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영웅 빅토리최
마지막 영웅 '빅토르 최' (상) - 유익서
----- 차 례 -----
작가 소개
프롤로그
1. 너희는 퇴학이란다
2. 리술 아저씨
3. 너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4. 발렌치나와 로베르트의 절망
5. 나의 날개로 날겠어요
6. 기차에서의 작은 연주회
7. 바이칼 호반에서
8. 이리나 네스테랭코바의 사랑
9. 따마리스크
10. 다시 '제6병동' 멤버들과
11. 고향, 꼭 가고 싶은 곳
12. 거리의 악사들
13. 자레치나야의 어머니
14. 리술 아저씨의 죽음
15. 제61 기술전문학교
16. 나는 건달입니다
17. 너도 비틀즈를 좋아하는구나
18. 가린과 쌍곡선
19. 보리스 그레벤쉬코프
20. 그림장수로 나서다
21. 르빈의 생일
22. 록그룹협회에 가입하다
23. 유형지로 떠난 아르까지나
24. 운명적인 만남
25. KINO, KINO, KINO
프롤로그
세상에는 죽고나서도 살아있는 인물이 있다.
인류의 기억과 수명을 함께 하고, 태양과 별들의
운행과 영원히 운명을 같이하는 인물이 그들이다.
빅토르 최. 그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일까.
그러나 빅토르 최, 그를 인류 역사와 궤를 같이할
그런 훌륭한 인물이라 단정하기에는 어딘가
망설여지는 데가 없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생전의
활동이 인류 문화발전에 공헌한 다른 위대한 인물들의
공적과 견주기에는 어딘가 적절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에게 새로운 이상사회 실현의 길을 제시한
위대한 사상가도 또 인류평화에 기여한 종교가나
정치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인류생활의 편익과 발전을
위한 결정적인 이기를 발명한 과학자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를 외침으로부터 구해낸 용맹스런 장군도
아니며, 위험을 무릅쓰고 오지를 탐험하여 신개지를
열어준 탐험가도 아니다. 그리고 인류 정서순화에
이바지한 톨스토이나 차이코프스키 같은 위대한
예술가도 아니다.
빅토르 최, 그는 소비에트의 록가수 겸
영화배우였다. 그러므로 그를 인류문화 및 역사발전에
크게 기여한 위대한 인물들과 견준다는 것은 참새가
백조처럼 여겨지기를 기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그가 죽은
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를 추모하여 러시아
전역에서 그의 무덤을 참배하려 오는 끊이지 않는
젊은이들의 행렬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그의 추모의 벽을 날마다 찾아와 무리를 이뤄
그의 노래를 합창하며 그를 추모하는 젊은이들은 또
무엇인가. 가슴 뭉클한 그런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가 아직도 러시아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생생히
살아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 빅토르 최,
그는 분명 죽은 지 다섯 해가 지난 지금까지 그리고
다음, 다음 언제가 될지 모를 그때까지 러시아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생생히 살아있을 것이다.
빅토르 최. 그는 1962년 6월 카자흐스탄 공화국
크질오르다에서 출생했다.
스물여덟 살이던 1990년 8월 라트비아 공화국
리가에서 그는 사망했다.
아버지는 최동열이라는 한국인 2세였고 어머니는
발렌치나 바실리예브나라는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인이었다. 다섯 살 때 레닌그라드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빅토르에게는 카자흐스탄에
대한 추억은 거의 없었다.
그는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고 목각기술
또한 탁월했다.
그는 열다섯 살 때부터 시를 짓고 거기에다 곡을
붙여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1982년 봄, KINO라는 록그룹을 조직하여 그
리더로서 노래하고 연주했었다. 가수로서 한창 명성을
얻어갈 무렵 그는 영화감독들의 권유로 영화 몇 편에
출연하였다. 영화에 출연할 때마다 그는 가식적인
연기가 아닌 평소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그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이글라'는 1989년, 1천 5백만 명이라는 놀라운
숫자의 관객을 동원했고, 그는 황금의 쥬크 영화제
심사위원들과 소비에트 영화평론가들에 의해 그해
최우수 배우로 선정되었다.
1990년 6월, 모스크바 올림픽 주경기장 루즈니끼
스타디움의 성화대에 점화를 하고 그곳을 가득 메운
청중들을 상대로 공연을 했고, 그의 노래는 소비에트
전역에서 애창되었다. 그의 공연장 입장료는 천문학적
숫자를 기록했다.
외국인 혐오증이 일반화되어 있는 소비에트인들이
결코 달가워할 리 없는, 머리칼이 까맣고 얼굴 색이
엷은 상아빛의 동양계,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카레이츠 3세인 그의 영화와 노래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던 것이다. 저항적이며 자유지향적인
노래를 불러왔던 그의 사망소식은 KGB에 의한 타살일
것이라는 의혹과 함께 급속히 소비에트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소비에트 여러
곳에서 무려 다섯 명의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저
세상으로 가는 그의 적적한 저승길의 길동무가 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장례식은 젊은이들의 열화 같은 성화를 이기지
못해 며칠씩 연기되었고 마지막 떠나는 그를 전별하기
위해 소비에트 전역에서 젊은이들이 꾸역꾸역 묘지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카잔에서 키예프에서
알마아타에서 타슈켄트에서 '빅토르 최'라 명명한
거리가 하나 둘 생겨났다.
어느 날 저녁부터 젊은이의 거리, 예술의 거리
모스크바 아르바트의 한 벽에 그를 추모하는 글귀가
등장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벽은 온통
그를 추모하는 낙서들로 뒤덮이고 말았다.
'최, 네가 나를 있게 한다'
'빅토르, 너는 영원히 우리 심장에 함께 있다!'
'비쨔, 네가 세상에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우리 사랑하는 비쨔를 돌려주십시오'
'최, 넌 우리의 영웅이며 신이다!'
'최, 너의 눈은 항상 별을 향해 있었다. 그 별들은
너를 불러갔다!'
'키노는 우리 생활방식이다!'
'빅토르, 넌 우리를 위해 존재했다. 우리는 너를
도울 것이다!'
이런 글귀들을 보며 젊은이들은 그를 더욱
그리워하고 그를 향한 뜨거운 가슴을 달래고는 했다.
벽에 붙은 그의 사진이나 KINO 연주회 포스터,
신문기사들도 젊은이들의 추모의 정을 더 부추겼다.
솜씨 좋은 소녀에 의해 벽에 그려진 그의 초상들도
살아 있을 때의 그의 추억들을 되살려 주고는 했다.
앞에서 잠깐 말했듯, 아르바트 거리의 빅토르 최 벽
앞에는 밤이 되면 안개처럼 내리는 가로등 아래 수십
명의 젊은 남녀들이 모여 그가 생전에 불렀던
노래들을 합창한다. 그들 젊은 남녀들의 가슴에는
빅토르의 얼굴을 넣은 동그란 배지가 달려 있다. 어떤
젊은이는 칼라와 가슴 두 곳에 그의 얼굴 사진을
인쇄한 배지를 달고 있다. 레닌 동무나 스탈린 동무의
배지를 달고 다니는 사람은 있다지만 가수의 배지를
달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니......
그를 기리고 추모하는 것은 젊은이들만이 아니다.
그가 죽고나서 세 해가 지난 93년, 그는 모스크바
꼰쩨르트 자르 앞 스타광장의 명예가수의 전당에
영원한 소비에트 인민의 영웅인 브소츠키 다음 차례로
헌액되었다. 레오니드 우테소프, 끌라브디야
수르젠꼬, 리디야 루스라노바, 이자벨라 유르베바,
바딤 꼬진, 마르크 베르네쓰, 블라디미르 브소츠키,
이런 세기적 가수들에 이어 그가 명예가수의 전당에
헌액이 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페테르부르크 보코슬로스코야
클라드비세 공동묘지에 있는 그의 무덤은 5년이 지난
지금까지 더운 여름이나 혹한의 겨울에도 젊은이들이
떠나지 않고 지켜왔었다. 무덤 치고 그처럼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은 무덤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그의 무덤 이웃에는 2차대전 때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군의 영혼의 안식처가 있다. 살았을 때의 그의
계급장의 별들과 그의 근엄한 얼굴을 새긴 대리석
비석이며 러시아 정교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등
유택의 외양은 훌륭한 편이다. 그러나 그 유택에는
일년에 한두 번, 그 유택 주인의 기일이나 출생일에
그의 자손들이 들고 온 꽃이 놓여있는 것이 고작이다.
장군의 묘뿐만 아니라 그 묘지에는 저명한 과학자,
정치가, 학자들의 유택도 많았다. 그런 유택들마다
초상을 새긴 거대한 대리석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그런 무덤들은 일년 내내 쓸쓸하다. 어쩌다
연중 한두 번 꽃을 들고 찾아오는 추모객이 없지
않지만, 그러나 빅토르의 무덤처럼 언제나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 것은 아니다.
빅토르 무덤 앞의 추모비는 다른 무덤의 추모비와는
외양도 다르고 크기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웅장하다.
상아빛 대리석 받침대 위에 검은 오석의 기둥이
세워져 있고 그 위에 그의 초상을 조각한 브론즈가
상징적인 반원 모양을 하고 올려져 있다. 그 추모비는
페테르부르크의 저명한 조각가들이 헌정한 것이다.
빅토르의 시와 노래를 사랑한 조각가들이 자기들
스스로의 의사에 의해 각기 돈을 갹출하여 재료를
구입하고 제작하여 건립한 의미 깊은 것이다.
빅토르의 무덤 앞에는 거의 매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꽃이 피는 봄부터 혹한이
내습하는 초겨울까지 그의 꽃이 떨어지지 않는다.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 아직 한번도 그의 무덤 위나
대리석 추모비 위에 휴지나 낙엽 같은 것이 떨어져
뒹군 적이 없다. 봄 여름 가을에는 물론 겨울에도
그의 무덤은 정결하다. 겨울에 아무리 눈이 많이
내려도 그의 무덤과 비석은 눈에 덮여 있는 때가
없다. 봄 여름 가을에는 가까운 곳에 텐트를 치고
숙식하며 그의 무덤을 지키는 젊은이들이 있고
겨울에는 가까운 관리사무소에 딸린 공중변소에서
생활하며 그의 무덤을 지키는 젊은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는 날을
제외하고 그의 무덤 추모비 받침대 위에는 그가
살았을 때 그토록 즐겨 태웠던 담배가 연기를 피워
올리며 놓여 있지 않은 날이 없다.
추모비 옆에는 그의 연주 모습을 담은, 높이가
4m가량 되는 대형 브로마이드가 세워져 있고 추모비
앞에 세워진 몇 개의 걸개에는 그의 무덤을 찾아온
추도객들이 걸어놓고 간 갖가지 기념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돈이 있는가 하면 반지가 있고 목걸이가
있고 손수건도 있다. 돈이나 귀중품이 없는 어여쁜
어떤 아가씨는 종이에 성난 듯 몇 자를 급히 휘갈겨
매달아놓고 갔다. 거기에는 '더러운 자식'이라는
욕설이 씌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왜죽어!!!'라고 되어 있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면
묘지관리소의 마리아 부인께서 그토록 분개했겠는가.
마리아 부인은 빅토르 무덤 옆의 장군의 유택을
가리키며, 조국전쟁 때 전공을 세워 국가와 인민에
공헌한 그 장군의 묘는 돌볼 생각도 하지 않고 노래나
불렀다는 젊은 빅토르의 묘를 애지중지 돌보는 것이
얼마나 부당하게 생각됐으면, 그의 무덤을 찾아온
젊은이들을 애국심은 머리털만큼도 없는 싹수가 노란
것들이라며 침을 뱉었겠는가.
어쨌든 빅토르는 죽고난 지금, 살았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그래 죽고나서도 그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것이다.
아직 어떤 검증을 거친 사실은 아니지만 빅토르는,
침체된 소비에트의 부흥을 위해 글라스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를 외치며 '제2의 혁명'을 표방하고
나선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영향을 미친 다섯 사람
중의 한 명으로 꼽는 사람도 있다. 아무렴, 세계
정세의 움직임을 읽는 예리한 통찰력과 높은 학식을
지닌 고르바초프 같은 거인이 한낱 록가수 겸
영화배우로부터 어떤 정치적 영향을 받았다 하겠는가.
하기야, 안드로포프를 거쳐 체르넨코로 그리고
고르바초프로 권력이동이 단기간에 급속히 행해진
일종의 과도기를 거치는 동안 제1 국영 TV 방송에서
진보적이며 반체제적인 성격이 짙던 시사비평 프로인
'관점'을 진행하던 르쎈코가 빅토르의 노래를 자주
방영해준 것을 두고 혹시 그것을 본 고르비가 무슨
영향이라도 받은 것이 아닐까 짐작한 어떤 호사가의
한마디가 그렇듯 세상에 널리 퍼져나간 것인지도 모를
일이긴 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소문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래, 이제 그가 살아있었을 당시의 일들을 펼쳐
보일 때가 되었다. 사람들로부터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그의 스물여덟 해의 생애는 도대체 어떤
일들로 채워져 있었을까.
그의 스물여덟 해의 생애를 펼쳐 보이는 데는
아무래도 그가 열여섯 살에 겪었던 매우 불행했던
사건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사건은
장차 성장해 가며 그리고 생활을 해가며 그가 자주
겪어야 했던 좌절과 절망을 예고하는 그런 상징적인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 발렌치나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그를
쎄로브 미술학교에 보내고 싶어 애를 태웠고 그
학교에서 미술공부하기를 바랐었다. 학제 상
쉬꼴라에서 8학년을 마쳐야 쎄로브 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그의 어머니는 그를 집에서
가까운 쉬꼴라에 입학시키고서도 늘 장차 넌 반드시
쎄로브 미술학교에 다녀야 해, 그리하여 너의 재능을
키워야 해, 하고 다짐을 두고는 했다. 마침내 그는
쉬꼴라 8학년을 마치고 쎄로브 미술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는데, 그 시험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학과
성적도 체크했지만 무엇보다 그림솜씨를 꼼꼼히 따져
시험했다. 토르소를 데생하게 하고 꽃과 사과가 있는
정물을 그리도록 과제를 내었다. 빅토르는 그들이
내는 과제를 어렵지 않게 모두 해냈다. 그리하여 겨우
입학이 허용되었다.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한
것이었다.
1. 너희는 퇴학이란다
교장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쎄레브라꼬프 교장은 책상 앞의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은 물론 코밑 수염도 아마빛인
쉰다섯의 그는 매우 완고한 성격이었다. 세상살이를
화해와 화합보다 끊임없는 경쟁과 대립으로 일관해온
그는 늘 일종의 피해의식에 젖어 있었다. 사람을 대할
때도 그랬지만 어떤 일을 처리할 때도 먼저 자기에게
돌아올 어떤 피해를 먼저 생각했다. 그는 가끔 자신이
평교사에서 순탄하게 교장까지 승진하여 오늘에 이른
것도 다 매사 꼼꼼하게 따져 처리한 습관 탓이려니
여기고 있었다.
교장 오른쪽 긴 소파에 앉아 있는 뚜젠바흐 교감도
꼼꼼한 성품은 교장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아랫볼이 눌러놓은 밀가루 반죽처럼 쑥 들어간 기다란
얼굴에 눈빛이 무엇인가를 쉴새없이 탐색하는 듯한
그는 매사를 빈틈없이 처리하는 것으로 평교사들
사이에 인식되어 있었다. 교직에 입문한 이래
25년여를 보내는 동안 주임, 장학사를 거쳐 교감에
승진한 그는 이제 2년여를 기다리면 교장으로 승진할
수 있을 것으로 본인은 믿고 있었다.
교감과 나란히 앉아 있는 쩨레긴 학생주임은 이미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그는 회의를 시작하기 전부터
어떤 책임의 중량이 자기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거북한 기분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제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아이들이란 자유분방하고 자주
실수도 저지르며 어른들을 걱정스럽게 만드는
존재라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사란
그런 좌충우돌하는 아이들을 꼭 붙잡아 매두는 기둥
구실을 해야 한다고 믿어 왔다. 실수를 저지르는
아이들은 잘 타일러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게 해줘야
하고, 그리고 훌륭한 위인들의 삶을 거울 삼아 학생
각자의 장래를 착실히 준비하게 해야 하는 그런
충직한 마음으로 근무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런 신념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익혀 왔다.
이번 빅토르와 가예프의 사건도 그의 신념과 이상을
외면한 현실의 문제로 여겨졌다. 당원인 숄로느이
선생은 그들 행위는 곧 반사회적, 반국가적 행위라고
낙인찍지 않았는가. 빅토르와 가예프의 담임인
사를로따 선생이 아무리 고군분투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구제는 이미 물 건너간 것에 틀림없었다. 이미
죽은 싸늘한 시체에 산소호흡기를 들이댄들 무슨
소용이랴.
사를로따 이바노브나. 마흔한 살의 미혼녀인
사를로따 선생은 다리며 팔이며 허리가 바람을 넣은
풍선처럼 뚱뚱했다. 그녀가 걸어갈 때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조바심 나게
하였다. 그녀는 매일 잠자리에서 깨어날 때마다,
오늘은 먹는 것을 줄여야지 하고 결심하고는 했다.
그러나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고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다. 그녀는 특별히 남보다 많이 먹는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흘레쁘(검은 보리빵)나 감자튀김이나 아이스크림
따위를 하루 종일 입에 달고 있다시피 했다. 그녀의
날씬해지고 싶은 열망이 그러나 식욕을 한번도
이겨내지 못한 것이었다. 꼭 뚱뚱해서만은 아니겠으나
다른 사람에 비해 그녀는 감정이 풍부하고 눈물이
많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 감정의 파문도
일으키지 않을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로도 그녀는
눈물을 흘려 함께 있는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일이
잦았다.
이번 빅토르와 가예프의 일로 그녀는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 조금 전에도 간신히 눈물을 그쳐
그녀의 눈자위는 아직도 발그레했다. 사를로따 선생은
빅토르와 가예프의 장래가 걱정되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숲을 위해 병든 나무는 잘라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를로따 선생의 교육자로서의
따뜻한 가슴은 얼마든지 이해합니다. 그러나 일을
국소적으로 보지 말고 좀더 넓게 보시기 바랍니다."
쎄레브라꼬프 교장은 사를로따 선생을 쓰다듬듯
바라보며 아까의 흥분했던 음성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빅토르와
가예프의 행동은 학생 신분을 크게 벗어나 있습니다.
교실에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다니, 그것도 어디 예사 노래를 불렀습니까.
반동적인 브소츠키 노래가 아니며, 부패와 타락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록큰롤 아니었습니까.
반도덕적이고 선동적인 그런 노래를 학교에서는 절대
용납해서 안됩니다. 이 사실을 만약 당에서 알게
된다면 우리 선생님들도 지도 소홀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가차없이 제적시켜야 합니다."
뚜젠바흐 교감은 아까부터 펴온 강경론을 다시
펼쳐놨다.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제 그들을 구제할 단계는 넘었다고 판단됩니다.
빅토르와 가예프는 수업에도 잘 들어오지 않고 결석도
잦습니다. 지난 학기에도, 성적도 성적인 데다
출석일수도 문제가 되어 진급을 시키느냐 마느냐
했었습니다. 그런 말썽꾸러기들이 오래 전부터 숨어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연주를 해왔다니 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룹 이름이 '제6병동'이라니
가당치도 않는 것 아닙니까. 여러 선생님들도 다 잘
아시다시피 그것은 정신수용소를 그린 체호프의 소설
제목 아닙니까. 이는 분명 불순한 뜻을 품고 그런
이름을 붙인 게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학생주임도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쩨레긴 선생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룹 이름을
'제6병동'이라 하다니 그들은 이미 어린애들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불온한 사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당이나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할 줄
압니다."
당원인 숄로느이 선생이 매우 강경한 어조로 말하며
교장을 쳐다봤다. 그는 매사에 당을 우선시키고 늘
애국자연했다. 그의 회색빛 눈은 언제나 사냥개의
그것처럼 냄새를 맡고 탐색하는 듯 가늘게 좁혀져
남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숄로느이 선생님께서는 지나친 생각이십니다. 그
아이들은 불온한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보다 좀
생각이 많고 진취적일 뿐입니다. 학교 규칙은
위반했다 할지라도 매사 독창적이고 재주가 있는
아이들입니다. 저는 그 아이들의 재주가 아까울
뿐입니다."
사를로따 선생은 무엇인가 갑자기 오래 잊고 지내던
슬픔이 되살아난 듯 코끝이 찡해왔다. 아무리 자기가
항변하며 그들을 변호해 봐야 선생님들의 생각을
돌이킬 수 없으리라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그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사를로따 선생님이야말로 사태를 감상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냉정하게, 공부에
열중하고 당에 충실한 학생들을 보호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다른 학생들의 학업을 방해하고 나쁜 행동을
저지르고 다니는 그런 반국가적인 불량학생들은
단호히 처벌해야 합니다."
숄로느이 선생은 냉소적인 시선으로 사를로따
선생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반국가적인
불량학생. 사를로따 선생은 그의 시선이 마치 시체를
파먹다 나온 벌레 같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떨었다.
이제 완전히 처벌 쪽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더
항변해 봐야 들어줄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사를로따
선생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상처를 받고 어딘가
어두운 거리를 배회할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특히
빅토르의 경우, 수학이나 과학 같은 학과에는
등한하고 성적도 나쁜 편이었다. 그러나 역사나
국어는 곧잘 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림은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잘 그렸다. 그의 그림은 좀
엉뚱한 데가 없지 않았으나 그 엉뚱함은 곧 분방한
상상력의 소산임을 사를로따 선생은 믿고 있었다.
사를로따 선생은 빅토르나 가예프가, 미리 어른들에
의해 짜여진 일정한 틀을 모두 거부하고 스스로 그
틀을 짜나가려는 창조적인 의지를 가진 아이들로
생각하였다. 시키는 대로 순응하기보다 자신들의
의견을 가지고 그 의견을 실천해 보려는 사뭇
대담하고 영리한 아이들,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명확히 구분해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을
솔직히 선호하고 행동하는 아이들....... 그 아이들은
주관이 뚜렷하여 자신들이 싫어하면서도 사회제도나
규범으로 정해져 있다고 하여 맹종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은 사회가 금지한다 해도 그것을
그대로 취하고 행동하고, 반면 사회가 권장하고
기린다 하여 싫은 것을 그대로 따라 하는 아이들도
아니었다. 사를로따 선생은 그 아이들의 분명한
선택과 행동을 보고서야 자신이 한번도 사회가 금지한
것을 범하려 하지 않았고, 어떤 행동이나 심지어는
욕망까지도 사회가 허락하는 범위를 넘어서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서글프게 깨닫고는
했다.
그들은 어른에게 깨달음과 뉘우침을 주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 빅토르와 가예프 그리고 다른 학교 학생인
빠쉬코프와 뜨로피모프 등이 교실에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기타와 드럼을 치며 노래를 부른 것을
사를로따 선생이 안 것은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그들의 연주회가 숄로느이 선생에게 적발되어
교장에게 보고된 이후의 일이었다. 적발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으나 그들이 교실에서 음악회를
열어온 것은 벌써 여러 차례의 일로 학생들
사이에서는 꽤 널리 알려져 있다 했다.
"교장 선생님 이하 여러 선생님들께 다시
말씀드립니다. 저는 정학 같은 좀더 관대한 처벌을
내리기를 애원합니다. 아이들의 장래도 걱정되려니와
그들의 독창성이 저는 너무 아깝습니다."
사를로따 선생은 승산이 없다는 걸 잘 인식하고서도
마지막 시도라는 기분으로 열정을 실어 말했다.
"빅토르와 가예프의 행동이 다른 학생들에게 결코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리라는 데는 생각을
같이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에게 다른 아이들의
학업을 방해하려는 따위의 어떤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교실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부른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학생 신분에 벗어난 행동이라는 것은 저도
압니다. 그러나 조사 결과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그
아이들이 불렀다는 노래 가운데 많은 것이 그들
자신이 지은 곡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아이들의 독창적인 재능을 한번 생각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의 창조적인 머리를
아껴주시고 장차 이들의 창조력이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선처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나 사를로따 선생의 열정적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딱하다는
눈치였다.
"사를로따 선생님은 사태를 좀더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창조적인 재능을 칭찬하고
계십니다만, 그 노랫말을 눈여겨보셨습니까? 하나같이
냉소적이고 선동적입니다. 젊은이의 기상은 찾아볼 수
없고 하나같이 의기소침해 있거나 패배자의
넋두리같은 내용입니다. 게다가 반사회적 요소가
짙습니다. 이런 노래가 사회에서 용인되리라
믿습니까? 이 아이들의 노래가 학생들의 것이라
사회에 널리 퍼지지 않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회에 알려졌더라면 필경 다
잡혀가 감옥에 갇히거나 아니면 멀리 유형이라도
보내졌을 것입니다."
숄로느이 선생은 냉소를 띠고 사를로따 선생을
반박했다. 사를로따 선생은 갑자기 머리 속에
칠흑처럼 새까만 화폭이라도 펼쳐진 듯했다. 사를로따
선생이 보기에 그들의 노랫말은 재치 있고 흥겹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어떤 독특한 설렘으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런데 똑같은 노랫말을
가지고도 저토록 다르게 이해하다니, 이제는 더 말할
기력도 없었다.
"글쎄요. 저는 여러 선생님들께서 몇 가지 오해를
하고 계신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들의 노래를
반사회적이고 반국가적인 요소가 짙고 게다가 서구의
록 음악이라고 지적하셨는데, 아닙니다. 그 노래들은
그 아이들의 느낌과 생각을 아주 솔직하게 나타낸
독창성이 돋보이는 것들입니다."
"아니, 괴상한 머리와 옷차림으로 발광하는 그것이
독창적이란 말입니까? 그것이 위대한 혁명의 나라
소비에트의 노래라 주장할 생각입니까?"
숄로느이 선생의 반박에 사를로따 선생은 더욱
절망감을 느꼈다. 어찌 저토록 아이들에게 적의를
가질 수 있을까. 혼자서 다 국가를 위하고 혁명을
위하는 것처럼.......
얼마 후 교장실에서 나온 사를로따 선생은 환각처럼
가예프를 보았다. 가예프는 교실 모퉁이를 얼른 돌아
몸을 감추었다. 사를로따 선생은 무엇에 끌리듯
가예프가 몸을 감춘 모퉁이를 향해 재빨리 걸어갔다.
이런 시간에 아이들이 학교에 남아 있지 않을
터인데....... 아무렴 환각일 거야, 그렇게
여기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긴 복도를 걸어나갔다.
교실 모퉁이를 돌아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5월의
햇볕이 폭포처럼 쏟아져내렸다. 잠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햇볕이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치 않은 사를로따 선생은 눈부심 속에서 어렴풋이
가예프를 보았다. 가예프뿐만이 아니었다. 빅토르도
함께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정해지는
과정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일까. 햇볕을 털어내고
아이들을 쳐다보는 사를로따 선생은 절망적인 표정이
되었다.
"너희들, 다 알고 있었구나?"
빅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예프가 갑자기 발목이
부러지도록 거칠게 벽을 걷어찼다.
"제적인가요?"
가예프가 발목의 통증을 잠시 참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무엇을 내동댕이치듯 거칠게 물었다.
사를로따 선생은 이번에는 자신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해 보여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찡 울려오는 걸
느꼈다.
"선생님들의 의견이 그렇게 모아졌다."
선생님들이 힘을 합해 너희들의 장래에 사형선고를
내렸구나. 너희들이 당할 고통에는 아무도 관대하지
않았어. 아무 재주도 없는 아이들, 무익하고 무해할
아이들을 위해 너희들의 창조적인 머리를
잘라버렸구나. 사를로따 선생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속을 바라보듯 어두운 생각을 뒤적이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힘주어 움켜쥐었다.
"상심하지 마세요. 그것이 선생님 탓이 아니라는 걸
우린 다 알고 있습니다."
빅토르가 도리어 사를로따 선생을 위로했다. 눈물이
울컥 솟구치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사를로따 선생은
빅토르를 바라보았다. 자작나무처럼 훤칠한 키에
참나무처럼 단단한 어깨며 콧날이 오똑하고 눈이
부리부리하고 얇은 입술에 볼이 훌쭉한 얼굴을 가진
빅토르는 그러함에도 노란 피부의 동양인이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동양인의 모색을 가진 빅토르의 장래가
더욱 걱정이었다. 빅토르를 본 순간 자기가
교장실에서 아이들의 장래에 대해, 그리고 아이들의
독창성에 주목해 주기를 애원하다시피 한 것이 모두
빅토르를 염두에 두고 한 언행이었음을 느꼈다. 비록
피부색과 눈동자 색깔은 달랐지만 그는 필경 가슴속에
언제나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빅토르의 그림들이 떠올랐다. 그가 그리는
그림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결점은 지니고 있었으나
보고 있는 사람의 혼을 자극하는 어떤 강렬한 기운을
느끼게 하였다. 아마 죽음과 탄생을 추상적으로
나타내려면 저렇게 그려야 하리라. 사를로따 선생은
이제 겨우 열여섯 살 아이의 그림에서 그런 걸
느끼고는 했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노래들도 대부분
빅토르, 그가 시를 짓고 곡을 붙이고 노래를 불렀다
하지 않던가. 빅토르를 바라보는 사를로따 선생은
금방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너희들, 앞으로는 학교에서 보지 못하겠구나.
그렇지만....... 나는 너희들이 보고 싶을 게다."
사를로따 선생은 애써 자제하려 해도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빅토르는 이미 등을 돌리고 인사도 없이 유리창이
즐비하게 달린 학교 건물 옆을 따라 걷고 있었다.
"선생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가예프는 오른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물건을 던지듯
작별의 말을 툭 던지고 등을 돌려 빅토르의 뒤를
따라갔다.
사를로따 선생은 빅토르에게 작별인사를 하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그를 불러 세우고 싶어 손을 드는
순간 빅토르는 교사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감추었다.
2. 리술 아저씨
학교를 빠져나온 빅토르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뛰듯이 걸어갔다. 그의 시선은 막연히 전방을 향해
있었다. 그가 걸어가고 있는 5월 셋째 주의 공원의
나무들은 새로 돋은 윤기 흐르는 황록색 잎을 달고
싱싱하게 솟아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푸드득
푸드득 날아 오르내리는 새들의 날갯짓도 어느 때보다
기운차 보였다. 벤치에 앉아 봄의 향기를 즐기고 있는
노인들의 표정도 밝아 보였다. 엄마와 나온 아이들은
아장아장 부드러운 풀 위를 걸어다니며 허리를 굽혀
무엇인가를 줍고는 했다. 그러나 빅토르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곧 공원을 지나 대로로 나섰다. 자동차들이
매연을 뿜으며 질주하는 차도와 나란히 뻗어있는
인도를 따라 계속 뛰어가듯 바삐 걸어갔다. 가능한 한
학교로부터 멀리 그리고 빨리 달아나고 싶었다.
"비쨔! 비쨔!"
뒤따르던 가예프가 숨가쁘게 불렀다. 그러나
빅토르는 계속 앞만 보며 걸어갔다.
"비쨔!"
가예프는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불렀다. 흘낏 뒤를
돌아보았으나 그뿐, 빅토르는 휙 돌아서더니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국영 마가진(수퍼마켓) 모퉁이에서
빅토르를 겨우 따라잡았다. 마가진 정문으로부터
동쪽으로 인도를 따라 다섯 채의 박스형 가게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보드카나 맥주나 담배 따위를 파는
작은 가게들이었다. 신문이나 잡지를 앞에 진열해
놓은 박스도 있었다.
"야, 좀 천천히 가자."
빅토르는 또 흘낏 쳐다보고 가예프 따위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귀찮아하는 표정이었다.
"야, 어디로 갈 거니?"
가예프의 물음에 빅토르는 거칠게 도리질을 했다.
"난, 혼자 있고 싶어."
빅토르는 무슨 원수를 대하듯 험악한 눈으로
가예프를 노려보며 악을 쓰듯 내뱉었다. 그는 주먹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가예프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빅토르는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제기랄! 저만 제적당했나.
그와 앞일을 의논하고 무엇인가 대책을 세우려던
가예프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 한번
추스른 다음 빅토르를 등지고 반대편으로 급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빅토르는 그날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네바 강변을
따라 걸어 내려가다 스몰리 수도원 부근에서 석양을
맞았다. 석양빛을 받은 수도원과 에카테리나 2세에
의해 귀족의 딸들을 위해 설립된 기숙학교로 쓰였던
하얀 목조 건물의 벽이 불그스레 물들어 가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석양빛을 받은 수도원 첨탑은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10월 혁명 직후 볼세비키의 작전본부로 쓰였고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선언했던 이곳 스몰리
수도원에서 레닌은 얼마나 많은 석양을 맞았던
것일까. 그가 맞은 석양빛은 이처럼 쓸쓸하지도
적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날이 어두워진 줄도
모르고 강을 바라보고 있던 빅토르는 그러나 조금도
무게가 덜어지지 않은 분노를 그대로 가슴속에 품고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어느 길을 어떻게
걸어갔는지 알 수 없었다. 불이 밝혀진 곳을 향해
막연히 걸어가다 보니 그는 여름정원에 닿아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백조운하의 담벽을 넘어 그는
여름정원으로 들어갔다.
가로수 길을 따라 조각상을 하나하나 지나
여름궁전의 건물에 도달할 때까지 아무도 그를
제지시키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천사상이 서 있는
가로수 길의 종점에 당도하여 잠시 주위를
살펴보았다. 감히 정문으로 들어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작은 목재 문이 있었다.
그는 그 목재 문을 당겨 보았다. 아무 저항없이
열렸다. 건물 안쪽 먼 데서 새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계단이 보였고, 그 계단을 올라가면 정문의 계단과
만나리라 여겨졌다. 빅토르는 작은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이 꺾여 올라가는 곳에 널따란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을 보자 갑자기 피로가 새를 잡는 그물처럼 그의
온몸을 덮쳐왔다.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빅토르는 퇴학 당한 첫날을 보냈다.
이튿날도 그는 종일 여름정원에서 빈둥댔다.
집에 들어가 마주치게 될 아버지 로베르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어머니 발렌치나는 사를로따
선생으로부터 이미 퇴학 사실을 통보 받았을 것이다.
실망한 어머니의 고통스런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보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세상의 모든 것,
관공서며 학교며 미술관이며 오페라 극장이며
아파트들, 그 모든 것들을 다 불질러 없애 버리고
싶은 충동을 삭이며 낮을 보내고 밤을 보냈다. 그의
분노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한데서는 아직 견디기 힘든
날씨임에도 추위같은 걸 별로 느끼지 않고 여름궁전의
계단에 기대어 밤을 샐 수 있었다.
몇 번인가 빅토르는 빠쉬코프나 뜨로피모프나
가예프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공연히 가예프를 냉정하게
따돌려 버렸던 자신의 거친 행위가 뒤늦게 후회되기도
했다. 그들 중 누구에게라도 연락을 하면 틀림없이
반색해 줄 것이고 침대와 음식을 제공해 줄 터였다.
그러나 그런 친구들로부터 침대와 음식을
제공받는다는 것은 곧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멱살을
내놓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니겠는가.
사흘째 되던 날 빅토르는 심한 배고픔을 느꼈다.
공복감은 영혼을 갉아먹는 무슨 몹쓸 균이라도
배양하는 것인가. 심한 배고픔은 그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인내심도 고갈시켜 버렸다.
집으로 들어갈까. 집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배고픔을
해결할 수단이 그에게는 없었다. 마가진에 들어가
식품을 훔칠 엄두는 아예 내지 못했고 행인을 위협해
돈을 갈취할 용기도 없었다. 그렇다고 구걸할 자신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들어가 이 갈증과
배고픔을 해결할 수밖에 없으리라. 막다른 곳에
몰아붙여져 그렇듯 절망적인 순간, 빅토르의 머리 속
저 안쪽 구석에서 작은 반딧불 같은 것이 하나 반짝
빛났다.
그래, 내가 왜 여태 리술 아저씨를 잊고 있었을까.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가 생각나자 기운이 솟아났다.
그래, 리술 아저씨에게로 가자. 리술 아저씨라면
음식은 물론 내게 가장 필요한 위안도 제공하리라.
빅토르는 여름정원을 뒤로 하고 거리로 나섰다.
"비쨔 아니냐?"
갑자기 사무실에 나타난 빅토르를 본 리술 아저씨는
깜짝 놀랐다.
"너, 무슨 일이냐?"
벌떡 일어난 리술 아저씨는 이마를 찌푸리며
빅토르의 위아래를 훑어 내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니? 너 추레한 입성은 그렇다
하더라도 어쩌다 얼굴이 그렇게 상했니?"
리술 아저씨는 빅토르의 뺨을 쓰다듬었다. 빅토르는
따뜻한 그 손을 밀어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빅토르는 이번에도 같은 말을 무심히 되풀이했다.
"가자. 우선 씻고 뭘 좀 먹어야겠다. 땟국이 줄줄
흐르는 지금 그 얼굴로는 어디 가도 쫓겨나겠구나."
리술 아저씨는 사무실 구석의 책상 서랍을 열고
타월과 비누를 꺼냈다.
"자, 얼굴이나 대강 좀 씻으렴."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의 뒤를 따라 화장실로 갔다.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콸콸 쏟아지는 물로 얼굴을
씻으니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머리도 감으렴!"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기 전 이미
수도꼭지 밑에다 머리를 들이밀었다. 비누칠을 하여
거품을 일으키며 머리를 감고 푸푸 얼굴을 씻노라니
오랫동안 떠나 있던 문명세계로 다시 돌아온 듯
안도감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이젠 어디 가도 쫓겨나지는 않겠다."
타월로 머리와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고 있는
빅토르를 바라보며 리술 아저씨는 아까보다 훨씬
표정이 밝아졌다.
"가자."
리술 아저씨는 앞장서 계단을 내려갔다.
몇 차례 계단을 꺾어 내려가 복도를 따라 얼마나
갔을까. 빅토르는 구수하고 달콤한 음식 냄새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냄새만으로도 군침이
돌고 혀는 요동을 쳤고 배는 체면도 돌보지 않고
꿀럭거렸다.
리술 아저씨는 마침내 한 도어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고 그 도어를 열었다. 순간 왈칵 몰려나온 음식
냄새로 빅토르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간판은 없었으나
냄새만으로 그곳이 식당임을 알 수 있었다.
"자. 어서 먹어."
리술 아저씨는 흘레쁘와 치즈와 감자를 으깨 양념을
한 샐러드를 주문해 빅토르 앞에 펼쳐놓았다.
"국물이 있어야 할 것 같아 벨메니를 시켰다. 곧
나올 게다."
빅토르는 이미 흘레쁘를 볼이 미어터지도록 쑤셔
넣고 아귀아귀 씹고 있었다.
"천천히 먹으렴. 목 메일라."
리술 아저씨는 물컵을 빅토르의 손에 쥐어주었다.
물을 마시고 간신히 흘레쁘를 넘긴 빅토르는 사레가
들었던지 기침을 쿡쿡 해대며 목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곧 그는 또 다급히 샐러드를 입 안 가득 넣고
우물거렸다.
"뺏아갈 사람 없어. 좀 천천히 먹으라니까."
그때 벨메니가 나왔다. 빅토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국물을 후후 불며 후루룩후루룩 입안으로 떠
넣었다. 국물이 어찌나 뜨거웠던지 혀를 다급히
휘두르며 김을 불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러나 그의 뱃속은 뜨거움 따위는 문제로 삼지 않고
음식을 재촉해댔다. 눈 깜짝할 새에 빅토르는 앞에
가져다 놓은 음식을 몽땅 먹어치우고 말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리술 아저씨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음식을 깨끗이 해치운 후 고개를 든
빅토르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리술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너무 무안하여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리술 아저씨는 손수건을 꺼내 빅토르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 있는 땀을 훔쳐주었다.
"미안해요."
"미안하다니. 나는 너처럼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
첨 봤다. 그렇듯 유쾌한 모습을 보여주고 미안하다니,
쯧쯧. 우유를 한잔 더 하련?"
"한잔 더 해도 될까요?"
"그럼, 그럼."
리술 아저씨는 스스로 일어나 우유 한잔을 더 사와
빅토르 앞에 놓았다.
"그래 무슨 일이길래 널 그렇게 망가뜨렸니?"
우유를 반쯤 마시는 동안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리술 아저씨는 미소를 머금은 채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빅토르는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뱃속에 음식이 가득 채워지자
포만감과 함께 찾아온 안도감과 나른함이 온몸을
해파리처럼 축 처져내리게 했다. 눈두덩에 돌멩이라도
올려놓은 것처럼 무거움을 느꼈다. 눈이 사르르
감겼다. 측은한 생각에 리술 아저씨는 그러한
빅토르를 잠자코 지켜보았다. 저럴 때는 잠깐
지나가는 잠을 피할 수 없으리라.
"제가 깜박했군요!"
빅토르는 5분도 지나지 않아 깨어났다. 그는
겸연쩍고 민망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아,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그러나 지난 사흘간의
한뎃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나를 안도감과
함께 새삼 깨달았다.
"지난 며칠, 여간 힘들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그래
무슨 일이 널 그렇게 괴롭혔는지 알고 싶구나!"
빅토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작정했다.
"학교에서 제적 당했어요."
"제적을 당했어?"
리술 아저씨는 깜짝 놀랐다.
"저는 죽고 싶었어요."
"쯧쯧, 그래 힘들었겠구나. 그래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제적까지 시켰다는 거냐?"
"학교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노래를 불러?"
리술 아저씨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빅토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 친구들과 어울려 교실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친구들과 어울려 교실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퇴학을
시켜!"
"그래요. 많은 아이들이 우리 노래를 듣고
싶어했어요. 우리는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방과후에 교실에서 친구 넷이서
그룹 연주를 했어요."
"넷이서 그룹 연주를 했다?"
잠시 찌푸린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리술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학교에서 부를 수 없는 노래를 부른 모양이구나?"
"학교에서 부를 수 없는 노래라니요? 우리는 우리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불렀을 뿐인 걸요. 브소츠키의
'내가 사랑하는 러시아'나 마르크 베르네쓰의
'낭만주의자', 그리고 우리가 지은 노래를 불렀어요."
"브소츠키와 베르네쓰의 노래라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노래는 아니구나."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운 노래만 불러야 한다는
법이 어딨어요."
빅토르는 대들듯 당돌하게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않단다. 학생은 학생 신분에 맞는
노래를 배우고 또 불러야지, 어른들 흉내나 내서야
되겠니."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리술 아저씨라면
학교 당국의 가혹한 처사를 엄중히 비판하며 함께
분해하고 억울해 하며 위로해줄 줄 알았었다. 그런데
자신의 역성을 들어주기는커녕 학교 당국의 생각과
똑같은 말을 그대로 주워섬기고 있었다.
"브소츠키나 베르네쓰같은 가수들은 자기들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느낀 대로 세상을 노래하고
있지 않아. 감정이란, 특히 조타수가 없는 감정이란
배를 산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옛어른들이
말씀하셨거던. 그러니까 당에서는 그들의 노래는 우리
사회를 자칫 험한 산으로 이끌고 가는 위험한
것들이고 그리고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다고
생각하거던. 그래서 일반인들도 부르지 못하게 하는데
학생인 너희들이 부르도록 놓아둘 리 있겠니."
빅토르는 귀라도 틀어막고 싶었다. 어른들은 다
생각이 똑같은 것인가. 리술 아저씨는 빅토르의 그런
머리 속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곧
이렇게 말했다.
"비쨔, 너의 기분은 내가 다 안다. 내가 학교
당국의 처사가 부당한 점을 지적해 주기를 넌 바랐을
터이지. 아니면 너가 이해할 수 없는 학교 당국의
처사를 내가 바로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주기를
바랐겠지."
"예, 그래요. 저는 학생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제적시키는 학교 당국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어요. 어른들은 왜 우리들이 싫어하는
것을 강요하고 좋아하는 것은 금지시키지요?"
빅토르는 새삼스럽게 분개하였다.
"너가 이해할지 모르겠구나. 어른들은 역사적으로
축적된 지혜와 경험을 토대로 제도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의해 세상을 꾸려간단다. 그런데 그
제도라는 것에 어긋나는 일이 발생하면 법률이란
규정으로 엄히 다스리지. 목적이야 국가발전 내지
인민의 복지실현 등에 두고 있지만, 원래 표방했던
목적과는 다르게 국가제도라는 것이 운용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란다. 내가 너무 어려운 말을 하고 있지?"
"아니에요.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빅토르는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너희들이 학교에서 노래 부른 행위는, 그러니까
어른들이 마련해둔 제도와 규정에 벗어나 있기 때문에
제재를 가한 것이란다. 그러나 그것이 꼭 옳은
것인지, 또는 부당한 것인지 나는 말할 입장이
못되는구나. 다만 너가 장차 이 사회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그 제도라는 것을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이해해 줬으면 하는 생각에서 내가
이렇게 어려운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았구나."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의 말을 제대로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아저씨의 대답은 궁금증을 풀어주기는커녕 그
궁금증을 더 키워놓기만 하였다. 그러나 조금 전보다
마음은 훨씬 가벼워졌다.
"저는 어른들이 좋아하는 노래와 우리들이 좋아하는
노래가 다른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빅토르의 눈에 궁금증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리술 아저씨는 빅토르의 눈을 근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애야, 그걸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니. 아이와
어른은 하는 일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삶의
목적도 다르지 않니. 아이들은 성장해 가며 장차
살아갈 준비를 하는 도정이고, 어른들은 보다
안정되고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삶의 전쟁터에
내던져진 투사같은 그런 존재들 아니더냐.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필요한 노래는 정서함양에 필요한
것들이어야 하고 어른들에게 필요한 노래는 위안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이어야 한단다.
그런 생각을 더듬고 있던 리술 아저씨는 그러나
엉뚱한 말을 꺼내놓았다.
자기 말이 스스로도 흡족치 않았던지 말하는 동안
몇 번이나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른들에게는 모든 일에 합목적적인 가치관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란다. 어떤 일이 그 가치관에 합당하지
않으면 행하지 않거나 금지하기 마련이란다. 그런데
너희들 또래 아이들에게는 어른들과 같은 그런
합목적적 가치관이라는 것이 없지 않니? 다만
단순하게 좋아하고 싫어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너희들은 모든 일을 이해하지 않아? 그러니까
어른들이 좋아하는 노래와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니?"
"저는 무슨 말씀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그래 내 대답이 너무 어른들만 아는 그런 추상적인
것이 되고 말았구나."
리술 아저씨는 빅토르의 의문에 충분히 공감하였고
그에게 더 적합한 대답을 해주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아이는 리술 아저씨의 대답에 만족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아이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어떤
수수께끼를 떠안은 것처럼 보였다.
"어른들은 여러 사람들이 모여 다 함께 잘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늘 궁리를 한단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지 않느냐. 그래서 자기만 좋은 것을 찾는 것이지.
그래서 서로 좋아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리술 아저씨는 자신의 대답에 스스로 화가 났다. 왜
좀더 솔직하고 바른 대답을 회피하고 빙빙 우회하고
있는가.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맞는 노래를
가르친다. 그것이 아이들의 정서에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자라면 어른이 되지 않나요?"
"그래 그렇지만 아직 어리니까 어릴 때는
어린이들이 불러야 하는 그런 노래를 부르라는
뜻이겠지. 그러나 빅토르 네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아저씨가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고 네가
좋다면 브소츠키든 베르네쓰든 불러도 좋지만
학교에서는 그런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그럴 필요가 없게 됐잖아요. 학교에 우리
책상은 없는 걸요."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냐?"
"글쎄요. 아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지난 며칠간 집에 들어가지 않았던
게로구나. 어디서 어떻게 지냈지?"
리술 아저씨는 별안간 그렇게 물었다.
"아무 데나 발걸음 닿는 대로 돌아다녔어요."
"그럼 어머니도 만나지 못했겠구나?"
빅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쯧쯧, 어릴 때의 고통에는 어머니의 품보다 더
좋은 약이 없단다."
"아직 어머니를 만날 자신이 없어요."
"자신이 없다! 그건 네 생각일 뿐이다. 네가 집에
들어가지 않는 동안 어머니는 얼마나 널 걱정하고
계시겠니? 널 걱정하고 계실 어머니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
빅토르는 큰눈을 꿈벅거리며 잠시 생각을 더듬었다.
"아마 너와 내가 이렇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너를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닐 게다."
"나중에 용서를 빌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만날
생각이 없어요."
빅토르의 얼굴에 근심스런 표정이 역력히 그려졌다.
"알았다. 잘 생각해서 하렴.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집에 들어가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려야 한다."
"예."
잠시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래......, 언젠가 빅토르, 너 구름을 좋아한다고
했지?"
리술 아저씨는 무슨 생각에선지 이야기의 방향을
돌렸다.
"예, 구름은 갖가지 재미난 형상을 만들어 보이고
또 어떤 때는 내 마음을 가라앉게 하는 마력을
지녔거던요."
울적한 기분을 털어내려는 듯 빅토르도 쾌활하게
대답했다.
"여름이나 가을 하늘에 뭉게뭉게 피어오르거나
새털처럼 가볍게 옷자락을 펼쳐보이는 구름이 매우
아름답지."
"예, 저는 늘 반했어요."
"더구나 해질녘 석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붉게
물든 구름이 보는 사람의 가슴속에 많은 노래를
지어주고는 하지 않던?"
"아저씨, 그래요. 석양녘 붉게 물든 구름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가슴속에서 노래가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어요."
"그럼, 그 구름들은, 어때 한번 생각해본 적 있니?
구름들은 자기들이 짓고 싶은 모양을 스스로 짓고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글쎄요?"
빅토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구름도 우리 사람들과 같단다.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다고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구름도 자기
뜻대로 만들고 싶은 형상을 다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란다."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가 하려는 말뜻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사람들은 자기가 갖고 싶은 걸 다 가질 수 없고,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는 없지. 사회가 정해둔 어떤
규칙에 따라야 하고 자기 사정에 좌우되어야 하고 또
남의 권익을 침해해서도 안되듯 구름도 제 마음대로
무슨 형상을 다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란다. 구름의
생성소멸도 그렇지. 대기권의 기온이나 기류에 의해
구름이 생성되거나 소멸되는 것이지. 그리고 구름은
바람의 영향을 받아 어떤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란다."
빅토르는 말뜻은 알아듣겠으나 그 비유가 결코
적절하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빅토르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자 리술 아저씨는 또 입을 열었다.
"빅토르, 언젠가 내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지?"
"예......?"
"할아버지께서 원래 살던 곳이 먼 원동의 연해주라
하지 않았니?"
"시베리아 동쪽 끝 블라디보스톡에서 오셨다고
했어요."
"그래, 블라디보스톡에서 오셨다고 했지. 그때
할아버지는 중앙아시아로 옮기시고 싶어 옮기신 줄
아니?"
빅토르는 잠자코 리술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았어. 그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만이
아니라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톡, 우스리스크,
포시에트, 핫산 등 연해주에 살던 조선족을 스탈린이
모조리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옮겨온 것이란다."
"왜요?"
빅토르도 언젠가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있기는
했었다. 그러나 별달리 관심이 쏠리는 일이 아니어서
귀담아 듣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나 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듣지 못한
모양이구나?"
"아버지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일이어서 그냥
귓등으로 흘려듣고 말았어요."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 그래,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란다. 연해주에 사는 조선인들이 일본과 내통하여
소비에트에 해를 끼친다는 이유에서였지.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도 밝혀내지 못한 미스터리란다."
"단순한 혐의만으로 조선족들을 수만리 떨어진
중아아시아로 이주시켰단 말이에요?"
"그런 셈이지....... 당시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들은 수십년, 또는 십수년씩 피땀 흘려 농토를
일궈 자리를 잡고 살았으므로 아무도 다른 고장으로
옮기고 싶어하지 않았었어. 그런데 소비에트
정부에서는 조선인들을 모조리 열차에 태워
카자흐스탄, 끼르끼스탄, 우즈벡스탄, 타지크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에다 부려놓았단다."
빅토르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그들 조선 사람들은 당국에서 금지하는 노래를
부른 것도 아니었고, 당시 연해주에 사는 러시아
사람들을 해치거나 또는 그들이 싫어하는 어떤 짓을
한 것도 아니었다. 모두들 하나같이 부지런했고
러시아 사람들을 도와 열심히 농사를 지었을
뿐이란다."
"그럼 조선 사람이면 조선으로 돌아가지, 왜
러시아에서 살다 중앙아시아로 옮기란다고
옮겼을까요?"
빅토르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걸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 건데 순서가
바뀌었구나. 애초 연해주로 이주해온 조선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향에 농사지을 땅을 갖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었단다. 고향 땅에서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자 농사지을 땅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러시아
땅으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었어."
"조선이란 나라는 농사지을 땅이 없는가요?"
"땅이야 있지만, 조선은 주로 산으로 되어있는
지형이라 어디 시베리아처럼 넓은 땅이 있어야지. 또
그 좁은 땅도 가진 사람만 많이 갖고 고루 가지지
못했지. 따라서 가진 사람은 배불리 먹고 입었지만
땅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굶주리고 헐벗기
마련이었단다. 그래서 농사지을 땅을 찾아 많은 조선
사람들이 연해주로 넘어왔단다."
리술 아저씨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
때문인듯 눈을 좀 찡그렸다. 누런 피부색이지만
햇볕을 잘 쬐지 않아서인지 얼굴색이 창백하여
피부색으로만 말할 것 같으면 러시아인들에 못지않게
하얀 편이었다. 빅토르는 어딘가 허약해 보이는 리술
아저씨의 가슴이며 얼굴을 쳐다보며 아저씨의
지난날이 몹시 고달팠으리라 짐작하였다. 잠시 후
리술 아저씨는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당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강제로
합병을 한 터라, 거기에 반대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관헌에게 쫓겨 연해주로 피신온 사람들도
많았었다. 농사지을 땅을 찾아온 사람들은 조선으로
돌아가봐야 다시 굶주릴 것이 뻔하고 독립운동을 하다
온 우국지사들은 조선으로 돌아가면 잡혀서
감옥살이나 할 것이 명약관화하니 돌아갈 수 없었지.
그래서 다 중앙아시아로 실려온 것이란다."
리술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빅토르는 마음이
아팠다.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것 같았다. 그러나 빅토르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불렀다 하여 학교로부터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
사람이란 자기가 하고 싶다고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가 바라지 않는 일을 하면 제제를 받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하려는 이야기로서는
너무 가혹한 비유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사람이
자기의 기호에 따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란
이토록 귀한 것인가.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빅토르
너는 장차 무슨 일을 하든지 이 꽃 하나는 잊지
않도록 하여라....... 너, 중앙아시아에 가본 적
있다고 했지?"
"예, 끄질오르다 할아버지 댁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따마리스크라는 꽃을 보았겠구나?"
"따마리스크?"
빅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모를 수도 있지. 중앙아시아 들판에 흔하게
피는 꽃이야. 허리 높이의 가느다란 줄기에 작은
팥알같은 분홍색꽃들을 무수히 달고 있는 것인데,
조선족들이 이주해온 이래 그 꽃의 색깔이 더
선명하고 고와졌다는구나."
"......?"
빅토르는 다음 말을 재촉하듯 리술 아저씨의 눈을
쳐다보았다.
"조선인들이 이주해온 것은 마침 겨울이 시작되던
무렵이라 여간 춥지 않았었단다. 원동에서
중앙아시아까지 한달 가량 기차에 짐짝처럼 거칠게
실려오는 동안 병을 얻어 죽은 어린아이들이나
늙은이들이 부지기수였는데, 죽지 않은 사람들도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로 부려졌었단다. 그런
사람들을 나무 한그루 옳게 없고 바람막이가 될
바위나 언덕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부려놨으니 흙을
파고 땅 속으로 숨어들 수밖에."
리술 아저씨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급하게 담배를 눌러 끄더니 다시 갈증 만난
사람처럼 담배에 불을 붙여 급히 빨아들였다. 담배에
불을 붙일 때 리술 아저씨의 손이 몹시 떨렸다.
"땅을 삼사 미터 파고 들어가 위에다 갈대같은 풀을
덮어 겨우 한기를 면했는데,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었으니 그 고생이 오죽 했겠느냐. 다행히 현지
카자흐스탄인들이 이들 조선족들을 가엾게 여겨 먹을
것도 나눠주고 마실 물도 주었지만, 음식도 입맛을
돌볼 입장이 아니어서 생기는 대로 먹으며 연명을
했지만 물이 맞지 않아 배탈이 난 사람들이 많이
죽어나갔다는구나. 더구나 어른들보다 어린아이들이
더 많이 배탈을 앓다 죽어나갔다는 것이다. 어찌나
아이들이 많이 죽어나갔던지 묻을 데가 모자라
한꺼번에 합장을 하고는 했다는구나. 그런데 그 험한
겨울을 나고 봄이 되어 들판에 풀이 자라자 아이들이
묻힌 곳마다 처음 보는 꽃이 피어 있는데 다른 곳에
핀 꽃들보다 유난히 그 색깔이 곱더란다. 그 꽃이
따마리스크였단다."
"그때 죽은 아이들의 혼이 피워내는 꽃이었군요?"
빅토르의 말에 리술 아저씨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죽은 아이들의 혼이 피우는 꽃이라니,
그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다. 이
아이는 장차 무엇을 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될까.
"언젠가 그 아이들의 혼령을 위로할 수 있는 시를
지으려마."
열여섯 살의 빅토르는 남달리 감수성이 예민했다.
그러나 리술 아저씨의 말에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자기더러 시를 짓는 사람이 되리라 몇 차례나
말하고는 했으나 자신은 시를 짓는 재주를 타고난
것으로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지금까지
빅토르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왔을 뿐이었다. 그림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은
노래였다. 그는 노래부르는 것이 늘 즐거웠다. 노래를
부르면 까닭 모르게 가슴 어느 곳에 응어리처럼 얹혀
있던 슬픔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노래를 부르면 더
진한 슬픔이 온몸을 물들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없지 않았으나 그 슬픔이 도리어 위안이 되고는 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를 때
가장 즐겁고 행복했다. 빅토르는 생각했다. 그래 시를
짓는 시인이 되지 못하면 노래로라도 불러주마. 죽은
아이들의 혼령이 피우는 너 분홍색의 따마리스크여.
빅토르는 속으로 그 생각을 깊이 간직했다.
3. 너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와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었다.
한동안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리술 아저씨는
매우 주술적이었고 신비했으며 사람을 끄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너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수천 수만의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모습이 상상된다."
빅토르가 글리보에도프 운하 하변에 있는
시립예술학교를 다니던 열세살 무렵의 일이었다. 그때
리술 아저씨는 빅토르의 환심을 사려는 듯 그런
황홀하고 매력적인 말을 건네며 접근했다. 그 말을
들은 빅토르는 장차 어떤 훌륭한 그림을 그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려나,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 무렵 가장 자신있게 할 수 있는 것을
들라면 그림을 첫손가락에 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짐짓 그 무렵 빅토르의 관심이 가장 많이
쏠려있는 일은 빠쉬코프와 의논중인 보컬 그룹
'제6병동'의 결성에 관한 것이었다.
보컬 그룹 '제6병동' 결성에 관해 빠쉬코프와
빅토르는 뜻이 완전히 일치해 있었다. 베이스 기타를
연주할 친구를 하나 더 구하면 바로 그룹 활동을
펼쳐갈 작정이었다. 비록 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연주활동을 펼쳐갈 예정이었으나 구색은 다 갖출
필요를 느꼈다. 장차 '제6병동'이 성인 그룹으로
성장해갈 수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빅토르는 미처
그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으나 빠쉬코프는
모스크바에서 꽤 이름을 떨치고 있는 그룹 '벨료샤'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룹 '벨료샤'는 원래 쉬꼴라
상급반 학생들이 조직하여 학생들을 상대로
연주활동을 펴다가 그룹 멤버들이 쉬꼴라(10년제
초등학교. 8학년을 수료하면 전문학교 진학자격이
주어지고 10년제를 졸업하면 대학진학 자격이
주어진다)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나가자 그 멤버들이 그룹 활동을 계속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제6병동'이라 하여
'벨료샤'처럼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빠쉬코프는 그렇게 주장했다.
빅토르는 빠쉬코프에게서 기타를 처음 배웠었다.
배운 지 일년 남짓 되었을까, 어느날 우연히
빅토르의 기타 연주를 들은, 해군성 문관으로
근무하는 빠쉬코프의 아버지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가
빅토르의 기타 솜씨를 빠쉬코프보다 낫다고
칭찬하였다.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는 기타 연주를
즐겨했고 미국의 엘비스 프레슬리와 영국의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 등을 좋아하는 록 음악 팬이기도 했다.
그리고 빠쉬코프에게 직접 기타를 가르치기도 했었다.
그러한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로부터 그런 판정을
들은 빠쉬코프는 억울한 기분이 없지 않았으나
빅토르의 기타 솜씨가 가르친 자신보다 훌륭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빅토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렴,
어렸을 때부터 기타를 쳐온 빠쉬코프를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 생각했다. 그러나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의 칭찬은 빅토르에게 자신감을 갖게
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빅토르는 빠쉬코프의
집에서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나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들을 때면 그들의 기타 연주에 더 조심스레
귀를 기울이고는 했다. 그리고 그들 노래의 특색을
나름대로 체크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원인을 스스로 밝혀내려고 노력했다. 물론 빅토르는
그런 원인을 밝혀낼 수 있을 만큼의 음악적 소양은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집에 돌아가 혼자
있을 때마다 남모르게 그들의 노래를 흉내내고 그들의
기술을 익히려 노력했을 따름이었다.
바로 그럴 무렵의 어느날이었다. 학교 가는 길에
가끔 마주쳐 낯이 익은 동양계 아저씨가 어쩌다
나란히 걷게 되었을 때 '너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수천 수만의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모습이
상상된다'며 말을 걸어왔었다. 학교 가는 길에 몇
차례 얼굴을 보거나 눈이 마주치기는 했으나 그때까지
아직 서로 말을 나눈 적은 없었다.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같은 피부색과 까만 머리칼, 검은 눈동자로
인해 아버지 로베르트와 같은 고려인이거나 아니면
끼따이츠겠거니 짐작했었다. 막연히 친근감은
느껴졌으나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낯익은 거리의 낯익은 건물 같은 그런 존재쯤으로
여기며 지나치고는 했었다.
빅토르는 별로 관심없는 얼굴로 그 아저씨를
돌아보았다.
"너는 필경 네가 모르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을 게다"
아저씨는 거듭 그렇게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빅토르는 참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도 다 있다는
생각을 하며 거리의 건물들이며 학교로 가는 낯익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학교가 멀지 않았음을 짐작한
빅토르는 따라서 아저씨와 헤어질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안도하며 걸음을 계속했다.
"동양에는 사람의 미래를 내다보는, 즉 사람의
운명을 알아맞추는 학문이 있단다. 서양의 예언서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빅토르는 흘낏 아저씨를 쳐다봤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주역이라고 하는데, 음양 두 가지를 가지고
천지간의 만상을 풀이하고 사람의 길흉을 점치는
것이란다. 그리고 관상이라는 것과 수상이라는 것도
있단다. 관상이란 얼굴 생김새로 그 사람의 타고난
운명과 미래를 점치고 수상이란 손바닥 손금의
생김새를 보고 그 사람의 발복과 성격 등을
알아맞추는 것이란다. 헌데 네 얼굴을 보아하니, 너는
눈이 맑고 귀가 남달리 크고 얼굴색이 곱다. 너의
눈은 봉의 눈을 하고 있고 눈꼬리가 살쩍을 향해
있으니 벼슬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유명인사가 될
게다. 게다가 너의 걸음걸이와 몸짓 또한 당당하고
의젓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상이다."
갈수록 모를 말이었다. 듣기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듣기 좋은 말도 아니었다. 내가
유명해진다니....... 그 사이에 학교 앞에 이르러
있었다. 빅토르는 아저씨를 얼른 돌아본 후 학교로
들어갔다. 그 아저씨는 언제나 학교를 지나 더 가고는
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빅토르는 그 아저씨와 또
마주쳤다. 압도버스에서 내린 그 아저씨는 빅토르가
눈에 띄자 걸음을 빨리하여 빅토르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나란히 걸었다.
"나는 까레이란 나라에서 왔단다."
순간 빅토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휙 꺾어 그
아저씨를 돌아보았다. 까레이란 말이 빅토르에게
그렇듯 갑작스런 반응을 보이게 했던 것이다.
"너, 까레이를 알고 있구나?"
처음 말을 걸어왔을 때 빅토르는 그 아저씨가
아버지 로베르트나 할아버지와 같은 까레이츠거나
아니면 끼따이츠거니 속으로 짐작을 했었다. 그러나
막상 까레이츠라는 실토를 듣자 상대방의 어떤
부끄러운 데를 고백받은 것 같은 당혹감을 느꼈다.
빅토르는 백기를 드는 기분으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도 까레이에서 오셨다고
하셨어요."
아저씨는 활짝 웃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까레이츠가 아니고서는 너처럼
먼 하늘바래기가 잘 없거던."
아저씨는 또 빅토르가 알아듣지 못할 알쏭달쏭한
말을 하였다.
"너는 길을 걸을 때도 앞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앞을
건너뛰어 건물 뒤의 하늘을 보며 걷더구나. 나는 처음
너를 보았을 때 저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몹시 걱정했었다."
아저씨로부터 그 말을 듣고 나니 빅토르는 자신이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사이 빅토르는 교문
앞에 다달아 있었다. 빅토르는 더 무슨 말인가를
나누고 싶었으나 헤어져야 했다. 빅토르는 지난번과는
달리 교문을 들어가면서 아저씨를 돌아보았다.
아저씨는 빅토르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로부터 사흘쯤 지나서였다. 빅토르는 아저씨와 또
마주쳤다.
"어떠냐? 오늘 학교 마치면 아저씨 사무실로
놀러오지 않으련?"
빅토르는 그 제안이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얼른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아저씨가 또 말했다.
"몇 시에 학교를 마치지? 그 시간에 내가 교문
앞에서 기다리지."
"그림을 좀 그려야 하니까, 두 시쯤 학교를 나올 수
있을 거예요."
