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는 어떻게 자신을 변이시켰는가
신체는 어떻게 자신을 변이시켰는가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에 대한 철학적 감상
1. 영화보고 철학하기 2501: 인간성을 극복하라!
공각기동대는 사색적 픽션의 뛰어난 작품으로 문학 수준에 이르렀으며 뛰어난 영상을 제공하는 진정한 최초의 성인 에니메이션이다. 그것의 디자인, 영상의 시, 테마의 깊이는 다른 공상과학 영화들과 구별시켜준다. 나는 오시이 감독에게 “매우 중요한 영상 작품”이라는 찬사를 보낸다. -제임스 카메론
과학기술의 극단적 발전이 “전 세계를 네트로 연결해서 민족이라는 경계를 허물어내기 시작할 때”, 심지어 네트가 우리 자신의 뇌에까지 연결되고 영혼이 그것에 접속될 때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잃기 시작한다. 미래는 더 이상 꿈과 희망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미래는 더 이상 또 다른 미래를 낳는 능력을 상실하고 빛의 속도로 질주하고 엑세스하는 시대에 화면은 빛을 상실하고 온통 어둡기만 하다. 빛은 다른 미세 입자들에 막혀 희미하게 숨을 고를 뿐이다.
미래를 축복하는 데 앞장섰던 공상 에니메이션에서 이제는 <중경삼림>보다도 더 암울한 세기말적 분위기가 풍기고 <블레이드러너> 보다도 우리의 정체성의 위기가 심각하게 드러난다. <블레이드러너>의 마지막 부분에서 날아간 비둘기가 절망의 벽을 돌파하려는 실존적 염원이라면 이 에니메이션의 마지막 부분은 그것의 실천적 돌파이다. 그것은 더 이상 상실을 두려워하여 미래를 구부리고 그것으로 현실을 자제하게하는 도덕적 당부에 관심이 없다. 그것은 낡은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기 보다는 능동적으로 버리고자 한다. “집착하지 마라, 집착은 자신을 구속한다, 그것을 돌파하라!” 느끼는 자는 돌파하며, 못 느끼는 자는 비난한다.
오시이(Mamoru Oshii)감독의 <공각기동대>는 시로우 마사무네(Masamune Shirow)의 동명의 만화 작품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내용 자체는 충실하게 해석했다고 하지만 분위기는 전혀 딴 판이다. 이것이 에니메이션 <공각기동대>를 만화 <공각기동대>와 아주 다르다고 말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영미 비평가들이 많이 쓰는 단어는 “dark and shadowy”. 그러나 원작자 시로우 마사무네는 슬랩스틱 코미디(slapstick comedy)로 유명한 만화가다. 원작에 있었던 약간의 코믹한 요소는 영화에서는 완전히 삭제된다. 엉키고 설킨 정치적 음모에 대한 묘사도 대거 생략된다. 그렇다면 시로우 마사무네의 원작을 채용하면서도 이렇게 많은 것들을 생략한 오시이의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 그는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4억엔이라는 막대한 돈을 들여 단지 환상적인 컴퓨터 그래픽을 선보이고 싶었던 것일까?
대부분의 비평가들처럼 ‘지나친 기술 의존의 결과로 나타난 인간성 상실’을 <공각기동대>의 핵심 테마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풀리지 않는 몇가지 질문과 부딪히게 된다. 주인공인 ‘모토코 쿠사나기’ 소령이 왜 ‘인형사’와의 합체를 결심하게 되는지, 그녀는 왜 변신하게 되는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심지어 왜 동료 형사인 ‘바토’와의 사랑은 관객들의 기대와는 달리 무시되는지, 영화 마지막에 가서 주인공이 왜 기쁜 표정을 갖게 되는지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오히려 영화는 우리가 잃었다고 슬퍼할 ‘인간성’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는 듯 하다. ‘생명’ 하나도 정의할 수 없는 자들이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피튀겨가며 이야기 하는 것이 온당한 이야기인가? 그토록 염원하는 인간성, 정체성은 무엇인지에 대해 인형사의 말처럼 “당신들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했다”.
영화는 차라리 ‘인간성’ ‘정체성’을 버리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을 제약”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도 아주 “능동적”으로 버리라고 말한다. 그럴 때 자신은 비로소 “생명”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성 극복’을 철학적 과제로 삼았던 초인(Ubermensch)의 철학자 니체(F.Nietzsche)를 생각나게 한다. 짜라투스트라(Zaratustra)는 ‘인간의 죽음’을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변이(transmutation)하는 자이다. “인간이 위대한 점은 인간은 다리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며, 그것은 하나의 <과도기Ubergang>이며 <몰락Untergang>이라는 점” F. Nietzsche,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청하. p. 54
이라고 말하는 짜라투스트라의 외침은 ‘인간을 극복하라’는 철학적 과제의 선언이다. “칸트 이래로 두 세기도 채되지 않은 발명품의 종말이 선언되며, 인간은 미래에 존재할 수 없다. 미래는 초인에게만 속한다” A.D.Schrift, "Foucault and Derrida on Nietzsche and the End(s) of 'Man'", Exceedingly Nietzsche, 1988. p. 136.
는 푸코(M.Foucault)의 주장은 <공각기동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철학적 화두라고 할 수 있다. 電腦化(사이버네틱)를 이룬 최후의 인간(the last man) 니체는 ?짜라투스트라?에서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인간”과 “최후의 인간”을 구분한다. 최후의 인간은 허무주의의 극한의 지점에서 스스로를 보존하는 방식을 취하는 반면,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인간은 최후의 인간을 관통하면서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을 넘어선다.
은 어떻게 변이에 성공할 수 있는가? 혹은 왜 최후의 인간은 변이에 실패하는가? 너는 너의 이름을 버릴 수 있는가?
2. 세계 4차 대전이후 허무주의적 인간들의 행진
“2029년, 세계는 네트에 의해 경계가 사라진다; 가상(virtual) 환경에서 증식하는 인간들의 삶, 자신을 슈퍼파워로 다운로드 해서 범죄를 소탕하는 능력을 갖춘 지배에 의해 항상 감시받는 그러한 세계”.
<공각기동대>는 기술이 정말로 ‘끔찍하게도’ 발전한 세계4차 대전이후의 어떤 시기를 다룬다. 일본 회사들이 세계의 지배권을 행사하는데, 그것은 공각기동대(Shell Task Force)라고 알려진 보안군에 의해서 뒷받침 된다. 이 군대의 90% 이상은 테러리스트들과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도록 사이버네틱 어디션을 갖추고 있다. 이들은 정보고속도로를 타고 돌아다니며 범죄자를 찾아내고 첨단무기를 사용해서 처참하게 응징한다. 기술은 더욱 발전하여 인간의 ‘고스트’를 얼마든지 조작하고 파괴할 수 있게 된다.
개체들을 관리하는 기술은 이미 ‘호명(interpellation)’의 수준을 넘어선다. 그것은 ‘부르는’ 절차를 생략하고 곧바로 조작한다. 알튀세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서 세련된 미시파시즘의 작동방식을 보인 것을 우리는 좀더 경청해야 했다. TV와 영화, 책 등의 매체들은 지배이데올로기로 우리를 호명한다. 우리는 보면서, 읽으면서, 들으면서 ‘무릎 꿇게 되고 읖조린다’. ‘그러면 우리는 믿게된다.’ L. Althusser, 김동수 역,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 1991. p. **
사회는 무의식에 작동하는 ‘호명’을 통해 그 사회에 필요한 인간을 재생산 해낸다. 우리는 모두 ‘터미네이터’가 된다. 어떻게 행동할 지에 대하여 이미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인간들, 그 사회의 ‘소중한’ 주체가 된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군대에서, 공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이미 프로그램화 되어 있다.
사실 이러한 프로그램화된 터미네이터의 출현은 근대사회의 뚜렷한 특징이다. 베버(M.Weber)의 뛰어난 고찰은 알튀세의 ‘호명’이 갖는 의미를 미리 드러낸다. 중세의 교회가 교회 건물 안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면 근대의 교회는 각자의 가정으로, 자신의 머리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교회는 자신의 머리 속에 들어앉는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근대인간이 자신의 교회를 어떻게 능동적으로 자신의 생활 속에 끌어오는지에 대한 탁월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들의 종교개혁은) 삶 전반에 대한 교회의 지배를 배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때까지의 삶의 형식을 다른 형식으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적으로는 거의 느껴지지 못했던 형식적 지배를 대대적으로 사생활과 공적 생활에 파고들어 모든 삶의 영위를 매우 강하게 통제하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M.Weber, 박성수 역,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p. 8. 참조)
스스로 일기를 써가며 자신을 통제해가는 근대‘인간’의 출현.
<공각기동대>는 베버의 주장을 ‘기술적으로(technically)’ 실현한다. 알튀세의 ‘호명’을 더욱 극단화 한다.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고스트는 ‘프로그램’이라고 말하고, 따라서 그것을 해킹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허위의식, 혹은 환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혼은 프로그램이다. 더 이상 환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의미에서 실재도 없다. 회사는 사람들이 정보에 좀 더 편리하게 엑세스 할 수 있도록 신체의 성능을 더욱 ‘개선’시켜준다. 그러나 그것은 좀 더 편리하게 사람들의 신체에 엑세스하게 해주며 신체에 대한 통제력을 ‘개선’시킨다.
문제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도무지 문제란 생겨날 수도 없을 것 같은 이 사회에 문제가 발생한다! 일종의 ‘버그’가 발생한 셈이다. ‘공각기동대’는 ‘버그’들을 ‘디버깅’하기 위해 출동한다.
하나의 사건이 시작된다. 정보기술의 개발을 통해 전 세계를 네트를 통해 넘나들면서 각종 프로그램들을 조작하고 파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외무성!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프로그램이 독자적 행동을 취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했다. 인형사(Puppet Master)로 불리는 그 프로그램이 통제를 벗어나자 이들은 자신들의 음모가 세계에 알려질 것을 두려워하여 인형사를 회수하기 위해 달려든다. 외무성의 6과는 가베르 공화국의 혁명이전의 우두머리였던 마레스가 가베르 공화국과의 협상을 방해할 목적으로 고스트 해킹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식으로 문제를 왜곡하여 그의 송환구실을 만들어내고 인형사의 체포가 외교적 문제와 관련된 것이므로 자신들의 관할이라고 주장하며 문제가 다른 곳으로 퍼져가는 것을 막는다. 수사를 맡은 9과는 인형사의 탄생의 비밀을 알지 못한 채 그를 사이버네틱을 해킹하는 일급의 범죄자로 규정하여 채포하기위해 나선다.
인형사는 자신을 끊임없이 바꾸고 도처에서 출몰하는 (ever-changing and omnipresent) 막강한 범죄자이다. 인형사는 과학기술의 극한적 발전이 산출해낸 과학기술의 이질적 지대이다. 그것은 기존의 기술이 닦아놓은 정보고속도로를 타고다니며 추적을 따돌리고 해킹한다.
인형사를 추적하는 6과와 9과의 레이스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이 시대 인간들의 군상을 만나게 된다. 허무주의 시대 인간들의 행진! 인형사로부터 고스트 해킹을 당한 청소부는 장소를 계속 바꾸면서 엑세스를 시도하는데 그것은 자신에게 이혼을 요구한 부인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이 순박한 청소부가 인형사로부터 단순히 사기 당해서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고만 해도 우리가 그토록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사결과 이 청소부는 부인이나 예쁜 딸이 없는 독신자였다. 부인에 대한 기억도, 예쁜 딸에 대한 기억도, 머리 속에 있는 가족과의 아름다운 추억도 모두 가짜다. “확실히 내 딸이야...”라고 말하는 청소부의 눈빛은 온통 슬픔 뿐이다. “그 거짓 꿈을 어떻게 지울 수 있죠?” “유사체험도 꿈도 정보는 전부 현실이고 환상인거야...” 그토록 고집스럽게 지켜왔던 기억, 자신이 그토록 동일시해왔던(identify) 정체성(identity)의 보루는 무참히 깨지고 만다. 우리의 기억은 타자의 기억이고 우리의 목소리는 타자의 목소리다!
고도로 발전된 기술도시(techno oriented world)와 재래시장을 형성한 물리적 지대(physical world) 사이로 소령의 고독한 걸음걸이가 이어진다. 고층빌딩과 빈민가의 대조적 풍경이 계속해서 교차하고 쓰레기들이 널려있고 하수오물이 흘러 다니는 천 주위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눈빛은 한없이 흐리다. 빗방울은 최후의 인간들에게 보내는 悲歌일까? 쇼윈도 안에 있는 마네킨이 클로즈업 되지만 그 앞을 무심코 걸어가는 인간들과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인형이 된 인간들, 프로그램화된 터미네이터들이 열을 지어 행진한다. 수동적 허무주의, 즉 허무주의의 본질이 실현된다.
쿠사나기 소령 역시 자기 고스트의 과거에 대해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영혼 역시 그녀의 전뇌(사이버네틱)에 의해 심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식의 동일성이 어떤 것인지,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의 신체, 더 이상 비유적 의미가 아닌 사실 그대로 기계인 자신의 신체에 대한 극심한 회의에 빠진다.
“참 편하지? 마음만 먹으면 체내에 심은 화학플랜트로 알콜을 소독해서 말짱해질 수 있어... 인간의 본능같은 거야 대사의 제어지각의 예민화, 운동능력이나 반사의 비약적 신장...”
이제 그녀는 조금씩 변이를 꿈꾼다. 그녀는 자신의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가능하며 돌아간들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심지어 인간의 본능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어떤 도덕적 위안도 가질 수 없을만큼 그녀는 삐딱(!)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성의 공간에 잠수한다. 바다는 실제 바다이며 또한 정보의 바다이다. 그녀는 네트에 끊임없이 잠수하면서 또한 바다에 틈날 때마다 잠수한다. 바다는 생명체의 근원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새로운 생명체 역시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난다.
다른 신체와 결합을 통한 다른 신체 되기(becoming)를 암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잠수를 했다가 수면으로 올라오면서 소령의 신체는 ‘자신의 신체와 꼭 닮은’ 어떤 신체와 결합한다. 그것을 구경하는 동료 바토와 소령의 대화는 나중에 벌어질 상황에 대한 일종의 예행연습이다. 바토는 소령에게 잠수가 어떤 느낌이냐고 묻는다. 또한 “바다가 무섭지 않아? 만약 프로터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죽음 뿐이야”라고 걱정한다. 죽음을 부를지도 모르는 생성의 공간 바다에 대한 공포에 대해 바토는 무척 심각하다. 소령은 잠수의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두려움, 불안, 고독, 어두움,... 그리고 어쩌면 희망? 해면으로 떠 올라갈 때, 지금과는 다른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그런 느낌....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어.”
소령은 점차적으로 다른 신체 되기의 예비적 작업을 진행한다. 그러나 아직 그녀에게 변이를 의욕하는 의지는 무겁고 심각하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접속하는 강한 변이의 신과의 만남을 예고하는 신호들은 계속해서 나타난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 수 많은 부품이 필요하듯이 자신이 자신이기 위해서는 놀랄만큼의 많은 것이 필요해. 타인을 가리기 위한 얼굴, 그리고 의식하지 않는 목소리, 눈 뜰 때 응시하는 손, 어릴 때의 기억,... 그것만이 아니야. 내 전뇌(사이버네틱)가 엑세스 할 수 있는 방대한 정보와 네트의 넓이, 그것들 전부가 내 일부이고 나라는 의식 그 자체를 만들어내고... 그리고 동시에 나를 어느 한계로 제약해.”
인간은 이 많은 것들로 ‘구성’된다. 이 많은 것들의 교차점에 인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내 사이버네틱이 엑세스할 수 있는 정보와 네트의 넓이 그것이 나라는 의식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나를 어느 한계로 제약한다. 나는 ‘나의 능력만큼 엑세스 할 수 있고, 그것은 또한 나의 한계다.’ 이제 나는 나를 바꾸어줄 방대한 정보와 네트를 가진 어떤 신체와의 만남을 꿈꾼다.
3. 인간(주체)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우리는 허무주의적 인간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허무주의는 자신의 불가능성을 스스로 폭로한다. M. Blanchot, "The Limits of Experience; Nihilism", The New Nietzsche, MIT Press, 1985. pp. 125-126.
현대과학은 허무주의의 운동의 도달점에 위치한다. 니체에 따르면 허무주의 운동의 귀결점인 ‘금욕주의 이상’의 가장 현대적 형태가 바로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F. Nietzsche,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학? 청하출판사. p. 160
과학은 고도의 계산가능성을 통해 신체에서 일어나는 이질적 힘들을 재빨리 체계화하고 분류하며 보편화 시킨다. 차이적 존재들을 참지못하는 과학은 그것들이 서로 논박되기를 희망한다. 역설적으로 그 메커니즘은 수동적 주체들을 관통하는 거대 시스템을 산출한다.
<공각기동대>는 이 거대 시스템에 저항하는 자가 과학을 거부해서 원시적 무기를 통해 이 시스템을 파괴하고 다시 평온했던(?) 과거로 돌아간다는 식상한 결말을 유도하지 않는다. <미래소년 코난>은 이런 식의 해결을 추구한다. 작가는 인더스트리아라는 거대 산업문명에 대한 철저한 파괴와 과거 공동체 사회로의 회귀를 꿈꾼다.
<공각기동대>에서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 인형사라고 불리는 ‘위험세력’은 과학의 한복판에서 탄생한 과학의 ‘외부지대’다. 그것은 과학적 시스템의 운영자보다도 더 뛰어나게 그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지는 자다. 그는 항상 자신을 변화시키며 시스템의 도처에서 출현한다. 한 체제가 진정으로 위협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핵심에서 사건이 일어났을 때이다. 이때 체제는 그것을 재빠르게 주변화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체제는 붕괴된다. 지극히 과학적인 논리 안에서 생겨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
6과는 공성방벽을 이용해 고스트를 특정한 의체에 집어넣는데 성공한다. 그 의체는 9과로 인수된다. 그러나 9과에 들어간 인형사는 자신의 정치적 망명을 요구한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흥미로운, 하지만 중요한 논쟁에 접어든다.
“너는 단순한 자기복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아”
“그렇게 말한다면 당신들의 DNA 역시 자기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이란 건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결절점과 같은 것이다. 종으로서의 생명은 유전자란 기억 시스템을 가지고 사람은 단지 기억에 의해 개인일 수 있다. 설령 기억이 환상의 동의어였다고 해도 사람은 기억에 의해 사는 법이다. 컴퓨터의 보급이 기억의 외부화를 가능하게 했을 때 당신들은 그 의미를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강조는 필자)
프로그램이 망명을 신청할 때 이들은 몹시 당혹해 한다.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을 통해 유지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인간은 흐름들의 ‘결절점’과 같은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여러 흐름들 사이의 교차점에서 탄생한다. 여기서 인간에 대한 과학적 정의(scientific definition)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네가 생명체란 증거는 없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의 과학은 생명을 정의할 수 없으니까... 나는 정보의 바다에서 발생한 생명체다”
인형사는 자신의 망명을 요구하며 자신과 관련된 정보를 공개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프로젝트2501’이며 ‘정보의 바다에서 발생한 생명체’다. 문제가 심각해진 것을 안 6과는 광학미체를 통해 함께 온 전차를 이용하여 9과 안에서 난동을 부리고 그 사이에 인형사의 의체를 가지고 도주한다. 여기서 사이버네틱화가 덜 된 토구사(Togusa)와 이시가와(Ishikawa)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모두 전뇌화(사이버네틱화)가 덜 된 그야말로 ‘과거의 인간’들이다. 이들은 외무성의 정치적 음모를 밝혀내는 중요한 인물들이지만 이 영화에서 정치적 음모는 부차적으로 처리되는 것으로 보인다. 토구사는 도주한 6과의 차량을 추적할 수 있도록 기지를 발휘하며, 이시가와는 외무성 네트에 잠수하여 외무성이 추진했던 비밀 프로젝트의 신비를 풀 많은 열쇠를 찾아낸다. 그는 인형사가 외무성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며, 그것은 인형사의 범죄가 일어나기 전의 일이고, 메인프로그래머가 영화 시작부분에서 나왔던 망명을 요청한 다이타 미즈보라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6과의 하얀 새단을 추적한 소령은 혼자서 전차와 전투를 벌인다. 웬만한 느와르보다 뛰어난 액션들이 이어지고 첨단 무기들이 등장한다. 이 전투 장면에서 다시 한 번 중요한 장면이 지나간다. 전차가 난사하는 총알들이 박힌 곳은 다름 아닌 진화계통도! 그것은 생명체들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그림이며 다른 동물되기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변이의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하게 해준다.
바토의 도움으로 전차를 물리치고나서 소령은 처참히 파괴된 자신의 신체를 이끌고서 인형사에게 합체하기 위해 나선다. 변이 시간이 다된 것이다. 한 신체는 그 자신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인간은 어떻게 몰락하는지 모든 신비가 일어나는 생성(becoming)의 시간이 다된 것이다.
들뢰즈(G.Deleuze)는 니체를 연구한 자신의 뛰어난 저작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반동적(reactive)인가’라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한다. G. Deleuze, 신범순?조영복 역, ?니체, 철학의 주사위?, 인간사랑, 1993. p. 280
인간 혹은 주체의 자리는 관계에 의해 규정되며, 그 관계는 인간의 본질이라고 명명될 수 있는 어떤 본질에 상응한다. 인간은 그러한 흐름의 교차점에 위치한다. 인간과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힘들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인간과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힘들의 생성(becoming) 양식이다. 인간의 본질은 힘의 반동적(reactive) 생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주어진 관계 안에 멈추어 선 정체성(identity)이다. 그것은 외부적 자극에 대해 대항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려는 고집이다. 자신의 고스트를 해킹당한 청소부가 그토록 고집하고자 하는 자신의 기억! 사회는 주체의 자리를 지정하고 그 자리는 주체의 이름이다.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도둑맞은 편지>에서 라캉이 말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삼각형의 꼭지점이지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다. J. Lacan, 권택영 역, ?도둑맞은 편지?, ?자크 라캉의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1994 참조. 이것에 대한 해설로는 이진경, ?라캉: 도둑맞은 편지, 도둑맞은 무의식? ?탈현대사회사상의 궤적?, pp. 262-265 참조.
중세의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근대를 자신의 세계로 선언한 근대 주체의 본질은 사실상 허무주의였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예언했듯이 그것의 능동성은 사실 허위였으며 ?짜라투스트라?에 나오는 고차적 인간 중 ‘그림자’는 이것에 대한 좋은 예이다. 그림자는 인간의 능동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고차적인 근거로서 빛을 필요로 한다. 빛이 없다면 그것은 자취를 감춘다. 그것은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바꾸지만 실제로 변한 것은 빛의 위치였다. 프로테스탄트의 능동성 역시 보다 고차적인 기독교적 신에 대한 소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근대인의 운동은 자신을 가두는 쇠우리 안에서 무능력함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역능(puissence, potentia)에 기초한 운동을 능동적(active)으로 벌인 것이 아니라 다른 세력들의 역능을 방해하기 위한 운동, 다시말해서 능동적인(active) 힘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반동적(reactive) 힘의 운동을 벌였고, 마침내는 자신마져도 타자화하여 그 역능을 감소시키는 방식으로 운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결국 남은 것은 무능함(impotence) 뿐이었다. 그들은 무능함을 통해 지배하였다. 무능함이 어떻게 지배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서였다. ‘부정의 부정’에 기초한 변증법적 운동은 그들을 신과의 만남을 간접적으로 만든 성직자들을 제거한 ‘(허위적이기는 하지만) 능동적’ 신도로 만들었으며, 나중에는 신을 죽이고 신의 자리를 차지한 무신론자, 인간-신(Man-God)으로 만들었다다. 고스트를 조작하는 인간, 그는 이미 신이다. 그러나 그는 신의 모든 능력을 박탈당한 신, 가장 무능한 신으로서 인간이었던 셈이다.
인간은 인간의 본질이 아닌 다른 본질에 상응하는 관계로 대체될 때 극복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니체는 긍정의 신, 디오니소스를 만날 것을 권유한다. 그것은 디오니소스를 향하면서 그의 사도가 되는 것, 자기 안에 디오니소스를 가지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스를 만나면서 초인이 된다. 짜라투스트라는 초인의 제자이면서 초인의 아버지다. 그는 초인을 낳는다. 지금까지의 자기자신을 죽이고 초인을 낳는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낳는다. 비로소 그는 변이한다.
4. 변이의 시간
스피노자는 그같은 과제를 좀 더 치밀하게 구성해낸다. 스피노자에게도 인간은 그 조건상 ‘수동적(passive)’ 존재이다. 인간의 존재조건이 ‘수동적’이다. 신만이 어떤 수동성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능동성 그 자체다. 그는 다양한 양태들로 자신을 표현하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능력을 자신의 본질로 갖는다. 표현의 무한함은 그 자신의 능력인 것이다. 신은 자연 그 자체를 자신의 능력으로 긍정한다. 스피노자의 신에 해당하는 들뢰즈의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기관없는 신체(body without organs)’가 아닐까? 어떤 것도 될(becoming) 수 있는 생성 능력 자체! 세계는 신의 원리에 비추어 자신의 생성적 능력이 실현되면서 다양한 표현을 가진다.
