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영웅 빅토리최
마지막 영웅 '빅토르 최' (하) - 유익서
----- 차 례 -----
작가 소개
26. 뜨로삘로의 오디션을 받다
27. 마리아의 사람으로
28. 시련의 나날
29. 미장공이 되다
30. 다시 모스크바로
31. 리태백 시인의 시를
32. 록그룹 경연대회에서의 참패
33. 르빈과 몌별하다
34. 벨르이 빌레뜨를 받다
35. 캄차카의 임시 대장
36. 심의에 걸리다
37. KINO, 그랑프리를 수상하다
38. 고대하던 화부가 되어
39. 아르까지나, 아르까지나
40. 술 없는 세상을
41. KINO, 하늘을 날다
42. 빅토르, 영화에 출연하다
43. 아냐와의 조우
44. 라시드 누그마노프와의 만남
45. 첼리아빈스크에서의 경험
46. 나타샤 라즐로고바
47. 모스크바의 환상
48. 황금의 쥬크 영화제의 영웅
49. 루즈니끼 성화대에 점화하고
50. 대통령의 미소
51. 영원한 작별
작가의 말/러시아 젊은이들의 영웅을 만난 기쁨
빅토르의 음악세계/상업화된 현란한 음악을 거부...
26. 뜨로삘로의 오디션을 받다
사람이란 어떨 때 위안을 받지 않고도 지낼 수 있는
것일까.
사람이 온전한 평온을 누릴 수 있는 때가 언제일까.
아무 걱정없는 가족과 더불어 살고 학교나 회사나
그밖의 사회생활이 원만하며 장래에 대한 어떤
불안감도 없을 때, 남의 위안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온전한 평온을 누릴 수 있는 것일까. 그럴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일까?
인간이란 신체적, 심리적, 환경적으로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춘 상태에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들은 적이 있다. 인간이란 어떤 조건에 놓여 있든
새로운 욕망을 창출해내고 그것을 이루기까지 불안과
긴장 속에 놓여 있기를 결코 마다하지 않는 그런
불합리한 존재라고 들은 적이 있다. 리술
아저씨로부터 들었는지 아니면 중국의 어떤
철학책에서 보았는지 빅토르의 기억은
아슴푸레했으나, 그 기억을 토대로 인간이란 그런
부조리한 존재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었다.
빅토르는 자신이 어떤 완벽한 생활조건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늘 불안하고 조금씩 화가 나 있고 세상을
원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려니 여겨 왔었다.
어떤 때 그는 자신이 온통 적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 생각될 때도 있었다.
어떤 사람도 자기에게 우호적이지 않고 해를 입히려
하고 자기 따위는 세상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같은 존재려니 하는 자의식에 사로잡혀 고통을
당하고는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는 집도 그에게는
그다지 믿음직한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80cm 정도
두께의 콘크리트 벽이 외부의 적들을 막아줄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공부와 멀어진
날로부터 아버지는 빅토르에게 애정 표시에 인색하게
되었고, 빅토르의 모든 행동을 걱정과 근심과 우려로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은 늘 빅토르를 부담스럽고
미안하고 죄송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늘 도망치고
싶게 충동질하였다. 빅토르는 언제나 욕구불만에
사로잡혀 있었다. 염세적이었고 도발적이었다.
일상적인 것은 백안시했고 좀더 충동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선호하였다.
그 때문인지 그의 음악은 남과 달랐다. 음악은
만드는 사람의 정서에 따라 다르기 마련일 터였다.
그러나 장르와 분야에 따라 어떤 눈에 보이지않는
일정한 궤도와 법칙이 있기 마련이었다. 구미의 록
음악이 구미의 언어와 문화전통과 환경과 풍광에 따른
어떤 특색을 지니고 있듯, 소비에트 록 음악도 러시아
특유의 언어와 음울한 기후와 문화적 전통이 스며있는
어떤 법칙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빅토르는 그
러시아적 특색을 수용하면서도 또 배격하고 그
궤도로부터 일탈되는 자기 모순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그의 염세적인 성격과 욕구불만의 반영이었다.
그 자신도, 그의 음악도 따뜻한 손길이 필요했고,
위안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르까지나는 멀리 시베리아 유형지로 떠난
후 소식이 없었다.
"마리안나, 오늘 저녁에 만날 수 없을까?"
빅토르는 학교에서 어슬렁거리다 마리안나에게
전화를 했다.
"글쎄, 나중에 무슨 일이 있을지`......."
마리안나는 빅토르가 싫지는 않았다. 그에게서
연락이 없을 때면 초조하게 기다리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지 못해 그에게 전화도 하고는 했다. 그러나
이대로 진전시켜도 될 것인지, 요즘 그녀의 걱정은
거기에 쏠려 있었다. 나이가 세 살 아래이고, 그리고
동양계라는 말에 얼굴을 찌푸리던 어머니의 반응이
그녀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그 두 가지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리안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늘밤, 뜨로삘로 녹음실에서 녹음을 하기로
했거던. 보리스와 아크와륨 그룹이 도와주기로
했고......."
"그래, 그런데 녹음을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되는
것인데?"
"레코드를 제작하겠지. 우리의 첫음반이 될 거야.
뜨로삘로라면 소비에트에서 가장 능력있는
녹음기술자로 알려져 있는 베테랑이야."
"아, 그렇군! 어디로 갈까?"
"거기 마치는 대로 뜨로삘로 스튜디오로 오지 뭐."
빅토르는 데리러 오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뜨로삘로 스튜디오의 위치와 전화번호를 마리안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드디어 빅토르는 뜨로삘로와 만났다. 그동안
빅토르에 대해 궁금증을 품어왔던 뜨로삘로는
스튜디오로 들어서는 빅토르를 반갑게 맞이했다.
빅토르를 보자 뜨로삘로는 언젠가 보리스
그레벤쉬코프의 말이 떠올랐다.
"빅토르 최가 세상에 나오면 우리 같은 것들은 다
설 자리를 잃을 것 같아!"
오만하고 안하무인격이며, 세상에 자기가 최고라고
자만심에 가득 차 있는 보리스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너무나 뜻밖의 내용이었다.
"빅토르 최가 어떻다고?"
"비쨔의 노래를 들어봤어요?"
"아니, 아직 애송이 아냐?"
"모르는 사람은 애송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노래를
들어보면 생각이 싹 바뀔 걸"
"그렇게 대단해?"
"내 생각만 그런게 아니라 나우멘꼬 생각도 나와
똑같답니다."
"그렇다면 나도 한번 들어봐야 하겠는걸!"
뜨로삘로는 그렇게 말했다.
"지난번 그들의 노래를 열 곡 정도 들었는데,
하나같이 재미있었어요. 아마 가장 의미심장한 언어로
현재의 소비에트 청년들의 심정을 노래하는 그룹일
거예요."
보리스는 그런 칭찬도 했다.
"대망의 레닌그라드 록 가수들의 등장이셔!"
안을 향해 뜨로삘로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것이
어쩐지 빈정거리는 것 같아 빅토르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뜨로삘로의 회색빛 머리털이나 수염,
차가운 느낌의 갈색 눈동자, 이런 것들에 전혀
친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보리스가 문으로
다가왔다.
"어서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서 왜 그러고 있어?"
보리스의 재촉을 받고서야 비로소 빅토르는
녹음실로 들어갔다. 녹음실은 음침하고 칙칙했다.
특수한 방음장치로 외부와 차단되어 있고 검고 두꺼운
커튼으로 창문이 가려 있는 데다 밝혀진 전등의
촉수가 낮기 때문인 듯했다.
녹음실 안에는 아크와륨 그룹 멤버들이 연주 준비를
마치고 녹음대기 상태에 있었다.
보리스도 밀폐된 녹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한 곡의 연주를 끝낼 동안 빅토르와 르빈은 대형
리시버를 끼고 녹음기기를 조작하고 있는 뜨로삘로
옆에 무료히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마침내 아크와륨
그룹의 '터부' 한 곡의 녹음이 끝났다. 그들은 밀폐된
녹음실에서 나왔다. 밖에서 스피커를 통해 그들의
노래를 들었던 빅토르는 전반적으로 경쾌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보리스가 녹음실에서 나오자
빅토르는 외교관 같은 표정과 어투로 말했다.
"신곡이군요. 널리 유행되겠어요!"
빅토르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보다 보리스의
희망과 기대를 말한 것이었다. 빅토르는 그렇게 말해
놓고 곧 쑥스러움을 느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사교적인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나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쨔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유행을
기대해봄직도 하겠군!"
보리스는 빅토르의 심중 따위야 개의치 않은 밝은
얼굴로 가볍게 받아 넘겼다.
"제 생각이야 어디 보랴를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냥 음악이 좋다는 말을 그렇게 했을 뿐이지요"
"암튼 고맙군. 그래 준비는 됐겠지?"
"예, 어디서 할까요?"
빅토르는 옆에 있던 뜨로삘로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기 플로어가 있잖아"
뜨로삘로는 경쾌하고 신선해 보이는 알루미늄제
녹음기기 옆에 서서 녹음기기 맞은편의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빅토르와 르빈은 뜨로삘로가 손으로 가리키는
벽쪽으로 옮겨가 기타를 점검했다. 아크와륨 그룹의
찌토프와 판께르, 쥬사도 보리스 옆의 긴 쇼파에 앉아
두 사람을 주시했다.
마침내 그들은 연주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시간은
있으나 돈이 없다'를 연주했고 그 다음 '알루미늄
오이'를 연달아 연주했다.
'건달들'을 노래하고 났을 때 뜨로삘로가 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
"잘 들었어요"
보리스와 찌토프, 쥬사도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
박수소리에 묻혀 뜨로삘로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때 초인종소리가 들렸다. 찌토프가 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마리안나가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고 어둠침침한 녹음실로 들어왔다. 그녀를 보며
빅토르는 손을 들어보였다.
"제 친구 마리안나입니다."
빅토르는 보리스와 뜨로삘로에게 차례로 마리안나를
소개시켰다. 마리안나는 사람 상대에 익숙한 때문인지
표정 하나 흐트리지 않고 자기 이름이며 근무하고
있는 직장 등을 능숙하게 소개하였다.
"한발 늦었군요. '가린과 쌍곡선'의 연주가 금방
끝났습니다."
뜨로삘로가 웃으며 말했다.
"어때?"
보리스가 뜨로삘로의 감상을 물었다. 뜨로삘로는
빅토르와 르빈을 쳐다보며 빙그레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보랴 말인데 틀림이 있겠어. 언제라도 좋아.
녹음을 하지. 하지만 연주자 구성이 선결문제 아냐?"
뜨로삘로의 말인즉, 빅토르와 르빈의 노래를
취입하겠다는 승낙의 뜻을 확실히 한 것이었다.
"그건, 걱정할 것 없어. 우리 아크와륨 그룹이
도와줄 생각이거던. 나와 찌또프가 도와주면 될 거
아냐?"
"그렇다면 내일부터라도 당장 좋아!"
보리스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가 적극적으로
나오자 뜨로삘로도 그렇게 대응하였다.
"고맙습니다!"
빅토르는 달리 더 할 말이 없었다. 얼굴을 붉히며
뜨로삘로에게 어색하게 인사했다. 그는 뜨로삘로의
입에서, 내일부터라도 당장 좋아, 라는 말이 떨어진
순간 하늘 높이 치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을 감추느라 오히려 얼굴 표정이 이지러져 울상이
되었다.
"고마워 할 것 없네. 우리 녹음실은 재능있는
사람들에게는 늘 열려있거던"
뜨로삘로는 말은 그렇게 했으나 아직도 빅토르의
노래실력에 대한 의문을 다 씻어 버리지는 못했다.
보리스의 칭찬과는 달리 빅토르의 노래는 어딘가 아직
풋내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어쩐지
부랑아들이나 흥얼거리고 다닐 그런 천박한 내용의
것들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일어났다. 그들의
노래는 세련되지 못했고 어딘가 서툴고 어두웠다.
빠른 리듬에도 불구하고 지나치다할만큼 우수가 짙고
칙칙했다. 젊은이들이 이런 칙칙한 노래를 좋아할까?
그러나 세상 일이란 의외성이 너무 많았다. 예컨대
'라스꼬브이 마이'라는 그룹이 등장했을 때 많은
전문가들은 그 그룹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연주도
삼류고 노래도 썩 좋은 것은 아니어서 곧 해체되리라
전망했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젊은이들은 그들
'라스꼬브이 마이' 그룹의 노래를 사랑하며 즐겨
불렀다. 그러므로 뜨로삘로는 자신의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보리스나 미하일이 추천할 정도라면 자신의
의견은 죽여도 좋을 것이라 판단되어 그들의 음악
녹음을 선선히 허락한 것이다.
"어때, 뜨로삘로는 우리 음악을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지?"
뜨로삘로의 녹음실을 나와 거리를 걸으며 빅토르가
르빈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가 속에 없는 말을 했겠어."
"아냐, 그는 보리스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녹음을
해주겠다고 한 것 아냐?"
"또 비쨔의 그 자의식 발동 시작이군. 공연한
생각으로 사서 고생하는 버릇 좀 그만 고쳐......."
르빈은 그렇게 반박했다. 그러나 빅토르는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자기 눈은 속이지
못한다고 장담하였다.
"어쨌든 녹음은 해준다니, 녹음만 하면 될 거
아냐."
"그거야 그렇지만."
빅토르는 아무래도 개운치 않았다.
"암튼 모든 일이 잘 될 거니까 걱정 하지마. 그럼
내일 당장 녹음하자구?"
"그래 보랴가 오후 세 시에 뜨로삘로네로 온다니까,
그때 만나."
르빈은 빅토르와 마리안나를 뒤에 남겨두고 마침
정류장에 정차하는 트란바이를 향해 뛰어가며
소리쳤다.
"노래부르는 것을 보고 싶어 뛰어왔는데 한발
늦었다니."
잠시 르빈의 뒷모습을 좇던 시선을 빅토르의 얼굴로
옮기며 마리안나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얼굴에는
미소가 잔잔히 피어 있었다.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지?"
가로등 불빛이 마리안나의 얼굴과 늘씬한 몸을
비추고 있었다. 잔잔한 미소를 띤 평온한 표정의
마리안나는 삶의 여유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슬픔이나 외로움을 전혀 겪지 않고 성장했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 생각은 빅토르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슬픔이나 외로움을 겪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내 노래를 좋아할 수 있을까.
빅토르는 자신에 대한 마리안나의 관심의 정도에
아직도 의구심을 털어 버리지 못했다. 그는
마리안나가 자신보다 세 살이나 위이고 또 150루블의
고액급료를 받는 안정된 사회인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거기에다 마리안나는 어떤 남자도 사랑을
품을 만한 엷은 금발에 영롱한 회색빛 눈동자의
전형적인 슬라브계 미인이었다. 그러한 마리안나가
건달에다 나이도 어린 동양계를 좋아할 리 없으리라
짐작하며 빅토르는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고통을
느꼈다.
"저녁도 저녁이지만, 어디 가서 술을 좀 마실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비쨔, 그럼 잠깐 기다려. 내가 전화 좀 하고
올게."
마리안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트란바이 정류소
옆 아파트 벽에 회색빛 공중전화기가 붙어 있었다.
토큰 투입구도 찌그러지고 고정못도 헐거워져 금방
떨어질 것 같은 외양과는 달리 기능은 말짱했다.
레닌그라드에 설치된 모든 공중전화가 다 저
모양이지. 어디 공중전화뿐인가. 스탈린, 후르시초프
때 설치한 이래 돌보지 않은 가로등도, 가로 표지판도
다 저렇게 파손되거나 노후화되어 있었다. 영원히
돌보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공공기물들은 언젠가는
기능을 잃고 폐기되고 말 터이지.
"뽈리나가 집으로 와도 좋대."
마리안나는 마치 공략하기 힘든 고지를 점령한
소대장 같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뽈리나 아파트 옆에 늦게까지 하는 마가진이 있어.
거기서 술을 살 수 있을 거야."
마리안나는 뽈리나가 아파트를 비워줄 수도 있다는
말은 빅토르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좋아!"
네바나 함정 같은 카페를 염두에 두고 있던
빅토르는 좀 의외였다. 그러나, 짤막하게 동의했다.
마리안나는 제르진스키 거리 행의 트란바이가
도착하자 빅토르를 앞세우고 트란바이에 승차하였다.
뽈리나의 아파트에는 자스민 향기가 은은히 감돌고
있었다.
손님이 온다니까 일부러 향수를 뿌린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자스민 향의 향수를 상용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담배 연기에 자스민 향기가
무슨 소용이람. 빅토르는 들고온 붉은 포도주를
내려놓으며 뽈리나에게 인사를 하였다. 마리안나의
얼굴은 좀 둥글고 온화한 편인데 비해 뽈리나의
얼굴은 폭이 좁고 콧날도 오똑 솟아 있어 날카로운
인상을 던졌다. 지방질과 물기를 몸에서 가능한한
짜내버린듯 깡마른 몸에 성깔도 만만치않아 보였다.
오는 길에 그녀가 레닌그라드 서커스 극장에서
공중묘기를 하는 연기자라는 말을 들은 빅토르는
뽈리나를 보자 자기 직업에 가장 적합한 몸매를 갖고
있군, 하고 생각했다.
"록큰롤을 하는 가수야."
마리안나는 빅토르를 뽈리나에게 소개했다.
"보리스 그레벤쉬코프 알지?"
"그럼 그의 노래는 즐겨 듣는 걸"
"보리스가 뜨로삘로에게 소개하여 비쨔 노래를 곧
취입할 거야."
마리안나의 그 말에 뽈리나의 동공이 키워졌다.
얇은 입술이 아침의 나팔꽃처럼 벙글어졌다. 그녀는
미소를 띠고 빅토르를 다시 쳐다보았다.
"레코드 취입하면 내가 일착으로 살 수 있으면
좋겠군요."
"제 힘으로 가능하다면 가장 첫손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빅토르의 그 말에 뽈리나와 마리안나는 소리내
유쾌하게 웃었다.
빅토르는 붉은 포도주를 부엌의 전기 오븐에다
데웠다. 유리병에 손을 대지 못할 정도로 뜨거워지자
얼른 포도주 병을 꺼냈다.
"포도주가 이렇게 자극적인 줄 나는 미처 몰랐네!"
데운 포도주는 처음이라며 뽈리나는 신기해 했다.
빅토르와 마리안나가 담배를 태우자 뽈리나도 따라
피웠다.
"나는 담배는 잘 안피는데, 비쨔 담배피는 모습이
어찌나 멋지고 맛있어 보이는지 안피고는 못배기겠는
걸."
뽈리나는 마냥 유쾌해 했다. 빈 술병은 하나둘
쌓여갔다.
"마리안나, 우리 이번에 그룹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어느 사이 빈 술병은 여섯으로 늘어 있었다.
"뭘로?"
"KINO."
"KINO!"
"그래, 누구나 친밀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지만, 록 그룹 이름이 KINO라니, 어쩐지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마리안나는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아냐!"
뽈리나가 손을 들어 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마리안나와 생각이 달라. KINO, 좋은
이름이야"
뽈리나는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뿜은
다음 말했다.