아저씨에 대한 두려움도 경계심도 이미 다 사라져
버린 빅토르는 즐거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아저씨는
어쩌다 한번씩 집에 오는 크질오르다에 산다는 삼촌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빅토르는 아저씨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고, 그 사무실에 가보고
싶기도 했다.
"그럼 그때 내가 여기서 기다리마."
아저씨는 약속 대로 두 시에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빅토르가 교문을 나서자 미리 와서
기다렸던지 보던 신문을 접으며 빅토르를 반색했다.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이 여기서 멀지 않단다."
아저씨 말대로 아저씨의 사무실은 학교에서 멀지
않았다. 겨우 한 블럭을 더 가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들어간 곳에 있는 매우 견고해 보이는 기다란 5층
건물의 몇 개의 출입구 중에 하나를 열고 들어가자
계단이 나오고 계단을 세 차례 꺾어오른 다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선 순간 빅토르가 그렇게
느낀 것이었을까.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자신을
주시하는 것 같아 거북했다. 그들은 모두 머리카락이
금빛이거나 회색빛이었고 피부가 백랍빛의 러시아계
사람들이었다. 당황해 하는 빅토르를 얼른 아저씨는
다른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거기에는 남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낯선 빅토르에게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들어설 때 흘낏 쳐다보았을 뿐 다시 책상에
코를 박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 사람 역시
러시아계였다.
"그렇게 불안해 할 것 없다. 이곳은 책을 만드는
곳이란다. 책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한결 예의 바르고
선량하단다."
권하는 의자에 빅토르가 불안한 기색으로 앉자
아저씨는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방안에 들어설
때부터 왠 책이 이렇게 많은가 놀랐었는데, 과연 책
만드는 사무실이라는 것이었다. 빅토르는 무심코 책이
빼곡히 들어찬 책장이 빙 둘러서 있는 방안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그때 일하던 남자가 다시 눈을 들고
빅토르를 눈여겨 보았다.
"새 친구가 생긴 모양이군요?"
남자의 물음에 아저씨는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할아버지가 까레이에서 오셨대요."
"고향 사람끼리 잘 만났군요. 축하합니다."
그 남자는 활짝 웃으며 매우 호의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아저씨는 책상 서랍에서 비스킷과 초콜렛을
꺼내놓았다.
"너와 만날 것에 대비해 사둔 것이다. 점심은
먹었니?"
"예......."
"그래도 시장할 테니 이걸 먹으렴."
"고맙습니다."
빅토르는 비스킷을 깨물어 먹으며 깔바스를 마셨다.
그날 빅토르는 아저씨의 이름이 리술이라는 것과 책
만드는 일에 종사하며 스스로 시를 짓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존경하는 사람은 인도와
중국의 성자들임도 알았다.
"러시아서는 표트르 대제와 꾸조토프 같은 장군과
푸쉬킨, 도스토예프스키, 차이코프스키 같은
예술인들이 많이 배출되었지. 동양에도 그런 위대한
왕과 장군들과 예술가들이 많이 배출되었지만
무엇보다 훌륭한 성자들이 더 많이 배출되었단다."
빅토르가 비스킷을 세 개 먹고 깔바스 한 컵을
마시고 났을 때 아저씨는 말했다.
"어린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치 않을지
모르겠지만, 너한테 동양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구나. 암, 동양 사람들에 대해 알아야지."
리술 아저씨는 얼굴이 마른 편이었다. 얼굴에
투실투실 살이 찐 아버지와는 달랐다. 크질오르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한다는 레프 삼촌처럼 살결이
맑고 입술이 얇아 어딘가 이지적인 인상이었다.
"저도 동양에 대해 알고 싶어요. 무슨 이야기든
해주세요."
"그래, 그러려마. 소비에트에 사는 조선인들은 대개
자신이 동양 사람임을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동양인들이 그렇게 부끄러운 존재들만은
아니란다. 너, 징기스칸을 알지?"
"예, 역사책에서 읽었어요."
"그 징기스칸은 이곳 러시아를 정복한 몽골인이다."
"알고 있어요."
"징기스칸과 그 아들 바투와 그 자손들에 의해
러시아는 약 2세기 동안 지배를 받았어."
빅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책 여러 군데에
몽골인들과의 전쟁 사실이 씌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을 이긴 이반 3세의 우그라 강의 전승
사실이 자랑스럽게 기록되어 있었다.
"동양에는 그런 무서운 장수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란다."
리술 아저씨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태우며 말을
계속했다.
"성자들 가운데 석가모니와 공자 같은 어른은
예수와 나란히 세계 삼대 성인으로 꼽힌단다.
석가모니와 공자 외에도 노자며 장자며 열자 같은
이들도 이들 성자들에 못지않은 높고 깊은 덕과
사상을 지녔었고......."
그렇게 시작하여 그날 리술 아저씨는 빅토르가 전혀
알지 못했던 동양 사람들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갑자기 하도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들은
빅토르는 얼떨떨할 뿐 그것을 미처 다 소화하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도무지 듣지도 배우지도 못했던
새로운 지식들이었다. 빅토르는 들을수록 호기심이 더
일어났고 궁금해졌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는
달리 신비하고 재미있었다.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빅토르는 자신이 오래 전부터 알고 싶어 했던 어떤
것과 비로소 만난 듯한 흥분을 느꼈다. 특히
석가모니에 대한 이야기가 빅토르에게는 인상에 크게
남았다.
옛날 인도에 샤키야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단다. 그
나라 왕자로 태어난 싯달타는 영민하여 지혜롭게
성장하였고, 열여섯에 아름다운 아내를 맞아들여
아들도 낳고 행복한 생활을 누렸었지. 그러나 어떠한
행복도 영원하지는 않고, 인간의 고통과 번뇌는 어떤
사람일지라도 똑같이 겪으며, 작은 짐승은 큰짐승의
먹이가 되고, 사람은 병들면 고통받아야 하고, 그리고
늙으면 죽어야 하는 이런 현상을 목격하고 생각한
바가 있어 집을 떠났었어. 물론 왕위도 버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과도 영원히 헤어질 결심으로
집을 떠난 것이었지. 그는 영원한 지혜를 얻고자 험한
산에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고행수도를 했어.
그리하여 집을 떠난 지 6년 만에 드디어 그는 '깨닫는
자' 즉 붓다가 되었단다. 그로부터 붓다는 반세기
가량 인간에게 생명력 넘치고 미래지향적이며
창조적이며 윤리적인 지혜를 설파하고 계도하셨지.
그의 가르침은 인류의 많은 숙제를 풀어 주었고,
2천5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가르침은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현재 그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는
자가 수억이 넘는단다.
다 기억할 수는 없으나 대략 그런 이야기였다.
빅토르는 책에서 옛 왕들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왕들은 무소불위, 못하는 것이 없고, 명령하는
자며, 다스리는 자며, 왕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복종하게 되어있었다. 왕은 마녀도 쳐부수고, 적들을
물리치고 백성들을 위하여 온정을 베풀고 사랑하였다.
왕은 만인 위에 군림하고 호령하였다. 왕은 세상의
귀한 보물은 다 소유하고,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미녀들을 아내로 삼았다. 그러한 왕을 빅토르는
선망했었다. 그런데 그렇듯 모든 사람들이 선망해
마지않던 왕의 자리를 버리고 설산에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수행을 하고 마침내 깨닫는 자가 되어
금욕하고 고행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지혜를 전하고 다닌 사람이 있었다 하니 빅토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상징성만을 빅토르는 어렴풋이 짐작하였지 그가
깨달았다는 그 깨달음의 내용은 겨자알만큼도
알아듣지 못했다. 리술 아저씨는 그날만이 아니고 몇
번이나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을 빅토르에게
들려주고는 했었다. 먼 훗날 리술 아저씨가 돌아가고
그리고 더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끝내 다
이해하지 못한 그 이야기들을 리술아저씨는 어린
빅토르에게 무엇 때문인지 지치지도 않고 거듭거듭
들려주고는 했었다.
다만 빅토르가 어렴풋이 짐작하고 배웠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야기들 가운데서 모든 사물이나
현상계는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닌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까지 다 식별해야 비로소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수수께끼같은 사실을 어렵풋이
짐작했다고나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형체가 있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형체가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정도였다.
가득 채워진 것만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비어있는 것이 더 필요한 경우가 있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뿐인가, 버릴 때 짐짓 갖게
된다는 그런 뜻이 포함된 이야기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해도 그때 당장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후 리술 아저씨를 만날 때마다 조금씩 들은
말들을 보태 붓다가 어렵게 깨달음에 이르렀듯 비로소
조금씩 조금씩 느끼고는 했었다. 그리고 또 있다.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를 통해 사물과 현상계의 본질을
있는 대로 직시하여 깨달아 알면 선입견이나 집착을
버리게 되고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어 인간의 고통을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도 비록 오랜 시간이 소요된
후였지만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었다. 싯달타가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은 것을 마음이 번뇌의 속박에서
해방된 해탈의 경지라 하였고, 이 해탈한 마음에
의하여 얻어진 진리를 열반이라 이른다는 말도
들었었다.
4. 발렌치나와 로베르트의 절망
발렌치나는 쎄로브 미술학교를 방문했다.
17년 동안 교사로서 근무했으므로 발렌치나는
누구보다도 학교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학교질서를
크게 해치거나 학생 신분을 일탈한 불순하고 불온한
행위를 저질러 면학불가 판정을 받고 제적된 학생의
복교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적된 학생이 복교되는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것은 정치적인 사유로 제적되었다가 그 정치적인
사유가 해소되었을 경우 드물게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사를로따 이바노브나 선생의 귀띔에 의하면
빅토르의 경우는 학교질서를 크게 어지럽히고 학업을
방해하는 행위를 저질러 제적처분을 받은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복교는 불가능할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로베르트 최의 강권을 이기지 못해 나선
것이었다.
며칠 전이었다. 늦게 귀가한 로베르트는 드물게
저녁을 청했다. 늦게 귀가할 때면 대개 밖에서 저녁을
먹고 오기 마련이었는데 그날 따라 저녁을 달라고
하였다. 수프를 데우고 야채 샐러드와 흘레쁘와 차이
등 간단히 상을 차렸다. 로베르트는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고 발렌치나는 맞은편에 앉아
식사하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발렌치나는 급기야 망설이던
사실을 털어놓기로 작정했다. 숨길 수도 없고
숨겨서도 안되는 일임을 알고 있었으나 차마 털어놓을
자신이 없어 지난 며칠간 혼자서 속에 담고 끙긍
앓아왔었다.
"로바, 우리에게 예상치 못했던 불행이 닥쳤어요."
검은 보리빵을 수프에 적셔 입에 넣고 씹던
로베르트는 문득 긴장한 얼굴로 발렌치나를 건너다
보았다.
"비쨔한테 일이 생겼어요."
"비쨔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거요?"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됐어요."
"왜?"
로베르트는 순간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발렌치나의 입을 주시했다.
"제적됐어요."
로베르트는 금세 사색이 되었다.
"왜!"
로베르트는 놀라 외쳤다.
"사를로따 선생님이 그러는데, 비쨔가 학교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불렀대요."
"이놈 자식, 내가 기타를 진작 뺏아 버려야
했는데....... 아무렴 그랬다고 제적까지 시켜?"
"한두 번 그런게 아니었대요. 비쨔는 그룹 밴드를
조직해 교실에서 연주를 여러 번 했나 봐요. 다른
학생들의 학업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부른
노래들이 불온한 것이었대요."
"아, 빌어먹을! 당신이 기타를 사준 것이
잘못이었어."
로베르트는 들고 있던 빵을 신경질적으로 접시에다
팽개쳐 버렸다. 그의 작은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래요. 지금 생각하니 잘한 짓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아이들 때는 여러 가지 취미를 갖고 또 여러
가지 경험을 쌓아야 하는 걸로 알았는데......."
발렌치나는 로베르트의 말이 터무니없는 억지임을
알면서도 반박하고 나설 기분이 아니었다. 로베르트의
절망과 걱정이 얼마나 클까, 오히려 거기에 마음이 더
쓰였다.
"이놈 자식, 당장 끌어와요."
"아까 나갔어요. 당신, 아이를 봐도 나무라지
마세요. 비쨔인들 지금 얼마나 속이 상하고,
고민되겠어요."
로베르트는 빅토르가 사흘째 집에 들어오지 않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고민할 놈이 그런 짓을 저질러?"
로베르트는 다시 벌컥 역정을 냈다.
"애들의 호기심이나 욕망이란 한이 없는 것
아니에요. 그것이 좀 지나쳤다 뿐 어디 죽을 죄를 진
것도 아니잖아요. 나는 비쨔가 가여워 죽겠어요."
"나쁜 자식!"
"뉘우치고 또 겁을 먹고 있는 아이를 야단쳤다가
도리어 나쁜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잖아요. 우리 가족
모두에게 닥친 불행으로 알고 노력해서 이 불행을
극복해 나갑시다."
"아, 정말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로베르트는 도리질을 하며 탄식했다. 그는 빅토르가
공부와 점점 멀어지는 걸 일찍이 눈치챘었다. 그래서
미술학교에 진학시켰고 장차 화가로 성장해 주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그 미술학교에서도 제적을 당하고
말았다니 장차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로베르트는 자기 형제들을 더듬어 보았다. 하나같이
공부에 열심이었고 성적은 우수했었다. 4형제 모두가
대학까지 나왔고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좋은 직업을
갖고 잘 살고 있었다. 그리고 조카들도 다 공부를
잘한다고 칭찬들이었다. 그런데 빅토르만 무슨
돌연변이처럼 공부를 싫어하고 성적이 형편없었다.
그림솜씨야 레닌그라드 어린이미술대회에서 1등상을
받을 만큼 뛰어났다 하지만, 학생 때야 뭐니뭐니해도
공부를 잘해야 으뜸으로 쳐주지 않던가. 그 때문에
사촌들끼리 모이면 늘 기가 죽은 모습으로
구석자리로만 배돌더니 급기야 학교로부터 제적까지
당했다니, 로베르트는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앞으로 집안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고개를 들지
걱정이기도 했다. 로베르트의 걱정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빅토르의 장래를 생각하면 더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기제조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로베르트
최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오로지 공부에 열중했었다. 비록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처럼 큰 도시는 아니었으나
크질오르다에서 성장한 그는 쉬꼴라 10학년 동안 줄곧
성적이 1% 안에 들었었다. 그리고 레닌그라드
공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할 때도 역시 1%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학졸업과 동시에
현재의 무기제조공장에 들어가 일하게 되었고
공장에서도 가장 대우가 좋다는 연구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빅토르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공부를
열심히 하며 순조롭게 성장하기를 바랐었다. 그렇게
해야만 장차 빅토르가 소비에트 사회에서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날개를 꺾이고
말았다니....... 소비에트 사회에 올바로 편입되어
생활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유민 1세대인 아버지나
2세대인 자신의 형제들이 치렀던 땀이며 피를
상기하면 로베르트는 더욱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피부색이 다르고 눈동자 색깔이 다르고 코가
대체로 낮은 동양인이 러시아인들로부터 차별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를 뼈아프게
체험해온 로베르트로서는 빅토르가 정규교육 코스를
정상적으로 그리고 우수한 성적으로 마쳐주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그런데 그렇듯 간절한 로베르트의
소망이 헛되이 스러지고 말았으니 앞으로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내일 당신이 학교로 한번 찾아가 보구려. 어떻게
구제할 길이 없는지."
로베르트는 힘없이 탄식하듯 말했다.
"그러지요. 교무회의에서 제적 결정이 난 아이를
구제할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진상이라도 좀더
철저히 알고 싶네요."
이튿날 발렌치나는 근무시간을 틈내어 쎄로브
미술학교를 찾아갔다.
"아이를 잘 지도하지 못해 죄송해요."
사를로따 선생은 그렇게 말하며 찾아온 발렌치나를
맞이했다.
"사를로따 선생님께 폐만 끼쳐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비쨔는 여간 재능있는 아이가
아닌데, 제적을 시키다니 너무 비정한 처사예요."
"저도 많은 아이들을 염두에 두고 지내야 하는 교사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학교 처분을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한 불행한 아이의 어머니 입장에 놓이고 보니,
아이의 장래가 걱정이 되어 이렇게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별말씀을 다......."
"그래 학교에서 밴드를 결성해 연주를 했다고
제적을 시키다니, 비쨔가 그것 말고 무슨 다른 나쁜
짓을 더 저질러서 제적한 것은 아니었나요?"
"아닙니다. 발렌치나 선생님께서 당하고 계신
슬픔이나 고통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저도
빅토르의 제적에 끝까지 반대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빅토르의 장래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지 그의
행동을 용인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빅토르와 가예프는
지나쳤습니다. 두 아이는 다른 학교 학생 두 명과
어울려 밴드를 결성해 교실에서 여러 차례 연주를
했기 때문에 교무회의에서 퇴학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음악실에서 조용히 연주를 한 것이 아니라
교실에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머리며 옷이며 분장까지
완전히 괴상한 모습으로 연주를 했다 합니다. 게다가
그 밴드 이름이 무엇인지 들어봤습니까?"
"아뇨."
"'제6병동'이랍니다."
"그래요? 아이들이 그 뜻이나 알고 있을까요?"
"발렌치나 선생님, 빅토르는 보통 아이가 아닙니다.
빅토르는 그 뜻을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체호프 소설 제목 아닙니까?"
발렌치나는 그 암울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정신병동을
그린 소설로 제정 러시아 말기의 암울하고 절망적인
사회를 상징적으로 그린 작품이라고 했었다.
"맞습니다. 쎄레브라꼬프 교장 선생님은 그 점에 더
유념했습니다."
발렌치나는 갑자기 커다란 벽이 눈앞을 가로막는 것
같은 답답한 기분을 느꼈다. 계속해 말을 하고 있는
사를로따 선생이 아득히 멀리 있는 것 같은 환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저도 빅토르와 가예프에게 그 이름을 갖게 된
내력을 물었습니다. 빅토르가 그 이름을 지었다는데,
빅토르가 뭐랬는 줄 아십니까. 놀랍게도 지금
자기들이 살고 있고, 장차 살아갈 세상이 그 6병동과
뭐가 다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빅토르는 또,
자신들이 그 수용소에 수용된 정신병자와 다름없는
존재들이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빅토르는 이제 열여섯 살에 불과합니다."
발렌치나는 믿어지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빅토르는 보통아이들과는
다릅니다. 지적 수준이 월등히 높고 사고력도
뛰어납니다. 빅토르는 직접 시도 써서 그것을 노래로
불렀다는데, 그 시를 보지 못했습니까?"
발렌치나는 빅토르가 시를 지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자기 아들에 관한 사실을 남의 입을
통해 듣게 되다니, 겸연쩍기도 하고 자신이 너무
무관심했나 하는 자책감도 들었다.
"비쨔가 시를 지었어요?"
"그럼요, 그런데 그 내용이 어른들도 흉내내기 힘들
정도로 사회비판적이고 풍자적이랍니다. 그래서 여러
선생님들께서 빅토르를 그대로 용인하면 다른
학생들에게 예기치 못할 무서운 일을 초래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셨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발레치나에게는 무서운
사실들뿐이었다. 사를로따 선생이 빅토르를 두고
보통아이들과 다르다고 한 말에 위안보다는 걱정이
앞선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빅토르와 매일 한
집안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지냈다는 사실에 아연하며 무섭도록 씁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하며 겪어왔을
소외감의 중량이 또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하니 두려웠다.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고통을 겪지 않고 어찌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알겠습니다. 저는 어머니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군요. 제가 나쁩니다. 에미가 아이의 고통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니......."
발렌치나는 빅토르가 더욱 가여워졌다. 빅토르는 이
세상에 자기 편을 하나도 갖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일
터였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이 세상을 그토록 차갑고,
무섭고 극복해내야 할 대상으로 이해했겠는가. 어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가서 실컷 울고 나면 이
답답한 가슴이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을 것인가.
"이해를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저도 빅토르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 반드시 훌륭한 화가가 되리라
확신하고 있는데......."
사를로따 선생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면목없습니다."
발렌치나는 빅토르에 대해 자신이 더 많은 관심을
쏟지 않은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사를로따 선생은 발렌치나를 교장실로 안내하였다.
"발렌치나 선생님께서도 학생들을 가르치시니
아시겠지만 우리가 학생들에게 사회의 나쁜 물이
튈까봐 얼마나 노심초사하는 바입니까. 그 일을 위해
우리는 교과과정에 못지않게 규율과 기강확립에
신경을 써온 것 아닙니까. 그러한 터에 여러 차례
교실에서 펑크 차림으로 대중음악을 연주하며 소란을
피운 학생들을 어찌 학교에 더 머물게 하겠습니까."
찾아가 인사를 드리자 쎄레브라꼬프 교장은 자기
처사를 그렇게 변호하고 나섰다. 발렌치나는 우리
안에 있는 백 마리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더
가엾이 여기는 하느님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으나 입
밖에 내서 말하지는 않았다.
"사를로따 선생님으로부터 잘 들었습니다. 저는
아이의 장래가 걱정이 돼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찾아뵈었습니다."
"사를로따 선생님께서 빅토르의 재능이 아깝다고
여간 애석해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빅토르만큼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도 드물지요. 허나 학교 규칙을
어겼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도 비쨔의 일로 선생님들께서 겪으셨을 고충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에미로서 비쨔의 장래가
걱정입니다. 어디 보낼 만한 학교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면학불가 판정을 받았으므로
정규학교에서는 받아주지 않겠지요?"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발렌치나 선생님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정규학교에서는 받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 무슨 기술학교 같은 데 입학을
청원해보시오."
쎄레브라꼬프 교장은 조심스럽게 발렌치나를
쳐다보며 그런 권유를 하였다.
"알겠습니다. 빅토르 때문에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발렌치나는 아이의 장래를 위해 더 좋은 길을 찾을
수 없는 현실에 아뜩한 절망감을 느꼈다. 학교로부터
수학능력 부족이나 면학불가 판정을 받은 학생들은
취업을 하거나 아니면 특수기술학교에서 취업교육을
받는 길밖에 없었다. 발렌치나는 인사를 하고 교장의
방에서 나왔다.
"발렌치나 선생님, 교장 선생님 말씀대로
특수기술학교라면 빅토르를 받아줄 것입니다.
기술학교에 보내더라도 그림은 계속 그리게 하세요.
비쨔 재능이 아까워서......."
사를로따 선생이 뒤따라오며 말했다. 사를로따
선생은 빅토르의 창의성을 누구보다 귀하게 여기고
있었다. 공부는 소홀히 하는 편이었으나 남다르게
감수성이 예민하고 다소 엉뚱한 데가 있는 것 같으나
그 엉뚱한 것이 가끔 소스라치게 새로운 것을
깨우치게 하는 그런 기능을 하였다. 빅토르는 분명
예사스런 아이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빅토르
같은 아이를 둔 부모는 필경 남들이 쉽사리 갖지 못한
행복을 누리리라, 그렇게 여겨왔었다.
"그래요. 저도 교장 선생님의 조언을 신중히
검토하겠습니다."
"빅토르라면 어떤 일이든 잘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사를로따 선생님같은 분한테 우리
빅토르를 맡길 수 없어 여간 유감이 아닙니다."
발렌치나는 로베르트가 저녁에 퇴근하여 돌아오자
쎄로브 미술학교에 가서 듣고온 이야기를 다 전했다.
발렌치나의 말을 몇 마디 듣지 않아 로베르트는
보드카 병을 찾아와 시무룩한 얼굴로 아무 소리없이
그것을 따라마셨다. 속으로 화를 삭이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전날과 마찬가지로 그날도 빅토르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닷새째 되는 날 저녁에 빅토르가 집으로 돌아왔다.
초췌한 모습이었다.
빅토르를 본 순간 로베르트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눈을 부릅뜨고 빅토르를 노려보던 그는 불현듯 손이
번쩍 올라갔다.
"로바......."
그러나 그때 등 뒤에서 칼날같은 소리가 날아왔다.
로베르트는 반쯤 올린 손을 허공에서 문득 멈추었다.
"내가 뭐랬어요."
재빨리 로베르트 앞으로 다가온 발렌치나는 허공에
들린 그의 손을 잡아내렸다.
의기소침한 얼굴로 성난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던
빅토르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어머니가 그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머니의 눈짓에
따라 빅토르는 어깨를 움츠리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무기력하고 구부정한 빅토르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로베르트는 아무 말도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책상 앞의 의자에 쓰러지듯 앉아 두
손을 펴고 얼굴을 쓰다듬으며 신음을 토해 놓았다.
5. 나의 날개로 날겠어요
며칠 동안 빅토르의 가슴은 파란 물빛으로 젖어
있었다.
영원히 파란 물결을 찰랑거릴 것 같은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 하늘이 늘 고여 인간의 일을 번민하고
있는 호수. 늘 떠나는 바람만 있는 호수. 무수한
날짐승들의 무덤이 있는 호수. 인간의 기원을 경건히
받아들이는 호수.
핀란드 만의 해안에서 한나절 동안 가예프와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노래를 부르고난 빅토르는 마음 속으로
여행을 결심했다. 발틱 해는 얼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횟가루를 풀어놓은 듯 탁했다.
빅토르는 기타를 치며,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를 이기지
못하는 목소리로 노래를 목이 아프도록 불렀다.
가예프는 마침내 목이 아프다면서 노래를 그쳤다.
빅토르는 자신이 지은 노래를 몇 곡 더 부른 다음에야
노래를 그치고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바라볼
때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한없는 기대감으로 가슴
설레게 하는 수평선은 오늘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펼쳐져 있었다.
"어제 뜨로피모프를 만났어."
가예프가 말했다.
"며칠 전 빠쉬코프한테서 전화가 왔더군."
빅토르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그들은 그래도 퇴학은 맞지 않아 다행이지!"
"글쎄, 퇴학을 맞은 우리가 다행인지, 퇴학을 맞지
않은 그들이 다행인지."
빅토르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투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빠쉬코프는 뭐래? 다시 뭉치자고 하지 않았어?"
"그런 말 없었어."
"뜨로피모프는 연주를 하지 않으니까 살맛이
없다던데."
"나는 당분간 쉬고 싶어."
빅토르는 황혼이 물들어가는 바다에다 눈을 주었다.
그의 옆 얼굴을 쳐다본 가예프는 벌리려던 입을
다물었다. 빅토르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 보였다. 저럴
때 빅토르는 어떤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걸 가예프는 잘 알고 있었다.
"넌 어쩌기로 했니?"
얼마 후 빅토르는 바다에서 시선을 거두어 가예프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제 또 라이욘 직업보도소에 들렀는데,
방직공장에 일자리가 날 거래. 난 거기서 일할 거야.
넌 어떻게 하기로 했니?"
"......"
"방직공장에서 무슨 일을 할지 모르지만, 노래만
부를 수 있다면 나는 해낼 수 있을 거야."
가예프는 자신이 일하지 않으면 빵도 하나 해결할
수 없는 집안 형편이 가끔 절망적일 때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했었다.
소비에트 점령군의 병사로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가예프의 아버지는 게릴라와 교전중 전사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 일로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워 있는 때가
더 많았다. 아버지의 쥐꼬리만한 연금으로 생활해야
하는 그들은 언제나 궁핍했다. 학교나 다닌다면
모르려니와 퇴학 당한 그는 어머니와 자신의 생활을
위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직 어떻게 될지 몰라."
빅토르는 어딘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머리 속에 굴리고 있었다. 잠시라도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있을라치면 질식할 것 같았다. 가급적
집에서 멀리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생활이 절박한
가예프 앞에서 한가로운 여행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비쨔, 넌 학교를 다녀야 해."
"글쎄, 어머니가 학교를 알아본다고는 하셨지만
퇴학 당한 아이를 받아주려는 데가 없는가봐."
"어떻게 잘 되겠지."
가예프는 힘없이 말했다. 그는 노래를 부를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자신없는 표정이었고 말투 또한
그렇게 처져 있었다.
"그렇겠지. 세상은 결국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될거야!"
빅토르는 확신은 없었으나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 속에는 간절한 기원과 소망이 스며 있었다.
인간의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리술
아저씨는 늘 그렇게 말했었다. 소망은 노력을 부르고
노력은 결실을 가져온다는 매우 평범한 사실에 바탕을
둔 소박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빅토르는 인간의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리술 아저씨의 말을
믿기로 했었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뭐 이상할
것도 없지만....... 세상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다른 누군가가 바라는 대로 될 거
아니겠어.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 되겠지,
뭐."
가예프의 냉소적인 말에 빅토르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들은 석양에 물드는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빅토르는 퇴학 당한 날 스몰리 수도원에서
맞았던 석양녘이 상기되었다. 꼬마로보 해변의 노을은
훨씬 더 현란했다. 그날의 상처는 많이 아물었으나
석양을 마주한 마음의 파장은 그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스몰리 수도원과 네바 강을 물들이던
노을도 그랬듯 지금 바로 눈앞의 바다를 주황색으로
물들이는 저 현란한 노을이 자신이 세상을 떠나고도
계속 석양녘이면 저렇듯 황홀하게 피어나리라는
서글픈 생각이 무슨 자극적인 극약처럼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감을 느꼈다.
레피노 언덕의 어두운 흙 속에 40여년 동안 누워
있는, 산 사람들 속에 섞여 있지 않으면서도 산
사람들의 정신에 아직도 생생히 영향을 끼치는
레핀(러시아 화가)은 저 아름다운 석양을 두고 어찌
이 세상을 떠났을까.
빅토르는 문득 고개를 돌려 레피노 쪽을
바라보았다. 송림과 자작나무 숲에 가려 레피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듯 눈으로는 가 닿지 못했으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머리로서는 가까이 있는
레피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레핀. 개인적
취향을 정직하게 말하라면, 빅토르는 레핀을 좋아하지
않았다. 레핀의 그림은 너무 단정하고 사실적이었다.
초상화에 대부분의 걸작을 남겼다고는 하나 그
인물들이 하나같이 당대의 유명인사들이었고 하나같이
근엄했으며 따지고 보면 전부가 인민 위에 군림했던
냉정한 착취자들이었다.
레핀이 그린 초상화의 인물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당당히 턱을 쳐들고 있었다.
물론 게으른 자들의 무지와 사랑과 우정을 그린
작품도 있었다. 노동자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군데군데 해진 누더기를
걸친 집시 소녀의 맑은 얼굴 모습을 그린 작품도 없지
않았다. 그런 작품을 감상할 때도 빅토르는 그
작품들이 너무 목적의식에 억눌려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어떤 작품이든 레핀의 작품은
정치적인 굴레를 벗어나 있지 않다고 느껴지고는
했다.
레핀은 제도의 순응주의자였으며 권력에 훼절된
기회주의자로 여겨졌다. 무엇보다 혁명시대에 그가
누린 부와 명예는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 농민의 희생
위에 구축된 것이 아니었던가. 혁명의 제일 지도자
레닌의 비호를 받으면서 갖은 호사를 누린 그는
고리끼와 함께 작품과는 다른 점에서 빅토르에게는
거부감을 주고는 했다.
레피노의 레핀의 집에 갔을 때 빅토르는 놀랐었다.
혁명이 극복해냈던, 혁명으로 몰아냈던 귀족의 호사를
귀족보다 더 철저히 누린 레핀의 흔적이 그대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예술가의 번민과 고뇌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호사를 극한 사교장의
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그래 그런 사치를 누렸던
레핀은 이 세상을 어찌 뜰 수 있었을까. 어떤
누구보다도 세상을 떠나기가 싫었을 레핀도 어쩔 수
없이 두고 떠났던 노을이 아니었던가.
빅토르는 레핀의 그림을 볼 때마다 느낀 것이지만
보는 사람의 상상력이나 의견을 보탤 여지없이
완벽하게 그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상하는
사람이 보완시켜 즐길 어떤 부분을 남겨두지 않은 그
철저하고 완벽한 작품에 그는 비슷한 양의 반발심과
질투심을 느끼고는 했다. 그의 그림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은 들을지 몰라도 빅토르에게는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래 레핀도 어쩔 수 없었던 저
노을을 아무런 힘도 없는 내가 어쩔 수 있겠는가.
<어머니, 저...... 기다리지 마세요. 멀리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간 빅토르는 노트를 찢어
그렇게 썼다. 그는 눈에 잘 띄는 곳에 그것을
놓아두고 작은 가방을 챙겼다. 세면도구와 속옷 한
벌, 겉옷 한 벌씩을 가방에 넣었다. 거추장스러운
것을 생각하면 엄두가 나지 않겠으나 그는 기타를
케이스에 넣어 어깨에다 맸다.
빅토르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에 소리죽여
집을 나왔다. 물론 어머니의 서랍에서 이미 돈을 슬쩍
꺼내 주머니에 단단히 넣었다. 세어보지는 않았으나
아껴쓰면 한달 정도는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은
금액이었다. 하기야 무임승차와 한뎃잠으로 일관할
여행에 돈이 들면 얼마나 들겠느냐는 계산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여행허가증도 없이 떠나는
여행이었다. 어디선가 중도에 가로막혀 돌아오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6. 기차에서의 작은 연주회
빅토르의 눈은 먼곳을 향해 있었다.
네프스키 거리를 지나오는 동안, 그의 눈은 카잔
성당의 원주들도, 고스티니 드보르 백화점의 아취형
문들도, 에카테리나 2세 상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은 이미 먼곳을 방황하고 있었다. 그의 등에는
어깨걸이 가방이 흔들거리며 매달려 있고 커버를 씌운
기타는 그의 머리와 나란히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네프스키 거리는 도스토예프스키 기념관과도,
그리고 봉기 광장과 광장 옆의 모스크바행 열차가
발착하는 모스크바 역과도 이어져 있었다. 그는
모스크바 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기차를 타기도
전에 빅토르의 마음과 눈은 바이칼 호반에 닿아
반짝이고 있었다.
집을 나서서 얼마 걷지 않아 빅토르는 행선지에
수정을 가했다. 처음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의
할아버지 집으로 갈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곧
할아버지 집보다 바이칼 호수의 매력이 더 강렬히
그를 유혹했다. 크질오르다 행은 바이칼 호수
다음으로 미루어도 상관없으리라. 이번 여행은 어차피
내 마음이 가 닿는 곳에 몸을 부려야 하리라. 나의 두
다리는 내 마음이 가서 쉬고 싶은 곳에다 나를 데리고
가서 부려놓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모스크바 역에
도착한 빅토르는 먼저 카사로 갔다. 돈을 지불하고
구매권을 받아 매표구로 가서 그것을 제출하고
열차표를 구입했다. 바이칼로 가는 시베리아 열차는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블 역에서 출발하고,
중앙아시아행의 열차는 모스크바의 카잔 역에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이번 여행은 먼저 모스크바를
경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스크바 역의 대합실은 언제나 붐비었다. 여행객과
짐과 장사치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들로 시끄러웠다. 먼 여행을 다녀온 듯 커다란
짐을 가진 후줄근한 여인과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는
듯 생기있는 아가씨가 교차하여 시야에 들어오기도
했다. 열차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빅토르는 대합실
한구석의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아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시간에 맞추어 기차에 탑승한 빅토르는 창문을 통해
뒤로뒤로 물러나는 레닌그라드의 모습을 눈여겨
지켜보았다. 낯익은 사람들이 사는, 전화 한 통화만
하면 친숙한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이곳
레닌그라드와는 달리 모스크바나 또 자신이 가려는
바이칼 호수 어느 곳에도 아는 사람 하나 없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마음에 보랏빛 물감이 젖어드는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여수(旅愁)라는 것인가.
빅토르는 여수가 지닌 무엇인가 허허로운 기분을 온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레닌그라드를 다 벗어날 때까지
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레닌그라드 교외를 벗어나
버드나무와 자작나무 숲을 번갈아 뒤로 보내며
빅토르는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모스크바의 레닌그라드 역에 도착한 그는 곧장
이웃해 있는 야로슬라블 역으로 달려갔다. 미리
열차표를 확보해둘 심산이었다. 시베리아 열차시간을
알아보고 그는 이르쿠츠크까지 표를 끊었다.
발차시간이 오후 3시 5분이었으므로 장장 네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빅토르는 시내 구경에 나섰다. 그의 발길은 무엇에
이끌리듯 붉은광장으로 향했다. 붉은광장에는
소비에트 인민의 순례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레닌
묘가 있고 레닌 박물관이 있고 미닌과 포자르스키
동상이 있어 붉은광장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그러나 빅토르는 레닌 묘를 그냥 지나쳤다.
레닌 박물관에도 또한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그의
관심은 성 바실리 사원에 쏠려 있었다. 언젠가 미술사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빅토르의 가슴 속에
아로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16세기에 이반 대제가 카잔 칸을 항복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사원을 건립했다고 했다. 당대의
최고설계사 포스토닉 바르마에게 설계를 맡겼는데
완성된 사원을 보고 그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은
이반 대제는 다시는 이렇듯 아름다운 건축물을
건립하지 못하도록 설계사 포스토닉 바르마의 두 눈을
뽑아버렸다고 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래
빅토르의 가슴 속에는 성 바실리 사원과 기구한
운명의 설계사 포스토닉 바르마의 일화가 육중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붉은광장의 남쪽 끝자락, 모스크바 강이 내려다
보이는 모스크바레츠키 다리 초입을 지키듯 양파머리
모양의 성 바실리 사원의 지붕들이 서로 높낮이를
다르게 하여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첨탑의
십자가에 구름이 걸릴 듯 말 듯 지나가고, 가운데
높은 양파머리 지붕을 둘러싸고 사각추, 삼각추,
다이아몬드 모양들이 모자이크된 여덟 개의 둥근
지붕들이 다양한 입체감을 주며 시선을 붙들어 맸다.
하나도 같은 모양이 없는 둥근 지붕이며 벽이며
문이며 난간들이었다. 그려진 무늬까지도 어느 것
하나 같지 않았다. 쌓아올린 벽돌도 하나 같은 것이
없는 듯했다. 따지고 보면, 제각기 제 모습을 뽐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부조화로 인해 다양해 보이고,
그 다양해 보이는 모습이 던지는 인상의 종합이 묘한
입체감과 함께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빅토르는 그
아름다움에 취해 한동안 그 지붕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한곳에 붙박힌듯 서 있었다.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책에서 사진을 통해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성 바실리 사원을 맴돌며 포스토닉 바르마의
생애를, 기구한 예술가의 생애를 생각하며, 아무
실효없는 서글픈 분노를 느끼고, 안타까워하고,
권력자의 횡포에 분개했다. 그리고 권력자의 비호를
받으며 부와 명예를 누렸던 레핀이 생각나고,
고리끼가 생각나고, 권력투쟁에 패배한 트로츠키의
최후가 생각났다. 어쩌다 크렘린 안의 이반 대제의
황금빛 종루가 시야에 들어오자 빅토르는 또
무심해지지가 않았다. 인민 위에 군림해온 제왕은
영원하다! 그 영원은 저주와 존경과 늘 함께 하는
것인가.
그는 게르첸 거리와 아르바트 거리를 돌아다니다
시간이 되자 역으로 갔다.
빅토르가 탄 컴파트먼트는 4인실이었다. 대체로
폭이 넓은 침대가 양쪽 벽에 2단으로 붙어 있었다.
빅토르의 침대는 입구 왼쪽 윗층 침대였다. 어깨에서
막 기타와 백을 벗어 침대 위에 올리려는데 한 젊은
청년이 들어왔다. 그는 빅토르를 향해 미소를 던지며
인사를 했다. 그 청년과 조금 간격을 두고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몸피가 굵은 여인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함께 가실 동행자들이군요!"
그 여인은 쾌활하게 말하며 미소를 띠었다.
동행자라는 말이 묘한 울림으로 가슴에 철썩였다.
빅토르는 엉겁결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였다.
여인은 스스럼없이 빅토르의 손을 잡고 다시 미소를
보냈다. 그 여인에 이어 마흔을 넘겼을 것 같은
중년남자가 또 들어왔다. 그는 가볍게 눈인사를
보내며 자기의 지정 침대 밑에다 가져온 가방을
넣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가방을 넣고 하얀 침대 시트의 주름을 펴고 앉으며
중년남자가 맞은편의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이르쿠츠크까지 갑니다."
"여행이 지루할 만하면 내리게 되겠군요."
"멀리 가시나 보죠?"
"하바로프스크까지 갑니다."
"끝까지 가시는군요!"
여인의 말이, 언뜻 인생의 종말에 가서 닿게
되겠군요, 하는 뜻으로 들렸다. 이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종착지는 어떤 인생의 종착지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리라.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다섯 밤, 여섯 낮을 달려 먼
극동의 하바로프스크에 닿는다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우랄 산맥을 넘고 시베리아 대륙을 가로질러 가며
모습을 계속 달리해가는 자연경관을 구경하는 재미가
꿈결같다고 했었다. 노보시비르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 이르쿠츠크, 울란우데, 체다,
스코보로디노. 하바로프스크에 닿기 전에 만나는
도시마다 어느 것 하나 가슴 울렁거리게 하지 않는
곳이 없다 하였다. 여인의 둔부같은 완만한
구릉지대가 시야 끝까지 펼쳐져 있는가 하면 호수가
있고 한없이 자작나무 숲만 이어지다 문득 나무 한
그루 없는 타이가 평원이 눈 가는 데까지 펼쳐져 있다
하였다.
그러나 빅토르는 여인과 같은 세 밤과 세 낮을
보내고 닿는 이르쿠츠크까지 표를 끊었었다. 앙가라
강과 바이칼 호수가 있는 이루쿠츠크. 수없이 많은
밤, 한번도 가보지 못한 비아칼 호수를 얼마나 자주
꿈에 보았던가. 어렸을 적부터 그는 그림으로 여러
차례 바이칼 호수를 그렸었다. 그리고 자주 바이칼
호수로 가는 기차를 그리기도 했었다. 레닌그라드
어린이미술대회에 입상한 작품도 바이칼 호수로 가는
기차를 그린 그림들 중의 하나였다.
"학생, 그 기타를 좀 빌릴까?"
펠림역을 지나고 우랄 산맥 초입의 타이가를 개간한
약간 높은 언덕에 세워진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나타내는 오벨리스크를 구경하고 얼마쯤 달렸을까,
머리맡에 소중히 세워 놓은 기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건너편 청년이 말을 걸었다. 갈색 눈동자에
회색 두발의 청년은 얼굴이 갸름했다. 스무 살은 훨씬
넘었을까, 선량한 인상이었으나 기타를 선뜻 내주고
싶지는 않았다.
"노래를 부르실려구요?"
"그래, 이렇게 있으려니 심심해서."
청년은 눈가에 웃음을 머금고 손을 내밀었다.
"무슨 노래를 부르실 건데요?"
"아무 것이나. 심심하니까"
"무슨 노래를 부를지 모르지만 제가 반주를
해드리면 안될까요?"
"그래, 네가 반주를 해주겠니?"
빅토르가 기타를 남에게 내주기 싫어 그렇게
말했더니 청년은 매우 반색을 하였다.
청년은 잠시 창 밖의 들판을 바라보더니 빅토르가
기타를 꺼내 줄을 고르는 걸 기다렸다. 청년은 몸을
바로 해 빅토르를 향해 앉았다. 경쾌한 기타 선율이
객실을 울렸다. 빅토르가 줄을 고르고 청년을
바라보자 청년은 빅토르가 잘 알고 있는 민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랑을 잃고 긴 방랑의 길을 떠나는
젊은이의 우수에 찬 심정을 그린 노래, '종소리는
단조롭게 울리네' 라는 노래였다. 차륜과 철로가
부딪치는 마찰음이 계속되고 있었으나 우수를 머금은
청년의 음성에 실린 노래와 빅토르의 달콤한 반주가
객실 안 손님들의 심경을 쓸쓸하게 만들었다.
빅토르도 자주 불렀던 노래여서 반주에 어려움이
없었다.
"이리로 내려오지 않겠어요?"
여인이 위를 향해 말했다.
"그래, 노래가 좋군. 다 이리 내려오세요."
중년의 남자도 여인에 이어 그렇게 말했다. 위칸에
있던 빅토르와 청년은 아래칸으로 내려갔다.
"기타 솜씨가 상당하구나.!"
여인이 빅토르를 쳐다보며 칭찬했다. 빅토르는
여자의 칭찬을 건성으로 들어넘겼다.
"한곡 더 부를까."
청년은 빅토르에게 말했다.
"아까부터 기차가 달려오는 동안 창밖으로 본 거친
들판을 바라보며 흥얼거렸는데, '끝없는 거친
들판'이라는 노래 들어본 일 있니?"
빅토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반주를 시작했다. 거친
들판에서 길을 잃은 마부가 아내와 양친에게 유언을
남긴다는 슬픈 내용의 민요였다. 마부의 유언을 들은
친구는 눈물을 흘리고, 마부가 그의 아내에게 재혼을
부탁한다는 대목에서 그 노래는 더 슬픈 감동을
자아냈다. 빅토르 옆에 앉은 여인과 청년의 옆에 앉아
있던 중년남자도 그 노래를 함께 불렀다.
"기타 솜씨를 보니 노래도 잘 하겠구나. 너도 한곡
들려주렴."
청년의 노래가 끝나자 빅토르의 기타 솜씨를
칭찬했던 여자가 말했다. 청년과 중년남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의 요청을 거들고 나왔다. 빅토르는
청년에게 기타를 빌려주고 자기는 모르는 척 창밖을
내다보거나 아니면 침대에 누워 잠자는 척했던 것보다
일이 훨씬 나쁘게 진전되자 후회가 일었다. 그러나
후회란 언제나 돌이킬 수 없는 것, 빅토르는 차분히
자신을 다스리고 노래를 골랐다. 민요를 부르기에는
그의 마음이 그렇듯 편하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의
가슴 속에 타오는 불길을 잡아주는 구실을 하는
브소츠키의 노래를 선택했다. 그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온 '러시아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노래를 시작한 것은 평소 수줍어하고
내성적이며 남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과는
판이한 일이었다. 여행이 가져다주는 다감한 정감
때문인가.
다른 사람들도 다 노래를 따라 불렀다. 노래를
끝마쳤을 때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새로운 경험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빅토르의 음성은 매우 침울하고
우수에 차 있었다. 브소츠키의 노래에 그야말로
환상적이라 할 만큼 잘 어울렸다. 그들은 감동을
받았다. 노래라는 것이 이토록 가슴을 절절히 적시는
것이라는 걸 그들은 처음 느낀 기분이었다. 노래란
감정의 때를 씻어내는 거즈같은 것이려니만 여려왔던
그들에게는 놀라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한곡 더 들려주겠니?"
여자는 아직도 감동에 젖은 음성으로 빅토르에게
부탁했다. 그 표정은 진심에 넘쳐났다. 청년의
얼굴에서도 그와 비슷한 감동에 젖은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노래가 마음 속에서 아직도 울리는 것 같구나."
청년이 말했다.
빅토르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음성은
아까보다 더 음울했고 아까보다 더 우수에 찼고
아까보다 더 침중했다.
너의 열일곱 살이 존재하는 곳은 어디지?
볼쇼이 카레트니 거리지.
너의 열일곱 살의 불행이 존재하는 곳은 어디지?
볼쇼이 카레트니 거리지.
너의 검은 연발총이 숨겨진 곳은?
볼쇼이 카레트니 거리지.
그럼 너가 사라진 곳은?
볼쇼이 카레트니 거리지.
친구야, 넌 이 거리를 기억하겠니?
아니지. 넌 볼쇼이 카레트니 거리를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볼쇼이 카레트니라는 이름 한번 들어본 적 없던
사람이
그의 인생의 절반을 잃어 버린 곳이니 말이야.
그거야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
그들이 거리의 이름을 바꿔 버린 이후,
모든 게 낯설 게 변해 버렸어.
하지만 정처없이 길을 나설 때,
네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언제나
볼쇼이 카레트니 거리일 거야.
그거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
빅토르의 노래가 끝나자 객실은 잠시 숨을 죽였다.
기차의 단조로운 소음을 가르고 가느다란 샘물처럼
고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여자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고왔던지 빅토르는 반주를 하지 않았다. 반주를
함으로써 도리어 노래를 그르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브소츠키의 '땅의 노래'였다. 여자는
한곡을 마치자 빅토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빅토르는
말없이 기타를 여자에게 내주었다. 여자의 노래를
들은 빅토르는 무엇인가 모를 힘이 기타를 내주기
싫은 마음을 눌러 버렸다.
여자는 매우 능란한 솜씨로 기타를 연주했다.
전문가가 아니면 흉내낼 수 없는 능란한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여자는 기타 반주에 맞춰 '석양의
종'을 부르기 시작했다.
여자의 현재의 사정이 어떤 것인지 짐작케하는
노래일까. 석양 무렵 들판에 은은히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듣고 젊은 시절의 추억을 더듬으며 현재의
초라한 자신의 신세에 눈물짓는다는 매우 슬픈 내용의
노래였다.
빅토르는 귀를 기울여 여자의 노래를 들었다.
여자의 노래는 슬픔을 이겨내려는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리라. 빅토르는 자신의 남모를 가슴 속
피흘림이 많은 위안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노래를 불러야하는 이유가 바로 저런 데 있을 터이지.
여자가 노래를 마치자 청년의 옆에 있던 중년남자가
이어서 스스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남자는 바딤 까진의 노래를 불렀다. 40년대의
전설적인 가수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빅토르는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지금 남자가
부르는 노래도 귀에 익기는 했으나 다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작은 객실의 음악회는 석양이 스러지고 어둠이
대지를 덮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수수께끼로 뒤덮인
대지의 신령들이 기차의 창문에 매어달리는 어둠으로
바뀌어 사람들에게 잠을 불러오자 가까스로 음악회를
마쳤다. 빅토르는 베르네쓰의 노래와 브소츠키에 이어
자기 자신이 노랫말을 쓰고 자기 자신이 곡을 부친
노래도 들려주었다. 그의 노래는 다른 사람들의
노래에 비해 어둡고 침울했으나 영혼의 왼편
자락이라도 잡고 흔드는 것처럼 뜨거운 감동을
주었다.
객실의 사람들은 어느 사이 가족처럼 친해졌다.
각기 털어놓은 자신들의 내력도 흥미진진했다.
청년은 울란우데가 집인데, 모스크바에서 좀더 좋은
인생을 열어갈 욕심으로 중앙당 간부로 일하는 숙부를
찾아가 일자리를 부탁해, 도모제도브 공항에서
항공기의 급유를 체크하는 일을 했는데, 함께 일하던
동료의 모함으로 항공유를 착복했다는 혐의를 받고
해고되어 겨우 결백을 밝혀냈으나 다시 그 직장으로
돌아갈 수 없어 당분간 집에서 쉬려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하였다.
마흔을 넘긴 것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좀더
복잡한 사연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어릴 적부터의
꿈은 훌륭한 군인이 되는 것이었는데, 불행히
색맹임이 밝혀져 장교가 될 수 없었고, 좌절의 아픔을
견디며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군사기술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운명에 떼밀리듯 시베리아 탄광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석탄 캐는 일에 십수년 봉사하다 폐를 상해 병원에
입원해 있다 겨우 퇴원하여 하바로프스크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하였다. 집에는 아내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려 늙은 어머니와 어린 딸 둘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며 깊이 한숨을 쉬었다.
중년남자의 신세 타령을 듣고 잠시 객실은
숙연해졌다. 숙연한 기운이 가시고 여자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였으나 여인은 한사코 입을 열지 않았다.
자기는 남에게 털어놓을 만한 이야기가 없노라 했다.
대개의 소비에트 여성들이 걷는 아주 평범한 길을
걸어왔을 뿐이라며 자신의 이야기는 바로 당신들
이웃여자 아무와 비교해도 비슷하리라 생각하고,
그것으로 자기 이야기를 듣는 것에 대신해 달라고
하였다.
"노래 솜씨가 예사가 아니던데, 혹시 가수로 활동한
한 것 아닙니까?"
여자가 입을 열지 않자 청년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넘겨짚었다.
"아아니, 가수라니요."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손을 저었다.
"나같은 것이 가수를 했다면 이 나라 사람 가수
아닌 사람 없게요."
여인은 볼을 붉혔다.
"그럼 무슨 일을 하며 그 나이 동안 사랑하고
슬퍼하고 또는 기뻐했을까요?"
청년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냥 평범하게 지냈어요. 다만 한가지 밝히자면
집이 이르쿠츠크라는 것뿐이에요."
여인은 무엇인가 의도적으로 감추려는 빛이
역력했다.
"그럼 울란우데와 그다지 멀지 않으니
이르쿠츠크에서 내려 당신의 집으로 한번 가봤으면
좋겠군요."
"글쎄요. 그렇게 해도 좋겠지만 우리집에는 불독
보다 험상궂은 남자가 대문을 지키고 있는 걸요."
여인은 마침내 웃었다.
"꼭 그렇게 말한다면 가장 유쾌한 여행의 동반자가
어떤 사람인줄 모르고 지낼 수밖에 없는 이 서운함을
혼자 감당해야겠구려."
청년도 웃고 말았다. 그리고 청년은 빅토르를
쳐다보았다.
"노래 잘하고 기타 잘 치는 자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여인도 호기심어린 눈으로 빅토르를 바라보았고 창
밖의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내다보고 있던 중년남자도
눈을 돌려 빅토르를 건너다 보았다. 그 시선들이 모두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고 재촉하고 있었다. 쉬꼴라
8학년 아니면 9학년쯤 되어보이는 앳된 소년이 기타를
매고 혼자 긴 여행을 하는 것이 처음부터 예사스러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생이라면, 방학도 아니고
한창 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렇다고 학생이 아니라고
단정하기도 어려웠다. 단정한 옷차림이며 햇볕이나
먼지 머금은 바람 따위와는 인연이 멀어보이는 말쑥한
얼굴이며 가늘고 긴 손가락 등으로 미루어 일터에서
일을 하는 소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눈동자가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검은 머리에 누런
피부색의 소년은 매우 영리해 보였다.
빅토르는 그들의 호기심을 배신하는 쪽으로 대답을
할까, 아니면 그들의 호기심을 더 유발하는 쪽으로
대답을 할까 잠시 망설였다.
"대답 대신 노래나 한곡 더 들려 드리면 안될까요?"
"한사람의 내력을 짧은 노래 한곡으로 다 나타낼
수가 있겠나. 노래도 듣고 싶지만 혼자 이렇게
여행하는 내력이 더 궁금한 걸!"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저의 부랑기를 고백하는
수밖에."
빅토르는 노래 몇 곡으로 친숙해진 컴파트먼트
메이트들을 돌아보았다.
"저는 고리끼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빅토르는 자조적인 웃음을 띠고 말했다. 그는
고리끼의 작품 속의 인물을 빌어 자신을 설명할
생각으로 그렇게 운을 뗐다.
"난데없이 고리끼라니. 러시아 사람치고 열에 아홉,
고리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있을까!"
청년이 빈정거렸다. 소비에트 사람이라 하지 않고
러시아 사람이라고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소비에트 공화국 15개 나라는 피부색과
종교와 풍습과 정서가 각기 다른 여러 민족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고리끼를
좋아하지 않은 민족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인이라면 열에 아홉은 고리끼를 즐겨 읽을
터였다.
"저는 고리끼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고리끼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작품도
작품이려니와 대초원이나 첼까쉬에 나오는 부랑자들을
좋아합니다. "
여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순간 반짝 빛났다.
여인은 빅토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빅토르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왜냐하면 저도 그 부랑자같은 신세거던요."
"고리끼가 들었다면 좋아하지 않겠는 걸. 그의
부랑자들은 제정 러시아의 산물이지. 혁명으로 세상을
밝힌 소비에트 산물은 아니거든! 소비에트에는
부랑자가 있을 수 없지."
청년은 다시 빈정거렸다. 그러나 어떤 적의 같은 건
담고 있지 않았다.
"혁명이여 영원하라, 인가요?"
빅토르는 자제하지 못하고 비꼬았다. 청년은
의아스러운 눈으로 빅토르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번져갔다.
"혁명은 끝난 지 오래라는 뜻이군. 젊음은 또다른
혁명을 요구하지."
"소비에트 사람은 나이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른 게 신기하죠? 저는 어느 시대에나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떠도는 부랑자는 있기 마련이라
생각하거던요. 만약 세상이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낙원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래, 낙원이라 할지라도 혁명은 필요했을 테지."
"너무 그렇게 비약시키지는 마세요. 학생은
방랑하는 중이라는 뜻 이상이 아닌 것 같은데!"
여인이 청년을 제지하였다.
"저는 그리고 예세닌과 마야코프스키와 브소츠키를
좋아합니다."
이번에는 여인도 의아스러운 눈으로 빅토르를
쳐다보았다.
"인생을 일찍 완성시킨 사람들이거던요."
빅토르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여인을 바라보았다.
"다 일찍 자살한 사람들이군!"
청년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날렸다.
"인생의 고통과 번민과 오의를 일찍 체득하기 위해
스스로 고생길을 나섰다는 뜻으로 들리는구나?"
여인은 매우 친근하고 우호적인 투로 말했다.
여인의 해석이 청년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하였다.
쬐끔한 놈이 제가 인생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건방지게, 청년은 빅토르가 가소롭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요즘 어린
것들은 마냥 건방지기만 해서 저 녀석도 그런 놈들
가운데 하나이겠거니 여기기로 한 것이었다.
7. 바이칼 호반에서
3박 4일 동안 4인실의 컴파트먼트 안에서 정이
들었던 사람들은 작별을 아쉬워했다. 앞으로도 2, 3일
동안 계속 더 기차를 타고 가야할 청년과 중년 남자는
이르쿠츠크에서 하차하는 여인과 빅토르의 손을
차례로 잡으며 앞날의 행운을 빌었다. 빅토르는
그들을 등 뒤에 남기고 이르쿠츠크라는 미지의 땅에
대한 호기심과 적당량의 불안감을 거느리고
플랫폼으로 나섰다.
"빅토르, 이르쿠츠크에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지?"
번잡한 지하통로를 지나 광장으로 올라선 빅토르가
작별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돌아서는 순간
여인이 말했다.
"어디 특별히 갈 곳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발걸음
닿는 곳이 제가 갈 곳이겠죠."
"그런 막연한 대답이 어디 있어."
"사정을 솔직히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아마 바이칼을 가겠다고 먼 레닌그라드에서
여기까지 온 모양인데, 내 집으로 가면 어떨까?
그러면 바이칼도 내가 안내하지......."
여인은 기차에서부터 빅토르에게서 묘한 매력을
느꼈다. 자신이 좇고 있던 꿈, 그러나 중도에 포기해
버렸던 꿈을 앓는 소년을 보고 그냥 무심해지지가
않았다. 빅토르에게서 줄곧 자신과 닮은 성품을
발견했었고, 일종의 동지애 같은 걸 느꼈다. 여인은
빅토르를 자기집에 데리고 가 이르쿠츠크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돌봐주고 싶었다. 더구나 이런 낯선
도시에 혼자 던져진 어린 소년이 겪게 될지도 모를
어떤 불행한 사건을 미리 막아주고 싶기도 했다.
"불독보다 험상궂은 사람이 대문을 지키고 있다하지
않았어요?"
기차에서의 말을 상기시키자 여인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지. 빅토르가 우리집에 가면
장미꽃 같은 소녀가 대문을 열어줄 걸."
여인의 대답은 경쾌했다. 여인의 성심어린 권유에도
빅토르의 마음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이르쿠츠크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진
돈이라야 돌아갈 기차삯과 약간의 여유뿐이었으니
자고 먹고 할 일이 걱정이기는 했다. 그러나 빅토르는
그런 걸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걱정을 했으면
아예 여행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노숙과 여행길에
만나게 될 사람들의 너그러운 인심에 의존하기로
결심하고 떠난 여행이었다. 이르쿠츠크 사람의
자애심의 발로를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으나 빅토르는
어쩐지 여인을 따라나서면 무엇인가 부자유스러울 것
같았다.
"저는 이 길로 바이칼로 갈 작정입니다."
빅토르는 여인을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내가 빅토르의 기분을 모르지는 않아. 고리끼의
부랑자들을 좋아한다 했으니 노숙과 걸식을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겠지. 그리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영원한 자유를 품고 있다는 바이칼과 어서 만나고
싶겠지."
빅토르는 자기 심정을 그대로 꿰뚫어보는 여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나 내 권유를 따른다 해도, 내가 제공하는
편의를 받아들인다 해도 빅토르가 만나는 바이칼은
혼자 가서 만나는 바이칼과 하나 다르지 않을 걸!"
여인의 단정적인 말에 빅토르는 조금 동요하였다.
"바이칼은 여럿이 가도 혼자 만나는 게 될 거야.
바이칼은 늘 그래. 그러니 내가 제공하는 호의를
받아들여. 그렇지 않으면 내가 혁대를 잡고 끌고 갈
테야."
여인의 적극적인 권유를, 여인의 순수한 호의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빅토르는 여인을 따라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제가 이리나를 따라가도 바이칼은 혼자 가도록
해줘야 합니다."
"내 말을 못 알아들었군. 바이칼은 그런 사소한
감정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니까. 백 명이 가도
바이칼은 언제나 혼자 만나게 된다니까."
빅토르는 이리나의 말뜻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래도 혼자 가고 싶은 걸요."
"알았어. 하지만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고독이 있는 거야. 내가 어떻게 빅토르의 그 견고한
고독을 간섭할 수 있겠어. 내가 옆에 있다 해도
조금도 방해받지 않을 테니, 그런 신경 쓰지마. 내가
안내하지 않으면 누가 안내할 거야. 마음 푹
놓으라구."
"글쎄요!"
빅토르는 십 년은 사귄 사람 같은 따뜻한 이리나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압도버스를 타고 앙가라 강을 건넜다. 강은 넓었고
그 흐름은 도도했다. 멀리 맞은편 강안에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백작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오벨리스크가 바라보였다. 그는 동시베리아 개척과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을 제창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압도버스는 키로프 광장을 거쳐 피오네르
궁전을 끼고 서커스 극장 쪽으로 진행했다. 이리나는
프로뻬트로스카야 거리에서 하차하였다.
그녀는 5층 아파트로 빅토르를 안내하였다.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간 이리나는 문 밖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빅토르에게 들어오라고 재촉했다.
"장미꽃 같은 소녀가 문을 따줄 거라고 했잖아요?"
빅토르는 일부러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유리에바!"
이리나는 좀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빅토르를 그러나
애교 넘치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이름도 예쁘군요!"
"이제 열 살 난 숙녀지. 내가 집을 비우는 동안
아는 사람 집에 맡겼어. 지금쯤 학교에서 돌아왔을
걸."
"이제 겨우 열 살이에요?"
"그럼 내 나이에 몇 살쯤 된 딸이 있을 줄 알았어?"
"좋아요. 유리에바라도 데리고 오세요."
"원, 그래, 그래. 유리에바라도 있으면 덜
심심하겠단 말이지?"
유리에바는 눈동자가 파란 깜찍한 소녀였다.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에도 명랑함을 전혀 잃지 않고 학교에
잘 다녔노라고 했다. 두 모녀는 헤어져 있을 동안 두
사람이 겪었던 일이나 생각났던 일들에 대해 부지런히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누가 말리지 않으면 밤새도록 이야기를 계속할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다정한 사이의 모녀가 어찌
며칠씩이나 헤어져 있었습니까. 모처럼 저를 손님으로
모셨으면 저에게도 신경을 좀 써주셔야지 않겠습니까.
목도 마르고 피곤하기도 하고......."
"아, 그렇군. 내 정신 좀 봐. 끄바스라도 먼저
내놓았어야 하는 건데....... 유리에바 잘 사귀거라.
매우 재능이 많은 오빠란다."
이리나는 빅토르와 유리에바를 부엌으로 불렀다.
식탁에 끄바스와 우유를 내놓고 마시라고 권했다. 세
사람은 묵묵히 음료수를 마셨다. 우유잔을 비운
유리에바가 입을 열었다.
"어디서 왔는데?"
"레닌그라드에서 왔대."
"레닌그라드? 모스크바보다 멀지?"
"그럼 더 멀지. 핀란드와 가까운 북쪽 도시야."
"이르쿠츠크에는 뭣땜에 왔는데?"
"글쎄, 너가 직접 물어보렴."
유리에바는 시선을 돌려 빅토르를 바라보았다.
호수처럼 파란 눈동자가 투명했다. 얼굴도 인형처럼
깜찍했다.
"바이칼에 가려고 왔어. 헌데 유리에바를 만난 순간
내 목적을 다 이룬 것 같더구나."
"피이!"
"정말이다. 나는 유리에바만큼 예쁜 소녀를 보지
못했거던."
"피이!"
"유리에바, 칭찬으로 알아들으렴."
"사람을 놀리고 있잖아."
"아냐, 난 정말 놀랐어. 사람이 유리에바만큼 예쁠
수도 있나, 싶었거던."
"고맙다고 해라. 농담이라도 듣기 좋게 하는
오빠란다."
"고마워요. 하지만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간직해
두겠어요."
"그래, 그래."
빅토르는 비로소 활짝 웃었다. 이리나는 그러한
빅토르를 유심히 건너다 보았다. 마치 무슨 보배를
앞에 두고 바라보는 듯 그녀의 눈에는 감탄과 흡족한
기운이 어렸다.
"헌데, 기차에서 물어볼 기회를 놓쳤는데, 기타에
그려진 새, 그것 누가 그린 것이야?"
"새요?"
"그래, 공명판에 그려진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하는
새그림말야?"
"아, 그것, 제가 그린 거예요."
빅토르는 그렇게 말해 놓고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나는 그 그림을 본 순간 그것을 그린 사람은
욕구불만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어. 그렇게
날개를 찢어지게 벌리고 나는 새가 어딨어."
빅토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심했나!"
"아뇨. 잘 봤어요. 나는 언제나 내가 싫거던요."
"땅을 딛고 사는 평범한 자신이 싫은 것이겠지."
"그래요. 가능하다면 하늘을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고 싶어요."
"너 하기 달렸겠지. 그리고 때를 기다려야
할게고......."
"사람이란 누구나 때를 기다려야 하는 존재군요."
빅토르는 언젠가의 리술 아저씨의 말이 떠오르자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 때를 기다리지
않고 현재를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리나 네스테랭코바는 자신이 기다렸던 그 어떤
때는 아직도 이르지 않았음을 새삼스레 절감하며
비통해졌다.
