언제 그것이 사라져 갔는지를 우리는 모른다. 다만
어느 날 아침 그것을 안다. 겨울이 지나갔다는 것을. 가을이 가버렸다는 것을.
언제 어디로 돌아가 닿을지도 모르는,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지도
모르는 나그네 길을 떠났던 그때, 나는 무엇이었던가. 확실한 것이 단 하나
있다. 나는 그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 나를 부를 수 있는 이름도, 그 이름
옆에 붙을 수 있는 또 다른 어떤 이름도 나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느 것,
그것만이 확실할 뿐이다.
다만 하나가, 내 가슴 밑바닥에 주룩주룩 모래를 뿌리고 지나가는 하나가
있다. 모든 길이 끊기고 시위는 흰빛으로 뒤덮인 마을. 바람은 눈가루를 날리며
종일 오가지만, 그러나 바람은 사람처럼 눈 위를 걷지 않는다. 봄이 와서 녹아
내릴 때까지 눈 속에 갇혀 살아야 하는 마을처럼 그렇게 정물화된 것이 하나
주룩주룩 뿌려지는 모래를 맞으며 서 있다.
첼로. 수초처럼 다가와 우리들을 감싸던 첼로의 음율. 죽음에 입맞추듯이
우리를 눈멀게 하던 그 소리를 칼질. 그녀와 나를 불타서 재로 만들어 가던 그
무녀의 춤. 우리가 사랑했던 첼로.
칸막이 저편에서 여자가 말했다.
"주민등록증 내세요."
뿌연 유리 칸막이 때문에 그녀의 얼굴이 뿌옇게 바라보였다. 그녀의
목소리까지도 뿌옇게 흐려 있어서 나는 다시 되물었다.
"뭐요?"
"주민등록증이요."
"그런 걸 보여야 됩니까?"
"거기 써 붙인 거 안 보여요?"
승선자 유의 사항. 만취 질병 등으로하여 승선이 불가능하다고 인정되는 자의
승선을 거부할 수 있다. 승선자는 필히 주민등록증을 제시하여야 한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꺼내 유리 칸막이를 반달 모양으로 잘라 낸 안쪽으로 들이밀었다.
최형민. 나라는 이름의 사내의 얼굴이 칙칙한 컬러사진으로 거기 내팽겨쳐지듯
붙여 있었다. 돈과 주민등록증을 받아 앞으로 당긴 여자가 빠르게 볼펜으로
종이 위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나는 주민등록증가 그녀가 내미는 승선권을 주머니에 넣으며 돌아섰다.
대합실 안을 둘러보았다. 대합실 벽을 따라 놓여진 의자에는 앉을 자리가
없었다. 출구 쪽에는 보따리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벌써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이나 보따리나 한결같이 표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보따리처럼 만들어진 사람이거나, 사람처럼 만들어진
보따리들이었다.
사람들의 머리 위 때묻은 유리창으로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잿빛이었고, 바다는 푸른색보다는 검은색이 더 많이 드러나는 모습으로 펼쳐져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합실이 조금씩 붐비어 가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텅 비어 보이던 거리에서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모여들어 대합실을
채워 나갔다.
"영남이가 돌아왔다면서요?"
내 옆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던 부인들의 말이 내 의식을 뚫고 들어섰다.
돌아왔다는 말 때문이었을까.
"예. 한 달포 돼가요."
"잘됐네요. 이제 장가만 보내면 되겠네요."
"그게 어디 맘처럼 되나요."
"제대도 했겠다. 살림이 그만한데 시집을 처녀 없을라구요."
돌아왔다는 건 군에서 제대를 했다는 말이었다.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집이란 떠났다가는 다시 돌아가고 돌아왔다가는 다시 떠나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잇고 있는 굵은 아니면 가느다란, 그렇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끈은 무엇일까. 그 끈이 끊어질 때 아무도 돌아가지 못한다. 그는 돌아갈 곳이
없고, 돌아와도 이미 그 곳은 그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다.
"요새 처녀들이 어디 섬 구석으로 시집을 올라고 하나요."
처녀. 결혼하지 않는 여자. 사회적으로는 그렇다. 남자와 자기 않은 여자.
어느쪽이 완성일까. 처녀는 여성의 완성일까. 그렇다면 남자는 그것을 파괴하는
힘인가. 아니면 남성을 받아 아이를 낳음으로써 비로소 여성은 완성되는
것일까.
자연 신화에서는 한 계절이나 주기가 바뀔 때 그것을 성적 폭력으로
이해했었다. 그러므로 가을은 여름에게 능욕당한 계절이었다. 그리고 그
결실이었다. 왜 그들은 이 변화를 성으로 이해했을까. 풍요 때문이었다고 했다.
한 계절이 다른 계절을 성적으로 범함으로써 비로서 사라져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성이란 풍요였다. 생산이었고.
"그럼 내가 한 번 나서 볼까, 잘하면 술이 석잔이라는데..."
"누구 생각나는 색시가 있으세요?"
"그렇네요, 영남이 맘에 들어야 되는 일이긴 하지만, 아 어디 별처녀
있겠어요. 그저 맘씨 곱고 살림 잘하면 되지. 얼굴 반반한 거 보다야 몸
튼튼해서 자식 잘 놓으면 되는 거고. 영남이가 눈이나 높지 않나 모르겠네."
"높기는요."
"그럼 됐지요 뭐. 어디 누구는 살아 보고 시집 온답디까. 그담에 것들이야
지들이 알아서 하는 건데."
갑자기 사람드리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대합실 안이 어수선해 졌다. 뒤에
섰던 사람들이 우루루 앞으로 몰려 나갔다. 여객선 회사의 검푸른 점퍼를 입은
두 명의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한 남자가, 쇠줄로 얽어 매고 열쇠로 잠가
놓았던 문을 풀었다. 다른 남자가 말했다.
"아 다들 타실 거니까, 이렇게 밀고 들어오고 그러지 마세요."
사람들이 대합실을 빠져 나갔다. 밖으로 나간 사람들은 배와 부두를 연결하고
있는 부교 위를 뛰어서 건너갔다. 배에 오르기를 서두르는 사람들이 뒤에서
자꾸 등을 밀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무슨 짐이 이렇게 커요?"
"커 봤자지. 이불 보따리가 무슨 무게가 나가나."
"이불은 뭐하러 가지고 타요. 아주 펴고 길게 누워서 가실려구요?"
여객선 회사의 두 남자 직원은 그런 말을 지껄여 가면서 승객들이 내미는
승선권을 두 장으로 잘랐다. 찢어 낸 한 장을 그들은 손에 모아쥐었다.
누군가가 등뒤에서 내 등을 밀쳤다. 몸이 앞으로 밀리는 것과 함께 향수
냄새가 내 코를 스쳐 갔다. 여자의 냄새였다. 도회의 냄새. 암컷의 냄새. 싼
향수 냄새가 풍기는 뒤쪽으로 나는 고개를 돌렸다.
껌을 씹으면서 여자가 나를 보았다.
"뒤에서 밀잖아요."
여자는 아무 표정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껌을 씹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마치
자동 인형의 움직임 같았다. 그녀의 눈에는 흰자위가 가득했다. 나는 이 세상을
이러이러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그녀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모양이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과 거기 발리워진 암갈색
화장이 그렇게 질금질금 말들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가죽 코트가 번들거리면서 나를 춥게 만들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표를 내밀면서 물었다.
"얼마나 걸립니까?"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우도"
"한 시간 반 운항 거리인데....오늘은 기상이 나빠서 더 걸릴 것도 같고."
향수 냄새가 아주 가까이에서 내 목을 타고 넘어왔다. 나는 여객선 회사
직원이 내미는 승선권 쪼가리를 받았다. 그것을 구기듯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문을 나섰다. 바람이 몸을 웅크리게 했다.
일렁거리는 부교 위를 걸어서 나는 배로 다가갔다. 갑판으로 올라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목에 털이 달린 짧은 가죽 코트의 여자는 화장 가방 하나를 들고
있었다. 저것이 저 여자의 그물인가, 아니면 창인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이제 저 여자는 그물과 창을 들고 땅 위로 올라설 것이다.
배 안으로 들어서며 나는 2등실이라고 씌어진 옆에 빨간색으로 그려진
화살표를 보았다.
3등 선실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드러누운 사람, 술을 마시는 사람
그리고 화투를 치는 사람이 그들이었다.
누워 있는 사람들은 누에 같았다. 그것은 3등 선실의 구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잠실 안에서 뽕잎을 먹고 있는 누에들은 언뜻 보아서는 그
움직임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은 한결같이 정지되어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눈여겨보면 누에들은 온몸의 주름을 이용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고
끊임없이 입을 놀려 뽕을 씹는다.
선실 안에는 미음자로 통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 부분은 조금
높게 층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앉거나 누울 수 있게 비닐 장판이 깔려 있었다.
거기 누에처럼 눕거나 웅크리거나 구부리고 앉아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거나
화투를 치거나 잠이 들려고 애쓰고 있었다.
"뒤통수를 칠 게 따로 있지, 이거야 씨벌, 고스톱도 아니다."
"고운 말 쓰기 운동은 국가 시책이여."
"내 돈 나가는 마당에 국가가 무슨 개나발이여."
"이 사람이 지금 맨정신에 하는 소리여. 국가를 두고 개나발이라니, 자네
지난번에 동원 훈련 안 갔다 왔나 봐."
"광 팔었으면 국으로 입이나 닫고 있어."
"그런다고 패가 맞는가. 화투는 자고로 마음을 비워야 쓰는 게여."
"얼씨구 하나 붙었다. 어느 놈인지 좆 수그러드는 소리가 들린다 들려."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은 조용조용 말을 했다. 한 쪽에서는
누군가가 버너를 가지고 화기 엄금이라고 써 붙인 바로 밑에서 무언가를 끓이고
있었다.
낚시꾼들은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모여 앉아 담배를 피웠다.
"영진의 김 부장은 인사를 모르더군. 그만큼 도와 줘도 뭐 쓴 술 한잔이
없어."
"원래 사람이 그렇지."
"아니 그런데 고려는 왜 망한 거야. 한참 잘 뻗어 나간다고 굿을 하더니."
"잘 뻗어 나갔지. 거기다가 얼마나 눈먼 때였어. 해외 건설을 하는데, 영어로
회사 이름이 코리아 뭐뭐 그랬거든. 그러니까 저쪽에서 무슨 국영 기업체 같은
것으로 알았나 봐."
"잔치 한 번 잘못했다던데 그건 어떻게 된 소리야?"
"그 회장이 환갑 잔치를 한 대나 하면서, 홍콩으로 날아간 거야. 현장
근로자까지 모두 담아 싣고 홍콩에 가서 그냥 호텔에서 환갑 잔치를 열었거든.
노가다가 그냥 통 크게 한 번 논 거지 뭐."
"미련하기는."
"아무튼 일이 안 되려니까 현지에서 소문이 어떻게 나버렸는가 하면, 고려가
공사는 안 하고 근로자까지 모조리 싣고 도망을 쳤다 해서 소동이 벌어진 거야.
그럴 수밖에, 하여튼 한국 사람이라는 건 하나도 안 남기고 싣고
날라갔으니까."
"미친. 구멍을 파도 아주 제대로 팠군."
"그러면서 넘어가는데, 얼마 안 걸리드라구. 회사 망하는 거 우스워. 담보
확보한다고 차압 들어오고, 대출 막히면 그게 명줄 따는 거지 별건가."
"은행만 좋은 일 시키는 거지 뭐."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져 가고 있었다. 2층 객실로 오르는
통로에 서서 나는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누에들처럼 그들은 거의 움직임이 없이
움직였다. 그러나 저들은 고치를 짓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의 몸을 뽑아 실을
만들고 자신은 조그맣게 졸아들어서 번데기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다만
지치고 흔들리면서 각자가 내려야 할 섬까지 이 배가 가 닿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렇다고 거기에서 무슨 화려한 부화가 그들을 맞을 리도 없다.
내 2등 선실은 네 사람이 함께 쓰게 되어 있었다. 우도까지는, 누워서 잠을
자며 가지 않아도 되는 거리였다. 쾌청한 날이면 그냥 갑판에서 보내도 좋은
거리였다.
나는 선실로 들어가 내 자리에 누웠다. 선실 침대에 누워서 느끼는 배의
흔들림은 앉거나 서서 있을 때와는 많이 달랐다. 비로소 배가 물 위에 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몸으로 다가온다.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물결처럼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신애가
있다. 그녀의 비늘뿐인 몸, 발가벗은 몸이 내게 감겨 든다.
때로는 그녀가 봄이었을 때, 나는 여름이 되었다. 그녀가 가을 이었을 때
나는 겨울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가졌다. 하나의 계절이 가고 다른
계절이 오는 것과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닮아 있었던가.
그녀는 땀에 젖으 자신의 몸에 내 손을 당겨 올려 놓았다. 그리고 가만가만히
쓸어 내렸다. 젖가슴을, 그 밑의 배를, 수없이 많은 물방울이 떨어져서 파인
듯한 배꼽을 그녀는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놓고 쓸어 나갔었다. 그리고 아주
목소리를 낮추어서 노래처럼 말했다. 올페우스가 죽으면 강물은 눈물로 넘치고,
나무들은 상복을 입듯이 잎을 떨어뜨린단다.
계단을 올라갔다. 갑판으로 나갈까 생각했지만 거기에는 굵은 로프가 두 줄
가로질러져 있었다. 그리고 페인트가 조금 벗겨진 팻말이 철사로 매달려
있었다. 출입금지. 그것뿐이었다. 왜 나가지 못한다거나 나가서는 안된다는
아무 설명도 거기에는 없었다.
갑판 저편에 펼쳐져 있는 바다를 내다보며 나는 오래오래 서 있었다.
그렇다면 신애는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나는 또 물었다. 가난은 아니었을까.
그녀는 내게 내가 가진 모든 가난의 이름이 아니었던가. 안고 싶고 가지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파묻히고 싶고 잠들고 싶고 허물고 싶고 벗어나고 싶고 일으켜
세우고 싶던 그 모든 이름의 대상은 아니었을까.
갑판에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전생에 나는 물고기였는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던 여자. 물고기. 전생에
물고기였던 여자. 나는 자신이 전생에서 그 무엇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여자를 그녀밖에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늘 그렇게 소금기를 그리워했다.
빌딩의 지하 계단을 내려가다가도 그녀는 아, 바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때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었다. 지하에 일식당이나 횟집이 있는 건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아니. 그냥 내 안에서 뭐가 꿈틀했던 거야. 바다가 그립다고.
마른 플라타너스 잎이 떨어져서 굴러가고 있는 늦가을의 거리에 서서도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렸었다. 아, 바다. 이럴 땐 난 바다에 가지 않으면 안 돼.
무엇이 꿈틀했나요? 선생님 속에서?
아니. 그냥 울렸어.
뭐가요?
첼로 같은 거. 아주 깊고 음울하고 가라앉은 어떤 소리 같은 거. 우우웅 하고
내 밑바닥을 긁고 지나갔어. 이건 바다를 부르는 소리야.
어떻게 무엇으로든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그녀
또한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 물고기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그 후 어느 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전생에 물고기였을 거야. 아마 그랬을
거야.
내가 그때 왜 비늘을 떠올렸을까. 그녀의 몸이 비늘로 뒤덮인 듯이
느껴졌을까. 어느 수족관 앞에서 그녀는 또 말했었다.
물고기는 자유인가 봐. 바람같애. 저 부드러운 몸체를 봐. 비늘로 뒤덮인
몸은 얼마나 아름답니.
그녀가 바다에서 가지고 온 것은 그녀가 태어난 마을 그 본적지밖에는 없었을
텐데 왜 그녀는 그렇게 바다를 그리워했을까.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보다도 더 그녀는 그랬다.
바다는 내게 아무것도 가르친 것이 없었다. 바람과 어두움, 그리고 그 바람과
어두움이 다가오는 곳..... 그것이 나의 바다였다. 그러나 그녀는 나와는
다르게 바다를 살았던 건 아니었을까. 이 땅 위에서, 이 땅 위로 끌어올려진
고기처럼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은 전생에 물고기였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전생에 물고기였나 봐 하는 그녀의 그 말을 떠올리며
첼로의 그 둔중하고 음울한, 그러나 깊은 환희에 들끓고 있는 소리를 듣는다.
흑백사진은 언제 보아도 기념비 같다. 이제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런 것이 느껴진다. 걸려 있는 흑백 사진 속의 사람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 적이 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물었었다.
선생님, 죽은 사람의 컬러 사진은 왜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가 않는지
몰라요. 호소력이 없어요.
그때 신애는 말했었다. 편견이야. 아니면 직관.
그럴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떠올린다. 그것은 기념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칭송할, 추억할, 반추할, 다시 꺼내어 펼쳐 보거나 뒤집어 볼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컬러 사진 속의 얼굴에는.
흑백 사진만으로는 가득한 앨범 하나. 나를 기른 고모의 방에는 그런 앨범이
있었다. 그 사진 속의 사람들은, 이미 거의가 죽은 사람들이었거나, 고모와는
멀리 있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죽은 사람의 옆에 혹은 떠나 있는 사람의 옆에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이
서 있기는 했다.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흑백 사진 속의 사람들은 지금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아주머니인 사람의 아주 어린 시절이 거기에 있었다.
젊은 얼굴로 부끄럽게 웃고 있는 처녀는 이미 할머니가 되어 백내장 때문에
눈이 안 보인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 곳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다가 고모 댁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 앨범을 넘기면서 말하곤 했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배밭골 정임이를 여기 오니 보겠네. 얘가 지금 애들이
몇이지? 뭐 벌써 사위를 봐?
그랬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사진 속의 그는 죽고, 아주 다른
사람이 그의 이름과 얼굴 윤곽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았다. 철조망 앞에서
철모를 쓰고 풀과 나뭇임을 꽂은 완전 무장을 한 모습으로 박혀 있는 한 남자의
사진도 거기 있었다. 고모가 사랑했던 남자. 그러나 고모는 이미 그 무렵 사진
속에 철모를 쓰고 있는 남자의 어머니쯤으로 늙어 있었다.
소리 없이 떠오른다. 텅 빈 커다란 학교 운동장 가의 정적. 어른이 없는 집.
혼자 있음. 길게 울리며 꼬리를 남기는 괘종시계 소리. 학교 선생님이었던
고모를 따라 나는 그렇게 학교 옆에서 살았다. 어느 곳이나 시골 마을에서 제일
큰 것은 학교였다. 그리고 제일 높은 곳에는 교회가 있었다.
이 두 건물이 가지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둘 다, 교회도 학교도 마을과는
떨어져 있었다. 그 거리는 나와 마을과의 거리였다. 나를 혼자 있게 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기억에 없다. 고모와 살았다. 그리고 자랐다. 아이들은
자라는 것이니까.
그리고 어느 날, 고모에게서부터 걸어 나가서 내가 처음으로 만나는 여자,
그녀의 이야기를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겨울이면 풀들이 마른다는 것을
나는 늘 그녀와 함께 확인한다. 가을이 깊어가면 그녀의 무덤에도 풀들이
마르고, 바라보이는 먼산에도 잎 떨어진 나무들뿐이다.
내가 그녀를 새벽이었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녀에게 저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랬다. 그녀는 새벽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늘 황혼처럼 스러져 가며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새 여자는 다 깨끗하지
"혹시, 혹시 말이죠, 라이터 가지신 거 있어요?"
형민이 몸을 돌렸다. 갑판에서 불어 들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면서
여자가 거기 있었다. 향수. 털 달린 가죽 코트. 그의 뒤에서 배를 타던
여자였다.
그녀의 손에 하얗게 담배 한 개비가 들려 있었다. 형민은 라이터를 꺼내는
대신 들고 있던 담배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녀는 그것을 받았다. 담배를 건네주며 그녀는 길게
연기를 뱉아 냈다. 바람이 그녀의 얼굴 쪽으로 불고 있었기 때문에 연기는
뒤편으로 흩어져 갔다. 형민이 다시 바다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혹시, 혹시 말이죠, 라이터 가지신 거 있어요?"
형민이 몸을 돌렸다. 갑판에서 불어 들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면서
여자가 거기 있었다. 향수. 털 달린 가죽 코트. 그의 뒤에서 배를 타던
여자였다.
그녀의 손에 하얗게 담배 한 개비가 들려 있었다. 형민은 라이터를 꺼내는
대신 들고 있던 담배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녀는 그것을 받았다. 담배를 건네주며 그녀는 길게
연기를 뱉아 냈다. 바람이 그녀의 얼굴 쪽으로 불고 있었기 때문에 연기는
뒤편으로 흩어져 갔다. 형민이 다시 바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한잔 안 하실래요?"
천천히 몸을 돌리면서 형민은 그녀를 마주보았다. 아주 작은 얼굴이었다.
머리칼이 뒤로 흩날리고 있어서 이마가 드러났기 때문에 그런 느낌은 더했다.
잠깐 눈길이 마주쳤다.
"술?"
여자가 아하 하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목소리가 조금 쉰 듯이 가라앉아
있었다.
"난 우도까지 갑니다."
그곳은 술을 마시기에는 너무 짧은 거리였다.
"좋잖아요. 아직 한 시간은 남았고, 소주 딱 한 잔 나눠 마시면 되겠네요."
형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자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날씨라고 미친년 같애. 나만 나왔다. 들어가는 날이면 이래. 내가 섬을
떠다든가."
섬으 떠날 수도 있다고 믿는 여자. 그렇다면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를 더 묻지
않아도 되었다. 섬은 떠날 수 없는 사람들만이 모여서 사는 곳이다. 그래서
그들은 섬을 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섬의 밖, 육지에서 온 사람만을 땅에서
온 사람이라고 불렀다.
형민이 말했다.
"매점 앞에 의자가 있더군요."
"의자는 왜요?"
"거길 가야 술을 마실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아하,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여자가 담배를 길게 바다 위로 버렸다. 반쯤 타고 남은 흰 담배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배 밑쪽으로 떨어졌다. 여자가 가죽 코트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열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소주병을 꺼내 잠시 잡고 있으라는 듯 형민에게 건네주었다.
여자는 다시 가방에서 비닐 포장이 된 안주를 꺼내 들었다. 마른 오징어를 잘게
찢은 것이었다. 처음부터 배에서 술을 마시기로 준비를 한 이 여자가 왜
담뱃불을 빌려가면서까지 자기와 술을 마시려고 했는지 형민은 알 수가 없었다.
"난, 나한테 술을 사라는 줄로 알았지요."
"모르는 남자한테 어떻게 술을 사달라고 그래요."
말해 놓고 나서 갑자기 여자가 웃었다.
"안 어울리죠."
그들은 갑판으로 나가는 통로를 가운데 두고 벽을 기대고 서서 술을 마셨다.
일회용 플라스틱 컵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안주는 그녀가 들고 있었고
술병은 형민이 들고 있었다. 마른 오징어는 짰다.
"우도에는 왜 가세요?"
"그냥. 누굴 좀 만나러."
물고기 하나가 바다 위가 아닌 그의 가슴속에서 튀어오르듯 떠 올랐다가
사라져 갔다. 비늘이 하나도 없는 맨살의 물고기. 물고기가 사라진 물살을
따라가듯 그의 눈길이 먼바다 쪽으로 향했다.
우도에서도 옛날에는 풍장을 했다고 했다. 말라 가는 살과 뼈, 섬을 떠나간
사람을 기다리는 주검. 신애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때 왜 정사를
꿈꾸었던가. 나란히 누워서 죽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 까아맣게 함께 삭아
내릴 수만 있다면...풍장.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그에게 술잔을 돌렸다.
"그런데 있죠, 아저씨. 뭐, 총각이라고 부르는 거보다야 아저씨가 그래도
났지. 학생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근데 뭐하는 사람이에요?"
"나 말입니까?"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도까지 가는 사람."
여자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놀구 있네."
"맞습니다. 저 지금 놀고 있습니다."
큰 파도가 배를 치고 지나갔는가,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둘 다 고개를 숙이며 바람을 피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 밑을 닦고 있었다. 형민이 잔에 술을 부어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가 말했다.
"어떤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가 그러드라구요. 술만 먹으면 우는 남자가
있었는데 그러드라구요. 술은 뭐 신의 눈물이라나. 웃기고 자빠졌네
싶더라구요. 그렇지만 뭐 그 남자는 늘 그랬다구요. 술은 신의 눈물이다.
그래서 자기는 마셨다 하면 안 울 수가 없다나 뭐."
여자가 다시 눈 밑을 닦았다. 형민은 그때에야 그녀가 물보라 때문이 아니라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배에서 내린 그는, 두 가지에 조금씩 취해 있었다. 갑판에서 마신 그
소주에도, 그리고 둔중하게 머리를 아니 몸을 흔들어대는 뱃멀미에도.
부두에는 몇 척의 어선들이 들어서 있었고, 여객선에서 내린 손님들이 빠져
나가는 길목에는 아주머니들이 커다란 물통이나 혹은 스티로폼 판대기 위에
생선들을 놓고 팔고 있었다. 그것을 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앞을
지나가면서 형민은 뜻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려는 사람이 없는 것만이
아니라, 그 아주머니들조차 무엇을 팔려고 하는 사람들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듯이, 그리고 저녁이면 발을 닦고 잠자리에 들 듯이
그 아주머니들은 그렇게 단순하게 길들여져서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일상으로서 거기 그렇게 나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위를 갈매기들이
날았다. 끼룩끼룩거리며 날고 있는 그 새들을 형민은 잠시 바라보았다.
갈매기. 그 울음 소리가 그에게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아마 전생에 물고기였을 거야. 갈매기가 끼룩거리며 바로 옆을
지나갔다. 형민은 고개를 숙이며 구두 끝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난 전생에 갈매기는 아니었을 거다. 물고기를 잡아먹는 너는 아니었을
거다. 왜냐구? 나는 말이다, 전생에 물고기였다는 사람을 알았거든.
사랑했거든.
모르지. 전생에서의 만남에 무엇인가 다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그 업을 다시
살기 위해서 물고기와 갈매기가 서로 사랑했는지도.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형민은 아주머니들이 좌판을 벌이고 있는 부두를 빠져
나왔다. 도망치듯이. 바람 때문은 아니었다. 추위 때문도 아니었다. 땅으로
떨어지면 얼음처럼 깨어질 것같이 멈출 듯 멈출 듯이 갈매기들이 날고 있는
바다 쪽에서 속이 울렁 거릴 정도로 비린내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어디쯤 깨끗한 여관이 있는가를 몰랐기 때문에 형민은 누군가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때에 제일 필요한 것이 택시 기사였다. 낯선 곳에서 식당을
찾거나 여관을 찾을 때, 그가 가르쳐 주는 곳으로 가면 된다는 건 고모한테서
배운 것이었다.
고모가 가지고 있던 고정 관념의 하나였다. 고모는 안쪽을 들여다보아서
손님들이 없는 식당을 들어서는 법이 없었다. 손님이 없는 집은 일단 음식이
맛없다는 증거라는 것이었다.
그런 고모가 군청 정도가 있는 작은 읍내에 가서 식당을 찾을 때 즐겨 쓰던
말이 있었다. 택시를 타고 고모는 말했다.
"여기 군수 영감이 잘 가는 식당이 어디예요?"
그렇게 해서 찾아가는 식당은 맛없을 수가 없다는 거였다.
고모는 무언가를 틀에 짜맞추듯이 그런 고정 관념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그것의 실효성을 진정으로 믿었었다. 밤에는 전연 손톱이나 발톱을 깎지 않았던
고모였다. 밤에 발톱을 깎으면 이 다음에 죽어서 고양이가 된다던가. 밤에
발톱을 깎으면 그 조각이 어디론가 튀어 달아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었겠지만, 고모는 그런 말도 진정으로 믿었다.
밤에 베개를 세워 놓는 것을 몹시 싫어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밤에 베개를
세워 놓으면 도둑이 든다고 고모는 믿는 사람이었다.
부두를 빠져나온 형민은 좁고 지저분한 길과 쓰러질 듯 낮게 엎드린 건물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낯선 이곳에 버려진 것같이 느껴져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넌 여길 찾아온 사람이야. 유행가 가락이 아니니까. 제발
좀 갈 곳 없는 나그네처럼 굴지 마.
"여기, 섬에 혹시 택시 같은 거 없습니까?"
"택시오? 젊은 양반. 아니 요새 세상에 택시 없는 데도 있답디까."
퉁명스레 내뱉으며 그가 형민을 쳐다보았다. 남자는 땅땅하게 퍼진 몸매에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다. 군대에 가서 요런 상관 만났가는 세빠지게
고생하겠구나 싶은 그런 얼굴이었다.
"미안합니다. 지나가는 택시가 보이질 않아서."
"아, 여기야 섬이니께, 육지처럼 택시가 뱅글뱅글 돌아 다니는 게 아니고,
세워 놓고 손님 오기를 기다리지 않소."
"몰랐습니다. 처음이라서."
남자가 몸을 돌렸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세워 놓고 기다린다는 택시는
어디에 있다는 건가. 형민은 남자의 옆을 따라 걸으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택시를 어디 가서 탑니까? 어디서 기다리는 데요?"
"저어쪽으로 돌아가야지."
남자는 턱으로 방향을 가리키고 나서 골목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저어쪽이라고 그가 가리킨 곳으로 형민은 천천히 걸었다.
배가 떠나고 들어오며 사람들이 오가는 섬에서라면 부두 앞이 가장 번화한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택시도 거기서 손님을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왜 부두와는 떨어진 곳에 가야 택시를 탈 수 있는지를 전연 알 수가
없었다.
아무 여관이나 들어가서 그냥 묵도록 할까. 들어가서 싫으면 다른 여관으로
옮기면 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 때였다. 길 건너편에서
달려오는 택시가 있었다. 형민은 손을 흔들기 위해 차도로 내려섰다.
그때였다. 그가 택시를 소리쳐 부르기도 전에 차가 멎으면서 차창 밖으로 한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어떤 남자가 그랬어요. 술은 신의 눈물이라고요. 그 말을 했던 여자였다. 털
달린 가죽 코트, 그리고 향수 냄새. 그녀가 얼굴을 내민 채 커다랗게 말했다.
"타세요."
형민은 뛰어서 길을 건너갔다.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타라면 그냥 타요."
"난 지금 여관을 찾는 길입니다."
"알아요. 그러니까 타라잖아요."
택시 문을 열고 그녀 옆자리에 앉았다. 향수 냄새가, 바닷바람을 타고 풍겨
오던 그 냄새가 훅 다가왔다.
눈이라도 내리려나. 형민은 먼저 끼고 더러운 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2층이어서 바다가 밑으로 내려다보였다. 좌판 같은 상이 놓여 있고 바닥에는
비닐을 깐 횟집 2층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줄 알았던 여자가 다가오면서
말했다.
"방 잡아 놓았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요. 여기서 한찬 마시고 그러고 가서
쉬면 되잖아요."
"어디 있는 여관인데요?"
"바로 요 뒤."
말해 놓고 여자가 목소리를 높이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말했다.
"아줌마, 뭐해. 여기 소주부터 좀 주지 않고."
"알았어요, 가요."
여자가 털 달린 코트를 벗어 방석 옆에 놓았다. 여자는 속에 흰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몸에 들러붙는 스웨터가 코트 속에 감추어져 있던 그녀의 몸매를
드러나게 했다. 젖가슴의 부피를 거의 느낄 수 없이 여자는 몸이 말라 있었다.
택시에서였다. 여관을 찾는다는 그에게 여자는 말했다. 여관은 내가 잡아 줄
테니까, 여기선 제일 깨끗한 곳으로 잡아 줄 테니까, 우선 뭘 먹어야 할 거
아냐.
여자는 조금씩 반말을 썼다가 어떤 때는 존댓말을 그렇게 섞어 써가면서 그를
데리고 횟집으로 들어섰었다. 그 옷차림이나 향수 냄새로 미루어 그녀가 흔히
말하는 물장사라고 불리우는 직업의 어느 테두리 안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을
하면서 형민은 그녀를 따라 횟집 2층 방으로 올라왔고 그녀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회와 술을 시켰다.
온돌을 놓은 2층 방은 바닥이 따근따근했다. 앉아서 창 밖으로 바닷가
내려다보이는 방이었다. 여자가 담배를 집어 들며 말했다.
"여관은 깨끗할 거예요."
"고맙습니다."
"새로 지은 여관이거든."
혼자말처럼 중얼거리고 나서, 갑자기 여자는 그 목소리와는 달리 그릇이
깨지듯 웃었다. 뱃멀미로 머리가 지끈지끈 쑤셔 와서 이마를 찌푸리며 그가
물었다.
"왜 웃으세요?"
"새거는 깨끗하거든. 여관만 그런 게 아니지. 사람도 새거는 깨끗한 거야."
"그렇겠지요."
"그렇기는 뭐가 그래요."
여자는 그의 말을 끊듯이 빠르게 말했다.
"좋은 거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거야. 새거는 깨끗하다. 그 말이야 맞지.
그렇다고 해서 깨끗하다고 새거가 다 좋은 거냐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구.
깨끗하지 않아도 좋은 게 있고, 새게 아니더라도 좋은 건 있거든. 안 그래요?"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여자도 그래. 깨끗한 여자? 물론 있지. 새 여자는 다 깨끗하겠지. 그렇지만
깨끗한 여자라구 다 좋은 여자라는 법은 없는 거아냐?"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가 말했다.
"뭐가 그렇게 복잡합니까. 깨끗한 것도 있고 새것도 있고 좋은 것도 있고...
그렇게 뒤섞여 있는 게 세상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거기는 뭘 하고 사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배에서부터
뭐하는 사람인지, 직업이 참 궁금하더라구."
그때 주인 여자가 야채며 초장과 함께 소주를 가지고 올라왔다.
모르겠다. 술 마시고 한잠 자고 나면 뱃멀미도 좀 가라앉겠지. 그리고 이
여자를 만나지 않고 혼자라 해도, 아마 오늘은 술이라도 하지 않고는 보내기가
어려울지도 모르지. 함께 마주앉아 있기가 좀 지루하긴 해도, 이것도 다 이
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이 여자도 이 섬의 하나라고. 저쪽 어느
절벽이나 이쪽 부둣가나, 그렇게 섬의 하나라고 말이다.
"회, 바로 갖다 드릴게요."
주인 여자가 반찬들을 상 위에 늘어놓고 나서 말했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사이 유리 잔에 소주를 따르고 난 여자가 말했다.
"자 우선 한잔해."
그들은 말간 유리 잔 속의 소주를 들어 한 모금씩 했다. 주인 여자가 올라와
회를, 물고기의 머리가 그냥 얹혀져 있는 넓적한 접시를 상에 올려놓았다.
"드시고 나면 매운탕 해드릴게요. 머리는 빼갈까요?"
그가 물었다.
"생선 말고 뭐 다른 안주는 없습니까?"
"튀김이 되는데요."
"알았어요, 됐습니다."
주인 여자가 나가고 난 뒤였다. 여자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회....안 좋아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먹습니다."
"별남자 다 보겠네. 오늘 내가 아주 사람을 영 잘못 봤네. 회를 안 먹는
사람이 섬에는 뭐하러 와."
난 전생에 물고기였나봐. 짧게 그런 말이 바늘이 되어 그의 겨드랑을 뚫고
들어와 등허리 쪽으로 빠져 나갔다. 여자가 목소리를 바꾸며 말했다.
"난 여기서 한잔하고....저녁에 나갈 거니까, 아저씨는 염려 푹 놓고 있다가
먼저 가도 돼. 여관으로."
"나도 급할 거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 여긴 왜 왔어요?"
이 여자는 몇 살쯤 되었을까. 서른이 넘으면 여자의 나이는 헤아리기가
어려워진다. 서른 살과 서른다섯의 여자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모르듯이, 그는
서른다섯의 여자와 서른아홉의 여자가 또 어떻게 다른지를 몰랐다.
"사람을 만나러...."
"누구? 애인? 애인이 이런 섬까지 도망을 왔으면 찾을 생각말고 아예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걸. 여자가 여기까지 올 때는 혼자 오지는 않으니까."
섬으로 찾아올 때 여자는 혼자 오지는 않는 건가. 혼자인 여자는 그렇다면
어디로 가나. 강가인가. 아니면 산속인가. 자기 손으로 소주 한 잔을 따라
단숨에 들이켜고 난 여자가 또 무언가가 깨어지는 듯한 웃음을 웃었다. 그
눈가에 지는 주름이 여자의 나이를 느끼게 했다. 낡아빠진 것 같은 나이를.
여자가 말했다.
"이 섬까지 엄마를 찾아오지는 않았을 거 아냐. 엄마라고 여자가 아닌가 뭐.
도망을 와도 누구랑 함께 왔겠지."
잠이 깨었을 때 형민은 캄캄하게 어두운 천장을 쳐다보고 누워 있었다.
술기운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빗소리가 들렸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형민은
생각했다. 겨울비가 내리나. 빗소리에 잠이 깬 것일까, 아니면 잠이 깨어
빗소리를 듣게 된 것일까.
겨울 빗소리는 마치 무엇인가를 더듬는 소리 같았다. 어둠 속에서 무엇을
찾기 위해 누군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같았다. 이따금 창틀 어딘가에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그렇게 마치 새벽 어둠 속에서 길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겨울 빗소리가 새벽에 길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 같다니. 형민은 침대에서
뛰듯이 내려왔다. 머리를 흔들며 형민은 어두운 방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빗소리에 잠이 깬 것이 아니라, 잠이 깨었기에 빗소리를 듣게 되었을 거다.
형민은 그런 생각에 스스로 덧없어하면서 욕실로 갔다.
세면대 앞에 서서 형민은 찬물로 몇 번 얼굴을 닦았다.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형민은 거울 속을 바라보았다. 낯선 얼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누구인가. 형민은 물 묻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이 깊이 들어가고 두
볼이 꺼진 듯이 메말라 있는 얼굴,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형민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자네는 몹시 말랐군. 아 그래. 난 그걸 말하려고 했던 건 아냐. 그냥 자네
모습이 왜 이렇게 낯설게 보이냐는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마른 자네의
모습에게, 자넨 참 늙었군 그래,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네. 자넨 살아 보지도
않고 늙었어.
거울 속의 사내가 말했다. 아냐. 난 살았어. 누구처럼 많은 것을 살지는
못했겠지. 그러나, 나는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살지 않았나. 사랑을 말일세.
사랑을 살다니. 그건 사는 게 아니라네. 사랑은 하는 거라네.
산다는 거랑, 한다는 거랑은 그럼 어떻게 다르다는 거지?
형민은 수염이 조금씩 자라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했었지. 산다는 건 뭔가를 쓰는 거고, 한다는 건 뭔가를 만드는 거란다.
침대로 돌아와 형민은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가만히 몸을 꼬부리고 옆으로
누웠다. 문 앞에 켜놓은 불빛이 희미하게 방안으로 들어와 거울 속에 누워 있는
내 모습을 비춰 주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누워 있는
자세입니다. 거울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알고 있겠지. 밖에는 비가 와. 겨울비야. 어쩌면 좋지. 나는 그냥 여기까지
와서, 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면 죽어도 좋으리라 생각하며 여기까지 왔었어.
죽는다는 게 뭘까. 아무 두려움도 없는 곳으로 떠나는 것, 그런 것일까. 그
곳이 어디인지, 얼마나 멀며 어떤 곳인지를 우리는 모르니까,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는지도 몰라. 이상하지. 그 곳은 분명히 있어. 다만 우리가 모를 뿐이지.
사람들은 죽어서 그렇게 우리들 곁을 떠나고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말하니까. 그러나....우리는 그 곳을 몰라. 한 번 그 곳으로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그 곳이 죽음인거겠지. 당신이 간 그 곳.
어제 어떻게 이 여관까지 왔던가를 형민은 떠올렸다. 그녀와 어디서
헤어졌더라. 여기까지 온 기억이 토막토막 끊어져서 이어지지가 않았다.
이 섬에 온 여자를 찾아왔다면 그냥 가는 게 좋아. 여긴 그런데야. 여자는
그런 말을 했었다. 그러나 그건 술이 취하지 전에 한 말이었다.
그녀는 갈매기가 끼룩거리는 창 밖을 내다보다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었다.
"여긴 마지막이야. 더 갈 데가 없어. 섬이란 그런 데야. 뱃길이 끝나는 데가
섬이야. 여기까지 온 여자가 이제 어디로 가겠어. 그런 여잔 더 갈 데가 없어.
더 갈 데도 없는 여자를 찾아서 무엇에 쓰겠어."
"써요?"
"그럼.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여자. 버릴 일밖에 남지 않은 여자는 여기
그냥 내버려두라는 얘기야."
우도는 섬이다. 형민은 취기 속에서 소리 없이 그렇게 중얼거려 보았었다.
우도는 섬이란다. 그럼 섬이고 말고.
"섬까지 온 여자는 마지막까지 온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녀가 조금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무엇인가가 불타듯이
번득이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자면 얼마나 많은 데를 거쳐서 오는 줄 알아? 그만두자. 네가 뭘
알겠어, 젊은 사람이."
"아가씨도 젊은데요."
"고맙네. 그런 말도 하실줄 아시고. 하긴 처음부터 그래 보였어. 그래서 내가
배에서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한 거니까."
"어디를 거쳐서 옵니까, 여자가 여길 오자면?"
"서울 가자면 대구 대전 수원을 거쳐야지....그냥 가는 게 아니잖아."
"비행기를 타면 되잖아요."
"비행기?"
그렇게 묻고 나서 그녀가 웃기 시작했다. 몸을 흔들며 그녀가 웃었기 때문에,
형민은 옆에 손님이 없는 게 다행이다 생각될 정도였다. 겨우 웃음을 그친
그녀가 핸드백을 열어 손수건을 꺼냈다. 눈 밑을 닦아 내면서 그녀가 말했다.
"어찌나 웃었던지 눈물이 다 나네. 아, 재밌다."
형민은 무언가 막막한 심정이 되어 창 밖을 내다보았다.
"당신...아니 그냥 너라고 하지 뭐. 나 이제부터 당신한테 말 놓을게."
"지금도 놓고 있어요."
"너도 나한테 말 놓아도 돼."
형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너 조금 전에 뭐라고 했니. 비행기를 타고 가면 되지 않냐고 했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그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전에도 똑같은 말을 한 남자가 있었어. 날아가면 되지 않냐구.
그렇지만 말이지..."
형민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웃음은 언제 사라졌던가.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렇지만, 사람은 날개가 없어. 날개가 있어야 날아가는 거야."
이상스레 한 쪽 눈에서만 눈물이 넘쳐서 그녀의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물은 마치 흉터처럼 그녀의 짙게 화장한 얼굴에 줄을 만들며
그녀의 입꼬리로 흘러 들어갔다. 눈길을 돌리며 형민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형민이 다시 빈 잔에 가득 소주를 따랐다.
"그 남자가 어느 날 말했어. 나와 넌 더 갈 데가 없는 사람이라고, 섬 다음에
무엇이 있겠냐고."
더 갈 데가 없다고. 형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창가로 걸어가서 형민은
멀리 지붕 위로 바라보이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나는 무엇이었나 신애에게.
나도 말했었다. 더 갈 데가 없다고. 신애에게.
가슴속에서 갈매기 울음처럼 신애의 목소리가 날며 지나갔다. 아니란다. 그건
다른 거야. 넌 말했지. 우린 이제 더 갈 데가 없군요. 그렇게 말했을 뿐이야.
형민은 고개를 흔들며 가슴속에서 떠 다니는 신애의 말을 지웠다.
언제 울었던가 싶은 목소리로 여자가 말했다.
"회를 정말 안 먹는 거야? 이거 맛있는 거야, 배때기 살."
형민이 고개를 돌려 먼 바다를 내다보던 눈을 내리깔며 소리없이 말했다. 난
전생에 물고기였던 여자를 알아요.
늦가을 제비는 눈물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슬픔이 아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어떤 슬픔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이런 목소리를 하진 않았을까. 그런 생각들을
소꿉장난처럼 늘어놓고 지내던 어린 시절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내가
자라는 것과 함께 변해 갔다. 그 속에서 아버지는 변해 갔지만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결코 변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아버지가 없다는 크고
견고한 틀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내가 아주 어린 나이에 늙어 버린 건 아닌가
생각하곤 했다. 아버지와 함께 나는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은 ㅅ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게 나이란 없다. 그 또한 죽은 시간을 살기 때문이다. 아버지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아버지는 언제나 사람들이 쯧쯧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있었다. 내가 중학교를 처음 들어가게 되었을 때도 사람들은 말했다. 쯧쯧쯧
혀를 차면서, 네 애비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허이구 무심한 인사. 이렇게 자식 크는 것도 못 보고 뭐가 급해서 그렇게
가기는 빨리 가.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때마다 고모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가만히 나를 돌아보는 그 고모의
눈을 나는 늘 흰 보자기처럼 느꼈었다. 위에서부터 나를 둘러씌우는. 고모는
그렇게 아주 커다란 날개거나 크고 희디흰 보자기였다.
그것을 사랑이었다고 알게 된 것은 아주 훗날의 일이었다. 내가 젊은이가
되었을 때, 나는 이따금 고모가 내 곁에 있어서 그 희디흰 보자기로 나를
둘러씌워 주기를 바랐던 때가 있었다. 주위의 모든 것에서부터 나를 떼어 내어
싣고 날아가는 아주 커다란 날개, 하늘을 날아가는 융단처럼 말이다. 그 융단에
나를 태워 줄 고모가 이제는 없다는 것을 느꼈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혼자임을
알았다.
고모의 방에 걸려 있던 사진틀, 그 흑백 사진들 속에는 스무명쯤의 사람들이
살았다. 저마다의 나이로 저마다의 옷을 입고, 혹은 웃거나 혹은 표정을 한 채
그들은 완전 무장을 한 군 인으로 혹은 토담집 마루를 등지고 우두커니 서서
혹은 어깨를 끌어안은 모습으로 사진관 의자에 앉아서 살았다. 해가 지나도
그들은 나이를 먹지 않았고 한 번 화난 사람은 늘 그렇게 화를 내면서 살아
있었다.
그 사람들을 기억할 때마다 나는 비로소 살아 있는 아버지를 느낀다. 그
마을에서만은, 이제는 중풍을 맞고 쓰러져 있는 오촌 당숙이라 며느리를 내쫓고
그 나이에 아직도 부엌에서 설거지 그릇을 놓지 못하고 있다는 왕고모 할머니나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284고지에서 철모에 풀을 꽂은 채
서 있는 오촌 당숙이나 마찬가지로, 친척의 혼례에 갔다가 차일을 친마당
가에서 몸을 움츠리며 배시시 웃고 있는 왕고모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또한 그 젊은 나이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다른 그 누구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살아 있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 죽은 자들의 마을, 흑백 사진 속의 마을에서 아버지는 시인이었다.
아버지는 사진 속에서 흰 모자를 쓰고 고개를 약간 기울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흰 모자와 긴 얼굴에 고개를 약간 기울인 그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그 눈이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어딘가 달랐다. 그는 아주 허약해 보였고, 그 사람이
서 있을 마을은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았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이 그 사진
속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그네처럼 바라보였다.
"느이 아버지는 시인이었단다."
고모가 처음으로 내개 그런 말을 해준 것이 내가 중학교를 들어가던 해였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나는 그때 고모가 말하는 그 시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지
못했다.
"시인이 뭔데요?"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쓰는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그때 나는 구체적으로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건 왜 써요?"
"제 애비 같은 소릴 하는구나. 왜 그걸 쓰는지도 모르면서 쓰고 있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란다."
"그래서 아버지는 시를 썼어요?"
"써서는 찢어 버리고, 써서는 찢어 버리고."
아버지는 더욱더 추상적으로 되어 갔다.
"찢어 버릴 걸 왜 써요?"
"그래서 내가 물었단다. 바로 너처럼. 찢어 버릴 걸 왜 쓰냐고."
"그래서요?"
"그랬더니 그 인사가 이러는 거야, 네 애비라는 사람이. 살 수 없으니까
쓰지요. 원 무슨 소린지."
시인이라는 건 믿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인가 보다. 나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 나라면 그냥 살겠다. 쓰긴 뭐하러 쓰냐. 가고 싶은 곳
있으면 가면서 살고, 이쁜 여자 만나면 내 각시 만들며 살고."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 차라리 고모는 시인 같았다.
사진 속에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나는 떠올렸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를 않아요. 나는 마음속으로 가만히 그렇게 부르짖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어디를 보고 있는데 아버지만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아요. 언제나 내
뒤편이나 내 옆을 보고 있어요.
"시인이란 말이다."
고모가 말했다.
"돈을 벌지 않는 사람이란다. 느이 아버지는 한평생 돈을 벌지 않았단다."
나는 그때 깔깔깔 웃었던 것 같다.
"왜 웃니?"
"우습잖아요."
"뭐가?"
돈을 벌지 않는 직업도 있는 것일까. 직업이긴 하지만 돈을 벌지 않는 직업.
그것을 가지고 시인이라고 하는 건가. 편리하기도 하여라.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돈을 벌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요?"
"그러니까 시인이지."
"엄마가 그럼 돈을 벌었어요?"
이번에는 고모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니, 네 엄마라는 여자는 더 시인이었지. 그 여잔 물만 먹고도 살 그런
여자였단다."
물만 먹고도 살 여자. 그것이 고모의 입을 통해 흘러 나온 어머니였다.
물고기. 강물을 오가며 사는 물고기. 땅 위에 사는 것들은 물만 먹고 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물고기였을까. 그래서 결국 물로 돌아간 것일까.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에서 선녀는 아이를 둘씩 낳았지만 결국 그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고 하늘로 날아간다.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어머니는 물고기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내게 가르친 사람은 그렇게 고모였다.
잘못 뭍으로 오라왔던 물고기였는지도 모를 어머니.
그 말은 얼마나 오랫동안 내 컴컴한 의식의 지하를 가로질러 가는 한 줄기의
햇빛처럼 선명하게 내게 각인되어 있었던가.
훗날 신애를 만났을 때 나는 그녀에게 말했었다. 당신은 물만 먹고도 살 그런
사람 같아요.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사람. 물만 먹고도 살수 있는 여자, 그 두 사람은
부부로 만나 살았다. 한 아이를 두었고, 한 사람씩 죽어 갔다.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시인이 먼저 죽었다. 그리고 물만 먹고도 살 수 있는 여자는
아이를 데리고 여기저기 떠돌았다. 세상에는 물만 먹고 살아도 되는 여자는
있었지만 물만 먹고 살아도 되는 어머니는 없었다. 물만 먹고 살아도 되는
여자는 그래서 물 속으로 갔다. 흰 고무신 한 켤레를 가지런히 벗어 놓고
그녀는 물에 빠져 죽었다. 흉흉한 소문이 그녀의 뒤에 남았다. 연기처럼,
그것은 꿈틀거리는 욕정과 끊임없이 마을 밖으로 뛰쳐 나가려는 영혼과 절망
속에 스스로를 내던지듯 뒤엉킨 육신이 만들어 내는 연기였다.
바람난 여자는 마을에서 문둥이와 같다. 문둥이 앞을 지나갈 때면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치마폭으로 감싸며 돌려 세우고 그들을 보지 못하게 했다. 바람난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여자가 문밖을 지나갈 때면 문을 닫게 했고, 그녀를
보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저주받은 여인이었으며, 버림받은 여인이었다.
스스로를 저주하고 스스로를 버린.
그녀는 문둥이처럼 마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동구 밖의 삶을 살아야
했다. 문둥이, 남의 집 문간에 쭈그리고 서서 그 집 여자들이 고개를 돌리면서
내주는 찬밥을 얻으러 이 집 저 집 마을을 돌아 다니는 것이 그들의 하루였다.
그리고 동구 밖으로 나와 그들은 불을 피웠고 찬밥을 끓여서 먹었다. 마을
밖에서 연기가 피어 오를 때면 사람들은 중얼거렸다.
"문둥이가 또 불을 피웠구먼. 애들아 너희들 밖에 나가지 말아. 문둥이는
애들 간을 빼먹기 위해 저러고 있는 거란다."
"왜 간을 빼먹어요?"
"그래야 사니까. 그래야 문둥병이 나으니까."
이상하다. 왜 바람난 여자가 남자와 놀아난 것을 두고 여자들은 같은 말을
했을까. 그 년이 남자 간을 빼먹었지. 왜 그렇게 말했을까.
문둥이와 바람난 여자는 마을 밖에서 살아야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하나 다른 것이 있었다. 문둥이는 이제부터 간을 빼먹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었고 바람난 여자는 이미 간을 빼먹은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남겨 놓고 한 켤레의 고무신을 들고 소년이 들판을 향해 섰을 때
그때는 가을이었다. 가을도 늦은 가을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제비들을 보았다.
잎 떨어진 앙상한 대추나무에, 전선줄에, 뒤곁에 빨랫줄에 앉아 있던 제비들.
떠날 준비를 하며 흩뿌려진 씨알처럼 그렇게 날아올랐다가는 다시 내려와 앉곤
하던 가을 제비들.
제비를 보았다. 나는 아직도 그렇게 아름다운 새를 알지 못한다. 늦가을
제비는 눈물이다.
내게 처음으로 눈물을 가르친 새들, 늦가을의 제비. 그래서 나는 아직도
제비를 보면 그것이 새가 아니라 어떤 목소리처럼 느껴진다. 참 많은 제비들이
그렇게 앉아 있던 그 가을 때문에 나는 이제 한 여름에도 제비를 보면 모든
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리는 환각에 빠진다. 누렇게 익어 가는 밀보리가
넘실거리는 들판이 한순간에 까아맣게 타들어 가고, 줄지어 선 앙상한 전신주와
그 사이에 악보처럼 앉아 있는 제비들로 그 자리가 환치된다.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슬픔이 아니다. 아버지를 아는
사람에게만이 아버지에 대한 슬픔이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다르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내게 때로는 분노가 되었다가 때로는 소리 없는 한숨이
되기도 하고, 그렇게하여 마지막에는 슬픔이 된다. 상실감...이라고 훗날 내가
이름붙인 그 슬픔 속에서 어머니는 있다. 앞치마를 두른 모습으로 언제나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머리를 빗으면서 그렇게 있다.
"몸을 씻거라."
제삿날 저녁이면 고모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커다란 함지에 더운물을
끓여 놓고 나를 그 곳에 들어가게 했다. 목욕탕이 없는 산골 마을에서 살
때였다.
몸을 씻고 들어서는 나를 기다리며 고모는 언제나 새 옷을 준비하고 앉아
있었다. 그때쯤이면 부엌에서는 밥에 뜸이 들고 있었다.
"이거 입어야 해요?"
"그럼"
고모는 내게 흰 두루마기를 내밀었다.
"이거 고모가 만든 거지요?"
"그래, 해마다 키가 달라지니 손을 안 볼수가 없구나."
제삿날 저녁 한복을 입으면서 나는 아마 조금씩 또 그렇게 늙어 갔으리라.
다른 아이들이 이불을 차며 잠을 들었을 시간에, 그 한밤에 나는 두루마기를
입어야 하는 아이였다.
"그래. 어디 잘 맞나 보자. 크는 아이라 나중에 기장을 늘일 수 있도록
했다만 소매가 문제로구나."
고모는 내게 두루마기를 입히고 나서 옷고름을 매어 주며 말했다.
"이건 내년까지는 입겠구나."
두루마기 차림의 나를 눈이 부신 듯이 올려다보면서 고모는 눈밑을 닦아
냈다.
"옷을 보면 사람이 크는 걸 알겠는데, 왜 이렇게도 세월이 느린가 모르겠다."
나는 입술을 꾸욱 다물고 서 있어야 한다.
"야속한 사람들."
물만 먹고도 살 여자와 시인을 두고 고모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지만, 그런 고모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고모가
학교에서 가지고 온 흰 종이를 꺼내 주면 나는 제상 위에 그것을 깔았고,
그리고 말했다.
"홍동백서, 좌포우헤...맞지요, 고모?"
"예에는 네 가지가 있단다. 그래서 사례라고 하지. 관혼상제가 그거야."
내가 놓은 제물을 다시 옮겨 놓으면서 고모는 말했다.
"원래는 관례라는 게 있었단다. 결혼하기 전에 이제 어른이 되었다는
성인례로서 지켜지던 것이지. 남자는 스무 살에 관례하고 여자는 열다섯 살에
계례라는 것을 행했단다. 그래야만 비로소 성이이 되는 거지."
고모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이제는 옛날 얘기지. 관례법이 없어진 지 오래
됐으니...그러니 이제는 세상에는 어른이 없는 거나 같지. 관례도 없이 어떻게
어른이 되겠니."
타오르는 촛불을 나는 바라보았다.
"남녀가 만나 시집장가드는 게 그 다음의 혼례라는 거야. 혼례에서 지켜야 할
것은 동성동본은 혼인을 금하고, 재물을 논하지 않는 거란다."
"동성 동본이 뭔데요."
"한 형제지. 동성, 성이 같고. 동본, 본이 같은 남녀는 혼인을 하지 않는
법이야. 따져 올라가면 다 한 핏줄 한 형제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상례인데,
그건 사람이 인간 세상을 마치는 일이니, 죽으면 지내는 장례인데..그거야 넌
아직 몰라도 된다. 원래 발상을 할 때는 자손이 모여 앉아 곡을 하고 망인을
거두어서 머리를 남쪽으로 가게하여 모시는 거였다만 요즘에야 어디 그거나마
지켜지더냐."
"아이...그만해요 고모."
"왜?"
"무섭잖아요."
"무서워? 이 녀석아. 나 죽으면 네가 성복해야 할 텐데 무서워?"
"성복이 뭔데요?"
"상주가 되어서 상복을 입는 걸 성복이라고 하지. 네 녀석 길러 봤자 내가
제삿밥 얻어 먹으러 오기는 다 글른 거 같구나. 머리 검은 짐승은 자고로
공덕을 모르는 법이니까."
"머리 검은 짐승이 뭔데요?"
"아, 사람하고 까마귀지 뭐야."
내가 히히히 하고 웃었다. 고모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내 죽어서 가만 있을 줄 아니. 네 녀석 뒤를 졸졸 따라다닐 거다."
"숨어야지."
"숨긴 어디 가서 숨어. 제삿밥만 얻어 먹으러 올까. 어림없지. 이사를 가도
내가 이삿짐보다 먼저 가 있을 텐테."
"그러면 고모가 귀신이에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날의 고모를 떠올릴 때면 나는 그때 고모가 정말로
현세를 믿고 있었을까 하는 느낌이 들곤 했다. 내세가 아니라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말이다.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 이후의 제삿날까지를 고모는
마치 공기알 놀리듯 손바닥에서 놀리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죽음이 그 이후에 다가올 일들을 그처럼 현실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면, 차라리 그때 고모의 안에서 부정되고 있었던 것은 내세가 아니라
오히려 현세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칼에 베이면 피가 흐르고, 작은 가시가 들어도 쑤시고 아픈 이 땅 위에서의
나날이 고모에게서는 마치 만지면 소리도 없이 부스러지는 불타 버린 종이의
재처럼 그렇게 피를 흘리지도 아프지도 않게 흘러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귀신이 어디 따로 있다더냐. 죽으면 다 귀신이지."
"고모."
"왜?"
"그럼 고모도 이 다음에 귀신이 돼 ?"
"나만 된다든?"
"그럼..."
"너도 되지."
내가 귀신이 된다니.
"너도 되고 나도 되고...다 죽으면 귀신이 되지."
귀신이 된 고모와 귀신이 된 내가 또 어딘가를 거닐고 있었다. 귀신이 된
고모가 따악따악 칠판을 치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귀신이 된 내가 멸치 국물이
흘러 냄새가 나는 도시락을 책가방에 집어 넣고 있었다. 두 귀신이 생선도 사러
가고, 메뚜기를 잡으러 가을 논둑길을 걷고, 제삿날을 맞으면 먹을 갈아 지방도
쓰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난 안 죽을 거야 고모. 난 귀신은 안 될 거야 고모.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귀신이 되면 그런 건 안 해도 돼. 귀신은 제사를 차리는 게 아니라 제사를
얻어 먹으러 다니지."
"아 참 싫다."
"뭐가."
"그런 얘기만 하는 고모가. 고모는 지금 죽지도 않았는데 귀신 같아요."
"으흐흐."
갑자기 고모가 이상스런 목소리를 내면서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귀신 흉내를
내었기 때문에 나는 키야악 소리를 지르면서 방구석으로 달아났다. 촛불이
펄럭거렸다.
정색을 한 고모가 말했다.
"자 이제 제사 모시자꾸나."
어머니는 머리를 빗었다. 내 안에서 어머니는 지금도 머리를 빗고 있다. 곧고
희디희게, 마치 쪼개졌던 무엇인가가 합쳐진 자국처럼 그렇게 앞가리마를 타고
어머니는 머리를 빗었다. 검고 긴 머리를.
머리를 빗고 있는 어머니는 내 옆에 있는 어머니였다.
몇 살에 내가 외가로 갔는지...내 기억에는 없다. 그 곳에서 국민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으니까 아마 그 이전의 어느 때였으리라는 막연함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와 함께 나와 외가와의 인연은
끊어졌다. 줄이 끊어진 연이 너울거리며 언덕 저편으로 사라지듯이 그렇게 나와
외가와는 멀어져 갔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줄을 타고 솟아올라 있던 연이
한순간 힘없이 꼬리를 감으며 푸슬푸슬 무너져 내리다가 밤나무 언덕 저편으로
사라져 가듯이 그렇게 나와 외가와는 문을 닫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였다.
