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시작 [박노해]
박 노해 두번째 시집
참 된 시 작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 바람 잘 날 없어라 / 그해 겨울 나무
그리운 사람 / 작아지자 / 강철은 따로 없다 / 강철 새잎 / 그대 나 죽거든
때 늦은 나이 / 우리는 간다 조국의 품으로 / 눈물의 김밥 / 닭갈비 / 상처의 문
나는 순수한가 / 사랑의 적 / 징역에서들 보면 / 침묵이 말한다
<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
바람찬 날이다
경주 남산
민들레 꽃씨는 바람에 흩날리고
바람 속에서
바람을 품고
천년의 긴 호흡으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바람이었나 하늘이었나
밤새 독거방 낡은 창은 덜컹대고
감시등 불빛 아래
유유히 떠도는 민들레 꽃씨처럼
내 영혼은
저문 들길 지나 낯선 산굽이를 돌아서는
출가승의 옷자락처럼 허허로운데
무겁구나 지나온 날
깊어가는 상처는 그칠 줄 모르고
사흘 밤낮 몹시 아픈 날
스스로 치욕의 삭발을 하고
찬 마룻바닥에 모로 누워 회색벽에
무겁게 토해내는 신열의 부르짖음
무너졌다, 패배했다, 이렇게
흐르는 눈물 흐르는 대로 흘러
그래 지금 침묵의 무덤을 파고
나를 묻는다 나를 암장한다
숨죽인 호곡처럼
머리 푼 밤바람은 쓰러지는데
어둠속으로 얼굴들이 흐르고
해가 길어지고 해가 짧아지고
서리 내리고 눈이 내리고
죄닦음이 다하고 눈 맑아진 어느날
내 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씨앗 하나
피투성이 목숨으로 품어온 씨앗 하나
한 순간, 싹.이.틀.까
젖어드는 눈 감으면
벽 그림자 ----
상처 속에 싹트는 씨앗 하나로
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아아 바람이었나 하늘이었나
* 이 시와 다음 시는 경주교도소 이감 직후인 1992년 4월
졉견창구를 통해서 누나가 받은 것임.
< 바 람 잘 날 없 어 라 >
바람 잘 날 없어라
내 생의 길에
온 둥치가 흔들리고
뿌리마다 사무치고
아 언제나 그치나
한 고비 넘으면 또 한 고비
너무 힘들다
너무 아프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싸워야 하나
바람 잘 날 없어라
울지 마, 살아 있다는 것이다
오늘 이 아픔 속에 외로움 속에
푸르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 그 해 겨 울 나 무 >
1
그해 겨울은 창백했다
사람들은 위기의 어깨를 졸이고 혹은 죽음을 앓기도 하고
온몸 흔들며 아니라고도 하고 다시는 이제 다시는
그 푸른 꿈은 돌아오지 않는다고도 했다
세계를 뒤흔들며 모스크바에서 몰아친 삭풍은
팔락이던 이파리도 새들도 노래소리도 순식간에 떠나보냈다
잿빛 하늘에선 까마귀떼가 체포조처럼 낙하하고
지친 육신에 가차없는 포승줄이 감기었다
그해 겨울,
나의 시작은 나의 패배였다
2
후외는 없었다 가면 갈수록 부끄러움뿐
다 떨궈주고 모두 발가벗은 채 빛남도 수치도 아닌 몰골 그대로
칼바람 앞에 세워져 있었다
언 땅에 눈이 내렸다
숨막히게 쌓이는 눈송이마저 남은 가지를 따닥따닥 분지르고
악다문 비명이 하얗게 골짜기를 울렸다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필요없었다
