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지 않는 칫솔 [서민]
닳지 않는 칫솔
서민(공중보건의) 지음
<키를 재는 과는 무슨 과?>
지난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씨의 둘째아들 수연씨의 키가 160cm니
165cm니 하는 공방전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미국에 머물고 있던 수연씨
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귀국했다.
당시 수연씨가 키를 잰 곳은 서울대병원이었는데, 키를 재러 미국에서
부터 날아온 것도 그렇고, 키같은 것을 꼭 서울대병원에서 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하여튼 그런 코미디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여기서 문제 하나.
키를 잰 의사는 과연 무슨 과 의사일까.
의사 몇 명에게 물어봤는데, 대부분이 내과라고 했다. 나는 학생시절 내
과 실습을 12주나 돌았지만 키 재는 광경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키를 실
제로 측정하는 과는 소아과인데, 애들 발육을 평가해야 하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소아과에서도 키를 의사가 직접 측정하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수연씨는 평생 한번 만나기 힘든 서울대 의대 교수님께서 직접
키를 측정한 유일한 사람이 아닐까.
정답은 신경정신과의 정도언 교수님이셨다.
아니, 정신과에서 키를?
나도 왜 그랬는지 의아했는데, 정도언 교수님께서 서울대 의대 홍보담당
실장이란 보직을 맡고 계신 탓이었다. 그때서야 난 비로소 서울대병원도
홍보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 서울대병원에는 환자가 많다.
서울대병원에 가보면 그 엄청난 환자들 숫자에 우선 놀란다. 간 박사이
신 김정룡, 이효석 교수님 진료를 예약하려면 대략 2년을 기다려야 한다.
다른 교수님 진료를 받기 위해서도 최소한 몇 달 정도는 걸린다.
소아안과의 사시(사팔뜨기라고도 한다)를 전공하시는 장봉린 교수님의
진료를 받으려면 더욱 황당하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 누나의 부탁으로 예약 절차를 물
어봤더니 매달 1일마다 선착순 50명만 예약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8
월1일 새벽 5시에 병원으로 갔는데, 세상에나, 내 앞에 줄 서 있는 사람이
60명이 넘었다. 포기하고 가면서 중간쯤 서 있는 사람에게 몇 시에 오셨냐
고 물었더니 어제 밤을 샜단다.
외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입원을 하기도 정말 힘들다. 입원결정서를 받고도 입원실이 없어서 입원
을 못한다. 응급실에는 입원을 못하고 있는 환자들로 늘 바글바글이다.
병원 주차요금을 가장 먼저 유료화한 곳도 서울대병원이다. 그나마 돈
내고 세우려 해도 세울 곳이 없다. 지금의 주차장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서
울대병원 입구에 길게 늘어선 차 때문에 인근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주
차를 하는 데만 평균 40분 정도 기다렸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 만
하다. 택시를 타고 서울대병원에 가자고 해도 근처 지하철 역에다 내려줄
정도였으니까.
피 한번 뽑으려고 해도 '대기인수 381명'이라는 안내판을 보면서 혀를 내
두른다. 돈을 내려고 해도 번호표를 탄 뒤 2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떠나기
를 기다려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서울대병원과 조금만 관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외래 예약, 입퇴원에 관한 청탁을 받게 된다. 나만 해도 의대 졸업 후 조교
로 4년간 있으면서 정말 많은 사람을 입원시키거나 외래예약을 해주었다.
사실 뭐 나라고 별다른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예약 창구에 가서
불쌍한 얼굴로 "저, 여기 직원인데요... 저희 친척이거든요. 어떻게 좀 빨리
안 될까요?"라고 말하면 3개월 기다리는 것이 1개월로 단축된다. 이것만해
도 굉장한 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디가지나 '예약'이 그렇다는 이야기고 입원만은 결코 내가 힘을
쓸 수 없는 분야다. 차라리 원무과 직원들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친
해지는 길이 훨씬 빠르다.
2. 그래도 환자는 많다.
서울대병원에 오는 환자들 중에는 지방에서 오는 경우도 많다. 그건 정
말 마음 아픈 일이다. 병이 생겨도 자기 고장에서 해결을 못하고 서울까지
온다는 것은, 서울대병원 수준의 병원이 지방 대도시에도 몇 개 더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하여튼, 몇 시간 동안 기차나 버스를 타고 서울에 온다.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난 뒤 병원에 예약을 하려고 한다. 어디가 아픈데 담당 교수를 누구
로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예약 창구에서는 밀려드는 환자 때문에 친절하
게 상담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멍하니 벽에 붙어있는 안내문을 보게 되는데 특진보다 일반이 몇
천원 더 싸다. 게다가 일반을 신청하면 당일 접수가 가능하단다. 그래서 시
간과 돈을 아낄 겸 일반을 신청하게 되는 수가 많다.
특진은 의대 교수님이 봐주시는 것이고, 일반진료는 그 밑에서 훈련을
받은 레지던트가 환자를 본다. 일반 진료를 신청할 거라면 굳이 힘들여 가
며 서울대병원까지 올 필요가 없다. 지방 병원에 있는 의사, 동네 개업의들
도 모두 다 레지던트를 마치고 전문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특진을 신청하면 정말 황당하다.
치료비도 훨씬 비싼데다 세상에, 멀리서 왔는데 오늘은 그냥 가시고 몇
달 후에 다시 오란다. 기다리는 동안 병이 다 낫던지 아니면 더 악화되겠
다 싶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삼성 의료원처럼 전화로 예약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진료를 받을 때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벽에 붙어있는 아크릴 판에는 담당 교수 밑에 진료시간과 환자 이름이
쭉 씌여있는데, 10시나 10시반 등등 씌여있는 진료시간을 맞추어 와보았자
한 시간이 자나도록 부르지를 않는다. 참다 못해 간호사에게 물어보면 "그
냥 기다리라."고 하는데, 언제까지 기다릴지 기약이 없다.
많게는 두 시간 이상 의자에 무료하게 앉아있다 보면 없던 병도 생길 지
경이다. 사실 교수님 한 분에게 너무 많은 환자가 배정이 된 탓에 시간을
정확히 맞출 수 없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적어도 나는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환자들의 이해만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3. 서울대병원은 교육 병원이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입원을 한다. 그러면 인턴이 와서 자세한 병력을 묻
는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 언제부터 그랬느냐, 과거에 그런 적이 있느
냐...
다음에는 간호사가 역시 상세한 질문을 하게 되고, 이어 주치의가 와서
같은 질문을 한다. 그리고 나면 유난히 새 가운을 입은 순진한 의사가 쭈
뼛쭈뼛 들어와서는 이것저것 묻는다. 바로 의과대학 학생들이다. 정말 같은
대답을 반복해야 하는 환자로서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
내가 실습 돌 때만 해도 조금 어리숙해 보이는 나같은 사람만 "학생이
들어왔구먼."하고 발각되었는데, 요즘에는 환자들의 지적 수준이 향상되었
는지 학생들을 쪽집게처럼 알아본다.
학생인 걸 안 이상 몸도 피곤한데 잘 대답해줄 리가 없다. 나중에 교수
님 앞에서 환자 면담 결과를 발표해야 하는 우리 학생들은 이래저래 힘들
다.
우리 때는 직장 검사라고 항문에 손가락을 넣어 전립선의 이상 유무를
파악하는 촉진도 해본 적이 있었고, 분만을 앞둔 임산부의 자궁이 얼마나
열렸는지 손가락을 넣어보기도 했는데, 요즘 시대에도 학생들이 그런 실습
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환자들로서는 자신이 실습 대상이 된다는 것에 기분 나쁠지 몰라도, 대
학 병원은 엄연히 교육 병원이고 학생때 실습을 잘 해야 나중에 훌륭한 의
사가 되므로 환자들이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해 달라는 것이 대학 병원의 방
침이다.
내가 환자로 있는데 후배들이 나 진찰한다고 하면? 글쎄, 응해줄까?
3. 그래도 적자를 본다?
그렇게 넘치도록 많은 환자가 와도 적자를 본다니 이해할 수 없다. 교
육 병원이니 인력을 다소 과하게 뽑았다고 하지만, 뽑은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너무 바쁘다. 집에 못 들어가는 것은 예사고, 근로 시간을 말하면 노
동법에 명시된 주 44시간의 3배는 거뜬히 채우는 것 같다. 옆에서 보면 '좀
많이 뽑아서 교대로 쉴 수 있게 해주지...' 하는 안쓰러움이 드는 것도 당연
하다.
그런데 왜 적자를 볼까?
서울대병원이 적자라면 환자가 이곳의 10분의 1도 안 오는 다른 병원은
어떻게 먹고 살까. 병원이 다들 적자라면 왜 대기업마다 의료사업에 뛰어
들기 위해 로비를 하고, 몇몇 대학에선 의대 신설을 해달라고 아우성을 치
는 것일까.
혹시 서울대병원 교수들의 월급이 많아서?
월급명세서를 보면 정말 놀랍다. 오래 근무하신 교수님들도 신문사 기자
들 초봉보다 적은 봉급을 받는다. 특진비 등을 받으면 조금 낫겠지만, 그렇
다고 기업들 중 월급이 가장 많다는 SK 텔레콤을 따라 가지 못한다.
평소 가운 입은 모습만 보니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우
리 교수님들도 자녀들 과외비를 걱정하고, 주택부금 붓는 일에 머리가 아
프다. 서울대병원보다 봉급을 훨씬 많이 준다는 삼성의료원이 적자라는 것
이 이해가 가도, 교수 한 명이 하루에 100명 넘는 환자를 보면서도 겨우
생계 유지 정도의 돈을 받는 서울대병원이 적자라는 것은 일반인들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적자의 큰 원인 중 하나는 연구비에 대한 투자다.
병원 이름으로 많은 연구비가 나간다. 환자를 보는 임상의사에게도 연구
란 중요한 일이다. 연구가 있어야만 의학 발전이 오기 때문이다. 밤 늦게까
지 교수님들의 연구실은 불이 환히 켜져 있고, 거기서 수많은 논문들이 나
오고 있다.
서울대병원은 연구비 투자비율이 아마 가장 높지 않을까 싶고, 그런 그
런 투자가 있기 때문에 오늘의 위상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적자의 다른 원인은 잘 모르겠다. 나는 병원 경영에 관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레지던트 숫자가 좀 많긴 하지만, 통계에 의하면 레지던트 1인당
1,000만원 이상을 벌어준다고 하던데...
그럼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모르니깐!
하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현재 수준의 '친절도'를 가지고는 결국에
는 환자를 떠나 보내버릴 것이라는 사실과 최고의 의료 수준 명성으로 버
틴다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점을...
병 때문에 오는 환자들의 고통을 헤아려 보다 환자를 위한 병원이 되었
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4. 이미지 개선?
의사가 잘못하면 신문기자는 신나게 써댄다. '의사낀 억대도박단 검거'니
뭐니 하며... 실제로 의사들이 다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의사의
잘못은 크게 부풀려지는 바람에 국민들은 알게 모르게 세뇌되어 의사는 돈
만 아는 냉혈한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의사들이 홍보를 잘못한 결과다. 요즘같은 시대에 PR에 실패하고
서는 성공하기 어렵다. 다소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홍보에 열을 올려야
한다.
예를 들면 서울대병원 직원들의 사랑의 헌혈 운동이라든지, 병원측에서
고아원 등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곳에 성금을 보낸다든지, 서울대병원 의사
중에서 '미스터 스마일'과 '미스 스마일'을 뽑거나, 서울대병원에서 주민들
을 초청해 영화상영을 하는 것 등이다.
이런 것은 바로 신문에 보도가 되고, 신문에 그런 기사가 자주 난다면
서울대병원의 이미지가 크게 개선될 수 있다. 기자들은 의사의 비리 추적
에 혈안이 되어 있는 듯하지만, 인간미 넘치는 기사에 더 크게 굶주려 있
다. 왜냐하면 기자도 아플 때가 있고 그러면 병원에 가야 하니깐.
또한 서울대병원 교수님들은 TV에 출연하거나 신문에 글 쓰는 것을 별
로 즐겨하지 않으신다. 물론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기도 힘들고 또 나름대
로 소신이 있는 탓이긴 하지만, 내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우리 교수님들 중
에서도 '스타 교수님'이 탄생했으면 한다.
신문에 기고하시거나 혹은 TV에 나와서 올바른 의료상식을 전달해 주고
-지금 잘못된 상식이 얼마나 많은가!-퀴즈프로나 <체험! 삶의 현장>등의
프로에도 나가 떡을 찧는다든지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생각해 봄직하
다. 자신이 담당하는 질병에 관해 일반인도 읽을 수 있도록 알기 쉽게 책
을 쓰는 것도 좋다.
머지않아 의료시장이 개방되고 외국 병원이 들어오게 된다. 우리가 TGI
Friday 같은 레스토랑에 갔을 때 받는 서비스를 병원에서도 받을 수 있다
면, 누가 거길 마다하겠는가. 그때 가서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환자를 위한 병원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엘니뇨 현상에 관하여
1995년의 겨울은 유난히도 눈 혹은 비가 없는 겨울이었다. 제한급수가
실시되었고, 변기에다 벽돌을 넣어 물을 아끼자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여튼 그 해는 내가 해마다 만들어 오던 눈사람 제작을 포기해야 했던 쓰
라린 해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이때 처음으로 나는 매스컴을 통해서 '엘니뇨 현상'이란 말을 들었으며,
이 겨울 가뭄의 원인이 엘니뇨 현상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사람 중 임동석이라는 사람이 있다. 어느날 우연히
만났는데, 갑자기 "엘니뇨 때문에 가뭄이 심해서 큰일이야."라고 말하는 것
이다. 평소 학구적인 얘기는 별로 안 하는 임동석인지라 나는 크게 감동했
다.
"야, 너 정말 많이 아는구나."
1997년의 겨울이 왔다. 이틀 걸려 비가 내렸고, 대관령에는 160cm가 넘
는 엄청난 폭설이 왔다. 난 임동석과 테니스를 치고-근무지가 같으므로 우
린 점심 때마다 테니스를 치곤 한다-벤치에 앉아 땀을 식히는데, 임동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엘니뇨 때문에 눈, 비가 많이 와서 큰일이야."
난 황당했다. 강수량이 많아도 엘니뇨, 적어도 엘니뇨라니?
난 2년전 그가 했던 말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랬더니 임동석은 얼굴이
하얗게 되더니 속이 안 좋다고 샤워도 안 하고-평소에도 잘 안 하니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들어가 버렸다.
우리는 합리적인 사람을 동경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애쓴다. 그런데 합
리적인 사람과 합리화시키는 사람은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비단 이번 일만 가지고 임동석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토요일에 임동석과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갔는데, 어디에 갔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임동석과 같이 간 걸로 보아 좋은 목적으로 간 것은 아
니었을 것이다. 마침 길이 잘 뚫려서 예정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
리면서 난 이렇게 말했다.
"야, 오늘 길 하나도 안 막혀서 좋다."
그랬더니 임동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토요일이니깐."
몇 주 후에 다시 임동석과 함께 어디론가 차를 타고 갈 일이 생겼다. 그
런데 그날따라 차가 너무너무 막혔다. 짜증을 내면서 내가 이렇게 내뱉었
다.
"무슨 차가 이렇게 막힐까."
그랬더니 임동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토요일이니깐."
난 어이가 없어 임동석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임동석은 사태가 자신
에게 불리한 것을 알고는 의자에 기대 잠을 자는 척했다. 난 생각했다. 왜
우리 나라가 IMF 구제 금융을 받아야 하는지, 왜 선진국 진입의 문턱에서
미끄러져야 했는지, 왜 핵주먹 타이슨이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었는지...
이 땅에는 결과론적인 사람이 너무도 많은 것이다. 우리 나라가 OECD
에 가입하게 되자 사람들은 이제 선진국의 대열에 본격적으로 진입했다고
기뻐했다. 그러다가 막상 IMF 신탁 통치를 받게 되자 사람들은 이렇게 말
했다.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내, 이럴 줄 알았어."
우리 나라에는 정말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26가지 이야기
우리 나라 신문기자들은 무척 행복할 것 같다. 정치, 경제, 사회면 모두
다 기사 쓸 것이 넘쳐난다. 특히 사회면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잊을만
하면 엽기적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희대의 사기사건이 일어난다.
잠잠하다 싶으면 승용차를 몰고 여의도 광장을 질주하는 화풀이 범죄가
있고, 지존파나 막가파 같은 반사회적 범죄가 뒤를 잇는다. 그러다 보니 사
람들은 신문보기가 겁이 나고,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인간적인 따뜻한
기사에 굶주려 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란 책이 한 때 베
스트셀러를 기록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글은 내가 자라오면서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던 혹은 마음이 아팠던
일들을 모아본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마음이 아픈 일보다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을 일이 더 많아지기를 기원하면서...
1. 말라리아
말라리아 환자의 급증으로 인해 국립보건원에 있는 말라리아 약이 다 떨
어졌다. 약을 가지러 국립의료원 약제과에 가서 "클로로퀸 주세요."라고 한
뒤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자 약사 한명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마태우스인 나를 드디어 알아보는구나.'
이런 우쭐감에 있는데, 드디어 그 약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
는 것이었다.
'사인 좀 해달라고 하겠지.'하고 볼펜을 꺼내려는데 그녀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가서 기다리세요!"
2. 사랑의 스튜디오
언젠가는 방송계를 평정하고 말겠다는 결심을 한 나는 그 첫걸음을 <사
랑의 스튜디오>라는 남녀 짝짓기 프로로 내딛게 되었다. 녹화에 대한 긴장
감 때문에 그날 점심을 거르기까지 한 나는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말만했
다 하면 방청객이 다 웃어줘서 '이제 떴다!'는 희열감 속에서 무대를 내려
왔다.
'이제 섭외가 물밀 듯이 들어오겠구나...'
녹화장 문을 막 빠져나가는데 방송 관계자 한분이 마구 뛰어와서는 날
불렀다.
"서민씨! 잠깐만요."
난 생각했다. '드디어 시작인가?'
내가 우아하게 고개를 돌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저, 기생충 약, 봄 가을로 꼭 두 번 먹어야 하나요?"
3. 음주운전과 부침개
난 술을 한잔만 마셔도 운전을 안 하는 철칙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끔
겪게 되는 음주운전 단속에 늘 자신감을 갖고 임한다. 어느날 밤, 난 음주
단속을 하는 경찰관을 만났다.
"후 하고 불어보시겠습니까?"
난 부는 대신 당황해서 손을 저었다.
"저, 정말로 술 안 마셨는데요."
경찰은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부세요."
할 수 없이 난 경찰의 얼굴에 대고 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경찰이 얼굴
을 잔뜩 찌푸리더니 황망히 한마디를 던졌다.
"가, 가세요."
난 미안했다. 운전하기 바로 전 집에서 만들어 준 김치 부침개를 4개나
먹은 상태였기 때문에.
4. 행위예술
내게는 몹시도 무던한 친구가 있다. 어느날 그 친구 집에 가서 논 적이
있었다. 맥주를 마시다가 술이 떨어졌다. 친구가 가게에 간 사이 오줌이 마
려워 변소에 갔더니 불이 안 들어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깜깜한 와중에
도 그런대로 조준을 잘 해서 소변을 보고 나오는데 변소 문앞에 프래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들어갈 때 무심코 이게 뭔가 하고 들어갔던 기억이 뇌
리를 스쳤다.
'아! 이것이 바로 행위예술이구나!'
예술이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 생활 주변을 대상으로
한 것일수록 더 대중성을 가질 수 있다.
5. 재수강
대학에 막 들어오고 나서 OMR 카드에다 수강 신청을 했다. 교과목 번
호를 잘 표기하고 나니깐 오른쪽 칸에 '재수 표시'라고 씌여 있었다. 여기
서 재수라는 것은 전학기에 그 과목에서 F를 맞아 그 과목을 다시 수강할
경우를 말하는데, 재수강을 하면 B+ 이상이 안 나오게 되어있던지 하여튼
그랬다.
물론 나도 그 당시에는 '재수표시'가 무얼 뜻하는지 몰랐다. 그런데 어떤
학생이 갑자기 손을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 저 삼수했는데요."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오는 질문이었다.
6. edge ball
한국과 북한이 세계 탁구선수권대회 준결승에서 만났다. 한국의 에이스
라는 유지혜가 어이없이 첫판을 내줘 두 번째 판은 꼭 이겨야 하는 경기였
다. 한국은 키가 훤칠한 김무교 선수가 나섰고, 북한 선수는 이름을 잘 모
르겠으니 알파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접전이 계속되었다. 11대 11부터 17대 17까지 계속되는 숨막히는 경기였
다. 김무교가 친 볼이 궤적을 크게 그리더니만 탁구대 모서리에 맞고 튕겨
나갔다. 탁구에서는 이런 것은 '에쥐 볼(edge ball)' 이라고 부르며 득점이
인정되는데, 이럴 때 공격한 선수는 미안하다고 손이라도 들어주는 것이
예의다. 그런데 이것을 심판이 못 본 것이다.
김무교 선수는 항의를 함과 동시에 북한의 알파라는 선수에게 물었다.
"에쥐잖아?"
만일 상대방 선수가 사실을 인정하면 판정은 번복된다. 그런데 알파는
이렇게 말했다.
"뒤로 돌아 있어서 못 봤다."
TV에서는 느린 그림으로 몇번을 다시 보여주었는데, 거기서는 분명히
알파의 눈이 공에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에쥐볼이 되는 것을 보고 있
었다. 아나운서가 말했다.
"예, 분명히 공을 보고 있었는데요."
스포츠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승리를 위해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최
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옳지
못한 권모술수가 스포츠에서는 없다. 하필이면 우리 동포인 북한의 어린
선수가 눈앞의 승리를 위해 거짓말을 하다니...
결국 우리는 북한에게 3-0으로 완패했지만 내가 슬펐던 것은 우리가 져
서가 아니라 승리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북한 선수의 얼굴 때문이었다.
7. K가 묵음?
난생 처음 외국에 나갈 일이 생겨 여권과엘 갔다.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앞에 있는 사람과 여직원이 가벼운 실랑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대로 해주세요."
"이대로는 못합니다."
진상을 알아보니 내 앞 남자-나이는 나 정도 되었을까?-가 여권에 기재
할 영어 이름을 'Kseng Ze-Wkol'이라고 써낸 것이다.
남자의 이름은 송지철이니 'Song Ji-Cheol'정도로 써야 되는 것이니 여
직원으로선 황당할 수밖에.
"맨 앞에 K는 왜 썼어요?"
그러니깐 묵음이란다. 뒤에 있는 W도 묵음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남자는 자신이 영문과를 나왔으니 더 잘 알고 해달라는대로 해주지 당신이
뭔데 꼬투리를 잡느냐고 했다. 황당한 여직원이 물었다.
"어느 대학 영문과 나왔어요?"
남자는 S대를 나왔다고 했다.
우리는 한 개인이기에 앞서 자신이 속한, 혹은 속했던 집단의 대표다. 그
사람의 행동 하나에서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을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
여직원을 비롯해서 거기 있던 다른 사람들이 S대를 얼마나 우습게 볼 것
인가.
8. 스파르가눔(sparganum)
뱀의 껍질을 벗겨보면 하얀 실같은 것이 나온다. 성냥으로 끄집어 내 물
에 넣어 두면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면서 운동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
생충 스파르가눔이다.
이것을 먹으면 피부로 가서 종괴(mass; 불룩 튀어나온 것을 의미함)를
만들며, 충체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종괴도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 주로
피부 조직으로 가지만 때에 따라서는 뇌를 침범, 간질 발작 등을 일으키기
도 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뱀을 날로 먹는 것을 좋아한다. 정력에 좋다
면 무엇이든지 먹는 탓에 스파르가눔으로 인한 환자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다. 이 스파르가눔이란 기생충이 피부 중에서 흔히 침범하는 곳이 바로
남자들의 고환이다.
그래서 뱀을 먹고 스파르가눔 충체가 고환으로 가면 고환에 종기가 생긴
다. 고환이 커지니 '역시 뱀 먹은 효과가 있구나.' 하고 좋아하기 마련인데,
결국에는 고환을 잘라내야 한다. 변강쇠 꿈꾸다 내시가 되는 것이다.
과거 공수부대의 생존훈련(산속에 떨어뜨려 놓고 살아서 기지로 돌아오
게 하는 훈련)때 주로 먹는 게 뱀이었으므로 군인들 중에 많은 환자가 있
었다. 뱀을 날로 먹지 않아도 운이 없으면 뱀이 목욕한(?) 오염된 약수를
먹고도 감염될 수 있다.
의대본과 2학년 때 우리는 스파르가눔 실습을 한다. 뱀을 죽이기 위해
가위로 머리를 자른 후 껍질을 벗기고 학생들로 하여금 성냥 등을 이용하
여 충체를 꺼내게 한다. 뱀은 머리만 남아도 입을 벌리고 움직일 수 있으
므로 짓궂은 학생들은 뱀 머리끼리 싸움을 붙이는 경우도 있다.
하여튼, 뱀 한 마리당 적게는 5마리에서 많게는 수십마리까지 스파르가
눔 충체를 발견할 수 있다.
기생충학 교실에 있는 동안 곰 쓸개를 먹고, 혹은 사슴피를 먹고 몸에
열과 발진이 생겨 찾아오는 환자를 꽤 보았다. 남자가 대부분이지만 여자
도 상당히 있다는데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초등학교 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부른 기억이 있는데, 이젠
'우리의 소원은 정력'으로 바꾸어 불러야 하지 않을까.
정력,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9. 모기
국내에서 멸종된 것으로 생각했던 말라리아(일명 학질)가 극적으로 부활
해 매년 수백명의 환자를 양산하고 있으며, 그 숫자도 93년 2-3명, 94년 수
십명, 95년 100여명, 96년 300여명에 달하게 되었다. 97년 통계는 아직 나
오지 않았지만 대략 1,000명을 넘어서는 등 급격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
으며 지역적으로도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의 보건을 걱정하는 국립보건원에서는 당연히 말라리아 연구에 열심
이다. 그 중 하나가 지역에 따라 모기를 채집해서 모기 내에서 말라리아
원인균을 검출해내고자 하는 일이다.
모기 중에서도 아논펠레스 시넨시스(Anopheles sinensis)종만이 말라리
아 전파를 담당하고, 그 중에서도 사람의 피를 빠는 모기가 중요한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사람을 반바지 차림에 웃통을 벗긴 채
누워 있게 한 뒤 피를 빨기 위해 착륙하는 모기만을 튜브로 빨아서 잡는
것이었다.
누가 희생양이 될 것인가를 정하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평소
에 별로 하는 일도 없고, 밤새 모기를 잡느니 차라리 웃통 벗고 누워 있겠
다는 내가 마루타가 된 것이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깐 이건 정말 인간 이
하의 짓이었다.
"모기 앉았다!"
황급히 소리를 지를 때면 이미 모기가 나에게 침을 박은 후 날아가버리
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결국 온몸이 울퉁불퉁해지고 나중에는 아예 감
각이 없어져 모기가 물어도 가렵지 않았다.
그리고 9월 초의 깜깜한 밤에 플래시를 들고 반바지에다 웃통을 벗은 채
돗자리에 누워 있으니 왔다갔다하는 주민들이 나를 거의 정신병자로 보는
것이었다. 더욱 무서운 일은 지나가던 어떤 아저씨가 나를 물끄러미 보다
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젖이 이쁘네."
난 내가 잘못 들은줄 알고 다시 반문했다.
"네?"
그 아저씨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젖이 참 이뻐." 하는 것이 아닌가.
난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이 땅에는 아직도 많은 호모가 있구나. 방심하
면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하는 수가 있겠구나...
참,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일하고 있는 우리의 국립보건원에서는
이런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 그러니 우리 국민
들도 국립보건원을 좀더 따뜻한 눈으로 봐 주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10. 핸드폰
5월의 어느 일요일, 직장에서 열린 테니스 대회에 나가기 위해 하얀 속
살을 드러낸 반바지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기에는
반바지 차림이 너무 튈 것 같고, 또한 시간도 약간 늦었고 해서 택시를 잡
아탔다.
기사 아저씨와 이런저런 얘기-나는 택시가 손님이 가자는 길로 안 가고
합승이 잘 되는 밀리는 길로 돌아간다는 데 불만을 토했고, 그 아저씬 "나
쁜 놈들!"이라며 함께 흥분했다-를 나누다 보니 택시는 어느덧 직장에 도
착했다.
요금을 지불하고 나서 손을 흔들며 택시를 보내려는 찰나 아무 생각없이
왼쪽 주머니를 만졌더니 세상에, 휴대폰이 없는 것이다. 필경 택시 앞좌석
에 있겠지 하는 생각에 큰소리로 택시를 불렀다. 내 소리를 못들었는지 택
시는 스르르 떠났고, 나는 인간이 그렇게 빨리 뛸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빨
리 달렸다.
힘에 부치자 할 수 없이 신발 한짝을 벗어 힘껏 던졌지만, 던지기에는
워낙 소질이 없는 탓인지 그것마저 빗나가고 말았다. 난 마침 내 옆을 지
나는 택시를 무조건 불러세웠다.
"아저씨, 앞 택시 좀 잡아 주세요. 핸드폰이 거기있어요."
날 태운 택시는 굉음을 내며 달렸지만 그만 빨간 신호에 걸려 그 택시를
놓쳐버렸다. 그러자 그 기사님이 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한 번 걸어보라고
했기에 난 직장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그 기사 아
저씨가 전화를 받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 아저씨가 이렇게 말하
는 것이었다.
"뭐, 내가 이 휴대폰 가지고 팔자를 고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 휴대폰
아주 좋은 거더군요. 이 정도면 청계천에 갖다 팔면 30만원은 받는데, 돌려
받으려면 그 정도는 주셔야지 않겠어요?"
나는 빌었다.
"10만원에 안 될까요?"
밀고 당기다 결국 20만원에 합의를 보았다. 일단 합의를 보았는데도 그
아저씨는 맘이 변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에이, 5만원만 더 쓰시죠?"
내 애처로운 목소리가 통했는지 다행히 그대로 20만원에 합의를 봐 주었
다. 지금은 돈이 없으니 다음날 계좌로 부치겠다고 하자 아저씨는 신용카
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아서라도 당장 내놓으라고 했다. 하긴, 내가 그 아저
씨라도 다음날 보낸다는 걸 안 믿었을 것이다.
"알았다."고 하자 순식간에 택시가 왔고, 그 아저씨는 내 고사리같은 손
을 이끌고 현금지급기 앞으로 가 20만원을 건네받았다. 손에 침을 묻히며
돈세는 모습이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을 연상케 했다.
사실, 돈을 주기 전 경찰에 신고할까 하는 마음이 왜 없었겠냐만 그러다
가 보복 당해 오랜 기간 고생 했다는 얘기를 들은 게 있어 눈 딱 감고 돈
을 줘버렸다.
돈을 건네자 다소 맥이 빠지긴 했지만 최소한 30만원에서 10만원을 깎은
내가 무척 대견스러웠다. 사실 나는 뭘 살 때 한 번도 깎아 본 적이 없었
고, 그럴 만한 주변머리가 없었다.
남들에게 얘기했더니 다들 "바보!"라고 혀를 끌끌 찼고, 내 여자친구마저
"나 오빠랑 결혼 안 해!"라면서 "어쩜 그리 이용만 당하고 사느냐!"고 소리
를 질렀다.
택시를 탈 때마다 기사 아저씨께 물어보았다. 모두들 휴대폰을 되돌려준
경험이 있었는데, 최고 많이 받은 게 5만원이었고, 1만원을 받은 경우도 있
었다. 난 억세게 재수없는 기사 아저씨를 만났다는 생각에 울화통이 터졌
다.
내가 좀 모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같은 사람도 있고, 나같이 모자란
사람을 등쳐먹는 그런 기사도 있으니 우리 사회가 유지되는 게 아닐까.
11. 평소에 잘 하자
프로야구팀 OB 베어스의 차세대 에이스로 주목받는 선수가 바로 박명환
선수다. 충암고를 졸업하고 3억2천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액수에
입단, 약관의 나이에 마운드가 두텁기로 이름난 OB의 선발투수에 끼는 영
광을 안았고, 그를 전폭적으로 믿어주는 김인식 감독의 배려 하에 착실히
성장하고 있다.
그런 박명환이 어느 날 선발등판했다. 볼은 좋았지만 4점인가 실점을 하
고 그만 7회에 강판을 하게 되었다. 박명환으로서는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잘 안 잡아 준 것이 불만이었다.
박명환은 마운드를 내려오면서 심판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심판 좀 잘 보세요."
그런데 심판은 박명환의 퇴장을 선언했다. 그다지 심한 말은 아니었지만,
심판은 다르게 들었단다.
"X팔, 좀 잘 보세요."
심판이라는 말의 발음이나 입모양이나 꼭 'X팔'과 비슷해 오해의 소지가
있긴 했고, 박명환도 그런 말이 아니었다고 다음날 백배사죄했지만, 나는
박명환이 결백하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뭐 그런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
다.
요는 평소에 잘 하자 하는 것이다. 평소 심판에게 수시로 미소를 짓든지
"힘드시지요? 따뜻한 사탕 하나 드릴까요." 등의 정겨운 말 한마디가 있었
다면, 실제로 욕을 했더라도 심판이 잘못 들었겠지 하고 너그럽게 생각했
을 것이라는 것이다.
심판은 정말 3D 업종의 하나다. 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보호
장구를 착용하고 가장 힘들다는 기마자세로 3시간, 4시간을 버틴다. 깜빡
볼 판정을 잘못 했을 경우 비난이 쏟아진다.
타자나 포수가 공에 맞고 쓰러지면 관중들은 걱정을 해 주지만, 심판이
파울볼에 맞고 쓰러지면 웃음을 짓고, 박수를 친다.
한국 프로야구를 지키는 심판들의 노고에 갈채를 보내며...
12. 술의 힘은 어디까지?
난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이다. 단점이라면 술을 빨리 마신다는 것, 그리고
항상 취할 때까지 마신다는 것, 그러다 보니 중간에 맛이 가 곯아떨어지거
나 귀소본능에 의해 집으로 가는 일도 있는 것 등이다.
집안에 운전면허 소지자가 나 혼자였던 탓에 난 대학 때 차를 몰고 학교
에 다녔다. 그러다보니 학생 때 별로 술을 마신 기억이 없다. 술자리에 참
석하더라도 난 차가 있다는 이유로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몸이 싱싱하다. 자랑은 아니지만 현재 일주일에 다섯 번씩 술을 마
시고 있는데, 앞으로 한 10년은 현 추세로 마셔도 끄떡없을 듯 싶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술을 마셨다. 내가 좋아하는 삼겹살에 참나무통 맑
은 소주를 들이키니 기분이 좋았다. 1차를 마치고 현관에 흩어져 있는 신
발 중에서 내 구두를 찾아 신고 밖으로 나갔다. 조금 가다보니 느낌이 이
상했다. 아무래도 내 신발이 아닌 듯 싶었다.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리자 누
가 물었다.
"왜? 신발 바뀌었니?"
나는 긴가민가 해서 다시 그 삼겹살집으로 뛰어들어갔다. 현관을 훑어보
니 내 신발은 없는 듯했고, 내가 신은 것이 맞는 것 같아 늘 하던대로 2차
를 갔고, 늘상 되풀이되는 일이지만 정신을 잃은 채 귀소본능에 의해 택시
에 실려 집으로 왔다.
다음날 아침, 출근을 하려던 나는 깜짝 놀랐다. 웬걸, 처음 보는 신발이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신발이 맞기는커녕 너무 작아
들어가지도 않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신발을 신고 2차에서 그렇게 요란하
게 춤을 추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발사이즈는 265mm. 그 신발은 245mm였다. 술의 힘은 이렇듯 놀라운
것이다.
13. 거울아, 거울아...
내가 어렸던 시절에는 거울이란 것이 그리 흔치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몰랐고, 다른 애들하고 놀면서 혹은
만화를 보면서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으리라고만 상상하곤 했다.
그러던 중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어느 날인가 학교에 커다란
전신거울이 하나 설치됐다. 난 내 모습을 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부끄러우니 다들 하교한 뒤 혼자 남아 거울을 보았다. 거울을 본 순간 난
너무 놀랐다.
'내가 이렇게 못생기다니...'
난 깜짝 놀라 뒤를 보았다. 혹시라도 내가 아니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
었는데,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실망스러웠다. 눈이 특징적으로 작았으며
올챙이 모양이었다.
바보스러워 보이는 내 얼굴 때문에 내가 겪어야 할 고통은 생각보다 컸
던 것 같다. 중학교 교복을 입고 나서는 여학생이 내 얼굴을 볼까봐 모자
를 푹 눌러쓰고 다녔으며, 고1때는 "널 보고 나서 그래도 내가 꼴등은 안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애들 중 너처럼 이상하게 생긴 애는 처음 봤어!"
"넌 어떻게 그렇게 생겼니?"
내 별명은 와이셔츠 단추구멍이었다. 중1때는 날 놀리느라 '왕눈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사진까지 기피하게 되어 고2때 간 수학여행에서 난
거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정말 무지 가슴 아픈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대학에 갔다고 해서 외모에 대한 내 콤플렉스는 별반 나아진 게 없었다.
흔히들 말하기를 의대만 가면 여자들이 줄을 선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 전
혀 사실이 아니다. 울적한 대학시절을 2년이나 보냈다.
여자 앞에만 서면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고, 말 또한 거의 못하고
어색한 침묵만 계속되었으니 어느 누가 나를 좋아하겠는가.
그러던 중 폭우와 함께 번개가 치던 어느날인가 미팅을 하는데 그날 따
라 말문이 뻥 트이는 것이었다. 평소 유머만을 생각하고, 벽을 보면서 말하
는 피나는 훈련을 한 것이 드디어 효과를 본 것이다. 그 이후부터 난 여자
친구 걱정을 별로 해본 적이 없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든
다. 여자는 남자의 외모를 그다지 따지지 않는다. 그런데 남자들은 여자가
이쁠 것만 요구한다. 그 대신 여자는 남자의 조건, 즉 유머라든가 하얀 속
살, 사회적 지위 같은 것을 따져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대부분 남자들이 살면서 노력하면 가질 수 있는 것
들이다. 그런 면에서 여성들의 판단은 합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남자는 여자가 이쁘지 않을 경우 그 여자가 가진 다른 많은
장점들은 아예 무시하는 것일까.
그 여자도 물론 이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않은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남자가 선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말이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별로 없다. 이것 또한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면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
을까.
14. 그래도, 여자로 태어난다면?
남자 대학생들에게 물었다.
"여자로 태어난다면 가장 하고 싶은 것은?"
40%에 달하는, 가장 많은 대답이 바로 '여탕에 가겠다'라는 것이었다. 물
론 질문 자체도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들이 겨우 그 정도의
대답밖에 못한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물었을 때 나오는 대답이 바로 '여탕 가
는 것'이다. 그래도 대학생 쯤 되었으면 "퀴리부인이 되겠다." "젖소부인이
되겠다." "여성 파일럿이 되겠다"든지, 하여튼 뭔가 진취적이고 여성만의
분야에 도전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요즘 젊은 여성들은 다 집에서 샤워를 매일 하기 때문에, 막상 여탕에
가보았자 아주머니나 할머니들께서 때를 밀고 있지 정작 보고 싶은 것은
못보기 십상이다.
설사 원하는 연령층의 여인이 머리를 감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좋을 것
도 없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치마를 입은 여성이 이
쁜 이유는 치마를 입었기 때문이다. 목욕탕에 대한 환상을 깨자.
15. 쌀뜬 돼지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 다들 이렇게 말한다.
"돼지고기는 바싹 구워 먹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돼지고기를 먹을 때 덜 익어 빨간 것도 넙죽넙죽 잘 먹는
다. 그래서 남들이 막 먹기 시작할 때 나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이제 2차
가지!"라고 말할 수가 있다. 도대체 왜 생선회는 날것으로 먹으면서 돼지고
기는 꼭 익혀 먹으라고 하는가.
그것은 과거 제주도 똥돼지에 만연했던 '유구낭미충'이라는 기생충 때문
이다. 이 기생충은 돼지의 근육에 살며 사람이 이것을 먹었을 때 장에 머
리를 박고 뱀처럼 길게 자라기 시작한다. 다 자라면 길이가 몇m에 달하는
끔찍한 기생충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속칭 '갈고리 촌충'이다.
갈고리 촌충은 성충이 되면 길이가 수m가 되는데, 꼬리 부분이 계속 떨
어져서 대변으로 배출된다. 크기에 비해서는 별반 자각 증상이 없지만 우
연히 자신의 변에서 몇cm 정도의 하얀 조각이 꿈틀대는 것을 발견, 보통
이 조각을 가지고 환자들은 병원에 오게 된다.
그러면 병원에서는 이 조각을 기생충학 교실로 보내게 되는데, 마침내
이 조각이 갈고리 촌충이라는 것을 알게 된 환자는 3차례에 걸쳐 충격을
받게 된다.
기생충은 이제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1차 충격을,
못 살고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의 병인 기생충이 어찌 나같은 인텔리에
게 왔는지에 대해 2차 충격을 받는다.
기생충학 교실에서는 환자의 충체를 빼내기 위해 디스토시드(일명 프라
지콴텔; 간디스토마에 쓰이는 약으로 이 약이 발명된 것은 인류에게 가장
큰 선물이라는 말을 누가 한 적이 있다)를 먹인 후 설사제를 먹인다. 다시
말해 약을 먹고 기생충을 죽인 후 설사, 즉 장을 뒤흔들어 빼내는 것인데
이때 환자는 3번째 충격을 받게 된다. 내몸에 이렇게 긴 기생충이 들어 있
었다니...
그리고는 며칠간 밥을 먹지 못한다. 환자들은 충체를 본 순간 다음과 같
이 얘기한다.
"어째 속이 꽉 찬 것 같더라구요."
"어쩐지 밥을 먹어도 계속 배가 고프더라구요."
특히 갈고리 촌충이 안 좋은 이유는 자칫하면 사람 몸 안에서 알 껍질을
깨고 나온 충체가 뇌로 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질 발작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간질이 기생충으로 인해 일
어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몇 년 전 제주도에서 '쌀뜬 돼지가 발견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 학
교 교수님들은 매우 흥분하셨다. 똥돼지가 사라지면서 갈고리촌충이 거의
멸종위기에 처해 이것을 연구하는 일이 매우 힘들었는데, 마침 쌀뜬 돼지
가 발견되다니...
돼지에 있는 것은 새끼고, 이것은 오직 사람 몸 안에서만 어른(성충)으로
자란다. 연구를 하려면 '어른'을 얻어야 한다.
어느날 기생충학 교실원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모였다. 그 당시 가장 유
명하던 파리크라상 제과점의 빵 속에 기생충의 새끼를 넣었다. 가임여성은
제외되었다. 모두들 빵을 먹었다. 선배 한분은 갈고리촌충 새끼를 씹어죽이
려고 빵을 수백번 씹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몇주후 대변을 보니 하얀 조각
이 나왔다.
"걸렸구나..."