"록 음악 가수라면 대중적 인기를 노리는 것은
당연할 것이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려면 대중적인
인지도와 친밀도가 높은 이름에 의지하는 것도 한
방편 아닐까?"
뽈리나는 빅토르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보며 그와
생각이 같음을 알았다.
"더 적절한 이름을 구하기도 힘들거야, KINO.
KINO의 앞날에 축복 있을지어다!"
뽈리나는 술잔을 높이 들어보이며 외쳤다.
"뽈랴 말을 듣고보니 그렇기도 하겠네."
마리안나도 곧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내가 KINO의 매니저 하면 어떨까?"
마리안나는 빅토르의 얼굴을 쳐다보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마리안나가 우리 KINO의 매니저를 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군."
"그럼 오늘 여기서 나를 KINO의 매니저로 임명한
것이야?"
"나는 그 말이 이곳만 벗어나면 효력정지되는 그런
물거품 같은 것이 아니길 바라겠어."
빅토르는 흥겨운 음성으로 빈정거렸다.
"효력정지? 물거품?"
마리안나의 얼굴은 아까부터 불그스레 홍조를 띠고
있었다 뽈리나도 마찬가지였고 빅토르도 그랬다.
그들은 포도주 열 병에 어지간히 술기운들이 올라
있었다. 마리안나는 입술을 깨물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눈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냐, 나는 진심으로 말했어. 비쨔는 사람 마음을
몰라주는 아주 못난 성품을 지녔어. 내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도 알면서, 계속 의심하고 있어. 내가
칼로 내 심장을 도려내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을
보여줘야 비로소 믿을 그런 못난이야!"
마리안나의 눈에 물기가 번졌다. 예기치 않았던
갑작스런 사태에 빅토르는 당황했다. 이런 자리에서
갑자기 마리안나로부터 사랑을 고백받으리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더구나 마리안나로부터 먼저
사랑고백을 듣다니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빅토르 자신이 애걸복걸 마리안나의 사랑을
구걸하게 되리라 생각했었다.
빅토르는 손을 뻗어 마리안나의 손을 잡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래, 마리안나가 우리 KINO의 매니저를
맡아준다면 나는 마음놓고 노래에 열중할 수 있을
거야."
빅토르는 어색하게 얼버무렸다.
"비쨔는 좀더 솔직해져야 되겠어. 지금이 손이나
쓰다듬고 매니저 운운할 단계야? 마리안나는 자신을
전부 다 보여주는데 비쨔는 그게 뭐야?"
뽈리나는 빅토르를 쏘아보며 비꼬았다.
마리안나는 빅토르의 손을 끌어 당겼다. 팔을 따라
빅토르의 몸이 마리안나에게로 쏟아지듯 넘어졌다.
마리안나의 팔이 굵은 삼노줄처럼 빅토르의 어깨와
등을 감았고 그녀의 입술이 빅토르의 입술을
덮어버렸다. 반사적으로 빅토르의 팔이 로프처럼
단단하게 마리안나의 허리를 감았고 그들의 포옹과
뜨거운 입맞춤은 격렬하게 이어졌다.
"그래, 그림이 진작 그랬어야 옳지!"
두 사람이 포옹을 풀고 포도주로 입술을 축이자
뽈리나는 두 사람을 남기고 아파트를 나가려고 했다.
빅토르와 마리안나가 아무리 만류해도 듣지 않았다.
"나도 눈치없는 사람은 아냐. 아파트는 혼자인
사람보다 사랑하는 한쌍에게 더 필요한 것이야.
더구나 갈 곳이 없다면 모르지만 올랴나 나타샤, 어느
집에 가도 나를 반길 걸. 내 걱정은 말고 오늘밤 두
사람은 평생 서로 묶고도 남을 끈이나 엮으라구."
뽈리나는 그 말을 남기고 아파트를 나가고 말았다.
아파트에 남은 두 사람은 도리어 더 어색해졌다.
그러나 남은 술은 그 어색함을 적절히 해소시켜
주었다. 담배도 빅토르의 주저와 망설임과 소심함을
조금씩 덜어주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대로 갔고, 침대에 들어가서야 빅토르의 주저와
망설임과 소심함이 완전히 씻어졌다. 그들은 먼저 긴
입맞춤으로 애무를 시작했다. 입맞춤이 끝나자
빅토르는 부드럽게 그녀의 옷을 벗겼고 그녀도 그의
옷을 벗겼다.
빅토르는 신중한 반면 마리안나는 서두르고 있었다.
알몸이 되자 자석처럼 서로 엉겨들었고 서로가 서로를
성급하고 탐욕스럽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빅토르는
마리안나의 몸 구석구석의 촉수를 일일이 자극하며
충동질하였고 그녀의 예민한 감응에 반사적으로
대응하였다. 빅토르는 점점 더 대담해졌다. 거칠고
서툴기는 했으나 마리안나의 몸은 그의 손길
하나에도, 그의 혀와 살갗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의 혀는 그녀의 유두를 물고 애무했고, 그의 손은
그녀의 은밀한 곳을 계속 더듬었다. 그녀의 손은
깃대처럼 꼿꼿한 그의 남자를 틀어쥐고 애무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그녀의 몸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곧 환희의 깊은 샘을 퍼올리기 시작했다.
"나도 비쨔 일을 돕고 싶어."
긴 여행이 끝났을 때 마리안나가 빅토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서커스 극장은 어쩌고?"
"비쨔를 모를 때는 거기에 만족했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 내 몸 속에도 건달기가 있었나봐.
서커스 극장 그만 때려치울까봐."
"하지만, 당장은 그만두지 말고 거기 다니면서 돕는
쪽으로 생각해 보지?"
"그러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직장을 그만 두면 고생이 따를 걸!"
"고생이야 각오하고 있어."
"그래도 좀더 두고 봤으면 좋겠어."
"나는 늘 비쨔와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
마리안나는 대담하고 적극적이었다. 빅토르는
마리안나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터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빅토르도 집을 떠나 살고 싶은 욕망을 불쑥불쑥
느끼고는 했다. 르빈이나 마이크네 집이나 아니면
생일 파티에 초대된 집에서 밤을 지내고 집에
들어가지 않기 일쑤였다. 아버지나 어머니도 그의
귀가를 기다리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그의 외박은
이미 일상처럼 되어 있었다.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바람이 잘못 불면 한번씩 나가지 이번 학기
들어서는 학교에 나가는 날보다 나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빅토르는 학교 졸업따위는 포기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학교 공부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목각이야 싫지 않았으나 목각은 노래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 때문에 학교와도 먼 거리를 두고
생활했다. 오로지 그에게는 노래만이 가치가 있고
그의 존재 의의를 느끼고 실감하게 할 따름이었다.
따라서 그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멀리멀리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그런 결심을 실행에 옮길 만한
재정적 능력이 없었다. 그는 어쩌면 늘 유보된 상태에
놓여있는 셈이었다. 어떤 것도 확정된 것 하나 없는
유보된 상태, 절망적이기도 다른 한편 희망적이기도
한 그런 입장에 놓여 있었다. 이제 마리안나가
빅토르의 유보적인 입장을 해제시켜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방도 한 칸
없지 않아?"
빅토르는 어렵게 입을 뗐다.
"뜻만 있으면 못 구할 것도 없지 뭘."
"어떻게?"
"내게 생각이 있으니 맡겨둬."
마리안나는 휘파람을 불듯 경쾌하게 말했다.
27. 마리아의 사람으로
아파트 사이에 종려나무와 자작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굴밤이 맺혀 있는 참나무는 큰 키를
바람에 내맡기고 있었다. 회색털의 까마귀가 땅에
뒹구는 수박이나 멜론 껍질을 쪼고 있고, 어느 집
고양이가 가끔 종려나무 밑을 가로질러 갔다. 시간과
삶은 흐름을 멈추고 작은 공원에 고여 있었다.
금요일 오후였다. 학교에서 일찍 퇴근한 발렌치나는
잠시 공원의 벤치에 앉아 어린아이들의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무료를 달래고 있었다.
트란바이와 일렉트릭치카가 다니는 큰길로 나가는
아파트 모퉁이에 낯익은 모습의 청년이 나타났다.
키가 헌칠하고 어깨가 약간 굽은 검은 옷의 젊은이,
비쨔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비쨔와
비슷한 큰 키의 아가씨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어깨를 덮은 너풀거리는 머리만으로는 쉽사리 남녀를
구분할 수 없었다. 비쨔도 검은 머리가 어깨를 덮고
있지 않은가. 옷으로도 그들 남녀를 구분하기는
힘들었다. 그들 펑크족들은 여자들일수록 남자들 옷을
더 챙겨 입었다. 아무리 외양이 그렇더라도
발렌치나는 남녀를 구별할 수 있었다. 그들의
걸음걸이며 몸짓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보폭의 차이도
눈에 띄었지만 팔을 흔드는 각도도 남녀가 달랐다.
"마마, 전화를 받지 않길래, 혹시 여기 계시지 않나
했어요."
곁으로 다가온 빅토르가 말했다. 발렌치나는
빅토르와 함께 온 아가씨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마마, 마리안나예요."
마리안나는 긴장한 얼굴로 목례를 하였다.
"마마, 우리 결혼을 약속했어요. 가능하다면
결혼식을 올리기 전이라도 함께 생활할 작정입니다."
발렌치나는 너무 갑작스럽고 놀라운 빅토르의
선언에 어리둥절했다. 머리도, 혀도 굳어 버린 것
같았다.
발렌치나는 빅토르가 그림을 포기하고 록가수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었다.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팽개쳐버리고
엉뚱하게 록가수가 되겠다니, 이만저만 어리석게
들리지 않았었다. 발렌치나는 그때 말했었다. 비쨔,
넌 타고난 화가라고 너도 들었지. 드바레쯔
삐아네로프에 있는 이르 스튜디오 선생님들께서
뭐라든, 넌 마음만 먹는다면 훌륭한 화가로써 성공할
수 있다 하지 않았어. 나는 아직도 그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게다가 넌 전 레닌그라드
어린이미술대회에서 1등상을 받기도 했잖아.
민속박물관에서 미술대회 입상작 전시회가 열렸을 때
너의 그림 앞에서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감격해했는지
너도 알잖아. 넌 화가가 되어야해. 훌륭한
화가가.......
그러나 빅토르는 발렌치나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고 있었다. 속이 상해 물만 거듭 들이키고 있는
발렌치나를 두고 집을 나간 빅토르는 이틀, 사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서야 몹시
굶주리고 잠이 모자란 듯 넝마같은 모습으로
기어들어와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었다.
기대를 저버린데 대한 미움과 돌아와준데 대한
고마움이 뒤섞여 발렌치나는 갈피를 잡지 못했었다.
그러나 아들을 위해 삐로그를 굽고 아들이 좋아하는
벨메니를 만들어 식탁을 푸짐하게 하여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래, 넌 한마디 하면 그것으로 끝. 주위에서
아무리 설득해도 너의 생각대로 행하고 말았지.
이번에도 내가 끼여들 여지는 손톱만큼도 없을
터이고. 그래 그림을 포기하고 록가수가 되겠다고
했을 때보다 더 놀라운 소식이구나. 그래 너가 나를
놀라게 한 일 가운데 두번째로 대단한 소식이다.
결혼할 예정인데, 당장 함께 살겠다고. 그렇다면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난 며칠 전부터 벌써 함께 살았단
말이지.
"넌 자신의 밥벌이도 못하잖아?"
"이번 유월이면 전문학교를 마치잖아요. 어디라도
취직이 되겠지요."
발렌치나는, 그래 학교야 기간을 채웠으니
끝내겠지. 하지만 너처럼 학교에 등한한 아이에게
졸업장을 수여할까. 졸업장 없는 아이를 누가 데리고
가 쓰겠어. 그러나 마리안나 앞에서 차마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슬픈 눈으로 빅토르를 쳐다보며
발렌치나는 도리질을 했다.
"취직이 안되면 어때요. 경비원이나 청소원으로
일해도 우리 두 사람 입에 풀칠이야 못하겠어요."
빅토르는 용돈 마련을 위해 종종 경비원이나 목욕탕
청소원 같은 아르바이트를 해왔었다. 그러나 그런
임시직으로 생할한다는 사람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었다. 빅토르는 어머니의 걱정하는 마음을 환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어머니 걱정마세요. 제가 다니는 서커스 극장에서
받는 월급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어요."
옆에 있던 마리안나가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서커스 극장 의상 담당으로 일하고 있다니까
월 급여가 상당하겠구나. 하지만 남자란 제 벌이가
있어야 하는 것이야."
"걱정마세요. 비쨔는 곧 유명해질 거예요."
"희망이 돈을 낳는다면 무슨 걱정이람!"
발렌치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도리질하며 하릴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로베르트가 이 사실을 알면 무어라
할 것인가. 로베르트는 러시아 사람들의 풍속에
익숙해 있으면서도 사고나 행동은 지극히 동양적
도덕관에 입각해 있었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남을
먼저 생각하고, 당장의 이익보다 장래의 이익에 더
신경을 쓰며, 자신의 편안함을 도모하기보다 공공의
이익이나 질서를 더 우선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였다.
발렌치나는 그러한 로베르트가 어떨 때는 어리석거나
바보가 아닌가 여겨질 때도 없지 않았다. 사람이란
누구나 이기심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로베르트는
자기보다 남, 자기 식구보다는 이웃, 개인보다는
사회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였다. 그러한 로베르트는
남녀 관계도 도덕적으로 조금이라도 흠결이 있을 경우
불륜이라 단정하고 얼굴을 찌푸리고는 했다. 그러한
로베르트가 빅토르의 결정을 부도덕하게 생각할 것은
명약관화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입도 뻥긋 못할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어떤 원조나 도움을 기대하기란
악마에게서 선행을 기대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마리안나 가족들도 두 사람의 결정을 알고
있겠지?"
"아뇨,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내일 어머니와
비쨔가 만나도록 할 작정입니다."
발렌치나는 속으로 또 도리질을 했다. 로베르트를
집에 데리고 가서 소개하자 어머니와 아버지의 반응이
어떠했던가. 그들은 시종일관 쌀쌀하고 냉랭하게
로베르트를 대했고, 그가 돌아가고 나자 동양계는
안돼! 하고 외치지 않았던가. 왜 동양계는 안되느냐고
따지자 러시아계 청년들도 쌔고 쌨는데 왜 하필
동양계냐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머리를 저었었다.
동양계는 사람이 더럽고 용맹이 없으며 배신을
잘한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입에 담지 못할
욕설같은, 저주같은 말로 동양계의 험담을 늘어
놓았었다. 발렌치나는 어찌나 듣기 싫었던지,
징기스칸과 그 후예들에게 지배받았던 약 3세기에
걸쳐 형성된 열등감이 아직도 러시아 사람들의 가슴
속에 멍처럼 남아 있어 그런 말을 하느냐고
대들었었다. 어쨌든 발렌치나는 집을 버리고
로베르트를 선택해야 했었다. 마리안나도 같은 슬픈
운명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하니,
마리안나가 한없이 측은하였다.
"얘야, 자신있니?"
발렌치나는 측은한 눈으로 마리안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마리안나는 무슨 말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가족들이 비쨔를 받아들이지 않을 텐데?"
"아니예요. 어머니는 지금까지 저의 선택에 한번도
반대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선택들은 딸의 장래를 걱정하고 불안하게
만들지는 않으리라 판단되었기 때문일 터이지?
이번에도 그럴까?"
"어머니, 어머니께서 걱정하시는 것과는 달리
비쨔는 장래가 매우 촉망되는 가숩니다. 보리스
그레벤쉬코프가 감탄하여 비쨔를 뜨로삘로 씨에게
추천했고, 뜨로삘로 씨는 비쨔의 레코드를 취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
발렌치나는 잠시 빅토르를 쳐다보았다. 발렌치나는
금시초문이었다. 게다가 레코드 취입이라는 것이 갖는
의미도 또한 명확히 인식하고 있지 못했다. 언제나
그렇듯 얼굴에 표정을 그리지 않는 빅토르는
무감각하게 마리안나의 말을 듣고 있었다.
"뜨로삘로 씨가 레코드 취입을 한다. 그게 너희들
장래의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해줄 수 있을까?"
"어머니, 비쨔는 지금 가수지망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리스는 소비에트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유명한 가수입니다. 그리고 뜨로삘로라면
녹음기술이 최고라고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비쨔의 노래를 듣고 감탄하여 레코드 취입을
승락한 것입니다. 이는 비쨔의 출세를 보장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입니다."
마리안나는 빅토르의 재능을 몰라주는 발렌치나가
섭섭했다.
"그래, 그래. 나는 모르겠다. 너희들 좋아 사서
고생하겠다는데 말린들 무슨 소용있겠니. 너희들
마음대로 하려무나. 다만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에만 게으르지 않도록
주의하거라."
"마마, 고맙습니다."
빅토르는 어머니의 뺨에 키스를 하였다. 마리안나도
발렌치나와 포옹을 했고 서로 뺨을 비볐다.
다음날, 마리안나는 빅토르를 어머니에게로 데리고
가 인사를 시켰다. 어머니는 빅토르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무슨 재난을 당한 사람처럼 낭패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지못해 차를 끓여내고 딸기절임과 과자를
대접하면서도 얼굴이 밝아지지를 않았다. 마리안나는
어제 만난 발렌치나의 걱정이 그대로 현실로 나타난
것에 당혹했다. 어머니는 한번도 자신의 선택을
반대하지 않았었다. 학교선택이며 미술전공이며
그리고 디자인 공부며, 장차 살아갈 날들을 위해
그녀가 선택한 것들에 한번도 반대하지 않고 도리어
열심히 하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었다. 따라서 이번
비쨔의 선택도 마리안나가 자신의 인생을 위해 매우
신중히 선택한 것으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랐었다.
마리안나로서는 빅토르를 만난 것을 행운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두 사람이 결혼할
작정이라는 말을 듣고 즉각적으로 반대하고 나왔다.
"나는 끼따니나 야뽀네쯔나 까레이츠나, 모든
동양인은 싫다. 그들이 어쩌다 러시아에 와 살게
됐는지 모르지만 러시아 사람들과는 물과 기름같은
사이 이상이 되지 못한다. 두 사람의 만남도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어머니는 망설임없이 자기 생각을 그대로 다
드러냈다.
"딸의 불행을 막으려는 것은 모든 어머니가 같을
것이야."
"엄마, 언제 내가 엄마 실망시킨 적 있었어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없었지. 하지만 오늘 이처럼
크게 실망시키기 위해 그동안 나를 기쁘게 해온 게
아닌가 의심스럽구나."
"엄마, 아니에요. 저를 믿어보세요. 비쨔에게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벌써 실망했는걸. 앞으로 두고 볼 일이 아닌 것
같다."
"엄마, 비쨔는 곧 유명한 가수로 출세할 거예요.
엄마, 이 마리안나는 유명한 가수의 부인이 될
거라구요."
"일없다. 수천 명의 가수지망생 중에 제 밥벌이라도
하는 가수로 출세하는 사람 몇이나 된다구. 더구나
동양계를 누가 그렇게 좋아해주겠어."