어머니는 머리를 빗었다.
장마철을 넘기는 일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그때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그렇다. 6월이 기울어 가면서 첫 장마가 오고 7월로 접어들며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내 안에서는 곰팡이가 자라고, 나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징그러워지는 스스로를 본다. 그리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머리를 빗고 있는
어머니. 희디희게 앞가리마를 타서 머리를 빗고 있는 어머니.
후두둑거리며 빗발이 툇마루를 때리고 있었다. 뒤꼍 장독대 옆으로 심어진
검붉은 맨드라미는 비에 젖어 꽃대가 꺾일 듯 그 닭 벼슬 같은 꽃잎을
내려뜨렸고, 흙물이 좔좔거리며 마당 가를 흘러내렸다. 한차례 비가 퍼붓고
나면 마당 가의 사과나무에서는 몇 개씩 풋사과가 떨어져 있었다. 소들은
어두컴컴한 외양간에서 천천히 여물을 씹었고 외할아버지는 마루로 올라오는
닭들을 ㅉ으며 중얼거렸다.
"어허 이런 미물들이 있나."
논물을 보러 나갔던 외삼촌이 비에 쫄딱 젖은 몸으로 들어서며 내뱉는 소리도
들렸다.
"이러다가 무슨 절단이 나겠네."
"그래 어떻드냐?"
"밑에 논에는 물이 차서, 벼가 다 넘어가게 생겼는데요."
뒷동네에서 산사태가 났다는 소리도 들려 왔다. 집이 다 넘어 가고 돼지마저
떠내렸갔다는 이야기였다. 흐린 하늘에 검푸른 구름이 휘몰리며 잠시잠시 비가
그치면 마을 사람들은 긴 막대기에 낫이며 쇠스랑을 매달아서 강가로 나갔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물건을 건지기 위해서였다.
장마가 한창인 그 어두컴컴한 방에서 어머니는 거울을 문가에 기대어 놓고
머리를 빗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말하곤 했다.
"삼촌이랑 물 구경 가도 돼?"
"강엘 나가려고?"
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무슨 구경이라고 하니."
"삼촌은 간다는데..."
"빨래도 안 마르는데 옷만 적셔 들이면 어떻게 하니."
"지금은 비 안 오잖아. 가도 되지?"
"삼촌 뒤에 서 있어라. 앞에 서면 안 된다."
어머니가 말하지 않아도 그랬었다. 장마철의 강물은 마치 나를 낚아패
가기라도 할 듯 으르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늘 삼촌들 뒤에서 고개를
빼고 강물을 내려다보았었다.
"꼭 네 아버지 같구나."
나는 왜 물 구경을 가겠다는 내가 아버지와 닮아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 사람이 늘 그러더니. 맑은 날은 해가 엉덩일 비춰야 일어나는 사람이 비
오는 날이면 부지런을 떨지. 남들은 비 온다고 다들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그
사람은 비만 오면 옷 떨쳐 입고 집을 나서지."
어머니는 그런 말을 하면서 희미하게 웃었었다.
둥둥둥둥, 마치 먼 어딘가에서 들려 오는 북소리처럼 그렇게 소리를 내면서
강물은 흘러갔다. 그것은 땅 속에서 들려 오는 소리 같았다. 검고 누런
흙탕물이 넘실거리는 강물은 이제는 어제까지의 그 강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포의 덩어리 같았다. 우리들이 멱을 감으며 옷을 벗어 놓던 강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마을 어른들이 개를 잡아 먹던 자리도, 삼을 내다
찌던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강물은 몹시 화가 난 듯이 그렇게 북소리를 울리며
넘실거렸다.
그런 날이면, 외숙모는 감자를 갈아서 전을 부쳤다. 솥뚜껑을 뒤집어 노호
거기에 기름을 발라서 부쳐 내는 감자전이었다. 기름 냄새가 어둡고 습기 찬
집안에 퍼져 나갔다.
"비 오는 날은 왜 이렇나 몰라. 입이 궁금해서..."
그런 말을 하면서 외숙모는 전을 부쳤고 나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기름이 튈 때마다 키들키들 웃어 가면서 무쇠 솥뚜껑 위에서 구어져 가는 전을
신기해하며 바라보곤 했었다.
파를 썰어 넣은 간장 종지와 함께 외숙모가 부친 전을 들고 들어오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혼자말을 했었다.
"무슨 여자가 근심이 없담. 먹을 거만 있으면 근심이 없담."
"뭐가 엄마?"
"하늘에 별만큼이나 사람도 크고 작고....가지가지라는 소리다."
머리칼 한 올도 흐트러짐이 없이 깎아 놓은 듯 머리를 빗고 앉아 있는 어머니
옆에서 나는 외숙모가 부친 감자전을 먹었다.
"우리 새끼도 이 다음에 각시 얻으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근심 없는
각시 얻거라."
"그게 뭔데?"
"비 오면 전 부치는 각시지. 무슨 걱정."
논물을 보러 나가거나 밭을 돌아보는 일을 빼고 나면 장마를 맞고 있는
집안은 커다란 바위와 같았다. 소리 없이 그렇게 아침을 맞았고 저녁을
기다렸다.
그 속에서 어머니는 머리를 빗었다. 문가에 마주앉아 거울을 세워 놓고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밤에 잠이 깨었을 때 나는 내 옆에 없는 어머니를
보았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무엇을 끌고
다니듯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방안을 더듬거려 보았지만 어머니는 없었다.
가마니짝을 끌고 다니는 것 같은 밤비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조금씩조금씩
흐느끼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울면서 다시 잠이
들었다.
비 오는 날이면 그렇게 잠이 깨었고 나는 눈을 감은 채 손으로 옆자리의
어머니를 더듬었다. 언제나 비어 있는 자리가 어둠 속에서 만져진다. 빈손을
오므려 가슴으로 가져오며 나는 배를 깔고 엎드린다. 그러면 덜 슬펐다. 옆으로
눕거나 바로 눕는 것보다 배를 깔고 엎드리면 조금은 외로움이 가셔졌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그렇게 비어 있는 자리가 어둠 속에서 만져진다. 빈손을
오므려 가슴으로 가져오며 나는 배를 깔고 엎드린다. 그러면 덜 슬펐다. 옆으로
눕거나 바로 눕는 것보다 배를 깔고 엎드리면 조금은 외로움이 가셔졌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그렇게 비어 있는 어머니의 잠자리를 확인하면서 오히려
마음을 놓았다. 가슴을 깔고 엎드리면서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옆자리의
어머니가 없다는 것은 이제 안심해도 좋은 일이 되어 있었다. 지금 어머니가
없다는 것은 이제 안심해도 좋은 일이 되어 있었다. 지금 어머니가 없으니까
내일도 아무 일없이 하루가 갈 거다. 안심하거라 안심하거라. 아침이 와서 눈을
뜨면 어머니는 옆에 있을 것이니까.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는 부엌에서 들어서며
내 이불을 벗긴다. 그 눈가에 웃음이 가득하다. 어머니는 내 엉덩이를 철썩
때리며 말한다.
"에이그. 이게 언제 크나."
그런 날이면 어머니의 목을 끌어안으며 나는 눈을 감고 중얼거려도 되었다.
"엄마. 나 오줌 쌀 뻔했어."
장마가 계속되던 어느날 나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여전히 어머니는 없었다.
나는 베개를 깔고 엎드린 채 어둠에 뒤섞여 들려 오는 빗소리를 들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발소리를 죽이며 걸어가고 있는 거 같은 그 소리. 불 꺼진
집안에서는 이따금 마루 위 천장을 기며 찍찍거리는 쥐들의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그때 가만가만 문이 열렸다. 어머니였다.
툇마루로 올라선 어머니는 마치 어떻게 하면 문이 열리는지를 알아 보려는
사람처럼 흔들 듯이 조금씩조금씩 문을 열었다. 비에 젖은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몸을 구부리고 그 커다란 어둠의 덩어리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는 수건을 찾아 젖은 머리를 닦았고 천천히 옷을 벗었다. 어둠에 익은
내 눈앞에 어머니의 모습은 그림자처럼 떠올라 있었다. 발가벗은 어머니가 젖은
옷을 뒤뜰 쪽으로 난 마루 위에 내놓기 위해 문을 열었다. 그때 번개가 치고
지나갔다. 내 쪽을 향해 등을 돌린 채 방문을 열고 있던 어머니의 발가벗은
뒷모습이 아주 짧은 순간 어둠 속에 찍혔다가 사라졌다.
문을 닫고 돌아선 어머니가 그렇게 발가벗은 채로 더듬거리듯 장롱을 뒤져
속옷을 찾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으면서 혼자 약속 하고 있었다. 내일부터는
문을 잠그리라. 어머니가 나가고 나면 문을 잠그리라.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비 내리는 새벽은 무서웠고 그 새벽에 물이 흐르게 젖어서 돌아온 어머니는
더 무서웠다. 마치 어머니는 홍수가 나서 넘실거리던 그 강물, 부서진 집채가
떠내려가고 죽은 돼지가 떠내려가던 그 강을 건너서 돌아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옷가지를 찾아 든 어머니가 내 옆에 앉으며 마른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
냈다. 희미하게 모습이 드러나는 어머니의 조그만 젖가슴을 올려다보면서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가며 가만히 불렀다.
"엄마"
잠시 미동도 없이 어머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움직이던 손도, 흔들리던
젖가슴도 그녀의 숨결도 다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잠시 후 어머니는 아주 낮은
소리로, 내가 불렀을 때보다도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깨어 있었니?"
나는 베개 위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깨났니?"
"엄마 들어오는 것도 봤어."
어머니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엄마 어디 갔었어?"
"그래."
"어딜?"
"그냥..."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간 후에야 나는 그때 어머니의 말, 그냥...이라는 말을
이해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냥...이라는 이 말보다 더 사랑을 깊이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 사랑이란, 그냥...인 것이다. 사랑이라는 그 설레임에
그냥...이라는 말 이외의 그 무엇이 놓여질 수 있으랴.
어머니는 아무 말없이 나를 향해 몸을 숙였다. 그러곤 나를 껴안으며 자리에
누웠다.
"왜 깨났니. 자거라."
맨가슴에 나를 안으며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어깨로 흘러내린 어머니의
젖은 머리칼이 내 이마에 닿아 섬득하게 차가웠다. 비에 젖어서일까. 젖가슴도
차가웠다. 차갑고도 부드러운 젖가슴이 내 얼굴을 눌러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자거라. 자거라."
그녀가 내 등을 쓸어 내렸다. 비에 젖어서일까. 어머니의 맨살에서는
이상스레 비린내 같은 것이 났다. 나는 꼼지락거리며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다짐하고 있었다. 문을 잠글 거다. 엄마가 나가고 나면 문을 잠글 거다.
나는 잠이 들었다.
비가 개고 나자 한여름이었다. 강물은 다시 맑아졌고 귀가 멍해지는 더위가
이어졌다.
매미가 목이 쉬게 울어대던 날이었다. 윗마을의 면장네 집 며느리를 세운
여자들이 들이닥쳤을 때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서있었다. 다만 그렇게 서
있었다. 집 안에는 남자들이 아무도 없었다. 할아버지도 삼촌도.
외숙모가 내 등덜미를 잡아 끌 듯이 사랑방으로 내몰았다.
"이 찢어 죽일 년."
면장네 며느리는 미친 사람 같았다.
"이년아 어디 보자. 무슨 여우 x x를 찼길래 남의 사내를 홀려 내나 나도 좀
보자."
그녀는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아 끌며 소리쳤다.
"이년이 겁도 없이 어딜 나돌아다니며 가달을 짝짝 버렸겠다."
저고리 앞섶이 튿어진 채 어머니는 그렇게 질질 끌려갔다. 치마가 걷어
올려져 허옇게 넓적다리가 드러난 어머니가 뒷마당으로 내동댕이쳐졌을 때 나는
방문을 열고 뛰쳐나가며 면장 집 며느리의 팔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아이구, 이번에는 새끼가 사람 문다아아."
그녀의 팔을 물고 늘어진 내 눈두덩에서 무언가 불똥 같은 것이 번쩍했다.
그녀의 주먹이 내 얼굴을 후리쳤던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왔다. 강물은 더 맑아졌고 벼들은 머리를 숙이며 익어 갔다.
그 가을날 어머니가 남긴 고무신만이 먼저 명주소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풀려 들어가게 깊은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명주소는 강
아래쪽에 있었다. 그 곳은 우리 또래 아이들은 절대 가면 안 되는 곳이었고,
깎아 지른 듯 드높은 바위 밑으로 언제나 검푸른 물살이 휘몰리는 곳이었다.
어머니는 거기서 몸을 던졌던 것이다.
배를 띄우고 마을 사람들은 어머니를 찾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발견된 것은
명주소에서가 아니었다. 물길이 흘러 내려가는 아랫 마을에서였다. 떠오른
어머니의 시체가 어떠했는지를 나는 모른다.
더엉더엉 징 소리가 울리고, 무당이 흔들어대는 요령 소리와 함께 어머니의
혼백이 갈 길을 갈라 주는 굿이 그 명주소 바위위에서 있던 날 나는 집에 갇혀
있어야 했다. 비만 오지 말거라. 비가 오면 어머니는 나가니까...비만 오지
말거라. 텅 빈 집을 지키며 나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눈이 부셔서 얼굴을
찡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손을 내저으면 푸른 물이 들 것만 같은 짙푸른
하늘에는 비행기운이 몽실거리며 길게 두 줄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마당 가에서는 익은 사과가 하나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커다란 나나니벌
하나가 잉잉거리며 날고 있는 서까래 밑에는 거미줄이 가득했다. 마당 가를
내다보며 앉은 채 볼을 타고 뜨거운 것이 흐러내려 찝찔하게 입가로
스며들었다. 나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아 가며 그 눈물을 삼켰다. 마당이
뿌옇게 흐려져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는 머리를 빗고 있을 거라고 그때
나는 생각했다. 어디선가에서 머리를 빗고 있을 어머니. 하얗게 앞가리마를
타고 옻칠처럼 검게 빛나는 머리칼을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게 빗고 있을
어머니.
고모가 나를 데리러 온 건 다음해 봄이었다.
저 먼 세상 그는 가고, 여기 홀로 나만 남아
내 기억의 창고에는 언제나 새로운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떤 세월의
힘에도 색깔이 변하지 않았고 그 모습도 줄어들지 않았다. 꺼내어 먼지를 털어
내지 않아도 좋았고, 제기를 닦듯이 때가 오면 빛을 내듯이 닦아 주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은 언제나 은빛으로 반짝이면서 선명하다. 내 첫 바다였다.
그리고 바다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많은 것을, 포기하라고 포기하라고
말해 준 바다도 있었다. 다시 일어나, 다시 시작해 하고 속삭인 것도 바다였다.
돌아오렴, 언제든 돌아와서 내 곁에 있으렴. 그렇게 말없이 약속해 주던 바다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의 말을 믿었다.
어느 날 나는 바다가 이제는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철썩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안에서도 바다는, 하오의 햇살 속에서 은빛으로
부서지다가 저녁이 되면 진홍빛으로 물들면서 스러져 갔다. 그렇게 저물어 가는
그 황혼의 바다는 내안에서도 어둠을 맞았고 허옇게 파도를 부셔 가면서 밤을
살았다.
고모는 그때 바닷가에 살고 있었다.
풍금을 켜고 붓 글씨를 잘 쓰는 고모가 아니라 다만 나를 데리러 온 고모를
따라서 나는 외할아버지 댁을 떠났다. 그것은 이별이 아니었다. 내쫓기는
것이었다.
이제는 어떻게도 더 살아갈 수가 없는 그 마을에서, 물에 빠져 죽은 바람난
년의 새끼로서 속절없이 살아가고 있던 나를 데리러 온 고모를 따라 버스에
올랐고, 노란 똥물이 올라올 때까지 토하고 또 토하는 차멀미를 하면서도
이것밖에 길이 없다는 것 하나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렇게 고모를
따라갔다.
산과 강을 끼고 살아왔던 내가 처음 만난 바다는 그렇게 먼 길을 떠나온 긴
여행의 끝에 놓여 있었다. 저게 바다란다. 너 바다 처음 보지? 고모가 버스
안에서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바다에 대해 그때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므로 아무것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갑자기 차창을 메우며 바다는 그렇게 다가왔다.
그것이 바다였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하늘과 닿아 있는 수평선만이
끝에서 끝까지 내 시야의 왼쪽과 오른쪽을 이어주고 있을 뿐 그 사이의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 그 곳이 바다였다.
"고모, 너무 넓어요."
"뭐가?"
"바다요,"
"얘 좀 봐. 얘가 말을 다 하네."
중얼거리면서 잠시 고모는 나를 바라보았다.
"너도 말을 할 줄 알았니? 난 네가 벙어린 줄 알았다."
그때 내가 웃었을 것이다. 고모 앞에서 처음으로 웃었던 웃음.
거기 바다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 바다는 나에게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없는 것이었다. 가없이 이어진 물의 벌판은 나에게 어떤 절대로서,
그리고 허무로서 다가왔을 뿐이었다. 다른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는 곳,
그것이 바다였다.
그러나 내가 처음 만난 바다는 물이 아니었다. 그것을 나는 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 망망함 때문에 숨이 막혔고, 그 앞에서 나는 점점
작아져서 아주 조그맣게 졸아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첫 바다는 은빛이었다.
그때 바다 위에는 비낀 하오의 햇살이 내리고 있었고 그 빛은 아무런 바다의
색깔도 나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다만 그것은 은빛의 벌판이었다. 발을 내딛을
수 없는.
모든 첫 체험이 그렇듯이 그것은 현실이기보다는 몽환에 가까웠다.
거기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 고기를 잡고 해초를 딴다는 사실을 내가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으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길을 나는 고모와 함께 걸었다. 오후였다. 바다에
내리는 햇살이 물결에 부딪혀 수면은 잘게 잘제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빛나고
있었다. 은빛이었다. 멀리 고깃배 하나가 잃어버린 물건처럼 떠서 포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고모가 나를 데리러 와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모는 마른 풀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으면서 말했다.
"이제 다 왔으니, 얘야 좀 쉬었다 가자."
나는 고모 옆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잘디잔 은빛의 조각들이 가득
부서지고 있는 물결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어머니를 잊을 수 있을까 어떨까 잠깐
생각했었다.
"너 나 생각나니?"
나느 고개를 저었다.
"하긴, 네가 외가로 간 뒤에는 한 번도 만나질 못했으니."
나는 고모가 치마 저고리가 아닌 양장을 하고 있다는 게 낯설었다. 그러나
그녀를 따라 나설 때 나는 그 옷차림이 나를 아주 낯선 곳으로 데려가기에
얼마나 알맞은가 생각했었다.
"고모는 학교 선생을 해."
나는 말없이 들었다.
"너 알고 있었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너랑 나랑 둘이 사는 거야."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거기서도 혼자였으니까.
아무도 나와 놀아 주지 않았으니까.
고모가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바다를 내다보다가 내 손을 내려다보다가,
그라다가 고모는 주름치마 위에 내 손을 놓으면서 말했다.
"사내 녀석이라고 그래도 손은 크구나."
나는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금방이겠지. 애들 크는 거야 금방이니까. 금방 클 거다. 그럼 되는 거야.
남자는 크면 되는 거야."
잠시 후 고모가 물었다.
"너 엄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왜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됐다."
무엇이 되었다는 것인지 고모는 똑같은 말을 몇 번 되풀이했다. 됐어, 그러면
된 거지. 그리고 고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외할아버지 댁 대청 마루에 놓이던 어머니의 하얀 고무신 두 짝을
떠올렸다. 처음 어머니의 투신을 보고 달려간 마을 사람이 가져온 것이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시체가 떠오르질 않네요."
그들은 그렇게 말했었다.
"가게! 다들 내 집에서 나가게. 난 그런 딸, 둔 일이 없네."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난 무책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불행하게도 내 어머니에게 가해진 무책임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물었다.
"고모는 식구가 몇이에요?"
"식구?"
"네. 아이들이 몇이에요? 난 몇 사람이랑 같이 살아요?"
"우리 둘뿐이야."
그렇게 말하고 나서 고모는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게 걱정인 모양이구나. 누구랑 사나 하고 말이다. 괜찮아. 고모는 아무도
없어. 아이들도 없고, 아저씨도 없고...아무도 없어."
"정말이요?"
"그래, 고모는 아이들이 없어."
"왜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너하고 살려고 그랬나 보지."
그렇다면 고모도 고아인가. 나처럼 고아인가.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고모에게
말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만히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사실은, 저 알아요."
"뭘?"
"엄마 돌아가신 거. 물에 빠져 죽은 것도 다 알아요."
"그랬구나."
고모가 가느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부터 난 혼자라고 그랬어요. 고아래요. 난 아무도 없대요."
"누가 그러든?"
"윤식이 형이요. 윤식이 형이 그랬어요. 난 고아라고요. 고아는 아무도 없이
혼자 사는 아이라고 그렇게 가르쳐 줬어요."
"윤식이 형이 누군데?"
"일하는 아저씨요. 외할아버지 댁에서..."
"그 머슴 녀석 말이로구나. 무슨 할 일이 없어서 그런 소리를 애들 데리고
앉아 하고 있담. 그 놈도 참 쓸개 빠진 녀석이네."
고모는 조금 화난 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 목소리가 아주 빨랐다. 무언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뭔가 많이 잘못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윤식이 형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나한테 팽이도 깎아 주고, 연도 만들어
주고 그랬어요. 그 형은 꿩을 참 잘 잡아요. 나랑 같이 꿩약 놓으러도 다니고
그랬어요."
어머니는 이제 나의 것, 나만의 것이 되었구나 하고 나는 그때 생각했었다.
이제 어머니는 누구에게도 없다. 나에게만 남아 있다. 다들 어머니를 버렸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나는 슬프지 않았다. 비로소 어머니는 나의 것이
되었으니까. 어머니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그것은 차라리
남들에게 남아 있는 어머니를 할 수만 있다면 전부 거두어들이는 일일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 그 누구에게도 어머니가 남아 있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어린 마음으로 남들과 내가 무엇이 다른가를 조금씩
깨우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어머니가 살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조금씩조금씩 그렇게 해서 끝내는 말끔히 사라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였다.
어머니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차라리
남들에게 남아 있는 어머니, 그들이 버리지 못하고 있는 어머니를 , 할 수만
있다면 전부 거두어들이는 일일 것 같았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어머니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먹기 위해서 깎아 버린
과일의 껍질이었다. 잔치가 끝난 다음날의 뒷설거지 같은 것이었다. 아니면
서릿발이 돋는 한겨울인데도 아직 논한가운데 헐벗은 옷을 걸치고 서 있는
허수아비였다. 이제 새들도 그에게 속지 않았다. 건드리면 푸스스 내려앉을 재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남아 있는 어머니는 달랐다. 어머니는 싱싱하게 살아서 물이
오르고 잎을 틔워 가지 않았던가. 어머니는 얼어붙었던 내 지층을 뚫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가 이제부터 어떻게 커갈 것인지, 그가 무엇으로 자라나서
내게 그늘을 만들고 바람에 나부낄지는 그때부터의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가 내 안에서 자라나기 위해서라도 나는 남들에게 남아
있는 어머니를 거두어들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 그
누구에게서도 어머니가 남아 있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나는 알고 있었을까. 그렇게 해서 내게 무엇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인가.
어머니가 이제 나의 것으로, 나만의 것으로 돌아왔다고 해도 그것은 또 다른
상실감 이외의 그 무엇이었을까. 생성과 소멸이 언제나 손등과
손바닥처럼....하나이듯이.
이제 어머니는 밤에 집을 나가지 않아도 되고, 어딘가를 혼자 헤매지 않아도
되고, 비에 젖지 않아도 되고.....머리를 빗으며, 다만 머리를 빗으며 하얀
앞가리마를 빛내며 내 안에 앉아 있으면 된다고 해도, 그것조차 어쩌면
나에게서도 어머니가 떠나가는 한 과정은 아니었을까.
고모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구, 진달래가 폈구나."
그렇게 말하며 고모는 언덕으로 달려 올라갔다. 나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바닷바람에 펄럭이는 고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발가벗었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거기에 겹쳐졌다.
언덕을 내려온 고모는 손에 꽃을 꺾어 들고 있었다. 진달래 한송이를 따 입
안에 넣으며 고모가 말했다.
"너도 먹을래?"
"꽃을 먹어요?"
"그럼"
고모는 나에게 처음으로 꽃을 먹는 법을 가르친 사람이었다.
섬으로 찾아가면서도 그랬다. 나는 이제 혼자가 되었다고. 그렇지만 다른
한편 생각해 보면, 나는 언제나 혼자는 아니었던가 싶었다. 고모와 함께 보낸
소년 시절이 끝났을 때 내게서도 평화는 끝이 났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돌아보며 중얼거린다. 고모와의 생활이 내게 처음 가르친
것은,...평화였다고...평화라는 것.
저녁 무렵 학교에서 돌아오는 고모를 기다리면서 나는 바닷가를 걸었고,
그때마다 이런 것을 평화라고 하는가 보다 생각했었다.
저물어 가는 바다 위로 고깃배가 떠나가고, 바람이 없는 날 방파제에서는
파도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물 같은 것, 평화가 내게 처음으로 가르친 말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훗날 나는 얼마나 많이 그런 평화를 그리워했던가. 내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면, 나는 그 저녁 무렵의 바다를 떠올렸었다.
바다는 내게 처음에 평화였고, 그리고 그 후에도 그랬다. 그러나 바다는
평화만은 아니었다. 그것이 무서운 공포며 절대며, 그리고 삶의 터전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가.
그렇지만 시간이란 또 무엇이었던가. 그것을 나는 그때 두 가지로 이해하곤
했다. 하나는 자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멸해 가는 것이었다. 그랬다.
시간은 많은 것을 자라게 했다. 작은 것을 크게, 여린 것을 단단하게, 아직
떫고 풋풋한 것을 달고 무르익게 만드는 것...내게 그것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또한 많은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미 늙어 있는
노인을 더욱 늙게 하고, 그래서 어느 날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그
보이지 않는 힘을 나는 시간으로 이해했었다.
그러나 어찌 그것뿐이었을까. 어느 날 아침 말없이 서 있던 나무에게서 툭
하는 소리를 내며 열매를 떨어뜨리는 것도 시간이었다. 누렇게 넘실거리는
논밭에서 곡식들을 거두어들이고 나면 이제 겨울을 나야 할 들판은 흙을
드러내며 버려진 땅처럼 언제나 그렇게 묵묵했다. 그 위에 무서리가 내리고
어느날 깊고 깊게 눈이 쌓였다. 그것 또한 시간이었다. 그 곳에 무엇이 살아
있었다고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하는 그 사라짐을 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코를 흘리던 아이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고 어느 날 검정 제복을 입은
중학생이 되었을 때, 그 코홀리개 아이도, 연필통을 달가닥거리며 집으로
뛰어가던 아이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이 그들을 어디론가 데려가
버렸을 것이다. 그들의 어제를 싣고 가는 수레도 또한 시간이었다.
아름다움이라든가 슬픔이라든가 기다림까지도 나는 그렇게 시간 안에서
이해하려고 했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 매일매일의 변화를 내 안에서
길들일 수 있었으랴.
시간은 그렇게 해서 나에게, 모든 사물은 변하는 것이라는 작은 깨달음을
심어 주기 시작했었다. 영원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그 후 아주 먼 훗날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때 나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뜻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자라나는 것과 사라져 가는 것은 생성이며 소멸이었지만, 그러나 그것 또한
말의 속임수 이외에 무엇이었던가. 무엇인가가 새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그것에
있던 것들이 소멸해 가는 과정이 있게 마련이었다. 마찬가지로 무엇인가가
사라질 때 거기에는 다만 페허만이 남지는 않았다. 이 땅에서, 내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모든 것들은 자신이 떠나가는 그 자리에 무엇인가를 심어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시간 안에서 혼자인 것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들은 그 무엇도 혼자는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 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하나만으로 살아가는 것, 결코 혼자인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마침내 더불어 서로서로가 된다는 믿음을 말이다.
내가 이름붙인 평화란 그런 것이었다. 피 흘려 싸우며 하나가 남고 하나가
멸망해 가는 게 아니라, 떠나가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을 위한 자리를 언제나
마련하고 있다는 그 덧없는 흐름, 나에게 있어 평화란 그런 말이었다.
그때는 봄날이었다. 봄날의 오후였다.
그때 고모와 내가 얻어 살고 있던 집은 고모가 나가던 학교 바로 뒤에
있었다. 일요일이었을까.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되니까 아마 토요일이 아니라면
일요일이었을 게다.
고모는 마루에 앉아, 햇살이 가득하게 쌓이고 있는 마루에 앉아 다 마른
빨래를 개고 있었다. 방안에 앉아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마루 쪽에서
들려 오는 나지막한 고모의 노랫소리를 나는 들었다.
"저 먼 세상 그는 가고, 여기 홀로 나만 남아..."
나는 놀라며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고모가 집에서 노래를 하는 걸 나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므로 고모는 노래를 가르치기도
했을 테고 물론 풍금을 켤 줄도 알았다. 그때 그 학교에는 어디서 났는지
아코디언이 있어서 나는 고모가 그것을 켜는 것도 본 적이 있었다. 그런
고모였지만 집에서 노래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 세상에 비 내리면 그 세상은 꽃이 필까."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는 고모의 목소리도 목소리였지만 그 노래의 곡조나
가사가 섬뜩하게 내 가슴에 와 닿았다.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꽃이 피면 님을 위해 피거늘, 이 세상에 새 울면 님을 위해
울거늘, 누가 있어 꽃을 꺾고 누가 있어 새를 보리."
나는 가만히 문을 열고 마루로 나섰다. 소리 없이 나는 마루 끝에 나앉아
댓돌 쪽으로 발을 늘어뜨린 채 앉아서 고모의 노래를 들었다. 그 노래는 내가
어디에서도 들은 적이 없는 그런 노래였다.
마른 빨래들을 손바닥으로 펴 개어 놓는 고모의 무릎 위에도 햇살이
가득했다. 고모는 마루로 나오는 나를 한 번 올려다보았을 뿐이었다.
이 세상에 비 내리면 그 세상은 꽃이 필까. 이 세상에 꽃이 피면 그 세상은
눈 내릴까. 누굴 위해 꽃은 피고 누굴 위해 새는 우나. 고모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멀리 마당 저편을 내다보고 있었다. 밭 언저리에 피어 있는 복사꽃이
아지랑이 속으로 바라보였다.
"고모"
"왜?"
"그게, 누구 노래예요? 처음 듣는 건데."
고모가 희미하게 웃었다. 소리도 없이, 얼굴을 들지도 않으면서.
고모가 말했다.
"내 노래지."
나는 놀라며 고모를 바라보았다. 빨래를 손바닥으로 타악타악 두드리면서
고모는 마당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그 노래...고모가 지었어요?"
고모가 대답은 없이 또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데 고모, 그 노래 좀...슬퍼요."
고모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누구를 위한 노래예요?"
"누구는. 인석아 고모는 뭐 좋아했던 사람도 없었을 거 같니."
"그럼, 그 사람이 먼저 돌아가셨어요?"
대답 없이 고모는 다시 빨래를 개기 시작했다. 고모의 입에서 조금 전보다는
더 가늘고 낮게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 세상에 비가 오면 그 세상에 꽃이 필까. 저 먼 세상 그는 가고, 여기 홀로
나만 남아...누굴 위해 꽃을 꺾고, 누가 있어 새를 보랴.
고모가 노래를 그치고 말했다.
"그럼. 고모도 좋은 총각이 있었단다."
지금도 봄날이 오면,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언덕 저편을 떠돌고 있는 오후면
나는 고모의 모습과 함께 그 노래를 떠올린다. 그 희미했던 웃음도, 살아 남은
사람의 마음에 그렇게 남아서, 먼저 간 사람의 뜻은 이어지는 것이로구나 하고
나에게 처음으로 가르쳤던 그 고모의 희미한 웃음.
넌 이제 나를 떠나야 해
잠을 깨운 건, 전화 벨 소리였다. 형민은 눈을 감은 채 더듬거리며
송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아, 있었구나. 나야 나."
그 여자였다.
"아직 자고 있었어?"
잠이 덜 깬 형민의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져서 새어 나왔다.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냐구? 잘 주무셨나 해서 문안 인사 올리옵나이다."
라이터를 찾아 형민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소식 좀 전해드리려고 전화올렸는데요..."
"무슨"
여자가 물었다.
"거기 지금 창문에 커튼 쳤어?"
그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에는 두텁게 커튼이 내려져 있었고 그 틈새를
비집고 빛이 새어 들고 있었다.
"왜요?"
"밖이 보이냐구?"
"아니요."
"그래? 그럼 창문 좀 열어 봐."
"무슨 일인데요?"
눈.밖에 눈이 온다니. 그럴 리가. 형민은 머리를 흔들며 때묻은 듯 칫칫한
커튼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목소리가 송수화기 속에서 밝게 울렸다.
"하여튼 나와. 아직 잤나 본데.... 하여튼 기다릴 테니까."
"거기가 어딘데요?"
"여관 골목을 나오면 큰길에 바로 다방이 있어. 거기 있으니까 나와요."
"나, 이 전화 소리 때문에 깼는데...."
"더 자려구?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 할 거 아냐.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해.
나오기만 하면 되니까. 눈이 온단 말야."
여자가 전화를 끊을 것만 같아서 형민이 빠르게 말했다.
"잠깐만요. 잠깐."
"뭔데?"
"그런데...이름이 뭡니까?"
"나? 이 남자 봐. 어제 그렇게 잔뜩 불러 놓고서도 이제 와서 날 보고 이름이
뭐냐네."
"내 이름이지 누군 누구야. 너 술 마시면 안 되겠다....정말."
그랬던가. 술이 취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던가. 그러나 형민은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나, 유희야. 정유희."
전화를 끊었다. 침대를 내려온 형민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조금 열어
보았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진눈깨비였다. 아주 빠르게 눈발은 빗살처럼
허공을 그으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어지럽게 내린 눈발은 땅에 떨어지며
바로 녹아 버리고 없었다.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형민이 물었다.
"실례지만....유희 씨는 뭘 하고 사세요?"
"왜, 궁금해?"
"묻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거 아녜요."
이곳으로 나오기 전에, 여관에서 목욕을 하면서도 그는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녀는 무엇을 하는 여자일까. 그리고 입맛이 없어 하며 해장국물을 뜨고 있는
자신의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다가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찻잔을 들면서 유희가 말했다.
"달린 거 없는 여자니까 염려 마. 새끼니 남편이니 그런 거 없으니까.
정처없이 온 남자 하나, 밥 사주고 술 사줄 돈도 있고 차 마셔 줄 시간도
있으니까. 그럼 됐어?"
"좋은 여자네요. 그런데 하나 틀렸어요. 나 정처없이 여기까지 온 거
아닙니다."
"알아."
"뭘 아세요?"
"정처없이 오지 않았다는 거. 그냥 그렇게 말했을 뿐이야. 이섬에 처음
왔다는 얘기였어."
뒤쪽에서 누군가가 똑같은 말을 했다.
"알기는 뭘 알아."
"알지요. 제가 왜 몰라요."
"알쥐는 털 없는 쥐가 알쥐야."
뒷자리에서 다방 여급과 손님이 그렇게 시간을 허물고 있었다.
"섬 여자들이 그게 쎄다면서."
탁하고 손바닥이 무엇인가를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그. 또 그런 소리. 김 사장님 입도 세탁기에 좀 돌려야 한다니까."
"바닷가 여자들이 좀 헤프기는 하지만, 헤픈 거하고 쎈 거하고는 다른 거
아닌가. 안 그래?"
"세다 보니까 헤퍼질 수밖에 없는 거지요. 뭘 몰라도 한참 모르시네."
"가만있어 봐, 언니. 쎄다는 말은 남자보고 쓰는 말 아냐? 여자 보고 누가
쎄다고 하나...."
"그럼, 여자보고는 뭐라고 그래."
"밝힌다고 그러지."
"어쩐지. 예가 이래 봬도 대학 중퇴라구요. 지방 대학이래서 그렇지."
여자. 처녀. 여자의 성기는 신하에서 모든 것의 재생을 의미했다. 새롭게
태어남을 상징했다. 그와 달리 남자의 그것은 창조였다.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것을 읽으며 보냈던 그때를 형민은 떠올렸다. 책을 놓고
바라보면 정신 병동 뒤편의 숲에서는 바람이 불 때마다 떡갈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지곤 했다. 그때는 가을이었다. 늦가을.
식어 가고 있는 찻잔 속의 커피를 형민은 내려다보았다. 다방에 앉아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저 남자야말로 무얼 하는 사람일까. 이 섬에서.
갈매기가 창 밖을 날아갔다.
"야, 박양아. 그런데 너 언제 줄 거야."
"뭘요?"
"뭐긴 임마. 그거. 죽으면 썩어질 걸 가지고 왜들 그렇게 비싸게 구나 몰라.
그렇다고 그게 닳기를 해, 망가지를 해. 물 좋을 때 인심이나 팍팍 쓰고 가지.
살보시라는 말도 못 들어 봤냐."
"메뚜기도 한철이래요."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이다."
"맨입에."
"야, 아무려면 내가 날로 먹자고 하겠냐."
여자가 웃는 소리가 들렸고 남자도 따라 웃었다. 그들은 눈으로 무언가 말을
했으리라.
"말씀만 하세요. 언제든, 열쇠로 잠근 것도 아니고 은행에 넣어 놓은 것도
아니고, 그게 뭐 힘든 거라구요. 벌리고만 있으면 된다면서요?"
"히야, 사람 미치네 이거. 너 이러다가 나 병 나면 어떡할려구 그래."
슬리퍼를 짜악짜악 끌면서 여자가 다가가며 말했다.
"김 사장님이 병 나실 일이 있음 세상 사람 버얼써 다 죽었겠다."
고대 사회에서는 남자의 정액을 보다 순수한, 피의 정수라고 이해했었다.
보다 순수한 피는 심장으로부터 혈관으로 흘러 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정제된
남녀의 생식기 안에 고여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해서 여자는 그 정액을 피에
의해 증류하고 응고시켜서 아이를 만들었다. 그것이 성교였다.
그때 생각했었지. 성이란 흔히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서로 얼마쯤 뒤섞여 있는 것인가. 섹스 없는 사랑. 사랑 없는
섹스.
"나가지."
형민이 유희를 건너다보면서 말했다.
"왜 재미있는데."
말없이 앉아 있는 사이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유희도 듣고 있었나
보았다. 형민이 일어섰다. 차값을 내러 가며 흘깃 바라본 남자는 머리가 많이
벗겨져 있었다. 앞에 앉아 있던 두 여자 가운데 한 여자가 말했다.
"박양아 차값 받아."
형민이 밖으로 나오면서 유희를 돌아보았다.
"저 여자가 맨입에는 못 먹는 지방 대학 중퇴생인가 봐."
유희가 표정없는 얼굴로 말했다.
"못 됐어."
눈길을 걷는 그들의 머리 위로 끼룩거리며 갈매기가 날았다. 눈 내리는 흐린
하늘은 갈매기의 빛깔과 너무나 닮아 있어서, 갈매기가 날아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주 커다란 눈 덩이처럼 보일 것 같았다.
"난 어제 어떻게 여관에 갔는지도 모르겠어요. 많이 마신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술 취하면 아무것도 해주지 말아야겠구나. 내가 여관까지 데려다 준 것도
모르다니."
"그랬어요?"
그는 조금 부끄러워서, 그 취중에 자신이 했을 짓들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에 잠이 깨었는데 다른 생각은 나지 않는데, 그 사람 이야기는 잊혀지지가
않았어요. 술은 신의 눈물이라면서 울곤 했다던 남자 이야기요, 두 분이 서로
사랑했다는 것도 알겠던데 말예요."
"별거 아냐. 그 사람은 이제 죽은 사람이니까 내가 좀 좋게만, 이쁘게만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그럴 수도 있으리라. 나도 안다. 한 사람이 죽으면 그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어떻게 이어져 가는지를, 그것을 나는 안다.
햇살이 가득하게 쌓이고 있는 마루에 앉아 다 마른 빨래를 개고 있던 고모가
부르던 노래는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그런 것이 아닐까. 저 먼 세상 그는
가고, 여기 홀로 나만 남아... 이 세상에 비 내리면 그 세상은 꽃이 필까.
누군가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던 그 노래. 이 세상에 꽃이 피면 님을 위해
피거늘, 이 세상에 새 울면 님을 위해 울거늘. 누가 있어 꽃을 꺾고 누가 있어
새를 보리.
마른 빨래들을 손바닥으로 펴 개어 놓는 고모의 무릎 위에도 햇살이
가득했었지. 복사꽃 아지랑이 속으로 바라보이던 밭이랑.
고모 노래 그런데 좀...슬퍼요. 그때 나는 그렇게 말했으리라. 그리고 고모는
그 입가의 희미한 웃음처럼, 난 뭐 좋아했던 사람도 없었을 거 같니 하고
말했었어. 먼저 간 사람의 뜻은 살아 남은 사람의 마음에 저렇게 이어지는
것이로구나 생각하게 했던 고모의 그 희미한 웃음.
"또 물어서 미안한데 정말 뭘 하고 사세요?"
유희가 손바닥을 내밀어 눈발을 받으면서 말했다.
"다 그렇잖아. 몸 하나로 살긴 남자도 마찬가지지. 여자도 몸뚱이 하나, 그거
가지고 살긴 마찬가지란 말이야. 그렇게 아직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겠지. 어딜
가든 몸을 팔면 돼. 일에 팔고 돈에 팔고 정에 팔고...팔 데는 많아."
눈발이 차츰 가늘어졌다. 바닷바람에 묻혀 오던 눈발이 멎으면서 그만큼
하늘이 조금씩 개어 왔다. 유희가 물었다.
"이 섬에는 왜 온 거야?"
"누굴 찾아왔다고 했잖아요."
"누군데? 뭐하는 사람?"
형민이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
"정유희 씨. 이제 눈도 그쳤는데 이쯤에서 돌아가죠."
"그래?"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가 몸을 돌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가야 할 데가 있어요."
여자가 앞서 걸어가면서 물었다.
"어딘데?"
"나도 모르겠어요. 거기가 어딘지. 이 섬이라는 것만 알거든요. 들머리가
어느쪽이에요?"
여자가 손으로 그들의 뒤편을 가리켰다.
"거길 가려고 온 거야?"
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희의 목소리가 바닷바람 소리에 섞이면서
들려왔다.
"거기 사람이 아무도 안 사는 데야. 알고 있어?"
그때는 봄이었다고...형민은 진눈깨비가 녹으며 질척거리는 길바닥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고등 학교 교실에 나타난 여자 선생님. 그녀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녀의 묘지. 거기에도 눈이 내렸을까. 그래서 이 겨우내
쌓여 있을까. 바닷바람에 얼고 또 녹으리라. 지난 몇 번의 겨울을 그렇게
났듯이 묘지에는 그렇게 눈이 쌓이리라.
몇 송이 눈발이 그의 이마에 선득선득 와 닿았다간 녹아 내렸다.
젊음. 혹은 청춘. 이상하다. 그 나날에는 왜 그렇게도 죽음이 가까이에 와
있는 것인지. 죽음을 어떤 것의 끝으로 이해할 때 그 죽음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시기이건만, 그러나 젊은 날에 느끼는 죽음은 그토록
달콤하기까지 하다.
혼자 떠났던 여행 길에서였다. 남해의 어느 여관 방에 나는 누워 있었다.
벽에는 그것이 모란인지 작약인지 알 수 없는 꽃 그림이 걸려 있었고, 구석에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한문이 씌어진 두 쪽 가리개가 놓여 있었다. 그 방에서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누워서 나는 포구를 오가는 뱃소리를 들었다. 아무데도
돌아갈 곳이 없었고, 무엇을 먹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게, 나는 그때 굶고
있었고 가지고 있는 것은 병째 마시다가 휴지를 구겨서 주둥이를 막아 놓은 반
병의 소주뿐이었다.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벽을 바라보며, 그 벽지의
무늬가 일렁거린다고 느끼며 나는 아무도 모르게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새벽 차를 타러 나가는지 옆방에서
문소리가 들렸고 저벅거리며 발소리가 들렸다. 저 소리가 어쩌면 내가 살아서
듣는 마지막 사람의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왜 그토록
죽음을 달콤하게 느꼈던가.
누군가에게는 스치고 지나가는 짧디짧은 시간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길고 긴 나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은 지금 청춘 그
속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청춘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청춘이라든가 젊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찾아 헤맨다든가
떠 다니는 시간을 갖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내게 있어 청춘은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부끄러움이었다고.
실패한 것이었기에 부끄럽다고. 그러나 그것은 청춘에 대답은 아니다.
자랑스럽고, 그리고 이룩했다면...그것이 나의 청춘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청춘이 한결같이 부끄러움으로 가득 차고 실패한
나날이어야만 하는 것일까.
청춘에는 이것이 청춘이구나 하고 느낄 여유도 시간도 없다. 다만 살 뿐이다.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청춘이라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그
세대라고. 다만 다들 말한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찾아 나서는 때가
그때가 청춘이라고. 탐색 혹은 모색이라고.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인생론이라고 말하여지는 그 무엇도 나는 읽지 않았다. 인생은 읽는 것도
아니려니와 말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다만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찻집에서 인생은...하고 말을 꺼내고, 술잔을 들면서
인생은...하고 중얼거렸다. 기뻐하고 한탄했다. 그들은 향하여 고개를 젓고
있는 내 젊은 날이 보인다. 아니다. 그것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다만 살면
되는 것이라고.
오늘은 가지 않을 거야. 이제까지 기다려 온 일이잖아. 여관벽에 걸려 있는
달력을 바라보면서 형민이 중얼거렸다. 내가 여기 와 있다는 걸 당신도 알
거야. 그럼 된 거야. 솔직히 말할까. 이제 와서 당신을 만난다는 게 왜 이렇게
두려운지 모르겠어.
신애가 말했다. 이제 떠나려고 하기 때문이야. 힘들어 하지마. 그냥 편하게
생각해. 넌 이제 나를 떠나야 해.
형민은 마음 속의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은 맞았다. 떠나려
한다는 말. 그러나 그것은 신애를 떠나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제 그가
앞에 놓고 있는 것은 자신의 젊은 날, 아니 자신의 자라 온 시간들을 떠나려는
일이었다.
넌 학교에서 파충류도 안 배웠니?
아이 녀석 좀 봐.
내 성장기에는 하나의 매듭처럼 고모의 그런 말이 있다.
"얘 좀 봐. 벌써 키가 이렇게 컸네. 이거 봐라. 이젠 이 옷이 작아서 입질
못하겠구나. 그렇게 길던 바지가 이렇게 덩그렇게 올라다가니."
고모가 그런 말을 할 때는 절기가 바뀌어 새로 옷을 꺼내 입어야 할 때였다.
봄이 와서 지난해 입었던 옷을 꺼내 내게 입혀 보면서 그때마다 고모는 말하곤
했다.
"애들 크는 건 정말 금방이네. 어느새 이게 못 입게 됐으니."
고모는 거의 모든 내 옷을 손수 만들어 입혔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커버려서
이제는 못 입게 된 옷 때문에 늘 고모에게 미안했다.
"미안해요 고모. 크지 말 걸 그랬나 봐."
"무슨 소리니. 어서 커야지. 고모는 그냥 네 목을 쑤욱 잡아 뽑아서라도 네가
어서 컸으면 좋겠다."
"그러면 입을 옷이 또 없을 텐데."
"없으면 만들면 되지."
언제였던가. 나와 함께 고구마밭을 매다가 잠시 밭둑에 나와 앉았을 때
고모는 불쑥 말했다.
"이 녀석 좀 봐. 팔에 알통이 다 생겼네."
학교 뒤편으로 있는 실습지라는 이름의 텃밭을 고모와 나는 가꾸고 있었다.
학생들이 가꾸고 남는 땅을 그렇게 선생님들이 나누어서 무언가 푸성귀나 고추
같은 것들을 기르고 있었는데, 그해 고모는 그 밭을 조금 빌어 고구마를
심었었다.
밭둑에 나와 앉은 고모는 그때 내 팔뚝이 많이 굵어진 게 눈에 띄었나
보았다. 나는 팔을 내밀었다가 꺾으면서 알통을 커다랗게 만들어 보였다.
"제법이구나."
"이건 보통이에요. 다른 애들도 다 이정도는 돼요."
"그래도 얘...어디 좀 만져 보자."
고모는 무슨 신기하고 놀랄 만한 것이라도 되는 듯이 내 팔뚝을 어루만졌다.
"얘, 아주 딱딱하구나."
"아령을 해서 더 딱딱하고 크게 만들어야 한다구요."
"징그러운 녀석."
"남자는 그래야 한다구요. 징그럽다니요."
"점점 하는 소리하며....네까짓 게 무슨 남자는 남자니."
고모가 내 등허리를 만지면서 어깨가 제법 널찍해졌다는 말을 들려준 것도 그
무렵이었다.
고모가 보여 준 그런 놀라움 가운데 하나로 내 수염이 있다. 어느 날 아침을
먹고 있는 내 옆에서 고모는 갑자기 소리치듯 말 했다.
"아니, 너."
나는 고모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거 수염 아니니."
"네?"
"아니...얘 좀 봐. 벌써...징그럽게. 너 그 얼굴에 난 게 수염 아니냐."
거무스름하게 코밑에 수염이 돋아 나기 시작한 것을 고모가 본 것은 내가 몇
살 때였을까.
어느 날 거울 앞에 섰을 때 나도 모르게 내 얼굴에 나 있는, 아니 뾰족하게
피부를 찌르고 올라와 있는 수염을 만났을 때의 당혹감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좋을까. 내가 수염이 나기 시작하다니! 하는 놀라움은 잠시 후 이상스런 허탈감
같은 것으로 변해 갔다. 거기에는 나도 어른이 되어가기 시작하는 것인가 하는
낯설음과 함께 결국 나도 수염을 깎으며 살아가야 하는 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기 시작했구나 하는 이상한 슬픔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왜
이것을 슬픔이나 낯설음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남과 같이 된다는 것은 전연 슬퍼할 일도 혼자 쓸쓸해할 일이 아닌데 말이다.
그렇지만 그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길을 찾아 가듯이 하루하루가 무엇인가
이름할 수 없는 나날들이었던 그때의 나에게 있어, 그 낯선 만남이란 어딘가
나를 지금의 자리에서 내쫓아 멀리멀리 혼자이게 하는 그런 것이 있었다.
"수염이 뭐 어때서요. 다른 애들도 벌써 얼마나 많이 나는데요."
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그렇겠지. 그럴 나이가 됐지."
무엇에 도장을 찍듯이 중얼거리던 고모가 갑자기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아이구 징그러워라. 저게 어느새 수염이 다 나고."
이 녀석 좀 봐, 하는 그 감탄사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 말 대신에 자리잡기 시작하는 말이 있다. 아버지와 나를 비교하는
말이었다.
"넌 참 어쩌면 그렇게 네 아버질 닮았니."
고모는 그런 말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때때로 고모는 탄식처럼 말하기도
했다.
"넌 참 오빠랑 판박이 같구나. 그대로 쏙 빼놓았어. 너만했을 때 오빠가 꼭
이랬단다."
이 녀석 좀 봐. 고모와 함께 살면서, 아니 자라면서 고모는 나에게 그런 말을
참 많이 했었다. 그러나 이 녀석 좀 봐 하면서 놀라던 그 많은 고모의 말
가운데 아직도 내 안에서 물소리처럼 살아 있는 그것은...욕탕에서의 그날이
아니었을까.
"이 녀석 좀 봐."
목욕을 시켜 주면서 고모는 마치 유리창이 깨지기라도 하듯 말했었다.
그 무렵 고모와 내가 살던 곳은 일제 시대의 지어진 학교 관사였다. 나이 든
교장 선생님은 가족을 데리고 와 살 수가 없는 형편이어서, 안채 쪽의 방
하나를 쓰면서 혼자 사셨다. 학교를 다니고 있는 자녀들을 전학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교장 선생님의 사모님이 토요일이면 반찬을 해
가지고 왔다가 일요일이면 하루 종일 빨래를 해 널고 돌아가곤 했다. 고모와
나, 우리는 그 학교 관사의 뒤채에 살았다.
일요일이면 관사 앞 뜰에 너울거리며 말라 가던 그 빨래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혼자 사는 나이 든 분에게 그렇게 많은 빨래 거리가 있었을 리
없는데도 어쩐 일인지 사모님은 오시기만 하면 뜰 하나 가득 빨래를 해
널으셨다.
오늘이 일요일이구나 하고 감격해 하는 일이 그렇게 해서 매주 이어졌다. 그
교장 선생님은 몇 개의 조롱을 만들어서 새를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일요일이면 이 조롱 속의 새들은 빨래에 에워 싸릴 수밖에 없었다. 하얀 문조를
내가 처음 본 것도 그 교장 선생님이 기르고 있는 새장에서였는데, 아주 잘
지저귀던 다른 새들의 재잘거림조차 일요일이라고 울지 않았을 리 없지만
어쩌면 그 뜰을 가득 메운 빨래들에는 새소리 같은 것을 멀리 밀어내는 힘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부지런하기도. 또 이불 호청을 뜯으셨네."
고모는 뜰을 내다보면서 혼자마러럼 그렇게 중얼거리곤 했었다.
"너도 이 다음에 저런 각시 얻거라."
피이. 나는 소리 없이 고모 몰래 입을 비죽거렸다.
"부지런한 여자하고 살면 두 가지 좋은 게 있지."
"그게 뭔데요."
"여자가 멋을 부리려면 그게 여간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이쁘게 얼굴 가꾸고 매일 새색시 같지."
"그런 여자 보고 사람들이 여우 떤다고 그러는데요."
"그거는 부러워서들 그러는 거야. 이쁜 여자가 제 여자래 봐라, 누가 이쁘게
꾸민 여자를 욕하니."
나는 후후후 하고 웃었다.
"그리고 부지런한 여자랑 살면 깨끗한 이부자리에서 잔단다."
나는 그 말이 까닭 없이 우스워서 이번엔는 헤헤헤 하고 웃었다. 깨끗한
이부자리에서 자는 거 하고 여자가 부지런한 거 하고 관계가 있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아마 그때 그런 말을 나에게 하고 있는 고모가 더
우스웠던 건 아니었을까.
"빨래 가운데 제일 힘들고 손 많이 가는 게 이불 빨래란다. 그 큰 걸 뜯어
빨아야지 풀먹여서 다듬이질해야지 꿰매야지, 그게 어디 보통 품이 들어가는
거래야 말이지. 그러니 웬만하게 부지런한 여자 아니어서는 늘 새물나게 상큼한
이부자리에서 잠을 자본다든."
어린 마음에도 그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나는 이불 빨래를 자주 하는 교장 선생님의 부인은 부지런한 여자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지런한 지는 몰라도 교장 선생님 부인은 아무리
보아도 이쁘지는 않았다.
부지런한 것가 이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고모가 말하는, 너도 이 다음에 부지런한 여자랑 살아라 하는 말이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어디 부지런한 여자하고 산다고 다 좋은 것만 있겠니, 귀찮은 것도
많겠지."
"왜요?"
"사람은 다 남이 자기 같기를 바라는 가거든. 그러니 부지런한 여자가
게으름피는 남자를 보면 어디 그냥 놓아두겠니. 달달 볶겠지."
달달 볶는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몰라도 나는 어렴풋이 뭔가
거기에도 불편함이 있으리라는 고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가령
깨끗이 손을 닦은 사람이 아직 닦지 않아 더러운 사람의 손을 잡기 싫듯이
말이다.
그런 말을 하다가 고모는 말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게으른 여자가 어떤 여잔지 아니? 씻기 귀찮다고 차를
마시면서 찻잔 받침을 하지 않는 여자란다. 이 다음에 너 크거든 아무리
게으르더라도 찻잔은 받혀서 마시는 여자랑 살아라."
"난 고모하고 살 건데 뭘."
"징그럽다, 내가 뭘 못해서 너랑 사니. 난 이따금 너 사는 데 가서 야단이나
치는 재미로 살란다. 이것도 살림이라고 하니!"
열어 놓은 창문 밖으로는 뜰에 널어 놓은 빨래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새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려 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고모를 바라보았다.
고모는 달 지난 잡지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고모는 어떤 여자예요? 부지런하고 멋쟁이예요?"
"멋을 아무나 낸다든?"
"왜요?"
"혼자 사는 여자가 멋을 내면, 돌아오는 건 욕바가지밖에 없단다."
그게 무슨 말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혼자 사는 여자는 종아리만 내놓아도 허벅지 내놓았다 소리를 듣고, 허벅지
본 사람은 뭐 봤다고 하는 게 세상이란다."
"뭘 봤다고 하다니요?"
"그런 말은 몰라도 된다."
그 학교 관사에서 살던 시절의 나날 속에는 뜨거운 김을 뭉게 뭉게 피어
올리던 목욕탕에 대한 즐거움이 있다. 그리고 그 목욕탕 안에서 듣곤 하던 말,
고모의 말, 이 녀석 좀 봐 하던 그 고모의 목소리가 남겨 준 즐거움들이 있다.
일본식으로 지어진,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 놓고 쓰던 목욕탕은 집 뒤편에
따로 떨어져 지어 있었다. 밖에서 불을 때게 되어 있었고 그렇게 해서 더ㅇ니
커다란 물통에는 나무로 만든 또 그만큼 커다란 나무 뚜껑이 덮여져 있었다.
물을 길어다 붓는 것은 고모였다. 나는 밖에서 불을 지폈고 욕탕을
들락거리면서 커다란 뚜껑이 덮여 있는 목욕통 안의 물이 데워지는가를 손을
담가 확인했다. 김이 오르기 시작하고 밖이 안 보이게 욕탕의 유리창에
수증기가 어린다. 물이 너무 덥지 않도록 아직 타고 있는 나뭇가지들을
정리하고 나서 나는 고모를 부른다.
"고모. 물 다 데웠어요."
갈아입을 옷을 들고 고모가 먼저 욕탕으로 들어갔다. 목욕통 안은 바닥이
뜨겁기 때문에 발을 데이지 않게 나무 깔개가 깔려 있었다.
목욕은 고모와 함께 했다. 우리는 욕통에 들어가서 오래 몸을 불렸다.
더운물에서 오래 견디지 못하는 나는 욕탕 안을 캘캘거리면서 들락날락했고,
고모는 땀을 흘려 가면서 물 밖으로 목을 내민 채 앉아 있곤 했다.
몸에 비누질을 해 닦고 나서 다시 욕탕 속으로 들어가면 그때부터 고모는
아주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때 부르는 노래는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봅처녀였다.
왜 욕탕 안에서 고모는 늘 그 노래를 불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언젠가는
한 번 물어 봐야지 하고 생각하는 사이 나는 어느새 고모와 함께 욕탕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커버렸던 것이다.
훗날 나는 물었었다.
"고모 요새도 목욕할 때면 봄처녀 불러요?"
무슨 소리냐는 듯 고모는 내 말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전에는 늘 목욕하면서 봄처녀만 불렀을라구. 요새는 영어 노래도 부르고
<고히비토>라는 일본 노래도 부른단다. 너 모르지? 가레 하찌루
유구레와...하는 그런 노래."
그렇구나. 고모와 나와의 사이에는 그렇게 시대의 흐름도 배어 있구나.
이것이 세월이라는 것이겠지. 고모가 <고히비토>라는 그 노래를 배웠다고 했을
때 나는 몇 살이었을까.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목욕탕은 좁았기 때문에 고모의
목소리는 공명이 되어서 봄처녀는 조금은 서러운 노래가 되곤 했다. 목욕탕
안에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가 어딘가 습기 낀, 마치 욕탕 안의 물기를 머금은
듯 그렇게 낮았기 때문이었다.
노래를 부르다가 가끔씩 고모는 말했다.
"그 목에 때도 밀고, 몸을 좀 박박 좀 닦아라."
그렇게 더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던 고모는 밖으로 나와 먼저 나를 앞에 앉혀
놓고 몸을 닦아 주었다. 온몸에 비누질을 하고 나서 고모가 껄끄러운 때밀이
천으로 몸을 닦아 나갈 때면 나는 간지러움에 몸을 꼬면서 목욕탕이 떠나가라
웃었다.
"이거 봐라. 창피하지도 않아. 때가 국수발 같지 않니."
그렇게 몸을 닦아 나가면서 고모는 말하곤 했다.
"이 녀석 봐. 몸이 제법 딴딴하네."
몸을 미는 것이 끝나서 마지막으로 비누질을 할 때쯤이면 고모는 내 고추에도
비누질을 했다.
"언제 커서 이 고추가 사람 구실을 하나. 귀엽기는."
그런 말을 중얼거리면서 고모는 내 고추를 만지작거렸다.
비누 거품을 내면서 그렇게 고모가 내 고추를 닦아 주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철썩 하면서 고모의 물 젖은 손이 내 엉덩이를 때렸다. 철썩철썩 때리면서
고모는 무엇이 우스운지 계속 웃어댔다. 내 고추는 고모를 향해 가느다랗게
뻗어 있었다.