다른 사람도 그랬지만 그 선배 역시 헛구역질과 식욕부진으로 많은 고생
을 했다고 한다. 물론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약을 써서 치료를 했지만...
다행히도 그 일은 내가 기생충학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일이다.
우리 기생충학자들은 연구를 위해 이렇듯 몸을 바쳐 가면서 열심히 일을
한다. 지금도 기생충학 교수님들의 연구실에는 밤늦도록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16. 보카 주니어스
얼마전 축구신동으로 일컬어지는 디에고 마라도나가 소속된 아르헨티나
축구팀이 한국을 찾았다. 팀이름이 보카 주니어스인 전통있는 명문팀으로
한국대표팀과 수준 높은 경기를 벌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마라도나는 전성기가 지난 나이임에도 간혹 번뜩이는 패스를 해 "역시!"
라는 찬사를 받았다. 다음날 애들끼리 모여 전날 있었던 축구 얘기를 하는
데, 한 친구가 매우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것이다.
"아니 아르헨티나가 우리 축구를 얼마나 우습게 보기에 주니어 팀을 내
보낸단 말이야!"
17. 카페에서
내 친구 중 고법민이라는 사람이 있다. 워낙 유머 감각이 출중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만 남을 겨우 웃길 수 있는 나같은 사람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
고 있는데, 세인들은 우리 둘의 관계를 천재인 모차르트와 그의 재주를 시
기하는 살리에르에 비유하기도 한다.
하여튼 고법민이 서클 후배들과 카페에 갔다. 커피를 시켰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커피가 담긴 컵이 너무도 예뻤다. 여자 후배 하나가 말했다.
"법민이 오빠, 나 이 컵 갖고 싶어요."
정의의 사도인 고법민이 거절할 리 없었다. 결국 고법민은 컵을 옷에 숨
겨가지고 어기적거리며 카페 문앞을 나섰는데, 갑자기 주인 아저씨가 부르
는 것이 아닌가.
"학생, 이리 와 봐!"
같이 있던 서클 후배들은 고법민만 남겨두고 모두 슬금슬금 도망을 갔
고, 고법민은 '걸렸구나'하는 생각에 쭈뼛쭈뼛 주인에게 다가갔다. 그랬더니
주인 아저씨가 하는 말.
"학생, 가방 갖고 가야지!"
18. 아픈 것이 죄
아는 PD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지러워 죽겠고, 조금만 움직여도 계속 토
한다고 했다. 응급실에 갔는데 잘 모르겠다고만 해서 나에게 연락을 했다
는 것이다.
우리는 어지럽다고 하면 흔히들 빈혈인가 하고 생각을 하는데, 물론 빈
혈이 있으면 어지러울 수 있지만 실제로 어지럼증의 원인 중 빈혈이 차지
하는 비율은 비교적 낮다. 가장 많은 원인이 귀에 있는 평형을 담당하는
기관의 이상인데, 얼마전 농구선수 서장훈이 이 부위의 염증으로 인해 거
의 경기에 나서지 못한 적이 있다.
하여튼 서울대병원에는 아는 사람도 많고, 그래도 가장 뛰어난 병원이라
는 생각에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오라고 했다.
딱 보니깐 정말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일단 의자에 눕힌 후 바퀴 달린 침
대를 찾았다. 그랬더니 침대가 없단다. 오후에 침대를 구해주겠다는 말만
듣고 난 간호사에게 갔다.
"저 아는 PD 분이 어지러워 서 있을 수 없다고 해서 그러는데요... 좀 봐
주실 수 있나요?"
그랬더니 그 간호사가 "하이참, 나."라면서 한심하다는 표정을 했다.
"아니, 이 병원이 아프다고 다 올 수 있는 병원인 줄 아세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아픈 것이 죄라고 다시금 부탁을 했다.
"그래도 이왕 왔으니 좀 봐주세요."
간호사가 도끼눈을 뜨고 말했다.
"막무가내로 와놓고선 날더러 어쩌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다른 병원으로 가라는 것이다. 다행히 후배 레지던트를 만나
침대 문제는 해결되었는데, 그 레지던트가 말하기를 귀 근처의 병은 이비
인후과 소속이라면서 연락을 했는데 오후 3시에나 시간이 난다고 했다.
그 당시 시각이 오전 10시도 채 안 되었지만, 역시 아픈 것이 죄라고 환
자는 3시까지 기다리기로 했고, 나는 일단 직장에 출근을 했다.
한두 시간도 아니고 다섯 시간을 기다리게 하는 것도 황당한 노릇이었지
만, 레지던트가 4년이고 한 연차당 5명씩 뽑으니 다 합하면 20명이나 되는
데, 그 많은 레지던트 중 꼭 그 사람만이 응급실을 맡아야 한다는 사실 또
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전화를 해 보니깐 그 레지던트가 나타난 것은 오후 5시 반이 넘
어서였고, 특별한 설명도 해주지 않고 쓱 가버렸다는 것이다.
난 환자 보호자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야 했다. 의대를 나왔다는 나도 이
런 수모를 겪는데, 아무 힘도 없는 환자들은 어떨까. 정말 아픈 것이 죄다.
19. 나야 나
<마태우스> 출간과 관련해 방송출연을 조금 한 탓에 나를 알아보는 사
람들이 가끔 있다. 게다가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준 적도-무지
쑥스러웠다-있었다. 사실이다!
방송을 그만두고 나서 다시 예전의 평범한 나로 돌아간지 8개월이 지났
다. 이젠 삐삐 오는 횟수도 많이 줄어들었고, 길거리에 나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녀도 예전같이 "야, 쟤, 쟤 너모르니?" "혹시, 삐삐소설가 아니세
요?" "TV에서 봤어요."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남이 나를 알아봐 준다는 점에 조금은 우쭐한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지
만 난 성격이 워낙 내성적이어서 마냥 쑥스럽기만 했고, 지금의 생활이 정
말 좋기만 하다. 나같은 무명도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는데, 유명 연예인은
정말 길거리 다니기 피곤할 것이다.
부산에 있는 디스코텍에 한 번 끌려간 적이 있다. 거기서는 남자끼리 온
사람과 여자끼리 온 사람에게 부킹(합석시켜 주는 일)을 잘 될 때까지 시
켜주는 것이다.
여자애들이 웨이터 손에 이끌려 왔다가 맘에 안 드니깐 그냥 가고, 또
오고...를 반복했는데, 여자애들이 올 때마다 같이 있던 내 친구놈이 이러는
것 아닌가!"
"이 사람 몰라요? 연예인인데..."
그러면 여자애가 "어머, 무슨 프로 나가시는데요?"라고 하고, 난 두손을
내저으며 아니라는 말을 한다. 다행히 알아봐주는 여자가 몇 있기는 했지
만, 대부분은 무슨 알지도 못하는 애가 연예인을 사칭하는가 하는 표정을
짓곤 했다.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소개될 때 옆에 있던 내 친구들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야, 너 애 모르니? 삐삐소설 쓰는 사람인데, TV에도 자주 나와!"
그런 말은 참 멀미가 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냥 국립보건원에서 공
중보건의로 있고, 기생충학을 전공한다고 하면 되고, 상대가 나를 알아보면
알아보는 것이고 모르면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어느 날 술을 마시러 지하철을 타고 친구집 근처에 갔다. 난 술을 마실
때면 늘 비장한 각오로 임한다. 지갑에서 술값과 차비만 빼놓고, 삐삐, 전
자수첩, 핸드폰까지 몽땅 놓고 갈 뿐 아니라 제일 남루한 옷으로 갈아입고
간다. 한두번 잃어버린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하철 역에서 나오는데 그만 불심검문에 걸리고 말았다. 세상에, 나처럼
온순하게 생긴 사람을!
신분증을 제시하라는데,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없다고 했더
니 잡아가려고 하기에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다가 잘 안 통해서 이렇게 말했
다.
"나, 몰라요? 테레비 나오는 사람인데..."
경찰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만 다른 경찰 두명
을 불렀다.
"야, 너네 이 사람 아니? 테레비 나온데."
"글쎄요.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평소에는 누가 나를 알아보면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하거나, "쌍둥이
형 얘기군요."하고 자리를 피하던 나였지만 그 당시는 참 야속했다. 세 명
중 어떻게 한 명도 날 모른단 말인가.
"어느 프로 나가는데요?"
"저, 이소라의 프로포즈하고... 아침 프로 몇 개..."
이소라의 프로포즈 나간다고 하니깐 대번에 "아, 그럼 가수세요?"라고
묻는다.
"가수가 아니라 저, 소설 쓰는 사람인데..."
그랬더니 조금 상의하다가 보내 주었다. 길을 가면서 난 생각했다.
'조금 더 유명해지고 말아야지...'
20. 이름을 잘 짓자!
지금이야 이름 짓는 것이 많이 세련되어졌지만, 50대가 지나신 분들의
이름을 듣노라면 재미있을 때가 가끔 있다. 점례, 끝순이, 말자... 또 딸의
이름에 아들을 향한 희망을 담은 이름이 특히 많다.
내가 아는 어느 집의 경우 처음에 딸을 낳으셨단다. 귀하게 되라고 '귀
진'이라 지었다. 둘째는 또 딸. 그래서 '또진'. 셋째도 그만 딸을 낳았다. 마
지막이 되라고 지은 것이 '말진'. 공교롭게도 딸 둘을 연속으로 더 낳으셨
다. 각각 '사진'과 '오진'. 다행히 딸 하나를 더 낳은 뒤 아들 셋을 연속으로
낳아 한을 푸셨다.
우리 또래의 어떤 여자애 이름은 '소원'이었는데, 혹시나 하고 물어봤더
니 딸 여섯 중의 막내고, 그 밑에 남동생이 하나 있단다. 아들을 바라는 소
원이 이루어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름은 중요하다.
한참 학교에 다닐 때 이름이 이상해 놀림을 받는다면 공부에 전념하기
힘들어진다. 지금 보면 성공한 사람중 이름이 희한한 사람이 별로 없는 이
유가 바로 그것이다.
내가 아는 친구 중 '장진석'이라는 애가 있었다. 얼핏 봐서는 별반 이상
할 것이 없지만 짓궂은 애들이 받침을 빼고 읽었다. 아주 착한 애였는데,
나마저도 그런식으로 놀려대 정신적 고통을 준 것에 대해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지아니 베르사체라는 유명한 디자이너도 결국동성애자의 흉기에 찔려
'사체'로 발견되었다. 친구 중에 '삼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삼수까지는 안
갔지만 재수의 쓴맛을 봐야 했다. 박종팔이라는 권투선수는 오벨 메이야스
의 펀치를 맞고 이름처럼 '팔회에 종쳤다.'
이와 반대로 이름은 잘 지었는데 동명이인의 실수로 인해 나쁜 이름이
되어 버린 경우도 있다. 기생충학 교실에 있는 박정희 씨. 사실 정희야 여
자 이름이고 괜찮은 이름인데, 웬지 남자 이름처럼 느껴지고 별명 또한 '각
하'다. 5공 때의 영부인 이순자 씨 때문에 이 땅에 있는 많은 '순자'들의 마
음 고생이 심했었다.
물론, 이름이 나빠도 본인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이름 때문에 겪은 마음 고생은 큰 상처로 남지 않을까. 우리 모두 아름다
운, 그리고 세련된 이름을 짓도록 노력하자.
서민, 얼마나 다정다감하고 서민적인가.
21. 습관인가 버릇인가
과에서 베어스타운에 놀러 갔다. 재미있게 놀고 돌아오는데, 길도 잘못
든데다 토요일 오후라서 차가 살인적으로 밀렸다. 판교-구리 고속도로로
진입해 차들에 둘러싸여 대책없이 서 있는데, 내 차에 타고 있던 이모양
(26세. 성격이 활달해 우리 과의 마스코트로 군림하고 있다)의 얼굴이 하얗
게 되었다. 왜 그러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 내릴래. 더 이상 못 참겠어."
나는 조금만 더 가면 이곳을 빠져나갈테니 참으라고 말했더니 그녀는
"싫어. 내릴래."라고 고개를 젓는다.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 게 꼭 무슨
일을 칠 것 같아 나는 차를 갓길에 댔다.
그녀는 고속도로 밑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젊은 여성으로서는 생각하
기조차 싫은 추억일 것이지만, 잠시 후 활짝 웃는 얼굴로 그녀는 다시 나
타났다. 고속도로를 빠져나가고 나서도 계속 밀리고 있는데, 내 옆좌석에
탄 조신형 씨(37세. 공수부대 출신으로 성격이 시원시원한데다 공으로 하
는 운동에 능통하다)도 심각한 표정으로 더 이상 못 참겠다는 것이 아닌
가. 뒤에 타고 있던 이형우(32세. 나보다 20일이나 늦게 태어났지만 꼬박꼬
박 반말을 한다)의 얼굴 역시 하얗게 되었다.
나는 차를 근처 원자력 병원에 주차시켰다. 일행은 앞다투어 차에서 내
렸다. 베어스타운을 떠난 지 6시간만의 일이었다. 나는 차에서 여유있는 모
습으로 라디오를 들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날 존경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 비결을 물었다.
난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참는 거지 뭐."
내가 하루 두 번 이상 소변을 안 보는 것은 기실 어린 시절 무지하게 소
변을 참은 데서 기인한다. 내가 소변을 보면 짓궂은 남자애들이 쳐다보곤
했는데, 내성적인 내가 계속 감추니 다들 더 보고싶어했고, 그럴수록 더 감
추니 "서민은 여자다!"라든지 "서민은 번데기다!"라는 악성 루머가 떠돌기
도 했다.
이런 현실에서 내가 어찌 맘 편히 소변을 볼 수 있었겠는가. 중고교 시
절 및 대학 시절, 대부분의 학생들이 수업 끝나는 종이 치는 것과 동시에
화장실로 달려갈 때 나는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책을 보거나 다른 생각을
했다. 그 결과 나는 장시간 여행을 갈 때도 소변 때문에 괴로웠던 기억은
없다.
의학을 조금 배우고 나니 내가 했던 행동이 얼마나 멍청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소변을 참게 되면 방광에서 소변이 역류하고, 대장균 같은 것이 요
관을 타고 신장으로 들어가 신장에 염증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면 잘 낫지
도 않을뿐더러, 한 번 역류하게 되면 쉽사리 교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실습을 돌다가 시간별로 X-레이를 찍어 보았더니, 다행히도 별 이상은
없어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지금이라도 소변을 오래 참는다고 자랑하는 사
람이 있으면 달려가서 한 대 쥐어박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참을 걸 참아라."
22. 에스더, 고마워요!
1996년 가을, 내가 한참 신문에 나고 했을 때 신문을 보고 많은 삐삐가
쇄도했다. 나는 가능하면 많은 이에게 응답을 해주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에스더라는 여고생이었다. 내가 응답해 준 것에 대해 너무나
기뻐해 줘 나를 쑥스럽게 했고, 삐삐 인사말에 남기는 멘트도 재치가 넘쳤
다.
어느날은 "어머? 마태우스 아저씨예요?"라고 시작되는 멘트를 남기기도
했고, 한번은 내 삐삐소설을 녹음한 뒤 자신의 인사말에 녹음시키고는 "이
렇게 시작되어도 에스더의 삐삐입니다.", 어떤 때는 "이 번호는 없는 국번
이거나 결번이오니..."로 시작되는 한국통신의 메시지를 그대로 녹음해 머
리가 둔한 나로 하여금 여러번 다시 걸게 만들었다.
성격도 밝고 명랑해 친구도 많았고 유행하는 재미있는 얘기들을 내게 해
주었다. 청주에서 날 보려고 먼길을 찾아와 주기도 했고, 생일 때와 날 알
게 된지 1주년이 되었을 때, 그리고 수시로 내게 과분한 선물과 편지들을
보내 주었다. 내가 인기가 없어져 버린 요즘까지도 나와 연락을 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다.
<소설 마태우스>의 경우 한때나마 교보와 종로서적, 영풍문고의 진열대
에 전시되었던 적이 있고, 신촌문고에서는 '베스트셀러'로 분류되기도 했지
만 지금은 웬만한 책방에서도 '마태우스 주세요' 하면 고개를 갸우뚱한다.
약 1만권 정도 팔렸으니 나름대로 망하지는 않았지만, 엊그제 신촌문고에
서 컴퓨터로 두드려 보았더니 '마태복음'만 있고 '마태우스'는 없기에 약간
슬펐던 적이 있었다.
그날 집에 있는데 내게 호출이 왔다. 에스더였다.
"아저씨, 있잖아요. 오늘 어떤 책방에 갔는데 아저씨 책이 베스트셀러 칸
에 있는 것 있죠? 너무 기뻐서 혹시 누가 사가나 하고 기다렸는데, 30분쯤
지나니 한명이 와서 아저씨 책을 집어들더니 좀 보다가 샀지 뭐예요. 너무
좋았어요."
가슴이 뭉클했다. 내가 자기에게 해준 것이 얼마나 된다고, 내게 그런 엄
청난 호의를 베푸는가. 내가 해준거야 하루에 삐삐 한두번 쳐주는 것 정도
인데. 요즘 스타가 얼마나 많은가. HOT, 지누션, 구피, 안재욱 등등... 그런
스타들을 제치고 내게 관심을 쏟아 주니 정말 고맙기도 하고, 열심히 살아
야 할 책임을 느낀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말하고 싶다.
"에스더, 고마워요."
23. 휴게소 사건
의대생의 경우, 9주간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나면 군대에서 원하지 않는
사람은 공중보건의가 되어 보건소나 국립보건원 같은 특수기관에 근무를
하게 된다. 물론 나도 군대에서 하등 필요없는 인간인지라 당연히 공중보
건의(줄임말: 공보의)가 되었다.
공보의가 되고 나서 경기도 여주에 모여 1주일간 공보의 교육을 받았다.
교육 후 약 400명 정도의 인원이라 서울에 가기 위해 관광버스 몇대를 대
절했는데, 대부분 차를 가지고 온 탓에 관광버스는 거의 텅텅 빈채로 서울
로 향했다. 중간에 휴게소에 내리면서 기사 아저씨가 "15분 있다가 떠납니
다."라고 말을 한 채 소변을 보러 가셨다.
20분쯤 지나니 기사아저씨가 버스에 탔다. 그리고 "안 온 사람 있어요?"
하고 물으셨는데, 마침 우리 일행 중 변비로 무척 고생하는 애가 있었다.
당연히 눈에 띄지 않았다.
"한명 안 왔는데요."
5분쯤 더 기다리니 그 친구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어색한 웃음을 지
으며 버스에 탔다. 대충 보니 다 온 것 같고 해서 곧 버스가 떠났고, 나는
다시 공보의 동료들과 수다를 떨었다. 서울에 들어가기 직전 기사아저씨가
버스를 세웠다. 그러더니 어떻게 연락됐는지는 몰라도 휴게소에서 못탄 공
보의가 3명이 있는데, 짐이 이 버스 안에 있으니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20분쯤 기다리니 다른 버스에서 공보의 세 명이 내려 이쪽으로 왔다. 우
리는 야유와 조롱이 섞인 박수를 쳤다. 그러나 그들은 타자마자 대뜸 기사
아저씨에게 욕을 해댔다.
"아니, 이 양반아! 승객이 탔는지 확인도 안하고 떠나면 어떡해?"
기사 아저씨가 미안하다고 했지만 그들 세명의 다짐은 계속되었다. 나는
황당했다. 휴게소에서 늦게 온 것, 그리고 고속도로변에서 20여분을 기다린
것에 대한 최소한의 사과 정도는 있어야 했지 않을까. 어쩌면 세명 모두
그럴까. 시달리던 기사 '아저씨가 우리에게 물어 보았더니 다 왔다고 해서
출발했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공보의가 뒤를 보더니 고함을 내지른다.
"누구야? 다 왔다고 한 게!"
이건 뭐 숫제 깡패다. 그들은 정말 화가 나 있었다. 우리 중 나이가 많은
공보의가 그들을 제지했지만 그들은 다시 그 선배를 둘러싸고 싸움을 계속
했다. 일단 서울에 가서 싸우라는 우리의 야유를 듣고 버스는 떠났다. 잠실
역에서 버스가 섰다. 우리가 내리고 나자 그들은 다시 기사 아저씨를 윽박
지르기 시작했다. 몇 명이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 같았어도 그런 행동을 했을까.
저것이 우리 의사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니 부끄러웠다. 자신에게 손
톱만큼의 불이익만 있어도 저렇게 핏대를 올린다. 서울에 도착해서까지 싸
움을 계속하는 그런 작태를 보면서, 왜 일부 의사들이 욕을 먹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24. 의사의 X는 더 더럽다
대구 군의학교. 거기서 나는 3주간의 교육을 받았다. 우리가 대구에서 교
육받는 마지막 공보의였고 다음에 오는 공보의들은 대전에 짓고 있는 새로
운 건물에서 훈련을 받게 된다. 대구의 건물은 일제시대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튼튼하게 지은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화장실이 문제였다. 쭈그
리고 앉는 변기였는데, 도대체 물이 내려가지 않는 것이다.
대위 한분이 우리를 모아놓고 말씀하셨다.
"화장실 물이 잘 안 내려갑니다. 그러니 후보생 여러분은 일을 본 후 꼭
바가지에 물을 받아 뒷처리를 깨끗이 하고 가세요."
그랬지만 대부분의 공보의들은 절대로 그럴 맘이 없다. 자기집 화장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 저기 문 열어보고, 그 중 깨끗한 것에 이층,
삼층으로, 심지어는 변기의 앞 바닥에 싸놓곤 했다. 설마...
천만에, 실제 상황이다. 화장실 청소를 할 때마다 몇층으로 쌓여 굳어버
린 변을 치우느라 애를 먹었고, 또한 일반 변소보다 냄새도 훨씬 더 났다.
어느날 나도 갑자기 용변을 봐야 할 일이 생겼다. 인간이니깐 당연하다.
여기 저기 열어보았지만 다들 몇층씩 쌓여 있었다. 다소 결벽증이 있는 나
는 바가지로 물을 퍼부어대며 청소부터 했다. 만족해 하며 바가지를 갖다
놓고 돌아오니 그새 어떤 놈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소리를 지
르려 했지만 이미 문을 잠궈 버렸다. 정말 화가 났다. 그래서 발로 문을 몇
번 차주고 나왔지만 분은 풀리지 않았다.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고, 자신의 변을 변기에 쌓아두고 나가는 그
런 몰염치, 그런 것이 일부 젊은 의사들의 모습이다.
25. 1천원이 아까운 우리들
군대에 있는 9주간 우리는 두 번에 걸쳐 총 40만원 가량의 월급을 받는
다. 일반 사병들의 한달 월급이 1만 몇천원 정도니 제대할 때까지 받아도
손에 쥐지 못하는 돈이다. 그것을 외박 나가서 술먹고 이틀만에 다 써버리
는 경우가 많다. 의사 선생님들이니만치 얼마나 씀씀이가 크겠는가.
훈련기간 중 우리를 가르치시던 중대장 한분이 출근길에 교통사고로 사
망하셨다. 35세의 젊은 나이였다. 우리는 모든 공보의가 조위금을 걷기로
하고 얼마를 낼것인가를 상의하기 위해 중대장들끼리 모였다. 나는 그 당
시 중대장이어서 참석을 했는데, 그 의견들을 들어보니 정말 가관이었다.
"우리가 천명이니깐, 천원씩만 내도 백만원 아닙니까. 그 정도가 적당하
다고 보는데..."
"천원은 좀 그렇고, 이천원씩 내는 게 어때요."
공보의 나이가 대부분 삼십세인데, 어떻게 천원, 이천원씩 내자는 말이
나오는지 기가 찼다. 이천원으로 하자는 쪽으로 결정이 나는 듯해 웬만하
면 말을 안 하는 내가 손을 들었다.
"우리가 천명이니깐 얼마씩 걷으면 얼마, 이런 논리로 나가지 말자. 우리
개개인으로 따져 봤을 때 애들과자값도 안 되는 천원을 내는 것이 말이 되
나. 우리를 가르치시는 교관님이 우리 때문에 돌아가셨다. 아무리 그래도
오천원은 내야 하지 않겠는가."
내 말에 다들 수긍하는 눈치였고, 결국 오천원으로 결정이 났다. 중대로
돌아와 오천원씩 걷기로 했다고 하자 놀랍게도 다들 아우성이었다.
"아니, 그렇게나 많이..."
"아니 그럼, 천명이니깐 오백만원이나 내자는 게 말이 되나?"
내가 말했다. 안 낼 사람은 안 내도 된다고. 오천원이 비싸면 성의껏 얼
마라도 내라. 70% 정도가 오천원을 냈고, 말도 안 되는 논리-군사독재에
반대한다나?-를 내세워 아예 안 낸 사람도 20%쯤 되었다.
오천원이 정말 큰돈이었을까.
그 다음날 일본과 한국이 올림픽 예선 축구경기를 했다. 스코어 맞추기
를 하는데, 1인당 배팅액은 만원이었고 조위금 내는 실적이 가장 저조했던
우리 내무반은 11명이나 참가했다.
훈련소를 떠나기 하루 전날, 각 방마다 파티가 벌어졌다. 그러면서 수고
하신 교관님들께 선물을 사드리기로 했다. 이번 역시 중대장인 내가 걷었
는데, 해괴한 논리로 돈을 안 내는 사람을 보면 정말 쥐어박고 싶었다. 우
여곡절 끝에 얼마를 걷었다.
파티를 즐기고 있는데, 한 내무반 반장이 날 찾아오더니 자기 내무반에
서 갹출한 선물값을 돌려달란다. 이유를 묻자 자기들이 시끄럽게 놀았더니
한 교관이 잔소리를 좀 했다는 것이다. 역시 기가 찼다. 애들도 아니고, 잔
소리 좀 들었다고 돈을 돌려달라?
이젠 많이 적응되었지만, 일부 '젊은 의사'들의 작태는 보통사람들의 상
상을 초월한다. 물론 선물비는 돌려주었다.
26. 우린 의사야!
국립보건원에 있다 보면 1년에 몇차례 국가시험 감독으로 차출이 되곤
한다. 휴일에 못 쉬는 것이 좀 싫긴 하지만, 점심도 먹여주고, 수고했다고
일당까지 주는데다 다음날 근무도 경우에 따라서는 빠질 수 있어 여러 가
지로 좋은 일이다.
이젠 약국에서도 한약을 팔 수 있게 되었고, 96년에 이어 97넌 어느날
두 번째로 약사들이 한약 관련 무슨 시험이 치러졌다. 대상자의 대부분은
97년 2월 약대를 졸업한 사람들이었는데, 약사 후보생 대부분이 여자라서
나야 뭐 미인들을 감상하느라 그다지 지루하지 않게 하루를 보냈다.
시험관리 본부에서 준비한 맛있는 도시락을 까먹고 난 뒤 시간이 남아서
운동장에 나와 공보의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는데, 한 여자가 우리에게 물
었다.
"알람시계 받으셨어요?"
무슨 말인지 몰라 자세히 물어보니, 신용카드 회사에서 나왔는데, 자기
회사 카드에 가입을 하면 알람시계를 준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시험
이 치루어진 학교 운동장 곳곳에는 3-4개 회사에서 나와 카드 가입 사은품
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 여자는 한참 말을 하다가 우리 가슴에 붙은 '감독관'이란 스티커를 보
고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 약사 아니세요?"
"네."
그랬더니 여자는 "약사인 줄 알았어요."하더니 싸늘하게 획 돌아서 가버
리는 것이 아닌가. 아니, 약사 아니면 사람도 아닌가, 우리는 뒤에다 대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의사예요!"
<에어포스 원>을 보고
에어포스 원은 미국 대통령 전용기다. 그러면 우리 대통령은 무엇을 탈
까? 그랬더니 누군가 전세기를 탄단다. 전세기와 전용기는 어떻게 틀릴까.
전세기를 타다가 권좌에서 물러나면 전세금을 빼 줘야 할까?
하여튼 나는 <에어포스 원>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흔히 볼 수 있는 비
행기 납치극을 비교적 재미있게 꾸민 영화로,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테러
범들이 대통령이 탄 비행기를 납치해 대통령을 인질로 잡는다. 그리고는
포로와 교환하자고 부통령에게 제의한다. 그러자 국민들은 백악관 앞에 모
여 대통령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촛불시위를 벌인다.
영화 속 얘기지만 실제 그런 일이 발생했더라도 미국 국민들은 아마 그
렇게 했을 것이다. 그들은 대통령을 사랑한다. 전 미국 대통령인 레이건이
자신이 치매의 일종인 알츠하이머(Alzheimer`s disease)에 걸렸다고 했을
때 국민들은 모두 가슴 아파했다.
경우를 바꾸어 '문민 대통령'이 탄 비행기를-전세기인지 전용기인지는 잘
모르겠다-납치했다. 그리고는 많이도 말고 1만 달러를 요구하면서 불응할
경우에는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그럴 경우 당신이 부통령이라면 어떤 결정
을 할까.
나의 경우는 유감스럽게도 '100달러도 아깝다. 마음대로 해라.'라고 할 것
이다. 당황한 범인들은 아마 "1,000만달러를 보내지 않으면 살려보내겠다."
고 협박할 지도 모른다.
우리 국민들도 영화 속에서처럼 대통령이 무사히 구조되자 뛸 듯이 환호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다보니 시종일관 마음이 착잡했다.
우리 국민들은 참 불행한 국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선을 했음에도, 스
캔들이 끊이지 않음에도 여전히 70%가 넘는 인기를 과시하는 클린턴 대통
령과 한자리 숫자까지 지지율이 떨어진, 한수 더 떠 '절대 복제하지 말아야
할 인물'로 지목되는 우리의 '문민 대통령'.
US Open 골프를 보니 골프광 클린턴이 딸과 함께 갤러리로 서 있는 장
면이 있었다. 딸 체시아가 '타이거 우즈'의 팬이란다. 우리 대통령은 그렇게
자유롭게 거리를 다닐 수가 없으며, 클린턴처럼 밝게 웃는 장면을 별로 본
일이 없다.
지난날 우리끼리 모인 자리에서 대통령 얘기를 하면 시종일관 냉소적인
얘기만이 나올 뿐이었다. 대통령의 아들의 뻔뻔한 모습을 청문회에서 보면
서 탄식을 하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 중 누가 제일 좋아?"
그러면 난 이렇게 물어보라고 했다.
"역대 대통령 중 누가 제일 덜 싫어?"
전직 대통령이 하다 못해 파킨슨씨 병 같은 것에 걸렸다고 해서 우리 국
민들이 가슴 아파할까. 올바른 지도자를 만나지도 못했지만, 뽑지도 못했
다.
이제 새로운 대통령을 뽑았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번 선거 역
시 나는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후보를 뽑을 수가 없었다. 다만 가장 덜 나
쁜 사람, 다시 말해 차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5년 후, 그 대통령은 또 어떤 평가를 받을까.
올챙이의 꿈
"휴우..."
한숨과 함께 몇방울의 정액이 플라스틱 컵에 쏟아졌다. 정자무는 컵에
담긴 정액을 슬라이드 위에 올려 놓고 커버글라스를 덮었다. 자무는 커버
글라스를 덮을 때마다 자신의 정자가 납작해져 죽어버리는 상상을 하며 몸
서리치곤 했다. 자무는 현미경의 불을 켠 뒤 대안렌즈에 눈을 갖다 댔다.
"휴우..."
자무는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세 개이거나 아예 없는 기형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도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시야를 계
속 옮기던 자무는 한참만에야 꼬리를 바르르 떨고 있는 정상 모양의 정자
를 찾을 수가 있었다.
"와! 움직인다!"
한참 관찰하다가 그것이 물결의 파동에 의한 것임을 깨닫자 자무의 두
어깨는 다시금 축 처져 버렸다. 자무의 시선이 벽에 붙어 있는 표로 향했
다.
'정액 검사시 기준표'
가. 정액이 총 부피가 최소 2ml가 될 것
나. 1ml당 정자 수가 3*10의 9승개가 될 것.
다. 운동성을 가진, 정상 정자가 50% 이상일 것.
이 기준표는 그래도 10년 전 기준에 비하면 많이 줄어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자무는 현미경을 아무리 옮겨다녀도 제대로 헤엄치는 정자 한 마리
보기가 힘든 실정이다.
자무의 아내 난소유는 이미 친정으로 떠난 후였다. 결혼한 지 10년이 될
때까지도 "어떻게 되겠지요. 최선을 다해 봅시다."며 자신을 위로했었건만,
최근 들어서 발기조차 잘 안되는데다 옆집에 살던 임동석내외가 결혼 8년
만에 임신을 해버리자 아무 말없이 짐을 꾸렸다.
'동석이 녀석이 나보다 더 나쁜 무정자증이란 걸 아내에게 말해 주는 게
나을 뻔 했어.'
임동석은 자기 아내가 임신을 했다며 자무 앞에서 연방 자랑을 해대서
정자무의 속을 뒤틀리게 했다. 그러나 그날밤 소주 11병을 마신 임동석은
자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무 형, 나 그동안 왜 애가 없었는지 알아?"
"제수씨가 피임약 먹고 있었다며?"
"아니야."
"그럼? 하늘을 못 봐서 별을 못 땄나?"
"형, 사실 나 무정자증이야."
"무정자증?"
"응, 제대로 자란 정자가 하나도 없다나봐."
"언제부터야?"
"대학교 1학년 때. 학생들 다 검사하는 거 있잖아. 거기서 결과가 그렇게
나왔어."
"제수씨도 그 사실을 알아?"
"숨겼지. 그런데 이제는 아는 것 같아. 임신을 하고도 저렇게 당당하잖
아."
동석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자무도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어릴 적부터 자무의 친구들은 자위 행위를 해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자
무는 늘 불결함을 느꼈다. 자무 자신은 자위행위를 하지 않았다. 샤워를 할
때나 그 부위를 만질 때마다 자무는 항상 불쾌한 느낌을 받았는데, 한쪽이
더 불룩하고 뭔가 속에 든 것 같은 찜찜한 느낌이었다.
한 번은 친구들이 가르쳐 준대로 해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고환에만
손이 닿으면 기분이 불쾌해졌다. 여러번의 망설임 끝에 자무는 어머니에게
상의했다. 어머니는 "얘는. 공부나 할 것이지 맨날 그딴 짓만 하려고 하네.
어쩜 넌 네 아빠를 꼭 빼닮았니?" 하시고는 바람 소리를 내며 방으로 가
버렸다. 그날밤 자무는 4살 때 이후 처음으로 요에 지도를 그렸다.
세월이 흘러 자무도 대학에 갔다. 개강 파티로 자무는 같은과 선배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얼굴이 까무잡잡한 선배 하나가 돌연 자무에
게 물었다.
"야, 너 지금까지 몇번이나 쳤냐?"
자무는 당황해서 씹고 있던 껌을 삼켰다.
"뭘 말입니까?"
그 선배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임마, 그거 있잖아. 그거."
"아, 그거요. 아직 한 번도 안 쳤는데요."
옆에 있던 선배가 자무의 말을 받았다.
"야, 너무 많이 쳐서 기억이 안 나나보지? 여기 이 안문상 선배로 말할
것 같으면 별명이 TK지. 그 방면에 있어서 지도를 받고자 하면 안문상을
찾아."
"TK요?"
자무가 눈을 꿈뻑거렸다. 자무가 되묻자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TK 몰라?"
선배 하나가 자무의 귀에 속삭였다.
"TK란 말야, 딸케이의 약자야."
선배는 말을 마치고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전 정말 한 번도 경험이 없습니다."
자무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어? 정말? 웬 성모 마리아가 우리 과에 들어왔지?"
"너 혹시 고자 아냐? 병원에 한 번 가봐."
그것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무는 병원에 갔다. 머리가 벗겨진
의사가 자무를 보고 껄껄 웃었다.
"아니, 왜 웃습니까?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자무가 물었다.
"아닙니다. 당신을 보니 제 환자 중 한사람이 생각이 나서 웃었습니다."
의사의 말인즉 다음과 같았다. 환자 중에 윤경식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
단다. 외항선원이라 한 번 배를 타면 몇 년씩 있다가 돌아오곤 하는데, 이
번에 3년만의 항해를 마치고 돌아왔더니 아내가 임신을 했더란다. 이럴수
도 있느냐고 묻기에 자기딴에는 한 가정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다음과 같
이 말했다고 한다.
"정자의 운동성이 떨어지게 되면 수년만에 나팔관의 팽대부에 도달할 수
있고, 그때가 마침 배란기라면 임신이 충분히 가능하지요."
자무는 병원에 오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얘기를 듣고 난 의사는 유리같
은 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음, 증상을 들어보니 정계정맥류(varicocele) 같군요."
"정계정맥류라뇨?"
자신에게 질병이 있다고 생각한 자무는 깜짝 놀랐다. 아직 피지도 않은
꽃 아닌가.
"정맥류란 고환에 존재하는 정맥혈이 순환이 되지 않고 고환 주위에 머
무는 병이지요. 원래 고환 주변의 온도는 체온보다 2-3도 가량 높아야 정
자가 활발히 운동을 할 수 있는데, 이 정맥류가 있는 경우에는 고환의 온
도가 체온과 비슷해져 정자의 운동성이 떨어지게 되지요."
이럴 경우 불임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언급한 뒤 의사는 언제부터 증상
이 시작되었는지 물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인데... 한 중2때 정도?"
"아이구, 이거 너무 늦게 오셨군요. 정맥류 같은 병은 간단한 수술로 원
래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지만, 뚜렷한 자각 증상이 없어 대부분 병원에
오는 것을 미루어 불임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학생의 경우는
아직 젊으니까 뭐라고 속단하기 곤란합니다."
의사는 자무의 정액을 채취한 뒤 현미경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씨없는
수박... 자무는 병원 천장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남들처럼 장가도 가야 하는데...
"이거 증세가 많이 악화되었군요. 활발히 움직이는 놈들이 몇 개 없어요.
그래도 이 정도라면 노력 여하에 따라서 아기를 가질 수는 있습니다."
자무는 현미경을 보았다. 영화 같은데서 보았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정
자들은 흡사 슬로우 비디오처럼 움직임이 둔했다. 자무는 다음날 방사선
동위원소를 이용한 조영술을 실시하여 정계정맥류로 확진을 받았다. 수술
을 받기 전 자무는 정자 은행에 자신의 정자 10 vial을 예치했다.
"10 vial정도면 충분하지요."
의사는 처음 봤을 때보다 머리가 더 벗겨져 보였다.
수술은 성공리에 끝났지만 너무 늦은 탓에 정자의 기능은 정상으로 회복
되기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더욱 악화되는 일을 막기 위해 '킹스퍼
(kingsper)'라는 약을 꾸준히 복용하라고 했다.
'그때가 벌써 15년 전이군...'
자무는 대학 때부터 쫓아다녔던 난소유와 결혼했다. Kinsper를 꾸준히
먹어도 자무의 증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갔다. 자무는 정자은행에 맡긴 정
자를 쓰기로 했다. 영하 180도의 액체 질소용기에 담겨있던 정자를 보는
순간 자무는 아기 낳는 장면을 머리 속으로 그렸다. 그러나 녹여서 현미경
으로 관찰한 자무의 정자는 모두 죽어 있었다. 10 vial 모두.
어이가 없어진 자무는 은행 측에 따졌다. 일정 기간마다 냉동 촉매제인
액체 질소의 양을 제대로 체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지점장은
자신은 잘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다가 몇푼의 보상을 해주는 선에서 사건
을 마무리지었다.
언제부터인가 무정자증 환자의 급증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더니
만, 2010년에 들어서는 결혼 적령기인 26세-35세의 50% 이상이 무정자증
환자로 밝혀졌다. 태어나는 신생아의 30% 이상이 무정자증으로 태어나고,
나머지도 자라면서 50% 이상이 무정자증으로 된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무정자증의 원인을 유전적 소인, 환경오염이나 스트레스, 음
주나 흡연, 약물, 방사선 등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 전문가들 역시 70%
이상 무정자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공수정으로 아기를 갖는 일은 일부 있는 자들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
고, 불법으로 정자가 매매되기도 했으며, 어떤 기업은 오직 정자만 팔아서
국내 10대 그룹에 끼일 정도가 되었다.
신문에는 '정자를 만들어 드립니다'로 시작하는 수많은 약 광고가 광고란
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중국, 인도네시아, 태국 등지에서 효과도 미지수인
수많은 약물이 국내로 반입되고 있었다. 정자 형성에 탁월한 효과를 보였
다는 발표가 나간 뒤 한국 남자들은 아침마다 미나리를 갈아 만든 주스를
먹어야 했고, 연구 결과 약간의 효과를 보았다는 게 보도되기만 하면 그
음식은 씨가 말라 버렸다.
고추와 가지, 오이 등은 그런 연구결과가 없음에도 날개돋힌 듯이 팔려
농부들을 의아하게 했다. 무정자증 환자가 임신한 아내를 살해하는 사건이
종종 일어나기도 했다. 의학계에서는 무정자증을 고치기 위해 수많은 방법
을 시도 중이었지만 뚜렷한 효과를 본 방법은 하나도 없었다.
어둠 속 플래시 불빛이 한줄기 비추어졌다. 수많은 적외선 줄기를 뚫고
한 사내가 접근했다. 사내는 능숙한 솜씨로 경보기의 전원을 껐다. 문가에
다다른 사내는 뭔가를 꺼낸 뒤 문에 접지 시켰다.
"우지끈..."
나지막한 소리를 내며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사내는 거대한 금고 문으
로 들어가 다이얼을 돌렸다. 몇분간의 사투 끝에 금고문이 활짝 열렸다. 사
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기 있군!"
사내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목록을 확인했다. 사내는 천천히 장갑을
손에 낀 후 액체질소 탱크로 손을 넣었다. 시원한 감촉이 밀려왔다. 사내는
A3이라고 쓰인 홀더를 꺼냈다. 10개의 vial에 꼽혀 있었다. 사내는 그 중 3
개를 꺼내 가져온 팩킹 박스에 담았다. 서둘러 금고실을 나온 사내는 현관
에 섰다.
"어라?"
현관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곳은 경보기를 끄면 현관문이 잠겨 버리는 군.'
사내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한참을 씨름하다가 사내는 현관 앞에
주저앉아 버렸다. 갑자기 출출해졌다.
'뭐 먹을 것 좀 없나?'
주위를 둘러본 사내는 책상위에 놓여 있는 초콜릿을 보고 환호했다. 다
먹고 난 뒤 유효기간이 2년 정도 지났음을 확인하고는 다소 속이 거북해졌
다. 배가 불러오자 사내는 졸음이 몰려옴을 느꼈다. 자면 안된다고 너무 골
똘히 생각하다가 그만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사내는 싯가 30억원어치의 정자를 훔친 혐의로 기소되었다. 사내의 이름
은 이원규라고 했다. 그는 무정자증으로 자녀 없이 살아 왔는데, 형편상 정
자를 살 능력은 없고 집에서는 구박이 심해 할 수 없이 정자를 훔치게 된
것이었다.
이원규는 구치소로 끌려갔다. 거기에는 20여명의 사람들이 아무 말없이
앉아 있었다. 다소 무료했기에 이원규는 그 중 가장 험상궂게 보이는 사람
에게 말을 걸었다.
