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칼의 날 [포사이즈]
재칼의 날(상)
-포사이즈
----- 차 례 -----
제 1 장
제 2 장
제 3 장
제 4 장
제 5 장
제 6 장
제 7 장
제 1 장
오전 6시 45분 -- 3월의 파리는 아직
추웠다. 바로 지금 한 사나이가 총살형을
당하려는 순간이다. 이른 아침의 한기가
기분 탓인지 한결 싸늘하게 느껴졌다.
1963년 3월 11일, 이블리 기지의 병영 안
광장에서 프랑스의 한 공군 중령이
얼어붙은 땅속에 박힌 말뚝에 손을 뒤로
묶인 채 20미터 전방에 늘어서 있는
총살집행대의 병사들을 점점 더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자갈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그 자리의
긴장감을 조금이나마 흐트려 놓았다. 장
마리 바스찬 칠리 중령의 얼굴에
눈가리개가 씌어지자 이 세상의 빛이
카빈 총에 실탄을 장진하고 노리쇠를
당겼다. 그 메마른 금속음은 신부의
중얼거리는 기도 소리를 한층 무력하게
만들었다.
담장 밖에서는 대형 트럭이 그 앞을
가로막은 차를 향해서 요란한 클랙슨으로
호통치고 있었다. 그 귀청이 떨어질 듯한
소리는 총살대 지휘관이, "준비!" 하는
구령 소리를 삼켜 버렸다. 이윽고 총소리가
진동했지만, 이제 겨우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시가지에는 잔물결 하나 일지 않고,
한 떼의 비둘기만이 놀라서 푸드덕 소리를
내며 허공을 날았을 뿐이다. 몇 초 뒤에
울린, 그의 죽음을 확인하는 총소리도 담장
밖에서 몰려오는 차의 소음으로 지워져
버렸다.
㏊?당신은 제게
OAS(Organisation Arm-e Secr-te :
비밀군사조직) 암살단의 리더인 칠리
중령의 사형집행은 그것을 끝으로 해서 그
음모에 종지부를 찍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그것은 하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을 뿐이었다.
왜?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이 3월의
아침, 파리 교외의 군인형무소 광장에서 한
영관급 장교가 총살형을 당하기까지의
경위를 먼저 설명해야만 한다......
마침내 태양이 엘리제궁의 높은 담
너머로 그 모습을 감추고 기다란 그림자가
앞뜰을 덮으면서 평온한 시간을 가져왔다.
그 해 여름 들어 최고의 더위를 기록한
그날은 저녁 7시가 되었는데도 수은주는
거리마다에는 파리지앵들이 주말을
교외에서 보내자고 졸라대는 마누라와
아우성치는 아이들을 자동차나 기차에
밀어넣고 줄을 지어서 파리를 빠져나갔다.
1962년 8월 22일, 파리 교외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 무리의 사나이들은
프랑스 제5공화국 대통령인 샤를 드골
장군이 이날 당연히 죽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파리지앵들이 강이나 해변의 시원함을
찾아서 거리의 열기로부터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엘리제궁의 화려한
파사드(건물의 정면) 깊숙이에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각료회의가 계속되고
있었다. 겨우 찾아온 땅거미에 열기가 한풀
수그러들기 시작했고, 갈색 자갈을
DS 살롱이 마치 한 줄로 엮어 놓은 것처럼
원을 그린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다.
제일 먼저 땅거미가 찾아든 서쪽 담장의
짙은 그늘 속에 몸을 숨긴 운전사들은 콧대
높은 주인들을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으며, 언제나처럼 실없는 잡담에 열을
올렸다.
각료회의는 전에 없이 장시간
계속되어서, 참석자들이 특별한 결론도
없이 회의를 끝낸 시각은 오후 7시
반쯤이었다. 황금색 쇠줄과 훈장으로
제복을 장식한 안내원이 파사드 현관의
유리문 너머에 모습을 나타내어
운전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운전사들은
피우던 담배를 자갈 바닥에 내던지고는
구두로 밟아 문질렀다. 정문 옆의 초소에
로 신법이
차림새를 가다듬고 바둑판 무늬처럼 생긴
커다란 철문을 좌우로 열어젖혔다.
운전사들은 각자의 운전석에 가서
앉았다. 장관들이 떼를 지어 현관 유리문
너머에서 그 모습을 나타냈다. 안내원이
문을 열자 장관들은 주말의 휴가에 대한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면서 현관 앞 층계를
소란스럽게 내려왔다. 서열에 따라서
각자의 DS 살롱이 차례차례 층계 아래에
와서 서자 안내원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뒷문을 연다. 장관들은 차례대로
자기의 승용차에 올라타고 경비원들의
경례를 받으면서 포부르 생 토노레
가(街)로 사라졌다.
10분 뒤에는 장관들은 이미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앞뜰에 남아 있던 두
다가왔다. 대통령 깃발이 펄럭이는 첫번째
대형차를 운전하고 있는 인물은 프란시스
마르라는 경관이다. 그는 파리 외곽
사토리에 있는 경비대 본부 겸 훈련소에서
파견된 베테랑이었다. 그는 과묵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장관 차를 모는 운전사들의
신나는 수다에도 끼지 않았다. 그 얼음같이
냉정한 신경과 신중하면서도 능숙한 운전
기술은 대통령 전속 운전사로서는
필수조건이었다. 차 안에는 마르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두 번째 DS 19의 운전사
역시 사토리에서 파견된 경관이었다.
7시 45분, 또 한 무리가 현관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앞뜰에 있던 담당관들은
또다시 긴장으로 몸이 굳어졌다.
언제나처럼 짙은 회색 더블 양복에 검은
너머에 나타났다.
대통령은 부인인 이본을 먼저 문밖으로
내보내고 곧 뒤따라 나와서 부인의 팔을
끼고 층계를 내려왔다. 시트로엥 앞에서
대통령 부처는 좌우로 갈라졌다. 부인은
뒷좌석의 왼쪽에서, 드골 장군은
오른쪽에서 각기 차에 올랐다.
대통령의 사위이며 당시 기갑사단의
참모장으로 있던 알랭 드 부아슈 대령이
좌우의 문이 꼭 닫혀졌는지를 확인하고는
마르의 옆자리에 앉았다.
대통령 부처를 따라서 층계를 내려온
경호원 중에서 두 남자가 재빨리 두 번째
차에 탔다. 한 사람은 알제리 카빌리아
지방 출신의 앙리 드쥐다인데, 당당한
경호원이었다. 그는 조수석에 자리를
잡고는 왼쪽 옆구리에 차고 있던 무거운
리볼버 권총을 느슨하게 해놓고는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 순간부터 그의 눈은 앞서가는
대통령의 차가 아니고, 인도나 길모퉁이를
끊임없이 살폈다. 또 한 사나이가 뒤에
남은 경비원 한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몇
마디 귓속말을 하고서 뒷좌석에 올라탔다.
대통령 경호대장인 장 뒤클레 총경이다.
서쪽 담 옆에서 흰 헬멧을 쓴 경관 두
명이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어두컴컴한 그늘에서 나와 문 쪽을 향해
갔다. 두 대의 오토바이는 정문 앞에서
2-의 간격을 두고 멈춰섰다. 마르는 첫번째
시트로엥을 층계 옆에서 출발시키고 정문을
향해 커다랗게 커브를 틀어서 선도하는
번째의 시트로엥이 그 뒤를 따랐다. 그때가
오후 7시 50분이었다.
다시 정면의 철문이 열리고 차들은
부동자세를 한 위병 앞을 지나서 포부르 생
토노레 가로 나갔다. 그리고 생 토노레
가에서 일행은 마리니 가(街)로 들어섰다.
밤나무 가로수 그늘에서 흰 헬맷을 쓴 한
청년이 스쿠터(한 발을 올려 놓고 달리는
스케이트)에 올라탄 채 일행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더니, 이윽고 서 있던
인도 옆을 출발하여 일행을 뒤따랐다.
8월의 주말 치고는 교통량이 적어서
대통령의 통과를 예고하는 무선통신은 일체
내보내지 않았다. 선도하는 오토바이의
사이렌 소리로 그것을 알아차린 교통경찰이
통과를 제지시켰다.
대통령을 호위한 차들은 가로수 그늘로
어두워지기 시작한 큰길을 속력을 내어
통과했다. 아직은 저녁 노을로 밝은
클레망소 광장으로 들어가서 알렉상드르
3세교 쪽으로 향했다. 스쿠터를 탄 청년은
대통령 일행의 차들 바로 뒤를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그 뒤를 따를 수
있었다. 다리를 건넌 마르는 선도하는
오토바이를 따라 제네랄 가리에니 가(街)를
지나서 넓은 앙발리드 대로로 들어섰다.
이때 스쿠터에 타고 있던 청년은 결정을
내렸다. 앙발리드 대로와 바른 가(街)가
마주치는 지점에서 그는 속력을 늦추고
모퉁이에 있는 카페 앞에 스쿠터를 세웠다.
카페에 들어선 그는 주머니에서 토큰을
汰?
좋은 장소 같구려."
신청했다.
장 마리 바스찬 칠리 중령이 무돈 시의
외곽에 있는 카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나이는 35세, 세 아이의 아버지,
공군본부에 근무하고 있는 그는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지극히 평범하고 보수적으로
행동하고 있었으나, 샤를 드골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격렬한 적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드골은 1958년에 자신을 권좌에
올려놓은 조국 프랑스와 그 국민을
배신하고 알제리를 민족주의자들의 손에
넘겨 주었다고 그는 보고 있었다.
프랑스가 알제리를 잃었다고 해서 그
자신이 무엇을 잃은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그의 행동에 동기가 되고 있는 것은
개인적인 이해 때문은 아니었다. 애국자로
배반한 자를 처단하는 일이 곧 조국을
위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당시
이런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은 상당수
있었지만, 드골을 살해하고 그 정권을
무너뜨리겠다고 맹세한 OAS의 과격파에
버금갈 정도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바스찬
칠리는 이 과격파의 핵심 요원이었다.
전화가 걸려왔을 때 그는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바텐더는 그에게
수화기를 건네주고서 카페의 한쪽 구석에
설치해 둔 TV를 조정하러 갔다. 바스찬
칠리는 한동안 전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이윽고, "알았어. 수고했어." 하고
조그맣게 말하고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았다. 맥주값은 아까 이미 지불해
두었다. 그는 천천히 카페를 나와 인도에
신문을 꺼내어 그것을 신중하게 두 번
펼치는 흉내를 냈다.
거리 반대편에 있는 아파트 2층에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아가씨 하나가
레이스 달린 커튼을 닫고서 방에 모여 있는
12명의 사나이들 쪽을 보았다.
"제2루트예요."
그들 중에서 5명의 젊은이는 살인에
관해서는 아직 아마추어들이었는데, 그들은
아가씨의 이야기를 듣더니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하는 운동을 멈추고
흥분으로 들떴다. 다른 7명은 그들보다는
연장자이며, 냉정한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가장 연장자인 알랭
부그르네 드 라 토크네 중위는 바스찬 칠리
다음가는 부지휘관이며, 시골 지주의
극우주의자(極右主義者)이다. 나이는 35세,
아내와의 사이에 두 아이가 있었다.
그 방에 있는 12명의 과격분자들 중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는 조르주 와탱이었다.
단단하고 위엄이 있어 보이는 어깨 위에
각이 진 아래턱이 위압감을 주는 이 39세의
OAS 광신자는 본래 알제리의
농업기술자였지만, OAS에 참가하고 나서
2년 뒤에는 조직에서 가장 난폭한 살인자로
부상했다. 한쪽 다리에 오래 된 상처가
있어서 '절름발이'로 불리고 있었다.
아가씨의 말을 들은 이 12명의
사나이들은 뒷문 층계를 내려가 골목길로
나섰다. 거기에는 여섯 대의 차가 -- 모두
훔치거나 빌린 것들뿐이다 -- 한 줄로
세워져 있었다. 시간은 오후 7시 55분.
습격할 장소를 물색하고는, 사격의 각도와
달리는 차의 속도와 거리, 그리고 달리는
차를 저지하는 데 필요한 탄약의 강도 등을
정확히 계산해 두었다. 그가 습격 장소로
택한 곳은 리베라시옹 가(街)라고 불리는
긴 직선도로로, 프티 클라마르의 교차로로
통하고 있었다. 그들의 계획은 이러했다.
복수의 저격수를 포함한 제1그룹이
교차로에서 200미터 떨어진 도로상에서
대통령이 탄 승용차에 총탄 세례를
퍼붓는다. 이 그룹은 도로 옆에 주차해
놓은 밴의 뒤에 몸을 숨기고서 달려오는
승용차를 향해 아주 낮은 각도에서 사격을
시작하여 저격수에게 최대한 시간 여유를
준다.
바스찬 칠리의 계획에 의하면 첫번째
150발의 총알이 명중할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의 승용차가 정지함과 동시에
제2그룹이 옆길에서 뛰어나와 아주
가까이에서 뒤따라오는 호위차에 사격한다.
이렇게 두 그룹은 몇 초 사이에 대통령
일행을 해치우고 다른 골목에 준비해 둔 세
대의 도주용 차로 현장에서 사라진다.
이 습격부대의 13번째 요원인 바스찬
칠리는 망보는 역할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오후 8시 5분까지 두 그룹은 각기 정해진
위치에 배치되었다. 기습 지점에서 파리
쪽으로 100미터 되는 곳의 한 버스
정류장에 바스찬 칠리는 신문을 들고
태연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밴의 옆에
서 있는 제1그룹의 지휘관인 세르주
베르니에에게 신문을 흔들어서 신호를
베르니에는 발 아래 풀밭에 엎드려 있는
부하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와 동시에
토크네가 기관단총을 가진 '절름발이'인
와탱을 조수석에 태우고 차를 도로로 몰고
나와 경호원이 탄 차를 저지하기로 되어
있었다.
프티 클라마르의 도로 한쪽에서 총의
안전장치를 푸는 가벼운 금속음이 울리고
있을 무렵, 드골 장군의 차의 행렬은
정체현상을 빚는 파리 중심가를 빠져나와
차량 통행이 뜸한 외곽 지역에 다다르고
있었다. 속력은 시속 100km에 가까웠다.
도로가 활짝 트인 지점에서 프란시스
마르는 흘끔 손목시계를 보고는 뒤에 앉아
있는 노장군의 짜증을 알아차리고 더욱
속력을 냈다. 두 대의 오토바이가 뒤로
오토바이가 선도하는 그런 부산스러운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언제나 가능한 한 선도
없이 다니는 걸 좋아했다. 이 행렬은
그러한 편성으로 프티 클라마르의 제네랄
르클레르크 로(路)로 접어들었다. 시각은
오후 8시 17분.
거기서 약 1마일 떨어진 곳에서 바스찬
칠리는 중대한 실수의 결과를 맛보고
있었다. 하긴 그는 몇 달 뒤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비로소 경찰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는 기습 계획의 시간표를 작성할 때,
달력을 조사하여 8월 22일의 일몰 시각은
오후 8시 35분이며, 설령 드골이 정상적인
스케줄보다 늦는다 해도 -- 사실 늦었지만
-- 시간은 충분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961년의 것이었는데, 1962년의 8월 22일은
8시 10분에 일몰이 온 것이다. 이 25분의
차이가 프랑스의 역사를 오늘과 같이 만든
것이다. 8시 18분, 바스찬 칠리는 시속 약
110km로 리베라시옹 가(街)를 자기 쪽으로
질주해 오는 차의 행렬을 확인했다. 그는
미친 듯이 신문을 흔들었다.
거기서 100미터 떨어진 도로의
반대쪽에서 베르니에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흐릿한 사람의 움직임을 똑똑히
보려고 초조하게 일몰의 땅거미 속에서
신경을 온통 눈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중령이 신문을 흔들었나?" 하고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통령 전용차의 뾰족한 코끝이 버스
정류장 앞을 통과하여 그의 시선에
"쏴!"
그는 발 밑에 엎드려 있는 부하에게
소리쳤다. 시속 110 킬로미터의 고속으로
눈앞을 지나가는 목표물을 향해 그들은
90도 각도에서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대통령 전용차에 12발의 총알이
명중한 것은 살인자들의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총알의
대부분은 시트로엥의 뒤쪽에 명중했다.
타이어 두 개가 총격으로 빠져나갔다.
펑크에 대비해서 자동 튜브를 장치해
놓았지만 너무도 급격하게 공기가
빠져나갔기 때문에 고속으로 질주하던 차가
심하게 흔들리면서 앞바퀴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프란시스 마르의 운전 기술이
드골의 생명을 구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타이어를 총격으로 꿰뚫고 있는 동안, 다른
요원들은 어스름 속으로 사라져 가는
시트로엥의 뒤창을 향해 매거진(연발총)
탄환을 퍼부었다. 몇 발은 차체를
관통하고, 어떤 총알은 뒤창을 뚫고
대통령의 코 몇 -- 앞을 날아갔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부아슈 대령이 뒤를
돌아보며 대통령 내외에게, "엎드려요!"
하고 소리쳤다. 드골 부인은 남편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나 장군은, "또
시작이군!" 하고 차갑게 중얼거리며 깨어진
뒤창 너머를 돌아다보았다.
마르는 흔들리는 핸들을 꼭 잡고 악셀을
늦추면서 미끄러지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엔진을 고속으로 회전시킨
시트로엥은 제2그룹이 대기하고 있는 옆길
달려나갔다. 그 뒤에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은 경호차가 바짝 뒤따르고 있었다.
아베뉴 뒤 부아에서 엔진을 걸어놓은 채
대기중이던 부그르네 드 라 토크네는
고속으로 접근해 오는 목표물을 앞에 놓고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동차를
충돌시켜 대통령과 함께 죽느냐, 아니면
조금 늦게 클러치를 넣고 목표물에
접근하느냐? 그는 결국 후자의 방법을
택했다. 옆길에서 차를 몰고 나가 대통령
차의 행렬 곁에 붙었으나, 그의 바로 옆에
온 것은 드골의 승용차가 아니고 경호원인
드쥐다와 뒤클레 총경이 탄 차였다. 오른쪽
창으로 상반신을 내민 와탱은 부서져 나간
유리창을 통해서 드골의 오만한 옆얼굴이
보이는 시트로엥의 뒤쪽을 향해 기관총의
"왜 반격하지 않나?"
초조하게 드골이 물었다. 드쥐다는
3미터쯤 떨어져 있는 OAS의 살인자를
쏘려고 필사적이었지만, 옆에 있는
운전사가 걸리적거려서 겨냥할 수가
없었다. 뒤클레는 운전사에게 대통령의
차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OAS의 차는 갑자기 후퇴했다.
뒤쪽에 붙어 있던 두 대의 오토바이도 한
대는 갑자기 옆길에서 튀어나온 토크네의
차에 몰려 넘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고 뒤따라왔다. 차의 행렬은
로터리로 접어들어 그곳을 지나
비라크블레를 향해서 계속 달렸다.
습격 지점에서 기습을 다시 시도할
여유는 이미 없었다. 다음 기회를 기다릴
이용한 세 대의 차를 버린 채 도주용 차에
올라타고 짙어져 가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차에 설치되어 있는 통신기로 뒤클레
총경은 비라크블레를 불러내어 간단히 사건
경위를 전했다. 10분 뒤에 일행은
비라크블레 공항에 도착했으나, 드골
장군은 그대로 헬리콥터가 대기하고 있는
에이프런(격납고 앞의 광장)까지 차를
몰라고 했다. 시트로엥이 멈추자 수많은
장교와 담당관들이 순식간에 차를 에워싸고
재빨리 문을 열어서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드골 부인을 부축해 내렸다. 장군은 반대쪽
문으로 내려서 목덜미에 붙어 있는 유리
조각을 털어냈다. 그리고 허둥대며 말을
걸어오는 장교들을 무시하고 차의
"자, 집으로 갑시다."
부드럽게 부인에게 말을 건넨 장군은
비로소 공군 장교들에게 OAS에 대한 평을
한마디했다.
"녀석들은 총 하나 제대로 못 쏘는
놈들이었어." 그는 싸늘하게 이렇게
내뱉고는 부인을 헬리콥터에 태우고 자신도
그 옆자리에 앉았다. 이어서 드쥐다가
올라타고 대통령 부처는 주말을 보내기
위해 시골 별장을 향해 날아갔다.
프란시스 마르는 아직도 잿빛 얼굴로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오른쪽 앞뒤 바퀴는
완전히 펑크가 나고 시트로엥은 림(바퀴의
테두리 쇠)만으로 달려온 것이다. 뒤클레는
나직하게 마르에게 위로의 말을
한마디하고는 묵묵히 차 안을 청소하기
전세계의 저널리스트들이 이
암살미수사건을 뒤쫓았으나 정보 부족
때문에 추측 기사로 지면을 메우고 있는
동안 국가경찰을 주체로 한 프랑스 경찰은
비밀정보기관과 헌병대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 경찰 역사상 최대의 수사활동을
개시했다. 그것은 마침내 지금까지 일찍이
없었던 대대적인 인간 사냥 작전으로
발전했다. 이를 능가한 인간 사냥은 나중에
나타난 또 한 사람의 암살자를 대상으로 한
작전의 경우뿐이었다. 이 암살자의 정체는
아직도 미궁 속에 있고, 지금도 경찰의
자료에는 '재칼'이라는 암호명으로만 남아
있다.
경찰이 수사 진전의 단서를 잡은 것은
9월 3일이었다. 경찰의 수사활동에서 흔히
의례적인 검문을 실시하고 있을 때였다.
리용 시 남쪽에 있는 발랑스의 변두리,
파리와 마르세유 사이를 잇는 국도에
설치된 검문소에서 네 명의 남자를 태운
승용차가 정지 명령을 받았다. 경관들은
그날 이미 수백 대의 차를 정지시켜서 타고
있는 사람들의 신분증명서를 조사했었는데,
그 승용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 중 한
사람이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남자는 분실했다고 했지만 경관은 이 또한
관례에 따라 간단한 조사를 하기 위해 그
남자와 다른 세 명을 발랑스로 연행했다.
발랑스에서 조사해 본 결과, 다른 세
명은 문제의 남자와는 아무 관계도 없고
다만 편승시켜 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세 사람은 즉시 석방되었다.
것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즉시
그의 지문조회가 파리로 보내졌다. 12시간
뒤에 회답이 왔다. 그 지문의 주인은
22세의 외인부대 탈영병으로서, 군법회의에
회부된 자였다. 그러나 이름은 본인이
진술한 그대로 -- 피에르 다니 마가도.
마가도의 신병은 사법경찰 리용 지방
본부에 송치되었다.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경비하던
경관이 장난삼아 물었다.
"프티 클라마르 사건은 어떻게 된 거야?"
마가도는 힘없이 어깨를 움츠리면서
말했다.
"그래, 뭐가 알고 싶소?"
지방본부의 간부들은 뜻밖의 수확에 숨을
죽여 그의 진술에 귀를 기울이고, 속기
기록했다.
그는 장장 여덟 시간에 걸쳐서 노래하듯
진술했다. 마지막에 가서 그는 프티
클라마르 습격에 참가한 인물 전원과,
계획의 입안이나 무기 조달에 협력한 9명의
공범자 이름까지 모두 밝혔다. 모두 22명에
이르는 전용이었다. 즉각 수사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경찰에서도 쫓아야
할 상대를 알고 하는 수사였다.
결국 경찰의 추적에서 빠져나간 자는 한
명뿐이며, 그는 지금까지도 체포되지 않고
있다. 그 인물은 누구인가? 다름아닌
조르주 와탱이며, 그는 현재 OAS의
간부들과 함께 알제리에서 철수한 다른
민간인 속에 섞여 스페인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리고 여타 공동 주범에 대한 심문과 기소
준비는 같은 해 12월에 완료되어 이듬해인
1963년 1월에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이 진행됨에 따라 OAS는 드골 정권에
재차 정면 공격을 가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고, 프랑스의 정보기관은 이에 대해
필사적인 반격을 가했다. 명랑한
파리지앵의 생활 이면에서, 문화와 문명의
평화로운 가면 밑에서 가장 격렬하고
처참한 지하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프랑스의 비밀정보기관은
'외국자료정보대책본부'로 불리고 있는데,
보통은 그 머리글자를 따서 SDECE라고
약칭한다. 그 임무는 외국에서 하는 첩보
활동과 국내에서 하는 대첩보활동 등 두
가지로 나뉘지만, 각 부서의 일은 가끔
순전히 정보만을 취급하는 부서로서 7개의
과로 나누어져 있다. 제1과 -- 정보분석,
제2과 -- 동부 유럽, 제3과 -- 서부 유럽,
제4과 -- 아프리카, 제5과 -- 중동, 제6과
-- 극동, 제7과 -- 미국 및 서반구 전역.
제2부는 대첩보. 제3부와 제4부는 특별히
공산권을 취급하는 사무실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제6부는 경리, 제7부는
총무담당이다.
제5부는 특별한 명칭이 없으며, 다만 --
액션(행동)이라는 표시만 붙어 있다. 대
OAS 전쟁의 핵심이 된 것이 바로 이 액션
서비스(행동부대)이다. 파리 북동쪽의
을씨년스러운 거리, 포르트 데 리라에
가까운 불바르 모르티에 변두리에 있는
낡은 2층 건물의 본부에서 액션 서비스
나갔다. 이 사나이들은 거의가
코르시카인이며, 소설 등에서 나오는 '터프
거이'에 가장 가까운 이미지를 가진
우락부락한 패거리이다. 그들은 먼저
기초훈련으로 육체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단련을 받은 다음, 사토리로 옮겨져
특별훈련반에서 온갖 전투기술을 몸에
익힌다. 소형 화기를 써서 싸우고,
맨손으로 격투, 유도 등. 그리고 무선통신,
폭파와 파괴 공작, 심문, 고문, 납치,
방화, 암살 등을 배운다.
프랑스어밖에 못하는 대원도 있지만,
수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전세계의
수도에 대해서 훤히 알고 있는 대원도
있다. 그들은 임무 수행중에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주어져 있어서 때때로 그것을
OAS의 행동이 점점 난폭, 잔인해짐에
따라서 마침내 SDECE의 국장인 우젠 기보
장군은 맹견에게 물렸던 재갈을 벗기듯이
그들에 대한 일부 제한을 완전히 풀어 주어
OAS와 맞붙게 했다. 그 중에서 몇 명은
OAS의 요원이 되어 간부회의에까지
침투했다. 거기서 그들은 정보를 보내어
다른 동료들의 행동에 길잡이 노릇을 했다.
프랑스나 그 밖의 감시가 엄한 나라에
잠입한 많은 OAS의 밀사들은 이 테러리스트
조직의 내부에 침투한 액션 서비스
공작원이 제공한 정보에 의해서 차례차례
검거되었다. 또 교묘한 유도작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국내에 잠입하려고 하지
않는, 지명수배된 자들은 가차없이
국외에서 살해되었다. 다른 이유로 실종된
대부분은 그들이 액션 서비스에 의해서
살해되었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물론 OAS도 폭력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 은밀한 역할 때문에
'수염'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액션
서비스의 공작원을 경관보다도 더
증오했다. 알제 시내에서 드골파 정권과
OAS와의 사이에 펼쳐진 처참한 권력 투쟁의
최종 단계에서 OAS는 7명의 '수염'을
포로로 잡았는데, 며칠 뒤 그들은 귀와
코가 잘려져 나간 시체가 되어서 발코니며
전신주에 매달려 있었다. 지하 전쟁은 그와
같은 양상으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누가,
어디서, 누구의 손에 의해 고문당하고
죽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개개의 내막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 OAS의 조직 밖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
중에는 암흑가에서 악명을 떨치던 프로
청부살인자도 있었고, SDECE의 대원이 된
뒤에도 옛날 패거리들과 접촉을 계속하면서
종종 더러운 일에 가담하는 자도 있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는 '비밀' 경찰이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드골 대통령의 측근
중 한 사람인 자크 포칼의 지령으로
활동하고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비밀' 경찰은 있지도 않았다. 비밀
경찰이 한 짓이라고 소문난 사건은 모두가
액션 서비스의 공작원이나, 일시적으로
조직원이 되었던 암흑가의 보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었다.
파리와 마르세유의 암흑가를 쥐고 흔들며
액션 서비스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벤데타'(복수)의 전통이 있다. 그들은
모종의 임무에 종사하고 있던 동료 7명이
알제에서 학살된 뒤, OAS에 대해서 복수를
선언했다. 이렇게 1944년 남프랑스에
상륙작전을 감행한 연합군에 협력한 당시의
암흑가의 코르시카인들(물론 그들은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었다. 전후 그들은
협력의 결과로서 코트 다쥘 일대
비합법사업의 이권을 한손에 쥐었다.)과
같은 식으로 60년대의 코르시카인들은
OAS에 복수를 맹세하고 프랑스를 위해서
싸운 것이다. OAS요원 중 대부분은
피에누아르(알제리 태생의 프랑스인)이며,
코르시카인과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서로의 싸움은 때로는
동족상잔이라는 양상을 띠었다.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OAS도 또한 작전을
개시했다. 그 조직의 기수이며 프티
클라마르 사건의 배후 조종자는 앙투안
아르그 대령이었다. 프랑스 명문대학의
하나인 에콜 폴리테크니크(이공과대학)를
졸업한 아르그는 우수한 두뇌와 정열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드골 휘하의 자유
프랑스군의 소위로서 나치스의 손아귀에서
프랑스를 해방시키기 위해 싸웠다.
나중에는 알제리 파견군의 기병 연대장으로
알제리에서 근무했다. 그는 땅딸막하고
유난히 힘이 센 남자로서, 빛나는 무공을
세운 비정한 군인이었다. 그리고 1962년,
망명 OAS의 작전 주임(사실상의 보스)이
되었다.
심리전에 경험이 많은 그는 드골 정권에
부문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작전의 일부로 그는 OAS의
정치조직과 레지스탕스 전국평의회 의장인
전 외무장관 조르주 비도에게 서유럽
제국의 주요 신문, TV와의 인터뷰를 하게
하여 드골 장군에 반대하는 OAS의 입장을
설명케 할 계획을 세웠다.
아르그는 뛰어난 머리 덕분에 일찍이
프랑스 육군에서 최연소 대령이 되었고,
현재는 OAS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되었는데, 이제 그는 그 지능을 거침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그는 주요한 TV
네트워크, 신문 특파원과의 일련의
인터뷰를 마련했고, 전 외무장관을 지낸
노정치가는 OAS의 불쾌한 활동을 능란한
말솜씨로 간단히 숨겨 버리는 데에
아르그가 기획 입안한 일련의 이 선전
공작의 성공은 프랑스 전국의 영화관이며
카페에서 폭발하는 플라스틱 폭탄이나 테러
행위에 못지않은 심리적인 충격을 프랑스
정부에 주었다. 그리고 2월 14일, 또다시
드골 암살음모가 발각되었다. 그 다음날
장군은 생 드 마르에 있는 사관학교에서
강연을 할 예정이었다. 그 암살계획에
의하면 장군이 현관 홀로 들어선 순간,
이웃 건물에 숨어 있던 암살자가 등뒤에서
사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음모 때문에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장
비숑, 포병 대위 로베르 푸아나르, 그리고
사관학교의 영어 교사인 폴 루슬레 드
리퍄크 부인 등 3명이었다. 저격수는 바로
그 조르주 와탱이었는데, 이번에도 그는
장치된 소총이 푸아나르의 아파트에서
발견되어 위의 세 사람이 체포된 것이다.
와탱과 소총을 사관학교 안으로 들여보낼
방법을 찾기 위해 그들은 마리우스 토라는
준위를 끌어들였는데, 그가 배반하여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한 사실은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다. 드골 장군은 다음날인
15일, 예정대로 사관학교의 행사에
참석했는데, 그때 마지못해 방탄시설이
장치된 차를 타고 가기로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암살계획으로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유치했지만, 이 사실은 드골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그는 내무장관인
프레이를 불러들여 테이블을 두드리며 이
국내의 치안을 책임진 장관에게 호통을
"이 암살 소동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즉시 OAS의 간부를 잡아서 본때를
보인다는 안이 받아들여졌다. 프레이
장관은 고등군사재판소에서 진행중인
바스찬 칠리 재판의 결과를 분명히
예상하고 있었다. 샤를 드골을 어째서
살해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는 근본
명제에 대해서 칠리가 세인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레이로서는 좀더
강력한 억제책이 필요했다.
2월 22일, SDECE 제2부(대첩보/국내치안
담당)의 부장이 내무장관에게 보낸 서류의
사본 한 통이 액션 서비스 부장 앞으로
왔다. 다음은 그것을 발췌한 것이다 -- .
사람인 전 프랑스 육군 대령 앙투안
아르그의 거처를 알아내는 데 성공. 현지에
있는 아군 기관에서 온 정보에 의하면 그는
서독으로 도주하여 며칠 동안 그곳에 묵을
예정......'
'위 정보로 판단하건대 아르그에
접근하여 그를 검거하는 일은 가능할
것으로 생각됨. 단, 본 대첩보부가 보낸
그의 검거에 대한 협력 요청은 서독
치안당국에서 거부되었으며, 또한 서독
치안당국은 아군의 공작원이 아르그 및
다른 OAS 간부에게 접근하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아르그 검거는 최대의
스피드와 배려로 실행함이 필요함.'
이 일은 액션 서비스에 일임되었다.
간부회의에 참석한 아르그가 뮌헨으로
돌아왔다. 그는 은신처로 가지 않고 --
회의를 열기 위해서였겠지만 -- 방을
예약해 둔 에덴 볼프 호텔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현관 홀에 들어선 순간 그는
완벽한 독일어를 구사하는 두 남자의
제지를 받았다. 그는 그들을 독일 경관으로
생각하고 여권을 꺼내려고 가슴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순간, 그는 억센 그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탁물
운반차 안으로 실리고 말았다. 그는 욕설을
퍼부으며 대들었으나 그들은 이제
프랑스어로 윽박질렀다. 이어서 거친 손이
코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다른 손이 복부를
손가락으로 찔려 어이없이 간단히 쓰러지고
말았다.
24시간 뒤, 파리의 케데조르페부르(통칭
'범죄해안') 36번지에 있는 사법경찰
형사부의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경사에게 거친 음성으로 '짐을 깨끗이 꾸려
놓았어.' 라고 하며 앙투안 아르그가 빌딩
뒤에 주차해 있는 밴 안에 있다고 차디차게
말했다. 몇 분 뒤에 밴의 문이 강제로
열리고 너무 놀라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는
경관들 앞에 아르그가 굴러 떨어졌다.
24시간이나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눈은 초점을 잃고서, 경관들의 부축을
받고 간신히 일어섰다. 얼굴에는 코피가
말라붙어 있고, 입은 재갈을 물리어 상처가
나 있었다.
대령인가?" 하고 물었다. "그렇다." 그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액션 서비스는
어젯밤 비밀리에 그의 신병을 독일 국경
너머로 운반해서 사법경찰에 통보한
것이다. 경찰 주차장에 짐이 도착해 있다는
익명의 전화는 액션 서비스 터프 거이들의
유머였다. 결국 아르그는 1968년 6월까지
석방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액션 서비스에서도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아르그를 체포한
것은 분명히 OAS의 사기를 현저하게
떨어뜨렸다. 그러나 이 일은 아르그의
부지휘관이며, 이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아르그에 못지않은 전략가인
마르크 로댕 대령을 드골 암살 작전의
총지휘관 자리에 앉게 만든 것이다. 모든
되었다.
3월 4일, 고등군사재판소는 장 마리
바스찬 칠리에게 판결을 내렸다. 그와 다른
두 명은 사형이 선고되었다. '절름발이'인
와탱을 포함해서 도망중인 세 명에
대해서도 사형이 선고되었다. 3월 8일,
드골 장군은 피고측 변호인의 감형 탄원을
세 시간에 걸쳐서 말없이 듣고는, 사형이
선고된 두 명에 대해서 종신형으로 감형할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바스찬 칠리의
경우에는 판결대로 결재했다.
그날 밤 변호사가 그에게 이 결정을
전했다.
"형 집행은 11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유유히 미소짓고 있었기
때문에 변호사는 다시 일러 주었다.
"당신은 총살당하는 겁니다."
그래도 여전히 칠리는 미소지은 얼굴을
흔들었다.
"당신은 알지 못하겠지. 프랑스인이라면
설령 총살대원일지라도 나를 향해서 총을
겨눌 리가 없어."
그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처형
뉴스는 오전 8시, 프랑스 국영방송을
통해서 들려왔다. 이 뉴스는 서유럽
각지에서 청취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어느
팡숑(민박 형태의 하숙집)에서도 들린 이
방송은 나중에 드골 장군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간 일련의 계획과 행동에 불을 당기게
되었다. 그 방에 있는 사람은 OAS의 새
작전 책임자인 마르크 로댕 대령이었던
것이다.
제 2 장
마르크 로댕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스위치를 끄고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아침식사를 그대로 두고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창가로 걸어가서 연거푸
피우고 있던 담배를 다시 한 개비 입에
물고 불을 댕기고는, 늑장을 부리고 있는
봄기운 탓에 아직도 눈에 그대로 덮여 있는
바깥 경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조용히, 그러나 원한에 차서 그는
중얼거렸다. 이어서 그의 입에서 터져나온
것은 대통령과 그의 정부와 액션 서비스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격렬한 분노의
욕설이었다.
달랐다. 여위고 큰 키,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 증오 탓인지 뼈만 앙상한 얼굴에
평소에는 비(非)라틴적인 냉정성으로
감정을 숨기고 있다. 그에게는 이공과대학
졸업과 같은 출세로 향한 패스포드는
처음부터 없었다. 가난한 제화공의
아들이었던 그는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했을 때는 아직 10대의
청소년이었지만, 어선을 타고 영국으로
빠져나가 '롤렌의 십자가'를 기치로 내건
자유 프랑스군에 한 사병으로 입대했다.
중사에서 준위로 승진한 것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벌어진 혈전, 그리고 루크레르크
장군 인솔하에 참가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사투 속에서 간신히 쟁취한 것이었다.
그리고 파리 해방작전의 야전근무에 의해서
없는 장교복을 마침내 입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민간인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군대에 남을 것인가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민간인으로서 그에게 어떤 생활이
있을 수 있겠는가? 기껏 생활의
수단이라고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제화공
기술뿐이었다. 더구나 조국의 노동자
계급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과거의 레지스탕스
조직과 국내에 있었던 자유프랑스군도
손아귀에 넣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군에
남았지만, 그 군대 안에서 그는 자기가
야전에서 피와 땀으로 얻은 장교의
계급장을 교실의 이론학습으로 간단히 손에
넣는 사관학교 출신의 풋내기들을 보고,
비애를 맛보았다. 그들이 그를 따돌려
버리고 계속 승진해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 비애는 더욱더 쌓이고, 나중에는 심각한
것이 되었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멋지게
차려입은 부대가 연병장에서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는 사이에 야전에서 피투성이의
싸움을 해나가고 있는 역전의 정예부대인
식민지군에 가담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손을 써서 그는 식민지 파견군의
공정부대로 전속이 되었다.
그리고 1년 뒤, 그는 인도차이나
파견군의 중대장이 되었다. 거기에는 그와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병사들이 있었다. 제화공의 아들이
땀을 흘리는 길밖에는 없었다.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났을 때에 그는 소령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본국에서 실의에 찬
1년을 보낸 다음, 이번에는 알제리로
파견되었다. 인도차이나에서 철수, 그리고
프랑스 본국에서 보낸 1년은 그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원한을 정치가와
공산주의자(그는 이 둘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었다)에 대한 불 같은 증오로 바꾸어
놓았다. 군인이 프랑스를 지배하지 않는 한
국민들 사이에 만연하고 있는 배반자와,
입만 살아 있는 무리들의 마수에서 조국을
해방시킬 수는 없다. 이 두 악마가 없는
곳은 군대뿐이다 -- .
눈앞에서 부하가 적탄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또 적의 포로가 되어 학살당하여
경험이 있는 야전장교가 모두 그렇듯이,
로댕은 자본가 계급이 고향에서 안온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피를 뿌리며
희생되는 병사들을 지상의 소금으로
숭배하고 존경하고 있었다. 인도차이나의
밀림에서 8년 동안이나 싸운 뒤 프랑스
본국에 돌아와서 알게 된 것은 국민들
대부분이 전쟁터의 병사들 생각은 추호도
하고 있지 않다는 현실이며, 또 적의
정보를 얻기 위해 포로를 고문하는 등의
사소한 일을 들고 나와 군부를 비난,
공격하는 좌익 문화인의 언동이었다. 이런
풍조는 마르크 로댕의 내부에서 어떤
하나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승진의 길이 막혀 있는 데에서 오는 원망과
중복되어 거의 광신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리고 국민의 지지만 충분했다면 군은
베트민을 쳐부술 수 있었다고 그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인도차이나의
포기는 그곳에서 죽은 -- 글자 그대로
개죽음이다 -- 몇 만에 이르는 젊은이들에
대한 배반이었다. 그런 배반은 이제 두번
다시 없을 것이고 있어서도 안된다.
알제리가 그것을 실증할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1956년 봄, 마르세유를 떠날
때의 그는 전과 같은 행복한 기분을
되찾았다. 그때의 그는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알제리의 땅에서 자신이 일생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세계의 눈에
프랑스 육군의 영광을 보여 줄 위업이
달성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 뒤 2년, 치열한 전투의 나날을
반란자들은 그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약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와 부하들이
아무리 반도(反徒)의 농민들을 죽여도,
아무리 마음을 쑥밭으로 만들어도, 아무리
FLN(민족해방전선)의 테러리스트들을
고문하고 죽여도 반란은 확대만 되어갔고,
끝내는 알제리 전역으로 퍼져 도시를
삼키고 말았다.
필요한 것은 물론 프랑스 본국에서 보다
많이 지원해 주는 것이었다. 현지에서는
전쟁의 시비가 문제될 리 없었다. 알제리는
프랑스이며, 300만의 프랑스인이 살고 있는
프랑스의 일부인 것이다. 프랑스인이라면
노르망디나 부르타뉴, 그리고 알프스
코트다쥐르를 위해서 싸웠듯이 알제리를
위해서 싸울 것이며, 또 싸워야 한다고
동시에 마르크 로댕은 들판의 전선에서
도시로 들어갔다. 먼저 본으로, 이어서
콩스탕틴으로.(둘 다 알제리 북부의 도시)
야전에서 그는 ALN(민족해방군)의
병사들, 정규군은 아니지만 용감한
병사들을 상대로 싸웠다. 로댕은 그들을
미워했었지만, 그 증오도 끔찍한 도시
게릴라들과의 싸움에서 품게 된 그것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도시에서
벌이는 전투는 프랑스인의 카페나
슈퍼마켓, 유기장(遊技場)에 설치된
플라스틱 폭탄과의 싸움이었다.
콩스탕틴에서 프랑스 민간인의 살상을
노리고 폭탄을 장치하는 쓰레기 같은
녀석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그는 철저한
거주구에서 '도살자'라는 경멸에 찬
별명으로 통했다.
FLN과 그 군대인 ALN을 격멸하기
위해서는 파리에서 보다 많은 지원이
절대로 필요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이 결정적으로 없었다. 과격파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로댕 또한 자기의
신념이 전부이며, 현실을 냉정한 눈으로 볼
줄을 몰랐다. 불어나는 군사비, 그
부담으로 휘청거리고 있는 프랑스 경제,
병사들의 사기저하 같은 냉엄한 현실도
그의 눈으로 보면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1958년 6월, 드골 장군은 총리로 권좌에
복귀했다. 장군은 부패하고 붕괴 위기에
제5공화제를 폈다. '프랑스의 알제리'라는
그의 발언이 국민의 일반 여론으로
메아리쳐, 그것이 그를 마티뇽(총리
관저)으로 다시 데려왔고, 이어 1959년 1월
그는 마침내 엘리제궁의 주인이 되었다.
그때 로댕은 감격에 넘쳐 자기 방으로
달려가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알제리를
방문한 드골의 모습은 로댕의 눈에는 마치
올림푸스에 강림한 제우스처럼 보였다.
새로운 정책이 시행될 것으로 로댕은
믿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추방되고, 장 폴
사르트르는 반역죄로 기소되어 총살되고,
노동조합은 무릎을 꿇고, 알제리에 있는
동포와 프랑스 문명의 프런티어를 지키는
군대에 대하여 조국의 따뜻한 지원의 손이
곧 다가올 것이라고.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드골이 독특한 방법으로
프랑스 부흥에 손을 대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무슨 착오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서둘러서는 안된다. 그분에게
시간을 주자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리고
벤 베라와 FLN을 상대로 예비교섭에
들어간다는 소문이 들렸을 때, 그는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1960년, 빅 쇼
올티스가 이끄는 거류민들이 본국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로댕도
그들의 처지를 동정했지만 반란하는
현지인들을 단시일 내에 굴복시키기에는
아직 그 기회가 무르익지 않았으며, 드골은
그 때문에 전략적 양보책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양반은 모든 것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양반은 '프랑스의
알제리'라고 자랑스럽게 외치지 않았던가.
그러나 샤를 드골이 부르짖는 프랑스
부흥책에 프랑스령 알제리는 들어 있지
않았다. 이 사실이 명백해짐에 이르러서야
로댕의 세계는 달리는 열차에서 굴러
떨어진 꽃병처럼 무참히 박살나고 말았다.
신앙, 희망, 신념, 신뢰가 모조리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남은 것은
증오뿐이었다. 국가체제, 정치가,
저널리스트, 알제리 원주민, 인텔리,
노동조합, 외국인, 모든 것이 미웠다.
그러나 증오의 최대의 대상은 그였다.
1961년 4월, 로댕은 소수의 비겁자를
제외한 대대 전원을 이끌고 반란을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단순하고도
교묘한 드골의 술책으로 말미암아 반란은
사실상 제대로 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끝장나고 말았던 것이다. FLN과의 의논이
시작된다는 성명이 발표되기 몇 주일 전,
수천 대의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각 부대에
지급되었을 때 장교들은 누구 하나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라디오는
병사들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위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장교나 상급
하사관들 대부분은 오히려 그 지급을
기쁘게까지 생각했다. 프랑스에서 흘러오는
팝 뮤직은 끔찍한 더위와 파리와 따분함에
시달리고 있던 병사들에게 있어서도 좋은
기분전환이 되었다.
그러나 드골의 소리는 재즈처럼
시험대에 오른 이때, 알제리 각지의 수만의
병사들은 일제히 라디오를 켜고서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뉴스 뒤에는 로댕이 1940년
6월에 들었던 같은 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내용도 거의 같은 것이었다.
"제군들에게 지금 충성을 묻고 있는
것이다. 나는 프랑스다. 프랑스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 제군들은 내 뒤를 이어
주기 바란다. 나를 따라 주기 바란다."
대대에서는 대대장이 눈을 떴을 때 남아
있는 것은 몇몇 장교들뿐이었으며,
하사관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반란은 어이없게도 환상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 . 라디오에 의해서.
로댕은 그래도 운이 다하지는 않았다. 부하
장교와 하사관들 중에서 120명이 그의 밑에
다른 부대에 비해서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가했었던 고참병과, 알제리 출신의
병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부대의 반란병과 합류하여 '엘리제궁의
유다(배반자)'를 쓰러뜨리기로 맹세하고
비밀군사조직(OAS)을 만들었다.
의기양양한 FLN과 끝까지 조국의 영광을
지키려는 일부 프랑스 군과의 사이에는
이미 파괴의 향연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 7주간 사이에
프랑스인 거류민들은 전재산을 헐값으로
팔아치우고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을
떠났지만, OAS는 알제리를 프랑스인이
이주해 올 당시의 상태로 만들어서
돌려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끝없이 파괴해
나갔다. 모든 것이 끝나자
있는 간부들은 일제히 망명했다.
1961년 겨울, 로댕은 망명 OAS의
작전주임 아르그 대령을 보좌하기로
되었다. 그 이후, 프랑스 본토에 대해
시작된 OAS의 공세를 북돋운 것은 아르그의
뛰어난 식견과 재능, 감화력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한 것은 로댕의
조직력과 교묘한 꾀와 강인한
정신력이었다. 그가 단순한 과격분자였다면
위험스럽긴 해도, 평범한 존재에 불과했을
것이다. 60년대 초기에는 함부로 총을
쏘아대는 패거리들이 OAS 안에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로댕은 그 이상의
존재였다. 늙은 제화공은 아들에게 기능이
뛰어난 두뇌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그
것이 아니고, 그가 혼자의 힘으로 독자적인
방법으로 기르고 가꾼 것이었다.
프랑스라는 국가나 군대의 명예라는
개념에 있어서는 다른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편협했지만, 파괴나 살육이라는 실제적인
문제가 되면 그는 멋지다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냉철하고 이치에 맞는
집중력을 발휘했다. 이 재능에는 들뜬
열광이나 무의미한 폭력보다는 훨씬
실용적인 가치가 있었다.
3월 11일의 아침, 드골 암살이라는
문제를 생각할 때 그가 활용한 것은 이
실무적인 재능이었다. 그 일이 용이하지
않다는 것은 물론 알고 있었다.
용이하기는커녕 프티 클라마르와
더욱더 어렵게 했다. 청부살인업자를
찾아내야 하는 일 하나만도 용이한 것이
아니었다. 대통령의 신변을 둘러싸고 있는
경비의 벽을 뚫는 데에는 보통 일반적인
수단으로는 불가능하며, 문제는 그
가능성을 가능하게 할 만한 인물이나
계획을 찾아내는 데에 있었다.
그는 차례차례 순서에 따라서 문제를
정리해 나갔다. 꼬박 두 시간, 연거푸
담배를 피우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느라고 온 방안이 연기로 자욱해진
무렵에야 그는 겨우 몇 가지 계획을
세우고, 이번에는 그 검증으로 옮겨 갔다.
어느 계획도 모든 장애를 넘어서 실행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다. 다만 어느 것이나
최후의 테스트에는 합격되지 않았다.
이것만은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것은 적의 경비벽이다.
프티 클라마르 사건 이후 사태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OAS 내부에 대한 액션
서비스의 침투는 조직의 존립을 우려할
만큼 현저했고, 아르그가 납치된 예를
거론할 것까지도 없이 액션 서비스는
이쪽이 어떤 행동을 취하려고 하면, 그전에
언제나 간부에게 손을 뻗칠 정도로 준비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었다. 서독 정부와의
마찰은 무시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마저 엿볼
수가 있었다.
아르그가 체포되고 나서 이미 14일,
OAS의 간부들은 모두 각기 행방을 감추고
말았다. 레지스탕스 전국평의회(CNR)의
다른 지도자들도 당황하여 허겁지겁
필요한 위조서류나 항공권이 부랴부랴
조달되었다.
이런 혼란을 보고 하부 조직원들의
사기는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 국내의 OAS 협조자들 -- OAS에
협력하여 그들을 숨겨 주고, 무기를
운반하고, 연락을 돕고, 정보를 제공해
주던 사람들도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이
변명해 가며 전화를 끊고 말았다.
프티 클라마르의 실패와 그에 이어진
체포자들의 심문이라는 사태에 직면하자
프랑스 국내에 있던 세 개의 조직계통이
부득이 폐쇄되었다. 경찰이 조직 내부에서
새어나간 정보에 의해서 차례차례 아지트를
기습하고 무기 은닉 장소를 찾아냈다. 드골
암살계획은 그 뒤 두 번이나 세워졌으나,
덮쳐 관계자가 모조리 체포되고 말았다.
레지스탕스 전국평의회가 위원회를
열어서 민주주의 부흥에 대해서 두서도
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을 무렵, 로댕은
침대 옆에 놓인 서류가방의 내용물이 말해
주는 냉엄한 현실을 앞에 놓고 암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금은 부족하고,
국내외의 지지는 잃었고, 조직원 상호간의
신뢰에도 상처가 나서 OAS는 바야흐로
SDECE와 경찰의 공격 앞에서 붕괴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바스찬 칠리의 사형도 조직원의 적개심에
불을 지르기는커녕 오히려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과가 되었다. 이런 단계에서
협력자를 찾아내기란 지극히 어려운
맡겠다는 인간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자들은 프랑스의 모든 경찰관과 수백만의
시민에게 얼굴이 알려져 있다. 또 지금 이
단계에서 어떤 계획을 세우려고 해도 그
준비에는 많은 그룹의 공동작업이
필요하며, 액션 서비스의 침투를 생각하면
암살자가 드골에게 접근을 시작하기도 전에
간단히 당해 버릴 것이다.
자문자답 끝에 로댕은 중얼거렸다.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라......"
그는 대통령의 암살도 불사할 사나이들의
명단을 짜 보았다. 누구 하나 경찰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없었다.
사법경찰 본부에는 그들에 대한 자료가
성경만큼이나 두툼하게 수집되어 있다.
이름도 없는 시골 팡숑에 숨어 있는
것이다.
정오가 가까워서야 겨우 해답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불가능하다고
물러섰었으나 마침내 그는 집요한 흥미에
이끌려서 생각에 잠겼다. 만일 그런 인물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그런 인물이
있기만 하다면......천천히, 신중하게 그는
그런 인물을 기초로 한 계획을 짠 다음,
온갖 장애나 마이너스 요소들을 예상하면서
검토해 보았다. 그 계획은 모든 점에서
합격이었다. 경찰의 경비라는 난관을
멋지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시계가 정오를 치기 조금 전, 마르크
로댕은 두툼한 외투를 걸쳐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현관문을 열자
바람이 온몸에 엄습해 왔다. 엉겁결에 그는
몸을 움츠렸지만, 난방이 지나치게 잘된
방에서 담배를 너무 피워서 생긴 편두통이
깨끗이 날아가 버렸다. 그는 왼쪽 길로
해서 아드라슈트라세의 우체국으로 가서
남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등
각처에 가명으로 몸을 숨기고 있는
동지들에게 임무상 여행을 떠나니 몇 주일
연락이 끊긴다는 뜻의 짧막한 전보를 쳤다.
팡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면서, 그는
동지들 중에는 혹시 로댕 역시 액션
서비스에 의한 납치나 암살을 겁내어
조직에서 떠날 생각이라고 짐작하고 있는
녀석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혼자 어깨를 움츠렸다.
좋을 대로 생각하라지. 애써 설명할 필요는
그는 팡숑으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었다.
그날의 메뉴는 아이스바인과 누들이었다.
인도차이나의 정글이나 알제리의 황야에서
오랜 야전생활을 보낸 그는 음식에 대한
고상한 취미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점심은
얼마나 맛이 없던지 목구멍으로 넘기는
데에도 고통을 느낄 정도였다. 오후 2시가
지나자 그는 짐을 챙기고 계산을 끝낸
다음,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한 사나이,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사나이를 찾아내기 위해서 혼자 여행길에
올랐다.
마르크 로댕이 오스트리아의 시골 역에서
기차에 올랐을 무렵, BOAC의 카미트 4B형
착륙하고 있었다. 그것은 베이루트에서
오는 것이었다. 도착 손님용 라운지를
지나가는 승객들 틈에 키가 큰 금발의
영국인이 한 사람 있었다. 그 얼굴은
중동의 햇볕에 건강하게 그을려 있었다.
그는 지난 두 달 동안 레바논에서 통쾌한
즐거움을 맛보고, 또한 거액의 돈을
베이루트의 은행에서 스위스의 은행으로
옮기는 더욱 큰 즐거움을 만끽한 뒤라서
흡족하고 편안한 표정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가 뒤로 하고 온 먼 이집트의 사막에는
깨끗이 척추가 꿰뚫린 세 명의 독일인
미사일 엔지니어의 시체가 분노에 떨고
있는 이집트 경찰의 손으로 장사지내져
잠들고 있었다. 그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나셀의 알 자피라 로켓의 개발이 몇 년은
억만장자는 지불한 액수에 합당한 결과를
얻어서 만족해 했다. 아무런 말썽도 없이
세관을 통과한 그 영국인은 렌터카를 불러
타고 메이페어 가(街)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90일에 걸친 탐색 결과 로댕의 손에
남겨진 것은 세 통의 얇은 문서였다.
그는그것을 한 통씩 마닐라지(紙)의 파일에
넣어 서류가방에 보관해 두고서 언제나
가까이에 두었다. 6월 중순에야 그는
오스트리아에 돌아와서 빈의
브뤼크나알레에 있는 크라이스트라는
팡숑에 방을 빌렸다.
빈의 중앙우체국에서 그는 짧막한 전보를
두 통, 한 통은 북이탈리아의 볼자노, 또
한 통은 로마로 쳤다. 둘 다 빈의 그가
급히 달려오라는 두 간부 앞으로 가는
소집전보였다. 24시간 이내에 둘 다 빈에
도착했다. 르네 몽클레아는 볼자노에서
렌터카로, 앙드레 카슨은 로마에서
비행기로. 물론 둘 다 가명을 쓰고 가짜
서류를 가지고 다녔다. 이탈리아 및
오스트리아에 상주하고 있는 SDECE의
주재원은 두 사람을 요주의 인물의
첫손가락에 꼽고 있으며, 바로 이 시간
갑자기 자취를 감춘 두 사람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서 미리부터 길들여 두었던
스파이나 정보제공자들에게 보너스를
내걸고 국경의 검문소나 공항에 잠복시켜
두었다.
팡숑 크라이스트에 먼저 모습을 나타낸
7분 앞둔 시각이었다. 그는 브뤼크나알레의
모퉁이에서 내려, 꽃가게 진열창에 모습을
비추어 비뚤어진 넥타이를 바로하면서 몇
분을 보낸 다음, 재빨리 팡숑의 현관으로
들어갔다. 로댕은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아주 가까운 동지들만이 알고 있는 20개의
가명 중 하나를 써서 방을 잡아놓고
있었다. 불려온 두 사람이 받은 전보에는
로댕이 팡숑에 들어갈 때에 쓴 슐츠라는
암호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슐츠 씨를 만나고 싶소."
카슨은 접수대에 있는 청년에게 말했다.
청년은 숙박자 명단을 펴보고서 말했다.
"64호실입니다. 약속이 있으십니까?"
"그래요, 연락 안 해도 괜찮소."
카슨은 곧바로 층계를 올라갔다. 1층의
찾으면서 걸었다. 그 방은 오른쪽 중간쯤에
있었다. 노크하려고 손을 올린 순간, 그는
등뒤에서 손목을 잡혔다.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니 투박한 턱을 가진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마치 눈썹 같은 모양으로
이마에 늘어진 한 줌의 장발 밑에서
무표정한 눈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슨이
3-쯤 뒤에 있는, 벽 일부가 움푹 들어간
곳을 지날 때 그 사나이가 그곳에서 나와
바로 뒤따라 걸어온 것이다. 얇은 싸구려
융단이었는데도 카슨에게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라고 하던가?" 하고 그 거인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태도로 물었다.
그러나 카슨의 손목을 잡은 손의 힘은
늦추지 않았다.
호텔에서 아르그가 납치당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고 창자가 금방 뒤집혔다. 그러나
이윽고 그는 등뒤에 있는 거인이
인도차이나 시대에 로댕의 중대에 있었던
폴란드계의 외인부대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로댕이 지금도 때때로 이 빅토르
코와르스키를 특수한 임무에 쓰고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나는 로댕 대령과 만날 약속이 되어
있어, 빅토르."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상대방이
자기와 주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을
듣고 코와르스키의 눈썹 사이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나는 앙드레 카슨이야." 하고 그는
덧붙였다. 코와르스키의 표정에는 변화가
뻗어서 64호실 문을 두드렸다.
"위?"
코와르스키는 문틈에 입을 갖다대고,
"손님이 왔습니다." 하고 신음하듯 말했다.
문이 조금 열렸다. 로댕이 그 틈새로
밖을 내다본 다음에야 문을 열었다.
"오, 앙드레, 정말 미안하네." 그는
코와르스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사, 이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네."
카슨은 그제야 오른손이 자유로워져서
방으로 들어갔다. 로댕은 문턱에 서 있는
코와르스키에게 다시 한마디하고는 문을
닫았다. 폴란드인은 다시 아까 그 자리로
돌아가서 몸을 숨겼다.
로댕은 카슨과 악수를 나누고는 가스
곳으로 안내했다. 6월도 중순인데 밖은
차가운 안개비가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북아프리카의 따뜻한 햇살에 길들여져
있었다. 가스 난로는 활활 타고 있었다.
카슨은 레인코트를 벗고 난로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전에 없이 지나칠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군, 마르크."
"아니, 나 자신을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야.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 몸
하나쯤은 어떻게든 처리할 수가 있어. 다만
서류를 처분할 시간을 벌어야만 하거든."
로댕은 창가에 있는 책상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 위에는 서류가방과 두툼한
서류철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빅토르를 부른 것도 그 때문이라네.
60초쯤의 시간은 벌어 줄 테니까. 그
사이에 저 서류를 처분할 작정이지."
"아주 중요한 것인 모양이군?"
"조금은."
표현은 대수롭지 않았지만, 로댕의
목소리에서는 중요함을 읽을 수 있었다.
"어쨌거나 르네를 기다리세. 11시 15분에
오라고 연락해 두었거든. 한꺼번에 둘이
나타나면 빅토르가 깜짝 놀라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서 말이야. 저 녀석은 자기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면 유별나게
흥분해 버리거든."
로댕은 왼쪽 겨드랑이에 우악스러운 콜트
권총을 차고 있는 빅토르가 흥분하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고는, 뼈만 앙상한
얼굴에 그로서는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다가가서 문틈에 입을 갔다대고 물었다.
"위?"
르네 몽클레아의 초조하고 긴장된
목소리가 들렸다.
"마르크,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로댕은 문을 열었다. 등뒤에서 거대한
폴란드인에게 떼밀린 몽클레아가 거기에 서
있었다. 빅토르는 왼손으로 경리 전문가의
두 팔을 붙잡고 있었다.
"가 있어, 빅토르!"
로댕은 경호원에게 말했다. 몽클레아는
풀려났다. 그는 겨우 안심이 된 얼굴로
방에 들어와서는 난로 옆에 앉아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카슨에게 볼멘 얼굴을
했다. 다시 문이 닫히고 로댕이
몽클레아에게도 사과를 했다.
악수했다. 그는 이미 외투를 벗어
두었는데, 몸에 걸치고 있는 주름투성이의
검은 회색의 양복은 싸구려였으며, 그
옷매무새 또한 어설퍼 보였다. 제복에
익숙해 있는 군인 출신들은 거의 전부가
그렇듯이 몽클레아나 로댕도 평복의
차림새가 빈말로라도 좋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주인으로서 로댕은 두 사람에게
팔걸이의자를 내주고 자신은 책상으로 쓰고
있는 테이블 앞에 있는, 등받이가 직각이고
앉는 자리가 딱딱한 의자를 갖다 놓았다.
그리고 침대 옆에 있는 캐비닛에서
프랑스제의 브랜디를 꺼내어 두 사람에게
치켜들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댕은 세 개의 잔에 가득 액체를 따라서,
자신들을 영접하는 의식 때문에 섬뜩해진
간을 데우려고 두 사람은 그 술을 마셨다.
등받이에 깊숙이 앉아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있는 르네 몽클레아는 땅달막하고
키가 작은 체구인데, 로댕과 마찬가지로
직업군인이며 육군의 토박이 같은
장교였다. 다만 그는 로댕과는 달리 실전
경험은 없었다. 군에 들어온 이후로 거의
사무직에서 지내 왔으며, 마지막 10년
동안은 외인부대의 봉급담당자로서
근무했다. 그리고 1963년 봄 이후로 OAS의
경리를 담당해 오고 있다.
앙드레 카슨은 민간인이다. 알제리에서는
은행의 지점장을 했으며, 지금도 그
자그마한 몸을 은행원다운 옷으로 감싸고
CNR의 연락담당자로 활동하고 있다.
둘 다 로댕과 마찬가지로, 각자 사정은
다르지만 OAS 내부에서는 사교성이 없는
편이다. 몽클레아에게는 19살이 되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마르세유 교회의
외인부대 기지의 급여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무렵 그의 아들은 일개 사병으로
알제리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게릴라의 포로가 되어 어떤 마을에
감금되었으나, 외인부대의 정찰 소대가 그
마을을 덮쳤을 때에는 시체가 되어 있었다.
시체는 그 마을에 묻혔다. 몽클레아 소령은
아들의 시체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 뒤 아들이 게릴라들에게 어떤 죽음을
당했는지 알게 되었다. 외인부대
내부에서는 어떤 비밀도 유지되지 않는다는
앙드레 카슨은 훨씬 더 깊은 사연이
있었다. 알제리 태생인 그는 일과 가정이
인생의 전부였다. 그가 근무하던 은행은
파리에 본점이 있기 때문에 알제리를
잃는다고 해도 실업자가 될 걱정은 없었다.
그러나 1960년에 거류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고향인 콩스탕틴에서
주동자의 일원으로 반란에 가담했다. 그
뒤에도 근무는 계속했었지만, 구좌수가
점점 줄어들고 사업가들이 재산을 정리하여
프랑스 본국으로 철수하는 것을 보고
알제리에서 프랑스의 존재가 마지막에
가까워 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육군부대의 반란이 있은 직후 드골 정권에
의한 새 정책과, 한 번도 본 적조차 없는
프랑스라는 조국으로 무일푼이 되어
처참한 모습에 격분하여 OAS의 한 부대를
안내하여 자기가 근무하는 은행에서 300만
구(舊) 프랑을 강탈케 했다. 그가 OAS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을 알아차린 젊은
출납담당직원이 그 사실을 본점에 보고했기
때문에 오랜 은행 근무도 거기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는 아내와 두 아들을
페르피냥의 처가에 맡기고 OAS에 가담했다.
프랑스 국내에 살고 있는 수천의 OAS
지지자들과 개인적인 안면이 있다는 것이
그의 존재가치였다.
로댕은 책상 앞에 앉아서 두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지만, 굳이
아무것도 물으려 하지는 않았다. 신중하게,
또한 논리정연하게 로댕은 지난 몇 개월
사례를 중심으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두
손님은 우울한 얼굴로 잔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하네. 지난 4개월 사이에 세 번이나 큰
타격을 받았어. 프랑스를 독재자의 손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계획도 좌절의 연속이야.
가장 최근의 예로는 사관학교 사건이
있었지. 어떻든 우리의 암살대원이 놈의
신변 가까이까지 접근한 사례는 두 번밖에
없었으나, 그 두 번 모두 계획 입안이나
실행면에서 기본적인 오류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어.
앙투안 아르그가 납치되어 우리는 가장
유능한 지도자 한 사람을 잃었네. 물론
바친 충절의 인사이기에 결코 입을 열
걱정은 없지만, 지금은 약물 등을 이용하는
고문 수단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입을 열 가능성이 매우
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조직 전체가
위험에 빠지게 되지. 현재 우리는 그런
상황하에 있다네. 조직에 관한 모든 것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야. 우리는 이제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새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어. 우리 세 사람이
뮌헨의 본부가 아닌, 이런 팡숑에 모인
것도 다 그 때문이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다고 해도 이것이
1년 전이었다면 사태는 지금만큼 나쁘지는
않았겠지. 1년 전이라면 한번 귀띔만
해놓아도 애국의 정열이 불타는 지원자들이
않아. 장 마리 바스찬 칠리가 처형당한
것으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걸세.
그렇다고 해서 나로서는 그 많은
지지자들을 책망할 수는 없어. 우리는
그들에게 결과를 약속했는데, 그것을
해내지 못했으니 그들에게는 구체적인
결과를 기대할 권리가 있어. 말로만
약속하는 게 아니고."
"알았네, 알았어.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하고 몽클레아가 물었다. 두
사람은 모두 로댕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몽클레아는 그의 처지로
보아 다른 누구보다도, 알제리에서 각처의
은행을 덥쳐 얻은 자금은 이미 조직의
유지를 위해 써버렸고, 우익 지지자인
사업가들로부터 오는 기부금도 날이 갈수록
와서는 대놓고 싫은 얼굴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었다. 또 암흑가와 연결된 루트도
나날이 그 힘이 약화되어 가고 자금을
숨겨둔 아지트는 차례차례 적의 습격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아르그가 체포된
뒤로는 지지자들 중 대부분이 지원의 손을
움츠리고 말았다. 바스찬 칠리의 처형은
이런 경향에 박차를 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로댕은 이야기가 방해받은 것도 개의치
않고 다시 계속했다.
"독재자를 제거하여 프랑스를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앞으로의 모든 계획이 새빨간
거짓말이 되며, 우리의 지상목표도 과거와
같은 방법으로는 사실상 그 달성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어. 우리는 그런
계획을 세우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프랑스판 게슈타포에게 발각되어, 애국의
열정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더 이상
희생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계획이
누설된다는 것은, 즉 우리의 조직 안에
배반자가 많다는 것을 말해 주는 거야.
배반자와 탈락분자들이 너무 많아.
정세는 말할 수 없이 나쁘네. 이런
생활을 이용해서 비밀경찰은 교묘하게 우리
조직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으며, 이제
와서는 최고 간부들의 회의내용조차 적에게
새어나가는 형편이야. 무엇을 결정해도
며칠 뒤에는 이미 적은 우리의 의도,
계획의 내용, 참가자의 이름까지도 완전히
알게 되는 거야. 이런 상황을 똑바로
본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지만,
어리석은 자의 낙원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어.
내 생각으로는, 독재자를 제거하는 첫째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 스파이 요원들의
조직망을 빠져나가 비밀경찰의 눈을
장님으로 만들고 놈들을 옴쭉달싹 못할
상태로 몰아넣는 방법이 꼭 하나 남아
있어."
몽클레아와 카슨이 흠칫 놀란 듯이
얼굴을 들었다. 방안은 정적으로 가득 차
있고, 때때로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로댕은 계속했다.
"나의 정세 분석이 불행하게도 틀리지
않는다면, 독재자를 없애는 일에 동참하고,
또 그럴 능력을 갖춘 인물들에 대해서는
적의 비밀경찰 또한 우리와 같을 정도로 잘
하나같이 프랑스 국내에서는 한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어. 움직이면 좋은
먹이감으로서 경찰뿐만이 아니고 수염이나
밀고자들에게도 쫓기게 돼. 남은 유일한
방법은 외부의 인물을 고용하는 것뿐이야.
그밖에는 없다고 나는 생각해."
몽클레아와 카슨은 처음 한 순간은
어이없는 듯이 로댕을 바라보았지만,
그러나 곧 그의 말을 이해한 것 같았다.
"외부인이라면 어떤 종류의 인물을
말하는 건가?" 하고 카슨이 겨우 입을
열었다.
"우선 외국인일 것, 이것이 첫째
조건이야. 다음으로는 OAS나 CNR의 요원이
아닐 것. 프랑스의 경찰에 알려져 있지도
않으며, 또한 그 기록에도 올라 있지 않을
있으며, 기록에 올라 있지 않은 인물은
말하자면 존재하지 않는 거야. 암살자가
미지의 인물이라면, 그는 적어도 놈들에게
있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는 셈이지.
그는 외국의 여권으로 이동하고, 일을
끝내면 자기 나라로 돌아가. 그렇게 되면
프랑스의 국민들은 즉시 반란을 일으켜
드골파의 반역분자들을 소탕하겠지. 그는
일을 끝내면 외국으로 탈출하겠지만, 그
탈출 자체는 별로 중요치 않아. 설령
잡히더라도 우리가 권력을 쥐면 즉시
석방시킬 테니까. 중요한 것은 그가 당국의
의심을 받지 않고 프랑스 국내에 들어오는
일이야. 이것만은 현재의 상태로선 우리
동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야."
두 사람은 침묵한 채 각자 생각에
차츰 그 형체를 갖추어 갔다. 몽클레아는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프로 청부살인자를 고용하자는
말이로군."
"그렇다네. 아무리 생각해도, 외부의
인물이 우리를 사랑하거나 애국심 때문에
그런 일을 맡을 리가 없으니 말일세. 이런
종류의 작전에 필요한 기술과 대담성을
찾자면 역시 진짜 프로가 아니고서는 안돼.
그리고 그런 인물은 돈을 위해서만 일하지.
많은 액수의 돈을 말일세."
로댕은 재빨리 몽클레아를 한번
쳐다보고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말일세, 그런 인물이 있기나
할까?" 하고 카슨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야기에는 순서가 있네. 비약해서는
안돼. 여러 가지 따져야 할 세세한 점도
있고 말이야. 우선 알고 싶은 것은, 이
아이디어에 원칙적으로 찬성하느냐 하는
점이야."
몽클레아와 카슨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로댕 쪽을 다시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로댕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것으로 원칙에는 동의한다는 첫번째
조건이 처리가 된 셈이야. 두 번째는
기밀유지에 대한 문제인데, 이것은 이
착상에 있어서 기본적인 조건이야. 내가
보기에 조직 안에서 이 사람만은 정보를
믿을 수 있는 인물은 점점 그 수가 줄고
있어. 아니, 그렇다고 내가 OAS나 CNR의
동지들을 배신자로 보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다만, 비밀이라는 것은 그것을
아는 인물이 많을수록 불안정해지지.
이것은 옛날부터 있어 온 상식이야. 이
아이디어를 성공시키는 데에는 절대적인
비밀이 요구되네. 따라서 알고 있는 사람의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는 이야기가
되지.
OAS의 내부에도 책임 있는 자리에 앉아
있는 스파이가 있어서 우리의 계획을
빠짐없이 비밀경찰에 통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까. 언젠가는 그 운이 다하기야
하겠지만, 여하튼 현재는 그런 무리들은
우리에게는 위험한 존재야. 거기다 CNR의
중요성이나 의미를 자각하지 못하는 자들도
있어. 무턱대고 신경질을 부리거나 겁을
집어먹기만 하고. 그런 무리들에게 우리가
고용하려는 인물의 존재를 섣불리
알려준다면 즉시 그 인물의 생명이 위험에
빠지게 돼.
르네, 그리고 앙드레, 자네들 두 사람을
이리로 부른 것은 우리의 대의명분에 대한
자네들의 충성심과 또한 입이 얼마나
굳은지를 믿고 있기 때문이야. 게다가
말일세, 르네. 자네는 프로 살인자가
요구할 것으로 생각되는 보수를 치르는
데에는 경리담당자로서 자네의 협력이
필요한 걸세. 그리고 앙드레 자네는
비상사태가 생겼을 경우 그 살인자를
지원할, 소수의 믿을 수 있는 인물을
그러나 계획의 상세한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세 사람의 가슴속에 묻어 두어야만해.
그래서 말일세, 이 아이디어의 계획 입안,
실행, 보수의 지불 등, 그 모두를 한 손에
담당할 3인위원회를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다시 침묵. 이윽고 몽클레아가 입을
열었다.
"OAS나 CNR의 간부회와도 일체 의논을
하지 않겠다는 거지? 귀찮게 될지도
모를걸."
"귀찮고 뭐고, 처음부터 전혀 알리지
않을 거니까 문제도 없을 거야."
로댕은 조용히 말했다.
"가령 이 아이디어를 그들에게
설명한다고 하면, 그 때문에 총회를
끌어, 수염 쪽에선 무엇 때문에 열린
총회인지 필사적으로 알아내려고 하겠지.
그러면 어느쪽인가의 간부회의에서 정보가
새어나갈 가능성도 있고, 또 간부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서 설명한다고 해도
원칙적인 동의를 얻기까지 몇 주일
걸릴지도 몰라. 그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번 계획을 털어놓으면 그 뒤의 계획 입안
단계에서도 하나하나 자세한 것까지 알고
싶어할 게 뻔해. 그 무리들은 묘한 체면이
있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으면 기분이
나쁜 거야. 그리고는 술이라도 취하게 되면
섣불리 입 밖에 내고 말지. 단 한마디만
내뱉어도 작전이 위험해질 수가 있다네.
따라서 그 친구들에게 알린다는 것은
백해무익이야.
OAS와 CNR의 간부회의 동의를 얻는다고
해도, 계획 수행에는 조금도 보탬이 될
것도 없으며, 만에 하나 실패했을 때의
타격은 조직에게는 치명적인 것이 돼.
더구나 30명 가까운 사람이 계획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것은 실패의 위험성이 그만큼
많아지는 것도 되고. 그러나 우리 셋만으로
일을 끌고 나간다면, 설령 실패해도 사태가
지금 이상 더 나빠지지는 않겠지. 적의
경계가 강화되고 보복의 희생자도
나오겠지만, 그것은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니까. 그리고 성공한다면 우리가
권력을 잡게 될 것이며, 그 단계가 되면
뭐라고 트집을 잡을 녀석도 없을 거야.
독재자를 제거한 방법이 어떤 것이었나
하는 등등 오히려 아카데믹한 연구과제가
지금 설명한 아이디어의 계획입안자 겸
조직자 겸 실시자로서 내게 협력해
주겠나?"
또다시 몽클레아와 카슨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로댕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이렇게
만난 것은 3개월 전 아르그가 체포된 뒤로
처음 있는 일이다. 아르그가 지도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에 로댕은 언제나
조용히 그늘에 숨어 있었지만, 이젠 마침내
강력한 리더로 부상한 느낌이었다.
지하운동과 재정의 두 책임자는 남모르는
감명을 받았다. 로댕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면서
미소지었다.
"좋아. 그럼, 구체적인 이야기로
아이디어는 바스찬 칠리가 처형되었다는
뉴스를 라디오에서 듣던 날 문득 머리에
떠올랐어. 그때부터 줄곧 그런 인물을
찾아다녔지. 아주 힘든 일이더구먼. 그런
녀석들은 자기선전 같은 것은 안 하니까
말일세. 여하튼 3월 중순부터 계속
찾아왔는데, 그 결과는 이 안에 정리되어
있어."
그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세 개의
서류철을 들어올렸다. 몽클레아와 카슨은
다시 시선을 주고받으면서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입은 열지 않았다. 로댕은
계속했다.
"먼저 이 자료를 검토해 보기 바라네.
그런 다음에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를
의논하세. 자료는 한 통씩밖에 없으니까
그는 클립에서 세 통의 얇은 서류철을
꺼내어 한 통은 몽클레아에게, 또 한 통은
카슨에게 건네주고 자기도 나머지 한 통을
손에 들고 있었으나, 그것을 읽으려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세 통의 자료 내용을 모두
외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긴, 읽는다고
해도 별로 많은 분량은 아니었다. 로댕은
'간단한' 자료라고 말했지만, 그 내용은
기가 막힐 정도로 정확했다. 먼저 카슨이
건네받은 한 통을 다 읽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로댕의 얼굴을 보았다.
"이게 전부인가?"
"그런 인물은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그럼, 이번에는 이것을 보게."
로댕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서류를
카슨에게 건네주었다. 몇 분 뒤에
그것을 로댕에게 돌려주었다. 로댕은
카슨이 읽은 한 통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번에도 몽클레아가 먼저 다 읽었다. 그는
로댕을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말이야...... 이것만으로는
뭐라고 말할 순 없지만, 이런 정도의
인물이라면 얼마든지 있을 것 같은데. 본래
프로 살인자란 어차피 돈 때문이니까 ---
."
카슨이 가로막았다.
"좀 기다려, 이건 좀 달라."
그는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서 거기에
있는 세 문단 쪽으로 부지런히 시선을
옮겨갔다. 그리고 그것을 다 읽고는 서류를
접고서 로댕을 바라보았다. OAS의 리더는
자기의 견해를 조금도 입 밖에 내지
몽클레아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카슨에게는 세 통째를 건네주었다. 두
사람이 4분 뒤에는 모두 다 읽었다.
로댕은 서류를 클립으로 꽂아서 책상
위에 도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등받이가
직각인 식탁용 의자를 반대방향으로 난로
가까이 갖다 놓고서 등받이 위에 두 팔을
올려놓고 말을 타듯 앉았다. 그는 그런
자세로 두 동지의 표정을 살폈다.
"무엇보다도 시장이 좁다. 이런 종류의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은 많을지도
모르지만, 어느 경찰 기록에도 오르지 않은
인물은 거의 없어. 일류라면 어느 기록에도
오르지 않았겠지만. 방금 읽어 본 세 사람
말인데, 편의상 여기서는 독일인,
남아프리카인, 영국인이라고 부르기로
카슨은 어깨를 움츠렸다.
"내게 묻는다면 의논할 여지도 없어.
지금 그 자료로 보아서,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한다면 영국인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해."
"르네는......?"
"나도 동감일세. 독일인은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아.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쫓기는
나치의 잔당을 살려내기 위해서 실행한 몇
건의 예를 빼버리면, 정치적인 일을 하지도
않았더구먼. 게다가 유태인에 대한 그의
감정은 개인적인 것이니까, 진정한
의미로는 프로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남아프리카인 말인데, 루문바 같은
조그만 나라의 흑인 정치가를 없애는
일이라면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프랑스
힘에 부칠 거야. 하지만 그 영국인은
프랑스어도 유창하게 할 수 있을 것도
같고."
로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결론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었네.
자료를 정리하는 단계에서 이미 두드러져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앵글로색슨의 자료는
확실한가?" 하고 카슨이 물었다.
"정말로 그런 일을 하긴 했나?"
"실은 나도 그의 경력을 알고 놀랐어.
그래서 시간을 더 들여가면서 조사해
보았다네. 절대적인 증거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말해서 하나도
없어. 그러나 증거가 있다면 오히려 솜씨가
없다고 보아야겠지. 어느 나라에 가도
버리거든. 어쨌든 단지 소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야.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그는 눈처럼 깨끗해. 설령 영국 정부가
그를 리스트에 올려놓았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다는 정도가 고작일
거야. 따라서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의
파일에도 올라 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영국 정부는 설령 SDECE로부터 공식적인
조회가 가도 그런 인물에 관한 것은 가르쳐
주지 않겠지. 자네들도 알고 있듯이 영국과
프랑스는 견원지간이야. 영국 당국의
관계자는 작년 1월, 조르주 비드가 몰래
영국에 가 있을 때에도 프랑스에 대해서는
계속 침묵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거야. 어떻든, 그 영국인은 이런 종류의
일에는 꼭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그게 뭔데?" 즉시 몽클레아가 물었다.
"즉, 보수가 비싸다는 점이야. 하긴 그와
같은 프로라면 그것이 당연하기는
하겠지만. 돈 사정은 어떤가, 르네?"
몽클레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좋지 않아. 최근 지출은 조금 줄었지만,
아르그 사건 이후로 CNR의 선생들이 모두
싸구려 호텔로 숨어들었다네. 일류
호텔이나 TV 인터뷰에는 완전히 흥미를
잃은 것 같더군. 하긴 지출이 줄기는
했지만, 수입 쪽도 엉망이야. 자네도
언급했듯이 지금 어떻게든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자금부족으로 조직이 깨어지고 말
걸세. 사랑과 키스만으로 조직을 운영할 순
없으니까."
로댕은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아야만 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얼마나
필요한지를 모르고 모금할 수도 없고 ---
."
"그러니까 말이야 --- ." 하고 카슨이
이야기를 떠맡았다. "먼저 그 영국인과
접촉해서 일을 맡아 줄 것인지, 맡아 주면
보수는 얼마나 되는지 그것을 물어
봐야겠지."
"자네 말이 맞네. 그럼, 당장 준비를
갖추고 싶은데, 이의는 없나?"
로댕은 두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댕은 흘끗
시계를 보았다.
"지금 1시가 조금 지났어. 런던에
잠입시켜 놓은 에이전트에게 전화해서 그
영국인과 접촉하여 이리로 와주도록 손을
먹은 뒤에 여기서 만날 수 있어. 여하튼
그가 오고 안 오고는 에이전트에게서 곧
연락이 오겠지. 옆방을 둘 잡아놓았으니까
쓰도록 하게. 따로따로 흩어져 있는
것보다는 한곳에 모여서 빅토르의 보호를
받는 게 안전하니까.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조치야. 조심하는 것 이상은 없어."
"결국 이야기가 이렇게 낙착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렇더라고
준비가 꽤 잘되어 있군."
카슨은 멋지게 로댕에게 당할 듯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로댕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의 정보를 모으는 데에도 꽤
힘들었으니까,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짐작하고 있었어. 게다가 앞으로는
바에야 빨리 움직이는 것이 제일이니까."
그는 일어났다. 두 사람도 따라서
일어났다. 로댕은 빅토르를 불러, 밑에
내려가서 65호실과 66호실의 열쇠를
받아오라고 명령했다. 빅토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는 몽클레아와 카슨에게
말했다.
"나는 빅토르를 데리고 중앙우체국에
전화를 걸러 갔다가 올 테니까, 그 동안
자네들은 둘이서 어느 한 방에 모여 절대
밖에 나가지 않도록 하게나. 물론 방문도
잠그고 있게. 내가 돌아오면 문을 노크해서
신호를 하겠네. 세 번 두드리고 멈췄다가
다시 두 번이야. 알겠지?"
이 신호는 '알제리 프랑세즈(프랑스의
알제리)'라는 말의 '3 플러스 2'라는
반대하는 파리 시민들이 과거 이 리듬으로
클랙슨을 울려서 대통령에 항의했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 ."
로댕이 말을 계속했다. "총을 가지고
있나?"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로댕은
책상으로 걸어가 호신용으로 간직해 두었던
짤막한 모양의 MAB(구경 9--)를 꺼냈다.
그는 탄창을 살펴보고는 찰칵 하고 그것을
총 뒤에 꽂고서 몽클레아에게 내밀었다.
"사용법은 알고 있지?"
몽클레아는 끄덕이며, "물론." 하고
말하고는 그것을 받아쥐었다.
빅토르가 와서 두 사람을 몽클레아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자, 하사, 일을 해야지."
그날 저녁때 황혼의 어스름이 밤의
어둠으로 바뀌기 시작할 무렵, 브리티시
유러피언 항공(BEA)의 뱅거드기가 런던에서
빈의 슈바하트 공항에 도착했다.
꼬리날개에 가까운 뒤쪽 객실의 창 옆
좌석에 몸을 파묻은 그 금발의 영국인은
뒤로 스쳐가는 진입등의 불빛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향해
내려갈 때, 이대로 가다가는 활주로 못
미쳐서 있는 언더슈트 에리어의 풀밭에
착지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될 정도의
속도와 각도로 진입등이 다가오는 것을 볼
때면 그는 언제나 전율 같은 환희를
느꼈다. 최후의 순간에 어슴푸레한 조명
있는 번호판, 그리고 진입등이 차례로
뒤쪽으로 사라지며 검고 매끄러운 콘크리트
활주로가 나타나더니 바퀴가 마침내
내려앉는다. 이 착륙이라는 작업의
정밀함이 그의 감각에 작용하는 것이다.
그는 정밀성을 좋아한다.
그의 옆에 앉아 있는, 런던의 피카딜리에
사무실을 가진 프랑스 정부 관광국 런던
지국의 젊은 프랑스인이 초조하게 그의
표정을 살폈다. 점심 휴식시간에 전화를
받은 뒤로 그는 신경증에 걸린 듯이 계속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1년쯤 전, 휴가로
파리에 돌아갔을 때 자원해서 OAS에
들어갔으나 그대로 런던에서 근무를
계속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 그 뒤
아무런 명령을 받은 게 없었다. 편지나
그것이 '오, 피에르!'라고 시작하는 명령일
경우에는 즉시, 그리고 정확히 그 명령에
따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6월
15일인 오늘까지 아무런 연락이나 명령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교환에게서
빈으로부터 지명전화가 걸려 왔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그때 교환은 프랑스에 있는
같은 이름의 고장과 구별하기 위해서
'오스트리아'라고 덧붙였다. 누구에게서 온
걸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수화기를
든 그의 귀에, "오, 피에르!" 하고 부르는
소리가 뛰어들어왔다. 그것이 자기의
암호명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는 데에는 몇
초가 걸렸다.
생겼다고 꾸며대고 사무실을 조퇴하여
사우스 오드리 가(街)의 외곽에 있는
아파트를 찾아가서, 노크 소리에 문을 연
영국인에게 말을 전했다. 그 영국인은 세
시간 이내에 빈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라는
전갈에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는 차분한
태도로 여행용 가방에 일용품을 챙기고,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히스로 공항으로 갔다.
프랑스의 젊은이는 현금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여권과 수표책밖에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영국인은 그것을
알고도 아무 말 없이 자기 돈을 꺼내서
왕복표를 두 장 샀다.
그 뒤로 두 사람은 거의 대화가 없었다.
영국인은 빈의 어디로 가는지도, 누구를
만나는지도, 또 어떤 용건인지도 일체 묻지
그가 물어 와도 자기가 모르고 있으니
대답할 수도 없었다. 그가 받은 지시라고는
런던 공항에서 빈으로 전화를 걸어서 몇 시
도착 BEA기에 타는지를 보고하는 것, 단지
그것뿐이엇다. 그리고 빈에 전화한 그는
슈베하트 공항에 도착하면 종합안내소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런 그믐밤에
홍두깨 같고 수수께끼 같은 지시나 내용이
그를 안절부절못하게 했으며, 옆에 있는
영국인이 침착하게 잘 견디는 것이 그것을
더욱 부채질했다.
공항 건물의 메인 홀에 있는 안내소에서
그는 귀여운 오스트리아 아가씨에게 자신의
이름을 댔다. 그녀는 등뒤에 있는 선반에서
메모지를 찾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
찾으라'고만 써 있었다. 그는 홀 한쪽
구석에 죽 설치되어 있는 공중전화 쪽으로
갔다. 그때 갑자기 영국인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환전'이라는 글씨가 보이는
부스를 가리켰다.
"동전이 필요할 텐데요?" 하고 그는
유창한 프랑스어로 말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전화를 무료로 걸게
해줄 정도로 인심이 후하지는 않소."
프랑스인은 얼굴이 화끈해서 환전
카운터로 걸어갔다. 영국인은 벽가에 놓인,
등받이가 있는 긴의자 중 하나에 앉아서
영국제 킹사이즈의 필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얼마 뒤에 그의 안내원이 몇 장의
오스트리아 지폐와 동전 한줌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공중전화 코너에 가서 빈
돌렸다. 전화에 나온 슐츠 씨는 그에게
간단명료하게 지시했다. 겨우 몇 초 사이에
전화는 끊겼다.
젊은 프랑스인은 긴의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영국인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지금 곧 갑니까?"
"예, 안내하겠습니다."
그 자리를 떠나려고 프랑스인은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동그랗게 말아서
바닥에 버렸다. 영국인은 그것을 주워
가지고 다시 펴서는 라이터 불을 켜서
갖다댔다. 그것은 순식간에 타오르고, 품위
있는 수에드 가죽(새끼 양이나 소의
소가죽을 부드럽게 보풀린 가죽) 구두로
문질러 검은 재가루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세웠다.
시가지의 중심부는 빛과 차의
홍수였으며, 택시는 40분이나 걸려서 겨우
팡숑 크라이스트 앞에 닿았다.
"여기서 헤어져야겠습니다. 당신을
여기까지 안내하고, 저는 이대로 타고
가다가 어디 다른 곳에서 내리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당신은 64호실로 가십시오.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영국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택시에서
내렸다. 운전사가 궁금한 얼굴로
돌아다보았다.
"계속 갑시다." 하고 프랑스인이 말했다.
택시는 이윽고 거리에서 사라졌다.
영국인은 팡숑 크라이스트의 출입문 위쪽에
박혀 있는, 고딕체로 거리 이름을 써넣은
번지의 숫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반쯤 피운
담배를 버리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프런트 직원은 출입문이 삐걱거렸을 때
등을 바깥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영국인은
카운터에 기척도 없이 다가가서 곧바로
층계 쪽으로 갔다. 프런트 직원이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으려는 순간, 처음 보는
방문자는 흘끗 그를 보면서 고용인에게라도
대하듯 가볍게 끄덕이고는 마치 늘 그래 온
것처럼, "구텐 아벤트.(안녕하시오.)" 하고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엉겁결에 그는
그렇게 대답해 버렸다. 그리고 그의 그
말이 끝났을 때 영국인은 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었는데 층계를 한꺼번에 두 개씩
올라서 이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층계를
훑어보았다. 가장 안쪽에 있는 것이
68호실이다. 그는 복도를 따라 방의 수를
세어서, 방 번호는 볼 수 없어도 64호실로
생각되는 문에 시선을 멈추었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 64호실
출입문까지의 거리는 대략 7미터이며,
복도의 오른쪽에는 그 사이에 다른 방의
문이 두 개 있고, 왼쪽 벽은 중간에 움푹
들어간 곳이 있으며, 싸구려 커튼 레일에
매달린 붉은 빌로드 천이 그 앞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는 벽의 움푹 들어간 곳을 주의해서
살폈다. 커튼 자락 끝은 바닥에서 10cm쯤
위에 있었으며, 그 사이로 검은 구두의
앞부분이 조금 보였다. 영국인은 뒤돌아서
현관 홀로 내려왔다. 이번에는 프런트
않고는 어쩐지 어색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영국인이 먼저
말했다.
"전화로 64호실을 불러 주겠소?"
그는 잠깐 손님의 얼굴을 살펴보고는
말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몇 초 뒤에 그는
조그만 교환대에서 손님 쪽으로 몸을 틀어,
카운터에 놓여 있는 전화의 수화기를
집어서 손님에게 건네주었다.
"15초 이내에 그 고릴라를 벽의 그
자리에서 치워 주시오. 싫다면 나는 이대로
돌아가겠소."
금발의 영국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다시
층계를 올라갔다. 층계 위에서 그는
64호실의 문이 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쪽을 잠깐 보더니, 이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빅토르." 하고 벽의 움푹
들어간 곳을 보고서 말했다. 거구의
폴란드인이 나타나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괜찮네. 이분을 기다리고 있었어." 하고
로댕이 말했다. 코와르스키는 기분이 좋지
않은 얼굴이었다. 영국인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로댕은 그를 침실로 안내했다. 그 방은
징집위원회 사무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책상 위에 서류가 흩어져 있었다. 테이블
뒤에, 그 방에는 하나밖에 없는, 등받이가
직각인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양옆에는
다른 방에서 가져온 비슷한 모양의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고, 거기에는 몽클레아와
어린 눈으로 손님을 바라보았다. 책상
앞에는 의자가 놓여 있지 않았다. 영국인은
주위를 둘러보고 팔걸이의자를 발견하자,
그것을 책상 쪽으로 돌려 놓았다. 로댕이
빅토르에게 새 지시를 내리고 입구의 문을
잠그고서 방으로 들어오니, 영국인은
팔걸이의자에 느긋하게 앉아서 몽클레아와
카슨을 마주 쳐다보고 있었다. 로댕은 책상
뒤에 자리를 잡았다.
몇 초 동안 그는 런던에서 온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사람을 보는 눈에 자신이
있었는데, 영국인의 인상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금발의 그 손님은 키가
180cm, 나이는 30은 넘어 보였고,
운동선수처럼 근육에 탄력이 있었다. 그
몸은 유연성이 있었으며, 햇볕에 그을린
의자 팔걸이에 두 손을 올려놓고 여유 있게
앉아 있는 모습이 로댕의 눈에는 자제력이
뛰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은
로댕의 마음에 걸리는 면을 가지고 있었다.
로댕은 겁쟁이의 부드럽고 촉촉한 눈을,
정신병자의 초점이 뚜렷하지 않은 굼뜬
눈을, 병사의 조심스러운 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국인의 눈은 밝고
맑으며, 아무 거리낌없이 솔직하게 마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안구의
홍채(紅彩)는 회색으로 어둡고, 겨울날
아침의 유백색 안개처럼 흐려 있다. 그리고
그 눈에서는 아무 표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로댕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데
몇 초의 시간이 걸렸다. 그 연막의
그늘에서 어떤 생각이 움직이고 있어도
로댕은 거기에서 어떤 불안을 느꼈다.
조직과 질서 속에서 만들어진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로댕도 예견할 수 없는 것, 즉
컨트롤할 자신이 없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소." 하고
그는 무뚝뚝하게 말을 꺼냈다. "먼저
나부터 소개를 하겠소. 나는 마르크 로댕
대령이오."
"알고 있소." 영국인이 곧바로 말했다.
"당신은 OAS의 작전주임이지. 르네
몽클레아 소령, 당신은 경리 책임자고.
그리고 당신은 프랑스 국내에서 지하운동의
책임을 맡고 있는 앙드레 카슨."
그는 정확히 지적하면서 세 남자를
차례차례 쳐다보고는 담배를 꺼내어
붙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카슨이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꽤나 잘 아시는 것 같군."
영국인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첫번째
연기를 한 모금 뿜어냈다.
"여러분, 터놓고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는 당신네들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고, 당신네들도 내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소. 우리 둘 다 상식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소. 그런데
당신네들은 당국에 쫓기고 있지만, 나는
아무런 감시도 받지 않고 어디든지
자유롭게 갈 수가 있소. 또, 나는 돈을
위해서 일하고, 당신네들은 이상을 위해서
일하지. 이런 근본적인 차이는 있어도,
구체적인 일에 들어가면 우리는 둘 다
가면을 쓰고서 상대방을 견제할 필요는
없소. 당신네들이 나에 대해서 여러 가지
물으며 돌아다녔던데, 그런 것은 반드시
조사당하는 사람의 귀에 들어오게
마련이라오. 그래서 당연히 나도 누가 나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졌소.
그것이 내게 복수하려는 사람인지, 아니면
나를 고용하려는 사람인지 그 부분을
분명히 알아야만 하니까. 그래서 내게
흥미를 가지고 있는 조직의 이름을
알아내고는 곧바로 대영박물관에 이틀간
다니면서 프랑스 신문의 파일을 열람했소.
그것을 통해 당신네 조직에 대해서는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소. 그래서
오늘 당신네 부하가 찾아왔을 때 조금도
놀라지 않았던 거요.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내게 무엇을 해
달라는 것인가 하는 점이오."
몇 분 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카슨이나
몽클레아는 먼저 말하라는 듯이 로댕을
보았다. 공수부대 대령과 청부살인자는
한동안 서로를 말없이 마주보았다. 폭력을
일삼는 인간을 잘 알고 있는 로댕은 눈앞에
앉아 있는 사나이야말로 자기네들이 원하는
자질과 재능을 갖춘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 순간부터 그의 눈에
몽클레아와 카슨은 가구의 일부로밖에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미 충분한 연구를 한 모양이니 우리
조직을 지탱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념에
대해서는 여기서 새삼스럽게 언급하지
않겠소. 방금 당신은 그것을 이상이라고
독재자에게 지배당하고 있소. 그는 조국에
상처를 입히고, 그 명예를 더럽혔다고
믿소. 그리고 또한 그의 정권을 쓰러뜨리고
프랑스를 진정 프랑스 국민에게 돌려주기
위해서는 먼저 그를 없애야 한다는 것도
굳이 설명하지 않겠소. 우리는 이미 6번에
걸쳐서 그의 암살을 계획했으나, 그 중에서
세 번은 계획 단계에서 탄로가 나고, 한
번은 실시 전날 적이 알아차렸고, 나머지
두 번은 기습에는 성공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소.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프로를 고용해서
이 일을 시켜 볼까 하는 생각을 현재로서는
갖고 있소. 그러나 소중한 자금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소. 그러니까 우선 알고 싶은
것은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하는
로댕은 교활하게 카드를 늘어놓았다.