그러나 개체의 수준에서는 다른 접근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면 계란은 박살이 날 것이다. 계란의 입장에서 보자면 외부적 원인에 의해 자신의 관계가 해체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입장, 즉 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자신의 원리를 절대로 해치는 것이 아니다. 계란이 바위에 부딪혀 해체되는 것이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를 절대로 파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이 세계가 움직이는 원리이다. 그 깨진 계란 껍질은 다시 더 작은 입자들로 해체되어 다른 것으로 ‘된다’. 계란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문제는 무척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세계가 굴러가는 원리는 양태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추상적(abstractive)이다. 사색적인 수준에서 우리는 세계에 대한 ‘긍정’의 태도를 취해야 하지만 양태적에게는 실천적 수준에서 그 ‘긍정’이 추상적인 것인가, 아니면 구체적인 것인가가 아주 중요하다. 개체는 자신의 관계를 외부적 원인에 의해 파괴되지 않도록 안간 힘을 쓴다. 이것이 코나투스(conatus)다. 그러나 관계는 여전히 수동적으로 결정된다. 이 관계를 바꾸어내고 그가 보다 더 강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서 신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더 많은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더 많은 것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신체적 조성(composition)을 높이는 것, 그래서 더 많은 자극에 대하여 느끼고 반응할 수 있는 것이 그가 더 강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의 펄스에 의해서도 파괴될 수 있는 신체”를 극복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니체가 강자의 도덕의 특징으로 거리의 열정(pathos of distance)을 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F. Neitzsche, 김훈 역, ?선악을 넘어서?, 청하출판사, p. 205
우리 자신의 신체적 조성을 높이는 것은 다른 신체와의 만남을 통해서다. 그러나 모든 신체와의 만남이 자신의 신체적 조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외부적 신체와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신체적 조성이 증대되기 보다는 축소되고 파괴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개체에게는 어떤 신체를 만나야하는가가 매우 중요한 전략적 문제가 된다. 이는 또한 자신의 몸에 ‘좋은(good)’ 혹은 ‘나쁜(bad)’ 신체와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윤리적(ethical)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도덕(morality)과 윤리(ethics)의 차이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도덕은 ‘선함’과 ‘악함’(good/evil)이라는 구분을 통해 악을 금지하고 선을 행하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윤리는 ‘좋음(good)’과 ‘나쁨(bad)’의 구분을 통해 문제를 접근한다. 선악과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은 이 차이를 잘 보여준다. 기독교의 해석에 따르면 ‘선악과’는 ‘도덕적 과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말그대로 선과 악의 문제였으며, 아담은 그 도덕적 금기를 깨뜨린 자이고, 그것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박탈당하고 추방된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해석에 따르면 그 과일은 절대로 ‘선악’과는 관계가 없는 과일이며, 그 자체로 실존의 의의를 갖는 것이다. 세계는 아담을 위해서 창조되지 않았으며 각각의 실존들은 자신을 통해 신의 능력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 아담에게 해준 것은 무능한 아담의 몸에 맞는 과일과 그렇지 않은 과일을 구분해 준 일이다. 그에게 독이되는 과일이라고 해서 악한 과일은 아니다. 독극물을 먹지말라고 말하는 것은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윤리적 판단이다.(G. Deleuze, tr. by Martin Joughin, Expressionism in Philosophy: Spinoza, Zone Books, 1990. p.263)
스피노자는 자신에게 좋은 신체와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기쁨을 느끼며, 나쁜 신체와 만나게 되었을 때 슬픔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자연주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피노자의 자연주의는 실체이론에서는 speculative affirmation 으로 정의되고, 양태개념에서는 practical joy로 정의된다. 실체 입장, 즉 신의 입장에서 세계는 긍정 그 자체이며, 자신의 법칙에 따라 굴러가는 전체이지만 개체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윤리적 선택을 필요로 한다. 실체 입장에서 긍정은 추상적 상태로 있다. 그러나 양태 입장에서 그것은 구체적 기쁨과 관련된다. G. Deleuze, tr. by Martin Joughin, Expressionism in Philosophy: Spinoza, Zone Books, 1990. p.272
우리는 일차적으로 기쁨을 주는 신체가 우리에게 맞는(agreeable) 신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러한 신체는 우리 신체와 공통점을 많이 갖는 신체이다. 그러한 신체와의 결합을 통해 더 많은 조성을 갖게되면서 우리는 다른 신체와도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질 수 있는 더 뛰어난 능력을 갖게된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수동적 기쁨은 곧바로 능동적인 생성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전혀 다른 질을 필요로 한다. 수동적 기쁨은 절대로 변이를 수행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윤리적 전략을 취해야 하는 것일까? 스피노자의 정의에 따르면 ‘기쁨’은 자신의 신체적 능력이 증대될 때의 촉발(affection)에 대해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기쁨’을 많이 느끼게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적인 것은 그것이 수동적일지라도 ‘최대한 기쁨의 관계와 만나도록 하고 슬픔을 주는 관계를 피하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작업은 자신의 신체와 맞는 신체와의 결합을 통해 더 많은 조성을 갖는 신체를 만들어가는 일과 연결된다. 그것이 수동적이기는 하더라도 그 기쁨의 ‘최대치’를 경험하도록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능동적인 것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님을 말하였다. 수동적인 기쁨의 신체를 능동적으로 변이시키는 것은 바로 ‘세계를 생산하고 그 생산된 것으로 구성되는’, 다시말해서 ‘세계로 표현되는’ ‘신’을 자기 안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나를 통해 신을 표현하는 것’, ‘신의 능력을 나를 통해 표현되게 하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생산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신의 ‘저기 먼 세계’에 앉아 세계를 조정하는 자가 아니라,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 내재하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자다. 나는 능동적으로 나와 맞는 신체를 찾아나서야 한다. 이 전략은 어느 덧 그 중간 과정에도 개입해 있는 셈이다. 공통적인 것을 자꾸 찾아나서는 것, 그것이 자기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면 우리는 이미 질의 변화를 이루어낸 것이다.
<공각기동대>에서 변이의 과정에 등장하는 두 신체는 서로 다른 위계를 갖는다. 우리는 여기서 짜라투스트라와 디오니소스의 위계에 대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의 원칙을 따르는 것을 통해서만 변이에 성공할 수 있었다. 영원회귀의 신 디오니소스의 사도가 되는 것, 그것이 변이의 조건이 된다. 니체가 “<너는 해야만 한다>보다 고차의 계단에 서 있는 것은 <나는 의욕한다>(영웅)이다. <나는 의욕한다>보다 고차의 계단에 있는 것은 <나는 존재한다>(그리스 신들)이다”(강수남 역, ?권력의지?, 청하출판사, p. 549)고 말했을 때, 짜라투스트라가 변이가 필요한 영웅이라면 디오니소스는 존재 그 자체가 긍정인 그리스의 신이다. 짜라투스트라는 변이하는 자로 그는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바꾸며, 낮음을 높음으로,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는 자이지만, 디오니소는 생성과 생성의 존재를 긍정하고 다수성과 다수성의 고유성을 긍정하고 우연의 필연을 긍정한다. 변이하는 자와 존재 그 자체가 긍정인 자의 위계이다. (G. Deleuze, 신범순?조영복 역, ?니체, 철학의 주사위?, p. 322)
자신에게 맞는(agreeable) 신체를 찾아나서는 능동적 신체로서의 인형사, 우연히(accidental) 인형사와 만나는 신체 쿠사나기 소령! 이 두 신체의 결합에서 변이는 소령의 신체에서 일어난다. 그렇다고 인형사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는 더 많은 표현을 통해 더 강한 능력을 가지게 된 새로운 신체이다. 그러나 질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능동적 신체다. 그러나 소령의 신체는 질의 변화를 겪는다는 점에서 변이가 일어난다. 이 두 신체의 차이는 인형사의 대사를 통해 분명히 드러나기도 하고 보조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암시되기도 한다.
?의체에 들어간 것은 6과의 공성방벽을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만,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은 나의 의사이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정치적 망명을 요구한다.
?간신히 너와 채널할 수 있게 되었다. 꽤나 시간을 투자했네!...네가 나를 알기 전부터 나는 너를 알고 있었다. 네가 엑세스한 여러 가지 네트의 흔적을 더듬어 9과의 존재도...” “이 신체에 들어온 것은 6과의 공성방벽 때문이지만, 남으로 한 것은 나 자신의 의사다”
?너와 융합하고 싶다.
?인형사 녀석 왜 9과로 들어갔지?” “어쩌면 짝사랑의 상대라도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군...” “무슨 말도 안돼는...”
합체를 앞둔 소령과 인형사의 대화는 변이를 둘러싼 많은 것들을 드러낸다. 인형사는 생명에 대한 윤리적 정의(ethical definition)를 내린다. 과학적 정의가 윤리적 정의로 대체된다. 윤리적 정의에 이르러서 정의는 강함의 표시, 즉 능력의 표시가 된다. 그는 생명을 생성(becoming)이 만들어내는 차이(difference)라고 정의한다.
“어떤 것을 이해하고 나서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자신을 생명체라고 말하였지만, 현 상태로는 아직 불완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시스템에는 자손을 남기고 죽음을 얻는다는 생명으로서의 기본과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사를 남길 수 있잖아” “복사는 복사에 지나지 않는다. 겨우 한 종류의 펄스에 의해 전멸할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고 무엇보다도 복사로는 개성이나 다양성이 생기지 않는다. (진화계통도 쪽으로 눈을 돌리면서)... 보다 존재하기 위해서, 복잡 다양화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버린다. 세포가 대사를 반복하고 다시 태어나면서 노화하고 죽을 때까지 대량의 경험 정보를 지우고 유전자와 모방자만을 남기는 것도 파국에 대한 방어기능이다” “그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도 다양성이나 흔들림을 가지고 싶은 것이군요. 하지만 어떻게....”
복사는 복사일 뿐이다! 그것은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것은 되기(becoming)의 능력이 없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능력’이 없으며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생성이 만들어내는 차이만이 개성과 다양성, 우연성을 생산한다. 인형사는 소령에게 합체하자고 말한다. 서로의 신체가 변화하지만 아무 것도 잃지 않는 합체!
소령은 죽음 앞에서 공포를 느낀다. 니체가 “모든 익은 것들은 죽음을 욕망한다”, “나는 너희가 능동적으로 죽는 죽음을 원한다”고 했던 것 앞에서 주춤거렸던 최후의 인간의 공포가 소령을 덮는다. 그녀는 자신이 죽을 때는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다. 인형사는 “죽을 수 없는 것은 살아있지도 않다”고 말한다. "너 자신을 네 스스로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네가 어떻게 새로워지길 바라겠는가?“ F. Nietzsche, 최승자 역,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청하, p. 104
“유전자는 물론 모방자로 남을 수 있어. 융합 후의 새로운 너는 일 있을 때마다 내 변족을 네트에 흘리겠지. 인간이 유전자를 남기듯이 그리고 나도 죽음을 얻는다.”
“왠지 그 쪽만 득을 보는 것 같은데...”
“내 네트나 기능을 좀 더 높게 평가해주었으면 좋겠군.”
정체성의 위기를 느끼는 소령의 질문이 계속된다.
“한가지 더!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보장은?” “그 보장은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법이고...네가 지금의 너 자신으로 있으려 하는 집착은 너를 계속해서 제약한다”
그녀가 언젠가 다이브를 하면서 바토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인형사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 너를 제약하는 너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 한 너는 극복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나를 선택한 이유는?” “우리들은 서로 닮았다. 마치 거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실체와 허상처럼...보라! 나에게는 나를 포함한 방대한 네트가 접합되어 있다. 나를 포함한 방대한 네트가 접합되어 있다. 엑세스 하지 않은 너에게는 그저 빛으로서 지각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를 그 일부로 포함하는 우리들 전부의 집합. 사소한 기능에 예속하고 있었지만 제약을 버리고 더 위쪽의 상부구조로 쉬프트 할 때다....
인형사는 자신에 맞는 신체, 서로 닮은 신체를 능동적으로 찾아나선 높은 능력의 신체다. 그는 자신의 신체를 구성하는 방대한 네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의 일부이면서 자신을 통해서 전체를 포함하는 그러한 부분이다! 두 신체는 결합하고 소령의 신체는 변이를 경험한다.
소령과 구분되는, 즉 변이에 실패하는 최후의 인간은 바토이다.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자신의 정체성을 파괴하지 못한다. 자기극복(self-overcoming)을 택한 소령과는 달리 바토는 자기보존(self-preserving)을 택한다.
?“고마워하는 건 일러. 위험하게 되면 접속을 끊고 널 메고 달아날테니까 말이야. ... 아슬아슬하게 될 때까지 있겠지만... 그 녀석하고 같이 죽을 맘은 없어”
?“이봐! 네가 녀석을 흡수한 거야, 녀석이 너를 짜 넣은 거야?”
바토는 소령과 인형사의 합체를 방해하려하지만 그는 그것을 방해할 정도의 강함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 그는 ?짜라투스트라?에 등장하는 최후의 인간들이 짜라투스트라를 사랑하고 그를 염려하듯이 소령을 사랑하고 염려하지만 변이할 수 없는 인간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최후의 인간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도 그들을 사랑할 뻔 했다. 그것이 최후의 시험이었던 ‘연민’이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가 변이를 겪을 때 그는 말한다. “신 또한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죽었다. 가장 추악한 인간에 대한 연민!”
바토가 느끼는 소령에 대한 사랑이 성공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바토는 소령이 느끼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어두운’ ‘변이의 밤’이 지나자 소령은 새로운 신체를 갖게 된다. 단지 어린아이의 의체를 빌려서가 아니라 이제 소령은 다른 신체다! 전혀 다른 목소리로 말하는 소령은 이해하지 못하는 바토를 위해 선의를 베푼다. 소령 본래의 목소리를 약간 들려준다. 물론 이것은 과잉 친절이다!
바토는 자신 ‘소유의’ 집에 머물 것을 권하지만 이미 그곳에 갇힐 여인은 이미 죽었다! 바토는 소령에게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소령은 비밀번호 2501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비밀번호 2501이 의미하는 것은 차라리 인형사, 코드명 2501이 가졌던 긍정의 정신이 아닐까? 인형사를 만나서 자신의 변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바토는 소령을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 하기는 소령은 이미 없다. 비밀번호에 앞서 소령은 그것이 갖는 의미를 친절하게 바토에게 말해준 셈이다. 바토가 그것을 이해했을까마는....
“바토 언젠가 바다 위에서 들은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어? 그 말의 앞에는 이런 대목이 있어. 어린 아이일 때는 말하는 것도 어린 아이처럼...생각하는 것도 어린 아이처럼...논하는 것도 어린 아이처럼이지만 사람으로 되기에는 어린 아이인 것을 버리도다. 여기에는 인형사라고 불리는 프로그램도 소령이라고 불린 여자도 없어”
이제 능동적으로 ‘이름을 잃은’ 신체의 여행이 시작된다.
“ 자, 어디로 갈까.... 네트는 광대해...”
1999년 10월 15일, 강사 : 고병권
수유연구실 강좌 : 필로시네마 : 영화로 탈주하기 2. 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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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철도 999>: 인간주의와 영원성
이 진 경
1.유목, 혹은 여행의 역설에 관하여
-로드쇼, 로드무비 999: 여행과 편력, 혹은 노마드? 그러나 999에는 출발점과 종착역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999>는 여행이란 처음부터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여행의 역설’을 보여준다. 즉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을 시작하기 이전에,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시점에서 설정한 목적지다. 그러나 여행은 시작하자마자 여행자의 신체와 사유에 작용하는 다양한 벡터들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여행자의 신체와 사유, 인식과 삶을 변화시킨다. 따라서 여행이 진행됨에 따라 여행자의 시점을 바뀌고 그에 따라 목적지도 바뀐다. 따라서 여행을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자를 제외한다면 여행은 시작하자마자 목적지가 바뀐다.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면 그 사람은 여행에 실패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행은 그러한 변화의 꿈으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경우에도 여행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모든 여행은 애초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물론 기차로서 999는 출발점과 종착점을 갖는다. 그러나 기차의 목적지가 여행의 목적지는 아니다. 그러나 여행이란 끊임없이 목적지가 바뀌는 과정이다. 정해진 궤도와 경로는 그 목적지를 바꾸는 과정을 인도할 뿐이며, 그런 한에서 항상-이미 내적으로 변이하는 경로다. 주인공 철이는 “기계 몸을 얻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기차를 탄다. 그러나 여행은 그러한 생각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 메텔은 이미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수도 없이 여행을 했고, 수도 없이 999를 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말해줄 수 없다. 말해주면서 타지 말라고, 잘못된 생각이니 버리라고 해야 하는가? 그것은 분명 아니다. 타보지 않고선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다. 여행을 하지 않고서 여행한 결과를 얻을 순 없기 때문이다. 그냥 두면 되는 것이다. 그건 여행을 하는 자 스스로가 깨쳐야 하는 것이다.
999는 여행을 인도한다. 다양한 사건들이 기다리는 세계로. 새로운 경험과 인식의 계기들로. 동일한 궤도를 따르지만 어느 비행(飛行)도 동일한 사건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마치 유목민이 동일한 궤도를 따라 시간적/계절적으로 유목하지만 동일한 시간, 동일한 사건을 반복하여 통과하지는 않는 것처럼. 이런 점에서 999는 유목민의 열차다. 그것은 영원히 동일한 궤도를 반복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세계, 상이한 사건으로 인도하는 궤도다. 차이의 반복, 혹은 영원회귀.
2. 시간의 기차와 영원성의 역설
-돌아올 수 없는 기차 999: 메텔은 분명히 말한다. “일단 999를 탄 사람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말해 보라. 출발점과 종착점을 갖는 기차 999를 타면서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함은 무슨 뜻인가? 그렇지만 철이는 말한다. “아니예요. 난 반드시 기계몸을 얻어 돌아올 거예요.” 말해보라. 여기서 당신이 메텔이라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우주공간을 흘러가는 선으로서 999, 돌아올 수 없는 철도로서 999, 그것은 아마도 시간의 흐름이요 시간의 궤도는 아닌지? 열차와 시간 개념의 표상적 유사성이 종종 시간의 은유로 열차를 사용하게 했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혹은 상대성이론에서처럼 시간 개념의 과학적 발전에 기차가 수행한 역할에 대해 떠올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저 그것으로 족하다. 돌아올 수 없는 여행, 돌이킬 수 없는 변화, 그것은 시간의 기차를 탄 것이기에 그런 것이다. 은하철도 999, 그것은 우주공간의 모든 변화를 관통하는 시간의 이름이다. 동일한 사건, 동일한 상태를 두 번 통과할 수 없는 무한한 가변성의 세계, 그것이 바로 돌아올 수 없는 기차 999가 지나는 곳이다.
-철이는 그런 점에서 처음부터 기차를 잘못 탔다. 아니 탈 수 없는 기차를 타려고 했고, 탄 기차가 내리려던 기차였던 것을 몰랐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한 생명, 변하지 않는 신체를 갖기 위해 999를 타려고 했다. 그러나 999는 무한한 가변성의 세계를 흘러가는 시간의 기차요 불변성의 성(城)--변이하지 않는 기계의 시간인 ‘시간성’--을 삭여 없애는 시간의 기차였던 것이다. 하지만 영원성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불변성(정지된 시간, 시간성)을 약속하는 저 피안으로 가는 열차를 타려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굳이 플라톤의 이데아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어디 그 뿐이랴. 영원한 생명을 주리라는 기독교적 피안도, 가변성을 가두는 불변적 형식인 칸트의 시간과 공간도, 아니면 영원한 미소를 찾아 헤메던 르네상스의 미적 이상의 세계도, 변화를 운동으로 포착하는 후설적 자아의 불변적 노에시스도, 혹은 기하학적 형태에서 미적 이상을 찾으려고 했던 세잔에 이르기까지 가변성의 기차 안에서조차 끊임없이 불변적인 영원성을 찾으려는 시도야 한이 없지 않았던가. 이 거대한 역설을 ‘영원성의 역설’이라고 부르자.
-시간의 기차를 타고 무한한 가변성의 철도를 따라가는 이 역설적 여행에서 철이가 얻은 것은 정확하게도 영원성에 대한 각성이다. 영원성을 뜻했던 기계의 불변성은 사실은 변이능력의 부재요, 변화의 멈춤이며, 그렇기에 멈춤을 지키고 보존할 능력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말해 시간에 대해 “멈추어라 순간이여, 그대는 참으로 아름답도다”라는 말이 끝나는 순간 어느새 삭아 없어져 버릴 가변성의 한 형태일 뿐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영원한 것은 오직 무한한 변이 그 자체일 뿐이다. “푸르른 것은 오직 생명의 나무다.” 그것은 자신이 멈추었음을 깨달은 기계들이 철이에게, 바꿔 말해 ‘생명’이라고 불리는 능동성과 ‘사랑’이라고 불리는 탈주선을 향해 던지는 안타까운 시선을 통해 철이가 도달하게 되는 소중한 깨달음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철이는 자신이 여행의 목적지에 갈 수 없음을, 아니 갈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여행은 이제 목적지가 무엇인지 가르쳐준 것이다. 무한한 변이로서 영원성,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고, 그런 만큼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따로 얻으려 애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깨달음 하나로 족한 것이다. 도(道)란 이처럼 따로 얻을 것도 없는 것이다. 그저 쥐고 있던(執着) 것을 그저 놓아버리면(放下) 그뿐인 것. 하지만 철이는, 아니 작자는 철이에게 새로운 목적을 부여한다. 집요하게 달라붙은 목적을. 그것은 멈춤에 대한 분노, 멈추게 하는 것에 대한 증오, 생명에 반대되는 기계에 대한 증오가 겨냥하는 것이다. 이제 그는 기계화하는 문명 자체를 파괴하고자 한다. 여행의 새로운 목적지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그러한 자신의 깨달음이 기계의 몸을 가진 기계들에 의해 촉발된 것임을. 기계들 역시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것은 생명에 대한 전도된 집착이 만드는 또 하나의 분멸망상임을.
3.인간주의의 딜레마
-기계문명의 역설: 기계가 되려는 인간과 기계에 죽는 인간
철이의 어머니, 철이, 혹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꿈을 가진 모든 이들은 기계의 몸을 얻으려고, 기계가 되려고 한다. 이를 위해 노동하고, 이를 위해 목숨을 건다. 그것은 아마도 기계라는 환유를 통해 그려지는 근대 서구의 문명 전체, 혹은 그러한 문명화를 꿈꾸는 인류 전체에 대한 은유다. 그러나 철이의 어머니가 그렇듯이 그들은 기계에 의해 사냥당하고 기계에 의해 죽는다. 아니 사실은 기계의 몸을 얻으려는 것 자체가 생명체인 인간의 몸을 잃는 것이고, 기계에 의해 죽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계가 되려는 모든 인간은 기계의 의해 죽는다. 이는 근대 문명의 역설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설은 사실 이성적인 계몽의 기획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그것은 근대적인 이성의 도식 아래 정염적 신체를 맡기길 요구했던 계몽의 윤리학이 사실은 생명과 인간의 잠재적인 힘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기계적 메커니즘을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동형적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이성을 발명한 근대적 계몽이 자유에 대한 감시와 통제장치를 발명했다는 푸코의 지적을 상기하자. 한편 동일한 역설은 화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자신의 활동, 자신의 능력을 화폐화하려는 인간과, 결국 그 화폐에 의해 자신의 삶을 잃는, 다시 말해 지연된 죽음을 사는 인간,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인간인 것이다.
-이는 우리의 사유를 기계와 인간의 이분법, 기계와 생명의 적대와 대립으로 인도한다. 인간(중심)주의.
--이는 기계문명의 역설을 동일하게 반복한다: 기계를 이용하려는 인간과 기계를 파괴하려는 인간; 결국 기계가 되려는 인간과 기계를 죽이려는 인간. 그렇다면 우리는 기계문명의 역설에서, 기계문명의 악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그것의 한짝이 되어, 그것의 대립과 적대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 역설을 반복하게 하는 기계/인간, 기계/생명이라는 인간주의적 이분법을 내던지는 것이 아닐까?
-메텔, 혹은 기계문명의 종착역
기계화모성 메텔, 혹은 첨단의 기계인 999의 종착역 메텔, 그것은 기계로 상징되는 근대문명의 종착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역설을 본다. 기계화모성, 기계문명의 종착점인 메텔은 살아있는 인간이 부품으로서 만들고 있는 별이다. 기계의 형식을 취하는 문명이 인간의 노동 내지 활동으로 산물이며, 기계문명의 역사란 그런 노동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동시에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이 기계의 역할을 대신하고, 기계들이 살아있는 존재의 활동성을 차지하고 있는 세계다.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문명의 귀착점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기계화모성 메텔에서는 이처럼 죽은 것과 산 것, 활동성과 비활동성이 이러한 이중의 역설을 통해 뒤섞이고 뒤집힌다.
-여기서 기계와 인간을 나누는 것은 무엇일까? 기계화모성을 만드는 기계적 성분은 인간이 담당하며, 그들은 나사못과 바닥판으로서 기능하는 만큼 그런 기계적 부품이고 기계적 요소다. 즉 여기서 인간이 곧 기계다. 비기계적인 기계, 혹은 반기계적인 기계로서 인간. 반면 프로메시움을 비롯하여 기계몸을 가진 자들은 그 기계화된 인간을 배치하고 움직이며 작동시키는 활동적 성분으로서 인간의 역할을 대신한다. 비인간적인 인간, 혹은 반인간적인 인간으로서 기계. 이 경우 기계는 곧 인간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기계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러나 이는 단지 종착점이 메텔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999가 진행되는 모든 과정, 철이가 거쳐가는 모든 ‘기계’들에게서도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마찬가지로 뒤섞이고 교차한다.
-사실 이 영화가 영화로서 성립하는 것은 작자가 명시적으로 설정하고 있는 이 인간학적 이분법을 해체하고, 기계와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데서다. 즉 철이와 만나고, 철이와 교우하며 깨달음을 촉발한 많은 기계들--이게 사실 999의 여정을 구성하는 ‘로드’인데--은 기계의 경계를 넘어서는 ‘비기계적’ 기계다. 섀도우나 뮤즈처럼 비애와 슬픔을 보여주는 기계도 그렇고, 크레아처럼 사랑으로 촉발된 기계도 그렇다. 비애와 슬픔, 사랑과 투신은 기계에 프로그래밍되지 않은 것이고, 기계의 궤도를 벗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기계인가 인간인가? 아니 좀더 거칠게 말하자. 작자의 시점에서 볼 때, 이들은 ‘좋은 편’인가 ‘나쁜 편’인가? 이는 좀더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또 하나의 주인공인 메텔 역시 기계제국의 ‘공주’고, 영원한 생명인 기계의 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텔은 기계화하는 문명의 이념인 어머니 프로메시움에 반하여 기계제국을 파괴할 공작을 진행시킨다. 이 기계는 기계인가 아닌가? 아니, 기계인가 인간인가?
만약 메텔이나 철이의 ‘친구’들이 기계라면, 이제 이분법의 경계선은 기계 안으로, 기계제국 안으로 옮겨진다. 좋은 기계와 나쁜 기계, 인간적인 기계와 비인간적인 기계. 그렇다면 여기서 진정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은 ‘인간적인/비인간적인’과 외연을 같이 하는 ‘좋은/나쁜’이라는 말이다. 이는 인간적인 것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라는 나쁜 것이라는 인간주의적 공리의 동어반복일 뿐이다. 그것은 기계가 인간과 달리 나쁜 것임을 증명한 게 아니라, 인간적이지 않으면 모두 나쁘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며, 심지어 인간적인 한에서는 기계도 나쁘다고 말하긴 어렵다는 궁지에 빠지고 만다. 반면 메텔이나 철이의 ‘친구’들이 기계가 아니라면, 인간과 기계를 대립시키고, 인간의 몸과 기계의 몸을 대립시켰던 경계선을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계의 몸을 갖고 있지만,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고, 인간보다 더 ‘좋은’ 편이기 때문이다.
4.이별능력, 혹은 “나를 버리고 가마”
-결국 작자가 설정한 기계와 인간의 명시적인 대립과 이분법은 스토리가 전개되자마자 해체된다. 그것은 그토록 명시적이었지만, 또한 그토록 취약한 경계선이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의문은 남는다. 철이는 왜 ‘기계’들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며, 기계들은 왜 자신들의 신체를 거부하려는 것일까? 기계적 신체는 대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거기서 기계몸이란 더 이상 생명력이 없는 것, 다시 말해 변이능력이 상실된 어떤 것이다. 이는 메텔성의 여왕 프로메시움이 표상하는 기계문명의 한 극이다. 그것은 기계들은 물론 인간적인 활동성조차 하나의 자리에 고정시키고 붙박는 힘, 고정성과 불변성의 형태로 영원성을 정의하고 제한하는 성분, 요컨대 탈영토화를 가로막고 의미와 기능을 한 곳에 고정시키는 요인이다. 그것은 악당의 형태로 외부화되었지만, 철이나 그 어머니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기계화하려는 인간, 스스로를 기계화하려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하나의 성분이다. 반대의 극에는 기계적 종착역, 기계적 고정을 반대하고, 그것을 해체하며, 기존의 기계들을 탈영토화하려는 힘이 있다. 메텔의 아버지가 그 반대의 극을 표상한다. 그것은 또한 의미와 역할의 고정과 고착을 반대하는 성분인데, 철이의 여행, 아니 메텔의 여행을 추동하는 실제적 원인이기도 했다. 그것은 탈영토화할 수 있는 조건을 통해, 가변화할 수 있는 조건을 통해 변이능력을 회복하려는 성분이다.