"요게 어느 때라고 벌써 빳빳해지네."
고모가 내 몸에 물을 끼얹었다. 새삼스럽게 고모는 내 고추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 좀 봐. 어느새..."
비누 거품이 사라지고 난 내 고추, 빳빳하게 곧게 솟아 있는 내 고추는
고모의 손가락만했다.
"이게 벌써, 사내는 사내라구..."
그렇게 중얼거리던 고모가 내 몸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기절을 할 듯
놀란 나는 욕실 문 쪽으로 도망을 가고, 고모는 김이 가득한 속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말한다.
"더운물로 한 번 씻고 나가거라. 감기 드니까 빨리 머리부터 말리고."
부옇게 흐린 수증기 속으로 바라본 고모의 몸은 어쩌면 희디흰기둥 같았다.
알몸으로 서서 두 손을 올려 머리칼을 위로 틀어 올리고 서 있던 그 희뿌연
고모의 모습은 내가 가스메 묻어 가지고 있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움의
하나리라. 몇 안 되는 소중한, 그리고 이제는 어디에서도 다시 찾을 길이 없는.
이 녀석 좀 봐.
고모의 그 말은 대나무의 마디처럼 내 성장의 굽이 마다에서 그렇게 나와
함께 자랐다.
사람의 지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 그것을 우리는 불가사의하고 부른다.
세계에는 그렇게 해서 많은 불가사의가 있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왕궁,
이해할 수 없는 탑, 이해할 수 없는 무덤.....그 의문이란 언제나 지금의 나를
잣대로 한 의문이었다.
인도의 타지마할을 사진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왜 그것이 불가사의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랑이 이룩한 것이 아닌가. 사랑으로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고.
그것이 한 왕의 젊은 나이에 죽은 사랑했던 왕비를 위해 세운 묘지였다. 죽은
여자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었다. 양파 모양의 그 건물을 바라보면서
나는 타지마할에 대해 쓴 많은 글을 읽었었다.
달이 뜨면 그 흰 대리석 건물은 푸른빛을 띠면서 빛난다고 했다. 양파 모양의
돔은 코란을 암송하면 그 둥근 지붕 때문에 공명이 되어 더 크고 신비스럽게
울려 퍼진다고 했다. 그 무덤을 지으면서 두 번 다시 그렇게 아름다운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려고 왕은 건물이 완성되자 거기에서 일하던 인부들의 손목을
전부 잘랐다고도 했다. 왕은 또 이 흰 대리석 건물과 마주보는 자리에 강을
사이에 두고 자신의 묘를 검은 대리석으로만 지으려 했다고 한다. 죽어서 강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희고 검은 두 개의 무덤이 아니 거대한 건물이 서로
바라보며 서 있기를 원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그 건물을 짓지 못한 채 아들의 반역으로 왕위를 찬탈당했다.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난 왕은 타지마할이 바라보이는 강 건녀편의 왕궁의
한 방에 갇혀서 아내의 묘를 바라보며 눈물짓는 만년을 보냈다고 했다. 지금도
그 방에 가 서면 강건너 저편으로 타지마할이 떠오를 듯 바라보인다는
것이었다.
타지마할은 사랑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을 때 나는 그것이
불가사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사람들은 불가사의라고 했다.
타지마할과는 달랐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죽음이 만들어 낸 위대함이었다.
영원한 삶에 대한 희구가 그러한 건축물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겠는가. 그
삼각뿔의 한 가운데로 우주의 힘이 집결되고 그때 죽었던 왕은 다시 살아나
생명을 이어 갈 것을 그들은 꿈꾸었던 것이니까. 죽음을 이겨내려는 노력은
그렇게 서로가 달랐지만 그러나 아...죽음 앞에서 인간은 위대한 것이 아닐까.
더 많은 피라미드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아닐까. 왜 그것이 불가사의여야
한단 말인가.
오히려 땅 위에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것을 바라보며 그때 나에게는
지울 수 없는 의문이 있었다. 무덤이나 신전이 아니었다. 왜 인간은 태어난
그대로는 살아가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왜 사람들은 옷을 입는 것일까.
그것은 고등 학생이 되면서 겨드랑이와 성기 주변에 털이 나기 시작했을
때까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의문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 고통으로
화니되는지를 그때 나는 몰랐었다. 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드에게
족쇄가 되고, 잘린 무릎이 되고, 그를 자유로부터 얽어매고 있는 사슬이
되는지를...내가 그때 더듬어 짐작할 수나 있었을까.
그랬다. 생명. 불가사의는 바로 이 땅 위를 살아가는 모든 것들의 생명
그것이 아니었던가.
내 손은 흙투성이였다. 아침에 내리던 비가 그쳐 있었다. 우리는 집 앞의
화단에 모종을 내고 있었다. 호미를 들고 내가 물었다.
"고모, 난 늘 이상한 게 있어요. 왜 세상에서 사람들만 옷을 입고 살아요."
"넌 참 별게 다 이상하구나."
"그럼 그게 안 이상해요? 땅에 사는 것 가운데 사람만 옷을 입잖아요."
"털이 없지 않니."
그렇게 말해 놓고 나서 고모는 무엇이 우스운지 혼자 입을 가리며 웃었다.
"새도 짐승도 다 털이 있잖아. 그런데 사람만 털이 없으니까 그렇지."
"뱀도 그렇고 지렁이도 그렇고, 봐요. 털이 없는 것들도 있다구요."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나우었던 때는 아마 내가 국민 학교를 마악 졸업하던
무렵이 아니었을까. 왜 봄날에 있었던 일들만이 그렇게 오래 기억 속에 살아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고모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때도 어느
봄날이었으니까.
고모가 깜박 속았다는 듯이 내 팔을 치면서 말했다.
"털이 없는 것들은 그러니까 겨울엔 못 살지. 여름만 살고 죽잖니.
모기도...나비도 그렇지 않니. 이제 한여름 되면 울어댈 매미만 해도 그렇지.
매미가 무슨 털이 있더냐."
"그럼 뱀은요?"
"넌 학교에서 파충류에 대해서도 안 배웠니."
고모는 나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런 것들은 땅 속에서 살지 않니. 아니면 물 속에서 살든가. 개구리도 털이
없지. 물고기도 물에서 사니까 털이 없고."
"맞아요. 고모 말이 맞아요. 그게 바로 이상하다는 거예요. 고모 말처럼
땅속에 살거나 물 속에 사는 것들은 털이 없지요. 그런데 땅에 있는 것들은
전부 털이 있단 말예요. 사람만 없잖아요. 사람이 옷을 입는 이유는
그거라구요."
얘야 이젠 좀 그만 하려므나 하듯 지친 얼굴로 고모가 말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니?"
"그냥 왜 사람만 옷을 입고 살게 되었을까 그게 이상할 뿐이에요."
"이상할 거 없다."
"이상해요."
"그럼 넌 벗고 살려무나. 네가 옷 벗고 살면 내가 좀 편하겠냐. 빨래 안 해서
좋고, 뭘 입힐까 걱정 안 해서 좋고."
나는 손바닥에 들러붙은 흙을 털어 냈다. 고모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들고
있던 꽃모종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내 얼굴을 흰 자위가 많은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얘, 형민아, 넌 뭐가 그렇게 이상한 게 많니.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와
그게 뭐가 다르니."
고모는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중얼거렸다.
"그랬을 거예요. 사람들은 아주 옛날에는 옷을 입지 않아도 되었을 거예요.
그냥 털이 많았을 거예요."
나는 그때 진화에 대하여 고모에게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옷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만들어 몸에 걸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몸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진 털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그런 말을 고모에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나하나 설득력 있게 고모에게 말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내가 꽃모종을 내면서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고모에게 했던 건 아마
언젠가의 겨울이었으리라.
"벗는다는 건 무엇일까요."
그때 나는 처음으로 구약 성서를 읽었었다.
"낙원에서 추방되면서 사람들은 옷을 입기 시작했대요. 부끄러움을 알면서요.
그렇다면 옷을 입는 게 부끄러운 것인지 아니면 벗고 있는 게 부끄러운 것인지
혼동이 와요. 뭐가 뭔지 분명하지가 않잖아요."
"죄를 짓는다는 이야기 아니겠니."
"죄라니요?"
"내가 알기에 기독교란, 사람에게는 원죄가 있다는 데서 시작하지 않든.
태어난 그때부터 사람으 죄를 짓고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낙원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벗는다는 게 수치스러운 게 아니었다는 얘기다. 죄를 짓고 보니까
그제야 옷을 안 입고 맨몸으로 있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낙원이라는 게 뭐예요? 똑같이 벌거벗고 있기는 마찬가지인데
낙원에서는 부끄러운 게 아니고 쫓겨난 이 세상 땅에서는 부끄러운 거란
말이잖아요."
"목사님한테 물으려무나. 난 주일 학교 선생은 아니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벌거벗는다는 것,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산다는 건 그
자체에 있어서는 죄도 부끄러움도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규정하는 잣대가 있을
뿐이었다. 어디에서는 그것이 죄악과 치욕이 되고 어디에서는 낙원이 된다는 걸
어떻게 이해하여야 한단 말인가.
"왜 사람은 옷을 입어야 하나 그게 아니라, 저는 왜 발가벗는 게 나쁜 거냐는
거지요."
왜 옷을 벗기는 걸 형벌로 사용한 나라가 있었고 그런 시대가 있었는지,
그렇게 어려운 말로 나는 나 자신의 의문을 설명하지는 못했다. 그때 고모가 한
말은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던 의문에 대한 가장 따뜻한 귀기울임은
아니었을까.
"뭐가 그렇게 어렵니. 부끄러운 걸 아니까 그렇지. 옷을 안 입은 게 부끄러운
거니까, 나쁜 짓을 한 사람에게 옷을 벗겨 벌을 주는 거지. 옷을 입히는 게
부끄러운 거라면 사람들은 벌로 옷을 입혀 버렸겠지."
"부끄러우니까 옷을 입는단 말이에요?"
내가 다시 물었을 때 고모는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형민아 그럼 사람이... 발가벗고 산단 말이니."
그때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사랑을 할 때 비로소 사람들은
발가벗는다는 것을. 발가벗고 하나가 된다는 것을.
벗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순결이나 무후를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가식 없는 진실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물을 다 버리고 난 그때의
순종 혹은 빈곤이 바로 옷을 벗는 다는 의미가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벗는다는 것은, 어떤 사실에 대한 반대를 표현하는 항의로도
쓰였다. 옷을 입는다는 질서를 깨는 이 벗는다는 행위는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 상태에 대한 반항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벗는다는 것은 치욕을 뜻하기도 한다. 죄 지은 자들은 그 옷을
찢겼다. 모욕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때리는 것보다도 더한 징계였다. 형벌
가운데서도 죄인을 나체로 만드는 것은 중형의 하나였다. 구약 성서 속에서
사람들은 간통을 한 여자의 옷을 벗기면서 그녀를 비웃었다. 헤브라이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치욕은 바로 옷을 벗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옷을 벗을 때 그것은 환희였다. 무엇보다도 옷을 벗는다는
것은 황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모든 춤, 모든 황홀의 절정에서 사람들은 옷을
벗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 그 몸이라는 것이 자신의 영혼과는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우리들의 정신과 그것은 어딘가 분리되어 있음을 알게 되는 때는
언제였던가. 그것은 부끄러움과 신비함이 분리될 수 없이 뒤엉킨 그런 감정의
당혹감 속에서 시작되지 않았던가. 육체란 무엇인가에 대해 눈뜨는 때는 그렇게
해서 몸의 어딘가에서 낯선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였다.
어느 날 자신의 목소리가 변해 있음을 안다. 이제까지의 내가 아닌 어떤 다른
사람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 있는 그러나 여전히 나의 것임이 확실한 목소리.
그리고 털이 있다. 놀랍게도 어느날 하나 둘 자라 있는 수염을 본다. 그리고
몸에는 여기저기에서 성징들이 나타난다.
이 지극히 동물적인 변화를 성장이라고 이름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처음 만날
때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당황하게 되는가. 자신의 의지와 바람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어느 날 몸의 저 깊게 감추어진 곳에 자라 있는 털을 만난 때,
영혼까지 더럽혀진 것 같아지던 그때, 그것은 그것은 저 성의 나라를 향한 길에
만나는 작은 건널목이 아니었던가.
채송화가 온 나라, 인도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서, 나는 문을 연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그 문은
열린다. 때때로 그 삐걱거리는 소리는 빛이기도 하고 색깔이기도 하다. 내
기억의 창고는 그렇게 해서 열린다.
그 기억의 창고에 잠들어 있는 지난날들, 그것은 이제 박제가 되어 남아 있을
뿐이지만 그러나 나만은 안다. 그 창고 속에 갇혀 있는 것들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내 안에서는 피가 튀고 소리를 내며 달려가고 비바람 치며 창문을
두드리고 있음을.
어머니의 하얀 고무신은 여전히 거기 놓여 있다. 미워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그리워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그렇게 거기 있다. 사랑
때문에 물에 빠져 죽은 여자, 사랑 때문에 삶을 포기해 버린 여자...그런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를 나는 모른다. 앞으로도 모르리라. 왜냐하면 그 여자는
바로 내 어머니였으므로.
그 하얀 고무신은 그렇게 거기 있다.
때때로 햇빛 가득한 아침들이 거기서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아우성치면서
나를 에워싸는 그 빛의 줄기들. 그것들이 내게 알려 준다. 가만히 손을
내밀어서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그때의 너는 이른 봄의 안개를 그렇게
좋아했단다 하고 봄날의 햇빛이 속삭인다.
봄비. 아지랑이. 밭두렁에 나와 앉아 있는 노인. 종달새의 지저귐. 새로 돋는
쑥. 질경이. 처음으로 학교를 가는 1학년 아이들의 잠이 덜 깬 얼굴. 한낮의
졸음보다도 더 졸린 뻐꾸기의 울음 소리.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뒷맛이 남던
찔레나무의 새순. 비단개구리가 까놓은 알. 겨우내 뭉갠 똥을 아직도 엉덩이에
단 채 껑충거리던 목달개 송아지. 자기가 깐 새끼들을 거느리고 담장밑을
돌아다니던 늙은 암탉. 벌들이 잉잉거리며 날기 시작하는 벌통.
내가 그토록 봄날을 좋아했던 것은, 봄이란 눈부신 변화였기 때문이었을
거다. 하루하루가 그토록 눈부시게 다른 날들이 어느 계절에 있었던가.
어느 날 마당 가에 엄지손가락만하게 함박꽃 새싹이 돋아 있는 아침. 소리를
내듯이 나라는 오동나무 잎. 물감을 들이듯 하루하루가 색깔이 달라지는
대추나무.
나무와 풀들만이 아니다.
어디에서 저 겨울을 났던 것일까. 다시 찾아오는 날 것은 제비만이 아니다.
그 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니? 손을 모아 물어 보고 싶게 새들이 나비가
벌레들이 살아서 오가기 시작한다. 황홀한 재회. 그들이 긴 겨울을 보낸 집들이
어디인가를 봄날은 알고 있었을까.
그 모든 것들은 겨울과 얼마나 달랐던가. 그러나 전연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시간이나 계절과는 무관한 일생을 살아가는 것이 있었다. 봄이 와도
겨울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 그것은 돼지가 아니었을까. 개들도 털이
빠지고 닭은 날개에 기름이 흐르기 시작했지만 돼지만은 여전했다. 절대의 자유
혹은 철저한 구속. 돼지는 그 둘 가운데 하나를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그 어두컴컴하고 좁은 울을 고집하면서 밖을 거부한 채 절대의 진리를
찾아 자신을 연마하고 있었다면 그때 그는 자유였다. 자유, 그 황홀한 이름.
그러나 어쩌면 그는 먹고 싸고 살찌는 것 이외의 모든 것을 거부당한 채 갇혀
있던 구속자, 수형자의 상징. 거세까지 당하며 일체를 빼앗긴 자. 돼지는 그 둘
가운데 어느 쪽이었을까.
봄날은 내게 그런 것을 가르쳤다. 무엇엔가의 의문을 가지라는 그토록 힘든
가르침을.
비 내리는 날이면 고모와 함께 나는 꽃을 심었었다. 꽃씨를 뿌리는 날은
언제나 맑은 날이었다. 비 오는 날에 우리는 꽃모종을 냈었다.
"너 이게 어느 나라 꽃인 줄 아니?"
꽃모종을 내면서 언제나 고모는 그렇게 묻곤 했다. 맨드라미도 채송화도,
고모는 해마다 그렇게 물었다. 이게 어느 나라에서 온 꽃인 줄 아니?
언제나 대문 옆에 심곤 하던 해바라기를 심으면서도 그랬고, 손톱에 물을
들이다면서 봉숭아를 심으면서도 그랬다.
바닥으로 기는 것같이, 아무래도 제대로 일어서지지가 않는 채송화를
심으면서 고모는 물었다.
"너 이 꽃이 어느 나라 꽃인 줄 알아?"
으으응.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꽃은 인도라는 나라에서 온 꽃이란다."
"그럼 우리 나라 꽃이 아니에요?"
"그럼 아니지."
채송화가 온 나라, 인도. 보슬비가 안개처럼 내리고 있었다. 집 앞길은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봉숭아를 심으면서 고모는 말했다.
"봉숭아는 어느 나라 꽃인지 알아?"
"맞다. 이건 우리 나라 꽃이다."
"왜?"
"고모가 손톱에 물을 들이잖아요."
여름이면 그늘에 앉아 고모는 백반 가루에 묻혀서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였다. 엷게 스며 들어 있는 듯했던 그 손톱 빛깔.
"아니란다. 이것도 우리 나라 꽃은 아냐. 멀리 외국에서 온 꽃이란다."
"어디서요?"
"브라질. 아주 먼 나라란다."
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해서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온 것인지를 생각할 때 나는 늘 꿈꾸듯 아득해졌다. 꽃의 그 기나긴
나그네길을 어떻게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건 다 어디 있는 나라예요?"
"아주 멀지. 멀고 멀지."
"고모는 가봤어?"
"얘 좀 봐."
고모는 웃으면서 물었다.
"너 세종대왕이라고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한글을 만든 사람이란다."
"아 그 임금님. 알아, 고모가 이야기해 줬잖아. 단종의 할아버지가 된다고."
"그래. 그건 어떻게 알고 있구나. 넌 꼭 세종대왕 그 사람을 고모는 만나
봤어? 하고 물을 아이 같구나."
나는 또 물었다.
"그런데 고모, 그럼 우리 나라 꽃은 어떤 거예요?"
"산에서 피는 꽃들은 거의가 우리 나라 꽃이지. 개불알꽃, 은방울꽃,
사마귀꽃도 그렇고 며느리쪽박도 우리 나라 꽃이지."
나는 이슬 같은 보슬비를 맞고 있는 고모의 촉촉하게 젖은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은 해마다해마다 그 어느 봄에도 꽃같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꽃에다가 뭐 그런 더러운 이름을 붙였어요? 개불알이니
사마귀니."
그렇게 해서 남자가 되는 거란다
내가 고모와 한 방에서 자는 것을 그만둔 것은 중학생이 되면서였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다음해 고모가 전근을 간 학교에서부터니까 2학년 때가 된다.
그때까지 나는 고모와 늘 한 방에서 살았다.
그 무렵이었다. 고모가 웃옷을 거의 벗다시피 하고 뒤뜰에서 머리를 감는
모습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그런 일은 아주 어려서부터 보아온 모습의
하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벗다시피 한 그런 고모의 살결이나
몸매를 바라볼 때 가슴이 아주 무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시작했었다.
무거워진다는 걸 다른말로 바꾼다면 무언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죄의식이 싹트고 있었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저녁이면, 언제나 먼저 잠드는 것은 나였다. 고모는 작은 탁자 모양,
서상이라고 불렀던 나뭇결이 고운 직사각형 모양의 상 앞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학교에서 마치지 못하고 집으로 가지고 온 일을 하곤 했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나는 말없이 고모의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잠이
들곤 했었다.
아직 국민 학교 시절이었던 때 고모는 내가 자라는 것을, 내 키와 팔의
굵기로 확인하곤 했다.
"얘 봐. 어느새 키가 이렇게 컸네."
그러면서 고모는 나를 자기 앞에 서게 했었다.
"이것 봐. 벌써 여기까지 오잖니."
고모는 내 머리 위에 손바닥을 대었다가 그것을 자기 가슴으로 가져 가면서
내가 어느 만큼 자랐나를 그렇게 확인하곤 했다.
그리고 또 하나가 내 손을 잡아 보거나 아니면 내 팔목의 굵기를 가늠해 보는
것이었다.
"너 아주 많이 크겠구나. 손 마디가 굵직굵직한 걸 보니. 어느새 이렇게 컸나
모르겠다."
잠버릇이 험한 내게 이불을 다시 덮어 주면서 고모는 내 팔목을 가만히 잡아
보곤 했다. 아침에 나를 깨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팔목을 잡아 보면서
탄식하듯 말하곤 했다.
"어느새 손아귀에 잡히는 게 들리네. 한 손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가
되었으니."
그런 말을 할 때의 고모의 목소리나 얼굴은 다른 때와 몹시 달랐다. 그때
고모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얼굴은 어리광을 부리거나, 안겨서 몸을
부벼 대고 싶도록 만드는 그런 것이었다.
어딘가 그런 모습에는 이제는 아이가 아니라 점점 커가는 나에 대한
어떤...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제 조금 더
지나면 너는 너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고모를 떠나서도 살 수 있는 나이가 너에게도 오겠구나 하는, 그 먼 날을
생각하는 기쁨과 대견함이 뿌옇게 서로 어울려서 안개처럼 깔리던 눈빛, 나는
그것을 그렇게 이해했었다.
그 무렵 고모는 잠옷을 입혀 준다든가 속옷을 갈아입힐 때면 내 고추를
만지곤 했었다. 내가 깔깔거리고 웃으며 몸을 피하면 고모는 그 모습을 더
재미있어 하면서 말하곤 했다.
"어디 보자. 요렇게 작아 가지고 언제 사람 노릇이나 하겠나 모르겠다."
사람 노릇이라는 게 고추와 무슨 연간이 있는 것인지를 그때의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문득 떠오른다. 고모가 전근을 가면서 내게 공부방을 만들어 주었던 그 해
봄이. 우리가 오래 살았던 그 바다가 있는 마을을 떠나 고모는 전근을 해야
했다. 그리고 새로 이사를 한 집에 살기 시작했던 봄. 그 봄날을 떠올릴 때면
참 많이 비가 왔던 기억이 거기에는 깔려 들곤 한다. 함석집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와 함께 그 추억은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혼자 자는 것이 무섭고
싫어서 언제나 고모의 방으로 베개를 들고 찾아 들어가곤 했으니까.
그러므로 기억한다. 중학교엘 들어가던 그 바닷가 집에서의 마지막 해를.
다음해 봄, 고모는 읍내의 학교로 전근을 했고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먼 도시로 나와 혼자 하숙을 하기 시작할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집 앞 정미소가 늘 시끄러웠던 것, 늘 잠옷 바람으로 밖에 나와 골목을
쓸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며 서성거리기도 했던 앞집 아저씨, 그리고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곤 했던 그런 것들이 마치 비를 피해 어느 후미진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강아지처럼 남아 있다.
앞집 아저씨를 볼 때마다 고모는 말하곤 했다.
"저럴 수가 있담. 이상한 사람이야, 파자마를 입고밖에 나다니다니. 저
사람은 낮에는 잠옷을 입고 지내다가 밤에 잘 때는 저 옷을 분명히 벗고 잘
거다."
그런 것들...몇 가지를 빼고 나면 마치 늦가을 벌판 같은 썰렁한 기억들만이
그 읍내의 생활 속에는 웅크리고 있다. 아마 나는 그때 흔히 사춘기라고 부르는
이름의 변화를 겪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읍내로 이사를 나와서였다.
그날도 함석 지붕을 때리며 비가 내렸다. 그 소리의 요란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혼자만의 방을 가지게 된 나는 아직 거기에 길들어 있지
못했다. 그러므로 요란하게 지붕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비가 내리는 밤이면
나는 고모가 있는 방으로 갔고 우리는 함께 잠을 잤다.
그리고 그 밤을 기억한다. 그 바닷가의 집에서 보냈던 고모와의 날들 속에,
아니 내 소년기의 어느 길목에서 만났던 육체의 변화를, 그것은 신비였을까.
아니면 때때로 우리의 영혼을 채우는 족쇄였을까, 순간 순간의 참담한 고통과
또 다른 한 순간의 기쁨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 영혼가 육체와의 싸움의
시작이었을까.
어느 날 밤이었다.
잠이 들었던 나는 무언가 불편함을 느끼며 어렴풋이 잠에서 깨었다. 어딘가
몸이 이상했다. 조금씩 잠에서 깨어나면서 나는 그때 고모가 내 몸에 손을 넣고
고추를 만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 손은 따뜻했다. 그리고 나는 어쩐지 지금 내가 잠에서 깨어 있다는 것을
고모에게 알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소리를 고르게 쉬면서 나는
꼼짝도 않고 그렇게 누워서 고모가 내 몸을 만지락거리는 것을 느꼈다. 고모의
손은 아주 부드럽게 내 고추를 만져대고 있었다.
때로는 움켜잡았다가 그리고 때로는 그것을 주무르기도 하면서....그렇게
고모는 내 고추를 쓰다듬어 갔다. 그리고 고모의 손이 움직여 가는 것과 함께
내 고추는 조금씩 커져 갔고 아주 빳빳하고 곧게 일어섰다.
단다하고 힘차게 솟아오른 내 고추를 고모는 조금씩 손에 힘을 주면서
쓰다듬어 갔다.
아주 멀리서 들리듯이 그러나 내 귓가에 숨소리가 가득하게 들리도록 입술을
가까이하고 고모는 속삭였다.
"녀석. 깨어 있었구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고모는 아주 힘있게 내 그 곧게 일어선 고추를 잡았다 놓으면서 말했다.
"너도 많이 컸구나. 이젠."
그렇게 말하며 고모는 내 속옷 속에서 손을 뺏고, 등을 돌리며 돌아누웠다.
내가 말했다.
"고모"
"왜"
고모는 벽을 향해 돌아누운 채였다. 밖에서는 여전히 빗소리가 들려 왔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뭐가"
"만지면 커지는 거 말예요."
"그냥 어른이 되어간다는 거지 뭐. 괜찮다. 남자는 다 그렇게 되는 거란다."
"그런데 있지요. 그렇게 커질 때는 뭔가 기분이 이상해요. 마음이
이상해져요."
내 고추는 여전히 딱딱했고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잠시 후 고모가 말했다.
"그런 그냥 남자가 되는 거란다. 그렇게 해서 남자가 되는 거란다."
"그런데 보통 때는 작던 것이 왜 만지면 커지기도 하는지 알수가 없어요."
"괜찮다. 걱정할 거 없단다."
"그게 좋기만 하진 않아요. 뭔가 기분 나쁘고 내가 막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
같기도 한걸요."
고모가 몸을 돌려 내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말했다. 아주 부드럽게.
"그건 그냥 남자가 되는 거란다. 남자는 다 그렇게 되는 거야."
나는 품에 파고들 듯이 고모의 가슴에 얼굴을 박았다. 고모가 팔을 돌려
가볍게 내 어깨를 안아 주었다. 내 마음속에서 빗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내
몸도, 그 힘차게 솟아올라 빳빳했던 것도 아주 조그맣고 부드럽게 되었다.
나는 잠이 들었다.
새로 이사한 그 곳에서의 생활이 왜 그렇게 삭막할 수밖에 없었던지
모르겠다. 그러나 몇 개의 그럴 수밖에 없었던 까닭들이 떠오르기는 한다.
낯선 거리, 낯선 사람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낯선 생활에 내가 쉽게
물들어 가지 못했다는 것도 그 하나리라. 나는 거기서 친구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학교 공부에 많은 시간을 헐어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골
중학교에서는 거의 공부라는 것을 하지 않았던 내 앞에 고등 학교 입시하는
언덕이 솟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곳에서의 나날 속에 내가 따스한 그 무엇도 남겨 가질
수 없었던 건 아마 내가 그때 매우 혼란스러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흔히 사춘기라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어쩐지 그 무렵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좋았고, 그것을 오히려 아끼며 즐기고
있었다.
소풍을 간 가을에는 반 아이들과 떨어져서 산기슭에 올라 붉게 혹은 노랗게
물든 단풍잎을 줍기도 했다. 고모에게 가져다 주기 위해서였다. 냇가로 갔던 봄
소풍에는 강가의 돌을 주워 가방에 넣기도 했다.
고모는 늘 그런 것들을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이따금 꺼내 보거나 방
한곳에 치장해 두곤 했는데, 나는 그런 고모의 어쩐지 쓸쓸하면서도 달콤한
마음을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생활의 비늘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중학교 졸업을 맞았다.
국민 학교 때와는 달리 중학교 졸업식장에서는 아무도 울지 않았다.
선생님들가 헤어진다거나 이제 이 학교를 드나드는 일도 없으리라는 확실함에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자신을 감싸주던 울타리 하나가 사라지는 것
같았던 국민학교 졸업식. 그러나 그런 느낌은 전연 찾아볼 수도 없었다.
졸업장과 함께 나는 졸업생 전체 가운데 세 사람에게 주는 상을 받았다.
그것이 자랑스러웠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고모에게만은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든 기쁨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달려서 집으로 돌아와
고모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어두워 오는 마당을 바라보면서 기다렸었다.
나는 고모에게 내가 그런 성적으로 특별한 상을 받게 된다는 걸 알리지 않고
있었다. 조금은 고모를 놀라게 하려는 마음도 섞여서.
늦겨울이랄까, 이른봄이라고 해야 할까. 그날따라 왜 그렇게 빠르게 저녁이
오는 것인지 모르게 마당은 어둑어둑해졌고 나는 이제 이 집에서도 이
읍내에서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모와 함께 밥을 먹고
잠이 들며, 어느 날 고모가 털실로 옷을 짜거나 가만가만 노래를 부르면서 가을
볕에 잘 마른 빨래를 개는 모습을 보는 일도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자란다는 건 혼자가 되는 거고 그래서 그만큼 외로워지는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그만큼의 부피와 무게로 그것을 견디어내는 힘도 함께 가지게
된다는 것도.
얼마나 지났을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고모의 목소리가 다가왔다.
작고 어두운 마당을 가로질러서.
"졸업식에도 못 가서 어쩌니."
그런 말을 하며 안으로 들어온 고모에게 나는 방으로 들어가면서 상을 받은
이야기며, 졸업식장에서 있었던 것들을 말했다. 미안해서 어쩌니. 고모라는 게
이런 날에도 널 챙겨 주지 못하는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야기를 듣고 난
고모는 내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넌 크면 클수록 오빠를 닮아 가는구나."
그 눈에 불빛을 받아 눈물이 번쩍이고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좋구나. 참 좋구나."
그때 고모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고모를 붙안고 울어
버렸으리라. 나는 우는 대신 아주 큰소리로 말했다.
"고모 이거."
책 모양의 내가 내민 조그만 상자를 고모는 여전히 눈물이 번쩍이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 동안 학교에서 저금했던 걸 받았거든요. 그래서 고모 드리려고 하나 산
거예요."
"뭔데? 어디 풀어 보자."
그것은 바닥에 놓을 수도 벽에 걸 수도 있는 사진틀이었다. 테를 나무로
두른. 왜 하필 이런 걸? 하는 눈으로 고모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랑 고모가 찍은 사진, 여기다 하나만 늘 넣어 두세요. 나...고등 학교 가
있는 동안. 그래 줬으면 싶었거든요. 난 이제 이 집에 없을 테고....그런
생각을 하니까..."
내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고모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했다.
"네 방은 네가 있을 때처럼 그대로 둘 거란다. 네가 늘 거기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날이 왔다. 나는 고등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떠나야 했고, 그런
하숙 생활을 위해서 고모는 새로 이불을 장만했고 속옷도 여러 개를 준비했다.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형민아."
"걱정 말아요. 고모. 내가 뭐 어린앤가요."
"그래도...왜 이렇게 마음이 안 놓이나 모르겠다."
"괜찮아요. 키도 고모보다 큰데 뭐가 걱정이세요."
내일이면 시외 버스를 타고 떠나야 한다. 고모와 함께 두 번 그 도시엘
갔었다. 한 번은 입학 시험을 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학교를 다니며 머물
하숙집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제 내일부터는 혼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창문을 어리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함께 가자. 언제 또 이렇게 한 방에서 잠을 자보겠니."
고모가 먼저 그런 말을 했을 때 나는 고모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 때문에 무언가가 가득 차오르듯이 목이 아팠다.
나란히 자리를 깔고 우리는 불을 끈 채 누워 있었다. 바람소리도 없이 달빛만
가득한 밤이었다. 며칠 후면 보름이었다.
"자주자주 편지 쓸 거예요."
"난 괜찮다. 너나 공부 잘하고 있으면 되지. 공연히 편지 써서 마음
소란스럽게 만들지 말고."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편지 많이많이 쓰라는
말씀이겠지요. 그럴 거예요. 오늘으 어떻게 지냈고 내일은 뭐할 거고, 그렇게
옆에 있듯이 느껴지게 알리며 있을 거예요.
"달빛이 참 좋네요."
"보름이 다되지 않았니."
멀리서 자동차의 불빛이 창호지를 바른 창에 나무 그림자를 비춰 주면서
사라져 갔다.
"고모, 우리 약속 하나 해요."
"약속은 무슨."
"고모, 언제든 고모가 보고 싶을 때는 난 그럴 거예요. 달을 바라볼 거예요.
고모도 그렇게 해요. 내가 보고 싶을 대는 달을 바라보세요."
"네까짓 녀석을 내가 뭐하러 보고 싶어하니."
고모가 낮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아 지금 고모도 저 달을 보고 있겠구나 하고, 나는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요. 고모도 그러시기예요."
"그런 걸 뭐라고 하는 줄 모르지?"
"뭐라고 그래요?"
"신파 연극이라고 한단다."
그녀가 또 낮게 웃었다.
"그래도....고모는 좋구나. 네가 이렇게 커서, 혼자 낯선 데가서 고등
학교까지 다니게 되리라고는 믿지 못했으니까. 너를 네 외가에서 데리고 올 때
그 기막힌 심정이야 어떻게 말로 하랴만, 그때도 어떻게든 널 사람 만들어야
하는 건 나밖에 없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네가 훤칠하게 커줄 줄이야
엄두나 냈겠니. 그냥 꿈만 같구나."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이불 위헤 놓여 있을 고모의 손을 잡았다.
"고모, 고마워요. 나 있지요. 다 알아요. 고모가 나 때문에 얼마나 마음
고생을 하신지도 다 알아요."
"이 녀석이 어디서 말만 늘었네. 알긴 네까짓 게 뭘 알아."
"두고 보세요. 열심히 공부해서 고모한테 뭐든지 다 해드릴 거니까요."
잡혀 있는 손가락에 힘을 주면서 고모가 말했다.
"이 고모는 너한테서 해 받고 싶은 게 딱 하나밖에 없단다."
"그게 뭔데요."
"네가 잘되는 거"
잠시 후 내가 물었다.
"고모, 나 공부 열심히 해서 이 다음에 뭐 될까? 고모는 내가 뭐가 되는 게
좋아?"
"너 좋은 일하며 살면 되지. 저 좋아하는 일하며 살 수만 있으면 그보다 더한
복이 어디 있겠니."
"나 의사 될 까?"
"의사? 아이구 얘, 맨날 아픈 사람만 보며 살아야 하는 그런 걸 왜 하니."
내가 후후후 하며 낮게 웃었다.
"고모가 좋아했던 남자...의사였다면서요."
"별소리를 다하네."
"고모가 그랬잖아요."
고모가 말을 피했다.
"이런 소리 하다가 밤새울라. 내일은 차 타야 하는데 그만 자거라."
"잠이 안 오는 걸요 뭐."
우리는 말없이 그렇게 누워 있었다. 자동차의 불빛이 또 창문으 비추며
지나갔다. 나무 그림자도 또 그렇게 창문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둘 다 말없이
그렇게 있었다.
방안이 마치 바닷속처럼 깊이깊이 가라앉는 것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무심한 사람들"
고모가 갑자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어찌 그렇게들 쉽게 갔단 말이니. 이걸 못 보고."
"아버지, 어머니 얘기는 하시지 않기로 했잖아요."
"좋은 일을 혼자 보고 있자니 왜 생각이 안 나겠어. 네 부모가 이렇게 되
너를 보지 못하는 게 왜 한스럽지 않겠어. 못나도 어찌 그렇게 사람들이
못났더란 말이냐."
둥둥둥둥 북이 울리고, 무당의 요령 소리가 잘랑거리던 그 강가를 나는 문득
떠올렸다. 어머니의 혼을 달래던 그 굿. 나 그런 딸 둔적 없소. 소리치며 등을
돌리던 외할아버지. 낯선 고모를 따라오던 그 긴 여행과 그 여행의 끝에서
만났던 드넓던 바다 빛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물이 차올라 눈가르 타고 흘러 베개 위로 떨어졌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놓으며 말했다.
"고모, 고모가 없었다면 난 어떻게 됐을까요."
울고 있는 것일까. 고모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한마디 한마디를 토막내듯
말했다.
"고모,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글 썰렁하 추억들 몇 개를 우뚝우뚝 남겨 놓고 나는 그 읍내를
떠나야 했다. 고등 학생이 되었던 것이다.
고등 학생이 되었다는 것은 나에게 특별한 몇 가지의 변화를 주었다. 도청
소재지인 도시로 나와 혼자서의 하숙 생활이 시작 되었다. 나는 방 하나에 두
명씩의 학생이 들어 하숙을 하는 하숙집의 여섯 명 학생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같은 시간에 같이 모여 앉아 아침저녁을 먹었다. 거기에는 3학년
학생도 있었고 나와 같은 1학년 학생도 하나 있었다.
가족이라는 것, 아니 가정이라고 말해야 할 그 무엇도 그곳에는 없었다. 함께
밥을 먹고 한 집에서 잠을 자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우리 하숙생은 각자가
혼자였다.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은 저녁 무렵이었다. 하숙집 아줌마가 저녁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리는 그 시간,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가 들리고,
때로는 음식 냄새가 풍겨 나오는 마당가에 서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자면
나는 가슴 밑바닥에서 눈물이라고 말해야 할 그런 것이 출렁이는 것을 느꼈다.
고모와 보낸 시절들의 모든 시간들이 하나하나 모래처럼 내 몸을 덮으며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저녁 해라는 것이, 때로는 붉게 때로는 잿빛 구름에 가려서 점점 흐려지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들판이 어두워 가는 그 낙조의 시간이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훑고 할퀴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고무신 한 켤레를 남겨 놓고 강물에 몸을 던진 어머니가 내게 빗소리의 공포를
불에 지지듯 내 가슴에 새겨 놓았다면, 그 고등학교 1학년에서 만난 석양은 또
다른 불로 내 가슴을 지지면서 자국을 남겼다.
그것은 허무라든가 상실감....아마 그런 것이었을 게다.
같은 하숙집에서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는 것 때문에 전연 모르는 아이와
같은 방에서 생활을 함께해야 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나를 견디어 내기 힘들게
했던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교과서 이외에는 아무것도 읽은 것이 없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일찍 잠이 들었고 늦게 일어났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체육관에서
살았다. 선수는 못 되었지만 체조반에 들어가 신입 반원으로 집에 돌아올
때까지 땀을 흘리는 아이였다. 그 아이에게서는 늘 땀 냄새가 났다.
'풀고갱'의 여인들
몸에 대한 내 관심은 부끄러움과 함께 시작되었다.
어느 날, 아무 까닭 없이 내 육체의 한 부분이 이상한 반응을 보인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목마름과 함께 내 성기가 부풀어 올라 딱딱하고 꼿꼿해진다. 내
의식과는 전연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그러한 순간적인 변화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조그맣게 죽이기 위하여 손을 넣어 잡아 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내
성기는 더욱 힘차게, 어떤 힘이 밑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듯이 빳빳하게 굵어져서
터져 버릴 것만 같아졌다.
왜 이런 것들이 나타나는 것일까. 아침에도 오후에도 그런 일들이 계속될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무슨 병에라도 걸린 건 아닐까 두려워하면서 내
성기를 쥐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곤 했었다.
그것은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는 전연 다른 것이었다. 무언가를 읽고,
그렇게 해서 무언가를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내 정신이라든가 영혼이 조금,
아주 조금, 한 1밀리미터쯤 자란 것 같은 그런 충만감과도 그것은 달랐다. 내
몸이 겪어 내는 그런 성적인 변화를 느낄 때마다, 나는 무언가를 내가 잃어버려
가는 것 같았고, 내가 아주 다른 그 무엇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그것이 육체라는 불가해한 생명체에 대한 작은 눈뜸들이었을까. 그것은
처음으로 몸에 돋아나기 시작하는 털을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겨드랑과
성기 주변에 돋아 나기 시작하는 털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얼마나 나
스스로에게 배반감을 느꼈던가. 그것은 아주 동물적인 치욕감 같은 것이었다.
내가 무엇엔가 더럽혀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에게서 버림받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었다. 내 몸에 왜 이런 것들이 돋아 나야 하는지를 나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누군가가 내 몸에 털이 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할까 봐,
그때부터 공중 목욕탕에 가는 일을 그만두었다. 다른 모든 남자들이,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그렇게 털을 가지고 있었지만, 왜 내가
이제부터 그들처럼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기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때 그 한가운데 있었다.
고모가 없다는, 고모를 떠나왔다는 그 생활의 불편함과 불결함은 저녁이
되면서 밖이 어두워지듯이 내게 덮쳐 왔다. 고모가 없이 나 혼자 해내야 하는
하루하루가 그토록 많은 불편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데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간섭으로는 혹은 귀찮게까지 느껴졌던 그 많은 고모의 손길이 한 순간
사라지고 났을 때 내가 겪어야 했던 것은 자유도 해방감도 아니었다. 그것은
견디기 힘든 불편함밖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난 주일의 때묻은 운동화를 그대로 신고 학교로 가야 하는 월요일.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어서 한밤의 배고픔을 참으며 잠자리에 들 때. 늦은 오후
수업이 끝나 하숙으로 돌아왔다가 체육복을 사러 학교 지정 판매처로 달려가야
하는 저녁 무렵... 그때마다 나는 이런 것들을 전부 가로막고 도맡아 주던
고모를 떠올려야 했다. 그렇지 않았던가. 더러운 운동화를 신고 월요일에
학교를 가면 어떻다는 건가. 운동화 끈을 꿰어야 하는 아침에 나는 고모와 등을
돌리고 쭈그리고 앉아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얘 출출할 테니 뭐 좀
먹고 자거라. 졸음을 참아 가면서 고모가 밤참을 차려 들고 들어올 때마다 나는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 건 내가 알아서 차려 먹을 테니, 고모는 졸리면
주무시고 날 좀 내버려둘 수 없어요. 내가 가지고 가야 할 학교의 준비물을
늦은 퇴근 길에 시내로 나가 사가지고 들어서는 고모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무슨 유치원생인 줄 아세요. 나는 속에서 뭔가가 울컥울컥 치밀어 올라
그것을 참느라 애써야 하지 않았던가. 겨울 체육복 같은 거. 학교에서 가지고
오라는 준비물 같은 거....나도 좀 친구들과 함께 왁자지껄 떠들며 읍내 상가로
나가 살 수 있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
그 모든 고모의 보호 아래서 나는 고모로부터의 탈출이 나에게 가져다 줄
자유와 해방감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외지에서의 하숙 생할이 한
순간에 내게 뒤집어씌운 그 잡스러운 많은 일들의 불편함은 나 혼자 꿈꾸어
왔던 자유나 해방감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었다.
때묻은 운동화를 신고 학교로 가던 어느 월요일 아침 나는 하얗게 빤 깨끗한
운동화를 신은 아이들을 보며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져서 고개를 떨구고 교문을
들어서야 했다. 공부를 끝내고 잠자리에 드는 한밤에 느껴야 하는 배고픔은
아주 동물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그 순간 나는 고모로부터 탈출한 것이 아니라
마치 고모로부터 버림받고, 고모가 나를 그렇게 내팽개친 듯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학교 준비물을 사가지고 터덜터덜 걸어서 돌아올 때, 그리고 하숙으로 돌아와
그 몸에 맞지 않는 학교 지정 체육복을 걸쳐 보며, 배꼽 한참 위로까지 치켜
올려 입어야 겨우 옷자락이 끌리지 않는 바지를 한심스레 내려다볼 때 내
귓가에는 지난날 체육복을 사가지고 와서 내게 입어 보기를 몇 번식 강요하던
고모의 목소리가 비웃음처럼 들려 왔다. 네 치수에 맞게 사느라고 했지만 어디
사이즈가 그렇게 제대로 있어야 말이지. 입어 봐라. 아니, 이거 팔이 이러헤
길어서야. 내가 좀 줄여 줄 테니 어디 다시 한 번 입어 봐라. 그때마다 나는
짜증을 내며 중얼거리지 않았던가. 그냥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면 어때요.
그까짓 체육복인데.
그 불편함이 쌓이면서, 재생이 불가능한 어떤 물질이 내 가슴에 퇴적되듯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에 휩싸였다. 그것은 마치 밑바닥에 침천된
유기물이 분해되지 못하고 썩어 가면서 황페화되는 강물처럼 나를 공허감에
짓눌리게 했고, 차츰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피하며 혼자 있는 것을 편하게
느끼도록 만들어 가고 있었다.
거기 겹쳐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내 생활의 아주 사소한 불결함들이 차츰
견디기 힘들게 되어갔다. 불결함이라니.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부엌이어쏘 마당이었고 방이었다.
도대체 이 계절에 왜 이렇게 파리가 많아야 하나 탄식이 나올 정도로 파리가
왕왕거리는 그 어둠침침한 하숙집 부엌을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하숙집의
밥이 적어서 저녁때가 가까워 오면 늘배가 고팠던 나는, 그 부엌에서
만들어지는 음식을 허겁지겁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퍼먹는 자신이
경멸스럽기까지 했다. 하숙생들이 풀어댄 코며 치약 거품들이 지저분한
세면장에 들어설 때면, 나는 이런 곳에서 살아야만 하는 자신까지 싫어질
정도였다.
어적어적 씹어 먹고 내던진 사과며 쓰레기들이 언제나 널려 있는 마당은
그래도 참아 줄 만했다. 비가 샜던 자리가 그냥 얼룩얼룩하게 남아 있는 내
방의 천장을 나는 언제나 이마를 찌푸리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같은 방 녀석이었다. 그 녀석에게도 숙제라는 게
없을 리 없었지만 녀석은 언제나 저녁밥을 먹고 나면 책을 펴는 법이 없이
곯아떨어졌다. 잠옷ㅇㄹ 입고 자는 법이 없는 녀석은 팬티 하나를 입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불을 두 다리 사이에 끼고 잠이 든 그 녀석의 그 우람한
다리통과 지저분한 속옷을 바라보아야 하는 한밤에, 나는 내가 그 녀석과 함께
방을 쓰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마치 무슨 형벌처럼 느껴졌다.
그 모든 것은 너무나 당연한 하숙집의 한 풍경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것을 그렇게 못 뎐뎌 할 수밖에 없었을까.
나는. 자기 전에 이빨과 손을 닦는다거나 아침에 일어나면 다른 무엇보다
잠옷만은 개어 놓고 학교로 가야 한다는 건 내 어릴 때부터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주머니 속에는 언제나 깨끗이 빤 손수건이 있어야 했다. 어른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앉고, 인사를 할 때는 자신의 신발이 보이도록 허리와
고개를 숙이고, 국물은 소리 내어 먹지 않으며, 숟가락과 젓가락을 한거번에 한
손에 잡지 않으며...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은 이미 어려서부터 내몸에 밴,
고모의 가르침이라기보다 고모와의 약속이었다.
그 고모와 함께 살면서, 나는 고모와 마주앉아 함께 빨래를 개곤 했었다.
속옷은 언제나 네모로 개어져서 장롱에 놓여졌다. 양말은 짝을 맞추어 동글게
접혀졌다.
우리가 지켜 왔던 집 안에서의 청결이란 다만 깨끗한 것만을 뜻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제자리에 제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걸 포함했다.
벽에 건 그림이 조금만 삐뚤어져도 고모는 그것을 못 견뎌 했다. 신발은 언제나
가지런하게 짝을 맞추어 현관에 놓여 있어야 했다. 마당의 수도 가에서 세수를
하고 났을 때는, 세숫대야아 플라스틱 바가지를 물통 옆에 가지런히 세워
놓아야 했다. 보고 난 신문은 처음처럼 다시 펴서 각이 지게 모아놓아야 했다.
오랫동안 그 모든 것들은 몸에 익어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 있었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이 하숙 생활에 있어서의 참기 힘든 불결함이란 그렇게
해서 두 가지 모양으로 나를 못 견디게 했다. 하나는 하숙집과 그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아이들이 가지는 불결이었고, 또 하나는 그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무질서였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고모와의 그런 질서에 때때로 얼마나
숨막혀 했던가를. 나도 아무렇게나 옷을 벗어 내던지고 싶었었다. 급할 때는
신발을 가리런하게 놓을 것 없이 팽개치듯 벗어 던지며 집안으로 뛰어들고
싶었었다. 깨끗이 빨아져서 장롱 속에 한 뼘씩 쌓여질 손수건과 속옷들을
네모나게 개면서 나는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하숙집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벗어 더니는 신발, 여기 저기 걸어
놓거나 의자 위에 벗어 놓는 옷가지에서 시작하여 공동 세면장의 그 더러움에
이르면 나는 거의 참기 어려운 구역질을 느꼈다. 그리고 거기에ㅡ 밑그림처럼
은은히 떠오르는 고모의 모습이 있었다. 조용조용 사락사락 움직이면서도 어느
곳 하나 어지럽거나 더러운 것을 보아 넘기지 못하던 고모와 나, 그 우리의
하루하루, 그것은 얼마나 정갈했고 사람다웠던가.
학교가 끝나면 도서관으로 가거나 아니면 하숙집과는 반대쪽에 있는 강가로
나가는 일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혼자서.
"넌 참 오빠를 닮았어."
그 강가에서 어느 저녁 무렵에 나는 그렇게 말하던 고모를 떠올렸다. 어렸을
때 나는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아버지와 내가 닮았다는 말은 차라리 어떤 신비스러움까지 내게
불러일으켰다. 아버지는 내 기억 속에서 자유로웠다. 그는 때로는 작아졌다가
때로는 커졌고, 아주 멀리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하다가 때로는 나를
어디선가에서 지켜보고 있는 듯이 가깝게 다가와 주기도 했으니까.
음식을 먹을 때도, 말을 할 때도, 때로는 외출에서 돌아오며 오줌이 마려워서
집 안으로 뛰어들 때도 고모는 그런 말을 했었다.
"오빠도 그랬단다. 늘. 야 비켜, 나 오줌 마렵단 말이다, 하면서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곤 했어."
강가에서 그 황혼 속으로 사라져 가는 산과 먼 도시의 외곽과 강물을
가로지르고 있는 철교를 바라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아버지는 내
안에서 만들어지지도 않으며, 그에 대한 어떤 기억이 되살아 날 수도 없으며,
나는 혼자라는 것을.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잃어버린 게 아니라는 걸, 아버지는
나를 두고 혼자 갔을 뿐이라는 걸. 간 사람은 아버지일 뿐 나와는 아무 연관도
없다는 걸.
그러므로 내가 잃어버리지 않아도 나는 많은 것을 잃으면 살아 갈 수밖에
없으리라는 걸 나는 또한 느끼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내 하루하루는 상실,
상실, 상실로 이어져온 것은 아닐까.
학교 3층에 있는 도서관은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옥상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떨어져 가는 저녁해를 나는 그 옥상에서 바라보곤 했다. 도서관에서
내가 학과 공부를 한 건 아니었다. 대체로 많은 시간은 외국 소설을 읽는 것과
화집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보냈다. 그 가운데서도 더 많은 시간을 나는 서양
명화의 화집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것마저 시들한 날이면 학교를 나와 하숙집과는 방향이 다른 반대편
국도를 걸어서 강으로 나갔다. 그 강가에서 나는 저녁 무렵 안개가 내리거나
황혼 속으로 해가 떨어져 갈 때까지 서성거렸다. 그리고 어둑어둑해진 길을
걸어 돌아오면 하숙집에서는 이미 저녁밥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나는 혼자
하숙집 아줌마가 차려 주는 밥을 먹었다.
"학생, 무슨 일이 있어? 요즘은 왜 그러헤 늦어? 별일 없으면 제발 식사 때
좀 와요. 상 따로 차리는 게 얼마나 손가는 일인 줄 알어?"
아줌마의 그런 불평이 나에게는 공허한 바람소리로 스치고 지나갔다.
다음날도 나는 강으로 갔고, 해가 떨어질 때까지 서성거렸다. 강물에 돌을
던지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때로는 돌을 줍기도 하면서. 그리고 하숙으로
돌아와서 나는 말했다.
"저 밥 먹고 들어왔습니다."
학교 수업은 아무 즐거움이 없는 시간의 고리들이었다. 캄캄하고 둥그런 통
속을 기어 나가듯이 나는 한 시간 한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국어가, 수학1이,
화학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 가운데 좋아했더 과목이라면 겨우 세계사와 기하
정도였다.
그 무렵 나는 이상스레 화가 폴 고갱에게 빨려 들어가 있었다. 그 나이의
학생들이 좋아하는 화가란 대개가 고갱보다는 고흐였고 그리고 샤갈이라든가
마리 로랑생이라든가는 아니었을까. 깨끗하고 회사하고 서정적인 그 그림들을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는 달리 어딘가 버림받은
사람들의 죄 없음을 그려 내고 있는 것만 같은 고갱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생애, 타이티에서 문명을 등지고 살아갔던 그를 생각하면
가만히 한숨이 나왔다. 그의 그림에 점점 더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고갱이
그려낸 그 흙빛의 여인들이 너무 너무 좋아서 화집을 펴놓고 오래오래 바라보곤
했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읽은 고갱의 아들이 쓴 그의 아버지에 대한 전기에는
이런 말이 나왔다.
"여덟 살 때 처음 아버지를 만났을 때, 내가 왜 이 낯선 사나이의 아들이어야
하는지를 나는 어떻게;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갱은 그렇게 살았던 것이다. 지금 내게 누군가가 나타나 내가 네
아버지다라고 한다면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책을 덮고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반짝거리면서 혹은 아프게 찌르면서라도 깨어진 조그만 유리 조각으로나마 남아
있었으면 했지만 나에게는 그런 작은 기억조차 없었다.
첫 장마가 개면서 매일 핏빛으로 붉게 노을이 지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내가 늘 찾아가곤 하던 그 냇가에 들어와 있는 침입자를
보았다. 그랬다. 그것은 침입자였다. 그 곳은 언제나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그렇게 한적한 곳이었다.
그 침입자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내가 앉아
있고 하던 바로 그 자갈밭에서.
어떻게 내가 앉아 있고 하던 자리에 누군가가 와 있을 수 있다는 건가. 왜
하필이면 내가 가 앉곤 하던 자리에 이젤을 버티자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건가,
저 여자는.
무언가 숨겨 두었던 아주 귀중한 것을 빼앗긴 것 같은 허전함으로 그날 나는
일찍 하숙으로 돌아갔다. 냇가를 떠나며 바라보니 여자는 이젤 옆에 앉아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다음에 그 곳을 찾았을 때 그녀는 없었다. 어쩌다가 여길 왔던 거라
생각하며 나는 여자가 이젤을 세우고 그림을 그리던 내 자리로 가보았다.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나는 발로 자갈들을 휘저어 놓았다.
그리고 중간 시험이 끝나고 나서 그 냇가에 나갔을 때 나는 다시 그녀를
만나야 했다. 이번에도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서 며칠,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리고 하루쯤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는 또 그 다음날, 그녀는 내가 학교를 끝내고 냇가로 나가면 이미 거기에
와 있었다. 하오의 그 냇가, 서서히 황혼에 물들기 시작하면서 푸른 배추밭도
잿빛으로 변해 가는 저녁 무렵까지를 그녀는 거기서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해서 어느 날 나에게는 냇가로 나가는 일에...마치 어느 봄날 아침
불쑥 흙을 헤집고 화단에 솟아올라 있는 달리아싹을 만나듯이 또 하나의 일이
덧붙여져 버렸다. 오늘도 그 여자가 나와 있을까 아닐까. 나는 냇가로 나가면서
그렇게 나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드넓은 서부를 백인들에게 다 빼앗겨 버린 인디언처럼,
아니면 농토를 팔아 치우고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어느 원주민처럼 그렇게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내가 그녀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보기로 한 건,
점령자는 도대체 무엇을 하러 여기에 온 걸까를 살피려는 인디언 같은 마음은
아니었을까.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여인에게 나는 가만가만 다가갔다. 화폭위에는 멀리 강을
건너지르고 있는 빈 철교와 그 너머의 불타는 노을이 그려지고 있었다.
뒷머리를 유난히 짧게 자른 여인의 가냘퍼 보이는 어깨를 나는 그림과 함께
힐끔거렸다. 나는 처음으로 보는 그 유화 물감과 그것을 캔버스에 찍어 바르고
있는 여인의 손을 낯설게 지켜보고서 있었다.
여인이 나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여인은 입꼬리를 올리며 소리 없이
웃어 보였다. 나는 한 손에 가방을 든 채였다.
"중앙고 학생?"
"네"
내 교복을 보고 그녀는 내가 다니는 고등 학교를 알아보았던가 보다. 그뿐,
여자는 다시 캔버스를 향해 돌아앉았다. 그때 황혼이 물든 하늘은 형언하기
힘든 붉은 색이었다. 그러나 캔버스의 5분의 4를 채우고 있는 그림 속의 하늘은
그 붉은 색깔과 달리 노랑에 더 가깝게 처리되어 있었다. 그녀의 움직이는 손과
붓끝을 바라보다가 내가 말했다.
"노오란 하늘이군요."
여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빨간 하늘을 왜 빨갛게 그리지 않냐고 묻고 싶은 거지요?"
이 여자가 나를 바보로 알고 있나 싶었다.
"고갱의 그림에는 노란색을 한 그리스도도 있습니다."
여인이 나를 돌아보며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림을 좋아하나 보지요. 고갱의 그림, <황색의 그리스도>를 다 알다니..."
그때 내 귓불이 붉어졌을까. 여자의 목소리가 천천히 들려왔다.
"옐로란 확산돼 가는,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색이에요. 감싸는 색이지요. 이
밑의 풍경들과 대비시키는 거예요."
그리고 방학이 왔다. 고모가 몇 번이나 편지아 전화로 말했던 대로 나는
이불을 싸가지고 버스에 올랐다.
집으로 돌아온 그 첫날 밤, 모기장 안에 누워서 고모는 물었다.
"그래, 어떻게 지냈니. 아니, 아니. 이렇게 물어서야 무슨 수로 대답을
하겠니. 가만 있어, 옳지 그렇지. 너 거기에서 제일 좋아하게 된 게 뭐니?
선생님도 좋고 친구도 좋고...편지에 보면 도서관을 아주 좋아하나 보던데."
모기장 밖에 켜진 촉수 낮은 전 등을 바라보면서 내가 말했다.
"강가에 나가곤 해요. 강이랄 것도 없는 냇물이지만,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안 가고 그 냇가로 나가요. 거기가 참 좋아요."
"혼자?"
"왜, 이상해요?"
"이상할 거야 없지만.."
잠시 고모는 말이 없었다. 모기 한 마리가 내 머리 쪽 모기장에 붙어 있었다.
저 모기의 눈에 지금 우리가 보일까. 무엇으로 저들은 먹이를 찾아 다니는
걸까. 눈일까 냄새일까. 저들이 우리를 알 수 없듯이 우리도 저들을 모른다.
나는 손으로 가만히 모기장을 흔들었다. 모기는 서둘러 어디론가 날아갔다.
고모가 말을 아끼면서, 천천히 말했다.
"고모는, 네가, 그래 강에 나가는 거야 뭐 어떻겠니, 그렇지만 혼자가 아니라
누구랑 같이 있는, 친구가 많은 아이였으면 좋겠다.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형민아."
"친구요"
"그래"
"차차 생기겠죠 뭐"
아주 거대한 성이 있고, 왕궁처럼 수많은 방들이 거기 있고, 분명히 거기에는
누군가가 있을 텐데 아무리 찾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래서 이방 저방, 이
낭하 저 화랑을 헤매며 소리를 치고 있는 것 같은, 그러나 끝내 나 혼자인 것만
같은... 그런게 저예요. 아시겠어요? 고모는, 이런 나를. 고모에게 등을 돌리며
모기장 쪽으로 돌아누웠다. 내 얼굴 바로 앞 모기장에 모기 한 마리가 달아
붙어 있었다.
나는 모기에게 중얼거렸다. 먹어 보렴. 임마. 날 먹어 보라구.
학교에서 우편으로 보낸 1학기 성적표를 받던 날이었다. 내 성적은 반에서도
바닥을 기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는 다른 책을 보았고, 시험 공부 같은 걸 해본
적도 없는 나보다도 더 형편없는 성적을 받아서 나를 꼴찌의 자리에 있지
못하도록 밀어낸 녀석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 애들은 무얼 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는 걸까. 너무나 당연한 내 성적보다도 나는 그것이 더 궁금했다.