그날 밤 이리나와 빅토르는 유리에바가 잠자리에 든
후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리나는 어떤 이야기 끝에 자신의 내력을 술술
털어놓았다.
어렸을 때부터 이리나 네스테랭코바는 예술에
관심을 갖고 사랑했다. 그것은 일종의 집안 내력으로,
여러 삼촌과 고모가 화가나 음악가로 활동하였고
연예계에 종사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만 유별나게 과학자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숙부 에브게니 리우비모프를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좋아하고 따랐다. 리우비모프는 바리톤
가수로 명성을 날렸다.
그녀는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 진학하여 피아노를
전공할 생각으로 피아노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주과학 분야에 종사하신 아버지는 숙부
에브게니 리우비모프를 늘 못난 놈이라 깔봤고 그
노래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따라서 이리나가
피아노를 전공하려하자 아버지는 못난 삼촌을 닮을
생각이냐고 한마디로 잘라 못하게 하였다.
카리스마적인 아버지를 거역하지 못한 어머니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자연과학대학에 진학했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사귄
유리 네스테랭코의 권유로 생물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국립 생물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을 했으나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결혼한 유리
네스테랭코가 광물연구소에 재직하던 중 그 연구소
소장의 비위를 거슬려 해직이 되는가 했더니 곧
반체제 운동을 하였다하여 체포되었고, 그는
시베리아로 유배를 당했던 것이다.
유리의 반체제 활동이라야 별것 아니었다.
지식인이면 누구나 관심을 갖기 마련인 인권탄압 및
관리와 당원들의 부정부패의 사례들을 수집하고
그것들을 지식인들 사이에 은밀히 돌려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하로프나 브르뤼크 등 드러내놓고 펼치는
인권신장 운동과 체제개혁 요구와는 그 정도나 차원이
아주 다르고 미미했다. 그러나 당국에서는 그를
반혁명적 반국가적 반동분자로 낙인찍었다. 물론 그는
정당한 절차의 재판을 받아보지도 못하고 유배를
당하고 말았다.
유리 네스테랭코는 처음 극동지방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강제수용소 마가단에 수용되어 강제 노역을
했다. 그러나 이태에 걸친 이리나 네스테랭코바의
애절하고 끈질긴 탄원이 약간의 효력을 발생했던지
지난해 이르쿠츠크에서 멀지않은 뭉크사르다크 산의
탄광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마가단에 수용되어 있을 때는 엄두도 내지 못했으나
뭉크사르다크 탄광으로 옮겨오고서는 일주일에
한차례씩 면회가 허락되었다. 이리나 네스테랭코바는
금요일의 면회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로 이사를 했고 일주일에 한번 그를 만나는
것을 유일한 보람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르쿠츠크에서 다행히 일자리도 얻을 수 있어 열 살
난 딸 유리에바를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이튿날, 이리나는 빅토르와 함께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그녀는 바이칼에 가기 전에 먼저 이르쿠츠크 시내를
구경시켰다.
"빅토르, 기차에서 너의 노래를 처음 들은 순간
네가 세상에 원망을 많이 품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데카브리스트들이 집을 짓고 군락을 형성하고
살았었다는 혁명의 마을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이리나가 말했다. 빅토르는 아직도 데카브리스트들이
지었다는 목조건물들에 대한 인상이 지워지지 않아
몽롱한 상태에서 이리나의 말을 미처 알아듣지
못했다.
150년이란 시간적 간격 저편에 혁명을 꿈꾸었던
젊은이들의 뜨거운 피와 정열이 빅토르의 가슴 속에
닿아 출렁거렸다. 비록 지금은 퇴락하여 보잘것없는
모습들이지만 그들이 짓고 그들이 생활했다는
목조건물들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
러시아에 최초의 혁명의 씨앗을 뿌렸다는 그들
데카브리스트들에게 빅토르는 무심해지지가 않았다.
"내 말 안들려? 빅토르 너의 노래는 혁명을 꿈꾸고
있는 것 같았다구."
"아, 뭐, 뭐라구요?"
"가능하다면 이 세상을 바꿔보고 싶다, 그런 야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단 말야."
"제가 그렇게 대단하게 보였어요?"
빅토르는 달리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자 그렇게
얼버무렸다.
"너의 그 어둡지만 광채를 뿌리는 눈빛과 너가 부른
브소츠키의 노래와 너가 지은 것으로 생각되는 노래를
듣고 느낀 것이었어."
"아니, 제가 지은 노래라니요?"
"그래, 너가 기차에서 부른 노래 중에 다른 데서
한번도 듣지 못했던 노래들이 있었어. 그것들이 누구
노래였던가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도무지
모르겠더라구. 그런데 조금 전 너의 눈빛을 본 순간
깨달았어. 그것은 너의 노래였어."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군요. 저는 이제 열여섯
살이에요. 제가 뭘 안다고 노래를 다 짓습니까."
"시치미 떼도 다 알아. 나도 처음에는 널 어리게
봤었지. 허나 아니었어. 난 학자야. 게다가 세상 험한
일도 많이 겪었고....... 혁명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던 너의 눈빛을 보고 나는 생각 했었어. 넌
가슴 속에다 혁명의 불씨를 키우고 있다고.......
그리고 기차에서 들었던 그 우수 짙은 노래들도 그
혁명의 불씨들이 만들어낸 노래들이라는 걸....... 내
짐작이 틀림없을 거야."
이리나는 빅토르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며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빅토르는 얼굴을 붉혔다.
빅토르는 자신의 감정이 밖으로 드러났다는 지적에
마음이 여간 쓰이지 않았다.
데카브리스트들(12월 당원들)....... 혁명의
마을.......
1812년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치고 러시아는
전쟁에서 승리했었다. 그러나 그 전쟁으로 서유럽에
원정하여 자유주의 사상을 섭취한 일부 청년장교들이
개혁을 은밀히 꾀하여 러시아는 내홍을 앓았다. 유럽
여러 나라 국민들의 보다 안락한 생활을 목격하고,
프랑스혁명에 공감한 젊은 청년장교들은 농노제
폐지와 입헌군주제 실시를 목표로 1816년 구제동맹을,
그리고 이어 복지동맹을 결성하고 은밀히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전러시아에 걸쳐 혁명의 기운은 무르익어갔고,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죽고 제위 계승문제로
혼란한 틈을 타 마침내 데카브리스트들은 무장봉기를
꾀하였다. 북방결사파가 이끄는 수개 연대가 12월
14일 페테르부르크 원로원 광장에서 거행된 새 황제
니콜라이 1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선서식장에서
선서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봉기군의
내부분열과 정부군의 대포공격에 의해 하루도 넘기지
못하고 봉기군은 진압되고 말았다.
페스텔과 시인 릴리예프 등 주모자 다섯 명은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300여명의 장교들은 시베리아
이르쿠츠크 등지로 유배되었다.
그들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 유배된 데카브리스트
혁명가들은 한 마을에 무리를 이루어 살았는데,
그들은 레닌그라드에서처럼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목조건물을 건립하였고 섬세한 목공예품을 조각,
지붕이며 창문을 장식하여 그 화려함이 눈부실
지경이었다. 지금은 거의 퇴락하여 지붕의 함석은
떨어지고 벌레가 쓸고 비바람에 풍화된 기둥은 곧
주저앉을 것처럼 허약해 보였으나 창문이며 발코니
등에는 당시의 목공예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자취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조국의 장래를 걱정한 나머지
자신들의 영화를 마다한 젊은 귀족장교들의 정열의
편린을 그 건물들에서 빅토르는 생생히 목격하였다.
"젊을 때는 누구나 한때 미래를 바꿔보려는 꿈을
꾸는 것 아니던가요?"
빅토르는 이리나를 돌아보며 미소를 띠었다.
"저 뒤 언덕에서, 고향에서 쫓겨나 평생을 쓸쓸히
후회하며 살다간 데카브리스트들처럼 말이지?"
이리나는 남편 유리 네스테랭코를 염두에 두고
빈정거리듯 말했다.
"저는 그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하며 구차하게
살아갔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만 할 일을 마땅히 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갔을 걸요."
이리나는 마치 유리 네스테랭코에게서 들은 말을
그대로 다시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
데카브리스트들에 관한 말이 나왔을 때 유리
네스테랭코는 말했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러시아에
혁명의 씨앗을 심어놓은 것만으로 그들 생애의 소임은
다 한 것으로 생각해! 유리 네스테랭코는 담담하게
말했었다.
"빅토르도 혁명을 꿈꾸는 거, 틀림없지?"
"세상에 순응하는 젊은이는 젊은이가 아니겠지요."
이리나는 유리 네스테랭코의 이야기를 해주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찌 이 소년이 유리 네스테랭코의
사상과, 꺾였으나 아직도 꺼지지 않고 불길처럼
타오르는 개혁의지를 이해할 수 있으랴,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땅에는 언제까지나 혁명이 필요한 것일까!"
이리나는 혼잣소리처럼 탄식하였다.
"인류가 살아있는 동안은 어느 시대에나 혁명이
필요할 걸요."
"왜?"
"저야 잘 모르지만, 제가 아는 어른 한분이
말씀하셨어요."
리술 아저씨의 침울한 얼굴이 떠올랐다. 빅토르는
말을 이었다.
"어떤 시대, 어떤 사회든 모순은 있게 마련이고 그
모순을 개혁하려는 세력이 반드시 대두한다는
것이었어요."
"매우 그럴 듯한 주장같구나. 허나 이상적인 제도를
지켜 나가면 모순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지 않겠어.
그럼 혁명은 사라지겠지."
"누구나 다 만족하는 사회가 있을 수 있을까요?"
"누구나 다 만족할 수는 없을지라도 여론
제조자들의 가치관에 역행하지 않는 그런 사회도 있을
수 있겠지."
"지금 우리 소비에트는 어떤가요?"
이리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젊은 사람들은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사정
아닌가요?"
이리나는 역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이 쉽게 열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빅토르도 입을 닫고 말았다.
몹시 붐비는 압도버스에 탑승하여 바이칼을 향해
가는 동안에도 그들은 전혀 말을 나누지 않았다.
바이칼로 가는 길은 포장이 잘 되어 있었다.
압도버스는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가끔 버섯
따는 사람들이 희끗희끗 모습을 나타내는 자작나무
숲과 소나무 숲이 교대로 이어지고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는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이 매우
한가로워 보였다. 가끔 지붕에 함석이나 타르를 입힌
집들이 나타났다가 급히 뒤로 물러나기도 했다.
한가로운 도로를 한 시간 반 가량 달렸을까, 마침내
바이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앙가라 강으로 이어지는
호수 남서쪽 자락부터 나타났다. 거기서부터 호수는
차츰 폭을 넓혀갔다.
압도버스는 널따란 선착장 옆의 정류소에서
태우고온 승객을 하나하나 다 부려놓았다.
압도버스에서 내린 빅토르는 고개를 숙이고
기념품과 지도 따위를 팔고 있는 작은 초소같은
가판소 옆의 콘크리트 난간에 바투 다가섰다. 그리고
나중에 더 잘 보기 위해 압도버스 차창을 통해
얼핏얼핏 모습을 보이는 바이칼을 애써 외면하며
달려왔던 빅토르는 천천히 호수로 눈을 돌렸다.
빅토르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이칼은 제
모습을 활짝 열고 보여주었다.
물은 푸르고 맑았으며 호면은 잔잔했다. 건너편
산들은 아득히 멀어 보였고 그 산들은 호수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었다. 가까운 선착장에는 몇 척의
동력선이 정박해 있었고 여러 마리의 갈매기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동력선의 마스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바이칼에 오면 내가 늘 가는 곳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볼까?"
"그럴까요."
빅토르는 담담히 대답했다.
이리나는 앞장서 마을 가운데로 뚫린 그다지 넓지
않은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로 목재로 지은
마을의 집들은 작고 아담했고 집뒤 언덕과 산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했다. 바로 코앞에다 푸르고 맑은
호수를 마당처럼 두고 있는 마을은 볼수록 다정스럽고
평화스러웠다.
이리나를 따라 걷는 동안 빅토르의 시선은 줄곧
호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시야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가늘게 나비지는 파도가 들어와
있었고 부질없이 자꾸만 수면을 쪼며 먹이 사냥을
하는 갈매기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의 심장은
조금씩조금씩 호수빛깔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처음 바이칼은 그에게 매우 평범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건너편, 산이 가로막고 있는 호수의 끝도,
또 호면을 쪼는 갈매기도 그냥 단조로워 보였다.
가볍게 내려와 하늘거리는 하늘도, 산그림자를 머금고
있는 먼곳의 호면도 그다지 인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선착장의 동력선은 호수의 낭만을 반감시키는
기분이었고 어쩐지 사람들의 생활과 바로 직결되어
있는 어떤 각박한 삶의 현장 같은 인상을 던졌다.
빅토르는 자갈이 깔린 호반으로 달려가 유리처럼
투명한 깊은 물과 육지를 애처롭게 쓰다듬듯 자갈밭을
기어오르다 내려가는 물결을 따라 오르내리고, 물에
젖어 있는 조약돌을 주워 양쪽 주먹에 가득가득
쥐기도 했고 마음을 설레게 하는 호면을 향해 그
조약돌을 힘껏 던지기도 했다. 호수와 빅토르는 그런
과정을 거치며 점점 친화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마을을 벗어나자 길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호반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마을과는 한참 멀어졌겠다고
여겨진 순간 그 길은 벼랑 위에서 끝이 나 있었다.
벼랑에 서서 바라본 호수는 에메랄드처럼 빛났다.
호수 건너편의 산들은 아득히 멀어 보였고, 호면에
드리워진 그 산그림자는 신비해 보였다. 게다가
수묵화처럼 형체가 지워진 건너편 산들은 사람의
발자취가 한번도 닿지 않은 처녀지 같아 보였다.
어쩌면 그곳에 가면 천사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리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빅토르는
한동안 바이칼에 눈을 빼앗긴 채 모든 사고와 행동을
정지 당하고 있었다. 그는 석상처럼 꼼짝도 없이
붙박혀 서서 온몸으로 바이칼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바이칼에서 살겠다는 말 나오겠다."
이리나의 빈정거리는 듯한 말에 빅토르는 간신히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처음 보는 이상한 구조물의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레닌그라드에 돌아가서도 잊지 않으려면 열심히
봐두어야지요."
"난 아무리 열심히 봐둬도 돌아서면 깜깜하더라."
이리나는 작은 지붕을 인 게시판같은 구조물의
기둥을 손으로 탁탁 쳤다. 기둥 사이 칠판 크기의
널빤지에 빽빽히 낙서들이 널려 있었다. 낙서들 위에
종이나 천조각이 붙어 나풀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뭐예요?"
빅토르는 손가락으로 그 구조물을 가리켰다.
"아, 이것. 빅토르도 소원이 있으면 여기다 몇 자
적지 그래. 바이칼이 그 소원을 풀어준대."
"아!"
빅토르는 거기에 빼곡히 적혀 있는 낙서들이며
종이나 천조각의 의미를 비로소 알아차렸다. 그
구조물은 호수를 찾아와 사랑의 결실이나 소원의
성취를 비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낙서는 대개
사랑의 맹세를 적은 것이거나 소원을 비는
내용들이었다. 남녀 두 사람의 이름과 함께 평생
변하지 않을 사랑을 기원하는 리본도 매달려 있었다.
사랑의 맹세나 소원을 비는 글귀들은 널빤지에만 씌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붕 안쪽에도 기둥에도 씌어져
있었다. 아예 기둥에다 사랑의 글귀를 깊이 새겨놓은
것도 눈에 띄었다. 빅토르는 호반을 찾아와 사랑을
맹세하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한 용도의
구조물을 세워둔 이의 배려에 눈물이 왈칵 솟으려
하였다.
사랑의 불변을 맹세하고 소원을 비는 정표를 달고
있는 것은 그 구조물뿐만이 아니었다. 가파른 벼랑
끝에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둥지에도 갖가지 색깔의
헝겊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호수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가지에도 이름을 쓰거나 소원의 글귀가 쓰인
헝겊들이 나폴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빅토르는 뜻하지 않았던 사태에
직면해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이리나가 붉고 푸른 길다란 헝겊 뭉치를 들고
벼랑 위에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만류할 겨를도 없었다.
단숨에 그녀는 한길 이상을 기어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호면 위로 길게 뻗어나간 가지로 방향을 바꿔
그것을 타고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 가지는 이리나의
체중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허약해 보였다. 가지가
부러지거나 자칫 잘못하면 열길 낭떠러지로 추락해
목숨을 잃을 게 뻔했다.
그녀는 목숨 같은 건 이미 포기한듯 가지 끝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빅토르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빨리 제지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은
절박했으나 그것도 생각뿐이었다. 이제나저제나
가지가 꺾어지지나 않을까 조바심치고 있는 사이 입에
물고간 헝겊을 가지 끝에다 칭칭 동여매고 있는
이리나의 모습이 보였다. 이리나는 헝겊이 제대로
매졌나 확인한 다음 천천히 조심스럽게 가지를 타고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는 가지를 무사히
건너왔고 소나무둥지에 다달았다. 그때에야 얼핏
그녀는 빅토르를 내려다보았다.
이리나가 미처 땅에 발을 디디기 전에 빅토르는
엉겁결에 그녀를 안아내렸다.
"그러다 가지라도 부러지면 어떡하려 했습니까?"
빅토르가 간신히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볼멘소리를 하자 이리나는 빙그레 웃음지었다.
무엇인가 큰일을 해낸 사람처럼 진지하고 흡족한
표정이었다.
"신표를 위험한 곳에 매달수록 소원풀이가 잘
된다고 해서......."
빅토르는 이리나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문득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사랑이란 사람을 이토록 무모하게 만드는 것인가.
8. 이리나 네스테랭코바의 사랑
그날 빅토르는 이리나가 권하지 않았으나 몇 곡의
노래를 바이칼에 바쳤다.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
불러도 그의 노래는 바이칼에 묻혀 멀리 뻗어나가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바로 발앞에서 힘없이 먼지처럼
추락해 버렸으나 빅토르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노래했다. 바이칼을 꿈꾸어온 어린 시절부터의
그리움을 정성을 다해 노래했다.
이리나도 노래를 했다. 역시 브소츠키의 노래였다.
나를 위해 내 착한 연인은 눈물을 흘리고
나를 위해 나의 친구들은 모종의 대가를 치르고
나를 위해 다른 가수들은 내 노래를 불러준다
나의 적들은 나 때문에 술을 마시겠지
내 노래는 이제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고
내 기타줄은 모두 튕겨져 나가 버렸다.
나는 이제 감금되어 해도 달도 쳐다볼 수 없게
됐다.
나는 자유로이 외출할 수도 없다. 그들이
금지하니까.
단지 낯선 장벽만 바라볼 뿐
이리저리로 몸을 틀어볼 수도 없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하늘 한 조각과 밤에 꾸는 꿈뿐
꿈속에서 나는 길을 떠나고,
꿈속에서 나를 묶었던 쇠사슬은 부서지고
꿈속에서 나는 내 기타를 다시 품에 안고,
꿈속에서 누군가 저 밖에서 기다렸다가
얼싸안고 내 노래를 부른다
이리나의 노래는 낮고 침울했다. 빅토르에게 세상에
대한 원망을 품고 있다고 핀잔을 하더니 더 격렬한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런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 터였다. 빅토르는 이리나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접근한 것이 깃이 같은 새들이 어우러지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음을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날더러 세상에 원망을 품고 있다더니 이리나는 더
강한 원망을 품고 있군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테지."
이리나는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잔잔히
말했다.
"조금 전 이리나가 부른 노래는 우리 친구들이 자주
부르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 세상이 바뀌기를
원하거던요."
"아무리 그래도 세상은 바뀌지 않아."
이리나는 갑자기 절망적인 목소리로 단정적으로
말했다.
"두고보세요. 세상은 바뀝니다."
빅토르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왜, 어떻게?"
"바뀌기 원하는 사람이 바뀌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지요."
"그런 비현실적인 추측이 어딨어!"
이리나는 도리질을 했다.
"두고보세요. 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래 부를
테니까요."
빅토르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불렀던 노래를
이야기했고 그 노래들로 인해 학교에서 제적 당한
이야기를 이리나에게 들려주었다. 이리나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이 나라는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을 희생시킬
작정인가!"
빅토르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이리나는 그렇게
탄식했다.
"그래 우리도 세상이 바뀌기를 바래. 하지만 세상은
다스리는 자들의 것이야."
이리나는 정치인들을 향해 많은 원망과 극단적인
저주를 퍼부었다. 그들의 부정과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며 격렬히 비판하였다. 그녀의 흥분이 가라앉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바이칼을 찾아갈 때와는 달리 돌아올 때는 둘 다
지치고 맥이 빠져 있었다.
그날 밤, 빅토르는 이리나의 현실주의에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 얼마 있지 않았을 때 손님이
방문했다. 건장해 보이는 서른 남짓한 남자였다.
빅토르를 보자 그 남자는 얼굴을 몹시 찌푸렸다.
"서로 인사하세요. 이쪽은 이반 끌르이긴 이쪽은
레닌그라드에서 온 빅토르. 이반, 빅토르의 노래를
들으면 반할 거예요."
이반은 악수를 나누고도 미심쩍은 표정은 지우지
않았다. 유리에바에게 장난감 선물을 건네고 그들은
간단한 식사와 함께 보드카를 마셨다. 빅토르는
이리나의 강권에 못이겨 보드카 두 잔을 마셨고
그녀의 강요에 의해 노래를 몇 곡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반은 근육질의 사내였다. 무얼 하는지 모르지만
필경 육체를 사용해 해결하는 그런 일에 종사하는
것으로 보였다. 빅토르는 끝내 그의 직업을 알지
못했으나 그가 유형온 유리 네스테랭코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과학자로는
보이지 않았고 말도 거칠었다.
유리에바가 졸음이 온다며 그의 방으로 가고
빅토르도 얼마 있지 않아 밤인사를 건네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이리나와 이반은 술자리를 끝낼
것 같지 않았다. 빅토르는 낮에 피로했던지 곧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나 잤는지 몰랐다. 잠결에 여자의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잠을 깼다. 그 비명소리가
어찌나 다급하고 절망적이었던지 빅토르는 방문을
벌컥 열고 튀어나갔다. 그러나 곧 들려온 비명소리에
주춤 발을 멈추었다. 비명에 섞여 들리는 환성,
그것은 쾌락을 이기지 못해 지르는 감창소리였던
것이다.
무안해진 빅토르는 행여나 그가 내는 소리가 저쪽에
들리지나 않을까 조심하여 다시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왔다. 다시 잠자리에 들었으나 그들의 사랑이
끝나고도 한동안 쉽사리 잠을 들 수가 없었다.
이리나의 두 얼굴에 대한 이해가 힘들었고 또 아침에
그녀를 자연스럽게 대할 수 없을 것 같아 걱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침에 이리나를 보았을 때 너무나 태연한
그녀의 모습에 도리어 당혹했다. 이반은 이미
돌아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리나는
유리에바의 등교 준비에 분주했다. 그녀는 어제의
다소 침울하던 모습은 간데없고 얼굴에 윤기가 흐르고
매우 쾌활했다.
이르쿠츠크를 떠났으나 빅토르의 마음 속에서는
이리나가 지워지지 않았다. 이리나는 혼란을
가져왔다. 낮의 얼굴과 밤의 얼굴이 다른 그녀.
사람에 따라 그렇듯 다른 얼굴로 대할 수 있는
것인가. 어느 얼굴이 그녀의 본색인지 끝내 헤아리지
못하고 헤어진 느낌이었다. 유형지의 아내?
"크질오르다로 간다고?"
역으로 배웅나온 이리나는 역시 레닌그라드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려는 눈치였다.
"그래요. 아직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크질오르다에 계시는 할아버지를 만나보고 싶은
걸요."
"할 수 없지. 걱정하고 계실 어머니 생각도 좀
하렴."
"명심할게요."
이르쿠츠크에서 서행의 시베리아 열차에 오른
빅토르는 자작나무 숲이 시야에 들어오든 완만한
구릉을 이루는 타이가 지대가 들어오든 그의 눈에는
바이칼 호수가 가득 고여 있었다. 멀어질수록
바이칼은 비로소 그에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바이칼은 자유를 가르쳤다. 슬픔과 기쁨, 분노와
환희, 고통과 쾌락, 좌절과 성취, 절망과 희망,
낙담과 소망, 모든 감정과 정서를 뛰어넘은 자유를
가르쳤다. 현실에의 집착과 안주를 뛰어넘는 자유,
그것은 빅토르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보이는
느낌이었다.
바이칼은 얼굴을 대하고 있을 때는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 그를 등지고 떠나자 그 모습이
새롭게 떠올랐다. 멀리 거리를 둘수록 앞에서는
도무지 느낄 수 없었던 감정들이 하나씩 상기되었다.
눈앞에서는 부분만 보이는 것 같더니 멀리 거리를
두자 그 전체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모습에 대한 인상을 어떻게
정리하여 말할 수는 있을까. 그리움 같은 것을
느꼈다는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으나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한다면 다른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름다웠다는 인상도 없지 않았으나
단순히 아름다웠다고 표현하기에는 그것이 너무
다의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중, 레닌그라드에
돌아가서도 오랜 후에 문득 생각했었다. 바이칼,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어머니의 품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고향, 어머니의
품, 그렇게 생각한 빅토르는 비로소 바이칼에 대한
인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멀리 우랄 산맥의 소재를 관념으로 상상하며
빅토르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기차를 내렸다.
시베리아 철도 바이칼 호는 황혼녘에 도착했다.
온도시가 타는 듯 붉은 노을에 물들어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 만난 노을은 우수와 함께 대상없는 그리움이
병균처럼 온몸에 퍼져나갔다. 이마에 노을을 적시며
빅토르는 역 광장에 망연히 서 있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도시에서 맞이하는 노을의 쓸쓸함에
온몸을 맡겼다. 무자비하게 노을은 그의 정신을
파먹었다. 객수가 얼마나 짙었던지 노을을 제외한
어떤 것도 그의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사물도
그의 눈길을 끌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가는 행인도 결코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얼마 동안이나 그렇듯 망연히 서 있었을까. 문득
기타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기타를 들고 있던 왼손이 문득 허전함을 느꼈고
불현듯 기타를 분실한 것 같은 공허감이 뇌리를
스쳐갔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기타는 그의 왼손에
들려 있었다. 공연한 걱정으로 불안감을 느꼈음을
알았으나 그래도 기타를 잃어버렸을 경우를 상정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제서야 그의 눈에는 역 광장
앞의 레닌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과 거리의 양편에
즐비하게 잇따라 서 있는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역
광장에도 행인들이 빈번히 내왕하고 있었다.
"노보시비르스크에 가면 꼭 향토박물관에 들러보렴.
저녁에 도착하여 밤 10시에 크질오르다행으로
바꿔타야 하니 불가능하겠지."
이리나는 빅토르가 향토박물관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마냥 아쉽다는 표정이었었다.
"그 박물관에는 시베리아 철도 건설에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그 전시물들 가운데 특히
철도부설공사에 동원되었던 죄수들의 차꼬와 그들을
닥달했던 채찍 등을 꼭 봐야 하는 건데....... 그걸
봐야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희생 위에 안락한
기차여행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거든. 그리고
문명의 발달이라는 것은 전쟁과 강제노역 등 인류의
희생 위에 비로소 얻어지는 것임을 알게 될
테고....... 그래야 빅토르의 노래가 더 조화롭게
되고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지 않겠어."
이리나의 말을 상기하며 빅토르는 광장을 건너
크라스니 대로를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비 강
쪽으로 걸어가며 행인들에게 향토박물관의 위치를
물었다. 크라스니 대로를 따라 걷다 스베르들로프
거리와 마주치는 데서 바로 왼쪽으로 돌면
향토박물관이 보일 것이라고 하였다. 과연 그곳에
도착하니 향토 뮤제이 간판을 단 건물이 보였다.
예상했던 대로 둔중한 목제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문에 붙은 안내판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관한다는 안내글이 씌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석양을 받고 있는 볼품없는 콘크리트 건물의 외양만
둘러보고 빅토르는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크질오르다행 기차는 예정대로 밤 10시에
노보시비르스크 역을 출발했다. 기차에 오른 빅토르는
앞으로 만나게 될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과
사촌형제들을 그려보았다.
9. 따마리스크
이르쿠츠크를 떠난 지 3일 만에 빅토르는
크질오르다에 도착했다.
5년 전쯤, 할아버지 70회 생신 때 아버지와 함께
왔을 때의 기억과는 달리 크질오르다는 노란 흙먼지가
날리는 삭막한 인상이었다. 납작한 콘크리트 상자
모양의 역사는 낡고 지저분했고, 역을 나오는 동안
마주친 사람들은 한결같이 꾀죄죄한 모습들이었다.
단신에 광대뼈가 나온 키르키즈나 카자흐의
중앙아시아계 사람들과 머리에 터반을 쓰거나 육각
모자를 달랑 얹은 건장한 체구의 트루크인들이 주로
눈에 많이 띄었다. 중앙아시아계 사람들이나
투르크인들은 모두 살결이 검은 편이었다. 거기에다
옷차림도 구질구질해 금발이나 아마빛 머리칼의
러시아계 사람이 나타나면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빅토르는 역 앞의 정류장에서 압도버스를 탔다.
압도버스는 시내 중심가를 가로질러 도시의 동쪽
끝으로 달려갔다. 할아버지 집은 교외에 인접한 도시
변두리에 있었다. 낯익은 마을 공회당의 모스크형
지붕이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빅토르는 압도버스에서
내려 막상 할아버지 집을 눈앞에 두게 되자 선뜻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공연히 왔다는 후회도
슬금슬금 일어났다.
담장 밖으로 가지를 늘어뜨린 키큰 배나무가 서있는
할아버지 집에 당도한 빅토르는 그만 발길을 돌려
버릴까 하는 생각이 또 일어났다. 배나무 잎은 노랗게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그는 마지못한
기분으로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마당에서 야채를
다듬고 있던 할머니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는 눈을 가늘게 좁혀 뚫어지게 빅토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어 눈이 키워지고 동시에 입이
헤벌어졌다. 할머니는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너, 비쨔 아니냐!"
할머니는 자기 눈이 의심스러웠던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예."
할머니는 앞으로 몇 걸음 쓰러지듯 다가와 빅토르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의 손은 가시나무를 만지는 것
같았다.
"너가 웬일이냐?"
"할머니가 보고 싶어 왔어요."
"그래, 그래 어서 들어가자."
마당의 기척을 알아차렸던지 방문들이 벌컥벌컥
열리며 숙모와 사촌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 빅토르구나!"
숙모는 마루로 나오며 뜻하지 않았던 빅토르의
출현을 반색하였다.
이미 낯이 익은 사촌들도 일제히 마루로 나와
빅토르를 반갑게 맞이했다.
마침 그때 대문이 열리고 레프 삼촌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퇴근해 돌아오는 길인 듯 가죽 가방을 든
레프 삼촌은 먼저 빅토르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이
되었다.
"비쨔구나. 그래 언제 왔니?"
빅토르는 아직도 어깨걸이 가방과 기타를 매고
있었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레프의 말에 사촌들은 빅토르를 에워싸듯 하고
방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그래, 아버지와 어머니 다 잘 계시지?"
"예, 할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어디 좀 나가셨다."
할머니는 웬 까닭인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방학 때도 아닌데, 웬일이냐?"
할머니는 새삼스레 의심쩍은 눈으로 빅토르를
탐색하듯 훑어보았다.
빅토르가 주춤거리며, 학교를 옮기려다보니 짬이 좀
나서 여행을 나섰노라고 꾸며 대답하려는 순간 레프
삼촌이 먼저 말했다.
"학생 때는 누구나 한번씩 멀리 돌아다니고 싶은
거예요."
빅토르는 빙그레 웃으며 막내삼촌 레프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준비했던 대답보다 레프 삼촌의
대답이 얼마나 그럴싸한가. 레프 삼촌은 이곳
크질오르다 대학에서 경영학교수로 재직중이었다.
큰삼촌 유리 막시모프 가족은 모스크바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막내삼촌 레프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너의 할아버지처럼 역마살이 끼였단 말이냐?"
할머니는 탐탁치않다는 눈으로 빅토르를
흘겨보았다.
"어릴 때 여행을 많이 해야 세상 물정에
밝아진다구요."
레프 삼촌이 다시 역성을 들었다.
"원, 그렇다 하더라도 너의 할아버지처럼 될까
걱정이구나!"
할머니는 그렇게 탄식하였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손주를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그때 할아버지 때문에 역정이 나 있었다.
온다간다 한마디없이 집을 나간 늙은이가 달소수가
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한번은 보름만에 돌아오고 한번은
스무 날쯤 지나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디서 죽었는지 아니면 무슨 사고라도 저질러 감옥에
갇혀 욕을 보고 있는지 달소수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한달이 넘자 할머니는 밤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고 걱정으로 눈을 뜨고 걱정으로 눈을
감는다 하였다.
"할아버지가 왜 그러시는데요?'
레프 삼촌과 둘이 되었을 때 빅토르는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별것 아니다."
"집을 나가신 지 한달이 넘었다면서요?"
"그래, 하지만 요새 가끔 있는 일이다."
"할아버지께서 어디 가시는 데가 있는 모양이지요?"
"아니, 그냥, 어딘가로 훌쩍 떠나셨다가 돌아오시곤
하시는데......."
"그냥 어딘가로 훌쩍 떠나셨다
돌아오신다면......?"
빅토르는 할아버지의 근엄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레프 삼촌이 말하고 있는,
어딘가 한구석이 빈 듯한 그런 분이 아니셨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이곳 크질오르다로 옮겨온
조선사범대학을 졸업한 할아버지는 평생을 관료생활로
일관하셨다. 정년퇴임을 하고 연금생활을 하면서도
등에다 항상 단단한 기둥 같은 것을 박은 듯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지내셨다. 그런 할아버지가 어떻게
달라졌길래 온 집안 사람들의 근심의 대상이 되었단
말인가.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그러시는 것 같아."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그러신다구요!"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가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고향에 가시고 싶다면, 보내드리면 되잖아요?"
빅토르의 말에 레프 삼촌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니."
"왜요?"
"가고 싶다고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거던."
빅토르는 또 리술 아저씨가 떠올랐다.
"할아버지 고향이 어딘데요?"
"북조선이다!"
"북조선이라면 우리 소비에트와 가깝게 지내는 나라
아니에요. 삼촌이나 아버지께서 애를 쓰면 보내드릴
수도 있을 거 아니에요?"
"우리가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란다. 우리같은
동양계들은 고향이란 말만 잘못 써도 당국의 제제를
받는 세상인데....... 더구나 우리가 설령 북조선
여행허가를 받아서 고향에 보내드린다 해도 그렇지.
열 살도 안돼 떠났다는 그곳에 할아버지 아는 사람
하나 있을 줄 아니. 도리어 안 가는 것만 못할 거야."
빅토르는 알쏭달쏭했다. 이해가 될 것 같기도, 또
전혀 이해가 될 것 같지 않기도 했다.
"어찌 했든 할아버지는 늘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시는구나!"
레프 삼촌은 탄식하듯 그렇게 말하였다.
며칠 후, 토요일 오후였다. 학교에서 돌아온 레프
삼촌이 빅토르를 찾았다.
"비쨔, 너 말 타봤니?"
"예, 할아버지 칠순 때 여기 와서 몇 번 타보기는
했지만 멀리 달려본 적은 없어요."
"그래, 그럼 오늘 한번 달려볼까?'
"아, 정말요?"
빅토르는 크질오르다로 오는 동안 몇 번인가 차창을
통해 안장도 없는 말을 타고 질풍처럼 달리는
유목민들의 모습을 보았었다. 그 모양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저절로 후련한 느낌이 일어났었다. 빅토르는
그 유목민들처럼 자신도 한번 말을 타고 시원하게
초원을 달리고 싶었다.
"가끔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꿈을 꾸고는 했는
걸요."
그렇게 얼른 꾸며 말해 놓고 보니 자신이 정말 그런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럼 잘 됐구나. 이곳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말을
탈 줄 모르면 사내로 치지 않는단다."
삼촌은 빅토르를 마굿간으로 데리고 갔다.
마굿간에는 두 필의 말이 매어져 있었다. 두 마리 다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사랑하는 듀크종 종마였다. 두
필의 말에 안장을 올리고 그것을 단단히 조여맨 다음
레프는 한마리를 마굿간에서 먼저 끌어냈다.
"자, 타보렴."
레프는 등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빅토르는 등자를
딛고 말잔등에 올라탔다. 말은 그가 올라탄 순간
꿈틀하는 것 같더니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레프는 한쪽 고삐를 잡고 말을 몇 걸음 걷게 하였다.
말은 순순히 걸음을 떼놓았다.
"말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따르도록 길이 잘 들어
있다. 하지만 무리하게 달리려들면 내팽개쳐 버릴
게다.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고 얌전히 타면 별일 없을
게다."
레프 삼촌은 말타는 요령을 꼼꼼하게 일러주었다.
"이 마당을 천천히 몇 바퀴 돌면서 몸짓에 따라
말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또는 발길이나 고삐의
움직임에 따른 말의 대응도 살펴보도록 해라."
빅토르는 삼촌의 말에 따라 신중히 마당을 몇 바퀴
돌았다. 몇 바퀴 돈 다음 빅토르는 말의 성미를
건드리지 않으면 말은 순종하리란 자신감을 얻었다.
그러나 아직 익숙해질 때까지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리라는 경각심 때문에 삼촌이 시키는 것보다 더
많은 횟수를 마당을 돌며 적응연습을 하였다.
"삼촌, 이만하면 탈 수 있을 것 같아요."
"말과 금세 친해지는 것 같구나."
레프 삼촌은 마굿간에 남아 있던 다른 말을 끌고
나와 거기에 올라탔다. 그리고 앞장 서 마당을
나갔다.
그들은 잔걸음으로 마을의 한길을 나란히 걸어갔다.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가끔 쳐다보았다. 거의가
피부빛과 용모가 그들과 비슷한 카자흐계
사람들이었다. 레프와 인사를 나누는 사람도 있었다.
"이르쿠츠크를 다녀왔다고 했지?"
얼굴이 유난히 검은 카자흐스탄인과 인사를 나누고
몇 걸음 지나갔을 때 레프 삼촌이 빅토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예, 오래 전부터 바이칼에 가고 싶었거던요."
"바이칼에 가보는 것이야 좋지. 바이칼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은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니......."
"저는 어렸을 때부터 바이칼 가는 그림을 그리고는
했었는 걸요."
"그렇지만, 바이칼에 실망했겠구나!"
빅토르는 바이칼과 처음 대면한 순간 사실 상당히
실망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멀리 바이칼을
떠나고나서 차츰 아름답게 채색되어 떠오르는
바이칼의 매력으로, 처음 기대나 상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바이칼을 간직하게는 되었으나 처음의
실망감은 아직도 씁쓸하게 기억의 잔해로 남아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레프 삼촌은 씨익 웃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오래 전, 시를 쓰시는 학교
선생님께 들었는데, 바이칼은 마음에 고통을 지닌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더구나."
빅토르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레프 삼촌의
말에 그러나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을 지닌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마음에 고통을 지닌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니요?"
무엇인가 짚히는 데가 있어 빅토르는 정색을 하고
레프 삼촌을 쳐다보았다.
"나쁘게 생각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제
레닌그라드에 전화를 했다. 어머니가 여간 걱정하지
않았던 모양이더라."
과연 예상했던 대로였다. 빅토르는 금방
시무룩해졌다.
"어머니는 너가 크질오르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한시름 놓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번 여행으로 너의
마음의 상처가 다 아물기를 바라더구나."
"죄송해요."
"괜찮다. 아픔을 겪으며 성장한 사람이 굴곡없이
편하게 지낸 사람보다 어려움을 잘 견디고 또
인생에서 거두는 것이 많다고 들었다. 너의 그 아픔이
인생의 풍성한 수확을 보장하리라 믿는다."
레프 삼촌의 말에 빅토르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때 갑자기 레프 삼촌이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급히 땅으로 내려섰다.
"빅토르, 잠깐 내리렴."
영문을 모른 채 빅토르는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고
땅으로 내려섰다.
"인사 올리렴."
레프의 앞에는 몸집이 작은 노인이 한분 서 있었다.
레프의 인사를 받은 그 노인은 온 얼굴에 주름을 가득
그리며 활짝 웃었다. 빅토르는 엉겁결에 시키는 대로
노인에게 고개를 꾸벅하였다.
"레닌그라드에 있는 로베르트 형님의 아들입니다."
"그래, 그러고보니 로베르트를 많이 닮은 것
같구나."
노인은 빅토르의 어깨를 친근한 손길로 다독여
주었다.
"아버지는 아직 안 돌아오셨지?"
"예, 어머님께서는 아버님 때문에 병환이 나실
지경입니다."
"자네들은, 아버님을 이해 하시게."
"예!"
"우리 늙은이들은 누구나 고향에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다네. 그 정도에 차이는 있을망정 나도 자네
아버님과 조금도 다를 바 없어. 마음은 늘 우리가
정착해 살다 떠난 연해주로, 또는 두만강 건너의
고향으로 달려가 있다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어서 가보게."
레프의 정중한 인사를 받은 노인은 가던 길을
계속해 갔다. 빅토르는 고향을 운위할 때 노인의 눈에
어리던 그늘같은 기운을 역력히 보았었다.
"삼촌이 존경하는 분이세요?"
"꼴호즈 회장님인데, 존경을 받을 만한
어른이시다."
"부자란 말이군요?"
레프는 고개를 저었다.
"노력영웅이시다. 노력영웅이라는 것은 의례적인
것일 수 있겠지. 하지만 옥수수며 면화며 대마 생산
분야에 있어서 전소비에트 공화국에서 제일인자가
되기란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겠니. 이곳 꼴호즈에
여러 소비에트 공화국 지도자들이 견학을 오는 것도
다 저 김회장님 능력 때문이란다."
빅토르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어디로
갔는지 노인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꾀죄죄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던 아까의 노인이 그렇듯 놀라운
능력을 지녔단 말인가.
"우리 고려인들이 소비에트 어느 공화국 사람들보다
근면하고 두뇌가 명석하다는 산증거 같은
어른이시야."
레프는 말을 천천히 몰며 말했다. 고려인들은
근면하고 두뇌가 명석하다! 빅토르는 아버지에게서
그와 같은 내용의 말을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액면대로 다 믿어지지는 않았다. 리술 아저씨도 그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믿어지지 않았다.
물론 레프 삼촌의 말도 믿을 수 없었다. 다만 왜
약속이나 한듯 고려인들은 두뇌가 명석하고
근면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듯 다른 민족에 비해 근면하고 두뇌가 명석한
민족이라면 어째서 자기 나라를 떠나 먼 이국에 와서
차별을 당하며 이 고생을 하며 산단 말인가.
리술 아저씨는 그 이유를 일본의 침략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근면하고 명석한 두뇌를 가진
민족이라면 일본의 침략 따위는 막아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저는 우리 고려인들의 두뇌가 명석하다는 말이
믿어지지가 않아요."
빅토르는 그렇게 말한 다음 자신의 의문을 솔직히
다 털어놓았다.
"비쨔 말을 듣고보니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구나.
하지만 우수한 민족이라고 다 잘사는 것은 아닌
모양이더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두뇌를 가졌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사는 너도 들어 알고 있겠지.
그리고 이곳 중앙아시아며 유라시아를 삼세기 가까이
지배했던 징기스칸 후예들을 보렴. 그들은 무예에는
능했지만 문화가 빈약했기 때문에 오늘날 그 후예들이
저 고생 아니냐.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예보다는
문장과 철학과 윤리와 평화를 더 사랑했다더구나.
따라서 국가 분위기가 무예보다 문장을 더 숭상하는
분위기였고, 무예를 등한히 하다 일본에게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한 것이라고 들었다."
리술 아저씨에게서도 같은 내용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일본의 침략을 받을 당시 조선은 문반이 무반보다
더 득세를 하고 있었고 따라서 나라는 문약해
있었으며 우수한 두뇌는 생산적인 데보다 소비적이며
유희적인데 더 치중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칼이
아닌 붓이 지닌 위력에 의존해 인생을 설계했고 국방
따위를 소홀히 여기는 상태에서, 서양에서 받아들인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침략을 받은 조선
조정은 올바른 저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유린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리술
아저씨는 고려 때 몽고침략의 아픈 교훈이 있을
터이고 또 조선 중기 때의 임진, 정유재란의 치욕
또한 겪은 왕실과 양반 지배계층 인사들이 국가를
지킬 간병양성을 게을리하고 정자를 짓고
음풍농월이나 일삼다 일본침략을 당해 백성들로
하여금 망국의 설움과 아픔을 겪게 만들었다며
통탄하며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었다.
"그게 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리석음이
자초한 불행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머리가 우수한
민족이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도 말할 수도 있겠다만, 우리 고려인들이
연해주에서 맨주먹 하나 들고 이곳 중앙아시아 땅에
강제이주 당해 와서 오늘날 이만큼이나 살게 된 것이
다 무엇 때문이겠니."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몸부림친 결과
아니겠어요?"
"너무 부정적이구나. 이곳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우리 고려인을 경이롭게 생각한단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만한 소출을 내지 못하는데 같은
땅을 부쳐도 고려인들은 그들의 두 배, 세 배의
소출을 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니. 그리고
학교에서도 카자흐스탄 아이들은 우리 고려인
학생들의 성적을 따라오지 못한단다."
"카자흐스탄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요."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탄에서도 다 마찬가지란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 로베르트 형님도 레닌그라드 유학
때 늘 최고점수를 받고는 했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빅토르의 머릿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갔다. 아버지 르베르트는 늘 빅토르에게
공부도 못하고, 게으른 자식이라며 꾸중을 했었다.
우리 집안에 너같은 창피한 자식은 없다며 매질을
하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렇듯 설왕설래하는 동안 그들은 마을을 벗어나
있었다. 빅토르의 눈앞에 아스라한 초원의 지평선이
전개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관목처럼, 자라다만 키가 낮은 자작나무와
포플러가 몇 그루씩 서 있을 뿐 끝없이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초원은 새도 한마리 깃들지 못할 것처럼
허허로워 보였다.
마을을 벗어나는 동안 빅토르는 말과 상당히
친숙해져 있었다. 얼핏 레프 삼촌을 곁눈질로 살폈다.
레프 삼촌의 시선은 망연히 전방을 향해 있었다.
빅토르는 고삐를 새롭게 추스려 잡았다. 안장에
궁둥이가 밀착되어 있는지 다시 확인했다. 그는
고삐를 슬며시 잡아당기며 발로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찼다. 그러자 말은 뒷다리에 힘을 주는가 싶더니
앞으로 쏠리듯 내달았다.
"조심해야 한다!"
갑작스레 내닫는 빅토르를 본 레프 삼촌은 당황한듯
다급히 경고했다.
"걱정마세요. 곧 돌아올게요."
빅토르는 갈기에 머리를 맞대듯 몸을 수그리며
지긋이 말의 옆구리를 다시 걷어찼다. 말은 질풍처럼
내달렸다. 모든 소음이 갑자기 사라지고 대지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전방은 궁륭처럼 둥그렇고 밝은
어떤 물체의 덩이로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그 궁륭
속으로 흡입되고 있는 듯 아스라한 떨림을 느꼈다.
무엇인가 고양되고, 문득 달콤하고 환상적인 죽음의
유혹이 느껴졌다. 그는 죽음과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하였다. 그러자 세상의 모든 억압으로부터 풀려난 것
같았다. 그 자유는 그에게 빛과 기쁨을 주었다.
한없이 미로같은 궁륭 속으로 빨려들어가다 그는 문득
고삐를 당겼다. 고삐를 당기며 몸을 뒤로 젖혔다.
말은 속도를 늦추었고 대지는 다시 살아나 시야를
채웠다. 초원을 달리던 바람은 비로소 제 소리를 찾아
그의 귀에 들려왔다. 빅토르는 말에서 뛰어내려
초원을 뒹굴었다. 그의 몸은 대지의 푸근한 품에
안기었다. 얼마나 그렇듯 대지의 숨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까,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삼촌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나는 네가 떨어진 줄 알고 깜짝 놀랐구나."
레프의 목소리는 도리어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그가
말에서 내려 옆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면서도
빅토르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경과한 것으로 느껴졌을 때 비로소
빅토르는 눈을 떴다. 처음 그의 눈에는 지평선의 끝이
보였다. 지평선에서 시야를 좁힌 순간 그의 눈은
갑자기 커다랗게 키워졌다.
그는 갑자기 몸을 떨었다. 저것이, 저것이.
빅토르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비칠비칠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는 한무더기의 분홍색 꽃무더기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삼촌, 여기가 우리 고려인들이 처음 도착했던
곳인가요?"
"아마, 그럴 게다. 여기저기 잘 살펴보면
흙구덩이를 파고 살았던 흔적이 보일 거야."
레프는 주위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빅토르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물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은 팍팍한 모래흙에
군데군데 풀이 덮여 있었다. 무릎에도 미치지 않을
관목들이 건조한 모래바람 속에 저항하듯 가끔 무리를
이뤄 서 있었다. 그 관목들 사이에 바람이나 비가
아니라 분명히 사람의 손길이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이는 웅덩이 메워진 곳이 보였다. 빅토르는 다시
한무더기 피어 있는 분홍색 꽃으로 눈을 돌려 그것을
쓰다듬었다. 싸리꽃처럼 작은 꽃들이 먼지처럼 금방
날아가 버릴 듯 애처롭게 달려 있었다.
"이것을 따마리스크라고 한다죠?"
"너가, 어떻게 아니?"
"레닌그라드에 제가 좋아하는 고려인 아저씨가 한분
계세요.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시를 쓰는
아저씨인데, 그 아저씨에게서 들었어요."
"이 들판 어디에나 피는 흔한 것이란다."
레프는 무감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무감각한
음성이 빅토르를 화나게 했다. 강제이주되어 당도한
고려인들의 어린애들이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지 못해
죽어간 사실을 레프 삼촌은 모른단 말인가. 굶주림과
추위보다 먼저 어린애들을 괴롭힌 것은 갈증이었고,
그 갈증을 달래기 위해 먹인 물이 독이 되어
어린애들이 죽어나갔다는 그런 사실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단 말인가.
그렇게 죽어나간 아이들이 하루에도 십수명씩
되었다 하지 않았는가. 아이들을 잃은 집에서는
슬픔을 가눌 기력도 없었고, 아이들을 내다 묻기
바빴다고 했었다. 이듬해 봄, 그 아이들이 묻혀 있는
곳에 유난스레 붉게 피었다는 저 따마리스크를 보고
그 부모들은 가슴을 쳤다는데 삼촌은 그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빅토르는 주위를 한바퀴 더 둘러보았다.
따마리스크는 황량한 들판 곳곳에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그 무더기로 피어 있는 따마리스크의 뿌리가
그곳에 묻힌 고려인 아이들의 엉치뼈며 가슴을
보호하는 갈비뼈며 눈과 코와 입이 있었던 두개골 등
온갖 뼈를 감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눈이
감겨졌다. 아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을 그렇게 죽게 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아, 이처럼 가슴 뜨겁게한 분노, 이것을
나는 영원히 기억하리라. 빅토르는 다시 따마리스크를
어루만지며 그렇게 속다짐을 하였다.
그래, 언젠가 나는 너희들의 혼백을 위해 시를 짓고
노래를 불러주마. 빅토르는 손으로 무거운 가슴을
쓸어내렸다.
10. 다시 '제6병동' 멤버들과
"여보세요, 여보세요."
빠쉬코프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이쪽에서 말을
하지 않자, 더 궁금한 듯 조급하게 '여보세요'를
외쳐댔다.
"여보세요."
마침내 빅토르는 입을 열었다.
"비쨔구나. 비쨔 맞지?"
순간 빠쉬코프는 수화기가 터지라고 소리쳤다.
"그래, 목소리 좀 낮춰. 귀청 떨어지겠다."
"아, 비쨔. 지금 어디냐?"
"어디긴 어디야. 네프스키 수도원이지."
빅토르는 네프스키 수도원의 도스토예프스키와
차이코프스키, 무소르그스키의 무덤과 그들의 동상을
머리에 그리며 대답했다. 사실 그는 구해군성 옆의
데카브리스트 광장에 있었다. 그의 시선은 청동
기사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럼, 레닌그라드로 돌아왔구나?"
"나, 담배 피우고 싶어 전화했어."
빅토르는 일부러 딴전을 부렸다.
"그동안 왜 연락 안했어?"
"바이칼에는 전화가 없었어."
"난 얼마나 자주 너네 집에 전화한 줄 알아? 하기야
엄마한테서 너가 바이칼로, 중앙아시아로 떠돌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다만......."
"우정에 눈물 쏟아지겠구나."
빅토르는, 집에 틀어박혀 있을 때는 집이 세상 다인
줄 알았더니 집을 나오고 보니 세상이 그렇게 넓을
수가 없지 뭐냐, 그렇게 말하려다 얼른 바꿔
대답했다. 그래, 다소 불안하고 막막하고 허허롭기는
하지만 집을 나오고 나서야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넓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가예프, 뜨로피모프, ......`애들과
만나기로 했어. 나타샤와 자레치나야도 나올 거야.
모두 널 보고 싶어 안달이라구. 세 시까지 카페
네바로 나와."
"그럼, 담배 줄 거야?"
빅토르는 친구들 이름을 듣자 갑자기 그들이 보고
싶어졌다.
"담배가 문제겠어."
"하지만 나는 카페 네바를 몰라."
"브로트스키 거리 초입에 있어. 장님만 아니면
누구나 찾을 수 있어."
"알았어."
"꼭 와야 해."
그냥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물이 모래로 스며들듯
다시 페트로그라트스카야 아파트 공사장으로 어둠을
타고 스며들어갈까 망설이다 빅토르는 빠쉬코프한테
전화를 건 것이었다.
그가 레닌그라드로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레닌그라드에 도착한 날 그는 그의 집 근처까지
가기는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따져보고 궁리해도
집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한참 아파트
주위를 배회하다 십수년 그가 살았던 아파트를 등지고
힘없이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한나절을 무작정
거리를 배회하던 그는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언젠가
봐두었던 짓다만 페트로그라트스카야 아파트
공사장으로 숨어들어 갔었다.
다섯 채의 짓다만 아파트는 5층까지 외벽과 바닥과
계단 등 기본 틀은 다 갖춰진 상태였다. 빅토르는
낮이 되면 빈 창문으로 바다가 보이리라 짐작되는
위치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그는 물론 지난 사흘
동안 누구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검은
보리빵과 끄바스와 담배를 확보해두고 어디를
둘러보아도 벽뿐인 짓다만 엉성한 아파트 콘크리트
벽에 기대어 지냈다. 그동안 그에게는 굶주림을
채워주는 빵이나 갈증을 풀어주는 끄바스보다
외로움을 달래주는 담배가 훨씬 더 절실하게
필요했었다.
빅토르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은 벌써 이태
전의 일이었다.
쉬꼴라 5,6학년만 되면 남자, 여자할 것없이 많은
숫자의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물론
학교나 가정에서 어린 그들의 흡연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다 숨어서 몰래 피우고는 했다. 숨어서
피우는 담배는 거기에 따른 스릴까지 겹치는 때문인지
그들에게는 멋지고 맛있게 느껴졌다. 빅토르도 별다른
고려없이 친구를 따라 담배를 시작했고 이제 그 맛을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머니로부터는 이미 묵시적인 허락을 받기도 했다.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와 책상 서랍을 열어본
빅토르는 거기에 담배와 성냥이 한갑씩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빅토르는 아무 말없이 그것을
태웠다. 일주일 후 또 담배와 성냥이 들어 있었다.
빅토르는 이번에도 그것을 아무 말없이 태웠다.
그로부터 또 일주일후 책상 서랍 안에 같은 담배와
성냥이 들어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는 담배를 아무
스스럼없이 다 태웠다. 빅토르는 그것이 어머니가
자신이 담배를 피우는지 안 피우는지를 떠보기 위한
것임을 눈치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응답을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어머니는 자청해서 빅토르의 용돈을 늘려
주고는 했다. 그렇듯 빅토르는 어머니로부터 공공연히
허락을 받고 담배를 피우게 됐던 것이다.
카페 네바는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과연
브로트스키 거리 초입에 레스토랑 네바가 있고 거기에
붙어있다시피 작은 카페 네바의 간판이 보였다.
카페는 침침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낯익은 담배
연기와 향기로운 커피 냄새가 훅 끼쳤다. 창문마다
두터운 커튼이 드리워져 외부의 광선을 차단하고 있고
벽이며 천정에 붙어 있는 색전구들은 조도가 매우
낮았다.
빅토르는 한동안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차츰 어둠에 눈이 익어갔고 주위가
식별되기 시작했다.
입구의 작은 간판이 던지던 인상과는 달리 안은 꽤
넓었다. 스무남은 개의 테이블에 손님들이 앉아 있고
안쪽 술병이 즐비한 선반 앞의 바텐더는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바에서 더 안쪽에는 드럼과
피아노 등 연주시설도 보였다.
누군가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빅토르는
그것이 자기를 부르고 있는 것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자레치나야가 먼저 일어나 손을 높이 쳐들었다.
"난 영 못볼 줄 알았어."
자레치나야의 눈에 들어온 빅토르의 모습은 몹시
추레했다. 얼굴은 초췌했고 뗏국이 흐르고 있었다.
옷차림은 남루하고 더러웠다. 어딘가 더러운 물에서
썩다 나온 푸성귀같다는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쳐갔다. 자레치나야는 눈시울이 금방 뜨거워짐을
느꼈다. 빅토르는 그러나 자레치나야의 높이 쳐든
손을 불이 번쩍 나도록 기운차게 쳤다.
"유령으로 생각하렴."
나타샤도 마찬가지로 그를 보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디 지하도나 지하철 같은 데서 뒹굴다
온 것인지 빅토르의 모습은 초라하고 더러웠다.
그러나 빅토르는 일부러 과장된 제스처를 지으며
펴들고 있는 나타샤의 손도 힘껏 때렸다.
"집으로 들어간 거야?"
빅토르가 자리에 앉자 빠쉬코프가 입을 열었다.
빅토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한테서 여러 번 전화가 왔었어.
크질오르다를 떠난 지 며칠이 지났다는데 아무 연락이
없다면서 혹시 네게서 연락이 오면 꼭 좀
알려달라시더군."
어머니라는 말이 나오자 빅토르는 육중한 물체가
가슴을 내리 누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연락했다는 말은 아니지?"
"물론 너 생각을 모르는데. 하지만 어미니께서 널
여간 걱정하지 않으셔."
"내게도 몇 번 전화를 하셨어. 너가 돌아오리라는
건 믿지만 기다리기가 고통스럽다고 하셨어."
가예프가 막심을 거들었다. 빅토르는 차라리 안들은
것만 못했다.
"어머니를 고통스럽게 하면 안돼."
자레치나야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 두자. 어머니 생각을
알았으니 비쨔가 알아서 할 일이다."
막심이 이야기를 막았다.
"그래, 그동안 어딨었어?"
자레치나야가 고개를 빼늘여 빅토르를 쳐다보며
물었다.
"바이칼로, 중앙아시아로 돌아다녔어."
"아, 그렇지. 바이칼로, 중앙아시아로 떠돌아다니는
부랑자가 됐다는 말은 들었어. 그래 재미있었어?"
"사람이 그립다는 것을 배웠다고나 할까."
"사람이 그립다는 걸 배운 사람이 이제서야
나타나?"
"아, 그렇지. 사람이란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을 잘못 말한 것이야."
"대단한 깨달음이셔."
"세상을 떠돌다보니 사소한 것도 크게 보이더라구."
빅토르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넌, 우리를 배신할 생각은 아니지?"
갑자기 빠쉬코프가 윽박지르듯 물었다.
"배신이라니?"
빅토르는 예기치 못했던 말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아니면 그렇게 오래 연락도 안해?"
"아, 난 또 무슨 말이라고. 오늘 이렇게 만났잖아."
"무슨 일에나 적절한 때가 있는 거야. 우리에게
너무 오래 걱정을 끼쳤다고 생각지 않아?"
"하기야, 그런 점이 있군."
막심의 말에 빅토르는 가슴이 훈훈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 간섭을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머리
한구석으로부터 슬며시 일어났다.
"우리를 친구로 생각했다면, 더구나 우리는
제6병동을 이태나 함께 꾸려온 동지들 아냐. 그런데
전화 한통도 안할 수 있어?"
"알았어. 그만 해둬. 아까도 말했지만 가는 곳마다
전화가 없었을뿐이지 마음은 그렇지 않았어."
"그래, 마음은 그러지 않았다는 말을 믿기로
하겠어."
"담배 한대 줘."
담배를 건네주던 손을 불쑥 뻗어 빠쉬코프는 갑자기
빅토르의 팔을 불끈 잡았다. 그는 팔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고 으스러지란 듯 꼭 쥐었다.
"난 두뇌가 좋은 사람은 두 번 어리석은 짓은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 있어. 그 말을
믿겠어."
"난 어리석은 짓 한 적 없어."
"너의 그 부랑기를 말하는 것 아니야. 전화를 옆에
두고 보지 못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
빠쉬코프는 그래놓고서 웃었다. 빅토르도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았어. 명심하지."
"헌데, 비쨔 너가 없는 동안 우리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어. 우리가 마지막 연주를 했던 것이 벌써 두
달째나 되어 가잖아. 그래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있어야지."
"무슨 좋은 계획이라도 있어?"
"몇 군데 카페에 부탁해 놨어. 여기 네바에서도
생각해 보자고 했고. 안되면 거리에 나가서라도
연주를 하고 싶어."
빅토르의 뇌리에 순간 지하보도의 한쪽에서 연주를
하던 거리의 악사들의 모습이 얼른 스쳐갔다. 연주
솜씨는 결코 전문가들에 손색이 없어 보이는데 그들은
거리에서 바이올린이나 아코디온이나 기타 연주를
하며 그들을 빙 둘러싸고 있는 청중들 코앞에다
모자를 들이밀고는 했다. 청중들은 묘한 미소를 띠며
코페이카 동전을 모자에 던져 넣고는 했었다.
"지하철 입구 같은 데서 연주회를 연다?"
빅토르는 별로 달갑지 않았다.
"지하철 입구면 어때 우리 연주를 들어줄 사람들만
있으면 나는 아무 데서나 연주하겠어."
빠쉬코프는 단호한 어투였다. 이미 결심이 선
모양이었다.
"동전 몇 푼 받으려고?"
빅토르는 빈정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비쨔. 내 맘 모르겠어? 돈 때문이 아냐. 나는 여러
사람 앞에서 연주를 하고 싶어."
"그래도, 순수하게 출발한 우리가 그런 타락한
모습을 보여서 될까?"
빅토르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게 왜 타락이야. 연주할 곳 없는 우리가
불쌍하지."
빠쉬코프는 빅토르를 설득시키지 못할까봐 조바심이
났다.
"로스트라 예술학교 팀들은 벌써 여러 번 거리에서
연주를 했었어."
옆에서 듣고 있던 나타샤가 빅토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로스트라 팀들이?"
로스트라 예술학교 팀이라면 빅토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팀의 리더 알리에프는 전자음악에 상당히
재능이 있다는 평판을 듣는 아마추어 가수였다.
"카페에서 노래할 무대를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그게 쉽지 않을 것 같거든."
빠쉬코프는 빅토르를 애원하듯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빅토르는 빠쉬코프의 시선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나도 실컷 북을 두드리고 싶어. 어디서라도 좋아."
가예프가 빅토르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빠쉬코프보다 더 간곡하였다.
"아까 막심도 말했지만 우리가 모여 연주했던 것이
벌써 두 달이 다 돼 가잖아. 나도 미친 듯이 기타를
치고 싶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던 기억이
까마득해."
뜨로피모프마저 간절한 눈으로 빅토르를
쳐다보았다. 빅토르는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빅토르도 연주를 하고 싶은 마음은 똑같았다.
멤버들과 어울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했다. 많은 사람들이 연주를 들어주면
더 신이 날 것이었다. 연주는 청중들이 많을수록
신명이 나 정신없이 연주와 노래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여 폭풍처럼 연주를 하고 나서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고 싶었다. 연주를 마치고 땀에
젖어 있을 때의 충만감과 자족감, 그 순간이 아련한
향수처럼 떠올랐다. 학교에서 백여 명의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졌던 마지막 연주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때 아이들은 얼마나 열렬히 즐기며
호응했던가. 빅토르는 그때 마치 영웅이라도 된 듯
고양된 기분이었었다. 물론 그 연주회가 화근이 되어
학교로부터 추방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어쨌든 그 마지막 연주회의 기억이 빅토르의 피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러나 아직도 빅토르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당국에 발각되면 혼나는 것 아냐?"
"물론 당국에서야 못하게 하지. 지하도나 지하철
입구, 번잡한 곳에서 요란한 연주를 하는데 경찰이
보면 가만두겠어. 로스트라 팀들도 몇 번
잡혀갔었나봐. 그렇지만 못하게 한다고 말을 듣나."
빠쉬코프는 그런 게 무슨 대수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더구나 아직 록은 당국에서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일이야 늘 일어나지 않겠어. 우리가
요령껏 해야지."
가예프 역시 그런 일쯤은 이미 각오하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글쎄, 어렵겠구나!"
빅토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는 하겠어. 그런 곳이 아니면 누가 우리
연주를 들어주겠어."
빠쉬코프의 결심은 이미 굳어 있었다.
"좀더 시간을 두고 기회를 기다리면 안될까?"
빅토르는 까닭 모르게 불안하였다.
"막연히 기다리는 것보다 그렇게라도 연주를 해야
기회가 올 걸!"
빠쉬코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빅토르는
빠쉬코프의 뜨거운 시선을 피해 버렸다.
"글쎄......."
빅토르는 친구들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끝내 확답을
하지 않았다.
카페 네바를 나온 빅토르는 친구들과 헤어졌다.
빠쉬코프는 빅토르가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헤어지려하자 자기 집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빅토르는 가볼 데가 있다고 거절했다.
"그럼, 저녁에라도 꼭 연락줘. 아니면 내일은 꼭
만나야 돼."
"알았어."
"꼭 연락해."