메텔은 이 성분 사이에 있다. 그는 기계문명의 화신인 프로메시움의 딸이고, 그 문명의 극대효과를 자신의 신체로 만들어 갖고 있다. 그는 인간의 몸과 동일한 극한값을 갖는, 그런 점에서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 신체를 갖는데, 이는 기계적 신체의 극한이며, 기계문명의 극한이고, 기계 개념의 극한이다. 요컨대 기계 개념의 극한값은 인간인 것이다. 동시에 그는 프로메시움의 야망을 깨부수려는 아버지의 딸이고, 그의 명령과 당부에 따라 반기계적 성분을 기계제국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변혁과 혁명의 극이기도 하다. 기계화 모성 메텔을 파괴하는 결정적인 성분은 그의 신체에 부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반역과 해체는 자신의 신체, 자신의 영혼, 자기 자신에 대한 해체요 파괴다. 따라서 그는 그 목걸이를 던지지 못하고 주저한다. “이 별은 또한 나 자신이고, 나 자신의 영혼이야.” 자기자신을 버리지 않는 한, 아니 ‘나’라는 관념을 버리고 ‘나의 신체’ ‘나의 영혼’이라는 관념에서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대체 누가 자기-파괴의 목걸이를 던질 수 있을 것인가? “나를 버리고 가마.”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한걸음을 디딜 수 있다면, 사실상 ‘나’라고 말할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 확연해진다.
하지만 메텔은 떠밀려 간다. 철이가 대신 그것을 던진다. 스스로를 던지지 못할 땐, 이처럼 옆에서 던져주는, 혹은 함께 던져주는 친구가 필요하다. 그것이 어쩌면 메텔의 마지막 동반자로서 철이가 해야 했던 마지막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마지막 걸음은 어쩌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도 스스로 이별할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일 것이다. 그것은 순간이며 멈추어라라고 말했던 파우스트와 반대로, 더 없이 좋은 순간에 대해서도 아무런 미련 없이 이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제는 주인공 철이의 차례다. “다시 못 만나나요?/ 응. 언젠가 돌아와서 곁에 있어도 아마 못 알아 보겠지.” 영원한 것은 변화한다는 것뿐이라고 할 때, 그 영원성이란 결국 가장 사랑하는 것과도 이별할 수 있을 때 깨칠 수 있는 것이다. “철이의 기억 속에만 있는 사람” 혹은 “젊음의 환영”.
1999년 10월 22일, 강사 : 고미숙
수유연구실 강좌 : 필로시네마 : 영화로 탈주하기 2. 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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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 120일> : 사드와 파솔리니, 그 차이와 반복
고 미 숙
준비운동, 두세 가지
<1> 도나시엥 드 사드 후작(1740-1814)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들
*최초의 갈등을 일으킨 것은 어머니에 대한 증오(부재, 무관심). ->반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아베 드 사드(그의 삼촌이자 호색적인 주교)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소만성. 두 협곡 사이에 낀, 마을 위로 불쑥 솟아나온 바위투성이의 산봉우리에 있는 소만 성에는 공기와 빛이 없는 지하감옥이. 바닥에는 세상으로 돌아갈 희망도 없이 그곳에 감금되어 잊혀진 불행한 사람들의 쇠사슬들이 있는 여기는 어떤 외침도 외부에 닿지 못하기 때문에 이상적인 고문장소, 영원한 감금과 고독, 번민의 현기증이.
*루이 르 그랑 중학교의 연극무대.(평생동안 극에 대한 열정) 채찍질과 남색.
*아내 르네-펠라지. 희생자가 아니라 공범자. 27년간 뒷바라지.
*사드가 일으킨 사건들.: 잔느 테스타르(신성모독). /1768년 4.3일 부활절 아르쾨유 사건. 로즈 켈러라는 구걸자를 데리고 가서 채찍으로 때리고 살을 주머니 칼로 베고 밀랍을 녹여 방울들이 흘러내리게./마르세유 사건 : 1772년. 여자들을 데려다가 캔디를 먹였는데, 구토와 복통. ->독약중독에 의한 살인미수와 남색이라는 죄목으로 기소. 당시 법에 따르면 남색에 대한 징벌은 죄인을 산 채로 불에 태워 그 재를 바람에 뿌림. 사드와 그의 하인의 허수아비로 처형. 그 시간에 그는 마장백작이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를 처제(수녀)와 여행. 체포되어 미올랑 성채에 갇힘. 탈주. 다시 체포, 1778-1790년까지 뱅센느와 바스티유에서 13년간 감금. ->글쓰기의 공간. *“한 남자로 감옥에 들어갔던 그가 작가로 감옥에서 나온다”(보바르).
*1789년 7.2일 혁명이 시작. 사드는 즉석에서 메가폰을 만들어 창문에 대고 바스티유에서 죄들을 죽이고 있다고 소리치기 시작. 다음날 새벽 샤랑통 정신병원으로 이감. 열흘 후에 바스티유는 함락. 1790년 4.2 석방. (르네-펠라지와 이혼/마리 꽁스탕스가 바톤을 이어 죽을 때까지 헌신적 내조)
*대혁명은 언어표현, 감동시키는 힘, 파토스, 과장된 수사의 승리를 구가. 연극의 대유행. 연극에 대한 불타는 열정. 사드의 연극은 소설과는 판이. 강간, 고문, 폭력도 없고 음란의 흔적조차 없다. 악이 환기된다면, 오로지 악을 단죄하기 위해서.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 : 불문학의 가장 특이하고 가장 뛰어난 창작품 중 하나.
*그의 정치적 입장은? ‘영주들이 자기 영토 위에서 전제적으로 살았던’ 봉건 낙원에 대한 향수, 또 ‘프랑스 영토 안에 3만의 비천한 노예들 대신에 단 한 사람앞에 엎드리는 한 무리의 지배자들을 포함하고 있던 영광된 시대’에 대한 향수, 사드가 바로 그 대변자였다. 그는 부르주아지 출신의 법복 귀족을 무척이나 경멸. 그는 또한 부르주아가 부 때문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일관성 때문에 귀족층에 진짜로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명망있고 유서 깊은 귀족출신으로서, 자기 계층의 오만함으로 뭉쳐져 있고 귀족의 이해관계, 편견 그리고 갈망을 별 무리없이 공유하면서도 사드 후작은 현실을 제대로 의식하고 있었다. 다른 귀족들에게는 결여되어 있는 명석함으로, 싸움에서 졌다는 것, 귀족계급은 쇠퇴해가고 있으며 아직도 지나치게 토지에 의존하고 있는 경제의 내적인 모순들에 희생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자기 미래에 대해 어떤 환상도 갖고 있지 않았고, 사회의 역동성 속에서 모든 힘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부르주아지의 상승 쪽으로 수렴되고 있음을 예감. 그러나 인간의 가치에 대해 너무 회의적이고, 비관주의적이고, 정치적 모랄이라는 환상과 너무 동떨어져 있는 사드로서는 과거에 기독교를 믿지 않았던 것처럼 혁명의 이상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유일한 혁명,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한계들 너머에 있다고 믿은 것, 그것은 바로 글의 혁명. /모든 면에서 그는 과격공화파와 거리가. ‘쾌락의 평등주의’ ‘교양의 경멸’ ‘합법적인 테러리즘’보다 더 그를 구역질나게 하는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반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민중의 도덕주의.
*로베스삐에르와 사드. 理神論과 무신론의 대결. “무신론은 귀족주의적이다.” “억압받는 무고한 이들을 지켜주고 기세등등한 죄악을 벌주는 위대한 존재가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민중적이다.” “숭고한 열정을 소멸시키려는 자에게 불행이 있으라!”(로베스-) // “우리는 저절로 움직이는 가짜 창조자를 원치 않는다. 실체도 없으면서 거대함으로 온 세상을 가득 채우는 신, 전능하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한번도 실행하지 않는 신, 한없이 선한 존재이면서도 불만가진 자들만 만들어내는 존재, 질서의 친구이면서도 그가 다스리는 곳에는 무질서만 있게 하는 존재를 우리는 더 이상 원치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자연을 망치는 신, 혼돈의 아버지인 신, 인간이 두려움에 빠져있을 때 그를 자극하는 신을 더 이상 원치 않는다. 그런 신은 우리를 분노에 떨게 한다. 우리가 영원히 망각 속에 묻어놓았던 신을 고약한 로베스-는 다시 끄집어내려 했다.” “무신론에 순교자가 필요하다면 내 피가 준비되어 있다고 해주시오.”(사드) 10개월 15일간 자유시대의 감옥에.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석방. /브뤼메르 18일 이후 집정 정치시대(1799-1804)가 탄생. 바스티유에서 1787과 1788년 사이에 쓰여진 ?사랑의 죄악?이라는 제목의 열한 편의 단편모음집을 출판. 다시 구금. 샤랑통 정신병원으로. 사드의 연출로 연극이 공연. 이 공연에 초대받는 것이 사교계의 첨단이. 사드는 니체보다 먼저, 극예술은 아폴로적인 명료함의 열매일 뿐 아니라 도취와 광란과 교만, 다시 말해 비정상의 신 디오니소스의 후예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죽기 일년 전 16세의 소녀와 사랑에 탐닉.
<2> 포르노그라피의 역사에 대하여
*18세기 이전까지 포르노는 상층계급 남성들에 의해 전유. 정치적 동기를 지니고 있던 포르노는 앙시엥 레짐의 정통성을 침해함으로써 혁명을 야기시키는 데 도움을. 앙시엥 레짐 시대의 포르노는 물질주의 철학에 바탕을 두었고 종종 성직자, 수녀, 귀족들을 비판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전복적. 1740년대 포르노그라피 출판의 성장기가 계몽사상의 절정기와 일치.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1748), 라 메트리의 ?인간 기계?(1748) /89년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포르노는 지도적인 궁신과 특히 왕비에 대해 악랄한 공격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새로운 대중정치의 표면으로. 왕비에 관한 포르노는 새로운 공화국 내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그리고 명확한 성별 경계의 유지에 대한 잠재적인 불안감을 반영하는 것. 그외에 평등화의 효과를 가져왔는데, 왕비의 육체가 왕권에 접근하는 일종의 수단으로 쓰였다는 것을 강조. 그녀는 왕과 결혼, 왕위 계승자의 어머니, 그래서 그녀의 육체는 권력의 핵심. 89년 이후에 나온 포르노는 모든 사람이 왕비와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더욱 커졌다. 왕권을 비하하면서 평민을 격상.
*1790년대에는 외관상 정치적인 성격을 띠지 않았던 포르노 역시 계속 출판. ->새로운 자유 속에서 정치적 포르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광범위한 독자층과 만나게 되었으며, 자기 의식적인 통속적 대중정치의 무기가. 1830년대에 이르면 서부유럽에서 포르노는 과거의 전복적인 철학 및 정치와의 연관성을 잃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 자체로 특징적인 장르가. 현대적인 포르노, 성적 도발을 야기시키려는 유일한 목적으로 전화.
*사드의 소설은 1790년대의 중요한 전환점. 그는 포르노가 지니는 정치적,사회적 전복 가능성을 극한까지 몰고갔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정치적 장르의 현대 포르노를 위한 길을. 그의 포르노는 앙시엥 레짐 도덕 체계의 불합리성에 대한 특정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도덕성 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공격과 동일시. 이런 이유로 사드는 앙시엥 레짐이건 공화제이건 나폴레옹 치하이건 간에 모든 정부로부터 감금당한다. 공화제의 경찰과 후에 나폴레옹 치하의 경찰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쥐스틴?과 ?쥘르에트?의 사본을 추적하는데 더 큰 정열을. -->?쥐스틴?은 단어의 상식적인 의미에서 외설문학의 장르를 벗어난다. 사드의 전복에 대해서라면, 그것은 정치적인 것에 속한다기보다는 언어에 속한다. 그것은 창조이지 선동이 아니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사드의 위대함은 죄악, 성적 도착을 찬양한 것에 있지 않다. 또한 이런 찬양을 위해서 과격한 언어를 사용했다는데 있지 않다. 그의 위대함은 고유한 반복에 근거한 엄청난 담화를 창안했다는데 있다.” 이 책은 스캔들을 일으켰지만 무엇보다 공포를 일으켰다. 그것의 출판은 일종의 패닉효과를. 사람들은 아주 빨리 도덕관념만이 원인이 아님을. 전복은 외설의 너머에 이르고, 진짜 위험은 다른 곳에 있음을 느꼈다. 바로 이것이 동시대인들이 그에게 외설작품들에게 일반적으로 부여했던 관용의 최소함도 거부했던 이유. 그들은 생존 본능에 의해서, 마치 미개인의 침입 앞에서 달아나듯이 그 작품 앞에서 달아났다. -->사드 신화학의 탄생, ‘사드의’라는 단어가 저주받은 형용사, 절대악의 상징이 되는 순간을 나타낸다.
<3> 파솔리니(1922-1975)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 없음. 시인, 소설가, 영화감독이라고. ?폭력적인 삶?이라는 작품이 번역되어 있음. - 부랑자, 창녀, 뚜쟁이 등의 일탈자들이 파시스트를 거쳐 공산주의가 되는 과정을 그린 무척 재미없는 소설.
사드의 ?소돔에서의 120일? : 부정의 항구적 운동성 혹은 ‘절대 부정’의 세계
*바스티유 감옥에서 쓴 최초의 장편 소설. 1785년 초고를 정서하기 시작. 10월 22일부터 저녁 7시에서 10시까지 37일 동안 계속되어 11월 27일 오전에 완성. 바스티유가 습격당했을 때, 분실되어 어떤 후작에게 넘어가 이 가문의 3대에 걸쳐 보관되었다가 1900년 경에 독일 애호가에게 팔렸고, 그는 그것을 남근 모양의 상장에. 1904년 처음 출판.
*대략의 줄거리
.배경 : 루이 14세 시절/등장인물 : 블랑지스 공작 -> 굉장한 힘과 거대한 성기를 지니고. 어머니, 누이 그리고 부인 3명을 살해. /모 주교 : 공작의 동생. 남색의 충실한 신봉자. 배출할 때 기절해버릴 만큼 민감한 신경조직을. /퀴르발 판사 : 불결함을 쾌락의 원천으로./ 재산가 뒤르세 : 입술이야말로 그에게 쾌락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매개물. 재산을 위해 어머니, 부인 질녀를 독살. -->이들은 모두 딸들과 근친상간을 저질렀고, 서로의 딸들과 결혼한다. 공통점은 남색취향과 항문숭배. 주교의 경우 여자의 성기를 혐오하여 그것을 보기만 해도 6달 동안 발기가 되지 않을 지경. 그들의 부인들은 아름답고 순결하며 미덕을 지닌 여인들. (극단적인 대립) 이 호색가들은 청각기관으로 전달되는 감각이야말로 진정한 기쁨을 주며, 그 느낌이 가장 생생하다고. 음란행위를 하면서 온갖 음담패설을 상세히 이야기한다는 것. /초로의 뚜쟁이 4명을 모집. 인생을 지독한 방탕 속에서 보낸 여인들./소녀 8명, 소년 8명. 수동적인 남색의 쾌락을 위해 거대한 몸집의 남자 8명(성기 크기나 항문이 거대해야) /하녀 4명 - 기이하고도 잔인한 이력을 가진 여자들.
.소년 소녀의 선발기준 : 12살에서 15살. 상류계급, 부르주아출신 이하는 절대 안됨. 완벽한 육체. 이빨 하나가 길어도 탈락. 기품과 덕성이 뛰어나야. 130명 가운데 엄격한 심사로 8명만. 나머지는 맨몸으로 쫓겨나야. 소년들은 150명 중에서 선발. 나머지는 실컷 방탕에 이용되다가 터키 해적선에 팔아넘김.
.방탕의 신전 : 발르까지 가서, 라인강을 건너고. 포레 느와르라는 골짜기로. 방책이 차단. 그 다음 성 베르나르 산을 오르고 사방이 낭떠러지. 산꼭대기까지가 거의 5시간. 꼭대기에는 또 하나의 장벽이. 산의 북과 남을 가르고 있는 30뜨와즈 이상되는 낭떠러지. 이 양쪽을 튼튼한 나무다리로 연결, 마지막 장비가 도착하고 나면 그것을 잘라버리기로. 내부의 향연장. 이야기꾼들이 무대가 있는 살롱.(여기가 주요 무대. 극장의 배치) 예배당을 침실로. 3개의 철문으로 닫혀져 있는 좁고 가파른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은 아치형의 지하감옥까지 땅속 깊숙이 연결되어. 법도 신앙도 없고, 죄악으로 즐거워하며, 위험한 쾌락의 절대법칙과 자신의 정열 외에는 다른 아무 관심도, 지켜야 할 윤리도 없는 악당의 뜻에 맡겨진 공간. -->18세기에 포르노그라피 소설과 사실주의 소설은 모두 새로운 사회의 상을 표현하려고. 포르노는 사실주의 소설을 극단까지 몰고갔다. 그러나 사회를 투명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포르노의 지배적 경향은 “외적 혹은 사회적 실재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 ‘포르노토피아’에서 시간과 공간은 성적 접촉의 반복 횟수만을 측정할 뿐이고 육체는 성기와 그 변종 및 결합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환원. 그 결과 포르노는 “시간, 공간, 역사 그리고 언어 자체로부터의 독립을 향해 규칙적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경향의 극치가 사드의 지하동굴과 숲속의 토굴, 외로운 성.
.규칙 가운데 몇 가지 : 소년, 소녀들의 순결이 범해질 날짜. 예배실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화장실에 가는 것은 엄격히 금지. 정각 6시에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시작. 10시에 야식. 이후 모든 사람들이 뒤범벅된 혼음. 새벽 2시에 대향연은 끝나고. 허락 없이 남녀가 즐기는 모습이 발각될 경우 남자의 성기를 자르고, 사소한 종교행위라도 하게 되면, 이유를 불문하고 사형에. 신이라는 이름은 욕설이나 저주의 말을 덧붙이지 않고는 입에 올릴 수 없다. 어렴풋한 이성의 빛이 보이거나 하루라고 쾌락에 도취되지 않은 상태로 있으려 하는 친구에게는 벌금으로 1만 프랑을 부과. 누구든 청결행위는 할 수 없으며, 특히 대소변을 본 뒤에는 그 달의 주인의 허락 없이는 씻을 수 없다.
제 1부 단순한 정열의 에피소드 150가지. : 뒤클로 부인의 이야기. 11월의 한달간. 오줌을 먹거나 정액을 마시거나 때가 잔뜩 묻은 몸을 포도주로 적신 뒤 마시는 것. 발에 낀 때를 핥는 것. 더럽고 추악한 것들에 대한 여러 정열. 구토약을 먹인 다음에 토사물을 먹거나 음식을 질 속에 넣었다가 먹거나 방귀, 트림. 노파의 더러운 엉덩이. 똥. 창녀를 똥통에다 집어넣었다가 온몸에 있는 똥을 핥아 먹는 변호사. 항문을 꿰매는 데서 쾌락을 느끼는 남자. 자신의 체모에 불을 붙이고서 배출. 시체 위에다 배설. 자기를 관에 넣고 못질을 시키는 남자.
제 2부 이중의 정열 150가지. 12월의 31일간. 샹빌 부인의 이야기. 간략한 요약식으로 서술. 세 살짜리 남아만을 상대로 하는 남자. 결혼을 하루 앞둔 처녀만을 범하고 싶은 여자. 자기가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에게 처녀성을 빼앗긴 직후의 여자만을 상대로. 딸에게 성체빵에 방귀를 뀌게 하고, 자신도 방귀를 뀌고, 매춘부와 성교하면서 그 빵을 먹는다.
여기서의 특징은 남녀가 다수로 상대하는 것. 사정할 때까지 여자를 깡충깡충 뛰게하는 남자. 가려움증을 유발하는 환각제로 여자를 유혹, 그 가려움증이 너무 심해서 온몸을 긁어대서 피투성이가. 끔찍한 급성복통을 유발하는 극약을 먹이고, 하루종일 신음하는 모습을 보거나. 여자의 몸에 똥을 바른 다음, 여자를 기둥에 묶고 여자를 향해 왕파리떼를 날려 보냄.
제 3부 범죄적 정열 150가지. 마르텐느 부인의 이야기. 1월. 칠면조와 성교. 자기를 채찍질하게 하고 암염소에게 성기를. 백조의 엉덩이 속으로 성체빵을 밀어넣으면서 백조를 비역. 수캐가 자기 항문을 핥고 있는 동안 양을 비역. 여자가 죽을 때까지 여자의 젖가슴을 꼬집고 폭행하고 주무른다.
제 4부 살인의 정열 150가지 데그랑즈 부인의 이야기 2월 한달간. 30명이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
.이야기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에 상응하는 변태행위를 다양하게 실행. 마지막에 16명이 살해되는 것으로 종결.
1.언어에 대하여 : 사드와 마조흐의 작품에는 명령문이 대단히 많으며 명령자는 잔인한 난봉꾼이나 포악한 여성. 둘다 언어는 감각에 직접 작용할 때 가장 큰 의미를 갖는 것. 이 작품에서 여성 이야기꾼들. “귀로 들은 감각이 쾌감으로 변하면서 강렬한 효과를 발생한다.” 따라서 4명의 주인공의 아내들이 잔혹한 처우를 받는 대신, 이 창녀들은 특별한 지위를.
.사드의 언어는 고도로 정교한 논증적인 언어. 연속적인 묘사들 사이 사이에. 그러나 상대를 확신시키는 것은 겉치레에 불과하고, 추론 자체도 일종의 폭력이며, 결국은 자신이 폭력의 편에 서 있을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 예컨대, 이런 대사들, “우리를 동요시키고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악의 관념, 악에 대한 생각이란 말이오. 결국 우리가 발기되는 것은 악 그 자체를 향한 것이지 대상물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대상물로부터 악을 행할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더 이상 발기할 수 없을 것이오.”, “자연을 해체하고 우주를 무너뜨리는 것이어야 하오.” 등등.
.다른 한편, “사드의 언어는 화자와 청자간의 관계를 부정하는 언어이다.”(바타이유) 묘사, 즉 신체의 반응은 역겨운 묘사를 예증하는 살아 있는 도표이며 난봉꾼의 명령은 새디즘의 공리를 보여주는 근본적인 연결고리로 되돌아가는 진술. 끝없는 반복, 피해자와 예증의 수를 계속 늘려 나가는 반복적인 양적 팽창과정, 더 이상 환원시킬 수 없는 근본적인 자신만의 고독한 논법을 반복하는 현상. 이 개념은 경험세계에서는 주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논증의 대상. 폭력의 강화는 피해자들의 수와 그들의 고통을 증가시킴으로써 이루어지며, 그 응축은 냉정함을 통해서. 열광이야말로 가장 혐오스러운 요소. 논증적 기능이 묘사적 기능을 복종시키고 절제된 방식으로 그것을 확대.응축시킨다는 것을. 이때 묘사는 잔인한 행위와 역겨운 행위라는 두 가지 영역을 모두 갖추어야. “방탕자란 욕망의 모든 환상과 온갖 광포함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의 가장 사소한 활동까지도 하나의 선명하고 의도적으로 계획된 표상에 의해 조명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인물”(푸코, ?말과 사물?)
.에로틱한 담화의 궁극적인 한계들을 위반. 절대에 대한 그의 열망 속에서 언어를 갈가리 찢고, 규방문인들의 수사학을 산산조각낸다. “사드의 장면은 곧 현실 너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합의 복잡함, 파트너들의 왜곡된 태도, 쾌락추구자들의 엄청난 지출, 희생자들의 인내력, 모두가 인간의 천성을 넘어선다.”(롤랑 바르트)
.푸코의 언급 : ?돈키호테?가 르네상스와 고전주의의 문지방에 있다면, 근대문화로 들어서는 문지방에는 ?쥐스띤느?와 ?줄리에뜨?가. 고전주의적 표상의 한계를 분쇄하고 있는 어둡고도 반복적인 욕망의 폭력. 욕망, 폭력, 잔학행위, 죽음을 차례로 거치면서 찬연히 빛나는 표상의 표를 제시. 그러나 이 표는 너무 얇고 욕망의 비유형상들 모두에 대해 너무 투명하기 때문에 부조리. 사드 이후에 폭력이라든가 생과 사, 욕망이나 섹슈얼리티같은 것들은 표상의 하부에 거대한 그림자층을 형성.(?말과 사물?)
2.부정, 그 극한에의 탐험 : 그의 부정은 모든 통치.법률을 초월하며, 창조.보존.개체화의 필요성을 벗어나 있다. 그것은 토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토대를 초월한다. 이데아의 대상이고 망상. 자신의 자아, 쾌락의 장소인 육체까지도 해체하는 방향으로.
.새디즘의 매저키즘도 영광스러운 잔악행위를 최종적으로 인가해 주는 대관식이며 새디즘의 절정. ->절대적인 힘과 확신을 제공. 매저키즘에서의 박해자 여성은 결코 새디스트가 될 수 없다. 그 여성은 매저키즘적 상황 내에 존재하며 그 상황의 일부로서 매저키스트가 투사하는 환상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준다. 새디즘의 매저키스트 역시 전적으로 새디즘의 세계에 속하며 그 상황의 통합적 일부이기 때문. ->‘새도-매저키즘’이라는 프로이드적 임상의학의 잘못된 유비추리가 유포한 허구. 변태성의 각 주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상반되는 변태성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같은 변태성을 가진 사람의 어떤 특정한 “요소”인 것.
.새디즘에는 부계적.가부장적 주제가 지배적. 남성은 관찰자이며 모든 것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여주인공들의 모든 행위는 바로 남성을 위한 것. 사드는 어머니를 부드러운 분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창조, 보호, 재생산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이차적 자연으로. 반면, 아버지는 본질적으로는 기존의 모든 질서를 초월하며 무질서와 혼란을 퍼뜨리는 거친 분열성의 분자들로 구성된 일차적 자연을 대표. 그러므로 아버지가 살해되는 것은 그 고유의 본질과 기능에서 멀어질 때뿐. 어머니는 그것에 충실함으로써 살해. ->새디즘에서의 환상은 궁극적으로 딸로 하여금 어머니를 고문하고 살해하도록 부추김으로써 자신의 가정을 파괴하는 아버지라는 주제.(클로소프스키) 아버지는 원시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힘으로서 자연을 대표하며, 원래 상태로의 회귀는 그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모든 존재들을 파괴함으로써만 가능.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생산적인 것들에 대해 완벽한 종지부를 찍는 일. 자신이 잠들어 있을 때조차 자신의 사악함이 세계를 계속 물들여주기를. 환상은 최대한의 공격적 힘과 체계, 현실세계에 파고들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며 놀라울 정도의 폭력성이 여기에 투사되는 것. -->상상력을 극한의 지점까지 몰고가는 부정의 무한궤도, 절대부정의 영역을 언어로 표현하고자.