절대적이던 남의 것은 무너져내렸고
그것은 정해진 추락이었다
몸뚱이만 깃대로 서서 처절한 눈동자로 자신을 직시하며
낡은 건 떨치고 산 것을 보듬어 살리고 있었다
땅은 그대로 모순투성이 땅
뿌리는 강인한 목숨으로 변함없는 뿌리일 뿐
여전한 것은 춥고 서러운 사람들, 아
산다는 것은 살아 움직이며 빛살 틔우는 투쟁이었다
3
이 겨울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죽음 같은 자기비판을 앓고 난 수척한 얼굴들은
아무데도 아무데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디를 굵히며 나이테를 늘리며 뿌리는 빨갛게 언 손을 세워 들고
촉촉한 빛을 스스로 맹글며 키우고 있었다
오직 핏속으로 뼛속으로 차오르는 푸르름만이
그 겨울의 신념이었다
한점 욕망의 벌레가 내려와 허리 묶은 동아줄에 기어들고
마침내 겨울나무는 애착의 띠를 뜯어 쿨럭이며 불태웠다
살점 에이는 밤바람이 몰아쳤고 그 겨울 내내
뼈아픈 침묵이 내면의 종울림으로 맥놀이쳐갔다
모두들 말이 없었지만 이 긴 침묵이
새로운 탄생의 첫발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해 겨울,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
< 그 리 운 사 람 >
그날 그 특이한 작별의 날
차창 밖엔 찬비 흩뿌리고 있었지
동지들과 비밀모임 뒤 속초를 떠나오던 날
서울길 동해바다는 성난 파도 치고
시퍼런 혁명의 바다에 작은 배 한 척,
나는 소리없는 울음을 깨물고 있었네
그때 동지, 당신이 내 곁에서 울어주고 있었네
아주 절실하게 일치하며 울어주고 있었네
비 그쳐 하늘 개이고 조국의 강과 산 들이
처녀처럼 생기찬 빛으로 깨어나는 순간
아 아름다워, 똑같은 탄성을 터뜨렸었네
마주친 눈빛 학이 되어 영혼으로 날아들었네
*
내 육신 하루하루 무섭게 갉아내리고
홀로이 흐느낌 퍽퍽 도끼자욱처럼 패어가던 날
안간힘으로 얼음산을 타고 오르며 어느덧
사람의 온기도 흔적도 기억마저 얼어붙어가던 날
소리없이 전해져온 푸른 숨결 하나 눈동자 하나
아주 우연인 듯 아니 운명인 듯
나는 양지바른 흙담에 기대앉아 침묵하며 봄볕을 쪼이는
아픈 아이처럼 그렇게 스르르 당신을 기대었네
피마르는 투쟁의 순간들마다 마치 십년 된 친구처럼
익숙하게 나를 부척하며 어둠 헤쳐나온 당신은
현실로 열린 나의 창, 나의 생기였네
*
오늘같이 슬픈 날
내 목숨은 적의 손에 넘어갔고
꺼질 수 없는 이상은 몸체 스스로 무너뜨린 날
어둠속 창살에 이마를 기대고 회한의 눈물에 떨며
참된 시작을 위하여 나의 전부인 것들을 다시
낯선 것으로, 미지의 것으로, 열려진 것으로,
그 막막한 불안과 비관 앞에 나를 세워두자고 한 날
한 순간에 조직도 사람들도 차갑게 등 돌리며 떠나간 날
이제 누가 나와 함께 절실하게 울어줄까
누가 나에게 푸른 숨결 불어넣어줄까
누가 이 패배자를 사람 그 자체로 품어줄까
*
부드러운 황토흙처럼 말없이 상처 감싸주던 사람
내 존재의 무게를 다 받아주면서도 표시하나 없는 사람
어떤 불행 속에서도 스스로의 결단으로 다시 피어날 것을 믿어준 사람
아무것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서 최악의 순간까지
나를 판단하지 않고,
의혹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사랑해준 단 한 사람
