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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퀼트 [제임스 데이비드] 01

Casey,Riley 2023. 4. 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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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임퀼트 1
James F. David


  프롤로그 : 옥수수 우박 
  픽업 트럭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인디안 보호 구역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진 숲을 통과하고 있었다. 차에 타고 있던 어느 누구도 숲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울창하던 소나무 숲은 전나무들로 바뀌었고, 산은 언덕처럼 낮아졌으며, 굽이굽이 휘감기던 고속도로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트럭은 캐스캐이드 산맥 동쪽을 따라 내려와 고지대 사막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날은 사슴 사냥이 시작되는 날로 트럭은 새벽녘에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트럭에는 켄트와 슬리핑백, 낚시 도구, 프라이팬, 손전등, 장총 3자루, 그리고 맥주 2상자가 실려 있었다. 차에 타고 있는 세 명의 혈기 왕성한 청년들은 스포츠와 여자 이야기 등을 주고 받으며 밀려오는 졸음을 쫓고 있었다. 차는 거의 다니지 않았고 이따금씩 카니타 리조트 광고판만 눈에 띄었다. 
  트럭이 숲을 벗어나 평원으로 나온 것은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였다. 세 명의 청년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초록과 갈색 그리고 흐린 회색이 어우러진 평원은 산과 상록수 그리고 폭포들이 흔해빠진 곳에서 온 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평원을 바라보다가 지루함을 느낀 청년들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밤의 정취를 한껏 음미하기 위해 트럭의 헤드라이트를 끄고 달빛을 친구 삼아 길을 나아갔다. 오랜 운전에 지친 그들은 길 한쪽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폈다. 운전을 하던 청년은 조수석 쪽으로 다리를 뻗고 누웠다. 잠시 후 그는 창 밖으로 몸을 내밀고 트럭 천장에 기대어 사막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가을 공기가 닿자 팔에 소름이 돋았지만 피로해진 몸과 마음은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청년의 코앞에서 뭔가 떨어지고 있었다.  
  “어, 이게 뭐지?”
  놀란 청년이 주워 든 것은 말린 옥수수 알이었다. 다른 두 사람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옥수수 알은 계속 떨어졌다. 그들은 옥수수 알이 어디에서 떨어지는지 보려고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별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떨어지는 옥수수 알에 맞아 살이 얼얼햇다. 옥수수 우박은 점점 세차게 내렸고, 그들은 자동차 안으로 몸을 피했다. 옥수수 알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트럭 천장을 두들겼고, 그들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우박이 그쳤다.
  세 청년은 차에서 나와 주위를 조심스레 살폈으나 하늘에는 별만 반짝일 뿐 우박이 내린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운전을 하던 청년은 땅에 쌓인 옥수수 알들을 발로 걷어차고는 트럭 천장을 쓸어 내리며 차의 상태를 살폈다.
  “이렇게 이상한 일은 처음이야.”
  한 청년이 말했다.
  “잭, 이게 어디에서 떨어졌을까?”
  “난들 알아? 이 근처에서는 옥수수를 기르지 않는 것 같던데. 그런데 케니는 어디 있지?”
  “나, 여기 있어.”
  그들은 트럭 뒤에 무릎을 꿇고 있는 케니를 발견하였다. 케니는 트럭 뒤에 실린 쥐돔(생선의 종류 : 옮긴이)통을 비우고 있었다.
  “케니, 뭐 하는 거야. 그건 내 거야!”
  그러나 케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통을 비우더니 그 안에 옥수수 알을 담기 시작했다. 그 사건 이후 케니는 말수가 줄었고 다른 일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냥 캠프에 도착해서도 옥수수 통만 바라볼 뿐이었다.
  토요일, 잭은 사슴을 잡았고 로비와 함께 가죽을 벗겼다. 로비가 다음날 아침 송어를 여섯 마리나 잡았지만 케니는 얼마 먹지 않았다. 일요일 오후 그들이 캠프에서 철수할 때까지도 케니는 옥수수 알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돌아오는 동안에도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1. 기숙사 
  ... 그리고 현재와 과거가 함께 존재하는 때가 오리라. 
  조라스트러스, 바빌론의 예언자
  오레곤주 클라버스 폴즈시, 오레곤 공과대학 토요일, 새벽 2시 (태평양 표준시)
  케니는 침대 위에 놓인 파일을 두고 망설였다. 더 이상 배낭에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몇 가지를 빼내고 나서야 노란색 배낭을 다 쌀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총을 넣었다. 배낭을 메자 등뼈에 총이 느껴졌다. 그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총을 수건으로 쌌다.
  케니는 시계를 잠깐 쳐다본 후 컴퓨터 앞에 앉아 다시 한 번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다. 그는 조라스트러스의 자료들을 더 추가시켜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십여 차례를 더 해본 뒤에야 포기했다. 케니는 앞으로 자신이 살아 나갈 미래에 대해 예언을 한, 오래 전에 죽은 그 예언자가 부러웠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바탕 어지러진 방을 둘러보았다. 전공 서적, 논문, 노트 그리고 필기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 디스켓 상자, 마우스와 프린터가, 컴퓨터 옆에는 신문 스크랩이 놓여 있었다. 책장에는 <이상한 사건들>, <설명 할 수 없는 일들>과 같은 제목의 책들이 꽂혀 있었고 책장 한쪽에는 말린 옥수수가 담긴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방에는 특별히 신경 써야 할 물건들은 없었지만 두 번 다시 이 방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갈을 하자 케니는 묘한 슬픔을 느꼈다. 그는 다시 한 번 배낭을 점검했고 총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방문을 잠갔다.
  기숙사는 조용했고 방문을 모두 닫혀 있었다. 늦게까지 공부하던 학생들도 30분전쯤 모두 잠자리에 들었고 이런 일요일에는 아침 9시 또는 10까지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케니는 차라리 이 방법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제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케니는 자신의 이야기에 무관심한 사람들과 말하기가 두려웠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겪은 옥수수 우박 사건과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말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런 그를 이상하게만 바라볼 뿐이었다. 케니는 그들을 위해서는 그들의 생각이 맞기를 바랬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 뭔가 해야 했다. 
  엘리베이터는 텅 빈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숙사를 떠났다. 케니는 주차장에 세워 둔 그의 감청색 도요다 자동차를 찾아냈다. 계기반에는 4만 5천 킬로미터를 달린 것으로 나와 있었지만 그 수치를 넘어선 것은 벌써 2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시트 커버는 다 헤졌고 조수석쪽 창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차는 잘 굴러가는 편이었다. 그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고 늘 그랬던 것처럼 두 번째에서야 성공했다.
  그가 필쳐 박사의 집에 도착했을 때 팻과 콜터, 그리고 피트라는 이미 도착하여 RV(레크리에이션용 차 : 옮긴이)와 밴에 물건들을 싣고 있었다. 필쳐 박사와 쿰 박사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컴퓨터에는 팻과 그가 개발한 시뮬레이션이 떠 있었다. 컴퓨터 옆에는 낡은 고대 예언집이 놓여 있었다. 고대와 현재가 한 자리에 있다는 것이 묘한 느낌을 주었다.
  “밤새 시뮬레이션을 해보셨어요?”
  케니가 물었다.
  “물론이네.”
  필쳐 박사가 대답했다.
  “나와 쿰 박사가 조라스트러스의 자료를 몇 가지 더 입력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야. 일은 벌어질 거야.”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케니는 다른 사람들을 도우러 갔다. 그들이 짐을 꾸리는 동안 웨인 부인과 어니 파웰이 트럭에 생필품을 싣고 왔다. 필쳐 박사는 그들 모두에게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철저한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었었다.  
  드디어 작별의 시간이 왔다. 쿰 박사는 아무 말없이 케니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나 필쳐 박사에게는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케니, 마음을 바꿀 수 없겠나? 우리와 함께 가지. 그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함께 있어야 하네. 자네에게는 우리 그룹이 필요할 거야.”
  케니는 필쳐 박사의 말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 갈 무렵 케니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막바지에는 모임에도 좀처럼 참석하지 않았고, 팻조차도 그에게서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앴다. 케니는 그룹과 함께 하고자 노력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을 수가 없었다. 그는 두려움을 떨치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었다. 두려움은 이제 그의 생활이 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친구가 아니라 가족이 필요했다. 그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고, 그래서 그저 ‘가족과 함께 있어야 돼요.’라고 말하기만 했다.
  “꼭 그래야겠나?”
  필쳐 박사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이걸 가지고 가게. 자네를 위해 조라스트러스의 비전을 복사해 두었네. 도움이 뒬 걸세.”
  케니는 친구이자 스승인 필쳐 박사로부터 원고 뭉치를 받아 배낭에 넣었다.
  “조심하게. 케니. 그 일이 일어난 후에라도 자네를 찾겠네... 가능하다면 말이야.”
  “고맙습니다. 아주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케니의 목소리가 갈라졌고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와 필쳐 박사는 한참을 발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케니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작별 인사를 했다.
  “이제 가보겠습니다.”
  필쳐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일 먼저 케니와 악수를 했고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작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나 웨인 부인은 케니가 내민 손을 탁 쳐버리더니 그를 껴안았다. 포옹을 푸는 순간 케니는 웨인 부인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았다. 케니는 자신의 눈에도 어리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몸을 돌려 도요다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왔던 길을 거슬러 내려가면서 다시는 그들을 만나지 못할 거라고 직감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케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2. 앙트르프르네호
  1803년 운석이 떨어지기 전까지 과학자들은 하늘에서 돌이 떨어지는 것을 전설 속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그 사건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불가사의한 것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E. 스즈끼,『믿음과 행동』
  플로리다주 네이플즈시 토요일, 오전 9시 3분 (서부 표준시)
  앙트르프르네호는 파이버 글래스로 만든 105미터 짜리 범선으로 원행용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배에는 개조하여 넓힌 선실, 돛대와 조종간 그리고 이중으로 꼰 구명 밧줄이 갖추어져 있었다. 표면이 오톨도톨한 알루미늄으로 된 돛대는 그 두께가 1미터나 되었고, 지름 6센티미터 짜리 스테인리스 밧줄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 날씬한 자태와 눈부신 휜식을 뽐내며 떠 있는 앙트르프르네호는 론 텁먼이 항상 원해 오던 모든 것을, 아니 그 이상의 것을 갖춘 배로 마침내 그의 소유가 된 것이다.
  카르멘과 그녀의 딸은 이미 배에 올라 항해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있었다. 이미 18개월 전에 한 가족이 되었지만 론에게 로자는 아직도 카르멘의 딸로만 생각되었다. 식구 모두가 융화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고, 특히 크리스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카르멘에게 쉽게 호감을 가져 론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로자는 론에게 쉽게 친밀감을 보이지 않았다. 로자는 크리스와는 잘 지낼 정도가 아니라 친남매 이상으로 사이가 좋았다. 남매로서의 역할은 크리스와 로자 모두에게 낯선 것이었지만 그들은 쉽게 적응하고 유대감을 느꼈다. 론과 카르멘이 결혼하기 전 로자는 크리스와 놀기 위해-실은 론을 피하기 위해서-밖으로 나가곤 했다. 론은 로자와 크리스가 그러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둘의 나이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로자가 크리스보다 여섯 살이 많았고, 둘의 관심사나 집안에서의 역할 모두가 달랐다. 부모의 재혼으로 혈연 관계가 이루어지는 경우 아이들은 부모들의 애정을 두고 경쟁하지 않는다. 그러나 로자는 일부러 더 론에게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대했다. 그녀는 격주로 친아버지를 방문했으며 자신에게는 친아버지 외에 아무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론은 친부모가 재결합할 수 있다는 희망을 로자가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카르멘의 재혼이 로자의 그런 기대를 갑자기 깨뜨린 것은 틀림없었다.
  로자는 18개월 전보다 더 요트에 대해 무관심했다. 론은 이번 항해를 통해 로자와 가까워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항해의 즐거움이라도 누리고 싶었다. 
  론은 뱃머리에 기대어 물장구를 치고 있는 크리스를 향해 소리쳤다.
  “배에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크리스는 잠시 어리둥절해 하더니 똑바로 서서 손을 이마에 대고 거수 경례를 하며 말했다.
  “승선을 허락합니다.”
  론 또한 거수 경레로 답례하며 베에 올랐다. 크리스는 론의 축소판이었다. 엷은 금발, 푸른 눈, 지금은 많이 탔지만 창백한 피부색이 론을 꼭 빼 닮았다. 언젠가는 크리스도 아버지처럼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을 것이다. 그들 부자는 선원들처럼 휜색 티셔츠와 반바지, 갑판용 신발을 신고 있었다.  
  “1등 항해사, 항해 준비는 완료됐나?”
  “1시간 전에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선장님.”
  “물품을 점검하겠다.”
  크리스는 론이 선실로 들어가자 뱃머리로 돌아갔다. 거주 공간이 8평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생필품들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가스 스토브, 냉장고, 그리고 발로 펌프질ㅇ르 해야 물이 나오는 수도가 민물용과 바닷믈용으로 구분되어 있는 싱크대가 앙트르프르네호의 선실을 채우고 있었다. 선실 중앙의 탁자는 2개의 원형 디젤 엔진을 가리기 위해 놓은 것이었다.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선실에는 2층 침대를 놓았고 배 선미로 머리를 두도록 했다. 벽에는 작은 해상 지도가 접힌 채 걸려 있고, 지도 위로는 앙트르프르네호의 속력계, 정밀 시계, 나침반이 있었다. 무선 방향 탐지기와 음향 측시 탐지기, 그리고 단파 라디오는 지도 아래에 놓여 있었다.
  카르멘과 로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이야기하다가 론이 선실로 들어오자 입을 다물었다. 로자와 카르멘은 론과 크리스만큼이나 서로 매우 닮아 있었다. 갈색 머리, 갈색 눈, 가는 팔 다리 등등. 그러나 카르멘이 살집이 있는 반면 사춘기에 접어든 로자는 아직 호리호리했다.
  “숙녀 여러분, 준비됐습니까?”
  로자는 무릎 위로 손을 올려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카르멘은 기대하지 말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자는 가기 싫대요.”
  “하지만 모든 것이 준비됐고 단지 하룻밤이야.”
  “내 말은 그게 아니에요. 로자는 버뮤다에 가기 싫대요. 1개월 동안이나 친구들과 떨어져 있을 수는 없잖아요.”
  “친구가 아니에요.”
  로자가 말했다. 그녀는 반항하듯 고개를 꼿꼿이 들고 론을 쳐다보았다.
  “우리 아빠 때문이에요. 난 오랫동안 아빠를 혼자 둘 수 없어요. 엄마에게는 론 아저씨와 크리스가 있지만 아빠한테는 나밖에 없어요. 내가 항해를 떠나면 아빠는 혼자 있어야 된단 말이에요.”
  론은 카르멘이 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보았다. 자신이 아는 바로는 로자의 아버지는 전혀 쓸쓸해하지 않을 것이다. 론은 카르멘의 결혼이 전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파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카르멘이 이러한 사실을 로자에게는 숨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저씨와 엄마는 함께 있을 수 있지만 아빠는 한 달 동안 혼자 있어야 한단 말이에요. 그렇 수는 없어요.”
  론은 한 달이 아니라 1주일만 바다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 그는 항해를 갔다 돌아오는데 2주일, 바다에서 2주일간 정박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론은 카르멘의 표정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이번 여행은 버뮤다 항해를 준비하기 위한 일종의 시험 항해였다. 그들은 네이플즈시를 떠나 바아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다. 아이들은 건강해질 것이고 론은 아이들과 카르멘에게 그가 배를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무선 방향 탐지기를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것은 보다 어려운 항해를 나갈 때 사용할 것이고, 그는 아직 버뮤다 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 이 문제에 대해 얘기 줌 할 수 있겠죠?”
  카르멘이 말했다.
  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에 자신이 그랬듯이 로자가 며칠 간의 항해로 바다를 좋아하게 되길 빌었다. 
  “그럼 바다에 나가 이야기를 하자꾸나.”
  론이 제안하였다.
  “내 생각에는 푸른 바다와 하늘 외에는 볼 것이 없는 곳이라면 모든 것이 훨씬 명료해질 것 같은데. 로자, 밧줄을 풀어라. 여보, 당신은 가서 크리스를 도와주겠소? 자, 항해를 시작한다.”
  “명령하지 마세요. 선장님.”
  카르멘이 농담조로 경고했다.
  “그럼 부탁드릴까요?”
  카르멘은 웃으며 론을 포옹한 다음 갑판 위로 올라갔다. 론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고, 별빛을 길잡이 삼아 고요한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 다음 로자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로자야, 즐거운 항해가 되기를 빈다. 부탁해.”
  그런 다음 그는 갑판으로 올라와 시동을 걸었다.
  3. 어둠 속의 총 
  그 순간 불가사의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숲은 불타오르고 끔찍한 해충 떼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슈 왕, 야오 경전
  오레곤 동굴 토요일, 오전 10시 25분 (태평양 표준시)
  테리 로버츠 박사는 얼룩 다람쥐에게 먹이를 주는 아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 엘렌은 크래커 조각을 미끼 삼아 다람쥐들을 가까이 오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얼룩 다람쥐들은 엘렌이 잡아 먹을러라고 생각하는지 다가오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생각에 테리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엘렌은 얼룩 다람쥐를 해칠 위인이 못 되었다. 테리는 그녀가 벌레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정원을 조심스럽게 파헤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었다.
  엘렌은 고개를 숙인 채 다른 얼룩 다라쥐를 쫓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곱슬거리는 금발이 어룰 옆을 가리곤 했다. 계란형의 갸름한 얼굴, 갈색 눈동자, 코와 입매는 아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테리를 빼고는 엘렌을 만나는 모든 이들이 그려를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엘렌만큼은 아니지만 테리도 곱슬머리였다. 그는 보통 키에 보통 체격을 갖고 있었다. 지적인 면은 보통 이상이었지만 그는 스스로를 그리 놓이 평가하지 않았다. 어떤 지도 교수는 그를 ‘특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공원 삼림 경비원 복장을 한 키가 작고 체격이 단단해 보이는 젊은 여자가 동굴 입구에 떼를 지어 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다가왔다. 그녀는 사무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10여 명 정도의 그룹으로 나누었다. 테리와 엘렌도 한 그룹에 포함되었고 가이드는 한쪽을 가리켰다. 
  “한 줄로 동굴에 들어가신 다음 입구 안쪽에서 저를 기다려 주세요. 입장권도 준비하시구요.”
  엘렌이 먼저 들어갔고 테리가 입장권을 가이드에게 넘겨주었다. 그녀는 반을 찢은 다음 나머지 반을 돌려주었다. 테리와 엘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동굴 안에서 가이드가 설명할 때를 기다렸다. 테리는 동굴 여행에 대한 기대로 설레기 시작했고, 엘렌의 귀에 대고 ‘자, 모험을 시작할 준비가 다 되었습니까?’라고 속삭였다. 그러나 엘렌은 아무 말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케니는 그룹의 뒤쪽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이 누나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약 누나가 자신을 본다면 경찰을 부를 것이다. 손에 입장권을 쥔채 그는 누나에게 할 말을 되새겻다. 그는 전에도누나를 납득시키려고 했었지만 방법이 너무 서툴렀었던 데다 자신 스스로도 확신이 부족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그는 필쳐 박사로부터 받은 조라스트러스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케니는 이제 컴퓨터 시뮬레이션의 결과에 대해, 이 모든 것이 조만간 벌어질 엄청난 재앙들을 예고하는 징조라는 것을 누나에게 말할 자신이 있었다. 반드시 그녀를 이해시켜야만 했다. 그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그는 결코 자신의 두 번째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고 싶지 않았다.
  케니는 배낭을 열고 총을 쌌던 수건을 옆으로 치워 총이 보이도록 했다. 그는 총을 만지며 이것을 실제로 사용할 것이지 고민했다. 그는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누나가 재앙을 혼자 겪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누나가 지금은 자신을 미워하겠지만 얼마 안 있어 이해하게 될 거라고 케니는 믿었다.
  케니는 배낭을 메고 일행에 합류했다. 누나는 그가 입장권을 내밀 때에서야 그를 알아보았다. 
  “저리가, 케니”
  “증거가 있어. 보여줄게.”
  케니가 말했다.
  “듣고 싶지 않아.”
  “조라스트러스라는 예언자가 있었어. 모든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그가 옳았다는 것이 밝혀졌어.”
  “케니, 나는 동굴 안내를 해야 돼. 그런 건 목사한테나 가서 얘기해.”     
  “누나, 제발.”
  “안돼.”
  그녀는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누나, 나는 입장권을 가지고 있어.”
  “너는 관광을 하려는 게 아니야. 나를 괴롭히려는 거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게. 그저 누나랑 함께 있게만 해줘.”
  “내가 너를 말릴 수는 없겠지만 만약 그 말도 안되는 세상의 종말 따위에 대해 다시 설교를 시작한다면 경찰에 연락하겠어.”
  케니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사람들 틈에 섞였다.
  테리는 엘렌의 어깨에 손을 얹고 걸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부부처럼 보였다. 한 쌍은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다니는 것이 갓 결혼한 부부 같았다. 다른 젊은 두 부부는 사내아이 둘을 데리고 왔는데 10살, 8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수근거리며 킥킥대고 있었다. 부유해 보이는 노부부는 은퇴해 인생을 즐기며 사는 사람들 같았다.
  다른 한 남자는 미키 마우스와 미니 마우스 그림이 그려진 모자를 쓴 아이를 배낭에 넣고 동굴 안에 들어왔다. 아이 엄마는 뒤따라 오면서 연신 고개를 젓는 아이의 얼굴에서 침을 닦아 내고 있었다. 아이 엄마는 미키 마우스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남자는 노트 베리 농장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인종이 다른 중년의 부부가 들어왔다. 부인은 백인으로 금발 머리를 감싼 스카프에서부터 색상이 화려한 L.A. 기어 운동화에 이르기까지 꽤 모양에 신경을 쓴 차림이었다. 10년쯤 후면 조금 뚱뚱해지겠지만, 지금은 아주 육감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일행 중 유일한 흑인인 그녀의 남편은 키가 최소한 180센티미터는 될 것 같았다. 그는 이 관광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테리는 짧고 단정하게 자른 머리카락과 꼿꼿한 자세로 보아 그를 군인일 거라고 추측했다.
  일행 중 마지막 참가자는 노란 배낭을 멘 남자로 대학생처럼 보였는데 유일하게 혼자 온 사람이라 눈에 띄었다. 테리는 불룩한 그의 배낭을 바라보며 중요한 물건을 차에두지 마십시오 라는 경고를 떠올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레곤 동굴 관광을 1시간 동안 안내하게 될 질입니다. 동굴 안 기온은 평균 섭씨 13도로 한기가 약간 느껴지지만 습도가 높아 쾌적하실 겁니다. 동굴 안의 전기 시설은 1965년 관광객들과 동굴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여러분께서는 따로 손전등을 사용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테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대용 손전등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동굴 안에서는 금연이며 껌이나 쓰레기 등도 남기지 않도록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엘렌은 휴지를 꺼내 씹던 껌을 싼 다음 주머니 속에 넣었다.
  ‘무리에서 이탈하지 말 것’ 등등의 몇 가지 주의를 준 뒤 질은 관광객들을 동굴 속으로 안내했다. 공기는 상쾌했고 사람들은 재킷을 벗어 허리에 둘렀다. 전깃불리 켜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 둘씩 손전등을 집어넣는 사람들이 늘었다. 가이드는 가끔씩 멈추고 동굴의 주요 특징을 설명했다.
  “1967년 만들어진 이 입구를 들여다보시면 동굴 벽의 원래 색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동굴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이 길을 밝히기위해 횃불을 사용했기 때문에 보시다시피 벽과 천장이 변색되었습니다. 원래 동굴은 입구에서 보셨듯이 눈처럼 흰색이었습니다... ”
  동굴 관광은 휴가나 다름없었던 로스엔젤레스에서의 세미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엘렌이 생각해낸 것이었다. 테리는 가족 관계의 역기능에 대한 논문을 제출했지만 세미나 대부분을 듣지 않았다. 엘렌은 5번 도로를 타고 오는 동안 휴계소의 여행 안내소에서 집어 온 자료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엘렌은 한껏 기분이 들떠 있었고, 오레곤 동굴을 가본지도 몇 년 지났고 해서 그들은 미드포드에서 방향을 바꾸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들은 아침에 동글을 둘러보고 저녁에 포틀랜드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의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테리는 곧 있게 될 특이한 순간에 대해 생각했다. 가이드가 동굴 안의 불을 끌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완전한 어둠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테리는 주위 사물을 알아보기 위해 애쓰던 당시의 기억을 되살렸다. 그 당시에는 어둠이 별로 유쾌하지 않게 느껴졌는데, 신기하게도 지금은 그 순간을 기다기고 있었다.
  관광이 진행되면서 일행들은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젊은 부부가 데려온 아기는 칭얼거리며 가이드의 주의를 흩뜨리곤 했다. 노부부는 앞줄에 서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열심히 설명을 듣고 있었다. 사내아이들이 이리저리 휘젓고 다녀도 아이들 부모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노란 배낭을 멘 젊은이는 항상 끝에 서서 슬퍼 보이지만 결의에 찬 표정으로 가이듬나 쳐다보고 있었다.
  일행은 여러 갈래로 길이 나뉘어지는 큰 동굴 입구에 도착했는데 이전에 방문한 수많은 방문객들에 의해 길은 잘 닦여져 있었다. 가이드는 작은 동굴 속에서 끝이 나 있는 한쪽 길로 사람들을 안내한 다음 입구에 서서 일행들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느껴 보지 못한 완전한 어둠을 경험하시게 될 겁니다.”
  다음 순간 불이 꺼졌다. 몇 명은 눈이 갑자기 보이지 않자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후 다시 불이 켜지자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꼼짝 말고 그대로 서 있어요.”
  “케니, 뭐 하는 거야. 미쳤어?”
  테리는 목소리가 들려 오는 쪽으로 몰을 돌렸다. 배낭을 멘 청년이 총을 들고 입구에 서 있었다. 청년 옆에 서 있던 가이드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조금 전까지의 즐거운 분위기는 사라져 버렸다. 아이가 조그만 소리로 무섭다고 말했다 등에 업힌 갓난아이는 아버지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좋아하고 있었다. 테리는 흑인이 뒤쪽에 있다가 청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았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죠.”
  청년이 그 남자를 향해 총을 겨누며 말했다. 청년의 얼굴은 결의에 차 있었고 테리는 두려움을 느꼈다.
  “모두 그 자리에 앉아요. 누나도 앉아.”
  가이드만 제외하고 모두 자리에 앉았다. 테리는 군인이 가장 늦게 앉았고 청년이 들고 있는 총을 계속 눈여겨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케니.”
  가이드는 부드럽게 애원했다.
  “제발 총을 내려놔. 사람들이 겁먹고 있잖아. 여기에는 아이들도 있어. 아이들이 놀라겠어.”
  “다 누나 실수야. 나는 말해 주려고 애썼어. 그 일은 일어날 거야... 그것도 곧. 난 재난이 닥쳤을 때 가족들과 같이 있고 싶어. 적어도 누나만이라도. 자 이제 앉아.”
  말을 마치자 그는 총으로 가이드의 얼굴을 밀었다. 그 바람에 그녀는 뒷걸음치다가 사람들 사이로 넘어졌다. 
  테리는 가이드가 보인 반응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청년은 그녀를 누나라고 불렀지만 가이드는 겁먹고 있었다. 그건 불길한 징조였다. 청년은 가이드에게 강한 애정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별다른 전문 지식을 동원하지 않아도 테리는 케니가 불안정하고 아주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 있었고 숨소리만 들렸다. 마침내 노부인이 말을 꺼냈다.
  “젊은이. 나는 이제껏 동굴 관광객들을 인질로 잡았다는 사람은 한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오.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거요?”
  “절 믿지 않으실 거에요! 아무도 나를 믿지 않았어요. 누나도 마찬가지였어요.”
  “마음을 열고 젊은이의 얘기를 듣겠다고 약속할게요. 여기 행크한테 물어 봐요.”
  노부인이 자신의 남편을 가리켰다.
  “이 양반이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지 말해 줄 거요. 행크하고 40년을 산다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오.”
  노신사가 부인을 바라보며 미소지었으나 케니는 묻지 않았다.
  “할머니도 저를 믿지 않을 거에요. 하지만 알고 싶다면... 지금 저는 여러분들을 구해 주려는 거에요.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노부인은 그 소리들을 무시하고 다시 물었다.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구한다는 거요?”
  “그 앤 미쳤어요.”
  가이드가 말했다.
  “하늘이 무너질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요.”
  케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가 금세 빨개졌다. 노부인에게서 누나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의 눈에 고통이 어려 있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나는 세상의 종말에서 여러분들을 구하려는 겁니다.”
  4. 항해 
  우리가 사흘째 사막을 지나고 있을 때 홍수가 일어났다. 커다란 파도가 우리 일행을 덮쳤고 낙타 2마리와 세 사람이 실종됐다. 물이 빠져나갔을 때 우리 주위에는 엄청난 양의 물고기들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물은 소금기가 많아 전혀 마실 수가 없었다.
  아부 알 아사드, 1413년

  플로리다주 네이플즈시를 떠나 토요일, 오후 1시 35분 (서부 표준시)
  로자를 즐겁게 해주려는 론의 노력은 크리스가 알아챌 정도로 눈에 띄었다. 
  “놀랄 일인데요. 아빠. 누나한테 뽀뽀라도 해주지 그러세요?”
  론은 농담을 받아넘기면서도 로자가 항해에 관심을 갖도록 무진 애를 썼다. 그는 로자에게 키 잡는 방법과 돛을 내리고 올리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고, 각 돛대의 명칭과 나침반 보는 법 등을 설명해 주었다.
  론은 로자에게 키를 잡게 한 뒤 자신의 삼촌과 함께 참가했었던 패스넷 요트 경주 대회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론은 다른 41개 팀의 참가자들과 함께 영국 와이트 제도의 카우스를 출발하여 아일랜드 해안의 패스넷 락을 거쳐 플리머스로 돌아오는 시합을 벌였었다. 32개 팀이 완주를 했으며 론과 그의 삼촌은 그 가운데 17등을 했다. 그러나 론에게는 17등도 우승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거센 해류와 싸워 가며 안개 낀 해안을 따라 경주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해냈다. 론은 로자가 한번도 보지 못한 정열을 쏟아 열심히 경주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로자도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게 되었다. 수년 동안 이 이야기를 들어 온 크리스조차 이번에는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바다에서 듣는 이야기는 거실에서 들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오후가 되자 론은 육분의를 가지고 와 크리스와 로자에게 항해법을 설명해 주었다. 카르멘은 키 옆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려 주는 저 키를 항해용 삼각자라고 부른단다. 우리는 지구 표면의 세 꼭지점을 알아낸 다음 출발하는 거야. 우리는 지구의 극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고, 바로 저게 그중의 하나야.”
  “어느 극이요?”
  크리스가 끼여들었다.
  “저기에도 2개나 있잖아요.”
  “그래, 알고 있어.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데 있는 것이 북극이란다. 우리는 별과 다른 행성들의 위치를 알고 있고... 그건 바로 지구 표면 위에서 별이나 행성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는 얘기야.”
  “하지만 지구는 회전하고 있잖아요.”
  “맞아요.”
  크리스가 따라 했다. 
  “지구는 아주 빨리 돌고 있어요. 아마 시속 160만 킬로미터로 돌걸요.”
  “그래. 지구는 회전하고 있어. 하지만 시속 160만 킬로미터는 아니란다. 아마 1천 6백 킬로미터 정도일 거야. 그래서 우리는 아주 정밀한 시계가 필요한 거란다.”
  “선실에 있는 그 시계 말이죠?”
  크리스가 물었다.
  “맞아, 크리스. 선실에 있는 시계는 그리니치 천문대 표준시에 맞추기 때문에 아주 정확하지. 이제는 내 시계를 그 시계에 맞춰야겠구나.”
  “나는 아저씨가 라디오를 듣고 시계를 맞추는 줄 알았는데요.”
  로자가 말했다.
  “내가 라디오를 듣는 건 우리 시계가 그리니치 천문대 표준시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야. 라디오에서는 항해 중인 사람들이 시간을 맞출 수 있도록 그리니치 표준시를 알려주고 있거든.”
  “그럼 시계가 고장나면 항해도 할 수 없는 건가요?”
  로자가 질문했다.
  “맞아, 길을 잃고 유령선이 되어 영원히 떠돌 거야.”
  크리스가 대답했다.
  “아니, 그럴 경우 시간이 얼마나 차이나는지만 알아내서 수저하면 돼. 지구가 돌고 있다는 네 생각은 옳지만 우리는 언제 어디에 어떤 별이 뜨는지 알 수 있어. 우리는 별자리를 찾기 위해 항해력을 사용한단다.”
  론은 책을 들어 보여 주었다. 크리스가 책을 향해 손을 뻗자 론은 책을 위로 쳐들었다.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어. 그래서 우리는 극점이 어디 있는지, 하루 중 어느 때 어떤 별이 지구 위에 있을지 알 수 있는 거야. 그런 다음 우리의 위치를 표시해서 삼각형을 완성시키는 거야.”
  그때 로자가 물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면 왜 이런 것들이 필요한 거죠?”
  “맞아,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면 왜 이런 것들이 필요한 거죠?”
  크리스가 새 누나를 따라 똑같이 물었다.
  “우리는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단다. 우리는 지나온 지점에서의 방향과 속도로 현재 위치를 추측할 뿐이야. 대강의 위치만으로는 부족하고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만 해. 여기 육분의가 있어.”
  론이 육분의를 상자에서 꺼냈다. 크리스가 다시 그걸 만져 보려고 하자 론이 육분의를 머리 위로 쳐들었다. 
  “이건 내가 사용하는 거야. 만약 로자가 원한다면 사용법을 알려주지.”
  “저는요?”
  크리스가 보챘다.
  “글쎄. 봐서.”
  론이 애매하게 대답했다. 론은 도움을 청하느라 카르멘을 쳐다보았지만 아내는 궁지에 빠진 그를 보고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삼각형의 각 점을 알고 있고, 이미 어떤 시간에 어떤 별들이 지평선 위로 어느 정도 높이 올라와 있어야 하는지 알고 있어. 육분의를 가지고 지평선 위에 떠오른 별의 정확한 거도를 측정한 다음 관측 시간을 표시하는 거야. 이제 삼각형의 두 점을 알기 때문에 그 다음에 별의 예측 고도와 실측 고도 사이의 차이를 계산해서 세 번째 점을 알아내는 거란다.”
  론은 얼마 안되는 청중을 둘러보았다. 카르멘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크리스는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로자는 화가 나 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론은 자신의 항해법 강의가 왜 로자를 화나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로자가 불쑥 말했다. 
  “이건 기하학이에요. 안 그래요? 저한테 숙제를 시키려고 꾸민거에요. 그렇죠?”
  “아냐, 이건 속임수가 아니야. 기하학이긴 하지만 나는 네가 관심가질 거라 생각했는데... 항해를 나가려면 배워야 하는 거니까.”
  “제가 바다 위를 이리저리 떠다니면서 기하학을 배우고 싶어한다고 생각하셨어요? 이런 계산을 얼마나 자주 하세요?”
  “하루에 7번 내지 8번쯤. 해 뜨기 전에 한 번. 아침에 두어 번, 그리고 저녁에...”
  론이 말을 하다가 멈췄다. 그는 자신이 로자의 화를 돋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루에 여덟 번이요? 하루에 여덟 번씩이나 계산을 해야 한다구요? 그리고 그걸 계산하러 그렇게 일찍 일어나야 하나요? 정말 대단하세요.”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 대부분이 계산되어 있기 때문에 너는 그냥 산술표만 이용하거나, 선실의 전자 항법 장치를 사용하기만 하면 돼.”
  “만약 제가 다른 사람한테 기하학 숙제를 부탁했다면 아저씨는 저를 영원히 외출 금지시키셨을 거에요. 그런데 저보고 아저씨 숙제를 대신 하라구요? 항해에 필요해서 기하학을 배워야 한다면 그러기 싫어서라도 육지에 있어야겠어요. 표식들이나 지도를 판독하는 일은 아저씨가 할 일이에요.”
  “하지만 이런 바다 위에서는 별이 지도 구실을 한단다.”            
  “맞아요.”
  크리스가 끼어들었다.
  “별이 지도 구실을 해요. 각 점들을 연결하는 그런 지도에요.”
  론이 크리스를 노려보는 동안 로자는 일어나더니 갑판 아래로 내려가 이물 쪽으로 갔다. 론은 로자를 생각하다가 버뮤다 해협을 떠올렸다. 그러자 기분이 우울해졌다. 크리스는 아직도 론 옆에 앉아 육분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크리스가 관심을 갖게 된다면 로자가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크리스, 육분의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고 싶니?”
  크리스의 얼굴이 크리스마스 아침의 아이처럼 빛났다.
  “그럼요. 진짜 만져 볼 수 있어요?”
  론은 크리스에게 육분의로 어떻게 태양과 지평선을 관측하는지 한참을 설명했다. 크리스가 육분의로 천체를 관측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마침내 론은 설명을 끝내고 아이를 보냈다. 로자는 오지 않았다. 대신 이물 쪽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론은 크리스에게 낚싯대를 쥐어 주거는 키를 잡고 있는 카르멘 옆으로 갔다.
  오후에 앙트르프르네호는 남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론이 닻을 내렸고 모두 함께 카르멘이 준비한 게 요리와 샐러드, 그리고 부드러운 빵을 곁들여 식사를 했다. 점심을 먹고 나자 로자는 한결 마음이 풀려 론에게 다시 이야기를 걸었다. 점심 식사가 끝난 뒤 크리스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카드놀이를 하자고 졸라댔다. 카르멘은 지금까지 한번도 그 카드 게임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크리스는 아주 능숙하게 방법을 설명했다. 크리스가 카르멘에게 속임수에 걸리면 안된다고 주의를 주었지만 얼마 안 가 그녀는 크리스의 속임수에 넘어갔다. 그들은 한참동안 게임을 하다가 카르멘의 제의에 따라 수영을 즐겼다.
  그들은 따뜻하고 푸른 바닷물 속에서 1시간쯤 수영을 즐겼다. 마침내 지쳐 버린 아이들은 뱃머리에 누워 몸을 말렸고, 론과 카르멘은 고물에 앉았다. 
  “너무 속이 훤히 들여다 보였어요.”
  카르멘이 말했다.
  “로자한테 말이에요. 억지로 그 애가 버뮤다에 가고 싶어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알고 있소. 항해법 강의가 실패로 돌아간 후 포기했다오.”
  “아주 재미있던데요. 기하학을 가르쳐 10대 소녀가 항해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하다니. 당신이 포기한 뒤에 오히려 상황이 나아졌다는 걸 알아요?” 
  “어쨌든 점심 식사 후에는 즐거웠잖소. 하지만 카드놀이는 집에서도 할 수 있는 거였는데. 항해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거잖소.”
  “하지만 집에서는 카드놀이를 안 하잖아요. 아이들은 친구들과 TV에 매달려 있고 당신과 나는 일거리를 집까지 가져오기도 하구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카드놀이를 한 게 언제인지 알아요?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했던 때 말이에요.”
  카르멘이 옳았다. 항해로 인한 일종의 고립된 상황이 그들을 함께 있게 했다. 로자가 항해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이번 여행이 가족의 유대를 강화시켜 줄 것이다. 론은 버뮤다 항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나 계속 다짐하면서도 버뮤다에 가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았고, 그건 상황 해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론은 몸을 뒤로 젖히며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끝나기를 빌었다.
  5. 인질 
  오늘 아침 나는 뭔가 지붕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창가로 가 보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른 생선들이 하늘에서 거리와 집 위로 빗발치고 있었다. 생선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자 마을 주민들이 바구니를 들고 몰려들었다. 내 보죄관은 3천 마리 내지 4천 마리의 생선이 떨어진 것으로 추측했다. 
  위더스푼 대령, 인도, 1836년
  오레곤주 애쉬랜드시 토요일, 오후 3시 40분 (태평양 표준시)
  로빈 카일은 순찰차 앞좌석에 다리를 뻗고 쉬고 있었다. 자는 건 아니었지만 점점 졸음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돌발적인 범죄 사건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 눈을 반쯤 뜨고 있었다. 이런 비포장도로에서는 범죄가-자동차조차도-흔하지 않았다. 카일이 도로 순찰을 나오는 것ㅇ느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법죄자를 잡느라 이 아름다운 가을날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자신은 게으른 것이 아니라 이런 휴식을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할 뿐이었다. 잭슨 카운티에는 범죄라고 할 만한 사건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는자신이 시간을 아주 효율적으로 보내는 거라고 믿었다.
  이따금씩 스피커를 통해 호출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지만 소리를 줄여 놓았기 때문에 귀에 거슬리지는 않았다. 10대 소녀 한 명이 말을 타고 순찰차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카일은 소녀와 말의 엉덩이가 리드미컬하게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카일은 총을 들어 그드를 겨누었다. 이런, 아까워라, 금지 구역 안이 아니군. 카일이 아직도 그들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그의 호출 번호가 불리우고 있었다. 그는 못들은 척하다가 두 번째세서야 마지 못해 대답했다.
  “카일, 바쁜데 방해해서 미안해요.”
  호출은 한 캐런은 마치 카일이 뭘 하고 있었는지 안다는 듯 말햇다. 
  “하지만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생겼어요. 오레곤 동굴에서 인질극이 벌어진 것 같아요.”
  카일은 귀에 뭐라도 달라붙은 것처럼 머리를 옆으로 누이고 탁탁쳤다.
  “오레곤 동굴이라고 했소? 무슨 인질극이 벌어졌다는 거요?”
  “다른 것과 마찬가지의 인질극이요, 카일! 총을 가진 남자가 10여명의 인질들을 동굴에 억류하고 있어요. 범인은 아무도 자신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인질들을 죽이지는 않겠대요.”
  카일은 하필이면 납치범이 동굴에서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동굴을 확실히 공격하기 어려운 장소였고, 총알이 아무데로나 날아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에 총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 일은 비행기를 납치한 것과는 달랐다. 비행기는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었다. 버스도 마찬가지였지만 동굴을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이 유별난 동굴은 도시 생활의 편의와는 거리가 먼 장소였다.
  “아주 이상한 일이군, 캐런.”
  카일이 말했다.
  “동굴을 납치 장소로 고르다니! 나는 잡치범이 노동자의 천국이든 어디가 되든 간에 신변 보장과 교통편을 요구할 거라는데 내기를 걸겠어. 다른 요구 사항은 없소?”
  “없어요. 카일. 특별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다 됐어요? 그자는 자신이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 주는 거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그 일이 벌어진 후 혼자 있고 싶지 않다면서요.”
  “뭐가 벌어진 후라고 했소?”
  “지구의 종말 이후요.”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요?”
  “공원 관리자들은 동굴 지형을 아는 경찰관을 찾고 있어요. 그들은 당신이 구조 훈련 과정을 이수했다는 것을 들었다는군요.”
  카일은 그 말에 기겁을 했다. 그는 2주일 간 업무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실을 찾기 위해 특별 훈련을 신청했었고, 훈련보다는 친구들과 한가로이 맥주나 마시고 별도의 수당이나 받는데 신경 썼던 것이다. 과정 이수 후 2년 간 한 일이라고는 불시착한 비행기에서 1구의 사체를 끌어내고, 8미터 높이의 언덕에서 굴러 다리가 부러진 사람 한 명을 구조한 것이 전부였다. 카일은 캐런에게 그가 받은 훈련은 구조 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지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으려는 바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카일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좋아요, 캐런. 그들에게 장비를 갖추고 가는데 두어 시간 걸릴 거라고 말해요.”
  카일은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모든 상황이 끝나 있기를 바랬다. 
  “카일, 걱정 말아요. 그들도 서두를 필요 없다고 하던데요. 동굴 속의 인질범은 아무데도 가지 않을 거라구요.”
  6. 총을 가진 청년
  하나도 도망치거나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지하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가도 내가 거기까지 가서 그들을 끄집어낼 것이다.
  아모스서 9장 12절
  오레곤 동굴 토요일, 오후 3시 42분 (태평양 표준시)
  엘렌과 테리는 등을 마주 댄 채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눕거나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공포심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청년이 다음 순서의 관광객들을 위협해 쫓아 버린 후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 청년은 어떤 요구나 정치적인 주장을 하지 않았지만 그가 한 사람도 내보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분명했다. 간간이 그의 누나가 사정하기도 하고 설득해 보려고도 했지만 소용 없었다. 마침내 그녀도 지쳐 다른 인질들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테리는 인질극에 대해 아는 내용들을 떠올려 보았다. 만약 사람들이 꽤 오랫동안 인질로 잡혀 있는 경우, 그리고 상황이 점점 악화될 경우 어떤 사람들은 인질범에 대해 동정심을 보이기도 한다. 이번 사건같은 경우 계속된는 불안, 상황에 대한 통제 불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불안의 원인이 뭔지 알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할 것이다. 테리는 은행 금고에서 3일 간이나 계속되었던 납치 사건을 기억해냈다. 강도는 인질들을 억류하고 한 여자를 성폭행했으며, 경찰은 건물의 냉방을 중단시키는 동시에 음식에 독을 넣었고, 최소한이 물만 제공했었다. 그러나 인질극이 끝나자 풀려난 인질들의 대부분은 납치범들이 어떻게 될지에 관심을 보였었다.
  두 사내아이들이 동굴 뒤쪽으로 돌을 던지고 있었다. 테리는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군인이 일행의 뒤쪽에서 중간 부분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청년은 무릎을 세워 가슴 앞으로 끌어당기고 앉아 앞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계속 총을 들고 있었지만 총부린느 땅끝을 향해 있었다. 테리는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팔을 포갠 다음,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하고 머리를 옆으로 돌려 군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테리는 무슨 일이 생기려는 건지 알았다. 군인은 가끔씩 다리나 팔을 뻗거나 허리를 쭉 펴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조금씩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마치 시계를 보는 것과 같았다. 인내심이 요구되지만 오랫동안 바라보면 시침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는 이치와 똑같았다.
  테리는 그 군인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겁이 났다. 만약 청년이 알아차리면 어떻게 하지? 만약 저 남자가 돌발적인 행동이라고 한다면 ? 저 사람 때문에 청년이 사람들을 해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테리는 청년의 정신 상태가 위험하지 않다는 확신을 할 수 없었다.
  테리는 예전에 래리라는 이름이 정신 분열증 환자를 치료한 적이 있었다. 그 환자는 막노동을 했고, 자신의 아파트에서 카트리나라는 이름의 흰색 페르시아 고양이를 기르며 살고 있었다. 만약 그가 텔레파시 능력을 가진 메이슨 단원(비밀결사 집회:옮긴이)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강하게 우기지만 않았더라도 테리는 그를 떠맡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메이슨 핀을 꽂은 어떤 세일즈맨이 래리의 방문을 두드렸다. 래리는 그의 사슴에 총을 쏘았고 그건 정당방위였노라고 주장했다. 래리는 결국 정신 병원에 수감되었고, 카트리나는 동물 보호소에 보내졌다. 저 청년도 그런 사람일까?
  테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젊은이, 이름이 뭡니까?”
  그가 조그맣게 물었다. 잠시 후 테리는 조금 더 큰 소리로 물었다.
  “케니라고 한 것 같은데, 맞죠?”
  머리를 드는 청년의 눈빛이 몽롱했다. 청년은 천천히 테리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시선과함께 총구도 같이 움직였다. 마침내 케니가 테리를 쳐다보았지만 테리는 청년이 자신을 보고 있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아무 말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청년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테리는 청년도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지쳤고, 어저면 더 겁에 질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케니에요. 바보 멍청이. 케니 랜덜.”
  그의 누나가 청년을 대신해서 대답했다.
  청년은 누나를 쳐다보았지만 총부리는 여전히 테리를 겨누고 있었다.
  “나는 테리에요, 케니. 이쪽은 내 아내 엘렌이요.”
  테리는 자신이 심리학자라는 것을 밝혀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문제가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말에 안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정신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심리학자에 대해 적대감을 보이기도 했다. 테리는 직업을 밝히는 것이 아직은 성급하다고 판단했다.
  “케니, 나와 아내는 겁이 나는데 당신은 괜찮아요? 지금 겁나지 않아요?”
   케니의 눈은 아직도 초점을 잃고 있었지만 사람들을 모두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테리는 그가 군인의 움직임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말하고 싶지 않아요.”
  “뭘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거죠, 케니?”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죠.”
  “케니, 난 그게 뭔지 알고 싶어요.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거죠?”
  마침내 케니가 테리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초리와 손에 든 총을 보자 테리의 뱃속이 마구 뒤틀렸다.
  “이미 말했잖아요, 세상에 종말이 올 거에요.”
  “어떤 식으로? 어떻게 지구에 종말이 온다는 거죠?”
  “믿지 않을 걸요. 아무도 나를 믿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어요. 중거를 보여주려고도 했지만 누구도 보지 않았어요.”
  그는 누나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가족들조차도 그랬어요.”
  케니는 편집증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케니는 자신이 대단한 비밀을 알고 있으며 자신만이 그걸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케니가 편집증 환자라면 대단히 위험했다. 
  “케니, 내게는 말한 적이 없잖아요. 당신을 이해하도록 노력할게요. 약속해요.”
  “제가 말했잖아요. 하늘이 무너져 내릴 거래요.”
  케니의 누나가 말했다.
  케니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가 싶더니 얼굴이 붉어졌다.
  “누나는 한번도 내 말을 들은 적이 없어. 난 하늘이 무너진다고 말한 적 없어. 뭔가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했을 뿐이야. 그건 아주 다른 거야. 증거도 있었지만 한번도 보지 않았잖아. 안 그래”
  테리는 케니가 화내는 것을 보고 그가 극단적인 행동을 할까봐 우려했다. 테리는 케니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로 했다. 테리는 케니가 누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지만 그녀 때문에 화가 나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케니, 난 진심으로 당신의 이야기를, 이론을 듣고 싶소.”
  케니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더니 테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당신은 왜 마른 옥수수 알이 맑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사람들이 갑자기 화염에 쌓인 채 죽어 갔는지 알고 있어요? 그리고 문명이 어떻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는지 이해할 수 있어요?  처음에는 우리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러다가 우리는 그 현상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고대의 인물을 알게 되었어요. 그는 당시 주위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어요. 그는 그런 현상들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고, 우리도 마침내 그게 무얼 뜻하는제 알아냈어요. 우리에게는 자료와 이론, 그리고 증거도 있었지만 아무도 우리를 믿지 않았어요.”
  케니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고 그의 얼굴에는 괴로움이 떠올랐다. 슬픈 표정으로 그는 계속했다.
  “나는 신께 그 옥수수 알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떨어졌기를 기도했어요. 하지만 내가 선택되는 바람에 예기치 않게 그 일로 빠져든 거죠. 이젠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곧 끝날 테니까.”
  전문가로서 테리는 케니에게서 이끌어 낼 것이 아직 많다는 걸 알아차렸다. 케니는 자유롭게 감정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고, 이것이 만약 환자 치료의 한 과정이었다면 테리는 케니의 잠재 의식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갔을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질들과 사람들이 불에 타 죽은 사건, 그리고 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불타 죽는다는 걸까? 케니가 언급한 ‘우리’는 누구이고 오래 전 그 일을 알고 있었다는 사람은 누굴까? 그러나 케니는 자신의 환자가 아니었고, 그는 틀림없이 협조하지 않을 것이다. 테리는 현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간단하게 한다고 해도 여기에서는 치료가 소용없을 것이다.
  “우리가 불에 타 죽게 된다는 건가요, 케니? 그게 곧 일어날 일이에요?”
  테리는 케니가 노란 배낭 속에 가솔린 통을 놓고 지구의 종말이 실현되지 않을 경우 그걸로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뇨, 우리가 불탄다는 게 아니에요.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래요.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난... ”
  말꼬리를 흐리는 케니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제기랄, 난 아인슈타인이 아니에요. 그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에요.”
  케니는 손목시계를 흘낏 바라보았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케니, 핵폭발을 생각하고 있는 거요? 그래서 사람들이 불타는 건가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케니가 입술을 씰룩이더니 피식 웃었다.
  “어떤 면으로는 핵공격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건 그 이상이에요. 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거구요.”
  “자연 상태의 핵공격이아, 설명해 줄 수 있겠소, 케니?”
  케니의 미소가 금방 사라졌다.
  “아뇨, 할 수 없어요. 하지도 않을 거구요. 만약 내가 틀렸다면 당신들은 모두 자유의 몸이 되는 거고, 만약 내가 옳다면 당신들은 나를 고맙게 생각하게 될 거에요.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어요.”
  케니는 배낭 속에서 그라놀라(귀리와 건포도를 섞은 건강 식품:옮긴이) 한 줌을 꺼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 이거라도 먹어 두세요.”
  사람들은 천천히 다음 사람에게 그라놀라를 넘겨주었다. 오직 아이들만 그걸 먹고 있었다.
  7. 두려움에 떤 잛은 여름
  미야에서 발견된 기록들과 불교의 경전, 시빌의 책에는 7번의 태양 시대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태양들’은 연속되는 시대들로서 기록에 따르면 각 시대는 전 세계절으로 그리고 아주 끔찍할 정도로 파멸될 것이라고 한다.
  임마누엘 벨리코프스키, 충돌하는 세계
  오레곤 동굴 토요일, 오후 4시 15분 (태평양 표준시)
  케니는 동굴 입구를 등지고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그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노부인이나 어떤 남자가 한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미치지 않았어. 그는 계속해서 되뇌었다. 미치지 않았다구! 그는 필쳐 박사 일행이 이곳으로 와서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 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들은 가설을 세웠고, 그것을 입중해냈다. 
  그들이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7월 4일이 막 저물어 가는 무렵이었다. 케니와 팻은 6월 한 달 내내 예언된 사건이 일어날 장소와 시기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허탕만 치고 있었다. 낙하 현상 한 가지만 예측할 수 있어도 그들은 자신들의 모델을 수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낙하 현상을 예측하기 전에는 모델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을 알아낼 수 없었다. 따라서 매일 밤 다른 학생들과 자원자들은 야영지에 모여 신시한 사건들이 실리지는 않았는지 신문을 샅샅이 뒤졌다.
  필쳐 박사와 쿰 박사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 조라스트러스의 예언집과 다른 고대 문헌들을 연구하거나 모델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역사상의 기록들을 찾는데 온 노력을 기울였다. 팻과 케니는 필쳐 박사의 RV안에서 프로그램을 수정했다.
  사람들은 보통 밤 11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웨인 부인은 11가 되기 전에 잠들었는데, 그건 그래야만 그녀의 신령인 손텔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니 파웰은 때로 웨인 부인 옆에 앉아 손텔의 메시지를 듣기도 했지만 대부부은 미니 밴의 라디오에서 그날의 야구 경기 결과를 들은 다음 잠을 자러 가곤 했다. 피트라젤레스키와 콜터 스윈슨은 가끔 슬리핑백을 가지고 산책을 나갔다. 피트라는 오레곤 공과대학의 학생이었으나 콜터는 남부 오레곤 주립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가 그 학교를 선택한 것은 플레이보이 지에 가장 파티가 많은 학교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룹에 합류하기 전에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필쳐 박사와 쿰 박사는 종종 밤늦게까지 토론을 벌이곤 했는데 한참 하다 보면 케니와 팻이 가진 지식은 바닥이 나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한 나날들이 몇 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며칠에 한 번씩 필쳐 박사와 쿰 박사는 케니와 팻에게 가능성이 있는 지역과 날짜에 대해 물었다. 케니와 팻이 프로그램을 가동시켜 예측을 하면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 그들은 남부 다코리다에서 시작해 남쪽가 북쪽을 오가며 작업을 진행시켜 나갔다. 케니는 이번에 예측한 태평양쪽 해안이 틀릴 경우 이 모든 것이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회는 몬타나주 글라시어 국립공원 근처의 캠핑장에 머무르던 어느 날 찾아왔다. 그들은 모델을 설명할 만한 이상한 사건들이 나와 있는지 그 지역 신문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피트라가 신문에서 갑작스런 홍수에 한 소년의 세발 자전거가 물에 떠내려갔다는 이야기를 찾아낸 것은 밤 11시가 다 된 무렵이었다. 소년은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그 기사에는 두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첫째, 갑작스런 홍수가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홍수가 일어날 만큼의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었다. 기사는 그것이 일시적인 지역성 강우였다는 기상 담당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이상한 것은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그 소녀의 말에 따르면 물이 짰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필쳐 박사는 머리카락을 10번이나 손으로 빗어 넘겼다. 그건 그가 확신을 한다는 증거였다.
  “바로 그거야.”
  그가 쿰 박사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머지 않아 사건이 일어날 거요, 박사.”
  쿰 박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랜덜 군, 니양 군.”
  필쳐 박사가 계속했다.
  “이 사건을 모델에 추가하게.”
  케니와 팻은 자료를 입력하고 모델에 맞추려고 애썼다. 일이 잘 진척되지 않아 그들은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다. 다음날 아침 필쳐 박사와 쿰 박사가 부푼 기대를 안고 왔다. 
  “13일 남았습니다. 오차는 48시간입니다.”
  팻이 대답했다.
  “그럼, 위치는?”
  필쳐 박사가 물었다.
  “전 항상 옐로우 스톤 국립공원을 가보고 싶었습니다.”
  케니가 대답했다.
  그들은 3일간 야영지에 더 머무르며 그 지역의 도서관과 신문 보관소 등을 다니며 다른 사건들은 없었는지 조사했다. 피트라와 웨인 부인은 신문에 난 소년과 그의 가족을 만나 그 사건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그들은 소년을 만났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쳐 박사는 확신을 가졌다.
  그들은 며칠 동안 옐로우 스톤 국립공원 밖에서 야영을 하며 자료를 수집했다. 옐로우 스톤 국립공원은 그런 사건을 찾아내기에는 최악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울창한 숲, 험준한 산들과 함께 셀 수 없이 많은 목초지는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알아차린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필쳐 박사와 쿰 박사는 제일 가능성이 높은 첫 번째 시기가 다가오자 관측자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고민했다. 마침내 그들은 고지대와 탁 트인 초원, 그리고 관광객 편의 시설이 있는 평지의 공터를 관측지로 결정했다.
  관측 첫날 케니는 올드 피이스풀 근처에서 숙소 주변을 살피도록 지시 받았다. 피트라는 거지대 초원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에서, 웨인 부인은 그랜드 캐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배정되었다. 팻은 워시번산 위 막다른 길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그는 일행 중 등반 경험이 가장 풍부했고, 장비 또한 제일 잘 갖추고 있었다. 콜터 스윈슨은 초원을 살피기 위해 루즈벨트 호텔로 갔다. 필쳐 박사는 사건이 큰 호수 근처에서 일어날 경우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지만 어니 파웰은 옐로우 스톤 호수가 옆 레이크 빌리지로 갔다. 필쳐 박사와 쿰 박사는 숙소에 남아 교대로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모든 사람들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교대되었고, 번갈아 가며 식사를 하고 잠을 잤다. 필쳐 박사는 그들 모두에게 임무 중에는 화장실도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냥 보기만 해서는 안돼.”
  그는 쉴새없이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계속 강조했다. 
  “주위의 관광객들이 하는 말에도 주의를 기울이게. 공원은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은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비디오 카메라로 주위 경치를 찍어 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도 있어.”
  필쳐 박사를 바라보는 일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는 쉴새없이 머리를 빗어 넘겼고 항상 땀을 뻘뻘 흘렸다. 정년 퇴직을 2년이나 넘긴, 작고 뚱뚱한 필쳐 박사를 보며 케니는 박사가 심장 마비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하곤 했다.
  케니가 필쳐 박사를 찾아간 것은 지난 11월로 옥수수 사건을 겪은 뒤였다. 필쳐 박사는 케니의 말에 귀기울인 유일한 사람이었다. 케니는 가족과 친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아버지는 그를 놀렸고 누나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케니의 목수수 우박에 대한 강박관념은 커져만 갔다.
  케니는 그가 경험한 것과 같은 이상한 사건들에 대한 책을 찾기 위해 서점에서 대부분의 전ㄱ 시간과 주말을 보냈다. 그는 책에서 뿐 아니라 오래된 신문 기록에서도 하늘에서 뭔가 떨어지고,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기록들을 찾아냈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기는커녕 자신이 겪은 일과 그 사건들과의 연결 고리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공원을 산책하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꽃더미에 파묻혀 버린 모녀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컴퓨터를 이용해 각 사건들을 입력하고, 유형을 분류하여 그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썼다. 그러나 필쳐 박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전혀 진척이 없었다. 그러다가 케니는 학생 회관 게시판에서 필쳐 박사가 다음날 저녁 ‘지각의 대변동과 그로 인한 문화적 진화’에 대한 강연을 한다는 공고문을 보게 되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필쳐 박사는 동전 수집가처럼 학위를 모으는 사람으로 악평이 나 있었다. 그는 이 대학 저 대학을 옮겨 다니며 서로 다른 과목을 가르치고 새로운 학위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예일 대학에서 지직학자로 출발했으나 미시간 대학에서는 동물학을, 브리검 영 대학에는 잠시 있다가 오레곤 주립대학으로 옮겨와 고생물학을 가르쳤다. 그는 그 외에도 컴퓨터 정보과학과 경영학 학위도 갖고 있었다.
  필쳐 박사는 정년하기 전까지 8년을 오레곤 공과대학에서 시스템 사이언스를 가르쳤다. 학셍들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신기한 사건들에 대해 알아 오는 것이 전부였고, 필쳐 박사는 새로운 주제에 관심을 보이다가도 30분도 안되어 다른 주제로 빠져들기 일쑤였다. 수업에 지루해 하는 경영학과 학생들에게 시빌의 경전이나, 인디언 학자 익스틸조키틀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테즈쿠코의 왕의 연대기를 낭독할 때면 그의 정열은 빛을 발하곤 했다. 필쳐 박사는 호오소온 효과니, Y경영 이론이니 등을 말할 때에는 심드렁했지만, 불교의 경전인 비수디 마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열심이었다.