빠쉬코프는 헤어지기 전 빅토르의 손을 꼭 쥐었다.
"알았다니까."
빅토르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친구들과 헤어졌다.
빠쉬코프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 빅토르를
바라보았다. 빅토르의 초췌한 모습이 측은하기 짝이
없었다. 또 어느 곳에 가서 지내겠다는 것인지. 저
몰골을 보면, 필경 어딘지 모르지만 노숙을 하는 게
틀림없어. 팔짱이라도 꽉 끼고 집으로 데리고 가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그러나 저 고집을 누가 꺾을
수 있겠어, 하는 생각에 그만 후회를 거둬들였다.
"나하고 함께 가면 안돼?"
친구들과 헤어져 얼마를 걸었을까. 또각또각,
뒤에서 빠른 구둣소리가 들리더니 자레치나야가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나, 비쨔의 여행담 듣고 싶단 말이야."
빅토르는 얼핏 자레치나야를 돌아보았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자레치나야는 빙긋 웃었다.
그러나 빅토르는 대답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게다가 집에 엄마가 없어. 모스크바에 갔는데 며칠
있어야 올거야."
"내게 있을 곳을 제공하겠다, 그 말이군?"
빅토르는 냉소적이고 야유 섞인 어투로 빈정거렸다.
"어떻게 생각해도 좋아. 가능하다면 밧줄로
포박해서라도 끌고 가고 싶은 걸."
"내 보금자리는 거대한 아파트촌이야. 그곳에 가면
불편한게 하나도 없어."
"아파트촌?"
자레치나야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여러 채의 아파트가 서 있는 곳이야."
"믿을 수 없어. 지금 비쨔가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어떤 꼴을 하고 있는데?'
빅토르는 오른발 발꿈치를 딛고 빙그르르 한바퀴
맴을 돌아보였다.
"아까 비쨔를 봤을 때 눈물이 나서 혼났단 말야."
"내가 그렇게 서러워 보였어?"
"불쌍해 보였어. 그냥 놓아주지 않겠어. 내가
데리고 가서 목욕도 시키고 음식도 먹이겠어."
"그렇게 해서, 눌러 있겠다면 어쩌려구?"
"그럼 눌러 있으라지."
"엄마가 동양계 건달을 좋아하겠다!"
"엄마의 삶이 아니잖아."
"그럼 날 남편으로 맞아들일 생각이야?"
"안될 것도 없지."
자레치나야는 빅토르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자레치나야가 손해 보는 짓이야."
"이익 보려는 생각은 애시당초 없으니 걱정마."
"글쎄...... 후회할 짓은 서로 안하는 게 좋을
거야."
"어떻든 지금 내 생각은 뜯어고칠 수 없어. 함께
가야 해."
"아냐. 나는 갈 데가 있어."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를 염두에 두고 말했다. 물론
만나기로 약속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리술
아저씨를 만나러 갈 생각도 없었다. 간다면
페트로그라트스카야 아파트 공사장의 아지트로 숨어들
수밖에 달리 갈 곳도 없었다. 빅토르는 혼자 있고
싶었다.
"그럼 그곳에 함께 가지 뭘."
"함께 갈 데가 아냐."
"무슨 일인데?"
"나 혼자만 알아야 되는 그런 일이야."
"참 어렵게 산다! 그럼 날 이렇게 길에다 버릴
거야?"
"다음에 예의를 갖추어 모실게. 오늘은 이대로
가봐야겠어."
빅토르가 막 돌아서려는데 자레치나야가 급히 그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얼른 손을 빼더니
자레치나야는 급히 정류장 쪽으로 뛰어갔다.
주머니에는 5루블리의 돈이 들어 있었다. 당황한
빅토르는 뛰어가는 자레치나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급히 그녀를 부르려 했다. 그러나
곧 도착한 트롤리버스에 탑승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본
그는 무연히 벌린 입을 닫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그는
천천히 정류장으로 다가갔다. 자레치나야가 탄
트롤리버스는 이미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빅토르는
자레치나야가 넣고간 돈으로 버스표를 구입했다.
버스표를 주머니에 넣으며 그는 해를 쳐다봤다.
아까 카페 네바를 나올 때도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해를 쳐다보았었다.
그때는, 어두워질 무렵까지는
페트로그라트스카야까지 걸어 갈 수 있을까, 헤아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버스표를 산 이번에는 어디서
얼마나 더 서성거려야 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릴까
하는 생각으로 쳐다본 것이었다.
다음날 빅토르는 또 카페 네바로 나갔다.
빠쉬코프를 비롯한 어제의 친구들이 그대로 다 나와
있었다.
"자레치나야, 어제 고마웠어."
빅토르는 낮게 속삭였다.
"어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나타샤가 관심을 나타냈다.
"그냥, 우리만 아는 일이야."
"언제부터 두 사람이 우리였어.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해지는 걸."
"어제 내가 술을 한 병 사줬거든."
자레치나야가 나타샤에게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어제 그 돈이 내게 술이라도 마시라고 준 것이란
말인가.
"난 또 뭐라고, 하기야 나도 비쨔 행색을 보고 뭔가
손을 써야겠다 싶었는데, 개똥 같은 자존심 하나로
사는 게 비쨔 아냐. 괜히 그런 말 했다가 어떤 무안
당할지 몰라 관뒀더니, 넌 그래도 나보다 용하다,
얘."
"그런 일에 체면 따져 되겠어! 마음이지."
그날의 이야기 주제도 어제와 같았다. 거리의
악사로 나가자는 것이 주제였다. 빅토르도 그들의
분위기에 휩쓸릴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그러나
빠쉬코프의 강요에 완곡히 반대 입장을 취해오던
빅토르는 빠쉬코프의 다음 한마디에 그만 백기를 들고
말았다.
"우리 지금 '빨라따 세스또이'(제6병동) 멤버들로서
만난 것 아냐?"
빅토르가 출연할 수 있는 카페를 더 알아보자고
주저하자 빠쉬코프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맴버들은 리더의 말에 복종해야 되는 거
아냐?"
"그렇지. 그렇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맞장구를 치며 모두 빅토르를
쳐다보았다. 빅토르로서도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알았어. 무서워서 살겠나. 리더의 명령에
순종할게, 그렇게 눈총주지 말아."
빅토르는 하는 수 없이 웃으며 겸연쩍게 말했다.
그때 모두의 시선이 빅토르의 등뒤로 쏠렸다.
빅토르는 등뒤에 뜨거운 기운을 느끼며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가 거기 서
있었다.
"어젯밤 어머니 전화를 받았어. 나로서는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어."
빠쉬코프는 그 순간 얼굴을 붉히며 급히 변명했다.
빅토르는 잠시 빠쉬코프를 노려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이 많았구나!"
카페를 나오자 어머니가 빅토르의 아래 위를 살피며
촉촉히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너에게 아무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빅토르는 어머니의 말을 알아들었다. 빅토르의
아픔을 함께 앓아 주지 못한 것이 마음 아프구나,
그렇게 들렸다.
"연락도 한번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예의상 그렇게 말했으나 빅토르는 전혀 죄송한
마음이 아니었다.
"나보다 아버지가 더 걱정하셨단다."
아버지가 걱정했을 리 있나요. 늘 부끄럽게 여기는
아들인데, 눈앞에서 없어지자 속이 시원했을 걸요.
어머니도 의례적인 말을 한다고 여겼다.
어머니는 궤도전차 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떼놓았다.
거기서 궤도전차를 타면 그들이 사는 아파트에 닿을
수 있었다. 어머니를 따라가 만나게 될 아버지의 성난
모습이 떠오르자 저절로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너가 여행 가 있는 동안 내가 몇 군데 학교를
알아봤다. 너가 없는 사이 야간기술학교에서 입학을
허용한다는 연락이 왔더구나."
빅토르는 야간기술학교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당장의 걱정은 아버지와의 대면문제였다. 죽을 각오를
할 수밖에 없으리라.
"야간학교라도 다니겠어요."
빅토르는 어머니가 한없이 고마웠다.
"수속을 다 밟아놨다. 내일부터라도 너가 나가기만
하면 돼."
"알았어요. 내일부터라도 다닐게요."
두 모자는 그들 앞에 와서 선 궤도전차에 탑승했다.
"그럼 낮에는 자유롭겠군요?"
궤도전차는 한산했다. 그들은 빈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자리를 잡고 앉은 다음 빅토르가 말했다.
"아니다. 라이욘에서 너 취직자리를 마련해두었다는
연락이 왔었다."
"어딘데요?"
"아마, 도금공장이라고 했지!"
사회 제도는 무섭게 치밀하고 조직적이었다.
학교에서 제적시킨 학생은 공장에서 일하도록 즉각
조처가 된 것이었다. 빅토르는 아연해졌다. 그 조처를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리라.
아버지와의 대면은 빅토르가 걱정했던 것보다 쉽게
풀렸다.
부자간에 어떤 이해의 장이 마련되어 거북했던
사이가 해소된 것이 아니었다. 그날밤, 집에 들어온
로베르트는 빅토르를 얼핏 일별한 다음 왔구나,
한마디 하고는 그만이었다. 빅토르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부딪치지
않으려는 눈치도 보였다.
빅토르는 그렇듯 쌀쌀한 아버지를 계속 미워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 싶기도 했다. 빅토르는, 사람이란
어떤 적이 존재해야 자신의 발전을 더욱 꾀하게 되는
것이라고 어디서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는 불행히도
가장 가까워야 할 육친을 적으로 두게 된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빅토르는 낮이면 공장에 나가 일을 하고
저녁에는 야간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야간학교의 공부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공장은 얼마 가지 않아 싫증이 났다.
11. 고향, 꼭 가고 싶은 곳
도금공장에서는 낮이면 일년 열두 달 언제나
황갈색의 황산니켈용액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황산과 염산 등의 약품을 넣고 끓이는 전기솥에서
뿜어나오는 화공약품 냄새는 늘 공장 안에 빼곡히 차
있었다.
그 때문에 빅토르는 출근하고 한 시간만 지나면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빅토르가 하는 작업은 가장
초기 단계의 공정으로 매우 단조롭고 반복적인
것이었다. 청결한 걸레로 도금할 쇠붙이나 플라스틱
제품의 먼지를 털고 기름기를 닦아내고 철저히
건조시킨 다음 그것을 다음 공정으로 넘기는
일이었다. 다음 공정은 그 물건을 황산니켈 용액이
끓고 있는 전기솥에 넣고 일정한 시간 끓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 건져 올린 제품은
맑은 물에 세척되어 다시 빅토르의 손으로 돌아왔다.
빅토르는 그 물건들을 통풍이 잘되는 곳에 옮겨
건조시켜야 했다.
여성의류에 다는 단추, 손목시계 케이스, 각종
계기판의 테, 도어핸들, 장난감 부속, 자동차 장식물,
계급장 등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각종 반짝거리는
물건은 다 그 공장을 거쳐 갔다. 그것들은 알루미늄,
구리, 아연 등 비철금속이나 플라스틱 제품이 주종을
이루었다.
대개 처음 공장에 들어올 때는 검고 칙칙한
물건들이, 그러나 공장을 떠날 때는 번쩍번쩍
금빛이나 은빛을 뿜으며 눈부신 모습이었다. 어떻게
보면 물건을 아름답게 화장을 시키는 셈인데 그렇듯
물건을 화장시키는 작업장으로서는 당치않게도 그
공장의 환경은 열악했다.
바닥은 항상 물기로 질척거렸다. 흙탕물이 튀겼고
화공약품 냄새로 질식할 것 같았으며 먼지가 꽉 차
있었다. 황산니켈 용액이 끊는 전기솥 근처의 모든
물건은 용액이 튀어 대개 구멍이 뚫려 너덜거렸다.
주위에 어디 성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천장에
집진기와 환풍기가 있었으나 그것들을 아무리 열심히
돌려도 노동자들은 늘 두통을 앓았다.
그러나 빅토르는 아무 불평없이 공장을 다녔다.
따라서 도금공장에 다니는 동안 빅토르에게는
세상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점점 더 쌓여갔다. 도금할
물건의 청결상태와 탈지상태, 건조상태 등을 철저히
점검하고 그것을 바구니에 넣어 건네주거나 황산니켈
용액에서 건져올려 찬란한 금빛을 뿜어내는 물건들을
판에 널어 말리거나 다 건조된 물건을 운반용
바구니에 넣어 창고로 옮기는 등의 일을 하면서
빅토르는 조금도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손과 발만 움직였을 뿐 마음과 정신은
조금도 그 노동에 기여하지 않았다. 엄격히 말하면
일과 그가 따로 놀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 공장에서
늘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일을 했다. 그러나
어찌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현실 인식은
세상에 대한 원망과 저주로 발전하였고
세상으로부터의 도망과 일탈을 꿈꾸게 되었다.
세상으로부터의 도망과 일탈은 그러나 죽음밖에 달리
길이 있을 수 있겠는가.
빅토르는 어느날부터 죽음을 은밀히 준비하였다.
언제라도 죽을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죽음은
쓰디쓰고 달콤한 유혹으로 빅토르와 늘 함께 있었다.
죽음의 반대편에는 그에게 위안이 될 무엇인가를
바라는 욕구로 충만해 있었다. 그에게 무엇이 위안이
되었겠는가.
그럴 때 목마르게 필요한 것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리술 아저씨를 만나는 일도
작은 위안이 되었다.
소비에트에서 살려면 먼저 인내심을 길러야 해!
언젠가 리술 아저씨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전에는 별로 실감하지 못했으나 멀리 여행을 다녀오고
또 고달픈 공장 생활을 겪게 되자 종종 그 말이
떠오르고는 했다.
리술 아저씨는 빅토르가 아는 한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 없는 매우 유식한
사람이었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외로운 거야.'
리술 아저씨는 언젠가 그런 말도 했었다. 하기야 리술
아저씨의 경우, 유식해서 외로운 것인지, 외롭기
때문에 유식한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어느 날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를 방문했다.
야간학교에 가기 싫어 결석하기로 작정한 날의
오후였다.
"너무 오랜만이다. 얼굴 잊어 버릴 뻔했구나."
"공장 다니랴, 학교 다니랴 늘 바빴습니다."
도금공장에 다니고 나서 빅토르는 한동안 리술
아저씨를 찾아오지 못했다. 공장을 마치면 야간학교에
가야 했고, 주말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
연습하느라 겨를이 없었다.
"그래, 공장 일은 힘들지 않니?"
"세상 공부하고 있는 걸요."
리술은 한때 빅토르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전의 일이었다.
빅토르가 학교를 퇴학 당한 후 새롭게 닥친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안쓰러움을 느끼고는
했다. 밝고 명랑하게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더라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이에게 그런 시련이 닥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세상 공부......."
"그래요. 소비에트에서는 인내심을 길러야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언젠가 어른들을 염두에 두고 괜한 소리를
지껄였는데, 그것 참!"
"후회하세요?"
"아니. 마침 퇴근하려던 참이었다. 별일 없으면 내
아파트로 가련?"
"그러죠. 그동안 저에게 많은 일이 일어났었어요."
"나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만, 학교에서 그런 일을
당했으니 어련했겠느냐?"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를 따라 압도버스에 탑승했다.
압도버스에서 내린 리술 아저씨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있는 마가진에 들어가 흘레쁘와 감자, 토마토 등을
사서 자루에 담았다. 그리고
마로제노에(아이스크림)를 사서 빅토르에게 건넸다.
빅토르는 혀끝에서 녹는 마로제노에의 맛을 오랜만에
즐기는 것 같았다. 여러 번 와봤으나 리술 아저씨의
아파트는 언제나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혼자
사는 아저씨가 언제 이렇게 손질하여 청결한지,
빅토르로서는 볼 때마다 궁금했다. 어머니가 늘
청소하는 집도 청결함에 있어서는 리술 아저씨의
아파트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토마토를 썬다, 차이를 끓인다, 흘레쁘를 내놓는다,
리술 아저씨는 한동안 분주하게 움직였다.
"너 얼굴을 보니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바삐 서둘렀다. 어서 먹으렴."
"예. 고맙습니다."
빅토르는 시장했던 터라 허겁지겁 그것을 먹었다.
"제가 지난번 크질오르다에 다녀왔다는 말씀
드렸던가요?"
우유로 목을 축인 다음 빅토르가 입을 열었다.
"그래, 바이칼로, 중앙아시아로 다녀왔다고 했지.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안했다."
"할아버지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을 했었어요."
"할아버지께서 관리 생활을 하시다 퇴임하셨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지요. 비록 지방 관리지만 꽤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셨대요. 그런 할아버지께서 할머니로부터 늘
핀잔이나 듣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해 있잖아요."
"퇴임을 하시고 늘 같이 있게 되자 할머니께서
공연히 들볶는 것이겠지."
"그러면 좋게요."
"......?"
"할아버지께 문제가 있었어요."
"할아버지한테?"
"그럼요. 제가 갔을 때 할아버지는 집에 계시지
않았어요. 집을 나가신 지 한달이 훨씬 넘었다
하셨어요."
"집을 나가셨다?"
"집을 나가신 게 한두 번이 아니었대요. 어떤 땐
보름만에, 어떤 때는 한달 만에 집으로 돌아오시기도
했는데,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닌 것인지 꼭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시고는 했대요. 그런데 이번에는 한달
보름이 지나도록 돌아오시지 않아 할머니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어요."
"그것 참 모를 일이구나."
"삼촌이 그러시는데, 할아버지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그렇게 집을 나간다는 것이었어요."
"으음, 그래!"
리술 아저씨는 순간 갑자기 숨을 멈추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가까스로 그렇게 신음 같은 소리를 토해
놓았다.
"할머니 말씀은, 아무리 그런다고 돌아갈 수 없는
고향, 크질오르다에 뼈를 묻을 생각을 해야 한다며
할아버지를 바보 취급했어요."
"으음, 그래!"
"할아버지는 집에 계실 때도 늘 동쪽 하늘만
바라보고 계신대요."
"그럴 수도 있을 게다."
"그런데 고향이라는 것이 사람을 그렇게 괴롭히는
건가요?"
빅토르는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글쎄다. 어디서 읽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만,
사람이란 죽을 때까지 어릴 때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다. 즉, 사람이란 태어나서 철날 무렵
정을 나누었던 사람들과 주변 풍광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는 날까지 그 정든 사람들과 더불어
살거나 철들 무렵에 살았던 고장을 떠나지 않고 눌러
산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너의 할아버지나 나 같은
사람은 누구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란다."
"아저씨도 그러세요?"
"그럼. 나는 사람 아니냐."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쳐다보니 겸연쩍다만, 나는 요즘 부쩍 내가
태어나 뛰어놀았던 고향에 대한 꿈을 자주 꾼단다.
가능하다면 나도 죽기 전에 꼭 한번 고향에 가봤으면
싶구나."
빅토르는 순간 리술 아저씨의 눈에 물기 같은 것이
어리는 걸 보고 슬며시 눈을 돌렸다.
리술 아저씨는 고향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 고향 이야기 때문에 리술 아저씨의
아파트를 나올 때까지 빅토르는 크질오르다에서
보았던 따마리스크에 대한 이야기는 끝내 꺼내놓지
못하고 말았다.
12. 거리의 악사들
드디어 '제6병동' 멤버들은 거리로 나갔다.
미리 마련한 프로그램에 따라 연주를 하기로 했는데
빅토르와 빠쉬코프가 교대로 노래를 부르고 가예프는
드럼을, 뜨로피모프는 베이스기타를 담당하기로 했다.
나타샤와 자레치나야는 청중들의 반응을 체크하는
한편 돈을 거두는 모자 담당을 맡기로 했다. 그리고
때때로 자레치나야는 뜨로피모프를 도와 베이스기타를
연주하기로 했고, 나타샤는 록 음악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바이올린으로 그들을 돕기로 했다.
그날, 오후 세 시경 그들은 가족들이 집을 비운
빠쉬코프의 집에 모였다.
빠쉬코프와 뜨로피모프, 자레치나야, 쏘피아,
나타샤 등은 모두 학교에서 조퇴를 하거나 아예
결석을 했고 빅토르와 가예프는 공장에 나가지 않고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며 어정거리다 약속된 막심의
집으로 모였다.
모두들 약간씩 긴장한 빛을 띠고 있었다. 거리의
연주회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무사히 끝난다면
다행이련만 만약 비밀경찰이나 그밖의 기관원의
단속을 받을 경우를 대비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까게베나 경찰한테 걸릴 경우 우리가 연주한
음악들은 누구나 다 아는 민요나 예술가곡이라고 딱
잡아떼야 해."
"그래야지. 하기야 아무리 들은들 그들이 우리
연주를 알겠어."
"그래 철저히 속여 넘겨야 해."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는 무조건 사방으로
튀고."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로 나가자 자레치나야와 나타샤는 마치
소풍가는 아이들처럼 즐거운 표정으로 짖궂은 장난을
주고 받았다. 빠쉬코프와 빅토르와 가예프는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했다. 뜨로피모프는 언제나 그렇듯
무덤덤한 얼굴로 앞장 서 마야코프스카야 역의 계단을
내려갔다.
바실레오스트로프스카야 선과 프라볼벨레시나야
선이 교차하여 환승하는 마야코프스카야 역은 언제나
승객들로 붐볐다.
네거리의 출입구가 한데 모여 있는 지하 1층
회랑에는 매표소가 있고 한쪽 벽면을 따라 담배와
초콜릿 따위를 파는 박스형 가게들이 몇 개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좌판을 펼쳐놓고 그 위에 장미며
카네이션, 백일홍 등을 파는 꽃장수들이 있었다.
새로 출발하는 거리의 음악가들은 꽃장수들이
난전을 펼치고 있는 곳에서 열 걸음쯤 떨어진 기둥
옆에 진을 쳤다.
빅토르는 아까부터 자꾸만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양 어깨에 납덩이라도 올려놓은 듯 거북한
중량이 줄곧 그를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혀도 굳어져
있었다. 다른 일행들이 없었다면 벌써 도망가고
말았을 것이다.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거북한 느낌은 케이스를 열고
기타를 꺼낼 때도 손끝에 느껴졌다. 손가락이 굳어져
말을 잘 듣지 않는 듯했고 그것을 어깨에 매고 줄을
고를 때도 전과는 다른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는 일, 지나가는
행인들을 일순 살펴본 빅토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레치나야와 나타샤의 기타 듀엣으로 거리의
음악제는 막을 올렸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연주가 끝나갈 무렵 구경꾼은 그들을 둘레로 울타리를
치기 시작했다. 기타 연주가 끝나자 빠쉬코프가
빅토르에게 눈짓을 했다. 노래를 부르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빅토르는 양 어깨를 추스러올리며 난처하다는
시늉을 했다. 빅토르가 아직 노래 부를 각오가 덜
되었음을 알아차린 빠쉬코프는 얼른 자신이 앞으로
나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푸쉬킨의 시에다 그 자신이
곡을 붙인 노래였다. 노랫말을 알아들은 청중들은
쉽게 공감을 나타냈다. 그들 또래의 청소년들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돋웠다.
사람들의 울타리는 두겹 세겹으로 늘어갔다.
빠쉬코프가 세 곡을 부르고 나자 빅토르는 더
못한다고 버틸 수가 없었다. 바쉬코프의 뒤를 이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기타는
고음으로 반주를 했고 그는 아주 낮고 낮은 저음으로
노래했다.
처음에는 하도 낮아 주의깊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의 노래는 소음에 묻혀 청중들의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청중들의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노래에 매몰되어가자 그의 음성은 점점 제
소리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의 노랫말은 색다른
의미를 띄고 청중들의 귀로 속속 들어갔다. 세속과
관습과 이미 있어온 것들에 익숙해 있는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의 노래가 노래 같지 않았다. 그것은
뜻없이 중얼거리는 넋두리 같기도 또는 젊은이의 푸념
같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세상의 어떤 틀에 갇히기 전, 그러니까
아직도 세상을 익혀가고 있는 청소년들의 귀에는 또
다르게 들렸다. 전부터 존재했던 것들은 나이 많은
이들의 몫이고, 나이 많은 자들이 세상을 떠날 때
함께 그의 관 속에 넣고 떠나주기를 바라는
젊은이들은 빅토르의 노래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였다.
세상의 결함들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자유와 개혁을
염원하는 젊은이들의 야망과 이상을 숨기지 않고 다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 뜻을 이루기 힘들게 되어 있는
세상 구조에 도전하는 젊은이의 패기가 팽팽하게 살아
있었다.
빅토르가 노래하고 있는 동안 몸이 풍선처럼 뚱뚱한
여자들이며 피로가 얼굴을 덮고 있는 사내들은 발길을
돌려 총총히 제 갈길을 가버렸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그의 노래를 끝까지 지켜서서 들었다.
젊은이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숫자가 늘어갔다.
그들은 빅토르의 노래가 지니고 있는,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벅차나 피할 수는 결코 없는 계시 같은,
어떤 의미의 잠언 같은 메시지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빅토르가 노래를 마쳤을 때 그를 지켜보며 노래를
듣고 있던 젊은이들은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아가씨 몇이서 손바닥을 마주쳐 짝짝짝 하다 그쳤다.
빠쉬코프가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빠쉬코프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아까 박수를 쳤던
아가씨들은 반주를 하고 있는 빅토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시 빅토르가 노래할 차례가 되었다. 그가 노래를
시작하자 아가씨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노랫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있는 대로 다
세워 기울였다. 리듬에 맞추어 턱을 끄덕끄덕 하는
아가씨도 있었다. 어떤 젊은이는 발장단을 치기도
했다.
그때 나타샤가 모자를 들고 구경꾼 앞을 한바퀴 빙
돌아다녔다. 구경꾼들은 모자에다 1꼬뻬이까 동전을
주로 던져넣었다. 어떤 사람은 1루블리 짜리 지폐를
정중하게 넣는 사람도 있었다. 모자에다 돈을
던져넣는 구경꾼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미소가 어려
있었다.
빅토르는 다섯 차례나 노래를 불렀다. 빠쉬코프는
세 차례, 자레치나야와 뜨로피모프의 기타 합주가
두번, 자레치나야와 나타샤의 바이올린 합주가
한차례씩 소개되었다.
연주회를 시작하고서도 한동안 빅토르는 긴장을
풀지 못했고 울적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버릇 같은
공연한 상념의 나락에 떨어져 좀해 빠져나오지
못했다.
노래는 무엇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으나 이제 노래는 자신을 존재케하는 이유였다.
노래가 없다면 그는 자신이 무의미한 티끌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노래를 통해 그는 기쁨을 얻고
슬픔을 느끼고 좌절의 고통을 겪었다. 어머니의
사랑도 노래가 지니고 있는 위안에는 따르지 못했다.
그가 몇 해 동안 속앓이를 하며 사랑했으나 결코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아냐(아니찌까 애칭).
그는 혼자서 그녀를 좋아했었고, 그 짝사랑의 대상인
아냐를 통해 그는 인생의 단맛 쓴맛, 기쁨과 고통을
경험했었다. 아냐로 인해 경험한 그 숱한 고통도
실로, 노래로 인해 겪은 단맛 쓴맛, 기쁨과 고통,
쓰라린 번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연옥으로 가는 궤도차를 타더라도
그것은 이제 노래 때문일 것이고 천국으로 가는
날개를 얻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노래를 통해서일
것이라 여겨졌다. 다시 말해 노래는 그의 존재의 모든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에게는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그런데 그토록 소중한
보물을 이렇게 길에다 아무렇게나 버리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그는 한동안 그런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길에서 노래 부르고 있는 그 행위를 길에다 노래를
버리고 있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천사가 영혼을
악마에게 양도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용서 못할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노래를 몇 곡 부르고 나자 점점 생각이
바뀌어갔다.
그는 혼자 견디는 것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으나,
혼자 견디는 것의, 그 죽은 후에 살을 다 내리고
마침내 남는 뼈에 피어날 인광처럼 섬뜩한 외로움을
너무나 자주 겪어, 이제는 그 몸서리나는 외로움을 더
견디고 싶지 않아 친구를 찾게 되고, 그렇듯 목마른
헤맴 끝에 간신히 만난 친구들을 잃을 것이 두려워
함께 거리로 나선 것을 줄곧 속으로 후회하고 있던
그는 그러나 노래를 몇 곡 부른 다음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노래를 듣는 청중들의 진지한 태도에 눈이
돌려졌다. 장난기 섞인 청중도 없지 않았다. 두서넛이
어울려 노래 부르는 그들을 흉내내거나 꼬뻬이까
동전들과 지폐가 한 2루블리 정도 들어 있는 모자
속을 들여다보며 비웃음을 던지는 청년도 있었다.
그런 굴욕감은 그러나 무엇이 못마땅한지 금방
침이라도 내뱉을 듯 얼굴을 찌푸리고 그냥 지나가는
행인에게서 느끼는 것보다는 덜했다. 그들의 철저한
무시가 도리어 치욕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의외로 그들의 노래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눈을 반짝이며 열중해 듣는
아가씨도 있었고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는
청년도 있었다. 모자에 세 차례나 돈을 넣는 중년의
사내도 있었다. 가던 길을 포기해 버린 듯, 아니면
행선지를 잊어버린 듯 아예 눌러앉아 노래를 감상하는
눈빛이 초롱초롱한 소년도 있었다. 그들의 진지한
태도를 본 빅토르는 가슴에 서리처럼 앉아 있던
후회가 서서히 걷히는 것을 느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빅토르는
자신이 그들에게 노래를 한곡 한곡 나눠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를 열심히 듣는 그들은 가슴
속에, 혹은 머리 속에 자신들의 노래를 한곡 한곡
담아가리라 여겨졌다. 그런 생각 때문에 마지막 두
곡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다 쏟아부어 열창하였다.
그는 열심히 듣는 이들에게 자신의 노래를 열성을
다해 나눠주었던 것이다. 모두들 열심이었고,
우려했던 당국으로부터의 제재의 손길도 뻗치지 않아
가두 연주회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날, 첫번째 노상음악제에 대한 평가는 성공과
실패를 반반으로 보았다. 가예프와 자레치나야는
성공적이었다 하였고 나타샤와 뜨로피모프는
실패쪽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가예프와 자레치나야는 장소는 어디가 됐든
청중들에게 노래를 들려준 것만으로도 의의있는
일이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노래를 들어준 청중이 어디 하나 둘이었느냐,
그만하면 첫시도 치고는 성공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느긋해 했다. 그러나 뜨로피모프는
집시도 아닌 우리가 그런 지하철역 입구에서 노랠
부른 것을 성공했다고 즐거워할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은인자중 때를 기다리며 연습에 열중하는
것에 미치지 못했다고 말했다. 나타샤의 평가는 좀
달랐다. 모자 담당을 했던 그녀는 일곱 사람이 열심히
노력한 결과가 겨우 5루블리 70꼬뻬이까밖에 벌지
못했으니 그것을 어찌 성공한 연주회라 할 수
있느냐는 주장이었다.
"비쨔는 어떻게 생각해?"
빠쉬코프는 화살을 빅토르에게로 돌렸다. 빅토르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리로 나갈 가치가 있었어, 없었어?"
빅토르는 여전히 빙그레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앞으로 또 거리로 나가자는 가예프의 말을
지지하는 거야, 거부하는 거야?"
빠쉬코프는 거듭 다그쳤으나 빅토르는 역시 입을
꿰맨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유, 답답하긴. 그래 알았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란 말이지?"
빠쉬코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기 주장을 유보할 수도 있지. 그걸 가지고 왜
시비야?"
자레치나야가 장난기 어린 말투로 빠쉬코프를 향해
빈정거렸다.
"알았어. 우리 침묵의 가수님. 거리로 나가자면
나가고 나가지 말자면 안 나가겠다 이거 아니유?'
빠쉬코프의 비꼬는 말에도 빅토르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빠쉬코프를 쳐다보기만 했다.
가예프와 자레치나야는 노상음악제를 다시 열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다음주쯤 또 지하철역이나 궁정 광장이나
오스트로프스키 광장 같은 곳이나 또는 카잔 성당 뜰
같은 넓은 장소로 진출하여 음악제를 열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 준비는 가예프와 자레치나야가 맡도록 결정이
났다.
13. 자레치나야의 어머니
'제6병동' 멤버들의 두번째 가두 연주회는 예기치
않았던 일로 뒤로 미루어졌다.
자레치나야의 어머니 니꼴라예브나 자레치나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반 페트로프에 대한
외골수의 사랑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불행한 생애를
스스로 슬프게 마친 것이었다.
자레치나야는 언젠가 술을 마시고 푸념하듯
말했었다.
우리 못난 어머니, 나와 성을 같이 쓰는 못난
니꼴라예브나의 평생의 꿈은 오페라 '눈처녀'의
배역을 한번만 더 맡아 노래 부르는 것이었어.
콘세르바토리에 재학시 내 못난 어머니는, 학교
무대에서 눈처녀역을 맡아 노래했는데 그때 많은
칭찬을 들었다는 것이야. 그러나 누가 알았겠어.
그때의 그 칭찬이 그 못난이가 평생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이 될 줄을. 그리고 못난 우리 엄마
니꼴라예브나의 운명적인 사랑은 어쩌면 바로 그
눈처녀의 슬픈 사랑을 흉내낸 것이었는지도
몰라.......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작곡한 오페라 '눈처녀'는
서리의 왕 마로스와 봄의 요정 베스나 사이에서
태어난 스네구로치카의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스네구로치카는 사시사철 언제나 추운 숲속에서만
살도록 되어 있었다. 태양신 야리로의 최초의 빛과
사랑이 그녀에게 닿으면 죽게 될 것이라는 예언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젊은 목동 레르의
노래소리에 마음이 끌린 스네구로치카는 인간
세상으로 나와 레르의 마음을 끌어보려 갖은 애를 다
쓴다.
그러나 마음이 얼어붙어 있는 그녀는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한편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한 미즈기르는
약혼녀 크파바와 파혼한다. 억울하게 파혼 당한
크파바는 황제에게 중재를 간청했고, 중재를 위해
스네구로치카를 소환한 황제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눈이 부시지만, 그녀의 마음이 차갑게 닫혀 있어
사랑을 할 수 없음을 안다.
여름을 맞이하는 축제날이 돌아왔다. 목동 레르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축제를 장식한다. 황제는
그에게 원하는 처녀와 결혼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한다.
레르는 미즈기르로부터 파혼 당한 크파바를 원했고,
크파바는 사랑의 상처를 씻고 행복을 찾는다.
끝내 레르의 사랑을 얻지 못한 스네구로치카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가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어머니는 그녀의 간청을 슬픔 마음으로
들어준다. 어머니의 슬퍼하는 속내를 알지 못한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세상으로 다시 나온다.
스네구로치카는 미즈기르와 재회하여 사랑의 기쁨을
마음 가득 느낀다. 그들은 황제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결혼하기로 한다.
그러나 황제를 찾아가 사랑을 이루었음을 고하는
순간, 그때 마침 내리쬐는 태양신 야리로의 여름빛을
받은 스네구로치카는 가엾게도 그 자리에서 녹아
내리고 만다.
"못난 우리 엄마는 스네구로치카와 같은 운명을
타고 났던가봐."
자레치나야는 그런 넋두리로 어머니와의 마지막
작별을 준비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출생
내력을 털어놓았다.
"이반 페트로프, 들어 봤니?"
자레치나야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친구들을 향해
그렇게 첫마디를 뗐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볼쇼이 오페라단의 베이스 이반 페트로프, 못들어
봤어."
"그 이반 페트로프라면 여기 모르는 사람 있겠어."
"그 인간이 내 아버지야."
"뭐!?"
모두 거의 동시에 놀라 소리쳤다. 나타샤는 벌인
입을 닫지 못한 채 자레치나야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레치나야의 아버지가 그렇게나 유명한
볼쇼이 오페라단의 독주자 이반 페트로프라니, 모두
금시초문이었다.
일찍이 여러 음악제전에서 상을 받았고 특히
차이코프스키 음악콩쿨에서 최고상을 수상했으며
볼쇼이 오페라단의 독주자로 선정된 이래 지금까지 그
명성을 그대로 유지해온 그는, 무대에서의 연기력도
뛰어나 근래에도 볼쇼이 오페라에 가면 그가 타이틀
롤을 맡은 '보리스 고두노프'를 관람할 수 있었다.
그는 무소르그스키의 가곡이나 쇼스타코비치의
성악곡을 특히 잘 부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모스크바에 있다던 아버지가?"
소피아는 자레치나야의 어깨를 잡아 자기쪽으로
돌리며 따지듯 물었다.
"그래.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야."
"생물학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또 뭐냐?"
"법률적으로는 아니라는 말이야."
쏘는 듯한 자레치나야의 말에 소피아는 멈칫
놀랐다. 소피아는 그 말에서 대뜸 비극적인 냄새를
맡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난 아직 그 인간을 한번 만나본 적도 없어."
역시 그랬었구나. 빅토르나 빠쉬코프도 숨을
죽였다. 가예프는 다음 말이 궁금했던지 자레치나야의
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난 못난 엄마만의 슬픈 사랑의 씨앗이었거던."
그녀의 어머니 니꼴라예브나 자레치나야는
레닌그라드 콘세르바토리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그녀는 장차 소프라노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콘세르바토리를 졸업한 이듬해 그녀는 마침내
모스크바 볼쇼이 오페라단의 임시단원으로 입단이
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재능이나 실력이 인정되어
입단된 것이 아니었다. 볼쇼이 오페라단의 제작
담당자인 삼촌을 그녀가 조른 끝에 겨우겨우
임시단원으로 입단하게 된 것이었다. 입단 후 그녀는
가진 재능과 열성을 다 기울였으나 만년 단역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가끔 단역으로 이반 페트로프와 같은 무대에
오른 것이 빌미가 되어 분수도 헤아리지 않고 그녀는
그에게 사랑을 품게 되었다. 단역 가수가 당대 최고의
베이스 가수 이반 페트로프를 사랑하다니 당키나 한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맹목적인 사랑은, 마침 신이
그녀에게 불행을 심어주기 위해 손길을 뻗쳐 도운
탓이었을까, 페트로프와 몇 번 데이트를 하는데
가까스로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페트로프는 두번째 부인인 볼쇼이 오페라단의 최고
소프라노 나샤 마샤와 영원히 식지 않을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니꼴라예브나 같은 단역이나 맡는
임시단원을 깊이 사랑할 리가 없었다. 그렇듯
가망없는 사랑에 그러나 그녀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리하여 얻은 것이 자레치나야였다. 자레치나야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페트로프는 니꼴라예브나와의
사랑의 유지를 더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소프라노로서의 재능도 따르지 못했던 그녀는 얼마
가지 않아 단역도 얻지 못하고 천덕꾸러기로 전락했고
그리고 부질없이 설움을 쌓아가던 그녀는 결국 볼쇼이
오페라단에서 쫓겨난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재능이 뒷바침되지 못한 그녀에게 있어 삼촌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실패한 소프라노 가수는 불행의 씨앗 하나를 안고
레닌그라드로 낙향하여 모스크바 쪽을 바라보며
옛추억이나 반추하고 지내다 스스로 욕된 목숨을 끊고
만 것이다.
공교롭게도 니꼴라예브나 자레치나야는
스네구로치카와 같이 사랑을 이루지 못할 슬픈 운명을
타고난 것인가. 이반 페트로프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생명을 끊어 버려야 했다니.
빅토르는 자레치나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견뎌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이의 슬픔의 무게는 지구 같은
추로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니꼴라예브나 자레치나야는 무덤에 안장되지
못했다. 어머니 쪽의 친지들이 있었으나 그녀의
자랑할 것 없는 생애와 죽음이 달갑지 않았던지
그녀의 죽음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무덤에
묻어 그녀를 오래오래 기억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친지들은 그녀를 한웅큼의 재로 만들어 네바 강에다
뿌리고 말았다.
어머니를 재로 뿌리고 온 날 밤이었다. 슬픔에 젖어
있는 자레치나야를 혼자 남겨둘 수 없다고 생각한
친구들이 그녀의 아파트에 남아 함께 술을 마셨다.
자레치나야는 슬플 이유가 없으니 위안 받을 필요가
없다고 했으나 친구들은 그녀를 혼자 두기를 꺼렸다.
자레치나야는, 그녀 어머니는 페트로프의 사랑을 잃은
직후부터 이미 죽은 사람과 다름없었으므로 이번
죽음은 두 번 거듭 죽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조금도
슬프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빅토르는 그녀의
가슴 속에 큰 내를 이루며 흐르고 있는 슬픔을 감지할
수 있었다. 열두 시를 넘기고 막심과 가예프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빅토르는 남아 나타샤와 소피아와
마시던 술을 계속 더 마셨다. 아무래도 자레치나야의
슬픔을 꿰뚫듯 알고 있는 그로서는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담배와 술도 지쳤을 때 빅토르는 노래를 한
곡 불렀다.
그의 노래가 거의 다 그렇듯 보라빛 우수에 젖어
있었고 상처입은 사람의 신음처럼 고통스럽게 들렸다.
그의 노래는 슬픈 사람을 더 슬프게 하였다. 그의
노래가 이어지고 있는 동안 자레치나야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두어 옷자락이
흥건히 젖었다.
그날 밤, 슬픈 일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을 슬픈 일로 여긴 빅토르의 정서를 옳은 것으로
간주했을 경우이지만`.......
슬픔이나 고통은 여러 사람이 나누어 져야
가벼워진다고 했다. 그러나 자레치나야의 슬픔을
나누어 질 아무런 수단도 빅토르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 어떻게 어루만지고 쓰다듬어 주면
자레치나야의 슬픔이 가라앉고, 그녀가 위안을 받을
수 있을까. 술을 마시며 담배를 태우며, 노래 부르며
줄곧 그 생각만 하였다. 그러나 옆에 있어 주는 것
외에 다른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자레치나야의 친구들은 하나둘 돌아갔다.
새벽녘에는 마침내 나타샤와 소피아와 자레치나야
그리고 빅토르 넷만 남아 술을 마셨다.
얼마 후 소피아는 슬그머니 일어나 욕실 옆방으로
들어가는 기척이더니 감감 무소식이었다. 맥주가 반쯤
남아 있는 잔을 그대로 두고 나타샤는 소파에
기대더니 곧 눈을 감았다. 자레치나야도 술잔을 든 채
시들시들 눈을 감았다.
빅토르는 그들을 그냥 둔 채 슬며시 일어났다. 그는
거실에 붙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1인용 침대
하나와 붙박이장이 있는 작은 방이었다. 자레치나야의
옷가지가 눈에 띄었다. 자레치나야 방임을 알 수
있었다. 빅토르는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곧 날이 새겠거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그는 자신도 모르게 피곤의 호수로 깊이
잠수하였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빅토르는 몽롱한
가운데 전신에 야릇한 자극을 느끼기 시작했다.
안개같은 어렴풋한 의식 속에서 아련한 쾌감이
일어났다. 그런 그의 품으로 파고 들며 그의 탱탱하게
발기한 남성을 애무하는 여자의 손이 의식되었다.
여자의 머리 냄새를 맡으며 그는 어렴풋이나마 그것이
자레치나야임을 짐작했다. 자레치나야는 빅토르의
입술이며 혀를 숨가쁘게 빨아들이고 목이며 가슴을
애무했다.
마침내 그녀는 빅토르를 가로 올라타고 앉아 그의
남성을 자신의 부풀어 오른 몸 속으로 깊이
받아들였다. 명치께를 뚫고 솟아오를 것 같은
빅토르의 남성을 힘껏 흡입한 그녀의 몸은 빅토르의
남성으로 터질듯 가득 채워졌다.
쾌감에 몸을 떨며 빅토르가 어렴풋이 눈을 떴다.
그러자 자레치나야는 얼른 몸을 숙여 입술로 그의
눈을 덮어 버렸다. 그 순간 빅토르의 남성이 그녀의
전신을 빽빽하게 관통하는 것 같은 견디기 힘든
쾌감이 그녀를 몸서리치게 했다. 빅토르는 양손으로
그녀의 허리와 히프를 잡고 계속 밀고 당겼고
자레치나야는 빅토르의 동작보다 더 적극적으로
거기에 응했다.
자레치나야는 점점 호흡이 가빠졌고 비명을
질렀으며 빅토르의 가슴에 비오듯 땀을 흘리는 뺨을
가져다 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동작은 계속
더 격렬해졌고 비명소리는 더 높아졌다. 마침내
자레치나야는 빅토르의 등을 손톱으로 드윽 긁었고
귓볼을 불끈 물었다. 빅토르는 순간 폭포처럼 덮치는
쾌감을 견디느랴 그런 아픔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절정의 파도가 지나가자 자레치나야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고마워."
자레치나야는 끈끈한 목소리로 귓가에 소곤거렸다.
빅토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절정의 순간이
지나갈 무렵 거실에서 인기척이 들린 것 같아 신경이
거기에 더 쓰였다. 자레치나야의 비명소리가 거실에
들리지 않았을 리 없었다. 나타샤와 소피아가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자레치나야는 바로
어제 그녀의 어머니를 재로 만들어 네바 강에 뿌리지
않았던가. 그런날 밤에 쾌락의 정사를 치르다니,
그것도 께름칙했다. 그러나 자레치나야는 그런데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옆방의 인기척이 좀더
분명해지자 그녀는 고개를 들고 거기에 귀를
기울였다.
"일어난 모양이네. 커피라도 끓여 줘야 되겠지!"
그렇게 담담히 중얼거린 자레치나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다시 탱탱히 일어서 있는 빅토르의 남성을
발견한 그녀는 빅토르의 남성을 자신의 여성에 깊이
넣고 탐욕스럽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더 빠르게, 더
거칠게 그녀는 빅토르를 자신의 몸속으로 깊이깊이
빨아들였다. 비명소리를 자제하는 눈치였으나 그것이
잘 되지 않는지 헉헉 숨을 가쁘게 드내쉬었다.
자레치나야는 자신의 쾌락의 샘물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열심히 길어올렸다. 쾌락의 그릇이 마침내
다 채워지자 몸서리를 치며 깊이 모를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담배 한대 붙여줄까?"
자레치나야는 혀로 귓볼을 애무하며 속삭였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여
빅토르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주었다.
"갈증나지. 커피 끓여다 줄게."
빅토르는 커피보다 당장 물이라도 한컵 마시고
싶었으나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가는 자레치나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담배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담배는 피로를 다스리며 나른하게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도대체 자레치나야는 어쩌자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그것이 그녀의 외로움과 슬픔을 이기려는
노력이었던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미련을 안고 자살한
여인의 집에서 당사자의 딸이 뜨거운 정사판을 흥건히
벌이다니, 그런 민망스런 행동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죽은 자의 일과 산 자의 일은 분명히
구분된다는 것인가.
어쨌든 빅토르로서는 개운치 않은 기분이었다.
부엌쪽에서 여자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유리그릇 부딪치는 맑고 투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소리에 이어 사람들이 생활하며 내는
부스러기같은 낯익은 소음들이 들려왔다. 그런
소음들에 무연히 귀를 맡겨놓고 있는 사이 무엇
때문인지 빗줄기 같은 것이 가슴 속에 확 뿌려지는
듯한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역시 잘한 일은
아닌걸. 죽은 자를 마땅히 추도해야 할 때에, 죽은
자의 가장 슬픈 유족이 쾌락의 정사를 벌였다니, 그건
죽은 자를 배신한 것과 다름없는 행위일 터이지.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빅토르에게는 쓰라린 회한과
함께 배신에 따른 묘한 이율배반적인 쾌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리고 어쨌든 지난밤의 정사는 슬픈
사건이라는 생각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 슬픈
정사를 치른 후 열흘쯤 지나서였다.
빠쉬코프와 빅토르 등 '제6병동' 멤버들은 두번째로
가두 음악회를 열었다.
마침 여름이 마지막 자락을 여며갈 그런
무렵이었다. 북쪽의 호수지대에서 몰려온 검은 구름이
걸핏하면 비를 뿌리고, 핀란드 만으로부터 바람도
자주 불어왔다. 아스팔트 위를 뒹구는 자작나무며
미루나무 잎들이 자주 발길에 채이고는 했다. 이번의
가두 음악회도 가예프와 자레치나야의 극성을 어쩌지
못해 빠쉬코프와 빅토르가 동의하여 열리게 된
것이었다. 나타샤나 뜨로피모프는 마음은 내키지
않았으나 멤버들과 행동을 같이 해야 하는 암묵적인
사슬에 묶여 함께 악기를 들고 거리로 나온 것이다.
그들의 두번째 가두 음악회는 푸쉬킨스카야 역 1층
회랑에서 펼쳐졌다.
지난번의 마야코프스카야 역처럼 그곳도
환승역이어서 행인들의 왕래가 많았다. 지상에서
계단을 내려가자 우측으로 꺾여 넓고 긴 터널이
나왔다. 그 터널을 지나자 백열등이 주위를 밝힌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매표구가 있고 지하철
토큰을 삼키는 여러 대의 집표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집표기 안쪽에는 탑승장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요란한 금속성 소음을 일으키며 작동하고 있었다.
'제6병동' 멤버들은 매표구 건너편에 짐을 부렸다.
담배나 버스표를 파는 작은 가게 하나쯤은 있을 법한
공간인데도 다른 시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들이 전을 벌리기에는
안성맞춤의 장소로 여겨졌다. 빠쉬코프와 빅토르는
묵묵히 어깨에 매고온 기타를 벗어놓았고 가예프는
드럼 가방을 열고 드럼 틀을 꺼내 그것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자레치나야는 전처럼 마치 소풍나온 아이처럼 줄곧
즐거운 표정이었다.
나타샤는 좀 긴장된 얼굴로 들고온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그리고 작은 손가방에서 모자를 꺼냈다.
모자를 꺼내던 그녀는 자레치나야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구경꾼들의 코앞에 들이밀며 고뻬이까 동전을
구걸하게 될 나중의 일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자레치나야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가예프와 자레치나야의 분주한 준비가 끝났다.
자레치나야가 먼저 기타 솔로로 50년대에 이자벨라
유르베라가 불러 당시 소비에트 인민들로부터 널리
사랑을 받았던 '로망스'를 연주했다. 사랑도 성공하지
못하고 소프라노의 꿈도 이루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세상을 떠난 그녀의 어머니
니꼴라예브나가 평소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였다.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을 애틋하게 그리고 있는
내용의 그 노래는 요즘도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해
가끔 들을 수 있었다.
미트로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온
행인들이나 미트로를 타기 위해 지상에서 계단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이 연주하는 자레치나야와 그 일행을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자레치나야의 연주가 끝나고 나타샤가 그 뒤를
이었다. 바이올린을 어깨에 착 붙이고 활로 현을 몇
번 썬 다음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중
'프롬나드'와 '난장이'를 연이어 연주했다. 나타샤가
연주하는 동안 사람들이 하나둘 발걸음을 멈추고
연주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자레치나야와
나타샤의 가벼운 솔로 연주에 이어 빠쉬코프와
빅토르와 가예프와 뜨로피모프의 4인조가 어우러져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흔히 들을 수 있는 민요나
국민가곡을 연주했다. 이어 빠쉬코프가 지은 노래와
빅토르가 지은 노래를 두 사람이 교대로 부르며
연주를 계속해 나갔다. 그들의 노래는 템포가 빨랐고
가사는 자극적이었다. 그들의 노래는 어디서 자주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은 낯설고 신선한 그들의 노래에 관심이
끌렸던지 발걸음을 멈추고 하나둘 구경하기 시작했다.
빅토르가 노래를 두 곡 마치고 빠쉬코프가 교대로
다시 노래를 부를 때였다. 별안간 주위의 공기가
어수선해졌다. 바이올린과 아코디온과 첼로와 드럼을
들거나 멘 한떼의 젊은이들이 구경꾼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서며 도끼눈을 하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젊은이들은 '제6병동' 멤버들과 같은 또래들이었다.
남자 넷에 여자 둘로 숫자도 똑같았다. 빅토르는
그들이 자신들과 같은 목적으로 거기에 나타났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어깨에 메고 온 악기를
옆에다 부려놓은 그들은 상기된 얼굴로, 검은 모자를
들고 서성거리고 있던 나타샤를 손짓으로 불렀다.
나타샤는 빠쉬코프를 흘낏 돌아본 후 손짓을 한
젊은이에게로 다가섰다.
"너희들, 여기서 뭘 해?"
머리의 가리마 선이 선명한 푸른 눈의 앳된
젊은이는 나타샤를 쏘아보며 시비를 걸었다.
"왜. 보면 몰라?"
나타샤도 질세라 눈에 심지를 잔뜩 세우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여기서 비켜줘야겠어."
"왜?"
"여긴 우리 자리야."
젊은이는 나타샤 어깨너머로 연주 중인 빠쉬코프를
노려보며 말했다.
"여기가 너희들 자리라니, 여길 너희들이 샀다는
거냐, 세냈다는 거냐?"
나타샤는 지지 않고 야무지게 따지고 들었다.
"지난 4월부터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오후면 언제나
우리가 이곳에서 연주를 해왔어."
"그러니, 이곳 푸쉬킨스카야 역이 너희들 구역이니
비켜달라, 이 말이군?"
"말귀 한번 밝아 좋구나."
앳된 젊은이는 빙긋 웃었다.
"그렇게는 할 수 없어. 오늘은 너희들이 늦게
왔으니 너희들이 양보해야겠어."
"뭐, 우리더러 딴 데로 가라고?"
젊은이의 얼굴이 험상궂게 뒤틀어졌다.
"그래, 이 구경꾼들이 안보여. 지금 우리가 연주를
그만둘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나타샤는 일행을 둘러싸고 있는 구경꾼들을
바라보며 자신있게 말했다.
"허, 좋게 말로 하렸더니, 왜 이렇게 도도하게
나오지. 넌 비키고 저쪽 키 큰 친구더러 오라고 해."
젊은이는 뜨로피모프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던
뜨로피모프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왜, 무슨 일 있어?"
뜨로피모프는 나타샤에게 물었다.
"여기가 자기들 영역이니 우리더러 비켜달라잖아.
그렇지만 어디 이곳이 임자가 따로 있는 곳인가?"
나타샤는 투덜거렸다. 그때 노래를 마친 빠쉬코프가
달려왔다.
"우리가 임자라는 것이 아니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오후면 우리가 이곳에서 연주회를 열어왔다고
했잖아. 이런 곳에 나온 사람이 그런 관행이나
불문율도 모른다니?"
드럼을 메고 있던 다른 젊은이가 화난 얼굴로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먼저 자리잡고 있는 걸 봤으면
오늘은 양보하지 그래?"
사태를 금방 알아차린 빠쉬코프가 부드러운 말씨로
설득하고 나섰다.
"아니지. 우리는 양보 못해."
처음의 가리마 선이 선명한 젊은이가 완강히
대꾸했다.
"이런 자리는 먼저 차지하는 사람의 몫이
아니던가?"
"그렇지 않아.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오후면 우리
연주를 들으러오는 팬들이 있단 말야. 그 사람들은
너희들이 연주하고 있는 록 같은 건 좋아하지 않아."
"록을 좋아하든 클래식을 좋아하든 오늘은 이왕
우리가 먼저 시작한 것이니까, 앞으로 한 시간만 더
우리가 연주할게. 우리가 가고나서 너희들이 하면
되지 않아?"
빠쉬코프는 말썽이 일어날까 저어하여 중재안을
내놓았다.
잠시 자기네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던
친구들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 손금에 없던 록큰롤 연주나
들어줘야겠군."
가리마 선이 선명한 앳된 젊은이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래, 그러지."
드럼을 메고 있던 젊은이도 맞장구를 쳤다. 그들
젊은이들은 청중들 사이에 끼여 '제6병동' 멤버들의
연주를 눈여겨 지켜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한결같이
경멸의 빛이 어려 있었다. 아예 입가에 슬슬 비웃음을
머금은 젊은이도 있었다. 바른 템포의 록 음악을
그들은 좋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구경꾼은 시간이 갈수록 그 숫자가 늘어갔다.
빠쉬코프와 빅토르는 연주에 더 신명이 났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주위에 문득 긴장감이 감도는 걸 빅토르는
민감하게 느꼈다. 언제 왔는지 젊은이들 옆에 서 있는
안경 낀 사내가 아무래도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 옆의, 감시견처럼 눈을 반짝이며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사내도 역시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 사내
옆에 뒤에 도착한 젊은이들 중 드럼을 메고 있던 치가
서있다 쥐새끼처럼 얼른 모습을 감추는 것이 보였다.
빅토르는 빠쉬코프를 얼핏 돌아보았다. 그는 연주에
열중한 나머지 심상치 않은 주위의 공기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연주를 중단한 빅토르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움추리며 기타를 들고 슬그머니 뒤로
몸을 뺐다. 자레치나야의 팔을 나꿔채 이끌었다.
영문을 알지 못한 채 자레치나야는 끌려왔다.
"막심!"
빅토르는 사내들을 곁눈질하며 빠쉬코프를 불렀다.
빠쉬코프는 그래도 못들은 채 연주를 계속했다.
가예프가 빅토르의 이상한 표정을 알아차리고 주위를
재빨리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낌새를
알아 채지 못하고 다시 드럼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상해. 몸을 피해야 할 것 같아."
빅토르는 재빨리 자레치나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레치나야는 얼른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까게베들 같애!"
비로소 자레치나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나타샤에게 얼른 속삭여 그 사실을 알렸다.
나타샤도 표정이 굳어졌다. 연주를 중단한 빅토르를
흘낏 쳐다본 그녀는 빠쉬코프에게로 다가가며 그의
팔을 나꿔챘다.
바로 그때였다. 사내들이 급히 움직이는 것이
빅토르의 시야에 들어왔다. 빅토르는 반사적으로 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생명보다 더 아끼는 드럼을 버리고
가예프가 급히 따랐고 빠쉬코프와 나타샤에게 빨리
피하라고 외치며 자레치나야가 그 뒤를 따랐다.
구경꾼들을 헤치며 사내들 둘이 뛰어들어 빠쉬코프와
뜨로피모프를 붙들었다. 나타샤는 충분히 피할 겨를이
있었으나 오금이 박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역시
붙들리고 말았다. 빠쉬코프는 그런 와중에서도
빅토르와 가예프와 자레치나야가 자리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지역 경찰청사로 붙들려간 빠쉬코프와 뜨로피모프와
나타샤는 피의자들을 수용하는 임시유치장에
수용되었다. 절도나 폭행범으로 잡혀온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작취미성의 주정뱅이도 있었다.
붙들려간 지 몇 시간이 지나서야 빠쉬코프는
불려나가 조사를 받았다. 주소, 성명, 학교 등을
꼼꼼히 묻고 부모의 직업과 당원 여부를 조사하였다.
빠쉬코프에 이어 뜨로피모프도 똑같은 절차를 밟아
조사를 받았고 나타샤도 마찬가지였다.
개별 조사가 끝나자 셋을 한꺼번에 불렀다.
"셋 다 부모는 잘뒀구만.!"
조사관은 경멸조로 그렇게 한마디 흘렸다.
앞에서도 말했듯 빠쉬코프의 아버지는 해군성의
문관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박물관의
사무원으로 근무하였다. 뜨로피모프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 다 시청 운하국의 간부로 근무했다.
나타샤의 아버지는 인투리스트 업무를 관장하는 시청
관광국에 근무했고 어머니는 국영 끄니거(서점)에
근무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희들 때문에 부모들이 고생 좀
치르겠는걸!"
이어 그들을 다시 훑어보며 조사관은 냉랭하게
내뱉았다.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면 다른 고생은
안시키겠지만, 만약 속이려 든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어디서 록큰롤을 배웠지?"
"록큰롤이라니요?"
빠쉬코프는 전혀 모를 소리를 듣는다는 듯 놀란
눈으로 조사관을 쳐다보며 반문했다.
"저희는 록큰롤은커녕 팝도 모릅니다."
"그런 거짓말해도 소용없어. 우리가 바보들인 줄
알아."
조사관은 바닥을 굴리며 소리쳤다.
"모함입니다. 저희들은 다 성실한 학생들입니다.
우리가 록큰롤을 어디서 배웁니까?"
"성실한 학생들이 공부는 안하고 거리에서 기타나
퉁당거려?"
"저희들은 취미로 민요나 가곡이나 가벼운 클래식을
연주했습니다."
이미 이런 사태에 대비하여 생각해 두었던 말을
빠쉬코프는 눈도 꿈쩍 안하고 늘어놓았다.
"너희들 집을 수색하면 금방 다 드러날 걸 왜
오리발이야."
"저희들은 정말 억울합니다. 당국에서 금하는 것을
저희 학생들이 왜 연주합니까. 저희들은 모함을 받은
것입니다."
"어설픈 수작 집어치워. 당국에서 금지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연주를 했으니 어떤 벌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겠군."
"아닙니다. 정말 저희들은 록큰롤 따위는 전혀
모릅니다. 아까 푸쉬킨스카야 역에서 우리보다 늦게
도착한 패거리들과 자리다툼을 벌였는데 아마 그
패거리들이 우리가 자리를 비켜주지 않자 모함을 한
모양입니다. 정말 저희들은 록큰롤을 연주한 적이
없습니다. 왜 반사회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는
록큰롤을 우리가 연주합니까."
그런 실랑이로 일관된 일차 조사가 끝나고 그들은
임시구류소에 유치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는 동안
아무 조사가 없었다. 임시구류소에 갇힌 채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동안 그들은 집에 연락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임시구류소를 나가는 사람에게
집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연락을 부탁하기도 또 집에
연락 좀 해주십사고 경비원에게 애걸하기도 했다.
그러나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새에 그들의 부모들은 몇
차례나 경찰에 불려다니며 조사를 받았다. 그들의
부모는 아이들이 학교생활 등 신분상의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무혐의로 플려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 부모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결과는 얻지 못했다.
젊은이들은 한달여만에 간신히 석방은 되었으나
신분상의 불이익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다. 그들은
학교로부터 제적이라는, 일찍이 빅토르와 가예프가
겪었던 불행을 겪어야 했다. 그렇게 되자 그들에게
급격한 변화가 닥쳐왔다. 부모들로부터 그들은
음악이라는 것과 손을 끊기를 강요 당했다. 경찰에
불려다니면서 온갖 수모를 겪은 부모들의 고초를
뒤늦게 안 그들은 부모들의 강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뜨로피모프는 멀리 흑해 연안의 사촌
집으로 추방(?) 당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되자 '제6병동'은 해체되기에 이르고
말았다.
14. 리술 아저씨의 죽음
도금공장을 그만둔 다음날 오후였다.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가 근무하는 출판사로 전화를 걸었다.
도금공장에 다닌 지 4개월이 지나면서 빅토르는
잔기침이 잦아졌다. 얼굴색도 파리해지고 몸도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병원을 찾아가 의사로부터,
도금공장에 더 다니다가는 진폐증이 아니면
비중격천공증같은 병에 걸려 콧뼈가 흐물흐물
물러나게 될지도 모르리라는 말을 들은 빅토르의
어머니 발렌치나는 기겁을 하고 놀라 그를 퇴직하게
주선했던 것이다. 그러나 빅토르 자신은 아직 그렇게
심한 증세는 아닌 걸로 알고 있었다. 어쨌든
도금공장에서 풀려나고보니 빅토르는 오랜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자유스러움을 한껏
느꼈다.
전화를 받은 여자는 그런 사람 없다고 하였다.
다시 걸었으나 똑같은 여자가 전화를 받았고 역시
없다는 대답이었다. 빅토르는 그 길로 리술 아저씨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뜻밖에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누구냐고 물어왔다. 리술 아저씨가 뒤늦게 결혼이라도
한 것일까.
"리술 아저씨 안 계세요. 저, 비쨔가 왔다고
하세요."
"리술 아저씨라니? 그런 사람 없어요."
집을 잘못 찾은 것인가. 빅토르는 아파트 현관에
붙은 호수를 다시 살폈다. 305호,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래 위층을 오르내리며 또 살피고 살핀 다음
다시 갔다. 여자가 대답하는 것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으나 리술 아저씨 집이 틀림없었다.
"이 집이 틀림없는데. 리술 아저씨 안 계세요?"
초인종을 누른 다음 빅토르는 다시 그렇게 외쳤다.
문도 열지 않고 안에서 아까의 여자가 소리높여
대꾸했다.
"그런 사람 없어요. 우리는 이사 온 지 한달도
안됐어요."
"이사를 왔다구요?"
빅토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동안 연락을 안한 사이에 이사를 한 것일까. 더구나
사무실에서도 그런 사람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전에 살던 리술 아저씨는 어디로 간다고
하셨어요."
"우리는 그런 사람 몰라요."
그렇다면 리술 아저씨가 아파트를 비워주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 것인가. 빅토르는 종잡을 수 없는
기분으로 힘없이 그곳을 물러나왔다. 아저씨 안부에
대한 궁금증이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까닭모르게 언젠가 아저씨가 들려준 말이 귓전을
때렸다.
사람은 늘 자신을 비워야 한단다.
리술 아저씨는 빅토르가 알아듣는지 알아듣지
못하는지 그런 건 개의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곤 했다.
사람들은 지위는 무조건 높은 걸 좋아하고 재물은
무조건 곳간이 가득하도록 갖고 싶어하지. 비어 있는
것은 싫어하고 가득차 있는 것만을 선호하지 않더냐.
그러나 채워져 있는 것만이 가치가 있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란다. 비워져 있는 것이 더
유용한 경우를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더냐.
사람이 집을 지을 때 어디 방을 가득 채워서 짓더냐.
사람들이 항아리를 만들 때 속을 비워두는 까닭은
어디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말한 다음 빅토르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했다. 빅토르가 대답이 없자 리술
아저씨는 다시 말했다.
우리는 채우려는 지혜보다 비우려는 지혜를 더
열심히 터득해야 한단다.
빅토르는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도 같은
아리송한 말에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리술 아저씨는 또 말했다.
러시아의 철학자는 사람이 욕망은 갖되 종국에
차지할 수 있는 땅이 얼마만한 것인가를 명확히
인식하게 만들었고, 강이나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낮은
곳에 위치하여 모든 골짜기의 물을 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매우 소중한 지혜지만 위의
중국 철학자의 가르침도 소홀히 알아서는 안될 게다.
빅토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기만 했다.
천지는 영원무궁한 것이다. 천지가 영원무궁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란다.
언젠가 리술 아저씨는 그런 말도 들려주었다.
이것도 옛날 중국의 한 철학자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상징하는 바를 잘 새겨 이해하도록
하려무나.