그날 저녁 무렵 고모와 나는 천천히 골목을 걸었다. 과일 장수가 세워 놓은
리어카 앞을 지나 우리는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미끄럼틀이며 그네가 있는
어린이 놀이터를 향해 우리는 약속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놀라워하기보다 오히려 고모는 슬퍼하는 것 같았다. 그 한심한 성적표에 화를
냈다면 차라리 나는 마음이 편했으리라. 그러나 고모가 내게 보여 준 건
슬픔이었다. 그리고 그 슬픔을 호두 껍질처럼 딱딱하게 감싸고 있는 절망감이
나를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고모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결국 넌 겨우 그 정도의 아이였니? 이제 이
고모와 넌 어떻게 해야 하니.
어린이 놀이터 안으로 들어갔을 때, 쥘부채를 펴 가슴에 부치면서 고모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지 않고서야...어떻게 네 성적이 그럴 수가 있니."
"공부할게요"
"공부할게요 하는 걸 보니까 그 동안 공부를 안 한 건 아나 보구나."
"알아요. 고모. 나 공부 안했어요."
"이 뻔뻔한 녀석 좀 봐."
어이없는 얼굴로 고모가 웃었다.
부채를 접고 나서 그네를 타고 있는 여자애들을 바라보면서 고모가 말했다.
"난 넌 기르면서 한 번도 속썩어 본 적이 없는데...이번엔 참 속상하구나.
알아, 이 녀석아? 고모가 속상하는 거."
"나 때문에 고모 속상할 거 없어요."
"그게 하고 싶다고 되고, 안 하고 싶다고 안 되고 그러는 거냐."
나는 몸을 돌려 고모를 내려다보았다. 빗어 넘겨서 뒤로 묶은 고모의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보였다.
맞아요, 고모. 자기를 넘어서는 거 그런게 있는 거예요. 학교, 선생님, 성적,
아이들, 교실. 그 어느 것도 전 어떻게도 견디질 못하겠어요. 나도 그래요. 나
자신이라는 거. 그걸 어떻게도 견디질 못하겠는 거예요.
"하숙을 옮겨 줄까? 내가 봐도 그 집은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더라. 방이 바로
골목에 붙어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 발소리도 다 들리고."
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고모. 사람들의 발소리가 어때서요.
아 이렇게 늦게 돌아가는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어디에 살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 발소리를 듣고 있자면 눈가에 눈물이 맺힐 때도 있었던
걸요.
내가 말했다.
"자취를 하고 싶어요."
"자취? 네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일이구나. 성적이 그런 판에 자취를 하겠다니. 공부를 해야 하니까
자취를 하고 있다가도 하숙으로 옮겨야 할 텐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그때 고모가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이제 나는 고모와
함께 잠을 자고, 고모와 함께 밥을 먹던 그 아이는 아니었다. 나는 남자였고,
내 안에서는 자유라든가 생명이라든가 그리고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수업이라든가 성적이라든가 시험이라는 것과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였다. 아직 햇살이 남아 있는데도 놀이터 옆
풀밭에서는 찌륵찌륵거리며 풀벌레가 울었다. 부채를 접어 든 채 고모는 말이
없었다. 내가 말했다.
"하숙집에서 주욱 걸어 올라가면 조그만 다리가 나와요. 그 다리 밑을 흐르는
개울이 있는데, 거길 잘 가 있곤 해요. 학교가 끝나면요. 내가 거기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요, 고모?"
"집 생각하며 쫄쫄 짜냐? 무슨 생각을 하는데?"
"자살"
나는 가만히 말했다. 그리고 고모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걸음을 멈춘 고모는
잠시 후 눈길을 피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랬구나."
그뿐 고모는 더 말이 없었다. 나는 마치 무슨 배신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골목 끝에서 유모차를 밀며 여자 하나가 올라왔다. 잠시 후 고모가 말했다.
"절에 가서 중이 되고 싶으냐? 그 나이 때 하는 생각이란 다 그렇단다.
중이나 될까. 자살이나 할까. 다 그러는 거란다."
고모의 말에, 그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에 놀란 건 내 쪽이었다.
고모가 말했다.
"고모도 그랬다, 네 나이에."
여름 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이제 강가로 나가지
않았다.
'잘할게요.'
다시 학교로 가기 위해 짐을 싸던 날 밤, 마루에 내놓은 커다란 가방과
깨끗이 빨아 시친 이불 보따리를 내다보면서 내가 한 말이었다.
'힘들 땐 연락하거라. 내가 올라가 볼 테니.'
'괜찮아요. 이제 좀 나아지지 않겠어요, 마음도 좀 가라앉고 왜 그래야
했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고 그래요.'
'그러면야 얼마나 좋겠니.'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고모는 가만히 한숨을 쉬듯 말했다.
'네가 네 힘으로 이겨내야 하는 건데.'
나는 고모를 바라보면서 애써 밝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아마 처음 혼자서 밖에 나가 있다가 보니까 그랬을 거예요.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적응한다는 말. 그런 거겠죠. 너무 걱정 마세요."
'난, 고모는 걱정을 하는 게 아냐. 네가 아까워서 그러지. 공부에서 마음이
떠나는 네가 아까워서 그러는 거지.'
그때의 그 아깝다는 그 말보다 더 고모의 슬픔을 응축해 놓을 말은 없었으리라.
나는 모깃불이 타고 있는 마당을 내다보면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고모의 아까움을 위해서, 고모의 슬픔을 위해서. 나는 말뚝을 박듯이 내 가슴에
그 말들을 쿵쿵 박아 내리고 있었다. 자취방을 구해서 짐을 옮겼다. 개학을
하고 이틀이 지나서였다. 멀리 돌아다닐 것도 없이 방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셋방을 찾아 나섰던 동네가 나지막한 시네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택 단지랄 것까지는 없었지만 집 장사들의 새 집들이 들어서고
있던 마을이었다. 학교까지의 거리가 먼저 있던 하숙집보다 좀 멀기는 했다. 그
리고 방향도 달랐기 때문에 아침 등교 길이면 로터리를 지나 학교로 가야 했다.
거기서 나는 매일 무리 지어 학교로 가는 여학생들을 만나야 했다.
그녀들은 더러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는
고모뿐 여동생도 누나도 없이 자라야 했던 나로서는 그 여학생들의 모습이
그렇게 낯설어 보일 수가 없었다. 저 아이들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 애들의 조그맣게 튀어나온 요가슴을 몰래 흠쳐보면서 나는
그들이 신기하게까지 느껴졌다.
자취 생활의 고됨과 혼자 있어도 좋은 자유는 서로서로 톱니처럼 물리면서
하루하루 견딜 만한 것이 되어갔다. 그리고 어느 토요일 나는 면도칼을 숨겨
주머니에 넣고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관외 대출이 되지 않는 고갱
화집에서 내가 좋아하던 그림 하나를 오려 냈다. 노트에 그것을 숨겨 가지고
도서관을 나왔을 때 목덜미에서는 땀이 흘렀다. 나는 그 그림을 책상 앞에
붙였다. 그것은 거의 흙빛에 가까운 여인들의 그림이었다. 이 땅에 태어나
문명이라는 이름의 때가 끼기 이전의 사람들, 그 그림 속의 여인들은 그렇게
보였다. 순수함, 태초의 모습, 아무것에도 더럽혀지지 않은 그 무죄. 아침에
일어나 그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곤 하면서도, 나는 이제 한 사내로 자라 있는
남성으로서의 어떤 성욕도 그 그림 속의 벌거벗은 여인들에게서 느끼지 못했다.
차라리 그것은 '비너스의 탄생'이나 그 어떤 성화 속에서 보여지는 여인들의
나신보다도 더 순결해 보였다.
그녀들의 몸에서는 흙 냄새가, 자연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부도를 내고 도망 와 있는 사람이래요. 그래서 살림이 아무것도 없잖아.
빚쟁이들 피해서 와 있는 거죠 뭐." 이웃집 아주머니들의 수군거림에 의하면
내가 세든 집은 그런 집이었다. 남자는 대체로 집에 없었다. 한 주일이 넘게
집을 비웠다 나타나서는 바로 또 집을 나가곤 했다. 다만 남자가 집에 없었지만
서른 중반 가량의 부인은 늘 짙게 화장을 하고 지냈다. 일요일 같은 날 종일
집안에서 텔레비전을 켜놓고 지내면서도 여자는 그렇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 내
방은 대문 쪽으로 문이 나 있는 끝방이었다. 다만 화장실에 가려면 마루를 지나
주인 여자가 쓰는 안방 옆을 지나가야 했다. 그 방 방문은 미닫이로, 문에
교과서 크기만한 유리를 붙여 놓아서 안에서 밖을 내다보게 되어 있었다.
주인 여자는 일찍 잠이 들어서 텔레비전의 9시 뉴스가 시작되면 방의 불이
꺼졌다. 다만 밤에 마루를 지나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어쩌다 그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었다. 그럴때 얼핏 들여다본 그 작은 유리 저편에서
여자는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기도 했고 편지라도 쓰는지 무엇인가를 적고
있기도 했다.
처음 그 모습을 본 건 아직 늦더위가 남아 있던 초가을이었다. 엎드려 있는
여자의, 환한 형광등 불빛 아래 윗옷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자의 어깨와
겨드랑과 그리고 등이 바라보였다. 꽃무늬 얼룩진 이불은 그녀의 허리께에
걸쳐져 있었다. 그녀의 그 희디횐 어캐와 등을 바라보며 나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발소리를 죽이며 화장실로 갔던 나는 어떻게 마루를 지나 내방으로
가야 할지 몰라 화장실에서 서성거렸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발끝으로 걸으며
나는 화장실을 나왔다. 마루를 건너갔다. 환하게 새어 나온 불및이 마루 위에
깔리고 있었다. 내 방문 요까지가 저만큼 남아 있을 때 나는 참을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내 눈길이 여자가 누워 있던 방으로가 꽂혔다. 여자는 갈
때와는 달리 천장을 쳐다보며 누워 있었고 유리 가득 그녀의 얼굴이
바라보였다.
놀라며 내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간 나는 등뒤로 문을 닫고 얼마를 그렇게 서
있었다. 책상 앞에 붙여 놓은 고갱의 그림 속에서 여인들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지 말라고 했잖아. 내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밀어내며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여자는 누워 있었어. 그렇다면 ... .여자는
젖을 드러내고 누워 있을지도 몰라. 분명히 윗옷을 입지 않고 있었으니까. 다른
목소리가 가슴을 가로질러 갔다. 너 왜 이러니. 주인 여자를 훔쳐봐서 뭘
어쩌겠다는 거니.
다른 목소리가 이번에는 그 목소리를 걷어차듯 말했다. 여자의 젖이란
말이다. 문을 조금만 열면 그 틈으로 보일 거란 말이다. 얇은 여름 잠옷 속에서
내 성기가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입술을 캐물며 나는 책상 앞으로 갔고 고갱의
그 여인들을 따라보았다. 흙빛의 여인들. 그 어느 곳도 아름답다거나
그윽하다거나 황흘해 보이지 않는 여인등 그냥 거기 그렇게 ......앉아 있는
여인들.
불을 끄고, 나는 깔아 놓았던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썼다. 벽 쪽으로 돌아누우며 나는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남은 숙제는
내일 아침에 해. 안 하면 어떻겠어. 그까짓 숙제라는 게 도대체 뭐겠어.
부도를 내고 숨어다닌다던 그 남편이 돌아온 다음날 아침이었다. 주번이라
다른 날보다 일찍 학교로 가기 위해 잠을 깬 나는 안방에서 들려 오는 여자의
그 울음 소리를 들었다. 흐느끼는 것 같은, 신음 소리 같은, 여자의 낮은 울음
소리는 조금씩 높아졌고 마침내 비명 소리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 순간 그 울음
소리도 비명도 거친 숨소리와 함께 멎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려던 나는 안방에서
건너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 아침이면 어떨 때 미치겠어.
왜?
자기가 아침마다 해줘 버릇해서 그러나 봐.
여자가 키들키들 웃는 소리와 무슨 간지럼을 참지 못해 하는 것 같은 기름기
흐르는 목소리가 마루를 건너서 들려 왔다.
그러다 바람나는 거 아냐?
바람 같은 소리하고 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자기나 조심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조금 빠른 목소리로 여자가 남자를 불렀다.
있지, 있지. 저 옆집 여자 되게 웃긴다. 글쎄 남자가 출장 가잖아. 그러면
여자가 남핀 거기에다가 뭐라고 글씨를 쓴댄다. 거기다 고씨를 써?
으응. 거기다가 자기 이름도 써놓고 그런대. 출장 가서 바람 못 피우게.
키들키들 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뭘로 쓰냐니까, 수성 사인펜으로 쓴대. 그래야 물이 묻었다 하면
지워지기 때문에. 무슨 일 치면 당장 알 수 있대. 별 미친 것들 다 있네, 아니,
목욕하면 다 지워질 거 아냐. 그러니까 출장 가서는 목욕도 하지 말라는 거지,
아이구. 야. 그러고 사느니 죽지. 아니 ......제 X대가리에다가 여자 이름을
써가지고 돌아다닌단 말야. 도대체 결혼한 지 얼마나 됐는데?
신혼이지 뭐. 결혼해서 아직 1년도 안 됐다는데.
거, 그 억자 어떻게 생겼어.
조회가 시작되었다. 언제나처럼 국민 의례는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로
이어졌다. 그리고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다. 강당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날따라 교장 선생님은 화가 많이 나, 마이크를 잡고 소리치고
있었다.
'담배 그렇게 피우고 싶거든 화장실이나 옥상에 올라가 피우지 말고,
교장실로 와서 피워요. 얼마든지 피우게 해주겠어요. 그리고 학생 여러분들이
원한다면 흡연 장소도 정해 주=K어요. 젊은 청소년들이 화장실 그 더러운 냄새
나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선생님은 용서할 수도 없고 그냥 보고
있을 수도 없어요.
우리 반에도 담배를 꾀우는 녀석들은 있었다. 그떻지만 담배를 피운다는 건.
피우는 그 애들만의 문제였다. 그들이 3교시가 끝나는 벨이 울리기 무섭게
화장실로 들어가 담배를 피워대며 화장실을 점거함으로 해서 어느 설사 난
녀석이 발을 동동 구른다 해도 그건 그 설사와 담배 둘 사이의 문제였다.
그들은 같은 반 우리에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는 일이 없었다.
'어떻게 그 더럽고 냄새 나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쉬는 시간 내내 버티고
있어야 하는지, 나는 정말 알 수가 없어요.'
뒤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자기 아들한테 물어 보지.'
교장 선생님에게는 고3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도 담배를 피웠다. 교장 훈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나는 우울하게 창 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목소리를 바꾼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들려 왔다.
'꼬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새로 오신 선생님 한분을
소개하겠습니다. 그 동안 미술 선생님의 갑작스런 교통 사고로 여러분들의
공부에 지장이 컸지요t 바로 그 자리를 맡아 여러분과 함께 공부할, 미술을
담당해 주실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은 높은 재능으로 이미 여러 전시회에서
수상을 한 바도 있는 분이십니다. 특히 여러분이 아주 좋아할 여
선생님입니다." 3학년 쪽에서 와아 하며 휘파람 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단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교장과 교무 주임 선생님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자 올라오세요. 여러분, 강신애 선생님이십니다.'
이번에는 3학년만이 아니라 전교생이 와아 하며 휘파람 소리를 냈다. 검정
투피스 차림의 여자가 계단을 올라 단상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바라보였다. 교장
선생님 옆에 선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학생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가
고개를 드는 것을 바라보는 내 입술이 나도 오르게 천천히 벌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인사만을 한 채 단 아래로 내려가려고 몸을 돌렸다. 교장이 말했다
"한말씀 하시지요, 강 선생님."
3학년들이 거세게 휘파람을 불어댔고, 여선생이 그냥 내려가겠다고 손을
내젓는 사이 학생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녀가 되돌아와서 천천히
마이크를 잡고 섰다.
'반갑습니다. 여러분과 만나게 되어 기뽑니다. 이 만남이 뜻깊은 것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그녀가 다시 단상을 걸어서 밑으로 내려오는 동안,
나는 아주 느리게 돌아가는 화면을 바라보듯 단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리
없이 나는 부르짖었다. 저 여자는, 맞아, 그 여자야. 아니 저 선생님은. 맞다,
강가에서 황혼을 그리곤 하던 그 여자야.
겨울 갈매기
저녁이었다. 여관을 나서는 그에게 검정 양복을 입은 종업원이 말했다.
'저, 손님. 305호시죠?'
'네.'
형민이 걸음을 멈추면서 그를 돌아보았다.
"잠깐 기다리세요. 어떤 여자 뿐이 쪽지를 놓고 갔습니다."
쪽지. 형민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검정 양복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쪽지.
호텔에서라면 쪽지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메일이 와 있습니다, 혹은 메모라고도
말하겠지. 그렇구나. 여긴 섬이다. 그것도 아주 먼 섬이다.
'여기 있습니다.'
검정 양복이 하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3O5라는 방 번호 밑에 흘려쓴
영자로 'from 유희 이라고 적혀 있었다. from이라는 영어 글씨가 갑자기 그에게
낮설게 느껴졌다. 종이를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그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여관을 나서면서 형민은 주머니에 든 쪽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쪽지를
남겼다면 뭘까. 문득 그녀가 했던 말을 형민은 떠올렸다. 이 섬은 그냥 섬이
아니야. 마지막 섬이지. 이 섬에서는 더 어디로 갈 데가 없어.
마지막 섬.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며 형민은 길가에 쌓여 있는 눈이 바닷바람에
휘몰리며 그치며 기온이 많이 내려가 있었다. 발 밑에서가 뽀드득거렸다.
형민은 주머니에서 유희가 놓아두고 간 메모지를 꺼냈다, 장갑 낀 손으로
그는 종이를 펼쳐 보았다.
<그냥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기다리겠어.> 그리고 전화 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 섬까지 홀러 오기 전에 그녀는 무엇이었을까. 형민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메모지를 접어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우수한 경리 여사원은
글씨를 또박또박 바르고 예쁘게 쓴다면 그녀는 분명 우수한 경리 사원이었을 것
같았다. 동글게 돌아간 글씨도, 전화번호를 적은 아라비아 숫자도 그녁가 다만
세상을 떠돌다가 여기에 와 머물고 있다는 상상을 가볍게 밀어내고 있었다.
형민은 눈가루가 날리는 거리를 두리번거리면서 공중 전화를 찾았다.
밤이었다. 벌판에는 허옇게 눈이 쌓여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눈가루를
날리며 지나갔다. 길 한복판에 차가 멈춰 섰다. 차창에 앉아 있는 형민에게
유희가 말했다.
'내려. 다 왔어,'
차를 내렸다. 밖은 캄캄한 늪지 같았다. 그 어둠의 한가운데 그들을 버리기
위해 왔던 것처럼 택시는 두 사람을 내던지듯 남겨 놓고 눈가루를 날리며
멀어져 갔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마지막 불빛처럼 그는 사라져 가는 택시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해변의 모퉁이를 돌아 불빛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살아요?"
형민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물었다. 어둠 속으로 바라본 곳은 어디에도
사람이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왜? 이상해?"
'여긴 누가 살고 있는 데가 아니라,. ...뭐랄까, 그냥 오줌이나 한번 누기
위해서 차를 내리는 그런 데 같잖아요."
유희가 킥 하고 짧게 웃었다. 그녁는 어둠 한 쪽을 가리켰다.
'저쪽이야, 따라와.'
그녀가 가리킨 쪽에 어둠의 덩어리 같은 숲이 희미하게 바라보였다. 밤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다만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숲인지 아니면 잔소나무 같은 것들로
뒤덮인 언덕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유희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서걱서걱
눈이 밟히는 발소리가 마치, 따라와 괜찮아 하듯이 들려 왔다.
"이거 좀 들어 줄래?"
그녀가 뒤를 돌아보면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내가 살던 데야. 거기나 함께 갈까 해서 연락했던 거야. 유희가 그런 말을
하면서 가게에 들러 샀던 물건들이었다. 물건을 사러 가며 그녀는 말했었다.
커피는 있을 테지만 프림이 떨어졌을지도 몰라. 저번에 갔을 때도 그냥 마신 거
같거든.
커피를 그냥 마신다고 해서 무슨 위장병이 생기는 것도 아닐테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형민은 그때 이것저것 물건을 고르는 여자를 바라보았었다.
살았던 곳이라고 그녀는 분명히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살고 있지 않은 집이라는 말이었다. 빈 집이 하나있나 보다 했는데, 이렇게
동떨어진 데였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형민은 유희가 내미는 커다란 비닐
봉지를 받아들었다. 안에 든 물건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짤그락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것은 술병들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어둠의 덩어리같이 바라보이던 숲이 가까워지면서 갑자기 바람소리가 들렸다.
눈이 밟히는 소리가 거기다. 유희가 걸음을 멈추면서 말했다.
"다 왔어. 저기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저쪽을 형민은 바라보았다.
저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아, 다 왔구나 하고 생각해. 여길 오면 집은 안
보여도 먼저 들리는 게 언제나 저 바람소리거든. 이 캄캄한 데서, 이렇게
외따로 떨어져서, 무섭지도 않았던가.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을 형민은 참았다.
언제나 캄캄한 것은 아니겠지. 낮에는 캄캄할 리가 없지. 그리고 외따로 떨어져
있다는 게 언제나 무섭게 만드는 것만은 아닐테지. 지금은 겨울이다. 겨울에는
함께 있어도 때때로 외따로 떨어져 있는 듯싶고, 한낮에도 캄캄하게 느껴져서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을 때도 있으니까.
여름에는 어떤 곳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뒤따라 걷고 있는 형민에게 유희가
말했다.
'저 집이야.'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갑자기 화면이 바뀌듯이 그렇게 짐 한 채가 서 있었다.
숲도 눈 쌓인 길도 그리고 어둡기도 마찬가지였다. 길이 꺾이는가 하자, 집 한
채가 마치 환한 불및 속에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그들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허리 높이로 둘러쳐진 울타리 사이로 조그만 문이 있었다. 유희는
덜그럭거리면서 문에 얽어 놓은 줄을 풀었다. 찌그덕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문이 열렸다. 바람소리. 발소리. 문을 여는 소리. 주변의 적막함 때문에 형민은
갑자기 이 세상의 소리들이 몇 배는 커져 버린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조그만 마당을 지나가서 계단을 올라가 유희가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uu1걱거리며 다시 문소리가 들리고, 현관으로 들어선 그녀가 불을 켰다. 불빛이
쏟아져 나오면서 갑자기 마당이 환하게 드러났다. 거실로 들어간 그녀가 커튼을
열면서 밖을 내다보았을 때까지 형민은 마당 가쎄 서 있었다.
"거기서 뭐 해, 들어오지 않고.'
거실은 이내 따뜻해졌다. 어디서 이런 난로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요즘은 거의 모습을 감춘 무쇠 난로였다. 위로난 뚜껑을 열고 장작을 집어넣고,
밑으로는 공기가 들어가도록 된 팔랑개비 모양의 구멍이 있는 그 무쇠 난로.
그것은 어린 시절 고모가 나가던 학교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난로에 불을 지피랴, 이방 저방 문을 열어 놓으랴......그렇게 오가면서
유희는 마치 관광객을 안내하는 가이드처럼 말했다. 여기서 그 남자랑 살았어.
그 남자가 혼자 살던 집인데, 병원에 있을 때 어느 날 그러는 거야. 그 집은 네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다. 줄 게 그거밖에 없어 미안하다. 참, 뭐 이런
남자가 있나 싶드라. 마지막에는 더럽게 고생하다가 갔는데, 암이라는게 그렇게
무서운지 몰랐어. 사람을 보통 아프게 해야지. 그렇지만 어떡해. 주욱, 한시도
안 떠나고 그런 사람 코을 지켰어. 먹는 거 다 떠먹이고 변이랑 뭐 그런 거 다
받아내고 물수건으로 닦아 주고, 머리 감기고.'
난로만 옛날 거지, 골동 취미가 있었던 남자는 아니었던 거 같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형민은 여기서 살았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여기 살았다던
남자의 냄새를 별로 느낄 수 없었다. 집안의 구조부터가 그랬다. 집은 도시
변두리 주택가에서 흔히 볼수 있는 보통 단층 주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집
안의 구조도 거실을 가운데 하고 방과 부엌과 욕실이 돌아가며 붙어 있는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유희가 부억에서 무언가를 준비하는지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달그락거리며
들려 왔다. 형민이 말했다.
'여기서 살았나요? 두 분이.'
'그 남자가 살던 집이야. 있던 물건도 거의 그대로고 함께 살았다면서요?
하고 물으려다가 형민은 그만두었다. 둘이 살기 더 이전에 남자가 혼자
마련해서 살던 집이라는 걸 유희가 애써 말하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밖으로 나오는 그녀에게 형민이 말했다.
'괴팍한 분은 아니었나 봐요. 그 남자.'
'왜?"
'집이 뭔가 그런 느낌을 줘요.
'이런 외딴 언덕에 와서 혼자 살았는데?'
'그건 그렇지만 집 모양은 그냥 평범하잖아요. 뭘 꾸미며 산거 같지도 않고.
그냥 이 집처럼 생긴 사람이었다면. 뭐랄까, 편한 남자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다 드는데요."
난로 앞으로 다가오며 유희가 물 묻은 손을 닦았다. 그녀가 소리 없이
웃었다.
'잘 봤는지도 모르지. 이 집같이 생긴 남자. 무슨 소린가 하면 ......멀리서
보면 수염도 머리도 길게 기르고 그러니 아주 이상한 남자처럼 보일 수밖에
없어. 이렇게 외따로 떨어져 있는 이 집처럼 말야. 그렇지만 안으로 들어와
보면 그 남자도 이 집 같았어. 세 끼 열심히 찾아 먹고 목욕 잘 다니고 약속 잘
지키고."
유희가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술병과 마른안주들을 쟁반에 담아 가지고
나왔다. 이 집에서 살았다던 그 남자가 그랬듯이, 잔과 안주를 들고 난로 옆을
오가는 여자도 술집에서 만나던 유희는 아니었다. 배에서 낮선 남자에게 담배를
빌리고, 횟집에서 술을 마시며 울던 여자도 아니었다. 차 안을 가득하게 향수
냄새를 풍기던 여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오늘따라 그녀가 입고 있는 발등에 와 닿게 긴 스커트며 헐렁하고 높은 목을
한 셔츠만이, 전연 다른 옷차림인데도 어딘가 이상스레 그때의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저쪽도 방인가 보죠?'
'아, 거기가 조금 달라. 그 사람이 잠도 자고 술도 먹고 하면서 혼자 쓰던
방이야. 이 집에서 제일 크고 제일 지저분하고 그 사람에게는 제일 중요한
데였을 거야.'
형민은 그때 제일 묻고 싶었던 말을 물었다.
'뭘 하던 사람이었는데요?'
'아무것도 안 했어.'
'아무것도 안 하고 어떻게 먹고 살아요?돈은 그럼 유희 씨가 벌었습니까?'
유희가 갑자기 멈춰 버린 화면처럼 그 자리에 섰다.
'그 남자가 한 말 그대로 할까. 난 고생도 남들 몇 번 태어나야 할 거 만큼
했다. 울어도 남들 몇 번 태어나야 할 만큼 울었다. 돈도 그떻게 벌어봤었고.
또 그렇게 날렸어. 이젠 좀 아무것도 안 하고 살 거다.'
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술병과 병따개를 들고 다가왔다. 둘은 난로
옆으로 나란히 앉았다. 거실에는 몇 개의 의자가 있었는데 그것들은 세트로 된
것이 아니라 제각각 다른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난로 위에 마른 북어를 굽기 시작했다. 형민은 찬 맥주를 따랐고
여자는 이마를 찡그리더니 작은 소주잔을 집어 들었다.
'난 소주가 좋아. 소주로 할래.'
둘은 잔을 부딪쳤다. 소주를 한 모금 천장을 쳐다보면서 흐응 하고 웃었다.
'이 집에 남자가 온 거 처음이야. 그 사람 죽고 나서. 그 사람이 보고
있으면, 미친년 하면서 웃겠다."
여자의 그 말이, 지금은 죽은 한 남자가 살다가 남겨 두고 간집에 그 남자와
살던 여자와 함께 있다는 생각을 일깨웠기 때문일까. 형민은 어딘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때 그 술집에서 들려 주었던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형민은 기억했다. 그
남자에게 여자는 어느 날 말했다고 했다. 난 더 갈데가 없다고. 한 여자가
헤매어 갈 곳이 섬 다음에도 무엇이 남아 있겠냐고. 그런 여자에게 한 남자가
말했다고 했다. 더 갈 곳이 없다는 그 여자에게 말했다고 했다. 날아가면 되지
않냐구. 날아가 버리면 되지 않냐구. 그러나 자기에게는 날아갈 날개가
없었다고 여자는 대답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 이 여자는 이상스레 한 쪽 눈에서만 눈물이
넘쳐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나는 그 눈물이 마치 흉터 같다고
생각했었지. 짙게 화장한 얼굴에 줄을 만들며 그녀의 입꼬리로 흘러내려 가던
그 눈물. 마치 조각도로 표면을 파내듯이 얼굴의 화장을 지우며 흘러내리며
들어가던 그 눈물.
'전에 했던 말 생각나요?'
'무슨 말?
'그 남자랑 살았던 이야기 말입니다. 누더기로 누더기를 깁듯이 그렇게 만난
사이였다고.
'난 그때 그 말이 어쩌면 유희 씨가 아닌, 그 남자가 한 말일 거라고
믿었었죠.'
'내가 그 얘기까지 했었어? 웬일이람. 별 속이야기를 다했네,'
형민이 그녀의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난 차라리 조금 다른 생각을 했어요. 누더기로 누더기를 깁는 다는 건
상처받은 짐승들끼리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할아 주는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피 흐르는 서로의 상처를 할아 주며 그떻게 응크리고 산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그리고 형민은 덧붙였다.
'그게 어떤 건지를 난 알거든요. 저 세상의 바람. 저 세상의 비. 저 세상의
추위에 떨면서 그러나 두 사람만은 피 홀리는 털짐승처럼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는 거. 그게 어떤 건지를 나는 안다.
그때 유희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널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래서였나 봐."
하나둘 빈 술병이 늘어갔다. 형민은, 마치 이 방에 세 사람이 앉아 있는 거
같아요 하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때 유희가 넘어지듯 의자에서 내려서며
소리쳤다.
'북어가 타버리잖아.'
난로 위에서 구워지고 있던 북어를 집어 유희가 손바닥에 탁탁 털었다. 이
여자에게 중요한 건 뭔가. 여기서 함께 살다 죽은 남자보다도 이 여자에게는
지금 북어가 더 중요한 것만 같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여자는 남자가 간
후에도 그와 함께 살던 이 집을 가구가 놓여 있는 모양 하나도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놓아두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북어를 찢어 접시에 담고 나서 유희가 의자 위로 올라가 앉았다. 그녀는
책상다리를 하듯 앉아 긴 스커트로 두 무릎을 감싸면서 소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 사람을 따라 여길 왔을 때, 묻더라. 같이 살지 않겠냐는 거야. 그래서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 저질로 살자면 살겠다고 했어. 아무렇게나 막
저질로 살자면 살겠다고. 나 고상한 것에는 닭살이 돋는 사람이라구.'
'저질이 어떤 건데요'
'제 꼴에 맞게 사는 거지 뭐 "
'그렇지도 않던걸요. 여관에 메모 써놓은 거 보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알아요.
'from 유희'라고 써 있길래, 이 여자 좀 봐 싶었거든요. 그 많은 말 가운데
하필이면 from이라고 썼을까 하면서요.
'from 유희가 뭐 어때서. 그게 바로 저질이야. 한글로 쓰면 누가 뭐래.
꼴값하는 게 바로 그런 거야. 그게 바로 나 같은 저질이 사는 모양새고.'
자기가 산 삶을 저질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있어 그 저질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 형민은 처음으로 이 섬에 와서 이 여자를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질로 살자면서 우리가 한 게 뭔지 알아. 그 중에 이런 게 있어. 말
만들어내기인데, 한자 풀이야. 가령, 한자의 고사 성어라는 거 있지. 옛날 한문
네 글자로 된 거 말야
내가 소리내어 웃었다.
'고등 학교는 나왔네요. 그런 걸 다 아는 거 보니.`
'나오고 싶어서 나오니? 다니라니까 다니고, 졸업장 주니까 나온 거지.'`
그러고 나서 그녀가 말했다. 한자 풀이란, 그 고사 성어들을 우리 나름대로
풀어 보는 거야. 유명무실이라는 말이 있지, 모양만 그럴듯하고 실속이 없을 때
알아? 돈 잘 벌고 명예도 있어서 그럴듯하지만 밤일은 전연 별볼일 없는 남자.
형민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러면 천만다행이란 뭐냐. 그건, 돈도 못 벌고 아무 능력도 없는 남자가
그거 하나는 끝내 준다, 이럴 때가 바로 천만다행이야."
유희는 웃지도 않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면 금상첨화는 뭔지 알아? 생긴
것도 잘 빠지고 돈도 잘 벌고 그거까지 끝내 주게 해 주는 남자. 알겠어? 그런
한자 풀이나 하고 있었던 게 우리가 사는 거였어. 우린 서로 내기를 하듯이
매일 그런 말들을 생각해 냈어. 아, 이런 것도 있었어. 과일과 여자. 여자를
과일에 비교하는 거였어.
과일과 여자는 두 사람이 함께 만든 거라고 했다. 줄거리는 남자가 만들었고
거기에 장식을 붙인 것은 여자였다. 내용이 이랬다.
남자가 말한다.
1o대의 여자를 과일에 비교하자면 호도와 같다. 딱딱해서 깨기도 힘들고 깨어
봐도 안에 먹을 것도 별로 들어 있는 게 없다.
여자가 덧붙인다.
맞아. 먹기도 힘들고 복잡하기만 하지.
2o대의 여자는 밤이야. 단단한 겉껍질도 있고 떫은 속껍질도 있어. 그러나
벗기기에 그렇게 힘든 건 아냐. 구워 먹어도 맛있고 삶아 먹어도 좋고, 어떻게
해도 다 맛있지.
여자가 말한다.
날것으로 먹으면 더 맛있지.
3o대 여자는 뭘까. 그건 수박이야. 칼만 대면 좌악 쪼개지지.
먹는 데 힘들 게 하나도 없어. 달고 시원하고.
그리고......물도 많아.
40대 여자는 석류가 아닐까. 껍질을 벗기느라 애쓸 것도 없으니까. 깨거나
자를 필요도 없어. 저 혼자 이미 좌악 벌어져 있어. 그러다가 여자가 50데가
되면 이건 곶감이지. 껍질이고 뭐고 까거나 벗길 것도 없어. 선반 위에 올려
놓았다가 이따금 꺼내 먹으면 돼. 안 먹어도 그만이지만 먹어 보면 그런데로
맛도 있고 먹을 만도 하지.
그럼 6o대 여자는 뭐야?
6o대? 6o대의 여자라는 건 없어. 60대의 여자는 그건 여자가 아냐.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돌리는 형민에게 여자가 말했다.
"그렇게 살았어 우린.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사람은 아프기 시작했고, l년쯤
아프다가......그 사람은 갔어.' 세운 두 무릎 위에 턱을 얹으면서 여자가
말했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을 통해서 안 게 뭔지 알아? 그 남자가 내게
가르치고 간 게 하나 있다면 그건 사랑이란 거야. 사랑, 그건 생활이 아니라는
거였어. 그 사람은 이런 말을 했어. 함께 살기 시작하고 얼마가 지나서였는데,
그가 말하는 거야. 너와 나는 이제 암컷과 수컷은 아니라고. 무슨 뜻인지 알아?
처음에 우리는 아무데서나 막 잤어. 거실에서도 자고, 목욕탕에서도 자고. 부억
바닥에서도 잤어.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내 스커트 속으로 불쑥 손이
들어오기도 했어. 그러다가 조금씩 그게 변하기 시작했어. 우린 목욕을 하고,
안방에 이불을 깔고 나서야 서로를 안게 되었어, 그때 우리는 알았어. 그
사람도 나도 날개 같은 건 있지도 않고, 있다 해도 우린 이미 날아갈 수가
없다는 걸 말야.'
산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한다는 것이리라. 그리고 사람이 무엇을
한다는 그 행위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먹고 입고 그렇게 살기 위하여 무엇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가 생식 기능이다. 자식을 낳는 일이다. 그
본질에 있어 인간은 이 두 가지의 행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 또한 마찬가지리라. 다만 모든 동물 가운데 인간만이
생식 본능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것이 가지는 즐거움을 위해서 성을
나누어 갖는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성에 그토록 깊이 지배당한다.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추상 명사다. 만질 수도, 바라볼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사랑이 한 남자와 여자의 것으로 좁아질 때 이 추상 명사의
껍질을 둘러싸고 있는 것도 성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이 섹스라고 하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감정은 정열이라는 이성에 대한 황흘한
그리움의 이름으로 도금된다. 이때의 정열은, 이성에 대한 애정과는 다르다. 한
뿌리에서 자란 다른 나뭇가지다.
결혼이라는 이름의 암컷과 수컷의 만남. 그 살아감에는 애정이라는 게 있다.
그러나 애정에는 황홀함이 없다. 그건 생활이다. 서로를 불편하지 않게 하고,
서로 참고 양보해 가는. 그렇게 기대거나 의지하며 살아가는 그것도 사랑의
하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황흘함이란 없다.
서로가 단순한 암컷과 수컷이 되는 것, 생식 행위로서의 관계가 아닌 인간의
행위들, 그것이 섹스며 사랑이다. 그것을 떠받들고 있는 것은 정열이며
본능적인 불타오름이다. 그러나 반한다는거나 황홀해진다는 것이 사라지고 난
그 자리에 자리잡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애정이라는 이름의 생활이다.
애정이란 한 암컷과 수컷이 함께 계속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함께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생활이다.
부엌살림이며 세탁기며 청소를 하기 위한 걸레들이 필요한 곳, 거기에서 성의
황흘함은 사라진다. 결혼에는 그렇게 해서 타성과 습관의 이끼가 자란다. 일상
생활의 냄새가 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황흘한 섹스이다. 침대 옆에
거울이 달린 싸구려 호텔 방과 문 저편에 부엌 싱크대가 바라보이는
콘도미니엄의 침실은 서로 의미가 다르다. 그렇게 해서, 사정은 정액을 통해
많은 체력을 소모시킨다고 이해되었던 고대 사회에서는 특별한 날을 앞두고
섹스는 금기시 되었다. 신을 향해 간절히 기원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몸을
정갈히 한다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금욕적이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전쟁이라든가 커다란 종교적 의식 요에서 금욕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섹스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간에도, 유목민들이 수렵을 위해 떠나야 할 때도
금지되었다. 농경민들에게 있어서는 씨 뿌리는 시기가 그때였다.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도 고기잡이 앞에서도 그랬다.
그러므로 그와 반대가 되는 계절이 되면 옛사람들에게는 난교가 행해졌다.
<새벽입니다. 혼자 돌아갑니다. 어젯밤 이 집에 와서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추억이나 그리움에는 체온이 없다고 말입니다. 최형민>
유희는 안방에서 자고 있을 것이다. 종이를 접어 마치 나비를 박제하듯이
그렇게 방문에 붙여 놓고 형민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밖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난로에 불을 계속 지펴서인지, 담요를 두르고 소파에서 잠을 잤지만 그는 별로
추위를 느끼지 못했었다.
'아, 난 들어가야겠어.'
유희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킨 것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그녀가 말했다.
'추우면 들어와. 옆에서 자도 돼.'
그가 술병을 들어 보였다.
'아직 남았어요.'
그쯤에서 아무 기억이 없었다.
유리창에는 성에가 끼어 있었다. 창으로 다가간 그는 입김을 불어대며
손가락으로 성에를 긁어 냈다. 눈 덮인 마당과 담장 너머의 들판이 조그맣게
바라보였다.
밖으로 나왔다.
어젯밤 이곳으로 오며 캄캄한 어둠에 가려져 있던 들판이 한눈에 다가왔다.
굵은 붓으로 그려 놓듯이 여기저기 둘러쳐진 돌담들, 외로움을 숨기듯이 몇
그루씩 서 있는 나무, 그 사이로 봄이면 유채꽃으로 노랗게 푸르게 넘실거릴 것
같은 밭은 눈이 덮여 고요했다. 덮인 눈 때문에 더욱 눈부시게 흰 벌판이
그렇게 멀리 바다까지 이어져 있었다.
코트 깃을 올리며 형민은 집을 돌아보았다. 집 뒤로는 키 낮은 소나무들과
함께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린 채 숲을 이루고 있었다.
새가 울며 날아갔다.
저 여자와 나는 어젯밤 무엇을 했던가. 우리는 마치 족쇄를 찬 죄수들 같다.
과거라는 족쇄, 그 사슬을 끌며 우리는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건 아닌가. 나에게 있어 신애는 무엇이었던가. 이제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 그녀는 그렇게 나에게 길이고 들판이 아니었던가. 눈 덮인 벌판을
가로질러 그는 길로 나섰다. 길에는 자동차가 지나간 자국들이 눈 위에 남아
있었다. 지나가는 택시나 버스가 있으면 타야겠지만, 어쩐지 바닷가의 큰길까지
걸어가도 좋지 않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갈매기가 머리 위를 날아갔다. 형민이 말했다.
'겨울 갈매기네요.'
겨울 갈매기. 말해 놓고 나자 그는 그냥 갈매기가 아니라 겨울 갈매기에게는
어떤 또 다른 의미가 얹혀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가 말했다.
갈매기가 무슨 철 따라 나오는 과일인 줄 알아. 겨울 갈매기라는 말이 어디
있어. 여름에 살던 애가 겨울에도 사는 건데. 그러다가 명 짧으면 죽는 거고,'
'그렇군요.
"그렇긴 뭐가 그래.'
봄 갈매기......그렇게 말해 보면 아무 뜻도 없어 보이니까요. 여름 갈매기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왠지 겨울 갈매기라고 하니까,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거든요.'
'어려운 말 하지 마. 하긴...... 부산에 있으면 부산 갈매기니까, 목포
갈매기니 인천 갈매기니 할 수야 있겠지.'
형민이 실없이 웃었다.
갈매기들도 거기 사투리로 울지도 모르겠네요.'
유희가 따라 웃었다. 그 웃음이 얼굴에서 천천히 사라졌을 때 그녀가 말했다.
'다음부턴 자고 났을 때 아침을 먹고 가도록 해. 혼자 빠져 나가는 거 아주
나쁜 버릇이야. 난 내가 술 취해서 실수라도 했나 걱정했어.
날씨 때문인가. 부두에는 이제 다시는 바다로 나갈 것 같지 않게 낡은 배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갈치가 잡히는 어느 새벽에 긴 장화를 신은 어부들이
막소주잔을 나누었을 것 같은 가게앞을 지나갔다. 미닫이 문을 한 가게는 문을
닫고 있었다. 여자가 부두 쪽을 내다본 채 말했다,
'왜 갔는데?
"아침에 얼굴을 대하는 게 어쩐지 부담스러웠어요."
'우리가 뭘 했다고?"
아무것도 안 했지만요,'
'혼자 있고 싶었다고 말하는 게 솔직한 거 아냐?'
'그래요. 혼자 있고도 싶었구요.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요.
형민은 좁은 골목 사이로 내다보이는 거리를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신애를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런 마음으로 거기 남아
있고 싶지가 않아서였어. 이 섬의 눈덮인 벌판에 쏟아지고 있는 아침 햇살을
어떤 여자의 집 창문으로 내다보는 건 있을 수 없다고.
이 여자는 죽은 남자의 집에서 산다. 거기에는 쓰다듬고 껴안을 그의 자취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무언가.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여자의 무엇을 가지고 있나.
몇 가닥의 기억, 쓰라린 추억들, 괴로움 속에서 함께 보냈던 날들에 대한 회오,
그런 것 외에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나를 그 새벽에 이 집에서 나가게
했던 건 그런 고통의 조각들이었다.
좁은 골목 끝으로 '사롱 땅끝'이라는 간판이 바라보였다. 말라 버린 피딱지
같은 색깔로 씌어진 글씨 주변에 조그만 전구들이 달려 있었다. 지난밤에는 저
꼬마 전구들에 불이 들어오면서 손님을 부르고 있었겠지. 화장을 지운 여자.
아침의 여자. 땅끝이라는 간판은 그런 여자의 끝처럼 느껴졌다.
형민이 불쑥 물었다.
'어떻게 두 분이 만났습니까."
'그냥 어쩌다가 만나는 거지 뭐. 남자 여자가 무슨 계약서 쓰면서 만나니? 배
타다가도 만나고, 버스 내리다가도 만나고, 술먹고 해롱거리다가도 만나고,
세상에 남자 여자가 뭐 그렇게 거룩하게만 만나는 건 아니란다."
유희가 한 쪽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 내 빌딩이 있어. 놀고 있기도 뭐해서 양품점을 했고, 그때 그 남자를
만난 거야.'
그렇게 말하다 말고 유희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런데, 참. 3층도 빌딩은 빌딩인가? 난 그게 늘 아리까리하더라. 3층을
가지고 빌딩이라고 해도 되는 건지 아닌지 '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안 하면 되죠 뭐.'
'그럼 3층은 뭐라고 그래?'
'3층집.'
그 3층집은 술집 '땅끝'건너편에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혼자 몸으로
살다가 남겨 놓은 재산이 뱃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파는 어구상이었다. 그
어구상 건물을 헐고 그녀가 3층 빌딩을 새로 올렸던 건 그를 만나기 몇 달
전이었다.
유희는 그 새로 올린 빌딩의 아래층에서 조그맣게 양품점을 하고 있었다.
양품점이라고는 해도 그 가게에서는 화장품도 팔았고, 넓적하고 번쩍거리는
벨트며 몇 켤레의 구두까지 진열해 놓고 있었다.
배를 타고 나가서 물건들을 떼어 오곤 했지만, 그늄가 진열해 놓은 물건이
그랬듯이 그 가게는 이곳 물장사 아가씨들이 대부분의 손님이었다. 어느 날
콧수염을 기른 이필수가 그 가게를 기웃거리다가 안으로 들어왔다.
수염을 기른 텁석부리 어부들은 드물지 않게 눈에 뜨이던 거리였다. 그랬지만
유희는 그날 보았던 이필수의 콧수염을 오래 잊지 못했다. 그래서 유희는 함께
살게 되었을 때도 이따금 같은 말을 했다.
난 그렇게 얌전하게 콧수염을 기른 사람은 처음 보았어, 영화에서는
보았지만.
안으로 들어온 필수는 진열장 위 벽 쪽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저거 얼마짜리요?'
그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에 유희는 알지 못했다.
'어떤 거요? 벨트요?'
'아니 저거 말이요.'
장식용으로 벽에 매달아 놓은 마른 풀과 찔레 열매밖에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영문을 몰라 하는 그녀에게 필수가 말했다.
'저 위에 거.
'아, 모자요.'
그것은 흰색의 여자용 모자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팔 게 아니라 벽에 걸어
놓기 위해서 장식용으로 사왔던 모자였다.
'그거 파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여자 모자예요.'
유희는 물건을 내릴 생각도 없이 대답했다.
'알고 있소.'
"누구 선물하시려구요?'
그때 처음으로 필수가 유희를 마주보면서 말했다.
'내가 쓸 거요.'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훗날 떠올릴 정도로 유희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 처음 보는, 느릿느릿하기만 한 손님에게 떠들어댔다.
'아저씨가요? 그 콧수염을 기르고요?'
'왜, 콧수염과 모자는 안 어울립니까?'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가 어디 있어요. 콧수염에다가 거기다가 또 저 여자
모자를 쓰려고요? 그럴 거까지 뭐 있겠어요. 그냥 곱게 사시죠.'
남자는 웃지도 않고 그냥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가게를 찾아왔다.
처음에 유희는 그가 필수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그 모자를 다시 손가락질하면서 내려 보라고 했을 때에야. 아 어제의 그
콧수염......하면서 그를 기억해 냈다. 그날 필수는 콧수염이 없었다. 머리까지
어제와는 달리 짧제 자르고 있었다.
'어머. 아저씨 콧수염 어쩌셨어요?
'어쩌다니. 깎아 버렸지.'
'아니, 왜요? 힘들게 길렀던 걸 왜 갑자기 싹 밀어 버리셨어요?
'아가씨가 그랬잖소. 안 어울린다고."
'네에? 그거야 아저씨 얘기가 아니라. 모자랑 안 어울린다고 한 거지요,'
돈을 치르고 나서, 벽에서 내린 모자를 만지작거리면서 그때 필수가 말했다
"내가 이걸 쓰고 다닐 거 같소?'
웃기는 사람이네. 샀으면 그만이고 나야 팔았으면 그만이지 그걸 쓰고 다니던
누굴 주던 내가 무슨 상관이람. 그렇게 눈을 목소리도 몸놀림도 깜박이며
유희는 서 있었다.
'역시 누구 선물하실 거군요. 멋쟁이 여자인가 보죠?"
그때 필수가 말했다.
'집에 갖다 둘 거요.'
'아니, 왜요?
"이 섬에 제일 안 어울리는 게 하나 있는데 그게 뭔지 아슈?' 뭐예요?
" 나요. "
히히히. 유희가 웃었다. 공연히 여자한테 찐득거리며 말이나 붙이려는,
알아봤지, 그런 남자는 아닌가 하고 알아봤었어. 그런데 그런 생각치고는 제법
돈을 투자할 줄 아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모자를 다 사고.
'그랬는데, 이 모자가 나타난 거요. 난 이 모자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저건
정말 이 섬과는 안 어울려도 너무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었소. 그런데 도대체
팔리지를 않고 언제나 저기 걸려 있는 거요. 그래서 아무래도 이 모자 주인은
나로구나 생각했던 거요."
사람들은 어디론가 다 떠나가 버린 것 같은 부듯가 뒤편의 하오의 거리를 두
사람은 천천히 걸어 나갔다. 부듯가를 떠돌던 갈매기들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밤이면 불들이 켜지고, 여자들이 웃음을 팔고. 취한 사내들이 흐느적거릴
거리에는 낮선 침묵만이 떠돌고 있었다.
'그 사람은 아주 요리를 잘 만들었어. 달걀을 한 손으로 깨는 것이 음식을
만들 줄 아나 모르나의 시작이라고도 했어."
'그런 남자였군요."
'낚시나 등산을 다니는 남자들은 찌개 한 가지는 잘 끓이잖아.'
'그렇나요? 늘 끓여 먹으니까 그런가 보지요.'
"그렇지만 그 사람은 좀 달랐어. 물론 오래 혼자 살았으니까 혼자 끓여
먹어야 했을 테고 그래서 음식을 만드는 법이야 알 수 밖에 없었겠지만, 그
사람은 음식 만드는 걸 아주 좋아해서 하는 그런 사람이었거든. 여름이면
오이지 같은 것도 아주 짭짤하게 잘 담가서 항아리에 돌맹이로 눌러 두고,
물김치 같은 걸 담글때면 너무 많이 씻어서 으깨지면 풀내가 난다면서 꼭
자기가 씻곤 했으니까.
"그런 남자를 가지고 가정적이라고 하잖아요.'
유희가 픽 웃었다. 방끝'부근에는 이제 양품점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뭐가요?"
'그런 사람이었는데도 ......김치까지도 잘 담그는 사람인데도 그 남자는
세상에 그 무엇도 할 줄 모르는 사람 같기만 했거든. 그게 그 남자였어.'
그렇게 만난 남자라고 했다. 무슨 자죽 많은 인생을 살았는지 그 나이가
되었지만 아내도 아이들도 없이 혼자 이곳으로 떠돌아와 정착해 버린
사람이라고 했다. 학원 강사에서 사업까지 안 해본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건어물 장사에서부터 손에 닿는 대로 일을 하며 살아가던 그가 마지막으로
차렸던 것이 '땅끝'이라는 술집이었고, 아프기 시작하면서 남에게 넘겨 버린
그곳이 그의 마지막 일터라고 했다.
찌개 냄새가 풍겨 오기 시작했다. 두 번째 오는 집이어선가. 한결 편안하게
앉아 있는 자신을 향해 형민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어쩌자는 거냐, 넌 이
여자랑.
주방에서 맥주병을 들고 나오며 유희가 말했다.
'한잔할래?
"아니요.'
형민이 손을 저었다. 유리 컵에 맥주를 따르면서 그녀가 말했다.
'이때 마시는 술이 제일 맛있어. 저녁 준비하면서 마시는 술. 뭐라드라.
이렇게 저녁에 음식 만들면서 마시는 술 때문에 알코올 중독이 되는 여자들이
있어서 미국에는 이 술에 대해 뭐라는 이름도 있다던데. 그 사람이 그런 것도
가르쳐 줬었는데. 머리 나쁜 여자는 이래서 안 돼.'
유희가 맥주를 주욱 들이켰다.
'안 되긴요. 머리 나쁜 여자는 그래서 편하기 때문에 남자들이 좋아하는가
보던데요.'
흐흐거리면서 마치 머리 나쁜 여자는 이렇게 웃는 거야 하듯이 유희가
웃었다. 형민이 현관 입구에 쌓여져 있는 구두 통을 가리켰다.
'저기 써 있는 엘리트라는 말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요?'
'나도 고등 학교는 나왔을 거 같다면서?'
'선민,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뜻이잖아요. 구체적으로는 그러니까 유태인을
뜻하거든요. 신에 의해서 선택된 사람들 그렇지만 선택된다는 게 꼭 뭐 좋은
것만도 아니지요. 선택이란 이러이러한 뜻에 맞아서 골라진 걸 의미하니까요.
가령 예를 들어서, 튼튼하고 용기 있으니까 너 전쟁에 나가라 하고 뽑혀서 좋을
거 하나 없잖아요.'
'갑자기 무슨 얘기야. 난 그냥 구듯방 이야긴 줄 알았더니. 저 구듯방 주인,
덩치는 이런 사람이 목소리는 꼭 기집애 같단다.'
'왜 유태인이 선택된 민족이 되었는지 아세요?'
유희가 빈 잔에 맥주를 따랐다. 거품이 잔을 타고 넘으려고 하자 그녀는
입술을 대어 잔의 술을 소리 내어 빨아들였다.
'신이 세상을 창조해 놓고 나서, 이런 것은 하지 마라 하는 여러 계명들,
말하자면 십계명을 만들어 놓고 나서 인간들에게 물었대요. 인간들이 이것을
좋아할지 어떨지 궁금했거든요. 그래서 여러 민족을 찾아 다녔는데, 먼저
프랑스 사람들이 말했답니다.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프랑스 사람이 야한가 보지.'
'아랍 쪽 사람들도 못 지키겠다고 했어요. 도둑질하지 마라가 문제가 된
거죠. 우리는 사막에서 여행자들을 털어먹고 살아가는데 이건 우리에게는
맞지가 않습니다 했대요.'
'중동 쪽 사람들, 그 사막에서 그러며 살았구나. 난 몰랐지.'
'그래서 신은 아주 실망했답니다. 인간은 안 되겠구나. 내 뜻을 따라
살아가기에는 틀렸구나. 이 땅 위의 모든 종족에게 보였지만 다들 이런 핑계
저런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우린 어려운데요......히더라는 거지요."
'한국 사람은 뭐라고 했는데?'
'그건 모르겠어요. 한국 사람한테는 안 왔었나 봐요. 기독교가 자생한
나라라고 하잖아요.'
'그런 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들었다가는 화내겠다.'
'하여튼, 그래서 대단히 실망한 신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게 유태인이랍니다.
유태인들에게 이 계명을 주겠다고 하니까, 유태인들이 물었어요. 그게
얼마짜리입니까. 신이 대답했지요. 공짜다, 그냥 주는 거다. 그랬더니
유태인들이, 좋습니다. 그럼 우리가 가지지요. 그래서 유태인이 선택이 된
겁니다.'
"노벨상 제일 많이 탄 사람들이 유태인이라면서?'
형민이 클클거리며 웃었다. 유희가 입을 비죽거렸다.
'별걸 다 안다 이거지?'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맞는 말이에요. 슷자는 전세계 인구의 2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데 세계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사람들이 그들이거든요. 노벨상만 해도
제퍼센트 가까이를 그 사람들이 받고 있어요. 그러니까 전세계 사람들한테
미움을 받고 배척당하는 거예요. 너무 똑똑하고 실제적이고 계산에
밝으니까요.'
형민이 몇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이 사람들이 누군지 아세요?'
'몰라. 너랑 펜팔하던 외국 사람이니?'
'왜 이러세요, 정말. 이 사람들이 누군가 하면 다들 2o세기를 뒤바꾼
사람들이잖아요.'
'난 몰라. 뭘 바꿨는데?'
'마르크스는 인간의 정신 그 사상적인 면에서, 아인슈타인은 과학으로 문명의
본질을 그리고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 그 속에 잠재해 있는 게 무엇인가를
밝히면서 말예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다 유태인이에요.'
'너도 흑시 유태인 아니니?'
'왜 이래요, 정말.
'아냐. 갑자기 네가 아주 똑똑해 보여서 말야.'
남자. 부서지고 쓰러지고 무너지면서 여기까지 홀러 왔을 한 중년 남자의
젊은 날은 어떤 것이었올까. 아니 그 남자는 무엇을 마감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찾아와야 했을까. 찬 맥주와 무쇠 난로의 열기가 만나면서 그녀의 얼굴을 마신
술보다도 더 붉게 물들여 가고 있었다.
형민이 스스로에게 말했다. 내일은 그녀를 만나러 가자.
섬에 내리는 눈
섬에는 언제나 눈이 내린다. 더 많이 내린다. 내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해도
그건 내 잘못은 아니리라. 눈은 그렇게 내렸으니까.
종일 거리에는 밤새 쌓인 눈들이 바람에 날려서 마치 잘디잔 유리 가루처럼
얼굴을 따갑게 했다. 그리고 저녁이 왔다. 여관방에서 바라본 거리는
무엇인가로 내리치면 쨍 하고 금이 갈 듯이 얼어붙어 있었다.
'커피를 좀 마시고 싶은데 ... .. "
프런트로 전화를 했을 때 종업원은 말했다.
'배달시키면 됩니다."
'한 잔을 배달시킬 순 없잖아.'
'그거야, 쌍화차 같은 거 두 잔 시켜서 아가씨 보고 한 잔 마시라고 하면
되지 뭘 그러세요. 관계없습니다.'
'난 지금 커피를 말하는 거라구.'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목도리를 두르고 밖으로 나섰다. 바작바작거리면서 발
밑에서 얼어붙은 눈이 바스러지며 소리를 냈다. 모두들 집으로 돌아갔는지.
초저녁인데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텅 빈 거리를 나는 걸었다. 로터리를
돌았다. 멀리 길 건너편으로 찻집임을 알리는 불및이 바라보였다. 그 간판에는
'다방'이라고도 '커피 하우스 라고도 씌어 있지 않았다. 거기에는 붉은 글씨로
'coffee' 라고 영문으로 씌어 있었고 마지막의 e 자는 그 끝을 돌려서 'coffee'
라는 글자 전체에 밑줄을 그으며 맨 앞의 c자 옆에 동그라미를 하나 그려 놓고
있었다.
길을 건너갔다. 파커를 입고 고개를 숙인 남자 하나가 어정쩡하게 다리를
벌리고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마치 그림자처럼 느리게 내 옆을 지나갔다.
무엇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걸어왔던가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나는 거리에 서
있었다. 그랬다. 나는 커피를 마시려고 했었다. 다만 커피였지, 밖으로 나올
생각이 아니었다. 길을 잃은 사람처럼 서 있다가 나는 그 찻집의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걸어 올라 갔다.
찻집 안은 마치 무엇엔가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밝았다. 적당하게 어둡기를
바랐던 나는 창가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실내를 둘러보았다. 동반자 없이 입장
불가. 그렇게 어딘가에 씌어 있기라도 한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는
손님들은 모두가 남자와 여자였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종업원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는 내 탁자에 보리차가 아닌 냉수가 담긴
흰컵을 가져다 놓았다. 여자가 물었다.
'뭘 드실래요?
"커피.'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주머니에서 일회용 라이터를
꺼냈다. 아무 표정도 없이 그녀는 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초에 불을 붙였다.
촛불은 잦아들듯 동글고 조그만 불꽃을 피워 올렸다가 이내 길게 늘어났다.
여자는 낡은 청바지 차림이었다.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꽉 낀 청바지는 엉덩이 부분이 유난히 색이 바래 있었다.
청바지라는 게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 신애가 했던말 문득 그 말이
모기가 날아가듯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몸에 들러붙는 바지를 입은 그녀의
앞에서 나는 황흘했었다.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끓고 청바지의 지퍼를 내릴 때, 브라자로 갈라지는
그녀의 바지 속으로 때로는 붉고 때로는 검은 그리고 희디횐 레이스 모양의
속옷이 드러날 때, 나는 거기에 얼굴을 묻으며 울고 싶었다. 울 때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잊으니까.
달그락거리며 여자가 내 앞에 찻잔을 놓았다. 꽃무늬 잔에 긴 암갈색 커피가
나는 맛이 없어요 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돌아서는 여자에게 내가 물었다.
'이 촛불은 왜 켜는 겁니까?'