하루에도 몇번씩 와락 그리움 치달리는
나의 빛
나의 힘
내 마음의 봄언덕……
*
아 그대마저 와르르 무너져내르는 날
나는 이제 무엇으로 싸워가나 무엇으로 일어서나
끝 모를 징역 마룻바닥에 허물어져 미친 듯 나는 통곡한다
그러나 나는 나를 잘 알지 나는 나를 잘 알지
마지막 한 가닥 희망과 애착마저 툭, 끊어져
오직 홀로 남은 나 자신과 처절한 묵시의 투쟁 끝에 서면
나는 결국 죽음조차 의연하게 껴안을 수 있었지
그래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오늘은 통곡할지라도
자신을 저버리지는 말자 포기하지는 말자
시퍼런 슬픔의 심연 끝바닥에 다다르면
그래 나는 다시 서서히 솟아오를 수 있을 것이야
허허로운 눈빛으로 다시 솟아오를 수 있을 것이야
< 작 아 지 자 >
작아지자 작아지자
아주 작아지자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침내는 아무것도 없어지게 하자
자신을 지키려는 수고도
작아지면 아주 작아지면 텅 비어 여유로우니
나의 사랑의 시작은 작아지는 것이요
나의 성숙은 더욱 작아지는 것이며
나의 완성은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
작아지자 아주 작아지자
작아져 순결한 내 영혼에 세상을 담고
세상의 슬픔과 영혼을 담고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침내는 아무것도 없어진 나 ----
조국의 들꽃이 되자
눈물 젖은 노동의 숨결이 되자
아무것도 아닌 이 땅의 민중이
그 모오든 것이 되도록 하자
< 강 철 은 따 로 없 다 >
우리 모두는 무쇠같은 존재
무르지 않고 굽지 않는
강철은 따로 없다
온몸으로 부딛히고 담금질당하면
무쇠가 빛나는 강철이 된다
강철의 모습을 보았는가
그는 적개심으로 핏발선 투사의 얼굴이 아니다
열광으로 들떠 있는 쇳소리가 아니다
투쟁의 용광로에서 다듬어지고 무르익은
부드럽고 넉넉하게 열려진 가슴,
적과 철저하게 투쟁할수록
안으로 텅 비어 맑고 웅혼한 종울림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강인한 포옹이다
강철은 따로 없다
작은 싸움도 온몸의 열의로 부딪쳐가며
큰 싸움, 빛나는 길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무쇠같은 존재
강철은 따로 없다
< 강 철 새 잎 >
저거 봐라 새잎 돋는다
아가 손마냥 고물고물 잼잼
봄볕에 가느란 눈 부비며
새록새록 고목에 새순 돋는다
하 연둣빛 새 이파리
네가 바로 강철이다
엄혹한 겨울도 두터운 껍질도
제 힘으로 뚫었으니 보드라움으로 이겼으니
썩어가는 것들 크게 썩은 위에서
분노처럼 불끈불끈 새싹 돋는구나
부드러운 만큼 강하고 여린 만큼 우람하게
오 눈부신 강철 새잎
< 그 대 나 죽 거 든 >
아영아영 나 죽거든
강물 위에 뿌리지마
하늘바람에 보내지 말고
땅속에다 묻어주오
비 내리면 진 땅에다
눈 내리면 언 땅에다
까마귀 산짐승도 차마 무시라
뒷걸음쳐 피해가는 혁명가의 주검,
그대 봄빛 손길로다 다독다독 묻어주오
나 언 땅 속에 길게 뿌리누워
못다 한 푸른 꿈과 노래로 흐를 테요
겨울 가고 해가 가고 나 흙으로 사라지고
호올로 야위어가는 그대……어느 봄 새벽,
수련한 함박꽃으로 피어 날 부르시면은
나 목메인 푸르른 깃발 펄럭이면서