어머니는 턱이 양어깨에 차례로 닿을 만큼 크게
도리질을 해보였다.
"엄마, 그게 아니래두요."
"일없어. 아버지도, 너희 오빠도 사실을 알면
가만두지 않으려 들거야. 내가 입 밖에 내지도 않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없었던 것으로, 알겠어?"
빅토르는 끝내 뾰뜨르 니콜라예브나의 뺨에 키스를
하지 못하고 서글프게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마리안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어머니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빅토르에게 온갖 수모를 겪게 하고
소득없이 돌아나오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미안해!"
"미안하긴, 나 때문에 어머니를 실망시켜드려 내가
죄송한 걸!"
"어머니는 상관없어. 내 힘으로 방도 얻겠어.
비쨔는 아무 걱정마."
마리안나는 결심을 굳혔다. 어머니를 설득하여
방이라도 한 칸 구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지금
그녀는 암담하여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어쩌랴.
"방은 내가 어머니께 말씀드려 볼게."
"정말?"
"어머니는 우리 사이를 결코 반대하지는 않았어.
그러니 도와주실거야"
"그렇게만 된다면 좋으련만."
"잘 될거야."
"그렇지만 최악의 경우도 상정해야 해. 노천에서
생활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제 우리는 헤어져 살 수는 없어. 알았지?"
"그래, 알았어."
빅토르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고, 아무 작정도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마리안나는 빅토르에게 위안이
되었다. 등을 비빌 만한 믿음직한 바람벽이 되었고,
매일 쳐다보는 하늘에서 발견하는 별들로부터 위안을
받듯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갈 곳이 없는 그들은 뽈리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뽈리나의 남자가 와 있다고 퇴짜를 놓았다. 왜
오늘 같은 날은 생일잔치도 없지. 르빈은 어딘가 외출
중이었고, 마이크는 마침 보리스와 함께 있다고 했다.
빅토르와 마리안나는 마이크네 집으로 갔다. 그들이
도착해 보니 보리스는 일이 있어 돌아갔다고 했다.
마리안나의 손에는 흘레쁘와 보드카 한 병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둘 다 굶주려 있었다. 뱃속에서는
계속 쪼르륵 소리가 옆에 있는 사람도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났다. 그들은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흘레쁘를 펼쳐놓고 뜯기 시작했다. 그들은 목구멍을
태울 듯한 보드카로 갈증을 달래며 흘레쁘를 뱃속으로
밀어넣었다.
"굶주린 하이에나 꼴이군. 마리나 어디 토마토라도
좀 내주구려. 저러다 빛도 보기 전에 세상 뜰라."
두 사람을 지켜보던 마이크가 그의 아내에게 외쳐
말했다.
마리나는 토마토와 차이를 내놓았다.
28. 시련의 나날
방. 한 칸의 방. 정분을 나누고 사랑을 키워가는
방. 가장 작은 단위의 삶이 영위되는 방. 있는
자에게는 평안을, 없는 자에게는 불안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방. 방이 제공하는 안락의 크기를, 방이
없는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느낄 수 없으리라.
혼자인 남녀에게는 방은 제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남녀가 둘이 만났을 때 방은 제 가치를 지닌다.
남녀가 만나는 최소한의 구비조건인 방의
소중함을...... 방을 생각할 때마다 빅토르는
고단함을 느꼈다.
집에는 자신의 방 한 칸이 있었다. 자신의
성장과정을 고스란히 보낸 정든 방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련해 주기는 했으나 온전히 혼자의 세계를
꾸려올 수 있었다. 어떤 외부의 간섭으로부터도
보호해 주는 안락한 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빅토르
혼자일 때의 것이었다. 마리안나와 둘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만남이 아니므로 그
방을 차지할 수 없었다.
마리안나도 마찬가지였다. 방 한 칸이야
못구하겠느냐고 큰소리를 쳤으나 어머니 설득에
실패하였고, 궁리 끝에 집으로 들어가 자신이
오랜동안 사용하여 자신의 체취가 배어 있는 자신의
방을 차지하려고 했으나 그것 역시 어머니가
반대였다. 마리안나 혼자가 아닌 빅토르와 짝을
지었을 경우 그 방은 내놓을 수 없다고 완강히 손을
내저었다. 두 사람의 막연한 기대가 무너지자
대책없이 그들은 무숙자로서 거리를 배회할 수밖에
없었다.
옛날과 달리 거리는 춥고 쓸쓸하였다.
마리안나는 낮에는 시간을 보내기가 용이했다.
서커스 극장에서 주어진 일을 하며 보내면 되었다.
빅토르도 낮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졸업을 앞둔 학교에 나가 빈둥거리거나
르빈과 어울려 음악연습을 하거나 아크와륨 그룹을
찾아가 기타나 치며 어슬렁거릴 수 있었다. 그러나
마리안나와 둘이 되는 밤이 문제였다. 빅토르
혼자서라면 레피노의 숲이나 해변에 가서 바다를 앞에
두고 파도의 노래를 들으며 밤을 새울 수도 있었다.
아니면 어디 북쪽의 호반을 찾아가 노래를 부르다
온다하여도 결코 마음 상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밤은 언제나 그에게는 따뜻한 반려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되어 방이 필요한 요즘 밤은 언제나 충만하고
자유스럽던 예전의 밤이 아니었다. 번민과 불만과
자학의 밤으로 바뀌었다. 생일 파티에 초대 받는 밤이
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록카페에 가서 무료로
노래불러주며 보내는 시간도 한정이 있었다. 르빈도
몇 번이나 방을 제공했고, 보리스도 몇 차례나 그의
집에 두 사람을 재우고는 했다. 그러나 늘 그런
신세를 지고도 뻔뻔스러울 수 있는 배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뽈리나의 방이 언제나 개방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이크네 아파트도 늘 찾아가
괴롭힐 수도 없는 일이었다. 빅토르와 마리안나에게는
방이 간절히 필요했다. 그러나 방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흐르고 날은 바뀌었다.
마침내 빅토르의 전문학교 졸업식날이 되었다.
그러나 빅토르는 졸업생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수학기간은 채웠으나 출석일수가 모자라고 성적이
미달되었다. 게다가 졸업논문 대신 제출해야 할 목각
제작물을 제출하지 않아 학교 당국에서는 졸업을
시키지 않았다. 그는 졸업장 대신 수료장을 받는 몇
안되는 학생 중의 한명으로 분류되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 서운함과 쓰라린 기분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었다. 강의실의 창문을 통해 졸업식이
거행되는 강당을 숨어서 멀리 바라보고 있던 그는
쓸쓸하게 강의실을 나왔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교정을 가로질러 학교를 나왔다.
세상은 자신의 뜻이나 희망과는 영 딴판으로
운행되었다. 세상은 자기 편이 아니었다. 항상 다른
사람의 편이었다. 이미 소외감에 익숙해 있던 터라
쓸쓸함이 덜할 법도 한데 그날은 영 담담해지지가
않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그날 저녁 마리안나와 만났을 때 그녀는 불안하게
물었다. 지난 어느 날도 고달프게 보내지 않은 날이
없었으나, 그날처럼 어두운 얼굴을 한 적은 없었다.
빅토르는 그날이 자신의 졸업식날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졸업도 하지 못하고 수료장 한장 달랑
받는 그런 쓸쓸한 날임을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왜, 내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했어?"
빅토르는 애써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 웃음은 한
모서리가 으깨진 어색한 것이었다.
"무슨 일 있었지?"
"아니, 무슨 일 있을 게 뭐 있어. 내게 요즘처럼
나쁜 일이 계속된 것으로도 모자라 또 무슨 몹쓸 일이
더 있겠어."
빅토르는 애써 명랑한 척 꾸몄다. 마리안나는
그러한 빅토르의 표정을 보자 더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했다.
"그래도 뭔가 내게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어."
마리안나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더 캐묻지는
않았다. 무엇인가 나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일도
있으리라는 짐작으로 마리안나는 입을 다물었다.
"뜨로삘로네 녹음실에서 보랴와 만나기로 했어.
오늘 한 곡은 녹음할 수 있을 거야."
빅토르는 꾸민 듯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내가 포도주 몇 병은 사갈 수 있어."
마리안나도 일부러 명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녹음실에서 노래를 취입할 때마다 떠들썩하게 술을
마시고 담배 연기를 자욱하게 내뿜던 그들의 모습을
상기했다. 그들은 언제나 개구장이들 같았다.
빅토르와 마리안나가 포도주와 담배를 사들고
녹음실로 가자 르빈이 먼저 와 있었다. 그들이 담배를
한대씩 피우고 났을 때 보리스와 쥬사가 함께
나타났다. 그들은 전기오븐에 올려진 붉은 포도주를
꺼내 미처 다 데워지지 않은 그것을 갈증 만난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마셨다.
그날 저녁 녹음할 노래는 공교롭게도
'건달들'이었다. 보리스가 타악기 까시오똔을 맡고
르빈과 쥬사는 베이스기타를 맡아 연주하였다.
밀폐된 녹음실로 들어간 그들은 녹음기기를
조작하는 뜨로삘로의 손짓에 따라 움직였다. 마침내
시작을 알리는 빨간등이 켜졌다. 그들은 연주를
시작했다. 아까 졸업식장에서 지펴진 빅토르의 가슴속
쓰라린 불꽃은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는
남모르게 속으로 눈물짓고 있었다. 그는 전에 없는
열정으로 '건달들'을 노래했다.
나는 언제나 혼자이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나는 희망도 없다
장차 무엇이 될지 알 수도 없다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어머니 저는 건달입니다
군중 속에서 나는 바늘처럼 떠돈다
나는 목적이 없는 사람이다
매일 흔들리며 놀 뿐이다
나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나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어머니 저는 건달입니다
"오늘 따라 한번도 정지를 안 시키다니 웬일이야?"
밀폐된 녹음실에서 나오며 보리스가 뜨로삘로를
향해 빈정거렸다.
"말투가 뭐 그렇게 꼬여 있나. 날 늘 정지만 시키는
사람으로 알았나보군. 그리고 또 내가 정지시키고
거듭 다시 연주하게 하는 것이 마치 일부러 애를
먹이려 그런 것처럼 생각했던 모양이군."
뜨로삘로는 톡 쏘아부쳤다.
"늘 그러잖아. 한 곡 취입하려면 며칠씩 다시, 다시
부르짖는 것으로도 모자라 짜증에다 화에다 요란을
떨었잖아."
"그거야, 제대로 되지 않거나 실수를 하면 몇
번이든, 며칠이든 다시 해야잖아. 노래란 팬들의
마음에 들도록 녹음해야 하는 거 아냐?"
"그렇긴 하지만."
"보랴도 다음 녹음 할 때는 오늘 비쨔처럼만
열정적으로 불러봐. 내가 다시 하라고 하나."
"그래, 나도 그 점은 인정하지."
보리스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서 그는 불끈
주먹을 쥐고 빅토르의 가슴을 내질렀다. 갑작스런
보리스의 주먹 공격을 받은 빅토르는 윽, 숨을
들이키며 주저앉았다. 그것은 그들 비트족들 사이에
통용되고 있는 일종의 애정표시와 다름없는 짓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 주먹은 너무 심했다.
얼굴빛이 핼쑥해진 빅토르는 가슴을 쓸어안고
주저앉았다. 마리안나는 빅토르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그러나 웃음띤 얼굴로 보리스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과격하다 해도 그것이 애정표시이므로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상대가 보리스가 아닌가. 등을
두드린다, 가슴을 쓰다듬는다, 한동안 소란을 피운
끝에 빅토르는 간신히 호흡을 고르고 안정을 찾았다.
"날 죽이고 무슨 이익 챙길 게 있다고 주먹을
그렇게 세게 내지릅니까?"
"이미 내 자리를 위협하고 있는데 곱게 보일 리
있겠어!"
보리스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실컷 도와주고서 이제 와 후횝니까?"
"글쎄 말이다. 그래서 인간이란 우스운 존재라 한
모양이지!"
보리스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빅토르는 포도주를 받아 마시고 안정을 찾았다.
뜨로삘로는 다음 곡 녹음에 들어가자고 했다.
'건달들'과는 달리 다음 곡 '일렉트릭치카'는 쉽게
녹음되지 않았다. 보리스의 말대로 뜨로삘로는 다시,
다시를 열 번, 스무 번도 더 부르짖었다. 나중에는
보리스가 짜증을 내고 말았다.
"몇 마디 칭찬이 이번에 이런 고통으로 되돌아올 줄
몰랐군!"
까시오똔을 냅다 팽개치며 보리스가 투덜거렸다.
"공연한 투정 집어치워. 아까 건달들은 보컬과
퍼스트기타, 베이스기타, 그리고 까시오똔이 놀라울
만큼 조화를 이뤘었어. 그런데 이번 노래는 기타
따로, 까시오똔 따로, 노래 따로 노니 녹음하는 내가
어떻게 하겠어."
"알았어, 알았어. 그럼, 한번만 더 해보자구."
그들은 다시 녹음실로 들어갔고 다시 연주를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뜨로삘로는 정지신호를 보냈다.
"대충 맞아들어간 것 같은데 또 왜 그러시나?"
"대충 맞아들어간 것 같애? 대충으로 만족할 거야?
비쨔한테 무슨 원망 들으려구."
보리스가 아무리 짜증을 내도 뜨로삘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시, 가자고 말했다. 새벽 두 시를
넘기고도 뜨로삘로의 마음에 흡족한 녹음을 하지
못하고 그들은 지쳐떨어지고 말았다. 포도주도 다
마셨고, 담배도 떨어졌다. 그날 밤, 빅토르와
마리안나는 다른 잠자리를 구하는 어려움을 겪지 않고
뜨로삘로의 녹음실에서 보냈다.
며칠 후, 록그룹회관에서 KINO 그룹 연주회가
열렸다. 그 연주회는 록클럽의 정기 초청공연이었다.
공연 절차는 일반적이었으나 공식적인 공연은
처음인 빅토르와 르빈에게는 긴장된 순간순간을
보내야 했다. 프로그램은 빅토르와 르빈이 보리스와
의논하여 짰다. 50분짜리 공연 스케줄이었다. 공연
전날 그들은 록그룹회관에 가서 그들이 부를 노래를
심의위원들 앞에서 연주해야 했다. 록 클럽에 문의를
해본 결과 록 클럽의 심의를 거치지 않은 노래를
부르다 정보요원이나 경찰에 적발되면 공연중지는
물론 응분의 처벌을 받게 되어 있다 하였다.
심의란 의례적인 것이어서 별 까다로운 지적은
없었다.
록 클럽 초청공연 날, 빅토르와 마리안나와 르빈은
나란히 록그룹회관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갱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분장실에서 화장을 하고
있으니 보리스와 판께르, 쥬사 등 아크와륨 그룹
멤버들이 도착했다.
"야, 비쨔, 넌 하얀 가면을 쓴 것같구나!"
보리스는 마리안나가 하얀 분가루로 얼굴을 뒤덮듯
분장시킨 빅토르를 쳐다보며 배를 움켜잡았다. 옷도
너덜너덜한데다 그런 우스꽝스런 분장을 한 모습이
아무리 펑크족이라 해도 너무 하지 않았나 여겨졌다.
르빈의 분장도 우스꽝스럽기가 빅토르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보리스도 무대 분장을 남다르게 하는
편이었으나 빅토르나 르빈의 분장은 너무
이색적이어서 황당할 지경이었다.
"마리안나가 분장을 맡았어요 재밌잖아요?"
"그래, 어쩐지 공중곡예사같다 했더니, 암튼 특색이
있으니......."
보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4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 객석은 그 반도
차지 않고 썰렁했다.
마침내 꼴랴 미하일로비치가 청중들을 향해 공연
스케줄을 소개했다. 처음 KINO 그룹에 이어 아우
그룹과 쓰윈 그룹이 공연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KINO 그룹은 이번이 최초의 공식적인 공연이므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내달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보리스는 녹음기를 안고 무대 한 구석에 숨어
있었고 판께르는 타악기를 담당하고 쥬사는 무대
왼쪽에 베이스기타를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마이크는
손등과 발을 덮는 긴 옷을 입고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쓰고 피아노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빅토르와
르빈은 긴장된 순간을 맞았다.
꼴랴 미하일로비치의 소개가 끝나고 막 뒤로 그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아주 높은 단말마적인
비명소리가 무대를 뒤덮었다. 예정된 쥬사의
헤프닝이었다. 쥬사의 목소리는 매우 높았고 길었다.
여름밤 하늘에 길게 꼬리를 늘이며 흘러가는 유성처럼
쥬사의 비명소리는 무대를 가로질러가는 동안
계속되었다. 마이크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자
빅토르와 르빈과 판께르가 연주를 시작했다. 긴장
탓인 듯, 빅토르의 노래는 무거웠다.
저녁은 언제나 기대보다 더 느리게 찾아온다
아침이 오면 밤은 별을 데리고 사라진다
나에게 밤이 마감되고, 낮이 시작된다
스물네 바퀴여 물러가라, 스물네 바퀴여 물러가라
나는 언제나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다
빅토르는 쉴새없이 튀어오르거나 뛰어다니며
광란하듯 노래했고 르빈도 빅토르에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몸을 비틀거나 뛰어다니며 연주했다.
판께르는 있는 힘을 다해 드럼을 두드리며 무대를
광란의 도가니로 만드는데 공헌했다.
청중들은 한동안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낯익은
하드록도 아니고, 록클럽 공연장에서 보아왔던
전통적인 록 음악도 아닌 KINO 그룹의 파격적인
무대를 바라보며 의아해하는 눈치들이었다. KINO
그룹의 이질적이고 파격적인 공연을 지켜보고 있던
청중들은 30분쯤 지나자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노래가 한 곡씩 끝날 때마다 박수를 쳤고
잘한다는 환호성도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도 많은
숫자의 반응은 아니었다. 청중의 3분의 1쯤이 그런
반응을 보였다.
마지막 '너는 언젠가 비트팬이었다'를 연주할
때였다. 거의 벌거벗다시피한 보리스가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어깨걸이북을 힘껏 치며 무대를 몇
차례 왕래하였다. 그리고 청중들에게 낯익은
마까레위치가 무대로 튀어나와 빅토르를 거들었고
쓰윈도 한떼의 젊은이들을 몰고 무대로 뛰어들었다.
피아노를 치던 마이크는 줄무늬의 티셔츠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황금빛 섹스폰을 목에 걸고 나와
반주를 했다. 그들에게 낯익은 보리스와 마이크,
마까레위치 등이 등장했기 때문일까, 청중들은 비로소
전체가 한덩이가 되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박수를
치거나 환호성을 질러댔다. KINO 그룹의 공연은 매우
파격적이었고 이질적인 것으로 청중들에게 기억될
장면들을 연출해 보였다.
KINO 그룹이 공연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올 때 꼴랴
미하일로비치는 당황한 목소리로 청중들에게 해명하기
바빴다.
"KINO 그룹은 우리에게 야단스런 영화 한 편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록 음악은 이처럼 다양하다는
점을 청중 여러분께서는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빅토르와 르빈은 전신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그들은 탈진하였고 청중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았던 것에 마음이 쓰여 내심 고통을 겪고
있었다.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마. 우리 아크와륨도 3,4년
고전 끝에 겨우 일어섰거던."