'멋있잖아요.'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로 그녀가 대답했다. 넌 그럼 이게 멋있지 않다는
거니? 여자는 표정없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우리 집 이름 몰라요? 가게 이름이 '촛불'이에요.'
나는 늙은이처럼 중얼거렸다.
'그래서 초를 켜는 거였군.'
'또 있어요, 이유는.'
'뭔데?
"초를 켜면 담배 냄새가 없어지거든요.
처음 듣는 소리였다. 촛불을 켜면 냄새가 사라진다는 건가. 종업원이
돌아가고 난 후 나는 커피를 마실 생각도 없이 타오르고 있는 촛불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추억은 어디에나 묻어 있었고, 마음의 발길에 채여 뒹굴었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신애와 나는 촛불 하나가 켜진 방에 누워 있었다.
사람 사는 것도 저런 거겠지.
그때 신애는 그런 말을 했었다.
타오르다가 다 타버리고 나면 그렇게 끝나는 거. 사랑도 그런 거겠지.
그 말을 할 때의 신애는 마치 어둠이 발리워진 듯이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 둘의 사이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하던 그때였다.
창 밖을 내다보았다. 문을 연 가게들에서 흘러 나오는 불빛이 눈이 얼어붙은
길을 비추고 있었다. 텅 빈 거리에 이따금 차들이 지나갔다. 그림 엽서 속의
낯선 거리처럼 그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식어 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 순간 미루고 미뤄 왔던 결심을 했다.
내일은 신애의 무덤엘 가자고.
그 다음날도 계속 많은 눈이 내렸다. 섬에서 쏟아져 내리는 눈발을
바라본다는 건 내게 첫 경험이었기 때문에 나는, 섬에는 언제나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택시를 타고 좁은 시가지를 벗어나자 이내 눈으로 뒤덮인 벌판이 나타났다.
곡식을 다 거둬들인 밭이었다. 여기저기 추수를 끝내고 나서 쌓아 놓은 옥수수
대궁이나 콩단 같은 것이 눈에 덮여서 널려 있었고, 돌로 쌓아 올린 밭둑만이
밭과 밭의 경계를 알려 주듯 구불구불한 곡선을 이루며 까딸게 그 희디흰
벌판에 금을 그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눈에 뒤덮인 그 곳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벌판처럼 느껴졌다.
끊일 듯 끊일 듯하면서 여전히 내리고 있는 눈발이 히터를 켠 차유리에
부딪치며 녹아서 흘러내렸다. 체인을 감은 택시는 느리게 타이어 자국이 난
눈길을 달렸다. 무료했던지 기사가 물었다
'누굽니까?
'네?'
'이 한겨울에 공동 묘지를 가자니까 안 물을 수가 없네요. 누가 돌아가셨는데
거길 가는 겁니까?'
'가봐야 할, 그런 사람입니다.'
'보아하니 이 섬 출신은 아니신 거 같고, 그렇다면 부모님 산소가 있는 것도
아닐 테고."
나보다 더 가까운 남이라고나 할까요. 나 자신보다도 더 가까운 남. 그런
말을 하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누구의 딸이었던 여자다. 누구의 언니였던
여자다. 누구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 있어 무엇이었던가.
내가 그녀에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란, 그렇다, 나보다 더 가까운 남이라는
말밖에 없다.
산이랄 것도 없는 작은 언덕 하나를 휘돌아가자 이내 바닷가 눈앞을
막아섰다. 나와의 만남을 그렇게도 막았던 여자. 그 여동생이 왜 하필이면
신애의 시신을 여기까지 옮겨다 묻어야 했었는지를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신애는 그랬다. 다만 나는 전생에 물고기였는지도 몰라 하는 말을
했듯이 그 동생도 신애의 그런 마음을 생각해서 이곳까지 그녀를 묻으러 왔던
건 아닐까. 전생에 물고기였을 거라고 믿는 여자가 묻힐 곳, 그 곳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섬으로 정했다는 게 이상할 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어떡하실 겁니까? 돌아오실 때는.'
'차편이 전연 없나요?'
"섬을 한 바퀴씩 도는 버스가 있기는 한데, 그게 지켜야 말이지요. 더군다나
눈이 이렇게 쌓여서 .....다니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또 그 공동 묘지에서
버스 타는 데까지는 꽤 멉니다.'
거기서, 거기 쓰러져서 나 또한 함께 얼어 죽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가슴 바닥이 얼어붙어 있던 나로서는, 돌아갈 차편 따위를 염려할
여유는 없었다.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빨리 끝날 거면 내가 기다려도 됩니다. 뭐 추운데 산소에 가서 오래 있을 거
없잖습니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가 다시 말했다.
아니면, 몇 시까지 오라고 하면 제가 다시 와도 되니까 손님 편한 대로
하십시요."
'괜찮습니다. 그냥 저만 내려 주고 돌아가시죠.'
택시 기사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중얼거렸다.
'뭐, 얼어 죽기야 하겠습니까.'
멀리 묘지를 올려다보며 서서 나는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한번 추슬렀다.
가방 안에서 술병이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맨 뒤쪽으로 가면 돼요.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의 동생이 말해 주던 대로 나는 눈을 맞으며 묘지의
위쪽으로 올라갔다. 뒤를 돌아보니 나를 내려 준 택시는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구두 위를 덮는 눈을 밟으며 나는 무덤들 사이를 걸었다. 무덤들은 대체로
작았고 별다른 치장을 하지 않고 있었다. 더러는 쓰러질 듯 비스듬히 서 있는
묘비도 있었다.
맨 뒤, 산비탈 위로 늘어선 무덤들 사이를 걸으며 나는 신애의 이름이 적힌
묘비를 찾아 나갔다. 그리고 한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곳이었다. 다른
무덤들과는 조금 모양이 달랐다. 직사각형으로 돌을 대고 그 위에 봉분을 만든
무덤이었다. 얇고 조그만 묘비가. 검은 돌에 새겨진 그녀의 이름이 나를
맞았다. 강신애. 묘비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이름과
그리고 그녀가 태어난 해와 죽은 해가 써 있을 뿐이었다. 그 묘비뿐 그녀의
무덤 앞에는 상석이나 꽃병 같은 다른 석물조차, 아무것도 없었다. 눈에 덮인
무덤을 내려다보며 나는 서 있었다. 겨우 이것이었나. 이게 우리의 끝인가.
갑자기 눈발이 굵어지면서 쏟아져 내렸다. 나는 천천히 무릎을 낍으며 그녀의
무덤앞 눈 위에 앉았다. 어금니를 악물면서 나는 앞으로 꼬꾸라지듯 고개를
꺾었다. 차가운 눈 속에 얼굴을 묻고 나는 그렇게 얼마를 .,....쓰러지듯
엎드려 있었다.
몸을 바로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이제야 왔어.
앞으로 다가가서 나는 그녀의 묘비 위에 얹힌 눈을 쓸어 내렸다. 그리고 돌에
파여진 그녀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긁어 내려갔다.
나야. 이.제야 왔어.
다시 한 번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어금니를 힘주어 물었다.
가방을 열고, 나는 향을 꺼내 몸을 숙이고 불을 붙였다. 한 움큼의 향이
연기를 피워 을리며 타올랐다. 그것을 눈 위에 꽂아 놓고 나는 술병을 꺼냈다.
웃긴다고 하지 마. 자기가 늘 좋아했기에 포도주를 사왔어. 자기 집에 가면 늘
있던 바로 그걸로. 나는 포도주를 따 그녀의 무덤가에 주룩주룩 부었다. 나는
내가 결코 울지 않으리라 다짐했듯이. 울지 않았다.
춥겠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나는 그녀의 무덤을 내려다보았다.
울지도 않고 절을 하지도 않을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런데, 그렇구나. 넌 말이 없구나.
무덤 앞에 포도주 병을 꽂듯이 세워 놓고, 나는 가방에서 다른 술병을 꺼냈다.
가방을 깔고 나는 그녀의 비석에 새겨진 이름이 내려다보고 있는 바닷가를
향해서 나란히 앉았다. 바람에 날린 눈발이 아우성치듯 휘몰려 왔다.
한잔해. 나도 네 덮에서 한잔할게.
나는 위스키 병을 따 들어붓듯이 마셨다. 그녀가 처음으로 물었다.
잔 같은 걸 가져오지 그랬니. 안주도 없잖니.
괜찮아. 네 옆이니까.
나는 날리는 눈발을 피해 손으로 눈가를 가리면서 다시 술병을 들었다. 몇
모금의 술이 꿀꺽거리면서 목을 타고 넘어갔다. 추위와 술이 부르르 몸을 떨게
만들었다.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알고 있었지? 내가 정신 병원에 있던 일......다 알고 있었지?
네가 그렇게 되었다는 걸 병원에서 들었으니까, 너도 내 일을 알고 있었겠지.
머리에 쌓이는 눈을 털면서 내가 말했다.
많이 생각했었어. 그렇다고, 넌 꼭 그런 방법을 택해야 했을까.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자살했다는 말을 듣고 많이 그런 생각을 했어. 다 내 잘못이야. 그걸
빌고 싶어. 모든 게 다 나 때문이라는 걸.
술이 타고 내려간 몸이 짜르르 아려 왔다.
다만 이런 거라도 너에게 말해 주고 싶었어. 그때 내가 널 사랑했을 때, 나는
내 몸과 네 몸이 무엇이 다른지를 알지 못했어. 네 몸이 나의 몸이 되어서 서로
떼어놓을 게 없이 생각되었거든. 다시 한 모금의 술을 마시고 나서 나는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술병을 들고 벌떡 일어서며 나는 쏟아지고 있는 눈발을 향해 소리쳤다. 미안해.
난 평생 너한테 미안할 수밖에 없어.
얼마나 시간이 흘럿을까. 눈발이 조금 가늘어져 있었다. 네 옆에 눕고 싶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그녀의 무덤 옆에 하늘을 쳐다보면서 누웠다.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건 술 때문만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눈을 감고 누워서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발이 휘몰리고 있는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왜 길이 없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걸어 나갔을까.
내가 물었다. 그리고 내가 대답했다.
우린 길이 없다고 믿지 않았어. 얼마든지 우리의 길은 있었어.
그렇게 누워서 나는 한 병의 위스키를 비웠다.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병의 술을 따기 위해 일어나 앉아서 나는 신애의 무덤을 덮고 있는 눈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어떻게 살아갈 거냐고? 모르겠어. 이 섬을 떠나가서, 저 세상으로
돌아가서 뭘 할지는 아직 몰라.
새로 딴 술병을 들고 일어서는 내 발이 조금 헛놓였다. 비틀거리면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뭐가 되었으면 좋겠다든가..... 어떤 남자로 컸으면 좋겠다든가 그런
이야기를 우린 나눈 적이 없었잖아. 왜 그랬을까.
그때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아무 생각하지 않고 나는... ..그런 남자가, 그런
무엇인가가 되려고 하면 되는 건데 말야.
아무 느낌도 없이,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 때문이 아냐. 혼자 남았다는 게, 그게 싫어서야.
나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염려 마. 힘들게 살지는 않을 거야. 그냥......편하게 살게. 여기까지 온 것도
그거였어. 시내가 내게 말하는 거 같았어. 그냥 편하게 한번 왔다 가렴 그렇게
말야. 그러면 조금은 쉬워질지도 몰라 하고 말야.
이마에 선득선득 눈발이 와 닿았다간 녹아 내렸다.
눈은 내린다. 쌓인다. 쌓여서 얼고 그리곤 또 녹으리라. 지난 몇 번의 겨울을
그렇게 났듯이 신애의 묘지에는 그렇게 눈이 쌓이리라. 무덤 위에서는 풀이
자라고, 바닷바람에 묘비도 깍여 나가며 세월이 가겠지. 그리고 흙이 되겠지.
눈 덮인 봉분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그때 내 안에서 신애가 말했다.
이따금 오렴. 난 이제 아무데로도 옮겨 가지 않으니까, 그렇게 와 주면 되잖니.
난 이제 더 늙지도 않고, 그러니까 나이를 먹지도 않을 텐데 뭐. 너 살아가는
걸 보고 싶지 않겠니. 내려가서 열심히 살아. 그리고 이따금 찾아와 줘. 와서
풀도 뽑고 지금처럼은 말고 조금만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들려주고.
그래서 네 속에서는 내가 살아 있다고 말해 줘. 그러면 되는 거잖아. 옛모습
그대로 살아 있다고 말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되지가 않아. 해낼 수가 없어. 모든것에 네가 있어.
보이는 거. 생각나는 거, 어디에나 네가 있어
그녀가 내 어깨를 짚듯이 말했다. 그래. 힘들 때면 와. 더는 못 견디겠을 때는
와. 왔다가 가면 되잖아. 지금 이렇게 찾아왔듯이 이렇게라도 왔다가 가.
그러면 무언가 조금은 달라져 있을 거야. 네가 힘들어 하는 걸 난들 견딜 수
있겠니.
그렇게 해서 조금씩 단단해지고, 견뎌지고, 쉬워지길 바래.
그렇지만......그렇지만. 정 힘들고 견딜 수 없다면 어쩌겠니. 어쩌겠어. 함께
죽을 수 없었던 나 때문인걸. 너만은 살아내길 바랬던 나 때문인걸.
여기 어디서 횟집이라도 차릴까
'겨우 술이나 마셔야 나한테 전화를 하는구나.
형민은 소파에 길게 누워 있던 그 자세로 방안으로 들어서는 유희를 맞았다
'미안해요. 이런 폼을 하고 있어서.'
'좋네 뭐.'
중얼거리듯 말하면서 유희가 방안을 둘러보았다. 반 넘게 비어 있는 양주
병을 보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또 벗고 침대 속에라도 누워 있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거든. 미리 벗고
있는 남자 옆으로 벗고 기어들어 가는 그런 여자는 아냐. 난.'
유희가 방안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건 내 방법이 아니거든. 난 남자 옷을 벗겨 주는 식이거든.'
형민이 비틀비틀 소파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런데, 왜 온 거야?'
'목소리가 너무 취해 있어서. 무슨 일이 났나 했어.'
'전화는 했지만 오라고 하지는 않았어.'
'그래 그건 맞아, 그렇지만 오라는 거보다 더하던걸. 그런데 왜 그 집 가지
않을 거냐고 한 거야?'
숲을 등지고 있는 유희의 그 집에 가지 않을 거냐고 형민은 물었었다. 유희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어?
'있었지.
"무슨 일?
'만났어.
"누구랑?'
'한 여자랑.'`
'어떤 여자랑 만나러 이 섬까지 온 거야? 그 여자가 이 섬에 살아? 그 여잘
찾고 있었던 거야, 그럼?
'더럽게 여러 가지 묻네.'
말하고 나서 형민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그는 창틀 옆에 놓아둔
양주 병을 들어 두 모금 마셨다. 유희가 말했다.
'그런데 왜 그 여잘 버려두고 나한테 전화를 하니?"
다시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들이키는 형민에게 유희가 다가섰다. 그녀는 그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창틀이 아닌 탁자 위에 놓았다.
'가자. 우리 집에."
'거기 가면 밥 있어? 나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거든.'
'밥이야 하면 되지."
유희의 손이 그의 헝클어진 머리가락을 쓸어 내려갔다. 그가 말했다.
"나 어떤 여자 무덤엘 갔었어."
'아무 얘기 안 해도 돼.'
"해야 해. 해 버려야 해. 그래서 편해질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해야 해. 그게
오늘 그 여자가 나한테 한 마지막 말이었어."
난로에 불을 지피고 나자 이내 실내는 따듯해졌다. 옷을 갈아 입고 나오며
유희가 말했다.
맥주 찬 게 있는데 ......
형민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마시던 거 그냥 마실래.'
여기까지 오는 동안 형민은 차에서 잠이 들었었다. 욕실로 가 찬물로 얼굴을
닦고 나서 밖으로 나왔을 때 피워 놓고 있었다.
'이쪽으로 앉아.'
그는 유희가 끌어다 놓은 난로 옆 의자에 앉았다. 술기운으로 해서 몸이
무중력 상태처럼 봉 떠 있는 것 같았다.
'술을 마실 줄도 모르면서 마시는 거 같아.'
어떻게 산에서 내려왔는지 기억이 어슴푸레했다. 다만 하나 정확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녀의 무덤 가의 그 눈 위에 누워 있을 때 전연 추위를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따듯해했다는 것이다. 그 따듯함이 이상스레 가물가물 그를
졸럽게 했었다.
그녀가 말하는 소리를 들은 건 그때였다.
잠들지 마. 여기서 잠들면 안 돼.
먼 바람소리처럼 그렇게 그녁가 속삭이고 있었다.
잠들면......그럼 죽어. 일어나서 내려가.
유희가 컵에 얼음을 넣고 여관에서 가지고 온 위스키를 따라 형민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맥주였다. 얼음이 든 잔이 차가웠다. 그 잔을 불에 대고
그는 난로 불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럼 다 끝난 거네. 이제.'
"뭐가?'
'만나야 할 여자 만났으면. 무덤까지 가서 만났으면 이제 떠나는 일만 남은
거 아냐?'
그는 대답 대신 잔을 들어 두 모금 술을 마셨다. 술 마셔야 할 일이
남았겠지, 폐인처럼, 그렇게 될 때까지 마시겠지. 가지고 온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마시겠지. 견딜 수 있을 때까지 마시겠지 그리고 돌아가겠지. 그러나
그는 다른 말을 했다.
'여기 어디서 횟집이라도 차릴까.'
여기서 살게?'
정유희도 살고, 술은 신의 눈물이라면서 누더기처럼 산 남자도 있었는데
......나라고 못 살게 없잖아.'
'사랑했던 여자의 무덤도 있고.'
마치 책을 읽듯이 중얼거리던 유희가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가 무슨 신파 연속극하는 덴 줄 알아. 집어치워.'
"아냐, 그냥 하는 소리가 아냐. 횟집 하나 내고, 주방장 월급 주며 시작할
돈은 있어. 우리 할아버지가 나한테 물려준 유산이 있거든.
"유산?'
지금은 다른 사람이 부쳐 먹고 있는 땅이 있어. 그렇지만 명의는 내 이름으로
되어 있는 거야. 거기에 최근 길이 뚫리고 개발 붐이 일어서, 나 이래 보여도
꽤 부자야. 횟집 사장 정도는 할 돈이거든."
'돈? 그떻지만 나라면 횟집 따위는 안 해.'
'왜?
"종일 비린내가 나니까. 그리고 종일 고기를 죽여야 하니까.'
난 전생에 물고기였나 봐. 신애가 하곤 했던 말이 창문을 흔드는 바람소리와
함께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야. 전생에 물고기였던 여자를 잊는 방법,
그건 매일 물고기를 죽이며 사는 방법일 수도 있어. 또 다른 사랑의 방법.
유희가 그를 가만히 건너다보면서 물었다.
'나하고 살자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럴 수도 있지.'
'여자 무덤 지키는 남자랑......살아? 그건 뭘까. 동거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고, 그냥 남자와 여잔가.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전연 그럴 수 있다는 표정이 아니면서 유희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유희는 그의 잔에 얼음을 한 덩어리 넣었고 술을 따랐다.
'다른 말 말고, 하고 싶었던 그 얘기나 해. 싫으면 안 해도 좋고 얘기 할
사람이 필요했잖아."
'한 여자가 있었어. 내가 고등 학교 때야. 그때 처음 그 여자를 만났어.
그때, 내가 고등 학생이었던 그때 그 여자는 스물 일곱이었어."
'맙소사.
유희가 비명을 질렀다.
'연상의 여인이라. 나이 차이도 보통이 아니네. 미안한 말이지만 그
여자......그러고도 괜찮았어?"
'이 술잔으로 얼굴이 짓이겨지고 싶지 않거든. 미안하다고 해 '
유희가 재빨리 말했다.
'미안해."
잠시 후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죽고, 사내자식은 정신 병원으로 들어갔어.'
이따금 사람답게 하루를 보낸다는 것도 좋은 거 아냐? 그런 말을 하면서
유희가 형민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올린 건 며칠 후였다. 그가 묵고 있던
여관으로 전화를 한 유희는, 나 그리로 갈거야, 하고 불쑥 말했다.
아직 아침도 안 먹었는데? 하는 형민의 말에 유희는. 꼭 뭐 그렇게 세 끼
찾아 먹으려고 그래......하면시 전화를 끊었다.
멍하니 송수화기를 들고 있던 형민은 침대를 빠져 나와 욕실로 갔다.
샤워기를 틀고 오래오래 그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에 몸을 맡기고 서
있었다. 나에게 서둘러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에게는 아무런 약속도
일정도 없다. 이제 섬을 나간다해도, 돌아가야 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그냥 봄을 맞아 볼까. 그때까지 있어 볼까. 섬에 온 후 처음으로 형민은
그런 생각을 했다.
조금씩조금씩 그는 샤워기의 손잡이를 더운물 쪽으로 돌렸다.
물은 점점 뜨거워졌다, 살갗이 아플 정도로 뜨거운 물을 맞으면서 그럴 수도
있으리라고 그는 자신에게 고개를 고덕였다. 겨울을 여기서 난다고 해서
아무것도 달라질 건 없으리라, 오히려 지방의 어디, 혹은 어느 바닷가 그런
이름을 들먹억 가면서, 제주도에 가 겨울이라도 나고 오기를 바랐던 건 형민의
고모였으니까.
여기저기 여행을 다녀와도 좋고,가볍게 운동도 시작하고. 음악 영화 뭐 그런
것들도 가까이하면서 쉬면 되는 거니까......1년쯤 갑자기 휴가가 생겼다고
생각하라니까. 조 박사가 말했던 그 휴가를 여기서 지낸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친 형민이 옷을 갈아입었을 때였다. 그가 아직 젖은 머리를 손으로
털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하고 물을 사이도 없이
안으로 들어선 건 유희였다.
'불쑥 들어설 거면 노크는 뭐하러 해?'
'문이 열렸으니까 들어왔을 뿐이야. 어떤 여자가 자고 나가면서 문을 잠그지
않았었나 보지?'
유희가 방안을 둘러보며 의자에 앉았다. 형민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버를 걸치고 나서 그는 전화 속에서 했던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침 먹으러 가지. 세 끼 꼬박꼬박 찾아 먹는 게 사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설렁탕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왜 깍두기를 이렇게 크게 만드나 몰라.'
밥을 먹으면서 형민이 말했다.
'서울에서 그러니까 시골에서도 그러는 거야.'
유희의 편하디편한 논리에 그는 하품을 하듯 웃었다.
'그럼 서울에서는 왜 깍두기를 그렇게 크게 만들어?이걸 한입에 먹을 수가
없잖아. 입으로 잘라 먹으라는 뜻인데, 그렇지 않아? 왜 이렇게 깍두기가 큰
거야?'
'잘게 썰기가 손이 가니까 그러나 보지 뭐. 넌 별거 가지고 다 시비를 걸고
그런다. 커서 싫으면 안 먹으면 될 거 아냐.'
'가령 여자들은 어떻게 하지?남자랑 둘이서 식사를 하는데 이렇게 큰
깍두기가 나왔단 말야. 그럼 어떻게 하냐구? 이빨로 반을 잘라서 반은 먹고
그리고 반은 놓아두었다가 다시 먹고 그러란 말야? 연애하는 사이라면,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그럴 수도 없잖아.'
유희가 수저를 놓으며 한심하다는 듯 형민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애, 연애하는 사이에 깍두기 같은 거 반으로 잘라서 먹든 셋으로 잘라 먹든
무슨 상관이니, 얘 참 웃기는 애네.
'그래도 서로 이쁘게 보여야 할 땐데. 깍두기나 이빨로 자르고 마주앉아
있어서야 그게 영 그림이 그렇잖아.'
'맙소사. 그림 좋기만 해. 뭐가 어떻다는 거야? 짝두기 반쪽으로 잘라서 반은
너 먹고 반은 나 먹고, 그러는 게 연애 아냐?'
그런 아침을 먹고, 오늘따라 포근한 날씨를 즐기면서 찾아 들어간 찻집에서
유희는 말했다. 이따금 사람답게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은 거 아니냐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사람이 가야 할 곳을 그들은 생각했다.
사람들은 흔히 사람답게 사는 건,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 아닌 더 멀고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일종의 추상 명사들. 그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지켜 주는 거라고. 사랑. 명예, 꿈. 자존심, 조국, 서로 나누어 가짐,
그리움......그런 것들을.
그러나 형민은 유희가 말하는 사람답게의 뜻을 알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그런 추상 명사들에 둘러싸여 있는 게 아니라
시장 속에 있다고.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인 사물들 속에 있다고. 입고 먹고
잠을 자는 것, 그것이 없는 곳에 무슨 사람다운 사람의 시간이 있겠는가도
생각했다.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여기서 지내자면 면도기에서 속옷까지
이것저것 필요한 사람은 형민이었다.
그들은 찻집을 나섰다.
'시장엘 갈까 아니면 백회점을 갈까.'
'여긴 백화점 같은 덴 없어. 꿈꾸지 마.'
그렇게 말하면서 다가선 유희가 형민의 팔짱을 꼈다.
사람답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유희가 말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아무것이나 먹을 수 없다는 거지. 뭐든지 요리를 해야 먹을 수가 있어.
동물은 그냥 먹지. 그 말에 형민은 대답했었다, 또 있어. 사람은 벗고 살 수가
없어. 무엇이든 몸에 걸쳐야 해. 그러고 보면 사람처럼 복잡하고 불편한 동물도
없는 것 아니겠어.
둘은 그런 말을 떠들어 가면서 시장 안을 돌았다. 시장 안에서 불쑥 형민이
말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
'뭐가?
'사람은 말야......모든 동물이 다 그렇지만 하루 종일 사랑을 할 수는
없다는 거야.'
'넌 무슨 그런 생각을 하니?너 참 이상한 사람이다.'
'생각을 해봐. 그렇지 않나. 사람은 사랑 없이는 못 산다고들 말하잖아. 사랑
때문에 죽기도 하고. 그렇지만 하루 종일 사랑만을 할 수는 없거든. 더군다나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것은,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아냐. 사람은 일만은 하루
종일 할 수가 있어.
일은 하루 종일 해도 되는데, 왜 목숨을 건다고 말하는 사랑만은 그렇게 되지가
않는 거지?'
'너는 아마 약간 복잡하거나 아니면 약간 덜 떨어진 그중 하나일 거야."
생선 가게 앞은 번들번들 얼음이 얼어 있었다. 두터운 털 파카를 입은
부인들이 연탄 난로를 쬐면서 무엇이 우스운지 소리 내어 웃고 있는 앞을
그들은 지나갔다.
'참 너... ..생선을 못 먹는다고 하지 않았니?'
'아니. 생선을 먹지 말자고 결심했거든."
'그건 또 무슨 소리니? 아니 이 세상에 하지 않아도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뭘 못해서 하필이면 생선을 안 먹겠다는 결심을 하니."
'그럴 일이 있어."
난 아무래도 전생에 물고기였나 봐. 바다 냄새만 맡아도 살 것 같거든.
그리고 그렇게 늘 바다엘 가고 싶으니까. 신애는 그랬었다. 자신은 전생에
물고기였을 거라고 정말로 믿고 있었다. 물고기였던 여자를 사랑하면서 나는
이제부터 생선은 먹지 않으리리 생각했었지. 유희가 그런 말까지 알아야 할
이유는 없으리라. 아니, 그 말만은 나 혼자 간직해야 하리라. 내 안에 그녀가
살아있는 한 나는 생선을 먹지 않을 테고. 그녀가 바닷가에 묻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떠올린 것도 그것이었다. 살아서 바다 내음까지도 그렇게 그리워했던
그녀를 위해서 그건 살아 남은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번거로움이
아니었던가.
형민이 싫어한다는 말에 생선을 사지 않기로 하고 옷 가게를 찾아가면서 유희는
내내 투덜거렸다.
'넌 장가는 가면 안 되겠다.'
'왜?
"그런 이상한 식성을 가지고 어떤 여자를 괴롭히려고 장가를 드니. 그런
남자는 혼자 된장이나 퍼먹다가 죽는 게 좋아.'
'나만 그런 거 아냐. 생선 안 먹는 사람들 많아. 회교도들도 생선은 안
먹어.'
유희가 걸음을 멈추었다.
'정말? 사막이래서 생선이 없는 거야? 사우디 그런 데가 전부 사막이잖아.'
형민이 이번에는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회교도들이 사는 데도 다 바다가 있고 강이 있어.'
'네가 혹시 ... ..회교도니?'
'알아 둬. 회교도들이 모든 생선을 안 먹는 건 아냐. 다만 비늘 없는 생선은
안 먹어."
'비늘 없는 생선?그런 게 어디 있어.
흐유. 형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문어, 낙지, 오징어, 해삼, 멍게 ..... 다 비늘 없는 생선이지 뭐야.
"아니, 회교도인지 뭔지 하는 애들도 차암, 그 좋은 낙지랑 해삼 멍게를 왜
안 먹지. 별 이상한 사람들 다 많네. 그런데 . 넌 어디서 그런 걸 알았니?
생선도 못 먹는 주제에,"
싸아하게 코를 찌르는 화섬 제품의 냄새를 맡아 가면서 그들은 옷 가게를
기웃거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유희는 형민의 몸을 훑어보곤 했다. 치수를
알아야지, 그떻게 중얼거려 가면서.
'가만있어 봐. 옷 가게를 이렇게 다녀서는 안 되겠고. 필요한게 뭔지부터
알아야겠어. 일단 갈아입을 게 있어야 빨아 입을 거 아냐?'
유희가 형민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필요한 거야?'
'아니, 여기까지면 돼. 모자는 안 쓰니까.'
"여기는?"
유희가 그의 다리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누가 보겠다. 벌건 대낮에 그것도 길에서 남자 어디를 손가락질을 하고
그래.'
유희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양말에서부터 속옷까지 입을 것들을 사가지고
나오다가 불쑥 그녀가 물었다.
차암. 너 잠옷은 있니?'`
형민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도대체 가지고 있는 게 뭐야?'
'입은 거."
다시 잠옷을 사기 위해 들어가는 유희의 뒤에서 형민이 말했다.
'난 그냥 아무거나 입은 채로 자면 돼.'
'시끄러워."
그날 가게들을 다 돌고 나서 거리로 나섰을 때, 차를 기다리며 서서 갑자기
유희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너 혹시 여길 오면서 자살이라도 하겠다고 온 건 아니겠지? 잠옷을 사면서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어. 솔직히 말해 봐.그런 건 아냐?'
형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게 없잖아. 여행을 오는 사람이 속옷도 양말도 가지고
온 게 없잖아."
"필요하면 사면 돼. 입던 쥔 버리고. '
차암 세상 편리하게 사는구나 너."
'그리고 무엇보다......여기 와서 이렇게 오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쉽게 떠날 수 있을 줄 알았지. 그런데 막상 와보니까 내가 어디론가
그렇게 빨리 가야 할 곳이 없어. 그래서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야. 유회한테
폐를 끼치겠다는 건 물론 아니었구 "
빤히 형민을 바라보다가 유희가 물었다.
'여자도 사면서 돌아다닌 건 아니겠지?'
사랑이란......하고 생각할 때 그리고 그때를 돌아보며 이제 와서 내가
떠올려야 하는 건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커다란 연못, 깊디깊은 심연은
아니었을까.
나는 거기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랬을 것이다. 나는 다만 그 속에 녹아
흐트러진, 아니 흘러 들어간 작은 도랑 물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해서 그
연못에서 떠다니며 살았던 물풀은 아니었을까,
사랑이란 누군가를 누군가에게 젖어 들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서로가
서로에게 젖어 드는 것, 그래서 서로 섞여 하나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섞이지만 끝내 각자로 남는 그런 것.
사랑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가슴 저 밑에서 울려오는 첼로 소리를
듣는다. 그토록 자기를 주장하면서도 그러나 챌로는 다른 소리를 억누르지 않고
스며들지 않던가. 때로는 너무 낮고 낮아서 연기처럼 밑을 서성거리다가 때로는
장중하게 울리는 그 첼로의 소리들.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나와
신애에게 있어서.
그러나 떠오르는 의문은 언제나 남는다.
우리는 결국 서로에게 스며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각자가 스스로의 운명을
장중하게 울리다가 줄이 끊어지고 만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사랑에 무슨 끝이 있어야 한다고 믿지도 않았고 그것이 가 닿아야 할 어떤 곳,
끝내는 머물러야 할 어떤 자리가 있다고도 나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신애와의
만남부터가 우리 두 사람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가기도 했으리라.
그렇게 시작한 우리들의 사랑이 무엇을 꿈꿀 수 있었으랴.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고 그 무엇도 그녀에게 줄 것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우리의 만남에 함께 자리할 수 있는 무슨 끝이나 어떤 곳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는 것부터가 그때의 나로서는 불가능했던 것일까.
내가 알았던 것은 오직 하나였다. 그것을 나는 첫눈에 알았다.
그녀는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러기 위해 태어나 준 여자라고.
밖을 내다보면서 형민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잡고 있던 창문의 커튼을
열어 놓으면서 형민이 들어섰다.
'밖에 달이 떴어.'
저녁 먹은 것을 치우고 난 유희가 걸어 나오면서 물었다.
'커피 할 거야?'
밖에 달이 떴다니까.
'커피 할 거냐니까 무슨 딴소리.
밖에 달이 떴다고 내가 먼저 말했어.'
유희가 다가와 섰다.
'달 뜬 게 뭐 이상하니.'`
'봐.'
고개를 들며 창 밖을 내다보던 유희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형민의 어깨를 두들겨댔다.
'아니, 무슨 달이 저렇게 크니. 저건 정말 징그럽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유희에게 형민이 물었다.
'뭐 좀 물어 봐도 돼?'
'뭘? 돈 꿔달라고만 하지 마 '
'성이란 뭘까?"
유희가 든 담배가 그녀의 눈 밑에서 멈췄다. 빤히 형민을 쳐다 보면서 그녀가
되물었다.
'성이라니?그게 뭔데?
'섹스.
담배를 든 그 자세 그대로 그녀는 형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 멕였나. 밥 잘 먹고 너 왜 헛소릴 하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성이란 뭘까. 왜 사람들은 그것을 감춰야 하는
것으크 불결한 것으로 아니 때로는 법으로까지 금제의 선을 그어 놓는 것일까.
형민이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말야, 그것이 일종의 도구라는 생각도 해.'
얘가 순 나쁜 남자네. 도구라니. 너 같은 애가 바로 여자를 따먹는다는 둥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 짓 한번 하고 나면 이 여자는 내 거라고 생각하는
거고. 그게 무슨 도구니?'
'내 말은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라는 뜻이야.'
'몰라, 난 그렇게 어려운 말.'
'어렵지 않아. 지독하게 쉬운 말이야. 그렇잖아, 표현하는 거지. 안고 싶고,
가지고 싶고, 뭔가 확인하고 싶고. ....그걸 표현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잖아."
'본능이지 뭐."
'아냐. 그건 둘만이 나누어 갖는 기쁨의 표현이야.'
'좋은 말은 다 골라 하고 있네.'
중얼거리고 난 유희가 앞에 있는 탁자 위의 제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
그러고 나서 유희는 형민을 돌아보면서 입술을 뾰족이 내밀며 웃었다.
'이렇게 입으로만 애기를 할 게 아니라, 직접 해보면 어떻겠어?
"뭘?
"성인지, 섹스 말야.'
'누가?"
'우리 둘이서 말야.'
유희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중얼거렸다.
'그 남자는 여기서 나랑 자기도 했고 그 성인지 섹슨지도 했고 또 다른 짓도
했어."
'그게 뭔데?
"먼저 죽는 거.'
둘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없이 달빛을
내다보고 있었다. 겨울, 한겨울의 달빛을. 내렸던 눈이 드문드문 녹아서
얼룩무늬가 져 있는 밭에 납빛으로 달빛이 깔리고 있었다. 이상스레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끓어 오르는 갈증을 느끼며 형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달빛을
바라보았다.
섹스라는 인간의 본능 섹스를 통해서 사람들은 상대를 독점하고, 가족을 만들고
그 만든 것을 또 보호하려는 본능. 서로 다른 두 개의 본능이 결국 섹스에게
그런 멍에를 씌운 건 아닌가. 하나의 본능 뒤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본능.
형민이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한 여자를 사랑했어."
담배 연기를 뱉어 내며 유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사랑에 무슨 그래서가 있어. 했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말장난하지 마. 사랑이란 사는 거야. 살림차린다는 말 몰라?
그렇게 사는 거라구.'
'사는 거?
"그래. 우리가 밥을 먹고 웃을 입고 그렇게 사는 그게 사랑이야."
사랑 또한 수없이 많은 일상을 반복해 가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거나 같다는
소릴까. 그것은 아무것도 특별한 일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그런 거라는 뜻일까. 형민은 그때 신애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사는 건 말이지, 사는 일이란, 그리고? 그래서? 로 계속되는 고리 같은 거야.
'어떤 여자가 이런 말을 했었어. 사는 건 그리고? 그래서? 하면서 이어지는
고리 같은 거라구. 그러나 사랑은 달라. 그건 고리가 아냐. 사랑은 물이 아니라
불 쪽에 가까워. 그건 오래오래 길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야. 촛불 같은 거야.
타고 나면 없어지는 것이지.
"그 여자가 누구였는데?'
"내 선생님이었어. 고등 학교 때. '
유희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을 해?'
'가만있어 봐. 헷갈리네. 그러니까 지금 선생님이었다고 했어?'
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전에 얘기한 그 여자?바로 네 고등 학교 여선생이었다구?'
'그래. 맞아.
"미친놈. 연상의 여자하고 연애를 했다더니 그게 아니잖아.
중얼거리듯 말하고 나서 유희가 웃기 시작했다. 아, 눈물난다.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릴 때까지 웃어댔다.
모두가 다 똑같아. 내가 우리의 사랑을 가지고 웃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저들은 또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일뿐이야. 첼로와 물고기와
고갱의 그 푸른 옷을 입은 흙빛의 여인들과 그리고 캄캄하게 어두운 목탄화
그림이 있던 우리의 사랑을 나는 누군가가 이해해 주리라는 기대를 그래서
버렸어.
웃고 있는 유희를 형민은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미친놈.'
유희가 똑같은 말을 했다.
미친놈이라구. 그래, 난 진짜로 미쳤던 사람이야. 가을에는 그곳에도 나믓잎이
쌓였고 겨울이 오면 숲을 잠재우며 눈이 내렸어. 정신 병동에서 바라보던 뒷산.
겨우 웃음을 그친 유희가 말했다.
'남자와 여자는 엄연히 달라. 남학생이 여선생을 좋아할 수는 있어. 그건
미안하지만, 여선생이 더 문제다. 어떻게 쬐끄만 애하고.......'
유희가 또 웃어대기 시작했다.
사랑의 이름으로
신애, 아니 미술 선생님의 첫 번째 시간, 그것은 내 앞에 하나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을까 아니면 모든 문이 닫히는 순간이었을까. 하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열리는 것이었든 닫히는 것이었든, 그 문은 거대하게 크고, 너무
두터워서 아무리 두드려도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결코 움직일
수 없게......견고하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미술 시간은 석고 데생이었다. 중학교 때 그림을 그린 몇 명을
제외하고 우리는 목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학생들이었다. 미술실은
교사 2층의 맨 끝이었다. 아그리파였던가. 미술실에 놓여 있는 석고상을 보면서
한 녀석이 그 코를 매만지며 킬킬거렸다.
'야 이 사람 물건 되게 크겠다. 이 코 좀 봐.'
나는 그때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다.
코 큰 남자가 그것도 크대 임마.'
덩치 큰 뒷줄의 아이들이 키들거리며 떠드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녀석들은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으며 만나는 여학생들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무슨 모험담이나 되는 듯이 그들은 우리에게 이야기하곤 했었다.
X월 X일
이론 시간이었다. 미술의 역사. 그 가운데서도 서양 회화의 역사였다. 시간
내내 뒷자리의 녀석들은, 우리에게는 들릴 정도로 그러나 선생님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정확한 음량으로 떠들어댔다.
야 잘 빠졌다,저 선생.킬킬킬.
잘 빠지긴 짜아식아. 젖이 너무 작잖아. 히히히.
젖만 작냐? 히프가 저래 가지고 애나 낳을 수 있을까. 키들키들
그래도 저렇게 빠진 몸이 옷걸이로는 그만이야. 느이들 모르지? 모델하는
애들, 걔네들 살 없어. 히쭉히쭉.
반장 화영이가 일어서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첫 시간인데 좀 조용히 합시다,
그래 임마, 우리도 첫 시간이니카 선생님을 좀 감상하고 있을 뿐이야.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에 대하척 선생님이 칠판에 쓰고 있는 사이에 녀석들은
화영이에게 속삭였다.
야, 우리 다음 시간에는 선생님을 모델로 그리자고 하자. 키들키들.
좋아, 흐흐흐, 그러자. 히히히.
맞아. 모델은 원래 벗겨 놓고 그리는 거라구. 다음 시간에는 누드 모델
그리기로 하자, 반장, 반장 하는 일이 뭐야? 빨리 선생님께 말씀 여쭈라구.
칠판을 등지고 돌아서며 선생님이 우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할말 있으면 손 들고 일어나서 하고. 왜 이렇게 수업 태도들이 시끄러워요.
선생님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X월 X일
미술반에 들어가다. 미술부 회원이 된 셈이다.
지난 학기 동안 왜 그떻게 힘들어 했는지를 모르겠다. 자신이, 왜 언제
그랬는지 과연 그게 나였는지조차 떠올리기 어렵게 나는 변한 것 같다.
1주일에 세 번 선생님의 지도를 받게 된다. 장 선생님과 두 분이 시간 나는
대로 지도한다고 했다. 그러나 상급생들의 이야기로는 그것은 단순히 그렇게
정해져 있을 뿐,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따금 야외 스케치를 나갈 때 선생님들이 따라 나서기는 한다고 했다.
선배들이, 미술실 청소를 누가 무슨 요일에 할 건지 청소 당번을 정하라고 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청소는 내가 하겠습니다, 하고 말해 버렸다. 그렇게 해서
나는 저녁이면 혼자 남아 미술실 청소를 한다. 석고상들의 먼지를 털기도 하고
모델로 쓰이는 말라 빠진 북어나 과일들을 정리하기도 한다. 언제나 조심스러운
건 마른 꽃들이다. 그건 잘못 다루면 부서지고 만다. 학생들이 그리다 만
그림들이 이젤에 얹혀 있는 사이를 돌며 바닥을 쓸고 물걸레질을 한다.
고모와 살면서 혼자 늘 청소를 했기 때문일까. 혼자 있는 그 시간이 즐겁다.
미술실과 나는 아주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다. 학생들이 그리다만 그 그림들과도
그리고 석고상들과도 언젠가는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오늘 처음으로 했다.
X월 X일
나는 처음에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미술실에서였다. 선생님이 나를 불러서 말했다. 너 헌책방 같은 게 어디 있는
줄 아니? 내가 알고 있던 헌책방은 자춰방 골목에 있는 허름한 서점뿐이었다.
선생님이 말했다. 그건 책 값으로 파는 거잖니? 내가 말하는 건 헌책을 싸게 살
수 있는 데 말야. 선생님이 찾고 있던 건 고물상이었다. 종이 값으로 싸게 살
책을 말하고 있었다. 무엇에 쓸 것이냐고 내가 물었을 때 선생님이 말했다.
너희들 다음 시간에 콜라주를 해야 하는데. 색종이만으로는 부족하니까.
X월 X일
오늘은 데생이 아닌 뜯어 붙이기를 했다. 색종이와 컬러 인쇄된 헌 잡지들이
수북이 쌓인 미술실에서 우리는 각자 필요한 종이를 가져다가 뜯어 붙이기를
했다. 다들 끝났을 때 선생님은 우리의 작품을 칠판에 내다 세우고는 그것들에
대한 소감을 곁들여 평을 해나갔다. 더러는 거기에 제목을 붙여 주기도 했다.
나는 선생님이 내 작품에도 제목을 붙여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자 입 안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말없이 내
뜯어 붙이기를 바라보다가 학생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건 좋군요. 특히 만든 학생의 심리 상태 같은 게 드러나 보여요.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평면 위에 색과 선 그리고 면으로 구성된 이런
구도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가를 보는 눈이에요. 이 작품은 표현이 아주
둔중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움직임이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선생님은 내 그림 위에 쓰셨다, 제목을.
'군무 '
그렇게 써놓고 나서 선생님은 옆에 한자를 덧붙였다. 澤舞'라
군무. 여럿이 함께 추는 춤.
학교 수업이 끝났을 때 나는 미술실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그리고 내 뜯어
붙이기를 내밀면서 말했다. 이거 제가 한 거예요, 선생님. 너였구나. 무슨
뜻인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선생님이 말했다.
둔중하더구나. 놀랍게 무거웠어. 그러면서 어둡지는 않았고. 그러고 나서
선생님이 내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나는 지금 선생님의 손이 닿았던 그
어깨를 가만히 만져 본다.
X월 X일
선생넘이 우셨다. 오늘처럼 싫은 날은 없었다. 선생님도 미술 시간도.
청소를 해놓고 혹시 선생님이 들르실까 기다렸지만 끝내 선생님은 나타나지
않으셨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미술실을 나와 교무실을 창 밖에서 들여다보았을
때 거기에는 빈 책상과 의자들만이 고요했다.
왜 선생님은 그렇게 약했을까. 화가 나도록 약했을까. 늘 맨 뒷줄에 앉는 키 큰
녀석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마 오늘 선생님을 놀려대기로 무슨 약속을 하고
나온 듯했다. 수채화 시간이었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러나 적어 놓기는 하자.
'오늘부터 앞으로 세 시간에 걸쳐 수채화를 할 깁니다. 수채 물감들 준비했죠?'
그때까지 선생님의 목소리는 경쾌했다. 네, 하고 우리가 대답할 사이도 없었다.
뒤쪽에 앉았던 녀석들이 합창을 하듯 말했다.
'아니요오.'
선생님의 눈이 둥그래지셨다.
지금 그 뒤에서 뭐라고 했어요?"
'준비 못했어요오.
'준비를 못했다고요?'
'네에에.'
그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합창이었고. 더러는 낄낄거리기까지 했다.
'분명히 전 시간에 준비물에 대해서 말했잖아요?'
'네에에.
"그런데 왜 준비를 안 했어요?'
몰라요오.'
그때부터는 엉망이었다. 선생님은 화를 내면서 얼굴이 점점 빨갛게 되어갔고,
뒤쪽 아이들은 무슨 말을 물어도, 몰라요오 아니면 네에에였다. 낄낄거리는
소리가 이어지고. 이제는 수채화 도구를 준비한 학생들까지 이 갑작스럽게 변한
학급 분위기에 책상을 치면서 키들대며 웃었고 그들까지 몰라요오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겠다는 거예요, 뭐예요?"
몰라요오.
"내 수업을 거부하는 거예요?
'몰라요오.
"수업받기 싫은 학생들은 나가요! '
싫어요오
'난 출석 같은 건 안 부르니까 싫은 사람은 나가라니까!'
'싫어요오. 안 나갈래요오. 있을래요오.'
마치 합창을 하는 것 같은 그 느린 목소리에 이제는 반수가 넘는 학생들이
합세하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면서 선생님이 앞에 있던 백묵 통을 집어 뒤쪽의 덩치 큰
녀석들에게 내던졌다. 그러나 그 녀석들은 꿈쩍도 안 했다.
'넌지지 마세요오 맞으면 아파요오.'
'나가라니까!
"싫어요. 싫어요오. 싫어요오.'
그들을 쏘아보고 있는 선생님의 눈에서 눈물이 배어 나왔다.
마치 무언가 찔러서는 안 되는 것을 찌르기 위해 칼을 돌고 서있는 사람처럼
선생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듯이 선생님이 미술실을 빠져
나갔다.
학생들이 일제히 책상을 치면서 인디언들의 축제처럼 괴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선생님은 다시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X월 X일
네가 열쇠를 하나 가지고 있지 않겠니.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내 발 밑이 무너져 내리면서
아주 까마득한 저 밑으로 몸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늘 네가 일찍 나오더구나. 청소를 하는 것도 너고.
여기만 오고 싶거든요, 그렇게 말하고 싶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선생님이 말했다.
오고 싶을 땐 언제든지 와. 와서 그려. 그리다가 가고. 이제부터 넌 언제나
여길 와도 돼.
돌아오는 길에 세 군데나 문방구를 돌며 오랫동안 서성거리고서야 마음에 드는
열쇠 고리 하나를 살 수 있었다. 지금 미술실 열쇠는 그 열쇠 고리에 걸려
있다.
사랑이라는 건 무엇일까. 그때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하나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어떤 모습은 아니었다. 형태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거다.
사랑.. .. 그것은 만질 수도. 쓰다듬을 수도 없어야 했다. 네모로 각이 져
있다거나 아니면 둥글게 부드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거나. 어느것이어도 좋았다.
형태가 없는 것, 아니 그 모양을 가늠할 수 없는 것. 그것을 나는 사랑이라고도
생각했으리라. 저녁 하늘 ... 놀이 지기 시작하는 서쪽 하늘을, 그 붉게 물들어
가는 허공을 무심하게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아니면 안개 ......멀리 있던
것들이 사라지고 가까이 있던 것들마저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갑자기 나를
혼자 이게 하는 안개, 그러나 결국 나는 혼자가 아니라 더 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게 하는 안개, 가느다란 빗발......내리다가 말다가 하는
비. 우산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오후. 빗물에
젖어 잘 보이지 않는 거리의 시계, 그 시계 바늘. 뒷모습 혹은 어떤 사람의
어깨 ......유럽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의 레인코트 같은 그런 코트, 허리를
묶은 긴 코트, 일자로 뻗어 나간 어깨와 코트 아래로 뻗어 내린 다리 밑에서
돌을 깐 길을 찍듯이 울리며 가는 하이힐. 새벽 ... 그때의 싸아한 아침 공기.
마치 그림자처럼 개를 끌고 가는 사람, 담장밑을 숨듯이 걸어가는 고양이.
지나가는 차량도 없는 길에서 저 혼자 변해 가는 횡단 보도의 신호등. 어쩐지
슬픈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 푸른 색깔.
그리고 사랑은 먼 것이어야 했다. 가까운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일상이었고. 신문에 끼여서 들어오는 선전 문구로 가득 찬 종이쪽, 읽지도 않고
버려지는 종이쪽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질겅질겅 껌을 씹는 여자, 그 입술은 사랑이 아니었다. 포장을 친 떡볶이집에
앉아 있는 여자 애들의 무심한 얼굴, 그 어디에 사랑이 자라날 온기가
있겠는가. 달걀이 얹힌 라면을 먹고 있는 학교 효 분식 센터의 여자 애들,
어디에 사랑이 클 터가 있겠는가.
버스표가 사랑일 수 없고, 학원 앞에서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의 참고서로
통통하게 배가 부른 가방이 사랑일 수 없다, 그것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커다란 목소리로 떠드는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형부 될
사람하고 고스톱을 쳤는데, 웃겨, 무슨 남자가 그렇게 화투를 못 치니. 그 좁은
공간에서 그렇게 너스레를 떨고 있는 여자에게서 느껴질 사랑도 이 세상에는
있을까. 건드리면 가느다란 쇠줄이 윙기듯 소리가 날 듯한 긴장감으로 싸여서
그러나 윤기 흐르는 따뜻한 입술로 서 있는 여자, 어쩌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가 꿈꾼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내게 있어 사랑이라는 것은.
그러나 나는 그때 몰랐었다. 그랬으리라. 그런 것에서 많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사랑은 싹트고 자라난다는 것을. 사랑은 그렇게 특별한 것도
갑작스러운 것도 아니다.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먼지가 쌓이듯이 그렇게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어느 날 그 먼지를 닦아 낼
때 그 밑에서 드러나는 가구의 선명한 윤기처럼 바로 그렇게 시작된다는 것을.
그러나 그때 내가 꿈꾸던 사랑은 결코 내가 알고 있는 것이어서는 안 되었다.
나는 여자가 어떻게 밥을 먹으며 어떻게 옷을 입으며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몰랐다. 내가 아는 것은, 여자는 고모가 전부였다. 그러나 고모는
여자는 아니었다. 어머니를 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까.
고모는 질박한 뚝배기떴다. 그러나 사랑은 유리그릇처럼 투명한 것이어야 했다.
때리면 은빛으로 도금된 듯한 그런 소리가 울리는 크리스털이어야 했다.
그때의 나는 그랬다. 모든 것과 함께 있는 것, 모든 것과 닮아 있는 것 그것은
나에게 사랑은 아니었다. 그것은 무언가 다른 것이어야 했다.
고모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 점점 뜸해졌다.
영어 학원에 다녀오는 길에 나는 시내의 로터리에서 전화를 했다.
'전화를 다하고......무슨 일이 있니?'
아니에요. 그냥 했어요.'
'요즘은 왜 편지도 잘 안 쓰더구나?잘 지내지?'
'그럼요. 중간 고사 성적 나오면 보내 드릴게요.'
'자신 있나 보구나. 이젠 공부를 좀 하나 보지.'
'그렇지도 않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요."
'너만 잘 있으면 나야 무슨 걱정. 몸은 건강하지? 아침저녁 요샌 추우니까 감기
들지 않게 조심하고. 밥은 제대로 챙겨 먹니? 이제 겨울 되면 하숙해야지
추운데 끓여 먹겠니? 내가 한번 올라가 볼까? 내복은 아직 안 입어도 되겠지?
김장철 전에는 부쳐 주마. 그럼 되겠지?'
내가 대답할 사이도 없이 고모는 열 개쯤을 한꺼번에 물으셨다.
전화를 끊고 나오면서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냥 한 건데. 마침 공중 전화
박스가 텅 비어 있길래 들어가 본 건데
X월 X일
선생님과 함께 어두워지는 미술실에 남아 있었다. 청소를 끝낸 후였다.
선생님은 자신의 책상을 치우고 계셨다. 화집을 정리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고갱의 화집을 한 쪽으로 넘겨 놓다가 깜짝
놀라듯이 말했다.
이게 여기 있었네.
그것은 고갱의 그림으로 된 달력이었다. 이미 11월인데도 그 달력은 비닐로
싸인 새것이었다. 선생님이 혼자말을 했다. 그렇게 찾을 때는 없더니 비닐
커버를 벗겨 내고 선생님은 고갱의 그림들을 넘겨 보고 있었다. 나는 미술실의
커튼을 닫았다. 형광등 불빛 아래 학생들이 그리다 만 그림들로 이젤이
어지러웠다. 다가서는 나에게 선생님이 말했다.
'형민이 너 ......고갱을 아니?'
내가 웃으며 말했다.
'반나 보지는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따라 웃었다.
내가 말했다.
'고갱이 고흐와 형제가 아니라는 건 압니다.'
신애가 소리 없이 옷는 얼굴로 의자에 앉은 채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오래
참았던 고백을 했다.
'고갱이 그린 <황색의 그리스도>도 아는데요,
무슨 소리니?
"생각나지 않겠지만,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나오시기 전에 강가에서 그림을
그리곤 하실 때 전 선생님을 뵌 적이 있어요. 그때 말씀하셨잖아요. <황색의
그리스도>를 다 아냐고요.
신애가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내 가슴에서 물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생각나. 그런 학생이 있었어. 그럼 ... 그게 너였다는 거니?'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그녀가 내 어깨를 쳤고 그리곤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랬으면서, 그걸 이제야 말하니. 나쁘구나 너 참.'
달력을 비닐 커버에 다시 집어 넣고 난 그녀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거 너 줄게."
나는 그 달력을 받았다.
'미안해, 겨우 몇 달밖에 안 남은 달력이라서.'
'달력이 아니라 화집이잖아요. 고갱 거를 참 가지고 싶었거든요.
"그랬었니? 잘됐구나.'
나는 내가 도서관의 책에서 고갱의 그림을 면도칼로 오려 내어 내 방에 붙여
놓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까말까 망설였다.
나는 선생님이 내미는 고갱의 그림이 있는 열두 장의 고갱의 그림이었다.
미술실 문을 닫고 우리는 천천히 왔다.
선생님이 물었다.
집에서는 무슨 일을 하시니?
'집이요?
"그래.'
'전 여기가 집이 아니에요. 조금 시골이에요. 중학교도 거기서 다녔고요.
" 아 그랬지 참. 아버지는 뭘 하셔?'
'아무것도 안 해요.
안 하다니?
"돌아가셨어요. 제가 아주 어려서.
선생님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걸 어쩌니.'
선생님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 눈길을 차마 오래 바라 볼 수가 없어서
나무들이 늘어선 학교 뒷산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학교 교정보다 더 많은 어둠이 몰려서 응성거리고 있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다가왔다. 아주 먼, 저 숲의 어둠 속에서 어느 한 가닥이 풀려서 내게
다가오듯이.
'몰랐단다. 정말 미안하구나."
돌아오면서 나는 선생님이, 아니 그녀가, 누나였으면 좋았을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밤이 너무 아름답다.
고모가 올라온 건 가을이었다. 마침 시에서 열리는 행사에 학생들을 데리고
올라을 일이 있어서 왔던 길이라고 했다. 학생들과 함께 묵고 있는 여관으로
내가 찾아갔을 때 고모는 혼자 여관방을 지키고 있었다. 인솔자로 남자
선생님이 한 분 더 계셨기 때문에 하릇밤 나와 이야기나 하면서 자고 가겠다는
고모를 모시고 자춰방으로 향했다.
'여기냐?"
방안을 둘러보며 고모는 꼿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사내 녀석 방이 이렇게 깨끗하냐.'
고모가 오는 것 때문에 특별히 청소를 한 것도 아니었다.
'나 혼자잖아요.
'그러니까 좀 지저분해야지. 계집스럽기는. 인형 사다 놓지 않은 게 다행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리된 방에 고모가 만족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빨래는?
'토요일 날 몰아서 해요.'
고모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마치 저희들끼러 무언가 재미있는 귓속말을 하다가
웃음을 터뜨리는 어린 계집아이들처럼.
'밥은?
' 한번에 왕창 했다가 두고두고 먹지요 꿔 그게 좀 귀찮기는 귀찮데요. 누가
하루 세 번씩 밥을 먹도록 정헤 놓았는지. 알약 같은 거 하나 먹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되면 얼마나 편리하겠어요.
"요샌 강에 안 가니',
'그건 그만뒀어요. 나 요즘 공부 열심히 해요. 다음 학기 성적은 아마 다를
거예요.'
그러고 나서 나는 덧붙였다.
'강에 나가는 거보다 공부나 하고 있는 게 더 쉬워요.'
그 말에 고모가 웃었다.
이제야 철이 드나 보구나.'
그러나 그때 나는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다. 고모와 나의 사이에
이제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이 껍질처럼 생겨나고 있다는 걸 나는
아프게 느껴야 했다.
고모 제가 제일 견딜 수 없을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일요일 아침 교회를 가는
아이들을 볼 때예요. 제일 부러운 것도 그 애들이고요. 그 애들은 이 세상의 한
쪽만을 사는 거 같으니까요. 밝은 쪽만을요. 그런데 나는 그렇지가 못해요. 난
왜 이렇게 어둡고 칙칙하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방안으로 비쳐 드는 저녁 빛이 한결 어두워졌을 때 고모가 말했다.
'저녁은 나가서 먹자."
'고모가 해주지. 고모 밥 먹고 싶은데."
'싫다 애. 저 엉덩이도 못 돌릴 부어에 들어가긴 나도 싫다.'
저녁을 먹으러 가기 위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골목길을 우리는 걸었다.
초가을 밤바람이 서늘했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면서 내가
말했다.
'고모 나 무슨 비밀 얘기 하나 할까요?'
'비밀?말 안 하는 게 비밀이지 하는 게 무슨 비밀 얘기냐.'
나 있지요......에이, 그만두죠."
'해봐라.
"그럴까, 해도 되죠?"
발끝으로 땅바닥을 긁적거리면서 내가 말했다.
'나 누구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누굴 좋아하게 됐다니까요.'
뭐가 어째? 이 놈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벌써부터 여학생 꽁무니나
쫓아다니나 보구나. 이런 큰일이 있나.'
'여학생이 아네요."
'그럼.
"우리 학교, 선생님이에요. 미술을 가르쳐요.
고모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밝았기 때문에 나는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마치 무슨 모욕이나 당한 듯이.
'그거 잘됐구나.'
말해 놓고 나서 고모가 물었다.
'미인이냐? 그 여선생님이."
'잘 모르겠어요.'
고모가 내 머리에 군밤을 먹였다.
'학교 때 선생님 좋아하는 거야 당연한 거지 나쁠 게 뭐 있니.
그렇지만 너 그 선생님이 좋다고 너도 그림이나 그리겠다고 나서진 말아. 제발
고모 말대로 이과 공부 해가지고, 조용조용 살아. 네 엄마 아버지처럼은 안 돼.
푸르고 투명한 술
사랑이란......하고 생각할 때 그리고 그때를 돌아보며 이제 와서 내가
떠올려야 하는 건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커다란 연못, 깊디깊은 심연은
아니었을까.
나는 거기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랫을 것이다, 나는 다만 그 속에 녹아
흐트러진, 아니 홀러 들어간 작은 도랑 물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해서 그
연못에서 떠다니며 살았던 물풀은 아니었을까.