마지막 질문 --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 을 받고 영국인의 회색
눈에 어떤 표정이 얼핏 지나갔다.
"암살자의 총탄으로부터 완전히 보호되어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소." 하고
영국인은 말했다. "더구나 드골은 대중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기회가 아주
많소. 그렇기 때문에 그를 죽일 수는 물론
있소. 다만 문제는 달아날 기회가 적다는
점이지. 대중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독재자를 없애는 데는 자기의 생명을
던지는 광신적인 인물이 있어야 하는
법이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 ."
그는 비꼬듯 덧붙였다. "당신네들은 아직
그런 인물을 만들어 내지 못했소. 퐁 드
생명을 희생시켜서라도 기습을
성공시키겠다는 결의를 가진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한 거요."
"아니오, 애국심에 불타는 프랑스인들
중에는 지금이라도 -- ."
카슨이 얼굴이 벌개져서 입을 열었지만,
로댕은 손을 흔들어 그것을 막았다.
영국인은 카슨을 한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프로는 어떻소?" 하고 로댕이
재촉했다.
"프로는 일시적인 열광만 가지고는
행동하지 않소. 그렇기 때문에 냉정할 수
있고, 또 기본적인 실수를 저지를 위험이
비교적 적다고 할 수 있소. 또 그는
이념이나 주의에 좌우되지 않기 때문에
최후의 순간에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좋은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망설이지도 않소. 일에는 우발적인 착오가
따르기 마련이지만, 프로는 그것을 끝까지
계산하기 때문에 성공할 가능성이 어느
누구보다도 높다고 할 수 있소. 그러나
프로는 임무를 달성하고, 더구나 그 일에
아무런 희생을 치르지 않고 도망칠 수 있는
계획이 세워질 때까지는 절대로 행동에
옮기지 않소."
"독재자를 살해하고 무사히 도망칠 수
있는 계획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오?"
영국인은 몇 분 동안 조용히 담배만
피우면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칙적으로는 가능하오. 충분한 시간이
있고 준비가 완벽하다면 틀림없이
거요. 다른 목표와 비교하면 훨씬 힘들지."
"어째서?" 하고 몽클레아가 물었다.
"드골 쪽에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오. 개개의 계획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전반적인 의도 그 자체를
항상 경계하고 있으니까. 한 나라를 대표할
만한 거물은 모두 보디가드나 경비요원을
갖추고 있지만, 오랫동안 암살의 위험을
느끼지 않게 되면 자연히 조사가 형식적인
것이 되고, 경비하는 방법도 기계적이 되어
무엇보다도 경계심 그 자체가 허술해지고
맙니다. 그런 때에 암살자가 나타나면 단
한 발의 총탄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것이었기에 패닉(갑작스런
공포)이 일어납니다. 암살자는 그 틈에
도망치는 거요. 그러나 드골의 경우엔
없고, 또 경비도 기계적인 것이 아니오.
설령 암살자의 총탄이 그에게 명중했다
하더라도 경비진은 어리석은 패닉은
일으키지 않고 즉시 암살자의 체포에
들어갈 거요. 그러니까 그것이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현시점에서는 가장
어려운 모험 중 하나가 아니겠소? 상대방은
당신네들이 세운 계획을 모두 실패로
돌아가게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계통을
통한 시도 또한 모두 저지하고 있으니까."
"우리들이 만일 프로 살인자를 고용할
경우에는 -- ." 하고 로댕이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 영국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그것을 가로막았다.
"프로를 고용하지 않을 수 없을 거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오? 순수한
사람이 아직도 많이 있소, 우리의 조직
안에는."
"물론이오. 확실히 와탱과 키리체가 있긴
하지." 하고 금발이 대꾸했다. "그리고
드겔드레나 바스찬 칠리 같은 인물이
하나둘이 아닐 거요. 그러나 당신네들이
나를 이리로 부른 것은 일부러 정치적인
암살 이론에 대해 의논이나 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고, 방금 한 이야기 중에도
나왔듯이 암살 지원자가 갑자기 동이
나버렸기 때문도 아니오. 당신네들의
조직에 비밀경찰의 첩자들이 다수 침투해
들어와서 최고의 기밀사항이라도 금방
새어나가기 때문이며, 더구나 당신네 조직
요원들은 모두가 다 전 프랑스 경찰이
얼굴을 알고 있으니 아무래도 외부 인물이
그것은 분명히 옳은 생각이오. 외부 인물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남은
문제는 누가 얼마를 받고 맡을 것이냐 하는
것뿐이지. 적어도 나에 대한 것은 충분히
검토할 시간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어떻소?"
"드골을 암살해 주겠소?"
로댕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말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질문은 방안 가득히
긴장을 감돌게 했다. 영국인의 시선이
로댕의 얼굴로 다시 갔지만, 그 눈엔
아무런 표정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럴 수야 있지. 하지만 비쌉니다."
"얼마?" 하고 몽클레아가 물었다.
"먼저 이해해 주시기 바라는 것은,
이것은 일생에 한 번이라는 점이오. 이
없소. 체포되지 않고, 더구나 정체도
탄로나지 않고 도망칠 수 있는 기회는 아주
적소. 이 한 번의 일로 일생 동안 일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고, 드골파의
복수로부터 나를 지키는 데 필요한 돈을
받지 않고서는 수지가 맞지 않소."
"우리가 권력을 잡으면 -- ." 하고
카슨이 끼어들었다. "당신에게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 ."
"보수는 현금으로 받겠소." 영국인은
그의 말을 가로막듯이 그렇게 말했다.
"받은 착수금으로 먼저, 나머지 반은
일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총액은?" 하고 로댕이 물었다.
"50만."
로댕은 몽클레아 쪽을 보았다.
"그건 거금인데. 50만 신
프랑이라면......"
"달러요." 영국인은 태연하게 고쳐
주었다.
"50만 달러?" 몽클레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당신, 돌지
않았소?"
"아니오." 조용히 영국인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프로로서는 최고요. 따라서
보수도 제일 비싸지."
"훨씬 싼값으로도 프로를 고용할 수
있소."
카슨은 비꼬아 주었다. 하지만 영국인은
감정 없는 소리로 대꾸했다.
"물론 더 싼값에 고용할 수 있는 프로도
있을 거요. 그러나 그런 자들은 착수금만
대한 변명이나 하거나, 어쨌든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할 거요. 최고의
프로를 고용하면 결과는 보장될 것이고,
돈을 낸 보람도 있을 겁니다. 보수는 50만
달러. 그 이하로는 이야기가 안되겠소.
당신네들은 프랑스를 수중에 넣으려 하고
있소. 50만 달러라면 오히려 나라를 아주
싸게 평가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지."
이 대화를 말없이 듣고 있던 로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에게는 50만 달러나 되는 현금이
없소."
"압니다." 영국인은 표정도 바뀌지
않았다. "내게 일을 부탁하고 싶으면
어디서든 돈을 구해야겠지. 내게는 이
끝냈으니까, 앞으로 몇 년 놀면서 지낼
정도의 돈은 있소. 다만 이 시점에서
은퇴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 들어온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매력적이오. 그러나
그래봤자 당신네가 얻게 될 보수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지 -- . 당신네들 쪽에서는
프랑스라는 대국을 수중에 넣는 것이니까.
그런데도 당신네들은 내 요구를 듣고
꽁무니를 빼고 있소. 애석한 일이지만, 돈
마련이 안된다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당신네들 손으로 그 일을 해보는 수밖에
없겠소. 어차피 모든 계획이 당국에 의해서
수포로 돌아가게 되기 십상이지만."
그는 담배를 끄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로댕이 먼저 일어났다.
"앉으시오. 돈은 틀림없이 준비하겠소."
"좋소. 하지만 그 밖에 또 조건이 있소."
"말해 보시오."
"당신네들이 외부 인물을 고용하려는
것은 당신네들의 비밀이 계속 경찰에게
새어나가기 때문이오. 그래서 묻는 것인데,
외부 인물을 고용한다는 아이디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조직 내부에 몇이나 있소?"
"지금 여기 있는 세 사람뿐이오. 바스찬
칠리가 처형되던 날 이 아이디어가
생각나서 그 뒤로 조사도 일체 내가 혼자서
해왔소. 여기 세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해주시기
바라겠소. 절대로 다른 데로는 새나가지
않게 해주시오. 이 모임의 기록이나 자료
같은 것은 모두 불태워 주십시오. 당신네들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저는 2월에
아르그 대령도 그런 꼴이 되었지만,
당신네들 중 하나라도 체포될 경우에는
즉시 일에서 손을 떼도록 해주어야겠소.
그러니까 당신네들은 일이 끝날 때까지
어디고 안전한 곳에 가서 엄중한 경계 속에
숨어 있으란 말이오, 아시겠소?"
"좋소, 그 밖에는?"
"일을 실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계획을 세우는 것도 모두 내가 혼자
하겠소. 자세한 것은 누구에게도,
당신네들에게도 말하지 않겠소. 다시
말하자면, 지금부터 나는 행방불명이 되는
거요. 일체의 연락을 끊겠소. 런던의
주소나 전화번호를 당신네들이 알고 있긴
하지만, 행동으로 옮길 준비가 되는 대로
그 동안에 긴급사태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지금의 주소로 연락해 주시오. 하지만 아주
중대한 사항일 경우에 한해서만 하겠다고
약속해 주시오. 그리고 스위스 은행의
이름을 알려 주고 가겠소. 그 은행에서
25만 달러의 입금통지가 오는 대로 행동을
시작하겠소. 그러나 그때까지 내 준비가
모두 끝나지 않았을 경우에는 다소
늦어질지도 모르겠소. 어쨌거나 나는 내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행동을 시작할 거요.
당신네들 형편에 따라서 간섭당하지도
않겠소, 물론 지시도 받지 않겠소,
좋습니까?"
"이의 없소. 하지만 정부 안에 우리의
요원들이 숨어들어가 있는데, 그들의
정보수집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오.
있으니까."
영국인은 잠시 이 제안에 대해서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알겠소. 그럼, 그쪽의 준비가 끝나는
대로 전화번호만 하나 편지로 알려 주시오.
프랑스의 어디에서도 즉시 걸 수 있는
파리의 전화가 좋겠소. 대통령 신변의 경비
상태에 관한 정보가 필요할 때에는 그
전화번호를 돌리겠소. 물론 그때는 내
거처를 가르쳐 주지는 않을 거요. 그리고
전화의 주인에게도 내 임무를 알리지
마시오. 내가 OAS를 위해서 일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르면 모를 수록 좋기 때문이오.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둘수록
말이오, 중요한 내부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고위급으로 한정할 필요가 있소.
신문에서도 알 수 있는, 휴지 같은 정보는
원치 않으니까. 이 점도 동의하시는
거지요?"
"좋소, 알겠소. 그러니까 당신은 동료든
다른 것이든 필요없고, 혼자서만
행동하겠다는 거로군. 자신의 머리만을
믿고, 서류 위조 같은 것은 어쩔 셈이오?
우리 조직에는 우수한 위조 전문가가
둘이나 있는데."
"나 스스로 해결하겠소."
카슨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독일 점령하의 레지스탕스와 같은
조직을 가지고 있는데, 원한다면 그 조직을
총동원해서 당신을 돕겠소."
힘으로 행동하겠소. 그것이 나의 최대의
무기요."
"그러나 만일 일이 잘못되어 도망쳐야 할
때에는 --- ."
"잘못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소. 만일
일어난다면 당신네들 쪽에서 실수를 했을
때뿐이오. 나는 당신네들의 조직과는
완전히 무관한 상태에서 행동하고 싶소.
당신네 조직에는 스파이나 배신자들이
우글거리고 있단 말이오. 이렇게 나를
이리로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오?"
카슨은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몽클레아는 단시일내에 50만 달러라는
현금을 모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
방법만을 생각하면서 어두운 얼굴로 창을
너머로 영국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하게, 앙드레. 이분은 혼자서
행동하고 싶은 거네. 모두 맡겨 버리기로
하세. 그것이 이분의 방법이니까. 게다가
우리 조직의 암살지원자들같이 지원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바꾸어 말해서 50만
달러나 되는 거금을 내고 고용할 가치가
없는 거지."
"그러니 남은 문제는 -- ." 몽클레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단시간 내에 50만
달러라는 거금을 모으는 방법
말인데......"
"조직을 써서 은행을 터는 방법은
어떻소?"
태평스러운 얼굴로 영국인이 제안했다.
"어떻든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문제요."
돌아가기 전에 마무리지어 둘 점은 이제
없나?"
"당신이 착수금 25만 달러를 챙기고
행방불명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아까도 얘기했듯이 나는 이 일을 끝내면
은퇴하고 싶소. 당신네들 조직의
암살자들에게 쫓기는 것은 싫소. 그렇게
되면 나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그
돈의 액수 이상을 써야만 할 거요. 25만
달러 정도는 금방 없어져 버리지."
"그럼, 반대로 -- ." 카슨은 집요했다.
"당신이 일을 끝낸 뒤에 이쪽에서 잔금
지불을 거부하면?"
"처지가 바뀔 뿐이오." 영국인은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그런 경우에는 내가
당신네 세 분을 노리게 될 거요. 그러나
않겠지. 그럴 거요."
여기서 로댕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막았다.
"더 이상 없으면 이것으로 의논은
끝내기로 하세. 이 이상 손님을 잡고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야. 아, 그래,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호칭에 대한 것인데, 익명으로
통하고 싶다면 암호명이 필요해. 적당한
것이 떠오르지 않소?"
영국인은 잠깐 생각하고서 말했다. "이
일은 일종의 사냥이니까 '재칼'이 어떨까?"
로댕은 동의했다. "좋소. 아니, 정말
좋은 이름이군."
그는 영국인을 문까지 앞장서 데려가서
열어 주었다. 빅토르가 벽의 오목한
은신처에서 나타나서 다가왔다.
살인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능한 한 빨리 당신이 지정한 방법으로
연락을 취하겠소. 그 동안에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계획을 착수해 주겠소?
좋소. 그럼, 봉수아르, 미스터 재칼."
손님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사라졌다. 코와르스키는 그것을 묵묵히
배웅했다. 영국인은 그날 밤 공항 호텔에서
묵고, 다음날 아침 첫 비행기로 런던으로
돌아갔다.
팡숑 크라이스트의 한 방에서 로댕은
카슨과 몽클레아가 퍼붓는 불만과 질문의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둘은 완전히 실성한
사람 같았다.
"50만 달러......"
몽클레아는 같은 말을 몇 번씩이나
"대체 무슨 수로 50만 달러라는 거금을
모으겠다는 건가?"
"결국 재칼 말대로 은행을 털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하고 로댕이 대답했다.
"나는 그자가 마음에 안 들어." 카슨은
입 속의 것을 뱉어내듯 말했다. "놈은
동지를 거부하는 독불장군이야. 그런
상대는 위험해. 이쪽 컨트롤이
불가능하니까."
로댕은 항의를 막듯이 말했다.
"들어 보게, 둘 다. 우리는 이 계획을
생각해 냈고, 그것에 동의했으며, 돈을
위해서는 프랑스 대통령을 살해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인물을 찾아냈어. 나는 저런
친구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데, 그
친구라면 해낼 거야. 이미 계획은 실천
하세. 그의 일은 그에게 맡겨두면 돼."
제 3 장
1963년 6월 중순부터 7월 한 달간에
걸쳐서 프랑스 전국의 중요 은행, 보석상,
우체국이 무장강도단에게 피습되었다.
그것은 프랑스의 범죄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것이었다.
거의 매일같이 각지의 은행이 권총,
총신을 짧게 자른 숏건, 기관단총 등으로
무장한 강도단에게 습격당했다. 보석상의
피해는 거의 모든 상점마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서, 지역경찰이 부들부들 떨거나
피를 흘리고 있는 주인이나 점원에게서
조서를 받고 있는 사이에도 같은 시간에
다른 지역에서 발생하여 그리로 출동하는
상황이었다.
사살된 예가 두 건이나 보고되는 등,
7월말에 가서 사태는 극도에 달해 마침내
내무부 직속의 국가보안공화부대 --
프랑스인에게는 CRS로 알려져 있는
치안유지 전문의 국가경비대 -- 가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출동하게 되었다.
어느 은행에서나 손님은 반드시 현관
홀에서 자동소총을 가진 푸른 제복의 CRS
대원에게 몸수색을 당했다.
갑자기 몰아닥친 이 범죄에 대해서
은행이나 보석상들은 날카롭게 정부를
비판했다. 그들의 항의에 굴복하여 경찰은
야간경비를 강화했지만, 이 조치는 결국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범인들은 밤의 어둠을 틈타 은행의 금고
문을 강제로 여는 정통파 프로가 아니고,
저항하면 용서없이 쏘아 버리는
폭도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위험한 것은
오히려 대낮이었다. 전국 각지의 은행이나
보석상은 영업중인 대낮에 복면을 하고
총을 든 여러 명의 범인들이 뛰어들어
무조건, "손들어!" 하고 외치는 살기 어린
고함소리에 펄쩍 뛸 수밖에 없었다.
7월 말에 범인 셋이 부상당한 채
체포되었다. 그 중 하나는 OAS를 구실삼아
나쁜 짓을 일삼는 조무래기 악당이었다.
다른 둘은 외인부대의 탈영병으로서 OAS의
요원임을 자백했다. 그러나 아무리 혹독한
신문을 당해도 그들은 이 격류와 같은
범행의 파도가 어째서 갑자기 프랑스를
덮치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것이라고 단정하게 되었다. 사실 그들은
빼앗은 금품 중에서 얼마 안되는 액수를
보수로 받기로 하고 오로지 명령에만 따른
잔챙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사직당국은 마침내 이 소란의 배후에
있는 것이 OAS이며, 어떤 이유에서 OAS는
갑자기 돈이 필요하게 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당국에서 정작 그 이유를
알아낸 것은 8월 초순이 되어서였으며,
더구나 그것도 소름끼치는 사태에 직면하고
나서부터였다.
6월 말이 되자 사태는 점점 중대한
양상을 띠게 되어, 마침내 그 처리가
사법경찰 형사부 국장 모리스 부비에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게데조르페부르 36번지에
있는 사법경찰 본부 안에 있는, 숨막히게
현금과 보석류(이 경우는 시가로 환산된
금액)의 그래프가 작성되었다. 7월 말까지
피해 총액은 200만 신 프랑, 40만 달러를
넘어섰다. 범행에 쓰인 비용이나
범인들에게 준 보수를 뺀다고 하더라도
부비에의 짐작에 의하면 막대한 금액이
남아야 한다.
6월 4주째인 어느 날, SDECE 국장인 기보
장군 앞으로 로마 지부장에게서 온
보고서가 도착되었다. 그것은 OAS의 최고
간부 3명인 마르크 로댕, 르네 몽클레아,
그리고 앙드레 카슨이 로마 시내 콘도티
가(街) 외곽에 있는 모 호텔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그 보고서는
또한, 그렇잖아도 호텔 생활은 비싸게
먹히는데 세 사람은 맨 위층 전부를 자기들
전용으로 각각 빌려쓰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들은 밤낮 약 8명의 외인부대 출신의
사나운 녀석들에게 경호를 받으며 호텔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 SDECE는 그들이 회의를 하기 위해
모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그들은 앙투안 아르그와 같이
납치당하는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특별히 조심하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기보 장군은 테러리스트 조직의
최고간부들이 로마의 호텔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아이러니컬한 미소를
지었을 뿐, 특별한 조치는 취하지 않고 그
보고서를 파일로 작성했다. 지난 2월 에덴
볼프 호텔에서 있었던 아르그 납치사건은
분명히 서독의 주권을 침범한 것으로서, 그
외무부와 본의 서독 외무부 사이에서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기보
장군은 납치를 수행한 액션 서비스의
부원들에게 만족하고 있었다. OAS의
최고간부들이 겁을 먹고 호텔에 숨어
산다는 것 자체가 그 일에 대한 무엇보다도
뚜렷한 성과였다. 장군은 마르크 로댕의
파일을 보면서 일말의 불안을 느끼긴
했지만, 억지로 그것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래도 로댕쯤 되는 녀석이 어째서 그렇게
겁을 먹고 있는지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SDECE에서 오랜 경험도
쌓았고, 무엇보다도 정치와 외교의 현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기보는 두번 다시
외국에서 아르그의 경우와 같은 강경수단을
취할 생각은 없었다. OAS 간부 세 명이
밝혀진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런던으로 돌아간 재칼은 6월 말과 7월
초를 신중하게 작성한 스케줄에 따라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돌아간 그날부터 그는
무엇보다 먼저 샤를 드골에 관한
기록문서며 책, 그리고 드골이 직접 쓴
저서를 닥치는 대로 읽어 나갔다. 가까운
도서관에 가서 대영백과사전의 프랑스
대통령 항목을 펴 보니 끝부분에 참고서의
리스트가 나와 있었다. 그것만 보면
충분했다. 그는 가명을 써서 수신처를
패딩턴 구(區) 플리드 가(街)의 모처로
지정하여 유명한 서점에다 책을 주문하고,
필요한 참고서의 우송도 의뢰했다. 그런
책을 그는 매일 밤 새벽 동틀 무렵까지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모습을
마음속에서 그려 나갔다. 책에서 얻은
정보의 대부분은 이용 가치가 없었으나
간혹 눈에 뜨이는, 성격적 특징을 나타내는
구절을 꼼꼼하게 노트에 기록했다. 프랑스
제5공화국 대통령의 성격을 아는 데에 가장
도움이 된 것은 대통령의 회고록인
<칼날>이었다. 그 안에서 드골은 인생과
조국, 그리고 자신의 운명에 대한 태도를
화려한 필치로 기술해 나갔다.
재칼은 치밀한 사람이었다. 탐욕스럽게
책을 찾아 읽고, 소심할 정도로 신중하게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현재는 필요치
않아도 장래에 도움이 될지도 모를 정보도
대량으로 머릿속에 넣었다. 이것은
직업상의 습관이기는 하지만, 역시 하나의
샤를 드골의 저서와 그를 잘 아는 사람이
쓴 책에서 재칼은 높은 긍지와 오만한
대통령의 모습을 그려 볼 수가 있었지만,
6월 15일 빈에서 드골 암살에 대한
일거리를 맡은 이후로 그의 골치를 가장
아프게 해온 최대의 문제점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7월의 첫째 주가 지나도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저격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대영박물관에 간 그는 늘
그랬듯이 가명을 써서 자료열람 신청을
하여 프랑스의 주요 일간지 중 하나인 '르
피가로'의 백넘버를 찾기 시작했다.
마침내 해답이 나왔다고나 할까,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대강 7월 7일 전후의 3일
사이였던 것은 틀림없다. 어떤
하나의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것을
드골이 대통령에 취임한 1945년 이후
현재까지 매년의 기록과 대조해 본 결과,
간신히 해답을 찾아낸 것이다. 샤를 드골은
어떤 특정한 날에는 몸이 아프거나, 날씨가
나쁘거나, 자신에게 닥칠 위험 같은 것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반드시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밝혀낸 다음, 재칼의 준비는 연구단계에서
실제의 계획을 세우는 단계로 들어섰다.
아파트에 누워 뒨굴며 크림색 천장을
바라보면서 킹사이즈의 필터 담배를 연거푸
피워대며 오랜 시간 생각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계획이 세부적인 데까지
정리되었다.
최종적으로 이 계획대로 실천하자고
면밀하게 검토했다. '언제'와 '어디에서'는
이미 결정해 두었으므로 '어떤 방법으로'를
해결한 것이다.
1963년 현재, 드골 장군은 단지 프랑스
대통령일 뿐만 아니라 서방세계에 있어서도
가장 엄중하고, 또한 교묘하게 경호되고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재칼은 그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드골의 암살은 나중에
증명되었듯이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암살보다도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재칼은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미국의 배려로
케네디의 신변경비 상태를 연구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건너간 프랑스의 담당관은 미국의
시크릿 서비스가 취하고 있는 경비태세의
안이함에 얼굴을 찌푸리고 귀국했다.
프랑스 담당관이 미국의 방식을 채택하지
1963년 11월 케네디는 댈러스에서 미치광이
같은 아마추어의 손에 암살된 반면, 드골은
그 뒤에도 살아남아서 평화적으로 은퇴하여
자택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무대 뒤에서 있었던 이런 일들까지는
모르고 있었지만, 재칼의 현상 인식은
정확했다. 그가 상대하려는 프랑스의
경비진은 세계에서도 최고에 속한다는 것,
더구나 그를 고용한 조직은 기밀누설로
산산조각이 나 있는 점 등. 그에게 유리한
점은 혼자의 힘으로, 더구나 익명으로
행동한다는 작전과, 목표로 하고 있는
인물이 경비진과 협력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그 인물은 어떤
특정한 날에 그의 천성인 높은 긍지와
완고한 성격과, 명색이 대통령인데 자기
신념에 따라서, 설령 어떤 위험이 가까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대중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었다.
코펜하겐의 카스트라프 공항에서 날아온
SAS 여객기가 런던의 히스로 공항의 터미널
건물 앞에서 마지막 커브를 꺾고, 몇 미터
더 가서 멈춰섰다. 그래도 엔진은 몇 초
동안 계속 울렸으나 그것도 곧 정지되었다.
이윽고 트랩 차가 기체 옆에 와서 붙게
되자 승객들이 제일 꼭대기의 승강구에
서서 미소를 뿌리는 스튜어디스에게
눈인사를 해가며 한 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터미널 건물의 가장 위층에
있는 송영장으로 쓰이는 테라스에서는 그
금발의 사나이가 짙은 선글라스를 이마에
모습으로 도착하는 여객기에서 내리는
승객들을 관찰하는 것은 벌써 오늘 아침
들어 여섯 번째가 되지만, 따뜻한 햇살이
넘치는 테라스는 여객기의 도착을
기다리다가 승객들이 트랩을 내려오기
시작하면 자기가 찾는 상대를 빨리
찾아내려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로 혼잡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거동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여덟 번째의 승객이 기내에서 나와 햇살
속에 나타나서 기지개를 켰을 때, 테라스의
사나이는 조금 긴장해서 트랩을 내려오는
그의 모습을 망원경으로 쫓았다. 세워진
칼라의 회색 사제복을 걸친 것이
목사이거나 신부였다. 나이는 40대
후반쯤으로서, 회색 머리를 중간 정도의
얼굴보다는 젊은 것 같았다. 큰 키에
어깨가 널찍하고 아주 단단해 보이는
체구라서, 테라스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나이와 같은 몸매였다.
승객들이 여권 검사와 통관을 위해서
도착 승객용 라운지를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재칼은 옆에 놓여 있던 가죽 서류가방에
망원경을 집어넣고는, 찰칵 하고 닫고서
조용히 뒤에 있는 유리문을 빠져나가 중앙
홀로 내려갔다. 15분 뒤에 덴마크의 목사는
손가방과 여행용 가방을 들고 세관에서
나왔다. 누구 마중나온 사람도 없는
모양인지, 목사는 그대로 버클리스
은행에서 설치해 놓은 환전소 창구로
걸어갔다.
조사를 받을 때 목사는 옆에 금발의
영국인이 서 있었던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영국인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척하면서 선글라스 밑으로
몰래 이 덴마크인의 외모를 살펴보고
있었지만, 목사에게는 적어도 그런
사나이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목사가 크롬웰 가(街)행 BEA 버스를
타려고 중앙 홀에서 나왔을 때, 영국인은
서류가방을 들고 그의 몇 발자국 뒤를
따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버스로
런던 시내로 들어갔다. 크롬웰 가의
터미널에서 목사는 버스를 뒤따라온 수하물
운반용 트레일러에서 자기의 여행가방을
내려 줄 때까지 몇 분 기다려야만 했다.
그리고 여행 가방을 받아든 그는
화살표에 '택시'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출구를 향했다. 그 사이에 재칼은 버스
뒤를 돌아서 버스 주차장을 가로질러
종업원용의 주차장에 세워두었던 자기 차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픈식 스포츠카
뒷좌석에 서류가방을 던져 놓고 재빨리
운전석에 올라서 엔진을 걸고 터미널 왼쪽
벽 가장자리로 차를 옮겼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주면 아케이드 밑에
줄줄이 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의
기다란 줄이 보인다. 목사는 세 번째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는 크롬웰 가를
나서자 나이츠브리지 쪽으로 향했다.
스포츠카가 그 뒤를 따랐다.
택시는 하프문 가(街)에 있는 조그맣고
지내기에 편할 듯한 호텔 앞에서 목사를
몇 분 뒤에 바로 옆인 카즌 가(街)의
길가에 있는 주차요금기 옆에 세워놓았다.
재칼은 서류가방을 트렁크에 넣고 잠그고서
셰퍼드 마켓의 신문 파는 곳에서 '이브닝
스탠더드'를 한 부 사가지고 호텔의 로비로
돌아왔다. 그 동안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25분 뒤, 목사가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방 열쇠를 접수대 여자에게
맡겼다. 그녀는 그것을 못에 걸었다.
열쇠는 한동안 흔들렸다. 친구라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로비의
의자에 앉아 있던 재칼은 읽고 있던 신문을
내려 목사가 식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맡긴 열쇠가
47번이라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몇 분
지나서 접수대 여자가 투숙객이 부탁한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재칼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도 모르게
층계를 올라갔다.
47호실의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2인치 폭의 부드러운 운모(雲母) 끈으로는
어림도 없어서 팔레트 나이프를 밀어넣자
스프링 자물쇠가 찰칵 하고 열렸다. 목사는
점심을 먹으러 갔을 뿐이라서 여권은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아둔 채였다. 재칼은
그것을 가지고 30초 뒤에는 복도에 나와
있었다. 여행자 수표에는 일부러 손대지
않았다. 방에 도둑이 든 흔적이 없으면
경찰은 목사가 여권을 어디 다른 곳에서
분실했다고 생각할 것이고, 목사에게도
그렇게 설득하려고 하겠지. 그렇게
기대하고 한 짓이다. 사실, 결과는 재칼이
주문하기 전에 재칼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호텔에서 사라졌다. 목사가 여권
분실을 알게 된 것은 오후 늦게였으며,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어서 온
방안을 찾다가 결국 단념하고 호텔
지배인에게 알렸다. 지배인은 방안을
샅샅이 찾아보고는 여행자 수표를 비롯해서
다른 소지품이 모두 그대로 있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는 호텔에 경찰을 부를
필요는 없으며, 여권은 이리로 오는 도중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거라고 당혹해 하고
있는 목사를 온갖 말로 타일렀다. 사람좋은
목사는 이곳이 외국이며, 또한 자기가
불 리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자각도
있었으므로 할 수 없이 지배인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덴마크
동안의 런던 체재 후 코펜하겐으로
돌아가는 데에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아
놓고서 그 뒤 여권에 대한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여권을 대신할 서류를 발급해
준 총영사관의 사무직원은 코펜하겐 시
산크트 엘드스키르크의 페르 옌센 목사의
이름으로 여권 분실을 기록하고, 그 역시
그대로 잊어버렸다. 7월 10일의 일이었다.
이틀 뒤, 뉴욕 주 시라큐스 시에서 온
미국 학생이 비슷한 경우를 당했다. 그는
뉴욕에서 런던 공항에 도착하여 오셔니크
빌딩 안에 있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창구에서 여행자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여권을 꺼냈다. 현금으로 교환한 그는
그것을 윗도리 안주머니에 넣고, 여권은
지퍼가 달린 대형 지갑에 도로 넣고서
넣었다. 몇 분 뒤, 그는 포터를 부르려고
가방을 밑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3초
뒤에는 이미 가방은 사라지고 없었다.
처음에 그는 포터에게 항의를 했으며,
포터는 그를 팬아메리칸 항공의 상담소에
데리고 갔고, 상담소 직원은 그를 가까이에
있는 공항 경비원에게 넘겼다. 경비원과
함께 대기소로 간 그는 거기서 사정을
설명했다.
누군가가 자기의 것과 바꿔 들고간 것이
아닐까 하는 추리도 있었지만, 조사해 본
결과 그것은 아닌 것으로 판정이 나고 결국
절도사건으로 보고하게 되었다.
경비원은 이 장신에 근육질의 체격을
가지고 있는 미국 청년에게 소매치기나
절도범이 설치는 데 대해서는 유감스럽게
외국인 손님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으며, 또 얼마나 여러 가지로
대비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미국 청년도 사람이 좋아서,
자기 친구도 한번 뉴욕의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 비슷한 피해를 당한 적이 있으며,
대도시는 어디나 다 마찬가지라고 오히려
경비원을 위로했다.
이 피해보고서는 도난당한 가방의 모양과
그 내용물, 신분증과 지갑 안에 든 여권의
기재사항 등을 적은 메모지를 달아서 런던
경시청의 관계 각 부서에 통상적인 순서를
거쳐서 회부되었다. 당연히 이것은 파일로
작성되고 형식적이나마 수사도
진행되었지만, 몇 주일이 지나도 단서 하나
잡히지 않아서 그대로 사건은 잊혀지고
한편, 미국인 학생 마티 슐버그는
글로브너 광장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가서
여권을 도난당한 것을 신고하고, 귀국에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았다. 그는 한 달
동안의 휴가를 이용해서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왔을 때 사귄 영국의 걸프랜드와
둘이서 스코틀랜드의 고지를 두루 여행할
예정이었다. 영사부에서는 여권의 도난을
기록하여 워싱턴의 국무부에도 보고했으나,
양쪽이 모두 당연한 일처럼 그 일을 잊고
말았다.
런던의 히스로 공항에는 국제선 전용
건물이 둘 있는데, 송영을 위해 쓰이는
테라스에서 재칼이 망원경으로 관찰한 도착
승객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다. 그 중
여권을 분실한 두 사람은 나이는 다르지만
다 키가 약 180cm, 어깨가 넓고, 근육질의
날씬한 몸매에, 눈빛은 청색, 그리고 그
얼굴의 생김새는 그들을 미행해서 여권을
훔쳐 간 점잖은 외모의 영국인 얼굴과 아주
비슷했다. 두 사람의 다른 점을 들자면
옌센 목사는 48세, 머리칼은 회색이며,
글씨를 볼 때에는 금테 안경을 끼는 데에
비해, 마티 슐버그는 나이 25세, 밤색
머리칼, 언제나 굵은 테의 안경을 끼고
있는 점이다.
이 두 사람의 얼굴을 재칼은 사우스
오들리 가(街) 외곽에 있는 아파트에서
책상 앞에 앉아 곰곰이 연구했다. 그리고
하루를 잡아 무대화장 전문가, 안경점,
주로 뉴욕에서 만든 미국 타입의 의복을
취급하고 있는 웨스트사이드의 남성복
도수 없는 안경알을 넣은 금테와 검고 굵은
테의 안경을 각각 하나씩, 뉴욕제의 검은
가죽 구두, T셔츠와 팬티,
오프화이트(회색이 도는 흰색)의
슬랙스(헐렁한 바지), 소매 끝과 깃을
빨간색과 흰색 털실로 짜고 앞에는 지퍼가
달린 나일론 점퍼, 그리고 목사용의 흰
셔츠에 풀기가 빳빳한 칼라와 검은 흉배
등을 사들였다. 목사용 의류에 붙어 있는
상표는 깨끗이 떼어냈다.
그날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첼시(런던 시내 남쪽의 한 구(區)로,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 두 사람의
호모가 경영하는 남성용 가발점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회색과 밤색의 염색약과,
단시간 내에 가장 자연스러운 색깔을 내는
염색약을 바를 때에 쓰는 조그만
헤어브러시도 몇 개 샀다. 이런 물건과
미제 의복 말고는 그는 한 상점에서 한
가지 이상의 물건을 사지 않았다.
다음날인 7월 18일, '르 피가로'지의
한쪽 구석에 난 작은 기사를 그는 읽었다.
그것은 프랑스 사법경찰 형사부 차장,
이포리트 듀퓌이 총경이 파리의
케데조르페부르 본부 내에서 집무하다
심장발작을 일으켜 병원으로 호송 도중
사망했다는 내용이다. 후임에는 살인과의
과장 클로드 르베르 총경이며, 여름에
접어들어 형사부의 각 파트가 일에 쫓기고
있을 때이기도 해서 르베르 총경은 즉시
새로운 임무의 중책을 떠맡지 않을 수 없을
매일 런던에서 구할 수 있는 프랑스의 각
신문을 빼놓지 않고 사 보고 있었는데,
그때도 표제 속에서 '형사부'라는 단어가
눈에 띄어서 그 기사를 읽어 보았으나
내용에 있어서는 별로 관심을 끄는 것이
없었다.
런던 공항에서 관찰을 시작하기 전에
재칼은 이번 일을 마무리지을 때까지는
계속 다른 사람으로 행세하기로
마음먹었다. 영국에서 가짜 여권을
구하기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는
살인청부업자나 밀수업자 등이 가명을 댈
때에 쓰는 수를 쓰기로 했다. 그는 우선
조그만 마을을 찾아 런던 주변의 시골을
차로 돌아다녔다. 그리고 세 번째로 찾아간
마을의 묘지에서 그의 의도에 합당한
반으로 죽은 알렉산더 댓건이라는 사람의
무덤이었다. 만일 댓건이 살아 있다면
1963년 7월 현재 그보다는 몇 달 연상인
셈이다. 그가 목사관을 찾아가서 자기는
족보학을 공부하고 있는 아마추어인데,
지금 댓건 가문의 족보를 조사하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하자 노인인 목사보는
친절하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다. 옛날에
분명히 그 마을에 옮겨와서 정착한
댓건이라는 가족이 있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재칼은 교회의 과거장(過去帳 ;
교회에서 죽은 사람들의 속명, 세례명,
죽은 날짜 따위를 기록해 두는 장부)을
보여 주면 조사에 도움이 될 것 같다며,
그것을 목사보에게 부탁했다.
노인은 바로 친절 그 자체였다. 교회로
건축된 교회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보수비를 모으는 헌금함에 지폐를
밀어넣으니 목사보의 태도는 더욱더
우호적이 되었다. 과거장에 의하면 댓건
부부는 모두 지난 7년 여 사이에
사망했으며, 가엾은 외아들 알렉산더는
30여 년 전에 이 교회의 묘지에 묻혔다.
재칼은 1929년의 출생, 혼인, 사망
페이지를 별로 흥미도 없는 듯이 넘기다가
4월 항에 달필의 목사다운 필적으로
댓건이라는 이름이 기입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알렉산더 제임스 ㅋ틴 댓건, 1929년 4월
3일, 세인트 마크 교구(敎區) 샘번
피실레이에서 출생.
재칼은 자세히 메모하고서 목사보에게는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교회를 떠났다.
런던에 돌아온 그는 출생, 혼인,
사망신고를 일괄해서 관리하고 있는
중앙등록소를 찾아갔다. 젊은 서기는 그가
내민 슈로프셔 군(郡) 마켓 드 레이턴 시에
있는 법률사무소의 공동경영자라는 명함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받았으며, 최근에
사망한 노부인으로부터 부동산을
손자들에게 물려준다는 취지의 유언장을
맡아 가지고 있기에 지금 그 손자들의
행방을 찾고 있는 중이라는 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손자 가운데 한 사람은
이름이 알렉산더 제임스 ㅋ틴 댓건이며,
1929년 4월 3일 세인트 마크 교구 샘본
피슐레이에서 출생한 것까지는 알고 있다고
영국의 공무원들은 정중한 문의에는 아주
친절히 대응하는, 장점인지 결점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런 특징이 있는데, 이
서기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록을
조사해 본 결과, 문제의 아이는 분명히
같은 날 같은 곳에서 태어났으나, 1931년
11월 8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했다.
재칼은 규정된 수수료를 지불하고
출생증명서와 사망증명서를 각각 한 통씩
작성해서 받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노동부 지부에 들러서 여권
신청용지를 받고서, 다음에는 장난감
상점에서 아이들이 쓰는 인쇄 세트를 사고,
마지막으로 우체국에서 1파운드짜리
우편환을 샀다.
아파트에 돌아온 그는 여권 신청용지에
넣고, 다른 난에는 자신의 것을 그대로 써
넣었다. 예를 들면 키, 머리카락, 눈의
색깔 등. 직업란에는 단지
'비즈니스맨'이라고만 썼다. 부모의 이름은
출생증명서에서 보고 베꼈다. 그리고
신원보증인 난에는 그날 아침에 만난
세인트 마크 교구의 목사보인 제임스
엘더리라는 이름을 써넣었다. 목사보의
이름은 교회의 문에 못박아 둔 명패에
문학박사 칭호와 함께 써 있었던 것을 보고
알았던 것이다. 목사보의 사인은 희미한
잉크와 가느다란 펜을 가지고 섬세한
느낌을 주는 서체로서 누가 봐도 목사의
글씨다운 면이 느껴지도록 위조했다.
다음에는 인쇄 세트를 써서 '샘본
피슐레이, 세인트 마크 교회'라는 스탬프를
단정하게 눌러 찍었다. 그리고
출생증명서의 사본과 여권 신청서에
우편환을 첨부하여 페리 프랑스에 있는
여권발행국으로 우송했다. 사망증명서는
찢어 버렸다. 4일 뒤의 아침, 그가 그날의
'르 피가로'지를 읽고 있을 무렵 깔깔한 새
여권이 지시해 놓은 곳으로 우송되어 왔다.
그는 점심을 마친 다음 그것을 찾으러
갔다. 그리고 그날 오후 늦게 아
파트를 잠그고 차로 런던 공항으로 가서
수표 사용을 피하고 현금으로 항공료를
지불하고서 코펜하겐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그의 여행가방은 바닥이 이중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곳은 보통 잡지 정도의
두께여서 웬만큼 철저히 조사하지 않고는
들키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 안에 그는
두었던 손금고에서 꺼낸 2,000파운드어치의
지폐를 숨겨 넣었다.
코펜하겐에서는 예정대로 순조롭게 일을
처리해 나갔다. 카스트라프 공항에
도착하자 곧 다음날 오후의 사베나 항공의
브뤼셀행 비행기 좌석을 예약했다.
시내에서 쇼핑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기에 콩스 니 토르브에 있는 호텔
당글테일에 방을 잡고 세븐 네이션에서
왕족 같은 저녁을 먹고는, 티볼리 공원을
산책하면서 금발머리 둘과 함께 진한
대화를 즐기고 밤도 늦은 새벽 1시에
호텔에 돌아와서 침대에 파고들었다.
다음날, 코펜하겐의 중심부에 있는, 이
나라에서 가장 이름이 알려져 있는 남성복
전문점에서 춘추용 목사복, 검은 구두,
셔츠를 석 장 샀다. 모두 덴마크 상표가
붙은 것만을 골랐다. 흰 셔츠는 별로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에 붙어 있는
상표를 성직수임식을 앞둔 신학생이라
칭하기 위해 런던에서 사 모은 사제복에
입은 셔츠와 흉배에 옮겨 붙이기 위해서
일부러 산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야 할 물건은 덴마크어로
쓴 프랑스의 저명한 교회와 사원에 관한
책이었다. 그리고 티볼리 공원의 연못가에
있는 을씨년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3시 15분발의 사베나 항공기로
브뤼셀을 향해 날아갔다.
제 4 장
폴 구상스 같이 재능이 풍부한 인간이
어째서 중년에 되어서 인생의 길을 잘못
들어서게 되었는지, 그것은 몇 안되는 그의
친구들이나, 꽤 많은 고객이나, 벨기에
경찰에게도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는
리에주(벨기에 서부의 도시)에 있는
파블리크 나시오날에 30년이나 근무했으며,
정확성이 절대적 조건이 되는 기술부문에서
정밀성의 화신이라고 불렸었다. 또,
성실성이라는 점에서도 그는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30년 사이에
여자용 소형 권총에서부터 중 기관총까지,
회사가 제작하는 모든 화기에 있어서는
회사 내에서 제일가는 전문가가 되어
전시중의 행동 또한 눈부신 것이었다.
벨기에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했을 때, 그가
근무하는 총기공장도 접수되어 독일군을
위한 총기를 만들기 시작하여 그는 공장에
남아서 일을 계속했는데, 전후의 조사에서
그 동안의 그의 행동이 밝혀졌다.
그는 레지스탕스의 비밀요원이 되어
활약하는 한편, 개인적으로도 격추당한
연합군 조종사의 탈출을 돕기 위해서
아지트망을 만들어서 협력하고, 또한
공장에서는 사보타주를 이끌었던 것이다.
당시 리에주에서 운반되어 온 총기의 상당
부분이 정확히 발포되지 않기도 하고,
총알을 50발 정도 쏘고 나면 폭발을 일으켜
독일병을 사상케 했다고 한다. 그는 남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이런
나중에 그가 죄를 지어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변호사가 어디에선가 찾아내어 법정에서
발표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재판관도
오랜 의논 끝에 형의 경감에 동의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전시중의 행동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 해방 후 훈장이다
표창이다 하며 소란을 피우는 것이
싫었다고 하는 그의 겸손해 하는 진술에
배심원들이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후 50년대의 초기에 막대한 분량의
무기 거래로 직원 중 누군가가 외국의
거래선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 혐의가 당시 부장 자리에
있었던 그에게로 돌아갔으나 그의 상사는
경찰에 그 신용 있는 구상스를 의심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강경하게 항의했다.
변호했다. 그러나 재판장은 이토록 대단한
신뢰를 배신했다는 것은 더욱 용서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징역 10년 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 형은 항소로 5년이 되었고,
형무소에서는 복역태도가 좋아서 3년 반
만에 석방되었다.
출소했을 때 아내는 이미 이혼수속을
끝내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서 나가 버린
뒤였다. 리에주 교외의 아름다운
주택지(그런 곳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에
화단으로 둘러싸인 주택에서 살았던 과거의
생활은 이미 흘러간 꿈으로 사라져 버렸다.
물론 회사와의 인연도 끊어져 버렸다. 그는
브뤼셀에서 조그만 아파트를 빌렸다.
그리고 비합법적으로 무기를 손에 넣어서
암흑가의 조직에 팔기 시작했다. 그 장사는
고객으로 갖게 될 만큼 번창하여
브뤼셀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 집을
갖게까지 되었다.
60년대에 들어설 무렵에는 '총장사'라는
별명으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존재가
되었다. 벨기에에서는 벨기에 국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신분증명만 보이면 누구라도
스포츠용품점이나 총포사에서 리볼버
권총이든 라이플이든 자유롭게 살 수가
있다. 다만, 총기나 거기에 쓰는 탄약을
상점에서 팔았을 경우 사간 사람의 이름과
신분증명서의 번호를, 총기나 탄약의
종류와 함께 매상 장부에 기재해 놓지
않으면 안된다. 구상스는 반드시 훔쳤거나
위조한 신분증을 구해서 그것을 썼다.
그는 그 도시에서도 솜씨 좋기로 이름난
소매치기는 국가의 귀빈으로 형무소 생활을
할 때는 별문제지만, 도시로 돌아오면 지갑
한둘 소매치기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로
하였다. 구상스는 그가 소매치기한 지갑에
들어 있는 신분증명서를 현금으로 사
주었다. 구상스는 또한 위조의 명수와도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사나이는 40년대
말에 대량의 프랑스 프랑을 위조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Banque de
France'(프랑스 은행)의 'u'자를
멍청하게도 빠뜨린 채 인쇄하는(당시는 그
정도로 미숙 했었기 때문이지만) 실수를
저질러서, 그 뒤로는 여권의 위조로 직종을
바꾸어 성공하고 있었다. 구상스는 최근엔
손님에게서 무기의 부탁을 받아도 자기가
직접 총포사에 사러 가지는 않게 되었다.
배역을 못 맡은 3류 배우들에게 교묘하게
위조한 신분증을 들려서 사러 보내고 있다.
그 '스탭들' 중 그의 진짜 내력을 알고
있는 것은 소매치기 명수와
위조전문가뿐이다. 또, 고객들 중에서는
벨기에의 암흑가 간부들만이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와 그의 스탭들을
보호해 주고, 체포되었을 때에도 무기의
출처는 절대로 밝히지 않았다. 그는 그런
녀석들에게는 그만큼 이용가치가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하긴 벨기에 경찰 당국에서도 그의
동태를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무기를 가지고 있는 현장을
덮치거나, 공소를 유지하여 그를 유죄로
몰아넣을 정도로 유력한 증언을 도저히
서류를 위조하거나 총을 개조하는 데
쓰이는 기계류가 갖추어져 있다는 낌새를
채고 가끔 덮쳐 보았지만, 언제나 거기
있는 것은 연철의 금속이나, 브뤼셀의
유명한 조각 작품을 모방한 토산품을
만드는 데 쓰이는 설비뿐이었다. 아주
최근에 덮쳤을 때에도 그는 경찰에 대한
존경의 표시라면서 '오줌싸개 소년'의
모형을 지휘자인 경감에게 정중하게 증정한
적이 있었다.
1963년 7월 21일 고객 중의 하나인,
1960년부터 1962년까지 카탕가(아프리카
자이르 공화국 남단부에 있는 샤바
주(州)의 옛 명칭) 정부에 고용되어
일했으며, 현재 브뤼셀의
적선지대(赤線地帶)를 한 손에 틀어쥐고
찾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그 영국인을
기다리면서 아무런 의구심도 느끼지
않았다.
손님은 약속대로 정오에 나타났다.
구상스는 그를 조그만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의자에 앉은 손님을 보면서 말했다.
"선글라스를 벗으면 안되겠소?"
장신의 영국인이 망설이는 것을 보고
그가 말했다.
"거래를 할 때에는 되도록이면 서로 믿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마시겠소?"
알렉산더 댓건 명의의 여권을 지닌
영국인은 짙은 선글라스를 벗고 맥주를
따르는 왜소한 총기상을 이상한 물건을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구상스는
탁자에 앉아서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는데, 무슨
용건인지요?"
"내가 온다는 것을 루이에게서 들으셨을
텐데?"
"물론."
구상스는 시인했다.
"여기 이렇게 와 있지 않소. 무슨
용건인지 루이가 말 안 합디까?"
"못 들었소. 단지 그 양반은 당신과는
카탕가에서 사귀게 되었으며, 당신의 입이
무거운 것은 보증하고, 총을 필요로 하고
있고, 대금은 파운드의 현금으로 지불할
것이라는 정도밖에는 말하지 않았으니까."
영국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나는 이미 당신이 하는 장사를
알고 있으니까 공평을 기하는 의미에서 내
필요한 총은 특수한 부속품이 달린
전문가용 총이오. 나는 그......뭐라고
할까, 강대하고 재력 있는 적을 가진
인간을 없애는 일이 전문이오. 그런 인간은
그 역시 힘과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이
보통이지요. 편한 일은 아니오. 상대방도
전문가를 고용해서 자신을 지키고
있으니까. 그러니 이런 일에는 면밀한
계획과 거기에 적합한 무기가 필요하단
말이오. 현재 일거리가 하나 있어서, 그
때문에 라이플이 있어야겠다는 이야기요."
구상스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멋진 일이지. 나와 마찬가지로
스페셜리스트(특별주의자)로군. 어쩐지
의욕이 생기는데. 그래, 어떤 종류의
"타입은 중요하지 않소. 일의 성질상
여러 가지 계략이 있기 때문에, 그
제약하에서도 충분히 기능을 발휘할
라이플이 필요하오."
"알았소."
구상스는 신난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즉, 어떤 상황하에서 특정한 인간이
특정한 일을 위해서 한 번만 쓰는 특별
주문의 총이라는 이야기로군.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나 말고는 그런 요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인간이 없지. 흠 ---
꼭 하고 싶소, 그 일은. 당신, 정말 내게
잘 왔소."
영국인은 구상스가 프로 기질답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 미소지었다.
"나도 이리로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그래, 그 제약이라는 것이 어떤 거요?"
"우선 첫번째로 그 제약은 크기요,
길이가 아니고. 움직이는 부분의 크기지
노리쇠 뭉치와 총신 뒤쪽 끝의 굵기가 이
이하라야겠소."
그는 오른손을 올려서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으로 직경 6cm 정도의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노리쇠 뭉치가 그 정도 굵기로 제약이
된다면 연발식은 무리라는 애긴데. 거기에
스프링 메카니즘을 짜넣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렇다면 아무래도 단발식
라이플이 되지 않을 수 없지."
구상스는 천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영국인의 설명을 귀담아
듣고는, 노리쇠 뭉치가 극도로 가느다란
"그리고, 그리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단발식이라고 해도 모제르
7.92나 리 엔필드 303처럼 노리쇠 손잡이가
옆으로 튀어나오면 안되겠소.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잡고서 가볍게 뒤로 당길
수 있어야만 하오. 그리고 방아쇠의
안전장치는 필요없고, 방아쇠 자체도 사격
직전에 달 수 있는, 탈착이 가능한 것으로
할 필요가 있소."
"왜?"
"총을 몇 개로 분해해서 원통형 용기에
넣어 보관하고 운반할 필요가 있으니까,
돌출된 것이 있으면 불편하단 말이오. 용기
자체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 모양이어서는
안되고, 또 원통형 용기에 넣자면 총의
곤란하다는 이야기지. 어째서 원통형
용기에 넣으려고 하는지, 그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겠소. 자, 어떻소? 탈착이 가능한
방아쇠는 만들 수 있겠소?"
"물론이오. 방금 말한 조건은 거의 전부
실현이 가능해. 신탄총식으로 뒤에서 둘로
꺾이는 단발 라이플이라면 별로 힘 안
들이고도 만들 수 있지. 그런 식이라면
노리쇠는 없어도 되지만, 대신 경첩이
필요하게 되니까 전체의 중량이 별로
변하진 않겠지. 그런 라이플을 설계해서
제작하자면 내 손으로 직접 쇠토막을
가공하여 노리쇠 뭉치를 만드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내 손으로
만들어야겠는걸. 조그만 공장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하자고 들면 못할 것도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소?"
구상스는 어깨를 움츠리고는 두 팔을
벌렸다.
"2~3개월쯤은 잡아야겠는걸."
"그렇게는 기다릴 수 없소."
"그렇다면 이미 만들어 놓은 총을 사와서
개조하는 수밖에 없겠는데. 그 밖의
조건은?"
"중량은 되도록 가볍게, 구경은 크지
않아도 되고. 총알의 위력으로 보완이
되니까. 총신의 길이는 최대한 30cm 정도."
"사격 거리는?"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대략
130m쯤."
"노리는 것은 머리, 아니면 가슴?"
"머리, 가능하다면. 그게 효과가
"명중된다면야 그야 머리가 훨씬
효과적이지. 확실하게 죽으니까. 그러나
노리기 쉬운 것은 가슴 쪽이야. 총신이
짭고 가벼운 총으로 여러 가지 장해를
받으며 130m 거리에서 쏘자면 아무래도
가슴이 쉽지. 당신이 머리를 쏠지 가슴을
쏠지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한 것은,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오?"
"그렇소. 바로 그래요."
"그럼, 두 발을 쏠 기회가 있다고
보시오? 첫번째 탄피를 약협에서 뽑아내고
새 탄환을 넣고서 약실을 닫고 다시 조준이
완료될 때까지 몇 초 걸린다고 보오."
"기회는 없다고 보는 것이 좋겠지. 하긴
소음기를 써서 첫번째가 엉뚱한 곳으로
사격을 눈치채지 못했을 경우라면
모르지만. 그러나 처음 한 발로 관자놀이를
꿰뚫었다고 해도 현장에서 도망치자면 역시
소음기를 쓰지 않을 수가 없겠지. 주위에
있는 녀석들이 총알이 어디서 날라온
것인지를 알아낼 때까지 적어도 몇 분의
여유가 있어야 하니까."
구상스는 탁자 위에 있는 메모지로
시선을 옮기더니 계속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작약탄(炸藥彈)을 쓰는 게
좋겠는걸. 총과 함께 준비해 주겠소.
작약탄은 아시겠지?"
영국인은 끄덕였다.
"글리세린을 쓰나, 아니면 수은을 쓰나?"
"수은이 좋을걸. 뒤도 깨끗하고, 우선
있소?"
"있소. 총을 될 수 있으면 가늘게 하고
싶으니 총신 아래쪽에 붙어 있는
나무덮개는 전부 떼어내 주시오.
개머리판도 떼어내고. 그 대신 영국제
기관단총처럼 쇠로 된 개머리를 붙여
주시오. 그리고 아래위의 틀과 어깨받이,
이렇게 세 부분을 분해할 수 있게
해주시오. 마지막으로 고성능의 소음기와
망원 조준기. 둘 다 모두 가지고 다니기에
편리하게 탈착이 가능하도록 해주시오."
구상스는 조금씩 맥주를 홀짝이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영국인은 차츰
초조해졌다.
"어때요, 할 수 있겠소?"
구상스는 그제야 꿈에서 깨어났다.
"오! 미안, 미안. 하나같이 어려운
주문이지만, 물론 가능하지. 이래봬도
주문받은 물건을 못 만든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당신이 지금 얘기한 건
말하자면 사냥이오. 더구나 그 무기는
검문을 당해도 추호의 의심도 받지 않을
방법으로 운반될 수 있어야만 하는 거겠지.
사냥이라면 사냥총이 필요하게 돼. 당신이
원하는 것은 말하자면 그거요. 구경 22로는
너무 작아. 토끼 정도라면 괜찮겠지만.
그렇다고 레밍턴 300처럼 크면 당신의
주문에 맞출 수가 없고.
그래, 꼭 알맞을 듯한 총이 떠오르는군.
더구나 이 브뤼셀의 스포츠용품점에서
간단히 손에 들어오기도 하고.
정밀하기로는 그 이상이 없는 비싼 총이오.
가볍고도 가늘어서 주로 영양을 사냥할 때
쓰지만, 작약탄을 쏜다면 더 큰 사냥감도
쓰러뜨릴 수 있소. 그런데 과녁이
되는......신사는 천천히 움직이나, 빨리
움직이나, 아니면 전혀 움직이지 않나?"
"정지되어 있소."
"그럼, 문제없소. 세 개의 쇠막대기를
조립한 개머리와 조립식 방아쇠는 따로
연구하지 않아도 만들 수 있소. 또, 총신을
20cm 짧게 하고, 그 끝부분에 소음기를
끼워넣기 위해서 깎아내는 작업도 내가
직접 할 수 있소. 그런데 총신을 20cm나
줄이면 명중율이 훨씬 떨어진단 말이야.
안됐지만 총이 아까워. 당신, 저격훈련은
받았소?"
영국인은 끄덕였다.
거리에서 망원조준기를 써서 노리는 데에는
문제없겠지. 소음기는 내가 만들어 주겠소.
별로 복잡하진 않은데, 기성품이 아주
드물어서 말이오. 대체로 라이플은 사냥에
별로 쓰지 않으니까, 라이플용의 긴
소음기는 더구나 구하기 어렵지. 그런데
아까 당신은 총을 분해해서 가지고 다니는
데에 원통형 용기를 쓴다고 했는데, 그건
어떤 것을 쓸 생각이오?"
영국인은 일어나서 탁자에 다가가서는
왜소한 벨기인을 내려다보듯 그 앞을
막아섰다. 천천히 그는 윗도리의
안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순간
벨기에인의 눈에 공포의 그림자가 스쳤다.
이때 그는 이 살인전문가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든, 그것이 절대로 눈에는
모든 표정을 덮어 버리는 자욱한 연기처럼
잿빛으로 흐려 있었다. 영국인이
안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은빛 샤프
펜슬이었다. 그는 구상스의 메모지를 자기
쪽으로 돌려 놓고 재빨리 스케치했다.
그리고는 메모지를 총기상 쪽으로 돌려서
보여 주고는 물었다.
"이러면 알겠소?"
"물론." 하고 벨기에인은 정확한
스케치를 흘끔 보고는 대답했다.
"이것은 모두 알루미늄제 원통으로서,
돌려서 박으면 전체를 짧게 만들 수 있게
되어 있소. 여기에는 -- ." 하고 도면의 한
곳을 샤프 펜슬 끝으로 두드리면서
영국인이 말했다.
"개머리 일부를 넣을 거요. 그리고
알루미늄 관을 조립하면 이 부분이 되는
거요. 어깨받이는 이거......여기요......
즉, 알루미늄 관 자체가 어깨받이가 되는
셈이지. 그리고 여기 -- ."
그는 도면 위, 다른 한 곳을 두드렸다.
벨기에인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곳 가장 큰 부분은 직경이 가장 큰
알루미늄 관이고, 이 안에 장전 손잡이를
짜넣은 노리쇠 뭉치를 넣을 거요. 그리고
여기는 총신의 모양과 같이 끝이 가늘게
되어 있소. 총신에는 가늠쇠를 달지 않소.
망원조준기를 쓰니까 그럴 필요가 없지.
게다가 가늠쇠가 없으면 꺼내고 넣기에도
간단하니까 부드럽게 넣고 뺄 수가 있소.
나머지 두 군데......여기와 여기에는
망원조준기와 소음기를 넣을 거요.
볼록한 곳에 꽂아 넣으면 되겠지. 이
전체를 조립하면 분해된 라이플이 안에
들어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할 거요.
분해한 7개 부분, 즉 탄환, 소음기,
조준기, 라이플의 몸체, 그리고 긴
삼각형의 개머리를 만드는 세 개의
쇠막대기 -- 이것은 언제라도 곧 꺼낼 수가
있고, 그것을 조립하면 즉시 사격이
가능한, 그런 것이 아니면 안된단 말이오.
알겠소?"
왜소한 벨기에인은 한참 더 도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무슈." 그는 경의의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정말 천재적인 발상이오.
이거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지.
틀림없이 만들어 보겠소."
영국인은 기쁜 얼굴도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불쾌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부탁하겠소. 그런데 시간 말이오, 대강
14일 뒤에는 총이 필요해. 가능하겠소?"
"물론. 우선 시중에서 파는 총을 손에
넣는 데에 3일, 개조하는 데에 1주일쯤
걸리겠지. 망원조준기도 간단히 구할 수
있소. 어떤 모양의 것으로 하는가는 내게
맡기고. 사정 거리를 130 미터로 하고서,
거기에 가장 적합한 것을 고를 테니까.
눈금 조정은 당신이 직접 시험사격을
해보고 나서 당신이 하는 것이 좋겠군. 그
밖에 소음기를 만들고 실탄을
개조하고...... 서두르면 약속한 날까지 될
수 있겠소. 다만, 이번에 여기 올 때에는
마지막에 가서 의논할 게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12일 뒤에는 다시 한
번 더 왔으면 하는데, 어떻소?"
"알겠소. 7일에서 14일 뒤 사이라면
언제라도 올 수 있소. 그러나 14일이
최대의 한계요. 8월 4일에는 런던으로
돌아가 있어야만 하니까."
"8월 1일 여기에 와서 최종적인 의논이
되면, 4일 오전중에는 당신 주문에 딱
들어맞는 총을 넘겨주겠소."
"좋소. 그럼, 경비와 수수료는 얼마나
되겠소?"
벨기에인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여러 가지 수공, 기계 사용료, 거기에
내 전문지식, 그 모두를 통털어서
1,000파운드는 받아야지. 고작 라이플 한
모르지만, 이건 보통 라이플이 아니오.
예술품이지. 이런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 만들 자격이 있는 인물은
유럽이 넓다고는 해도 나밖에 없으니까.
최고의 것에는 최고의 보수를 주어야 해.
그리고 수수료 이외에 소재가 되는 총,
실탄, 조준기, 그 밖의 물건 구입비로서
200파운드는 필요하고."
"알겠소."
영국인은 여러 말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5파운드짜리
지폐 다발을 꺼냈다. 20매씩 작은 다발로
나뉘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다섯 다발
접어서 무표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성의를 보이기 위해서 선금으로
500파운드 내겠소. 나머지 700파운드는
하면 되겠소?"
벨기에인은 돈다발을 주머니에
챙겨넣으면서 말했다.
"역시 프로페셔널, 그것도 신사
프로페셔널과 하는 거래는 기분이 좋군."
"또 하나 부탁이 있소." 하고 손님은
구상스의 말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자기
말을 계속했다. "앞으로는 이번 일로
인해서 루이와 접촉하거나, 또 그나 다른
누구에게든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 마시오. 그리고 또 내가 누구에게
고용되어 누구를 노리고 있는가에 대한
것도 일체 알려들지 마시오. 탐색하면
반드시 내 귀에 들어오고, 그때는 죽어야
하니까. 이번에 내가 여기 올 때를 노려
경찰에 연락하거나 함정을 파도 역시
구상스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영국인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그는 공포로 창자를
도려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갖가지 총을
찾아서 벨기에 암흑가의 패거리들이 그에게
꽤 많이 온다. 하나같이 보통 수법으로는
어림도 없는 냉혹하고 무자비한
사나이들이지만, 도버 해협을 건너온 이
손님에게서는 여느 악당으로부터는 찾아볼
수 없는 이질적인 것,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강인함이 느껴졌다. 이 영국인은
신변경비가 엄중한 어떤 중요인물을
암살한다고 한다. 암흑가의 보스 정도가
아니고 좀 다른 종류의 거물, 아마
정치가겠지. 구상스는 차라리 생각을
바꾸도록 충고할까 했지만, 입에서 나온
것은 자신의 처지를 잘 분별하고 있는
"무슈!" 하고 그는 소리를 낮추어서
말했다. "나는 당신이나 당신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소.
당신에게 건네줄 총의 번호도 깎아버릴
생각이오. 나로서는 당신에 대한 것을 캐는
것보다 당신이 하는 일로 내게까지 불똥이
튀지 않도록 신경쓰는 편이 훨씬 중요한
일이지. 봉주르 무슈."
재칼은 밝은 햇빛 속으로 나갔다. 그리고
길을 둘 건너서 빈 택시를 잡아타고
브뤼셀의 중심부에 있는 호텔 아미고로
돌아왔다.
그는 서류위조 전문가를 찾아야만 했다.
구상스라면 총을 사들이는 데 필요한
신분증명서를 갖추기 위해서 위조전문가를
고용하고 있겠지만, 자신이 직접
협조를 구했다. 위조 전문가를 찾아내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브뤼셀은 유럽에서는 신분증명서의 위조
센터로서 긴 전통을 가지고 있고, 별로
귀찮은 절차를 밟지 않고서도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어서 편리하게 여기는 외국인이
많은 형편이다. 60년대 초 콩고 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외국인의 용병 공급기지의
역할까지 했다. 하긴 나중에 프랑스 및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영국 부대가 콩고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그 역할도 자연히
소멸되었지만, 카탕가가 비틀거리자 구(舊)
촘베(1919~1919, 콩고(현재 자이르)의
정치가) 정부에 기식하던 300여 명의
'군사고문'이 실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브뤼셀로 다시 돌아와 환락가에
종류의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다.
루이의 중계로 재칼은 누브 가(街)
외곽에 있는 술집에서 그 사나이와 만났다.
그가 자기를 소개하고서, 두 사람은 안쪽
벽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자기
명의의 운전면허증을 꺼내 놓았다. 그것은
2년 전 런던에서 취득한 것으로서, 아직 몇
달은 유효기간이 남아 있었다.
"이것은 -- ." 하고 그는 벨기에인에게
말했다. "지금은 이미 죽은 어떤 남자의
것이었소. 나는 영국에서 운전정지처분을
받아 면허증을 몰수당했으니까 이 첫
페이지를 내 이름으로 바꾸어서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소."
재칼은 댓건 명의의 여권을 위조업자
앞에 놓았다. 위조업자는 흘끔 그것을
발행된 것이라는 것까지 확인하고 교활한
눈으로 영국인을 보았다.
"알 만하군요."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빨간
면허증을 폈다. 그리고 이윽고 면허증에서
얼굴을 들고는 말했다.
"이거라면 어려울 것 없지. 영국의
공무원 나리들이란 모두 신사들뿐이라서,
관공서에서 발행한 서류가 위조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지요. 그러니까 위조를 막기
위한 대비책 같은 건 거의 없어요. 이런
거라면 -- ."
그는 면허 번호와 소유자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 면허증 첫 페이지에 붙어
있는 조그만 종이쪽지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있어요. 비밀 무늬도 코딱지만 하니까
문제없겠는데요. 그럼, 일이라는 건
이것뿐이오?"
"아니, 이것 말고 두 가지 더 있소."
"내 그럴 줄 알았지. 이렇게 말하긴 좀
뭣하지만, 이렇게 간단한 일을 부탁하자고
일부러 이 나를 골랐다면 내 솜씨가
아깝지. 이런 정도라면 두세 시간이면 해낼
인간이 런던에도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그래, 다른 두 가지라는 것은 뭐요?"
재칼은 자세히 설명했다. 벨기에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담배갑을 꺼내어 재칼에게 권했지만, 그가
사양하자 자기만 한 대 빼어 물고는 불을
붙였다.
"그건 좀 어렵겠는데. 프랑스의
진짜 견본이 잔뜩 있으니까. 그래요, 좋은
것을 만들자면 진짜를 옆에다 두고 보면서
해야만 되거든. 그런데 말이오, 또 하나
그것은 본 적도 없으니. 우리 동업자
중에서도 손대 본 녀석이 없을 것 같은데."
그는 여기서 일단 입을 다물었다. 재칼은
옆을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맥주를 한잔 더
주문했다. 웨이터가 가고 나자 다시
위조업자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사진 말인데요, 그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오. 나이, 머리칼의 색깔과
길이에 차이가 있어야만 된단 말이오.
신분증명서를 위조해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은 보통 자기 사진을 가지고 특징을
약간 흐리게 해서 붙여 달라고 하거든.
그런데 당신은 지금의 그 얼굴과 닮지 않은
그는 영국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면서
맥주를 반쯤 마셨다.
"그런 사진을 만들자면 위조하는
신분증의 소유자와 대체로 같은 나이에다
얼굴 모양이나 머리 모양이 거의 당신과
비슷한 사람을 찾아내어, 머리칼을 당신이
희망하는 길이로 잘라내지 않으면 안돼요.
그 사진을 신분증에 붙이는 거지. 실제로
그 신분증을 쓸 때에는 그 사진과 비슷하게
위장하지 않으면 안되고. 아시겠소?"
"물론."
"그러니까 이 일은 시간이 좀 걸린다 그
말이오. 브뤼셀에는 언제까지 있을 거요?"
"한가하지가 못해. 내일이라도 떠냐야만
되는데, 8월 1일에는 다시 돌아와서 사흘쯤
머물 생각이오. 4일에는 런던으로 돌아가야
또다시 벨기에인은 눈앞에 있는 여권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니, 천천히 호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내서 알렉산더 제임스 ㅋ틴 댓건이라는
이름을 적고는, 여권을 접어서 영국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 종이쪽지와
운전면허증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알겠습니다. 그 날짜에는 댈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당장 당신의 사진을
찍어야겠는데요. 정면과 옆에서. 사실 이런
일은 시간도 잡아먹고 돈도 들어요, 경비도
여유가 있어야 되고...... 그 증명서를
만드는 데는 아무래도 진짜를 견본으로
쓰지 않으면 안되니까, 프랑스에 있는
소매치기 명수인 친구에게 연락해야 될지도
모르고. 물론 브뤼셀에서도 짐작되는 곳에
녀석에게 부탁하게 될 것 같다 이 말이오."
"요금은?"
"전부 합해서 2만 벨기에 프랑."
재칼은 머릿속에서 파운드를 환산했다.
"약 150파운드로군. 좋소. 선금으로
100파운드 주지. 나머지는 현물과 바꾸기로
하겠소."
벨기에인은 일어났다.
"그럼, 사진을 찍으러 가실까요? 우리
스튜디오가 있으니까."
두 사람은 택시로 달려 1마일쯤 떨어진
곳에 있는 아파트의 지하실로 갔다. 거기는
아주 평범한 사진관의 스튜디오로서,
'여권용 사진을 기다리는 동안에 완성해
드립니다' 라는 뜻의 간판이 밖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진열장에는 사진사의
보란 듯이 나붙어 있다 -- 굉장히 수정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아가씨의 모습, 신성한
결혼이라는 개념을 모욕하는 듯한 인상
나쁜 커플의 결혼사진, 그리고 갓난아기의
전신을 찍은 사진. 벨기에인은 앞장서서
층계를 내려가, 현관문을 열쇠로 열고
손님을 안으로 안내했다.
촬영은 두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위조업자는 진열장의 사진을 찍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멋진
기술을 발휘했다. 스튜디오의 구석에 놓여
있는 대형 트렁크를 열어보니 고급
카메라와 플래시, 그 밖에 머리 염색약,
가발, 온갖 종류의 안경, 무대용 화장품
등으로 가득했다.
촬영을 반쯤 하다가 위조업자는 신분증
쓰지 않고도 가능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30분쯤 재칼의 얼굴을 매만지던 그는
트렁크에서 가발을 하나 골라냈다.
"이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회색 머리칼을 텁수룩하게 커트한
가발이었다.
"손님의 머리를 이런 식으로 커트해서 이
색으로 물들이면 이 가발과 같은 인상이
되겠는데요."
재칼은 가발을 받아들고서 살펴보았다.
"써보고 사진이 어떻게 나오는지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군."
그 착상은 성공이었다. 여섯 가지 사진을
찍어서 현상실로 뛰어든 위조업자는 30분쯤
지나서 여섯 장의 인화지를 손에 들고
나왔다. 두 사람은 그것을 탁자 위에
있는 것은 늙어빠진 남자의 얼굴이었다.
피부는 회색이며, 눈밑이 고생 탓인지
질병에 시달린 것처럼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콧수염이나 턱수염은 없지만, 회색
머리칼은 적어도 50대에다, 나이보다도
훨씬 늙어 보이는, 애처로운 초로의 남자
같은 인상이다.
"이거면 되겠는데." 하고 위조업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나 화장하는 데 30분이나 걸려서는
안되지. 더구나 가발도 사용해야 하니,
혼자서는 아무래도 안되겠는데. 게다가
이것은 실내에서 라이트를 비추고 촬영한
것이지만, 내가 신분증을 내밀고 사진과
비교될 때는 바깥의 햇빛 아래에서란
말이야."
하고 위조업자가 반대했다.
"본인의 얼굴이 사진과 똑같지 않더라도,
또 반대로 사진의 얼굴이 본인과 꼭 닮지
않아도 그 점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신분증을 조사하는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이란 그런 겁니다. 먼저 얼굴을 보고
나서 신분증을 보자는 것이 보통이죠. 그런
다음에야 사진을 봅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눈앞에 있는 사람의 이미지가
마음속에 남아 있게 됩니다. 그것이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요. 사진과 다른 점보다는
비슷한 점을 찾으려 하게 되는 겁니다.
게다가 이 사진은 가로 20cm, 세로
25cm짜리의 대형이지만, 신분증에 붙이는
사진은 3~4cm짜리입니다. 인상이 아주
다르지요. 사실 하나에서 열까지 아주
신분증이 3년 전에 발행된 것이라면
소유자가 그 뒤로 조금도 변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게다가 이 사진에선 손님은
줄무늬의 노타이 셔츠를 입고 있어요. 가령
이 셔츠 대신에 와이셔츠에 넥타이, 또는
스카프를 목에 감거나 터틀넥 셔츠(자리목
스웨터)라도 입는다면 완전히 느낌이
달라지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 화장은 급하게는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특히 머리 말인데요. 아무래도
미리 텁수룩하게 커트해서 사진보다 약간
진한 듯하게 물을 들여 놓아야지요. 그리고
한물간 초로의 느낌을 주기 위해서 2~3일
수염을 제멋대로 자라게 놔두었다가 거친
솜씨로 면도를 하는 겁니다. 일부러
흔히 보았을 겁니다. 바로 그런 모습으로
하는 거지요. 다음은 얼굴색인데, 이게 또
중요합니다. 불쌍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역시 회색으로 까칠해진 환자처럼 기름기가
싹 빠져 버린 느낌이 아니면 효과가
없지요. 손님, 무연화약(無煙火藥)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재칼은 그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위조업자의 설명을 듣고는 내심 탄복하고
있었다. 총기상도 그랬지만, 이 위조업자도
자기의 일에는 정통해 있는
프로페셔널이다. 두 사람을 소개해 준
루이에게 일이 끝난 다음에 적당한 인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위조업자의
물음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글쎄, 어떻게든 구할 수는 있을 거요."
그것을 십어서 넘기면 30분쯤 지나
구역질이 나지요. 아주 심한 것은
아니지만,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렇게 되면
얼굴색도 새파랗게 되고 진땀을 흘리게
되지요. 이 수법은 전에 군대에서 많이
썼던 겁니다. 잡역이나 행군에서 빠지기
위해 그런 수법으로 꾀병을 앓는 거지요."
"여러 가지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어서
고맙소. 그런데 부탁한 물건은 틀림없이
약속한 날까지 되겠소?"
"기술적으로는 절대 자신 있습니다.
다만, 또 하나의 프랑스 신분증 진짜가
빨리 구해지느냐 하는 것만이 걱정입니다.
하지만 그쪽도 빨리 손을 써서 8월
초까지는 모두 갖추어 넘겨드릴 수 있도록
해놓겠습니다. 그......선금을 주시겠다고
재칼은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5파운드짜리 지폐 20장 다발을 하나 꺼내어
벨기에인에게 건네주었다.
"다음에는 연락을 어떻게 하지?"
"오늘밤과 같은 방법으로 해도
좋습니다."
"그건 안돼. 그 친구가 행방불명이
되거나 일 때문에 이곳을 떠날 때도 있을
텐데, 그렇게 되면 당신을 찾아내는 게
불가능해."
벨기에인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8월 1일부터
사흘 동안 아까 그 바에서 매일 밤 6시에서
7시까지 손님을 기다리겠습니다. 오시지
않으면 이 거래는 없었던 것으로 하지요."
재칼은 이미 가발을 벗고, 화장 지우는
그것이 끝나자 그는 말없이 넥타이를 매고
윗도리를 입었다. 그리고 천천히
위조업자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분명히 말해 둘 게 있소."
조용한 목소리였다. 조금 전까지의
친근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상대방을
응시하는 두 눈은 도버 해협의 안개처럼
차갑고 음산했다.
"일이 끝나면 약속대로 그 술집에 와야
해. 그때 새 운전면허증과 함께 아까 맡긴
것에서 오려 낸 페이지도 돌려주어야 하고.
방금 찍은 사진의 원판과 현상한 것도
모두. 댓건이라는 이름과, 그 면허증
소유자의 이름은 잊어버려. 그리고
위조하는 프랑스의 신분증 두 장에
기입하는 이름은 그쪽에서 적당한 것을
아무것이나 좋으니까. 서류를 내게
넘겨주면 그 이름도 잊는 거야.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돼.
이상의 조건 중에서 하나라도 어기면
당신은 죽는 거야. 알겠소?"
위조업자는 한동안 말없이 재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 영국인을 그저
영국에서 차사고를 냈거나, 아니면 무슨
개인적인 이유로 프랑스에서 중년 남자로
둔갑하려는 흔히 있는 악당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마약이나 다이아몬드를
브루타뉴 부근의 한적한 어항에서 영국으로
운반하는 일수업자 정도겠지 하고.
그렇더라도 기분좋은 녀석이라고.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착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알겠소."
그리고 다섯 블록쯤 걷다가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 아미고로 돌아왔다.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는 룸서비스를 불러 냉동
닭고기와 포도주를 가져오게 해서 공복을
채우고, 샤워로 화장을 완전히 씻어 낸
다음 침대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호텔을 체크아웃한 그는
파리행 브라반 급행을 탔다. 7월 22일의
일이다.
같은 날 아침, SDECE의 액션 서비스의
책임자인 롤랑 대령은 책상에 놓인 두 통의
문서를 훑어보았다. 두 통 모두 다른
부서의 에이전트가 제출한 통상적인 보고서
사본이었다. 청색 복사지의 상단에 그것이
배부된 부과장의 이름이 나란히 기재되어
되어 있었다. 그 보고서들은 그날 아침
본부에 도착한 것으로서, 여느때 같으면
롤랑은 죽 한번 읽고 내용을 파악하고서
불유쾌한 기억들로 가득 찬 머리 한구석에
간수하고 그것으로 끝내 버리겠지만, 이 두
통의 보고서에 공통으로 나타나 있는 한
가지 내용이 그의 마음에 걸렸다.
첫번째 보고서는 제3부(서유럽 담당)가
내보낸 회람용 메모 형식이었으며, 로마
지부에서 온 속달 공문의 개요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로댕, 몽클레아 및 카슨은 여전히 호텔의
가장 위층에 틀어박혀 있으며, 8명의
경호원이 경비하고 있음. 그들은 6월 18일
그 호텔에 들어간 이후로 한 번도 밖에
나오지 않았다. 제3부에서 파견된 인원이
24시간 감시중. 파리에서 간 지시 --
건드려서는 안된다. 감시를 계속하라 -- 는
그전과 같음. 그 호텔에 머물러 있는 세
명은 3주일 전에 외부에 대한 연락방법을
확립(6월 30일자 로마발 보고서를
참조)하여 현재도 여전히 그 방법을 유지.
연락원은 빅토르 코와르스키. 이상.
롤랑 대령은 책상 위 오른쪽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담황색 파일을 집어들어서 폈다.
그 재떨이는 105mm 포탄 탄피를 잘라서
만든 엄청나게 큰 것이지만, 이미 꽁초가
반이나 차 있었다. 그는 6월 30일자 로마발
제3부의 보고서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마침내 찾고 있던 문장을 발견했다.
매일 -- 보고서에는 이렇게 지시되어
있었다 -- 경호원 하나가 호텔을 나가 로마
푸아티에라는 인물의 명의로 우체국까지만
배달되는 우편물용 정리함 하나가 확보되어
있다. 열쇠가 달린 사서함을 빌리지 않은
것은 뜯기거나 내용물을 탈취당할 것을
겁내고 있다고 보여짐. OAS의 세 간부에게
가는 우편물은 모두 푸아티에 앞으로 되어
있으며, 우체국까지만 배달되어 우편
담당직원이 보관하게 된다. 그 직원을
매수하여 우편물을 우리 쪽 에이전트에게
넘겨주도록 해보았으나 그 시도는
실패했다. 직원은 우리 쪽의 접근을
상사에게 보고했으며, 그는 상급 직원과
교체되었다. 푸아티에 앞으로 오는
우편물은 당연히 이탈리아 공안경찰의
검열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제3부는
이탈리아 당국과 접촉하여 협조를 의뢰하는
실패했지만, 어떤 주도권을 잡을 필요는
있다. 전날 밤 안에 도착된 우편물은
다음날 아침 경호원에게 건네주는데, 그의
이름은 빅토르 코와르스키라고 하며, 전
외인부대의 하사이고, 인도네이시아에
로댕이 지휘하는 중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코와르스키는 푸아티에 명의의 가짜
신분증이나, 아니면 이탈리아의 권력층에서
발행한 신원보증서 같은 것을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코와르스키가
우편물을 부칠 경우에는 우체국 중앙 홀
안에 있는 우편함 옆에서 수집시간 5분
전까지 기다렸다가 집어넣으며, 또한
우편함 내의 우편물을 모아서 분류장으로
가져갈 때까지 그것을 감시한다. 이 사이에
그 우편물을 탈취하는 방법도 생각할 수는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은 파리에서 온
지시를 어기는 것이다. 간혹 코와르스키는
국제전화 창구에서 장거리전화를 걸 때가
있으나, 그가 신청한 번호를 알아내거나
대화를 엿들어 보려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상.
롤랑 대령은 파일의 겉장을 덮고 그날
아침 도착한 두 번째 보고서를 손에
들었다. 이것은 국가사법경찰인 메츠
경찰서에서 보내온 것이며, 줄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즉, 메츠
경찰서에서 시내의 술집을 단속할 때
도주하는 사나이를 체포하려고 난투극이
벌어져 경찰관 두 명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서에 연행하여 지문 조회를 해본 결과,
그 사나이는 헝가리 출신의 산도르
1956년 헝가리 사태 때 서방 쪽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국가사법경찰본부가 그
보고서에 첨부한 메모에 의하면,
코바크스는 1961년 알제리의 본 및
콩스탕틴 두 구역에서 발생한 일련의 테러
살인사건에 관계하여 지명수배된 OAS의
악명높은 테러리스트로서, 당시 그는 같은
OAS의 암살자이며 현재 수배중인 전
외인부대 하사 빅토르 코와르스키의
파트너로 행동했었다고 한다.
롤랑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한 시간
이상이나 생각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한 듯이 눈앞에 있는 인터폰의 버저를
눌렀다.
"예, 부르셨습니까?" 하는 소리가
인터폰에서 들렸다.
줘. 지금 곧."
10분 뒤에 문서창고에서 파일이 오자
롤랑은 다시 한 시간이나 그것을 검토했다.
어떤 특정한 부분을 그는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었다. 내려다보이는 거리에
점심을 먹으러 가는 파리지앵들의 모습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할 무렵, 롤랑 대령은
그의 비서, 문서과의 펜글씨 전문가,
그리고 직속부대에서 민첩한 요원 둘을
불러모아 놓고 회의를 열었다. 그는
일동에게 말했다.
"어떤 남자의 이름으로 편지 한 통을
써야겠어."
제 5 장
재칼이 탄 급행열차는 정오 전에 파리
북부역에 도착했다. 그는 택시로 마들렌
광장으로 통하는 쉬렌 가(街)에 있는
조그맣고 지내기 편할 것 같은 호텔로
갔다. 코펜하겐의 호텔 당글테일이나
브뤼셀의 호텔 아미고와 비교하면 격이
훨씬 떨어지지만, 파리에 머무는 동안에는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숙소를 정하고
싶어서 일부러 그 호텔을 선택한 것이다.
게다가 이번 파리 체류는 좀 길어질 것이니
경비도 절약이 되고, 또 7월에는 파리에
외국인 관광객이 많기 때문에 큰 호텔에
묵으면 런던에서부터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코펜하겐이나
조그만 호텔이 마음이 놓였다. 시내에 나갈
때는 반드시 짙은 선글라스를 썼다. 이것은
그가 늘 애용하는 것으로, 밝은 여름
햇볕이 넘치는 큰길에는 선글라스 차림이
드물지 않았고, 인상을 감추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다만 호텔의 복도나
로비는 위험했다. 준비가 여기까지 진행된
단계에서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누군가가 반가운 목소리로, "오! 뜻밖이군!
이런 데서 만나게 되다니!" 하고 그의
본명이라도 입에 담게 되어, 그를
댓건이라고만 알고 있는 프런트 직원이
의심하게 되는 불상사라도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하긴 그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에는
사람의 이목을 끌 만한 일은 전혀 없었다.
방에서 먹고, 그 이후는 조용히 지냈다.
다만 한 가지 그래도 꼽아 보라면,
아침식사에 따라나오는 검은딸기 잼이
싫어서 건너편 식료품 가게에서
마멀레이드를 한 병 사가지고 와서,
아침식사에 잼 대신에 그것을 곁드려
달라고 호텔 종업원에게 부탁한 정도이다.
호텔 종업원에 대해서도 조용한 언동으로
예의바르게 처신하고, 영국인 특유의
사투리가 섞인 프랑스어를 어쩌다가 한두
마디 애교삼아 입에 담고서 인사를 하면
상냥한 미소로 답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경을 써주는 지배인에게 아주 쾌적한
호텔이며, 여러 가지로 신세가 많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무슈 댓건은 -- ." 하고 어느 날 호텔의
정도였다.
"아주 친절한 분이야. 저런 모습이 진짜
신사지."
누구 하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낮에는 파리 시내를 구경하고 다녔다.
도착한 날 시내 지도를 사가지고 메모를
보면서 가보고 싶은 곳에 표를 해두었다.
그는 그 명소들을 찾아가서 놀랄 정도로
열심히 연구했다. 어떤 곳에서는 그
건축비를 마음속에 새기고, 또 어떤
곳에서는 그것에 얽힌 역사적인 사실도
음미했다.
그는 사흘이나 걸려서 개선문 주변을
돌아보고, 샹젤리제 거리의 카페 테라스에
앉아서 에투알 광장(현재의 드골 광장)을
둘러싼 기념비와 건물의 옥상 같은 것을
있었다면(물론 그런 건 없었지만) 화려한
오스만식 건축을 이토록 열심히 구경하고
찬미하는 관광객을 보고 틀림없이 놀랐을
것이다. 커피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몇
시간씩 말없이 건물을 바라보고 있는,
조용하고 기품 있는 영국인 관광객이
사실은 마음속으로 사격의 각도와 개선문
위쪽에서 아래로 타고 있는 '구원의
불'까지의 거리, 뒤쪽의 비상계단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뛰어내려가서 군중
틈에 섞일 수 있는 기회의 유무 등을
계산하고 있을 줄은 설령 옆에서 그를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도저히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사흘 동안 에투알 광장을 계속 돌아본
전몰자의 성당을 찾아갔다. 그는 꽃다발을
올렸다. 그곳 안내원은 과거 레지스탕스의
전사였는데, 세상을 떠난 동료들의 영혼에
대한 영국인의 태도에 감동하여 납골당
안은 말할 것도 없고 묘지의 구석구석까지
정중하게 안내했다. 그러나 안내원은 이
낯선 방문객의 시선이 끊임없이 납골당의
입구에서 옆에 붙어 있는 형무소의 높은
담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
높은 담장은 주변의 높은 건물의 옥상에서
성당의 안뜰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었다. 두 시간쯤 지나서 그는
안내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팁까지
건네주고 나갔다.
다음으로 그는 앙발리드(戰傷兵收容所)
광장을 찾아갔다. 광장 남쪽에는 프랑스
커다란 성당을 갖춘 앙발리드 건물이 있다.
서쪽은 파베르 가(街)이며, 여기에 그는
가장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전 내내 파베르 가와 '칠레의
산티아고'라는 이름의 좁은 삼각형 광장
모퉁이에 있는 카페에 계속 앉아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곳은 그르넬
가(街)가 90도 각도로 파베르 가와
교차하는 그르넬 가 146번지이며, 머리
위로 솟아 있는 건물의 7층인가 8층에
오르면 앙발리드의 앞뜰, 안뜰의 입구,
그리고 앙발리드 광장의 대부분과 그 밖에
거리 두셋이 눈에 들어올 것이라고 그는
추측했다. 그러나 구경하는 장소로는 더할
수 없이 좋은 곳이지만, 저격에는 마땅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 위층의 창에서
통로(그 밑에는 양쪽으로 전차(戰車)가
놓여 있는 층계가 있고, 거기에 차를
갖다댈 수 있다)까지의 거리가 200 미터
이상 된다. 게다가 146번지에서 밑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산티아고 광장의 울창한
보리수로 가려져 있는 것이다. 나무
사이에서 날개를 쉬는 비둘기의 똥으로, 그
밑에 버티고 서 있는 보반(17세기의 명장)
동상의 어깨가 희게 더럽혀져 있었다.
실망한 그는 차값을 치르고 그곳에서
나왔다.
노트르담 대성당 내에서도 그는 하루를
보냈다. 시테 섬에 있는 이 대성당의
주위는 좁은 골목이며 통로가 종횡으로 나
있고, 대성당의 입구에서 차가 세워져 있는
층계 아래까지의 거리는 몇 -밖에 안되며,
옥상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인접한 샤를마뉴 네거리 공원 주변의
건물이 너무 가까워서 경찰이 잠복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렌 가(街)
남쪽 끝에 있는 십자로 공원이다. 그날은
7월 28일이었는데, 전에 렘 광장이라고
불리던 이 십자로 공원은 드골파가 정권을
잡은 날을 기념해서 '1940년 6월 18일
광장'이라고 바꾸어 부르고 있었다. 재칼의
시선은 건물의 벽에 박아넣은 새 거리의
명판으로 옮겨가서 멈췄다. 예비준비를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읽어 두었던 자료
중에서 발견한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1940년 6월 14일, 런던에 망명해 있던
오만한 지도자는 마이크 앞에 서서
전투에는 졌지만 전쟁에 진 것은 아니라고.
남쪽에 몽파르나스 역의 건물을 옆에 둔
이곳, 전중파(戰中派)에게 추억 어린 이
광장에는 암살자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는 천천히 넓은
아스팔트를 멀리까지 둘러보았다.
몽파르나스 대로(大路)와 렌 가에서 합류해
오는 차로 광장은 마치 차의 소용돌이
같았다. 그는 렌 가의 양쪽에 줄지어 서
있는, 폭은 좁아도 높이 올라간 건물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광장의 끝을 돌아
남쪽으로 가서 울타리 사이로 몽파르나스
역 광장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은 하루에도
몇 만이나 되는 통근자가 타고 내리는
파리의 중요 역 중 하나이며, 승용차나
택시로 대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오기 전에 이곳에 얽힌 갖가지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기억들을 안은 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몽파르나스 역은
철거될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구
몽파르나스 역은 도시재개발을 위해서
1964년에 철거되었다. 새 역은 선로를 따라
약 500미터 내려간 곳에 지었다.)
재칼은 울타리를 등지고 렌 가를 오가는
차의 행렬을 내려다보았다. 그 저쪽에
'1940년 6월 18일' 광장이 있다. 프랑스의
제5공화국 대통령은 그날 반드시 여기에
모습을 나타낼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지난 1주일 동안 살펴본 다른 곳도 제각기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곳만은 절대로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가까운 장래에
몽파르나스 역은 사라져 버린다. 수많은
베를린의 굴욕을, 파리의 해방을 목격한
역전 광장은 카페테리아가 되겠지. 그러나
그전에 전투모에 황금 별을 단 그 사나이가
다시 한 번 틀림없이 이곳을 찾아올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렌 가의 서쪽
모퉁이에 있는 아파트의 가장 위층에서
역전 광장의 중심까지는 약 130 미터이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재칼은 훈련이
잘된 눈으로 머릿속에 새겼다. 렌 가가
광장과 맞닿는 곳에 있는 양쪽의 건물은
저격장소로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누구의 눈에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거기서
길을 따라 늘어선 3채는 역전 광장을
노리기에는 시계(視界)가 좁지만, 일단
후보지점으로 꼽을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너머는 문제도 안된다. 한편, 광장을
나 있는 첫번째 3채도 역시 후보지로서
생각해 볼 만하다. 그 너머는 시계도 좁고
거리도 너무 멀어서 문제 밖이다. 거리도
알맞고 역전 광장을 내다볼 수 있는 위치의
건물로는 이들 말고는 역 건물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고려의 대상이 안된다. 역전
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창문이라는
창문에는 모조리 경찰이 잠복하겠지.
재칼은 우선 렌 가의 서쪽 모퉁이에 늘어선
첫번째 3채의 건물을 연구하기로 하고,
동쪽 모퉁이에 있는 '앙 공작부인'이라는
카페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그는 테라스에 앉아서 커피를 주문하고,
거리의 반대쪽에 있는 3채의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거기서 세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거리의 반대쪽에 있는 앙시
점심을 먹고 동쪽의 건물들을 연구했다.
오후에는 그 3채의 아파트 앞을
왔다갔다하면서 현관 안을 들여다보며 내부
사정을 살폈다.
다음에 그는 몽파르나스 대로 쪽으로 난
건물을 살펴보았지만, 모두 비교적 새로
지은 사무실용 빌딩으로서 사람의 출입이
잦았다.
다음날 그는 렌 가로 가서 동서 양쪽에
각각 3채씩 있는 아파트 앞을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인도의 나무 그늘 밑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는 척하면서 위층의
동정을 살폈다. 모든 건물이 다 5층이나
6층짜리로서 검은 타일을 붙인 급경사의
지붕에 다락방의 창문이 튀어나와 있었다.
다락방은 옛날에는 하인들의 방이었지만,
빌려서 살고 있다. 지붕도, 그리고 그
다락방의 창문도 그날은 엄중하게
감시당하겠지. 아니, 지붕 위에 감시원이
배치되고 굴뚝 뒤에 숨어서 건너편 창이나
지붕을 감시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락방 바로 아래층이라면 높이도
충분하고, 또 길 건너쪽에서 보이지 않도록
방구석에 몸을 숨길 수만 있다면
저격장소로서는 안성맞춤이다. 사격을
위해서 창문을 열어 놓아도, 무더운
파리이고 보면 별로 수상히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건너편 건물에서 보이지 않도록
창 앞에서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역전
광장의 표적에 대한 사격 각도가 좁아진다.
그래서 재칼은 동쪽과 서쪽의 모퉁이에서
건물은 모퉁이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렇잖아도 사격 각도가 좁았다.
남은 것은 동서 각각 두 채의 건물인데, 이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날의 저격시간은 오후의 중간쯤이 될
것이므로, 태양은 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은 했더라도 아직 높은 위치에 있고
햇볕은 역 건물의 지붕을 넘어서 거리
양쪽에 있는 건물의 창문 속으로 비쳐들
것이리라. 그래서 그는 서쪽에 있는 두
건물을 선택했다. 그리고 햇살의 형편을
실제로 확인하기 위해서 7월 29일 오후
4시까지 거기서 기다려 보았다. 그 결과,
서쪽에 있는 두 건물의 가장 위층 창은
겨우 햇빛이 들 정도라는 것을 알았다.
같은 시각, 동쪽에 있는 건물은 아직도
다음날 그는 관리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곳을 살피기 시작한 지 사흘째의 일이다.
그는 노리고 있는 두 아파트의 중간, 양쪽
현관 가까운 곳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의 바로 뒤, 끊임없이 사람들이
오가는 인도 너머로 보이는 입구에 관리인
노파가 앉아서 뜨게질을 하고 있었다. 꼭
한 번 가까이에 있는 카페의 심부름꾼이
잡담을 하러 왔다. 그는 노파를 마담
베르트라고 불렀다. 그것은 보기에도
즐거운 광경이었다. 따뜻하고 밝은
오후여서 역 건물 상공 남동쪽에 떠 있는
태양이 어두운 현관 안에까지 햇빛이
비추었다.
그녀는 마음씨 좋은 할머니 같은
느낌이었으며, 가끔 아파트를 들락거리는
하고 인사했다. 그때마다 그들은 또 명랑한
소리로, "봉주르, 마담 베르트." 하고
인사를 받는 것을 훔쳐보고 있던 재칼은
노파가 세든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판단했다. 마음씨 좋은 할머니라 불행한
사람이나 동물을 보면 동정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천성을 가졌을 것이다. 오후
2시가 지나서 어디에선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것을 본 그녀는 1층 안쪽에
있는 관리인실로 달려가서, "나비야!" 하고
부르고는 그 도둑고양이에게 접시에 우유를
담아서 갖다주었다.