  공고문에 씌여진 ‘지각의 대변동’이라는 단어가 케니를 강연 장소로 이끌었다. 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 안에 30여 명이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있었다. 대부분은 주변에 살고 있는 지역 주민들이었다. 몇 명은 나이가 지긋해 보였는데 무료 강의인데다 흥미로워 보이는 주제에 이끌려 온 것 같았다. 강의실에는 케니 외에도 몇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그때는 피트라의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그는 그녀의 예쁘장한 얼굴과 긴 갈색 머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들어오는 사람들 중에서도 두드러져 보이던 날씬한 몸매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웨인 부인은 연한 금발에 통통한 체격을 가진 부인이로 역시 그 강의실에 있었는데 그녀는 피트라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쿰 박사가 필쳐 박사를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케니는 쿰 박사를 모르고 있었다. 쿰 박사는 오레곤 공과대학의 교수가 아니었다. 쿰 박사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으며 오레곤 대학에서 몇 젼간 인류학을 가르쳤으나 논문을 발표하지 않으면 사장되는 학계 풍토에 염증을 느끼고 교수직을 내놓았다는 것을 케니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쿰 박사는 필쳐 박사의 수많은 학위와 논문을 열거한 후에 고대사와 지질학 분야에서의 필쳐 박사의 연구 성과를 설명하며 강연의 주제를 소개했다. 소개가 끝나자 약한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웨인 부인이 제일 열성적으로 손뼉을 치고 있었다. 필쳐 박사는 단상 위에 노란색 종이 뭉치를 내려놓은 뒤,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의는 해수면에서 440미터나 떨어진 영국 서부 요크셔에서 어떻게 하마 화석이 발견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필쳐 박사는 영국 북부의 하마들이 무덤을 만들기 위해 바다에서 그처럼 멀리 떨어진 곳까지 올라갔다는 주장의 모순점을 지적했다. 필쳐 박사는 지질학적 대이변만이 합리적인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에는 극에서 극까지 지구의 기추가 어느 정도 일정했었고 극의 기온은 현재보다 30도 정도 따듯했었다. 이렇게 가정해 본다면 극에서 적도까지 아열대성 식물들이 골고루 퍼져 있었을 것이다. 필쳐 박사의 이론에 따르면 그 시기에는 지구가 기울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거대한 행성과 혜성들의 항로가 축을 변화시켜 극지방은 기온이 내려가고 적도 쪽은 더 기온이 높아져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계절의 구분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케니는 점점 강의에 빠져들었다. 옥수수 우박 사건 때 느꼈었던 감정들의 되살아나고 있었다. 
  강의에 이어 쿰 박사와 필쳐 박사간에 토론이 벌어졌다. 쿰 박사는 하마 화석은 북아프리카-나일강 근처라고 생각되는 곳을 떠나 이동한 하마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쿰 박사는 동물들이 이미 북쪽까지 헤엄쳐 간 경험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겨울에는 이동을 맘추었다가 따뜻한 여름동안 북쪽으로 헤엄쳐 가다가 영국에 도착해서 화석이 발견된 곳까지 이르렀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필쳐 박사가 즉시 반박에 나섰다.
  “그럼 하마들은 무엇 때문에 따뜻한 적도에서 추운 북극해로 이동했을까요?”
  그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하마가 어떻게 그같은 정반대의 기후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죠?”
  “하마는 살아 남지 못했어요.”
  쿰 박사가 대답했다.
  “그게 요점이었나요? 하마들은 옮겨 간 곳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무엇이 동기였을까요? 어떤 본능들이 하마들을 북쪽으로 이동시켰을까요? 언제 북구에 도착했고 무엇 때문에 내륙으로 들어가 산과 언덕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을까요?”
  “그렇다면 고래는 왜 해안가로 밀려와 죽는 거죠?”
  쿰 박사가 질문을 제기했다.
  “만약 고래한테 다리가 있었더라면 고래도 해안까지가 아니라 근처의 산 위로 올라갔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은 하마의 이동을 볼 수 없는거죠?”
  필쳐 박사가 말했다.
  토론은 이후 20여 분 동안 계속되었다. 케니는 두 사람이 설전을 벌이면서도 신랄하게 공격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두 사람의 토론은 조화로운 오케스트라의 연주 같았고, 둘 가운데 필쳐 박사의 역할이 좀 더 크게 부각되어 있었다. 쿰 박사는 논리 정연하게 반론을 폈으나 필쳐 박사의 열성이나 지식에는 미치지 못했다.
  몇 사람이 필쳐 박사와 쿰 박사와 함께 토론을 한 후에도 케니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쑥스러워 가만히 앉아 있었다. 웨인 부인과 피트라 그리고 쿰박사는 자리에 남아 필쳐 박사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아가고 없었다. 케니는 필쳐 박사가 옆으로 지나가자 수줍음을 무릅쓰고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이죠?”
  필쳐 박사가 대꾸했다.
  “제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데요…옥수수 알이 하늘에서 떨어졌는데요…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맑은 하늘에서 옥수수가 떨어진다는 게 이상해요. 꾸민 얘기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저 혼자 이론을 만들어 보기도 했습니다만, 교수님이시라면 제가 그 현상을 더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케니는 잠시 말을 멈추고 지금 말하려는 문제에 대해 자신이 충분히 검토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너무 막연하고 불충분한 것 같았다. 케니는 입을 다문 채 필쳐 박사로부터 무사될 순간을, 아니 그 이상의 모욕이 가해질 순간을 기다렸다. 필쳐 박사는 무표정하거나 화를 낼 것으로, 필쳐 박사의 일행들은 웃음을 터뜨릴 것으로 그는 예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필쳐 박사를 포함하여 그들 모두는 케니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들어보고 싶군요. 하지만 자리를 옮깁시다. 커피 좀 마셨으면 해서요.”
  케니는 쿰 박사의 미니 밴을 따라 클라머스 폴즈 시외로 갔다. 한참 차를 몰고 가다 보니 수풀이 우거진 곳에 2층집이 있었다. 집안의 모든 벽에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닿은 책꽂이가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책이 빼곡이 채워져 있었다. 다른 책들과 논문 및 잡지들을 담은 상자가 마루 위에 쌓여 있어 때가 많이 탄 꽃무늬 양탄자를 거의 모두 가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겹겹이 늘어선 서가에서 많은 양의 책과 논문들을 익숙하게 뽑아 마루에 놓여 있는 자료들 옆에 놓았다. 그들은 케니에게 안락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웨인 부인과 필쳐 박사가 커피를 끓이기 위해 자리를 비운 동안 다른 사람들은 하마 화석에 대해 이야기했다.
  케니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있었지만 불편함과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웨인 부인과 필쳐 박사가 돌아왔고, 갑자기 필쳐 박사가 케니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자, 케니, 이제 자네에게 일어났었던 일을 우리에게 말해 주겠나.”
  그가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케니는 차근차근 사냥 여행과 옥수수 우박 사건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그가 책과 신문 기사를 통해 그런 류의 사건들을 찾아냈는지 이야기했다. 넋을 잃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추호도 의심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케니는 사건 자체뿐 아니라 자신의 생각까지도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옥수수 우박 사건이 일어났을 때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를 그룹의 사람들과 공유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친구들로부터, 결국은 누나에게조차 무시당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케니는 사람들의 눈을 보고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으며, 자신의 경험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케니가 이야기를 끝내자 정적이 감돌았다. 그는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필쳐 박사만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필쳐 박사가 입을 뗐다.
  “조지, 당신에게는 익숙한 일 아니오?”
  쿰 박사는 양손을 머리 뒤로 돌려 깍지를 낀 채 흔들의자에 앉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필쳐 박사보다 10살 정도 젊어 보였지만 머리가 벗겨진 쿰 박사는 한참동안 의자를 흔든 후에야 대답했다. 
  “그래요, 체스터.”
  “쉬운 것부터 시작해 볼까요?”
  필쳐 박사가 제안했다.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에 불타 버렸소. 도시 전체가 멸망할 운명이었지. 이제, 당신 차례요, 조지.”
  “성경과 미드라쉬에 따르면 이집트에서는 하늘에서 개구리들이 떨어졌어요.”
  쿰 박사가 천장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성서에 나오는 전염병도 좋은 예요. 메뚜기와 해충떼가 어디에선가 나타났소. 아주 쉬운데! 멕시코의 쿠아티틀란 연보에 나온 뜨거운 돌 우박 사건은 어떻소?”
  “그건 운석일지도 몰라요.”
  쿰 박사가 대꾸했다.
  “말도 안돼. 수천 개의 뜨거운 돌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주위에 있는 것을 불태운다고? 운석은 대기 중에서 거의 연소하기 때문에 지표면 근처에서는 우박처럼 떨어질 수가 없어요. 당신 차례요, 조지.”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 
  쿰 박사가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몸을 앞으로 숙여 사람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나를 꿀맛이 나는 노란색 열매라고 표현했어요. 만나는 열매의 한 종류이겠지만 그게 왜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누구도 설명하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옥수수라고 해서 떨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는 거죠.”
  쿰 박사가 몸을 돌리더니 창백한 눈을 반짝이며 똑바로 쳐다보았기 때문에 케니는 당황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옥수수로 빵을 만드는 것처럼 만나를 갈아서 빵을 구웠어요.”
  쿰 박사가 계속했다.
  “아마 그들은 그 전에 옥수수를 본 적이 없을 거에요.”
  “그럴 듯해요.”
  필쳐 박사가 말했다.
  “박사는 아직도 성경과 탈무드를 인용하기는 하지만 아주 창의적인 생각이오. 호머와 헤시오도스는 천상의 꿀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어요.”
  “리그 베다 송가도 구름 사이로 떨어진 마드후에 대해 노래하고 있죠.”
  필쳐 박사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바로 그것들이 신이 내린 음식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들인 겁니다.”
  “그럴지도 몰라요. 만약 조금 전에 내가 말한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면 마야에 내린 붉은 먼지를 예로 들겠습니다.”
  “잠시 생각해 봅시다. 케니는 하늘에서 떨어진 물고기같은 것들에 대해 말했어요. 만약 더 큰 물체가 떨어진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오, 조지? 뭘 얘기할 수 있겠소?”
  필쳐 박사가 말을 멈추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유럽에서 발견된 하마 화석에 대한 우리의 토론을 기억해 보십시오.”
  필쳐 박사는 처음에는 피트라를, 뒤이어 웨인 부인을 바라보았다.
  “하마들이 영국까지 이동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웨인 부인이 목청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그럼 하늘에서 떨어진 건가요?”
  “가능한 일이죠. 옥수수가 떨어지고, 물고기가 떨어졌다면 하마라고 왜 떨어질 수 없겠소?”
  케니는 놀랐다. 필쳐 박사는 지금 한 시간 전까지 그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정립하고 신봉해 온 지각 대변동에 관련된 이론을 과감히 포기하려는 것이다. 케니는 새로운 이론은 낡은 이론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야 받아들여진다고 믿어 왔었다. 그러나 필쳐 박사는 과학자로서는 놀라우리만큼 유연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쿰 박사는 발을 쭉 뻗고 손가락으로 책을 톡톡 치며 흔들의자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다른 불가사의한 사건들을 설명할 수 있겠군요. 미시간에서 고래 2마리의 화석이 발견된 것은 아시죠? 미시간이라니! 바다에서 엄청나게 떨어져 있는제, 그렇지 않아요?”
  쿰 박사가 케니를 바라보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고래 회석에 대해 필쳐 박사가 보충 설명을 했다.
  “퀘백에서도 고래 화석이 발견됐어요. 해발 180미터나 되는 곳인데 자, 생각을 정리해 보죠.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고래와 하마, 코뿔소 그리고 코끼리가 발견됐어요. 심지어는 남극에서도 발견됐지. 북극과 남극에서 발견된 침엽수는 두말하면 잔소리죠.”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킬리만자로 산꼭대기의 표범이에요.”
  쿰 박사가 끼어들었다.
  “조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돌팔매를 당했다던 그 바빌론 예언자의 이름이 뭐죠?”
  “조라스트러스였던 것 같은데요.”
  “맞아요. 맞아. 그는 케니가 말해 준 것과 같은 사건들의 기록들을 모았어요. 물론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죠.”
  쿰 박사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잠시 후 말했다.
  “조라스트러스를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어요, 내 기억에는 그가 미래에 대해 많은 예언을 했었던 것 같아요.”
  “조지, 그건 다음에 하는 게 어때요?”
  필쳐 박사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오늘밤에는 지구 축의 변화에 따른 지각의 대변동이나 이동 등으로 예상치 않은 장소에서 발견된 동물들을 찾아봅시다. 동물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단순해서 좋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근거가 부족해요.”
  필쳐 박사는 말을 멈추고 케니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케니를 보고 있었다. 이제 그는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하늘에서 떨어진 꽃더미에 파묻힌 모녀의 이야기와 자신이 세운 가설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표정이 환히 빛났다. 그들도 자유로이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다. 그런 과정 속에 가설은 차차 발전하게 된 것이었다.
  케니는 그날 밤 그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그 모임에 참여하는 이들을 두고 괴짜니 미치광이니 하고 수군거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케니 또한 몇 달 전까지는 그들과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임의 구성원으로서 사물을 바라보았았다. 기묘한 모임이기는 했지만 모두가 감수성이 풍부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그날 이후 케니는 그룹과 함께 매주 토요일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는 웨인 부인이 손텔이라는 영혼과 교감을 나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피트라와도 친구가 되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만났다. 편의점을 운영하는 중년의 부부는 토요일 저녁이면 번갈아 가면서 모임에 참석하곤 했다. 그들은 듣기만 할 뿐 토론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보니 스미스같은 사람은 가끔씩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리 열심이지는 않았다. 보니는 어느 날 다른 학생과 함께 나타났는데 콜터 스윈슨 이라는 그 학생은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 척했지만 눈은 피트라에게서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주 토요일 혼자 나타난 콜터는 피트라 옆에 앉았다. 그후부터 콜터는 계속해서 모임에 나왔다.
  2주일 후 모임에 모습을 드러낸 쿰 박사는 매우 흥분되어 있었다. 조라스트러스가 쓴 저작물의 번역본 일부를 어렵사리 구한 것이다. 조라스트러스는 바빌론에 살았던 실제 인물로 예언자로 불렸으나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이었다. 쿰 박사는 조라스트러스의 비전이라 불리는 저작물을 발견했다는데 특히 흥분하고 있었다. 케니가 경험한 옥수수 우박같은 사건들이 고대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케니에게 믿음을 갖게 했다. 그들은 조라스트러스 또한 가설을 세웠었고, 놀랍게도 그것이 케니의 것과 아주 비슷하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조라스트러스의 비전을 발견한 이후 사람들은 더 자주 모였다. 사람들은 케니가 조사한 것과 조라스트러스가 기록해 놓은 사건들을 연구하기 위해 매주 토요일 밤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손텔의 계시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지만 언제나 마지막에는 케니의 해석으로 되돌아왔다.
  팻은 케니와 함께 컴퓨터로 이론의 모델을 만들기 위해 필쳐 박사가 채용한 사람이었다. 케니와 팻은 세밀하지는 않았지만 신빙성 있는 모델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람들은 그 모델들을 가지고 토론했고, 거기에서 나온 의견들을 수렴하여 다시 모델을 수정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케니는 자신이 올드 페이스풀의 저수지 근처를 벌써 열 바퀴째 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닝 글로리 저수지에서 2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잠시 후에 있을 교대 시간 전까지는 한바퀴 더 돌 수 있었다. 케니는 하루에 4차례씩 저수지에서 주변의 초원과 하늘을 살펴보았다. 엘크 몇 마리가 근처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고, 케니는 그 모습을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엽서에는 저수지가 매우 푸르고 맑게 나와 있었지만 직접 와 보니 물빛이 흐릿했기 때문에 케니는 매우 실망했다. 안내원에 따르면 관광객들이 저수지에 던진 동전이 물의 온도를 변화시키면서 물색이 흐려졌다고 한다. 그때 케니는 혐오감과 상실감을 동시에 느꼈었다.
  케니는 관측 지점을 향해 보도 위를 걷고 있었다. 앞족에서 자기 또래로 보이는 두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웅덩이를 쳐다보며 큰 소리로 웃고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케니가 가까이 가보니 한 사람이 웅덩이 속으로 씹던 껌을 던지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떠들썩하게 웃으며 껌과 동전을 던지고 있었다. 그 남자가 또 다시 동전을 던지려 하는 것을 보자 케니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케니는 동전을 쥔 손을 나무 울타리 위로 잡아챘다. 동전은 산책로 위로 굴러 떨어졌고, 남자는 고함을 질렀다. 
  “이봐, 뭐야?”
  남자가 소리질렀다.
  그러자 다른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당신들은 웅덩이를 오염시키고 있어요.”
  케니가 말했다.  
  “저 사람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동전 때문에 물빛이 달라지고 있어요. 웅덩이가 막힐 수도 있어요.”
  “그런 우리가 알아서 해.”
  덩치 큰 남자가 대꾸하며 케니의 배를 쳤다. 케니는 숨을 몰아쉬며 고꾸라졌다. 덩치 큰 남자가 케니의 머리를 움켜잡고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해. 내 친구 말고, 알았어?”
  그러면서 그는 케니를 울타리 위로 떠밀었다. 케니는 울타리 쪽으로 넘어졌고, 다시 날아오는 주먹 세례를 피하느라 얼굴을 가렸다.
  “어서 꺼져 버려!”
  덩치 큰 남자가 소리지르며 케니의 머리를 후려쳤다. 
  케니는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두 남자가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떤 부부가 두 아이를 데리고 오고 있었기 때문에 케니는 얼굴을 가리느라 웅덩이 쪽으로 돌아섰다. 잠시 후 자신의 팔을 잡는 손길을 느끼고 그가 얼굴을 돌려보니 그 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케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가 나는데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쳤어요.”
  케니가 손을 이마로 가져가는데 피가 흘러내리며 눈썹을 적셨다. 그 부인이 건네준 휴지로 이마를 닦자 휴지는 곧 피로 물들었다. 상처를 닦는데 이마에 뭔가 박혀 있는 것이 느껴졌다. 케니는 휴지를 몇 장 더 얻은 뒤 부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상처가 꽤 심했다. 
  케니가 오두막을 향해 걸어가는데 삼림 경비대 복장을 한 매력적인 젊은 여인이 그를 자세히 바라보더니 옆으로 와 같이 걷기 시작했다.
  “상처를 한 번 봐야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진짜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제정신이 아닌 거에요. 내 허락없이는 갈 수 없어요.”
  그는 그녀가 안내하는 대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케니의 상처를 알코올 솜으로 닥아 내기 시작했다.
  “상처 속에 뭐가 있어요.”
  “아마 나무 가시일 거에요.”
  “어쩌다 다쳤어요?”
  그녀가 약장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넘어지면서 중심을 잡으려다가 머리를 울타리에 부딪혔어요.”
  “아하, 그래요. 자 이제 준비됐어요.”
  그녀가 핀셋을 들고 다가왔다. 처음에 가시를 뽑을 때는 별로 아프지 않았지만 나중에 뽑은 2개는 매우 아팠다.
  “조금 아플 거에요.”
  케니가 질겁을 하자 그녀가 말했다.
  그녀가 세 번째 나무 가시를 뽑으려고 하는데 다른 대원들이 삼십 세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를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들 뒤로 부상당한 사람 또래의 두 여자가 따라 들어왔는데 그들은 모두 사이클 복장을 하고 있었다.
  “레슬리, 여기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다른 손님을 모시고 왔거든.”
  레슬리라고 불린 그 경비 대원이 새로 도착한 환자 쪽으로 몸을 돌렸기 때문에 케니는 부상당한 여인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피에 젖은 손수건을 귓가에 꼭 대고 있었다.
  레슬리는 놀란 것 같았다.
  “하루에 두 명씩이나 머리를 다치다니? 평소에는 기껏해야 무릎이 까지거나 벌에 쏘인 사람들뿐이었는데.”
  “가끔씩은 물소에 찔린 사람들도 치료했었잖아.”
  한 대원이 덧붙였다.
  “스티브,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금방 끝낼게요.”
  레슬리는 케니의 상차에서 마지막 가시를 빼낸 후 과산화수소수로 소독하고 붕대를 댔다. 케니는 나가다가 레슬 리가 부상당한 여인한테 묻는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다치신 거에요?”
  레슬리는 케니가 방금 앉았던 의자로 환자를 안내하며 물었다.
  “갑자기 우박이 내린 것 같아요. 자전거를 타고 블랙 샌드 베이신을 넘어 이 길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거대한 우박 덩어리가 떨어졌어요.”
  “그런 우박이 아니었어요.”
  친구 중의 한 명이 말했다.
  “아주 커다란 얼음 조각이었어요. 게일 위로 떨어진 얼음 조각은 15센티미터나 됐는데 그건 작은 편이에요. 웅덩이로 떨어진 건 최소한 60센티미터가 넘을 거에요.”
  케니는 나가려다가 말고 그 자리에 섰다. 그는 자신들이 또 놓쳤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응급 센터에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었고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관측 장소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자신들이 예측한 시기와 장소가 좀 더 정확해져 있었다. 지금까지 오는 동안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발생한 것이다.
  케니가 전한 소식에 모임의 모든 사람들은 흥분했다. 케니와 팻 그리고 필쳐 박사는 즉시 캠프로 돌아가 새로운 자료를 입력하고 모델을 수정했다. 다른 사람들은 자료를 펼쳐 놓고 응급 치료를 받던 여자가 말했던 것과 같은 사건에 대한 목격담이 있었는지 찾았다. 팻과 케니는 이틀 후 컴퓨터 모의 실험을 했고 유타 주의 프로보로 답사를 나갔다. 1주일이 지났지만 그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웨인 여사는 팻과 케니가 캠프에 도착하자 그들에게 린넨 서랍장이 갑자기 화염에 싸여 불타 버린 집에 관한 신문 기사를 보여주었다. 필쳐 박사는 그 사건을 하나의 징조로 받아들였다. 다시 만들어진 모델에 따라 그들은 뉴 멕시코 주의 라스 크루체스 시로 향했다. 그들은 거기에 캠프를 설치한 다음 사건들을 수집했는데 거기에서는 뒷마당의 수영장이 갑자기 범람한 바닷물에 잠기면서 개가 빠져 죽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그런 사건들을 찾아 여기저기 다녔고, 그들이 도착하기 전날 하늘에서 쏟아진 자갈이 깔려 있다는 아이다호의 한 캠핑장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필쳐 박사는 여행을 중단했다. 
  필쳐 박사와 쿰 박사는 며칠 동안 모든 것을 무시한 채 노트와 조라스트러스의 원고에 뭔가를 적으며 열심히 토론을 벌였다. 어느 날 저녁 그들이 RV로 케니와 팻을 찾아왔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잘못 생각한 게 있었어.”
  케니와 팻은 경청했다.
  “이런 현상은 동적일 거야.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러한 사건들을 놓쳐 왔어. 사건들은 우리가 도착하기 전이 아니면 다른 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발생했어. 우리가 역사상의 사실만 강조하다가 자네들에게 잘못된 방향을 일러준 것 같아. 조라스트러스의 예언에 너무 지나치게 의존했어. 그 원고에는 시대적인 특수성이 결여되어 있어. 우리나 조라스트러스나 사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어난다고 믿었지만 그렇지 않아. 과거에 발생한 사건들은 어떤 주기가 있네. 주기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점점 길어지고 있어. 하지만 우리가 쫓고 있는 사건들은 주기가 계속 짧아지고 있어.”
  그 순간 그들은 모델이 암시하고 있는 바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고, 다가올 미래에 두려움을 느꼈다.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케니의 걱정은 늘어갔고 걱정은 차츰 공포로 바뀌면서 그를 절망에 빠뜨렸다. 케니가 총을 사서 그것으로 누나를 납치할 생갈을 한 것도 바로 공포심 때문이었다.
  케니는 떠돌아다니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빨리만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케니는 기도했다.
  8. 동굴 속의 위기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우박과 불이 내렸다.
  잠언 18장 13절
  오레곤 동굴 토요일, 저녁 7시 30분 (태평양 표준시)  
  카일이 오레곤 동굴에 도착한 것은 연락을 받은지 4시간이 지난 후였다. 2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지만 그는 평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천천히 차를 몰았다. 그는 먼저 주유소에 들린 다음 등반 장비를 가지러 갔다. 그는 50미터 짜리 로프와 타원형 고리, 그리고 D자형 고리를 챙기고 기타 장비도 챙겼다. 그러고 났는데 핼멧과 등산화를 집에 두고 온 것이 기억났다. 그는 집에 가서 아예 등반 복장으로 갈아입기로 결정했다. 동굴에서는 갈아입기가 어렵기 때문에라고 카일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옷을 벗는 동안 그는 샤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드디어 마지막으로 그는 맥도널드에 들려 빅맥과 감자 튀김 큰 것, 콜라 큰잔을 샀다. 동굴로 오라는 연락이 계속 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운전 중에는 절대로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뜨릴 수밖에 없었다.
  동굴에 도착했들 때 카일은 아직도 상황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적잖이 실말했다. 공원 관리인이 공원 입구까지 몰려든 구경꾼들 사이를 헤치고 그를 안내했다. 카일은 동굴 입구 한쪽에 인질들의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카일이 가져온 장비들을 희망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동굴 입구 근처에 있는 작은 건물에서는 15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략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3명은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카일은 그들이 삼림 경비 대원이거나 주경찰일 거라고 짐작했다. 다른 두 남자는 정장을 하고 있었다. 카일이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 회의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제 안심해도 되겠군요.’라고 말하자 카일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정장을 입은 두 명의 남자는 FBI요원으로 젠킨스라는 사람이 책임자였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일 경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에 경험이 많으시다구요.”
  “할 수 있다면 어떤 임무라도 다 하겠습니다.”
  카일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좋아요, 훈련 과정을 1등으로 수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젠킨스는 카일의 특수 훈련 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카일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1등이 아닙니다.”
  “아, 그럼 몇 등을 했습니까?”
  “2등이요.”
  카일이 마지못해 말했다.
  젠킨스는 안심하는 표정이었고 다른 요원은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은 매우 겸손하군요. 카일 경관.”
  카일이 마지못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속으로는 두 번 다시 그런 과정은 밟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모두 잘 들으십시오.”
  젠킨스가 말했다.
  “이제 카일 경관이 도착했으니 작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몇 명이 동굴 안에 들어갈 겁니다. 인질들이 잡혀 있는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는 단 2개월뿐입니다. 다행인 것ㅇ느 입구가 좁고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총을 쏜다면 목표를 맞추더라도 그 유탄에 인질들이 희생될 수 있습니다.”
  “공포탄을 사용한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주 경찰 중 한 사람이 질문했다.
  “물론 피해를 줄일 수는 있겠죠. 하지만 없앨 수는 없습니다. 내가 신호하기 전까지는 절대 총을 쏘지 마십시오.”
  “실례합니다. 젠킨스 씨.”
  카일이 끼어들었다. 그는 이런 식의 회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훈련 과정에서 배운 바로는 인질극을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협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시간을 버는 겁니다. 범죄자를 일단 진정시킨 다음 독을 넣은 음식을 보낼 수도 있어요. 인질들의 안전을 위해 이틀 정도 기다려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젠킨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카일을 쳐다보았다.
  “조언은 고맙습니다만, 이번 일은 몇 가지 면에서 다른 사건과 다릅니다. 첫째, 아무런 요구 사항이 없습니다. 협상을 시도해 보았지만 인질범은 계속 대화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인질범이 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정치적인 문제도 아닌 것 같아요. 두 번째는, 인질범이 나름대로 기한을 설정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곧 끝날 거야’라거나 ‘사건이 끝난 후에 사람들은 모두 내보내겠다’는 등의 이야기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어떤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면... 어쨌든 가만히 않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그는 말을 잠시 멈추고 카일을 보았다. 그래서 카일은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이 예상했던 대로 젠킨스 요원은 그걸 카일이 동의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카일 경관.”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겠소.”
  카일은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기 경비 대원들이 동굴로 들어가는 또 다른 입구가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 입구까지 접근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당신의 경험이 필요한 겁니다. 경비 대원들이 당신을 안내할 겁니다. 당신한테 4시간의 여유를 주겠소. 이후 우리가 불을 끄면 동굴 속에서는 당신이 알아서 해야 합니다. 우리가 범인의 주의를 분산시킬 테니 당신이 뒤에서 그를 덮쳐요.”
  4시간이면 많은 시간이 아니었다. 함께 갈 사람들은 제이, 킴벌리, 셜리로 그들은 모두 삼림 경비 대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좋은 체격에 혈기왕성해 보였다. 나이는 세 사람 모두 20대 중반을 넘지 않아 보였다. 셜리와 킴벌리는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예쁜 편이었다. 그들은 가무잡잡한 피부에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셜리가 킴벌리보다 더 활발해 보였다. 셜리가 인솔자였고 그녀는 카일에세 그가 준비해 온 장비들을 차에 갖다 두라고 말했다. 맨손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주 이용되지 않던 등산로를 따라 올라갔다.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나아갔다. 카일은 금방 숨이 차 올랐으나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애썼다. 1.5킬로미터 정도 올라가자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길이 나왔다. 험준한 산등성이를 1킬로미터쯤 오르자 문이 나타났다. 문에는 열쇠가 채워져 있었다. 셜리가 문을 열고 앞장섰다. 카일은 주저했다. 지하 세계로 통하는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신비하면서도 믿어지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그 과정은 신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셜리를 비롯한 다른 대원들은 몸집이 작고 유연해서 동굴 속을 쉽게 지나갔지만 카일은 통로를 더 파낸 후에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나가는 도중 두 번이나 통로 중간에 몸이 끼이기도 했다. 셜리가 앞에서 그를 끌어당기고 킴벌리와 제이는 뒤에서 밀었다. 일행들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 주었지만 자갈이 수북한 통로를 엎드린 채 3시간이나 기었기 때문에, 피부는 다 까졌고 카일은 녹초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넓은 곳으로 빠져 나와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셜리가 입술에 손을 대고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하더니 천장을 가리켰다. 카일은 천장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보았다. 카일이 구멍 속을 보기 위해 헬멧에 달린 전 등을 켜자 셜리가 얼른 손으로 빛을 가리며 그를 한구석으로 밀었다. 
  “조심해요, 범인이 볼지도 몰라요.”
  그녀가 속삭였다.
  “여기서부터는 당신이 앞장서야 돼요.”
  “하지만 난 길을 몰라요. 당신이 앞장서지 그래요?”
  “당신이 총을 가지고 있잖아요. 일단 저 속으로 들어가면 각자가 알아서 해야 돼요. 만약 통로 사이에 끼이더라도 혼자 힘으로 빠져 나가세요.”
  카일은 차라리 셜리에게 권총을 주고 싶었다.
  “좋아요.”
  마침내 그가 대답했다.
  “곧장 가면 됩니까?”
  “5미터 정도 올라가면 수평 통로가 나오는데 거기서부터 30미터쯤 더 가세요. 조용히 하셔야 돼요. 그곳이 인질들이 억류되어 있는 장소 바로 위거든요. 동굴 안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동굴에서 나오는 빛으로 지형을 익혀 두세요.”
  “동굴로 떨어질 경우 어디로 가면 되죠?”
  “오른쪽이 조금 가까워요.”
  셜 리가 말했다. 그녀는 카일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숨을 곳은 별로 없어요. 만약 떨어지면 아래쪽으로 길을 약간 내려오세요. 시간이 충분하다면 대신 왼쪽으로 가시구요. 거기에는 석순(石荀)이 많아 숨을 수 있을 거예요.”
  셜리는 카일을 보고 싱긋 웃더니 구멍을 가리켰다. 구멍 안쪽은 밋밋했기 때문에 발 디딜 곳을 찾아야 했다. 그는 팔에 힘을 주어 위로 몸을 끌어올렸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 팔꿈치를 삐죽이 나온 바위에 바짝 댔다. 몸을 끌어올리느라 다리가 대롱대롱 흔들렸다. 카일은 자신의 그런 모습이 셜리에게는 우스워 보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누군가 카일의 엉덩이를 힘껏 밀어 올리는 바람에 그는 간신히 다리를 통로 안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러고 났는데 누군가 그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카일은 손의 임자가 제이가 아니라 셜리나 킴벌리이기를 바랬다.
  그는 벽에 등을 붙이고 조금씩 걸어갔다. 대원들이 한명씩 통로로 들어오면서 그들이 쓴 헬멧에서 나오는 빛도 약해졌다. 카일은 제일 중요한 감각이 쓸모없어지는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완전하다라는 단어를 쓴다면 지금이야말로 완전한 어둠이라는 말이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통로는 넓어졌고 카일은 다리를 잘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천천히 올라가고 싶었지만 혈기왕성한 대원들이 밑에서 기운차게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구멍을 거의 다 빠져 나오자 수평 통로가 나왔다. 그는 간신히 다리를 움직여 통로 안족으로 몸을 던졌다. 카일은 몸을 겨우 돌려 통로를 조금씩 통과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눈에 불빛이 보였다. 그는 인질 억류 장소가 가까워지자 속력을 줄였다. 카일의 발에 뒷사람이 부딪쳤고, 그는 나머지 대원들이 도착한 것을 알았다. 그들은 예정했던 시간보다 15분이나 빨리 도착해 있었다.
  누군가 카일의 바지를 잡아당기더니 그의 신발에 대고 속삭였다. 셜리였다.
  “살펴보지 않을 거에요?”
  카일은 아무 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한동안 시치미를 떼다가 앞으로 기어가 목을 숙여 동굴 안을 살펴보았다. 그는 머리를 아래로 내밀고 구석구석을 살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잠시 후 그는 머리는 들어올리고 방금 본 것들을 되새겨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사람들은 모두 거기에 있었다. 
  그는 동굴 구멍의 한쪽에는 손을, 그 반대편에는 발을 놓아 자신의 몸을 활 모양으로 구부렸다. 이제 동굴 안으로 다리를 내리고 팔힘만으로 매달려 있다가 소리없이 뛰어 내리는 일만 남아 있었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동굴 안의 불이 꺼졌다. 그가 아직 어둠 속에 매달려 있는데 손에 잡았던 바위가 부서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카일이 동굴 바닥에 거꾸로 떨어졌다. 바위 조각들이 그의 몸 위로 떨어지면서 제법 큰 돌이 카일의 얼굴을 쳤다. 카일의 콧날에서 피가 났다.
  인질들이 비명을 질렀고, 범인은 사람들에게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소리쳤다. 카일은 땅을 짚고 일어났지만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한쪽은 동굴 벽이었다. 두 길은 안전한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질범 쪽으로 가는 길이다. 그에게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면 꺼졌던 불이 켜질 터였다. 그때 옆에서 쾅하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캉일의 허리를 더듬으며 팔을 잡았기 때문에 카일은 몸을 움츠렀다. 그 손이 카일을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끌고 갔다.
  드디어 동굴 안에 불이 다시 켜졌고 그는 발을 헛디디며 땅위로 굴렀다. 누군가 그의 머리맡에 서 있었다. 약한 빛이 동굴 안을 채우고 있었다. 인질범은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카일은 머리를 들고 주위를 살펴보왔다. 그는 석순 뒤에 엎드려 있었다. 그는 좌우를 살펴보다가 가까이에 셜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카일의 코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카일은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져 말을 타고 지나가는 소녀의 뒷모습에 총을 겨누던 그 시골길로 되돌아가 있기를 소원했다. 셜리는 피를 다 닦아 낸 후 카일의 콧 등에 입을 맞추었다. 카일은 어둠 때문에 셜리가 자신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랬다.
  9. 마리엘 위더비
  윔홀은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에 의해 예견된 4차원 세계의 놀라운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4차원 세계에서 이 구멍들은 우주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연결하고 있으며 한 시간대와 다른 시간대를 연결하고 있다. 한 시간대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다른 시간대를 지나가야 한다. 만약 그런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4차원적인 현상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광홀한 우주를 떠돌라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로버트 이, 아인슈타인의 혁명
  대서양 부근 어딘가에서 시간과 공간의 법칙이 갑자기 파괴되면서 이 여파가 동부와 서부로 확산됐다. 바다 속에서 갑자기 육지가 솟아났다. 그 땅들은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얼마 안 가 고대 아틀란티스 대륙이 그랬던 것처럼 서서히 파도 속으로 가라앉았다. 피해 지역에서는 군용기와 여객기들뿐 아니라 하늘을 날던 갈매기 무리까지 사라져 버렸다. 여행객들과 조종사, 유학생, 비행사, 그리고 비행기를 탔던 국회 의원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버렸다. 대기를 메우고 있던 공기의 성분의 바뀌면서 엄청난 기압차가 발생했다. 엄청난 굉음이 자주 들려 왔다. 
  그 여파가 동부 해안에 미치면서 내륙도 영향권에 들었다. 도로, 차량, 주택, 사무실 빌딩과 패스트푸드점들이 숲, 풀밭, 얼음, 호수, 그리고 바다로 변했다. 인간이 건설한 문명들은 사람들과 함께 사라졌다. 남녀노소, 빈부, 직업, 종교에 상관없이 모두 함께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건의 영향력은 엄청났으나 모두가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지상에서는 그 영향력이 감소하였기 때문에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도 있었다. 엄청난 굉음에 잠을 깬 사람들은 자신의 집은 멀쩡한데 이웃집은 파괴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도로 반대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 다른 대도시의 주민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밤새 조용히 잠들어 있었고 깨어난 뒤 혼란에 빠져들었다.
  뉴욕시 토요일, 오후 8시 35분 (서부 표준시)
  마리엘은 창가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가을 저녁이 내는 소리를 감상하며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없었다. 소리를 듣기에는 여름이 가장 좋은 계절이었지만 이제는 집집마다 에어컨이 달려 있어서 문을 열면 모터 돌아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이 아파트에 처음 이사왔을 때 이웃 사람들 모두가 여름이면 창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마리엘은 사람들이 틀어 놓은 라디오나 오디오 소리뿐 아니라 서로 다투는 소리까지 듣곤했다. 어떤 이야기들은 내용까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웃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것 같아 그녀는 한 번도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싸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은 항상 결정해 두곤했다.
  마리엘은 귀에 이바라 부부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던 말은 스페인어로 했기 때문에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마리엘은 그들이 다투는 소리를 창가에 앉아 자주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리듬에는 아주 익숙해져 있었다.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필요는 없었다. 싸우는 이유는 세가지 중의 하나이니까-돈, 가족, 아니면 아이들이었다. 마리엘이 1955년 여기에 이사온 이래 그것은 부부 싸움의 변함없는 주제였다. 마리엘은 바로 아래층에 살고 있는 맥그리거네 집에서 울려 나오는 스테레오 소리 또한 듣고 있었다. 랩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맥그리거의 아들이 음악을 틀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맥그리거 부부는 아들에게 랩을 들을 때면 이어폰을 끼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은 그들이 집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기가 차가웠지만 마리엘은 문을 닫지 않앗다.대신 찻주전자를 불에 올려놓은 다음 무릎에 덮을 담요를 가지고 왔다. 마리엘은 의자에 다시 앉아 뜨개질 거리를 집어들었고, 말다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싸움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부엌에서 찻주전자 끓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컵을 받침에 얹어 창가로 돌아왔다. 이바라 부부가 화해했는지 소리가 없었다. 몇분 후 갑자기 음악 소리가 껴졌고 마리엘은 캐시 맥그리거가 숙제하라며 아들을 야단치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마리엘은 도시의 소음속에 홀로 남았다.
  마리엘은 아파트 안쪽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전에는 꽃과 채소를 심어 작은 정원을 꾸몄었다. 지금은 아스팔트 포장이 되었고 보기 흉한 쓰레기통만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오직 마리엘이 가꾸는 정원만이 남아 있었다. 꽃들은 아름다웠고 우중충한 아스팔트와 쓰레기통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마리엘은 정원을 아꼈지만 고층 건문들이 안마당을 가로질러 들어서면서 꽃을 키우는 일은 점점 힘들어졌다. 고층 건물들은 모두 유리와 철강으로 뒤덮인 사무실 건물들이었다. 마리엘은 유리창으로 범벅이 된 그 건물들이 싫었다.
  오래 전 마리엘에게는 지금은 고층 빌딩이 들어선 곳에 살던 친구가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후에 마리엘은 거티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여름이면 아이들은 마당에서 함께 뛰어 놀았고 마리엘과 거티는 서로의 집에 가거나 정원을 돌보았었다. 거티는 오래 전 플로리다로 이사갔고 거티가 살던 곳은 10년 전 빌딩이 들어섰는데 거티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 아파트에서의 마리엘의 삶은 아주 조용히 그녀와 남편 둘만으로 시작되었다. 아이를 낳으면서 그들의 생활은 활력과 스트레슬 가득 찼다. 지금은 그런 스트레스가 오히려 그리웠다. 세 아아이들이 자라면서 마리엘은 많은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아이들 친구의 부모들이었다. 남편이 하는 사업과 관련된 친구도 사귀었다. 항상 사업상의 모임이나 파티가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의 학교 일로도 바빴다. 학습, 음악 실기 교육 그리고 다른 수많은 활동들이 그들을 항상 바쁘게 만들었다. 마리엘은 그 당시 자신만의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고, 창가에 앉아 소리에 귁울이는 즐거움을 누리는 건 1주일에 고작 몇 시간 뿐이었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아이들은 다 자라 있었다.
  이제 아이들은 모두 다른 주에 살면서 가끔씩 안부 전화만 했다. 아이들이 떠나 버린 후에도 몇 년 동안은 그녀 곁에 남편이 있었고, 친구들 대부분도 아직 남편의 일과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의 친구들과 파티도 사라져 버렸다. 얼마 후 마리엘에게는 얼굴을 아는 정도의 관계만 남아 있었다.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갔지만 교회는 환경이 더 나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지금은 TV로 교회 예배를 보고 있지만 TV를 통해 교회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의 삶은 그녀가 몇 년 동안 들어온 말다툼의 끝처럼 매우 조용했다. 마리엘은 활력소를 원했고 말다툼이라도 할 상대가 있었으면 하고 바랬다. 
  마리엘은 하늘에서 별을 찾아보왔다. 그러나 달빛과 도시의 불빛에 가려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도시는 별을 보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마리엘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별을 잘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경 써야 할 다른 일이 생기기 전까지 그녀는 별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하게 될 것이다.
  이제 마리엘은 별과 달과 그 외의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오하이오에 사는 큰아들은 그녀와 함께 살고 싶어했다. 거기에서도 별을 볼 수 있다고 아들은 어머니를 설득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이젠 기억 저편의 일이 되어 버렸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삶을 원했다. 그녀는 자신 또한 기억으로 남을 때까지 이 아파트에서 생을 보낼 것이다.
  마리엘은 TV를 켜고 이리저리 채널을 바꿨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것은 없었다. 때로 그녀는 케이블 TV를 신청하려고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요금이 너무 비쌌다. 그녀는 무료로 보아야 할 것이 돈을 지불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시추에이션 코미디 프로에 채널을 고정시켰다. 계속되는 웃음소리가 마리엘도 재미있어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앗지만 그녀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마리엘은 TV를 끄고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 방송도 시시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찾아보면 들을 만한 것이 아직 있었다. 오래 전에 방송된 라디오 쇼나 악단 연주가 나올 때가 있었다. 하지만 마리엘은 오늘밤만큼은 토크쇼를 듣고 싶었고, 뉴욕시 라디오에서도 수많은 토크쇼가 방송되고 있었다. 마리엘은 그녀가 좋아하는 한 프로그램에 다이얼을 맞추었다.
  오늘밤 사람들은 자신들리 좋아하는 영화의 한 장면이나 영화에 관련된 쓸데없는 질문들을 하느라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대고 있었다. 마리엘은 자리를 잡고 듣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들은 영화의 마지막 대사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마리엘은 그녀가 보았던 영화들을 떠올리며 그 영화응 어디에서 누구와 보았었는지 기억하려고 애썼다. 누군가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던 배우들로 화제를 바꾸었다. 마리엘은 남편과 함께 007영화를 몇 편 보기는 했지만 좋아하지는 않았었다. 그 영화는 폴력적이었고 주인공의 성적 매력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아직도 그녀는 숀 코넬리와 로저 무어가 연기한 제임스 본드를 기억했다. 그녀는 창가에 놓은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며 라디오를 듣다가 어느세 잠이 들었다.
  마리엘은 마루에 머리를 부딪히는 바람에 잠을 깼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아픔이 가라않을 때를 기다렸다. 눈을 뜨자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그녀는 자신이 마루에 넘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창문사이로 달빛이 들어왔다. 또 정전이었다. 넘어지면서 부딪힌 데가 계속 아팠다.
  그녀는 마루에 가만히 누워 아픔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귀가 멍멍했다. 창 밖에서 들려야 할 도시의 소음을 들리지 않았다. 팔과 다리에 감각이 느껴졌다. 한동안 아프겠지만 부러진 데는 없었다. 그녀는 바박에 떨어진 안경을 찾아 썼다. 그런 다음 천천히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그녀는 촛불을 켜기 위해 거실 복도에 놓인 서랍장 쪽으로 걸어갔다. 발 밑을 살피며 걸었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았을 때 발에 뭔가 채였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소파 옆 작은 테이블에 놓여 있던 푸른 화병을 주워 들엇다. 마리엘을 쓰러뜨렸던 그 힘이 푸른 화병을 깨뜨려 버린 것이다. 마리엘은 조심스럽게 가다가 마루 위가 깨진 등 과, 베개, 장식용 자기들로 어질러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태풍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집안의 모든 물건들이 내동댕이쳐 있었다.
  촛불이 조명등처럼 방안을 밝혔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접시와 음식 통조림들이 떨어져 마루와 조리대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침대보와 마루 위에 유리 파편이 널려 있었다. 창문을 틀만 남아 있었고 유리는 모두 깨져 있었다. 마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녀는 청소할 생각에 한숨을 쉬다가 손전등과 라디오를 발견했고,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경우를 대비해 그것들을 챙겼다.
  마리엘은 라디오를 켰다 대부분의 지역 방송들이 나오지 않았다. 방송이 나오는 경우에도 정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녀는 부엌으로 가서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도 불통이었다. 전화까지 끊겼다는 것이 신경 쓰였다. 보통 전기가 나가도 전화는 쓸 수 있었다. 그녀는 흔들의자를 바로 세운 뒤 창가에 앉아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창 빡을 내다본 마리엘은 엄천난 충격을 받았다. 거티의 집터에 들어선 고층 사무실 빌딩과 그 주변에 있던 건물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풀밭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리엘은 창가에 서서 눈앞의 광경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머리를 부딪쳤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얼굴과 머리를 만져 보니 혹도 나지 않았고 찢어진 데도 없었다. 헛것을 본 게 아니라면 건물들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도시는? 마리엘이 모레노 씨한테 가서 그의 집 쪽에서는 도시 모습이 제대로 보이는지 물어 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문 밖에서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리엘은 촛불을 들고 문으로 가서 구멍을 통해 밖을 살펴보았지만 너무 어두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루이스 이바라스의 목소리가 들렸고 마리엘은 문을 열었다.
  “괜찮으세요, 위더비 부인?”
  “그래요, 루이스. 와 줘서 고마워요. 지금 우리 집 창 밖을 봐 줄래요? 내 눈에는 도시가 전혀 보이질 않아서요.”
  “맞아요, 위더비 부인. 부인이 이상한 게 아니에요. 제 눈에도 보이지 않아요. 건물을 모두 살펴보았는데 다른 거 그대로 있어요. 저희는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대피할까 생각 중에요. 만약 나가게 되면 부인을 모시러 올게요.”
  “고맙지만 난 괜ㅊ낳아요.”
  “머물러 계시면 위험합니다. 위더비 부인.”
  “난 남아 있을래요. 이제는 당신과 멜린다가 싸우는 소리를 듣지 못하겠군요. 이제는 싸우지 말아요. 당신들은 잘 어울려요. 나는 내딸에게 그 애가 당신과 멜린다 같이만 지낸다면 바랄게 없다고 말했다오.”
  “그러셨어요. 저희는 모두 잊어버렸어요. 어쨌든 저희와 함께 가셔야 돼요. 위더비 부인.”
  “빨리 가족에게 돌아가요. 아니, 잔깐만 기다려요.”
  위더비 부인은 부엌으로 가서 과자를 종이 봉투에 넣은 다음 그걸 루이스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들에게 이 과자를 줘요. 애들이 겁 먹고 있다면 달래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루이스는 사양하지 못하고 종이 봉투를 받았다.
  “만약 이곳을 떠나게 되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나는 집을 절대 떠나지 않을 거에요. 잘자요. 루이스.”
  마리엘은 다시 창가로 돌아와 새로 생긴 초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 마리엘은 언젠가 토크쇼에서 사람들은 오직 두 가지, 죽음과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두려워한다고 말하던 걸 기억했다. 마리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 나이 정도의 사람들은 살아오면서 오랫동안 수많은 죽음을 보아 왔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리엘에게는 미지의 것이 오히려 그리웠다. 그녀의 삶은 거의 십여 년 동안 잔인할 정도로 똑같은 일상들로 채워져 있었다.
  건물 반대편에서는 도시의 소음이 들려 왔지만 풀밭은 아주 조용했다. 초원은 망망대해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건 단순한 초원이 아니었다. 마리엘은 침침한 눈과 어둠을 원망하여 눈을 크게 떴다. 안경을 벗어 안경알을 닦았으나 소용없었다. 멀리 풀 속에서 뭔가 반짝거렸다. 물이었다. 초원 끄트머리에 늪이 있었다. 마리엘은 남편의 망원경이 집에 남아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초원에는 볼 것이 매우 많을 것이다.
  마리엘은 라디오를 틀렸다. 그녀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진 다이아몬드 쇼를 틀렸다. 그는 상스럽고 천박해서 마리엘은 그가 진행하는 토크쇼를 거의 듣지 않았다. 그러나 쇼 진행 도중 자주 뉴스를 했기 때문에 마리엘은 진 다이아몬드 쇼에 주파소를 맞췄다. 그는 유타주 솔트레이크시에 사는 한청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진 우리는 절대로 핵에 관한 진실을 알지 못할 거에요. 왜냐하면 그들은 절대로 진실을 밝히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면 너무 많은 것을 잃거든요.”
  “그들이 누구죠?”
  “물론 대기업들이죠. 핵무기 제조 회사나 대형 정유사같은 대기업이 자신들의 종업원들이 권력에 접근하도록 허용할 것 같아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요. 그래서 정부가 발명가들의 명성을 파괴하는 데 열심인 거에요.”
  “그럼 이 땅의 정부, 대기업, 정유, 회사, 그리고 석유 회사를 소유한 사람들이 서로 결탁해서 핵을 개발한 사람들을 불신하도록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건가요?”
  “그래요.”
  “그렇다면, 왜 아무도 핵융합 실험을 다시 하려고 하지 않죠?”
  “그건 정부가 모든 과학자들을 매수해 버렸기 때분이죠.”
  “그럼, 구(舊) 소련 과학자들까지도 말입니까?”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니까요.”
  “그렇군요, 만약 당신이 편집증 환자라면 말이 되는군요. 다른 전화를 연결합니다.”
  진 다이아몬드는 거의 매일 밤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그녀는 이처럼 끔찍한 프로그램에도 전화를 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무스당한 사람이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오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마리엘은 라디오를 껐다. 지금 듣고 싶은 것은 뉴스였지 잡담이 아니었다.
  마리엘은 밤새 창가에 앉아 초원을 바라보며 무슨 소리가 들리지는 않나 귀를 기울였다. 초원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리엘이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나직이 그르렁거리는 소리였다.
  하늘은 막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고 초원도 훨씬 잘 보였다. 초원 끝에 생긴 늪과 나무들이 보였다. 마리엘은 새로운 것들을 보자 흥이 났다. 마리엘은 안경 위로 돋보기를 얹은 다음 신나는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창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창문에 기대어 풀 사이로 10대 아이들 몇 명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옷차림을 보니 동네 불량배들이었다.
  불량배들은 모두 남자아이들 같았지만 마리엘은 요즘 들어 남녀를 구별하는데 영 자신이 없었다.그들은 초원을 지나 밖으로 나오고 있었는데 초춴 족을 바라보며 뭔가 얘기하며 웃고 있었다. 마리엘은 풀이 무척 긴 것을 보고 놀랐다. 풀은 키 큰 소년의 허리에 닿을 정도였다. 그녀는 아이들이 풀밭에 들어가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아이들이 싫은 게 아니라 풀밭에 들어가 있는 것이 싫었다. 그들은 이 새로운 세계의 한 부분이 아니었고 마리엘은 이 모든 것이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왔지만 그 다음에는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올 것이다. 그러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초원으로 몰려들 것이다. 그들은 초원을 나누어 길을 놓고, 건물을 지으려고 할 것이다. 얼마 안 있어 유리로 뒤덮인 건물들을 다시 볼지도 몰랐다. 안돼, 이 아이들이 여기에 있으면 안돼. 마리엘이 아이들에게 초원에서 나가라고 소리치려고 하는데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더니 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리엘은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흥분했는지 보려고 했다. 뭔가 있었고,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아이들이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리엘은 신나서 손뼉을 쳤다. 그녀는 남편의 망원경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물체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간신히 초점을 맞췄고,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지루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10. 그룹
  누가 신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단어가 의미없는 시간이 찾아오리라. 
  조라스트러스, 바빌론의 예언자
  오레곤주 이스트 호수 토요일, 오후 7시 35분 (태평양 표준시)
  “펫, 늦었네. 그만하고 오게.”
  필쳐 박사가 소리쳤다.
  “잠깐이면 됩니다. 박사님, 잠시만요.”
  펫은 캠핑장 근처의 소나무 위에 올라가 단파 수신기용 안테나를 조금 더 높이 달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들은 서머 호수에 있는 피트라와 콜터와는 연락을 취했지만 윔스프링즈에 있던 웨인 부인과 어니 파웰과는 교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테나 위치를 조정하느라 팻은 가족들에게 가야 하는데도 지금껏 남아 있었던 것이다.
  “팻, 어서 내려오게.”
  쿰 박사가 재촉했다.
  “나머지는 내가 하겠네.”
  “박사님은 몸이 무거우셔서 안돼요.”
  팻이 대답했다. vt은 쿰 박사가 나무 위로 올라오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말할 정도로 무례하지 않았다. 
  “다 됐습니다.”
  팻이 조심스럽게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고맙네. 팻. 이제 어서 출발하게! 가족 모두에게 안부 전해 주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필쳐 박사님. 쿰 박사님.”
  팻이 손을 내밀어 두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뭘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
  필쳐 박사가 확인 했다.
  “네, 박사님.”
  팻이 자동차를 몰고 떠난 후 필쳐 박사는 팻의 안전을 걱정했다. 필쳐 박사와 쿰 박사를 돕기 위해 남아 있었던 팻 외에 다른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전자 자기파가 발생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파는 3일 후에 발생할 예정이었으나 지점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만약 일이 예상보다 일찍 발생한다면 팻은 위험에 처할 것이다. 필쳐 박사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팻이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기를 빌었다. 
  박사가 단파 수신기를 다시 작동시켰다. 콜터와 피트라는 바로 아무 일 없다고 알려 왔다. 그러나 웨인 부인과 어니 파웰은 세 번빼 시도에서야 경우 연결되었는데 전파 방해로 거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30분마다 상황을 점검하기로 했다.
  저녁때까지 30분마다 상황을 점검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쿰 박사가 만든 스튜로 늦은 저녁을 먹은 뒤 그들은 RV밖으로 나와 잔디 위에 앉았다. 아주 맑은 밤이었다. 보름달이 떠 있었지만 그들은 은하수를 볼 수 있었다. 다른 여행자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시끌벅적하게 자신들의 텐트나 트레일러로 돌아오고 있었다. 오직 필쳐 박사와 쿰 박사만이 침묵에 잠겨 있었다. 
  밤 11시에 수신기가 울렸다. 피트라는 별다른 일이 없다고 보고 했다. 그녀 뒤에서 콜터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해대는 것을 듣고 필쳐 박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글지글 끌리는 소리는 더 심했지만 어니 파웰로부터는 별일 없다는 연락이 왔다. 쿰 박사는 꼬챙이로 불 속을 쑤시고 있었다. 쿰 박사는 장작을 몇 번 뒤적이더니 필쳐 박사에게 말을 걸었다.
  “체스터, 전파 장애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쿰 박사가 다시 불 속을 쑤셨다.
  “그것이 그 일과 관련 있는 게 아닐가 하구요.”
  필쳐 박사의 눈썹이 약간 올라갔다.
  “조지,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소.”
  쿰 박사는 필쳐 박사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필쳐 박사는 다른사람이 독창적인 생각을 해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쿠 박사를 약간 짜증하게 했지만 쿰 박사는 이미 오래 전에 남에게 인정 받는 것에 대한 끝없는 추구를 포기했다. 그는 이제 진정한 과학자였고, 그가 원하는 것은 진리를 이해하는 것뿐이었다. 생각을 헤낸 것이 자신이든 필쳐 박사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는 다시 모닥불을 돋았다.
  “물론 전파 장애가 그 일 자체일 수도 있어요.”
  필쳐 박사의 눈썹이 다시 올라갔다.
  “그럴 리가. 난…난 받아들일 수 없어요.”
  쿰 박사는 이해했다.
  그들 모두 일어날 일에 대해 두려워하면서도 거기에 매달려 왔었다. 그들과 나머지 사람들은 뭔가 일어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라던가 직업적 유대 관계를 끊고 살아왔다. 그들은 수신기에 생긴 전파 장애 이상의 중요한 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전파 장애를 발생시키는 원인에 대해 좀 더 의견을 나누었다. 모닥불이 점점 달아오르는 가운데 그들은 가설을 세우고, 질문하고, 다시 이론을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러한 토론을 거치면서 그들은 완벽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서로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외로운 두 남자가 고대의 불가사의한 사건에 대해 공통의 애정을 가지게 되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들이 알고 지낸 7년 동안 대화의 주제가 바닥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신비한 일들이 사라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밤중위 점검에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프트라는 아주 철저하게 살피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프트라 목소리 뒤로 술에 취해 낄낄대는 콜터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필쳐 박사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콜터는 때때로 유능해 보였고 피트라는 그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콜터는 자제력이 없는 것 같았고, 더 나아가-필쳐 박사의 관점에서는-우둔해 보였다. 필쳐 박사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 중의 하나는 피트라같이 진지하고 총명한 젊은 여인이 콜터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었다.
  웨인 부인이 잠시 후 아무 이상 없다는 연락을 해 왔다. 웨인 부인은 손텔이 자신에게 그들의 예측은 정확하며, 곧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다시 확인해 주었다고 말했다. 필쳐 박사는 손텔에게 감사의 듯을 전해 달라고 웨인 부인에게 말했다.
  필쳐 박사와 쿰 박사는 전파 장애에 대한 토론으로 다시 돌아와 태양의 흑점이 전파 장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이 피트라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태양의 흑점 주기에 대해 막 토론을 시작했을 때였다. 그들은 응답하기 위해 서둘러 RV로 돌아갔다.
  “뭔가 일어났어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조금 전에 이상한 소리가, 쿵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지금 동쪽에서 불이 났어요. 꽤 큰 불같은데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모르겠어요.”
  필쳐 박사와 쿰 박사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쿰 박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좀 더 대단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동감입니다.”
  필쳐 박사가 말했다. 그가 피트라에게 지시했다.
  “오늘밤 절대 그 근처에 있지 말게. 안전한 장소로 옮기고 아침에 다시 확인을 하는 것이 좋겠어. 우리는 웨인 부인과 어니 파웰에게 연락을 취해 알리겠네.”
  필쳐 박사는 피트라와의 통신을 끝내고 웨인 부인을 호출했다. 전파 장애는 덜했으나 지지직거리는 마찬가지였다.
  “웨인 부인, 웨인 부인. 들려요?”
  잠시 후 그는 다시 수신기를 켜고 어니 파웰을 불렸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11. 구출 작전
  거센 바람과 구름과 함께 엄청난 우박이 세상에 몰아쳤다. 폭풍이 그쳤을 때 땅 아래 숨어 있던 생물들이 땅 위로 올라와 번성하였다.
  뉴질랜드, 마오리 족의 구전 역사
  오레곤 동굴 토요일, 오후 11시 5분 (태평양 표준시)
  테리는 군인이 조금 더 앞으로 나와 이제는 앞쪽에 앉은 사람들 가까이에 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불이 정전된 동안 움직인 것이다. 청년이 배낭에서 손전 등을 꺼내 불을 켰을 때 군인이 이미 앞줄에 와 있었다.
  테리는 엄두도 나지 않았고 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필요하다면 군인을 돕고 싶었다. 기회는 테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가 머리를 무릎에 기댄 채 졸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펴졌고, 사람들은 놀라 잠에서 깼다.
  “동굴 속에 계신 여러분, 안녕하세요.”
  청년 또한 놀라 목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일어섰다. 그 순간 군인이 뛰어올라 청년을 덮쳤다. 청년이 그를 떠밀었지만 소용없었다. 군인은 청년을 쓰러뜨린 다음 팔을 뻗어 청년이 떨어뜨린 총을 잡으려고 했다.
  테리는 주저하다가 자신 외에는 아무도 고군분투하고 있는 군인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직도 청년이 총을 쥐고 있고, 군인이 그 팔을 잡아끈는 것을 보았다. 청년은 발길질을 하며 군인을 떼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한손으로는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텔는 엉켜 있는 두 사람 위로 몸을 날려 총을 잡았다. 테리의 무게에 군인이 옆으로 밀려나면서 총을 쥔 청년의 팔을 놓쳤으나 테리가 대신 그 팔을 잡았다. 팔을 잡는 순간 테리는 그 청년이 힘에 부치는 상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테리는 청년의 눈에서 조증의 기미를 보았고 그의 힘은 증세에 비례해 생기는 것 같았다.
  군인이 총을 잡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누군가 그들을 강하게 덮치면서 청년의 팔을 누르고 있던 테리를 쳤고, 군인은 청년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새로 등장한 사람은 헬멧을 쓰고 등산복을 입고 있었는데 거의 청년의 얼굴 바로 앞까지 굴러 왔다.
  테리는 등산복 차림의 젊은 여인이 무릎으로 청년의 배를 침으써이 전쟁을 끝냈을 때에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경찰들과 삼림 경비 대원들이 곧 귿르을 에워쌌고 수감을 찬 청년은 조금 전과 달리 조증ㅇ서 울증으로 바뀌어 있었다. 청년은 울면서 동굴 안에 남아 있게 해 달라고 사정했다.
  “아직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가 되풀이해 말했다.
  “제발, 여기 있게 해주세요. 누나! 누나! 사람들이 나를 끌어가지 못하게 해. 곧 일어날 거란 말이야. 부탁이야. 누나!”
  질은 동생을 안심시키며 달래고 있었다. 그러나 테리는 그가 누나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 청년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누군가 무전기로 들것을 요청하는 소리가 들렸고, 경찰이 인질들을 동굴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 시작했다. 청년은 인질들이 모두 나간 후에도 훌쩍이며 애원하고 있었다.
  경찰은 모든 사람들을 조사한 뒤 보고서를 작성했다. 몇 시간이 흘렀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테리와 엘렌은 겨우 해방됐다. 그들은 주차장으로 걸어가다가 군인 부부와 마주쳤다. 군인 부부가 테리와 엘렌을 향해 걸어오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콘래드라고 합니다. 빌 콘래드. 동굴 안에서 아주 잘 하셨어요.”
  그가 테리에게 말했다.
  “당신을 따라 했을 뿐인데요, 뭘. 저는 테리라고 하고 이쪽은 제 아내 엘렌입니다.”
  “이쪽은 제 아내 엔지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빌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그 청년이 생각하는 건지 도대체 모르겠더라구요.”
  주차장에서 그들은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며 모여든 사람들과 마주쳤다. 테리의 귀에 라디오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죠?”
  앤지가 물었다. 
  한 쌍의 남녀가 사람들 틈에서 빠져 나와 그들에게 기꺼이 소식을 알려주었다.