보리스는 의기소침해 있는 빅토르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며 격려했다.
왜 신은 연약한 사람에게 이토록 심한 시련을
내리는 것일까. 자기 눈에 좀 덜 찬 사람일지라도
너그럽게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며 행운의 편린이라도
누릴 수 있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왜 신은 항상
인색할까?
마리안나의 위로도 그날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시 빅토르에게 정말 되는 일이란 하나도 없었다.
그 무렵 빅토르에게는 밤이 가장 무서웠다. 전에는
그에게 있어 밤은 창조적인 시간이었다. 그는 밤이면
시를 짓고 그 시에다 곡을 붙이는 작업으로 충만하게
보내고는 했다. 밤은 그에게 늘 어깨동무를 하고
뛰어노는 가장 다정한 친구같았었다. 하기야 그때는
그에게 방이 있었다.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그 소유의 방이 있었다. 어느날 그
방을 잃은 다음부터 그에게 밤은 고통의 대상이 된
것이었다. 밤이 온전히 옛날 모습으로 되돌아오려면
먼저 방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할 것이었다. 이제 두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방을 소유할 수 있어야,
예전의 밤이 되돌아올 것이었다.
빅토르에게서 쉽사리 시련이 떠나지 않는 것은 그
자신에게 책임의 일단이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행운이 될 수 있는 조건이
그에게는 행운의 조건이 되지 않는데 시련과 불행이
있다.
사회는, 그리고 그 사회제도는 그 사회를 사는
사람들이 영위하는 삶과 연관된 많은 직업을 제공하고
있다. 제각기 적성에 맞는 직업을 갖게 되고, 그
직업에 묵묵히 종사하며 톱니바퀴처럼 자기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소득을 얻고, 그 소득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문화적 수요에 필요한 지출을
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제도가 만들어놓은
직위나 질서를 인정하고 거기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지며 스스로 만족하는 습관을 기른다.
그러나 빅토르는 사회가 제공하는 이미 만들어진
어떤 직업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 직업에 종사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빅토르의 만족을 위해
만들어진 사회제도상의 직업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직업을 스스로 개척해 가야만 했다.
그의 시련과 불행은 바로 거기에 연유한 것이었다.
예컨대 에카테리나 궁전의 일만해도 그렇다.
에카테리나 궁전의 일을 이야기하기 전 먼저 밝혀둘
것은, 하기야 그에게도 작은 행운이 없지는 않았다.
그들은 록 클럽 정기공연을 마치고 뜨로삘로네
녹음실에서 KINO 그룹 제1집의 녹음을 마쳤었다.
그 앨범은 'KINO 45'로 이름지었는데, 그렇게 이름
지은 데는 다른 특별한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펑크들의 특징이랄 수 있는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생각이 그 작명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KINO의 제1집이라는 평범한 이름 대신 붙은 45란
숫자는 그들의 연주시간이 45분인 데서 연유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약 두 달에 걸쳐 그
녹음을 완성한 것이었다. 그들의 그 녹음에는 그들이
지닌 혼신의 열정과 음악에 대한 광적인 애착이
녹아들어 있었다.
그들이 'KINO 45'의 녹음을 마치고 얼마 있지
않아서였다.
제61 기술전문학교로부터 빅토르에게 연락이 왔다.
에카테리나 궁전에서 목각수 추천 의뢰가 왔으니
학교로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어머니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빅토르는 학교로 갔고, 학교에 가서 다른
두 명의 학생과 에카테리나 궁전의 목각수로 추천되어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61 기술전문학교 졸업생
중 목각전공자가 가장 선망하는 직장이라면
에르미타주 박물관, 에카테리나 궁전, 파블로프스크의
대궁전이 차례로 꼽힐 것이었다. 그러므로 빅토르가
에카테리나 궁전에 추천된 세 명의 학생 중에
끼였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고 그에게는 큰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각 전공의 졸업생이
50여명이나 되는데, 에카테리나 궁전이라면 으레
졸업생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졸업생을 추천해야
온당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업도 하지
못한 수료생을 추천한 학교당국의 조치는 매우
이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 목각 담당
루드밀라 이바노브나 자르꼬바 선생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그런 특별한 조치가 취해졌다는 사실을 빅토르는
알게 되었다.
루드밀라 선생이, 에카테리나 궁전같은 중요한
자리에 능력이 모자란 학생을 보내 제61
기술전문학교의 이미지를 훼손시킬 경우 다음
후배들에게 그런 의뢰가 들어오겠느냐는 논리로
교장을 설득, 비록 졸업은 하지 못하고 수료한 것에
그쳤으나 능력있는 빅토르를 보내자는 주장을
관철시켜 이루어진 일이라 하였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마리안나는 빅토르가 여간
대견하고 자랑스럽지 않았다. 마리안나는 이미 그가
그린 유화와 수채화를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이 그림을
전공한 예비화가였던 마리안나의 눈에도 빅토르의
유화나 수채화가 독특한 자기 세계를 가진 것으로
보였다. 구도며 형체가 정연하고 아름다운 것보다
원색을 피한 마띠엘 효과를 백분 발휘하고 있는
유화들의 색감은 어딘지 어둡고 쓸쓸해 보이지만,
빅토르의 노래가 그러하듯 영혼과 교감하는 듯
신비하고 율동적이었다. 그의 목각도 마리안나의
눈에는 예사 솜씨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어떤
물체의 모형을 조각한 것도 그 물체를 그대로
모사하지는 않았다. 형체를 부수고 비틀고 재구성하여
자기 개성을 심어놓았다. 언젠가 다섯 개의 발가락이
달린 목각 재떨이가 있었는데 그 발가락 다섯 개가
모두 남자의 성기로 되어 있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었다. 그의 익살이 목각 작품에 그렇듯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목각 작품들 중에는 긴옷에 머리를
정수리에서 묶은 독특한 동양적인 인물들의 작품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마리안나는 빅토르가 에카테리나 궁전에 취직하는
과정에서 그가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수료만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의례적인
졸업보다 수료가 더 매력적인 것으로 생각되었고 그의
그림과 목각들이 전에 없이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루드밀라 선생의 그렇듯 눈물겨운 노력으로
에카티리나 궁전에 일자리를 갖게 된 빅토르는 처음
며칠 동안은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그 만족감은 불만과 부담감으로
바뀌었다. 다른 목각 전공의 졸업생에게라면 그보다
더한 행운은 없으리라 생각했을 에카테리나 궁전의
일자리가 빅토르에게 부담과 불안감을 안겨준 것은
다른 까닭 때문이 아니었다.
그도 그런 자리에 추천된 것이 얼마나 영예로운
사실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에카테리나
궁전에 출근을 한 빅토르는 이내 그만두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집에서 출근하는 시간이 무려
두 시간이나 소요되었고, 일하는 시간에는 잠시
한눈을 팔 수도 없었다. 퇴근시간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다. 직구장은 엄격했고 마음내키는 대로 밤
여덟 시까지도, 열 시까지도 붙들어두기 일쑤였다.
마리안나에게 돌아가면 열두 시가 넘어있기 예사였고
몸은 피로에 지쳐 있기 마련이었다. 에카테리나
궁전에 출근하면서 다른 대안이 없어 뽈리나의
아파트에 얹혀 살기로 했는데, 마리안나와 지낼 수
있는 시간도 모자랐고, 빅토르를 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은 노래를 연습할 시간이 없는 것이었다. 당장
그만두고 싶었으나,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이례적으로
추천해준 루드밀라 선생의 배려를 생각하면 쉽게 그럴
수가 없었다. 루드밀라 선생뿐만이 아니라 모처럼
아들에게 환한 미소를 던졌던 어머니의 실망 또한
얼마나 클 것인가. 거기에다 모처럼 반듯한 직장을
가짐으로서 마리안나에게 얼마나 떳떳한 존재가
되었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쑥들어가 버리고는 했다.
그러나 그만두어야 되겠다는 충동이 일어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빅토르는 두 달 가량 에카테리나 궁전에 출근을
했다. 그리고 아무 통고도 없이 어느날부터 출근을
하지 않았다. 에카테리나 궁전의 직구장도, 루드밀라
선생도, 그리고 어머니도 그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는 직장으로부터 부모로부터 영영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에카테리나 궁전에 출근을 단념한 그는 오랜만에
평안을 느꼈다. 루드밀라 선생의 실망도 어머니의
실망도 그의 자제력을 유지시키지 못했다. 그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고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자유롭게 행동하고 싶었다. 노래는
그런 속에서만 창작할 수 있었다. 전혀 구속받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만이 노래를 짓고 부를 수 있다는
깨달음이 그에게서 루드밀라 선생의 그리고 어머니의
실망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에카테리나
궁전의 일자리는 사회가 마련해둔 좋은 일자리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빅토르에게는 도리어 방해가
되었고 노래창작에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빅토르는 에카테리나 궁전에 결근하는 날 르빈과
모스크바로 떠났다. 마리안나도 동행했다. 르빈의
친구 알렉세이 리젠코의 초청공연간 것이었다.
초청공연이라지만 무명의 그들에게 출연료 같은 건
없었다. 마리안나는 에카테리나 궁전에 출근하지 않고
모스크바 공연을 떠나는 빅토르에게 그러나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다만 모스크바 공연에 필요한 것들을
묵묵히 준비하였다. 기차에서도 또 모스크바에서도
빅토르는 결근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리안나는 침묵하는 그에게 굳이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알렉세이 리젠코의 초청공연은 공식적인 허가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어느 아파트의 지하실에서
펑크들과 비트팬들을 모아놓고 공연하는 지극히
사사로운 작은 연주회였다.
지난번 레닌그라드 록그룹협회의 정기공연 때처럼
마리안나가 출연자들의 분장을 특색있게 해주었다.
옷도 펑크족들의 취향을 잘 나타냈고 얼굴에 분과
립스틱과 눈썹연필로 치장, 기묘한 모양을
만들어냈다.
모스크바의 낀체프와 쎄브추크도 함께 공연하게
되었다. 르빈과 빅토르는 준비한 프로그램을
공연하였다. '일렉트릭치카' '나무' '그는 언젠가
비트팬이었다' '건달들'을 차례로 연주하였다.
청중들은 그들의 기호에 적중했던지 처음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요원이다!"
다시 한 곡을 새로 부르려던 빅토르는 출입구의
다급한 외침소리에 멈칫 당황했다. KGB 요원의
내습이라는 것이었다.
정치적인 목적의 모임뿐만 아니라, 어떤 모임이든
열 사람 이상 모이는 대중집회는 반드시 당국의
허가를 받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중음악집회는 허가가 잘 나지 않았다. 열
건의 신청을 내면 겨우 한 건 정도의 허가가 날까말까
하였다. 그렇듯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공연허가를
받아내느니 몰래 지하실 같은 데서 오늘밤처럼
공연하는 것이 록그룹들로서는 청중들과 접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비밀 공연은 수시로 열리고는 했다.
알렉세이 리젠코는 당황하지 않았다. 낀체프도 별로
서두르지 않고 기타와 드럼을 챙기고 있었다. 그러나
빅토르와 르빈은 허둥거리고 있었다. 마리안나는 아예
사색이 다 되어 빅토르의 팔을 잡았다.
"자, 여러분 침착하십시오."
알렉세이 리젠코가 말했다.
"손님들께서는 앞문으로 천천히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리젠코는 손님들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르바, 빨리빨리 움직여. 저 뒷문으로 나가면
계단이 있을 거야. 그 계단은 큰길로 이어져 있어,
어서 그쪽으로 빠져 나가라구."
리젠코는 손님들에게 했던 말투와는 달리 낮으나
힘주어 재촉했다. 레닌그라드 친구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뒷문을 통해 곧 큰길로 나왔다. 그들은 정신없이
줄행랑을 놓았다.
다행히 한 사람도 KGB 요원에게 붙잡히지 않았다.
이번 모스코바 공연은 마지막 순간의 줄행랑과 차표를
끊지 않고 무임승차한 기차에서 이리저리 도망다니며
가슴 졸였던 순간순간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으리라.
29. 미장공이 되다
1982년, 그해 일년 동안 빅토르와 마리안나에게는
시련이 그치지 않았다.
시련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두 가지에 다
닥쳐왔다.
에카테리나 궁전의 일자리를 팽개치고 모스크바
공연을 다녀온 빅토르와 마리안나는 곧 크림 반도로
여행을 떠났다.
빅토르는 막연히, 그리고 충동적으로 레닌그라드를
벗어나고 싶었다. 빅토르에게는 낮이면 나갈 직장도
없고 밤이면 잠잘 곳도 마땅치 않았다. 레닌그라드의
모든 거리와 건물과 동상 같은 조형물들과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는 아무 상관없이
지나가는 자동차마저도 자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눈만 들면 사방에 숨어 있던
적들이 키를 세워 덤벼들 것 같았다. 눈을 부릅뜬
살벌한 적들에 둘러싸여 전전긍긍하느니,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마리안나는 얄타로 튀자는 빅토르의 제안을 받고
번민에 사로잡혔다.
지난 모스크바의 연주여행 때의 3일간의
무단결근으로 극장측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다. 어떤
질책도 달게 받을 각오를 하고 나간 마리안나에게
총지배인격의 인민배우 올레그 뽀뽀브는 새로운
프로그램 개발의 과제를 맡겼다. 의상담당자에게
프로그램 개발이라니, 늑대에게 밤하늘의 달을
따오라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새로운 프로그램 개발이란 서커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단원이 기존의 한
가지 기술을 능난하게 공연할 수 있도록 몸에
완벽하게 익히기까지는 일년, 이년의 오래고 고된
훈련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능력이란 한계가 있어서 인간능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서커스 기술개발이란 이미 할 만한
것은 다 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서커스 단원들에 의해 개발 가능한 모든
기술은 이미 개발되어 공연되고 있으며 따라서 새로
개척할 어떤 기술도 이제 남아있는 것은 없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따라서 프로그램의 변형은 자주
되풀이 되지만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새로운
기술개발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개발이란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고도의 전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리안나에게 새로운 프로그램 개발의 과제를
맡기다니, 그것은 분명 처벌의 성격이 강한 조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입장에 놓여있는 마리안나에게 빅토르가
크림 반도로의 여행을 제안해온 것이었다.
하루 이틀, 말없이 번민에 싸여 지낸 마리안나는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크림 반도로의 여행을
결심했다.
서커스 극장과 빅토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기로에
놓였을 때 마지막으로 선택해야 할 쪽을 그녀는
신중하게 고려했고, 그리고 다소 비장한 기분으로
크림행을 선택했던 것이다. 크림반도로의 여행은 즉
서커스 극장을 포기할 마음의 준비를 한 것과
다름없었다. 높은 수준의 급료와 남이 부러워하는
안정된 직장인 서커스 극장을 포기하고나니
마리안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얄타에서 지내는 동안 마리안나는 빅토르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애를 썼다. 여행을 즐기는
표정을 지었고, 푸른 잉크라도 쏟아놓은 듯 짙푸른
흑해를 바라보며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포기는 했으나 레닌그라드의 일이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얄타 시내를 벗어나 아루프카 언덕에서 바라본
흑해는 마치 꿈속의 풍경같았다. 브론초프 백작 궁전
테라스에 앉아 빅토르는 말했다.
"난 저 바다처럼 살 거야."
햇빛을 받으며 에메랄드빛 융단처럼 반짝이는 해면
위로 바람이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가고 있었다.
"저 바다는 내가 모르는 어떤 먼 세계로 이어져
있을 거야."
빅토르는 그렇게 말하며 마리안나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이 떨리고 있음을 마리안나는 감지했다.
"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처럼 내 삶은 한없이
펼쳐져야 해."
마리안나는 빅토르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바다는 볼 때마다 나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아.
그래서 달려오고 싶었어."
마리안나는 빅토르를 따라나선 것을 열 번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 마음이 썩 밝은 것은
아니었다.
텐트를 치고 보낸 마지막 사흘간의 해변 생활은
그녀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가슴속 깊이
아로새겨졌다. 특히 발 아래 바위를 끊임없이 되풀이
할퀴며 철썩이는 하얀 파도와 햇빛에 반들거리는
눈부신 바다를 배경으로 부른 빅토르의 노래 '파도의
멜로디, 바람의 멜로디'는 너무너무 인상적이었다.
파도가 모래 위의 흔적을 지우는 것을 나는 본다네
바람이 자기만의 신비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나는
듣는다네
나뭇가지들이 그들의 현으로 반주하는 것을 나는
듣는다네
파도의 멜로디 바람의 멜로디
이곳에서는 아스팔트의 기억은 사라진다네
이곳에서는 자동차의 기억도 사라진다네
이곳에서는 높이 솟구치는 물보라를 봐야 한다네
파도의 멜로디 바람의 멜로디
갈 곳 잃은 누군가를 회상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웃으며 노래불렀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점점 더해오는 한기를 느끼며 사랑을 회상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파도의 멜로디 바람의 멜로디
"나는 무슨 코라도 꿰어져 끌려가는 기분이야."
빅토르는 마냥 얄타에 눌러 있으려 했다.
마리안나의 채근에 마지못해 레닌그라드행 기차에
오른 빅토르는 풀 죽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래도 레닌그라드는 우리 삶의 터전인걸 어떻게
해."
"그럼 마음은 코발트빛 흑해에 두고 몸만 회색빛
레닌그라드로 돌아가는 것으로 해야겠어."
사람의 생활이란 자신의 이상과 희망만으로
영위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회있을 때마다
느끼고는 했으나 영영 떠나고 싶지 않은 흑해에
머루를 수 없는 현실이 왜 그토록 원망스러운지.
빅토르는 사람의 생활이란 자기 마음대로,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아픈
사실을 얄타를 떠나면서 또한번 뼈아프게 느껴야
했다.
빅토르에게, 크림 반도는 이상이고 레닌그라드는
현실과 같은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크림 반도의
기억은 끝없이 달콤하고 레닌그라드의 현실은 늘
쓰라렸다. 그는 달콤한 이상을 등지고 쓰라린 현실로
곤두박질쳐졌다.
레닌그라드로 돌아온 빅토르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욘 직업알선소를
뻔질나게 드나든 끝에 그는 겨우 레닌그라드 공원
건설 트러스트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 곳에는
목각공 일자리가 있기는 했으나 빅토르에게 그의
전공을 살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벽이나 천정을 수리하는 미장공자리가 주어졌다. 그
자리도 마다할 형편이 아니어서 그는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 저녁 늦게 돌아오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마리안나는 서커스 극장에서의 해고를 각오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인사를 할 생각으로 올레그
뽀뽀브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 어디 갔길래 전화 한 통 없었어?"
올레그 뽀뽀브는 예상과는 달리 반가워하는
음성이었다. 마리안나는 얼른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새로운 프로그램 개발을 부탁했더니 지레
겁먹고 어딘가 멀리 달아났던 모양이지."
올레그 뽀뽀브는 공연히 너털웃음까지 터트렸다.
마리안나는 역시 입이 떨어지지 않아 꿀먹은
벙어리처럼 묵묵히 있었다.
"어서 돌아와. 그동안 단원들 유니폼 관리가 엉망이
됐다구. 마리안나가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이
모양이니 원."