4시 조금 전, 그녀는 뜨게질거리를 뭉쳐
원피스에 달린 커다란 호주머니에
밀어넣고는 빵집으로 무엇인가를 사러
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재칼은
얼른 들어섰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층계를 소리도 없이 뛰어올라갔다.
층계는 엘리베이터 구멍을 나선형으로
돌면서 위로 올라가게 되어 있고, 건물의
뒤편에는 층마다 좁은 층계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층계참 쪽으로 난 벽에는 문이
있고, 그리로 해서 철제 비상계단으로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가장 위층으로
통하는 층계참에서 그는 문을 열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비상계단은 뒤뜰로 통하게
되어 있고, 그 광장의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몇 채의 건물 뒷문이 그리로 나
있었다. 그리고 뒤뜰과 인접해 있는 건물
사이로 지붕이 달려 있는 좁은 골목이
북쪽으로 뻗어 있었다.
재칼은 조용히 문을 닫고 빗장을 건 다음
복도 막다른 곳에 다락방으로 통하는
엉성한 층계가 보였다. 복도를 따라서
좌우로 둘 씩 문이 나 있었다. 한쪽은 뒤뜰
쪽으로 보고 있는 두 개의 플랫(아파트
형식의 넓은 방)을 위한 것이고, 다른 두
개는 건물의 바깥쪽으로 나 있는 플랫을
위한 것이다. 그는 그의 독특한
방향감각으로, 바깥쪽으로 난 플랫의
어느쪽인가에 렌 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창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창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면 '1940년 6월 18일'
광장과 그 너머에 있는 역전 광장이 보일
것이다. 그가 바깥에서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창문이었다.
바깥쪽으로 난 플랫의 초인종 옆에
명판이 걸려 있고, 하나에는 '마드무아젤
써 있었다. 그는 벨을 누르고 귀를
기울었으나 어느쪽 플랫에서도 반응이
없었다. 그는 자물쇠를 살펴보았다. 두
쪽이 모두 단단한 문틀에 박혀 있다.
자물쇠의 구멍을 막는 침은 조심성 많은
프랑스인들이 좋아하는 두툼한 강철로 된
것 같았다. 더구나 이 자물쇠는 이중으로
걸리게 되어 있다. 열쇠 없이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여벌 열쇠는 마담
베르트의 방에도 있을 것이다.
몇 분 뒤에 그는 층계를 뛰어서
내려갔다. 아파트 안에 있었던 시간은 고작
5분 정도일 것이다. 관리인이 돌아왔다.
관리인실에 들어간 그녀의 모습이 우유빛
유리를 통해서 보였다. 그는 얼른 고개를
외면하면서 아치형 현관을 걸어나왔다.
이웃하여 같은 모양의 아파트가 두 채
늘어서 있고, 그 다음에 우체국이 있다.
우체국 옆은 리트르 가(街)라는 좁은 길이
있다. 그는 우체국 건물을 따라서 그 길로
들어갔다. 우체국 건물이 끝난 곳에 지붕이
있는 골목이 있었다. 재칼은 멈춰서서
담뱃불을 붙이며 재빨리 골목을
들여다보았다. 골목 쪽으로 우체국의
뒷문이 있고, 야근의 전화교환원들은
그리로 해서 우체국을 드나든다. 그리고
터널 같은 골목 막다른 곳에 밝은 햇살이
든 뜰이 있다. 그 뜰의 한구석 그늘진 곳에
방금 나온 아파트에 달린 비상계단의
마지막 발판이 멀리 보였다. 재칼은 담배를
깊이 한 모금 빨고는 걷기 시작했다.
도주할 수 있는 길이 발견된 것이다.
꺾여 보지라르 가(街)로 들어간 그는, 그
길이 몽파르나스 대로와 교차되는 지점까지
걸어갔다. 교차점의 모퉁이에 서서 대로의
앞뒤를 둘러보며 빈 택시를 찾고 있는데,
경찰 오토바이 한 대가 교차점에 들어와서
멈추고, 그 한가운데에서 경관이 차의
흐름을 막기 시작했다. 경관은 날카롭게
호루라기를 불어서 보지라르 가에서 나오는
차와 역 쪽으로 대로로 흘러들어오는 차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뒤로크 지하철 역에서
대로로 달려오는 차는 도로의 오른쪽으로
보냈다. 경관이 미처 차를 통제하기도 전에
뒤로크 역 쪽에서 순찰차의 사이렌이
울려왔다. 재칼은 모퉁이에 선 채
몽파르나스 대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앙발리드 대로에서 온 차의 행렬이
가로질러서 그가 있는 쪽으로 오고 있었다.
선도하는 것은 사이렌을 울려대고 있는 두
대의 흰 오토바이이며, 검은 가죽 점퍼로
당당하게 위엄을 갖춘 경관이 흰색 헬멧을
햇빛에 번쩍이고 있었다. 바로 뒤에 상어의
코 같은 모양을 한 두 대의 시트로엥
DS19가 따르고 있다. 재칼의 앞에 있는
경관이 빙글 돌아 그에게 등을 보인 채
꼿꼿이 선 자세로 왼손을 교차점의 남쪽에
있는 메인 로(路) 를 가리키며 오른손으로
손바닥을 밑으로 향해서 가슴에 대고
달려오는 그 차들을 최우선으로 통과시키려
동작을 취했다.
먼저, 선도하는 흰 오토바이가 차체를
비스듬히 기울이면서 오른쪽으로 꺾어 메인
로로 들어섰다. 바로 뒤를 따르는 첫번째의
운전사와 부관의 등을 노려보듯이 잿빛
양복을 입은 장신의 사나이가 똑바로 앉아
있었다. 재칼은 비록 순간적이었지만
오만하게 쳐든 얼굴과 특징 있는 코를
분명히 보았다. "당신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은 -- ."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망원조준기의 렌즈 속에서요." 이윽고
그는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로 돌아갔다.
뒤로크 지하철 역 가까이에서도, 거기서
금방 나온 한 여성이 이상할 정도로 열심히
대통령의 통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길을 건너가려 하다가 경관에게
제지당했는데, 그 직후에 대통령 일행의
차들이 앙발리드 대로를 나와 몽파르나스
대로로 들어섰다. 그녀 역시 첫번째
시트로엥의 뒷좌석에 앉은 그 독특한
이상하게 빛났다. 일행의 차들이 사라져
버린 뒤에도 그녀는 그 방향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경관이 수상한
눈으로 훑어보자 부랴부랴 길을 건너갔다.
자클린 뒤마는 26세의 미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살려 샹젤리제의
뒤편에 있는 고급 미용실에서 미용사로
일하고 있었다. 이날 7월 30일의 저녁때,
그녀는 밤의 정사를 위해서 부르토유 광장
끝에 있는 아파트로 서둘러 돌아가는
중이었다. 몇 시간 뒤에는 증오하는 정부의
팔에 알몸으로 안긴다고 생각하며, 그 일을
위해서도 한껏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는 애인과 다음 데이트를
언제나 하게 될까 하는 것만이 인생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녀는 원만한, 애정으로 굳게
아버지는 착실한 은행원, 어머니는
프랑스의 전형적인 중산층 주부, 그녀
자신은 미용학교의 졸업반, 그리고
남동생인 장 클로드는 군에 입대해 있었다.
사는 곳은 르 브자네 교외의 일급지는
아니라도 주택지에 있었고, 가족은 거기서
쾌적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59년의 저물어가는 어느 날, 가족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고 있는 자리에
국방부에서 전보 한 통이 날아왔다. 그것은
아르망 뒤마 부부에게 알제리 파견군
제1공수사단 소속의 병사 장 클로드가
알제리에서 전사한 사실을 알리는
국방장관의 전보였다. 장 클로드의 사물은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유족 앞으로
보내겠다고 덧붙여 있었다.
넋나간 사람처럼 정신을 잃고 말았다.
무엇을 보고 들어도 느낄 줄 몰랐다.
미용실에서 아가씨들이 이브 몽탱이나 새로
미국에서 들어온 록 음악에 대해 귀가
아프게 수다를 떠는 데에도 끼어들지
않았고, 르 브자네에서 지내는 평온한
가정생활에서도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끝없이 돌아가는 테이프처럼 계속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토록 사랑하던
남동생 장 클로드에 대한 것뿐이었다.
상냥하고 여린 마음을 가졌었고, 전쟁과
폭력을 증오하고, 오로지 학문을 사랑하던
남동생.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했던 그 장
클로드가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듯이
알제리의 겨울 골짜기에서 전사한 것이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천천히 증오가 싹트기
비겁한 야만인이 남동생을 학살했다고.
그리고 어느 날 프랑수아가 나타났다.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아주 느닷없이,
어느 겨울 일요일 아침, 마침 부모님은
친척집에 가고 없었는데 프랑수아가 르
브자네의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12월이어서 마을은 눈에 덮여 있고,
사람들은 모두 창백하게 여윈 모습이었다.
프랑수아는 늠름한 얼굴이 갈색으로 햇볕에
그을려 있었다. 현관에 선 그는 마드무아젤
자클린이 있느냐고 물었다.
"전데요. 무슨 일이신지요?"
그는 자기가 장 클로드가 소속되어 있던
소대의 지휘관이며, 장 클로드에게서
부탁받은 편지를 전하러 왔다고 신분과
용건을 말했다. 자클린은 그를 안으로
그 편지는 전사하기 몇 주일 전에 쓴
것으로서, 장 클로드는 그것을 안주머니에
넣은 채 어떤 프랑스 거류민 일가를 학살한
게릴라 부대를 수색하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갔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색대는
게릴라를 발견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민족해방군(ALN)의 정규 대대와 우연히
맞부딪쳤다. 새벽의 여명 속에서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지고 그 전투가 한창일 때,
장 클로드는 총알을 가슴을 맞고
쓰러졌는데, 숨을 거두기 전에 이 편지를
소대장에게 맡겼다는 거였다.
자클린은 편지를 읽고 조금 울었다. 편지
자체는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고,
콩스탕틴의 부대에서 있었던 훈련이며
일상생활에 관한 두서없는 이야기였다.
통하여 듣게 되었다 -- 양쪽에서
쳐들어오는 ALN의 공격을 받으면서 소대는
저지대로 6킬로미터 후퇴하였고, 그 동안
계속 공군기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아군의
전투폭격기가 날아온 것은 오전 8시였다.
자신이 남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단에서도 거칠기로 유명한 연대에
지원하여 거기에 배속된 그녀의 남동생은
어느 바위 그늘에서 분대장의 무릎에 안겨
마지막 피를 토하고 남자답게 죽어갔다고
한다.
프랑수아는 자클린에게 상냥하게 대했다.
그는 4년 동안의 야전생활에서
직업군인으로 단련된, 정말로 남자다운
남자였지만, 부하의 누나에 대해서는
자상한 마음씨를 보여 주는 상냥한
갖게 되었고, 파리에서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그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어물거리다가는
부모님이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부모님은 그 전보를 받고서
두 달 동안 슬픔을 참으며 겨우겨우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금 그들의 아들이 죽던
모습을 들려준다는 것은 너무도 잔인한
일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그녀는 동생에
관한 것은 부모님에게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중위에게 말했고, 그도
동의했다.
그러나 그녀의 호기심은 지칠 줄 몰랐다.
알제리 전쟁에 대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전쟁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또 정치가들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전쟁을 종결시키고 알제리를 프랑스의
알제리로서 유지할 인물은 그 이외에는
없다는 국민의 열광적인 기대 속에
수상직에서 엘리제궁의 주인이 되었다.
그런데 프랑수아는 그녀의 아버지 같은
이가 존경해 마지 않는 그 장군을,
프랑스에 대한 배반자라고 단정했다.
두 사람은 프랑수아의 휴가중 매일 밤
함께 지냈다. 매일 저녁, 미용학교를
졸업하고서 곧 근무하기 시작한 미장원에서
일을 끝내면 그는 서둘러 그를 만나러
갔다. 그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그녀에게
했다. 프랑스 육군을 배반한 것, 투옥되어
있는 FLN의 지도자 벤 베라와 프랑스 정부
사이에 있었던 비밀교섭에 대한 것, 그
결과 알제리를 야만인의 손에 넘겨주려
이야기했다. 1월 중순 그는 알제리로
돌아갔으나, 그 뒤 8월에 그가 1주일 간의
휴가를 받았을 때 두 사람은 마르세유에서
짧은 만남을 즐겼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프랑수아는 프랑스 청년에게서 볼 수 있는
착함, 청결함, 남자다움 등 그 모든 것을
상징하는 존재로 뿌리박혀 있었다. 그 해
가을과 겨울 내내 그녀는 프랑수아의
사진을 침대 옆에 놓아두고, 오로지 그를
기다리면서 밤에는 언제나 잠옷을 벗어서
그것을 배에 안고 잠들었다.
다음해인 1961년 봄, 그것이 마지막이
되어버린 휴가 때에 다시 그는 파리에
왔다. 그녀는 가장 예쁜 옷을 입고 제복
차림의 그와 거리를 걸으면서 그만이
파리에서 가장 미덥고, 핸섬한 남자 같아
사람의 모습을 보자, 다음날 미장원은
자클린의 핸섬한 애인에 대한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그녀는 한시도 그와 헤어져
있고 싶지 않아서 그날 유급휴가를 받고
그와 함께 지냈다.
프랑수아는 흥분해 있었다. 정세는
갈수록 긴박감이 더해 가고 있었다. 정부와
FLN 사이의 비밀교섭은 이미 공공연하게
화젯거리가 되어 있었다. 육군은, 진정한
프랑스 육군은 그런 정세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단언했다. 실전에서
단련된 27세의 청년장교와 그의 사랑을
가슴에 안고 있는 23세의 아가씨에게
있어서 알제리는 프랑스의 일부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하나의 신념이 되어
있었다.
채 알제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4월 21일
알제리 파견군의 일부가 본국 정부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제1공수사단은
거의 전원이 반란에 가담했다. 얼마 안되는
극소수의 신병만이 기지를 빠져나가
총독부에서 드골파의 부대에 합류했다.
반란파는 굳이 그들을 막지 않았다. 그리고
1주일 뒤, 반란군과 정부측 부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5월초, 프랑수아는
격전중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4월에 앞으로 당분간은 소식을 전하지
못한다는 편지를 받은 자클린은 7월 들어서
통지를 받기까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파리 교외의 싼 아파트를
빌려 혼자 그 비통함을 견디려고 했지만,
괴로움은 너무도 큰 것이어서 마침내
부모님은 그녀를 데리고 여름 휴가에 함께
갔다. 휴가여행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그녀도 그럭저럭 기운을 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12월, 그녀는 OAS의 지하공작원이
되었다.
그 동기는 단순했다. 먼저 프랑수아,
다음으로 남동생 장 클로드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복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뿐이었다. 그 복수의 정열을
빼고 나면 그녀는 이 세상에 대해 아무런
야심도 없었다. 다만 심부름이나 하고,
연락이나 하고, 때로는 빵 속에 숨긴
플라스틱 폭탄을 장바구니에 넣어서
운반하는 등 보조적인 임무밖에 주어지지
않는 것이 유일한 불만이었다. 자신은 좀더
중요하고 큰일을 할 수 있다고 그녀
들면, 가끔 그랬듯이 카페나 극장에서
플라스틱 폭탄이 폭발한 뒤, 거리에서
통행인들에게 직무상 질문을 하고 있는
경관들도 그녀가 긴 속눈썹을 들어 윙크만
해도, 예쁘게 생긴 입술을 조금 내밀기만
해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통과시켜 주는
것이었다.
프티 클라마르 사건이 있은 뒤, 자칭
프로 살인자 하나가 피신 도중 블루토유
광장 변두리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에 사흘
동안 숨어 있었던 적이 있다. 마침내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그녀는
기뻐하고 있었는데, 그 남자는 사흘 뒤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한 달 뒤에 그
남자는 체포되었는데, 그녀의 아파트에
한때 숨어 있었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그녀가 속해 있는 세포조직의 리더는
안전을 고려해서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 몇
달 동안은 OAS의 일은 하지 말라면서 일체
임무를 맡기지 않았다. 다시 그녀가
레포(연락원)로서 일을 시작한 것은 1963년
1월이 되어서였다.
그리고 7월 어느 날, 어떤 남자가 그녀를
만나러 왔다. 세포조직의 리더가 데리고
왔는데, 그는 그 남자에게 대단한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남자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다만 거침없이 질문을 했다.
조직을 위해서 특별한 임무를 맡아줄 수
있는가? 네, 물론이죠. 위험하고 싫은
일인데도......? 상관없습니다.
3일 뒤, 그녀는 남자 하나가 아파트에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안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의
이름과 정부 안에서의 지위를 알게
되었으며, 임무의 내용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7월 중순, 그녀는 어느 레스토랑에서
우연인 척 가장하고 그 남자의 옆 테이블에
앉았고,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테이블
위에 있는 소금병을 빌려 달라고 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계속 말을 걸어
왔다. 그녀는 적은 말수도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노리던 대로 그는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품위 있는 침착성에 끌린
것이다. 어느 틈엔가 그가 리드하고 그녀가
얌전히 따르는 식으로 대화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2주일 뒤에 이미 두 사람은 몸으로
맺어져 있었다.
정도의 남성 경험은 있었다. 이 새 애인은
쉽게 정복되는 경험 풍부한 여자에게
익숙해 있었다. 그녀는 때때로 자신의 이
멋진 몸뚱이를 이대로 썩힐 생각은 없다는
뜻을 내비치면서, 그래도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얌전하고 수줍은 듯이
처신했다. 이 작전은 성공했다. 그
남자로서는 그녀를 끝까지 정복하는 것이
최대의 목표가 되어버린 것이다.
7월 하순이 되어 세포조직의 리더에게서
이제 슬슬 동거생활로 들어가 보라는
지시가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자면
남자의 아내와 두 아이가 장애물이었다.
그런데 7월 29일, 부인과 아이들끼리만
루아르 계곡의 별장으로 출발했다. 남자는
일 때문에 파리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미장원으로 전화를 걸어서 다음날 밤 그의
아파트에서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다.
아파트로 돌아온 자클린은 흘끗 시계를
보았다.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다. 오늘밤은 정성을 다해서 꾸며볼
생각인데, 아무리 정성을 다한다 해도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녀는 옷을 벗고서
샤워를 한 뒤 옷장 문 안쪽에 붙어 있는
거울에 알몸을 비춰 가며 타월로 몸을
닦았다. 그러나 타월의 감촉에도 자극이
느껴지지 않았으며, 두 손을 올려 장미빛
젖꼭지가 숨쉬는 풍만한 가슴을 들어올려도
그전에 프랑수아를 만날 때 언제나 느꼈던
그 황홀에 가득 찬 기대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멍청하게
밤의 일을 생각했다. 하복부가 이상하게
어떤 애무를 해 오든지 참고 받아들이자고
그녀는 자신에게 맹세했다. 책상 서랍에서
프랑수아의 사진을 꺼냈다. 그는 사진틀
속에서, 역으로 그를 마중나간 그녀가
플랫폼을 날듯이 뛰어오는 모습을 발견할
때 늘 보여 주던, 그 겸연쩍어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 언제나 그녀가 거기에 얼굴을
묻고 황홀감을 느끼던 두툼한 가슴을 감싼
가죽 제복, 달아오른 볼에 차갑게 느껴지던
공수대원의 날개 모양의 흉장 -- 그 모두는
아직 거기에, 그 유리 속에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서 프랑수아의 사진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마치 섹스할 때처럼
그는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몸은 아직도 분명히 그를 기억하고
힘이 체내에서 느껴지고, 부드럽게
신음하는 환희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눈을 뜨고 따뜻해진 사진틀의
유리를 가슴에 안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프랑수아." 하고 그녀는 나직히
속삭였다.
"부탁이에요, 오늘밤 나를 지켜봐
주세요."
7월의 마지막 날 재칼은 바빴다.
오전에는 '벼룩 시장'에 가서 허술한
부대를 한 손에 들고 노점상 앞을 여기저기
쏘다녔다. 그곳에서 산 것은 기름때가 묻은
검은 베레모, 뒤축이 닳아빠진 구두,
때묻은 바지, 그리고 긴 군용 외투였다.
이것들은 구석구석 헤매고 돌아다닌 끝에
겨우 찾아낸 것으로서, 사실은 좀더 가벼운
여름용은 눈에 띄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프랑스 육군의 것은 모두가 거친 모직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외투 자락의 길이는
지나치게 넉넉해서, 그가 입어도 무릎 훨씬
밑에까지 내려갔다. 그에게는 그 점이
중요한 것이다.
'벼룩 시장'을 나오려다가 그는 헌
훈장만을 팔고 있는 노점을 발견했다.
그래서 훈장 한 벌과, 그리고 빛바랜
기장의 사진과, 갖가지 훈장이 어떤 작전의
어떤 전공에 대해서 주어지는가 하는
설명이 되어 있는 소책자를 샀다.
그는 호텔로 돌아와서 계산을 끝내고
짐을 꾸렸다. 새로 사들인 물건은 여행가방
가장 밑바닥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소책자의 설명을 읽으면서, 적에 대한
비롯하여 제2차대전중 자유 프랑스군에
참가한 인물에게 주어진 해방훈장과
종군훈장 등을 골라서 하나의 세트를
만들었다. 종군훈장으로서 빌하카임,
리비아, 튀니지, D데이, 그리고 르클레르크
장군 휘하 제2기갑사단의 각 종군훈장을
골랐다. 그리고 호텔의 프런트에서
브뤼셀행 급행 '북방의 별'호가 오후 5시
15분에 북부역에서 출발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 기차에 타고 차 안에서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그날 12시 전에 브뤼셀에
도착했다.
제 6 장
그 다음날 아침, 빅토르 코와르스키
앞으로 가는 편지가 로마에 도착했다.
우체국에서 그날의 우편물을 넘겨받은
거한의 하사가 호텔로 돌아와서 로비를 막
지나려는데 보이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손님, 죄송합니다."
하사는 언제나 그렇듯이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에게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언제나 현관과
엘리베이터 사이를 앞만 보고 걷는 그에게
보이의 모습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검은 눈의 보이는 편지 한 통을
손에 들고 코와르스키에게로 다가왔다.
코와르스키라는 분에게...... 어느
손님인지 몰라서......아마 프랑스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코와르스키는 보이가 이탈리아어로
말하자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이 대강 어떤 뜻인지
직감이 갔다. 더구나 자기의 이름은 그
발음이 엉망이었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그는 보이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채어 휘갈겨쓴 이름과 주소를 보았다.
그는 가명으로 호텔에 묵고 있는데, 대체
이것이 어찌된 영문인지 수상했다. 그는
글씨를 읽는 것을 아주 싫어해서, 5일 전에
파리의 한 신문이 OAS의 최고 간부 셋이 그
호텔의 가장 위층에 틀어박혀 있다는
특종을 캐낸 일 같은 것은 전혀 모르고
적어도 그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니
그 편지는 그를 당혹케 했다. 여느때도
그는 편지 같은 것은 거의 받아 본 적도
없었으며, 또 그런 단순한 인간들이 모두
그렇듯이 어쩌다 편지를 받으면
그것만으로도 대사건이 일어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보이는 코와르스키야말로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듯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프런트에 있는 녀석들도 그런 이름을 가진
투숙객을 몰라서 그 편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참이었다.
코와르스키는 보이를 내려다보고는,
"좋아, 알아봐 주겠소." 하고 프랑스어로
거만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인의
"알아보겠소, 알아본다니까."
코와르스키는 위층을 가리키면서
되풀이했다. 이탈리아인은 그제야 웃었다.
"아, 알겠습니다. 물어봐 주시겠다고요?
부탁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거창한 몸짓으로 감사를 나타내며
이탈리아어로 말을 하는 보이를 뒤로 하고
코와르스키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8층에 도착해서 밖을 내다본 그는 복도를
감시하고 있던 당직 반장이 들이대는
자동권총 앞에 우뚝 섰다. 한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반장은
곧 안전장치를 걸고서 총을 주머니에
넣었다. 엘리베이터 안을 살펴보고
코와르스키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 위에 붙어
7층을 지나서 위로 올라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언제나 되풀이되는 의례적인
절차다.
당직 반장 이외에도 복도 막다른 곳에
있는 비상구 앞에도 한 사람, 층계 있는
곳에도 한 사람 감시원이 있다. 이
비상구와 층계에는 호텔측 몰래 폭약이
장치되어 있으며, 복도에 놓인 책상 밑의
스위치를 도화관과 연결된 전류를 끊어
버리지 않는 한 그 폭약은 시종 살아
있었다. 낮 감시원은 지붕 위에도 한 사람
배치되어 있었다. 밤에 지키는 세 사람은
지금 방에서 자고 있지만, 만일의 경우에는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9층으로 간다는 표시등에
불이 들어오면 그때는 그것이 곧
일이 꼭 한 번 있었다. 그것은 완전히
우연이었는데, 룸서비스의 마실것을 나르는
보이가 실수로 9층의 버튼을 누른 것이다.
물론 보이는 기절할 정도로 혼이 났고,
두번 다시 그런 실수는 하지 않게 되었다.
당직반장은 9층에 전화로 우편물이
도착했음을 보고하고서, 코와르스키에게
올라가도 좋다는 눈짓을 했다.
코와르스키는 이미 자기 앞으로 온 편지는
안주머니 속에 넣고 있었다. 간부 앞으로
가는 우편물은 철제 가방에 넣어서 왼쪽
손목에 쇠사슬로 매어 있다. 가방과 사슬의
자물쇠는 스프링식이며, 열쇠는 로댕이
보관하고 있다. 몇 분 뒤, 로댕에게
우편물을 건네주고 코와르스키는 8층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오후 늦게 당직반장과
한다.
방에 돌아온 그는 이윽고 편지를 뜯고서
보낸 사람의 사인부터 보았다. 그것이
코바크스라는 것을 알고 그는 놀랐다.
코바크스와는 이미 1년이나 만나지
못했는데, 그가 읽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듯이 코바크스는 글솜씨가 아주
형편없었다. 그러나 코와르스키는 고생한
끝에 간신히 편지를 읽을 수 있었다. 별로
길지 않는 내용이었다.
우선 첫머리에, 편지를 쓴 날 신문에
로댕, 몽클레아, 그리고 카슨, 이렇게 새
사람이 로마의 호텔에 숨어 있다는 기사를
읽고는 (친구가 읽어 주어서) 그렇다면
옛날 동료인 코와르스키도 세 사람과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보게 될지
설명이 있었다.
이어서, 최근 프랑스에서는 어디를 가도
경찰의 눈이 번득이고 있으며, 한편
보석강도에 대한 지령은 지금도 상부에서
계속 내려오고 있어서 사정이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코바크스도 네 번
강도질에 참가했는데,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며, 빼앗은 것들을 상부에 넘겨줄
때에는 정말 싫을 때가 있다. 옛날
부다페스트에서 했을 때에는 2주일밖에
계속되지 않았는데, 그때는 훨씬 더 보람이
있었다 -- 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몇 주일 전에
미셀을 만났는데, 그 녀석이 조조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실비아가 루크 뭐라나 하는
병에 걸렸다는 모양이라고 했다. 잘은
하루라도 빨리 좋아지도록 빌고는 있지만,
자네도 너무 걱정 마라 -- . 그러나
코와르스키는 걱정이었다. 그 귀여운
실비아가 병이 들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36년의 거칠기만 한 인생에서
코와르스키의 마음에 사람다운 인정미를
느끼게 한 일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폴란드가 독일에
침략당했을 때 그는 겨우 12살이었으며, 그
1년 뒤에는 부모가 모두 독일군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그에게는 누나가 하나
있었는데,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성당
뒤의 호텔에서 일을 했다. 그녀가 그
호텔에서 적의 장교 녀석들을 상대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소년인 그에게도
분노하여 군정장관에게 항의했다. 그런데
오히려 체포되어 수용소로 보내진 것이다.
그는 즉시 빨치산에 가담하여 15살 때에
처음으로 독일병을 죽였다. 독일군이 가고
러시아병이 왔을 때, 그는 17살이 되어
있었다. 부모는 생전에 언제나 러시아인을
미워하고 겁내면서, 옛날 그들이
폴란드인에게 어떤 방법으로 보복했는가를
들려주곤 했다. 그래서 그는 곧 빨치산에서
빠져나와서 마치 쫓기는 야수처럼 체코
쪽으로 도망쳤다. 그가 속해 있던 빨치산
조직의 투사들은 나중에 인민위원회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는
체코에서 다시 오스트리아로 달아나서
난민촌에 수용되었다. 그때, 이
폴란드어밖에 모르고 뼈와 가죽만 남은,
때로 쇠약해 있었다. 수용소에서는 전후
유럽이 낳은 불쌍하고 죄 없는 떠돌이 한
사람으로 생각되고 있었다. 그는 미국이
보급하는 식량 덕분에 나날이 체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1946년 봄의 어느 날 밤,
그는 수용소를 탈출하여 남쪽인 이탈리아로
가서, 거기서 다시 수용소에서 알게 된
폴란드인 -- 이 남자는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다 -- 과 함께 프랑스에 숨어들었다.
마르세유에서 그는 어떤 상점에 침입하여
반항하는 가게 주인을 죽여 버렸다. 동료는
그에게 외인부대로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다고 얘기해 주고 그에게서 떠나갔다. 그
다음날 당장 그는 원서를 제출하고,
전쟁으로 황폐한 마르세유에서 경찰의
수사가 겨우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지중해에 면한 항만도시 마르세유는 그
무렵 미국에서 오는 보급물자의
양륙항구로서 붐볐으며, 물자를 둘러싼
살인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코와르스키 사건도 용의자가 짐작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며칠 사이에 수사가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이미 외인부대의 한 병사가 되어
꼼짝도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당시 그는 19살, 처음에는 고참병들에게
'프티 보놈'(귀여운 호인)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그러나 살인을 비롯해서 무슨
일이든 태연히 해치우는 광포성을 보이자
어느새 알아주는 존재가 되었고,
코와르스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6년은, 그때까지
인간적인 면을 완전히 앗아가 버렸다. 그
뒤 그는 알제리로 보내졌는데, 그 사이에
6개월쯤 마르세유 교외에 있는
총기조작훈련기지에 배속받게 되었다. 이
마르세유에서 보내는 동안에 그는 줄리와
만났다. 그녀는 변두리의 술집에서 일하는,
가냘픈 몸집에 성미가 고약한 여자였는데,
그 무렵 그녀는 기둥서방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 코와르스키는
술집에서 그 남자를 날려 버렸다. 가엾은
기둥서방은 단 한 주먹에 6미터나 나가
떨어져서 10시간이나 의식불명이 되었다.
그는 그 뒤로도 몇 년 동안이나 절룩거리고
걸었으며, 깨어진 아래턱 때문에 고생했다.
줄리는 거구의 외인부대 병사가 마음에
들었고, 그 역시 '보호자' 같은 처지가
부포르트의 싸구려 아파트까지 바래다
주었다. 두 사람 사이 -- 특히, 그녀 쪽 --
에는 육체적 욕망은 있었으나 애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으며, 그녀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는 더욱 냉담해졌다.
'당신 아이예요.' 라는 그녀의 말을 듣고
그는 그것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고 하며, 그런 것을
전문으로 하는 할머니를 알고 있으니까
그녀에게 부탁해서 아이를 지워 버리겠다고
했다. 코와르스키는 그녀를 때려 주고,
그런 소리 다시 했다가는 죽여 버리겠다고
겁을 주었다. 3개월 뒤, 그는 알제리로
가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역시 폴란드
출신의 외인부대 병사였던 조셉
조조는 인도네시아에서 부상당하여
제대했으며, 중앙역의 플랫폼에서 가벼운
요기를 할 수 있는 간이매점을 끌고 다니는
명랑한 과부와 함께 살게 되었다. 결혼한
것은 1953년인데, 그 뒤 두 사람은 열심히
장사했다. 마누라가 매점을 끌고 다니면서
가벼운 음식을 손님에게 팔고, 조그만
다리를 쩔둑거리면서 그 뒤를 따라다니며
돈을 받기도 하고 거스름돈을 내주면서
함께 애썼다. 밤이 되면 조조는 가까운
기지에서 놀러오는 외인부대 병사들로
붐비는 술집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옛날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외인부대 병사들은
거의 젊은 녀석들뿐이고 인도네시아 전쟁에
참전한 녀석들은 없었는데, 어느 날 밤
그는 우연히 코와르스키를 만난 것이다.
의논했다. 조조 역시 낙태에는 반대였다.
둘 다 과거에는 카톨릭 신자였던 것이다.
"그녀는 아이를 없애고 싶다는 거야."
하고 코와르스키가 말했다.
"정말 기가 막히는 갈보로군." 조조가
말했다.
"정말이야." 코와르스키도 맞장구쳤다.
두 사람은 술집의 벽에 걸아놓은 거울울
불쾌하게 쳐다보면서 술잔을 거듭했다.
"무엇보다도 아이가 불쌍하잖아?" 하고
코와르스키가 말했다.
"좋지 않은 짓이야." 하고 조조도
동의했다.
그러자 코와르스키가 침울하게, "나는
아이 같은 것은 가져 본 적이 없단
말이야." 하고 중얼거렸다.
말이야."
이것은 조조의 쓸쓸함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날이 샐
무렵까지 마시면서 이야기하다가, 어떤 한
가지 계획을 생각해 내고는 주정꾼 특유의
그 진지한 얼굴로 실행을 약속했다. 다음날
아침 조조는 코와르스키와 한 약속이
떠올랐으나 아내에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난감했다. 그는 사흘 동안
끙끙대며 걱정했다. 그리고 한두 번 넌지시
아내의 심중을 떠본 뒤에, 마침내 침대에서
큰맘 먹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내는 기꺼이 찬성했다. 즉시 준비를
서둘렀다.
얼마 뒤, 코와르스키는 알제리로 가서
당시 소령이었던 로댕의 대대에 편입되어
그의 아내가 위협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임신한 줄리를 지켰다. 코와르스키가
마르세유를 떠날 때에 그녀는 이미 임신
4개월이라 낙태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상태였다. 조조는 다시 따라다니기 시작한
기둥서방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쫓아
버렸다. 코와르스키에게 턱이 박살난 그
기둥서방은 외인부대 병사를 보면, 설령
그것이 의족을 한 상이군인이라도 그 앞을
피해서 지나갈 정도로 겁먹고 있었기
때문에, 조조가 협박하자 옛날
수입원이었던 줄리에게 더러운 욕지거리를
퍼붓고는 완전히 손을 끊어 버렸다.
1955년도 저물어 갈 무렵, 줄리는 푸른
눈에 금발인 딸을 낳았다. 즉시 조조와
그의 아내는 줄리의 동의를 얻어
이렇게 되어 줄리는 또다시 그전의 타락한
생활로 되돌아가고, 조조 부부는
실비아라고 이름지은 딸을 얻게 된 것이다.
부부는 그 일을 편지로 코와르스키에게
알렸고, 그는 막사의 침대에서 그것을
읽고는 기묘한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다른 사람에게 말해 버리면
반드시 자기에게서 떠나 버린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 장기간에 걸친
어떤 전투임무를 맡고 기지를 출발할 때,
종군 신부가 유언장을 만들어 두라고 일러
주었다. 유언장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모인 급료는 어쩌다
나가는 휴가 때에 시내의 술집이나
남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약간의 소지품도 본래는 군대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부는
외인부대의 병사의 것이라도 사물(私物)은
사물이며, 유언장이 있을 때에는 그대로
처리된다고 보증하여, 코와르스키는 신부의
조언을 들어가며 모든 사물을 마르세유에
살고 있는 전 외인부대 병사인 조셉
그리보스키의 딸에게 물려준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만들었다. 이 유언장의 사본은
그의 다른 서류와 함께 파리에 있는 국방부
문서보관소에 보존되었다. 그 뒤 1961년의
본 및 콩스탕틴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의
용의자로 코와르스키의 이름이 떠올랐을 때
이 문서들이 드러나고, 급기야 액션
서비스에서까지 알게 되었다. 즉시
실비아에 관한 사정 일체가 판명되었다.
그러나 코와르스키는 그런 일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코와르스키는 평생에 겨우 두 번 딸을
만난 적이 있다. 한번은 1960년,
군사법정의 증인으로서 출정하는 로댕의
호위병으로 마르세유에 돌아왔을 때였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두 살이었으며, 두
번째는 네 살 반 때였다. 코와르스키는
조조 부부에게 줄 선물과 실바아에게 줄
장난감을 양손에 가득 안고 찾아갔다. 두
사람은 -- 조그만 소녀와 곰 같은 빅토르
아저씨는 금방 마음이 통해서 친해졌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로댕에게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실비아가 지금 루크 뭐라나 하는
편지를 읽고는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점심식사를 끝내고, 그는 다시
9층으로 우편물용 가방을 받으러 갔다.
지난 달까지 카슨이 지배하는 지하조직이
일련의 강도사건으로 빼앗은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그것을 알리는 편지가 이제 도착할
때가 거의 되었기 때문에 로댕은 한 번 더
코와르스키를 우체국에 보내기로 했다.
"저 -- ." 갑자기 하사가 입을 열었다.
"루크 뭔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손목에 사슬을 매고 있던 로댕은
깜짝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그런 사람은
모르는데."
"사람 이름이 아니고 피가 나빠지는
병이라는데요."
방의 반대쪽에서 잡지를 읽고 있던
"그것은 류키미아(백혈병)를 말하는
거겠지."
"어떤 병입니까?"
"암이야. 혈액암이야."
코와르스키는 로댕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시빌리안은 믿을 수가
없었다.
"고칠 수 있겠지요?"
"아니, 안돼. 불치의 병이야. 치료법이
없어. 백혈병이 뭐 잘못되기라도 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코와르스키는
우물거렸다. "책에서 잠깐 읽어서요."
그는 그대로 방에서 나갔다. 로댕은
간단한 명령서 이외에는 글자 같은 것은
읽은 적이 없는 보디가드가 책을 읽고
백혈병 같은 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을
달라질 정도는 아니었으며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마음속으로 기다리던 편지가 오후
우편으로 도착한 것이다. 그것은 OAS가
스위스의 은행에 가지고 있는 예금구좌의
잔고가 마침내 25만 달러를 넘어섰다는
보고였다.
로댕은 만족한 얼굴로 그 돈을
살인청부업자의 구좌에 넣도록 의뢰서를
은행 앞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는 나머지
25만 달러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드골 대통령만 없애버리면 그전에 OAS가
강대한 세력으로 효과적인 활동을 했을
무렵 자금 지원을 해주던 우익의 실업가나
은행가들이 25만 달러 정도의 돈이라면
언제라도 준비해 줄 것이다. 겨우 몇 주일
전 로댕의 기부 의뢰에 대해서, "요즘 애국
못하고 있소. 이렇게 되면 과거에 투자한
것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어쩌고 하면서 속보이는 구실을
내세우며 거절의 전화를 해오던 녀석들이
그때가 되면 앞을 다투어 신생 프랑스의 새
지배계급이 될 군인에게 원조의 손길을
내밀게 되겠지.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로댕은
불입의뢰서를 썼다. 그러나 25만 달러를
재칼에게 지불하라는 로댕이 쓴 의뢰서를
보고 카슨이 반대했다. 그들이 영국인과 한
약속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행동과 신변경비 상황에 대해서 최신의
정확한 정보를 어느 때고 제공할 수 있는
연락원을 배치한다는 점이며, 이것은
재칼의 일을 성공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성공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이 단계에서
돈을 넘겨주면, 준비가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행동하게 만든다. 언제
사냥감을 덮칠 것인가는 그의 자유이지만,
2~3일 늦어진다고 해서 전체의 계획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실패한다면 두번 다시
암살계획은 세울 수 없겠지)는
살인청부업자에게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 .
카슨은 아침 우편으로 파리의
책임자에게서 드골 측근에 요원 하나를
잠입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편지를 받은
것이다. 그 요원이 드골의 행방, 그
중에서도 그의 여행이나 공개석상에 나가는
예정 -- 그 어느쪽도 최근에 와서는 미리
믿을 수 있는 정보를 얻게 되자면, 아직
며칠의 여유가 더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재칼이 그 임무에 불가결한
정보를 언제라도 알 수 있는 전화를 파리에
설치하기까지 앞으로 며칠 간 돈의 지불을
늦추자 -- 이것이 카슨의 주장이었다.
로댕은 한동안 생각한 끝에 결국 카슨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모두
재칼의 의사는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은행에 대한 지불의뢰나 파리의 전화번호를
알리기 위해서 런던으로 보내는 편지가
며칠 빠르든 늦든 상관없이 재칼의
스케줄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그날을 정해 놓고 시계처럼 정확하게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냉온방용의 환기장치 뒤에 웅크리고 있는
코와르스키는 콜트 45권총을 손에 쥔 채,
마르세유에서 루크 뭐라나 하는 병에 걸려
누워 있는 딸의 일로 가슴을 앓고 있었다.
동틀 무렵이 되어 그에게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번 조조와 만났을 때
아파트에 전화를 놓는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 생각났다.
코와르스키가 그 편지를 받은 날 아침,
재칼은 브뤼셀의 아미고 호텔을 나와서
택시를 잡아타고 구상스가 살고 있는
거리의 모퉁이까지 가서 내렸다. 이미
아침을 먹을 시간이다. 그는 댓건이라고
말하고 -- 구상스는 그의 이름이 댓건인 줄
안다 -- 전화를 걸어서 11시로 약속을
해두었었다. 그 거리의 모퉁이에 도착한
앉아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거리를
지켜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는 11시
정각에 문을 노크했다. 구상스는 그를
맞아들이고서 조심스럽게 자물쇠를 잠그고
사슬까지 걸었다. 그리고는 그를 조그만
사무실로 안내했다. 사무실에 들어간 그는
총기업자 쪽을 돌아보면서 갑자기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소?"
총기업자는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재칼은 차갑게 상대방을 보았다. 눈을
반쯤 감은 그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8월 1일 이리로 오면 4일에는 가지고
돌아갈 수 있도록 총을 준비해 주겠다고
"알고 있소. 문제가 있다고 한 것은 총에
대한 것이 아니오. 총은 이미 준비되어
있소. 내 걸작 중의 하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멋진 것이지. 문제는 다른 곳에
있소. 모든 것을 내가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뜻밖의 일이 생겼소. 아무튼 총부터
구경하시지."
책상 위에 길이 60cm, 폭 45cm, 깊이
10cm의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구상스가
뚜껑을 열었다. 재칼은 들여다보았다.
케이스 안에는 분해한 총의 각 부품이 그
모양에 따라서 몇 개의 칸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것은 총을 살 때 가지고 온 케이스가
아니오. 그건 너무 길거든. 그래서 내가
직접 만들었지. 꼭 맞도록."
들어맞는다. 위쪽에는 총신과 노리쇠
뭉치가 들어 있으며, 전체의 길이는 약
18인치. 재칼은 그것을 손에 들고
살펴보았다. 아주 가볍고 기관단총의
총신과 비슷하다. 노리쇠 뭉치에는
가느다란 장전 손잡이가 들어 있는데,
이것이 닫힌 상태로 되어 있다. 노리쇠의
뒤쪽 끝에는 동그랗고 볼록한 돌기(突起)가
달려 있다. 재칼은 오른손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그 돌기 부분을 잡고 홱
왼쪽으로 돌렸다. 노리쇠의 자물쇠가
풀리고 고랑 안에서 회전했다. 노리쇠를
후퇴시키니까 총알이 들어가는 약실과
총신의 검은 구멍이 보인다. 그는 노리쇠를
제자리로 갖다놓고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부드럽게 본래의 장소로 들어가
노리쇠 뒤끝 부분의 바로 밑에 강철제
디스크가 용접되어 있다. 그것은 두께가 반
인치, 직경이 1인치가 채 못되고 노리쇠
후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위쪽을 초생달
모양으로 깎아놓았다.그리고 뒷부분에 깊이
반 인치의 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그
안쪽에는 나사로 되어 있다.
"그것은 총대의 프레임을 꽂아 넣는
구멍이오." 하고 벨기에인이 조용한 소리로
설명했다.
개조하기 전에 달려 있던 개머리판의
나무로 된 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노리쇠 뭉치의 아래쪽에
가느다랗게 조금 나와 있는 부분만이
개머리판의 나무 부분이었던 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나무 부분을
막아 놓았다. 재칼은 라이플을 뒤집어서
뒤쪽을 보았다. 노리쇠 뭉치의 바닥과
반듯하게 되도록 짧게 절단한 방아쇠의
잘라낸 자리가 보였다. 거기에 조그만 금속
조각을 용접하여 한가운데에 나사를 자른
구멍이 뚫려 있다. 구상스는 아무 말 없이
길이 1인치의, 한 쪽 끝이 나사로 되어
있는 약간 휘어진 쇠막대기를 재칼에게
건네주었다. 재칼은 나사로 되어 있는 쪽을
구멍에 꽂고 집게와 엄지손가락으로 재빨리
돌려 박았다. 새 방아쇠가 노리쇠 뭉치
아래쪽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옆에 있던 벨기에인이 케이스 안에서
한쪽 끝을 나사식으로 만든 가느다란
쇠막대기를 꺼냈다.
"총대 프레임 중 하나요."
있는 구멍에 대고 돌려가며 박았다. 옆에서
보면 그 쇠막대기는 총의 뒷부분에서
밑으로 30도 각도로 튀어나와 있다. 나사
홈을 파놓은 쪽에서 5cm 되는 곳이 약간
납작하게 되어 있고, 그 중앙부에 거의
총신과 평행되는 각도로 구멍이 나 있다.
즉, 구멍은 똑바로 뒤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구상스는 두 번째의 약간 짧은
강철봉을 꺼냈다.
"위쪽 프레임이오."
그것도 꼭 들어맞았다. 아래쪽
프레임보다 훨씬 낮은 각도에서 두 개의
강철봉은 밑변이 없는 삼각형의 두 변처럼
뒤로 튀어나와 있다. 다음으로 구상스는
밑변을 케이스에서 꺼냈다. 이 어깨받이,
즉 총대 끝의 양쪽에는 조그만 구멍이
"이것은 나사식이 아니고, 아래 위
프레임의 끝을 이 두 개의 구멍에 찰칵
밀어넣게 되어 있소."
재칼은 두 개의 강철봉 끝을 각각 구멍에
넣어 찰칵 하고 밀어넣었다. 이렇게 조립한
총을 옆에서 보니 방아쇠가 노리쇠 뭉치
아래쪽으로 튀어나와 있고, 세 개의
강철봉이 개머리판의 윤곽을 그려내어
비로소 라이플 같은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재칼은 개머리판을 어깨에 대고, 왼손으로
총신을 받치고서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는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
눈으로 총신의 앞끝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전방의 벽에 과녁을 정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노리쇠 뭉치 속에서 찰칵 하는
금속음이 부드럽게 울렸다. 그는 구상스
정도의 검은 원통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소음기로군."
재칼은 건네주는 원통을 받아들고 총신의
끝을 살펴보았다. 아주 가늘게 나선형 홈이
파여 있다. 그는 소음기를 굵은 쪽부터
총신에 씌우고 더 이상 들어가지 않을
때까지 재빨리 돌려가며 박았다. 소음기는
긴 소시지처럼 총신 끝으로 튀어나왔다.
그는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구상스가 그
손바닥에 망원조준기를 올려놓았다.
총신 윗부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한
쌍의 홈이 길게 파여 있다. 이 홈에 조준기
아래쪽에 붙어 있는 스프링식 클립이 들어
있어서, 조준기는 총신과 평행으로
고정되게 만들어져 있었다. 망원조준기의
오른쪽과 위쪽에 각각 나사가 달려 있어서,
재칼은 다시 한 번 라이플을 사격 자세로
들고 목표를 겨누었다. 얼핏 보기에는
고상한 체크 무늬의 양복을 입은 영국
신사가 피카딜리 근처의 총포상점에서
스포츠용의 총을 고르고 있는 그런
그림이다. 그러나 10분쯤 전까지만 해도
기묘한 모양을 한 부품을 모아둔 것에
지나지 않았던 이 총은 예사 스포츠용
라이플은 아니다. 고속탄을 발사하고
사정거리가 긴, 완전히 소음장치가 되어
있는 암살용 흉기이다. 재칼은 총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벨기에인 쪽으로
돌아서며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멋있어. 정말 멋있어. 고맙다고
해야겠군. 나무랄 데라곤 없어."
구상스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조정해서 시험사격을 해보는 것뿐이야.
총알은 있소?"
구상스는 서랍에서 100발이 들어 있는
통을 꺼냈다. 통의 봉한 자리가 뜯어져
있고 여섯 발이 모자랐다.
"이것은 연습용이오. 작약탄으로
개조하기 위해서 여섯 발을 빼냈소."
재칼은 한 웅큼 손에 쥐고 그 총알을
살펴보았다. 사람을 일격에 쓰러뜨리기에는
구경이 너무 직지만, 구경에 비해서는
총알의 길이가 유난히 길었다. 그것은
그만큼 화약의 양이 많아지고 총알에
가속도가 붙어 명중율과 살상력이
증대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 총알
끝부분이 보통 사냥용의 것은 뭉뚝하게
깎여 있는 데 비해서 이 총알은 날카로울
납인데, 이것은 백동(白銅)이다. 시판되는
총알 중에서 이것과 같은 것을 든다면
경기용 라이플 총알밖에 없다.
"개조한 실탄은 어디에 있소?" 하고
재칼이 물었다.
구상스는 다시 책상으로 걸어가서
티슈페이퍼에 싸둔 것을 꺼냈다.
"물론 보통때는 안전한 곳에 숨겨두지만,
당신이 온다고 하기에 꺼내 놓았소."
그는 티슈페이퍼를 펼쳐서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보여 주었다. 언뜻 보기에는
방금 재칼이 통 속에 도로 넣은 총알과
똑같았다. 손에 쥐고 있던 총알을 통 속에
모두 넣은 재칼은 천천히 개조탄을 하나
집어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총알 끝 껍질을 줄칼로 밀어서, 그
드러나게 했다. 이렇게 되면 끝이 약간
평평하게 된다. 다음에는 거기서 내부로
5mm만큼 조그만 구멍을 뚫고서 수은을
부어넣고는, 그 구멍을 납을 녹여서 막아
버린다. 납이 굳으면 줄칼과 사포(砂布)로
본래대로 끝이 뾰족해지도록 다듬는다.
재칼은 그때까지 그런 종류의 실탄을
써볼 기회가 없었지만, 그에 대한 지식은
물론 가지고 있었다. 공장 생산의 규격품
이외에는 제네바 협정에 의해서 일반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으나 이 작약탄의
위력은 단순한 덤덤탄(명중하면 상처를
확대시키는 총알)에 명중하면 소형의
수류탄처럼 폭발한다. 이 탄환을 발사하면
탄두에 넣어 놓은 수은이 탄환이 전진하는
힘에 의해서, 마치 차를 난폭하게 속력을
뒤로 밀리게 된다. 그리고 탄환이 인체의
살이나 뼈에 맞으면 급격하게 감속된다. 그
충격으로 안에 들어 있던 수은이 탄환의
앞쪽을 향해 굉장한 힘으로 밀리게 된다.
그 힘에 의해서 앞쪽이 터지며 펼친
손가락이나 활짝 피어나는 꽃처럼 납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이 납 조각들은 홍차
잔의 받침접시 정도의 면적으로 방사선
모양을 이루면서 확산되어 그 범위 내의
신경이나 세포조직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예를 들어 머리에 명중했다고 하면 그대로
관통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굉장한
압력을 뿜어내어 뇌 조직을 엉망으로
파괴시켜 두개골을 박살내 버린다.
재칼은 그 실탄을 가만히 티슈페이퍼
위에 도로 내려놓았다. 그것을 만든 중년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멋지군. 당신 기술은 정말 일류급
프로요. 그런데 그 문제라는 것이......?"
"실은 분해한 총을 넣을 원통에 관한
거요. 생각처럼 간단치가 않아서. 처음에는
당신 말대로 알루미늄을 썼지. 아니, 일의
순서상 물론 총의 개조를 먼저 했소. 다른
일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겨우 2~3일
전부터요. 그 원통은 내 기술과
공작기계라면 별로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줄 알았지. 그런데 말이오, 원통을
가능한 한 가늘게 하려고 얇은 알루미늄
관을 사왔더니, 이게 너무 얇은 거요.
조립할 수 있도록 나선형 홈을 파려고
해보니까, 하긴 티슈페이퍼처럼 얇고 보니,
조금이라도 압력을 가하면 구부러지거나
가령 폭이 넓은 노리쇠 뭉치가 들어갈
정도로 큰 관에다가, 더구나 두께가 두꺼운
것을 쓴다면 그건 누가 봐도 이상하게
생각될 물건이 되고 말지. 그래서 부득이
스테인리스를 쓰기로 했소.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재료가 있긴 하지만, 쓴다면 역시
스테인리스가 가장 알맞다고 생각했소.
조금 무겁기는 해도, 보기에도 알루미늄과
같고, 또 튼튼하니까 얇아도 되고. 홈을
파도 휘어질 염려도 없고. 다만 단단한
재질 탓으로 일하는 데 시간이 걸려요.
어제부터 시작했지......"
"알겠소. 당신 말이 모두 옳아. 나로서도
완전한 것이 아니면 쓸 수 없지. 그럼,
완성은 언제?"
구상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수가 없소. 물론 재료는 모두 갖추어져
있고, 기술적인 문제도 없긴 하지만. 음,
5일이나 6일......넉넉잡아
1주일쯤이면......"
재칼은 당혹한 표정을 짖지 않았다.
사정을 설명하는 벨기에인을 무표정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가 말을 마친
뒤에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좋소." 하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여행 예정을 변경해야 하지만, 지난번
여기에 왔을 때 생각했었던 것처럼 큰
장애가 되지는 않겠소. 지금부터 어떤 곳에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그 결과 여하에
좌우되기는 하겠지만, 어쨌거나 이 총에
익숙해지려면 사격연습이 필요해. 그러자면
총과 총알, 개조한 것도 한 발 필요하고.
있어야 하고. 벨기에 내에서 전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사격연습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가 좋겠소? 150 미터 정도의
공간이 있는 곳이라야만 되는데."
구상스는 잠깐 생각해 보고는 말했다.
"아르덴 고원지대가 좋을 것 같은데.
거기는 짙은 숲이 많고, 네댓 시간 정도는
사람 그림자도 얼씬 않는 곳이 많이 있지.
하루면 갔다 올 수도 있고. 오늘은
목요일이라 내일부터는 주말 휴가를
들어가서 피크닉으로 사람들이 몰릴 테니까
좋지 않군. 그러니까 5일 월요일이 좋겠소.
화요일이나 수요일까지는 내 일도 끝낼
거고."
재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총과 총알은 지금 가져
또다시 연락하겠소."
기선을 빼앗긴 벨기에인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려고 하는데, 재칼은 그것을
막아 버렸다.
"아직 700파운드 빚이 있는데, 그것은 --
." 그는 돈뭉치 몇 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중에서 500파운드요.
나머지 200파운드는 물건을 다 받고
지불하겠소."
"감사합니다, 무슈."
총기업자는 돈다발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총을 분해해서 황녹색
천으로 안쪽을 바른 케이스 안에 하나씩
소중하게 집어넣었다. 재칼이 요구한
작약탄 한 개는 티슈페이퍼에 싸서
총기청소용 걸레와 브러시 옆에
총알이 든 통과 함께 재칼에게 내밀었다.
재칼은 총알 통을 호주머니에 넣고서
케이스를 손에 들었다. 구상스는 정중하게
그를 배웅했다.
재칼은 호텔에 돌아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총을 넣은 케이스는 옷장 깊숙이에
숨긴 다음, 문을 잠그고 열쇠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오후가 되자 그는 어슬렁어슬렁
중앙우체국을 찾아가서 취리히에 있는
번호를 대고 기다렸다. 전화가 통하기까지
30분쯤 걸렸고, 마이어 씨가 전화를
받기까지 다시 5분이 걸렸다. 재칼은 먼저
구좌번호를 말하고, 자기 신분을 대고는,
이어서 이름을 댔다. 마이어 씨는 일단
수화기를 내려놓고 2분 뒤에 다시 돌아와서
수화기를 들었지만, 그 어조에는 전과 같이
스위스 프랑에 의한 예금이 눈에 띄게
불어난 고객에 대해서는 그 대응도
정중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재칼은 한
가지만 물었다. 스위스의 은행원은 다시
수화기 옆을 떠났다가 이번에는 30초도
안되어 돌아왔다. 손님의 예금 원장과
출납장을 갖고 와서 대조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없습니다. 새로 입금된 것이
있으면 속달우편으로 알려 달라고 하신
손님의 편지도 여기에 있습니다만, 그 뒤
어디에서도 입금된 것은 없습니다."
"지난 2주일 동안 런던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 입금된 것이 있는가 해서
물어본 것이오."
"아, 그러시군요. 어디에서고 입금이
항상 이용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이어
씨의 소리를 들으면서 재칼은 전화를 끊고
우체국을 나왔다.
그날 저녁때 6시가 좀 지나서 재칼은
누브 로(路)의 변두리에 있는 아파트로
갔다. 위조업자는 이미 와 있었다. 재칼은
한 구석에 빈 자리를 발견하고
위조업자에게 그리로 오라고 턱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이자 위조업자가 그 자리로 왔다.
"됐소?" 하고 그가 물었다.
"예, 전부 다됐습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아주 근사해요."
"내놔 보시지." 하고 재칼은 말했다.
위조업자는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게다가 그 프랑스의 것은 밝은 곳에서
자세히 봐야 합니다. 스튜디오에
놓아두었어요."
재칼은 차가운 시선으로 상대방을
쳐다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그리로 가서 보기로 하지."
몇 분 뒤에 두 사람은 술집을 나와서
스튜디오가 있는 거리의 모퉁이까지 택시로
갔다. 아직 남은 노을빛으로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으며, 재칼은 밖에
나갈 때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짙은
선글라스를 써서 인상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는 좁고, 그곳에는 이미 어둠이
깔려 오고 있었다. 노인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는데, 관절염이라도 앓고 있는지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고리가 달린 열쇠로 문을 열었다. 스튜디오
안은 밤같이 어두웠다. 문 옆의 창에 붙여
놓은 사진 사이에서 새어들어오는 몇 줄의
희미한 빛으로 사무실의 의자와 테이블을
간신히 식별할 수가 있었다. 위조업자는 두
겹으로 쳐놓은 빌로드 커튼을 지나
스튜디오로 들어가서 라이트의 스위치를
올렸다.
그는 천천히 호주머니에서 갈색 봉투를
꺼내어 속에 든 것을 인물 사진 찍을 때
소도구로 쓰는 둥근 마호가니 나무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테이블을 방
한가운데 라이트 밑으로 옮겼다.
스튜디오의 안쪽에 설치해 놓은 조그만
무대의 위쪽에 있는 한 쌍의 아크등은 꺼진
채 어둡고 조용했다.
위조업자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테이블에 펼쳐 놓은 세 장의 카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재칼은 첫번째
카드를 집어들고 라이트 밑에서 비춰
보았다. 운전면허증이다. 첫번째
페이지에는 다른 종이가 한 장 붙어 있고,
거기에 다음과 같은 활자가 보였다 --
'면허취득자 이름 알렉산더 제임스 ㅋ틴
댓건. 주소 런던시 W1, 운전 차종 1a, 1b,
2, 3, 11, 12, 13. 유효기간 1960년 12월
10일~1963년 12월 9일'이라는 글씨가
위쪽에, 그리고 면허증 번호(물론
가공이지만)와 '런던시 교통위원회' 및
'1960년의 도로교통에 의함'이라는 글씨가
있고, 다시 '운전면허증' '교부료 15파운드
영수필'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물론 충분하고도 남는다.
두 번째 카드는 콜마르에서 출생하여
현재 파리에 살고 있는 앙드레
마르탱(53세) 명의의 신분증명서이다.
첨부된 사진은 재칼 자기의 것이지만, 다만
현재의 그보다 20년쯤 늙어 보이고, 잿빛
머리카락은 부스스하며, 기운 없고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 신분증 자체도 하급
노동자의 것에 어울리게 때묻고 귀퉁이가
구겨진 상태다.
그가 가장 흥미를 가진 것은 세 번째
카드이다. 붙어 있는 사진은 신분증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두 장의 카드가 만일 진짜라면
발행일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므로 그것을
몇 개월 늦추어 놓은 것이다. 이 카드의
것인데도 신분증과 비교하면 인화지가 훨씬
빛바랜 느낌이고, 또 사진의 얼굴 자체도
턱 부근에 텁수룩한 수염이 제멋대로 자라
있어서 인상이 좀 다르다. 이런 효과는
교묘한 수정 솜씨에서 나온 것이며, 이 두
사진은 다른 시기에 다른 모양을 하고 찍은
동일인물의 두 가지 모습의 사진이라는
느낌을 준다. 양쪽 모두에서 위조업자의
기술은 뛰어난 것이었다. 재칼은 얼굴을
들고 카드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잘되었군. 내가 기대한 그대로요.
고맙소. 잔금이 50파운드 틀림없지?"
"예, 그렇죠."
위조업자는 기대에 찬 얼굴로 웃었다.
재칼은 5파운드짜리 지폐 10장 한 다발을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위조업자에게
사이에 끼운 돈다발이 상대방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말했다.
"더 있을 텐데?"
위조업자는 못 들은 척 하고 시치미를
떼려고 했다.
"뭔데요?"
"진짜 운전면허증에 붙어 있던 종이
말이야. 돌려 달라고 해두었을 텐데."
위조업자가 좋지 못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은 이미 분명했다. 그는 이제야 그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리고
허풍스럽게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잡았던
돈다발을 도로 놓고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듯이 고개를 숙이고 뒷짐을
진 채 두세 걸음 재칼을 등지고 걸어갔다.
그러나 곧 방향을 바꾸어서 다시 돌아왔다.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재칼의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약간 의문을 나타내는 것
같기는 했지만, 단조롭고 무표정했다.
얼굴에도 표정은 없었다. 눈은 자기 자신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이
반쯤 감고 있었다.
"실은 말이오, 당신의 본명 -- 이라고
생각되지만 -- 이 붙어 있는 그 면허증의
첫번째 페이지는 여기에 없어. 아니, 뭐 --
."
그는 걱정으로 가득 찬 사람을
안심시키려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아주 안전한 곳에 보관해 두었어.
은행의 대여금고 속. 그건 나밖에는 열지
위험한 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조심성이 많아지지. 언제나 보험 같은 것을
들어 두고 싶어하거든."
"원하는 게 뭐야?"
"어떻소, 그 종이를 살 생각은 없소?
약속한 요금과는 별도로 말이오."
재칼은 훅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인간들은
어째서 자기의 인생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듯이.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은 위조업자의 제의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떻소, 손님?"
아첨하듯 위조업자가 물었다. 마치
리허설을 한 것같이 매끄러운 연기였다.
조금씩 빙빙 돌려서 넌지시 속을 내보이는
방법이다. 그러나 재칼의 눈으로 보자면
"나는 협박에는 이골이 나 있는
편이라서." 하고 재칼이 받아 주었다.
그러나 힐난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주
보통 소리이고, 말투도 역시 그랬다.
위조업자는 움찔했다.
"뭐라고, 손님, 협박? 이 내가? 말도
안돼. 내 제안은 협박 같은 것이 아니야.
누구나 하는 당연한 일이지. 나는 다만
거래를 하자고 했을 뿐이야. 어느 정도의
돈을 준다면 물건은 고스란히 넘겨주겠다는
거지. 어쨌거나 내 쪽에서 손님의 면허증,
신분증의 필름, 그리고 이건 좀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 ."
정말 미안한 듯이 그는 얼굴까지
찌푸렸다.
"손님이 화장하기 전 맨 얼굴로 아크등
사진도 은행 금고 속에 들어 있거든.
그것들이 모두 영국이나 프랑스 경찰 손에
넘어가면 손님도 좀 곤란해지는 게 아닐까?
손님 같은 분이라면 그런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서 돈을 쓰는 것은 가볍게
생각할 줄 아는데?"
"얼마나 받고 싶소?"
"천 파운드만 받지."
재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제안에 대해서 생각해 보다가,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천 파운드야 어쩔 수
없겠지." 하고 위조업자의 요구를
인정했다.
위조업자는 거보란 듯이 활짝 웃었다.
"역시 손님하고는 말이 통하는군."
"그러나 대답은 노야."
소리로 말했다. 위조업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째서? 아무래도 알 수가 없군. 이제
방금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천
파운드도 어쩔 수 없지 않으냐고 했잖아?
서툰 흥정은 사양하겠어. 우리는 서로 이런
거래에는 도가 터 있을 줄 아는데?"
"이유는 두 가지가 있어." 하고 재칼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 사진의 필름이
복사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증거가 없어.
따라서 앞으로도 두번 세번 등칠 가능성이
없다고는 못하지. 또 자네가 그 물건을
동료에게 맡기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고. 그
녀석은 물건을 내놓기가 좀 아까워서
자기도 천 파운드 받지 않고는 넘겨줄 수
없다고 나올지도 모르고."
"그런 걱정을 하셨군. 그렇다면 그건
지나친 걱정이지. 도대체 소중한 그 물건을
동료에게 맡길 바보 짓을 이 내가 할 리가
없지 않겠나? 만일 돌려주지 않겠다면
본전이고 이자고 없어지니까. 첫째, 손님은
물건과 맞바꾸지 않으면 천 파운드나 되는
돈을 낼 리도 없겠고. 그러니까 나도 내가
직접 갖고 있지 않으면 거래를 할 수 없게
되지. 한 번 말해 두지만 물건은 틀림없이
금고 안에 들어 있어.
그리고 두번 세번 돈을 뜯길 염려도 전혀
없지. 가짜 면허증의 사진판을 영국 경찰에
가져가 본들 상대해 줄 리도 없고, 설령
손님이 가짜 면허증을 쓰다가 경찰에
끌려가 봐야 큰 죄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
내게 몇 번씩이나 돈을 뜯길 바에야 차라리
신분증 역시 비슷하고. 프랑스의 경찰도
어떤 영국인이 앙드레 마르탱이라는 가공의
프랑스인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또 실제로 손님이 그 이름을
써서 프랑스에 들어갔을 때에는 체포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만일 내가 그것을 미끼로
몇 번씩 돈을 뜯는다면 손님은 그 신분증을
버리고 다른 위조업자에게 다른 것을
만들게 하면 그만이지. 그렇게 하면 이미
앙드레 마르탱이란 인간은 없어지고
마니까, 프랑스에 간다고 해도 겁날 건
없는 거지."
"그럼,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 내게
이득이 되는 게 아닌가? 어차피
150파운드만 내면 새것을 한 벌 갖출 수
있으니까."
으쓱했다.
"그런데 손님은 그렇게 느긋할 여유가
없어. 지금 곧 앙드레 마르탱의 신분증이
필요한 거야. 누군가 다른 위조업자에게
만들게 하자면 시간도 적잖게 걸릴 것이고,
또 만들어 봤자 내 작품과는 비교가
안되지. 내 작품은 손님도 보았듯이 어디
한 군데 나무랄 데가 없으니까. 요는
손님에겐 그 물건과 내 침묵이 지금 당장
필요한 거야. 물건은 이미 손님에게
건네주었으니까, 내 입막음으로 천 파운드
있어야겠다는 이야기지."
"그렇군. 그 나름대로 사리에 맞는
이야기로군. 그러나 나는 천 파운드나 되는
큰돈을 이 벨기에에 가져 오지는 않았어.
당장 내놓으라고 해봐야 소용없어."
것인가는 다 알고 있었지만 굳이 원한다면
그것을 털어놓아도 좋다는 여유 있는
미소였다.
"손님, 누가 보아도 손님은 당당한 영국
신사야. 그런데 손님은 중년의 프랑스인
노동자로 위장하고 싶어해. 손님의
프랑스어는 유창하고 거의 사투리가 없어.
그래서 앙드레 마르탱의 출생지를 콜마르로
해놓았지만. 알자스 지방 출신이 하는
프랑스어에는 꼭 손님의 프랑스어와 같은
사투리가 있거든. 그러니까 앙드레
마르탱으로 변장하면 영낙없는
프랑스인으로 통할 거야. 정말 이렇게 멋진
생각을 해낸다는 건 탄복할 일이지. 아무리
의심 많은 경찰이라도 설마 마르탱 같은
가난뱅이 중년 남자를 수상하게 생각지는
모르지만, 손님, 상당히 값나가는
것이겠지. 마약인가? 요즈음은 영국에서도
꽤 유행하는 모양이던데. 그리고 마약의
공급지라면 그야 마르세유이지. 아니면,
다이아몬드인가? 그 어느 것이든 손님의
장사는 돈이 너무 남아서 처치곤란할 그런
것 아닐까? 영국 신사쯤 되는 분이
경마장에서 남의 지갑이나 노리는 치사한
짓은 할 수 없을 테고. 그것보다, 손님,
우리 이제 서로 연극은 집어치우시지, 안
그래? 런던에 전화해서 이쪽 은행에
전보환으로 천 파운드 보내라고 해. 그렇게
하면 내일 밤이면 거래를 끝내고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안 그래?"
재칼은 과거의 잘못을 슬픈 마음으로
떠올리듯이 두세 번 고개를 끄덕였다.
띄우며 위조업자를 쳐다보았다. 위조업자는
그가 미소짓는 것을 보고 비로소 이
부드러운 영국인이 사태를 냉정하게
받아들인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안심했다.
이런 거래는 늘 우여곡절이 따라다니게
마련이지만, 그러나 최후에는 결국 무사히
끝나게 되는 것이다. 위조업자는 긴장이
풀리는 것을 역력히 느꼈다.
"좋아. 자네가 이겼어. 내일 정오까지 천
파운드 준비하지.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
갑자기 위조업자의 얼굴이 떫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여기서는 만날 수 없다는 점이야."
위조업자는 당혹스러웠다.
조용하고 남의 눈에도 안 띄고."
"내 처지로는 여기만큼 위험한 곳도
없어. 조금 전에 자네는 여기서 나 모르게
내 사진을 찍었다고 했잖아. 자네 같은
친구들이 어딘가에 숨어서 돈과 물건을
교환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위조업자는 마음이 놓였다. 얼굴에도
그것이 나타났다. 그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 점은 걱정 없어. 여기는 내 성이야.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있으니까, 내가
부르지 않는 한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 또
싫어도 조심 안 할 수가 없지. 생각해 봐.
관광객의 기념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명목상
하고 있는 장사고, 뒤로는 따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형편이니 말이야. 이건
한길에다 스튜디오를 차려 놓고 당당하게
할 일은 못되니까......"
그는 왼손을 올려서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그 속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섹스 행위를 암시했다. 재칼의 눈이
빛났다. 그의 표정이 움직이더니 마침내
웃기 시작했다. 위조업자도 따라서 웃었다.
재칼은 그의 두 팔을 때리듯이 거머쥐고
몸을 고정시켰다. 그는 아직도 손으로
에로틱한 흉내를 되풀이하면서 웃고 있다.
그때 갑자기 그는 급소에 무시무시한
충격을 느꼈다.
머리가 헤엄치듯 앞으로 나오고, 두 손은
외설스러운 무언극을 하는 대신에 방금
재칼의 오른쪽 무릎이 왔다간 사타구니
소리는 비명으로 바뀌어 구역질하듯
목구멍이 울었다. 반쯤 의식을 잃은 그는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이어서 앞을 향해
옆으로 쓰러져서 고통을 참으려고 했다.
재칼은 가만히 그를 일으켜 무릎을 꿇게
하고, 뒤로 돌아가서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오른쪽 팔로 그의 목을 감고
손목으로 자신의 왼쪽 팔을 잡았다. 왼손은
그의 뒤통수 부분을 눌렀다. 이윽고 재칼은
갑자기 힘을 주어 위조업자의 목을 앞으로
뒤로, 그리고 옆으로 세게 꺾었다. 목뼈가
부러졌다. 별로 큰소리는 아니었지만, 좁고
조용한 스튜디오 안에서 그것은 소형
권총의 발사음처럼 울렸다. 위조업자의
몸은 마지막으로 한번 브르르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 뒤로는 못쓰게 된 인형처럼
안고 있다가, 이윽고 앞을 향해 바닥에
떨어뜨렸다. 시체는 얼굴은 옆으로 하고
손은 아직도 사타구니를 잡은 채 악물고
있는 이빨 사이로 깨물어서 반쯤 잘린 혀가
조금 나와 있고, 부릅뜬 두 눈은 리놀륨의
지워져 가는 무늬를 노려보고 있었다.
재칼은 빠른 걸음으로 커튼 쪽으로
걸어가서 완전히 쳐져 있는지 살펴본 다음,
시체를 반듯하게 눕히고 호주머니를
여기저기 뒤져서 바지의 왼쪽주머니에 들어
있던 열쇠다발을 찾아냈다. 스튜디오 안쪽
구석에 옷과 화장품 따위가 들어 있는
커다란 트렁크가 있다. 네 번째 열쇠로
트렁크가 열렸다. 그는 10분쯤 걸려서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모두 꺼내어 바닥에
쌓았다.
위조업자의 시체를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어 안고는 트렁크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시체를 안에 넣기는 쉬웠다. 힘없는
사지는 트렁크의 모양에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꺾여졌다. 몇 시간 지나면
사후경직이 되어 시체는 트렁크의 바닥에
고정되어 버릴 것이다. 재칼은 조금 전에
꺼낸 것들을 트렁크에 넣기 시작했다.
가발, 여자의 속옷 등 조그맣고 부드러운
것은 팔다리의 틈새에 채웠다. 그 위에
화장용 브러시며 화장품 튜브 등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림 병,
잠옷, 스웨터, 청바지, 드레싱 가운, 검은
망사 스타킹 등을 트렁크에 가득 채워서
시체를 완전히 감추었다. 뚜껑을 닫을
때에는 약간 힘을 주어 눌러야만 할
자물통을 걸었다.
이 작업중에 재칼은 트렁크 안에 있던 천
조각으로 손을 감싸고서 병이나 그 밖에
지문이 남을 만한 물건을 만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기의 손수건으로 자물통과
트렁크의 표면을 닦고서, 테이블 위에 있던
돈다발을 호주머니에 넣고 테이블도 깨끗이
닦아서 본래대로 벽에 갖다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불을 끄고 벽 옆에 나란히
세워놓은 의자에 앉아 어두워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몇 분 뒤, 그는 담배갑을
꺼내어 남아 있던 열 개비의 담배를
호주머니에 넣고는 빈 갑을 재떨이삼아 한
대를 피웠다.
위조업자의 실종이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물론 재칼도 하지 않았지만,
건 하고 나면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지하로 잠적하거나 여행을 떠나는 일이
있을 것이므로, 갑자기 그가 단골 장소에
나타나지 않아도 같은 패거리들은 그 녀석
또 한 건 한 모양이군 하는 정도로밖에
생각지 않겠지 -- 하는 계산을 재칼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
신분증의 위조나 포르노 사진의 일거리
때문에 그와 관계가 있는 녀석들이 찾기
시작하겠지. 스튜디오가 있는 곳을 알고
있는 녀석들은 찾아오기도 하겠지만,
입구가 잠겨 있어서 안에는 들어올 수가
없을 것이다.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와도
시체를 찾자면 스튜디오 안을 온통 다
뒤지고 트렁크의 자물통을 부수고서
허접쓰레기를 꺼내야만 된다.
위조업자는 두목에게 말썽을 일으켜서
살해된 것으로 생각하고 경찰에는 알리지
않을 것이다. 보통 포르노 사진광이었다면
순간적인 발작으로 살해했다고 해도 이렇게
꼼꼼하게 시체를 숨길 여유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언젠가는 경찰이 냄새를 맡게
되겠지. 그 시점에서 피해자의 얼굴 사진이
발표되고, 그 술집의 바텐더는 8월 1일
저녁때 위조업자가 체크 무늬의 양복에
선글라스를 낀, 키가 큰 금발의 남자와
함께 술집에서 나갔다는 생각을 해내겠지.
그러나 위조업자가 빌린 대여금고 --
설령 본명으로 빌렸다고 하더라도 -- 의
존재에 생각이 미치고 내용물을 조사해
보는 일은 적어도 몇 달 사이에는 없을
것이다. 또한, 재칼은 바텐더와는 한마디도
주문한 것은 두 주일 전의 일이니까
웨이터가 천재적인 기억력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의 프랑스어에 있을까 말까
한 외국 사투리까지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경찰은 키가 큰 금발의 남자를
우선 수색하겠지만, 설사 알렉산더
댓건까지는 용케 찾아낸다 하더라도
재칼까지 찾아내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렇게 모든 가능성을 고려에
넣고도 줄잡아 한 달의 여유는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한 달이면 충분하다.
위조업자를 없애는 것은 바퀴벌레를 밟아
버리는 것처럼 간단했으며, 또한 기계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재칼은 느긋한
기분으로 두 개비째의 담배를 마저 피우고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에 싸여 있었다. 그는 입구의 문을
잠그고 슬그머니 스튜디오를 떠났다.
거리에서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반
마일쯤 가서 하수도 맨홀에 열쇠 꾸러미를
집어넣어 버렸다. 한참 밑에서 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길로 호텔에
돌아와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다음날 금요일, 재칼은 교외에 있는
노동자들이 주로 살고 있는 주택지로
물건을 사러 갔다. 캠핑용품 전문점에서
등산용 구두, 등산용 긴 양말, 작업복
바지, 체크 무늬의 셔츠, 그리고 배낭을
샀다. 그 밖에 엷은 폼 러버(스폰지
고무)로 된 시트 몇 장, 그물 부대, 삼베
실, 사냥칼, 가느다란 페인트 붓 두 자루,
핑크와 갈색 페인트 한 깡통씩, 그리고
살까 했으나 월요일까지 놔두면 썩어버릴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물건 사는 것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온
그는 알렉산더 댓건 명의의 여권과
일치하는 새 운전면허증을 보이고서 다음날
아침부터 쓰기로 하고 렌터카를 빌리고는,
프런트 주임에게 어디 해안의 관광지
호텔에 샤워실이나 욕실이 딸린 방을 하나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8월의 여행 시즌이라
어느 호텔이나 모두 붐볐지만, 여기저기
많이 알고 있는 프런트 주임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제브뤼헤 어항이 굽어보이는
아담한 호텔에 방을 잡아 주었다. 주임은
바다에서 잘 쉬라고 인사했다.
제 7 장
재칼이 브뤼셀에서 물건을 사고 있을
무렵, 빅토르 코와르스키는 로마의
중앙우체국에서 국제전화를 거느라고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이탈리아어를 할 줄 모르는 그는
직원에게 도움을 청해서 프랑스어를 조금
할 수 있다는 직원을 찾아냈다. 그리고는
애타게 프랑스의 마르세유에 살고 있는
어떤 남자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데, 그
번호를 모른다고 그 직원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주소와 이름은 알고 있소.
이름은 그리보스키요." 직원은
'그리보스키'라는 발음에 당황해서 종이에
써서 보여 달라고 그에게 말했다.
건네주었지만, Grzyb......와 같은 철자로
시작되는 이름이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이탈리아인은 코와르스키가 Z라고 쓴
글씨는 사실은 i일 거라고 생각하고서
국제전화의 교환수에게 Grib......라고
철자를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조셉
그리보스키라는 이름은 마르세유의
전화번호부에는 올라 있지 않았다.
교환수는 그 말을 직원에게 전했다. 직원은
코와르스키 쪽으로 돌아서서 그런 분은
없다고 하며 설명했다.
그러나 이 직원은 마침 외국인에게는
친절하게 해야 된다고 믿고 있는 양심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만일을 위해서 철자를
써서 보여 주었다.
"이런 이름을 가진 분은
"아니오, 틀려. GRZ요." 하고
코와르스키는 고쳐 주었다.
직원은 놀랐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손님, GRZ?
GRZYB입니까?"
"그래요, GRZYBOWSKI요."
직원은 어깨를 움츠리고는 교환을
불러냈다.
"국제전화의 번호안내를 바꿔 줘요."
그리고는 10분도 채 안되어 조조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고, 30분 뒤에는
전화가 통했다. 어찌된 일인지 조조의
소리에 언제나와 같은 탄력이 없고,
코박스가 편지로 알려 준 나쁜 뉴스를
인정하는 데 망설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 전화를 잘 걸었네. 벌써 3개월째
실비아가 병들었다는 것은 사실일세. 차츰
약해지고 바짝 말라서 의사에게 데리고
갔을 때는 이미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어. 지금 옆방에서 자고 있네. 아니,
옛날 그 아파트가 아니야. 좀더 깨끗하고
넓은 곳으로 옮겼어. 뭐라고? 주소? 조조는
천천히 주소를 말했다. 코와르스키는
입술을 빨아가며 종이에 적었다.
"얼마나 견딜 수 있는 건가?" 하고 그는
고함치듯 물었다. 네 번째에 겨우 질문의
의미가 조조에게 통했다. 그러나 조조는
대답이 없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대답이 없어서 코와르스키는 소리를
질렀다. 겨우 조조의 소리가 들려왔다.
"1주일쯤일까, 길어도 2주일이나 3주일일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코와르스키는 손에
거머쥔 수화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그것을 제자리에 놓고 전화박스에서
비틀거리며 나왔다. 넋나간 얼굴로 그는
통화료를 치르고 우편물을 받아서 가방에
넣고, 그것을 쇠사슬로 손목에 달고는
호텔로 돌아왔다. 태어나서 처음 그는
마음으로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더구나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지시해 줄 사람도 없었다.
전부터 계속 살고 있는 마르세유의
아파트에서 조조는 코와르스키가 전화를
끊는 소리를 듣고 자기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문득 돌아보니 액션 서비스의
두 사나이가 콜트 45권총을 손에 쥐고 아까
조조를, 또 한 사람은 새파랗게 질려서
소파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그의 아내를
각각 겨누고 있었다.
"개 같은 자식." 조조는 욕을 퍼부었다.
"이젠 꺼지시지."
"놈은 오나?" 하고 하나가 물었다.
"아무 말 않고 끊었어."
코르시카인의 검은 두 눈이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
"와야 해. 이건 명령이란 말이야."
"나는 시키는 대로 모두 말했어. 옆에서
다 들었겠지. 그 녀석은 충격을 받았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어.
말릴 틈도 없었어."
"여기로 오는 게 더 좋은데 말이야.
조조, 자네를 위해서도."
"녀석은 올 거야." 조조는 단념한 듯이
말했다. "올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올
거야. 아이 때문에 말이야."
"좋아. 이제 자네 역할은 끝났어."
"그럼, 이젠 돌아가시지."
코르시카인은 총을 손에 든 채 일어섰다.
또 한 사람은 아내를 지켜보면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럼, 우리는 이제 돌아가겠지만,
자네들도 함께 가줘야겠어. 동네에 떠들고
돌아다니거나 로마에 전화를 걸면
곤란하니까. 그렇지, 조조?"
"어디로 데리고 가겠다는 거야?"
"산에 있는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게
해주지. 공기는 신선하고 햇빛은 가득해.
자네 건강을 위해서도 좋지."
넋빠진 소리로 될 대로 되란 듯이 조조가
물었다.
"일이 끝날 때까지."
조조는 창문으로 가서 복잡한 골목길을
내려다보았다. 처마 끝에 그림엽서를
달아맨 생선가게 판매대가 죽 늘어서 있다.
"지금은 관광 시즌이 한창때라 모든
기차가 손님으로 초만원이야. 8월 한 달
내내 버는 것보다 더 벌 수 있지. 지금
장사를 쉬면 손해를 메꾸는 데 2~3년은
걸려."
그거 재미있다는 듯이 코르시카인은
웃었다.
"그것도 자네의 새 조국 프랑스를
위해서야.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기뻐해도 좋을 정도지."
"정치 같은 것은 내 알 바 아니야. 누가
정부를 만들거나 어느 당파가 정권을 잡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그러나 말이야,
나는 너희들 같은 녀석들만은 아주
질색이야. 나도 잘 알고 있어, 너희들이
어떤 인간이란 것을.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히틀러든 무솔리니든 OAS든 꼬리를
흔들고 따라다니지. 아무리 정부가
바뀌어도 너희들 같은 쓰레기는 언제까지고
달라질 것이 없어."
그는 큰소리로 떠들어대며 의족을 끌면서
코르시카인에게 다가갔다. 코르시카인의
손에 쥐어진 콜트 권총의 총구는 꼼짝도
않는다.
"조조!"
아내가 소파에서 소리쳤다.
어쩌려고 그래!"
조조는 멈춰서서 비로소 그녀의 존재가
생각난 듯이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방안을 둘러보며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내는
애원의 눈길을 보냈으나, 액션 서비스의 두
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주 쳐다볼
뿐이었다. 그들은 이런 욕에는 익숙해 있는
몸이다. 아무리 울고불고 법석을 떨어도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상관인 듯한
녀석이 침대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짐을 챙겨. 먼저 자네, 다음에
부인이야."
"실비아는 어떻게 되나요! 4시면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집에 아무도 없으면
어떻게 해요?" 하고 아내는 사정하듯
코르시카인은 남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도중에 학교로 가서 조퇴시키도록
되어 있어. 준비도 다되어 있어.
교장에게는 할머니가 편찮아서 가족들이
모두 가게 되었다고 말해 두었어. 그러니
상관없어. 자, 빨리 해."
조조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아내 쪽을
한번 쳐다보고는 침실로 들어갔다.
코르시카인이 뒤따랐다. 아내는 두 손으로
손수건을 비틀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소파 끝에 앉아 있는 또 하나의 요원 쪽을
보았다. 코르시카인보다 젊은
가스코뉴인이었다.
"그 사람을......어쩔 셈이에요?"
"코와르스키 말인가?"
"그래요, 빅토르 말이에요."
싶다는 거야. 그것뿐이야."
한 시간 뒤, 한 가족 세 사람은 대형
시트로엥에 실려서 앞좌석에 앉아 있는 두
요원을 따라 벨코르의 산속에 있는 호텔로
갔다.
그 주말을 재칼은 바닷가에서 보냈다.
수영 팬티를 사온 그는 토요일은 제브뤼헤
해안에서 일광욕을 하고, 북해에서 수영도
몇 번하고, 조그만 항구도시를 찾아가기도
하고, 그 옛날 영국군이 피와 총알의 파도
속에서 악전고투했다는 방파제를 따라서
산책을 하기도 했다. 방파제에 앉아서
농어를 낚고 있는 해마 수염의 노인들
중에는 45년 전의 격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굳이
없었다. 겨우 몇몇 가족이 해안에 흩어져서
일광욕을 하며 아이들이 파도가 밀려오는
물가에서 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 그는 짐을 챙겨서 호텔을
나와 느긋하게 차를 몰면서 플랑드르의
시골을 드라이브하고 제브뤼헤와 헨트
마을을 구경했다. 그리고 점심은 단의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숯불구이 스테이크의
기막힌 맛을 보고, 오후 2시 좀 지나서
브뤼셀로 돌아왔다. 그날 밤 브뤼셀의
호텔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는,
다음날은 아르덴 고원에 드라이브를 가서
2차대전중 발지 전투에 참가하여
바스토뉴와 말메지의 중간에서 전사한 형의
무덤에 찾아간다며 모닝콜과 아침식사의
룸서비스, 그리고 도시락 준비를 부탁했다.
주겠노라고 했다.
로마에 있는 빅토르 코와르스키는
재칼처럼 우아하게 시간을 보낼 처지는
아니었다. 할당된 시간에 따라서 8층의
층계참에서 경비주임으로 근무하고, 밤에는
지붕 위에서 버티었다. 비번 때에도 거의
잠을 못 이루고 8층의 방 침대에서
뒨굴면서 담배를 피우거나 1갤런짜리 큰
병으로 가져오는 싸구려 포도주를 마시면서
지냈다. 이탈리아산의 싸구려 붉은
포도주는 알제리 시대에 즐기던, 위 속을
휘저어 놓는 피나르하고 비교하면 시원찮고
감칠 맛도 없었으나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상관으로부터 명령이 없이 자기 혼자의
판단으로 무슨 일이거나 결정을 해야 할
상황이 되면 그는 언제나 어물어물 시간이
결론을 내린 뒤였다. 로마를 떠난다고 해도
하루뿐이다. 비행기의 사정이 여의치
못하더라도 이틀이면 된다고 그는
판단했다. 어쨌거나 이 행동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대장에게는 나중에 사정을
설명할 생각이었다. 화를 내기는 하겠지만,
대장이라면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정을 설명하고 48시간의 휴가를
받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긴 로댕은
곤경에 빠진 부하를 외면해 버리지 않는
훌륭한 지휘관이기는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아무래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도저히 실비아에 대한 것을 이해해
주지 않을 것이고, 코와르스키 자신도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말로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재주는 전혀
임하기 위해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외인부대에 입대한
뒤로 처음 무단외출을 한다고 생각하니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같은 시각, 재칼은 브뤼셀의 호텔에서
잠을 깨어 꼼꼼하게 준비를 했다. 우선
샤워를 하고, 수염을 깎고, 침대 옆에까지
날라다 준 멋진 아침식사를 먹었다. 그리고
분해한 라이플이 들어 있는 케이스를
옷장에서 꺼내어 부품을 하나하나 폼 러버
시트로 싸서 삼베실로 묶었다. 그것을 배낭
바닥에 넣고, 그 위에 페인트 깡통, 붓,
작업복 바지와 체크 무늬의 셔츠,
하이삭스와 부츠를 집어넣었다. 그물로 된
주머니는 배낭의 왼쪽에 달려 있는 포켓에,
총알이 든 통은 또 다른 포켓에
다음으로 그는 당시 유행하던 세로
무늬의 셔츠와 언제나 애용하고 있는
우스테드 체크 무늬 대신에 비둘기색의
가벼운 상하복을 입고, 구치제의 가볍고
검은 가죽 스니커(고무창 운동화)를
신었다. 여기에 검은 실크의 니트 넥타이를
매어 앙상블을 이루었다. 그는 한 손에
배낭을 들고 호텔의 주차장에 넣어두었던
차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배낭을
트렁크에 넣고 다시 로비로 돌아와서
도시락을 받아들고 프런트 직원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전 9시에는 국도
40호선을 타고 나뮈르를 향해 가고 있었다.
기복이 없는 전원은 이미 햇볕에
닳아오르기 시작하여 한낮의 무더위를
예고하고 있었다. 도로망 지도를 보니
마일 되는 곳의 삼림지대 안에 조용한
마을이 있다. 정오까지는 너끈히 160km를
주파할 수 있다고 본 그는 와론 평원을
가로지르는 평탄한 직선도로로 심카
아론드를 타고 달렸다.
태양이 머리 위에 오기 전에 그는
나뮈르와 마르슈 마을을 지났다. 마침내
1944년 겨울 독일의 하스 폰 만트이펠 장군
휘하의 티게르 전차사단에 의해 쑥밭이 된
조그만 마을인 바스토뉴를 지나고, 거기서
남쪽 길로 꺾어 산으로 들어갔다. 차츰
삼림이 울창해지며, 구불구불한 도로는 꽉
들어찬 느릅나무나 너도밤나무의 거목들로
그늘이 져서 완전히 하늘이 가려졌다.
마을을 지나 5마일쯤 간 곳에서 삼림으로
몰고 1마일쯤 가니까 다시 다른 산길이
나왔다. 그는 그 산길로 접어들어 조금 간
다음, 그늘 밑의 우거진 잡초 뒤에 차를
숨겼다. 그리고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담배를 피우며 식어가는 엔진 소리,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리는 산비둘기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천천히 그는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서
배낭을 꺼내어 보닛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옷을 하나씩 갈아입었다. 비둘기색
양복은 차곡차곡 접어서 뒷좌석에 놓고
작업복 슬랙스(헐렁한 운동용 바지)를
입었다. 따뜻해서 윗도리는 필요치 않을 것
같아 와이셔츠를 벗고 체크 무늬의 스포츠
셔츠만 입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스니커를
신고 작업복 자락을 그 속에 밀어넣었다.
그는 폼 러버로 싼 라이플 부품을 하나씩
꺼내어 조립했다. 소음기와 망원조준기는
바지 양쪽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탄환을 20발 통에서 꺼내어 셔츠의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 넣고, 티슈페이퍼에 싼
작약탄은 종이에 싼 채로 다른 쪽
호주머니에 살며시 넣었다.
조립이 끝난 라이플을 차의 보닛에
올려놓고 그는 다시 트렁크 쪽으로 가서,
며칠 전 호텔로 돌아오다가 시장에서 사서
그대로 트렁크에 넣어 두었던 물건을
꺼냈다. 사람의 머리 만한 멜론이다. 그는
트렁크를 닫고 페인트, 붓, 사냥칼과 함께
멜론을 배낭에 넣고서 차를 잠그고 숲으로
들어갔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빈터를 발견했다. 끝에서 끝까지 150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총을 나무 옆에 세워 두고
150보 똑바로 걸어가서, 총을 세워 둔 곳이
보이는 나무를 골랐다. 그는 배낭 속의
것을 땅 위에 펼쳐 놓고 페인트 깡통을
열고서 멜론을 칠하기 시작했다. 위와 아래
부분을 갈색으로, 중앙 부분은 핑크색으로
재빨리 칠한 다음 페인트가 마르기 전에
집게손가락으로 두 눈, 코, 콧수염, 그리고
입을 그렸다.
얼굴을 다 그린 그는 손가락으로 칠이
지워지지 않도록 멜론 꼭지에 칼을 꽂아서
들어올려 살그머니 그물 부대에 넣었다.
실이 가늘고 그물코가 커서 멜론의 윤곽과
거기에 그린 얼굴이 분명하게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높이 약 2미터 되는
그물 부대를 달아매었다. 핑크색과
갈색으로 나누어 칠해 놓은 멜론은 나무의
짙은 녹색을 배경으로 해서 인간의 살아
있는 얼굴처럼 보였다. 그는 두세 걸음
물러서서 자신의 솜씨를 살펴보았다.
150미터의 거리라면 그것으로 충분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는 페인트 깡통은 뚜껑을 덮어서
숲속에 던져 버렸다. 두 개의 깡통은 풀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붓은 손잡이를
밑으로 해서 땅에 꽂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발로 밟아서 박아 버렸다. 그리고 배낭을
가지고 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소음장치를 다는 것은 간단했다. 총신에
끼우고 나사처럼 돌려서 고정시키면 된다.
조준기는 총신의 윗부분에 끼워 넣었다.
약실에 밀어넣었다. 한 눈을 감고 조준기를
통해서 빈터 저쪽에 매달려 있는 표적을
찾았다. 망원 렌즈에 잡힌 멜론의 모습은
놀랄 만큼 크고 선명하여, 고작 30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멜론을 싸고 있는 그물 부대의 그물코나
인간의 얼굴을 그린 손가락의 선이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다리의 넓이를 약간 바꾸고 조준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나무에 기댄 뒤에 다시
조준기 속을 들여다보았다. 십자선이
중심에서 벗어나 있기에 그는 오른손을
뻗어서 조정나사를 돌려 완전히 중심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멜론의 한가운데를
겨냥해서 쏘았다.
반동은 생각보다 가벼웠고, 소음장치의
조용한 거리에서 쏘아도 조금만 떨어져
있으면 안 들릴 것이다. 총을 겨드랑이에
끼고 그는 멜론을 달아매 둔 곳으로 갔다.
총알은 멜론의 우측 상단의 껍질을
스치고서 그물코를 찢고 나무의 줄기에
가서 박혀 있었다.
그는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서
조준기의 세팅을 바꾸지 않고 두 발째를
쏘았다.
결과는 총알이 가 박힌 지점이 반 인치
빗나가 있을 뿐, 첫번째와 같았다. 다시 두
발 시험사격을 해본 결과, 그는 겨냥은
옳았지만 조준이 약간 우측 상단 쪽으로
벗어나 있다고 판단하고 나사로 조절했다.
이번에는 왼쪽 밑으로 벗어났다. 좀더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 그는 다시 멜론 있는
그것은 입의 왼쪽 아래쪽 구석을 꿰뚫었다.
그는 같은 조준으로 다시 세 발째를
시험사격했으나 모두 같은 위치에
명중했다. 그래서 그는 아주 조금 조준을
원래의 자리 쪽으로 옮겨 놓았다.
9발째에는 겨냥한 자리인 이마를
꿰뚫었다. 세 번째에는 멜론으로 다가가서
총알이 맞은 지점을 분필로 동그랗게
표시했다 -- 오른쪽 위 구석, 입의 왼쪽
아래 구석, 그리고 이마의 중앙.
다시 자리로 돌아온 그는 연거푸 두 눈,
콧날, 윗입술, 그리고 턱을 쏘았다.
다음에는 멜론을 옆으로 돌려 놓고 나머지
여섯 발을 관자놀이, 귓구멍, 목, 뺨, 턱,
두개골을 보고 쏘았다. 단 한 발만이 조금
빗나갔을 뿐이다.
조절나사의 위치를 확인한 다음
호주머니에서 접착제를 꺼내어 끈적거리는
액체를 나사 못에 발랐다. 30분쯤 담배를
두 개비를 피우는 사이에 접착제가 완전히
굳었다. 사정거리 130 미터로 이 총의
조준이 정확히 고정된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가슴 호주머니에서
티슈페이퍼에 싼 작약탄을 꺼내어 약실에
꽂았다. 그리고 특별히 신경써서 멜론의
중앙부를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소음기의 끝에서 파란 연기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그는 총을 나무에 기대어
세우고 빈터 저쪽 끝에 매달려 있는 그물
부대를 향해 갔다. 그것은 박살이 나서
안은 거의 비어 있었다. 총알을 20발이나
맞은 멜론은 무참하게 찢겨 버리고 말았다.
위에 흩어져 있었다. 씨앗과 액은 나무
줄기에 달라붙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다.
남아 있는 레몬의 살은 그물 부대 바닥으로
한데 모여, 자루는 마치 축 늘어진
고환처럼 나무에 꽂아둔 칼에 매달려 있다.