잠든 땅 흔들어 깨우며 살아날 테요
아영아영 나 죽거든
손톱 발톱 깎아주고 수염도 다듬어서
그대가 빨아 말린 흰옷 이쁘게 입혀주오
싸늘한 살과 뼈 험한 내 상처도
그대 다순 숨결로다 호야호야 어루만져
하아 --- 평온한 그대 품안에 꼬옥 보듬어 묻어주오
자지러진 통곡도 피 섞인 눈물도 모질게 거두시고
우리 맹세한 붉은 별 사랑으로, 눈부신 그 봄철로
……슬픔 이겨야 해 아영, 강인해야 해……
어느 날인가 그대 날 찾아 땅속으로 오시는 날
나 보드란 흙가슴에 영원히 그댈 껴안으리니
< 때 늦 은 나 이 >
오늘로 내 나이 서른다섯인가
부러진 칠십이라 하던가
상처만큼 살았고 겪어온 나이
찬 마룻바닥에 짬밥을 놓고
구매한 되지훈제 한 봉지 사과 한 개 걸게 차려
나이만큼 절실한 생일식사 기도를 드리니
강하고 깃발 날리는 것보다 부드럽고 나직한 것이
더 힘차다는 것을 아는 나이
뜨거운 열정, 철저한 헌신성, 불타는 투혼에 묻혀진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을 아는 나이
말 한 마디 글 한 편 결정 하나에
묻고 확인하고 다시 돌아보고 또 검증하며
젖먹이 아가를 품은 듯 운동한다는 것이
두렵고 두려운 것임을 아는 나이
한 시절 모든 것이 선명했던 투쟁 속에서
깨질 것은 깨어지고 무너질 것은 무너져내려 이제는,
스스로 창조의 걸음 내딛는 때늦은 나이
서른다섯 생일날, 오 '이제와 우리 죽을 때'
맑아지고 밝아진 마지막 미소 한 떨기
나를 아는 모든 이에게 남겨줄 수 있도록
뎌 겸허하고 더 성실하게 투쟁하게 하소서
더는 늦지 않게 서둘지 말고
새벽 종울림으로 울어나 흐르게 하소서
< 우 리 는 간 다 조 국 의 품 으 로 >
우리는 간다 조국의 품으로
조국이 우리에게 반역의 낙인을 찍어도
우리는 간다
이 땅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 나라의 슬픔과 기쁨 속에 자라나
푸른 하늘 맑은 강 이슬 맺힌 대지 위에
기쁜 노동과 해방의 노래를 불렀다
조국이 우리에게 쇠창살이어도
지하밀실의 깊고 긴 비명이어도
우리는 간다 조국의 품으로
사랑하는 친구여
이제 더이상 봄을 기다리지 말자
우리 함께 역사의 봄을 찾아나서자
우리의 이마 위에 우리의 깃발 위에
반역을 낙인을 찍은 것은 조국이 아니다
조국을 짓밟고 선 총칼들일 뿐이다
조국이 우리에게 죽음이어도
우리는 피어난다 민들레꽃처럼
우리는 간다 어둠에서 어둠속으로
목숨 바쳐 간다, 흐느낌으로 간다
사랑하는 조국의 품, 민중의 가슴팍으로
피로 쓴 '노동해방'
아 ! 아 ! 생명의 깃발로 간다
< 눈 물 의 김 밥 >
새벽 두시 김밥을 먹는다
피멍든 몸을 떨어가면서
갈라터진 혓바닥에 침 적셔가며
안기부 지하밀실 야식을 먹는다
방금까지 비명 터지던 고문장에서
목메인 김밥을 씹어먹는다
마른버짐 볼에 핀 어린날이었던가
소풍가서 먹었지 달디단 그 김밥
잔업 때 억지로 삼키던 팍팍한 매점 김밥
지난 여름이었지 울산 가는 기차를 타고
아영이랑 나눠 먹던 그리운 김치김밥
앞으로 아홉밤 ---
살아 나가자 기어코 이겨서
이 참혹한 고문의 밤을 끝끝내 뚫고
떳떳한 목숨으로 살아 나가자
아 만약 나 살아 나간다면
언젠가 어느날인가 햇살 온몸에 다시 받는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김밥을 싸들고
아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가보리라
가서 들꽃처럼 정결한 웃음에 젖어