매사에 완고한 올레그 뽀뽀브가 아쉬운 소리를 다
하고, 마리안나에게는 예상하지 않았던 반응이었다.
마리안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듣고 있는 거야?"
"예."
"내일부터 당장 나와서 우리 단원들을 좀
돌봐달라구. 알았어?"
"예, 알았어요."
마리안나는 그 말 한마디만으로 전화를 끊었다.
각오했던 것과는 달리 서커스 극장에서 해고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리안나는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임에도 그래지지가 않았다.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마음은
왠지 더 어두워졌다. 무엇인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 해야 할 일을 방해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음날부터 마리안나는 다시 서커스
극장에 출근하였다.
레닌그라드의 장마철인 늦여름은 언제나 척척하고
울적했다. 그 여름의 끝에 그들의 숙원 한가지가
풀렸다. 그들에게 방이 생긴 것이었다. 빅토르의
어머니 발렌치나가 봉기 광장 부근에 방 한 칸짜리
아파트를 얻어주었다.
그들의 방황은 이제 끝난 것인가. 무숙자로서의
방황이 병균처럼 영혼을 갉아대던 그 불안한 세월이
이제 정말 막을 내린 것인가. 아파트 공사장으로 몰래
숨어들 때의 그 많은 불안한 밤들. 하룻밤을 지낼 수
있는 장소를 궁리하며 지하철 역 벤치에 앉아
오고가는 전동차들을 지켜보고 있을 때의 그 막막한
기분들. 간신히 없는 용기를 짜내 찾아간 친구들 집
초인종을 누를 때의 그 저주스런 자신의 처지. 이런
것들로부터 정말 자유스러워질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하룻밤을 지낼 수 있는 방을 가진 사람들의
행운을 부러워하던 것도 이제는 다 지나간 추억이 된
것인가.
자신들의 방을 확인한 빅토르는 만감이 교차하였다.
방이 생기고 나자 오랜동안 고달팠던 밤이 다시
예전처럼 달콤한 과즙이 흐르는 그런 풍성한 밤으로
바뀌었다. 빅토르에게는 다시 창작의 불꽃이 타올랐고
세상의 따뜻한 손길을 무한히 느끼게 되었다.
그가 다니는 레닌그라드 공원 건설 트러스트에서의
일은 그에게는 여간 힘들지 않았다. 모래에 시멘트를
넣고 이겨야 하고 그것을 나르거나 직접 흙손으로
벽을 바르기도 해야 했다. 가을바람 탓인지 시멘트가
묻은 손등은 금방 쩍쩍 갈라져 피가 났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직장에서는 맡은 일을
열심히 해냈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밤늦도록 시를
짓고 노래 연습을 하였다. 어떤 날은 르빈과 보리스
등을 불러 함께 붉은 포도주를 마시며 밤늦게까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방을 갖게 되자 그는 모든
일에 자신감을 되찾은 듯하였다.
곪은 손가락 때문에 일을 더 계속 할 수가 없었다.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다니기는 했다. 그러나
약품이 떨어져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얼른 낫지
않았다. 곪은 손가락 때문에 일찍 퇴근해 병원을
다녀온 날 밤이었다.
빅토르는 밤을 꼬박 새워 새로 노래를 한 곡
지었다.
날이 밝자 그는 일터로 나갔고 그날도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일찍 귀가했다. 마리안나가 집에
도착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였다. 보리스와 류다
부부와 마이크가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포도주를 한
보따리 든 르빈과 판께르도 곧 모습을 드러냈다.
쥬사는 보드카 두 병을 보물처럼 싸안고 조심스럽게
나타났다.
방 한 칸과 부엌 한 칸의 작은 공간에 사람들로 꽉
메워졌다.
마리안나는 토마토와 오이절임을 내놓았고 삐로그도
준비했다.
붉은 포도주는 오븐에 데워지고 작은 공간은 삽시에
담배연기로 가득찼다. 드디어 빅토르가 기타를
들었다. 그는 사랑스런 여인을 안듯 기타를 품에
안았다. 그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손놀림으로 기타의
현을 조율했다. 그의 손은 퉁퉁 부어 있었고, 어떤
손가락은 아직도 곪아 있었다.
잠깐 침묵이 깔렸다. 그 침묵은 높은 기타 소리에
곧 유리조각처럼 부서졌다. 빅토르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노래였다.
그는 간밤에 지은 노래를 친구들에게 처음 소개했던
것이다.
밤은 짧고 목표는 멀다
밤이면 갈증이 더 인다
부엌에 나가 물을 마시지만 한없이 쓰다
너는 여기서 살 수도 없고
너는 여기서 살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마지막 영웅 안녕
너의 친구들도 안녕
너는 홀로 있기를 원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너는 혼자 남기를 원하지만
어찌 혼자 남을 수 있겠는가
너의 짐은 가벼우나 손은 마비되어 있고
너는 트럼프에 매달려 긴밤을 샌다
마지막 영웅 안녕
너의 친구들도 안녕
아침이면 너는 서둘러 떠난다
전화벨은 앞으로 부르는 명령같다
너는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떠난다
너는 떠나지만 너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 영웅 안녕
너의 친구들도 안녕
마지막 영웅 안녕
부엌에서 그 노래를 듣고 있던 마리안나는 저도
모르는 사이 눈물을 흘렸다. 빅토르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꾸밈없이 노래로 표현하고 있었다.
밤이면 일을 하고 싶고, 일을 시작하면 갈증만 생기고
마음은 일을 향해 바쁘지만 손은 굳어있고, 어쩔 수
없이 안타깝게 트럼프에 매달려 밤을 새운다. 그리고
날이 새면 또 가고 싶지 않고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일터로 달려나가야하고, 마리안나는 빅토르의 내면을
환히 들여다본 것 같았고 따라서 그의 고통이
그녀에게 전이되어 가슴을 에이는 것 같았다.
"전에 들어보지 못한 스타일이군!"
보리스 그레벤쉬코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더 어둡고 애절해진 것 같잖아?"
판께르가 보리스의 뒤를 이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기 자신을 냉소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도
그렇고."
마이크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나는 좋은데."
보리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나도 나쁘다고는 하지 않았어."
마이크의 대답이었다.
"록큰롤의 기원이야 원래 블루스에서 찾아지는 것
아니던가. 현실을 아무 꾸밈없이 이렇듯 진솔하고
평범하게 그리면서도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쉽겠어."
보리스는 마이크를 쳐다보며 말했다. 마이크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평범한 것을 감동으로 승화시키는 재능, 비쨔는
매우 귀한 재능을 타고났어!"
"그래, 평범한 것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기술,
그게 예술이겠지."
마이크는 보리스의 의견에 동조하고나서 천천히
포도주를 마셨다.
"한번 더 들려줄 수 있겠어?"
보리스의 재청을 받은 빅토르는 아까보다 더
신중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올릴 뿐 좌중은 모두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보리스가 아까의 의견을 다시
강조했다.
'나의 친구들'이나 '8학년 여학생' 같은 노래는
어딘가 설익은 냄새가 풍겼는데 이번 '마지막 영웅'은
아주 세련되고 잘 익은 것 같다!"
보리스는 빅토르의 가수로서의 재능을 거듭
확인했다는 말로 그 노래에 대한 의견을
마무리지었다.
손님들을 다 배웅하고 났을 때 마리안나는 말없이
빅토르를 포옹했다.
"축하해요."
빅토르는 민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나도 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동을 받았어요. 아까
비쨔 노래 들었을 때 나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미처 알지 못해 류다한테 그만 눈물을 들켰다구요."
"뭘, 아직도 멀었어. 더 두고 많은 손질을 해야 할
거야."
"아까 보랴는 그것으로서도 매우 대단한 것이라
했잖아요."
"보랴는 장점만 보고 약점은 안 본 것 같애.
약점투성이야. 게다가 보랴는 내 곪은 손이 측은해
공치사를 늘어놓더군."
"그게 보랴 좋은 점 아니던가요. 그리고 마이크도
좋다고 했고. 나도 좋았어요."
"그래, 하지만 거친 데를 손질하고 나면 더
좋아지게 될거야."
빅토르는 손을 치료하고 잠자리에 들자는
마리안나의 청을 거절하고 다시 기타를 들고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들지 않은 대목에
손질을 가했다. 그를 잠자리로 끌어들이는데 실패한
마리안나는 결국 혼자 잠자리에 들고 말았다. 그리고
마리안나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빅토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짤막한 메모를 남겼는데 먼저 일터로
간다는 내용이었다. 시계를 보니 여덟 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30. 다시 모스크바로
어느새 가을이 되었다. 몇 달 지나는 동안 흙손
잡는 솜씨는 많이 나아졌다. 그러나 날씨가
쌀쌀해지자 미장이 일은 힘이 들었다. 바람에 시멘트
가루가 날려 눈에 들어가는 것도 참기 어려웠고 벽을
바르다 콘크리트 버무린 것이 살갗에 묻기라도 하면
그곳은 트고 쓰렸다. 차츰 빅토르는 미장이 일에
싫증이 났다. 기분같아서는 당장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러나 에카테리나 궁전의 일자리를 차던져 버린데
대해 회개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꿋꿋이 버텨왔었다.
어쨌든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 아닌가.
그러던 어느날, 르빈으로부터 모스크바에서 공연
제안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하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이번에도 알렉세이 리젠코가 초청을 했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공연이라면 빅토르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동안 경험에 비춰볼 때 레닌그라드에서의
공연보다 모스크바 공연이 늘 즐거웠다. 레닌그라드
팬들은 KINO 그룹을 아마추어로 여기고 있었으나
모스크바 비트팬들은 스타로 여기며 열광하고는 했다.
빅토르와 마리안나는 직장에서의 허가가 떨어지느냐,
아니냐가 문제였으나, 그건 언제나 포기할 각오가
되어있었으므로 일단 직장에 모스크바 출장을
알려놓는 것으로 그들은 떠나기로 결심했다.
"출연료는 각기 75루블씩 받기로 했어."
르빈은 다소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빅토르는
귀가 번쩍 뜨였다. 75루블이라면 그들에게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더구나 얼마전까지 그들은 출연료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초청받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지 않았던가.
르빈은 빅토르에게 출연료 교섭 과정을 소상히
들려주었다.
전소비에트의 모든 전화는 도청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므로 모스크바 공연 관련 전화
통화는 자연 암호를 주고받는 식으로 진행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잘 있니? 나는 모든 것이
잘 되었다. 나도 잘 있다. 나는 생일 파티를 하고
있는데 나의 친구는 스무 살이다. 이 말 속에는 20일
모스크바로 가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내용을
은폐하되 사실을 전달해야 하므로 함축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순간 메시지를 찾아낼
수도 있었으나 어떤 때는 상대방의 메시지를 찾아내기
위해 오래 머리를 굴려야 할 때가 훨씬 많았다.
이를테면, 너에게 1965년도의 비틀즈 레코드가 있니?
하고 상대방이 물어왔을 때 르빈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비틀즈의 레코드를
선물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숫자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얼른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1965년이라구? 하고 되묻자 상대방으로부터, 그래
65년, 이라는 대답이 되돌아왔을 때에야 르빈은
그것이 출연료를 65루블 주겠다는 뜻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르빈은 그것이 각자 65루블인지 알아야 했다.
르빈은, 물론 나는 비틀즈를 몹시 좋아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그것이 없다. 혹시 네게 그것이
두 장 있느냐, 고 물었다. 그러자 리젠코는 두 장
있다고 대답했다. 르빈은 일단 안도했다. 그러나
르빈은 출연료를 좀더 올려받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물론 비틀즈의 레코드도 좋지만 80년과 81년도에 나온
엑스터시 그룹의 레코드가 나는 더 좋은데, 하고
리젠코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러자 리젠코는 다소
쌀쌀하게 대답했다. 나는 새로운 파도는 좋아하지
않는다. 록의 전성기는 75년이다. 르빈은 그래 나도
록의 전성기는 75년이라 생각한다고 쾌히 승락했다.
출연료가 75루블로 정해진 것이었다.
"수고했어."
빅토르는 웃으며 르빈을 칭찬했다.
사실 모스크바든 노브고로드든 탈린이든 오라는
데만 있으면 그들은 달려갔다. 대개 일 인당 1,20루블
정도의 출연료를 받았고 어떤 때는 왕복 차표를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때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재수없을 때는 차표도 받지 못하고 노래부를 기회를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허탈하게 돌아올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러한 그들에게 75루블의 출연료는 적은
것이 아니었다.
모스크바 공연 준비는 학생증 위조로부터 시작됐다.
지금까지 모스크바 여행은 주로 무임승차로
왕래했었다.
그러나 이번 공연 여행은 마리안나가 무임승차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녀도 무임승차를 해봤으나 탈
때부터 내릴 때까지 차장과 숨바꼭질하는 것도 못할
짓이지만, 그 불안감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더구나 이번 공연 여행은 기타며 분장도구를
소지하고 가야 하지 않은가. 기타 케이스와
분장도구를 들고 어찌 도망다니겠는가. 게다가 이제
다 스무 살을 넘긴 어엿한 청년들 아닌가. 마리안나는
그런 말끝에, 요금이 반액으로 할인되는 학생증을
모두 소지하자고 제안했다. 비록 기간은 지난
것이었으나 빅토르는 학생증이 있었다. 르빈은 쉬꼴라
10학년 졸업으로 더 진학을 하지 않아 학생증이
없었고 졸업한 지가 오래된 마리안나 역시 학생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미술대학을 나온 마리안나가
학생증 위조를 맡았는데, 시효가 지난 빅토르의
학생증에 숫자를 고치고, 알음알음으로 간신히 구한
남의 학생증에 자신의 사진을 바꿔붙이는 등 아주
감쪽같이 학생증을 위조해냈다.
학생은 모든 공공요금이 반액으로 감면되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같은 데는 일반인의 3분의 1
정도에 관람이 가능하였고 열차도 반값에 탈 수
있었다. 예컨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간 붉은 화살호의
요금 20루블을 10루블에 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성인 요금을 다 주고 모스크바를 다녀올
경우 세 사람의 열차삯만 왕복 120루블이 되었다. 두
사람이 150루블의 출연료를 받기로 했는데 기차에다
120루블을 빼앗기고나면 빈손만 달랑 남는 셈이었다.
기타와 분장도구를 챙겨든 그들은 약속한 날짜에
모스크바로 달려갔다.
공연은 이번에도 아파트 지하실에서 열렸다.
리젠코의 수완이 늘었던지 70여명의 청중이 지하
홀을 꽉 채우고 있었다. 오늘처럼 이름없는
연주자들의 공연은 대개 여남은 명이 아니면 스무남은
명의 청중들이 모여도 만족해야 했다. 청중들은 대개
젊은이들이었고, 간간이 호기심 많은 중년남자들이
끼여 있기도 했다.
무대라고 따로 차려진 것은 없었다. 안쪽 벽 앞에
나무의자 서너 개가 놓여 있었고, 서너 사람이 춤을
출 만한 플로어 같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마리안나의 솜씨에 의해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하고
눈썹과 콧수염도 하얗게 칠하고 다리에 꼭 끼는 까만
바나나 바지에 가슴을 깊이 판 까만 셔츠를 입은
빅토르와 역시 분칠을 하여 하얀 가면을 쓴 듯한
얼굴에 몸에 꼭끼는 초콜릿빛 바지와 셔츠를 입은
르빈이 기타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뒤이어 사샤
립니쓰키가 드럼틀 앞에 가서 앉았다.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는 사샤는 리젠코의 부탁으로 타악기를 담당해
주기로 했던 것이다.
"레닌그라드에 혜성처럼 나타나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KINO 그룹과 함께 오늘밤을 맘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리젠코의 과장된 KINO 그룹 소개에 이어 빅토르와
르빈과 사샤는 연주를 시작했다. 빠르고 분방하고
가슴을 찌르는 것 같은 '일렉트릭치카'로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은 있으나 돈은 없다'
'건달들'로 이어져갔다. 청중들은 노래와 연주에
상당히 공감하는 빛을 보였다. 한 시간 정도 공연을
하고 끝을 내려하자 청중들은 KINO, KINO를
외쳐부르며 앵콜을 요청했다. 빅토르와 르빈은 온몸이
완전히 땀으로 흠뻑 젖었고 호흡은 가빠올랐으며
갈증은 갈수록 더해갔다. 그러나 청중들의 앵콜에
고무되어 그런 고통도 잊은 채 그들은 세 곡을 더
연주한 다음에야 간신히 목을 축였다. 청중들의
박수갈채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무사히 공연을 마친
것이었다. 손님들이 서서히 나가고 숨을 돌리려는데,
밖을 지키고 있던 프로모터측의 청년이 뛰어
들어왔다.
"긴 바바리를 입은 사내 셋이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는데, 아무래도 비밀경찰 같아요."
청년은 리젠코를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막 땀을 식히려던 빅토르와 르빈은 아연
긴장하였다. 그러나 전에는 공연 도중에 비밀경찰이
갑자기 들이닥쳐 경황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공연을 다
마치고 손님들이 반쯤 나간 상태여서 다행이었다.
"악기를 챙겨 바로 뒷문으로 나갑시다. 자
따라오세요."
공연을 주관했던 리젠코는 잠시 당황한 듯하더니
상황을 살핀 후 르빈에게 말했다. 그는 지하실
뒷문으로 달려갔다. 르빈과 빅토르와 마리안나는 급히
그 뒤를 따라 뛰었다. 그러는 와중에 리젠코는 르빈의
손에 출연료를 쥐어주었다. 아파트를 벗어나 큰길로
나선 그들은 행인들 사이에 섞여 걸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KINO 그룹 멤버들은 그 길로 역으로 달려가
레닌그라드행 기차표를 샀다. 공연 때마다 갖가지
수모를 겪으면서도 빅토르와 르빈은 어디서든
공연초청이 오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자신들이 아직 규모가 큰 공식적인 공연으로 청중들과
만날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바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고달픈 그런 연주여행에 종말을 고하고
출연료를 듬뿍 받는 화려한 무대에서 공연할 날이
오겠거니 기대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급하게
부질없는 꿈을 좇으며 마음 고생을 사서 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무리 적은 숫자의 청중이 들어주는
하찮은 공연이라도 결코 마다하지 않고, 주어진
기회를 잘 활용하고 거기에 충실하기로 마음 정하고
있었다. 그렇듯 겸허하고 충직하게 생각하고 대처해
나갔으나 불행과 시련은 빅토르와 마리안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잦은 결근으로 직구장의 눈밖에 난 빅토르는 끝내
건설 트러스트의 미장공 일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빅토르는 그런 일을 가지고서는 시련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는 야간 경비원 자리를 구해 용돈을
벌 수 있었고 어떤 때는 국영 마가진의 청소를 맡아
하고 일당을 받기도 했다. 직장이란 하나의 수단이지
그의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한다
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직장을 부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인으로부터 갑자기 집을 비워달라는
통고를 받았을 때 당황하고 서러움을 느끼기는 했으나
그런 일도 빅토르는 별다른 시련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한겨울에 일주일 안에 어디로 이사를 가란
말인가. 사뭇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주인의 말인즉 집을 엉망으로 사용하고 밤마다
떠들어 더 보고 있을 수 없다면서 내일이라도 당장
집을 비워달라고 통고해왔다. 만약 내일 당장 갈 곳이
없다면 일주일 말미를 줄테니 집을 구해 나가라고
쌀쌀하게 통고했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집이
얼른 구해지지 않았다.