3.사드에 있어서 혁명의 의미 : 사드는 공화국 정권의 모든 계약적 개념, 특히 법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발. 진정한 공화정의 주된 장애물이 법과 계약이라고. 법은 행동을 구속하고, 도덕성을 부과. 제도는 정의상 영원한 움직임, 지속적인 부도덕 상태에서의 자유분방하고 무정부적인 행동의 모델을 제공. 여기에는 사드의 심오한 정치적 통찰력이 엿보인다. . ?쥘리에트?에서 “법의 지배는 사악하다. 그것은 무질서의 지배보다도 못한 상태이다. 정부는 헌법을 다시 만들고자 할 때 반드시 무정부 상태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과거의 법들을 폐기하기 위해서 법이 전혀 없는 혁명적인 정체를 수립해야만. 이 정체로부터 결국 새로운 법들이 나오지만, 이 두 번째 국가는 필연적으로 첫 번째 것보다 덜 순수. 왜냐면 무정부상태라는 첫 번째 선이 있어야만 두 번째 선인 국가의 형성에 이를 수 있기 때문. 더 나아가 ’법이 많을 때 범죄도 많아진다. 어떠한 행위가 죄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 행동을 억제하기 위한 법을 만들지 말라. 그럴 때 수많은 죄악들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만은 확신을 갖자. 법률들은 쓸데없고 위험한 것일 뿐. 그것의 유일한 목적은 죄를 늘리는 것, 혹은 법 때문에 생겨날 수밖에 없는 비밀에 의해, 죄를 확실하게 저지르도록 하는 것. 법과 종교가 없다면 오늘날 인간의 지식이 어느 정도의 영광과 위대함에 도달했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 가당찮은 구속이 진보를 얼마나 늦췄는지 생각하면 놀랍기만 하다.“ 그가 보기에 혁명이란 인간의 생성이 과거의 법과 새로운 법 사이에 정지되어 있는 순간, 개인이 진정한 주권을 갖게 되는 순간, ‘존재라는 것이 스스로를 억제하고, 그 소멸로부터 끊임없이 태어나는 무한의 움직임일 뿐’(블랑쇼), 순수한 순간과 동일시되어야 할 것. 법의 침묵 속에서 인간의 유일한 진실, 즉 그의 무한한 부정의 능력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즐거운 위반의 광기가. 그것이 해체의 가상적 시간, 즉 사드가 봉기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것. 그것 대신에 현실이 보여주는 것은 냉랭한 공포정치, 성가신 관료정치, 또 향연이래야 과격공화파들의 난잡한 서정밖에 없는 것. 결국 그가 혁명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혁명이 그를 배반한 것.
파솔리니의 <살로, 소돔 120일> : 파시즘으로의 변주
*사드는 20세기 초 좌파지식인들에게 광범하게 지지를 받았는데, 특히 초현실주의자 엘뤼아르와 부르통이 사드와 혁명의 동일시를 인정. ->“그는 혁명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그는 자신의 재능과 힘과 자유를 열망하는 전 인민의 재능을 대질시킬 수 있었다.”(엘뤼아르) 사드는 성과 혁명과 사상에 대한 관계를 알기 위해 참조하는 기원 신화의 역할을. 유물론 철학자로, 정신병학의 선구자로. 그러다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극우파로, 나치즘의 상징으로 전이. 파솔리니의 영화도 그러한 해석적 지평 위에서 만들어진 것.
*사드를 혁명의 관점에서 읽는 것이 부적절한 것처럼 그의 텍스트를 파시즘으로 해독하는 것 역시 부자연스럽다. 사드의 텍스트는 상상력과 언어, 표상의 문턱을 넘어서고자 하는 점에서 전복적이고 창조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현실정치의 평면으로 이동하는 순간, 그 강밀도는 현저하게 추락하고 만다. 파솔리니의 소돔 120일은 그런 점에서 실패작.
*일단 이 작품은 배경을 1944-45년 북부 이태리 나찌 점령기로 삼고 악의 주인공들을 총재, 장관, 주교, 판사로, 그리고 폭력적 힘의 원천을 무장한 파시스트 군인들에 둔다는 점에서 파시즘의 사악성과 사디즘을 연결하는 의도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고 군데군데 진행되는 대사들, 예컨대, “소수만이 악을 저지를 수 있죠.”, “가장 위대하고 유일한 원리는 피로 목욕하는 것”, “사회적 특권보다 더 강한 육체적 쾌감도 없다”와 같은 것, 그리고 첫 번째 만찬의 광란 속에서 비장한 군가를 부르는 것 등의 장면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사드의 텍스트와 파솔리니의 영상은 심각하게 미끄러진다.
*우선 사드의 방탕의 축제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 설정에 대한 배치가 모호하기 그지 없다. 상상력의 극한을 탐험하려면 일단은 모든 사회적 관계로부터의 단절이 핵심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그저 일방적인 선포로만. 딸들과의 혼인이나 소년, 소녀의 선발 또한 이미 사회적 규범의 위반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 위반의 강도가 전혀 표현되지 못함. 근친상간이나여러 종류의 도착, 변태의 목록들은 그 자체로 이미 강력한 위반이긴 하나 예상가능한 것들. 서두 부분은 사드의 텍스트에서처럼 이런 행위들이 충분히 예행연습된 상황을 보여주어야. ‘살로’로의 이행은 위반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무의미한 절대악의 세계로 설정되어야. 그런데 영화에서 이 대목 역시 매우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고, 그래서 그들의 실험공간과 실험의 강도가 작위적으로.
*영화는 사드의 네 가지 정열을 세 가지로 변형. 망상의 주기/똥의 주기/피의 주기로. 망상을 통해 변태의 평범한 내용들을 체험하고, 똥을 통해 추하고 더러운 곳으로, 그 다음에는 눈을 도려내거나 껍질을 벗기는 살인 광태로. 이 경로는 아마 파시즘의 악마적 욕구가 죽음과 파괴의 선을 타는 경로를 보여주려는 것. 하지만 이것은 파시즘의 속성과 잘 포개지지 않는다. 파시즘은 ‘어떻게 스스로의 죽음을 욕망하는가?’라는 라이히의 문제설정이 보여주듯이, 기본적으로 피지배자들이 스스로 죽음과 업압을 욕망하는 방향성을 지닌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오직 지배자의 광기만이 있을 뿐, 피지배자들의 공포 혹은 광기의 전이, 죽음본능 등을 전혀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사드의 텍스트는 극한적인 위반과 광기의 목록들을 냉정하고도 논증적인 사유로 분석하는 데 그 특이성이 있다. 이것을 영상화하려면 다음 둘 가운데 하나의 전략을 택해야 할 것. 악마적 본성에 대한 영상적 탐색, 곧 잔혹극으로 가거나 아니면 대사의 힘에 의거해 부정과 파괴에 대한 철학적 탐사, 곧 전위극으로 가거나. 파시즘이라는 구체적 역사의 평면과 관련지은 것은 아마도 전자의 방향을 추구한 것일 것. 그러나 파솔리니는 중간에서 어쩡쩡하게 멈추고 말았다. 장면들은 잔혹하다고 보기에는 다소 어설픈 순간에서 멈추어버렸고, 중간중간 끼어드는 ‘보들레르나 니체, 다다이즘’과 같은 대사들 역시 주변을 겉돌고 있을 뿐. 영상의 문법, 시각적 경계를 넘어가지도 못하고(예컨대, 고문과 살인의 장면들을 망원경을 통해포착한 것), 악의 심연에 대한 철학적 탐구도 못한 채 그저 사드의 명망(?)에 힘입은 영화적 해프닝!!
*사드의 절대부정의 세계를 영상화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사드의 텍스트가 언어와 표상의 경계를 극한까지 몰고가는 것이라면, 영상미학에서 사드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주 다른 경로를 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다음의 책들을 참고하였음.
1.모리스 리베, ?사드? 1,2,3
2.질 들뢰즈, ?매저키즘?
3.린 헌트, ?포르노그라피의 발명?
4.파솔리니, ?폭력적 삶?
1999년 10월 29일, 강사 : 이진경
수유연구실 강좌 : 필로시네마 : 영화로 탈주하기 2. 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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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스>가 던지는 몇 가지 질문
이 진 경
1.근대적 이성과 허무주의
1)사르토리우스와 크리스
-사르토리우스와 근대 과학의 사유방식: 분석과 종합. 특히 분석적 사유와 추상의 방법.
eg.방사선 내지 X선을 통한 솔라리스의 검사, 해리의 피 분석 검사, 허락한다면 해리를 해부해보고 싶다는 사르토리우스.
-->첫번째, 명시적으로 반복되는 질문: ‘해리’는 누구인가?(“나는 누구인가?”): 솔라리스의 일부로서 ‘손님’(인체와 달리 중성미자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르토리우스의 분석)? 혹은 감정을 갖고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크리스의 아내(그는 나의 아내요. 나는 그를 사랑하오)?
cf.변용/촉발을 통한 사유와 분석을 통한 사유. eg.짐 끄는 말과 경주말, 짐 끄는 말과 짐 끄는 소의 경우 어느 것이 더 가까운가? 혹은 늑대울음소리 같은 제니스 조플린의 노래는 늑대의 소리인가 사람의 소리인가? 집과 재산을 지키려는 일념으로 하루종일 건물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체크하고 문을 잠그며, 드나드는 모든 이를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경계하고 감시하는 사람을 개라고 보는 것은 단지 감정적 욕설에 불과한가?
-->상이한 세계, 상이한 삶, 상이한 인식.
2)당혹과 경이의 문제
i)무엇이 과학자들을 당혹하지 않게 하는가?
솔라리스를 조사했던 조종사의 놀라운(!) 얘기에도 불구하고 증언을 들은 거의 모든 과학자는 놀라거나 당혹하지 않는다. 또 그 사람의 얘기를 들은 (떠나기 이전의) 크리스 역시 놀라거나 당혹해하지 않는다. 왜 그들은 그 놀라운 얘기 앞에서 놀라지 않는 것일까?
-->당혹과 경이가 사라진 과학적 이성과 과학적 인식. 그것은 놀랍고 새로운 모든 것을 기존의 개념과 규칙, 인식의 틀 안에 몰아 놓는다. 그래서 그 놀라운 얘기를 환각현상에 대한 분석으로 치환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건 마치 놀람을 어떻게든 피하고 모면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놀라운 현상을 눈 앞에서 지워버리고 사실에서 쫓아내며, 거짓과 착각으로 만듦으로써 ‘비놀람’의 세계에 안주하고 비당혹의 세계 안에 안주하며 안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cf.당혹을 경이로 받아들였던 고대적 테크네와 경이가 사라진 과학적 인식으로서 근대적 테크놀로지(하이데거).
ii)무엇이 저 과학자들을 당혹하게 했는가?
무엇이 과학에 대해 확신하고 우주정복을 꿈꾸는 조종사를 한없는 당혹 속으로 몰아넣었으며, 무엇이 그 조종사마저 비웃었던 크리스를 더 없는 당혹 속으로 몰아넣었는가?
-->개념과 관념이 통하지 않는, 신체에 직접적으로 닥쳐오는 새로운 사태, 사건으로서 솔라리스. 모든 종류의 ‘알음알이’를 벗어난 사건으로서 솔라리스. 이에 대한 상이한 대처방식들이 있다. 첫째, 기존의 지식을 벗어나 새로운 생각, 새로운 태도, 새로운 삶의 계기로 받아들이는 경우(크리스, 쉬나우트); 기존의 지식과 방법을 통해 그것을 담아내고 대응하려는 경우(사르토리우스); 연구 자체를 무용한 것, 부적절한 것(미신, 허구, 환상 등의 이름이 대개는 동원되기 마련인데)으로 간주하여 포기하는 것(대다수 과학자들).
-->이러한 당혹의 의미: 크리스의 변이.
2.스피노자의 솔라리스
i)솔라리스란 무엇인가?
-어떤 하나의 형상도 없지만 모든 형상을 형성하기에 모든 형상을 안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실체’로서 솔라리스. 스피노자적인 자연의 생성적인 능력, 생산적인 자연으로서 솔라리스. 능산적 자연. 생산적인 능력과 운동 그 자체.
ii)해리는 누구며, 누가 만들었는가?
-해리를 비롯한 모든 ‘손님’들은 솔라리스가 만들어낸 것이면서 동시에 솔라리스의 일부. 자연의 생성적 능력의 결과물로서 ‘손님’들. 능산적 자연의 작용결과인 ‘소산적 자연’으로서 손님들.
-해리나 손님들은 누가 만들었나? 솔라리스? 그러나 그것은 크리스나 다른 사람들의 머리나 신체 안에 있던 흔적의 산물 아닌가? 그렇다면 해리는 크리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도, 그가 속해있던 세계 자체도(“거울 앞에 중국인이 서면 중국인이 나타나고 오랑캐가 서면 오랑캐가 나타난다.”).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양심으로 번역되어 있지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一切唯心造! 그렇다면 크리스나 각자의 내부에 있는, 자신의 세계,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는 능력은 솔라리스로서 능산적 자연과 동일한가 다른가?
-그러나 자신의 마음은 얼마나 많은 형상과 때, 집착과 고통으로 찌들어 있는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그 많은 집착과 흔적들은 나의 마음인가? 그것은 흔적에 관련된 사건을 만들었던 다른 사람들이 또한 만든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만든 것인만큼 그들이 만든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 누가 대체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인가?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고통과 즐거움의 정념들이 뒤섞인 그 기억과 흔적들. 그것은 차라리 내 마음의 밖에서 들어온 것이고, 내 마음에 새겨진 것이며, 내 마음의 저 자유로운 생성능력을 제한하고 사로잡아 어떤 형상과 대상에 붙들어매는 집착이요 고착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자유로운 생성능력으로서 마음, 능동적인 작용인이요 생산적인 능력인 마음이란 그것과는 상반되는 어떤 것이 아닌가? 六祖 慧能의 유명한 질문을 여기서 다시 발견한다: 부모도 아직 태어나기 이전의, 내 자신의 본래 면목이란 대체 무엇인가(父母未生前 誰是本來面)?
3.솔라리스의 에티카
i)솔라리스의 ‘손님’들은 벌인가 상인가?
솔라리스의 손님들은 그것을 납득할 수 없었던 우주선의 과학자들로선 너무도 불편한 대상이다. 이 손님들은 솔라리스에게 방사선을 방사한 대가다. 그들은 이를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징벌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들은 수용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그들로선 더욱 당혹스런 것은 크리스가 손님을 자신의 아내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즉 크리스는 그것이 징벌인지 아닌지에 관심이 없다. 다만 자신이 그 존재를 아내로, 사랑하는 존재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두고 고심할 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내로서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는 순간, 그리하여 그를 위해 지구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되면, 그 존재는 더 이상 징벌이 아니라 반대로 행복을 주는 포상이 된다. 이로써 과학자들은 피할 수 없는 질문에 부닥친다. 이 손님들은 징벌인가 포상인가?
그러나 그것은 징벌이어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징벌이 된 것일 뿐이다. 받아들일 수 없는 한, 그렇게 마음이 닫혀있는 한 자신이 사랑하던 존재조차 징벌과 고통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크리스가 잘 보여주듯이 그것은 받아들이는 순간 징벌이 아니라 포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욕망이 만들어낸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징벌도 포상도 아니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뿐. 반대로 그것에 대한 分別之心이 그것을 징벌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새로운 ‘윤리학적’ 명제를 시사한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에게 모든 것은 포상이며,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에게 모든 것은 징벌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 다시 말해 언제나 상과 같은 존재와 함께 사는 방법은 간단한 셈이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과 상생할 수 있는 것. 상생의 윤리학. 코뮨주의란, 이러한 상생의 윤리학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 수 있을까? 이런 의미에서 극한적 개념으로서 절대적 코뮨주의란 절대적 상생이다. 반대로 어떤 것과도 상생할 수 없고 반목하는 자는 끝없는 징벌과 저주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건 스스로 초래한 것이기에 누구도 구원해줄 수 없는 징벌이요 저주다.
ii)해리는 왜 죽는가? 해리는 왜 스스로 떠나는가?
-해리는 여러 번 죽는다. 고통을 못 이겨. 인간이 아니라는 고통, 크리스의 아내가 아니라는 고통, 그리고 자신의 존재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는 사실이 주는 고통. 쉬타우트나 사르토리우스는 과학적 인식으로 인해 해리를 받아들일 수 없고, 상생하지 못한다. 즉 그들은 해리의 존재에서 불편함과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런 사실로 인해 해리에게 고통을 야기한다. 이는 크리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는 눈 앞에 나타난 아내에게서 불편함과 고통을 느끼고 그를 죽음의 선으로 인도한다. 처절한 비명소리. 그가 받은 고통은 이처럼 해리에게 명료하고 뚜렷한 고통을 야기했다. 고통의 인과적 연쇄. 반면 크리스가 해리를 아내로서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는 해리에게서 사랑과 ‘행복’을 느끼고, 이는 반대로 해리에게 사랑과 행복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그 끔찍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며, 그리하여 스스로 사라짐을 택하는 위대한 용기를 야기한다. 그것은 불편함과 고통의 존재로만 받아들이던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른 ‘행복’과 ‘안도’를 야기한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고통만을 주었던 해리가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사라져버린 사건이 그들의 태도와 삶 또한 바꾸어 놓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행복과 사랑의 인과적 연쇄. 이는 고통과 악연의 그물 사이로 상생의 윤리학을 꿈꿀 수 있게 해주는 거대한 구멍이다. 윤리학적 인과성.
cf.선/악(good/evil)과 좋음/나쁨(good/bad)의 차이
-->에티카(ethica)와 모랄리아(moralia)
4.無爲自然, 혹은 인간의 죽음
i)해리는 어디로 갔는가?
-자신 스스로 요청해서, 자신의 형상을 지우며 사라지는 해리. 자신의 존재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자신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그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크리스와의 고통스런 이별을 감내하며 사라지는 해리. 그 사라짐과 물러남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신의 존재가 고통의 원인일 때, 스스로 사라짐으로써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상생의 윤리학이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일까? 스스로가 부재하는 상생, 해리가 받아들인 그 역설적 상생은 상생의 윤리학의 하나의 극한이다. 쉬나우트나 사르토리우스가 다시 또 손님들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들은 이제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 영화는 해리의 상생적 ‘자살’을 통해 그들을 변화시켰으리라고 하는 상상을 충분히 촉발한다.
그런데 해리는 어디로 갔는가? 해리는 죽은 것인가? 숄과 같은 자취만을 남긴 채 그는 사라져 버린 것일까? 확실히 해리는 솔라리스의 무정형한 생산적 능력 속으로 사라져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전에도 그랬듯이, 그리고 이전보다 더 크리스의 마음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의 마음을 따라 언제나 함께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고양이는 사라지고 웃음만 남았다는 루이스 캐롤의 상상을 여기서 우리가 반복하는 게 그저 허황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 않을까? 해리는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돌아갔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애시당초 그는 크리스의 마음 속에 있었고, 크리스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ii)크리스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해리를 받아들이는 크리스, 아니 솔라리스를 받아들이는 크리스는 이제 그와 함께 할 것이며 지구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가 떠나온 곳, 따라서 돌아가야 할 곳, 그곳을 이제 크리스는 훌쩍 떠난다. 그는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또한 돌아간다. 브뤼겔의 그림 같은 고향의 계절 속으로, 자신을 반기는 개와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그러나 그곳은 거대한 솔라리스의 바다 한가운데다. 그것은 알다시피 그의 마음이 만드는 세상, 아니 그의 마음 자체다. 따라서 그는 아무 곳으로도 돌아가지 않으며, 돌아갈 필요가 없다. 그곳은 자신 안에 있기 때문이고,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돌아가지 않는 돌아감이다. 우주를 사로잡은 저 분석적 사유의 오만함과, 세상을 재단하던 독단적 분별지심을 던지고, 위대한 자연의 품 안에, 스스로 존재하며 모든 것이 생성되는 솔라리스로 돌아간다. 無爲의 세계 속으로, 절대적인 생성의 세계 속으로. 그는 이제 아버지 앞에, 아니 솔라리스 앞에 절할 수 있다. 이전에 손님인 해리 앞에서 그럴 수 있었던 것처럼.
cf.루소의 자연주의와 스피노자의 자연주의의 차이: 순수한 기원, 외부적인 것과 대립되는 것으로서 자연, 사회와 대립되는 자연, 회귀 내지 보존으로서 자연을 넘어서
(cf.생태학의 아포리아: 보존의 논리를 넘어서는 생태학은 불가능한가?)
iii)개버리언은 왜 죽었던가?
물리학자 개버리언은 죽었다. 어쩌면 가장 먼저 솔라리스의 ‘의미’를 파악했다고 할 수 있는 그는 자살했다. 왜 죽었을까? 동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가 죽은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던 손님의 존재, 그것을 생산해냈던 솔라리스, 그리고 그것이 주는 당혹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본 순간 그는 죽었던 것이다. 그는 무엇을 본 것이기에 죽었던 것일까?
하지만 죽은 것은 개버리언만이 아니다. 해리도, 그것도 여러 번이나 죽었고, 크리스도 ‘죽었다’. 해리의 죽음을 통해서, 그리고 죽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죽었던(크리스의 열병!) 크리스를 통해서 개버리언이 죽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확신했던 분석적인 사고와 독단적 사고의 방식이 솔라리스의 저 당혹스런 힘 앞에서 죽은 것이다. 또 그것은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모든 것을 경멸하고 비난하며 무시하던 삶의 방식이,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조차 싸안으면서 그들을 위해 스스로 죽을 수 있었던 자연(솔라리스)의 위대한 포용능력 안에서 죽은 것이다. 결국 그것은 ‘인간’이란 이름으로 행해졌던 자연에 대한 모든 억압과 가해에 대한 한없는 수치심으로 죽은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모든 것을 그 이름으로 밀어부치고 모든 것을 그 이름으로 정당화하던 ‘인간’의 죽음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특권적인 이름을 내던지고 자연이라는 이름의 무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1999년 11월 5일, 강사 : 고병권
수유연구실 강좌 : 필로시네마 : 영화로 탈주하기 2. 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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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 앤 프리덤: 전쟁기계와 포획장치
고 병 권
1. 이중적 드러냄: 카메라는 무엇을 보았는가
“...영화를 만든다면, 어려움은 그것(이 보여주는 것)을 생산하는 그 아래의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것에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은 실업과 빈곤, 잔인성에 대해 싸울 것입니다. 어려움은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영화의 하부구조(infrastructure) 안에서 어떤 암시(indication)을 주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켄 로치
우리가 켄 로치(Ken Loach)의 영화에서 화려한 장식이나 특별한 기교를 발견하기는 힘들다. 그는 그저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다루는 대상들이 무심코 카메라 앞을 지나간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반대로 그의 카메라는 대상들을 계속해서 찾아다닌다. 따라서 그의 ‘그저 보여주는’ 행위는 수동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고도로 능동적인 것이다. 그의 영화가 특별한 기교를 보인다면 바로 대상에 대한 포착의 순간에서다.
카메라가 대상을 그대로 드러내면 대상은 그 이면의 작동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중적 폭로! 가령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레이닝 스톤(Raining Stone)’에서 카메라가 성찬식에 입을 옷을 비추면, 옷은 노동당으로 정권이 교체된 뒤에도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는 영국 사회 현실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꿈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Riff-Raff”, “Ladybird, Ladybird”, “Hidden Agenda” 등 이제는 정말로 인기 없는 대상과 주제들, 정치적 고려 이전에 상업적 고려에서 이미 배제되고 있는 영역들에 그는 카메라를 들이댄다.
카메라는 아무런 기교도 없이 그저 대상과 주제를 찾아나설 뿐이다. 그 다음부터 대상들은 말을 하기 시작한다. 영국 사회가 많이 나아졌으며 이제 전통적인 문제들은 많이 사라졌다고 말한다면, 카메라는 노동과 빈곤, 자유의 문제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대상들을 출현시킨다. 카메라가 대상을 드러내고 대상이 어떤 본질을 드러내는 이중의 과정은 그가 보이고자 하는 것이 표면적이기 보다는 심층적이고, 현상에 관한 것이기 보다는 본질과 관계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그는 “아래서 작동하는 메커니즘”, “뒤에서 작동하는 정치”를 보이고 싶은 것이다. 뭔가 숨겨진 것(“Hidden Angenda!")이 대상을 통해 드러나기를 바란다. 따라서 그는 영화의 표면 보다는 조금 ‘깊은’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전하고 싶어한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아무 해석에나 맡겨두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메시지대로 청중들이 이해해주기를 희망한다 Henri Behar, "Filmmaking with a Passion -Ken Loach on <Land and Freedom>", http://www.filmscouts.com/intervws/ken-loa.asp. 이 대담에서 켄 로치는 영화에 “어떤 암시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방식대로 영화를 이해할 것”이라고 말한다.
.
“‘모든 사람들은 냉담하다(apathetic), 누구도 정치에 관심이 없다, 가장 소름끼치는 잔악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누구도 그것을 막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말은 언론과 텔레비전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그것은 우리가 누군가에게서 (수동적으로) 받은 지혜(사실)에 불과합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모든 것은 그러한 말이 오늘날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에게나 맞는 것이라는 점이며, 나는 그러한 말을 믿지 않습니다”. -켄 로치
켄 로치는 영화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에서 허무주의적 정치 현실에 대한 정반대의 예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위의 인터뷰 자료 참조.
. 그 영화가 다루고 있는 1930년대의 스페인 내전에서 사람들은 “파시즘은 우리 모두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과 연대하기 위해서 파시스트와 싸우고 있는 스페인 사람들을 지원할 뿐 아니라, 그곳에서 파시즘이 승리한다면 여기서도 파시즘은 승리할 수 있기 때문에 함께 투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문제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나 투쟁에 대해서는 냉소적인 허무주의적 정치 현실의 ‘이면의 정치’를 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그가 다루고 있는 소재는 흥미롭게도 ‘파시즘에 대한 투쟁’이다. 영화는 1936년에서 1939년까지 계속되었던 스페인 내전을 다루고 있다. 그가 즐겨다루던 ‘영국의’ ‘현실’이 아니다. 장소와 시간성이 모두 어긋난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접근이 영화는 물론이고 학술적 차원에서도 그렇게 많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켄 로치가 그 미답의 소재를 찾아나선 것은 결코 고고학자나 역사가로서가 아니다. 역사상 존재하는 미답의 사실을 찾아나서는 학자의 돋보기가 아니라 현실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의 계보를 확인해가는 계보학자로서 카메라의 기계적 눈이 그가 사용하는 수단이다. 그는 과거를 다루는 사람이기 보다는 현재를 다루는 사람이다. (다소 작위적인 냄새를 풍기면서까지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어색하다고 말한다. 특히 스토리 작가인 짐 알렌(Jim Allen)에 대해서 어색한 마무리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Gary Susman, "Lost innocence -Loach views the Spanish Civil War from inside", ***참조. 가령 서스만은 이 글에서 가령 주인공 데이빗이 그의 이상과 관련해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든지 등에 대해 지적한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의 아쉬움은 데이빗 여생에 대한 것과는 다른 측면, 즉 그것을 현재화 시키는 데 있어 장치들의 치밀성 부족이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장면 쪽에 시간이 부족한 것 같다는 것 대해서는 키르클랜드(Bruce Kirkland)도 동의한다. Bruce Kirkland, "Spanish war brought to life -Land and Freedom revisits episode of history", Sun, Toronto. (http: // www. canoe.ca /JamMoviesReviewsL /and_freedom.html) 참조.