사랑이란 누군가를 누군가에게 젖어 들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서로가
서로에게 젖어 드는 것, 그래서 서로 섞여 하나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섞이지만 끝내 각자로 남는 그런 것.
사랑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가슴 저 밑에서 울려오는 챌로 소리를
듣는다. '그토록 자기를 주장하면서도 그러나 챌로는 다른 소리를 억누르지
않고 스며들지 않던가. 때로는 너무 낮고 낮아서 연기처럼 밑을 서성거리다가
때로는 장중하게 울리는 그 첼로의 소리들.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나와 신애에게 있어서.
그러나 떠오르는 의문은 언제나 남는다.
우리는 결국 서로에게 스며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각자가 스스로의 운명을
장종하게 울리다가 줄이 끊어지고 만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사랑에 무슨 끝이 있어야 한다고 믿지도 않았고 그것이 가 닿아야 할 어떤 곳,
끝내는 머물러야 할 어떤 자리가 있다고도 나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가 있었으랴. 무엇을 꿈꿀 수 있었으랴. 그러나
그것은 내 믿음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고. 그 무엇도
그녀에게 줄 것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내가 알았던 것은 오직 하나였다. 그것을 나는 첫눈에 알았다.
그녀는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러기 위해 태어나 준 여자라고.
내가 처음으로 그녀의 집에 갔던 건 저녁 무렵이었다. 그날 그녀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었다. 오후 시간을 미술실에서 보내고 밖으로 나오려고 하던 그
무렵이었다. 미술실로 찾아온 김 선생이 나를 부르면서 말했다.
'마침 잘됐다. 너 심부름 좀 하나 해라.'
그는 나를 불러 세우고는 들고 온 서류 봉투를 내밀면서 말했다.
"이거 윤 선생 집에 좀 갖다 드려.'
나는 그때 그녀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저, 선생님이 어디 사시는지를 모르는데요.'`
아 참, 그렇나. 난 또 네가 미술실 일을 보기에 아는가 했지."
그는 미술실에 굴러다니는 종이를 찢어 아무렇게나 갈겨 썼다. 신애의
집이었다. 그 종이를 내게 주면서 그가 말했다. 오늘 아파서 못 나왔다던데
아파트에 가면 있을 거다. 만약 없으면 경비실에 맡겨 놓아도 되는 거고. 집에
가는 길에 좀 들렀다가 가.'
주소를 적은 종이와 함께 나는 그가 내미는 봉투를 받았다. 봉투에는 마치 무슨
시험지 같은 종이들이 들어 있었다. 학교를 나와 아파트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학교에 나오지 못한 그녀를 찾아간다는
게 무엇보다도 나를 즐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라도 그녀가 사는
집에 찾아가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게 거의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어떤
집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그녀는 있을 것인가. 어느새 그 곳에 왔는지 모르게
신애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앞에서 시내 버스를 내렸을 때 나는 비로소 그녀에게
가지고 갈 것을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선생님이 아프다고 하지
않았던가. 두리번거리는 내 눈에 아파트 상가 한 쪽의 꽃집이 눈에 들어왔다.
꽃을 사 들고 그녀의 아파트 벨을 누르고 서 있을 때 나는 무언가 아주 커다란
발 하나가 저벅저벅 내 가슴을 밟으며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인터폰을 통해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신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네, 선생님. 접니다,'
'누구?"
'형민입니다.'
잠시 후 문이 열렸을 때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어떻게 왔어?"
그때 내 얼굴은 빨갛게 물이 들어 있었으리라. 꾸벅 인사를 하고 나서 나는
내가 생각해도 좀 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김 선생님이 이걸 갖다 드리라고 해서 왔습니다. '
나는 서류 봉투를 먼저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들며 그녀는 조금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고 나서 나는 꽃을. 상가 꽃집에서 산 장미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거 ....... '
그녀의 눈길이 잠깐 장미에 가 얹혔다. 그러고 나서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난
그녀가 말했다.
학생이 무슨 장미야. 이거 비싼 건데.'
많이 편찮으세요?'
'아니, 몸살인데... ...아침에 일어날 수가 있어야지. 요즘 좀 과로했더니
그랬나 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는
아파트 복도는 어둑어둑했다. 그 희미한 빛 속에서 바라본 그녀는 그 긴 목이
더 길어 보이게, 깊이 목이 파인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몸살 때문이었을까,
조금은 헬쓱해 보이는 그녀를 꿈처럼 바라보다가 나는 몹시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선생님. 가보겠습니다.'
뛰듯이 돌아서려는 나를 그때 그녀가 불렀다.
영민아, 잠깐 기다려."
내가 돌아섰다.
'뭐가 그떻게 바쁘니. 어차피 늦었는데......나랑 저녁이나 먹고 가려무나.
괜찮겠지?'
꼭 무슨 실연한 여자가 차린 것 같은 집이란다. 신애가 그렇게 말했던 식당은
단지 안의 상가 2층에 있었다. 집에서 입고 있던 옷에 헐렁하게 코트만을 걸친
채 그녀는 나를 데리고 아파트를 나왔고, 작고 아기자기한 그 식당으로 가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이 식당의 어디가 그녀에게 실연한 여자를 느끼게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하면서 나는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레스토랑 페페. 그게 그 집
이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이 식당은 실연한 여자가 차린 집 같은 게
아니라 곧 실연할 여자가 하고 있는 집 같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고 있었다.
'왜 웃니?
' 아니에요. 그냥 선생님이 말하던 이 식당 설명이 우스워서요.
'실연한 여자?'
'네. 그렇지만 전 실연한 여자가 아니라 곧 실연할 여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것도 말 된다 뭐.'
그녀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면서 나는 어쩐지 언젠가 그녀가
소리내어 웃는 모습을 보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밥을 다 먹고 났을 때
커피를 마시면서 그녀가 말했다.
'교사라는 게 너희들 가르치는 일만 하는 건 아니란다. 이런 저런 잡무가
얼마나 많은지 나도 놀랄 정도야.' 조금은 쓸쓸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신애가 그때 한 쪽을 가리켰다.
'저기 저 사람들 좀 봐. 뭔가 초록및 음료를 마시고 있지 않니? "
나는 신애가 가리키는 쪽 좌석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한 남자와 한 여자였다.
서른 살은 조금 넘었을까.
'내가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할까.'
신애가 내 쪽으로 몸을 숙이며 탁자에 팔을 었었다.
'내가 어렸을 땐데 나는 흔자서 한 약속이 있었어. 이 다음에 내가 누구랑
연애를 하게 되면 꼭 압생트라는 술을 마셔 보겠다고.'
나는 이럴 때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어려서 훗날 누구와 연애를
하며 무슨 술을 마셔 보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걸 나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겨우 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물었다.
'지금 그 술 이름이 뭐라고 하셨어요?'
'압생트. 색깔이 저기 저 사람들이 마시는 거와 너무 닮은 그런 술이야. 그
술은 원래는 물처럼 투명해. 그런데 거기다가 물을 붓거나 얼음을 넣으면
색깔이 변해, 바로 저런 푸른빛으로 어려서 그 술을 보았을 때 얼마나
화려했는지. 그때 난 처음으로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단다.'
어른이 되지 않아도 술을 마실 수는 있어요. 어쩐지 그녀가 하는 말이 나와는
너무나 먼 세계의 그것처럼 느껴지면서 나는 표현하기 힘든 무엇을 느꼈다.
외로움이기도 하고 안타까움이기도 한.
'그렇게 색깔이 변하는 술은 압생트말고도 또 있어. 다 비슷한 향기를 가진
술이지. 물처럼 맑던 술이 우웃빛으로 변하는데, 그 술을 중동에서는
아락이라고 해. 그리스에 가면 같은 술을 가지고 우조라고 하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그런 때가 와서 내가 그녀와 압생트든
우조든 마실 수 있는 때가 올 수 있다면 ......그랬다, 나도 그녀처럼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날 돌아오며. 나는 무슨 말을 신애에게 하고 싶었던가
생각했다.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나는......일요일 아침 교회에 가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웠어요. 그 애들은 이 세상의 한 쪽만을 사는 거 같았으니까요. 난
왜 이렇게 어둡고 칙칙하나......그런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그들은 아주 밝고
따스한 곳에서 햇병아리처럼 살아가는데 말입니다. 아니죠. 어떤 때는 흰
갈기가 날리는 말 같기도 했으니까요.
그날 아침은 안개가 짙었다. 미술 부원 아흡 명이 선생님과 함께 떠난 야외
스케치였다. 일요일에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리기로 한 건 대추술 유 선생이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 대추술은 유선생 별명이었다.
반원들이 모이기를 기다리며 서성거리던 버스 정류장에는 가을 안개가 휘몰리고
있었다. 하나 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신애는 청바지에 똑같은 천으로 된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유 선생은 언제나 똑같은 낚시꾼 차림이었다.
그날의 야외 스케치 장소는 버스로 한 시간이 채 못 되는 거리에 있는
계곡이었다. 작은 폭포가 있었지만 가을 가뭄에 물이 말라서 폭포에서는 물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바위를 타고 흘러내렸다. 단풍이 지고 있었다.
버스를 내려서, 형민은 신애의 화구 가방을 들고 그녀의 옆에서 걸었다. 신애가
그에게 물었다.
3학년 저 애들은 왜 저렇게 뒤에 처지니? 늘 그렇드라."
콧수염이 거뭇거뭇한 3학년 선배들은 거의가 담배를 피웠기 때문에 맨 앞에
서서 걷는 대추술 유 선생을 따라 걸어야 하는 건 언제나 우리 밑의
학년들이었다. 그들은 뒤에 처져서 담배를 피우며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모르셨어요? 담배를 피의느라 그래요.'
'난 또......그걸 몰랐지. 기왕에 피우는 거 그냥 피워도 될 텐데. 뒤로 처지는
건 뭐란 "
사실은 형들이 대추술을 무서워하거든요.'
신애가 후후 하고 웃었다.
산을 오른 그들은 늘 그래 왈던 대로 저마다 자리를 잡고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체로 그림을 그리는 건 오전 시간이었다. 점심이 끝나고 나면,
이제까지 그린 그림을 돌아보며 유선생이 이것저것 지적을 하기도 하고 몇 군데
손을 대주는 결우도 있었다. 오후에 그림에 더 손을 대는 학생들이 있기는 했지
만, 그때부터는 자유 시간이었다. 점심 시간이 시작되면서부터 유 선생은
가지고 온 술을 마셨다. 오후 시간이면 그래서 유 선생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
있게 마련이었고, 학생들은 그 술이 깨기를 기다리듯이 대추술 유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날 유 선생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화구를 꺼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산에 땋자마자 학생들이 이젤을
세우는 것을 바라보면서 술병을 땄다.
한낮이 가까워 오면서 산에도 안개가 걷혔다. 그때 이미 유 선생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유 선생을 조심스레 홀깃거리면서 신애가
학생들에게 말했다.
'애들아. 선생님 저렇게 술을 마시면 어떻게 산을 내려가니';
상급생들이 별걱정을 다한다는 듯이 대답했다.
'내려가실 땐 다 깨시잖아요.
그래도 오늘은 좀 다르다, 아침부터 드시지 않니
'그림 그리기 싫으실 땐 늘 그러시는 걸요
학생들은 전연 유 선생의 술에는 관심도 없는 얼굴들이었다.
그런 유 선생이 신애를 부른 건 점심 시간이 가까워서였다.
'난 말이죠 필요할 땐 남자 뺨도 올려붙이는 그런 여자가 좋습디다.
'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김길흥이한테 잘해 줄 필요 없습니다.'
김길홍이라면. 학년 주임을 맡고 있는 김 선생이었다. 형민이에게 서류를 전해
주라면서 신애의 집까지 심부름을 시켰던.
잘해 준다니요?
만인에게 사랑을 베푸는 건 사랑이 아닙니다. 그건 종교가 할일이에요.
' 선생님, 지금 저한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세요?'
'만인을 사랑하는 건 인류를 구원하려고 했던 몇 사람으로 족합니다. 우린 그
사람들이 밝힌 진리 덕분에 밥 잘 먹고 잠 편히 자면서 살면 됩니다. 학교
선생을 한다는 게 자기 색깔을 죽여야 하는 건 아닙니다.'
'왜 갑자기 그런 어려운 애기를 하세요.'
'싫은 걸 싫다고 할 때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냄새가 있는 거 아넙니까. 사람은
사랑할 것만 사랑하는 겁니다.'
신애가 얼굴을 굳히면서 물었다.
'제가 뭐 잘못하고 있는 게 있나요?'
'김길홍이 그 자식 나쁜 놈입니다.'
산애가 애매하게 웃었다.
'왜 그러세요. 유 선생님답지 않게. 저 유 선생님이 누구 욕하는 거 처음
보는데요.'
'그 놈이 강 선생 보는 눈이 안 좋아서, 하는 말입니다.'
신애가 화난 얼굴로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켈얘기는 아니고... ...그 놈이 전력이 좀 지저분해서."
유 선생이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너희들은 자식들아, 뭘 재미있어서 듣고 있어. 저리들 가.'
3학년인 규태가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다 압니다. 킬러잖아요, 킬러."
옆에 앉았던 성일이가 손가락에 침을 묻혀 허공에 점을 찍으며 말했다.
'아냐 이러고 다니지. 새로 여선생님만 왔다 하면 이렇게 침을 칠해 놓고
다니잖아요."
유 선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들이 못하는 소리가 없어. 너희들 가서 그림이나 끝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면서 합창을 하듯 3학년 학생들이 말했다.
네, 알았습니다. 천천히 드십시오."
유 선생에게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것은 그가 나이가 많고 학교에
오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이야기란 것은 이랬다.
몇 해 전인가 고3학생들이 어느 술집에 들어갔더니 거기 유 선생이 취해
있더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질겁을 하고 밖으로 나오려고 하자 어느새 그들을
알아본 유 선생이 학생들을 안으로 불렀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날 학생들과
함께 유 선생은 몹시 취했고 선생은 학생들을 끌고 포장마차에까지 가 2차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학생들의 부축을 받으며 집에까지 간 유
선생은 대문 앞에서 막무가내로 학생들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더라는 것이었다.
그때 유 선생이 한 말이 두고두고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그의 별명이
되었다. 야 이 녀석들아, 들어와서 우리 집 대추술 마시고 가거라. 선생은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서 학생들을 안으로 불렀다고 했다.
마지못해 현관 앞까지 따라간 학생들 앞에 이윽고 부인이 얼굴을 내보였다. 그
순간 이제까지 큰소리를 쳐대던 모습은 간 곳이 없이, 갑자기 유 선생이
애걸하듯이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여보, 우리 대추술 아직 남았지?'
학생들의 말에 의하면, 사모님은 우람했다고 했다. 키가 작은 유 선생에 비해
키도 주먹 하나 정도는 큰 부인이 떠억 버티고 서서 묻더라는 것이었다.
'대추술이요? 어디 있는데요?'
'아니, 우리 대추술 아직 남았잖아.'
'대추술 당신이 다 마신 지가 벌써 작년 아네요.'
'아냐. 우리 대추술 아직 남았어.'
유 선생의 목소리가 변할 때부터 이제나저제나 도망칠 궁리만을 하고 있던
학생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는 사이, 사모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너희들, 거기 시 여기다 이름들 다 적어 놓고 가지 못해. 내일 교장
선생님한테 전부 알려 버릴 테니까. 한다한다 하니까 학생 놈들이 선생과 술을
다 마시질 않나.'
대추술은커녕 명단을 적어 내라는 말에 흔비백산해서 줄행랑을 놓은 선배들이
그 후 무언가 일이 있을 때마다 유 선생에게, 선생님 우리 대추술 아직
남았지요? 했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유 선생님 별명이 대추술이었다.
그날 시내에서 버스를 내린 유 선생은 신애를 보면서 말했다.
산에서 내가 한 말, 술 취해서 한 소리가 아닙니다.'
신애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전 그냥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시내 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건너가고 있었다.
신애의 뒤쪽에 서서 형민은 신애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전 김 선생님께 특별히 뭘 잘해 드리고 그런 적이 없는 걸요.
'그러나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질 않아요. 그리고 난 같은 미술 교사로서 이
말을 하는 겁니다. 다른 뜻이 아니에요.'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세요. '
'아이들이라니요? 학생들 말인가요?'
'그럼 누구겠어요.'
신애가 어이없다는 듯 외면을 하더니 허공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유 선생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교사가 아이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도 문제가 되나요?'
형민은 자리를 피해 옆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신애의 조금 높은 목소리를
들었다.
'오늘 이상한 말씀을 참 많이 하시네요.'`
'다 강 선생을 아껴서 하는 애깁니다.'
그 다음 말은 들리지 않았다. 형민은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길가에 서 있었다. 왜 유 선생이 그런 말을 하는지 형민으로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어디 갔나 찾았다. 같이 가야지, 너 혼자 가기니?'
옆에 와 서며 신애가 말했다. 형민이 신애의 화구를 들어 보이며 얼굴을
붉혔다.
'이건 그냥 댁에 갖다 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랬다. 우리가 어떻게 내일을 알 수 있으랴.
나는 이미 그 한가운데 있었다. 나에게 있어 신애는 이미 운명이었다. 그녀의
팔에 모기가 앉으면 잠시 후 나는 아팠다. 그녀가 하품을 하면 나도 함께
졸렸다. 그녀가 밤비를 맞으면 나는 감기에 걸렸다. 그녀가 새로 산 하이힐이
발에 잘 맞지 않으면 나는 발뒤꿈치가 쓰렸다.
운명이란 그런 것이었다. 우리들.
금빛의 다리는 없어도
그때부터의 한걸음은 어려웠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나는 그때 그것을 운명이라고 믿었었다. 물이 낮은 곳을 향해 흐르듯이 이미
모든 것은 한곳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운명이라는 그릇에 우리의 시간이 담긴다. 운명은 굳어 있는 고형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진다.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네모진 그릇에 담으면 네모지게.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그릇 하나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단 하나의 길고 긴 대롱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그녀가 미술 교사가 되고, 내가 다니는 학교로 부임을 해왔다는 것도 우리의
만남을 위해 놓여진 몇 개의 징검다리는 아니었을까. 내가 고모 밑에서 혼자
자랐다는 것도 마찬가지리라. 생활안에서 사람을 아니 여자를 나는 알지
못했다. 누이도 어머니도 이웃집 친구 누나도 나는 가지지 못했었다.
장기의 말들은 저마다 가는 길이 정해져 있다. .말은 날 일자로밖에 갈 수가
없다. 포(包)는 무엇인가를 타고 넘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차(車)는 가로나
세로로 똑바로밖에 갈 수가 없다. 가련한 졸(卒)이여, 장기판 위에서 졸은 한
란씩밖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리고 졸은 앞으로만 나아갈 뿐 뒤로 돌아갈
수가 없다. 나는 그때 내 운명은 그렇게 졸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내일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내일을 알 수 없다는 것만큼 우리의
삶을 빛나게 하는 것이 또 어디 있으랴.
버스를 내리면서 신애가 말했다.
'따듯한 커피라는 말 알아?'
형민이 수줍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날은 마셔야 하는 거, 그게 따듯한 커피야. 가자, 우리 집에 "
그냥.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말한다, 우리 집이라고. 혼자 살면서도 우리
집이라고 말한다. 형제가 없이 아들은 저 하나면서도 우리 아버지라고 말한다.
우리 나라, 우리 학교. 우리 동네. 뜻은 분명히 단수인데도 말할 때는 그것을
복수화시켜서 말한다. 신애의 말을 들으면서 형민은 놀라듯 생각했었다. 우리
집이라니. 이 여자는 지금 그 집을 누구와 누구의 집이라는 뜻에서 우리
집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녀가 혼자 살면서도 우리 집이라고 말한 그 집에서,
둘은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밖이 조금씩 어두워지는가 하자, 이내 캄캄하게
되었다. 늦은 가을의 저녁은 빨랐다. 신애가 잘라서 먹다가 남은 케이크를
냉장고에서 꺼내 놓으며 말했다.
'먹으렴."
'저녁은 집에 가서 먹겠어요.'
'너 혼자 자취한다면서? 지금 집에 가서 저녁을 챙겨 먹겠다는 거니?'
신애가 웃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닌.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신애가 저 얼굴을 할 때 나는 왜 무서운
느낌이 드는 걸까. 형민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아마 그럴
거야. 저건 어른의 얼굴이어서 일 거야.
'저녁은 나가다가 사줄 테니까 우선 이거 먹고 있어. 배고플 거 아니니.'
케이크를 잘라 놓고 식탁에 마주앉으면서 신애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따금 누가 생일 파티를 하는 건 좋은 거다, 그렇지? 이렇게 케이크도 먹고
말야.'
'누구 생일이었는데요?'
'내 생일.'
말해 놓고 신애가 고양이가 갸르릉거리듯이 웃었다.
'글쎄, 어제가 내 생일이라고 누가 이걸 사가지고 온 거야
어제가 생일이셨어요? 몰랐습니다.'
아냐. 물론 .....생년월일을 보면 양력으로는 어제가 내 생일이야. 그런데 우리
집안은 촌스러워서 생일은 음력으로 하거든'
형민은 그때 생일 케이크를 가지고 온 사람이 김길홍 선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유 선생이 나쁜 놈이라고까지 말하던 그 김길홍 선생.
형민은 갑자기 케이크를 내려다보며 식욕을 잃었다. 손을 놓는 형민을 보며
신애가 눈으로 물었다, 크게 뜨면서. 왜?
'선생님, 커피를 조금만 더 주시겠어요?"
커피를 더 따라 주면서 신애가 말했다.
'차가 있는 곳에는 사랑이나 스캔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서양 사람이
있었는데. 옛날에 그런 얘기가 있었지. 내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고.'
신애가 찻잔을 들고 좁은 거실로 나오며 혼자 웃었다.
'나한테 그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분이 뭐라고 하셨는지 아니.
우리보고 늘 연애해야 한다고 술 마셔야 한다고, 그래야 그림도 된다고 그러던
선생님이었는데......그만 어느날 그 선생님 사모님이 바람이 났지 뭐니.
애인이 생긴 거야. 아는 사람은 다 알게 요란한 연애 사건을 벌였지 뭐니.'
형민을 돌아보며 신애가 손짓을 했다. 찻잔을 들고 거실로 나오라는. 찻잔을 두
손에 들고 형민이 거실 소파로 나와 조심스레 앉았다.
그랬는데 그 선생님이 뭐랬는지 아니? 바람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를 하는 거야.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하자. 바로 자기하고 연애를 하는 여자지. 그
여자를 보고 저 여자 바람났다고는 말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게 바람의 정의래.
우리는 그 말을 듣고 모두 박수를 쳤지. 그렇지만 결국 그 선생님 부부는
이혼했어. 사모님은 남자랑 이민을 갔지."
신애가 음악을 틀었다. 형민으로서는 처음 듣는 곡이었다. 오르간으로 울려대는
격정적인 멜로디에 겹쳐서 어떤 남자의 절규가 흘러 나왔다. 이어서 음악이
멎으며 교통 사고를 연상하게 하는 소음들이 울려 퍼졌다.
'무슨 영화 음악인가 보지요?'
'맞아. <페드라>.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야.'
페드라란 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여자의 이름이지. 마더 콤플렉스. 어머니를
사랑한 아들의 이야기야. 그렇지만 여자인 페드라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들을
사랑한 여자의 이야기가 되지. 물론 의붓아들이긴 했지만. 그리스 비극을
현대판으로 옮긴 영화인데 오래된 흑백 영화야, 물론 영화는 그리스의 대리석
조각처럼 정교하단다. 아버지와 재혼한 새어머니를 사랑하게 된 아들. 사업밖에
모르는 선박왕 남편의 전실 자식과 사랑에 빠진 여자. 장엄한 비극이지. 난 그
영화를 퍼국에서 온 친구의 테이프로 봤는데, 나도 이 다음에 사랑을 할 때는
비 오는 날 해야지 하고 생각했단다. 고등 학교를 졸업할 때였어. 그 영화에서
두 남녀가 처음 만나 사랑을 하는 날 밖에는 비가 내리거든. 유리창에 흘러
내리는 빗줄기 저편으로 어른거리는 두 남녀의 모습을 찍는데 그 장면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거든. 거기 주제 음악이 깔려 물론 둘 다 죽지. 여자는 두
사람의 관계가 알려지자 수면제를 먹고 자살해. 아들은 차를 몰고 달려나가지.
바닷가 절벽 위로 난길을 달리면서 그는 바흐의 음악을 틀어. 잘 있거라
바다여. 태양이여 너도 안녕이다. 그런 대사가 음악에 맞춰 절규하며 흐르지.
그러다가 차는 바다로 굴러 떨어지고......거기에 흐르는 음악이 바흐의
칸타타와 푸가야.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신애는 아파트 창 밖을 내다보며
서 있었다.
'일요일이면 늘 여기 서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아파트에
어린아이들이 없었다면 얼마나 살벌할까. 자전거를 다거나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단다.' 형민이 말했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거 아세요?'
'마르케스의 소설.'
'네. 저는 거기서 아들이 죽는 장면의 그 피가 참 마음에 들어요. 혁명을 하던
아들이 총에 맞아 암살당하잖아요. 그러자 그 아들의 피는 어머니를
찾아가지요. 카팻 밑을 흘러서 밖으로 나와 횡단 보도를 건너가지요, 피가.
그리곤 길을 따라가 장미 넝쿨이 무성한 담을 넘어서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찾아 들어가잖아요. 몰래 거실을 지나 어머니가 있는 부엌문 틈으로 피가
들어가지요. 아들 피가 와 땋는 그 순간 어머니는 몸을 돌리며 말하지요. 아,
이 화약 냄새."
'그 소설에는 꽃비가 내리지. 마을에 꽃비가 내려서 양이 몇백마리 질식해
죽었다더라 하면서. 또 있지. 죽었는데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 그
사람은 집을 떠나지 못하고 집 앞 커다란 나무 밑에 내내 앉아 있지.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를 보지 못하니까 거기다가 오줌도 누고 그러지. 빨래를 널다가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여자도 있지."
형민은 말없이 앉아서 거실 창을 내다보고 있는 신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복도에서 비상 벨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복도를 타고
울려대는 비상 벨 소리는 거의 발악에 가까웠다. 귀를 찢는 듯한 그 금속성
음향에 형민이 벌떡 일어섰다. 거의 동시에 신애가 거실 바닥에 펄썩
주저앉았다.
'불 났나 봐!"
신애가 다시 벌떡 일어섰다.
'어떡하니! 우리 다 죽나 봐.'
풀썩 주저앉은 신애가 이번에는 엉금엉금 현관 쪽으로 기어갔다.
'선생님."
소리치면서 형민이 현관으로 내달렸다.
'문 열지 마세요. 제가 나가 볼게요.'
'나가지 마. 뭐라도 터지면 어떡하니. 나가지 마.'
비명을 지르면서 신애가 일어섰다. 여전히 벨은 울려대고 있었다. 형민이 현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긴 복도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몇 집 건너편에서
놀란 주부가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뭐죠? 왜 이러죠?"
형민이 큰소리로 물었다. 저쪽에서 대답이 왔다.
'모르겠네요. 경비실에서도 전화를 안 받아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서던 형민이 굳어진 듯 그 자리에 멈춰섰다, 신애가 방과
거실을 들뛰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등뒤에서 여전히 찢어지듯 울려대는
비상 벨 소리를 들으며 형민이 안으로 들어섰다. 빨래 자락이 바람에
너풀거리듯 방에서 거실로 또 주방으로 들락거리던 신애가 형민을 보자 우뚝
멈춰 섰다.
'너 거기 있었니? 난 네가 나간 줄 알았지. 큰일났네, 어쩌니.
선생님.
"빨리 나가자, 여기 있을 게 아냐. 불이 났나 봐. 저건 불 났을 때 울리는
거야.
'선생님."
소리치면서, 몸을 돌려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신애의 몸을 형민이 잡았다.
신애가 몸을 웅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벌어진 입, 커다란 그녀의 눈이
그의 앞에 있었다.
'별일 아닐 거예요 괜챦을 거예요. 옆집들도 다 그냥 있어요.
신애의 두 어깨를 잡은 손에 형민이 더욱 힘을 주었다.
'앉아 계세요. 제가 다시 나가 볼게요.'
그녀를 안듯이 하면서 형민이 신애를 소파에 끌어 앉혔다. 그때 형민은 그
냄새를 맡았다. 신애의 냄새. 훅 하고 스며 오는 그녀의 냄새. 그것은
향수라거나 아니면 어떤 종류의 화장품 냄새도 아니었다. 오래도록 형민은 늘
그 냄새를 기억했다.
비상 벨이 멎은 건 얼마가 지나서였다.
밖에 나갔다 온 형민이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누가 장난을 쳤나 봅니다. 아이들이겠지요.'
거실 천장에 붙은 스피커가 삐익 하는 소리를 냈다. 이어서 탁하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금번 당아파트에 오작동으로 인하여 화재 경보기에 작동이 있었습니다, 이 점
입주자 여러분께서는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똑같은 말이 몇 번 반복되었다. 신음처럼 신애가 말했다.
'저게 무슨 소리니? 오작동이라니 ....... "
한숨을 쉬듯 형민이 말했다.
'잘못 울렸다는 말이겠지요.'
형민은 신애를 가만히 건너다보았다.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 넘기면서
신애도 그를 마주보았다. 신애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스쳐 지나가듯 웃었다.
형민이 쿡 하고 소리 없이 웃었다. 잠시후 둘은 갑자기 소리를 내어 웃기
시작했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나는지, 눈 밑을 손가락으로 닦아 내면서 신애가 말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니?
형민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른스러운 거니? 아니면 . ...무서운 게 없는 거니? 난 죽는 줄 알았다. 난
이 세상에서 소리가 제일 무서워.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형민이 말했다. 낮게.
'저녁때 ......어두워 오는 집에 혼자 앉아 있는 게 어떤 건지 아세요? 전
그렇게 자랐거든요.'
들릴 듯 말 듯 그가 덧붙였다.
'모르실 거예요. 아무 소리라도......얼마나 그리운지. '
모든 시작에는 금빛으로 찬란한 다리가 내일을 향해서 놓여진다. 영광을
향해서든 몰락을 향해서든 모든 시작에는 그런 다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작은 다리가 아닌 늪이 있었다. 영광을 향해서도 몰락을 향해서도 아닌,
그것은 허무를 향해서 펼쳐져 있는 가없는 늪이었다. 나는 이미 그 늪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날 혼자 돌아오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 다음에 커서 무엇이 되려 하는가.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벌고 그래서
다른 어른들이 그러듯이 집을 사고 결혼을 하며 살아갈까. 나는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내가 살아갈 모양을 만들어 놓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아주 비현실적으로, 키리코의 그림 속에 나오는 좁은 골목과
건물들의 긴 그림자와 원근법으로 그려 낸 도시의 저 끝 적막한 거리에 서 있는
듯한 심정으로, 신애와 나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것도 구체적인 것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나는 그
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버스를 내려 집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나는 생각했다. 신애에게 말하고 싶었던
그 말들을. 일요일 아침 교회를 가는 아이들. 제가 요즘 제일 부러운 건 그
애들이에요. 그 애들은 아주 환하고 싱싱한 세상을 사는 거 같아요. 그런데
나는 왜 곰광이처럼 아니 물밑에서나 자라는 이끼처럼 살고 있는 걸까요.
그러면서 편해하는 걸까요. 그 애들은 이 세상의 한 쪽만을 살고 나는 그와는
다른 한 쪽을 사는 거 같거든요. 난 왜 이렇게 어둡고 칙칙하나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나는 이 세상을 살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불이
켜 있지 않은 내 방의 어두운 창문을 을려다보면서 나는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아니었다, 그 말은 진실이 아니었다. 어둡고 칙칙한 게 아니었다. 나는 그때
자살을 꿈꾸고 있지 않았던가. 학교 공부는 다시 엉망이었다. 성적은 말할 수
없이 떨어져 있었고 내가 다시 공부라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는 나
자신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막막하게 서서 나는 내 볼을 타고 홀러내리는 뜨거운 것을 느꼈다. 눈물은
찝찔하게 입가로 홀러 들었다. 그 눈물 속에 신애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냄새가 있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때 알았었다. 내가 신애를 사랑할
수도 있으리라는 걸. 내가 그녀를 안고, 고녀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을 수도
있으리라는 걸. 육체와 정신은 결코 이원론 위에 서 있지 않다는 걸.
안개여, 안개여
차가운 이성, 영혼이라는 이름의 정신만이 그토록 드높은 것일까. 왜 우리는
그토록 뜨거우며 절실한 육체에 대해서는 언제나 낮은 가치를 두는 것일까.
무엇이 자라기 위해서는 토양이 필요하다. 영혼의 꽃이 피지 않은 육체는 아무
의미가 없고 그러므로 육체는 다만 정신의 시종으로만 있단 말인가. 육체는
언제나 악마의 편에 서 있고, 유혹의 대상이 되며 ......정신의 길을 가로막는
수렁이어야 하나. 육체라는 이름의 악마. 그러나 그 악마가 없는 정신이란
무엇인가.
그녀의 집에 갔던 그날이 떠오른다. 처음으로 내가 그녀와 가장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던 그날을. 나는 그날 신애의 심부름으로 그녀의 집에 갔었다. 미술실에
들어선 신애가 난감한 얼굴로 나를 부르고 말했던 것이다. 집에 두고 온 것이
있는데 네가 좀 갖다 줄 수 있겠니. 방에 가면 있어. 이렇게 노란색인데 끈으로
묶여 있는 봉투야.
신애에게서 열쇠를 받아 들며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 순간,
나는 이미 무언가 그녀에게 숨겨야 할 일을, 아니 나쁜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그런 나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신애가 말했다.
집 안이 엉망이니까. 그 봉투만 가지고 와야 한다.
그녀의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 나는 벌써 악마와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면 그것은 악마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무것에도 더럽혀지지 않은 내
육체였다.
그녀의 방에서 봉투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말대로 책상 위에,
마악 들고 나가려다가 잊은 듯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들고 방을 나온 나는
현관으로 향했다. 뛰는 가슴으로 나는 그냥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떤 힘에 떠밀리듯 신발을 신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가려는 내 안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이대로 그냥 나가겠다는 거니? 꼭 그래
야 하겠니?
나는 돌아섰다. 그리고 마치 거기 누가 있기라도 한 듯이 넓지 않은 거실을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신발을 벗었다. 거실을 지나 나는 부억을
들여다보았다. 씻지 않고 넣어 둔 그릇들이 들어 있는 싱크대. 두 개의 조그만
화분, 그리고 널어 말리고 있는 수건을 나는 바라보았다.
책상이 있는 곳이 아닌 또 하나의 방, 나는 천천히 다가가 그방의 문을 열었다.
단순하다고 말해야 할, 텔레비전 같은 데서 본 여자의 침대와는 어디도 닮아
있지 않은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횐색의 옷장이 좁은 벽을 채우며
창 옆으로 서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 옷장으로 다가갔다. 옷걸이에 아무렇게나 걸쳐놓은 잠옷이 거기
옷장의 손잡이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마치 그 옷장의 어떤 주술에 끌려가듯이
다가섰고 그리고 두 손으로 잠옷을 들어 올렸다. 잠옷은 연한 보라색으로
모양은 단순했다. 레이스 같은 것은 붙어 있지도 않았다. 그녀가 입으면 길이가
무릎쯤에 올 것 같은 잠옷을 나는 별쳐 보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잠옷을
그것이 있던 모습 그대로 옷장 손잡이에 걸었다. 천천히 내 무릎이 꺾여
내려갔다. 나는 그 잠옷에. 연하디연한 푸른빛의 그 부드러운 천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 내 등뒤에서 악마가 웃고 있었을까. 아니었으리라. 진정이라는
이름으로나 불리어질 어떤 뜨거움이 내 어깨를 감싸고 있었으리라.
나는 내 몸의 한 부분이 크고 딱딱하게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울고 싶었다. 거기 그렇게 그녀의 옷에 얼굴을 대고 무릎을 끓고 서서.
모든 것은 그렇지 않을까. 모든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마지막이 아닐까.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우리는 늘 믿는다. 모든 것은 반복된다고. 매일이.
계절이. 또 한 해가 그렇게 오고 또 간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낭비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일까. 어제와 오늘이 같다고 누가 말하는가. 어제는 그
하루의 싱싱함으로 다가왔다가 목숨을 다하고 사라져 갔다. 그것뿐이다. 다시
오는 하루는 이제 어제가 아니다. 봄도 가을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서 사라져
가는 것은 모두 영원인 것을. 우리가 눈멀어서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인 것을.
지난해의 봄은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다시 그 봄은 오지 않는다. 가을도
같다. 그러나 우리는 어제의 봄이 다음해에 다시 온다고 믿는다. 이 눈멂.
지금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는 가을이 어떻게 다시 올 수가 있단 말인가. 한번
지나가 버린 것은 그것으로 끝이라고 믿지 않을 때 우리가 정말 그 시절을
살았다고 말해도 좋은 것일까. 플라타너스가 너울거리며 그 잎을 떨어뜨리기는
다음해에도 또 그 다음해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해의 잎이
아니다. 올해의 잎은 그것으로 끝. 다시 오는 것은 그것으로 또 다른 시작이며,
사라져 가는 것 또한 그것으로 모든 것의 마지막이다. 이 일회성 그러나 우리는
그 일회성을 향해 언제나 고개를 젓는다. 믿지 않는다. 내일이 있다고
믿으면서, 오늘이 계속된다고 믿으면서 아니 그렇게 속으면서 우리는 한 발 한
발 영원이라는 망각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을 뿐인 것을.
지금 내 옆에 있는 아버지가 지난해의 아버지가 아닌 것과 같지 않은가. 그는
지난해의 아버지보다 횐 머리카락은 늘고 더 늙고 주름졌으며. 그리고 더 낡고
힘없어지고 더럽척졌거나 아니면 더욱 깊어지고 가벼워지고 한 발짝 죽음에
다가가 있는 아버지인 것을.
시간은 물이 아니다. 작은 조각들, 한 순간 순간의 이어짐일뿐이다. 그것은 한
순간 순간의 죽음일 뿐이다. 물방울이 모여서 작은 도랑이 되고 그것이 시내가
되어 홀러 가는 것처럼 시간은 그렇게 모여지지도 이어지지도 않는다.
어쩌면 우리의 시간이란 촌충일지도 모른다. 그 몸의 마디마디가 하나씩 부러져
나가서 또 하나의 몸체가 퍼는 촌충들의......삶.
부러져 나가는 시간의 마디마디는 그것으로 완성이며 끝인 것이다.
저도 따라가면 안 되나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참으며,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학생들이
돌아가고 난 미술실은 고요했다. 마치 물 속처럼. 그리고 그녀는 물감투성이의
횐 앞치마를 두른 모습으로 그 물속을 소리 없이 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묻고 또 물었다. 저도 따라가면 안 될까요 하고. 그림
도구들을 챙기고 난 신애가 창 밖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잎 떨어진 아카시아가,
아직 떨어지지 않은 잎을 단 채 앙상하게 서 있었다. 내 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그녀가 말했다.
'이번에 가고 나면 이제 마지막이겠지.'
마지막이라는 말이 이상스레 내 가슴에 와 닿으며 물감처럼 풀려 나갔다. 내가
물었다.
'이젠 야외 스케치 안 나가시려고요?'
'왜?
"마지막이라고 그러셨잖아요.'
'가을 말이야.'
나는 그녀의 등과 어깨를 그리고 어깨 위에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가을이라니요?'
가을처럼, 마지막 가을처럼 내가 물었다.
'나뭇잎도 다 떨어질 텐데. 이번에 갔다 오면 이젠 겨울 아닐까."
그녀가 말한 마지막은 그림이 아니었다. 가고 있는 가을을 말했던 것이다.
그녀가 돌아서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겠지? 마지막 가을이겠지.
올해의 마지막. 마지막 가을 그림. 나는 그렇게 풀어 말하고 싶었지만 다만
그녀를 바라보고만 서 있었다.
가만히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그녀가 무언가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의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미술실이 조금 더 어두워져 있었다. 지익 소리를
내며 가방의 지퍼를 잠그고 나서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넌 안 갈 거니?'
'저 .......'
우리 둘의 눈이 마주쳤다.
'가도 되나요?
"무슨 소리니. 그럼."
그녀가 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노래를 홍얼거렸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나는 가슴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아서 고개를 숙이며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 집 앞에서 만나자. 거기, 그 집 알지? 실연한 것도 같고 안 한 것도 같은
여자가 있는 그 집 말야. 거기서 아침 함께 먹고 떠나자.'
이제 문을 닫고 미술실을 나가야 할 시칸이었다. 창가에 놓인 아그리파 상이
묵묵하게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잎 떨어진 아카시아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말했다. 내일 비가 오지 않게 해주세요.
산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단풍도 끝 무럽이었다. 안개가 우리의 몸을 축축하게
적셔 주었다. 산을 오르면서 우리는 그 자욱한 안개 속에서 몇 마리의 다람쥐를
만났다. 갈색의 몸에 가무스름 한 줄이 간 것들이었다.
우리는 그 안개 속에 파묻힌 절간 마당을 그림자처럼 걸어서 지나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독경 소리도. 다만 어느 처마에선가, 풍경이 안개에
젖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소리도 안개에 젖은 거 같다, 그렇지?'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저 소리 말야, 풍경 소리.'
나도 따라 발걸음을 멈추고 그 소리를 들었다.
안개에 젖은 소리. 그것은 어디서 들려 오는지 그 방향을 모를 그런 소리였다.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좀 무섭다.
내가 소리를 죽이면서 웃었다. 나는 그녀가 아주 작게 느껴졌다.
'넌 안 무섭니?"
'여긴 사람 사는 데예요.'
"아냐. 아무 소리도 안 나잖아."
"사람이 살고 있어요.'
아니라니까.
"사람이 사니까 이렇게 깨끗한 거예요. 하나도 안 사는 데 같지요?
" 아니야. 사람이 아니고 중이 사는 데야.'
그녀가 소리내어 웃으면서 안개 속으로 뛰어갔다. 나는 그녀의 뒤에다 대고
소리쳤다.
'그래요. 중이 살아요. 이 절은요 대처승이 사는 절이에요. 부인도 있어요.'
우리는 절을 옆우로 하고, 뒤편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올라갔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마치 이제까지는 쉬고 있다가 갑자기 다시 흐르기 시작한 듯이 도랑
물 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는 어렴풋이 절 지붕이 바라보이는 곳에 가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안개가 끼어서 어떻게 그림을 그릴까 싶었다.
내가 산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림 같네요.'
우리는 나란히 서서 안개가 휘몰리는 계곡과 절 앞으로 펼쳐진
산자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림 같다니?'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이건 ......자연이란다."
그녀의 목소리도 안개에 젖어 잇었다, 어디서 들리는지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그런 목소리.
'그림 같다는 건 뭘까?그림처럼 아름답다는 말?'
'나닌가요?
"사람들은 그렇게들 말하지. 아름답다거나 꿈 같은 풍경을 보았을 때 말야.
그림 같다고. 그렇지만 정말 그런 걸까. 그림과 자연은 뭘까. 사람들이 자연을
베끼거나 자기 눈에 보이는 형태로 옮겨 놓은 것, 그게 그림이겠지. 그렇지만
말야, 넌 어떻게 생각하니?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 뭐라고 생각해?'
'자연."
말해 놓고 나서,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자연이라고.'
'정말 자연일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연일까?'
아니면요?
자연도 아름답지.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않아. 사람이 만든 것도
아름다워. 난 때때로 자연보다도 아름다운 건 사람이 만들어 낸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그녀가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림 그려야지. 그림 같은 자연만 보고 있을 거야?'
인간이 만들어 낸 색, 그것은 전부 자연에 있는 색이겠지.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낸 모양, 그 형태라는 건 자연과는 다르지 않을까. 비로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화구가 든 가방을 어깨에서 내려놓았다.
신애가 말했다.
'예술이 무엇인지 아니? 피카소가 비둘기를 그렸다고 해봐. 그때 아무도 왜 그
비둘기 날개의 깃털이 그렇게 작냐거나 크냐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 그것이
예술이야.
우리가 밑그림으로 스케치를 끝냈을 때부터 조금씩 안개가 걷혀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날씨는 여전히 흐려 있었다.
잠시 쉬기로 하고, 신애가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냈다. 아침에 집 앞 찻집에서
사 담은 것이었다. 커피를 따르고 난 그녀가 내게 먼저 종이 컵을 건네 줬다.
'선생님은요?
"먼저 마셔.
'저 괜찮아요.
"마시면 되는데 뭐가 괜찮니.'
나는 종이 컵을 받아 두 손으로 감쌌다.
커피. 담배나 마찬가지로 그건 어른이 되어서야 마시는 거라고 말했었다. 그건
사람 머리를 나쁘게 하고, 잠이 오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사람을 흥분시킨단다.
고모의 그런 말에 나는 물었었다.
그럼 고모는 왜 그걸 마셔요? 아주 좋아하시잖아요. 고모는 나를 보면서
웃었었다. 얘, 난 이제 더 나빠질 머리도 없단다. 커피를 마시든 안 마시든
잠자는 시간도 같고. 그리고 난 커피를 안 마셔도 홍분을 잘하잖니.
머리 좋고, 일찍 잠이 들면서도 늘 졸립다는 말을 하고 그리고 고모는 결코
흥분 같은 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고모는 그랬다. 그런
고모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따듯한
것만으로는 안개에 젖은 몸이었기에 좋았다. 나는 아마 곧 머리가 나빠질 테고,
잠을 자지 못하면서, 잘 흥분하게 되리라. 나는 흔자 그런 생각을 했다.
신애가 물었다.
'여자 혼자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좀 천박하단다."
네에? 그렇지 않을 거 같은데요. 자기 혼자만의 뭘 가진다는 게 얼마나 좋아요.
그건 내 방을 가지는 거잖아요.'
'자기 방을 가지고 싶니, 넌?'
'아니요.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나는 내 방을 가지고 살았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기의 방을 가진다는 건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가. 내 의자, 내
침대. 그런 것들은 단순한 의자나 침대가 아니라 나만의 시간이 아닐까.
'봐. 혼자 살다 보면 생활에서 격식이 사라지거든. 무슨 소린지 알아? 누가
있으면 식탁에 차려 놓고 먹을 밥도 그냥 대층 부엌에 서서 먹게 되거든."
내가 낮게 웃었다.
옷은 뭐 안 그렇니? 혼자 살다 보면 누구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아무렇게나
그냥 막 입고 있는 거야,'
'그런데 선생님. 왜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세요?'
신애가 내가 들고 있는 종이 컵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말했다.
'종이 컵을 하나만 가져왔거든.'
나는 웃어야 할지 아니면 컵을 닦기 위해 절간 어딘가에 있을 샘물로 달려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것밖에 내가 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벌컥벌컥 이제는 식어서 미적지근해 진 커피를 마셨다.
내가 일어섰다.
'닦아 가지고 올게요."
'됐어. 그냥 줘.'
그때 왜 갑자기 김길홍 선생의 얼굴이 떠올랐을까. 강신애 선생을 치근거리며
좋아한다는 말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비밀이 아니었다.
젖은 장미 한 잎
그 산에서 내려오던 날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무엇인가가 이미 우리의 삶에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허망한 건 없으리라. 어떤 기쁨도 비탄도 모든 것이 그렇게
예정되어 있다고 할 때, 삶이란 사막일 뿐이 아닐까.
그렇다. 살아간다는 건 새가 울고 풀들이 자라며 비가 내리는 그런 나날들이다.
언제 어디서 새가 날아와 울지를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어느 때 새는 날아와
울고 그리고 날아간다.
어느 봄날 얼어붙었던 땅을 뚫고 올라오는 풀의 신비, 그것은 뜻 모를 깊이를
가진 아름다움이 아닌가. 안개가 끼는 날, 비가 내리는 날, 그리고 눈발이
흩날리는 날, 우리는 이 땅 위에서의 시간이 얼마나 많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는가를 불현듯이 깨닫는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일들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이미 짜여진 순서대로 진행되는 단순한 일일 뿐이라고
생각할 때 그것은 얼마나 허망한가. 사막이다. 풀도 자라지 않고 새가 울지도
않으며, 빗발도 안개도 눈이 내리는 것도 볼 수가 없는 그것은 사막이다. 오직
낮과 밤만이 있는 시간의 진행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는 생각한다. 어떤 눈부신 만남도 이미 그렇게 되기로
약속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덧없는 이별도 마찬가지다. 그것 또한 이미
자신에게 정해져 있던 운명이었으며 그 예정된 길을 다만 살았을 뿐인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생각해 보면 모든 비극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비극이란 결과가 아니다. 그것 또한 시간이라는 과정이다. 하나씩 그럴 수밖에
없는 것들이 쌓여서 어느 날 비극이라는 몰락과 파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예정되어 있는 파멸을 모른 채, 훗날 비극의
씨앗이 될 것들을 오늘도 우리는 기쁘게 심는다. 다시 한 번, 이 삶에도 커튼
콜이라는 게 있어서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면, 저 죽음의 견고한 암흑이 걷혀져
그녀를 이 햇빛 속에서 한 번만 만날 수 있다면 나는 그때 묻고 싶었다. 왜
우리는 이런 결과를 알지 못했을까 하고.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요양원에서 잎 떨어진 나무들이 앙상하게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야산을 걸으면서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묻고 싶다고. 삶을 예정된
것으로 말했던 당신은 왜 우리의 만남이 결국은 이떻게 끝날 것이라는 걸
몰랐었냐고.
그러나 그녀는 없고, 한번 죽음의 커튼이 내려지고 나면 이 삶의 햇빛 속으로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커피를 마시고 났을 때였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일어서면서 신애가 말했다.
형민인 사는 게 뭐라고 생각해?
나는 그때 사는 게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믿고 있었다. 다만 하나만은, 산다는 건 하루하루가 다르다고. 다른
그림이라고. 어느 날은 유화일 수도 있고 어느 날은 수채화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다만 데생일 뿐일 수도 있다고. 결국 그떻게 많은 그림들이 퍼즐처럼
모여서 한 사람의 일생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나는 그 무렵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는 그런 느낌을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사는 거요?그건 다만,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좋은 거.
"네. 많은 것과 함께 있는, 그래서 좋은.. ,,.그런 좋은 거요.?
나는 어려서부터 혼자였다, 그런 내가 왜 그때 많은 것과 함께 있다는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나는 흔자 있다는 것이 사람이 아닌 더 많은 것들과
만나는 시간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모른다. 혼자 있는
사람의 시간이란 감옥처럼 갇혀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아니었다, 흔자
있는다는 것은, 그림자를 바라보는 일이었고 나믓잎이 흔들리는 것을 아는
일이었고 바람소리를 듣는 일이었다.
'그래, 그것도 틀린 에기는 아니겠지."
신애는 흔자말처럼 내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사는 거. 좋은 거. 산다는 건 좋은 거.'
그리고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아주 커다란 나뭇잎이
천천히 떨어지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그런데 말이지 .......'
나는 숨을 죽이며 그녀를 바라보았었다.
나도 그랬을 거야. 사는 건 좋은 거라고. 그런데 말이지,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단다. 사는 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고 말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야. 그건 끊임없는 반복이거나 아니면 예정된 길을 가는 그런
건 아닐까 하고말야."
길이라니. 예정된 길이라니. 우연이라는 신비도 어려움을 향해 맞서 나가는
용기도 없는. 아니 무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그 무엇도 없는 단순히 부친
편지에 답장을 기다리듯이, 물이 끓기를 기다리듯이 그렇게 예정되어 있는 게
삶이라니. 왜 그랬는지 모른다. 갑자기 신애가 아주 많은 불행을 산 사람처럼
느껴졌다. 무서울 정도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 정해진 걸 사는 거 같기도 하고.... 누가 만들어 주는 대로 그 길을
걸어가는 거 같기도 하고.
나는 눈길을 숲으로 돌렸다. 삶이란 길을 가는 것 같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길이란 이미 누군가가 걸어다닌 땅이지. 그렇지만 적어도 산다는 건 그런 길을
가는 건 아닐 거야. 아무도 걷지 않은 숲 속에서 길을 찾아 나가는 걸 거야.
나는 왜 갑자기 신애가 그런 말을 해야 했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신애가 말했다.
'나이가 들고, 조금씩 세상을 알고......그러면서 생각하게 돼 하루하루가,
지난해와 올해가 아무것도 다르지 않다고. 내용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옛날에는 마차를 타고 여행을 했다면 이제는 비행기를 탄다거나 하는 거와
아무것도 다를 게 없어."
신애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빗발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 빗발 속으로 우수수
소리를 낼 듯이 늦가을 단풍이 든 나뭇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결국은, 비가 오네요."
내가 소리쳤다.
'절로 내려가야겠어요.'
'많이 을 거 같지는 않은데. 좀 참아 주지 이럴까.'
세상이란 게 다 예정되어 있다고 말하던 신애였다. 그런 여자가 갑자기 하늘에
대해 참아 주지도 못하냐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화구를 챙겼다.
늦가을 산에서 맞는 늦가을 비. 그렇게 말하면 떠오를 수밖에 없는 어두운
색깔들이 있다. 짙은 갈색 아니면 잿및의 어두움. 그러나 그날 절로 내려오는
우리는 봄처럼 푸르렀었다. 절에 내려와 비를 피하면서도 그랬다.
조그마한 절이었다. 대웅전이라는 말의 그 크다는 '대' 자를 쓰기가 좀
쑥스럽게 규모가 작은 건물 로으로 비슷한 크기의 법당이 있고 그 뒤편에
살림집이 있었다. 우리는 절 마당으로 들어섰다. 부처님이 모셔진 법당은 문이
닫혀 있었다. 우리는 법당 추녀 밑에서 비를 피하며 서 있었다.
'넌 어떻게 알았니?이 절에 대처승이 산다는 걸."
네. 전에 여길 몇 번 왔었거든요."
자살이라는 이름은 아니었지만, 아 이제는 아무 길이 없다, 죽는 것밖에 없지
않을까,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지내던 때, 학교 성적도 생활도 엉망으로
흐트러져 갈 때 나는 혼자 이 절에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이 절의
주지 되는 사람의 부인이라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주지가 몇 살인지는
몰라도 부인은 아주 젊은 여자였다.
'여길. 왜? 학교에서 소풍이라도 왔던 거니?"
흔자 산엘 오르내려야 하게 어려웠던 때가 있었어요. 그 긴 굴속 같던 나날에서
나를 빠져 나오게 해준 게 선생님이에요. 나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거짓말을
했다.
'그냥. 친구들과요.'
우리가 그렇게 서 있을 때였다. 요사채 쪽에서 우산을 쓴 사람이 나타났다.
승복을 입고 있었다. 법당 쪽으로 올라오던 그는 우리가 서 있는 모습을 보더니
불쑥 말했다
이런. 비를 맞으셨네.'
빗속이었는데도 그의 목소리는 굵었고 우렁우렁 울리는 듯했다. 신애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우산을 쥔 손에 다른 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허리를 굽히고 난 그가 뜨락으로
올라서며 말했다.
'보아하니 그림을 그리러 오셨던가 본데......비 그칠 때까지 저 밑에 가서
기다리시지요.'
그가 빗물이 흐르는 우산으로 아래쪽에 있는 건물의 마푸를 가리켰다. 그러고
나서 그는 법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우리는 그가
가리켰던 건물 마루에 가 앉았다. 신애가 법당 쪽을 보면서 말했다.
'저 중은 뭘 먹어서 저렇게 사람이 번지르르할까. '
'번지르르하다니요?'
내가 보기에 그는 별로 살진 얼굴도 아니었다. 체격이 큰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기름기가 흐르는 남자는 아니었던 걸 기억하면서 내가 말했다.
선생님도. 목소리가 참 좋기만 하던데요, 전.'
내가 고개를 돌렸다. 그게 아마 처음이었을 거다. 그녀가 누구를 욕하거나 나쁜
말을 했던 게.
'친절하던데 왜 그런 말을 해요?"
"몰라, 난 괜지 중이 싫드라.'
'별 못하시는 말씀이 없네요."
'중만 그렇다는 게 아냐. 신부도 수녀도 다 마찬가지야. 뭔가 이 세상과 떠나
살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난 그렇단다. 그냥 싫어,"
무슨 까닭이 있는 거예요?'
'아마 약이 올라서겠지 뭐."
신애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약이 오르다니요?'
'그런 거 있잖니, 뭔가 약오르는 거. 그래, 나는 이렇게 더러운 세상에서
더러운 짓을 하며 사는데, 너는 혼자 그렇게 고고하고 청청하다는 거냐? 뭐
그런 질투겠지.'
별 희한한 질투가 다 있네요."
'그래. 그러니까 중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시기하는 거겠지 뭐.
'선생님. 중이 아니고 스님이에요.'
'중이나 스님이나."
'중보고 중이라면 중이 싫어해요.
내 말에 신애가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고 나서 그 웃음이 사라지는 얼굴로
갑자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도대체 우리가 지금 무슨 애기를 하고 있는 거니.'
그날 그 비 내리는 절 마당을 내다보며 그녀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오래오래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아니 이따금 내 가슴에 뿌려진다. 소리를 내며 뿌려지는
싸락눈처럼 그렇게 내 가슴에 깔린다.
비를 맞아 가며. 법당 주변에 있는 나무의 단풍들을 주워 들고와 그것을
스케치북 갈피에 넣곤 하면서 신애는 말했었다.
'네 길을 가면 되는 거야. 누구에게나 자기가 가게 될 길은 있으니까."
전 그 길이 어떤 건지를 몰라요. 어디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아마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절 지붕 위에 내리고 있는 실비를 바라보았으리라.
'그러나 그 길이라는 건 지금 보이지 않아. 아직은 그럴 거야. 다만 언젠가는
알게 되지. 그 길에 들어섰다고 생각되면, 아 이게 내 길이구나 싶으면, 그
길을 가면 된다는 얘기야. 물론, 돌아서기도 해야 할 테고 되돌아오기도 해야
하겠지만. 알겠어?'
노란 단풍잎을 또 몇 개 주워 가지고 온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단풍잎에 묻어
있는 물기를 닦아 내면서 말했었다.
'모든 것은 시든단다. 우린 그걸 늘 잊지.'
모든 것, 살아 있던 모든 것에게는 돌아가야 할 날이 있기에, 땅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기에 시들어 가는 걸까. 살아 있는 것만이 아니리라. 꿈도 가치도
열망도 그리고 사랑도 마찬가지리라. 언젠가는 시들어 가리라. 그러나 시들어
가는 것에도 열매는 있는 것이 아닐까. 열매를 남겼기에 이제 시들어서 사라져
가도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때 그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그때 내리고
있던 가을비보다도 더 가늘고 나직했다. 그렇게 내게 스며들고 있었다.
'어떤 꽃도 빨리 피었던 것은 빨리 져버리지. 그러나 늦게 핀 꽃이라고 해서
모든 꽃이 늦게 지지는 않는단다. 참 이상하지. 그러나 훗날 생각할 때, 그녀가
절에 내려와서 한 말들은 마치 우리가 요으로 만나야 할 운명을 내다보는 것
같은 말들이었음을 그때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그녀는 무엇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때까지 그녀는 나에게 있어 선생님이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거기 있기만 해도 좋은, 내일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만으로도 오늘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만큼 그렇게 좋은.
빗방울이 그치면서 습기 가득한 안개가 눅눅하게 몸을 감싸는 속에서 우리는
절을 떠났다.
내가 앞서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빨걸음이 느려지면서 조금씩 뒤처질
때마다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기다리고 서 있곤 했다. 그렇게 산을 다 내려왔을
때였다. 그때야 나는 그녀의 얼굴빛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입술이
가짓빛이었다.
'왜 그러세요?'
내가 묻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그녀가 길가에 주저앉았다.
'어디가 아프세요?'
그녀가 이마를 짚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아프신데요?'
'아무래도 점심 먹은 게 잘못됐나 봐.'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술이 떨리고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언제 시외 버스가 올지 알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승용차라도 세워서 태워
달라고 부탁하려고 길 건너편으로 건너가려는 나에게 그녀가 물었다. 가늘게.
어딜 가니?
"차 잡으려고요."
'가지 말고 여기 있어.
발걸음을 멈추면서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에 흐트러져서 흘러내려와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쳐다보았다. 이마에 땀이 배어
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나는 그녀의 옆에 그녀와 같은 모습으로 쭈그리고
앉았다.
괜찮으세요?'
그녀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괜찮지 않아.'
'제가 건너가서 지나가는 차가 있으면 태워 달라고 할게요.'
좀 있으면 낫겠지 뭐.
나는 벌떡 일어섰다. 멀리서 횐 승용차 한 대가 산기슭을 돌아 달려오는 것이
바라보였다, 나는 길 가운데로 나서면서 두 손을 들어올려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나를 피하듯 반대 차선에 걸치면서 자동차가 멎었다.
유리 문이 열리면서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옆자리에 붉은 윗옷을 입은 여자가 타고 있었다. 그가 대뜸 소리쳤다.
'죽을려고 환장했어"
'미얀합니다.
' 미안하다면 다야. 뭐 이런 게 있어. 나 정말 미치겠네. 야 임마. 그렇게
뒤어나와서 차를 세우면 어떻게 해.'
남자는 화난 얼굴로 문을 올리려고 했다. 나는 옆으로 다가가며 소리치듯
말했다.