그는 부대를 벗겨 근처 풀밭에 던져
버렸다. 표적이 되었던 멜론은 물컹한 살
덩어리가 되어 본래의 모양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칼을 나무에서 뽑아
칼집에 넣었다. 그리고 라이플을 가지고 차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총을 분해하여 하나씩 폼 러버로
싸고서 부츠, 하이삭스, 셔츠, 바지 등과
함께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올 때의
옷으로 갈아입고 배낭은 트렁크에 넣고서
천천히 점심으로 싸온 샌드위치를 먹었다.
국도로 나가 바스토뉴, 마르슈, 나뮈르를
지나 브뤼셀로 돌아왔다. 호텔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가 지나서였으며, 일단
배낭은 방에 올려다 놓고 프런트로
내려가서 렌터카 요금을 계산해 주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서 샤워를 하기 전에
한 시간에 걸쳐서 라이플의 각 부분을
꼼꼼하게 닦아낸 다음, 케이스에 넣어서
옷장에 숨겼다.
그날 밤 늦게 배낭, 실베실, 그리고 폼
러버 등, 이제는 쓸모없게 된 것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21발의 탄피는 운하
속에 던져 버렸다.
같은 날 8월 5일 아침, 빅토르
코와르스키는 다시 로마 중앙우체국에
나타나서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직원에게
안내소에 전화를 걸어서 그 주 안에 로마를
떠나 마르세유로 갔다가 돌아오는
비행기편의 시간표를 물어봐 달라고 하고
싶었던 것이다. 월요일에 떠나는 것으로는
한 시간 뒤에 출발 예정이라 이것은
아무래도 안되었다. 다음 비행기는
수요일에 있었다. 다른 항공회사에는
로마에서 마르세유로 직행하는 비행기편은
하나도 없었다. 우회해서 가는 비행기는 몇
편 있었다 -- . 손님, 우회하는 비행기편은
안됩니까? 안돼요? 수요일 편은? 그거라면
11시 15분발이며, 정오 조금 지나서
마르세유의 마리난 공항에 도착합니다.
돌아오는 편은 그 다음날 있습니다.
예약하시겠습니까? 편도입니까? 아니면,
왕복? 알겠습니다. 성함을 말씀해
종이를 꺼내어 이름을 썼다.
EC(유럽공동체) 안에서는 여권이 필요치
않으니까 신분증명서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수요일, 이륙 한 시간 전에
피우미티노 공항에 있는 알리탈리아 항공의
창구로 가면 된다는 거였다. 직원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코와르스키는
우편물을 찾아서 가방에 넣고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재칼은 구상스의 집으로
갔다. 아침식사 때에 전화를 걸자
총기업자는 밝은 목소리로 다되었다고
말했다. 11시에 오시겠소? 그럼, 총을 잊지
마십시오.
재칼은 이번에도 30분 전에 그 거리로
갔다. 총을 넣은 아타셰 케이스(네모난
사온 투박한 천으로 된 가방에 들어
있었다. 그는 11시까지 30분 동안 거리를
슬며시 살핀 다음에 천천히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구상스가 문을 열어 주자
그 뒤로는 거침없이 성큼성큼 사무실로
들어갔다. 구상스는 현관을 잠그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제는 문제없겠지?"
"그래, 이번에는 잘되었소."
책상 뒤로 돌아간 구상스는 삼베실로
말아 놓은 몽둥이 모양의 것을 몇 개
꺼냈다. 그리고 삼베실을 풀면서 두께가
얇은 강관을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모두
번쩍거리게 광택을 내어 알루미늄같이
보인다. 마지막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그는 아타셰 케이스를 달라고 손을
총기업자는 라이플의 부품을 하나씩 강관에
넣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꼭 알맞게
들어갔다.
"시험사격은 어땠소?"
그는 손은 움직이면서 물었다.
"두말할 나위 없었소."
구상스는 망원조준기를 손에 들고
조절나사가 접착제로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나사가 작아서 조작하기 어려울 줄
알았지. 본래 달렸던 나사는 너무 커서
걸리적거리기에 하는 수 없이 이 조그만
것을 썼는데. 강관 속에 안 들어가서
말이오."
그는 조준기를 스테인리스 강관에
집어넣었다.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부분을 각각 강관에 모두 넣고서, 그는
철사 같은 방아쇠와 다섯 발의 작약탄을
손에 들었다.
"이 두 개는 특별한 곳에 감출 필요가
있어서."
그는 검은 가죽을 대어 놓은 총 개머리의
어깨받이를 꺼내어 가죽 부분에 달려 있는,
면도칼날로 흠집을 낸 부분을 가리켰다.
그리고 거기에 방아쇠를 집어넣고, 틈새를
검은 테이프로 막았다. 완전히 흠집이
가려지고, 그런 흔적도 없어졌다. 다음에
그는 책상 서랍에서 검은 고무 덩어리를
꺼냈다. 직경 약 1인치 반, 길이 2인치의
원통이다. 그 한쪽 끝의 중심부에서 나선형
홈이 파인 볼트 같은 것이 튀어나와 있다.
"이것을 강관의 마지막 것에 박는 거요."
있다. 그는 그 구멍에 작약탄을 한 발씩
꽂았다. 놋쇠로 된 뇌관만 보인다.
"고무를 강관에다 붙이면 총알은
깜쪽같이 안 보이게 되어 있소. 이 고무는
그러니까 지팡이의 물미(땅에 꽂기 위해
지팡이 끝에 끼우는 뾰족한 쇠)가 되는
셈이지."
재칼은 말이 없었다.
"어때, 이 정도면?"
총기업자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재칼은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강관을 손에
들고서 하나하나 점검하기 시작했다.
흔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강관의
내부에 이중으로 발라 놓은 천이 충격이나
소리를 흡수해 버리는 것이다. 강관 중에
제일 긴 것이 20인치이며, 거기에는 총신과
하나가 1피트 정도로서 개머리의 상하
프레임, 소음기와 조준기가 각각 들어
있다. 방아쇠를 숨겨 놓은 개머리의
어깨받이와, 총알을 박아놓은 고무 원통은
관 속에 넣을 필요가 없어서 이 두 개는
따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각 부분을
집어넣어 버리니 암살용 저격총은 고사하고
사냥용 라이플로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나무랄 데가 없군." 재칼이 조용히
끄덕였다. "내가 바라는 대로 되었어."
구상스는 기뻤다. 총기의 전문가로서
그는 무엇보다도 찬사를 바랐다. 또 그는
눈앞에 있는 손님 역시 총에 관해서는 일류
전문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재칼은 분해한 총을 넣은 강관을
소중하게 싸서 하나씩 가방 속에 넣었다.
원통을 넣고 가방을 잠그고서 아타셰
케이스를 총기업자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이제 필요없소. 총은 실제로 쓸
때까지 관에 넣은 채로 두겠소."
그는 잔금 200파운드를 안주머니에서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젠 거래가 끝난 셈이오."
구상스는 돈을 호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말했다.
"그렇군요. 그 밖에 뭐든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서슴지 마시고 말하시오."
"그럼, 하나만. 2주일 전에 침묵은
생명이라고 말씀드렸소만. 그걸 잊지
마시도록."
"물론 잊지 않소, 나는."
조용히 대답하면서 구상스는 겁먹고
살인청부업자는 내 입을 막기 위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일 작정일까? 설마?
그런 일을 하다가는 애써 손에 넣은 총을
써보기도 전에 경찰에 쫓기게 된다. 재칼은
그의 마음속을 읽고 있었던 모양인지 빙긋
웃었다.
"걱정 마시오. 당신에게 손댈 생각은
없소. 당신같이 머리좋은 사람이라면
손님에게 기습당할 경우를 생각해서 적절한
조치를 해두었을 거요. 한 시간 이내에
전화가 걸려온다든지, 전화를 해보고 받는
사람이 없으면 친구가 찾아온다든지, 또는
사망했을 때에는 펴보라고 변호사에게
편지를 써서 맡겨 둔다든지. 입을 막기
위해서 당신을 없애는 것은 좋지만, 대신
그 이상의 문제를 만들게 될 거요. 나는
부스럼이지."
구상스는 깜짝 놀랐다. 사실 그는 죽었을
때에 펴보라고 변호사에게 편지를 맡겨
두었던 것이다. 그 편지에는 뒤뜰에 있는
돌 밑을 찾아보라고 적어 놓았다. 그 돌
밑에는 상자가 묻혀 있는데, 그날 그날
찾아오는 사람의 이름을 쓴 종이가 들어
있다. 그리고 매일 종이를 바꾼다. 오늘의
종이에는 댓건이라는 이름을 가진 키가
크고 돈이 많은 영국인이 찾아올
예정이라고 써두었다. 그것도 일종의
보험인 것이다.
영국인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맞았어. 당신은 안전하다는
거로군. 그러나 만일에 내가 여기에 온
일이나 당신에게서 총을 사간 일을
당신을 없애겠소. 내가 여기서 나가면 그
순간부터 나라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시오."
"알고 있소. 내게 오는 손님은 모두
똑같은 약속을 하라고 하니까. 총신에
새겨져 있는 총의 번호를 산(酸)으로 지워
버린 것도 실은 그런 생각 때문이지. 나도
나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니까."
재칼은 다시 미소지었다.
"서로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군.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
구상스는 현관까지 그를 배웅했다.
총이나 살인청부업자에 대해서는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구상스도 재칼에
대해서는 결국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관문 저쪽으로 그의 모습이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는 사무실로
돌아와서 돈을 세어 보았다.
재칼은 싸구려 가방을 가지고 있는 것을
호텔 종업원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점심이 늦어지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택시로 중앙역에 가서 수하물 보관소에
그것을 맡기고 보관증을 도마뱀 가죽의
지갑 속 비밀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시뉴라는 레스토랑에서 프랑스 및
벨기에에서 사전준비를 무사히 끝낸 것을
자축하여 호화판 점심을 먹고는 호텔로
돌아와서 짐을 꾸리고 계산을 끝냈다.
호텔을 출발할 때에는 체크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특제품의 체크 무늬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침착하고 여유가
보이에게 들게 하고는 기다리고 있는
택시로 다가갔다. 지금까지 한 준비에
1,600파운드나 썼지만, 그 대신 라이플과
세 종류의 위조 카드를 수중에 넣었다.
런던행 제트 여객기는 오후 4시 지나서
브뤼셀을 출발했다. 런던공항에서는 짐
조사를 받았지만, 물론 조사에 걸릴 만한
것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7시에는
오랜만에 웨스트 엔(런던 시내
서부지역으로, 부호들이 많이 산다.)에
가서 저녁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아파트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 02
재칼의 날(중)
-포사이즈 장편추리소설
----- 차 례 -----
제 8 장
제 9 장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제 13 장
제 14 장
제 8 장
수요일 아침, 언제나처럼 코와르스키는
중앙우체국으로 갔는데, 그때 아무데도
전화 걸 예정이 없었던 것이 그에게는
불운이었다. 전화를 걸기 위해서 시간을
끌었더라면 비행기 출발 시간에 맞춰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푸아티에 앞으로 오는
편지 다섯 통을 받아 가지고 그것을
쇠사슬로 손목에 연결된 가방에 넣어서
다급하게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9시
반에는 가방을 로댕에게 전해 주고 눈을 좀
붙이기 위해서 자기 방으로 들어왔다. 다음
보초 근무는 밤 7시부터이며, 옥상에서
대기하기로 되어 있었다.
방에 돌아온 그는 콜트 45권총을
꽂았다.(로댕은 시내에 나갈 때에는 절대로
권총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엄하게
일러놓았다.) 만일 그가 몸에 꼭 끼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면 총과 홀스터는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양복은
솜씨 없는 재봉공이 되는 대로 지은 듯한
것으로서, 코와르스키 같은 거구가 입어도
마치 헐렁한 부대처럼 넉넉했다. 그는 전에
사두었던 반창고와 베레모를 윗도리
호주머니에 쑤셔넣고, 6개월 동안 모아둔
리라화와 프랑화의 지폐를 안주머니에 넣고
방을 나섰다.
층계참의 책상에 앉아 있던 당번주임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주임에게,
"전화를 걸고 오라고 했어." 라고 말하며
kqc泳C⒯?쳰9??棹粗??
주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가
엘리베이터에 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1층에 내려온 그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면서 거리로 나갔다.
거리 건너편에 있는 카페에서 '오지'라는
잡지를 읽고 있던 남자가 잠깐 잡지를
내리고 코와르스키가 두리번거리면서
택시를 찾고 있는 것을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 지켜보고 있었다. 코와르스키는
택시가 눈에 띄지 않자 모퉁이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잡지를 읽고 있던 남자는 카페
테라스를 떠나 차도 바로 옆, 인도
가장자리에 멈춰섰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해 있던 소형 피아트가 남자 앞에
와서 섰다. 남자가 타자 피아트는 걸어가고
있는 코와르스키의 뒤를 천천히 미행했다.
오는 택시를 세워서, "피우미치노
공항으로." 하고 운전사에게 말했다.
공항에 도착한 코와르스키는 알리탈리아
항공의 창구에 가서 현금으로 비행기표를
샀다. 창구의 여자에게 가방이나 짐은
없다고 한 뒤에, 11시 15분발 마르세유행에
탑승할 손님은 1시간 5분 뒤에 호명을
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호텔 앞에서부터
미행해 온 SDECE의 요원은 그 동안 계속
코와르스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코와르스키는
카페테리아에 들어가서 카운터에서 커피를
사가지고 이착륙하는 비행기가 보이는 창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공항이 어떤
조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지만
공항이 좋았다. 그의 귀에 익은 엔진
-- 독일의 메사슈미트, 소련의 스톨모비크,
미국의 하늘을 나는 요새. 그리고 그 훨씬
뒤의 것으로는 베트남에게서 공중지원을
해준 스카이레이터며 B_26, 알제리 시대의
미스트레나 후거 등. 민간항공의 여객기는
그 맛이 조금 다르지만, 기수를 내리고
은빛 새처럼 활주로에 진입하여 엔진을
낮추면서 실에 매달린 듯이 착지하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본래 여성적인
성격이지만 공항이 가지고 있는 기능적인
소란스러움이 어쩐지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그는 몽상에 빠졌다. 만일
자기가 다른 인생을 살았더라면 공항에서
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재의
그 일뿐이며 이미 무엇으로도 바뀔 수가
없다.
옮겨가서 굵은 눈썹이 고통스럽게
흐려졌다. 그런 일이 어째서 있을 수
있는가 하고 그는 분노를 참으며
마음속에서 말했다. 그 아이가 죽고,
파리에서는 하릴없는 악당들이 태평스럽게
살아 있는, 그런 일이 있어도 좋단 말인가?
악당들에 관해서는 로댕에게서 여러 가지
들은 바 있다 -- 놈들은 프랑스를 부끄럽게
했고, 군을 배반했고, 외인부대를
해체했으며, 인도네시아와 알제리에 살고
있던 동포들을 테러리스트 손에 넘겨준
것이다.
탑승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코와르스키는 다른 승객들과 함께
유리문에서 희게 불타는 콘크리트의
에이프런으로 나가서 비행기로 향했다.
트랩을 올라가서 기내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베레모를 쓰고 한쪽
볼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요원 하나가
동료 쪽을 향해서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윽고 터보플로프기가
이륙하여 두 요원도 데크를 떠났다. 그 중
하나가 중앙 홀에서 신문 판매대에 들르고,
다른 하나는 시내전화의 다이얼을 돌렸다.
그는 먼저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밝히고
한마디씩 또박또박,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놈은 갔어. 알리탈리아 451편이야.
마리난 도착 1210. 이상."
10분 뒤 이 보고는 파리에 닿았으며,
다시 10분 뒤에는 마르세유에 전달되었다.
알리탈리아 항공의 바이카운트기는
끝없이 푸른 리용 만 상공에서 크게
귀여운 이탈리아 스튜디어스가 통로를
돌아다니면서 승객이 모두 안전띠를 매고
있는지 확인한 다음 뒷부분에 있는 자신의
자리에 가 앉아서 벨트를 채웠다. 바로
앞좌석의 승객이 희게 빛나는 론 델타의
평야를 처음 구경하듯 진지하게 창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것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손님은 노동자 같은 거구의 남자로서,
이탈리아어는 한마디도 못하고 동구풍
사투리가 강한 프랑스어로 말했다. 짧게
깎아올린 검은 머리에 검은 베레모를 얹고,
커다란 몸에 주름투성이의 양복을 걸치고서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그리고 한쪽
볼에 붙인 반창고가 얼굴을 반이나 가리고
있었다. 틀림없이 면도를 하다가 실수로
생각했다.
바이카운트기는 정각에 터미널 건물
근처에 착륙했다. 승객들은 세관으로 갔다.
그들이 유리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경관 옆에 서 있던 대머리의 가냘픈
사나이가 가볍게 경관의 발목을 차면서,
"거구의 남자야. 검은 베레모에 반창고."
하고 속삭이고는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 또
하나의 경관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승객들은 검사대 창 사이를 지나기
위해서 두 줄이 되었다. 양쪽 창 안쪽에
경관이 한 사람씩 마주앉아 있다. 그
사이의 3미터쯤 되는 통로를 승객이 지나는
것이다. 승객은 각자의 여권과 입국 카드를
제시한다. 창 안에 서 있는 인물은
입국하는 외국인이나 귀국하는 프랑스인을
코와르스키가 검사대 창 앞에 갔으나,
안에 있는 푸른 제복은 거의 그를 볼
생각도 않고 노란 입국 카드에 쾅 하고
스탬프를 찍고는, 내민 신분증명서를 한번
흘끗 보고서 다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그를 통과시켰다. 겨우 안심하고
그는 세관의 벤치 쪽으로 갔다. 세관의
담당자들도 역시 대머리 남자에게서 같은
말을 이미 들은 뒤였다.
주임 담당관이 코와르스키를 향해서
말했다. "휴대하신 짐은 저쪽에서
찾으십시오." 하고 컨베이어 벨트 옆에서
자기 짐을 기다리고 있는 다른 승객들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짐은 비행기에서
트럭으로 세관 밖까지 운반되어, 거기서
다시 컨베이어 벨트에 얹혀 안으로
코와르스키는 담당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짐은 없소."
담당관은 눈썹을 위로 올렸다.
"없으시다고요? 그럼, 혹시 신고하실
것은?"
"없소."
담당관은 노래하는 듯한 마르세유
사투리에 어울리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가십시오."
그는 택시 승차장으로 통하는 출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코와르스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밝은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나
택시 타는 것에 익숙치 못한 그는 부근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공항버스를
발견하고서 거기에 올랐다.
담당관이 주임에게로 몰려왔다.
"어째서 수배를 하는 걸까, 저
사나이를?" 하고 한 사람이 말하자 다른
사람이 대꾸했다.
"뭔지는 모르지만 어쩐지 인상이 안 좋은
녀석이야."
"저 친구들에게 심문당하면 더 무서운
얼굴이 될걸." 하고 세 번째 담당관이
턱으로 등뒤의 사무실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대머리의 일행이 숨어 있었다.
"자, 모두들 일합시다."
주임이 말했다.
"이래서 우리도 나라를 위해서
이바지하고 있는 셈이지."
"샤를 영감을 위해서?" 하고 첫번째
담당관이 그곳을 떠나면서 중얼거렸다.
버스가 마르세유의 중심가에 있는 에르
프랑스의 지점에 도착한 것은
점심때였으며, 시내는 로마보다 훨씬
더웠다. 마르세유의 8월에도 여러 가지
좋은 점은 있지만, 활발하게 행동할 의욕을
빼앗아가 버리는 무더위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열기가 전염병처럼 시내를 온통
뒤덮고 사지에 스며들어 힘과 에너지를
빨아들여 버리는 것이다. 덧문까지 내려
버린 방안에 틀어박혀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는 것이 고작이며,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여느때는 활기에 넘치고 밤이 되면
휘황한 빛으로 소용돌이를 이루는
마르세유의 중심가, 칸비에르도 지금은
죽은 듯 고요하다. 몇몇 오가는 사람이나
없다. 택시를 잡는 데 30분이나 걸렸다.
운전사들은 대개 공원의 나무 그늘 같은
곳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조조가
가르쳐 준 주소는 마르세유의 중심부에서
교외의 캐시를 향해서 뻗어 있는 간선도로
쪽에 있었다. 코와르스키는
리베라시옹(해방) 로(路)에서 택시를 내려
나머지는 걷기로 했다. 운전사는 좋을 대로
하라고 말은 했지만, 그 어조에는 이 더위
속을 택시에서 내려 일부러 걷는 바보 같은
외국인이라는 듯한 빈정거림이 담겨
있었다.
코와르스키는 시내로 돌아가는 택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인도 옆 카페에 들러서 웨이터에게
길을 물은 뒤에야 종이쪽지에 써둔 좁은
비교적 새것이었다. 조조 부부의 장사가
제법 잘되고 있는 모양이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 부인이 전부터 욕심내던
가게를 샀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장사가
잘되어 돈을 잘 버는 모양이다. 게다가
여기라면 항구 옆보다는 환경도 훨씬 좋고,
실비아를 위해서도 좋겠지. 딸의 일이
머리에 떠오른 순간 그는 불길한 상상을
하면서 아파트의 현관 앞 층계 밑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조조는 전화에서 뭐라고
했더라? 1주일? 길어야 2주일? 그런 말도
안되는......
그는 단숨에 층계를 뛰어올라 현관 홀의
벽에 두 줄로 걸려 있는 우편함 앞에서
멈춰섰다. '그리보스키'라는 이름은
하나뿐이었다. '23호실'이다. 2층이었기
똑같은 문이 늘어서 있었다. 23호실의
문에는 '그리보스키'라고 타이프로 친 흰
카드가 초인종 단추 옆에 있는 명찰꽂이에
꽂혀 있었다. 그 플랫은 복도의 끝 쪽에
있었으며, 22호와 24호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는 단추를 눌렀다. 눈앞에서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안에서
도끼자루가 그의 이마를 내리쳤다.
그것은 피부를 찢었지만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에 맞고 튀어올랐다. 그의 양쪽
22호와 24호의 문이 안에서 열리고
남자들이 튀어나왔다. 모두가 1초도 안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코와르스키는
화가 났다. 생각한다는 것은 질색이지만,
격투 기술만큼은 완전히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좁은 복도이고 보니 거구의
다만 다행인 것은 그는 키가 워낙 컸기
때문에 도끼자루가 완전히 내리치기 전에
이마에 맞아 버려서 완전한 타격을 줄 수가
없었던 점이다. 두 눈은 피로 흐려져
있었으나, 그는 앞문 안에 둘, 좌우에 둘씩
적이 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알아차렸다.
좀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넓은 장소가
필요했다. 그는 23호실로 뛰어들었다.
바로 앞에 있던 남자는 충격을 받아 뒤로
비틀거렸다. 등뒤로 다가온 적은 깃이나
소매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방으로
뛰어든 그는 겨드랑이 밑에서 콜트 권총을
뽑아 돌아서면서 문을 향해 쏘았다. 그러나
그 순간 이번에는 손목에 일격을 당하여
겨냥이 밑으로 처졌다. 총알은 기습해 온
한 명의 무릎에 맞고, 그 사나이는
또다시 도끼자루가 손목을 강타했다.
손가락이 저려 오며 힘이 빠져 권총이
손에서 떨어졌다. 다음 순간 다섯 명의
사나이가 그에게 덤벼들었다. 싸움은
3분이나 계속되었다. 그는 정신을 잃을
때까지 가죽으로 감싼 곤봉으로 머리를
20회 이상 얻어맞았다고 나중에 그를
진찰한 의사가 증언했다. 한쪽 귀는 반쯤
찢어지고, 코는 부러지고, 얼굴 전체는
진홍색으로 물들었다. 그의 움직임은 거의
반사운동이었다. 격투중에 그는 바닥에
떨어진 권총에 손을 뻗었지만, 손가락이
닿을까 말까 하는 순간에 권총이 발길에
채이며 방구석으로 날아가 버렸다. 마침내
그가 기절하여 앞으로 엎어졌을 때는,
그런대로 제 발로 서 있는 적은 셋밖에
거구가 바닥에 고꾸라져서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찢어진 머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다는
징조이다. 세 사나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무릎을 총에 맞은 사나이는 문 옆 벽에
기대어 웅크리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박살이 난 무릎을 피로 범벅이 된 손으로
거머쥐고 고통으로 핏기마저 사라진
입술에서는 저주의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또 한 명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사타구니 사이에 두 손을 박고 몸을 천천히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마지막 하나는
코와르스키 옆에 뻗어 있었다.
코와르스키의 강력한 펀치를 정통으로 맞은
관자놀이가 허옇게 부어올라 있었다.
굴려서 반듯이 눕혀 놓고는 감겨진
눈꺼풀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창가에 있는 전화로 걸어가서 시내 번호를
돌리고 응답을 기다렸다. 그는 아직도
숨결이 거칠었다. 이윽고 전화를 받는
상대에게 그가 말했다.
"해치웠어......저항이 있었느냐고?
당연하지. 미친 놈같이 날뛰었으니까......
한 발 쏘는 통에 게리니가 무릎을 맞았어.
카페티는 급소를 맞고 앓는 중이고,
비사르트는 편히 누웠어...... 뭐라고? 아,
녀석은 살아 있어. 생포하라는 명령이었지?
없앨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큰 피해는 입지
않지...... 그야 물론 다치긴 했어. 잘
모르겠지만, 좌우간 정신은 잃었어......
아니, 샐러드 바구니 (죄인 호송차)는
빨리."
그는 수화기를 때려부술 듯이 내려놓고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온 방안에 부서진 가구의 조각들이
땔감나무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하긴 땔감이 아니면 별로 쓸 데도 없었다.
잠복하여 기다리고 있을 때에는 모두들
간단히 복도에서 끝날 줄로만 알았었다.
그래서 가구류를 다른 방으로 옮기지도
않았던 것이다. 리더 자신도 코와르스키가
한 손으로 집어던진 팔걸이의자에 가슴을
맞아 아직도 그곳이 뜨끔거렸다. 본부
녀석들도 어떻게 된 모양이야. 저 자식이
어떤 놈인지 미리 한마디도 말해 주지
않았으니 하고 그는 속으로 욕을 퍼붓고
15분 뒤, 시트로엥 구급차 두 대가
아파트 앞에 멈추고서 의사가 올라왔다.
의사는 5분쯤 코와르스키를 진찰해 본
다음에 그의 소매를 걷고 주사를 놓았다.
거구를 실은 들것이 비틀거리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있던 의사가 벽
옆에서 피를 흘리면서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고 있는, 무릎에 총상을 입은
코르시카인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무릎에서 떼어 내고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휘파람 소리를 냈다.
"좋아, 일단 모르핀을 한 대 놓고
병원으로 데려가지. 센 것으로 놓아 줄
테니까. 여기서는 그 이상은 어쩔 수가
없어. 하지만 이런 일은 다시는 못해."
주사바늘이 실을 뚫고 들어가자 게리니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앉아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페티는 일어나서 구역질을
참아가며 벽에 기대어 있었다. 동료 둘이서
양쪽 겨드랑을 끼고 그를 복도로 데리고
나갔다. 리더는 비사르트를 안아 일으켰고,
움직이지 못하는 게리니는 두 번째
구급차의 들것으로 운반되어 갔다. 복도에
나온 리더는 엉망이 된 실내를
돌아다보았다. 옆에 서 있던 의사가 감탄한
듯이 말했다.
"굉장한 난장판이군."
"뒷일은 관할 경찰에 맡겨야겠군."
리더는 문을 잠갔다. 22호와 24호실의
문도 열려진 채였지만, 내부는 어질러지지
않았다. 그는 그 두 개의 문도 잠갔다.
"아무도 살지 않소?"
의사를 앞세우고 리더는 아직 의식이 채
돌아오지 않은 비사르트를 부축해 가며
층계를 내려가서 차에까지 데리고 갔다.
그로부터 12시간 뒤, 파리 교외에 있는
옛날의 성까지 차로 운반된 코와르스키는
지하의 독방에 눕혀져 있었다.
유리창이라면 어디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내부가 그대로 드러난 더러운 벽, 곰팡내
나고 여기저기 외설스러운 그림이나
기도문이 아무렇게나 쓰여 있었다. 그곳은
좁고 무더운 독방으로서, 소독약 냄새와
땀과 지린내가 뒤범벅된 괴상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다리를 콘크리트 바닥에
아주 묻어 버린 철제 침대에 코와르스키가
반듯이 눕혀 있었다. 비스킷같이 얇은
매트리스와 돌돌 말아서 베게 대신 머리에
없었다. 그의 복사뼈, 허벅지, 그리고
손목은 투박한 가죽 띠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슴에도 가죽 띠가 단단히 조여져
있었다. 아직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으며,
깊고 불규칙적인 호흡만 하고 있었다.
얼굴의 핏자국은 닦여 있었으며, 귀와
머리 부분의 찢어진 곳은 꿰매어져 있었다.
부어오르고 휘어진 코에는 반창고가 붙어
있었고, 거칠게 숨쉬고 있는 입 틈새로
불거진 앞니가 보였다. 어쨌든 얼굴 전체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 상태였다. 또한, 검은
털로 덮인 가슴과 어깨, 복부에도 주먹이나
구두, 곤봉 등에 의한 타박상이 생생했다.
오른쪽 손목은 두꺼운 붕대를 감고서
테이프로 고정시켜 놓았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진찰을 끝내고
넣었다. 그리고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남자 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곧 열리고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다시 문이 닫히고 간수가
커다란 쇠빗장 두 개를 철컥 하고 걸었다.
"대체 무엇으로 저 남자를 때린 거요?"
복도를 걸으면서 의사가 물었다.
"여섯 명이 달려들어서 겨우
쓰러뜨렸소." 하고 롤랑 대령이 말했다.
"아무리 그렇지만 상처가 너무 심해요.
소 같은 몸을 가졌으니까 살았지. 보통
인간이라면 벌써 죽었을 겁니다."
"어쩔 수가 없었소. 이쪽도 셋이나
다운되었다니까."
"굉장한 격투였겠군요."
"그랬다는군. 그래, 녀석의 부상은 어느
"쉽게 말하면 오른쪽 손목의 골절, X선
사진을 찍지 못했으니까 확실한 건 말할 수
없지만 말이오 -- 그리고 왼쪽 귀가
찢어지고, 머리는 터졌고, 코뼈가
부러졌소. 찢어진 상처나 타박상은 셀 수도
없고. 그리고 뇌진탕을 일으켰는데, 이것은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소. 운이
좋으면 곧 낫는 수도 있지만. 외부 상처는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별것 아닌데,
걱정되는 것은 역시 머리요. 뇌진탕이 어느
정도 심한지 속단할 수가 없소. 두개골은
깨지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은 당신
부하가 잘해서가 아니오. 그가 상아같이
단단한 두개골을 갖고 있는 탓이지. 그러나
당분간 그대로 가만 놔두지 않으면
뇌진탕이 악화될지도 몰라요."
되겠는데......" 하고 롤랑 대령은 빨아도
잘 타들어가지 않는 담배 끝을 보면서
말했다.
두 사람은 1층으로 이어지는 층계 있는
곳에서 멈춰섰다. 의사의 사무실은 복도를
똑바로 계속 간 곳에 있다. 그는 불쾌한
얼굴로 액션 서비스의 보스를 흘끗 보았다.
"여기는 유치장과 다를 바 없군." 의사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국가의 치안을
어지럽히는 녀석들을 가두어 두는 곳이라.
그러나 나는 의무관으로서 죄수들의
건강관리에 책임을 지고 있소. 저쪽
복도는......"
그는 방금 둘이 나온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당신 영역이오. 그쪽에서 무슨 일이
권한도 없소. 그러나 이것만은 말해
두겠소. 저 남자가 낫기 전에 당신이 하는
그런 방법으로 심문을 시작하면 틀림없이
죽고 말 거요. 설령 죽지 않더라도 미쳐
버리고 말 거요."
롤랑 대령은 의사의 엄한 경고를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듣고 있다가 말했다.
"그럼, 얼마나 있으면......?"
의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소. 내일이라도
의식을 되찾을지도 모르고, 며칠 계속
잘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설령 의식이
돌아온다고 해도 최소한 2주일은 심문받을
수가 없소. 뇌진탕의 정도가 경미한
경우라도 최소 2주일 동안은 절대로 안정이
필요해요."
"있지요. 있지만 나는 처방해 주지 않을
거요. 하긴 당신이라면 약을 구하는 것쯤은
문제가 없겠지만,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으니까. 게다가 억지로 말을 하게 해봐야
나오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는 잠꼬대 같은
것에 불과해요. 머리가 흐려 있으니까. 그
흐린 것이 사라질지 그대로 남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설령 사라진다고
해도 그것이 저절로 맑아지도록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소. 거기에 섣불리
약물 같은 것을 썼다가는 백치가
되어버려요. 그렇게 되면 아주 쓸모가
없지. 1주일쯤 지나면 깨어나기는 할 거요.
어쨌든 좀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밖에는 없소."
그렇게 말해 버리고 의사는 사무실로
코와르스키는 3일 뒤인 8월 10일에 의식을
되찾은 것이다. 그리고 그날 그는
처음으로, 그리고 최후의 심문을 받았다.
브뤼셀에서 런던으로 돌아온 재칼은 꼬박
사흘 걸려 마지막 준비를 갖추었다. 우선
그는 알렉산더 제임스 댓건 명의로 된 새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자동차연맹의 본부가
있는 패넘 하우스로 가서 한 벌로 되어
있는 여행가방을 세 개 샀다. 그 중 하나는
페르 옌센 목사로 변장할 필요가 생겼을
경우에 대비하여 그때 입을 의상을 넣기로
했다. 런던에서 산 목사용 셔츠, 스탠드
칼라, 그리고 검은 흉배에서 상표를 떼어
버리고 그 자리에 코펜하겐에서 산 석 장의
셔츠에 붙어 있던 덴마크의 상표를 옮겨
어울리는 구두, 양말, 내의, 진한 회색
양복을 집어넣었다. 그 가방에는 또 미국
학생인 마티 슐버그의 옷가지 -- 운동화,
양말, 청바지, 스웨터, 점퍼를 넣었다.
다시 그 가방의 안감을 뜯고 두 겹으로
되어 있는 가죽 사이에 외국인 두 사람의
여권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랑스 성당에 관한 덴마크어로 된 책,
목사용과 미국인 학생용 안경,
티슈페이퍼에 싼, 색깔이 있는 콘택트 렌즈
두 벌, 그리고 머리 염색용 물건 등을
넣었다.
두 번째 가방에는 파리의 '벼룩
시장'에서 산 프랑스제 구두, 양말, 셔츠,
바지, 그리고 자락이 복사뼈까지 내려오는
군용 외투와 검은 베레모를 넣었다. 그리고
위조신분증과 상이군인 증명서를 역시
안감을 뜯고 두 겹으로 된 가죽 사이에
숨겼다. 이 가방에는 저격용 라이플과
총알을 넣은 강관을 넣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은 넣지 않았다.
세 번째의 조금 작아 보이는 가방에는
알렉산더 댓건의 물건을 넣었다 -- 구두,
양말, 속옷, 셔츠, 넥타이, 손수건, 양복
세 벌 등. 그리고 안감에는 브뤼셀에서
돌아올 때 은행에서 찾아두었던
10파운드짜리 지폐로 1,000파운드나 되는
돈을 집어넣었다.
준비를 끝낸 이 세 개의 여행가방에
단단히 열쇠를 채우고 그는 그 열쇠를
열쇠고리에 끼웠다. 회색 양복은 깨끗이
다림질해서 옷장에 걸어 두었다.
국제면허증, 그리고 1,000파운드가 들어
있는 지갑을 넣어 놓았다.
짐은 세 개의 가방 이외에 아타셰
케이스가 있었다. 그 안에는 면도기구,
잠옷, 스폰지와 타월, 그밖에 자질구레한
물건들 -- 가벼운 그물처럼 짠 허리끈,
구운 석고(石膏) 한 봉지, 붕대, 반창고,
탈지면, 커다란 가위 등을 집어넣었다. 이
아타셰 케이스는 들고 다닐 생각이다. 어느
공항에서도 아타셰 케이스는 세관에서
프리패스다. 열어서 조사를 받는 일은
없다고 보아도 좋다.
짐을 모두 집어넣고 모든 준비는 끝났다.
옌센 목사와 마티 슐버그는 만일을 위해서
준비한 것으로서, 일이 예상대로 되지 않아
알렉산더 댓건의 신분을 포기하지 않으면
것이다. 그러나 앙드레 마르탱의 신분은
그의 계획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다른 두 개는 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고,
그런 경우에는 일을 끝내고 어딘가의 짐
보관소에 맡기는 것으로 마무리지을
생각이다. 다만 도망칠 때에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앙드레 마르탱의 변장용 물건이나 라이플도
일을 끝냈을 때에는 버릴 생각이다. 즉,
그가 프랑스로 들어갈 때에는 여행가방
셋과 아타셰 케이스라는 적지 않은 짐이
있지만, 프랑스를 떠나올 때에는 가방
하나와 아타셰 케이스만 든 가벼운 차림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준비를 끝낸 그는 출발 신호가 될
두 통의 편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한
관한 정확한 정보를 알아낼 파리의
전화번호이고, 또 한 통은 취리히 은행에서
올 입금통지서였다.
편지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절룩거리며
걷는 연습을 했다. 이틀 동안의 연습으로
누가 보아도 진짜 절름발이로 보이게
되었다.
첫번째 편지는 8월 9일 아침에 도착했다.
로마의 소인이 찍힌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메모가 들어 있었다.
'연락처는 모리트르 5901. 암호는 "이시
샤칼(이쪽 재칼)"에 상대방은 "이시
바르미(이쪽 바르미)" 라고 대답함. 성공을
빔.'
아침이었다. 그는 입금통지서를 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살아서 돌아올 수만
있다면 일생 동안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밝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일에
성공하면 더욱더 넉넉해지는 것이다. 그는
성공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패가 없도록
모든 점에서 이미 계산을 다해놓은 것이다.
즉시 그는 전화로 항공편을 점검해 보고서
다음날인 12일 아침에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지하실에는 침묵이 가득 차 있었다.
들리는 것은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다섯
사나이들의 무거운 숨소리와, 그 앞에 놓인
커다란 오크 나무 의자에 묶여 있는
사나이의 신음소리뿐이었다. 방의 크기나
벽의 색깔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단
둘러싸듯 비치고 있었다. 흔히 있는 독서용
전기 스탠드이지만, 전구는 광도가 높은
강력한 것이어서 지하실의 더위를 한결
견디기 어렵게 하고 있다. 스탠드는 테이블
왼쪽 끝에 고정시켜 놓았으며, 빛이 앞쪽
의자에만 비치도록 갓을 기울여 놓았다.
동그라미를 그린 빛의 일부가 더러워진
테이블 위를 비추고, 여기저기 놓인
손가락과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르는 짧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는 모습을
희미하게 떠올리고 있다.
불빛이 강렬한 만큼 지하실의 다른
부분의 어둠이 한층 어둡게 느껴진다.
테이블 뒤에 한 줄로 앉아 있는 다섯
사나이들의 어깨와 몸통은 죄인의
위치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다. 조금 옆으로
실루엣을 볼 수가 있지만, 그는 물론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가죽 띠로 발목을
의자 다리에 고정해 놓은 것이다. 의자
다리에는 모두 L자형 쇠붙이가 앞뒤에 붙어
있고, 그것이 바닥에 박혀 있다. 또한,
죄인은 팔걸이에 두 손목을 가죽 띠로
묵이고, 허리와 털투성이의 가슴에도 가죽
띠가 매어져 있다. 모든 띠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것은 사나이들의
손뿐이며,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장식은 놋쇠로 테를 두른
홈으로서, 이 홈에서 앞쪽 끝에
베이클라이트(합성수지) 손잡이가 달린
레버가 튀어나와 있는데, 그것은 앞뒤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옆에 간단한 스위치가
오른손이 하릴없이 그 옆에 놓여 있었다.
테이블 밑에서 코드가 두 가닥 나와
있다. 하나는 스위치에서, 또 하나는
전류조절기에서 나와 있으며, 끝에 있는
사나이의 발 밑에 놓인 소형 변압기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변압기에서 고무로
코팅된 굵은 코드로 이어져서 테이블 뒤쪽
벽에 있는 커다란 콘센트에 꽂혀 있다.
심문자들 뒤쪽 한구석에 볼품없는 나무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고, 남자 하나가
벽을 보고 앉아 있다. 테이블에는 녹음기가
놓여 있었으며, 돌아가고 있지는 않았으나
'ON'의 램프에 녹색 불이 들어와 있었다.
무거운 숨소리 말고는 실내의 조용함은
거의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사나이들은 하나같이 셔츠의 소매를
열기와 함께 냄새도 지독했다. 땀과
담배연기와 토해 낸 음식물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토해 낸 것들의 냄새만으로도 참기
어려운데, 거기에 짙은 공포와 고통의
냄새가 거들어 더욱 강렬한 혐오감을 주는
것이었다. 한가운데 있는 사나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뜻밖의 밝은 목소리였으며,
부드럽게 비위를 맞추는 듯한 어조였다.
"들어 봐, 빅토르.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결국 끝에 가서는 말을 하게 돼. 그야 너는
배짱 좋은 녀석이지. 용감한 병사이기도
하고. 우리도 그건 알고 있어. 존경할
정도야. 하지만 말이야, 아무리 자네라도
그렇게 언제까지 버틸 수는 없어. 같은
값이면 어째서 지금 말해 버리지 않나?
로댕이 화낼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
말해 버리라고 할 거야. 이 고문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자네를 이
이상 더 괴롭히지 않기 위해서 오히려
자진해서 자기 입으로 털어놓겠지. 자네
역시 알고 있을 거야, 어떤 인간이라도
마지막에 가서는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연다는 것을 그렇잖은가, 빅토르? 고문을
당하고서야 입을 여는 사람을 자네도 본
적이 있지? 누구라도 다 마찬가지야. 빨리
말해 버리면 편안해지는 거야. 말해 버리면
자고 싶은 만큼 잘 수가 있어.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의자에 묶인 사나이는 눌려 짜부러진
얼굴을 들어서 땀을 번쩍이면서 불을
들여다보는 자세였다. 두 눈은 감고
있는데, 그것이 빛 때문인지 마르세유에서
분명치 않았다. 얼굴을 전방의 어두운
공간을 향한 채로 입을 열어서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순간 끈적거리는
위액이 솟아나와서 더러워진 가슴을 타고
무릎에 고여 있는 토해 낸 것들 속으로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머리가 축
늘어지고 턱이 가슴에 닿았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칼이 좌우로 흔들리면서
'노'라는 대답을 알렸다. 또다시 테이블에
있는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빅토르, 자네는 강한 사람이야. 우리는
모두 그것을 알고 있어, 인정해. 이미
자네는 인내의 기록을 깼으니까. 그러나
언제까지나 견딜 수 있는 건 아니야.
우리는 견딜 수 있지만 말이야.
언제까지라도. 필요하다면 며칠이나 몇
옛날처럼 정신을 잃고 편안히 지내도록
그냥 놔두지 않아. 기술이 발달했거든.
약물이 있단 말이야. 지금 제3단계가
끝났지만, 지금부터는 점점 더 괴로워질
거야. 자네를 생각해서 하는 말일세. 빨리
말해 버리는 편이 좋아. 우리는 인간이니까
고통을 잘 이해하지만, 전기는 그런 것을
몰라. 얼마든지 자네를 괴롭힐 거야.
어떤가, 말하겠나? 로댕 일행은 로마의
호텔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
턱을 가슴에 댄 채 코와르스키의 커다란
머리가 천천히 좌우로 흔들렸다.
심문하고 있는 사나이의 두 손은 테이블
위에서 불빛을 받아 희고 날씬하고
평화스럽게 조용히 멈춰 있다. 그는 다시
문득 움직이더니 엄지손가락을 손바닥
쪽으로 꺾어서 구부리고 네 개의 손가락을
넓게 펴서 테이블 위에 놓았다. 스위치를
맡고 있는 사나이의 손이 놋쇠 손잡이를
눈금 2에서 4로 움직여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온 오프의 스위치를
잡았다. 다시 다른 사나이가 테이블에서
떨어져, 세우고 있던 집게손가락을 살짝
앞으로 넘겨서 사인을 보냈다. 스위치가
들어갔다.
코와르스키의 몸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조그만 구리로 된 단자가 살아 있는 것처럼
어렴풋이 웅웅거렸다. 그의 거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허리를 올려
공중유영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의자 위에서
차츰 위로 올라갔다. 두 손 두 다리를
뼈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부어오른
눈꺼풀에 가려져 있던 두 눈이 앞으로
튀어나와 천장을 노려보았다. 입은 놀란 듯
딱 벌어지고, 지옥의 절규가 폐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꼬리를 끌듯 두
번, 세 번......"
그리고 오후 4시 10분, 마침내 빅토르
코와르스키는 무릎을 꿇었다. 녹음기가
돌기 시작했다. 울음과 신음소리에 섞여
토막토막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가운데 사나이의 입에서 나온 질문이
한결 날카롭고 선명하게 울렸다.
"왜 놈들은 거기에 있는가......그
호텔에......로댕과 몽클레아와 카슨, 이
세 놈 말이야......놈들은 무엇을 겁내고
있는가......로마에 가기 전에는 어디에
아무도 가까이 못 가나......어서 말해,
빅토르......왜 로마에......로마에 가기
전에는 어디에......왜 빈에......빈의
어디야......뭐라는 호텔인가......왜
거기에 갔었나......"
코와르스키는 50분에 걸쳐서 심문에
대답했고, 마지막에는 뜻도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고는 기절했다. 녹음기는
마지막 한마디까지 기록했다. 심문자의
소리는 코와르스키에게서 대답이 더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질 때까지 몇 분
동안 더욱 부드럽게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는 부하에게 뭐라고 한마디 명령을
내리고는 그 참혹한 의식을 끝냈다.
녹음된 테이프는 즉시 차로 액션
서비스의 사무실로 보내졌다.
이글거리게 했던 태양이 기울고 서늘한
황혼이 찾아오자, 오후 9시에 가로등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센 강가에는 여름
저녁을 즐기는 연인들이 퇴색하기 쉬운
사랑과 청춘의 달콤한 술을 한껏 즐기면서
손을 맞잡고 산책하고 있다. 물가를 따라
줄지어 선 카페에서는 재잘거림과 술잔
부딪는 소리, 인사와 희롱하는 소리,
비꼼과 아첨 소리, 사과와 중재하는 소리로
활기에 차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인들의
대화의 재치이고, 여름 저녁 센 강가의
매력인 것이다. 여기에서는 돈을 마구
부려대는 외국의 관광객이 한몫 끼는 것도
허락이 된다.
그러나 이런 즐거운 떠들썩함도 포르트
데 리라에 가까운, 어떤 조그만
세 사나이가 책상 위에서 천천히 돌고 있는
녹음기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오후 늦은 시간부터 계속 그런 모습으로
테이프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가 계속 스위치에 손을 올려놓고 두
번째 남자의 지시에 따라서 재생과
되감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두 번째 남자는
헤드폰을 쓰고 잡음 같은 소리 중에서
의미가 담긴 말을 찾아내려고 눈썹을
찌푸리고 있다. 입에 문 담배의 연기로
매운 눈을 뜨면서 한 번 더 듣고 싶은
부분이 있다고 손가락으로 신호를 했다.
가끔 10초 정도 돌아가는 부분을 대여섯 번
되풀이해서 듣고는 겨우 다음 부분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알아낸 말을 구술한다.
세 번째 남자는 젊은 금발로서, 타자기
소리는 또렷하게 들리고 의미도
분명하지만, 대답하는 소리는 아주
알아듣기 힘들다. 타자수는 인터뷰의
기사를 쓰듯이 질문은 반드시 줄을
바꾸어서 시작하고, 첫머리에 Q라는 글자를
붙였다. 그리고 대답은 다음 줄에 R이라는
자를 치고서 그 다음을 쳤다. 대답하는
문장은 계속적이며, 아무래도 앞뒤가
연결이 안되는 부분은 '......' 으로
메꾸었다. 작업이 끝난 것은 한밤중인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문을 활짝 열어
두었는데도 실내의 공기는 담배 연기로
자욱하고, 종이가 눈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세 남자는 피로로 몸이 굳어진 채
일어섰다. 그리고 각자 기지개를 켜기도
풀었다. 이윽고 한 사람이 수화기를 들어
외부로 연결하라고 하고는 다이얼을
돌렸다. 헤드폰을 끼고 있던 남자는 그것을
벗어 놓고 테이프를 되감았다. 타자수는
타자기에서 용지와 복사지를 빼내어
그때까지 타자한 것들과 합쳐서 차레대로
정리했다. 복사지를 두 장 끼워서 타자했기
때문에 자술서는 세 통이 만들어졌다.
첫번째 것은 롤랑 대령에게, 두 번째 것은
보존용, 세 번째 것은 롤랑 대령이
적당하다고 인정했을 경우 즉시 각
부장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우선 복사부터
하기로 했다.
전화는 레스토랑에서 친구들과 식사중인
롤랑에게 연결되었다. 일터를 떠난 롤랑은
멋쟁이 독신자에다 품위 있는 언동으로
신사였다. 자리를 같이 한 부인들에게는
칭찬을 잊지 않으며, 그 남편들에게는
어떤지 모르지만 그녀들에게서는 크게
환영을 받았다. 웨이터가 전화가 왔다고
그에게 알리자 그는 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의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는 카운터 위에 있었다.
그는, "롤랑이오." 라고만 대답하고
상대방에서 신분 밝히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미리 약속해 두었던 말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수리에 보낸 차의 정비가
끝났으니까 대령이 편리한 때에 가지러
오면 된다는 둥 옆에서 들어 보아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대화였다. 롤랑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리고 5분 뒤에는 내일은
부드러운 어조로 양해를 구하고, 10분
뒤에는 포르트 데 리라로 향해 아직도
붐비는 도로를 차로 빠져 나왔다. 사무실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가 지난 시각이며,
일류 양복점의 디너 재킷을 벗고서
야근하는 직원에게 커피를 시킨 다음
전화로 차장을 불렀다.
코와르스키의 자술서가 사본과 함께
도착되었다. 26페이지에 걸친 자술서를
처음에는 그 요지를 알기 위해서 죽 한번
훑어나갔다. 도중에서 조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어서 그는 눈썹을 찌푸렸으나
개의치 않고 끝까지 읽었다.
두 번째는 천천히, 각 패러그래프에
신경을 집중해 가면서 주의깊게 읽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펜꽂이에서 검정
인도네시아, 알제리, 조조, 코바크스,
코르시카인, 악당, 외인부대 등에 밑줄을
그어 가면서 다시 신중하게 읽었다. 그러나
이런 어구들은 그에게 아무런 흥미도 갖게
하지 않았다.
자술의 대부분은 실비아에 관한 것이며,
일부에서는 줄리라는 여자에 관해서도
언급되어 있었지만 롤랑에게는 그것이 모두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부분을 빼버리면 고작 6페이지 정도의
분량밖에 안되었다. 그 속에서 그는 의미
있는 것을 잡아내어 보려고 애썼다. 로마가
나왔다. OAS의 간부 세 명은 로마에 있다.
그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왜
그들은 로마의 호텔에 틀어박혀 있는가?
신문자는 이 질문을 여덟 번이나 했다.
납치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거야
당연할 거라고 롤랑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이유라고 한다면 온갖
고생을 해가면서 코와르스키를 잡아 온
것은 헛일이 된다. 하지만, 주의해서 읽어
보니 코와르스키는 이 똑같은 여덟 번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한 것 가운데 어떤 한
단어를 두 번 입에 담았다. 아니,
중얼거렸다고 해야 할지, '비밀'이라는
낱말이다. 형용사로 쓴 것일까? 그러나
그들이 로마에 있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그렇다면 명사인가? 어떤 비밀을 말하는
걸까 ?
롤랑은 열 번째 읽고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OAS 간부 세 명이 로마에 있다.
그것은 납치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납치를 겁내고 있는 것이다......
롤랑은 묘한 미소를 띠었다. 로댕은
겁먹고 달아나거나 숨을 사나이는 아니다.
그런 점은 국장인 기보 장군보다 롤랑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로마의
호텔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비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비밀일까? 모든 것은
빈에서 시작이 된 것 같다. 빈이라는 말은
앞뒤 세 번이나 나왔다. 처음에 롤랑은
리용 시의 바로 남쪽에 있는 비엔이라는
동네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이것은 오스트리아의
수도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빈에서 모임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납치되어 심문당해서 비밀을 토해
내게 될까 봐 로마의 호텔에 틀어박힌
틀림없다......
시간은 흐르고 여러 잔째 커피가
운반되었다. 포탄 탄피의 재떨이에는
꽁초가 수북했다. 그리고 몰티에 대로
동쪽에 있는 우중충한 공장지대의 하늘에
동이 틀 무렵, 롤랑 대령은 마침내
무엇인가를 잡았다. 물론 빠져 있는 부분도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빠져
있는 것일까? 새벽 3시에 코와르스키가
사망했다는 전화가 왔었는데, 그를 다시는
심문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빠져 있는
부분은 영원히 메꿀 수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반쯤 미친 머리에서 죽음 직전에
짜낸 지리멸렬한 진술 중 어딘가에 메꿀 수
있는 무엇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
롤랑은 겉보기에 아무 맥락도 없을 듯한
크라이스트 -- 크라이스트라는 이름의
인간. 코와르스키는 폴란드인이니까 이
고유명사는 올바로 발음했을 것이
분명하다. 롤랑도 전시중의 경험에서
독일어를 조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올바른
철자로 써넣었다. 자술서를 타자로 친 것은
프랑스인이라, 그가 철자를 잘못 쳐놓았다.
이것은 사람의 이름일까? 어떤 장소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롤랑은 교환대를
불러내어 빈의 전화번호부를 조사해서
크라이스트라는 사람이나 장소를 빼내어
달라고 일렀다. 10분 뒤에 대답이
돌아왔다. 빈에는 크라이스트라는 이름의
전화등록자가 전화번호부에 두 단이나 나와
있고, 장소 이름으로는 두 군데 -- 에발드
크라이스트 남자국민학교와 브뤼크나알레에
롤랑은 뒤의 두 개를 메모하고 팡숑 쪽에
밑줄을 그었다. 다시 그는 읽기 시작했다.
어떤 외국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몇 군데 있다. 코와르스키는 그
남자에게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인지, 어떤 곳에서는 '봉' -- 좋다는
의미의 말로써 언급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파슈르' -- 싫은 자식이라고 불렀다.
5시가 좀 지나서 롤랑은 녹음기와 테이프를
갖고 오라고 해서 한 시간쯤 반복해서
그것을 들었다. 그는 스위치를 끄고 화난
듯이 끙끙거렸다. 그리고 타이프로 친
진술서를 몇 군데 펜으로 고쳐 놓았다.
코와르스키는 그 외국인을 '봉'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실은 '블론드'라고 한
것이다. 또 '파슈르'는 '포슈르', 즉
여기까지 알게 되자 분명치 않은
자백에서 하나의 명확한 의미를 찾아내기는
쉬웠다. 재칼(프랑스어로는 샤칼)이라는
말은 코와르스키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려서
고문을 당하게 한 녀석들을 저주하는
단어라고 생각하고 롤랑은 그것이 나올
때마다 지워 버렸지만, 이것에서도 새로운
의미가 떠오르는 것이다. 즉, 재칼은
블론드(금발)의 외국인 살인청부업자의
암호명이며, OAS의 간부는 로마의 호텔에
틀어박히기 직전에 빈에서 그
살인청부업자와 만난 것이다.
롤랑은 그제야 비로소 과거 8주일에
걸쳐서 프랑스 전국을 뒤흔든 일련의
은행-보석강도의 진정한 이유를 알게 된 것
같았다. 블론드는 OAS에서 어떤 일거리를
돈을 요구할 수 있는 일은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다. 갱들의 싸움에서 거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전 7시. 롤랑은 통신실을 전화로
불러서 야근 교환수에게 SDECE의 빈 지부에
긴급명령을 내리도록 명령했다. 빈은
제3부(서유럽 담당)의 관할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명령은 분명히
월권행위였지만, 그걸 알고서도 관할
의식을 무시한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코와르스키의 진술서 사본을 모두 회수하여
자기 금고 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보고서 작성으로 들어갔다. 수령자는 단 한
사람이며, '타인이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그는 펜으로 초안을 썼다. 먼저
책임하에 행한 작전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했다. 가까운 가족이 병으로
입원중이라는 편지에 이끌리어 마르세유로
돌아온 코와르스키를 액션 서비스의
요원들이 체포, 심문하여 그의 진술을
받아낸 일, 또한, 체포 때에 그가 저항하여
난투가 벌어져서 요원 두 사람이,
부상당하고 그는 또한 자살을 기도하여
중상을 입어 부득이 입원시켜서 감시하는
일. 그리고 이 진술은 병원의 침대에서
행해졌다는 것. 이상이 서론이며, 보고서의
알맹이는 진술의 내용과 롤랑의 해석으로
되어 있었다. 거기까지 쓴 그는 펜을 쥔
손을 잠시 쉬고 아침 햇살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거리의 지붕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 자신도 잘 알고 있었지만, 문제를
없는 지극히 리얼리틱한 성격이었으며,
부서 안에서도 역시 그런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절을 신중하게
작성했다.
"이 음모를 뒷받침할 증거를 수집하도록
현재 조사를 진행중임. 그러나 그 조사에
의해서 위에서 언급한 일들이 사실이라고
판명되었을 경우, 위의 음모는 본인의
견해로는 테러리스트에 의한 대통령
암살기도로서 가장 위험하다고 아니할 수
없음. 만일 위의 음모가 현실로서,
존재하고, 그들에게 고용당한 재칼이라는
암호명을 가진 외국인 살인청부업자가 현재
그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국가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지
않으면 안됨."
자신이 직접 타자로 쳐서 그것을 봉투에
넣고는 직접 봉인을 해서 최고기밀의
도장을 스탬프로 찍었다. 그리고 펜으로 쓴
원고는 불에 태워서 방 한구석에 있는
세면대 배수구에 그 재를 떠내려 보냈다.
작업을 끝낸 그는 얼굴과 손을 씻었다.
그리고 타월로 닦으면서 세면대 위에 있는
거울을 문득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얼굴은 지난날의
매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청년 시절 그처럼
활기에 넘치고 나이를 먹어도 그토록
여성을 매료시켰던 갸름한 얼굴은 이미
지쳐 버린 중년의 검은 기미로 얼룩져
있었다. 생존경쟁의 자리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잔혹성을 진저리나게 경험하고,
음모나 배반에 앞장서고, 부하를 죽음으로
고문으로 괴롭히며 울려 온 반평생은
54세라는 나이 이상으로 그를 늙게 했다.
코 양옆에서 입 가장자리까지 뻗어 있는 두
가닥의 주름은 늙은 농부의 얼굴을
연상시키고, 눈 밑에는 언제나 검은 기미가
끼어 있으며, 품위 있는 회색을 하고 있던
귀밑털은 윤기 없는 흰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금년까지만 하고 이젠 정말 이 일을
그만두자."
마음속에서 중얼거렸지만 초췌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거울 속의
얼굴에는 이 결심에 대한 불신과 단념이
분명히 떠올라 있었다. 얼굴은 마음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거야. 어떤 일이건 오랜
세월 해오게 되면 도중에서 발을 씻기가
어떻게도 변할 수는 없는 거야. 레지스탕스
조직에서 경찰로, 그리고 SDECE로, 그리고
액션 서비스로 -- .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 왔는가, 몇 명이나 죽여 왔는가
하고 그는 거울 속의 얼굴에게 물었다. 그
모든 것은 프랑스를 위해서 해온 일이다.
그럼, 프랑스는 나를 위해서 무얼 해준다는
것인가? 거울 속의 얼굴은 말없이 마주
쳐다볼 뿐이었다. 양쪽이 모두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롤랑은 연락담당인 오토바이 대원에게
사무실까지 오라고 전화로 명령했다. 올
때에 달걀튀김, 롤빵과 버터, 밀크커피(큰
컵에 가득), 그리고 출두한 연락담당에게
봉인을 한 봉투를 건네주고는 명령을
내렸다. 이윽고 달걀과 빵을 다 먹어치운
창으로 다가서서 커피를 마셨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지붕들 너머로 노트르담
대성당의 첨탑이, 다시 그 너머, 아침
안개가 낀 센 강 멀리에 에펠 탑이 보였다.
시간은 이미 8월 11일 오전 9시를 지나,
시내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가죽
점퍼를 입은 연락담당은 아마도 붐비는
차에 혀를 차고는 사이렌을 울리면서 제8구
쪽으로 서둘러 달리고 있겠지.
그 보고서에 기록한 위협을 피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연말까지 현직을
유지하느냐 못하느냐가 정해질 거라고
생각하며 롤랑은 쓰디쓴 입맛을 다셨다.
제 9 장
그날 아침 느지막히 내무장관은 집무실의
책상에 앉아서 침통한 얼굴로 밝은 햇살이
비치는 창밖의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앞쪽으로 난 곳에 프랑스 공화국의 문장을
장식한 아름다운 연철로 된 문이 있다. 그
너머는 부보 광장이며, 그 한가운데 서
있는 경찰관 주위를 포부르 상 토노레
가(街)와 마리니 가(街)에서 흘러들어온
차가 소용돌이처럼 돌고 있다. 역시 이
광장으로 통하고 있는 미로메스닐 가(街)와
소세 가(街)의 차는 경찰관의 호루라기
소리에 따라서 광장을 가로질러 각자의
방향으로 사라져 간다. 경찰관은 다섯
가닥의 차의 흐름을 투우사가 소를
느끼게 하는 동작으로 처리하고 있다. 로제
프레이 내무장관은 경찰관 임무의 단순함과
자신에 가득 찬 그 동작이 부러웠다.
문 안쪽에서 두 명의 경찰관이 광장
한가운데에서 일하고 있는 동료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단기관총을 어깨에 메고
연철의 문 너머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은 문에 의해서 속세의 소란에서
지켜지고, 월급과 지위와 직장을 보장받고
있다. 그들의 하루하루 또한 단순하고,
야심도 크지 않다. 그러므로 장관은
그들에게도 선망을 느꼈다.
문득 정신을 차린 프레이 내무장관은
등뒤에서 들리는 서류의 소리로 회전의자를
정면으로 다시 돌렸다. 책상 너머에 있던
남자가 파일을 접어서 그것을 조용히 책상
마주쳤다. 집무실은 쥐죽은듯 조용했다.
맨틀피스(벽난로 장식 선반) 위의 앉은뱅이
시계가 째각거리는 소리와 부보 광장에서
전해 오는 어렴풋한 차의 진동이 오히려
정적을 더욱 깊이 느끼게 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나?"
대통령 경호대의 지휘관 장 뒤크레
총경은 경비문제, 특히 암살방지에
대해서는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이라고들
한다. 그가 현직에 취임하게 된 것은 그
솜씨를 높이 평가받았기 때문이며, 사실
그는 오늘까지 드골 암살을 노린 여섯 건의
음모를 어떤 경우에는 실행단계에서, 또
어떤 경우에는 준비단계에서 모두 막았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롤랑의 해석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소리로 그는 딱 잘라 말했다. 마치 축구
시합의 결과에 대해서 예상을 장담하는
듯한 태도였다.
"만일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일찍이 없었던 위기가 되겠지요.
치안당국이 자랑하는 자료나, OAS 내부에
침투해 있는 요원들의 조직도 완전히
단독으로 행동하는 외국인 제3자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력할 뿐입니다. 더구나
상대는 돈으로 고용된 살인청부업자입니다.
롤랑의 표현을 빌린다면 -- "
그는 보고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펴서
소리내어 읽었다.
"'대통령 암살 기도로서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프레이는 짧게 깎은 회색 머리칼을
돌렸다. 그는 쉽게 초조해지지 않는
남자였지만, 이날 8월 11일의 아침만은
어쩔 수 없을 만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긴 세월 샤를 드골의 대의에 몸바쳐 온
그는 지적이고 세련된 외모 뒤에 어떤
만만찮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내무장관이라는 중요한 직위를 차지한 것도
그 때문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었다. 투명한
푸른 눈은 때에 따라서는 따뜻하고
매력적이기도 하고,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워지기도 하며, 가슴과 어깨는 강한
힘을 느끼게 하고, 단정한 얼굴 모습은
권력자와의 교제를 자랑으로 삼는 부인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는다. 그러나 프레이는
이런 특징들을 단지 선거에만 이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적의, 영국의 차디찬 무관심, 지로
장군파의 야심, 그리고 공산주의자의
증오를 상대로 고통스러운 싸움을 해왔다.
프레이는 그 싸움 속에서 정치항쟁의
기술을 배웠다. 어쨌든 그들은 그런 싸움을
이겨 냈고, 그들이 신봉해 온 인물은 18년
사이에 두 번, 한 번은 망명자의 처지에서,
또 한 번은 실의와 굴종에서 최고권력의
자리로 복귀했다. 그리고 과거 2년 사이에,
이번에는 장군을 두 번이나 권좌에 앉히는
데 공헌한 집단인 군이 공공연히 대적해
왔다. 겨우 몇 분 전까지도 내무장관은
군의 반란분자들과의 싸움은 이제 종말에
가까웠으며, 적은 힘없이 몸부림치며
사라져 가고 있다고 낙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것을 충격적인 방법으로 알게 된 것이다.
로마에 있는 삐쩍 마른 광신자가 한 인물을
없애서 모든 체제를 붕괴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에 따라서는,
예를 들면 28년 전의 영국이나, 그 해의
세밑 미국처럼 대통령의 죽음이나 국왕의
폐위에 의해서도 무너지지 않는 안정된
기구를 갖추고 있는 곳도 있다. 그러나
1963년의 프랑스는 국가가 확립된 근본을
생각해 볼 때, 대통령의 죽음은 곧 폭동과
내전의 서막이 될 뿐이라는 것을 프레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눈부시게 빛나는
앞뜰을 내려다보면서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것은 아무래도 대장에게 말 안 할
수가 없겠군."
총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전문가는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에게 맡기면 되니까
홀가분하다면 홀가분하다. 그는 대통령에게
사태를 고하는 역할을 자진해서 떠맡을
생각은 없었다. 장관은 방향을 바꾸어 그를
보았다.
"좋아. 당장 오후에라도 대통령을 만나서
말씀드리지."
팔팔하고 힘찬 소리였다.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다짐을 해둘 것도 없겠지만, 내가
대통령에게 사태를 설명하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일체 비밀로
해주기 바라네."
뒤크레 총경은 일어나서 물러갔다.
그리고 광장을 가로질러 바로 그 앞에 있는
엘리제궁으로 돌아갔다. 집무실에 혼자
다시 돌려놓고 또 한 번 처음부터 천천히
읽어 보았다. 롤랑의 추론이 옳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며, 뒤크레가 그것을
재확인한 지금, 잔재주를 부릴 여유는
없었다. 위험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중대한 위기다. 책략으로 피할 수
없는 이상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인터폰의
스위치를 누르고서 버저로 대답하는
통화구에 대고, "대통령 관저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연결해 주게." 하고 말했다.
곧 인터폰 옆에 있는 빨간 전화가
울렸다. 그는 수화기를 들고 말했다.
"포카르를 부탁해."
조금 시간이 지난 다음, 프랑스
최고권력자의 한 사람인 자크 포카르의
프레이는 면회하려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되도록 빨리 부탁하네, 자크...... 그야
물론 시간을 조정해야겠지만. 응,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되도록 빨리 대답을 듣고
싶네."
한 시간 뒤에 회답이 있었다. 면회는
대통령이 시에스타(낮잠)를 끝낸 바로 뒤인
오후 4시로 결정되었다. 순간 프레이는
낮잠 같은 한가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라고
항의하려고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대통령의 측근은 모두 그렇지만,
프레이 또한 그 부드러운 목소리를 지닌
문관의 의향을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불리한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포카르는
말하자면 대통령의 귀이며, 그가 쥐고 있는
두려워하고 있다.
그날 오후 20분 전 4시, 재칼은 런던
제일을 자랑하는 생선요리 전문점
커닝검에서 일급 런치를 즐기고 밖으로
나왔다. 사우스 오드리 가(街)로 나가면서
그는 당분간은 이제 런던과는 이별일 뿐만
아니라, 실컷 맛있는 것을 먹을 이유도
있다는 생각으로 충만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바로 같은 시각, 검은색 시트로엥 DS19가
프랑스 내무부의 정문에서 부보 광장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광장의 한가운데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던 경찰관은 문안에
있는 동료에게서 미리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트로엥의 모습을 보자마자 모든
시트로엥은 100 미터쯤 도로를 내려가서
엘리제궁의 포치 쪽으로 구부러졌다.
여기서도 내무장관의 도착을 통보받은 당번
경찰관이 차의 행렬을 중간에서 막고
시트로엥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포치의
양쪽에 있는 위병초소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경찰관이 자동소총인 기관단총에
흰장갑을 낀 손을 척 갖다붙여서 경례를
했다. 내무장관의 차는 엘리제궁의 앞뜰로
들어갔다.
문 안쪽 아치에 낮게 쳐놓은 쇠사슬
앞에서 차가 일단 정지하자, 뒤크레의
부하인 당번경감이 재빨리 차 안을 보았다.
그는 내무장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으며,
내무장관도 따라서 끄덕였다. 경감의
신호로 사슬이 땅에 떨어지고, 시트로엥은
광대하게 자갈이 깔린 그 너머로 궁전의
정면이 보인다. 운전사인 로베르는 일단
차를 오른쪽에 붙였다가 거기서 좌회전하여
정면 현관으로 통하는 층계 밑에 옆으로
갖다댔다.
은색의 사슬로 장식한 검은 프록코트로
위엄을 갖춘 안내원 하나가 문을 열었다.
내무장관은 차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층계를 뛰어올라가서 정면 현관의 유리문
앞에서 주임 안내원의 영접을 받았다. 두
사람은 목례를 나누고, 내무장관은
안내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원이
문 왼쪽에 있는 대리석 테이블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동안 내무장관은 높은 천장의
황금색 사슬에 매달린 거대한 샹들리에
밑에서 한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수화기를
잠깐 미소짓고는 언제나처럼 우아한
걸음으로 양탄자를 깔아놓은 대리석 층계를
올라갔다.
이층에 올라간 두 사람은 짧막한
층계참을 가로질렀다. 안내원은 층계참
왼쪽에 있는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안에서, "들어오십시오." 라는 분명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안내원은 문을 열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내무장관을
'대기실'로 들여보냈다. 내무장관이 방에
들어가자 등뒤에서 문이 닫히고, 안내원은
침착한 걸음걸이로 입구로 들어섰다.
'대기실' 안쪽에는 남향으로 커다란
창문이 있고, 거기서 들어오는 햇빛이
양탄자를 따뜻하게 비추고 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어진 커다란 창 하나가 완전히
비둘기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창에서
300-쯤 저쪽에 있는 샹젤리제 대로는
상쾌한 향기로 무성한 보리수와
너도밤나무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고,
오가는 차 소리는 비둘기 울음소리보다도
작게 들린다. 도시에서 자란 프레이는
엘리제궁의 이 방에 올 때마다 수풀 우거진
시골의 성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궁전의 반대쪽을 달리는 포부르 상 토노레
가를 지나가는 차 소리 같은 것은 먼 꿈만
같았다. 대통령은 시골이 좋은 것이다.
그날의 당번 부관은 투사르 대령이었다.
그는 책상에서 일어나서 프레이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대령 -- ." 프레이는 왼쪽으로 보이는
황금색 손잡이가 달린 문 쪽을 턱으로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령이 문으로 다가가서 가볍게 노크하고
한쪽 문을 열고서 그 자리에 섰다.
"내무장관께서 오셨습니다."
알았다는 뜻의 분명찮은 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대령은 한 발자국 물러서며
내무장관에게 미소를 보냈다. 프레이는
대령 앞을 지나서 샤를 드골의 서재로
들어갔다.
이 방에는 장식이나 비품을 갖추도록
지시한 사람의 개성을 느끼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프레이는 올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오른쪽으로 높고 고상한 세
개의 창이 나란히 있고, '대기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정원 쪽으로 나 있었다. 여기도
역시 창 하나가 완전히 열려 있고,
무성한 보리수와 너도밤나무 사이에는 20보
떨어진 거리에서 트럼프의 스페이드
에이스의 그림을 정확히 맞출 만한 솜씨를
가진 사격의 명수들이 자동소총을 안고
숨어 있을 것이다. 하긴 그들은 대통령의
눈에는 띄지 않도록 엄중한 명령을 받고
있다. 경호원의 열의는 어찌되었거나
대통령은 어마어마한 신변경비를 극히
싫어했으며, 경비상의 이유로 자기의
프라이버시가 침범당하게 되면 불같이 화를
냈다. 경호대장인 뒤크레에게 있어서
이것은 최대의 고민거리였다. 무릇
경비라는 이름이 붙는 것은 그 모두가
자기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경호하는 일만큼 어려운 임무도
없다. 모두들 뒤크레를 동정은 할 망정
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유리문을 한
붙박이 책장 앞에 루이 15세풍의 테이블이
있고, 그 위에 루이 14세풍의 앉은뱅이
시계가 올려져 있다. 바닥에는 1615년에
샤이요의 왕실 양탄자 공장에서 만들어진
비누공장 양탄자가 깔려 있다. 그 공장은
언젠가 대통령이 설명해 주었는데, 본래
비누공장이던 것을 양탄자 제조공장으로
바꾼 것이며, 그래서 거기서 만드는
양탄자는 모두 사봉누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방에는 단순한 것, 경박한 것,
악취미적인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랑스의 영광을 상징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프레이의 생각에 의하면
언제나와 같은 은근함으로 그를 맞기
프랑스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프레이는 문득 해럴드 킹이
그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킹은 파리에
주재하는 영국의 원로 저널리스트로서,
드골과 친교를 맺고 있는 유일한
앵글로색슨이지만, 그는 드골의 행동을
평하여 그것은 20세기의 것이 아니고
18세기의 궁정풍이라고 놀렸다. 그 뒤
프레이는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우아한
몸짓으로 인사를 하는, 비단과 화려한
단자에 몸을 감싼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지만 도무지 그 이미지가 연결이
안되었다. 비슷한 점은 있지만 분명하게
떠오르지는 않는 것이다. 현실은 오히려
궁정인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프레이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무슨 일엔가 화가
군대용어로 냅다 소리치는 바람에 그
너무도 거친 모습을 보고 측근이나
관료들이 어이가 없어 할말을 잃은 적이
있었다.
프레이도 잘 알고 있듯이 대통령을 가장
화나기 쉽게 하는 것은 신변 경비에 관한
문제다. 더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내무장관으로서 그는 프랑스의 국가기구,
특히 대통령의 신변안전에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문제에 관해서는
두 사람이 모두 정면에서 받아들인 적은
없고, 조치가 필요한 경우에도 프레이는
어디까지나 겉으로 표 안 나게 일을
해나갔다. 지금도 그는 서류가방에 넣어
가지고 온 보고서와, 그로 말미암아 해야만
할 요청들을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장신을 짙은 회색의 양복으로 감싼
대통령은 책상 옆을 돌아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각하."
그는 내민 손을 잡았다. 적어도 지금은
이 노인이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는
책상 앞에 놓인 보베 직조의 천으로 씌운
등받이가 곧은 의자 하나에 앉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주인으로서의 의무를 끝낸
드골은 책상 뒤로 돌아가서 벽을 등지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반들거리게 닦아
놓은 책상에 두 손의 손가락을 올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무슨 긴급한 용건이 있다고 하던데,
무슨 일인가?"
프레이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나서
어쨌든 남의 장광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짧고 간결하게
용건을 설명했다. 프레이 자신도 이야기는
간결한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말수 많은
부하가 당혹해 하는 경우도 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드골은 몸이
굳어졌다. 그리고 점점 몸이 늘어나듯 차츰
깊게 뒤로 등을 넘기면서, 믿고 있던
하인이 불쾌한 오물을 가지고 온 것을
책망하듯이 높이 솟은 코 양옆에 있는 눈이
프레이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프레이는
대통령의 눈에는 자신의 모습이 몽롱한
그림자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통령은 근시인 것이다. 하긴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연설 원고를 읽을
때를 빼놓고는 공개된 장소에서는 절대로
프레이는 1분도 채 안되어 설명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롤랑과 뒤크레의
의견을 알리고서 이렇게 덧붙였다.
"롤랑의 보고서는 여기에 가지고
왔습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대통령은 한 손을
내밀었다. 프레이는 보고서를 꺼내어 그
손에 건넸다. 대통령은 가슴에 달린
호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어 쓰고 책상
위에 보고서를 펴놓고서 읽기 시작했다.
비둘기조차도 조심이 되는지 우는 소리가
멎었다. 프레이는 창밖의 수목을
바라보다가 책상 위에 놓인 놋쇠 스탠드로
시선을 옮겼다. 그것은 왕정복고시대의
아름다운 촛대를 전기 스탠드로 바꾸어
만든 것으로서, 드골이 이 방의 주인이
서류를 비쳐 온 물건이다.
드골 장군은 읽는 것도 빠르다. 3분에 다
읽고는 그것을 꼼꼼하게 접고서, 그 위에
두 손을 마주잡아 올려놓으며 물었다.
"그래서 자네는 내게 어떻게 하라는
건가?"
프레이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조치에 관해서 요령
있게 설명을 했다. 그 중에서 그는,
"저의 판단으로는 이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이 필요합니다......" 라는
식으로 두 번 말했다. 그리고 33초째에
'프랑스의 국익'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을
때 드골은 그를 막았다. 대통령의 잘
울리는 목소리에서는 프랑스라는 한마디에
어떤 신성한 느낌마저 주는 마력을 지니고
드골만큼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통령이 비열한 살인청부업자의 위협에
떨지 않는 일이야말로 프랑스의 국익에
부합하는 일이야."
드골은 여기서 일단 입을 다물었다.
미지의 살인청부업자에 대한 모멸의 느낌이
무겁게 방에 가득 찼다.
"고용된 외국인 살인청부업자 같은 걸
겁내어서는 안돼."
프레이는 만사 끝나 버렸음을 깨달았다.
드골 장군은 그가 두려워한 정도로
화내지는 않았다. 장군은 말하기 시작했다.
자기의 생각을 명확하게 전하는, 자신에
넘치는 말투였다. 그 가운데 어떤 부분은
옆방에 있는 투사르 대령의 귀에도
띄엄띄엄 들렸다.
하는......비열한 살인청부업자에게
손상당한다는 것은......단연코 용서할 수
없는......"
그로부터 2분 뒤에 프레이는 대통령의
방에서 물러나왔다. 그는 우울한 얼굴로
투사르 대령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기실'을 나와 층계를 내려갔다.
물러나온 내무장관을 현관 앞의
시트로엥까지 안내하고 그가 사라져 가는
것을 배웅하면서 안내원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를 떠맡게 된 모양이군. 대체 대장이
무슨 말을 한 것일까?"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20년이나 자리를 지켜온
주임안내원답게 그 표정은 궁전의 석벽처럼
요지부동의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해서는 대통령께서 내게 단단히 다짐을
했어."
프레이는 창밖을 보고 있다가 돌아서면서
책상 앞에 서 있는 사나이를 보고 말했다.
엘리제궁에서 돌아오는 즉시 그는 보좌관을
불렀다. 알렉상드르 송기네티는
코르시카인이다. 과거 2년 동안 전
프랑스의 치안기구의 운영이 내무장관에게
위임되어 그것을 실질적으로 총괄해 온
송기네티는 각 방면에서 좋고 나쁜 갖가지
소문의 대상이 되어온 터이다. 그는
필요하다고만 생각되면 CRS의 폭동진압부대
동원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데모가
거칠어지면 가차없이 잡아들였다. 그래서
극좌익에서는 뱀처럼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또, 공산주의자는 그를 가리켜
치안유지 방법이 철의 장막 너머에 있는
노동자의 천국인 그것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로부터 파시스트로 낙인찍힌
극우의 무리들 역시 민주주의와 시민권을
억압한다고 해서 그를 증오했다. 다만
극우의 경우, 민주주의 운운은 명분에
불과하고 정작 본심은 다른 데에 있었다.
그의 가차없는 조치가 사회질서의 붕괴를
겨우 막고 있었기 때문에 질서회복의
기치를 들고 있는 우익의 공격을 무익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이 그들
노여움의 근본적인 이유였다. 일반 시민의
대부분도 그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가혹한 법령이나 포고에
매일같이 시달림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CRS의 곤봉에 얻어맞고 쓰러지는
데모대원의 사진 보도 등 불만의 이유는
한이 없었다. 보도기관은 그에게 '무슈
앙티 OAS'라는 별명을 붙였으며,
골리스트파의 심문을 빼놓고는 모두가
합세해서 몰매를 때리고 있었다. 이렇게
그는 프랑스 제일의 악역을 맡고 있지만,
그 고충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가
신앙하는 신은 엘리제궁에 있었으며, 그의
대리인으로서의 지위에 조금의 불만도
없었다. 그는 롤랑의 보고서를 철한 누런
겉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장난이
아닙니다. 대통령도 어떻게 되신
모양입니다. 우리는 대통령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데, 당사자인 본인이 그것을
잡아들일 마음만 먹으면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조치도 취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다면 정말 곤란합니다. 대체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그 녀석이 습격해 오도록
기다리고만 있자는 겁니까? 팔장을 끼고
보고만 있을 겁니까?"
내무장관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보좌관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예상이 적중했다고 해서 어깨의 짐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책상 뒤에 앉았다.
"알렉상드르, 들어 보게. 현재로서는
아직 롤랑의 보고서가 사실이라는 증거는
없다네. 이것은 어디까지나
코와르스키......인가 하는 녀석이 고통에
못 이겨 내뱉은 말들을 롤랑의 개인적인
아직 조사가 계속되고 있는 중이야. 아까
SDECE의 기보 장군에게 연락해 보았더니,
오늘밤 안으로는 조사결과가 판명된다고
하더군. 그러나 어쨌든 말일세, 현
단계로서는 암호명밖에 모르는 외국인을
잡기 위해서 전국적인 수사를 전개한다는
것은 좀 비현실적이야. 그런 의미로는 나도
대통령과 같은 의견일세. 게다가 이것은
대통령의 지시......아니, 절대적인
명령이네. 만에 하나라도 잘못 듣는 일이
없도록 다시 말해 두겠네. 공표는 절대로
해선 안되며, 전국적인 규모의 수사도
안돼. 소수의 관계자 이외에는 알아서는
안돼. 만일 비밀이 새나가면 보도기관은
얼씨구나 하고 좋아할 것이고, 여러 외국은
조소를 보낼 것이며, 우리 경계조치는
도망쳐서 숨어 있다는 인상을 국내외에
주게 된다는 생각인 거야.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대통령은 그런 사태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거야. 대통령은
말일세......"
프레이는 집게손가락을 세워서 강조했다.
"분명히 말씀하셨어. 만에 하나 우리들의
조치가 새나가 비밀이 조금이라도
공개된다면, 아니 막연하나마 그런 인상을
일반에게 주게 되면 전원 즉시 파면이라고.
나도 그처럼 결연한 장군의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야."
"그러나 공식일정은 -- ." 하고 보좌관은
장관을 설득하려는 듯이 말했다. "변경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놈을 체포할
때까지는 공개석상에 모습을 나타내시는
-- ."
"공식 일정의 변경은 없어. 한 시간,
1분의 변경도 안된다는 말씀이야. 수사는
완전히 비밀리에 진행되어야만 해."
지난 2월 육군사관학교를 무대로 한
암살계획 때 관계자들을 미연에 체포해서
방지한 이후로 알렉상드르 송기네티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과거
두 달 동안, 은행강도와 보석상 피습의
거센 파도와 싸우면서, 그것을 마지막으로
최악의 상태에서는 벗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OAS의 조직은 내부에 침투한 액션
서비스와 외부에서 공격하는 경찰과 CRS의
양면 공격으로 괴멸되어, 일련의
강도사건은 망명자금을 마련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몇 안되는 잔당의 최후의
그러나 롤랑의 보고 내용은 무정한
것이었다. OAS의 고위층에까지 침투해 있는
롤랑의 부하들도 상대가 로마에 숨어서
꼼짝 않고 있는 간부 세 사람밖에 정체를
모르는 익명의 살인청부업자와 만나서 일을
꾸미는 데에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또 OAS와 관련 있는 모든 인간에
관한 그 많은 자료 -- 정보가 필요할 때
내무부는 언제나 여기에 의존했다 -- 도
재칼이 외국인이라는 단순한 사실 하나로
그 모두가 한낱 쓰레기 더미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행동을 못하게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무엇을 못하게 한다고 말한 적은 없네."
하고 프레이는 고쳐 말했다. "공공연한
비밀리에 진행되지 않으면 안돼. 그렇게
되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야.
극비리의 조사로 살인자의 정체를
알아내고, 국내외 어디에 있든 그 소재를
찾아내어 신속히 없애버리는 거야."
"......신속히 없애버려야만 해.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야."
내무장관은 자신의 말에 대한 효과를
확인이라도 하듯이 회의실 테이블 앞에
줄지어 앉아 있는 관계자들을 둘러보았다.
내무장관은 장방형 테이블 상석에 서
있었다. 바로 오른쪽에 보좌관인 송기네티,
왼쪽에 프랑스 경찰의 행정면을 대표하는
경시총감인 모리스 파퐁 장군이 앉아 있다.
송기네티의 오른쪽, 테이블의 긴 변을
따라서 SDECE 국장인 기보 장군, 다음에
앞에 놓여 있는 보고서의 사본을 작성한
롤랑 대령, 대통령 경호대 지휘관 뒤크레
총경,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통령 관저
무관인 공군 대령 생클레아 드 비로방.
생클레아는 열광적인 골리스트로서도
유명하지만, 자기의 야심에 관해서도
열광적이라는 평이 대통령 측근들
사이에서는 자자하게 나오고 있다.
이 네 명과 마주앉아 있는 것은
국가경찰국장 모리스 그리모와 국가경찰에
속하는 5개 부문의 각 책임자들이다.
이 국가경찰은 범죄 소탕의 기수로서
소설가들의 애호를 받고 있지만, 국가경찰
그 자체는 소수의 스탭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기구로서, 실제 일을 하는 것은
그의 통제를 받고 있는 다섯 개의
그렇게 오해되고 있지만 국가경찰의 기능은
순수한 행정적인 것으로서, 스탭에는 한
사람의 경찰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모리스 그리모 다음에 앉아 있는 것은
프랑스의 사법경찰을 쥔 마크스 페르네,
케데조르페부르에 있는 사법경찰의 본부는
내무부의 옆, 소세 거리 11번지에 있는
국가경찰의 그것에 비하면 몇 배나 크다.
사법경찰은 프랑스 전국의 17개 경찰관구에
각각 하나씩 있는 17개 지방경찰을
통제하고 있다. 이 지방관구경찰의 밑에
지구경찰이 있다. 이것은 총 453개에
이르고, 74개의 중앙공안위원회와 253개의
지방공안위원회, 그리고 126개의 경찰서로
이루어져 있다. 이 경찰망은 2,000개에
이르는 시, 구, 동을 커버하고 있다.
시골이나 고속도로의 치안유지는 헌병대와
기동경찰대가 주로 맡고 있다. 많은
지방에서는 능률을 고려해서 헌병과
기동경찰대가 같은 시설과 장비를 쓰고
있다. 1963년 현재, 마크스 페르네의
지휘하에 있는 사법경찰의 인원은 2만 명을
넘고 있다.
페르네의 왼쪽에는 다른 4개 부분의
책임자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보안경찰(BSP), 통합정보부(RG),
국토감시국(DST), 그리고
국가보안공화부대(CRS).
BSP는 주로 국가가 관장하는 건물,
통신시설, 고속도로, 그 밖에 사보타주나
파괴공작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지키는 일을
임무로 하고 있다. 다음의 RG는 다른
존재로서, 팡테옹에 있는 본부의 자료
센터에는 부 창설 이래 경찰의 눈에 걸린
인간의 개인적인 자료가 450만 통이나
수집되어 있다. 전장 81 킬로미터에 이르는
선반에 가득 차 있는 이들 자료는
이름순으로, 또는 범죄의 종류에 따라서
색인이 붙어 있다. 또, 각 사건의 증인이나
참고인의 이름도 리스트로 작성하여
보관되어 있다. 이 자료 시스템은 당시
아직 컴퓨터화되어 있지 않았지만,
직원들은 예를 들어 10년 전에 시골의
한구석에서 발생한 방화사건의 자세한
내용이나, 신문의 기사거리도 되지 않았던
사소한 사건의 재판에 나온 증인의
이름일지라도 불과 몇 분이면 찾아낼 수
있다고 언제나 자랑하고 있다.
채취된 지문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것까지도 포함해서 모아 두고 있다. 또
국경을 통과하는 관광객의 입국 카드나
파리 교외의 그 지방 호텔에 묵은 손님의
숙박 카드도 포함해서 각종의 카드가
1,050만 장이나 보관되어 있다. 다만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이런
카드는 차례에 따라서 소각되고 새로 모인
카드와 교체된다. 또한, 파리 시내의 호텔
숙박 카드는 RG에 가는 것이 아니라 팔레
대로에 있는 경시청에 신고하기로 되어
있다.
DST는 국내에서 대 간첩활동을 주임무로
하고, 공항이나 국경을 항상 감시하고
있다. 프랑스에 입국하는 사람의 입국
카드는 '바람직하지 못한 인물'을 체크하기
경찰관에게 조사를 받은 다음, RG의 자료
센터로 보내기로 되어 있다.
가장 마지막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CRS의 책임자이다. 45,000명의 진용을
자랑하는 CRS는 과거 2년 동안 송기네티의
지시로 빈번하게 출동하여 일찍부터 악평을
들어 오고 있다. CRS의 지휘관은
위치관계상 테이블의 말석에서 내무장관과
마주보는 곳에 앉아 있다. 그의 왼쪽,
생클레아가 앉은 자리에서 보자면 바로
오른쪽 자리에 거구의 우람한 사나이가
앉아 있다. 그는 연신 파이프를 빨아대고
있으며, 까다로운 생클레아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그가 회의에 참석한 것은
내무장관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서, 마크스
페르네가 그를 데려온 것이다. 그는
"우리기 놓인 처지는 이상과 같네." 하고
내무장관은 다시 입을 열었다.
"롤랑 대령의 보고서는 이미 여러분들이
읽은 바와 같다. 그리고 대통령이 프랑스의
권위를 고려해서 우리에게 과해진 제약에
대해서는 방금 내가 설명한 바와 같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하겠는데, 모든
수사활동은 극비리에 진행되어야만 해.
그리고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지만, 이
일은 절대로 비밀로 해주어야겠어. 지금 이
방에 있는 사람들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여러분에게 이 자리에 참석을 요구한
것은 언제고 모든 부서의 협력이 필요하게
될 것이며, 각 부서의 책임자로서 이
문제가 다른 어떤 임무보다도 우선하는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야. 필요한 경우에는
여러분들 스스로 자진해서 지체없이 움직여
주기 바라네. 진정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조그만 일은 별문제이지만,
이번 일은 부하에게 맡겨선 안되네."
내무장관은 여기서 다시 입을 다물었다.
테이블의 양쪽에 나란히 앉은 몇몇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과 내무장관은 눈앞의 보고서에
시선을 못박고 있었다. 테이블의 말석에
앉아 있는 부비에는 인디언이 봉화를
올리듯 입가에서 단속적으로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 그때마다 옆에 있는 공군
대령은 얼굴을 돌렸다.
"그럼 -- ." 하고 내무장관은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의견을 말해 주게. 롤랑
액션 서비스의 부장은 보고서에서 고개를
들고 SDECE의 보스를 옆눈으로 보았지만,
기보 장군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무시했다. 장군은 롤랑이 제마음대로
제3부의 관할인 빈 지부를 쓴 일로 해서
제3부장이 불평을 해대는 바람에 그것을
달래느라고 진땀을 뺀 뒤였다. 그는 그
생각을 떠올리면서 똑바로 앞쪽을 보고
있었다.
"예." 하고 대령이 대답했다. "빈의
공작원이 크라이스트라고 하는
브뤼크나알레에 있는 조그만 팡숑에 마르크
로댕, 르네 몽클레아, 그리고 앙드레
카송의 얼굴 사진을 가지고 탐문해
보았습니다. 코와르스키의 사진은 빈
지부에 없었으며, 이쪽에서 전송으로 보낼
호텔의 프런트 직원이 세 사람 중에서
적어도 두 사람의 얼굴은 본 적이 있다고
증언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누구인지는 식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돈을 좀 쥐어 주고 6월 12일부터
18일까지의 숙박부를 조사해 보도록
했습니다. 6월 18일은 세 사람이 로마의
호텔에 틀어박힌 날입니다. 그래서 결국
프런트 직원은 6월 15일에 슐츠라는
이름으로 방을 예약한 남자가 로댕이라고
그의 얼굴 사진을 지적했습니다. 로댕은
그날 오후 무슨 흥정 같은 것을 하고는
하룻밤 잔 뒤 다음날 그곳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슐츠에게는 인상이 고약한 거한의
동행이 있었습니다. 프런트 직원은 그것
그런데 점심 전에 슐츠에게 두 남자가
찾아와서 세 사람이 회의를 한 모양입니다.
이 두 사람은 카슨과 몽클레아겠지요.
장담은 할 수 없지만, 두 사람 중 한쪽은
전에 얼굴을 본 기억이 있다고 프런트
직원이 말했다고 합니다.
또, 그의 증언에 의하면 그 남자들은
종일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던 모양이며,
다만 아침 늦게 슐츠와 거한 -- 슐츠는
그를 코와르스키라고 불렀답니다 -- 이
30분쯤 외출을 했습니다. 남자들은 낮에
점심 먹으러 내려오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 남자가 찾아온 것도?"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송기네티가
물었다. 롤랑은 그의 질문을 무시한 듯이
사무적인 어조로 계속했다.
나타났습니다. 그 남자는 재빨리 현관으로
들어와서 그대로 순식간에 층계를 올라가
버려서 프런트 직원은 얼굴을 볼 틈도
없었던 모양이며, 열쇠를 프런트에 맡기지
않고 직접 몸에 지니고 다니는
숙박객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다만
그때 프런트 직원은 층계를 올라가는
남자의 윗도리 옷자락을 보았습니다. 그
남자는 곧 다시 밑으로 내려온 모양인데,
프런트 직원은 그 윗도리를 보고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남자는 프런트의 전화로 64호실, 즉
슐츠의 방을 대달라고 해서 슐츠와 두세
마디 프랑스어로 말을 주고받은 다음 다시
층계를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30분쯤
지나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처럼
먼저 슐츠를 방문했던 두 사람이 따로따로
호텔을 나갔습니다. 슐츠와 거한은 그대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아침식사를 끝내고
출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손님의 특징에 대해서
프런트 직원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대강
다음과 같은 정도입니다 -- 연령 미상,
키가 크고, 얼굴 모양에는 특징이 없으며,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으며,
프랑스어가 유창하고, 조금 긴 듯한 금발을
이마에서 뒤로 빗어넘겼음."
"그 프런트 직원에게 부탁해서 블론드의
몽타주 사진 작성에 협조를 구할 수는
없겠나?"
경시총감인 파퐁이 물었다. 롤랑은
고개를 저었다.
경찰의 사복형사로 위장하고 탐문을
갔었습니다. 다행히 빈 출신으로 통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말이지요. 하지만
그런 연극은 하루가 고작이지 오래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프런트 직원의 심문도
호텔에서 한 정도이고, 어디로 데리고
나가서 어떻게 해보기는 힘듭니다."
"블론드의 특징도 그것만으로는 아무
도움도 안돼."
RG의 책임자가 주의를 주었다.
"이름을 묻지 않았었나, 그 프런트
직원은?"
"예, 방금 말씀드린 것은 세 시간이나
걸려서 심문한 결과입니다. 모든 점을 두번
세번 되풀이해서 확인했습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이 프런트 직원이 기억하고
것도 아니니, 그런 정도로 기억하고 있는
것만도 다행이지요."
"아르그처럼 납치하여 파리에서 몽타주
사진을 만들 수는 없었나?" 하고 생클레아
대령이 화가 나서 말했다.
내무장관은 그것을 막았다. "납치는 더
이상은 할 수 없어. 아르그 사건으로
아직도 서독 외무부로부터 공격당하고
있어. 그런 방법은 한 번으로 끝내야지
두번 다시 할 짓은 못돼."
"하지만 이만저만 중대사가 아닙니다.
아르그 사건 때보다는 은밀하게 일을
진행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DST의 국장이 말했다.
"설령 납치에 성공한다고 해도 -- ."
하고 마크스 페르네가 반대 의견을 말했다.
것은 아무 쓸모가 없어. 두 달이나 지난
잠깐 동안의 기억을 근거로 작성된 몽타주
사진으로는 인상과 특징을 확정짓기가
도저히 불가능해. 다시 말하자면 그와
비슷한 인간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니
오히려 수사를 혼란케 할 뿐이야."
"코와르스키는 알고 있는 것은 몽땅
털어놓고, 하긴 결정적인 것은 무엇 하나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이미 죽어 버렸으니,
그 밖에 재칼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인간은
넷뿐입니다."
뒤크레 총경이 끼어들었다.
"한 사람은 재칼 본인이고, 다른 세
사람은 로마의 호텔에 있는 녀석들입니다.
어떨까요, 세 사람 중 하나라도 좋으니
파리에 데리고 오는 것이?"
"몇 번이나 되풀이하지만, 납치는 절대로
안돼. 그건 의논의 여지가 없어. 수상
관저의 코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이탈리아 정부는 광분해 할 거야. 절대로
무사히 끝나지는 않을걸. 게다가
현실적으로도 실행 불가능해. 자네가
설명해 주지 않겠나, 장군?"
SDECE 국장인 기보 장군은 일동을
둘러보고 말했다.
"호텔을 감시하고 있는 현지 요원의
보고에 의하면, 로댕 일행은 신변에 엄중한
경계망을 둘러치고 있어서 이쪽에서 손을
쓰려고 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전에 외인부대 소속이었던 총잡이
8명, 코와르스키가 빠졌으니까 7명이지만,
그들이 엘리베이터, 층계, 비상계단, 옥상
하나라도 생포하려면 가스 수류탄이나
기관총을 써서 대규모의 총격전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더구나, 설령 누군가를
체포할 수 있다고 해도 미처 날뛰는
이탈리아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국경까지
500--나 신병을 운반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SDECE에는 그 방면의
전문가가 있는데, 그들이 단언하고 있소.