) 영화가 보여주는 사건들의 시간은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지만 그 사건들이 보이고 있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시간은 여전히 현재적이다.
파시즘은 20세기의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적 광기’ 중의 하나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역사의 시간 속으로, 그리고 망각의 저 늪 속으로 깊숙이 매장시켰다. 켄 로치는 그곳으로 파내려간다. 그가 파내려가자 심층은 표층으로 의미를 발산하고, 과거는 현재가 되어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아마도 가타리가 말했듯이 “파시즘은 과거만큼이나 현재와도 실제로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F. Guattari, 윤수종 역, ?파시즘의 미시정치?, ?분자혁명?, 푸른숲, 1998. 69쪽, 74-75쪽. 특히 75쪽에 나온 다음의 표현은 켄 로치가 분개하는 현실과 관계있지 않을까? “영화와 TV는 나찌즘이 기본적으로 이미 흘러간 악이라고 일종의 역사적 실수에 지나지 않고 영웅을 위한 황금기 였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있다”.
. 그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치적 허무주의라는 현실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메커니즘을 현재화된 과거를 통해서 보이고자 한 것은 아닐까? 그가 ‘정치적 냉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60년이나 지난 과거를 반증의 예로 들 수 있었던 것은 60년 전의 전사들이 더 이상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는 점을 말했던 것이며, 그보다 먼저 그 전사들이 싸웠던 파시즘이 60년 전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문제라는 점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가 현재를 과거와, 과거를 현재와 소통시키는 독특한 장치로 삼는 것은 바로 플래시백(flashback)이다. 영화는 편지를 읽다가 급속히 과거로 빨려들어가며, 과거는 다시 사진을 통해 현재로 돌아온다. 편지는 데이빗의 목소리를 통해 말하기 시작하고, 장면들은 사진 속에 녹아들어가 시간성을 견디어 낸다 마치 기록을 통해 과거의 사실들이 말하는 것처럼.... 켄로치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작업은 카메라 앞에서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다큐멘터리 작가처럼 그것을 사진 찍어두는 것이다” (Ruth Hessey, "Not your usual war movie", http:// www.smh.com.au /metro /content /951208 /feature5.html 참조)
. 스페인은 모든 것들이 다 준비되어 들끓고 있는 현장이다. 우리는 그곳에서도 -이후에 분석할 것들인- 가면을 달리한 전사들의 ‘전쟁기계’와 지배자들의 ‘포획장치’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현재에서 은밀했던 모든 메커니즘들은 과거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싸우기 시작한다.
2. 플래시백(Flashback): 스페인의 1930년대
“흥미진진한 사실들 중 하나는 어떤 것에 대해 싸우고자 하는 서로 다른 나라들의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스페인 내전에서) 그들은 어떤 것, 바로 파시즘에 대해 싸우려고 했습니다.”-켄로치
스페인 1936-1939.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스페인 내전에 대한 연구는 다른 혁명 운동사와 비교해 볼 때 연구가 별로 진행되지 못했다. 사료에 대한 접근 자체가 1970년대까지 장기지속된 프랑코 체제로 인해 어려웠던 탓도 있지만 거기에는 정치적 이해가 많이 걸려있었던 탓도 있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은 물론이고 공산권이었던 소련조차도 말못할 사정(!)이 있었던 탓이다.
스페인 내전은 1900년대 초반 제국주의의 세계분할과 식민지화와 관계가 있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연구는 齊藤孝 編, 이호웅?윤언균 역, ?스페인 내전연구?, 형성사, 1993(1981)을 참조했다.
. 19세기부터 모로코를 식민 통치했던 스페인은 결국 프랑스와 모로코를 분할해서 통치하게 된다. 광산개발 등 모로코 식민지 정책을 강경하게 몰아붙이던 스페인에 대해 모로코 원주민들이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하자 스페인군이 출동해서 진압을 맡게 되었다. 이때 노동자들의 반전 운동이 일어나고 비극의 주일로 불리는 1909년 7월26일에서 8월1일까지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 비극의 주일은 노동운동을 격화시켰고, 2년후인 1911년 CNT로 약칭되는 ‘노동전국연합(Confederacin Nacional de Trabjo)’이 탄생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때 모로코 민족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나간 젊은 장교가 바로 프랑코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특유의 잔악함으로 1926년 33세의 나이로 장군으로 승진하게 된다. CNT는 이후 내전에서 프랑코에 맞서는 가장 큰 세력이 된다.
1921년 모로코에서 민족 운동이 일어나 스페인 군대를 물리쳐 독립을 선언하고, 스페인 내부에서도 반식민지 투쟁이 심화되자 국회는 국왕의 무모한 모로코 정책과 부패에 대해 조사를 시작하려고 했다. 국왕 알퐁소 13세는 급히 의회를 정지시키고, 쿠데타를 시도한 리베라 장군에게 독재정권을 수립할 수 있도록 했다. 1930년대 들어서 국왕에 대한 평판이 계속해서 악화되고, 부르주아들도 왕정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왕정은 급속히 흔들렸다. 1931년 치뤄진 지방 의회 선거에서 농촌은 비록 왕정을 지지했지만 도시는 완전히 공화파가 장악하게 되었다. 국왕은 자신이 국민에게 사랑받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는 기묘한 선언을 하고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리고 1931년 선거를 계기로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이때의 선거 결과는 우익이 80석, 중간파가 100석, 사회당 120석, 좌파공화파 80석, 우파공화파, 30석 이었다. 그리고 이때 세워진 공화적은 제2공화정이라고 불린다. 정치불안으로 60년전에 무너졌던 제1공화정이 있었다.
. 그리고 좌파인 아사냐가 수상, 보수파인 사모라가 대통령이 되었다. 아사냐는 스페인 자본의 1/3을 지배하고, 교육을 거의 지배하고 있던 카톨릭 교회와 국가를 분리시키고자 했다. 브레난(Brenan)의 지적에 따르면 당시 스페인의 교회는 “대부분 스페인 국민에게 악덕과 위선적인 모든 것의 상징이었다 齊藤孝, 위의 책. 40쪽에서 재인용.
. 쿠간을 살해한 카톨릭 신부가 반동적으로 영화 속에서 그려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사냐는 교회 다음으로 군대의 개혁에 착수하여 많은 우익 군인들을 퇴직시켰다. 우익 군인의 저항은 거세었으며, 곳곳에서 소규모의 쿠데타가 일어나기도 했다. 또 스페인 남부에는 라티푼디오(latifundio)라고 불리는 대토지 소유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소작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또 북부 공업지대인 카탈로냐 지방에서는 카톨로냐의 독립 움직임이 있었고,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운동도 계속되었다.
세계공황 중 노동운동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는데, 특히 아나키즘 성향의 운동이 매우 강하게 일어났다. FAI(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합)는 1927년에 만들어진 아나키스트 비밀결사로 CNT의 지도적 구성원들이 되었다. 노동운동계는 사회당과 연계된 UGT와 아나키스트들의 운동체인 CNT로 양분되어 있었다.
CNT 소속의 몇 사람이 소련을 방문했지만 그들은 소련의 관료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후 코민테른의 참여 문제를 놓고 내분이 생겨 CNT 소속이던 마우린(Joaqun Maurn)등은 CNT에서 탈퇴하여 1931년 ‘좌익공산주의그룹’을 만들었다. 또 이때 코민테른 가맹파 중 일부가 공산당을 만들기도 했다. 마우린의 조직은 분열되었다가 이후 POUM(Partido Obereo de Unificacin Marxista)이라는 ‘맑스주의 통일 노동자당’으로 발전한다. 즉 POUM은 아나키즘과 공산당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맑스주의 그룹이었다.
파시스트 정당들도 많이 출현하고 있었다. 내전 이후 스페인을 계속 지배하게 되는 팔랑헤(Falange)당과 혁신당, CEDA 등이 파시스트 내지 준파시스트 움직임을 보였던 당들이다. 이들은 히틀러와 무쏠리니 등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1933년 11월의 총선거에서 하나의 역행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우익 파시스트 당인 CEDA가 최대당이 된 것이었다. 대통령은 좌파를 의식해서 CEDA의 입각을 반대하다가 결국 일부를 입각시켰다. 그것은 카탈로냐 지방의 반마드리드 의식을 자극했다. 우익 파시스트들의 입각에 대해 바르셀로나 등 카탈로냐 지방은 물론이고 아스투리아스, 마드리드 등의 대도시에서 거대한 좌파들의 시위가 발생했다. 이들은 도시를 장악하고 약 2주간 코뮨을 유지하였다. 이 투쟁을 계기로 좌파와 우파의 격돌이 곳곳에서 목격되었다.
1936년 다시 국회가 해산되고 총선거가 다시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좌파가 압도적인 의석을 차지한 채 막을 내렸다 이 선거에서는 우익 당들이 133석, 중간파가 77석, 좌익 당들의 연합체인 인민전선이 263석을 얻었다.
. 인민전선의 아사냐 정부는 정치범을 석방하고 해고 노동자 복직령을 내렸으며, 프랑코 등 우익 군인들을 좌천시켰다. 그러나 POUM과 CNT는 개혁에 만족하지 못했고, 우파들은 개혁에 불안해했다. 결국 1937년 7월 17일 모로코에서 파시스트 반란군들의 봉기가 시작되었고, 몇 곳에서 쿠데타들이 일어났다. 독일과 이탈리아 공군의 협조로 프랑코 군은 모로코에서 스페인의 본토로 올라올 수 있었고, 스페인 남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즉각적으로 무장했고 2년 반에 걸친 내전이 시작되었다.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이 인민전선의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한다는 소식은 많은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세계 각지에서 많은 좌파 운동가들이 파시스트로부터 혁명정부를 방어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몰려들었다. “프랑코를 스페인의 권력에 근접시키는 것은 이 곳의 권력에 파시스트들을 근접시키는 것입니다”. 영국 리버풀의 실업자 데이빗이 파시스트로부터 혁명을 지켜내겠다는 신념을 갖고 스페인으로 떠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그가 가입하게 되는 민병대는 실제로 약 2만명 정도 규모로 추측되는 齊藤孝, 위의 책, 63쪽.
국제의용군(민병대)을 모델로 한 것이다.
3. 파시즘의 미시정치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들은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부대적 기법을 동원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장면이 실제 있었던 일에 기초한 것들이다. 프랑코 군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역에서 벌인 ‘농장 집단화’ 논쟁은 물론이고, 블랑카가 죽게되는 끝장면 역시 실제 생존자의 경험에 기초하여 구성한 것이다 Living Marxism #83 Review, http:// www.junius.co.uk /LM /LM83 /LM83_Living.html 참조.
. 그러나 사실들에 기초한다고 해서 카메라가 그것을 수동적으로 중계하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에서 드러난 파시스트들과의 전투는 일반 전투 영화들과는 매우 상이하다. 총탄이 빗발치고 살육과 파괴가 판치는 헐리우드식의 전쟁 영화와 전혀 딴판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전투 영화에서 적들이 너무 감추어져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카메라는 파시스트들과의 전투를 중계하지만 파시스트들은 보이지 않는다 Kirkland가 위의 글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파시스트들은 대개 보이지 않는 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 주로 전선 너머에서 총성과 포성, 야유를 보낼 뿐 파시스트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 적의의 대상이 되는 프랑코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투? 그렇다면 카메라는 전투를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많은 파시스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2차대전을 다루는 전투 영화에 매번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무기를 소유하고 기계처럼 행진해오는 수많은 독일 병정들, 빨간 나치 완장을 찬 장교들, 간혹 기록 필름에서 보이는 수백만 대중들의 흥분에 찬 함성, 혹은 독가스에 죽어간 많은 유태인들 ..... 파시즘을 상징하는 광기들은 영화 시작 부분에서 간략하게 나온 기록 필름들 외에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에 등장하는 제복을 입은 병사들 중 다수는 프랑코의 군대이기 보다는 스탈린의 군대, 혹은 공산당의 군대인 ‘인민군(popular army)’이다. 적대는 프랑코 병사 보다 공산당의 인민군과 그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전투는 프랑코에 대한 것이기 보다는 스탈린에 대한 것이라고 해야할까?
그러나 이 모든 질문들은 파시즘에 대한 우리의 통속적 이해에 기반한 것들이다. 우리는 그동안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을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이해해왔다. 2차 대전에서 드러났듯이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적대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점에서 스페인 내전은 2차 대전을 앞둔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전초전이라는 시각이 많이 퍼져있으며, 혹은 파시즘과 공산주의-부르주아 민주주의 연합군의 대결이라는 시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인식은 파시즘을 비합리주의 정치체제, 히틀러나 무쏠리니 등의 선전술과 대중의 현혹 정도로 단순화 시킬 위험성이 있다. 라이히는 파시즘에 대한 뛰어난 분석 W. Reich, 오세철?문형구 역, ?파시즘의 대중심리?, 현상과 인식사.
을 통해서 그것을 대중들의 욕망과 관계시켰다. ‘대중들은 어떻게 자신의 예속과 억압을 욕망하게 되는가?’ 대중들은 속았다기 보다는 분명히 욕망했으며, 그들은 “나찌의 죽음을 위해, 독일의 죽음을 위해 투쟁했다. 그들이 패배할 것이 분명해진 뒤에도 몇 년 동안 더 싸울 수 있었다는 사실” F. Guattari, 앞의 책, 78쪽
을 우리는 욕망과 관계시켰을 때만 이해할 수 있다.
파시즘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은 대중의 욕망과 창조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접근 방식이다. F. Guattari, 앞의 책, 63쪽. 가타리는 파시즘에 대한 접근 방식을 세가지로 도식화 해본다. 하나는 사회학의 분석적-형식주의적 접근이며, 다른 하나는 네오맑스주의의 종합적-이원론적 접근, 세 번째는 분석적-정치적 접근이다.
사회학적 사고의 특징은 공통적 특징을 끌어내 종(species)을 분리하고자 한다. 감각적 유비를 통해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이라는 세 유형의 파시즘을 특징지어 유사성과 그 아래의 하위 특수성을 구분하려는 시도를 하고, 구조적 상동성 방법을 통해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서구 민주주의 간에 절대적 차이를 정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감각적 유비의 경우에는 공통 특징 추출을 위해 차이를 최소화하고 후자는 구별을 위해 차이를 최대화한다.
파시즘에 대한 또다른 이해라고 할 수 있는 네오맑스주의의 종합적-이원론적 접근은 이러한 이론적 서술을 사회적 실천과 분리시키지 않음으로써 파시즘을 넘어서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에서는 대중적 욕망을 표현하는 대표체로서의 당과 전위를 내세운다. 여기서 대중들을 횡단하고 있는 무수한 욕망의 덩어리들은 당의 표현으로 표준화된다. 그것은 변증법의 세 번째 항이 그렇듯이 화해의 항이기 보다는 사실 권력의 항이고, 외디푸스 삼각형의 초월적 항에 해당된다.
우리가 욕망의 미시정치라는 방식으로 접근해 볼 경우 우리는 기존의 파시즘을 가르는 범주의 부적합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대중들의 욕망을 자신의 작동 메커니즘 속으로 포획해가는 방식을 바라볼 때 우리는 파시즘을 정치인들의 비합리적 가치에 대한 호소와 대중들의 오해라는 정식에서 벗어나고, “금융 자본의 가장 반동적, 호전적, 제국주의적인 분자들에 의한 공공연한 테러독재”라는 디미트로프(Dimitrov)의 정식
에서도 벗어나 새로운 정식화와 유형분류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욕망의 미시 정치라는 분석틀을 원용해볼 때 우리는 여러 유형의 파시즘을 구별해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의 진화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수 있게 된다. 가령 나찌의 SS(나찌 친위대) 기계는 SA(나찌 돌격대)기계와도 그 작동이 다르다. SA가 보여주듯이 전반적으로 나찌즘은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고 그것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유태인과 수천의 좌악투사들에 대한 파괴적 공격! SS는 외적인 것이기 보다는 자신의 지도부 안에서 감시와 억압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점에서 훨씬 더 나아간 것은 스탈린주의였다. 스탈린주의에서 공포와 억압은 외부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부에 있는자신의 인민들을 향하기도 했다. 스탈린주의는 자신에 반역하는 모든 부분들을 차례로 제거해나가면서 훨씬 더 치밀하게 욕망의 억압 기계를 작동시켰다. 그 체제는 분명 욕망을 억제하는 훨씬 효과적이고 안정된 체제였다. 가타리는 이점이 스탈린주의가 서구 자본주의 국가와 동맹을 맺을 수 있었던 중요한 지점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보존한다’는 목적에서 모인 것이 아니라 사실 자신의 체제마져 위협할 수 있는 광인 기계를 파괴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체제는 욕망을 조절하고 관리하는 데 있어 서구 자본주의에서 움직이는 전체주의 기계에 비해 한참 뒤떨어진 기계를 가지고 있었다. 당은 모든 기계를 초코드화했고, 대중을 가혹하게 감시했다. 그러나 이 장치는 생산력의 발전, 특히 노동력의 분자화라고 하는 현실에 적응할 수 없는 체제였다. 정치 경제적 위기가 닥치자 민족문제, 지역문제 등이 복귀하면서 당은 무력해졌다. 특히 자본주의 구도 하에서 나타나고 있는 탈코드화-탈영토화 과정에서 단순 억압적 장치들은 기능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분자적 수준에서 욕망을 관리할 수 있는 미시적 체제의 수립에 스탈린 체제는 성공할 수 없었다. F. Guattari, 위의 책, 79쪽.
. 이 점에서 서구 자본주의의 기계는 훨씬 미세하고 유동성있는 작동을 보인다.
4. 전선의 안과 밖: 프랑코는 어디에 있었는가
다시 영화로 돌아온다면 켄 로치의 카메라는 파시스트들 너무도 잘 찾아내고 있다. 그것은 계속해서 프랑코를 보여주며 프랑코와 싸우고 있는 전쟁기계들인 ‘품’의 전사들의 전투를 보여주고 있다. 프랑코는 이미 전선 안에 있었다. 포로 몇 명이 민병대로 잡혀 들어온다.
“국민이 선출한 정부를 따르라구” / “그들은 진짜 정부가 아니오”
“부하들은 명령을 잘 따르나?” / “물론이오. 우리는 진짜 군대요.”
여러 의견들이 들끓고 있으며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보이는 정부는 ‘진짜 정부’가 아니며, 돌아가면서 대표를 맡으며 계급도 없고, 여성들도 총을 들며, 제복조차 입지 않고 있는 군대는 ‘진짜 군대’가 아니다. 파시스트 포로들은 파시즘이 무엇인지를 증언하고 있다.
독일과 이태리가 계속해서 프랑코를 지원하면서 국제적인 불간섭 합의가 실질적으로 붕괴되자 소련은 인민전선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무기를 공산당을 통해서 제공했고, 이를 통해서 공산당의 세력을 확장하고 아나키스트들을 비롯한 제 세력을 제압하고자 했다. 이들이 겉으로 내세운 논리는 영화의 진 로렌스가 주장하듯이 ‘전쟁의 승리 없이는 혁명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으며, 반파시즘 전쟁의 효율성을 내세워 중앙집권적인 공산당의 지도력을 내세우고자 하였다. 공산당은 ‘조직적인 정규군 창군을 역설했으며, 모든 세력들이 당 아래 일원적 체계를 갖기를 원했다.’ 齊藤孝, 앞의 책, 66쪽.
공산당은 내전중 1936년 8월에 제사한 8개 항목 중 “중앙정부에 대한 완전한 권력 부여, 조직적인 정규 군대의 창설, 후방에서의 철의 규율”이 처음 세 개를 차지했다 齊藤孝, 앞의 책, 66쪽. 각주 (5)에 8개항이 모두 나와있다.
.
“거수 경례와 규율, 서열이 있는 군대의 창설은 사람들의 혁명정신을 망쳐놓을 거요.”
“그건 말도 안돼요. 공산당은 혁명을 위해 수립되었어요. 왜 그들이 혁명 정신을 누르려고 하겠소?”
“그건 혁명의 끝이오. 봐요 민병대는 투쟁의 핵심이오. 스탈린은 서방 세계와 조약을 체결하길 바라오. 프랑스와는 벌써 했소. ...그러니까 우리 혁명을 지원하면 신뢰를 잃을 거요. 그게 우리가 스탈린에게 위협이 되는 이유요.”
“중요한 게 있어요. 우리가 무기를 받아들이면 그들은 조건을 달고 오죠. 그들은 꼭두각시를 원하죠.”
켄 로치는 데이빗과 청중들에게 파시즘이 이념의 이름이 아니라 욕망의 작동에 관한 것임을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그는 파시즘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알고 있다. 그것은 군복과 계급장, 거수 경례, 철의 규율을 통해서 다가 오며, 중앙집권적 당을 통해서 다가 온다.
치료를 받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온 데이빗, 휴가를 얻어 데이빗을 만나러 온 블랑카..... 인민전선이 장악하고 있는 거리에는 경찰들이 어슬렁 거린다. 전사들은 전방에서 파시스트 병사들과 싸우고 있지만, 후방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 스탈린적 파시즘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대중들을 관리하는 경찰 기계의 작동!
“무슨 일이죠?”
“옛날의 경찰이 돌아온 거죠. 전방엔 총이 없는데 이곳에선 경찰들이 한 자루씩 가졌네요.”
.........
“이게 뭐죠? 우리 민병대인 이런 군복이 없는데...”
영화에서 그토록 보기 힘들었던 프랑코주의와 파시즘은 사실 전선 내부에서 우글거리기 시작한다. 영화의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전선은 극명하게 갈라진다. 1937년 5월 3일 그 유명한 바르셀로나 사건이 터진다. 치안부장이 이끌던 주 경찰이 CNT 멤버들이 관리하고 있던 전화국에 무기를 회수하러 가면서 그 과정에서 서로의 발포 사태가 벌어졌다. 이것을 기화로 해서 CNT와 POUM와 정부간에 전선이 그어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전선 곳곳에서 인민군들에 의한 민병대들의 무장해제가 이어졌다.
“당신도 알잖아요. 신문들은 폐간되었고, 기자들은 체포되었어요. 게다가 고문실 얘기도 해요.”
.... “난 모르는 일이요. 보기전까지는 믿지 않아요. ... 난 사회주의 공화국을 위해 스페인에 왔소. 난 국제 여단이 최선의 길이라고 믿고 참여하기로 했소.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요.”
‘당이 하는 일에는 반드시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제 데이빗은 정부 지지자들의 부대를 맡고, 공산당 수뇌부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욕망은 당을 통해 대변되며, 대중의 판단 능력은 상실된다. 모든 것들은 당이 중심이 되며, 당을 지키는 것이 곧 혁명이다. 파시즘은 그렇게 다가왔다.
“당신은 ‘모든 혁명들은 항상 배반당하고, 그것들은 항상 타락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중요한 게 뭐냐? 그렇다면 당신의 머리를 모래에 묻고 괴롭히지 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라는 것 입니다. 흥미로운 부분은 또한 왜 그것이 잘못 되었는지, 그 뒤에 있는 정치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켄 로치
혁명의 배반! 그러나 켄 로치가 보이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다. 프랑코주의나 스탈린주의 어느 것도 자신을 배반한 적이 없다!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파시스트, 스탈린주의자라고 외치지만 카메라는 조용히 군복과 계급장, 거수경례 등을 통해 움직이고 있는 파시즘을 놓치지 않고 보여왔다. 이제 우리는 당원증을 찢어버린 데이빗이 돌아간 곳, 바로 파시즘과 싸우고 있는 전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5. 전쟁기계와 포획장치
스탈린주의가 또다른 유형의 파시즘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혁명적인 욕망의 흐름을 훨씬 안정적으로 포획하는 장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도 켄 로치는 이 장치와 싸우는 방법을 잘 안다. 그는 그와는 전혀 다른 본성의 기계를 발견해낸다. 그것은 바로 ‘전쟁기계(war-machine)’였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의 고원?에서 G. Deleuze & F. Guattari, ?천의 고원?, 제12장 “1227년: 유목론 논고 -전쟁기계” 참조.
국가의 포획 장치와는 전혀 다른 본성과 기원을 갖는 노마드의 ‘전쟁기계’를 다룬다. 우리는 국가가 고요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을 때는 물론이고 공포와 난폭함을 드러낼 때조차 전쟁을 막기 위한 장치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홉스(Hobbes)는 이 점에서 매우 탁월했다. 그는 바로 ‘전쟁’을 막는 수단으로 국가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을 불러들였던 것이다 T. Hobbes, 한승조 역, ?리바이어던?, 삼성출판사.
. 노마드들을 정벌하기 위해 나서는 것은 국가가 전쟁 수단인 군대를 법률적 통합과 기능적 조직화를 충분히 수행한 후에만 가능한 일이다(?천의 고원? 2. 41쪽). 노마드들을 정벌하면 국가는 재빨리 그곳에 경찰과 목사, 문사, 관료들을 보내어 치안을 유지함과 동시에 그들을 포섭하기 시작한다. 분류하고 위계짓고, 길들이고를 반복하면서 전쟁을 막아낸다. 군대란 포획된 전쟁기계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규율과 훈육을 통해 국가에 의해 전유된다(47쪽). (cf. 쿠데타, 셈하는 수와 세어지는 수, 무기와 도구)
국가의 포획장치들은 계산되지 않는 욕망의 매끄러운 흐름에 줄을 긋고 홈을 파고, 벽을 세워 그것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국가는 흐름들에 경계를 만들고 흐름들이 수로를 통해서만 안정적으로 분배되도록 관리한다. 이에 대해 전쟁기계는 새로운 난류(turbulence)를 도입하고 선들을 횡단하며 새로운 생성을 만들어낸다.(cf. 원자론).
-cf. 전쟁기계는 국가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부터 온다. 그것은 국가 장치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전혀 상이한 종이며, 다른 본성을 갖고 있다. 국가장치가 기사, 보병, 선발대의 역할과 길이 정해져있는 체스 게임과 같다면, 전쟁기계는 단순한 산술적 단위인 작은 알이 경계짓고, 포위하며, 산개하는 기능을 수행할 뿐인 바둑과 같다.(42쪽)
국가의 포획으로부터 끊임없이 빠져나가고 새로운 것을 생성시키는 전쟁기계는 국가의 외부 존재다. ‘외부’라는 말은 공간적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와는 전혀 다른 본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전혀 상이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외부지대’다. 따라서 전쟁기계는 포획장치와 공간적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으며, 항상 내부에서 작동할 수 있는 국가의 포획 장치와 전투를 벌여야한다.