좀 태워 주세요. 아파서 그럽니다. 저쪽에 환자가 있어요.
'야 임마. 부탁하려는 놈이 그렇게 튀어나와서 사람을 놀라게 하냐?'
나는 허리를 굽혀 가면서 애원했다.
'저 저희 학교 선생님인데워. 갑자기 아파서요. 좀 태워다 주시겠어요.
시내까지만 가면 됩니다. 아니. 택시 있는 데까지만 가면 되니까. 좀
부탁드럽니다. 네, 좀 도와 주세요."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했던가. 한참을. 마치 내 말을 듣고 있는 게 아니라 내
얼굴을 보고 있는 듯이 앉아 있던 남자가 옆에 앉은 여자를 홀긋 보았다.
여자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다.
고개를 젓듯이 긴 머리를 한 번 흔들었다 놓으면서 여자가 말했다
자기 좋을 대로 해."
'얘가 나 겁준 거 생각해서는 태워 주고 싶지 않은데...'
그때 그가 그냥 지나쳐 가려고 했다면 나는 길가의 돌을 들어서 그를
때렸으리라. 남자가 소리내어 입맛을 다시고 나서 말했다.
'타.
그러고 나서 무엇이 이어졌는지. 모든 것이 헝클어져서 뒤죽박죽이 되어 나는
그것들을 순서대로 기억해 낼 수가 없다. 아마 나는 신애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부축해서 길을 건넜고 차에 그녀를 태웠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나는 다시 우리의 짐을 가지러 뛰어갔다.
'뭐야? 그거 무슨 짐이야? 그림 그리냐?'
차가 달리기 시작하고 나서 남자가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차에 오르면서도 그
후에도 신애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시내 입구에 있는 다리를 건넌
우리는 그 횐색 차에서 내려 택시를 잡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때 있었던 일들을 순서대로 늘어놓은 것일 뿐이다.
그때의 내 마음은 그랬다. 내 모든 것인 그녀가 거기서 그렇게 죽을 것만
같았다.
아, 모든 것이라고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얼마를 나눌 수도 있는 것, 잘라서 두 개를 만들 수도 있는 그런 것이
된다. 그때 그녀는 무엇으로 나눌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어떤 것을
합쳐 놓으면 될 수 있는 그 무엇도 아니었다. 나눌 수도 모아질 수도 없는,
그녀는 나 자신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었다.
할 수 있다면 목숨을 바쳐도 좋은 .... . 아니, 아니다.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쳐 죽든가 아니면 이대로 살아가든가 그 둘 가운데 어느것을 선택할 힘이
나에게 있었다면 나는 차라리 그녀를 위해 죽기를 원했으리라.
그리고 그 밤이 왔다.
아파트 앞에서 택시를 내려 그녀를 방으로 부축해 가는 내 등뒤에서 운전사가
소리치고 있었다. 이 짐은 안 가지고 가느냐고 물감 통과 이젤이며 캔버스를
들고 내가 다시 신애의 아파트로 들어섰을 때 그녀는 안방 문을 열어 놓은 채
침대에 쓰러지듯 엎드려 있었다. 산에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은 채였다. 현관
앞에 물건들을 내려놓고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병원엘 가실래요?'
'괜찮아. 좀 있으면 낫겠지.
'그럼 약이라도 사올게요. 어떤 걸 사올까요?
엎드린 채 그녀가 말했다. 더듬거리듯.
'일요일인데, 단지 안에 있는 약국은 쉬는 날일 텐데. 열이 나니까.. ...체한
건지도 모르겠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말처럼 아파트 안의 약국은 문이 닫혀 있었다. 약국을
찾기 위해 나는 길을 건너 거리를 걸었다. 아니 뛰었다. 그리고 내가 겨우
찾아낸 약방에서 이런 저런 약들을 달라고 했을 때 주인은 물었다. 어디 여행을
가느냐고. 나는 아마 소화제에서 감기약까지를 다 달라고 했던가 보았다.
그때에야 나는 내가 얼마나 서둘렀는지를 알 것 같았다. 산에서 비를
맞았으며, 찬 점심을 먹었고, 열을 내며 떨고 있다고 신애의 증세를 말했다.
약방을 나와 돌아오는 길에는 택시를 탔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엎드린
채였다.
신애가 약을 먹고 났을 때였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고마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내가 말했다.
'옷이 젖었을 거예요. 갈아입고 누우세요. 전 나가 있을게요.
나를 보면서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밖으로 나온 나는 현관 앞에 버리듯 놓아두었던 물건들을 정리했다. 어느새
저녁이 와 있었다. 아파트 거실의 조금 열려진 커튼 사이로 밖의 어둠이 안쪽을
기웃거리는 듯싶었다. 안에서 신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민이 어디 있니?"
네, 선생님.'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녀는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불을 꺼내 덮고 얼굴과 팔만을 내민 자세로 그녀가 말했다.
이제 가봐야지. 늦었잖아.'
'조금만 있어 볼게요. 더 아프시면 어떡해요. 밖에 있을게요."
'그럼 텔레비전이라도 보든가. 나 좀 잘 테니까, 내가 안 일어 나도 좀 있다가
가도록 해.'
네. 제가 알아서 할게요.'
문을 닫고 나왔다. 좁은 거실에 앉아 나는 순간 순간 밀려드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 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으면서 갑자기 피로가
밀려왔다. 신애의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몸을 꼬부리고 나는 소파 위에 옆으로 누웠다. 좀 있어 보다가 가기로 하자,
아마 한잠 자고 나면 열도 내릴 테니까. 그때 일어나면 가기로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래 11시쯤 여길 나가면 되겠지. 누군가의 집에서 좀 빠른 음악
소리가 들려 왔다. 텔레비전을 켤까 했지만 신애가 시끄럽게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나는 그만두었다. 그렇게 누웠다가 나는 잠이 들었던가 보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그때 내가 느킨 것은 이름할 수 없는 어떤 향기였다. 나는
꿈처럼 그 향기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저 먼 의식 속에서 들려 오는 내 말을
내가 듣고 있었다. 이 냄새였어. 그날 그 비상 벨이 고장이 나서 울리던 날,
내가 맡았던 선생님의 냄새.
가늘게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닫았던
신애의 방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 향기를 맡고
있었다.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비쳐 드는 희미한 빛 속으로 신애가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침대로
다가갔다. 그렇게 그녀를 내려다보며서 있던 나는 바닥에 무릎을 끓고 앉으며
그녀의 침대에 팔을 얹었다. 아무 움직임이 없는 그녀에게서는 숨소리조차 들려
오지 않았다.
어둠이 눈에 익으며 내 눈앞에 놓여 있는 그녀의 손이 보였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손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손에 입술을 댄 채 얼마를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무엇에 이끌리듯이 몸을 일으키며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다시는 돌아 나갈 수 없는 마지막 문을 열듯이, 내 얼굴이
그녀에게로 내려갔다. 내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 얹혔다. 속삭임 하나가 길고
긴 천을 찢듯이 내 가슴속을 가로질러 갔다. 이제 죽어도 좋다고. 그녀의
따듯한 숨결이 내 볼을 간지럽히듯 느껴졌다. 나는 가만히 입술을 뺐다. 그때
무엇인가 아주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그것은 신애였다. 그녀의 손이었다.
그리고, 아. ....나는 내 입술 위에 무엇인가가 닿는 것을 느꼈다. 몸을 굽히며
눈을 감았다. 내 입술에 젖은 한 잎의 장미 꽃잎이 놓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가볍고 젖어 있었지만 그러나 따듯하지는 않았다. 신애의 입술이었다.
나는 죽은 것처럼 그렇게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을 적시며 가만히 할아
나갔다. 그것은 어찌나 부드러웠던지 마치 거미줄 같은 것이 와 겹겹으로 내 입
술을 덫는 것 같았다. 아니 수없이 많은 나비의 날개 같은 것이. 내가 그녀의
입술을 가만히, 마치 할듯이 그렇게 깨물었을 때였다. 그녀의 혀가 내 입으로
들어왔다. 나는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무엇에 이끌리듯이 그녀의
혀를 빨아들였다. 내 입 안에서 그녀의 혀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한 순간이
지나갔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그녀의 혀가 더 깊이 내 입 안으로 헤집고
들어왔다.
오르간이 있던 겨울
겨울이 왔다. 싸락눈이 뿌려지면서 첫눈이 내렸다. 첫눈이 그렇게 오는 듯
그치면서 겨울이 시작되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겨울로 향한 문이
열리고 있었다.
무슨 뜻이 있어서도 아니었으리라. 레코드 상점의 스피커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댔다. 나는 그것이 누구의 노래인지도 모르면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들으며 학교로 갔고, 12월의 시험을 마쳤다. 그 노래와 목소리가
귀에 익게 되었을 무렵, 팻분이라는 사람이 부른 아주 오래된 노래라는 것을
가르쳐 준 건 신애였다.
그때 나는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 아무것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그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나는 그때 이 세상의 무엇도 가지고 싶은 것이
없었다. 나는 다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애는 나에게 그러한 삶의 바닥이
되어 있었다.
그 무렵, 살아간다는 것이 왜 그토록 단순해 보였을까. 죽음마저도 아주
가까이에 있는 빈 꽃병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싱싱하게 꽃들이 꽂혀 있었던 그
자리. 그렇지만 지금은 비어서, 그 비어 있는 것으로 존재하는 빈 꽃병. 나는
그랬다. 다 살아 버린 것 같은 소년이 되어 있었다.
방학이 시작되었다. 나는 쓸쓸하다는 말의 의미를 되씹듯이 그렇게 내
자취방에서 짐을 꾸렸다. 신애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고모가 있는 읍내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일 새벽에 떠나 버릴까. 아니, 하루 이틀 더 있다가 어떻게든 신애를 만나고
떠나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 싸놓은 이불과 책 보따리들을
바라보고 있던 그 맘올 신애가 나를 찾아왔다. 그 자춰방으로.
내가 한 번도 가르쳐 준 적이 없는 내 방이었다. 어떻게 여길 알고 왔느냐고
나는 묻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녀를 문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사복에 외투를
입었다. 목도리를 두르며 밖으로 나오니 그녀는 골목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한가운데, 결코 어떤 힘으로도 움직여지지 않을 물체처럼 서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골목을 빠져 나왔고, 거리로 나섰고, 그리고 시내를 빠져 나을 때까지
또 걸었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는 처음으로 함께 잠을 잤다.
오는 입구 쪽에 새로 지어진 조그만 호텔이었다. 내 생애에 처음으로 맞았던
아름답고 서글픈 밤이었다. 그날따라 밖은 몹시 추웠다.
바삭바삭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 그리고 아주 크고 그러나
손에 잡혀지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그 무엇이 지나갔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는 아무 상처도 남기지 않고 다만 지나가기만 했다는 것 .....그런
기억들이 불의 도장처럼 내 의식에 찍히면서 우리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으로 그 밤을 보냈다.
그것은 물과 같았다. 물처럼 그녀는 나에게 와 닿았고 나는 거기 잠겼을
뿐이었다.
그것은 안개와 같았다. 멀리 있는 모든 것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것들은 현실의 각도나 형태를 잃어버리는 그 안개 속 같은 시간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칼이었다. 나는 무엇인가를 힘껏 네리쳐 자르는
마음으로 그 일을 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나는 다만 내
몸이 가는 곳으로 맡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 그것이 그녀의 안에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뿐이었다, 이미 기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한 남자외 여자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한다는 것을 내가 알 리 없었다. 내
몸의 모든 것은 이미 무엇인가에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몸이 나는
아주 차가운 얼음처럼 느껴졌다. 내 모든 것은 이미 터질 듯 커져 있었고,
목마른 사람처럼 무엇인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그녀의 젖가슴은, 아, 나는 이제까지 그렇게 부드러운 것을 만난 적이 없다.
그것은 깊게 부드러웠고 넓게 부드러웠으며, 그러면서도 어딘가 결코 무너질 수
없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만 울고 싶었다.
그 모양을 마치 잘 익은 복숭아를 생각나게 하는 그 형태를 나는 어둠 속에서
다만 손으로 느꼈을 뿐이었다.
그녀의 다리는 왜 그렇게 견고하고 힘차게 느껴졌던가. 그것은 마치 대리석의
기둥 같았다. 나는 그녀를 세워 놓고 그 다리 아래 무릎을 끓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녀를 아주 멀리 세워 놓고.
아랫배는 단단했고 매끄러웠다. 왜 그토록 많은 그리스의 대리석 조각이
벌거벗은 여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나는 그때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마지막 아름다움으로서.
그리고 나는 그녀의 엉덩이를 참담할 정도의 마음으르 그렇다, 가슴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아져서 두 손으로 껴안 듯 매만졌다. 그것은 얼마나 풍성하고
넉넉하고 완벽했던가. 여자의 엉덩이가 그렇게 아름답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고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영원이 되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형태와 부피
그리고 부드러움이라는 질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 무엇을, 그녀의 무엇을 만져야 하고 어디를 쓰다듬어야
한다든지 아니면 어느 곳을 껴안으려고 내 팔과 다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자연이라는 것을 무엇이라고 나는 이해했던가.
그것은 다만 이 세상에 있는 것이라고 나는 그때 겨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산
강 나무 들판... ..사람이 만들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대로 있는 것. 그것이
자연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자연은 그렇게 나의 밖에 있는 것이었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의 대명사였다. 자연이란,별이 그렇고 달이 그렇고
아침마다 떠올랐다가 지는 해가 또한 그랬다. 누가 안개를 피워 올리는가.
사람들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안개는 피어 올라 아침 강을 뒤덮기도 하고
마을 길에 깔리기도 하고 산허리를 휘감기도 했다. 저녁놀 또한 다른 게 무엇이
랴. 그것은 그렇게 황혼과 함께 잠시 하늘을 물들이면서 무슨 축복처럼 우리의
저편에 떠올랐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것들을 나는 자연이라고 알고 있었다.
겨울이 오면 강이 얼고, 봄비를 맞으면 흙을 헤집고 새싹이 솟아오르는 그런
것. 신애의 몸이 가르친 것, 아니 내 몸이 알게 된 것도 그것이었다.
자연이라는 이름의 그 질서.
모든 것은 아가들이 어머니의 가슴에서 젖을 빨듯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내가
자연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게 나는 마치 그 모든 것을 어딘가에서 배워서
아니면 치러서 알고 있었던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우리는
마쳤다.
'너 지금 울고 있잖니."
나는 그녀에게서 얼굴을 돌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가 두 번째로 사랑을
나누고 났을 때였다.
'그러지 마. 네가 그러면 난 어떻게 견디라구."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면서 나는 다만 중얼거렸다
'난 너무 많이 뭔가를 잘못한 거 같아요.'
'넌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나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당신은 바다였어요. 파도가 와 철썩이는 모래밭에
섰을 때 그 발을 간지럽히며 헤살거리는 그런 바다였어요. 나는 오래 당신을
따듯한 바닷물로 기억할 거예요.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나란히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라 소리없이 귓가로 흘러내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왜 울어요?
"몰라.'
'제가 죽을까요?'
그럴 수 있다고 너무나 확실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에, 내 목소리는 마치, 찬
콜라를 마시고 싶어요 하는 것처럼 들렸을지도 몰랐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세상이 전부 불타 버린 거 같아.'
바람이 창문을 조금 흔들며 지나갔다.
'다 재가 된 거 같아.'
경적을 울리며 구급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재 속에......거기 나 혼자 서 있는 거 같아.'
나는 모래 위에 글씨를 쓰듯 마음 바닥에 손가락으로 그녀의 말들을 적었다.
세상이 전부 불타 버린 거 같아. 다 재가 된 것 같아. 그 재 속에 거기 나 흔자
서 있는 거 같아.
그녀도 나도 눈물을 그쳤을 때, 그녀가 벗은 몸을 시트로 감싸면서 침대
머리맡을 등지고 일어나 앉았을 때, 그렇게 서로를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을 때,
밤이 지나가는 소리가 마치 길고 긴 군대의 행렬처럼 느켜졌을 때, 내가
말했다.
'우리 엄마는... ..자살했어요,'
가만히 신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나는 내 기억 속에도 남아 있지 않은
엄마의 얼굴이 저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남자를 좋아했었나 봐요.'
'어떻게 돌아가셨니 ......."
그것은 묻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내 말을 듣기 위한 것도 아닌. 마치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내가 가르쳐 줄까 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물에 빠져서 ......
'그럼, 투신 자살?"
'어려서 전 잘 몰라요. 나중에 들어서 알지요. 다만 굿을 하던 생각만 나요.
엄마가 귀신이 되어 돌아다니기 때문에 굿을 해준다고 했던 게 기억 나요.
엄마가 귀신이 됐다던 옆집 할머니의 말이 왜 그떻게 무섭게 들렸는지 몰라요.
그때부터 난 혼자였어요. 난 귀신의 아이였거든요. 신애가 손을 뻗어 내 볼을
감쌌다,
'그 후에 주욱 고모랑 살았어요. 아니 ... 고모랑 컸다는 말이 옳겠지요.
고모는 엄마며 아버지면서 또 고모였으니까요.'
신애가 말없이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몸을 가리고 있던가 홀러내려 두 젖가슴
사이가 조금 드러났다.
'고모를 좋아했던 남자도 있었겠지요. 언뜻 들은 애기로는. 혼담까지
오가다가도 웬지 막상 결혼은 못하곤 했대요. 무슨 살이 꼈다나 하면서 고모는
늘 그랬어요. 난 혼자 살 팔자란다,'
신애가 가만히 웃었다, 나는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모습을 보면서 그때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이 달걀 모양으로 갸름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조금
턱이 뾰족하다는 것도.
'고모도 누구 좋아한 남자가 있었나 봐요. 제가 조금의 일이에요. 그런데 그
남자가 부인이 있는 남자였거든요. 그 남자가 마지막이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
다음에 잘 살았어요.
그녀가 가만히 내 이마에 입술을 댔다. 그녀의 희디횐 젖가슴이 시트 밖으로
드러났다. 오래오래 그렇게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고
싶었지만, 그러는 순간 마치 그녀가 재가 되어 푸스스 물러앉으며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밤이 가면 아침이 온다는 것을 그날 나는 처음 알았다.
우리들이 그렇게 한몸이 되어 나눈 사랑은 많은 것을 잠재우는 것이었다. 많은
아픔을, 많은 허무함을, 그리고 그토록 뒤엉켜 있는 혼란스러움을 잠재우는
것이었다.
그녀는 숲이었다. 나는 신애의 그 희디횐 젖가슴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둥그러움이라고밖에 이름할 수 없었던 엉덩이와.... 누구일까, 그녀를 만들어
낸 창조주가 남겨 준 상처처럼 신비롭기까지 한 배꼽과 그 모든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 내는 지체의 숲에서 잠들었다. 그녀의 품에 안겨서, 그녀를 품에 안으면
서.
그때 그 모든 아픔이나 허무함이나 혼란은 머나먼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홀러가 버리는 시간처럼.
그녀는 초원이었다. 나는 그녀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풀 향기를 맡았다.
그녀의 허리를 껴안으며 가없이 드넓은 초록의 벌판을 뛰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몸과 내가 하나가 되었을 때면 나는 네잎 클로버만이 가득한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차마 눈을 뜨기에도 아깝게 찬란한 햇살이
퍼붓는 초원, 바라보고 있으면 내 눈에 푸르른 물기가 옮아 을 젓만 같은 그런
해맑게 푸른 하늘이 그 위로 펼쳐져 있는 초원. 그녀와 내가 발가벗고 누웠을
때 나는 언제나 그랬다.
우리는, 풀이었고 숲이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이었을까. 비를 피해 동굴 속에 들어와 있는 털 많은 짐승들은
아니었을까. 그 무엇을 잡아먹지도 않는 짐승, 그 무엇을 해치지도 않는 짐승,
...... 마른 풀잎 위로 소리도 없이 떨어져 내리는 열매들을 먹으며 살아가고,
겨울을 위해 그것들을 모아 놓는 그런 짐승이 어느 날 비를 만나 동굴에 피해
와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듯 그떻게 우리는 서로의 벗은 몸을 껴안고 있었다.
해가 드러나기를 기다리면서, 젖은 숲이 마르기를 기다리면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두 마리의 짐승. 그것이 우리였다.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었다. 우리는 아마 세상에서 우리를 향해 부릅뜨고 있는 눈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만나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그 입이, 그리고 용서받을
수 없는 불륜이라는 이름의 수군거림, 우리를 향해 저마다 들고 있는 돌덩이
들이 ......그런 폭우가 밖에서는 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몰랐고, 또한 우리에게 있어 그때 함께 껴안고 있던 사랑이란 그것만으로
하나의 완성이었기 때문에, 그런 빗줄기 따위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을
뿐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새벽이었다. 신애의 손이 가만히 내 배를
어루만지다가 조금씩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멈췄던 그녀의 손이, 그
작고 가느다란 손이 내 몸의 한 부분을 쥐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상해. 어쩜 이떻게 작아져 있니.
갑자기 그것이 커지기 시작했다.
점점 부풀어올라 힘차게 일어서는 내 몸을 잡고 있는 손에 조금씩 힘을 주어
가면서 그녀가 아주 나직나직 말했다.
'싫고, 나쁘고, 좋고... ..그런 어떤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단다, 난
남자에게서. 그랬는데 어딘가 아주 낯선 데 갑자기 떨어져 버린 느낌이야.
낯선,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도시에 갑자기 내려 버린 한밤처럼. 그냥 네가 날
기쁘게 했다는 것만을 알아. 마치 내가 지금 어디 서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낯선 도시의 지도만을 한 장 들고 있는 것처럼.'
한 주일이 지나갔다. 고모에게 내일 집으로 내려갈 거예요 하고 전화를 하던
날도 그녀는 내 옆에 함께 있었다. 그리고 아침이 왔을 때, 어제와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거리였지만 그러나 이제 어제의 거리가 아닌 그 얼어붙은
겨울 새벽의 한복판에 서서 내가 말했다.
'나 기차 탈 때 역에 나와 주실래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모가 있는 집으로 가기에는 버스를 타는 것이 더
빠르고 편할 수도 있었다. 기차를 타면 내려서 다시 버스를 타야 하는
길이었기에.
그리고 그날 오후 나는 싸두었던 짐을 그냥 셋방에 놓아둔 채 몇 권의 책이 든
가방만을 들고 역으로 향했다. 신애는 이미 대합실에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표를 사가지고 돌아서서 바라보니 신애는 창가에서 사람들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그녀와 나란히 역 앞 광장을 내다보며 서서
말했다.
' 나부탁이 있어요."
내게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녀가 물었다.
'뭔데?'
광장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는 사람을 내다보면서 내가 말했다.
'기차, 같이 타요."
'어쩌게?'
'조금만, 조금만 저랑 같이 있어 주시면 되잖아요.'
내 애절함과는 달리 신애가 되물었다.
'조금만이라니?
'조금만 가다가 어딘가 중칸 역에서 내리시면 되잖아요 그렇게 돌아오시면 안
될까요?"
그녀는 아무 가방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란 솔더 백도, 아주 조그만 가죽
백도. 허리를 맨 긴 코트를 입고 주머니에 깊이 손을 찌르고 있던 신애가
말없이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그녀의 손에는 기차표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내가 사가지고 있던 것과 똑같은 승차권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가다가......내려야겠다 싶을 때 아무데서나 내릴게.'
그녀가 기차를 향해 돌아서면서 말했다.
'그럴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그 겨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었다. 그러나 나는 그 소설 속의
싱클레어가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문제들은, 고통이 아닌 달콤한 위안이며
살아가는 의미인데도. 왜 그는 그것을 견뎌 내기를 그다지도 힘들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에바 부인을 만나 드디어 그가 하나의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도 나에게는 헛되게
생각되었다. 그가 찾아간 곳은 겨우 언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알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이다. 피부와 살과 뼈가 피의
움직임을 따라 생명이라는 신비로 숨쉬는 몸이 아니다. 말이란, 그 몸이 만들어
내는 부호일 뿐이 아닐까.
차라리, 그래도 나에게 조금의 위안이라도 준 책이 있었다면 그것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였고.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었으며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였다.
소설 <닥터 지바고>는 영화와는 달랐다. 그곳에는 혁명의 피가, 세상살이의 땀
냄새로 얼룩진 이 땅 위의 질서라는 이름의 죽음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랑은
그러한 혁명의 핏및 광장에서일수록 더욱 빛나며 장렬한 것이라는 걸 내게 억센
손으로 악수를 하듯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살던 그때는 혁명의 시대도
아니었다. 싸워야 할 이념의 적이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다만 사랑이라는 그
본질에 있어서 겪어야 하는 남들과의 갈등만은 혁명의 광장에서와 다를 것
없기는 했지만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신애로부터 놀라운 선물을 우편으로 받았다. 그것은
애훈짜리 한 개의 녹음 테이프에 담긴 음악이었다.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곡이었다. 그 소설에 대한 내 이야기를 적어 보낸 것을
보고 신애가 구해서 보내준 것이었다.
함께 보내 온 그녀의 편지를 나는 얼마나 많이 읽었던가.
,.....북스테후데의 작품을 정리한 사람은 G. 카르슈테트라는 사람이야. 그에
의하면 북스테후데의 작품으로 아직 남아 있는 것은 모두 273곡이라고 해. 그
가운데 l35곡이 성악곡이고. 이 음악들은 바흐 이전의 프로테스탄트 음악의
절정이란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바흐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작품들이기도
하지.
그의 <전주곡과 푸가> F 샤프 단조는, 카르슈테트가 엮은 북스테후데 작품
총목록 146번으로, 뭐랄까.. ...데미안 속의 그들이 어떤 청춘의 어두움 속에
있었나를 느끼게 하는 것이기에 너에게 보내.
연주자는 헬무트 발하라는 사람이야. 그는 16살에 눈이 먼 시각장애자이긴
하지만 우리 시대의 최고의 오르가니스트란다. 어쩌면 그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는 것이 그를 음악의 내면 세계로 더욱 깊이 가 닿게 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
.... 나는 이번 겨울, 언제보다도 많은 작업을 하며 보내. 그리고 또 그린단다.
그리고 네게 보여 주고 싶은 그림도 그렸어.
슬프다는 것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졌다면 웃으시겠지요. 신문 광고를 보고
아주 싼 전집물 문학 서적을 샀다고 해도 또 웃으시겠지요. 그걸 그냥 아무
뜻도 없이 읽어 내려가고 있다면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웃으시겠지요.
이따금 아주 이따금 내 생활을 빨아서 널 수 있다면 하고 생각 합니다.
이따금 자주 영혼이라는 것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도 생각 합니다.
사랑이라는 말보다는 운명이라는 말이 더 잘 맞는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이제 그만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날 기차를 내려 저를
바라보던 선생님의 눈을 생각합니다.
그것이 호수였다면, 그때 나는 차창을 열고 그 호수에 몸을 던져 뛰어내렸을
거라고도.
북스테후데의 그 음악을 들으며.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 편지를 썼다. 그 편지를 신애에게 부치던 날은 눈이 내렸다. 눈을 맞으며
나는 멀리 우체국까지 걸었다. 천천히 우표를 사고, 풀이 준비되어 있었는데도
나는 침을 발라 우표를 붙였다. 편지를 보내고 우체국을 나왔을 때도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눈이 그치지 말고 내려서 거리를 덮고 쌓이고,
집을 덮고 쌓이고, 삐뚤삐뚤 서 있는 전신주를 덮고 쌓억서 아주 그 거리가 눈
속에 파묻히기를 바랐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옷이
젖도록 눈을 맞으며 걸었다. 집으로 돌아올 땐 저녁이 와 있었고 눈은 그쳐
있었다. 아무 식욕도 느끼지 못하며 나는 어두운 내 방에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음악을 들었다. 오르간 연주를.
그 겨울 나는 참 많이 걸었다. 녹지 않은 눈이 발에 밟혀서 뽀드득거리는 길을
걸었고, 녹아 질척거리는 길을 걸었다. 얼어붙은 눈이 무늬를 이루면서
아스팔트 포장 도로 위를 휩쓸려 가는 거리도 걸었다. 그렇게 그 겨울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걸으며 생각하곤 했다.
성이라고 하는 육체와 이성이라고 하는 영혼은 우리의 몸 안에서 어떻게 나뉘어
있는 것일까. 어느것이 위에 있으며, 아니면 어느것이 아래에 있는 것일까. 한
인간의 몸이라고 하는 구조물 안에서 왜 이 둘은 끊임없이 싸우거나 아니면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기만 하는 것일까.
등이 서로 달라붙은 두 마리 기형의 동물처럼 영혼과 육체는 서로 떨어질 수
없으면서도 서로가 바라보는 곳도, 가려고 하는 곳도 다르다. 그것이 하나일
수는 없는 것일까.
육체는 끊임없이 묻는다. 해방시키라고, 왜 먹고 자고 마시고......살아가는 그
당연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인간의 한 부분을 그토록 이상한 족쇄와 사슬로
묶어 놓는 것이냐고. 그토록 육체를 괴롭히는 영혼이라는 너, 이성이라고 하는
너는 무엇이냐고. 함께 누워서 바라보고 싶다는 이 욕망에 너는 왜 그토록 많은
율법이라는 사회적 족쇄를 채워 얽매는 것이냐고. 그러나 영혼은 언제나 육체를
향해 눈을 부릅뜨며 채찍을 든다. 그것이 인간과 다른 동물과의 차이라고.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방법들이라고. 인간은 사회의 틀
안에서만 두 육체를 맺어야 하고, 그리고 그런 두 몸과 몸의 만남은 영흔의
만남이 만들어 주는 방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네가 개나 들쥐나 뱀이 아닌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도대체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그것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의 하나가 아닌가. 그러나 사랑이란 또 얼마나 많은 모양과 깊이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모성애라고 부르는 그 헌신과 희생의 상징인 어머니의
사랑에서부터 조국이나 이념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는 사랑에
이르기까지 인간에게는 여러 모양의 사랑이 있지 않느냐. 그 가운데 네가 지금
말하는 사랑은 고통스럽겠지만 다른 모든 동물이 가지는 생식 기능과 무엇이
다르냐고.
자식을, 새끼를 낳기 위한 성행위와 인간의 사랑이 다른 것은 바로 그
점이라고. 아이를 낳기 위해서 인간이 사랑을 하느냐. 그렇다면은 얼마든지
사랑하거라. 그러나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그것을 더욱
빛내기 위한 만남으로서의 육체가 가지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달라야 한다고.
영혼은 끊임없이 그렇게 채찍을 들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랑에 있어 육체와 영혼은 얼마만큼의 넓이와 무게로 서로
공존하고 있는 것인가. 그 황금 분할은 몇 대 몇이란 말인가.
첼로가 있던 겨울
푸른 풀밭이 드넓게 이어지고 있었다. 갈대인 듯 보리밭인 듯 바람에 쓸리고
있는 그 풀들은 무어라 이름하기 힘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키 작은
토끼풀이거나 넘실거리는 잡초들의 언덕이어도 좋았다. 그 푸른 들판에 한
벌거벗은 여자가 비스듬히 엎드려 있다. 그것이 신애가 제일 먼저 꺼내 보여 준
그림이었다. 푸른빛과 우유빛이 마치 여자의 몸을 음각하기라도 하듯 대비를
이룬 그 그림은, 여자의 누드였다. 다만 그 여자에게는 날개가 달려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날개보다도 가슴에 다가오는 것은 그림 속의 여자의 머리카락과
털이었다. 여자의 우유빛 몸을 장식하듯 홀러내린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음모는
싱싱하게 살아 있어서. 백 개의 털을 백 번의 손놀림으로 그렇게 하나하나를
그려 넣은 것만 같았다. 그렇게 선명했다.
푸른 언덕, 푸른 풀밭, 푸른 물결들이 어떤 그림에서는 융단처럼 어떤
것에서는 휘장처럼 너울거리는 속에 그렇게 벌거벗은 여자들이 그려진 신애의
그림들을 나는 보아 나갔다.
누워 있는 여자도 있었다, 한 쪽 젖가슴이 옆으로 드러난 채 무릎을 감싸 안고
앉아 있는 여자도 있었다. 팔베개를 하고 엎드려 있는 여자도 있었다. 그
여자들의 등에 때로는 투명하게 때로는 잿빛으로 날개들이 달려 있었다. 다만
어쩐지 그 여자들은 체격에 비해서 젖가슴이 작았다. 젖가슴이 작은 데 비해
몸은 탄력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허리도 그 밑으로 이어진 엉덩이도
풍만했다.
다만 그림 가운데 어떤 여자도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려는 여자는 없었다.
'아, 이건 . ...."
내가 조그맣게 소리치며 그림 앞으로 다가간 건 열 점이 넘는 그림을 보고 났을
때였다. 그것은, 날개를 구기듯 깔고 옆으로 누워 있는 여자의 그림이었다.
팔로 젖가슴을 가리듯 손을 앞으로 하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내 곁에서 그녀가 말했다.
'왜?
' 이 여자는 표정이 있네요."
이제 다 끝났어요. 그만 돌아가 줘요. 그렇게 속삭이고 있는 것 같은 여자의
표정을 그는 바라보았다.
'너무 좋네요. 이 그림은."
젖가슴을 감싼 채 애달프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벌거벗은 여자를 나는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랫도리에도 한 올 한 올을 세어 가면서 그려 넣은 것
같은 음모가 검게 빛나며 싱싱했다. 다 타서 사그라지는 불꽃 같은 그런
눈빛으로 그럼 속의 여자는 이쪽을 보고 있었다. 우리 몸에 있는 것 가운데
오히려 생명이라든가 자란다든가 하는 것과는 가장 멀게 느껴지는 것이
머리카락이며 음모가 아니었던가. 자르거나 빠져 버려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
머리카락이며 손톱 같은 것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저 그림에서는 오히려
그것들만이 살아서 숨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스토브 위에 올려놓은 주전자에서 물이 소리를 내며 끓기 시작했다. 그림을
보고 있는 내 등뒤로 다가와 목을 껴안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널 그리고 싶어.
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를 밀어내기라도 하듯 신애가
천천히 말했다.
'널 그리고 싶어. 벗은 널.
신애는 작업실로 쓰고 있던 아파트 방에서 나를 그렸다. 낮에는 두텁게 쳐진
커튼을 걷고 우윤빛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속에서 나를 그렸고 밤이면
커튼을 친 불멎 아래서 나를 그렸다.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그렇게 벗고
있었다. 때로는 서서 때로는 앉아서. 그리고 때로는 몸을 밧줄로 동억맨 듯이
구부리고. 우린 그렇게 살았어.
그리고 그림에 지치면 우리는 사랑을 나눴다.
들었다. 낮고 느리게, 우리들의 영혼을 쓰다듬듯의 무반주 챌로 모음곡 가운데
사라방드.
나는 천장을 쳐다보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내 벗은 가슴 위로 신애의 흐트러진
머리가 그녀의 가쁜 숨결만큼이나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내 손이 나가
힘없이 그녀의 머리칼 위에 놓였다.
'이상해.'
잠에 취한 듯한 목소리로 신애가 말했다. 나는 아무 뜻없이 반말로 물었다
뭐가?
우리. 그냥 뭐랄까. ...왜 이런 걸 아직까지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처음이야. 이런 기분
'어떤 기분?'
우리는 서로의 몸을 나누어 가지는 그 행위를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같이 잔다는 거. 이거 말야.'
신애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몸을 조금 일으켰기 때문에 그녀의 작은
젖가슴이 조금 더 길게 늘어지며 아래를 기웃거리기라도 하듯 젖꼭지가 내
가슴에 닿았다. 내가 말했다.
'난 신애 때문에 처음으로 이런 걸 ......알았어. 황흘함이랄까. 뭔가 견디기
힘든 기쁨이랄까. 그런 게 여기에 있다는 걸 말야.'
'바보.'
신애의 손이 내 몸을 쓸어 내려갔다.
'우린 그냥 사랑하는 거야. 이게 사랑이라는 거야. 그것은 마치 추울 때
추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더울 때 더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랫배를 쓸며 내려간 그녀의 손이 내 넓적다리 위로 미끌어져 내려갔다.
그리고 거기 잠시 머물렀던 그녀의 손이......쓰러져 누워 있는 무엇에게
모포를 덮어 주듯이 그의 그것을 잡았다. 손은 차갑지도 따스하지도 않았다.
다만 나는, 무언가 정갈한 것이 나의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우리들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거무스레한 내 사타구니 사이로 내려와 있는
그녀의 희고 작은 손은, 어딘가에 깊이 내려 쌓여 있다가 아직 녹지 않고 남아
있는 눈 같았다.
누워 있는 애벌레처럼 힘없이 조그맣게 쪼그라들어 있는 내 그것을 감싸 쥐면서
신애가 말했다.
'난 말야......얘가 ... . . '
그녀는 웃고 있지 않았다.
'어느것이 제 모습인지 모르겠어. 어느 게 본래의 그건지.'
'뭐가.
"앰. 이거 말야.'
그녀가 나의 그것을 조금 힘주어 잡았다.
'이렇게 조그맣게 오그라들어 있을 때가 얘의 원래 모양인지, 아니면 딱딱하고
커다랗게 되었을 때가 얘의 원래 모양인지,'
내 그것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다.
'둘 다겠지.'
내 안에서 누군가가 말하고 있었다.
영혼과 육체가 따로 존재하는 거라고 난 믿지 않아. 그걸 상징하는 게 바로
네가 지금 쥐고 있는 그거야. 그건 영혼이라는 쪽에서 아무리 그걸 보고
커지라고 말을 해도 그것만으로는 커지지 않아. 마음과 그것이 함께 손을
잡아야만 커지고 딱딱해져서 힘차게 일어서.
그렇지만 육체라는 쪽에서 보아도 똑같애. 그것이 커져 있다고 해서 마음이
황홀한 건 결코,아니니까. 때때로 아침이면 아무 느낌도 없이 그것 혼자
커다랗게 설 때가 있지. 그러나 그건 영혼이라든가 사랑의 행위라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신애의 손에 조그맣게 쥐어져 있던 그것이 점점 커지고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자신이 잡고 있는 길이만큼이나 손 밖으로 튀어 나온 내
그것을 신애가 내려다보았다. 힘차게 부풀어오른 귀두가 버섯 모양을 하며
굵어져 검붉은 빚을 띠고 있었다. 신애가 내 몸 위로 올라가 자신의 몸을
겹쳤다. 우리들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져 갔다. 신애가 내 귓가에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흐트러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이야.
그녀가 내 귓불을 ㅎ으면서 숨소리를 가득 쏟아 봇고 있었다.
'우린 지금 사랑을 하고 있을 뿐이야. 사랑.'
그런 날, 우리는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들었다. 그 신음하는 듯한 3악장의
아다지오를
그림을 그릴 때도, 사랑을 나눌 때도..,...서로를 안고 앉아서 창문으로 스러져
가는 저녁빛을 바라볼 때도, 어두운 거리를 걸어나가 찻집에서 마주앉아 있을
때도......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녀를
떠올리며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노트에 적곤 했다.
나는 아마 전생에 물고기였을 거야. 그녀가 했던 말이었다. 전생에 물고기였던
여자에게 있어서, 그녀를 사랑하게 된 나는 무엇이었을까.
너는 말이지, 전생에 갈매기였는지도 몰라, 왜냐구? 멀리 날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람들과 살고 있지도 않으니까요. 남들이 볼땐 늘 외롭지. 새들은
말이지, 가만히 보면 두 가지란다. 가깝게 낮게 날면서 사람과 함께 살고
있거나, 아니면 아주 멀리 날면서 사람과는 떨어져서 살아. 그런데 갈매기는 좀
달라. 갈매기는 사람과 살고 있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저 혼자 아주 먼 곳을 떠
있듯이 날면서 살아가지도 않거든. 그 말을 듣고 나자 나는 정말로 전생에
갈매기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난 전생에 새였을까요? 갈매기였을까요?
바보......하고 그때 신애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 새들은 땅도 물도 하늘도 그의 집이란다. 땅에서도 물에서도
하늘에서도 살지 않니. 그떻지만 넌 그 세 가지 가운데 어디에도 없어. 때로는
땅이었다가 때로는 하늘도 돼. 그렇게 살아.
그러니까 난 새는 아니었을 거란 말이지요?
그래.
그럼 ......무엇이었을까요? 난 전생에 무슨 곤충 같은 건 아니었을까요?
그때 신애가 웃었던가.
어느 학자가 그랬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남아 있을 동물이 뭘까?
마지막까지 이 땅 위에 남아 그 주인이 될 것은 뭘까? 그건 곤충이래요.
무엇보다도 강하고 어느것보다도 작고, 그리고 지혜롭대요, 곤충이.
그러렴. 오래오래 살아 남으렴 넌 곤층이 되렴.
그게 아니고, 지금 그렇다는 게 아니고, 전생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전생에
곤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예요. 소리내어 우는 매미나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사라져 가는 누에 같은 건 아니었을까?
모르지요. 조금은 이쁜 등허리를 가진 딱정벌레였을지도. 거미였을지 누가
아니.
거미는 곤충이 아니라구요. 아, 선생님은 학교 때 과학을 너무 싫어했던가
봐요. 거머를 곤층이라고 하는 사람을 난 이 세상에서 처음 만나요. 그러고
보면 선생님은 처음투성이예요. 난 이 세상에서, 전생에 나는 물고기였나 봐
하는 사람도 처음 만나거든요.
이건 두 주일 만에 작곡된 곡이래. 그렇게, 슈만의 챌로 협주곡을 들려 주면서
신애는 클라라와 슈만의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 곡이 작곡될 때는 아직
두 사람에게 다가을 비극은 먼 지평선에 있었대.
챌로는 네 개의 줄로 된 악기다. 활로 그어서 소리를 내며, 악기의 생김새도
그렇지만 그 구조나 소리를 내는 원리도 바이올린과 같다. 다만 크다. 길이는
바이올린의 두 배, 면적은 네 배가 되고 용적은 열두 배로서. 각 부분의 비율도
함께 크다. 이 크기 때문에 비올라나 바이올린과 달리 연주자는 의자에 앉아야
한다. 이때 악기를 바닥에 대고 나무. 또는 금속으로 만든 언더핀이라는 봉을
사용해서 악기의 높이를 조절한다. 초기에는 연주자가 두 무릎 사이에 악기를
끼워 고정시켰다. 합주에서는 낮은 음역을 맡지만, 챌로의 음질은 깊고 높고.
눈부시게 풍부하다. 특히 저음을 내는 두 현은 남성적인 힘과 울림이 깊다.
소리의 영역도 넓다. 음역은 네 옥타브를 넘어설 수 있어서 현재 사용되는
현악기 가운데 가장 넓다. 연주에는 왼쪽 손가락 전부를 사용한다. 물론
바이올린의 연주 기법을 전부 구사할 수 있으나, 악기의 크기 때문에 매우 빠른
연주는 저음역에서 약간 제한된다. 반면 왼쪽 엄지손가락을 사용하기 때문에
고음역에서의 손가락 움직임은 대단히 자유스럽다. 중세의 비올 속에 속하던
저음 현악기인 챌로는, 15세기 후반 고음역으로 발달하면서 l520년경 태어났다.
그 후 관현악에서 콘트라베이스 파트를 한 옥타브 높게 중복해서 연주하는
역할을 했다. 초창기의 첼로는 다섯 현과 네 현의 두 가지였다. 독주 악기로서
곡이 만들어진 것은 바이올린보다 약 2세기 늦게 17세기 중기 이탈리아의
독주가 카발리에리에 의해서였다. 그때까지는 거의가 바이올린과 챔발로의 반주
악기로서 쓰여졌다. l9세기 후반 챌로의 높이를 조절하며 바닥에 놓고 연주할
수 있는 언더핀이 고안되었다. 그때부터 보다 안정된 자세로 확실한 연주가
가능하게 되면서 비로소 척성 웰리스트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신애와 나 사이에서 언제나 떨리며 다가오던 선율, 자크린느뒤 프레의 연주도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할 때, 나는 그 풍만한 첼로의 몸체를
떠받치고 있는 원뿔형의 가느다란 언더핀을 탄식 속에서 생각하곤 했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커다란 코끼리는 어떻게 해서 그 엄청나게 큰 몸을 움직인다고 생각하니?
그래요. 선생님. 생각해 보면 그것들도 힘줄과 근육과 연골로 둘러싸인 뼈를
움직여서 걷고 있는 거 같지는 않아요.
큰 고래가 어떻게 바다를 헤엄쳐 다닐 거라고 생각하니.
왜 고래는 그렇게 커야 하는지조차 전 모르겠어요.
큰 것만이 아니야. 새들도 마찬가지 아니니. 제비라든가 철새들. 어떻게 그들이
바다를 건너고 육지를 가로질러 수천 리를 날아갈 수 있다는 거니. 넌 그게
상상이 되니? 그걸 이해할 수 있단 말이니?
나는 그때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란다.
신애는 나에게 무엇을 가르쳤나. 그것이 ..... 세상이란다.
이것이......세상이란다. 신애는 늘 그런 말을 했었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었던가,
나의 몸이 네 몸이 되어
나는 그녀를 껴안지 않아도 좋았다. 나는 그녀와 땀 흐르는 몸을 비벼 가면서
사랑을 나누지 않아도 좋았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나누었던 사랑의 표현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손을 잡듯이, 잘 있었어?
하고 인사를 나누듯이 그때 내가 여자의 몸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었단
말인가. 여자를 어떻게 안는지 그때의 내가 무엇을 알고 있었던가. 나는
정말이지 내 육체의 일부분을 어떻게 해야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삽입된 두 육체가 서로에게 무엇을
전해 주는지도 알지 못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물듯이 그렇게 나는 그녀를 안았었기에. 그렇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처음에 나는 언제 내 몸이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녀를 안고 있으면 어느 순간 나는 그녀의
속에 있었으니까. 나는 왜 내가 그녀의 몸에 들어가 있을 때 희열을 느끼는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나는 그것을 느꼈고 거기에 몸을
맡겼을 뿐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거나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거나.
손을 잡고 거리를 걷고 어두운 벌판을 앞에 두고 서로를 안고 서 있는 그 모든
행위의 끝에 그 육체의 만남이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거나 손을 잡거나 하는
모든 행위는 옷을 벗고 만나는 그 마지막 사랑의 몸짓을 위해서 있을뿐이었다.
그것이 우리 두 사람의 몸이 가진 만남이었다. 거기에 어떤 법이 관행이
세상과의 약속이 들어와 자리잡아야 한단 말인가. 결코 그런 이름으로 불리울
수 있는 것들이 범접하지 못할 곳에 사랑은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나를 끊임없는 갈등으로 몰아간 것은, 영혼이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나였다. 그것은 칼날이었다. 그것은 나를 도려내면서 수없이
물었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그것은 단순한 기쁨일 뿐 ...... 그것은
시작일 뿐 끝이 아니라고. 보아라. 너는 그것을 통해서 점점 더 페허가 되어
가리라고. 너는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고. 그것은 허무가 홀러가 쌓이는
퇴적지에 불과하다고. 거기에는 어떤 새로움도 없다고. 그것은 익숙해지면
익숙해지는 만큼 네가 믿고 있는 그 사랑에 두꺼운 각질의 표피를 만들면서
네가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것을 서서히 습관이라는 늪으로 몰아 가리라고.
무엇이 어디서부터 그렇게 자리잡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 행위의 끝에는 주체할
수 없는 또 다른 혼란이 찾아 들기도 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껴안으면
껴안을수록, 아니 내가 그녀를 안을 때마다 그만큼 그녀가 더럽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통스러움이었다.
행위가 끝나고, 땀으로 젖은 몸을 한 채 천장을 올려다보고 누워 있는 그녀를
바라볼 때면 채찍을 든 채 저벅거리는 발소리를 울리며 그 말들이 다가왔다.
갑자기 물가로 끌어올려진 물고기처럼 퍼득거리며 튀어 오르던 그녀의 몸은
죽음처럼 고요해져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칼과 지친 듯이 나지막하게 퍼져 있는
젖가슴과 초점 없이 흐려져 있는 그녀의 눈멎이 있을 뿐이었다. 졸음을 참지
못해 하는 신애가, 먼 길을 헤매어 걸어온 나그네같이 피곤함에 뒤덮인 신애가
있을 뿐이었다. 언제나. 헬 수 없이 많은 시간, 물방울이 거기 떨어지는 일이
반복된 끝에 파여진 흠처럼 싱싱했던 그녀의 배꼽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내 가슴속을 가로지르면서 키득키득 웃어대는 비웃음 가득한
영혼이라는 또 하나의 내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얼마나 많이 죽고 싶었던가. 아침은 언제나 기다리지 않아도
왔다. 선생님을 사랑했어요. 나는 잠들지 못한 채 어떤 거대한 것이 소리 없는
이 대지 위를 지나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었다. 그것이 밤이 가는
소리였다.
아침마다 커튼 사이로 마치 금이 가듯이 엷은 빛의 기둥들이 만들어졌다. 창
밖이 그렇게 밝아 왔다, 그러나 그 새벽에 우리는 왜 그렇게도 귀가 멀어
있었을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까. 우리의 파멸을 알리는 북소리가 그렇게
가깝게, 우리를 둘러싸고 울려오고 있었는데도, 왜 우리는 그것을 그토록
몰랐을까. 소문과 투서가 시작된 것은 새 학기가 되면서부터였다. 신애가
교장실로 불려갔던 날 나는 그녀의 아파트 앞을 서성거리면서 11시가 넘도록
기다렸다.
돌아가. 오늘은. ....그냥.
그날 집 앞 공터에서 나를 만났을 때 신애가 한 첫말은, 그것이었다. 돌아가.
나는 자동 인형처럼 돌아섰다. 몇 걸음을 걷다가 나는 돌아서며 물었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그러니 그것은 얼마나 힘없는 목소리였던가. 마치 모기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아니, 불멎을 찾아 헤매는 하루살이의 날갯짓
같았다. 소문은 빨랐다. 사람들은 우리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즐겼고,
우리의 이야기를 통해서 스스로 위안받고 있었으니까. 그건 마치 누가
죽었다거나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며 자신은 아직 이렇게 건강하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몰겠 즐기면서 웃음 짓는 것과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었다.
제일 먼저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김 선생이었다. 신애를 따라 다니며
치근거렸던 김 선생. 그는 마치 제 아내를 어느 놈이 능욕하기라도 한 듯이
입에 거품을 물며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했다.
'최근 학교 안팎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퍼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두 쉬쉬하면서 입들을 다물고만 있지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거 아닙니까. 정식으로 이 문제를 교무 회의에서 다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장에게 제일 먼저 이 사실을 알린 것도 그였다고 했다.
어떻게 여교사가 남학생을 자신의 아파트로 끌어들여서 함께 잠을 자는 짓을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이건 우리 교육자 모두를 모욕하는. 있을 수 없는 파렴치한
행위며 우리 사회의 도덕적 기준으로도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학생은 마땅히
처벌받아야 하고 그런 몰지각한 교사는 학교를 떠나야 합니다. 다른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그 학생을 제적해서 신성한 교육의 장에서 내몰아야 함은 물론
여교사는 영원히 교육계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정조 관념이니 사제간의 윤리니
하는 말을 꺼네기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교사들의 반응은 단순했다. 어떻게 하면 이 추악한 소문에서 학교와 교사들이
빨리 빠져나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얼마만큼 그리고 어디까지
나나 신애는 찢고 짓밟아야 할 것인가가 그들의 관심이었다. 다만 교사들의
의견은 둘로 나누어졌다. 그 두 불륜의 연놈을 매도하고 매장하는 길만이
학교가 덜 상처를 입고 떳떳해지는 방법이라고 믿는 쪽이 있었다. 그러니
한편에서는, 일이 커지고 까발려져서 학교에 좋을 것이 없으므로 가능한 한
덮을 것은 덮고 빨리 지나가는 것이 교육적으로도 옳지 않은가 이야기를
조심스레 내놓았다. 교장실에 불려가서도. 그리고 교무실에서도 신애는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학교를 떠나겠으나, 다만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만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파면이 아닌, 사표 제출
쪽으로 구제를 해달라는 호소를 하기 시작한 건 신애의 가족들이었다. 선생이
학생에게 강간을 당했다면 모를까. 그리고 그것을 움켜쥐고 협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나이 든 여교사와 풋내가 나는 학생 아이 사이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가족들이 해결할 수 있게 시간을 달라며 신애 집안에서
나섰던 것이다.
'결혼하겠어요. 그러면 되는 거 아네요? 꿔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경멸이 가득 찬 눈길로 쉭신을 둘러싼 가족들에게 신애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내가 안 건 훗날의 일이었다. 언니는 널 살리기 위해서 결혼하겠다는 말까지
했어, 그걸 알기나 아니? 신애의 동생은 그런 말로 나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나 왜 그랬을까. 신애는 내게 그녀가 겪고 있던 그런 고통을 결코
말하지 않았었다.
이 자식, 뭐 이런 놈이 있어? 이 놈 새끼 형무소에 집어 넣어
버려야 제정신을 차리겠나.'
자취방 문을 걷어차며 안으로 들어선 그녀의 오빠는 내 광대뼈를 으스러뜨릴
듯이 때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내가 얼굴을 싸쥐며 꺼꾸러졌을 때, 코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는 내 허리를 질근 질근 밟아대던 구듯발로 얼굴을 걷어찼다.
입술이 찢어지고 너덜너덜해진 입 안의 살점이 혀를 굴릴 때마다 느껴졌다.
'이 쥐새끼만한 놈이. 이게 미쳐도 보통 미친놈이 아니잖아.'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 건 그가 시키는 대로 무릎 끓고 앉아서였다."
'너 바른대로 말해! 네가 강간했지?"
놀라며 쳐드는 내 얼굴을 그의 구듯발이 걷어찼다.
'이새끼야, 대답만 해, 네가 강간했지!'
멕가 신애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때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 사람에게, 우리는 서로 사랑했습니다 라고
말한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도 싶었다.
'네가 몸 버려 놓고 나서 이 자식아 그 다음에는 그걸 미끼로 협박을 했던 거
아냐! 안 그래?'
그래, 맞다고 생각했다. 신애. 나는 그날 밤 너를 얼마나 안고 싶었던가. 네
향기, 망사 천같이 일렁이던 네 몸. 네 가느다란 숨소리까지 ......그래 나는
안고 싶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손등이 내 뺨을 후려치며
지나갔다.
'나쁜 놈 새끼 "
그가 주머니에서 종이를 커냈다.
'너 임마 여기다가 이름 쓰고 지장 찍어"
다른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녀를 강간했고 그 후에도 소문을 내겠다면서 계속
잠자리를 요구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미 조그만 인주까지 준비해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름을 쓰고 붉은 인주를 엄지손가락에 묻혀다. 내가 물을 것은 단
한마디였다.
'이걸 뭐에 쓰시려고요?'
'몰라서 물어? 너 같은 놈은 형무소로 보내야 돼.
그가 돌아가고 난 그날 밤, 나는 신애의 아파트 요에서 그녀의 방에 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며 서성거렸다. 입술은 마치 벌에 쏘인 듯이 부풀어올라
있었고. 입 안과 턱은 음식을 씹을 수도 없이 부어 있었다. 부어 오른 얼굴과
퍼렇게 멍이 든 눈가를 손바닥으로 감싸면서 나는 추위와 어둠에 떨면서 그녀의
방에 불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자정이 가까워서였다. 그러나 그 쓰는 혼자가
아니었다. 오빠와 또 한 사람의 여자와 함께였다.
내가 어둠 속을 뚫고 달려나가 그녀의 팔을 잡았을 때, 마악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고 있던 그녀의 오빠가 돌아섰다 나와 오빠 사이에 서 있던 그 짧은 순간
신애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신애의 팔을 잡는가 했을 때
신애가 나를 향애 달려나왔다.
달려온 신애는 나를 잡고 뛰기 시작했었다. 우리는 불이 나간 아파트 가로등
밑을 지나 캄캄한 공터를 내달렸고. 문 닫은 상가 뒤편을 돌아 길가로 나서며
벅시를 잡았다.
'상일동으로 가 주세요. 빨리요.'
신애가 숨가쁘게 말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밖을 바라보았었다.
나를 때리려고 찾아들었던 것일까. 이젤 다리를 들고 아파트 단지 입구로
뛰어나오는 그녀 오빠의 모습이 길게 흔들리는 그림자와 함께 차창 뒤편으로
바라보였다. 그날 밤 우리는 돌아갈 집을 잃은 채, 세상에서 쫓겨났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쓰디쓰게 핥으며 여관 방에 누워 있었다.
내 요에서 그녀가 운 건 첫밤이 있고 난 후다. 아무것도 참으려 하지 않고
그녀는 울었다.
나 학교를 그만둬.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예요?
넌 어딘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갈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학교에 부탁했어.
그녀는 가슴을 열고 내 피멍이 들어 부어 오른 얼굴을 자신의 젖가슴 사이에
감싸 안았다.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내 목덜미에 떨어졌다.
'우리 같이 죽어요.'
나는 어깨를 들먹이며 그렇게 말했던가. 그러나 신애의 목소리는 마치 옷을
깨끗이 차려 입고 나들이를 나가듯이 단정했다.
아냐.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그건 지는 거야.'
그때 나는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신애는 지금 싸우고 있다고. 나와는 달리
신애는 이미 우리의 사랑이 싸꺼야 얻을 수 있는 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걸. 그러나 나는 아무 힘이 없었다. 물결에 떠밀려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때 내가 남자였다면 이떻게 말해야 했으리라.
'우리 도망을 가요. 어디든 좋아요. 그래서 함께 살아요."
그러나 그때 내가 무엇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런 땀과 피와 살 냄새를
풍기는 생활의 가죽들을.
새벽이 왔다. 침대를 내려선 신애가 커튼이 쳐진 창가에 가 서 있는 모습을
나는 바라보고 있었다. 문가에 켜 놓은 흐릿한 불빛때문이었을까. 그녀의
벌거벗은 몸이 적갈색으로 바라보였다. 풍만한 넓적다리 옆으로 떨어뜨린 듯이
내려와 있는 그녀의 손은 살아 있는 사람의 그것처럼 느켜지지가 않았다.
그녀의 작은 젖가슴까지도 그렇게 정물처럼 바라보였다. 얼마를 그렇게 서 있던
신애가 돌아섰다.
그녀의 아랫배를 덮듯이 드넓게 퍼져서 언제나 팬티 밖으로 넘쳐 나오게 무성한
역삼각형 꼴의 체모가, 마치 검은 속옷을 입은 것처럼 바라보였다. 수없이 많은
비밀의 속삭임처럼 뒤덮여 있는 그녀의 검은 숲을 향해 내가 말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잠시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이제 뭘 하겠어요. 공부를 해서 대학엘 가나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학교를
졸업하고, 그리고 세상에 나가 취직이라는 걸 하나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난 그렇게 살아 낼 자신이 없어요. 선생님과 헤어질 수가 없어요. 선생님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신애가 다가왔다. 그녀는 내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울기는 .......'
신애가 중얼거렸다.
'그래. 울 수 있으면 울어. 그러면 좀 나아질 테니까.'
나는 침대를 내려서서 무릎을 끓으면서 두 팔로 신애를 안았다. 그녀의 벗은
몸. 그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고 나는 울었다. 그녀의 체모가 내 볼에 닿아
부드러웠다. 눈물이, 슬픔도 그 무엇도 아닌, 그렇게라도 이름붙일 수 있다면
허무를 쥐어짠 즙 같은 눈물이 그녀의 체모를 적시며 내 볼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고갱씨
그때는 나뭇잎이 지고 있었지. 그리고 절이 있었다. 안개 속에서 우리는 그
늦가을의 산을 올랐었다. 가을 비 내리던 날, 나뭇잎들이 떨어지던 날, 모든
것들이 이제 어떤 하나의 끝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던 그날, 우리는
하나의 사랑을 시작했었다.
모든 것들이 마지막을 준비하는 계절에 시작했던 사랑이었다.
물감 통과 이젤이며 캔버스를 들고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가던날, 침대에
그녀를 눕히고 소파에 나와 쉬고 있던 그 밤의 적막. 마치 닭털 베갯속이
흩어져 날아 내리는 것같이 시간이 내리고 있었지. 밖에서는 어둠에 젖으며
비가 뿌리고. 그리고 나는 그 밤과 아침 사이에 놓여 있는 신애를 떠올린다.
돌에 새겨진 비명을 읽듯이. 나의 시간에 각인된 그녀의 몸과 영혼을
......어떤 비바람에도 깎이거나 닳지 않을 것으로 믿었던 그 시간들을.
그랬었다. 나는 그날의 그 아침을 떠올릴 때마다 몸을 휩싸는 무엇을 느낀다.
영흔과는 반대편에 서 있기도 하고 때로는 공유되어 있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가
되기도 하는 그 육체라는 이름의 사랑을 말이다.
그것은 향기였다. 냄새였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냄새.
내가 그때까지 어디에서도 맡아 본 적이 없던 냄새 .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그녀의 냄새. 그것이 나에게 있어 여자였고 신애였다.
그 밤에서부터 아침까지를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가만히 내가 누워 있는
소파로 다가와 내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그녀는 몸을 숙였었다. 그리고 가만히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주었던 여자. 그때 나는 눈을 뜨지 않고 누워서
그것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것은 그 무엇도 아닌 냄새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녀의 옆에서 떠돌던, 그녀의 냄새.