이것은 군의 특공작전에 필적하는
것으로서, 도저히 해내지 못할 것이오."
회의실은 침묵에 싸였다. 내무장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때, 그밖에 다른 의견은 없나?"
"무슨 일이 있어도 재칼을 찾아내야
해요. 그것만은 절대적입니다."
생클레아 대령이 말했다. 테이블을
다른 사람들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상석의
내무장관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건 이미 알고도 남는 일이야. 지금
우리가 머리를 짜내려는 것은, 주어진
제약하에서 어떤 방법으로 놈을 찾아내는가
하는 일이야. 그러자면 어떤 부서가 가장
적합하겠는가? 그것이 당면 과제야."
"대통령의 보호에 대해서는 다른
부서에서 모두 실패했을 경우,
최종적으로는 대통령 경호대와 대통령
비서실이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장관님,
우리는 반드시 그 책임을 다할 것입니다."
참석자 중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지겹다는 얼굴을 하고 눈을 감았다. 뒤크레
총경은 찌르는 시선을 잠깐 대령에게
던졌다.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기보 장군은 조그만 소리로 롤랑에게
말했다.
"독선은 그쯤 해두시지. 대장도 녀석이
하는 말은 문제도 삼지 않는데, 그것을
모르니 불쌍하군."
프레이 내무장관은 눈을 들어 엘리제궁의
무관에게 시선을 보내면서 장관으로서의
무게를 보이는 발언을 했다.
"생클레아 대령의 말은 물론 옳아. 다만,
대령도 알고 있겠지만 어떤 부서에서
암살저지의 중책을 떠맡을 때, 만일
실패하거나 일이 공개되어 버릴 방법을
섣불리 채택하여 대통령의 지시를 어기게
될 경우, 그 부서의 장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돼."
위협의 감정이 부비에의 파이프에서
테이블 주위를 둘러쌌다. 앙상한
생클레아의 창백한 얼굴이 눈에 띄게
긴장하고, 눈에서는 걱정과 근심의 빛이
배어나왔다.
"대통령 경호대에는 제약이 너무
많습니다."
뒤크레 총경이 냉정한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언제나 대통령의 신변 가까이에
있어야만 하고, 그곳을 떠날 수가 없어요.
이 수사는 광범위한 영역에 걸친 것으로서,
경호대로서는 본래의 임무를 포기하지 않는
한 맡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뒤크레의 말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서,
그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진해서 그 임무를 떠맡으려는
자신에게 멈추는 것을 피하고 싶어했다.
프레이는 참석자를 둘러보다가 말석에서
연기에 싸여 있는 부비에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자네의 의견은 어떤가?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형사 출신으로 거친 그는 입에서
파이프를 빼고, 자기를 향해 방향을 바꾼
생클레아 대령에게 짙은 향기의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담담하게 말하듯이 조용히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가 놓여 있는 상황을 정리하면 대개
이런 것이 되겠군요. 먼저 SDECE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재칼의 정체는 OAS도
모를 정도니까 OAS 내부에 침투시킨 요원을
그러니까 액션 서비스도 공격의 상대를
모르니까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지요.
다음에는 DST입니다. 국경에서 놈을
잡으려고 해도 누구를 잡아야 좋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지요. RG도 어떤 자료를 찾아야 할지도
모르니까 정보 제공이 안되고요. 또한,
경찰은 누구를 체포해야 할지 모르니 놈을
체포할 수도 없으며, CRS도 추적할 상대를
모르고서는 추적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프랑스의 전 치안기구가 재칼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무력한 존재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 생각으로는 무엇보다
먼저 놈의 이름을 찾아내는 일이
급선무라고 봅니다. 이름을 모르고서는
어떤 명안이나 묘책도 무의미하니까요.
얼굴을 알게 되면 여권을 알 수 있으며,
여권을 알면 신병을 확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을 찾아내는 일, 더구나 그것을
은밀하게 하는 일, 이것은 바로 형사의
일입니다."
단숨에 여기까지 이야기한 부비에는 다시
파이프를 물고 입을 다물었다. 일동은 그의
말을 조용히 분석했다. 아무도 결함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송기네티는
내무장관의 옆자리에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프랑스에서 가장 유능한 형사는
누구인가?" 하고 내무장관은 조용히
물었다.
부비에는 잠깐 생각한 다음 파이프를
입에서 뺐다.
우리 차장, 클로드 르베르 총경이지요."
"곧 이리로 불러다 주게나."
내무장관이 명령했다.
제 10 장
그로부터 한 시간 뒤, 클로드 르베르는
어이없는 얼굴로 내무장관의 회의실에서
나왔다. 그는 50분에 걸쳐서
내무장관으로부터 임무의 내용에 관한
브리핑을 받았다.
갑자기 소환되어 내무부에 출두한
르베르는 회의실로 불려가서, CRS의
책임자와 그의 상사인 부비에 사이에
앉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14명의 참석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의 가치를 점치고
있는 속에서 그는 롤랑의 보고서를 읽었다.
다 읽고 난 보고서를 테이블에 도로
올려놓은 그는 지극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째서 자기가 이리로 불려온 것일까 --?
의논도 요청도 아닌, 분명한 지시이고
명령이었다. 긴 설명이 계속되었다. 특별
사무실을 설치할 것, 필요한 정보는
무제한으로 제공하겠다는 것, 각 참석자가
대표하는 각 부서의 전 조직을 마음대로
써도 좋다는 것, 경비에는 제한이 없다는
것. 그러나 절대로 비밀을 지킬 것, 이것은
대통령의 명령이라는 뜻의 말이 도중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설명을 들으면서
르베르의 마음은 깊숙히 가라앉았다.
그들은 불가능한 일을 의뢰, 아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수사의 단서라고는 하나도
없으며, 무엇보다 아직 범죄가 일어나지도
않았다. 실마리도 참고인도 없다 -- .
로마의 세 사람은 손이 닿지 않는
존재이다. 수상한 암호명 하나에 의지하여
클로드 르베르는 좋은 경찰관이다.
스스로도 그렇게 인정하고 있다. 그저
말없이, 남의 눈에 띄지도 않는 인기 없는
일을 하고 있는 좋은 경찰관이다. 때로는
좋은 경찰관을 대단한 형사로 변신시키는
어떤 번득임을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는 경찰의 일이란 99퍼센트까지가 틀에
박힌 무던한 수사로서, 검증에 검증을
되풀이하면서 부분과 부분을 부지런히
이어나가, 그렇게 해서 꿰어맞춘 전체가
하나의 그물이 되고, 그 그물로써 범죄자를
칭칭 얽어매어, 신문의 화려한 표제가 되지
않아도 좋은, 공소를 유지할 수 있는
케이스로 간추리는 -- 그런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사법경찰의 내부에서 그는 말없이 착실히
그는 정성껏 일하는 수수한 존재로서
선전을 싫어하며, 동료 중에는 그것을
이용해서 이름을 날린 사람도 있었다.
기자회견 같은 것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래도 그는 묵묵히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의 유죄를 입증하면서 착실히 승진해
왔다. 3년 전에 형사부 살인과의 과장
자리가 비어 그가 후보로 추천되었을
때에는 다른 유자격자들도 모두가 거기에
찬성했다. 살인과에서도 착실히 성적을
올려 3년 동안의 재임중에 꼭 한 건
용의자가 법규상 문제로 석방된 예를 젖혀
두고는 사건을 빠짐없이 해결하고 범인을
체포했다.
살인과장이 되고부터 그는 전보다 더욱,
그 역시 구식 경찰관인 형사부장 모리스
3주일 전에 형사부 차장이 갑자기 죽어서
부비에의 강력한 요청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 사법경찰 내부에서는 이 인사를
평하여, 부비에는 정치적인 활동에 오로지
시간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눈부신
활동으로 자기의 주가를 떨어뜨리지 않을,
퇴직이 임박한 부하를 택하게 된 것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비판은
너무 짐작이 지나쳐서 중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내무부에서 진행된 회의가 끝난 뒤,
롤랑의 보고서 사본은 모두 모아서
장관실의 금고 속에 넣었다. 르베르만이
부비에가 가지고 있던 사본을 건네받고, 그
사본의 소지가 허락되었다. 그가 회의에서
요청한 것은 단 한 가지, 재칼 같은 프로
외국의 경찰 간부에게 은밀히 협조를
요청하고 싶으니까 그 점을 허락해
주어야겠다는 것뿐이었다. 이런 협조
없이는 조사를 시작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그는 지적했다.
송기네티는 그런 무리들이 비밀을 지켜
줄 것인가에 의문을 제기했다. 거기에
대해서 르베르는 자신이 접촉하는
사람들과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이고, 더구나 그의 요청은 공식적인
것이 아니고 서유럽 각국 경찰의 간부
사이에 존재하는 개인적인 관계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내무장관은
한동안 생각한 끝에 르베르의 요청에
동의했다.
르베르는 회의실 앞의 복도에 서서
돌아가는 참석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쌀쌀맞게 고개를 끄덕이고, 또
어떤 사람은 간단히 인사까지 하면서 동정
어린 미소를 짓기도 했다. 부비에는 아직도
회의실 안에서 마크스 페르네와 무엇인가를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다른
참석자들보다 가장 뒤에 나온 것은
엘리제궁의 대통령 비서실을 대표해서 나온
귀족적인 공군 대령이었다. 참석자 일동을
소개받을 때, 그 대령이 생클레아 드
비로방이라는 이름이었다는 것이 르베르는
생각났다. 생클레아는 키가 작고 뚱뚱한
총경 앞에 멈춰서서 드러내 놓고 불쾌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수사의 성공을, 조속한 성공을
바라겠소. 엘리제궁은 수사의 진전에
찾아내는 데 실패한다면, 그때는 각오해야
될 게요...... 다시 말하자면, 그 충격이
클 것이라는 이야기요."
거기까지 말한 대령은 홱 돌아서서 현관
홀을 향해 층계를 내려갔다. 르베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몇 차례 바쁘게 눈을
깜박였을 뿐이다.
클로드 르베르라는 인간을 형성하고 있는
요소 중의 하나는 사람에게 신뢰감을
주어서 무엇이든 말하게 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며, 제4공화국 때
노르망디에서 형사생활로 들어간 이후
20년간 범죄수사에 성공해 온 것도 이 재능
덕분이었다. 그는 부비에와 같이 경찰관의
전통적인 이미지에 어울리는, 사람을
압도하는 거구의 소유자는 아니다. 또,
타입의 형사처럼 용의자를 겁주거나 달래어
눈물을 흘려 가며 자백하도록 이끌어가는
매끄러운 구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특별히 자기의 약점이라고 생각지는
않고 있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범죄의
대부분은 시정의 장사꾼이나 월급쟁이나
우체국원, 은행원 같은 소시민이
주인공이며, 범인이 되고 피해자가 되고
목격자가 되는 것도 그들이라고 하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소시민이 상대라면 입을
열게 할 수가 있고, 자신도 있었다. 이것은
우선 그의 몸 치수가 오히려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땅딸막하고 키가
작은 남자로서, 만화가가 그리는 공처가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직장 안에서 아무도 모르는
깔려 있는 신세다. 촌스러운 옷차림에
언제나 구겨져 있는 양복과 레인코트.
태도나 몸가짐은 부드러워서 오히려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사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으며, 증인에게 정보를 얻고자 할
때에도 그 태도는 먼저 심문하고 간 형사의
그것과는 너무도 달라서, 자연히 증인도
형사들의 푸른 서슬에서 구원된 기분이
되어 르베르에 대해서 태도를 누그러뜨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르베르의 재능이
이것만은 아니다. 유럽에서도 가장
강력하다는 살인과를 3년이나 이끌어 온
인물이다. 그 유명한 프랑스 사법경찰의
형사부에 10년이나 재직하고 있는 형사다.
온화한 언동과 겉으로 보이는 단순함
뒤에는 교활한 두뇌와 어떠한 공격이나
있다. 언젠가 그는 암흑가의 거물급
보스에게 협박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
보스는 그가 다급하게 눈을 깜박거리는
것을 보고 협박에 무릎을 꿇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그 보스는, 온화한
갈색 눈과 칫솔 같은 콧수염을 지나치게
얕보았다고 형무소 안에서 후회했었다.
그 밖에도 르베르는 지금까지 두 번,
이른바 유력자라고 불리는 인물에게서
압력을 받은 적이 있다. 한번은 어떤
재계의 인물이 사원을 횡령죄로 고발했을
때, 또 한번은 사교계의 거물이 어떤 젊은
여배우가 약물로 사망한 사건의 수사를
중지하도록 요구한 때이다. 전자의 경우,
그 재계 인사의 신변을 조사한 결과 고발된
사원과는 무관한, 보다 큰 배임 사실이
스위스로 달아나는 신세가 되었다. 후자의
경우는 사교계의 거물이 실은 고급
아파트에서 난교(亂交) 파티를 연 사실이
들통나서 그 역시 형무소로 갔다.
생클레아 대령의 악의에 찬 말에 대해서
르베르는 꾸지람을 들은 국민학생같이 눈만
껌벅이며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위임받은 일의 수행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이윽고
부비에가 페르네와 함께 회의실에서
나왔다. 페르네는 르베르의 건투를 빌면서
잠깐 악수하고 층계를 내려갔다. 부비에는
커다란 손으로 르베르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대강 그런 일일세, 클로드. 잘
부탁하네. 그렇게 우거지상을 하지는 말게.
어쩔 수가 없잖나. 녀석들에게 맡겨
두었다가는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백날 의논만 할 뿐이지 결말이 안 나. 자,
차 안에서 이야기하세."
두 사람은 뜰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트로엥에 탔다. 시각은 이미 오후 9시를
지나 뇌이 쉬르 센(불로뉴의 숲 가까이에
있는 고급주택지)의 하늘 위에 걸려 있는
짙은 남빛 구름만이 아직 저녁임을 알릴
뿐이었다. 차는 마리니 가를 내려가서
클레망소 광장을 가로질렀다. 르베르는
오른쪽을 흐르고 있는 샹젤리제의 빛의
흐름을 바라보았다. 여름밤의 샹젤리제의
아름다움은 시골을 떠나온 지 10년이나
되는 지금도 르베르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부비에가 입을 열었다.
버리는 거야. 책상을 깨끗이 정돈하고,
지금 손대고 있는 사건은 파이에와
말크스트에게 시키도록 하게. 새 사무실이
있어야겠나?"
"아니, 지금 것을 쓰겠습니다."
"그것도 좋겠지. 지금부터 거기가 '재칼
탐색작전'의 본부가 되는 셈이야. 다른
일은 쳐다보지도 말게. 알겠지? 누구
조수로 쓰고 싶은 사람이 있나?"
"예, 카롱을......"
카롱은 살인과에서 함께 일한 젊은
경감으로서, 형사부 차장으로 승진한
르베르가 자기 있는 곳으로 끌어와서 새
자리를 만들어 앉혔다.
"좋아, 카롱이라면 쓸 만하겠지. 그
밖에는?"
쓰자면 임무의 내용을 알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부비에는 잠깐 생각하고서 말했다.
"그야 어쩔 수가 없겠지. 자네도 혼자서
일할 수는 없을 게고, 아무래도 조수가
필요하니까. 그러나 그 녀석에게 말하는
것은 한두 시간 기다려 주게. 장관에게
전화해서 정식으로 OK를 받아낼 테니까.
그러나 다른 녀석에게는 절대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알겠나? 한마디만 뻥긋하면
순식간에 신문에 나 버리니까."
"걱정 마십시오. 카롱 말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부탁해.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말해 둘
것이 있어. 회의가 끝나고 나서 송기네티가
오늘밤의 참석자 전원에게 수사의 상황을
제안을 했는데, 장관도 거기에 동의했어.
페르네와 나는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노력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앞으로
매일밤 10시에 자네는 내무부에서 모두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돼."
"그게 무슨 뜻이지요......?"
"명분은 아주 그럴듯해."
부비에는 비꼬듯이 말했다.
"자네의 설명을 듣고 의견이나 충고가
있으면 말하겠다는 것이 이유야. 그러나
걱정할 건 없어. 늑대들이 구박하면
페르네와 내가 구해 줄 테니까."
"그 설명회는 앞으로 계속해야 하나요?"
"장관이 그만두자고 할 때까지는
계속되겠지. 그것보다 문제는 이 작전에는
시간적인 스케줄이 없다는 점이야. 어떻게
찾아내야만 해. 저쪽이 시간표를, 어떤
내용의 시간표를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가장 곤란하단 말이야. 내일
아침일지도 모르고, 한 달 뒤일지도 몰라.
어쨌든 놈을 체포하거나, 적어도 정체를
밝혀내고 소재를 확인할 때까지 전력투구해
주기 바라네. 그 다음은 액션 서비스의
녀석들이 손을 써줄 테니까."
"그들은 불량배 집단인데." 하고
르베르는 중얼거렸다.
"사실이야." 부비에도 태평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녀석들은 녀석들대로 써먹을
데가 있어. 지금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시대야. 보통 범죄도 늘어나고 있지만,
거기에 정치적인 범죄라는 신종 범죄까지
일이 있는 걸세. 그것을 녀석들이 해주는
거지. 어쨌든 재칼의 건을 부탁하네."
차는 게데졸페부르로 들어서서
사법경찰본부의 문으로 들어갔다. 10분 뒤
클로드 르베르는 자기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는 창으로 다가가서 그것을 열고 센 강
건너 왼쪽 강가의 그랑 조귀스탕 쪽을 한참
바라보았다. 시테 섬을 감싸듯이 흐르는
강으로 가로막혀 있지만 강가를 따라서
점점히 늘어선 레스토랑의 손님들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고, 유쾌하게 웃어젖히는
소리와 술잔 부딪히는 소리까지도 들릴 것
같았다.
르베르가 별종의 인간이었다면, 권세욕이
강한 야심가였다면 오늘밤 주어진 권한의
지대함을 생각하고 일시적이나마 자기는
되었다는 감개에 젖었을 것이다. 대통령과
내무장관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가 이러이러한 시설이나 조직을 쓰고
싶다고 요구하면 그것을 거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은밀하게 할 수만 있다면 군대를
동원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을 것도 분명하다 --
강력한 권력이 주어지기는 했지만, 그것도
임무를 완수해야만이 그 타당성이 보증되는
것이므로, 성공하면 경력에 빛나는
업적으로 남겠지만 실패하면 생클레아 대령
말마따나 비참한 꼴로 사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르베르는 역시 르베르이고, 또
야심가도 아니므로 이런 생각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아내인 아메리에게
전화로 어떻게 설명할까 하는 공처가다운
걱정뿐이었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말크스트와 파비에 두 경감이 그날
밤 르베르가 내무부로 불려가기까지 그가
취급하던 네 가지 사건의 자료를 가지러 온
것이다. 르베르는 두 사람에게 각각 두
건씩 나누어 주고 30분에 걸쳐서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두 사람을 내보내고 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다시 노크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뤼시앵 카롱이었다.
"부비에 부장님이 이리로 출두하라고
해서."
"알고 있어. 실은 이번에 일상적인 일을
모두 집어치우고 특별한 임무를 맡게
되었네. 자네가 내 조수로 임명되었어."
것이 자기라고 밝혀서 상대를 기쁘게
해주고 자랑도 해볼 만한 일이지만,
르베르에게는 그런 신경은 아예 없었다.
책상 위의 전화가 울리자 그는 수화기를
들고서 한동안 듣고만 있었다.
"부장님에게서 온 거야. 자네에게 임무의
내용을 말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네.
먼저 이것을 읽어 보게."
카롱이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롤랑의 보고서를 읽는 동안에 르베르는
책상 위에 있던 서류나 메모류를 등뒤의 장
속에 쑤셔넣었다. 이런 사무실을 보고서
사상 최대의 맨헌트(사람 사냥) 작전의
신경 중추라고 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소리다. 경찰의 사무실이란 어디나 다
마찬가지로서, 대개 어수선하기 마련이다.
넓이는 20 평방미터 정도이고, 남쪽으로
창이 둘 있으며, 강 건너 생 미셀 대로
주변에 밀집한 카르티에 라탱의 활기
넘치는 길거리가 바라다보인다. 그 창을
통해서 밤의 소리와 여름의 열기가
흘러들어온다. 실내에는 책상이 둘 있다.
하나는 르베르가 쓸 것으로서 창을 등지고
있었고, 또 하나는 비서용으로 동쪽 벽에
붙여서 놓여 있다. 문은 창과 마주보고
있었다.
두 개의 책상과 그에 따른 의자 이외에
실내에 있는 가구라고 한다면 등받이
자리와 직각 의자가 하나, 문 옆에
팔걸이의자가 하나, 서쪽 벽을 거의 다
메우고 있는 여섯 개의 커다란 자료정리장
-- 그 위에 참고서와 법률서가 죽 놓여
-- 그 안에는 연감과 자료가 들어차 있다
-- 이 놓여 있었다.
조금이나마 가정을 생각케 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르베르의 책상 위에 있는
가족 사진이 있을 뿐이며, 살찐 체격에
성깔이 있어 보이는 부인 아메리와,
금속테의 안경을 쓰고 머리를 땋아내린
못생긴 소녀, 그리고 아버지를 꼭 빼닮은
호인형 얼굴의 소년이 찍혀 있다.
카롱은 보고서를 다 읽고 나서 얼굴을
들었다.
"엄청나군요."
"그래, 미친 녀석이 발광하는 모양일세."
절대로 거친 말을 쓰지 않는 르베르가
전에 없이 험한 말을 입에 담았다.
사법경찰의 간부는 대개 부하들에게서
불리지만, 르베르는 술이라야 아페리티프가
고작이고 담배는 피우지도 않으며 큰소리를
낸 적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라 부하들은
저절로 학교 선생님이 영상되는지,
살인과는 물론 형사부 안에서도 '교수'라는
별명을 붙여 놓았다. 일에 관해서만 그
솜씨가 대단해서 다행이지, 그렇지
못했다면 비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자, 그거야 어떻든 자세한 설명을
해주겠네. 앞으로는 그럴 시간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30분 동안 그는 카롱에게 프레이
내무장관이 대통령을 만난 것에서부터
내무부에서 열린 회의, 부비에 부장의
추천으로 급히 소환된 일, 그리고 그의
사무실이 재칼 수색의 작전본부가 된
카롱은 묵묵히 듣고 있었으나, 르베르의
설명이 끝나자 정말 억울한 듯이 말했다.
"너무하군. 그들은 차장님에게 멋지게
올가미를 씌웠군요." 그리고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상사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차장님,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떠맡으려고 하지 않으니까 차장님에게
억지로 떠맡긴 겁니다. 만일 그 살인자를
찾아내지 못하면 모두들 몰려와서
물러나라고 할 겁니다."
르베르는 슬픈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네, 뤼시앙.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명령이었으니까. 이렇게 된 바에야
이제는 해보는 수밖에 없지."
"하다니, 어디서부터 시작할 겁니까?"
주어져 있다네. 그것을 쓰는 일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세."
르베르는 오히려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은 자리에 앉아 주게. 지금부터
말하는 것을 메모하는 걸세. 내 비서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다른 부서로
옮기든지, 유급휴가를 줄 것. 자네가 비서
겸 조수가 되는 거야. 관리부에다
간이침대와 침구, 세면도구, 그리고
면도용품을 준비시킬 것. 그리고
커피포트와 우유와 설탕을 갖다 놓으라고
할 것. 커피는 많이 필요하게 될 거야.
틀림없이.
그리고 전화교환실에 가서 외선의
직통전화선 열 개와 전속 교환수를 한 사람
배치해 달라고 하게. 여러 말이 나오면
그 밖에 어느 부서라도 좋네만, 내가
의뢰하는 것을 가지고 갈 때에는 직접 그
부서의 책임자를 만나서 내 이름을
들먹이게. 내무장관의 명령으로 내 요청은
최우선적으로 취급해 주기로 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오늘밤의 회의에 참석한
각 부서의 책임자에게 배포해 줄 메모를
준비해 주게. 서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자네는 내 유일한 보조자이며, 내가 없을
때에는 내 대리인으로서 필요한 요청을 할
권한이 부여되어 있다는 내용의 메모일세.
알겠는가?"
메모를 끝낸 카롱은 얼굴을 들고
대답했다.
"예. 오늘밤 안으로 모두 해놓겠습니다.
제일 먼저 무엇부터 시작할까요?"
사람이라야 되겠어. 총무부장의 집에
연락해 주게. 부비에 국장의 이름을 대고."
"예. 먼저 어떻게 시작할까요?"
"되도록 빨리 다음에 말하는 7개국의
경찰 살인과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
다행히 인터폴의 회의를 통해 개인적으로
모두 아는 사람들뿐이야. 상대방과 연결이
안될 때에는 차례차례 다른 곳으로 걸어
주게. 7개국 중에서도 먼저 미국이며,
워싱턴의 FBI일세. 다음이 영국 런던
경시청의 형사담당 부총감. 그리고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서독, 마지막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이야. 자택도 좋고
사무실도 좋아. 여하튼 찾아내게. 그리고
내일 아침 7시에서 10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인터폴의 통신실에서 전화를 걸 테니까,
그것이 끝나면 인터폴에 가서 각각 약속한
시간의 통화를 예약하는 거야. 전화는 모두
UHF에 의한 지명통화일세. 각국의
담당관에게는 내 이야기의 내용을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하고, 이것은
프랑스만이 아니고 그들 나라에게도 중요한
일이라고 못을 박아 주게. 그리고 나서는
내일 아침 6시까지 통화를 예약한 순서에
따라서 리스트를 작성해 놓고. 나는
지금부터 살인과로 가서 프랑스에서
움직이고 있는 의심스러운 외국인 살인업자
중 검거되지 않는 녀석이 있는지 만일을
위해서 조사하고 오겠네. 그런 살인자는
솔직히 말해서 생각나지도 않고, 로댕도
그런 녀석을 고를 정도로 바보가 아닌 줄은
알지만...... 자네, 할 일은 알고 있겠지?"
어이없는 얼굴로 카롱은 휘갈겨쓴
메모에서 고개를 들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당장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르베르는 방을 나가서 층계로 갔다. 그때
마침 노트르담 대성당의 종이 12시를 치고,
시간은 8월 12일의 오전이 되었다.
제 11 장
라울 생클레아 드 비로방 대령은
한밤중인 12시 조금 전에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는 그때까지 세 시간 동안
내무부에서 열린 회의에 관한 보고서를
타이프치고 있었다. 그 보고서는 아침에
제일 먼저 대통령 비서실장의 책상으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보고서의
작성에는 세밀하게 신경을 써서 원고를 두
번이나 찢어 버리고 세 번째에야 겨우 거의
만족스러운 것이 완성되어, 그것을 자기가
직접 타이프쳤다. 타이프 같은 것은 손에
익지 않아서 짜증이 났지만, 보고서
안에서도 일부러 지적해 두었듯이 자기가
직접 함으로써 그 비밀이 비서의 눈에 띄지
것이다. 비서실장이 그것을 읽어 보고 한
시간 뒤에는 대통령의 책상에까지 가게
되겠지. 그것이야말로 그가 바라는 바이다.
그는 글귀의 선택이나 문장의 구성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대통령의 안전에
관계되는 중대사를, 오로지 하찮은
조무래기 악당들을 잡아내는 임무를 맡아온
한낱 총경에게 맡긴다는 것에 반대한다는
취지를 넌지시 비쳤다. 이렇게 해두면
르베르가 그 암살자를 찾아냈을 경우에도
비판을 받을 리 없고, 또 실패했을
경우에는 처음부터 이미 르베르의 기용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 되니까
점수를 딸 수 있다는 속셈이다. 그는
르베르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도 호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생각 없는 작은 남자라는
'분명히 현저한 기록을 남겨 온'이라고
꽤나 신중한 표현으로 그를 묘사했다.
펜으로 쓴 두 통의 원고를 다시 읽어
보고서, 생클레아는 르베르의 기용을
정면으로 반대하게 된다면 그것이 회의에서
합의된 일이기 때문에 그 이유를 묻게 될
것이므로 유리한 계책이 아니며, 그보다는
대통령 비서실을 대표하여 수사의 추이를
감시하다가 실수가 생겼을 때에는 제일
먼저 냉정한 태도로 그것을 지적하는, 그런
작전이 자기에게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르베르가 하는 일을 감시하자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 하고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을 때에 송기네티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내무장관이 매일밤 10시부터
경과보고를 시키기로 결정했다고 알려
주었다. 이 소식은 생클레아를 기쁘게
했다. 첫번째 문제는 이것으로 해결하면
된다. 낮에 조금만 공부해 놓으면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할 수가 있고,
그렇게 하면 적어도 대통령 비서실은 일의
중대성과 긴급성에 언제나 유의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무리들에게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의 개인적인 견해는, 설령 암살자가
가까이에 와 있다고 하더라도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신변에 둘러쳐진 경계망은 세계 제일의
밀도와 효력을 자랑하고 있으며, 대통령이
공개석상에 참석할 때의 준비나 그곳으로
가는 루트의 선택은 모두 그가 책임지고
외국인 살인자에게 허물어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파트로 돌아가서 자기의 플랫으로
들어간 그의 귀에 새로 사귄 정부가
침실에서 말을 걸어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에요?"
"그래, 나야. 쓸쓸했나?"
정부가 침실에서 달려나왔다. 목
언저리와 옷깃에 레이스를 곁들인, 필름
같이 얇은 검정 베이비돌(영화
'베이비돌'의 여주인공이 입은 짧은
잠옷)풍의 잠옷을 입고 있다. 열어젖힌
문으로 새어나오는 침대 옆의 스탠드
불빛을 받아서 젊은 여체의 곡선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생클레아는 정부의 모습을 보고 이 여자는
떨리는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을
맺어준 운명의 장난 같은 것은 무시해
버리고, 오로지 자기가 바라는 현상만을
받아들이고 만족하려는 것이 그의 성격의
특징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드러난 두 팔을 뻗어서
그의 목을 끌어안고는 길고 탐욕스럽게
입술을 빨았다. 그는 서류가방과
석간신문을 손에 든 채 한껏 반응을
보였다.
"자 -- ." 입술을 떼며 그가 말했다.
"침대에서 기다려, 곧 갈 테니까."
빨리 가라는 듯이 그는 정부의 엉덩이를
가볍게 때렸다. 그녀는 팔딱팔딱 뛰듯이
침실로 달려가서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반듯이 누워서 발을 아무렇게나
가슴을 내밀었다.
서류가방을 제자리에 가져다 두고 침실로
들어간 생클레아는 만족스러운 듯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도전하듯 마주
쳐다보았다. 2주일 동안의 동거생활을 거친
그녀는 생생한 행위를 전제로 한 노골적인
유혹이 있어야만 비로소 이 바짝 말라 버린
엘리트의 욕정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클린은 처음 만난 날부터 이
남자를 미워하고 있었으며, 그의 약한
정력은 그의 수다스러운 달변과, 특히
엘리제궁에 있어서의 그의 지위의 무게로써
메꾸면 된다고 생각하고 참아 왔다.
"빨리 해줘요." 그녀는 속삭였다. "빨리!
당신을 갖고 싶어."
생클레아는 욕정을 얼굴에 드러내면서
나란히 놓았다. 다음에는 윗도리를 벗어서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을 하나씩
단정하게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음에는 바지를 꼼꼼하게 접어서 왜건의
가로대에 걸었다. 셔츠 자락 밑으로 드러난
가늘고 긴 다리가 윤기 없는 흰 뜨게질
바늘 같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난 기다리다가
죽을 뻔했는데."
생클레아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당신이 골치를 썩을 문제는 아니야."
"어머, 심술쟁이."
그녀는 뾰로통한 얼굴로 돌아누우면서
무릎을 구부렸다. 밤색 머리칼이 어깨를
덮고, 말려올라간 잠옷 밑에 있던 히프가
넥타이를 풀었다. 이윽고 그는 실크
파자마에 단추를 채우면서 침대로
다가갔다.
그녀 옆에 몸을 눕힌 생클레아는 잘록한
허리에서 높이 솟은 히프를 향해 손을 옮겨
갔다. 손가락은 무슨 곤충처럼 따뜻하고
둥근 히프 위를 기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또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섹스를 원하지 않았었나?"
"이렇게 늦었으면서도 이유는 한마디도
설명해 주지 않는군요. 사무실에 전화를 걸
수도 없고,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았나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으로 몇
시간이나 기다렸어요. 지금까지는 늦어지면
언제든지 전화를 걸어 주었는데, 정말 너무
그녀는 반듯이 누워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팔베개를 하고 한 손을
잠옷 밑으로 넣어서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아주 바빴어. 긴급사태가 좀
발생해서 말이야. 아무래도 내 손으로
처리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전화를 걸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사무실에서는
모두들 일하고 있는 데다가, 사람들의
출입도 빈번해서 그럴 기회가 없었어.
게다가 집사람이 시골 별장에 가 있다는
것을 아는 녀석도 있고 해서 말이야.
교환을 거쳐서 집으로 전화를 거는 것도
수상쩍게 생각할 테고."
그녀는 파자마 속으로 손을 넣어서
시들은 그의 페니스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나타내기 시작했다.
"늦어지는 이유를 저에게 알릴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한 일이란 있을 리가 없어요.
정말 저는 내내 걱정만 했단 말이에요."
"돌아왔으니까 이젠 됐잖아. 위로
올라가, 평소처럼."
그녀는 소리내어 웃으면서 나머지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끌어내려서 귓밥을
살짝 물었다.
"안돼요, 아직 요 얘기가 준비가 되지
않는걸요."
그녀는 나무라듯 늦게 일어나는 페니스를
문질러댔다. 생클레아의 숨소리가 차츰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클린의 입을
힘껏 빨면서 한 손으로 좌우의 젖꼭지를
번갈아가며 찝었는데, 그만 힘이 너무
"빨리 위로 올라가."
그는 신음하듯 말했다. 그녀는 몸을 조금
틀어서 파자마의 앞을 벌렸다. 그는 밤색
머리칼이 자기의 배에 와 닿는 것을 보고
반듯이 몸을 가라앉히고서 희열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OAS가 아직도 대통령을 노리고 있어.
오늘 그 음모를 찾아냈거든. 그 처리를
하느라고 늦어지고 말았어."
자클린은 갑자기 얼굴을 들었다. 그
바람에 페니스가 입에서 그만 튀어나와
버렸다.
"그런 건 거짓말이 뻔해요. OAS 같은
것은 벌써 옛날에 뿔뿔이 다 흩어져
버렸다던데."
그녀는 다시 입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리지 않았어. 이번에는 외국인 살인자를
고용해서 대통령을 죽이려 하는 거야. 아
-- 물면 아파."
그로부터 30분 뒤, 라울 생클레아 드
비로방 대령은 지친 듯 가볍게 코를 골면서
얼굴을 반쯤 베개에 파묻고 잠들어 있었다.
옆에 누워 있는 자클린은 커튼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불빛으로 어슴푸레 보이는
천장을 어둠 속에서 꼼짝 않고 쳐다보고
있었다. 생클레아가 잠꼬대로 하는 말을
듣고 그녀는 움찔했다. 그런 음모가
있었다는 것은 몰랐지만, 코와르스키가
자백한 내용의 중요성을 그녀 나름대로
이해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침대
옆 시계의 글자판이 2시를 가리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고 살그머니
소켓에서 뽑아 버렸다. 침대를 빠져나오기
전에 그녀는 대령이 자는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에게는 여자를 끌어안고
자는 습관이 없어서 그것만은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완전히 잠 속에 깊이
빠져 있었다.
침실을 나온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거실을 지나서 그곳 문도 꼭 닫았다.
그녀는 홀의 테이블 위에 있는 전화로
모리트르의 어떤 번호를 돌렸다. 신호음을
들으면서 몇 분 동안 기다렸다. 이윽고
조는 듯한 소리가 대답했다. 그녀는 2분 간
숨쉴 틈도 없이 말했다. 알았다는 상대방의
말을 확인한 다음에야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살그머니 침실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정말로 잠들려고 눈을 감았다.
그날 밤, 유럽 5개국과 미국 및
아프리카공화국 경찰의 형사담당
책임자들은 잠자다가 파리에서 걸려 온
국제전화로 일어났다. 그들은 거의 모두들
쏟아지는 졸음으로 짜증스러웠다. 서유럽
각국은 파리와 시차가 없어서 어디나
한밤중이었다. 워싱턴에서 파리의 전화를
받은 것은 오후 9시였는데, FBI의 살인과
책임자는 디너 파티에 참석중이었다.
카롱은 세 군데 전화한 끝에 마침내 그를
찾아냈지만, 옆방의 파티장 소음으로 인해
이야기가 생각대로 잘 진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그는 카롱이 의뢰하는
내용을 알아듣고서, 워싱턴 시간으로 새벽
2시에 FBI의 통신실로 들어가서, 파리
시간으로 오전 8시에 인터폴에서 르베르가
이탈리아, 서독 및 네덜란드의 각 담당관은
모두들 가정에 충실한 사람들인 모양인지
각자 자택에서 자고 있었다. 차례차례
깨워진 그들은 카롱의 의뢰에 따라서
지정된 시간에 각각 그들의 통신실에서
긴급한 용건으로 르베르에게서 걸려 올
지명전화를 받기로 승낙했다. 남아프리카의
반 루이스는 출장중이며, 다음날
아침까지는 돌아올 수 없다고 해서 카롱은
차석인 앤더슨에게 이야기했다. 뒤에 이
말을 들은 르베르는 오히려 좋아했다.
앤더슨은 잘 알고 있지만, 반 루이스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 루이스는, 말하자면 정치적 배려에서
임명된 사람임에 비해서 앤더슨은 르베르와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단련을 받아가며 그
런던 경시청의 형사담당 부총감, 앤터니
매린슨의 베이크슬레이 자택으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오전 4시 조금 전이었다. 침대
옆에서 끈질기게 울어대는 전화 벨소리에
짜증스럽게 끙끙거리던 그는 수화기를
들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예, 매린슨이오."
"앤터니 매린슨 씨입니까?" 하고
상대방에서 물었다.
"그렇소. 나요."
그는 어깨에 걸려 있는 시트를 몸을
흔들어서 밑으로 내려 보내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저는 프랑스 사법경찰의 뤼시앙
카롱이라는 사람입니다. 클로드 르베르
총경의 대리로 전화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영어가 분명하게 들린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전화의 회선은 비어 있겠지.
매린슨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시간에
전화를 걸다니, 어째서 낮에 걸어 주지
않는 거야 -- .
"그래서?"
"르베르 총경을 아실 줄 압니다만."
매리슨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르베르?
아, 그렇군, 사법경찰 살인과 과장으로
있던 그 조그만 친구. 풍체는 볼 것
없지만, 솜씨는 좋은 사람이던데. 2년 전,
영국의 관광객이 살해된 사건 때에는 여러
가지 신세를 졌었다. 그가 범인을 즉시
체포해 주어서 다행이었지. 그것이 오래
끌었더라면 프랑스에 대한 국민감정으로
보아서도 곤란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래요, 르베르 총경이라면 알고
있소만,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옆에서는 아내 릴리가 잠자다가 이야기
소리에 짜증이 나는지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다.
"실은 긴급사태가, 비밀을 요하는
중대사가 발생해서 르베르 총경님이 그
처리를 맡고 있습니다. 중대한
비상사태라서, 그 일에 관해 르베르
총경님이 오늘 아침 9시에 런던 경시청의
통신실에 당신 앞으로 지명통화를
신청하려고 합니다만, 받아 주시겠습니까?"
매린슨은 잠깐 생각했다.
"그것은 통상적인 조회전화요?"
만일 그렇다면 인터폴의 네트웍을
이용하는 게 좋다. 오전 9시는 본청도 바쁠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르베르
총경님이 개인적으로 은밀한 협조를
요청하시는 겁니다. 런던경시청에 영향을
미칠 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되며, 또
공식적인 요청을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매린슨은 생각에 잠겼다. 본래 그는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며, 외국의 경찰에서
오는 은밀한 협조의뢰 같은 것에 관련되고
싶지 않았다. 범죄가 일어났다거나, 범인이
영국으로 도망쳤다든가 하는 것이라면
사정은 다르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비밀을
요하는 것일까? 여기서 그는 몇 년 전의
어떤 사건이 떠올랐다. 핸섬한 건달과
사랑의 도피행을 떠난 어떤 장관의 딸을
다시 찾아 데리고 오는 역할을 그때 그는
유괴죄를 적용할 수도 있는 케이스였다.
그러나 장관은 신문이 절대 눈치채지
못하도록 사태를 처리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이탈리아 경찰의 간부에게
은밀하게 의뢰하여 협조를 구했으며,
배로나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놀이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군,
좋아. 르베르는 베테랑 클럽의 정으로서
협조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때에는
서로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베테랑 클럽이 있는 것이니까.
"알겠소, 전화를 받지요. 9시라고?"
"예,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주무시오."
매린슨은 수화기를 제자리에 올려놓고서
괘종시계를 7시에서 6시 30분으로 다시
파리가 아직 날이 새기 전 졸음 속에서
헤매고 있을 무렵, 어느 조그만 아파트의
플랫에서 한 중년의 전직 국민학교 교장이
거실 겸 침실 안을 불안한 듯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방안은 한없이 어질러져
있었다. 책과 신문, 잡지, 원고가 테이블
위,의자와 소파 위 가릴 것 없이, 심지어
벽에 바짝 붙어 있는 좁다란 침대
위에까지도 흩어져 있었다. 또 한쪽 벽의
움푹 들어간 곳에는 개수대가 있고,
거기에는 더러워진 식기가 넘쳐나올 듯이
쌓여 있었다.
신들린 사람처럼 방안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어지럽혀진 방안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시디벨라베스의 국민학교 교장에서
둘이나 딸려 있는 관사에서 쫓겨난 뒤로 그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터이지만,
어지럽혀진 방에는 이제 이골이 나서
별다른 느낌도 없었다. 실은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아침 노을이 동쪽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할 무렵 그는 겨우 자리에 앉아서
신문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벌써 몇
번째나 외신 전용의 페이지에 나와 있는 그
기사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OAS의 간부 로마의 호텔에 투숙.'
이것이 그 기사의 제목이다. 기사를 다
읽고 나서야 마침내 결심을 한 모양인지,
그는 아침의 냉기에 대비해서 가벼운
레인코트를 걸치고 아파트를 나섰다.
가까운 거리에서 빈 택시에 올라탄 그는
그리고 북부역의 역전 광장에서 택시를
내려 차가 사라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역전을 지나서 거리를 건너 밤새 영업하는
카페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커피를
주문하고 전화에 쓰는 토큰을 받아들고서
커피를 카운터에 놓아둔 채 안쪽의 전화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국제전화의
번호안내원을 불러서 로마 시내에 있는
호텔의 번호를 물었다. 1분도 채 안되어
번호를 알게 되자 그는 전화를 끊고 카페를
나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100-쯤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카페로 들어가서 다시
전화를 걸어, 이번에는 국제전화를 걸 수
있는 야간영업을 하는 우체국이 가까이에
없는지 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역 바로
옆에 그런 우체국이 하나 있었다.
않고 전화번호만을 말하고 국제전화를
신청했다. 초조하게 20분쯤 기다리자 겨우
전화가 통했다. 그는 전화에 나온
이탈리아인 같은 목소리에게 말했다.
"시노르 푸아체와 이야기하고 싶소."
"시노르 누구라고요?" 하고 상대방이
다시 물었다.
"프랑스인이오. 푸아체라는 사람입니다."
"누구라고요?"
"프랑스인, 프랑스인으로서......"
"아, 알았습니다, 프랑스인을
말씀하시는군요.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전화의 스위치를 바꾸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친 듯한 프랑스어가 대답했다.
"예."
"잘 듣게." 파리의 남자가 재촉하듯
그대로 메모해 주게. 알겠지? '바르미가
푸아체에게. 재칼의 존재가 발각.
되풀이한다. 재칼의 존재가 발각.
코와르스키가 잡혀 가서 죽기 직전에 자백.
이상' 썼나?"
"알겠소." 졸린 듯한 목소리가 말했다.
"위로 올려 보내겠소."
바르미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고 다급히
요금을 치르고서 우체국을 나왔다. 그리고
곧 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통근객들 속으로
섞여 버렸다. 그제서야 겨우 태양이 동쪽
지평선에 그 얼굴을 내밀어 인도에 머물러
있는 밤의 냉기를 쫓아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제 30분만 지나면 크루아상과
커피 향기 어린 아침의 냄새가 배기 가스와
바디 로숀과 담배 연기 속으로 사라져
뒤에, 차 한 대가 우체국 앞에 멈추고
DST의 관계관 두 사람이 우체국 안으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은 교환수에게 그의
인상이나 특징을 물었지만 구체적인 것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이날 아침 7시 55분 마르크 로댕은
로마의 호텔에서 자고 있다가 밤에
아래층에서 당직을 맡고 있던 부하가
흔드는 바람에 잠에서 깨었다. 순간적으로
눈을 뜬 그는 반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손을 베개 밑 권총으로
집어넣으려 했다. 그리고 부하의 얼굴을
보고서야 긴장을 풀고 가볍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는 흘끗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꽤나 늦잠을 잔 것이다.
8월의 태양은 이미 높이 솟아 있었다.
밤에는 몽클레아와 카슨을 상대로 트럼프를
하면서 싸구려 붉은 포도주를 마시기도
하고, 운동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이라고는
무엇 하나 하는 것이 없으니 몸이 완전히
둔해져서 생활 또한 절도가 없었다. 늦잠도
그 한 예이다.
"전갈이 왔습니다, 대령님. 아까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굉장히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외인부대 병사였던 보디가드는 바르미의
전갈을 받아쓴 메모지를 내밀었다. 로댕은
그것을 재빨리 훑어보고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시절부터 밴
버릇으로 언제나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사롱(말레이족의 옷으로서, 일종의 치마)을
허리에 감고는 다시 한 번 그 전갈을
"알았어. 가도 좋아."
보디가드는 방에서 나가 아래층으로
돌아갔다.
로댕은 메모지를 움켜쥐면서 속에서
분노의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바보
자식, 바보 자식, 바보 자식, 코와르스키,
이 자식 !
코와르스키가 자취를 감추고 이틀쯤은
로댕도 단순히 녀석이 도망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 부하들 사이에서
OAS는 드골을 살해하고 현정부를
넘어뜨리려는 목적이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패배적인 바람이 일면서 도망치는
녀석이 몇 명인가 있었다. 그러나 로댕은
코와르스키만은 최후까지 그들의
대의명분에 충성을 다할 것으로 믿고
그런데 이 전갈은 그가 어떤 이유로
프랑스에 돌아가서 체포되었거나, 또는
이탈리아 안에서 납치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고문을 당하고 입을 연
듯하다. 로댕은 살해된 코와르스키에
대해서 참으로 슬퍼했다. 로댕이 병사로서,
또는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떨친 그
이면에는 부하에 대한 깊은 헤아림이
있었다. 이 헤아림은 야전의 병사들에게
있어서는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군사평론가들에게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마운 것이다. 가장 사랑하던 부하
코와르스키가 마침내 가버렸다. 남자다운
최후였을 거라고 로댕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에 대한
감상보다는, 그가 어떤 일을 알고 있었으며
중요하다. 빈에서 있었던 회의, 호텔 이름.
이것은 물론 알고 있다. 회의에 참석한 세
사람의 이름. 이것은 SDECE에게 있어서
뉴스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재칼에
관해서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엿듣는
인물은 아니다. 그것은 틀림없다. 세
사람을 찾아온 키가 큰 금발의 외국인이
있었던 것은 알고 있었겠지만,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무기판매업자일지도
모르고, 스폰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름 같은 것은 한 번도 그의
앞에서 입에 담은 적이 없다.
그러나 바르미의 전갈은 재칼이라는
암호명을 지적하고 있다. 어찌된 일인가?
코와르스키는 어떻게 암호명을 알게
되었을까 ?
광경이 떠올랐다. 그때 로댕은 영국인과
함께 문 있는 곳에 서 있었다.
코와르스키는 조금 떨어진 복도에 있었다.
그는 벽의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 숨어
있다가 영국인에게 들킨 일, 즉 프로가
프로에게 한방 먹은 것이 불쾌했던
모양인지 일이 터지기만 하라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앞에서 로댕은, "안녕히
가시오, 미스터 재칼." 하고 영국인에게
작별인사를 했었다. 그랬었군, 제기랄 !
다만 재칼의 본명은 코와르스키도 모르고
있었다. 몇 번 기억을 되풀이해서 생각해
보아도 이 결론만은 변함이 없었다. 본명은
로댕과 몽클레아와 카슨 세 사람밖에
모른다. 그러나 하여튼 재칼이라는 이름은
알려지고 말았다. SDECE가 코와르스키를
실패한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팡숑 --
회의......그들은 이미 프런트 직원을
심문했겠지. 인상, 모습, 암호명을 알고
있다. 코와르스키가 추리한 것처럼 금발의
사나이를 살인자라고 판단했을 것이
분명하다. 당연히 드골의 신변에 둘러쳐진
경계망은 더욱 엄중해지고, 암살자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모든 공식일정은
취소되고, 드골은 엘리제궁에 틀어박혀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겠지. 모든 것은 끝난
것이다. 작전은 실패다. 즉시 재칼에게
작전중지를 알리고 이미 건네준 돈
가운데에서 지금까지 그가 쓴 경비와
수수료를 제하고 나머지를 되돌려달라고
해야만 한다. 먼저 무엇보다도 급선무는
작전중지를 대지급으로 그에게 알리는
남에게 강요할 정도로 로댕은 아직까지는
지휘관으로서 타락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는 즉시 코와르스키의 실종 이후 우편물
심부름이나 전화 거는 일 등 그가 해오던
일상의 일을 대신 해온 보디가드를 불러서
간단히 명령을 전했다.
오전 9시, 우체국에 나타난 보디가드가
런던의 어떤 번호를 대고 국제전화를
신청했다. 20분 뒤 전화가 연결되어
교환수가 그에게 전화박스에 들어가서
수화기를 들라고 손짓으로 알렸다. 그가
수화기를 들자 교환수는 자기가 들고 있던
교환수용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았다. 그의
귀에 영국의 전화벨이 울리는
따르릉......따르릉......따르릉......하는
소리가 덧없이 전해질 뿐이었다.
그날은 할 일이 많아서 재칼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렀다. 세 개의 여행가방은 전날
밤 그 속에 든 것을 한 번 더 검토해서
챙겨 두었다. 이제는 아타셰 케이스에
목욕용 스폰지와 면도용품을 넣기만 하면
된다. 잠에서 깨자 언제나 그렇듯 커피를
두 잔 마신 다음 얼굴을 씻고 샤워를 하고
면도를 했다. 그리고 세면도구의 나머지를
케이스에 집어넣고서 네 개의 짐을 문
옆에까지 갖다놓았다. 다음에 그는
아담하면서도 쓰기에 편한 부엌에서 재빨리
달걀을 스크램블해서는 오렌지 주스와 블랙
커피를 곁드려 아침을 먹었다. 천성이
깔끔해서 남은 우유는 개수대에 부어
버리고, 두 개의 달걀도 깨뜨려 개수대에
버렸다. 오렌지 주스의 남은 것은 내친
쓰레기통에 버리고, 빵과 달걀 껍질과 커피
찌꺼기는 디스포저로 처분했다. 이로써
집을 비운 사이에 썩을 만한 물건은 모두
없앤 셈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얇은 명주로 된
폴로네크의 스웨터를 입고 그 위에 댓건
명의의 여권과 면허증, 100파운드짜리
돈다발 등을 호주머니에 넣은 회색 양복을
입었다. 발에는 짙은 회색 양말에 날씬한
모양의 검은 가죽 단화 차림이었다. 여기에
선글라스를 쓰면 앙상블이 완전히
갖추어지는 셈이다.
9시 15분, 그는 좌우 양쪽 손에 두 개씩
짐을 들고 플랫을 나와서 자동자물쇠가
달린 문을 닫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걸어서 바로 옆인 사우스 오드리
세웠다.
"런던 공항. 제2공항 청사까지 갑시다."
택시가 달리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플랫에서는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보디가드가 우체국에서 호텔로 돌아온
것은 오전 10시였다. 그는 로댕에게 가르쳐
준 번호를 대고 런던으로 전화연결은
되었는데, 30분이나 기다려도 응답이
없었다고 보고했다.
"무슨 일이야?"
보디가드의 보고를 옆에서 듣고 있던
카슨이 그가 방에서 나간 다음에 로댕에게
물었다. OAS의 간부 세 사람은 거실에 앉아
있었다. 로댕은 안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내어 카슨에게 건네주었다. 카슨은
사람은 해답을 요구하며 리더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 해답은 없었다.
로댕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고서 폭염
속에 이글거리는 로마 시가의 지붕들을 창
너머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왔나?" 카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 하고 로댕은 짧막하게
대답했다.
"그 사람을 막아야만 해." 몽클레아가
항의하듯 말했다. "프랑스 경찰이 조직을
총동원해서 그를 찾고 있어."
"키가 큰 금발의 외국인을." 로댕이
조용히 말했다.
"8월이 되면 프랑스에는 백만 명 이상의
외국인이 몰려와. 더구나 적은 그의
아는 것이 없어. 그도 프로니까 가짜
여권을 쓰겠지. 녀석들이 그를 찾아내는
데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걸려. 게다가
그가 바르미에게 전화를 걸면 사태를 알 수
있게 돼. 그때는 시치미를 뚝 떼고서
프랑스에서 빠져나가겠지."
"바르미에게 전화를 걸면, 즉시 작전을
중지하도록 바르미가 얘기하겠지."
몽클레아가 말했다.
로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르미에게
그럴 권한은 없어. 그는 다만 여자에게서
정보를 듣고 그것을 전화로 물어 보는
재칼에게 전해 주는 역할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 그 이상의 권한도 책임도 그에게
주지 않았어."
"그러나 재칼은 이것으로 일이 끝났다고
첫번째 전화를 거는 즉시 프랑스를
떠나야지, 그렇지 않으면 일이
곤란해지겠는걸."
몽클레아는 여전히 같은 의견이었다.
"옳은 이론이야. 틀림없이." 하고 로댕은
조용히 말했다. "중지하면 돈을
돌려받아야만 해. 하지만 어쨌거나 그도
포함해서 우리들 전부가 중대한 승부에
직면해 있는 셈이야. 그것은 오로지 그가
자신의 계획에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어."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그에게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나?"
카슨이 물었다.
"분명히 말해서, 없네. 그러나 그는
프로페셔널이야. 나도 프로페셔널을
사고방식이 있어. 자기가 애써 계획한
작전을 포기하기는 좀처럼 어렵지."
"그럼, 이쪽에서 직접 연락을 하세."
"안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 그는
이미 출발했어. 바라던 대로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는 거야. 따라서 그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려 하는지
우리는 전혀 몰라. 이쪽과는 완전히 연락을
끊고 자신의 계획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있으니까. 바르미에게 전화를 걸어서
계획을 중지하도록 전달하는 것도 이제
와서는 할 수가 없게 되었어. 그런 전화를
걸었다가는 대번에 바르미의 존재를 적에게
가르쳐 주게 되니까. 여하튼 이미 재칼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어. 지금으로서는 벌써
너무 늦어 버렸어."
제 12 장
클로드 르베르 총경은 오전 6시 전에
사무실로 돌아왔다. 카롱 경감은 지친
얼굴로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책상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무엇인가를
갈겨쓴 메모가 몇 장 놓여 있었다. 방안의
사정이 조금 바뀌어 있었다. 서류를 넣는
캐비닛 위에서 전에 퍼콜레이터(여과장치가
달린 커피포트)가 부글부글 소리를 내면서
커피 냄새를 풍기고 있다. 그 옆에는 종이
컵이 쌓여 있고, 깡통에 든 우유, 그리고
설탕 주머니가 여러 개 놓여 있다.
이것들은 모두 밤 사이에 지하에 있는
식당에서 가져오게 한 것이다.
두 개의 책상 사이에 간이침대가 놓여
쓰레기통도 비워서 팔걸이의자 옆에 놓여
있었다. 창은 아직 열린 채였고, 카롱이
피우는 담배의 파란 연기가 아침의 신선한
공기 속으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창
너머에서는 새벽의 여명이 생 쉴피스
성당의 첨탑을 얼룩지게 물들이고 있었다.
르베르는 자기 책상으로 다가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24시간밖에 깨어 있지
않았는데, 카롱과 마찬가지로 초췌해
있었다.
"실패였어. 과거 10년 동안의 기록을
조사했지만 말이야. 프랑스 안에서 정치에
얽힌 암살을 시도한 외국인 살인자는
도겔도르뿐인데, 그 녀석은 이미 죽었어.
게다가 놈은 OAS의 일당이며, 우리
파일에도 빠짐없이 올라 있었어. 아마도
골랐을 테지. 그 점에서는 정말 현명한
방법이야. 그리고 과거 10년 사이에 프랑스
국내에서 일을 저지르려 한 살인청부업자는
네 명이 있었는데, 그 중 세 명은 체포되고
나머지 하나도 아프리카의 어딘가에서
종신형을 받았어. 게다가 그 녀석들은 모두
암흑가의 살인자들로서, 프랑스의 대통령을
노릴 정도로 간이 큰 놈들이 아니야. RG의
자료 센터에 한 번 더 재조사를 부탁해
두었지만, 재칼의 재료는 없을 것 같아.
로댕은 그를 고용하기 전에 그 점을 충분히
확인해 보았을 거야."
카롱은 새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뿜어
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럼, 외국 쪽에서 조사해야만
되겠군요."
어딘가에서 훈련과 경험을 쌓아야만
하니까. 그리고 실제로 여러 차례 일을
성공시켜서 그 솜씨를 증명하지 않고서는
세계의 톱이 될 수는 없어. 상대는
대통령급은 아니었겠지만, 그에 못지않은
중요인물이었겠지. 암흑가의 보스 정도는
아니야. 그렇다면 반드시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눈길을 끌었을 게 틀림없으니까.
반드시 말이야. 전화 연락은 준비가
되었나?"
카롱은 메모해 놓은 종이를 손에 들었다.
이름들이 적혀 있고, 왼쪽에는 시간이
기입되어 있다.
"7명 모두 OK입니다. 먼저 7시 10분에
FBI의 국내정보부장입니다. 워싱턴
시간으로 오전 1시 10분입니다. 저쪽
옮겼습니다. 그리고 브뤼셀이 7시 반,
암스테르담이 15분 전 8시, 본이 8시 10분,
남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가 8시 반이고,
런던 경시청이 9시, 마지막이 로마인데 9시
반입니다."
"모두 살인담당의 책임자들인가?"
"아니면 그와 동등한 인물입니다. 런던
경시청에서는 형사담당 부총감인 앤터니
매린슨 씨입니다. 그곳에는 살인과라는
부서는 없는 모양이더군요. 그리고 또 한
사람, 남아프리카의 반 루이스 씨와는
아무래도 연락이 안되어서 차장인 앤더슨
씨가 전화에 나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르베르는 잠깐 생각해 보고 나서 말했다.
"잘했어. 오히려 앤더슨이 나도 좋아. 한번
일을 함께했었던 적도 있고. 그보다 언어의
셋은 영어야.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것은
벨기에뿐일 거야. 그 밖에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 한해서 영어를 할 생각이네 -- "
"서독의 디트리히 씨는 프랑스어를 할 줄
압니다." 카롱이 말했다.
"그래? 그럼, 그 두 사람과는 직접
프랑스어로 하기로 하지. 나머지 다섯 명은
직접 전화로 자네가 통역을 해주어야만
되겠군. 그럼, 슬슬 가보기로 할까?"
두 사람을 태운 공용차가 당시 폴 발레리
가(街)에 있는 인터폴 본부에 도착한 것은
10분 전 7시였다. 그로부터 세 시간,
르베르와 카롱은 지하의 통신실 전화에
매달려서 각국의 담당 간부에게 협력을
의뢰했다. 옥상에 있는 꼬이고 헝클어진
공중선에서 발신되는 극초단파는
되돌아오지 않도록 성층권(成層圈)과 또 그
위를 달려서 각지의 안테나로 수신되었다.
그 주파수에 의한 무선통신은 그 부근 다른
곳에서의 수신도 불가능하고, 수신 교란도
불가능하다. 세계가 아침 커피나 취침 전의
나이트캡(잠자리에 들기 전의 한잔 술)을
마시고 있을 때에 형사와 형사가 미묘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어느 통화나
르베르의 요청은 거의 비슷한 것이었다.
"아니, 현단계에서는 아직 공식적인
레벨에서 협력을 요청할 수는
없습니다......물론 저 자신은 공식적인
처지에서 행동하고
있습니다만......그러니까 현재로서는 범행
의사가 구체화되었다든지 준비단계에
들어갔다고 하는 것도 확인이 안된
중 하나로 부탁드리는 겁니다......실은
지금 어떤 남자를 수색중에 있습니다만,
단서가 될 만한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이름도 모르고, 인상,
특징도 분명치 않습니다......"
르베르는 자기가 알고 있는 특징 같은
것은 빠짐없이 말했다. 각국의 담당관은
한결같이 어째서 협력을 구하는지 그
이유와, 조사의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어색한
공기가 쌍방을 감쌌다. 상대방은 모두들
정해 놓고 거기서 입을 다물곤 했다.
"간단히 말해서 그 남자가 어떤 자이든
분명한 조건을 하나 갖추고 있습니다......
즉, 암살청부에서는 톱 클라스의 프로라는
점이지요...... 아닙니다. 갱 살인자가
있는 정치암살의 프로입니다. 그런 남자에
관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자료가 없으면 혹 그런 자에
대해서 들어본 정보 정도라도 좋습니다.
귀국에서 일을 저지른 일이 없는 자라도
좋습니다."
르베르가 이렇게 말하면 듣는 사람은
반드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돌아오는 소리는 여느때의 목소리보다는 착
가라앉은 낮고 긴장된 것이었다. 각국의
담당관은 르베르가 표현하는 의미를 확실히
읽고 있는 것이다. 일류 정치암살
청부업자의 대상이 될 만한 목표라면
프랑스에는 단 하나밖에 없다.
상대의 대답은 예외없이 똑같았다.
"물론 협력하겠습니다. 기록을 모두
있도록 노력하지요. 르베르 씨, 행운을
빌겠습니다."
각국과의 통화를 모두 끝내고 수화기를
놓았을 때, 르베르는 지금부터 7개국의
외무장관, 아니 총리가 이 일을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아마
십중팔구 즉각일 것이다. 그만큼 중대한
일이다. 은밀한 협조를 부탁해 오긴 했지만
경찰관으로서는 역시 정부 고위층에
보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장관급의
인물들이라면 비밀을 지켜 줄 거라고
르베르는 확신했다. 권력자들 사이에는
정치적인 입장이나 사상적인 문제를 초월한
강한 연대감이 있다. 그들은 같은 클럽의,
권력자 클럽의 회원이다. 공통의 적에
대해서는 단결한다. 암살자는 눈앞에 있는
한편으로는 만에 하나 그의 조회가
보도기관에라도 새어나간다면 뉴스는 한
순간에 세계로 퍼져 나가고, 즉시 그는
해고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 점에서
걱정되는 것은 영국인이었다. 매린슨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 정보는
오늘 중으로 상부에 전달될 것이다.
거기서부터가 문제다. 드골이 영국의 EC
가입을 간단히 거절해 버린 것이 겨우
7개월 전의 일이다. 1월 14일 드골이 그
사실을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뒤,
교활하기로 유명한 영국 외무부는 교묘히
보도기관을 다루어 프랑스 대통령에 대한
비난 캠페인을 벌였다.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드골 장군에게 복수하는 것은
아닐까? 르베르는 눈앞에 있는 발신기의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자, 돌아가세." 작은 몸집의 총경이
스툴에서 일어나서 문으로 갔다. "아침을
먹고 조금 자기로 하세. 지금 당장은 할
일이 없으니까."
형사담당 부총감, 앤터니 매린슨은
눈썹을 찌푸리며 전화를 끊고서 근무교대를
위해 들어온 경관의 거수경례에도 답하지
않고 통신실에서 나갔다. 그는 템스 강이
내려다보이는, 넓지만 살풍경한 자기의
방으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르베르의 의뢰가 어떤 성질의 것인지, 또
의뢰의 이유가 무엇인지 그런 점은 확실이
알고 있었다. 프랑스의 경찰은 톱 클라스의
눈치채고서 동요하고 있는 것이다.
르베르가 생각했듯이 그런 종류의 암살자의
표적이 되는 인물을 1963년 8월의
프랑스에서 찾아내는 데는 특별히 깊은
통찰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같은
경찰관으로서 르베르가 놓인 곤란한 처지를
동정했다. 창 밑 둑 너머로 천천히 흐르고
있는 강을 바라보면서 그는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불쌍하게도 됐군."
"예?"
아침 우편물을 가지고 온 비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비서가 나간 뒤에도 매린슨은 창
너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공식적인
지켜야만 하는 르베르의 처지에 동정은
하지만, 자신에게도 상사가 있다. 조만간
르베르의 요청을 상부에 보고해야만 한다.
매일 아침 10시부터 부서장 회의가
열리는데 -- 이제 30분 남았다 -- 그
자리에서 발표해야만 될까 ?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그는 그 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르베르가
요청해 온 내용의 개요를 적어 공식적으로
총감에게 제출하기로 했다. 왜 부서장
회의에서 발표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비밀을 요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된다. 그리고 조사를 하면서도
당분간은 그 이유나 목적을 숨겨 두자고
그는 생각했다.
책상 뒤에 앉은 그는 인터폰의 버튼을
"예?"
옆방에 있는 비서가 대답했다.
"잠깐 와보게, 존."
짙은 회색 양복을 입은 젊은 경감이
노트를 손에 들고 들어왔다.
"미안하지만 범죄기록센터에 가야겠네.
부장인 매컴을 직접 만나서 부탁하게. 나의
개인적인 의뢰로서, 이유는 지금 밝힐 수는
없다고 미리 말하고, 현재 생존해 있는
프로급 암살자의 기록을 조사해 달라고
하는 거야."
"암살자라고요?"
비서는 상사가 화성인의 기록을 조사해
오라는 명령이라도 내린 듯한 아연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 살인자야. 단, 암흑가에서
아니야. 돈에 고용되어 경비가 삼엄한
정치가들을 노리는, 말하자면 정치암살의
전문가 말일세."
"그러니까 오히려 특별국의 손님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래. 나중에 가서는 완전히 특별국으로
넘겨 버릴 생각이지만, 그 전에 일단 우리
쪽에서 조사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일세. 아, 존, 매컴에게 점심때까지
조사의 결과를 알려 달라고 하게."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15분 뒤에 매린슨은 아침의 정례회의에
참석했다.
회의가 끝나고 자기 방으로 돌아온 그는
우편물을 대강 훑어보고는 그것을 책상
한옆으로 밀쳐 두고, 비서에게
천천히 경시총감 앞으로 짤막한 보고서를
치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그는 한밤중
그의 집으로 걸려온 전화, 인터폴을 통한
오전 9시의 지명전화, 그리고 르베르의
요청해 온 내용의 성격 등에 관해서 간단히
기술했다. 그리고 보고서의 가장 아랫단은
일부러 공백으로 남긴 채, 그것을 책상
서랍 속에 넣고 자물쇠를 잠그고 평소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12시 조금 전에
비서가 노크하고 들어왔다.
"방금 매컴 부장님이 전화했습니다.
하지만 그 조건에 일치하는 암살자의
기록은 없는 모양입니다. 살인자로서
기록되어 있는 자가 17명 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암흑가 출신으로서 그 중에서
10명은 현재 복역중이고, 다른 7명은
두목에게 고용되어서 런던, 또는 다른
나라의 대도시에서 일을 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국을 방문하는 외국의
정치가를 노리는 그런 종류의 살인자는
아닌 모양입니다. 부장님 역시 특별국에
물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시더군요."
"그런가? 수고했네. 그런 정도만
알았으면 됐어."
비서를 물러가게 하고 매린슨은 서랍에서
아까 쓰던 보고서를 꺼내어 타이프라이터에
끼웠다. 그 가장 아랫단에 그는 이렇게
덧붙여 썼다.
"기록센터에 조회한 결과, 르베르 총경이
알려 준 조건에 일치하는 인물은 기록에
없다는 보고임. 따라서 앞으로의 조사는
특별국장의 손에 일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그는 보고서에 사인하고서 사본을 세 통
남겨 두고 나머지는 기밀서류용의 휴지통에
버렸다. 이것은 뒤에 처리기에 넣어
가루처럼 만들어서 버리게 될 것이다.
그는 사본 한 통을 봉투에 넣어서 총감
앞이라고 기재했다. 다음의 한 통은
'극비통신'의 파일에 철해서 벽에 붙어
있는 금고에 넣었다. 그리고 세 통째를
윗도리 안주머니에 넣고, 책상 위의
메모장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갈겨썼다.
수신인 -- 파리, 사법경찰 형사부 차장
클로드 르베르 총경.
발신인 -- 런던 경시청 형사담당 부총감
앤터니 매린슨.
내용 -- 조회하신 바에 따라서
해당하는 인물이 없음. 그러나 계속
특별국에서 조사 예정. 필요한 정보 입수
즉시 보고하겠음. 매린슨.
발신 일시 -- 8월 12일 ○○○○시.
시간은 12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그는
수화기를 들어 응답하는 교환수에게
특별국의 딕슨 부총감을 대달라고 했다.
"여보세요, 알렉? 나야, 토니
매린슨이야. 할 이야기가 좀 있는데.
고맙지만 갈 수가 없네. 점심은 샌드위치로
때우고 있다네. 언제고 한번 자리를 만들어
보세. 아니, 그러니까 자네가 점심 먹으러
나가기 전에 한 2~3분이면 되네. 미안.
그럼, 지금 가겠네."
사무실을 나갈 때, 그는 총감 앞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잠깐 특별국의 딕슨을 만나고
올 테니까, 미안하지만 이것을 총감의
사무실에 전해 주게. 슬그머니 말일세.
그리고 이 전보를 깨끗이 타자쳐서
전신실로 보내 주고."
"알았습니다."
비서가 전문을 훑어보는 것을 매린슨은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비서는 다 읽고 나서
눈이 동그래졌다.
"존."
"예?"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되네."
"예."
"절대 비밀이야."
"예,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겠습니다."
비서는 전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그것과
기록센터에 조회한 내용을 함께 생각해
보면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거 대단한데."
매린슨은 딕슨의 방에서 20분 동안이나
이야기했다. 그 바람에 특별국장은
클럽에서 점심 먹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매린슨이 그에게 보고서 사본을 건네주고
방을 나오려다가 문의 손잡이를 쥐고서
돌아다보았다.
"미안하네, 알렉, 하지만 이건 역시
자네의 영역이야.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우리 영국에는 그런 위험인물은 없어. 결국
르베르에게 그런 회답을 보내게 될 걸세.
정말 그의 처지에는 동정이 가지만."
딕슨이 이끄는 특별국은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의 정치가를 암살하려고 노리는 요주의
인물들의 감시를 첫번째 임무로 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딕슨은 르베르가 놓여 있는
처지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매린슨 이상으로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자국의 요인이나
외국에서 방문하는 정치가를
과격분자로부터 지키는 일도 큰일은
틀림없으나, 그들은 대개 아마추어여서
역전의 프로들만으로 구성된 특별국에서
전력을 다하면 비교적 쉽게 막을 수가
있다. 여기에 비하면 군인 출신의 용맹한
자들 중에서 골라뽑은 자국 내의 테러
조직으로부터 총리를 지키는 일은 훨씬
어렵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프랑스 당국은 OAS를 쳐부수고 말았다.
같은 프로로서 딕슨은 그들에 대한 칭찬을
프로페셔널을 고용했다고 하면 문제는
다르다. 다만 딕슨의 처지에서 보면 이런
말을 할 수는 있다. 즉, 정치암살을
청부맡을 프로라는 조건이 붙으면 거기에
합당한 인물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며,
적어도 특별국의 기록에 의하면 영국인으로
그런 조건에 알맞은 자는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매린슨이 가고 난 다음 딕슨은 보고서의
사본을 훑어보았다. 이윽고 그는 비서를
불렀다.
"토머스 총경에게 이리로 오라고 전해
주게. 시간은, 그래......"
그는 흘끗 시계에 눈을 주고 점심을
끝내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했다.
"정각 2시가 좋겠군."
재칼이 탄 제트기는 12시 조금 지나서
브뤼셀 나시오날에 착륙했다. 그는 세 개의
여행가방을 터미널 건물의 자동 라커에
맡기고서 석고, 탈지면, 붕대 등이 들어
있는 아타셰 케이스만을 가지고 시내로
들어갔다. 그리고 중앙역 앞에서 택시를
내려 수하물 보관소로 갔다. 총이 들어
있는 여행가방은 1주일 전에 그것을 맡겼을
때 직원이 밀어넣어 둔 선반에 그대로
올려져 있었다. 그는 보관증을 주고
여행가방을 되찾았다.
역 가까이에 조그맣고 더러운 호텔이
있었다. 그것은 세계 어느 도시에 가도
중요한 역 부근에는 반드시 한두 집은 있게
마련인 싸구려 호텔이며, 아무것도 묻지
않는 대신에 사기당할 각오를 해야만 하는
하고 방을 잡고서, 요금을 공항에서 환전한
벨기에 프랑으로 선불하고 자기의 짐을
가지고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문을
단단히 잠그고 냉수를 세면대에 채우고
석고와 붕대를 침대 위에 내놓고서 일을
시작했다.
일이 끝나고 석고가 굳기까지 다시 두
시간이나 걸렸다. 그 사이에 그는 석고로
둘러싼 무거운 다리를 스툴에 올려놓고서
담배를 여러 개비 태우며 창밖의 그을린
지붕의 물결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 엄지손가락으로 석고를 눌러 보고,
그때마다 좀더 굳어질 때까지 기다리자고
시간을 늦추었다.
총이 들어 있던 여행가방은 빈 채
나뒨굴고 있었다. 남은 붕대와 석고는
아타세 케이스에 넣어두었다. 모든 준비를
끝낸 다음, 빈 여행가방을 침대 밑으로
밀어넣고 재떨이의 꽁초를 창밖으로
버리고서 방을 나섰다.
다리를 석고로 굳히고 나니 이제는
싫어도 쩔룩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층계를 내려가니
다행히도 졸린 얼굴을 한 꾀죄죄한 프런트
직원은 재칼이 호텔에 처음 찾아왔을 때도
그랬지만, 카운터 안쪽에 있는 골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점심때라서 뭔가 먹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카운터 쪽으로 난
반투명 유리문은 열려 있었다.
현관문을 재빨리 살피고서 들어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칼은
가방을 가슴에 안고 엉금엉금 기어서,
가로질렀다. 그리고 여름 더위 때문에 활짝
열어놓은 현관문을 지나서 인도로 내려가는
층계 위에까지 나와서야 일어섰다. 그곳은
프런트 직원의 시선으로부터는 사각이 되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재칼은 층계를 애를 먹어가며 내려가서
쩔룩거리면서 큰길과 마주치는 모퉁이까지
갔다. 곧 택시가 다가왔다. 그는 그것을
타고 공항으로 갔다.
터미널 건물로 들어간 그는 여권을 손에
들고 알리탈리아 항공의 카운터로 갔다.
여직원이 빙긋 웃으며 그를 맞았다.
"이틀 전에 댓건이라는 이름으로
밀라노행 좌석을 예약해 두었소만."
여직원은 밀라노행 오후편 예약장부를
살펴보았다. 그 비행기는 한 시간 30분
"예, 예약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댓건 씨지요? 요금은 아직 지불되지
않았군요. 지금 지불해 주시겠습니까?"
재칼은 현금으로 지불하고서 항공권을
받았다. 그러자 한 시간 뒤에 탑승
어나운스먼트나 있을 거라고 가르쳐
주었다. 석고로 굳힌 다리를 보고서 다친
사람이라고 생각한 친절한 포터의 부축으로
그는 세 개의 여행가방을 라커에서 꺼내어
알리탈리아 항공에 맡기고 무사히 세관도
통과했다. 담당관은 국외로 나가는
여행자라고 생각하고서 형식적으로 여권을
조사했을 뿐이다. 재칼은 탑승하기까지의
시간을 이용해서 출발용 라운지에 부속되어
있는 레스토랑에서 즐겁게 늦은 점심을
쩔룩거리는 그에게 항공회사의 직원은
최대한의 동정심을 보였다. 버스에서
트랩으로 옮길 때에도, 또 트랩을 오를
때에도 직원이 도와주었다. 귀여운
이탈리아 스튜어디스는 판에 박힌 미소로
그를 맞아들여서 기체의 중심부가
마주보이는 자리 하나에 앉혀 주었다.
거기라야 다리를 뻗을 여유가 있다고
그녀가 말했다. 다른 승객들은 석고로 싸맨
다리에 닿지 않도록 조심해 가면서 건강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재칼의 앞을 지나 자리에
앉았다.
4시 15분, 여객기는 이륙했다. 그리고
기수를 남으로 하고 밀라노를 향해 속도를
높였다.
심정으로 딕슨 국장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고약한 여름감기에 걸려서 그것이 벌써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는 탓도 있었지만,
새로이 주어진 일이 더 기분을 우울하게
했다.
월요일에는 언제나 이 모양이다. 먼저
꼭두새벽부터 소련의 통상대표단 하나를
미행중이던 부하가 보기좋게 놓쳐 버렸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이어서 M15로부터 그
대표단에 대해서는 손을 떼라는 간섭이
들어왔다. 즉, 그 대표단의 일은 모두
M15에게 일임하는 것이 좋다는 노골적인
야유였다.
그리고 오후가 되자 더욱 골치아픈 일이
생겼다. 경찰관에게 있어서 특별국이든
아니든 그 신분이나 직종에 관계없이
토머스가 방금 국장으로부터 위임받은
케이스는 피의자의 이름조차 모르는
것이다.
"이름은 몰라. 그러나 이것은 수사
기술의 훈련이 될 거야." 라고 딕슨이 평을
내렸다. "내일까지 끝내 버리게."
사무실로 돌아온 토머스는 불쾌하게
중얼거렸다. "기막힌 훈련이군."
피의자로 지목되는 인물의 수는 적지만,
그래도 하나하나의 기록을 조사해서 정치적
트러블을 일으킨 적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전과의 내용은 어떤지, 다른
사건으로 혐의를 받은 일이 있었는지, 이런
것들을 모두 조사하는 데에만도 몇
시간이나 걸린다. 딕슨의 설명 중에서 단
한 가지 단서가 될 만한 자료라면 피의자가
영국을 방문하기 전과, 영국에서 머무는
동안 특별국을 가장 머리 아프게 하는 것은
무슨 짓을 하게 될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유형무형의 사건들이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토머스는 현재 별로 긴급을 요하지 않는
수사에 매달려 있는 두 경감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뒤로 미루고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두 사람에게
해준 설명은 딕슨이 자기에게 한 것보다도
더 간단했다. 이러이러한 인물을 찾아야만
한다고 명령을 내렸지만,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이러이러한 인물이 드골 장군의
암살을 노리고 있는 것 같다는 프랑스
경찰의 걱정은 런던 경시청 특별국이
없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책상 위를
정리하고 앉았다.
알리탈리아 여객기는 오후 6시 지나서
밀라노의 리나테 공항에 착륙했다. 재칼은
친절한 스튜어디스의 도움을 받아가며
트랩을 내려서, 거기서부터는 그라운드
호스티스의 부축을 받으며 터미널 건물로
들어갔다. 분해한 총을 숨기기 위해서
일부러 다리 부상으로 위장하여 석고로
싸맨 것은 이곳 세관을 통과하기
위해서였다. 여권 검사는 형식적인
것이었지만, 컨베이너로 운반되어 온
여행가방이 세관의 벤치에 올려졌을 때가
말하자면 승부처인 것이다. 그는 고용한
포터에게 세 개의 여행가방을 한 줄로
케이스를 그 옆에 놓았다. 그가
쩔룩거리면서 벤치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세관의 담당관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것은 모두 선생의 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여행가방 세 개와
이쪽의 조그만 가방이 내 것입니다."
"혹시 신고하실 것은?"
"없습니다."
"사업상 오시는 겁니까?"
"아니, 휴가입니다. 다친 다리도
회복시킬 겸해서요. 산속의 호수로 갈
생각입니다."
담당관은 표정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권을 보여 주십시오."
재칼은 여권을 건네주었다. 담당관은
면밀하게 그것을 살펴보고는 말없이
"그럼, 이것을 열어 주십시오."
담당관은 여행가방 하나를 가리켰다.
재칼은 열쇠 꾸러미에서 하나를 골라내어
그것으로 여행가방의 자물쇠를 열었다.
포터가 그것을 옆으로 넘겨서 양쪽으로
열었다. 다행히 그것은 덴마크의 목사와
미국 학생의 의류를 넣어 놓은 가방이었다.
물론 담당관으로서는 그 옷가지들이 갖는
의미 같은 것은 알 리가 없다. 덴마크어의
책에도 그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표지는
샬트로 성당의 컬러 사진이며, 제목은
덴마크어였지만, 그것은 영어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그 두 가지 사이의 차이를
모르는 외국인이 영어라고 생각해도 이상할
것은 조금도 없다. 담당관은 또 교묘하게
봉합해 놓은 안감을 뜯었던 자국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철저하게 조사를
한다면야 당연히 들통나겠지만, 이것은
사실 형식적인 조사이고 보면 수상쩍은
물건이 나오지 않는 한 대강대강 끝내
버리는 것이 상식이다. 분해한 저격용 총은
1미터도 안되는 곳에 있었지만, 담당관은
물론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그는 가방을
닫고 자물쇠를 잠그라고 재칼에게
신호했다. 그리고 분필로 재빨리 네 개의
짐에 OK라고 사인을 했다. 여기서 비로소
담당관은 미소를 지었다.
"지체하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즐거운
휴가를 보내십시오."
택시를 잡아 준 포터에게 팁을 쥐어주고
재칼은 공항을 뒤로 했다. 밀라노의 거리는
언제 와도 소란스럽다. 때마침 저녁의
샐러리맨들의 차가 거리에 넘치고, 그것이
또 대중없이 경적을 울려대기 때문에
시가지가 온통 소음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느낌이었다. 그는 중앙역에서
택시를 세웠다.
여기서도 그는 포터를 사서 짐 보관소로
갔다. 이미 택시 안에서 그는 가방에 넣어
두었던 가위를 꺼내어 호주머니로 옮겨
놓았다. 짐 보관소에는 가방과 여행가방 두
개를 맡겼다. 프랑스의 군용 외투를 넣은
것 -- 이것은 아직 여유가 충분히 있었다
-- 은 그대로 들고 있었다.
그는 포터를 돌려보내고 나서 남성용
화장실로 들어갔다. 소변 보는 곳 왼쪽에
죽 늘어 서 있는 세면대는 하나밖에
사용되고 있지 않았다. 그는 가방을
남자가 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큰 볼일을 보는
곳으로 얼른 들어가서 안으로 문을 잠갔다.
변기에 다리를 올려 놓고 그는 가위로
석고를 풀기 시작했다. 10분쯤 걸려서 겨우
석고를 떼어내자 그 밑에서 탈지면이
나타났다. 보통 골절한 다리를 석고로
굳히는 경우 굵어지기 때문에, 그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솝을 쑤셔박아 놓았던
것이다. 완전히 석고를 떼어낸 그는
장딴지에 석고로 숨겨 두었던 양말과
구두를 꺼내어 신었다. 석고와 탈지면의
나머지는 변기 속에 버렸다. 첫번째 물을
흘려 보냈을 때는 막혔지만, 두 번째는
깨끗이 흘러가 버렸다. 다음에 그는
여행가방을 변기 위에 올려놓고 열어서
총을 넣은 강관을 하나씩 찔러 넣었다.
그렇게 하자 가방이 하나 가득히 되었다.
안쪽에 있는 잠금 고리가 팽팽하게 되었다.
이제는 아무리 흔들어도 내용물이 튀어나올
걱정은 없다. 그는 가방을 닫고 문밖의
동정을 살폈다. 세면대에 두 사람, 소변기
앞에서 두 사람이 있다. 그는 그곳을
나가서 재빨리 화장실을 빠져나가 층계를
뛰어올라갔다. 그는 역의 중앙 홀로
들어갔다. 너무 순간적인 일이라서 화장실
안에 있었던 사람들도 미처 알지 못했다.
불과 10여 분 전에 쩔룩거리던 부상자가
맡긴 짐을 건강한 모습으로 찾으러 갈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포터를 불러서 외환을
바꾸고 어쩌고 하자면 바빠서 그러니, 대신
짐을 찾아서 되도록 빨리 택시를 잡아
지폐를 쥐어주고는 보관소를 가리켰다.
그리고 자기는 영국 파운드를 리라로
바꾸기 위해서 환전소에 있겠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인은 싱글벙글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하물 보관소 쪽으로 갔다.
재칼은 남아 있던 20파운드를 리라로
바꾸어서 그것을 호주머니에 챙겨넣고
있는데 포터가 짐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2분 뒤, 그는 택시에 올라 호텔
콘티넨털로 향하고 있었다.
멋진 현관 홀에 있는 접수대에서 그는
안내하러 나온 담당자에게 말했다.
"이틀 전에 런던에서 전화로 댓건이라는
이름으로 방을 예약해 두었는데."
방으로 안내된 것은 8시 조금 전이었다.
그는 느긋한 기분으로 샤워를 하고 면도를
넣고 자물쇠를 채워 두었다. 또 하나, 그의
옷가지가 들어 있는 것은 침대 위에 열려
있고, 밤에 입을 양복, 네이비블루의
하복은 옷장의 문에 걸려 있다. 회색
양복은 다리미질을 맡겼다. 지금부터
칵테일로 목을 축이고 호화스러운 저녁을
먹고서 일찌감치 잘 생각이다. 다음날인
8월 13일은 바쁜 하루가 될 것이다.
제 13 장
"아 무것도 없군요."
젊은 경감 하나가 브린 토머스의
사무실에서 배당받은 서류철의 마지막 한
권을 덮으면서 상사 쪽을 보았다. 그의
동료는 이미 조사를 끝내고 같은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토머스 자신도 5분 전에
조사를 끝내고 창가로 걸어가서 부하에게
등을 돌리고 저녁 노을 속에서 흐르듯 가고
있는 차의 행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매린슨의 사무실과 달리 1층의 그
방은 강을 향해 있지 않아서 호스페리
로(路)를 오가는 차의 흐름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아주 기분이 나빴다.
담배를 너무 피워서 목구멍이 아릿하게
제대로라면 금연을 해야만 할 처지이지만,
정신적인 중압감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담배를 끊을 수가 없었다.
두통도 심했다. 담배 연기로 탁해진 공기
탓만은 아니었다. 기록이나 자료 파일에
나오는 인물들을 조사하기 위해서 계속
조회 전화를 걸어 그때마다 부정적인
대답이 가져다 주는 그 대화가 오히려 더
두통의 원인을 만들고 있었다. 모든
인물이, 거주지나 행동이 명확하게 나와
있거나, 아니면 프랑스의 대통령을
암살하는 일에는 적합치 않다고
판정되었다.
"좋아. 그럼, 이것으로 끝이야." 창에서
돌아서면서 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했지만, 지정된
"영국인 중에서 그런 일을 하는 인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경감 하나가 말했다.
"단지 우리의 파일에 나와 있지 않을
뿐이지."
"파일에 올라 있지 않은 녀석이 있을
리가 있나!"
토머스는 화가 난 소리로 말했다. 프로
암살자가 어느 파일에도 올라 있지
않으면서 자기의 '영역'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가정이 도대체 마음에 안 드는
거다. 이 불쾌감은 감기나 두통에 의해서도
얼버무려지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지면
웨일스 사투리가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시골을 떠난 지가 30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시골 사투리는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그겁니다." 또 한 경감이 말했다.
거지요. 이 나라에는 아마 그런 족속은
없는 게 아닐까요? 잉글랜드의 기질에 맞지
않으니까요."
토머스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대영국제국의 국민을 말할 때는
영국인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부하가
잉글랜드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듣고는,
그럼 웨일스인이나 스코틀랜드인이나
아일랜드인 중에는 그런 인간이 있다는
말이냐고 곡해하고 싶기도 했다.
"이젠 됐어, 파일을 전부 돌려주고 오게.
철저하게 조사해 보았지만 그런 인물은
없었다고, 보고할 테니까. 이것으로 책임은
다한 거야."
"누구의 조회였습니까?"
"누구라도 상관없어. 수상한 낌새를
우리와는 상관없어."
두 부하는 자료를 그러모아 가지고
문으로 갔다. 그들에게는 돌아가야 할
가정이 있고, 한 사람은 머지않아 처음으로
아버지가 될 예정에 있다. 그가 먼저
문으로 다가갔다. 뒤따르던 동료가 눈썹을
찌푸리면서 상사를 돌아다보았다.
"저, 총경님, 파일을 조사하다가 문득
생각이 난 건데요, 만일 영국인 중에 그런
인물이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국내에서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즉, 영국은
일종의 작전기지, 아니 그보다는 휴식의
장소, 피난처일 테지요. 자기 나라에서는
오히려 착실한 시민으로서 얌전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일종의 지킬과 하이드라는 말인가?"
조사해 달라고 한 그런 타입의 프로
살인자가 정말로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렇게 수선을 떠는 것을 보아 상당한
거물이 틀림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그만한 실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렇잖으면 문제가 안되니까요."
"그래서?" 토머스는 진지하게 그를
지켜보면서 다음 말을 재촉했다.
"방금도 말씀드렸듯이 그런 인물은
외국에서밖에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자기
나라의 경찰에게는 주목을 받지 않는 거죠.
'서비스'에서는 한번쯤은 그런 소문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만......"
토머스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테니까. 그리고 이 조사에 대한 것은
깨끗이 잊어버리는 거야."
그러나 혼자가 되고 보니 경감이 한 말이
토머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았다. 보고서를 쓰는 것은 간단하다.
해당자 없음 -- 그것이면 된다. 조사의
결과는 의심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의뢰한 조회 이면에 무엇인가가
있었다고 한다면? 프랑스 당국이 대통령에
관한 풍문에 단순히 과잉반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들이 말했듯이 수사의
단서도 거의 없고 살인자가 영국인이라는
증거도 없다고 한다면 전세계의 경찰에
같은 내용의 조회를 했을 것이다. 그런
살인자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지만,
만에 하나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면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프랑스의
의심이 정곡을 찌른 것이라면 어찌되는
걸까? 그리고 살인자가 영국인, 아니
출생지만이라도 이 영국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
토머스는 런던 경시청, 특히 특별국의
실적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외국의
요인을 영국 안에서 죽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으며, 스캔들의 냄새조차 풍긴 적이
없다. 소련 KGB(국가보안위원회 --
비밀경찰)의 보스인 이반 세로프가
후루시초프 영국 방문의 사전 준비를
위해서 런던에 왔을 때, 토머스가 직접
그의 호위에 나섰었다. 세로프의 목숨을
노리는 폴란드나 헝가리의 망명자들이
기회만 노리고 가는 곳마다 대기하고
쓰다듬으면서 준비하고 있었지만, 토머스는
끝내 총격 소동을 일으키게 하지 않았다.
토머스는 퇴직까지 앞으로 2년, 그때가
오면 브리스톨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시골집에 틀어박혀 사랑하는 아내 메그와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 이런 때에 확고하게
일해서 나쁠 것이 없다. 모든 것을
점검하는 것이다.
청년 시절 그는 유명한 럭비 선수로
이름을 떨쳤다. 그라모건의 윙으로서
활약할 때 그 질풍 같은 돌진은 상대
팀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물론
이미 플레이를 할 수는 없지만, 런던
웰시의 팬이며, 틈이 나면 리치먼드의 올드
데어 파크로 시합을 보러 간다. 선수들과는
모두 낯익은 사이이며, 시합 뒤에는 흔히
그는 언제나 환영받는 존재였다.
선수 중에 외무부에서 일하는 청년이
있었다. 동료들은 모두 그 친구를 외무부의
관리라고만 알고 있었지만, 토머스는 그
이상의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청년, 배리
로이드가 속해 있는 조직은 외무장관의
감독하에 있지만, 외무부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비밀정보부가 바로 그것이다.
약칭을 SIS라고 하고 단지 '서비스'라고만
불리기도 한다. 일반에게는 M16이라는
잘못된 명칭으로 알려져 있는 조직이다.
토머스는 수화기를 들어서 어떤 번호를
댔다.
두 사람은 오후 8시, 템스 강가의 조용한
퍼브(서민적인 술집)에서 만났다. 토머스는
맥주를 주문하고, 두 사람은 한동안 럭비
특별국의 총경이 자기를 불러낸 것은
시즌까지 아직 2개월이나 남아 있는 럭비
이야기나 하기 위해서는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맥주가 나오고
서로 건배를 한 다음에 토머스는 부두로
이어지는 테라스로 나가자고 턱짓을 했다.
밖은 조용했다. 여느때는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아베크족들이 저녁식사 때라 그런지
한 쌍도 없었다.
"문제가 좀 있어서 말이야." 토머스가
말을 꺼냈다. "자네의 힘을 빌리고
싶은데."
"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토머스는 파리의 의뢰를 설명하고서,
범죄기록센터와 특별국에서 한 조사 결과에
관해서도 말해 주었다.
그것이 영국인이라고 하면 국내에서는 손을
더럽힌 적이 없는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만. 외국에서만 일을 하는
녀석이고, 만일 자취를 남겼다면 서비스의
눈에는 띄었을 것이 아닌가?"
"서비스?" 로이드가 조용히 되물었다.
"시치미떼도 안되네, 배리. 다 알고
있으니까."
토머스는 속삭였다. 어두운 양복을 입은
두 사람의 모습을 뒤에서 보면 강 건너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그날 시티(런던
금융-상업의 중심지)에서 있었던 거래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금융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브레이크 사건 때에 파일을 모두
쏟아놓고 조사를 했었는데, 그 중에는
있었어. 자네 파일도 구경했다네.
브레이크의 용의점이 짙어졌을 때 자네가
그의 부서에 있었으니까. 그래서 자네의
소속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
"그랬었군요."
"럭비 경기장에서는 한낱 팬에
불과하지만 이래봬도 특별국의 베테랑일세.
내게 신분을 숨기려고 해도 그렇게는 안될
걸세."
로이드는 맥주잔 속을 들여다보았다.
"이것은 공식적인 조회입니까?"
"아니, 공식적인 것은 아닐세.
프랑스에서 들어온 문의도, 르베르에게서
매린슨에게 보내는 비공식적 의뢰였다네.
매린슨은 기록센터에 조사를 시켰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서 그렇게 회답을 한
마지막으로 확인을 의뢰한 것일세. 그래서
내가 그 조사를 맡게 된 거야. 모두가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어. 때로는 이런
방법도 필요하다네. 아주 미묘한
문제이니까. 보도기관으로는 절대로
새어나가서는 안되네. 지금으로서는
르베르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영국에서는 얻게 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만, 더욱 만전을 기한다는 의미로 모든
방면을 조사하고 있는 중이라네. 자네가 그
마지막이 되는 셈이지."
"그 인물은 드골을 노리고 있군요."
"프랑스 쪽의 말투로 미루어 보아서는
틀림없는 것 같네. 다만 무슨 일이 있어도
비공개로 하고 싶은 모양인지 굉장히
조심하고 있는 것 같네."
우리에게 직접 접촉해 오지 않는 걸까요?"
"두 나라 경찰 간부의 개인적인 친분에
기대를 걸고서 르베르가 매린슨에게 직접
의뢰해 온 걸세. 프랑스의 정보기관과 자네
부서 사이에는 그런 관계가 없잖나? 모르긴
하지만."
SDECE와 SIS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감정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어서
토머스는 은근히 그것을 비꼰 것이었지만,
로이드는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나?"
조금 지나서 토머스가 물었다.
"이상한 일이 있어서요." 하고 로이드는
강을 바라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필비 사건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물론이지."
안에서는 뼈아픈 패배로 기억하고 있지요.
그가 철의 장막 너머로 달아난 것은 1961년
1월, 베이루트에서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나중에 가서야 안 일입니다만, 당시
서비스의 내부는 큰 혼란에 빠졌었습니다.
이동도 많았었지요. 하긴 아랍 담당 부서의
요원들은 거의 전원이 저쪽에 정체가
알려지고 말았으니까요. 다른 부서도 물론
상당한 타격을 입었습니다만. 그래서
첫번째로 이동명령이 떨어진 것은 카리브
해 연안지구의 톱 에이전트였던
친구였습니다. 카리브 해로 옮기기 6개월
전까지 베이루트에서 필비와 함께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입니다."
그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도미니카
장군(1891~1961)이 시우터드
트루히요(당시의 수도로서, 지금은 산토
도밍고로 이름이 바뀌었다) 교외의 한적한
도로에서 암살되었습니다. 보고에 의하면
빨치산(민간인 유격대)에 살해당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독재자이기에 적도
많았을 테니까요. 그 직후에 도미니카에
주재해 있던 한 동료가 런던으로 귀국하여
한동안 함께 일을 했었는데, 그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트루히요의
차는 저격수가 쏜 총알 한 발로 그 자리에
서 버리고, 그 순간 빨치산들의 습격을
받아서 장군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현지에서 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고속으로 달리고 있는 차를 150미터의
거리에서 겨누어, 더구나 그곳만은 방탄
삼각창을 통해서 운전사의 목을 정통으로
맞춰 즉사시켰다고 하니까 놀라운
솜씨지요. 그런데 기묘하게도 저격수는
영국인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겁니다."
두 사람은 비어 버린 맥주잔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어두운 템스 강의 수면을
오랫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마음에는 머나먼 열대의 섬의
황폐할 대로 황폐해진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시속 100km에 가까운 속도로
바위들을 잘라내어 만든 도로를 달리는 차,
30년 동안이나 혹독하게 지배해 온 역전의
노군인이 망가진 차에서 끌려나와 길가에서
사살당하는 광경 -- .
"그......소문의......인물 말인데,
이름은 알고 있나?"
내에서 잠깐 입에 오르내린 정도의
이야기라서요. 당시에는 여러 가지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카리브 해의
독재자 사건 같은 것은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었으니까요."
"자네에게 그 이야기를 한 동료는
보고서를 썼었나?"
"썼을 겁니다. 의무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문입니다. 단지
풍문일 뿐입니다. 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실 이외에는, 즉
뒷받침이 있는 정보밖에는 취급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그 보고서는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거야."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현지에서도
소문이었습니다. 도대체가 소문이 많은
땅이니까요."