  “믿지 못하겠지만, 여러 곳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사라져버렸다니까요!”
  “뭐가요? 산사태라도 일어났어요?”
  테리가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여인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일 같지는 않아요. 5번 고속도로로 차를 몰고 가면 거기에서 길이 끝난 것을 발견하게 될 거에요. 4차선 도로가 있던 곳에 지금은 풀하고 나무 그리고 산밖에 없어요. 믿을 수 있겠어요? 산이 생기다니.”
  12. 세 친구
  주님의 날은 밤중에 도둑같이 오리라. 사람들이 평안하고 안전한 세상이라고 마음놓고 있을 때 갑자기 멸망이 닥칠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절
  오레곤주 뉴버그시 토요일, 오후 11시 20분 (태평양 표준시)
  커비가 타코 벨 간판을 쳐다보는 동안 리프먼은 커비의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시간을 재고 있었다. 존은 뒷자리에 앉아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다리 사이에 음료수 컵을 끼운 채 앉아 있었다. 리프먼은 계속 시간을 말하면서 엔진을 것었다.
  “2분이야. 2분이나 걸렸어! 넌 절대로 이길 수 없어. 이제 파이 먹으로 가자.”
  “웃기지 마.”
  커비가 투덜댔다.
  그들은 함께 음료수를 마셨다. 그건 그날 시합의 마지막 내기였고, 내기에서 지는 사람이 파이를 사기로 했었다. 이제는 커비와 존이 시함할 차례였다.
  그들은 포틀랜드에서 320킬로미터 정오 떨어진 뉴버그시에 와 있었다. 뉴버그시는 너무 작아서 30년 전 주를 관통하는 고속도로가 생겼어도 잘 알려지지 않은 동네였다.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생겨났던 모텔, 드라이브 인 시설들(차를 탄 채 이용할 수 있는 영화관, 식당, 은행 등:옮긴이)과 음식점들도 대부분 문을 닫았고 이제 마을은 대형 제지소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 앞으로 20여 년 이내에 뉴버그는 도시 확장 사업 계획에 따라 포틀랜드에 편입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24킬로미터나 이어지는 숲과 농장이 뉴버그를 도시와 구분 짓고 있었다.
  존, 커비 그리고 리프먼은 보통 포틀랜드 82번가나 122번가에서 길 이름 바꾸기 놀이를 했었는데 금방 지루해졌기 때문에 다른 지역을 찾아나섰다. 그러다가 뉴버그를 발견하게 되었다. 뉴버르에는 작은 대학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동차를 몰고 한동안 대학 주위를 돌다가 여학생이 나타나면 창문을 내리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 장난에도 지쳤을 때 그들은 이름 바꾸기 놀이거리가 도로변을 따라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참을 놀다가 자기 차례를 마쳤을 때 커비는 어던 방법으로든 간에 친구들에게 집에 가자고 말해야 했다. 벌써 시간은 밤 11시 30분이 다 되어 있었고, 어떤 일이 있어도 12시 이전에는 집에 들어가야 했다. 부모님은 지금쯤 여행에서 돌아와 계실 것이고 그는 자신이 매일 밤 귀가 시간을 지나 들어온 것으로 오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친구들에게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너희 부모님들은 너무 엄격하셔. 겁쟁이 같으니라구.”
  리프먼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커비는 별말 하지 않았지만 억지로 짓는 웃음과 표정이 리프먼의 말을 인정하고 있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존은 항상 집에 제일 먼저 들어갔다. 그의 아버지는 심리학자였고 때로 육아 교실에서 상담도 했다. 그는 자신들의 아이를 잘 키운 것으로 신용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육아 상담 분야에서는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이를 잘 키우는데 중요한 것은 일관성과 교육이란다.” 
  항상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존이 도덕적으로 침범할 수 없는 명확한 규범을 갖고 있는 반면, 리프먼의 아버지는 자신의 눈앞에서만 아니라면 리프먼이 뭘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통 리프먼은 아버지 눈앞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더 최악이었던 것은 커비의 아버지였다. 그는 오레곤주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목사로 케이블  TV를 통해서도 신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는 아들을 믿었다.
  그는 아들에게 자동차를 사줄 만큼 믿었고, 한 가지 외에는 간섭하지 않을 정도로 아들을 믿었다. 커비는 매주 수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에는 교회에 가야 했다. 존이 아는 한 커비는 아버지의 믿음을 배신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최소한 그의 아버지는 아무 것도 몰랐다. ‘성령’이 아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커비는 키가 2미터나 됐고,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커비가 지나갈 때마다 미식축구팀 코치는 군침을 삼켰으나 커비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학교에서 가장 컸지만 동시에 가장 점잖았다. 만약 커비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어린 아이 같은 엷은 푸른색 눈동자와 동그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커비는 누가 거칠게 나오면 자신도 똑같이 험상궂게 찡그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보려면 서둘러야 했다. 커비는 상대가 뭘하든지 겁내거나 외면하지 않고 흐릿한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위협하듯 천천히, 그리고 아주 짧게 말했다. 그 방법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존이 아는 사람 가운데 머리를 부숴 버리겠다고 말하지 않는데도 그처럼 무서워 보이는 사람은 커비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집에 가기 전 마지막 단어 바꾸기를 했고, 커비가 최고 점수를 받았다. 마지막 세임은 리프먼도 칭찬할 정도였다.
  리프먼이 말했다.
  “기본이 됐어. 아주 좋아. 기-본-이-됐-어.”
  기본이 됐다 라는 말은 리프먼이 가장 좋아하는 최상급 표현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을 때 이 표현을 사용했다. 존과 커비는 리프먼이 그 표현을 쓰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 셜록 홈즈가 왓슨 박사를 모욕 할 때 항상 쓰던 표현처럼 리프먼이 자신들을 아무 것도 모른다고 놀리는 줄 알았었다. 그렇지만 리프먼은 그 의미를 분명히 밝혔고, 그 말은 인생 전반에 관련하여 기초가 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건 리프먼의 바램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나 사물들, 또는 사회에 의지하지 않고 사는 것이 그의 희망이었다.
  리프먼은 자기 주장이 강했지만 그의 앞에서 생존주의자라고 말해서는 안되었다.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리프먼만큼 충분히 기본이 되어 있지 않았다. 리프먼은 생존주의자들이 지나치게 과학 기술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냉동 건조 식품, 정수기, 태양열 교환기 그리고 자동화기 등이 그 예였다. 리프먼에게 기본이 되어 있는 사람은 칼만 가지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기본이 됐어!  커비, 생각지 않게 승자가 되었구나.”
  다시 리프먼이 소리쳤고 존에게 낄낄대며 ‘자, 어서 지갑 꺼내. 파이 먹을 시간이야.’ 라고 말했다.
  어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존은 게임이 끝났다는 사실이 기쁘기만 했다. 그들은 세븐 일레븐에 우르르 몰려가 파이를 집어들었다. 항상 그랬듯이 커비는 사과 파이를 집었고, 존은 딸기 파이를, 리프먼은 레몬 파이를 골랏다. 존과 라프먼은 문 쪽으로 가고 있었고, 커비는 내셔널 인콰이어러 지(미국의 주간지:옮긴이)의 표지를 훑어 보고 있었다.
  “세상에, 존, 이런 걸 왜 사?”
  리프먼이 물었다.
  “뭐?”
  “이 딸기 파이 말이야. 눈 씻고 찾아봐도 딸기는 안 보이는데.”
  존이 리프먼에게 파이를 먹어 보라고 말하려는 순간 자동차 한 대가 커비의 차 옆에 멈추는 것이 보였다. 차 뒷유리창에 달린 커다란 파이오니아 스피커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록 음악이 시끄럽게 나오고 있었다. 세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셋 중에서 키가 제일 작았는데, 키가 177센티미터인 존보다 조금 작아 보였지만 어깨가 떡 벌어져 있었다. 세 명 모두가 바랜 빛깔의 리바이스 청바지와 청재킷을 입고 있었고, 옆을 치켜 깎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덩치가 제일 큰 남자는 키가 185센티미터 정도 돼 보였고 다른 두 사람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흉할 정도로 못생겼고 여드름 난 얼굴은 앞머리로 덮여 있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가 제일 앞에 서서 걸어왔다. 
  “이 멍청이들이 우리 동네에서 뭐 하는 거지?”
  존은 그들이 자신과 리프먼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그것이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리프먼은 그렇지 못했다.
  “지금 우리보고 하는 말이에요?”
  리프먼이 놀라우리만치 험악하게 대꾸했다.
  존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리프먼을 알아 왔다. 그들의 홈룸 시간은 체육 수업이었고 해병대 출신의 체육 선생은 라커룸을 같이 쓸 사람을 지정해 주면서 그들의 이름을 소리질러 불렀다.
  “리프먼, 로버츠는 238번.”
  그렇게 리프먼을 안 이래 존은 리프먼이 싸우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리프먼은 자신의 키가 185센티미터라고 주장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고 몸도 마른 편이었다. 그의 신장은 학교의 불량배들을 기죽일 수는 있겠지만 지금 뉴버그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코방귀를 뀌며 껌을 몇 번 씹더니 리프먼을 위아래로 자세히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재빨리 리프먼이 들고 있던 파이를 낚아챘다. 그는 파이를 들고 의기양양해 했다. 여드름이 코웃음치며 동조하고 있었다.
  제일 큰 덩치가 리프먼 쪽으로 돌아섰다.
  “다시 찾고 싶지, 이 겁쟁아?”
  리프먼은 대답하지 않고 노려보기만 했다. 덩치가 껌을 소리내어 씹으며 웃고 있었다. 덩치는 손을 뻗어 리프먼의 머리에 파이를 쑤셔 넣었고, 리프먼은 피하다가 땅 위로 넘어졌다.
  “잘했어.”
  여드름이 낄낄댔다.
  리프먼은 천천히 머리 위로 손을 가져갔고 파이 조각을 떼내더니 그걸 덩치의 발 밑에 던졌다. 파이 속에 들어 있던 레몬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때 커비가 편의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평소에 불량배들에게 했던 것처럼 거칠게 행동했다.
  “무슨 문제 있어?”
  커비가 평소보다 2옥타브나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커비는 불량배들을 밀치고 지나가서 자동차 문을 열었다. 덩치의 얼굴이 붉어지는 게 열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커비는 그들보다 더 세 보였다. 존은 뒷좌석에 올라탔으나 리프먼은 놀랍게도 조수석에 앉았다. 리프먼의 행동에 커비도 놀랐다. 커비는 자신의 차를 거의 운전하지 않았었다. 리프먼이 속력을 내며 거칠게 차를 모는 동안 커비는 조수석에 앉아 창문을 열고 소리지르기를 좋아했었기 때문이다.
  커비가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후진하는 동안 리프먼은 덩치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리프먼을 향해 씹던 껌을 뱉었고, 껌은 조수석 창문의 한가운데데 달라붙었다. 리프먼이 가운뎃손가락을 올려 보임으로써 그에게 앙갚음을 하자 덩치는 리프먼을 노려보았다. 커비가 없었더라면 또 다른 소란이 있었을 것이다. 커비가 북쪽으로 차를 모는 동안 리프먼은 뿌루퉁해져 창문에 붙어 있는 껌 덩어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존은 왜 리프먼이 괴로워하는지 알고 있었다. 덩치와의 사건을 혼자 해결하지 못하고 커비의 도움을 받은 것이 그의 ‘기본적인’인 원칙과 위배되기 때문에 리프먼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커비는 포틀랜드로 가기 위해 99번 돌를 탔다. 뉴버그 계곡을 벗어나 브리드 힐을 오르고 있을 때였다. 존은 계곡 아래 작은 마을에서 반짝이는 빛을 보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불이 꺼졌다. 존이 어 하는 순간 엄청난 굉음이 들리면서 차가 덜컹댔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돌풍이 몰아 닥쳤다.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바람에 휩쓸려 보호대 역할을 하고 있는 큰 바위 근처까지 자동차가 밀려났다. 커비가 브레이크를 밟으며 자동차가 계곡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그들은 말을 잃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자동차 주위를 휘감았다. 존은 길 건너편에 전나무가 두동강난 채 나동그라진 것을 보고 무서움을 느꼈다. 뽑힌 나무들이 쓰러지면 여기까지 날아올까? 차가 불어오는 돌풍에 뒤뚱거리자 존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안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는 언덕 뒤에서 깔때기 구름이 서쪽으로 움직이며 나타나 순식간에 농지를 뒤덮고 곡식과 나무들을 뒤흔드는 광경을 보았다. 존은 17살이었고, 오레곤에서 태어나 줄곧 살아왔다. 그는 지금까지 오레곤에 이런 폭풍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깔때기 구름이 일으킨 먼지와 파편들이 길을 메우고 있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존은 이 돌풍이 도로를 따라 직선으로 진행되면 고속도로는 끊어지고, 돌풍은 동쪽으로 범위를 넓혀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쪽에 자리한 농가들은 돌풍의 진로에서 약간 북쪽으로 비켜나 있었다. 돌풍은 뉴버그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돌풍은 마을 어귀의 가축 사육장을 휩쓸고 지나가며 세 채의 온실을 산산조각내더니 공중으로 솟구쳐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돌풍이 다시 땅 위로 몰려와 포드 자동차 전시장을 덮쳐 에어로스타와 머스탱을 날려 버렸다. 그런 다음 깔때기 구름이 다시 몰려와 소용돌이치더니 마침내 사라졌다.
  존과 커비, 리프먼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바람이 잦아지며 주위가 조용해지자 그들은 차 밖으로 기어 나왔다.
  “대단한데.”
  리프먼이 계곡의 피해를 살피면서 말했다.
  “얘들아, 포드 전시장에 가 보자.”
  “그만둬, 리프먼.”
  커비가 말을 막았다.
  “길을 보라구.”
  존은 뉴버그로 가는 길을 돌아보았다. 길은 뽑힌 나무들과 파괴된 온실의 잔해들로 가득 차 있었다. 파편들이 길 위에 많이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큰 나무들을 뽑히지 않고 서 있었다. 그들은 자동차에 다시 올라탔고, 모두 흥분되어 돌아오는 동안 계속해서 그들이 본 것에 대해 떠들었다.
  드디어 그들이 언덕을 모두 올라와 비탈을 내려다보니 울창한 숲이 도로 중앙에 생기면서 길이 1차선 도로 2개로 변해 있었다. 마치 청록색 터널을 지나 차를 모는 것 같았다. 갑자기 커비가 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차가 끼익 소리를 내며 멈췄다. 리프먼은 거의 자동차 앞유리에 머리를 부딪힐 뻔했고, 존은 손에 음료수를 들고 있다가 옆으로 굴렀다. 존은 불평을 하다가 밖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불과 3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길이 끝나 있었다.
  아스팔트는 수평으로 깨끗하게 잘려 있었다. 그리고 길이 있어야 할 곳에는 숲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것들은 뉴버그로 가는 길에 나 있던 나무들과는 달라 보였다. 2차림(원시림 파괴 후 심은 재생림:옮긴이)인 더글라스 전나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전나무보다 둘레가 서너 배는 더 되 보이는 거대한 나무들이 서 있었다. 존은 자동차 선 루프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머리 위로 뻗어 있는 나무의 거대한 밑둥치부터 꼭대기까지를 살폈다. 돌풍이 도로를 이렇게 바꿔 버린 건가? 전에도 이 나무들이 있었는데 전나무에 가려져 있었던 건가?
  커비와 리프먼도 차 밖으로 빠져 나왔고, 리프먼은 근처에 서 있는 나무를 발로 툭툭 찼다.
  “이건 진짜야, 하지만 믿을 수 없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된거지-?”
  그가 중얼거렸다.
  리프먼은 갑자기 커비가 큰 소리로 훌쩍거리는 바람에 말을 중단했다. 존은 커비가 무릎을 꿇고 양팔을 벌린 채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하느님께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리프먼이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며 커비의 손을 얼굴에서 떼내려고 하였다.
  “가까이 오지마!”
  커비가 눈물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어? 보지 못했어? 예수의 재림이 임박한 거야. 선한 자는 하늘로 올라가게 되지만 나는 아직 부족해.”
  “그러지 마, 커비. 이건 산사태가 났던가 무시무시한 돌풍이 불어닥친 것뿐이니까 쓸데없는 소리하지마.”
  커비가 계속 훌쩍이자 리프먼이 커비를 향해 흙을 걷어찼다. 그러더니 숲 가장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어두운 숲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존은 커비에게 다가갔지만 한편으로는 망설여졌고, 무섭기까지 했다. 리프먼은 무신론자였으나 존은 기이한 일들을 통해 신의 존재가 증명된다는 것을 철저히 믿고 있었다. 짧은 순간 벌어진 기적의 어떤 힘이 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을까? 잠시 후 되돌아온 리프먼은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큰애기, 이제 그만 좀 울어. 난 이게 예수의 재림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겠어. 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커비를 잘 지켜 봐.”
  존이 싫다고 말하기도 전에 리프먼은 뉴버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리프먼은 어둠이 내릴 무렵 숲-몇 시간 전만 해도 있지도 않았던 그 숲으로 모습을 감췄다.
  “리프먼, 난 이번 일만큼은 네 말이 맞았으면 좋겠어. 네가 옳기를 신께 빌고 있어.”
  존이 속삭였다. 
  13. 비행기 연착
  비행팀장은 그들이 항로를 벗어났으며, 자신의 비행기 나침반이 고장났다는 것을 무선으로 알렸다. 어뢰를 탑재한 다른 네 대의 비행기 조종사들도 계기가 말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잠시 후 통신이 두절되었다. 비행기들이 사라진 후 그 지역을 수색하기 위해 13명의 승무원을 태운 마틴 마리너 호가 급파되었다. 수색기 또한 두 번 다시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로저 코크랜, 사라진 것들 : 버뮤다 삼각주의 비밀
  하와이 호놀룰루 토요일, 오후 10시 11분 (알류산-하와이 시간대)
  조교수인 에밋 퍼글리시는 도착 시간 안내 모니터를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공항은 한적했으나 그는 늦을까봐 조바심을 내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걸리적거렸다. 그는 재빨리 와 박사가 탄 비행기편을 모니터에서 검색했다. 에밋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행기가 도착하려면 아직 몇 분 더 있어야 했다.
  출구 번호를 적은 에밋이 걸음을 돌리기도 전에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았다. 캐롤리 첸-슬레이터 교수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캐롤리는 어떤 것에서나 절제되어 보이지 않았는데 웃는 것이나 성격, 옷 입는 취향 모두가 그러했다. 지금은 번쩍거리는 꽃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옷이 야하다고 생각할 텐데 그녀는 샌들과 머리 한쪽에도 커다란 꽃을 꽂고 있었다. 캐롤리의 의상에 대한 취향은 야한 것을 넘어서 서커스 단원 복장처럼 요란할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퍼글리시 박사.”
  그녀가 격식을 차려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캐롤리.”
  에밋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와 캐롤리는 학과가 다르기는 했지만 같은 대학에 재직하고 있었고, 그녀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배웅 온 거에요, 마중 나온 거에요, 아니면 어디 가는 거에요?”
  에밋은 거짓말을 할까도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런 너무 심한 행동이었다.
  “왕 박사를 마중 나왔어요. 본토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시거든요.”
  캐롤리는 즉시 에밋에게 아부한다며 야유를 보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에밋이 변명하듯 말했다.
  “왕 박사가 차를 오랫동안 주차장에만 세워 두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또 그녀는 가족이 없으니까-”
  “친구도 없을 거구요.”
  “난 친구에요.”
  “종신교수직을 얻으려고 비굴하게 구는군요.”
  캐롤리가 따끔하게 말했다. 에밋은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웬일이세요?”
  “오빠 배웅하러요. 오빠는 몇 주일 동안 본토에 가 있을 거에요. 저 쪽에 있는 사람이에요.”
  캐롤리가 가리키는 쪽을 에밋이 바라보니 그녀보다 조금 더 나이들어 보이는 제복 차림의 남자가 발권대 앞에 서 있었다.
  “오빠가 물건들을 PX에서 싸게 사 주기 때문에 이러고 있어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캐롤리. 이젠 출구로 가 봐야겠어요.”
  “같이 가요.”
  에밋은 마지못해 종잡을 수 없는 첸-슬레이터 박사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와 함께 왕 박사를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캐롤리를 떼놓을 방법이 달이 없었다.
  “캐롤리, 저 혼자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요.”
  “은밀하게 아부하려구요?”
  “난 그저 그녀를 돕는 것뿐이에요, 만약 우리 둘이 함께 있는 것을 왕 박사가 본다면 우리가 데이트나 하는 걸로 생각할지도 모르잖아요.”
  캐롤리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여자 친구로는 적당하지 않나 보죠?”    
  에밋은 캐롤리가 농담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그녀에게 조금은 끌리고 있다는 걸 인정했다. 캐롤리는 키가 165센티미터 정도였고, 동그란 얼굴은 짧지만 숱이 많은 갈색 머리카락으로 덮여 있었다. 옷차림이 아니라면 그녀는 쉽게 눈에 띄는 형이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에밋이 변명하듯 말했다.
  “왕 박사가 교수들끼리 개인적인 관계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죠.”
  “섹스를 말하고 있군요.”
  “관계에요. 관계는 일을 복잡하게 만들죠-”
  에밋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그 순간 아주 커다란 굉음이 터미널을 뒤흔들었기 때문이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놀라 숨을 죽였고 아이들은 울기 시작했다.
  “비행기 소리였어요?”
  캐롤리가 창가로 갔다. 에밋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하늘은 맑은데요.”
  그녀가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비행기도 보이지 않았다. 에밋은 더 이상 궁금해 하지않고 왕 박사가 나올 출구를 찾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도착시간이 20분이나 지났을 때 도착 시간 안내 보니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에밋은 시간 대신 연착이라고 바뀐 모니터 앞에 모여든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다. 30분 후 엄청난 재앙의 실체가 드러났다.
  14. 해일
  바다는 사막으로 변하고 물고기는 바다 속에서 죽어 갈 것이다.
  노스트라다무스 
  플로리다주 네이플즈시 근해 일요일, 오전 3시 12분 (서부 표준시)
  엄청난 굉음에 카르멘과 론은 잠에서 깨어났다.
  “저길 봐요!”
  카르멘이 소리쳤다.
  론은 카르멘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론은 놀라며 마음속으로 해도를 그려보았다. 그들이 있는 지점에서 수백 킬로미터 이내에는 섬이 없엇다. 그가 항로를 잘못 잡았다고 하더라고 지도에 나온 섬 중의 하나에 이를 만큼 멀리 나왔을 리 없었다. 여러 생각이 교차되는 가운데 그는 눈앞의 섬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섬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아니, 섬은 빠른 속도로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때 마침 아이들이 선실 밖으로 나왔다.
  “저게 뭐에요?”
  로자가 물었다.
  “어, 섬이네. 저기에 가는 거에요?”
  “저기에 가는 거에요?”
  크리스가 따라 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섬은 분명히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원래 크기의 반 정도만이 눈에 보였다.
  “하늘을 봐요.”
  카르멘이 말했다.
  구름이 무서운 속도로 섬을 뒤덮고 있었다. 구름만 아니라면 사방이 잘 보일 정도로 맑은 밤이었다. 갑자기 번개가 치더니 천둥이 울렸다. 구름이 배 쪽으로 몰려왔다. 천둥소리에 귀가 멍멍해졌고, 번개는 하늘을 찢을 듯한 기세로 번쩍이고 있었다. 
  “와, 꼭 레이저 쇼를 보는 것 같아.”
  크리스가 천둥 치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너무 가까워요.”
  카르멘이 론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여기에서 벗어날 수 -”
  갑자기 강풍이 불어닥쳤기 때문에 카르멘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그제서야 론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여보, 로자와 크리스에게 구명 조끼를 입히고 당신도 얼른 입어. 그리고 선실로 들어가! 빨리!”
  “왜 그래요?”
  론은 망설였지만 다가오는 위험으로부터 숨을 곳은 없었다.
  “해일이 배를 덮칠 것 같아.”
  로자와 크리스는 꼼짝하지 못했고, 카르멘은 재빨리 아이들을 선실로 내려보냈다. 바람은 점점 더 강해졌고 거세진 파도에 앙트르프르네호는 요동을 쳤다. 론은 섬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배에 시동을 걸었다. 한없이 길게 느껴지던 몇 초가 지나 시동은 걸렸지만 엔진은 이런 엄청난 해일 속에서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론은 망설였다. 머리로는 해일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과 새로 얻은 가족의 생명이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마침내 그는 키를 오른쪽으로 돌려 섬으로 향했다.
  카르멘이 구명 조끼 2개를 가지고 왔다. 크리스와 로자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선실 밖을 조심스럽게 내다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론도 많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카르멘은 잠깐 주위를 둘러본 다음 론을 바라보았다.
  “틀린 항로를 가는 건 아니죠?”
  “만약 해일이 밀려오면 그 속을 뚫고 나가야 해. 만약 해일을 피해 도망친다 해도 곧 파도에 휩쓸려 물 속에 잠겨 버릴 거요. 파도가 우리를 덮친다면 배는 뒤집히게 될 거야.”
  “해일 속으로 들어가도 괜찮겠어요”
  “그 방법밖에는 없어.”
  론은 더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이 없었다. 말할수록 목소리가 더 떨려 왔다.
  “정말, 이게 최선의 선택이야.”
   카르멘은 론이 구명 조끼를 입는 동안 키를 꽉 잡고 있었다. 론은 선실로 내려가 아이들이 구명 조끼를 제대로 입었는지 확인한 다음 아이들을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다시 론이 키를 잡았고 카르멘은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난간을 힘주어 잡았다. 바람은 거세졌고 섬 위에 떠 있던 구름이 별을 가렸다. 이제 번개는 조금 뜸해지고 있었다. 계속되다가 간간이 들리는 천둥소리가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론은 다음 천둥소리를 기다리며 잠시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고요한 별빛으로 가득 찼던 밤이 잠깐 사이에 폭풍우 속의 악몽으로 변해 있었다.
  론이 두리번거리며 섬을 찾는데, 파도가 뱃머리에 몰아치면서 론과 카르멘은 물에 흠뻑 젖었다. 배는 계속되는 파도에 뒤둥거렸고 론은 방향을 잡기 위해 애썼다.
  “카르멘, 섬이 보이오?”
  “저기 있는 것 같아요.”
  론이 고개를 들었지만 파도와 물방울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론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 확신했다. 파도가 다시 뱃머리를 쳤고 론은 해일이 배를 침몰시키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카르멘이 소리쳤다.
  “이럴 수가! 론, 저것 좀 봐요!”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론의 눈에 띄었다. 엄청난 파도가 그들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자, 모두 뭔가 잡아!”
  배 안으로 물이 들어왔다. 배는 기우뚱거리기 시작했고, 론과 카르멘은 더 큰 파도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키를 더 세게 잡았다. 배가 파도와 엔진의 힘 사이에서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뱃속이 뒤틀리며 속이 울렁거렸다. 뱃머리는 점점 더 심하게 흔들렸기 때문에 론은 배가 뒤집히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는 파도 속을 뚫고 똑바로 나아가겨고 애썼지만 앙트르프르네호는 파도와 바람에 제대로 나아가지 못했다. 론이 겨우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파도가 밀려들었다.
  파도가 그들 위로 덮치며 앙트르프르네호를 뒤흔들었다. 론이 키를 놓치고 바다 속으로 떨어졌다. 론은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리다가 비명소리를 들었다. 공포에 질린 가운데 론은 그것이 금속성의 소리라는 걸 알았다. 앙트르프르네호의 돛이 부러지고 있었다.
  론은 파도에 몸을 맡겼다. 헤엄치려고 할수록 물 속으로 가라앉았기 때문에 그는 구명 조끼의 부력에 의지해 물 위에 떠 있기로 했다. 파도가 조금 잠잠해지자 그는 발장구를 치며 수면 위로 올라왔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폐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물에 잠겼고, 의식이 흐려지는 가운데 론은 자신의 폐에 물이 차서 잠시 후면 죽게 된다는 생각에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가 고래가 물 위로 솟는 것처럼 그는 바다 위로 떠올랐다. 그가 공기를 들여 마시는 순간 다시 파도가 몰아치면서 바닷물이 입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물 속으로 가라앉지 않으려고 발장구를 쳤고, 기침을 하며 물을 토해냈다. 폐와 코가 화끈거렸다.
  계속 몰아치는 파도 속에서도 그는 다른 식구들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찾지 못했들 뿐 가족이 가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절망스러웠다. 왼쪽에서 뭔가 하얗게 반짝였다. 그는 파도가 밀려오기를 기다렸다가 반짝이는 것이 뭔지 보기 위해 발을움직여 파도를 탔다. 앙트르프르네호의 선체가 저만치에서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배를 향해 헤엄쳐 갔지만 아무도 없었다.-크리스도, 카르멘도, 로자도 없었다. 
  론은 마침내 파도에 몸을 실어 배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배는 뒤집혀 있었지만 보기에는 멀쩡했다. 아직 식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 살아 있어야만 해. 살아 있어야 해! 그는 이미 아내를 잃은 경험이 있었고, 다시 아내와 아이들까지 잃는다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론이 고물에 올라가 키를 잡으려는데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이들이 아직도 선실 안에 있었다.
  론은 물 속으로 잠수하려고 했지만 구명 조끼 때문에 물 위로 자꾸 떠올랐다. 그는 조끼를 채우고 있던 고리를 풀어 버렸다. 신발과 옷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는 신발과 티셔츠를 벗어버신 다음 물 속으로 잠수하여 뒤집힌 배의 갑판으로 갔다. 선실 문이 열려 있었다. 그는 문틈을 잡고 문 안쪽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는 바로 눈앞에서 다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몸을 돌려 밑으로 내려갔다. 론이 표면 장력을 뚫고 선실에 들어가 보니 오염됐지만 따뜻한 공기가 남아 있었다. 불빛도 보였다. 누군가 부표등을 켜 놓고 있었다. 로자가 거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자는 울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저씨, 크리스가 다쳤어요. 깨워도 일어나지 않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크리스를 여기에서 데리고 나갈 수가 없어요.” 
  론은 크리스를 살펴보았다. 로자가 의식을 잃은 크리스의 머리를 물 속에 빠지지 않게 받치고 있었다. 론은 물살을 가르고 다가갔다. 크리스의 이마 위에 상처가 크게 나 있었고,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상처로 들어가고 있었다. 론은 크리스의 손목을 잡았지만 맥박이 자신의 것인지 크리스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론은 크리스의 몸을 흔들고 말을 시키며 아들을 깨우려 했다.
그는 혼수 상태가 계속될수록 크리스의 상태는 악화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이를 살리려면 폭풍우가 심해도 배 밖으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해야 했다. 눈에 눈물이 고였고, 론은 로자가 얼마나 난감했을지 충분히 짐작했다. 로자는 혼자 물 밖으로 헤엄쳐 나올 수도 있었지만 그러려면 크리스를 두고 올 수밖에 없었들 것이다. 만약 크리스를 데리고 나오려고 했다면 크리스는 그 자리에서 익사했을 것이다.
  공기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약간의 산소가 남아 있었지만 론과 로자는 점점 숨을 거칠게 쉬기 시작했다. 크리스가 물을 먹게 되더라도 데리고 나가는 길밖에 없었다. 그는 아내가 크리스를 데리고 참가했던 유아 수영 강습에서 아기들이 물 속에 잠길 경우 반사적으로 호흡을 멈춘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 반사작용이 지금도 일어날 수 있을까? 크리스의 뇌가 물 속에서 견딜 수 있을까? 크리스가 30초만 호흡을 멈출 수만 있다면 론은 다들을 밖으로 꺼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선택은 그의 몫이었다.
  “로자, 물 속을 더듬어 보면 테이프가 있을 거야. 만물장 속에 넓은 테이프가 들어 있어.”
  ‘만물장’은 그들이 어떤 물건을 둘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할 때 찾는 서랍장이었다. 론은 서랍장에 두세 가지의 테이프를 넣어 두었는데 대부분이 물에 젖어도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로자는 주위를 잠시 둘러보다가 구명 조끼를 벗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잠수하는 동안 론은 빨래 집게를 찾기 위해 크리스를 데리고 옷 건조대가 붙어 있는 선실 끝에 다녀왔다. 로자는 아직도 물 속에 있었는데 물건을 가지고 올라왔다가는 불에 비추어 보고 던져 버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로자의 머리가 다시 물 위로 불쑥 올라왔고 그녀는 손에 은색 테이프 뭉치를 들고 있었다.
  “찾았어요.”
  그녀는 론에게 테이프를 건냈다. 그녀는 크리스를 구하는데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로자가 크리스의 구명 조끼를 벗기는 동안 론은 크리스를 간신히 받쳐들고 있었다. 그런 다음 론은 간신히 테이프를 길게 잘라 냈지만 접착면이 서로 붙어 버렸다. 론은 할 수 없이 다시 테리프를 잘랐다. 공기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고 산소는 아까보다 더 희박해져 있었다. 이제 산소는 얼마 가지 않을 것이다. 론이 테이프 때문에 애를 쓰는데 로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칼을 찾아 가지고 왔다.
  론은 로자에게 미소를 지으며 칼로 테이프를 자른 다음 그걸 크리스의 입에 붙였다. 크리스는 코로 숨쉬기 시작했고, 숨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렸다.
  “됐어, 로자. 이제 가거라.”
  망설이는 로자의 눈빛에 근심이 가득했다.
  “저도 도울게요.”
  로자가 말했다.
  “밖에 나가서 기다리다가 크리스를 잡아끌어 올리렴.”
  로자는 공기를 들여 마신 다음 물 속으로 들어갔다. 론은 그녀가 물 위로 나갔을 즈음해서 크리스를 입구로 데려갔다. 그는 크리스를 선실 문을 거쳐 키가 있는 쪽으로 해서 물 위로 내보내야 했다. 조금만 헤엄치면 됐지만 크리스가 의식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론은 한 번에 끝내기 위해 크리스의 코를 빨래 집게로 집은 다음 자신도 여러 번 공기를 들여 마셨다. 크리스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려 숨을 쉬려고 버둥댔으나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이를 물 속으로 밀어 넣고 그 뒤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크리스의 몸은 계속 물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는 한손으로는 문틀을 잡고 다른 손으로 크리스의 티셔츠를 잡아당길 수 있었다. 론은 크리스의 머리가 문틀에 부딪히지 않도록 주위를 치우고 크리스의 몸을 낮추어 잡아 당겼다. 크리스는 처음에는 천천히 문가로 오더니. 점점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론은 문틀을 놓고 두 손으로 크리스를 밑으로 밀었다. 론이 너무 세게 미는 바람에 크리스의 몸이  입구에 끼었다. 론은 크리스가 움직일 수 있도록 방향을 바꾸려고 했다. 벽에 부딪히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 문틀에 크리스의 이마와 코가 부딪히면서 빨래 집게가 떨어져 나갔고, 크리스는 발작하기 시작했다.
  크리스는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미친듯이 뭔가 잡으려고 버둥댔다. 론은 아이를 진정시키려고 하다가 요동치는 아이의 발에 배를 걷어채였고, 폐에 남아 있던 공기가 터져 나왔다. 숨을 쉬려면 수면 위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시 선실로 내려가 오염된 공기나마 들여 마셨다. 크리스의 몸부림에 물살이 일렁였다. 공기가 더 필요했지만 그는 물 속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크리스의 몸은 아직도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아이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때 갑자기 크리스가 빠른 속도로 문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론은 놀랐지만 숨이 가빴기 때문에 물 위로 올라와 공기를 들여 마신 다음, 다시 잠수해서 크리스를 뒤쫓아갔다.
  밖으로 나온 론의 폐에 바다 내음이 들어찼다. 론은 카르멘이 로자와 함께 크리스를 배 위로 끌어올리는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론은 물 속에서 아들을 밀어 올린 뒤 조심스럽게 배 위로 올라왔다. 배는 해일의 영향으로 아직도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바람은 잔잔해져 있었다. 론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어두웠고 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로자는 크리스를 옆으로 끌어 당겼고, 카르멘이 크리스의 심장을 두 손으로 눌렀다. 잠시 후 크리스가 다리를 움직였다. 론의 몸에 안도감이 퍼져 나갔다. 아이가 의식을 되찾고 있었다.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이제 안심할 수 있었다. 그는 카르멘이 그녀의 구명 조끼를 벗어 크리스에게 입혀 주눈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론은 몸서리를 쳤지만 살아 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했다.
  ‘론은 잠시 후 배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숨을 멈춘 채 물건 상자를 열었다. 비상 식량과 물병이 상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는 물병 2개를 들어 한 병은 문 안쪽에 놓고, 다른 하나는 물 위로 끌어 올렸다.
  “여보, 이걸 받아. 좀 더 가져와야겠어.”
  론은 두 번째 물병을 쉽게 찾아 가지고 왔다.
  “론, 구명 보트는 있어요? 찾을 수 있겠어요?”
  구명보트는 선실 앞 뱃머리에 매달려 있었다. 보트에는 비상 장비와 차양이 갖추어져 있었다. 론은 망설였다. 아직도 보트가 배에 남아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앙트르프르네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잠시나마 배 위에서 안전하게 있지만 가조귿ㄹ을 위해 음식물과 물을 가져와야만 했다. 구명보트를 풀어내려면 물 속에서 거꾸로 매달려 작업을 해야 할 것이고, 잠수도 여러 번 해야 할 것이다. 선실로 가서 먼저 장비를 챙기기로 결정하과 론이 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카르멘이 그를 불렀다. 
  “론, 로자한테 줄 구명 조끼도 있어요?”
  론은 너무 부끄러웠다. 크리스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는 카르멘의 아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론은 다시 잠수했고 선실 안에서 물에 떠다니는 구명 조끼를 찾아들고 나왔다. 구명 조끼의 부력이 물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에 그는 몇번이나 밖에서 공기를 들여 마신 후에야 구명 조끼를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구명 조끼를 건네 받는 카르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론은 자신을 용서했다.
  기진맥진했지만 론은 구명 보트를 가지고 가기로 했다. 론은 숨을 들여 마신 다음 뱃머리 쪽으로 헤엄쳐 갔다. 구명 보트가 아직 배에 매달린 채 근처에 있었다. 보트는 아직 배에 매달려 있었지만 줄이 느슨해져 있었고, 고정 장치는 이미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는 보트의 특징을 잘 살핀 다음 물 위로 나왔다. 그는 완전히 지쳐 있었기 때문에 실수를 연발하고 있었다. 쉬지 않으면 더 이상 잠수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카르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론, 다시 해일이 밀려오고 있어요.”
  론은 있는 힘을 다해 배 고물로 가서 키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크리스는 고개를 떨군 채 앉아 있었고 카르멘과 로자는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파도가 밀려들었다. 처음 파도보다는 덜했지만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주위가 어두웠기 때문에 파도는 진한 초콜릿색으로 보였고 섬에서 날아 온 잡동사니들이 - 통째로 뽑힌 나무까지 - 파도에 섞여 날아왔다. 앙트르프네호가 파도에 밀려 위로 솟구치는 것 같더니 뒤집혔다. 그 순간 배에 뭔가 강하게 부딪치면서 선체가 심하게 흔들렸고, 잠시 후 배가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크리스의 몸이 미끄러지자 카르멘과 로자가 필사적으로 그의 구명 조끼를 잡았다.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배가 산산조각이 났다. 엄청난 힘이 선체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그들 위로 진흙과 나뭇잎과 다른 파편 덩어리들이 쏟아졌다. 거대한 힘이 다시 배를 뒤흔들었고, 론은 역류되는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론은 물살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갑자기 파도에 밀려 온 나무가 앙트르프르네호 위로 떨어지면서 배가 두 동강이가 났다. 배의 파편이 사방으로 날았다.
  론은 부서졌지만 아직 구명 보트를 달고 있는 앙트르프르네호로 헤엄쳐 갔다. 배는 아주 빠른 속도로 물에 가라앉고 있었다. 배를 부숴 버린 나무가 론과 구명 보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론은 물밑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물 속에 잠긴 나무에는 아직도 많은 가지들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론은 더 깊이 감수해야 했다. 배가 물에 잠기면서 다시 뒤집어졌기 때문에 론은 배 고물까지 쉽게 갔지만 배가 빠른 속도로 가라앉으면서 그도 물살에 빨려 들고 있었다. 그는 헐렁하게 풀여 있는 중에 매달려 고리를 풀었다. 구명 보트가 서서히 펴지고 있었다. 론은 능숙하게 팽창 고리를 잡아당겼고, 압축 공기가 보트 속으로 퍼졌다. 공기가 다 차자 보트는 수면 위로 불쑥 튀어 올라왔다. 론은 물 속에 드리워져 있는 줄을 잡으려고 했지만 손에 닿지 않았다. 겨우 줄을 잡은 그는 줄을 잡아 당겨 물 위로 올라왔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멀리 밀려와 있었다. 폐는 심하게 아팠고, 그는 이리저리 몸을버둥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보트를 물 위로 끌고 올라올 수 있었다.
  두려움이 가라앉자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카르멘이 아이들을 데리고 구명 보트 쪽으로 오고 있었다. 론은 탈진하여 물에 몸을 맡기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아직 거칠었고 파편들이 섞인 파도가 그의 얼굴을 쉴새없이 때렸다. 그는 몸을 돌려 보트 쪽으로 갔고 다른 식구들도 보트로 왔다.
  “로자가 다쳤어요, 론.”
  카르멘이 말했다.
  “로자를 보트에 올리려고 하는데 도와줘요.”
  론은 카르멘 옆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로자에게 헤엄쳐 갔다.
  “괜찮아? 어디를 다쳤니?”
  “허리요, 나무에 부딪힌 것 같아요.”
  8각형으로 된 보트는 공기로 부풀린 4개의 기둥이 차양을 받치고 있었다. 론은 카르멘이 그랬던 것처럼 로자를 보트 위로 조심스럽게 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결국 론은 로자를 거칠게 밀어 올려야만 했다. 통증을 참느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로자는 보트 안으로 털썩 나가떨어졌고, 그녀는 누운 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보트 끄트머리에 매달려 잠시 쉬고 있던 론을 카르멘이 끌어 올렸다. 론의 무게 때문에 보트가 밑으로 가라앉으면서 파편이 섞인 바닷물이 로자 위로 밀려 들어왔다. 카르멘이 론의 엉덩이를 잡고 그를 다시 끌어올렸다. 
  보트는 심하게 흔들렸지만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따금씩 파도가 보트 안으로 밀려 들어왔지만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한동안 그렇게 누워 있었다.
  15. 쿱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며 짙은 구름이 산을 뒤덮은 가운데 큰 나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야영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엑소더스 19장 16절
  오레곤주 칼튼 일요일, 오후 12시 30분 (태평양 표준시)
  경찰서장 빈센트 피터스는 코퍼 스킬렛에서 마운트 베수비어스를 먹고 있었다. 그 오믈렛에는 칠리 소스와 사우어 크림이 얹어져 있었다. 그는 오늘 저녁 이 오믈렛을 다 먹는데 몇 시간은 걸릴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쨋든 그건 나중 문제였고, 지금은 앞에 놓여 있는 음식을 즐기고 싶었다. 만약 쿱이 허락하기만 한다면. 예비역 장교인 스탠리 쿠퍼는 피터스 서장의 맞은편에 앉아 갓 파더스 스페셜을 먹고 있었다. 달걀은 스파게티 소스와 올리브, 소시지로 뒤덮여 있었다. “쿱”은 - 그는 그렇게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 웨이트리스가 통로 옆 테이블의 포크와 나이프를 정돈하느라 허리를 구부리자 잠깐동안 그 모습을 흘낏 쳐다보았다. 웨이트리스는 잠시 후 테이블 위의 팁을 집어들고 자리를 떠났다. 쿱이 그녀의 뒷모습에 계속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서장님, 내 말은 - ”
  쿱은 눈썹을 위 아래로 움직여 가며 말을 계속했다.
  “인구 증가 비율만큼 경찰을 증원하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우리 시는 규모에 비해 재정적으로 무능한 사람이 많은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 없겠죠. 어디 그것뿐입니까, 떠돌이들과 목적없이 사는 사람들 때문에도 골치를 앓고 있잖소. 바로 지난주에도 그런 사람들을 여섯 명이나 시 공원에서 내쫓았단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피터스 서장은 겉으로는 열심히 듣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쿱의 말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칼튼 정도의 도시에는 대규모의 경찰 병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쿱과 같은 예비역 장교들을 파트타임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서장에게는 그들이 필요했고, 그래서 가끔씩 그들에게 점심을 사거나 집에 초대해서 바베큐 파티를 열기도 하는 등 그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특히 쿱에게는 더욱 그랬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쿱은 전일 근무를 원했지만 피터스가 서장으로 있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쿱이 하는 일은 십중팔구 피터스를 짜증나게 했다. 예를 들면 쿱이 말하는 방식이 그랬다. ‘재정적 무능력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목적없이 사는 사람들’은 빈민가 주민들을 뜻했고, ‘떠돌이’들이란 그 도시에 살지 않으면서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쿱은 전에 지역 신문 편집장 앞으로 경찰서가 ‘재정적으로는 향상되었으나 수지상으로는 적자인 문제’와 ‘인원을 축소하는 것’에 불평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피터스는 쿱이 예산 삭감과 감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걸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이해했을지 궁금했다. 심지어 어떤 경찰관은 쿱이 연필을 가리켜 ‘손으로 잡고 의사를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휴대용 표현 기구’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하기까지 했다. 피터스는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그렇지만 쿱과 함께 있으면 그 이야기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서장, 인원을 늘리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요. 코앞에 닥쳤을 때 급히 결정을 내린다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요. 지금부터 생각해 두다가 때가 되면 그때 실행해야 합니다.”
  “쿱, 특별히 염두에 두신 분이라도 있어요?”
  “서장,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다른 예비역 장교들보다 훨씬 풍부한 경험이 있소. 나는 특수 훈련을 3군데에서 받았고, 특별 근무도 했었소. 타이핑도 그래서 배운 거 아니오. 대가를 바라고 이런 것들을 한 건 아니고, 그저 내 자격에 대해 설명하려는 것뿐이오.”
  쿱의 이력에 대한 설명은 식당을 뒤흔든 엄청난 소음에 중단되었다. 음식 접시가 카운터 뒤쪽 벽으로 날아갔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창문이 실하게 흔들렸고, 다른 손님들은 놀라 숨을 죽이고 있었다.
  “뭐지?”
  쿱이 희미한 웃음을 띄웠다.
  “공식 허가를 받지 않고 통과하는 비행기가 분명해.”
  만약 비행기라면 초음속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피터스 서장이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고, 쿱이 뒤를 따라 나왔다. 하늘은 맑았고 별만 반짝이고 있었다. 하늘에는 한 대의 비행기도 보이지 않았다. 쿱이 거리를 내려다보았지만 몇 집의 불빛이 여기 저기에서 꺼지는 것 외에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서장, 저기 좀 보시오.”
  피터스는 쿱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마을 서쪽 하늘에서 수백 미터 높이의 구름이 치솟고 있었다. 구름은 마치 바람에 밀려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피터스는 지금까지 이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뭔가 하늘을 들쑤시면서 광란의 상태로 몰아가고 있었다. 곧이어 번개가 번쩍이는가 싶더니 천둥소리가 들려 왔다. 그들은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무엇 때문에 저 작은 최후의 격렬한 전쟁이 일어난 것 같소, 서장?”
  피터스는 ‘최후의 격렬한 전쟁’이 쿱에게는 핵전쟁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핵전쟁은 아닌 것 같습니다.”
  피터스가 말했다.
  쿱의 얼굴에 실망한 빛이 역력히 떠오르고 있었다.
  16. 대통령
  훌륭한 지도자들은 자신의 경험 뿐 아니라 다른 사라들의 경험을 어느 정도로 잘 이용하느냐에 따라 그 능력이 가려진다. 그러나 경험하지 못했던 일에 직면하게 되면 그들은 놀라우리만치 급속도로 평범해진다. 
  칼 콤스탁, 정책결정자들
  워싱턴 D.C. 일요일, 오전 4시 37분 (서부 표준시)
  스코트 맥킨타이어 대통령은 비서실장이 깨우는 바람에 잠을 깼다. 대통령은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비서실장인 엘리자베스 호오손은 대통령이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자고 있는 대통령을 깨우지 않았다. 2명의 테러범이 뉴욕시에 폭탄 테러를 가하며 정치범 석방을 요구했을 때에도 그녀는 대통령을 깨우지 않고 최소한의 관계지만 대책 회의에 소집했었다. 러시아 전투기와 미국 추격기가 사우스 캐롤라이나 해안에서 충돌했을 때, 대통령은 엘리자베스가 이미 소집한 안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자다가 일어난 적이 있었다. 그런 전례로 볼 때 엘리자베스가 그를 깨웠다면 중대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서둘러 옷을 입었다.
  엘리자베스는 대통령의 국방 특별 자문역인 윈필드 대령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에 있었다. 대통령은 그들의 말끔한 얼굴과 잘 다려진 옷을 보고 놀랐다. 윈필드 대령의 제복은 새 옷처럼 주름 하나 없이 줄이 빳빳이 서 있었다. 관자놀이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은 잘 벗겨져 있었고거무스럼한 얼굴에도 깨끗이 면도한 흔적이 보였다. 엘리자베스 호오손 역시 단정한 차림이었다. 대통령은 어떻게 이런 한밤중에 그들이 깨어 있을 수 있는지, 또 이렇게 빨리 모일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최소한 엘리자베스는 나이에서 유리했다. 그녀는 아직 30대였지만 윈필드 대령은 50이 넘은 나이에 엘리자베스와 같은 재주를 부리고 있었다. 맥킨타이어는 대통령으로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몸을 꼿꼿이 세우고 방으로 들어갔다.
  모든 조명은 켜져 있었고 집무용 책상 위에도 독서용 등이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모든 전등이 켜져 있었지만 대통령의 눈에는 방안이 어두워 보였다. 창 밖의 어둠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은 잠시 새벽녘의 어둠과 저녁 무렵의 어둠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는 책상에 앉아 클립을 들고 그것을 구부리고 만지작거렸다. 클립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준비되었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말을 꺼냈다.
  “사고가 발생했는데... 아주 이상합니다.”
  그것이 그녀가 말한 전부였다. 대통령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 호오손이 난처해서 말을 못하는 건가? 그녀와 윈필드 대령이 시선을 교환했지만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무슨 일이요?”
  대통령이 물었다.
  “러시아가 발트해 연안 국가들이라도 침공했소? 그럼, 캘리포니아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라도 한 거요? 아니면 내가 탄핵이라도 받은 거요?”
  “국토의 일부가... 일부에서 통신이 두절되거나 정전이 됐고, 또 사라져 버렸습니다.”
  엘리자베스가 이윽고 말했다.
  “사라졌다고? 누가 사라졌단 말이오?”
  “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사람이 없어진 차원이 아니라, 각하, 뉴욕의 상당 부분이 없어졌습니다.”
  대통령은 당황했다.
  “사라졌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오? 황폐해졌다던가, 증발되었다, 홍수가 났다라는 말은 알겠는데 ‘사라져 버렸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각하, 도로와 건물, 자동차, 그리고 사람들이 있던 곳에 이제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아무 것도 없다구?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니.”
  “각하, 호오손 실장은 도시가 있던 자리에 이제는 수풀이 생겼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윈필드 대통령이 끼여들었다.
  대통령은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그는 그들이 농담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았지만 엘리자베스는 유머 감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대통령은 지금까지 그녀가 예의바르게 웃는 것 외에는 어떤 느낌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장난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도시는 사라질 수 없으며,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소... 뉴욕 시의 일부가 없다니, 초원으로 변했다고 했소?”
  “예, 각하.”
  윈필드 대통령이 대답했다.
  “남아 있는 지역에는 전기가 끊겼습니다. 비공식 보고이기는 하지만 신빙성이 높은 것 같습니다. 케네디 국제 공항으로 오던 비행기들이 회항하고 있고, 현재까지 한 대의 비행기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케네디 국제 공항은 없습니다. 그 사실은 이미 정찰 비행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대통령은 윈필드 대령이 말한 내용을 골똘히 생각했다. 클립을 움직이는 손놀림이 조금씩 느려지더니 마침내 멈췄다. 엘리자베스와 윈필드 대령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대통령을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대통령은 천천히, 그러나 아주 꼼꼼히 클립을 만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클립을 돌리는 움직임이 빨라졌고 대통령이 고개를 들었다.
  “내게 ‘국토의 일부’와 ‘실종된 것들’에 대해 보고한 거죠. 복수형이었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엘리자베스가 대통령의 책상으로 걸어왔다.
  “각하, 다른 주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행했다는 보고가 올라와 있습니다. 정정, 폭풍, 굉음, 그리고 도로나 마을 전체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등의 내용입니다. 그런 현상이 어떻게 확산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국지적인 사건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윈필드 대령, 가능한 많은 지역으로 수색팀을 파견해 직접 확인하고, 위성 정찰도 하시오. 이 문제는 내가 직접 챙기겠소. 만약 비상 경계령이 발동되지 않았다면 즉시 발동시키시오, 참모 회의에서 전체적으로 보고 받겠소.”
  윈필드 대령은 지시를 받고 집무실을 나갔다. 엘리자베스도 나가려는데 대통령이 그녀를 불렀다.
  “엘리자베스, 아내의 일정표를 잃어 버렸어.”
  “영부인께서는 애틀란타에 계십니다, 각하. 애틀란타에 대해서는 보고된 내용이 없습니다.”
  “고맙소.”
  엘리자베스가 떠난 뒤에도 대통령은 어두운 창 밖을 바라보며 클립을 계속 돌리고 있었다.
  17. 과학 담당 자문역
  내가 싱가포르에 도착한 날 아침, 하늘에서 물고기가 떨어져 길을 가득 메웠다. 물고기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자 중국인들과 말레이인들이 물고기를 주워 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구니가 넘칠 정도로 물고기를 가득 담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주 이상한 나라에서의 이상한 시작이었다.
  프랑소와 드 카스텔노, 1861년 2월 16일
  워싱턴 D.C. 일요일, 오전 5시 13분 (서부 표준시)
  닉 폴슨의 귓가에서 전화 벨이 울려 대고 있었다. 피로로 머리는 거의 마비되어 있었지만 그는 눈을 뜨고 시계를 보려고 애썼다. 한참동안 숫자들이 흐릿하게 보였는데 5시 13분처럼 보였다. 숫자판 중에 구석의 입자판 두 개에 심한 때가 끼어 있어 읽기가 쉽지 않았지만 오전을 나타내는 A.M. 글자가 선명히 보였다. 다시 전화가 울렸고, 닉은 잠깐동안 따르릉 거리며 울리던 옛날의 전화 소리를 그리워했다. 따르릉 소리는 사람들의 잠을 확실하게 깨웠고, 활력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이 삑삑대는 소리는 곤히 자는 사람을 제대로 깨우지 못했다.
  닉은 수화기를 겨우 잡아들었지만 반대편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대통령 비서실장인 엘리자베스 호오손이라는 것을 알았다.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는 낭랑하게 들렸다.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다시 한 번 이야기해 주세요. 겨우 두어 시간밖에 자지 못했어요.” 
  “비상 국가 안보 회의가 오늘 아침 7시에 열리는데 당신도 그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가능한 빨리 와서 우리가 입수한 자료들을 살펴보면 아마 도움이 될 거에요. 대통령께서는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어하세요.”
  닉은 자신이 엘리자베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 확신하지 못했다. 닉은 한 번도 안보 회의에 참석한 적이 없었고, 더욱이 고학 자문역이 필요한 긴급 사태는 더욱더 상상할 수 없었다. 비상 사태에는 일반적으로 두 종류의 사람들이 필요했다. 협상을 할 사람들과 사람을 죽여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닉은 자신이 그 두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지금 비상 사태의 성격에 대해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전화로는 안돼요. 폴슨 박사, 한 시간 내에 이쪽으로 오세요.”
  엘리자베스가 전화를 끊었다. 그녀에게 인사 따위는 불필요했다.
  그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깨달았다.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건 오직 두 가지뿐이었다.  -섹스와 두려움. 캐시가 2개월 전 그를 떠난 이후로 그에게는 두려움만이 남아 있었다.
  20분 후 그는 자신의 볼보 자동차를 텅 빈 거리로 몰고 나왔다. 비는 그쳤고 도로는 물기로 반짝거렸다. 닉은 차를 몰며 전기 면도기로 수염을 깎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성긴 머리를 빗어 넘겼다. 그는 안보 회의가 왜 소집되는지 단서가 될 만한 소식을 듣기 위해 라디오를 켰다. 하지만 FM에서는 음악만 흘러 나왔고, AM에서 겨우 약간의 뉴스를 들을 수 있었다.
  “빌, 뉴욕 시민들은 이번 정전 사태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과거의 경험에 미루어 볼 때 일부 시민들이 이런 불의의 사태를 악용하기도 하지만 현재까지 약탈 소식은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정부가 - ”
  닉은 주파수를 바꾸었다.
  회의는 뉴욕의 상황과 관련된 건 아닐까, 하지만 정전은 안보 회의가 소집될 만큼 긴박한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 정전이 테러 행위에 의해 촉발된 거라면 회의를 소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왜 과학 자문역이 필요하지? 핵공격은 분명 아닐 것이다. 닉은 핵응전 팀에 속해 있지 않았다. 게다가 핵폭발이라면 지금쯤 뉴스에 보도되었을 것이다. 닉은 이리저리 다이얼을 돌리다가 토크쇼 방송에 다이얼을 고정시켰다.
  “진, 내가 직접 본 걸 말하는 거에요, 도로는 사라져 버렸고 나무도 없어졌어요. 오래된 양초 공장도 없어졌고, 모든 것이 사라졌어요. 사라져 버렸다구요! 듣고 있어요?”
  “켄... 켄, 잘 들려요. 하지만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요? 당신은 나와... 내 방송의 청취자들에게... 당신이 잠깐 뒤를 돌아봤더니, 아주 잠깐 동안, 모든 것이 눈에 뒤덮였다는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켄, 그렇게 빨리 눈이 쌓일 수는 없어요.”
  “눈이 내린 게 아니에요.”
  “켄, 마저 말할게요... 갑자기. 아무런 경고도 없이, 섭씨 15도를 기록한 밤에 5미터, 아니 6미터의 눈이 내렸다니... 공장을 뒤덮을 정도로요? 믿을 수 없군요, 켄. 약 처방을 새로 받으러 가야겠군요.”
  “그럼, 밖에 나와 보지 그래요, 그럼 내가 그 상상의 눈을 뭉쳐 던져 보일 테니 -”
  닉은 전화가 끊어진 것이 아쉬웠다. 전화를 건 그 남자는 닉이 항상 토크쇼 진행자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말하려고 했다.
  “장난하는 건가요, 켄. 이런 멍청이 같으니. 이제 오레곤주 칼튼 시의 쿱을 3번 전화로 연결합니다. 쿱, 말씀하세요. 당신은 지금 나이트 토크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진, 있을 것 같지 않은, 정말 알 수 없는 일을 당신에게 말해 주겠소. 몇 시간 전에 포틀랜드 방향에서 초음속의 진동이 있었소. 나는 방금 순찰을 돌고 오는 길이오.”
  “그래, 순찰에서 뭘 발견하셨나요?”
  “포틀랜드를 보지 못했소?” 
  “포틀랜드를 보지 못했다구요? 좋은 구경거리를 놓치셨군요. 쿱, 그 대도시를 보았더라면 두 번 다시 시골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을 거에요.”
  “나는 농장을 경영하는 사람이 아니오, 그리고 포틀랜드를 안 가본 것도 아니오. 포틀랜드가 있던 곳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고 단지 숲만 있어요.”
  “쿱, 칼튼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술을 마시죠. 내가 얼마나 더 말을 해야 하는 겁니까?”
  닉은 방금 들은 이야기를 믿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라디오에 전화를 해서 도시가 사라졌다고 이야기하는데 진지하게 들렸다. 도시가 사라졌다는 발상 자체도 이상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의 말하는 태도가 더 이상했다. 예를 들자면 그 남자는 절망하거나 당황한 것 같지도 않았고 슬퍼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신나해 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로 들끓는 도시가 사라졌다면 그건 틀림없이 엄청난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아주 열광하고 있었다.
  “나는 근무 중에는 술을 마시지 않소, 진. 그리고 나는 이 비상 사태가 종결될 때까지 근무를 계속 하게 될 거요. 나는 예비역 경찰로서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소.”
  “저도 경찰관 자리를 하나 예약해 두어야겠군요.”
  “진, 그게 전부가 아니오. 안경을 쓰고 보니 공룡이 있었소.”
  “공룡이라구요? 멸종되어 수백만 년 동안 이 땅에 존재하지 않던 그 공룡을 말하는 건가요?”
  “그럼 도대체 뭐겠소? 내가 본 것이 공룡이 아니라면 3미터나 되는 도마뱀이었을 거요. 난 이제다시 돌아가 이 지역을 침범한 도마뱀을 잡을 수 있을지 알아봐야겠소.”
  “쿱, 그러는게 좋겠어요. 그리고 다시 전화해서 당신이 도마뱀을 제대로 잡았는지 알려주는 걸 잊지 마세요. 그동안 나는 청취자들에게 사라진 도시를 찾아보라고 할 테니까요.”
  전화가 끊겼고 진행자는 말했다.
  “밥, 이제 전화를 골라서 받아야겠어. 오늘 보름달이 떴거나, 뭐 다른 일이 있나?”
  그런 다음 진은 아이오와주 수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진, 당신의 충고가 필요해요.”
 전화를 건 사람은 술에 취해 있었다.
  “수에 사는 양반께서는 도대체 어떤 충고가 필요합니까?” 
  “당신이 내게 마누라를 없애 버리라고 했었죠. 우리는 문제가 있었어요... 그녀는 나를 속이고 있었다구요. 당신은 나보고 마누라의 물건을 집 밖으로 던져 버리라고 했어요. 마누라다ㅗ 함께 던져 버리구요.”
  “그래요, 기억나요. 수에 사는 양반,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여편네가 농장을 가지고 갔어요.”
  “농사 도구를 말하는 건가요?”
  “아니, 제기랄, 농장 전체를 다 가져가 버렸다구.”
  “발음을 제대로 해봐요, 수에 사는 양반.”
  “부부 싸움을 대판 하고 나서 나는 밖으로 나와 트럭을 타고 맥주를 사러 나갔어요. 내가 길을 반 정도 내려갔을 때 엄청난 굉음이 들리더니 도로가 갈라졌소. 그때 소리가 너무 커서 지금도 귀가 잘 들리지 않아요.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소.”
  “당신에게는 오레곤주에 살고 있는 친척이 없을 것 같은데, 맞아요?”
  “내게는 아무도 없고, 어디고 갈 데도 없소.”
  “자, 이제는 뉴스를 들을 시간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최근에 사라진 도시와 종장들과 함께 마이크를 진 젠킨스에게 넘기겠습니다. 뉴스가 끝난 후에는 비행 접시나 낙태같은 일반적인 이야기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공룡 이야기는 절대 안돼요. 저는 진 다이아몬드였습니다. 여러분은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이트 토크를 듣고 계십니다.”