옛날 목수인 석이란 사람이 목재를 구하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먼길을 떠나 곡원이란 땅에 이르렀다. 그
마을 사당 앞에 가죽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그
나무의 크기가 실로 놀라울 만했다. 수천 마리의 소를
쉬게 할 만한 그늘이 드리워 있었고 그 굵기를 재어본
즉 백 아름이나 되었다. 그 높이는 산을 굽어볼
정도이고 열 길쯤 올라가야 비로소 가지가 있었다.
배를 지을 수 있는 굵은 가지만도 여남은 개가
넘었다. 목수인 석은 그러나 그 나무를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쳐 버렸다. 그 나무를 실컷 구경하고
뒤따라온 제자들이 여쭈었다.
저희가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른 뒤로 여지껏
저렇게 좋은 재목을 보지 못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치시니,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 가죽나무를 제대로 쳐다보지 않고 그냥
지나친 것이 무슨 까닭이었냐고 물었느냐?
저 나무를 베면 배 몇 척은 짓겠습니다.
아서라, 모르는 소리 작작하거라. 배를 지을 만한
재목이라면 지금까지 남아 있었겠느냐.
제자들은 더욱 모를 소리였다. 스승이 덧붙여
말했다.
저 나무는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껏 목숨을
부지해온 것이다. 배를 지으면 가라앉을 것이요. 관을
만들면 쉬이 썩을 것이며, 그릇을 만들면 속히 깨질
것이다. 그것으로 문을 만들면 진이 흘러 귀찮을
것이고. 기둥을 세우면 곧 좀이 슬어 썩을 것이다. 저
가죽나무는 아무 쓸 데가 없었으므로 지금까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서 있게 된 것이다.
이야기를 다 듣고 아무리 궁리하고 또 궁리를
거듭해도 그 상징하는 바를 알 수가 없었다. 빅토르는
그날 밤을 거의 하얗게 새다시피하며 머리를 굴렸다.
그래도 그 상징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야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남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리술 아저씨가 자주 그런
모호한 이야기를 해준 까닭은 빅토르에게 사유하는
습관을 길러주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어쨌든 리술 아저씨는 빅토르가 궁금하게 여기는
것, 빅토르가 알고 싶은 것의 모든 해답을 머릿속에
지니고 있었다. 학교에서, 집에서, 거리에서 궁금했던
모든 것에 대해 물으면 기꺼이 그 해답을 머리에서
꺼내 자세히 보여주고는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쓴 시집을 빅토르에게 읽게
했고, 시를 지을 때의 기쁨과 보람을 그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시를 짓는다는 것은 신이 내릴 수 있는 최상의
기쁨을 누리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하였다. 시를 짓는
사람은 시를 지을 때 모든 보상을 다 받는 것이라
했다. 빅토르는 그것이 무슨 뜻을 담고 있는 말인지
다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시인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게로구나, 막연히 그런 짐작만
하였다.
왜 그런지 까닭 모를 일이었으나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의 안부가 전에 없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다음날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리술 아저씨는 보이지 않고 리술 아저씨의 책상에는
딴 사람이 앉아 있었다. 슬라브계로 대머리가 훌렁
벗겨진 그 사람은 대체로 리술 아저씨와 비슷한
연배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까닭
모르게 마치 나쁜 목적으로 사무실을 기웃거리는
불량소년쯤으로 여기는 것인지 무섭게 쏘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빅토르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문쪽으로
돌아섰다.
"아, 빅토르로구나."
그때 마침 리술 아저씨와 함께 일하던 베네라가
방으로 들어오며 아는 체를 했다.
"리술 아저씨, 어디 가셨어요?"
"그래, 모르고 있었구나. 이리 와 좀 앉거라."
베네라의 얼굴에 스산한 기운이 스쳐갔다. 베네라는
빅토르의 손을 끌어다 자기 책상 옆의 의자에 앉혔다.
"한동안 연락을 드리지 못했어요. 어디로
옮겼나요?"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의 책상에 앉아 있는 사내를
곁눈질했다. 그 사내는 그러나 책상에 얼굴을 숙이고
하던 일을 계속할 뿐이었다. 이쪽에는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베네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돌아가셨어."
"돌아가시다니요?"
빅토르는 말뜻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돌아가셨다니까."
"아니, 죽었단 말이에요?"
빅토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래."
"아니, 그럴 리가`......?"
빅토르는 너무나 뜻밖의 소식에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슬픔이 가득 고인 눈을 들어 베네라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아직 믿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란다."
"그럴 리 없어요.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빅토르는 문득 가슴 속을 쓸며 지나가는 냉기와
고통을 동시에 느꼈다.
"한달쯤 됐나. 아무 연락도 없이 사흘간이나
사무실에 나오지 않길래 아파트로 찾아가지 않았겠니.
그런데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있어야지.
그래서 그날은 어쩔 수 없이 그냥 돌아왔는데
이틀이나 더 기다려도 역시 소식이 없지 않니. 그래서
또 아파트를 찾아갔었다. 그래도 안에서는 사람
기척이 없더구나. 옆집에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이고, 할수없이 문을 따고 들어갔었다. 리술
선생님은 거실 바닥에 모로 쓰러져 계시더구나. 이미
죽은 지 오래되어 부패하고 있었는데, 검시를 한
의사의 말에 의하면 뇌출혈로 돌아가셨다더구나."
"제가 너무 오래 찾아보지 못했어요."
"비쨔 너 책임은 아냐."
"그래도 제게 그렇게 잘해준 분이었는데......."
"내게도 이를데없이 고맙게 해주신 어른이셨어.
나도 늘 은혜만 입었지 아직 하나도 갚지 못했는데,
덜컥 세상을 뜨고 마셨구나."
"베네라 씨에게도요?"
"그럼, 그렇게 외롭게 사신 분이 어쩜 그렇게
마음이 따뜻했던지, 우리 사무실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선생님을 못잊을 게다."
"제게 늘 용기를 주셨는데......."
"우리에게도 늘 그랬었다. 그리고 우리 사무실에서
선생님만큼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도 없었고,
우리가 늘 존경했었어."
베네라의 말은 빅토르의 슬픔을 조금 덜어주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살았다니 슬픈
가운데서도 위안이 되었다.
"그럼, 어디다 모셨어요?"
베네라는 잠시 말없이 빅토르를 쳐다보았다.
"우리도 유택에 모시고 싶었다. 그런데 고인의
소원이 다르더구나."
베네라는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묘가 없군요?"
빅토르는 베네라의 입을 지켜보았다.
"그래. 우리는 고인의 유품을 다 정리하여 이곳
출판사의 창고에 보관 중이란다. 유족이 나타나면
언제라도 돌려줄 생각이지. 그런데 선생님의 주머니에
있던 지갑에서 우리는 정성들여 쓴 메모를 한장
발견했었다. 거기에, 만약 자기가 죽거던 화장을 하여
그 재를 핀란드 만에 뿌려달라고 씌어 있지 않겠니."
"재를 핀란드 만에 뿌렸다구요?"
"우리도 묘소를 지어 때때로 참배하고 싶었지만,
우리는 고인의 뜻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런 유언을 남겼을까요?"
"글쎄, 우린들 선생님의 뜻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니? 다만 굳이 바다에다 재를 뿌려달라신 것은 그
바다가 선생님의 고향과 닿아 있는 걸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닐까, 짐작했을 뿐이란다."
빅토르는 문득 크질오르다의 할아버지가
연상되었다. 그렇게 할머니로부터 핀잔을 들으면서도
고향에 가고 싶어 집을 나가 부질없이 낯선 곳을
떠돌다 넝마같은 모습으로 돌아오고는 한다던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가 이해가 되지 않더니,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던 리술 아저씨도 그 뼛가루를
자기 고향땅과 닿아 있는 바다에다 뿌려달라고
했다니, 묘한 감회가 서렸다. 하기야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자, 아저씨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똑같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핀란드 만 어디죠?"
"레피노, 가봤니?"
"예."
"레피노를 지나면 솔 숲속에 근로자
사나토리움(휴양소)이 있어."
"예, 압니다."
"그 사나토리움을 지나 얼마쯤 더 가면 독일인
식품점이 있다. 그곳 조금 못미쳐 모래밭이 있는데
그곳 바다에다 뿌렸단다."
"알겠어요. 우리가 가끔 가서 노래부르곤 하던
곳이에요."
"그곳에 가서 노래를 불렀다고?"
"예, 노래 부를 데가 마땅치 않아 그냥 친구들과
어울려 그 부근에 가서 실컷 노래를 부르다
돌아오고는 했어요."
"언제 한번 친구들과 가서 진혼곡이라도
불러드리렴."
"그래야지요."
"나도 매년 기일 때마다 꼭 그 해변을 찾아가 꽃을
바칠 생각이다."
"고마워요."
"아냐. 내게는 아주 소중한 선생님이셨어. 나는
선생님의 시도 좋아한단다. 게다가 얼마나 많은 걸
내게 알게 하셨는데. 동양 철학과 동양 종교에 대한
것은 모두 선생님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어."
베네라는 리술 선생이 비운 자리를 메워줄 어떤
대안도 없다는데 생각이 미칠 때면 눈앞이
아뜩해지고는 했다. 리술 선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나
리술 선생이 권해 읽은 책들을 통해 얼마나 폭넓게
세상과 인생을 이해하게 되었던가. 가능하다면 늘
옆에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었다. 빅토르는, 저도
그랬어요, 하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린 내가
어찌 30대 중반의 무르익어가는 지성과 견줄 수
있겠는가, 그런 깨달음이 그의 입을 막았던 것이다.
빅토르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베네라는 문앞까지
빅토르를 배웅했다. 어쩐지 리술 선생의 어린시절의
어떤 모습을 보내는 것 같아 베네라는 가슴이
묵직했다.
길에 나온 빅토르는 전에 느끼지 못했던 허허로움과
외로움을 느꼈다. 리술 아저씨는 언젠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옛날 기따니에 장자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었다.
그 철학자는 아내가 죽었는데도 슬퍼하기는커녕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더라는 것이다. 이를
이상히 여긴 한 손님이 그 까닭을 물었다.
평생 고락을 함께 하고 자식을 낳고 살며 정이
두터웠을 터인데, 그런 아내가 죽었는데, 어찌 곡은
하지 않고 도리어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이에 장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어찌 그렇게만 생각하나. 아내가 죽었을 때 나의
슬픔도 여간 크지 않았었네. 그러나 생각해보게.
아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원래 생명이 없었네.
생명뿐만 아니라 형체도 없었지. 형체뿐만 아니라
원래 기(氣)도 없었지. 흐릿하고 아득한 혼돈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해서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생기고 형체가 갖추어져 생명이 생겼네. 그것이 또
바뀌어 죽음으로 돌아간 것이네. 이것은 춘하추동 네
계절이 번갈아 운행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네. 아내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바야흐로 언젠가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올 걸세. 지금은 천지 사이의 큰방에서 편안히
자고 있는 것이네. 그런데 큰소리로 울며 슬퍼한다면
내가 어찌 천명에 통한 자라 할 수 있겠나.
그 이야기에 의하면 리술 아저씨도 춘하추동이
바뀌듯 자연의 순리에 따라 천지 사이의 흐릿하고
아늑한 혼돈의 세계, 어느 큰방에서 잠들어 있을
것이리라.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되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리라.
그러나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영영 떠난 것으로 생각되었다.
15. 제61 기술전문학교
이듬해 여름 학기에, 빅토르는 시립 제61
기술전문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제61 기술전문학교에 다니게 되기까지 발렌치나가
겪은 번민과 고뇌는 그때까지 한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격심한 것이었다.
아직도 빅토르가 장차 화가가 되기를 바란 어머니
발렌치나는 빅토르를 어쨌든 미술학교에
편입학시키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발렌치나는 시교육국과 당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비록 학교로부터 제적은 당했으나 미술에 남다른
소질을 타고난 아이에게 그림공부를 계속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것이 그 탄원서의 요지였다. 어린
나이에 그 소질을 꺾어 버리면 장차 당과 국가에
공헌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 버리는 비정한 처사가
됨을 강조했다. 발렌치나는 레닌그라드 어린이
미술대회에서 입상한 상장 복사본과 빅토르가 그린
그림을 첨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미술학교로부터
퇴학 당한 빅토르에게 기회는 잘 주어지지 않았다.
탄원서를 제출하고 석 달을 기다려도 아무런 조치도,
통고도 없었다.
발렌치나는 시교육국으로, 당으로 직접 발이 닳도록
찾아다니며 하소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빅토르의
서류를 검토한 시교육국이나 당에서는 한결같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다니는 야간학교에서 기술을 익혀 국가와
당에 공헌하도록 하세요."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미
상장과 그림을 봐서 아시겠지만 그 아이에게는 미술에
대한 남다른 재능이 있습니다. 아이의 재능을 길러
당과 국가에 헌신할 수 있도록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발렌치나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러나 빅토르의 장래를 걱정하느라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발렌치나는 한두 번의 거절로 단념할
수가 없었다. 거듭 찾아가고 또 찾아가 사정을
하였다. 발렌치나의 하소연에 질렸던지 시교육국의
관리는 서류를 다시 검토하였다. 그리고 미술학교
편입학을 알아보겠다고 약속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에 다시 찾아간 발렌치나에게 그 관리는
역시 고개를 저었다.
"담당 상관과 의논했는데, 미술학교 편입학은
불가하답니다. 다만 그렇게 미술학교를 원하니까 하는
말인데 제61 기술전문학교는 입학이 가능한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제61 기술전문학교라면?"
"미술학교와 크게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염색,
도예, 목각기술 등을 전공할 수 있으니까요."
"아!"
발렌치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아이를 화가로 키우고
싶은데 도예나 목각이 어찌 당하겠는가. 역시 희망을
버려야 한단 말인가. 더구나 그 전문학교도 입학
여부를 알아봐야 한다지 않은가. 다른 일반
기술학교를 가는 것보다는 도예나 목각을 배우게
하는게 나을까.
"예, 그럼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제61 기술전문학교도 입학이 보장된 것은
아닙니다. 그곳도 일종의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니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리라는 생각입니다만 입학
여부는 학교 당국이 결정할 일입니다."
"어쨌든, 고맙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발렌치나는 먼저 로베르트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 이미 빅토르에 관한 모든 기대를 버린
로베르트는 심드렁하게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렸다.
"당신 알아 하구려."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랬다. 발렌치나는 속이
상했으나 어쩌지 못하고 빅토르의 의향을 물었다.
"좋아요. 목각도 조각의 일종이니까, 목각기술을
배운다면 한번 해보죠."
빅토르는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지긋지긋한
도금공장에서 벗어났으니, 이제 취미에 맞지 않는
선반공이나 토목기술 따위를 가르치는 야간학교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할까, 하는 생각이었다.
더구나 목각이라면 그림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림은 캔버스에 물감으로 형체를 나타내는
것인데 비해 목각이란 나무를 칼로 빚어 사람이나
짐승이나 새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빅토르는
캔버스에 어떤 형상을 그려내는 것이나 나무를 빚어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나 다 같을 것으로
여겼다.
빅토르의 뜻을 안 발렌치나는 시교육국을 찾아가
제61 기술전문학교 입학원을 제출했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제61 기술전문학교에서 쎄로브 미술학교로부터
성적과 품행불량으로 제적 당한 학생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발렌치나는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빅토르도 또한 자신으로부터 비켜가려는 행운을
원망스럽게 바라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발렌치나는 빅토르의 상장과 그가 그린
그림을 싸들고 제61 기술전문학교로 찾아갔다. 그리고
교장을 붙들고 하소연하였다. 발렌치나의 자식을
걱정하는 헌신적인 모성애에 마음이 움직인데다
아이가 그렸다는 그림을 직접 본 교장은 무조건
냉정해질 수만은 없었다.
"아이에게 그런 미술적 재능이 있다면 아이를
테스트 해보고 여러 선생님들과 의논한 끝에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발렌치나는 미술 테스트라면 빅토르는 반드시
통과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는
교장의 발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었다.
며칠 후 빅토르는 제61 기술전문학교에서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교장실에서 교장과 화가인 네끄라소프 선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상과 흉상을 데생하고 꽃병의 꽃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호두나무와 끌을 내주며
생각나는 것을 새겨 보라는 과제물도 받았다.
두상과 흉상 데생이야 그에게는 너무 쉬운 과제였고
꽃도 자신 있었다. 호두나무로는 작은 새를 깎아
보았다. 물론 목각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새는
빅토르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새와 비슷한
모양은 새겨냈다. 그 두 가지의 테스트를 마친 그는
돌아가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
테스트를 마치고 온 빅토르는 곧 입학 허가가
떨어지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 닷새,
열흘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하루하루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으나 좀해 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다 지친 발렌치나가 학교를 방문해 결과를
문의했으나 선생님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려 결정이
지연되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빅토르는 자기와는 늘
거리가 멀던 행운을 상기하며 제61 기술전문학교
입학을 단념하였다. 그렇게 단념하고 나니 도리어
마음은 편해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제61 기술전문학교로부터
연락이 왔다. 마침내 입학 허가 결정이 났다는
것이었다. 빅토르는 마치 지옥에 떨어졌다 되돌아온
느낌으로 그 소식을 들었고,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발렌치나의 기쁨 또한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빅토르는 마침내 제61 기술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목각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는 매우
만족하였다. 도금공장에 다니는 동안 빅토르는 신역의
고달픔이라는 것이 무엇이라는 걸 잘 체득하였다.
고생이라는 것을 그는 거기서 생생히 경험하였다.
인생이 힘든 것이라는 사실도 이미 그때 다
알아버렸다. 제61 기술전문학교에 입학한 것은 자신의
재능을 살리고 그런 신역의 고달픔을 다소 잊게 하는
피난처가 될지도 모르리라 그는 기대했다.
제61 기술전문학교에 다니게 된 것은 빅토르에게는
행운이었다.
나무로 빚어낼 자신의 마음의 문양이며 흔적들에
대한 기대로 그는 가슴 설레었다. 끌은 그의 마음에
순응했고 목재의 재질은 끌과 조각도에 순종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그가 좋아하는 레르몬토프 상도
도스토예프스키 상도 나타났다. 바이칼 호에서 그의
마음속 한 자락을 끊임없이 물고 흔들어대던 갈매기도
모습을 드러냈고 어딘가 상상의 나라로 그를 질풍처럼
실어다줄 것 같은 크질오르다의 갈색 말도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리술 아저씨의 모습도 여러 개 조각했다.
"이 사람은 러시아인이 아닌 것 같구나. 누구?
아버지?"
어머니는 어느날 빅토르에게 흐뭇한 얼굴로 물었다.
빅토르는 속으로 기겁을 했다. 내가 아무렴
아버지를 조각할까? 어머니의 상상력이야 단조로울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리술 아저씨에 대해
어머니에게 한번도 이야기한 적 없는 빅토르는 그것이
리술 아저씨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조각하는 아들임을 공연히 드러낼
필요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굳이 사실을 말하여
어머니를 서운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빅토르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의 무응답을
긍정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시겠다!"
빅토르는 묵묵히 있었을 뿐이다. 리술 아저씨는
재로 오대양을 떠돌다 언젠가는, 마침내 고향에 닿을
수나 있을까. 빅토르는 그런 생각을 하였다. 재라도
고향에 가 닿기를 바라 바다에 육신을 태운 재를
뿌려달랬다는 리술 아저씨.
빅토르가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리술
아저씨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다. 빅토르는 그가
요즘도 노래부르러 다닌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빅토르를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고
또 그가 노래부르는 것을 역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빅토르가
노래부른다는 사실을 말해도 아버지에게 굳이 알려
그가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막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노래부르러 다닌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어머니 역시 노래부르는 그를 그저
마지못해 지켜볼 뿐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기
때문이었다.
제61 기술전문학교에 열심히 다니는 것에 못지않게
빅토르는 노래를 짓고 연습하는데 열심을 기울였다.
'제6병동'의 해체 이래 빠쉬코프와 가예프는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빠쉬코프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노래를
멀리했고 가예프는 드럼을 아직도 좋아했으나 공장에
묶여 있는 그의 고달픈 처지가 연주와 거리를 멀게
했다. 나타샤와 자레치나야와는 마음만 먹는다면 만날
수는 있었으나 어쩐지 전에 빠쉬코프와 어울릴 때와는
달리 자주 만나지지가 않았다. 자레치나야와는 각별한
사이라 할 수 있었으나 그녀 역시 매일이다시피
만나곤 했던 전처럼 가깝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들과 만나지 않은 사이에도 빅토르는 전처럼
노래에는 열심이었다.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전에는 기타 연주에 열성을 부렸으나 근래에는 시를
짓고 거기에다 곡을 붙이는 일에 더 열성이었다. 그는
시를 지으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그것을 고쳤다.
그리고 거기에 곡을 붙이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노래를 불러 고쳐가며 연습을 하였다. 주로 그가 짓는
노래는 자신의 처지나 느낌을 솔직하게 나타낸
것들이었다. 그 노래들은 꼭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록큰롤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 속에 부글거리며 항상 끓고 있는
용암같은 느낌을 퍼내는데 가장 적합한 것으로
여겨지는 록큰롤 형식으로 그는 노래를 짓고 부르고는
했던 것이다. 만약 록큰롤이라는 음악 형식이
없었다면 어쨌을까. 아마 그가 최초로 록큰롤을
창시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그는 빠쉬코프의 집을 드나들 때부터 비틀즈며
롤링 스톤즈, 이글스 등의 노래를 자주 들었고
그것들을 작은 녹음기로 녹음하여 리시버를 귀에 꽂고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펑크록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는 섹스 피스톨즈의 파격에도
관심이 쏠렸다. 그렇지만 그런 파격적인 음악의
수용에는 아직 소비에트 사회가 인색했으므로 은밀히
즐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비에트도 한두 해 사이에 많이 변해 가고
있었다. 다행히 지난해까지만 해도 유럽이나 아메리카
스타일의 노래를 신경질적으로 단속해오던 당국에서도
차츰 그 단속의 고삐를 늦추었다. 당국의 단속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카페같은 유흥업소에서
연주되는 음악에는 대체로 관대하게 보아 넘기고는
했다. 그것이 관광객들을 의식한 것이었든 아니면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기 위한 배려였든 록 음악을
지향하는 젊은이들에게는 복음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록이나 서구식 대중음악의 공개적인 공연은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런 음악의 연주회는 주로
지하에서 열리고는 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탈린,
키예프 같은 대도시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블루스나
포크송, 컨트리송, 록큰롤같은 구미의 대중음악이
전염병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그 음악들은 대체로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저항적인 젊은이들의 기호에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음울한 사회분위기와
무엇인가 하나도 투명한 것이 없는 예측불능의
자신들의 미래에 불안감을 느낀 젊은이들은 폭발적인
에너지의 록큰롤에 흠뻑 빠져들어갔다. 그러한 추세를
무시하지 못한 대중가수들은 공개적인 무대에서 그런
노래를 용감하게 공공연히 연주하기도 했다. 그들은
당국에 적발되면 제재를 받고 다행히 적발되지 않으면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 무렵 빅토르는 저녁이 되면 네프스키나 게르첸
거리며 로스 거리를 돌아다니는 습관이 생겼다. 그들
거리에는 작은 카페들이 있었고 그 카페들에서
록큰롤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야 했다.
몇 군데 카페에서는 밴드들이 생음악으로 록을
연주하고는 했다. 그들은 모두 열정적으로 연주했고
듣는 사람들도 거기에 열광하고는 했다. 그들은 주로
아메리카나 잉글랜드 록 가수들의 노래를 앵무새처럼
흉내내고 있었다. 빅토르는 그들의 연주를 눈여겨보고
귀담아 들었다. 아무리 섣부른 노래라도 그에게는
공부가 되었다.
술 한잔 사 마실 돈이 없었으므로 카페의 한쪽
구석에 말없이 웅크리고 앉아 연주를 듣거나
연주자들과 말을 나눌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잘
부탁하면 자기에게 연주할 기회를 줄지도 모르리라는
기대로 그들과 자연스럽게 만나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잘 오지 않았다. 그들은 풋내기
가수 지망생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무대는 구걸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력으로
얻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래도 점잖은 편이었다.
"여기가 어디 조무래기들의 놀이턴줄 알아!"
그렇게 심하게 모욕을 주기도 했다. 빅토르는
굴욕감을 감내하고 말고 할 형편이 아니었다. 더 심한
모욕을 당했을지라도 참아내야 할 형편이었다.
그날도 빅토르는 몇 군데 카페를 기웃거리며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한군데서는 노래를 부를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 당했다. 그는 힘없이 거리를
배회하다 오스트로프스키 관장 뒤 로시 거리의 카페
동굴로 들어갔다.
빅토르는 구석자리에 앉아 마침 무대에서 연주하는
밴드의 연주를 무심히 듣고 있었다. 한 팀이 내려오고
다른 팀이 무대로 올라갔다. 그들도 역시 유럽풍의
노래를 흉내내고 있었다.
"노래 한번 부르고 싶나?"
언제 다가왔는지 한 젊은이가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빅토르는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조금 전
무대에서 노래부른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빅토르보다
두세 살은 더 먹어 보인 청년이었다. 눈동자가
갈색에다 얇은 입술과 높다란 코를 가진 어딘가
우크라이나계로 보였다.
"여러 카페에서 자네를 봤어. 오늘 내가 노래 한번
부르게 해주지. 이리 따라오게."
너무 뜻밖의 말에 놀라 빅토르는 미처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빅토르는 석고처럼 굳어졌다. 그가 손을
잡아끌지 않았다면 빅토르는 필경 그렇게 굳어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는 빅토르에게 기타를
내밀었다.
"기타는 칠 줄 알겠지?"
빅토르는 경황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떻게
손을 썼는지 무대 위의 연주가 끝나자 그는 빅토르의
등을 떼밀어 무대로 올려보냈다. 엉겁결에 무대에
올라간 빅토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먼저 홀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모든 눈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때 빅토르는
그렇게 느꼈다. 그러나 빅토르는 주눅들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해졌고 안정이 되었다. 짧은 동안에 그는
자신이 노래할 레퍼토리를 뒤적여 보았다. 처음부터
자신이 쓰고 지은 노래를 소개하고 싶은 욕망이 내심
강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낯선 노래는 청중들의
공감을 얻지 못할 우려가 있었다. 그런 모험을
감행하기보다 누구나 다 아는 익숙한 노래를 불러야
하리라 생각했다. 오래 전 바이칼 가는 기차에서
불렀던 브소츠키의 '볼쇼이 카레트니' 거리를
부르기로 작정했다.
빅토르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는
힘이 있었고 호소력이 있었다. 기타는 숙련된
솜씨였다. 청중들이 첫노래에 대한 감상을 미처
정리하기 전에 빅토르는 또 노래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노래였다. 홀 안은 그가 부르는
노래로 가득찼고 다른 소음은 일체 사라진 듯 했다.
노래가 끝났을 때 그러나 박수 소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사회자가 이미 다른 가수를 소개하고 있었으므로
쫓기듯 무대를 내려온 빅토르는 기타를 돌려주며
아까의 청년에게 수줍은 듯 인사했다.
"노래가 너무 무겁군! 그러나 인상적이었어."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언제나
이곳 카페 동굴에 오면 만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빅토르는 그의 이름을 미처
새겨듣지 못했다.
"고맙습니다. 저는 빅토르라고 합니다."
"빅토르, 웬지 자주 만나게 될 것 같군. 자, 그럼."
청년은 그렇게 말하고 손을 들어보이며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마지막 말이 어쩐지 달콤하게 이명처럼 귓전을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박수도 유도해내지
못한 자신의 노래 솜씨를 생각하자 기분이 축 처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자주 만나게 될 것 같군, 하던
청년의 마지막 말이 가슴 속에 물결처럼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막 몸을 돌려 문쪽으로
나가려는데 한 여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삐바 한잔 살까?"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로 이끌었다. 얼떨결에
의자에 앉기 바쁘게 여자는 맥주병을 빅토르에게
내밀고 있었다. 그는 무심결에 맥주병을 받아들었다.
여자는 산뜻한 인상의 미녀였다. 눈빛은 맑았고
도톰한 입술은 고혹적이었다.
우유빛 살결의 러시아계였다. 얼핏 여자를 일별한
빅토르는 맥주를 갈증 만난 사람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 니나야. 아까 노래 잘 들었어. 내게 다시
노래를 좀 들려줄 수 없겠어?"
빅토르는 무심코 무대를 바라보았다.
"나는 저 무대에 다시는 올라갈 수 없는 걸."
빅토르는 침울하게 대답했다.
"누가 저 무대에서 부르는 노래를 듣고 싶다고
했어."
빅토르는 니나를 쳐다보았다. 그보다 한두 살 위로
보였다.
"내 아파트에도 기타가 있어. 그리고 술도
있고......."
빅토르는 잠시 니나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뜻밖의
대담한 제안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그녀의 얼굴을 쏘아보는 빅토르의 시선이 부드럽지
않을 것임에도 그녀는 표정이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반응은 예기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인지 아주
태연했다.
"어때, 함께 갈 수 있지?"
빅토르는 지금까지 그런 제안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강압적인 제안에 저항하기보다는
순응했다. 거부감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하게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니나는 카페 앞에 세워두었던
승용차에 올라 문을 열어 놓고 빅토르가 타기를
기다렸다. 흔해빠진 소비에트산 라다가 아니라 빨간
립스틱 빛깔의 소형 볼보였다. 아마 스웨덴에서
생산된 이 소형 볼보는 핀란드를 거쳐 어떤 밀수꾼의
트레일러나 콘테이너에 실려 이곳으로 들여왔으리라.
아니면 어떤 외교단이 해외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들여온 것인가. 웬만큼 돈이 있는 사람들도
소비에트산 라다나 지글리로 만족하는데 아무리
소형일지라도 외국산 차라니, 이는 부와 직위 중 어느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뭘 보고 있어. 어서 타."
뭘 그렇게 바보처럼 서 있어. 그녀의 말은 빅토르의
귀에 그런 조롱으로 들려왔다. 빅토르는 신비의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고 싶은 지옥으로
한발 들여놓는 두려운 기분으로 니나의 옆자리에
올라앉았다. 빅토르가 도어를 닫자 니나는 씽긋 웃은
후 전조등을 켜고 차를 진행시켰다.
"걱정할 것 없어. 나는 그대에게 호감을 갖고
있으니......."
니나는 다시 씽긋 웃었다.
일리야 아파나씨예브나, 그녀는 아까 까페 동굴에서
비쨔를 처음에는 전혀 눈여겨 보지 않았었다. 어두운
구석자리에 앉아 열광적으로 연주하는 무대 위에 눈을
박고 있는 꼭지가 덜 여문 애송이로 보였었다. 머리가
빈 아이들은 록 음악에 어떤 견해도 없이 흠뻑
빠져드는 것이다. 니나는 그의 노래를 듣고나서
아버지의 그런 꾸중을 연상했다.
세상 일이란 인간의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이 아버지, 어머니의 변함없는 주장이었다.
니나는 아버지, 어머니의 잔소리는 교육용이려니만
여기고 한번도 그 잔소리를 귀담아 들은 일이 없었다.
저 아이도 나처럼 세상살이가 아버지나 어머니 말처럼
어렵다면 뭣 때문에 살겠느냐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래, 인생은 즐겨야 하는 것이야. 왜 골머리를
썩이며 살아야 해. 니나는 무대 위에서 노래부르는
그를 보며 그런 동류의식 같은 걸 느꼈었다.
아버지는 늘 말했었다.
밀은 그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고 때가 되면 땀을
흘리며 거둬들여야 비로소 빵의 재료가 된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거둘 밀이 없다. 흘레쁘도 그렇고,
토마토도 그렇다. 감자도 씨감자를 심어야 그것이
여러 줄기로 확산되고 거기에 덩이가 열려 성장해야
마침내 수확을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필요로 하는
식료품이 다 그렇다. 양고기를 얻기까지 사람들은
양을 먹이고 보살펴 살이 찌도록 오랜 기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나무에 자연적으로 열리는 사과며 배도
그렇다. 그냥 아무 때나 열매를 따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봄에 꽃이 피고 작은 열매를 맺어 여름의
무성한 햇볕을 받으며 과실에 달콤한 과육이 채워지고
그리고 가을이 되어 드디어 따는 수고를 거쳐야
그것은 우리의 혀끝에 달콤한 맛을 선사하는 것이다.
사람도 그와 다르지 않다. 어릴 때부터 학교나
가정에서 장차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얻고
방편을 익히고 먼저 배운 선생님들로부터, 그리고
부모나 친척들로부터 경험한 바를 듣고 배워 비로소
세상에 나가 제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의
삶이나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노력하는 만큼만 거두는 것이다. 니나는 아버지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렇게 들어왔다. 그러나 먼저도
말했듯 니나는 한번도 그런 잔소리를 새겨듣지
않았었다. 어쨌든 좋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거야.
"아까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
니나는 꾸밈없이 말했다. 브소츠키의 '볼쇼이
카레트니 거리'는 귀에 익은 것이어서 그냥
무난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거기에 이어진 노래는
낯선 것이었으나 그 우수와 폭발을 애써 참고 있는
듯한 저음이 인상적이었다. 눈을 지긋이 감고 고개를
쳐든 오만한 몸짓도 니나의 마음을 끌었다. 그리고
무대를 쫓겨내려올 때의 풀죽은 모습은 귀여웠다.
노란 동양계 피부며 검은 머리카락이며 용모도
이국적이어서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나는 브소츠키를 좋아한다."
영영 말을 하지 않을 것 같던 비쨔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의 노래보다 그의 인생을 더
사랑하는데......."
"대부분이 다 그렇지. 그의 연극이며 영화며`......
열정적인 삶을 다 사랑하지. 브소츠키처럼 러시아의
환부를 정확히 적출해 보여준 사람이 있었을까.
러시아인의 아픔과 장차 닥쳐올 불행을 정확히
예고해준 사람이 있었을까. 허나 나는 그의 노래를 더
좋아한다."
"넌 브소츠키의 다른 면을 보고 있구나!"
"브소츠키가 러시아 민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으니까."
"하기야 그럴지도 모르지. 한데 언제부터
노래불렀니?"
"언제부터 노래부르다니?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어."
"그거야 누구나 그렇지. 하지만 넌 가수가 될 작정
아니니?"
"그렇게 됐으면 좋겠지만, 어디 그것이 쉽겠어."
"재능이 있다면 기회는 올 걸!"
보기보다 니나는 어른스런 말을 하였다.
기회란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찾아오는 것일까.
16. 나는 건달입니다
니나의 아파트에 들어선 순간 빅토르는 저도 모르게
냉소를 흘렸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화장품
냄새라든가, 어디엔가 꽃병이 있는 듯 낯익은
꽃향기가 떠돌고 있다든가, 고혹적인 여자 살내음이
베어 있다든가 하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니나의 아파트는 난장판이었다. 어떤
것도 제자리에 있는 것이 없었다. 먼지투성이 구두
한짝이 문이 활짝 열린 침실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책꽂이에 꽂혀 있어야 할 책은 신장에 던져져 있었다.
거실의 테이블 위에 치즈와 버터가 널려 있고 주방의
식탁에는 담배 꽁초가 수북히 쌓인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손이나 좀 씻을까 하여 세면장으로 갔더니
욕조에 비누 풀린 물이 가득 채워져 있고 덜 잠근
수도꼭지에서는 물방울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엉망이고 너절하고 지저분하다기보다 구애받지 않는
자유, 마음을 있는 대로 아무렇게나 풀어 헤쳐놓아도
편안한 여유, 무슨 짓을 해도 간섭받지 않는 방종이
허락되는 공간의 편안함이 느껴졌다.
"담배 안 태울래?"
겉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내던진 니나는 먼저 담배를
빼 입에 물고 빅토르에게 담배갑을 내밀었다.
빅토르는 담배를 한개비 빼물었다.
"담배, 일찍 시작했구나?"
"아니, 작년부터 시작했어."
빅토르는 니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니나가
내미는, 눈썹을 태울 것처럼 불꽃을 길게 피워올리는
성냥불에 대고 담배를 빨았다.
무엇이나 함부로 생각하고 가볍게 여기는 듯한
건방진 니나의 태도는 담뱃불을 댕겨주는데서도
나타났다. 이쪽이 충분히 붙였는지 확인도 하기 전에
팔을 당겨 성냥불을 꺼버렸다. 급히 두어 번
빨아들이자 흡족한 양의 연기가 기도를 거쳐 폐로
스며들었다.
"아까 동굴에서는 담배를 태우지 않더니."
"담배 살 돈이 없어 굶고 있었어."
"무엇이든 참는다는 것은 고통이지. 저기 여러 갑
있으니 마음껏 태워."
무엇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부술 것 같은
거친 태도로, 아니면 손끝도 꼼짝하기 싫어하는
나태한 몸짓으로 니나는 술병을 가져왔다. 한손에는
술병, 한손에는 소금에 절인 토마토와 오이가 들려
있었다.
니나는 마치 지구의 종말을 눈앞에 두기라도 한
것처럼 쫓기듯 두 개의 술잔에 술을 넘치게 따랐다.
그런 거칠고 부주의한 태도가 그녀의 몸에 배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자, 마셔."
니나는 그렇게 말하고 이쪽의 반응 따위는 괘념치
않고 탁 털어넣듯 술잔을 비웠다. 술은 무색무취의
보드카가 아니라 윤기나는 갈색빛을 띤 유럽산
위스키였다. 싸구려 보드카가 아닌 외국산 위스키는
마셔본 적이 별로 없었다. 고작 지린내가 나는 삐바를
홀짝이는 것도 과분한 것이 빅토르의 형편이었다.
고급 위스키를 빅토르는 맛을 음미해가며 천천히
마셨다. 혀를 쏘고, 목을 넘어갈 때 거기에 불이라도
붙는 것 같았다. 그 화급하고 확실한 자극이 전율과
함께 감정을 고양시켜왔다. 두 잔, 세 잔. 마실수록
그 자극과 전율이 온몸을 출렁이게 했다.
"너, 지금 침대로 가고 싶지?"
니나의 짓궂은 물음에 빅토르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좀 참아. 나는 너의 노래를 먼저 듣고 싶어."
니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술을 몇 잔이나
비웠으나 니나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걸음으로
벽에 걸려 있던 기타를 떼왔다. 그녀는 몇 번 줄을
튕겨보더니 기타를 빅토르에게 던졌다. 귀중한 기타를
함부로 거칠게 던지다니, 빅토르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황하여 황급히 그것을 받았다.
"너 자신의 노래를 불러줘.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노래 있지. 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노래, 너
자신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 같애. 그래서 내가
너를 초대한 것이야."
니나는 다시 잔을 채워 마셨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멜로디를 콧소리로 흥얼거렸다.
"나는 새로운 것이 좋아. 오래 묵은 것들은
옛사람들과 함께 모두 사라지라지.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필요하고, 우리는 새로운 노래를 불러야 해!"
빅토르는 좀 어이가 없었다. 저렇게 중구난방이고
좌충우돌하며 난폭하게 자신을 학대하는 아이들이
세상에 얼마나 있는 것일까. 빅토르는 니나의 재촉을
받고 마지못해 노래를 시작했다. 기분같아서는 노래는
부르고 싶지 않았다.
잘 있거라 나의 벗이여, 잘 있거라 사랑스러운
벗이여,
너는 나의 가슴 속에 항상 살아 있으리라
운명적인 이별은 우리의 새로운 만남을 준비한다
잘 있거라 나의 벗이여, 손도 한번 잡지 못하고
말도 한마디 나눌 수 없는 우리의 이별이지만
뒤돌아보지 말라, 슬퍼하지 말라, 내일을 향해 눈을
뜨라
죽음이 새로울게 없듯 산다는 것도 새로울게 없는
우리 인생임을
나의 벗이여, 내가 알 듯 너도 알리라.
"너는 건방지게 벌써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게로구나!"
니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노래하는 얼굴에 예세닌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어!"
빅토르는 속으로 몹시 놀랐다. 방금 그는 예세닌의
유시 '잘 있거라 벗이여'에 스스로 곡을 붙여
노래했던 것이었다. 예세닌은 빅토르가 좋아하는
시인이었다. 그는 혁명 후의 소비에트보다 혁명 전의
러시아를 더 사랑했던 시인이었다. 그는 한때 혁명이
가져다줄 노동자, 농민의 행복을 노래했으나 점점
환상에서 깨어나 러시아 정신, 러시아 혼의 상실을
안타까워하며 대담하게 옛날로 회귀하려는 성향이
짙은 반역적 서사시를 쓰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니나는 예세닌의 시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인가.
"이사도라 덩컨과의 짧고 불행했던 결혼, 그것의
파국이 오지 않았다면 예세닌이 좀더 오래 살았으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빅토르는 더욱 놀랐다. 니나는 결국 예세닌의
불행했던 결혼 이야기까지 들먹였다. 그렇다면 저토록
막되어먹은 망나니 같은 니나가 외양과는 다른 내면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예세닌의 죽음에 대해 세상에는 몇 가지 설이
떠돌고 있었다.
세기초에 러시아에 와 포킨 등 젊은 무용가들에게
새로운 무용의 씨앗을 뿌리고 유럽으로 돌아갔다가
그로부터 20여년 후 다시 러시아에 돌아와 학생들에게
무용을 가르쳤던 미국 출신 전위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 러시아와 예세닌을 사랑했던 그녀가 예세닌을
버리고 러시아를 떠나자 그것을 비관하여 술에 빠지고
정신쇠약에 걸려 마침내 자살했을 것이라는 설이 그
하나였다. 그리고 러시아 민중의 역사에서 취재하여
쓴 그의 반역적 서사시가 빌미가 되어 당국의 탄압을
받자 견디지 못해 자살을 했을 것이라는 설이 다른
하나였다. 그러나 그런 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적 충격이나 탄압에 의해서라기보다 단순히 그의
염세적 성격 때문에 자살했으리라는 설이 가장
유력했다.
어쨌든 예세닌은 서른 살의 나이에 레닌그라드의
호텔에서 손목의 혈관을 절단하여 그 흐르는 피로 '잘
있거라 벗이여'라는 유시를 남기고 목매 자살하고
말았다.
"다른 것을 듣고 싶어!"
니나는 술을 가득 채운 술잔을 빅토르에게 건넸다.
빅토르는 그것을 받아 몸안에다 부었다. 혀끝에서
시작된 전율이 발끝까지 몸서리치듯 흘러내려가는
쾌감을 즐겼다. 빅토르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의기소침한 저음으로 최근에 지은 자신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한숨쉬듯 노래했다.
나는 언제나 혼자이다.
나는 장차 무엇이 될는지 모른다.
나는 집도 없다.
나는 주머니에 가진 것도 없다.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나는 건달이다.
어머니 저는 건달입니다.
어머니 저는 건달입니다.
나는 군중 속에 밟히는 티끌같은 존재이다.
나는 목적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언제나 흔들리며 방황하고 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어머니 저는 건달입니다.
어머니 저는 건달입니다.
빅토르는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눈물이
울컥 치솟을 것 같았다. 그는 노래를 그치고 얼른
손등으로 눈을 훔쳤다. 천만 다행으로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는 뒤늦게 니나가 눈을 감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에게 자신의 소심함을 들키지 않은 것에
빅토르는 가까스로 안도했다. 순간 온몸을 조여붙이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울고 싶었다. 세상은 대개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것이지. 유리창만 다 깨버리면
세상은 없어지는 것인가. 유리창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깨버려야 세상은 없어지는 것인가.
어느 사이 니나가 빅토르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빅토르의 얼굴을 말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니나의 얼굴이 천천히 실루엣처럼 올라와 그녀의
차갑고 메마른 입술이 빅토르의 입술을 덮었다.
그녀의 따뜻하고 촉촉한 혀가 빅토르의 메마른 입술을
축이고 굳어 있는 그의 혀를 풀어주었다. 그녀의 팔은
이미 빅토르의 어깨를 덩굴손처럼 단단히 감고
있었다.
"너의 그 냉소적인 표정과 무심한 태도를 비로소
이해하겠어."
니나의 얼굴은 눈물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녀는 계속 고개를 끄덕이거나 발작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빅토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어쩌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어쩌면 내 속을
그렇게 잘 나타낼 수 있니?"
니나는 더듬거렸다.
그들은 침대로 갔다. 침대로 그녀를 옮기는 순간
빅토르의 가슴은 터질듯 벅차올랐다. 그녀의 옷을
벗기는 순간 드러나는 하얀 복숭아빛 살결은 빅토르의
맥박을 급하게 박동시켰다. 그녀는 연체동물처럼
빅토르의 육신을 휘감았고 그녀의 혀는 그의 온몸
구석구석을 애무했다. 터질듯 탄력있는 그녀의
가슴이며 육감적인 히프, 대리석처럼 미끈하게 뻗은
다리, 빅토르는 꿀을 만난 벌이 되었다. 니나는
밤새도록 흡반처럼 빅토르를 끊임없이 빨아들였다.
그녀의 심연은 들어갈수록 깊고 황홀했으며 그날 밤의
잠은 죽음보다 한결 유혹적이었다.
이튿날, 그들은 커튼을 걷고도 한참을 기다렸으나
날이 쉽사리 밝지 않아 한동안 당황했었다. 커피를
끓여 마시고 우유로 갈증과 허기를 때우고 담배로
머리속을 헹구고 그러고 나서도 날이 새지 않았다.
구름으로 덧칠되어 있는 하늘은 아무리 기다려도 더
어두워지기만 하고 마침내 가로등이 밝혀졌다.
창문으로 내다본 거리의 자동차들은 전조등을 켜고
달리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잠으로 하루를 다
보내버린 사실을 알고 씁쓸하게 안도의 시선을
교환했다.
그날 밤, 빨간 볼보를 몰고 그들은 밤 속으로
달려나갔다. 니나는 빅토르를 옆에 태우고 핀란드로
가는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앞에서 마주오던 건너편
차선의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려 니나의 과속을
경고했다. 추월 당한 자동차들은 다급하게 경적을
울리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반사적으로 니나는 더
거칠게 액설레이터를 밟았다. 소형 볼보는 미친 듯
달려나갔다. 니나는 두 시간을 달린 후에야 속력을
줄이고 자작나무 숲에 가린 호반에 차를 세웠다. 차가
서자 급히 시동을 끈 니나는 숨돌릴 겨를도 주지 않고
빅토르에게로 쓰러져와 그의 목을 감았다. 갈증 만난
사람이 물을 들이켜듯 그녀는 빅토르의 혀를
빨아들였다.
다시 과속으로 아파트로 돌아간 그들은 술로 정신을
마비시키고 담배로 마음 속의 공허를 메우며
노래부르고 뒹굴고는 했다.
다음날도 그들은 아침을 놓치고 저녁이 되어서야
하루를 맞이했고 그들의 하루는 그렇듯 밤에서 밤으로
곧장 이어져갔다. 그렇듯 저녁에 하루를 맞이하기를
네 번 거듭한 끝에 빅토르는 그녀로부터 도망을
기도했다. 니나는 들어도 들어도 또 노래를 듣고
싶어했고 그의 몸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내놓았는데도 더 내놓기를 바랐다. 빅토르는 니나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가 없었다. 니나의 탐욕은 끝이
없었고 그녀의 갈증은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았다.
빅토르는 니나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들어줄 수는 있었다. 빅토르는 니나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큰 육체의 욕구불만과 정신적 욕구불만에
늘 허덕이고 있었다. 지난 네 밤과 네 낮으로 그의
모든 욕구가 다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막처럼 황폐해져 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가하지 않는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걱정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계속된 학교 결석에 대한
불안감 때문도 아니었다. 빅토르는 자신의 노래가
낭비되고 있는 것이 불안했다. 그는 니나의 격렬한
욕구를 채워준 다음 담배를 태워물고 의식적으로 잠을
쫓으며 니나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니나는 덩굴손처럼
빅토르를 감고 있던 팔을 힘없이 풀고 가까스로
잠들었다.
빅토르는 고르게 드내쉬는 그녀의 숨결을 확인하고
담배 한 갑을 주머니에 넣고 니나의 아파트를 나왔다.
빅토르는 그들이 함께 지낸 나흘 동안 직접 눈에
보이는 것 이외의 어떤 것도 서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 니나의 가족에 관한 것이며 니나의 볼보에
대한 궁금증이며 니나의 윤택한 생활의 방편도 묻지
않았다.
니나는 빅토르의 부모에 대한 것도 학교에 대해서나
집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빅토르는
그녀의 부모가 누구이며 어디에 사는지도 몰랐고
그녀의 장래의 꿈이 무엇인지도 듣지 않았으며
전화번호도 알아두지 않았다. 그들은 나흘 동안의
경험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헤어진
것이었다.
카페 함정
빅토르는 니나와의 조우가 어쩐지 꺼림칙하여
한동안 네프스키 거리의 카페에 발을 끊었다. 니나와
보낸 나흘간의 무질서한, 그러나 달콤하고 넉넉한
타락이 그에게 꿀처럼 회상되고는 했다. 빅토르는
다시 그 꿀을 찾아 거기에 매몰될 자신의 무절제가
두려웠다. 그는 니나의 덫에서 헤어날 자신이 없었다.
그 때문에 니나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이었다.
학교 공부에 열중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빅토르는 무료한 시간을 대부분 공상으로 보냈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리술
아저씨로부터 받은 책들이었다. 그 동양 고전들은
그의 공상에 아름다운 채색을 하거나 화려하고 날렵한
옷을 입혀주었다. 어쩌면 지극히 비현실적이랄 수
있는 그 책들은, 그러나 인간의 일에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암시적이며 은유적인 메시지로 가득 차
있었다. 리술 아저씨가 준 책들이 아무리 그의 공상을
다채롭게 채색해 주고 그 공상이 노랫말을 쓰게 하고
또 거기에 곡을 붙이는데 재미를 느끼고 그리고
기타를 안고 그 노래를 부르며 백번 천번 연습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음에도 그는 끝내 또 카페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노래를 방안에만 가둬 기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노래를 그의 귀로 실컷
들이키고 싶은 충동도 이겨내기 어려웠다. 그는
저녁이 되자 거리로 나갔다.
트롤리버스는 집 앞 정류장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객이 내리고 타면 곧 출발하고는 했으나
마침 도착한 트롤리버스는 빅토르가 탈 때까지 퇴근해
귀가하는 승객을 부리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만원인
트롤리버스에 승차하였다. 빅토르는 네프스키 거리는
그냥 지나쳤다. 네프스키 거리의 어느 카페를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를 니나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제르진스키 거리로 가면 니나와
마주치지 않아도 될 터이고 니나의 유혹으로 인한
번민도 없을 터이지, 그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제르진스키 거리의 초입에서 트롤리버스를 내렸다.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거리에는 꺼졌던 생명이
되돌아오듯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
빅토르는 전에 몇 번 들른 적이 있는 카페 반란으로
들어갔다.
이른 시각인가. 여남은 개의 테이블 중 겨우 두
개밖에 차 있지 않았다. 무대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빅토르는 빈주머니를 생각하자 어깨가 축 늘어졌다.
주머니가 비어 있는 주제에 테이블에 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무엇에 등을 떼밀리듯 카페 반란에서
나왔다. 일단 목표로 했던 카페 반란에서 나오자 갈
곳이 막막했다. 막연히 거리를 배회할 도리밖에
없었다. 거리를 걷고 있는 저 사람들은 모두 제
갈곳이 있을 것이리라. 얼굴에 미소가 번져 있는 저
사람은 필경 따뜻하고 푸짐한 식탁이 마련된 집으로
돌아가고 있겠지. 팔에다 백을 건 저 아리따운 여자는
기다리고 있는 남자에게로 가고 있을 것이리라. 저
뚱뚱해뵈는 아주머니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재롱둥이 아이들을 생각하며 귀가를 서두르고
있으리라. 심지어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뵈는 저
남자도 돌아갈 가정이 있으리라. 저들에게는 나에게는
없는 생활이 있으리라. 왜 세상은 나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빅토르는 생각을 계속했다. 왜
나는 세상이 마련해둔 안락을 추구하지 않은 것인가.
세상이 만들어 놓은 만족과 안락을 피해 왜
딴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는 나의 독자적인 만족과
안락을 어렵고 힘들게 추구하고 있는 것인가.
학교에서 하라는 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면 선생님도,
아버지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터이고 그 칭찬이
가져다주는 행복으로 나는 만족하지 않았겠는가.
아버지처럼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면 아버지가 그랬듯
학교 졸업과 함께 좋은 일자리에 가서 일을 하고 그
급료로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공부를 등한히한 것은 그렇다 할지라도 학교
선생님이나 어머니께서 그토록 칭찬을 아끼지 않던
그림공부를 내가 계속했더라면 이렇게 방황하지 않고
지금보다는 훨씬 안정된 생활을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상념을 더듬으며 거리를 걷던 빅토르는 머리를
저었다.
그는 세상이 마련해둔 그런 안락을 마다하고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을 아직 한번도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는 현재의 생활에 만족은 하지 못하였으나 불만은
없었다. 그는 어떤 형태의 것이든 자신에게 다가올
그의 미래를 믿었다. 최악의 경우가 온다해도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것으므로 후회는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사크 성당의 육중한 황금빛 돔이 바라보이고
앞발을 허공을 향해 쳐들고 있는 말을 다그치고 있는
니콜라이 1세 기마상이 멀지않은 이사키에프스키
광장에 펼쳐지고 있는 빠른 진행의 어둠을 발로
헤치며 카페 반란과 멀어지고 있었다. 구마리아
궁전의 모퉁이를 돌아 마이로로프 대로로 꺾여지던
빅토르는 몇 해 전에 다녔던 미술학교가 그 부근에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빠쉬코프와 '제6병동'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그들의 노래를 마음껏 들려줄 수
있었던 학교였다.
추억이나 더듬고 있을 한가한 겨를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발길을 돌렸다. 다시 이사키에프스키
광장쪽으로 발을 떼놓았다. 바로 그때 그의 시선을
무슨 흡반처럼 빨아들이는 간판이 있었다. 카페 함정.
사람들이 여가를 즐기는 카페에 함정이라는 이름을
붙이다니, 그 주인의 심리학적 계략을 한번 구경하고
싶은 유혹이 불끈 일어났다. 무슨 마력에 이끌리듯
이미 그의 발걸음은 카페 함정을 향해 옮겨지고
있었다. 계략으로 남을 곤경에 빠뜨리는 어떤 장치,
짐승을 잡기 위해 파놓은 허방다리. 그러함에도
함정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취형 작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좁다란
공간이 있고 맞은편에 화장실 표시가 있었다. 왼쪽에
도어가 있고 그 도어 너머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음악소리를 더듬는 더듬이가 예민하게 발달된 그는
이미 그 도어를 밀고 있었다. 조도가 낮은 전구들이
천정에 매달려 있는 실내는 침침했다. 테이블에는
손님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고 다행히 무대도 있었다.
무대에서는 두 사람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소나기처럼 쏟아져나오고 있는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빅토르는 어눌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배인 되십니까?"
술 판매대 옆에 서 있는 얼굴이 붉고 통통한
사내에게 주저하며 다가가 말을 붙였다. 사내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빅토르를 쏘아보았다.
"나중에 노래를 좀 부를 수 있을까요?"
빅토르는 자주 퇴짜를 경험했던 터라 크게 기대는
걸지 않았다.
"저 애들이 내려오면 물어보구료."
지배인은 별 거지 같은 자식이 맹랑한 소리를 다
한다고 생각하는 듯 턱으로 휙 무대쪽을 가리켰다.
"고맙습니다."
빅토르는 고개까지 푹 숙이며 인사하고 카운터 옆의
구석에 서서 무대를 지켜보았다. 그들의 노래는 너무
경박하였다. 즐거움이라고 해서 모두 저렇게 경박하게
표현해서는 안되는 것 아닐까. 좀더 침착하고 품위를
갖춘 즐거움도 있으리라. 사람들은 왜 즐거움은
화사하고 경쾌하게 표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무대 위의 두 사람은 한 곡을 마치고 다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달콤한 사랑의 세계를 노래했다. 구원받은 자들의
사랑을 그들은 노래했다. 바이칼 가는 기차에서
만났던 이리나 네스테랭코바가 뇌리에 떠올랐다. 남편
유리 네스테랭코의 유형지를 따라다니며 그의 수발을
들고 헌신하는 그녀라면 사랑을 저렇게 노래부르지는
않을 것이리라. 사랑은 꿀처럼 달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쓰라림과 번민과 고통으로 가득 채워져
멍에가 되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는 이리나라면
저들과 반대쪽의 정서를 노래했으리라.
마침내 그들의 밝은 사랑은 막을 내리고 그들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얼굴이 땀에 번들거리는 청년이
다가오자 망설이던 빅토르는 말을 붙였다.
"노래 잘 들었습니다. 저...... 노래를 좀 부를 수
있겠습니까?"
빅토르보다 서너 살쯤 더 먹었을까, 그 청년은 금세
미간을 좁히고 냉담한 시선으로 빅토르를 쏘아보았다.
"노래는 잘하지 못하지만 기타는 좀 치는
편이거던요. 쉬는 시간에 땜쟁이로 사용하실 만
할겁니다."
어느 사이 애걸조가 되어 있었다. 빅토르는 그렇게
말해 놓고 그것이 속이 상해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던 쓰라린 기억들이 빠르게
머리 속을 스쳐갔다. 그는 긴장하여 다리가
뻣뻣해졌다. 청년은 미간을 더 삐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가뜩이나 없는 손님 더 떨어지게 당신같은
동양계의 무명을 무대에 올릴 수 있겠어요."
빅토르는 역시 예상했던 대답을 듣고 말았다.
참담한 기분으로,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그는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깨가 축
늘어졌고 카페 함정을 힘없이 걸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거리는 적의를 품고 있었다. 거리는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깔,깔,깔 금방이라도
그런 비웃음소리가 터져나올 것 같았다. 너 같은 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사라져야 해. 너는 이 세상 어디에도
쓰일 데가 없어.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빅토르는 터덜터덜 거리를 걷다가 힘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를 받아들이는 유일한 장소인 집은
그러나 그에게 열등감만 심어주었다. 자기를 받아주는
집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곳이겠는가. 자기 같은
머저리 못난이를 받아들이는 집 또한 그렇게 못난
머저리가 아니겠는가.
그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저녁이 되면 거리로
나섰다.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카페를 기웃거리며
무대에서 노래부르는 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가 돌아오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그의 발길은 또 함정으로
향해졌다. 아무 데도 갈 데가 없는 그는 카페마다
기웃거리다 우연히 발길이 함정으로 향했다. 저녁
아홉 시가 넘은 시각인데 카페는 조용했다. 무대에
노래부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몇 개의 테이블에 손님이 앉아있을 뿐 한산했다.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아도 노래부르던 친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빅토르는 지배인에게로 다가갔다.
금발의 지배인은 낯이 익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지배인은 다가오는 빅토르를 바라보며 눈쌀을
찌푸렸다.
"아저씨, 무대가 비어있군요? 제가 노래 좀 부르면
안될까요?"
지배인은 흥, 냉담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안돼. 곧 애들이 올 거야."
빅토르는 그만 돌아나오려다 손님들이 없는 한쪽
구석자리로 가 앉았다. 그곳 함정에 들어오기 전 그는
두어 시간 동안이나 거리를 방황했기 때문에 다리라도
좀 쉬고 싶었다. 그가 자리에 앉은 다음 얼마쯤
지났을까, 담배가 몹시 피우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그러나 담배가 없는 서글픈 자신의 주머니를 생각하며
비감해 있을 때, 출입구에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지난번 무대에서 노래부르던 치들은 아니었다.
언젠가 카페 동굴에서 그에게 노래를 부르게 주선해
주었던 친구가 맨 앞장을 서 있었다. 그 친구는 남녀
네 명의 친구들과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는 곧
담배를 피우는 그들의 모습을 건너다 보았다. 그때
그들의 테이블을 향해 걸어가는 지배인의 옆모습이
보였다.
빅토르의 시선은 그들에게로 날아가 꽂혀 있었다.
지배인과 그들은 무엇인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지배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낯익은 청년이 무엇
때문인지 고개를 완강히 젓고 있었다. 지배인은
불쾌한 표정으로 그들의 테이블에서 떨어져 바쪽으로
돌아갔다. 청년이 이름을 말해 주었는데, 잊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며 빅토르는 담배를 얻으러 가볼까
망설였다.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청년이
두대째의 담배를 다 태우고 그 꽁초를 재떨이에다
부벼 끌 때까지 그는 계속 담배 생각을 하며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옆에 다가와 있는 기척을 느꼈다.
지배인이었다.
"아까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했던가?"
"예?"
빅토르는 의외의 말에 놀라 지배인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무대에 올라가 몇 곡 불러 보겠나? 허나
솜씨가 서툴면 당장 끌어내 버릴 거야."
빅토르는 주저하는 시선으로 지배인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없는 모양이군!"
빅토르는 황급히 부인했다. 얼마나 목마르게
갈망했던 기회인가.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그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너무 갑작스런 제안이라서......."
"애들이 늦어지는 모양이니까. 먼저 몇 곡만 부르고
내려오라구."
"예, 고맙습니다."
빅토르는 머리를 꾸뻑 숙여 재빨리 지배인에게
인사하고 무대로 날 듯이 뛰어 올라갔다. 빅토르는
마이크 옆에 세워진 기타를 들고 줄을 몇 번 튀겨본
다음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직 경험이 짧은 탓인지
그는 무대에만 오르면 어깨가 굳어지는 버릇이
있었다. 청중들과 자칫 눈이라도 마주치면 입이
열리지 않는 폐단도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기타의
현을 부드럽게 튀겨나갔다. 전주를 끝내고 드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는 곧 그 자신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왔다.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낯설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수많은 밤을 지새며 연습을 해온 익숙한 노래였다.
손은 스스로 현의 위치를 알아 튀겼고 노래는 저절로
나왔다. 그는 점점 무아경에 몰입하여 노래부르기
시작했다.
무수한 세월의 중량에 지붕이 떨린다
하늘의 목동이 구름을 몰고 간다
도시는 밤하늘에 빛을 쏘아올린다
그러나 밤은 힘이 세다
이미 잠자리를 마련한 사람은
편히 잠들라, 편히 잠들라
나는 이 시간을 목마르게 기다렸고
드디어 밤은 왔다.
침묵하던 입은 열리고
아무 것도 기달릴 것 없는 사람은
말에 안장을 얹는다
그들은 밤의 중심으로 떠났고
이제 아무도 그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미 잠자리를 마련한 사람은
편히 잠들라, 편히 잠들라
이웃 사람이 귀가한다
질주하는 말의 발자국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들은 나의 잠을 빼앗아간다
나의 꿈을 방해한다
아무 것도 기다릴 것 없는 사람은 또 길을 떠난다
그러나 이미 잠자리를 마련한 사람은
편히 잠들라, 편히 잠들라
시를 낭송하듯 잔잔하게, 무슨 사연을 하소연하듯
애절하게, 세상을 질타하듯 날카롭고 거칠게 세 곡의
노래를 마친 빅토르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아무도
박수 따위를 치지 않았다. 그의 노래는 무의미하게
시간의 강물에 던져진 작은 나뭇잎처럼 흔적없이
흘러가 버렸다. 옆으로 다가가자 지배인이 생소한
곳에서 조우한 야만인을 쳐다보듯 이상한 눈으로
빅토르를 쳐다봤다.
"수고했어."
지배인은 노래를 더 불러 달라거나, 노래를 잘
들었다거나 한마디 코멘트도 없었다. 의기소침해진
빅토르는 아까의 자리로 가서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무대는 텅비어 있었고 테이블은 술을 찾는 손님들로
채워져갔다.
빅토르는 아무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신의
노래에 대한 자조적인 감정으로 기분이 더
우울해졌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골몰해 있었기
때문에 누가 옆에 다가온 것도 미처 알지 못했다.
"역시 혼자군?"
고개를 들어보니 낯익은 그 청년이었다.
"저쪽 우리 자리로 옮기지. 같이 술이나
한잔하게......."
청년은 정중하게 청하였다. 빅토르는 그 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늘 혼잔 것 같애?"
청년의 말에 빅토르는 얼굴을 붉혔다.
"자, 마셔."
청년은 초콜릿빛 맥주병을 빅토르 앞으로
옮겨놓았다. 빅토르는 그렇지 않아도 목이 컬컬하던
참이었다. 체면 돌보지 않고 꿀꺽꿀꺽 단숨에 병을 다
비우고 말았다. 그가 빈 병을 내려놓자 청년이 눈이
휘둥그레져 쳐다보았다. 빅토르는 또 얼굴이
붉어졌다.
"담배는 안 태우니?"
청년의 옆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은 금발의 아가씨가
담배갑을 내밀며 물었다. 어딘가 깔보는 것 같은
기운이 눈에 어려 있었다. 혀끝에 군침이 돌았으나
고개를 저었다.
"난 엘레나야."
아가씨는 자기 이름을 먼저 밝혔다. 담배를 얼마나
자주 피우는지 오른손 검지와 장지 끝에 노랗게
담배진이 배있는 그녀는 차가운 회색 눈에 고집스럽고
오만해 보이는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난, 빅토르야. 빅토르 최."
그때 청년이 다른 한 아가씨와 청년을 소개시켰다.
다른 아가씨는 이름을 카자코바라고 했다. 석고처럼
하얀 얼굴에 코가 유난히 뾰족해 성깔깨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살속이 비칠 만큼 살갗이 투명했고
파란 눈동자는 바이칼을 연상시켰다.
다른 한 청년은 올레그 발린스키라고 했는데, 말
붙이기가 까다롭던 예전 학교 친구를 연상시켰다.
빅토르를 청해간 친구와는 달리 친해지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들은 한결같이 세상을 시들하게 여기고
있는 듯 약간씩 건방진 표정들이었다. 아니면 세상의
흐름으로부터 밀려난 자신들의 처지를 인식하고 화가
난 시큰둥한 표정이라고나 할까. 그들의 표정에서
빅토르는 자신의 표정을 읽는 것 같아 고통스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뭐랬어. 자주 만나게 될 것 같다고 했었지."