"형씨는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소? 보아하니 이런 데 계실 분이 아닌 것
같은데..."
험상궂은 사람은 껄껄 웃었다.
"나는 정자무라고 하오. 이름처럼 운동하는 정자가 없소. 얼마 전 하도
화가 나서 정자은행을 털다가 그만 잡히고 말았지."
옆에 있던 사람이 거들었다.
"나도 결혼한지 십년간 애가 없었죠. 알아보니깐 무정자증이라는 겁니다.
우리 같은 사람도 애 낳고 살아야지 하는 마음에 정자은행을 털었죠."
이원규는 정자무에게 물었다.
"아니 그럼, 여기 온 사람은 모두 정자은행을 털었나요?"
정자무는 고개를 저었다.
"저기 저 사람은 소아의 정자를 불법으로 팔다가 잡혔고, 저기 빨간옷
입은 사람은 무정자증 환자의 정자를 정상 정자로 속여서 팔았지요."
'모두 다 정자 때문에...'
이원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제 사태가 이지경까지 이르렀나요?"
"휴우..."
정자무는 한숨을 푹 쉬었다.
"처음에 학자들이 이런 사태를 예상했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소.
1940년에는 ml 당 남자들의 평균 정자수가 1억1천3백만마리였다고 하지요.
그러던 것이 1990년에는 6천6백만마리로 줄어 거의 50%가 감소했습니다.
학계에서는 나름데로 대책 마련도 하고 이런 식이라면 2000년대가 되면 무
정자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생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모두들 한쪽
귀로 흘린 채 오로지 환락을 즐기기 바빴지요..."
이원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얘기라면 과거 자신도 들은 바가 있다.
남자의 정자생산량이 매년 2%씩 줄기 때문에 60년 후에 태어나는 남자는
생식능력을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얘기, 그래서 능력이 있을 때 정자은
행에 예치를 해 놓아야 한다는 얘기를. 원규는 하지만 설마 자신이 무정자
증 환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이원규는 다시금 물었다.
"그러면 전혀 가망이 없는 것인가요?"
정자무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그렇지는 않지요. 옛날 매독이나 AIDS가 창궐했을 때도 우리는 모두
죽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의학계에서는 훌륭하게 대처를 해 왔
습니다. 정자감소증 역시 불치의 병은 아닐 겁니다. 다만 이것이 현대문명
이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경고로 알고, 인간이 자연에 대해 겸허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앞으로 몇 년의 세월이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무정자증은
꼭 고쳐질 것입니다."
이원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대문명이 주는 경고! 우리는 그동안 우리의 정액을 아무 생각없이 순
간의 쾌락을 위해 버려 왔다. 아이가 생기는 것을 귀찮아 했으며, 필요에
따라 애를 지우기도 했다. 태어난 애를 버리기도 했다. 거기에 대한 하늘의
벌이 바로 무정자증인 것이다....
3년의 세월이 흘렀다.
"끼-익"
감옥문이 열렸다. 아무 생각없이 감옥문을 나오던 정자무는 깜짝 놀랐다.
"아니, 여보!"
친정으로 도망갔던 아내가 마중 나와 있었다.
"여보, 고생 많았지요."
둘은 힘차게 포옹했다. 아내가 입을 열었다.
"당신, 감옥에 있어서 모르시겠지요. 당신도 이제 애를 가질 수 있게 되
었다구요."
"그게 정말이야?"
"예, 한국의 마태우스 박사라는 분이 정자를 만드는 세르톨리 세포
(Sertoli cell)에 간단한 유전적 조작을 가해 무정자증을 치료할 수 있게 되
었어요."
그 다음 말은 정자무에게 들리지 않았다. 씨없는 수박이라고 놀림받던
십여년의 세월이 떠올랐다. 자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자무는 그 후 열한명의 자식을 낳았다.
삐삐
무선호출기, 즉 삐삐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의사들 사이에서나 주
로 쓰였던 것이었다. 그 당시 삐삐는 어디에 숨어 있든지 즉각 의사를 불
러다 일을 시키고자 하는 것이었기에, 인턴이나 레지던트들은 삐삐를 흔히
개목걸이에 비유하곤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삐삐가 울리면 "에이."하고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일쑤였고 호출 자체가 스트레스 역할을 했다.
그런 삐삐가 점차 대중화되어 가입자 수가 1천만 명을 헤아리게 되면서
호출이 오는 횟수가 곧 그 사람의 사회적 중요성과 인기의 척도인 양 여겨
지게 되었다.
오직 전화번호만을 남길 수 있는 초창기 삐삐에 음성사서함이라는 기능
이 추가된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은 자기 삐삐에 자기 자신
의 인사말까지 남기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삐삐가 우리 사회에 미친 파장은 실로 엄청나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약속 시간에 늦는 애를 위해 존재했던 '돌쇠야, 어디어디로 2차 가니까 와
라'는 식의 메모란이 사라졌다. 또한 호출기를 이용한 문자가 만들어졌다.
호출기에 번호를 입력하고 '8282'를 치면 '빨리빨리' 연락하라는 소리고, 끝
에 '1004'라고 치면 '당신의 천사', 즉 애인이라는 소리다. '1010235'는 '열열
히 사모'한다는 소리가 되겠고, 그밖에도 많은 문자가 있다.
음악을 녹음해 놓는 사람도 있고, "오늘은 첫눈이 왔어요." 식으로 매일
매일의 일기를 쓰기도 하고, "지금 거신 번호는 국번이 없거나 결번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기..." 등의 기상천외한 인사말이 등장하기도 했다. 또한 얼굴
을 직접 대하면서 하기 어려운 얘기들-예를 들면 "나 오늘 출근 못합니
다." "어제의 일 사과드립니다." "사랑해" "너 빨리 돈 갚아!" 등등-을 음성
메시지를 통해 상대에게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삐삐에 소설을 연재한다는 것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면서 내게는 꽤 많
은 삐삐가 온다. 소설의 내용이 다소 유치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고 격려해준다는 점, 큰 힘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삐삐가 안 온다고 울적해 하는 사람들의 얘기인즉 한달에 10,700원 내는
것은 다 똑같으니 삐삐가 적게 올수록 손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
에서 삐삐가 가장 많이 오는 사람 중 하나인 내 경우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하루에 1,000여통의 삐삐를 확인하느라 혹은 답변에 응하느라고 내가
쓰는 전화비는 실로 엄청나다.
3,000원짜리 전화 카드를 사보았자 3일도 못되어 다 써버리고, 내방에 전
화 한 대를 새로 놓았으며, 어쩔 수 없이 구입한 휴대폰의 통화료만 해도
월 15만원을 헤아린다. 급한 연락을 받기 위해 할 수 없이 삐삐 한 대를
더 구입해야 했다.
이것들이 내 경제에 주름살을 드리우지만 나를 통해 위안을 받는다는 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다지 아까울 것은 없다. 하여튼 삐삐가 안온다
고 울적해 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한달에 한 번이라도 꼭 울려야 할
때 울려 준다면 제값을 하는 것이다.
음성사서함의 역기능도 적지 않다.
바로 삐삐치는 사람에게 철저하게 익명성이 보장되는 탓에 발생하는 언
어폭력이다. 내가 아는 여학생은 자신의 삐삐에 날마다 심한 욕설을 퍼부
어 대는 사람 때문에 번호를 세 번이나 바꾸어야 했다. 내 경우를 보아도
하루 십여통 정도는 입에 담기 어려운 욕이 담겨져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
도 음성사서함은 삐삐의 대중화를 가져온 놀랄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
다.
삐삐 호출과 관련, 가장 짜증나는 일이 세가지 있다.
첫째, 호출을 해놓고서는 통화중인 경우인데, 자기 딴에야 이유가 있겠지
만 공중전화 부스의 길게 늘어선 줄을 헤치고 겨우 전화를 했을 때 계속되
는 통화중 신호는 정말 짜증스럽다.
두 번째 경우가 호출하고서는 전화를 안 받는 경우다. 내 친구 중에서도
호출을 하고서 기다리는 동안 화장실을 가거나 다른 방에서 일을 보는 애
가 있는데, 그러고 나서는 꼭 호출해도 연락 안 온다고 불평을 한다. 나름
대로 무슨 논리가 있겠지만 하여튼 내 상식으로는 용서가 안 된다. 이것은
통화중인 경우보다 더 짜증난다.
세 번째, 호출을 해놓고서 자기가 한 적이 없다고 잡아떼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지 이해가 불가능하다.
이밖에도 잘 못된 삐삐 사례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삐삐는 현대인에 있어서 필수품이 되어 버렸고, 이른바 삐삐 문화라
는 것이 생겨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삐삐를 통한 언어다. 물론 '말로 하면 글로 뜬다'는 문자
삐삐가 선을 보였지만, 대부분의 삐삐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다양한 삐
삐 언어가 등장했다.
내 삐삐에 처음 '17317071'이 호출되었을 때 난 뭔지 참 황당했다. 친구
에게 물었더니 거꾸로 한 번 보라는 것이다. 그랬더니 대략 'I LOVE
YOU'라는 글자였다. 그 치밀함에 난 혀를 내둘렀다.
비슷한 것이 해태제과에서 제작한 '38317'로 거꾸로 보면 사랑한다는 뜻
의 독일어 'LIEBE' 이밖에도 7942(친구사이), 526(온리유), 337337(힘내라),
045(빵사와) 등이 있으며, '486'은 '사랑해'의 획수가 각각 4(사), 8(랑), 6
(해)인데서 기인한 용어다.
별로 급하지 않은 호출이 난무하는 덕에 공중전화 박스에는 줄이 길게
늘어선다. 도처에 설치된 공중전화기에는 몇 년 전보다 사람의 줄이 훨씬
길게 늘어서 있다. 5명의 여학생들이 (가방까지 메고) 한 부스 안에 들어가
전화를 거는 놀라운 광경도 목격했다. 물론 대부분 호출에 응답을 하기 위
해서고,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공중전화에 대한 우리의 문화가 여전히 정착되지 않아서인지, 했다 하면
3분을 넘기기 일쑤고 그러다 보면 정말 급한 사람이 전화를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핸드폰이 이 불황 속에서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긴 하
지만...
또한 극장이나 강의시간,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의 호출음은
듣는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 그런 곳에서는 당연히 진동 모드로 해놓는 예
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영화를 보다 삐삐 호출음을 들을 때마
다 난 이렇게 말한다.
"아니 별로 많이 오지도 않는 애들이 왜 삐삐를 켜놓고 그래? 나도 한
번 삐삐 켜놓아 볼까?"
이 땅에 건전한 삐삐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다.
빨간 핸드폰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면서 지금은 호출 오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지만, 97년 초만 해도 나의 삐삐는 거의 모터에 가까웠다.
소음 때문에 거의 진동으로 해 놓는데, 한번 호출이 오면 약 8초간 진동
이 울린다. 그런데 8초 안에 또 호출이 온다면 진동이 계속 이어지게 되고,
또다시 호출이 오고... 이걸 이용해서 떡을 찧는다든지 전기를 만든다든지
하는 유용한 일에 쓸 수 없을까하고 머리를 짜내던 시절이었다.
내가 <아침을 달린다>라는 프로의 리포터를 맡고 있을 때인 1월 초, 나
는 '마태우스와 떠나는 겨울 스키'를 촬영하기 위해 베어스타운으로 향했
다.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삐삐소설 녹음을 해야 하는데, 방안에 PD와
카메라맨 등 여러 명이 잠을 자고 있으니 쑥스러워서 녹음을 할 수가 없었
다. 할 수 없이 방을 빠져나와 공중전화를 거는데, 공중전화라는 것이 옆사
람 하는 말이 다 들리기 마련이다.
그 당시 내가 연재하던 삐삐소설은 '빨간 핸드폰'이라는 다소 황당한 내
용이었는데, "삐삐소설 빨간 핸드폰 네 번째 시간입니다..."라고 큰소리로
얘기하자 옆에 있는 사람이 날 마치 실성한 사람 보듯이 쳐다보는 것이 아
닌가. 도저히 못하겠다 싶어 다시 방에 들어와 그래도 방송국 사람들은 내
가 삐삐소설을 한다는 것을 아니까 덜 부끄럽겠다 하는 생각에 수화기를
들었다.
내용은 주인공의 삐삐 호출이 와서 공중전화에 줄을 섰는데, 한 사내가
핸드폰을 건네준다. 물론 그 핸드폰의 색깔이 빨간색이어서, 주인공은 섬뜩
한 느낌을 받았다는데까지 였다.
"호출이 왔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호출 번호는 뭐라고 하지?' 하다가 '그래, 우리 보
건원 번호로 하자!'는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
"화미는 호출기를 보았다. 삼팔공에 일오일공, 빨리빨리라고 찍혀 있었
다."
그리고 나는 아무 생각없이 스키 타는 장면을 찍다가 밤늦게 귀가했는
데, 다음날 과에 출근을 해보니 김남열씨라고 우리 과 연구원이 이렇게 말
하는 것이다.
"어제 하루종일 전화가 왔는데, 내가 받으면 끊고, 받으면 끊고 해서 정
말 짜증이 났어요. 그래서 오후에는 아예 수화기를 내려놓고 있는데, 그 놈
의 범인 잡히기만 하면..."
그 말을 듣고 나는 정말 놀랐고, 한편으로는 김남열씨에게 미안했다. 범
인은 한명이 아니다. 수백명일 것이다. 내 삐삐소설을 듣고 거기 나오는 번
호로 전화를 해보는 호기심은 그 나이 또래에는 다 있는 것이 아닌가. 내
가 잠깐 생각이 없었던 것이 이렇게 남에게 큰 피해를 끼치다니... 한때 우
리 나라에서 호출이 가장 많이 올 때의 해프닝이었다.
한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10시 임성훈입니다>에 출연해서 삐삐소설
얘기를 했는데, 그때 TV자막으로 "지금 호출하세요. 012-842-8349"라는 것
이 나왔단다. 그 프로를 주부들이 얼마나 많이 보는가. 방송때는 호출기를
꺼놓고 있어서 몰랐는데, 귀가하면서 호출기를 켜자마자 초당 3회 이상의
삐삐가 오는 것이다. 호출기에 숫자가 나타났다 다른 숫자가 덮고, 또 덮고
하는 모습이 마치 불꽃놀이처럼 장관이었다.
집에 가자마자 나는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국이동통신이라기에 나는
홍보를 해줘서 고맙다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은 대뜸 '당신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당신이 회선을 몽땅 잡아먹어서, 다른 삐삐가 전부 불통이 돼 버렸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자주 있느냐?"
얘기를 듣고 보니 그도 그럴 법해서 미안하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는
데, 이것 역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러다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인기 절정의 라디오 프로에 출연하면
서, 내게 호출이 오는 횟수는 대충 잡아 하루 일만통을 헤아리게 되었다.
우리나라 중고생들이 그 프로를 좀 많이 듣는가. 나는 필사적으로 메시지
를 확인했지만, 하나를 듣고 지우는 동안 10여통 이상의 호출이 오는데 어
떡하겠는가. 음성메시지는 항상 '제한된 용량을 초과하여...'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그 후 방송에서도 삐삐를 이용한 이벤트가 많이 이루어졌다. '별이 빛나
는 밤에'의 DJ 이적씨는 자신에게 멋있는 메시지를 남기면 그걸 녹음해서
라디오에서 틀어주고 또 전화 인터뷰도 했는데, 그 결과 이적 씨의 삐삐는
몸살을 앓았다.
한 번은 인기 모델인 홍진경씨가 <아이러브 코메디>라는 프로에서 소원
을 삐삐로 남기면 들어준다는 그런 이벤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TV에 삐
삐번호가 나가자마자 23만통이 한꺼번에 와서 전국의 삐삐가 모조리 불통
이 되었다고 한다. 놀란 홍진경 씨는 삐삐 얘기를 취소하고 PC통신으로 바
꾸어야 했다.
나는 이제 완전히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가끔 길거리에서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여기저기 인터뷰를 하고, 방
송출연을 하던 시절은 참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왜 요즘은 방송에
안 나가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난 내 이름처럼 서민으로 사는 것이 훨
씬 좋다.
자신의 꿈이 방송 쪽인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방송국에서도 사람은 필
요하고, 탤런트와 댄스가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얼마 전 영턱스클럽의 멤버 하나를 새로 뽑는데 몇 천명이 넘는 지원자
가 몰렸다. 거기에 뽑히면 물론 스타덤에 오른다. 문제는 확률이 너무 낮다
는데 있다. 게다가 한 그룹의 인기라는 것도 몇 년 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
분이다. 인기가 떨어지고, 더 이상 방송국에서 불러주지 않는다면 그 다음
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공부는 가장 확률이 높은 게임이다. 나처럼 변함없이 기생충을 사랑하고
모기를 존경하면서 차분히 실력을 쌓는 것만이 경제난에 허덕이는 우리나
라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불고지죄
중학교 2학년이면 내가 열네살 때, 그러니깐 지금부터 무려 18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는 전두환 대통령이 막 집권했을 서슬푸른 시기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이 틈을 타서
북한이 쳐들어오면 어쩐다? 하는 걱정이 나를 짓눌렀다. 우리 나라에서 오
직 대통령은 박정희 씨 뿐인데, 이제 우리 나라는 어떻게 되는가 암담하기
만 했다. 곧이어 국무총리였던 최규하 씨가 차기 대통령에 올랐다.
80년 5월,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고 지칭되는 시기에 나는 대학생들의
데모 장면을 숱하게 볼 수 있었다. "왜들 저러는 거지?" 하는 의문과 함께
저들은 간첩의 사주를 받은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훗날 '광
주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된 '광주사태'가 발발했다.
부끄러웠다.
내가 태어난 곳인 광주에 폭도들이 저렇게 많이 살다니... TV화면에 비
친 사람들의 시위 모습은 정말 폭도 그 자체였다. 차를 불태우고, 돌을 던
지고, 전경을 두들겨 팼다. 난 생각했다. 이런 위기 상황에는 강력한 지도
자가 필요하겠다고.
이에 나타난 사람이 전두환 씨다. 전씨는 우선 뒷골목 깡패를 모조리 소
탕했다. 이른바 삼청교육대 프로그램이다. 깡패에게 돈을 뜯기거나 그냥 쳐
다봤는데 눈이 작은 탓에 째려본다고 맞을 뻔한 적이 있던 나는 안심하고
거리를 다닐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곧이어 '과외금지'라는 혁명적 조치가 잇달았다. 그 덕에 나는 지겨운 공
부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TV를 보니깐 연예인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라고 외치면서. 그밖에 다른 단
체들도 열심히 전두환 대통령을 외쳤다.
'정말 훌륭한 사람은 저렇게 추대가 되는 구나.'
난 이렇게 생각하며 전두환 씨가 대통령에 오르는 모습을 머리 속에 그
렸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그런데, 이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뭐하
지?)에 의해 체육관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전씨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통
령에 당선된다.
내가 기억할 수 있던 유신시절의 대통령 선거도 후보가 늘 한명이었기
때문에 후보가 전씨 한명인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전두환 씨의
인기에 맞설 사람이 없으니깐 아무도 못 나오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밖
에.
취임식에서 전씨는 좋은 말을 많이 했다. 머리가 별로 없는 것이 오히려
친근감을 주었다. 옆에 서 있던 영부인 이순자 씨도 턱이 조금 뾰족하고
길다고 느꼈지만 웃는 모습이 참 온화해 보였다.
전씨가 공포한 5공화국 헌법을 난 달달 외웠다. 사회 시험에 5공화국 헌
법의 요지를 쓰라고 나오자 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회정의의 구현, 복지국가의 건설...'
이렇게 좋은 헌법이 있으니 우리 나라는 곧 복지국가가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전씨는 외국순방을 자주 갔다. 갈 때마다 중고생들이 동원되었는데, 난
중학교는 공항가는 길목인 연남동에 위치한 경성을, 고등학교는 아현동에
있는 한성을 나왔기 때문에 꼬박꼬박 나가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보통 대통령이 지나가기 두 시간 전부터 미리 가서 나누어준 태극기를
들고 언제나 오려나 하고 하염없이 수다를 떨었다. 지겹고 귀찮기도 했지
만 막상 대통령이 탄 차가 지나가면 열광적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대통령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다니...' 하는 마음에 가슴 벅차했으
며, 혹시 대통령이 내려서 손이라도 잡아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1980년 어느날 TV는 김대중 씨의 간첩 혐의 사실을 알리는 뉴스가 나오
고 있었다.
'세상에, 저런 사람이 대통령을 하려고 했다니.'
여전히 어린 나는 또 한번 전율했다. 조목조목 나오는 내용마다 북한을
찬양 고무하고 있었다. 당시 나의 투철했던 반공 사상에 비추어 보면 정말
김대중 씨는 구속되어야 마땅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정치경제 교과서에는 유신헌법을 만든 이유가 '사회가
민주화로 이행하면서 기강이 해이해졌으며, 북한의 침략 위협까지 있게 되
어 강력한 영도력있는 대통령제가 필요했다고 씌여 있었다. 읽고 나서 유
신헌법이 없었더라면 정말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혼자 아찔해하기
도 했다.
고2 때 독일어 시간인가, 독어 선생님께서 갑자기 "북한에서 영어를 안
배운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셨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는
데, 난 원래 손을 들어 의사 표시를 하는데 남의 눈치를 거의 보지 않는다.
당연히 손을 번쩍 들었다.
"왜 안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난 이렇게 대답했다.
"전쟁준비 해야지요."
1985년 3월, 나는 대학에 입학했다. 선배들에게, 혹은 친구에게서 얘기
를 듣고, 그때까지 보지 않던 신문도 열심히 보았다.
이럴 수가!
내가 지금까지 배웠던, 알고 있던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고 거대한 사기
극이었다. 박정희 씨가 얼마나 독재자였던가를 알게 되었다. 한꺼풀 벗기자
또 다른 세계가 드러났다. 모든 것이 다 비리였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그리고 수없이 자행된 인권 탄압의 실상 등등...
세상에, 히틀러가 따로 없었다. 더 놀란 것은 전두환씨가 그보다 더하다
는 것을 알고 나서였다. 그 바람에 내 머리 속은 가치관의 대혼란이 찾아
왔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로 쫓겨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거기서 또 몇 년이 흐르고 난 뒤 나는 두 전직 대통령이
법정에 서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만약 그 시절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면 그 어린 학생들에
게 그렇게 교육을 시켰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들에게 유신 찬양 리
본을 달게 했을까. 김일성 1인 독재라고 수없이 가르치면서 유신헌법이 그
와 비슷한, 세계 유래없는 독재 헌법이라는 것을 어느 선생님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었다.
1961년 5월 16일에 일어난 군사 쿠테타가 우리 국가를 구했던 구국의 혁
명이라고 오랫 동안 속아 왔었다. 전두환 씨가 정권욕에 눈이 멀어 총칼
로 정권을 찬탈했다는 것을 나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이 한동안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대표적
인 반일주의자인 나 역시 무척 흥분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나라
교과서 왜곡 정도가 더 심하지 않았을까. 중학교 1학년때 지리선생님은 우
리에게 이렇게 강의하셨다.
"우리 나라는 서울이 특별시고 부산이 직할시지요. 북한은 직할시가 많
으면 좋은 줄 알고, 개성하고 함흥 두 군데를 직할시로 정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직할시(현재 광역시) 숫자는 무려 6개다. 서울 부산 대
구 찍고, 광주 인천 그리고 울산까지...
지금까지 교편을 잡고 계신 그 지리 선생님은 이제 어떻게 말씀을 하실
까. "북한은 겨우 직할시가 두 개밖에 없어요."라고 하실까? 이렇게 속고만
자라온 아이가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당연히 우리 사회는 불신으
로 가득 찬 사회가 되어 버리고 만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그 당시 담임 선생님은 음악 선생님이
셨다. 음악이란 인간을 편하게 해주는 측면이 많음에도, 우리 선생님은 우
리반 애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군것질을 하지 말라. 혹시 친구 중에 군것질을 하는 애를 보면 지체없
이 고발해라."
걸린 애는 그 당시로는 큰돈이었던 200원을 벌금으로 물리셨다. 군것질,
다시 말하면 간식이다. 지금 생각해도 간식이란 것이 그렇게 큰 죄라는 느
낌이 없지만, 그 당시 서슬푸른 담임 선생님의 한마디는 곧 법이었다.
우리 학교 매점에는 160원짜리 햄버거를 팔았는데, 엄청나게 맛이 있었
다. 한창 자랄 때니 그 맛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며, 쉬는 시간마다 애들
이 햄버거를 사기 위해 줄을 섰다. 다만 중학교 전체 30반 중에서 유독 우
리반 애들만 남들이 햄버거 먹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배고픔을 이기
곤 했다. 담임 선생님께서 금지한 것을 어찌 거역하겠는가.
그 금지 조항이 발효된 후 나는 몰래 햄버거를 먹은 적이 있다. 햄버거
를 사들고 남들 눈에 안 띄려고 얼마나 뛰었는지. 학교 구석에 앉아 친구
와 몰래 햄버거를 나누어 먹으면서, 난 엄청난 행복감에 젖어야만 했다. 그
리고 나서...
그날 오후 반 애들 앞에서 나는 선생님께 불려 갔다. 군것질 금지 조항
을 어겼다는 것이다. 우리반 애 중에는 나를 고자질했던 학생도 있을 것이
다. 다음날 나는 200원을 선생님께 드렸다. 물론 200원이 아까왔지만 더욱
더 슬픈 것은 우리가 서로 감시를 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는 것이었다.
군것질-끝에다가 '질'을 붙였다고 다 나쁜 짓은 아니다. 예를 들면 바느
질, 대패질, 학질 등 질로 끝나면서 아무 해가 없는 단어도 있다-하는 것을
선생님께 고자질하는 풍토 속에서 그 해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군것질을
하지 못했다. 그저 남들이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나의 중학교 2학년은 그렇게 흘러갔다. 내 친구, 혹은 우리반 애들이 혹
시 군것질을 하지 않을까 감시하면서...
변비, 이렇게 이기자
건강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거기에 부응하듯 각종 건강잡지, 비
디오 등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TV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뉴스와 신문에
이르기까지 각종 건강 정보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그러다보니 황수관 박사님 같은 스타가 탄생하기도 하며, 한때 200m 달
리기에서 아시아 최강으로 군림하던 장재근 선수가 잘 빠진 몸을 무기 삼
아 각종 에어로빅 프로를 석권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변비에 관한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변비라 함은
10대, 20대 여성들의 절반 이상이 앓고 있는(그냥 필자의 생각이지 통계에
의한 것은 절대로 아님)무서운 질병이다. 또한 변비는 걸렸다 하면 만성으
로 되어 수년, 혹은 수십년까지 고통을 받게 된다.
변비라 함은 통상적으로 3일 이상 변을 못보는 것을 일컫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변비로 고통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내 놓고 "나 변비
요."라고 하는 사람이 드문 것은 변보는 일을 입밖에 내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동양사상에서 연유된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화장실에 갈 때는 꼭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속이
고 용변을 보았다고 한다. 그 전통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듯하다.
의사들이 변비에 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척추
디스크라든지, 탈모증, 치질 등의 우아한 질병도 많은데 변비에 관해 언급
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점잖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은
변비의 고통을 잘 모르는 탓이다.
변비 환자는 흔히 화장실에 안 간다고 생각을 하는데, 실제로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화장실에서 보내게 된다. 막상 일을 성사시킬 것 같은 예
감이 들더라도 밖에서 누가 노크를 한다던지, 밖에서 "왜 이렇게 안 나와."
라고 한마디하면 결국 실패하고 만다.
고생 끝에 일을 성사시킨 기쁨이야 매일 일을 보는 사람의 몇 십배에 달
하지만, 그 한순간의 짜릿함에 비해 너무나도 큰 며칠간, 혹은 십수일의 고
통을 치르게 된다. 속에 뭔가 꽉 차 있다는 느낌 때문에 밥도 잘 안 먹게
되고, 먹은 게 별로 없으니 나오는 것 또한 별로 없기 마련이다.
이 고통을 오직 환자 하나의 잘못으로 돌리고 말 것인가. 그래서 필자는
다소의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변비라는 무서운 병마를 탈출하는 방법을 간
략하게 기술할까 한다.
첫째, 신문은 갖고 들어가지 말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다. 모든 일에는 정신력이 우선이다. 변비 환자들이 화장실
에 가는 형태를 한번 살펴보라. 죄다 신문이나 잡지, 소설책 등을 갖고 들
어간다. 바로 이것이 첫단추를 잘못 꿰는 것이다. 정신을 그 일 보는 데만
써도 될까말까한데, 신문읽는데 정신을 쏟다니.
게다가 이런 볼거리를 가지고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장기전에 대비한다
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 자체가 잘못이다. 목표를 3분으로 잡아도 실제 이
것저것 다 합하면 7-8분이 걸리는데, 장기전을 머리 속에 둔다면 빨리 끝
날 일이 없다. 그리고 독서라는 것은 쾌적한 환경에서 했을 때 가장 효과
가 좋은 법이다.
우리가 못 살 때는 신문이 휴지를 대신했다. 지금은 아무도 신문을 찢어
뒷처리를 하지 않는다. 화장실에 신문을 갖고 들어가는 습관을 버리는 것
이 중요하다.
둘째, 많이 먹는다.
변비가 10대-20대의 여성에게 유독 많은 이유는 이들이 소위 다이어트에
신경을 쓰느라 제대로 먹지 않기 때문이다. 다이어트로 살을 빼면 필연적
으로 변비가 찾아온다. 먹지 않았는데 변이 제대로 나올 리 없다. 물입자
백만개가 모여 비 한방울이 되듯이, 먹은 게 어느 정도 있어야 소화될 것
소화되고 남는 것이 변으로 나오게 된다.
필자가 군대에 있을 때의 일이다. 많은 동료들이 변비에 시달렸건만 필
자는 9주간의 군의관 훈련 기간 중 하루도 일을 걸러 본 적이 없다. 그 비
결은 바로 잘 먹는 데 있었다.
군대밥은 기름기가 거의 없어 그다지 맛이 있는 것은 아니니 양으로 승
부를 한다. 다시 말해서 밥을 많이 준다. 난 그걸 한 번도 남긴 적이 없으
며 오히려 더 갖다 먹었다. 그 결과 난 새벽 5시 반이면 일어나 어김없이
상쾌하게 일을 보았고, 변비로 인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동료들을 흐
뭇한 눈으로 바라볼 수가 있었다.
그렇게 밥을 많이 먹었어도 나는 착실히 군대 훈련을 받은 덕에 9주간
5kg을 뺄 수 있었다. 잘 먹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다이
어트다.
대개 변비에 대한 처방으로 섬유질이 많은 음식을 권장한다. 난 거기에
대해 반대다. 섬유질이 많은 식사를 한다면 당연히 변을 잘 볼 수 있다. 그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변을 보기 위해 먹는 것은 결코 아니
지 않는가. 우리가 먹는 것은 몸에 양분을 공급하기 위해서고, 거기서 남은
것과 대사된 노폐물이 변으로 합쳐져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
미의 변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이 사실적이고 실제적 의미의 변비 치유책이지만, 여
건상 제대로 시행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편법이지만 그동안 나 혼자만
알고 있었던, 그리고 측근들에게만 은밀하게 털어놓았던 비책 몇 가지를
공개할까 한다.
우선 몸에 꼭 끼는 옷을 입는다.
이것은 치약의 원리를 적용한 것인데, 이 방법을 써서 자주 변의를 느끼
는 성과를 거둔 이가 주위에 있다. 게다가 땀을 많이 흘리게 되어 살도 저
절로 빠지는 효과도 있다. 이왕이면 옷 색깔도 엷은 밤색 계통의 옷을 입
으면 좋다.
또 하나는 병에 있는 담배 꽁초를 꺼낼 때의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요
즘에는 좌변기가 일반화되어 있는데, 일을 보는 도중 몸을 앞뒤로 흔들어
주면 큰 도움이 된다. 변비 환자 중 20% 정도가 직장이 일자로 되지 않고
약간의 굴곡이 있기 때문이라는데, 특히 이런 환자들의 경우 이 방법을 쓰
면 효과를 볼 수 있다.
또하나.
평소에는 일을 잘 보던 사람이 시골에 가게 되면 변비에 시달리는 경우
가 있다. 영화배우 강수연씨도 영화촬영 때 무려 한달이나 변을 보지 못해
결국 쓰러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것이 '심리적 변비'인가 '생리적 변
비'인가 하여튼 그렇다.
농촌에 가면 아직도 수세식이 아닌 곳이 존재한다. 누구나 한 번은 그런
곳에 가본 경험이 있거나, 앞으로 가게 될 것이다. 필자의 경우는 도시, 농
촌을 가리지 않고 일을 잘 봐서 주위 사람들의 전폭적인 부러움을 사고 있
다. 그 비결은 바로 극한 상황을 가정한 끊임없는 '이미지 트레이닝'에 있
다.
집에서 안락하게 일을 볼 때도 나는 시골의 푸세식 화장실에 앉아 언제
밑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공포감을 상상한다.
누구나 늘 따뜻할 수는 없다. 더울 때 추운 겨울을 생각하는 지혜가 필
요하리라 생각한다.
존재의 이유
다음 글은 어느 할아버지 한분의 회고다.
...내가 시애틀의 뷰리지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던 1965
년 어느 날, 4학년 담임 선생님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그 선생님은 자기 반에 다른 학생들보다 일찍 과제를 끝마치기 때문에
좀 어려운 일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학생이 하나 있다면서 "그 애에게
도서관 일을 돕도록 하면 어떨까요?"하고 물어왔다.
"그 학생을 저한테 보내세요."
얼마후 연한 갈색 머리에 몸이 가냘픈 소년이 진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나에게 왔다.
"제가 할 일이 있나요?"
소년이 물었다. 나는 그 소년에게 책들을 서가에 정리해 두는 '듀이 10진
분류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 소년은 그 원리를 금방 이해했다. 다음
에 나는 대출되었다가 이미 반납되었음에도 엉뚱한 카드가 잘못 끼워진 채
서가에 꽂혀졌기 때문에 반납되지 않은 책으로 취급되고 있다고 생각되는
책들의 카드 한 묶음을 소년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 소년은 이렇게 말
했다.
"일종의 탐정 노릇을 하라는 거군요?"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 소년은 즉각 빈틈없는 탐정이 되었다.
소년은 그의 담임선생님이 문을 열고 "쉬는 시간이다."라고 말할 때까지
엉뚱한 카드가 꽂혀있는 책을 세 권이나 찾아냈다. 그 애는 일을 다 끝마
치고 쉬겠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그만 밖에 나가 신선한 공기를 쐬어야
한다고 고집했고, 결국 소년은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했다.
이튿날 아침, 소년은 일찍 도서관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그 책들을 다 찾아내고 싶어요."
그날 저녁 소년이 계속 도서관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요구했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그러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 애는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일했다.
몇주일 후 나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쪽지를 발견했는데, 그 소년의 집
에서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즐거운 저녁 식사가 끝나 갈 무렵 소년의 어머니가 자기 가족이 이웃 학
군으로 이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기 아들의 가장 큰 걱정은 뷰리지 초
등학교 도서관을 떠나게 되는 것이라고 소년의 어머니는 덧붙였다. 소년이
물었다.
"서가에 잘못 올라간 책들은 누가 찾죠?"
소년이 전학가는날, 나는 아쉬운 작별을 했다. 그 아이는 처음에는 어느
아이와 비슷해 보였으나 일에 대한 열정으로 나에게 그 애는 이미 특별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소년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오래 기다릴 필
요가 없었다. 며칠 후에 그 애가 문을 열고 나타나더니 기쁨에 들뜬 목소
리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 학교 도서관의 사서는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요. 아빠가 태워다 주시지 못할 때는 걸어서 오겠어요."
나는 그 때 어떤 일에 이처럼 강한 집념과 열성을 가진 소년이라면 장차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그 애
가 정보화시대의 마법사가 되리라는 것을 내가 어찌 짐작할 수 있었겠는
가.
그 소년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회장이며 미국 최고의 부자인 빌 게이츠
였다...' (<이울>이라는 잡지에서 인용함)
나는 이 글을 읽고 난 뒤 내가 초등학교 때 혹시 큰 인물이 될만한 조짐
을 보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지극히 평범하기만 했던 나로서는 아무리 생
각해 보아도 어머님을 제외하고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의 저편에는 분명 내게 반짝
였던 일면이 분명 한두가지 쯤은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난다. 바로 나의 눈썹이다. 난 백미, 즉 눈썹이 하얗
다. 다 하얀 것은 아니고 오른쪽 눈썹의 절반이 하얗다.
어릴 적 내 눈썹이 하얀 걸 발견하신 어머님께서는 한약방에 대리고 가
셨다. 그랬더니 그 의사 선생님이 "이것은 백반증이요. 그냥 놔두면 몸 전
체가 하얗게 됩니다."라고 하시면서 한약을 뭉텅이로 지어 주셨다.
허구헌날 한약을 먹어댔지만 내 눈썹은 여전히 하얗게 남아 있었다. 다
시 한약방을 찾아갔다.
"아, 한약을 먹으니 최소한 더 번지지 않는 거잖소!"
어머님은 일본에 사시는 할머님께 부탁해서 약을 구해 왔다. 물약을 눈
썹에 바른 후 햇빛을 30분씩 쬐라는 좀 이상한 처방의 약이었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검어지라는 눈썹은 멀쩡하고 눈썹 밑의 살만 꺼멓게 타는 것이
었다. 어머님이 시킨다고 밖에 나가서 30분간 햇볕을 쬐는 어린 나의 모습
을 상상해 보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그 방법도 별반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사춘기가 되자 눈썹이 하얀 것을
부끄럽게 여긴 나는 작은 가위로 눈썹을 자르기에 이르렀다. 거울을 보고
열심히 잘랐는데, 잘린 걸 보면 검정 눈썹 열 개에 하얀 것 하나 꼴이었다.
결국 난 오른쪽 눈썹 반이 없는 상태로 학교에 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고1때 우연히 백미라는 단어를 배웠다. 그 뒤 난 나의 눈썹을 부끄럽게 생
각해 본적이 없다. 나보다 더 심한 조순 전 서울시장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눈썹 전체가 하얀 것이 아님을 보면 크게 되
려다 말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빌 게이츠는 대학에 다닐 때 수강신청을 한 과목은 전혀 듣지 않고 다른
과목을 청강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시험 전날이 되어야 자신이 신청한 과
목을 공부했다고 하는데, 하버드 동창생의 말을 인용하면 빌은 자신이 겪
은 어느 누구보다도 천재였으며,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 얘기를 듣고 나의 대학시절을 생각해 보았다. 빌게이츠와 비슷한 부
분은 내가 신청한 과목을 별로 듣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 시간에 뭘 했냐
하는 것이 빌 게이츠와 차이가 난다. 즉, 전자오락과 영화, 프로야구관람,
낮술 등으로 소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후 빌 게이츠는 하버드를 중퇴하고 마이크로소프트사를 만들어 세계
제일의 갑부가 되었다. 나는 기생충과 더불어 '삐삐소설'이라는 것을 쓰며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빌 게이츠는 컴퓨터 분야에서 사람들에게 많은 편리함을 가져다 주었다.
나는 그런 간편함 대신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고 유머를 개발
해 그들을 잠시나마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한다.
빌 게이츠같은 사람도 필요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나같은 사람도 필요하
다.
침
침이 없다면 우리는 밥을 지금처럼 맛있게 먹을 수 없을 것이다. 침의
도움이 없다면 생선가시, 돌, 먼지 등 입에 들어온 이물질을 뱉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침은 공격무기로서의 효과도 있다.
손이 묶인 상태에서 악당이 "빨리 말을 해!"라고 윽박지르면 우리편이
"에이, 더러운 놈!" 하면서 침을 탁뱉는 장면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이럴
때는 이를 잘 안 닦은 경우가 더 효과적임은 물론이다.
또한 침은 풀이 그다지 흔하지 않던 시대에는 우표를 붙이는 주요 수단
이었고, 어느 길로 갈까 망설일 때 손바닥에 침을 뱉은 다음 탁 쳐서 그것
이 튀는 방향으로 가면 십중팔구 맞는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명필 한석봉이 글씨 연습을 할 때 다리 난간에서 침으로 글씨를 쓴 일화
가 있으며, 낙타가 사막에서 잘 견디는 이유는 낙타가 침샘이 많아 보통
동물보다 수십배나 많은 침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특별한 놀이 기구가 없던 어린 시절에는 누가 침 멀리 뱉나 내기를 하면
서 놀기도 했는데, 이 놀이가 어찌나 인기를 끌었는지 나중에는 '누워서 침
뱉기'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석가가 108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서 보리수 아래서 가부좌를 틀 수 있던 비결은 입안에 고이는 침을 모아
배고플 때마다 먹었던 까닭이다.
이렇게 침은 우리에게 유용한 존재다. 하지만 모든 사물이 그렇듯이 잘
쓰면 약이고 못 쓰면 병이다. 침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인간들은 너무 침을 자주 뱉는다. "카악!"하고 거리에 침을 뱉을 때
지나가는 우리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그리고 나서 우리 자신도 길가에 "카
악!"하고 가래침을 뱉는다.
침은 습관이다.
한 번 뱉기 시작하면 평생 뱉게 된다. 원래 길거리에 침을 뱉으면 6,000
원씩 내게 되있던 것이 언제인지 몰라도 30,000원 정도로 대폭 인상되었다.
그때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침뱉기를 자제했다. 돈내는 것보다는 침뱉는
걸 참는 것이 더 나으니깐. 그러나 길가에 담배꽁초 버리는 것과 노상방뇨,
침뱉는 것을 단속하기에는 우리의 경찰력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그래서 지
금 우리의 거리는 침으로 오염되고 있다.
난 이런 것을 제안한다.
첫째, 이를 잘 닦자.
침은 두 종류가 있다. 하얀 침과 노란 침이다. 하얀 침은 물론 침은 침이
지만 보기에 그다지 나쁘지 않다. 문제는 노란 침이다. 침이 노랗게 되는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담배로 인해 기관지가 나빠졌기 때문이다. 또한 담
배를 피우면 침이 많아진다. 이것을 극복하는 길은 열심히 양치질을 하는
길밖에 없다. 특히 요즘 나오는 화이트 치약이라고 이빨이 하얗게 되는 치
약을 쓰면 효과가 커진다.
둘째,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보고 정 못참겠는 사람에게는 침주머니
를 채우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누군가 이 거리를 침으로 오염시키고 있다.
우리의 국토를 깨끗하고 청결하게 지킵시다!
한국축구, 이러면 안 된다?
1. 축구팬이란?
한국청소년 대표팀이 1997년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브라질에게 10대3
으로 대패하면서 예선 탈락의 수모를 겪었다. 우리와 같이 아시아 대표로
나갔던 UAE가 16강에 올랐고, 일본마저 8강에 올라 더욱 더 속이 쓰렸는
데...
청소년 축구경기에 쏠렸던 우리 국민들의 성원과 관심, 지고 난 뒤 언론
사에 빗발쳤던 항의 전화를 보면 분명 우리 나라는 축구의 나라다. 월드컵
축구 때만 되면 모두들 TV를 보느라 불야성을 이루고, 지기만 하면 성난
야수로 돌변, 대표팀에게 돌을 던진다.