  닉은 계속 다이얼을 돌렸으나 뉴욕이 정전 상태에 있다는 것 외에는 다른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백악관의 경비 태세를 보고 닉은 사태가 얼마나 심가한지 알았다. 정문 입구에는 정보 요원들과 제복을 입은 해군들이 한께 경비를 서고 있었다. 닉이 세 번째로 신분 확인을 하고 있을 때 엘리자베스가 나타나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엘리자베스에게는 아무도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지 않았다.
  “자료는 내 책상 위에 있어요. 내 사무실을 쓰도록 하세요.”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죠?”
  “보고서를 읽어보세요. 나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해요. 닉, 고어 박사가 이 회의에 참석한다는 것을 미리 아는 게 좋겠어요.”
  닉은 그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아놀드 고어는 대통령에 의해 초대 과학 자문역으로 일했던 사람이다. 그는 자문역으로 2년간 일했었다. 대통령과 고어는 미시간 주립대학 교수 시절부터 친구였었다. 그건 아주 이상한 형태의 우정이었다. 고어는 물리학자였고 맥킨타이어는 정치학자였다. 그들은 정치적인 신념이 같았다. 맥킨타이어가 주 의회에 진출하기 위해 학교를 떠났을 때 고어는 학교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에서 벗어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민주당이 분열되었을 때 맥킨타이어는 새로 창단을 하면서 신민주당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가 상원에 출마했을 때 고어는 학교를 떠나 선거 운동을 도왔다. 맥킨타이어가 신민주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고어는 성공적으로 치러진 선거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런 그가 놀랍게도 대통령 비서실장 자리를 고사했다. 그 자리는 엘리자베스 호오손에게 돌아갔다. 대신 그는 과학 담당 자문역을 원했고 그것이 그에 대한 인상을 바꾸어 놓았다. 
  만약 어린 소녀들과 섹스 스캔들만 없었더라면 그는 아직도 과학 자문역으로 있었을 것이다. 거오는 감옥에 가지 않는 다는 조건하에 유죄를 인정했고 과학 담당자문역은 닉의 차지가 되었다. 
  닉은 과학을 대중화시킨 것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은하수의 비밀, 해양 탐사, 동물의 세계 등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만든 프로그램이 TV에서 방송된 후 그의 명성은 높아졌다. 닉의 성공은 그를 대중들 뿐 아니라 정치인들에게도 알려지게 했지만 과학자로서의 명성은 타격을 입었다. 그는 더 이상 이론가가 아니었으며 그는 무명 잡지에 글을 발표하지도 않았다. 그는 더 이상 보조금을 타내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의 첫사랑을 추구할 수 있었고-모든 과학이 그의 첫사랑이었다. 그는 그러한 거래를 후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TV 특집 프로그램에 나가거나 죄담회에 참석하며 대통령과 과학 사이의 연결 고리 노릇을 하고 있었다.
  닉은 고어가 참석한다고 해서 자신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어는 영부인이 자리에 없는 지금 대통령의 정신적인 지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닉은 엘리자베스가 문가에 자리잡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얼굴이 못생겼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매우 부드러워 보였고, 피부는 완벽했다. 볼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그녀의 미소는 눈부셨고, 그녀의 미모는 가까이 다가가고 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것에 무관심해 보였다. 그녀는 무색 무취의 일산화탄소 같았다. 닉은 그녀가 아주 따분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말한 대로 책상 위에 서류들이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철 집게 외에 거의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서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첫 번째 보고서는 뉴욕에 대한 것이었다. 닉은 그 서류를 전에 본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정전 사태에 대한 내용이 아니었다. 뉴욕시의 일부가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닉은 토크쇼에서 들은 내용들을 생각하느라 서류를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전화를 건 세 사람은 뭔가 사라졌다고 말했었다. 포틀랜드, 오레곤, 그리고 아이오와의 농장에서 전화가 걸려 왔었는데 첫 번째 통화자가 뭐라고 했었지? 양초 공장이 눈에 파무혔다고 했던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닉은 빠른 속도로 보고서를 넘겼다. 보고서에는 포틀랜드나 아이오와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정전과 산사태, 그리고 다리 붕괴 등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그 사건들은 거의 동부 해안과 중서부 지방에서 일어난 것들이었다. 보고서를 읽어 가는 도중 닉은 구식 전화기가 따르릉 거리는 듯한 환청을 들었다.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는 이번에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었다.  
  18. 초원
  현재 느끼는 놀라움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느낄 놀라움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시대가 도래하는 날,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분명히 알게 되리라.
  조라스트러스, 바빌론의 예언자
  뉴욕시 일요일, 오전 7시 7분 (서부 표준시)
  그것은 초원을 가로질러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네 발로 걸으며 가끔씩 수풀 속에서 뭔가 집어먹고 있었다. 동물은 빨리 가는 것 보다는 먹는 것에 관심이 많은 듯 유유히 풀을 뜯고 있었다. 마리엘은 동물이 풀을 뜯으며 창문 쪽으로 오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흥분했다. 짐승은 덩치가 엄청나게 컸다. 처음에 그녀는 짐승이 코끼리 정도밖에 안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코끼리보다 훨씬 컸다. 엄청나게 큰 동물이었다.
  새로운 흥분에 휩싸인 마리엘은 그것이 공룡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두려웠다. 아파트를 쳐다보는 공룡의 입에 풀이 물려 있었다. 마리엘은 동물의 눈을 보고 공룡이 총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엘이 공룡의 풀 뜯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사라져 버리라고 소리쳤지만 소리는 더 커지고 있었다. 마리엘이 문을 열어 보니 루이스와 멜린다가 다섯 아이를 데리고 서 있었다. 
  “위더비 부인, 이제 가셔야 돼요. 저희는 떠날 겁니다. 같이 가세요.”
  “루이스, 이미 말했잖아요.”
  “위더비 부인, 창밖에 뭐가 있는지 보셨어요?”
  “알아요, 루이스. 나도 밖에 뭐가 있는지 알아요. 그래서 더 갈 수 없는 거에요.”
  멜린다가 안으로 들어와 애원했다.
  “위더비 부인, 여기 계시면 위험해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건물이 없어지기 전에 떠나셔야 돼요. 다른 사람들도 모두 떠나고 있어요. 캐플란씨 가족도, 그레코씨 가족도 가고 없어요. 모레 노씨도 한 시간 전에 떠났구요.”
  “맥그리거네도 떠났어요?.”
  “모르겠어요.”
  멜린다가 대답했다.
  마리엘은 아파트에 혼자 남아 있고 싶지는 않았다. 만일 아파트가 비어 있는 걸 안다면 강도들이 들어올 것이다.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마리엘은 그냥 남아 있기로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이렇게 살아 있는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멜린다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저건 공룡이에요, 부인. 부인을 해칠 수도 있어요.”
  “멜린다. 저 동물은 풀만 먹어요.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나는 괜찮을 거에요.” 
  루이스가 다시 마리엘을 설득하려 했지만 멜린다가 가로막았다.
  “여보, 아이들을 생각해 봐요. 우리는 여기에서 나가야 돼요.”
  루이스는 고개를 숙였고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가겠습니다, 부인. 아이들을 돌봐야 하니까요.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부인을 모시러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루이스, 정말이지 나는 괜찮아요.”
  “다시 오겠습니다.”
  마리엘은 이바리스 가족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는 건물 내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는 않는지 귀를 기울였다. 아파트는 비어 있는 것 같았고 낯설게 느껴졌다.
  마리엘은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창가로 갔다.
  “집을 떠나라고? 고마운 말이기는 하지만 억지로 끌어내기 전까지는 절대 안가.”
  마리엘은 보고 공룡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지만 그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공룡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키가 아래층에 살고 있는 맥그리거네 집 창문에 닿을 정도였다. 공룡은 거대한 두 뒷다리를 걷고 있었는데 세 갈래로 갈라진 발가락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달려 있었다. 매우 강해 보이는 앞발은 인간의 손과 아주 비슷하게 다섯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엄지발가락 끝에는 날카로운 꼬챙이처럼 생긴 발톱이 달려 있었다. 두껍고 질려 보이는 가죽에는 갈색과 초록색 반점이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공룡의 어깨는 딱 벌어져 있었고, 두틈한 목은 머리로 올라갈수록 좁아져 턱 부근은 아주 가늘었다. 어둡고 움푹 파인 눈은 깜빡거리고 있었고, 코끝에는 콧구멍 두 개가 나 있었다.   
  이건 어떤 종류의 공룡일까? 마리엘은 궁금했다. 그 순간 아직 책이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공룡이 풀을 뜯고 있는 걸 확인한 다음 그녀는 손전등을 들고 창고로 쓰는 방으로 갔다. 벽장에는 아이들이 어릴 때 쓰던 오래된 장난감과 책이 들어 있었다. 가끔씩 집에 오는 손자들이 그 장난감들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는 어른이 된 자신의 아이들이 팽이를 돌리고 블록으로 집을 지으며 놀던 때를 회상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손자들도 다 자랐고 자주 오지도 않았다. 장난감을 옆으로 치우고 책 더미를 해치는 마리엘의 가슴에 슬픔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구석에 놓인 책 더미의 맨 밑에서 《아이들을 위한 공룡 백과》를 찾아냈다. 책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그녀는 공룡이 가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책을 찾느라 힘이 들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밖을 보니 공룡은 계속 풀을 뜯으며 가까이 오고 있었다. 공룡은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리엘은 그 공룡이 어떤 종인지 알기 위해 책을 뒤적였다. 그녀는 뿔이 세 개 달린 트리케라톱스, 목이 긴 아파토사우루스와 두꺼운 갑옷같은 것을 두른 스테고사우루스 그림을 보았다. 하지만 어느 것도 창 밖의 공룡과 비슷하지 않았다. 마리엘은 알로사우루스 그림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알로사우루스는 두 다리로 걷고 있었지만 머리가 그녀의 공룡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알로사우루스에게는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엄지발가락이 없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머리는 아주 컸지만 앞발은 무척 작은데다가 주름까지 쭈글쭈글하게 져 있었기 때문에 마리엘은 그것도 자신이 찾는 공룡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알로사우루스와 타라노사우루스는 길고 뾰족한 이빨을 가지고 있었다. 마리엘의 공룡에게는 그런 이빨이 없었다.
  그녀는 책을 뒤적이면서도 가끔씩 밖을 내다보았다. 다시 책에 눈을 돌렸을 때 그녀는 이구아노돈 그림을 발견했고, 바로 그것이 그녀의 공룡이라는 걸 알았다. 이구아노돈의 무딘 이빨에 대한 설명을 읽은 그녀는 혼자 웃었다.
  “그래, 알고 있었어. 네가 채식주의자라는 걸 벌써 알고 있었어.”
  마리엘은 의자에 앉아 공룡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다. 아파트의 다른 사람들은 공룡이 무서워 모두 떠나 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남아 있었고 이렇게 즐거운 일까지 생긴 게 아닌가! 이구아노돈이라. 공룡 이름치고는 멋있는 이름이었다.
  이구아노돈은 계속 풀을 먹으며 마리엘에게 다가왔는데 건물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녀는 공룡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더 두껍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악어 가죽을 보는 것 같았다. 뒷다리로 일어서는 공룡의 키가 5미터도 넘는 것 같았다.
  오전 늦게 마리엘은 잠시 쉬었다. 그녀는 여태껏 음식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있었다. 같이 식사할 사람이 없으면 식욕도 감소한다. 마리엘은 머핀에 버터를 바르며 전자 렌지가 고장나지 않았기를 빌었다. 부엌 창문은 너무 작아 공룡을 잘 볼 수 없었지만 마리엘은 계속 밖을 내다보았다. 쟁반에 머핀과 주스를 담던 그녀는 눈앞의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사라졌던 도시가 다시 되돌아와 있었다. 
  마리엘은 싱크대에 기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도시는 희미하기는 했지만 다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안경을 닦고 다시 보았지만 도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왜 저렇게 희미하지? 다음 순간 마리엘은 이구아노돈을 기억해내고 서둘러 거실로 돌아와 얼른 창 밖을 살폈다. 공룡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마리엘은 공룡 뒤편을 바라보았다. 도시는 돌아와 있었지만 매우 흐리게 보였고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는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아파트를 강타하던 순간부터 모든 걸 이해하려고 애썼다. 마리엘은 이구아노돈이 아직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공룡은 마지막 풀밭을 건너와서는 맥그리거네 집 창문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기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아주 못생긴 동시에 너무 아름다웠다. 그녀는 공룡이 겁벅지 않도록 창에서 물러나 구석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공룡은 머리를 위아래로 치켜들더니 꽃을 뽑아 한입 가득 물었다. 마리엘은 형형색색의 식사를 즐기고 있는 그 모습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졌다. 공룡은 그녀의 꽃밭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꽃들은 벌써 반이나 없어져 버렸다. 화가 난 그녀는 밖을 향해 소리질렀다.
  “내 정원에서 나가! 얼른 수풀로 돌아가지 못해.”
  이구아노돈은 그 큰 머리를 들더니 돌려 마리엘을 바라보았다. 영리해 보이는 눈동자에는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오직 호기심만 어려 있었다. 마리엘이 다시 소리쳤지만 공룡은 마리엘을 무시한 채 다시 정원을 파헤쳤다. 마리엘은 창가에서 물러나 공룡에게 던질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추억이 서린 귀중한 물건들을 어느 하나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베개를 집어 공룡에게 던졌다. 베개는 곧장 날아가 공룡의 머리를 맞추고 땅에 떨어졌다. 공룡은 피하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코로 베개를 슬쩍 밀어보고는 몸을 돌렸다.
  마리엘은 점점 더 화가 났다. 그녀는 아끼는 베개를 하나 잃어버렸는데 공룡은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좀 더 무거운 물건을 찾기로 했다. 마리엘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찾기 위해 아파트 안을 둘러보았다. 부엌에서 그녀는 주철로 만들어진 후라이팬은 찾았지만 곧 내려놓았다. 그녀는 공룡을 다치게 하려는 게 아니라 단지 다른 자리로 옮기고 깊을 뿐이었다. 그래서 통조림 캔도 포기했다. 마침내 마리엘은 식료품 저장실에서 2.5킬로그램 짜리 밀가루 부대를 찾아서 창가로 가져왔다. 그런 다음 그녀는 설탕 봉지를 가지러 다시 저장실로 갔다. 밑을 내려다보니 이구아노돈은 아직도 마리엘의 정원을 파헤치고 있었다. 마리엘은 밀가루 부대를 양손에 들고 공룡에게던졌다. 이번에는 공룡이 놀란 것 같았다. 밀가루 부대가 공룡의 머리를 맞추고 찢어지면서 공룡은 밀가루를 하앟게 뒤집어썼다. 공룡은 가만히 서서 밀가루가 날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마리엘은 밀가루를 뒤집어쓴 공룡이 머리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다가 뒷다리로 일어섰어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공룡이 입을 벌리고 쉿쉿 소리를 내고서야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 그 소리는 마치 거대한 뱀이 내는 소리 같았고, 그녀는 뱀을 무척 싫어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설탕 봉지를 집어들었다. 공룡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쳐들었고 벌린 입속에서 어금니가 번득였다. 공룡이 다시소리를 질렀고 마리엘은 창 밖으로 설탕을 던졌다. 설탕 봉지는 입을 크게 벌기고 있던 공룡의 입안으로 떨어져 혀에 맞았다. 설탕은 혀 위에서 녹아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갔다. 갑자기 공룡은 머리를 홱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 공룡의 눈에 나타난 놀라움을 본 마리엘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 놀란다면 지능이 높다는 걸 말해 주는 거야.  
  공룡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입맛을 다셨다. 공룡은 혀를 날름거렸다. 공룡은 땅에 떨어진 베개의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들어 마리엘 쪽을 향해 코를 킁킁대기 시작했다. 공룡은 입을 벌리고 또 다시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공룡은 설탕을 더 먹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공룡이 내는 소리는 마치 ‘아아 -아’하는 것처럼 들렸다. 너무 귀여웠다. 마리엘은 식품 저장실로 가서 어제 과자를 구우면서 뜯어 놓은 설탕 봉지를 찾아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공룡은 마리엘을 보자마자 입을 크게 벌리고 ‘아아 -아’하며 울었다. 마리엘은 봉지를 들어 공룡의 입안에 설탕을 털어 넣었다. 설탕을 삼킨 공룡이 잠시 후 입맛을 다셨다. 공룡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소리르 질렀다.
  “아니, 내가 뭘 한 거지?”
  마리엘이 혼잣말을 했다.
  “네가 단 걸 좋아할 줄은 생각도 못했단다.”
  마리엘은 뭘 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공룡에게 계속 설탕을 줄 수 없었고, 그렇다고 공룡이 떠나가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녀가 다른 설탕 봉지를 가지러 가려고 하는데 엄청난 진동음이 공중에서 들려 왔다. 공룡이 소리를 향해 몸을 돌리는 바람에 꼬리가 아파트를 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아파트가 흔들렸다. 다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총성이 울렸다.
  이구아노돈은 소리가 난 수풀 쪽으로 달려갔다. 다시 시그러운 소리가 들렸다.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마리엘이 왼쪽을 바라보니 멀리서 다른 공룡 한 마리가 네 발로 뛰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마리엘은 그 공룡을 뚜렷하게 볼 수 없었다. 이구아노돈은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마리엘은 다시 슬픔과 외로움을 맛보게 되었다.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던 그녀의 삶이 새로운 흥분으로 채워지나 싶었는데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녀는 흔들의자를 천천히 움직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공룡이 설탕을 간절히 원했던 것처럼 자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라디오를 켠 다음 뜨개질 거리를 집어들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이구아노돈은 설탕 맛을 기억하고 단 것이 먹고 싶어지면 다시 그녀에게 돌아올 것이고, 그녀는 계속 그곳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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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국가 안보 회의
  만약 하늘에서 뭔가 떨어지는 기이한 현상들 가운데에서 공통점을 찾는다면 그 당시 전력이 끊긴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전문가들도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콘스탄스 존스, 포티올로자와 현대
  워싱턴 D.C 일요일, 오전 7시 50분 (서부 표준시)
  국가 안보 회의는 화려한 장식의 조명이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백악관 지하 상황실에서 열렸다. 닉이 전에 상황실에 왔을 때는 이렇게 모든 불이 켜 있지 않았었다. 탁자 위에는 커피와 도너츠, 그리고 오렌지 주스가 놓여 있었다. 오렌지 주스에는 아무도 손대지 않았으나 커피포트는 벌써 두 번째 채워지고 있었다. 닉도 커피를 집어들었다. 
  엘리자베스의 자리는 대통령 바로 옆이었지만 회의 도중 대통령에게 귓속말을 할 수 있도록 약간 뒤로 의자가 밀려나 있었다. 닉에게는 정해진 자리가 없었고, 엘리자베스는 그에게 장방형 회의 탁자의 끝부분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회의가 시작되려는 순간 고어 박사가 들어왔다. 그는 조금 전 닉이 엘리자베스에게 받은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고어 박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 앉은 뒤 바로 수첩에 뭔가 적기 시작했다. 닉은 고어 박사의 자리가 자신보다 대통령과 가깝다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이번 일은 성격상 군 비상 사태이기도 했기 때문에 CIA, NSA(미 국가 안전 보장 기구:옮긴이)와 군 첩보부의 보고서가 첫 번째 의제로 다루어졌다. 닉은 마지막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전 군에 비상 경계령이 내려진 가운데 SAC(미국 전략 공군 사령부:옮긴이)소속 전투기가 비행 항로를 점검하고 공중 정찰을 수행 중이라는 보고가 있었고, 대통령은 보고서를 자세히 읽었다. 정보 기관의 여러 보고서는 미국 군사력에 대한 평가와 동원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목전의 관심은 ELF(초저주파:옮긴이)의 손실에 쏠려 있었다. ELF는 초저주파 송신 시스템을 구성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송신선으로서 핵 탑재 잠수함과 군 수뇌부간의 연락을 가능케 했다. 이 시스템이 손상되었다는 것은 적의 공격에 대응하는 방어 능력이 취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했고, 위성을 이용해 통신하려면 잠수함이 물 위로 부상해야먄 했다. ELF 시스템의 손실은 30퍼센트 정도인 것으로 추정, 보고됐는데 농촌이나 숲이 있었던 곳과 툰드라가 있던 지역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ELF 시스템도 같이 파괴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은 지형의 엄청난 변화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고, 단지 통신망의 손실에 대해서만 주목했다.
  드넓은 토지가 사라진 자리에 다른 지형들이 들어섰고, 심한 경우 기후까지 바뀌기도 했다는 보고가 전국에서 빗발치고 있었다. 닉은 뉴욕시의 일부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초원이 생겼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또 다른 보고에 의하면 아이오와주에는 거대한 빙하가 생겼고, 조지아주에는 밀림이, 오하이오주에는 사막이 생겼다는 것이다. 세인트루이스 서부와 다른 지역에는 엄청난 홍수가 일어났다. 홍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닉에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고, 그는 생각에 잠겨 진행 중인 회의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닙니다, 각하. 시스템이 손상됐다는 일부 보고가 있기는 하지만 피해 규모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지형이 바뀌어도 ELF선은 유지될 수 있습니다만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가동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즉시 시스템 상태를 조사할 팀을 구성하겠습니다.”
  엘리자베스가 몸을 앞으로 내밀고 대통령의 귀에 뭔가 솟삭였고, 대통령이 물었다.
  “대령, 언제쯤 조사 보고서가 완성되겠나? 날짜를 비서실장에게 알려주게.”
  대통령은 손가락에 클립을 끼워 빙빙 돌리다가 다음 의제를 찾느라 잠시 손놀림을 멈췄다. 그가 채 찾기도 전에 엘리자베스가 의제를 가리켰다. 대통령은 엘리자베스의 노골적인 참견에 그슬려 하는 것 같지 않았다.
  CIA 국장이 다음 순서였다. 새무얼 캐넌 역시 대통령의 오랜 친구였다. 그는 국장 인준 청문회에서 호된 시련을 겪었었다. 국회는 자동차 회사의 전 회장을 CIA 국장으로 임명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하지만 대통령은 능력에 상관없이 그를 CIA 국장으로 밀어 붙였다.
  “샘, 당신 말은 그 사건들이 우리의 군사 시설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무작위적으로 발생했다는 거군요. 민간 시설과 군사 시설이 동시에 파괴됐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각하.”
  CIA 국장이 대답했다.
  “무기가 무엇이었던 간에 우리의 전략 시설 일부가 파괴되었습니다. 몇 가지 시설물과는 연락이 끊겼습니다.”
  통신이 두절되었다는 건가, 아니면 시설물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인가? 닉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작전이 민간인을 향해 실시된 겁니까?”
  대통령이 물었다.
  “만약 목표가 민간인이었다면 그리 정교하지 않은 무기를 사용한 걸로 보입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도 피해를 입었다는 미확인 보도가 있습니다. 무엇이건 간에 무기는 가공할 위력은 있되 정확성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캐넌은 3백만 명의 생명은 안중에도 없는 듯 뉴욕의 3분의 1을 날려 버린 무기가 정확히 조준되지만 않으면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다시 앞으로 몸을 내밀고 대통령에게 뭔가 얘기했다.
  “러시아군이 기술적으로 그런 공격을 감행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알겠소.”
  대통령이 말했다.
  “하지만 러시아 외에 이런 공격을 가할 나라가 없잖소. 우리 감시망을 피하는 것이 가능하오? 그들이 일전에 체르노빌에서 했던 실험은 어떻소?”
  CIA 국장과 엘리자베스가 체르노빌 이야기에 몸을 움찔했다. 대통령은 체르노빌을 들어 국가 안보에 생긴 허점을 지적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각하.” 
  캐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그러한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이...”
  그 문제를 논의하자는 것이 아니오. 그 일이 지금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조사해 보라는 것이오.“
  CIA 국장은 뒤에 앉아 있는 자신의 비서관을 돌아보았다. 그런 다음 그는 엘리자베스 호오손에게 뭔가 속삭였다. 그들이 소근대는 동안데도 고어는 보고서에 몰두해 있는 것이 닉의 눈에 들어왔다. 
  “저희가 보유한 자료들에 따르면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과 그 문제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우리가 실험하는 도중 부주의로 그런 사건들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없는 거요? 핵융합 실험, 미립자 투광기 아니면 반물질 우주 방출 등 때문에 그럴 수도 없잖소? 난 항상 그 프로젝트들이 걱정스러웠소.”
  대통령이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각하, 그렇다면 확실하게 보장할 수 없는 연구들은 모두 중단되어야 합니다.”
  닉은 토론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은밀히 진행되는 이 계획들이 어떤 것들인지는 몰라도 비밀을 털어놓게 된 CIA 국장의 얼굴이 화를 참느라 벌겋게 물들고 있었다.
  “진정하시오, 샘. 나는 그림의 떡같은 비밀 병기보다는 지금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을 알고 싶소. 그 프로젝트들이 현 상황을 유발시킨 건지 궁금하단 말이오.”
  CIA 국장의 반론에 대통령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엘리자베스가 다시 대통령의 귀에 대고 귓속말을 했다.
  “샘, 지금 이 시간에도 진행되고 있는 1급 비밀 연구들은 수십가지요. 그중 내가 말한 것은 단지 3가지뿐이오. 나는 모든 비밀 연구들을 당장 중단시킬 수도 있소. 내 말 알아듣겠소? 연구도, 실험도, 실행도 중단시킬 수 있단 말이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기 전까지는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요인을 없애야 하는 거요.”
  “하지만 각하 - ”
  “더 이상 하지만이라는 말은 하지 마시오, 샘. 모든 연구를 중단시켜요.”
  새뮤얼 캐넌은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논쟁에서 그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설득할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대통령이 다시 한 번 캐넌을 놀라게 했다.
  “이번 사건들에 대해 달리 짐작되는 원인은 없소?”
  “네, 각하. 기술적으로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나라들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발트 연안 국가들이 그런 고도의 공격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러시아의 경우 구 소련으로부터 기술 이전이 상당히 많이 되어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을 말하는 게 아니오. 다른 종을 의미한 거요.”
  “동물들... 그러니까 고래나 뭐 그런 것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샘, 나는 이것이 외계인의 소행에 의해 발생했을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소. 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소?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요?”
  고어는 보고서를 읽다가 말고 대통령과 캐넌 국장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었다. 닉은 고어의 얼굴에서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다.
  “각하, 그런 이론을 뒷받침할 증거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캐넌 국장이 당황한 듯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그 이론을 반박할 만한 증거도 없지 않소, 내 말이 틀렸소?”
  궁지에 몰린 캐넌 국장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고 비서관에게 뭔가 속삭였다.
  “그 부분에 대해 조사해 보겠습니다, 각하. 세티(SETI, 지구 밖 문명 탐사계획:옮긴이)연구팀이나 블루 북(Bluebook, 원래는 국회나 정부의 보고서를 의미하나 여기에서는 특수실험을 의미함 : 옮긴이)을 통해 검토해 보겠습니다.
  닉의 눈이 다시 휘둥그래졌다. 그는 10년이 넘도록 블루 북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었다. 아직도 공군이 UFO를 연구하고 있다는 말인가? 닉은 앞으로도 계속 안보 회의에 참석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회의에는 아주 흥미진진한 정보들이 넘쳐흘렀다. 
  “그렇게 하시오, 샘.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난 진지하게 말하는 거요. 나는 고도의 지능을 갖춘 생물이 우주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소. 이번 사태가 외계인 침공의 서주일 수도 있어요. 아니면 우호의 표시일 수도 있겠지. 샘, 당신이 뭘 생각하는지는 알고 있소. 하지만 일단 검토해 보시오. 됐어요, 계속합시다.” 
  대통령이 의제가 적힌 종이 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엘리자베스의 도움없이 의제를 찾아냈다.
  다음에 이어진 보고는 민간인의 피해 상황에 관한 것으로 지형 변화에 대한 몇 가지의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확인된 곳 가운데 최대의 피해지는 뉴욕시였으나 플로리다, 텍사스, 메릴랜드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도 피해가 극심했다. 이 지역의 피해가 대부분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에 위치한 군 기지들 역시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닉은 마음속으로 피해 지역 리스트에 자신이 라디오에서 들은 지역을 보탰다. 땅과 함께 사라진 민간인의 규모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 없었지만 닉은 그 수가 수천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측했다. 
  민간 피해 조사 보고서의 마지막 부분에 통신 문제가 나왔다. 전체적으로 통신망이 보존되어 있기는 했지만 여러 군데가 파괴되어 있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라디오와 TV방송국 시설들이 사라져 버렸고 다른 지역에서는 전파 방해를 받고 있었다. 핵폭풍이 불었을 때 보다는 약하지만 남아 있는 다른 시설들에 피해를 입힐 수 있을 정도로 전자파가 강력했다. 통신 위성이 망가진 것도 통신망을 교란시키는 한 이유였다. 어떤 지역에서는 지역 방송과 라디오, 전화 서비스가 제곡되고 있는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장거리 전화는 사용할 수 있는데 그 지역내 전화는 불통인 경우가 생기는 등 통신 체계가 뒤죽박죽 되어 있었다.  
  닉은 미국의 아침을 그려보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이 나오지 않가ㅗ 지역 뉴스만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어둠 속에서 잠을 깬 사람들이 방송이 나오는 채널을 찾기 위해 휴대용 라디오를 꺼내고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연락하거나 긴급 조치 -연락해도 빨리 응할 수 없는-를 요청하기 위해 전화에 매달려 통화 불통 상태에 이른다....
  엘리자베스가 계속 상황을 점검하기로 하고 통신 관련보고는 끝났다. 엘리자베스가 대통령에세 의제를 가리켰고 대통령은 닉을 바라보았다.
  “폴슨 박사, 이제 당신 차례인 것 같군요. 의견을 말해 주겠소?
  대통령은 닉에게 몸을 돌리기 전 잠시 고어를 쳐다보았다. 닉은 중요한 경기에 대신 출전하게 된 2군 선수가 된 느낌이었다.
  “감사합니다, 각하. 먼저 이번 일은 미국에 가해진 공격이 아닙니다.”
  곧 말을 덧붙였다.
  “다른 나라로부터 공격받은 게 아닙니다. 외계 생물의 공격 가능성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대통령은 닉 자신도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이 설명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구석에 앉은 고어의 입이 살짝 위로 치켜졌다.
  “닉.”
  대통령이 물었다.
  “어떻게 다른 나라의 공격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요?”
  “이번 현상은 전국적으로 발생했습니다.”
  닉이 짧게 대답했다.
  “저는 이것이 전세계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는 보고서를 보았습니다. 제3의 세력이 무기를 이용해 무차별 공격을 가한다는 것은 모순돼 보입니다.”
  대통령은 CIA 국장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보시오, 샘. 당신은 이런 일이 다른 나라에서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잖소.”
  “저는 오직 확인된 것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외국의 미확인 정보도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만...몇가지 조사해 보았지만 외국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된 바 없습니다.”
  “됐소.”
  대통령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입을 굳게 다문 대통령의 눈빛이 차가웠다.
  “계속하시오, 폴슨 박사.”
  “둘째, 이런 현상을 불러일으킨 원인에 대해 기술적으로나 이론적으로 근거를 댈 수 없습니다.”
  “폴슨 박사...닉... 그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요?”    
  “그게 아닙니다. 저는 이것이 자연 현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다시 뭔가 말하려고 하는데 고어 박사가 끼어들었다.
  “자연적인 거라구요? 도시가 사라지고 지형이 바뀌는 것이 자연적인 현상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전에도 발생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도 이런 일들이 현대에 들어와서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고대 자료에는 이런 종류의 것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홍수, 사라진 대륙, 사라진 사람들, 서로 다른 내용의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고어가 차갑게 닉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통령은 닉의 이론에 관심을 갖는 것 같았기 때문에 닉은 ‘대중들에게 설명하듯이’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지질학적인 시간대를 살펴볼 때 우리는 이 지구에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살고 있는 겁니다. 만약 지구의 나이를 24시간으로 생각해 본다면 공룡은 불과 1시간 전쯤에 나타난 동물이고, 사람들은 몇초 전에 지상에 나타난 셈이죠. 우리는 아직도 23시간 정도를 이해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이전에도 이런 일들이 수없이 발생했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모르고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 거라면 지질학 분야에서 화석에 대한 기록 등으로 남아 있습니다.”
  고어자 주장했다.
  “그런 것들이 증거가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모델을 만들면서 시간의 전이를 이론적 토대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그런 증거들을 현재의 이론들로만 설명하려 들다가 결국 이론의 한 변형으로만 받아들이고 곧 잊어버리게 될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죠. 공룡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암석을 발견했는데 그 암석에 인간의 발자국도 찍혀 있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발자국이 인간의 것일리 없다고 확신했는데 그것은 인간과 공룡이 동시대에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신 어떻게 인간과 공룡의 발자국이 함께 찍혀 있을 수 있었을까를 연구했었습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던 공룡의 발자국이 인간의 것처럼 보인 거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실제로 인간과 비슷한 발자국을 가진 공룡이 있습니다.”
  고어가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그런 공룡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상에서 발견된, 인간의 것처럼 보이는 그 발자국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침식 작용이 필요합니다. 앞발톱이 없어질 정도의 침식이죠.”
  “타당성이 있는 가설이오.”
  고어가 주장했다.
  “물론입니다. 충분한 타당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캄의 면도날 이론(이론은 간단할수록 좋다는 원리 : 옮긴이)은 보다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발자국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전혀 간단하지 않아요. 인간과 공룡을 한 시대에 배치시킨다는 것은 진화 이론을 지지해 온 지난 백여 년간의 연구를 부정하는 것이오.” 
  “시간 전이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일부 공룡들은 다른 시간대에서 인간과 공존했을 수도 있습니다.”
  닉이 말하는 동안 엘리자베스가 대통령의 귀에 뭔가 속삭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통령이 손을 저어 거부의 뜻을 나타냈다.
  “폴슨 박사, 지금 시간의 전이를 말했는데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거요?”
  대통령이 물었다.
  닉은 그 질문에 당황했다. 그 질문이 뭘 뜻하는지 분명했다. 하지만 이 회의에서 얘기된 다양한 내용들은 사태의 파장에 대해서만 설명할 뿐 확실한 증거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예, 각하. 저는 시간의 전이 현상이 이번 사태를 설명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구성하는 것들은 과거의 부분들을 대체해 오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보고 내용을 떠올려 보십시오. 국토의 일부가 갑자기 폭설로 뒤덮이고, 용암이 넘쳐흐르며, 툰드라로, 사막으로, 정글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과거에 있었던 것들입니다.” 
  “하지만 눈은 지금도 내리고 용암이나 사막도 마찬가지요. 나는 이런 것들이 와해된 시간의 증거라고는 믿지 않소. 지형적인 변이일 가능성은 없소?”
  “공룡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몸을 똑바로 세웠고 웅성거렸다. 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위 관리들은 모두 자신의 비서관에게 뭔가 지시하거나 옆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통령이 먼저 말했다.
  “공룡에 대한 보고는 전혀 듣지 못했는데. 그런 게 있었나, 엘리자베스? 샘? 공룡 이야기는 도대체 뭐요?”
  “폴슨 박사가 어디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각하.”
  CIA 국장이 대답했다. 그런 다음 그는 비서관에게 뭔가 속삭였다. 모든 사람이 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라디오 토크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된 건 아닙니다, 각하. 하지만 공룡의 등장은 시간 전이와 일치하는 현상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 드리고 싶습니다만.” 
  “공룡이라, 상상해 보시오, 공룡들이라...”
  대통령이 생각에 잠기며 중얼거렸다. 엘리자베스가 그에게 뭔가 말하는 바람에 대통령은 공상에서 깨어났다.
  “폴슨 박사, 계속하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공룡들을 찾아보도록 하시오! 샘, 미확인 보고라도 좋으니 자료를 수집하시오. 엘리자베스가 다음 회의 일정을 잡을 거요. 그동안 여러분 모두가 가능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 이 사태를 해결할 방안을 찾을 수 있도록 하시오.”
  “해결 방안이라고 하셨나요, 각하?”
  닉이 놀라 물었다.
  “그렇소, 나는 이번 일이 발생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원하오.”
  대통령은 구부러진 클립을 닉 쪽으로 툭 던졌다. 닉은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고 한숨을 쉬었다. 대통령은 엉터리 과학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았다. 이번 일은 외계인의 침략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하고 모든 것을 침공 이전으로 원상 복구시키는 과학자가 나오는, 영화에나 나오는 가상 현실이 아니었다. 시간과 공간과 우주 전체의 질서가 바뀌어 버린 현실의 문제였다.
  닉은 다른 사람들의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 자신의 이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신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고대와 현대가 뒤섞여 버린 지금 구 문명의 규칙들이 이 상태에 적응할 수 있을까? 인간이 지금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공룡도 지배자였던 시대가 있었다. 만약 인간과 공룡이 조우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도대체 어떤 일이?
  20. 숲
  나는 여동생 빌헤르미나가 그녀의 방 침대 위에서 불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침대보는 말짱했고 집 어디에서도 불이 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경찰은 나를 의심했으나 오직 악마만이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인간을 숯덩이로 만들 수 있다.
  마가렛 드워, 1908년 3월 22일
  뉴튼의 학설, 아인슈타인의 이론, 양자론들은 모두 독특한 방식으로 우주를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론들 모두 물리학 법칙들이 인간의 요구나 필요를 무시한 상태에서 이용되어 왔다는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다. 그 결과 지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교묘하게 황페해져 갔지만 누구도 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조부모나 친구들하고만 있던 아이들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고,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알지 못했다. 출장으로 집을 떠나 있던 부모들은 두 번 다시 집에 돌아올 수 없었거나 돌아올 방범을 찾지 못했다. 사이가 나빠 별거를 하고 있던 부부들도 절대로 재결합할 수 없었다 -이제 그들 사에에는 너무도 먼 공간과 시간만 존재했다. 늦게까지 밖에 있던 사람들은 돌아갈 집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였고, 집에서 사랑하는 이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사람ㄷ르의 바램도 허사로 돌아갔다.
  이번 사태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물리적인 상황은 훨씬 나은 편이었다.
  갑자기 일어난 사태로 인해 신체가 무참히 훼손된 사람이나 동물은 전혀 없었을 뿐더러 손가락 하나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힘의 3요소인 시간과 공간, 물질이 서로 반응하여 각 조직의 세포 주의를 감쌌다. 식물들은 모세관을 비롯해 통째로 없어져 버렸다. 인간과 동물도 있던 그대로 사라져 버려 생존자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무생물은 사정이 훨씬 나았다. 영향력은 연속성과 전체성을 고려한 것 같았다. 영향권에 들어 있던 자동차들이 사라져 버렸고 견인되던 차나 보트들은 그 자리에 남았다. 길은 칼로 자른 것처럼 갑자기 뚝 끊겨 버렸는데 밸러스트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벽돌과 나무로 구성된 구조물들도 마찬가지로 전체가 사라진 것은 있어도 일부가 부서지거나 잘라진 것은 없었다. 대부분의 구조물들이 지하부터 지붕 꼭대기까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몇몇 건물들에서 벽이나 토대가 일부 커다란 조각들이 남긴 채 없어진 경우들이 있기는 했다.
  사건의 영향력은 놀라웠지만 모두 강력한 것만은 아니었다. 지구속 깊이까지는 영향을 미칠 수 없었고, 물 속 깊이에 위치한 구조물들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대신 불가해한 물리학 법칙에 따라 새로 들어선 땅들 위에 새로운 지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평평하던 땅에 초원이 새로 생겼고, 구릉지나 지세가 험한 지역은 헝클어진 쇼올처럼 이리저리 뭉개져 있었다. 숲은 상태가 심각했고 많은 나무가 뿌리째 뽐혀 버렸다. 가파른 언덕 위에 심어져 있던 나무들은 도미노처럼 줄줄이 쓰러져 있었다. 뿌리가 깊지 않은 세쿼이아(미국 캘리포니아 산 거목:옮긴이)는 살아남아 새로운 땅에서 자라게 되었다.
  오레곤주 뉴버그 동쪽 일요일, 오전 6시 30분 (태평양 표준시)
  커비와 존은 차 안에 앉아 리프먼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존은 라디오를 이리저리 틀어 보았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포틀랜드 방송을 두 번 다시 듣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커비는 눈을 감고 머리를 숙인 채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존은 커비가 기도하는 거라고 짐작했다. 커비는 리프먼이 뉴버그를 향해 언덕을 내려간 이후 죽 이러고 있었다. 존은 리프먼이 어서 돌아오기를 바랬다. 리프먼과 깊이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분명했다.
  “예수이든 뭐든 간에 재림이란 없어. 이건 산사태가 났거나 화산이 폭발한 것뿐이라구.”
  리프먼이 그렇게 말한다면 존은 그렇게 믿을 것이다. 존은 그를 믿고 싶었다. 
  존은 움직일 수 없는 바위같은 커비와, 저항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리프먼 사이에 끼인 자신의 모습을 종종 발견하곤 했다. 그들이 가진 확신은 결정으로 이어졌고 어떤 길로 갈 것인지, 어떤 수업 시간표를 짤 것인지도 그에 따라 결정되었다. 존은 그들의 확신을 부러워하면서도 자신은 그렇지 못한 것이 유감스러웠다. 그는 어쨌든 자신이 셋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았다. 리프먼과 커비는 존 없이는 어디든 함께 가는 법이 없었다. 
  존은 아버지가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해 하시던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었었기 때문에 커비가 신경성 불안증에 시달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커비는 심각할 정도로 우울해 했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고 땀을 뻘뻘 흘리며 용서를 비는 기도를 무척 빠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커비는 존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는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존도 겁먹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최후의 순간이 도래한 것으로 확신하는 커비 같지는 않았다. 존은 아직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존은 커비의 끊임없는 기도에 질려 마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커비처럼 덩치 큰 남자 애가 이렇게까지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무거운 짐을 들고 산등성이를 올라오는 리프먼을 존이 본 것은 새벽이 다 되어서였다. 리프먼은 두 번이나 쉬고 나서야 등성이를 오를 수 있었다. 존이 리프먼과 물건을 같이 들었다. 리프먼은 세 종류의 물건들을 가지고 왔다. 여러 가지 생필품이 든 자루와 활과 활통. 그리고 수통이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 훔친 거지, 그렇지?”
  “밤중에 운동 용품 가게에서 꺼내 왔어.”
  “이럴 수가, 차라리 총을 가지고 오는 게 낫겠다.”
  “활에 총알을 장전할 수는 없어. 총은 쇠줄에 묶여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커비는 어때?”
  “마찬가지야. 더 나빠진 것 같지는 않아.”
  “너희 아버지가 정신과 의사인데도 그렇게 몰라?”
  “어떻게 알아, 난 아버지가 아니라구.”
  리프먼은 커비 앞으로 가서 땅 위에 커비 몫의 물건을 내려놓았다. 
  “커비, 이제 곧 날이 밝을 거야. 네게 이게 예수의 재림도 아니고 휴거도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이겠어.”
  커비가 기도를 멈추고 리프먼을 올려다보았다. 커비의 눈은 부어 있었고 얼굴 위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떻게 중명하겠다는 거지, 리프먼? 다른 일일 수가 없어.”
  커비가 체념한 듯 말했다.
  “첫째, 뉴버그엔 아직도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어. 지금 잔해들을 치우고 있어.”
  “리프먼, 그건 네가 뭘 모른다는 걸 말해 줄 뿐이야. 하나님은 죄인들을 하나로 데려가시지 않아. 주님을 따르는 자들만 선택하셔. 물론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었겠지, 하지만 그들은 모두 죄를 지은 사람들일 거야. 너를 마을로 가게 내버려두다니 내가 실수한 거야. 뒤를 바로 뒤쫓아갔어야 하는 건데. 우리는 하나님이 내리신 시련을 바로 보아야 해.” 
  리프먼은 한숨을 깊이 쉬었다.
  “커비, 머리를 굴려 봐. 없어진 건 사람들이 아니라 길이야.”
  숲을 뒤돌아보는 커비의 얼굴에 두려움 대신 혼라스러움이 떠오르고 있었다. 리프먼은 그 기회를 이용해 커비를 계속 밀어붙였다.
  “나는 휴거 따위 믿지 않아. 하지만 그런 게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창녀나 주정뱅이들을 선택하실 리는 없어.”
  “하나님은 그들 또한 원하셔! 리프먼, 너는 기독교 정신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며, 진심으로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이면 누구나 받아들이신다구.” 
  “커비, 여기 오다가 스트립 쇼를 하는 나이트 클럽 본 것 기억나? 여자들이 누드 쇼를 한다는 큰 간판이 달려 있었잖아. 클럽 주변에는 주차한 트럭들로 붐비고 있었어.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도 워하신다구? 거기에 있었다면 그 사람들은 회개한 게 아니야. 내 말이 틀려?” 
  “아니야, 내 생각은 달라.” 
  “제기랄, 그렇지 않다니까. 그럼 가서 확인해 보자.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가보면 되잖아. 나이트 클럽이 없어졌으면 내가 옳은 거니까 너는 휴거 따위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마.”
  커비가 반색을 하는가 싶더니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트 클럽까지 가는 것은 나중 문제고 커비는 정신 치료를 받어야 했다. 나이트 클럽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커비의 몸이 굳어지고 있었다.  
  리프먼은 존과 커비에게 물건을 나누어 주었다. 모두 비상식량과 통조림을 챙겼다. 그리고 나침반과 이불, 휴대용 손전등 그리고 성냥을 나눠 가졌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화 쏘는 연습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존은 리프먼이 훔쳐 온 종류의 활을 쏘아 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 파이버 글래스로 만든 활을 써 본 적이 있었는데 이번 활의 양끝에는 풀리가 달려 있었다.
  존은 리프먼의 활 솜씨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리프먼은 존과 커비에게 활 잡는 법과 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화살은 사냥용으로 화살 끝에 아주 날카로워 보이는 삼각 촉이 달려 있었다. 리프먼은 활을 뒤로 잡아당겨 10여 미터쯤 떨어진 판지를 조준하더니 명중시켰다. 존이 다음으로 활을 잡았으나 파이버 글래스 활보다 당기기가 훨씬 어려웠다.
  “어서 해봐, 겁쟁아.”
  리프먼이 약올렸다.
  팔이 떨렸고 존은 귀밑까지도 시위를 당길 수 없었다. 갑자기 팔이 앞으로 펴졌고, 리프먼은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쉬워지지는 않아. 좀 더 화살을 뒤로 잡아당겨 봐, 쏘기 편하도록 풀리가 있는 거야.”
  존은 조심스럽게 조준한 다음 화살을 놓았다. 화살은 판지 5미터 정도 날아가다가 떨어져 풀숲으로 모습을 감췄다. 커비는 활을 잘 잡아당기기는 했지만 너무 높이 조준하는 바람에 화살이 언덕 위로 날아가 버렸다. 조금 더 연습했지만 커비와 존의 실력은 나아지지 않았다. 
  태양이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그들은 숲 속으로 걸어갔다. 햇살이 마치 한 필의  옷감을 짜는 날줄과 씨줄처럼 나무 사이를 비추고 있었다. 리프먼이 맨 앞에 서서 사냥칼로 풀을 치며 길을 만들었다. 하지만 풀이 듬성듬성했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다양한 조류의 양치 식물들이 60센티미터에서 120센티미터 정도로 자라 있었는데 어떤 것들은 머리끝까지 솟아 있었다. 땅은 짚더미를 밟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그들은 가끔씩 팜파스의 풀처럼 끝이 날카롭고 뻣뻣한 수풀 속을 지나기도 했다. 그들은 금세 수풀을 통과하는 법을 알았다. 길에는 한 가지 종류의 나무들만 있었고, 나무의 껍질은 아주 거칠거칠했다. 많은 나무들이 그 안을 자동차로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컸다. 리프먼은 그중 한 나무 옆에 멈추어 서서 칼로 나무껍질을 벗겨냈다.
  “이걸 봐, 커비. 이건 그냥 삼나무야. 전에 캘리포니아에서 본 적이 있어.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야.”
  “그럼 어떻게 삼나무가 오레곤에 있을 수 있는 거니?”
  리프먼은 커비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존은 리프먼이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기를 바라며 뒤를 따랐다. 존은 오레곤에 삼나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리프먼이 언덕 위로 걸음을 재촉했고 존과 커비는 헉헉대며 그 뒤룰 쫓아갔다. 리프먼은 언덕 위에 오르더니 땅에 무릎을 꿇고 나무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서 앉아, 소리내지 말고.”
  커비와 존은 리프먼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왜 조용히 하라는 거야?”
  존이 계속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주위를 봐, 보여?”
  존과 커비는 땅을 보다가 리프먼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옮겼다. 커비가 천천히 손을 들어 앞쪽의 나무를 가리켰다. 나무 중간쯤의 가지 위에 도마뱀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전에 존이 본 것과는 달랐다. 머리는 붉은 갈색이었고 꼬리는 흐릿한 녹색이라 나무와 구별이 잘 되지 않았다. 뒷다리는 아주 긴 반면 앞다리는 짧았다. 머리 주위에 딱딱해 보이는 깃같은 것이 주름처럼 달려 있었고 정수리 부근에는 작은 뼈가 불쑥 삐져 나와 있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도마뱀의 크기가 1미터가 넘는다는 사실이었다. 존은 다음 순간 다른 도마뱀이 조금 더 높은 가지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존이 나무 주변을 살펴보니 거대한 도마뱀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도마뱀들은 밑에 있는 이상한 세 피조물의 손이 닿지 않을 거라고 믿는지 나무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침내 낮은 가지 위에 앉아 았던 도마뱀이 위로 올라갔고 다른 도마뱀들도 그 뒤를  따랐다. 숨막히던 정적이 깨졌고 그들은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움직이자 도마뱀들이 나뭇가지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나무 위에 도마뱀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들은 입을 열었다. 
  “맙소사, 난 저렇게 큰 도마뱀을 본 적이 없어.”
  존이 말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
  커비는 그 말에 대답하려다가 리프먼이 노려보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몰라, 하지만 있을 때 실컷 구경해.”
  리프먼이 말했다.
  그는 리프먼이 현재 상황을 즐기다는 걸 알아차렸다. 숲 속으로 들어 갈수록 리프먼은 마치 자신이 숲의 일부인 것처럼 확신해 차 보였다. 하지만 커버는 심하게 떨고 있었다. 그는 말을 별로 하지 않았고, 존과 리프먼이 지금까지 생각해 오던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도마뱀과 마주친 이후 존은 숲을 지나가면서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전에는 신경 쓰지 않던 움직임, 그늘, 소음 등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얼마 후 그들 앞에 쓰러진 나무가 나타났다. 나뭇가지 사이로 양치 식물들이 자라 있었다. 리프먼은 나무의 밑동을  밟고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때 갑자기 나무 아래에서 뭔가 괴성을 지르며 뛰어나오더니 존의 발 등을 넘어 양치 식물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놀란 존이 소리를 지르며 물러나다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땅 위로 넘어졌다.
  “뭐야?”
  “난 봤어.”
  커비는 그들이 숲에 들어 온 이후 처음으로 자신 있게 말했다. 
  “족제비처럼 생긴 건데 눈이 아주 컸어.”
  “성경에 거대한 눈을 족제비 얘기는 안 나오니?”
  리프먼이 비웃듯 물었다.
  커비는 잠시 리프먼을 노려보다가 그의 뒤를 따라 통나무를 넘었다. 맨 뒤에 선 존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산등성이를 넘어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힘든 길이 이어졌다. 가끔씩 나무가 뿌리째 뽑혀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고, 그럴 때면 주의를 기울이며 나무에 기대어 잠시 쉬곤 했다. 몸을 뻗다가 존은 등성이 한편이 완전히 뽑혀 버린 나무들로 뒤덮여 있는 것을 보았다. 숲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존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숲 속을 걷는 것이 쉬어졌다. 그냥 별 생각하지 않고 몸만 기계적으로 움직이자 리프먼과 커비를 따라가는 것이 훨씬 수월해졌다.
  태양은 중천에 떠 있었고, 리프먼은 메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고 부러져 있는 나무의 가지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커비, 어때. 나이트 클럽은 없지?”
  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여기 오는 동안 수없이 본 나무들과 똑같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나 있는 곳에 와 있었다. 존은 왜 리프먼이 이 자리를 나이트 클럽이 있던 자리라고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커비는 위치를 확인하려는 듯 주위를 살폈다.
  “왜 여기라고 생각하는 거야?”
  존이 물었다.
  리프먼이 대답하려는 순간 커비가 말을 잘랐다.
  “만약 여기가 아니라면 벌써 지나온 걸지도 몰라.”
  존은 다시 한 번 리프먼과 커비의 단정적인 태도에 놀랐다. 
  “커비, 내가 옳다는 거야, 뭐야? 여기서는 죄인이 아무도 없지? 누드 쇼를 하는 나이트 클럽이 있어? 하나님이 조금씩 심심해져 무용수들을 데려갔다고 생각해?” 
  커비는 생각에 잠겼다.
  “그럴지도 몰라, 리프먼, 그럴수도 있어. 하지만 이게 휴거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겠어?”
  리프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전에 말했잖아’ 라고만 중얼거렸다. 존은 통조림을 열고 부드러운 양치 식물 위에 앉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돌풍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오레곤에서는 아닐지라도 돌풍은 이전에도 일어난 적이 있었고 충분히 보편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었다. 미드웨스트에는 그들이 돌풍 오솔길이라고 이름 붙인 지역도 있었다. 하지만 이 불가사의한 숲은 뭘까? 어디에서 나타난 것이고 누드 쇼를 하던 여자들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라디오 방송국은 어떻게 된 거지? 포틀랜드까지 이 숲이 이어져 있을까? 만약 방송국이 없어졌다면 우리 집은 어떻게 됐을까? 그럼 부모님은? 커비가 옆에서 배낭을 메는 바람에 존의 생각은 거기에서 중단되었다. 
  “어디 가는 거야, 커비?”
  리프먼이 물었다. 
  “그거 하나는 확실해.”
  커비가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부모님을 찾아볼 거야.”
  존도 커비와 생각이 같았다. 존은 집은 남아 있는지, 부모님에게 무슨 일은 생기지 않았는지 알아야만 했다. 그는 통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커비, 걸어갈 거야?”
  존이 물었다.
  “어느 길로 갈 거야?”
  “저쪽으로.”
  커비가 그들이 올라온 길을 턱으로 가리켰다.
  “밴을 두고 온 데로 돌아가 차를 몰고 가면 어떨까? 도로가 괜찮으면 윌슨빌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5번 도로를 타면 되잖아?”
  “거기에는 아직 파편들이 많이 남아 있을 거야. 그걸 다 치우려면 최소한 이틀은 걸릴 걸. 그리고 윌슨빌까지 가는 임시 도로를 만들기 전에 사람들이 99번 도로를 치워놓을 거야. 나는 그전에 걸어서 포틀랜드에 도착할 수 있어. 다음 언덕까지 가서 이 숲을 벗어나면 그 다음에는 도로에서 히치하이킹을 할 거야.”
  “커비, 이 숲이 보스톤까지 쭉 이어져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알잖아.”
  리프먼이 말을 가로챘다.
  “나이트 클럽이 있던 자리를 찾아냈다고 너희 집까지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야.”
  커비는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땅에서 잔디와 양치 식물들을 뽑아 풀에 묻은 흙을 털었다. 그러더니 칼끝으로 풀을 잡아당겼다.
  “우리 집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알아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아버지의 교회는 잘 찾을 수 있어.”
  커비는 땅 위에 세 개의 원을 그린 다음 구불구불한 선 몇 개를 그렸다.
  “나무나 그 외의 사물들이 모두 다른데도 언덕이나 계곡이 똑같이 보인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어. 이건 내가 교회에서 본 그 언덕들이야. 여기가 록키 부트고 이건 타보산, 여기는 산 위에 있는 묘지들이야. 우리 아버지 교회는 바로 이 언덕 위에 있어.”
  커비는 칼로 두 언덕 뒤의 한 지점을 짚었다.
  “여기가 윌라밋강이고 여기가 콜롬비아야. 웨스트힐을 내려가 계곡이 나오면 그때 윌라밋강을 건너기만 하면 돼. 만약 콜롬비아가 나오면 내가 너무 동쪽으로 왔다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에 남쪽으로 방향을 틀면 되고.”
  리프먼은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클라카머스와 이쪽에 다른 강이 있다는 걸 잊어버리지 마.”
  리프먼이 몇 개의 선을 더 그리며 말했다. 리프먼은 지형을 보며 몇 가지 더 말하다가 마침내 존에게 몸을 돌렸다.
  “너도 같이 갈 거니?”
  리프먼이 물었다.
  “나도 부모님을 찾아야겠어.”
  “존, 나라면 해안가에 있는 별장으로 부모님을 찾아가겠어. 결국에는 부모님도 네가 거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고 그쪽으로 오실거야. 그리고 만약 너의 부모님께서 사라진 무용수들과 같은 곳에 계신다면 그때는 정말 별장에 가 있어야 할 걸. 별장이 비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려고 할 거고, 그럼 너는 그 사람들을 쫓아낼 수 없을 거야.”
  존은 순간 고민에 빠졌다. 부모님이 누드 무용수들처럼 사라졌을리 없었다. 리프먼이 해안에 있는 별장에 대해 한 이야기는 옳았다. 별장에는 음식도 있고 돈도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커비의 말도 옳았다. 조금만 더 가면 숲은 끝날 것이고 히치하이킹을 하면 저녁 무렵 집에 돌아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해안가 별장까지는 히치하이킹을 한다 해도 하룻밤이 꼬박 걸릴 것이다.
  “조금만 더 가면 숲은 끝날 거야, 리프먼.”
  존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커비랑 같이 갈래.”
  “나도 너희들하고 같이 가는 게 낫겠군.”
  리프먼은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마다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존은 리프먼이 커비와 함께 땅 위에 그린 지도에 자신의 집을 표시해 둔 것을 보았다.
  그들이 다시 출발한 것은 따뜻한 가을 늦은 아침이었다. 그들은 재킷을 벗어 허리에 둘렀다. 숲 속을 걸어갈수록 나무들은 점점 드물어졌고 얼마 후 그들은 작은 초원에 이르렀다. 잎이 떨어진 나무들이 삼나무와 함께 심어져 있었다. 존은 무화과처럼 생긴 열매가 달린 나무들과 포플러 나무를 보았다. 초원에는 양치 식물들이 하나도 없었고 풀은 무릎 높이로 자라 있었다. 
  리프먼이 포플러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더니 뭔가를 향해 활을 조준했다. 존과 커비도 어설프지만 리프먼의 흉내를 냈다. 리프먼은 숲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속삭였다. 
  “뭔가 뛰어가는데... 저기다.”
  존은 리프먼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으나 숲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동물이 나무 사이로 달려가더니 모습을 감췄다. 그 짐승은 키가 150센티미터 정도로 두 다리로 달리고 있었는데 길다란 꼬이가 쭉 뻗어 있었다. 앞발은 길고 가늘었으며 뱀같은 목의 끝에는 조그만 머리가 달려 있었다. 커다란 노란색 눈은 입 바로 위에 달려 있었다.
  “너도 봤니?”
  존이 말을 더듬었다.
  “응.”
  리프먼이 대답했다.
  “털 뽑힌 타조같은 걸.”
  두 마리가 더 지나가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 동물들의 꼬리와 목에는 넓은 초록색 줄이 나 있었는데 녹색기를 띤 황색이 연한 녹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서둘러, 저 동물들을 쫓아가 보자.”
  리프먼은 흥분해서 말했다.
  리프먼은 앞장섰다. 존은 머뭇거리는 커비의 어깨를 잡고 리프먼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초원을 가로질러 쫓아갔지만 동물들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뒤쪽에서 나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은 것은 그들이 거의 초원의 반대쪽까지 갔을 때였다. 뒤를 돌아보니 숲 속에서 웬 동물이 갑자기 뛰쳐나와 그들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조금 전에 그들이 보았던 털 빠진 타조 같은 동물이 몸을 숙인 채 강력해 보이는 두 발로 속력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것은 아까보다 더 큰 놈이었다. 짧고 굵은 목과 커다란 머리를 가진 이 짐승의 입은 오리 주둥이와 흡사했다. 미끌미끌해 보이는 가죽에 긴 꼬리가 달린 그 짐승은 의심할 것 없이 공룡이었다. 
  존이 눈앞의 광경에 넋을 잃고 있는데 커비가 배낭을 잡아 흔들며 존에게 뛰라고 소리쳤다. 존은 커비를 따라 뛰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호흡이 가빠졌다. 너무 무서워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바닥이 울퉁불퉁했기 때문에 존은 얼마 못 가 땅 위로 나동그라졌고 그 바람에 앞서 뛰던 커비를 놓쳤다.
  존은 몸을 일으켜 다시 달리다가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공룡이 거의 그의 뒤에 와 있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존을 한입에 삼킬 수 있을 만큼 큰 공룡이었다. 심장은 더 빨리 뛰기 시작했고 폐는 찢어지는 것 같았으며 다리는 풀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공룡은 언덕 위로 달리고 있었고 존의 오른쪽에서 땅이 가라앉고 있었다. 언덕을 오르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언덕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이 존의 시선을 끌었다. 리프먼이 나무 사이를 헤쳐 나오고 있었다. 커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속 언덕 위로 올라가고 있었고 존은 무작정 커비를 쫓아갔다. 존은 우정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공룡들이 리프먼을 쫓아가기를 빌었다.
  존이 다시 뒤를 돌아보니 자신을 삼킬 수 있을 정도로 공룡이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다른 공룡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날카로운 이빨은 사람을 한입에 두 동강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존은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달리면서 커비의 머리가 움직이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커비의 머리가 확 젖혀졌고 존은 얼른 땅 위로 몸을 엎드렸다. 존은 다리를 가슴 앞으로 모으고 숨을 죽였다. 예상대로 조그만 공룡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땅을 쿵쿵 울리는 소리와 함께 다른 공룡들이 작은 공룡의 뒤를 쫓고 있었다. 수풀 속에 있었지만 존은 자신의 머리 위에 나타난 공룡들의 머리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수풀 속에 누워 있었다. 빠르게 뛰던 가슴은 이제 진정되었고 숨쉬기도 편했다. 그는 풀 끝에 얼굴과 목, 그리고 팔을 베인 것을 알았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수풀 밖으로 나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던 길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가서 리프먼을 찾고 싶었다. 커비한테는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존은 공룡들이 달려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거대한 공룡들이 지나가며 풀을 밟아 놓았기 때문에 걷기 쉬웠다. 몇 걸음 걷다가 존은 커비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그건 솔직히 말해서 나중에 리프먼을 만나더라도 커비를 찾기 위해 자신은 노력했다는 변명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존은 커비를 찾는 동안 자신은 충분히 노력했노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존이 돌아서는데 커비가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존, 여기야.”
  커비는 통나무 위에 앉아 신발 끈을 풀고 있었다. 팔과 얼굴에서 피가 많이 흐르고 있었다. 존의 얼굴이 밝아졌다. 
  “야, 다시 보게 되다니, 어떻게 피했어?” 