"하지만 정확성을 기하고 싶으니, 그
파일을 조사해 주지 않겠나? 소문의 남자
이름이 나와 있을지도 모르니까."
로이드는 철책에서 물러났다.
"돌아갈까요? 도움이 될 만한 것이
발견되면 전화하겠습니다."
둘은 술집으로 돌아가서 술잔을 돌려주고
출구로 향했다.
"부탁하네." 악수하며 토머스가 말했다.
"아무것도 안 나올지도 몰라. 그러나 만에
하나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는 법이니까."
토머스와 로이드가 템스 강가에서
이야기하고 있을 무렵, 재칼은 밀라노의
식후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파리에서는 클로드 르베르가 내무부
회의실에서 열린 첫번째 경과보고 회의에
참석해 있었다.
참석자는 24시간 전의 그것과 같은
얼굴들이었다. 내무장관이 상석에 앉고,
관계 각 부서장이 테이블 양쪽으로 줄지어
있다. 내무장관은 쌀쌀맞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먼저 첫번째로 말을 꺼낸 것은
내무장관의 보좌관이었다. 그날 아침
일찍부터 밤에 걸쳐서 프랑스 전
국경검문소의 세관에게, 입국하는 장신의
금발머리 외국 남성의 짐을 철저하게
검사하라는 지령을 내렸다고 그는
보고했다. 특히 여권 검사를 엄중히 하여
위조품에 주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DST의
국장은 고개를 끄덕여 그것을 인정했다.)
프랑스에 입국하는 관광객이나
비즈니스맨은 국경에서 경계가 갑자기
엄중해진 것을 알고 놀랄지도 모르지만, 이
경계조치가 장신의 금발머리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것까지는 아마 모를 것이다.
눈치빠른 신문기자 정도가 물어올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언제나 으레 하는
임시조치라고 설명하면 그뿐이다. 그러나
사실 그런 문의는 아마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 .
내무장관 보좌관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로마에 있는 OAS 간부 하나를 납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제안이 지난번
회의에서 있었지만, 외무부는 외교상의
있으며, (그들에게는 재칼 사건을 알리지
않았음) 대통령도(당연한 일이지만)
외무부를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앞으로도 고려의 대상 밖인 것이다 -- .
SDECE의 기보 국장은 모든 자료를
조사했지만, OAS 내부나 그 지지자들
중에도 정치암살의 프로페셔널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정체는 전혀 잡을 수가
없다고 보고했다. 또 RG의 국장도 전
프랑스의 범죄기록을 뒤져 보았으나 결과는
SDECE의 경우와 마찬가지로서, 프랑스인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국내에서 행동하려
한 적이 있는 외국인 살인자 중에서도
해당자는 없다고 보충 설명을 했다.
다음으로 DST의 국장이 발언하면서 그날
오전 7시 30분, 북부역 가까이에 있는
건 전화를 도청했다고 보고했다. 8주일 전,
그들 세 사람이 그 호텔에 틀어박힌 이후,
국제전화의 교환수는 그 호텔로 가는
전화를 빠짐없이 체크하여 DST에
통보하도록 명령을 받은 것이다. 마침 그날
아침 당번 교환수가 깜박 잊어서 그 번호가
리스트에 올라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전화를 연결한 뒤였다. 그러니까 그가
DST에 통보했을 때, 전화는 이미 통화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눈치빠르게
통화를 도청했다. 통화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바르미로부터 푸아티에에게. 재칼의
존재가 발각. 반복함, 재칼의 존재가 발각.
코와르스키가 잡혀 죽기 직전에 자백.
이상."
"어떻게 알아냈을까요?"
테이블 끝에서 르베르가 조용히 말했다.
참석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다만 롤랑 대령만은 깊은 생각에
빠져 정면의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대령이 시선을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마르세유야." 느닷없이 그가 말했다.
"코와르스키를 로마에서 꾀어 내기
위해서 미끼를 썼던 겁니다. 그는 조조
그리보스키라는 녀석의 오랜 친구입니다.
그 녀석은 부인과 딸이 하나 있는데,
우리는 코와르스키를 잡을 때까지 그들
셋을 보호해 두었었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난 뒤에 집에 돌아가게 했지요.
코와르스키를 체포한 것은 그들 간부 세
사람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였으며,
못하고 있었지요. 어쨌든 조조와 그
가족들은 우리가 코와르스키를 체포한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요. 물론 그 뒤로
피차 쌍방의 사정이 바뀌었습니다만.
여하튼 바르미라는 스파이와 내통한 것은
조조가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실책입니다."
"DST는 우체국에서 바르미를
체포했습니까?" 하고 르베르가 물었다.
"아니, 교환수의 부주의로 불과 몇 분
차이로 놓치고 말았어." DST가 대답했다.
"서툴기 짝이 없군." 하고 생클레아가
단정해 버렸다. 차가운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기보 장군이 잔뜩 비꼬는 투로 반박했다.
"현재 우리는 모든 점에서 수세에 몰려
나아가고 있는 꼴이니까 서툰 일이 있는
것도 당연하지. 대령이 모든 책임을 지고
이 임무를 맡아 줄 생각이라면......"
생클레아 대령은 SDECE 국장이 겁주는
것보다는 그것이 더 큰일이기라도 한 듯이
서류철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나 그도
방금의 말이 서툴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무장관이 어색한 공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녀석들도 살인자의
존재가 발각된 것을 알았으니까 작전을
중지하리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들 보나?"
"동감입니다." 생클레아는 태세를 정비할
양으로 내무장관의 말에 편을 들었다.
"장관께서 말씀하시는 대로입니다.
녀석들도 바보가 아니죠. 즉시 재칼과의
"녀석의 존재가 발각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이릅니다."
르베르가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모두
그의 존재를 거의 잊고 있었다.
"아직 그의 이름조차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이번 일로 그는 더욱
조심스럽게, 또 더욱 세심하게
준비하겠지요, 가짜 신분증, 변장......"
내무장관의 말로 싹트기 시작한 낙관적인
공기가 갑자기 식어 버렸다. 프레이는
존경의 눈으로 작은 몸집의 총경을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부터 르베르의 보고를 들어
보기로 하지. 어쨌든 그는 이 수사의
총괄책임자이고, 우리는 모두 그를 돕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여 있는 거니까."
온 조치에 대한 개요를 설명했다. 외국인의
기록은, 만일 있다고 한다면 어느 외국
경찰의 파일에밖에는 없을 거라는 점,
국내의 파일을 조사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사실로 그런 판단의
근거가 더 확고해졌다는 점, 여러 외국으로
협조를 요청하는 의뢰가 허락되었으므로
인터폴을 통해서 7개국 경찰 간부에게
지명전화를 건 일 등.
"오늘 각국에서 회답이 도착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네덜란드, 해당자 없음.
이탈리아, 프로 살인자는 몇 명 있지만
모두 마피아의 수하에 있는 자들임. 로마의
두목에게 은밀히 조회한 결과, 마피아의
살인자는 특별한 명령이 없는 한 정치적인
살인은 하지 않으며, 마피아는 외국
않는다는 회답을 받았음."
르베르가 메모에서 얼굴을 들었다.
"이 이야기에 거짓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영국, 해당자 없음. 단,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 특별국에 조사를 의뢰."
"여전히 슬로 모션이군." 생클레아가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르베르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일은 철저히 합니다. 런던
경시청을 얕보아선 안됩니다."
그는 다시 메모를 읽으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미국, 여기엔 두 개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
본거지를 둔 국제적인 무기상인의 한쪽
팔이라고 알려진 인물입니다. 해병대
요원을 지낸 적도 있는 인물로서, 픽스
만(만) 사건 직전에 반(反)카스트로파의
쿠바인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 그 쿠바인은
픽스 만 침공작전에서 한 부대의 지휘관이
될 예정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뒤 그
인물은 앞에서 언급한 무기상인에게
고용됩니다만, 그 상인은 CIA의 은밀한
요청으로 픽스 만 진격부대에 무기를
공급했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이 상인의
경쟁자 두 사람이 누군가에게
살해되었습니다만, 이것은 문제의 인물이
한 짓으로 믿고 있습니다. 무기장사라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인 모양이더군요. 그
인물의 이름은 찰스 아놀드. 별명은
'귀염둥이.' 현재 FBI가 거처를 조사중에
있습니다.
마피아의 보스인, 앨버트 애나스타셔의
경호원이었던 마르코 비텔리노입니다.
애나스타셔는 1957년 10월, 이발소의
의자에 앉아 있다가 총에 맞았는데, 이때
비텔리노도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미국으로
탈출하여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뿌리를
내리려고 하다가 그 지방 조직의 협박을
받고 물러났습니다. 현재 그가 돈이 아쉬운
처지라면, 보수 여하에 따라서는 외국의
조직에 고용되어 살인을 청부맡을 가능성이
있다고 FBI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방안은 완전히 침묵 속에 있었다. 14명의
참석자는 서로 소곤거리지도 않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벨기에, 가능성은 하나. 카탕가의 촘베
1962년 국제연합군에 체포되어 추방처분.
두 건의 살인용의로 기소되어 있기 때문에
벨기에로 귀국 못하고 있음. 프로
살인자이고 간교함이 뛰어나다는 겁니다.
이름은 쥘 베란저. 중앙아메리카로 달아난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벨기에 경찰은
지금도 계속 그의 거처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는 모양입니다.
서독. 가능성은 하나. 한스디터 카셀. 전
친위대 소령이며, 전범 용의자로 2개국에서
지명수배를 받고 있습니다. 전후 가명으로
서독에 잠복, 구 친위대의 지하조직인
'오데사'의 살인담당을 맡고 있습니다.
정부의 후원에 의한 전범자 색출 활동을
강화하라고 외치던 좌익의 정치가 두 명의
살해에 관계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스페인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때 어느
경찰간부와 있었던 관계를 밀고하여 그
간부는 퇴직당했습니다. 현재는
마드리드에서 은퇴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르베르는 얼굴을 들었다.
"그러나 이 인물은 이미 그런 일을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57세니까요.
마지막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가능성은
하나. 프로 살인자로서 이름은 피에
슈이퍼. 역시 촘베에게 고용되었던 총잡이
중 한 사람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아무 죄로도 수배당하지 않고
있으나 탐탁치 않은 인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사격의 명수이고, 살인이
있었던 카탕가 제2차 정권 붕괴 때
콩고에서 추방된 뒤로 소식 불명입니다만,
아직도 서아프리카 어딘가에 잠복중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
경찰의 특별수사대가 자세한 것을 조사중에
있습니다."
르베르는 설명을 끝내고 얼굴을 들었다.
참석자는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 ." 하고 그는 변명하듯 말했다.
"모두가 모호하다는 비난은 면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지금으로선 가장 가능성이
있는 7개국에만 조사를 의뢰했다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재칼은
스위스인일지도 모르고 오스트리아인일지도
모릅니다. 7개국 중에서 3개국이나 해당자
이것들은 어느 것이나 액면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재칼은 이탈리아인일지도
모르고, 네덜란드인이나 영국인일지도
모릅니다. 또는 남아프리카나 벨기에,
서독, 또는 미국인으로서 각국 관리의 눈을
피해 있는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즉,
용의자를 특정지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광명이 비춰 줄 것을 기대하면서 그믐밤에
손으로 더듬어 가고 있는 것이
현상황입니다."
"기대만으로는 안돼." 하고 생클레아가
단정하듯 말했다.
"무슨 안을 가지고 계십니까?" 르베르는
조용히 물었다.
생클레아는 차디차게 말했다. "놈은 이미
손을 뗐다고 생각해. 계획이 들통난 지금에
거라고 적들도 단념하고 있겠지. 로댕이
얼마의 보수를 약속했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된 상태에서는 이젠 계획을
중지하고 돈을 되돌려받는 방법밖에
없겠지."
"손을 떼었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 ." 르베르는 반론을
제기했다. "단순한 추측은 기대와 오십보
백보입니다. 역시 제 생각으로는 당분간
조회를 계속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조회 말인데, 그 뒤의 상태는
어떤가?" 하고 내무장관이 물었다.
"이미 각국의 경찰이 완전한 자료를
텔렉스로 보내오고 있습니다. 내일
정오까지는 모두 갖추어질 겁니다. 얼굴
사진도 전송이 될 겁니다. 몇 나라에서는
있으며, 그것이 판명된 시점에서 우리가
그것을 인수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각국에서는 비밀을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하고 송기네티가 물었다.
"비밀을 누설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터폴에 가입해 있는 각국
경찰의 간부는 매년 수백 건에 달하는
극비의 조사를 서로 의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비공식적인,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
의한 것도 있습니다. 다행히도 어느
나라에서나 체제에 관계없이 경찰은 범죄
저지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정치의 입장에 있어서와 같은
대립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상호간의
협력관계는 대단히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내무장관이 물었다.
"경찰관에게 있어서는 그것도 범죄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번
사건에 있어서도 외무부를 통하지 않고
직접 상대방의 경찰과 접촉한 것입니다.
물론 이쪽에서 의뢰가 있었다는 것은
상부에 보고되겠지만, 그 때문에 비밀이
누설될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정치암살은 어느 나라에서나 중대한
범죄니까요."
"그러나 녀석들은 조회하는 이유를
눈치채고 속으로 드골 대통령을 비웃겠지."
생클레아가 화가 나서 말했다.
"설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일은 자신들이 당할지도 모르니까요."
"미안하지만 자네는 정치라는 것을
프랑스의 대통령을 살인자가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할 녀석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어.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은
일반이 알게 되는 것을 피하고 싶어하는
거야."
"일반이 알게 된다는 표현은 정확지
않습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은밀하게
전해질 뿐입니다. 그들은 정치의 중추에
있으며, 나라의 정치를 좌우할 만한 비밀을
알고 있어도 결코 그것을 밖으로
누설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특히 서방의 지도자들은 자국의 치안기구의
내면까지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알지 않을 수 없는 거지요. 그리고
알게 된 정보를 감추어 두지 않으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알고도 남는
"그야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겠지만, 어느 정도는 어쩔 수가
없겠지요. 대통령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하고 부비에가 화난
듯이 말했다.
"우리는 벌써 2년 동안이나 OAS와 싸우고
있어. 대통령은 신문잡지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태를 피하라고 하셨으니, 바로 그
점을 조심하면 되는 거야."
"여러분, 잠깐만." 내무장관이
가로막았다. "그런 의논은 이제 그만하면
됐소. 여러 외국의 경찰 간부에게 협조를
의뢰해도 좋다고 르베르에게 허락한 것은
바로 나요."
그는 흘끗 생클레아를 보았다.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서 말이오."
태도에 대해서는 참석자 모두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 밖에 할말은?" 내무장관이 일동에게
물었다.
롤랑이 손을 들었다. "스페인에는 OAS의
망명자가 많아서 마드리드에 우리의 지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카셀인가 하는
나치의 잔당에 관해서는 서독에게 수고를
끼치지 않아도 우리가 조사할 수 있습니다.
본의 외무부와는 아직도 유대가 긴밀하지
못하니까요."
아르그 납치사건과 그 뒤의 본의 분노를
떠올리고서 일동은 쓴웃음을 지었다.
프레이는 눈썹을 올려서 르베르를 보았다.
"액션 서비스 쪽에서 카셀을 조사해
준다면 크게 도움이 됩니다. 나머지 것들은
이후로도 계속 관계부서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그럼, 여러분, 오늘밤은 이 정도로
합시다."
내무장관은 시원스런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 서류를 챙기면서 일어섰다. 일동은
흩어졌다.
바깥 층계를 내려오면서 르베르는 짐을
내려놓은 듯한 기분으로 파리의 달콤한
밤공기를 가슴 가득히 들이마셨다. 그때
시계가 12시를 치고 8월 13일, 화요일이
되었다.
12시 조금 지나서 치즈위크의 토머스
자택으로 배리 로이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토머스는 그에게서 전화가
생각하고 막 자려던 참이었다.
"그 보고서를 찾았습니다." 하고
로이드가 말했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
당시 섬에서 떠돌던 소문에 대해서
형식적으로 보고했을 뿐이더군요. 보고서
제출과 거의 동시에 '조사 불필요'라는
도장이 찍혔습니다. 그 무렵엔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으니까요."
"그래, 이름은 나왔나?"
토머스는 자고 있는 아내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한 소리로 물었다.
"예, 섬에 있던 영국인인데 사건이 있은
뒤로 사라져 버렸답니다. 사건에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소문과
함께 이름이 들먹여졌었던 것 같습니다.
찰스 칼스로프라는 이름입니다."
즉시 조사해 보겠네."
그는 전화를 끊고 잠자리에 들었다.
꼼꼼한 로이드는 토머스에게 한 요청과
그의 답변에 관해서 짧막한 보고서를 써서
문서과에 제출했다. 당직 담당관은 의아한
얼굴로 잠깐 내용을 훑어보고는 파리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외무부
프랑스국(局)으로 가는 문서 운송배낭에
집어던졌다. 이 운송배낭은 프랑스
국장에게 직접 건네주도록 되어 있다.
제 14 장
재칼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오전 7시
반에 기상하여 침대에까지 가져다 준 차를
마시고서 양치질을 하고 샤워를 한 뒤
면도를 했다. 그리고 옷을 입은 다음에
여행가방 안감 속에 숨겨 온 1,000파운드의
돈다발을 빼내어 그것을 안주머니에 넣고서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다. 오전 9시, 그는
호텔 앞 만조니 로(路)로 나가서 은행을
찾아 걸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 동안
은행에서 은행으로 다니면서 파운드화를
바꾸었다. 200파운드는 이탈리아의 리라로,
나머지 800파운드는 프랑스의 프랑으로.
점심 전까지 이 일을 끝낸 그는
카페테라소에서 에스프레스 커피를
두 번째의 탐색 여행을 떠났다. 물어 물어
돌아다닌 끝에 포르타 갤바르디의 외곽에
있는 캘바르디 역 가까운 초라한 거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그가 찾고 있는 세놓는
차고가 줄지어 있었다. 그는 그 중 하나를
같은 거리에서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고
있는 주인에게서 빌렸다. 이틀 동안의
요금이 1만 리라로서, 사실 터무니없는
금액이지만, 이틀이라는 짧은 기간이라
비싸게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에
그는 가까이에 있는 철물점에서 아래위가
붙은 작업복, 펜치, 가느다란 철사, 납땜용
인두, 그리고 땜납을 사들였다. 이
물건들을 같은 상점에서 산 마직 가방에
집어넣어 빌린 차고에 던져 두었다. 그리고
차고의 열쇠를 호주머니에 넣고 한길가의
오후 일찌감치 미리 레스토랑에서 전화를
걸어 두었던, 조그맣고 별로 손님도 없는
렌터카 회사로 택시를 타고 갔다. 거기서
그는 1962년형 알파 로메오
스포츠카를빌리기로 했다. 회사 사람에게는
2주일의 휴가 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돌아다니고 싶으니 차는 2주일 뒤에
돌려주겠다고 했다.
여권과 영국의 운전면허증, 그리고
국제면허증 등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가까운 곳에 그 렌터카 회사의 보험을
취급하는 보험회사가 있어서 한 시간도
못되어 계약수속을 마칠 수가 있었다.
공탁금으로 100파운드나 맡겨야 했지만,
여하튼 그것으로 알파 로메오는 그의
손으로 건너오고 즐거운 여행이 되라는
이미 그는 런던의 자동차 연맹에
조회하여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모두 EC의
가맹국이므로 운전면허증, 렌터카의
등록증, 거기에 보험계약서가 갖추어져
있으면 이탈리아 번호의 차를 프랑스에서
운전하는 데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 두었다.
렌터카 회사를 나온 그는 코르소
베네치아에 있는 이탈리아 자동차 클럽에
가서 국외 드라이브 여행 전문의 보험을
취급하고 있는 어느 믿을 만한 보험회사를
소개받았다. 즉시 그는 프랑스 여행에 특별
보험을 들고 현금으로 보험금을 지불했다.
담당자의 설명에 의하면, 그 회사는
프랑스의 큰 보험회사와 제휴하고 있으며
프랑스 내에서 사고가 생겼을 때에는 그쪽
했다.
수속을 마친 그는 알파 로메오를 타고
호텔로 돌아와서 차를 호텔의 주차장에
두고 방으로 올라가 분해한 저격용 총을
넣은 여행가방을 옷장에서 꺼냈다. 그리고
티타임 뒤에 아까 빌려 놓은 차고로
되돌아갔다.
입구의 문을 꼭 닫고 납땜 인두의 코드를
머리 위 전구 소켓에 이은 그는 강력한
라이트로 차의 밑을 비추면서 일에
착수했다. 그로부터 두 시간 걸려서 그는
강관을 자동차 섀시의 플랜지(튀어나온
부분)에 갖다 붙였다. 알파 로메오를 고른
것은 이탈리아의 차 중에서 알파의 섀시가
특히 깊은 플랜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동차 잡지에서 읽어 알고 있었기
함석으로 싸두었었다. 그것을 철사로
플랜지의 안쪽에 묶고, 철사가 섀시에
접촉되어 있는 부분을 납땜한 것이다.
작업을 끝낼 쯤에는 작업복은 바닥에 흘린
기름으로 시커멓게 더러워지고, 손은
철사를 힘껏 섀시에 감아 매느라고 쑤셔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하튼 이것으로
준비는 갖추어졌다. 강관은 차 밑에 머리를
들이밀고 찾아보지 않는 한 들킬 염려는
없다. 게다가 곧 먼지와 흙탕물을
뒤집어쓰면 더욱 찾아내기 힘들게 된다.
그는 작업복, 납땜 인두, 철사의 나머지
등을 가방에 넣어서 차고 한쪽 구석에
쌓아놓은 걸레 밑에 숨겼다. 펜치는
대시보드(운전석 옆 사물함) 속에 넣었다.
여행가방을 트렁크에 넣고 알파의 운전석에
내리고 있었다. 그는 차고를 잠그고 열쇠를
호주머니에 넣고서 호텔로 돌아왔다.
밀라노에 도착하여 그는 샤워로 하루의
땀과 먼지를 씻어 버리고 욱씬거리는 손을
찬물에 담가서 식혔다. 그리고 저녁을 먹기
위해서 양복을 입었다. 즐겨 마시는
캄파리소다를 마시러 바에 가기 전에 그는
프런트에 들러서, 저녁을 마치고 나오며
지불을 끝낼 테니까 계산을 해놓으라고
일러놓고는, 다음날 아침 5시 반의
모닝콜과 아침 차의 룸서비스를 부탁했다.
그리고 두 번째의 호화판 저녁을 마친
다음, 남은 리라로 숙박료를 치르고서 11시
조금 전에 잠자리에 들었다.
재스퍼 키그레이 경은 뒷짐을 지고
외무부의 사무실 창문 앞에서 호스 가드
종대를 이룬 근위기병이 빠른 걸음으로
몰(세인트 제임스 공원 북쪽의 산책로)
쪽으로 나아가서 거기서 다시 버킹검
궁전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행진해
나아간다. 보기만 해도 즐겁고 인상깊은
광경이다. 재스퍼 경은 거의 매일 아침 이
가장 영국적인 광경을 사무실의 창문
앞에서 보고 있다. 이 창가에 서서
기병대의 퍼레이드를, 아침 햇빛의
찬란함을, 목을 빼고 구경하는 관광객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말발굽 소리, 말의
울음소리, 관광객들의 탄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멋없는 외국에서 지내는 대사
근무의 보상이 된다고 생각하는 일조차
있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기묘하게도 언제나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자랑스럽게 턱이 들리며 목덜미의 주름이
펴지는 것이었다. 때로는 책상 앞에 앉아서
집무중에 자갈을 박차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 일부러 창가로 가서 기병대가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까지 있었다.
그리고 또 때로는 도버 해협을 떼지어
건너와서 그 박차의 소리를 파리의 군화나
그 못마땅한 베를린의 장화 소리로 지워
버리려 한 대륙의 독재자들을 생각하고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황급히
서류로 눈을 돌리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날 아침은 그렇지는 않았다. 불
같이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도
윤기라곤 없는 얇은 입술을 꼭 다문 바람에
입안으로 감춰져서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 정말로 재스퍼 경은 격노해 있었다.
안에 있는 것은 경 혼자였다.
재스퍼 경은 영국 외무부 프랑스국의
국장이다. 도버 해협 너머에 있는 그
나라와의 사이에는 옛날부터 진정한
우호관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담당국의 책임자조차도 우호적인 감정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그 혼란한 나라의 인물,
동태, 야심, 그리고 때로는 그 책략을 연구
분석하여 사무차관에게 보고해서
외무장관의 귀에 들아가도록 하는 쪽에
중점을 두고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첫째 임무로 되어 있었다.
물론 경은 외교관으로서 요구되는 온갖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잖고는
외무부의 국장 같은 요직을 차지할 수는
없다. 프랑스 이외의 중요 각국에서 활약한
있었지만 그때마다 상사들의 그것과 멋지게
일치하는 정치적 판단의 건전성 등등.
훌륭한 경력과 자랑스러운 업적들.
지금까지 한 번도 공적으로는 결정적인
과오를 저지른 적도 없으며, 타이밍 나쁘게
자기 혼자만 옳았던 적도 없었다. 또,
혼자서 유별나게 지지를 하거나, 외무부
고관들 사이에서 주류를 이루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의견을 주장하는 그런
실수를 한 적도 없다.
나중에 외무차관보가 된 주독 대사관
1등서기관의 혼기를 놓친 딸과 결혼한 일도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았다. 1937년에 그가
베를린에서 외무부에 보낸, 독일의
재군비는 서유럽의 장래에 정치적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 불운한 각서가
덕분이었다. 전시중 외무부에서 한때 발칸
반도 담당으로 배속되어 있을 때, 유고의
빨치산인 미카이로비치 일파를 지원하도록
강력히 진언한 일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수상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현지에
낙하산으로 내려가서 실정을 탐사하고 온
피츠로이 매클린이라는 일개 대위가
제안한, 티토라는 가엾은 공산주의자를
지원해야 한다는 권고 쪽을 채택했다. 그
결과 젊은 재스퍼는 프랑스국으로 전속되어
버렸다. 프랑스국에서 그는 알제리의 지로
장군을 지원해야 된다는 의견을 설명하고
다녀서 주목을 받았다. 분명히 그것은
뛰어난 정책이긴 했다. 다만 애석하게도
당시 런던에 망명해서 자유 프랑스군을
조직하려는 노력을 계속하던 또 한 사람,
공작 때문에 어이없이 밀려나고 말았다.
어째서 처칠 수상은 그 오만한 남자의 편을
들었는지 외교의 전문가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도움이 되는
대상은 물론 아니고, 재스퍼 경(오랜
외교계 생활의 공적에 의해서 1961년에
나이트(騎士) 작위를 받았다)이 외무부
프랑스국장으로서 지낸 자격에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경에게 있어서는
프랑스와 프랑스에 관련된 모든 것이
혐오의 대상일 뿐이었다. 1963년 1월 14일,
드골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영국의
EC가입을 거부하는 바람에 재스퍼 경은
면목없이 되어 외무장관 앞에 나가서 입도
열 수 없게 되었지만, 그 사건으로
증오를 느끼게 되었다. 그 미움에 비하면
그때까지 지녔던 프랑스 일반에 대한
혐오감 같은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재스퍼 경은
창가에서 홱 돌아섰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있던 서류를 지금까지 읽고 있었던 것처럼
손에 들었다.
"들어오시오."
거기에 나타난 것은 아직 젊은
사무관이었다. 그는 손을 뒤로 하고 문을
닫은 다음 책상으로 다가왔다. 재스퍼 경은
안경 렌즈에 넣은 반달형 근시 렌즈 위로
흘끗 청년을 보았다.
"오, 로이드. 방금 자네가 어젯밤에 철해
놓은 보고서를 읽고 있던 참이야.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어. 프랑스의
협조 요청 말일세. 그것이 특별국의
총경에게로 돌려지고, 총경은 SIS의 젊은
사무관에게, 물론 비공식으로 의논해
왔다는 거지, 그렇지?"
"예, 그렇습니다."
로이드는 창가에 서서 지금 처음 보는
듯한 태도로 보고서에 눈을 주고 있는 늙은
외교관의 깡마른 몸을 응시했다. 재스퍼
경은 이미 내용을 알고 있다. 이 차디찬
태도는 포즈에 불과한 것이라고 그는
추측했다.
"그리고 그 사무관은 자기의 권한 밖의
일을 상사에게 한마디 양해도 없이 특별국
담당관에게 알려 주었고. 더구나 있을 수
없는 것은, 그 내용의 근거는
비즈니스맨으로 생각되는 한 영국인이 실은
구체적인 증거도 없는 풍문이야. 맞나?"
이 노인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 . 로이드는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경이 노리고 있는 것은 다음의
말로써 곧 명백해졌다.
"나는 너무 뜻밖일세, 로이드. 아무리
비공식적인 것일지라도 어제 아침 우리
나라로 요청되어 온 것이 직접 관계되는
우리 국에 보고된 게 24시간 뒤라니 대체
어찌된 것인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나?"
로이드는 경의 말을 이해했다. 요컨대
그의 세력권에 양해 없이 들어선 것에 대해
화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는 잊지 않았다.
20년 이상 관료조직 속에 있으면서
것이다. 관료들은 국사(國事)보다는 그러한
싸움에 더 정력을 쏟게 되며, 거기에
정통한 경을 화나게 하면 어떤 보복이
있을지 모른다.
"화를 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만, 토머스
총경으로부터 그......비공식적인 요청이
있었던 것은 어젯밤 9시이고, 그 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한밤중이었습니다."
"그랬었군. 하지만 자네는 토머스의
요청에 대해서도 12시간 전에 대답을
해주었잖나. 그건 무슨 이유에서인가?"
"총경이 저에게 협조를 요청한 것은
조사상의 단순한 지표를 구하기
위해서이고, 각 부서간의 협조라는 의미로
흔히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했다고? 자네가?"
버렸다. 노여움이 역력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서간의 협조라고 했는데, SIS와
프랑스국 사이에는 그런 것이 없단
말일세."
"저의 보고서를 손에 들고 계시지
않습니까?"
"좀 늦었어. 너무 늦었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로이드는 반격해 주려고 마음먹었다.
토머스에게 협조하기 전에 상사와 의논을
했어야 했다고 하더라도, 그 상사란 SIS의
상사이지 재스퍼 경은 아닌 것이다. 게다가
SIS의 책임자는 부하들에게 인기가 있지만,
외무부의 늙은 너구리들에게는 미움을 사고
있다. 부하가 그들에게 질책당하는 것을
"무엇에 늦었다고 하시는 겁니까?"
재스퍼 경은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토머스의 요청에
응하는 것을 막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고는 말할 수는 없었다.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지만, 이
보고서의 내용은 한 영국 시민의 명예에
관한 문제야.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 같은
것은 추호도 없는 사람이야. 그런데도
이렇게 이름을 퍼뜨려 살인에 관계되는
풍문을 활자화하는 것이 잘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은가?"
"특별국의 요청에 응하여 이름을
밝혔다고 해서 그것이 퍼뜨린 것이
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재스퍼 경은 분노를 누르려고 입술을 꼭
호락호락하지는 않아. 앞으로 경계할
필요가 있어 -- . 그는 간신히 터지려는
분통을 참아냈다.
"그렇군. 특별국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자네의 생각은 훌륭하지만, 그전에
한마디라도 의논이 있었더라면 더욱
좋았겠지."
"어째서 경과 의논하지 않았느냐고
물으시는 겁니까?"
재스퍼 경은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그래, 바로 그것을 묻고 있는 거야."
"재스퍼 경,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실례인 줄 압니다만, 저는 SIS의
직원입니다. 저의 어젯밤 행동이 마음에 안
드시면 그에 대한 불만은 저에게 말씀하실
것이 절차상 옳지 않습니까?"
절차라고? 이 애송이는 프랑스 국장에
대해서 절차에 대한 것을 가르칠 셈인가?
"물론 그렇게 하겠네." 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히 그렇게 하겠어."
로이드는 이만 물러가겠다고도 않고
유유히 그 방에서 나왔다. 나중에 보스에게
꾸중 들을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그때의
토머스의 요청은 긴급을 요하는
것이었으며, 일각의 유예도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고 변명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보스가 적당한 채널을 통해야만
했다고 생각한다면 책임을 혼자서 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일지라도 질책을
당하는 것은 보스로부터이지 재스퍼
경에게서는 아니다. 토머스 씨는 정말
그러나 재스퍼 경 쪽은 문제를 삼을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이고 있었다.
기술적으로는 그의 주장대로 칼스로프에
관한 정보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파일에 묻혀 있었다고 하더라도 역시
상사의 재가를 얻은 다음에 내보내야만
한다. 그 상사란 반드시 그 자신이
아닐지라도 상관없지만. 프랑스국장은
SIS의 정보 보고를 받는 한 사람이지만
SIS의 관리자는 아니다. 물론 그는 SIS를
좌지우지하는 그 성질이 고약한
천재(이것은 누군가가 SIS의 보스를 촌평한
말이다)에게 불만을 터뜨려서 로이드를
호통칠 수는 있다. 적어도 그 애송이의
경력에는 흠이 생기겠지. 그러나 동시에
자기 사람을 자기의 양해 없이 오라 가라
펄펄 뛸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우울했다. 게다가 SIS의 보스는 정부
고위층에 아주 가깝다는 소문도 있다.
브레이드스에서 함께 트럼프를 했다거니,
요크셔로 사냥을 갔다거니. 더구나 지금은
글로리어스 투엘프스(영국에서
뇌조(雷鳥)의 사냥이 시작되는 8월 12일)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는 그때
열리는 파티에 초대되려고 각 방면에
공작하고 있었다. 이런 때이니 이 문제는
내버려두는 편이 좋아 -- .
"어쨌든 체면에 상처는 입었어도 피는
흐르지 않았으니."
그는 근위기병의 퍼레이드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흐르지 않으니까요."
오후 1시 지나 클럽에서 있는 점심에
초대한 손님에게 그는 말했다.
"앞으로는 그들도 프랑스국과
협력하겠지요. 그러나 SIS가 일을 너무
많이 하는군요. 큰소리로 할 이야기는
못됩니다만."
그는 이 농담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불운이었던 것은 손님의 신분을 좀더
철저히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손님은
수상 주변과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경시총감의 보고서와 재스퍼 경의 SIS에
대한 촌평은 의회에서 답변을 끝내고 오후
4시 전에 다우닝 가(街) 10번지의 수상
관저로 돌아온 수상의 눈과 귀에 거의
동시에 들어갔다. 그리고 4시 10분,
토머스는 이날 아침부터 계속 이름밖에
모르는 어떤 남자에 대한 것을 조사하고
있었다. 해외여행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먼저 페티 프랑스의
여권발행국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아침
9시의 집무 시작과 동시에 그리로 뛰어든
그는 찰스 칼스로프가 제출한 여권
신청서를 복사해서 받았다. 그런데 찰스
칼스로프라는 이름의 신청자가 여섯이나
있었으며, 서류도 여섯 장이나 나왔다.
더구나 미들 네임이 모두 틀리므로 여섯
명이 모두 다른 사람인 것이 된다. 그는 또
각자의 사진을 열람했다. 이 사진은
복사하지 않고 반환해야 된다고 했다.
여권 중 하나는 1961년 1월에 신청된
것이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보아서 사건과
그 찰스 칼스로프가 다른 신청서를 냈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그가 다른 이름으로
여권을 얻어 도미니카에 입국했을 가능성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도미니카에서 다른 이름을 쓰고 있었다면,
트루히요 암살을 둘러싼 소문 중에서
칼스로프라고 지명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토머스는 일단 이 남자는
제외시키기로 했다.
다른 다섯 명 중에서 하나는 나이가 너무
들었다. 1963년 8월 현재 65세였다. 문제는
남은 네 사람이다. 르베르가 알려 준 큰
키에 금발이라는 특징과 일치하고 안
하고에 관계없이 토머스는 제거법을 쓰기로
했다. 만일 여섯 명 전원이 제거되어
재칼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해도,
그것이 오히려 좋을지도 모른다.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르베르에게 그렇게
대답할 수 있으니까.
신청서에 기재되어 있는 주소는 런던
시내의 것이 둘, 지방의 것이 둘. 그러나
그저 불쑥 전화를 걸어서 찰스 칼스로프
씨를 대달라고 해놓고는 1961년에
도미니카에 갔었냐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령 간 적이 있었어도 아니라고
하면 그뿐이니까. 또 이 네 사람은
하나같이 직업란에 '비즈니스맨'이라고
기입해 놓았지만, 이것도 아무런 증거나
단서가 될 수는 없다. 당시 도미니카의
술집에서 수군거리던 소문에 의하면 분명히
비즈니스맨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것도
믿을 만한 것이 못되고, 틀렸을 가능성도
이날 오전중, 토머스의 의뢰를 받은
지방의 두 경찰서에서는 각각 관할 내에
주소를 둔 두 사람의 카스로프에 대해서
조사를 진행했다. 한 사람은 근무처에서
형사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주말을
이용해서 가족과 간단한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점심시간에 형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서 여권의 조사를 받았지만,
1960년에서 61년 사이에 도미니카 공화국에
출입국했다는 기재는 없었다. 여권은 두
번밖에 쓰지 않았다. 한번은 마조르카, 또
한번은 코스타 브라바로 여행했을 때이다.
다시 근무처인 비누공장으로 조회해 본
결과 그는 10년 전부터 경리부에서 일하고
있으며, 1961년 1월은 정기휴일 이외에는
하루도 쉰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블랙풀 시의 호텔에 묵고 있었다. 여권은
집에 있다고 하기에 옆집 사람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하고서 책상 서랍 가장 위쪽에
들어 있는 여권을 형사가 조사했으나,
도미니카 경찰의 스탬프 같은 것은
어디에도 찍혀 있지 않았다. 근무처에
알아보았더니, 그는 타이프라이터의
수리공으로 1961년 중에는 여름 휴가
이외에는 회사를 쉰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건강보험증이나 출근부도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었다.
런던 시내에 사는 두 사람의 찰스
칼스로프 중에서 하나는 캐트퍼드에서
채소가게를 하고 있었다. 대인관계가
능수능란한 두 명의 사복형사가 찾아갔을
때에 그는 마침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여권을 가지고 내려왔다. 그러나 이 또한
다른 둘과 마찬가지로 도미니카에 갔었다는
기록은 없었다. 채소가게 주인은 그 섬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네 번째의, 그리고 최후의 칼스로프는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는 않았다. 4년 전의
여권 신청서에 기재되어 있는 주소는
하이게이트의 아파트였다. 그곳을 관리하고
있는 부동산사무소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1960년 12월에 그 아파트에서 나갔으며,
이사간 곳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미들 네임은 알고 있었기에
토머스는 그것에 의지해서 조사를
계속했다. 전화번호부에는 올라 있지
않았으나 특별국의 권위를 내세워 체신부에
조사시켜 CH 칼스로프라는 인물이 서런던에
머리글자는 찰스 해럴드라는 이 마지막
칼스로프의 그것과도 일치한다. 그래서
토머스는 서(西) 런던 구청에 문의했다.
전화를 받은 구청 직원은 분명히 찰스
해럴드 칼스로프라는 인물이 그 주소의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선거인명단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즉각 그 아파트에 형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 플랫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고, 아무리 벨을 눌러도 응답이
없었다. 아파트의 주민은 칼스로프가
어디를 갔는지 아무도 몰랐다. 헛걸음을 한
순찰차가 본청으로 돌아왔기에 토머스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다. 세무서에 찰스
해럴드 칼스로프의 세금 환부금에 대한
기록을 조사해 달라고 의뢰한 것이다. 그가
근무처이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토머스는
수화기를 들고 한동안 듣고만 있었는데,
갑자기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이 나에게?"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개인적으로? 아, 물론 가지. 5분 뒤?
그럼, 나중에."
토머스는 경시청을 뛰어나가 거칠게 코를
풀면서 의사당 앞 광장을 가로질렀다.
여름이 되었는데도 감기가 낫기는 고사하고
점점 심해져 가고 있었다. 광장에서 화이트
홀 가(街)로 나아가 첫번째 모퉁이를
왼쪽으로 돌아서 다우닝 가로 들어섰다.
수상 관저가 있는 이 조그만 막다른 골목은
언제나 햇볕이 들지 않고 음침하고 좀
없이 불평이나 해대는 하릴없는 무리들이
우악스러운 경관 두 사람에게 밀려
한쪽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들은 공문서를
가지고 오는 공직자들을 바라보면서 혹시
수상의 모습을 창 너머로라도 살짝 볼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싶어서 언제까지고 버티고
있는 것이다.
토머스는 길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좁은 잔디밭으로 둘러싸인 앞뜰을
가로질렀다. 거기에 다우닝 가 10번지의
뒷문이 있었다. 그는 문 옆에 있는 버저를
눌렀다. 곧 문을 연 거구의 경사가 그를
보자 경례를 붙였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즉시 드시도록
할로비 경호대장이 말씀하셨습니다."
제임스 할로비는 몇 분 전에 그에게
경호대장이다. 41세 치고는 젊게 보이는,
핸섬하고 아직도 퍼블릭 스쿨의 넥타이를
매고 있는 감상적인 사람이지만,
경찰관으로서는 발군의 실적을 남긴
인물이다. 계급은 토머스와 같은 총경이다.
그는 일어나서 토머스를 맞았다.
"오, 브린, 오랜만이군." 그는 부하 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마워,
이젠 됐어."
경사는 물러가면서 문을 닫았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하고 토머스가
물었다.
할로비는 깜짝 놀라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묻고 싶다네. 15분 전에 수상께서
전화를 했는데, 자네 이름을 대면서 곧
일을 하고 있나?"
토머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라면
하나밖에 없지만, 이렇게 빨리 수상의 귀에
들어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수상이
경호대장에게도 밝히지 않았다면 자기의
입으로 말할 수는 없다.
"글쎄, 전혀 짐작도 안되는군."
할로비는 수화기를 들고 수상 집무실을
대달라고 했다. 교환대에서 연결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
"할로비입니다. 토머스 총경이
왔습니다...... 예, 지금 곧."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곧 방으로 와 달라고 하시는군. 역시,
자네,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지? 아까부터
아니야. 그럼, 가세."
할로비는 앞장서서 방을 나가 복도
막다른 곳에 있는 베이지색 문 쪽으로
걸어갔다. 마침 안에서 나온 남자 비서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열린 문을 잡은 채
한 발 물러섰다.
할로비는 토머스를 안으로 들여보내면서
분명한 소리로, "토머스 총경입니다, 수상
각하." 하고 말하고는 물러났다.
토머스는 손을 뒤로 돌려서 문을 닫았다.
그곳은 천장이 높고, 내부장식이
차분하고 조용한 방이었다. 여기저기에
책과 서류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고, 파이프
담배와 내장재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상의 집무실이라기보다는 대학의 학장
서재라고 하는 편이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불러서 미안하네. 앉게나."
"실례합니다."
책상 앞에 있는 등받이가 직각인 의자에
토머스는 앉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수상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1 대
1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축 늘어진
눈꺼풀 밑에 슬픈 듯한, 풀죽은 듯한 눈이
있었다. 아니, 장거리 경주를 뛰고 난
경주견 같은 인상이었다. 수상은 말없이
책상으로 돌아와서 그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화이트홀(중앙관청가)에서는
수상의 건강이 좋지 않으며, 그것은 바로
그 킬러 사건의 진구렁에서 간신히 정권을
지켜온 고생 때문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킬러 사건은 간신히 정리가 되었지만,
아직도 여기저기서 그 화재가 끊이지 않고
초췌감과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애를 본
토머스는 놀랐다.
"토머스, 어제 아침 프랑스 사법경찰의
간부에게서 온 협조 요청 때문에 자네가
그로 말미암아 조사를 하고 있는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수상 각하."
"프랑스의 치안당국은 어떤 인물, OAS에
고용되었다고 생각되는 프로 암살자가
가까운 장래에 프랑스 국내에서 임무를
수행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여 우리 나라에
협조를 요청해 왔다...... 그런 이야기지?"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에서 온 요청은 그런 프로
살인자로서 정체가 판명되어 있는 인물이
있다면 알려 달라는 것이고, 왜 그것을
설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청의 배후에 있는 것은 당연히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자네는
어떻게 해석하나?"
"수상 각하의 상상과 같습니다"
"당연하지. 프랑스의 당국자가 그런
인물의 정체를 알아내려는 유일한 이유는
무엇인가? 특별히 천재가 아니라도 쉽게
추측할 수가 있어. 그래, 그 인물이 노리고
있는 상대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살인자는 대통령 암살을 위해서 고용된
것이라고 프랑스 당국에서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맞는 말일세. 암살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
"예, 이미 6번이나 그런 시도가 있었다고
수상은 눈앞에 있는 서류를 쳐다보았다.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닥친 이
사건의 단서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데, 토머스, 자네의 조사가 좀더
미지근하고 지지부진한 것이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인물이 우리 나라의 고관 중에
있는 모양이야. 알고 있나?"
토머스는 놀랐다.
"모르고 있습니다."
대체 수상은 어디서 그런 것을 들었을까
?
"현재까지의 경과를 들려주게나."
토머스는 조사가 범죄기록센터에서
특별국으로 옮겨진 경위, 로이드와 접촉한
것, 칼스로프라는 인물의 일, 그리고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다 듣고 난 수상은 의자에서 일어나서
밝은 햇빛을 받으며 정적에 싸여 있는
잔디밭 뜰 쪽으로 나 있는 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수상은 오랜 시간 뜰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하고
토머스는 의아했다. 아마도 현재 300마일
저쪽, 그의 나라를 통솔하고 있는 그
오만한 프랑스인과 지난날 함께 산책했던
알제리의 해안을 생각하고 있겠지. 20년 전
두 사람은 한창 일할 장년의 나이였으리라.
그 뒤 실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고, 두
사람 사이에도 갖가지 일이 있었다. 어쩌면
화려한 엘리제궁에서 프랑스 위에 군림하는
바로 그 인물이, 자신의 꿈을 이룬 충만한
가입을 실현시켜 정치생활의 마지막 꽃을
피우려고 한 영국 수상의 기대를 잘 계산된
야한 언사로 무참히 짓밟아 버린 8개월
전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한 매춘부와 뚜쟁이에 의해서 영국
정부가 붕괴의 위기에 빠졌었던 고뇌 속의
지난 몇 개월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상은 싫든 좋든 하나의 규범을 가진
세계에 태어나서 그 규범을 믿고 그것에
따라서 살아온 노인이다. 그런데 이제는
세상이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새로운
생각을 가진 새 인종이 그 새로운 세계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미
과거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새로운 세계에도 새로운 규범이 이미
생겨났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고 있는
것이며, 알아도 원치 않을 것이다.
지금 해가 잘 들어오는 뜰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수술은 이미 더는 늦출
수가 없고, 수술과 함께 수상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머지않아 세상은
새로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 이미 많은
것들이 그들의 손에 넘어가 있다. 그러나
뚜쟁이나 매춘부, 스파이......
암살자에게도 넘어가는 것일까 ?
말없이 기다리고 있는 토머스의 눈에
수상의 어깨가 문득 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수상은 돌아섰다.
"토머스, 드골 장군은 나의 친구야.
장군의 신변에 조금이라도 위험이 닥치고,
더구나 그 위험이 영국인에 의해서
진행시켜 주기 바라네. 관계 부처의
책임자에게는 각 조직이 최선을 다해
협조하도록 내가 특별지시를 해두겠어.
그러니까 협조가 필요할 경우에는 즉시
의뢰하면 되네. 또, 조사의 진행에 필요한
자료는 어느 부서에 있는 것이라도
마음대로 써도 좋아. 모든 권한을 자네에게
주겠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한 프랑스
측과는 자유롭게 협조하게나. 이것은
수상의 명령일세. 그리고 프랑스 측이 쫓고
있는 인물이 누구이든, 영국 시민이
아니거나 또한 영국을 기지로 행동하고
있지 않은 것이 판명되었을 경우, 그때는
조사를 끝내도 좋네. 그리고 직접 내게
보고해 주게. 그러나 만일에 이
칼스로프가, 또는 영국의 여권을 소지하고
인물이라고 생각될 때에는 자네가 그
인물을 막아야만 하네. 어떤 자든 절대로
막지 않으면 안되네. 알겠는가?"
이 이상 명확한 지시는 있을 수 없다.
어떤 정보인가가 수상의 귀에 들어가서
이런 지시가 내려진 것이라고 토머스는
추리했다. 그 정보란 조사의 빠른 진전을
바라지 않는 인간이 있다고 하는 수수께끼
같은 말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물론 확신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수상은 고개를 끄덕여서 면담이 끝났음을
알렸다. 토머스는 일어나서 문 있는 곳까지
가더니 거기서 갑자기 멈춰섰다.
"저...... 수상 각하."
"뭔가?"
도미니카에서 있었다는 그 칼스로프에 관한
소문에 관한 겁니다. 그것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을 프랑스에 알려도 괜찮을지요."
"그 남자의 과거의 행동을 분석한 결과
프랑스에서 찾고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할
만한 근거가 현시점에서 발견되었는가?"
"아닙니다. 2년 전의 소문 말고는 찰스
칼스로프를 의심해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그 거처를 뒤쫓고 있는
칼스로프 역시 과연 1961년 1월에 카리브
쪽에 있었던 칼스로프와 동일인물인지
아닌지도 판명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동일인물이 아닐 때에는 조사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상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2년이나 지나 버린, 아무런 뒷받침도
측을 공연히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좋지
않아. '뒷받침이 없는'이라는 내 말을 잘
음미하도록 하게. 어쨌든 조사를 진행해
주게. 어느 칼스로프라도 좋아. 트루히요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소문을 뒷받침할
정보를 얻는 대로 즉시 프랑스에 그 사실을
연락하고, 어디에 있든 그 인물을
잡아내도록."
"알겠습니다."
"미안하지만 해로비에게 이리로 오라고
해주게나. 즉시 자네의 권한을 보증하는
명령을 내리고 싶으니까."
그 뒤 저녁때까지 토머스의 사무실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특별국에서
가려뽑은 6명의 경감으로 기동부대를
편성했다. 한 사람은 휴가마저 취소되어
기밀정보를 훔쳐 동구의 어느 나라 대사관
소속 무관에게 팔아넘겼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의 자택을 감시하고 있던 두
사람은 그 임무가 취소되고, 또 다른 두
사람은 지난번 토머스와 함께 이름 없는
살인자를 찾기 위하여 특별국의 자료를
조사한 이들이고, 마지막 하나는 마침
비번이라 자택의 온실 손질을 하고 있는
것을 전화로 불러 즉시 사무실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토머스는 전원을 모아 놓고 자세하게
임무의 내용을 설명하고는 누설 금지를
맹세케 하고, 그리고는 끊임없이 걸려 오는
전화에 응답했다. 오후 6시 지나서, 찰스
해럴드 칼스로프의 세금 환부에 관한
서류가 발견되었다는 연락이 세무서에서
받으러 갔다. 그리고 칼스로프의 행방을
찾기 위하여 그의 아파트 부근으로
탐문수사를 나갔던 또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네 사람은 전화에 매달려서 일에
정신이 없었다. 4년 전의 여권 신청서에
첨부된 사진은 사진반에서 복사하여 각자
한 장씩 호주머니에 넣었다.
용의자의 납세 기록을 보니 작년에는
계속 실업자였으며, 재작년은 외국에 가
있었다. 그러나 1960년부터 61년에 걸친
회계연도에는 그 대부분을 영국 유수의
소형화기(小型火器) 제조회사의 수출판매를
맡고 있는 조그만 회사에 적을 두고
있었다. 토머스는 곧 그 회사의 전무
이름을 조사했다. 전무는 서리 군(郡)의
별장에 묵고 있었다. 곧 전화로 면담
공용차로 버지니아 워터 마을로 향했다.
패트릭 몬슨은 죽음의 상인이라는
이미지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풍모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흥청거리게 돈이 벌리는 죽음의 상인이
죽음의 신에 둘러싸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리가 없다. 몬슨의 입을 통해
칼스로프가 1년 못되게 그 회사에
다녔었다는 것을 알았다. 더 중요한 것은
1960년 12월부터 61년 1월까지 육군에서
불하된 기관단총을 트루히요의 경찰대에
팔기 위해서 도미니카의 수도인 시우더드
트루히요에 파견되었었다는 사실이다.
토머스는 불쾌한 얼굴로 몬슨을 보았다.
그런 무기가 뒤에 어떻게 쓰였던지 관계
없다고 억지로 자신에게 타일렀지만,
칼스로프는 어째서 허둥지둥 도미니카를
떠났나?"
몬슨은 이 질문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글쎄, 그것은 트루히요가 살해되었기
때문이지, 말할 것도 없이. 몇 시간 뒤에
그의 정권이 무너졌으니 말이다. 구정권에
무기와 탄약을 팔기 위해서 있던 사람을
신정권에서 어떤 눈으로 볼 것인가는 말 안
해도 알 일이니, 칼스로프가 즉시 국외로
탈출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토머스는 생각에 잠겼다. 그럴듯한
핑계다. 나중에, 칼스로프가 보고한 바에
의하면, 장군이 매복중이던 자에게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전해졌을 때 그는
경찰대의 대장실에서 흥정중이었다고 하며,
경찰대장은 파랗게 질려서 언제라도 탈출할
영지로 허둥지둥 돌아갔다. 몇 시간 뒤에는
구정권의 추종자들을 피로 제사지내려는
폭도의 무리가 거리를 메웠다. 칼스로프는
어부를 매수하여 가까스로 섬을 탈출했다는
거였다.
다 듣고 난 토머스는 물었다. 칼스로프는
어째서 회사를 그만두었나? 해고시켰다.
왜? 몬슨은 한동안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총경님, 중고 무기 장사는 경쟁이
치열합니다. 정말 먹느냐 먹히느냐이지요.
경쟁자가 무엇을 팔려고 하며, 또 값은
얼마인지,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같은
고객을 잡고 있는 이들에게는
사활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점에서
칼스로프는 회사에 충실치 못했다고나
런던 시내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토머스는 그의 설명을 되십어 보았다.
도미니카에서 허둥지둥 도망쳐 나온 이유에
대해서 당시 칼스로프가 했다는 설명은
이치에 맞는다. 그것은 그의 이름이
트루히요 암살을 둘러싸고 거론되고 있다는
SIS 요원의 보고와 모순되며,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한편, 몬슨의 이야기에 의하면
칼스로프는 배신행위를 서슴지 않는 악당인
모양이다. 그는 무기회사의 대표로서
무기를 팔러 섬으로 건너가긴 했지만,
동시에 혁명군 쪽과도 통했었던 것은
아닐까? 몬슨이 한 말 가운데 토머스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칼스로프는 입사했을 때에 라이플에
사격의 명수라면 라이플의 전문가라야
한다. 물론 입사 후에 사격을 익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1년이 채 못되는
시간이라면 풋내기와 다를 바 없다. 반(反)
트루히요의 빨치산이 고속으로 달리는 차를
단 한 발로 저지할 것을 기대하고 풋내기와
다를 바 없는 인물을 고용할까? 고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 아닐까?
칼스로프의 설명이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닐까?
토머스는 혼자서 어깨를 으쓱했다.
이것으로는 아무런 증명도, 또 반증도 될
수 없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다고
생각하니 토머스는 입맛이 썼다.
그러나 사무실에 돌아가자 그의 기분을
일시에 바꾸어 놓을 만한 뉴스가
탐문수사를 나갔던 경감에게서 전화연락이
들어온 것이다. 종일 일하느라고 밖에 나가
있던 이웃 여자가 귀가하여 그럴듯한
이야기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 여자의
증언에 의하면 칼스로프는 며칠 전
스코틀랜드에 놀러 간다고 하면서 아파트를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문 앞에 세워놓았던
차의 뒷좌석에는 낚싯대 비슷한 것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낚싯대? 더운 사무실 안에서 토머스는
갑자기 전신에 오한이 스치고 지나갔다.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다른 경감이
돌아왔다.
"총경님."
"뭔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습니다만."
"총경님은 프랑스어를 할 줄 아십니까?"
"아니, 자네는?"
"그런대로 하는 편이지요. 어머니가
프랑스인이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프랑스의 사법경찰이 찾고 있는 그
살인자에게는 재칼이라는 암호명이 붙어
있었다지요?"
"그것이 어쨌다는 건가?"
"예. 프랑스어로는 재칼을 '샤칼'이라고
하거든요. 철자로는 'CHACAL'입니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녀석은
말장난이라고 할까 엉터리 농담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좋아하는 놈일지도
모릅니다. 이 CHACAL은 찰스(CHARLES)의
처음 석 자와 칼스로프(CALTHROP)의 처음
석 자를 -- ."
토머스는 사무실이 떠나갈 듯한 재채기를
했다. 그리고 황급히 수화기 쪽으로 손을
뻗었다.
============================= 03
재칼의 날(하)
-포사이즈 장편추리소설
----- 차 례 -----
제 15 장
제 16 장
제 17 장
제 18 장
제 19 장
제 20 장
제 21 장
제 15 장
파리의 프랑스 내무부에서 있는 세 번째
회의는 내무장관이 외무부 관계의
리셉션에서 돌아오는 도중, 교통체증 속에
끼어들어 늦어졌기 때문에 10시가 지나서야
열렸다. 내무장관은 자리에 앉자마자
회의를 시작했다. 먼저 첫번째로 보고를 한
것은 SDECE 국장인 기보 장군이었다.
장군의 보고는 간결하면서도 요령 있는
것이었다. 전 나치의 살인자 카셀의 거처가
SDECE의 마드리드 지부 요원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마드리드 시내 고급 아파트의
가장 위층에서 조용히 은퇴생활을 보내고
있는 카셀은 역시 전 친위대 장교와
공동으로 사업을 해서 성공해 있으며,
않고 있다. SDECE의 마드리드 지부는 더욱
철저히 조사하라는 지시에 따라서 조사를
진행시켰지만, 그가 OAS와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발견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카셀은 고령으로서 때때로
다리의 류머티스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더구나 그 많은 음주량으로 보아서도 그가
재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렵다.
기보 장군의 보고가 끝남과 동시에
참석자의 시선은 일제히 르베르에게로
쏠렸다. 르베르의 보고는 신통치 않았다.
그날 사법경찰에 연락을 해온 것은 24시간
전에 가능성이 있다는 인물을 통보한 4개국
중에서 서독을 제외한 3개국이었다. 먼저,
미국이 알려 온 찰스 아놀드. 이 무기상의
세일즈맨은 현재 콜롬비아의 미 육군에서
참모본부에 팔아 넘기려고 공작하고 있다.
그의 행동은 항상 CIA의 감시하에 있으며,
현재로서는 그가 무기 판매 이외의 일을
획책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찰스
아놀드에 관한 자료는 혹시나 해서
비텔리노의 자료와 함께 텔렉스로 파리로
전성되어 왔다. 비텔리노의 경우도 역시
자료에 의하면 부정적이다. 이 코사
노스트라의 전 살인자의 거처는 아직
불명이지만, 키가 160cm에 옆으로만 퍼진
땅딸보로서, 검은 머리칼에 꺼벙하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갖고 있다. 이것은 빈의
팡숑 호텔 프런트 직원이 말한 재칼의
특징과 너무도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제외해도 좋겠다고 르베르는 생각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서아프리카의 모 국내에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회사의 사병대(私兵隊) 대장으로
있다고 한다. 그의 임무는 회사 소유의
광대한 광구의 경계선을 순찰하며 도굴자의
침입을 막는 데에 있다. 어떤 방법을 쓰고
있는지 그 점에 대해서는 심문하지
않았으나, 회사는 그가 일하는 태도에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그가 그
광구 안에 있는 것은 회사측에서 확인하고
있다.
벨기에 경찰도 용의자에 대한 조사를
끝내 놓았다. 카리브 해 연안의 한
대사관에서 보고서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에
의하면 카탕가 정부에 고용되어 있었던 그
살인자는 3개월 전, 과테말라에 있는 어떤
술집에서 싸움에 말려들어 사망했다고
르베르는 각국 경찰에서 온 보고를 모두
소개했다. 파일에서 얼굴을 들자 14쌍의
눈동자가 차갑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전부인가?" 라는 롤랑 대령의
질문은 전원의 기분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 어느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고?" 즉각
생클레아가 내뱉듯이 말했다. "이것은
형사가 할 일이라며 맡겨두라고 큰소리친
결과가 겨우 이거란 말인가?"
그는 방안의 분위기가 자기에게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서
부비에와 르베르를 밉살스러운 듯이
노려보았다. 내무장관은 두 사람을
의식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Q?'?꾁(씈B쭯t*븖2
"애석하게도 그렇게 됐습니다." 하고
르베르가 대답했다.
부비에가 르베르를 대신해서 해명을
시도했다. "르베르는 사실 단서라고는
하나도 없이 가장 찾기 어려운 상대를 찾고
있는 겁니다. 그런 상대는 자기의 일이나
거처를 알리고 다니지 않으니까요."
"그런 정도는 알고 있어." 내무장관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문제는 -- ."
노크소리에 말이 끊겼다. 내무장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긴급한 경우 이외에는
출입금지를 지시해 두었던 것이다.
"예."
문이 열렸다. 사환이 머뭇거리면서 서
있다.
"실례합니다. 르베르 총경님께 전화가
험악한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그는
변명하듯 말했다. "긴급연락인
모양이라서......" 르베르는 일어났다.
"잠깐 실례합니다."
5분도 안되어 르베르는 돌아왔다. 방안의
분위기는 여전히 싸늘했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후속조치에 대해서 격렬한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마침 생클레아 대령이
신랄한 비난을 해대고 있다가 르베르가
자리에 앉자 입을 다물었다. 자그마한
총경은 뒤에 뭔가를 갈겨쓴 봉투를 손에
가지고 있었다.
"겨우 상대의 이름을 알았습니다." 하고
그는 입을 열었다.
회의는 30분 뒤에 끝났지만 그때의
분위기는 경박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연락에 대해 설명을 하자 일동은 긴 여행을
끝내고 마침내 플랫폼에 도착한 기차처럼
훅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들
한결같이 적어도 이제는 구체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극비리에
프랑스 전역에서 찰스 칼스로프를 수색,
찾아내고, 필요한 때에는 그 자리에서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점으로 의견이
일치되었다.
칼스로프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다음날
아침 런던에서 텔렉스로 전송될 것이지만,
그때까지 RG는 칼스로프가 이미 프랑스에
침입해 있을 경우를 생각해서 그의 입국
카드와 숙박 카드를 찾아내는 데 힘을
다하기로 했다. 파리 경시청은 그가 파리
시내의 호텔에 잠복해 있을 경우를
숙박 카드를 점검하기로 했다. 또, DST는
전 프랑스의 국경검문소, 항만, 공항에
칼스로프의 이름과 특징을 알리고 이런
인물을 발견하면 즉시 검거하라고
지시했다. 만일 그가 아직 프랑스에 잠입해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런데로 좋다. 그가
나타날 때까지 완전히 비밀을 유지하고
도착과 동시에 체포하는 거다.
"칼스로프인가 하는 악당은 이미 독안에
든 쥐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야."
그날 밤 생클레아 대령은 잠자리에서 그
말을 정부에게 자랑삼아 했다. 자클린이
겨우 그의 오르가즘을 쏟아내게 하고
잠재운 것은 맨틀피스의 시계가 12시를
치고 8월 14일이 된 뒤였다.
내려놓은 토머스 총경은 이 일을 하기
위해서 끌어모은 6명의 경감을 둘러보았다.
여름밤의 정적 속에 빅벤이 한밤중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토머스는 장장
한 시간에 걸쳐서 오늘밤의 조사에 관해
설명하고 일의 분담을 결정했다. 경감
하나는 칼스로프의 소년 시절에 대해서
조사하기로 되었다. 그 밖에 부모가 있다면
현재 어디에 살고 있는가, 학교는 어디에,
학창시절 군사훈련 때에 사격 성적은
어땠었나, 성격적 특징이며 특별히 뛰어난
점은 무엇인가 등등. 또 한 경감은
청년시절에 관한 것, 학교를 졸업하고
병역에 임해서 -- 근무성적과 사격의 솜씨
-- 제대 후 어떤 직업을 거쳤으며, 해고된
무기회사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는지,
번째와 네 번째 경감은 1961년
무기회사에서 해고된 이후로 어떤 길을
밟아왔는지 그것을 캐기로 했다. 어디서
살면서 누구와 접촉하고, 어디서 어느
정도의 수입이 있었는가? 경찰에는 기록이
없고, 아마 지문도 떠놓은 것이 없을
테니까 가장 최근의 사진이 아무래도
필요했다. 나머지 두 사람은 현 시점의
거처를 찾아내는 일을 맡았다. 아파트에서
지문을
채취하여 어디서 차를 구입했는지를
밝혀내고, 런던시 교통위원회에서
운전면허증 발행의 기록을 체크해 보고,
기록이 없을 경우에는 지방의 관계부서에서
자료를 조사한다. 그 밖에 차의 모양, 몇
년식, 색깔, 번호를 조사하고, 아파트
드라이브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지 등을
체크하고, 다시 도버 해협의 페리 회사를
탐문하고, 모든 항공회사에서 행선지에
관계없이 좌석을 예약한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하기로 했다. 여섯 사람은
열심히 메모했다. 마침내 토머스의 지시가
끝났다. 그들은 일제히 사무실에서 나갔다.
복도로 나간 마지막 두 사람이 옆눈으로
서로 눈짓을 했다.
"골치아픈 일거리를 맡게 되었군."
"그것도 그렇지만, 이 칼스로프라는
녀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 또는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그 부근의 설명이 없다는
것은 이상해."
"이것만은 분명해. 이것은 아주
고위층에서 내려온 명령이야. 칼스로프는
판사를 깨워 가택수색영장에 사인을 받는
데 시간이 걸려서 두 경감이 칼스로프의
아파트에 간 것은 새벽이 가까워서였다. 그
무렵 특별국 사무실에서는 지칠 대로 지친
토머스가 팔걸이 의자에서 졸고 있었으며,
파리에서는 초췌한 얼굴의 르베르가 진한
블랙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두 경감은 곧 그 플랫의 가택수색을
시작했다. 둘 다 모두 베테랑이라 솜씨
좋게 작업이 진행되었다. 먼저 책상 서랍을
하나씩 빼내어 안에 든 것을 시트에
쏟아넣고서 그것을 선별했다. 서랍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알자 다음에는 책상의
몸체 자체를 여기저기 살펴서 비밀장치의
유무를 조사했다. 그 밖의 목제 가구류는
모두 분해해 버렸다. 이 작업이 한바탕
사육장같이 온통 엉망으로 어질러졌다. 한
사람은 거실을, 또 한 사람은 침실을
조사했다. 그곳이 끝나자 다음은 부엌과
욕실이다. 이렇게 가구, 쿠션, 베개,
양복에 이르기까지 조사를 끝낸 다음, 두
사람은 마루, 천장, 그리고 벽까지
찾아보았다. 아침 6시까지 플랫은 완전히
발가벗긴 모습이 되었다. 아파트의 이웃
사람들은 처음에는 층계참에 모여서 의미
있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더니, 어느새
닫혀 있는 문 앞까지 와서 수군수군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감들이 나오자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경감 하나는 압수한 서류며
물건들을 가방에 넣은 채 들고 있었다.
그는 곧 밑으로 내려가서 차를 타고
아파트에 남아있기로 했다. 아파트의
주민은 거의가 직장을 가진 사람들로서,
출근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에 먼저 그들부터
시작했다. 상인들은 뒤로 돌렸다.
토머스는 사무실 바닥에 펼쳐 놓은
칼스로프의 소지품을 한동안 살펴보고
있었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온 경감이
푸른색 표지의 여권을 발견하고는
주워들었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창가로
다가가서 아침 햇살에 비춰 보면서 한장
한장 넘기기 시작했다.
"이걸 잠깐 보십시오."
그는 여권의 어떤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십시오, 여기입니다...... '1960년
12월 입국. 시우더드 트루히요 공항,
시간적으로 일치합니다. 녀석이
재칼입니다."
토머스는 경감에게서 여권을 받아서
여기저기 뒤져보더니 이윽고 문득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녀석이 틀림없어. 그러나 여권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나?"
"아, 그렇군요 -- ."
경감은 마른 침을 삼켰다. 토머스는
절대로 난폭한 말을 쓰지 않았다.
"이 여권을 쓰지 않았다면 무엇으로
돌아다니고 있단 말인가? 이봐, 빨리
전화해. 파리를 불러내!"
같은 날 같은 시각, 재칼은 이미
있었다. 밀라노에서 제노바에 이르는 고속
7호선은 아침 햇살을 받아서 밝게 빛나고
있다. 알파 로메오는 시속 130km로 넓은
차도를 달리고 있다. 타코미터의 바늘은
적색 표시 밑에서 계속 흔들리고 있다.
시원한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있지만, 눈은 선글라스로 보호되어
있다. 도로지도에 의하면
벤티밀리아(반테밀)의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국경까지 210km이며 약 두 시간이면 주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정보다 페이스가 빨랐다. 제노바에
도착한 것이 오전 7시 조금 지나서였고,
항구로 가는 차의 행렬에 휩쓸려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7시 15분에는 시가지를
빠져나와 산레모로 가는 10호선으로
도착했는데, 그때는 이미 차도 많아지고
기온도 올라가 있었다. 10분쯤 기다린 뒤에
세관의 지시에 따라 주차 램프에 차를
넣었다. 여권을 손에 든 경관은 신중하게
그것을 살펴보고는 잠깐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세관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몇
분 지나서 그는 사복을 입은 남자와 함께
나왔다. 여권은 그 사복의 남자가 가지고
있었다.
"봉주르, 무슈."
"봉주르."
"이건 당신 여권이지요?"
"그렇습니다."
사복은 다시 여권을 조사했다.
"프랑스에 오시는 이유는?"
"관광여행입니다. 아직 코트
해안으로서, 칸-니스-모나코 등으로 연결된
리비에라 해안을 가리킨다.)를 가본 적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자신의 차입니까?"
"아니, 렌터카입니다. 사업상 밀라노에
왔다가 예상외로 1주일쯤 시간이 남아서
렌터카로 관광여행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흠, 그럼, 면허증이나 그 밖의 서류는?"
재칼은 국제면허증, 렌터카의 계약서,
그리고 두 종류의 보험증서를 꺼냈다.
사복은 그것들을 꼼꼼하게 조사했다.
"짐을 가지고 계십니까?"
"예, 트렁크에 넣어둔 여행가방 세 개와
아타셰 케이스입니다."
"그것을 모두 세관의 홀로
사복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경관이
여행가방을 꺼내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그리고 둘이서 건물 안으로 운반해
들어갔다. 밀라노를 출발하기 전 낡은 군용
외투와 앙드레 마르탱의 바지와 구두는
한데 뭉쳐서 트렁크의 구석에 처박아
두었었다.(이 가공의 프랑스인 서류는 세
번째 여행가방의 안감 속에 넣고 꿰매어
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개의
여행가방에 들어 있던 의류는 셋으로
나누어 세 개의 여행가방에 적당히 다시
넣어두었었다. 훈장류는 호주머니에 들어
있다.
담당관 두 사람이 가방을 하나씩
검사했다. 그 동안에 재칼은 관광객용의
입국 카드에 필요사항을 기재해 넣었다.
담당관의 주의를 끌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머리 염색약이 들어 있는 병을 손에 들었을
때에는 순간 그도 불안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이런 경우를 가상해서 미리 면도 로션의
병에 바꾸어 넣어둔 거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아직 면도 로션이 유행하지
않았으며, 거리의 상점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담당관은 흘끗 시선을 보냈으나
그대로 말없이 병을 아타셰 케이스 속에
도로 넣었다. 옆눈으로 흘끔 창밖을 보니
다른 담당관이 알파 로메오의 트렁크와
엔진을 살펴보고 있었다. 다행히 섀시
밑에까지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담당관은
트렁크에서 외투 뭉치를 꺼내어 펴보고는
더러운 듯이 쳐다보았으나, 외투는 겨울의
또 낡은 바지는 길가에서 수리라도 할 때에
쓰기 위해서일 거라고 혼자 짐작하고는
트렁크에 도로 넣었다.
재칼이 입국 카드의 기재가 끝남과
동시에 두 담당관은 가방을 닫으면서
사복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복은 입국
카드를 손에 들고서 한번 훑어보고는
여권과 대조한 다음 여권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베르시, 무슈. 봉 보아주."
10분 뒤 이미 알파는 망통 시의 교외에
들어서고 있었다. 오래 된 항구와 요트항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천천히 아침을 마친
뒤 재칼은 코르니시 가도를 모나코, 니스,
칸 방면을 향해서 더듬어 갔다.
런던 경시청 특별국 사무실에서 토머스
휘저으면서 텁수룩하게 자란 턱수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
칼스로프의 거처를 찾아내는 일을 지시받은
경감 두 사람이 앉아 있다. 세 사람은 새로
스카우트해서 팀으로 오게 된 6명의
부장형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특별국 사람들로서,
통상의 임무에서 풀려나고 토머스의 팀에
편입되기로 된 것이다. 오전 9시 조금 지나
이동 지시를 받은 그들이 하나둘 사무실로
들어왔다. 전원이 모이자 토머스는 일에
대해 설명했다.
"우리는 어떤 남자를 찾고 있어. 왜 그
남자를 잡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힐 수는
없으며, 자네들이 알 필요도 없어. 중요한
것은 그 남자를 한시라도 빨리 잡는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해. 가짜 여권으로
여행하고 있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어.
이것이 -- ."
그는 칼스로프의 여권 신청서에 붙어
있었던 사진을 복사해서 확대한 것을 여섯
명에게 건네주었다.
"그 남자의 얼굴이야. 그러나 변장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꼭 이 사진과
같다고는 말할 수 없어. 자네들은 지금부터
여권발행국에 가서 최근에 제출된 신청서의
명단을 받아 오도록. 지난 50일 동안의
것이면 되네. 그것으로 안되면 100일
전까지의 것을 조사하는 거야. 끈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애써 주도록."
거기서 토머스는 가짜 여권을 손에 넣는
가장 흔한 방법에 관해서 죽 설명했다.
녵D?
토머스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명심하게, 출생증명서만을 조사하고
끝내서는 안돼. 사망증명서도 조사해야
되네. 그러니까 여권발행국에서 명단을
받으면 전원이 중앙등록소에 가서 분담하여
사망증명서와 대조하는 거야. 이미 사망한
사람의 이름으로 신청서가 제출되었다면
그자가 범인이야. 자, 당장 가게."
8명의 부하들이 일제히 달려나갔다.
토머스는 곧 여권발행국과 서머셋 하우스에
전화를 걸어서 최대한의 협조를 해주도록
요청했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 그가
빌려온 전기면도기로 수염을 깎고
있으려니까 선임 경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과거 100일 사이에 제출된 여권
신청서는 8,041건이나 있다고 한다. 마침
신청이 많은 것이다. 토머스는 전화를 끊고
손수건을 대고 재채기를 했다.
"지긋지긋한 여름이야."
이날 아침 11시가 지나서 재칼은 칸에
도착했다. 전화를 걸 때에는 언제나
그렇지만, 그는 최고급 호텔을 찾았다. 몇
분 동안 시내를 돌아본 다음 마제스틱
호텔의 앞뜰에 알파를 세웠다. 그리고
머리에 빗질을 하면서 현관 로비로
들어갔다. 한낮이 가까운 시간이라 손님은
거의 나가고 로비는 한산했다. 그의 품위
있는 복장과 자신에 찬 매너는 과연 영국
신사란 이름에 어울렸고, 전화의 부스가
어디냐고 보이에게 물어도 수상쩍은 눈으로
보는 자는 없었다. 전화교환대와
카운터 안에 있던 여자가 다가오는 그의
기척에 얼굴을 들었다.
"파리를 부탁해요. 모리틀 5901입니다."
얼마 뒤 교환수는 교환대 옆에 있는
부스를 손으로 가리키더니 그가 안으로
들어가서 방음이 된 문을 닫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여보세요, 이쪽은 재칼."
"여보세요, 이쪽은 바르미. 아, 전화를
마침 잘 해주었습니다. 오늘로써 벌써
3일째 당신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재칼이 순간 몸이 굳어져서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이 유리
너머로 분명하게 보였다. 10분 정도
통화하는 사이에 그는 거의 입을 열지 않고
오로지 듣고만 있었다. 가끔 짧고 날카롭게
동정을 살피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교환수는 애정소설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리고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얼굴을 든
그녀는 아까 그 신사가 눈앞으로 가로막고
서서 선글라스 저쪽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황급히 교환대의
미터를 보고 통화요금을 알렸다.
보기좋게 몸을 태운 피서객들이 노니는,
햇빛이 눈부신 바다가 눈 아래에 보였다.
재칼은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무슨 깊은 생각에 빠져서 그는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코와르스키에 대한 것은
기억하고 있다. 빈의 팡숑에서 만난 거구의
폴란드인이다. 다만, 그 경호원이 어떻게
그의 암호명과 일의 내용을 알았는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프랑스의 경찰이
또는 코와르스키 자신도 살인자였으니까
본능적으로 그의 정체를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재칼은 현재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을
면밀히 검토해 보았다. 바르미는 일을
포기하고 런던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지만,
스스로 인정했듯이 작전중지를 결정할
권한은 그에게 주지 않았다. 재칼은
처음부터 OAS의 기밀유지능력에 강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에 일어난
일로 그의 불안이 증명된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도 유리한 점은 있었다.
프랑스 관리의 처지와 비교하면 그가 훨씬
유리한 편이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으로
둔갑하여 그 이름으로 취득한 정규의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종류나 되는 증명서와, 또 거기에 걸맞는
변장을 준비해 놓고 있다. 여기에 비하면
프랑스의 르베르 총경인가 하는 사람은
어떤 카드를 가지고 있는가? 대충에 불과한
인상 특징 -- 키가 큰 금발의 외국인,
그것뿐이다. 8월의 프랑스에는 이런
외국인이 그야말로 지천으로 널려 있으니,
그런 특징을 가진 모든 사람을 체포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두 번째로
유리한 점은 프랑스의 경찰이 찰스
칼스로프 명의의 여권을 휴대하고 있는
인물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거라면 얼마든지 찾아다녀도 걱정할 것이
없다. 그는 지금 알렉산더 댓건이며,
그것을 증명할 서류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와르스키가 죽고 없는
그의 정체나 거처를 모르고 있다. 이제
마침내 그는 혼자가 된 것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바라고 있었던 상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위험이 더해 가고 있는 것도
의심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암살의 의도가
노출된 지금, 그는 엄중한 경계태세하에
있는, 말하자면 경비의 보루를 공격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의 계획이
경비망을 뚫을 수 있는가 없는 가이다.
공평하게 저울질해 보고, 그것은
가능하다고 그는 자신을 가졌다.
그래도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는 미해결인
채 남아 있다 -- 여기서 돌아설 것이냐,
아니면 전진할 것이냐? 돌아서면 스위스의
그의 은행구좌에 불입된 25만 달러의
소유권에 대해서 로댕 측과 말썽이
주저하지 않고 그를 몰아세우고 고문을
해서라도 그들이 지정하는 은행에 돈을
불입하는 의뢰서를 쓰게 하고, 그런 뒤에는
살해해 버릴 것이다. 계속 도망다니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든다. 아마 있는 돈을 몽땅
털어도 결말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계획을 추진할 경우에도 일이 끝날
때까지 한층 더한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날이 다가올 수록 마지막 순간에
손을 빼기가 어렵게 된다.
계산서가 왔다. 그는 그것을 보고 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턱없이 비싼
값이다! 이렇게 우아한 곳에서 우아한
생활을 하자면 달러를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모자라겠지. 그는 보석처럼 빛나는
바다를, 물가에서 노니는 날씬한 여자들의
도로에는 캐딜락이며 재규어가 오가고,
차에 탄 사내들은 한쪽 눈으로 인도 위를
헤매며 걸 헌트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생활을 그는 오랫동안 꿈꾸어 왔다.
여행안내소의 창문에 코를 밀어붙이고
장부나 서류집계 등 더럽혀진 바다와는 딴
세상인, 통근전차의 비참함과는 전혀
상관없는 생활을 말해 주는 포스터를 넋을
잃고 바라보면서부터 가져온 동경이었다.
지난 3년 동안, 그는 그 꿈꾸던 세계의
일단에 접해 왔다 -- 화려한 옷,
호화스러운 식사, 멋진 아파트, 스포츠카,
우아한 여성. 지금 여기서 뒤돌아선다면
그런 모든 것을 단념해야 한다.
재칼은 돈을 치르고 팁을 듬뿍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알파 로메오를 타고
향해서 핸들을 꺾었다.
르베르 총경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자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이제는 영원히
잠들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뤼시앙 카롱은 한쪽 구석
간이침대에서 코를 골고 있다. 그는
칼스로프의 행적을 쫓는 일을 철야로
지휘하다가 날이 샐 무렵에 르베르와
교대한 것이다. 르베르의 책상에는 국내의
외국인 처소나 행동을 언제나 체크하고
있는 각 기관에서 들어온 보고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어느 보고서도
내용은 마찬가지였다. 즉, 파리 시내를
포함해서 전국의 호텔에 적어도 그런
이름으로 투숙한 외국인은 없다. 찰스
있지 않고, 어떠한 형태로든 프랑스 관저의
주의를 끌었던 적이 없는 것이다. 보고가
들어올 때마다 르베르는 칼스로프도
한번쯤은 프랑스를 다녀갔을지도 모르니,
그것을 알아낼 때까지 조사를 더
계속하라고 담당관에게 지시했다. 한
번이라도 다녀갔다면 그때의 기록에서
친구의 집이나 마음에 든 호텔 같은 단골
장소가 있는지 없는지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고, 이번에도 역시 가명으로 그런 곳에
묵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날 아침 토머스 총경에게서 온 전화는
예상외로 재칼을 빨리 체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관측을 무참히 짓밟아
버리고 말았다. 또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는 말이 오갔지만, 다행히
오간 것이었다. 정례회의의 참석자들은
아직 찰스 칼스로프라는 이름은 이미
실마리가 안된다는 것을 몰랐다. 이 일을
르베르는 밤 10시부터 열리는 회의에서
보고해야만 한다. 그때 칼스로프를 대신할
다른 이름을 제시하지 못하면 또다시
생클레아의 비웃음을 사고 다른
무리들에게서도 말 없는 비난을 받아야만
한다. 다만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일이 꼭 두 가지가 있었다. 그 하나는
칼스로프의 인상 특징과 정면을 향해 찍은
상반신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짜
여권을 사용하고 있다면 십중팔구 변장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사진이나 특징의 자료는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또 하나는
회의구성원 중 누구나가 르베르가 현재
이외에는 달리 손을 쓸 길이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경찰에서는 칼스로프가 어떤
볼일로 시내에 나간 사이에 아파트가
급습당하자, 아직 다른 여권이 준비되지
않아서 다급히 지하에 숨어 버리고 일은
그만 포기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견을
카롱이 내놓았지만 르베르는 한숨만
쉬었다.
"그래만 준다면 좋겠지만, 그건 아니야.
런던 경시청의 특별국에서 온 연락에
의하면 세면도구나 면도기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하네. 이웃 사람들에게는
낚시여행을 떠난다고 해놓고 아파트를 나간
모양이야. 그런데 자기 이름의 여권을 그냥
두고 간 것은 그것이 이미 필요없기
녀석이야. 나도 차츰 재칼의 사람 됨됨이를
알게 되는 듯한 느낌이야."
영불 양국의 경찰이 눈을 까뒤집고 쫓고
있는 사나이는 그 무렵 교통체증이 심한
코르니시 가도의 칸과 마르세유를 경유하는
구간을 피해서 가려고 마음먹었다. 두
구간은 모두 8월이 되면 지옥의 혼잡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댓건으로 둔갑한 그는 아무런
걱정도, 두려움도 없이 유유히 알파
로메오를 몰고 있었다. 그는 코트
다쥐르에서 시원한 알프스 해안 지방으로
헤치고 들어가서, 거기서 다시 브루고뉴의
산지로 나아갈 예정이었다. 특별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살해 예정일은 아직
멀었고, 예정보다 조금 일찍 프랑스에
그는 칸에서 똑바로 북쪽으로 뻗은 국도
85호선에 차를 올려놓았다. 국도 85호선은
그림 같은 향수의 도시인 그라스를 지나
다시 카스텔란을 향해서 뻗어 있다.
카스텔란에서는 베르동 강의 급류가 몇
마일 상류의 댐에 막혀 그 위세가 사라지고
사보이에서 내려가 카다라슈에 이르러서는
뒤랑스 강에 합류되어 있다. 재칼은
카스텔란에서 다시 바렘으로 빠져, 거기서
조그만 온천 마을인 디뉴에에 이르렀다.
저지대의 열기는 이미 멀리 지나왔고,
산지의 공기는 낮에도 변함없이 달콤하고
시원했다. 차를 세우자 아직도 햇살은
따가웠지만, 달리기 시작하니 시원한
바람이 살갗에 닿는 기분이 상쾌했고,
싱그러운 소나무 냄새와, 농가에서
어렴풋이 어려 있었다.
디뉴를 나온 그는 뒤랑스 강을 건너서
수면이 내려다보이는, 작지만 깔끔한
호스텔에서 점심을 먹었다. 앞으로
100마일쯤 내려가면 뒤랑스 강은 카바용
시를 중심으로 하는 올공 평원으로 나가서
엷은 갈색 자갈의 강변을 굽이쳐 흐르는
맛도 멋도 없는 강이 되어버리지만,
여기서는 아직 강다운 강으로 양쪽
기슭에는 짙은 녹음이 시원하고,
낚시꾼들을 기쁘게 해준다.
오후에도 또 그는 북쪽을 향해서
구불구불 이어진 85호선을 더듬었다. 길은
시스트롱을 지나서도 뒤랑스 강의 좌안을
따라서 상류로 뻗어 있다. 땅거미가 질
무렵 그는 가프 마을로 들어갔다. 그대로
서두르는 여행도 아니고, 또 관광 시즌이라
조그만 마을이 오히려 호텔도 붐비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시골풍의 호텔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래서 마을 외곽에서 암사슴
여관이라는 호텔을 발견했다. 옛날에는
사보이 공(公)의 수렵에 쓰이던
사냥막사처럼 보였는데, 아직도 시골의
면모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마음 편하고
맛있는 요리가 자랑거리였다.
방은 아직 몇 개 비어 있었다. 여느때
같으면 샤워로 끝내 버리지만, 그날은
느긋하게 욕탕에도 들어가고, 비단 셔츠에
니트 넥타이를 매고 회색 양복을 입었다.
낮에 입었던 체크 무늬의 양복은 하녀에게
다림질 해달라고 맡겼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에, 젊은 하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식당은 수림이 우거진 산허리 쪽으로 나
있어서, 소나무 가지에서 우는 매미 소리가
귀찮을 정도였다. 공기는 시원하고
상쾌했다. 식사 도중에 가슴께가 많이
파인, 소매 없는 드레스로 몸을 감싼 여자
손님이 좀 추워졌는지 창문을 닫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주인에게 말했다. 바로
창가에 앉아 있던 재칼은, 주인이 닫아도
좋겠느냐고 물으면서 저쪽에 있는 손님이
원해서 그런다며 가리키는 여자 손님 쪽을
흘끗 보았다. 그녀는 혼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30이 좀 넘은 미인으로서, 드러난
팔은 희고 부드러워 보였으며, 알맞게 부푼
가슴을 가지고 있다. 재칼은 주인에게
창문을 닫아도 좋다고 끄덕이고는 가볍게
머리를 기울여 그녀에게 가벼운 인사를
요리는 소문대로 굉장했다. 재칼은
모닥불에 구운 송어와 향료를 발라서
숯불에 구운 소의 등심을 먹었다. 와인은
'론의 언덕'이라는 향기 높고 맛이 좋은 그
지방 술로서, 라벨이 붙지 않은 병에 들어
있었다. 이것은 주인이 특별히 '암사슴
여관 와인'이라고 이름지은 것으로,
술창고의 통에서 방금 내온 것이었다.
손님들은 모두 그 와인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맛으로 보아서 당연한 일이었다. 재칼이
디저트로 나온 샤벳을 다 먹었을 때,
등뒤에서 아까 그 여자 손님이, 커피는
라운지에서 마시겠다며 낮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로 주인에게 말하는 것이 들렸다.
주인은 잘 알겠다면서 허리를 굽혔는데,
그때 그녀를 '남작 부인'이라고 불렀다. 몇
하고 그리로 갔다.
오후 10시 15분. 서머셋
하우스(중앙등록소)에서 토머스 총경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열어젖힌 창가에
앉아서 조용해진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밤도 이런 시각이 되면 지나는 행인도
뜸해지고 손님을 부르는 레스토랑의 불빛도
꺼져 버린다. 밀뱅크에서 스미스 광장에
걸친 사무실 거리는 깜깜해서 사람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특별국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만은 언제나
그렇듯이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다.
거기서 1마일쯤 떨어진 곳에 있는 서머셋
하우스에도 이날 밤은 휘황한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부장형사 6명과 경감 두
이름을 찾아내기 위해서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담당자
한 사람이 남아서 일을 거들고 있다. 몇
분마다 그는 수사원 중 누군가를 끝없이
이어진 파일의 이곳저곳으로 안내하며
다녔다.
전화를 건 사람은 팀의 책임자인 선임
경감이다. 목소리는 지쳐 있었으나,
지금부터 전하는 보고로 사망증명서를
체크하는 끝없는 고역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인지 밝은 구석이 있었다. 전화를
받은 토머스에게 그가 말했다.
"알렉산더 제임스 ㅋ틴 댓건입니다."
"그 사람이 어쨌다는 건가?"
"1929년 4월 3일, 세인트 마크 교구.
샘본 피실레이 출생. 금년 7월 14일에
신청했습니다. 여권은 다음날 발행되어
신청서에 기재된 주소지로 7월 17일
우송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주소지는 아마
편의상의 것일 뿐 자택은 아니겠지요."
"왜 그런가?"
토머스는 초조했다. 서두가 긴 이야기는
질색이다.
"그거야 알렉산더 댓건은 두 살 반인
1931년 11월 8일, 태어난 마을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해서 사망했거든요."
토머스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과거 100일 이내에 발행된 여권 중에서
체크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은 얼마나 남아
있나."
"한 300개쯤 됩니다만."
"그 안에도 가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사람들에게 맡기고 자네는 그 여권이
우송된 주소지를 조사하러 가게. 찾는 대로
곧 전화로 보고하고. 사람이 살고 있으면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보게. 그리고 가짜
댓건에 관해서 알아낸 것이 있으면 그
자세한 것을 가지고 돌아오고. 신청서와
함께 제출한 사진의 사본도. 다른 사람으로
둔갑한 칼스로프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으니까."
선임 경감에게서 두 번째의 전화가 걸려
온 것은 11시 전이었다. 문제의 주소지에
있는 것은 패딩턴 지구의 조그만 담배가게
겸 신문판매대로서, 가게의 창문에는
매춘부의 명함이 잔뜩 붙어 있었다. 가게의
2층에 살고 있는 주인을 깨워서 물어
보았더니, 일정한 주소가 없는 손님을
받아 건네주고 있다고 자백했다.
댓건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골손님은
없지만, 어쩌면 꼭 두 번 전화를 걸어 온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 한번은 우편물을
받아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또 한번은
배달된 봉투를 받으러 올 때. 경감은
주인에게 칼스로프의 사진을 보여 주었지만
본 적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신청서에
붙어 있던 댓건의 사진을 내보이자 그
사람은 본 적이 있는 것 같지만 자신은
없다면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던 것
같다고 대답했다. 카운터 뒤에 죽 늘어놓은
에로 잡지를 사로 오는 손님은 거의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고 했다.
"그 주인을 관할서로 보내. 자네는 곧
이리로 돌아오고."
곧 또 수화기를 들어서 파리로 전화를
신청했다.
회의가 중간쯤 진행되었을 때, 그날 밤
두 번째의 전화가 런던에서 걸려왔다.
그때까지 르베르는 칼스로프가 어선으로
바다를 거쳐 밀입국했거나, 육상의
국경이라도 아주 외진 곳으로 몰래
넘어오지 않는 한, 적어도 본명으로
프랑스에 입국한 흔적은 없다고 설명했다.
밀입국의 가능성에 대해서 그는, 프로는
그런 체신머리없는 짓은 안 한다는
의견이었다. 밀입국을 했더라도 언제고
어딘가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여권에
입국허가 스탬프가 찍혀 있지 않는 것이
탄로나서 즉시 체포되고 만다. 또,
호텔에도 투숙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자료센터, DST 및 파리 경시청의 각 대표에
의해서도 입증되었기 때문에 의논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두 사실과 관련해서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고 르베르는
설명을 계속했다. 그 하나는 칼스로프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가짜
여권을 준비하지 않았을 경우인데, 만일
그렇다면 경찰이 런던의 아파트를 덮쳤을
때에 분명히 그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르베르는 이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그의
플랫의 옷장이나 서랍에는 옷을 꺼내간
듯한 빈 자리가 있었고, 세면도구나
면도기구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모두
계획적으로 플랫을 비웠다는 것을 말해
스코틀랜드로 드라이브 여행을 간다고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하긴 이 스코틀랜드
여행 운운하는 이야기는 영불 양국의
경찰도 믿지 않고 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칼스로프가 가짜
여권을 손에 넣고 있을 경우로서, 현재
런던 경시청이 쫓고 있는 것은 이
방향이다. 이 경우, 그는 아직 프랑스에
입국하지 않고 어딘가에서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견해와, 이미 공공연히 입국해
있을 것이라는 견해 등 두 가지로 추측을
할 수가 있다. 이 단계에서 몇몇 참석자가
거친 소리로 입을 열었다.
"놈이 이미 프랑스에, 이 파리 시내에
들어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인가?"
알렉상드르 송기네티가 분개한 얼굴로
"요는 칼스로프는 독자적인 시간표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그 자신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미 수사를
시작한 지 72시간이 되었습니다만, 우리가
그의 시간표의 어디쯤에서 개입되었는지
그것을 아는 방법은 없다는 겁니다. 다만
이쪽에도 한 가지 유리한 점이 있는데,
칼스로프는 암살계획이 들통났다는 것은
알고 있어도 우리의 수사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새로 바꾼
이름을 밝혀내고 거처를 확인하기만 하면,
그런 줄도 모르고 마음놓고 있는
칼스로프를 체포할 기회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참석자들의 불안은 르베르의
파리 시내에 있을지도 모르고, 그 시간표에
의해서 암살의 실행이 내일로 예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모두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롤랑 대령이 그 불안을
덜어 주려는 듯이 말했다.
"칼스로프는 바르미라는 레포를 통해서
음모가 들통난 것을 알고 증거를 없얘기
위해서 아파트에서 나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총이나 탄약을 스코틀랜드의
호수에 던져 버리고 멀쩡한 얼굴로 경찰에
출두하면 증거는 하나도 없으니까
무죄석방이 될 테니 말이오."
참석자들은 각각 롤랑의 의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동의하는 표정이 많이
보였다.
"그럼, 묻겠네, 대령." 하고 내무장관이
계획이 들통난 것을 알기만 하면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지 않았는데도 지금 말한
것과 같이 행동하겠나?"
"물론입니다, 각하. 베테랑 살인자라면
어느 나라엔가는 파일에 자신의 기록이
올라 있을 것을 당연히 예상하고 있어야
하고, 또 계획이 폭로된 이상 경찰이
찾아와서 자택을 수색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니까요. 따라서 증거가 될 만한 것은
깡그리 처분하겠지요. 스코틀랜드의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호수 같은 곳은
알맞은 장소가 아닐까요?"
웃는 얼굴들이 롤랑을 에워쌌다. 그
미소에는 롤랑의 의견이 옳다고 치고서,
마음에 깃든 불안을 지워 버리고 싶은
희망이 들어 있었다.
추적을 멈추어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검거에 노력해야겠지요."
미소가 사라졌다. 침묵이 찾아왔다.
"아무래도 자네가 하는 말은 모순처럼
들리는데, 왜 그럴까?"
기보 장군이 부하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니까 놈을 찾아내어 처치하라는
명령은 어디까지나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놈은 계획을
포기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발등의
불을 끄고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것이라 무기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 아니고
어딘가에 숨겨 놓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열기가 좀 식은 뒤에 다시 계획을
진행시키는 거죠. 전보다 훨씬 완벽한
준비를 갖추고서 말입니다."
경찰이 거처를 찾아내면 신병을 확보해
주지 않을까?"
누군가가 의견을 말했다.
"글쎄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의문이군요. 증거가 하나도 없으니
말입니다. 있는 것은 그저 용의점뿐입니다.
게다가 영국인은 '시민권'인가 하는 것에
기막힐 정도로 예민하니까요. 아마 거처를
밝혀내고 심문하고, 그리고 나서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하게 되겠지요."
"대령의 말 그대로야." 하고 생클레아가
끼어들었다. "영국의 경찰이 칼스로프를
찾아낸 것은 상당한 요행이야. 녀석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으니까.
위험인물을 예사로 풀어놓거든. 차제에
롤랑 대령의 액션 서비스에게 전권을
주어서 녀석을 단숨에 없애버려야만 해."
내무장관은 르베르가 재미없는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서
말을 걸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칼스로프는
현재 이미 무기나 그 밖의 것들을 숨기거나
버렸을 것이라는 롤랑 대령의 추측에
동의하나?"
르베르는 테이블 양쪽에 줄지어 앉아
있는 기대에 찬 얼굴들을 잠깐 둘러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대령님의 의견이 옳았으면
좋겠습니다만, 애석하게도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내무장관의 의문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르베르는 부드럽게 되받았다.
포기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만,
그 전제는 어디까지나 가설입니다. 만일
거꾸로 작전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면, 만일
로댕의 연락이 그에게 전해지지 않았거나,
전해지기는 했으나 그것을 무시하고 계획을
추진하기로 결심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술렁거림이 일어났다. 르베르의 의견에
반대하는 소리가 조그맣게 오갔다.
롤랑만이 여기에 끼지 않고 가만히
르베르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르베르라는 사람은 여기에 있는 누구보다도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 그의 의견은
자기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것이라고 롤랑은 탄복하고 있었다.
르베르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이때였다.
그는 침묵하고 있는 일동에게 전화의
내용을 설명했다.
"그래서 앞으로의 조치는?" 하고
내무장관이 르베르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다음에 물었다.