청년은 담배갑을 내밀었다. 빅토르는 입 안에 도는
군침을 삼키며 담배를 한 개피 꺼냈다. 그러는
손가락을 끊어 버릴 듯 노려보고 있는 엘레나의 곱지
않은 시선을 빅토르는 면도날처럼 느꼈다. 그녀가
권하는 담배는 거절하고 청년이 내미는 담배는 받아
입에 무는 것이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겠지.
그러나 빅토르는 쓰윈이 켜주는 성냥불을 태연히
붙이고 연기를 폐 깊숙이 빨아들여 그 맛을 음미했다.
"쓰윈도 선견지명이 있나?"
카자코바가 빈정거렸다.
그래, 쓰윈이랬지. 순간 빅토르는 잊어 버렸던
청년의 이름이 얼른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본이름이 아닐 터였다. 아무렴 돼지(쓰윈)가 뭔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의 이름은 뾰뜨르 니꼴라예비치
쁘로조로프라고 했다.
"혼자서 세계 정복을 위해 내려온 외계인 같애?"
"외계인!"
빅토르는 픽 웃고 말았다. 그래, 내가 겪는
외톨이로서의 외로움은 어쩌면 계기 고장이라도
일으켜 항로를 잃고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느끼는
그런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전에 자주 반추했던
것처럼 그 생각은 낯이 익었다.
"외계인이 아니라면 늘 그렇게 혼자 떠돌아 다닐 수
있겠어?"
"늘 그래."
빅토르는 그래 나는 우주에서 온 외계인이야, 그런
생각을 굴리며 미소지었다.
"늘 그렇다니, 학교 친구들이라도 있을 거 아냐?"
"학교에 입학한지 몇 달 안됐거던. 게다가 날
좋아하는 친구들은 잘 안 생겨. 그렇다고 우정을
구걸할 수는 없고......."
쓰윈은 순간 러시아인들의 외국인 기피증을
떠올렸다.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러시아인들이
피부색과 용모가 다른 동양계에게 친근감을
느끼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하지만 그만한 노래솜씨라면 친구가 없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데. 어느 학굔데?"
"61 전문학교야."
"61 전문학교라면 도예같은 걸 배우겠네?"
"아니. 나는 목각 전공이야."
"목각 전공!"
카자코바는 흥미를 나타냈다.
"조각에 솜씨가 있는 모양이지?"
"아니, 그냥 마땅한 데가 없어서 다니는 거야."
"우리 사촌 오빠 한 사람도 목각기술잔데 그 오빠
작품이 가게에서 팔리는 걸 보니 기분좋던데."
"그렇지만 나는 목각을 생업으로 삼고 싶지는
않아."
빅토르의 말이 떨어지자 엘레나는 입술을 뾰족
내밀었다.
"쳇! 제가 무슨 가수라도 될 것 같은 모양이지."
"내가 무슨, 가수라도 될까봐 미리 걱정이 되는
모양인가?"
빅토르는 빙그레 웃었다.
"압도버스 운전수가 되겠다는 말도 안했잖아."
엘레나의 말에 빅토르는 또 쿡 웃고 말았다. 담배
한 대 받아 피우지 않았다고 저렇게 미워할 수 있는
것일까.
"왜 만나자마자 두 사람은 티격태격이야?"
"쟤가 잘난 척 하잖아."
"내가 보기에 빅토르는 전혀 잘난 척 한 것 같지
않던데."
"남자와 여자가 다른 점이 뭔데. 남자가 느낄 수
없는 것을 여자는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
아냐?"
"기악 전공과 현악 전공의 차이가 아니고?"
"쳇, 기억력을 그런데 쓰라고 하늘이 내린 줄
알아."
엘레나는 쓰윈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언젠가 엘레나는 쓰윈과 음악에 대한 의견 대립이
벌어졌을 때 자신이 전공한 바이올린을 내세워 공격과
방어를 한 적이 있었다. 엘레나는 쓰윈이 피아노를
전공했기 때문에 자기처럼 바이올린을 전공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섬세한 음감을 감지할 수 없다는 식의
묘한 논리를 펼쳐 쓰윈의 냉소를 자아냈었다. 쓰윈은
그때의 부질없는 언쟁을 빌어 말한 것이었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 빅토르는 잘난 척 한 적
없었어."
"미안해. 나는 아직 장차 무엇이 되리라 정한 것이
없어. 압도버스 운전수가 될지, 빌딩 수위가 될지,
목욕탕 청소원이 될지, 아직 나는 몰라."
"목욕탕 청소원이 가장 편할 것 같은데. 머리쓸
일이 없을 테니까."
"나도 그런 쪽을 바래."
빅토르의 말에 일제히 웃고 말았다.
"자, 장차 목욕탕 청소원의 성공을 위해!"
카자코바가 제 앞의 술병을 번쩍 쳐들며 외쳤다.
"꼭 목욕탕 청소원의 꿈을 이루시기를!"
엘레나도 술병을 쳐들며 말했다. 쓰윈도 발린스키도
빅토르도 각자 자기 앞의 술병을 높이 쳐들었다.
그들은 일제히 건배를 하였다.
그들은 한두 해씩 학년 차이는 있었으나 모두 같은
음악학교를 다닌 동창생들이었다. 모두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학교 밖에서 배운 것에 더 관심을 쏟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학교생활이나
학과공부에는 흥미를 갖지 못하고 거부감을 느끼며
반면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이나 이성의 관심을 끄는
일에 열중하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었다. 쓰윈과
엘레나는 이미 졸업을 했고 성악 전공의 카자코바는
중도에 일 년을 쉬어 올해 졸업반이었다. 첼로 전공의
올레그 발린스키는 이제 3학년으로 그들 사이에서
가장 어렸다. 어쨌든 그들은 학교에서 문제아로
취급받는 것까지 다 닮아 있었다.
"언제 한번 우리 집에 놀러올래. 록을 좋아한다면
너의 관심을 끌만한 것이 많을 거야."
쓰윈은 헤어지기 전 메모지에다 급히 전화번호를
적어 빅토르에게 내밀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 고마워."
빅토르는 그러나 한달이 지나도록 쓰윈에게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 무렵, 빅토르는 학교에서 목각 작품 두 점을
제작해 제출하라는 과제를 받아, 그것을 해내느라고
카페를 어슬렁거릴 겨를도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한가지는 러시아 왕실의 문양인 활짝 날개를 펼친
독수리를 조각하는 것으로 정했다. 독수리의 조각은
어렵지 않게 마쳤다. 이어 두번째의 과제물에
착수했다.
빅토르는 두번째 목각 소재를 물색하느라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 일본 문화와 중국 문화를 소개하는
책에서 용을 발견하고 거기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리술 아저씨로부터 용에 대한 전설을 여러 가지 들은
터라 그는 평소 용에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리술 아저씨가 가진 책 속에서도 용을 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의 임금이 앉는 의자에
새겨진 것이어서 모양을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의 그림은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힘찬 용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그동안 용의
자태에 대한 궁금증을 다 풀어주었다. 그 그림을
발견한 빅토르는 다음날부터 당장 그 비상하는 용의
자태를 나무에 새겨가기 시작했다.
그는 열흘이 흘렀는데도 마음에 흡족한 용을 새기지
못했다. 벌써 몇 개째의 목재를 버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모처럼 학교 작업실에 오후 늦게까지
남아 목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비쨔!"
그 날도 빅토르는 늦게까지 작업실에 남아 마음에
드는 용을 조각하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작업대 위에는 새기다만 용이 여러 마리 흩어져
있었다. 빅토르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막심 빠쉬코프가 웃고 있었다. 그는 전에 보지
못했던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카페 함정에서 만났던 쓰윈이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빅토르의 얼굴에서 비켜나 한쪽으로
물결처럼 누워있는 용의 비늘무늬에 꽂혀 있었다.
그는 놀라움을 나타낼 때 그러는지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는 카자코바와
엘레나가 뭔가 좀 시큰둥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미샤가 웬일이냐?"
빅토르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훔쳤다.
빠쉬코프를 보자 자신이 그를 너무 오래 잊고
지냈다는 사실이 상기되었다. 12세 때, 글리보에도프
운하 옆의 시립예술학교에서 만난 이래 요즘처럼 몇
달 동안이나 그를 잊고 지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제6병동을 조직해 함께 활동을 한 탓도 있었겠지만,
서로 먼 지방으로 여행을 가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개재되지 않는 한 일주일 이상 격조한 기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빅토르는 순간 빠쉬코프에 관한 추억이 일제히 키를
세우고 일어서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시와 음악도 알아야 해!
언젠가 빠쉬코프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는 자기가
지었다는 시를 빅토르에게 보여주며 감상을 묻기도
했다. 그는 그 시에다 제멋대로 곡을 붙여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고 또 그 감상을 물었다. 그럴
때마다 빅토르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가
흡족해할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답을 유보한 대신 빅토르는 어느날 자신이 지은
시를 수줍게 그 앞에 내놓고 그 감상을 물었다.
빠쉬코프는 빅토르 자신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고
여기는 것을 감탄해 마지 않았다. 빅토르가 그 서툰
시에다 곡을 붙여 기타를 치며 노래로 들려주었을
때도 빠쉬코프는 놀라운 신세계라도 발견한 것처럼
요란스럽게 감탄했었다.
거리의 악사로 나가 두 번의 연주회 끝에 결국
파국을 맞은 '제6병동'의 리더. 멤버들 넷이 다
제적이라는 최악의 처벌을 받고 뿔뿔이 흩어져 서로를
만나는 것조차 조심해 왔던, 늘 가슴 속에 살아있던
막심 빠쉬코프.
"연락도 한번 못해 미안해."
"이번 학기에 기술전문학교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들었어."
"아버지와, 어차피 지키지 못할 것이지만, 약속을
했거던. 그래서 겨우 들어간 학굔데, 흉내라도 좀
내야지. 요즘 개인지도를 받는 미술교수 수발 드느라
정신이 없어."
"나도 그래. 아무 낙없이 그냥 혼자 이런데 처박혀
시간이나 죽이고 있잖아."
"그래도 나보다는 낫던데."
빠쉬코프는 쓰윈을 돌아보았다.
"......?"
"쓰윈한테서 들었어. 너가 아주 좋은 노래
부르더라던데."
빅토르는 얼굴을 붉혔다.
"심심해서 카페를 어슬렁거리고 다니며 건달 노릇을
좀 했어."
"건달?"
"나 같은 놈을 건달 아니면 뭐라 부르겠어."
"그럼 너 같은 건달을 못만나 안달한 이 친군 뭐라
불러야 돼지?"
"다 건달들이지 뭘!"
옆에 있던 쓰윈이 그렇게 말하고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건달들끼리 잘 만났군. 그럼 어디 나가 축배라도
들까. 건달들의 만남을 위해!"
"어쨌든 일단 여기서 나가자."
빅토르는 여러 사람들에게 자기의 어설픈 솜씨로
빚어놓은 용들을 더 구경시키고 싶지 않았다.
빅토르는 학교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찻집으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난 전화를 해줄 줄 알았는데, 연락이 없어 당신
만나려고 카페는 있는 대로 다 수소문하고 다녔지
뭡니까."
자리에 앉자 쓰윈이 빅토르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저녁이면 함정과 동굴을
비롯하여 여러 카페를 전전하였다고 했다. 그는
저쪽의 연락처는 알아둘 생각도 하지 않고 이쪽
전화만 달랑 적어주고 연락하라고 한 건방진 행위가
두고두고 후회되었다. 그러나 그는 신기루였던지,
아니면 유령이었던지 어느 카페에서도 어느
길모퉁이에서도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를
만나고 싶은 열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 갔다. 그의
음악이 품고 있던 묘한 마력이 쓰윈을 부단히
유혹하여 그는 방황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렇듯 빅토르를 애타게 찾아다니던 어느날
빠쉬코프에게 전화를 하던 중 그 신기루 같은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털어놓았더니, 뜻밖에도 빠쉬코프는
'제6병동' 멤버로 잘 아는 친구라 하지 않는가.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쓰윈은 지난 한달여 동안
계속됐던 쓰라린 방황이 상기되어 빠쉬코프에게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반가운 마음을 있는 대로 다
털어놓았던 것이다.
"덫에 놀란 사슴한테, 무슨 미끼를 던질들 덥석
물겠어. 비쨔는 사람을 쉽게 사귀지 못해."
빠쉬코프가 옆에서 적절하게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빅토르를 덫에 놀란 사슴에 비유한 것은 어릴 때
짓궂은 러시아계 아이들과 끊임없이 되풀이했던
충돌을 염두에 둔 것이리라.
"그런데 비쨔, 너 신경과민도 알아줘야 해. 쓰윈
같은 사람을 피하면 영영 친구 사귀지 못해. 넌
모르고 있었던 모양인데, 쓰윈은 펑크록에는 도가 틘
친구야. 그룹도 있지."
"그룹?"
"그래, 그룹 돈빠스의 리더야."
빅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빠스라면 들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대화에 이어 빠쉬코프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얼마 전, 쓰윈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레닌그라드에
새로운 가수가 한 사람 나타났다고 호들갑을 떨잖아.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노랫말도 인상적이드라나. 아직
무대에 익숙치 않은 듯 수줍음을 타는 듯한 무대
매너도 호감이 가고. 이 친구 이야기를 몇 마디 듣지
않아 나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비쨔 너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지."
빠쉬코프는 온 얼굴에 웃음이 가득 번져 있었다.
"말 몇 마디에 난줄 알아차렸다니, 너의 통찰력
알아줘야겠구나."
"동양계에다 쓸데없이 미루나무처럼 키가 껑충하고
우수 짙은 음성으로 이 세상을 깔보는 듯한 내용의
노래를 탁월하게 부르는 사람이 비쨔말고 이 세상에
또 누가 있을까? 그래서 내가 그 친구를 잘 안다고
하자 쓰윈이 좋아하던 꼴이라니."
빠쉬코프는 그때의 쓰윈의 반응을 상기하면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너를 만나게 해주면 당장 레스토랑에서 아주
근사하게 한턱 내겠다고 하잖아. 난 누가 한턱 낸다면
약해지잖아. 그래서 그러겠다고 했더니, 그날 저녁
당장 보자는 거 있지. 그래서 한턱 잘 먹었지."
"내가 너한테 쓸모가 있었다니 듣기 싫지는 않은데,
쓰윈에게 공연한 돈을 쓰게 해 미안하군."
"그런 걱정 안해도 돼. 쓰윈이 얼마나 구수쇤데,
함부로 돈 썼겠어. 다 제 속셈이 있을거야. 게다가
쓰윈을 소개하면 비쨔도 혼자 다니는 외로운 신세도
면할 것 같아 내가 흔쾌히 한턱 받아 먹었던 거야."
17. 너도 비틀즈를 좋아하는구나
쓰윈은 건달이었다. 쓰윈의 친구들도 다
건달이었다. 그들은 일정한 직업도 없었다. 하는 일도
없었다. 늘 빈둥빈둥 놀았다.
쓰윈의 아파트를 드나드는 친구들 가운데 학생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결석을 밥먹듯 하고
공부에는 손톱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쓰윈네 아파트에 모여드는 친구들은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예사로 생각했다. 집에서 돈을
슬쩍해오거나 귀중품을 훔쳐오는 것도 예사로 여겼다.
아버지, 어머니를 이 세상의 가장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 것도 공통적이었다. 그들은 수중에 돈이 있을
때면 그것을 물쓰듯 써버렸다. 돈만 있으면 당장
담배를 사고 술을 퍼마시고 차를 타고 아무데나
목적도 없이 떠나 돌아다니며 낭비해 버렸다. 그리고
수중에 돈이 떨어지면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담배도
술도 굶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어떻게 지냈던가. 걸핏하면 집을
뛰쳐나오고, 아버지 말이라면 무조건 거부감부터
일어나 거역하기 일쑤고, 결석을 출석보다 몇 배나 더
하고 그리고 마침내 퇴학이라는 가장 가혹한 처벌을
받기도 하고.......
쓰윈의 아파트에 출입하기 전부터 빅토르는 자신이
건달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건달들'이라는
시를 짓고 노래를 만들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반성적 회한으로부터 비롯된
인식이었다. 쓰윈과 그 친구들의 생활을 보고서야
빅토르는 건달들 세계에서 일종의 동류의식과 함께
편안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 편안한 불안감은 그들을
더 똘똘 뭉치게 하는 접착제 역할을 했다. 철저한
건달들의 세계를 알게 된 것이었다.
그날도 쓰윈의 아파트에는 건달들이 많이 모였다.
올레그, 꾸끄, 쥬사, 미하일로브, 뽀스떼르, 엘레나,
카자코바 등 여나믄 명이나 모여 있었다. 빅토르는
쓰윈의 아파트에 그날이 세번째였다.
빅토르는 쓰윈의 연주를 몇 번 들었으나 그다지
좋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몇 번 만나지 않아
빅토르는 쓰윈이 자신과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쓰윈은 연주를 형식에 치중했다. 리듬이나
멜로디같은 음악적 요소보다 그것을 어떻게 남과
다르게 연주하느냐 하는데 더 신경을 썼다.
쓰윈은 기타를 연주할 때도 발을 구르거나 공명판을
두드려대기도 하고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목청껏 괴성을
지르기도 하고 갑자기 입에 담기조차 거북스런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는 펑크록을 한답시고 그렇듯
묘하고 엉뚱한 짓을 펼쳐놓았다. 쓰윈은 자신의 거친
연주 형식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좀더 심하게
말하자면 쓰윈은 음악에 대한 철저한 연구나 분석적
이해없이 막연히 레코드나 테이프를 통해 서구의
록이나 블루스나 재즈나 포크송 등을 듣고 그것을
흉내내면서 가수가 되려는 맹목적인 꿈을 품은 일종의
댄디스트로 보였다.
그에 반해 빅토르는 정제된 연주를 하는 편이었다.
빅토르는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이 록임을
자처하면서도 무조건 남의 것을 모방하거나 야단스런
무대 매너 같은 것을 흉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자기 식의 음악 문법을 개척해 나가려고 애썼다.
비록 그것이 모방보다 더 못하다 할지라도 그는 자기
음악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기존의
가치개념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이상의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음악이라 할지라도 예술공통적인 요소를
어찌 다 거부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파격의 신선함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사람의 정서적 욕구의 기본인
아름다운 충격이나 감동을 구사하지 않고서 예술이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런 빅토르의 생각은 빠쉬코프도 마찬가지였다.
'제6병동' 시절이 문득문득 그리워졌다. 그러나
빠쉬코프는 아직도 자기 아버지와의 약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영영 그의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할지도 몰랐다. 빠쉬코프를
음악적 반려로 다시 만나리라는 기대는 아쉽지만
포기한지 이미 오래였다.
비록 쓰윈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빅토르는 그를 싫어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쓰윈의
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쓰윈은 현재의 자신을
유능한 록큰롤 가수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기야 80년
봄에 발족한 레닌그라드 록클럽에 쓰윈의 그룹
돈빠스가 가입을 했고 거기서 연주회를 가졌기 때문에
가수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빅토르가
보기에 아직 가수라기엔 어설퍼 보인달 뿐 쓰윈
자신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빅토르에게 있어 쓰윈은 노래를 매개로 사귈 수 있는
몇 안되는 친구임을 빅토르는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쪽에서 싫어하지 않는 한 가까이 지내기로
작정했다.
쓰윈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열어준 쓰윈은
빅토르를 보자 오른팔을 불쑥 쳐들고 갈고리처럼 꺾어
내밀었다. 빅토르도 역시 오른팔을 꺾어 쓰윈의 팔을
걸고 힘껏 당겼다. 그들의 가슴은 격렬히 밀착되었다.
"으음!"
그들은 동시에 신음같은 그런 소리를 토하며 남은
손으로 서로의 등을 두드렸다. 그 묘한 동작은 그들
비트들의 인사법이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쓰윈은
빅토르에게 그 인사법을 가르쳐주었다. 나중에
록클럽에 함께 갔을 때 쓰윈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런 식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걸 본 후 빅토르도 그
인사법을 어설프게 써먹었다.
거실은 왁자지껄했다. 담배 연기가 숨막힐 정도로
자욱했고 자작나무 같은 것이 부패할 때 풍기는 것과
비슷한 그런 불쾌하지 않은 썩은 냄새가 가득 떠돌고
있었다. 빅토르는 빈 포도주병들이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보며, 그리고 나중 누군가 따뤄주는 포도주잔을
받아 마시고 나서 그 냄새가 포도주에서 나는
냄새임을 알았다.
마침 이야기를 하고 있던 쥬샤가 빅토르를 보자
벌떡 일어나 팔을 걸고 당기며 가슴을 부딪치는 그들
방식의 인사를 나누었다. 올레그와 꾸끄도 차례로
같은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눈인사와 고개짓으로 아는 체를 하고 인사에
대신했다. 쥬샤는 잠시 중단했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떤 마을의 농부들은 자기들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시냇물을 여름마다 원망했었지. 왜냐하면
여름이 되어 장마만 지면 자기들 밭의 농작물은
물론이려니와 자기들 가재도구까지 다 쓸어가 버리곤
했거던."
쥬사는 새 담배에다 불을 붙여 그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그는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연기가 눈에
들어갔던지 눈을 찌푸렸다.
"해마다 시냇물의 횡포를 견디지 못한 마을
사람들은 회의를 열어 그 대책을 의논했대. 난상토론
끝에 마침내 결론을 얻었는데, 시냇물의 상급기관이라
할 수 있는 큰강에 가서 시냇물에 대한 재판을 청하여
그동안 쓸어간 재물을 변상받기로 한 것이지."
아무도 쥬사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포도주를 권커니잣커니 마셔대거나
자기들끼리 낮은 소리로 무엇인가 속삭이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나 쥬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마을 사람들은 떼지어 큰강으로 내려갔지. 그러나
큰강에 도착한 마을 사람들은 그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어. 왜냐하면 그동안 시냇물이 쓸어간 자기들의
가재도구며 재산들이 모두 큰강에 모여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지."
"재판을 청구하러 갔더니 알고본즉, 큰강이 더 큰
도둑이었단 말이지?"
쥬사 이야기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뽀스떼르와 귀엣말을 나누던 꾸끄가 언제 들었던지
그렇게 물으며 크게 웃었다.
올레그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빅토르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언젠가 리술 아저씨가 권해 읽은 적이 있었던
크릴로프의 풍자적인 우화 한 토막이었다. 크릴로프는
오래 전부터 러시아 농민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취합하여 그것을 윤색하고 다듬어 새롭게
운문 형식으로 엮어냈다. 크릴로프의 우화는 신랄한
풍자와 익살이 전편에 충만해 있었다. 농민들은
전통적으로 관료나 귀족은 모두 자신들의 착취자로
여기고 있었다. 쥬사의 이야기에 올레그와 꾸끄가
웃고 있는 사이 쓰윈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침묵하라, 숨어라, 감추어라
자기의 감정이나 공상을
마음의 깊숙한 곳에서
그것들이 뜨고 지게 하라
밤하늘의 별처럼 묵묵히
그것들을 놀람으로 관조하라, 그리고 침묵하라
어찌 마음이 스스로를 말할 수 있으랴
타인이 어찌 너를 이해할 수 있으랴
네가 어찌 살고 있는지 알 리 있겠는가
이미 이야기된 사상은 거짓인 것이다
샘을 휘저으면 물이 흐려지리라
그 흐린 물을 마셔라, 그리고 침묵하라
아까 쥬사가 이야기할 때 그랬듯 아무도 노래를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 옆사람과
수군거리며 웃거나 포도주를 마시거나 담배를 태우고
미친 듯 히히덕거리고는 했다.
"그것 못 듣던 노랜데, 언제 지은 거니?"
쓰윈의 노래가 끝나자 전혀 딴전을 피우고 있던
올레그가 물었다.
"노랫말이 그럴 듯 한데?"
꾸끄도 빈정거리듯 말했다.
"노랫말이야 빌어온 것이지, 내가 지을 재주가
있나?"
"빌어오는 것도 재주지. 어디서 빌어왔는데?"
"표도르 쮸흐체프의 '침묵'이란 시가 있어.
거기에다 곡을 붙여본 것뿐이야. 시시하지."
"시시하군. 침묵은 부정과 불의에 대한 용인이야."
빅토르가 문득 그렇게 냉소적으로 한마디 던졌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표도르 쮸흐체프라면 평생 농노와 하인을 부리며
부귀영화를 누린 귀족 아냐? 그렇지. 외교관 노릇하며
러시아의 대지와 혼을 경멸해온 반동분자였어. 우리
것은 무조건 경멸하고 외국 것은 또 무조건 숭배해온
그런 역적 같은 야비한 놈이었어."
빅토르의 예기치 못했던 말에 좌중에는 일순 침묵이
흘렀다. 쓰윈의 칭찬섞인 열성적인 소개에도 불구하고
대개 그렇고 그런 친구려니 여겨왔었다. 더구나
자기들과 피부색이나 용모가 다른 동양계에게 갖는
일반적인 경시적 감정을 품고 그를 대해왔었다.
그런데 표도르 쮸흐체프 같은 그다지 널리 알려졌다고
할 수 없는 시인에 대해 꿰뚫어 알고 있는 것에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더구나 우리
운운하며 애국자적 표현을 쓰는 빅토르가 갑자기
낯설게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침묵하라, 침묵하라 침묵만을 강요했던
것이겠지."
침묵을 깨트리듯 올레그가 큰소리로 말했다.
"그래, 노래는 왜 하는 것인데. 권력에 바쳐진
노래는 어느 시대에나 쓰레기였어. 자유와 인민을
위한 노래는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게 되지."
올레그는 그렇게 덧붙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침묵과 아첨과 용인이 아냐.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억압으로부터 자유,
빈곤으로부터의 탈출, 오염되지 않는 공기와 물과
쾌적한 환경의 유지야. 우리는 침묵하는 비겁자가
되어서는 안돼!"
올레그는 단상 위의 연사같은 엄숙한 음성으로
말했다.
쓰윈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자기의 노래가 친구들로부터 비난을 받자 화가
났지만, 친구들의 지적이 틀린 것 같지 않자 혼자
속을 태웠다.
"데운 포도주 더 없어?"
쓰윈은 빈잔을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응, 다 비었는데. 포도주 더 없니?"
쥬사의 물음에 쓰윈이 턱으로 부엌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있어. 아직 열 병은 더 있을걸."
그때까지 한번도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던
르빈은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문 앞에 있던
빅토르도 일어나 부엌쪽으로 가는 르빈의 뒤를
따랐다. 그는 포도주를 더 마시고 싶었다.
빅토르는 쓰윈의 노래에 대해, 아니 표도르
쮸흐체프의 시에 대해 알은 체를 한 것이 겸연쩍었다.
게다가 난장판 같은 거실의 분위기도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물론 자신의 속에도 그런 무질서와 소란과
혼란이 내재해 있었다. 자신의 내면에도 폭력과
광기같은 터질 듯한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광기는
외부의 자극이 없는한 자신이 제어할 수 있었다.
빅토르는 묵묵히 새 담배에다 불을 붙였다.
빅토르를 곁눈질하며 르빈은 가스레인지에다
포도주병을 올려놓았다.
언제부터인가, 그리고 누구의 제안에 의해서인지
기억할 수 없으나 그들은 가급적 포도주를 섭씨
40~60도 정도로 데워서 마셨다. 그러면 톡 쏘는 맛도
한결 자극적이었고 취기도 빨리 올랐다. 거기에 맛을
들인 그들은 데우지 않은 자극이 덜한 포도주는
싱겁다하여 잘 마시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데울 때
주의를 게을리해서는 안되었다. 자칫 지나치게
데우다가 유리병이 터져버리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이 터지기 전 적당히 데워졌을 때
꺼내는 것이 요령이었다.
"난, 르빈이야. 알렉세이 르빈."
가스레인지에 포도주를 올려놓고 르빈은 빅토르의
맞은편에 앉으며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자기 소개를
했다. 그는 몸집이 통통하고 팔목이 굵었으며
손가락이 짧았다. 연한 은빛 머리카락 아래 반듯한
이마와 사려깊은 눈을 가진 그는 선량한 인상이었다.
눈이 서글서글하고 코끝이 동그랗고 붉은 입술은 많은
이야기를 할 것 같았다. 그는 대체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난, 빅토르 최야."
르빈은 빅토르를 새삼스럽게 뜯어보았다. 키가
멀쑥하게 컸고 팔, 다리, 손가락 등 신체의 모든
부위가 길쭉길쭉했다. 그는 칠흑처럼 까만 머리와
검은 눈동자에 상아빛 피부의 동양계로, 얼굴은
대체로 깡마른 인상의 타원형이었다. 높은 코며
일자로 다문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술 등 어떻게 보면
우크라이나계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눈빛이 순하고
대체로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제61 기술전문학교에 다닌다면서? 난 소년극장에서
조명 일을 보고 있어."
르빈의 말에 빅토르는 턱을 쳐들고 그를 바라봤다.
자기를 안다는 말에 의아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난, 비쨔 널 알고 있어."
"나를 알아?"
"그럼, 쎄로브 미술학교에서 공연하는 걸 봤는 걸."
르빈의 말에 빅토르는 눈을 반짝였다.
"막심하고는 쉬꼴라를 같이 다녔어."
"그렇다면 왜 막심이 내게 인사시키지 않았을까?"
"인사시킬 만큼 잘나지 못해서 그랬겠지."
르빈의 말에 빅토르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막심이 볼 때 난 서글픈 존재였을 거야. 뒤늦게 난
기타를 시작했거던."
"나도 막심한테서 기타를 배웠어. 나도 형편없어."
"나도 너가 막심한테서 배웠다는 말은 들었어.
하지만 막심이 여러 번 비쨔 너 칭찬하는 말 들었어."
"칭찬은 뭘. 저 혼자 칭찬을 다 들으려니까
민망스러워서 나를 약간 효과용으로 써먹었겠지."
"효과용으로 써먹었을 거라고. 아냐 막심이 어떤
친군데. 그 자식 눈에 차는 사람 몇이나 되게. 그
자식은 웬만하면 깔아 뭉게 버려. 어찌나 잘났던지."
빅토르는 르빈의 말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막심
빠쉬코프의 모습이 상기되었다. 르빈의 말이 맞았다.
막심처럼 잘난체 하며 다른 사람을 깔보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제6병동 멤버들 중 끝까지
교체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사람은 막심과
빅토르뿐이었다. 길면 2,3개월 붙어 있었고 한번
연주를 해보고 잘라버리기 일쑤여서 멤버 교체가
극심했었다.
"그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미움 좀 받았어."
"그래, 나도 자식이 하도 아니꼬워 한번 코피가
터지도록 패준 적이 있었어. 그런 자식하고 어떻게
그렇게 오래 지냈어?"
"늘 내가 참았지. 내가 뭐 내세울게 있어야지. 내가
러시아계도 아니지, 그렇다고 기타를 잘 치나 노래를
잘 부르나. 늘 그의 주장만 따라줬거던."
르빈은 빅토르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아냐, 아냐. 그 자식은 제게 순종한다고 옆에
붙여둘 그런 너그러운 친구가 아냐. 무엇인가 저보다
나은 점이 보여야 옆에 붙여줬어."
"그렇지 않아. 막심도 친구가 필요했던 거야.
어쩌면 내가 그의 유일한 친구였는지도 모르지."
르빈은 빅토르와 몇 마디 나누지 않아 그의 성품을
알 수 있을 것같았다. 그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성미로 보였다. 자기 주장을 가급적 죽이고 분위기에
맞추어 언행하는 그런 스타일로 보였다. 그렇다면 저
꾹 다문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술은 무엇이란 말인가.
저것은 그의 내면에 용틀임하고 있는 성깔을 나타내고
있는 것인가.
"내가 보기에 막심은 비쨔 너의 노래를 좋아했던 것
같애. 나도 공연을 봤지만 너의 노래는
인상적이었어."
빅토르는 민망스러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무엇인가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 같은 걸 느꼈어."
르빈은 속에 있는 말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당시 '제6병동'의 연주회를 수소문하며 그는 들으러
다녔다. '제6병동' 그룹은 주로 노래를 창작해
불렀지만 유럽쪽의 록 음악을 편곡하여 자기들
스타일로 연주하고 노래하기도 했다. 아직 그런
편곡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은 풍토 때문인지 그들의
편곡은 신선하게 받아들여졌었다. 그들의 음악은
과격하고 정열적인 사운드를 강조한 펑크 록과
전기기타를 중심으로 격렬한 비트와 절규하듯
노래하는 하드 록의 특성에 비틀즈를 가미한 듯
하면서도 그들만의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노래는 대체로 어두웠다. 음울하고 우수가 어려
있었다. 칙칙하고 어둡고 음울한 레닌그라드의 어느
거리를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아무튼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에 러시아 민요를 가미한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었다.
그런 기억을 갖고 있는 르빈은 아까 쓰윈과 함께
거실로 들어오는 빅토르를 본 순간 묘한 흥분을
느꼈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다는 막심의 반려인
빅토르와 드디어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구나!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뜨겁게 관류하였다. 르빈은 검은색
좁은 바지를 다리에 꽉 끼게 입고 검은 인조가죽의
쟈켓과 검은 와이셔츠 등 검은 색 일색으로 차려입은
빅토르에게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었다.
"그런 비행기는 관제탑 허가를 받고 태우는 것
아냐?"
빅토르는 르빈을 향해 고개를 저어보였다.
"솔직한 느낌을 말했을 뿐이야. 비쨔 너에겐 솔직한
것도 탈이군."
"자칫 잘못하면 아첨으로 들리거던."
그때 올레그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올레그는 가스레인지 위의
포도주가 얼마나 데워졌나 살폈다. 아직 흡족하게
데워지지 않았던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망설이던
그는 두 병을 가지고 거실로 돌아갔다. 그 빈 자리에
르빈이 포도주를 더 올려놓고 데워진 포도주 한 병을
따 그것을 잔에다 따랐다.
"자, 우리도 한잔씩 하자구."
"그래, 만나서 반가워."
"내가 할 소리야."
그들은 술잔을 서로 부딪치며 미소를 교환하였다.
"르바, 너도 비틀즈를 좋아하는구나?"
포도주잔을 비우고 빅토르가 르빈의 가슴을
바라보며 말했다. 르빈의 가슴에 존 레논의 사진을
담은 뱃지가 달려 있었다. 르빈은 빅토르의 시선이 와
닿아있는 가슴의 뱃지를 내려다 보며 싱긋 웃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야."
"나도 비틀즈를 좋아해. 존 레논도 그렇지만 폴
매카트니도 좋아."
"오, 그래. 나도 그들의 '프리즈 프리즈 미'나
'예스터데이'만 들으면 미쳐."
"나는 '미셸'도 좋고 '렛잇비'도 좋아."
"나는 그들의 자유분방함과 창조적 활동이 마음에
들어."
"그래, 그들은 재즈와 록큰롤을 자기들 나름대로
소화하여 소위 리버풀 사운드를 창조해냈지. 그들은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들의 힘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갔어."
빅토르의 말에 르빈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갑자기 열광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었어. 좋아, 비쨔는 내 마음에 꼭 들어.
자 술 마시자."
르빈은 포도주를 빅토르의 빈 잔에다 가득
따뤄주었다. 나누는 이야기마다 거의 의견이
일치되었다. 그들은 롤링 스톤즈의 노래도 이야기했고
엘비스 프레슬리며 심지어 가스펠과 소울의 대표적
주자 제임스 브라운에 이르기까지 록큰롤 가수들과
여러 음악의 특성에 대해 광범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실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아까 부엌으로 갈
때와는 다른 사이가 되어 있었다.
18. 가린과 쌍곡선
르빈은 자주 빅토르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가족은 혁명이 만들어낸 시대의
희생양이었어."
어느날 르빈은 담담히 자기 증조할아버지 이야기를
비롯해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불행했던
소년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증조할아버지가 반국가적, 반혁명적 혐의로
처형되고 우리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 형제들은 모두
시베리아로 추방되었어. 그들에게는 국가의 어떤
복지제도의 수혜도 금지되었고, 레닌그라드,
모스크바는 물론 키예프나 하바로프스크같은
대도시에는 2백 킬로미터 이내로는 접근할 수 없게
되었어."
빅토르는 혁명으로 인해 처형되거나 유형 당한
인사나 가족들에 대한 사례를 종종 들어 알고 있었다.
혁명은 어떤 사람에게는 행운을, 어떤 가족에게는
불행을 가져다준,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한
진운이었다. 러시아는 혁명으로 인해 행운을 누리게
된 인물이나 조직을 중심으로 질서를 잡아가게 되었고
마침내 그 질서에 의해 국가와 사회가 안정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혁명의 상처는 이제 어떤
화젯거리도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빈의 불행했던 소년시절을
이야기하려면 그 오래된 상처를 뒤적여야 실마리가
풀려나갔다.
극동시베리아 레나 강 중류 야쿠츠크로 유배당한
그의 증조할머니와 가족들은 노동으로 날을 지고샜다.
추위와 굶주림에 몸은 쇠약해지고 삶에 대한 희망도
의욕도 다 잃고 죽지 못해 살아갔다. 아이들에게는
가까스로 초등학교는 다닐 수 있는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기는 했으나 희망이 없는 아이들에게 교육은
시켜 뭘하겠느냐는 생각에 증조할머니는 자식들을
학교도 보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자식들은
증조할머니가 가르쳐 깨치게 된 읽기와 쓰기 정도밖에
다른 지식은 전혀 습득하지 못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평생을 유전개발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돌아갔고 우리 아버지도 평생 공장에서 노동자로
늙었어. 이제 마흔다섯인데, 마치 예순을 넘긴
사람처럼 보여."
빅토르는 아직 르빈의 아버지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빅토르는 가끔 지하철 대합실이나 길가에
쓰러져 있는 지저분한 주정뱅이를 연상했다. 평생을
공장에서 노동자로 늙었다면 대개 보드카로 육신을
적신 채 지내지 않고서 어떻게 살아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르빈의 아버지에 비하면 빅토르의 아버지
로베르트는 소비에트 사회에서는 매우 선택된
행운아라 할 수 있었다. 로베르트도 공장에 다니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가 아니라 군수산업체에서
엔지니어로서 기계 설계와 제작에 관여하고 있었다.
어머니 발렌치나는 빅토르가 어렸을 적 자주
아버지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하고는 했었다. 아버지
로베르트는 남달리 공부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그런
좋은 위치에서 사람들을 부리며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빅토르 너도 공부를 열심히 하여
아버지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하고는
했었다.
빅토르는 그러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차마
르빈에게 들려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말하든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잘 났어, 하는 자랑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빅토르는
자신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르빈에게 아주 쬐끔
꾸미고 과장해 들려주었다.
"나는 아버지 사랑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
빅토르의 말에 르빈은 그 선량해 보이는 눈을
꿈벅거리면서 빅토르를 의아스럽게 쳐다봤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공부가 영
싫어지더라구. 그리고 학교도 가기 싫고. 그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공부 못한다고 늘 꾸중을 들었고
걸핏하면 매를 맞았어. 종아리에는 아버지의 매자국이
지금도 있을 걸."
빅토르는 종아리를 걷고 그 부위를 르빈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매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빅토르는 순간 당황했다. 그는 종아리에
아버지의 매자국이 있는 것으로 항상 믿어 왔었다.
그런데 언제 그것이 없어진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 분명히 있었는데, 언제 없어졌지."
빅토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그래서 학교를 빼먹고 거리를 헤맸어.
그것이 되풀이되자 학교에서 집으로 경고장이 날아든
거지. 그것을 받아든 어머니가 얼마나 놀랐겠어."
빅토르는 간신히 빠져나온 검고 두려운 터널을
뒤돌아보는 기분으로 쉬꼴라 2, 3학년 때의 일들을
상기하였다. 그는 자신을 놀리는 아이들을 보다 못해
엉겨붙어 싸우다 코피가 터지거나 아니면 떼를 지어
덤벼드는 아이들을 당하지 못하고 몸을 가눌 수
없으리만치 얻어맞고 아무도 없는 교실에 늘어져 있다
집으로 간신히 돌아가고는 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몸서리를 쳤다. 이제 생각하면 약간 쑥스러운
일이지만 그 당시 그는 힘이 장사였다는 이고르
대제나 헤라클레스같은 거인이 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하기야 근래에 블루스 리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 영향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블루스 리가
나오는 영화는 모두 통쾌하였다. 무소불위, 적을
쳐부수는 그의 통쾌한 무술 장면은 눈이 부셨다.
빅토르는 어떻게든 어린 시절 불행했던 르빈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이쪽의 불행이 더 크고 심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르빈은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빅토르는 매우
착해보였다. 그런 그의 어디에 그런 불량기가
있었다는 것인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부랴부랴 학교로 쫓아가 진상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아버지 모르게 쉬쉬하며 나를 미술학교로 옮기게
하더군. 어렸을 때부터 나는 무엇이나 그리기를 좋아
했거던. 어떤 때는 내 그림을 본 선생님께서 넌,
화가가 되면 좋겠구나, 하는 말도 하셨고. 그래서
어머니는 내게 그림을 그리게 하기 위해서 학교를
옮기게 됐다고 아버지에게 말하더군. 그렇지만 나는
학교에 영 취미가 없는 거 있지. 그래서 너도
막심한테서 들었겠지만 미술학교에서도 제적
먹었잖아."
"그래, 알아. 그렇지만 그건......."
르빈은 그건 공부하고 관련없는 일이잖아, 하고
말하려다 말았다.
"암튼 나는 지금까지 즐거웠던 기억보다 괴롭고
슬펐던 기억이 훨씬 더 많아."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몇 해 전 우리가
레닌그라드로 옮겨온 다음부터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말이야."
"이야기를 듣고보니, 우리 둘 다 참 힘들게
성장했군. 우리 앞으로 서로 도와가며 지내."
빅토르의 말에 르빈은 그의 손을 굳게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집안에서의 불안한 위치도 비슷했고 공부를
멀리하고 엉뚱한 데 마음을 빼앗기며 지내는 건달기도
비슷했다. 그들은 그리고 둘 다 서로 만나면 안도감이
들고 다른 누구와 만날 때보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자주 찾았고 만나 하릴없이
소일하기를 즐겼다.
어느날 르빈은 거실에 걸려있는 턱수염을 길게 기른
깡마른 남자 사진을 가리키며 그것이 자기
증조할아버지라고 말하며, 증조할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랜 옛날, 60여년 전, 레닌그라드의 작은 아파트에
젊은 지성인들이 모여 토론을 벌이고는 했다. 토론의
주제는 한가지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철학, 문학,
자연과학, 미술, 음악 등을 두루 포함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대의 최고 지적 성과와 그 지적 성과의
현재적 역할과 장래의 전망에 대해 각자 의견을
제시하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는 했다.
볼세비키 혁명 후 4, 5년경, 새로운 질서와
구질서의 상충으로 사회는 크게 혼란을 겪고 있었다.
구질서와 구제도에 익숙해 있던 시민들에게 신질서와
새로운 제도는 무수한 가치전도의 혼란을 겪게
하였다. 구질서와 구제도가 허물어지며 거기에
봉사하거나 거기에서 발생한 권력을 누리거나 거기서
나오는 보수로 생활해 왔던 인사들은 일제히
숙청되거나 제거되었다.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제도에
익숙치 않은 시민들은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거나
조심스런 몸가짐으로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였다.
혁명의 주체인 볼세비키들과 노동자, 농민들은
혁명의 열기에 들떠 있었고, 그 우두머리들은 새로
잡은 권력의 아편 같은 맛에 혼몽히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 팔과 다리 구실을 하는 지역 당에서는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를 호령과 함께 수행하며
얻어지는 지배의 달콤한 맛에 취해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포악을 일삼게 되었다.
아무튼 그런 혼란기에 레닌그라드의 어느 작은
아파트에 젊은 지성들이 모여들고는 했다. 당시
혁명의 열기에 열광하는 볼세비키나 노동자,
농민들과는 달리 지식인들 중에는 아직 막스
레닌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인사들이 더러 있었다.
자신들이 연구해온 학문의 영역에서 도리어 막스
레닌주의를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인사들이었다.
문학, 종교, 역사, 음악 등에 종사하는 많은 학자들이
거기에 속했다. 레닌그라드의 작은 아파트에 모인
이들 지식인들은 모두 막스 레닌주의자도, 당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혁명의 반대자들이거나
비판자들도 아니었다. 세계 지성들의 지적 성과의
토대하에 연구하고 글을 쓰고 토론하며 새로운 지적
영역을 넓혀가려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학자
지망생들이었다. 소비에트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순수한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당에서는 그들에게 적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들이 그 동안 발표한 논문이나
글을 토대로 그들을 평가하고 그들의 반혁명적 요소를
문제삼았다. 특히 인간의 역사와 문화에 관하여
연구하는 인문학은 역사와 종교, 철학 등을 기반으로
새로운 이론을 세우는 그런 학문인 것이다. 거기에
모인 젊은 지식인들은 모두 인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역사와 철학을
연구했고 철학적 관심사들에서 종교를 분리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종교에 대한 연구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그들의 종교적 관심과 반혁명적
성향이 문제가 되어 레닌그라드의 작은 아파트의
토론회에 참석했던 거의 모든 젊은 지식인들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레닌그라드 제1차 5개년 계획이
추진되어가는 과정에서 불어닥쳤던 부르주아
전문가들과 종교 그룹 지식인들의 숙청바람에 휘말린
것이었다.
그들은 형식적인 간단한 재판에 의하여 수용소에
감금되거나 먼 시베리아 같은 곳으로 유형되었다.
알렉세이 르빈의 증조할아버지 미하일 이즈라일레비치
르빈은 바로 그 레닌그라드 작은 아파트에 모였던
젊은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미하일 르빈은 고대 인도와 뱅골 문학과 몽고
언어와 불교를 연구하였다. 그는 혁명 전 한때 몽고
주재 소련대사관에 파견되어 몽고불교에 관한 연구를
더욱 깊이 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는데, 몽고
주재 소련대사가 체포되면서 함께 체포된 것이었다.
체포 이유는 당장에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종교의식에서 반혁명적인 카니발리즘을 사용하는 몽고
신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미하일 르빈은 체포되어 아르한겔리스크에 유형되었고
그곳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와
가장 친한 친구였던 볼로쉬노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불법으로 레닌그라드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
발각되어 거듭 체포되었다. 그리고 곧 처형되었으며
그 가족은 먼 동북쪽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로
유배되었다. 따라서 미하일 르빈의 직계가족은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같은 대도시의 2백 킬로미터
반경 안에는 접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르빈의 아버지 몬스딴진이 다 성장했을 무렵
르빈의 증조할아버지 미하일 르빈이 복권되었고,
비로소 그 가족은 레닌그라드 고향에 돌아와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 꼰스딴찐
르빈은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해 도자기
공장에서 도공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르빈의 긴 이야기는 비로소 끝맺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르빈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분명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고 있는
표정이었다. 소비에트 사람들이라면 그런 유사한
사례는 얼마든지 겪었거나 알고 있는 그런 흔한
것이었다. 빅토르는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며 잘
들었다는 시늉을 했다.
이야기를 마친 르빈은 잠시 입술을 깨물고 잠자코
있었다. 그는 자신의 혈관 속에 옛러시아의 영화를
그리워하는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자신의 가계를 돌이켜 생각하면 현재의 빈한한 생활
따위야 무슨 대수랴. 그는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내 혈관
속에는 자랑스런 표트르 대제의 피가 흐르고 있어.
"내 노래 한 곡 부를까?"
갑자기 르빈은 그런 제안을 했다.
빅토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아직
르빈의 노래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잘됐다
싶기도 했다. 르빈은 방으로 들어가더니 기타를
가져와 의자에 앉았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푸쉬킨의 시에 내가 곡을
붙인 것이야."
르빈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대는 그대 손으로 만들지 않은
그대 자신의 기념비를 세웠노라
기념비로 가는 인민의 길에는
잡초는 자라지 않는다
불법을 모르는 머리를 쳐들고
그것은 알렉산더의 기념비보다도
더 높이 솟아 있다.
그렇다. 그대 모든 것은 죽지 않으리라
신성한 현(絃) 속의 그대 영혼은
그대 유해를 영원히 살게 하고
그리고 그대는 칭송을 받으리라
달이 비치는 세상에
단 한 사람의 시인이라도 살아있는 동안은
그대 소문은 위대한 러시아 전역에 퍼져가리라
"어때?"
노래를 마친 르빈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너무 관념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할아버지를
노래하는 데는 푸쉬킨 인용이 허용될지 모르지만,
구체적인 현실감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걸핏하면 푸쉬킨, 푸쉬킨이었다. 러시아 시인에는
푸쉬킨밖에 없다는 것인가. 쓰윈도, 르빈도 푸쉬킨
외에 다른 러시아 시인은 모른다는 것인가. 빅토르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아무튼 르빈은 빅토르와 친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빅토르는 또 르빈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의 집이 낮부터 저녁
늦게까지 비어 있으니 함께 노래나 부르자는
것이었다. 부모가 친지의 결혼기념일에 초대되어 저녁
늦게 돌아올 것이므로 마음놓고 노래를 부를 수
있으니 기타를 들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 오늘 또 8학년 여학생과 데이트 있는 건
아니겠지?"
"데이트야 있지만 르바가 그토록 목을 매니 약속을
뒤로 미루지 뭘."
"아냐, 아냐. 그건 안돼. 다음에 무슨 소리
들으려구. 데이트나 가시우."
"그럼, 그럴까."
"정말 그럴거야?"
"데이트나 가라며?"
"해본 소리였어."
"알았어. 나중에 갈게."
전화를 끊은 빅토르는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르빈이 집으로 오라는 것을 아르까지나와 약속이 있어
다음으로 미루었었다. 그날 빅토르와 아르까지나는
동물학 박물관으로 스케치하러 가기로 했었다.
"그 8학년 여학생 한번 안 보여줄 거야?"
그날도 르빈은 서운한 기분을 감추려 애쓰는
기색이었다.
"오늘 동물학 박물관에 스케치하러 가기로 했어.
거기로 오든가."
빅토르는 외로울 때의 기분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고 생각해 왔었다. 르빈은 늘 외로움을 탔었다.
그런 그를 모른 척하고 아르까지나와 동물학 박물관에
가는 것이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학 박물관으로 오라고? 훼방꾼 취급하려고."
"눈치있는 사람은 그러니까 그런 말도 안하지.
다음에 봐."
그렇게 말하고 빅토르는 동물학 박물관으로 갔었다.
그러나 내내 르빈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동물학 박물관은 언제나 어둠과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미술관이나 민속박물관에 비하면 관람객도
드물었다. 살아있거나 아름다운 생물이 아니라 죽은
것들을 박제하여 전시하고 있기 때문인가. 그러나
빅토르에게는 많은 것을 생각케 하고 느끼게 하여
가끔 혼자 찾아와 고생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 나타났다 사라진 동물이며 먼나라에
서식하여 책을 통해서밖에 볼 수 없는 동물이며
심지어 금방이라도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심해어 등을
눈여겨 구경하고는 했었다. 그곳에서 만물의
생성소멸의 이치와 시간을 실감하고는 했다.
언젠가는 목재에 그들을 재현시킬 생각을 품고
빅토르는 고래와 상어를 스케치했고, 독수리와 매를
스케치했다. 빅토르는 메머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메머드는 자연스레 공룡을 연상시켰고,
수천 수만 년의 시간의 퇴적을 느끼게 했다. 메머드는
그리고 지구의 미래를 생각하게 하였다. 우리도 수백
년 수천 년 후 언젠가 화석이나 골편으로 발견되어
그때 사람들의 연구 대상이나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래 화석이나 골편으로나마 후세 사람들에게
발견된다면 그 아니 큰 행운이겠는가. 빅토르는 그런
생각을 하며 메머드를 열심히 스케치했다.
"난 비쨔가 조각한 메머드를 갖고 싶어."
"왜 메머드야?"
"메머드만큼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온게 달리 뭐
있겠어!"
"좋아. 아르까지나, 넌 멋진 메머드를 책상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거야."
빅토르의 말이 떨어지자 아르까지나는 펄쩍
뛰어올라 빅토르의 목을 감고 입술에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빅토르는 아르까지나가 자신에게는 과분하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므로 아르까지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었다. 마음은
간절했으나 행동은 따라주지 않았다. 반면 사랑을
받는 것으로 다른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될
아르까지나 쪽이 더 적극적이었다. 데이트 제안도
그녀쪽에서 거의 먼저 하는 편이었고 선물도 늘
아르까지나가 했다.
빅토르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좋아하며 사귈 수 있는
여학생은 나타나지 않으리라 생각해 왔었다. 쉬꼴라
2, 3학년 때의 아냐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그는 여학생에게 일어나는 감정을 스스로 억눌러
죽여왔었다. 다시는 그런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61 기술전문학교에서 만난
아르까지나는 달랐다. 그녀는 빅토르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매우 적극적이었다. 더구나 솔낀이라는 친구가
그녀의 꽁무니를 끈질기게 따라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솔낀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어느날 미술시간에 우연히 나란히 앉아
꽃을 스케치하게 되었는데, 아르까지나가 빅토르의
스케치에 반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귀게 되었다.
그리고 목각실에서 우연히 빅토르의 목각작품 '용'을
본 아르까지나는 거의 까무라칠 정도로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때부터 아르까지나는 바짝 빅토르의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리도가 호수 등
북쪽 호수지대로 레피노로 꼬마로보 해변으로
돌아다니며 서로를 탐색하고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았다.
아르까지나는 앳되고 깜찍한 것이 마치 쉬꼴라
8학년처럼 보였다. 빅토르는 아르까지나를 알고부터
세상이 갑자기 눈부시게 밝아진 것 같았다. 그녀로
하여 그는 그때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도 했다. 키가 좀
작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으나 사실 학교 전체를
통틀어도 아르까지나만한 미모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므로 빅토르에게는 과분한 상대라 아니할 수
없었다.
아르까지나와 약속이 있었다면 빅토르는 르빈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르까지나는
어제도 만났었다. 오늘은 그녀가 집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르빈의 집에는 발린스키가 먼저 와 있었다.
첫인상이 그랬듯 발린스키는 빅토르에게 우호적이
아니었다.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는 명백히 알 수
없으나 빅토르에게 그다지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면 감정을 얼굴에 싣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빅토르가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발린스키는 다정하게 말을
걸거나 어떤 호의를 베푼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가
늘 굳은 표정으로 대해 왔기 때문에 빅토르 편에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해 왔다. 처음 만났을 때
그랬듯 그는 언젠가 사이가 나빴던 학교 친구를 늘
연상시켰다.
르빈은 미리 전자레인지에 포도주를 올려놓았다며
그것을 전자레인지에서 꺼내 잔 세 개에다 각기
따랐다. 그는 건배를 제안하였고 세 사람은 건배를
크게 외치며 단숨에 잔을 비웠다. 데운 붉은 포도주는
찌르르 낯익은 떨림과 함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빅토르는 석 잔을 거푸 청해 마셨다.
"어때, 우리 노래나 할까?"
술을 다섯 병쯤 비우고 났을 때 르빈이 갑자기
제안했다. 그는 이쪽의 대답도 들어보지 않고
올레그의 기타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마르크
베르네쓰의 열정이라는 곡이었다. 발린스키는 탁자와
의자를 드럼 틀로 삼아 손으로 반주를 맞추며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발린스키는 기타보다 드럼
솜씨가 더 좋다더니 과연 턱을 끄덕이며 몸을 흔들고
손을 구성지게 움직이는 모습이 바로 드러머의
그것이었다.
빅토르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비쨔, 너의 노래 한 곡 가르쳐주지 않겠니?"
노래가 끝나자 르빈은 또 갑자기 그렇게 물었다.
"그래, 그게 좋겠군!"
발린스키도 그렇게 맞장구를 치며 빅토르를
쳐다봤다. 발린스키가 빅토르에 대해 어떤 의사표현을
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빅토르는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쑥스럽기는 한데, 그럼 그래볼까."
빅토르는 발린스키의 얼굴을 탐색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눈이 마주치자 발린스키는 비로소
웃어보였다. 빅토르는 안도감을 느끼며 르빈에게
종이와 연필을 청했다.
르빈으로부터 가로로 줄이 쳐진 노트와 볼펜을
받아든 빅토르는 거기에다 악보를 그려나갔다. 악보를
다 그리고 난 그는 그 밑에다 노랫말을 적어 나갔다.
그것이 끝나자 르빈과 발린스키 앞으로 돌려놓았다.
르빈과 발린스키가 그것을 놓고 읽고, 그 악보에
따라 기타를 몇 번 쳐보는 것을 지켜보던 빅토르는
웬만큼 됐다는 판단이 서자 그들의 연습을
제지시켰다.
"자, 그럼 우리 모두 함께 맞춰볼까?"
빅토르는 말을 마치자 곧 연주를 시작했다.
르빈과 발린스키도 따라 연주했다. 그들의 합주는
몇 차례 연습 끝에 꽤 성공적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되엇다.
"'8학년 여학생'은 곡목도 좋고 부를수록 매력이
철철 넘치는 노래야."
잠시 쉬는 틈을 타 발린스키가 빅토르를 쳐다보며
아첨하듯 말했다.
"내 생각에, 데이트를 해본 세상 모든 여학생들은
다 좋아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하다 말고 발린스키는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빅토르의 얼굴이 붉어졌기 때문이었다.
빅토르는 칭찬을 들으면 으레 얼굴이 붉어지고는
했다. 그러나 발린스키는 그런 빅토르의 성품을
몰랐기 때문에 화가 난 것으로 알았다.
"다시 한번 더 나갈까?""
그러나 빅토르는 발린스키를 향해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제안했다.
"그러지. 아주 잘 되는 것 같은데."
르빈과 발린스키는 좋아하며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요즘 늘 내 자신의 처지가 불만이야."
노래를 마치고 담배를 한대씩 태우는 중에 르빈이
빅토르를 향해 나지막이 그렇게 말했다.
"기타를 치고 노래 부르는 것이 좋기는 한데, 맨날
이 짓만 해 어쩌겠어. 어떤 그룹에서 오라지도 않고,
공연할 곳도 없고....... 답답한 일이야."
"나도 마찬가지지 뭘."
"그래도 비쨔 넌 '제6병동'을 했던 경험이라도
있잖아. 그 경험만으로도 뭔가 자신감을 얻었을 거
아냐. 내게는 그런 경험도 없으니 내 솜씨가 어떤지,
내가 노래나 부를 수 있을지 불안해 못견디겠어."
르빈은 앞날을 생각하면 늘 불안했다. 기타나
노래는 웬만한 수준이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디서 한번도 검증을 받거나 평가를 받아본
일이 없었다. 그는 막연히 카페나 지하 록 음악
연주회장같은 데를 찾아다니며 노래를 듣거나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다니며 아마추어 가수들과 교제를
텄고 자신도 언젠가는 노래하고 연주하는 가수가
되려니 하는 포부를 지니고 있기는 했다. 그리고
쓰윈의 돈빠스 그룹도 사실 아직 그 계통으로부터
확실히 성공한 그룹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들 돈빠스
그룹도 카페를 기웃거리며 어쩌다 운이 좋은 날은 몇
푼의 돈을 받고 출연하는 일도 있었으나 대개
무보수로 노래부르고 연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쓰윈은 쥬사, 꾸끄, 미하일 등을 주축으로
활동할 뿐 아직 르빈에게는 어떤 약속이나 언질도 준
적이 없었다.
"우리들끼리 하나 만들면 어떨까?"
르빈은 빅토르와 발린스키를 차례로 쳐다보았다.
"우리가 만든다!"
"못할 것도 없잖아. 우리 셋 다 기타를 못치나 또
노래를 못부르나. 올레그는 드럼도 잘 치잖아."
르빈은 이미 오래 전부터 궁리해 왔던 것인 듯
열성적으로 말했다.
"그래 못할 것도 없겠군."
옆에 있던 발린스키가 조심스레 동의를 했다.
"비쨔, 어때. 함께 그룹을 하자?"
그 제안을 받은 빅토르는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우리 셋이면 잘 어울릴 것 같잖아.!"
올레그 발린스키는 빅토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래, 해볼만 하겠군."
"아, 그래. 됐어."
르빈은 무슨 결의라도 하듯 입술을 꾹 깨물고
빅토르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는 발린스키의 손도
끌어다 세 사람의 손을 포개었다.
"그럼, 우리 이제부터 한 멤버다!"
"그래, 우리 그룹 이름을 짓자."
"그룹 이름?"
"아무래도 이름이 있어야 어디 얼굴을 내밀 수 있을
거 아냐."
"그러지 그럼. 우리 성격에도 맞고 듣기도 좋은
것으로 정하지 뭘."
"하늘과 잠자리, 어때?"
역시 르빈은 오래 전에 생각했던 것인 듯 선뜻 그런
이름을 들고나왔다.
"너무 자연에 의존하고 있는 것 같잖아? 록은
도시풍이고 첨단적인 것인데......."
빅토르가 반론을 제기했다.
"좀더 문화적이고 도회적인 것으로 하자. 그
말이겠다?"
발린스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우리 록 음악은 문명의 첨단을 걸을 뿐만
아니라 자유, 개혁 그런 이데올로기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 아냐."
"너무 거창하게 나가는 것 아냐?"
"그래도 남보기에 그럴 듯한 게 좋지 않을까. 나는
쇼빠르크(동물원)나 아크와륨(어항) 같은 일차적
상상력으로 처리되는 그런 이름은 맘에 들지 않아."
빅토르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감히 당시
최고의 가수들로 꼽히는 미하일 나우멘꼬의 쇼빠르크
그룹과 보리스 그리벤쉬코프의 아크와륨 그룹을
아무렇지도 않게 까고 나오는 빅토르의 대담함에
르빈과 발린스키는 놀라 빅토르를 쳐다보았다.
"그럼 뭘로 하는 게 좋을까?"
"글쎄, 나는 '가린과 쌍곡선'이 좋을 것 같애."
빅토르의 말이었다.
"가린이라면 공상과학 영화 주인공을 말하는 것
아냐?"
"맞아.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문명의
톱니바퀴에 치여 죽어가는 영화의 주인공 있었잖아.
그 가린 앞에 놓인 쌍곡선을 생각해봤어."
"너무 절망적이잖아?"
"하지만 우리 앞에 놓인 것 가운데 그렇지 않은
것이 뭐가 하나라도 있어. 우리의 장래, 우리의
미래를 한번 생각해봐."
빅토르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으나 르빈과
발린스키는 무엇인가 거역하지 못할 어떤 힘이
느껴졌다.
"그래, 우리가 노래할 것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닥쳐있는 절망밖에 다른 것이 뭐가 있겠어. 그 절망을
노래함으로써 우리 이웃, 우리 친구들에게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와 깨달음을 줄 수 있다면
나는 기쁘겠어."
빅토르의 말에 르빈과 발린스키는 거의 감전된
것처럼 꼼짝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19. 보리스 그레벤쉬코프
자석은 같은 극끼리는 서로 배척하지만 사람의
관계는 끝없이 같은 극끼리 만나게 되는 것인가.
긴 겨울이 가고 어딘가로 떠났던 새들이 새싹이
돋은 것과 때를 같이 해 시치미를 떼고 돌아온 4월.
새들은 부드러운 바람을 즐기듯 나뭇가지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노래했다.
보리스 그레벤쉬코프를 우연히 만난 것은 그런
어느날이었다.
그 날 빅토르는 르빈과 페테르고프로 나들이를
갔었다.
지루하고 답답한 회색도시 레닌그라드를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빅토르는 학교를 빼먹고
더디게 더디게 눈보라를 뚫고 겨우 찾아온 봄을
반기기 위해 근교의 숲으로 된 작은 도시
페테르고프로 나들이를 간 것이었다. 르빈은 빅토르의
꾀임에 넘아가 소년극장을 결근하고 따라나섰다. 그는
직구장으로부터 경고와 주의와 위협을 여러 차례
받아, 이제 해고의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아무리
해고될 것이 두렵고 걱정된다 하여도 빅토르의 제안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르빈은 직구장의 해고통고보다
빅토르를 화나게 하거나 서운하게 할 것을 더
두려워했다. 소년극장의 일이야 당장의 밥벌이를 위한
것이고 빅토르와의 일은 장래 자신의 인생 전체를
좌우할 그런 일로 여겨졌다. 소년극장의 일은 단순한
생존의 방편일 뿐이지만 빅토르와 함께 하는 일은 그
생존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주는 보람있는 일인
것이다. 밥벌이야 다른 직장을 구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삶의 보람을 음악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두 사람은 페테르고프의 숲속에서 종일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다 마지막 기차를 타고
레닌그라드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자리를 찾아 객실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던 그들은
한 객실에서 장발의 사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르빈은
자기의 눈을 의심하며 빅토르를 쳐다보았다. 빅토르의
시선도 콧수염에 장발인 사내에게 붙들려 있었다.
그는 틀림없는 보리스 그레벤쉬코프였다. 록 클럽에서
연주하는 것을 어디 한두 번 봤는가. 보리스를 발견한
두 사람은 객실 입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아크와륨의 보리스가 맞죠?"
르빈은 장발의 사내를 바라보며 용기를 짜내 말을
붙였다. 빅토르는 가슴이 콩당콩당 뛰고 있었다.
보리스 그레벤쉬코프를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만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차마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어 시선을 아래로 깔고 르빈의 뒤에 수줍은 듯
서 있었다. 그의 눈에 보리스의 너덜너덜한 소매와
바지가랑이가 들어왔다. 보리스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둘을 쳐다보았다.
"저희들은 쓰윈의 친구들입니다."
르빈의 말에 보리스는 눈을 키워 새삼스럽게 르빈과
빅토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보리스의 얼굴에 웃음이
환히 번져나갔다.
"그렇다면, 자네들이 바로 그 친구들이군?"
"아니, 저희들을 아세요?"
르빈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보리스의
입에서 이 쪽을 아는 듯한 말이 나오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놀랄 것 없어. 얼마 전 모스크바의
아르죠므 트로이츠키를 만났거던."
모스크바의 아르죠므라면 두 사람도 알고 있었다.
지난 겨울 공연 초청을 받은 쓰윈의 돈빠스 그룹을
따라 모스크바 구경을 갔었는데 그 작은 아파트에서의
연주회를 바로 아르죠므 트로이츠키가 주관했었다.