  “네가 한 대로야. 이 통나무 뒤에 숨어 기다렸지 뭐. 작은 놈을 쫓아가던 그 큰 괴물 봤니? 그 작은 놈은 우리를 뒤쫓던 게 아니라 큰 공룡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던 거야.”
  “가자, 커비. 공룡들이 다시 올 거야. 여기를 빠져나가야 해.”
  “잠깐만 기다려.”
  커비는 신발을 벗어 돌 조각을 털어냈다.
  “왜 그랬어? 공룡이 널 잡아먹으려고 마음먹었어도 네가 공룡보다 빨리 달려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존, 나는 공룡보다 빨리 달릴 필요가 없었어. 그저 너만 앞지르면 됐었다구.”
  존은 잠시 생각하다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21. 이구아노돈
  공룡이란 단어의 원래 의미는 ‘무서운 도마뱀’으로 그 무시무시함이 인간으로 하여금 동시에 진화하도록 만드는 불행을 낳았다. 인간이 현대 인류의 모습으로 진화하지 못했다면 인간은 거대한 육식동물의 맹공 속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로버트 햄튼 박사, 공룡의 왕국
  뉴욕시 일요일, 오전 9시 37분 (서부 표준시)
  이구아노돈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보낸 하루는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구아노돈은 오지 않았지만 다른 공룡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책 소그이 그림으로 공룡들을 구별해 보려고 애썼지만 눈이 잘 보이지 않아 남편의 망원경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구아노돈이 떠난 지 몇 시간이 지났을 때 수풀이 한꺼번에 흔들렸고, 마리엘은 바람이 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마리엘은 풀 위로 쑥 올라왔다가 사라지는 작은 머리들을 볼 수 있었다. 정확히 세기는 못했지만 작은 공룡들이 이십여 마리 정도 몰려 있는 것 같았다. 공룡들은 몰려드는 파도를 피해 통통 튀는 바닷새처럼 앞뒤로 달리고 있었지만 마리엘에게는 잘 보이지 않았다. 머리들이 곧 사라졌다.
  마리엘은 아침 늦게야 잠들었다. 그녀가 잠에서 깼을 때 공중을 가르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창문으로 달려가 보니 머리가 큰 세 마리의 공룡이 수풀 속을 달려가고 있었다. 공룡들은 꼬리를 쭉 펴고 몸을 앞으로 숙인 채 두 다리로 달리고 있었다. 공룡들은 한 마리가 선두에 서고 두 마리가 그 뒤에 서서 달리고 있었다. 마리엘은 공룡들이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쏟아지는 잠을 쫓았다. 마리엘은 책에서 금방 그 공룡들의 그림을 찾았다. 그 공룡들은 데이노니쿠스였다. 책에는 데이노니쿠스가 자신보다 훨씬 큰 공룡의 시체 주위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커다란 살덩이를 물고 있는 육식 동물로 묘사되어 있었다. 육식 공룡들이 쫓겨날 거라는 생각에 마리엘은 데이노니쿠스의 출현을 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자신의 이구아노돈을 해치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크래커와 과일 주스로 아침을 때우고 그녀가 잠깐 졸고 있는데 현관 손잡이가 움직이는 소리가 았다. 마리엘은 즉시 일어났다. 마리엘은 손잡이가 좌우로 움직이는 것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복도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는 사람이라면 먼저 문을 두드렸을 것이기 때문에 마리엘은 집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소리를 질렀다.
  “문에서 떨어져! 난 총을 가지고 있다!”
  더 이상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손잡이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마리엘은 나무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아파트 건물 안에 도둑들이 활개를 치고 다닌다는 걸 알았지만 혼자서 행동을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창가에 앉아 설탕을 좋아하는 이구아노돈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오후에 새로운 공룡이 나타났다. 아주 우습게 생긴 그 공룡의 주둥이 위에는 작은 뿔이 달려 있었고 뒤통수에는 녹색의 흑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공룡은 초원을 따라 오며 풀을 뜯다가 가끔씩 냄새를 맡으며 지평선을 살폈다. 이구아나돈과는 다른 종류의 공룡이었다. 이구아노돈보다 훨씬 작았고 그리 영리해 보이지도 않았다. 공룡은 아파트를 바위나 절벽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고 마리엘은 이 공룡의 지능이 낮을 거라고 확신했다. 공룡은 아파트 옆으로 나 있는 수풀 속을 걷다가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잠시 후 자동차 경적 소리에 공룡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들려 왔다. 둥근 머리 공룡이 다시 나타났고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마리엘은 책장을 넘기며 비숫한 공룡을 찾았지만 책에 나온 공룡은 콧등에만 뿔이 나 있었다. 이름이 발음하기 매우 어려웠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그 공룡은 흉측하고 멍청한 공룡일 뿐이었다. 
  마리엘은 공룡이 다시 나탄난 것은 오후가 다 된 무렵이었다. 공룡은 풀을 먹으며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걸어오고 있었다. 공룡은 제자리에 서서 풀을 뜯으면서도 가끔씩 일어나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마리엘은 데이노니쿠스가 가고 없기를 빌었다.
  이구아노돈은 풀은 잊어버리고 바로 마리엘이 서 있는 창가에 눈을 고정시켰다. 공룡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주위에 육식동물이 숨어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자 공룡은 머리를 들고 입을벌리더니 낮게 ‘아아 -아’ 소리를 냈다. 소리가 잠잠해지자 마리엘은 설탕이 든 종이 봉지를 공룡의 입안으로 던져 주었고 공룡은 입을 다물었다. 
  공룡은 입맛을 다시며 더 크게 소리질렀다. 마리엘은 다시 설탕 봉지를 던져 주었다. 공룡은 설탕을 먹고 나서 다시 입을 벌렸다. 마리엘이 공룡을 야단쳤다. 
  “두 봉지 외에는 안돼. 이제 저기로 돌아가 풀이나 뜯어. 설탕만 먹으면 병에 걸린단다.”
  그녀는 세 아이를 키웠기 때문에 굴복시키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공룡은 두 봉지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공룡은 계속 밖에 서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마리엘이 꿈쩍도 하지 않자 머리를 떨군 채 초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리엘은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설탕 두 봉지를 창틀에 얹어 놓았다. 그녀는 뜨개질 거리를 다시 손에 잡았고 공룡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둠이 내릴 무렵 공룡이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풀을 뜯지 않고 바로 마리엘에게로 왔다. 공룡은 두 뒷다리로 서서 마리엘의 창문 쪽으로 똑바로 다가오더니 고개를 들고 소리를 질렀다. 소리가 잠잠해지자 마리엘은 설탕 봉지를 던져 주었다. 이구아노돈은 고개를 흔들며 설탕을 먹더니 초원으로 되돌아갔다. 
  “난 네가 똑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공룡 양반.”
  마리엘은 미소를 지었다. 마리엘은 부엌으로 가서 종이 봉투에 설탕을 담았다. 설탕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지만 설탕을 사러 밖에 나가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이웃 사람들이 집에 있다면 설탕을 빌릴 수도 있을 텐데. 그 순간 마리엘은 나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었던 걸 기억해냈다.
  “그래, 난 물건을 훔치는 게 아냐.”
  그녀는 중얼거리며 아래층으로 향했다.
  22. 새끼 공룡
  우리는 영국의 요크셔 근처의 계곡에서 바닥에서 3미터 정도 위에 있는 동굴을 발견했다. 동굴에서 발견된 것들을 그대로 믿는다면 순록과 하마, 사자 그리고 회색 곰들이 한때는 영국 땅에서 살았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윌리암 버클랜드, 1823년 
  오레곤주 벤드 북부 일요일, 오전 9시 45분 (태평양 표준시)
  피트라와 콜터는 벤드에서 쿰 박사 일행과 합류했고, 그들은 RV를 웜스프링즈로 몰았다. 피트라는 웨인 부인과 어니 파웰에게 계속 연락했지만 전파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전날 마신 술이 채 깨지 않은 콜터는 아직까지 뒷좌석에서 곯아 떨어져 있었다.
  윔스프링즈까지 가는 길은 놀란 여행객들로 붐볐기 때문에 쿰 박사는 방향을 돌려 인디안 보호 구역을 지나는 비포장 도로로 차를 몰았다. 그들은 나무 하나 없이 메말라 있는 땅을 지나갔다. 낮은 언덕에 작고 낡은 집들이 띄엄띄엄 서 있었다. 뜨겁게 달구어진 철조망들이 길을 따라 이어져 있었고, 울타리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우편함들이 달려 있었다. 울타리 주위로 말은 보였지만 소나 양은 보이지 않았다.
  도로 끝에서 길이 두 방향으로 나뉘어졌다. 필쳐 박사가 왼쪽을 가리켰고 그들은 북쪽으로 난 길로 들어섰다. 갑자기 길이 가파르게 꺾이는가 싶더니 계곡이 나왔다. 쿰 박사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고, 사람들은 모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뭔가 일어났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예측했었다. 조라스트러스는 예언은 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길은 언덕 아래까지 지그재그로 꺾이다가 계곡까지는 직선으로 나 있었는데, 길 한가운데가 녹색 선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쪽은 그들이 지금까지 지나온 메마른 황야였다. 다른 한쪽에는 무성한 초록색 수풀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멀리 호수가 보였고 그 뒤로 숲이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눈앞에 펼쳐진 것들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오직 콜터만이 별다른 느낌을 갖지 않는 것 같았다.
  “어서 가요. 저 아래 풍경이 꽤 괜찮은 것 같은에요.”
  콜터가 서둘렀다.
  앞에 앉아 있던 필쳐 박사가 콜터를 돌아보며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콜터, 이런 숲이... 열대림이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데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나?”
  “전 모르겠는데요. 아마 관개 시설로 만들었나 보죠.”
  필쳐 박사가 눈을 돌려 앞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들은 관개 시설로 농사를 짓지. 밀림을 만들지 않아. 좀더 가까이 가보죠. 조지.”
  쿰 박사는 지그재그로 엇갈린 길 위로 차를 몰았다. 뒤쪽에 앉은 피트라와 콜터의 몸이 이리저리 요동쳤다. 갑자기 피트라가 소리를 질렀다.
  “보세요! 호수 옆이에요. 뭔가 움직여요. 아주 커 보이는데요.”
  “안 보이는데, 피트라. 조지, 보여요?”
  “아뇨, 길에만 신경을 쓰는라구요.”
  “전 봤어요, 박사님.”
  콜터가 끼어들었다.
  필쳐 박사는 화가 났다.
  “그래 도대체 자네는 뭘 보았나, 콜터?”
  “피트라가 말한 대로 아주 큰 물체였어요. 제 생각에는 트랙터인 것 같아요. 아마 이 곳은 농장일 거에요.”
  필쳐 박사는 무시했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 작은 초원이 나타났다. 호수와 숲은 키가 3미터 정오 되는 이 수풀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쿰 박사는 수풀 위로 천천히 차를 세웠다.
  “피트라, 다시 연락해 보지.”
  필쳐 박사가 지시했다.
  피트라는 다시 웨인 부인과 어니 파웰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그들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응답이 없었지만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자동차에서 내려 초원으로 걸어갔다. 쿰 박사와 필쳐 박사는 풀과 양치 식물들을 주의깊게 관찰했다.
  “아주 이상해.”
  필쳐 박사가 계속 중얼거렸다.
  “정말 그렇군요.”
  쿰 박사가 동의했다.
  물 흐르는 소리에 그들이 고개를 들어보니 콜터가 풀 위로 오줌을 누고 있었다. 화가 난 필쳐 박사가 콜터에게 가려고 하자 쿰 박사는 필쳐 박사의 팔을 이끌며 다른 식물들이 있는 쪽으로 그를 데려갔다. 갑자기 콜터가 소리쳤다.
  “여기요, 이리 와 보세요!”
  콜터는 초원 속의 뭔가를 쫓아다니며 나무 사이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는 가끔씩 멈추어 서서 팔을 내밀곤 했다. 피트라가 콜터에세 달려가자 필쳐 박사가 그녀를 뒤따라가며 기다리가고 소리쳤다. 쿰 박사도 재빨리 그녀의 뒤를 따라갔고 결국 필쳐 박사는 맨 뒤로 처졌다. 콜터는 몸을 숙였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앞으로 달려갔고, 잠시 후 수풀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콜터의 손안데 웬 동물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동물이었다.
  동물의 몸길이는 50센티미터 정도로 피부는 밝은 녹색을 띠고 있었다. 콜터는 동물의 두툼한 꼬리와 -꼬리가 몸 길이의 3분의 1이나 되었다 -두꺼운 목을 잡고 있었다. 머리는 목보다 조금 더 컸고, 얼굴은 앵무새처럼 생겼으며, 주둥이 밑부분에 부리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머리 양쪽에 나 있는 두 눈은 굵은 주름으로 덮여 있었다. 뒷다리는 아주 두꺼웠지만 앞다리는 매우 가늘었다. 동물이 앞발톱으로 콜터의 손을 할퀴었을 때 보인 반응으로 보아 발톱이 매우 날카로운 것 같았다.
  콜터 곁에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에 놀라움이 가득 찼다.
  “저게 뭐죠?”
  피트라가 물었다. 
  “저건 오르니토미무스야.”
  쿰 박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프시타코사우루스 같은데.”
  필쳐 박사도 흥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색깔이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이렇게 밝은 초록이 아니에요.”
  “맞아요, 너무 밝은 색이군요.”
  쿰 박사가 동의했다.
  “하지만 보세요, 색깔이 엷어지고 있어요. 마치 카멜레온처럼요.”
  “조지, 당신이 옳은 것 같아요. 이제는 콜터가 입은 티셔츠 색깔과 비슷한 푸른색으로 바뀌고 있소.”
  “어서 오세요!”
  콜터가 소리쳤다.
  “계속 이렇게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구요. 이놈이 필요 없으세요?”
  “물론 필요하지.”
  필쳐 박사가 말했다.
  “하지만 그걸로 뭘 연구하지?”
  뾰족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들은 일단 RV로 동물을 데리고 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짐승은 몸부림쳤다. 그들은 프시타코사우루스를 침대가 놓여 있는 차 뒤칸에 넣고 문을 닫았다. 그들은 매트리스로 벽을 만들어 그 안쪽에 프시타코사우루스를 넣었다. 프시타코사우루스는 바닥에 내리자마자 이리저리 뛰었다. 짐승은 두 뒷다리로 서서 도망칠 틈만 찾았다. 하지만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매트리스를 뛰어넘는 길밖에 없었고, 감시자는 네 명이나 되었다. 프시타코사우루스는 탈출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겁에 질린 것 같았다.
  “가엷게도 겁먹은 것 같아요.”
  피트라가 말했다.
  “풀어 주면 안될까요?”
  “아직은 안돼.”
  필쳐 박사가 말했다.
  “연구해 봐야지. 오늘밤이면 충분해. 그럼 아침에 풀어 주도록 하지.”
  작은 동물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자 피트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먹을 걸 주면 어떨까요?”
  피트라가 제안했다.
  쿰 박사는 과일과 달걀을 내밀었고 콜터는 복숭아를 가져왔다. 그들은 과일을 프시타코사우루스에게 굴려 보냈지만 짐승은 못 본 체하고 도망갈 궁리만 했다.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콜터가 부탁했다.
  “프시타코사우루스일세.”
  쿰 박사가 대답했다.
  “그럼, 이제 저 동물을 시드라고 부르죠.”
  콜터가 제안했다.
  “그런데 어떻게 전에는 저런 동물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요?”
  필쳐 박사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건, 그들이 백악기 이후 멸종됐기 때문이지.”
  “백악기라면 선사 시대가 아니었나요?”
  콜터가 필쳐 박사에게 질문했다.
  “그럼 도대체 저게 여기에서 뭘하고 있는 거죠?”
  그 질문 하나가 그들을 뒤덮던 흥분을 가시게 했다. 공룡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쿰 박사와 필쳐 박사는 RV에 탔다. 콜터와 피트라도 따라서 차에 탔다. 콜터는 아무도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에 화가 났다. 하지만 무신경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콜터는 그룹에 적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고, 지금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있어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콜터를 제외한 세 사람은 뭔가 깊이 생각하다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은 누군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필쳐 박사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먼저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측하긴 했지만 이 일과는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피트라가 물었다.
  필쳐 박사는 피트라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필쳐 박사가 볼 때 피트라는 절대 잘못을 저지를 수 없었고, 그는 그녀의 아주 단순한 질문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설명해 주곤 했다.
  “좀 더 조사해 보아야 알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 초지에 나 있는 원시 형태의 식물들과 프시타코사우루스로 봐서는 지금 우리는 백악기 시대의 한 부분에 놓여 있는 것 같아. 일종의 일시적인 위치 이탈이지. 우리가 세운 가설과도 일치하고 있어. 하지만 나는 하늘에서 뭔가 떨어지는 거롤 예상하고 있었어. 대신 우리는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온 것들로 온통 둘러싸여 있군.”
  “또 다른 가능성도 있어요.”
  쿰 박사가 말을 이었다.
  “과거로 일부 이동해 간 현재에 놓여 있는 것일 수도 있죠.”
  필쳐 박사는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과거로 이동한 거라면 상당 부분의 땅덩이들도 우리와 함께 옮겨왔을 수도 있겠군요. 우리는 여기 오는 동안 무전을 칠 수 없었어요. 만약 과거로 거슬러 온 거라 해도 결국 우리한테는 별 차이가 없어요. 만약 백악기 상태가 확산되고 있다면 다른 방법으로 전파를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체스터. 하지만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우리가 만약 백악기 중 한 부분에 와 있는 거라면, 그래서 야생의 생물들이 가득한 거라면 뒤바뀐 땅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백악기에요? 그보다 더 중용한 점은 웨인 부인과 어니 파웰은 어디에 있는 거죠?” 
  필쳐 박사가 그 질문에 대답하려는 순간 뭔가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렸다. 피트라가 매트리스 쪽으로 달려가더니 손짓으로 사람들을 불렀다. 가보니 프시타코사우루스가 복숭아씨를 물어뜯고 있었다. 복숭아는 껍질 하나 남아 있지 않았고 씨는 반쪽으로 잘려 있었다.
  “한입에 먹어 치웠잖아.”
  콜터가 말했다.
  “네 손가락을 물어뜯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
  피트라는 그렇게 말하고 복숭아를 가지러 냉장고로 갔다.
  “이리 와, 시드. 어서 항복해.”
  피트라가 공룡에게 복숭아를 던져 주었다.
  겁에 질린 시드는 구석에서 주위를 살피는 것 같더니 바닥에 묽은 회색 똥더미를 남겨 놓고는 복숭아가 있는 쪼으로 달려왔다. 시드는 복숭아를 입에 물고 깨끗한 장소로 가더니 꼬리를 벽에 대고 앞발로 복숭아를 쥔 채 복숭아를 먹기 시작했다. 복숭아를 다 먹은 다음에는 씨를 반으로 잘랐다. 공룡은 씨를 조그맣게 쪼개더니 그중 2개를 먹고 나머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제 시드는 무서움을 덜 타는 것 같았고 구석에서 자신을 가두어 놓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콜터가 가방에서 빵 한 조각을 꺼내어 딱딱해진 껍질을 잘라 내고 구석으로 던져 주었지만 시드는 망설이며 주위만 살폈다.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자 시드는 빵을 와락 움켜쥐고는 덥석 베어 물었다. 콜터가 두 번째로 빵을 던져 주자 시드는 망설이지 않고 먹었다.
  “저것 좀 보세요, 체스터.”
  쿰 박사가 말했다.
  “시드가 주변 색과 비슷하게 색깔을 바꾸고 있어요.”
  “당신이 옳은 것 같군요, 조지. 백악기 시대에 살았던 것 가운데 몇 종이나 보호색을 바꿀 수 있었죠?”
  “저런, 똥 냄새가 지독하군.”
  콜터가 불평했다.
  “종이로 닦아 내야겠어요.”
  필쳐 박사가 움찔하며 입을 열려고 하는데 피트라가 끼어들었다.
  “바깥을 보세요! 뭔가 달려가요.”
  그들은 모두 RV 밖으로 나와 초원을 바라보았다.
  “저기, 저쪽이에요!”
  쿰 박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울타리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수풀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녹색의 반원형 머리로 마치 몸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동물들이 덤불 근처로 다가서는 것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쿰 박사의 다리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시드였다. 콜터가 시드를 쫓아가자 필쳐 박사는 그를 불렀다.
  “신경 쓰지 말게, 콜터. 이제야 분명히 알았네. 프시타코사우루스는 한 마리만 있는 게 아니야.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거야.” 
  필쳐 박사가 눈앞의 정글을 가리켰다.
  “저 정글을 찬찬히 조사해야겠어.”
  “웨인 부인과 어니 파웰도 찾아보는 거죠?”
  피트라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피트라, 물론이야. 난 그렇게 무감각한 사람이 아니야.”
  피트라가 대답 대신 그의 팔을 꼭 붙잡았다. 얼굴이 붉어진 필쳐 박사가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자, 이제 캠프를 만들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정글로 바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해. 시드보다 훨씬 큰 동물들이 있을지도 몰라.”
  그들은 RV를 운전하여 주변의 땅을 평평하게 만든 다음 차양을 치고 이동 탁자와 의자를 놓았다. 그들은 기둥 위에 방수 천을 올려 놓고 줄과 말뚝으로 단단히 고정을 시켜 차양을 만들었다. 콜터와 피트라는 장작용 나무를 구하러 키 큰 수풀 사이를 헤치고 다녔다.
  “피트라, 이것 좀 받아.”
  피트라가 돌아보니 콜터가 수풀 속에서 큰 가지를 집어들고 있었다. 아주 큰 나무에 붙어 있던 가지 같았다. 콜터는 가지를 앞뒤로 흔들며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며칠 동안은 충분히 쓸 수 있들 것 같았다. 콜터는 가지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나무를 어깨에 멨다. 그가 가지를 메고 일어서는데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고, 콜터는 가지를 놓고 풀 속으로 몸을 날렸다.
  “콜터, 뭐야?”
  피트라가 소리쳤다. 
  “이리 와 봐, 이것 좀 봐.”
  콜터가 웬 동물의 꼬리를 잡고 있었다. 피트라는 천천히 다가섰다. 그것은 도마뱀의 일종으로 짙은 녹색에 길이는 20센티미터쯤 되었다. 네 다리는 매우 길었고 앞다리와 뒷다리의 길이는 거의 같았다. 목은 매우 가늘고 약해 보였고, 코끝에는 두 개의 커다랗고 긴 콧구멍이 나 있었다. 이빨은 나지 않았지만 흰 잇몸을 드러내며 콜터를 물려고 했다.
  “이게 새끼인가, 아닌가?”
  “아마 작은 공룡 종류일 거야. 필쳐 박사님께 가져가자.”
  콜터가 공룡을 캠프로 데리고 오는 동안 피트라는 먼저 달려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모두들 다시 흥분했다. 필쳐 박사는 새로 발견한 공룡을 다시 RV 뒷좌석에 넣고 매트리스로 막았다. 콜터가 공룡을 바닥에 살짝 내려놓자마자 공룡은 출구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음, 체스터, 아주 놀랍군요. 지역적 동물군이 아닌 게 분명한데 내가 몰랐어요.”
  “마찬가지에요, 조지. 무사우루스 같지 않아요?”
  “이 종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다 자란 무사우루스일까요?”
  “만약 무사우루스가 맞다면 그럴 거에요. 그 종은 다 자라도 20센티미터에서 25센티미터 정도밖에는 안돼요.”
  “무스라니, 이렇게 작은 공룡한테는 우스운 이름인데요.”
  콜터가 말했다. 
  “마음에 들어.”
  필쳐 박사는 머리를 저었다. 콜터의 철없는 태도와 모든 종류에 별명을 붙이는 행동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사우루스는 나갈 통로를 찾느라 여기저기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행동을 멈추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공룡의 옆구리가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공룡이 앞으로 달려오더니 세 번만에 매트리스를 뛰어넘어 피트라의 바지 위로 떨어졌다. 피트라가 비명을 질렀고, 쿰 박사와 콜터가 공룡을 붙잡았다. 하지만 공룡은 몸놀림이 아주 빨랐고, 피트라의 셔츠 속으로 들어가 기어다녔다. 공룡의 날카로운 발톱이 배를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공룡을 잡기 위해 배 위를 손바닥으로 눌렀지만 공룡이 다칠까봐 힘을 주지 못했다.
  “아야, 마구 할퀴고 있어요. 이것 좀 빼 주세요. 등으로 갔어요.”  
  쿰 박사가 피트라의 셔츠 속으로 손을 넣었다가 맨살에 닿자 멈칫했다. 피트라는 공룡이 기어오르며 살을 할퀴는 바람에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깨로 올라가요! 모두 조심하세요!”
  피트라가 소리치며 다른 사람들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더니 셔츠를 머리 위로 끌어올렸다. 갑자기 모습이 드러나자 공룡은 꼼짝하지 않더니 가슴 아래로 뛰었다. 그때 필쳐 박사가 손을 뻗었고, 피트라의 가슴 사이에서 공룡을 집어들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박사는 공룡을 잡았다. 피트라가 셔츠를 얼른 내리고 보니 얼굴이 빨개지지 않은 것은 오직 콜터뿐이었다. 공룡이 필쳐 박사의 엄지손가락을 깨무는 바람에 박사는 공룡을 놓쳤다. 몸이 다시 자유로워지자 공룡은 벽과 캐비닛 위로 기어올라갔다.
  “조그만 게 피트라를 여기저기 더듬고 다니고, 저보다 백 배는 큰 사람들을 놀리다니. 끌어내릴까요?”
  “아냐.”
  필쳐 박사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네. 문을 열어 놓고 밖에서 기다려 보지. 아마 스스로 내려올 거야.”
  “조금 더 연구해 보셔야 되지 않나요?”
  콜터가 히죽거리며 물었다.
  그들은 남은 오후 시간동안 밖에서 작업을 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도 무스는 캐비닛 위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무스를 잡으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쿰 박사가 손가락을 물렸다. 마침내 그들은 공룡을 잡는 것을 포기했다.
  그들은 밖에서 요리하면 다른 짐승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쿰 박사가 차 안에서 미트볼을 곁들인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그들은 RV 안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저녁을 반쯤 먹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피트라가 일어나서 창 밖을 내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시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피트라가 문을 천천히 열었고, 그들은 모두 호기심에 어려 밖을 내다보았다. 그녀가 문을 닫으려고 하는 순간 작은 공룡 한 마리가 눈에 보이는가 싶더니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후 다른 공룡 한 마리가 나타났다. 바로 시드였다. 저녁을 먹으러 오면서 친구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23. 고속도로 위에 생긴 산
  랭 농장에 가까이 가자 친구인 데이빗이 들판에서 일하는 모습이 보였다. 집 근처에 있던 그의 가족들은 나를 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데이빗이 나를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갑자기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랭 일가와 함께 그를 찾아보았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오거스트 펙 한사, 1880년 9월 23일
  오레곤주 그랜츠 패스 북부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태평양 표준시)
  눈앞의 바위 더미들을 가리키는 걸로는 약간 과장되었지만 그건 틀림없는 산이었다. 테리는 마치 쏟아 부은 것처럼 도로 중간에 쌓여 있는 엄청난 바위들을 바라보았다. 근처 언덕 위에 쌓인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산사태로 인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식물들도 이상했다. 바위를 따라 풀이 듬성듬성 나 있었는데 주변의 식물군들과 많이 달라 보였다. 산사태 때문에 작은 풀들이 밑으로 깔렸나?
  테리와 엘렌은 오레곤 동굴을 떠난 이후 의심이 많아졌다. 오는 동안 여행객들로부터 산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지만 믿지 않았었다. 그들은 그랜츠 패스 북쪽으로 조금 올라갔을 때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는 차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자동차는 점점 뜸해졌고 결국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바로 교통 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차는 전혀 움직이지 못했고, 북쪽으로 향하던 사람들은 차를 두고 임시 주차장이 되다시피 한 도로를 걸어갔ㄷ. 테리와 엘렌이 2킬로미터쯤 걸었을 때 눈앞에 산이 나타났다. 백여 명의 사람들이 산앞에 무리 지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진을 찍거나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을 하고 있었다. 부모들은 아이를 돌 위에 세워 놓고 사지을 찍거나 돌이 없는 곳에서 가능한 많이 이 장관을 담으려고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바위를 타거나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테리와 엘렌은 다른 사람들처럼 떠들 수 없었다. 테리처럼 이 사태를 걱정하는 사람은 얼마 눈에 띄지 않았다. 이건 단지 400킬로미터 짜리 도로가 사라졌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테리가 모르는 더 큰 사건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이다.
  테리는 고속도로의 끝부분에 쭈그리고 앉아 잘려 나간 단면을 살펴보았다. 도로는 아주 날카로운 것으로 자른 것처럼 깨끗이 끊어져 있었다. 도로 한쪽에는 4차선 도로가 있는데 그 반대편으로는 아무렇게 자란 풀들이 바위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테리는 바위산 주변으로 길이 나 있는지 둘러보았다. 차를 몰고 그 근처까지 갈 수는 없겠지만 도대체 이 산이 얼마나 큰지 궁금했다. 엘렌에게 걸어가보자고 말하려는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들어보니 앞에 빌 콘래드가 서 있었다. 
  “반대 방향으로는 길이 남아있는지 궁금하신가 본데, 길은 있어요. 얼마나 멀리 가시는지는 모르지만요. 남쪽으로 내려가던 트럭 운전사와 여행객을이 산사태로 5번 도로가 막혔다고 제보한 이후 무전 통신은 그 이야기들로 떠들썩해요.”
  “제 마음을 정확히 읽으셨군요. 그럼 다음 질문도 맞춰 보시죠.”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 지도 모르구요.” 
  테리는 웃으며 고래를 끄덕였다. 빌도 자신만큼이나 어리둥절해 하는 것이 분명했다. 빌 콘래드는 동굴 안에서는 잘 훈련받은 군인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하지만 거짓말같이 고속도로로 중간에 나타난 장애물 앞에서는 그도 테리나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게 없었다. 엘렌은 앤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오래된 친구들처럼 이야기하며 깔깔대고 있었다.
  “동굴 안에 있던 그 청년을 생각하고 계시죠, 안 그렇습니까?”
  빌이 말했다.
  “혹시 이 일과 청년이 말하던 그 사건이 무슨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하시는 게 아닙니까?”
  빌 콘래드가 그 말을 꺼내기 전까지 테리는 그 둘을 연결해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는 두 사건 사이의 관계까지 생각해야 했다.
  “모르겠어요. 그 청년은 망상에 시달리고 있었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꽤 구체적으로 말했어요.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했죠.”
  “그의 누나는 하늘에서 뭔가 떨어진다고 말했어요.”
  “이게 떨어졌을 리... 불가능해요.”
  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테리는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을 써 보기로 하였다.
  “그 청년은 아주 전형적ㅇ니 편집증 증세를 보였습니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을, 자신만 이해할 수 있는 비밀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을 사회에 잘 적응해 나가며 살아가기도 하죠. 하지만 그들은 환상 속에서 살고 있고, 그들의 세계관은 그들 자신에게만 이해되는 거죠.”
  빌은 테리의 진단에 시큰둥했다.
  “정신과 의사이십니까?”
  “심리학자입니다.”
  “음, 만약 어떤 사람이 세상에 종말이 올 거라고 믿었는데 세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건 환상이겠죠. 하지만 종말을 믿는데 정말 현실로 나타났다면 그건 뭐죠? 그건 망상이 아니라 예언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멸망하지는 않았잖습니까.”
  “그렇지만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 저걸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박사?”
  빌이 머리로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테리는 빌이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는 걸 인정했다.
  “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안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테리가 말했다.
  “그저 두 사건 사이에 필연성이 존재하는 건 아니라고 말한 것뿐이에요.”
  “우연의 일치라기엔 참 이상해요.”
  빌은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세 사람은 한참을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잠시 후 분위기는 심각하게 변했다. 그들이 테리 쪽으로 다가왔다.
  빌이 말했다.
  “우리는 미드포드로 다시 돌아가 그 청녕을 찾아볼 겁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빌, 그 청년은 망상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씀드렸죠. 정말 아는게 있다고 해도 그와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을 겁니다.”
  “문제없어요. 정신과 의사를 모시고 가잖아요.”
  빌이 윙크를 하며 짓궂게 웃었다.
  “심리학자요.”
  “뭐든간에요.”
  “만약 그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를 잡기 위해 해군을 동원해야 할거요.”
  테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공군이죠.”
  “뭐든간에요.”
  “어서요, 여보, 같이 가요.”
  엘렌이 말했다.
  “어차피 이 길은 막혔으니 다른 길을 찾아야 하잖하요.”  
  아내의 말이 옳았다. 여기에 있을 이유도 없었고 그들이 돌아갈 길도 없었다. 테리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고, 그들은 차가 있는 쪽으로 내려갔다. 빌이 몰던 차는 산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테리의 차에 올라탔다.  
  빌 콘래드는 경찰서에 도착한 후 다시 한 번 진가를 발휘했다. 방분객 안내와 전화 교환을 하는 캐런이란 여자는 그 청년의 이름이 케니 랜덜이며 오레곤 공과대학에 다니고 있고, 경찰서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이 외에는 말하기를 꺼려했는데 빌이 권위적인 태도로 군인 신분증을 꺼내 보이자 얼른 케니가 인근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병원 관계자들은 쉽게 협조했고, 빌과 테리는 케니의 병실 문 밖에서 경찰과 의사들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찰은 대도시에서 전근 온 사람이었다. 그는 시카고 경찰에서 포틀랜드로 갔다가 다시 미드포드로 온 사람이었다. 그는 잘 훈련되고 직업이 정신이 투철한 사람으로, 빌의 은근한 위협에도 눈 깜짝하지 않았다.  
  “경관, 이건 공무요. 5번 도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가ㅗ 있잖소? 공군은 두 사건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보고 있소.”  
  엄포를 놓는 빌의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테리는 그가 공군에서 무슨 일을 담당할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 사건에 대해 잘 모릅니다.”
  경찰은 굽히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FBI가 용의자를 이송해 갈 때까지 구금하고 있을 뿐이오. 나에게는 당신을 출입시킬 권한이 없어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의사가 끼어들었다.
  “심한 착란 상태에 빠져 있어서 진정제를 주사했습니다. 몇 시간 동안 의식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깨어나도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는 질문에 전혀 대답을 하지 않고 있어요.”  
  “마비 상태인가요?” 
  테리가 물었다.
  “아직은요, 하지만 진행 중입니다.”
  빌은 계속 경찰관과 입씨름을 벌였고, 결국 그의 입에서 ‘당신은 면회가 가능할 지도 모르겠군요’ 라는 말이 나왔다. 빌은 굳은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테리는 뭘 해야 할지 몰라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엘렌은 로비에서 앤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테리는 아내를 불러 101번 고속도로를 탄 다음 오레곤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가자는 말을 하려고 했다. 5번 도로보다는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새로 생긴 산을 우회할 필요는 없었다. 테리는 마무리지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은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산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몰라도 그는 산을 움직일 수도 없을뿐더러 어떻게 그걸 넘어가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케니 랜덜에 관해서는 약간이라도 뭔가 할 수 있을 것이다. 과대 망상이 수반된 정신 분열증은 보통 그가 다루는 분야는 아니었지만 병원에서의 실습 기간동안 상당수의 정신병 환자를 보았었다. 하지만 케니 랜들의 문제를 처리하는데 테리보다 유능한 사람들은 많았다. 테리가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거의 굳혔을 때 빌이 ‘가시죠?’ 라고 말했고, 테리는 마치 아파치 전사가 된 듯한 기분으오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앤지와 엘렌은 커피숍에서 기다리기로 했고, 빌과 테리는 케니의 기숙사를 조사하러 갔다.  테리가 생각할 때 케니 랜덜의 기숙사 방을 가장 쉽게 알아내는 방법은 기숙사 관리 담당자에게 물어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빌은 그렇게 하는 대신 다른 학생들에게 케니를 아는지 묻고 다녔다. 모든 학생들은 케니를 알고 있었고 빌과 테리가 케니에 대해 묻고 다니자 호기심을 보였다. 세 번만에 그들은 케니의 방을 알아냈다. 빌이 기숙사 측에 물어 보기를 꺼려한 이유는 그가 방문 앞에서 신용카드로 방문을 따면서 분명해졌다.
  “빌, 이건 무단 침입이예요.”
  “아뇨, 그저 방안에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왜 도둑처럼 이래야 되죠?”
  “학교측에서 우리를 들여보내 줄지 자신도 없고, 경찰이나 FBI가 곧 방을 폐쇠시킬 수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지금쯤 여기로 오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죠.”
  “만약 여기에서 누구를 만나면 어쩌죠?”
  “걱정 말아요. 내게는 살인에 대한 면책권이 있어요.”
  방은 테리의 아들 방과 거의 똑같았다. 침대는 어질러져 있었고 벗어 놓은 옷들이 침대와 바닥에 널려 있었다. 종이와 책더미가 방안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책상에는 많은 양의 책과 보고서를이 쌓여 있었고 그 가운데에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빌은 컴퓨터 앞에 앉더니 디스켓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테리는 마지못해 주위를 기웃거렸지만 뭔가 건질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옷장에는 책과 지저분한 옷이 가득했다. 방 한구석에 타자기 상자가 처박혀 있었다. 생각했던 대로 상자에는 타자기와 리본 카트리지 여분 2개 외에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책체복들을 잠깐 훑어보았다. 책은 대부분 조직 심리학, 시스템 이론, 인사 관리, 역사, 문학에 관한 것이었고, 놀라울 정도로 많은 지형학 관련 서적에는 주요 부분에 형광펜 표시가 되어 있었다.
  테리도 전공 서적에 그런 식으로 표시를 했었는데 아직도 대학생들의 공부하는 방법은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책들은 과학에 과련된 것들로 《양자론》,《세로운 물리학》,《새 시대의 물리학》,《뉴튼의 우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등의 물리학 관련 서적이 많았다. 자기학, 초전도력 그리고 핵융합과 분열에 관한 책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케니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시간’에 관련된 분야 같았다. 제목이 시간이라는 단어가 들어 간 책이 최소한 십여 권은 될 것 같았다. 뭐지? 테리는 궁금해졌다. 이제 케니 랜덜이 경영학과 물리학 그리고 시간에 관련된 책을 즐겨 보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대학생이 왜 낯선 사람들을 동굴에 억류했는지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 했다. 동시에 5번 고속도로 한가운데에 어떻게 산이 생긴 것인지도 설명하지 못했다.
  테리는 다시 산을 떠올렸고 그것이 정말 자연적으로 생긴 것일까 의심했다. 그는 《통합 시간 이론》이라는 베목의 책을 집어들어 내용을 대충 훑어보았다. 불안함을 느끼며 테리는 기억을 더듬어 케니 랜덜과 그의 누가가 말했었던, 뭐가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했던 거을 떠올렸다. 하지만 왜 시간에 관한 책일까? 지형학이 갑자기 생긴 산을 설명하기에는 더 적당하지 않을까?
  빌은 아직도 케니의 컴퓨터에 내장된 프로그램들을 검색하고 있었다. 그래서 테리는 케니의 책상 위에 놓인 책들을 살펴보았다. 《믿을 수 없는 사실》,《미지의 세계》,《과학과 불가사리의》 등의 제목의 책이 있었다. 그 제목들을 보자 사실과 허구를 적당히 섞어 만드는 타블로이드판 신문들이 떠올랐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이란 책을 뒤적이다가 유령에 관한 장에서 친구의 충고를 무스하고 유령이 나온다는 집을 산 사람의 이야기를 발견했다. 어느 날 밤 그 사람은 잠을 자다가 누군가 자기의 목덜미에 숨을 내뿜는 느낌에 깨어났다. 남자가 몸을 돌려보니 바로 옆에 완전히 부패한 여자 시체가 누워 있었고, 바로 그 시체가 남자의 얼굴에 악취 나는 김을 뿜어 대는 것이었다. 혼비백산한 남자는 집을 뛰져나왔다.
  다른 이야기들도 다 비슷했기 때문에 테리는 책을 다시 책꽂이에 꽂으려고 했는데, 그 순간 책에서 분홍색 형광펜으로 표시된 부분이 눈에 띄었다.
  소위 ‘횃불 인간’이라는 부분으로 1905년 2월 5일 한 여자가 방안의 의자의 앉은 채 불에 타 죽은 사건이 나와 있었다. 그녀와 그녀가 앉았던 의자는 완전히 숯덩이로 변했다. 의자가 놓였던 마루는 사방 50센티미터씩 불탔지만 방안의 다른 부분은 말짱했다. 벽에도 그을음 하나 없었다. 그 여자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었고, 책은 그 사건을 자연적으로 발생한 인간 연소 현상으로 결론 내리고 있었다. 책에는 1725년부터 1977년 사이에 발생한 그런 류의 사건들이 더 나와 있었다. 마지막으로 발생했던 것은 1905년에 벌어진 사건으로 한 여자가 머리와 다리 하나 외에는 몽땅 불에 탄 채 멜레비전 앞에서 발견되었다. 그녀 외에는 모든 것이 멀쩡했다.
  테리는 책장을 넘겨 ‘멸종?’이란 부분을 찾아냈다. 이 장에는 남미의 한 해안에서 낚시꾼의 그물에 걸린 실라칸스(중생대 어류의 일종:옭긴이) 에 대한 이야기나 나와 있었다. 60킬로그램이나 나가고 비늘로 온통 뒤덮인 실라칸스는 반은 물고기이고 반은 육상 동물로 7천5백만 년 전에 멸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테리는 표시가 되어 있는 부분들을 찾다가 사스콰치(미국 북부에 있다고 전해지는 원시인:옮긴이)가 태평양 북서쪽과 티벳에서 발견 됐다는 내용과 아프리카에 공룡이 나타났다는 내용을 하늘에서 떨어진 것들에 관한 이야기도 꽤 많은 페이지를 차치하고 있었다. 맑은 하늘에서 떨어진 물고기, 개구리, 곡식, 얼음 조각 그리고 암석들이 사람들과 짐을 강타했다고 나와있었다.
  1861년 2월 16일 아침 싱가폴에서는 하늘에서 물고기가 쏟아져 중국인들과 말레이인들이 바구니에 수십 킬로그램의 물고기들을 담아 간 일이 있었다. 1920년, 1941년, 1968년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있었고, 1975년 인도의 카밀라에서도 하늘에서 정어리만한 물고 기들이 떨어졌었다. 기록에 의하면 물고기는 모두 말린 것들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이상한 사건은 이집트의 사막에서 작업을 하던 인류학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난장판이 되 캠츠에서 시체오 발견되었다. 익사가 사인이었다. 누구도 그들이 어떻게 사막한가운데에서 익사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그들이 습격 당한 흔적은 전혀 없었고, 당연히 사람이 물에 빠져 죽을 정도의 많은 물도 없었다.
  테리는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그러한 내용들에 흥미를 느껴왔고 노늘날에는 공포 영화 등에서 지주 다루어지고 있었다. 평법한 죽음은 그렇지 않지만 기이하게 죽는 모습을 사람들을 흥분시킨다.
  이야기들이 재미있기는 했지만 테리는 그 속에서 어떤 상호 연관성도 발견하지 못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연소 현상과 원시인 그리고 선사 시대의 어류 등을 연결짓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테리는 책을 제자리에 놓고 논문과 다른 책들을 살펴보았다. 컴퓨터 옆에 놓인 신문 스크랩 파일에는 조금 전에 책에서 읽은 것들과 비슷한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처은 기사는 시애틀에 사는 한 여자에 관한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그녀가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쉬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펑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놀란 그녀가 뒤를 돌아다보니 그 남자의 몸에 불이 붙어 있었다. 마치 횃불이 된 것처럼 그 남자의 몸은 불길에 쌓여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남자는 재로 변해 버렸다. 테리는 방안에 불에 타 죽은 채 발견된 노부인의 이야기를 바로 기억해냈지만 아직까지 이 사건들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다음에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스크랩이었다. 공원에 놀러 갔던 사람들이 갑작스런 꽃 우박을 경헙했다. 몇 명이 아니라 수천 명의 사람들 위로 떨어진 것이다. 억수같이 떨어지는 꽃더미에 한 여인과 아이가 묻혀 버렸다.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때 빌의 목소리가 테리의 상념을 깨뜨렸다.
  “통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빌은 컴퓨터를 분리하여 모니터와 키보드 그리고 마우스를 상자에 넣고 있었다. 자리가 모자라 본체는 상자 위에 올려놓핬다. 테리는 빌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거기 서 있지만 말고 뭔가 찾아보세요.”
  빌의 말에 반대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테리는 스크랩들과 책들을 침대 시트로 쌌다. 빌도 테리를 따라 침대 시트와 담요로 배낭을 만들어 물건들을 담았다. 책을 모두 담았을 때 테리는 책꽂이 끝에 놓인 항아리를 보게 되었다. 그는 항아리를 듣고 흔들어 보았다. 항아리에는 마른 옥수수 알이 가득 들어 있었다. 
  짐을 챙겨 방을 나설 때 테리는 죄책감을 느꼈지만 빌은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테리는 그들이 케니 랜덜의 물건들을 강탈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앤지와 엘렌은 커피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엘렌의 얼굴을 보자 테리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집에 가야 돼요. 여보, 존을 찾아야 돼요.”
  “무슨 말이야? 존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아무일 없겠지만, 아니 모르겠어요 포틀랜드가 사라졌대요.”
  24. 인물 파일  
  그는 아주 깨끗한 유니폼을 입고 이상하게 생긴 총을 가진 채 멕시코 시의 한 광장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했고, 그곳이 필리핀의 마닐라라고 여겼다. 그는 그날 아침 배치 명령을 받았다면서 총독 관저를 찾았다. 우리는 나중에야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어떻게 그가 필리핀에서 갑자기 멕시코로 오게 되었는지 지금까지 아무도 아지 못한다. 
  1593년 10월, 멕시코 시
  위싱턴 D.C.  일요일, 오후 1시 40분 (서부 표준시)
  엘리자베스의 조직적인 천성은 늘 대통령이 지시한 것보다 훨씬 많은 부분까지 챙겼기 때문에 닉은 그녀가 자신에게 일정표를 보여주었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단지 엘리자베스가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이 약간 짜증스러웠을 뿐이었다.
  그는 프레스넷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프레스넷은 고어 박사의 작품이었다. 그의 강점 중의 하나는 조직력이었다. 그는 그의 꿈을 실현시키는데 필요한 지원금을 의회로부터 받아냈다. 백악관에 있다는 이점과 지원금을 이용하여 그는 모든 분야의 과학자들을 채용하여 ‘대통령 과학 자문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위원회에 소속된 과학자들은 최신의 컴퓨터 장비와 백악관 보유 자료를 이용하는 등 엘리트 그룹으로서의 특권을 누렸다. 그들은 사실상 제한없이 자료를 검색 할 수 있었고 고성능 네트워크를 통해 전국의 동료 과학자들과 자유로이 정보를 교환할 수 있었다.
  고어 박사는 이번 사태와 같은 일로 프레스넷이 활용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거시다. 전산망의 상당 부분은 파괴되었고, 전산망에 접속하는 이들은 새로운 정보를 찾고 있었다.
  프레스넷에서는 물리적인 변화가 있다는 보고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그것은 이번 일이 무차별적으로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닉은 두 명의 조수에게 피해 면적을 산정하게 했다. 일단 자료만 충분해지면 사건의 패턴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닉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닉이 알아낸 유일한 사실은 아무런 유형없이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를 포함해 세계 각지에서 유사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자료들이 속속 도착했다. CIA 국장은 닉에게 ‘확인된 자료들만이 신뢰할 수 있으며 이 자료들은 대통령께 보고될 예정임’이라는 메모가 첨부된 자료들을 보내왔다. 닉은 ‘확인되었다’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니긍ㄴ 정보 누설에 관한 행정부의 정책을 잘 알고 있었고 국가 안보 회의에서 논의된 사항들의 기밀 유지에 대해 충분히 들어왔다. 메모는 CIA 국장의 서명과 ‘공룡에 관해서는 아직 확인된 바 없습니다’라는 내용으로 끝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매 시간마다 닉을 찾아와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그가 해결책을 찾아냈는지 물었다. 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인터뷰 일정을 잡아 놓고 있었다. 명단에 따르면 지각의 대변동에 대한 예언을 한 세 명의 영매들과 종말을 주장하는 두 명의 열성 종교인 그리고 국회 의사당 앞에서 옷을 벗고 수음을 하다가 체포된 한 남자가 면담 대상자들이었다. 마지막 인터뷰 요청자는 오레곤의 한 동굴에서 관광객들을 볼모로 인질극을 벌이다가 체포된 대학생이었다. 그도 역시 종말론에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닉은 엘리자베스가 넘겨 준 인터뷰 요청자들의 개인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자료를 훑어보던 닉의 입술 사이에서 휘파람이 흘러나왔다. 영매들에 대한 자료는 공군에서 팩스로 보낸 것까지 해서 아주 두툼했다.
  ‘왜 공군에서 심령 현상에 관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는 걸까?’ 닉은 궁금했다. 열성 종교인에 대해서는 FBI 자료가, 수음을 하다가 체포된 남자에 대해서는 경찰이 작성한 자료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학생 인물 파일에는 단지 어떤 공군 대령과 심리학자가 그를 오레곤 동굴에서 끌어냈다는 메모만 되어 있었다. 닉은 그 대학생 파일을 맨 밑에 두고 ‘마담 실비아’를 만날 준비를 했다.
  마담 실비아는 백악관에 왔다는 사실에 무척 들떠 있었다. 마담 실비아의 파일에는 그녀가 슈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타블로이드판 신문에 기사를 제공하고 있다는 설명이 있었다. 닉은 백악관에 왔다는 사실이 신문 판매 부수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셨다구요?”
  닉이 부드럽게 물었다.
  “종말이 아니라 대변화를 예언한 겁니다.”
  “세상이 끝난다고 말씀하신 걸로 아는데요.”
  “그건 당시들이 이해하고 있는 세상이에요. 나는 보다 원대한 세계의 일부분이에요.”
  마담 실비아가 거만하게 말했다.
  “이 세계는 보다 원대한 세계의 일부죠. 나는 이 우주를 구성하는 씨줄과 날줄처럼 본질적으로 위대한 의식의 한 부분이에요.”
  “그 의식이 미래를 볼 수 있는 힘을 주는 겁니까?”
  “그렇게밖에 이해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의 예언이 모두 적중한 건 아니에요. 안 그런가요?”
  “그래요. 나의 육체적 자아가 시야를 가릴 때도 있어요. 육신으로부터 정신이 자유로워질 때 완전하게 볼 수 있어요.”
  닉은 파일 속에서 3개월 전 마담 실비아가 향후 6개월 동안 벌어질 사건들을 예언한 신문 스크랩을 찾아냈다.
  ‘유례없는 지진과 홍수 그리고 폭풍이 세상을 휩쓸 것이다.’
  “이와 관련해 좀 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닉이 정중하게 물었다.
  “뉴욕이 사라집니다. 홍수와 사태, 태풍, 그리고 엄청난 폭풍이 몰아칠 거에요. 이런 것들은 대변동이 시작되는 징조로 벌써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닉은 뉴욕이 사라진다는 그녀의 말에 무척 놀랐다. 닉이 라디오에서 들은 것은 단지 정전 소식뿐이었다. 그는 뉴스를 들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원인이 뭐죠? 왜 이런 일들이 한꺼번에 발생하는 건지, 또 하필이면 지금인가요?”
  “그런 보다 원대한 계획의 일부에요. 그걸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요.”
  닉은 파일을 더 뒤적였다.
  “대변동을 예언한 것이 지난 3년간 여섯 번 ... 아니, 일곱 번이군요. 최근 5년 간 당신을 세 번이나 외계인과의 접촉에 대해 이야기했고 대통령 암살 사건을 두 차례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암을 치료될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네 번 말씀하셨군요.”
  “아까도 말했지만 미래르 보는 능력이 가끔 가려질 때도 있어요.”
  “신체적인 문제인가요?”
  “그래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들어온 사람은 열성 종교인으로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바싹 마른 남자로 어둡고 무감각해 보이는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러브씨? 본명이십니까?”
  “그건 예수님이 죄를 사해 주시면서 내려 주신 이름입니다.”
  그가 중얼거렸다.
  “좋은 이름이군요. 왜 새상이 멸망할 거라 생각하시죠?”
  “내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사건이 뭔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세상이 멸망한 건 아닙니다.”
  닉이 반박했다.
  “신은 이미 시작하셨습니다.”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나는 불과 유황 지옥을 보았어요. 신의 분노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걸 보았어요. 돌 하나 남아나지 않을 겁니다. 생물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그의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심판하리라...”
  그는 과장된 몸짓을 하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경비?”
  닉이 몸을 돌렸다.
  “...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고티에씨는 마담 실비아나 러브씨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는 어떤 것도 심각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통통한 얼굴에 억지로 웃고 있었고, 거의 머리가 다 벗겨져 이마에는 한 줌의 금발만 가지런히 빗겨져 있는 땅딸막한 체격의 남자였다.
  “세상의 종말을 예언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닉이 말하지마자 그는 웃기 시작했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나는 그걸 모두 내-보-였-죠. 바로 국회 의사당 계단 위에서요.”
  닉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신의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예언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겁니다.”
  “난 세상에 종말이 올 거라고 말한 적 없어요. 나는 뭔가 일어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일어난다는 것이 뭐죠?”
  “정부는 우리를 착취하고 있어요. 자, 당신한테 보여주겠소.”
  그는 바지 지퍼를 내리더니 손으로 바지 안쪽을 더듬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고티에씨. 보여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남자는 위를 바라보더니 킬킬거렸다.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 잠시만 시간을 주시죠.”
  닉이 방을 나가자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수음을 하기 시작했다. 닉은 문을 닫자마자 경비병에게 지시했다.
  “엘리자베스 호오손에게 즉시 이리로 와서 안에 있는 남자를 만나 보라고 전해 주시오.”
  25. 존과 커비
  여호와께서 그들을 온 세상에 흩어 버리시므로 그들은 성 쌓기를 중단하였다. 이런 이유로 바벨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창세기 11장 8-9절
  오레곤주 포틀랜드가 있던 곳에 생긴 숲 일요일, 오후 4시 40분 (태평양 표준시)
  커비와 존은 리프먼이 사라진 지점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조용히 리프먼을 불렀다. 그들은 어두워질 때까지 리프먼을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커비, 공룡이 리프먼을 잡아 먹었을까?”
  “절대 그럴 리 없어! 리프먼은 아냐. 게다가 공룡들은 우리 뒤를 쫓고 있었잖아.”
  “그럼 어디로 간 거지? 리프먼이 우리를 찾지 않을까?”
  커비는 대꾸없이 잔디밭 위에 털썩 주저앉아 배낭과 활을 내려놓았다. 존은 커비도 자신처럼 리프먼을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커비? 그놈들은 공룡이었다구... 실제로 공룡을 본 적은 없지만 그건 틀
림없이 공룡이었어.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뭐겠어?”
  “노아의 까마귀.”
  커비가 대답했다.
  “전에는 그렇게 불리웠는데 우리 교회 사람들은 아직도 그 이름으로 불러. 아주 오래된 이름이야. 공룡들은 아주 큰 새의 발자국처럼 보이는 세 개의 발자국을 남겨. 노아의 홍수로 큰 새들이 모두 멸종된 이후 사람들은 그런 발자국을 남기는 새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했고, 그 후로는 공룡을 노아의 까마귀라고 부르는 거래. 사람들이 공룡의 뼈를 발견한 이후에도 많은 신자들은 그게 공룡 뼈라는 걸 믿지 않았고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야. 이에 사람들이 뭐라 말할까?”
  커비는 상념에 잠기더니 막대기를 잘게 조각내어 수풀 속으로 던졌다. 존은 공룡이 나타났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온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가 가족과 리프먼을 떠올렸다.
  “나는 계속 갈 거야, 존.”
  이윽고 커비가 말했다.
  “리프먼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어. 어쩌면 리프먼은 벌써 포틀랜드에 도착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엄마와 아버지를 찾아야 해. 아버지는 무슨 일인지 모두 아실 거야... 아마 이번 일을 설명하실 수 있을 거야... 노아의 까마귀도... 모든 것을 말씀해 주실 거야. 아버지한테는 이 모든 걸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그 순간 존은 만약 리프먼이 계속 가자고 했다면 두말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리프먼을 따라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망설이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해안의 별장으로 가라는 리프먼의 말이 더 낫게 생각되었다. 특히 공룡과 맞닥뜨린 이후부터는 더 그랬다.
  그는 커비가 말한 ‘모든 걸 알 수 있는 능력’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존은 커비의 아버지가 어떤 이야기를 하실 지 알고 있었다 -심판이라던가 원죄 그리고 회개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지금 일어난 일을 종교적으로 설명하실 것이다. 커비는 그 설명에 위안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커비의 생각은 옳지 않?고 여기는 존에게는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존은 커비와 같은 이유로 부모님을 찾는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부모님과 함께 있고 싶었다.
  혼자 숲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존은 결국 커비와 함께 있기로 결정했다. 더욱이 주위를 둘러싼 혼란스러움이 존의 두려움을 부채질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린 세상이 확실한 증거였지만 다음 언덕을 넘으면, 아니 나무들만 지나도 눈앞에 버거킹이나 맥도널드가 나타나고 빅맥을 손에 든 리프먼이 왜 빨리 오지 못했는지 물어 볼 것만 같았다. 
  날은 점점 어두워졌고 그들은 안전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나무 위에 있던 도마뱀들 때문에 그들은 나무 위에서 자는 것이 두려웠고, 공룡을 따돌릴 수 있을 정도로 높이 올라갈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그들은 쓰러져 있는 몇 그루의 나무들 밑에 약간의 숨을 공간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땅을 조금 더 넓고 깊에 파낸 뒤 그 안에 몸을 눕혔다. 그런 다음 몸을 숨기기위해 작은 가지들을 끌어다가 나무 주위를 가렸다. 그리고는 훔친 담요를 덮었다.
  커비는 오랫동안 중얼거리며 기도했고, 존은 그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존은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야, 커비. 너, 지구의 중신을 파고 들어간 사람들에 대한 프로그램 본 적 있니?”
  “쥴 베른의 책은 읽었어.”
  “그거 말고, 베른이 쓴 책에는 지구의 중신으로 가기 위해 동굴 안으로 들어갔지만 내가 본 영화에서는 과학자들이 관산이나 터널을 만드는데 쓰는 굴착기로 땅을 팠는데, 한 번 땅을 파기 시작하면 멈추지 못하는 거야. 결국 지구룰 관통하는 터널을 파게 되었고 그래서 지구 한가운데가 텅 비게 된 거야.”
  “그런 영화라면 몇 번 본 적 있어.”
  “나도. 내 생각에는 그 영화의 속편들이었던 것 같아. 그 외에도 정말 지구 속은 텅 비어 있고 그 안에는 또 다른 문명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읽은 적이 있어. 그들 중 몇 명은 비행 접시가 날아온다고 믿고 있었어.”
  “비행 접시가 지구 속 가운데데서 날아온다구? 어떻게 그 속을 들어갔다 나온대?”
  “양극에 동굴이 있대. 그건 그렇고 영화에서 과학자들이 지구 속으로 들어가 보니 그 속에 공룡과 원시인들이 살고 있었어. 아마 리프먼이 옳을지도 몰라. 화산 폭발이나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 건지 몰라. 아마 여기는 지구의 속인데 폭발로 위로 밀려나온 걸 수도 있어.”
  “야, 존. 너 정말 그걸 믿는 거야? 이건 엉터리 공상 과학 영화가 아니야. 왜 예수님의 재림이 시작된 거라는 내 말은 그렇게 믿지 않으면서 그따위 말은 믿는 거야? 왜 하나님의 심판보다는 텅 빈 지구 속이 바깥으로 밀려 나왔다는 생각을 하냐구?”
  존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쉽게 믿을 수는 없었다. 주위를 둘러싼 숲은 물리적으로 존재했고 -그런 존에게 현실을 의미했다.
  하지만 커비는 달랐다. 초자연적인 것을 그는 쉽게 받아들였다. 신의 중재, 하나님, 성령, 정하, 이런 모든 것들이 퍼즐을 구성하는 하나 하나의 조각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한데 모여 하나님의 나라라는 그림을 구성하는 것이다. 존이 주변의 숲을 현실이라고 느끼는 것처럼 커비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실재하는 거라고 느끼고 있었다. 커비에게 있어 숲은 영적인 진실을 증명해 주는 현실 속의 증거였다. 존이 숲이 지구 속 한가운데에서 솟아난 것으로 믿는 것처럼 커비는 이 숲이 하나님의 이적으로 인해 생긴 것임을 굳게 믿었다.
  “리프먼은 네 가설이 잘못됐다는 것을 증명했잖아.”
  존이 우겼다.
  나이트 클럽이 사라졌다는 걸 기억해. 그리고 하나님이 지구를 멸망시킨다면 불이나 뭐 그런 것들을 쓰실 거야. 성경 어디에도 사람들이 공룡한테 잡아먹힌다고는 나와 있지 않아.“
  “성서를 해석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냐. 아무 장이나 읽어봐도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커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마 하나님은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하신 적이 있을 거야. 몇 달 전 우리 아버지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그런 알지? 세상 사람들이 자만심에 빠져 하나님께 이르는 탑을 만들려고 했었잖아. 사람들을 벌주고, 탑쌓는 일을 중지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모두 다르게 만들어 버리셨어.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서로 이야기할 수  없었어.”
  “커비,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그걸 서로 연결시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
  “그래, 하지만 우리가 벌거벗은 채 창만 들고 공룡 사냥을 나온 사람들을 만난다고 해도 너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
  “네 가설은 설득력이 없어, 커비.”
  “지구 속에서 비행 접시가 날아온다는 것보다도 약하니?”
  존도 자신의 이론을 별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화제를 바꾸었다.
  “커비, 네가 보기에도 그 동물들이 공룡 같았지? 내가 지금까지 본 공룡들하고는 달랐거든.”
  “야, 존. 너는 공룡을 본 적이 없어. 그림으로만 보았을 뿐이지.”
  “무슨 말인지 알잖아. 우리 뒤를 쫓아오던 작은 공룡 말이야. 머리는 아주 작고 뾰족하고, 다리는 몸에 비해 무척 컸잖아. 그리고 큰 공룡은 꼬리가 그렇게 길지 않았어. 내 생각에 공룡돌은 꼬리를 가지고 싸울 것 같아.”
  “큰 공룡을 잘 보지 못했지만 작은 놈은 아주 우습게 생겼더라. 책에 나온 모든 공룡 그림은 보두 추측해 그린 거야. 아마 공룡 뼈 위에 가죽을 덮다가 실수했나? 아니면 우리를 뒤쫓던 공룡들이 박물관에 있던 것들과는 다른 종류던가. 공룡들은 수천만 년 전에 살았던 동물이야. 아마 아까 본 공룡들의 뼈가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어.”