일주일의 말미를 하루 남기고서도 집을 구하지
못하자 빅토르와 마리안나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그날
저녁 따라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그들의 울적함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모스크바에서
손님이 왔다. 그들을 모스크바에 초청해 공연을
벌이고는 했던 절친한 알렉세이 리젠코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포도주와 보드카와
담배를 사들고 아파트의 문을 두드렸다.
빅토르와 리젠코는 얼싸안고 반가워했고 마리안나도
그를 반색했다. 세 사람은 곧 술을 마셨다. 자연 최근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록가수들에게 화제가
모아졌다. 빅토르와 마리안나는 주로 듣는 편이었고
리젠코가 록가수들의 활동과 그 노래들에 대해 짧은
비평을 가했다. 리젠코의 입쌀은 몹시 매웠다. 그의
입에 올랐다하면 마구 짓이겨졌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는 빅토르의 KINO를 따라갈 그룹은 이제 없노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술이 얼마쯤 올랐을까,
빅토르가 기타를 타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언제
생각하고 지어둔 것인지, 아니면 그때 즉흥적으로
부른 것인지 모르지만, '우리를 위한 비'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들은 마리안나는 노래에
취해 집에 대한 모든 시름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내 집에는 벽이 보이지 않는다
내 하늘에는 달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눈이 멀었으나 너가 보인다
나는 귀가 먹었으나 너를 듣고 있다
나는 잠을 자지 않으나 꿈을 꾼다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벙어리지만 너는 나의 말을 듣고 있다
우리는 그래서 강하다
또다시 밤이 온다
너는 술에 취했어도 빗소리는 듣고 있다
비는 우리를 위해 내리고 있다
집은 비어 있으나 우리는 여기 있다
여기는 아무도 없지만 우리는 여기에 있다
우리를 위해 내리는 비
너는 나의 별을 보고 있다
내가 떠나리라는 것을 너는 믿고 있다
나는 눈이 멀었기에 빛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취했으나 나의 사명을 기억하고 있다
너는 은하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밤이고 너는 아침의 주제다
나는 꿈이고 너는 신화다`......
빅토르는 집없는 시련 따위는 한 곡의 노래로
얼마든지 승화시켜 소화해낼 수 있었다. 리젠코는
다음날 아침 그들이 비워주는 집의 마지막 손님이 된
것을 도리어 재밌게 여기며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영영 잊지 못할 밤을 지샜노라는 말을 남기고.
빅토르와 마리안나는 그로부터 열흘쯤 후에
오흐따구역에 아파트를 얻어 이사를 할 수 있었다.
31. 리태백 시인의 시를
앞에서도 말했듯 빅토르와 마리안나는 직장이나
집으로 인한 고통 따위는 시련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통렬한 아픔을 느끼게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시련은 따로 있었다. 그들은 그러한
시련을 1983년 한해 동안에 세 차례나 겪어야 했다.
그해 봄, 빅토르는 본트레스트에 조각가로서
취직하여 몇 달 동안의 불안정한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본트레스트에서는 마뜨료시카나 일용적인
목기 따위를 일정한 모형을 만들어 여러 벌씩 기계로
깎았다. 빅토르는 그런 일에는 손을 대지 않고
건축물에 사용할 인물상이나 동물상을 조각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여인들이 문갑 같은데
장식물로 세워둘 작고 앙징스런 여신상같은 것도
조각했다.
그는 직구장으로부터 곧 실력을 인정받았다. 제61
기술전문학교 루드밀라 선생이 일찍부터 그 솜씨를
인정했던 실력을 그는 본트레스트에서 발휘했던
것이다. 마리안나는 빅토르가 여가 때면 깎아오는
작은 목각 하나씩을 받을 때마다 여간 기쁘지 않았다.
날개를 활짝 편 기러기며 오줌을 누는 귀염둥이
아기며 뛰어가는 고양이도 새겨오고는 했다. 그리고
한번은 다리를 포개고 앉아 명상에 잠긴 사람을
조각해왔는데 그것은 마리안나로서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묘한 자세였다.
"이건 붓다야. 동양에서는 이 어른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믿는대."
"붓다?"
마리안나가 기이하게 여기는 눈치를 보이자
빅토르는 말했다.
"전에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던 리술이란
아저씨가 있었어. 그 아저씨로부터 나는 많은 걸
배웠어. 그 아저씨가 빌려준 책을 봤는데, 붓다는
석가족의 왕자로 태어나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
있었는데, 모든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왕궁을 나가
험산에서 고행수도하여 마침내 큰 진리를 깨우치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했대. 즉, 동양인들이
숭앙하는 성인이지. 이것은 그 석가모니가 고행수도할
때 앉은 자세야."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가 생각나자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저도 모르게 슬픔이 온몸에 젖어드는
느낌이었다.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가진 자는
평생을 쓸쓸하게 지내야 한단다. 리술 아저씨는
그렇게 말했었다. 발틱해의 핀란드만에 뿌려진 리술
아저씨의 뼛가루는 그의 소망대로 대서양을 지나고
인도양을 거쳐 지금쯤 그의 고향의 바닷가에
다다르기나 했을까.
"그럼 그 아저씨도 동양인이겠네?"
"그래, 그 아저씨도 나와 같은 까레이츠야.
레닌그라드 국영출판사에서 일하는 시인이었는데,
아주 불행한 사람이었어."
"국영출판사에서 일하는 시인이었다면 상당한
지식인 아냐. 그런데 불행했다니?"
마리안나의 반문에 빅토르는 잠시 난감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 기회에 마리안나에게 까레이츠에 대해
설명해둘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마리안나, 까레이가 어디 있는지 알아?"
마리안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까레이가 어떤 나라인 줄은?"
"쬐끔 알아. 남북으로 갈려 있는데, 남쪽은
아메리카를 추종하는 세력이 다스리고 북쪽은 우리
소비에트 체제를 그대로 본받은 무리들이 다스린다는
말을 들었어."
"그럼 우리 까레이츠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이곳
소비에트에 와서 살게 됐는지 그 원인도 알겠군?"
마리안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비쨔를 만나기 전에는 몰랐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거든. 그런데 비쨔가 외로움을 유난히 탄다 싶어
내 마음이 여간 아파야지. 그래서 비쨔의 외로움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에게 귀동냥을 하게 됐어.
카레이츠는 원래 블라디보스톡이나 하바로프스크 같은
원동지방에서 살았는데 스탈린의 이민족 강제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더군."
"그래, 그랬었군."
"그런데 소금밭과 다름없는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에 부려진 까레이츠들은 근면하고 영리하여
똑같은 농사를 지어도 원주민인 카자흐스탄인이나
우즈벡스탄인들보다 훨씬 많은 소출을 올리고
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높아 우수한 엔지니어와
학자를 많이 배출했다더군."
마리안나의 말에 빅토르는 도리어 의아했다. 언제
그런 것까지 알아봤단 말인가.
"그뿐이 아니라, 타슈켄트에 있는 뽈리따젤
꼴호즈는 15개 전 소비에트공화국 당 제1 서기는
반드시 돌아보아야 하는 필수 견학코스로 정해져
있다더군. 옥수수와 면화, 대마 생산이 전 소비에트
공화국 소재 꼴호즈 중 가장 으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어."
빅토르는 전에 끄질오르다의 할아버지집에 갔을 때
마주쳐 인사를 올렸던 김병화 노인이 떠올랐다.
김병화 꼴호즈도 전 소비에트 연방의 꼴호즈 가운데
그 소출이 첫째 둘째간다 했었다. 김병화 꼴호즈
회원들 집에는 칼라텔레비전이나 전화, 냉장고 없는
집이 없고 거의 대부분의 회원은 승용차도 소유하고
있다 했었다.
"그러다 까레이츠 전문가 되겠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비쨔에게 더 신뢰가
가잖아."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떠났겠네?"
"비쨔 노래가 있는데."
마리안나는 얼굴에 함빡 웃음을 담으며 눈을
흘겼다.
"암튼 까레이츠들은 슬픈 사람들이야. 그중에도
리술 아저씨가 대표적이었지."
"그렇게 재능많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왜 슬퍼?"
"리술 아저씨가 그랬어. 까레이츠들은 가고 싶은
고향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고향이 그렇게 중요한가?"
마리안나의 반문이었다.
"일백이십여 개의 다른 민족이 모여 사는 이곳
소비에트는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 부심하며 무엇보다
고향이라는 개념을 없애려고 노력해왔다지만, 리술
아저씨는 사람이란 태어나서 자라면서 본 풍광과
철들어가면서 서로 정을 주고받은 사람들이
나이들수록 그리워지게 마련이라 하셨어. 그리고 그
욕망을 이루지 못하면 다른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외로움과 슬픔을 느낀다고 하셨어."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가 바로 옆에 있는 듯한
느낌을 순간 받았다.
마리안나는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 레닌그라드에서
성장했고 레닌그라드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따로 가고 싶고 그리워해야할 고향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 때문에 빅토르의 말에 얼른 공감이
되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고 싶은 고향으로 가면 될게 아냐?"
빅토르는 마리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기야
마리안나가 어찌 까레이츠들이 처한 입장을 알랴
싶었다.
"까레이츠들이 돌아가고 싶다고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어야지."
"원래 살던 곳으로 가면 되잖아."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냐. 사람이란 삶의
터전이라는 것이 필요하거든.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고
또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이웃이라는 것이 있어야
말이지. 아무리 고향이라도 그런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으면 고향이 아니지. 이미 그들이 떠난 원동은
그들의 생활터전이 없어지고 말았거든 아무튼
까레이츠들은 갈 고향을 잃고 말았어."
빅토르는 끄질오르다의 할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말했다.
"글쎄?"
"더구나 리술 아저씨는 입장이 또 달랐어. 리술
아저씨의 고향은 원동이 아니라 까레이의
북쪽이었거든. 그곳에는 아저씨의 그리운 부모형제가
살아 있대. 하지만 그는 돌아갈 수가 없었어."
"왜 돌아갈 수 없단 말이야. 북쪽은 우리
소비에트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다 하지 않았어?"
"그래, 북쪽은 공산주의 국가지. 하지만 리술
아저씨는 한창 스탈린 격하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후루시초프 때, 스탈린과 흡사한 철권통치를 휘두르는
북쪽의 김일성 정부에 반대하여 그 반대운동을 펼쳤던
재소 북한 유학생중의 한명이었거든. 그때 그 운동을
펼쳤던 북한 유학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소비에트에
망명하고 말았는데, 소비에트에 망명한 리술 아저씨가
어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겠어."
빅토르는 다시 리술 아저씨의 슬픈 인생역정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말했다.
"리술 아저씨는 소비에트에 망명은 했지만 평생
소비에트 공민권은 취득하지 않았어. 다른
망명동지들은 사회활동을 위하거나 또는 가족들을
위해 공민권을 취득했지만, 그는 망명은 했을지라도
자기가 태어나 자란 나라를 영영 버린 것은
아니라면서 끝내 소비에트 공민권을 취득하지
않았어."
"공민권 없이 어떻게 생활할 수 있었나?"
"대학 졸업 후, 정부 당국에서 망명자들을 위한
특별조치가 있었대. 그 특별조치의 배려에 의해 이곳
레닌그라드 출판사에 취직하여 평생 다른 욕심내지
않고 충실히 근무하며 그리고 시를 쓰며 사시다
돌아갔어."
"나는 정말 모르겠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것이
뭐 그렇게 불행하고 쓸쓸한 일인가?"
"나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아. 하지만, 리술 아저씨는
그렇지 않았어. 리술 아저씨는 짐승도 죽을 때는
고향쪽으로 머리를 둔다며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것을
아주 슬프게 생각했어. 어쨌든 나는 쎄로브
미술학교에 입학한 직후 리술 아저씨를 알게 됐는데,
리술 아저씨로부터 동양의 여러 사상가들의 책을
소개받았고, 장자, 노자, 공자의 책들과 그리고
끼다니의 유명한 두보라든가 리백이라는 시인의
작품도 읽을 수있었어. 그리고 까레이츠의 황진이,
소월 같은 시인의 시도 리술 아저씨에게서 들어 알게
되었어."
"그 아저씨로부터 동양의 사상가들과 시인들을 알게
되었다고?"
마리안나는 빅토르의 시적 재능의 수수께끼가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그럼. 나는 특히 리백이라는 끼따니 시인이 마음에
들어. 그 사람은 어찌나 자유분방하고 거칠것없이
살았던지, 꼭 비트족이나 히피같았던가봐. 리술
아저씨로부터 리백 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7∼8 세기에도 히피족이 있었구나 싶더라구."
마리안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는 빅토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나 낭만적이었던지, 연못에 비친 달을 잡으려
물 속으로 걸어들어갔다가 죽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라니까. 그리고 연못 위에 술잔을 띄워놓고
상대방과 시를 주고 받으며 술을 한잔씩 마셨대. 정한
시간안에 시를 짓지 못하면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고서. 리백의 시 한 수 외워볼까?"
마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꽃밭에 앉아 한 병 술을
친구없이 혼자 든다
술잔 들어 달님을 청하니
그림자랑 셋이 된다
달님은 마실줄 모르고
그림자는 흉내만 내는구나
잠깐 달님과 그림자랑 함께
즐기자,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내 노래에 달님은 서성거리고
내 춤에 그림자는 흐늘거린다
취하기 전엔 함께 즐겁지만
취한 다음에는 각각 헤어지리
영원히 맺은 담담한 우정
우리 기약은 아득한 은하수
마리안나는 그 동안 궁금했던 빅토르의 시적 재능의
수수께끼가 약간 풀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보리스와 물이 가득찬 욕조에 술잔을 띄워 놓고 노래
부르며 서로 술을 나눠 마시던 모습이 상기되었다.
"언젠가 보랴와 욕조에 술잔을 띄워 놓고 술을 마신
것도 그 리백이라는 사람의 흉내를 낸 것이었군?"
마리안나의 말에 빅토르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았어. 그런데 리백이라는 시인의 시는
그렇게 좋은데, 리술 아저씨의 시는 너무 어둡고
슬퍼서 나는 좋아지지가 않더라구. 그렇지만 리술
아저씨로부터 시를 짓는 방법도 배웠어. 거의 리백
시인의 시풍을 설명한 것이었는데, 그는 격식과
운율에 구애받지 않고 조금도 힘 안들이고 자연스럽게
써내려갔다고 했어. 즉 흘러나오는 말이 곧 시가 되는
그런 시풍을 지녔다는 것이었지. 그렇지만 그의 시는
다른 사람들이 도무지 따라내기 힘든 깊은 사상과
인생의 여러 단면들을 훌륭히 그려냈다는 것이었어.
그는 항상 어떤 틀에 매여 있기를 거부하고 끝없이
비상하고 자유분방했었대. 물론 그런 사람의 인생이
외형적으로는 행복할 수 없었겠지."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로부터 들은 이후, 인생에서의
불행 따위는 돌보지않고 오로지 시와 술로 평생을
보낸 리백 시인의 생애를 흠모하여 왔다.
리술 아저씨의 이야기에 의하면, 대체로 짧은
기간이나마 왕궁에서 벼슬을 지낸 리백 시인은,
임금이 몸소 국의 간을 맞춰주고, 왕비가 벼루를
들어주고, 재상이 신발을 벗겨 주는 호사를 누렸다고
했다. 그러나, 천성이 낭만적이고 어디 묶이기 싫어한
성품의 리백 시인은 관료생활의 구속을 견디지 못하고
좌충우돌하다시피 행동하다 참소를 당하고 왕궁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추방이
그의 시를 시들게 하지는 못했다. 도리어 그의 시는
더 높은 경지에 다다랐고 세인의 존경을 받으며 그는
일생을 시와 술과 함께 보냈다.
빅토르는 붓다와 리백 시인 외에도 어깨에서
다리까지 덮는 긴 옷을 입은 동양 사람을 조각해
오기도 했다. 그 긴 옷은 두루마기라는 까레이츠
어른들이 입는 외출복이라고 하였다.
마리안나는 평소 빅토르로부터 까레이나
까레이츠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지는 못했다.
그는 의식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피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런 조각들을 통해 빅토르의 의식
속에 카레이가 깊이 새겨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32. 록그룹 경연대회에서의 참패
그날도 마리안나가 퇴근하여 아파트로 돌아오니
빅토르는 며칠 걸려 깎았다는 앙징스런 목각을
내놓았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통넓은 치마를 입은
사람이었다.
"전통의상을 입은 까레이 여인이야"
빅토르는 목각을 유심히 살피는 마리안나에게
그렇게 설명했다.
"그런데 앞으로 며칠 일하러 가지 못할 거야."
마리안나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또 무슨
방랑병이라도 도진 것이 아닌가 걱정부터 앞섰다.
"이번 토요일, 록그룹협회 주관으로 경연대회를
연대. 우리 KINO가 거기에 입상해야 하지 않겠어."
마리안나는 빅토르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번 토요일이라면 삼일밖에 남지 않았잖아?"
"그래, 좀 일찍 일찍 통보해줄 일이지 너무 연습할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애."
"직구장에게 허락은 받았어?"
"말은 했는데, 듣는 둥 마는 둥 하더군 짤리면 또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지 뭘."
"알았어. 걱정말고 연습이나 열심히 해."
마리안나는 밝은 얼굴로 그를 격려했다.
빅토르는 그날 밤부터 르빈과 연습에 들어갔다.
이미 익숙하게 불러오던 노래들이라 어쩌면 연습을 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르빈이 바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빅토르는 달랐다.
"나는 노래란 완벽한 것이 없다고 생각해. 노래를
부르다 보면 고치고 싶은 데가 꼭 나오더라구."
"그래도 우리가 거의 일이 년 동안 내쳐 불러오던
노래들이잖아."
삼일 동안 출근도 못하고 연습해야 한다는 빅토르의
말에 르빈은 거듭 불평을 토해놓았다.
"아냐, 이번엔 달라 지금까지는 우리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렀어. 그러나 이번에는 여러 그룹들이
실력대결을 벌이는 거라구. 심사위원들이 듣고
우수팀을 선발하는 경연대회란 말이야."
"그래도 별 팀들 있겠어. 우리 정도면 우승은
따놓은 것과 같지 뭘."
르빈은 그래도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어. 이번 경연대회에
입상하지 못하면 무슨 꼴이 되겠어."
르빈은 빅토르의 주장에 마지못해 따르며 연습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다지 열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금 KINO 그룹 실력이면 우승은 문제없을 뿐만
아니라 감히 KINO 그룹을 뛰어넘을 그룹이 어디
있겠느냐고 자부심이 대단했다. 빅토르도 내심 그런
자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일어날지도 모를 실수를 미리 연습을 통해 막아두자는
생각이었다.