나는 청소년 축구 참패로 화가 나 있는 사람 몇 명에게 물었다. 청소년
축구대회가 몇 년마다 열리는지? 놀랍게도 대부분 4년-월드컵과 같으리라
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이라고 답했고, 나머지는 '바빠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자신이 성원하는 대회가 얼마만에 열리는 지조차 모르는 것이다.
정답은 2년이다. 박종화 감독이 세계 4강의 신화를 수립한 것이 83년이
고, 남북이 단일팀을 이루어 8강에 올랐던 것은 91년의 일이다.
다음으로 우리 나라에 프로축구 팀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물었다. 프로야
구팀과 같은 8개라고 답한 사람이 대부분이고, 나머지는 6개, 9개 등으로
정답을 맞춘 이는 평소에 스포츠에 조예가 깊은 아들을 두신 우리 어머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 우리 축구팬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프로축구 경기장을 찾은 적이 있냐는 질문에는 모두다 고개를 저었다.
월드컵과 같은 경기에 익숙해져 수준 낮은 한국축구는 못 본다는 것이다.
그 수준 낮은 경기를 벌이는 선수들 중 몇 명이 대표팀에 선발되어 경기를
치른다. 그렇게 모였다고 해서 갑자기 수준이 올라갈 리는 없다. 그래서 탈
락을 하기도 하고, 일본에게 참패를 하는 일도 있다.
문제는 우리 대표팀이 졌다고 해서 엄청난 비난을 하는 데 있다. 항의전
화에 이어 우리 대표팀에게 돌을 던지고, 수시로 똥침을 놓는다. 그들이 그
럴 자격이 있느냐 하는 것은 나중 문제고,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하는 것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2. 언론의 힘과 책임
우리 사회에 있어 가장 먼저 숙정되어야 할 분야가 바로 언론임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을 것이다. 다른 이유는 차치하고 오직 스포츠 문제
에만 국한시켜 보겠다.
무슨 대회가 있으면 우리 언론은 앞다투어 한국이 꼭 우승할 것으로 확
신하는 보도를 한다. 우리 국민들은 순진하다. 신문에, 혹은 방송에 보도가
되면 대부분 그것을 믿는다.
월드컵 예선전이나 아시안컵에서 우리 언론이 '한국축구, 본선진출 턱도
없다.' '우승 가능성, 낙타가 바늘구멍'이라고 쓴 기사를 본 적이 있는지.
이번 청소년축구에서도 예외없이 우리 언론은 '역대 최강의 전력'으로
1983년 4강 신화를 재현할 것이라는 보도를 일제히 했었다. 막상 청소년
축구가 패배하고 나자 우리 언론은 "우리 청소년팀은 역대 최약체였다. 그
들에게선 어떠한 전술도, 정신력도 찾아볼 수 없었다."라는 성토성 보도를
했다.
모든 언론이 일제히 "한국축구, 이대로는 안된다!"라며 하나둘씩 문제점
을 지적해 나갔다. 그리고 우리 축구의 명맥을 이어온 유서깊은 효창구장
을 악의 온상인 것처럼 써내려갔다. 인조잔디인 효창구장이 한국축구를 사
정없이 죽인다는 것이다. 10여년 전(확실치는 않지만)효창구장에 인조잔디
를 처음 깔았을 때 언론에서는 '비가 와도 끄떡없다.'며 무지무지 기뻐했으
며, 브라질 등을 초청해서 4개국 친선 축구대회를 했던 기억이 난다. 왜 그
때 반대하지 않았을까.
모든 나라가 프로팀에서 선수를 선발했고, 고교나 대학에서 선수를 선발
한 나라는 한국뿐이라고 했다. 사전에 미리 그걸 알아내 '한국 청소년팀,
전패 탈출하면 다행'이라고 보도했으면 우리 국민들도 그리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탈락의 휴우증도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또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 언론의 엄살이다.
이번 청소년축구 조예선 편성에서 우리 나라는 브라질, 남아공, 프랑스와
C조에 편성되었다. 그걸 보고 우리 언론은 최악의 조편성이라고 했고, 아
예 '죽음의 C조'라는 얘기를 했다. C조에 속한 네나라 중 어느 나라도 우
승은커녕 4강에도 들지 못했다.
이것은 탈락을 했을 경우 휴우증을 줄여보고자 한 것일까, 아니면 몽땅
탈락할 것이라고 예측해서 '죽음의 C조'라고 했던 것일까.
3. 핸드볼 스코어
계속 축구이야기.
우리 청소년팀이 10-3으로 지자 언론에서는 '핸드볼 스코어'라는 말을 일
제히 했다. 내가 핸드볼이라는 경기를 안 것이 중 1때인데, 그 후 20년이
다 되도록 10-3이라는 스코어는 본 적이 없다.
핸드볼은 축구와 달리 손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 20-30점대에서
결판이 난다. 핸드볼 경기가 10-3이었다면 해외토픽감일 것이다. 이런 스코
어는 주로 야구에서 기록될 수 있고, 아이스하키에서도 실력 차이가 크게
날 경우 간혹 나올 수 있다.
4. 축구 전용구장을 서울에?
일단 짓고 나서 월드컵을 치른다고 하자. 많은 관중이 스탠드를 메울 것
이다. 월드컵이 끝난 그 후는?
지금 보면 3만석도 안되는 프로축구장도 경기 때마다 썰렁하기 짝이 없
는데, 6만5천석의 전용구장은 더더욱 썰렁할 것이다. 건립 비용만도 수천억
원이 든다는데, 그 돈을 경제를 살리는데 쓰는 게 더욱 도움이 되지 않을
까.
과거 축구는 우리 나라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역할을 했다.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심해졌다. 축구는 철저한 단체경기다. 개
인경기의 성격이 훨씬 강한 야구나 농구가 각광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게
다가 위성 TV의 보급 등으로 인해 안방에서 수준 높은 외국 스포츠를 보
게 된 우리 국민들 눈에는 우리 축구가 더욱 초라하게 보일 뿐이다.
우리도 일본이나 중국처럼 어린 선수를 해외로 유학보내자는 의견이 나
온다. 10살도 안되어 프로팀에서 체계적 훈련을 받는 브라질 축구팀을 이
기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벌을 무지무지 중시하는 우리 나라의
풍토에서 어느 부모가 초등학교조차 안 나오고 공만 차는 아들을 두고 싶
어할 것인가.
5. 한국축구의 장래
한국 여자하키는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두 개나 딴 종목이다. 세계 1위
호주에는 등록된 선수만도 수만명이라는데, 우리 나라는 50명 가량의 선수
층에서 국가대표를 선발하니 이 정도라도 하는 것이 거의 기적이다. 올림
픽 금메달에 빛나는 여자핸드볼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외국 보도
진이 우리 핸드볼이나 하키의 실상을 알고는 혀를 내두른단다.
1997년 청소년 축구팀은 전지훈련 비용과 외국팀 초청 등으로 쓴 돈이 9
억원 정도란다. 이 돈을 여자핸드볼이나 하키에 투자를 했다면?
난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축구에 보이는 관심과 투자의 일부만이라도
가능성있는 비인기 종목에 투자를 한다면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꼭 우리
나라가 축구를 잘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미국은 축구를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은 없다. 일본 역시 축구는 후진
국이지만 아무도 막강한 경제력을 지닌 일본을 무시할 수 없다.
일본에게 축구 한 게임 졌다고 '국치'니 뭐니 하면서 나라가 망한 것처럼
슬퍼하기보다 일본의 젊은이들보다 공부를 한 시간 덜했다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 경제는 많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발전이지 축구가 아니다.
6. 맺음말
결국 한국축구는 월드컵에 진출했다. 이렇다할 낙이 없는 우리 국민들에
게 커다란 기쁨을 주었고,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해 주었다. 국민들은 열광
했고 축구 얘기로 전국이 떠들썩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후 벌어진 국
내 축구의 총 결산 FA컵 대회 때는 역시 몇 명의 축구관계자만이 자리를
지켰다.
축구팬들에게 바라는 것은 축구에 대한 지속적인 애정과, 우리 대표팀이
잘 했을 때 보내는 찬사보다는 못했을 때 그들에게 격려와 따뜻한 말 한마
디를 건넬 수 있는 포용력이다.
다이어트와 운동
살이 찌는 것도 노화의 한 징표인 것 같다. 사람은 대개 나이가 들면서
배가 나오고 살이 찐다. 나이 30에 배가 나온 것은 참 보기에 안 좋다. 또
한 번 찌면 빼기 어려운 것이 살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만 해도 175cm에 54kg의 날씬한 몸매를 자랑했는
데, 그 뒤 조교를 마치고 군대에 가기 직전 79kg이 되었으니 무려 25kg이
증가한 것이다. 그 십 년 동안 한 번도 체중이 준 적이 없다. 원인이라면
줄곧 팽창주의를 주장하신 우리 어머님 탓도 있겠고, 사양 않고 마셔댄 엄
청난 양의 술도 중요한 원인의 하나일 것이다.
나는 살이 찌는 것이 싫었다.
먹는 것을 줄이는 것은 내 왕성한 식욕에 비추어 볼 때 불가능했기에 난
운동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수영이다. 수영은 정말 자기 자신
과의 싸움이다. 25m의 풀을 혼자서 왔다갔다 하다 보면 정말이지 지겹기
짝이 없다. 기껏해야 500m쯤 하면 하기가 싫어진다.
어느 날인가 200m를 왔다갔다 한 후 쉬고 있는데 한 사람이 물살을 가
르며 열심히 수영을 하고 있었다. 참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고 계속 관찰했
는데, 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난 무척 놀랐다. 씨름 선수를 연상케
하는 몸매였으니까. 난 물어봤다. 수영을 얼마나 했냐고. 하루 1km씩 몇
년째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난 수영을 포기했다.
그 다음 생각한 것이 달리기였는데 마라톤 선수 중에는 뚱뚱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이다. 뛰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뛴다는 것은 정말
이지 재미가 없다. 또 요즘에는 차가 가뜩이나 많아 조금 뛰려면 골목길이
라도 차가 진로를 방해한다. 그러니 점점 아침에 일어나기가 싫었다.
처음에는 약 1km 정도 뛴 것 같은데 갈수록 귀찮아졌고, 비가 조금이라
도 오면 집에서 쉬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하기가 싫어졌고, 운동을 하다가
중단하면 살이 더 찌는 법이므로 체중만 더 늘어 버렸다. 그 무렵 신문에
살을 빼기 위해 이뇨제를 과다하게 먹고 죽은 여대생의 얘기가 실렸다.
"아, 이것이군."
난 이뇨제를 먹기로 했다. 라식스(Lasix) 열알을 산 뒤 역시 살 때문에
고민하던 동료 여선생에게 두알을 내밀었다.
"우리, 두알씩 먹지요."
막상 집에 가니 덜컥 겁이 나서 한알만 먹었다. 그날밤 나는 화장실에
들락거리느라 잠을 통 이루지 못했다. 그러면서 나는 정말 많은 양의 소변
을 보았다. 학교에 갔더니 왜 눈이 푹 꺼졌냐고 한마디씩 했다.
그때 나와 같이 이뇨제를 먹었던 여선생이 들어왔다. 나를 보자마자 머
리를 도리도리 졌는데, 생각해 보라. 한알 먹은 사람도 힘들었는데, 두알
먹은 사람이 어떠했겠는가. 거의 인간의 몰골이 아니었다. 도저히 힘들어서
못 견딜 것 같아 다시는 안 먹기로 했다.
그러다가 난 군대에 갔다.
군대에서는 아침마다 운동장을 두바퀴씩 돌렸다. 꾀부리지 않고 묵묵히
따라 했다. 군사 훈련도 힘에 겨웠지만 열심히 따라 했다. 제대를 했더니
4kg이 줄어 있었다. 너무 기뻤다. 제대 후 어떻게 이 체중을 지킬 수 있을
까 하고 고민하다가 시작한 것이 테니스다.
새벽 5시면 일어나 테니스장에 갔고, 틈 나는 대로 헬스장에 가서 운동
을 했다. 그러기를 3개월쯤 했을까. 내가 올라선 저울의 눈금은 69.85kg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서 중단하면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는 강박관념이 생
겨, 난 운동을 계속했고, 그 덕에 난 지금도 70kg 내외의 체중을 유지하고
있다.
누구든지 살을 빼기 위해 식사를 줄이는 사람이 있다면 차라리 밥을 많
이 먹고 테니스를 열심히 치라고 권하고 싶다.
담배와 고등어와 나무 한 그루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아니, 한 번도 피워본 적이 없거니와 피우고
싶은 적도 없었다. 주위에서 담배를 끊기 위해 고생하는 사람을 수없이 보
았기 때문이다. 담배라는 것은 웬만한 의지가 있지 않는 한 끊기가 힘든
것이므로 아예 시작을 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왜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는 것일까.
담배를 처음 피우게 되는 시기는 대부분 대학에 들어갔을 때다. 이것은
우리가 중고교 시절에 담배를 금지하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와서 규제가
풀리자 너도나도 어른이 되었음을 만끽하기 위해 담배를 피워댄다.
담배를 중고교 때부터 금지하는 것은 담배에 대한 괜한 신비감만 주입시
킬 뿐이다. 그러니깐 담배를 국가에서 허용할 생각이라면 중고생 때도 자
유롭게 피우도록 내버려 두자는 것이 내 의견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다들 멋있게 담배를 피워 댄다. 특히 담배를 피
우면서 총을 난사했던 홍콩 스타 주윤발의 모습은 많은 청소년들을 유혹했
다. 난 정부가 중독성이 없는 대마초는 단속하는 데 비해 담배는 그냥 놓
아 두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이다.
질병의 원인에 관해 세상에 알려진 것 중 담배와 폐암과의 관계 만큼 명
확한 것은 없다. 담배를 하루 한갑씩 이십년간 피울 경우 폐암이 발현된다
는 것이다.
과거 라면에 동물성 기름을 썼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라면을 먹지 않은
것이 있다. 고름우유 파동 때도 우유소비가 줄었으며, 신문에서 뭐가 안 좋
더라 하면 사람들은 그 음식을 기피한다. 그런 사람들이 왜 담배는 그렇게
피워대는 것일까?
사람들은 길을 가면서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그러나 중간중간 멈추어
서서 휴지통에 재를 버리는 사람은 본적이 없다. 다들 길가에 털기 일쑤
다. 꽁초 역시 길가에 던진다. 분명히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면 과태료가
부과되지만 단속하는 장면 역시 본 적이 없다.
그래도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울 경우는 쓰레기통에 들어갈 확률이 조금
이나마 있다. 문제는 차에서 담배를 피우는 경우다. 찻길에 쓰레기통이 있
을 리 없다. 차재떨이에는 대부분 동전을 모아둔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
다 버리는 것일까.
난 담배 피우는 사람이 차 재떨이에 동전이나 영수증 같은 것을 넣어 두
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 재는 물론이고 꽁초 또한 창밖으로 휙 던진다. 이
걸 어떻게 경찰이 일일이 단속하겠는가.
휴대폰을 받으면서 운전을 하는 것은 사고를 유발하니 막자는 여론이 있
다. 그런데 왜 똑같이 한손을 못쓰는데 담배는 괜찮은가.
산불이 나면 대부분 담배불이 원인이라고 한다. 산불은 한번 나면 수억
원의 재산 피해는 물론이고 생태계의 파괴등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
다. 현실이 그렇다면 산에서는 일체의 담배를 허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
닌가.
담배 냄새가 사람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곳은 화장실이다. 소변, 대변냄
새가 담배 냄새와 어울려 형언할 수 없이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우리가
화장실에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5분 정도다. 그 시간을 못 참아 다른 사람
에게 역겨움을 느끼게 한다면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공중전화 부스에서도 그렇다.
그 짧은 시간을 못 참아 그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재를 털고 꽁초를 버
린다. 역겨운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도대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사회라는 것을 인식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많은 흡연자들인 것이다.
담배를 피우게 되면 목이 웬지 답답하다. 그러다 보면 침도 무지하게 많
이 뱉게 된다. 침도 침 나름인데, 나의 침처럼 맑고 하얀 색이 아닌 누런
빛깔의 혐오스런 침을 뱉는다. 입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난다. 그 냄새를 맡
으며 난 생각한다.
'Kiss는 어떻게 하나?'
운전을 하다 보면 버스 전용차로로 가거나 갓길로 달리는 얄미운 차량들
을 많이 보게 된다. 선입견인지도 모르겠지만, 갓길로 가는 사람들은 대부
분 손에 담배를 들고 있다.
흡연자들의 의식없음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지표가 바로 양담배 소비다.
1988년 양담배가 처음 개방된 이래 국내시장 점유율은 점점 상승하여 대략
12%에 달한다고 한다. 이 어려운 경제 현실을 감안할 때 말도 안되는 일
이다.
지성이라고 자부하는 우리 대학생들, 입으로는 항상 민주와 자유를 외치
고 반미 투쟁도 하지만 대학가에서의 양담배 소비율도 11.2%라고 하니 정
말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40%를 넘는 대학도 두곳이나 된다고 한다. 마땅
히 대학 이름을 공개하여 해당 대학생들에게 자성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흡연자들의 이중성 중 하나가 남이 피우는 담배 냄새는 아주 싫어한다는
것이다. 또한 흡연자들은 아무리 밀폐된 공간이라 할지라도 태연히 담배를
피운다. 우리법에 혐연권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아직은 먼일인 것 같
다.
담배 없는 세상에서 살 날은 언제 오려나.
신 아메리칸 드림?
한때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미인 여배우들이 너도나도 재미교포 사업가
와 결혼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미국 가서 사업이나
할까?"라는 자조적인 말이 오가기도 했다.
재미교포 사업가-듣기에는 참 거창해 보인다. 하지만 이들과 결혼했던
연예인 대부분이 과히 좋지 않은 결말을 가져와 우리를 더욱 씁쓸하게 했
다.
여고생 가수로 빅히트를 쳤던 이지연양이 미국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일
하고 있는 모습, '한국 제일의 다리'로 불렸던 이보희씨가 채무자들에게 쫓
기다 귀국하던 장면, 두들겨 맞다가 이혼한 최수지 등등... 이런 현상은 바
로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서 비롯된다. 미국은 고생할 각오가 선 이런
사람들에게만 바로 약속의 땅인 셈인가.
언제부터인가 요즘 젊은이들에게도 이런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긴다리
를 선호하고, TGI Friday에서 수입냉동육을 먹기 위해 긴 줄을 선다. 가슴
에 성조기가 그려진 옷을 입고, 마돈나가 유행시킨 배꼽티를 입는다.
우리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검은머리가 못내 부끄러운지 밤색, 붉은색
혹은 보라색으로 염색을 해댄다. 이런 외모적인 것은 개성의 표현이라고
강변한다면 그렇다고 치자.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언어적인 측면이다.
감탄사라는 것은 그 민족이 오랜 기간 생활하면서 축적된 문화로 그 민
족 고유의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플 때 "아야!" 하지만 미국인들은
"Auch!" 라고 한다. 의성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 조상들은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야옹."이라고 표현 한 반면 영국에서는 "Mew mew."라고 한
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역겹기 짝이 없다. 좀 어이가 없고 황당한
경우 "Oh, my God!" 이라고 하질 않나, 말끝마다 "O.K.", 조금 미안할 때
는 "Sorry." 고맙다는 말 대신 "Thank you.", 일이 잘 안 될 때는 "Shet(철
자가 맞는지 모르겠다.)"이라는 말을 쓴다.
미국에서 살다 온 경우야 이해가 안되는 바 아니지만 전혀 그렇지도 않
은 애들이 억지로, 그 말을 의식적으로 쓰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
럽기까지 하다. 그렇게까지 해서 미국인이 되고 싶어하는 아이들...
우리의 음식인 김치를 냄새가 난다고 외면하고, 말 중간중간에 되지도
않는 영어를 섞어쓴다. 이러다가는 얼마 안 가서 눈동자까지 퍼렇게 염색
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우리는 한국인이다.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찬호를 보면서 나
는 내가 자랑스러운 한국인임을 느낀다. 아무리 우리가 금발로 염색을 하
고, 파란 눈을 하고 피부를 하얗게 탈색을 할지언정 우리의 속은 한국의
것이다. 지하에 묻힌 순국선열들께 죄송스럽다.
성탄절 밤의 고등어
허정은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중충한 날씨에도 사람들의 물결이 거리
를 뒤덮고, 차량은 극심한 정체를 보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날이었건만 아직도 서울에는 첫눈이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지구의 온난화가 심각한 모양이야...'
일기예보에서는 성탄절 전야에야 첫눈이 올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었다.
'눈이 오건 말건, 나하고는 관계 없는 일이지 뭐.' 정은은 책상 앞으로 돌아
와 자리에 앉았다.
"허정은 씨, 크리스마스 계획 있어요?"
정은보다 1년 먼저 입사한 지연이었다. 몇 달 전 남자 친구가 생긴 뒤로
는 항상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져 있는 그녀였다. 원래 정은과 친한 사이었
지만 최근들어 만남도 뜸하고 사이도 많이 벌어져 있는 상태인지라 정은은
심기가 다소 불편해졌다.
"저야 뭐 교회도 안 믿는데 크리스마스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정은의 쌀쌀맞은 말투에 지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밖으로 나갔다. 정
은은 책상서랍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이렇게 이쁜데 왜 나에게는 남자 하나 없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정은은 속이 뒤틀렸다.
'평소에는 놀다가, 연말만 되면 열심히 하는 척하는 풍토가 문제야. 왜 나
같이 괜찮은 여자를 가만 두는 걸까?'
한 남자가 정은을 보고 빙긋이 웃었다. 정은이 입사했을 때부터 줄기차
게 관심을 보여온 윤경식 대리였다. 정은은 처음 볼 때부터 경식이 싫었다.
나이가 무려 33세나 되면서 5살 연하의 자신을 흠모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그 나이가 되도록 겨우 대리에 머물고 있는 것도 그의 능력없음을 말해 주
고 있었다.
'말을 더듬지 않나, 평소 침을 질질 흘리질 않나...'
정은은 그가 자신을 쳐다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허탈해진
정은은 신문지를 펴놓은 채 비듬을 털기 시작했다.
"야, 눈오네."
이원규의 말에 정은은 독기 띤 눈으로 이원규를 쏘아 보았다.
"남이야 비듬을 털든 말든 무슨 상관이어요? 당신도 털면 되지."
이원규는 머쓱해져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정은은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요즘 들어 부쩍 짜증이
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정은은 깜짝 놀랐다.
'이게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것인가?'
커피를 뽑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으나 동전은 없고 마침 오징어 다리 한
개가 손에 잡혔다. 계단에 앉아 오징어 다리를 뜯고 있던 정은에게 한 남
자가 다가왔다.
아까 무안을 당했던 이원규 대리가 커피 두잔을 손에 든 채 정은의 옆에
걸터 앉았다.
"드세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손에 드니 정은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
았다.
"왜 남자들이 정은 씨에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아요?"
이원규가 대뜸 입을 열었다. 돌연한 질문에 정은은 마시던 커피를 뿜어
바지에 쏟고 말았다. 이원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정은 씨는 얼굴도 이쁘고 날씬해요. 멋있는 외모만으로 충분히 관심을
끌만 하죠. 그런데..."
이원규는 주머니에서 문어 다리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정은 씨보다 훨씬 안 이쁜 윤지연이 사내 커플이 된 것은 지연 씨가 남
의 말을 끝까지 들어줄 줄 알고, 남이 보지 못하는 세세한 면을 보아 준다
는 점 때문이죠. 남자란 말이죠, 정말 단순한 동물이예요. 누군가가 자신의
내면을 진지하게 어루만져 줄 때 이 여자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정은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기특하게 여긴 이원규가 허정은을 바라보니
정은은 이미 잠에 빠져 있었다. 이원규는 정은을 흔들어 깨웠다.
"어,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정은은 입가에 번지 침을 닦았다. 이원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
다.
"정은 씨가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안 갖는다고 불평하고 있다는 것,
다 알고 있어요. 왜 정은 씨가 다른 사람에게 먼저 관심을 가지면 안 되는
거죠? 얼굴이 이쁜 여자들의 단점이 너무 자기 중심적이라는 겁니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정은은 이원규가 고마웠다. 자신에게 이렇게 직언을 해주었던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순간 정은은 계단으로 나오다가 둘의 모습을 보고 돌아가는
윤경식의 모습을 보았다. 뒷모습이 슬퍼 보였다.
"크리스마스가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안았습니다. 이번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려면 지금부터 노력해야 될 걸요! 윤경식 씨말이죠, 괜찮은 사람입니
다. 정은 씨를 정말 사랑해 줄 사람이라구요."
말을 마친 이원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갔다.
'따뜻한 여자, 허정은?' 정은은 자신의 달라질 모습을 상상해 보고는 배
시시 웃었다. 사무실로 들어간 정은은 윤지연을 보고 말했다.
"지연 언니, 옷차림이 아주 우아하군요. 싸구려 티가 하나도 안 나요."
정은은 어리둥절하는 윤지연의 곁을 유유히 스치듯 지나갔다.
"과장님, 가발 쓰시니까 너무 젊어 보이는군요. 누가 과장님을 대머리로
알겠어요?"
과장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허정은
은 아랑곳하지 않고 임동석 앞에 섰다.
"임선배, 틀니 정말 좋은 건가 보다. 진짜 이빨 같아!"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던 이원규가 돌연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이원규의 웃음을 필두로 사무실 전체에 웃음이 만발했다. 임동석도 따라
서 웃음을 지었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한 윤경식은 자기 책상에 커다란 종이 가방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게 뭐지?' 꺼내보니 그것은 무스탕 잠바였다. 늘 삼베
옷으로 겨울을 나던 윤경식이었기에 무스탕을 보자 입이 헤 벌어졌다. 경
식은 삼베 옷을 벗고 무스탕을 입었다. 그때 윤경식은 허정은이 미소를 머
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윤경식이 바라보자 허정은이 천
천히 윤경식에게 다가왔다.
"어제 밤새도록 제가 짠 거예요. 아직 저는 당신을 좋아할지 결정하지
않았어요. 당신에게 기회를 드리겠어요. 오늘 오후를 제가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세요."
사무실 내에 박수가 터졌다. 이원규는 손이 부서져라 박수를 쳐댔다. 윤
경식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무스탕을 벗었다.
"저,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나 오늘 약속이 있거든. 얼마 전에 선을 봤
는데..."
그 다음 계속되는 말들을 정은은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정은은 말없이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퇴근시간이 조금 지나서 정
은은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께서 정은을 보고 말씀하셨다.
"얘가 꼭 성탄절 이브만 되면 빨리 오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밥 차려
줄게."
허기가 몰려와 정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찬으로 고등어가 나왔
다.
"성탄절에는 고등어가 최고여!"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셨다.
"어머니..."
정은은 목이 메었다. 고등어 가시가 목에 걸렸지만 정은은 아프지 않았
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숭고하다.
세기말의 패션 문화
우리 경제가 불황의 단계를 넘어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누
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외제품 안쓰기와 사치성 소비재 수입을 억제하자
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미국은 그것을 불공정 거래로 규정짓고 우리나라를
WTO라는 곳에 제소하겠단다.
80년대에 이르러 미국 경기가 침체되었을 당시 엄청난 국산품 애용운동
이 일어났고, 브루스 스프링스턴이란 가수는 미국 제품을 쓰자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기까지 했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다소 어이없는 일이다. 또 카
다피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든다고 리비아를 전투기로 폭격하는 것도 말이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자지 사실 깡패나 다름없다.
미국은 6, 25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은인의 나라고 지금도 주한 미군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미국은 참 좋은 나라며, 미국
이 다른 나라와 운동 경기라도 벌일라치며 열렬히 미국을 응원했던 기억이
난다.
지난 1980년, 광주민주화 항쟁 때 신군부에 진압을 승인했다는 이유로
불붙기 시작한 반미 감정은 갈수록 심해져 미국 대사관이나 문화원이 시작
한 반미 감정은 갈수록 심해져 미국 대사관이나 문화원이 점거 혹은 방화
를 다하는 일까지 있었다. 지금도 대학가에서는 반미 감정이 높으며, 미국
이 우리에게 부당한 내정간섭을 많이 한다고들 생각한다. 어느 대학인가에
서는 47%가 미국이 싫다고 했던지 하여튼 그렇다.
그런 대학생들이 최근들어 부쩍 미국 성조기가 그려진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것뿐 아니라 UCLA, Harvard 등 미국의 명
문대학 이름이 쓰여진 옷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것 역시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발상이 아닌가 싶다. 자신이 다니는 대학을 자랑스러워하기보
다는 미국의 대학들을 동경한다는 뜻일까.
어느 누구도 태극기가 가슴에 새겨진 옷은 입지 않는다. 베를린 올림픽
때 손기정 선수는 그토록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싶어했다. 지금은 누가 말
리는 것도 아닌데 왜 태극기가 그려진 상의를 입지 못하는지.
과거 <원더우먼>이라는 TV프로그램에 나왔던 린다카터는 매국노라는
비난을 사야만 했다. '미국 국기를 가지고 빤스 해 입었다.'고. 미국인들은
그렇게 자국의 국기를 아끼는데, 우리 학생들은 왜 이다지도 태극기에 대
한 애착이 없을까. 고등학생들은 대학생의 행동을 모방하는 경향이 있는지
라 고교생들까지도 성조기 옷을 입고 다닌다.
국경일 때 국기를 다는 집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게 현실이다. 태극기가
진정 사랑받는 날은 언제나 올까. IMF로 인해 요즘 외제가방 상표에 태극
기를 덧붙여 메고 다니는 고등학생들이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버님의 사랑
나의 아버님께서는 무척이나 무서우신 분이다. 어릴 때 아버님께서 퇴근
하시면 항상 불안해했으며, 그런 날에는 어김없이 두들겨 맞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날 잘 되라고 때리는 것이었지만 어린 나는 그런 것을 알지 못
했고, 다만 내가 잘못한 일을 아버님께 일러바친 어머님을 원망하기만 했
다.
세월이 흘러 내게도 조카라는 것이 생겼다. 누나가 애를 키우며 고생하
는 모습을 보면서 난 나의 부모님도 날 그렇게 키우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
게 되었고, 체벌의 필요성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어릴 적 아버님께서는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를 어느 날인가 계단에 매어
놓으셨다. 갑자기 자유를 잃어버린 고양이는 밤새 "야옹야옹." 울었다. 털
달린 동물을 이뻐하는 우리 형제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동생이 말했다.
"형, 우리 고양이 풀어주자."
난 즉각 동의했고 계단을 살금살금 내려가 고양이에게 갔다. 줄을 어찌
나 꼼꼼하게 매셨는지 도저히 풀 수가 없어 난 가위를 가져와 끈을 잘라버
렸다. 올라오는데 동생이 발을 헛디뎠는지 "꽈당!" 소리를 냈고, "누구냐!"
소리와 함께 아버님께서 나오셨다.
우리는 겁에 질려 방으로 뛰어올라갔다. 자는 척을 했지만 플래시를 얼
굴에 들이대는 아버님을 속일 수 없어서 우리는 마루로 끌려나가자 먼지나
게 맞았다.
아버님께서는 그 무서운 가운-붉은색 계통의 체크무늬였는데, 우리를 때
릴 때면 꼭 그 가운을 입고 계셔서 우리는 그 가운을 '무서운 가운'이라고
불렀다. 내가 체크무늬옷을 잘 입지 않는 것이 여기서 기인한다-을 입고
계셨는데, 어린 가슴에 그 당시의 공포는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지금 생
각해 봐도 그렇게 한밤중에 맞을만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싶고...
내가 고1때 난생 처음 전교 1등을 했을 때도 아버님께서는 칭찬 한마디
없으셨다.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요즈음도 아버님께서는 술
먹지 말라,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지 말라며 야단만 치신다. 지금의 아버님
은 그러나 예전의 아버님이 아니다. 지병으로 고생하시느라 많이 마르셨고,
힘도 많이 줄어드셨다.
아버님께서는 결코 날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감정 표현을 안
하는 성격이시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아버님의 진한 사람을 느낄 때가
언뜻언뜻 있었으니깐.
어느날인가 아버님께서 TV를 보시다가 거기서 소개된 횟집에 가자고 하
셨다. 아버님, 어머님과 나, 남동생, 모두 네명이 차를 타고 물어물어 파주
임진각 근처에 있는 '임진강 폭포어장'에 도착했다.
수많은 인파 때문에 우리는 이십분을 기다린 끝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할 수 있었다. 아버님께서는 향어회가 맛있다고 하셨다.
"향어 1kg을 주세요."
그랬더니 종업원이 "향어는 오래 걸립니다."라고 대답하기에 우리는 일
단 빨리 나온다는 송어를 먹고 향어를 나중에 먹을 셈으로 향어 1kg와 송
어 1kg를 시켰다. 잠시 후 송어가 나왔다. 아버님께서는 "나는 향어를 먹을
테니까 송어는 너희가 다 먹거라."고 하셨다.
나와 동생은 게걸들린 양처럼 회를 입에 넣었다. 평소 얼마나 먹고 싶었
던 회인가. 몇점 남지 않았을 때 동생이 불길한 소리를 했다.
"형, 혹시 이거 향어, 송어 합쳐 놓은 것 아니야?"
자세히 보니 두 종류였고, 색깔이 달랐다.
"저, 이거 향어랑 송어랑 같이 나온 거예요?"
그랬더니 그 종업원이 "네." 그러는 것이 아닌가. 회는 이미 몇점 안 남
아 있었고, 회를 못드신 아버님은 결국 삐지셨다.
아버님의 자식 사랑은 숭고하다...
당신도 기생충에 감염될 수 있다.
기생충 하면 사람들은 모두 회충만을 생각한다. 이제 멸종 상태에 이른
것은 사실이지만 회충이 기생충의 전부는 아니다. 아직도 전국 기생충 감
염률은 5%를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5%라고 하더라고 대략 200만명에 달
하는 숫자다.
우리가 선진국으로 알고 있는 미국, 일본, 영국 등지에서도 많은 기생충
학자들이 활발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회충이 사라짐과 동시에 우리나라
국민들은 대부분 기생충은 우리 나라와는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고, 아직도
기생충에 걸린 사람이 있냐고 묻는다. 다시 말하거니와 회충만이 기생충은
아니다.
여기서는 잘못 알려져 있는 기생충에 관한 상식을 일문일답으로 풀어보
겠다.
1. 봄, 가을 구충제를 먹어야 하는지요?
이것은 과거 회충의 감염률이 봄, 가을에 높았기 때문입니다. 정부와 기
생충학 학자들의 많은 노력에 힘입어 이제 회충은 천연기념물이 되었습니
다. 다만, 회를 자주 드시는 분들은 대변검사를 통해 반드시 기생충 검사를
정기적으로 받고 회충약과는 다른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2. 광범위 구충제란 무엇인가요?
젤콤이라는 약이 한알로 모든 기생충을 없애 주는 것으로 선전이 되고
있지요. 하지만 젤콤은 회충, 십이지장충 등 흙을 통해서 감염되는 기생충
에만 효과가 있을뿐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런 기생충들은 이미 멸종 위기에 있고, 지금 우리
나라 기생충 감염의 대부분은 회를 먹어 걸리는 간흡충(일명 간디스토마)
과 장흡충입니다. 이것들은 프라지콴텔(상품명:디스토시드)이라는 약을 먹
어야 치유됩니다.
3. 술과 함께 먹으면 알콜이 소독하므로 안전하다면서요?
하하, 참 그럴 듯한 말입니다. 이 말은 횟집 업자들이 만든 게 아닌가 싶
군요. 생선회에 들어 있는 기생충은 새끼고 사람의 몸에 들어가야 알껍질
을 깨고 어른으로 자라지요. 일단 몸안에 들어오면 십이지장의 알칼리성
환경과 그 자신의 효소에 의해 껍질을 벗습니다. 그 껍질이란 게 웬만한
것은 다 죽일 수 있는 위산에서도 견디는데, 술 좀 먹었다고 별일이야 있
겠습니까?
4. 요즘도 말라리아가 있나요?
참 희한한 일입니다. 80년대 초 멸종했던 것으로 알려진 말라리아가
1993년 외국여행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서 발견되었고, 점점 환자수가 늘어
1996년 300명을 돌파한데 이어 1997년에는 1,500명에 달할 정도로 급증세
를 보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휴전선 부근에 근무하는 군인들에게만
감염이 되어 혹시 북한이 모기를 이용해 생물학전을 펴는 것이 아닌가 하
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못하는 모기의 특성을 고려해 볼 때 그
럴 가능성은 희박하지요. 하여튼, 모기에게 자주 물리는 편인데다 몸살 기
운이 있으면서 열이 조금 오른다 싶으면 한 번쯤 말라리아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5. 사슴피를 먹으면 기생충에 걸리나요?
아, 사슴피 말입니까? 제가 기생충학 교실에 있을 때 사슴피를 먹고 온
몸에서 열이 나고 가렵다며 혹시 기생충에 걸린 게 아니냐면서 찾아오신
분이 몇 명 있지요. 물론 사슴의 혈액 내에 원충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걸
먹는다고 사람이 걸릴 염려는 없습니다.
일시적인 현상이니 가만 놔두면 없어질 것입니다. 다만 이 자리를 빌어
하고 싶은 말은 사람이 사람 피를 먹으면 드라큐라라고 욕을 하면서 사슴
피는 왜 먹습니까? 피 빨리는 사슴의 기분을 한 번이나마 생각해 보셨는지
요. 정력에 좋다는 것도 다 사슴업자들이 만든 거짓말입니다. 저도 몇 번
먹어 봤는데, 나아지는 것 눈꼽만큼도 없더군요. 오히려 더 안 좋아진 것
같아요. 괜히 비싼 돈만 버렸어요.
그리고,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씨 머리 하얗잖아요. 그게 다 사슴피 때문
이래요. 정말이라니깐요. 민주산악회 시절 회원들이랑 산에 다니면서 사슴
몇 백마리 작살내면서 피 먹었대요. 그래서 서석재 씨, 김덕룡 씨 같은 사
람도 젊은데도 다 머리가 하얗잖아요.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이지, 우리 사슴들이 인간에게 언제 피해 입힌 적
있나요? 왜 예쁘기만 한 사슴 뿔 잘라먹고, 간 떼어먹고, 피 빨아먹고, 고
기 구워 먹고, 가죽 벗겨 옷 해입고, 머리는 박제해서 걸어놓고 그러는가
요. 정망 사슴의 권리가 보장되는 나라에서 살고 싶어요.
6. 기생충에 걸리면 왜 영양실조에 걸리죠?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하하, 그 말은 마치 옛날 프랑스 공주가 빵을 달라고 시위하는 군중들에
게 "빵 없으면 스파게티 먹으면 되지..." 라고 했던 것과 비슷하군요. 물론
기생충은 먹어 봤자 얼마 못먹습니다. 그래서 "걸려도 밥 한숟가락 더 먹
으면 괜찮겠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기생충이라는 것이 본래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 많이 감염되지
요. 그러다 보니 칡뿌리를 뜯으며 겨우 연명하는 사람에게 기생충이 식량
을 뺏어 먹는다는 것은 엄청난 타격입니다. 이해가 되나요?
7. 애완동물에도 기생충이 있나요?
물론 있지요. 학교에서 고양이 실험을 할 때 대변 검사를 해보면 고양이
회충의 알이 엄청나게 나옵니다. 설마 하고 배를 갈라 보면 고양이 회충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지요. 이렇듯 동물들은 위생개념이 엉망입니다.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해서 개회충에 감염이 되면 간이 상처를 받을 수 있
으니 개를 만진 손으로 뭘 먹거나 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8. 말씀 감사합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예, 광절열두조충이라는 기생충이 있습니다. 농어나 연어같은 비싼 생선
을 먹어야 걸리는데, 어느 고관의 부인이 그 기생충에 감염되었습니다. 몹
시 충격을 받으셨는데, 계속 "나 같은 인텔리가 왜 기생충에..."라고 한탄을
하더군요. 이렇듯 기생충은 학벌이나 인물, 성별을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
누구도 기생충에 걸릴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추신: 참, 이 자리를 빌어 한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시금치 같
은 것을 먹으면 섬유질이 소화되지 않고 그대로 나올 수 있습니다. 딱 보
면 길다랗고 가늘어 기생충이라고 판단해서 정성스럽게 포장을 한 뒤 그걸
가지고 기생충학 교실을 찾아오시는 분이 있는데, 제발 그러지 마세요.
기생충은 그래도 그럴 듯하게 생기고,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금치 쪼가리를 가지고 와 기생충이라고 우기면 기생충에 대한 모독이다,
뭐 이런 얘기입니다.
학벌이 지배하는 사회
까마득하게 느껴지지만, 내 고교시절은 참 멋없게 흘러갔다. 오로지 공부
만 해야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 우리를 공부 못
하게 만드는 것들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놀아보았자 수다나 떨고, 전자오
락실에 가고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요즘에는 가수 클론과 터보, 김건모, 신승훈이 있고, TV를 보면 이쁜 애
들이 너무 많아서 눈이 부시다. 게다가 요즘 애들은 지나치게 조숙하여 고
등학교 재학생이 미스코리아에 뽑히는 일조차 생기고 있다.
지금 내가 다시 고등학생이 된다면 이런 갖가지 유혹을 떨치고 공부에만
전념할 의지 가 있을까 싶다. 게다가 수능시험조차 너무 어려워져 이해보
다는 암기만을 주로 했던 내가 과연 대학에 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조차
생긴다.
지금은 한물 갔지만 당시엔 갤러그라는 파리 잡는 오락이 유행했었다.
우주선을 이용해서 파리와 바퀴벌레, 모기, 벌 등을 죽이는 것인데, 지금이
야 별 희한한 전자오락이 많지만 그 당시는 특별히 놀만한 게 없던 탓에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갤러그의 유혹을 못이겨 틈만 나면 오락실에 갔고, 다녀와서는 내 의지
의 약함을 탓하느라 나뭇가지를 꺾어 스스로 종아리를 때리기도 했다. 물
론 살살 때렸는데 남들이-나를 존경하던 애들이 몇 있었다. 왜냐하면 공부
를 잘 한다고-내가 종아리 때리는 장면을 보면서 역시 뭔가 다르다고 감탄
하고 그러던 기억이 난다.
도서관 밖에서 애들하고 수다를 떠는 것도 또 다른 낙이었다. 일이십분
이면 괜찮지만 한시간, 두시간이 될 때가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시간이 좀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자리를 뜨지 말자!"
그래서 난 집에서 노끈을 가져와 의자에 나를 묶었다. 화장실에 갈 때도
의자를 등에 메고 다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한심한 짓거리였지만 친
구들과 도서실 아저씨는 나를 대견해 하셨다. '의지의 상징' 쯤으로 생각하
는 듯했다.