빅토르와 르빈은 그때 쓰윈을 빈대붙어 모스크바
구경간다는 기분으로 따라갔었다. 차표도 없이 붉은
화살호에 무임승차해 밤새 차장에게 쫓기고 불안에
떨었던 기억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었으나 그
여행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두 사람에게 두 곡의
노래를 부를 기회를 주어 '바샤는 디스코와 소시지를
좋아한다'와 '너는 알고 싶냐'를 모스크바 팬들에게
선사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대중음악 비평가의 제1인자로 알려져 있는
아르죠므 트로이츠키를 알게 된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는 70년대 초부터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해 사정이
허락하는 한 유럽의 새로운 대중음악을 소개해
왔었다. 그는 날로 다양화해 가는 소비에트
젊은이들의 정서에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켜온 선구적
인사로 알려져 있었다. 대체로 어둡고 단조로운
소비에트 대중음악계에 화려하고 다양한 서구의
대중음악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소비에트의
대중음악 스타들을 널리 사회에 알려왔다.
보리스 그레벤쉬코프의 아크와륨 그룹이며 미하일
나우멘꼬의 쇼빠르크 그룹 등도 바로 그의 소개에
의해 소비에트 전역에 널리 알려져 인기를 얻게 된
것이었다.
아르죠므는 어떤 면에서는 노래를 찾아 방랑하는
탐험가와 같은 사람이었다. 좋은 노래와 연주를
발굴해 세상에 소개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즐기게
하려는 것을 그는 천직으로 알았다. 그는 좋은 노래와
재능있는 가수를 찾아서라면 지구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사람이었다.
그런 아르죠므를 만나 어쨌다는 것인가?
"얼마 전 레스토랑 트룸에서 쓰윈이 기획한
밤음악회가 있었다면서, 거기서 자네들 노래를
들었다더군."
그렇지, 얼마 전 레스토랑 트룸의 배려로 쓰윈이
밤음악회를 열었었다. 레닌그라드에 있는 아마추어
밴드와 가수들은 거의 다 초청해 노래부르며
즐겼었다. 술과 담배도 여유롭게 제공되었고 서로
음악에 대한 의견을 나누느라 밤이 새는 줄도
몰랐었다. 그때 이색 손님으로 모스크바의 아르죠므
트로이츠키의 얼굴이 보였었다.
"예, 트로이츠키 씨가 그날 함께 있었지요."
"아르죠므가 그러잖나. 보리스 분발해야겠어.
레닌그라드에 자네를 위협할 만한 재능있는 가수가
등장했어, 하고 말일세."
빅토르는 레스토랑 트룸에서의 아르죠므
트로이츠키의 칭찬이 상기되어 얼굴이 붉어졌다.
"농담을 잘 하나보죠?"
"농담? 아니, 그는 농담 속에 칼을 늘 감추고
있지."
빅토르는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아르죠므 말이 모스크바에서 자네들 노래를 들었을
때는 펑크들 흉내나 내는 어릿광대들 정도로 봤었대.
그런데 이번 레닌그라드 밤음악회에서는 깜짝
놀랐다더군."
"모스크바에서의 일도 말했어요?"
"그럼. 모스크바에서는 플로어를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어린애들 같았다더군. 미안하네,
아르죠므의 말을 그대로 전한 것일세."
빅토르는 얼굴이 더 붉어졌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바샤는 디스코와 소시지를 좋아한다'를 부르며
무대를 펄쩍펄쩍 뛰어다녔었다.
"아르죠므의 말을 들은 이래 줄곧 자네들 노래를
듣고 싶었는데, 어디 노래를 좀 들려줄 수 없겠나?"
보리스는 놀랍게도 노래를 청했다. 그리고 보리스는
객실 안의 다른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네 사람의
다른 승객들은 아까부터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의
대화를 곁듣고 있었다. 노래를 부른다니 반가운
눈치들이었다. 레일 위를 굴러가는 반복적인 단조로운
바퀴소리 외에 달리 노래를 방해할 만한 것은 없었다.
"자, 내 기타를 치게."
빅토르는 기타를 메고 있었으나 르빈은 빈
손이었다. 보리스는 자기 기타를 르빈에게 내주었다.
연주자에게 있어 기타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는
르빈은 손을 저었다.
"내가 노래를 청한 것이니, 어서 받게."
르빈은 주저하며 기타를 받았다. 그렇게까지 하는데
노래를 못하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보리스,
그가 누구인가.
보리스 그레벤쉬코프라면 소비에트의 모든
젊은이들이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7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그가
불러온 노래들, 예컨대 '니힐리스트' '표트르 대제'
'새로운 전쟁' '황금도시' 등을 모르는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 그는 록큰롤의 씨앗을 러시아에 최초로
뿌려온 선구적 인사 가운데서도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의 대중적 인기는 달리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단지
미하일 나우멘꼬가 그와 어깨를 겨눌 수 있을까.
그러한 보리스가 노래를 청한 사실만으로도
그들로서는 영광으로 여겨야 할 입장이었다.
기타를 잡은 빅토르는 마음을 가다듬고 연주를
시작했다. 빅토르가 퍼스트를 맡고, 르빈은 베이스로
반주하였다.
먼저 '8학년 여학생'을 부르고, 이어 '나의
친구들'을 불렀다. 보리스는 그의 노래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일상처럼 홀로 있다
집은 비어 있고 갑자기 번화벨이 울린다
이제 누군가 문을 거칠게 노크할 것이다
빨리 문을 열라고 밖에서 소리칠 것이다
야, 뭘 좀 먹자는 취한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나의 친구들은 늘 이 세상을 행진하고 있다
나의 친구들은 맥주집 앞에서만 걸음을 멈춘다
비어 있던 내 집은 이제 사람들로 가득찼다
벌써 여러 차례 친구들은 내 집에서 술을 마셨다
누군가는 화장실을 오래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누군가는 유리창을 깨기도 했다
나는 그런 일에 익숙해 있다
나의 친구들은 늘 이 세상을 행진하고 있다
나의 친구들은 맥주집 앞에서만 걸음을 멈춘다
나는 웃고 있으나 항상 우스운 것은 아니다
이렇게 살면 안된다고 충고하면 나는 화를 낸다
왜 이렇게 살면 안된단 말인가
나는 살아 있지 않은가
이 항의에 누가 대답할 수 있는가
나의 친구들은 늘 이 세상을 행진하고 있다
나의 친구들은 맥주집 앞에서만 걸음을 멈춘다
노래를 들은 보리스는 실로 가슴이 뜨끔했다.
아르죠므의 칭찬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음을 직접
확인한 셈이었다. 어떤 훌륭한 노래를 들으면 그는
마치 옥이나 금을 얻은 듯 흐뭇함을 느끼고는 했다.
빅토르의 노래를 듣고난 보리스는 바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정말 오랜만에 좋은 노래를 들었다는
기분이었다. 거기에다 한걸음 더 나아가 보리스는
자신이 하고 싶고 가 닿고 싶은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능이 모자라 가서 닿지 못하는
어떤 목적지에 빅토르는 이미 닿아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가사며 멜로디 어느 쪽도 자신보다는 앞서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일종의
열패감은 기분을 언짢게 할 법도 한데 보리스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리어 반갑고 기뻤다. 그는 수첩을
꺼내 속장을 북 찢어 거기에다 자기 전화번호를 적어
빅토르에게 건넸다. 그리고 빅토르와 르빈의
전화번호를 수첩에다 받아 적었다.
"언제 우리 아크와륨 공연에 출연해 주게."
보리스의 정중한 제안을 받은 빅토르는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보리스의 전화번호 쪽지를 떨어뜨릴
뻔했다.
"예, 언제라도 불러만 주십시오."
빅토르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더듬거리며 말했다.
"고맙네. 내 곧 연락하지."
20. 그림장수로 나서다
"오늘...... 학교에 안갔어."
르빈의 전화를 받은 빅토르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8학년 여학생과 데이트도 없고?"
"응......."
빅토르는 소리나지 않게 픽 웃었다. 아침 일찍
아르까지나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만나자는 그녀의
말에 빅토르는 오늘은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보고
싶은 마음을 억제했었다. 사실 너무 자주 만나는 것
같아 빅토르는 다소 불안했다. 아르까지나 쪽에서 더
적극적이기는 해도 때때로 적당히 몸을 사릴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빅토르는 혹시 늘 보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아르까지나가 눈치라도 챌까
조심하였다.
"그럼 부탁이 하나 있어."
"부탁?"
"그래. 비쨔가 입고 다니는 바지며 쟈켓 다 비쨔가
직접 지어 입은 것이라 했지?"
"그래."
"내 것도 좀 지어줄 수 없어?"
"지어줄 수 있지. 허나 천이 없는걸."
"천은 있어. 극장 소품실에서 슬쩍해왔거던."
르빈은 빅토르가 입고 다니는 옷을 눈여겨 보며
내심 부러워 했었다. 다리와 가슴의 굴곡이 다 드러날
정도로 꼭 끼게 입은 것이 매우 이색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였었다. 그런 옷은 어디서 팔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돈이 많아 양복기술자에게 맞춰
입을 수도 없었다. 궁리 끝에 르빈은 자신이 근무하는
소년극장의 소품실과 소도구실에서 검은 린넨 천의
폭이 넓은 원피스와 검은 면직 양복 한벌을 몰래 빼내
숨겨두었었다.
"실수했을 경우 책임을 묻지 않을 거야?"
"삯도 안주는 주제에 잘못됐다고 변상하라 할 수
있겠어."
"그럼 한번 해보지."
르빈은 원피스와 양복을 싸들고 빅토르의 아파트로
갔다.
"도둑으로 잡혀 소년극장에서 해고 당하는 것
아냐?"
"모른다면 그만이지. 게다가 이건 요즘 쓰지도 않는
소품이야."
"하지만 언제라도 이 옷이 필요한 연극을 상연하면
어쩌려고?"
"그땐 봐서 새로 짓겠지."
르빈은 태연했다.
"여하튼 한번 지어볼까."
빅토르는 르빈을 앞에 서게 하였다. 그는 전문
재단사처럼 줄자로 르빈의 가슴과 어깨와 허리와
허벅지와 종아리의 치수를 일일이 쟀다. 상체의
길이와 다리 길이 그리고 히프와 아랫배의 치수도
쟀다.
"자, 이 송곳을 사용해 양복 저고리를 다 뜯어내."
빅토르는 르빈에게 그렇게 시키고 자신은 양복
바지를 뜯어가기 시작했다. 바지를 다 뜯은 빅토르는
그것을 펴놓고 백묵으로 아까 줄자로 쟀던 르빈의
허벅지와 종아리 굵기의 사이즈에 맞게 선을 그었다.
"난 바지 주머니는 달 재주가 없어. 봐, 내 옷도
주머니가 없지."
빅토르는 자신의 바지를 보여주었다. 양쪽 다
주머니가 없었다.
"그래 알았어. 비쨔 것처럼만 해줘."
빅토르는 어머니의 앉은뱅이 손재봉틀을 꺼내놓고
바느질을 시작했다. 그는 미리 백묵으로 그려놓은
선을 따라 재봉질을 해나갔다. 달달달, 재봉틀소리는
매끄럽게 이어져갔다. 양복 저고리를 뜯으며 르빈은
신기한 듯 빅토르의 재봉질을 곁눈질했다. 르빈은
한편 재봉질을 잘못하여 천을 버리게 되면 어쩌나
조바심을 치기도 했다.
"자, 한번 입어봐."
재봉질을 마친 빅토르는 르빈에게 바지를 던지며
말했다.
르빈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나갔다. 신기한 듯
바지를 뒤적거리던 르빈은 그것을 다리에 끼우기
시작했다. 스타킹처럼 그것은 다리에 꼭 끼었다.
허리를 굽혀 종아리와 허벅지를 살피던 르빈은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꼭 맞는데!"
"누가 지은 건데."
"쟈켓도 좀 부탁해."
"걱정마. 자켓에는 주머니도 양쪽에 하나씩
붙여줄께. 담배 넣을 데는 있어야겠지."
빅토르는 르빈이 뜯어준 양복 저고리의 천을 펼쳐
놓고 아까처럼 백묵으로 죽죽 선을 그어갔다. 소매와
등과 앞판을 분리한 다음 백묵선을 따라 다시
재봉질을 하기 시작했다. 바지를 지을 때와
마찬가지로 빅토르는 일이 다 끝날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일에만 열중하였다.
옆에서 마른침을 삼키며 그것을 지켜보던 르빈은
혹시나 실수라도 할까봐 가슴을 졸였다. 그러나
재봉틀소리는 아주 매끄럽게 이어져갔다.
"자, 입어봐."
이번에도 재봉질이 다 끝나자 빅토르는 쟈켓을
르빈에게 던졌다.
"야......!"
"어때 맘에 들어?"
"비쨔, 넌 타고난 예술가야."
"예술가!"
"누가 이렇게 멋진 쟈켓을 짓겠어."
"재봉사는 다 예술가겠네."
"그걸 말이라고 해. 어쨌든 이번 생일에는 폼 좀
잡겠는데."
아, 그렇지. 르빈의 말을 들은 빅토르는 불현듯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올레그가 생일을 그냥
지나버렸다고 아쉬워하자 르빈은, 난 늘 그런걸 뭐,
난 아직 생일 한번 차려 먹은 적 없었어, 하던 말이
상기되었다. 빅토르는 귀찮아 할 정도로 생일을 잘
챙겨주는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생일을 그냥 보내본
적이 없었다. 르빈의 그 말을 듣고 빅토르는 그가
얼마나 쓸쓸하게 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르빈 생일이 5월 20일이라 했었지."
"언제 그걸 알았어?"
"올레그 생일은 4월 5일이고."
"아 그래, 전에 올레그와 함께 있을 때 그런
얘기했지."
"내가 생일 선물 하나 해야겠군."
"생일 선물?"
"뭐 좋은 건 아냐. 큰 기대는 걸지마."
"난 싫어. 갚을 수 없는 빚은 지고 싶지 않아."
"그림인데, 갚고 말고 할게 뭐 있어. 그냥 받아가."
빅토르는 르빈의 손을 끌고 제 방으로 갔다.
"와! 전에 보다 더 많이 늘었네."
빅토르의 방에는 벽이며 책장이며 곳곳에 그림들이
널려 있었다. 주로 빳빳한 캔트지에 그린
인물화들이었다.
"야, 근사하다. 이건 모이쩌뚱 아냐?"
르빈은 한눈에 그림 속의 인물을 알아 보았다.
"그리고 이건, 흐루시초프의 웃는 모습이구나!"
르빈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이쩌뚱이며
후루시초프뿐만이 아니었다. 스탈린도 브레즈네프도
당시의 당 제1서기 유리 안드로포프의 초상도 있었다.
그 초상들은 평소 사진을 통해서 본 근엄한 얼굴이
아니라 입을 한껏 벌리고 웃거나 눈썹을 하늘을 향해
솟구치고 화를 내거나 하는 익살스런 모습으로
뒤틀어놓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한눈에 그림들이
누구를 그린 것인지 다 알아볼 수 있었다. 빅토르가
아무리 쎄로브 미술학교까지 다니며 그림공부를
했다고는 하나 솜씨가 이토록 뛰어날 줄을 르빈은
미처 몰랐었다. 그런데 그림 솜씨가 이렇게 탁월한데
어찌 쎄로브 미술학교에서는 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퇴학시켰다는 것일까.
"이 정도면 시장에 내다 팔아도 되겠다."
르빈은 한 장 한 장 볼 때마다 감탄을 하며 느낀
대로 말했다.
"설마, 심심풀이로 그린 이런 걸 누가 사겠어?"
빅토르는 당치않은 말이라는 듯 일축해 버렸다.
"아니, 에르미타주 앞 궁전 광장에서 파는 초상화
못봤어. 어디 이만한 것 있었어?"
르빈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관둬. 싱거운 소리 작작해. 그런 것들은 그럴
듯하고 예쁘게 그렸잖아. 이렇게 못난이들로 그린 것
있었어."
"모르는 소리마. 그런 밋밋한 그림보다 비쨔 네
그림이 훨씬 더 인기를 끌 걸! 이 성난 스탈린 좀
보라지. 어떤 사람인들 재밌어 안하겠어?"
"어쨌든 난 알 바 아냐. 난 심심풀이로 그린
거니까."
"만약 네 그림 한 점만 준다면 내가 이 그림들을
모두 돈으로 바꿔다 주지."
"그렇지 않아도 네게 그림을 선사하겠다 하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며 책상서랍을 열던 빅토르는 문득 한
생각이 떠오르자 속으로 무릎을 쳤다. 그는 그 생각을
속으로 굴리며 책상서랍에서 그림을 한 장 꺼내
르빈에게 건넸다.
"야, 존 레논 아냐. 존 레논이 보면 사진보다 더 잘
그렸다고 탄복하겠다."
"르바, 너가 가장 존경하는 가수라 생각해 잘
그리려고 애썼어."
"고마워. 이번 생일은 생애 최고가 될 거야."
아, 존 레논의 초상화를 벽에 걸어두고 볼 수 있게
되다니, 이런 꿈 같은 일을 상상이나 했던가.
"그래. 아무튼 미리 생일을 축하해."
"고마워!"
르빈의 커다란 눈에 금세 물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림 하나 가지고 왜 그래, 못났게."
"아무 것도 아냐. 유형지에서 레닌그라드로
이사하게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오늘 나는 실로 오랜만에 그날의 기쁨을
고스란히 다시 느꼈어."
르빈은 급기야 눈물을 떼구르르 흘리고 말았다.
순간 빅토르는 아까의 생각을 구체화시키기로 다시
결심했다.
"르바, 너 어릴 때 밉상소리 많이 들었지?"
"밉상소리?"
르빈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래, 너 눈물을 흘릴 때 얼마나 우스운 꼴이
되는지 알아?"
"난, 또 뭐라고......."
르빈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아까 내 그림 돈으로 바꿔다주겠다는 말
정말이야."
"그럼, 정말이고 말고. 사람들은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비틀어 놓은 당 제1서기들을 보면 배를
잡을 거야."
"한번도 그런 생각을 안해봤는데, 그럼 이번 한번만
타락 좀 해볼까."
"정말이니?"
"그럼."
"아무리 못받아도 5루블리씩은 받을 거야."
"암튼, 그림을 싸들고 궁전광장으로 나가볼까?"
벽이며 책장이며 여러 곳에 붙어있는 그림을
뜯어내는 빅토르의 모습을 르빈은 존경심을 담뿍 안고
바라보았다.
그림 중에는 레르몬토프와 예세닌도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도 고골리도 있었다. 뒤틀어 놓은
정치가들의 초상과는 달리 그들 예술가들은 고상한
인품과 높은 이상을 지닌 열정적인 인물들로 그려
놓았다. 그런데 같은 예술가래도 고리끼와 레핀은
정치가들처럼 익살스럽게 비틀어 놓았다.
"왜 고리끼와 레핀은 정치가들처럼 그린 거야?"
아무리 궁리해도 모를 일이었다.
"왜? 이들 두 사람이 소비에트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가와 화가라서, 예쁘게 그렸어야 한다고 생각해?"
"다른 예술가들은 다 고상하게 그렸잖아?"
"그것도 경우에 따라서 달라. 이들 두 사람은
내게서는 존경받지 못해. 이들은 권력의 온갖 달콤한
혜택을 분에 넘치도록 향유했거던. 권력의 달콤한
꿀단지에 혀를 박고 있는 동안 어찌 정신이 썩지
않았겠어?"
레닌의 비호를 받은 고리끼와 레핀은 소비에트
예술계의 불변하는 두 기둥으로 존경받고 행세했었다.
르빈은 그들의 작품이나 사상이나 인품 어느 모로
보나 그런 존경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빅토르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르빈은 속으로 놀랐다. 그 놀라움은 자신의 미욱함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졌고 빅토르의 말이 옳다는 생각에
귀착하였다.
르빈은 그날의 빅토르에 대한 인상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다.
그때까지 동양계에게 품고 있던 어딘가 표현하기
힘든 일종의 경멸감과 함께 그의 마음의 심저에 깊이
똬리를 틀고 있던 우월감이 완전히 씻겨진 것이었다.
마침내 그림을 싸들고 두 사람은 아파트를 나섰다.
빅토르가 앞장을 서고 20여점의 그림을 싸든 르빈이
그 뒤를 따랐다. 트롤리버스 정유소로 나가는
빅토르를 한가지 근심이 줄곧 사로잡고 있었다.
장난삼아 팔러 나갔다가 한 점도 팔지 못하고
고스란히 거둬들고 돌아오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였다.
그들은 궁전 광장행의 22번 트롤리버스에
탑승하였다.
대네바의 궁전다리를 건너 그들은 에르미타주
국립미술관 앞에서 내렸다. 흰기둥들과 창살이 많은
창문과 연한 하늘색 벽의 성곽처럼 길다란 에르미타주
미술관 앞 광장의 알렉산드르 원기둥 쪽을 향해 가던
빅토르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알렉산드르 원기둥 주위에는 관광객 풍의
외국인들이 고개를 들고 원기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외국인들을 잠시 바라보던 빅토르는 발길을
돌렸다.
"예까지 와서 돌아가겠단 말이야?"
르빈은 짜증이 났다. 빅토르는 무엇 때문인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래도 고스티니 드보르 백화점으로
가는게 좋겠어."
"고스티니 드보르 백화점으로?"
르빈이 그렇게 말하는 사이 벌써 빅토르는 네프스키
대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그냥
돌아가자는 줄 알고 기분이 상했던 르빈은 금방
기분을 풀고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해 걸었다.
그들은, 한때는 러시아 정교의 대집회 장소로
쓰이던 곳이 현재는 아이러니칼하게도 무신론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카잔 성당을 지나 곧
고스티니 드보르 백화점에 당도했다. 백화점 주위에는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로 붐볐고 활기에 넘쳐 있었다.
백화점 옆 골목길에는 난장이 열려 있었다.
붉은무우 몇 개와 양배추 서너 포기를 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노파도 있었고 싸구려 보드카와 맥주를
몇 병 놓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고 있는
중년의 후줄그레한 남자도 있었다. 마뜨료시카와
스베니르를 올려놓고 관광객을 기다리는 여인도
있었고 헌책 몇 권을 펼쳐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노인도 있었다.
르빈과 빅토르는 헌책장수 노인과 피망과 오이
여남은 개를 펴놓고 쭈그리고 앉아있는 노파 옆의
빈자리에 가서 신문지를 펴고 그 위에 그림을 펼쳐
놓았다.
"어! 누가 그린 것인지 솜씨가 상당하군."
르빈과 빅토르가 그림을 펼쳐 놓기까지 그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헌책장수 노인이
그렇게 감탄했다.
노인의 표정은 진지했다. 한때는 살과 지방으로
채워져 팽팽하게 탄력있었을 얼굴이 세월과 함께 그
살과 지방이 시간 속으로 스며들어가 버리고 이제
거죽만 남아 쭈글쭈글했다. 하도 많은 세상의 변화를
지켜봐온 노인의 눈은 세상 일들이 다 그렇게 보이는
듯 시들한 빛을 띠고 있었다. 소매끝과 옷자락이
마모되어 보풀이 터져나온 낡은 웃옷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노인의 낡은 육신을 더 처량하게 느끼게
하였다. 그 노인에게서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와
크질오르다의 할아버지의 편린을 보았다. 무엇인가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막연한 꿈 때문에 평생 마음
고생이 그치지 않았던 리술 아저씨와 돌아갈 수 없는
고향으로 향하는 향수 때문에 늘그막에 고생으로
일관했던 할아버지. 자기가 소장했던 책들을 내다놓고
지난날의 추억을 뒤적이며 소일하는 것으로 보이는
노인에게서 불행했던 두 어른이 연상되었다.
"한 장 드릴까요?"
빅토르의 말에 노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솜씨가 좋아서 한 말이야. 내가 어찌......."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한 장 가지세요."
노인이 빅토르의 심정을 어찌 헤아릴까.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나 할아버지에게 드리는 기분으로
노인에게 그림을 드리려는 것이었다.
"젊은이가 그렇게 말하니, 그럼 한 장 가질까."
노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하더니 허리를 펴고
일어나 다가왔다. 노인은 눈썹을 하늘로 솟구쳐올리고
화를 내고 있는 스탈린의 초상을 골라 들었다.
"이거, 누가 그린 거니?"
노인은 르빈과 빅토르를 차례로 쳐다보았다.
"제가 그렸습니다."
빅토르는 공손히 대답했다.
"나는 스탈린의 성격까지를 이렇게 잘 나타낸
그림을 아직 보지 못했다. 레핀 스케치도 이렇게
시니컬한 것은 없었어. 어디, 미술학교 다니나?"
빅토르는 소비에트에서 가장 존경받는 화가의
그림과 자신의 그림을 비교하는 노인의 말이 싫지
않았다.
"아뇨, 2년 전에 미술학교에서 퇴학 당했습니다."
빅토르는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미술학교에서 퇴학 당했어?"
노인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빅토르를 빤히
쳐다보았다.
"학생 때는 대개 정치적 정열을 불태우기도 하지."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듯 하던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뒤틀어 놓은 스탈린의 초상화
때문인가, 노인은 빅토르의 퇴학이 정치적 이유
때문인 것으로 이해하는 눈치였다. 노인은 그림을
다시 유심히 살피더니 주머니를 뒤져 3루블을
꺼내놓았다.
"아닙니다. 이건 제가 할아버지께 그냥 드리는
것입니다."
빅토르는 돈을 노인에게 되돌려주었다.
"아냐, 이 그림은 이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어.
나는 3루블밖에 치를 수 없는 내 형편이
원망스러운걸."
노인은 한사코 돈을 돌려받지 않았다. 노인의
반응에 빅토르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시작이 좋아서 그런지 그림은 한 장, 두 장 솔솔
팔려나갔다.
값을 물으면 5루블리를 불렀으나 대개 주겠다는
가격에 그림을 내놓았다. 3루블도 받고 4루블도 받고
5루블도 받았다. 두어 시간 동안에 그림이 열 점이나
팔려 나갔다. 그림이 팔려나가는 걸 줄곧
지켜보았던지 헌책을 파는 노인은 말했다.
"그래, 내가 뭐랬어. 그림 솜씨가 좋다고 했지.
백화점에서도 이렇게 빨리 팔려 나가는 물건이 없을
걸!"
노인은 웃을 때 주름살에 눈이 파묻혀 버렸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빅토르는 그림을 펼쳐 놓고 해가 기울도록 기다려도
아무도 쳐다봐주지도 않을까 봐 내심 걱정이 컸다.
설마 내 이런 하찮은 그림에 돈을 지불할 사람이 있을
것인가, 그런데 벌써 반이나 팔린 것이다.
"그런데 비쨔, 아까 왜 궁전 광장에서 이곳으로
옮기자고 했지?"
르빈은 그림이 팔려 나가 신이 났으나 아무래도
아까 처음 예정했던 궁전 광장에서 도망치듯 이곳으로
옮겨온 까닭이 궁금했다. 빅토르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궁전 광장을 굽어보고
있잖아."
"그래서?"
"그래서라니?"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굽어보고 있다고 그곳에서
도망쳤어?"
"그럼. 밀레, 꾸르베, 고호, 피카소의 명작들이
전시되어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 앞에서 어찌 이런
허접쓰레기같은 것을 펴놓고 있겠어!"
르빈은 비로소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빅토르는
속이 깊어, 하고 생각했다.
그들이 그런 말을 나눈 직후였다. 문득 길 건너편
네바 레스토랑 쪽에 시선을 던져놓고 있던 빅토르는
깜짝 놀랐다. 그의 시야에 손을 흔들고 있는
아르까지나의 모습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질주하는 자동차를 피하며 급히 길을 건너 빅토르
쪽으로 다가왔다. 빅토르는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고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화급히
어디라도 숨을 데를 찾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아르까지나는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눈부시게 하얀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분홍색 작은 손가방을 들고 있었다. 날씬하게
뻗어내린 다리의 곡선이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여름
햇빛을 함뿍 받으며 웃고 있는 주홍의 한련화를
연상시켰다.
"비쨔, 여기서 뭘 해?"
아르까지나는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빅토르는
대답은커녕 쩔쩔매고 안절부절 못했다. 그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벌겋게 달아 있었다. 아르까지나는 그들
앞에 펼쳐진 그림과 빅토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르까지나의 얼굴에 개구장이 같은,
재밌다는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비쨔, 네 그림이지? 그림을 팔고 있었구나?"
아르까지나의 그 말이 빅토르의 가슴을 날카로운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아니, 8학년 여학생 아닙니까?"
빅토르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못하자 보다 못해
르빈이 나섰다. 아르까지나는 르빈의 말뜻을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궁금한 듯 회색빛 눈동자를 빛내며
르빈을 쳐다보았다.
"비쨔가 늘 이야기 하고는 했지요. 자기 학교에서
가장 예쁜 여학생은 8학년처럼 앳되어 보이는
소녀라고 말입니다. 제가 바로 맞췄지요?"
아르까지나는 방긋 웃었다. 순간 양볼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넌 꼭 8학년 학생같애, 하던
빅토르의 말이 상기되었다. 그런데 친구들한테까지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인가.
"글쎄요......."
아르까지나는 별로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르빈, 나 먼저 갈게."
갑자기 빅토르는 르빈에게 그렇게 한마디 던지고는
어떻게 손쓸 사이도 없이 휘적휘적 큰길쪽으로 걸어가
사람들 사이에 휩쓸려 버렸다. 아르까지나는 재빨리
그 뒤를 쫓아갔다.
"왜 그래. 화났어?"
걸음을 빨리해 보조를 맞추며 아르까지나가 물었다.
빅토르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그래?"
재차 다그쳤으나 빅토르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들은 카잔 성당 앞에 이르렀다. 빅토르는 군데군데
잔디가 깔려 있는 성당 광장으로 걸어갔다. 광장을
지나 코린트식 기둥이 반원을 그리며 서 있는 회랑의
그늘에 이르러 빅토르는 털썩 주저앉았다.
아르까지나도 그의 옆에 앉았다. 반원형의 회랑 그늘
곳곳에 젊은 남녀들이 포옹하고 있거나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비쨔, 난 네가 오늘 학교에 나오지 않아 궁금했단
말야. 더구나 오늘 아침 일이 있다고 해 얼마나
서운했는데. 내가 알은 체해 화난 거니?"
"화난 거 아냐."
"그럼?"
빅토르는 아르까지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들켰잖아."
빅토르의 퉁명스런 말에 아르까지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빅토르의 성격을 잘 알면서도 그의 당황하던
모습을 예사롭게 봐넘겼다니, 아르까지나는 비쨔를
보자 반가움이 앞서 다른 데 신경을 쓰지 않았던
자신의 무감각이 한심스러웠다. 빅토르는 학교에서도
그랬다. 기껏 무대를 차려놓고 연주회를 할 때도
그랬었다. 무대에 올라간 그는 처음의 서먹서먹한
기운이 씻겨나갈 때까지는 엉망으로 어색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상기하며 아르까지나는 까르르 소리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귀여운 표정이
빅토르의 가슴에 너울너울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나갔다.
"아까 그 그림들 재밌던데......."
"재밌으라고 그리는 게 그림의 다는 아니잖아."
"나는 죽었다 깨나도 그런 재밌는 그림 그릴 수
없다. 그럼 됐지 더 뭘 바래?"
"넌 도예 솜씨가 나보다 낫잖아?"
아르까지나는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남녀가
포옹하고 있는 직접 구운 도자기를 빅토르에게
선물했었다.
"비쨔는 비겁해."
"내가 비겁하다고?"
"날 자꾸 약올리잖아."
아르까지나는 빅토르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럼 좋아. 비겁하지 않도록 노력하지. 대신
그림장수는 잊어줘."
"그림장수가 어때서?"
"이번엔 내게 피치못할 사정이 있어 나섰지만
앞으로는 이런 장난은 절대 안할 테니, 내 말 잘
기억해둬."
"무슨 일이든 그렇게 장담하는 거 아니라 했어.
만약 어려운 처지에 놓이면?"
"그런 장난스런 그림으로 연명해야 한다면 차라리
죽고 말지!"
"아버지께서 늘 그러셔. 사람에게는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막말은 하는 게 아니라 하셨어."
"그래도 이 일만은 꼭 지킬 거야."
"알았어. 내가 그림장사 나서자고는 하지 않을 테니
걱정마."
해질 무렵까지 여름정원을 오락가락하며 함께
지내다 빅토르는 아르까지나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는 땅거미가 지고 자동차들이 전조등을 켜고 달릴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아파트 옆의
작은 공원을 지나려는데 갑자기 검은 물체가 불쑥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아유, 깜짝이야."
르빈이었다.
"다섯 장은 못팔았어. 자, 55루블이야."
르빈은 남은 그림과 돈을 내놓았다.
"수고했어. 자, 이건 차비해. 나머지는 내가 쓸
데가 있으니 그렇게 알아."
르빈은 그러나 빅토르가 내미는 3루블을 받지
않으려 했다.
"수고비로 주는 건 아냐. 수고비라면 더 줘야
하겠지. 내가 다른 데 꼭 쓸 데가 있어 이것만 내놓는
거야."
"알았어."
르빈은 쑥스러운 듯 몸을 비틀며 돈을 받았다.
그리고 작별인사를 남기고 점점 밝아오는 수은등을 몇
개 지나 정류장 쪽으로 사라져갔다.
21. 르빈의 생일
"남자가 좀 그럴 듯한 꿈을 가져야지. 노래가 다
뭐냐?"
어느날 아버지 로베르트는 빅토르와 마주치자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노래란 여름날의 소나기구름 같은 것 아니냐.
한줄기 소나기를 뿌리고 나면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마는 소나기구름 같은....... 그래 노래라는
것은 젊어 한때 사람을 달뜨게 하지만 그 정열이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것이 뭐가 있겠니? 내 자식이
그런 허망한 것을 붙들고 인생을 걸고 있다니, 이
답답한 노릇을 어찌해야 좋단 말이냐?"
아버지 로베르트는 빅토르가 좀더 확실하게 장래에
대비할 수 있는 어떤 실제적인 공부나 일을 시작해 줄
것을 오래 전부터 바랐었다.
"아버지와 같은 엔지니어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아버지는 엔지니어로서 소비에트에 봉사해온 것을
늘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남들이 부러워할 남다른
특수 분야의 엔지니어로서 일해 오고 있으니
러시아인들로부터 차별을 받지 않았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찌 승용차를 두 대나 굴리며 이렇게 큰
아파트에서 윤택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겠느냐고
언젠가 말했었다. 아버지는 국가기밀에 속하는 어떤
군수공장에서 무기 만드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언젠가 무슨 천기나 누설하는 것처럼 주위를 살핀후
귀를 잡아당겨 그렇게 속삭이듯 말했었다.
"작은 삼촌 레프는 경영학을 공부해 교수가 되어
있지 않느냐."
그리고 또 귀가 따갑도록 출세한 아버지 형제들의
이야기를 되풀이 하고는 했다. 그 놈의 경제학
교수라는 것이 아무도 올라갈 수 없고 쳐다볼 수도
없는 그런 높은 자리라도 된다는 것인가.
"교수가 아니면 어떠냐. 너희 어머니처럼 교사가
되는 것도 좋겠지. 장차 이 소비에트를 짊어지고 나갈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이겠니."
아버지는 언제나 빅토르를 숨막히게 하였다. 어떤
것도 그가 되고 싶은 것과는 거리가 먼 것들을
주문하였다.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거기에 가진 열정을 다 쏟는다는 아주 평범한 사실을
아버지는 왜 간과하고 자기 생각만을 강요하는
것일까.
"아니면 비쨔 넌,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지
않느냐? 화가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래,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좋아한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길이 내게는 다 막혀 있지
않은가. 사람의 일이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니까, 장차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이야
그림 그릴 처지가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내가
기술전문학교에서 목각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지금까지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니 아버지도 참 딱하다.
그래 쎄로브 미술학교에서만 제적 당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빅토르는 화가가 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친구들과 그룹을 지어 노래부른 것은
아버지의 말대로 '한때 지나가는 부질없는 여름
소나기구름 같은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었다. 그러나
쎄로브 미술학교에서의 제적은 그가 아련히 품고 있던
화가에의 꿈을 그 싹부터 싹둑 잘라버린 계기가
되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화가가 되라니,
아버지의 요구는 빅토르에게 도리어 반발심만
일으켰다. 그러나 빅토르는 아버지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을 뿐 대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서
아버지로부터 놓여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장래에 대한 충고를 들은 그날
밤 빅토르는 오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의 희망이나 기대대로 살지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아버지를 끊임없이 실망시켜갈 자신의
장래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존해 있는 동안 줄곧
우려와 걱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아버지의 시선이
거북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내게 어쩌란 말인가.
그날 밤 빅토르는 기둥을 타고 내려오는 싯누런
황금빛 거대한 용을 보았다. 바위산처럼 우툴두툴한
머리에 툭 불거진 부리부리한 눈, 긴 수염과 한아름이
넘을 것 같은 굵은 몸통에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난
발과 네 다리가 선명했다. 손바닥처럼 넙적넙적한
황금빛 비늘이 온몸을 수놓듯 감싸고 있는 용은
쉴새없이 번쩍번쩍 황금빛을 뿌리며 기둥을 타고
내려와 길에서 농성하듯 한동안 꿈틀거렸고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고 있는 어떤 거대한 관을 꿈틀꿈틀
통과하여 머리부터 빠져나오고 있었다.
리술 아저씨로부터 용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동양에서는 권위와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로써, 하늘의 도리로 백성을 다스린다는 절대
권력의 중국 황실의 문양으로 사용되며, 서양에서는
인간의 재화를 지켜주고 인간을 위해 숨은 보물을
찾아주는 현명한 성수(聖獸)로 여겨지며, 한편 백성을
위해 신이 점지한 구원의 왕을 도와 왕업을 이루는
영웅을 돕는 상서로운 상상의 동물로 여겨진다
하였다.
그리고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는 용의
꿈을 꾼 자는 옛날부터 왕업을 이루거나 큰벼슬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한다. 그런데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것이 아니라 기둥을 타고
땅으로 내려온 황금빛 용의 꿈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실의와 절망을 상징하는 것일까. 아니면
권위와 부귀영화가 보다 가까워진 것을 나타내려는
것일까. 용은 뱀처럼 청록색의 몸체를 하고 있다
하였다. 그런데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몸통을
꿈틀거리며 땅에서 농성하는 것 같던 용은 도대체
무엇을 뜻한 것일까. 지금까지 여러 차례 조각했으나
한번도 마음에 흡족한 용을 얻지 못하자 용이 스스로
제모습을 보여준 것인가.
번민과 복잡한 심정으로 아침에 집을 나온 빅토르는
학교에 가서도 공부가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르까지나도 왠 까닭인지 요며칠 사이에는 만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보이지 않자 더 만나고 싶었다.
공중전화용 토큰을 간신히 구해 전화를 걸었으나
그녀는 부재중이었다.
"지금 없습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정중하게 대답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지금 없다고요?"
그렇게 말한 빅토르는 아르까지나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는데, 어디 간 줄 모르느냐고 덧붙여 물으려다
입을 다물고 전화를 끊었다. 자칫 아르까지나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우려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입을 봉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르까지나의
결석에 대한 궁금증은 갖가지 추측을 불러일으키며
빅토르를 괴롭혔다. 빅토르는 야비한 짓인 줄 번연히
알면서 솔낀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솔낀은 그의
교실에서 강의를 받고 있었다. 은회색 머리카락이
어깨를 덮고 있고 파란 눈동자에 많은 꿈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마는 철학자의 그것처럼
심각한 생각에 잠겨있는 듯 했고 훌쭉한 볼과 얇은
입술은 이성적인 면모를 보였다. 저렇듯 훌륭한
외모를지닌 솔낀을 마다하고 나를 데이트의 상대로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솔낀을 보는 순간 안도감과
함께 그런 의문이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길래 학교에 나오지 않은
것일까. 빅토르가 하루라도 결석을 하면 못 견뎌하던
그녀였다.
그녀와 사귀어온 지난 두 달 사이 이렇게
일주일이나 아무 소식없이 지낸 적이 있었던가. 무슨
사고가 났다면 전화를 받은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겠는가. 어디 멀리 갔다면 어찌 전화 한
통화 안했겠는가.
그동안 둘 사이에 다투거나 의견이 틀어진 일은
한번도 없었다. 아르까지나는 빅토르의 그림이며
조각과 시와 노래 솜씨를 높이 평가하였고 빅토르는
학교에서 가장 깜찍스런 미녀가 우아한 외모의
러시아계 청년의 프로포즈를 거절하고 동양계인
자신을 데이트 상대로 선택한 고마움 때문에 그녀에게
정성을 다해 왔었다. 아르까지나는 빅토르의 목각은
다른 사람들이 흉내내지 못할 어떤 특이한 점이
있다면서 반해 있었고, 빅토르는 어떤 구원의 땅이
있어 장차 그 땅에 가서 살게 된다면 반드시 동행해야
할 사람으로 아르까지나를 꼽고 있었다. 그런데
빅토르는 갑자기 행방을 감춘 그녀로 인해 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격렬하게 타오르는 사랑의 충동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자레치나야, 나야, 비쨔."
"비쨔?"
"그래. 오랜만이군."
"난 비쨔의 수첩에서 지워진 인생인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 서운한 말을 하는 거지?"
"아르까지나로부터 빅토르 이야기 잘 들었어."
"아르까지나로부터?"
자레치나야의 입에서 아르까지나의 이름을 듣다니.
"아르까지나는 쉬꼴라에서 친했던 친구야."
"아르까지나는 그런 말을 안하던데."
"비쨔 말이 나오자 내가 어리석게도 질투하는 빛을
보였나봐."
빅토르는 자레치나야와 지냈던 뜨거운 밤을
연상했다. 그러나 자레치나야에게서 어떤 애정 따위
미묘한 감정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녀도
비슷한 감정으로 자신을 대하는 것으로 알아왔었다.
"그랬어?"
"그렇지만 함께 잠잤다는 말은 안했으니 걱정마."
"고마워. 하지만 여자들은 나빠. 자기네들끼리는
지지고 볶으면서도 남자들한테는 시치미 뚝
따고......."
"걱정마. 아르까지나는 천사같은 아인데 내가
상처를 입혔겠어. 어쨌든 무슨 일이야?"
"르바 있잖아."
말이 나온 김에 아르까지나의 행방에 대해 묻고
싶었으나 빅토르는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르바 생일이 며칠 안남았어. 그래서 선물을 하나
준비했는데, 내가 직접 주기는 쑥스럽고, 그걸 좀
전해 줬으면 해서."
자레치나야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그래 좋아. 언젠데?"
"이번 금요일이야. 오늘 저녁 내가 물건을 집으로
가져다 줄게."
"그래. 알았어. 그런데 전에 비쨔, 내게 그랬지.
하늘이 고칠 수 없는 슬픔은 이 세상에 없다고."
자레치나야의 어머니가 죽고 그 재를 네바 강에
뿌리고 온 날 빅토르는 자레치나야의 귀에 대고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자 자레치나야는 빅토르의
가슴에 쓰러져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가.
"그래 생각나."
"나는 그 말이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몰라. 세상
사람들은 다 그 말을 기억해야 할 거야."
"글쎄! 저녁에 봐."
빅토르는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자레치나야의 말이 가슴 속에 길게 여운을 그리고
있었다. 왜 자레치나야가 그런 말을 한 것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목요일 오후였다. 전화를 걸어 르빈을 기다리게 한
다음 빅토르는 그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그는 붉은
포도주 두 상자와 보드카 열 병과 케이크 한 상자,
달걀 한 상자, 훈제한 돼지고기 등을 사서 마가진
사무원의 도움을 받으며 자신도 한짐을 지고 르빈의
아파트로 올라갔다.
"이게 다, 웬 거야?"
"내일 르바 생일이잖아?"
"내 생일?"
"자기 생일도 몰라? 어쨌든 무거우니까, 이거나
받아."
빅토르는 케이크 상자와 보드카를 르빈의 손에
넘겨주었다. 마가진 사무원이 지고온 포도주와 달걀도
안으로 들여놓았다.
"뭘 그렇게 넋나간 사람처럼 서 있어?"
마가진 사무원이 돌아가고도 르빈은 아파트
현관문을 닫지 않고 얼빠진 사람처럼 서 있었다.
"이러지 않아도 돼는데."
"걱정마. 다 너가 번 돈으로 산 것이야."
"내가 번 돈? 그림 판 돈으로 산 것들이구나."
"그래."
"그 돈, 비쨔 네가 쓸 데가 있다고 했잖아?"
"그래. 르바 네 생일 때 쓰려고 했던 거야."
르빈은 순간 매운 후추를 삼킨 듯 코끝이 찡 울리고
눈자위가 불그스레 물들었다. 나는 한번도 생일
차려먹은 적 없어. 무심코 지껄였던 말을 귀담아 듣고
이렇게 마음을 쓴 빅토르가 한없이 고마웠다.
"내일 저녁 보리스 그레벤쉬코프도 온다고 했어."
"보리스가?"
"전에 연락하라고 했었잖아. 전화를 했더니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었어."
"그래, 고마워."
르빈의 뺨에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참 못났어."
빅토르가 핀잔을 주자 르빈은 눈물을 닦으며 미소를
지었다.
"다른 친구들한테는 너가 직접 연락해. 가능한 한
한사람도 빠뜨리지마. 빠쉬코프도 보고 싶어."
"그래 가능하다면 비쨔 친구들도 다 초대할게."
다음날 저녁, 드디어 시간이 되자 빅토르는 르빈의
집을 향해 출발했다. 그는 아침부터 몇 군데 마가진을
돌아다니며 사 모았던 담배를 곱게 포장해 들었다.
어제 담배를 깜박 잊어버리고 사지 않았던 것이
뒤늦게 생각나 다행이었다.
르빈의 집에는 건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남자들로는 쥬사, 꾸끄, 쓰윈, 판케르, 올레그,
막심, 여자로서는 따치아나, 나타샤, 마샤, 소피아,
자레치나야 등이 모습을 나타냈다. 특히 자레치나야의
등장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녀는 자기 키 만한
물건을 낑낑대며 들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기다랗고 통통한 물건에는 분홍색 생일 축하 리본이
달려 있었다.
"생일 축하해."
자레치나야는 아파트에 들어서자 르빈에게 들고온
선물을 건넸다.
"고마워. 헌데 이건?"
"뜯어보면 알게 돼."
여러 사람이 주시하는 가운데 르빈은 포장을
풀었다. 기타 케이스가 나타났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르빈은 놀람과 흥분된 눈으로 자레치나야를
쳐다봤다.
"르빈의 음악적 재능을 기리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좀 전해 달라고 해서. 저는 수고만 보탰을 뿐입니다."
다시 박수가 일어났다.
"그 사람을 공개하세요."
"그 사람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를 때
아름다움이 창조된다 하였습니다. 여러분들께
궁금증을 선물한 그 사람에게 박수를!"
자레치나야가 먼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르빈은 케이스에서 기타를 꺼내 줄을 감거나 풀며
조정한 다음 그것을 한줄씩 쳐보았다. 딩, 디잉, 징,
지잉. 그 소리는 맑고 폐부를 찌르는 것 같았다.
르빈은 꿈만 같았다. 기타가 생겼다는 기쁨에 도취된
그는 그것을 선물한 사람에 대한 궁금증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동안 기타를 소유하지 못해
얼마나 애를 태워 왔던가. 틈틈이 남의 기타를 빌어
눈치를 보며 연습을 해왔고 다 함께 연주를 할 때는
기타가 없는 그만 혼자 멍한 눈으로 연주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그는 기꺼이 한쪽 눈과 기타를 교환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어떤 것도 기타와 바꿀 수 없는
자신의 가난을 얼마나 자주 원망해 왔던가. 그리고
월급이라고 쥐꼬리보다 적은 걸 어머니에게 내놓아야
하는 처지이고보니 언제 기타를 가질 수 있을지
생각할 때마다 답답했었다. 그러한 그에게 기타가
생기다니....... 그 기쁨을 도무지 감출 수가 없었다.
르빈은 그 자리에서 당장 그가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보리스의 등장이었다.
미리 예고해 두었으나 그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반신반의했던 터라 그가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자
일제히 박수로 환영하였다. 보리스는 준비해온 장미
한송이를 르빈에게 내밀며, 생일을 축하했다.
보리스는 자리의 가운데로 안내되었다. 무대에서
연주하는 모습이 아닌 평상시의 모습은 본 적이 없는
친구들은 안그런 척 하면서도 기회만 있으면
보리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보리스는 그 눈총들을
견디느랴 꽤나 신경을 썼다. 그 시선들은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아 더 거북스러웠다.
좌중은 술과 이야기와 담배로 왁자하게 어울렸다.
생일 축하 자리가 무색하리만큼 먹고 마시고 태우고
떠드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보리스, 제가 당신을 위한 노래를 지었는데,
들어보겠습니까?"
10여년의 나이가 이렇게 많은 격차를 느끼게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한시 바삐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빅토르가
보리스를 향해 말했다.
"나를 위한 노래를 지었단 말인가?"
"예, 마음에 들지 모르겠는데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보리스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르빈의 생일파티에 참석한 속뜻은 바로 빅토르와
르빈의 노래를 듣고자 해서였다. 그런데 그럴 기회가
잘 오지 않을 것 같아 일어서려던 참이었는데, 잘 된
일이었다.
빅토르의 노래는 아주 빠르고 경쾌했다. 팬들의
우상으로 군림하며 열광적으로 노래하는 가수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어쩐지 보리스 자신의 스타일을
그대로 흉내낸 것 같았다. 썩 훌륭한 노래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자신을 위한 노래라니 싫지는 않았다.
"어떻습니까?"
"선물받은 사람이 선물을 놓고 좋다 나쁘다 할 수
있나. 내게 그 악보를 한벌 주게. 나도 간직해야지."
"그러지요.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가린과 쌍곡선'이라 했나. 자네들 노래를
좀 들려주지 않겠나?"
"저희들 노래를 말입니까?"
"그래, 지난번 기차에서 두 곡밖에 더 들었나.
자네들 가슴 속에 들어 있는 보배를 다 구경하고
싶네."
"보배는 무슨 보뱁니까. 그냥 심심풀이로 지어본 것
뿐입니다."
빅토르는 어색하게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아무튼 오늘 르빈의 생일이니까, 축하도 할겸
노래를 불러보겠습니다."
"세 사람이 다 함께 불러보게."
"르빈은...... 자축해야겠군요."
"그렇게 됐나.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걸세."
빅토르와 르빈과 올레그는 거실 안쪽으로 들어가
보리스를 향해 나란히 섰다. 어깨에 윤택이 흐르는
선물받은 새 기타를 멘 르빈은 전에 볼 수 없던
생기있는 모습이었다. 세 사람은 기타의 줄을
조절하여 음정을 맞추고 서로 귀엣말을 나누었다.
이윽고 빅토르의 리드에 따라 연주가 시작되었다.
보컬은 빅토르가 맡고 르빈과 올레그는 반주를
하였다.
노래는 '건달들 1' '건달들 2'로 그리고 '시간은
있으나 돈은 없다' '8학년 여학생' '알루미늄 오이'
'나의 친구들' '전기철도' '너는 언젠가 비트팬
이었다'로 이어져 나갔다.
몇 곡 듣지 않아 보리스는 아예 눈을 감고 말았다.
좋은 노래는 언제나 그를 흥분시키고 전율시켰다.
빅토르의 노래는 보리스의 가슴 속 황금현을 끊임없이
감동으로 출렁이게 하였다. 빅토르는 보리스 자신은
갖지 못한 재능을 타고났음을 다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지난번 기차에서 빅토르의 노래를 듣고
났을 때 그가 남다른 영혼을 지닌 것으로 생각했었다.
오늘 거듭 그 사실을 확인한 셈이었다. 보리스는
저렇듯 위대한 노래가 무명의 청년들에 의해 지어졌고
또 그것이 아직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에 묘한
감동과 함께 흥분을 느꼈다.
그날 르빈의 집을 나오면서 보리스는 당장 빅토르의
노래를 취입시켜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신이 빅토르의 프로듀서를 맡아
일을 진행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였다.
22. 록그룹협회에 가입하다
르빈의 생일을 지낸 얼마 후, 보리스는 빅토르와
르빈과 올레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들은 붉은
포도주 몇 병을 들고 보리스의 집을 방문하였다.
보리스의 부인 류다는 세 사람을 다정하게
맞아주었다. 보리스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새로운 가수들에 대한 호기심이 없지 않았던 류다는
세 사람을 위해 조촐한 저녁상을 마련했다.
샤시리크(양고기구이), 삐로조그, 스메타나를 친
흰살생선, 감자 그라탱 등과 맥주를 차려놓았다.
류다로서는 정성을 다한 식탁이었다.
"보랴가 어찌나 칭찬을 하던지, 내가 더 보고
싶었네."
류다는 맥주를 권하고나서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달걀처럼 타원형의 얼굴이며 푸른 눈동자에 금발의
미녀였다. 핏줄이 내비칠 만큼 투명한 살빛이며 눈과
입가에 어려 있는 미소, 이런 것들이 눈부셨다.
빅토르는 아르까지나를 살짝 부풀려 놓은 것이 아닌가
혼잣속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들은 접시에 요리를 덜어, 먹기 시작했다.
시장하던 터라 음식이 꿀처럼 달았다. 맥주로 목을
축여가며 먹는 스메타나 소스를 친 흰살생선요리가
일품이었다. 샤시리크도 구수한 맛이 그만이었다.
"내가 언제 무슨 칭찬을 했다는 건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보리스가 류다를 쳐다보며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빅토르와 그 친구들을
칭찬했잖아요."
"후배들한테 점수 잃지 않으려면 속을 보이는 것이
아냐."
보리스는 웃으며 찡긋 윙크를 해보였다.
"정치가도 아니면서 그런 계산도 해야 하나?"
류다는 웃으며 빈정거렸다.
"더구나 다른 후배들도 아닌데......."
"그럼 내 듣는 데서 그런 말을 안해야지. 나 거짓말
못하는 것 잘 알잖아. 이왕 시작한 건데 다 털어놔
버리지 뭘."
"뭘 털어놓는다는 건데?"
보리스는 입술에다 오른손 검지를 대고 미소지었다.
"뭐는 뭐예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난 빅토르한테
밀릴 것 같다고."
"내 체면 좀 세워주구려."
"현실을 냉정히 직시해야 한다고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서도, 체면 생각해 달라고?"
"못 말리겠군. 그럼 다 말하구려."
"그럼 내가 말 못할 줄 아세요. 비쨔, 보리스가
그러는데, 비쨔 노래가 최고래."
류다의 말에 빅토르는 늘 그렇듯 수줍은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라하였다. 얼굴이 발그스레
물들어갔다.
"편하게 음식 좀 먹게 놔두구려."
"나우멘꼬나 마까르위치나 낀체프 같은 사람들은
기껏해야 서구의 록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는데,
빅토르는 아니라는 것이었어."
빅토르는 수줍은 얼굴로 몸둘 바를 몰라 쩔쩔매는
듯하면서도 자기 음악에 대한 보리스의 생각을 귀담아
들었다. 나우멘꼬, 마까르위치, 낀체프라면 보리스와
함께 소비에트에서 서로 자웅을 겨루는 최고의
인기가수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은 서구의 록
음악을 흉내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빅토르는 그런 흉내내는 단계를 뛰어넘었다는
거야. 보다 창조적이라는 것이지."
"그만 해둬. 그래, 내가 빅토르가 최고라고 했어.
그런데 사실 나도 빅토르의 노래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아."
보리스는 빅토르를 정시하였다.
"뭐가 궁금한가 하면, 똑같이 록을 하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다른가 하는 것이야. 노랫말도 그렇고
멜로디도 그렇고....... 내 질문이 너무 어린애
같은가?"
보리스는 시간만 나면 시집을 읽으며 그 시를 지은
시인들은 사랑을 어떻게 노래했고 세상을 어떻게
보았으며 인생을 어떻게 이해하려고 했는지, 그들이
숨겨둔 암호 같은 것을 해독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 그리고 그들의 시에서 힌트를 얻어 자기의
노래를 짓고는 했었다. 그 시들은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빅토르의 노랫말은 그런
고답적인 언어나 이해하기 힘든 은유나 상징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느낀 것을 직설적으로 펼쳐놓은
것에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단순하고 이해하기도
쉬웠다. 그러나 그 단순하고 직설적인 노랫말을
따라가다보면 어느 사이 더 심오한 상징과 은유로 이
세상과 인생과 사회와 인간관계를 노래하고 있음을
알게 하였다. 이것은 어느 시인보다 더 가서 닿기
힘든 어떤 새로운 경지의 상징과 은유 같았다. 그리고
멜로디도 또한 그랬다. 보리스 자신은 유럽에서
들여온 록이며 재즈며 포크송들을 한 소절 한 소절 다
이해할 때까지 거듭거듭 듣고 완전히 익히고 거기서
힌트를 얻어 곡을 만들고는 해왔었다. 그러므로
어딘가 그쪽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러나 빅토르의
노래에는 그런 냄새가 아주 적었다. 분명 록으로
출발한 것 같았으나 그의 노래는 러시아 특유의
회색빛 우수가 짙게 배 있었다. 록에다 러시아
민속음악을 가미했다고 할까. 아니 그렇게 말해
가지고는 그의 음악을 다 설명한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의 노래에는 러시아 민속음악적 요소와는
또다른 어떤 그림자가 분명히 어른거리고 있었다.
어떤 인간의 절절한 슬픔 같은 것이 짙게 바닥에 깔려
있었다. 러시아적 우수와 인간의 절절한 슬픔을
조화시킨 빅토르의 음악은 아무리 흉내내려고 해도
흉내낼 수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뇨. 저도 똑같이 서구의 록에서 배운 걸요. 저는
다른 점이 없다고 생각해요."
"글쎄,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지 모르지만,
빅토르의 노래에는 보다 인간 보편적인 우수와 슬픔이
담겨 있어. 거기에다 바로 당대의 10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느끼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꼭 집어내 노래하고 있으니, 어떤 젊은이들이
싫어하겠어. 얼마 가지 않아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인기를 끌 거야."
"원 과분한 말씀을......."
"저이가 그러는데, 장담한대요."
류다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그러려면 먼저 록 클럽에 가입해야 할
텐데?"
보리스의 말에 빅토르는 르빈과 올레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나우멘꼬에게 말해 자네들을 록 클럽에
추천하지."
"아, 그렇다면 록 클럽에 가입은 문제없겠군요."
르빈이 덤비듯 말했다.
"그래도 심사는 받아야할 걸. 많은 젊은이들이
심사를 받지만 다 통과하지는 못하는 것 같던데.
하기야 자네들 실력이면 그런 심사가 문제겠나.
그리고 내가 얼마 전 뜨로삘로와 만났을 때 자네들
노래를 한번 들어보라고 했어. 내 말을 듣더니 관심을
보이더군. 내가 프로듀서를 해도 좋다고 했거던."
"안드레이 뜨로삘로 말인가요?"
"그래 우리 아크와륨 레코드는 다 뜨로삘로가
녹음해서 낸 것이거던."
빅토르는 뜨로삘로를 너무나 많이 들어 알고
있었다. 레닌그라드뿐만이 아니라 소비에트에서
녹음기술이라면 최고로 치는 사람이었다. 그런
뜨로삘로에게 녹음할 수만 있다면 그 아니 큰
영예겠는가.
"록 클럽의 심사도 만만치는 않고 또 뜨로삘로의
오디션을 받으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 할 거야."
"고맙습니다."
빅토르는 긴장한 나머지 얼굴 근육이 굳어있었다.
보리스의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그를 흥분시키지 않은
것이 없었다. 록 클럽 가입을 위한 추천을 나우멘꼬와
보리스가 한다는 것도 그보다 더 유리한 입장에 놓일
수는 없을 것이었고 또 뜨로삘로에게 레코드 취입을
위한 녹음까지 부탁해 두었다 하지 않는가. 게다가
보리스 자신이 프로듀서까지 맡겠다고 장담해
두었다니, 몇 가지 행운을 한꺼번에 손에 쥔
것이었다.
"자네들 같은 재능이 오래 묵혀 있어서는 안되지.
자네들 노래를 하루 빨리 세상이 함께 즐겨야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일세."
보리스를 알고 사귀게 된 것만으로도
가수지망생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의 적극적인 도움까지 받게 되었으니 이런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빅토르는 노래를 시작한 이래
가장 큰 기쁨을 느끼고 자신감을 가졌다.
드디어 록 클럽의 심사를 받는 날이 되었다.
빅토르와 올레그, 르빈, 세 사람은 루빈스타인 거리
13번지에 있는 후줄근한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은
칙칙한 회색빛이었고 아랫도리는 도로의 흙탕물이
튀겨 지저분했다. 낡은 목제 계단은 음침하게
삐걱거렸다. 그들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음악과 연주 솜씨가 다른 어떤 아마추어
그룹보다 탁월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록 클럽의 심의위원들의 생각은
아니었다. 록 클럽의 심의위원들에게는 그들의 엄격한
심의기준이 있었다. 그들의 음악과 연주 솜씨를
심의위원들이 인정해줘야만 그들의 자부심은 비로소
공정한 것이 되는 것이다.
70년대 중반까지 소비에트 사회에서는 록큰롤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풍속을 해치고 타락을 부추긴다는
혐의를 씌워 당국은 서구로부터 들어온 소란스런 록을
엄격히 단속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단속하고
금지시켜도 그 단속과 금지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당국에서 금지하자 록은 지하로 숨어들어 젊은이들
사이에 무슨 전염병처럼 번져갔다. 그런 현실을
외면하지 못한 당국에서는 결국 70년대 중반부터 그
규제를 조금씩 풀어갔다.
그리고 록 음악의 규제를 푸는 대신 각지역에 그
음악을 관장하고 적당히 통제하는 기구를 설립하여
운영하게 하였다. 80년도에 레닌그라드며 모스크바,
키예프, 오데사 등 대도시에 록그룹협회가 설립되었고
그 지역의 록그룹 멤버들을 장악하게 하였다.
록그룹협회는 록그룹들의 공연에 관한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록그룹협회 지도부는 공연을 기획하고 쇼
비즈니스를 독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 협회에
가입을 하지 않은 그룹은 록그룹협회가 주관하는
공연에 참가할 수 없었고 그리고 독자적으로 공연을
할 수도 없었다.
지도부는 자주 회의를 열고 회원들을 관리했다.
당의 지시를 전달하고 KGB의 간섭도 받았다. 대체로
자유분방하고 저항적이었던 록 가수들은 당이나
비밀경찰의 비위를 거스를 때가 종종 있었다. 그들의
잘못이 당이나 비밀경찰에 적발되어 문제를 일으키면
협회에서 제명 당하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이런
일은 다 협회를 통해 이루어졌고 따라서 협회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게다가 협회는
정치적인 성향을 짙게 띠고 운영되었다.
음악적 재능과는 하등 관계없이 지도부에 사진 한
장을 제출하고 회원이 된 정치적 배경을 가진자들은
회원증 하나를 가지고 다니면서 유달리 가수 행세를
해대기도 했다. 정작 자격있는 자들은 소외되는
경향마저 없지 않았다. 어쨌든 '가린과 쌍곡선'이
록그룹으로써 활동하기 위해서는 록그룹협회에
가입해야만 하였다.
레닌그라드 록 클럽에도 정치조직처럼 내분이
그치지 않았다. 게나 자이쩌브가 회장으로 재직하며
전권을 휘두르자 따냐 이바노브나가 거기에 반기를
들고 나왔다.
따냐 이바노브나는 게나 자이쩌브가 음악은
등한시하고 매사 정치지향적으로 일을 처리해왔다고
공격하고 나왔다. 회원 그룹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당의 이익을 먼저 챙긴다고
공격하였다.
록은 자유분방함을 본질로 하는 음악이다.
기존질서에 저항적이며 어떤 규율이나 틀에 매이는
것을 거부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충동적 반성과
질문으로 엮어져 나가고 끊임없이 자유지향적이다. 늘
새로움을 추구하고 과거를 돌아보지않고 오로지
앞만보고 질주하였다. 폭발적인 젊음이 좌충우돌하는
록 음악은 그래서 구질서에 안주하고 구질서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함께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기 십상이었다.
자유, 새질서, 저항, 충동 등 인간 보편적인
가치지향을 극도로 억제해오며 오로지 빵만을
허용하는 소비에트에서 오래 길들여져 온 게나
자이쩌브는 정치지향적으로 록그룹협회를 운영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 터였다.
바로 그러한 점이 록 음악가들의 반발을 샀고 그
여론을 등에 업고 반기를 든 따냐 이바노브나에 의해
결국 게나 자이쩌브는 협회로부터 축출을 당하고
말았다.
심사를 받기 위해 록그룹협회에 나온 '가린과
쌍곡선'의 멤버들이 긴장을 풀지 못한 것은 자신들이
바로 현회장인 따냐 이바노브나의 눈밖에 나 있음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냐 이바노브나는 록그룹의 성향을 외면하고
정치지향적으로 협회를 운영하였다하여 게나
자이쩌브를 밀어내고 회장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또다른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록그룹협회 회장임에도 불구하고 록 음악보다 러시아
민속음악이나 민요를 바탕에 깐 전통적인 대중음악을
더 선호하였다. 따라서 요란하고 광적인 록 음악을
체질적으로 싫어하였다.
거기에다 어떤 개인이 마련한 밤음악회에서 우연히
'가린과 쌍곡선'의 공연을 본 따냐 이바노브나가
그들의 노래에 대해 혹평을 했다는 사실을 빅토르는
보리스를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노랫말이
반체제적이고 저항적이며 멜로디가 광적이고
선동적이라고 비판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그런 혹평이 나온 터이므로 심사를 받기 위해 준비를
하고 온 그들의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르빈이 앞장서서 노크하고 조심스레 협회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방의 중앙에 앉아있던, 금발에 날카로운 콧날의
따냐 이바노브나와 르빈은 먼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르빈을 쏘는 듯 쳐다보았다.
르빈은 어깨를 움츠리며 들어섰고 그 뒤를 빅토르와
올레그가 따라 들어서며 불안하게 주위를 살폈다.
"우리 레닌그라드의 새로운 영웅들이 등장하셨군!"
이고르 골르베브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활짝 웃었다.