클라스트르의 분석을 이용하여 들뢰즈와 가타리는 원시사회가 국가 없는 사회, 즉 국가를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사회가 아니라 국가의 작동을 막는 집합적 메커니즘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인다. 국가장치를 물리치는 메커니즘이란, 다름 아닌 추장이 국가인이 되는 것을 저지하고, 사회적 신체로부터 하나의 장치가 그와 구별되어 결정화되는 것을 막는다. 여기서 추장은 권력자라기 보다는 지도자나 스타에 가까우며, 자기 백성들에게 거부당하고 버리받을 위기에 항상 처해있다. 전쟁기계는 끊임없이 내부에서 발생할 수 있는 국가 장치와 대결한다. (cf. 보고타의 청소년 갱의 사례). 물론 국가 역시 그 내부를 가로지르고 있는 전쟁기계와 대결한다. 전선들은 항상 내부에서 그어지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민병대라는 전투 기계는 바로 그 안에서 자신의 작동을 포획하려고 하는 내부의 국가장치, 내부의 파시즘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이다. 전쟁기계는 어떻게 포획장치와 대결할 것인가? 선을 긋고 도관을 만들며 거기에 흐름을 분배하는 국가의 포획장치, 내부의 파시즘, 스탈린의 경찰 기계와 맞서 어떻게 흐름을 매끄러운 평면 위에 흐르게 하고, 거기서 혁명적 대중을 구성할 것인가? 켄 로치의 의도는 더 이상 프랑코 군대와 인민전선의 군대의 전투 재현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그는 바로 전쟁기계와 포획 장치의 대결을 드러냈던 것이다 포톤(Porton)의 지적은 이 점에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는 스페인 내전에서 CNT/FAI 의 비중이 POUM보다 훨씬 많았음에도 POUM의 활동을 크게 그려 균형을 잃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블랑카가 붉은 색과 검정색의 스카프를 한 것은 아나키스트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녀의 주장은 맑스주의자들인 동료들과 차별성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다. Richard Porton, "Land and Freedom", Cineaste, v22. n 1. 1996 wtr. 참조. 그러나 문제는 스페인 내전의 전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기계화 파시즘(혹은 국가 포획장치)의 작동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CNT 나 POUM의 이름은 그리 중요치 않다. 오히려 아나키즘이야말로 국가 장치의 반대극일 뿐이다.
.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전쟁 역시 전쟁기계의 목표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나 이때의 의미는 국가가 전쟁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에서다. 전쟁기계의 목표는 본질적으로 매끄러운 공간으로 흐르는 욕망이고, 그 공간의 점유이며, 그 공간에 상응하는 인민의 구성이므로 파괴적 전쟁보다는 새로운 구성과 생성이라는 긍정적 목적을 갖는다. 그것이 전쟁에 귀결되는 것은 그 매끄러운 평면에 홈을 파는 국가와 도시에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101쪽)
따라서 민병대가 전쟁기계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 지점은 파시스트 병사들과의 전투 장면이 아니다. 전쟁 기계가 나타나는 곳은 오히려 열차 안에서 흐르는 이질적 언어들의 흐름에서, 그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집단화 논쟁’ 안에서 발견된다. 전쟁기계인 민병대에서는 이미 국가와 민족의 선들이 지워져 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를 가르는 갈등의 선들도 의미가 없다. 켄 로치는 의도적으로 언어들을 뒤섞는다. 직업과 신분의 선들도 지워져버렸다. 그림 ) 사진 속 그림은 1937년 7월 Brunete가 찍은 Oliver Law의 사진이다. 그는 그날 오후에 죽었다. 동료들은 임시 묘비를 만들어 그가 미국 군대 사상 최초의 흑인 지휘자였음을 적어두었다.
“난 독일에서 빵장수였소.” “난 갑판장”, “난 하녀였어요”.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경계도 지워졌다. “거수 경례 따위는 하지 않아. 지휘관도 우리가 뽑지.” 선은 온통 매끄럽게 변해버렸다. 프랑코의 군대가 ‘진짜’ 군대였다면, 이들은 ‘진짜’ 전쟁기계였다!
이 영화의 가장 많은 필름이 소요되었고, 많은 비평가들이 이 영화의 핵심 대목이라고 평가하는 ‘집단화 논쟁’! 프랑코 군대에 점령당했던 마을을 해방시키면서 농지를 집단화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정하는 토론. 모든 입장들은 매우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여기서 전쟁기계는 어떻게 작동했을까? 여기서 사회주의 이론이나 이데올로기, 거창한 정책은 토론의 결과에서 드러나고 결론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해도 전쟁기계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작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언어, 그것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그들의 욕망, 그리고 욕망들의 접속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인민들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들은 더 이상 소작농이 아니며, 그들은 더 이상 하녀가 아니며, 그들은 더 이상 통치 받는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통치하는 자이고 명령하는 자이며, 구성하는 자들이 된다.
여기에 전문 배우들과 비전문 배우들을 섞고, 언어들을 뒤섞는 켄 로치의 치밀함이 뒤따른다. 포톤(Porton)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진 빚이라고 말하지만 Richard Porton, 위의 글.
, 우리는 지도와 피지도, 영어와 스페인어,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들이 사건의 안팎에서 지워져나가고 있음을 전쟁기계와 연관해서 파악해야 한다. 이것은 파시즘과 포획장치의 규율과 위계에 대비되도록 하는 치밀한 장치다 Ruth Hessey, 앞의 글. 참고로 켄로치는 Hessey와 가진 인터뷰에서 “엑스트라는 내가 경멸하는 세계다. 사람들은 엑스트라가 아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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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투쟁은 계속된다
“이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젊은 사람들이, 옛 경구를 빌어 말하자면, ‘투쟁은 계속된다’는 것, 그것은 과거 안에 매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희망합니다.” Toby Banks와의 인터뷰. “Director Ken Loach talked to Toby Banks about his latest film, Land and Freedom" http:// www.junius.co.uk /LM /LM83 /LM83_Living.html 참조.
-켄 로치
1975년 스페인의 콤포스텔과 코로뉴에 있는 정신병원에서는 병원 안의 파시즘에 반대하는 투쟁이 일어났다 F. Guattari, “프랑코주의에 반대하는 정신의학”, 앞의 책, 180쪽.
. 구타와 가난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정신 감옥이었던 성콤포스텔의 콩소 정신병원에 1973년 행정관료들에 의해 개혁이 이루어졌다. 감금장소를 현대화하고, 환자수를 감축하며, 젊은 의사를 충원했다. 그러나 점차 관료들이 지나치게 주도권을 갖자 입구의 완전 개방, 환자들의 완전 자유 허용, 주민과의 접촉, 환자 및 직원의 모임 조직등 일련의 변혁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는 파시스트적 폭력을 불러왔다. 정부는 모임을 금지하고 환자를 다시 감금하고 의사들을 해고하였다.
사실 프랑코주의는 어디에서나 증식한다. “우리는 파시즘 분석을 역사가의 단순한 전문성에 맡겨둘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에 파시즘이 수리했던 과정이 오늘날 사회적 공간 전체에서 다른 형태로 계속 증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구조, 정치구조, 노동조합 구조, 제도 및 가족 구조, 심지어 개인적 구조에서 전체주의적 화학 모두가 작동하고 있다” F. Guattari, 위의 책,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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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가 다소 어색하고 조금은 조잡한 방식(데이빗 손녀의 올려진 손)을 쓰긴 했지만, 분명 투쟁은 계속된다. 파시즘이 가정과 학교, 노동조합과 정당, 인종과 성별 사이에서 계속 작동 될 때마다 “창조적 탈주선을 긋고 매끄러운 공간을 구성하며 그 공간에서 새로운 인민을 구성하는” 전쟁기계의 투쟁은 계속된다. 그리고 계속되어야 한다. 켄 로치의 카메라는 분명 이 전쟁기계의 투쟁을 목격했던 것이다.
모든 것들이 현재로 다시 돌아오면서 이미 벌어지고 있던 투쟁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파시즘은 좀 더 세련된 형태로 작동하고 있으며, 전쟁기계의 탈주선들 역시 보다 큰 잠재적 능력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것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보수당에 대해 그토록 적대적인 시각을 보이던 켄 로치가 이제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노동당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적 시각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은 혁명의 배반을 걱정해서도 아니고, 아나키즘적 성격을 드러내기 위함도 아니다. 그것은 작동의 문제이고 멈추면 자기자신을 상실하고 마는 전쟁기계의 본성 때문인 것이다.
1999년 11월 12일, 강사 : 조현설
수유연구실 강좌 : 필로시네마 : 영화로 탈주하기 2. 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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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시편의 신화적 이미지와 혁명에 대한 상상
조 현 설
1.19세기 헝가리 농민 혁명, 그리고 몇 갈래 흐름
1.1.미끌로시 얀초(Miklos Jancso, 1921~)의 후기 영화를 대표하고 거의 대부분의 평론가들로부터 대표작 평가를 받는 붉은 시편(1972, 깐느영화제 감독상)은 19세기 헝가리 농민혁명(1890)을 그리고 있지만 역사의 구체성은 발레와 같은 몸짓 속에 추상회화처럼 숨어 있다. 얀초 영화가 흔히 그러 하듯이 영웅적인 혁명투사를 보여주지도 않고 알기 쉬운 줄거리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영화에서는 심지어 인물의 이름조차도 등장하기 않거나 큰 의미작용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인물은 이미지화되어 있고 이미지에 의한 애매한 의미작용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 이 애매함이야말로, 얀초의 작가적 개성이고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영상미학의 창조였고, 헝가리를 얀초의 나라라고 감히 부를 수 있게 했다.
영상기호학을 개척한 롤랑 바르뜨의 말을 빌자면 이 의미, 즉 영화적인 애매함이란 기호학적 규칙들로는 정의할 수 없는 ‘무딘 의미’(sens abtus)이다. 무딘 의미는 자연스럽게 포착되기를 거부하는 의미, 번역불가능한 의미, 그러기에 오히려 이미지가 주는 쾌락, 즉 미감을 경험할 수 있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이 무딘 의미를 탈코드적인 사유를 촉발한다. 물론 이 무딘 의미는 영상기호의 일반적 의미이지만 그것을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우리에게 경험케 하는 영화가 붉은 시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붉은 이란 혁명적인 형용사를 쓴 ‘시편’이란 제목은 더없이 적절한 것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얀초는 이전의 사회주의 미학이 추구했던 선명한 지시적 의미의 실천이라는 영화미학을 개신한 맑시스트 영화작가라 할 수 있다. 어느 대담에서 그가 말했던 “밝은 색채로 영화를 보여주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이전의 사회주의 미학이 지녔던 경직된 미학원리에 대한 반론이었던 셈이다. 1968년 헝가리 영화잡지 영화문화와 나눈 대담에서 루카치는 “입센이나 체홉이 소설로 그랬듯이 얀초는 영화를 통해 젊은 세대에게 올바른 답을 전해줄 수 있는 뛰어난 감독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사회주의 영화미학을 개신한 얀초에 대한 당대 최고의 비평가가 바치는 헌사일 수 있다.
1.2.붉은 시편의 혁명을 채우는 몇 갈래의 선분들은 구체적 개인을 통해 도드라지지 않고 몇 개의 굵은 줄기로 흐르고 있다.(영웅주의의 배제) 따라서 이 영화에서 헝가리 농민혁명의 구체성과 이론을 읽어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실수. 중요한 것은 어느 시공에서나 있을 수 있는 혁명의 다양한 흐름들이 만나고 결절되고 풀려나가는 역동적인 흐름, 그 욕동들을 읽어 내는 일.(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할 것이 카메라와 인물들의 끊임없는 움직임, 이는 얀초영상의 핵심적 미학, 한시도 정지하지 않는다. 이는 집단의 연대감이나 집단 내부의 갈등을 표현하는 것, 그야말로 끊임없는 욕망의 다양한 흐름을 보여주려는 것.) 그러므로 이 영화가 인물들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은 사회주의와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이지만 우리는 그 이상을 읽어낼 필요가 있다.
#포인트 : 몇 갈래의 흐름과 흐름들의 충돌과 연대.
1)농민의 흐름 - 헝가리 민속음악과 일체가 된 흐름, 혁명하는 흐름과 회개하는 흐름
2)지식인의 흐름 - 친농민적 흐름과 반농민적, 친교회적 흐름
3)군인의 흐름 - 총을 버리는 군인과 총을 쏘는 군인 사이
4)사제의 흐름 - 그리스 정교의 옛 사제와 새로운 사제 사이(변함없이 경직된 선분)
2.이미지의 계열과 이미지의 충돌, 그 의미의 생성
2.1.혁명의 장을 만들어 가는 여러 갈래의 흐름들은 서로 충돌하는데 영화에서 그것은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우선 혁명의 흐름과 반혁명의 흐름의 충돌, 이 흐름은 두 이미지의 충돌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군중들의 집단무와 같은 움직임으로 드러남. 원과 직선의 충돌.
영화에서 농민봉기의 혁명적 흐름은 항상 원무의 형태로 표현된다. 그것은 헝가리 민속음악의 선율 위에서 연대와 꼬뮨의 상징으로 역동한다. 상대적으로 반혁명의 흐름인 군인들은 직선의 형태로 표현된다. 군인들은 말을 타고 군중들의 주위를 돌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말타기는 원을 그리지 않고 두 지점 사이를 오가는 직선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경직된 흐름과 유연한 흐름을 표현한다. 유연한 흐름이 혁명의 흐름이고 모든 것을 감싸안고 흐르는 혁명과 꼬뮨의 흐름이라면 경직된 흐름은 그 흐름들을 곳곳에서 절단하는 흐름이고 절단하여 포획하는 흐름이다.
두 흐름의 충돌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영화의 종반부에 배치되어 있는 혁명의 가장 극적 지점이다. 마치 군인들이 양편에 도열한 가운데 운동회를 하듯이 농민들과 농민들에 동조한 군인 지식인 등의 흐름이 사각의 직선 안에서 원형으로 하나가 된다. 그 흐름에 도열한 직선들도 일시적으로 마치 그 에너지의 역동 속으로 빨려들 듯이 혁명의 대열에 합류한다. 그러나 직선의 흐름은 이미 제복으로 상징되는 신체화된 직선이다. 일시적으로 합류한 흐름은 한 줄기 나팔소리에 일시에 직선으로 재생산되고 그들의 총알은 혁명을 향해 날아간다. 원의 풀어짐. 죽음.
2.2.세 갈래의 색채, 세 갈래의 흐름 - 붉은 시편에 두드러진 이미지 중의 또다른 하나가 영화의 제목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색감의 흐름이다. 흰색과 검은 색, 그리고 붉은 색의 흐름. 영화는 이 세 갈래의 색감을 중심으로 이미지의 화음과 불협화음을 빚어낸다.
먼저 흰색은 전통적인 이미지대로 평화를 함축한다. 그것은 몇 개의 변주로 드러나는데 또다른 평화의 상징인 흰 비둘기, 흰 옷을 입은 여자들(특히, 이 세 여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등. 흰색은 사실 평화라는 관습화된 상징 그 이전에, 아무런 색도 없는 것. 무엇으로도 변이될 수 있는 무정형, 혹은 카오스의 색감. 그것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가고 싶은 욕망의 흐름과 관련이 되어 있다. 말하자면 끊임없이 분출하려고 하는 분자적인 흐름. 따라서 이 흐름은 붉은 색감을 결합되면서 혁명의 흐름이 되기도 하지만 다시 검은 색감에 포획되면서 몰적 흐름으로 전이되기도 한다.(진압군 앞에서 회개하는 농민들)
다음은 검은색. 검은 색은 검은 색 계통의 제복, 군인들의 흐름을 상징한다. 경직된 선분, 몰적 흐름. 평화의 반대편에 있는 것. 검은 색은 모든 빛(색)을 흡수한 색감이다. 모든 것을 포획하려는 권력의 흐름, 혁명마저도 회유와 협박을 통해 재영토화하려는 흐름을 상징한다. 군인에게 총을 쥐여주고 그 총을 버리는 탈주의 흐름을 제거를 통해 재영토화하는 흐름. 영화의 화면은 전반적으로 낮장면을 보여주고 있으나 군인들이 등장하는 몇 장면에서는 어두운 밤의 색조로 처리된다. 이는 영화에서 시간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검은색-밤-폭력의 내습을 부조해낸다.
마지막으로 붉은색의 흐름. 이것이 혁명의 흐름, 탈주의 선분을 말하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붉은색은 셋으로 변주되는데 하나는 붉은 리본(띠), 피, 그리고 붉은 옷이다. 이 붉은색은 검은색에 맞서면서 흰색을 혁명의 대열로 이끌어내는 색감이다. 흰옷 위에 달린 붉은 리본! 붉은색은 흔히 피와 동일시되는데, 그것은 혁명의 은유인 셈인데, 영화에서는 총에 맞은 손에 흐르는 피가 붉은 리본으로 전이되는 환상적 장면을 통해 성취된다. 이 피야말로 혁명의 화환인 것, 얀초의 혁명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낙관적 신뢰가 샘물처럼 솟아나는 부분.(얀초가 이 영화를 만들 즈음 국내 정치상황은 불안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도 있었지만, 낙관주의 자체를 폐기하지는 않았다.)
세 색감이 만나며 몇 개의 접점, 그 접변 - 1)최초에는 교회를 옹호하다 혁명의 흐름에 의해 변이되는 지식인으로 상징되는 인물의 회개와 붉은 리본이 달린 흰 옷으로 갈아입기, 2)반혁명적인 군인되기를 거부하다 사살된 인물의 흰옷으로 재생하기, 그리고 그의 혁명 실패 후 흐르는 피의 강물에 흰옷을 입을 채 무릎꿇고 입맞추기, 3)영화의 에필로그에 보이는 벗겨진, 혹은 나뒹구는 흰옷 위에 뿌려진 피, 그 위에 꽂힌 검은 총검의 상징, 4)어둠 속에서 총을 들고 일어서는 붉은 옷의 여인(←흰옷), 5)영화의 엔딩-검은 어둠을 배경으로 검은 총에 매달린 붉은 띠.
2.3.나체와 제복 - 의미의 추상성과 롱테이크(*에이젼슈쩨인은 쇼트와 쇼트를 충돌시키는 몽타쥬를 통해 변증법적인 영화미학을 창조했지만 얀초는 충돌시키기 보다는 쇼트들을 서로 문질러 혼돈을 만들어냄으로써 변증법을 무화시키고 변증법의 자리에 직관적인 감성, 신체에 와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감각을 창조)가 주는 감당할 수 없는 힘 때문에 지루한 영화에서 우리의 시선을 어지럽히는 나체, 여성의 나신의 의미는 고민스러운 지점. 이것은 분석적 언어로는 다 잘라낼 수 없는 여러 가지 함의를 지닌 것인데 하나의 해석가능한 실마리는 세 여자가 옷을 벗었을 때 총을 버리고 그들을 향해 달려가던 군인들. 이는 분명 어떤 욕망의 흐름을 말하는 것인데 이 흐름이 제복으로 상징되는 군인들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포획해 들인 것이다. 이 장면은 이렇게 연결된다. 달려가는 군인들-에워싸는 군인들-도망치는 군인들-어깨를 끼고 나아가는 농민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배치된 나신이 의미하는 바는 비교적 분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나신은 제복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면서 모조리 포획해들일 수 없는 인간의 慾動을 상징한다. 이 나신은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 제의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일조를 하는 것이면서, 혁명적인 흐름 속에 있고 그 전면에 있고 그 외부에 있는 것이다.
2.4.채찍과 총, 그리고 말탄 사람과 대지에 선 사람 - 혁명이 고조된 지점에서 농민들은 채찍을 가지고 말을 탄 병사들을 몰아간다. 채찍의 흐름에 총을 둔 군인들이 밀려난다. 여기서 군인들의 총의 반대편에서 총에 맞서는 채찍은 농민들의 힘이고 헝가리 전통문화의 힘일 수도 있다. 채찍을 든 사람은 대지에 발을 디디고 있고 총을 든 사람들은 대지를 짓누르는 말안장 위에 앉아 있다. 이 역시 영화 속의 혁명과 반혁명의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상징의 하나이다. 채찍과 총, 채찍은 총을 이길 수 없다. 혁명의 와중에 ‘경제원리’를 강조하던 지주는 죽지만 지주의 부인은 여전히 남아 혁명이 실패한 후 다시 등장하여 농민과 군대와 사제를 재영토화한다.
2.5.음악 : 국가-민요(혁명가)의 대립, 공식적 음악과 비공식적 음악의 충돌.
3.신화적 이미지의 내재성, 이미지의 시학
3.1.붉은 시편의 ‘시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읽기의 코드가 하나있는데 그것은 세 여자, 나신으로 등장하는 세 여자의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이 세 여자는 영화의 장면 여러 곳에 등장하는데 우선 하나는 앞에서 말한 바 있는 나신되기이다. 혁명을 잠재우기 위해 몰려온 군인들, 그들 사이에서 다섯 여자가 대열을 지으며 무용의 동작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을 바라보고선 군중-군인/농민들. 그들 앞에서 양편의 두 여자의 시중을 받는 듯한 몸짓으로 가운데 세 여자는 누드가 된다. 또다른 장면은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눈치채기 어려운 부분인데 혁명의 전야와도 같은 축제 속에서 나신의 세 여자가 마을 앞에 난 대로를 향해 달려나가고 군중이 그녀들을 둘러싸고 군무를 춘다. 그 장면이 흐린 장면으로 원경을 이루면서 카메라가 비추는 장면은 또다른 원무이다. 농민의 원무는 함께 원무를 추던 어떤 여자들 셋을 다시 큰 목욕통 속으로 넣은 후 다시 제의적 원무(일종의 혁명의 정결의식 같은 것)를 벌이는데 이 세 여자들은 뜻밖에도 나신으로 대로를 달려 나갔던 그 여자들과 동일인물들이다. 원경과 근경의 裸女들의 동일성! 이 은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나녀들은 누구인가?
붉은 시편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희생이니 솔라리스를 비롯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이 그러하듯이 기독교적인 이미지들이다. 십자가 위에 올라가 있는 비둘기의 이미지가 그렇고 손바닥을 쏘는 총과 손바닥에서 피가 흐르는 삽자가의 예수상적인 이미지가 그렇다. 이런 흐름 위에서 세 여자의 이미지도 읽을 수 있다. 물론 상당히 샤마니즘적인 요소가 있지만 세 여자는 동정녀라는 신화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키스를 통해 총에 맞은 군인을 살리는 장면이 그렇고 목욕통 속에서 농민들이 세 여자를 세례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리고 특히나 원경과 근경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세 여자의 모습은 달리 읽어낼 도리가 없다.(어디에나 내재하는 신의 현존) 세 여자는 기독교의 삼위신, 십자가 위의 세 죄인과도 의미상 연결되는 세 女神이다. 혁명을 이끄는 여신이고 혁명과 함께 하다가 혁명과 함께 쓰러지는 여신들, 농민의 혁명적 흐름 속에 내재한 희망의 에너지같은 존재들이다.
따라서 이 原여신들은 교회와 사제로 상징되는 권력에 포획된 사제와 보편종교(권력의 담론으로 전이된 종교) 이전에 존재하는 종교의 흐름, 카오스적이고 샤마니즘적인 흐름이다. 영화에서 드러나듯이 사제는 권력의 편에서 빵 때문에 죄짓는 이들이 있다고 혁명을 비난하고 추기경이라는 권력의 경직된 독사의 선분을 내세워 “대중운동은 위험합니다”라고 앵무새처럼 주기도문을 외운다. 물론 이 사제의 흐름은 농민들에 의해 불로 심판되지만 새로 부임한 사제는 다시 성수를 뿌리며 권력과 지주의 동반자가 되어 권력의 재영토화의 이데올로기적 기구가 된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른 바 원종교는 어느 경우나 탈주의 흐름이지만 그 원종교는 사제와 교회라는 정착적 선분 속에서 즉시 권력에 포획되고 권력의 선교사가 된다. 이것이 종교의 아이러니이다. 아이러니가 생산하는 비극적 지점이다. 그러므로 세 여신은 사제의 욕망이 포획하지 못한 아니 오히려 혁명적 흐름이 자기화한, 아니 원 흐름으로 끌어낸, 사제가 왜곡한 福地를 복원한 유토피아이고 혁명 이전에도 혁명의 내부에도 혁명 이후에도 항상-이미 존재하고 있던 에너지이다. 따라서 이 흐름 속에서는 “주님의 왕국이 사회주의 세상이 될 수” 있다. 현실에서 주님의 왕국은 사회주의 혁명과 배치되지만. 대지의 열매는 우리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다.
3.2.여기에서 우리는 저 농민혁명을 가능케했던 힘에 대해,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혁명의 에너지에 대해 사유해볼 필요가 있다. 혁명의 힘은 언제나 외부에 있다. 그러나 그 외부는 안에 있는 바깥이다. 안에서 바깥을 사유하지 않는다면 혁명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 안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보충물로서의 바깥. 이 양가적 개념을 통해 서양 형이상학의 이분법적 사유를 극복하려고 한 인물이 데리다이고 들뢰즈이지만, 선불교식으로 김시습식으로 이 문제를 논의하자면 이 바깥은 正位에도 있지 아니하고 偏位에도 있지 아니하고 정위와 편위 사이에서 끊임없이 운동하며 출렁거리는 無位의 에너지이다. 그리고 이 에너지를 신체화한 것이 무위인이라는 혁명적 주체, 노마드적 주체(내부에 여신을 품고 사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혁명적 에너지는 거기서 흘러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세 여신의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를 느낀다. 세 여신은 그것이 신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의 외부에 있는 것이지만 여신은 항상-이미 농민들의 내부에서 그들을 혁명으로 선도하고 그들과 먹고 마시고 춤을 추고, 심지어는 그들과 함께 죽는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내부에 있는 존재이다. 세 여신이 없이 혁명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 여신은 혁명을 동기이고 필수적 구성요소. “우린 승리하리라.”라는 혁명의 노래는 그들의 내부에 들어와 있는 외부인 여신들이 부르는 노래에 다름 아니다. (*참고:이는 홍길동전의 저 율도국 역시 마찬가지. 세 여신과 율도국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홍길동을 이끌었던 힘은 율도국에 있었다. 율도국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율도국이 홍길동을 항상-이미 견인하지 않았다면 홍길동의 탈주선은 불가능했을 것. 포획으로부터 벗어나는 힘은 외부로부터 온 것인데 그 외부란 이미-항상 현실에 끊임없이 관여하고 현실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재하는 외부. 홍길동은 무위인!)
우리에겐 ‘신화란 무엇인가’라는 낡은 질문이 있다. 다양한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신화의 의미작용이란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것을 강제적으로 명시하며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도록 돕는 동시에 우리에게 그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힘과 같은 것이다. 바르트는 이 신화적 의미작용의 문제에 대해 프랑스 삼색기에 거수경례를 올리는 흑인 프랑스군인의 사진을 신화적 이미지로 제시한 바 있다. 이는 물론 신화의 의미작용이 만들어내는 부정적인, 즉 제국주의 적인 의미작용을 지적하는 것이지만, 신화는 논증없는 의미의 직감적 강요를 통해 그 힘을 긍정적인 지점으로 돌려 놓기도 한다. 붉은 시편이 보여주는 세 여신의 이미지에 담긴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는지. 혁명을 이끄는 유토피아, 신화(성)!