내가 다니던 도서관은 벽이 얇은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합판과 합판 사
이로 여학생방이 희미하게 보였다. 각도가 좁아 기껏해야 여학생의 등만
볼 수 있었지만 그것만 봐도 참 행복한 일이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여학생, 잠도 어지간히 많이 자서 내가 볼 때마다
엎드려 잠만 잤다. 하지만 그 당시는 사춘기라 그 여학생이 '잠자는 공주'
처럼 느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애들이 실컷 보고 난 뒤 내가 볼
라치면 어김없이 도서관 실장님이 지나가다 그 광경을 보시곤 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무지하게 혼났을 테지만 실장님은 나에게 다가와서는
몇 대 두들겨 패시곤 밖으로 내쫓는 것에 그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밖
에만 나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여학생의 등-특히 요즘같이 노출이 심한
시대에는 액면 그대로의 등도 볼 수 있다-을 뭐 그렇게 보려고 했는지 이
해할 수 없다. 그런 것이 바로 사춘기고, 그래서 난 지금 애들의 고민을 이
해할 수 있는가 보다.
고3이 되자 하루에 한시간 반씩 즐기던 오락에 회의가 들었다. 그 시간
을 차라리 늘 부족하기만 한 잠을 자는데 쓰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미쳐 난 오락을 끊기로 했다.
항상 남들에게 내 의지를 보임으로써 감탄을 자아내던 나는 어떡하면 더
존경을 받을까 궁리하다가-어차피 갤러그에는 점점 싫증이 나던 때였다-
'오락 안해'라고 혈서를 써서 도서관 책상머리에 붙여 놓았다.
핀으로 손가락을 살짝 찌른 뒤 다시 찌르는 불상사를 없애기 위해 마구
짰다. 겨우 4자를 쓰는데도 피가 모자라 침을 조금 섞었다. 물론 침 섞은
티는 나지 않았지만, 하여튼 그랬더니 도서관 내에서 난리가 났다.
"저 의지력을 보라. 정말 민이를 본받아야 돼."
찬사가 등뒤에 쏟아졌다. 사람들, 특히 여학생들조차 그 소문을 듣고는
날 동공이 풀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어떤 학생은 "피 치고는 너무
묽은데, 물 탄 것 아냐?"라는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했다가 애들로부터 엄
청난 따돌림을 받았다. 그만큼 혈서 사건은 애들 사이에서 전설이었다.
난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듣는 것을 잘 못한다. 그건 치명적인 약점이다.
수업에 별반 관심이 없다보니 잡념이 생기고, 잠을 자게 된다. 내가 잠을
자면 남들-아까 그 애들-이 이렇게 말한다.
"서민 좀 봐. 밤에 안 자고 공부를 얼마나 했으면 저렇게 자겠어?"
수업시간에 지루해서 소설책을 읽었다. 역시 그 애들이 말했다.
"서민은 공부만 잘 하는 게 아니라 교양까지 갖추는 데, 우린 뭐냐."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식으로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다 미
화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나는 서울대 의대
에 갔다. 대학에 가니깐 다들 머리 좋고 공부 잘 하던 애들 천지였다. 해도
안 될 것 같아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팡팡 놀았다. 그래서 결국 어중간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남들은 서울 의대를 졸업했다는 사
실만 중시할 뿐 몇 등으로 졸업했는지 묻지 않는다.
왜 그럴까.
물어봐도 내가 대답 안 해줄까봐 그러는 것일까?
지금의 입시지옥은 대부분이 서울대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특수고교의
내신등급 문제로 자퇴를 하네 마네 하는 소동이 벌어진 이유도 서울대에서
특수고에 대한 내신을 관례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장승수 씨의 책은 한때 베스트셀러가 되었
다. 이것은 장씨가 서울대 법학과에 합격한 데서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론의 보도 역시 서울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명문고교란 단지 서울
대에 몇 명이나 보냈는지에 따라 정해진다. 왜 이렇게 서울대에 많은 관심
을 쏟고, 못 가서 안달하는지는 다음의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
1933년 이후 임용된 장, 차관급 인사 300명 중 서울대 출신은 60%에 이
른다. <월간조선> 96년 8월호에서 우리 나라 정계, 관계, 재계, 언론계, 법
조계 최상층부 845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서울대 출신은 52.2%에 이
른다고 한다(이 통계는 강준만 교수가 쓴 <인물과 사상> 1권 182쪽에서
인용했습니다)
서울대 교수였다가 총리나 장관이 되어 정,관계에 입문한 사람은 또 얼
마나 많은가. 가까이는 이수성 전총장부터 이홍구 전총리, 내 친구의 아버
님인 이현재 전총리 등등... 이러니 나라도 자식이 있으면 서울대에 보내고
자 온힘을 쏟지 않겠는가.
그런 면에서 내가 서울대를 나온 것은 정말 다행이다. 남달리 이해력이
부족해 남이 한번 말하면 잘 알아듣지 못하고, 조금 어려운 책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고, 실험에 있어서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낸 적은
아예 없으며,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아는 것만큼도 설명을 잘 못하는
나다.
그럼에도 나는 "야, 그래도 서울대 나왔대!"란 말로 버티고 있다. 만일
내가 서울대를 나오지 않았다면, 정말 무지하게 구박받았을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서울대만 졸업하면 평생 그 사실을 우려먹고 살 수
있으니 아무리 비싼 과외를 하고, 합격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더라
도 남는 장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사회에 나와서 경험해
본 결과 실제로 서울대 출신이라 함은 엄청난 프리미엄인 것이 사실이다.
내가 서울대를 나오지 않았고, 의사가 아니었더라도 이렇게 삐삐소설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고교생들에게 먼저 인간이 되라고 강요하기보다 우리기성 세대들의 시각
부터 변해야 하겠다. 인간성이 안좋아도 나중에 보면 공부 잘해서 좋은 대
학 갔다는 것으로 인간성이 아름답게 승화되어 버린다. 이 어찌된 비극이
란 말인가.
아! 공중보건의
공중보건의란 말 그대로 군대에서 별로 필요하지 않은 의사를 말한다.
의사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군대에서 필요로 하는 수요(군의관)를
능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야전 부대나 전시에 꼭 필요한 정형외과, 일반
외과 전문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의사는 공중보건의로 군복무를 하게 된다.
물론 군대에서도 내과, 정신과는 물론이고 산부인과, 소아과까지 최소한
의 인원은 있어야 하므로 전문의 가운데 신체 건강한 의사는 군대에 끌려
간다. 또, 군대의 노령화를 막기 위해서 인턴을 마친 젊은 의사들도 대부분
입대하게 된다.
군의관과 공중보건의의 차이점은 공보의는 많은 자유를 누리는 반면 군
의관은 군대라는 점에서 여러 가지 속박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공중보건
의-이하 공보의로 호칭한다-의 경우 출퇴근 시간에 다소의 융통성을 가질
수 있고(물론, 공보의 대부분은 근무시간을 잘 지킨다), 경우에 따라서는
퇴근 후 아르바이트 등을 함으로써(여기서 아르바이트라 함은 병원에서 당
직을 서는 게 아니라 수험생들에게 과외를 시켜 주는 일이나 농번기 때 모
내기를 돕거나 무를 뽑아 준다든지 하는 일 등을 말한다)약간의 부수입을
올릴 수가 있다.
사실, 전문의 나이가 보통 서른 정도고, 그 나이면 대부분 처자식이 있게
마련이다. 군의관의 월급이래봤자 이것저것 다 합해야 월평균 80만원 정도
니 그걸로 생활을 하자면 어렵기 짝이 없다. 하여튼, 이런 저런 이유 때문
에 모두들 공보의가 되고자 한다.
공보의냐, 군의관이냐의 결정은 군의학교에서 일주일간 받는 신체검사
때다. 이 신체검사에서 되도록 낮은 등급을 받기 위해 모두들 동분서주한
다.
나야 애당초 기초의학을 했으니 군대에서 하등 필요 할 까닭이 없어 아
무 생각없이 갔는데, 가보니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진단서 두세개씩은
떼어놓은 상태였다. 농구를 무척 잘 하는 내 친구도 고혈압에다 근전도장
애와 비뇨생식기 이상의 진단을 받았으며, 알레르기성 비염과 난시 정도는
대부분이 갖고 있었다. 의사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환자 수용소 같은 느낌
을 주었다.
결국 군의학교에 입소한 1700명 중 150여명이 군복무 면제 판정을 받았
다. 군의관 신검은 일반 현역병의 신검보다 훨씬 까다롭게 마련인데, 해마
다 200명 가까운 사람이 면제가 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놀라웠다.
다각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군의관 입대로 결정된 600명은 굳은 표정으
로 영천행 버스를 탔으며, 공보의 해당자인 나머지 900여명은 환희에 찬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공인의 힘과 책임
삐삐소설이라는 게 신문에 공개되면서, 졸지에 나는 삐삐를 엄청나게 많
이 받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매일같이 아침에 일어나면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해 삐삐에 녹음을 한다.
대본을 미리 써두지는 않는다. 대본을 보고 읽게 되면 우선 내가 지겨움
을 느끼고, 그럴 경우 내용이 참신하지 못하고 발전이 없기 때문이라는 판
단에서였는데, 매일매일 떠오르는 생각을 쓰다보니 내용 연결이 잘 안되는
단점이 있기도 하다.
처음 삐삐소설을 시작한 동기는 이왕 삐삐가 생겼으니 호출이 많이 오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고, 나에게 호출을 하는 사람을 잠시나마 즐겁
게 해주자는 생각, 그리고 남과 다르게 살고자 했던 내 생활방식 뭐 대충
이런 것들이었다.
하여튼 처음에는 내가 좋아서 한 일이었고, 그러기 때문에 남들이 많이
들어 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2년여를 연재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거기서
얻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쓴 책이 바로 <소설 마태우스>다.
96년 가을 책을 내고 나서 여러군데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
니 삐삐소설이 알려지자 하루 호출 횟수가 1,000여회를 넘어서게 되었다.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최고 인기프로에 출연한 후로는 거의 1만여통을
넘는 호출이 내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호출에 일일이 응답을 못하는 것에 늘 미안함을 느끼며, 열 개밖에 안되
는 메시지의 용량이 작음을 안타까와했다. 그 중에는 "당장 집어치워라,"
"죽여버리겠다." 등의 협박과 욕설을 녹음해 놓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내게 큰 격려가 되어주었다. "오빠 소설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라는
말을 들으면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자신을 채찍질하기도 했다.
이러기를 6개월, 97년 3월 이후 내가 방송을 전면 중단-사실은 잘린 것
이다-한 이후 내 인기는 점점 시들해져서 이제는 하루 2백통이 올까말까
하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호출해오는 사람에게 모두 응답해줄 수 있게 되
었다.
아침에 생각나는 것을 소설로 남기다 보니 전날 짬뽕을 먹었으면 "마태
우스는 짬뽕을 먹고 이를 쑤셨다." 라고 하기 일쑤고, 기분이 안 좋은 때는
"마태우스는 길가는 사람을 괜히 두들겨 팼다."라고 녹음하기도 했다.
독자가 많아지면서 '좋아서 한다'는 삐삐소설이 점점 부담으로 작용했다.
하루만 재미가 없어도 "이제 아이디어가 고갈되신 모양이죠?" "집어치워
라!" 등의 메시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다음과 같은 메
시지를 들었다.
"제 동생이 다음주 화요일이면 군대를 갑니다. 지금 연재하시는 것 가능
하면 다음 월요일까지 끝내 주시겠습니까? 참, 동생이 그 이후에도 삐삐소
설을 테이프에 녹음해서 보내달라는 군요. 혀가 조금 짧으신 것 같은데 발
음에 조금만 신경을 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열심히 해 주세요, 화이
팅!"
세상에, 내 소설을 녹음까지! 그때 나는 생각했다. 이 소설은 나와 독자
의 약속이다. 한명이 듣더라도 나는 최선을 다해서 이것을 할 것이며, 좀
더 재미있게 하기 위해 노력하리라.
우리 과는 지방출장을 참 많이 간다. 내방이 아닌, 여관방이나 공중전화
에서 녹음을 하자면 조금 쑥스럽기도하고, 마음이 불안해서 무슨 내용을
할지 생각이 안난다. 음질도 좋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대충대충 수준이 낮게 녹음을 하고 나면, 서울에 와서도 연결상 계속 저
절로 가기 마련이고, 그러다 '인기하락으로 조기 중단한다.'는 말과 함께 연
재를 마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방출장을 간다든지, 내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잔다는 것이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메시지를 남겨 준다.
처음에는 소설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지만, 나중에는 다들 자
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내가 메시지를 잘 지워놓지 않기 때문에, 혹은 힘
에 부쳐서 메시지를 못 지워 녹음할 공간이 없더라도 그들은 계속 내 소설
을 들어준다.
나에게 고민을 말할 때면 내가 그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느낌이 들어 고
맙기 짝이 없다. 소위 말하는 팬레터를 보내주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캥
거루 인형을 보내준 분도 있다. 다 복에 겨운 일이다. 요즘 얼마나 스타가
많은데 나한테까지 신경 써 줄 팬이 있단 말인가. 그만큼 우리나라 여중,
여고생들은 중압감에 시달리고, 그 탈출구로 내게 삐삐를 치는 것 같다.
한 번은 내가 심한 목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다.
웬만하면 소설을 연재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아 비참한
목소리로 "저 너무 아프거든요. 오늘 하루 쉴게요."라고 남겼다. 그랬더니
쾌유를 비는 메시지가 엄청나게 쇄도하고, 어떤 학생은 거의 우는 목소리
로 "빨리 나으세요."를 연발했다. 정말 고맙기 짝이 없다.
잊을만 하면 연예인들의 추태가 보도된다.
신은깅(가명)의 음주운전, 김흥군(본명 아님)의 음주 뺑소니, 일부 가수들
의 대마초 흡연 등등... 스타는 공인이다.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팬들은
열광한다. 인기를 먹고 사는 사람이 바로 이들 스타들이기에 행동 하나하
나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이들의 일탈 행위는 이들을 지켜 보는 팬들에
대한 가증스러운 배신이다.
호랑이는 무얼 알고 있었을까?
(1998년 2월 12일, 음력 대보름이었다. 그날 진주의 한 동물원에서는 조
그마한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 안에 갇혀 있던 호랑이 한 마리가 담장을
뛰어넘어 동물원 안을 배회하다가 30분만에 사살되고 만 것이다.
1. 호랑이해라서 안된다?
신문의 독자투고란을 보니 이런 글이 눈에 띄었다.
'호랑이해에 호랑이를 죽이다니..'
그건 말이 안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닭의 해에는 닭을 죽이면 안된다
고 생각하는 것일까. 소의 해에 소가 죽는 것에 대해 이처럼 분개했을까?
닭 한 마리든 호랑이 한 마리든 다 똑같은 생명이다. 그런 차별이 존재하
는 사회가 참다운 민주사회일 수 있을까?
2. 사람의 생명은 호랑이보다 귀하다.
아무리 우리 안에 오래 갇혀서 맹수의 본능이 퇴화되었다고 해도 호랑이
는 호랑이다. 호랑이를 쏜 그 경찰도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일제 치하에서 친일파로 일하던 사람을 욕한다. 친일파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뭐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 시
대에 살아보지 않고 그 상황에 처해 보지 않는 이상 무턱대고 비난할 자격
은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남의 일은 너무 쉽게 생각한다.
"아니 왜 호랑이를 죽였어? 마취총을 쏘면 되지."
마취총을 쐈다고 금방 호랑이가 쓰러지는 것은 아니다. 작용을 하려면
최소한 30분 정도가 필요하다. 그 30분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책임은
누가 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한방 쏘면 30분 걸리니 3방 쏘면 10분만에 마취되잖아."
이 말에 대해서는 나도 언급을 회피하겠다. 정말 무식에는 끝이 없는 것
같다.
하여튼 5m나 되는 우리를 넘은 호랑이가 3m 높이의 동물원 담장을 넘
어 시내로 나간다면? 만일 시민이 하나라도 생명을 잃거나 크게 다친다면,
경찰은 어디서 뭘 했냐고 비난여론이 들끓을 것이다. 정권교체기라서 다들
복지부동하고 있다느니 뭐니 하며...
자기, 혹은 자신의 아들이 호랑이에게 물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호랑이
해니깐 호랑이를 죽여서야...'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호랑이를 죽이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가장 좋은 것이 호랑이를 설
득해서 우리로 되돌리는 것이고, 마취를 해서 우리로 옮기는 것이 차선이
다. 최악의 선택은 호랑이를 사살하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가 호랑이가 밖
으로 나가 한바탕 난리를 편 다음에 쏴죽이는 것이다. 첫 번째, 두 번째가
힘들다면 당연히 세 번째를 택해야 하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경찰은 임무
를 다했다.
3. 호랑이는 뭘 알고 있었을까?
아무튼 호랑이는 우리에서 나간지 30분만에 사살되었다. 왜 그렇게 빠른
시간에 죽였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동물원 법규(그런게 있는지
잘 모르겠다)에 의하면 동물 탈출시 최소 1시간은 관찰하면서 갱생의 기회
를 준다.
하지만 이번 경우 경찰은 연락을 받고 출동하자마자 호랑이를 작살냈다.
혹시 호랑이가 무슨 비밀을 알아버린 것이 아닐까. 진주면 전두환 전 대통
령의 고향인 합천과 가까우니 혹시 5공과 관계가 있을지도?
의혹의 그림자를 느낀 필자는 보잉기를 타고 진주동물원을 찾아 갔다.
기자들은 이미 다 철수한 뒤였지만 '한국호랑이 연맹'이라는 단체에서 피켓
을 들고 시위를 하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한국 호랑이연맹?
우리나라에는 정말 별 희한한 단체가 다 있구나 하는 생각에 머리띠를
두르고 앉아 "호랑이 살려내라." "호랑이해에 웬 망발이냐."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는 사람에게 이 단체가 언제 생겼으며 무슨 일을 하는지를 물었
다. 그 사람의 대답은 이랬다.
"나도 잘 모릅니다. 지나가다가 어떤 사람이 머리띠랑 피켓을 주면서 앉
아만 있으면 일당을 준다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몇 명에게 더 물어보았다. 하나같이 고개를 저
었고, 몇 명 더 물어보려는데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사람이 날 불렀다.
"이봐요, 당신 뭡니까?"
나는 웬지 무서운 생각이 들어 일단 그 자리를 피했다. 동물원에 가서
내 신분-공중보건의-을 밝히고 호랑이 담당 사육사를 불러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어제 그만 두었단다. 연락처라도 좀 알아볼까 했는데 일체 모른
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연락처도 모릅니까?"
"아 글쎄, 내가 어떻게 알아요."
동물원장은 오히려 화를 냈다. 시간을 보니 점심시간이 좀 지나 있었고
더 있어봤자 뾰족한 수도 없었기에, 동물원을 나와 인근 식당으로 갔다.
4. 왜 나를?
"육개장 시킨 지가 한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계속 기다리라고만 하면 어
떡합니까?"
난 식탁을 치면서 마구 화를 냈다. 몇번이고 재촉을 한 끝에 육개장이
나왔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 나와 친해진 식당집 개의 머리를 몇번 쓰다듬
은 뒤 육개장 안에 있는 고기를 꺼내어 개에게 먹였다. 개는 덥썩 받아 먹
더니 꼬리를 쳤다.
"식당집 개라고 뭐 얼마나 잘 먹겠니..."
난 갑자기 측은한 생각이 늘었다. 그 때였다. 개가 부들부들 떨더니 그냥
뻗어 버리는 것이다. 옆구리에 캥거루 모양의 자국이 선명히 새겨졌다.
"키프로코스..."
먹으면 온몸에 캥거루 모양의 문신이 새겨지며 죽는다는 그 독약. 난 자
리를 박차고 나와 주방을 뛰어들었다. 식당 주인은 온데간데 없었다. 낌새
를 눈치채고 달아난 것이 분명했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왜 나를?"
밥맛이 없어진 나는 진주경찰서를 찾아가 어제 호랑이를 쏜 경관을 찾았
다. 예상했던대로였다.
"어제 날짜로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서..."
나는 연락처를 물었는데, 뜻밖에 전화번호와 약도까지 가르쳐 주었다. 나
는 다소 희망에 들떠 경찰서를 나왔다. 공중전화부스에 가서 적어준 번호
로 다이얼을 돌렸다.
"여보세요?"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임동석 순경 있습니까?"
"그런 사람 없는데요?"
"혹시 이사온지 얼마 안 되시나요?"
"여기서 십년째 살고 있습니다."
전화는 뚝 끊겼다. 난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약도를 들고 집을 찾아가 보니 사철탕 집이 나왔
다.
'이제 어쩐다?'
나는 동물원에 다시 가보기로 했다.
5. 타조 우리
호랑이가 있던 우리로 갔다. 숫사자 한 마리와 새끼사자 세 마리가 웅크
린 채 자고 있었다.
'이 높은 담장을 어떻게 뛰었을까? 호랑이의 점프력은 정말 대단하군.'
담장을 한바퀴 돌다보니 담장 위에 발자국이 찍힌 게 보였다. '여길 넘었
군.' 옆을 보니 호랑이의 발자국이 희미하게 나 있었다. 난 그 발자국을 따
라갔다. 발자국에 의하면 호랑이는 우리에서 나오자마자 타조 우리로 간
것이다.
'왜 타조 우리로 갔을까?'
난 점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난 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말을 안 듣는군."
험상궂게 생긴 사내 하나가 자전거 체인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왜 그러세요?. 저 관광객인데요?"
난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뒤로 한발짝 물러났다.
"휘익!"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 체인이 날아왔다. 난 몸을 날렸다. 바닥에 뒹굴면
서 난 주머니에서 500원짜리 동전을 꺼냈다.
"휘익!"
다시 체인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난 몸을 눕히며 동전을 날렸다.
"으윽!"
동전은 사내의 가슴에 정확히 박혔다. 괴로워 하는 사내의 얼굴을 몇대
갈긴 후 난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발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아악!"
저항할 새도 없이 난 맹수를 잡는 데 쓰는 그물에 갇혀 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어두컴컴한 지하였다. 건장한 사내 세명이서 나
를 지켜보고 있었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손과 발이 묶여 있었다.
"누구냐? 왜 이러는 거지?"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왔다.
"야, 왜 반말이야. 우리도 나이 먹을만큼 먹었다구."
난 다시금 물었다.
"누구세요? 왜 이러시는 겁니까?"
"어디까지 알고 있나?"
난 어리둥절했다.
"뭘 알입니까?"
다시 주먹과 발길질이 가해졌다.
"호랑이 죽은 거 말입니까?"
"순순히 불어. 안 그러면 또 때린다."
"그냥 뭐... 남들이 아는 정도..."
또다시 구타가 시작되었다. 점심을 먹지도 못한 탓에 나는 허기져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며칠을 두고 계속 고문이 이어졌다.
"순순히 불란 말야, 이 자식아!"
"정말 모릅니다."
날 걱정하고 계실 우리 가족과 여자친구, 보건원, 학교 생각에 눈물이 났
다. 온몸이 쑤셨다. 내가 울자 그들도 마음이 약해진 듯 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이 친구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아냐?"
다른 한사람도 이에 동조했다.
"얼굴을 봐. 뭘 알겠어?"
셋은 한참동안 숙의를 한 끝에 내 눈을 가리고 손발의 끈을 풀었다. 차
에 태우고 어디론가 한참을 간 끝에 나는 짐짝처럼 던져졌다.
6. 결말
난 그 후 한달간 병원신세를 졌다. 내가 입원한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날
찾았다. 상명대 미대에 다니는 장미영을 비롯해서 고3인데도 병원에서 몇
밤을 지새운 에스더, 내 교실 후배인 국상미 선생... 이분들에게 지면을 통
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난 그 뒤 호랑이의 죽음에 관해서는 잊고 살았
다.
올해는 유난히 더운 해였다. 6월에도 이미 30도를 넘나들었으며, 7월이
되자 38도를 넘는 살인적인 더위가 계속되었다. 7월17일 밤 9시 뉴스를 보
고 난 얼어 붙고 말았다.
"... 신민정당을 창당하고 전두환 씨가 총재로 취임했습니다. 장세동, 이
원조 씨등이 신당에 합류할 것을 선언하고..."
신당 창당을 발표하는 전두환 씨의 옆에 날 고문했던 사람중 하나가 서
있었다.
"한편 국민회의에서는 재산을 몰수당한 전씨가 무슨 돈으로 신당을 창당
했는지의 의혹을 밝힐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난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 창당자금은 바로 호랑이를 죽여서 판 돈이었
던 것이다.
유머의 금기에 도전한다.
남을 웃긴다는 것은 요즘같은 썰렁한 시대에 선망의 대상이다. 누구든지
유머 감각만 있다면 인종, 사상, 직업에 관계없이 스타로 떠오를 수 있다.
개그맨들의 그룹인 '컬트 삼총사'가 라디오, TV 프로의 섭외대상 1순위에
오른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시중에는 유머에 관한 책자가 여러 권 나와 있다. 그러나 그 책을 읽는
다고 누구나 다 웃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웃기는 이야기를
몇 개 알고 있는 것은 돈을 갖고 있는 것과 같아 마구 쓰다보면 밑천이 떨
어지게 마련이다.
반면 '유머의 기법'을 안다면 돈버는 기술을 갖는 것과 같아 반짝 스타보
다는 꾸준히 웃길 수가 있으며, 인생을 돌아볼 때쯤 후회 없었노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맞는 유머를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개인에게는 자신의 신체적, 언어적, 문화적 특성에 맞게 유머를 갈고
닦을 헌법상의 자유가 주어진다.
웃기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쉬운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길에 뛰어든다.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나
성급하다. 유머의 길에 들어서자마자 각광을 받으려고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미련없이 그 길을 떠난다.
나의 경우, 18년간 아무도 웃어주지 않았지만, 그러기에 더욱 노력을 했
다. 여기서 소개하는 몇가지 사례는 유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뿐더러
사회적으로 유익한 유머 구사에 길잡이가 될 것으로 믿는다.
1. 장교와 학생
의과대학에 다니다 보면 군의관 신검이라는 것을 받는다. 사병과는 달리
군의관들은 법무관, 종교인들과 더불어 다들 심드렁하고 관심이 없으며 늦
었다고 해서 결코 뛰는 일이 없다.
신검 때 꼭 지참해야 할 것이 바로 신분증이다. 창동 국군병원에 가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장교 한명이 나와 줄을 세웠다. 몇십명 안 되었는데
도 줄 세우는데 걸린 시간은 20여분. 장교는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마침내
8열로 줄을 세우고 운동장 바닥에 앉혔다. 나이도 나이고 하니 그냥 앉을
수는 없고, 다들 신문지 쪼가리를 깔고 앉는다. 신검요령에 대해 한참 설명
하고 난 뒤 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혹시 신분증 안 가지고 온 사람 있나?"
줄 뒤쪽에 있는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저요!"
장교는 화를 냈다.
"당장 나가! 그렇게 당부했는데, 신분증을 안 가지고 오나? 그럼, 여기는
뭐하러 왔어?"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데, 손을 든 학생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 신분증은 가져왔는데요?"
황당해진 장교.
"뭐야? 그럼 왜 손 들었어?"
학생의 대답이 압권이었다.
"저, 신문지를 안 가져왔는데요."
폭소가 터졌고, 장교도 웃음을 터뜨렸다. 유머란 바로 이런 것이다. 아쉽
다는 것은 그 학생이 나중에 학생들에게 둘러싸여서 계속 "정말 신문지로
들었어."라고 강변한 점이다. 그럴 때는 그냥 배시시 웃기만 하면 가치가
훨씬 올라갈 텐데...
유머란 이렇게 쉽다. 이렇듯 강한 이미지를 몇번 심어주다 보면, 웃기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고, 그러다 보면 별말 아닌데도 그 사람이 했기 때문
에 웃어주기 마련이다.
2. 내뱉은 말은 만회가 안된다.
조교를 마치고 군대 가기 직전의 일이다. 평소 워낙 인기가 높다 보니
여기저기서 환송회를 해주겠다는 요청이 쇄도했다. 그래서 난 무려 25차례
의 환송회를 받아야 했는데, 날짜도 모자라고 해서 본의 아니게 요청에 다
응하지 못했다. 연일 계속되는 술에 지쳐서 환송회를 1차에서 끝내고 밤
10시쯤 귀가해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야, 안 나오고 뭐 해? 우리 다 모여 있는데."
내가 몸 담았던 진료서클이었다. 난 빌었다.
"한번만 봐주라. 너무 힘들어서 그래."
"어, 이 자식이?" 하더니 친구 녀석은 대뜸 어떤 여자를 바꾸어 주었다.
"서민 씨, 안녕하세요?"
전화를 받은 사람은 내 친구 각시인데, 내가 늘 미인이라고 칭찬을 해대
는 사람이었다.
'이것들이 미인계를 쓰다니...'
"서민 씨, 제가 나오래도 안 나오실 건가요?"
"무슨 소리입니까? 당장 나갈 게요."
택시에 몸을 싣고, 난 다시 대학로로 향했다. 방금 그곳에서 택시 타고
왔는데 말이다. 술집에 도착하자 모두들 나를 반겨 주었다. 난 아까 전화한
친구 각시에게 말했다.
"희진 씨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미모로 랭킹 1위거든요. 희진 씨가 나
오라면 항상 나와야지요." 그랬더니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물었다.
"야, 민아. 내 각시는 몇 위야?"
그때 난 반사적으로 내뱉은 말이 "랭킹에 없는데."였다. 세상에! 그런 말
을 하다니. 말하고 나서 나는 아차 했지만 친구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갔다. 그 뒤 그 친구는 지금까지도 내게 별로 따뜻한 말을 한 적이 없다.
이렇듯 말 한마디의 위력은 큰 것이다. 만일 내가 그 순간 "0순위야!"라고
했던들...
3. 이소라의 프로포즈
남을 깔아뭉개는 유머는 구사하기가 쉽고,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이소
라의 프로포즈라는 프로에서 가수 김현철 씨가 나온 적이 있다. 그때 배철
수 씨가 "김현철씨는 왜 노래 부를 때 입이 옆으로 돌아가요?"라고 지적했
다. 그때 김현철 씨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물론 재치있게 "입은
비뚤어졌어도, 노래는 똑바로 한다"고 응수했지만, 그것은 너무 몰상식한
질문이었다. 김현철씨는 과거 심방중격결손(우심방과 좌심방이 뚫려 있다)
을 앓은 적이 있고, 그 결과 혈전이 뇌로 가서 뇌 일부분이 죽어 버린 적
이 있다. 그 당시 후유증으로 많은 고생을 했으며, 지금이야 정상으로 돌아
왔지만 가끔씩 그 잔재가 나타날 때가 있다.
다리를 저는 사람에게 왜 절룩거리느냐고 묻는 것이 말이 되는가. 진행
자 딴에는 웃으라고 한 소리라도, 듣는 이, 보는 이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를. 특히 공인인 경우는 더 말해 무엇하랴.
4. 사투리
"이름이 뭐예요?"
"김행건이요."
"김, 행, 건이요?"
"김행건이 아니라 김행건이라예."
"김, 행, 건 이요?"
"아유, 그게 아니라카이. 행님 할 때 '행'하고 '뿌리 건'이라예"
"아, 그러니깐 김형근 맞습니까?"
"그렇십니다, 김행건."
이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해프닝이다. 문제는 이 발음을 문제 삼아 두
고두고 놀리는 데 있다고 본다(하지만 대통령같이 공인인 경우에는 문제가
다르다고 본다. 공인이라면 표준어를 써서 사투리 때문에 놀림감이 되서는
안 되지 않을까). 누구는 처음부터 서울 사람이었는가. 늘 말하지만, 사투
리를 흉내내 웃긴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임을 명심하
기를.
5. 에필로그
이런 것, 저런 것 다 피하다 보면 뭘 가지고 웃기는가 하는 말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유머란 생활 속에서 찾아낼 때 가장 아름답다. 명성그룹 전
회장이었던 김철호씨가 강원도와 같은 돌만 많고 척박한 곳을, 개발하고자
했을 때 남들이 '뭐 볼 것 있다고 그러느냐.'고 말렸다. 그때 김회장은 이렇
게 말했다.
"돌 하나하나, 바람 한줄기가 모두 훌륭한 관광자원 아니겠어?"
그렇다 우리 주위에는 미소 짓고 웃길만한 소재가 넘쳐난다. 다만 꿰뚫
어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내 주위를 보라. 빈 우유팩, 그 옆을 기
어 다니는 바퀴벌레 한 마리, 잠에 빠져 코를 고는 벤지... 우리 모두 생활
속의 유머 찾기에 동참한다면, 우리 사회는 좀더 아름답고 살기 좋은 사회
가 되지 않을까.
왜 하필 오월에?
5월5일은 어린이날이고 또한 부처님 오신 날이 5월중에 있다. 그래서인
지 5월에 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은 청명한 날씨처럼 좋기만 했다. 대학 때
만 해도 5월은 각 대학마다 축제가 있는 때고, 중간고사도 끝난 뒤라 젊음
을 만끽했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흘러 내 나이가 계란 한판, 즉 30세를 훨씬 넘어섰다. 물론 아직
도 22세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다, 좀 심한 경우 고등학생이 아니냐고 하
는 사람도 있지만, 하여튼 대학의 울타리를 벗어나 직장을 갖게 되고 소위
월급이란 것을 타게 되면서 지금까지 누려왔던 환경이 조금씩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장 큰 변화가 세뱃돈을 받지 않게 되면서 좋기만 했던 명절이 어느새
부담으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명절 때 고스톱을 쳐서 얼마
라도 따지 않으면 쓸돈이 없다. 명절이면 모여 줄기차게 고스톱만 치시던
어른들의 처지가 이제는 이해가 간다.
5월5일 어린이날-어린이의 정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어린이는
아니다. 게다가 내게는 조카들이 있으니 선물을 해 주어야 한다. 애를 키워
본 사람은 알겠지만, 요새 애들 장난감이나 옷값이 장난이 아니다.
5월8일 이버이날-난 애가 없을 뿐 아니라 장가도 아직 가지 않았다. 내
또래 중에는 애가 둘 있는 애도 있지만, 아직 어버이날 선물을 해줄 능력
이 있는 애는 없지 않나 싶다. 따라서 이날 역시 나는 선물을 받기보다는
어머님, 아버님께 선물을 드려야 하는데, 요즈음엔 선물보다는 돈으로 드리
는 편이다. 그런데 어버이날 선물을 봉투에 만원짜리 한 장 달랑 넣을 수
야 없지 않은가.
5월 15일 스승의날-나를 오늘의 위치에 있게 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를
드리는 날이다. 역시 카네이션 한송이씩으로 떼우기에는 나의 사회적 지위
가 너무 부담스럽다.
이런 현실이다 보니 허리띠를 졸라매 배고픔을 이기고, 라면에 밥 한공
기 추가하는 걸 망설여야 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5월23일은 아버님의 생
신이다. 그래서 더욱 허리가 휘어진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5월에
갖가지 기념일을 다 만든 것이 나로서는 조금 불만이다.
하지만 옛말에 '돈이 없으니 생활이 건전해진다.'는 말이 있다. 물론 내가
어렸을 적 한 말인데, 이렇게 돈 쓸 곳이 많으니 아무래도 술 두 번 먹을
걸 한 번만 먹게 되는 좋은 측면도 있다는 말이다.
5월 하면 날씨가 좋아서 놀러갈 생각만 하기 쉬운데, 그만큼 또 학문에
매진하기에도 좋은 때다, 흔히들 날씨가 너무 좋으면 공부하기가 싫다고들
한다. 그런 사람일수록 비가 오면 공부하고 싶냐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오
히려 '비가 와서 울적하니 공부가 안된다.'고 할 것이다. 이 좋은 5월, 부모
님의 사랑을 가슴에 새기면서 술 안 먹고 학문에 매진하는 그런 건전한 생
활을 할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화사첨족: 지금까지 한 말은 30대에 국한된 말이다. 흔히들 30대를 낀세
대라고 한다. 신세대인 10대, 20대도 아니고, 기성세대인 40대도 아니라는
것으로, 레빈이 청소년기를 가리켜서 한 말인 '경계인' 혹은 '주변인'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보면 어울린다.
30대는 개인으로 보아서는 가장 중요한 시기다. 가장 많은 성취를 맛볼
수 있는 시기라는 점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생에서 가장 빨리 지나가는 시
기이기도 하다.
언제인가 기생충학계에서 혁혁한 업적을 쌓으신 교수님 한분이 "지금까
지 참 열심히, 재미있게 일했었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정말 부
러웠다. 나도 먼 훗날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30대, 중요한 시기다. 이 시기를 난 술과 노래로 덧없이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의대신설에 관하여...
1. 밥그릇 싸움?
10여년 전 사법고시 합격자 수가 300명으로 늘자 법조계에서는 법관들의
질적 저하를 우려하는 성명을 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나
는 법관들의 질이 낮아서 재판이 안 되었느니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
다. 그런 면에서 당시 질적저하 운운한 것은 기득권 계층이 그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일인 것으로 생각한다.
재판에서 아주 억울한 일이 있다고 해도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물론 홧
병으로 죽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주 극소수일 것이고, 설사
법관의 질적 저하로 인해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할지라도 법률에는 항소나
상고 제도가 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서는 상급법원의 심판을 받을 수가
있고, 상당수가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무래도 상급 법원은 정말 경력이 많은 인력이 모여 있을 터인즉 거기
서 내린 판단은 대체로 진실에 가깝다고 본다. 과거 민청학련 사건처럼 권
력에 의해 엉뚱한 판결이 내려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법관의 소신 문제지
자질 문제와는 하등 상관이 없을 터다.
의대 신설을 의료계에서 반대를 한다. 그랬더니 언론과 시민단체들은 '기
득권을 지키기 위해 그런다.'고 비난한다. 밥그릇 싸움이라는 것이다.
일반 국민들은 의사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을 갖지 않고 있다. 그것은
선배 의사들이 과거 저질렀던 잘못의 결과다. 환자들은 몸과 마음이 다 아
픈 사람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어찌보면 병이 낫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에게 의사들은 친절하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고, 생명을 담보로 행
해진 잘못이 결코 적지 않으리라. 게다가 일반 국민들의 심리에는 의사라
는 존재가 돈만 밝히는 샤일록처럼 느껴지는 바, 그들이 잘못되는 것을 고
소해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다른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플로베르가 쓴 <보봐리 부인>이 인기를 모은 것은 기득권층인 의사의
부인이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설정이 일반적인 정서와 부합했기 때
문이리라. 그래서 언론도 땅투기 같은 곳에 의사가 한명이라도 있으면 '의
사 낀 땅투기범 검거'라는 표제를 큼지막하게 쓰곤한다.
병원에 가본 사람은 누구나 느끼듯이 한시간 이상 기다려야 2분간 진료
를 받을 수가 있다. 언젠가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대 병원에 갔다. 10시반
예약인데 실제 의사를 만난 시각은 11시 반이 지나서였다. 2분간의 진료를
마치고 수납을 하는데, 사람이 많다 보니 돈을 내는데도 30분여를 기다려
야 했고, 약을 타는데도 다시 30분 이상을 기다렸다.
그러다보니 오전의 전부를 병원에 바치고 말았다. 열이 받는 것도 당연
한 이치다. 의사가 많다보면 아무래도 좀더 낫지 않을까 하고 환자들은 생
각한다. 이런 상황임에도 의료계에서 의대 신설을 반대한다니 밥그릇 싸움
한다고 욕을 한다.
충분히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현재 우리 나라의 의사수는 1992년에 취득한 내 면허번호가 46663이고,
그 뒤 5년간 매년 3,000여명의 의대 졸업생이 배출되었으니 대략 6만명, 국
민 700-800명당 의사 한명 꼴이다.
문제는 이들 의사들이 골고루 분포되지 않고 특정 지역에 편중되어 있다
는 사실이다. 그래서 농촌 지역 사람들은 의료 혜택을 받기가 힘든 것이다.
의사 수가 엄청나게 많은 필리핀에서는 의사들이 대부분 택시운전을 해
서 먹고 산다. 의사 하나를 키우는데 드는 국가적 비용이 얼마인데, 그렇게
키워 놓으니 택시운전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낭비인가 그런 얘기를 하려
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우리나라도 의사야 매년 3,000명, 혹은 그 이상
씩 나올 것이고, 언젠가는 우리 나라에서도 택시운전을 하는 의사가 나올
수도 있고, 그거야 뭐 그 사람들 사정이니 따지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는 왜 의대 신설 반대가 밥그릇 싸움이 아닌가하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2. 내 친구의 장모님
내 친한 친구에게 장모님이 한분 계셨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럼 두분 계
시는 사람도 있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겠지만, 그렇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
지는 것은 올바른 생활 태도가 아니다.
내가 오늘 아침을 못먹어서 힘이 없다고 얘기하면, 어떤 사람은 "난 어
제 저녁부터 굶었어."라고 따질 것인데, 그 사람이야 굶을수록 힘이 나는지
는 잘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굶어서 힘이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만큼 그런 것을 논쟁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직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면 다른 예를 들어보자. 밥 한공기를
먹고 배불러서 더 못 먹겠다고 하는 데, 옆에 있던 친구가 "야, 난 벌써 세
그릇 먹고 네 그릇째야!"라며 더 먹으라고 어거지를 쓰면 얼마나 황당하겠
는가.
우리 나라에서는 논쟁이라는 게 힘들다. 논쟁은 없고 감정의 대립만이
있을 뿐이다.
하여튼, 내 친구에게는 장모님이 한분 계셨다.
작년 초부터 기침이 자꾸 나서 병원에 갔더니 결핵이란다. 그래서 장장
6개월 이상 결핵 치료를 받으셨지만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서울대
병원으로 옮기자고 했다. 옮기고 나서 받은 진단은 폐암이었다. 그것도 말
기.
병원을 옮기고 나서 6일만에 환자분은 숨을 거두셨다. 이쯤되면 가히 충
격적인 일로 그전 병원에 소송을 제기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소송을
한들 이미 죽은 환자가 살아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왜 환자들이 다들 서울대 병원으로 몰리는가. 그것은 바로 다른 병원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관의 자질과는 다르게 의사의 자질이 떨어진다는
것은 이런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환자의 생명이란 어떤 금전적인 혜택
으로도 보상되지 않는다.
서울대 병원같은 3차병원으로 환자가 몰리니 2분진료에 한시간 대기 같
은 현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감기 환자 같은 사소한 환자조차 서울대
병원을 찾는다. 감기는 바이러스 질환이기 때문에 특별한 치료약이 있을
수 없다. 몸에 항체가 생겨 바이러스를 이길 때가 되어야 회복이 되며, 감
기약이라는 것은 다만 증상을 완화시켜 줄 뿐이다. 1차, 2차병원을 거쳐 서
울대 병원에 올 때쯤 되면 4-5일이 걸리고, 시기적으로 보아 굳이 약을 먹
지 않아도 회복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회복되고 나면 '역시 서울대 병
원'이라는 생각이 굳어지게 된다.
대학병원의 존재 이유는 1차, 2차 의료기관에서 고치기 힘들거나 고난도
의 의료기법이 요구될 때에 한해야 한다. 하지만 1차, 2차 의료기관에 근무
하는 의사들이 과연 이 환자를 큰 병원에 보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
는데, 과연 그 정도의 판단력이 있느냐도 문제다. '설마 의사가 그 정도야.'