촉촉한 눈물의 김밥을 먹으리라
술냄새 풍기는 건장한 고문자들에 싸여
군복에 검정고무신 신고 짐승처럼 떨며
꾸역꾸역 모멸찬 김밥을 먹는다
안기부 지하밀실 고문장, 잠시 후 시작될
처절한 공포의 순간들을 씹으며
피맺힌 적개심으로 씹으며
새벽 두시 눈물의 김밥을 먹는다
< 닭 갈 비 >
징역 참 좋아졌다
일요일 저녁차림은 푸짐한 닭죽이네
소지 녀석 신경써서 건져준 왕건이가
막상 받아보니 닭갈비 덩어리
버리자니 아깝고 뜯자니 엔간찮아
젓가락으로 뒤적뒤적 망설이다가
혹시 나,
닭갈비 같은 존재는 아닌가
뜻과 주장은 좋으나 나타나는 건 앙상하고
노동해방, 계급투쟁, 당파성, 혁명적 관점……
거 제껴두자니 아깝고 먹자니 뼈만 걸리는
꼭 닭갈비와 같은 존재
지금 우리,
마치 닭갈비 같은 처지는 아닌가
새벽을 외쳐온 양심과 도덕성은 믿어주지만
복잡한 오늘의 현실을 끌어갈 전문성과 책임성은……
몸 바쳐 투쟁해온 정의로움과 희생정신은 존경하지만
이 국가를 경영해나갈 실제 능력과 경륜은……
경악하여 눈 씻고 보니 현실은 급변하고
민중의 마음도 저만큼 달라져가고 있네
나, 그리고 우리,
더 늦기 전에 더 굳기 전에
실한 닭다리로 되어야겠네
허기진 우리 민중이 탐스럽게 뜯어먹어줄
지글지글 암소갈비 돼지갈비처럼
우리의 깃발 우리의 조직 우리의 실천은,
먼저 우리들 사람 그 자체가
경쟁력 있는 일꾼으로 다시 태어나야겠네
더 늦기 전에 더 굳기전에
< 상 처 의 문 >
내 마음밭이 거칠었습니다
내 영혼이 낮은포복하고 있습니다
어둔 강가에 세워진 나목처럼
겨울로 가는 찬바람을 그냥 맞습니다
아 지금 나의 침묵은 패배의 무게에 짓눌려
얼음강 짜개지는 신음입니다
하늘은 밤을 새워 벗어내리고
세상은 온통 순백입니다
이제는 내 거친 마음밭 감추지 말고
있는 그대로 열어 보이게 하십시오
삽과 호미 든 사람들 불러들여
마음껏 찧고 갈아엎게 하십시오
아픈 내 상처의 문
눈물 훔치며 열어두었나니
힘들여 내 마음밭도 갈아엎었나니
당신의 숨결로 부드럽게 골라주어 거기에
강인한 사랑의 싹이 움터오르게 하십시오
피 흐르는 나의 상처가
내 마음의 문을 닫아걸게 하지 말고
그 상처의 문을 통해 더 많은 일치와
더 굳센 연대가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찍혀진 상처만큼 뜨겁고 새푸른
순결한 나의 투혼이 살아오르게 하십시오
< 나 는 순 수 한 가 >
찬 새벽
고요한 묵상의 시간
나직히 내 마음 살피니
나의 분노는 순수한가
나의 열정은 은은한가
나의 슬픔은 깨끗한가
나의 기쁨은 떳떳한가
오 나의 강함은 참된 강함인가
우주의 고른 숨
소스라쳐 이슬 털며
나팔꽃 피어나는 소리
어둠의 껍질 깨고 동터오는 소리
< 사 랑 의 적 >
사랑을 알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다
자신을 전면적으로 내어줄 사랑 하나
키우며 살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누군가로부터 존재 깊숙한 사랑과 믿음
몸으로 확인받으며 살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사랑하면서도 사랑 받으면서도 그 사랑
제 한몸에 가두는 사람은 사랑의 배신자다
사랑 사랑을 노래하면서도
사랑 때문에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사랑의 불안과 가난과 상처에 몸부림치면서도
사랑의 적을 바로 찾지 못한 사람,