지난 2월에 있었던 '쎄와 각켈' 데뷔 10주년 기념
공연에서도 어쨌던가, 가끔 르빈과 연주가 빗나가
소리가 따로 놀기도 했었다. 물론 그런 실수를
청중들은 느끼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귀가 예민한 전문가들은 그런 실수를 잡아내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이번 제1회 록그룹
경연대회에서의 우승은 많은 사람들에게 실력을
인정받는 계기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빅토르와
르빈은 사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에 골몰했다.
마침내 경연대회 날이 되었다. 록그룹협회 공연장은
젊은 록큰롤 팬들로 꽉차 있었다. 보리스가 리드하는
아크와륨 그룹, 마이크가 이끄는 쇼빠르크 그룹,
그리고 매누팩투라협주단, 아우 그룹, 돈빠스 그룹등
레닌그라드 록그룹협회 회원 그룹들은 빠짐없이 다
참가하였다.
그러나 심사위원의 구성을 본 빅토르는 곧 마음이
어두워졌다.
록큰롤 경연대회의 심사위원으로 나온 사람들이
록큰롤 전문가 숫자보다 민요나 예술가곡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은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심사위원 구성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보리스와 마주쳤을 때 빅토르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점이 걱정되어 록그룹협회측에
항의를 했어. 그런데, 이번은 경연대회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인사들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했대."
보리스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그렇게 대답했다.
보리스의 그 말을 들은 빅토르는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겠다는 생각에 다른 말은 더 보태지 않고
돌아섰다. 그러나 아무래도 예감이 불길했다.
아무리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해 심사위원을
구성했다 할지라도 그렇지 이반 드미뜨리프나
그로모프나 미하일 리보비치 아스뜨로프가 뭐람.
저들은 둘다 엄숙주의자들 아닌가. 저들에게는 민요나
예술가곡을 주로 부르는 삐예하나 또는 요시프
꼬프존의 노래라면 좋아할지 모르려니와 바딤 꼬진의
노래나 블라디미르 브소츠키의 노래에도 고개를 저을
그런 인사들 아닌가. 그런 사람들에게 록의 심사를
맡기다니 늑대에게 새끼 교육을 맡긴 어미돼지 꼴이
되지 않을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레닌그라드에서 활동하며 록 클럽에 가입되어 있는
30여개의 그룹들이 이틀에 걸쳐 공연을 가졌다. 각
그룹마다 그들이 가진 재주를 다 발휘하여 연주를
하였다. 머리를 붉게 또는 노랗게 물들인 친구가
있는가 하면 얼굴에 무수히 하얀 줄을 그은 친구가
있고 아예 얼굴 한쪽을 붉게 칠한 친구도 있었다.
일부러 가랑이를 타 허벅지가 다 드러난 청바지
차림이 있는가 하면 등짝이 없는 자켓을 걸친 친구도
있었다. 옷이나 분장이나 가지각색이었다. 연주하는
방법도 또한 다양했다. 아크와륨처럼 온건하게
연주하는 그룹이 있는가 하면 제르깔로처럼 무대를
온통 방방 뛰어다니며 야단법석을 떠는 패들도
있었다. 외양에서만 그렇듯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래나 연주 솜씨도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불에 데인 것처럼 다급하게 비명을 지르는가 하면
이슬비처럼 조용히 속삭이듯 노래하고 연주하는
그룹도 있었다. 고물 기타를 휘두르며 무대를 휘젓고
다니다 그것을 때려 부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피아노에 얌전히 붙어서서 섬세하게 반주를 하는
연주자도 있었다. 펑크 록조의 노래로 정신없게
만드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예술가곡조의 노래를
부르는 친구도 있었다.
경연대회 결과는 우려했던 대로, 록그룹 가운데
가장 온건한 것으로 알려진 매누팩트라 그룹이
1등으로 뽑혔다. 그 다음이 아크와륨 그룹이었다.
KINO 그룹은 말할 것도 없고 록그룹 가운데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마이크가 이끄는 쇼빠르크 그룹도
등외로 밀려나고 말았다. 내로라하는 솜씨를 지녔다는
러씨야네(러시아인들)도 돈빠스도 조나단 리빙스톤도
삘리그림도 제르깔로도 다 고배를 들고 말았다.
원래 패장은 말을 아껴야하는 것이다. 보리스도
마이크도 그 결과를 말없이 수용했다.
엄격히 말하자면 매누팩트라 연주는 록이 아니었다.
새로운 가치의 추구도 저항도 젊음의 폭발적인
에너지도 느낄 수 없었다. 록은 단순한 음악만이
아니다. 새로운 젊은이의 문화를 창조하고 그것을
펼쳐가려는 역동적 의지가 함께 꿈틀거려야 하는
것이다. 빅토르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매누팩트라의 연주는 어떤 에너지도 저항도 새로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좋게 말해 러시아식 컨트리
송과 비슷한 것이었다. 록 음악 경연대회에서 그런
노래와 연주에 우승을 안기다니, 빅토르는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분노가 끓어올랐다 보리스를
바라보니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웃음
뒤에 짙게 배어 있는 비웃음과 야유를 빅토르는 읽을
수 있었다.
다행히 청중들이 잠자코 있지 않았다. 청중들은
심사위원들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KINO를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크와륨을 외쳐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KINO나
아크와륨 정도는 아니었으나 쇼빠르크를 외쳐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청중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는 매누팩트라 그룹의
앙콜 연주를 예고했다.
매누팩트라 그룹의 앵콜 연주가 시작되려하자
청중들은 일제히 야유했다.
"우우우우우우우."
분노한 청중들은 주먹을 뻗지르며 무대를 향해
욕질했고 하나둘 연주장을 등지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빅토르도 연주장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선배 그룹들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뜨지 못했다. 결과야
어찌됐던 행사자체가 록그룹협회 주관의 것임으로
회원그룹들은 자리를 떠서는 안되는 입장들이었다.
매누팩트라 그룹은 청중들이 거의 빠져나가버린
썰렁한 연주장에서 맥빠진 연주를 진행해나갔다.
록그룹 경연 대회이후 빅토르는 한때
실어증환자처럼 말을 잃었다. 매사에 의욕을 잃고
시간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겨 놓고 있었다. 담배는
나날이 그 양이 늘어나고 술도 많이 마셨다 만약 돈만
풍족했다면 그는 더 많은 붉은 포도주를 마셔댔을
것이다.
그 무렵 빅토르와 마리안나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경연대회가 끝나고 얼마 있지 않아 마리안나가
써커스극장으로부터 해고되었던 것이다. 빅토르의
공연이며 연습의 뒷바라지를 하다보니 자연 결근을
자주하게 되었다. 모스크바 공연이며 얄타로의 여행
등 예고없는 장기 결근들에 이어 평일의 결근도
계속되자 개선될 여지가 없는 것으로 판단한
총지배인격인 인민배우 올레그 뽀뽀브는 마리안나를
해고했던 것이다. 써커스 극장에서 해고되자
마리안나는 지출을 최대한 줄여야했고 한푼의
돈이라도 아껴 써야했다.
빅토르는 술이 떨어지면 보리스나 미하일에게
전화를 걸어 술을 사달라고 떼를 쓰고는 했다. 그들은
대개 빅토르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보드카는
빅토르의 정신을 갉아먹는 무서운 악마 같은
것이었다. 그는 보드카에 푹 절은 몸을 흐느적거리며
낮이며 밤을 보냈다.
그는 본트레스트의 직장에도 나가지 않았다.
노래도 부르지 않았다.
그는 성격마저 난폭해졌다.
33. 르빈과 몌별하다
빅토르는 록 음악 경연대회의 후유증에서
빠져나오는데 무려 한달 가량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런데 시련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던지, 그
후유증에서 겨우 빠져나와 한숨놓인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걱정거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빅토르와 르빈이 몌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결별은 어쩌면 이미 오래 전에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KINO 그룹의 세번째 공식공연이라 할 수 있는 '쎄와
각켈' 탄생 10주년 기념공연에서 실수를 한 르빈을
빅토르는 몹시 닦아세웠었다. '쎌과 각켈'은 보리스
그레벤쉬코프보다 선배로 소비에트 록의 제1 세대
그룹이었다. 그 기념공연도 록 클럽에서 주관한
것으로 10개 팀이상의 그룹이 출연해 경연을
벌이다시피 했었다.
"르바, 왜 그래? 꼭 기타가 노래보다 앞서야
되겠어? 그러려면 기타 독주회를 갖지 그랬어?"
빅토르는 전에 없이 르빈을 신랄하게 힐책했다.
르빈은 그렇게 많은 연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따라 빅토르와 호흡을 잘 맞추지 못했다. 그는 몇
번이나 빅토르보다 한 템포씩 빨리 나가고는 했다.
"내가 깜박했어. 내 실수야."
르빈은 곧 그렇게 시인하며 사과를 했다. 빅토르는
그러한 르빈을 계속 힐난했다.
"우리 연습이 늘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런 실수가 나올까봐 경계해서야. 그런데 르바는 늘
연습을 하자면 그만하자, 그만하자, 그러잖아. 난
르바와 일 못하겠어."
"다음에는 조심할께."
르빈은 빅토르와 맞서지 않고 바로 그렇게 용서를
빌었다.
"르바는 성의가 모자라는 것 같애. 혼신의 힘을 다
해도 사람들이 좋아해 줄까 말까한데, 적당히
하려고드니."
빅토르는 그러나 조금도 힐난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르빈은 순간 빅트르를 쏘아보았다. 그 점에 대한
르빈의 생각은 빅토르와 달랐다. 르빈의 생각에,
빅토르는 매번 지나치다 싶었다. 자신이 적당히
하려는 것이 아니라 빅토르가 지나치게 열심을 부리는
데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르빈의 생각에는
웬만큼 한두 시간 해도 될 것을 빅토르는 하룻밤을
꼬박 새며 몸이 넝마처럼 되도록 극성을 떨고는 했다.
그럴 때의 빅토르는 사람이 아니라 무슨 괴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르빈의 인내심과 열성으로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극점에까지 가서 닿아야
빅토르는 겨우 안도하고는 했다. 그러한 그가 르빈은
가끔 몸서리쳐지고는 했다.
"내가 다음에는 조심하겠다고 했잖아."
르빈은 벌컥 성을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르빈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잠재해 있던 동양계에 대한
경멸감과 반발심이 복받쳐올랐던 것이다. 더구나
나이로 쳐도 빅토르는 자기보다 두 살 아래가 아닌가.
그러나 그때는 그것으로 넘어갔다. 빅토르나 르빈
둘다 상대방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로
참고 조심하며 KINO의 발전에만 정신을 쏟았다.
그러나 이번 록 그룹 경연대회 이후 난폭해진
빅토르의 성격이 급기야 두 사람의 결별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 무렵, 르빈은 빅토르에게 불만이 많았다. 르빈의
생각에 빅토르는 독선적이고 안하무인격이었다.
모스크바 공연을 다녀온 이래 빅토르는 새로운 노래
창작에 전념하고, KINO 그룹의 출연관계나 녹음관계의
업무 등 비즈니스에 관한 것은 르빈의 몫으로
넘겨졌다. 아르죠므 뜨로이츠키의 주선으로 모스크바
타스통신의 프레스센터에서 공식적인 공연을 가진
적도 있었고, 아크와륨그룹과 함께 탈린과 리가
공연도 가졌고 노브고로드 공연도 가졌다. 이런
공연여행은 모두 르빈의 비지니스의 결실이었다. 이런
공연스케줄 수립 외에도 녹음 관계 일도 르빈에게
맡겨졌다. 빅토르는 그 동안 지은 노래를 충분히
연습하여 여러 공연장을 돌며 연주를 해왔다. 그
노래들을 또 한 장의 앨범으로 출반하고 싶었다.
두번째 녹음도 뜨로삘로와 일을 할 수 있었다면
문제는 복잡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렵
뜨로삘로는 아크와륨 그룹의 녹음 관계로 손이 쉴틈이
없었다. 그리하여 다른 녹음 기술자를 물색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르빈은 보리스에게 주선을 부탁하여
녹음해줄 사람을 분주히 찾았다. 그러나 르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KINO 그룹에 관심을 갖는
녹음기술자를 찾기가 힘들었다. KINO 그룹의 녹음을
해줄 수 있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녹음전문가들은
햇병아리들이 어미닭 흉내를 내려하는 것쯤으로
여겼다. 한결같이 올챙이 시절을 거치지 않은
개구리라도 있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들이었다. 르빈은
빅토르의 독촉을 받고 초조했으나 두번째 앨범 녹음의
성사는 쉽지 않았다. 세 군데, 네 군데에서 거절 당한
르빈은 초조해졌다.
"르바는 매사를 쉽게 생각하는 것이 병이야."
일주일이 지나도 녹음기술자를 물색하지 못하자
빅토르는 르빈의 태만과 불성실을 책망했다. 르빈은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아직 KINO 그룹의 지명도가
낮아 선뜻 녹음하려는 녹음기술자가 나서지 않아 애를
먹고 있는데 르빈의 태만에서 기인한 것으로 책망하고
있으니 르빈의 속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쨔."
르빈은 눈에 힘을 주고 빅토르를 노려보았다.
"넌 매사 환상에 젖어 있어. 현실을 너무 쉽게
생각해. 현실을 똑바로 보라구. 넌 내가 게으르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있는데, 녹음전문가를 못찾은
것은 내가 게을러서가 아냐."
빅토르는 르빈을 마주 쏘아보았다. 그 눈매가
어찌나 사납던지 르빈은 가슴이 서늘하였다. 그렇다고
르빈의 반발이 사그러들지는 않았다.
"어디 우리 KINO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줄 알아.
아직 핏덩이나 다름없이 여긴다구. 녹음을 부탁하면
대개 콧방귀나 뀌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르빈의 반박에 빅토르는 더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르빈을 노려보았다.
"한두 번 거절 당했다고 주저앉을 거야. 안돼면 열
군데, 스무 군데라도 알아봐야지."
"그래 알아보고 있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재촉하느냔 말이야."
르빈은 조금도 지지 않고 눈에 심지를 세우고
반박했다.
"알았어. 보랴한테 다시 한번 더 부탁해봐."
그날은 빅토르가 그렇게 말한 것으로 언쟁이 끝이
났다. 그런데 일은 엉뚱한 데서 터졌다.
마침내 르빈은 녹음을 해주겠다는 사람을
찾아내기는 했다. 그는 극장에서 음향 담당으로
근무하는 안드레이라는 사람이었다. 르빈의 연락을
받은 그는 KINO 그룹을 안다고 하였다. 언제라도
녹음을 해줄 수 있다는 대답이었다.
르빈은 그 대답이 어찌나 반가웠던지 당장
뛰어가겠다고 말했다.
"뭐, 지금 당장 가기로 했다고?"
그러나 전화를 받은 빅토르는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다
"밖을 봐, 어두워지고 있잖아. 이렇게 늦은 시각에
가야 한다고?"
빅토르는 떨떠름한 어투로 거듭 그렇게 투덜댔다.
"그래, 녹음해 준다는 사람을 간신히 구했어.
오늘밤이라도 당장 하재."
르빈은 속이 끓어올랐으나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지금은 안돼. 나는 차를 마시던 참이었어."
그렇게 녹음할 사람을 물색하지 못한다고 핀잔을
주며 재촉하더니 겨우 찾아놓으니 하는 말좀 보게나.
르빈은 화가 치밀었다.
"안드레이한테 가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내
입장도 생각해줘야지."
르빈은 성질을 눅이고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게다가 우리는 타악기 다룰 사람도 없잖아."
빅토르는 무엇 때문인지 마음 내켜하지 않았다.
하기야 타악기 연주할 사람을 구해야 하는 것이
선결문제이기는 했다. 르빈도 그말에는 대꾸를
잃었다.
"타악기 연주자는 내가 한번 찾아볼까?"
"그래, 타악기 연주자가 정해지면 다시 연락해줘."
르빈은 빅토르의 군림하는 듯한 어투에 마음이
상했다 그러나 르빈은 수첩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보리스와 마이크와 쥬사, 판께르 등 눈길 닿는대로
전화를 걸어 드럼 연주자를 수소문했다. 보리스와
마이크는 연락이 되지 않았고 연락이 되는 사람도
누구 하나 마땅한 타악기 연주자를 소개해 주지
못했다. 수첩의 E 부분에 와서 이바노바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에야 겨우겨우 희망이 보였다. 제냐
이바노바는 왈레리 끼릴로프를 소개해 주었다.
"만약 다른 사정이 없다면 도와줄 거야. 그는 아주
훌륭한 연주자야."
제냐의 추천사가 인상적이었다. 다행히 왈레리
끼릴로프는 전화를 받았고 KINO의 연주를 들은 적이
있다면서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오늘밤이라도
좋다고 대답했다.
르빈은 빅토르의 아파트로 달려가 끼릴로프를
소개받은 경과를 간략히 설명했다. 그들은 곧
아파트를 나와 택시를 타고 끼릴로프의 집을 향해
달렸다. 끼릴로프를 데리고 바로 안드레이 녹음실로
갈 작정이었다. 그들은 그동안 많은 연습을 해왔기
때문에 따로 더 연습할 필요가 없었고 끼릴로프에게만
간단히 연습을 시킬 작정이었다.
과연 제냐의 말대로 끼릴로프는 매우 훌륭한 타악기
연주자였다. 많은 설명이 필요없었고 연습도 한
차례로 그만이었다. 그는 록을 잘 소화하고 있었고
이번에 빅토르가 시도하는 비크비트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빅토르의 노래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열의도 보였다. 그날 밤, 그들은 새벽
3시까지 녹음을 하였다. 르빈의 생각에는 매우 잘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빅토르는 마음에 들지 않아
하였다. 개개인 사람에 차이가 있듯 녹음방법도
안드레이와 뜨로삘로는 차이가 있었다. 뜨로삘로는
까다롭고 엄격해 다시, 다시를 거듭했었다. 그러나
안드레이는 다시 한번 더 시키는 법없이 대충대충
넘어가는 식이었다. 아마 그것이 빅토르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끼릴로프의 드럼
연주도 빅토르는 탐탁지 않게 여겼다.
"두 사람 다 진지하지 않아. 그렇게 대충대충
넘어가는 사람들과 나는 일하기 싫어!"
진지하지 않다는 한마디로 빅토르는 다시는
끼릴로프와 안드레이를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독선적인 빅토르의 태도로 인해 르빈은 이번에도
피해를 입었다. 기껏 호의를 베풀려는 안드레이나
끼릴로프에게 녹음을 연기하기로 했다고 거짓으로
꾸며대 그들과 헤어져야 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서는 두 사람 사이가 벌어지지
않고 그럭저럭 유지되었다. 역시 둘다 서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 있지 않아 르빈과 빅토르는 록
클럽 가을 정기 연주회 준비를 해야 했다. 그
연주회는 인원 확보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이제까지
아크와륨의 도움을 받았으나 아크와륨과 앞뒤 차례에
나란히 공연하는 연주장에서 보리스나 쥬사 등
아크와륨 멤버들과 겹치기 공연을 한다면 청중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번 기회에 아크와륨 그룹의
그늘을 벗어날 필요가 절실하다고 빅토르는 생각했다.
"전에 올레그와 함께 만났던 막스 알지? 막스라면
우리를 도와줄지도 몰라."