  존가 커비는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커비는 한밤중에도 계속 기도를 했고, 가끔씩 큰 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존은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커비는 자기 가족뿐 아니라 존과 리프먼의 가족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존은 고마움을 느꼈다. 하지만 친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누워 숲이 내는 소리에 귀기울이며 가족을 걱정하고 있었다.
  26. 신세계의 거리
  다가올 재앙에 필적할 만한 것은 지금까지 없었다. 이태리, 스페인과 영국은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온 세계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노스트라다무스
  재앙은 3단계로 찾아왔다. 땅과 곡식, 건물들, 글고 사람들이 사라졌는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바로 두 번째 효과들이 생겨났다. 도로와 교각들이 사라졌고 많은 길들이 사라져 버렸다. 파괴된 자동차와 기차가 전국 곳곳에 쌓여 갔다. 어떤 지역에서는 댐이 물을 모두 방류한 뒤 어ㅁ둠 속으로 사라졌고, 마을은 갑작스런 범람에 휩쓸려 버렸다. 다른 지역에서는 화재가 일어나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었으며 살아 남은 사람들은 제대로 소방 작업을 할 수도 없었다. 수많은 사태가 발생하였고 언덕과 산에서 암석과 눈, 진흙 등이 사람들과 그들의 집 위로 쏟아져 내렸다.
  파멸의 세 번째 단계는 가장 가공할 만했다. 인간이 아루어 놓은 문명은 서서히 파괴되기 시작했고,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전기가 끊긴 지역이 가장 큰 위험에 처했다. 정전, 치안의 부재. 모든 지역에서 경찰을 필요료 했고 약탈이 시작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비극들도 엄청나게 많았다. 절대 시행될 수 없을 이식수술을 기다리다가 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수술팀을 기다리다 죽어 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충분하던 혈액도 천재 지면으로 환자가 많아지면서 점점 비싸졌다. 여러 치료제들이 혈액과 마찬가지로 품귀 현상을 보였다. 공급할 수 있는 제품이 있는 경우에도 고속 도로가 끊겨 운번할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충분히 치료할 수 있었던 병으로 인해 죽어 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가뭄이나 폭풍으로 인한 피해 때와는 달리 농작물보다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재앙은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수백만 명이나 사라져 버렸다. 여지껏 미국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식량 부족 사태로 인해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너도나도 식료품을 사재기했다. 식량을 많이 확보해 놓은 사람들도 적은 양을 가지고 견뎌야 했다. 조금밖에 갖지 않은 사람들은 곧 굶주림에 직면했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들은 기아 상태에 빠져들었다.
  뉴욕시 일요일, 오후 8시 10분 (서부 표준시)
  루이스는 아이들이 잠든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방안을 밝히고 있는 촛불이 흔들리면서 을씨년스러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방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정상이었다. 아이들은 사촌들과 함께 자고 있었다. 레이먼은 랜디와 같은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다섯 살배기인 두 아이는 한 시간 정도 킥킥대며 장난을 치다가 잠이 들었다. 호세는 마루에 깔아 놓은 슬리핑백 속에서 자고 있었다. 이제 겨우 9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이는 한참을 걱정하다가 잠이 들었다. 루이스는 샬롯트를 보러 옆방으로 갔다. 샬롯트는 사촌인 민디 옆의 바퀴 달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들은 아직 자지 않고 남자 아이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각각 11살, 10살인 그들은 친척들이 모일 때면 잘 어울리곤 했다. 카트리나는 한쪽 구석에 슬리핑백을 펴고 그 안에서 자고 있었다. 카트리나는 세 살로 같은 또래의 사촌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씬다는 루이스와 멜린다가 쓰기로 한 방의 옷장 속에서 자고 있었다.
  루이스는 거실로 돌아와 아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아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들은 멜린다의 오빠 부부가 뜨거운 커피와 집에서 만든 호박 빵을 가지고 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말없이 앉아 있었다. 
  “여기는 아주 조용하군.”
  스티브가 말했다.
  루이스는 자세를 고치고 타냐로부터 컵을 받아 들었다. 
  “꼬맹이들도 다 잠들었어요. 많이 걷는 바람에 아이들이 지쳤나봐요. 우습죠, 난 샬롯트와 민디가 제일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호세가 그런 것 같아요. 공룡을 본 이후 그 아이는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난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요.”
  타냐가 말했다.
  “물론 공룡을 보았다는 걸 믿기는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아요. 안 그래요?”
  멜린다가 올케를 보고 미소지었다.
  “맞아요, 우리도 믿을 수 없는 걸요. 언니도 봤어야 하는 건데. 먼저 도시가 사라지더니 그 괴물이 수풀 사이로 걸어오고 있는 거에요. 내가 지금까지 본 동물들 중에 제일 컸어요. 영화나 책에서 본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본 공룡 중에는 가장 무섭게 생겼더라구요.”
  스티브가 호박 빵을 먹으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돌아가서 볼만할 가치가 있겠는데.”
  그가 말했다. 
  “만약 전기만 들어온다면 TV로도 볼 수 있을 텐데. 라디오 방송에서는 정전됐다는 이야기 외에는 별다른 게 없어. 상당 부분의 도시가 사라졌다던가 공룡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전혀 없어.”
  “정말 보고 싶으시다면 저와 함께 가시죠.”
  루이스가 말했다.
  “전 돌아가야 하거든요.”
  “안돼요.”
  멜린다가 그 자리에서 반대했다.  
  “가면 안돼요. 너무 위험하다구요. 당신도 오면서 거리가 어땠는지 봤잖아요.”
  “여보, 위더비 부인이 아직 거기에 계셔. 부인을 모시고 와야 해.”
  “안돼요. 이미 위더비 부인에게 물어 봤잖아요. 부인을 도우려고 충분히 노렸했으니 조금도 죄의식을 느낄 필요 없어요. 모레노씨는 위더비 부인에게 물어 보기나 했어요? 맥그리거씨는 어떻구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당신만 걱정했다구요. 하나님은 당신이 착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실 거고, 이제는 가족 생각만 하기를 바라실 거에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요. 아니면 당신이 원하는 거요?”
  “여보 -”
  “위더비 부인은 좋은 분이고, 의지할 데도 없어. 어떻게 거기에 혼자 계시게 해? 부인을 억지로라도 데리고 와야 해. 부인을 보시고 돌아올게. 여기로 모시고 와도 되겠죠, 타냐? 그녀의 가족을 찾을 때까지만요.”
  타냐가 승낙하자마자 멜린다는 남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여보, 무서워요. 애들하고 나를 두고 가지 말아요. 만약 돌아오지 못하면요? 씬다는 영원히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 거에요.”
  “괜찮을 거야. 여보. 아주 조심해서 갔다 올게. 겨우 아파트까지 갔다 오는 거잖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약속해.”
  루이스는 자신의 명예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아주 고집스러웠고, 이번 일은 그의 명예를 걸고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멜린다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기다렸다가 아침에 가요. 이 한밤중에는 안돼요. 지금밖에 나간다는 건 미친 짓이에요.”
  “그렇게 할게.”
  그가 양보했다.
  그들은 포옹하며 속으로는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밤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스티브가 촛불을 끄고 커튼을 살짝 젖혔다. 창 아래 길은 텅 비어 있었지만 저 멀리서 불길이 보였다.
  “가지 말아요, 여보”
  멜린다가 속삭이며 남편의 손을 꼭 잡았다.
  루이스는 팔을 돌려 아내를 끌어안았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루이스는 다음날 아침 혼자 떠났다. 도로 여기저기에 자동차들이 버려져 있었고 가로등은 꺼져 있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멀리에서차가 다니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는 지하철이 끊긴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지하철을 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으슥한 곳을 피해 걸었다. 시간대를 잘 고른 것 같았다. 아파트 입구들은 커튼이 드리워진 채 닫혀 있었다. 길모퉁이의 채소 가게, 비디오 가게 그리고 통조림 가게들은 문이 잠겨 있었지만 피해는 전혀 없었다.
  영업을 하고 있는 것은 술집 두 군데뿐이었다. 조금씩 안심하고 있던 루이스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 된 거리를 보게 되었다.
  거리는 깨진 유리와 콘크리트 파편, 그리고 가게에서 약탈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루이스는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자동차가 뒤집힌 채 연기를 내뿜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몇몇 사람들은 길 위에서나 상점 진열대에서 집어 갈 물건은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루이스는 다른 길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 위험하진 않을 것 같았다.
  길에 다니는 차가 없었기 때문에 루이스는 길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어떤 가게들이 있는지에 따라 길 위에 널려 있는 물건들이 달라졌다. 가전 제품 가게 앞에는 옆이 부서진 토스터, 고출력 카세트 그리고 부라운관이 깨진 TV 2대가 뒹굴고 있었다. 식품점 앞에서는 깨진 계란과 야채, 그리고 찌그러진 빵 덩어리 등이 버려져 있었다. 가구점 앞에는 부서진 전기 스탠드와 매트리스, TV와 박살난 스테레오들이 널려 있었다. 주류 판매점 앞에는 버려진 것이 거의 없었지만 루이스는 그걸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술은 그만큼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땅에 떨어진 물건들을 뒤적이며 좀 더 나은 걸 고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당황하고 체념하고 있었을 뿐 적대감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늙은 베트남 남자가 자신의 가게에 남아 있는 사탕들을 거리로 내던지고 있었다. 몇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더니 조금이라도 더 가져가려고 아우성을 쳤다.
  루이스의 눈에 불길에 휩싸인 자동차가 들어왔다. 이제 약탈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거리의 구역마다 뒤집힌 차들이 최소한 한 대씩 있었다. 상점들은 단순히 약탈된 것이 아니라 분노하고 절망한 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루이스는 더욱 긴장했다. 두 채의 건물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전에 여기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그들이 이웃을 약탈하던 사람들인지 아니면 재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인지 궁금했다. 그때 길 건너편에 두 명의 남미계 젊은이들이 입고 있는 옷이 눈에 들어왔다.
  루이스는 그 녹색 재킷이 디아블로파 갱들의 상징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동차 옆에 잠시 멈추어 서서 갱들한테 뺏길만한 물건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차에 기대어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그들은 옷 색깔 외에는 주위의 다른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사람들은 그들 곁을 지나가면서도 피하기만 할 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루이스는 자신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에게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잠시 갱들을 바라보다가 걷기 시작했다. 그는 아파트까지 거의 다 와 있었고 그 일대는 좀비파의 구역이었다. 좀비는 백인 갱으로 디아블로파와는 사이가 나빴다. 루이스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소지품을 살피다가 세 명의 디아블로파 갱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조금 빨리 걸었고, 겁먹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갱들 가운데 두 명은 조금 전에 보았던 사람들이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그는 부자처럼 보였던 것이다. 루이스는 태연을 가장하며 걸음을 옮겼다. 갱들도 우연히 루이스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한 블록을 지난 다음 길을 건너 부서진 차 안을 살피는 체했지만 길 건너의 갱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루이스는 다시 걸었고, 스티브가 같이 왔더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둘이서라면 두 명의 갱들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을 터였다.
  반 블록 정도 더 왔을 때 그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그와 갱들은 모든 걸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루이스 바로 뒤에 와 있었고, 루이스는 뛰었다. 아파트까지는 800미터 정도만 더 가면 됐다. 그는 속력을 냈고 어느 정도까지는 그렇게 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다음 블록에서 갱들이 바짝 따라붙었다. 거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다. 사냥은 계속되었고 제물은 도망치고 있었다. 
  루이스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마침내 돌부리에 걸려 보도 위로 넘어졌고, 세 명의 갱들이 그에게 주먹질을 했다. 그는 발길질하며 갱들에게 저항했지만 잠시 후 뭔가 둔탁한 것에 머리를 맞고 의식을 잃었다.
  27. 하늘에서 떨어진 꽃
  만약 블랙홀의 구성 물질을 아주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건 전 지구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압축된 물질 주변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법칙이 엄청나게 달라진다.
  루이스 코너스 박사
  6천 미터 고지에서 서쪽을 향하여 월요일, 오전 6시 30분 (태평양 표준시)
  테리는 워싱턴 D.C.를 향하는 군용기에 몸을 실었지만 마음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는 아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포틀랜드가 사라졌다는 것은 믿기 어려웠지만 헛소문이라고 넘겨 버리기도 쉽지 않았다. 도시 하나가 사라지다니, 테리는 계속 중얼거렸다. 산사태같은 것이 일어났을 거야. 아니면 지진이 일어났던가. 그는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시키려고 했다. 아마 세인트 헬렌 화산이 다시 폭발해서 화산재가 도로를 막은 것일지도 몰라. 결코 도시가 한순간에 사라질 수는 없어. 하지만 그렇다면 5번 도로 한가운데에 산이 생기는 일도 있어서는 안돼. 만약 포틀랜드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면 존 곁에는 그와 엘렌이 있어야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테리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와 엘렌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다투었다. 엘렌은 같이 포틀랜드로 가서 존을 찾아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테리는 오레곤보다는 워싱턴 D.C.에서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빌의 설득에 넘어갔다.
  “케니 랜덜은 틀림없이 뭔가 알고 있어요, 테리.”
  빌이 주장했다. 
  “그는 현실에 아무 관심도 없었어요. 우리는 그가 알고 있는 걸 밝혀 내야 합니다.”
  “존에게는 우리가 필요해요, 빌.”
  엘렌이 쏘아 붙였다. 
  “포틀랜드까지 갈 수도 없어요. 길은 끊겼어요. 자동차들이 20킬로미터씩 꼬리를 물고 있어요.”
  “해안도로나 이면 도로로 갈 수 있을 거에요. 아니면 비행기를 타던가요.”
  엘렌이 희망을 버리지 않고 말했다.
  “빌, 나도 엘렌이 옳다고 생각해요.”
  테리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내 아들이 포틀랜드에 있어요. 아이가 무사한지 알아야 합니다.”
  빌은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논리와 확신을 가지고 테리를 설득했고, 결국 테리는 빌이 옳다고 여기게 되었다.
  “아들을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는 겁니다. 케니 랜덜을 워싱턴으로 데려가는 걸 도와주시면 저도 존을 찾는 일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비행기로 워싱턴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포틀랜드에 들를 수 있을 겁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어요. 사람들은 얼마 있지 않아 공룡 상태에 빠져들 겁니다. 공포에 질려 이성을 잃은 사람들과 약탈에 몰입한 사람들을 처리할 수 있겠어요?”
  테리는 마음이 약해졌지만 엘렌은 결심이 확고했다.
  “우리는 애를 찾아야 해요, 여보 -”
  “따님은요?”
  빌이 말을 되받았다.
  “이름이 뭐죠?”
  “캐롤린이에요.”
  앤지가 끼어들었다.
  “캐롤린은 워싱턴 D.C.에 있죠, 맞습니까? 따님은 걱정되지 않나요?”
  “모르겠고, 빌.”
  테리가 말을 더듬었다.
  “우리가 타고 갈 헬기를 알아보겠습니다.”
  헬기가 준비되었다. 테리는 자신이 포틀랜드까지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엘렌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가 떠나는 순간까지도 화를 풀지 않았다.
  빌은 군인 신분을 이용해 구금 상태에 있는 케니 랜덜을 데려가려고 했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미드포드 공항에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았고, 아이다호주 마운틴홈 공군 기지에서 707 군용기를 탈 수 있었다. 테리는 잠들어 있는 케니 랜덜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케니가 몸을 움직였기 때문에 테리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케니는 꿈을 꾸고 있었고 곧 깨어날 것이다. 테리는 케니가 지금 꾸고 있는 꿈이 지난 이틀 간 벌어진 일들보다 더 대단할지 궁금했다.
  조종사와 이야기를 하고 돌아온 빌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생각보다 더 심각한 것 같아요. 조종사들이 전국적으로 피해 상황을 수집하고 있다는데... 아주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거대한 얼음 조각들, 없던 사막이 생겼나 하면 엄청난 홍수도 있었다는군요. 도시가 사라졌다는 소문도 있어요. 뉴욕이 사라졌답니다.”
  테리의 심장이 요동을 쳤다. 한 도시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근거 없는 소문처럼 여겨졌지만 두 개의 도시가 사라졌다면 그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아직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까?”
  빌이 케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없어요. 하지만 곧 의식이 돌아올 거예요. 지금 꿈을 꾸고 있어요. 잠이 깊이 들지 않았을 때 꿈을 꾸는데, 깨고 나서 얼마 동안은 기억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꿈을 기억하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불안함을 느끼게 되죠. 그래서 무의식의 세계로 꿈을 전이시켜 자신의 불안을 조절하는 겁니다. 그가 일어났을 때 무슨 질문을 할지 생각해 두는 것이 좋겠어요.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을지도 몰라요.”
  “그냥 자게 둡시다. 위싱턴에 거의 다 왔고, 의사가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빌과 테리는 위싱턴에 도착할 때까지 케니에게 물어 볼 내용을 정리했다. 그들은 케니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꾸며 케니를 안심시킨 다음 그의 편집증적 성향을 교모히 이용해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여기가 어디죠?”
  갑자기 케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행기 안을 둘러보니 그는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정신 이상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빌은 재빨리 행동에 들어갔다.
  “내 이름은 빌 콘래드이고 이쪽은 테리 로버츠요. 지금 당신은 위싱턴 D.C.로 가고 있는 중이오 대통령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케니는 기쁜 표정을 지었지만 그 말을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케니. 당신은 사람들한테 경고를 했었죠. 당신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어떻게 그런 일을 알 수 있었죠?”
  갑자기 케니는 창문에 얼굴을 바싹 대더니 땅을 내려다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더니 안전 벨트를 풀고 이쪽 저쪽 옮겨 다니다가 비행기 꼬리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유리창에 얼굴을 기댔다. 테리가 그의 옆에 앉았고 빌은 그 앞좌석의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고 섰다. 갑자기 케니가 고개를 들어 테리를 바라보았다.
  “누나는 어떻게 됐죠?”
  “누나는 무사해요. 오레곤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요.”
  케니는 안심하는 듯 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테리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떠올랐다.
  테리는 질문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 일을 알았죠. 케니? 당신은 천재가 틀림없어요.”
  테리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케니는 창문애서 얼굴을 떼지 않고 말했다.
  “난 천재가 아니에요. 그저 다른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것을 알아냈을 뿐이에요. 옥수수같은 것들 말이에요.”
  “옥수수라구요?”
  테리가 물었다.
  “네, 옥수수요. 잭 로비와 사냥을 갔었는데 옥수ㅜ가 떨어졌어요. 그냥 하늘에서 떨어졌어요.”
  “당신 혼자 그걸 보았나요?”
  “당신도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는군요!”
  케니의 목소리가 분노에 떨고 있었다.
  “물론 내 친구들도 봤어요 하늘에서 옥수수가 떨어지는데 보지 못했을 것 같아요? 미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에요.”
  “아까 다른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당신은 알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건 뭐죠?”
  “제 친구들은 하늘에서 옥수수가 떨어졌다는 걸 이상하게만 여겼지만 저는 뭔가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 사건의 중요성을 알았던 거죠.”
  “일종의 계시인가요?”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거죠? 신비 종교의 교주라도 되는 줄 아세요? 난 옥수수가 아무 이유없이 떨어질 리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테리는 그가 잘 못 짚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지구의 종말을 예언했었던 다른 사람들처럼 케니도 뭔가 신비주의적인 해석을 내릴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테리는 다시 질문했다.
  “옥수수 말고도 뭔가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것 말고도 뭔가 더 찾아냈겠죠.”
  “물론이에요. 어렸을 때 신기한 사건들을 모아 놓은 책들을 읽곤 했었어요. 비행 접시를 본 사람의 이야기, 아프리카에 공룡이 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죠. 그중에는 하늘에서 떨어진 물질들에 대한 것도 있었어요. 얼음 조각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동물이나 개구리, 물고기들이떨어진 경우도 있었고 곡식까지도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었어요. 그저 재미 삼아 이런 책을 읽기는 했어도 진짜 있었으리 라고는 믿지 않았어요. 폭풍에 섞여 왔거나 비행기에서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내 머리 위로 옥수수가떨어진 뒤 생각을 바꿨어요. 그래서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이런 일들은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혼자선,ㄴ 사건들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 할 수 없었어요. 혼자서는 불가능했죠. 필쳐 박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그와 쿰 박사는 그 분야에 아는 게 많았어요. 조라스트러스의 원고를 발견한 것도 쿰 박사였어요. 근 ㄴ재앙이 시작될 것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언제인지…정확히 언제 일어날 것인지는 알지 못했어요.”
  케니는 말을 멈추고 뭔가 골똘히 생각했다. 근 SCKDANS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지만테리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했다. 케니의 눈은 초점을 잃고 흐려져 있었다.
  “마침내 이런 일들이 벌어진 원인을 알아냈군요. 당신과 다른 사람들이 함께. 그렇죠?”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우리는 신기한 사건들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모두 조사했어요. 신문들은 이제 거의 그런 사람들을 보도하지 않아요. 전에는 했었지만요. 나는 백년 전쯤의 사건들부터 조사를 했는데 필쳐 박사와 쿰 박사는 보다 오래 전부터 이런 일들이 있었다고 알려주었어요. 조라스트러스는 재난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그에 대한 예언을 했지만 우리는 거기에 맞는 모델을 만들 수가 없었었요. 그러다가 갑자기 알아냈어요…이미 시작되고 있었어요…팻하고 제가…하늘에서 꽃이 떨어졌어요.”
  ‘꽃’이라고 말하며 케니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꽃들이라…‥.”
  테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꽃들이―그냥 하늘에서 떨어졌어요.―”
  케니는 혀로 입술을 적셨다.
  테리가 다른 질문을 하려는데 좌석 벨트를 메라는 신호등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케니는 넋을 잃고 있었다. 눈은 한 곳에서 고정된 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테리와 빌이 그를 창가에서 떼어내 팔을 들어올리고 좌석 벨트를 매 주었다. 케니는 테리가 자신의 팔을 팔걸이에 내려놓을 때까지 밀랍 인형처럼 팔을 든 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구급차가 와서 케니를 싣고 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빌과 테리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벤에 올라탔다 빌의 얼굴에 실망한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좀 더 많은 것을 기대했었어요.”
  “그는갑자기 우리의 주의를 끌었고,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하지만 정보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에요. 필쳐 박사나 쿰 박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아뇨.”
  빌이 대답했다.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굴까요? 팻? 사람들을 시켜 조사하도록 하죠. 만약 케니같은 사람들이라면 그들도 친척들과 함께 어디 동굴속에 틀어박혀 있겠죠. 그 사람도 조사해 보도록 하죠. 예언자 말이에요. 이름이 뭐였죠?”
  “조라스트러스.”
  “맞아요, 그 이름을 들어본 적 있습니까? 난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가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말한 게 뭐였죠? 꽃과 옥수수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포틀랜드와 뉴욕이 지금 하늘에서 쏟아진 무언가에 파묻혔다고 생각하세요? 현재 보고되고 있는 것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보고서에서는 사라져 버린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사라지는 것과 파묻히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죠.”
  “물론 다르죠,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케니의 책 중에... 아니, 신문 스크랩 속에 하늘에서 꽃이 떨어진다는, 뭐 그런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는 그 꽃들이 하나의 증거라고 했어요.”
  케니의 방에서 집어 온 스크랩들을 담은 가방은 밴 뒤쪽에 놓여 있었고, 빌과 테리는 가방을 열고 파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침대 시트에 싸 놓은 짐꾸러미 속에서 기사를 찾아냈다.
  테리가 기사를 읽었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한 부인과 그녀의 다섯 살 난 딸이 일본 히로시마의 한 공원에 앉아 있는데 하늘에서 꽃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꽃은 야생화였는데 간혹 다른 색깔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하얀색 꽃들이었다. 꽃 소나기가 계속된 것은 1분 남짓했지만 아이가 꽃에 파묻혀 버릴 정도로 많이 내렸다고 했다. 어디에서 꽃이 떨어졌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테리는 이 기사를 읽고 케니의 방에서 느꼈었던, 미궁에 빠진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빌이 머리를 저었다.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아요, 테리. 당신은 어때요? 다시 한 번 읽어주시죠.”
  그들이 탄 차는 교통 체증으로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차 안에서 뭔가를 읽을 때마다 테리는 속이 메스꺼워지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심했다. 그는 점점 심해지는 메스꺼움을 참으며 기사를 읽었지만 이번에도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뭔가 생각날 듯 했다.
  “빌, 생각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말해 보죠.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번갈아 가며 이야기해 봅시다.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말해 보는 겁니다. 내가 먼저 하죠. 하늘에서 꽃들이 떨어졌다.”
  “낱말 잇기같은 거죠? 튜울립?”
  “어떤 거라도 좋아요. 공원, 사람들, 소풍.”
  “엄마, 딸, 가족, 사과 파이... 초밥 만들기.”
  “일본, 히로시마...”
  “제2차 세계대전, 나가사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핵폭탄? 핵폭탄이 사용된 거라고 생각하나요?”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이 핵사용이었고, 테리. 하지만 핵폭발이 꽃을 하늘에서 떨어지게 하지는 않아요. 폭탄은 사람들을 불태우지, 치장시키지 않아요. 만약 둘 사이에 연관이 있다면 나가사키에도 뭔가 떨어졌다는 기사가 있었을 겁니다. 내가 궁금한 건 -케니 위로 떨어진 옥수수들이 어디에서 떨어진 것일까 하는 겁니다.”
  그들은 스크랩을 나누어 나가사키에 뭔가 떨어진 것이 있었느지 찾아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핵실험 장소로 사용된 후 폐쇄된 네바다의 한 도시에 대한 기사를 살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밴이 멈출 때까지 자료들을 찾고 있었다. 
  테리는 워싱턴의 다른 건물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벽돌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 입구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고 현관에 경비도 서 있지 않았지만, 빌은 건물 안 구조를 잘 알고 있었고 테리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그는 경비병들을 시켜 가방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커다란 테이블 위에 쏟게 한 다음 내용물을 추려냈다. 그는 컴퓨터 디스켓과 하드 드라이브를 찾아내고 테리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겨가 보안 검색을 받은 후 수많은 컴퓨터 터미널과 워크스테이션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한 컴퓨터 앞에 테리의 딸 또래로 보이는 아름다운 처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빌에게 미소를 지었다.
  “대령님, 휴가 중이신 줄 알았는데요.”
  “그랬었지, 하지만 사건이 터져 돌아왔지.”
  “설마 초저주파 시스템이 손상되고 도시 몇 군데와 3개의 공군기지, 일부 항공사가 사라진 사건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죠?”
  테리는 갑자기 가까운 공항으로 달려가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사라진 도시가 하나에서 두 개로 늘어났고 이제는 ‘몇 군데’로 바뀌었다. 빌도 역시 놀란 것 같았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번 사태를 분석해 보게.”
  항상 그랬듯이 그는 유능한 전문가였다.
  “대령님, 최선을 다하겠지만 몇 시간은 걸릴 것 같은데요.”
  빌과 테리는 길레스피 중위가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에서 디스크와 파일들을 복사하기를 기다렸다. 그녀에게서 케니의 자료들을 돌려 받고 나서 빌은 중위에게 조라스트러스라고 불리던 예언자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지 물었다.
  “조로에 대해서는 들어봤는데요.”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빌은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다음 테리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컴퓨터 관련 부속들로 가득 차 있는 작은 방에는 서른 살 정도로 보이는 헝클어진 옷차림의 동양인 남자가 있었다. 그는 컴퓨터 모니터에 얼굴을 갖다 대고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식은 커피가 담긴 종이 컵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사방에 모니터와 컴퓨터, 키보드들이 널려 있었다. 방안에 컴퓨터 게임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필, 나 좀 도와주겠나?”
  필이 새끼손가락으로 탭 키를 누르자 게임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공적인 건가요, 사적인 건가요?”
  “공적인 일을 사적으로 부탁하는 거네.”
  “1급 기밀에 속하는 건가요?”
  필이 신나서 물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1급 기밀이지. 자네한테 알려줄 수 없을 정도의 것이지.”
  “좋아요! 한 번 보죠.”
  빌은 그에게 디스켓 박스 두 개와 하드 드라이브를 건네주었다. 곧 여러 가지 아이콘들이 컴퓨터 모니터를 채웠다.
  “이게 뭐에요? 1급 비밀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접근 보호 장치도 안되어 있잖아요. 재미없어요, 없던 일로 하죠.”
  “그 내용을 알아내는 게 아주 해볼 만한 걸. 아무도 밝혀 내지 못했으니까.”‘
  “아무도 못했다구요?”
  “CIA요원 두 명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사임했다네.”
  빌은 거짓말을 했다.
  “이럴 수가, 제가 해보죠. 뭘 찾아내면 되죠? 메시지요? 도식? 모형?”
  “자네에게 그릇된 정보를 줄 수는 없네. 나중에 와서 자네와 함께 살펴보지. 만약 뭔가 알아내면 연락 주게.”
  방에서 나가려다가 말고 빌은 갑자기 몸을 돌렸다.
  “필, 혹시 조라스트러스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봤나?”
  “물론이죠, 바빌론의 예언자였어요.”
  필이 컴퓨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죠. 노스트라다무스만큼은 알려지지 않았지만요. 아마 그가 일직 죽었기 때문일 거에요. 근시안적인 사고 방식을 지녔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조라스트러스가 오랫동안 살려두기에는 너무 똑똑해 보였을 거에요. 사람들이 그를 구덩이에 빠뜨린 후 돌로 쳐죽였어요.”
  필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빌과 테리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이번에 일어난 일들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그는 꽤 끔찍한 예언들을 남겼었죠.”
  “솔직히 모르겠네, 필.”
  그 방에서 나온 뒤 테리는 딸에게 전화를 할 수 있었다. 캐롤린은 테리가 알지 못하는, 안다 해도 알려 줄 수 없는 질문들을 퍼부었다. 하지만 어쨌든 캐롤링은 안전했다. 존을 찾으면 연락해 준다고 안심시킨 후에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필이 뭔가 알아낼 수 있을까요?”
  “테리, 자물쇠를 여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소. 하나는 순서대로 해나가는 것이오. 먼저 오른쪽으로 0에 맞추었다가 왼쪽으로 0에 맞추고 다시 오른쪽 0, 또사시 왼쪽으로 0, 이런 식으로 맞추다 보면 결국 자물쇠를 열 수 있는 것이오. 길레스피 중위와 그 팀 구성원들은 이런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필은 그가 목적하지 않았더라도 엄청난 목표물들을 적중시킬 수 있는, 마치 통제되지 않는 미사일같은 사람입니다. 조라스트러스를 알고 있잖습니까?”
  “그런데 왜 컴퓨터나 수리하고 있죠?”
  “한편으로는 그가 원한 것이기도 하고,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정말 정보국 내에서 제일 가는 수다쟁이이기 때문이죠. 그는 만약 목숨이 걸린 일이라도 비밀을 지키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이번 일에서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신조차도 감출 수 없을테니까요.”
  28. 둥지 속의 알
  인류의 마지막 시대에는 아주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세계는 절대로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의 시대는 보이지 않는데, 그것은 그 시대가 오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가 혼돈 속에 묻혀 버렸기 때문이다.
  멜타제덱의 예언
  오레곤주 웜스프링즈 인디안 보호 구역 월요일, 오전 6시 50분 (태평양 표준시)
  콜터는 아침이 되자 제일 먼저 RV에서 나와 용변을 볼 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는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시드와 세 마리의 다른 공룡들이 차 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콜터가 나오자 그를 향해 달려드는 바람에 바지가 거의다 젖은 것이다. 욕을 해대며 공룡들을 쫓다가 그만 콜터는 공룡들이 내깔려 놓은 똥더미에 발을 디딛게 되었다. 콜터는 발을 풀에 문지르며 계속 투덜거렸다. 마침내 그가 차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가서 소변을 보는데 시드와 공룡들이 몰려와서는 계속 그를 성가시게 했다. 콜터가 몸을 돌려 공룡에게 오줌 세례를 가하려는 순간 공룡들은 도망쳤고, 결국 오줌은 그의 발등 위로 떨어졌다. 그가 아주 크게, 그리고 오랫동안 욕을 해댔기 때문에 그가 차로 돌아왔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깨어나 있었다. 
  쿰 박사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자동차 안을 정리하고 오전에 할 일을 정하고 있었다.
  아침 공기가 쌀쌀하기는 해도 무척 상쾌했기 때문에 그들은 밖에서 식사를 했다. 시드와 두 마리의 공룡들은 식탁 주위를 맴돌며 눈치껏 땅 위로 떨어지는 음식물들을 채 갔다. 공룡들은 성가신 존재였지만 필쳐 박사 일행은 그 작은 동물들에게 뭔가 먹이를 줄 수밖에 없었다. 식사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 때 피트라가 무스를 기억해내고 무스에게 달걀과 비스킷 약간을 가져다주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들은 초원 가장자리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필쳐 박사는 콜터에게 초원과 사막이 만나는 부분의 땅을 파게 했다. 땅은 쉽게 파였고 필쳐 박사는 손으로 머리를 빗어 넘겼다. 쿰 박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모든 것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 뿌리 하나 상하지 않았는데요. 이 가장자리를 떠나 나 있는 풀들은 말짱해요.”
  “그래요.”
  필쳐 박사가 말했다.
  “100만 년 전쯤 세상의 어딘가에도 이 가장자리에 딱 들어맞는 풀더미들이 있겠죠. 참으로 독특해요. 난 꽤 심각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상황이 나쁜 것 같지는 않군요. 풀잎이 상하거나 뿌리가 뽑힌 게 보이지 않아요.”
  쿰 박사가 동의했다.
  “맞아요, 하지만 상태가 너무 좋은데요. 뿌리가 얼마나 쉽게 뽑히는지 보세요. 흙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겁니다.”
  피트라는 조용히 이야기를 듣다가 말했다.
  “어쨌든 식물들은 살아남지 못할 거에요. 이건 열대 식물이거나 아니면 아열대 식물일 거에요. 지금같은 기추에서는 밀림은 말할 것도 없이 소나무라도 견디지 못할 거에요. 풀들은 금방 시들어 버릴거고 식물들이 말라죽으면 시드와 다른 공룡들도 굶어 죽게 될 거에요.”
  “피트라가 옳아요.”
  필쳐 박사가 말했다.
  “할 수 있는 한 빨리 많은 조을 조사해야 합니다. 분석을 끝낸 다음에는 이 생물들의 생활권을 옮겨야 해요.”
  “무슨 말씀이세요?”
  콜터가 말을 잘랐다.
  “무스는 밖으로 끌어내지 못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시드하고 다른 공룡들을 함께 옮기시려는 거라면 다시 생각해 보시죠. 시드가 차 안에 배설했을 때의 냄새를 맡으셨잖아요.”
  피트라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얼른 나섰다.
  “그런 일은 아마 또 있을 거야. 너도 시드가 갇힌 후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잖아.”
  “어떤 식으로든 공룡들은 이동할 겁니다.”
  쿰 박사가 말했다.
  “식물들이 말라죽으면 다른 식량원을 찾아 나설 게 분명해요. 이곳에서는 우리가 발견한 동물들이 살아 남기 힘들어요. 공룡들이 이동한다 해도 오랫동안 버티지는 못할 겁니다. 공룡들이 굶어 죽지 않는다 해도 목장 주인들이 공룡을 죽일 겁니다.”
  “자, 그럼.”
  쿰 박사가 말했다.
  “할 일이 뭔지 가 볼까요?”
  그들은 물과 점심을 챙긴 다음 무릎까지 올라 온 풀숲을 헤치고 초원으로 갔다. 시드와 공룡들은 그들을 쫓아오고 있었는데 금세 풀빛과 몸 색깔이 비슷해져 잠시 후에는 공룡들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필쳐 박사는 뭔가 수풀 속으로 휙 사라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신경이 점점 예민해져 동물군들을 제대로 살피려면 덫을 놓는 것이 낫겠다며 불평했다. 그들이 키 큰 덤불 근처에 다다랐을 때 콜터가 풀 속으로 몸을 던지며 뭔가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콜터, 우리는 또 다른 프시타코사우루스는 필요 없네.”
  필쳐 박사가 풀을 밟으며 주의를 주었다.
  “다른 종류에요... 더 큰 놈이에요. 야 임마, 아, 아야, 아야! 이런 나쁜 놈 같으니라구.”
  “해치지 마!”
  피트라가 소리쳤다.
  “내가 다쳤단 말이야. 이제는 네가 당할 차례야.”
  콜터는 그의 팔 안에서 발버둥치는 동물을 안고 일어나느라 애쓰고 있었다. 이번에 콜터가 붙잡은 것은 시드보다 30센티미터는 큰 종류였다. 동물의 목 주위에는 딱딱하고 큰 깃같은 것이 달려 있었고, 머리는 몸 전체 길이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앵무새처럼 생긴 부리가 아래턱 쪽으로 구부러져 있었지만 시드보다는 덜 튀어 나와 있었다. 짧지만 튼튼해 보이는 다리는 크기가 거의 같았고 분명히 네 개였다. 몸통은 탁한 녹색을 띠고 있었다.
  “새끼 스테고사우루스 같은데요.”
  피트라가 말했다.
  “아냐, 아목이 달라, 케라톱신에 가까운 것 같아.”
  쿰 박사가 대답했다.
  “이 공룡은 다 성장한 상태로 보이는군.”
  쿰 박사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기를 바래요. 어미가 나타났을 때 새끼를 안고 있고 싶지는 않으니까.”
  콜터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더니 공룡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아직 풀어 주지 말게.”
  필쳐 박사가 말했다.  
  “아주 아름답군.”
  “무척 무거워요.”
  콜터가 대답했다.
  “그건 새끼 스테고사우루스가 아니야.”
  필쳐 박사가 정정했다.
  “내가 보기에는 마이크로케라톱스야.”
  “별로 크지 않은데요.”
  피트라가 말했다.
  “아주 무겁다니까요.”
  콜터가 다시 말했다.
  “차 안에 넣게, 콜터.”
  쿰 박사가 말했다.
  “나중에 살펴보도록 하지.”
  콜터가 걷다 말고 소리쳤다.
  “이번에는 종이를 깔아 놓을게요.”
  콜터가 이야기를 듣지 못할 정도로 멀어지자 필쳐 박사는 쿰 박사에게 몸을 돌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틀림없이 콜터는 저 공룡에게 마이크라는 이름을 지을 테니 두고 봐요.”
  우연히 이야기를 엿듣게 된 피트라는 소리 죽여 웃으며 울타리 쪽으로 걸어갔다. 쿰 박사와 필쳐 박사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동물들이 쏜살같이 수풀을 헤집고 다녔기 때문에 금세 필쳐 박사는 신경이 날타로워졌다. 박사는 콜터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콜터는 공룡을 잡는데 굉장한 솜씨를 보이고 있었다. 그는 공룡 잡는 일의 위험성을 모를 정도로 막무가내였다.
 키 큰 덤불들이 빽빽하게 나 있었기 때문에 걷기 힘들었지만 잠시 후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풀이 성긴 쪽을 발견해냈다. 피트라가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쿰 박사가 그녀의 팔을 잡아 세웠다.
  “어떻게 이 길이 생긴 것 같아?”
  피트라가 자세히 살펴보니 관목ㄷ르의 가지는 부러져 있었고 풀은 뭉개져 있었다. 필쳐 박사는 무릎을 꿇고 풀을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일행을 올려다보았다.
  “시드보다 큰 놈인 것 같군.”
  그가 말했다.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컸기 때문에 그들은 쿰 박사의 안내에 따라 길을 나아갔다. 덤불들이 점점 성겨지면서 걷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필쳐 박사와 쿰 박사는 가끔씩 멈춰 서서 다양한 종류의 관목들을 조사하고 분류를 하며 논쟁을 벌였다.
  저 멀리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호수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쿰 박사가 피트라와 필쳐 박사에게 관목 그늘 아래로 들어오가고 손짓했다. 2미터 정도 되는 물체가 바로 코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제대로 보기는 어려웠지만 그 동물은 길고 가는 목을 똑바로 쳐들고 걷는 것 같았다. 동물은 천천히 걷고 있었고 사람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숨을 죽였지만 동물은 태평스럽게 걷고 있었다. 그 동물이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그들 뒤에 있던 관목이 가라지더니 뭔가 뛰쳐나왔다. 그들은 놀라서 벌뗙 일어나 몸을 돌렸다 -바로 콜터였다.
  피트라가 숨을 크게 내쉬더니 주먹으로 살짝 그의 가슴을 때렸다.
  필쳐 박사와 쿰 박사도 피트라와 마찬가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이크로케라톱스는 안전한가?”
  필쳐 박사가 물었다.
  “사라는 아주 잘 있었어요. 시드보다 느린 것 같지만 힘은 훨씬 센 것 같아요.”
  “마이크로세라톱스한테 마이크가 아니라 사라라고 이름 붙였나?”
  “암놈한테 남자 이름을 붙여줄 순 없잖아요.”
  “그게 암놈인지 어떻게 알지?”
  필쳐 박사가 물었다.
  “자동차 안에 온통 오줌을 쌌기 때문에 알았죠.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싸던데요.”
  필쳐 박사가 콜터의 논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으나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먹을 거는 좀 줬어?”
  피트라가 물었다.
  “사과 두 개하고 크래커 조금 줬어. 무스한테도 주었는데 -”
  콜터가 말을 멈추고 일행의 뒤쪽을 넘겨다보았다.
  “저건 또 뭐죠?”
  사람들이 몸을 돌려보니 불과 3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키가 2미터는 되 보이는 공룡이 서 있었다. 공룡은 지금까지 그들이 보아온 종류와는 달랐다. 덩치가 훨씬 컸고 커다란 머리의 대부분을 입이 차지하고 있었다. 작고 까만 두 눈은 얼굴의 옆쪽에 붙어 있었고 툭 튀어나온 주둥이 끝에 아주 큰 콧구멍이 나 있었다. 공룡은 거대한 두 뒷발로 선 채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었는데 꼬리가 매우 굵었다. 가느다란 두 앞발에는 새 개의 발가락이 달려 있었다. 몸통은 흐린 녹색으로 주름이 늘어져 있었는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발가락마다 달려 있는 갈고리 모양의 발톱으로 아주 무시무시해 보였다. 콜터가 필쳐 박사의 어깨에 얼굴을 갖다 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만약 제가 이놈을 잡기를 원하시는 거라면, 제발 포기하세요.”
  그때 공룡이 그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일행은 간다이 서늘해졌고 콜터를 원망했다. 한편 공룡은 그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공룡의 눈에 적의는 보이지 않았고 그저 호기심만 담겨 있을 뿐이었다. 공룡은 방향을 바꾸고 몸을 앞으로 숙인 채 빠른 속도로 수풀을 지나갔다. 긴 꼬리는 등줄기를 타고 죽 뻗어 있었다. 공룡은 한 번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공룡이 사라질 때까지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겠어요, 필쳐 박사.”
  쿰 박사가 말했다.
  “저건 데이노니쿠스에요.”
  “아뇨, 내 생각은 달라요.”
  필쳡 박사가 재빨리 대답했다.
  “오히려 스테노니코사우루스 같은데요.”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이 없었다.
  “저희한테 말씀하시지 않은 게 있죠?”
  피트라가 물었다.
  쿰 박사가 망설이더니 마침내 말했다.
  “데이노니쿠스는 카르노사우루야.”
  피트라는 그 말이 뜻하는 것을 깨닫고 말을 잇지 못하는데 콜터가 침묵을 깨뜨렸다.
  “카르노사우루가 도대체 뭔데요?”
  두 박사는 아무 말 하지 않았고, 피트라가 콜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육식 공룡이라는 뜻이야.”
  “그래서? 박사님들께서 공룡 모두를 시드나 무스 같을 거라고 기대하신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콜터는 뜻하지 않게 포식자와 맞닥뜨린 것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고, 사실 대부분 그의 말이 옳았다. 콜터는 처음에는 이곳이 선사 시대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현실을 받아 들였고, 다른 사람들이 부정하는 현실의 위험들을 인식하고 있었다.
  필쳐 박사는 당화하여 자신과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명했다.
  “나도 공룡 모두가 시드 같을 거라고는... 작은 공룡만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네. 하지만 마찬가지로 선사 시대의 이 일부에 육식 동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는 걸세. 결국은 선사 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은 정도의 포식자들이 있었어. 공룡의 2퍼센트만이 육식 공룡이었어. 현재 포유 동물들도 같은 비율을 보이고 있지. 콜터, 자네가 숲 속을 지날 때 얼마나 자주 곰이나 사자와 마주칠 것 같나? 나는 결코 한 번도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네.”
  “어떻게 2퍼센트라고 확신하시죠?”
  콜터가 물었다.
  필쳐 박사는 망설이는 것 같았고, 쿰 박사가 대신 말했다.
  “2퍼센트라는 것은 비록 우연이 잠깐 겪은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경험에 근거한 추측일세.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
  “박사님, 우리에게 필요한 건 총이에요. 제가 마을로 가서 구해올까요?”
  콜터가 제안했다.
  “아냐...아냐.”
  필쳐 박사가 말했다.
  “나는 어느 것도 죽이고 싶지 않아...”
  “데이노니쿠스는 무리를 지어 사냥을 한다고 알려져 있어요. 체스터.”
  쿰 박사는 콜터의 생각을 받아들이려는 듯했다.
  필쳐 박사는 망설였다.
  “생각해 보기로 하죠. 돌아가서 이야기해 봅시다. 이제 돌아갑시다.”
  필쳐 박사가 데이노니쿠스가 지나간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그들은 말없이 걸었고 이제는 큼 공룡뿐 아니라 작은 종류에 대해서도 경계심을 가졌다. 그들은 RV 쪽으로 이어져 있는 키 큰 덤불을 지나서야 안심했다. 덤불은 점점 적어졌기 때문에 사야가 좀 더 넓어졌다. 그들은 곧 나뭇잎이 수북히 쌓인 작은 초원에 다다랐다. 그들은 초원을 가로지르다가 나뭇잎들이 무르다는 것을 깨닫고 그 가장자리로 돌아 걸었다. 콜터만이 발이 푹푹 빠지는 그 위를 계속 걸었다.
  “제기랄, 왜 이렇게 뜨거워.”
  그가 투덜거렸다. 
  필쳐 박사는 콜터의 불평을 무시하고 걷다가 갑자기 섰다. 그 바람에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피트라고 필쳐 박사와 부딪쳤다.
  “콜터, 햇빛 정도로 따뜻한 건가, 아니면 뜨거운가?”
  필쳐 박사가 물었다.
  “뜨거워요. 이리 오셔서 한 번 만져 보세요.”
  쿰 박사가 잎 속에 손을 넣었다.
  “이상할 정도로 따뜻해요. 틀림없이 부패하면서 생긴 열일 거에요.”
  필쳐 박사도 손을 넣었다.
  “체스터, 한 번 파 볼까요?”
  쿰 박사가 물었다.
  “그러죠. 하지만 서둘러야 해요. 콜터, 좀 파 보겠나? 조심해서 하게.”
  “뭐 때문에요?”
  “콜터, 어서 파게! 피트라는 가서 지켜 보고.”
  쿰 박사는 벌써 한 줌의 나뭇잎을 옆으로 치우고 있었다. 콜터는 허리를 구부리고 마치 개처럼 다리 사이로 낙엽들을 파냈다. 쿰 박사도 콜터를 따라 했다. 그들은제일 먼저 윗부분의 더미들을 치우고 점점 구멍을 넓혀 갔다. 겉에 있는 낙엽들은 말라 있었지만 구멍 안에 있는 것들은 습기 때문에 심한 악취를 풍기며 썩고 있었다. 
  고약한 냄새에 불평을 하면서도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하던 쿨터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20센티미터 정도 크기의 알을 발견한 것이다. 필쳐 박사는 즉시 그 알을 꺼내 쿰 박사에게 넘겨주었다. 알 표면이 아주 매끄러웠다.
  “따뜻하군요.”
  필쳐 박사가 말했다.
  “네, 아마 부식열 때문에 그럴 겁니다.”
  쿰 박사가 대답했다.
  “아주 영리해, 정말 영리해”
  “이리 와 보세요. 더 있어요.”
  콜터가 양손에 알을 쥐고 있었다. 그들이 둥지를 덮은 낙엽을 완전히 들어내자 세 겹으로 원을 그리며 놓여 있는 20센티미터 크기의 알들이 드러났다. 알의 뾰족한 부분이 원 안쪽으로 향해 있었다.
  필쳐 박사는 알의 모양을 스케치한 다음 알을 다시 묻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처음에 발견한 알은 집어들었다. 그들이 낙엽을 다시 덮었지만 처음과는 달라져 있었다. 훨씬 둔덕이 높아져 있었고 고르지도 않았다.
  필쳐 박사는 초원 언저리에서 쿰 박사의 스웨터로 감쌌던 알을 꺼내 자신의 셔츠 속으로 집어 넣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RV로 향했다.  
  인간이 떠난 지 40분 후 리노케로스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공룡이 초원으로 재빨리 들어왔다. 어미 공룡의 거대한 목 주변에는 커다란 깃이 달려 있었고 꼬리는 짧고 굵었다. 코에는 길고 굽은 뿔이 달려 있었고 두 개의 작은 뿔이 목둘레 깃에 달려 있었다. 머리는 몸통의 4분의 1은 족히 돼 보였다. 공룡은 네 다리로 걸었는데 뒷다리가 앞다리보다 길었기 때문에 엉덩이쪽이 몸 앞쪽보다 위로 올라가 있었고, 머리는 거의 땅에 닿을 정도였다. 공룡은 땅에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느라 정신없었다.
  시력이 나빴기 때문에 공룡은 예민한 후각을 이용하여 대부분의 정보를 얻어냈다. 공룡은 알을 낙엽 속에 묻어 놓은 이후 하루에 두 번씩 냄새를 맡곤 했는데 매번 똑같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지금까지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새로운 냄새가 났다. 공룡은 재빨리 낙엽을 앞발로 헤쳐 놓고 알을 살피기 시작했다. 알은 있었다. 어미 공룡은 꼬리로 나뭇잎을 다시 쓸어 덮고 땅을 평평하게 골랐다. 이제 어미 공룡은 땅에 머리를 대고 냄새를 맡은 다음 둔덕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어미 공룡은 초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다가 거기에서 알 냄새를 희미하게나마 맡았다. 아주 약한 냄새였지만 틀림없었다. 나뭇잎 썩는 냄새와 전에는 맡아보지 못한 이상한 냅새가 함께 섞여 있었다. 어미 공룡은 자신의 둥지를 침입한 자가 있다는 걸 알았다. 어미 공룡은 냄새를 좇아 초원을 떠났다.
  29. 숲 속의 생활
  아, 두 시대가 공존하는 시대를 살아서 볼 수 있다면!
  조라스트서스, 바빌론의 왕 앞에서
  오레곤주 포틀랜드가 있던 자리에 생긴 숲 월요일, 오전 7시 5분 (태평양 표준시)
  이제는 리프먼이 없었기 때문에 커비가 자동적으로 리더 역할을 해 나갔다. 존은 커비와 함께 있기로 한 결정을 후회했다. 그는 해변가 별장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부모님이 지금쯤 그곳에 도착해서 벽난로 앞에 앉아 게 요리를 벅고, 발코니에 서서 갈매기들이 빵 부스러기를 던져 주는 모습을 상상했다.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하마터면 갑자기 몸을 웅트리며 멈춘 커비에게 걸려 넘어질 뻔했다.
  “뭐야, 큰 -”
  “쉬.”
  커비가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그리고 앞쪽의 수풀을 가리켰다. 그들은 완만하게 경사진 비탈 위에 있었다. 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수풀을 살펴보았다. 그들이 올라온 언덕의 반대편은 급격하게 비탈이 지면서 작은 계곡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발아래 펼쳐진 계곡에는 나무가 거의 보이지 않는 대신 진한 초록색 풀들과 양치 식물들만 무성했다. 계곡 여기저기 수풀 위로 둥근 것들이 솟아나 있었다. 존은 그 둥근 것들이 불쑥 올라와 주위를 돌아볼 때까지 커비의 관심을 끈 것이 뭔지 알지 못했다.
  “코뿔소같은데.”
  “오히려 큰 아르마딜로같은데. 봐. 갑옷같은 걸 뒤집어썼고 뿔은 없잖아. 저기 좀 봐.”
  동물 가운데 한 마리가 초원에서 움직이고 있었고 그들은 그 몸집과 꼬리를 얼핏 보았다. 동물은 머리를 숙인 채 네 발로 걷고 있었는데 질질 끌고 오는 꼬리의 끝은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꼬리 봤니? 마치 철퇴같아, 기사들이 사용하던 무기 말이야.”
  커비는 존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다음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말했다.
  “계곡 밖으로 돌아서 가자.”
  “그게 좋겠어.”
  존이 조용히 대답했다.
  “서쪽으로 가다가 태평양이 나오면 왼쪽으로 가면 돼.”
  커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나무 사이를 빠져나갔다. 존은 그 뒤를 따라가면서 리프먼과 커비가 흙 위에 그렸었던 지도를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그들은 언덕을 올라온 뒤 자긍ㄴ 계곡으로 이어진 길을 지나왔고, 존은 이 언덕이 커비 아버지의 교회 근처에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계곡에서 본 큰 공룡은 그들이 도망치기 시작한 이후 본 것 중 가장 큰 놈이었다. 길을 지나는 동안 작은 도마뱀 종류는 많이 봤지만 이렇게 큰 공룡은 처음이었다. 존은 계속 해변가 별장에 대해 생각했다.
  나무들은 점점 울창해지고 있었고 거대한 삼나무가 또 다시 숲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더뭅ㄹ들이 적어지면서 연한 양치 식물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비탈진 언덕을 오르면서 존은 커비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앞서 가던 커비가 나무 사이로 사라졌기 때문에 존은 속력을 냈다. 갑자기 커비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존! 여기야, 여기!”
  존은 아픈 다리를 겨우 끌고 나무들 사이를 빠져 나와 언덕을 힘겹게 올랐다. 울퉁불퉁하던 땅은 평평해졌는데 숲을 빠져 나오자 산보우리가 나타났다. 커비가 소리를 지르며 뭔가 가리키고 있었다. 계곡이 그들 밑에 펼쳐지고 있었고 그 뒤로 언덕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존은 커비의 손끝을 따라 눈을 돌렸다. 자세히 보아야 했지만 언덕 사이에 있는 건 포틀랜드였다.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모습이었지만 틀림없이 포틀랜드였다.
  “찾아냈어.”
  존이 큰 소리로 말했다.
  “해낸 거야.”
  커비가 존을 힘껏 끌어안고는 빙글빙글 돌았다. 그들은 춤을 추며 함성을 지르다가 바위에 걸터앉아 가지고 있던 통조림을 먹었다. 그리고는 수통의 물을 마셨다. 그들은 신나서 월라밋 계곡까지 어떻게 갈 것인지 계획을 짰다. 잠시 후 커비가 포틀랜드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존은 무슨 일인가 싶어 커비를 따라 포틀랜드를 보았다. 포틀랜드는 아직 언덕 사이에 있었지만 아물거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 존은 다른 것을 보았다. -포틀랜드 뒤에 있는 언덕들이 보이고 있었다. 
  “내 눈에도 보여.”
  존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냐, 넌 볼 수 없어.”
  “커비, 저 건물들 너머를 볼 수 있단 말이야.”
  “그건 환영이야. 넌 건물 너머를 볼 수 없어.”
  존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본 것이 환영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ㄷ. 하지만 거기에는 공룡도 없을 것이다.
  커비는 말없이 언덕을 내려갔다. 존도 따라 내려갔지만 조금 전까지의 흥분은 모두 가시고 없었다.
  언덕을 내려가는 것은 위에서 볼 때보다 어려웠다. 나무가 별로 없던 숲은 갑자기 나무들이 뒤섞여 쓰러져 있는 길로 이어졌고, 존과 커비는 나무들을 타고 넘어야 했다.
  그때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괴성이 들리더니 나무들이 흔들렸다. 몸을 돌려보니 나무 사이로 두 마리의 공룡들이 빠져 나오고 있었다. 앞에 선 공룡은 2족 보행 공룡으로 둥근 머리에 굵고 짧은 목을 가지고 있었고 필사적으로 도망을 치고 있었다. 공룡은 키가 5미터가 넘어 보였고 존이 본 것 가운데 제일 큰 놈이었다. 하지만 그 뒤를 쫓고 있는 공룡은 그것보다도 더 컸다. 둥근 머리 공룡보다 3미터 정도 위에서 엄청나게 큰 입을 쩍 벌린 채 날타로운 이빨을 보이고 있는 공룡은 존이 보기에도 티라노사우루스였다. 둥근 머리 공룡은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고, 다리를 절룩이며 숲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공룡은 나무들이 쓰러져 있는 쪽으로 올수록 속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존은 그놈이 지쳤다는 걸 알았다 -놈은 곧 티라노사우루스한테 잡아먹힐 것이다.
  존과 커비는 뽑힌 채 쌓여 있는 나무들 쪽으로 달려가 그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땅이 흔들리더니 작은 공룡이 비명을 질렀다. 커비는 나무 사이로 밖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존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존은 고개를 돌릴 수 없을 정도로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는 땅에 몸을 바짝 엎드리고 밖을 살짝 보았다. 공룡들은 7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싸우고 있었는데 티라노사우루스가 둔근 머리 공룡의 목덜미를 물었다. 둥근 머리 공룡은 비명을 지르며 티라노사우루스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작은 공룡은 꼬리를 사납게 흔들어댔다. 티라노사우루스는 몸을 돌려 작은 공룡의 공격을 피한 뒤 제물의 움직임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계속 자신의 꼬리로 작은 공룡을 후려쳤다. 공룡이 몸부림칠 때마다. 풀더미와 흙먼지들이 엄청나게 일어나 존과 커비의 몸 위로 떨어졌다.
  둥근 머리 공룡의 목에서 솟아난 피가 가슴과 다리로 흘러내리면서 살을 붉게 물들였다. 티라노사우루스는 계속해서 둥근 머리 공룡의 목덜미를 물고 있었고, 둥근 머리 공룡은 결국 무릎을 꿇고 땅 위로 쓰러졌다. 둥근 머리 공룡의 고통스러운 비명은 구슬픈 흐느낌으로 변했고, 마침ㅇ내는 그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티라노사우루스는 죽은 공룡의 목덜미를 한동안 물고 있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고 나서야 먹이에서 입을 뗐다. 존은 티라노사우루스가 고개를 쳐들고 승리를 알리는 포효 소리를 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티라노사우루스는 오랫동안 시체의 목덜미에 흐르는 피를 핥기만 했다. 공룡의 혀가 피로 물들었다. 잠시 후 티라노사우루스는 숲이 떠나갈 정도로 게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셨다. 커비가 ‘하나님이 우리는 보호하사’ 하고 기도하는 순간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거처럼 공룡은 머리를 돌려 그들이 숨어 있는 쪽을 노려보았다.
  “움직이지마.”
  커비가 속삭였다.
  존은 커비에게 아무 말 하지 마랄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공포로 온 몸이 말이 듣지 않았다. 한참을 노려보던 공룡은 먹이로 몸을 돌렸다. 존은 조용히 바닥에 드러누웠다. 커비가 옆에 있었다. 존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앞으로 이 이상의 두려움은 느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타리노사우루스가 먹이를 먹는 소리가 울려왔다. 티라노사우루스는 침을 뚝뚝 흘리며 큰 소리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그 무시무시한 입 속에서 살과 뼈가 씹히는 소리였다.
  30. 파편
  도시는 혼란에 빠지며 땅 속에 있던 것들이 지상으로 나올 것이다. 
  조라스트러스, 바빌론의 예언자
  플로리다 네이플즈 앞바다 월요일, 오전 10시 15분 (서부 표준시)
  나무토막과 나뭇잎들이 뒤섞인 바닷물이 사람들을 덮쳤고, 그들은 놀라 잠에서 깨었다. 늦은 아침이었으나 짙은 구름과 안개로 밤처럼 어두웠다.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차양을 내려야겠어요.”
  카르멘이 말했다
  “크리스? 앉을 수 있겠니?”
  론은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크리스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얼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이마의 상처가 부풀어 있었다. 
  “크리스, 괜찮아? 로자 맞은편으로 움직일 수 있겠니?”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움직였다. 론은 몸을 뻗어 차양 위에 묶인 가리개를 내리다가 큰 파도가 몰려오는 것을 보았다.
  “모두들 붙잡아!”
  그가 소리쳤다. 
  그들은 모두 구명 보트 안에 달려 있는 밧줄을 붙잡았다. 카르멘은 크리스를 감싸 안았고 론은 자신의 팔을 로자의 팔에 끼웠다. 웅크리고 앉은 그들 위로 파도가 덮쳤다. 파도에는 진흙 덩어리와 그 밖의 파편들이 섞여 있었다. 나뭇잎들과 작은 가지들이 머리와 팔을 쳤다. 보트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파도가 지나가자 론은 컵으로 배 안에 들어온 물을 퍼냈고, 카르멘은 배 안에 쌓인 파편들을 치웠다. 로자는 왼팔을 심하게 다쳤기 때문에 오른팔로 카르멘을 도왔다. 론은 로자의 팔이 부러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크리스가 파편을 치우다가 말고 말했다.
  “저기, 안개가 엄청나요.”
  론이 보니 구름이 맹렬한 기세로 몰려오고 있었다.
  “다시 잡아.”
  보트가 심하게 흔들리면서 그들은 이리저리 밀려 다녔다. 뜨거운 수증기가 그들을 둘러쌌다. 수증기에서 뿜어 나오는 유황 냄새에 그들은 재채기를 해댔고, 코와 목은 타는 듯 했다. 흔들림이 조금씩 가라앉았고 공기도 맑아졌다. 론은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짙은 안개에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증기일 뿐이야.”
  그가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그는 더 말하지 않았지만 다른 식구들은 이미 많은 근심거리를 겪고 난 후였다.
  론은 보트 안에 쌓인 쓰레기들을 치우고 물을 퍼냈다. 그런 다음 물품들을 점검했다. 물과 주머니 칼, 그리고 조명탄 네 개, 낚시 도구, 그리고 노가 남아 있었다. 그가 다시 물건들을 정리하는데 뭔가 보트를 강타했다.
  “통나무에요.”
  카르멘이 소리쳤다.
  “밀어내게 도와주세요.”
  론은 노를 이용해 나무를 밀어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보트는 중심을 잃고 빙그르르 돌다가 나무와 부딪치고 말았다. 론은 노를 다시 붙잡고 나무를 밀어냈다. 갑자기 어떤 물체가 나무 위로 돌진 해 오고 있었다. 30센티미터 정도 크기의 녹색 도마뱀이었다. 론은 본능적으로 노를 휘둘러 도마뱀의 다리를 쳤다. 도마뱀은 통나무 옆에 매달려 있다가 나무 위로 올라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론은 다시 노를 휘둘러 도마뱀을 물 속에 빠뜨렸다. 도마뱀은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론은 통나무를 보트에서 밀어낸 다음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었고, 나무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뭐였어요?”
  카르멘이 물었다.
  “그렇게 생긴 것은 처음 봤어. 머리가 무척 큰데.”
  론은 도마뱀의 이빨이 아주 날카로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제는 없으니까 안심해도 돼.”