처음으로, 맞아 이 냄새였어 하고 내가 생각한 것은 언제였던가. 그날 그녀의
아파트에 비상 벨이 고장이 나서 놀란 우리가 밖으로 뛰어나가다가 몸을
부딪쳤을 때 맡을 수 있었던 그 냄새였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미술실 한
쪽에서 마치 혼자인 듯이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이제 나가도
될까요? 하고 묻기 위해 섰을 때 풍겨 오곤 하던 그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그녀만의 것. 바로 그 냄새였다.
어딘가 서글프고, 기약 없고, 그리고 저녁 무렵처럼 아니 어슴푸레 오는
새벽처럼 분간하기 어렵게 그 무엇을 감싸듯 다가오던 그 냄새, 그것이
그녀였다. 신애였다.
벌판 사이로 길이 있다. 벌판 옆으로도 있다. 그러나 길은 시작도 끝도 없다.
벌판은 시작되고 끝나는 곳이 있지만 길에는 그것이 없다.
이따금 속삭이듯이 묻는 소리를 듣는다.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누군가가.
여기는 벌판이야. 사람은 벌판에서 잠들면 안 돼. 길을 찾아서 떠나지 않으면
안 돼. 벌판은 사람이 잠자는 곳이 아냐. 사냥을 하는 곳이지. 그리고 말한다.
길은 사람들이 잠들 곳을 찾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거야. 사람들은 집에서
잠들어야 하지. 사랑을 나누고, 밥을 먹고. 어둠이 오면 불을 밝히고. ...그
곳이 집이야. 벌판에서 사람은 잠자서도 안 되고 사랑을 나누어서도 안 되고
불을 피워서도 안 돼.
그러나 때때로 또 다른 목소리가 울린다. 벌판을 두려워해서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집은 벌판으로 나가기 위해서 있는 거야. 길을 떠나기 위해서 집이
필요하듯이 벌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길이 있어야만 하는 거야. 그리고 또
다른 손짓이 있다. 둘 다 아니라고 부르는 손짓이. 무엇이 안쪽이고
바깥쪽인지를, 어느쪽이 먼저고 나중인가를 말하려고 하지 마. 그건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니까. 모든 것은 다 하나야. 영혼과 육체처럼.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마치 내 영혼의 목걸이가 된 듯이 이끌어가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화가 고갱의 그림들이었다. 화집이라는, 인쇄된 복제의 그림으로
받는 감동이라는 것이 그렇게 강할 수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갱의 그림들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듯이 나에게 이 세상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속삭인다. 내 어깨를 어루만져 주는 어떤 힘이
되어. 말하자면 그것은 현실보다 아름다운 현실이었으며 그러나 현실보다 더
추악한 현실이었다. 나는 신애와 누워서 그의 그림을 보면서 했던 말들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녀는 말했었다.
'이 여자는, 나보다도 여자 같애.'
여자가 자신보다도 더 여자 같다고 말하게 하는 그 그림 속의 여자를 나는 그때
어떤 여자로 이해해야 했을까.
'난 고갱의 풍경화를 볼 때마다 거길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단다, 여행이
아냐. 거기 가서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우리가 무슨 중국의 풍경화나 동양화의 어떤 비현실적인 절경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녀가 가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그 풍경 속에는 정말로 숲과
꽃과 넝쿨과 그리고 밀밭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계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고갱의 그림 속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풍경도 정물도 그
황금및으로 감싸인 흙 색깔의 여인들도 아니었다. 고갱 그 자신이었다. 집 요에
선 고갱의 모습, 그 푸른색으로 휩싸인 그림을 나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1889년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그 그림은 '봉주르 무슈 고갱'이라고
이름붙여진 그림이었다. 내가 신애의 집에서 본 화집 속에서 그 그림을 만났을
때 나는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랬다. 나는 그 그림을 본 것이
아니라 만났다. 베레모를 쓰고 수염이 성성한 고갱이 망토를 입고 서 있다.
어느 집 요이다. 그의 앞에는 나무로 얽은 목책 모양의 문이 있다. 그리고 그를
맞으며 인사를 건네는 한 척인이 등을 보인 채 서 있다. 문 앞에는 작은 강아지
하나가 있다. 그림은 여러 가지의 푸른색으로 넘치듯 출렁거린다. 다만 그림의
3분의 2쯤 되는 높이에 마을과 집이 조그맣게 바라보이고 들판인 듯싶은 평면이
노란색으로 강렬하게 화폭을 가로지른다.
인사를 나누고 있는 여인과 고갱은 어떤 사이일까, 얼굴 부분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마치 나는 어딘가에서 고갱을 만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그림 속에서 문앞에 서서 고갱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는
여인처럼. 그처럼 고갱의 삶과 고뇌와 우울과 기쁨들이 우러나 있는 그림을
나는 그 두꺼운 화집 속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 그림을 보면서 ......어쩐지 그가 오래 비워 두었던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저 그림 속에 등을 보이고 있는 여인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그림 속의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인지, 어딘가를 지나다가 누구의 집 앞에서 이름 모를 억인을 만난 것인지
......
누가 알랴. 안녕하세요, 고갱 씨. 그 그검의 제목을 생각할 때, 어딘가
산책길에서 만난 여인의 인사를 받고 있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 그림을 보면서
왜 푸른빛에 둘러싸인 그 사내가 그토록 외롭고 지쳐 보였을까, 그때 나에게는.
그 무렵 나는 화집에서 네가 만날 수 있었던 서양 미술사의 모든 화가 가운데
고갱만큼 여자의 진실을 그려 낸 작가가 있을까 생각했었다. 그 나이의 내가
여자에 대하척 무엇을 알았을 것이며, 더군다나 여자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말을 바꾸자면, 고갱이 그려 낸 여자야말로 내가 꿈꾸어 왔고 믿을 수
있는. 여자는 이런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해 온 바로 그 모습은 아니었을까.
진흙 색깔의 벌거벗은 여자들.
학생들이 다 집으로 돌아가고 난 빈 교실에서 내가 담임과 마주앉았던 날,
비로소 나는 내가 서 있던 그렇게 견고하다고 믿었던 바닥이 무너져 내리고
나는 밧줄 같은 것 하나를 잡고 매달려 있다는 걸 알았다. 담임이 왜 나를
상담실로 부르지 않았는지를 그때까지도 나는 알지 못했다.
운동장에서는 연습을 끝낸 축구 부원들이 트레이닝복으로 갈아 입고 커다란
가방을 들고 체육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느릿느릿 걸었다. 히말라야를
오르는 등산가들의 짐을 나르는 현지인들처럼, 연습 기구들을 모아 든 후배
학생들이 앞서가는 선배들을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내 옆으로 아무 말도 없이 담임이 다가섰다. 그는
축구반 아이들의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에서 눈을 떼는 나를 향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마주섰다. 그가 제일 먼저 한것은, 내가 책상 위로 나자빠질 정도로 나의
얼굴을 후려친 것이었다. 입가의 피를 닦으며 겨우 몸을 일으킨 나에게 그가
내뱉었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그것이 우리의 시작이었다. 또 다른 시작, 사랑의 대각선 저쪽에 서서 웅크리고
있는 증오의 시작이었다.
'너 그 여선생이랑 잤다면서? 도대체 뭐 이런 개 같은 것들이 다 있어."
그의 앞에서 나는 개였다. 그 무엇도 아닌.
'이거 사실대로 다 맞는 건지 확인해 임마.'
그가 복사된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누군가가 학교에 투서를 한 것이었다.
내가 신애의 아파트에서 자고 나온다는 이야기가 거기 적혀 있었다. 내용
가운데 사실과 다른 게 있으면 이야기 하라고 던지듯 말해 놓고 나서 한숨을
내쉬듯 그가 중얼거렸다. 학생놈을 제 아파트로 끌어들이는 여선생이 다
있으니, 이거 내가 창피해서 어디 선생 해먹겠나.'
담임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말했다.
'아직 학교 방침이 정해진 건 아닌데 ......보호자 모시고 와서,
전학이 어려우면 일단 자퇴서를 내도록 해."
진상 조사. 아마 그런 이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투서가 잇따르면서 장학사가
학교로 찾아오고, 신애가 교육청으로 불려가는 일이 이어졌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3학년 학생들에게 끌려갔다. 도서관 뒤편에 성냥갑처럼
지어진, 여섯 개의 대변을 볼 수 있는 칸이 있는 화장실 뒤편의 후미진
공터였다. 땅거미가 지고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거기서 ......엎드려뻗쳐를 한
채 그들이 소리치는 것을 들으며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벚을 때마다 슷자를 세! 쌍놈 새끼야.'
그들은 나를 둘러싸고 들고 있던 몽둥이로 내 엉덩이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나는 스물세 대까지 세었다. 그리고 그 다음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리를 절며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제 내가 해야 할 것은, 신애를 위해서라도
고모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교를 그만두는 일, 신애 오빠의
말처럼 모든 것을 내 잘못으로 이야기 하는 일......그것으로라도 나는 신애가
겪고 있는 어려고이 조금이라도 엷어지기를 바랐다. 사랑의 이름으로.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왜 그다지도 초라했던가.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내 또래의 학생들에게 끌려가
시궁창에 처박히도록 매를 맞은 건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서였다.
그러나 세상의 화살은 멈추지 않고 신애 쪽으로 날아갔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쓰러뜨린 건 지방 신문 사회면의 기사였다. 최근 모 고교에서는 여교사와
재학생 간의 확인할 수 없는 불륜이 화제가 되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고
있는데 ....... 그렇게 시작되는 기사는, 그 여교사는 미술 담당 교사라고까지
얽히고 있었다. 문제의 여교사와 학생은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며 어떻게 우리의 학교 교육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다는 시민들의
반응을 전하면서 그 기사는. 사실은 확인되고 규명되어야 마땅하지만.
소문만으로도 학부형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학교 안에서 학생들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가에 대해 분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학교에 학생들을 보낼 수
없다는 항의의 소리까지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쓰고 있었다. 이 기사는 며칠 후
조금 더 강도가 높아져서 학부형들이 학교를 방문, 항의 했다는 속보를 전했다.
학교는 기자들을 불러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면서, 다만 문제의 여교사는
도의적인 책임과 교육자의 품위를 손상한 과오에 대해 깊이 반성하면서 사표를
내도록 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신애는 사표를 낸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파면되었다. 그 이후 끊임없이 이어진 견딜 수 없는 일들을 나는 정신 병동
뒤편의 숲길을 거닐면서 이따금 떠올리곤 했다. 아무런 분노도 느끼지
못하면서.
다른 학교로 전학 가는 것을 전제로 하고 내 휴학이 결정된 것은 고모의 생각과
학교의 뜻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학교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이 끔찍한
추문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사자 두 사람이 학교를 떠나는 게 그 첫
번째 일입니다. 교장은 고모에게 그렇게 말하며,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서
퇴학만은 시키지 말아달라는 고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다. 그리고
고모는 신애를 만났다. 그럴 수도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리라. 아니, 너라면 안
그랬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끝내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둘 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었다. 묻고 싶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내가
사랑한 다른 사람을 짓밟는 일을 어떻게 내가 이겨낼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믿고 싶다. 고모에게만은 신애도 진정이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고.
그 누구의 앞에서도 할 수 없었던 말을 신애는 고모에게만은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것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다시는 나를
만나 주지 않겠다는 약속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모는 그녀의 말을 듣는 대신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다른 곳도 아니었다. 손님들로 붐비는 관광 호텔
커피 솝에서였다.
'너도 인간이냐."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신애의 머리채를 잡아챈건 고모였다.
'어떻게 ! 어떻게 어린애를 데리고......그럴 수가 있니. 애 앞길을 막아도
이렇게 막을 수가 있니I 너 한번 죽어 봐라.'
고모와 신애가 만나기로 했다는 것을 알고 내가 그 커피 솝으로 달려갔을 때는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로비로 나와 공중 전화로 다가간 나는 신애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스무 번쯤은 울랐을까. 귓가에 남아 있는 전화 벨 소러를 마치
그녀의 소식처럼 느끼며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고모의 입으로 두
사람이 만나서 있었던 일을 들었다.
두 사람을 다 잃어 버렸구나. 신음처럼 그런 말이 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신애도 고모도 나는 어느쪽도 지키지 못한 채 다 잃고 말았다는 걸 알았다.
'나가겠어요.
"어딜?'
'신애를 만나야 해요. 만나겠어요. 난 그런 고모를 용서 못해요
'그 여잘 또 만나기만 했다 하면, 난 다시는 널 안 본다."
'난 이미 고모를 안 보기로 마음 먹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
여자는 내가 사랑한 여자예요.'
'나쁜 놈, 나쁜 놈."
그날 밤. 아파트로 찾아갔을 때 신애는 침대에 누워서 아무 말이 없었다.
무엇으로도 나는 그녀에게 용서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거실로 나왔고.
소파에 몸을 꾸부린 채 누워 있었다. 밤이 깊어서 밖으로 나온 그녀가 말했다.
'편하게 누워 있어.
나는 그녀를 차마 바로 쳐다블 수가 없었다.
'그러고 있으면 내가 아프니까. 내 마음이 아프니까.'
아세요? 그냥 선생님을 멀리서 바라보고만 살 수는 없었을까.
그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내내 그런 생각 들어요.'
그녀가 내 곁에 와 앉으며 말했다.
'아까 그랬지? 산다는 건 뭐냐고. 사는 건 무엇이 다르냐고.'
'그래요. 난 그게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어요.'
'산다는 건 말이야 쓰는 거야. 사용하는 거. 목숨도 쓰고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도 쓰고, 사랑도 쓰고, 힘도 쓰고...,..그런게 사는 거야. 그런데 우리는
말이야 가지고 있는 거밖에는 쓸수가 없어, 알겠지?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것 안에서 살아가게 마련이야."
'그렇군.
'사랑할 사람이 없이는 무엇으로 어떻게 사랑하겠어? 희생하고 바치고 때로는
체념하고 때로는 박차고 일어나기도 하는 그 모든 것도 다 그래서 사는 게 되는
거야.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주기도 하고, 누군가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쓰러졌다가 일어서기도 하는 그것들도 다 사는 거란다.'
'하는 건? 사랑하고 용서하고 기다리고... .그런 건 다 하는거였잖아.'`
'아니야. 난 그렇게 믿지 않았어. 뭘 한다는 건 그건 만드는 일이야. 새롭게
만들어 가는 일.'
나는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부끄러운 말을 했다. 결코 나는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약속해요 우리. 헤어졌다가 나중에 만나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약속해요. 몇 년만 기다려요. 그럼 되잖아요. 안 만나 줘도 돼요. 그냥
기다리면 되잖아요.'
'누굴 속이겠다고 생각하지 마. 형민아."
내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오래오래 나는 그렇게 안겨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그으의 가슴이 따듯하게 느껴졌을 때였다. 내가 말했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잠옷 속으로 집어 넣었다. 그녀의 가슴이
조그맣게 손 안에 잡혀졌다.
'왜? 죽고 싶어?"
'더 살아 내기가 힘들어요.'
'기다리자면서? 바로 그 기다린다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아니.'
나는 천천히 그녀의 잠옷 단추를 풀었다. 횐 가슴이 드러났다.
그 희디횐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내게 그녀가 또 말했다.
'너는 뭘 기다리자는 거니?
'제가 크는 걸 기다려 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
'그래서가 아니에요. 그렇게 살면 되죠.'
'사는 게 뭔데?'
'함께 있는 거요.'`
그녀의 손이 천천히 내 볼을 지나 어깨를 쓸며 내려갔다.
'좋은 말이구나. 함께 있는 거.'
천천히 올라온 그녀의 손이 내 귓불에 와 멎었다. 어떤 부피를 알 수 없는
절망에 몸을 맡기듯이 나는 그녀의 젖가슴을 할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이기라도 한 것처럼, 무엇에 쫓기면서 나는 몸을 떨며
그녀의 젖가슴을 빨았다. 내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어디론가 사라져
가는 발소리처럼 들려왔다.
'함께 있으면서, 너랑 살면서 ..... 집도 사고 애도 낳고 파 썰어 넣으며
찌개도 끓이고, 마른걸레 들고 장롱도 닦고, 내가 그러는 걸 보고 싶어? 그래서
무엇이 온다는 거니? 거기에 무엇이 있다는 거니?'
고모가 신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짓밟았던 일을......떠올리면서 나는 전날
저녁 흩뿌려진 빗발로 해서 나뭇잎이 켜를 이루며 쌓여 있는 늦가을 숲을
거닐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엄마를, 기억에도 희미한 어머니를 떠올렸다.
고모와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 나는 한 번도 어떠니를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이며 무서움이었다. 절대의 공포, 마치
죽음과 같은. 끝도 시작도 없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지도 않고, 아무도 그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죽음이라는 것, 그런 공포가 내게 있어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에 대한 내 유일한 기억이란 동네 사람들에게 둘러싸씬 채 머리채를 잡혀
끌려 다니던 일이었다.
아니 .. ..,희미한 그런 그림, 사람들이 출렁거리듯 움직이고, 안개처럼 희뿌연
속으로 어머니가 물에 젖은 빨랫감처럼 너울거리는 그런 빛바랜 한 순간, 순간.
그것이 나에게는 어머니였다. 마치 오랜 세월 저 땅속에 메말라 있던 미이라가
묻혀 있던 무덤이 파헤쳐지듯이 나는 그 숲 속에서 희미하게 너울거러는
어머니와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은 어머니가 아닌
신애였다. 신애. 내가 사랑했고. 내 목숨이었고 . 그리고 나로 하썩 부서져 간.
아니 너울거리며 이 삶의 땅에서 끝내 만날 수 없이 사라져 간. 그날 숲에는
까치가 날곤 했다. 시내야. 나에게는 이제 찾아올 소식이 없는걸. 나는 아무
느낌도 없이 신애를 떠올렸고 아무 느낌도 없이 그 까치를 바라보았다. 왜
사람들은 저 까치를 길조라고 좋은 새라고 말하는 것일까. 까치의 무엇이 좋은
일을 사람에게 가져다 준다는 걸까.
어머니와 신애가 하나가 되어 너울거리던 그때 나는 분노 속에 산산이 부서져
가야 하지 않았을까. 나는 숲 속에 서서 고개를 젓고 있었다. 분노. 그건
까치와 같았다. 까치를 가지고 기쁜 일을 떠올러는 것과 다를 젓이 없었다.
아니. 그때 나는 분노가 무엇인지를 이미 잊고 있었다. 사랑, 분노, 증오,
배신, 우롱, 기만...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는 모든 명사를 나는 그때 이미
잃고 있었다.
학교를 그만둔 신애는 아파트를 정리하고 서울 집으로 떠났다. 나는 그녀의
아무 소식도 알 수가 었었다.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신애의
집에 전화를 했지만 대답은 하나였다. 그녀는 집에 없다는 것이었다. 어디
있는지도 알려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계속 이러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내가 칼을 들고 신애의 서울 집으로 찾아갔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녀를
만나게 해달라면서 나는 신애네 집 아파트 거실에서 칼을 들고 울부짖었고,
집에는 신애가 없었다. 그녀의 여동생이 끝내 내가 들고 있던 칼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채 실펴 나갔고, 경찰이 들이닥쳤다.
'한번만, 한번만 만나게 해주십시오.'
나는 그렇게 애원했었다. 어머니를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그녀의 여동생이 나를
맞았다.
'너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 있니. 너 있지. 우리도 창피하고 지겨우니까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언니는 집에 없어.'
'한 번만이면 됩니다. 이렇게 빌게요. 한 번만 선생님을 만나게만 해주세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언니가 널 안 만나겠다는 거 아니니, 돌아가. 말 안 들으면 오빠한테
전화하겠어.
'선생님을 만날 때까지 이 집에서 나가지 않을 겁니다.'
'경찰을 불러야 알겠니. 뭐 정말 이떻게 나쁜 놈이 있어. 어디까지 우리 식구를
괴롭히겠다는 거야. 이 자식아.'
밖으로 내보냈던 신애의 어머니가 문을 열고 들이닥친 건 그때였다. 그녀는 내
멱살을 잡으면서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네 놈을 내 손에 죽이고 말거여. 네 이노옴'
그렇다면 내가 죽어 주지요. 그렇게 소리치며 나는 싱크대가 있는 주방으로
달려갔고. 손에 든 식칼로 내 왼쪽 손등을 찌르면서 소리쳤다.
'신애 데리고 와. 그렇지 않으면 다 죽인다아.'
벽에 세워 놓은 스텐드를 들어 그녀의 동생이 쳤고, 나는 울부짖으며 칼을
휘둘렀다.
경찰서로 넙겨져서 첫 밤을 보내던 보호실에서였다. 내 몸보다 세 배는 되는
덩치를 한 형사 하나가. 구듯발로 저벅거리며 보호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담당 형사도 아니었다. 그는 나를 무릎 끓게 하더니 내 무릎을 발로 짓이겼다.
모로 자빠진 나를 다시 걷어찬 후 무릎 끓게 하고 나서 그가 물었다.
'뭐 이런 게 있어! 야, 이 새끼야. 너도 사람이냐? 이 새끼 이거 정신없는 놈
아냐 '
보호실 구석에 처박힌 채 나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리없이 웃었다.그가 말했다.
웃어? 이 새끼 봐라."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그때 내가 대답했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향해서 부른
처음이자 마지막 그녁의 이름이었다.
'나는 신애를 사랑했어."
나는 튀어 일어나며 형사의 배를 머리로 들이받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난
너한테 맞을 아무 이유가 없어! 나가! 난 너를 죽일지도 몰라,
병원에서 숲을 산책하며 보내던 그때 나는 나뭇잎에게 많은 말을 했었다. 그
나뭇잎들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떨어지면서 남는구나 하던 생각, 이들은 다 이루고 나서 지는구나 하던 그 생각
....... 나무들은 그랬다. 잎을 떨어뜨리면서 무엇을 잃는 것도. 버리는 것도
아니었다. 나무들은 그렇게 하여 마침내 한 해의 삶을 다 이루고 있었다.
쓰러진 건 나와 신애뿐일까. 나는 그 숲에서 몇 번인가 똑같이 물었었다. 나
자신에게. 아니 잎을 떨어뜨리며 서 있는 나무들에게. 섹스란 왜 그렇게 많은
것들로 우리를 얽어 매고, 힘겹게 하교 사지선다형 문제처럼 그 안에서만 모든
해답을 구하라고 했던 것일까.
남자의 성에 대한 성장은, 그렇다, 그것은 어머니에게서 시작된다. 그것이
사춘기를 거쳐 어머니를 떠나고, 친구나 동료라는 사회적인 관계로 이전되다가
여자 친구에게로 대상을 찾아간다. 구불거리는 긴 여행이다. 어머니에게서
시작된 성이라는 대상이 부드럽게 여자로 되돌아오는 과정, 그렇게 정상적인
의미에서의 섹스를 성장시켜갈 때 정신이 입는 상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많은 남자나 여자들은 그러한 자연스런 과정을 겪지 뭇한다.
사회적인 많은 환경들이 그러한 자연스런 섹스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대개는
충격적으로 혹은 파괴나 폭력과 함께 그것을 치러내게 된다. 이런 사회적인
여건이 많은 사람들에게 섹스를 자연스러운 인간 관계의 하나가 아닌 특수한,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고등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철저하게 울타리가 쳐져 있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성의 만남부터가 그렇다. 그리고 많은 남자들이 겪게 되는 군대 생활, 거기에서
그들은 더할 수 없이 불결한 최악의 상태에서 첫 경험을 한다. 그렇게 일그러진
성은 그의 의식 안에서 더 이상 아름답다거나 황흘한 사랑의 행위로서 서 있을
자리가 없다.
폭력도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욕망이란 건 동물적이다. 성욕과 식욕은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는 욕망일 뿐이다, 지극히 동물적인.
그리고 이 욕망은 그 안에 폭력이라는 원형질을 감싸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욕망의 껍질에 싸여 있는 것은 동물적인 폭력일 뿐이다.
동물들이 먹는 걸 빼앗겼을 때 격렬하게 화를 내며 반응하는 것과 같다. 집에서
키우는 개도 먹는 걸 뺏으면 으르렁거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성욕이라는
욕망이 좌절될 때 그 껍질 속에서 폭력적인 행위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강간이란 아주 단순한 거야. 섹스에 대한 성장이 굴절되고, 욕망에 굶주리면,
나오는 당연한 결과일 수 있거든. 의사는 저녁 햇및마저 사라진 창의
블라인드를 올리면서 말했었지.
'너무 힘들어 하지 말아. 인간은 누구나......성에 대해서 조금씩은 굴절된.
상처를 가지고 있어. 그렇게 살아. 폭력도 마찬가지야. 다만 이성의 힘으로
그걸 누르고 있을 뿐이니까.'
그는 마치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 같았어. 나도 거리를 지나가는 어떤 여자를
보면서 그 여자식 옷을 찢어발기고 싶을 때가 있어. 그러면서 성기도
부풀어올라.
겨울이 갔어
바다는 납빛이었다. 은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것 같은 모습을 하고 미동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다만 절벽 저 멀리 휘돌아 간 섬 기슭에 와 부딪치는
파도만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섬에 무슨 띠를 감아 놓은 듯이
바라보였다. 물결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려는
것처럼. 헐벗은 무덤을 내려다보면서 형민의 등뒤에 서 있던 유회가 물었다.
'이 여자를 누가 여기까지 옮겨 온 거니?"
'동생. 여자의 ......."
'왜?'`
'모르겠어. 태어난 곳이 이 섬이라는 것밖에.'
마른 잔디를 깔고 앉아 있는 형민을 내려다보다가 유희가 중얼 거렸다.
'난 술이나 마셔t짼다.'
바다를 등지고 앉으면서 유회가 무덤 앞에 있는 술병을 집어 들었다.
저만큼이었을 거야. 내가 눈 덮인 여기 와서 울며 쓰러져 있던 자리가. 형민은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그날을 떠올렸다. 유희가 물었다.
'안 할래?'
줘."
유희가 병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나서 형민에게 건냈다.
'너랑 나랑 둘이는 술이나 마시는 것밖에 같이 할 일이 없으니까.'
그런가. 우리는 공통 분모가 그것밖에 없나. 씁쓸하게 웃으면서 형민은 술병을
들어 쓰디쓴 소주를 마셨다. 아냐 많아. 너랑 나는 닮은 게 참 많아.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곳. 이 먼 섬까지 와 있다는 거. 누군가 한 사람씩의
죽은 이를 가지고 있다는 거. 그떻잖아. 너는 저 자신을 누더기가 누더기를
깁는다고 말했다는 누더기같은 남자를 가지고 있고 나는 이 여자를 가지고
있지. 다르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사랑에는 영혼과 육체가 벌인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있어, 왜 우리가 그렇게 싸우고 피 흘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를
너는 몰라. 우리는 왜 우리가 산 칩 열정 속에 세상에서 말하는 그토록 많은
죄악이 담겨 있었는지를, 나는 끝내 알 수 없었어.
술병을 건네 받은 유희가 마치 화를 내듯이 말했다. 간단히 정리를 하면 이런
거 아니니.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때 한 쪽은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쪽은 아직 어린 고등 학생이었다. 그거 아냐? 넌
그때 아마 주민등록증도 있는 성인이었을걸.'`
느닷없이 유희가 주민등록증이라는 말을 했을 때 형민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주민등록증. 그 무렵의 자신을 생각할 때 그것처럼 확실하게 현실의
냄새를 풍기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 싶었다. 주민등록증이라니.
'겨우 일이 년의 차이가 있을 뿐이야. 1년 후 아니면 2년 후, 대학생과 고등
학교 여교사가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봐. 그게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유희가 화난 사람처럼 세차게 고개를 흔들면서 바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하오의 겨울 햇살이 바다 위에 퍼부어지면서 바다는 마치 얼음이 깔린 것처럼
번들거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두 사람.'
'졌지. 우린 철저하게 졌어.'
'지다니?누구랑 싸움을 했는데 졌다는 거야?"
'세상 부모니 형제니 선생이니 ......나이라든가 그런 거. 이 세상. 어떤 글로
된 법칙보다도 더 무섭고 견고한, 세상살이에 대한 사람들의 약속. 우린 너무
약했어. 그런 것들이랑 맞서 싸워 나가기에.'
형민이 마치 돈을 세다가 아무래도 필요한 만큼의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산을 포기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가 그떻게 힘들었다는 거니. 아니, 한두 헤만 속이면 됐을거 아냐. 소문 안
나게.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하는 사람들도 그 정도는 다 어렵게 견딘댄다.
아버지 엄마 속이면서, 안 만난다고 하면서, 헤어졌다고 하면서.'
'이건 달라."
'뭐가 다르니. 고등 학교 때 선생님하고 연애해서 결혼하는 여자들이 어디 한두
명이니. 그거하고 너희들 두 사람하고 다른 게 뭐야. 남자 여자가 바뀌었을
뿐이지. 고등 학교 때 선생님하고 결혼했다고 자랑삼아서 얘기하는 여자들도
있드라.
세상 사람들이 전부 악마 같았다면 넌 그걸 이해하겠니. 아무도 이해 못해.
세상이 전부 우리를 죽이기 위해 골목골목에서 기다리는 거 같았으니까.'
모르겠다. 이제 와서 그것을 생각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형민이 고개를
숙였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몇 년만 기다리면 되었을지도. 그러나 그때
우리에게 있어 몇 년을 기다린다는 건 그게 바로 죽음이었으니까.
형민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겨우 알았지. 우리 둘뿐이라는 걸.'
'무슨 소리야?'
'아무도 우리가 누구며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녀와 나 사이에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몰랐어. 알려고도 하지 않았어. 우리는, 둘 다......그냥 나쁜
것들이었어. 그러면 그들은 되었어. 마치 우리에게 가흑하면 가혹할수록 그들
자신은 점점 더 해맑아지기라도 하는 듯이 마치 우리를 질타하는 것으로 그만큼
자신들이 속죄하기라도 하듯이.'
형민이 고개를 돌려 신애의 이름이 쓰여진 비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왜 아무 힘도 었어야 하지.
바람에 실려 유희가 내뱉듯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왜 죽었어, 이 여자는? 죽는다는 게 뭔데?
무엇을 네가 이해할 수 있겠니. 형민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어금니를 힘주어
물었다. 목숨이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에게
무엇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그 자신이 아닌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해서라도 뭔가를 지키고 싶어했을 거야. 결백 같은 것. 우리에게
잘못이 언다는 거.'
'그건 살아서야 가능한 거야."
'그렇게 말하지 마.'
'결국 바보들이었지 뭐니. 너희들은 둘 다. 하나는 죽고 하나는 정신 병원
신세나 지고. 그까짓 게 뭔데. 남자랑 여자랑 자는 게 뭔데, 둘이 만나 밥 먹는
거, 둘이 만나 춤추는 거, 둘이 만나 얘기하는 거 그런 거랑 뭐가 그렇게
다르다는 거야. 자는게, 그 잔다는 짓이.'
유희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술과 바닷바람에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 나랑 여기서 살지 않을래?아주 정식으로 말야 "
바다를 내다본 채 형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보고 다들 이제 사장이라고 부를 텐데 꿔. 내 가게 같이 하면서
......그럴래? 난 괜찮아. 합천의 해인사가 있는 그 산에 가면 자살을 하러
왔다가 그냥 거기 머물면서 묻혀 사는 사람들이 몇 있단다. 너도 나도......다
죽자고 그 터를 찾아서 여기까지 온 사람들 아니니?"
형민이 소리없이 웃었다. 신애, 당신 이 말 지금 듣고 있어?
용서해. 죽지 않고 산다는 건 그런 거란다 하면서 용서하길 바래.
'결혼도 하고 물론 식도 올리고 혼인 신고도 하고 말야. 몰라, 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어떨지. 그것도 노력해 볼게.'
아무것도 실감하지 못하면서 형민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유희가
바닥이 드러난 술병을 발 밑으로 떨어뜨렸다.
'내 얘기 좀 할까. 그 남자는 혼자 사는 거에 너무 잘 길들여져 있었어. 이
여자 저 여자랑 잠깐씩 살아 보기는 했다지만, 평생 혼자 산 남자의 어떤 버룻
같은 게 그 사람에게는 아주 딱딱하게 굳어 있었어. 내가 들어갈 틈이 없는
거야. 김치까지도 혼자 잘 담가 먹는 남자랑 어떻게 살 수가 있다는 거니,
남자랑 여자랑 만나 산다는 건 살림을 하는 건데.'
유회의 말에서 형민은 생활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생활이라고 현실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의그 무엇. 사랑과는 또 다른 성벽
하나. 사랑, 섹스, 생활. 그 세개의 성벽에 둘러쌓여서 사랑이란 세월의
비바람을 맞으며 이어져 가는 건가. 신애
형민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떠 잠이 덜 깬 채 눈요을 가로막고 있는 어두운
물체를 보았다. 그 한 덩어리의 어둠이 움직이며 말했다.
'왜 그래?'
유희였다. 그녀는 형민의 침대 앞에 선 채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희미하게
창으로 스며들어오는 및이 그녀의 몸을 검게 드러나게 했다.
'무슨, 꿈을 꾸었어?'
유희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무슨 소리를 마구 지르는 거 같았어.'
'저 방에서 듣고 달려온 거야?"
유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었다. 이마에 놓이는 유희의 손이 차가웠다.
마악 밖에서 들어온 사람의 그것처럼 차가운 그녀의 손을 이마에 느끼면서
형민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 여자는 지금 내가 꿈을 꾸며 무어라고 소리를 쳤기
때문에 이 방에 들어 온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오히려 악몽에 시달린 건 이
여자일지도 모른다고.
형민이 그녀가 앉은 자리를 넓혀 주면서 몸을 일드키려고 했다. 유희가 이마의
손을 떼면서 말했다.
'자도록 해. 내가 옆에 있어 줄게.
유희가 형민의 손을 잡았다. 움켜쥔 형민의 손을 끌어 유희가 자신의 몸에
가져다 댔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날리고 있었다. 소리내어 그
나뭇잎이 날려 가고 있었다. 우수수, 쏟아지는 빗소리 같기도 했다. 유희가
그의 손을 자신의 잠옷 속으로 밀어 넣었다. 형민의 손이 그녀의 젖가슴 사이에
놓여졌다. 따듯하고 부드럽게, 그의 손이 살 속에 묻혔다. 형민이 놀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밖에 눈이 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유희가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놓았다. 여전히 그의 손은
그녀의 젖가슴 사이에 있었다
바람소리처럼 그녀가 말했다.
'눈이 아주 많이 내려.'
유희의 손이 잠옷 앞자락의 단추를 풀어 나갔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네가 무서워하는 거 같아서.'
'난 무섭지 않아."
유희가 형민의 나머지 손을 당겨 작은 공처럼 그녀의 가슴은 그의 손 안에
들어왔다. 유희가 말했다.
'보여 줄까?'
형민이 고개를 저었다.
유희가 형민의 두 손을 움켜쥐면서 밑으로 끌어내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그녀의 젖가슴이 떠올라 왔다. 형민은 어둠에 찍혀진 여자의 몸을 바라보았다.
아주 낮게, 마치 무엇을 읽어 내려가듯이 유희가 말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아,'`
유희가 가만히 그의 가슴에 몸을 쓰러뜨렸다. 형민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면서, 말했다.
'난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남자야.'
'알아,
"그런데 ....... '
'마찬가지란 생각. 둘이 닮았다는 생각 ....... 그렇지만 하나는 달라. 넌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지만 그렇지만 누굴 또 미워하지도 못해. 그러나 난 달라.
난 누굴 얼마든지 미워할 수가 있어.'
그녀를 밀어내지 못하며 형민은 그떻게 누워 있었다. 밖에 눈이 내린다고
했던가. 창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집 전체가 어디론가
가라앉아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유희의 겨드랑에서부터 땀이 배어 나기 시작했다. 형민은 그녀의 온몸이 조금씩
축축해지면서 땀으로 젖어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젖가슴 사이로 땀이 배어 났고. 그녀의 배가 젖어서 미끈거리며 형민의 몸까지
적셔 갔다. 흐트러진 머리칼. 몸을 뒤흔들 때마다 출렁거리듯 흔들리는 젖가슴.
자신의 어깨 위로 치켜 올려지는 한 쪽 다리. 자신의 등을 할퀴듯이 조여 오는
그녀의 손가락 끝엔 새로 칠한 매니큐어가 및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형민은 눈을 감은 채 일그러지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반쯤 벌린
입술은 메말라 있었고 그 안에서 말려 올라가는 혀가 떨리듯 움직였다. 자신의
어깨 위로 올려 놓은 형민의 발을 그녀가 얼굴 쪽으로 끌어당겼다. 움켜쥔 그의
발가락을 빨아대던 유희가 더 깊이 그것을 입 안으로 틀어넣으며 이빨로 깨물기
시작했다.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점점 드높아지면서, 조금씩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더. 더. 그런 말이 마디마디 끊어지면서 홀러 나와 아, 아 하는 소리로
이어졌고, 나 몰라 하는 뜻 모를 헐떡거림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가쁜 숨
사이로 거의 기절하듯 그녀는 소리쳤다. 아, 그만해 그만해 ......하고.
그리고 한 순간 두 사람의 몸이 캄캄한 늪으로 빠져 들어가듯 움직임을 멈췄다.
땀으로 젖은 이마 위에 유희의 머리칼이 어지럽게 늘어붙어 있었다. 젖어 있는
그녀의 젖가슴 위에서 형민이 몸을 뒤치며 떨어지듯 그녀의 옆으로 누웠다.
유희는 눈을 감고 있었다. 밀려왔다가 멀어져 가듯 두 사람의 가빴던 숨소리가
잦아들어 갔다.
알몸으로 천장을 향해 누워 있던 유희가 형민의 목 밑으로 얼굴을 겹치듯 밀어
넣었다
'왜 우린 이제야 만났지 '
그녀가 속삭이듯 그러나 아직 가쁜 숨결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떻게 .. ...많이 느껴 본 적이 없어.
몸서리를 치듯이 어깨를 떨고 나서 유희가 형민의 가슴 위로 얼굴을 옮겨
놓았다.
가지 마. 아무데도 가지 마.'
유희의 땀으로 젖은 젖가슴 사이의 골은 아직도 물기가 번들거렸다. 그녀가
형민의 배꼽에 입술을 대면서 말했다.
'넌 이제 내 거야.'
밖에는 바람이 분다. 아침 햇살끼써 얼어붙어 있을 것이다. 얼어붙은 눈들이
밭이랑을 넘으며 이리저리 쓸려 가고 있으리라. 벌거벗은 그대로 누워서 형민은
자신을 닦아주는 유희의 손길을 따라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다시는 올려질 것
같지 않은 견고한 철제 셔터가 내려지고 있는 것만 같은 참혹한 마음으로
형민은 눈을 감고 있었다.
더 많이 아주 많이 더러워지고 싶었어. 그래서 그 더러움이 신애와 나의 지나간
나날까지도 더럽혀서 이제 더 살지 않아도 좋게 되었으면 싶었어. 이것은 아마
두 가지가 아닐까. 나 혼자 남아서 내가 살고 있는 나날이 신애의 모든 것을
더럽히고 있다는 염증 때문에 스스로 이 세상을 버리거나. 아니면 나라는
벌레의 사는 꼴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 때문에 이 세상을 버리는 데 아쉬울
게 없는 아침을 맞게 되었으면 하는 그런 절망감. 절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런 무력감.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섬에서 지금 나는 .
형민이 중얼거렸다.
'난 누구 거도 아냐.'
'싫어. 그건 안 돼. 다시는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내 거로 가질 거야.
"난 가질 게 못 되는 인간이야. 왜 그런지 알아?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알아? 난 밤이고 그림자고 다 죽지 않고 조금 남겨진 죽음 같은
사람이야. 정신 병원에서 나오며 나는 그것을 알았어. 그것을 알았을 때 의사가
말했어. 이젠 나가도 좋다고.
자신의 몸 위에 말을 타듯 앉아 마치 지금 그녀의 영혼이 그렇게 되어 있음을
보여 주듯이 뒤흔들리며 출렁거리던 젖가슴. 똑같이 온몸으로 희열에
젖어들면서 소리를 지르다가. ....서서히 영흔이 빠져 나가는 모습이 저런 것은
아닐까 싶게 땀으로 젖어 가면서 떨리던 그녁의 몸짓. 결국 그렇다, 나는
유희를 통해서 비로소 신애와 나 사이가 무엇이던가를. 알게 된 건 아닐까.
결코 우리는 상처받아야 할 사랑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질 수 있는 가장 드높은 형태의 모습은 아니었던가 하는 것. 그리고
지금 유희는 내게 가르치고 있다. 이것 또한 죽음이라는 걸. 섹스는
순간순간......살아서 치러 내는 죽음이라는 걸. 그래 그것은 죽음이야. 짧은
한 순간에 지나가고 다시 또 찾아오는 죽음. 섹스에는 그런 참흑함과 격렬함이
있다는 것을 유희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된 거야. 그래, 당신은 물고기였고
나는 투명한 물살을 헤치며 노니는 당신을 감싸고 있던 수초이길 바랐어.
우리에게 서로의 몸을 가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으니까. 그랬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몸을 죽음으로 느켜 본 적이 없어. 그것은 언제나 갓 피어나는
생명이었어.
다음날 아침 잠이 깨었을 때 형민은 눈을 감은 채 아직 그녀가 누워 있나 보기
위해 옆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 아무것도 만져지는 것이 없었다. 형민이 눈을
떴다. 옆에는 빈자리뿐이었다. 유희가 거실 쪽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발가벗은 채 그녀가 방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마치 우릴 가둔 거 같씨 밖을 좀 내다봐.'
어젯밤 눈이 온다고 했던 유희의 말을 형민은 떠올렸다.
유희가 형민의 벗은 몸 위에 자신의 몸을 포갰다. 밖의 기온때문에 그녀의 몸은
차갑게 얼어 있었다. 그녀가 형민의 몸 위에서 손을 뻗어 담배를 찾아 들었고
불을 붙썩 한 모금 빨았다. 그리곤 형민의 입술에 담배를 물려 주면서 물었다.
'그 여자는 어땠어?"
형민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눈 밑이 거무스름한 모습으로 유희가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자신의 발등을 형민의 발바닥에 붙여 밀어 올리면서 유희가
말했다.
'그 여자가 널 이렇게 가르친 건 아냐? 그게 아주 쌘 여자는 아니었어?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왜?"
'널 죽일지도 몰라. "
지나간 건 더럽혀지지가 않아. 더럽힐 수도 없어. 그래서 과거라는 말이 있는
거야. 과거가 있는 여자라는 말이 말야. 한번 지나간 거란 다시 깨끗해질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럽혀지지도 않아. 그러나 내가 살아 있는 한 신애도
살아 있어. 내 몸 속에 나와 함께.
유희의 몸을 옆으로 떨어뜨리면서 형민이 침대에서 네려왔다.
벌거벗은 채 그는 거실로 나왔다.
형민은 창가에 가서 섰다. 손가락으로 커튼을 비집고 밖을 내다보았다.
허무라는 걸 배웠어. 흘러가는 것.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갈 뿐이라는 걸,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거라는 걸 말야. 신애와 나의 나날은 그랬어. 그랬던
거야.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도 물과 같은 것. 흐르는 것이었어. 그것을 제일
먼저 내게 가르쳐 준 것이 바로 우리의 몸이었어 신애와 나의 몸. 여자는
어떤가 몰라. 그러나 남자에게 있어 그것은 허무야, 허무란 뭘까. 남지 않는
것이지 사라져 가면 그만인 것. 다시는 돌아을 수도 되돌이켜 볼 수도 그리고
어떤 유적도 앙금도 남지않는 절대의 없음. 그것이 허무겠지. 섹스란 바로 그
원형질이 아니었던가.
'너무 오래 집 안에 있다가 밖에 나가면, 아 나오길 잘했다고......그러다가
집에 돌아가면 역시 내 집이 좋구나 하고.'
외출 준비를 하느라 옷을 입고 있던 형민이 고개를 돌려 유희를 바라보았다.
'뭐야? 그 표정은. 볼수록 사람이 달라진다는 느낌이 들잖아."
유희가 자신의 몸을 옳듯이 내려다보았다.
'나 그냥 그대로야. 몸무게도 여전하고, 얼굴 못생긴 것도 여전하데 대책없이
무식한 것도 여전한데 뭐.'
대책없이 무식하다는 말에 형민이 웃었다.
'무식하지도 않네, 소크라테스는 통독을 했나봐. 너 자신을 알라 하나는 제대로
아니까.'
그럼 됐지 뭐가 어떻다구 그러니.'
'바로 그거야. 전에는 그냥 대책없이 무식한 그 자체였다구.
그런데 점점 자아 비판이 생긴다니까. 안 그래?"
'너야말로 왜 점점 대책없이 복잡해지니. 그냥 세상 살기 시들해진 남자로
알았는데 '`
이번에는 유희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배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때 넌 마치 사진 찍는 사람 같았어.
"사진 작가 같았다는 얘기야?'
'꿈도 크네. 사진을 찍는 남자가 아니라 사진 찍히고 있는 남자. 사람들이
그러잖아, 사진 찍을 때 말야, 좋은 일도 없으면서 웃으며 찍고, 친하지도
않으면서 어깨에 손 올려 놓고 찍고......그런데 넌 아무떻지도 않으면서
공연히 괴로운 척 인상 팍 쓰고 사진 찍어야 하는 걸로 아는 그런 병아리
텔런트 같았거든. 대책없이 심각한 척하면 그게 연기인 줄 아는 그런 신인
텔런트처럼말야.'
신애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나는요, 이런 남자였으면 좋겠어요. 사막으로
사라진 남자.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남자. 그때 신애는 내 귓불을 잡아당기면서
말했었지. 그냥 시장 바구니를 든남자로 살면 어때요? 아니면 여자 스타킹을
빨아 너는 남자, 그런 거로요.
형민이 말했다.
그러니까 나를 바보로 알았다 그거로군.'
'아니.'
유희가 웃지 않고 말했다.
'그냥 쉬운 남자 같았어. 아무것도 거절하지 못하는 남자."
그래서 나보고 .... ..'
그래, 술 한잔쯤 같이 마시고도 헤어질 때는. 뭐랄까 마치......과장님 먼저
가시지요, 하면서 택시 잡아서 태워 보내듯이 날 보내 줄 그런 남자 같았어.'
'그런데, 지금은 안 그렇다는 거야?'
'아니, 여전히 그래. 그래서 좀 화가 나, 함께 있다가 보니까 이 녀석이
나한테만 잘해 주는 게 아니라 아무 여자한테나 이렇게 잘해 줬겠지 그런
생각이 나니까.'
형민이 소파 위의 동그란 방석을 들어 유희를 향해 던졌다. 그녀의 발 밑에
떨어진 방석에서 디즈니 만화의 고양이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겨우 그거였군,
하려고 했던 말이. 바보치고도 아주 지독한 바보,
' 그래 맞아. 바보는 약도 없어. 수술도 안 되는 게 바보라는 병이야.'
문을 열고 먼저 밖으로 나가는 형민을 보면서 유희는 천천히 발 밑의 방석을
들어올렸다. 방석 위의 고양이는 혀를 내밀고 있었다.
밖에서는 눈이 녹고 있었다. 어제 오늘 따듯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고 그
따듯한 날씨도 오늘 외출을 하기로 한 이유의 하나였다. 눈이 녹으며 드러난
밭이랑과 남아 있는 눈이 벌판에 얼룩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밖으로 걸어 나간 유희가 형민의 등을 바라보았다. 하오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 겨울 벌판을 바라보며 형민이 서 있었다. 그의 긴 코트자락과 목도리가
어딘가 아주 먼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그를 생각하게 했다.
유희가 혼자말처럼 말했다.
'오늘 우리 소주 마시자.'
형민은 돌아보지 않았다.
아 오늘은 부듯가에 가서 소주 마시고 싶다. 그러자 우리.'
유희가 등뒤에서 킬킬거리는 소리를 형민은 들었다 맞아, 너 참 회를 아주
싫어하지. 그래도 할 수 없지 뭐. 난 먹고 싶은 건 먹어야 배기는 성미니까. 넌
구경이나 해. 중국집에서 짜장면 시켜 줄 테니까 그거나 먹고 있으려무나.
부듯가의 건물들도 여전했다. 눈이 녹아 있는 시멘트 도로는 잿빛으로 메말라
있었다. 모두가 같았다. 길도, 그 옆의 건물들도 다들 잿빛의 시멘트로 지어진
것을 말하기라도 하듯 회색빛으로 때묻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없었다. 마치 그 거리가 하나의 정물화인 것처럼 형민은 햇빛에
눈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그 곳으로 걸어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없는,
그런 정물화같이 거리는 그떻게 바라보였다.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없던
풍경화 속으로 아주머니 하나가 보퉁이를 들고 지나갔다. 고깃배의 움직임도
없고 들고나는 연락선도 없는 날의 부두는 언제나 저렇겠지. 바다를 내다보며
형민은 서 있었다. 등지고 서 있는 저 정물화 같은 풍경 속으로 나는 들어갈 수
있을까. 거기에는 삶이 있을 것이다. 현실이라는 이름의 싸움과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일의 그 하찮음 또한 도사리거나 응크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결국 그것을 피할 수는 없는 걸까.
난 아마 전생에 물고기였나 봐. 물......바다만 보면 좋으니까, 신애가 했던
말이 뿌우연 바다 저편을 바라보는 형민의 가슴속으로 피어오르듯 들려 왔다.
아냐. 우린 둘 다 물고기도 뭐도 아니었어. 우린 현실이라는 걸 몰랐을 뿐이
아닐까. 저 정물화 같은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그것,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말야.
'무슨 생각을 해?'
고개를 저으면서 형민이 돌아섰다.
'우리 저기 가서 차나 한잔해
'저기 다방에서?
의외라는 듯 유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형민은 그녀를 남겨 둔 채
부듯가의 거리를 향해 걸었다. 2층 다방으로 오르는 길은 춥고 썰렁했다.
페인트가 벗겨진 문을 밀고 형민이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다방에 있기
위해서는 이렇게 생겨야 한다는 무슨 표본 같은 여자가, 의자에서 흘긋 그를
돌아보았다.
'어서 오세요.'
여자가 일어선 앞자리의 손님뿐, 실내는 텅 비어 있었다. 형민은 바다 쪽을
향해 있는 창 옆자리에 가 앉았다. 여자가 다가와서 물었다.
혼자세요?"
그때 출입문이 열리며 유희가 따라 들어왔다. 형민의 옆으로걸어오는 유희를
보면서 다방 여자가 물었다.
'같이 온 거예요?'
연락선이 와 딸는 부두와 그 옆으로 마치 쓰레기 더미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어선들이, 때묻은 유리창 너머로 적막하게 바라보였다. 차를 시키고, 날라져 온
커피가 놓여졌지만 누구도 그것을 마실 생라이 없이 둘은 앉아 있었다. 그
말없음을 깨기라도 하듯 형민이 말했다.
나 이 섬에 남을까?'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듯 앉아 있던 유희가 물었다.
무슨 뜻이니?
"말 그대로. 여기 남을까 해서.'
여기 남다니?
"여기서 살면 어떨까 해서 ....... 하긴 벌어먹는 재주를 아직모르니까,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겠지만.'
유희가 말했다.
'저 여자닌 어때? 저 여자랑 살고 싶어?'
'누구?
"다방 껀. 요새 남자 없어. 늙은 선주 하나 있었는데 ......무슨 병에 걸렸다나
뭐래나. 아마 섬에 다시 돌아오긴 글렀나 봐.'지친 듯 말하고 난 유회가 탁자
효으로 다가앉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하는 얘기니? 여기 남겠다는 게?
눈을 떴을 때 방안은 캄캄하게 어두웠다. 늘 그랬듯이, 거실한 켠에 켜놓은
불빛이 방문 밑으로 하얀 선을 이루면서 기어들어 오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형민은 침대에서 내려섰다. 혼자 살며 생긴 버릇이야. 처음엔 무서워서 그랬어.
집 안에 불을 켜두는 이유를 유희는 그렇게 말했었지. 처음에는 무서워서
그랬는데 그 다음에는 혼자 있는 게 싫어서였어. 밤중에 일어나기라도 하면
불빛도 없는 방이 그렇게 싫었거든. 그러다가 방에 불을 켜고서야 잠이 드는
버릇이 생겼어. 난 혼자 있을 때는 늘 방에 불을 켜고 자. 형민은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되도록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는 거실 난로에 불을
지폈다. 잘 마른 장작에 불꽃이 타오르고 거실이 훈훈해졌을 때 그는 거실 옆
골방에 넣어 두었던 자신의 여행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이제 떠날 때야. 그는 멍하니 가방을 내려다보면서 누군가에게 말하듯이 중얼거
렸다. 봄이 올 때까지 억기서 보넬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 그는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거기서 손길이 멎었다. 구겨 넣은 옷가지를 내려다보면서 그는
이번에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지. 얼마를 그떻게 앉아 있던
형민이 가방을 뒤져 물건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수첩과 노트들이 여기 을 때 싸넣었던 그 모습대로 가방 바닥에 깔려 있었다.
신애가 보내 줬던 세 통의 편지도 있었다. 우리의 만남이 얼마나 짧게
끝났는가를 말해 주듯이 내가 받을 수 있었던 세 통의 편지. 그는 마음의
흔들림을 움켜쥐듯 이를 악물었다. 모두가 나를 걱정하는 글이었지만 그것은
나를 떠나기 위해 그녀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마음의 물결들이 출렁거리고
있는 그런 글들이 아니었던가. 결국 그것이 죽음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장작을 더 난로에 집어 넣고 형민은 흩어진 쟈신의 물건들을 내려다보며
바닥에 앉아 있었다. 등뒤에서 가볍게 문 소리가 났다.
형민이 고개를 돌렸다. 가운을 걸친 유희가 한 손에 담배와 라이터를 든 채 서
있었다. 가운 밖으로 허벅지부터 드러난 그녀의 다리 하나가 추위가 느껴질
정도로 싱싱하게 뻗어 있었다.
'왜 가방은 꺼내 놓고 그래?'
형민이 낮게 대답했다.
버릴 거와 남길 걸 나누려던 참이야."
가운 요자락을 여미면서 유희가 소파에 올라앉았다.
잠시 둘은 그렇게 앉아 있었다. 쥐들은 밤에도 잠을 자지 않는가. 찍찍거리는
소리가 부엌 뒤편 헛간 쪽에서 들려 왔다. 밤이면 창틀을 흔들며 지나가곤 하던
바람소리도 없이 난로 불이 타고 있는 거실은 고요했다.
난로에서 부지직 소리를 내면서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민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은 짐을 정리하던 중이야.'
형민이 말을 마디마디 끊으면서 중얼거렸다.
'떠나야 할 때가 된 거 같아서.'
'그럼......죽을 거니?'
아무렇지도 않게, 밖에는 비가 와 하고 말하듯이 유희가 물었다. 그것은,
가을이 깊어 가는 어느 날 화장대 앞에 앉으면서 주부가, 김장을 해야겠어 하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게 없는 목소리였다. 늦게 일어난 아침, 커피 같은 거 없어?
하고 중얼거리는 것과 아무것도 다르지 않았다. 유희가 그렇게 말해 주어서
다행이라고 형민은 생각했다. 가죽 코트에 짧은 스커트를 입고 향수 냄새를
풍기는 여자도 그녀였고, 벌거벗은 몸으로 한 남자에게 잠자리를 가르친 여자도
그녀였다. 그리고, 죽을 연기를 내뿜듯이 말하는 여자도 또한 그녀였다.
왜 그런 생각을 해?'
'난 네가 여기에 온 이유가 그 여자의 산소엘 가기 위해서라는 걸 알았을 때.
그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었어. 네가 여기까지 온건 자살을 하기 위해서구나.
그리고 난 그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어. 아마 이 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
여기선 그런 게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니까 말야."
난로 앞으로 다가간 유희가 몸을 구부리며 공기 흡입구를 열었다. 그러고는
동그란 나무 의자를 당겨 난로 앞에 걸터앉았다. 가운이 펼치고 그녀는 몸을
녹이기라도 하듯 앞자락을 열었다. 형민이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모르겠어.'
잠시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이제 뭘 하겠어? 세상에 나가 돈을 벌고, 어떤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할지도
모르지.'
'그렇게 안 살 수도 있잖아."
'아냐. 그럴 거야. 난 아마 아주 잘 그렇게 살 거야. 내가 날 아니까. 남들이
그러듯이 집을 사기도 할 테고, 아이를 낳고 늙어 가겠지. 술도 마시고
트럼프도 하고 아마 골프를 치러 다닐지도 모르지. 새벽이면 동네 약수터가
있는 산에 올라가면서 건강을 생각하기도 하겠지. 그게 뭐라는 거야. 어떻게
내가 그렇게 살아갈 수가 있다는 거야. 내가 그렇게 살아도 좋다는 거야?'
'넌 나하고는 다르잖니.'
'나르다니.'
넌 누구한테 사랑받았잖니. 그렇다면 넌 남아서 좀더 살아야 하는 거 아니니.
그 여자를 위해서라도.'
형민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꺾었다. 그리고 몇번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난 그렇게 살아 낼 자신이 없어.'`
유희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다가오는 목소리를 형민은 고개를 숙인 채 듣고
있었다.
"잊혀지면 잊고, 잊허지지 않는 건 그냥 두면 되고.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거란다.
유희가 다가와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부두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아니,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여름이 와도
그 부두는 그렇게 얼어붙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얼굴이니까. 얼어붙은
듯한 모습, 그것은 우리가 걸어가서 만난 부두의 제 모습이었을 뿐이다.
두 사람은 멀리 방파제 위로 갈매기가 날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을씨년스럽게
걸었다. 방파제가 뻗어 나간 방향과는 반대편으로 섬이 하나 솟아올라 있었다.
섬 위에는 소복하게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털모자를 씌워
놓았거나, 잘못 깎은 누군가의 머리 모양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 섬은 언제 보아도 못생겼어.'
유희가 중얼거렸다.
못생긴 섬. 그녀의 말을 입 속으로 되뇌어 보면서 형민은 잘생긴 섬이 어떤
것인지 몰랐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기암 절벽 ......서귀포의
어디쯤......아니면 긴 모래밭이 있는 곳......그 어디를 두고 사람들은 잘생긴
섬이라고 말할까. 형민이 다른 말을 했다.
'사람들은 왜 섬이 떠 있다고 말할까. 어떤 여자가 그랬어."
'또 시작이니? 남들이 그떻게 말하면 그런 거야. 섬이 떠 있다고 하면 떠 있는
거야.'
유희가 웅크린 형민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 섬이 솟아 있다고 한 사람도 있어.'
'그 남자가 그랬어? 그 남자는 섬이 솟아 있다고 했어?'
유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했다. 형민은 앞으로 내려와 있는 목도리를 다시 한번 목에 감았다. 유희가
말했다.
'배에서 처음 만날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무슨 생각?'
'이곳 사람의 냄새가 아닌 그런 게 있었어. 무슨 향기랄까. 그게 참 마음에
들었지."
나는 그때 왜 여기까지 왔던가, 이 섬까지. 나 자신에게는 성실하자. 신애만은
알고 있듯이. 그래, 나는 자살을 하러 왔었다. 그녀 옆에서 잠든다는 그것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더 살아갈 수 있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으니까.
어제 나는 신애의 무덤을 내려다보면서 소리 없이 중얼거렸었다. 이제 떠날까
해. 알고 있겠지. 내가 더 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는 걸 당신이
가르쳤잖아. 이 세상에는 내가 더 살아 볼만한 것들이 남아 있을 거라고. 안녕.
잘 있어. 다시 찾아올 때까지. 이제 돌아갈게. 가서 살아 볼게. 네가 버린
세상을.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다른 말을 했다. 나랑
당신은 한 번도 같이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지. 그게 이따금 서글펐어. 함께
술을 마실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으면 텐데 하고
말야.
형민이 바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몇 발짝 앞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유희의 체크 무늬 스카프 옆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여기서 그냥 살고 싶었어. 몇 번은 그런 생각을 했어.'
유희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여기 남으면 어떨까?진심으로 묻는 말이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녀가 말했다.
'아냐. 떠나."
잡을 줄 알았는데......그래 줬으면 했는데.
'나 같아져.
"너 같아진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유희가 몸을 돌렸다. 그녀의 말소리가 바람에 섞이면서 흔들리며 들려 왔다.
'영영 떠나지 못하고 만다는 말이야.'
두 사람은 얼마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유희가 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겨울이 갔어.'
형민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납빛 바다를 바라보았다. 구름에 뒤덮여 수평선은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았다. 아직 승선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돌아올 거야?"
형민이 유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저 여자는 지금 처음으로 하기
힘든 말을 했다. 끝내 이 말을 물어 보지는 못하리라 생각했던 말을. 나는 그걸
안다.
'아직 모르겠어.'
'돌아을 거라고 쉽게 좀 말해 주지 그러니.'
'왜?
"그러지 않으면, 내가 따라가겠다고 할 것만 같으니까.'
형민이 돌아섰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었다. 이 부듯가에 와 서면
신애에게 할 수 있는 무슨 말인가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었다. 섬을
떠나면서.
고개를 숙이면서 그가 증얼거렸다. 이 세상에서 당신은 물고기가 아니었어.
그렇지만. 만나, 우리. 다음 세상에서는 우리 물고기로 그렇게 만나.
형민이 유희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