얀초는 지극히 추상적인 이미지의 시학을 보여주는 붉은 시편을 통해 바로 이 지점을 노렸던 것. 이 추상적인 것, 신화적인 이미지야말로 혁명의 무한한 동기가 될 수 있다는 것. 명시적이지 않은 것, 그는 우리의 사유와 의식을 촉구하지 않고 저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감각을 직접적으로 난타하여 우리의 무의식에 어떤 주름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신체화된 이미지야말로 한순간 혁명적 흐름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왜 영화의 제목은 붉은 ‘시편’인가?
4.붉은 시편의 붉은 시
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사제복을 입은 ‘코믹한’ 군인의 회개제의를 통해, 그리고는 새로운 사제를 통해 붉은 시편의 붉은 시는 지워진다. 그런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영화적 시간의 역전(전체적으로 시간이 겹쳐지고 생사가 혼재되어 있지만)이 있는데 그것은, 이 붉은 시 지우기는 물리적 시간으로는 혁명 이후에 있는 것이지만 영화적 시간에서는 실패한 혁명의 나뒹구는 시체 앞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적 시간의 역전을 위해 얀초는 죽은 혁명농민들을 흰옷을 입혀 살려내어, 그리고 마치 뒤로 돌리는 영사기처럼 뒷걸음칠치는 동작으로 통해 빚어낸다. 이 역전을 통해 실패의 비극은 혁명의 역동성과 낙관으로 전환된다. 엔딩의 붉은 띠를 달고 들려진 총은 낙관의 힘을 상징한다. 죽은 여인은 붉은 옷을 입고 부활해 다시 혁명의 총을 쏜다. 다시 탈주를 감행한다. 비평가들이 얀초의 후기 영화를 두고 낙관적 기조를 운위하는 것도 이런 점을 두고 말한 것은 아닐런지.
얀초는 이상적인 혁명을 가능성을 믿는 맑시스트였다. 붉은 시편의 침묵의 언어 속에 가끔씩 낙엽 위에 부신 햇살처럼 드러나는 대사들은 좋은 사례 : “노인이 길을 가다 씨를 주워 심는다면 그 열매를 따는 것은 노인이 아닐 것이다. 그 후손이 열매는 딸 것이다. 우리는 후손을 위해 그 열매를 심는 것이다.” 얀초는, 88올림픽을 기념하는 문화행사의 하나로 기획된 KBS 드라마를 찍기 위해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는 어느 영화과 대학생들과 가진 비공개 대화석상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지난 시기 우리 선배들은 현실에 지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싸웠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고 그럴 필요도 없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참을성있게 웃으며 혁명하자.” 붉은 시편이 보여주는 혁명의 낙관성, 긍정의 철학을 담은 말이다. 우리에게는 의미심장한.
여기서 다시, 배신자를 칼로 찌르고 군인의 총에 스러진, 저 음유시인의 노래를 들어보자.
“진정한 종말이 올 때까지 계속 가리라. 바위는 강하고 버터는 부드럽지. 그러나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완전히 끝날 때까지, 바위는 강하고 버터는 부드럽지 …….”
99가을 수유강좌 필로시네마(2) 11/12. ☞ 조현설
붉은 시편의 신화적 이미지와 혁명에 대한 상상
1.19세기 헝가리 농민 혁명, 그리고 몇 갈래 흐름
1.1.미끌로시 얀초(Miklos Jancso, 1921~)의 후기 영화를 대표하고 거의 대부분의 평론가들로부터 대표작 평가를 받는 붉은 시편(1972, 깐느영화제 감독상)은 19세기 헝가리 농민혁명(1890)을 그리고 있지만 역사의 구체성은 발레와 같은 몸짓 속에 추상회화처럼 숨어 있다. 얀초 영화가 흔히 그러 하듯이 영웅적인 혁명투사를 보여주지도 않고 알기 쉬운 줄거리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영화에서는 심지어 인물의 이름조차도 등장하기 않거나 큰 의미작용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인물은 이미지화되어 있고 이미지에 의한 애매한 의미작용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 이 애매함이야말로, 얀초의 작가적 개성이고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영상미학의 창조였고, 헝가리를 얀초의 나라라고 감히 부를 수 있게 했다.
영상기호학을 개척한 롤랑 바르뜨의 말을 빌자면 이 의미, 즉 영화적인 애매함이란 기호학적 규칙들로는 정의할 수 없는 ‘무딘 의미’(sens abtus)이다. 무딘 의미는 자연스럽게 포착되기를 거부하는 의미, 번역불가능한 의미, 그러기에 오히려 이미지가 주는 쾌락, 즉 미감을 경험할 수 있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이 무딘 의미를 탈코드적인 사유를 촉발한다. 물론 이 무딘 의미는 영상기호의 일반적 의미이지만 그것을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우리에게 경험케 하는 영화가 붉은 시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붉은 이란 혁명적인 형용사를 쓴 ‘시편’이란 제목은 더없이 적절한 것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얀초는 이전의 사회주의 미학이 추구했던 선명한 지시적 의미의 실천이라는 영화미학을 개신한 맑시스트 영화작가라 할 수 있다. 어느 대담에서 그가 말했던 “밝은 색채로 영화를 보여주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이전의 사회주의 미학이 지녔던 경직된 미학원리에 대한 반론이었던 셈이다. 1968년 헝가리 영화잡지 영화문화와 나눈 대담에서 루카치는 “입센이나 체홉이 소설로 그랬듯이 얀초는 영화를 통해 젊은 세대에게 올바른 답을 전해줄 수 있는 뛰어난 감독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사회주의 영화미학을 개신한 얀초에 대한 당대 최고의 비평가가 바치는 헌사일 수 있다.
1.2.붉은 시편의 혁명을 채우는 몇 갈래의 선분들은 구체적 개인을 통해 도드라지지 않고 몇 개의 굵은 줄기로 흐르고 있다.(영웅주의의 배제) 따라서 이 영화에서 헝가리 농민혁명의 구체성과 이론을 읽어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실수. 중요한 것은 어느 시공에서나 있을 수 있는 혁명의 다양한 흐름들이 만나고 결절되고 풀려나가는 역동적인 흐름, 그 욕동들을 읽어 내는 일.(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할 것이 카메라와 인물들의 끊임없는 움직임, 이는 얀초영상의 핵심적 미학, 한시도 정지하지 않는다. 이는 집단의 연대감이나 집단 내부의 갈등을 표현하는 것, 그야말로 끊임없는 욕망의 다양한 흐름을 보여주려는 것.) 그러므로 이 영화가 인물들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은 사회주의와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이지만 우리는 그 이상을 읽어낼 필요가 있다.
#포인트 : 몇 갈래의 흐름과 흐름들의 충돌과 연대.
1)농민의 흐름 - 헝가리 민속음악과 일체가 된 흐름, 혁명하는 흐름과 회개하는 흐름
2)지식인의 흐름 - 친농민적 흐름과 반농민적, 친교회적 흐름
3)군인의 흐름 - 총을 버리는 군인과 총을 쏘는 군인 사이
4)사제의 흐름 - 그리스 정교의 옛 사제와 새로운 사제 사이(변함없이 경직된 선분)
2.이미지의 계열과 이미지의 충돌, 그 의미의 생성
2.1.혁명의 장을 만들어 가는 여러 갈래의 흐름들은 서로 충돌하는데 영화에서 그것은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우선 혁명의 흐름과 반혁명의 흐름의 충돌, 이 흐름은 두 이미지의 충돌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군중들의 집단무와 같은 움직임으로 드러남. 원과 직선의 충돌.
영화에서 농민봉기의 혁명적 흐름은 항상 원무의 형태로 표현된다. 그것은 헝가리 민속음악의 선율 위에서 연대와 꼬뮨의 상징으로 역동한다. 상대적으로 반혁명의 흐름인 군인들은 직선의 형태로 표현된다. 군인들은 말을 타고 군중들의 주위를 돌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말타기는 원을 그리지 않고 두 지점 사이를 오가는 직선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경직된 흐름과 유연한 흐름을 표현한다. 유연한 흐름이 혁명의 흐름이고 모든 것을 감싸안고 흐르는 혁명과 꼬뮨의 흐름이라면 경직된 흐름은 그 흐름들을 곳곳에서 절단하는 흐름이고 절단하여 포획하는 흐름이다.
두 흐름의 충돌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영화의 종반부에 배치되어 있는 혁명의 가장 극적 지점이다. 마치 군인들이 양편에 도열한 가운데 운동회를 하듯이 농민들과 농민들에 동조한 군인 지식인 등의 흐름이 사각의 직선 안에서 원형으로 하나가 된다. 그 흐름에 도열한 직선들도 일시적으로 마치 그 에너지의 역동 속으로 빨려들 듯이 혁명의 대열에 합류한다. 그러나 직선의 흐름은 이미 제복으로 상징되는 신체화된 직선이다. 일시적으로 합류한 흐름은 한 줄기 나팔소리에 일시에 직선으로 재생산되고 그들의 총알은 혁명을 향해 날아간다. 원의 풀어짐. 죽음.
2.2.세 갈래의 색채, 세 갈래의 흐름 - 붉은 시편에 두드러진 이미지 중의 또다른 하나가 영화의 제목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색감의 흐름이다. 흰색과 검은 색, 그리고 붉은 색의 흐름. 영화는 이 세 갈래의 색감을 중심으로 이미지의 화음과 불협화음을 빚어낸다.
먼저 흰색은 전통적인 이미지대로 평화를 함축한다. 그것은 몇 개의 변주로 드러나는데 또다른 평화의 상징인 흰 비둘기, 흰 옷을 입은 여자들(특히, 이 세 여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등. 흰색은 사실 평화라는 관습화된 상징 그 이전에, 아무런 색도 없는 것. 무엇으로도 변이될 수 있는 무정형, 혹은 카오스의 색감. 그것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가고 싶은 욕망의 흐름과 관련이 되어 있다. 말하자면 끊임없이 분출하려고 하는 분자적인 흐름. 따라서 이 흐름은 붉은 색감을 결합되면서 혁명의 흐름이 되기도 하지만 다시 검은 색감에 포획되면서 몰적 흐름으로 전이되기도 한다.(진압군 앞에서 회개하는 농민들)
다음은 검은색. 검은 색은 검은 색 계통의 제복, 군인들의 흐름을 상징한다. 경직된 선분, 몰적 흐름. 평화의 반대편에 있는 것. 검은 색은 모든 빛(색)을 흡수한 색감이다. 모든 것을 포획하려는 권력의 흐름, 혁명마저도 회유와 협박을 통해 재영토화하려는 흐름을 상징한다. 군인에게 총을 쥐여주고 그 총을 버리는 탈주의 흐름을 제거를 통해 재영토화하는 흐름. 영화의 화면은 전반적으로 낮장면을 보여주고 있으나 군인들이 등장하는 몇 장면에서는 어두운 밤의 색조로 처리된다. 이는 영화에서 시간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검은색-밤-폭력의 내습을 부조해낸다.
마지막으로 붉은색의 흐름. 이것이 혁명의 흐름, 탈주의 선분을 말하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붉은색은 셋으로 변주되는데 하나는 붉은 리본(띠), 피, 그리고 붉은 옷이다. 이 붉은색은 검은색에 맞서면서 흰색을 혁명의 대열로 이끌어내는 색감이다. 흰옷 위에 달린 붉은 리본! 붉은색은 흔히 피와 동일시되는데, 그것은 혁명의 은유인 셈인데, 영화에서는 총에 맞은 손에 흐르는 피가 붉은 리본으로 전이되는 환상적 장면을 통해 성취된다. 이 피야말로 혁명의 화환인 것, 얀초의 혁명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낙관적 신뢰가 샘물처럼 솟아나는 부분.(얀초가 이 영화를 만들 즈음 국내 정치상황은 불안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도 있었지만, 낙관주의 자체를 폐기하지는 않았다.)
세 색감이 만나며 몇 개의 접점, 그 접변 - 1)최초에는 교회를 옹호하다 혁명의 흐름에 의해 변이되는 지식인으로 상징되는 인물의 회개와 붉은 리본이 달린 흰 옷으로 갈아입기, 2)반혁명적인 군인되기를 거부하다 사살된 인물의 흰옷으로 재생하기, 그리고 그의 혁명 실패 후 흐르는 피의 강물에 흰옷을 입을 채 무릎꿇고 입맞추기, 3)영화의 에필로그에 보이는 벗겨진, 혹은 나뒹구는 흰옷 위에 뿌려진 피, 그 위에 꽂힌 검은 총검의 상징, 4)어둠 속에서 총을 들고 일어서는 붉은 옷의 여인(←흰옷), 5)영화의 엔딩-검은 어둠을 배경으로 검은 총에 매달린 붉은 띠.
2.3.나체와 제복 - 의미의 추상성과 롱테이크(*에이젼슈쩨인은 쇼트와 쇼트를 충돌시키는 몽타쥬를 통해 변증법적인 영화미학을 창조했지만 얀초는 충돌시키기 보다는 쇼트들을 서로 문질러 혼돈을 만들어냄으로써 변증법을 무화시키고 변증법의 자리에 직관적인 감성, 신체에 와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감각을 창조)가 주는 감당할 수 없는 힘 때문에 지루한 영화에서 우리의 시선을 어지럽히는 나체, 여성의 나신의 의미는 고민스러운 지점. 이것은 분석적 언어로는 다 잘라낼 수 없는 여러 가지 함의를 지닌 것인데 하나의 해석가능한 실마리는 세 여자가 옷을 벗었을 때 총을 버리고 그들을 향해 달려가던 군인들. 이는 분명 어떤 욕망의 흐름을 말하는 것인데 이 흐름이 제복으로 상징되는 군인들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포획해 들인 것이다. 이 장면은 이렇게 연결된다. 달려가는 군인들-에워싸는 군인들-도망치는 군인들-어깨를 끼고 나아가는 농민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배치된 나신이 의미하는 바는 비교적 분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나신은 제복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면서 모조리 포획해들일 수 없는 인간의 慾動을 상징한다. 이 나신은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 제의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일조를 하는 것이면서, 혁명적인 흐름 속에 있고 그 전면에 있고 그 외부에 있는 것이다.
2.4.채찍과 총, 그리고 말탄 사람과 대지에 선 사람 - 혁명이 고조된 지점에서 농민들은 채찍을 가지고 말을 탄 병사들을 몰아간다. 채찍의 흐름에 총을 둔 군인들이 밀려난다. 여기서 군인들의 총의 반대편에서 총에 맞서는 채찍은 농민들의 힘이고 헝가리 전통문화의 힘일 수도 있다. 채찍을 든 사람은 대지에 발을 디디고 있고 총을 든 사람들은 대지를 짓누르는 말안장 위에 앉아 있다. 이 역시 영화 속의 혁명과 반혁명의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상징의 하나이다. 채찍과 총, 채찍은 총을 이길 수 없다. 혁명의 와중에 ‘경제원리’를 강조하던 지주는 죽지만 지주의 부인은 여전히 남아 혁명이 실패한 후 다시 등장하여 농민과 군대와 사제를 재영토화한다.
2.5.음악 : 국가-민요(혁명가)의 대립, 공식적 음악과 비공식적 음악의 충돌.
3.신화적 이미지의 내재성, 이미지의 시학
3.1.붉은 시편의 ‘시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읽기의 코드가 하나있는데 그것은 세 여자, 나신으로 등장하는 세 여자의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이 세 여자는 영화의 장면 여러 곳에 등장하는데 우선 하나는 앞에서 말한 바 있는 나신되기이다. 혁명을 잠재우기 위해 몰려온 군인들, 그들 사이에서 다섯 여자가 대열을 지으며 무용의 동작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을 바라보고선 군중-군인/농민들. 그들 앞에서 양편의 두 여자의 시중을 받는 듯한 몸짓으로 가운데 세 여자는 누드가 된다. 또다른 장면은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눈치채기 어려운 부분인데 혁명의 전야와도 같은 축제 속에서 나신의 세 여자가 마을 앞에 난 대로를 향해 달려나가고 군중이 그녀들을 둘러싸고 군무를 춘다. 그 장면이 흐린 장면으로 원경을 이루면서 카메라가 비추는 장면은 또다른 원무이다. 농민의 원무는 함께 원무를 추던 어떤 여자들 셋을 다시 큰 목욕통 속으로 넣은 후 다시 제의적 원무(일종의 혁명의 정결의식 같은 것)를 벌이는데 이 세 여자들은 뜻밖에도 나신으로 대로를 달려 나갔던 그 여자들과 동일인물들이다. 원경과 근경의 裸女들의 동일성! 이 은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나녀들은 누구인가?
붉은 시편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희생이니 솔라리스를 비롯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이 그러하듯이 기독교적인 이미지들이다. 십자가 위에 올라가 있는 비둘기의 이미지가 그렇고 손바닥을 쏘는 총과 손바닥에서 피가 흐르는 삽자가의 예수상적인 이미지가 그렇다. 이런 흐름 위에서 세 여자의 이미지도 읽을 수 있다. 물론 상당히 샤마니즘적인 요소가 있지만 세 여자는 동정녀라는 신화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키스를 통해 총에 맞은 군인을 살리는 장면이 그렇고 목욕통 속에서 농민들이 세 여자를 세례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리고 특히나 원경과 근경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세 여자의 모습은 달리 읽어낼 도리가 없다.(어디에나 내재하는 신의 현존) 세 여자는 기독교의 삼위신, 십자가 위의 세 죄인과도 의미상 연결되는 세 女神이다. 혁명을 이끄는 여신이고 혁명과 함께 하다가 혁명과 함께 쓰러지는 여신들, 농민의 혁명적 흐름 속에 내재한 희망의 에너지같은 존재들이다.
따라서 이 原여신들은 교회와 사제로 상징되는 권력에 포획된 사제와 보편종교(권력의 담론으로 전이된 종교) 이전에 존재하는 종교의 흐름, 카오스적이고 샤마니즘적인 흐름이다. 영화에서 드러나듯이 사제는 권력의 편에서 빵 때문에 죄짓는 이들이 있다고 혁명을 비난하고 추기경이라는 권력의 경직된 독사의 선분을 내세워 “대중운동은 위험합니다”라고 앵무새처럼 주기도문을 외운다. 물론 이 사제의 흐름은 농민들에 의해 불로 심판되지만 새로 부임한 사제는 다시 성수를 뿌리며 권력과 지주의 동반자가 되어 권력의 재영토화의 이데올로기적 기구가 된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른 바 원종교는 어느 경우나 탈주의 흐름이지만 그 원종교는 사제와 교회라는 정착적 선분 속에서 즉시 권력에 포획되고 권력의 선교사가 된다. 이것이 종교의 아이러니이다. 아이러니가 생산하는 비극적 지점이다. 그러므로 세 여신은 사제의 욕망이 포획하지 못한 아니 오히려 혁명적 흐름이 자기화한, 아니 원 흐름으로 끌어낸, 사제가 왜곡한 福地를 복원한 유토피아이고 혁명 이전에도 혁명의 내부에도 혁명 이후에도 항상-이미 존재하고 있던 에너지이다. 따라서 이 흐름 속에서는 “주님의 왕국이 사회주의 세상이 될 수” 있다. 현실에서 주님의 왕국은 사회주의 혁명과 배치되지만. 대지의 열매는 우리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다.
3.2.여기에서 우리는 저 농민혁명을 가능케했던 힘에 대해,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혁명의 에너지에 대해 사유해볼 필요가 있다. 혁명의 힘은 언제나 외부에 있다. 그러나 그 외부는 안에 있는 바깥이다. 안에서 바깥을 사유하지 않는다면 혁명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 안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보충물로서의 바깥. 이 양가적 개념을 통해 서양 형이상학의 이분법적 사유를 극복하려고 한 인물이 데리다이고 들뢰즈이지만, 선불교식으로 김시습식으로 이 문제를 논의하자면 이 바깥은 正位에도 있지 아니하고 偏位에도 있지 아니하고 정위와 편위 사이에서 끊임없이 운동하며 출렁거리는 無位의 에너지이다. 그리고 이 에너지를 신체화한 것이 무위인이라는 혁명적 주체, 노마드적 주체(내부에 여신을 품고 사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혁명적 에너지는 거기서 흘러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세 여신의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를 느낀다. 세 여신은 그것이 신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의 외부에 있는 것이지만 여신은 항상-이미 농민들의 내부에서 그들을 혁명으로 선도하고 그들과 먹고 마시고 춤을 추고, 심지어는 그들과 함께 죽는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내부에 있는 존재이다. 세 여신이 없이 혁명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 여신은 혁명을 동기이고 필수적 구성요소. “우린 승리하리라.”라는 혁명의 노래는 그들의 내부에 들어와 있는 외부인 여신들이 부르는 노래에 다름 아니다. (*참고:이는 홍길동전의 저 율도국 역시 마찬가지. 세 여신과 율도국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홍길동을 이끌었던 힘은 율도국에 있었다. 율도국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율도국이 홍길동을 항상-이미 견인하지 않았다면 홍길동의 탈주선은 불가능했을 것. 포획으로부터 벗어나는 힘은 외부로부터 온 것인데 그 외부란 이미-항상 현실에 끊임없이 관여하고 현실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재하는 외부. 홍길동은 무위인!)
우리에겐 ‘신화란 무엇인가’라는 낡은 질문이 있다. 다양한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신화의 의미작용이란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것을 강제적으로 명시하며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도록 돕는 동시에 우리에게 그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힘과 같은 것이다. 바르트는 이 신화적 의미작용의 문제에 대해 프랑스 삼색기에 거수경례를 올리는 흑인 프랑스군인의 사진을 신화적 이미지로 제시한 바 있다. 이는 물론 신화의 의미작용이 만들어내는 부정적인, 즉 제국주의 적인 의미작용을 지적하는 것이지만, 신화는 논증없는 의미의 직감적 강요를 통해 그 힘을 긍정적인 지점으로 돌려 놓기도 한다. 붉은 시편이 보여주는 세 여신의 이미지에 담긴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는지. 혁명을 이끄는 유토피아, 신화(성)!
얀초는 지극히 추상적인 이미지의 시학을 보여주는 붉은 시편을 통해 바로 이 지점을 노렸던 것. 이 추상적인 것, 신화적인 이미지야말로 혁명의 무한한 동기가 될 수 있다는 것. 명시적이지 않은 것, 그는 우리의 사유와 의식을 촉구하지 않고 저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감각을 직접적으로 난타하여 우리의 무의식에 어떤 주름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신체화된 이미지야말로 한순간 혁명적 흐름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왜 영화의 제목은 붉은 ‘시편’인가?
4.붉은 시편의 붉은 시
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사제복을 입은 ‘코믹한’ 군인의 회개제의를 통해, 그리고는 새로운 사제를 통해 붉은 시편의 붉은 시는 지워진다. 그런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영화적 시간의 역전(전체적으로 시간이 겹쳐지고 생사가 혼재되어 있지만)이 있는데 그것은, 이 붉은 시 지우기는 물리적 시간으로는 혁명 이후에 있는 것이지만 영화적 시간에서는 실패한 혁명의 나뒹구는 시체 앞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적 시간의 역전을 위해 얀초는 죽은 혁명농민들을 흰옷을 입혀 살려내어, 그리고 마치 뒤로 돌리는 영사기처럼 뒷걸음칠치는 동작으로 통해 빚어낸다. 이 역전을 통해 실패의 비극은 혁명의 역동성과 낙관으로 전환된다. 엔딩의 붉은 띠를 달고 들려진 총은 낙관의 힘을 상징한다. 죽은 여인은 붉은 옷을 입고 부활해 다시 혁명의 총을 쏜다. 다시 탈주를 감행한다. 비평가들이 얀초의 후기 영화를 두고 낙관적 기조를 운위하는 것도 이런 점을 두고 말한 것은 아닐런지.
얀초는 이상적인 혁명을 가능성을 믿는 맑시스트였다. 붉은 시편의 침묵의 언어 속에 가끔씩 낙엽 위에 부신 햇살처럼 드러나는 대사들은 좋은 사례 : “노인이 길을 가다 씨를 주워 심는다면 그 열매를 따는 것은 노인이 아닐 것이다. 그 후손이 열매는 딸 것이다. 우리는 후손을 위해 그 열매를 심는 것이다.” 얀초는, 88올림픽을 기념하는 문화행사의 하나로 기획된 KBS 드라마를 찍기 위해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는 어느 영화과 대학생들과 가진 비공개 대화석상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지난 시기 우리 선배들은 현실에 지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싸웠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고 그럴 필요도 없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참을성있게 웃으며 혁명하자.” 붉은 시편이 보여주는 혁명의 낙관성, 긍정의 철학을 담은 말이다. 우리에게는 의미심장한.
여기서 다시, 배신자를 칼로 찌르고 군인의 총에 스러진, 저 음유시인의 노래를 들어보자.
“진정한 종말이 올 때까지 계속 가리라. 바위는 강하고 버터는 부드럽지. 그러나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완전히 끝날 때까지, 바위는 강하고 버터는 부드럽지 …….”
1999년 11월 26일, 강사 : 고미숙
수유연구실 강좌 : 필로시네마 : 영화로 탈주하기 2. 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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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와 실체에 대한 철학적 물음들 : 카게무사
고 미 숙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카케무사>는 엄청난 스케일의 자본이 투여되어야 하는 전쟁영화로 개봉되기까지 적지 않은 난관들을 거쳐야 했다. 구로사와는 초기에 제작자들의 외면으로 영화화가 어렵자 시나리오를 직접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1978년 번역대본과 그림을 갖고 유럽으로 건너가 전시회를 열었으나, 별무소득. 다시 미국으로. 미국에는 당시 미국영화계를 주름잡던 프란시스 코폴라와 조지 루카스가 자신들의 정신적 스승인 구로사와를 열렬히 맞이하였고, 마침내 그를 20세기 폭스사와 연결해 주었다. 20세기 폭스사는 다시 일본의 도호영화사에 접근하여 투자를 유도하여 미,일 합작을 성사시켰다. 이를테면, 구로사와는 “옆에 있는 제작자를 만나기 위해 지구를 반바퀴나 돌았던” 셈이다.
1980년에 개봉된 <카게무사>는 일본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인 6백만 달러가 투자되었고, 첫흥행에서 천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림으로써 일본영화 사상 최고 히트작이 되었다.준비에서 흥행까지의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구로사와의 영화적 열정과 세계영화사에서의 위치, 그리고 일본관객의 저력을 두루 확인할 수 있다. 영화화될 지도 미지수인 작품을 그림으로 옮기다니! 도대체 자신의 시나리오를 이토록 사랑하는 감독이 있을까? 여기에는 “진정으로 영화적인 표현을 얻기 위해서는, 카메라와 마이크는 불과 물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 수 있어야 한다. 시나리오는 그렇게 할 힘을 지닌 무엇이어야 한다.”는 구로사와의 육성이 그대로 무르녹아 있다.
그러면 도대체 그로 하여금 대륙을 횡단하게끔 한 시나리오는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전국 시대 전쟁의 한 책략이었던 그림자 무사에 관한 것으로 자신의 주인과 일체화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이야기다. 이미 <라쇼몽>이나 <7인의 사무라이>를 통해 저 아득한 시간의 장막 속으로 들어가 실존적 물음을 던지는 실력을 멋지게 보여준 구로사와답게 이 시나리오의 기본구조 역시 참으로 특이하면서도 모던하다.