할지도 모르지만 위의 경우에 비추어 본 것처럼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오늘도 서울대 병원에는 환자들이 길게 줄을 선다.
3. 올바른 의사의 양성
현재 우리 나라엔 32개 대학에 의과대학이 있다. 현재 의대 신설을 신청
해 놓은 대학도 40여개에 이른다고 한다. 이걸 알고 나면 우리 나라에 대
학이 그렇게도 많은지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어찌되었건 사실이다.
경제불황으로 인해 의대의 인기는 날로 높아만 가서 어느 대학이건 의예
과는 커트라인이 최고로 높다. 내가 의대 갈 때만 해도 물리학과나 전자공
학과가 가장 높았었는데, 이제는 의대가 최고 인기과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선배들이 "이제 의사의 시대는 갔다."고 말
하던 기억이 있는데, 갈수록 의대의 인기가 높아지는 이런 현상을 단지 경
제불황에서만 원인을 찾아야 할까.
하여튼 중요한 것은 현재 의대 신설이 장기적인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심 쓰듯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일단 신설을 했다고 하자. 의사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곳이므로 국가가 학생의 교육에 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최근에 신설된 대학들을 보면 교수 인력의 부족은 물론 학생
들을 위한 기본적인 시설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강원대 의대의 경우 해부학 실습을 위해 일주일에 한번씩 서울대에 온
다. 강원도에서 서울 혜화동까지 버스를 타고 오는데 걸리는 시간도 시간
이지만, 서울대 학생들도 일주일에 3번씩 하는 실습을 일주일에 하루, 단
몇 시간을 본다고 인체에 관해 알 수 있을까. 또 우리야 필요하면 밤 늦게
까지라도 남아서 복습을 하지만 그 학생들의 경우에는 그것 또한 불가능하
다.
내과의 경우 교수 수가 40명이 넘는다. 심장, 소화기, 간, 담도, 호흡기,
알레르기 등등으로 전공이 나뉘어 자신의 전공을 학생들에게 강의한다. 반
면 신설 대학에는 내과 교수가 2-3명 선이다. 어떻게 깊이있는 강의가 가
능할까.
부실한 교육 아래 자란 의사들이 많을 경우 그 피해는 우리 국민들이 져
야 하고, 의사에 대한 불신이 쌓여 갈 것이며, 1차, 2차 병원에 근무하는
실력있는 의사마저도 매도되는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과거 의사고
시는 지난 몇 년간 출제되었던 문제들, 소위 족보의 범위를 넘지 않았다.
한달만 공부하면 굳이 의대를 나오지 않더라도 붙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결과 매년 97%가 넘는 합격률을 보였다. 그러던 것이 족보 위주의 출제에
서 탈피하게 되자 50% 미만의 합격률을 보이는 학교가 생기기 시작한다.
세상에, 6년간의 교육을 받고도 의사고시에 그렇게 많은 탈락자가 생긴
다?
서울대를 간 사람이나 다른 의대를 간 사람이나 고등학교 때 공부 잘했
기는 마찬가지고, 실제 수능시험 점수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면
서울대 졸업자는 97%가 합격한데 비해 어느 대학은 50%만이 합격한 이런
차이는 전적으로 교육의 질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의료계에서 무조건
의대 신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4. 그러는 너는?
누군가 '너는 의과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시각이 다소 편향되어 있지 않
냐!'하고 물을 수 있겠다. 물론 어느 정도 그런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기초의학을 전공했다.
기초의학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기초의학이란 말 그대로 의학
의 기초가 되는 학문을 말한다. 생화학과 예방의학, 해부학, 기생충학, 생리
학, 약리학 등 직접 환자를 상대하지는 않지만 환자를 치료할 때 필수적으
로 알아야 하는 학문이다.
예를 들어 해부학을 모르고서는 수술이란 것을 할 수 없고 약의 부작용
을 모르고서는 환자에게 투약을 할 수 없는 일이다.
임상의학은 환자를 보지만 기초의학은 임상의학의 토대를 제공하고, 그
러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비를 따내야하고 밤을 새워가며 연구를 한다. 이
런 중요한 학문이 당장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한 의사고시에
출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당히 홀대를 받아온 것이 우리의 현실이
다.
굳이 미국이나 일본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기초의학에 투자되는 연구비
의 액수는 정말 미미하기 짝이 없으며, '투자 가치' 때문에 각 대학에서는
기초의학 교수 채용을 기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던 것이 99년부터 기초의학이 의사고시에 출제가 된다고 하니 여건
이 좀 나아질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같은 기초의학자는 환자를 보
는 길로 나갈 수는 없고 오직 대학 혹은 연구소에 취직하여 후학을 가르치
며 연구에 몰두하는 것을 최대의 기쁨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사정이 그렇
게 바뀌면 의과대학이 많이 신설되어 교수로 갈 수 있는 자리가 많아질 것
이고, 따라서 나로서는 훨씬 좋은 것 아니겠는가.
교수 자리가 없어 능력 발휘를 못하는 기초의학자가 아직도 많이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초의학계에서조차
의대신설을 반대하고 있다. 이 어찌 밥그릇 싸움으로 몰아붙일 수 있을까.
이들의 반대는 곧 올바른 의사교육을 하자는 취지로 요약된다.
5. 맺음말
사람들이 의사를 싫어하는 가장 큰 원인은 주사 때문이 아니라, 불친절
에 기인하는 것 같다. 병원에 가보면 정말 아픈 사람이 죄인이다. 환자가
부당한 처우의 시정을 요구하면 흥분해서 주먹을 휘두른다. 환자 중에도
이상한 사람, 황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일부 의사들
의 인성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흰 가운만 입으면 다 교수로
알았던 환자들도 이제 알 것은 다 안다. 어느 날 병원 대기실에서 들은 얘
기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맺는다.
#장소: 환자 대기실
여자: 아 글쎄, 레지던트 2년차래. 지가 알긴 뭘 알아.
남자: 어쩐지 계속 말도 안되는 소리만 하더라구.
여자: 따지려고 하다가, 또 성질낼까봐 참았어.
#장소: 응급실
진료문제로 레지던트와 싸우던 환자: 너희들이 항상 여기 있을 줄 알아?
여기 끝나면 밖에 나가 취직자리 구해야 하는 주제에...
머리숱과 건강
어느 날인가 아는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남자를 하나 사귀고 있는데, 잘
될 것 같다는 얘기였다. 난 이런 경우에 의례 하는 질문을 했다.
"얼굴은 잘 생겼어요?"
"아니."
"키는 커요?"
"나만 해."
그 누나 역시 별로 큰키가 아니었으니 이건 심각한 경우다. 그래서 난
말했다.
"에이, 남자 외모가 뭐 그리 중요한가요. 대머리만 아니면 되지."
그랬더니 누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다가 나지막히 속삭였다.
"대머리야."
난 다소 황당했고, 미안한 마음이 울컥 들었다.
"아, 뭐 그럴 수도 있지요. 하하하."
난 어색함을 풀기 위해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데 누나는 그 사람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요?"
"응, 사람이 참 착해."
나는 또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아니, 얼굴 안 생기고, 키도 작고, 대머리인데 착하지도 않으면 말이 됩
니까?"
산성비 등 환경오염 탓인지 젊은 남성의 대머리가 점점 늘고 있다. 미혼
여성들에게 물어보면 다른 것은 다 용서할 수 있어도 대머리는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이 많다. 이 원인을 면밀히 분석해 본 결과 과거 우리 나라 전
직 대통령 중 한분이 머리숱이 별로 없으셨던 탓인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
렀다.
이렇듯 한사람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인해 머리숱이 없는 사람에 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나빠졌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불가리아가 이변을 일으키며 8강에 올랐다. 불가
리아는 과거 멕시코 월드컵에서 한국에 일방적으로 몰리는 경기를 하다 가
까스로 1-1로 비긴 적이 있는 약체다.
8강전 상대는 강호 독일이었다. 여기서 불가리아는 더 큰 이변을 일으켰
다. 레치코프라는 선수의 결승 헤딩슛으로 불가리아가 독일을 2-1로 물리
쳤는데, 공교롭게도 레치코프 선수는 대머리였다.
다음날 우리 나라 한 신문에서는 기사의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
"공포의 대머리, 독일 격침."
외국 어디를 가도 우리 나라처럼 대머리에 민감한 나라가 없다. 대머리
의 경우 입사 시험에서 불이익을 받는 나라, 그래서 우리 나라는 국민 1인
당 가발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미국에서는 상징적인 새로 추앙받는 콘돌(독수리 비슷한데, 윗머리가 없
다)이 우리 나라에서는 가장 심한 욕이 되고 있으며, 빠르기로 이름난 타
조 역시 애완용으로 기르는 사람이 전무한 것도 머리털이 없는 탓이다. 모
탤런트는 할 수 없이 머리를 심어야 했으며, 5공화국 때는 대머리 연예인
의 출연이 금지되는 일도 있었다.
우리 아버님 역시 그다지 머리숱이 많지 않으시다.
대머리는 누구나 알다시피 유전될 때 우성으로 유전되는지라 장남인 나
는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머리가 빠지지 않았는지 살펴보곤 한다.
내 나이도 이제 30을 훌쩍 넘겼다. 아직까지 대머리의 징후는 보이지 않
아 다행이지만, 사람을 그렇게 외모로만 판단하는 사회적 시각이 변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모피의 법칙
(이 글은 소설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부분이 아주 많습니다.)
1. 지천명의 날
어느 잡지에서 껍질이 몽땅 벗겨진 채 죽어있는 여우를 본 순간, 난 결
심했다. 인간이 한철 따뜻하기 위해서 희생되는 여우가 더 이상 생겨서는
안 된다고...
모피 한벌을 만들려면 20-30마리의 여우가 필요하며, 친칠라 수백마리를
작살내 만든 모피는 천만원대가 넘는 고가에 거래된다. 다시금 눈을 돌려
우리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친칠라의 슬픈 눈을 본다.
친칠라는 달리고 싶다!
2. 왜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모피 의류는 야생동물 보호론자들의 격렬한 비난을 받고 있
는 중이다. 그래서 외국의 경우 아무리 추운 날일지라도 모피를 입고는 떳
떳이 활보하지 못한다. 남들의 발길이 뜸한 새벽이라든지, 으슥한 곳을 갈
경우에만 모피를 입는다. 많은 사람들이 모피를 잠옷으로 사용하기도 하며,
이 추세는 점점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얼핏 생각하면 굉장한 낭비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
니다. 모피를 입고 잠으로써 가뜩이나 기름값도 비싼데 난방비를 절감할
수가 있고, 사람이란 누구나 귀소본능이 있게 마련이라 알게 모르게 원시
시대를 동경하는데, 털옷을 입고 자면 안정감이 생겨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외국의 실정에 비추어 볼 때 우리 나라는 가히 '모피의 천국'이라
불릴 만하다. 우선 사교계에 출입하려면 모피를 입어야만 한다.
물이 가장 좋다는 나이트클럽 '로보텔'의 경우 무스탕이나 토스카나 등을
입지 않으면 아예 출입이 안된다. 로보텔 앞을 지나가다 보면 삼베옷과 거
적을 걸친 사람들이 로보텔 직원들과 거센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나라의 모피 수입액은 세계1위를 차지했다. 나는 가
끔 우리 나라가 중국이 아님을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할 때가 많다. 생각해
보라. 인구가 5천만을 밑돌기에 망정이지 2억만 되었다 해도 이 세상 여우
와 친칠라, 밍크는 모조리 멸종했을 것이다.
이런 인구를 가지고도 사슴과 노루의 차이를 없애 놓은데다-이 둘의 차
이는 뿔이 있고 없고의 차이다-위스키 수입 역시 세계4위를 달린다. 종합
무역량은 세계 10위고 교통사고는 세계1위, 해외 입양 세계3위, 공중전화
보급률 세계2위... 그리고 외채도 1위를 기록하는 등 엄청난 약진을 계속하
고 있다.
모피는 아무리 잘 입어야 5년 정도 지나면 털이 빠진다. 대충 기워 입으
려고 해도 6-7년을 버티기가 힘들다. 여우의 수명이 20년인 것을 감안했을
때 세상에 이런 모순이 없다.
털이 빠진 모피의 용도는 정말 처량하다. 일반 가정집에서는 걸레로 쓰
거나 다리 길이가 맞지 않는 의자의 받침대로, 혹은 베개, 이불에 넣어지거
나 자동차 시트에 깔리는 신세가 될 뿐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런 낭비를
해야 할 것인가?
3. 우리 나라 모피의 의식 수준
모피를 입는 외국인 100명에게 "모피를 입고 나서 가장 먼저 느끼는 감
정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놀랍게도 64%가 '죄책감'이었다. 이 죄책감이
란 바로 모피를 만들기 위해 희생된 여우나 밍크, 친칠라에 대한 것임은
물론이다. 그 다음으로 23%가 '남들의 시선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답했으며, 불과 3%만이 '따뜻함'이라고 답을 했다.
반면 모피를 즐겨 입는 한국인 100명에게 같은 질문을 했을 때 43%가
'남과 달라졌다는 특권의식'을 느낀다고 대답했고, 25%가 '뿌듯함'을 느꼈다
고 답했다. 다시 말해 68%가 모피의 본래 목적인 따뜻함과 무관한 이유로
모피를 입는다는 것이다.
이례적으로 한명이 '부끄럽다'고 대답을 해 질문을 한 기자가 감격을 했
더니만 '너무 싼 모피를 입어서!'라고 대답해 주위 사람들을 아연하게 했다.
모피를 입는 외국인들의 모피 보유 숫자를 조사한 결과 평균 1.3벌로 대
부분이 모피 한벌씩을 구입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한국인의 경우 3.7로 일
인당 3-4벌을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모피를 입는 빈도는 외국인의 경우
일년에 30차례 정도로 본전을 빼는 반면 우리 나라는 3차례 미만이 전체의
77%를 차지했다.
언제 모피를 입느냐는 질문에 외국인들의 경우93%가 '파티에 갈 때'라고
답한 반면 우리 나라의 경우는 32%가 '시장에 갈 때', 19%는 '대중목욕탕
에 갈 때'라고 하는가 하면, 7%는 '모피 사러 갈 때'라고 대답을 했다.
의아하게 여긴 기자의 추가 질문에 "모피를 입지 않고 가서 모피를 사면
그동안 한벌도 없다가 이제야 처음 사는 걸로 생각하고 종업원들이 다소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해 기자를 아연실색하게 했다.
4. 한국의 계산된 '여우 때리기'
그러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왜 여우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것일까.
한국인은 대대로 동물을 사랑해 왔으며, 광개토왕 같은 분은 걸을 때 개
미를 밟을까봐 땅만 보고 걸었다고 한다. 콩쥐팥쥐에서는 남들이 추하게
여기는 두꺼비를 등장시켜 미물에 대한 사랑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노력에 의해 한때 우리 나라가 야생동물의 왕국으로 군림했
던 적이 있었다. 그런 한국인이 왜 이토록 모피에 집착을 하며, 그런 과정
에서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가. 이것은 전적으로 모피 제조업자들의
언론 플레이에 의한 것이다.
그러면 언론 플레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언론플레이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언론을 이용하는 것
을 말한다. 미국의 PR 전문가 에드워드 버네이스라는 사람은 상품의 판매
를 위해 그 판매에 저해되는 문화환경 자체를 변화시키는 PR 전략을 구사
했다.
예컨대 그는 헤어네트를 판매하기 위해 3단계 PR 전략을 사용했는데, 1
단계는 여성 저명인사들을 이용하여 여성들이 긴머리를 선호하는 유행을
만들어냈다. 2단계로는 의학전문가들을 동원하여 공장 또는 식당에서 긴머
리를 휘날리며 일하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각 주 정부를 설득하여 공장 또는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헤어네트를
착용할 것을 의무화했다(참고문헌: 강준만 저 <문제는 다시 언론플레이
다>중에서)
물론 그의 PR 전략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피 제조업자들은 끊임없는 모함으로 인해 여우에 대
한 죄책감을 없애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전설의 고향>이라는 TV 프로
를 이용해서 우리 민족이 과거 숭배하던 여우가 사실은 아주 영악하고 주
술에 능하며 사람을 많이 해칠 뿐 아니라 심성조차 고약하다는 것을 주지
시켰다. 여우의 웃음소리조차 아주 간사한 것으로 묘사했으며, 모든 음모의
뒤에는 여우가 있다는 식의 왜곡을 자행했다.
게다가 조금 영악한 사람을 보면 '여우같은 놈'이라고 하게 함으로써 여
우란 아주 나쁜 동물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이솝 우화'에서 보면 늘 잔머
리만 굴리는 동물로 여우가 묘사된다. 포도를 따먹지 못하자 "저것은 시어
서 먹지도 못할 거야."라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여우는 누가 보아도 아주
나쁜 동물일 수밖에.
하지만 이솝의 아버지가 유명한 모피 제조업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왜 그가 그렇게 여우를 깎아내리는데 전력을 다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사람의 조상은 원숭이다. 원숭이에서 사람으
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꼬리를 잃었다. 원숭이가 꼬리 하나를 가지
고 나무에 매달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직립의 대가로 잃어버린
것에 대한 분노와 향수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꼬리는 우리가 경외감
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 되었다.
결국 꼬리달린 것에 대한 맹목적인 공포를 상쇄하기 위한 합리화 기제로
꼬리가 짧은 동물을 우대하고 꼬리 긴 동물을 학대하는 정책을 펴 나갔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영물로 추앙받는 기린, 사슴, 토끼 등은 꼬리가
짧으며, 미물로 생각하는 뱀, 악어 등은 길고 탐스런 꼬리를 가졌다고 할
수 있겠다.
모피업자들이 이런 사실을 놓칠 리 없다. 모피업자들은 여우에게 무려 9
개나 되는 꼬리를 달았다. 소위 말하는 구미호의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
구미호는 영화로도 수차례 만들어졌는데, 사람이 아닌 동물이 주인공인
영화로 여우처럼 자주 인용된 동물이 또 있는가. 꼬리가 9개란 사실만으로
사람들은 극심한 공포를 느꼈으며, 이런 관념은 사회 전반적으로 확대 재
생산되었다.
어느 초등학교 시험 문제에서 '가구가 아닌 것은?'이란 물음에 '침대'를
택한 것처럼 '여우의 꼬리는 몇 개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41%의 학생들이
'9개'라고 답해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게 해 주었다. 모피업자들의 농간에
의해 학교 교육의 뿌리마저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5. 우리 나라의 왜곡된 반 모피 운동
세계 각국의 모피 추방운동의 영향을 받아 우리 나라에서도 모피를 입지
말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너무나도 형식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명동에서 모피 입지 말기 운동을 벌이던 여성 174명 중 절반이 넘
는 89명이 가죽점퍼나 무스탕 등 모피를 입은 채 반대시위를 해 지나가던
시민들이 실소를 금치 못했는데...
그 중 한 여성에게 '왜 모피를 입고 나왔냐?'고 묻자 "옷이 이거밖에 없
어서."라는 대답을 했고, 또 한 여성은 당당하게 "내가 모피가 없어 이러는
줄 남들이 알면 어떡해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한 여성은 신문 칼럼에 '모피 반대운동을 벌이는 사람은 대부분 모피가
없는 사람이다. 자신이 돈이 없어 모피를 못 입는 것에 대한 패자의 심리
적 보상 행위로 남들이 모피 입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민주주의에서 요구
하는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라고 기술한 바도 있다.
패자의 심리적 보상행위? 그 논리대로라면 비판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재벌을 비판하는 경제학자는 재벌이 못된 콤플렉스 때문에 그러는가? 미인
대회가 여성의 상품화에 기여한다고 비판하는 사람은 자신이 미스코리아가
못 된 콤플렉스 때문인가?
프랑스의 유명한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프랑스 정치판은 물론 경제계까지
휩쓸고 있는 에콜 노말 대학에 대한 비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에콜 노말의 산물이지만 그걸 배반한 산물이다. 분개와 같은 감정
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면서 에콜 노말에 대해 비판을 하려면 그
출신이어야 한다."(참고문헌: 강준만 전 <서울대의 나라>)
다시 말해서 서울대 출신이 아닌 사람이 서울대를 욕한다면 그것은 콤플
렉스에 의한 것이라는 얘기고, 서울대를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서울대
출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여성의 말대로라면 모피를 반대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집에다 모피를 몇십벌씩 쌓아 놓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뼈를 깎는 마음으로 모피 반대운동을 해야 한다. 엘니뇨현상의 영향으로
인해 우리 나라의 겨울도 그렇게 춥지 않다. 모피를 입을 필요가 없는 것
이다. 정 추우면 내복을 입으면 된다. 요즘 내복이 얼마나 질이 좋은가. 과
거 우리가 입던 그 빨간 내복은 이제 자취를 감추었다. 입어서 거칠거칠한
것이 아니라 입어도 입은 줄 모르는, 피부와 비슷한 촉감을 지닌 그런 내
복이 속속 나오고 있다.
나도 지금 내복을 입은 채 이 글을 쓰고 있다. 방안은 불을 안 때서 싸
늘하지만 난 추운 줄을 모른다. 모피만이 전부가 아니다. 다시 한번 가죽이
몽땅 벗겨진 채 죽어있는 여우의 모습과 우리에 갇힌 채 공포에 떨고 있는
친칠라의 눈을 바라보라. 그래도 당신은 모피를 입겠는가?
6. 결론
모피를 반대하는 운동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여우가 그
다지 나쁜 동물이 아니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또한
개개인마다 모피 입은 사람을 보는 시각을 고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모피를 볼 때 느꼈던 선망 내지는 부러움보다는 경멸 혹은 공
개적인 모욕 등을 통해서 앞으로의 시대는 모피를 입는 것 혹은 보유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수치가 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캠페인을 펼쳐 나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은 원시시대가 아니다. 굳이 여우털이나 친칠라의 털로 옷을 만들어
입어야 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이 자리에서 말하고 싶다.
"가자! 모피 없는 세계로!"
정치소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1. 서론
식당에서 삼계탕을 먹고 있는데 방 한구석에 처박혀있는 잡지가 눈에 들
어왔다. 심심했던 차에 저거나 보자 하고 무심코 아무 페이지나 폈는데, 난
그 순간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닭뼈가 목에 걸릴 뻔했다.
그 기사는 '조류독감'으로 인해 홍콩에 비상이 걸렸다는 내용이었다. 커
다란 사진에 칼을 든 홍콩인 한 명이 닭을 거꾸로 들고 막 목을 치려는 장
면이 담겨 있었다. 평소 조류에 조예가 깊던 나로서는 몸을 부르르 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는 너무도 닭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 아니
닭에겐 인권이라는 것이 아예 없는지 모른다. 엄밀히 따지면 계권이므로.
인간이 감기에 걸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모든 닭을 잡아죽이다
니... 그것은 바로 군사문화의 소산이 아니고 무엇이라 말인가.
2. 닭의 역사
인류가 닭을 먹기 시작한 기원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
유래는 인간의 비겁성에서 기원한다. 닭, 돼지, 소를 흔히 인간이 즐기는 3
대 고기라고 일컫고 있다. 가만히 따져보면 다들 만만하기 짝이 없는 동물
들이다.
이 가운데 인간을 이길만한 동물이라고는 소밖에 없는데, 소라는 놈은
초식동물이라 그런지 지나치게 온순해 도무지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죽도
록 일만 하다가 잡아먹히고 마는-을 개선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보다 무력한 존재만 잡아먹는다는 말이다. 인간이
호랑이나 사자, 코뿔소 고기를 먹는가? 뒷발질이 위력적인 말을 잡아먹지
도 못한다. 그저 만만한 것이 닭이고, 돼지고 소다.
혹자는 호랑이 고기가 맛이 없다고 핑계를 댈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핑계
는 포도를 보고 '저건 시어서 못 먹을 거야'라고 말한 여우의 모습과 같다.
사실 삼겹살, 닭갈비, 물고기 등은 정말 맛이 있고, 나 또한 즐기는 음식
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처음부터 맛있었을까. 우리 조상들이 오랜 기
간 그것들을 먹어 오는 과정에서 입맛이 그렇게 변했을 뿐이다.
어릴 적 우유를 먹고 설사를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그
것은 우유 성분 중의 하나인 락토오스(lactose)를 분해하는 효소가 부족한
탓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설사를 해가면서 우유를 마셨고, 그 결과 이제는
더 이상 우유를 먹고 설사를 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그것은 락토오스 분
해 효소가 몸 안에 충분히 만들어졌기 때문인 것이다.
쇠고기도 마찬가지다. 우리 조상들이 설사를 해가며 소를 먹었고, 그 결
과 우리 입맛은 불고기라고 하면 최고의 음식인 것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
다. 다시 말해서 우리 주위에 풀만 있었다면 우린 초식동물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2. 왜 하필 닭인가?
이번에 이렇게 닭을 죽이는 이유는 홍콩에 나돈 소위 '조류 독감' 때문인
데, 그것은 말 그대로 조류에서 유래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전파되어 감염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인간의 비겁성을 드러내는
것은 왜 하필이면 닭만 그 피해를 겪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하늘을 나는 청둥오리, 갈가마귀, 백조 및 지상에서 치타 다음으로 빠른
타조의 경우 몰살의 위협을 겪기는커녕 지금도 유유히 하늘을 날고 있다.
오히려 청둥오리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머리를 때리거나 괴롭히는 사람
을 단속하기까지 한다.
인류를 놓고 보았을 때 청둥오리와 닭 중 어느 것이 멸종해야 하냐고 묻
는다면 난 기꺼이 청둥오리를 택할 것이다. 닭은 우리에게 많은 이로움을
준다. 달걀은 칼로리가 높은 음식일 뿐 아니라 각종 연구에 널리 쓰인다.
병아리는 타고난 귀염성으로 어린이들의 정서 함양에 큰 도움을 주며, 어
른이 되고 나서는 매일 한 개씩 달걀을 공급해 줄 뿐만 아니라 새벽마다
아침이 오는 것을 알려 준다.
닭을 원료로 한 음식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삼계탕, 닭갈비, 닭발, 닭
내장, 닭죽,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오골계, 영계백숙, 닭곰탕 등등. 닭은 이
미 우리 몸의 일부인 것이다. 또한 닭에서 파생된 캐릭터 산업은 날로 번
창하고 있다. '도날드 닭'이 그렇고, '머피의 법칙'을 부른 인기 그룹 'DJ닭'
이 그렇다. '닭대가리'라는 말은 목이 가늘고 긴 여자를 지칭하는 찬사로
쓰인다.
그런데 과연 청둥오리는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준단 말인가. 누구나 한
번쯤은 하늘을 나는 청둥오리가 무심코 배설한 소변 혹은 새똥에 맞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번 조류 독감 역시 방랑의 기질이 있는 청둥오리가
저 멀리서 옮겨온 것이 틀림없다. 철장에 갇힌 채 인간이 주는 모이만 하
염없이 쪼아먹던 닭이 무슨 죄가 있는가.
난 주장한다. 닭을 죽이는 대신 외모가 조금 낫다고 우아하게 하늘을 나
는 청둥오리를 먼저 족쳐 자백을 받아내야 한다고. 별로 하는 일없이 빈둥
거리는 타조의 목부터 비틀어야 한다고...
3. 그깟 감기 때문에...
조류 독감에 걸려 몇 명이 죽었다고 치자. 그런다고해서 사망자의 수만배
에 달하는 숫자의 닭을 죽여도 되는가. 인간이야, 인간의 생명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닭은 그 점에 제대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에볼라 바이러스같이 걸리면 거의 다 죽는 것이라면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깟 감기쯤 가지고...
물론 조류 독감은 '독감'이라는 말 자체가 의미하듯 일반 감기보다는 증
상이 심한 것이 사실이다. 보통 독감이라고 하면 '두통 등의 신경증상, 근
육통, 발열, 호흡기 증상'을 수반하는 경우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것은 적절
한 시기에 병원에 가서 수액공급 등의 조치만 취해 준다면 죽기가 힘들다.
내가 보기에 이번의 사망자는 제때 병원에 안간 탓이다. 이제는 조류 독
감이 전역에 알려져서 몸이 아프면 대부분 병원을 찾는다. 다시 말해서 더
이상의 사망자가 나오기는 힘든 상황이다. 닭을 죽이는 것은 치료적인 것
이 아니라 예방적 차원이다. 즉 닭을 죽이는 것은 조류 독감이 지금처럼
홍콩 전역을 휩쓸기 전에 행해졌어야 한다. 이제 와서 닭을 몰살시키는 것
은 완전히 '닭 잃고 닭장 고치는 격'이다.
게다가 조류 독감 바이러스를 갖고 있는 닭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닭을 죽이는 것 역시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닭으로 하여금 검사를 받게 해
양성일 경우에만 죽인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만약에 코끼리가 AIDS 바이러스(물론 바이러스는 종특이성이 매우 강하
므로 그럴 리는 없지만...)에 걸릴 것이 두려워 인간을 마구 죽인다면 인간
은 동의하겠는가? 정말 억울하고 분해 피눈물이 날 것이다. 왜 닭은 그런
억울함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것도 AIDS가 아닌 한낱 독감 때문에...
4. 인간은 반성해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다른 동물도 그걸 인정할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 하에 너무도 심하게 생태계를
파괴한다.
건강해지기 위해 곰쓸개를 빼먹고-효험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데!-사
슴뿔을 자르고, 노루피를 빤다. 이 순간에도 지구상 어딘가에는 많은 종이
멸종해가고 있다. 인간의 허리띠를 만들기 위해 악어가 죽어가고, 당구공을
만들기 위해 코끼리가 멀쩡한 이빨을 뽑히고 있다.
이 땅에 존재하는 풀 한포기, 개미 한 마리라도 다 존재의 이유가 있으
며, 살아있다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박제한 사슴머리보다는 살아있
는 칠면조 한 마리가 훨씬 더 아름다운 것이며, 산에 있는 돌멩이 하나가
집안에 갖다놓은 수석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우리에 갇힌 호랑이는 이
제 먹이를 잡을 능력이 없으며, 예전처럼 힘차게 포효하지도 못한다.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살 권리가 있다. 인간이 더 이상 총과 칼
로 이 지구를 난도질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물들의 대
오각성과 단합이 필요하다.
우리말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있듯이 동물들이 언제까지
나 착취만 당하라는 법은 없다. 그날-동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인류
를 멸망시키는-이 왔을 때 후회하면 이미 늦다.
토끼의 것은 토끼에게로, 얼룩말의 것은 얼룩말에게 돌려줄 마음은 정녕
없는가?
한국영화를 살립시다
1. 성웅 이순신
막이 오른다. 화면에 창문이 한 개 나타난다. 나레이터의 목소리가 들린
다.
"우리 모두 영구를 불러 봅시다!"
관객이 모두 영구를 외친다.
"영구야!"
그러자 창문이 열리면 "영구 없다!"라고 한다.
"다시 한 번 영구를 불러 봅시다."
관객은 목이 터져라 외친다.
"여엉구야!"
이것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심형래 감독의 <영구와 땡칠이>라는
영화의 도입부다. 내 친구가 그 영화를 보았는데 영화가 시작된 뒤에 조금
늦게 들어갔단다. 눈이 어둠에 적응이 되고 나자 '사람이 왜 이리없어?'라
고 생각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니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튀어나오
더란다.
아이들의 앉은키가 작다보니 사람이 없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아무튼
이 영화를 보고나니 왜 아이들이 존경하는 인물로 심형래를 꼽는지 이해가
갔다고 한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존경하는 사람을 말하라고 할 때면 늘 이순신, 에디
슨같은 위인들만을 꼽아 왔던 우리세대인데, 지금의 아이들은 매우 자유로
운 사고를 하고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군사정권 시절에 이순신같이 국
가에 대해 충성을 한 사람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도록 교육 받아온 우리인
데...
지금의 아이들은 놀만한 것이 없다. 어린 나이에 유치원, 영어학원, 피아
노, 미술학원을 다니느라 어찌보면 나보다 더 바쁘고 마음의 여유가 없다.
영화를 볼라쳐도 전부 '연소자 관람불가' 아니면 '중고생 이상 입장가'다.
TV에서 방영하는 만화영화는 거의 일본만화다. 그러던 차에 우리 아이들
을 위한 영화만을 만드는 심형래 감독을 어린이들이 어찌 존경하지 않겠는
가? <티라노의 발톱>등등, 심 감독의 영화는 해외로 수출되기까지 한다.
영화산업은 모든 가치가 집약된 미래 산업이다.
<쥬라기공원>이라는 영화는 전세계를 경악시키며 8억5천만달러를 벌었
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자동차 150만대를 팔아야 벌 수 있는 돈이라
고 한다. 우리 실정에 헐리우드 영화처럼 1억달러 이상의 제작비를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현실일수록 심형래 감독처럼 반짝이는 아이디어
와 탄탄한 시나리오가 필요하다고 본다.
2. 가치관
아는 사람 중에는 "한국영화는 절대 안 봐!"라는 가치관을 가진 애가 있
다. 가치관이라는 것은 '어떤 믿음이나 주의가 신념으로 내면화된 것'이라
고 정의되어 있다. 조금 안타까운 것은, 그 사람이 '우리 나라의 과학발전
에 한 몸을 바치겠다', '세계최고의 부자가 되겠다' 등의 크고 원대한 가치
관이 아니라 고작 한국영화를 안 본다는 사실을 마치 큰 사상처럼 떠받들
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한국영화는 국내보다 외국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해외 영
화제에서 상 타는 것을 보면 알 것이다. 그럼에도, 아까 그 친구와 같은 생
각을 가진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 이유는 일부 선정적이고 작품성도 없는
한국영화를 몇번 보고 실망한 탓일 것이다. 그것은 심성이 고약한 한국사
람 몇 명을 보고 '한국사람은 다 나빠!'라고 하는 것과 똑 같다.
터놓고 얘기를 해보자. 그럼 그 사람은 외국영화를 보고는 한번도 실망
한 적이 없다는 말인가?
쟝끌로드 반담 주연의 <하드타겟>, 실베스타 스탤론이 나오는 졸작 <데
몰리션 맨>, 결말이 너무 시시한 <브로큰 애로우>, 연기력은 전혀 없는
신디 크로포드 주연의 <페어게임> 따위의 영화를 보고 나서 돈이 아깝다
고 생각해 본 적이 없을까?
이상한 것은 외국영화가 재미없다면 자신의 판단력이 나빴음을 탓하고,
한국영화가 재미없다면 '역시 한국영화는 안돼.'라면서 한국영화 전체에 대
해 비난을 퍼붓는 것이다.
라디오 프로 <두시의 데이트>라는 것이 있다. 그 코너 중 하나가 '김국
진을 웃겨라'인데, 김국진을 웃기기 위해 수많은 전화, 팩스가 쇄도를 한다.
그래도 김국진은 웃지 않는다. 김국진은 안 웃기로 작정을 하고 나왔기 때
문이다. 경우를 바꾸어 내가 김국진씨에게 '웃겨봐'라고 했을 때, 김국진씨
가 과연 나를 웃길 수 있을까.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영화는 재미
가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시종일관 삐딱한 시선으로 영화를 볼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본 영화가 재미있을 리 없다. 그런 사람일수록 외국
영화라면 평범한 수준이라도 극찬을 늘어놓는 문화적 사대성을 갖고 있다.
3. 도대체 뭘 원하는 것일까.
몇 년 전 친구와 함께 <집시애마>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과거 엄청
난 흥행을 하고, 에로영화의 한 장을 연 <애마부인>의 후속편으로 내용이
야 여자가 불륜을 하고, 말을 좀 타는 장면이 나오고... 뭐 그런 뻔한 내용
이었다.
그런 영화를 보는 사람은 무슨 작품성 같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닐 테
고, 나와 내 친구처럼 야한 장면이 자주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영화는 참
야했으며 나와 내 친구는 충분히 만족해서 출구로 향하는데, 어떤 남자가
찌렁찌렁 울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역시 한국영화는 안돼!"
내 생각에는 그 영화가 한때 화제를 일으킨 <끌로드 부인>따위보다는
백 배 나으며, 어차피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나 화끈한 액션을
보러 간 것은 아닐 터인즉 도대체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
는 의문이 들었다. 게다가 그 영화는 한국영화의 대표가 아니다. 그 영화를
보고 한국영화의 수준을 판단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다. 게다가, '한
국영화는 안돼!' 하고 외치는 사람일수록 한국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한국영화는 우리 고유의 정서에 맞게 만들어진 영화다. 우리는 한국 사
람이다. 아무리 머리염색을 하고 피부탈색을 했다고 할지언정, 우리는 한국
인이다.
스크린 쿼터제라는 것이 있다.
한 극장에서 1년에 한국영화를 일정기간 이상 상영해야 한다는 조항으
로, 한국영화를 보호하는 데 그 뜻이 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1년에 140
일 이상이었던 것 같은데, 극장주들의 끈질긴 로비로 100일 이하로까지 내
려갔다고 한다. 아무도 한국영화를 보지도 만들지도 않는다면 우리 나라도
조만간 헐리우드의 식민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당신의 영화선택 기준은?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는 국내 개봉 한달만에 100만 관객을 동원했
다. <시사저널>에 의하면 이러한 열기는 본고장인 미국을 능가한다고 한
다. 언론에서 크게 소개가 되기도 했지만 이 영화가 아카데미상 7개 부분
을 휩쓸었던 것이 흥행의 원인일 것이다.
과거 <마지막 황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우리 관객들이 영화
선정의 가장 우선 순위가 아카데미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관객의
선정 기준 중 또 하나 중요한 것이 헐리우드 박스 오피스의 흥행 순위다.
그래서 신문 광고를 보면 '박스 오피스 몇주간 1위' 라는 것을 꼭 써넣는
다.
물론 나 자신도 이런 문구를 보면 보고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아카데미상이라는 것이 흥행과는 별 상관없이 작품성과 연기력을
바탕으로 시상이 되고, 우리 정서와 미국인의 정서가 틀리기 때문에 미국
에서 흥행한 영화라고 해도 우리가 봤을 때 꼭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한국영화의 수준도 많이 향상된 것 같다. 그리고 좋은 영화, 재미있
는 영화에는 어김없이 많은 관중이 몰린다. <서편제>가 그랬고, <장군의
아들> <은행나무침대>등이 그랬다.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우리 영화의 앞날은 밝아질 것
이다.
무식의 끝은 어디인가요?
(필자는 지금 녹번동에서 '무식, 더 이상 방관만 할 것인가'라는 사무소
를 운영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필자가 직접 듣거나 체험한 것으로서, 당사
자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 가명을 쓴다. 믿기지 않는 내용이 많지만 어디
까지나 사실에 바탕을 둔 것임을 공언하는 바다.)
1. 남산의 소나무
배우들에게 최고의 영예인 아카데미상은 오스카상이 라고도 불린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그 트로피를 본 여
직원 하나가 "어머, 이 트로피 꼭 우리 오스카 아저씨 닮았네!"라고 하는
것을 어떤 기자가 듣고 신문에 게재함으로써 오스카상이란 이름으로 더 많
이 불려진다.
얼마전 알파라는 사람이 여자 친구인 베타와 <히트>라는 영화를 보았
다. 알파는 벅찬 감동을 받으며 영화를 봤다. 그도 그럴 것이, 연기의 화신
인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 니로 두 배우의 성격 연기가 기가 막혔던 까닭
이다.
영화가 끝난 후 알파는 베타에게 말했다.
"아카데미상 받은 배우 두명이 나오니깐 화면이 꽉 차 보이네..."
베타가 물었다.
"로버트 드 니로도 아카데미상 탔어?"
알파 왈.
"정확한 이름은 모르지만 한 번 탄 걸로 아는데?"
그러나 베타는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며 수긍하려 들지 않았다. 다음날
베타는 어디서 찾았는지 잡지 한권을 가지고 왔다.
"봐! 로버트 드 니로는 아카데미상이 아니라 오스카상을 탔잖아!"
알파는 어이가 없었다.
"정말 그러네, 아는 체 해서 미안!"
결국 둘은 필자에게 찾아와 이 문제를 상의했다. 필자는 난감했다. 사실
대로 말하자니 베타의 무식이 탄로나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자니 전문가
로서 양심이 꺼려지고...
고민 끝에 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Oscar Prize is identical with Academy Prize."
그러자 둘은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껄껄 웃고 방을 나갔다. 둘다 무슨
말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영어를 모른다는 게 탄로가 나면 부끄러우니까
이해하는 척 한 것이었다.
필자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들이 먹다 놓고간 포카리스웨트를
들이켰다.
창밖으로 알파와 베타가 사이좋게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2. 암사슴의 저주
R이라는 친구가 있다. 다소 어벙한데다 사람의 얼굴을 잘 식별하지 못하
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길가다가 누굴 만나면 '아는 얼굴인데 기억이 안나
네.'하고는 일단 인사를 한 뒤 "혹시 누구세요?"라고 물어보기 일쑤였다.
몇 년 전인가는 "에구, 니 에미다."라면서 어머니가 마구 두들겨 팬 적까지
있으니 정도가 다소 심각하다.
그런 R이 여자친구 Q와 <더 록>이란 영화를 보러 갔다. 숀 코네리와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을 했는데, 영화는 시종일관 박진감이 넘쳤다.
영화가 끝난 후 둘은 장터국수로 가서 물만두와 비빔밥, 냉면을 시켰다.
R이 입을 열었다.
"안소니 퀸 말이야, 오랜만에 보니깐 반갑네."
먹고 있던 물만두가 기도로 들어갔는지 Q가 갑자기 기침을 해댔다. 정신
을 차린 Q가 물었다.
"안소니 퀸이 언제 나왔어?"
R은 뭔가 자신이 착각했다는 걸 알았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탈옥한 영국 정보원으로 나왔잖아!"
격하게 말하느라 침이 Q의 뺨에 튀었다. 뺨을 손으로 문지르며 Q가 말
했다.
"그건 숀 코네리야!"
무안해진 R이 소리쳤다.
"아니면 아니지 왜 화를 내고 그래!"
격분한 Q가 집고 있던 물만두를 R에게 던졌다.
"퍽!"
물만두가 R의 뺨에 붙었다. R도 지지 않았다. 먹고있던 비빔냉면 가닥을
집어들고 Q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숨이 막힌 Q가 비빔밥에 얹혀진 계란 후라이를 R의 얼굴에 덮어 씌워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지만 무식이 부른 이 싸움의 휴우증은 의외로 컸다.
결국 둘은 필자를 찾아왔다. 필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
다.
'순간의 무식이 이렇게 큰 싸움을 불러 일으키다... 도대체 무식의 끝은
어디인가?'
필자는 다시 그들 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전화 한 통화를
하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울린 '딩동' 소리에 정적이 깨졌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
"저, 군만두 시키셨죠?"
R과 Q는 난데없는 군만두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필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만두 9개를 단숨에 먹어버렸다. 만두 한 개가 남았을 때 필자가 말했다.
"이 만두 끝을 둘이서 한 쪽씩 잡으시오."
영문을 모르는 둘은 시키는대로 했다.