그는 진실로 진실로 불행한 사람이다
< 징 역 에 서 들 보 면 >
창살 너머로 던져주는 짬밥을 먹고 디룩디룩 살진 고양이가 한발 앞에서 슬금
거리는 쥐를 놓고도 게슴츠레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타고난 야성을 잃어버린 채
느작거리는 고양이의 모습이 얼마나 추한지 아십니까 역시 살오른 비둘기가 하늘
날기를 포기한 채 게으른 평화를 누리는 꼴이 얼마나 정떨어지는지 아십니까 노
동자여 농민이여 민중 형제여
어쩜 징역에 와서까지 지 잘났다고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고 유명인사 중에 친
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실세들과 한때 형님 아우 안 해본 놈이 없고 전부 다 운
수 나쁜 탓이요 남의 탓, 그러다가 누구 약점만 잡았다 하면 그 성능 좋은 두뇌
로 뒷다마 치고 지 몸 하나 편해보려고 온갖 짱구를 굴려대는 사기범 경제범들이
얼마나 개밥인지 아십니까 지식인들이여 전문가들이여 잘나가는 사람들이여
진급평점이나 올려볼까 가석방이라도 먹어볼까 법무부 교육대로 고자질 투서질
안테나질로 참 여러 사람 징역 깨지게 하는 밀대들이 얼마나 좆밥인지 아십니까
공무원들이여 이상한 신고정신 투철한 분들이여
수억대 뇌물을 주고받고 술값 몇백만원쯤 우습게 쓰고 사시던 회장님 사장님
국장님 이하 님자 돌림들이 영치금 하나 없는 불쌍한 '법무부 자식'들에게 200원
짜리 빵 하나 주는 게 아까워서 제 관물대에 썩어가도록 재어놓는 꼬라지가 얼마
나 개털인지 아십니까 자본가들이여 권력자들이여 잘 먹고 잘 사시는 분들이여
별것 아닌 요구에도 또박또박 행형법 규정 소장 지시 근무수칙 들이대며 인정
머리 하나 없는 또박이 교도관들이 얼마나 피박인지 아십니까 바꾸어서 사사건건
눈 붉히면서 투쟁투쟁 무조건 대들어놓고 보고 쨍쨍 왈왈 거리고, 원래 학생들은
잘 싸우고 남 잘 도와주고 희생에 앞장서고, 그것도 조직에서 정해진 규율인지
꼭 뭐에 쓰인 듯 모두지 사람 냄새가 안 나요 사람의 상식이 안 통해요 평소에는
귀여운데 시동 걸렸다 하면 자꾸 논쟁 걸어대고 이론으로 따져쌓고 무엇을 해도
목적을 가진 듯이 영악한 게 아 살아도 내가 더 살았는데 속이 읽어지지요 겸손
하게 위해주는 말조차 전술인 듯 싶어서 영 같잖아요 제가 너무 편견이지요 진지
한 교도관들이나 일반 재소자들로부터 이런 소리 전해들을 때마다 얼마나 부끄럽
고 가슴이 메이는지……그래도 어쩌다 그 친구는 역시 달라요 자기가 외치는 말
과 행동의 뜻을 알고 투쟁하는 것 같아요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마음을 일부러
만들지 않고 진실하게 대하는거나 몸에 밴 예의범절이 마음에서 참으로 우러나오
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사람 됐어요 사람이 아주 깊고 툭 터져 있어서 인심을 끄
는 게 앞으로 뭘 해도 크게 할 빨갱입디다 진짜 싸울 건과 싸울 놈과 때를 가려
서 다부지게 달라붙고 끈덕지게 밀어붙이는 게 겁나버립디다 혼자 떼놨는데도 더
지독하게 싸우는데 경교대에서 질렸다고들 그럽디다 평소에는 공손하고 선뜻 양
보도 잘하고 타협도 잘하는 친구인데……이런 소리 전해 듣는 게 또 얼마나 징역
기분 화창한지 아십니까
신참들 전방 오면 아무나 붙잡고 기도합시다 할렐루야 믿사옵니다 거기다 조용