르베르는 평소처럼 조용하고 침착한
태도로, 장군이 부대의 전개를 지시할 때와
같이 명령을 내렸다. 참석자는 모두가
그보다는 관직이 높았지만, 누구 하나
거스르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 새로 댓건으로
둔갑한 적을 전국적인 규모로, 더구나
비공개로 수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런던
경시청은 항공회사, 페리 회사 등의 조사를
진행시켜서 저쪽에서 먼저 그의 거처를
체포하고 영국령을 벗어나 있을 때에는
이쪽에 연락해 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프랑스 국내에서 그를 발견했을
경우는 물론 즉시 검거합니다. 그리고
제3국에 있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그가
나타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국경에서
체포하거나, 아니면......다른 방법을 써도
좋겠지요. 다만 그때에는 그를 찾아내는 제
임무는 끝난 것이므로 그 수단 방법 등에
대해서는 의견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를 찾아낼 때까지는 저의 방법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조금은 고압적이고 자신에 찬
언사였지만,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치 않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생클레아마저도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 갑자기
있는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자택으로 돌아간 그는
자클린에게 그 분풀이를 했다. 그녀는
엎드려 있는 그의 목뒤를 쓰다듬어 주며
부드럽게 그 화풀이를 들어 주었다. 그리고
새벽이 가까워서 그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몰래 침대에서 빠져나와 홀에서
짧막한 전화를 걸었다.
책상 위에는 여권 신청서가 두 통,
그리고 사진 두 장이 스탠드의 조명 속에
떠올라 있다. 아까부터 토머스 총경은
그것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좋아, 다시 한 번 체크해 보세." 그는
한옆에 앉아 있는 선임 경감에게 말했다.
"시작하세."
"칼스로프 -- 키 178cm. 맞나?"
"예."
"댓건 -- 키 180cm."
"구두 뒷굽을 높이는 겁니다. 굽을
손질하면 1인치나 2인치쯤 키를 크게
보이게 하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쇼
비즈니스에서 키가 작은 녀석들이 흔히
쓰는 방법이지요. 게다가 여권발행국에
가봐야 아무도 발 아래는 보지
않았으니까요."
"그 말이 옳아. 좋아, 뒷굽을 높인
구두라...... 다음, 칼스로프 -- 머리색은
갈색. 이것은 의미가 없겠군. 엷은
갈색부터 밤색까지 종류가 여러 가지
있으니까. 칼스로프의 머리칼은 이
사진으로 봐서는 짙은 갈색 같은데. 댓건의
금발이 섞여 있군."
"그렇군요. 대체로 머리칼의 색은
사진으로 찍으면 진하게 나타납니다.
라이트가 있고 없고에 따라서도 다르고,
라이트를 쓴 경우에도 위치나 빛의
정도에도 차이가 나니까요. 게다가
칼스로프는 댓건으로 둔갑하기 위해서
머리를 물들였을지도 모르지요."
"좋아. 그 말에는 수긍이 되는군. 눈의
색깔 -- 칼스로프는 갈색. 댓건은
회색이야."
"콘택트렌즈입니다. 간단한 속임수지요."
"OK. 나이 -- 칼스로프, 37세. 댓건은
4월로서 34세로 되어 있군."
"이 34세라는 것은 바꿀 방법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두 살 반에 죽은 진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지요. 하지만 37세 된
사람이 34세로 기입된 여권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지는
않습니다. 여권의 기재를 그대로 믿는 것이
보통이니까요."
토머스는 두 장의 사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칼스로프 쪽이 좀 무거울 것
같고, 얼굴도 크고, 체구도 듬직할 것
같다. 그러나 외모에 조금만 손질을 가하면
간단히 댓건으로 둔갑할 수가 있다. 로댕의
무리들과 처음 만났을 때에 이미 변장을
하고 있었고, 그 모습으로 가짜 여권을
신청했을지도 모른다. 프로 살인자쯤 되면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때로는 몇 달씩 다른
사람이 되어서 살아가는 재주를 몸에
익히지 않으면 안된다. 칼스로프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그런 교활한 조심성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도미니카의 술집에서
수군거렸다는 그 소문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런던 경시청의 특별국이라 할지라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그는 머리를 물들이고,
콘택트렌즈를 끼고,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댓건으로 둔갑해 있다. 이런 특징을 여권
번호와 사진과 함께 파리로 전송하도록
토머스는 텔렉스실로 내려보냈다. 그는
시계를 보고 새벽 2시까지는 르베르의 손에
들어가게 될 거라고 계산했다.
"나머지는 이제 파리에서 책임질
일이군요." 하고 경감이 말했다.
"아니야, 우리 쪽에서도 지금부터 할
일이 잔뜩 있다네."
"아침이 되면 제일 먼저 각 항공회사의
항공권 판매소, 도버 해협에 항로를 가지고
있는 각 페리 회사, 대륙횡단철도의 승차권
판매소 등, 모두를 체크해야만 해. 그의
정체뿐만 아니라 현재의 거처도 알아내야만
한다네."
이때 서머셋 하우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권 신청서의 나머지를 조사해
보았지만, 모두 이상 없다는 보고였다.
"알았네. 그곳 직원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귀가해도 좋네. 아침 8시 반에는 전원
이리로 오도록."
담배가게 주인을 관할서로 연행해서
심문한 부장형사가 진술서 사본을 가지고
돌아왔다. 토머스는 죽 그것을
훑어보았지만, 아까 경감의 질문에 대답한
것과 내용에는 변함이 없었다.
"구치할 이유가 없군, 이것만 가지고는.
집으로 돌려보내도 좋다고 관할서에
연락하게."
"예."
부장형사는 나갔다. 토머스는 잠깐
눈이라도 붙일 생각으로 팔걸이의자에
깊숙히 기대앉았다. 그가 경감과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 날짜는 이미 8월
15일로 바뀌어 있었다.
제 16 장
샤로니에르 남작 부인은 문 앞에
멈춰서서 그곳까지 그녀를 바래다 준 영국
신사 쪽을 돌아보았다. 복도는
어두컴컴하고 그의 얼굴은 실루엣으로 보일
뿐 자세한 표정 같은 것은 알 수 없었다.
즐거운 밤이었다. 그 즐거움을 문을 닫아서
쫓아내어 버릴 것인지 그녀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물음은 벌써 한
시간 전부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맴돌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정사의 경험은 몇
번인가 있었지만,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상류사회의 착실한 가정부인이며,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유혹에 몸을 내맡길 정도의
분방함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것도 남몰래 인정하고 있었다.
남작 부인은 그날 바르슬로넷에 있는
사관학교에서 거행된 외아들의 소위
임관식에 참석했다. 아들은 옛날 아버지가
재직했었던 알프스 연대에서 근무하기로
되어 있었다. 참석자 중에서 그녀는 가장
매력적인 어머니였지만, 아들이 장교의
흉장을 받고 임관하는 모습을 보고서
자기는 이제 어엿한 장교의 어머니이고,
앞으로 몇 달 지나면 40세가 된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져서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나이보다 5년은 젊게 보이고
스스로는 10년 이상 젊게 느낄 때조차
있었지만, 아들이 이미 스무 살이며
이제부터는 방학 때에 집에 돌아와서 성의
주변 숲속에서 토끼나 노루를 뒤쫓으며
노루는 고사하고 지금쯤 애인과 섹스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역시
자신의 나이에 저항을 느끼면서 이날 밤의
정사가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사관학교에서 그녀는 교장인 노 대령의
에스코트를 받았고, 그 젊어 보이는 모습을
아들의 동급생들이 선망의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때 그녀는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을 느꼈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껍질만 남아 있을 뿐
실질적으로는 파탄에 빠져 있었다. 남작은
젊은 파리지엔과 바람피우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여름 휴가에도 성에 돌아오지 않고,
아들의 임관식에조차 나타나지 않는
형편이다. 바르슬로넷에서 이 여관까지
차를 달리면서 그녀는 여자로서 완숙한
가엾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미 앞날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 기껏해야 대령 같은
노인들의 상대가 되어 주거나,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러나 상류사회의 유한마담들이 흔히 하는
자선운동에 헌실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직도 젊다는 자부심이 그녀 속에는
완강히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 의미로 남편
앨프레드가 하고 다니는 짓은 아무리
정나미 떨어진 남편의 행동이긴 해도 역시
고민과 굴욕의 원인이 되고 있었다. 언제나
틴에이저나 쫓아다니고 있는 앨프레드의
어리석은 짓은 사교계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어 있고, 그 비웃음은 동시에 아내인
그녀에게도 돌아오는 것이다.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장래를
남작 부인으로서가 아니고 한 여자로서,
아름다운 암컷으로 대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언제 들어왔는지
영국인이 커피를 함께할 수 있겠느냐는
소리를 듣고서야 문득 정신을 차린 그녀는
당황해서 노라고 말할 여유조차 없었다.
물론 곧 잘못했구나 싶었지만, 10분도 되지
않아서 그의 청을 받아들인 것을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33~35세 정도(라고
그녀는 짐작했다)의 젊은 남자이고, 그것은
남자로서 가장 알찬 나이이다. 그는
영국인이지만, 유창한 프랑스어가 막힘없이
술술 나오고, 게다가 용모도 그럴듯하고
유머도 있다. 그 교묘한 칭찬은 듣기
좋았으며, 오히려 그녀 쪽에서 바랄
된다면서 그녀가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12시가 다되어서였다.
그는 남작 부인을 에스코트해서 층계를
올라갔다. 두 사람은 층계참에 있는 창
앞에서 멈춰섰다. 창 유리를 통해서 달빛에
젖은 조용한 산비탈이 보였다. 한동안 두
사람은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시선은
바깥 경치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달빛에
창백하게 비친 가슴의 융기, 깊은 골짜기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가 알아차린
것을 알고서 그는 미소를 짓고는 귓가에
입을 갖다대고 속삭였다.
"달빛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교양 있는
사람이라도 원시인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돌리고는 층계를 올라갔지만, 마음속에서는
그의 뻔뻔스러운 찬미의 눈길에 환희를
느끼고 있었다.
"덕분에 아주 즐거웠어요."
그녀는 문의 손잡이를 잡으면서 그가
자기에게 키스를 강요할까 하고 막연히
상상했다. 그리고 그랬으면 하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평정을 꾸미고 있었지만, 굶주린
몸뚱이는 이미 달아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마신 와인이나
그가 커피와 함께 주문한 칼바도스 주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달빛에 비친
경치가 원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 밤이 이런 결말로 끝날 것으로
예상치 않았던 것만은 분명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남자의 손이 등뒤로
입술이었다. 여기서 그만두어야지 하고
그녀는 마음속에서 소리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은 말없이 키스에 응하고
있었다. 와인의 취기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역시 와인 탓이 틀림없다. 그녀를 안은 두
팔에 힘이 들어갔다. 강력한 손이었다.
그녀의 허벅지에 그의 하복부가 밀착해
왔다. 세틴 천의 드레스를 통해서 오만하게
단단해진 그의 남성을 느끼고 순간 그녀는
뒤로 물러났으나, 곧 다시 이번에는 자기
쪽에서 밀어붙이고 있었다. 익을 대로 익은
허벅지 사이에, 하복부에 밤이 샐 때까지
그를 잡아두고 싶었다. 두 사람의 무게로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저절로 포옹이
풀리고 그녀는 뒷걸음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밤을 새워가며 자료센터의 파일을 다시
조사했다. 댓건의 기록을 찾기 위해서다.
이번에는 수확이 있었다.
알렉산더 제임스 ㅋ틴 댓건이 7월 22일
브뤼셀발의 브라방 급행으로 프랑스에
입국한 사실을 가리키는 카드가 발견된
것이다. 이어 한 시간 뒤, 브뤼셀 -- 파리
간의 급행열차에 탑승하여 통관업무를
취급하는 세관 팀에게서 온 보고서가
발견되었다. 거기에 의하면 7월 31일,
파리발 브뤼셀 행의 '북방의 별'호의
승객명단 안에 댓건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또 파리 경시청으로부터 댓건이라는
이름으로 기입된 숙박 카드가 보내져 왔다.
여권 번호도 런던에서 연락해 온 것과
7월 22일부터 30일까지 마들렌 광장 부근의
조그만 호텔에 묵었다. 카롱 경감은 지금
곧 그 호텔을 덮치자면서 흥분했지만,
르베르는 그를 말리고 이른 아침에 살짝 그
호텔을 찾아가서 주인과 만났다. 그리고
8월 15일 현재 댓건이 그곳에 묵고 있지
않은 것을 알고는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주인 쪽에서는 숙박객이 깨지 않도록
르베르가 신경을 써준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르베르는 사복형사 하나를 그
호텔에 묵도록 하고, 언제 댓건이 나타날지
모르니 절대로 호텔을 떠나지 말라고 했다.
호텔 주인은 기꺼이 협조하겠다고
다짐했다.
"놈이 7월에 파리에 온 것은 -- ."
사무실에 돌아와서 르베르는 카롱에게
계획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완전히 짜여져
있다네."
르베르는 의자에 기대앉아 천장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놈은 어째서 호텔에
묵은 것일까? OAS의 공작원들이 모두
그렇듯이 왜 심파(동조자)의 집에 은신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 비밀의 유지라는
점에서 그는 OAS의 심파를 조금도 믿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연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는
아무도 믿지 않고 독자적인 방법으로
계획을 짜고 준비하여, 아마 아주 평범한
여행자로 가장하여 조금도 의심받지 않도록
신중히 행동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호텔의 주인도 그것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정말로 나무랄 데라고는 없는 신사라고
존재라고 르베르는 생각했다. 신사라는
녀석은 경찰에게는 가장 귀찮은 상대다.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르베르는 런던에서 보내 온 칼스로프와
댓건의 사진을 비교해 보았다. 칼스로프는
키, 머리칼과 눈의 색깔, 나이, 그리고
아마 몸가짐까지도 바꾸어 완전히 댓건으로
변신해 있을 것이다. 르베르는 그 이미지를
마음속에서 그려 보았다. 어떤 인물일까?
자신에 넘치고 오만하고, 절대로 붙잡히지
않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는 사나이.
위험하고 교활하고 세심하고, 모든 것을 다
계산하고 있다 -- . 물론 무장하고 있을
텐데, 그 무기는?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늘어뜨린 자동권총? 허리춤에 감춘 나이프?
라이플? 그러나 세관을 지날 때에는 어디다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대통령의
신변 가까이에서는 여자의 핸드백조차
조사를 받으며, 가늘고 긴 포장물을 가지고
있으면 대통령이 나타나기도 전에
불문곡직하고 연행당할 것이다. 그런데도
재칼은 해낼 자신이 있는 것이다. 마술사
같은 녀석이다. 생클레아 대령은 그저
폭도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천만에! 그러나 르베르는 자기에게 유리한
점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살인자의 새 이름을 알고 있지만,
살인업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것이
유일한 마지막 카드였다. 이것 이외에는
모두가 재칼 쪽이 유리하다. 그러나 회의의
멤버는 누구 하나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며, 또 하지도 못한다. 만일 재칼이
둔갑해 버리면 그때는, 클로드, 이미 손쓸
방법이 없어 -- 하고 르베르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는 소리까지 내어가며 말했다.
"그럼, 어쩔 수가 없지."
카롱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놈에게는 이미 기회는
사라졌습니다."
르베르는 전에 없이 조급해 있었다.
수면부족의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창으로 들어온 엷은 달빛이 차츰
흐트러진 담요 위를 지나서 지금은 침대와
문 사이에 벗어 던진 새틴 천의 드레스와
브래지어, 나일론 스타킹을 어렴풋이
어둠에 싸여 있다.
남작 부인 코렛은 반듯이 누워서 자신의
배를 베고 잠들어 있는 남자의 금발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밤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내고는 조금 열린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영국인은 굉장히
강력하고 능숙했다. 손가락과 혀와
페니스를 절묘한 기교로 구사하여 그녀를
다섯 차레나 절정으로 끌어올리고, 자신도
세 번 정점을 지났다. 그가 정점을 지날
때의 그 솟구치는 열기로 몸이 꿰뚫리는
듯한 느낌이 지금도 몸속에 남아 있었다.
이런 밤을 그녀는 몇 년이나 바라고
기다렸던가. 처음 그를 맞아들였을 때,
그녀는 몸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흘끗 보았다. 오전 5시 15분. 그녀는
금발을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자요?"
영국인은 아직 몽롱한 상태인지 입
속에서 뭔가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모두
완전한 알몸이었지만 중앙난방 덕분에
춥지는 않았다. 갑자기 금발머리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양쪽 허벅지 사이로
파고들었다. 뜨거운 입김과 샘물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는 혀의 촉감이 전율처럼
그녀의 뇌리에 전해졌다.
"안돼, 이젠 그만 해요."
그녀는 재빨리 허벅지를 오므리고 윗몸을
일으키고는 그의 머리칼을 잡고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는 일단 침대에 묻혀서
자세를 가다듬더니 이번에는 풍만한 가슴의
"그만둬요."
놀란 듯이 그는 얼굴을 들었다.
"이젠 충분히 즐겼어요. 나는 앞으로 두
시간이면 일어나야 해요. 당신도 방으로
돌아가서 자도록 해요, 착한 아기."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틀거리면서
침대에서 내려가 옷을 찾았다. 그녀는 담요
밑으로 파고들어 발 근처에 휘감긴 시트를
팽팽하게 펴고서 담요를 턱 밑에까지
끌어올렸다. 그는 셔츠와 바지를 챙켜 입고
윗도리와 넥타이를 한쪽 팔에 걸치고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빙그레 웃자 가지런한 이빨이 하얗게
보였다. 그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서
오른손으로 그녀의 목을 안았다. 얼굴과
얼굴이 다가갔다.
"응 -- 굉장히, 당신은?"
다시 그는 싱긋 웃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녀가 웃었다.
"당신 이름은 뭐예요?"
그는 잠깐 생각하고는, "알렉스." 하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요? 아주 좋았어요, 알렉스.
하지만, 이젠 방으로 돌아가세요."
그는 엎드려서 입술에 키스했다.
"그럼,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안녕,
코렛."
재빨리 그는 방을 나가서 문을 닫았다.
오전 7시, 아침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순경 하나가 자전거를 타고 암사슴
프런트에서 모닝 콜이며 아침식사 준비에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는데, 로비로 들어선
순경을 재빨리 발견하고는 경쾌하게 말을
걸었다.
"오, 잘되가시오?"
"그런대로요. 하지만 자전거로 여기까지
오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여기가 제일 마지막이 되지."
"그만 하시지."
주인은 빙긋 웃었다.
"대신 가프에서 제일 맛좋은 커피를
대접해 드리리다. 마리 루이즈, 경찰
아저씨에게 커피 올려라. 브랜디 좀 쳐서
말이야."
순경은 기쁜 듯이 웃었다.
"자, 이것이 어젯밤의 것이오." 하고
카드를 순경에게 건네주었다. "어젯밤에
새로 온 손님은 셋뿐이라오."
순경은 카드를 받아서 허리의 벨트에
달아맨 가방 속에 넣었다.
"이것뿐이라면 일부러 가지러 올 것도
없는데."
순경은 빙긋 웃고는 로비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커피를 가지고 온 마리
루이즈를 놀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가
숙박 카드를 가지고 가프 경찰서로 돌아온
것은 8시였다. 당직 경감은 귀찮은 듯이
잠깐 훑어보고는 선반에 던져 넣었다. 이
카드들은 나중에 리용의 지방경찰본부에
보내어지고, 거기서 다시 파리의
자료센터로 가게 된다. 늘 있어 온 일이기
때문에 경감은 제대로 카드를 살펴보지도
가혹하겠지.
그 무렵 암사슴 여관에서는 코렛 부인이
계산을 끝내고 차를 몰아 서쪽을 향해서
떠났다. 재칼은 9시까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토머스 총경은
졸다가 눈을 떴다. 그것은 인터폰에 달려
있는 전화로 복도 건너편에 있는 방과
이어져 있었다. 그 방에서는 6명의
부장형사와 두 경감이 토머스의 지시에
따라서 전화에 매달려 있었다.
토머스는 시계를 보았다. 10시다.
졸았다니 나답지 않군 -- 하고 혀를 차고서
월요일 오후 딕슨 특별국장으로부터 이번
일의 명령을 받고, 그 동안 몇 시간이나
오늘이 벌써 목요일이다. 다시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선임 경감의 소리가 느닷없이 보고를
했다.
"댓건입니다. 월요일 아침에 BEA의
정기편으로 런던을 떠났습니다. 예약을 한
것은 토요일입니다. 이름도 틀림없습니다.
알렉산더 댓건입니다. 항공권은 현금으로
사갔습니다."
"행선지는? 파리인가?"
"아닙니다, 브뤼셀입니다."
졸음으로 흐려 있던 토머스의 머리가
순간 맑아졌다.
"그래? 그러나 일단 출발했다가 다시
돌아올 가능성도 있을 수 있어. 놈의
조사를 계속해 주게. 특히 오늘 이후의
비행기편을 말이야. 브뤼셀에서 돌아왔다면
문제는 간단한데,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
아무래도 놈을 놓쳐 버린 것 같군. 하긴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런던을 떠나
버렸으니까 이쪽에는 책임이 없는 거야,
그렇지?"
"예. 그런데 칼스로프의 수색명령은
어떻게 합니까? 지방 경찰은 그렇잖아도
바쁘다면서 본청에다 불평을 해오는
모양입니다."
토머스는 잠깐 생각해 보고는 말했다.
"좋아, 철회하지. 놈은 이미 국내에는
없다고 보아도 좋으니까."
그는 내선 전화 수화기를 들고 파리의
르베르 총경 사무실로 국제전화를
목요일 아침 카롱 경감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러다가는 언젠가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10시 5분, 영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은 것은 카롱이었는데,
토머스가 기어이 르베르와 통화하고 싶다고
해서 간이침대에 엎드려 자는 르베르를
깨우러 갔다. 르베르는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르베르가 수화기를 들었지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곧 다시 카롱이 받아
쥐고 통역을 했다. 토머스의 보고를 다
듣고 난 르베르는 카롱에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전하게. 벨기에의 조회는
이쪽에서 하겠다고. 여러 가지 협조해
주어서 더없이 감사하다. 재칼의 행방이
즉시 연락하겠다. 이상이야."
전화가 끊기고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았다.
"브뤼셀 경시청에 전화를 걸어 주게나."
르베르는 조용히 카롱에게 말했다.
마침내 재칼이 잠에서 깨었을 때, 이미
해는 산 위에 올라 상쾌한 여름날을
예고라도 하듯이 밝은 햇빛을 내리쏟고
있었다. 그는 샤워를 하고 깨끗이 다림질된
체크 무늬의 양복을 입었다. 그것은 전날
하녀인 마리 루이즈에게 부탁해 두었던
여행복으로서, 방으로 가져온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10시 반 지나서 그는 알파를 몰고 시내로
나가 우체국에 들러 파리로 장거리전화를
입술을 꼭 깨물고 뭔지 굉장히 서두르고
있었다. 그는 부근의 철물점에서 짙은
남색의 래커, 흰 페인트, 칠에 쓰이는 붓
두 자루 -- 한 자루는 글씨용으로서 낙타
털로 만든 가느다란 것, 또 하나는 보통
쓰이는 페인트 붓 -- , 그리고 드라이버를
샀다. 그는 이것들을 글로브 콤파트먼트에
밀어넣고 암사슴 여관으로 돌아와서 숙박료
계산을 부탁했다.
계산을 끝낼 때까지 그는 짐을 챙겨서
자기가 직접 차에까지 옮겼다. 세 개의
여행가방을 트렁크에 넣고 아타셰 케이스를
조수석에 던져넣고는 로비로 돌아와서
계산을 끝냈다. 그를 상대했던 낮 당번의
프런트 직원은 나중에 그가 안절부절못하고
무엇인가 서두르는 눈치였으며, 빳빳한
그런데 프런트 직원은 보지 못해서
몰랐지만 영국인은 그가 거스름돈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간 사이에 카운터 위에 펼쳐
놓았던 숙박부에서 바로 앞날 페이지에
'코레즈 현 오트 샤로니 에르 마을,
샤로니에르 남작 부인'이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을 훔쳐보았다.
계산이 끝나고 곧 차도에서 알파의 엔진
소리가 들리고는 영국인은 암사슴 여관에서
그 모습이 사라졌다.
정오 전에 새로운 정보가 르베르의
사무실에 날아들었다. 브뤼셀 경시청에서
온 전화인데, 댓건은 월요일에 겨우
5시간밖에 그곳에 묵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런던발 BEA기로 브뤼셀에
갔다고 한다. 밀라노행 좌석은 지난 주
토요일 런던에서 전화로 예약되어 있었던
것으로, 요금은 알리탈리아의 창구에서
현금으로 지불되었다.
르베르는 즉시 밀라노 경찰에 전화를
신청했다. 그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DST에서
온 것인데, 전날 아침 벤티밀리아의
국경에서 이탈리아로부터 프랑스로 들어온
사람들의 입국 카드 안에서 알렉산더
제임스 ㅋ틴이라는 이름이 기재된 카드가
발견되었다는 연락이었다. 르베르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벌써 30시간 가까이나 지났잖아! 하루
이상이나 무엇을......"
그는 수화기를 내동댕이쳤다. 카롱은
지겨운 듯이 말했다.
"통상적인 절차로 입국 카드를 돌렸으니
벤티밀리아에서 파리까지 하루나 걸렸지.
오늘 아침부터 겨우 어제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는 거야. 전국에서 모인 카드가
2만 5천장 이상이나 되는 모양이야.
하루치가 그 정도야. 엄청난 숫자지.
소리를 질러서 DST의 녀석들에게 미안한데.
이젠 분명해졌어, 뤼시앙. 놈은 프랑스에
들어온 거야. 오늘 중으로 뭐라도 잡아내지
않으면 오늘밤 회의에서 큰 곤욕을 치를
거야. 참, 그래 그래, 런던에 전화 걸어서
토머스 총경에게 고맙다고 해주게. 재칼이
프랑스 국내에 들어왔으니 이제부터는 우리
힘만으로 해나가겠다고."
카롱이 런던과의 통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전화가 걸려왔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르베르는 승자의 얼굴로 카롱을 보았다.
그는 수하기를 손으로 막고서 말했다.
"놈의 행방을 알었어. 가포의 암사슴
여관이라는 호텔에 어젯밤부터 이틀
예정으로 묵고 있어."
그는 수하기에서 손을 떼고 힘차게
말했다.
"잘 들어, 과장, 왜 그 댓건이라는
남자를 잡아야 하는지 그 이유는 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것은
중대한 일이야. 그래서 말일세. 즉시
다음과 같이 손을 써주게."
르베르는 10분쯤 자세한 지시를 내렸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카롱의
책상 위에 있는 전화의 벨이 울렸다. 다시
렌터카를 타고 있다고 한다.
번호는'MI_61741.'
"전지역에 이 차를 긴급수배해
놓을까요?"
카롱이 물었다. 르베르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아니, 아직 일러.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경관은 단순한 도난차의 수배라고 생각하고
그 차를 발견하면 아무런 대비도 없이
정지하라고 할 거야. 그렇게 되면 대번에
놈에게 사살당하게 되지. 차 안에 총을
숨겨 둔 것이 분명하니까. 다행히 놈은 2박
예정으로 여관에 묵고 있어. 경찰대를
총동원해서 호텔을 포위하도록 손을
써놓았어. 가능한 한 경찰의 부상자를 내고
싶지 않으니까. 자, 서두르게, 헬리콥터가
그 무렵 가프 경찰서에서는 전 대원을
동원해서 시내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고, 호텔 주위에 몰래 감시원을
배치했다. 이런 명령은 리용 지방본부에서
전해졌다. 그 리용과 그르노블에서는
단기관총과 라이플로 무장한 경찰대가
병력수송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리고
파리 교외의 사토리 공군기지에서는 르베르
총경을 가프에 긴급 수송할 헬리콥터의
준비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나무 그늘에 있어도 한낮의 열기는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되도록 옷을 버리지
않도록 허리까지 알몸이 되어, 재칼은 꼬박
두 시간 동안 차와 씨름을 했다.
가프를 떠나서 그는 똑바로 서쪽으로
지나서 달렸다. 길은 거의 내리막이며
내던져 버린 리본처럼 구불구불 산속을
누비면서 이어져 있었다. 그는 최대한의
속력으로 밟아댔다. 커브에서는 타이어가
흰 연기를 내며 비명을 지르고서 마주오는
차를 벼랑으로 밀어 떨어뜨릴 뻔한 적도 두
번이나 있었다. 아스프르에서 그는
93호선으로 들어섰다. 이 도로는 드롬 강을
따라서 서쪽으로 가다가 론 강에 부딪친다.
아스프르를 지나 30km 정도의 구간은 길이
강을 건넜다가 다시 건너왔다가 하며 저
혼자 바쁘다. 뤼상두아를 지나자마자
곧바로 그는 93호선을 벗어났다. 산이나
촌락으로 통하는 샛길이 얼마든지 있다.
그는 마음내키는 대로 그 중 하나를 골라서
알파를 몰아넣고 1마일쯤 간 곳에 있는
들어갔다.
오후 3시 넘어서 그는 마침내 페인트
칠을 끝내고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솜씨를
감상했다. 흰 알파는 짙은 남색으로 변하고
페인트는 이미 거의 말라 있었다.
직업페인트공같이 매끄러운 솜씨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까이 다가가서 보지
않는 한 다시 칠한 표시가 나지는 않았다.
더구나 어둠 속에서라면 수상쩍다고 들킬
염려는 없었다. 앞뒤 두 장의 번호판을
떼어내어 뒤집어서 풀 위에 나란히 놓았다.
거기에는 흰 페인트로 프랑스의 가공
번호를 써넣어 두었다. 끝의 두 자리가
75로서, 이것은 파리를 나타내는 숫자이다.
프랑스 국내에서는 가장 흔하게 눈에
뜨이는 번호라고 할 수 있다.
적을 둔 흰 알파로 기재되어 있으니,
프랑스 번호의 짙은 남색 알파와는 분명히
다르다. 검문에 걸려서 서류 제시를
요구받으면 만사는 끝나는 거다. 휘발유에
적신 걸레 조각으로 손을 닦으면서, 지금
곧 출발하여 밝은 햇빛 아래에 풋내기의
서툰 도장 솜씨를 드러낼 위험을 저지를
것인가, 아니면 해질녘까지 기다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그는 한동안
망설였다.
가명이 들통난 이상 프랑스에 입국한
경로나 지점도 곧 알려질 것이고, 당연히
차도 수배될 것이다. 그러나 암살을 실행할
날짜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그때까지
어딘가에 숨어 있어야만 된다. 잠복장소는
꼭 한 군데라고 그는 마음속으로 결정했다.
가는 편이 가장 빠르다. 위험하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그는 판단했다. 그렇게
결정된 바에는 빨리 출발하는 편이 좋다.
이제 곧 전국의 교통경관이 금발머리의
영국인이 운전하는 알파 로메오를 찾기
시작할 것이 틀림없다.
그는 재빨리 새 번호판을 달고 페인트의
나머지와 붓은 멀리 던져 버리고서 목 없는
실크 스웨터와 윗도리를 입고 엔진을
걸었다. 93호선으로 되돌아왔을 때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41분이었다.
멀리 상공에서 동쪽으로 날아가는
헬리콥터를 그는 보았다. 디까지 앞으로
11km의 지점이었다. 디(Die)라는 이름은
영어로 읽으면 '다이'(죽는다는 뜻)로서
어쩐지 기분나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미신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시내의 중심부
전승기념비 옆에 있는 네거리에 서 있던
검은 가죽 점퍼의 흰 오토바이 대원이
알파를 발견하고서 손을 흔들어 도로의
오른쪽에 세우라고 하는 것이었다. 총은
아직 강관에 그대로 넣은 채 섀시에 고정해
놓았고, 권총이나 나이프도 몸에 지니고
있지 않다. 재칼은 순간 망설였다. 경관을
차로 치어 넘어뜨리고 도망쳐서 시내를
멀리 벗어난 곳에서 차를 버리고 거울도
세면기도 없이 옌센 목사로 별장할
것인가(네 개의 짐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아니면 얌전히 명령에 따라서
차를 세울 것인가 --? 그를 망설임에서
구해 준 것은 경관 쪽에서였다. 속력을
늦추기 시작한 알파는 쳐다보지도 않고
길가에 차를 붙이고서 돌아가는 형편을
지켜보았다. 곧 시내 쪽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든지 이미
탈출은 불가능하다. 이윽고 네 대의
순찰차와 여섯 대의 병력수송차가 시내로
들어왔다. 도로 옆으로 비켜선 교통경찰의
거수경례를 받으면서 차의 행렬은 알파
옆을 지나 재칼이 방금 지나온 길을 거꾸로
달려갔다. 쇠그물을 친 창문(이것 때문에
'샐러드 바구니'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너머에 헬멧을 쓰고 단기관총을 무릎에
올려놓은 무장경관의 모습이 보였다.
차의 행렬은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교통경찰이 경례하던 손을 내리고
이젠 가도 좋다고 거만한 태도로 재칼에게
신호를 하고서, 기념비에 기대어 세워둔 흰
엔진을 걸고 있는 사이에 알파는 모퉁이를
돌아서 서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오후 4시 50분, 경찰대는 암사슴 여관을
급습했다. 시내의 반대쪽에 착륙하여
순찰차로 그 여관으로 달려간 르베르
총경은 카롱을 거느리고 현관 앞 층계를
올라갔다. 카롱은 오른팔에 걸친 외투 밑에
MAT49형의 단기관총을 숨겨 가지고 있었다.
집게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려 있었다. 이미
시내의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있었다.
모르는 것은 여관 주인뿐이었다. 여관은
아침부터 다섯 시간이나 고립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안에서 지내는 생활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매일 들르는
송어장사가 안 보이는 것이 이상하다면
프런트 직원이 하는 말을 듣고
사무실에서 경리장부를 정리하고 있던
주인이 홀에 모습을 나타냈다. 카롱이
심문하는 것을 르베르는 옆에서 듣고
있었다. 주인은 카롱이 싸가지고 있는
기묘한 물건에 불안한 눈길을 보내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질문에 대답했다.
그로부터 5분 뒤, 여관은 제복경찰관으로
넘쳐 버릴 것 같았다. 그들은 종업원에게
질문을 퍼붓고, 방을 수색하고, 여관
안팎을 이잡듯이 뒤졌다. 르베르는 혼자
차도로 나와서 주위의 산을 바라보았다.
카롱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정말로 사라진 걸까요?"
르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흔적도 없이 말이야."
여관 주인이 놈과 한패가 되어 있는 건
아닐까요?"
"아니야. 그 주인이나 종업원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야. 놈은 오늘 아침이 되자
갑자기 마음이 변해서 출발한 거겠지.
문제는 어디로 갔느냐야. 그리고 우리가
놈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것을 과연 알고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야."
"알 리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지요.
우연입니다, 이것은. 그저 우연일
뿐입니다."
"그렇겠지, 뤼시앙. 그렇기를 빌어
보세."
"우선 당장의 유일한 실마리는 차의
번호입니다."
"그래. 자네가 차를 수배하자고 했을 때
무선으로 리용에 연락해서 전지역에
긴습수배를 발령하세. '최우선. 흰 알파
로메오, 이탈리아 국적, MI-61741. 접근할
때에는 주의를 요함. 운전자는 무기를
휴대. 위험인물임.' 요점은 이런 정도면
되겠지. 그리고 보도진에게는 절대로
새나가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려 두세.
피의자는 자신이 의심받고 있다는 것을
아마 모를 거야. 그러니까 라디오나 신문에
새어나가 본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엄중히
주의시킬 것이라고 덧붙여 둘까? 그럼,
뒷처리는 리용 지방본부의 가야르에게 맡겨
놓고 우리는 파리로 돌아가세."
짙은 남색 알파가 발랑스 시내에 들어간
것은 오후 6시가 가까워서였다. 여기서는
마르세유와 리용을 연결하고, 다시 파리와
대동맥인 국도 7호선이 있으며, 론 강의
양쪽 기슭에는 끊임없이 차의 굉음이
울려퍼지고 있다. 알파는 남쪽으로 뻗어
있는 고속도로를 횡단하여 왼쪽 강기슭의
생 페레이 방면으로 가는 533호선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다리를 건넜다. 다리
밑에서는 유유히 흐르는 강의 흐름이
저녁노을을 받으며 바쁘게 남으로 달리는
철제 곤충의 무리들을 완전히 무시한 채
유연한 자세로 지중해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땅거미가 계곡을 감싸기 시작할 무렵, 생
페레이를 빠져나온 재칼은 조그만
스포츠카를 채찍질해 가면서 오베르뉴
지방에 솟아오른 중앙고원 깊숙이로
올라갔다. 르 퓌이를 지나니 길은 갈수록
온천 마을이 있었다. 중앙고원의
바위산에서 분출되는 생명의 샘은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도시인을 끌어들여 교활하기로
유명한 오베르뉴의 백성들에게 부(富)를
가져다 준다. 브리우드를 지나니 알리에
강의 계곡은 이미 등뒤로 숨어 버리고 고원
목초지의 히스나 건초의 냄새가 밤 공기에
스며든다. 재칼은 이수아르에서 차에
기름을 보충하고 거기서 몽도레, 부르불로
향했다. 도르도뉴 강의 상류지대에 도착한
것은 밤 12시 전이었다. 도르도뉴 강은
오베르뉴의 고원에서 발원하여, 거기서
남서로 여러 개의 댐을 지나고 흘러서
마지막에는 보르도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부르불에서 그는 85호선을 타고
코레즈 현의 중심지인 위셀로 향했다.
"우둔하기 짝이 없군, 르베르. 그 손으로
놈을 잡아 놓고도 빠져나가게 하다니, 이
무슨 꼴인가?"
생클레아는 반쯤 의자에서 일어서서
르베르 쪽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르베르는
생클레아의 욕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료를 보고 있다. 대통령 비서실의 오만한
대령을 다루는 방법은 그러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생클레아 쪽은 머리를 숙이고 있는 그의
태도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모습인지,
아니면 태연하게 자기를 무시하는
태도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생클레아로서는 물론 앞쪽 것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그가 말을 끝내고 의자에 도로
앉기를 기다렸다가 르베르는 얼굴을
"나누어 드린 보고서를 보시면 아실 줄
압니다만, 우리가 그를 손 안에 잡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댓건이라고 하는 남자가 어젯밤부터
가프의 여관에 묵고 있다는 보고가
리용에서 들어온 것은 오늘 오후 12시
15분입니다. 그런데 재칼은 11시 5분에
급히 호텔을 떠났습니다. 리용에서 들어온
보고가 도착되는 것과 동시에 손을 썼다
하더라도 그때 이미 한 시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 나라의
경찰이 일반적으로 비능률적이라는 당신의
비난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사태를 극비로 처리하라는 것이
대통령께서 내리신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댓건이라는 남자를 검거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가장 손쉽고 확실한
방법입니다만, 그렇게 했다가는 대번에
보도진의 귀에 들어가고 마니까 그 방법은
당연히 쓸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암사슴 여관에 묵은 댓건의 숙박 카드는
통상적인 시간에 통상적인 방법으로
주고받아 정시의 비행기편으로 리용의
지방본부로 보내졌습니다. 그 리용에서
비로소 댓건이 수배중인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며, 이 시간적인 지연은
거국적으로 댓건의 이름을 떠들어대는
방법을 쓰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댓건은 이틀밤 예정으로 그 여관에
투숙했습니다만, 오늘 오전 11시에 무슨
변경했습니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변하게
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경관이 호텔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을 그자가 본 게 아닌가?"
생클레아는 다시 악담을 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댓건이 투숙한 것을
알게 된 시간이 12시 15분이며, 그는
그보다 70분 전에 여관을 떠났으니까요."
"요컨대 재수가 없었다, 아주 운이
나빴다는 거군."
내무장관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다만 아무래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째서 즉시 재칼의 차를 수배하지
않았는가 하는 거야. 이 점은 어떻게 된
것인가, 르베르?"
저의 실책이었습니다. 다만 저로서는 그가
오늘밤에도 그 호텔에서 묵으리라고
판단했었던 겁니다. 그렇게 판단한 근거도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그 부근을
드라이브라도 하고 있는 중에 경찰관에게
정지명령이라도 받게 되면 틀림없이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경찰관을
쏘겠지요. 그리고 자신의 정체가 경찰에게
탄로났다고 생각하고 즉시 도주를 -- "
"사실 도주하지 않았는가?"
생클레아가 단정하듯 말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정체가 드러났다고
생각하고 달아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현재로서는 그것을 입증할
자료가 없습니다. 다만 어쩐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졌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래서
보고가 들어옵니다. 차가 발견되었을
경우에도 즉각 연락이 들어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흰색 알파의 수배는 몇 시에
발령했는가?"
사법경찰국장관인 마크스 페르네가
물었다.
"오후 5시 15분에 그 여관의 뜰에서
지시를 했습니다. 7시까지는 각
교통순찰대에까지 하달되었을 겁니다. 또
각 시내 중요 경찰서에도 당직자에게
철저하게 지시하도록 연락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재칼은 이러이러한 위험인물이니까
그 점을 생각해서, 수배할 때는
'도난차'라고만 지정하고 발견되면 즉각
지방경찰본부에 연락하고 경찰관 혼자서는
시켰습니다. 이 조치가 잘 못되었다면
철회하겠습니다만, 그 결과로 어떤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책임은 지지 않겠습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안됐지만 한 경찰관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대통령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어."
롤랑 대령이 중얼거렸다. 여기저기서
동의하는 한숨이 나왔다. 르베르가 말했다.
"그 생각에는 저도 찬성입니다만, 단
그것은 경찰관 혼자서라도 재칼을 잡을 수
있다면이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그런데
교통경관이든 순찰경관이든 일반적인
경찰관은 프로 총잡이는 아닙니다. 그러나
재칼은 프로 중에서도 프로입니다. 만일에
그가 차를 정지당하면 경관 하나둘은
버리겠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중의
어려움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그 하나는
재칼이 변신한 것이 탄로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별개의 인간으로, 우리가
전혀 모르는 인물로 둔갑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경찰관이
사살되었다는 사건이 전국의 신문에 보도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미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재칼이 프랑스에 잠입한
진짜 목적 또한 48시간이면 들통나
버리겠지요. 기자들은 민감합니다. 아무리
숨겨도 재칼이 대통령을 노리고 있다는
낌새를 채고 맙니다. 그런 사태에 직면했을
때에 자신이 그 동안의 사정을 대통령께
설명하시겠다고 나설 분이 여러분 중에
계시다면 저는 기꺼이 그분에게 이 수사를
좋아, 내가 하지 -- 하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회의는 언제나처럼 12시 전에
끝났다. 그리고 곧 8월 16일, 금요일로
들어섰다.
제 17 장
짙은 남색 알파 로메오는 새벽 1시 전에
위셀의 역전 광장으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역 바로 맞은편의 카페 한 집만이 아직
영업중이고, 야간열차를 기다리는 손님
몇몇이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재칼은
머리에 빗질을 하고서 이제 막 가게 문을
닫으려고 의자를 쌓아올린 테이블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테라스를 지나 안쪽
카운터로 다가갔다. 그는 추웠다. 시속
60마일 이상으로 달리면 산의 밤 공기는
뼛속까지 스며들 정도로 차갑다. 또한
커브가 많은 산길을 달려왔기 때문에
손발이 굳어져서 쑤시고 있었다. 그리고 또
24시간 전에 저녁을 먹고 이날 아침 버터를
것이 없어서 굉장히 배가 고팠다. 그는
길쭉한 빵 한가운데에 칼집을 내고 거기에
버터를 넣고서, 얇게 썬 타르틴 뷔레를 둘
주문하고는 카운터 위에 있던 더운 물에
달걀을 네 개 넣었다. 바텐더가 타르틴
뷔레를 만들기 시작했다. 커피가
퍼콜레이터의 여과지에서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다. 그는 전화박스가 없는가
싶어서 부근을 둘러보았다. 박스는
없었지만 카운터 끝에 전화가 놓여 있었다.
"전화번호부는 있소?"
그는 바텐더에게 물었다. 바쁘게 손을
움직이면서 바텐더는 카운터 뒤 선반에
쌓아 놓은 전화번호부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직접 꺼내어 보시지요."
있었다. 주소는 오트 샤로니에르 마을의
성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알고 있지만,
그의 도로지도에는 그 마을이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전화는 에글르통 국의
번호였기 때문에 그쪽으로 알아보니 곧
마을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국도
89호선을 위셀에서 다시 30km 간 곳에
있다. 그는 차분히 앉아서 달걀과 버터빵을
먹기 시작했다.
'에글르통 -- 6km'라는 돌의 도표를 만난
것은 새벽 2시 전이었다. 그는 도로에 접한
숲속 어딘가에 차를 놓아 두기로 했다.
아마도 시골 귀족의 영지쯤 되겠지만,
그곳은 깊은 숲으로서 옛날에는 멧돼지
사냥의 명소였다고 한다. 아마 지금도
멧돼지 사냥은 하고 있겠지. 하긴 코레즈
변화가 없는 곳이 여기저기 적지 않으니까.
도로표식에서 수백 - 더 들어가니 숲속으로
뻗은 좁은 길이 나왔다. 입구에 통나무
기둥이 하나 가로 걸쳐 있고, '사유지'라고
쓴 간판을 못으로 박아 놓았다. 그는
통나무를 치우고 차를 타고 들어가서 다시
본래대로 해놓았다. 그리고 반 마일쯤
숲속으로 들어갔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수목은 불법침입자를 나뭇가지로 후려치는
유령처럼 보였다. 그는 차를 세우고
헤드라이트를 끄고서 글로브
콤파트먼트에서 펜치와 손전등을 꺼냈다.
차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작업을 시작한
지 한 시간, 등은 밤이슬에 완전히 젖어
버렸다. 간신히 그는 분해한 저격용 총이
들어 있는 강관을 60시간 만에 섀시에서
있는 가방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차 안에
운전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만한 것이
남아 있는지 확인한 다음, 부근에 무성하게
자란 석남화(石南花) 한가운데로 차를
몰아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쯤 걸려서
부근에서 석남화 가지를 꺾어 와서 차가
뚫고 들어온 자국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이것으로 차의 모습은 완전히 안 보이게
되었다. 다음에 그는 넥타이의 양쪽 끝을
두 개의 여행가방 손잡이에 묶었다. 이것을
앞뒤로 나누어 어깨에 메고 나머지 한 개의
여행가방과 아타셰 케이스를 두 손에
들고서 국도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길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00미터쯤 가서는 짐을
내려놓고 되돌아가서 이끼나 잡초에 난
지우고는 다시 돌아나오는 것이었다. 한
시간쯤 걸려서 겨우 성의 입구까지
되돌아온 그는 통나무 밑으로 빠져나와
거기서 반 마일쯤 떨어진 곳에서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체크 무늬의 양복은
흙투성이고, 목 없는 스웨터는 땀에 젖어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손발의 근육이
화가 치밀 정도로 욱씬거렸다. 그는
여행가방을 한데 모아놓고 그 위에 앉았다.
동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오기 시작했다.
시골 버스는 아침 일찍부터 운행한다.
앞으로 조금만 더 참자고 그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러나 사실 그는 재수가
좋았다. 5시 50분이 되어 시장으로 가는
농가의 트럭이 건초를 잔뜩 실은
트레일러를 끌고서 그 앞을 지나가는
속력을 늦추면서 큰소리로 물었다.
"차가 망가졌소?"
"아니오. 1주일 동안 휴가를 받아서
기지에서 히치하이크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오. 어젯밤 위셀에 도착했는데, 기왕
나선 김에 아주 튈까지 갈까 합니다.
튈까지만 가면 아저씨가 있으니까 트럭으로
보르도까지 데려다 줄 거요. 그래서
위셀에서 지금 겨우겨우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는 운전대에 앉은 사람을 보고 싱긋
웃었다. 운전사는 크게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밤새 걷다니 별난 사람도 다 있군. 이
부근의 길은 어두워지면 사람 새끼라고는
하나도 안 다니는데. 트레일러에 타시오.
싶으면 거기서 다시 걸어 보시고."
트럭은 15분 전 7시에 에글르통에
도착했다. 재칼은 농부에게 고맙다고
하고는 역의 뒤로 돌아서 그를 따돌리고
어떤 카페로 들어갔다.
"이 마을에 택시는 있소?"
그는 커피를 마시면서 바텐더에게
물었다.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기에 택시
회사에 문의해 보니 앞으로 30분 뒤에는 한
대 보낼 수 있다고 했다. 그 기다리는
시간을 이용해서 그는 카페의 손 씻는
곳에서 얼굴과 손을 씻고서 회색 양복으로
가라입고는 담배와 커피로 냄새나는 입안을
헹궜다. 택시는 7시 반에 왔다. 고물이 다
된 르노였다.
"오트 샤로니에르 마을을 알고 있소?"
"물론 알지요."
"멉니까?"
"18km쯤." 운전사는 엄지손가락으로 산
쪽을 가리켰다. "산속이지요."
"거기까지 부탁합시다."
재칼은 가방을 모두 지붕 위로 올리고
아타셰 케이스만 가지고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가 마을에 도착하자 재칼은 광장에
있는 '우체통'이라는 카페 앞에서
내려달라고 했다. 자기가 성으로 간다는
것을 운전사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택시가 사라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서
그는 짐을 카페로 끌어들였다. 이미 마을
광장은 찌는듯이 더웠다. 건초를 잔뜩 실은
짐수레에 매어져 있는 두 마리의 암소가
처음 먹었을 때를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 가장자리를 살찐 검은 파리가 거침없이
산책하고 있다.
카페 안은 어두컴컴하고 썰렁했다. 먼저
온 손님들이 새로 들어선 사람을
평가하려고 의자를 고쳐 앉는 것이 보였다.
아니, 그러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노파가 농부들의 무리에서
떠나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나막신 끄는
소리가 타일 바닥에 울렸다.
"뭘로 할까요, 무슈?"
재칼은 짐을 내려놓고 카운터 앞으로
가서 앉았다. 그곳 손님들은 모두 붉은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붉은 것으로 한잔 주시오."
와인이 나왔다.
"성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노파는 검은 눈을 번득이며 날카롭게
그를 쳐다보았다.
"2km요."
그는 지겨운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 바보 같은 운전사가 여기에는 성
같은 것이 없다면서 억지로 광장에
내려놓더니."
"그 자식은 에글르통 인간이로군?" 하고
노파가 물었다.
재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글르통의 인간들은 모조리
바보들뿐이니까."
"이거, 낭팬데. 지금부터 성에 가야만
하는데......"
손님으로 와 있는 농부들은 그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성에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 되는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는다. 그는 깔깔한
100프랑짜리 지폐를 꺼냈다.
"와인 값이 얼마요?"
노파는 날카로운 눈길로 지폐를 보았다.
푸른 작업복을 입은 농부들이 들먹들먹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거스름돈이 없는데." 하고 노파가
말했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트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사람이라면 잔돈도 가지고
있을 테고."
누군가가 일어나서 등뒤로 다가왔다.
"트럭이라면 있소, 선생."
걸직한 목소리가 말했다. 재칼은 깜짝
놀란 듯이 돌아다보았다.
"그렇지는 않소만. 하지만 내가 트럭
가진 친구를 알거든. 내가 부탁하면 성까지
태워다 줄지도 모르지."
그거 좋은 생각이라는 듯이 재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마시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양
말고 드시오."
농부는 노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파는 와인을 큰 잔에 따랐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소, 이렇게 더운
날에는 목이 탈 텐데?"
텁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커다란 얼굴이
싱글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농부는 다시
노파에게 고개짓을 했다. 그녀는 커다란 병
두 개를 대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농부들에게로 가지고 갔다.
아까 그 남자가 말했다. 농부 하나가
단숨에 와인을 마셔 버리고 밖으로 나갔다.
성으로 가는 길을 흔들리는 트럭에 앉아
재칼은 생각했다 -- 오베르뉴 농부들의
장점은 적어도 외부인에 대해서는 무서울
정도로 입이 무겁다는 점에 있다고.
샤로니에르 남작 부인 코렛은 침대
속에서 일어나 앉은 채 커피를 마시면서 또
한 번 그 편지를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의
분노는 사라져 버리고, 지금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일종의 울적한 혐오감뿐이었다.
지금부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면 좋단
말인가? 그녀는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갈팡질팡했다. 어제 오후 가프에서
느긋하게 차를 몰아 성으로 돌아온 그녀는
집을 지키는 충실한 두 고용인의 마중을
에르네스틴으로서, 남작 앨프레드의 아버지
때부터 성에서 일해 오고 있다. 또 한
사람은 루이종이라는, 에르네스틴이 겨우
허드렛일을 하고 있을 무렵 그녀와 결혼한
농부 출신의 정원지기이다. 현재 성은 방의
3분의 2는 잠가둔 채 쓰지 않고 있지만, 그
성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사람은 이
부부다. 코렛은 새삼스럽게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정원에서 뛰노는 아이들 모습도
없으며, 승마용 말을 나무라는 주인의
씩씩한 모습도 없는, 빈집이나 다름없는
성의 가엾은 여주인일 뿐이다.
코렛은 친구가 일부러 보내 준 파리의
사교잡지에서 오려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젊은 여자의 어깨 너머에서
얼굴을 내민 남편 앨프레드가 바보같이
눈으로 여자의 부풀어오른 가슴을
들여다보고 있다. 호스티스 출신의 댄서인
그녀가 남작이 자기와 '아주 친한 친구'
사이이며, '언젠가'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말이 설명문 가운데 있었다.
사진의 얼굴은 주름투성이이고 목에는
굵은 줄이 몇 가닥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보면서 레지스탕스의 대장이었던 그 젊고
핸섬한 앨프레드는 대체 어떻게 되어버린
것인가 하고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 늠름한 청년과 사랑을 하고 1년
뒤에 결혼을 했을 때에는 아들을 뱃속에
안고 있었다. 산속에 있는 비밀기지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아직 10대로서
레지스탕스의 레포를 맡고 있었다. 그는
30대 중반으로 페가사스라는 암호명으로
모습에 그녀는 반하고 말았던 것이다. 두
사람은 레지스탕스 신부의 집전으로 지하
교회에서 몰래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종전과 함께 남작 집안의 토지와
재산을 모두 그가 상속받았다. 아버지는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한 해에 심장
발작으로 사망하고 없었으므로 그는 새로운
샤로니에르 남작 집안의 영주가 되어
근처에 사는 농부들의 환영을 받으며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곧 그는 성의 생활에 싫증이
나버렸다. 파리의 매력과 환락가의 불빛
속에서 지하운동으로 보낸 젊은 날들을
보상받고 싶은 충동을 그는 참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현재 그는 57세지만, 70이라고 해도
코렛은 사진과 편지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침대에서 뛰어내려 벽에
걸린 거울 앞에 서서 실내복의 앞자락을
젖혔다. 발돋움을 하고 서서 하이힐을
신었을 때처럼 허벅지의 근육에 힘을
주었다. 나쁘지 않아, 이 나이에 이
정도라면 -- 그녀는 생각했다. 풍만하게
성숙한 여체가 거기에 있었다. 히프는
크지만 허리는 승마를 하고 산을 걸어다닌
덕분에 꼭 죄어져 있다. 젖가슴을 두
손으로 들어서 무게를 짐작해 보았다. 아주
예쁜 모양보다는 조금 큰 듯하지만, 아직
침대에서 남자를 흥분시킬 만한 매력은
충분했다. 좋아, 앨프레드, 바람피우기
경쟁이라면 자신 있어요 -- 하고 그녀는
남편의 이미지에 도전하고, 머리를
풀어내렸다. 그 한 가닥이 뺨을 흘러내려서
젖가슴 위에서 멈췄다. 그녀는 두 손을
허벅지 사이에 넣고는 24시간 전에 그곳을
애무해 주던 남자를 생각했다. 그는
노련했다. 그대로 가프에 그냥 있을 걸
그랬다고 그녀는 새삼스럽게 후회했다.
둘이서 실컷 즐길 수 있었는데. 사랑의
도피행을 떠나온 연인들처럼 가명을 쓰면서
이곳저곳에서 묵어 가며 -- 왜 이런 성으로
돌아온 것일까 ?
앞뜰에서 트럭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귀찮은 듯이 그녀는 실내복의 앞자락을
여미고 뜰이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다가갔다. 마을에서 온 덮개 있는 트럭이
서 있었다. 뒤쪽의 문을 열고 남자 둘이
무엇인가를 꺼내고 있다. 잔디밭의 잡초를
거들었다.
트럭에 가려져 있던 남자가 바지
호주머니에 종이쪽지 같은 것을
쑤셔넣으면서 모습을 나타내더니 훌쩍
운전대에 뛰어올라서 클러치를 밟았다.
누가 저런 짐을 가져오게 했을까?
그녀로서는 짐작되는 게 없었다.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세 개의 여행가방과 아타셰 케이스 옆에 한
남자가 서 있다. 햇빛에 비친 금발머리를
보고 그녀는 환희의 미소를 떠올렸다.
"짐승, 아름다운 원시의 짐승. 정말 잘
왔어요."
그녀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욕실로
달려 들어갔다.
방을 나가 층계참까지 가자 아래층
무슨 일이냐고 남자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남작 부인께서는 댁에 계신지요?"
곧 에르네스틴이 늙은 다리를 애써
이끌고 층계를 올라왔다.
"마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금요일 밤의 내무부 회의는 여느때보다
일찍 끝났다. 아무것도 없음이 유일한
보고였기 때문이다. 과거 24시간 동안 차의
특징을 기재한 수배서가 지나친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통상적인 절차를 밟아
프랑스 전국에 부려졌다. 그러나 차는
발견되지 않았다. 같은 요령으로
사법경찰의 각 지방본부는 관할구역 내의
경찰서에, 관할 내의 모든 호텔의 숙박
카드를 본부에 보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각
즉시 분류하여 댓건의 이름을
찾아보았지만, 이 또한 결국 헛수고로
끝났다. 이 사실은 그가 어젯밤엔 적어도
댓건이라는 이름으로는 호텔에 묵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전제를 설정해
보겠습니다."
마땅찮은 얼굴로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일동에게 르베르가 말을 꺼냈다.
"그 하나는 그가 아직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갑자기 암사슴 여관을 떠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고, 단지
우연이었다는 쪽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전제라면 그가 태연히 알파 로메오를
타고 돌아다니며 당당하게 댓건이라는
경우라면 쉽게 그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겁니다. 두 번째 전제는 그가 어딘가에
차를 버리고, 그리고는 자신의 재치에만
의존하여 잠복해서 이동을 꾀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 경우에는 다시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그는 다시 변신할 준비가 없는
경우로서 조만간 호텔에 묵거나 프랑스를
탈출하기 위해서 국경을 넘으려고
하겠지요. 또 하나는, 다시 다른 인간으로
변신해 있을 경우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래서 당신 생각은 어떻소? 놈이 다른
신분을 준비하고 있을까?"
롤랑 대령이 물었다.
한 것은 틀림없으니까 아마도 세계 최고의
살인자 중 하나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살인자로서의 비즈니스에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게다가
어느 나라의 관헌에서도 지금까지 그에게
아무런 혐의도 두지 않았고, 자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일을 할
때에는 반드시 가명을 써서 다른 사람으로
둔갑하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변장의 명수이기도 하다는 거지요. 그의 두
장의 사진을 비교해 보니 칼스로프에게
뒷굽이 높은 구두를 신기고, 키를 높이고,
체중을 몇 -- 줄이고, 콘택트렌즈로 눈빛을
바꾸고, 머리에 염색을 하면 댓건이
완성됩니다. 그런 정도의 기술을 가지고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좀 지나친
낙관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놈 쪽에서는 대통령에게
접근할 때까지 정체가 드러나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생클레아가 이의를 제기했다.
"놈이 변신할 재료를 몇 가지나 준비해
가면서까지 철저하게 조심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아닙니다. 지금도 철저하게 조심하고
있는 거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옛날에
붙잡혔을 겁니다."
"런던 경시청에서 보내온 자료에 의하면
칼스로프는 전후에 공수부대에서 근무한
것으로 되어 있어. 그때의 경험을 살려서
산속에 숨어 노숙을 하는 것은 아닐까 ?"
말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르베르는 동의했다.
"그렇다고 하면 이미 살인자로서의
위험한 존재는 아니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르베르는 생각해 보았다.
"그를 붙잡을 때까지는 위험이 사라질 수
없다는 쪽을 택하고 싶습니다."
"또는 죽을 때까지는." 하고 롤랑이
덧붙였다.
"놈도 바보가 아닌 바에야 목숨이 붙어
있을 때에 프랑스에서 탈출할 궁리를
하겠지."
생클레아의 말을 마지막으로 회의는 끝나
버렸다.
사무실에 돌아온 르베르는 카롱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현재 살아 있고, 또
무기를 가진 채 행방이 묘연해.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한시라도
빨리 그자와 차를 찾아내야만 해. 그는
짐을 세 개 가지고 있으니까 걸어서는 멀리
못 갔을 거야. 먼저 차를 찾아내고,
거기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세."
르베르의 지휘 아래 모두가 눈을
까뒤집어가며 찾고 있는 바로 그 인물은
코레즈 현의 한가운데에 있는 성에서 새
시트에 감싸인 채 누워 뒨굴고 있었다.
붉은 와인과 함께 퍼티와 토끼고기로
뱃속을 채우고, 식후에는 커피와 브랜디로
입가심을, 그 다음에는 느긋하게 목욕을
소용돌이 무늬의 금박을 바라보면서 그는
파리에서 계획을 실행하는 날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1주일 이내에 이 성에서 나가야만 한다.
남작 부인이 얌전히 놓아 줄지는
의문이지만, 그건 어떻게든 되겠지. 우선은
성에서 나갈 이유를 생각해 두어야만 한다.
문이 열리고 코렛이 들어왔다. 머리를
풀어 어깨에 늘어뜨리고, 실내복은 맨 위에
있는 단추만을 잠그고서 그 밑은 열려진
채다. 움직일 때마다 앞자락이 열렸다.
실내복 안은 완전한 알몸이며, 저녁 먹을
때에 신었던 스타킹과 하이힐 그대로였다.
재칼은 한쪽 팔꿈치를 괴고서 그녀가 문을
닫고 침대로 걸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리본을 풀었다. 잠옷 자락이 열리고 가슴이
드러났다. 다시 그는 몸을 일으켜
가장자리에 레이스 장식이 달린 얇은
드레스를 그녀의 어깨에서 벗겼다. 그것은
소리도 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밀어서 침대 위에서
천장을 보게 넘어뜨리고는, 양쪽 손목을
잡고 베개에 밀어붙이면서 그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넓적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고 앉았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생긋 웃었다.
머리칼이 밑으로 흘러내려 젖꼭지에 닿아
있다.
"자, 귀여운 원시인님,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보여 줘요."
그녀는 히프를 조금 들었다. 그는 머리를
그로부터 사흘, 피나는 수색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매일 밤
회의에서는 이미 재칼은 기가 죽어
프랑스를 탈출해 버렸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19일의 회의에서는 재칼은
프랑스의 어딘가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르베르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는 건가?"
생클레아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놈이 아직 프랑스 국내에 있다고 쳐도,
지금 놈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국경을 향해 도망칠 기회를 노릴
뿐이야. 그러나 모습을 나타냈다가는
그때가 마지막이지. 놈이 OAS나 그
당신의 가설이 틀리지 않는다면, 놈에게는
갈 곳도 감싸 줄 인간도 없고 주위에는
온통 적이 있을 뿐이지."
찬성하는 웅성임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참석자들 중 대부분은 경찰이 실패했으며,
살인자의 거처를 알아내는 일은 순수한
형사의 역할이라고 한 부비에 형사부장의
말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르베르는 녹초가 되어 머리를 흔들었다.
수면부족과 긴장과 정신적인 피로와,
경험이나 실적보다는 정치적인 술수로
고관의 지위를 얻은 무리들의 학대로부터
자신과 경찰을 지켜야 하는 불필요한
신경의 혹사로 말미암아 그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만일에 그의 주장이나 방법이
생명이 끝난다. 참석자들 중에는 그렇게
되도록 일을 이끌어 갈 인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옳다면? 재칼이
아직도 대통령을 노리고 있다면? 경계망을
뚫고 들어와서 목적을 달성한다면?
참석자들은 결사적이 되어 속죄양을 물색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죄양이란, 즉
르베르인 것이다. 여하튼 경찰관으로서의
긴 경력은 그 시점에서 끝나게 된다 --
재칼을 찾아내어 검거하지 않는 한.
검거해야 비로소 그들에게 자기가 옳았음을
시인하도록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재칼은
아직 프랑스 국내에 있으면서 대통령을
노리고 있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것은 다만,
뜻은 다르지만 재칼도 자기도 똑같은
해내는 것이라는, 물론 남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묘한 신념뿐이었다.
갑자기 이 골칫거리를 떠맡은 지 벌써
8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르베르는
만일의 경우에 있을 조치까지 포함해서
세부적인 것까지 계산을 다하고 있는 듯한
이 신출귀몰한 상대에 대해서 존경심마저
갖게 되었다. 물론 이런 감정을
회의석상에서 공공연히 입 밖에 낼 그런
어리석은 짓은 안 한다. 즉시 해고당할 게
뻔하다. 르베르에게 있어서 유일한 위안은
바로 옆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테이블을
응시하고 있는 부비에의 존재였다.
부비에도 역시 형사인 것이다.
"재칼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고 르베르는 대답했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
있습니다. 그런 느낌이 듭니다. 왜
그런지를 설명하긴 어렵습니다만."
"느낌이 든다고?"
생클레아는 비웃듯이 말했다.
"어떤 특정한 날이라고? 어떻게 된 건
아닌가, 총경? 추리소설을 너무 읽었거나.
이건 소설이 아니야, 현실이라네. 재칼은
달아나 버렸어 -- . 그렇게 되면 문제없는
거 아닌가?"
자신으로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면서 의자
뒤로 몸을 젖혔다.
르베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기를 빌고 있습니다. 그럼, 저는
이제 이 일에서는 손을 떼고 본래의 임무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수사를 계속해야 된다고 생각하나,
르베르? 위험은 아직도 남아 있다고
생각하나?"
"뒤에 하신 질문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밖에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 하신 질문에 관해서 말씀드리면,
절대로 확신을 갖게 될 때까지는 수사를
계속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았어. 그럼, 여러분, 계속 르베르
총경에게 수사를 부탁하고 이 회의도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여기서 끝내고 싶소
-- . 당분간은."
8월 20일 아침, 에글르통과 위셀의
중간에 있는 고용주의 영지에서 들쥐
사냥을 하고 있던 마르캉쥬 카레라는 사냥
당번이 상처입은 들비둘기를 쫓아서 마가목
들비둘기는 분명히 버린 것으로 보이는
스포츠카의 운전석으로 들어가서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비둘기의 목을 조르면서 사냥 당번은 숲
입구에 가로질러 놓은 통나무에 못질한
'사유지'라는 간판을 무시하고 아베크가
들어와서 차를 거기에 세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차를 덮어서
감춘 잡목은 그곳에 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흙에 꽂아 놓았을 뿐이었다. 다시
주변을 살펴보니 부근의 나뭇 가지를
꺾어낸 자국이 있고, 그 잘린 자국을
감추기 위해서 흙으로 문질러 놓은
것이었다. 시트에 쌓인 새똥의 양으로
미루어 차가 거기에 버려진 지 적어도
2~3일은 지났다고 그는 판단했다. 총과
그는 나중에 마을로 토끼사냥에 쓸
올가미를 사러 갈 때 순경에게 차에 대한
것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을 순경이 자기 집에 있는 수동식
전화로 위셀의 본서에다, 부근의 숲속에서
버려진 차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보낸 것은
정오 가까이 되어서였다. 차의 색깔은
흰색이냐는 질문에 그는 메모를 보았다.
아뇨, 청색입니다. 이탈리아 번호인가?
아니, 프랑스입니다. 차종은 모르겠습니다.
알았다고 위셀의 본서에서는 말했다.
오후에라도 레커차를 보낼 테니까, 그때는
현장 안내를 부탁하네. 파리의 높은
양반들이 이탈리아 번호의 흰 스포츠카를
찾아달라고 해서 모두 총동원되었기 때문에
손이 모자란다네 -- . 순경은 알겠다고
레커차가 문제의 차를 끌고 위셀
경찰서로 돌아온 것은 오후 4시였다.
그리고 5시 조금 전에 그 차를 조사하던
차량정비과 한 사람이 차의 도장 솜씨가
너무 형편없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험삼아
드라이버로 문질러 보니 짙은 남색 도료
밑에서 흰색이 나타났다. 이상히 여겨
번호판을 살펴보니, 그것은 앞뒷면이
바뀌어 있었다. 떼어내어 앞쪽을 보니
'MI-61741'이라고 되어 있다. 당황해서
그는 경찰서로 뛰어갔다.
그 소식이 르베르에게까지 전해진 것은
오후 6시쯤이었다. 오베르뉴의 중심지,
클레르몽페랑의 지방본부에서 바랑탕
총경이 전화로 알려 온 것이다. 바랑탕이
벌떡 일어났다.
"명심하게, 이건 중요한 일이야. 왜
중요한지 그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중요한 일이야. 그래, 이례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는 전권을
위임받았다네. 미심쩍으면 장관에게
문의해도 좋아. 여하튼 지금 곧 위셀로
경찰대를 파견하게. 솜씨 좋은 녀석들을
골라서 말이야. 되도록 숫자가 많은 편이
좋아. 차가 발견된 곳을 중심으로 해서
탐문수사를 벌이는 거야. 지도를 준비해서
그 지점을 중심으로 바둑판을 그려넣고,
하나씩 이잡듯이 탐문하게. 농가는
물론이고 상점, 카페, 호텔, 그리고 나뭇꾼
오두막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찾아가야 해. 그 국도를 늘 지나다니는
키가 큰 금발의 남자로서, 영국인이지만
프랑스어가 유창해. 여행가방 세 개와
아타셰 케이스를 가지고 있을 걸세. 그리고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고, 비싼 옷을 입고
있겠지만, 지금은 아마 들잠을 잔 것처럼
꾀죄죄한 모습이겠지. 탐문의 요점은 그가
어디에 있었나, 어디로 갔는가, 무엇을
사려고 했는가 -- 이 세 가지일세. 아,
그리고 신문기자의 귀에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되네. 무슨 뜻인가, 어렵다는
것은? 그야 물론 눈치가 빠른 녀석들이지.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묻겠지. 글쎄,
자동차 사고가 있었는데 타고 있었던
사람이 혼자 몽유병 상태로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을
수색중이라고나 해두지. 그래, 인도상의
해서든지 의심을 갖지 않도록 하게.
부탁하네. 지금은 여름 휴가철이라 하루
500건이나 사고가 발생해. 전국지에 실을
만한 기삿거리는 없다고 잡아떼면 돼.
그러니까 재주껏 속여야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그의 거처를 알아냈다
해도 가까이 가면 안돼. 멀리서 에워싸서
달아나지 못하게만 하면 되네. 나도 되도록
빨리 그리로 갈 테니까."
부숴 버릴 듯이 수화기를 놓고 르베르는
카롱 쪽을 보았다.
"곧 장관께 연락해서 회의를 8시로
앞당기도록 해주게. 저녁식사 때라는 건
알고 있어. 괜찮네, 곧 끝날 테니까.
그리고 공군기지에 전화해서 헬리콥터
준비를 부탁하게. 야간비행으로 위셀까지
놓게, 마중나올 차를 대기시켜야 하니까.
자네는 여기를 지키게. 잘 부탁하네."
클레르몽페랑에서 파견된 경찰대는
위셀에서 합류한 응원대와 함께 차가
발견된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 광장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서서히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는 시각이었다. 바랑탕은 무선차에서
그 지역의 다른 여러 마을에 파견되어 있는
순찰차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는 차가
발견된 지점을 중심으로 한 반경 8km
지역부터 우선 탐문을 시작하기로 했다.
탐문은 철야로 진행할 생각이었다. 시골
사람들은 어두워지면 대개 집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사정이 좋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복잡한 지형을 가진 지역이어서
수사원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거나,
오두막을 빠뜨릴 가능성도 있다.
또 한 가지 바랑탕이 전화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요소, 르베르에게 대놓고 말하고
싶지 않은 기질이 이 지방에는 있었다.
공교롭게도 부하가 그것과 부딪히게
되었다. 한밤중인 12시경, 한 조의
수사원이 알파가 발견된 지점에서 3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한 농가에서 농부 한
사람을 심문했다. 그 농부는 잠옷바람으로
입구에 막아서서 수사원들이 안에 들어가는
거부했다. 손에 든 등잔의 불빛이
수사원들의 모습을 어렴풋이 비췄다.
"이봐, 가스통, 자네는 가끔 그 길을
지나서 시장을 다니고 있잖아. 금요일
아침에도 그 길을 지나서 에글르통에
갔었지?"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 말해 보게."
"갔었나, 안 갔었나?"
"생각이 안 나는데."
"길에서 사람을 만나지 않았었나?"
"남의 일은 몰라."
"그런 게 아니라, 누구 만난 사람이
없었는지 그것을 묻는 거야."
"못 봤어, 아무것도."
"금발에 키가 크고 건장한 남자야.
여행가방 세 개와 손가방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 난. 몇 번
말해야 아나?"
그런 식의 대화가 20분이나 계속되었다.
수사원 하나는 꼼꼼하게 메모를 하고
되돌아갔다. 돌아나오는데 사슬에 매어둔
개가 짖어대고, 한 사람은 자칫 다리를
물릴 것 같아서 둘다 엉겁결에 옆으로
피한다는 것이 퇴비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농부는 그들이 도로로 나가서 차를 타고
돌아갈 때까지 꼼짝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문을 거칠게 닫고서 다가오는
염소를 발로 차 버리고는 마누라가 자고
있는 침대로 돌아왔다.
"당신이 태워 주었다는 남자 얘기네,
무슨 나쁜 짓을 했나?"
"알 게 뭐야. 하지만 나는 말이야,
불쌍한 사람을 경찰에게 고자질하는 그런
짓은 안 해. 그런 짓을 했다간 이 가스통의
체면에 먹칠을 하는 거지."
그는 기침을 하고 벌개진 숯불에
"더러운 개들!"
그는 등잔불을 입으로 불어서 끄고
침대로 들어가서 살집 좋은 마누라 곁으로
다가갔다.
"잡히지 마, 젊은 친구.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말야 -- ."
르베르는 서류를 내려놓고 일동을
둘러보았다.
"회의가 끝나는 대로 위셀로 달려가서
수사를 지휘할 생각입니다."
1분 가까이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내무장관이 르베르에게 물었다.
"이번 일로 미루어 현재로선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자네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페인트를 사서 차에 칠을 다시 했는데,
사이에 가프에서 위셀까지 몰고 갔다면,
그때는 이미 칠을 다시 한 뒤라고 생각해도
되겠지요. 그렇다면 페인트를 산 곳은
가프라는 것이 됩니다. 지금 그쪽을
조사하라고 일러놓았습니다만, 틀림없이 그
사실은 드러날 겁니다. 그가 급히 가프의
여관을 떠난 것은 어디에선가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전화를 했거나, 그가 파리나 런던의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거나, 여하튼
댓건으로 둔갑한 것이 드러났다는 정보를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순간적으로
정오까지는 우리의 손이 뻗을 것으로
계산하고 즉시 여관에서 사라진 거지요.
십중팔구는 그렇게 되었겠지요."
회의실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차고, 그
금이라도 갈 것 같았다. 공허한 소리가
어딘가 먼 곳에서 들려 왔다.
"이 방에서 기밀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뜻인가?"
"반드시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기밀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은 여기 말고도
있습니다. 전화 교환수, 텔렉스
오퍼레이터, 명령전달의 중개를 하는 중급,
하급의 담당관들. 그들 중에 OAS의
요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이것만은 이미 분명해졌습니다. 재칼은
프랑스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계획 자체가
들통나서 그것을 그만두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계획을 추진해
나간 것입니다. 이번에는 알렉산더
댓건으로 둔갑해 있다는 것이 탄로났다는
한 사람입니다. 아마 그것은 지난번 로마의
호텔로 전화 연락하는 것을 DST에게
탐지당한 바르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 ." DST 국장이 신음소리를
냈다. "그때 우체국에서 체포했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데, 르베르, 또 하나의 결론이라는
것은 뭔가?" 하고 내무장관이 물었다.
"그는 댓건으로 변신한 것이 탄로났어도
프랑스를 떠나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떠나는 것은 고사하고 파리로 오려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아직도
대통령을 노리고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
오만하게도 도전해 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내무장관은 일어나서 서류를 끌어모았다.
반드시 재칼을 찾아내게. 오늘밤이야말로
반드시. 필요하다면 사살해도 좋아. 이것은
대통령의 명령이라고 생각해 주기 바라네."
엄숙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프레이
내무장관은 회의실에서 나갔다.
한 시간 뒤, 르베르를 태운 헬리콥터는
기지를 떠나 어두운 밤하늘에서 남으로
진로를 잡았다.
"무례한 놈이야. 용서할 수 없어.
실질적으로 프랑스를 움직이고 있는 우리
고관들에게 미스가 있다고 넌지시 비치고도
태연해 하다니. 다음 보고서에는 분명히
그에 대한 것을 쓰겠어."
자클린은 슬립의 끈을 어깨에서 벗겼다.
그것은 밑으로 흘러내려 허리에서 걸렸다.
그녀는 두 팔로 양쪽에서 젖가슴을 누르고
얼굴을 밀어붙였다.
"자세하게 말해 줘요."
그녀는 노란 목소리로 달콤하게
속삭였다.
제 18 장
8월 초순 이후 줄곧 맑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8월 21일 아침도 밝고
맑았다. 크게 기복을 이룬 구릉이 멀리
바라다보이는 샤로니에르 성의 창문에서
보는 경치는 정말로 평화로웠으며, 18km
떨어진 에글르통에서 경찰이 펼치고 있는
탐문수사의 소동은 딴 세상의 일이었다.
알몸 위에 가운을 걸친 재칼은 남작의
서재 창가에 서서 파리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남작 부인 코렛은 이틀 밤 계속된
섹스 놀이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 2층
침실에서 자고 있다. 전화가 연결되자 그는
늘 그렇듯이 암호를 댔다.
"이쪽은 재칼."
쉰 목소리가 응답을 했다.
"또 정세가 변했소. 적은 차를 발견하고
-- ."
재칼은 때때로 날카로운 질문을 해가며
2분쯤 바르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메르시'라고 인사하고는 수화기를
내려놓고서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바르미의 정보에 의해서
싫든 좋든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처음 예정으로는 앞으로 2일 더
성에 머무를 생각이었지만 급히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게다가 지금의 전화에는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없었던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그 순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었지만, 담배를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담배를 다 피우고
꽁초를 창밖으로 내던질 때에 그 불안의
정체에 대해 짐작이 갔다. 수화기를
들어올리고 나서 곧 희미하게 툭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성에 온 지 나흘,
어제까지 세 번 파리에 전화를 걸었지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침실에는 같이
연결된 전화가 있지만, 그가 나올 때
코렛은 분명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분명히...... 그는 맨발 그대로 소리도
없이 층계를 올라가서 얼른 침대로
뛰어들었다. 수화기는 그대로 놓여
있었지만, 옷장의 문이 활짝 열려 있고
가방도 모두 열린 채 바닥에 내던져져
있었다. 열쇠 꾸러미가 옆에 떨어져 있다.
코렛은 부근에 마구 어질러 놓은 물건들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주위에는 가느다란
강관이 흩어져 있었다. 모두 마개 대신에
밀어넣어 두었던 마직 천이 빠져나와 있고,
어떤 강관에서는 망원조준기의 끝부분이,
또 다른 강관에서는 소음기가 삐죽이 나와
있었다. 그녀는 그가 들어왔을 때 공포에
떨면서 바라보던 것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것은 라이플의 총신과 노리쇠 뭉치였다.
두 사람 모두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재칼 쪽에서 먼저 정신을 차렸다.
"엿들었군."
"난......아침마다 당신이 누구에게
전화를 거는지 알고 싶어서......"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뇨. 당신이 침대에서 빠져나가면 그
기척에 반드시 잠을 깨요. 이......이것은
반은 심문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
어조에는 아니, 그저 장난감일 뿐이라고
그가 부정하기를 바라는 듯한 것이
느껴졌다. 그는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이때 그녀는 비로소 그의 눈 속에서 회색
반점이 확산되어 눈의 표정을 덮어 감추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생명 없는
기계처럼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섰다. 총신이 손을 떠나
소리를 내면서 다른 부품 사이로 굴렀다.
그녀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당신, 그 사람을 죽일 생각이군요. 당신
OAS지요? 이것으로 드골을 죽일
생각이지요?"
재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대답이 되었다. 그녀는 문을
발자국으로 따라가 그녀를 잡아서
침대에까지 다시 끌고 왔다. 흩어진 시트
위에서 팔딱팔딱 뛰면서 그녀는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벌렸다. 경동맥(頸動脈)에
가해진 일격이 소리를 막았다. 이어 그는
왼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머리를
침대 끝에서 밑을 향해 엎드린 자세로
눌렀다. 순간 양탄자의 무늬가 그녀의
망막에 비쳤으나, 목뒤에서 내리친 일격이
완전히 의식을 앗아가 버렸다.
그는 문으로 다가가서 바깥 동정을
살폈으나 층계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에르네스틴은 집 뒤쪽에 있는
부엌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루이종은 곧 시장에 갈 것이고.
다행히 둘 다 귀가 어둡다.
그것을 군용 외투와 앙드레 마르탱의
더러워진 옷이 들어 있는 세 번째의
여행가방에 넣었다. 여행가방의 안감을
두들겨 보았으나 안에 숨겨둔 증명서류에는
이상이 없었다. 그는 그 가방을 열쇠로
잠갔다. 덴마크의 펠 옌센 목사의 옷을
넣어둔 두 번째 가방을 열어놓기는 했으나,
안을 뒤진 흔적은 없었다.
침실 옆에 있는 욕실에서 그는 재빨리
얼굴을 씻고 면도를 했다. 그리고 10분쯤
걸려서 긴 금발을 가위로 5cm 정도
잘라내고, 다음에는 브러시로 염색약을
묻혀서 꼼꼼하게 머리를 빗어서 중년
남자같이 회색으로 물들였다. 선반에 세워
놓은 옌센 목사의 여권 사진을 보면서
염색약 덕분에 촉촉해진 머리칼을 사진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푸른색 콘택트렌즈를
끼었다.
세면기에 튄 염색약이나 비누거품을
깨끗이 닦아낸 그는 면도기구를 챙겨서
침실로 돌아왔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코렛의 발가벗은 시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코펜하겐에서 산 조끼, 바지,
양말, 셔츠를 재빨리 입은 다음에 검은
흉배를 목에서부터 걸치고, 그 위에
목사용의 흰 칼라를 목에 둘렀다. 그리고
검은 윗도리를 걸치고 촌스러운 구두를
신었다. 갑자기 목사가 탄생한 것이다.
다음에는 금테 안경을 안주머니에 넣고
세면도구와 프랑스의 성당에 관한
덴마크어로 된 책을 아타셰 케이스에
넣었다. 안주머니에는 덴마크의 여권과
옷가지는 본래의 여행가방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은 8시가
가까워서였고 에르네스틴이 아침 커피를
가지고 올 시간이었다. 에르네스틴과
루이종은 남작이 어릴 때부터 섬겨 온
충복이기 때문에 코렛은 그들에게 정사가
탄로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다.
창에서 바깥 동정을 살피고 있자니까
루이종이 자전거로 문 쪽을 향해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짐 싣는 곳에서는 바구니가
흔들리고 있다. 그때 에르네스틴이 문을
노크했다. 그는 숨을 죽였다.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커피를 가지고 왔습니다, 마님."
높은 목소리가 집안에 울렸다. 재칼은
"거기 그냥 두고 가시오. 나중에 마실
테니까."
문밖에서 에르네스틴이 아연하여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감히 서방님 침실에서 -- .
그녀는 황급히 루이종을 찾으러 갔지만,
그는 이미 밖에 나가고 없었다. 혼자 부엌
개수대를 향해서 요즘 인간들은
썩어빠졌어, 큰나리께서 살아 계실 때와
비교하면 말도 안된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침실의 창문으로
시트에 달아맨 네 개의 짐이 집 앞에 있는
화단에 툭 하고 가벼운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물론
침실의 문이 안쪽에서 잠기는 소리 같은
것은 들릴 리도 없었다. 재칼은 코렛의
덮어서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해놓았다.
그리고는 창문 턱에 나가서 창문을 꼭 닫아
두고 밑의 잔디 위로 뛰어내렸다.
성 옆에 있는, 마구간을 개조한 차고
안에서 코렛의 르노에 엔진이 걸렸다.
그래도 그 소리만은 에르네스틴에게도
들렸다. 황급히 식기만 넣어두는 방의
창문으로 내다본 그녀의 눈에 앞뜰로
통하는 차도로 들어가 그곳에서 멀어져
가는 르노의 모습이 보였다.
"또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이지, 저
마님은?"
층계를 오르면서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침실 문 앞에 놓아둔 커피는
아직 미지근했지만, 입을 대지는 않았다.
몇 번 노크한 다음에 그녀는 문을
방문도 잠겨 있었다. 양쪽 방 모두 안에서
응답하는 기척이 없었다. 어쩐지 불길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불길한 일이라면
전쟁중에 독일군 장교가 큰서방님이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밀고 들어와
묵으면서 작은 서방님에 대해 쓸데없는
것을 이것저것 캐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기분나쁜 일은 그때 이후로는
처음이다 -- .
그녀는 루이종에게 의논해 보기로 했다.
마을의 카페에 전화를 걸어서 시장에 있는
루이종을 불러 달라고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전화의 기계장치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화기를
손에 들기만 하면 누군가가 곧 대답해 줄
데려와 주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무지한
그녀로서는 무리도 아니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들어서 귀에다 대고 10분
동안이나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응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전화 코드는
도서실 벽 아래 부분에서 나와 있는데, 그
뿌리짬이 날카로운 칼 같은 것으로
비스듬히 반이나 잘려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침식사 때가 지났을 무렵, 르베르는
헬리콥터로 파리에 돌아왔다. 뒤에 그가
카롱에게 말했듯이 바랑탕의 일 처리는
농부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훌륭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식사
때까지 며칠 전 이른 아침에 재칼이 아침을
먹은 에글르통의 카페를 찾아내고, 이어서
에글르통을 중심으로 반경 20-- 지역 안의
모든 도로를 봉쇄하기로 하고, 정오까지 그
작업을 끝내도록 이미 손을 써놓았다.
르베르는 바랑탕의 성격을 계산에 넣고
재칼을 찾아야 할 중대성을 넌지시 비쳐서,
바랑탕은 그 바람에 우쭐해서 에글르통
주변에 감시망을, 그의 말대로 흉내내면,
'쥐의 뒷구멍보다 굳게' 펴게 된 것이다.
오트 샤로니에르 마을에서 나온 조그만
르노는 산지를 빠져나가서 튈로 가고
있었다. 경찰이 알파가 발견된 지점에서
지난 밤부터 계속 탐문수사를 해오고
있다면 새벽 전에는 에글르통까지 손이
뻗쳤을 것이라고 재칼은 추측했다. 카페의
바텐더나 택시 운전사의 진술로 오후에는
성에까지 손이 뻗치겠지.
영국인이지 회색 머리칼의 목사는 아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참으로 위기일발의
탈출이었다. 그는 산 옆길을 빠져나가
에글르통의 남서쪽 18km 지점에서 국도
8호선으로 나갔다. 거기서 튈까지 20km는
더 가야 된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10분
전 10시.
그가 직선 코스에서 커브를 다 돌았을
때, 에글르통에서 몇 대의 차가 그리로
왔다. 순찰차와 두 대의 트럭이다. 차는
직선 코스의 중간쯤에서 멈춰서고, 밖으로
뛰어내린 6명의 경찰관이 거기에 철제
울타리를 치기 시작했다.
"뭐라고, 없다고?"
에글르통에서 바랑탕은 흐느껴 우는 택시
"어디 갔소?"
"모릅니다. 정말 몰라요. 우리 주인은
매일 위셀에 가서 아침 기차가 도착하는
것을 역전에서 기다립니다. 그리고 손님이
없을 때에는 이 차고에 돌아와서 수리 같은
걸 합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손님을 태우고 어디로 갔을 거예요."
바랑탕은 어두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자에게 호통을 쳐 봐야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택시
회사라고는 해도 사장이 운전사와 정비공을
겸하고 있는 개인영업이다. 본인이
없고서야 이야기가 안된다.
"금요일 아침 사람을 어딘가에 태워다
주지 않았소?"
바랑탕은 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돌아왔어요. 그런데 그때 카페에서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마침 타이어를 하나 빼내었을 때인데, 하필
지금이냐면서 어물거리다가는 손님이
기다리다가 다른 택시를 타 버린다며 얼른
타이어를 끼우고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그
손님을 어디로 태우고 갔는지는 내게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녀는 훌쩍거리면서, "우리 그이는 내게
말도 잘 안 해요." 하고 내친 김에
불평까지 했다. 바랑탕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알겠소, 부인. 이젠 그만해요.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내가 기다리겠소."
그는 부장형사 한 사람에게 명령을
내렸다.
보내어 지키도록 하게. 택시의 번호는 알고
있지? 이 집주인이 나타나면 즉시 내게
데리고 와."
바랑탕은 차고를 나와서 자기 차에
올라탔다.
"에글르통 경찰서로 가세."
이때 그는 이미 수사본부를 에글르통
경찰서로 옮겨놓았다. 덕분에 경찰서는
그곳이 생긴 이래 처음 그렇게 떠들썩했다.
튈 못 미처 10km 지점에 있는 산속의
험한 골짜기 아래로 재칼은 댓건의 옷과
여권이 들어 있는 가방을 내던졌다. 이제는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해 주었다. 다리의
난간에서 떨어진 가방은 골짜기의 짙은
덤불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곳을 일부러 지나 세 블록쯤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서 남은 두 개의 가방과 아타셰
케이스를 가지고 역의 표 파는 곳으로
갔다.
"파리까지 한 장, 2등으로 부탁합시다.
얼마지요?"
그는 창구에서 역원이 앉아 있는 자리를
들여다보았다.
"97 신 프랑입니다."
"파리행 다음 기차는 몇 시에 있습니까?"
"11시 50분입니다. 아직 한 시간쯤
남았습니다. 플랫폼에 레스토랑이
있으니까, 거기서 기다리시지요. 파리행
기차가 도착하는 1번 홈에 있으니까
좋으시다면 이용하십시오."
재칼은 짐을 가지고 개찰구로 갔다.
다시 짐을 두 손에 들고 개찰구를 빠져
나갔다. 거기서 그는 푸른 제복에게 가던
길을 제지당했다.
"신분증을 보여 주시지요."
CRS의 대원은 아직 젊은데도 위엄을
보이려고 나이 이상으로 엄숙한 표정을
애써 짓고 있었다. 그는 자동소총을 어깨에
메고 있다. 재칼은 다시 짐을 내려놓고
덴마크의 여권을 꺼냈다. CRS 대원은
그것을 한장 한장 넘겨 보았지만 한 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덴마크인입니까?"
"뭐라고요?"
"당신은......덴마크인?"
그는 여권의 표지를 두드렸다. 재칼은
미소를 지으며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CRS 대원은 여권을 돌려주고서 플랫폼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재칼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없는 듯
개찰구로 들어온 다음 손님을 제지했다.
루이종이 시장에서 돌아온 것은 1시가
가까워서였다. 어딘가에서 와인을 한잔 한
모양이었다. 이리저리 고민하고 있던
에르네스틴은 단숨에 불만과 하소연을
쏟아놓았다. 루이종은 겨우 사정을
알아차렸다.
"알았어, 창문까지 기어올라가서 안을
들여다보지."
그러나 사다리를 세우는 일부터
야단법석이었다. 제멋대로 이리저리
흔들려서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었다.
세우고서 루이종은 벌벌 떨면서 올라갔다.
그리고는 곧 다시 내려왔다.
"마님은 주무시고 계셔."
"하지만 이렇게 늦게까지 자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어요."
"그러니까 오늘은 특별한 거야. 억지로
깨우면 안돼."
파리행 기차는 정시보다 꽤 늦어져서 1시
정각에 튈 역에 도착했다. 튈에서 탄 손님
중에 회색 머리를 한 프로테스탄트의
목사가 있었다. 그는 중년 여자 둘만이
앉아 있는 콤파트먼트의 구석에 앉아서
금테 안경을 끼고 아타셰 케이스에서 꺼낸
교회나 성당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파리에는 그날 밤 8시 10분에 도착할
샤를 보베는 고장난 택시 옆에 서서
시계를 보며 혀를 찼다. 오후 1시 반, 점심
먹을 시간인데 에글르통과 라마티에르 마을
사이에서 샤프트가 브러져서 그만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그는 벌써 몇 번째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택시를 그 자리에
두고 이웃 마을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버스를 타고 에글르통으로 돌아가면,
밤까지는 레커차로 끌어올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1주일 동안의 벌이가
날아가 버린다. 게다가 그의 전재산인
택시는 문이 잠겨지지 않는 것이다. 그대로
두고 가면 동네 불량배들이 달려들어
몸체만 남겨두고 몽땅 다 가져갈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역시 끈기 있게 트럭이
부탁을 해서 에글르통까지 끌어다 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도시락은 없었지만,
글로브 컴파트먼트에 와인 한 병이 들어
있었다. 병은 거의 비어 있었다. 택시는
수지가 안 맞는 장사다. 그는 뒷좌석에
기어들어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도로는
불볕에 타는 듯했고, 해가 기울어서
시원해지기 전에는 트럭 같은 것은 지나갈
것 같지도 않았다. 농부들은 지금쯤
시에스타(낮잠)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어느 사이엔가 운전사도 잠들어 버렸다.
"아직 안 돌아왔다고? 대체 어디에 간
거야?"
바랑탕은 수화기에다 대고 소리쳤다.
그는 지금 에글르통 경찰서에서 운전사
집에 있는 부하와 전화로 이야기하고 있는
대꾸했다. 바랑탕은 수화기를 내던지듯
도로놓았다. 오전부터 점심시간까지 각
도로의 검문소에서 끊임없이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지만, 에글르통을 중심으로
하는 반경 20km의 지역에서 나간 사람들
중에 장신, 금발의 영국인에 해당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고 한다. 잠자고 있는 듯한
시장 마을 에글르통은 위셀과
클레르몽페랑에서 끌어모은 200명에 달하는
경찰관이 어느 구석에 박혔는지 지금
여름의 열기 속에 고요하기만 했다.
오후 4시가 되자 에르네스틴은 이제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 한 번 창으로 올라가서 마님을
깨워 봐요." 하고 그녀는 남편 루이종을
들볶았다.
예삿일이 아니에요. 아무래도."
루이종은 자고 싶은 사람은 자도록
내버려두면 그만이라고 하며, 자기는 몸도
피곤하다며 마음내켜 하지 않았지만,
에르네스틴이 일단 그렇게 정하면 아무리
반대해도 소용이 없다. 그는 다시 사다리를
기어올라갔다. 이번에는 먼젓번보다 잘
올라갔다. 그는 창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밑에서는 에르네스틴이
걱정스러운 듯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분 뒤, 루이종이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큰소리를 쳤다.
"이봐, 마님이 죽어 있어!"
당황해서 사다리로 내려오려는 그에게
늙은 아내가 안으로 잠긴 침실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눈이 바로 옆에 있는 베개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봐요, 루이종."
"뭐야."
"마을에 가서 마티우 선생을 불러와요,
빨리."
루이종은 와들와들 떨리는 다리로 페달을
밟으며 저택에서 달려나갔다. 이미 40년
이상이나 오트 샤로니에르 마을의 환자들을
돌봐 온 마티우 의사는 자택의 뜰에 있는
살구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가
루이종의 이야기를 듣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사를 태운 차가 성에 도착한
것은 4시 반쯤이며, 의사는 침대에 누워
있는 코렛을 진찰하고는 방 입구에 서 있는
노부부 쪽을 돌아다보았다.
의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빨리 경찰을 불러야 해."
카이요 순경은 일에 관해서는 굉장히
딱딱한 사람이며, 경찰관의 임무의
중대성을 언제나 자신에게 타이르며,
조사를 할 때에는 언제나 사실 그대로를
이끌어내는 일이 제일이라는 좌우명을
꿈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부엌의
테이블에 앉은 그는 에르네스틴, 루이종,
그리고 마티우 의사의 이야기를 신중하게
기록하여 진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의사가 자신의 진술서에 사인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살인사건입니다.
첫번째 용의자는 여기에 묵었다가 마님의
차로 도망쳤다는 금발의 영국인이오. 당장
그리고 순경은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내려갔다.
오후 6시 반, 르베르는 파리에서 바랑탕
총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바랑탕?"
"아직 수확이 없어."
갑자기 바랑탕이 큰소리로 말했다.
"아침 10시 이전에 작은 샛길까지 모든
도로를 봉쇄했는데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어. 차를 버린 뒤에 멀리 도망쳤다면
모르지만, 놈은 틀림없이 아직 포위망 속에
있어.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금요일 아침
놈을 에글르통에서 어디론가 태워다 준
택시 운전사가 아직 안 돌아오는 거야.
사방으로 찾고는 있지만......잠깐 기다려,
수화기를 통해서 누군가와 빠른 말씨로
무슨 일인지 의논하는 바랑탕의 소리가
르베르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이윽고 다시
바랑탕이 전화에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살인사건이 발생했어."
"어디서?"
사이를 두지 않고 르베르가 물었다.
"부근 마을에 있는 성이야. 방금
순경에게서 연락이 왔네."
"피살자는 누군가?"
"성의 여주인이야. 잠깐 기다려......
샤로니에르 남작 부인이라는 여자야."
르베르의 얼굴색이 변했다. 옆에 있던
카롱조차도 분명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창백해졌다.
그자는 성에 이미 없나?"
다시 바랑탕은 누군가와 잠깐 이야기를
하는 눈치였다.
"오늘 아침 남작 부인의 차를 타고
자취를 감추었다는군. 조그만 르노야.
시체를 발견한 것은 정원지기인데, 오후가
되어서야 알았다는군. 아마 늦잠을 자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창으로
기어올라가서 안을 들여다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다고 하니까."
"르노의 번호와 특징은 알고 있겠지?"
"그래."