  아이들은 안심했지만 카르멘과 론은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밤부터 시달렸기 때문에 그들은 잠시 쉬면서도 속으로는 다들 걱정을 하고 있었다. 크리스는 보트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훨씬 나아진 것 같아요.”
  카르멘이 말했다.
  “혈색이 좋아졌어. 의사한테 보이면 좋을 텐데.”
  그들은 조바심을 냈지만 방법이 없었다.
  “저쪽에 도마뱀이 또 있어요!”
  갑자기 크리스가 소리쳤다. 
  로자가 크리스 옆으로 가서 보고 말했다.
  “여러 마리 같은데요.”
  “이쪽으로 와라, 얘들아.”
  론이 명령했다. 도마뱀들이 보트 쪽으로 오고 있었다. 
  “로자, 노를 다오.”
  론은 힘껏 노를 저어 보트를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물 위에 떠 있는 파편들 때문에 노젓기가 힘들었다. 뒤를 보니 물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머리들의 수가 더 늘어나 있었다. 카르멘이 칼을 가지고 론 옆으로 왔다.
  노 젓는 것만이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 물 속에 떠 있는 짐승들의 녹색 머리는 대부분 입이 차지하고 있었고, 작고 까만 문은 보트에 고정되어 있었다. 론은 노를 들었다.
  “여보, 저기 한 떼가 또 있어요.”
  론은 노를 휘둘러 첫 번째 놈을 몰아냈지만, 짐승은 이빨을 드러내며 다시 달려들었다. 두어 번 더 내려쳐 쫓았으나 이번에는 다른 놈들이 달려들었다. 론은 계속해서 세차게 내려쳤다.
  “이쪽이에요!”
  카르멘이 비명을 질렀다.
  론이 몸을 돌려 한 마리를 보트에서 떼어냈다. 도마뱀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져 나갔다. 크리스의 비명에 그가 고개를 돌려보니 보트가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머리 하나가 나타났고 론은 몸의 균형을 잡으며 있는 힘을  다해 노를 휘둘렀다. 짐승은 공격에 놀란 듯 했으나 앞발톱으로 보트를 꽉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론은 노를 옆으로 뉘여 짐승의 머리를 쳤다. 시체가 물에 떠내려갔다.
  론이 보트 뒤에 매달린 두 놈을 더 떼어냈을 때 다시 크리스의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한 놈이 크리스 쪽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몸을 숙여, 크리스!”
  크리스는 마치 노에 머리를 맞기라고 한 것처럼 바닥에 몸을 숙이더니 도마뱀의 주둥이를 잡고 목을 꽉 눌렀다. 론은 정신없이 노를 휘두르며 머리들을 계속 후려쳤다. 도마뱀들은 바다 속으로 내몰렸고 보트에서 멀어져 갔다. 통나무 하나가 근처로 밀려오면서 인간과 도마뱀과의 전투는 끝났고 살아 남은 도마뱀들은 재빨리 나무 위로 올라갔다.
  얼른 노를 저었고 안개 자욱한 바다에는 그들만 떠 있었다.
  “아빠, 그게 뭐에요?”
  머리를 저으며 론이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구나. 섬에서 온 동물들인 것 같아.”
  그때 갑자기 발톱이 보트 옆쪽에서 불쑥 솟아나면서 로자의 머리를 잡아챘다.
  “잡혔어요!”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주둥이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였다. 바닥이 미끄러워 론은 일어나느라 애를 먹었다. 론은 노를 잡고 보트를 잡은 괴물의 발과 머리를 내려쳤다. 놀란 짐승이 가만히 있다가 론의 머리 위로 솟구쳐 오르며 괴성을 질렀다. 론은 망설이지 않고 노를 들어 짐승의 목구멍 안에 던졌다. 괴물이 놀라 입을 다물다가 자기 발가락을 물었다. 괴물은 목구멍에 박힌 노를 빼내려고 앞발로 미친 듯이 긁어 대다가 옆으로 쓰러졌다. 그때 카르멘이 칼을 괴물의 목에 꽂았다. 론은 도마뱀을 힘껏 물 속으로 밀어냈다. 괴물은 꽥꽥대더니 요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극도의 공포 속에 기진맥진한 식구들은 보트에 드러누웠지만 카르멘은 계속 피 묻은 칼을 쥐고 있었다. 론은 크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더 이상 칼이 필요한 일이 없기를 빌었다. 곧 모두 잠이 들었다.
  “어, 어! 또 와요!”
  크리스가 다른 사람들을 깨우며 소리쳤다.
  카르멘과 로자가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움직이지마!”
  론이 소리쳤다.
  “보트가 뒤집히면 안돼. 카르멘, 당신이 뭔지 보고, 로자 너는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거라.”
  카르멘은 크리스 옆으로 조금 움직여 아이가 뭘 보았는지 찾았다.
  “크리스 말이 맞아요. 물보라를 일으키며 뭔가 오고 있어요.”
  “아까 그 짐승들 같소?”
  “모르긴 해도 더 큰 것 같아요. 여보, 당신이 보는 게 좋겠어요.”
  론은 크리스와 자리를 바꾸었다.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것 역시 괴물 같았고 사람과 비슷한 크리의 머리가 달려 있었다. 약간 벌어진 입 사이로 뾰족한 이빨들이 보였다. 동물은 작은 다리로 헤엄을 치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론이 몸을 돌려 무기를 찾았다. 칼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무기랄 수도 없었다.
  “론, 이리 와요! 이렇게 크다니. 정말 큰 놈이에요!”
  론이 보니 카르멘은 뒤로 물러나며 아이들에게 반대쪽으로 가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갑자기 보트가 옆으로 기우뚱하더니 엄청나게 큰 머리가 불쑥 솟구쳤다. 크리스는 비명을 지르며 론에게로 넘어졌다. 공룡은 입을 벌리며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앞발로 보트를 잡고 안으로 올라오려고 했다. 발톱이 보트를 찢는 바람에 공기가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다. 보트는 점점 물 속으로 잠겼고 도마뱀은 몸을 더 앞으로 끌어올렸다. 보트 안으로 물이 넘쳐 들어왔지만 도마뱀은 계속 기어올랐다. 거대한 뒷다리가 나타났다.
  “보트를 버려야겠어.”
  론이 말했다. 
  카르멘은 벌써 크리스가 물에 들어가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고 로자는 스킨 다이버처럼 등쪽으로 몸을 굴려 물에 뛰어들고 있었다. 도마뱀은 보트 안으로 올라오려고 애쓰고 있었다. 도마뱀은 사람들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론과 그의 가족들처럼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론은 물 속으로 뛰어들려다가 물건들을 기억해냈다. 그는 재빨리 그물 주머니에 1리터 짜리 물병 4개를 담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물 위에 떠 있는 부유물들을 치우며 헤엄쳐야 했다. 배에서 어느 정도 멀리 떨어져 나왔을 때 보트가 가라앉기 사작했고, 도마뱀의 무게에 눌린 보트가 도마뱀의 머리를 뒤덮고 있었다. 도마뱀은 발버둥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갈기갈기 찢긴 보트는 도마뱀의 몸을 조이고 있었다. 마침내 도마뱀은 물에 가라앉아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공기가 빠진 보트만 바다에 떠 있었다.
  사람들은 망연자실해서 물 위에 떠 있었다. 몸을 떠받칠 구명 조끼도 없었기 때문에 론과 카르멘은 곧 피로를 느꼈다. 그들은 원을 만들어 아이들의 사이 사이에 들어가 구명 조끼 역할을 했다.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바람은 아직도 강하게 불고 있었지만 바다는 많이 잠잠해져 있었다. 하늘은 아직 어두웠고 안개는 짙었으며 유황 냄새도 여전했다. 
  “엄마, 저쪽에 뭐가 있어요.”
  로자가 말했다.
  카르멘과 론이 동시에 쳐다보았다. 마치 뒤집힌 배처럼 위로 불룩 솟은, 앙트르프르네호의 두 배는 될 만큼 크고 검은 물체가 천천히 파도를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보트가 뒤집혔나 본데.”
  론이 먼저 말했다.
  “저리 헤엄쳐 가자꾸나.”
  그들은 작은 언덕처럼 보이는 그 물체를 향해 헤엄쳐 갔다. 카르멘이 먼저 그 위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그 물체가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론, 이건 파이버 글래스 같지 않은데요.”
  “일단 올라가요.”
  마침내 카르멘은 언덕 위로 올라갔고, 양팔을 벌려 균형을 잡으며 크리스를 겨우 끌어올려 그녀 옆에 앉혔다. 하지만 론과 로자는 계속 미끄러지며 올라가지 못했다. 론은 로자를 밑에서 오리느라 애썼지만, 로자가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데다 그물 주머니에 든 물병들이 너무 무거워ㅓ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다.
  론은 필사적으로 로자를 밀어 올렸다. 그때 그의 발에 뭔가 닿는 것이 있었다. 그는 발에 힘을 주고 로자를 밀어 올렸고, 로자는 등을 대고 누우면서 아픔을 이기지 못해 신음했다. 론은 그녀를 좀 더 위로 밀어 올린 다음 자신의 몸을 끌어올렸고, 겨우 크리스와 카르멘가 합류할 수 있었다. 네 사람은 서로 손을 잡은 채 평평한 바닥에 누웠다.
  론은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에 한참이 지난 후에서야 카르멘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지금까지 이런 배의 바닥을 본 적이 없었다. 매우 매끄러웠지만 파이버 글래스 소재로 된 바닥이나 페인트로 칠한 것보다는 훨씬 거칠었다. 그는 바닥에 뺨을 대고 기계적인 움직임들을 느껴 보려고 했다. 오른쪽, 왼쪽을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그게 뭔지 생각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물보라 소리가 들렸다.
  론이 뒤돌아보니 도마뱀 한 마리가 그들 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번 것은 아까보다. 훨씬 작았지만 목둘레에 딱딱해 보이는 깃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도마뱀은 그들이 있는 언덕 위로 올라오려는 것 같았다.
  도마뱀이 날타로운 발톱을 이용하여 옆으로 기어오르고 있을 때 론은 언덕이 떨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마뱀의 크기는 50센티미터쯤으로 머리는 삼각형이었으며, 목에 깃이 달려 있었고 꽤 살이 통통했다. 몸통의 끝에는 30센티미터 정도의 꼬리가 달려 있었다. 론은 힘껏 도마뱀을 걷어찼다. 하지만 도마뱀은 보기보다 재빨랐다. 물속으로 떨어진 도마뱀은 론의 다리를 할퀴어 세 군데나 상처를 입혔다. 도마뱀은 뒤에서 헤엄치며 따라오고 있었지만 얼마 가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처량함을 느꼈다. 그는 자신과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는 운명을 원망했다.
  론은가족에게 돌아와 다시 몸을 뉘였고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는 잠이 들었지만 결국 로자가 깨우는 바람에 일어났다.
  “일어나세요, 얼른요! 하지만 조용히 하세요. 엄마 말씀이 문제가 생겼대요.”
  그는 일어나려고 했지만 로자가 그를 제지했다.
  “천천히 움직이세요.”
  론은 혼란스러웠다. 왜 천천히 움직이라는 거지? 다른 도마뱀이 올라왔나? 그는 천천히 윗몸을 일으켰다. 햇살이 비추면서 주변의 바다가 조금 더 분명하게 보였다. 로자가 다시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가 앞을 보시래요.”
  카르멘은 로자 앞에 있었고 크리스는 카르멘의 다리 사이에 앉아 있었다. 론은 시키는 대로 바다를 보았다. 바다 속에서 잔물결이 일고 있었다. 희미한 빛 속에서 론은 큰 뱀같은 것이 올라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뱀 모양의 그 물체 꼭대기에 머리가 달려 있었다. 보기에는 마치 바다뱀 같았는데 론은 얼마 안 있어 그 머리가 그들이 올라아 있는 언덕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어떤 동물의 등에 올라타고 있었다.
  31. 루이스
  어떤 이들은 공룡의 시대는 처음부터 실패작이었기 때문에 끝나버린 것이라고 말한다. 언젠가 우리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로버트 윈스턴, 사라지는 것들
  뉴욕시 월요일, 오후 12시 02분 (서부 표준시)
  루이스는 어두 속에서 깨어났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는 통증을 느꼈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머리카락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등 뒤에 벽이 있었고 그는 벽에 들을 기대고 앉았다. 거울은 없었지만 그는 얼굴이 멍들고 부었으리라는 걸 충분히 짐작했다.
  루이스는 벽에 등을 댄 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주위가 좀 더 잘 보였고 그는 카운터 뒤쪽의 부엌 안에 있다는 걸 알았다. 깨진 접시와 그릇들이 주위에 널려 있었고 뒤집힌 금전 등록기가 바닥 한가운데에 뒹굴고 있었다. 빛이 틀만 남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거리로 나왔고, 방향을 잡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내에게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었고, 또 이런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아파트까지 거의 다 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파트를 향해 휘청휘청 걷기 시작했다.
  루이스가 거의 아파트에 다 왔을 때 사람들이 보였다. 일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들은 아파트 모퉁이 근처의 교차로에 세 겹으로 세워 놓은 자동차들 뒤에 서 있었다. 루이스는 차들이 차도 뿐 아니라 인도에도 범퍼가 맞닿을 정도로 바짝 주차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마침내 그는 사태를 파악했다 -자동차들을 공룡을 막는 바리케이드였다.
  루이스는 묵묵히 아파트로 걸어가며 열쇠와 지갑을 찾았다. 둘다 없었다. 자물쇠가 뜯겨 ㄴ가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주 멈추고 쉬어야 했다. 3층에 주저앉아 있는데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루이스, 루이스 맞아요?”
  루이스가 고개를 들어보니 위더비 부인이 설탕 봉지를 들고 있었다.
  “오, 루이스, 우리 집으로 가요. 무슨 일이에요?”
  “디아블로파한테 당했어요.”
  루이스가 간신히 말했다.
  “못된 놈들 같으니. 걔네들 엄마는 도대체 뭣들 하는 건지!”
  위더비 부인은 루이스를 부축해 일으켰다.
  “멜린다와 아이들은 무사해요? 오, 다행이군요. 그런데 여기에 와서 뭘 하는 거에요? 나 때문에 온 건 아니겠죠? 난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요. 지금 어떤 모습인지 알아요?”
  위더비 부인은 집으로 가는 내내 루이스를 야단쳤지만 루이스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녀는 루이스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한 다음 그의 신발을 벗기고 손뜨개 이불을 덮어 주었다.
  루이스와 멜린다도 이것과 비슷한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 -위더비 부인은 쉬지 않고 뜨개질을 해서 루이스 부부에게 노란색 꽃과 초록색 잎사귀 무늬가 수놓아진 침대보를 놓은 걸 보고 대단히 기뻐했고, 루이스의 딸을 위해서도 침대보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녀는 따뜻한 비눗물이 담긴 플라스틱 대야를 가지고 와서 그의 얼굴에 묻은 피를 수건으로 닦아 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물을 데우셨어요?”
  “루이스, 다 씻어 낼 때까지 아무 말도 말아요. 말을 하면 얼굴에 주름이 생겨요.”
  루이스는 위더비 부인의 말대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 위더비 부인이 말했다.
  “산티니네 집에서 발견한 가스 레인지로 물을 데웠다오. 내가 그걸 훔쳤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절대 아이네요. 설탕을 조금 빌릴까 하고 갔다가 찾아낸 거지. 그런데다 누군가 먼저 문을 열어 놓았더라구요. 안된 일이지만 당신 집을 포함해서 아파트 전체가 문이 뜯겨 있어요. 도둑들이 뭘 집어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네 텔레비젼과 스테레오는 없어져 버렸더군요.”
  루이스가 얼굴울 찌푸리며 신음 소리르 냈지만 위더비 부인은 못 들은 척했다.
  “그런데 루이스, 당신 집에서 설탕을 좀 꺼내 왔어요. 당신하고 멜린다 앞으로 메모를 남겨 놓기는 했는데 가게에 갈 수 있게 되면 그때 갚을게요.”
  “가게 근처에는 가지 마세요, 부인. 모조리 털렸어요.”
  위더비 부인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가만히 누워 있어요. 당신 집에 가서 갈아입을 옷 좀 가져올게요.”
  루이스는 말리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상처가 너무 아팠던 데다 무척 지쳐 있었기 때문에 말씨름을 할 기운도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소파에 누워 있다가 곧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갈증을 느꼈다. 그는 일어나서 부엌으로 갔다. 수도꼭지를 틀어 보았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위더비 부인이 가져 왔던 따뜻한 비눗물을 생각했다. 부인은 어디서 물을 구했을까? 그리고 부인은 지금 어디 계신 거지?
  루이스가 거실로 돌아와 보니 소파 옆 작은 탁자 위에 그의 옷이 단정하게 올려져 있었다. 위더비 부인은 파란색 바지와 흰색 셔츠를 골라 왔다. 루이스는 옷을 갈아 입는 도중 위더비 부인이 들어올까봐 욕실로 갔다. 욕실에 들어간 그는 물탱크가 바닥에 놓여 있는 걸 보았다. 물탱크 덮개는 보이지 않았고 옆에 놓인 받침대에는 물이 반쯤 담긴 컵이 담겨 있었다.
  그는 물이 깨끗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컵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가 옷을 갈아입고 돌아왔을 때도 위더비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건물 안을 둘러보려고 하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아아 -아.”
  크고 아주 시끄러웠다. 그는 소리를 따라 거실 창가로 갔다. 밖을 내다본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위더비 부인이 아파트 건물 밖에 있는 그녀의 정원에서 무릎을 꿇고 꽃을 가꾸고 있었다. 루이스는 그녀가 정원을 가꾸는 모습을 수없이 보아 왔지만 이런 상황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가 가족들을 아파트에서 피신하게끔 만든 공룡이 머리를 숙이고 입을 벌린 채 위더비 부인에게 가까이 오고 있었다.
  “도망치세요, 부인! 공룡이에요, 피하세요.”
  루이스가 소리쳤다.
  위더비 부인은 그를 쳐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일어서서 공룡을 바라보았다. 공룡은 그녀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루잇가 다시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그때였다. 위더비 부인이 손가방안에 손을 집어넣자 공룡은 입을 크게 벌리고 멈춰 서서큰 소리로 ‘아아 -아’ 하고 울부짖는 것이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봉지를 꺼내더니 봉지 않에 든 것을 공룡 입속에 털어 넣고 있었다. 공룡은 입을 다물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입 주위를 핥느라 공룡의 그 큰 혓바닷이 입술 사이로 드러났다. 공룡은 먼저 아랫입술을 핥더니 그 다음 윗입술을 핥았다. 공룡은 다시 입을 벌렸고 ‘아아 -아아 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위더비 부인이 다른 봉지를 집어들고 그걸 다시 공룡의 입속에 붓고 있었다. 공룡이 세 번째로 입을 벌리자 부인은 엄한 태도로 뭔가 말하고 있었다. 공룡 울음소리에 루이스는 그녀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놀랍게도 위더비 부인은 공룡의 턱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공룡의 머리를 밀어내고 있었다. 공룡은 움직이지 않았다. 위더비 부인은 손으로 턱을 살짝 때리며 머리를 다시 밀었다. 그러자 공룡은 머리를 들더니 잠시 서 있다가 초원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공룡은 도중에 두 번이나 멈춰 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울부짖었다. 그러더니 풀을 잔뜩 물고 멀리 사라져 갔다. 루이스는 공룡뒤로 도시의 모습이 어렴풋이 흔들리는 걸 보았다. 그러나 잘 보이지 않았다 -키가 2층 높이나 되는 공룡이 도시를 가리고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루이스는 너무 놀라 말을 잃고 창가에 서 있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위더비 부인이 아래에서 그를 부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아무 생각없이 손을 흔든 뒤 소파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자신이 깨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뭔가에 홀린 걸까? 디아블로파 패거리들한테 맞아 머리라도 다쳤나? 그는한번도 위더비 부인이 공룡에게 먹이를 직접 주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적이 있었던가? 루이스는 현실과 환상을 구별해 내려고 애를 쓰다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32. 퍼글리시 박사
  백악기 제3기에 공룡의 대다수가 멸종한 것은 운석 때문이라는 가설이 신빙성을 더해 가고 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공룡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것들 가운데에는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이다. 
  신디 웡, 백악기의 수수께끼
  하와이 호놀룰루 월요일, 오전 9시 30분 (알류산-하와이 시간대)
  에밋 퍼글리시 교수는 왕 교수의 고급스러워 보이는 푸른색 새 의자에 몸을 묻고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그는 의자의 부드러운 흔들림과 진한 푸른색 팔걸이에 감탄하고 있었다. 왕 박사가 쓰던 헌 의자는 에밋에게 돌아갔다. 새 의자는 에밋이 우연히 복도를 지나고 있을 때 배달되었다. 에밋이 그걸 보고 왕 교수에게 쓰던 의자를 자신에게 달라고 부탁했고, 그녀는 기꺼이 헌 의자를 그에게 주었다. 물론 시샘 어린 동료 교수들은 그가 의자를 얻기 위해 왕 박사에게 아첨을 했을 것이라고 떠들어댔지만 그건 아첨을 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시기가 잘 맞아 들어갔을 뿐이었다. 조교수인 퍼글리시 교수보다 고참인 다른 6명의 교수들도 그 의자를 갖고 싶었겠지만 왕 박사는 퍼글리시 교수의 입장을 딱하게 여기고 있었고, 마침 에밋은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인생은 대부분 늘 그렇게 진행되어 왔다.
  에밋은 개강을 2주일 앞두고서야 하와이 대학 천체 물리학 대학원에 교수 임용이 결정되었다. 그는 자기 분야에서 꽤 인정받고 있었지만 일자리를 얻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본토에서 전임 강사 자리를 제의 받고 두 번의 전화 면접을 갖기도 했었지만 그뿐이었고 다른 교수가 병이라도 나기 전에는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는 1년간의 임용안에 서명할 것을 동의했다. 그는 안식년을 맞은 교수를 대신해 임용된 것이었는데 그 후 안식년을 맞은 교수가 또 생겼기 때문에 그는 다시 계약을 할 수 있었다. 그해 에밋은 훌륭한 강의로 명성을 얻었고 국립 과학 재단이 훌륭한 논문으로 뽑은 논문을 공동 저술하기도 했다. 그 다음해에 종신교수가 자리가 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에밋은 자리를 따내는데 성공했다.
  그것이 2년 전이었고 이제는 알맞은 시간, 적절한 장소에 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적절치 못할 때에, 있어서는 안될 곳에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왕 박사는 네 명의 동료 교수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이제 에밋의 연구실이 있는 층에는 5개의 빈 연구실이 생겼다. 그중 왕 박사는 프레스넷에 접속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에밋은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번 사태에 대한 뉴스 보도가 믿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무슨 일인지 알아내고 싶은 욕망에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에밋에게는 프레스넷에 접속할 권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왕 박사의 컴퓨터는 자동적으로 그 시스템에 접속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단 시스템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는 왕 박사 앞으로 보내진 메시지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편지를 보내려면 비밀 번호를 알아야 했다. 그는 왕 박사의 방을 샅샅이 뒤졌고 마침내 의자 밑에 테이프로 붙여져 있는 비밀 번호를 찾아냈다. 프레스넷에 나온 내용은 하나같이 믿기 어려운 것들로 하와이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홍수, 산사태, 사라진 도시들, 어느 하나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아는 한 하와이는 통신망에 나온 그런 재앙들로부터 안전했다.
  에밋은 더 많은 정보를 원했지만 프레스넷에는 뉴스에 보도된 정도의 이야기들밖에 없었고, 겨우 몇 가지 정도만 조금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실망해서 모니터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문 밖에서 누군가 구두를 또각거리며 오고 있었다.
  조교수인 캐롤리 첸-슬레이터가 커피가 든 종이 컵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에밋은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것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찜찜했다.
  그녀는 식물학과의 유일한 여자 교수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캐롤리는 그녀의 다국적인 배경 때문에도 유명했는데 어머니 쪽은 2분의 1은 네즈 퍼스족(북미 인디언의 일종:옮긴이)의 혈통이, 4분의 1은 폴란드계, 나머지 4분의 1은 스페인 계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아버지는 중국인과 스웨덴인이 혼혈이었다. 슬레이터라는 성은 그를 입양한 양아버지의 성을 따른 것이었다. 그녀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단순히 인종의 도가니라고만 적혀 있는 명패가 놓여 있었다.
  캐롤리는 에밋만큼이나 학생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녀는 뛰어난 교수상과 함께 두 개의 전공 부문 상을 탔다. 캐롤리는 교수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았다. 그녀는 모두에게 친절했고 사람들은 항상 미소 짓는 그녀와 그녀의 유머 감각을 좋아했다. 교수들은 그녀가 입는 이상한 옷을 보고도 즐거워했다. 오늘은 갈색 곱슬머리를 얼굴 오른쪽으로 모두 넘기고 은색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단추를 채우지 않은 실험 가운 안으로 검은색 점프 수트와 커다란 타원형 버클이 달린 은색 벨트가 보였다. 그는 캐롤리가 평생토록 실험실에 살아야 하는 종신교수직에 머무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에밋, 당신도 알겠지만 사망 사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래서는 안되는 거에요. 당신은 예의도 없나요?”
  에밋은 캐롤리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캐롤리는 에밋이 만나 본 사람 가운데 가장 마음씨가 고왔다. 에밋은 그녀가 사라진 교수들의 가족에게 가끔씩 전화를 거고, 때로는 그들을 방문하기도 한다는 거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적절하게 경의나 조의를 표현할 줄 알았고 쉽사리 감정 이입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캐롤리는 웃으며 사는 생활을 훨씬 좋아했고, 에밋은 함께 있을 때 그녀가 웃음을 잃은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도 죽은 이들을 존경하기는 하지만 난 이 자리와 이 사무실이 드러내는 권위를 원해요.”
  “나라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사전 각본에 의해 학과장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사람들이 이야기를 자꾸 보태다 보면 당신이 결국 용의자 명단의 제일 처음에 오르게 될 거라구요.”
 “용의자라구요? 설마 당신은 제일 신참인 조교수가 학과장이 되기 위해 전세계적인 대재앙을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당신은 내가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그런 걸 이용할 거라고 생각하는군요.”
  “난 당신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당신을 잘 알지 못한다구요.”
  “고마워요, 캐롤리. 그건 그렇고 이것 좀 봐요.”
  에밋은 캐롤리가 보기 쉽게 모니터를 돌렸다. 에밋이 프레스넷에 접속했다는 걸 알게 된 그녀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녀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정이 좀 해볼게요.”
  그녀가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사무실에 몰래 들어와 당신은 들어갈 수 없는 컴퓨터 통신망에 접속을 했어요. 그건 도둑질이나 다름없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그리고 당신이 접근해서는 안되는 정보들을 보았어요. 그 좋은 머리로 다른 사람 흉내를 내서 프레스넷에 접근한 거에요. 내 말이 틀렸나요?”
  “그래요, 난 왕 박사의 책상에 있던 풍선껌도 먹어 치웠어요.”
  “물론 그랬겠죠. 내가 왜 당신한테 커피를 가지고 왔는지 모르겠네요. 당신과 같이 바쁜 범법자에게 숙녀를 도와줄 만한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난 당신에게 제안할 것이 있었다구요.”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유혹하는 버릇이 없는 걸로 아는데요.”
  “그래서 내가 길거리 여자가 못 되는 거라구요.”
  캐롤리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여기에는 라디오가 없나 보죠? 그럼 당신은 아직 뉴스를 못 들었겠군요.”
  에밋이 의자를 앞으로 흔들었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캐롤리가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섬 도처에서 식품점들이 약탈당하고 있어요. 여기 오는 길에 보니까 사방에 경찰들이 까려있더라구요.”
  하와이는 오하우 섬만큼 사람들이 많았고, 자원은 적었다. 본토에서 물건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30일도 채 지낼 수 없을 것이다. 백만명의 사람들에게 파인애플, 설탕, 그리고 어류들만이 공급될 것이고, 가스와 기름은 급속도로 줄어들 것이다. 공급이 끊기면 사람들은 동요할 것이고,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본토와 섬 사이를 이어주던 세 편의 항공기 운항이 중단되고 섬들 사이만 다니는 항공편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배는 어떨까? 에밋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식료품 사는 걸 도와주기를 바라는 건가요?”
  잠깐이나마 캐롤리는 상처받은 듯 했고 에밋은 후회했다. 그녀는 그가 알고 있는 가장 유능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괜찮아요, 리차드 오빠가 있잖아요, 기억나요? 어쨌든 고마워요.”
  그녀는 계속 말했다.
  “당신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 또 있어요. 우리가 하와이만큼은 이번 사태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 기억나죠? 모든 일로부터 말이에요. 아주 이상한 것이 해안가로 밀려왔어요. 대부분은 식물들이고 죽은 물고기도 약간 있어요. 특별한 건 없었지만 내 친구가 그러는데 그게 평범한 해초나 식물이 아니라는군요. 당신이 가보고 싶어할 것 같아서요.”
  “천체 물리학자가 필요한 건가요?”
  “그냥 같이 가자는 거였으니까 억지로 갈 필요는 없어요.”
  캐롤리는 기분이 상한 듯 선뜻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에밋은 캐롤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단순히 같이 가자는 것이 아니라 신변을 보호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걸 알았다. 에밋은 체격이 그리 크지 않았고, 키도 실제 175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은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언젠가는 자신도 그녀에게 그런 요청을 할 날이 있으리라는 걸 알았다.
  “얼마나 가야 되죠?”
  “기껏해야 두세 시간이에요. 당신은 금방 이 범죄의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에요.”
  에밋은 계속 모니터에 떠 있는 프레스넷 화면을 돌아보면서 주저했다. 캐롤리와의 답사가 통신망에 입력할 수 있는 정보 -그가 왕 박사인 척하고 통신망을 사용할 배짜이 있다면 -를 얻게 해줄지도 몰랐다.
  에밋은 몸을 돌려 자신을 짓궂게 바라보는 캐롤리의 얼굴을 보았다.
  “우리가 갔다 와도 컴퓨터는 계속 여기에 있을 거에요. 게다가 당신이 통신망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요. 접속하려면 비밀 번호가 있어야 하잖아요.”
  에밋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얼굴이 붉어졌다. 
  “당신 설마 통신망에 침입한 것은 아니겠죠?”
  “물론 아니에요. 대신 비밀 번호를 찾아냈어요.”
  “어디에서요?”
  “왕 박사의 의자 밑에서요.”
  “그녀의 의자가 바닥에 쓰러져 뒤집히기라도 했나요? 에밋, 당신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들은 캐롤리의 차를 타고 해안가로 갔다. 지나오는 동안 본 가게들에는 피해가 없었다. 칼라니아나올레 고속 도로로 이동하고 있는 군인 호송 차량은 나쁜 징조였고 그들은 신경이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고속 도로에서 군인 호송 차량들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던 것이다.
  와일루프 해변은 그랬던 것처럼 에밋에게 멋지고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예전같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은 공원 근처에 몰려 있었다. 그들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서 순찰을 돌고 있는 경찰차를 보았다.
  해변 쪽으로 다가가면서 에밋은 해안에 이상한 파편들이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해안에 채 닿기도 전에 여자 경찰관의 제지를 받았다. 그녀는 캐롤리이 조사 장비들을 검사했다.
  “죄송하지만 해변 접근이 금지되었습니다.”
  경찰이 말했다.
  “우리는 대학에서 나왔어요. 이리 와서 조사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온 겁니다.”
  캐롤리는 마치 주지사한테 부탁이라고 받고 온 것처럼 거만하게 말했다.
  에밋은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지갑에서 교수 신분증을 꺼냈다. 그건 단순한 도서관 출입증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름과 사진, 주소, 그리고 공인되된 교수 신분 번호는 경찰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녀는 캐롤리의 신분증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첸-슬레이터 박사님, 프글리시 박사님. 이렇게 빨리 오시다니 믿을 수 없군요. 어쨌든 감사드립니다. 만약 필요하시다면 저희가 여기에 남아 있겠습니다.”
  경찰이 저만치 걸어갔다. 그녀는 공원 출입구를 폐쇄한 뒤 엽총 두 자루를 가지고 돌아와 다른 경찰에게 건네주었다.
  “캐롤리, 나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죠?”
  에밋이 말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내 친구가 전화를 걸어 해변에 이상한 수상 식물들이 있다고 알려 주었어요. 그게 내가 아는 전부에요.”
  캐롤리는 앞장서서 해변가로 내려간 뒤 곧바로 해초들과 그 외의 것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에밋에게는 햇빛에 금방 시들어 버리는 냄새나는 녹색 식물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캐롤리는 대단한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말했다.
  “샘플로 몇 개 가져가고 여기서 나갑시다.”
  “재촉하지 말아요. 겨우 몇 분전에 도착했잖아요. 참 이상한데요. 이걸 좀 보세요.”
  캐롤리가 모래 위에 널려 있는 해초 4가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라미나리아의 변종들이에요. 라미나리아는 해저에서 자라는 뿌리 식물로 광합성을 하기 위해 큰 이파리가 하나 있어요.”
  캐롤리는 식물들의 밑둥을 가리켰다. 뿌리처럼 생긴 것들이 식물의 끝에 모두 달려 있었다.
  식물의 윗부분들은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첫 번째 것은 형광등 같은 관이 줄기와 뿌리에 달려 있었다. 하나는 카누를 젓는 노처럼 생긴 큰 이파리가 달려 있었다. 세 번째 식물은 긴 줄기 끝에 컬리플라워(식용식물의 일종:옳긴이)처럼 생긴 희끄무레한 가느다란 풀들을 매달고 있었다. 마지막 식물에는 아주 길게 자란 잔디처럼 생긴 것이 여거 줄기 매달려 있었다.
  “내 눈에는 네 가지가 모두 다르다는 것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당신은 왜 이렇게 흥분하는 거죠?”
  “이건 모두 라미나리아에요. 틀림없어요.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에요. 이걸 봐요.”
  캐롤리는 카누 노처럼 생긴 식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해양 식물 분류 책에서 본 종류일 거에요. 아마 이것도 그럴 거구요.”
  그녀가 아주 길게 자란 잔디같은 것을 가리켰다.
  “하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기록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러더니 그녀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흥분한 아이들처럼 떠들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 이건 변종들 같아요. 적어도 이 두 가지는 그래요. 종신 교수가 될 수 있겠는데요.”
  그녀는 신이 나서 해초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에밋은 기분이 편치 않았고, 경찰관드이 어리둥절해 하는 것을 보았다. 불편해진 에밋이 해초들이 널려 있는 해변을 걷는데 경찰관이 소리쳤다.
  “거기에요. 사람들이 바로 거기에서 그걸 봤어요. 관광객들이 말한 지점이에요.”
  에밋의 머리카락이 그것이라는 말에 곤두섰고, 그는 경찰관이 해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뒤돌아 보니 캐롤리는 아직도 무릎을 꿇고 해초들을 분류하느라 정신없었다. 캐롤리에게 시간을 더 주기 위해 에밋을 천천히 걸으며 규칙적으로 모래 위로 밀려드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가까워질수록 파도는 엄청난 해초 더미처럼 보였다.
  경찰이 아직도 그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식물을 조사하는 것처럼 쭈그려 앉았다. 그러나 그는 파도를 바라보며 프레스넷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종류의 해초들은 통신망을 불법적으로 사용하려고 위험을 무릅쓸 만한 가치는 없어 보였다.
  에밋이 씁쓸해 하는데 왼편에서 뭔가 그를 둘러싼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이미 그것은 모습을 감춤 뒤였다. 그는 서서 그 물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을 기다리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캐롤리가 그의 곁으로 오더니 파도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커다란 은색 벨트를 풀고 점프 수트 앞에 달린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 에밋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녀는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수영복에는 커다란 금속 장식이 달려 있었다.  
  “캐롤리, 뭐 하는 겁니까?”
  “샘플을 더 구하려구요. 물 속에 있는 것들이 훨씬 상태가 좋을 거에요.”
  에밋이 조심스레 파도 속에서 본 것을 찾느라 해변을 살피는 동안 그녀는 무릎 깊이의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순간 발자국 소리가 들려 에밋이 고개를 돌려보니 두 명의 경찰관이 총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저렇게 바다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해초 샘플을 채취하려고 들어간 겁니다. 신선한 상태의 샘플이 필요하거든요.”
  두 명의 경찰관들은 당황하여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해초가 필요한 거죠?”
  경찰관이 물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캐롤리가 대답하러 돌아왔다. 그녀는 아직도 수영복 차림으로 물 속에 서 있었다. 에밋은 그녀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정을 하기 위해 견본을 모으는 거에요. 그게 해양 식물학자가 하는 일이죠.”
  “당신이 식물학자인가요?”
  여자 경찰관이 매우 놀랐다는 듯이 물었다.
  “왜 그들이 식물학자를 보냈죠 - -?”
  그때 캐롤리 뒤에서 뭔가 머리를 쳐들고 물 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여자 경찰관은 끝까지 말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천천히 물 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거북이와 비슷하게 생긴 머리에 가느다란 목, 도마뱀과 같은 회색 가죽으로 뒤덮여 있었다. 조용히 벌린 입안으로 뾰족한 이빨들이 보였다. 머리가 수면 위로 올라올수록 뱀처럼 보이던 목은 점점 두꺼워지고 있었다. 드디어 캐롤리 머리 위로 모습을 드러낸 짐승은 목길이에 비해 키가 작아 마치 난장이처럼 보였다. 물 위로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지만 이미 짐승의 머리는 수면에서 5미터는 올라와 있었다.
  에밋과 경찰관들은 말을 잃고 서 있었다. 캐롤리가 말을 거는 바람에 정신을 차린 에밋은 자신과 경찰관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 캐롤리를 발견했다.
   “뭐들 하는 거에요? 지금 어떻게 보이는지 알기나 -?”
  다음 순간 여자 경찰관은 총을 겨누며 캐롤리에게 물 속에서 나오라고 소리쳤고, 에밋은 튕겨나가듯이 캐롤리 쪽으로 달려갔다. 그 순간 캐롤리는 뒤를 돌아보더니 탄성을 발하고 있었다.
  그때 짐승이 마치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에밋이 캐롤리에게 거의 다 왔을 때 괴물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밋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괴물이 해안에서 꽤 멀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그렇게 큰 동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캐롤리를 해안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만 잡아당겨요. 저게 뭔지 모르겠어요?”
  “돌고래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아요. 물 속에서 나갑시다.”
  “저건 플레시오사우루스에요. 믿을 수 있어요? 플레시오사우루스라구요. 모두들 저 종이 멸종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수백만 년 전에 멸종한 줄 알았는데. 같이 가 봐요!”
  캐롤리가 소리를 지르며 에밋에게서 팔을 빼냈다. 그러더니 놀랍게도 파도 속으로 사라지는 동물을 향해 헤엄을 쳤다. 갑자기 공룡의 머리가 물 속으로 잠기며 뭔가 물어뜯었고 놀란 경찰관들이 소리를 질렀다.
  “캐롤리!”
 에밋이 소리쳤다. 놀란 에밋이 신발을 벗고 물 속으로 뛰어들려고 할 때 캐롤리가 물 위로 나오면서 그의 바지를 잡아당겼다.
  “너무 멀어서 몸을 제대로 볼 수 없었어요. 하지만 네 개의 지느러미가 있고 꼬리만 30미터가 넘는다는 건 확실해요.”
  에밋은 벗으려던 바지를 다시 입은 뒤 캐롤리를 물 속에 끌어냈고, 두려움에 젖어 공룡을 바라보았다. 플레시오사우루스의 목은 마치 휘어진 거대한 파이프 같았다. 곧게 올라간 목 위로 머리가 달려 있었는데, 입에는 물고기가 물려 있었고 머리와 턱을 이용해 물고기를 돌리더니 통째로 삼키고 있었다. 그런 다음 고개를 돌려 해변가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에밋과 캐롤리는 안전권에 있었고 경찰들은 사격 준비를 했다.
  “쏘지 마세요. 쏘지 말아요.”
  캐롤리가 소리쳤다.
  “위험하지 않아요. 물고기만 먹는다구요.”
  “고래나 사람도 통째로 삼킬 만큼 엄청난대요.”
  에밋이 대꾸했다.
  “그렇게 크지 않아요. 크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아니라 물고기만 먹는다구요.”
  경찰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들은 공룡을 쏘고 싶었지만 캐롤리는 공룡 전문가였고 대학에서 조사 나온 사람이었다. 경찰들은 명령에 복종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이었고 사격은 최후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캐롤리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공룡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편 에밋은 캐롤리를 물가에서 데리고 나오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경찰들이 공룡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들에게 다가왔다.
  “바다 깊은 곳에서 저 공룡 무리들이 살고 있을 거에요.”
  캐롤리가 추측했다.  
  “해저 화산이 폭발했거나 사태가 일어나 공룡이 해수면 위로 올라온 걸 거에요. 그러면 흔치 않은 라미나리아들도 설명할 수 있어요. 아마 라미나리아는 플레시오사우루스들과 함께 밀려온 것이 틀림없어요.”
  캐롤리는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플레시오사우루스는 아직도 해변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에밋과 경찰들은 그 소리에 움찔했다. 캐롤리는 소리가 잠잠해지자 계속했다.
  “하지만 이건 파충류에요. 공기없이는 그렇게 깊은 바다 속에서 살 수 없어요. 만약 계속 수면 위로 올라왔다면 왜 지금까지 보지 못했을까요?”
  물 밖으로 안전하게 올라온 후에도 에밋은 계속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플레시오사우루스는 계속 해변을 바라보고 있었고, 사람들 때문에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에밋은 캐롤리의 옷을 집어들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느라 옷 입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건 어때요? 남극 빙하 속에 공룡 알이 냉동되어 있었어요. 그 알이 빙하 속에서 부화해 북쪽으로 온 거에요. 빙하가 녹으면서 발생한 열이 알을 덥혔을 거에요. 그렇게 새끼 플레시오사우루스가 나타난 걸지도 몰라요.”
  그러더니 그녀는 얼굴을 다시 찌푸렸다.
  “그건 나도 믿기 어려운데.”
  캐롤리는 입을 다물고 공룡을 바라보았다. 에밋은 그 크기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캐롤리가 몸을 돌려 에밋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번 일에 대해 뭘 알고 있죠? 나한테 숨기는 게 뭐에요?”
  “돌아갑시다.”
  “이 일이 그 사건들과 관련이 있죠, 그렇지 않아요?”
  “여기 신발이 있어요. 캐롤리. 난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요. 그래서 내가 왕 박사으 사무실에서 알아내려고 한 거에요.”
  캐롤리는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어쨌든 내 견본을 가져가는 걸 도와줘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에밋이 해초들을 줍고 있는데 다시 경찰이 소리를 질렀다.
  “조심하세요. 괴물이 오고 있어요.”
  에밋이 고개를 쳐들었다. 공룡이 오고 있었다 -플레시오사우루스는 물을 가르며 해안으로 오고 있었다. 공룡은 다가오면서 날카롭게 울어댔다. 경찰들이 다시 총을 들자 캐롤리가 달려가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아요. 내가 말했잖아요. 저건 사람들을 잡아먹지 않는다구요.!”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에밋은 경찰의 얼굴을 보고 그들이 캐롤리의 말을 믿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에밋이 다시 플레시오사우루스를 보았을 때 공룡의 움직임은 달라져 있었다. 공룡은 해안으로 오지 않고 물 속에서 자맥질을 하며 목을 앞뒤로 흔들어대고 있었다.
  “캐롤리, 내 생각에는 공룡이 올라오려고 하는 게 -”
  “아니에요!”
  캐롤리는 경찰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저 공룡은 바다에서 살아요. 육지에서는 살 수 없어요. 지느러미밖에 없다구요.”
  경찰은 캐롤리의 말을 들으면서도 공룡에게 총을 치우지 않았다. 공룡의 몸이 천천히 물 속에서 나왔고 5미터는 되는 긴 목이 드러났다. 목은 머리와 마찬가지로 회색을 띠고 있었으나 등을 따라 진한 초록색 반점들이 나 있었ㄷ. 플레시오사우루스가 바다 속으로 잠수했다가 해안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훨씬 선명하게 보였다.
  “첸-슬레이터 박사님.”
  여자 경찰관이 총을 공룡에게 겨눈 채 말했다.
  “전 전문가는 아니지만 공룡은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헤엄을 치고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저건 공룡이 아니에요.”
  캐롤리가 주장했다. 
  “저건 파충류에요. 절대로 해안으로 올라오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우리가 신기하게 보일 거에요. 뒤로 물러나는 게 좋겠어요.”
  플레시오사우우스가 해변과 주차장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저한테는 호기심이 아니라 화가 난 것처럼 들리는데요.”
  경찰관이 대답했다.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공룡이 공격해 온다면 그 때는 박사님이 뭐라고 하셔도 사살할 겁니다.”
  “공격할 리 없어요...”
  캐롤리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신뢰를 잃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 또한 플레시오사우루스가 공격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하지 못했다.
  플레시오사우루스는 노처럼 생긴 네 개의 지느러미를 이용해 물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지느러미들은 조화를 이루며 움직이고 있었는데, 앞 뒤 지느러미들이 앞으로 회전하며 모래를 파내어 공룡의 몸을 해안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경찰은 구경꾼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고, 캐롤리와 에밋도 해변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갔다. 하지만 동물은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공룡은 주차장과 맞닿아 있는 제방까지 왔을 때 멈췄고, 머리를 앞뒤로 흔들며 사람들을 향해 울부짖었다. 날카로운 울음소리에 사람들은 뒷걸음쳤다. 갑자기 플레시오사우루스가 구경꾼들에게서 들은 돌리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공룡이 바다로 돌아가기를 기다렸지만 공룡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뒷지느러미를 접어 꼬리 밑에 넣었다가 밖으로 다시 펼치며 모래를 양 옆으로 파내고 있었다. 
  “뭐하는 거죠?”
  에밋이 캐롤리에게 물었다.
  “믿을 수 없어요. 그럴 리 없어.”
  “뭔데요? 뭐가 어쨌다는 거에요?”
  “잠깐만요, 에밋. 곧 보게 될 거에요.”
  한동안 모래를 파내던 공룡이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플레시오사우루스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그 긴 목을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는데 마치 등 뒤에 있는 사람들은 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았다. 거친 숨소리는 이제 잦아들었지만 공룡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봐요, 에밋.”
  캐롤리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봐야죠.”
  그녀는 에밋이 말릴 새도 없이 앞장섰기 때문에 에밋은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랐다. 그는 공룡의 걸음을 보고 자신이 괴물보다 빨리 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당황한 빛이 역력한 여자 경찰관이 그의 뒤를 따랐다. 캐롤리는 그들을 플레시오사우루스 바로 뒤로 데리고 갔다. 플레시오사우루스의 머리가 가끔씩 좌우로 움직였기 때문에 그들은 가는 도중에 여러 번 멈춰 서야 했다. 그러나 플레시오사우루스는 그들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캐롤리는 주차장 끝에 도착해 공룡이 파 놓은 구멍을 내려다보더니 흥분해서 에밋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에밋이 조심스레 다가서며 모래사장을 보니 세 개의 알이 있었다. 에밋은 캐롤리에게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경찰과 캐롤리가 동시에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에밋이 시키는 대로 조용히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플레시오사우루스의 엉덩이가 움직였고, 또 다른 알이 구멍 안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나머지 알들이 나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공룡에게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리 왔을 때 캐롤리가 기쁨에 겨워 떠들기 시작했다.
  “믿을 수 있어요? 플레시오사우루스가 지금 해변에 알을 낳았어요. 둥지에 있는 알이 수컷이었으면 좋을 텐데. 그 종을 다시 복원시킬 수 있을 거에요.” 
  플레시오사우루스는 그 이후에도 한 시간 정도 해변에 더 머물렀고, 사람들은 점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카메라 후래쉬가 터지기 시작했고, 경찰은 사람들이 공룡을 놀라게 할 것을 우려해 사람들을 다시 뒤로 물러나게 했다. 잠시 후 공룡은 뒷지느러미로 둥지를 덮기 시작했다. 둥지가 완전히 덮였고, 플레시오사우루스는 몸을 돌려 사람들에게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울부짖었다. 그러고 나서야 공룡은 바다로 돌아갔고, 도중에 두 번이나 멈추고 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마침내 공룡은 바다속으로 사라졌다. 에밋은 공룡이 멀리 안 갔을 거라고 짐작했다.
  캐롤리는 바로 경찰에게 거녀가 사람들을 데리고 오기 전까지 둥지를 지켜 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알이 부화할 때까지 둥지를 24시간 내내 지킬 수 있도록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 그리고 환경 보호주의자들을 모아 올 것이다. 
  경찰이 그녀의 말에 동의하고 나서야 에밋은 캐롤리를 주차장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구경꾼들은 넋을 놓고 있었다.
  그들은 에밋의 아파트에 들러 신발과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학교로 향했다. 캐롤리는 에밋을 학교에 내려 준 다음 사람들을 모으러 갔다. 그녀는 벌써 알을 ‘그녀의 아기들’이라 부르고 있었다. 
  에밋은 왕 박사의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프레스넷게 접속했다. 그는 프레스넷에 플레시오사우루스에 관한 이야기들이 올라와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플레시오사우우스의 출현은 혼자 알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차례 내용을 다시 읽어 본 다음 프레스넷에 올리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그는 왕 박사의 비밀 번호를 입력시키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에밋의 터미널로 추가 정보를 요청하는 메시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에밋은 뿌듯했다. 이제 그는 게임에 뛰어든 것이다.
  33. 사냥 
  어마어마한 크기의 뿔이 달린 짐승이 마을 사람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짐승은 사람들처럼 두 발고 걸었고, 몸에는 커다란 꼬리가 달려 있었다. 창도 살을 찢지 못했다. 부족의 전사 백여 명이 희생된 후에야 우리는 그 짐승의 피를 마시고 심장을 먹어 치울 수 있었다.
  톨텍 족의 전설 중에서
  오레곤주 벤드 북부 월요일, 오후 12시 5분 (태평양 표준시)
  필쳐 박사는 RV로 돌아오는 내내 알을 셔츠 속에 품었다. RV로 돌아오자 그는 알을 담요에 싸서 햇빛이 잘 드는 앞좌석에 놓았다.
  사라는 아직도 차 뒤쪽에서 낑낑대며 신경을 긁고 있었다. 피트라가 사과를 던져 주자 사라는 얼른 달려들어 아작아작 소리를 내며 사과를 깨물어 먹었다. 피트라는 무스와 사라 쪽으로 사과를 하나 더 굴려 보냈다. 
  쿰 박사와 필쳐 박사는 낮에는 30분마다 알을 돌려놓아 햇빛을 골고루 받을 수 있도록 하고, 밤에는 알을 오븐에 넣거나 그들이 품고 자기로 했다. 필쳐 박사는 아을 싼 담요를 벗겨 내고 표면을 쓰다듬었다.
  “아주 딱딱한데요.”
  그가 말했다.
  “곧 부화한다는 의미죠.”
  “제 생각돠 같아요.”
  쿰 박사가 말했다.
  “박사가 더 이상 담요를 벗겨 내지만 않는다면 곧 부화할 거에요.”
  그 이후로 필쳐 박사는 수시로 상태를 점검하면서도 알을 싼 담요는 벗기지 않았다. 대신 그는차 뒤편에 놓인 침대에 앉아서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는 사라를 살펴보았다. 가끔씩 사라의 코에서 점액질의 분비물이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흥미를 느낀 필쳐 박사는 사라가 감기에 걸린 것 같다고 혼잣말을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콜터는 바닥에 조이를 더 깔아 놓았다.
  그때 쿰 박사가 필쳐 박사를 밖으로 불러냈다. 나와 보니 쿰 박사와 피트라가 초원 위에 엎드려 풀을 살피고 있었다.
  “뭐에요, 조지? 마이크로케라톱스가 감기에 걸리 것 같아요... 홍미롭지 않아요? 물론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연구해 볼 만한 일이에요.”
  “그렇군요.”
  쿰 박사도 동의했다.
  “하지만 좀 더 심각한 문제가 생겼어요. 이 풀들을 보세요. 풀들이 어떻게 시들어 가고 있는지. 초원이 말라 가고 있어요. 비가 오지 않으면 오래 버티지 못할 거에요. 그리고 몇 달 안에 눈이라도 온다면 동물을 비롯해 모든 것이 죽을 겁니다.”
  “예상했던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빨리? 조사를 방금 시작했을뿐인데.”
  피트라가 필쳐 박사의 팔을 잡으며 말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며 초원을 가리켰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자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커다란 동물이 걸어오고 있었다. 엄청난 크기의 머리에는 코뿔소처럼 큰 뿔이 달려 있었고 목 주변에는 커다란 깃이 달려 있었다. 깃 위로 작은 뿔 두 개가 솟아 있었다. 머리에서 어깨까지 150센티미터 정도 되었고 몸통은 그보다 더 길었다. 공룡은 머리를 땅 위에 머리를 내린 채 걷고 있었다. 
  “체스터, 뭐 같습니까?”
  쿰 박사가 물었다.
  “트맄라톱스이까요?”
  “아뇨, 뿔이 아니에요, 하지만 비슷하게 생겼군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어요.”
  피트라가 조용히 말했다.
  “제발 돌아가요.”
  “우리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건 좋지 않아.”
  쿰 박사가 말했다.
  “피트라, 자네가 먼저 가게.”
  그녀는 뒷걸음쳐 몇 발자국을 뗀 다음 몸을 돌려 RV로 갔다. 그녀가 차에 도착했을 때쯤 필쳐 박사가 뒤를 따랐다. 그가 몸을 돌리자 공룡은 머리를 들고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였다가 재빨리 쳐들었다 -공룡은 울부짖기 시작했다. 공룡은 머리르 다시 떨구더니 그들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쿰 박사와 필쳐 박사가 있는 힘을 다해 RV로 뛰었다. 피트라는 두 사람을 재촉해 불렀다. 콜터는 그녀의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안전하게 차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문을 닫고 안에서 문을 잠궜다. 콜터가 웃었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어, 피트라. 어미의 몸집을 보라구.”
  창문을 내다보니 공룡이 점점 더 크게 보이긴 했지만 RV만큼 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룡은 아주 가까이 와 있었다.
  “모두 몸을 숙여요, 몸을 숙이던가 바닥에 엎드려요!”
  그들은 모두 벽에 드응ㄹ 대고 바닥에 앉았다. 공격해 오는 공룡을 보는 일도 끔찍했지만 반대로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더한 공포심을 느끼게 했다. 잠시 후 공룡이 차를 들이받았다.
  공룡이 콧등 위에 난 뿔로 문을 들이받자 자동차 문이 찌그러지면서 경첩이 떨어져 나갔다. 공룡은 엄청난 힘으로 계속 공격했고 머리를 자동차 안에 밀어 넣었다. 목 주위의 깃이 너무 넓었기 때문에 문안으로 깊이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문 옆의 벽은 휴지처럼 구겨졌다. 그 충격으로 차 안에 있던 물건들이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볼펜과 종이, 전등, 사과, 그리고 복숭아 등등이 사방으로 튀었고, 서랍장이 열리며 은그릇들이 주위에 나뒹굴었다. 찬장이 열리며 건조 식품이 네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RV는 초원을 나뒹굴었고 사람들은 차 안에서 이리저리 나동그라지고 있었다. 충격이 사그라들면서 차가 멈췄다. 그들이 정신을 차려보니 차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차가 바로 놓이기를 기다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직도 공룡의 머리가 문 사이에 끼어 있었고, 공룡은 성난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ㄷ.
  사람을은 두려움에 질려 꼼짝하지 못했지만 콜터는 주걱을 집어들더니 공룡 얼굴 앞으로 다가가 공룡의 콧등을 마구 내리쳤다.
  “여기서 나가지 못해.”
  그가 소리질렀다.
  흥분한 공룡은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공룡의 힘은 가공할 만했다. 공룡이 머리를 흔들 때마다 차도 함께 흔들렸고 문 입구에서는 가느다란 금속 파열음이 들렸다. 공룡이 어마어마한 힘으로 머리를 흔들다가 문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더니 공룡은 갑자기 차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차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공룡은 계속해서 공격했고 결국 최후의 일격이 차 뒷편의 창문을 산산조각내면서 유리 파편이 RV 안으로 쏟아져 들었다. 그 와중에 겁에 질린 사라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공격이 중단되었고 사라의 비명소리도 작아졌다.
  사람들이 한숨을 돌리는데 공룡의 숨소리가 들려 왔다. 공포에 질린 그들은 소리가 나면 공룡이 다시 공격해 올까봐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때 계속 주걱을 쥐고 있던 콜터가 창문 쪽으로 다가가자 필쳐 박사는 그의 바지 뒷주머니를 잡았다.
  “뭘 해도 좋아, 하지만 그걸로 두 번 다시 공룡을 치지는 말게!”
  콜터는 알았다는 듯이 싱긋 웃은 다음 그 쓸모도 없는 무기를 필쳐 박사에게 넘겨주었다. 그 순간 공룡이 울부짖었다. 콜터가 몸을 숙이는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부서졌다.
  공룡은 계속 차를 들이받았고 사람들의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울부짖었다. 그러더니 다시 공격을 멈췄다. 사람들은 너무 놀라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공룡이 차를 두 번 더 들이받더니 자리를 잡고 섰다. 그리고는 위협이라도 하는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분명했다. 공룡은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34. 시간의 파동
  나는 지금까지의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것이다.
  조라스트러스, 바빌론의 예언자
  워싱턴 D.C. 월요일, 오후 3시 58분 (서부 표준시)
  불만스러운 얼굴로 필은 앞에 쌓여 있는 파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케니의 디스켓은 세 종류였다. -소프트웨어, 쓸모 없는 쓰레기, 그리고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소프트웨어의 범주에 드는 것들은 워드프로세스, 그림 그리기 아니면 스프레드 쉬트같은 상용 프로그램들이었다. ‘쓸모 없는 쓰레기’에 속하는 것들은 케니의 논문이나, 평론, 수업의 요점 정이, 그리고 집에 보낸 편지들 같은 걸 저장해 놓은 파일들이었다. 빌은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들어있는 디스켓을 재빨리 집어들었다. ‘알 수 없는 것들’에 들어 있는 것에 필은 관심을 가졌다.
  “지금까지 알아낸 것을 말해 주게, 혹시 우리가 자네를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을지 알아?”
  빌이 제안했다.  
  “프로그램이 열 개 정도 있는데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어요.”
  필이 마우스로 메뉴를 꺼냈다. 그러자 세 개의 칼럼이 화면을 메웠다. 첫 번째 칼럼에는 날짜, 두 번째에는 장소가, 마지막에는 사건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첫 번째로 입력되어 있는 것은 1879년 7월 22일이었다 -런던에서 개구리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두 번째 것은 1881년 8월 19일 우크라이나의 키에프였다 -불타 죽은 여인 사건이었다. 세 번째는 1882년 3월 2일 풀로리다의 성 오거스틴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하늘에서 얼음 조각이 떨어졌다. 테리는 목록을 살펴보았다. 모두 케니의 책과 자료들을 가득 채운 것과 같은 사건들이었다.
  “이 목록에는 522가지의 사건들이 입력되어 있어요. 다른 세 개의 목록들도 마찬가지구요. 모곡 중의 하나에는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 사스콰치나 티벳의 설인, UFO 등의 그런 이야기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어요. 남미 해안에서 잡힌 선사 시대의 물고기 이야기 외에는 다 잡동사니에 불과한 것들이죠. 저도 금물고기의 사진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거죠.”
  테리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5번 고속 도로에 생긴 산을 믿지 못하고 있다가 직접 보고 난 뒤에야 믿을 수 있었다.
  “상당수의 사건들이 꽤 오래 전에 일어난 것들이에요. 조라스트러스의 이름들이 붙어 있는 파일을 찾아냈어요. 정말 그 파일 안에 나와 있는 것들은 아주 오래 전의 것들이에요.”
  빌과 테리가 시선을 교환했다. 조라스트러스라는 이름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이제 화면은 명령 언어로 채워졌다.
  “이게 두 번째 유형의 것들이죠. 이걸 보면 파일의 주인이 뭘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을 거에요. 대부분이 디스플레이 명령이에요 -자료의 배열들을 읽고 일종의 계산을 한 다음 결고를 떠오르게 하는 명령어죠. 여기가 중요한 부분이에요.”
  필이 화면 위로 지나가는 화면들 가운데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에서 그 공식이 시작되는 거에요.”
  “뭐에 쓰는 공식이지?”
  빌이 물었다.
  “나는 수학자가 아니에요.”
  필이 고집을 부리더니 결국 알려주었다.
  “그는 세 개의 변수에 곡선을 맞추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요, 이런 거죠. 제가 종이 위에  A와 B, 그리고 C를 연결한 선을 그렸는데 각 점을 2센티미터씩 늘렸을 때 어떤 모습이 나올지 가정해 보는거죠. 그게 그 사람이 컴퓨터를 가지고 한 일이에요. 그렇지만 꼭 숫자를 더하기만 한 것은 아니고 가끔씩은 뺄셈이 이용되기도 했어요.”
  “그래서 결국 어떻다는 건가?”
  “제가 유일하게 알아낸 것이 바로 이거에요.”
  필이 몸을 뻗고 세 번째 칼럼을 톡톡 두드렸다.
  “수치는 1과 200 그리고 366사이에서 변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1에서 366 사이에 있고 다른 것은 1과 200 사이에 있어요. 마치 자동차 주행 기록계 같아요. 이 칼럼에서는 일단 수가 365 또는 366에 이르면 다음 칼럼으로 숫자가 넘어가요.”
  “날짜와 연도를 세고 있는 건가?”
  “그래요, 윤년까지도 바로잡고 있어요.”
  “음...”
  빌이 말했다.
  “말이 되는군. 케니는 과거의 이러한 사건들이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ㄱ야. 세 번째 분류는 어떤 건가?”
  “그래픽들이에요. 여기를 보세요.”
  필이 마우스를 사용해 다른 파일을 불러냈다.
  화면의 삼분의 일 정도 되는 지점에 화면 구분선이 나와 있었다. 나뉜 화면 중 넓은 부분에 작은 원 두 개가 그려져 있었는데 스크린 윗부분의 각 모서리 쪽에 하나씩 있었다. 필이 어떤 키를 누르자 그 원들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화면이 정지했을 때 두 원이 연결되는 부분에 A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또 다른 A라는 글자가 세 가지의 형태로 왼쪽 칼럼 부근에 나타났다. B와 C가 나타나며 원 안에서 새로운 접점을 만들어 냈다. 왼편의 칼럼에 이제 세 개의 세 자리 숫자가 나와 있었다. 테리는 A라는 글자가 변화하는 모습을 주목했다. 다른 키를 누르자 다시 원이 넓어졌다. 원이 화면 끝까지 퍼졌을 때 프로그램이 멈췄다.
  “그게 단가?”
  빌이 물었다.
  “그게 프로그램의 전부란 말인가?”
  “그가 모든 숫자들을 운용했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더 이상은 알아낼 수 없었어요.”
  “필, 나머지 숫자들은 어떤가? 날짜를 세는 것은 실제로 4개의 숫자일 뿐이야. 자, 여기를 보라구.”