한 시간만 골라잡아서 앞방 옆방 안가리고 멱따는 찬송가 불러대는 게 또라이도
아니고 미친놈도 아니고 정말 얼마나 딱한지 아십니까 계급적 원칙, 당파성, 집
단주의, 조직적 자세, 계급투쟁……아 그거 원인은 스탈린 때문이고 낙후된 조건
탓이고 적들 탓이고 지도자들 무능력 탓이고 고르비 탓이고 혁명혼이 빠진 탓이
고 운동 아닌 모델 탓이고 사람개조사업 잘못한 탓이고 제 나라 실정에 맞는 사
회주의 안한 탓이고 탓이고 탓이고, 보라 우리는 더 전투적이고 더 계급적이고
더 혁명적이고 더 원칙적이고 더 헌신적이고 우리는 우리만은……허공을 때리는
모범답안들과 지하에 빛나는 결의들을 새겨도 보고 이해도 하고 껴안아도 보고
접어도 보고 보고 보다가 아아 결국 이렇게 북받치는 날이면 행여 새어나갈까봐
뼁끼통 물을 자꾸자꾸 내리면서 뼈저리게 웁니다 교조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전형
적인 교조주의자에 다름아니었던 나, 스탈린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실상 그 손바닥
안을 기고 있었던 나, 노동자계급의 분노와 과학을 구분 못한 나, 혁명적 열정과
지성을 구분 못한 나, 세계와 혁명과 현실과 시와 삶과 사람 그 자체에 대하여
겨우 절반도 깨우치지 못했으면서도 전부를 아는 것처럼 착각했던 나, 부끄럽고
죄 많은 나 자칭 사회주의 혁명가인 나는 나는……이제서야 얼핏 진리의 한 자락
을 본 듯싶기도 한데 그것을 내 품에 껴안는 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더 울
어야 밝아져올 것인가 얼마나 많은 밤들을 더 몸부림쳐야 맑아져올 것인가 하루
하루 겸허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지 아주 아주 소박하고 무심하게 열심히 투쟁해
나가야지 --- 하여튼 징역에서들 보면 하 신비도 하지 겨울뿐인 듯 싶은 척박한
징역땅에서 벌써 노오란 민들레꽃 진보랏빛 제비꽃 움터나오는 걸 좀 봐 다들 내
징역 내가 살기 힘든데도 참된 애정과 우의로 웃음꽃 만들며 살아가는 것 좀 봐
가난과 고통의 삶에서 새싹 디밀어올라 꽃같이 환한 투쟁 피워내는 우리 노동자
동지들 좀봐 이미 깨지고 무너지고 끝장나버린 듯한 사회주의 고목더미에서 이리
힘찬 신록 우람우람 자라나는 것 좀 봐 처절한 자기비판으로 하얀 무명옷을 입고
나선 열린 가슴들은 참 순결하고 아름답기도 하지 그래 긴 호흡 강한 걸음으로
새로운 창조의 뿌리 키워나가는 걸 보면 하 인간세상이라는게, 역사라는 게, 혁
명이라느게, 엄숙하고 신비하기도 하지
< 침 묵 이 말 을 한 다 >
때로 침묵이 말을 한다
사람이 부끄러운 시대에는
이상이 몸을 잃은 시대에는
차라리 침묵이 주장을 한다
침묵으로 소리치는 말들,
말이 없어도 귓속의 귀로
마음속의 마음으로 전해지는
뜨거운 목숨의 말들
아 피묻은 흰옷들 참혹하여라
아직 말을 구하지 못한 이 백치울음
그러나 살아있는 가슴들은 알지
삶은 불을 잉태하고 있다는 걸
진실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침묵 속에 익어가고 침묵 속에 키워지고
마침내 긴 침묵이 빛을 터트리는 날
푸른 사람들, 소리치며 일어설 것이다
침묵이 말을 한다
침묵이 소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