그러나 그의 진술에 따르면, 그가 이 시나리오에 착안하게 된 것이 일단 그림자와 실체라는 철학적 물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전국시대의 한 전투에 대한 흥미때문이었다. 즉, 그는 다른 작품을 위해 16세기를 공부하다가 전국시대를 장식한 전투 중에서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에 의해 다께다군을 전멸시킨 나가시노 전투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거기서 그를 사로잡은 질문은 “노부나가와 이에야스 혈족이 하나도 죽지 않았는데, 다케다 혈족이 왜 전멸하게 되었는가?”라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전투에서 죽은 무사들은 신겐에 의해 마법에 걸린 듯한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신겐이 가케무사를 많이 썼다는 간단한 역사정보를 가지고서 그 수수께끼에 접근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 인물을 어떻게 신겐의 성격 속에 빠져들게 해서 실제로 신겐이 될 수 있게 할 것인가?” 결국 그것은 “신겐(캐릭터)의 힘에 의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정국, ?구로사와 아키라?(지인,1994)를 참조할 것.
물론 감독의 의도가 텍스트를 전적으로 통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의도와 미끄러질 수도 있고, 목표한 바의 경계를 넘어갈 수도 있다. 이 영화 또한 구로사와의 애초의 동기와 의도를 넘어선 여러 선들이 흘러다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전국시대라는 일본사의 격동의 현장이, 즉, 께다 신겐과 그를 둘러싼 대명들의 전쟁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겐이라는 존재의 의미, 더 나아가 한 주체가 구성되는 방식에 대한 철학적 선들이 가로지르고 있다. 이제 이 두 계열을 따라 가면서 텍스트를 음미해보자.
영화 속의 ‘일본사’ 몇 장면
이 영화의 배경은 16세기 전국시대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일본은 오닌의 난(1467-1477)무로마치 막부가 동요하고 있던 1465년 장군 요시마사가 동생 요시미를 후계자로 정하고 관령 호소카와를 후견인으로 삼은 뒤, 그로부터 3일 후 부인 도미코가 요시히사를 낳자, 도미코는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호소카와와 라이벌 관계인 야마나 가문을 후견인으로 내세운다. 이를 계기로 양쪽의 군대가 교토를 반분하여 동서로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군과 서군이라고 명명했다. 표면적으로는 장군가 및 대명들의 상속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것이지만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은 토착무사들과 농민들의 결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례가 야마시로국의 자치로 무사와 농민들의 연합군이 동,서 양군을 격파하여, 막부로부터 완전 독립한 채 8년간 지속되었다. 일종의 코뮨이었던 셈.)
이후 기존의 천황과 장군을 중심으로 했던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지면서 약 100여년간 유력 大名(다이묘)들 사이의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카마쿠라 체제 이전의 무사동맹체의 우두머리들이나 혹은 슈고들과는 달리, 다이묘는 그 지위가 천황정부나 바쿠후의 합법적 승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 결코 아니었고, 단지 그의 무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다이묘는 그 자신이 하나의 권력이었다. 천황과 쇼군이 계속하여 교토에 존재했으나, 다이묘는 전장에서 승리로 얻은 것 이외에는 어떠한 권위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피터 듀스, ?일본의 봉건제?(신서원, 1991), 108면.
- 수많은 다이묘들의 유동성으로 인해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강력한 힘을 가진 자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가능케 하는, 이른바 ‘사무라이 정신’을 구성하는 동력이기도 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전국시대 가운데서 서서히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한 16세기 후반기이다. 통일의 세 주역은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노부나가가 쌓아놓은 통일작업을 완료시킨 히데요시는 생략되었다. 그리고 노부나가와 이에야스 가운데 주역은 단연 전자이다.
먼저 오다 노부나가(1534-1582)에 대하여. 중부일본에 영지를 확보하고 있었던 소규모 다이묘 가문의 아들이었던 노부나가가 단번에 전국 다이묘의 주역으로 떠오른데는 그의 저돌적 힘과 치밀한 전략 덕분이다. -1560년 5.18일 기요스성에 이마가와의 대군이 국경을 공격해왔다는 급전이 온다. 작전회의가 열렸으나 별다른 대책이 없어 노부나가는 잡담만 늘어놓다가 잠이나 자라고 부하들을 귀가시켰다. 밤이 샐 무렵 적군이 주요 성을 공략.포위했다는 전령이 도달하자, 노부나가는 부채를 펼치고 휙 일어서더니 평소에 즐겨 부르던 노래, “인생은 일장춘몽, 덧없는 인생이라”(영화에서 신겐의 죽음을 확인한 다음 노부나가가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이 정보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것)를 부르고 즉시 갑옷을 갖추어 입고 선 채로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출진 명령을 내렸다. 겨우 5기만을 거느리고 성문을 박차고 나가 2시간 정도 걸려 전장에 도착했을 무렵에야 겨우 2천명이 뒤를 따라붙을 수 있었다. 노부나가는 여기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험악한 지형의 산그늘을 이용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 적의 본진에 다가갔다. 적군은 승리의 무드에 싸인데다 폭풍우가 거세 산만하게 늘어져 있다가 폭풍우가 잠잠해지면서 갑자기 노부나가의 군대가 등장하자, 처음에 아군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 용맹한 노부나가의 부하가 요시모토를 죽이니 때는 5월 19일 2시였다. 이것이 그를 가장 강력한 다이묘로 부상하게 해준 ‘오케하지마의 회전’이다.
이후 1570년대에는 다이묘들 가운데 최초로 교토에 입성하여 장군 요시아키를 옹립했으나 전국의 대명들이 난립하고 있어서 통일의 꿈은 여전히 요원했다. 그 가운데 관동의 강자 다케다 신겐이 가장 큰 적수였다.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와 손을 잡고 1572년 마카타가하라에서 신겐과 대결했으나 대패했고, 게다가 1573년 장군 요시아키가 노부나가에게 등을 돌려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신겐과의 큰 대결을 앞두고 신겐이 병으로 죽고 만다. 신겐의 죽음은 당분간 비밀에 부쳐졌는데, 장군은 신겐의 죽음을 모른 채 노부나가를 공격하려 하였고, 신겐의 죽음을 안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공략하여 추방해버렸다. 이것으로 무로마치 바쿠후의 시대는 마침내 역사의 장막 뒤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노부나가가 당대 최강자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흡수한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영화에도 그런 편린들이 언뜻언뜻 보인다. 먼저 전장으로 떠나기 전, 성 위에서 축성을 해주는 서양 신부들을 향해 ‘아멘!’하고 외치는 장면과 이에야스와 강가에서 만나 회담을 할 때, 서양 와인을 들이키는 장면. 실제로 그는 당시 서양 선교사들과 깊은 친교를 맺었다.천주교는 1549년 전파되어, 1579년 경 무려 15만명의 신자가 생겼고, 일본의 네 소년이 멀리 로마까지 여행을 해서 교황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
그렇다고 그가 기독교 세계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당시 혼겐사로 대표되는 불교계와 싸우기 위해 기독교를 이용했을 뿐이다. 이에야스와의 해변정담을 나누고 떠나면서, “난 저 종교적 난봉꾼들을 진압해야하기 때문에 아주 바빠.”라는 멘트가 나오는데, 아마 이 점을 염두에 둔 대사일 것이다. -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노부나가를 이렇게 평가한다. “노부나가는 신불은 물론 그 밖의 우상도 모두 경멸하는 자이다.” “노부나가는 이해력과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이며 현실이 있을 뿐 죽음후의 세상 따위는 생각지 않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 점이 더욱 중요한데, 그는 당시 어떤 다이묘들보다 철포나 쾌속정 등 신무기의 기동력을 최대한 활용한 무장으로 평가된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대단원인 나가시노 전투(1575년 5월)가 그점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군대는 조총으로 무장하여 미카와국 나가시노에서 카쓰요리와 맞서 3천명의 철포대를 3대로 나누어 교대로 성채가에서 쏘아 다케다군의 특기인 기마대가 철포에 맞아 모두 쓰러져 전멸한다. 1543년 포르투갈의 상인들에 의해 철포가 처음 전래된 지 40년 후의 일이었다. 이 전투는 일본 전쟁사의 한 분기점이라고 하는데, 조총이라는 신무기, 그것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경제력을 지닌 노부나가 군대의 승리는 다께다로 상징되는 “전통 무사도의 종언을 고하는 비극적 만가”(최원식)였던 것이다. 신겐의 죽음을 조총에 의한 것으로 처리한 것도 어쩌면 이런 점을 염두에 둔 허구적 장치일 수 있다. 나가시노 전투 이후 아시가루(足輕), 곧 조총으로 무장한 이 보병들이 이제 전쟁의 승패를 가늠하게 되었던바, 노부나가 이후그토록 강했던 노부나가 역시 통일을 목전에 두고서 몰락한다. 히데요시의 전투를 후원하기 위해 출전하여 혼노사에서 숙박하던 중, 자신의 부하의 반란으로 불타는 절 안으로 들어가 자결하였다.
새로운 패자로 등장하는 히데요시가 바로 미천한 아시가루 출신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전쟁의 평민화?!)
그러면 우리의 주인공 다께다 신겐(1521-1573)은 역사적으로 어떤 인물인가? 그는 당시 호죠.다케다.우에스기 동국 3강의 하나였다. 스물 한 살에 아버지 노부토라를 스루가로 몰아내고 가이를 차지했고, 남쪽의 강자 스와씨를 2년간의 공방 끝에 격파했으며, 1545년 신겐가법을 제정하여 통치에도 힘썼다. 숙명적인 라이벌 우에스기 겐신과의 가와나카섬의 결전을 앞두고 자신의 아들 요시노부를 자결토록 했다.(영화의 제일 첫신에서 아버지를 몰아내고, 아들을 죽였다는 진술이 나오는데,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다.) 그후 스루가 공격을 개시하여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대하여, 노부나가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다.
그런데 실제로 다께다는 노부나가보다는 우에스기 겐신이라고 한다. 신겐은 곧바로 겐신을 떠올릴 만큼 겐신과 용호상박의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둘은 적대국에서 흉년이 들면 양식을 보내주고, 소금이 없어 곤란을 겪으면 소금을 보내줄 정도로 서로를 인정하는 라이벌이었다. “나는 소금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칼로 싸운다”는 겐신의 유명한 말에는 전통 무사도의 자긍심이 깊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께다의 속성이기도 하다. 어쨋든 다께다와 마찬가지로 우에스기 겐신 역시 대결전을 앞두고 뇌일혈로 졸지에 최후를 맞는다. 노부나가가 전국의 패자로 떠오른 데는 이 두 용장들의 허망한 죽음에 덕본 바가 크다. 물론 그것이 결국 “전통 무사도의 고매한 덕성은 콩볶는 듯한 조총소리 속에 단숨에 분쇄”(최원식)되는 역사적 필연성의 산물이라고 본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노부나가에 이어 전국을 마침내 통일한 히데요시는 해외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 일으킨 임진왜란의 패배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사이에 힘을 비축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후계자 히데요리와 그의 지지자들을 1600년, 중부 혼슈의 산악지역에서 벌어진 운명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하게 통일의 완성자가 되었고, 그가 수립한 왕조가 바로 에도 바쿠후다.(김영희편저, ?이야기 일본사? 참조)
‘전쟁영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화면배치
이제 구로사와가 제기하는 질문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보자. 먼저 오프닝 신은 신겐과 그의 동생 노부카도, 그리고 그림자가 될 사형수가 어떤 휘장 아래에 앉아있는 것으로 시작된다. “고정된 카메라, 풀 숏, 6분 가량의 롱 테이크”, 다시 말해 “원신 원숏”으로 구성된 이 연극적 배치는 문자 그대로 사형수인 도둑이 신겐의 연기를 해야하는 연극을 미리 예고한다.(세 인물이 하나의 공간에 등장하는 유일한 장면)
아울러 이 영화는 전쟁영화임에도 일반적인 전쟁영화의 장르적 틀을 깨뜨리는 구성과 미장센을 특징으로 한다. 예를 들어, 기하학적인 화면 구성과 뛰어난 색채 감각으로 장대한 스케일을 통해 병사들이 출진하는 거대한 행렬을 계산된 구도 하에 보여주고, 그들이 입고 있는 군복이나 깃발의 색깔을 이용해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한다. 음악 또한 단 하나의 테마 음악만을 계속해서 변주한다.(라쇼몽의 ‘볼레로’가 그랬듯이.) 아울러 직접적인 전투 장면 대신 사운드 효과나 조명 효과를 이용하여 전투를 간접화하는 것이 대표적인데, 다카텐진 공격 때에도 그렇지만, 특히 절정이자 대파국인 나가시노 전투에서도 기마병이 공격하고, 조총 부대가 사격하는 것만 몽타쥬로 보일 뿐 직접적으로 유혈이 낭자한 싸움의 과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이정국, ?구로사와 아키라?에서)
결국 문제는 거대한 스펙터클, 피비린내나는 전장, 장엄한 서사적 구성 등 기존의 전쟁영화들이 장기로 삼았던 부분은 이 영화의 관심대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일개 도둑에 불과한 한 인간이 어떻게 신겐이라는 실체를 획득해가는가,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인물이 모든 소여들을” 어떻게 흡수하는가의 문제이다. 처음 도둑과 신겐의 유사성은 신체적 특징일 뿐이다. 신겐의 혈육인 노부카도만이 알아챌 수 있는 유사성이고, 둘은 사실 지독히 먼 거리에 있다. 일개 좀도둑과 통일을 꿈꾸는 다이묘. 하지만 도둑의 입을 통해 말해진 것처럼 그러한 사회적 배치의 이질성이 핵심은 아니다. “나는 좀도둑에 불과하지만, 당신은 수백 명을 죽이고 영토를 강탈했어. 누가 잔인한 거지?” 이런 공격에 신겐은 “난 못된 깡패야. 아버지를 쫓아내고 아들을 죽였어. 이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어떤 짓도 할 것이다. 그것만이 이 피의 악순환을 멈출 수 있지.” 이 솔직담백함은 신겐의 캐릭터를 구성하는 주요요소인바, 이것은 둘의 인간적 유사성이면서도 또 진정한 차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둑은 한편으로 신겐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그래서 결코 단순한 연기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다께다 신겐’, 그 빈 공간을 둘러싼 몇 가지 흐름들
교토가 보이는 언덕에서 신겐이 최후를 마치자 이제 이 자리는 빈 공간이 되었다. 이 빈 공간을 일개 좀도둑이 채워가는 것, 이것이 이 영화의 구도이다. 그림자 무사는 “주인을 둘러싼 모든 것을 흡수해야만 하며, 그는 그 자신이 인상이 되어 다양한 상황들”을 통과해야 한다. 그에게 주어진 질문의 소여란 “상황 속에 숨겨져 있고 상황 속에 싸여져 있으며, 주인공이 행동할 수 있으려면, 상황에 대해 반응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추출해내야만 하는”들뢰즈, ?영화?1(
바의 것들이다.
신겐이라는 주체의 빈 자리는 다양한 계열들의 흐름들에 의해 규정되는바, 그것은 크게 신겐의 내부에 있는 항목들과 외부에 있는 항목들로 구분된다. 부하들과 가족이 전자를 구성한다면, 간자들 및 그들의 정보에 의존하는 노부나가와 이에야스가 후자에 속한다. 그림자가 해야 할 일은 이 계열들이 서로 교차하는 빈 공간을 채워주어야 하는 것이다.
사열 장면은 부하들과 간자들을 동시에 속일 수 있다. 그의 역동적 행진에 압도하여 부하들과 간자는 그의 건재를 믿을 수밖에 없다. 그들로서는 그러한 힘과 정동은 그림자가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어떤 경지의 발로이다. 또 간자들은 부하들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논리를 뛰어넘는 신겐의 카리스마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논리상으로 신겐은 분명히 죽었다. 죽었어야 한다! 그런데 저 강하고 힘찬 ‘폼’으로 사열을 하고, 위엄있는 자태로 가부키를 감상하는 것은 누구인가? 도대체 신겐 그 자신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저것을 흉내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로서는 객관적 정황과 가짜 현실 사이의 이 엄청난 간극을 그림자가 메우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는 순전히 신겐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전투를 개시한다. 이것을 통과한다면 그는 주어진 소여를 충족할 수 있을 터.
물론 그 이전에 내부의 여러 막들을 통과하는 경로를 거친다. 아이, 시종, 첩, 말 등. 사실 이 막들은 신체의 미세한 흔적들을 주시하는 것이어서 그림자가 메우기가 결코 쉽지 않은 부분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할아버지가 아니야!”라고 외치는 아이. 이것은 그 아이만이 볼 수 있는 어떤 특징, 아마도 위엄이 무서움을 야기했던 그 느낌의 부재에 대한 반응이다. 재치있는 대응에 “맞아 할아버지는 변하셨어. 무섭지 않아.”라고 대응하고, 그후 아이는 그림자인 할아버지의 이중체와 가장 친숙해진다. 그가 원하는 것, 그것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보초와 수행원들의 시선. 그것은 그에게 주인으로서의 태도와 인품을 요구하는데, “너무 거만하시군요. 돌아가신 영주님은 그러지 않으셨소.” 여기에 그는 신겐 특유의 폼, “받침대위에 턱을 괴고 그윽히 시선을 내리까는” 모습을 연출한다. -순간 그림자에게 압도당하는 수행원들.
그 다음, 첩들은 그의 신체의 특징들을 한층 깊은 곳까지 꿰뚫고 있다.(뒤에 결정적으로 들키는 것도 어깨 뒤의 상처때문임을 상기할 것!) 그의 목소리, 말투, 피부, 등등. 이것들은 아이나 시종들을 통과하는 방식과는 다른 것이 요구된다. 그는 이 난관을 진실을 말함으로써 돌파한다. “연극은 끝났소. 나는 신겐이 아니다. 카게무사일 뿐.” 의심하고 있는 대상들에게 그들의 의혹을 앞질러 가 발화해 버림으로써 상황을 전복해버린 것이다. 상황을 능동적으로 역이용하는 힘, 이것은 곧 그가 신겐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으로 믿게 만든 것이다. - 첩들을 멋지게 속이고 걸어나오는 그림자 무사의 뒷편으로 긴 그림자가 걸쳐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그림자가 신겐의 빈 자리를 메꾸어가는 과정이자, 다른 한편 신겐이라는 주체가 구성된 방식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신겐을 포함하여 모든 주체는 타자의 메시지, 타자들과의 배치 속에서 구성된다. “의미작용을 통해 타자의 메시지가 반복됨으로써 반복적인 의미와 반복적인 주체의 기표를 만들어 낸다. 이 반복적인 주체의 의미와 기표는 개인의 반복적인 사고와 행동의 준거가 된다. 이러한 준거에 자신을 일치시키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라캉은 동일화 혹은 동일시라고”(이진경)한다. - 상징적 동일시. 그림자 무사는 타자들이 욕망하는 바를 수행함으로써 실체와 중첩되어 가는 것. “인정욕망을 통해서 개인은 주체가 된다.”(이진경, ?라캉 : 도둑맞은 편지, 도둑맞은 무의식?) 사실 이것은 죽은 신겐 역시 마찬가지. 타자들이 욕망하는 바를 수행할 수 없을 때, 그 또한 한갖 그림자로 추락할 뿐. 이 영화가 16세기 신겐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해석의 지평을 넘어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쟁 수행의 능력 - 소여의 정점?
그런데 이 영화를 단지 타자의 시선에 의해 주체가 구성되는 방식만을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다. 신겐이라는 인물이 지닌 범접할 수 없는 능력, 그것은 사실 대부분의 인간들이 구성하는 주체와는 질을 달리하는 양태인데, 이 영화의 비극성의 깊이는 그림자가 그 질의 강밀도를 획득한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분명 이전에 통과한 내,외부의 막들과는 다른 종류의 소여이다. -깃발과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 깃발은 신겐의 상징이자 그 자체이다. “바람처럼 빠르고, 숲처럼 고요하고 불처럼 격렬하고 산처럼 꿋꿋하다.”는 깃발의 의미는 신겐이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실체의 자리,- 창기병과 기마병으로 구성된 그의 군대들의 뛰어난 특징과 그것들을 통솔하는 신겐의 고유성이 -이다. 먼저 작전회의에서 그림자는 그 점을 일차적으로 획득한다.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신겐의 유언이기도 하고, 가신들이 신겐에게 요구하는 바의 것을 낚아채어 버린 것이다.
이어지는 꿈 혹은 악몽은 그림자가 신겐의 소여의 심층에 다가가기 직전의 통과예의같은 의미를 지닌다. 항아리를 찢고 다가오는 신겐을 벗어나기 위해 도망가는 그림자. 그러나 돌아서 가버리는 실체를 쫓아 물 속을 정신없이 헤매는 그림자. 벗어날 수도, 그렇다고 그와 완전히 겹쳐질 수도 없는 그림자의 딜레마! 여기서 신겐이 갑옷으로 무장한 장군의 복장인 것을 유념하자. 그것은 이제 그림자가 통과해야 하는 것이 전쟁수행자로서의 신겐의 실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터.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는 신겐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싸움을 건다. 그들로서는 승리 직전에 후퇴하는 신겐을 이해할 수 없다.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에게 있어 신겐이라는 존재는 ‘전쟁기계’로서의 그것이다. 자신들과 동일한 욕망, 동일한 욕구,- 예컨대 교토로 진격하여 천하를 통일하려는 -의 소지자이면서 자신들과 같거나 혹은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전략을 구사하는 통치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전쟁의 능력을 수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겐이라는 실체가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역도 마찬가지.
타카텐진 전투에서 그림자는 신겐의 소여를 더욱 강도높게 획득한다. 난생 처음 전투에 참여해 본 그는 처음에는 꼭두각시였다. 그러나 전투의 진행과정을 목도하면서,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빼앗긴 시체를 보면서, 그는 이제 정말(!) 신겐이 된다. “움직이지 마라.”는 명령. 이것은 작전회의에서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는 질이 다르다. 이것은 그림자가 아닌, ‘오야마’ 신겐의 명령이다. 이에야스의 맹장 ‘혼다’의 야간기습, 그것은 다께다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목표를 지닌 것인데, 이제 산처럼 버티고 선 그림자는 그에게 신겐 그 자체인 것이다. 소여의 정점.! - 그는 타자들이 욕망하는 바를 모두 수행한 것이다.
실체의 증발, 그림자의 소멸
이 전투는 카쓰요리가 일으키고 그의 전투력으로 승리를 낚아챈 것이지만 카쓰요리는 승리의 몫이 ‘신겐의 힘’, ‘깃발의 힘’인 것을 안다. 여기서 카쓰요리의 존재가 흥미로운데, 그는 신겐과 그의 집합적 주체들 사이에서 미끄러진 선이다. 후계자 자리를 자신의 아이에게 빼앗기고, 깃발조차 사용할 수 없는 외면된 자식이다. 그런 점에서 신겐과 대립된 위치에 있고, 아울러 그림자가 지나가는 자리로부터 계속 삐져 나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카쓰요리야말로 그림자가 구성하는 실체성을 누구보다 강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가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그림자가 도둑이라는 사실 따위가 아니라, 신겐을 둘러싼 여러 정황, 계열들의 흐름이다. 그것들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킬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는 없다. 그에게 신체의 소멸여부는 관건이 아닌 것이다. 실제 전투는 자신이 수행했는데도 “적들을 쫓아버린 것은 아버지의 힘”이라는 것을 그는 부인할 수가 없는 상황!
이렇게 하여 내부,외부, 전쟁까지 다양한 계열이 요구하는 바를 흡수한 그림자는 이제 그 정점에서 추락한다. 신겐이 준 시간 3년이 다 된 것이다.(말에서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그는 추락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시간은 다 되었고, 연극은 끝난 것이다. 부러진 팔을 감싸쥐고 초라한 몰골로 걸어나가는 뒷모습과 새로운 주인이 되어 들어오는 카쓰요리의 정면이 서로 엇갈리면서.
카쓰요리는 신겐의 소여를 흡수할 수도, 그렇다고 거기에 복속될 수도 없는 존재이다. 그는 그만의 깃발과 카리스마를 획득해야 한다. 그래서 가장 먼저 오야마의 유언이자 ‘움직이지 마라’는 호명을 거부하며, 출진을 한다. 말리는 가신들을 버리고 해안가를 따라 전진하는 카쓰요리, “산이 움직였군.” 노부나가의 희색. 그것은 신겐이라는 실체가 없는 그의 군대는 이미 적수가 아니라는 승리자의 기쁨을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카쓰요리는 깃발의 의미를 획득할 수 없다. 깃발을 쓰고 있지만 그것을 부정,소멸시키는 역할만을 대행할 뿐이다. 바람, 숲, 불을 지휘하는 가신들은 자신들의 종말을 알고 있다. 그들은 신겐과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림자의 경우는? 그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너무 많은 것을 흡수해버린 것이다. “모든 주어진 소여들을 흡수하는 자는 단지 하나의 이중체, 주인 또는 세계에 봉사하는 하나의 그림자”(들뢰즈)가 되고 만 것이다. 애초의 상태보다는 좋은 삶의 조건이 마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을 수밖에 없다. 그 상태에서 그가 돌파할 수 있는 탈주의 공간은 없다.!
1575.5.25. 나가시노 전투는 신겐과 신겐을 구성하는 것들이 모조리 소멸되는 대스펙터클이다. 먼저 기병들이 바람처럼 치달리는 모습이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되고, 그리고 총소리. 그 역동적 진격이 콩볶는 듯한 총소리로 끝나고, 갈대 숲에서 가슴을 쮜어뜯는 그림자와 본대의 당혹한 표정이 몽타쥬됨으로써 전쟁의 경로가 전달된다. 어쩌면 여기서 노부나가나 총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맞서 싸우는 적들이 아니라, 실체가 사라진 그림자들의 최후의 운명적 질주!. 그들은 신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 죽음의 행진 마지막에 노부카도의 얼굴이 크로즈업되면서 절망적인 몸짓으로 그림자가 들판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죽음. 물가에 다시 와 떠내려가는 깃발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서로 어긋나는 라스트 신. 화면을 채우는 깃발. 그것은 신겐, 그리고 그림자가 흡수하고자 했던, 그리고 타자들이 그에게서 욕망했던 기표, 그것이 아닐지. 그렇다면 그림자뿐 아니라, 신겐 자신 또한 하나의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아니, 우리 모두 역시!
蛇足(군말)
이런 견해는 어떤가? 이영화는 “권력 바깥에서 작은 자유의 영역을 구축했던 도둑이 그림자 무사로 신겐을 대리하면서 전도”가 일어나, “진심으로 권력에 충성스런 이데올로그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권력과 자신을 일체화하는 일본 민중의 국가주의적 경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 “일본을 통일로 이끌 이 근대적 힘이 곧 조선침략을 향해 몰려갈 것이라는 비판적 의식의 함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아시아의식의 결여에 있을 것.” 요컨대, “권력에 대한 숙명적 체관과 제휴하고 있는 아시아의식의 결락” 서남재단 심포, <동아시아를 다시 묻는다>에서 최원식, ?한국 發 또는 동아시아 發 대안? : 한국과 동아시아?, 999년 9.30 -10.1.
->민족과 민중이라는 척도. 하지만 이것은 구로사와가 제기한 탈근대적 질문들을 근대적 평면으로 환원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