"그럼, 긴급수배하게. 이젠 비밀로 할
필요도 없어. 살인범으로 공공연히 수배할
수 있으니까. 내 쪽에서도 전국에
지명수배하겠네. 자네 쪽에서는 가능하면
방향으로 도주했는지, 대강의 방향이라도
알면 좋겠네."
"알겠네. 지금부터가 정작 시작이로군."
르베르는 전화를 끊었다.
"이게 무슨 꼴이야, 나도 이젠 늙었군.
둔해졌어. 샤로니에르 남작 부인의 이름은
암사슴 여관 숙박부에 이미 기재되어
있었어. 재칼과 같은 날 그 호텔에 묵었단
말이야."
오후 7시 반, 튈의 골목길을 순찰중인
경찰관이 르노를 발견했다. 45분에 경관은
튈 경찰서로 돌아가서 보고하고, 55분에 튈
경찰서는 바랑탕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8시
5분 그는 르베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에서 500-쯤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네."
"응, 어딘가에 있을 거야."
"파리행 아침 기차의 튈발 시간과 파리의
오스테를리츠 역 도착시간을 찾아보게,
빨리. 부탁일세, 빨리 빨리."
다급한 말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파리행은 하루에 두 번뿐이야. 아침
기차는 튈을 11시 50분에 출발, 파리
도착은......음, 여기 있군. 8시 10분이야
-- ."
르베르는 수화기를 내던지고 방에서
뛰어나가면서, 따라오라고 소리쳤다.
8시 10분 도착하는 급행열차는 정각에
오스테를리츠 역에 와 닿았다. 기차가
멈춰서자마자 일제히 문이 열리고 승객들이
마중을 받고 서로 끌어안는 사람도 있고,
빠른 걸음으로 구내를 빠져나가 택시
승차장으로 서둘러 가는 사람도 있었다. 흰
칼라를 세운 장신에 회색 머리칼을 한 그
인물도 그런 사람 중 하나로서, 그는 제일
먼저 택시 승차장에 도착하여 벤츠의
뒷좌석에 세 개의 짐을 던져 넣었다.
운전사는 요금기를 꺾고 큰길로 나가는
비탈을 내려갔다. 이 역전 광장에는 반원을
그린 듯한 차도가 나 있는데, 한쪽은
입구로 되어 있고 다른 한쪽은 출구로 되어
있다. 택시는 출구를 향해서 비탈길을
내려갔다. 그때 사이렌 소리가 택시를 서로
먼저 타려고 불러대는 소음을 제압이라도
하듯이 울려왔다. 택시가 비탈길을 다
내려가서 길거리로 들어가려고 일단
호송차가 역전 광장으로 들어가서 정면
출입구 앞에 멈췄다.
"흥, 경찰은 오늘밤도 바쁜 모양이군요."
하고 운전사가 말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손님?"
손님은 그랑 조귀스탕 강가에 있는 어떤
조그만 호텔의 번지를 댔다.
오후 9시, 르베르가 사무실로 돌아오니
튈에 있는 바랑탕 총경에게 전화를
걸어달라는 전갈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는 5분 만에 연결이 되었다. 르베르는
바랑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메모를
해나갔다.
"차의 지문을 채취했나?"
"물론. 성의 방에 있는 것도 전부 떴네.
일치해."
"가능한 한 빨리 이리로 보내 주게."
"곧 보내지. 튈 역에서 놈을 만났던 CRS
대원도 파리로 보내 줄까?"
"아니, 그럴 것까지는 없네. 증언 내용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직접 들어 봐야 그
이상은 없을 테고. 정말 이번에는 여러
가지로 신세가 많았네. 고맙네. 그쪽은
이제 수사를 종결해도 돼. 놈은 이쪽
관할로 들어왔으니까. 앞으로는 이쪽에서
해나가겠네."
"정말로 덴마크의 목사가 그놈이란
말인가? 아닐지도 모르잖은가?"
"아니야, 놈이 분명해. 여행가방 중에서
하나는 오트 샤로니에르와 튈 사이에서
버린 거야. 강이나 계곡에서 찾아보게.
딱 들어맞잖나. 걱정 말게. 놈이
틀림없으니까."
르베르는 전화를 끊고 떫은 얼굴로
카롱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목사야. 덴마크의 목사로
둔갑했어. 이름은 몰라. CRS 대원은 여권에
기재되어 있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인간이란 정말 불완전한 거지. 언제나 이
인간적인 요소가 사태를 복잡하게 한단
말이야. 택시 운전사는 길가에서 낮잠을
자고, 정원지기는 여주인이 점심때가
되어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동정을 살펴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경찰관은 여권의
이름을 기억 못하고 있어. 그런데 말이야,
뤼시앙, 나도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은퇴해야겠어. 이젠 나도 그럴 나이야.
준비를 해주게나. 들볶이러 갈
시간이니까."
내무부에서 열린 회의는 날카롭게 긴장된
공기에 쌓여 있었다. 르베르는 40분에
걸쳐서 알파가 발견된 숲에서
에글르통까지의 재칼의 도주경로, 요긴한
정보를 줄 택시 운전사가 행방불명이었던
일, 성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튈에서
파리행 급행을 탄 목사 이야기 등에 관해서
차례차례 자세하게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생클레아가 차갑게 빈정거렸다.
"요컨대 새 이름과 얼굴을 가진 살인자가
파리 시내로 들어왔다는 말이군? 또 실패를
한 모양이군, 총경?"
"책임문제를 따질 때가 아니야." 하고
내무장관이 생클레아를 막았다.
덴마크인 여행자가 몇이나 있을 것
같은가?"
"200~300명 정도 아닐까요?"
"조사할 수 있겠나?"
"내일 아침 호텔의 숙박 카드가 경시청에
도착되기 전에는 무리입니다."
"오늘밤 12시, 2시, 4시, 세 번에 걸쳐
시내의 전 호텔에 담당자를 파견해서
카드를 모아오도록 하지." 하고 경시총감이
의견을 제시했다.
"직업란에는 틀림없이 '목사'라고
기입하겠지. 목사 차림을 하고 다른 직업을
써넣는다면 종업원이 의심할 테니까."
일동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상대는 재칼입니다. 아마 흰
칼라 위에 스카프를 감거나, 칼라를 떼어내
기입하겠지요." 하고 르베르는 경시총감의
아이디어에 반대했다. 몇몇은 미워
죽겠다는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내무장관이 결론을 내렸다.
"사태가 여기까지 온 이상,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야. 재칼을 찾아내어 검거할
때까지 대통령께서 공개석상에 참석하실
일체의 예약을 취소하도록 말씀드릴 수밖에
없어. 당장 대통령을 뵙고 간청해 보겠네.
그리고 오늘밤 파리 시내의 호텔에 투숙해
있는 덴마크인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내일
아침 제일 먼저 조사할 것. 이것은
르베르와 경시총감에게 일임하겠네."
르베르와 파퐁 총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폐회하지."
사무실에 돌아온 르베르는 카롱에게
말했다.
"모두들 재칼이 수사의 눈을 피해
파리에까지 숨어든 것은 그의 행운과
우리가 우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하긴 그에게는 행운도 따랐고,
동시에 악마적인 교활함을 발휘했어. 한편,
우리들은 불운의 연속에다가, 더구나
실수까지 저질렀어. 실수는 내 책임이지만.
그러나 그가 여기까지 오게 된 이면에는
다른 요인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는
두 번이나 단 몇 시간의 차로 그를 놓치고
말았단 말이야. 한번은 가프에서 정말
간발의 차로 색을 바꾸어 칠한 차를 타고
사라져 버렸어. 그리고 다음에는 알파
로메오가 발견되고 불과 몇 시간 뒤에 남작
번 모두 내가 내무부 회의에서
이번에야말로 꼬리를 잡았으며, 12시간
이내에 체포가 가능할 것이라고 보고한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 일이야. 이봐,
뤼시앙, 기왕 전권을 위임받은 김에 그
권한을 이용해서 전화로 도청해 보기로
하세."
르베르는 창틀에 기대어 천천히 흐르는
센 강 너머 불빛 밝은 카르체 라탕을
바라보았다.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소리가
밖에 비친 수면을 건너 흘러내려온다.
거기서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또 한
남자가 역시 창에서 상체를 내밀고
노트르담 대성당의 조명 속에 떠오른
첨탑의 왼쪽에 웅크리고 있는
사법경찰본부의 건물을 묵묵히 바라보고
신고 흰 셔츠와 검은 흉배 위로 목 없는
실크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영국제
킹사이즈 필터 담배를 입에 문 젊은 얼굴,
그 위에 나 있는 회색 머리칼과는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센 강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그런
줄도 모르고 서로의 방향을 쳐다보고
있는데, 교회의 종이 8월 22일이 온 것을
알리면서 울려퍼졌다.
제 19 장
그날 밤도 르베르는 거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새벽 1시 반, 이제 막 눈을 붙인
그를 카롱이 흔들어 깨웠다.
"죄송합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습니다. 그 남자, 재칼은 덴마크의
여권을 가지고 있다지요?"
르베르는 머리를 흔들어 졸음을 쫓았다.
"그래서?"
"위조했거나 훔쳤거나 그
어느쪽이겠지요. 그가 머리를 물들인 것은
아마도 여권의 사진과 같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며, 그렇다면 훔쳤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겁니다."
"이론상으론 그렇게 되는군. 그래서?"
그는 주로 런던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권을 훔친 것은 파리와 런던, 둘 중
하나가 되겠지요. 여권을 잃어버렸거나
도둑맞았을 때 그 덴마크인은 어떻게
했을까요. 제일 먼저 영사관으로 갔을
겁니다."
르베르는 간이 침대에서 기어나왔다.
"자네는 가끔 사람의 맹점을 곧잘
찌르는군. 런던의 토머스 총경 자택으로
전화를 걸어 주게. 그리고 다음은 파리의
덴마크 총영사 관저야. 순서를 틀리지
말게."
그로부터 한 시간, 르베르는 전화에
매달려서 토머스와 총영사에게 각각 그들의
사무실로 나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3시가 가까워서야 겨우 침대로 돌아왔지만,
시내의 호텔에 묵고 있는 덴마크인의 숙박
카드를 12시와 2시, 두 번에 걸쳐서 모아
보았더니 980여 장이 되었고, 현재 그것을
'가능성 있음', '수상함', '기타'의 세
종류로 분류하는 작업이 진행중이라고
한다.
오전 6시, 더 자지 못하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DST의 기술직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12시 지나서 회의에 참석한
전원의 전화를 도청, 녹음하도록 지시해
놓았더니 마침내 수확이 있었다는
보고였다. 르베르는 즉시 카롱을 대동하고
DST의 본부로 차를 달렸다. 지하에 있는
통신연구실에서 두 사람은 테이프레코드로
녹음을 재생했다. 처음에 윙 하고 발신음이
들리고, 이어서 따르륵따르륵 하는 소리가
전화번호를 돌리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다음에 신호음이 여러 번 길게 계속되고,
마지막으로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찰칵
하고 들리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쉰 목소리가 먼저, "여보세요."
다음에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자클린."교꼭 목소리가 대답했다. "여기는
바르미."
이어서 여자의 빠른 말소리가 들렸다.
"그가 덴마크인 목사로 변장한 것이
탄로났어요. 오늘밤 12시, 2시, 4시, 세
번에 걸쳐 시내에 있는 모든 호텔에서 숙박
카드를 거두어 오고, 파리에 묵고 있는
덴마크인을 조사하는 모양이에요. 그리고
형사가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러 가나
봐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소."
그리고 먼저 남자가 수화기를 놓고,
이어서 여자도 수화기를 놓았다.
천천히 계속 돌아가고 있는 테이프의
릴을 르베르는 잠자코 쳐다보다가, 이윽고
얼굴을 들어 기술직원에게 물었다.
"여자가 돌린 번호는 알았나?"
"예. 다이얼의 디스크가 제로로
되돌아가는 시간을 재면 숫자가 나옵니다.
여자가 건 번호는 모리틀의 5901입니다."
"소재지는?"
기술직원은 르베르에게 메모를
건네주었다. 그는 그것을 한번 훑어보았다.
"자, 뤼시앙, 바르미를 찾아뵈러 가세."
"여자는 어떻게 하지요?"
"언제고 고발해야만 되겠지."
오전 7시,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바르미는 가스 난로로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노크 소리를 듣고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서 가스 불을 끄고는 문을 열려고
갔다. 네 명의 남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그는 알고
있었다. 제복을 입은 두 명이 그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키가 작고 온화해
보이는 남자가 가만 있으라고 손을 들어
둘을 막았다.
"전화를 들었소." 키 작은 남자는 조용히
말했다. "바르미 씨지요?"
전 국민학교 교장은 얼굴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옆으로 비켜서서 남자들을
방으로 들였다.
"옷을 갈아입어도 좋소?" 하고 그는
"물론."
제복 경찰관의 감시를 받아가며 그는
파자마 위에다 바지를 입고 셔츠를 걸쳤다.
사복을 입은 젊은 남자는 그 동안 계속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키 작고 나이 든
남자는 방안을 왔다갔다하면서 잔뜩 쌓아둔
책과 서류들을 보고 다녔다.
"이것을 모두 정리해서 조사를 하자면
큰일인걸, 뤼시앙."
입구에 서 있는 남자가 신음하듯
대답했다.
"우리 일이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이젠 준비가 끝났소?" 키 작은 남자가
바르미에게 물었다.
"예."
"그럼, 자네들은 밑에서 기다리게."
평교사로 밀려난 전 교장이 어젯밤에 본,
두툼하게 철해 있는 종이 뭉치를
넘겨다보았다. 별것 아니었다. 채점중인
시험 답안지였다. 하지만 그가 학교에
나가고 있을 리는 없다. 재칼에게 언제
전화가 걸려와도 받을 수 있도록 온 종일
지키고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7시 10분,
전화벨이 울렸다. 르베르는 잠깐 그것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억양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재칼."
르베르는 열심히 응답할 말을 찾다가,
"여기는 바르미." 하고 엉겁결에
대답하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이제
"그 뒤 뭐라도?" 하고 저쪽에서 물었다.
"아무것도 없소. 놈들은 코레즈 현에서
당신 행방을 놓쳤소."
이마에는 진땀이 배어 있었다. 적어도
앞으로 몇 시간은 재칼이 현재 있는 그
장소에다 묶어 두지 않으면 안된다. 철컥
하는 소리가 들리고 전화가 끊겼다.
르베르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층계를
뛰어내려갔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차에
뛰어올라 운전사에게 소리쳤다.
"본부로 가는 거야."
센 강변 조그만 호텔 로비에 있는 전화
박스 안에서 재칼은 미심쩍은 얼굴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을 리가 없지. 르베르인가 하는 총경은
운전사를 추적해서, 그 줄을 따라 오트
사로니에르 마을까지 찾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성에서 시체를 발견하고, 르노가
없어진 것을 알았을 것이 분명하고.
그리고는 튈에서 르노를 발견한 뒤 역에
있었던 녀석들을 심문하고, 그리고......"
그는 전화 박스에서 나와 프런트로
다가갔다.
"계산을 부탁합시다. 5분 뒤에 내려올
테니까."
오전 7시 반, 르베르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런던의 토머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회답이 늦어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
하고 런던 경시청 특별국 총경이 말했다.
사무실로 끌고 가는 데 꽤 시간이
걸려서요. 결과는 당신 말대로였습니다.
7월 14일에 덴마크의 목사가 여권분실
신고서를 냈더군요. 본인은 웨스트 엔드의
호텔 방에서 도둑맞은 것 같다고 한
모양입니다만, 도둑맞았다는 증거도 없고
호텔 측의 입장도 생각해서 결국
경찰에까지 신고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목사의 이름은 페르 옌센.
주소는 코펜하겐. 특징은 키 180cm, 눈은
청색, 머리칼은 회색, 이상입니다."
"바로 그자가 틀림없습니다. 정말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르베르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카롱에게
말했다.
"경시청으로 전화."
강변의 호텔에 도착했다. 그리고 37호실은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것처럼 온통
어질러졌다.
"정말 안됐습니다만." 지배인은 수색대를
지휘하고 있는, 지쳐 버린 듯한 키 작은
남자에게 말했다. "옌센 목사님은 한 시간
전에 체크아웃 하셨습니다."
재칼은 빈 택시를 잡아타고 어젯밤에
도착한 오스테를리치 역으로 갔다. 수사의
손이 이미 다른 곳으로 뻗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수하물 보관소에
총과 군용외투, 그리고 가공의 프랑스인
앙드레 마르탱의 옷가지가 들어 있는
가방을 맡겼다. 이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미국인 학생인 마티 슐버그의
넣은 아타셰 케이스뿐이었다.
이 둘을 들고 그는 역 바로 옆에 있는
싸구려 호텔로 들어갔다. 아직 검은 양복을
입은 채이고, 목사용 흰 칼라는 목 없는
스웨터를 입어서 감추고 있었다. 프런트
직원은 게으른 사람이라 그가 필요사항을
기입한 숙박 카드를 규칙대로 여권과
대조해 보지도 않았다. 재칼은 맡은 일에
성실하지 못한 프런트 직원의 성격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성명란에 페르 옌센과는
다른 이름을 써넣고 넘어갔다.
방으로 들어간 재칼은 얼굴과 머리의
작업에 착수했다. 회색의 염색약을
용해재로 씻어내니 본래의 금발이
나타났다. 그것을 이번에는 마티 슐버그의
머리칼 색에 맞추어 밤색으로 물들였다.
금테 안경은 미제의 굵은 테 안경과 바꾸어
썼다. 검은 구두, 양말, 셔츠, 흉배,
그리고 목사용 양복은 한데 뭉쳐서 옌센
목사의 여권과 함께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운동화에 청바지, T셔츠에 점퍼
차림의 뉴욕 주 시라큐스 시의 대학생으로
탈바꿈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여권과 프랑 화폐
다발을 양쪽 안주머니에 넣고서 완전히
준비가 끝난 것은 10시경이었다. 옌센
목사의 의류 등을 넣은 가방은 옷장에 던져
넣고, 옷장의 열쇠는 하수구에 버렸다.
그리고 비상계단으로 해서 몰래 밖으로
나가서 다시는 그 호텔로 돌아가지 않았다.
몇 분 뒤, 다시 오스테를리치 역의 수하물
보관소에 나타난 그는 아타셰 케이스를
보관증과 함께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는 택시로 왼쪽 강변으로
되돌아가서 생 미셀 대로와 위셋 로(路)의
모퉁이에서 차를 내려 카르체 라탕에 몰려
있는 학생들과 젊은이들 틈에 섞여들었다.
우중충한 싸구려 식당의 구석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그는 오늘밤 어디서 묵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르베르는 이미 옌센
목사의 정체를 벗겨 버렸을 것이고, 마티
슐버그로 있을 수 있는 것도 고작 24시간의
여유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르베르란 놈!"
그는 마음속으로는 욕을 퍼부었지만,
웨이트리스에게는 싱긋 웃으면서
시원스럽게 말을 걸었다.
"오, 멋진데."
오전 10시, 르베르는 다시 런던의
토머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부탁을
들은 토머스는 나지막히 한숨을 쉬면서
하는 데까지는 해보겠다고 정중한 어조로
승낙했다. 전화를 끊고서 토머스는 지난 주
조사에서 협조해 준 선임 경감을 방으로
불렀다.
"우선 앉게."
경감을 보고 그가 말했다.
"또다시 프랑스에서 조사를 부탁해 왔네.
아무래도 그를 놓친 것 같아. 마침내 그는
파리로 들어갔는데, 또다시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 것은 아닐까 하는 거야. 그래서
말일세, 지금부터 런던에 있는 각국
영사관에 모조리를 전화를 걸어서 7월 1일
이후 영국을 방문한 각국 사람들 중에서
물어 보는 거야. 흑인과 아시아인은
제외하고, 백인 중에서 말일세. 이름과
함께 키도 알아보게. 180cm 이상인 남자는
모두 용의자야. 자, 서두르게. 부탁하네."
이날 내무부의 정례회의는 오후 2시로
앞당겨졌다.
르베르의 보고는 늘 그렇듯이 담담했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이젠 지긋지긋해!"
프레이 내무장관은 설명을 듣다 말고
소리쳤다.
"놈은 악마의 부적이라도 차고 다닌단
말인가!"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장관님.
적어도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비밀리에
겁니다. 부랴부랴 가프를 떠난 것도, 또
오트 샤로니에르에서 여자를 살해하고
수사망에 걸려들기 직전에 탈출한 것도,
그때 그때 이쪽의 움직임을 정확히
보고받았기 때문입니다. 매일 밤 저는 이
자리에서 수사의 진척상황을
보고드렸습니다만, 지금까지 세 번 불과 몇
시간의 차로 그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오늘
아침의 경우는 바르미를 체포한 일과,
전화로 제가 바르미 흉내를 낸 것에 그가
의혹을 품게 되어, 그때까지 있었던 곳에서
갑자기 사라져서는 또다시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두
번의 경우는 모두 제가 회의에서 보고를
드린 다음날 이름 아침에 정보를
통보받았습니다."
메웠다.
"자네는 지난번에도 분명히 같은 뜻의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내무장관은
쌀쌀하게 말했다. "확증이 있어서 하는
말이겠지?"
대답 대신에 르베르는 소형
테이프레코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스위치를 눌렀다. 전화에서 녹음한 대화가
숨막힐 듯한 정적 속에서 금속성 소리를
내면서 흘러나왔다. 재생이 끝났는데도
조그만 기계에 모인 일동의 시선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생클레아 대령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떨리는 손으로 서류들을
그러모아서 가방에 넣었다.
"저건 누구의 소리인가?" 하고
내무장관이 침묵을 깨뜨렸다. 르베르는
일어섰다. 일동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참으로
유감입니다만......장관님......그것은....
..제 친구 목소리입니다...... 그녀는 지금
제 아파트에 있습니다......이만 실례."
그는 엘리제궁으로 돌아가서 사표를 쓰기
위해서 황망히 회의실을 나갔다. 남은
사람들은 말없이 자기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르베르." 내무장관은 조용히
말했다. "다음을 계속해 주게."
르베르는 토머스에게 부탁해서 지난 50일
사이에 런던에서 분실된 여권을 깡그리
조사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했다.
"그 결과는?" 하고 그는 물었다.
"저녁때까지 연락이 올 것으로
재칼의 특징과 유사한 사람이 아마 한둘은
있을 겁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즉시 그
여행자의 본국에 연락해서 사진을 전송해
달라고 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칼스로프나 댓건이나 옌센과는 다른 네
번째 인물이 어떤 인상과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되지요. 잘되면 내일
정오까지는 그 사진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나는 -- ." 하고 내무장관이
말했다. "이번에 대통령을 뵐 때에 이 일을
보고하겠네. 대통령은 살인자가 두려워서
공식 일정을 변경한다는 것은 결단코
허락할 수 없다고 내 요청을 거절하셨어.
솔직히 말해서 예상치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한 가지는 양보해
걸세. 다음과 같은 뜻으로 말이야. 즉,
재칼은 살인범이다. 그는 보석을
강탈하려고 샤로니에르 남작 부인을
살해했다. 그는 파리로 도망쳐서 숨어 있는
모양이다. 이런 내용이야. 알겠나?"
이것은 석간 최종판에는 실리도록 발표할
생각이야. 그리고, 르베르, 재칼이 새로
변신한 인물이 확인되면 곧 그 이름을
신문에 발표하게. 내일 조간에 크게
나오겠지. 그리고 그 인물의 사진이 내일
오전 중에 도착되면 살인사건의 최신
정보로서 신문, 라디오, TV에 발표하는
걸세.
이것과는 별도로 이름이 알게 되는 대로
파리에 있는 모든 경찰관과 CRS 대원을
동원해서 거리로 내보내 거동 수상한
조사하도록."
경시총감, CRS 국장, 그리고
사법경찰국장, 이렇게 세 사람은 열심히
메모하고 있다. 내무장관은 계속했다.
"DST는 RG(종합정보부)의 자료 센터의
협조하에 OAS의 동조자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조사하도록. 알겠소?"
DST와 RG의 국장은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법경찰은 전 수사원을 통상의
임무에서 재칼 수색으로 돌려 주기
바라오."
마크스 페르네 국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통령의 신변 경비에 관해서
말인데, 앞으로의 대통령 스케줄은 대소를
막논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정확히 파악하여
말미암아 대통령의 노여움을 사도 어쩔 수
없어. 경호대는 신변경비를 특히 엄중히
하여 끊임없는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도록.
알겠나, 뒤크레?"
대통령 경호대장인 장 뒤크레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법경찰의 형사부는 -- ."
프레이 내무장관은 부비에 부장의 눈을
지켜보았다. "전부터 늘 암흑가의 악당들을
끄나풀로 쓰고 있는데, 그자들에게 재칼의
새 이름과 인상, 특징을 알려 주어 수색에
협조시키도록 하게. 알겠나?"
모리스 부비에는 무뚝뚝하게 끄덕였다.
실은 그도 아까부터 내심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도 맨헌트는 몇 번인가
경험해 왔지만, 이토록 대대적인 예는
번호를 알아내는 것과 동시에 경찰관은
물론이고 암흑가의 앞잡이까지 무려
10만이나 되는 사람이 한 남자를 찾아서
거리, 호텔, 바, 레스토랑을 휘저어대는
것이다.
"그밖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캐낼
만한 곳은 없소?" 하고 내무장관이
일동에게 물었다. SDECE의 액션 서비스
책임자 롤랑 대령이 얼른 기보 장군을
쳐다보고, 이어 부비에에게로 시선을
옮겨서 가볍게 기침소리를 냈다.
"유니온 콜스가 있습니다."
기보는 딴전을 피우며 손톱을 바라보고
있다. 부비에는 눈썹을 찌푸렸다. 다른
참석자들도 태반은 찌푸린 얼굴이었다.
유니온 콜스는 피의 복수라는 전통을
프랑스 최대의 조직범죄 신디케이트로
악명높은 존재이다. 마르세유를 중심으로
해서 코트 다쥐르의 대부분은 그들의
세력하에 있다. 그들이 마피아보다 더
교활하고 위험하다고 하는 전문가조차
있다. 20세기 초에 미국으로 건너간
마피아는 자신들의 존재에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그
때문에 마피아라는 말은 아이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유니온 콜스는
신경질적이리만큼 그런 점에 대해서는
경계해 왔다.
지금까지 드골파는 이미 두 번 유니온
콜스의 힘을 빌린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크게 도움이 되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언제나 당혹하곤 했다. 그들은 협조할
부정사업에 대한 경찰의 단속을 늦추어
달라는 것이었다. 1944년 8월, 그들은
연합군의 남프랑스 진격작전에 협력하고서
그 이후로 마르세유와 툴롱은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1961년 4월부터
시작된 대(對) OAS 및 알제리 거류민과의
싸움에도 다시 힘을 빌려주고 그 보상으로
파리에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경찰관인 부비에는 그들의 존재를
혐오하여 롤랑 대령의 액션 서비스가
그들을 자주 이용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도움이 될 것 같은가?" 하고
내무장관이 물었다.
"재칼은 교활한 남자인 것 같습니다만,
유니온도 그 점에서는 뒤지지 않습니다.
생각합니다."
"파리에는 몇 명이나 있나?"
내무장관은 의심스러운 얼굴이었다.
"약 8천 명 정도일 겁니다. 경찰, 세관,
CRS, SDECE 등에도 끼어 있고, 물론
암흑가의 주류는 전부다 그들입니다.
게다가 녀석들은 하나의 조직으로 이어져
있어서 더욱 강하지요."
"부디 신중을 기해서 잘 부탁하네."
그밖에는 발언자가 없었다.
"그럼, 이런 정도로 해두지. 르베르,
한시 바삐 이름과 인상, 특징을 알아내고,
사진을 구해 주게. 그래만 주면 6시간
이내에 재칼을 잡아 보겠네."
"아직 3일 여유가 있습니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르베르가 문득
"무슨 뜻인가?" 하고 마크스 페르네가
물었다. 르베르는 바쁘게 몇 번 눈을
깜박였다.
"여태까지 깨닫지 못한 것은 저의
불찰이었습니다. 이미 1주일 전부터 저는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재칼은 스케줄을
짜놓고 있습니다. 대통령 암살의 날을 정해
놓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가프에서 탈출했을 때 어째서 즉시 옌센
목사로 둔갑하지 않았을까요? 어째서
파리행 급행을 타지 않고 발랑스 같은 곳에
갔을까요? 어째서 프랑스에 잡입한 뒤
1주일이나 쓸데없는 시간을 보낸
것일까요?"
"어째선가?"
누군가가 물었다.
때문입니다. 그날 결행할 예정으로 모든
일정을 짜놓았기 때문이지요. 뒤크레
총경님, 오늘이나 내일, 또는 모레
토요일에 대통령께서 엘리제궁 밖으로
나와서 무슨 행사에 참석하실 예정은
없습니까?"
뒤크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8월 25일, 일요일은요?"
테이블 주변에서 한숨이 터졌다.
내무장관이 신음하듯 말했다.
"8월 25일은 해방기념일이야.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거의 모두가 1944년 그
파리 해방의 날, 대통령과 더불어 승리를
축하했었지."
"재칼은 상당한 심리학자이기도 합니다.
1년 중에서 그날 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념식에 참석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겁니다. 말하자면 장군에게는 영광의
날이니까요. 재칼은 그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고 내무장관은
시원시원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놈을
잡은 거나 마찬가지야. 놈의 정보선이
끊겨진 지금 파리의 어디에도 그자가 숨을
곳은 없어. 마지못해서라도 녀석을 감싸 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야. 반드시 녀석의
덜미를 잡아 보겠네. 르베르, 빨리 이름을
부탁해."
르베르는 일어나서 문으로 갔다. 다른
참석자들도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그때
갑자기 내무장관이 르베르를 불러세웠다.
"자네에게 좀 물어볼 것이 있는데,
것은 특별히 그를 의심할 이유라도
있었나?"
르베르는 입구에서 내무장관 쪽을
돌아다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아뇨. 그래서 어젯밤 여러분 전원의
전화를 도청하게 했습니다. 그럼, 이만
실례합니다."
그날 오후 5시, 오데옹 광장의 외곽에
있는 카페 테라스에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짙은 선글라스로 강한
햇빛을 막고 맥주를 마시면서 재칼은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지나가는 두 남자의 모습을
보고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그는 맥주값을
치르고 그곳을 나왔다. 그리고 100미터쯤
들어가서 두세 가지 물건을 샀다.
오후 6시, 석간 마지막 판에 일제히
다음과 같이 톱으로 실렸다. 최상단에
커다란 표제가 시선을 끌었다 -- '남작
부인 살해범, 파리에 잠입.' 표제 밑에
부인이 5년 전 파리에 와서 어느 파티에
참석했을 때 사교잡지에 실렸던 사진이
나와 있었다. 그것은 어떤 사진 대리점에서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각 신문은 모두 그
사진을 싣고 있었다. 오후 6시 반, '프랑스
수아르' 신문을 겨드랑이에 낀 롤랑 대령이
워싱턴 가(街)에 있는 조그만 카페로
들어갔다. 턱수염이 짙은 바텐더가
날카롭게 대령을 훑어보고는 안쪽에 있는
남자를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가
"롤랑 대령입니까?"
액션 서비스의 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로 오십시오."
남자는 안쪽 문을 빠져나가서 그 카페의
경영자의 거처로 보이는 2층 거실로
올라가서 문을 노크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로 들어간
롤랑은 팔걸이 의자에서 일어선 남자의
마중을 받고 내민 손을 잡았다.
"롤랑 대령님이시죠?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유니온 콜스의
책임자입니다. 어떤 남자를 찾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만......"
런던의 토머스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오후 8시였다. 완전히 지쳐 버린
목소리였다. 각국 영사관이 하나같이
개중에는 잔뜩 투덜거리기만 하고 협조를
꺼리는 곳도 있어서 아침부터 굉장히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여성, 흑인, 아시아인, 그리고 키 작은
남자를 제외하니 과거 50일 사이에
런던에서 여권을 분실한 남성 여행자는
모두 8명이었으며 토머스는 각자에 대해서
정확히 그 이름, 여권 번호, 특징을 알려
주었다.
"그럼, 이 8명 중에서 해당되지 않는
사람을 제외시켜 나가기로 하십시다. 8명
중 3명은 재칼이 런던에 없을 때에 여권을
분실했습니다. 우리는 7월 1일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각 항공회사의 예약자 명단과
창구의 항공권 판매대장을 조사해
보았는데, 그는 7월 18일에 BEA의 야간
그리고 그 항공사의 브뤼셀 지점에서
현금으로 항공권을 사고 8월 6일 밤,
영국으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쪽의 조사결과와도
일치합니다." 하고 르베르가 말했다.
"그 동안 그는 파리에 있었던 거지요.
7월 22일부터 31일까지 말입니다."
"그렇군요."
국제전화라서 그런지 토머스의 목소리는
갈라진 느낌이었다.
"문제의 여권 중에서 3통은 그가 없을
때에 분실한 것이니까 이것은 제외해도
되겠지요?"
"예."
"나머지 5명 중 한 명은 엄청나게 키가
큰 사람입니다. 6피트 6인치이니까요.
셈이지요. 게다가 이 남자는
이탈리아인이며 여권에도 키가 --로
기입되어 있을 테니까 프랑스 세관원이라면
한눈에 알아보았을 것이고, 재칼과의 키
차이도 금방 알았을 겁니다. 혹 재칼이
죽마라도 타고 다녔다면 몰라도."
"정말 거인이군요. 그것은 제외하지요.
그래, 나머지 넷은?"
"하나는 뚱보로서 체중이 242파운드,
그러니까 100kg이 넘습니다. 재칼이 이렇게
뚱뚱하게 보이려면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옷을 껴입어야 할 겁니다."
"그것도 제외하지요. 다음을
부탁합니다."
"또 한 사람은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키는 일치합니다만, 나이가 70몇인가
않는 한 70몇 살로 둔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괌갚陋孤 제외해야겠군요.
그럼, 나머지 둘은?"
"하나는 노르웨이인이고, 또 한 사람은
미국인입니다. 이 둘은 모두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키가 크고 어깨 폭이 넓고,
나이는 20부터 50 사이. 다만 노르웨이인의
경우는 부정적인 요소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금발이라는 점입니다. 재칼은
댓건의 허물을 벗은 다음 자기 본래의 머리
색깔로 되돌아갔을 거라고는 얼른 생각되지
않는군요. 본래 댓건을 닮은 남자니까요.
또 하나는 이 노르웨이인이 영사관에서 한
말 때문입니다. 하이드 파크의 호수에서
걸프렌드와 보트 놀이를 하다가 옷을 입은
채로 연못에 빠졌다니까, 그때 여권이
연못에 빠지기 전까지는 틀림없이 가슴이
안주머니에 들어 있었는데, 나와서 보니
없어졌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미국인은
런던 공항 중앙 홀에서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여권이 들어 있는 손가방을 날치기
당했다고 공항경비소에 신고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미국인, 마티 슐버그의 자료를 보내
주십시오. 얼굴 사진은 워싱턴에 연락해서
전송해 달라고 하겠습니다. 정말 여러
가지로 신세가 많습니다."
오후 10시부터 이날 두 번째 회의가
내무부에서 열렸다. 지금까지 열린 회의
중에서는 가장 짧은 회의였다. 이미 한
시간 전에 프랑스의 전 치안기구의 각
자료를 등사판으로 밀어서 배포되었다.
사진도 아침까지는 전송되어 올 예정이라,
아침 10시에 가두 판매될 신문에는 실을 수
있을 것이다.
내무장관이 일어섰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첫번째
회의에서 재칼이라는 암살자의 신원을
알아내는 일은,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순수한 형사적인 일이라고 한 부비에의
의견에 찬성했다. 나는 새삼스럽게 그
의견에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소. 지난
10일 동안 르베르 총경은 참으로 훌륭하게
그 임무를 수행해 주었소. 암살자는 세
번이나, 칼스로프에서 댓건으로, 댓건에서
옌센으로, 옌센에서 슐버그로 변신했고,
게다가 내부에서 끊임없이 정보가
변신할 때마다 그 가면을 벗기고 마침내
적의 덜미를 잡는 것은 시간문제에 이르게
되었소. 우리는 그의 노고를 높이 치하하고
감사해야만 할 것이오."
내무장관은 당황해서 있는 르베르에게
가볍게 인사를 보냈다.
"앞으로의 일은 우리가 해야만 하오.
이미 그의 이름, 특징, 여권의 번호,
국적까지 알고 있소. 몇 시간 뒤에는
사진까지 손에 넣게 될 것이오. 사진이
도착되면 단시간 내에 반드시 재칼을 잡게
될 것으로 나는 확신하고 있소. 이미
파리의 전 경찰관, CRS 대원, 형사에게
명령이 하달되어 있소. 아침까지는, 늦어도
내일 정오까지는 재칼은 숨을 곳이 없게 될
것이오. 르베르, 다시 한 번 고맙다는
10일에 걸친 수사의 무거운 짐과 긴장에서
자네를 해방시켜 주겠네. 사진의 입수와
동시에. 그 뒤는 우리가 맡겠네. 자네
임무는 이제 끝난 걸세. 정말 잘 해주었어.
고맙네."
르베르는 내무장관의 찬사가 얼른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당황해서 몇 번 눈만 껌벅이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프랑스의 치안기구를
좌지우지하는 실력자들을 향해서 허리를
굽혔다. 그들은 모두 미소로 답했다.
르베르는 조용히 회의실에서 나왔다. 실로
열흘 만에 르베르는 잠을 자러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에 열쇠를 꽂고서 돌리는
것과 동시의 아내의 찢어지는 듯한 불평
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는 12시를 치고, 8월
제 20 장
재칼이 그 바에 들어간 것은 오후
11시경이었다. 안은 어두워서 금방
내부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왼쪽에 기다란
카운터가 있고, 그 뒤쪽 벽은 거울로 되어
있으며, 술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바텐더는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게 안은 좁고 길었으며, 안쪽에까지
카운터가 길게 뻗어 있으며, 오른쪽 벽을
따라서 조그만 테이블이 한 줄로 놓여
있다. 안쪽은 좀 넓은 편이어서 거기엔
약간 큰 테이블이 몇 개 있었고, 5~6명의
손님이 앉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카운터
앞에는 걸상이 놓여 있다. 테이블의 자리도
재칼이 가게에 들어서자 바로 문
가까이에 놓인 테이블의 손님이 이야기를
중단하고 그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손님들도 이내 동료의 반응을 깨닫고
잡담을 멈추고서 문 옆에 서 있는 늘씬하고
균형잡힌 체격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조그맣게 소곤거리는가 하면, 킥킥거리며
웃기도 했다. 재칼은 가장 안쪽 끝의
걸상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카운터와
테이블 사이를 걸어가서 앉았다. 등뒤에서
빠른 어조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애, 저것 봐! 저 근육, 난 그냥 미칠 것
같아."
바텐더가 앞으로 다가와서 찬찬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홍색 입술을 조금
벌리고 아양 섞인 미소를 지었다.
등뒤에서 소리 죽인 웃음소리가
일어났다. 거의 모두가 반감이 섞인
웃음소리였다.
"스카치로 해볼까."
꽤나 신이 나는 모양인지 바텐더는
뛰다시피 그곳을 떠났다. 남자, 사나이,
사내. 오늘밤은 멋진 밤이 되겠어!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그들'이
손톱을 세우고 덤벼들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거의 대부분은
단골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개중에는
약속이 없어서 봉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 양반이면
되겠다며 바텐더는 가슴이 뛰었다. 이
친구라면 틀림없이 모두를 흥분시킬 수
있을 거야.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금속 같은
빛을 내는 금발이 고대 그리스 신의
동상처럼 곱슬거리며 갈라져 내려와서
이마를 덮고 있다. 그러나 신의 초상을
닮은 것은 거기까지였다. 눈은 짙은
마스카라로 인해 끔찍했으며, 입술은
산호같이 붉은색으로 빛나고, 볼은
연지빛으로 발그레하다. 그러나 지치고
나이먹은 주름살은 화장으로도 감출 길
없고, 윤기를 잃은 탐욕스러운 눈은
마스카라로도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한잔 사줄래?"
풋내나는 소녀 같은 말투였다. 재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호모는 어깨를
으쓱하고 일행 쪽으로 돌아앉았다. 둘은
수군수군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가끔
재칼은 점퍼를 벗고 있었다. 바텐더가
내미는 술잔에 손을 뻗으니 어깨와 등의
근육이 T셔츠 밑에서 분명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바텐더는 미칠 듯이 기뻤다.
'스트레이트'일까? 설마. 그럴 리는 없다.
'스트레이트'라면 이런 곳에 올 리가 없다.
그러나 그저 무작정 호모를 탐내고 온
친구도 아니다. 아니면, 술 한잔 사달라고
조르는 코린을 딱지놓을 리가 없지.
틀림없이 그거야...... 멋져! 젊고 핸섬한
'사내'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상대를 찾으러
온 거야. 아무래도 오늘밤은 재미있게 될
것 같다.
12시가 가까워 오자 술집에 있던
'사내'들이 각기 상대를 고르기 시작했다.
불러서 무엇인가 의논한다. 바텐더는
카운터에 돌아가서 호모들 중 하나에게
사인을 보낸다.
"무슈 피에르가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는군요, 달링. 아주 얌전한 얼굴로
예의바르게 상대해요. 잘못되어 지난번처럼
울음을 터뜨리지 않도록 해요."
재칼은 12시가 지나서야 겨우 그럴듯한
상대를 발견했다. 안쪽에 있던 두 남자가
아까부터 계속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둘은
각각 다른 테이블에 있으면서 가끔
라이벌을 밉살스러운 듯이 노려보곤 했다.
양쪽이 모두 중년인데, 하나는 뒤룩뒤룩
살이 쪄서 조그맣게 튀어나온 눈이
눈두덩이에 파묻히고, 목덜미의 살이 칼라
밖으로 비어져 나와 있다. 천박하고 돼지
체격에 품위가 있어 보였으며, 목은 새처럼
가늘게 여위었고, 벗겨진 머리에는 성근
머리칼을 단정하게 빗어 붙였다. 복장을
보니 고급 양복에 통 좁은 바지, 윗도리
소매 사이로는 레이스가 보이는 멋쟁이
차림이다. 목 밑으로 보이는 실크 넥타이는
마치 미술품처럼 보였다. 미술이나
패션이나 헤어 모드에 관계가 있는
인물이라고 재칼은 생각했다.
뚱보 쪽에서 바텐더를 불러서 무슨
말인가 소곤거렸다. 지폐 한 장을 바텐더의
착 달라붙은 바지 주머니에 밀어넣었다.
그는 재칼 앞으로 돌아왔다.
"저이가 샴페인을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하고 그는 속삭였다. 장난기 어린
얼굴로 쳐다본다.
"그럼, 이렇게 전해 줘." 부근에 있는
호모들이 들리도록 그는 분명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매력이 없어."
여기저기서 훅 하는 한숨소리가 들렸다.
칼날처럼 여윈 젊은이들이 몇 명,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걸상에서 내려
다가왔다. 바텐더는 믿기지 않는 얼굴을
하고 눈이 동그래졌다.
"샴페인을 한턱 내시겠다는 거예요.
저분은 굉장한 부자라고요. 처음 와서 이런
행운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어요."
대답 대신에 재칼은 걸상에서 내려와서
위스키 잔을 들고 또 한 사람인 그 마른
남자에게로 갔다.
"여기 앉아도 좋습니까?" 그는 물었다.
"어떤 양반이 귀찮게 굴어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뚱보 쪽에서는 이
노골적인 모욕에 화가 잔뜩 나서 술집에서
나갔다. 라이벌인 여윈 예술가는 앙상한
손으로 젊은 미국인의 손을 잡고는 그
뚱보가 정말로 무례한 사람이라며
헐뜯었다.
재칼과 예술가 타입은 1시가 지나서 그
술집을 나왔다. 그전에 쥘 베르나르라는 그
'호모'가 지금 어디에 묵고 있느냐고
재칼에게 물었다. 재칼은 부끄러운 듯이
우물쭈물하면서 실은 아무데도 묵을 곳이
없으며, 한푼 없는 학생이라고 대답했다.
베르나르는 자신의 행운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천만다행이라는 듯이
자기는 아주 멋지고 조용한 플랫을 가지고
있다. 혼자서 살고 있으며, 아무도
있는 무리들은 모두가 무례한
녀석들뿐이라서 일체 사귀지 않고 있다.
하다못해 파리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동거생활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설득조로
말했다. 재칼은 고맙다는 표정으로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술집에서 나가기
직전에 그는 화장실(하나밖에 없었다)에
들어가서 얼른 눈가에 마스카라를 칠하고,
볼에는 파우더를 바르고, 입술에는 루즈를
그렸다. 베르나르는 화장한 그를 보고
뾰로통했지만, 술집에서 나갈 때까지는
참았다.
거리로 나간 순간 베르나르는 잔소리를
했다.
"그런 것을 다 바르나? 난 싫은데. 거기
있었던 녀석들과 마찬가지잖아. 당신은
돼."
"당신이 좋아할 줄 알고 했는데요. 집에
가서는 지워 버리지요."
조금 기분이 풀어진 베르나르는 차로
다가갔다. 플랫으로 돌아가기 전에
오스테를리츠 역으로 새 애인의 짐을
가지러 가기로 약속을 했다. 첫번째
교차로에서 차도를 내려온 경찰관이
정지하라고 했다. 경관의 얼굴이 운전석
창으로 가까이 왔을 때 재칼은 실내등을
켰다. 경관은 두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황급히 물러났다.
"빨리 꺼져!"
불심검문이고 뭐고 할 것도 없다.
움직이기 시작한 차 뒤꽁무니를 보면서
"구역질나는 호모 같으니!"
두 사람은 역 옆에까지 가서 또다시
경찰의 제지를 받고 신분증을 보여 달라는
말을 들었다.
재칼은 아양을 떨듯이 킥킥거리고
웃으면서, "다른 볼일은 없으세요?" 하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잔소리 말고 어서 가!"
경찰관은 당황해서 물러났다.
"경찰 아저씨들을 놀리면 안돼."
베르나르가 타일렀다. "체포당한단
말이야."
재칼은 수하물 보관소에서 얼굴을 돌리며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짓는 직원에게 두
개의 가방을 받아가지고는 베르나르의 차
속으로 던졌다.
정지명령을 받았다. 이번에는 2인조의
CRS대원이었는데, 한 사람은 하사관이고,
또 한 사람은 졸병이었다. 아파트까지 겨우
몇백 -를 남겨 놓은 교차로에 접어들었는데
졸병이 손을 들어 멈추라고 하고는
조수석의 창으로 재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순간 그는 질려 버렸다.
"에이, 징그러워. 당신들, 어딜 가는
거야?" 하고 그는 꽥 소리를 질렀다.
재칼은 입을 이쁘게 오므려 아양을
떨면서 말했다.
"어디일 것 같아요, 오빠?"
CRS 대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속이 다 뒤집히는군, 얼른 꺼져."
순식간에 후미등의 불빛이 멀어지더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상관이 졸병에게
"어째서 신분증 조사를 하지 않았나?"
"농담이십니까?"
졸병은 항의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남작 부인을
안고 있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죽여
버렸다는 놈입니다. 저런 기분나쁜
호모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베르나르와 재칼이 아파트의 플랫에
도착한 것은 새벽 2시경이었다. 재칼은
거실에 있는 긴 의자에서 자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베르나르의 반대를 끝내 물리쳤다.
우선은 양보를 한 베르나르는 침실
문틈으로 재칼이 옷을 벗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뉴욕에서 왔다는 이 근육
덩어리 학생을 설득해 내기는 어렵겠지만,
그만큼 즐거움도 클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기 전에 재칼은 예쁘게 꾸며 놓은
부엌에 있는 냉장고를 들여다보았다. 안에
들어 있는 식료품은 혼자라면 어떻게
사흘은 버티겠지만, 둘이서는 아무래도
모자란다. 아침이 되어 베르나르가 우유를
사러 나가려고 했지만, 재칼은 커피에 넣을
거라면 깡통에 든 우유가 더 좋아한다면서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둘은 오전 내내
방안에서 보냈다. 재칼이 정오의 TV 뉴스를
보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첫 뉴스에서 샤로니에르 남작 부인
살해범 수사의 상황이 나왔다. 베르나르는
공포에 떨면서 소리쳤다.
"어머, 싫어, 폭력은 나빠."
다음 순간 TV 화면 가득히 얼굴 모습이
비쳤다. 젊고 핸섬한 남자로서, 밤색
아나운서는 계속 설명했다. 범인의 미국인
학생 마티 슐버그이며, 이 남자에 대해
짐작가는 바가 있는 분은 -- .
소파에 앉아 있던 베르나르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재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사라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은 아나운서가
슐버그의 눈이 청색이라고 했으나 그건
틀렸다는 점이었다. 목을 조르면서
내려다보고 있는 눈은 회색이었다......
몇 분 뒤, 흐트러진 머리칼에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혀를 빼어문 쥘
베르나르의 시체를 재칼은 옷장 안에
숨겼다. 그리고 거실에 있은 잡지대에서 한
권을 뽑아들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금부터 이틀 동안 기다려야만 한다.
없었던 정도로 철저한 수색이 진행되었다.
초일류 호텔에서 싸구려 매음굴에
이르기까지 숙박업소라는 이름이 붙은 곳은
한 집도 빼놓지 않고 수사관이 찾아가서
숙박객 명단을 조사했다. 팡숑, 하숙집,
호스텔 등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
레스토랑, 나이트클럽, 카바레, 카페
등에는 사복형사가 찾아가서 범인의 사진을
웨이터나 바텐더에게 보여 주며 다녔다.
OAS 동조자의 집은 모조리 경찰관의 기습을
받고서 수색을 당했다. 70명 이상의
젊은이가 범인과 조금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심문을 받기 위해 연행당했다가 끝에
가서는 그저 형식적인 사과의 말과 함께
풀려났다. 형식적으로라도 사과를 받은
것은 이들 젊은이가 모두 외국인이었기
취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상식에 따랐을
뿐이다.
거리에서, 택시에서, 버스에서 몇십
만이나 되는 사람이 정지명령을 받고
신분증 조사를 받았다. 파리로 통하는 주요
간선도로에는 각처에 검문소가 설치되었고,
차는 1~2마일쯤 가면 반드시 정지당하고
검문을 받았다.
지하의 암흑가에서는 코르시카인들이
거들었다. 그들은 난봉꾼, 매춘부, 노름꾼,
소매치기, 도둑, 사기꾼 등이 꼬이는 곳에
소리 없이 나타나서 섣불리 감추어
주었다가는 유니온이 그냥 두지 않을
거라고 겁을 주면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다.
형사는 물론 군인, 헌병에 이르기까지
명에 달하는 조직폭력단원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관광회사의
종업원들은 손님의 인상에 각별히 신경을
쓰라고 회사 간부에게서 지시를 받았다.
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카페, 바, 클럽,
그리고 여러 학생단체의 모임이나
연락장소에는 젊은 사복형사가 숨어들었다.
외국의 교환학생을 프랑스인 가정에
배치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무실에는
형사가 찾아가서 경고를 해두었다.
카디건에 낡은 바지 차림으로 정원 일을
하면서 8월 24일(토요일)의 오후를 보낸
르베르는 저녁때가 되어 갑자기 내무부의
장관 집무실까지 나와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6시에 차가 데리러 왔다.
내무장관의 모습을 보자 르베르는 자신의
좌우하는 그 정력적인 실력자가 완전히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8시간 사이에 갑자기 늙어빠진 것
같았으며, 눈가에는 수면부족으로 말미암아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내무장관은
르베르에게 책상 앞에 있는 의자를 권하고,
자신은 회전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는 그
회전의자를 돌려서 창밖의 보보 광장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여유는 없었다.
"안 나타나."
내무장관은 짧막하게 말했다.
"지상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렸네. OAS
쪽에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의 행방을
모르고 있을 거야. 암흑가의 무리들도 그의
소문조차 듣지 못했다고 하네. 유니온
의견이야."
그는 말없이 한숨을 쉬고는 앞에 있는
자그마한 형사를 바라보았다. 르베르는 몇
번 눈만 깜박였을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2주일 동안 자네가 뒤쫓던
사나이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우리는
조금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네. 자네
의견을 말해 주지 않겠나?"
"그는 파리에 있습니다. 파리 어딘가에.
내일 있을 행사의 예정을 말씀해 주실 수
없으십니까?"
프레이 내무장관의 얼굴은 고뇌로
일그러졌다.
"대통령은 공식 일정의 변경을 일체
허락치 않으시네. 실은 오늘 아침에도
불쾌한 얼굴을 하실 뿐 상대도 안
하시더군. 그러니까 내일 예정은 이미
발표한 그대로일세. 오전 10시에 대통령은
개선문 밑에서 '영원의 불'에 점화하고
11시부터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미사에
참석, 12시 30분에 몽발레리랑의
레지스탕스 전몰자 묘지에 참예하여 묵도를
올리고 엘리제궁으로 돌아가 점심과
시에스터, 그리고 오후의 행사는
하나뿐인데, 지금까지 별로 공훈을
인정받지 못했던 레지스탕스의 전(前)
전사(戰士) 10명에 대한 '해방훈장'
수여식이 있어.
식전은 몽파르나스 역의 역전 광장이며,
오후 4시부터 시작되네. 장소는 대통령이
직접 선택하신 곳이야. 자네도 아다시피
이미 새 역의 기초공사가 시작되고 있어.
현재의 역이 있는 터에는 사무실 전용
빌딩이 들어서고, 나머지는 쇼핑 센터가 될
걸세. 예정대로 공사가 진행되면 내년
해방기념일에는 지금의 역은 없어지게 될
테지. 말하자면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뜻으로 그곳에서 식을 거행하는 셈이라네."
"군중 정리는 어떤 방법으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것 때문에 머리를 짜내고 또 짜내고
있다네. 각 식장에서는 구경온 군중을
지금까지보다는 훨씬 멀리 격리시켜 놓을
생각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식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에 식장을 철책으로 에워싸고,
그 안에 있는 건물은 지하실에서 지붕까지,
하수도까지 포함해서 철저하게 조사할
물론 예외는 아니지. 그리고 식이 시작되기
직전부터 총을 가진 감시원을 주위의 건물
옥상에 잠복시켜서 반대쪽 건물의 지붕이나
창을 감시시킬 예정이야. 철책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경비원과 식에 참석할
사람들뿐이며, 다른 사람들은 일체
접근금지할 생각이네.
이번에는 정말로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로
철저한 경계조치를 취하기로 했다네.
노트르담 새 성당에는 옥상이나 첨탑은
말할 것도 없고 종각 안팎에까지 경찰을
잠복시킬 걸세. 미사에 참석하는 신부는
물론이고 신부의 종자나 합창대의
아이들까지도 혹시 흉기를 숨겨 가지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엄중한 신체검사를
하기로 되어 있어. 그리고 재칼이
있으니까 경찰관이나 CRS 대원에게는 내일
새벽에 특수한 배지를 나눠 주기로 했네.
그리고 대통령께서 탈 시트로엥의 창에는
몰래 방탄유리를 끼워두었어. 이 일은
절대로 밖에서 말해선 안되네. 대통령께
들키는 날에는 벼락이 떨어질 테니까.
공용차의 운전사는 평소대로 마르이지만,
재칼이 차에 타고 있는 대통령을 저격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여느때보다는 빨리
달리도록 몰래 명령을 내려놓았다네. 또
경호대장인 뒤크레는 특별히 키가 큰
녀석들을 골라서 대통령의 주변에 사람으로
울타리를 만들 예정이야. 이것도 물론
대통령께는 비밀일세.
이상의 조치 이외에 대통령의 신변 200
미터 이내에 접근하는 자는 그가 누구든
되어 있어. 외교단은 잔소리를 할 것이고
보도진은 화를 내겠지만, 그런 일에
구애받을 수는 없네. 기자들과 외교관용의
통행증은 내일 아침 일제히 전부를 바꿔
버릴 예정이야. 재칼이 그들 중 하나로
둔갑할 경우도 있을지 모르니까. 그 밖에
짐이나 기다란 물건을 가지고 있는 녀석은
눈에 뜨이는 대로 쫓아 버릴 생각이야.
어떤가, 무슨 의견 없나?"
르베르는 교장선생님 앞에 앉은
국민학생처럼 무릎 사이에서 손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는 제5공화국의
권력기구의 어마어마함에 압도당해 있었다.
시골 순경으로 출발하여 남보다 눈치가
조금 빠른 덕분에 범죄자를 잡는 일로
인생을 살아왔다. 그렇게 착실하게 외길
메카니즘의 강대함이 거의 두려움으로
느껴지기조차 했다.
"아마 재칼은 -- ."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신이 죽을 것으로 생각지는
않을 겁니다. 자기 생명을 희생하지 않아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는 프로 살인자이며 돈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므로 죽어 버리면 의미가
없어지니까요. 현장에서 무사히 탈출해서
번 돈을 쓸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죠.
그는 7월 말에 파리로 사전 조사를 와서
그때 이미 계획을 세워 두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이 성공할 것인가 못할
것인가, 탈출이 가능한가 어떤가, 그 점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문이 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영국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승산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드골 장군이
1년 365일 중에서 어느 날, 즉 파리
해방기념일에는 아무리 위험하게
생각되더라도 긍지와 체통을 위해서라도
군중 앞에서 식을 거행할 것이라고 재칼은
계산했겠지요. 대통령의 신변 경호가 그의
존재가 폭로된 뒤에 더욱 엄중해졌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는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르베르는 일어나서 내무장관 앞이라는
것도 잊고 방안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돌아가지 않겠지요. 왜? 목적을
이루고 탈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마도 보통 사람이 생각해 낼
수 없는, 그런 아이디어를 준비하고 있을
라이플일 겁니다. 그러나 폭탄은 발견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총일 수밖에
없지요. 차를 타고 프랑스로 들어온 것은
그 때문입니다. 총은 그 차에 감추어져
있었던 겁니다. 섀시에 용접을 했거나 내부
어딘가에 넣어서."
"그러나 총을 가지고 대통령께 접근할
수는 없네!"
내무장관이 소리쳤다.
"극소수의 몇몇 사람 말고는 아무도
장군에게 접근할 수 없어. 그 소수의 몇
사람도 엄중한 소지품 검사를 받아야만 해.
어떤 방법으로 철책의 경비망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건가?"
르베르는 다시 일어나서 내무장관 쪽을
보았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만,
그는 아직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으니까요.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영불 두 나라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마침내 파리에
잠입했습니다. 지금쯤 아마 또 다른 얼굴로
둔갑해서 다른 신분증을 준비해 가지고
총을 안고는 어딘가에서 꼼짝 않고 숨어
있을 겁니다. 이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장관님. 그가 지금 어디에
있든지 내일은 틀림없이 나타납니다.
나타나면 어떻게 해서든지 막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풋내기 형사에게 고참이 해주는
말은 끊임없이 눈을 크게 뜨고 있어라 --
이것밖에는 없습니다.
것은 이런 정도입니다. 설명해 주신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면 참으로 완벽한
체제입니다. 내일은 각 식에 따라다니면서
재칼의 출현을 눈을 크게 뜨고 지키지요.
남은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프레이 내무장관은 실망했다. 그는
부비에가 프랑스 제일의 형사라고 보증한
이 남자에게서 앗 하고 탄복할 만한 하늘의
계시와도 같은 멋진 아이디어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남자는
겨우 눈을 크게 뜨자는 것이다. 내무장관은
일어섰다.
"알았네."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한껏 눈을 크게 뜨고 지켜 주게나."
그날 밤 재칼은 베르나르의 침실에서
늘어놓았다. 밑창이 닳아빠진 검은 구두,
회색 양말, 바지와 노타이 셔츠,
종군기장으로 장식한 긴 군용 외투, 그리고
재향군인의 검은 베레모, 그 모두가 가공의
프랑스인 앙드레 마르탱의 옷이다. 그는
이것들 위에 브뤼셀에서 위조해 받은
신분증명서와 상이군인증을 꺼내 놓았다.
다시 그는 가벼운 망사직 벨트와
개머리판, 노리쇠 뭉치, 총신, 소음기,
그리고 조준기를 넣은 알루미늄 같은
광택을 내는 스테인리스 강관 다섯 개를
거기에 늘어놓았다. 그 옆에 다섯 발의
작약탄을 박아놓은 검은 고무 물미를
꺼냈다.
그는 작약탄 두 발을 고무 물미에서
빼내어 부엌 개수대 밑 도구상자에서
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탄두대에서 연필
모양의 화약을 빼내어 버리고 못쓰게 된 두
발의 총알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작약탄은
세 발이 남아 있다. 세 발이면 충분했다.
그는 이틀 동안이나 면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턱에는 황금색 수염이 더부룩하다.
그는 그것을 파리에 숨어들어온 날
사두었던 싸구려 면도칼로 일부러 피부에
상처를 내가면서 서툴게 깎았다. 욕실
선반에는 옌센 목사로 변신할 때에 쓰던
회색 머리 염색약이 들어 있는 면도용
로션의 병과 용해액이 놓여 있다. 마티
슐버그로 변신하기 위해서 밤색으로
물들였던 머리칼은 이미 본래의 금발로
돌려 놓았기 때문에 그는 거울 앞에 앉아서
그 금발을 짧막하게 군인 모양으로 잘랐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전체를 점검했다.
그리고 오므렛을 만들어 먹고는 TV 앞에
앉아서 잠잘 시간까지 버라이어티 쇼를
즐겼다.
1963년 8월 25일 일요일은 굉장한
더위였다. 1년 하고도 3일 전, 장 마리
바스찬 칠리 중령과 그의 저격대가 프티
클라마르에서 드골을 기습한 날과
마찬가지로 여름의 열기가 거리를 태울
듯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 저격대원
중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지만, 그들의
행동은 이날 단숨에 대단원을 맞으려 하고
있는 일련의 사건을 야기시킨 것이었다.
파리는 이날 19년 전에 독일군에게서
해방된 기념일을 축하하려 하고 있었다.
7만 5천 명의 치안요원이 온통 땀에 젖어서
축제를 경비하고 있었다. 떠들썩한 보도
탓인지 해방기념의 여러 행사에는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식의
운영을 담당하는 경비원이 쳐놓은 인간
울타리에 시야가 가려져서 거의 드골
대통령의 모습을 볼 수도 없었다.
식에 참석하게 된 무관이나 문관은 실은
초대의 기준이 키의 크기에 따른
것이었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대통령을
지키는 방패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철없이 기뻐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에워싸여 군중들의 시야에서
차단된 드골 장군은 그 사람들의 울타리
안에서도 다시 네 사람의 경호원의 호위
속에 있었다.
근시인데다 더구나 군중 앞에서는 절대로
안경을 쓰지 않는 습관이라 양쪽 팔꿈치
바로 뒤와 좌우에 각각 한 사람씩 경호원이
따르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로제 테시에, 폴 코미티, 레미몽 사샤,
앙리 드쥐다, 이렇게 네 사람이었다.
기자들 사이에서 그들은 '고릴라'로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그들의
특징을 야유하는 별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분명히 걸음걸이 같은 데에 고릴라와
비슷한 데가 있었지만, 거기에는 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온갖 전투기술을 몸에 익힌 전문가이며,
가슴과 어깨는 강인한 근육으로 다져져
있다. 그리고 그 근육에 힘을 주면 저절로
두 팔이 옆으로 벌어지고, 몸과 팔이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자동권총을 매달고
있어서 걷는 모습이 더욱 고릴라처럼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걸을 때에도
수상한 것이 보이면 즉각 권총을 뽑아서
발사할 수 있도록 언제나 두 손바닥을 반쯤
펴고 있다.
그러나 수상쩍은 사람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개선문에서의 식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그 동안에도 에투알
광장 주변에 있는 건물 옥상에서는
쌍안경과 라이플을 가진 수백 명의
사나이들이 굴뚝 뒤에 숨어서 감시를
계속하고 있었다. 식을 끝낸 대통령 일행이
탄 차들이 줄을 이어 노트르담 새 성당
쪽으로 사라져 가자 경비원들은 후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옥상에서
노트르담 새 성당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파리의 추기경이 다수의
고위 성직자를 거느리고 미사를
집전했으나, 성직자들은 성의를 입을
때부터 이미 엄중하게 감시를 받았다.
파이프오르간의 거대한 파이프 사이에는
라이플을 든 두 경관이 숨어서(물론
추기경은 몰랐지만)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또 참석자
사이에는 다수의 사복형사가 섞여 있었다.
그들은 무릎을 꿇지도 않고 눈도 감지 않고
오로지 주위의 감시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나, 기도 때만은 근무중의 경관이
언제나 잊지 않는 그것을 열심히 외웠다 --
주여! 내가 근무중에만은 제발 아무 사고도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떨어진 곳에 있었던 두 구경꾼이 안주머니
쪽으로 손을 집어넣었을 뿐인데도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한 사람은
겨드랑이를 긁으려고 한 것이고, 또 한
사람은 담배를 꺼내려 한 것인데도.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라이플의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폭탄이
터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경관들은
재콜이 경관으로 둔갑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날 아침 일찍 지급받은 표식용
배지를 서로 확인해 보기까지 했다. 배지를
분실한 어떤 CRS 대원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죄수 호송차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카빈총은 압수되었다. 가엾은
그 대원은 저녁때까지 유치장 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것도 20명이나 되는
증언하고서야 비로소 석방되었다.
몽발레리앙에서는 경비진이 초긴장
속에서 경계에 임하고 있었으나, 대통령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 분위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비진의 수뇌부에서는 적어도
대통령이 납골당에 들어가 있는 동안만은
안전하리라고 생각했고, 문제는 갈 때와
올라올 때 차가 묘소 부근을 통과하는
순간이다. 그 부근은 노동자 계층이 살고
있는 구질구질한 동네로서, 도로가 좁고
구불구불했다. 차가 한 모퉁이에
접어들면서 속력을 늦추는 순간을 노려서
암살자가 덮쳐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때 재칼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피에르 발레미는 만사가 귀찮았다.
카빈총의 가죽끈이 어깨에 파고들어
아팠다. 목은 타는 듯이 바짝 말라 있었다.
점심 먹을 시간이지만, 도저히 요기 같은
것은 하게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CRS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루앙의 공장에서 레이오프(일시
해고)되어 직업소개소에서 CRS 대원모집의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을 때에는 아직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
포스터는 CRS의 제복을 입은 젊은이가 보람
있는 CRS 생활을 자랑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 제복은 일류 디자이너가
직접 만든 것처럼 멋지게 보였다. 발레미는
거기에 끌려서 CRS에 응모해 버렸다.
그러나 현실은 포스터처럼 달콤한 것은
아니었다. 숙소는 교도소 -- 사실 전에는
연습. 멋지게 보이던 남색 사지천 셔츠는
살갗에 따갑기만 했다. 살을 에는 듯한
혹한과 타는 듯한 혹서 속에서 가두에 마냥
선 채, 한 번도 현실로서 겪어본 적 없는
'거물 체포'에 참가한 허망함. 거리에
나가서 통행인의 신분증을 조사한다고
쉽사리 수상한 인물이 눈에 띌 리도 없고,
매번 힘겹고 지치기만 하니 그 허무함을
술로 달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급히 파리로 끌려온
것이다. 루앙에서 나와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휘황한 거리'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바르비셰 중사의
분대에 있는 한 그것은 좀처럼 바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루앙의 부대 안에 있을
"봐! 저기 철책이 보이지, 발레미? 너는
저기를 감시하는 거야. 철책이 움직이지
않도록 잘 지키고 있어. 관계자 이외에는
통과시키면 안돼. 정신 바짝 차려, 책임이
막중한 일이니까."
흥, 뭐가 책임이야! 해방기념일인지 뭔지
모르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지방에서까지 경비 지원을 하기 위해서
몇만 명이나 끌고 오다니, 이건 너무한 거
아냐! 내 숙사에만도 지방의 10개 현의
사람이 모여 있어. 파리의 녀석들은
누군가가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한다 해서
모두들 이렇게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소문이었지만, 소문 같은 것을 어떻게
믿나? 소문은 절대로 사실로 바뀌지 않는
거야 -- .
그가 감시하고 있는 통행금지 철책은 '6월
18일 광장'에서 250 미터쯤 들어간 곳에
있었으며, 거리의 양쪽에 있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로막아 놓았다. 몽파르나스 역은
광장 저쪽 200 미터 떨어진 곳에 있고, 그
앞에 식이 거행될 역전 광장이 있다.
거기서 식장 정비를 하고 있는 경관과
군악대들 모습이 조그맣게 보였다. 앞으로
세 시간이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 .
통행금지 철책 너머에는 벌써 구경꾼이
몰려들고 있었다. 정말 할 일도 없는가
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 더위 속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 봐야 결국 볼 수 있는 것은
저 멀리에 있는 사람의 무리들뿐이며, 그곳
어딘가에 드골이 있는가 보다고 짐작밖에
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도 그들은 샤를
구경하러 모여든다.
철책 너머에는 벌써 200명 정도의
구경꾼이 모여 있다. 그때 발레미의 눈에
그 노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노인은
비틀거리면서 목발에 몸을 의지하여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 베레모는 땀과
기름투성이이고, 긴 군용 외투 자락이 무릎
아래까지 덮여 있다. 가슴에 매단 훈장이
흔들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동정 어린 눈으로 노인을 훔쳐보고 있다.
발레미는 그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괴팍한 영감들은 자기에게는 이게 전부라는
듯이 언제나 훈장을 차고 다닌단 말이야.
하긴 개중에는 정말로 훈장밖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는 노인도 있겠지. 전쟁으로
발 하나를 잃어버린 사람 같은 경우에는
다리가 온전할 때에는 거침없이 뛰어다녔을
텐데, 지금은 마치 언젠가 해안에서 본
외다리 갈매기 같다. 저렇게 알루미늄
목발을 짚고 죽을 때까지 절뚝절뚝
걸어야만 하다니 불쌍하기 짝이 없군 -- .
노인이 다가와서, "지나가게 해 주구려."
하고 미안한 듯이 부탁했다.
"우선 신분증을 보여 주십시오."
노인은 낡아빠진 셔츠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두 개의 증명서를 꺼냈다. 발레미는
그것을 받아서 훑어보았다. 성명 앙드레
마르탱, 나이 53세. 출신지 알자스의
콜마르. 현주소 파리. 나머지 하나도
소지인은 같고, 맨 위에 커다랗게
'상이군인'이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분명히 상이군인이야, 이 노인은.
증명서에 붙어 있는 사진을 보았다. 같은
얼굴이지만 찍은 지가 꽤 오래 된
모양이다. 그는 얼굴을 들고서 말했다.
"베레모를 벗어 주십시오."
노인은 베레모를 벗어서 손바닥에서
꼬기작거렸다. 발레미는 눈앞에 있는
얼굴과 사진을 비교해 보았다. 똑같다.
다만 지금의 얼굴은 병색이 있다. 면도를
하다가 베인 거겠지. 조그만 상처가 여러
개 있고, 거기에 발라 붙인 화장지에는
피가 배어나와 있다. 얼굴은 회색이고,
진땀으로 온통 얼룩져 있다. 짧게 깎은
회색 머리칼이 베레모를 벗을 때
흐트러졌는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다.
발레미는 증명서를 돌려주었다.
"그쪽에 왜 가려고 하나요?"
"연금으로 살아가고 있지. 디락방을
빌려서."
발레미는 증명서를 도로 빼앗았다.
현주소는 분명히 파리 6구, 렌 가(街)
154번지로 되어 있다. 발레미는 옆에 있는
집을 올려다보았다. 문 위에는 132번지라는
표시가 붙어 있다. 154번지는 훨씬 더
저쪽이다.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는 노인을
말릴 수는 없었으며, 그런 명령도 받은 바
없다.
"그럼, 가도 좋습니다. 되도록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가야 해요. 이제 곧 대통령이
오니까요."
노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증명서를 받아
호주머니에 넣었는데, 그 바람에
비틀거려서 발레미가 부축해 주었다.
받게 돼. 나도 2년 전에 받았지만."
노인은 가슴에 단 '해방 훈장'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다만 그때에는 국방장관이 주었었지."
발레미는 훈장을 들여다보았다. 아,
이것이 '해방 훈장'이라는 물건이로군.
이따위 것 받아봐야 다리 하나를 날렸다면
수지가 안맞지 -- . 그는 문득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고 쌀쌀맞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목발을 짚고 거리를
걸어갔다. 발레미는 그때 철책을 타고
넘으려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그리로
뛰어갔다.
"안돼, 안돼,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자,
내려가요, 내려가."
상이군인은 거리의 가장 끝 쪽,
발레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현관으로
사라져 가는 외투였다.
관리인인 마담 베르트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 그림자에 깜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이날 아침부터 경관이 찾아와서 아파트의
방이란 방은 모조리 살펴보았는데, 만일
사는 사람들이 그냥 있었더라면 뭐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았을지 몰라서 그녀는
한숨이 다 나왔다. 다행히 방에 남아 있는
사람은 셋뿐이고, 나머지는 모두들 여름
휴가로 시골에 가고 없었다.
겨우 경관이 돌아가고 그녀는 평소대로
현관 입구에 앉아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바로 옆 역전 광장에서
두 시간 뒤에 있을 식에는 아무 흥미도
없었다.
미안합니다만...... 물 한잔 얻어 마실
수가 없겠습니까? 식이 열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더워서......"
"그녀는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옛날
죽은 남편이 입었던 그런 군용 외투를 입고
왼쪽 가슴에는 훈장이 대롱거리고 있다.
반신을 목발에 의지하고, 외투자락 밑으로
나와 있는 다리는 하나뿐이다. 초췌한
얼굴은 회색이며, 온통 땀이 배어 있다.
마담 베르트는 뜨개질거리를 맡아서 앞치마
주머니에 밀어넣었다.
"어머, 저런! 그런 몸에다...... 이 더운
날씨니. 식이 시작되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더 있어야 하는데, 지금부터
기다리려면...... 자, 들어오세요,
이리로......"
관리용 플랫으로 갔다. 상이군인이 그 뒤를
따랐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소리
때문에 입구의 문이 닫히는 소리를 그녀는
듣지 못했다. 그녀는 갑자기 뒤에서 뻗어온
남자의 왼손에 턱이 붙잡히고, 오른쪽 귀
뒤에 있는 유두골(乳頭骨) 밑을 단단한
주먹으로 일격을 당했다. 그것은 완전히
불의의 기습이었다.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그 물을 받고 있는 잔의
영상이 안구 깊숙한 곳에서 검은 파편처럼
튀어 흩어졌다. 그리고 기절한 그녀의 몸은
소리도 없이 다박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재칼은 외투 앞자락을 젖히고 허리로
손을 돌려 다리를 구부려서 엉덩이에 붙여
고정시켜 두었던 그물처럼 짠 허리끈을
풀었다. 그리고 굽히고 있었던 무릎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오른쪽 다리에 피가
통하기 시작할 때까지 몇 분 동안 다리를
쓰지 않고 기다렸다.
그리고 5분 뒤, 그는 개수대 밑에 있던
단단한 끈으로 마담 베르트의 손발을 묶고
대형 반창고를 입에다 붙인 뒤 식기실에
밀어넣고서 문을 닫았다.
거실로 가서 실내를 뒤져 보니 테이블
서랍에 열쇠 꾸러미가 들어 있었다. 그는
외투의 단추를 잠그고 목발을 주워들었다.
12일 전, 브뤼셀에서 밀라노로 갔을 때
쓰던 바로 그 목발이다. 그는 거실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현관 홀에는 아무도
없다. 그는 관리인의 플랫에서 나와 문을
잠그고 층계를 뛰어올라갔다.
6층에 올라간 그는 마드무아젤 베랑제의
조용했다. 다시 한 번 노크했지만 역시
응답이 없었다. 옆집인 샤리에 부부의 플랫
역시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그는 열쇠
꾸러미에서 베랑제라는 명찰이 달린 열쇠를
골라내어 문을 열고 들어가서 다시 잠갔다.
그는 창가로 가서 밖을 보았다. 길 건너
맞은편에 있는 건물의 옥상에서는 남색
제복을 입은 CRS의 대원들이 각자의 위치에
자리잡는 순간이었다. 자칫 늦을 뻔했다.
그는 손을 뻗어서 창문 고리를 벗긴 뒤,
안으로 당겨서 열게 되어 있는 두짝 문을
조용히 열어서 좌우의 벽에 완전히 붙여
버렸다. 그리고 그는 창문에서 훨씬 뒤로
물러섰다. 열린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융단의 일부를 밝게 비추어 방의 다른
부분은 오히려 어두웠다.
맞은편에 있는 감시원도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한쪽으로 몰아놓은 커튼 뒤에 숨어서
밑을 내려다보니 밑으로 비스듬히 130 미터
저쪽으로 역전 광장이 보였다. 그는 창에서
2미터 정도 물러난 곳에다 거실에 있던
테이블을 옮겨다 놓았다. 그리고
테이블보와 조화 화분을 치우고 팔걸이의자
위에 있던 두 개의 쿠션을 포개 놓았다.
총좌(銃座)이다.
그는 외투를 벗고 팔을 걷어붙이고서
목발을 분해했다. 먼저 검은 고무 물미를
빼냈다. 남아 있는 세 발의 작약탄의
뇌관이 번쩍거리고 있다. 다른 두 발의
화약은 뽑아내어 얼굴색을 검게 하고 땀이
나게 하기 위해서 그 화약을 먹었었는데,
목발의 다음 부분을 빼내어 안에서
소음기를 꺼냈다. 그 다음 부분에는
망원조준기가 들어 있었다. Y자 모양의
겨드랑이에 끼는 부분 바로 밑, 목발
중에서 가장 구경이 굵은 부분에서는
노리쇠 뭉치와 총신이 나왔다.
그리고 Y자 모양으로 된 두 개의 가지
부분에는 두 개의 강철봉이 들어 있으며,
그것은 프레임 개머리판의 아래 위 뼈대가
된다. 마지막으로 가죽을 붙여 놓은
겨드랑이 받침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으며, 단지 가죽 속에 방아쇠를 숨겨
두었을 뿐이다. 이 겨드랑이 받침은 그대로
개머리판의 어깨받이가 되는 것이다.
마치 애무하듯 그는 조심스럽게 총을
조립했다. 노리쇠뭉치와 총신, 개머리판의
방아쇠. 마지막으로 조준기를 끼워서
단단히 고정시켰다.
테이블 앞에 놓아둔 의자에 앉아서 두
개를 포개 놓은 쿠션 위에 총신을 안정시킨
그는 한쪽 눈을 감고 조준기를
들여다보았다. 밝은 햇빛이 비친 광장이
렌즈 속으로 들어왔다. 식의 참석자들이
정열할 장소를 아스팔트 위에 그리고 있는
작업원 하나가 조준기의 십자선을
가로질러서 지나갔다. 그는 그 남자를
쫓았다. 남자의 머리가 아르덴의 숲속에서
시험사격 했을 때에 썼던 멜론처럼 크고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만족한 얼굴로 테이블 끝에 세 발의
작약탄을 병정처럼 줄지어 세웠다. 그리고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장전
손잡이를 후퇴시켜 노리쇠 뭉치에 첫번째
총알을 밀어넣었다. 한 발이면 일은 끝날
것이지만, 만일을 위해서 예비로 두 발을
더 준비해 온 것이다. 그는 노리쇠를
전진시켜서 총알을 약실로 보내고, 다시
노리쇠 뭉치를 오른쪽으로 반 회전시켜서
잠갔다. 그리고 총을 조심스럽게 쿠션 위에
눕혀 놓고 담배와 성냥을 꺼냈다.
첫 개비를 힘껏 빨아들이면서 그는
의자에 깊숙히 기대앉았다. 앞으로 한 시간
반이 남았다.
제 21 장
르베르는 태어나서 아직 한 번도 물을
마셔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목은 타는 듯이 마르고, 혀는 마치
용접이라도 해놓은 듯이 입천장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 갈증은 반드시 더위 탓만은
아니었다. 긴 인생에서 비로소 그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오후에는 틀림없이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것이라고 그는 공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실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오전중에는 식의 차례에 따라서 그 역시
개선문, 노트르담 대성당, 그리고
몽발레리앙으로 옮겨 다녔다. 아무 일도
지나서야 그날 새벽 내무부에서 열린
마지막 회의에 참석한 몇몇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 그곳의 분위기는 긴장과
분노가 차츰 일종의 해방감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남은 식은 앞으로 계속 되지만,
'6월 18일 광장'은 완전히 봉쇄되어 있다고
참석자들은 장담했다.
드골 대통령이 점심을 들기 위해서
엘리제궁으로 돌아간 다음 그들은 가까운
레스토랑에 들어갔었는데, 점심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서 롤랑 대령이 말했다.
"놈은 돌아간 거야. 일을 내팽개치고
달아나 버린 거지. 하긴 그것이 현명한
짓이라고 해야겠지. 그러나 놈은 언제
어딘가에서 반드시 꼬리를 드러낼 거야.
그때는 액션 서비스가 틀림없이 잡아서
르베르는 지금 몽파르나스 대로에
있었다. 군중은 광장으로부터 200 미터
떨어진 곳에서 진로를 제지당하고 있었다.
거기에서는 광장 저쪽에서 무슨 일이
거행되는지 볼 수도 없게 되어 있었다.
봉쇄선을 맡고 있는 경관이나 CRS 대원은
르베르의 질문에 대해서 똑같은 대답을
했다. 정오에 철책을 세운 뒤로는 안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대로도 옆길도 골목도 모두 봉쇄되어
있었다. 광장 주변에 있는 건물 옥상에는
감시원이 제각기 자리를 잡고 감시를
계속하고 있다. 역 건물도 경관으로 가득
차 있었고, 역전 광장을 내려다보는
옥상에는 CRS 대원이 무리를 짓고 있다. 또
사람이라곤 없는 플랫폼의 높은 지붕 위와
자세로 찰싹 달라붙어 있다. 기관차나
기차는 모두 생 라자르 역으로
되돌려보내고 역 구내는 텅 비어 있었다.
봉쇄선 안쪽에 있는 건물은 모두
지하실에서 다락까지 철저히 조사를
끝냈다. 아파트는 그곳에 살던 사람의 거의
대부분이 여름 휴가로 산과 바다로 떠났기
때무에 빈집이 많았다.
요컨대 '6월 18일 광장'은 바랑탕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쥐의 뒷구멍보다 굳게'
봉쇄되어 있는 것이다. 르베르는 정말
오베르뉴 사람다운 바랑탕의 말이라고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바랑탕도 재칼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르베르는 질러 가기 위해서 통행허가증을
나왔다. 거기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광장에서 200 미터 지점에 봉쇄선이
설치되어 있고, 그 너머에는 군중이
벌떼처럼 모여 있으며, 안쪽으로는 경계에
임하는 CRS 대원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르베르는 여기서도 또 CRS
대원들에게 물어 보기 시작했다.
수상한 사람이 있었나? 아니오. 봉쇄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없습니다. 역전
광장에서 군악대가 연주 전에 음정을
맞추는지 갖가지 악기의 높고 낮은 소리가
소음이 되어 들려왔다. 르베르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거의 대통령이 도착할
시간이다. 여기를 빠져나간 자는 없나? 예,
하나도 없습니다. 좋아, 정신 바짝 차려야
하네.
몽파르나스 대로에서 대통령 일행이 탄
차의 행렬이 '6월 18일 광장'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차렷 자세로 경례하는
경관 앞을 지나서 역전 광장의 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시선이 검은 차로 빨려들고
있다. 군중이 몰리면서 조금씩 앞으로
밀려나오고 있다. 르베르는 주위의 옥상을
올려다보면서 모두들 잘 해나가고 있다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옥상의 감시원들은
밑에서 일어나는 광경에 한눈팔지 않고
각자 건너편 건물의 옥상이나 창에 수상한
움직임이라도 없는가 해서 끊임없이 경계의
눈을 번득이고 있다.
르베르는 렌 가의 서쪽으로 다가갔다.
젊은 CRS 대원이 132번지의 건물 벽과
봉쇄선의 철책 사이의 좁은 틈 사이에
신분증을 보였다. 순간 젊은 대원은
긴장으로 몸이 굳어졌다.
"여기를 빠져나간 사람은 없나?"
"없습니다."
"자네는 몇 시부터 여기를 지키고 있나?"
"12시에 길을 봉쇄했을 때부터입니다."
"정말 아무도 빠져 나가지 않았는가?"
"예......실은......불구자 노인 하나가.
바로 저쪽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불구자?"
"예, 노인입니다. 환자 같았습니다.
신분증도 상이군인증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소는 렌 가
154번지였습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통과시켰습니다. 진땀을 뻘뻘
흘리고. 이 더위에 그런 외투를 입고
그 영감은, 미친 사람이에요."
"외투라고?"
"그렇습니다. 기장이 긴, 옛날 군인들이
입었던 군용 외투라던가요? 바로 그겁니다.
이 더위 속에선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그 사람이 어디가 아프다던가?"
"더위를 먹었나 봅니다."
"상이군인이었다고 했지? 어디를
다쳤던가?"
"절름발이입니다. 다리가 하나
없었습니다. 목발을 짚고 있었습니다."
광장에서 트럼펫 소리가 울려퍼졌다.
자, 조국의 아들 딸들이여, 영광의 날은
왔도다......
군중 속에서 '라 마르세이예즈'의 노래
소리가 울려 나왔다.
르베르에게는 자신의 목소리가 굉장히
작게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다리가 하나 없는 사람이
쓰는 거 말입니다. 그 사람이 알루미늄으로
만든......"
르베르는 뛰기 시작하면서 그 CRS
대원에게 따라오라고 소리쳤다.
대통령 일행이 탄 차의 행렬은 텅 빈
역전 광장으로 들어와서 역사(驛舍)의
정면에 죽 늘어서서 멈춰섰다. 그 반대쪽,
역전 광장과 '6월 18일 광장' 사이에 있는
철책을 따라서 이날 훈장을 수여받게 될
10명이 줄서 있었다. 역전 광장의 동쪽
구석에는 진한 회색의 하복을 입은
정부요인들과 외교단이 서 있었다.
약장(略章)이 보인다.
서쪽에는 의장대와, 그 조금 앞으로는
붉은 제복으로 단장한 군악대가 위엄 있게
정렬해 있었다.
차들 중에서 한 대의 차 주위에 의전국과
대통령 비서실의 직원들이 몰려들었다.
군악대가 국가인 '라 마르세이예즈'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재칼은 총을 들어 조준기로 역전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가장 앞쪽에 서 있는,
첫번째로 훈장을 수여받을 퇴역군인 모습이
렌즈 속으로 들어왔다. 통통하고 조그만
남자가 완전히 굳어져서 차렷 자세로 서
있다. 머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옆얼굴이다. 몇 분 뒤에는 이 남자
맞은편에 또 하나의 얼굴이, 황금 별 두
오만한 얼굴이 나타날 것이다.
'마르숑, 마르숑 아 라 빅투아르......'
국가 연주가 끝나자 주위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의장대 지휘관의 구령이
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받들어 -- 총!
흰 장갑이 일제히 3박자로 소총을 받들면서
양쪽 뒤꿈치가 일제히 부딪쳤다. 대통령
전용차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흩어져서
둘로 갈라졌다. 그 중앙에서 키 큰 사람이
나타나서 퇴역 군인들의 대열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뒤를 따르던 무리들은
퇴역군인들의 전방 50 미터 지점에서
멈춰서고, 수훈자를 대통령께 소개할
재향군인회 총재와 10개의 훈장과 붉은
약장을 받쳐 든 직원만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 앞을 샤를 드골은
"이 아파트인가?"
르베르는 헐떡이며 멈춰서서 현관을
가리켰다.
"그런 것 같습니다. 예, 분명히
여기입니다. 광장에서 두 번째
집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이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자그마한 총경은 안으로 뛰어들었다.
발레미도 뒤를 따랐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길에서 좀 들어온 곳이라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역전 광장의 철책을 따라서 서 있는
고관들은 이미 두 사람의 기묘한 행동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체포되어 심문당한다면 총경으로
둔갑한 묘한 남자가 있기에 그놈을 잡기
위해서 온 것이라고 발레미는 대답할
그가 현관 홀로 들어가자 총경은
관리인의 플랫 문을 흔들고 있었다.
"관리인 어디 있나?" 하고 총경은
소리쳤다.
"모릅니다."
발레미는 왜 그러느냐고 물어 보려
생각했지만, 그때 이미 총경은 문의 유리를
팔꿈치로 깨어 버리고 안으로 손을 넣어서
문을 열고 있었다.
"이리 와!"
총경은 그렇게 말하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오지 말래도 간다고. 당신은
돌았어 하고 발레미는 마음속으로 악담을
퍼부었다.
키가 작은 총경은 식기실 문 앞에
있었다. 그 어깨너머로 안을 들여다본
모습을 보았다.
"아니!"
그는 총경이 이렇게 당황하고 있는 것이
거짓이나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이때
비로소 알아차렸다. 이 사람은 진짜
총경이며, 범죄자를 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언제나 그가 꿈꾸어 오던
일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는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가장 위층이야."
총경은 발레미가 질려 버릴 정도로 빨리
층계를 뛰어올라갔다. 그는 어깨에 메고
있던 카빈총을 벗어들면서 뒤따랐다.
드골 대통령은 열의 선두에 있는
퇴역군인 앞에 멈춰서서 약간 허리를
퇴역군인의 관등성명을 알려 주며 19년 전
이날 어떤 공을 세우고 이 명예로운 자리에
서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총재의 설명이 끝나자 대통령은 그
퇴역군인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훈장을
받쳐들고 뒤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직원
쪽으로 돌아서서 내미는 훈장을
받아들었다. 군악대가 '라 마르죠렌'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장신의 장군은 앞에
있는 노인의 둥근 가슴에 훈장을 달아
주었다. 그리고 경례를 하기 위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거기서 130 미터 떨어진 아파트의
6층에서 재칼은 총을 들어 망원조준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굴의 특징까지
뚜렷하게 알아볼 수가 있었다. 군모 채양
군모 옆으로 올라갔었던 손이 내려오고
조준기의 십자선의 중심점이 관자놀이와
맞추어졌다. 살며시 부드럽게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 .
다음 순간 그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역전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작약탄이
총구에서 튀어나가기 직전에 대통령은
갑자기 머리를 앞으로 숙인 것이다. 재칼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대통령은 앞에
있는 퇴역군인의 두 뺨에 엄숙하게 입을
맞추었다. 대통령은 장신이기 때문에
축복의 입맞춤을 해주기 위해서는 고개를
조금 앞으로 숙여야만 했던 것이다. 이
입맞춤은 프랑스나 그 밖의 라틴계 민족의
습관이었으나, 앵글로색슨인 재칼은 미처
그것을 몰랐었다.
대통령 머리 뒤 1인치를 빗겨 지나갔다.
날아가는 총알에서 나는 소리를 대통령이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재향군인회 총재와 직원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들로부터 50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던
여러 참석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총알은 태양의 열기로 눅눅해진
아스팔트에 박혀 거기서 분해되었다. '라
마르죠렌'의 연주가 계속되고 있다.
입맞춤을 끝낸 대통령은 자세를 바로하고
조용히 다음 퇴역군인 쪽으로 옮겨 갔다.
재칼의 입에서 저주의 말이 튀어나왔다.
130 미터의 사정거리에서 정지되어 있는
표적을 노려 실패해 본 경험은 단 한 번도
아직 기회는 있다. 그는 노리쇠를 열어
탄피를 빼냈다. 그리고 두 발째 작약탄을
장진하고 노리쇠를 닫았다.
르베르는 헐떡이면서 6층까지 갔다.
심장이 입에서 튀어나와 층계참에 굴러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뉜 아파트 중에서
거리 쪽으로 난 문이 둘 있었다. 그는 그
문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CRS 대원이
카빈총을 허리에 바짝 붙인 채 앞을 겨누고
다가갔다. 르베르가 두 개의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데 한쪽 문 안에서 '퍽'하는
소리가 들렸다.
르베르는 집게손가락으로 자물쇠를
가리키며, "쏘아 부숴!" 하고 명령하고
버티고 서서 쏘았다. 나무와 쇠 조각과
찌그러진 총알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문은 비틀거리듯 안으로 열렸다. 발레미가
방으로 뛰어들었다. 르베르도 뒤따랐다.
그 남자의 회색 머리칼이 발레미에게는
눈에 익었다. 그러나 그 밖에는 완전히
변신되어 있었다. 다리는 이상 없이 둘이
있었으며, 외투는 벗었고, 라이플을 들고
있는 손은 젊은이의 것이었다. 총잡이의
움직임은 빨랐다. 테이블 앞에서
일어서면서 빙글 몸을 돌려 총대를 허리에
댄 채 라이플을 쏘았다.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발레미의 귀에서는 아직도 자신의
카빈총의 발포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총알은 그의 가슴으로 들어가 흉골에
맞으면서 작열했다. 살을 찢는 느낌이 먼저
그러나 그것도 곧 사라져 버렸다. 태양의
빛이 여름에서 겨울로 변한 것처럼
희미해졌다.
융단 조각이 튀어올라 그의 볼을 때렸다.
그때 그는 융단에 볼을 대고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다리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목으로
차츰 감각이 사라져 갔다. 마지막으로
의식에 남은 것은 켈마딕 바다로 수영하러
갔을 때에 맛본 것과 같은 짜고 쓴 맛이
입안에 가득했고, 그때 본 말뚝 위에 앉아
있던 다리가 하나뿐인 갈매기의
영상이었다. 이윽고 암흑이 찾아왔다.
발레미의 시체 옆에 서 있던 르베르는
상대의 눈을 쳐다보았다. 심장은 멈춰 버린
듯이 소리도 없었다.
"재칼......" 하고 그가 말했다.
라고만 말했다.
재칼은 라이플의 노리쇠를 열었다.
탄피의 약협(藥莢)이 반짝 빛나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재칼은 테이블 위에 있던
무엇인가를 집어서 노리쇠에 밀어넣었다.
회색 눈은 다만 르베르를 보고 있을
뿐이다.
놈은 나를 죽일 셈이로군 하고 르베르는
꿈속 같은 감각으로 생각했다. 놈은 쏘려
하고 있어. 나를 죽이려 하고 있어 -- .
르베르는 바닥을 보았다. CRS의 젊은
대원이 옆으로 쓰러져 있다. 카빈총이 그의
손에서 떨어져 르베르의 발 아래에 있었다.
분명히 의식하지도 않은 채 르베르는
무릎을 맞추어 한 손으로 MAT 49형 자동
카빈총을 집어들면서 다른 한 손으로
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르베르는
방아쇠를 찾아내어 힘껏 당겼다.
굉장한 총소리가 조그만 방안을
진동시켰다. 그 소리는 광장에서도 들렸다.
나중에 그 소리에 대해서 질문한
신문기자는, 어떤 바보 같은 녀석이 식이
한창 진행중인데 근처 길에서
머플러(소음기)가 터져 버린 오토바이의
엔진을 거는 소리였다는 설명을 들었다.
탄창에 반이나 남아 있던 9mm 탄환이
재칼의 가슴에 벌집을 만들었다. 그의 몸은
허공으로 튀어올랐다가 반 회전해서 방
한구석에 넝마 뭉치처럼 뒨굴었다. 전기
스탠드가 그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역전
광장에서는 군악대가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그는 곧 선임
경감을 사무실로 불렀다.
"놈을 처치했어."
입을 열자마자 그는 말했다.
"파리에서. 이제 문제는 없지만, 일단
놈의 플랫에 가서 유품을 정리해
주어야겠네."
오후 8시, 경감이 칼스로프의 유품을
정리하고 있는데 열어젖힌 문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경감은 돌아다보았다. 한 남자가
찌푸린 얼굴로 서 있었다. 커다란 몸집에
단단해 보이는 남자였다.
"무엇하러 왔소, 당신?"
경감이 물었다.
"그것은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대체
"시치미떼지 말고 이름을 대봐."
"칼스로프라는 사람이오. 찰스 칼스로프.
여기는 내 집인데, 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경감은 총을 가지고 올 걸 하고
후회했다. 그는 신중하고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좋소. 그럼, 경시청까지 가
주어야겠소."
"꼭 그래야만 하겠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 줘야겠소."
그러나 오히려 설명을 하게 된 쪽은
칼스로프였다. 결국 그는 24시간 경시청에
구치되었다. 그 사이에 토머스 쪽에서는
재칼의 사망 사실을 세 번이나 파리에
확인하고, 스코틀랜드는 서틸랜드 군(郡)의
북부 여기저기에 있는 다섯 군데 여관의
3주일 동안 이 다섯 여관을 차례로 묵어
가며 등산과 낚시에 빠져 있었다는 증언을
듣게 되었다. 겨우 칼스로프는 석방이
되었지만, 토머스는 그를 보내면서
경감에게 말했다.
"재칼이 찰스 칼스로프가 아니라면, 대체
놈은 누구란 말인가?"
"물론 영국 정부가 -- ." 다음날
경시총감은 딕슨 특별국장과 토머스 총경
앞에서 말했다. "재칼을 영국인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어. 한때 어떤 영국인이
의심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지금은 그
의심도 사라졌어. 또 재칼이 프랑스에
잠입한 뒤로 한때 불법으로 입수한 영국의
여권을 이용하여 영국인으로 둔갑했었던
덴마크인으로도, 또 미국인으로도, 그리고
프랑스인으로도 둔갑했었던 자야.
우리로서는 암살자가 댓건 명의의 여권을
써서 프랑스에 잠입하여 그 이름으로
가프라는 곳까지 간 것까지를 확인했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한 거야. 그 뒤 그가 어느
나라 사람으로 둔갑하고 무슨 짓을
했는지는 영국이 관여할 바 아니야. 이
사건은 이것으로 끝이야."
다음날 한 남자의 시체가 파리 교외의
묘지에 있는 무비명 무덤에 묻혔다.
사망증명서에 의하면 그 시체는 성명
미상의 외국인 관광객의 것으로서, 그
남자는 1963년 8월 25일, 파리 교외의
국도에서 뺑소니차에 치어 사망했다고
한다. 매장에 입회한 것은 신부와 경관 한
사람의 무덤을 파는 인부였다. 관이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누구 하나
표정이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또 한 남자만은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나자
그는 곧 얼굴을 돌리고서 이름을 물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고 묘지의 오솔길을 혼자
멀어져 갔다. 혼자 돌아가는 그 외로운
그림자에는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재칼의 날은 끝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