  필이 마우스를 다시 조작했고, 몇 가지 명령어들이 화면을 채웠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군.” 
  필이 다른 키를 눌러 다른 프로그램들을 불렀다. 이번 것도 다른 프로그램과 비슷해 보였지만 두 개의 원이 확장되는 대신 이번에는 프로그램과 비슷해 보였지만 두 개의 원이 확장되는 대신 이번에는 지속적으로 파동을 보내는 흔들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개의 원이 넓어지면 그 안에있던 다른 워니 첫 번째 원을 따라 스크린의 끝으로 퍼져 갔다. 퍼져 나가던 원들이 거의 서로 닿을 때쯤 영상이 조그만 원으로 나뉘더니 그 원이 각각 넓어지고 있었다.
  “그가 단위를 조정하기는 했지만 같은 원이에요.”
  필이 말했다.
  원들은 계속 넓어지고 있었는데 안에 있는 원들이 하나씩 커지면서 밖의 원과 합쳐졌고 결국에 는 두 개의 원만 남아 있었다. 다음 순간 영상이 정지했다. 테리는 왼쪽에 나와 있는 숫자들을 바라보았다.
  “필, 무슨 날짜를 계산하는 거죠?”
  “테리, 무슨 생각이 떠올랐어요?”
  빌이 물었다.
  “히로시마와 원자 폭탄을 떠올렸던 것 기억하시죠? 아마 이 원들이 원폭 투하와 일치하는 거라면요?”
  테리와 빌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필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잘못 계산하셨어요. 만약 어제부터 숫자를 뺀다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해로부터 17년이나 벗어나게 되요...하지만...재미있는 생각이군요.”
  필이 혼자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자 테리는 케니가 긴장 상태에 빠져들던 모습이 생각났다. 하지만 빌은 계속 필을 다그쳤다.
  “다른 숫자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개구리들이나 사태, 그리고 케니의 목록에 나온 사건들과 무슨 관련이 있지는 않나?”
  필은 생각에 잠겨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위도와 경도에 대해 생각하고 계시는 거죠? 두 분이 오셨을 때 제가 하고 있던 작업이 그걸 이용한 거였어요.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서요.”
  필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좋아요, 아마 두 분이 저를 도우실 수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조금만 더 있으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령님, 자료가 더 필요해요.”
  빌은 그가 필요한 것이라면 뭐든지 구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럴 수가,”
  필이 웃음을 터뜨렸다.
  “몇 가지는 기밀 사항인데요.”
  현대 커뮤니케이션은 라디오와 TV, 전화, 그리고 컴퓨터 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전송 기기와 구리선, 광섬유 전송선, 중계탑, 접시 안테나, 중계 기기, 증폭기, 스위쳐, 그리고 위성이 필수적이다. 이 시스템의 일부가 손상되면 자동적으로 보완 시스템이 작동되게 되어 있다. 보완 시스템이 손상되면 컴퓨터가 자동적으로 다른 전송 경로를 찾아낸다. 전송 경로를 찾아내지 못하면 이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재앙으로 생겨난 것들과 마찬가지로 손실들도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몇몇 위성이없어졌고 일부 위성 기지들도 피해를 입었다. 지하 수송로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케이블들도 말짱했다. 영향권에 직접 들어 있었거나 그 일대의 도시들이 초토화된 반면 영향권에서 벗어난 도시들 안에서는 전화와 TV, 그리고 라디오, 장거리 전화 사용이 가능하였다. 어떤 곳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어떤 곳에서는 라디오나 TV방송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결과 어떤 이들은 그들 앞에 펼쳐진 기이한 사건들을 증언하는 TV 앞에 꼼짝 않고 붙어 잇게 되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풍문 밖에는 전혀 듣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시골에서는 지구를 휩쓸고 있는 이러한 사건들을 전혀 모른 채 일상적인 삶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닉 폴슨은 수음을 하던 그 남자를 만난 이후 엘리자베스의 예지자들에 대해 조심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영매들과, 종교적 광신자들, 미치강이들이 줄을 섰으나 닉은 CIA에게 면담을 대신 하도록 했다. 그동안 닉은 프레스넷을 훑어보기로 했다.
  닉은 통신망의 어느 부분이 손상되었나를 대강이나마 알아보기 위해 통신망 디렉토리를 살펴보았다. 델라웨어 대학과 뉴햄프셔에 하나씩 프레스넷 터미널이 깔려 있는 것으로 나왔지만 미국 북동쪽은 거의 통신이 두절되어 있었다. 시카고 쪽은 잘 보존되어 있었다. 남동부도 거의 전부를 잃다시피 했다. 조지아, 미시시피, 그리고 루이지애나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고 나머지 남부 지역에서 보내온 것도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캘리포니아를 제외한 서부 쪽에는 자문 위원들이 거의 없었지만 휴스턴, 갤버스턴, 리노, 샤이엔과 남부 캘리포니아 항구들에 작동하고 있는 터미널이 있었다. 북서쪽에는 시애틀에만 있었는데 워싱턴 대학과 보잉사에 터미널이 있었다. 알래스카, 푸에르토리코, 괌에서는 보고된 것이 없었다. 하와이에는 세군데에 연결이 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 조사를 마친 후 닉은 통신망의 3분의 1 정도만이 제 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프레스넷에 올라와 있는 보고 내용들은 닉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들은 믿을 수 없는 지형적 변화에 관한 것들이었다. 휴스턴의 로버트 코리라는 과학자는 본인이 자동차로 고속 도로를 달리다가 갑작스런 압력 파동으로 길 밖으로 튕겨 나갔다고 메시지를 보내 왔다. 다시 고속 도로로 진입한 그는 차를 돌리다가 붉은 용암층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미니애폴리스의 마비스 판즈워드라는 사람이 보내온 내용에 따르면 한밤중에 쉭 하는 소리가 크게 나서 커튼을 걷어 보니 창밖에 정글이 생겼다고 했다. 프레스넷은 이런 종류의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닉은 낙담하고 있었다. 그 내용들은 너무나 설명 위주였고 분석이 없었다. 프레스넷의 자문 위원들은 과학자가 아니라 관광객들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닉은 프레스넷에 접속을 할 수 있는 전 사용자에게 지형적인 변화에 대한 분석을 즉시 보내 달라고 메시지를 띄웠다. 그는 ‘이상한 사건들’과 그 사건들간의 공통 분모를 찾아내어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닉은 이 메시지가 네트워크를 이용하고 있는 과학자들의 관심을 한데 모으기를 바랬다. 처음에 그는 공룡에 관한 보고나 선사 시대의 다른 생명체에 대한 보고를 해 달라고 요청하고 싶었지만 그가 과학자들에게 그런 요구를 한다면 그것이 그들의 관측 보고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제했다.
  전화가 여러 번 울린 후에야 닉은 전화를 받았다. 경비병이 콘래드 대령이라는 사람이 심리학자와 하사 한 명과 함께 입구에 와 있는데 자신들이 아주 중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며 닉과의 면담을 끈질기게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닉은 엘리자베스가 가지고 있던 목록에서 인질극을 벌였던 대학생이 심리학자와 한 대령에 의해 이송된 사실을 기억해냈ㄷ. 프레스넷에서 건진 내용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낙담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만나 보기로 했다. 그는 만약 그들 중 누구 하나라도 자신 앞에서 수음을 시작한다면 자신이 직접 그를 거세시키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 만남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장사꾼들처럼 보였지만, 닉은 대령의 태도를 보고 잠시 마나 보기로 결정했다.
  대령은 야먀모토 하사에게 그들이 가지고 온 컴퓨터를 장치하도록 명령했다. 간단한 소개가 끝나자 대령이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냈습니다.”
  닉은 희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대령은 다른 영매들과 마찬가지로 확신에 차 있었고, 그는 경험으로 미루어 그렇게 확신에 가득 찼던 사람들 중 누구도 옳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령의 설명은 그럴 듯했다. 정신병을 앓는 대학생, 동굴에서의 인질극, 고속도로 가운데 생긴 산, 그 뒤에 이어진 인질범의 방 수색.
  빌이 자신들이 수집한 정보들을 말해 나가자 테리가 신문 스크랩 일부를 넘겨주며 닉에게 책의 일부를 보여주었다. 닉은 테리가 기대했던 어떠한 회의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닉이 물었다.
  “케니 랜덜은 그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고 모델을 만들었습니다...필, 준비됐나?”
  콘래드 대령이 물었다.
  “네, 이제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건 모형의 일부고, 저는 이 프로그램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대령님께서는 제가 이걸 깨끗이 청소조차 하지 못하도록 하셨거든요.”
  필이 고개를 젓더니 키를 눌렀다.
  그들이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동안 닉의 생각은 확고해졌다. 그들이 프로그램을 다 마쳤고 그는 질문했다.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방정식이나 다른 것들은 없습니짜?”
  콘래드 대령이 나머지 자료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필쳐 박사와 쿰 박사, 그리고 케니의 동료였던 팻의 이름을 말했다. 또한 바빌론의 예언자였던 조라스트러스의 원고에 대해서도 말했다. 가능성이 희박한 이야기이긴 했지만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비교해 본다면 결코 불가능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닉은 경비벼에게 캐니의 나머지 소지품들을 가지고 오도록 했다. 그는 안보 회의에 이것들을 가지고 갈 것이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려면 먼저 자신부터 확신을 가져야 했다.
  “좋습니다. 그럼 컴퓨터 프로그램을 시작해 봅시다. 내게 모든 걸 보여주시오.”
  닉은 젊은 해군 경비병이 조라스트러스의 원고로 알려진 것들을 모두 종이 상자에 담아 가지고 왔을 때 정부가 얼마나 유능할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상자에는 여러 나라의 말로 되어 있는 원고 사본들이 들어 있었다. 영어본을 집어들어 훑어보기 시작했다. 콘래드 대령은 그들이 찾던 것을 발견해냈다.
  “여기, 이게 조라스트러스의 비전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들에 대해 썼습니다 -물, 개구리, 바위, 그리고 나무가 통째로 떨어졌다고 나와 있습니다. 내용 가운데는 이상한 동물이 나타났다는 것도 있습니다. 그는 그 동물을 두 발로걸으며 소를 통째로 잡아먹는 괴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 안에 들어 있나요?”
  닉이 물었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콘래드 대령이 대답했다. 
  “여기에 나와 있는 날짜들은 대부분이 프로그램에서 별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여기 목록을 다시 검토해 보죠.”
  필과 테리, 그리고 콘래드 대령이 프로그램을 가지고 다시 작업을 하는 동안 닉은 조라스트러스라는 예언자가 단지 이상한 일들을 열거해 놓은 것이 아니라 그 현상들을 설명하려고 애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예언은 구체적이고 사건들을 아주 자세히 묘사해 놓고 있었다. 조라스트러스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건들이 과거로부터 온 것이가 믿었고, 그것들이 여러 시대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생긴 파편의 증거라고 믿고 있었다. 닉은 원고를 계속 읽어 가면서 이 예언자를 존경하게 됐다. 예언의 구체적인 날자를 찾지는 못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료에는 고대의 예언자가 옳다는 증거들이 무궁무진했다. 이제 안보 회의 참석자들을 확신시키는 것만이 남아 있었다.
  35. 엘렌과 앤지
  에일린 모 등대는 크리스마스 전 10일 동안 불이 꺼져 있었다. 12월 26일 식량 운반선이 등대에 도착했을 때 세 명의 등대지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양초의 심지는 잘 다듬어져 있었고 초롱에는 기름이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침대도 깨끗했다. 오직 신만이 선량한 이 세 사람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실 것이다.
  데이빗 로즈, 1900년 스코틀랜드
  오레곤주 칼튼 월요일, 오후 3시 11분 (태평양 표준시)
  엘렌은 등과 허리에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포틀랜드로 가는 길을 찾으려고 했지만 5번 고속도로 위에 생긴 산 주위에서 길을 찾느라 이면 도로를 메우고 있는 관광객들만 마주치고 있었다. 관광객들과 구경꾼들이 섞여 매우 혼잡한 걸 보니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그녀는 존의 소식을 알기 위해 포틀랜드와 그 일대에 사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려고 벌써 몇 시간째 애쓰고 있었지만 통화를 하지 못했다. 각 주를 연결하는 장거리 전화선들은 괜찮았지만 그 지역 회선은 통화가 제한되고 있었기 때문에 포틀랜드로 전화를 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엘렌이 느끼는 절망감은 남편에 대한 노여움과 섞여 거의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서라도 존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앤지가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엘렌은 예의상 앤지의 호의를 거절하면서도 속으로는 마음을 한시름 놓았다.
  그들은 포틀랜드에서 남동쪽으로 1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칼튼이라는 곳에 와 있었다. 도로는 거의 마비된 상태였다. 그들은 라디오에 귀기울이며 새로운 소식은 없는지 다른 방송을 틀어 보았다. 그러다가 어떤 여자 제보자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경찰이 고속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쳤어요. 더 이상 갈 수가 없다는 거에요. 마을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찼고 반대쪽으로도 길이 없다는군요. 이상입니다.”
  앤지는 라디오를 껐다.
  “오면서 본 것과 똑같군요. 아마 저 경찰은 무슨 일인지 알지 몰라요.”
  그들은 지프를 한쪽으로 세운 다음 꼼짝하지 못하고 서 있는 자동차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소풍용 의자와 담요를 들고 걷고 있었다. 아이들은 술래잡기를 하며 자동차 주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바리케이드까지 왔고 방향 표지판 위에 다음과 같이 나무를 톱으로 잘라못질을 해 놓은 것을 발견하였다.
  지나갈 수 있음
  지나갈 수 없음
  폐쇄된 도로임
  근처에 경찰 두 사람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가 책임자인 게 분명했다. 사람들은 분노와 절망, 그리고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경찰은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한 번에 한 사람씩 말씀하십시오, 한 번에 한 명씩입니다.”
  엘렌을 바라보는 앤지의 눈빛이 ‘이번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경찰 곁으로 가더니 도발적인 자세로 말했다.
  “이봐요, 왜 길을 막은 거죠?”
  그녀가 큰 소리로 느릿느릿 말을 걸었다.
  그 소리에 몸을 돌리던 경찰의 짜증난 듯한 표정이 앤지의 육감적인 자태에 누그러지고 있었다.  
  “잘 들으세요.”
  그는 다른 사람들도 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제 이야기를 들으십시오.”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경찰은 앤지를 보며 말을 꺼냈다.
  “도로를 폐쇄한 것은 더 이상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길은 마을 반대편으로 1.6킬로미터 정도 더 이어지다가 끊겼습니다. 길에는 버려진 승용차와 트럭들로 발 디딜 곳이 없습니다. 마을에는 주차할 공간도 숙박할 공간도 더 이상 없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길을 따라 가 보십시오.”
  실망한 목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우리는 포틀랜드에 가야 한다구요.”
  뒤쪽에서 누군가 불평했다.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언제쯤 도로가 복구될까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똑같은 상황이실 겁니다.”
  경찰이 말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길을 복수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만약 믿지 못하신다면 직접 가서 확인하십시오.”
  경찰은 머리르 절레절레 젓더니 사람들을 쫓았다.
  사람들은 내키지 않아 하면서 흩어졌고 그들이 들은 이야기를 방금 도착한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경찰에게 살짝 다가간 앤지는 꼬박 하루 동안 운전을 해서 피곤할 텐데도 무척 매력적으로 보였다. 경찰고 앤지의 매력을 인정하는 것 같았고, 그 사실이 은근히 엘렌의 신경을 건드렸다. 하지만 엘렌은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약이 좀 오른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뭘 도와 드릴까요?”
  경찰이 앤지의 가슴 사이에 팬 골짜기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여기 있는 내 친구는 집에 꼭 가야만 해요, 경관님.”
  앤지는 엘렌을 보고 계속 고래를 끄덕이며 처량하게 말했다.
  “친구 아들이 혼자 집에 있는데 아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았는지 무척 걱정하고 있어요.”
  경찰은 앤지한테 홀려 있어 엘렌은 잠간 쳐다보기만 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가 힘없이 말했다.
  “도로가 그냥 폐쇄된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사라져 버렸어요. 짐과 상점들이 있던 도로가 없어진 겁니다.  그릇 가게를 하던 빌 브란트는, 그는...그는 도로가 끊긴 지점 근처에 살고 있었어요. 그 사람은 아이가 다섯이에요.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전 모른다구요! 거기에는 나무밖에   남아 있지 않아요.”
  그의 목소리는 두려움과 분노로 뒤섞여 있었다.
  “나무와 풀밖에 남아 있지 않다구요.”
  그가 되풀이했다.
  엘렌은 칼튼으로 오는 동안 라디오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수없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두려움이 컸지만 두려움을 느낄수록 아들을 찾아 집에 가야 한다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테리와 빌이 돌아올 지 알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남편이 워싱턴에 간데 대해 화가 나 있었다.
  앤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며 경찰에게 바싹 다가서더니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물론 당신에게는 힘든 일이라는 걸 알아요. 피터스...경관님? 데려다 달라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여기에서 포틀랜드로 가는 다른 길을 알려 주실 수는 있지 않을까요? 아들을 찾으로 갈 수 있는 길을요.”
  앤지의 매력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경찰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정말 안된 일이군요.”
  그가 엘렌을 흘낏 쳐다보더니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길이 없어진 문제가 아닙니다. 모두 사라졌어요. 포틀랜드는 이제 없어요. 모든 길은 다 끊겼어요.”
  엘렌은 무시당하는데 지쳤다.
  “라디오에서 포틀랜드를 보았다는 사람들 얘기를 들었어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또 어떻게 경관님께서 도시가 사라졌다는 걸 아시죠?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
  “부인, 저는 사람들이 의심하는데 질려 버렸어요. 하도 많이 반복한 이야기라 이젠 지쳤습니다. 부인이 뭘하든지 아무 말 하지 않을테니 제발 이 마을로 자동차만 가지고 오지 마십시오.”
  피터스 경관이 몇 발자국 걸어가더니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엘렌은 희망을 가졌다. 그들은 집에 가까이 와 있었다. 지프를 타고 갈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 지나온 곳들은 숲이나 장애물들로 가득했다. 만약 그들이 쇠줄이나 톱으로 길을 만들며 가야 한다면 며칠은 걸릴터였다. 유일한 방법은 걸어가는 것이었다.   
  “실례합니다.”
  한 경찰관이 앤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앤지의 가슴을 본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는 키가 크고 마른 체격으로 작은 머리에 코와턱이 뾰족했다. 그는 선글래스를 쓰고 있었는제 안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농구 선수들처럼 안경 양쪽에 끈을 매달고 있었다. 사람들이 보면 괴짜, 얼간이 또는 구닥다리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합쳐 놓은 듯한, 아니 그 이상으로 보였다.
  “어쩌다 두 분의 사정을 엿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요. 시골길을 여기저기 쑤시고 돌아 다니는 오토바이 족들을 몇 명 알고 있는데, 그들은 얼마 동안 포틀랜드에 갔다 온다고 하는군요. 만약 제가 두 분 사정을 말한다면 그들이 도와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엘렌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제복에 달린 명찰에는 스탠리 쿠퍼라고 적혀 있었고 그의 눈빛은 상당히 진지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아주 이상해 보였고 그것이 엘렌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앤지도 그를 자세히 보고 있었다.
  “포틀랜드 남동쪽에 갈 수 있을까요?”
  엘렌이 물었다.
  “아직 포틀랜드가 있다면요.”
  앤지는 마음을 결정한 것 같았다. 그녀는 경찰의 팔에 팔짱을 끼며 몸을 기댔고, 그 바람에 그녀의 가슴이 경찰의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정말 우리를 도와주시는 거죠?”
  앤지가 소녀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당신이 같이 가신다면 정말 안전할 거에요, 스탠리.”
  “쿱이라고 부르세요.”
  “그래요, 쿱. 쿱, 아주 귀여운데요.”
  앤지가 킥킥대며 웃었다. 엘렌은 웃어야 할지 그냥 있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쿱,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 지 모르겠어요.”
  앤지가 손으로 그의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쿱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했는데 그 모습에 엘렌은 거북함을 느꼈다. 
  경찰차의 인도 아래 앤지의 지프는 도로 한쪽으로 옮겨졌고, 차는 마을 가까운 곳에 있게 되었다. 그날 밤 엘렌과 앤지는 지프 안에서 잤다. 자리가 아주 불편했기 때문에 그들은 깊이 잠들지 못했다. 엘렌은 자식에 대한 걱정과 남편에 대한 노여움을 느끼며 밤을 지샜다. 그녀는 거의 존만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이 있는 곳은 이미 알고 있었고, 남편이 딸을 돌볼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은 없는지 전혀 알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36. 야수
  나는 다리와 마을을 방어하기 위해 양쯔강을 건너 3천 명의 지원병을 배치시켰다. 다음날 아침 병영에는 겨우 백여 명의 군사들만이 남아 있었다. 다리 위에서 보초를 서던 경비병은 밤사이에 강을 건넌 사람은 전혀 없었다고 보고했다. 우리가 점령당했을 때 일본군은 우리 군대와 내통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만약 사라진 병사들만 있었더라면 얼마 후 시작된 약탈에서 난징을 보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리 푸 시엔 장군, 1937년 12월
  오레곤주 포틀랜드가 있던 곳에 생긴 숲 월요일, 오후 4시 10분 (태평양 표준시)
  티라노사우루스가 사냥을 끝내고 계곡 아래로 내려간 것은 늦은 오후가 다 되어서였다.
  “여기를 떠나다니 정말 다행이야.”
  존이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커비가 ‘아멘’ 하고 기도하더니 존을 재촉했다.
  “존, 다시 가야 돼.”
  “싫어, 여기가 더 안전해.”
  “공룡의 시체 때문에 밤새 다른 육식 동물들이 모여들 거야. 그리고 우리도 찾아낼 거야.”
  존은 다 포기하고 그냥 거기에 있고 싶었다. 그는 공룡은 말할 것도 없이 곰이나 사자가 나타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 것도 몰랐다. 만약 리프먼이 같이 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을 것이다. 결국 그는 생존의 본질에 대해 알고 있었고, 공룡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커비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존, 주위 15킬로미터 반경 내에 있는 공룡들이 모두 티라노사우루스가 사냥한 걸 들었을 거야. 그놈들은 어쩌면 이미 남아 있는 먹이를 생각하고 있을 걸. 괴물들이 몰려오기 전에 여길 떠나야 해.”
  존이 그 말에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소리는 점점 커지다가 갑자기 뚝 그치는 것 같더니 뭔가 그들이 숨어 있는 쪽을 향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존은 움찔하며 커비 옆으로 갔고, 그들은 뒤쪽의 통나무에 몸을 바짝 붙일 채 바닥에 드러누웠다. 갑자기 틈 사이로 세 개의 발가락이 달린 발이 불쑥 들어오더니 흙을 파냈다. 놀랍게도 그 짧은 시간 동안 입구는 두 배나 넓어져 있었다. 구부러지고 날카로운 발톱은 조직적으로 흙을 파내더니 모습을 감췄고, 존과 커비는 공포에 질려 꼼작하지 못했다. 커비가 미친 듯이 기도문을 외웠다. 그때 존과 커비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세모꼴의 머리가 입구를 막고 있었다.
  존은 잡아먹힐 위기에 처했다. 공룡은 머리를 앞으로 들이밀며 커비와 존을 물려고 버둥댔다. 쩍 벌린 입속에 톱니처럼 나 있는 날카로운 이빨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씩씩대며 내뿜는 숨에서 풍기는 고기 썩는 냄새가 그 좁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두려웠던 데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꼼짝하지 않았다. 갑자기 공룡이 머리를 빼내더니 입구를 넓히기 위해 발을 집어넣었다. 존은 다시 공표에 질렸고,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가능ㄹ 만들기 위해 통나무 사이를 마구 헤집었다. 제일 넓다고 해도 팔과 머리만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틈 사이로는 어깨도 집어넣을 수 없었다. 존은 만약 죽는다면 다리부터 먹히고 싶지는 않았다. 선택하라면 차라리 머리부터 뱃속에 들어가는 것을 택할 것이다.
  존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살펴보았지만 엄청난 발톱이 넓히고 있는 입구 외에는 나갈 데가 없었다. 커비는 무릎을 꿇은 채 활과 화살을 찾고 있었다. 그는 활에 화살을 끼우고는 그의 무기를...화살을 쏠 준비를 했다. 커비를 바라보고 있든 존도 화살 통에서 화갈을 꺼냈다. 일어서기에는 충분치 않았으나 존은 화살을 쏘기에 최대한 좋은 자세를 취하려고 애썼다. 그는 손을 심하게 떨고 있었고, 잘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활을 수직으로 세우면 지붕에 닿았기 때문에 커비는 활을 비스듬하게 뉘여 잡았다.
  쾅 하는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함께 나더니 괴물이 다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귀를 찢는 듯한 울부짖음에 존은 온 몰의 신경이 터져 나가는 것 같았다. 공룡이 다시 으르렁거렸고 시큼한 악취가 존의 얼굴을 뒤덮었다. 공룡은 앞뒤로 머리를 흔들며 통나무를 흔들었다. 커비는 공룡에게 다가가서 공룡의 눈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공룡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계속 몸을 흔들어 대며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존은 몸이 떨려 화살을 제대로 쏘지 못했다. 일어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발을 활에 올려놓은 다음 화살이 제대로 당겨질 때까지 활을 당겼다.
  “쏴, 존, 어서!”
  커비가 다른 화살을 장전하며 소리쳤다.
  공룡은 다시 밀고 들어왔고, 이번에는 통나무가 움직였다. 존은 갑자기 미끄러지며 나동그라졌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다.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존은 소리를 지르며 시위를 당겼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공룡의 눈에 박혔고, 공룡은 포효하며 몸뚱이를 일으켜 세웠다. 공룡의 힘에 통나무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커비가 입구를 가리켰고 존은 서둘러 빠져나갔다. 커비가 그 뒤를 따랐고, 그들은 정신없이 도망쳤다. 뒤에서 공룡의 성난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정신없이 달리던 존이 풀뿌리에 걸려 바닥에 넘어졌다. 커비는 존의 몸을 뛰어 넘어 계속 달렸다. 얼마 후 커비가 넘어졌고 존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들은 계속해서 달렸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도망쳤다.
  존과 커비는 허리를 붙잡고 숨을 몰아쉬다가 자신들이 풀밭에 들어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상적으로 호흡할 수 있게 되자 그들은 다시 주변의 소리에 귀기울였다. 그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망쳤기 때문에 육식 공룡들이 뒤쫓아 왔을까봐 겁먹고 있었다.
  그들은 한 시간 이상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존은 가족을 걱정했다. 누나는 워싱턴에 무사히 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부모님은 별장에 계실지 아니면 포틀랜드에 계실지 알 수 없었다. 존은 커비가 앞으로도 그의 부모니믕ㄹ 찾아다닐 것이고, 자신은 그런 커비를 계속 따라 다닐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밴을 남겨 둔 것보다는 포틀랜드가 더 가까웠다. 그는 포틀랜드의 모습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어떤 선택이 남아 있겠는가? 커비는 한참동안 풀밭에 누워 있었다. 존은 커비를 따라 누웠고, 커비와 등을 마주 대고 있다가 커비가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37. 구원의 손길
  커다란 짐승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앞에서 인간들이 도망치고 있다.
  조라스트러스, 바빌론의 예언자
  플로리다주, 네이플즈 앞바다 화요일, 오전 6시 50분 (서부 표준시)
  새벽이 밝아왔고, 그들은 괴물의 머리를 똑똑히 보았다. 물 밖으로 5미터 가량 올라와 있는 목 위로 머리가 다려 있었는데 크기는 목둘레보다 커 보이지 않았다. 살가죽은 그들이 앉아 있는 등처럼 깉은 녹색을 띠고 있었다. 목과 머리가 리드미컬하게 움직였가. 론은 고개를 돌리고 바다 속을 쳐다보았다. 물이 소요돌이치는 것으로 보아 꼬리가 움직이는 게 틀림없었다. 의심할 것도 없이 이 동물은 헤엄치고 있는 중이었고, 아주 천천히 가고 있었다.
  카르멘은 아직도 크리스를 앞에 앉히고 팔로 감싸안고 있었다. 로자는 카르멘 뒤에 앉아 있었는데 왼팔을 구부린 채 오른팔로 받치고 있었다. 카르멘이 속삭였다.
  “론, 뒤로 물러나요. 물 속으로 들어가요.”
  론은 움직이려다가 주저했다. 그들은 이 동물의 등 위에서 밤을 지새웠고, 등에서 내리기가 두려웠다. 그리고 갈 곳이라고는 도마뱀들이 들끓고 있는 바다 속밖에 없었다. 짐승은 적대심은켜녕 사람의 존재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무게가 수백 킬로그램은 나갈 공룡에게 그들은 코뿔소 등 위에 앉은 새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한편 론은 이놈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빠 그들 가족에게 신경을 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동물은 태양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고, 그건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이렇게 가다 보면 플로리다 해변에 도착할 것이다. 공룡의 속도로  볼 때 해안까지 가려면 이틀은 걸릴 것이다. 이 방법 외에는 그들이 해안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는 공룡의 등 위에서 내려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몸을 의지할 만한 통나무나 그런 물건들을 찾아내야 했다.
  “여보.”
  그가 속삭였다.
  “잘 모르겠어...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정확한 방향으로 정확하게 가고 있어.”
  “당신, 농담하는 거에요?”
  그녀가 작은 소리로 대꾸했다.
  “이게 뭔지 알기나 해요? 이건 부론토사우루스라구요.”
  론은 지금 또 놀라기에는 지난 몇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충격을 받았었다. 그는 단지 멍하게 ‘브론토사우루스라고? 당신, 지금 공룡의 한 종류인 브론토사우루스라고 말한 거야?’ 라고만 중얼거렸다.
  “지금은 그렇게 안 불러요.”
  로자가 속삭였다.
  “요즘은 아파토사우루스라고 불러요.”
  “맞아, 저건 포토사우루스야.”   
  보통 때처럼 크리스가 따라 했다.
  카르멘은 몸을 움찔하더니 크리스의 말을 막았다. 론은 크리스의 목소리를 듣고 아이가 점점 회복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뭐든 상관없어, 난 내리고 싶어요.”
  카르멘이 단호하게 말했다.
  “엄마, 저 공룡은 초식 동물이야, 풀하고 나뭇잎만 먹어.”
  로자가 말했다.  
  로자는 공룡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카르멘은 딸의 말을 주의깊게 들었다. 론은 이 동물이 공룡처럼 보인다는 건 인정했지만 공룡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공룡은 오래 전에 멸종된 동물이었다. 하지만 이 경도와 위도에는 섬이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 동물과 다른 도마뱀들은 다른 섬에서 온 것 같았지만 공룡이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없었다. 바다에 사는 큰 동물 이야기는 수없이 많았다. 물론 이 동물은 수중 동물인 것 같지는 않았다. 동물은 바다 속으로 잠수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고, 고래처럼 물을 뿜는 구멍도 없었다. 론은 공룡과 비슷한 종류일 거라고, 하지만 공룡은 멸종했다고 생각했다. 만약 꼭 그러고 싶다면 동물을 브론토사우루스라고, 아니면 아파토사우루스라고 부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론은 이 정도 크기의 동물은 애들에게 모두 아파토사우루스로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더 이상 물 속에는 못 있겠어요.”
  로자가 말했다.
  “보세요.”
  크리스가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다른 공룡이 또 있어요.”
  론이 보니 물 소겡 조금 작은 형체가 있었는데 그들이 타고 있는 공룡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작은 놈은 큰 공룡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헤엄을 치고 있었다. 
  “새끼에요.”
  로자가 소근댔다.
  “그래요.”
  크리스가 또 따라 했다.
  카르멘이 크리스에게 주의를 주자 아이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새끼가 있네.”
  론은 새끼 공룡이 다 자란 코끼리보다도 훨씬 클 거라고 추측했다. 모긍ㄴ 어미 공룡에 비하면 훨씬 짧았지만 물 위로 보이는 것만 해도 2미터는 될 것 같았다. 어미를 쫓아가는 새끼 공룡은 별로 힘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론은 어미가 속도를 많이 늦추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론은 이 공룡들의 골격 구조와 해부학적 구조가 궁금했다. 공룡들은 헤엄치는데 온 힘을 쓰는 것 같았고 속력도 빠르지 않았다. 골격이 가볍고 체내 지방 함량이 놓다면 폐활량이 높아 물 위에 그냥 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그들이 공룡의 등 위에 그대로 있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될 것이다. 그들은 이것보다 더 나은 뗏목이나 탈 것을 찾지 못 할 것이다.
  론이 말했다.
  “여보, 여기에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물 속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최소한 몸을 의지할 것을 찾을 때까지는 있어야겠어.”
  카르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론은 그녀가 뗏목에서 한바탕 벌어졌었던 도마뱀들과의 전쟁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주위의 바다 속을 철저하게 살펴본 그녀는 대답했다.
  “좋아요, 하지만 아주 잠깐만 있는 거에요.” 
  크리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몸이 저릴 때까지 꼼짝히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 괴물의 등에서는 안전했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몸을 움직였고, 카르멘은 한 번에 한 사람씩 천천히 움직이라고 주의를 주었다. 론은 다른 식구들과 마찬가지로 맨실에 내리쬐는 태양과 공룡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느끼며 곧 잠이 들었다.
  38. 친구
  우리는 종종 문명을 얇은 합판에 비유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계속되는 폭력은 문명이 끊임없이 추락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그물과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물이 사람들로 메워지면 그물은 코를 더 크게 늘려 사람들이 문명의 통제에서 빠져 나와 그 안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그물이 찢어지는 날이 오는 날, 신이여 우리를 살피소서. 
  샬린 홀, 폭력적인 사회
  뉴욕시 화요일, 오전 7시 30분 (서부 표준시)
  위더비 부인이 부엌에서 일하는 소리에 루이스는 잠에서 깼다. 기분이 훨씬 나았다. 두통도 사라졌고 아직 머리에 혹은 있었지만 입술의 부기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고 지난밤부터 계속 잤다는 걸 알았다. 위더비 부인은 아침을 만들고 있었다. 루이스는 커피와 구운 베이컨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가 가족을 생각나게 했다. 아내는 틀림없이 걱정하느라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루이스는 돌아가야 했고, 그는 위더비 부인과 함께 가기를 바랬다.
  루이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현기증은 사라졌고 그는 부엌 입구에 기대어 섰다. 부인은 체크 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달걀과 베이컨을 요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루이스를 보자 친할머니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식탁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앉아요, 루이스. 시간 맞춰 일어났네요. 토스트가 없어서 어쩌죠. 토스터를 사용할 수가 없어요. 얼른 전기가 들어와야 할텐데. 참,  가스레인지로는 구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아니에요, 부인. 이거면 충분해요. 기대 이상인데요.”
  “빵을 구워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정말 괜찮아요.”
  루이스는 식탁에 앉아 걸신들린 듯 음식을 먹어 치웠다. 반쯤 먹었을 때 위더비 부인이 혀를 차더니 마지막으로 남은 계란 두 개를 마저 부쳤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부인, 마지막 계란을 저한테 주셨군요. 아시겠지만 이제는 살 수도 없는데. 최소한 한동안은요. 지금 밖은 무법 천지에요. 제 얼굴을 보시면 믿으실 수 있을 거에요. 저와 같이 멜린다 오빠네로 가시죠. 아이들도 거기 있어요. 부인은 정말 우리한테 큰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거에요. 저와 아내가 새로 살 집을 찾아보는 동안 아이들을 돌봐주실 수도 있잖아요. 아이들도, 특히 카트리나가 좋아할 거에요. 그 아이가 부인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시죠?”
  “루이스, 카트리나는 무척 귀여워요. 하지만 여기가 내 집이고 떠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해요. 계란이 없어도 난 괜찮아요. 식료품도 한 달은 충분히 지낼 만큼 있어요. 또 바닥이 나도 빌려 올 이웃들이 주변에 많고, 전에도 이런 정전은 많이 겪어 봤다오. 루이스, 준비만 충분하다면 그런 것들은 전혀 문제될 게 없어요.”
  “하지만 부인, 밖에는 공룡이 있어요.”
  “루이스, 아주 많은 공룡이 있어요. 계속 몰려오고 있어요. 그중 몇 마리는 아직까지 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있지만 내가 본 것 중에는 폴라칸투스와 파키케팔로사우스와 무시무시한 데이노니쿠스도 있었어요. 그 놈들은 무시무시한 육식 동물들이라오! 내 친구인 이구아나돈도 물론 있어요. 알고 있겠지만 초식 동물이에요. 그 공룡은 아주 달작지근한 걸 좋아해요.”
  그녀는 달걀 부침을 루이스의 접시 위에 놓아주고는 냉장고에서 사과 주스를 꺼내 루이스의 컵을 가득 채웠다.
  “내가 왜 사과 주스를 아직도 냉장고에 넣어 두는지 알 수 없다니까. 냉장고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데. 습관이 들어 그럴 거야.” 
  루이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 큰 공룡이 부인을 잡아먹을 필요는 없겠지만 만약 부이능ㄹ 밟기라도 한다면 부인은 팬케이크처럼 납작해질 거에요.”
  “그 공룡은 아주 조심스러워요.”
  위더비 부인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루이스, 팬케이크 더 먹을래요? 아주 쉽게 거품을 냈어요. 시럽도 많아요. 물론 -”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벌써 배가 부른데요. 저는 공룡이 부인을 팬케이크처럼 납작하게 밟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팬케이크를 더 먹고 싶다는 게 아니었어요. 공룡은 조심하고 다닐 만큼 영리하지 않아요. 부인을 해칠 거에요. 일부러 그러지는 않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그 공룡은 아주 영리해요.”
  위더비 부인이 변명하듯 말했다.
  “그 공룡이 얼마나 빨리 설탕 먹는 법을 익혔는지 당신도 봤어야 하는 건데. 지금은 내 정원에 들어오지 않도록 가르치고 있어요.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
  거실 창문 밑에서 들리는 ‘아아 -아’ 하는 익숙한 소리가 위더비 부인의 말을 막았다. 그녀는 소리르 듣자마자 조리대 위에 놓여 있는 설탕 봉지 두 개를 들고 부엌을 나가다가 뒤를 보며 소리쳤다.
  “루이스, 계란 마저 먹어요. 가서 공룡에게 설탕 좀 주고 올게요. 주지 않으면 우리를 귀찮게 할 거에요.”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갔을 때 루이스는 위더비 부인이 아프트 밖으로 나가 공룡에게 직접 먹이를 주려고 한다는 것 깨달았다. 어쩔 수 없었다. 루이스는 위더비 부인을 구하려다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그녀는 루이스의 도움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를 억지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그는 위더비 부인을 여기에 남겨 두어야 했고, 만약 공룡이 부인을 해친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의 탓이 아니었다. 그는 충분히 노렸했다.    
  창문 밖을 내려다보니 공룡은 위더비 부인과 같이 있었다. 공룡이 네 다리르 꿇고 앉아 커다란 입을 벌리자 부인은 입안으로 설탕을 부어 주고 있었다. 참 이상하면서도 보기 좋았다. 하지만 루이스는 오래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위더비 부인은 떠나야 할 것이다. 이번에는 금방 전기가 연결되지 않을 것이도, 복구된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약탈이 끝나면 경찰은 이 아파트 건물을 소개시킨 후 공룡이 있는 초원을 봉쇄할 것이다.
  루이스는 마침내 자신이 졌다는 걸 인정했다. 떠나야 했다. 그에게는 자신을 걱정하는 가족이 있었고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집에 돌아가 있어야 했다.
  위더비 부인이 공룡에게 설탕을 다 주었고, 공룡은 풀을 한입 가득 물고는 초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루이스는 창 밖으로 부인을 불렀다.
  “위더비 부인, 집에 돌아가야겠어요. 같이 가시지 않겠어요?”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웃음을 보냈다.
  “가서 아이들이나 잘 돌봐 줘요, 루이스. 이 나이든 여자는 그만 신경 써요.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몇 년 동안 지금처럼 행복한 적은 없었으니까.”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작별 인사를 했다. 루이스는 생각했다. 그녀는 죽을 거야. 하지만 행복하게 죽겠지. 그는 문을 나섰다.
  밖은 루이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더 나빴다. 머리를 다치면서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어렴풋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공룡이 출현한 곳 부근은 거의 모두 초토화되어 있었다. 빌딩에 불지른 흔적은 없었지만 창문들은 모두 부서졌고, 조름이라도 쓸 만한 물건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약탈 끝에 남아 있는 물건들이 길을 매우고 있었고,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들은 그 물건들을 주워 담고 있었다. 대부분이 남자였다. 사람들은 모두 오래 전에 이곳을 떠났고 위더비 부인처럼 나이든 사람들만이 남아 있었다.
  루이스는 아파트 입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온갖 인종의 젊은 남자들로 가득했다.  지난 몇 년간 루이스의 이웃에 살던 백인들은 모두 이사를 가 버렸는데, 그 자리르 라틴계와 흑인 중 누가 채울지는 알 수 없었다. 부분적으로는 그런 이유로 이곳에 갱들이 더 날뛰는 지도 몰랐다. 좀비파라고 불리는 백인 갱들은 자신의 구역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갈수록 점점 난폭해졌다. 그들의 세력은 계속 약해지고 있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디아블로파와 킴보파 갱들 일부를 흡수하고 있었다. 아직 군중들 틈에는 갱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스는 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것이 신경쓰였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지? 왜 약탈하기 좋은 곳으로 가지 않는 걸까? 왜 여기에 있을까? 공룡들 때문에 한쪽으로 몰려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럼 반대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루이스는 조심스럽게 걸었다. 멀리서 탕탕 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즉시 그게 총성이라는 걸 알았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는 좌우를 살폈지만 총성은 점점 가까워졌기 때문에 건물 입구 안으로 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며 나갈 기회를 노렸다. 남자들이 그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루이스는 그들이 입은 붉은 재킷을 보고 좀비파 갱들이라는 걸 알았다. 그들은 속력을 줄이더니 사방으로 흩어져 몸을 숨겼다. 잠시 후 그들은 루이스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뭔가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그러더니 다시 루이스가 있는 방향으로 뛰었다. 이제는 루이스가 숨어야 할 차례였다.
  루이스는 주위를 살피다가 바로 앞에 미스터 최의 식료품 가게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이따금씩 여기에서 물건을 샀기 때문에 그를 알고 있었다. 미스터 최와 그의 부인은 가게 위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무뚝뚝했지만 그의 부인은 위더비 부인만큼이나 사람이 좋았다.
  가게의 창문은 인근의 다른 집들처럼 아예 남아 있지 않았다. 유리문이 부서져 있었기 때문에 루이스는 문틀을 넘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의 선반들 대부분이 뒤집혀 있었다. 루이스는 뒤로 가서 숨기 좋은 장소를 찾았다. 통조림 캔 몇 개가 바닥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었다. 
  밖에서 총성이 들렸는데 아까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루이스는 서둘러 가게 뒤편으로 갔다. 그는 뒤집혀 있는 선반을 지나다가 그 밑으로 삐져 나와 있는 다리를 보았다. 그는 다리를 툭 건드려 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시체는 평범한 갈색 작업화를 신고 있었는데 그 크기가 무척 작랐다. 선반을 들어올린 루이스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미스터 최였다. 그는 바닥에 등을 대고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피가 머리 주변에 흥건했다. 루이스는 조심스럽게 선반을 일으켰다. 미스터 취는 가게를 지키려다 죽은 것이다. 루이스는 가게가 미스터 최의 모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루이스는 만약 자신이 미스터 최였어도 가게를 지키다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루이스는 미스터 최의 부인을 생각했다.
  루이스는 총격전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렸고, 가게 위의 아파트로 올라가는 저장실 안 계단을 찾아냈다. 저장실은 말짱했다. 루이스는 얼른 집안을 살펴보았다. 방들은 모두 비어 있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총성이 울렸고 이번에는 아주 가까이서 소리가 났다. 루이스는 자신을 향해 쏘는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할 때까지 마루에 몸을 엎드리고 있었다. 그는 거실 창문에까지 기어간 다음 벽에 등을 붙이고 천천히 일어나 거리를 슬쩍 내다보았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총성이 들리더니 붉은 재킷을 입은 사람이 달려갔다. 몇 발의 총성이 다시 울렸다. 좀비파 갱 두 명이 도망치고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제복 차림의 남자들이 라이플을 가지고 나타났다. 군인이 라이플을 들고 거리에 총을 쏘고 있었다. 군인은 계속 총을 쏘았고 다른 군인이 그 옆을 지나 달려갔다.
  루이스는 몸을 벽에 바싹 붙었다. 흥분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면서 루이스는 거리에 나타난 것이 주 방위군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루이스는 위더비 부인에 대한 걱정을 접었다. 방위군이 그녀를 아주 시키거나, 아니면 최소한 보호할 것이다. 그건 이제 루이스가 아내와 아이들에게 돌아가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리엘은 루이스를 그리워하고 있었ㄷ. 그는 바로 조금 전에 떠나갔을 뿐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돌보아 줄 수도 있고, 함께 이야기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떠나갔다는 게 아쉬웠다. 루이스가 거티를 비롯해 마리엘이 중녕에 이르기까지 사귄 다른 친구들의 자리를 대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요즘 젋은이답지 않게 매우 친절하고 공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같은 아파트 건물 안에 사는 가운데 마리엘을 방문한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어 보는 등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 준 유리한 사람이었다. 마리엘은 지난 몇 년간 루이스가 보여준 성의에 감동했었는데 이제는 자신의 신변을 걱정하고 찾아오기까지 한 것이다. 이제 루이스는 그녀에게 있어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런 행동은 아들이 어머니한테나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마리엘은 앞으로도 루이스를 그리워 할 것이다.
  루이스가 떠난 지 얼마 안돼 총성이 들렸다. 물론 마리엘은 전에도 총소리를 들어봤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크게 나는 소리를 들은 적은 없었다. 그녀는 총소리를 듣자 화가 났다. 총성이 공룡들을 쫓을 지도 몰랐다. 최악의 경우 이구아노돈이 설탕을 먹으러 더 이상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마침내 소리가 약해졌고, 마리엘은 초원에 있던 공룡들이 다시 돌아올 거라는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바라보아도 그녀는 풀밭에서 뭔가 빨리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때 도시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더 멀리 있는 겇어럼 보였는데 연못에 비쳐 흔들리는 것처럼 도시는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창에 몸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초워과 아스팔트의 경계가 분명하게 보였고 멀리 내다보면 아물거리는 도시가 보였다. 마리엘은 앞치마로 안경알을 닦았다. 그녀가 다시 안경을 썼을 때 도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이런. 처방전을 다시 받아야겠는걸.”
  마리엘은 다시 한 번 창밖을 내다 본 다음 맥그리거네 집에서 설탕을 찾다가 발견한 오렌지 맛 나는 차를 마시기로 결심했다.
  루이스는 총소리가 길 위쪽으로 옮겨가면서 점점 작아가는 걸 주의깊게 들었다. 그는 텅 빈 거리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가 숨어 있는 건물 근처에서 다시 총성이 울렸다. 루이스는 다시 위더비 부인 생각을 했고, 그녀의 달걀을 다 먹어 치운 것이 미안해졌다.
  그는 바닥을 기어 미스터 최의 부엌으로 갔다. 벽에는 흰색 구식 냉장고가 놓여 있었다. 문을 열자 시원한 기운이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차갑지는 않았지만 방안보다는 훨씬 시원했다. 전기는 나간 상태였지만 냉장고의 중간 단에 달걀 두 꾸러미가 있었다. 한 상자는 하나도 손대지 않은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반 정도 남아 있었다. 루이스는 달걀을 집어든 뒤 선반 위를 더듬었다. 그는 1리터 짜리 오렌지 주스를 찾아내어 달걀과 함께 놓았다. 만약 그가 아래층에서 뭐라도 가졌다면 그도 약탈자라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여기에서 가져가는 것은 빌려 가는 것이었다. 그와 미스터 최는 정확하게 말해 친구는 아니었지만 최소한 서로 알고는 있었다. 
  캐비닛에서 그는 6개의 팩이 든 주스 상자 2통과 과일 통조림을 찾아냈다. 마지막으로 그는 5킬로그램 짜리 설탕 봉지를 찾아냈다. 그가 물건을 모두 종이 상자에 담았을 때 총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이제는 자동화기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루이스는 창문까지 기어가 살짝 밖을 내다보았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지만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군인들이 오고 있었다. 그들은후퇴하면서 서로를 엄호하느라 거리에 마구 총을 쏴대고 있었다. 그들은 곧 사라졌고, 거리는 다시 조용해졌다. 루이스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좀비파 갱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기관총을 들고 있었다. 다른 좀비 일당들이 자동 권총을 쏘아 대며 모습을 드러냈다. 좀비파 갱들은 거리를 향해 총을 쏴댔고, 루이스는 총성이 미스터 최의 가게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루이스는 실망하여 뒤로 물러섰다. 그는 결국 군인들이 재무장하고 돌아와 좀비파들을 검거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총소리가 작아지고 있었고, 루이스는 대부분의 좀비파들과 다른 갱들이 그들의 영역에서 방위군을 몰아내느라 정신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찜찜했지만 그는 지금이야말로 모험을 할 때라고 생각했다. 위더비 부인에게 주려고 모은 식품들이 루이스를 물건을 약탈해서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쪽으로 보이게 할 것이다. 만약 거리에서 붙잡히면 식료품을 주고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거리는 텅 비어 있는 것 같았지만 루이스는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시선의 주인공들이 빌딩 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총격전의 현장을 떠나며 그는 건물을 사이에서 바리케이드 역할을 하고 있는 자동차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자동차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거리를 따라 내려오다가 몇 명이 무리 지어 있는 걸 보게 되었는데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은 붉은 재킷을 입고 있었다. 루이스는 다른 길로 가려고 방향을 바꾸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들과 다시 마주쳤다. 그들은 루이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루이스는 겁이 덜컥 났다. 선택은 오직 한가지밖에 없었다. 방향을 바꿔 공룡이 있는 초원으로 가는 것이었다.
  길이 갑자기 끊기면서 초원이 나타나자 루이스는 망설였다. 너무 괴이했고 믿어지지 않았다. 뒤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들이 그를 밀었다. 그는 식료품 상자를 건물 한구석에 내려놓았다. 초원에 들어서기가 두려웠던 그는 상자를 내려놓은 다음 주변을 살폈다. 세 남자가 차 옆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루이스가 모습을 감춘 건물 쪽을 가리켰기 때문에 루이스는 벽에 더욱 바짝 붙으며 몸을 숨겼다.
  그는 초원을 바라보며 위더비 부인이 말했던 공룡을 생각했다. 몇 마리나 있을까? 부인이 뭐라고 불렀었지? 무시무시한 육식 동물들 그는 망설였다. 주위에는 살인자들로 가득했고 그는 긍중 누가 제일 위험한지 알지 못했다.
  그는 다시 건물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제 차 옆에는 여섯 명이 서 있었고, 그들은 루이스가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루이스는 그들이 초원을 겁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처럼 공룡들을 두려워하고 있어.
  초원으로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어마어마한 덩치에 네 발로 걷고 있는 그 동물의 목 주위에는 날카로운 톱니같이 생긴 것이 죽 달려 있었다. 공룡은 건물을 따라 걷다가 잠시 후 모습을 감췄다.
  루이스는 얼른 초원에 다른 공룡이 있는지 살폈다. 공룡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으나 멀리에서 건물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위더비 부인네 거실 창가에서도 비슷한 갈 본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처럼 가물가물하던 건물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머리를 다쳐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인 것이 분명했다. 루이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빠져나가고 싶었고, 지금 그의 머리속은 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루이스는 상자에서 설탕 봉지를 끄집어 낸 다음 위더비 부인의 정원을 지나 초원 안으로 걸어갔다. 그는 초원에 나 있는 풀들이 신기루처럼 눈 깜짝할 사이 사라져 버리지는 않을까 염려하면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앞에서 뭔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풀이 흔들리고 있었다. 루이스는 그것이 사라진 걸 확인한 다음 설탕 봉지의 위부분을 찢고 풀 위에 설탕을 조금 부었다. 그런 다음 그는 재빨리 초원에서 나와 위더비 부인의 정원에 한 주먹을, 그리고 건물들이 있는 길로 가는 중간 중간에 세 줌의 설탕을 뿌렸다. 아직 남아 있는 설탕 봉지를 든 채 그는 건물 모퉁이에 앉아 기다렸다.
  마리엘은 흔들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초원은 조용했고 그녀는 뜨개질을 꽤 많이 했다. 시간은 유쾌하게 지나갔고 얼마 안 있어 눈에 익는 모습이 멀리서 보이고 있었다. 이구아노돈은 창문으로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제 파티를 즐길 시간이었다. 마리엘은부엌으로 가 설탕을 작은 봉지 두 개로 나누면서 아파트 안을 더 뒤져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그녀에게는 흑설탕과 가루 설탕, 그리고 시럽, 당밀 등 단 것을 좋아하는 이구아노돈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충분했다.
  마리엘은 봉지를 창가로 들고 와서 공룡이 소리지를 때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공룡이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하려고 애쓰기도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처음에는 무척 듣기 싫었었지만 이젠 그 소리도 사랑스럽게 들렸다.
  이구아노돈은 보통 때처럼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공룡은 갑자기 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무슨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가 뭔가 먹었다. 풀은 아니었다. 공룡은 풀을 먹을 때 풀을 뽑은 다음 고개를 들고 주의를 살폈기 때문이었다. 공룡은 다시 이상한 행동을 되풀이했다. 이구아노돈은 허공에 대고 코를벌름벌름 거리더니 마리엘에게 오던 걸음을 돌리고 아스팔트 위에서 뭔가 주워 먹고 있었다. 마리엘이 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 보니 루이스가 아파트 건물 모퉁이에 서 있었다. 루이스가 여기에서 뭘 하는 거지? 마리엘은궁금했다. 왜 아직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았을까? 그녀는 설탕 봉지를 집어들고 방을 나섰다.
  루이스가 몸을 숨기고 보니 공룡이 나머지 설탕 가루들을 찾아 열심히 오고 있었다. 위더비 부인 집에서 보았을 때부터 공룡이 무서웠지만 지금처럼 가까이에서 보니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머리는 무척 컸고 살갗은 아주 두틈해 보였다. 입속에는 커다란 이빨들이 나 있었고 뒷다리는 엄청나게 컸으며, 앞다리는 그 두께로 보아 기운이 엄청날 것 같았다. 그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앞발 끝에 달려 있는 갈고리 모양의 발톱으로 사람을 꿸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루이스는 위더비 부인을 다시금 존경했다.
  설탕을 모두 먹어 치운 공룡은 건물 모퉁이에 설탕을 붇고 있는 루이스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공룡이 설탕을 향해 움직이자 루이스는 모퉁이를 돌아 자동차가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마리엘이 아파트에서 나와 정원에 왔을 때 루이스가 건물 모퉁이를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이구아노돈이 그의 듸를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이구아노돈이 거기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서는 요란한 경적 소리와 함께 총성이 끊기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땅에 떨어진 설탕을 주워 먹느라 정신없는 이구아노돈을 향해 서둘러 걸어갔다. 설탕을 다 먹은 공룡이 고개를 들고 냄새를 맡고 있었다. 마리엘은 공룡이 좁은 골목길로 들어설까봐 겁이 났다. 그래서 그녀는 공룡에게 소리쳤다.
  “기다려, 기다려!”
  공룡이 머리를 돌리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머리를 숙이고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공룡은 그녀에게 다가와서는 입을 벌리고 ‘아아 -이힝’ 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마리엘은 첫 번째 봉지에 든 설탕을 공룡의 입안에 부어 주고는 공룡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두 번째 봉지를 먹인 후 마리엘은 이구아노돈의 주둥이를 밀며 초원으로 돌아가라고 말한 뒤 공룡을 남겨 두고 루이스를 찾으러 갔다.
  루이스는 길을 반 정도 내려올 때까지 설탕을 땅에 부었다. 그런 다음 바리케이드 쪽으로 걸어갔다. 바리케이드 뒤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한 사람은 붉은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두 명은 권총을 들고 있었다. 한 사람이 자동차 지붕을 손으로 두들기며 루이스에게 소리쳤다.
  “뭐 하는 거냐, 멍청아!”
  그는 붉은 재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안심한 루이스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설탕을 계속 부었다. 
  “너한테 말한 거야, 바보같은 자식아!”
  루이스는 천천히 머리를 들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한테 한 말이었소? 난 지금 내가 기르는 공룡한테 먹이를 주고 있던 참이었는데.”
  그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루이스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허리 춤에 권총이 꽂혀 있었다. 싸늘한 눈초리로 루이스를 바라보는 그 남자의 손 등에 문신이 --좀비파의 상징인 주름진 머리가 새겨져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눈초리만큼이나 싸늘했다.
  “나는 건방진 놀들을 좋아하지 않아.”
  루이스는 설탕 봉지를 들고 계속 걸었다.
  “정말, 난 애완용 공룡한테 먹이를 주고 있는 거요, 봐요, 설탕이잖소.”
  그는 갱의 신발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여 남자의 발치에 설탕을 쏟았다.
  갱들 가운데 한 명이 큰소리로 말했다.
  “어이, 바튼. 통행세 안 받아?”
  바튼은 루이스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문신이 새겨져 손으로 총자루를 문질러댔다.
  “지갑을 내놔.”
  바튼이 명령했다.
  “지갑은 없어요. 정말이오. 어제 강도한테 뺏겼어요.”
  “만약 여기에서 살아 나가고 싶다면 뭐라도 내놓는 것이 좋겠어, 친구.”
  갱은 총으로 루이스의 배를 찌르며 말했다.
  “난 이미 당신한테 모든 사실을 말했어요. 이 설탕 외에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그래, 그렇게 말했지. 애완용 공룡과 그 빌어먹을 것들을 말이야.”
  눈앞에서 불이 번쩍 하는 것 같더니 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갱이 내려친 총에 머리를 맞은 루이스는 길 위로 쓰러졌다. 고통이 가신 뒤에도 루이스는 갱에게 자신이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계속 엄살을 부렸다. 그때 차 뒤에 있던 갱이 바튼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뭔가 골목길을 따라 내려오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리엘은 모퉁이를 돌자마자 길이 끝나 가는 지점에서 루이스가 어떤 남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불량해 보였고 루이스가 어울릴 만한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았다. 마리엘은 길을 따라 내려오며 루이스를 가족에게 돌아가게 할 방법을 생각했다. 또 그녀는 그가 왜 이구아노돈에게 설탕을 먹이고 있었는지 물어 보기로 했다. 그때 갑자기 루이스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루이스를 때려 눕히는 게 보였다. 루이스는 머리를 감싼 채 나뒹글고 있었다. 그녀는 루이스를 도와주기 위해 부지런히 길을 내려왔다.
  차 뒤에 있던 남자들이 그녀를 보았고 루이스에게 몸을 숙이고 있던 남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루이스를 때린 남자는 고개를 들더니 멍하게 마리엘을 바라보았는데 그걸 보고 마리엘은 더 화가 났다. 그녀는 남자가 겁내거나 최소한 부끄러움을 느끼게를 바랬다. 그녀는 이를 꽉 물었다. 이런 사람은 맞아야 해. 갑자기 그 남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잠시 후 남자는 몸을 돌려 일행들이 숨어 있는 자동차 쪽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마리엘은 당황했다. 그들은 거리 아래쪽을 가리키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마리엘이 무엇 때문에 갱들이 난리를 피우는지 보려고 몸을 돌려보니 이구아노돈이 건물들 사이로 내려오고 있었다. 공룡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마리엘은 갱들이 총을 갖고 있었던 사실을 기억해내고 몸을 돌려 그들에게 총을 쏘지 말라고 경고했다.
  “공룡은 당신들을 해치지 않을 거예요. 내가 저 공룡을 키우고 있어요. 내가 공룡을 초원으로 되돌려 보내겠어요.“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갱들은 공룡의 크기와 무시무시한 모습에 압도당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들은 손에 총을 들고 있었다.
  마리엘은 이구아노돈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손을 저어 공룡을 초원으로 돌려보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공룡은 머리를 숙이더니 천천히 네 발을 꿇고 그녀의 뒤에 앉았다. 개들은 계속 총을 들고 있었다.
  마리엘은 공룡에게 다가가 주둥이를 밀며 도망치라고 말했다. 공룡은 꿈적도 안하고 천천히 갱들을 향해 그 커다란 주둥이를 벌렸다. 마리엘이 깊은 동굴 속같은 이구아노돈의 입속을 쳐다보는데 묵직한 으르렁거림이 울려 나오더니 곧이어 ‘아아아아 -히히히힝’하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바리케이드 저편에서 총소리가 났다. 이구아노돈의 주둥이 바로 뒤에 구멍이 뚫렸다. 놀란 공룡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고 잠시 마리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공룡은 몸을 일으켰고 무시무시하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바리케이드 너머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고, 마리엘은 공룡 목 주위의 두꺼운 살갗 위로 흐르는 피를 보았다. 
  마리엘은 가슴이 메어졌고, 총을 쏘지 말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총성은 멈추지 않았다. 목과 가슴에 총알 자국이 더 생겨났다. 흐르끼던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갱들에게로 달려갔다. 그러자 시작만큼이나 아주 빨리 총성이 멈추었다. 마리엘이 돌아보니 심하게 다친 공룡이 초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구노돈은 똑바로 걷고 있었으나 머리를 수그린 채 아주 천천히 가고 있었다. 공룡은 비틀거릴 때마다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안돼, 가지마!”
  마리엘이 공룡을 불렀다.
  “제발 돌아와.”
  하지만 공룡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서둘러 공룡을 뒤쫓았다. 그녀는 뒤에서 루이스가 뭐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오직 상처입은 공룡만이 중요했다.
  공룡은 벌써 초원에 들어가 있었다. 마리엘은 공룡을 따라 잡으려고 애썼지만 공룡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초원에 들어서자 세로운 비극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룡이 질질 끌고 가던 꼬리에 눌린 풀들이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이었다.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마리엘은 눈물을 닦고 핏자국을 따라갔다.
  탈진한 루이스는 간신히 일어섰다. 하지만 아파트 쪽으로 한걸음 한걸음 내딜 깨마다 비틀거렸다. 그의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바튼과 다른 갱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탄환을 공룡의몸에 박아 넣는지 자랑하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온 뒤 루이스는 잠시 계단에 앉아 쉬었다. 현기증이 가라앉자 그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지만 계단을 오를 때마다 쉬어야 했다. 그는 경우3층까지 올라왔고 비틀거리며 복도를 지나 위더비 부인의 집으로 -창가에 놓인 그녀의 흔들의자에 다가갔다. 그는 의자에 털썩 몸을 내려놓았고 의자를 천천히 움직였다. 욱신거리던 머리가 조금 나아졌고, 그는 눈을 뜨고 밖을 내다보았다. 몰려오는 잠을 쫓지 못하던 그가 마지막 본 것은 초원을 천천히 걷고 있는 공룡과 그 뒤를 쫓는 작은 생물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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