"힘껏 당기세요."
둘이 만두를 당기자 만두가 터지면서 안에 든 것이 탁자 위에 쏟아졌다.
"바로 이것이오. 무식은 바로 터진 만두와 같소."
"아, 그렇구나."
둘은 크게 깨달았다. 둘은 필자에게 연방 머리를 조아리며 문을 나섰다.
필자는 천천히 흩어진 만두속을 주워먹기 시작했다.
3. 웬 법정?
의대생들의 사회 전반에 걸친 상식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만큼 전공과목의 공부할 양이 많고, 또 인턴, 레지
던트로 남기위해 끊임없는 경쟁을 하기 때문에 주변에 눈을 돌릴 시간이나
심리적 여유가 없는 탓이다. 이유야 어떻든간에 무식한 건 무식한 것이니
만큼 필자가 경험했던 예를 소개하고자 한다.
1991년 쌍방울 레이더스라는 프로야구팀이 창단되었다. 프로야구 제8구
단으로 탄생한 쌍방울로 말미암아 우리 프로야구는 7팀이 경기를 벌이던
기형적인 방식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장차 나아가야 할 목표인 양대 리그
분할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하여튼 쌍방울은 개막경기서 빙그레(현재 한화 이글스)에 11대0으로 이
기며 돌풍을 예고했고, 조규제와 김기태 두명의 걸출한 선수의 활약에 힘
입어 6위로 페넌트 레이스를 마칠 수 있었다.
그해 6월 급기야 쌍방울에게 밀려 최하위로 떨어진 OB베어스의 박철순
선수는 열이 받았다. '프로 10년된 팀이 신생팀보다 못하다니.' 울컥한 박철
순은 치렁치렁한 머리를 박박 밀어버렸다.
다음날 각 스포츠 신문에는 삭발을 한 박철순의 사진이 실렸다. 필자는
호기심이 일어 그 사진을 옆자리에 있던 친구에게 보여 주고는 '누구냐?'고
물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 친구는 '법정'이라고 답했다.
머리카락이 짧으니 스님일 것이고, 아는 스님이라고는 법정밖에 없던 그
친구로서는 당연한 대답이었는데, 삭발을 했지만 부리부리한 두 눈을 보면
박철순임을 누구나 알 수 있었음에도, 정말 무식의 끝이 어디인가를 생각
하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4. 바다표범의 수염
루이 13세라는 술이 있다. 이제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 술을 알고, 가격
이 100만원쯤 한다는 것, 그보다 더 비싼 술도 몇 개 존재한다는 것, 루이
14세는 7만원 정도밖에 안한다는 걸 알고 있다.
얼마전만 해도 양주라고 해보았자 시바스 리걸, 딤플, 조금 비싸면 XO밖
에 모르던 우리 국민들의 수준이 한 단계 격상된 것이다. 이젠 우리도 외
국의 우아한 레스토랑에 가서 "루이 13세 한병 주시죠."라고 세련되게 얘
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지식이 다 누구의 덕인가. 바로 우리 국회의원들의 공로다. 지식 습
득 경로가 어떻든 모르던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대단한 기쁨이다. 사람들
은 말한다. 우리 나라 국회의원들 도대체 하는 일이 뭐냐, 없애야 한다니
뭐니...
국회의원들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7만원짜리 루이 14세를 100만원 주고
구입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참으로 감사드린
다.
무식이란 범죄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요즘 사람들은 무식한 소리를 하고서도 '헤-'하고 웃어 버리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줄 알고 있으며, 또한 주위 사람조차 보복이 두려워
그 자리에서 일깨워 주는 일이 드물다.
사람들은 점점 더 무식해진다.
과거 퇴계 이황 선생은 무식과 기아, 질병을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3
대악으로 여겼다.
현대인들을 보면 뒤의 두가지에는 여전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만 무식
에 있어서는 엄청난 인내심을 가진듯하고, 불감증이라고 표현해야 좋을 그
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우선, 무식이 죄악이라는 사상이 사회 각 분야에
확대되는 것이 중요하다.
넉사냥
어느 토요일 아침, 나는 KBS 봉고를 타고 전주로 향했다. 이번에 취재
할 작품은 넉사냥이었는데, 넉사냥이란 말은 우리 생각처럼 '너구리를 잡는
다'에서 유래된 것은 아니고, 뭔가 심오한 다른 뜻이 있지만 진정한 뜻이
뭔지는 모른다.
진돗개를 데리고 사냥을 한다?
하긴 우리집 개들도 쥐를 잘 잡으니 산에 풀어 놓으면 동물인들 못잡겠
냐는 생각이 들어 별반 신기한 것이 없을 듯 싶었다. 하지만 그 아저씨-여
기서는 삼대아빠로 부르겠다. 왜냐하면 지금 그분의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데다, 그 사냥개의 이름이 '삼대'이므로-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게 아니
었다.
원래 우리나라의 진돗개는 짐승을 잘 잡는 개이며, 그래서 넉사냥이라는
전통까지 생겼다. 세월이 흐르며 순종이 거의 없어지고 진도에조차 거의
잡종만 남게 되었고, 집안에서만 기르다 보니 사냥개의 야성이 거의 없어
져 노루는 커녕 토끼 한 마리도 못잡는 개로 변해 버렸다는 것이다.
삼대아빠는 오랜 세월 진도를 누비며 사냥하는 개를 찾아다니셨단다. 그
러기를 십오년, 삼대를 본 순간 "이 개다!"라는 생각이 들어 당장 데려오셨
다고 한다. 처음 삼대가 노루를 잡았을 때 삼대아빠는 감격해서 엉엉 우셨
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듣고 생각해보니 삼대란 놈은 무지하게 사나울 것이라는 생각
이 들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의젓하다고 해야 할까? 하여튼 나같은 놈은
안중에도 없다는 표정으로 도도하게 앉아 있었다.
삼대아빠의 소개가 이어졌다.
"개가 짖는 것은 허세다. 두려우니깐 짖는 것이다. 정말 우수한 개는 절
대 짖지 않으며 행동으로 보일 뿐이다."
기골이 장대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삼대였다. 하루종일 봉고 뒤에 얌전히
앉아 있기에 "대소변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여쭈어 봤더니 그 정도는 스
스로 할 줄 안다고 하셨다.
7시간여를 봉고 뒤에 갇혀 있다가 막상 삼대를 산에 풀어 놓으니 잽싸게
뛰어나가 대소변을 한꺼번에 보는데, 산이 만들어지고 강이 생겼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대소변을 참도록 강요하는 것이 가엾어 보였다.
나는 산에 풀어만 놓으면 금방 짐승을 잡을 줄 알았더니 그런 것이 아니
었다. 기본적으로 산에 짐승이 없는 것이다. 이산 저산 헤메다가 "이 산이
아닌가 보다."면서 다른 산으로 옮기고, 산을 옮기고 나서는 "이산은 짐승
이 많아 보인다." 면서 희망을 부풀리지만 또 "이 산이 아닌가 봐."면서 다
른 산으로 옮기고...
밤 11시를 지나자 나는 초조해졌다.
밤 12시부터 <이소라의 프로포즈>라는 프로를 하는데, 그날은 내가 나
오는 날이었다. TV 출연을 많이 안해봐서인지 TV에 나온 내 모습을 너무
나 보고 싶었다. 삼대가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11시20분쯤 되었을 때
환호성이 울렸다.
"잡았다!"
뛰어가보니 삼대가 너구리 한 마리를 물고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목을
물어 단번에 죽인 듯했다. 숨진 너구리를 뺏어서 들어보니 대략 10kg은 넘
을 것 같았다. 너구리를 들고 사진을 찍는데, 내가 두손으로 들고 있기에도
퍽이나 무거웠다. 그런 걸 보면 삼대의 목힘은 엄청난 것이다. 하여튼 삼대
덕분에 나는 <이소라의 프로포즈>를 볼 수 있었다.
다음날이 되자 산에 짐승이 없는 것이 걱정이 되었다. 우리는 토끼 한
마리를 사기로 했다. 토끼를 산에 풀어놓고 카메라로 찍으려 했는데, 삼대
녀석이 토끼를 보고도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삼대아빠의 설명에 의하면 야생토끼가 아닌 집토끼라 그렇다는 것이다.
마당에서 닭이나 토끼와 잘 놀고 했다는 말을 들어보니 그것도 그럴 법 했
다. 나중에 삼대 아빠가 물라고 하기 전까지 삼대는 우아하게 앉아만 있었
다.
넉사냥의 방식은 이렇다.
삼대가 앞서 나가며 짐승을 찾고, 주인은 천천히 따라간다. 삼대가 짐승
을 잡으면 한입에 즉사시킨 후 주인에게 달려와 같이 가자고 한다. 주인은
삼대의 이빨에 낀 짐승의 털이나, 몸에 묻은 핏자국을 보고 잡았구나 하는
것을 알고선 삼대를 따라가 짐승을 포획한다는 것이다.
오후가 되어서야 한참을 헤멘 끝에 삼대는 너구리 한 마리를 또 잡았다.
전날 잡은 것과 비교도 안될 만큼 큰 것이었다. 이틀간 험한 산을 누빈 삼
대의 엄청난 체력에 고개가 숙여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
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다음날부터 4일간 SBS에서
취재를 온다는 것이다.
4일이나! 그 취재가 이루어졌는지 나도 모르겠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삼
대는 아무 불평없이 주인의 뜻을 따를 것이라는 것이다.
삼대아빠가 넉사냥을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뜻이
라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명해지려
고..." 혹은 "개를 비싼 값에 팔기 위해서."라고 시기를 한다. 실제로 이 방
송이 나간 뒤 모그룹 회장이 삼대를 1억원에 사겠다는 제의를 했단다. 그
러나 그에게 있어서 삼대는 아들이고 자식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자식'을 팔지 않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삼대에게는 5마리의 새끼가 있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상태였지만 아버
지를 닮아 용맹하리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경우의 매사냥도 그렇지만, 넉사
냥도 누군가 이어받지 않으면 조만간 명맥이 끊기지 않을까 우려됐다.
그리고 우리에게 점차 잊혀져가는 '우리것'들은 과연 넉사냥 뿐일까?
외다리 정육점의 비밀
서교동 상업은행 뒤 약간 후미진 골목길에 들어서면 '외다리 정육점'이라
는 간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그 정육점의 주인 윤경식 씨는 늘
한쪽 다리를 들고 있다.
사람들은 윤경식이 학처럼 한쪽 다리를 들고 있는 광경이 못내 신기해
그 정육점에 와서 고기를 산다. 고기를 사지 않더라도 윤경식이 외다리로
서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가는 사람도 많았다.
한쪽 다리가 아픈 게 아닌가 하고 묻는 사람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리를 수시로 바꾸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런 것도 아닌 듯했다.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윤경식은 빙긋이 웃으며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너도 해봐. 엄청 재미있어!"
하여튼 이 외다리 정육점은 점차 이 동네의 명물이 되어 갔다. 자신의
인기가 높아가자 윤경식은 다양한 이벤트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즉, 학의
의상을 입거나, 타조 옷을 입음으로써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는데, 이럴
때면 학을 본 적이 없는 어린이들이 대거 몰려오는 등 교육의 장이 되었
다.
또한 파는 고기에다 한쪽 다리로 서있는 타조 마크를 찍어 주었는데, 이
고기는 노량진 수산시장 같은 곳에서 고가에 암거래되기도 했다. 이 고기
가 얼마나 인기였는지 타조마크를 위조하는 업체가 생기기도 했다.
윤경식은 돈도 많이 벌었다.
빨간색 티뷰론을 끌고 다니며 고기를 배달했고, 자동차 타이어에 다이아
몬드를 박았다. 여름인데도 발목까지 오는 밍크를 입었고, 여우목도리를 목
에 걸쳤다. 애완용으로 달마시안(온몸에 점이 박힌 개)을 샀고, 원숭이 골
과 독수리 혀 등 최고급 요리가 밥상에 올려졌다.
그러던 어느날, 한 사내가 외다리정육점을 찾았다. 바바리코트 차림이었
는데 40도를 웃도는 더위가 계속되고 있어 코트가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윤경식이 입은 밍크 코트를 본 사내는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사, 삼겹살 한근만 주세요."
사내는 윤경식이 싸준 삼겹살을 받아 문을 나섰다. 윤경식은 혀를 끌끌
찼다.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네.'
화요일 아침 7시40분. 사내는 TV를 켰다. <아침을 달린다>라는 프로의
한 코너인 '외다리가 본 세상'이 막 시작하고 있었다. TV 화면에는 97 한
국 에어쇼가 방영중이었다.
"이 비행기는 러시아의 SU-27기로..."
리포터인 윤경식이 비행기를 가리키며 설명을 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
는 훈훈한 현장을 윤경식이 외다리로 찾아가 보는 코너였는데, 아주 폭발
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청자 중 몇 명을 뽑아서 삼겹
살 한근씩을 경품으로 주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사내의 이름은 마태우스, 명망있는 강력계 형사였다. 마태우스는 외다리
정육점에서 범죄의 냄새를 맡았다. 한 번도 틀려본 적이 없는 범죄의 냄새
를.
'이상하단 말이야...'
윤경식은 오늘도 그 사내를 볼 수 있었다. 벌써 보름째 매일 삼겹살을
사가는 중이었다. 윤경식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 삼겹살을 좋아하나 보죠?"
사내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웬 관심?"
윤경식은 괜히 말을 걸었다고 후회했다.
'가다가 자빠져라!'
마태우스는 그동안 촬영한 비디오 테이프를 돌려보고 있었다. 보름간 정
육점 실태를 촬영한 것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별다른 혐의점을 찾을 수 없
었다. 한참 보다보니 배가 출출해졌다. 라면을 찾았으나 그만 다 떨어지고
없었다. 마태우스는 할 수 없이 동네 슈퍼로 발길을 옮겼다.
"어이쿠!"
마태우스는 그만 돌에 걸려넘어지고 말았다. 무릎에서 피가 나는 걸로
보아 십자인대에 손상을 입은 것 같았다. 그순간 마태우스는 뭔가 깨달은
것이 있었다.
"바로 그거야!"
집에 돌아온 마태우스는 비디오 테이프를 면밀히 관찰하고는 고개를 끄
덕였다. '외다리, 너도 이제 끝장이야!'
윤경식은 의자에 앉아 코를 후비고 있었다. 날씨가 건조해서 그런지 무
지 아팠다.
'오늘따라 손님이 없네...'
그 순간 누군가 정육점으로 들이닥쳤다. 윤경식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서 오십시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람은 지난 15일간 매일 삼겹살을 사갔던 바로 그
사내, 마태우스였다.
"삼겹살 한근 주세요."
"아, 예. 잠깐만 기다리세요."
윤경식이 깽깽이 걸음으로 고기를 꺼내들고 왔다.
"잠깐!"
마태우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러십니까?"
윤경식이 의아한 눈길로 마태우스를 쏘아보았다.
"아까 코 후비던 손이잖아요. 손 씻고 다른 고기로 주세요."
윤경식은 투덜거리며 손을 씻고는 새로 가져온 삼겹살을 저울에 올려놓
았다.
"정확히 600그램이군요. 하하하하."
그때 마태우스의 손이 날렵하게 윤경식의 손을 낚아 챘다.
"이 손! 바로 이것이 100그램의 비밀이었다."
손을 잡힌 윤경식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넌 늘 저울에 손을 올려 놓고 있었지. 무게를 달 때마다 그 손으로 100
그램씩 이득을 본 것이야."
마태우스는 수갑을 꺼내 윤경식의 팔목에 채웠다.
"넌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한쪽 다리를 들었어. 그 작전은 성
공했지, 아무도 너의 손을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깐."
어떻게 알았는지 즉각 기자들이 몰려왔다.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어떻게 그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습니까?"
"그간 수입이 짭짤했을 텐데, 재산은 어느 정도나 모았는지..."
범인을 잡을 때마다 마태우스는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 이번 사건도 예
외가 아니었다. 범죄는 날이 갈수록 흉포화, 지능화된다. 쥐꼬리만한 봉급
에 낡은 장비, 밥값도 안되는 수사비를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 더
이상 형사들에게 희생만을 강요할 수 없는데.
한국의 바스티유라고 불리는 청주교도소.
한 죄수가 외다리로 서 있었다. 그 죄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마태우스, 꼭 복수할 거야."
섹시한 목소리의 비결?
1. 정답은 알레르기성 비염
내가 고2때인가, 감기에 걸렸던 적이 있었다. 금방 낫겠지 하고 버티다
보니깐 몇 달을 갔다. 한약방에 가보니 코점막이 비후되었다고 한약을 한
보따리 싸주셨다. 지극히 성실했던 나는 꼬박꼬박 그 약을 먹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 병명은 알레르기성 비염이었다. 이게 어느 정
도로 잘 낫지 않느냐 하면, 이비인후과 개업한 사람이 알레르기성 비염(이
하 비염) 환자 10명만 확보한다면 그 병원은 절대 문을 닫지 않는다는 것
이다. 괜히 한약값만 날린 셈이다.
비염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증상은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심해져 버렸다. 조금만 찬바람
을 쐬도 콧물이 났고, 길을 가다가 시도 때도 없이 맑고 투명한 콧물이 흘
렀다. 점막의 비후 덕분에 코가 완전히 막혀 냄새같은 것을 전혀 못 맡는
것은 당연했고, 언제부터인가 나는 입으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콧물에 대비해서 나는 꼭 휴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
녔다. 언젠가 그 휴지를 화장실에 간다고 빌려달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내
가 다소 야박하게 군 것에 대해 이 글을 읽고 이해해주기 바란다. 생각해
봐라, 휴지를 몽땅 써버리면, 이 나이에 내가 옷소매로 코를 닦아야 하고,
혹시 반쯤 남겨 오더라도 결벽증에 시달리는 내가 그 휴지로 코를 푼다는
것이 가능이나 하겠는가.
바로 이것 때문에, 나의 삐삐소설을 듣는 독자들 가운데 "목소리가 섹시
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섹시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그다지 기분 나
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날카롭게 "왜 코맹맹이 소리를 내시나요?" 라거나
"감기 드셨나보죠?"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도 만만치 않다.
비염은 아침에 특히 상태가 안 좋은데, 내 삐삐소설은 거의 아침에 녹음
을 하니 더더욱 목소리가 코맹맹이 소리가 날 수밖에 없다.(아직도 궁금하
면 012-842-8349)
내 목소리가 오재영 씨의 목소리를 닮았다는 사람도 많은데, 내 생각에
오재영 씨도 알레르기성 비염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난 오재영 씨를 보고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어느날 라디오에서
오재영 씨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순간, 내가 언제 저 프로도 나갔던가
착각할 정도로 나와 비슷했다. 같이 듣던 사람이 분명 생방송인데도, "서민
선생님 언제 녹음했어요?"라고 물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는 어느 정도 컸으니깐 괜찮았지만, 어린 나이에 이 병에 걸리면 숨을
입으로 쉬게 되고, 그러다보면 얼굴이 바보같이 돼버린다. 본인도 괴롭고
학교성적도 좋을 리가 없다. 애가 입으로 숨을 쉬기 시작하면 부모들은 꼭
병원에 데리고 가서 의사의 처방에 따르는 것이 좋다.
2. 코고는 것은 이혼 사유
비염을 앓기 때문에 나는 무지하게 코를 곤다. 낮에 잠깐 조는 것도 코
를 곯아대니, 밤에 누워서 잘 때는 상상을 초월한다. 술을 마시면 더욱 심
해 내 코고는 소리에 놀라서 내가 잠을 깬다.
군대에 갔을 때 첫날밤 우리 내무반 사람들(전부 의사들이다.) 모여서 대
책회의를 했단다. 베개를 얼굴에 덮어보기도 하고 목 사이에 끼워 보기도
하는 등 별짓을 다했지만 안 되겠어서 날 깨웠다. 의술의 한계에 부닥친
것이다.
"제발 좀 일어나세요, 네?"
그 다음부터 나는 훈련이 끝나고 취침시간이 되면 플래시를 비춰가며 삼
국지를 읽다 애들이 다 잔 후에야 잠이 들었다.
개는 사람보다 몇배 청각이 뛰어나다.
나의 애견이자 아들인 벤지는 늘 나와 함께 잠을 자는데, 그렇다면 벤지
는 나의 코고는 소리를 몇배나 크게 느끼며 잠을 잘 것이다 .그러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다. 내가 벤지를 괜히 이뻐하는 것이 아니다.
코를 고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옛날에 배우기로는 UPPP란 수술
로 많이 고쳐질 수 있다고 한다. 코고는 것은 이제 이혼 사유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알레르기성 비염도 수술로 코고는 것이 완화될 수
있다면 나도 수술을 해야 할텐데...
3. 발음이 정확치 않아요
내 삐삐소설 독자들의 또다른 불만이 바로 발음이 정확치 않다는 것이
다. 내가 들어 봐도 가뜩이나 코가 막힌 소리를 내면서 그나마도 발음이
불분명하다. 그래서 별로 수준이 높지도 않은 내 삐삐소설을 두 번, 세 번
들어야 겨우 이해가 될까 말까란다.
세상에, 그 아까운 전화비...
발음이 정확치 않은 까닭은 내 스스로 판단해 보았을 때 혀가 짧다는 것
이다. 혀가 짧은데, 어떻게 하라고! 난 독자들에게 답삐(응답하는 삐삐를
말한다)를 남길 때 "혀 짧아서 그러니 이해하세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심심해서 내 친구와 누구 혀가 더 긴가 재보기로 했다.
놀랍게도 내 혀가 더 길었다. 그런데도 그 친구의 발음은 정확했다. 난 충
격을 받았다. 화장실에 틀어박혀 2시간쯤 고민하다가 난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혀의 길이가 아니다. 혀를 얼마나 잘 쓰느냐가 문제인 것
이다."
거울을 보고 내가 산출한 공식에 의해 계산을 해 봤더니 나는 내 혀의
단 18%만 쓰는 것이다. 최대 쓸 수 있는 비율이 40%이므로 내 노력에 의
해 내 혀짧은 발음을 교정할 수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발음을 '갱제'라고 해도 신문에서 다 알아서 고쳐 주니
까 문제가 없겠고, 김국진 씨야 개그맨이니 혀짧은 소리가 매력일 수 있어
도 작품성을 생명으로 하는 내가 발음이 정확치 못한 것은 말도 안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진재영 씨가 발음을 고치는 데 썼다는 방식으로 야쿠
르트 병을 입에 물고 발음교정을 하고 있다.
4. 너, 아직도 하니?
처음 매스컴의 취재 대상이 된 것은 내가 의대를 나왔다는 것도 있겠지
만 짧은 시간(약 23초)의 인사말에 소설을 쓴다는 것이었으리라. 그것도 매
일매일 바꾸어가면서,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95년부터 2년간이나 혼자
소설을 연재해 왔다는 꾸준함도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어려서부터 추리소설을 많이 읽었고-코난 도일과 아가사 크
리스티, 김성종 씨 등등-새로운 유머를 개발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
탓에 스토리 구상과 전개에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신문과 잡지에 몇번 나고, TV에도 출연하면서 내게 오는 호출 횟수가
몇백, 몇천을 헤아리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삐삐를 하나 더 샀다. 그래도
내 호출기인데, 평범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거기다가도 '주부를 위한
삐삐소설'이라는 것을 연재하고 있다.
두 개를 다 하려면 힘들지 않겠냐는 질문을 받으면 난 고개를 젓는다.
강한 부인을 위해 너무 세게 흔들다 턱이 빠져버린 일도 있다. 아침에 내
가 이 두 소설을 연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단5분이 될까말까?
내게 오는 호출 메시지 중에서 "저도 소설을 할테니까 지켜봐 주세요."
라는 것도 꽤 있었다. 난 번호를 적고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모니터를 해
보았다. 1년은 고사하고, 한달도 못가서 다들 그만 두었다.
그만 둔 이유를 물어봤더니 대부분이 "유치하다고 다들 그만두래요."란
다. 세상에, 누구는 처음부터 잘했나. 열심히 하다보면 발전하는 것이지. 초
창기의 비난을 못 견뎌한다면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나는 우등상보다는 개근상이 좋다.
5. 따라서 나는...
학회 등을 이유로 외국에 나갈 기회가 많아졌다. 그럼에도 나는 "공중보
건의라서 외국 못 나가요."라고 고개를 젓는다. 내 친구들 보면 잘만 나가
더라. 내가 안 나가는 이유는 바로 삐삐소설을 연재하기 위해서다! 이 얼마
나 감동적인가. 내 삐삐소설을 듣고 기분이 좋아질 독자가 한 명이라도 있
는 한, 내 삐삐소설은 계속될 것이다.
통신에 관해서는 세계 2위의 전화 보급률을 자랑하지만, 아직도 우리 나
라에는 전화시설이 좋지 않은 곳이 있다. 여름마다 무료진료를 떠나는 곳
에 갔다가, 공중전화 두 대가 몽땅 고장난 걸 보고 초조했던 기억, 출장갔
을 때 여관 전화가 삐삐를 아예 못치도록 잠겨 있는 경우 그 쓰라림... 이
런 것들이 오히려 나의 투지를 더욱 불태운다. 난 힘차게 포효해 본다.
"으르릉!"
사라다빵에 얽힌 전설
아버님께서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어느 집이나 그렇지만, 가족 중의 누
구라도 입원을 하는 경우 이만저만 우환이 아닐 수 없다. 하여튼 그래서
어머님께서는 매일 병원에서 밤을 보내신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잠깐씩
병실에 들르는 수준인데, 장남으로서 이럴 때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게 마
음이 아프다.
어느 부모나 그렇듯이 어머님께서는 내가 잘 먹는 것을 좋아하신다. 소
위 '팽창주의'를 추구하시는데, 내 체중이 대학 들어온 이후 무려 20kg 이
상 증가한 것은 매일 마셔대는 술도 술이지만 어머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별로 배가 안 고파도 아무 생각없이 밥을 두공기씩 먹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병원에 계시는 어머님께 기쁨을 주기 위해 병원에서 밥을 먹는 일이 많
은데, 그럴 때마다 어머님께서는 참 기뻐하신다.
입원 삼일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어머님께서는 사라다빵을 먹으라고 내
놓으셨다. 먹다보니 맛이 이상했다.
"엄마, 맛이 이상해."
어머님께서는 야심작으로 내놓으신 것을 내가 맛없다고 하시면 몹시 흥
분하신다.
"무슨 소리야. 어제 사온 건데."
"안 먹겠다는 게 아니라, 맛이 조금 이상하다구."
어머님은 눈을 크게 뜨시며 흥분하셨다.
"하루밖에 안 되었는데, 뭐가 이상해. 안 먹으려면 관둬."
"안 먹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 맛이 이상하다니깐."
그러면서 나는 사라다빵 두 개를 다 먹고, 입맛을 회복하기 위해 소라빵
을 한 개 더 먹었다. 배가 빵빵한 채로 나는 출근을 했는데 속이 별로 좋
지 않아서 점심을 굶었다. 물론 설사도 한 번 했다. 책상에 앉아 아랫배를
손으로 쓸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민아!"
어머니셨다.
"아이고, 민아. 냉장고의 전원이 꺼져 있었는데, 내가 그것도 모르고... 배
안 아팠냐?"
내가 배가 아팠다면 어머님이 마음이 아플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응, 조금 아파서 점심 굶었더니 괜찮아. 참, 설사도 한 번 했어."
그랬더니 어머님께서는 마음이 아프시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사실대로
배가 무지 아팠다고 했으면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난 어머님의 숭고한 사
랑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님의 사랑은 이렇듯 위대하다.
내가 어떤 여자와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오더니 남매냐고 물었다.
"아닌데요. 왜 그러세요?"
그랬더니 아, 글쎄 우리가 닮았다는 것이다. 나도 황당했지만 그 여자,
특히 자신의 미모에 자신이 있었던 그 여자는 무척이나 황당해하면서 눈을
위아래로 치켜 떴다. 나는 괜히 미안해서 "내 얼굴이 여자 얼굴이면 이쁜
얼굴이란 말야."라고 말했지만, 사실 나의 얼굴은 전혀 잘 생긴 것과는 거
리가 멀다.
날 닮았다면 남자고 여자고 "아니, 그렇게 모욕적인 말을..."이라고 말한
다. 그 중에는 내가 볼 때 나보다 못 생겼다고 생각하는 애도 있었다. 하여
튼 나 역시 내가 미남이 아니란 것을 잘알고 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정우
성 씨나 장동건 씨 같이 너무 잘 생겨 접근하기 힘든 것보다는 나처럼 생
겨서 누구나 편하게 생각하는 그런 게 더 좋은 면도 있다.
하여튼, 아버님 병실을 지키고 있는데 주치의 선생님(이하 주선생이라
부르겠다)이 들어오셨다. 내가 조교시절에 가르쳤던 후배들이 이제 주치의,
인턴을 하고 있으니 참 격세지감을 느끼는데, 주선생이 대뜸 어머님을 보
면서 "서민 선생님하고 어머니하고 어쩜 그리 닮았어요! 붕어빵이네요."라
고 하는 것이 아닌가.
놀라운 것은 어머님께서 그 말을 전혀 기분 나빠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님께서는 흰 이를 드러내며 배시시 웃기만 하셨는데,
바로 그것이 어머님의 숭고한 사랑이다...
지하철에서
당산철교가 끊어졌다. 그 바람에 한강 남쪽에서 지하철2호선을 타고 시
내로 가야 하는 많은 사람들은 무료로 운행되는 셔틀버스를 감사하는 마음
으로 타야만 한다. 셔틀버스를 타느라 길게 줄을 늘어서 있는 광경이 어느
덧 익숙한 풍경이 되어 버렸다.
많은 시민들이 이렇듯 불편을 감수하며 살고 있지만, 불편을 느끼는 사
람이 있으면 이익을 본 사람도 있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나같이
홍대 앞에 집을 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다.
첫째, 홍대입구에서 지하철이 출발하기 때문에 무조건 앉아 갈 수 있다.
게다가 승객도 많이 줄어 쾌적하기까지 하다.
둘째, 술을 먹고 지하철을 타다 보면 졸다가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칠 때
가 간혹 있다. 특히 나처럼 늘 술을 인사불성으로 마시는 사람에게는 이제
홍대입구 이상 전철이 안 간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것
이다.
어느날이었다. 할아버지 한분이 지하철에서 큰소리로 한탄을 하는 것이
다. 한탄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요새 젊은것들은 몸도 빠르고 날래서 나같
은 노인을 밀치며 자리를 쉽게 잡는다. 그나마 양보심도 아예 사라져서 노
인들이 타도 전혀 자리 양보할 생각을 안한다. 특히 경로석이란 것은 말뿐
이지 온통 젊은이들의 차지란 것이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는 경로석 앞에
서 있으면 자리를 구걸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예 그쪽으로는 가지도
않는단다.
할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동안에 양심에 찔려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한 젊은 여자뿐이었고, 대부분은 6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서 계신데도 묵묵히 앉아 있었다. 내가 느끼기에도 요즘은 자리 양보하는
광경을 보기 힘들다.
옛날에는 그래도 양심이 있으니 신문보는 척, 자는 척 하는 애교를 부렸
지만 요즘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서도 전혀 양보를 안 해주니 정말 안타까
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로석'은 정말 '경건한 자세로 노인을 바라보는 자
리' 혹은 '경우에 따라서 노인이 앉을 수 있는 자리'로 변해 버렸다.
홍대가 종점이 되어 버린 탓에 나 역시 앉아서 타고 가는 기회가 많이
늘었다. 앉아보니 정말 편하다. 사람들이 이 맛에 앉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었다.
그래도 나는 아직 젊다. 그만큼 튼튼한 두다리가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할머니가 전철을 타는 것에 대해 "택시 타지 왜 전철을 타서 자리
를 구걸하냐."고 얘기한다.
놀라운 얘기다.
혹자는 "나이들면 집에 있지 왜 나다니냐."는 얘기를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노인들은 공짜표로 타는 것이니 앉으면 안된다."고 한다.
무서운 얘기다.
우리 젊은이들이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이 두렵기까지 하다. 내 나이 이
제 32세. 20년 후에는 내 까만 머리도 하얗게 바뀔 것이다.
그날이 오면 난 어떻게 전철을 탈까?
그때 서 있을 것에 대비해 난 오늘도 열심히 테니스를 치며 다리 운동을
한다.
가자, 낮술의 세계로
낮술을 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에는 대낮에도
음주단속을 하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나는 점차 궁금해졌다. 왜 낮술
을 할까? 낮에는 열심히 일만 하는 나의 정서상 낮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낮술을 하는 심리를 알아보기 위해 보름간 낮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그 결과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낮술은 경제적이다.
낮에는 밤보다 훨씬 빨리 취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환한 대낮에
술을 마신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과연 이것이 의
대를 나온 사람이 할 소리인지?)
난 주량이 소주 두병 정도 된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세병까지도 마신다.
남에게 그다지 빠지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자랑할 만한 수준은
아니어서 늘 '두병만 더 마셨으면...' 하고 한탄한다. 남들은 '술을 많이 마
시다보면 주량이 는다'고 하지만 나는 술을 처음 마셨던 대학 일학년 때부
터 꾸준히 두병을 유지하고 있다.
하여튼, 그런 내가 낮에 술을 마시면 한병 반이면 이내 정신을 잃어버리
는 것이다. 한병만 마셔도 얼떨떨한 것이 꼭 밤에 두세병 마실때의 느낌을
갖게 한다. 게다가 밤과는 달리 낮에는 안주를 먹고 싶은 생각이 그다지
나지 않기 때문에 김치찌개 등의 식사와 곁들여 먹을 수 있어 더욱 경제적
이다.
둘째, 낮시간이 빨리 간다.
보건원에서 나는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한다. 점심식사가 11시 반부터
이니 오전에는 두시간여만 버티면 되는 반면 한시부터 6시까지 기다리기란
가끔 지루할 때가 있다.
이럴 때 점심에 마신 낮술은 오후 시간을 쏜살같이 가도록 해준다. 또한
사람은 지나치게 긴장할 때보다 약간 몽롱한 것이 더 능률이 높을 것이며,
평소 잘 안돌아가던 머리도 알콜로 인해 혈액순환이 좋아진다면 아이디어
도 잘 떠오를 수 있다.
낮술을 몹시 즐기던 아인쉬타인이 E=mc2이란 공식을 낮술을 즐기다 생
각해 낸것도 우연이 아니다.
셋째, 밤에 술을 마실 필요가 없다.
프로작이라는 약이 있다. 주로 알콜중독에 걸린 사람들에게 쓰는 약인데
이 약을 먹으면 술맛이 너무나 쓰게 느껴져 술 마실 생각을 안 하게 된다
는 것이다. 낮술의 원리가 이와 마찬가지다.
즉, 비싼 프로작을 먹느니 차라리 밥 먹을 때 소주 한병 시킴으로써 프
로작을 대신할 수 있다. 게다가 알콜중독인 사람이 술을 안 먹으면 금단증
상이 오기 마련이다. 차라리 이럴 때 낮술을 마신다면 그런 금단증상 없이
쉽게 밤에 술을 끊을 수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낮술을 마신 15일 동안 나는 한 번도 밤에 술을 먹고 싶
었던 적이 없으며, 어쩔 수 없이 참석했던 술자리에서도 별로 술을 들이키
지 않아 남들로 하여금 "서민이 몸 사린다."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그렇
게 살다 보면 결국에는 음주량이 매우 줄어들어 건강에 크게 득이 되기 마
련이다.
이밖에 낮술을 마시면 남들로 하여금 웬지 호기있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으며, 아침에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 수가 있으므로 정신건강에 좋고 근
무를 잘 할 수도 있다. 이렇듯 온통 장점뿐인 낮술!
자, 우리 모두 낮술의 세계로 가자!
술의 힘과 책임
나의 주량은 정확히 계산하면 소주 2병 4잔이다. 나는 술을 오랜 시간에
걸쳐 마시는 것보다는 그냥 빨리 마시고 금방 취해버리고 마는 스타일이
다. 이런 스타일을 고집하는 이유는 나의 건강을 위해서다.
생각해 보라. 내가 술을 천천히 마신다면 더 많이 마실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3병 이상 먹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망가지는 나
의 건강,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래서 나는 술자리에 가면 "야, 너 천천히
마셔."라는 주위의 협박을 항상 뿌리치고, 최고의 스피드로 술을 마신다...
소주를 마시고 나서 맥주를 마시면 마시는 맥주가 우리 몸에서 모조리 소
주로 느껴지기 마련이고, 십중팔구 나는 정신을 잃고 잠을 청한다. 그렇다
고 해서 맥주를 취할 때 까지 마신다면 돈도 아깝고 배가 불러올 것이며
나중에 고스란히 뱃살로 연결된다.
그래서 나는 늘 소주-맥주 순서로 섞어 마신다.
1. 목동과 안양사이
신촌 근처에서 술을 마셨다. 소주를 마시고 맥주를 시키면서 난 친구에
게 말했다.
"이거 마시면 취할 것 같으니 택시에 태워 보내줘."
친구는 알았다고 했고 난 마음놓고 맥주를 들이켰다. 얼마나 시간이 지
났을까. 어느 순간 나는 길바닥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나를 발견했다. 시간
을 보니 새벽 한시가 다 되어 가고 눈 앞에 펼쳐진 거리의 풍경이 목동 비
슷했다.
'이런, 어쩌다 목동까지 왔지?'
새해를 3일 남겨둔 때여서 엄청나게 추웠다. 부들부들 떨면서 나는 가끔
씩 지나가는 택시에 대고 "홍대앞!"을 외쳤다. 이상한 일이었다. 모두들 내
말을 한마디로 일축하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한 10대 정도 그냥
보냈을까. 바르르 떠는 내 모습(술이 깨면 급속히 한기가 찾아온다.)이 처
량했는지 택시 한 대가 날보고 타란다. 잽싸게 탔더니 아저씨가 물으셨다.
"혹시 여기가 어딘 줄 아세요?"
"목동이잖아요."
그러자 아저씨가 씨익 웃는 게 아니가.
"여기는 안양의 끝이어요."
뭐가 뭔지 잘 이해가 안 갔지만 한참 생각해 보니 이런 것이었다. 나는
신촌에서 103번 버스를 탄 것이고 타자마자 자리에 앉아 잠을 잤다. 그러
다 보니 종점 안양까지...
다음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따졌다.
"야 임마! 택시 태워 달라니깐!"
친구는 되레 화를 냈다.
"괜찮냐고 하니깐 네가 막 뛰어가면서 그냥 가라고 했잖아"
난 어이가 없었다. 술취한 사람이 언제 취했다고 하는 걸 봤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녀석은 의리가 없는 놈인 것 같아 이 자리에서 이름을 밝힌
다. 이름은 윤종필. 순천향대 의대를 나왔고 방사선과를 하고 있다. 성격은
과묵하고 말이 없으며, 1년 전까지만 해도 나한테 여자 소개해 달라고 무
지하게 졸랐던 녀석인데, 나보다도 먼저 장가를 가서 지금은 잘 살고 있다.
정의는 늘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2. 또 안양?
술을 먹고 지하철을 타면 난 기둥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쓰러지지 않으려
고 애쓴다. 그런 나에게 빈자리가 눈에 띄면 앉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
러나 앉는 동시에 나는 잠이 들고 만다.
잠에서 깨어나면 대개 지하철 역 밖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상태로 발견되
어지곤 하는데, 아마 지하철 역무원들에 의해 짐짝처럼 들려 내동댕이 쳐
진 것일 것이다. 그런 주제에 나는 누가 술 먹고 지하철 바닥에 엎드려 있
으면 혀를 끌끌 찬다.
'쯧쯧, 무슨 술을 저렇게 먹는담...'
10정거장이든 20정거장이든 난 전철이 멎을 때까지 잠을 잔다. 2호선이
한바퀴 돌고 난 뒤 잠을 깬 적도 있다. 한 번은 학교 선배와 술을 마시다
가 역시 정신을 잃었다. 선배는 친절하게도 나를 택시에 태워 주었단다.
물론 나는 택시 안에서 세상 모르게 잠을 잤고 다음날 아침 어머니로부
터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나를 태우고 온 택시가 안양에서부터 왔다면서
2만원을 요구하더란다. 번호판을 보니깐 경기 택시가 틀림없기에 할수없이
2만원을 꺼내주었다고 하셨다.
난 황당했다.
'설마 또 안양에?'
그러나 선배에게 확인해 본 결과 날 택시에 태운 시간이 오후 9시쯤이
고,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집에 도착한 시간은 9시반, 그러니깐 대학로에서
술은 취했지만 귀소본능만은 남아있는 나의 '홍대입구' 외침에 따라 우리집
까지 그냥 가놓고선, 내가 취해 있으니 안양에서 온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
셈이다.
정말 택시는 나빠!
3. 택시비는 자동?
교수님 댁에서 술을 마셨다. 평소 못 먹어보던 양주가 나온 것에 흥분해,
맛있는 안주와 더불어 거푸 먹다보니 역시 정신을 잃었다. 할 수 없이 차
를 가지고 온 친구가 나랑 우리 동네 사는 다른 친구들을 데려다 주었는
데, 우리집 앞에 가서 내 친구들이 나에게 해댄말이 아주 히트다.
"야, 서민 말이야, 택시비 내는 것은 자동이거든. 한번 볼래?"
날 흔들고 이렇게 말했단다.
"손님, 다 왔습니다."
그랬더니 혼절해 있던 내가 눈도 안 뜨고는 지갑에서 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주더란다. 다들 신기해 했는데 평소 내가 이런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
는데다, 지갑에는 집에 있는 돈을 몽땅 가지고 다니질 않나, 얼굴하고 옷입
은 것을 보면 귀티가 줄줄 흐르고... 해서 나는 늘 지갑털이들의 표적이 되
어 왔다.
한 번은 술을 먹고 깨보니 우리집 앞 길바닥에 앉아있는데 주머니를 보
니 지갑이 없는 것이다. 돈도 가득 들었는데, 너무너무 속이 상했다. 다음
날 단골 맥주집에 가서 쓰린 속을 달래는데 술집 아줌마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어제 서민 선생 너무 취했더라."
난 황당했다.
"제가 여길 왔었나요?"
"그럼, 나갈 때 평소와는 달리 돈까지 내고 갔는데..."
그 말을 듣자 속쓰린 것이 좀 누구러졌다. 거기서 술값을 냈으면, 낸만큼
번 게 아닌가.
술을 그렇게 마시니 본의 아니게 지하철 유실물 센터를 자주 가게 된다.
거길 가보니 쓸만한 것인데 주인이 안 나타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우리
경제가 이렇게 된 원인 중 하나도 잃어버리면 말지 하는 소비적인 정신도
크게 기여를 했을 것이다.
우리, 술 먹을 때는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맙시다!
4. 기타 사례 4가지
(1) 당산철교가 끊기는 바람에 홍대역이 종점이 되었다. 그렇다고 전철이
무한정 홍대에 서있는 것은 아니다. 전철의 차고지는 바로 15정거장쯤 떨
어진 성수역. 난 홍대 역에서 잠을 자다 내리지 못했고 정신을 차려 보니
성수 전철역 바닥에 앉아 있었다. 황당했고, 더욱 쓰라린 것은 내 지갑이
또 없어진 것이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100원짜리 한 개가 나왔다. 난 그 돈으로 전화를 걸
어 집에 갈 수 있었다. 지갑은 나중에 을지로입구 화장실에서 발견되었지
만 돈과 신용카드 3장이 몽땅 없어졌다.