염소처럼 턱수염을 기른 이고르는 좁은 얼굴에 눈도
작았다. 마치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서류철을 들며 말했다.
"신세대 음악가들이라고 했던가?"
굳이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근엄한 표정이 되는
꼴랴 미하일로비치가 표정에 어울리지 않게 농담을
던졌다.
"자 그럼 따냐, 연주실로 가서 이들의 음악을
들어봐야겠군요."
이고르의 말에 심의위원인 따냐와 꼴랴
미하일로비치도 책상 위에서 서류철을 들고 일어섰다.
그들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던 다섯 명의 심의위원들은
하나하나 복도로 나가 연주실을 향해 걸어갔다.
빅토르와 르빈과 올레그는 어미소를 따라가는
송아지처럼 어정어정 그 뒤를 따랐다.
연주실이래야 별다른 장치나 장식이 없었다.
넝쿨장미를 벽을 따라 길게 고정시켜 놓은 것이
시선을 끌었다. 연한 갈색 벽에 진홍색의 넝쿨장미가
수를 놓은 것처럼 선명했다. 그 벽 아래에 가슴
높이의 탁상과 의자가 한벌 달랑 놓여 있고 그 앞에
무도장의 플로어 같은 공간이 있었다. 거기에 딱딱한
목재 의자가 일여덟 개 무질서하게 놓여 있었다. 따냐
이바노브나와 이고르 골르베브, 꼴랴 미하일로비치 등
다섯 명의 심의위원들은 플로어 맞은편 벽 아래에
놓여 있는 기다란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르빈과 빅토르, 올레그는 꼴랴 미하일로비치가
손으로 가리킨 플로어에 놓인 목재 의자에 앉았다.
"보리스와 나우멘꼬의 추천서에 의하면 이들
젊은이들은 그동안 록음악을 열심히 창작하고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 록그룹협회에서는 이제 이들이
추구하고 있는 음악적 세계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이들이 창작한 음악이 어떤 것인지 들어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고르 골르베브가 입을 열었다. 그의 발언은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이어 따냐 이바노브나가
냉랭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들 그룹 이름이 무엇입니까?"
"가린과 쌍곡선이라 합니다."
빅토르는 수줍은 듯 말끝을 얼버무렸다. 빅토르의
대답에 이고르와 꼴랴는 웃었다. 그러나 따냐
이바노브나는 쌀쌀한 표정으로 빈정거리듯 물었다.
"가린과 쌍곡선이 무슨 뜻이지요?"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따냐의 빈정거림이 비위를 거슬렸던지 빅토르는
수줍은 표정을 씻어버리고 도전적인 얼굴로 대답했다.
"그룹 이름이 꼭 무엇을 의미해야만 합니까?"
빅토르는 손까지 저어가며 반문했다. 빅토르는 잠시
자신의 입장을 망각한 듯하였다. 빅토르는 따냐
이바노브나가 자기들에게 우호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자기도 모르게 그렇듯 퉁명스럽게 대꾸한
것이었다. 르빈은 아슬아슬한 위기감을 느꼈다.
"그렇군요. 그룹 이름이 꼭 무슨 의미를 지닐
필요는 없겠지요!"
따냐 이바노브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버릇없는 것들, 그녀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그려져
있었다.
르빈은 쌀쌀한 태도의 따냐 이바노브나의 입장에
도리어 이해가 갔다. 그녀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중이 떠중이 아무나 록 클럽에 가입시켜서는 안되는
일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하나에서 열까지
가입신청자에 대해 엄격히 체크하고 심의해야 할
책임이 있을 터였다. 음악만 들어 심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룹 멤버들의 신상도 파악해 둬야 하고
그리고 그룹의 이름도 또한 기록해 두어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물은 것인데, 엉뚱하게 몽환적인
영화주인공의 이름을 차용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에는 거부감이 일어났을 것이었다. 그런데
빅토르의 언행이라니.......
"자, 따냐, 저 젊은이들의 음악을 들어보도록
합시다."
옆에 있던 이고르 골르베브가 긴장을 흐트리며
제안했다. 르빈은 등골이 쭈욱 당겨올라가는 듯한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고르의 제안에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따냐의 비위를 거스를
경우 심의를 거부할지도 모를 일이었던 것이다.
빅토르는 그러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덮여있고
표정이 경직되어 있었다. 여차직하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릴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그는 따냐 이바노브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록그룹 멤버들 사이에서 따냐는 평판이 좋지
않았다. 록그룹협회 회장인 그녀가 정작 록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비판의
요점이었다. 그녀는 록 음악과 거리가 먼 패거리들을
협회에 가입시켜 반발을 사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그녀가 자신들의 음악과 무대 매너를 좋지 않게
여기고 있어 심의를 하는 동안 나쁜 점만 찾아내려
애를 쓰고 또 가입을 거부할 구실만을 찾으려 애를 쓸
것으로 여겨졌다.
"자, 시작하세요."
꼴랴 미하일로비치가 재촉했다.
빅토르는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연주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빅토르의 리드에 르빈과 올레그는 베이스
기타와 드럼으로 화음을 맞추었다. 일단 연주에
들어가자 그들은 곧 거기에 몰입하였다.
그동안 무수한 밤과 낮을 통해 연습한 곡들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있었다. 빅토르의 집에서
르빈의 집에서 올레그의 집에서. '나의 친구들'
'알루미늄 오이' '건달들 1' '건달들 2' '8학년
여학생' '파도의 노래, 바람의 노래' 등 일여덟 곡을
연달아 연주하였다. 마지막으로 빅토르가 얼마 전
작곡한 '비트니크'를 연주했다. '비트니크'는 반주가
침울한 기타로 일관하는 매우 수준 높은 록
음악이었다.
연주를 마친 르빈은 자부심을 가지고 심의위원들을
바라보았다. 빅토르는 땀이 번진 이마를 소매로 닦고
있을 뿐 그의 눈은 아무 데도 보고 있지 않았다.
"이 노래들을 무슨 의도로 지었는지 말해 주겠소?"
따냐 이바노브나가 요란한 음악 뒤에 따라온 연못속
같이 착 가라앉은 정적을 깼다. 그녀의 시선은
빅토르의 정수리에 꽂혀 있었다.
고개를 쳐든 빅토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당신들은 건달을 좋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사실이오?"
따냐 이바노브나는 면돗날처럼 날카롭게 물었다.
"좋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 자신이 건달이
아닌가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기분을 노래한 것입니다."
빅토르는 눈에 심지를 박은 듯 빳빳한 시선으로
이바노브나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당신들이 바로 건달들이란 말이군요?"
따냐 이바노브나는 냉소를 머금고 빈정거렸다.
빅토르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나의 친구들은 항상 세상을 행진하고 있는데,
맥주집 앞에서만 걸음을 멈추네, 라고 노래했는데,
그렇다면 당신들은 늘 술만 마신다는 뜻 아닌가요?"
"아니,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보시면
곤란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지적했을 뿐이지 않소?"
"저의 창작의도는 지적하신 것과 다릅니다. 저는
우리 자신들의 처지며 생각을 사실대로 그리긴 했으나
거기에는 그런 사실을 반성적 계기로 삼으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빅토르는 자존심이 상한 듯 힘주어 또박또박
대답했다.
"아무리 변명하고 미화시키려 해도 이건 동네 골목
음악에 지나지 않아요."
따냐 이바노브나는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따냐,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이들의 음악은 동네
조무라기들이나 흥얼거릴 그런 수준의 노래는 아닌 것
같군요."
꼴랴 미하일로비치가 조심스레 의견을 개진했다.
따냐 이바노브나는 놀란 눈으로 꼴랴를 쳐다봤다.
"저는 이들의 음악을 매우 흥미있게 들었습니다.
가사도 흥미롭거니와 곡도 매우 독창적이고
매력적입니다."
"그래요. 놀라운 발견이군요!"
따냐 이바노브나는 고개를 완강히 저으며
빈정거리듯 쏘아부쳤다.
"저도 이들의 창조성을 높이 평가하고 싶군요."
그러나 꼴랴의 말에 힘을 얻은 이고르 골르베브도
그들의 노래를 칭찬하고 나왔다.
"그동안 이들은 록 클럽 스터디에도 부지런히
참석했고 창작과 연습에 남달리 열심이라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의 노래는 현재 여러
전문가들도 인정하고 있는 바입니다."
이고르 골르베브는 그가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는
보리스 그레벤쉬코프의 추천서를 상기하며 그렇게
말했다.
"추천서는 저도 봤습니다만, 여러 전문가들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보리스와 아르죠므 트로이츠키에게서 여러 차례
이들을 칭찬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들의 노래 솜씨가 궁금했었는데, 오늘 듣고 보니
과연 보리스가 칭찬할 만하다고 여겼습니다."
이고르 골르베브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따냐, 이들은 분명 가능성이 대단한
젊은이들입니다. 이들을 더 괴롭히지 말고 그만
가입시킵시다."
꼴랴 미하일로비치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제안했다. 따냐 이바노브나는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꼴랴를 쏘아보았다.
"저도 이들을 저희 협회에서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이고르 골르베브 옆에 있던 미하일 이바노비치가
역시 가입쪽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물론 저도 동감입니다. 저들의 노래는 분명
지금까지 다른 가수들로부터 듣지 못했던 장점이
있습니다. 솔직하고 호소력 있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표트르 베소프쉬꼬프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가입을 지지했다. 다른 네 명의
심의위원들이 모두 가입시키자고 하자 따냐는 잠시
붉어진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저도 보리스와 마이크로부터 이들이 자기들 뒤를
이어갈 가장 유망한 젊은이들이라고 평가하는 걸 여러
번 들었습니다. 이들을 협회에 가입시킵시다."
다시 꼴랴 미하일로비치가 결정적인 발언을 했다.
"좋습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이 모두 그러니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저들 '가린과 쌍곡선' 그룹의
협회 가입을 승인합시다."
마침내 따냐 이바노브나도 그들의 협회 가입을
승인했다. 그리고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더욱 창작과 연습을 열심히
하여 록 클럽 발전에 기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클럽의 행사나 연주회에는 빠짐없이 참석해야만 할
것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따냐의 마지막 당부를 들은 빅토르는 약간 야유섞인
음성으로 대꾸했다.
23. 유형지로 떠난 아르까지나
아르까지나가 유형지로 떠났다는 사실을 빅토르는
나중에야 알았다.
그녀와의 이별이 정치적인 사유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안 빅토르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
분노는 가장 빠른 체념을 가져왔다. 소비에트에서
정치적인 사건에 불만을 오래 품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자는 없다는 사실이 그 체념의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소비에트에서는 모든 것이 정치적으로 시작하여
정치적으로 끝난다는 격언이 왜 말똥구리처럼 거리를
굴러다니겠는가.
아르까지나의 유형지 행은 당시의 정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1961년, 후루시초프 치하에서 제22차 소비에트
공산당 전당대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이
전당대회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은 절정을 이뤘다.
그는 권력을 남용하고 정직한 시민을 무수히 탄압하는
등 많은 죄악을 저질렀으므로 붉은광장의 레닌 묘소
옆에 안치된 스탈린의 시체는 마땅히 다른 곳으로
치워야한다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당시 소비에트의
국력과 국제적 지위는 정점에 이르러 있었다. 몇
세기에 걸쳐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은 나날이 쇠퇴하거나 무너져갔고 사회주의에
동조하는 신생독립국의 숫자는 해마다 늘어갔다. 몇
해 전 인류 역사상 최초로 유리 가가린이 우주선을
타고 지구궤도를 돌고 귀환하여 경쟁국인 미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며 사회주의 과학문명의 우월성을 세계
만방에 떨치기도 했다. 그리하여 소비에트 인민들
중에는 이미 사회주의 이상이 성취된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제22차 소비에트 전당대회에서는 당의 바이블격인
공산당 강령이 레닌 시대 이래로 처음으로
수정되었다. 전당대회에서 후루시초프는 '현세대의
소비에트 인민들은 장차 계속 진짜 공산주의를
향유하며 살게 될 것'이라 공언했고 그 공언은 일말의
의심도 회의도 없이 인민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전당대회에서 후루시초프는 연설을 통해, 1980년이
되면 노동자들은 누구나 무료점심을 먹게 될 것이며,
학교에 다니는 아동들과 대학생들에게까지 의복과
책이 무료로 배부될 것이고 모든 인민들은 돈
걱정없이 주택을 할당받을 것이며 수도, 가스, 난방,
전기, 교통수단 이용도 모두 무료가 될 것이라는
무지개빛 청사진을 제시해 보였다. 그러나 '세상에
러시아에서처럼 정치적인 발언과 실제적인 현실이
다른 나라는 없을 것'이라는 오래 묵은 경구가
러시아에 아직도 존재하고 그것이 유효한 까닭은
나변에 있었던 것일까.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 막상 약속한 1980년이
되었으나 니키타 후루시초프가 그려보였던 무지개빛
낙원은 도래하지 않았다. 1980년대의 소비에트
인민들의 생활은 1960년대보다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기만 했다.
아무 노력하지 않고 자리만 지켜도 급여가 나오는
볼세비키의 평등주의 산물인 소득 평준화 정책은
사무원이나 노동자들 사이에 태만을 불러왔고 그
태만은 생산율을 급격히 저하시켰다. 그리고
개인능력을 도외시하고 평균적 평가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 제도는 사회 모든 분야의 발전을 크게
저해하거나 도리어 후퇴시켰다.
70년대를 정점으로 전소비에트 곡물 수확량이 계속
하향곡선을 그은 것도 따지고 보면 바로 그 노동력의
저하에서 기인한 피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수년래
평균 2억 3천 7백만 톤에 이르던 곡물수확량이
1979년에는 1억 8천만 톤으로 뚝 떨어졌고 1981년에는
1억 5천만 톤으로 더 떨어져버렸다. 게다가 1979년
소비에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이를 극렬히
비난하며 철군을 촉구하던 미국이 소비에트군의
침략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부분적인 식품수출을
금지하자 소비에트는 당장 크게 곤란을 겪었다.
소비에트 전역의 인민들이 식품부족으로 곤궁한
생활을 하며 러시아적 인내심으로 그 시련을 견뎌야
했다.
바로 그 무렵, 레닌그라드 공산당
식량당담책임자였던 아르까지나의 아버지 니꼴라이
리보비치는 곡물착복 혐의로 체포되었고 곧 강제노동
10년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에 유형되었던 것이다.
소비에트 관공서의 어느 부서든 담당책임자의 물품
착복은 소비에트 전역에서 자행되는 지극히 일상적인
관행이었다. 직속상관에게 바칠 뇌물이 늘 필요한
담당책임자란 직위가 구조적으로 부정을 저지르도록
되어 있었다. 만약 상관에게 뇌물을 시원찮게 받쳤을
경우 그 직위는 어느날 아침 출근해 보니 자기 책상이
치워져 있다는 식의 불행한 일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므로 그런 착복은 공공연히 자행되었고 설사
탄로가 난다해도 은밀히 처리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르까지나 아버지 니꼴라이
리보비치는 운이 나빴다. 곡물착복을 했으되 일상적인
수준 이상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그는 체포되었고
시베리아 유형 10년이란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것은
식품부족현상으로 민심이 흉흉할 때인지라 흉흉한
민심무마용의 희생양이 필요한 때 그가 운 나쁘게
걸려든 것이었다.
니꼴라이 리보비치의 부인 소피아 알렉산드로브나는
남편만 달랑 유형지로 보낼 수 없다며 동행을
자청했고 당국에서는 자비를 베풀어 그녀로 하여금
유형지에 동행하여 남편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허가했다. 아르까지나도 가족과 헤어질 수 없어 함께
아버지의 유형지로 떠났던 것이다.
"아르까지나는 자기 아버지가 저지른 야비한 행위며
유배를 당한 사실을 비쨔 너가 알까봐 여간 걱정하지
않았어."
자레치나야는 그렇게 말을 맺었다. 그 옆에는
마샤가 앉아 있었다.
자레치나야는 아르까지나를 찾아 방황하는 빅토르를
보다못해 그녀의 행방을 털어놓고 말았다.
자레치나야는 아르까지나의 당부보다 아르까지나의
소식을 몰라 애타하는 빅토르의 모습이 더 보기에
가여웠던 것이다. 아르까지나는 멀리 시베리아로
떠나기 직전 자레치나야를 찾아와 그 사실을
털어놓으며 자기 아버지가 나쁜 일로 시베리아에 유형
당했다는 사실을 빅토르는 몰랐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하염없이 울다 그녀와
헤어졌었다.
"제기랄, 왜 내가 몰라야 해."
알았다고 어떻게 손을 쓴다거나 할 형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겪을 때 그
아픔은 함께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런 큰 고통이야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나눈다해도 당사자의 그것이
가벼워질 까닭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자신의 처지가 빅토르는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너한테 연락을 할까 말까 아르까지나는 얼마나
고통스러워 했는데. 아마 시베리아 어느 곳에선지
지금도 아르까지나는 비쨔 네 노래를 부르며 너를
그리워하고 있을 거야."
자레치나야의 그런 말은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위안이 아니라 비수로 가슴을 도려내는
것보다 더 쓰리고 아팠다.
빅토르는 여러 여자를 알고 사귀기는 했다.
여자로부터 상처를 입기도 또 위안을 얻기도 했다.
쉬꼴라 3학년 때 그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아냐를 그는 가장 좋아했었다. 그 당시 아냐는
어머니보다 더 많은 시간 그의 마음과 가슴 속에
살아있었다. 어떤 때는 머리가 온통 아냐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도 했었다. 슬픔, 기쁨, 고통, 환희,
쓰라림, 달콤함 등 모든 감정의 중심에 아냐가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아냐는 그러한 빅토르를 도리어
냉랭히 비웃고 멸시했다. 캄차뜨끼! 아냐는 어쩌다
빅토르가 그녀에게 환심을 사려 하면 그렇게 놀리며
멀리 달아나고는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바보가 누군지 아느냐고
어느 사람이 캄차뜨끼에게 물었다. 캄차뜨끼는 그것도
몰라 묻느냐는 듯 빙그레 웃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바보는 아르메니아인이지 누군 누구겠느냐고
캄차뜨끼는 대답했다. 왜 아르메니아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바보냐고 다시 묻자, 캄차뜨끼는 또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왜냐하면, 내가 몇 번이나 너가
밤마다 같이 자는 여자가 내 아내라고 말해
주었는데도 알아듣지 못하니 그처럼 어리석은 바보가
어딨겠어요.
이 캄차뜨끼 우스갯소리는 소비에트 사람들 사이에
가장 널리 회자되고 있는 아넥도트(해학, 익살)였다.
아냐는 빅토르를, 저녁마다 아내를 도둑맞는
캄차뜨끼 사내라고 놀려댔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아냐는 빅토르의 가슴에 멍으로 남아 있었다.
아냐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빅토르는 오랫동안
여자들에게 한눈을 팔지 않았다. 여자들로 하여
다시는 고통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깊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예컨대 자레치나야와 몇 번 잠을
같이 자기는 했으나 아냐에게 느꼈던 그런 몹쓸
감정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자레치나야의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 함께 잠을 잤다는 것이 도리어 맞는
말일 터였다.
그런데 아르까지나는 달랐다. 아르까지나는
오랫동안 꺼져 있던 빅토르의 낭만적인 사랑의 불씨에
불을 붙였다. 다시는 여자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던
그에게 사랑의 감정을 다시 느끼게 했다. 함께 있으면
즐겁고 헤어지면 만나고 싶고 오래 만나지 못하면
괴로웠다. 그녀에게 늘 즐거움을 주고 싶고 그녀의
마음에 들고 싶었다. 빅토르는 자기만 그런 줄
알았더니 아르까지나는 더하다고 했다. 늘 함께 있고
싶다고 했고, 함께 있다가 귀가 시간인 저녁 10시가
가까워오면 안절부절 못했다. 아르까지나는
가정이라는 굴레를 원망했고 10시만 되면 귀가를
서둘러야 하는, 어머니의 간섭을 원망했다.
"비쨔, 넌 좋겠다. 부모의 간섭을 받지
않으니......."
언젠가 아르까지나는 매우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저녁 아홉 시가 넘었을 무렵이었다. 빅토르와 함께
노닥이는 사이에 언제 다섯 시간이란 긴 시간이 다
지나가 버렸는지, 아르까지나는 한숨 지었다.
"아냐, 그렇지 않아!"
빅토르는 천천히 말했다.
"간섭은 애정이야. 방임은 자유가 아니라 포기를
의미하는 거야. 아르까지나는 애정 속에 있고 나는
포기한 상태에 있는 거야. 넌 어머니의 간섭을
이해하고 거역하면 안돼."
빅토르는 아르까지나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집까지 가는 트롤리버스 안에서 아르까지나는 계속
집에 가기 싫다고 투덜거렸다. 빅토르도 아르까지나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밤새도록
이야기나 노래를 하며 노닥거리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잠을 함께 자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순결한 양심은 그녀를 끝까지 아끼고
보살펴야하리라 충고했다. 그래 빅토르는 그녀와
만나고 함께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것에서 한량없는
기쁨을 찾기로 했다. 그러던 그녀와 갑자기 연락이
끊기어 있는 동안 빅토르는 또다른 고통을
경험했었다.
그는 '가린과 쌍곡선'의 록그룹협회 가입으로
전보다 더 많은 연습을 해야 했고 올레그의 제안으로
푸른 바다와 항상 싱그러운 바람이 머리칼을 날리는
크림 반도의 얄타에 가서 3주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르까지나의 소식이 궁금해 늘 마음은
그녀에게로 달려가 있었다. 그 때문에 그로서는 처음
겪었던 여러 즐거움이 하나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 시베리아라면 나도 안다. 브소츠키도 한때
캄차카 반도 옆 오호츠크 해 연안의 마가단 수용소에
유배 당한 일이 있었다. 그는 몇 년 후 방면되어
모스크바로 돌아와 다시 무대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에서 만난 이르쿠츠크의 이리나
네스테랭코바는 또 어쨌던가. 공산당이 가장 가혹하게
다루는 반체제 운동을 했다는 그녀의 남편 유리 또한
마가단에 수용되어 있다 청원 끝에 이르쿠츠크로
이주해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기다리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아르까지나와 그 부모들도
감면되어 레닌그라드로 돌아오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반체제 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곡물착복 혐의로
체포되었다면 뇌물을 받은 바 있는 상사들도 오래
그를 방치해두는 그런 비양심적인 행위를 하겠는가.
어떤 방법도 강구할 능력이 없는 빅토르로서는
시간에다 그 해결을 맡기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샤의 생일에 뭘 선물하지?"
마음 속으로 슬픔을 다스리며 침묵하고 있던
빅토르는 마샤의 말귀를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사샤 생일에 뭘 선물할까 물었어."
"담배 아니면 붉은 포도주 이상 있겠어!"
빅토르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돈도 없는데 붉은 포도주나 몇 병 사들고
가야겠군."
자레치나야는 아르까지나의 소식을 듣고나서 더욱
침울해진 빅토르가 걱정되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가 걸핏하면 아르까지나의 소식을 알아내지
못해 안달하는 것이 보기에 안타까워 아르까지나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전해준 것이지 않은가.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지 고통을
보태주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었다.
그들은 자레치나야의 아파트를 나왔다.
자작나무 잎은 노랗게 물들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한잎 두잎 떨어져 길거리에 뒹굴었다. 종려나무,
마그노리아 나무들도 이제 거의 다 무성했던 여름의
옷을 벗어가고 있었다. 눈이 한 차례 올 듯 말 듯
하늘은 낮게 찌푸려 있었다. 비는 속절없이 아무 때나
뿌려 우산을 준비한다는 것이 도리어 귀찮을
정도였다. 핀란드 만과 거대한 라드가 호에 근접해
있는 까닭인가, 레닌그라드의 가을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비를 뿌리다 말다 하였다. 겨울에는 또 눈이
그렇게 자주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어 버렸다.
압도버스에 탑승한 그들은 비가 아닌 눈이 내리기를
바라며 하늘을 가끔 쳐다봤다. 마이오로프 대로를
따라가다 그들은 니콜라이 성당 부근에서 하차하였다.
사샤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살고 있었으나 군인인
아버지는 대개 영내에서 생활하며 집을 비울 때가
많았고 그의 어머니는 사샤에게 매우 관대했다.
그리하여 친구들이 자주 찾아와 분탕질을 쳐도 눈쌀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도리어 사샤와 그 친구들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빅토르와 자레치나야와 마샤는 주머니를 탈탈 털어
붉은 포도주 세 병을 사들고 사샤네 아파트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떠드는
소리가 안에서 복도까지 들렸다.
24. 운명적인 만남
사샤네 아파트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급히 계단을
뛰어오르는 소리와 빅토르를 부르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르빈이었다. 그들은 이곳 사샤네 집 생일
파티에서 만나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아는 얼굴들도 있었으나
모르는 얼굴들이 더 많았다.
사샤는 르빈의 어릴 적 친구로 바이올린이 그의
전공이라 했다. 음악대학에 재학중인 그는
차이코프스키 콩쿨에 입상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고
있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콩쿨에 참가할 수 있는
추천서 한장 써줄 교수도 한 사람 확보하지 못한
처지였다. 따라서 그 방면에서는 아주 별볼일없는
친구로 낙인 찍힌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그는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어릴 적부터 품어온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을 포기한 지 이미 오래라는
것이었다. 재능이 없으면 노력이라도 뒤따라야
바이올리니스트 흉내라도 낼 수 있을 터인데 사샤는
재능과 노력 그 어느 쪽도 모자라 끝내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을 포기하고 바야흐로 손쉬운 록
음악 쪽으로 관심을 돌린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록 음악 쪽이라고 그렇게 호락호락할까.
거실에 음식상과 술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이번에 록 클럽에 정식으로 가입한 '가린과
쌍곡선'그룹 등장입니다."
르빈과 빅토르가 들어가자 사샤가 큰소리로 여러
사람에게 그들을 소개했다. 얼굴을 아는 사람들은
일일이 일어나 악수를 나눴다. 어떤 친구는 손목을
걸고 흔드는, 건달들 특유의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대략 인사를 다 나누고 자리에 앉으려던 빅토르는
자기 옆의 여자에게 얼핏 눈이 돌려졌다. 순간 그는
그만 그 여자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빅토르라고 합니다."
빅토르는 얼굴을 붉히며 자기 소개를 했다.
"저는 마리안나예요."
여자는 정중히 자기 이름을 댔다. 엷은 빛의 금발에
눈이 동그랗고 물기를 머금은 듯한 회색눈동자는 매우
영롱했다. 입술은 도톰하고 육감적이었다. 얼굴은
윤곽이 또렷하고 매력적이었다.
첫눈에 빅토르는 마리안나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원래 그럴수록 그렇지 않은 척하는
성품이었다. 아무리 좋은 상대라도 그런 내색을
하는데 그는 인색했다. 특히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는 자기방어를 먼저 했다. 섣불리 마음을
솔직히 털어놨다가 공연히 상처를 입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러시아인들로부터
무수히 차별을 경험해 왔었다. 러시아인들은
이국인들, 특히 독일인들에게는 뿌리깊은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유태인들은 벌레처럼 싫어했다.
독일인이나 유태인을 대하듯 극심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들은 동양계에게도 매우
비우호적이었다. 심한 경우 노골적으로 멸시하거나
경원하기 일쑤였다.
물론 빅토르 아버지 로베르트의 주장이 그렇듯,
머리가 우수하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아무리
동양계나 터어키계 외국인이라도 별다른 차별을 받지
않았다. 능력 앞에서는 러시아인들은 공손했다.
그러므로 자기가 지닌 재능을 발휘하여
러시아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사람은 인종차별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러시아에는 인종차별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러시아인들과
더불어 성장해오는 동안 빅토르는 무수히 차별을
경험해 왔었다.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을 솔직히
토로했다가 당한 민망스런 경우들을 돌이켜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자연 그는 러시아 애들과 일정한 거리
이상은 가까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릴 적에 일찍
터득했다. 아무리 가까이 지내거나 사귀는 사이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거리감을 느끼고는 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어릴 적부터 가급적 자기 마음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 자기 방어본능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아르까지나를 제외한 어떤 러시아 사람도
인종적 차별의식없이 만난 적이 없었다. 어릴 적,
아주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도 틀어지면 늘 그랬었다.
너는 할 수 없는 까레이츠라고 경멸하며 돌아서고는
했었다.
"이 메론 좀 드세요. 아주 잘 익어 당도가 높아요."
마리안나는 포크에 메론을 찍어 무뚝뚝해 보이는
빅토르에게 건넸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그것을 받아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그러는 그가 꼭
철없는 개구장이 같았다. 아까 거실에 들어올 때부터
마리안나는 빅토르를 유심히 살폈었다. 굳이 그를
살피려고 해서 살핀 것이 아니었다. 그냥 눈이 그를
따라다녔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었다.
그는 키가 훤칠하게 컸고 다리의 근육까지 다 드러날
정도로 꽉 낀 까만 바지를 입고 가슴이 패여 시원해
보이는 역시 까만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의 바지나
셔츠는 몸에 꽉끼어 있어 손가락 하나 더 들어갈
여유도, 한치의 천도 떼어낼 여유도 없어 보였다.
기다란 그의 얼굴은 우수가 깃들어 있었으나 날카로운
콧날과 꽉다문 얇은 입술이며 정갈해 보이는 이마가
매우 이지적인 인상을 던졌다.
"여기, 제 전화번호예요."
마리안나는 어떤 특별한 작정도 없이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전화번호를 적어 그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은 빅토르는 아주 잠깐 마리안나를 쳐다보더니
재빠르게 자기 전화번호를 적어 건네주었다.
마리안나는 사샤와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학년 차이는 있었으나 같은 쉬꼴라를 다녔기 때문에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다. 또 어쩌다 가끔 친구들
모임 등에서 마주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어릴 적의 세
살이란 나이 차이는, 물론 남녀라는 성별 차이에서
오는 것도 없지 않았겠으나, 각기 사귀는 친구가
다르고, 기호가 다르고, 취미를 달리해 가까히 지낼
기회가 없었다. 마리안나는 지난번 미술대학 친구의
파티에서 사샤와 마주치지 않았다면 오늘 그의 생일
파티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 파티에서
오랜만에 만난 사샤와 마리안나는 무심히 이야기를
나누던중 어쩌다 두 사람의 생일이 같은 날임을 알고
서로 놀랐었다.
"어때요. 우리 생일 파티를 같이 하지 않을래요?"
사샤가 그때 즉석에서 약간 들뜬 목소리로
제안해왔다. 그러나 마리안나는 내키지 않아
거절했다. 나이 지긋한 여자가 이제 스물밖에 되지
않은 손아래 남자와 생일을 함께 지낸다는 것이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샤는 아직 직업도 갖지 못한 애송이 학생이었고
마리안나는 그때 레닌그라드 서커스 극장의
의상담당직을 맡아 일하고 있는 사회인이었다.
생일 파티 공동개최 제의를 거절했음에도 사샤는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생각을 고쳐먹으라는 권유의
전화를 끈질기게 걸어왔다. 끝내 마리안나가 거절하자
사샤는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않으며, 그럼 자기 생일
파티에는 꼭 참석해 달라고 졸랐다. 만약 생일이 같은
날임을 여러 사람 앞에 공표하지만 않겠다면
참석하겠노라 조건을 제시하자 사샤는 꼭 그러마고
약속했고 그래서 마리안나는 사샤의 생일 파티에
참석한 것이다.
빅토르는 마리안나를 줄곧 눈여겨 보았다. 그녀가
먼저 전화번호를 적어준 것도 그의 마음을 그쪽으로
기울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마리안나에게 전화는 하지
않았다. 아직 저쪽의 마음을 다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화를 걸었다가 어떤 무안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 때문에 망설였다.
당시 빅토르의 마음은 매우 공허하고 쓸쓸했다.
집은 그의 마음의 안식처가 되지 못했고 학교도 그의
정신을 옭아매는 어떤 매력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학교 친구들은 한결같이 어울리기 싫은 자식들밖에
없었다. 선생님들은 항상 빅토르에게 적의를 가진
것처럼 쌀쌀하게 대하는 것 같았다.
그는 르빈과 올레그와 음악을 하는 무숙자,
건달들에게 정을 붙이고 지냈다. 정신없이 노래부르며
놀 때가 가장 좋았다. 그러나 축제와 같은 그런
시간이 끝나면 가슴 속을 가득 채워오는 공허감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 공허감은 장래에 대한
불안감과 인생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폭풍우처럼
몰아쳤다. 록그룹협회에 가입을 했고 보리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와 격려를 받았으나, 내가 가장 하고
싶고 되고 싶은 이것이 정말 가치가 있고 내 삶의
튼튼한 방편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인가. 가수로서 많은
사람들의 지속적인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한번
밤하늘에 빗금을 긋고 사라져 버리는 유성 같은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언제나 빅토르의 뇌를 갉아대는 그 불안감은 그를
방황하게 만들었고 우수에 잠기게 했고 주눅들게
하였고 자신없게 만들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낙이라면 아르까지나의 존재였다. 그녀는 빅토르의
장점보다 허물에 더 관심을 갖고 사랑하고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무숙자같은 방랑벽을 사랑했고 그의
무뚝뚝함과 불안감을 이해했다. 그의 정신의 안락처는
아르까지나였다. 그런데 그녀는 어딘가 모를 먼
시베리아 유형지로 떠나고 없었다.
"비쨔, 저 마리안나예요."
어느날 마침내 마리안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몇
번이나 그녀의 전화번호를 들고 다이얼을 돌리려다
그만두고 그만두고 했던 빅토르로서는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어제도 전화 했는데, 집에 없더군요."
"예, 어제는 쓰윈의 집에서 노래연습을 했습니다."
"언제 시간 있으면 서커스 구경오세요."
"정식으로 초대하는 것입니까?"
빅토르는 기쁨을 감추려고 애를 썼으나 약간 달뜬
목소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럼요. 우리 서커스 아시죠?"
"예, 압니다. 언제 갈까요?"
"내일 저녁공연 어때요? 공연이 끝나면 제가 저녁을
사드릴게요."
"좋습니다. 서커스 초대만으로도 고마운데
저녁까지......"
"그럼요. 다음, 비쨔가 돈을 많이 벌면 그때
갚으세요."
"고맙습니다. 내일 저녁공연이면 일곱 시부터지요?"
"그래요. 여섯 시 반까지 오세요. 내가 입구에서
기다릴게요."
전화를 끊은 빅토르는 한동안 팔을 힘껏
바람개비처럼 돌리며 야호야호, 환성을 질렀다.
다음날 약속시간에 빅토르는 마리안나가 일하는
국립 레닌그라드 서커스 극장으로 찾아갔다. 그녀는
약속대로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빅토르가
나타나자 빙그레 웃으며 반색했다.
"사람이 어쩜 그렇게 무심해요? 지난 며칠간 혹시
전화가 올까봐 자리도 한번 뜨지 못하고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아세요?"
마리안나는 웃으며 빅토르가 가까이 오자 활달하게
말했다. 빅토르는 자기도 몇 번이나 전화를 걸려다
그만두었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마리안나는 곧 그를 자리로 안내했고 얼마후
서커스는 시작되었다. 빅토르는 무대에 눈을 주고
있었으나 마음은 서커스를 보고 있지 않았다. 줄곧
그의 마음은 옆에 앉은 마리안나에게로 쏠려 있었다.
인민배우 나탈리야 이바노브나의 공중곡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천정 한쪽에서 단단하고 미끈한
체구의 나탈리야 이바노브나와 다른 한쪽에서
니꼴라이 세르게예비치가 등장했다. 두 인민배우는
공중그네를 타고 앞뒤로 반원을 그리며 오락가락했다.
앞으로 갈 때 두 곡예사의 발이 아슬아슬하게 스칠
뻔했다. 그들은 어느 사이 발과 손의 위치를 바꿔,
거꾸로 매달려 반원을 그렸다. 그리고 눈깜짝할 사이,
나탈리야의 팔과 니꼴라이의 팔이 엉겼다. 나탈리야
이바노브나의 몸은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 오르내렸고
또 눈 깜짝할 사이, 나탈리야 이바노브나는
니꼴라이의 그네에 사뿐 올라가 있었다. 아슬아슬하고
눈부신 순간이었다. 그들 묘기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의 착시현상 같은 혼란을 겪게 하였다.
그러나 빅토르는 전에 없이 그 묘기를 무감각하게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역시 공훈배우 표도르
일리이치의 마술묘기도 건성으로 그냥 지나쳤다.
묘기가 한가지씩 끝날 때마다 관중들은 요란하게
박수를 치고는 했다. 관중들의 박수소리가 들리면
그제서야 빅토르는 따라서 손바닥을 그냥 짝짝 마주쳐
소리를 내고는 했다.
"어째, 재미없어 하는 것 같았어요?"
마리안나는 서커스가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서
고개를 돌려 빅토르를 쳐다보았다.
"아니, 재밌게 봤습니다."
빅토르는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았을까 문득
걱정을 하며 황급히 부인했다. 그는 줄곧
마리안나에게 정신이 팔려 서커스의 묘기에는 거의
정신을 주고 있지 않았었다.
"어디로 갈래요? 내가 저녁을 살게."
"그래도 되겠어요?"
"왜?"
"너무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다음에 갚으라니까."
"못갚으면, 어떻게 해요?"
"비쨔는 능력이 있으니까,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될
걸."
마리안나는 사샤로부터 빅토르를 칭찬하는 말을
들었었다. 장차 매우 유명한 가수가 되리라
예견했었다.
"어쨌든, 그렇다면 좋아요. 식사는 관두고 카페에
가서 술이나 한잔 사주세요?"
"좋을 대로!"
서커스 극장을 뒤로 하고 폰타카 운하의 강변로를
따라 네프스키 대로 쪽으로 나왔다. 거리는 어둠이
깔려 있었고 내왕하는 자동차들의 전조등 불빛과
무궤도전차의 지붕에서 스파크를 일으키는 파란
불꽃이 묘하게 낭만적인 분위기로 가슴에 스며들었다.
빅토르는 마리안나보다 키가 더 컸다. 마리안나도
적은 키는 아니었다. 짐작컨대 빅토르의 신장은 1m
90cm는 되어 보였다. 그는 가슴도 넓었다. 검은
머리칼과 아이보리빛 피부색만 아니면 동양계로
보이지 않을 만큼 그는 충분히 러시아적이었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마리안나는 빅토르의 어깨가
까닭 모르게 축 처져 있는 것을 보았고 그럴 때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치 세상의 모든 중량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 무게에
짓눌려 활개를 펴지 못하고 있지 않나 걱정이 되었다.
에카테리나 2세 동상이 암청색 하늘을 배경으로
어두운 모습으로 서 있는 오스트로프스키 광장을
지나고 시체드린 도서관도 지났다. 좀 너무 걷는다
싶을 즈음 빅토르는 가로를 꺾어돌며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보이죠? 카페 사이곤."
마리안나의 시선은 빅토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카페 사이곤은 그녀의 시선에는
잡히지 않았다. 빅토르가 작은 목재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을 때에야 가까스로 문 위에 걸려있는 간판을
볼 수 있었다. 빅토르는 카페 사이곤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으나 내심 한가지 걱정이 없지 않았다. 혹시
니나와 마주쳐 마리안나와 동행을 그르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페 함정이나
네바로 가자니 너무 멀었다. 마리안나를 그렇게 많이
걷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행운이 내편이라면
니나와 마주친다 할지라도 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으리라.
카페 사이곤은 거칠고 광적인 음악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입구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곳의 플로어에는
몇 쌍의 남녀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큰곰자리식으로
전구가 배열되어 있는 검은 벽 앞에서는 세 명의
밴드가 전기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플로어와 대각선의 위치에 있는 바 쪽에서 뻗어나간
빠른 사이키 조명이 세 명의 연주자들과 춤추는
남녀들을 쉴새없이 칼로 자르듯 스쳐가고는 했다.
마리안나는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빅토르는 익숙하게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삐바 둘."
빅토르는 카페 사이곤에 와서 이렇게 당당히 술을
주문해 마신 적은 거의 없었다. 대개 차나 한잔
홀짝이다 돌아가거나 아니면 남의 덕에 술을 몇 잔
얻어마시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곳에 자주 오나 보죠?"
가져온 맥주병을 서로 부딪치며 몇 모금 마신 후
마리안나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음악과 홀의
소음에 묻혀 버려 빅토르는 미처 알아듣지 못했다.
빅토르는 그녀가 두번째 고함을 지르다시피 묻고서야
비로소 그 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역시 고함을 지르듯
대답했다.
"갈 데가 별로 없거던요."
빅토르는 카페 사이곤뿐이 아니었다. 카페
함정이나, 카페 마린스키 같은 데도 자주 들르고는
했으나 그의 주머니는 대부분 텅텅 비어있었다.
아무리 주머니가 텅텅 비어 있은들 어떠랴. 가끔 텅텅
빈 주머니로 인해 무안을 당한 적이 없지 않았으나
그런 무안을 당하며 겪는 고통보다 도무지 구제할 수
없는 그리고 아무런 출구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를,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 자신의
장래를 생각할 때마다 겪는 불안감이 더 고통스러운
것을. 록카페에 와 앉아 있으면 자신에 대한 그 어떤
불안감도 조금씩 잊혀지고는 했다. 록카페의 음악은
그의 울적한 기분을 씻어내 주었다. 그리고 차츰
록카페가 마치 마음의 고향처럼 안온함을 느끼게도
해주었다. 빅토르로서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을
꼽으라면 별다른 주저없이 록카페를 꼽았을 것이었다.
마리안나는 처음 겪어보는 록카페의 분위기였으나
처음의 당혹감은 점점 엷어져갔다. 거부감이나
이질감도 차츰 없어져갔다. 빅토르를 이해하는
방편으로 연주자들을 바라보자 어딘가 광적이고
무질서하고 난폭해보이는 분위기가 차츰 친숙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 미샤 아닙니까?"
두병째 맥주를 주문하여 그것을 마실 때였다. 그들
테이블로 한 남자가 다가오자 빅토르가 활짝 웃는
얼굴로 크게 말하며 일어섰다. 미하일 나우멘꼬였다.
빅토르는 좀 어색한 얼굴로 마리안나를 나우멘꼬에게
소개했다. 나우멘꼬의 명성은 마리안나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이번 록 클럽 심사 때, 따냐 이바노브나가
까다롭게 굴었다면서?"
미하일은 큰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예, 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의견은 꺾지못하고
민주적으로 처리하더군요."
"그래, 따냐는 록 음악을 잘 모르거던. 암튼 이제
우리 다 같은 현역이니까 잘 해보자구."
미하일 나우멘꼬는 빅토르의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 손을 흔들어보이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마리안나는 기분이 썩 좋아졌다. 나우멘꼬가 일부러
다가와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고 갈 정도라면 빅토르가
그들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그들은 며칠간 연락이 없었다. 빅토르는
마리안나를 만나고 싶었으나 아직 그쪽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해 망설였다. 마리안나 역시 빅토르와 만나고
싶었으나 그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정한 궤도를 따라 도는
우주의 행성처럼 따로따로 돌며 서로를 기다렸다.
그들은 시간이 흐르자 어떤 구실이 생기기를 바랐고
어느날 드디어 그들에게 만날 구실이 생겼다.
"비쨔, 가브릴 포포프 알지?"
이번에도 마리안나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래, 쎄로브 미술학교에서 만났어."
"오늘이 가브릴의 생일이래. 함께 갈까?"
"그러지, 나도 초대받았거던."
"잘 됐어. 그럼 나중에 봐."
그날 가브릴의 생일 잔치에는 쎄로브 미술학교 출신
동창들 중 알만한 얼굴들은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빅토르를 반가워 했다. 비록 빅토르가 중간에 퇴학을
맞기는 했으나 그가 학교에 다닐 때 그룹을 지어
학생들을 모아놓고 록 음악을 연주하던 대담하고
기발한 모습을 그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빅토르가 성적불량이란 치욕적인 구실로
제적을 당하기는 했으나 기실은 학교 내에서
음악활동을 펼치던 것이 적발되어 제적을 당했다는
사실도 다알고 있었다. 당시 그의 퇴학을 부당하게
여기는 학생들이 많았고 따라서 그를 경원하거나
멸시하는 아이들보다는 그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가진
아이들이 훨씬 더 많았었다.
"우리 쎄로브 미술학교에서 가장 날렸던 가수
빅토르의 노래를 오랜만에 듣지 않을 수 없지."
축하 파티가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누군가가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맞장구치는
소리가 일제히 터져나왔다.
빅토르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포프가 그에게 기타를 가져다 주었다. 빅토르는
기타 줄을 몇 번 튕겨보며 말했다.
"가브릴의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내가 얼마
전에 창작한 노래를 몇 곡 들려드리겠습니다."
빅토르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먼저 '건달들'을 불렀다. 두번째는 '청명한
날씨'를 이어 불렀다.
두 곡의 노래를 들은 마리안나는 매우 감동했다.
마리안나는 자기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앵콜을 청했다.
마리안나의 얼굴을 잠시 일별한 후 빅토르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다시 노래를 시작하였다. '8학년
여학생'이라는 노래였다. 그 노래 역시 마리안나를
감동시켰다. 마리안나의 기쁨은 여간 크지 않았다.
빅토르의 재능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노래에 대해서라면 전문가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도 노래를 즐겨 듣는 편이었다. 그러므로
노래의 좋고 나쁨은 분명히 구별해 들을 수 있었다.
왜 비틀즈가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보리스
그레벤쉬코프의 '오월의 노래'가 전소비에트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빅토르의 재능을 알아보는 데는
손색이 없는 감별력을 지녔다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빅토르에 대한 마리안나의 관심과 사랑은 더
깊어갔다.
25. KINO, KINO, KINO
나는 장차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또 낯익은
불안감이 빅토르를 찾아왔다. 근래들어 장래에 대한
불안감은 그의 수면을 갉아먹었고 식욕을
감퇴시켰으며 외부 나들이를 제한시켰다. 그는
의기소침한 채 방에 틀어박혀 담배나 태우며
뒹굴었다. 그리고 발작적으로 노래를 부르고는 했다.
담배를 태워 방안을 너구리굴처럼 만들거나
발작적으로 노래를 부른다고 달라질 것은 하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엇을 달리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학교에 나가 목각을 한다! 지리와 역사를 배운다!
학교를 졸업하면 목각수로서 공장에 취직하여
마트료시카를 깎고 목공예품을 만들며 한평생을 산다!
한평생을 목재에 톱질을 하고 대패질을 하고 끌질을
하며 어떤 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그 목공예품들이
내게 어떤 위안이 될까. 그 목공예품들은 내게 어떤
가치를 지니게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들은
무의미할 따름이겠지. 내가 하고 싶은 것과는 거리가
멀어.
목각수가 아니면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노래
부르는 가수가 될 수 있을까? 록 클럽에 가입했으므로
노래부르는 가수야 못될 것도 없겠지. 그러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널리 사랑을 받는 유명한 가수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인기가수가 되지 못하고 일류 가수를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나 하는 삼류가수로 전전하고 말
것은 아닐까.
록 클럽에 가입했으므로 어떻게 생각하면 가수의
출발선상에 비로소 서게 된 셈이었다. 그러므로
장래에 대한 새로운 설계와 희망으로 가슴 부풀어
있을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았다.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 전보다 더 선명해졌다.
"비쨔, 나야. 보리스."
하루는 보리스 그레벤쉬코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뜨로삘로에게 녹음을 부탁해 놓았다 하고서
그동안 아무 연락이 없어 궁금하던 터였다.
"보랴, 자주 찾아보지 못했군요."
"오늘 별다른 일 없으면 우리 집으로 오지."
"갈 때마다 신세만 지는 걸요."
"언제 무슨 신세를 졌는데? 다른 일은 아니고
그냥....... 모스크바에서 쎄브추크와 리젠코가
왔거던. 나중 미하일도 올 거야."
"르바가 오기로 했는데 같이 가도 될까요?"
"그럼, 르바야 비쨔와 한몸 같은 사람인데."
"그래요. 좀 있다 함께 갈게요."
보리스의 아파트에는 모스크바 손님들 외에 미하일,
판께르, 쓰윈 등이 먼저와 있었다. 보리스의 부인
류다는 손님 접대에 분주했다. 류다는 빅토르를 매우
반색했다.
"비쨔, 애인이 생겼다면서, 소개 안시켜 줄 거야?"
"누가 그래요?"
빅토르는 볼이 붉어졌다.
"누가 그러긴, 레닌그라드에 소문이 짜아한데. 귀
가진 사람은 다 알 걸."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빅토르는 류다와의
난처한 대화를 모면하였다. 빅토르와 르빈이 도착했을
때 모스크바에서 온 쎄브추크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새노래를 레닌그라드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그의 노래가 끝나자, 보리스를
비롯해 미하일, 판께르, 쓰윈 등이 그의 노래를 두고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빅토르가 듣기에 쎄브추크의 노래는 평범해 보였다.
멜로디만 자극적이고 충동적으로 만든다고 록 음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록 음악에는 젊음이, 젊은이의
혼이, 젊은이의 생생한 열정이 실려야 하는 것이다.
혼과 열정을 실으려면 남의 흉내나 적당히 내는
것으로는 어림없다. 남이 흉내낼 수 없는 어떤
독창적인 멜로디와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담겨 있어야
한다. 쎄브추크의 노래에는 혼도 열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보리스는 동료의 의욕을 꺾지
않으려는듯 말했다.
"전 작품보다 한결 훌륭한데, 열심히 연습하면 히트
치겠는 걸! 미하일은 어때?"
미하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글쎄 좀더 빠르게 휘몰아치면 어떨까?"
"빠르게 휘몰아쳐?"
"그러면 더 역동적이 될 것같은데!"
옆에서 듣고 있던 빅토르는 속으로 재치있는
답변이라 생각했다. 어떤 노래든 속도를 가하면 훨씬
더 역동적이고 화려하게 들리리라. 쎄브추크의 감정도
고려한 아주 적절한 의견이었다.
잠시 어두워졌던 쎄브추크의 얼굴이 곧 밝아졌다.
"그래 미하일의 말이 맞은 것 같애. 더 빠르게 하면
활기차게 들리겠지."
아둔한 탓인가, 쎄브추크는 미하일의 참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쎄브추크의 새로운 노래에
대한 이야기가 시들해질 무렵 보리스가 찻잔을 들고
빅토르의 옆으로 옮겨 앉았다. 그는 검푸른 색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수염이 텁수룩한 그의 얼굴빛은
창백했다.
"우리 아크와륨 그룹은 최근에 새 앨범을
완성했어."
보리스는 남의 일 말하듯 감정을 씻어낸 음성으로
말했다.
"어떤 노래들인데, 또 크게 성공하겠군요?"
빅토르는 부러운 마음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그냥 앨범 이름을 '삼각형'이라고 붙여봤는데,
별거 아냐. 그런데......."
보리스는 차를 홀짝 들여마셨다. 찻잔을 제자리에
놓은 다음 빅토르와 르빈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내가 뜨로삘로에게 자네들을 소개하겠다고
했잖나."
빅트로는 차마 말을 꺼내 묻지 못하고 속을 태우고
있었는데 다행히 보리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귀를 쫑긋 세우고 다음 말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
"뜨로삘로가 녹음을 약속했네. 가까운 시일 안에
연락이 있을 걸세."
"고맙습니다."
"내게 고마워할 것 없어. 자네들 재능 덕이니까."
보리스는 활짝 웃었다. 잠시 사이를 둔 후 보리스는
덧붙여 말했다.
"게다가 아직 감사하기에는 시기상조야."
"왜요? 뜨로삘로가 취입을 약속했다하지
않았습니까?"
빅토르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물론 약속했지. 하지만 세상 일이란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것 아냐?"
보리스의 농담을 알아차린 빅토르는 긴장을 풀며
웃음지었다.
"헌데 자네들 둘 가지고서는 녹음하기가 어려울
텐데 어쩌려나?"
보리스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빅토르는 보리스의 말뜻을 금방 알아들었다. 올레그가
타악기를 맡았었는데 얼마 전 그는 '가린과
쌍곡선'에서 탈퇴하고 말았었다. 그러므로 녹음을
하려면 당장 타악기 연주자가 필요했다.
올레그의 탈퇴는 예견된 것이었다. 그는 음악을
사랑했다. 오페라도 발레도 좋아했다. 차이코프스키도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콜사코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그는 교향곡, 오페라, 발레
음악을 다 좋아했다. 그것들은 현실에서 구할 수 없는
어떤 높은 경지의 정신적인 위안을 주었다. 음악을
듣고 있을 때면 종교에서 제시하는 천상의 약속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고는
했다. 그는 음악가가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막연한 생각일 뿐 학교에서 정해진
음악시간에 배우는 것 외에는 따로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보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막연히 그리고 가끔
그런 생각을 해왔을뿐이지 음악이란 자신과 거리가
멀다고 느껴왔었다.
그러나 올레그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여자들과
데이트를 즐기는 걸 보며 그도 자신에게서 전에
느껴보지 못하던 감정을 느끼고, 전에 바라지 않던
것을 바라는 것을 막연히나마 알게 되었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담배도 태우고 술도 마셨다.
여자들과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겁기도 했다.
그런 변화는 그에게 아울러 빠른 템포의 음악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특히 그는 록 음악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록 음악의 빠르고 광적인 리듬은 자신의
핏속을 흐르는 뜨거운 열정에 잘 조화되었다. 그
리듬뿐만이 아니라 노랫말도 마치 자신의 내면의
욕구를 그대로 잘 나타낸 것들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올레그는 학교에서 만난 르빈과 친해졌고
그의 권유로 드럼을 시작했었다. 드럼은 경쾌했다.
마구 미친 듯이 두드려 얻어지는 리듬은 속에서
활화산처럼 들끓는 정염에 늘 기름을 부었고 그의
설명할 수 없는 정염의 불길은 드럼의 파괴력 앞에서
가까스로 위안을 얻고는 했다.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하는 젊음의 터널이 그에게도 길게 이어졌다고나
할까. 그 터널을 빠져나오는 동안 드럼을 계속했고
마침내 '가린과 쌍곡선'그룹에 가담해 록그룹협회에
가입까지 하는 것으로 발전했었다. 그리고 올레그는
빅토르나 르빈 등 록가수 지망생들, 즉 건달들의
괴팍한 차림새들이나 당치않게도 방약무인한 태도,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행동들에 공감하여 망설임없이
그 흉내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날 문득 올레그는 그를 방문한 회의와
만나 생각했다. 록 음악은 내가 가야 할 길은 아니다.
나의 일탈은 여기서 끝나야한다. 내가 가야 할 길은
빅토르나 르빈과는 다르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자격에 따라 주어지는 직장에 종사하며
만족해야만 한다. 주어진 직장에 충실하다보면 출세의
길도 자연 열리리라. 올레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수로서, 또는 연주자로서
성공할 확률이 지극히 낮아 음악의 길을 포기하는
것으로는 여기지 않았다. 그는 애써 진실을 외면하고,
다른 길을 걷고 싶다는 말로 르빈과 빅토르에게 그
사실을 통고했다.
"나 때문에 가린과 쌍곡선이 어떤 타격이나 입지
않았으면 좋겠어."
올레그는 헤어지는 친구로서 당연한 걱정을
해주었다.
"괜찮아. 올레그, 너는 몇 번이나 내게 너의 희망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말했어. 그래서 언젠가는 너가
우리 곁을 떠나리라 예견하고 있었지. 다 잘 될
거야."
자신의 탈퇴를 예견하고 있었다는 르빈의 말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나 막상 듣기에는 서운했다. 좀더
섭섭해하며 아쉬워해 주면 덜 서운했으련만.......
올레그는 그러나 한편 그렇듯 자기의 퇴장을 가볍게
받아주는 르빈이 편했다.
"올레그, 너의 어머니도 내게 몇 번 당부하셨거던.
올레그 장래를 생각해서 우리더러 되도록 널 멀리해
달라고. 오랜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넌 좋은
친구야!"
르빈은 어머니나 아버지의 걱정을 한번도
덜어드리지 못한 자신을 잠시 돌이켜보았다. 그러나
곧 어른들의 구미를 다 맞추려다가는 젊은이의 몫은,
젊은이의 길은 자연 포기해야 한다는 현실을
상기했다.
올레그와 그렇게 헤어진 후 빅토르와 르빈은
타악기연주자를 물색해 왔었다. 타악기 연주자 몇
사람을 만나보았다. 능력있는 사람은 이쪽을 얕보고
함께 일하기를 꺼렸고, 함께 활동해 보겠노라 나서는
친구는 능력이 미치지 못했다.
타악기연주자를 빨리 구하지 못한 것은 빅토르의
구미가 까다로운 탓도 있었다. 르빈에게는 이만하면
됐다싶은 사람도 빅토르에게는 거부 당했다. 드럼이야
박자에 맞춰 두드리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음악에 대한 이해의 폭에 따라 그리고 음악에 대한
열정에 따라 그 연주가 달라지는 것인데, 모래알만한
재주로 자만심에 차 있는 사람이 무슨 발전을
하겠느냐고 도리질을 했다. 일이 그렇게 되어 '가린과
쌍곡선'은 한동안 타악기주자 없이 연습을 해왔었다.
"보랴. 우리 '가린과 쌍곡선'은 당장은 타악기
연주자를 구할 방법이 없어요. 가능하다면 당신네
아크와륨 그룹에서 좀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
빅토르는 궁리 끝에 보리스에게 그런 제안을 했다.
보리스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왼쪽으로 갸우뚱
기울이며 미소지었다.
"이번 취입은 우리 '가린과 쌍곡선'에게는 매우
중요한 기회 아닙니까. 우리들이 세상에 널리
소개되는 최초의 작업인데, 잘 해내고 싶습니다."
빅토르는 열성적인 음성으로 그렇게 부언했다.
빅토르는 간곡하게 애원하며 매달리고 싶었다.
"그래, 꼭 성공해야지!"
보리스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자네들이 우리 아크와륨 멤버들에게
노래를 한번 들려주게. 그래야 아크와륨 멤버들이
자네들을 어떻게 도와 주어야할지 알 수 있지 않겠나.
그리고 뜨로삘로도 그때 와서 함께 노래를 듣도록
하고 말이지."
눈을 반짝이며 보리스의 말을 듣고 있던 빅토르는
가까스로 긴장을 풀었다.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좋습니다. 그럼 언제가 좋을까요? 우리는 그동안
집중적으로 연습해 두었기에 언제라도 좋습니다."
빅토르의 대답을 들은 보리스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것을 뒤적이던 보리스는 말했다.
"언제라도 좋겠지. 아, 그래 바로 내일 우리
아크와륨 멤버들이 뜨로삘로의 녹음실에서 만나기로
되어있는데, 내가 먼저 다른 멤버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자네들에게 전화로 알려주면 어떨까?"
"좋습니다"
빅토르와 르빈은 거의 동시에 즐거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럼, 내일 만나지. 헌데 자네들도 곧 이런 수첩을
장만해야 할걸."
보리스는 빙그레 웃으며 수첩을 빅토르의 코앞에
들이밀듯 보여주었다. 펼쳐진 수첩에는 양면에
1일부터 31일까지의 날짜가 적혀 있고 그 날짜들마다
깨알같은 글씨의 스케줄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
수첩은 보리스가 얼마나 바쁘고 인기있는 가수인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증거물이었다. 빅토르는 그러나
보리스의 말을 우스갯소리 정도로 흘려 듣고 말았다.
"그런데, 어떤가?"
보리스는 무엇인가 꺼내기 난처한 말이라도 있는 듯
빅토르와 르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망설였다.
빅토르와 르빈은 보리스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가 이런 말 한다고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자네들, '가린과 쌍곡선'이라는 그룹 이름말인데,
어떤가? 어쩐지 시대에 뒤떨어지고, 어설픈 아마추어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나? 이번 취입을 계기로 한번
바꿔보지?"
빅토르는 얼굴이 잠깐 굳어졌다. 그러나 곧 밝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예, 지적 잘해주셨습니다. 그렇잖아도 어딘가 애들
장난같다는 인상이 들었는데 좋은 이름 있으면 하나
지어주세요."
빅토르는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었다.
그는 '가린과 쌍곡선'이라는 이름에 묘한 자부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보리스의 말 한마디에 자기
주관을 꺾고 즉석에서 아첨하고 나온 것이었다.
그렇게 말해놓고 빅토르는 자신에게 놀랐다. 언제
자기가 이렇듯 주위의 충고에 부드럽게 대응하게
되었는가. 그러나 보리스는 지금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은혜를 베풀고 있지않은가. 그가 이름없는
우리의 프로듀서가 되어 주겠다고 자청하고 나섰고
거기에다 소비에트 최고 녹음기술자인 뜨로삘로로
하여금 우리의 레코드를 취입하도록 주선하고 나서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필경 그룹 이름을 바꾸라는
충고도 어디까지나 호의로 제안한 것일 터였다.
우리들 앞에 아스팔트는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가
걸어갈 길을 닦아주는 보리스의 제안을 뿌리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에 빅토르는 보리스의
권유를 즉석에서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럴까."
보리스는 빙그레 웃으며 미하일 나우멘꼬를
돌아보았다.
"미샤, 이들 새로 출발하는 그룹을 위해 좋은 이름
하나 지어주지?"
"그래, 나도 '가린과 쌍곡선'이 비쨔 말마따나
어린애 장난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한번
생각해보지."
미하일이 말하자 쓰윈도 쎄브추크도 무어라 부르는
게 좋을까, 하고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들은 기존의
록그룹 이름들을 차례로 거명하며 하나하나 짧은
촌평을 가했다. 그들의 입쌀에 오르는 이름들은
하나같이 혹평을 받았다. 심지어 보리스의 아크와륨
그룹도 혹평의 대상이 되었다.
"어디 지을 이름이 없어 물고기 키우는 '어항'이라
짓는단 말인가."
미하일의 신랄한 촌평이었다.
"어항이 어때서. 오색찬란한 지느러미를 흐느적이며
헤엄치는 예쁜 물고기들의 보금자리가 어항 아냐.
게다가 낭만적인 사람들이 어항에 그런 예쁜 물고기를
키운다는 것을 몰라서 그래? 우리는 다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지었어. 헌데 미샤 자네들의 쇼빠르크는 뭐
좋은 줄 알아?"
"동물원이 뭐 어때서. 화려한 날개를 가진 공작도,
우아한 백조도, 대륙을 횡단하는 왜가리도 있잖아.
거기다 표범과 사슴과 사자는 또 어떻고. 우리는
그렇게 다양한 존재들이 혼재하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어."
"우리는 인간의 일을 노래하는데......."
"우리도 그렇지. 하기야 숫퇘지(쓰윈)보다야
아크와륨이 좀더 나은가?"
미하일은 보리스의 다음 공격이 어떻게 발전할지,
공연히 건드렸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쓰윈을 물고
늘어지며 그렇게 한발 물러났다.
"됐어.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의 뜻을 모르는
사람같구만."
보리스는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암튼 비쨔네 그룹 이름이나 좋은 걸로 하나
지어주게."
보리스는 미하일과 쓰윈과 판께르와 쎄브추크를
차례로 쳐다보며 부탁했다.
"그러지, 이름값은 맥주 한 상자니까, 그렇게 알고
비쨔, 술 준비나 해둬."
"예, 좋습니다."
빅토르는 시원스레 대답했다.
얼마 후 빅토르는 그에게 호의를 가진 여러 사람을
뒤에 남기고 보리스 그레벤쉬코프의 집을 나왔다.
그는 매우 흐뭇했다. 보리스를 프로듀서로 얻었다는
것이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보다 더 큰 만족감을
주었다. 더구나 이름까지 지어주겠다는 고마운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나 그때까지도 빅토르는 세상이
자신의 작업에 바야흐로 관심과 애정을 갖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만 보리스가
개인적인 관심과 애정을 보인 것 정도로만 생각했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르빈과
빅토르는 비를 맞으며 모스꼽스끼 거리를 걸었다.
그들은 지하철역으로 가야 했다. 빗물이 고인 곳에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건물들의 벽은
네온과 가로등의 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자동차들이
지나갈 때면 전조등을 받은 벽들이 환하게 밝아졌다.
자동차가 지나가 버리면 벽은 다시 어두워졌다. 마치
명암이 교차하는 빅토르의 마음 같았다.
"료사, 사전을 다 뒤지듯 그토록 많은 단어를
동원했는데도 우리는 아직 이름을 구하지 못했군!"
빅토르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르빈은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들의 머리와 옷은 비에 젖어갔다.
50m 전방에 지하철역 입구가 보였다. 빗속을 걸어온
사람들이 우산을 접으며 지하철역 입구로 들어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온
여인 하나가 결코 서두르지 않고 지하철역 입구로
들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뒤따라 들어가는 사람들에
가려 그 여인의 모습이 보이지않게 되자 빅토르는
시선을 지하철 역 입구에서 돌렸다. 그러자 순간
무엇인가 날쎈 짐승이 그의 시야로 덤벼들듯
뛰어들었다. 그것은 지하철역 입구 옆의 영화관
아크릴 간판이었다. 하얀 바탕에 붉은 글씨의 KINO,
그 네모난 아크릴 상자 속에다 불을 밝힌 영화 상영관
간판은 주위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며 자기 존재를
강조하듯 빛을 뿜고 있었다.
"료사, 우리 아까 KINO라는 단어를 거론한 적
있어?"
빅토르는 숨을 멈춘듯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무엇인가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나 긴장되어 있을 때
빅토르는 그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직 KINO는 누구도 말한 적 없었어."
르빈은 눈앞에 보이는 빨간 글씨의 영화관 간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럼 우리 그룹을 KINO라고 하면 어떨까?"
빅토르는 르빈의 어깨를 잡으며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흠뻑 젖어있는 그의 머리에서 빗물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르빈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누구, 영화 모르는 사람 있겠어. 뜻도 간명하고 네
개의 자모로 되어있어 자켓 같은데 디자인하기도
좋겠는데!"
르빈의 대답이었다.
"KINO. 그래 바로 그거야. 누구나, 특히 젊은
사람들은 친숙하게 느끼지 않겠어. 우리 KINO로
하자?"
"좋아!"
빅토르와 르빈은 거의 동시에 손을 뻗어 손바닥을
부딪쳤다. 두 사람 다 손바닥에서 불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빗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 얼싸안고 상대방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권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