(2) 어느날 순대집에서 나오는데 내 신발이 없는 것이다. 내가 맨 마지막
손님인지라 어떻게 할 방법도 없고 해서 한 켤레 남은 구두를 신고 나왔
다.
몸이 말을 안 듣다 보니 내릴 때 전철문에 발이 끼었고, 그 신발은 지하
철 선로로 떨어져 버렸다. 전철이 떠나가고 신발을 주우려는데, 선로 옆에
웬 개울이 흐르고 내 신발은 저만치 떠내려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취해서 잘못 본 것인지 모르지만, 그날은 한쪽은 신발, 한쪽은 맨발인 채로
집에 와야 했다.
(3) 술을 무지하게 마시다 정신을 차려보니 경찰서였다. 택시비를 안 준
다고 기사 아저씨가 나를 경찰서로 끌고 온 것이다. 나는 경찰차를 타고
집에 도착, 어머니를 깨워서 돈을 드렸는데, 나중에 지갑을 보니깐 이만원
이나 있었다.
(4) 교수님과 술을 마시고 같은 방향이라 택시를 함께 탔다. 택시 안에서
나는 잠이 들었고 어떻게 집에 도착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교수님이 다음
날 그러시는데, 내가 먼저 택시를 내리면서 이렇게 말하더란다.
"언니, 나 갈게 나오지 마!"
나는 왜 술만 마시면 사람을 부를 때 언니라고 할까.
털
지금은 애들이 신체적으로 빨리 성숙할 뿐 아니라 알것도 다 안다. 즉
내가 어른이 돼서야 깨달은 사실들을 지금 아이들은 아주 당연한 상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금 애들에게 그런 얘기를 한다면 두들겨 맞기 십상이겠
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라는 말이
웬만큼 통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청소를 하다가 주운 쪽지에 "xx야! 너 멘스하니? 난
해."라는 글이 씌여 있었다. 그래서 내가 "야, 멘스가 뭐냐?"라고 물었더니
그 당시에 초등학교 수준을 뛰어넘는 지식을 과시하고 있던 K가 가소롭게
웃으며 "멘스란 말이야, 거기에서 피가나는 거야."하는 것이었다.
애들이 K를 여름처럼 소나기구름처럼 둘러싸고 "피가 왜 나?" 그랬더니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두손을 내저으며 "너희들은 아직 몰라도 돼."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 해 보면 K도 거기까지는 잘 몰랐던 것 같다.
하여튼 그렇게 순진한 우리들에게 있어서 충격적인 사건이 생겼다. 체육
시간에 K가 옷을 갈아입는데 옆에서 있던 친구가 그만 털이 나있는 현장
을 목격해 버린 것이다. 그 다음부터 K는 '털!'이 되었다. 친구들은 부를 때
마다 "야, 털." 이렇게 불렀고, 호기심이 동한 애들은 수시로 털을 좀 보여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그래서 K는 하루에도 몇번씩 탈의실로 애들을 몰고
가야만 했다.
훗날 대학에 가서 초등학교 동창회를 했다. 여학생들도 물론 많았는데,
K를 본 어떤 친구가 반가움에서 "야, 털!"이라고 큰소리로 외쳤고, 그 바람
에 폭소가 쏟아졌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난 털에 대해서 수치스런 느낌을 가졌다. 그러던 어
느날,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내게도 드디어 털이 나기 시작했다.
난 고민이 되었다. '누가 나를 놀리면 어쩌지?' 털이 제법 자랐을 때 난 가
위를 들고 털을 몽땅 잘라 버렸다. 몇 달이 지나자 털은 다시금 무성하게
자라났다. 난 겁이 덜컥 났다. 다시 가위로 몽땅 잘라 버렸다.
이러기를 몇차례 하던 어느날인가는 아버지께서 목욕을 같이 가자고 하
셨다. 난 아무 생각없이 따라나섰는데, 옷을 벗은 내 모습을 보신 아버님께
서 이렇게 호통을 치셨다.
"너 잘랐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리자 난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그날
난 어떻게 맞았나 기억이 나진 않지만, 하여튼 무지하게 혼났던 것 같다.
그 뒤부터 난 털을 자른 일이 없다. 어느 순간 이미 어른이 되어 버렸으
며, 털이 나는 것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쌕쌕 오렌지 주스
기생충학 교실은 누차 강조하지만 대변 검사를 하는 곳이 결코 아니다.
기생충학 교실은 기초 의학 교실로서 기생충을 가지고 인류 평화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연구를 하는 곳이라는 것은 여러차례 설명한 바 있다. 물론 사
람의 장내에 기생하는 기생충의 속성상 대변을 이용해서 뭔가 보람있는 일
을 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장 속에서 꾸물거리는 기생충을 빼내기 위해서는 일단 기생충
약을 먹여 기생충을 죽인 다음에 설사제를 투여해 기생충을 꺼낸다.
촌충같이 길고 큰 기생충이야 눈에 훤히 보이지만, 장흡충류(은어나 숭
어 등을 날 것으로 먹었을 때 걸린다)의 경우는 크기가 잘해야 1cm 미만
이다. 물론 정신을 집중하면 보이긴 보이지만 대변에 찌꺼기가 좀 많은가.
또한 장흡충의 종류가 10가지가 넘는데, 도대체 어떤 장흡충이 존재하는
가를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한 사람이라 해도 한 가지 종류의 장흡
충만 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다. 당연한 것이 회를 좋아하는 사람이 은어회
하나만 먹는 것이 아니라 숭어, 빙어, 농어, 연어, 향어 등 날생선이란 날생
선은 다 먹기 마련이다.
게다가 어떤 사람에게서 어떤 기생충이 몇 마리 나왔는가 하는 점은 아
주 유용한 정보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입체 현미경이라는 걸 보면서 한
마리 한 마리 주사기 침을 이용해서 골라야 한다. 물론 힘들고 고된 작업
이지만 인류의 평화라는 더 큰 목적을 위해 한 마리 한 마리 정성 들여 고
른다. 그렇게 한참을 고르다 보면 기생충도 이쁘게 느껴지는 것이 인지상
정이다.
물론 설사변을 그대로 볼 수는 없다.
즉, 씻어야 한다. 바가지에 담아온 설사변을 망으로 거른 후 물을 담고
한참 놓아두면 기생충같이 무거운 것은 밑에 가라앉는다. 그러면 상층액을
조심스럽게 따라 버린다. 그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하고 나면 육안으로 보아
도 밑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깨끗해진다.
설사변을 물로 씻다보면 건더기 같은 것이 둥둥 떠 있는 것이 마치 쌕쌕
오렌지 주스 비슷해서, 우리 교실 사람들 어느 누구도 쌕쌕오렌지 주스를
먹지 않는다.
이런 일을 하다 보니 우리끼리는 밥을 먹을 때 웬만한 얘기에도 밥맛이
없어지는 경우란 없다. 다음은 우리가 밥먹을 때 나눈 대화의 한 예다.
#장면1. 시간: 점심시간, 장소: 낙지볶음집
서민: 54병동에서 레지던트가 장모세선충 여부 좀 검사해달라고 변을 보
냈는데, 종이 상자에다가 24시간 모은 대변을 담았거든. 근데 변이 순 물이
야. 으... 갖고 오다가 교실 바닥에다 조금 흘려버린 것 있지.
최은봉: 아, 실험실 뒤에 잔뜩 쌓여 있는 게 그거군요. 어쩐지 냄새가 너
무 나더라구요.
박정희: 나도 봤어. 어쩌면 그렇게 물만 잔뜩 있는지...
서민: 검사해도 뭐 나오는 것도 없던데. 남은 것 어떻게 버려야 되지?
박정희: 변기에다 붓고, 물 내려야지요. 근데, 사람없을 때 해야 될 걸요.
서민: 이제 그만 좀 보냈으면 좋겠어. 벌써 며칠째야? 그냥 변보다 물똥
이 더 비위 상하는 것 같아.
#장면2. 시간: 저녁, 장소: 아카데미하우스 뷔페홀
장동일: 서민 선생, 회충알 본 적 있어요?
서민: 그럼요, 몇 번 봤는데. 아직도 회충이 있구나하고 생각하니 너무
반갑더라구요. 저는 어떤 여자가 입으로 회충 뱉는 것도 봤는데요.
장동일: 우리도 한 번 경험이 있어요. 지난 번 개한테 구충제를 먹였더니
개가 한참 있다가 입으로 개회충을 뱉더라구요.
우리는 이런 얘기를 하면서 밥을 맛있게 먹는다. 면역이라는 것은 그래
서 좋은 것인지 모른다.
과거 우리 교수님들은 화성군 일대 주민들을 대상으로 회충 조사를 엄청
난 규모로 한 적이 있다. 지금 보아도 그 당시의 일들은 지금의 우리들은
갖기 힘든 지고한 학문적 정열로 이루어진 훌륭한 일이다.
교수님들이 매일같이 화성군 주민들의 변을 잔뜩 받아다가 큰 박스에 넣
고 그 당시에는 차도 없을 때라 기차를 이용, 교실에 와서는 회충을 열심
히 골라 내셨다. 그러기를 2년여, 회충의 크기는 몇 개월 때가 제일 크며,
알은 언제 가장 많이 낳고, 약을 어떻게 먹여야 회충이 근절되는지 등등
주옥같은 기초학 자료가 다 그 연구에서 나왔다.
나 역시 젊기 때문에 아직도 분자생물학적인 일, 즉 전기영동이나 DNA
를 증폭해서 진단하는 일 같은 것이 훨씬 더 멋있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
만 지금까지도 그 화성군의 회충조사 자료가 외국 논문에 곧잘 인용되는
것을 보면, 학문에 있어서는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알아내고자 하
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대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그런 우리의 솔직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시고 널리 홍보하시는 분이 바로 도올 김용옥 박사다.
유머를 구사해도 대변이나 방귀 이야기가 들어가면 흔히들 저질이라고
손가락질한다. 하지만 가장 원초적이고 재미있는 얘기는 바로 그런 것들이
아닐까.
이 기회에 대변에 관한 금기를 깨자!
당신도 웃길 수 있다.
초등학교 시절, 좌중을 웃기는 학생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는 아이가 있
었다. 그 당시 웃기는 애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남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그애한테는 더욱 그러했다.
그 애는 그때 자신의 목표를 설정했다. 그 아이는 남이 웃긴 말을 할 때
마다 노트에 받아적었다. 그것의 대부분은 지금 다시 본다면 유치하기 짝
이 없을 그런 것이었지만,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아이가 과연 자신의 목표대로 성공했는지는 난 모르겠다. 하지만 확
실한 것은, 그는 그렇게 끊임없이 웃기려고 노력한 끝에 서클의 같은 기인
안문상보다도 10년 이상 젊다는 것이다.(안문상에 대해 개인적 관심이 있
는 독자는 서민 저 <소설 마태우스>를 참조)
앞에서 나온 그 멍청한 아이는 바로 나고, 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을만
큼 경지에 올랐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을 읽을 사람은 남을
웃기는 데 대한 자신만의 뚜렷한 가치관이 없는 사람에 국한돼야 한다.
지금부터 나는 내가 살아오며 체험한 웃음에 대한 가치관을 피력해 보도
록 하겠다. 유머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으며, 첫째는 남의 도움없이 자신이
얘기를 풀어나가는 스타일로 소위 하이 코미디라고 불린다.
주병진 씨 같은 경우가 여기 속한다.
둘째, 남의 얘기에 끼여들어 한두마디 던짐으로써 웃음을 이끌어내는 스
타일로, 이것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기 때문에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
람이 이 방식을 따르고 있으며, 소위 저질 코미디로 분류된다. 여기서는 후
자, 즉 저질 코미디에 관해 주로 기술하겠다.
하나, 히트를 쳐라.
가수 변진섭이 처음 '홀로 된다는 것'으로 히트를 쳤다. 그 뒤 그는 그
앨범에 있는 모든 노래를 히트시키며 100만장의 앨범판매량을 기록했다.
존 그리샴의 첫 작품은 여러 출판사에서 박대를 받았다. 그러던 그가
<펠리칸 브리프> <The Firm>등을 히트시키자 흥행에 참패했던 그의 첫
작품마적 뒤늦게 히트를 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이것은 존 그리샴의 이
름값 덕분이다.
유머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주병진 씨가 하면 더 웃긴다.
주병진 씨는 한국 제일의 개그맨이라는 것이 팬들의 뇌리에 박혀 있으며,
그가 말을 하려고만 해도 웃는 사람이 생긴다. 무슨 말이든지 아무튼 웃길
거라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웃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중 최고로 웃기며 내가 넘어야 할 벽으로 생각하는 고법
민(삼성의료원 성형외과)은 예과시절을 평범하게 보낸 뭇사람의 하나였다.
그러던 그가 본과에 온지 얼마 안되어 '억!'이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키며 화
려하게 등장했고, 그 다음부터 그가 하는 말은 모조리 유행어가 되었다.
그 당시 서클애들은 모였다 하면 어제 고법민이 무슨 얘기를 했다더라
하면서 걔는 정말 천재니 뭐니 그런 찬사를 늘어놓았고, 심지어 누가 고법
민의 걸음걸이를 잘 흉내내는지 경연을 벌였다.
dB(데시벨)이 소리의 강도 단위이듯 dK(데시고)는 웃기는 강도의 단위
로 1dK=1,000dS(데시서: 서민의 웃기는 정도)라는 등식까지 생겼었다. 그
러던 고법민이 지금은 자만에서 비롯된 탓인지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전락
한 것이 마음 아플 뿐이다.
하여튼, 사람들을 웃길 때는 처음이 어렵지 몇번 웃기고 나면 나중에는
손만 흔들어도 웃게 된다는 것을 여기서 말해 두고자 한다.
사람들은 누가 한번 웃기면 우연이겠지 하고 생각을 한다. 두 번 웃기면
'어, 이거 봐라!'하고 생각한다. 세 번째 웃기면 그제서야 그 사람을 인정하
고,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웃는다. 아니 웃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니 그 상황에서 어떤 유머를 쓸 것인가를 잘 선택해서 적절하게 구
사해야 한다. 첫인상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둘, 웃음의 기본은 반복이다.
반복은 가장 쉽게 남을 웃길 수 있는 방법이다. 영화 <경마장 가는 길>
을 본 사람은 느꼈을 것이지만 그 영화는 끊임없는 언어의 반복이 웃음을
자아낸다. 만일 누가 계속 '대머리'라고 외치고 다닌다면, 종국에 가서는 대
머리가 그 사람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며, 대머리란 말만 해도 폭소가 터질
것이다.
그럼 어떤 말을 반복할 것인가. 내 친구 중에 "엄마한테 혼나."라는 말
한마디를 가지고 무지하게 우려 먹었던, 그래서 수많은 폭소를 자아냈던
친구가 있다. 여기서 보듯이 가장 자기에게 잘 어울리는 말, 그리고 아무리
반복해도 질리지 않을만한 말을 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반복의 시
점을 잘 잡아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남이 방금 했던 말을 곧바로 써먹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필자
또한 수없이 우려 먹었던 방법인데, 효과는 아주 좋다. 명심할 것은 사람들
중에는 그런 유머가 통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전혀 통하지 않는 유리벽같
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는 잽싸게 그걸 포기하고 다른 유머를
찾아야 한다.
셋, 타이밍은 웃음의 생명이다.
'버스 지나간 뒤에 손 흔든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머리는 대개가 비슷
하며, 우리 세계(좀 웃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과연 이 말이 웃길 까 생각하다간 타이밍을 빼앗긴다.
필자도 과거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더듬는-웃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
달리다 보면 말을 더듬게 되는 수가 많다-고질적인 병폐로 인해 남에게 타
이밍을 빼앗겨 심한 좌절감을 겪은 일이 있다. 동물적인 감각에 의해 반사
적으로 튀어나온 말들만이 짜릿한 성공을 맛볼 수 있다.
얼마전 내가 술을 먹고 비몽사몽에 빠진 상태로 족구를 한 적이 있다.
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남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내가 잘 올라가지도 않는
다리로 공을 차려다 헛발질을 했다고 한다. 내 몸은 공중에 붕 떴다가 떨
어졌다.
누가 다가와서 "안 아파요?"라고 하니깐 내가 "지금 아픈 게 문제예요?
쪽 팔려 죽겠는데..."라고 대답했단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그동안 기른 동물적
감각 탓인 것 같아 뿌듯했다.
과거 필자가 KBS-TV <아침마당>이란 프로에 나갔을 때 무거운 분위
기에 걸맞지 않는 돌출발언으로 좌중을 썰렁하게 한 적이 있다. 그런 분위
기에서는 가벼운 농담과 해학이 필요한 때였는데, 아무튼 그런 우를 범하
지 않도록 적절한 상황 판단과 예리한 통찰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넷, 잘 되는 건 계속 써라.
과거 필자가 아주 어린 시절, "지금 몇시냐?"라고 물으면 "서울시 여러분
내가왕초"라고 대답해서 웃길 수 있었다. 20년이 흐른 지금은 그런 얘기로
는 개미 한 마리도 웃길 수 없다.
관객의 수준은 갈수록 높아져 가며, 새로운 유머의 개발은 점점 어려워
만 간다. 따라서, 한 번 성공한 말은 관객이 식상할 때까지 최대한 우려 먹
어야 한다. 필자는 과거 '호모시리즈'로 근 6개월을 버틴 적이 있다. 단 관
객이 식상했다는 눈치가 보이면 과감히 집어치워야 한다.
다섯, 좋은 친구를 사귀어라.
이승만 전 대통령이 방귀를 뀌자 비서가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 유명하다. 그런 인의 장막 속에서 살았기에
이박사는 국민의 마음을 알지 못했고,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말만하면 웃
어주는, 웃음이 헤픈 친구와 사귀면 당장은 성취감을 맛볼지 몰라도 자기
발전의 노력을 게을리하게 되고, 거기 안주하게 된다.
필자가 이만큼이라도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필자가 나태할 때마다
"안 웃겨."하고 야단을 쳐준 심정석(심정석의 인간성과 취향, 무술 실력에
관한 서술은 서민 저(소설 마태우스>38, 304쪽 참조), 고법민 같은 고마운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내 친구 중에는 남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자신이 웃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가 우리 중에 가장 힘이 센 관계로 그가
말하면 그냥 억지로 웃어주게 되고, "너 말이야, 사실은 하나도 안 웃겨."
라는 충언을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 결과 그는 아직까
지도 썰렁한 말을 하며, 그래도 자신은 웃긴다는 환상 속에 빠져 살고 있
다. 이 어찌 비극이 아닌가.
여섯, 무조건적인 모방은 피하라.
TV 유행어가 적절한 시기에 사용될 때는 간혹 웃음을 유발할 수 있어
도, 유행어를 남발하는 것은 자기 발전에 커다란 장애를 가져오게 된다. 한
때 '잘났어, 정말'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너도 나도 그 말을 썼다.
그런 말은 아무리 해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수 없다. 공중파 방송을
탄 말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TV는 단지 현세태를 반영하는 참
고자료로만 사용될 때만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일곱, 자신은 웃지 마라.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로, 자신의 심각한 표정은 웃음의 효과를 극대화하
는 비결이다. 자신이 말하고, 자신이 더 크게 웃으면 남들로 하여금 '혹시
바보가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며,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해 놓고선
자신이 다 먹어버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필자도 간혹 내가 한 말에 내가 웃어버린 적도 있지만, 이럴 때는 최소
한 웃음을 참으려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더욱 한심한 경우는 '이런 말
을 해야지.' 하고 생각을 하면서 그 생각 때문에 미리 웃어버리는 경우다.
이런 사람을 필자는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의 얘기를 들어 보면 정
말 그 말을 했다면 아주 히트를 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반짝이는
말이 많다. 하지만 그 친구는 늘 자신의 생각에 자신이 먼저 웃어버리는
관계로, 또한 우리 사회는 혼자 실없이 웃으면 '혹시 정신병이 아닐까'하고
생각하는 탓에 그 많던 친구도 다 떨어져 나가고, 현재 낙향해 은둔하는
삶을 살고 있다.
여덟, 풍부한 상식을 길러라.
아는 것은 힘이다. 필자는 과거 개그맨 강석 씨가 '유세차'란 말을 듣고
'어디 바늘 떨어졌습니까?'란 말을 하는 것을 보고는 잔잔한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무식하면 곰도 웃길 수 없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유머는 깊어
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요즈음 개그맨의 학벌이 점점 높아지는 것
도 이같은 이유에서가 아닌가 싶다.
내 친구 하나가 밥값을 좀 내달라고 하는 것을 내가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랬더니 "산타크로스가 갑자기 스크루지가 되었네."라고 말하는 것이 아
닌가. 산타크로스야 누구나 다 알지만 그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읽었기
에 그런 유머를 쓸 수 있었고, 나 또한 그 소설을 읽었기에 그 말을 이해
하고 웃어줄 수 있었다.
만일 그가 네 살짜리 아이를 앞에 놓고 그런 말을 했다면 애들을 놀린다
고 따귀를 맞지 않았을까. 이렇듯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한 유머를 구사하
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심심하면 평소 웃기던 애한테 재미있는 얘기를 해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에 대비해서 늘 최신 유행하는 웃기는 얘기-음담패
설도 좋다-몇 개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팬들은 매번 좀 더 수준높은
유머를 갈망한다. 그 기대에 늘 부응하기 위해서는 더욱 풍부한 상식을 길
러야 한다.
아홉, 끊임없이 노력해라.
필자는 20년간 웃기기 위해 노력했다. 늘 웃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
달려 말을 더듬게 된 적도 있지만, 머리 속은 어떻게 하면 더 웃길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임에 가서도 모임이 끝난 후 '이렇게 말했으면
더 웃지 않았을까.', '이 말은 다른 데 가서도 써먹을 수 있겠구나.', '이 말
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하고 냉철한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은 웃기는 데 절대로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남을 웃긴 사람은 없다. 웃기는 데 소질은 더더욱 필
요치 않다. 오직 부단한 노력만이 유머의 필요충분 조건이다.
열, 누구나 자신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우리 세 살짜리 조카가 쓰레기통에 휴지를 버리고 혼자 박수를 쳤다. 그
모습이 참 웃겨서 내가 만들어 잘 우려먹은 것이 '박수 시리즈'였다. 이렇
듯 세 살박이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 내 주변을 보면 실제로는 하나도
웃기지 않으면서 웃긴다고 생각하고 썰렁한 말을 연발하는 사람이 꽤 있
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도 나는 배운다.
'저런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지.'
나는 개 한 마리를 키운다. 벌써 키운지 9년째가 되니 정도 무지 들었는
데, 참 귀여운 짓을 많이 한다. 그녀석으로부터도 나는 귀여움을 배운다.
주위를 둘러보면 배울 것이 엄청나게 많다. 하늘을 나는 족제비 한 마리,
모이를 쪼아먹는 비둘기, 머리에 뿔이 돋은 암사슴 한 마리로부터도 나는
배운다. 자신만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결코 웃음이
찾아올 수 없다.
열하나, 적절한 동작의 혼합도 유머의 강도를 높인다.
흔히들 넘어지고 자빠지는 유머를 저질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다 보니 어
느새 우리는 동작을 이용하여 웃기면 저질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서경석,
이윤석 씨같이 말로만 웃기는 것을 동경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그
렇지 않다.
단체로 놀러 가게 될 경우에 사람들은 평소 웃기던 사람에게 많은 기대
를 하게 된다. 그럴 경우에 대비해 춤도 웃기고 다양하게 출 수 있어야 한
다. 필자가 늘 후회하는 것이 춤추는 것을 퍽이나 싫어해서 전혀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래 또한 잘 불러야 한다. 평소 웃기는 사람은 노래하라는 지목을 많이
받는다. 따라서 노래 몇곡 쯤은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하며, 고음에서 목소리
가 갈라진다든지 가사를 까먹어서 웃긴다든지 하는 유치한 방법을 쓰지 말
고 자기 나름대로 그 노래 속에 웃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필자는 노래 중간에 멘트를 끊임없이 넣는 방법을 개발해 꽤 히트를 쳤
었고, 내 친구 심정석은 30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서태지의 '하여가'를 잘
불러 인기를 모았다.
필자가 친구 고법민과 어떤 여자애를 앞에 앉혀놓고 한시간여를 떠들었
던 적이 있다. 놀랍게도 그 여자는 우리의 유머에 전혀 웃지 않았다. 당황
한 나는 고법민을 화장실로 불러내 함께 전략을 상의했다. 결국 동작을 써
보기로 했다. 그래서 고법민은 코끼리 흉내를 내고, 필자는 팔을 길게 늘어
뜨려서 고릴라 흉내를 냈다.
놀랍게도 그 여자는 그때서야 웃기 시작했다. 한번 웃기 시작하더니 두
시간여를 계속 웃었다. 이렇듯 유머가 통하지 않을 때는 웃기는 동작도 한
방법이 된다.
열둘, 남을 무안하게 만들어서 웃음을 유발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필자도 한때 그런 길로 갈까 하는 유혹을 받은 적이 있었고, 실전에서
가끔씩 사용하기도 해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파안대소 속에서 가슴에 못
박히는 자의 눈물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또한, 조금 웃기게 되면 자만하여 노력을 게을리하게 될 수가 있다. 필자
역시 지금부터 10년전 뭇 여자들이 필자에게 모두 웃어 주는 것을 보고
'이것이 정상이구나'하고 착각하는 우를 범했었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 보
면 필자의 귀염성에 의한 것이었지 유머 감각에 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결과 새로운 것의 개발을 게을리하고, 인생을 즐기다 보니 곧 슬럼프가
찾아왔다. 그러고 나니 개미 한 마리 웃길 수 없었다.
친구들끼리 만났을 때 나 때문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웃음이 터질
때 '나도 한마디 해야 하는데...'하는 초조와 불안을 느꼈다. 자신감을 잃고
나니 할말이 없었고, 억지로 짜낸 말은 결코 웃음을 자아낼 수 없었다. 나
는 깊은 반성을 했다.
2년간 침묵 속에서 재충전의 시기를 가졌다. 마침내 호모시리즈로 화려
하게 복귀하면서 나는 예전의 감각을 찾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다시 환호
했지만, 난 다시 자만에 빠지지 않았다. 팬들의 환호는 거품과도 같다는 것
을 잘 알고 있기에. 내가 그 환호에 빠져 타락할 때 팬들은 다시 등을 돌
린다. 팬들은 냉정하다...
처음에는 유치하다고들 그런다. 그럴 때는 좌절감을 느낀다. 집어치우고
싶다.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왜 웃기며 살아야 하는지 회의가 일 것이다. 나
자신도 그랬다. 그러나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포기란 신이 우리에게
준 능력을 제대로 쓰지 않고 사장시키는 것으로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유머는 생활의 활력소다.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갑시다! 유머의 세계로!
왜 '닳지 않는 칫솔'인가?
책에 있어서도 제목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나위가 없다. 책의 제목을 정
하는 것은 따라서 정말 어렵고도 힘든 일이며, 당연히 그래야 한다. <바바
하리 다스의 칠판>이란 책은 일단 출간되었다가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하
자 <성자가 된 청소부>로 제목을 바꿔 달아 일약 베스트 셀러 대열에 올
랐다.
물론 그 내용이 베스트셀러가 될 만한 내용이었음은 물론이지만, 제목이
란 이렇게 책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가 <인생의
대교훈>은 <내 아들아, 너는 이렇게 살아라>, <어린 나그네>는 <소설 화
엄경>으로 제목을 바꾸어 성공한 경우에 속한다.(참고문헌: 강준만 저 <고
독한 대중>169쪽)
제목이 중요한 것은 꼭 책만이 아니다. 진로에서 나온 대표적인 히트 상
품인 '참나무통 맑은 소주'의 성공은 술의 맛보다는 양을 추구하는 우리 애
주가들의 속성으로 보아 독특한 이름이 큰 몫을 한 경우에 속한다.
이 이름을 지은 사람들은 젊은 기획팀이었는데, 이를 사장단 회의에서
반대를 했다고 해서 진로에서는 제품명을 정할 때 나이든 간부는 아예 제
외시키기로 했다고 한다. 내 첫 작품인 '<마태우스>-마침내 태어난 우리의
스타'가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데는 특이한 제목 덕을 많이 보았다고
생각한다.
난 제목을 정할 때 다음과 같은 원칙에 의한다.
첫째, 튀는 제목이어야 한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의 성공 이래 '...가지 이야기'라는 제
목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좀머씨 이야기>가 잘 나갈 때는 '무슨무슨 이
야기'가 유행을 했었다. 난 적어도 내 책만은 이런 유행에 편승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참신하면서도 관심을 끌만한 제목, 그것이 바로
<닳지 않는 칫솔>이었다.
혹자는 내가 이빨을 닦다가 우연히 생각한 것이라고 의혹을 제기할 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벽을 보고 마주앉아 몇 시간이나 머리를
짜내 얻어낸 산물임을 강조하고 싶다.
어떤 사람은 이 책의 내용과 맞지 않는 제목이라며 나를 비난한다. 책의
제목이 내용을 한 마디로 함축한 것이라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이 책
처럼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모든 분야를 폭넓게 다룬 책을 어찌 한 마
디로 요약할 수 있다는 말인가.
형식보다는 실질을 숭상해야 할 부문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이다. 책이 제목에서부터 관심을 끌지 못한다면, 그 책은 절반의 실패를
범한 것이다.
둘째, 간결해야 한다.
요즘 가요를 봐도 'DOC와 춤을', '꿍따리 샤바라' 처럼 산뜻하고 간결한
것이 주를 이룬다. 과거 홍서범씨의 히트곡 '나는 당신께 사랑을 원하지 않
았어요'처럼 15자나 되는 제목의 노래가 지금 나온다면 그렇게 사랑을 받
았을까. 책 제목은 시대의 흐름에 둔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맨 처음 생
각했던 <눈 비비다 눈 빠진 사나이>를 포기하고 <닳지 않는 칫솔>을 택
한 이유다.
셋째,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
즉, 튀는 제목이라 하더라도 단지 잘 팔리기 위해 어거지를 써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이 책을 '젖소부인 음메하네'라고 제목을 붙인다면, 당장이
야 호기심을 끌 수 있겠지만 이건 일종의 사기다. 제목은 그 자체로 사회
에 주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닳지
않는 칫솔>은 남들 생각처럼 양치질 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칫솔 하나를 3년 넘게 쓰는 사람이 있었다. 한달
만에 칫솔을 한 개씩 갈아치우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그 사
람 집에 잠복하면서 감시를 한 적이 있었다.
비결은 간단했다. 안 닦는 것이다.
밥을 먹기 전에는 "먹고 닦아야지."라고 중얼거리더니 밥을 먹고 나서는
돌연 시계를 보더니 "아이구, 벌써 시간이 이렇게..."하더니 서둘러 나가 버
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 사람일수록 말할 때 침을 더 많이 튀긴다. 침이 떨
어진 곳에는 잔디가 하얗게 죽어버리고, 몇 년간 풀이 나지 않는다. 나는
이런 풍토를 개탄하고자 하였다.
나는 내 첫 저서인 <소설 마태우스>에 내 호출 번호를 과감히 적었다.
그것은 독자의 소리를 직접 듣고자 함이었다. 재미있다고 말해준 분들에게
도 감사를 드리지만, "생각보다 별로였다."라고 솔직히 비판해 주신 분들에
게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는 바다.
그런 비판을 최대한 수용해서 쓴 책이 바로 <닳지 않는 칫솔>이다.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교훈을 준다기보다는 교훈이 무엇인가 스스로 생각하
게 하는 계도적 내용이 주를 이룬다. 따라서 사고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미
취학 아동이나 초등학교 1,2학년 어린이들이 읽기에는 적합치 않다고 생각
한다.
재미있게 읽어줄 독자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는 책을 낼 것이다. 이
책은 이제 어떠한 평가를 받을까?
불가사의
1. <소설 마태우스> 3대 의혹
하나- <마태우스>를 읽은 사람은 대부분 나를 멀리 하거나, 관계를 끊
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둘- 1만권이나 팔렸는데 (참고로 5,000권 정도 팔리면 본전이다), 왜 출
판사는 홍대앞 사무실을 빼고 1호선 독산 역 근처로 사무실을 옮겨야 했
고, 사장님은 왜 서울에서 안산으로 집을 옮겨야 했을까.
셋- 책 출간을 누구보다 기뻐해주신 분은 어머님이셨다. 그런데 왜 어머
님은 내가 다시 2권 낼 낌새를 보이자 "행여 너 또 책 낼 생각하지 말거
라."라고 말씀하셨을까.
2. 내 아들...
아직 미혼이라 잘 모르긴 하지만, 자신의 저서라는 것은 마치 아들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소설 마태우스>가 장남이라면 <닳
지 않는 칫솔>은 둘째 아들이다. 내 장남에 대해 많은 격려와 동시에 비난
이 삐삐 메시지를 통해 내게 전달되었다. 처음으로 내 책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밝혀주신 한 아주머니의 말씀이 기억에 난다.
아줌: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생각보다 별루에요.
서민: (매우 충격을 받음) 아, 그러세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
제가 책값 물어드리면 안 될까요?
아줌: 그렇게 말하니깐 내가 미안하네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하여
튼, 앞으로 더 열심히 쓰시고, 2권 나오면 또 사 읽을게요.
서민: 아니예요, 2권 나오면 제가 책 보내드릴게요.
내게 호출한 사람들은 다 내 노트에 적혀있기 때문에 아마 난 약속을 지
킬 것이다. 하여튼 그 모든 비난을 겸허히 받아들여 쓴 책이 바로 <닳지
않는 칫솔>이다. 이 책과 더불어 IMF시대를 밝은 웃음으로 극복하고 유머
가 넘치는 삶을 열어가기를 권해드리는 바다.
3.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
어느 가수가 5집을 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더 잘 할 수도 있었는데 아쉽다. 6집은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말은 흡사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자신의 창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임에 있어서 어찌 한 점 소홀함과 후회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소설 마태우스>도 그랬지만, <닳지 않는 칫솔>도 내가 가진 것 전부를
쏟아 부었다. 이것은 내 최선이다. 이 책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는
다면 내 역량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것일 수밖에.
4. 감사의 글, 그리고 그 뒷 얘기
날 키워주신 아버님, 어머님께 우선 감사드린다. 오늘이 있기까지 많은
힘이 되어 준 여자친구 연희와 "언제 책이 나오느냐."고 내게 물어온 에스
더를 비롯한 독자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지난 1월초, 오페레타, '박쥐'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내 친구 소프라
노 윤이나, 잘 될 때까지 내가 소개팅을 시켜주기로 한 사랑스런 후배 김
보경, MFC 선후배님, 직장 동료분들, 내 많은 친구들에게도 내가 많이 많
이 사랑한다고 전하며 책 열권씩 사라고 강렬히 협박하고 싶다.
늘 나와 함께 해준 내 아들 벤지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좋아하는 통닭을
한 마리 사줄 작정이며, 무엇보다도 부족한 내게 책을 또다시 펴낼 기회를
주신 장문산 출판사의 김린 형님께 감사드린다.
5. 유령선
원래 이 책에는 '유령선'이라는 삐삐소설이 등장한다. 벽을 보고 가부좌
를 튼 뒤 침을 몇시간 모은 뒤 한번에 삼켜 배고픔을 잊는다는 획기적인
내용으로, 내 친구 엄재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양한 색깔의 침으로 일관해 읽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탓
에 그만 빠지고 말았다. 자신의 이름이 없자 배신감으로 몸을 떨 엄재희의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6. 며느리
어떤 독자가 내게 삐삐를 쳤다. 내 첫 작품인 <마태우스>를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었다고, 이렇게 많이 웃어본 적은 처음이라고. 번호가 남겨져
있기에 난 곧 답삐를 쳤다.
"난 내 책을 내 아들처럼 생각해 왔소. 당신이 그렇게 내 책을 사랑해
주시니 당신은 내 며느리요."
얼마 걸리지 않아 다시금 삐삐가 왔는데, 단 한마디가 녹음되어 있었다.
"시아버님!"
이런 유머가 있기에 사회가 유지되는 것인가 보다.
7. 심신
난 <마태우스>에서 이런 구절을 쓴 적이 있다. '가창력보다는 얼굴에 호
소하는 가수 심신이 라디오 프로에 나왔다.'라고...
어느날 독자에게서 삐삐가 왔다.
"당신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심신 오빠를 욕해 놓을 수가 있어요?
당신이 심신 노래를 다 들어보지도 않아 놓구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당신을 정말 증오합니다."
번호가 찍혀 있었으면 난 틀림없이 전화 혹은 삐삐메시지로 사과했을 것
이다. 대중을 상대로 책을 펴낸다면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서 했어야 했다.
난 어느새 공인 비슷한 반열에 들어간 것일까?
8. 전유성 님
혹시 <마태우스>를 개그 드라마의 소재로 삼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
내 유머 감각의 수준을 평가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전유성 씨에게 책을 한
권 보냈다. 며칠 뒤 내 호출기로 전화번호가 찍혔다. 팬이려니 하는 마음에
서 별 생각 없이 전화를 했는데...
"여보세요. 저 호출하신 분이요?"
"나 전유성인데요."
이 말에 나는 갑자기 일어나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네, 저... 저... 서민입니다."
"책을 쭉 읽어 봤는데. 재미있는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지루한 감이
있어. 개그 드라마로 쓰기는 힘들 것 같은데... 그래도 삐삐에다가 이런 식
으로 이야기 남기는 것은 좋은 생각인 것 같아."
지루하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지만 전화를 끊고 가슴이 벅찼다. 전유성씨
가 좀 바쁜가. 그럼에도 시간을 내 내 책을 읽어 주고, 답까지 주다니.
그리고 내 삐삐에 음성을 남겨주신 유명인이라면 "실례합니다."라는 코
맹맹이 소리로 유명했던 탤런트 김애경 씨, 가수 이소라씨, 국가대표를 지
낸 농구선수 전나영 씨가 있다....
9. 미지왕
<미지왕>은 '미친놈 지가 무슨 왕자라고'의 약자인데, 국내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흥행에 참패했다. 나 역시 그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 어느 신문에
그 영화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김용태 감독이라는 34세의 젊은 감독의 작
품인데 그 감독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금기시하는 대변, 방귀, 침 이런 것들이 웃기는
소재로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런 것들을 터부시하고 애써 외면하는 우리의
이중적인 태도가 문제다."
어쩌면 그렇게도 내 생각과 일치할까. 이미 영화가 종영된 뒤였으므로
난 비디오로 그 영화를 두 번 보았다. 기억에 남는 장면 하나.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신부집에 사위감이 왔다. 음식을 많이 차려 놓고
장인 될 사람이 신랑감에게 커다란 컵에 술을 가득 담아 준다. 신랑감이
그걸 '원샷'을 하는데, 거의 다 마실 무렵 그만 방귀를 뀌고 말았다.
그러자 장모 왈.
"아니, 자네가 그 정도밖에 안되는 사람인가? 실망이 크네."
장인 왈.
"정말 그 정도밖에 안되나? 적어도 이 정도는 되야지."
그러면서 방귀를 뽕 뀌었다.
다시 장모 왈.
"아유, 당신 젊었을 때는 더 잘 했잖아요."
그러자 장인.
"그런가?"
방귀를 계속 뀐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장인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딸
에게 말한다.
"얘야. 새 빤스 하나 가져와라."
정말 웃기지 않는가? 난 무지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게 왜 흥행이 안 되
었을까.
첫째, 국산영화다. 둘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유치 한것이라는 생각이
다. 셋째, 방귀와 침을 금기시하는 우리 관객들의 풍토다.
우리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 뭔가 남아야 만족을 한다. 어설픈 교양주의
가 만연된 사회에서 전세계적으로 히트한 <총알탄 사나이>같은 영화가 발
을 붙일 곳은 없는 것이다.
<라디오시대>라는 라디오 프로가 있다. 이종환, 최유라 씨가 진행을 하
는 최고인기 프로로 이 프로가 방송되는 오후 4시-6시에는 교통사고도 더
많이 나고, 이걸 듣고 히죽히죽 웃다가 정신병자로 몰리기도 하는 그런 프
로다. 이 프로는 서민들이 보내는 편지와 전화로 꾸며진다. 특히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는 정말 재미있다. 당연히 청취율 1위다. 그런데 이 프로가
대변, 방귀 등의 저급한 소재를 썼다는 이유로 방송윤리위원회에서 경고를
받았단다.
도대체 유머를 고급과 저급으로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고급 유머란
많이 배운 사람만이 알아듣고 웃을 수 있는 걸까? 침과 방귀가 들어가면
무조건 저급 유머인가? 청취자들이 부담없이 듣고 웃으면 그만이지, 꼭 사
상과 철학을 논해야 좋은 프로란 말인가?
아무리 좋은 프로라 하더라도 청취자가 외면하면 결코 좋은 프로가 되지
못한다. <라디오 시대>에서 무슨 캠페인을 벌이면 효과가 훨씬 크게 나타
나는 것도 높은 청취율 탓이다.
실제로 라디오 시대에서는 버려진 아이들이나 화상으로 투병중인 아이
등 불우이웃을 돕는 일을 많이 하고 있다. 이런 훌륭한 프로를 표창은 못
할 망정 학계에서나 쓰일 잣대를 가지고 저급이라고 욕할 수는 없는 일이
다.
웃음은 그게 어떤 것이든 언제나 아름답다...
10. <마태우스>와 관련된 말, 말들
1. "마라톤 코스를 한번 뛰었다고 다 마라톤 선수는 아니다."-1998년 2월
11일. 술집 '낯선 천국'에서 술을 마시는데, 팬 하나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혹시 소설가이신가요?"라고 묻기에 책 하나 썼다고 다 소설가는 아니다라
는 뜻으로 한말
2. "읽으면서 계속 이해가 안 갔고, 머리가 아파 왔다. 다 읽고 정말 화
가 났다."-1997년 2월8일. 어느 독자. 이 분에게는 내가 삐삐로 사과를 하
면서 책값을 물어주거나 아니면 다른 책을 선물하겠다고 했더니 도서대여
점에서 빌린 거라 괜찮다고 답이 왔음.
3.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앞으로 계속 좋은 책을 써주셔서 사회에
밝은 웃음을 주시기 바랍니다.-1998년 2월10일. 전남대생. 전화번호를 남겼
기에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절필하려고 했는데, 그 메시지를 받고는 다시
금 펜을 들 용기를 얻었습니다."
4. "너 한번만 더 쓰면 죽여!"-1997년 8월15일. 어느 독자. 연락처를 안
남겨서 사과를 못했음.
5.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왜 이제서야 발견했는지 모르겠군요. 나온지도
꽤 되었는데."-1997년 9월13일. 도서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만 밝혔음.
<닳지 않는 칫솔>은 이제 나의 삐삐에 어떤 말을 남겨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