르빈은 빅토르의 눈치를 살폈다.
"베이스 기타 말이지?"
빅토르도 막스를 알고 있었다.
"그래 막스한테 연락할까?"
"그러지 본인이 원한다면 함께 해도 좋아."
빅토르도 그의 연주를 기억하고 있었다.
르빈의 연락을 받은 막스는 쾌히 응낙했다.
그 말을 들은 빅토르는 막스와 연습하고 난 뒤
연락해 달라고 하였다.
이번에도 르빈은 빅토르의 대응에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세 사람이 함께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연습한 다음 연락하라니, 그런 독선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성질 같아서는 당장 그만 때려치우고
싶었다. 하루쯤 속을 끓이던 르빈은 이번에도 참기로
했다. 그는 독립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르빈은
어쩔 수 없이 빅토르의 노래를 들고 자기 집과 멀지
않은 국치노의 막스네 집을 드나들며 연습에
들어갔다. 막스의 집에 드나들던 어느날 르빈은
막스의 친구인 유리 가스빠란과도 알게 되었다. 유리
가스빠란은 첼로도 기타도 연주할 수 있는
재주꾼이었다. 막스도 그랬지만 가스빠란도 여간
성품이 차분하고 음악에 열심이 아니었다. 그도
빅토르의 노래를 좋아하였다. 그들 셋은 의기가
투합하여 함께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르빈은 빅토르의 집이 있는 그라스단가로 가는
트롤리버스를 정류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친숙한 목소리가 인사를 건네왔다. 막스와
가스빠란이었다. 유리는 기타를 메고 있었다.
"어디 가는 길이니?"
"생일초대에 갔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야."
막스의 대답이었다.
"그래, 르바는 어디 가는 길인데?"
"응, 연습하러 가는 길이야."
르빈은 그렇게 말해놓고, 이들과 함께 빅토르한테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때, 시간 있니?"
"왜?"
"시간 있으면 비쨔네로 함께 갔으면 해서? 그 동안
우리가 연습한 걸 비쨔와 함께 해보면 어떨까. 그리고
유리도 가서 안면이나 터놓자구."
"집에 가던 길이니 우리는 상관없어. 그래 함께
갈까?"
셋은 트롤리버스가 오자 그것을 타고 30여 분간
흔들리며 빅토르네 집이 있는 그라스단가로 갔다.
가는 동안 그들은 음악이며 영화 이야기를 떠들석하게
주고받느랴 옆 사람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했다.
그들은 서로 주먹으로 배를 찌르거나 가슴을 쳤고
배를 얻어맞은 막스는 신음을 토하기도 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거칠게 보이는 것에 조금도 신경을
쓰지않았다. 그들이 트롤리버스에서 내리자 옆에 있던
승객들은 찌푸렸던 이마를 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휘파람을 날리며 빅토르의 아파트에
도착했고 르빈은 거침없이 초인종을 누르고 아파트로
들어갔다. 그러나 막스와 유리를 소개받은 빅토르는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인사를 나누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르빈을 부엌으로 불렀다.
"왜, 아무 연락도 없이 모르는 사람을 집으로
데려온 거지?"
빅토르는 불쾌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어 르빈을
힐책했다.
르빈은 당황했다. 빅토르가 이렇게 힐난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리안나는 시선을
딴 데다 두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왜? 막스 몰라? 막스와는 그동안 충분히 연습했어.
그래서 함께 오자고 했어. 그리고 유리는 우리한테
도움이 될까해서 데리고 온 거야. 한번 들어봐.
유리의 기타 솜씨가 괜찮아. 어쩌면 우리 공연에
도움이 될거야."
"필요없어. 막스만 있으면 충분해. 내게 의논하지
않고 너 마음 대로 일을 결정하지 말아."
빅토르는 건짜증까지 냈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어. 나는 네게
사람을 소개했을 뿐이야. 결정은 너가 하는 거야.
그리고 나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 그런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지?"
르빈의 대꾸도 자연 거칠어졌다 그렇게 말하자
빅토르는 대꾸를 하지 못했다.
"요즘, 비쨔 마음이 상해. 있어 르바가 이해해줘."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마리안나가 참견을 하였다.
"그래도 그렇지. 나는 하느랴 하는데 매번
핀잔뿐이니 일할 의욕이 나야지."
르빈은 투덜거렸다.
"좋아, 좋아. 내가 신경과민이었어. 집이 좁고
초라한데 친한 사람에게라면 모르겠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거던."
빅토르는 손을 저으며 변명하듯 그리고 르빈을
달래듯 말했다. 빅토르의 말을 듣고 보니 르빈도 그
심정에 이해가 갔다.
"알았어. 전화라도 한번 하고 올걸 나도 너무
무신경했어."
빅토르와 르빈은 곧 화해의 말을 주고 받았다.
그들은 담배를 한대씩 태운 후 곧 연주에 들어갔다.
막스와 르빈과 연주를 하던 빅토르는 무슨 생각을
했던지 유리에게도 기타를 내주며 연주하도록 했다.
그때까지 세 사람의 연주 광경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유리는 솔로로 기타를 연주하였다. 유리는 자기
나름의 록큰롤 스타일을 선보였다. 그것을 몇 소절
듣지 않아 빅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에너지가 모자라. 나는 겉으로만 화려한 것은
싫어. 내면의 폭발할 것 같은 힘, 그것이 필요해."
빅토르의 지적을 유리는 곧 알아들었다. 리듬 앤
블루스에 비트를 섞어 힘차게 연주를 하였다. 그것을
들은 빅토르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맞아, 그거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명이고,
영웅이고, 파괴와 건설이야. 우리는 기존의 어떤
틀에도 묶이거나 안주해서는 안돼.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것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가야 해. 이 점만
유념한다면 우리는 함께 일할 수 있을 거야. 어때
유리도 이번 공연에 우리와 함께 출연하지?"
"기회를 준다면."
유리는 얼굴에 홍조가 어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유리와 같은 동네에 사니까 자주 만나 연습을
해봐. 재능이 있어 보이니까."
막스와 유리를 먼저 보내고 난 빅토르는 르빈에게
말했다. 르빈은 그러마고 단단히 약속했고 막스와
유리와 셋이서 열심히 연습을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연주회에 네 사람이 출연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공연을 마친 빅토르는 연주가 여러 곳 틀렸다면서
화를 냈다. 그것은 빅토르의 생각만이 아니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보리스 그레벤쉬코프가 옆에서 핀잔을
주었다.
"어떻게 했길래 서로 호흡이 그렇게 어긋나지?"
"글쎄요, 잘 한다는 것이, 의욕이 너무 앞서
그랬겠지요."
얼굴을 붉히며 르빈을 힐책하던 빅토르는 정작
보리스가 그렇게 참견하자 딴전을 피웠다.
"르빈 하나 빼놓군 하나도 비쨔 노래를
못맞추더군."
"이런 정기 공연이야 의례적인 것이니까 다음에 더
잘하면 되겠지요."
"하기야 그렇지만, 일반 청중들에게는 한두 번의
인상이 중요한 것인데."
"다 열심히 할거예요."
"글쎄, 한걸음 한걸음이 다 중요한 것 아냐?"
보리스는 빅토르를 아끼기 때문에 그런 충고를 한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열심히 연습하겠습니다."
빅토르는 애써 웃으며 보리스의 팔을 잡고 아크와륨
그룹 쪽으로 걸어갔다. 음악잡지 '록시'의 평도 매우
신랄했다. 다른 그룹에 대한 평도 대체로 우호적인
것이라 할 수 없었으나 특히 KINO 그룹에 대한 평은
가혹했다. 노래에 대한 평가보다도 무질서한 무대
매너에 대한 비평이었다. 노래를 부르며 무대를
종횡무진 뛰어다닌 빅토르의 연주 태도도 곱게 보지
않았고 무릎까지 벌어져 펄럭인 르빈의 바지도
시비거리로 삼았다. 연주를 하며 쇼를 연출한 르빈과
막스 그리고 유리를 호되게 비판하였다. 코미디언들이
아니라면 어찌 기타를 놓고 무대에서 괴상한 몸짓을
연출하며 심지어 노래말에 맞춰 도둑흉내(냉장고를
터는 도둑이란 노래를 부르는 동안 르빈은 실제
냉장고를 열고 음식과 술을 꺼내 먹고 마시는 시늉을
해보이기도 하였다)를 낸 르빈이 속한 KINO 그룹을 록
클럽에서 제명시키라는 극언까지 하고 있었다.
그 일로 하여 시당국에서는 록크럽에 주의를
주었다. 풍속을 문란하게 하는 무질서한 공연은
앞으로 금지한다는 내용의 경고장도 발부하였다.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보리스와 마이크, 그리고
빅토르가 록 클럽 회장과 KGB에 소환을 당하였다.
거기에는 시청 공연담당자도 와 있었다. 정보부 공연
담당자는 미리 준비한 서류를 제시하고 거기에
서명하도록 했다. 서류에는 록 클럽과 그 회원
그룹들은 건전한 국민정서 함양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만을 공연하되 풍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저속한 공연은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것이었다. 특히
아크와륨과 KINO 그룹에게는 별개로, 다시 한번 더
그런 무질서하고 난폭한 공연을 할 경우
의법조처하겠다는 엄중한 경고가 내려졌다.
KGB에 다녀온 빅토르는 멤버들을 불러 술을 냈다.
"우리는 성공하고 있는 거야."
전과 다름없이 붉은 포도주를 오븐에 데워 마시며
빅토르는 멤버들에게 말했다. 르빈과 막심, 유리
누구에게도 그가 그토록 혹독한 비판을 받고 또
정보부와 시 당국으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고 도리어
성공운운하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는 우리 먼저 사람들과 닮았다는 것이 가장
불쾌해. 그리고 우리 먼저 활동한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말을 들어도 잠이 안와. 그런데 이번
'록시'의 혹평이나 까게베의 경고나 시당국의
경고들이 전에 없이 가혹하고 강경한 것이었다니 우리
KINO는 전에 어떤 그룹보다 많은 주의를 끌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어."
르빈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당국의
경고를 위안으로 삼다니, 위태로운 발상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막스나 유리는 좀 달랐다. 빅토르의
말을 들은 그들은 빅토르의 음악관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래 록을 한다면 전사람들과 무엇인가
달라야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앞으로 좀더 정신 바짝 차리고 곡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겠어."
빅토르는 멤버들 앞에서 새로운 각오를 밝혔다.
그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앞으로 나는 시대를
노래하겠어, 내 문제만이 아닌 이 시대를. 그래,
우리는 시대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해. 우리는 시대의 소명에 귀기울여야 해,
하고 속으로 다짐하였다. 르빈은 그냥 좀
의아스럽다는 생각으로 그 말을 받아들였고 막스와
유리는 그래야 마땅하리라 여겼다. 어쨌든 KGB의
소환을 빅토르는 자기발전의 긍정적 계기로
삼으려했다.
르빈과의 의견충돌은 거듭 되풀이 되었다.
안드레이와의 녹음을 탐탁치않게 생각하던 빅토르는
다시 녹음을 해야겠다고 나섰다. 마침 뜨로삘로가
녹음을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보리스가
프로듀서를 하겠다고 나섰다. 전에도 보리스가 KINO
그룹의 프로듀서로 일하겠다고 했으나 아직 뚜렷하게
활동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곡목
선정이며 녹음방식에까지 자기 의견을 반영시키겠다고
나섰다. 빅토르로서는 보리스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르바, 보리스가 프로듀서해 준다니 성공은
예약해둔 것과 다름 없겠지."
"그럼 막스와 유리를 불러 빨리 연습을 해야겠군."
르빈은 빅토르의 불 같은 성격을 아는지라 하루라도
빨리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아냐, 막스와 유리는 안돼. 이번에도 아크와륨
그룹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야. 막스와 유리는 아직 그
수준에 미치려면 멀었어."
르빈은 무슨 둔중한 것에 정수리라도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막스와 유리는 훌륭한
연주자야. 그들과 해야 해. 그리고 아직 그들 실력이
모자란다면 연습을 시키면 될게 아냐. KINO 앨범은
KINO 멤버가 해야돼."
르빈은 흥분된 목소리로 외치듯 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내 앨범을 만드는데, 나를
가르치려는 생각은 집어쳐."
빅토르도 언성을 높였다. 지난번 연주만해도 그렇지
무대만 시글벅적했지, 그걸 연주라고 했단 말인가.
적당히 흥이나 내는 아이들과 내 노래를 취입하라니,
당치않아.
빅토르의 말을 들은 르빈은 르빈대로 그 동안
쌓여왔던 빅토르에 대한 신뢰가 와르르 큰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것 같았다. 르빈은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위쨔 그것이 너의 앨범이라면 네가 알아서 하렴.
만약 그것이 KINO 그룹 앨범이라 생각한다면 우리
KINO 멤버들이 해야할 거야."
"료싸, 너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군. 나는
너희들 없이도 녹음할 수 있어."
"알았어, 알아서 해."
심한 배신감을 느낀 르빈은 그렇게 외치고 튀어나가
버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록 클럽에서 마주친 쓰윈이 불쑥
말했다.
"르빈과 헤어졌다면서?"
너무나 뜻하지 않았던 말에 빅토르는 당황했다. 그
동안 줄곧 불길하게 머리를 점령해오던, 그러나 애써
무시하려했던 예감이 적중한 것에 심한 당혹감을
느끼며 쓰윈을 쳐다보았다.
"르바와 헤어져?"
빅토르는 침착하려고 애쓰며 반문했다. 그의 얼굴은
핼쑥했다.
"모스크바에서 르바를 만났는데, 르바가 그러던데."
쓰윈은 순간 안할 말을 한 것 아닌가 생각했다.
"르바가 그래?"
빅토르는 저도 모르게 거칠게 도리질을 했다.
"그래 비쨔에게 다른 계획이 있는 것 같아, 자기는
KINO에서 빠졌다고 그러던데?"
"아냐, 아냐 르빈은 뭔가 오해하고 있어. 왜 우리가
헤어져."
"르빈은 이미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던 걸."
쓰윈은 이왕 시작한 악역이라면 끝까지 해내야하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두 사람 다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한쪽은 떠났는데 한쪽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허송세월한다면 그 아니 딱한
노릇이겠는가. 쓰윈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는 사실을
빅토르에게 다 전해주었다.
"모스크바에서 할동을 해?"
빅토르는 힘없이 되뇌였다.
"르바의 말인즉 앞으로 계속 모스크바에서
활동하겠다던 걸."
쓰윈의 한마디 한마디가 무슨 예리한 송곳처럼
빅토르의 가슴을 찔렀다.
"아냐 그럴 리 없어. 내게 무슨 다른 계획이
있겠어. 르바와 한번도 헤어지는 데 대해 의견을 나눈
적 없었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르바
생각은 분명한 것 같았어. 르바는 이미 돌아섰어."
"설마."
그날 저녁 빅토르는 모스크바의 리젠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리젠코도 쓰윈과 비슷한 내용의 대답이었다.
"르빈은 다른 말은 없었고, 다만 비쨔가 다른
계획이 있어 자신은 KINO를 떠나게 됐다고 하던 걸."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어. 나는 르바가
모스크바에 간 줄 전혀 모르고 있었어. 그래 지금
연락할 수 있어?"
"아니, 친구와 만난다고 했는데, 난 그 연락처를
모르는 걸."
"그럼 르바더러 내게 전화 좀 해달란다고 전해줘."
빅토르가 그토록 간곡히 부탁해두었는데도
르빈으로부터는 전화가 없었다. 일주일이 답답한
가운데 흘러갔다. 빅토르는 어쩔 수 없이 르빈을
단념할 수밖에 없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굳혀갔다.
르빈을 단념한다는 것은 여간 외롭고 막막하고 힘들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 르빈과 보냈던 나날들의
기억이 아주 무서운 기세로 빅토르를 압박해왔다.
그가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도
함께 일어났다.
빅토르는 며칠 동안 담배 연기와 싸구려 보드카에
젖어 방안을 뒹굴었다. 그는 방안을 뒹굴며
히히덕거리거나 혼잣소리로 중얼거리고는 했다.
노래는 꿈을 싣고 다니지. 우유 한잔과 검은
보리빵, 폐에 늘 무위를 선사하는 한가치의 고마운
담배. 언제나 손과 가슴을 떨지않고서는 들 수 없던
푸른빛 도는 보드카잔. 무색무취의 투명한 보드카잔은
정녕 나의 영혼을 증류시켜 놓은 것일 터. 영혼은
보드카잔에서 늘 충만하고 다른 영혼을 뒤흔들 꿈에
부풀어 있지.
나는 누구인가? 가장 평범하고, 가장 일상적인
어법으로 말해보자. 그러나 가장 평범하고 가장
일상적인 어법으로밖에 말해지지 않는 나의 존재의
서글픔이여. 색다른 어법, 감탄과 현란한 수사로
채색된 그런 어법으로 말해져야하는 아주 특별한
존재여야 하는, 그러나 그렇지 못한 나의 서글픔이여.
"빅토르!"
빅토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리안나는 목소리에
감정을 싣는데 능숙하다 그녀의 부르는 음성만으로도
용건을 짐작할 수 있다. 누가 방문한 것인가.
마리안나의 음성은 밖에 누군가 와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을
것이다. 빅토르는 초인종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반들거리는 도어 핸들이 돌려지고 있다. 도어가
열리고 종잇장처럼 하얀 얼굴의 보리스
그레벤쉬코프가 들어선다. 그의 얼굴에 우호적인
미소가 어려있다. 그 미소는 걱정으로 바뀌었다.
"아, 보랴!"
빅토르는 혀꼬부라진 소리를 내며 손으로 허공을
젓는다. 그는 보리스에게 전화를 걸어 르빈을
되돌려달라고 터무니없이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자 보랴, 술 한잔하세요."
빅토르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술을 권했다.
"보랴, 난 노래부를 거예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우리 할아버지의 향수를 노래하고 우리들 자유를 위해
노래할 거예요."
술에 젖은 빅토르의 머리에, 바다에 재를
뿌려달랬다는 리술아저씨가 떠올랐다. 중앙아시아의
들판에 피어있는 따마리스크가 생각났다. 그리고
시베리아로 유형 가 있는 아르까지나의 아버지와 그
가족들이 상기되었다. 지금도 데카브리스트들의
마을을 방황하고 있을지도 모를 이리나
네스테랭코바가 기억났다. 레피노의 언덕에 누워 있는
레핀이 또 머리에 떠올랐다. 바실리 사원을 너무
아름답게 지은 탓에 두 눈을 뽑히었다는 포스토닉
바르마가 머릿속을 한참 뱅뱅 맴돌았다.
"나는 이 세상을 다 노래할 거야."
"그래 알아. 비쨔는 노래 불러야지. 르빈이
떠났다고 이렇게까지 할 것 있겠어."
르빈, 그래 르빈은 내게 형제 같은 존재였어. 나는
그를 형제처럼 생각했어. 그러나 그는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어. 나는 다른사람에게는 못할 말이나
행동도 르빈에게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나는
그에게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할 수 없는 말이나
행동을 거침없이 해왔어. 그런데 그 내면에는 사랑이
깔려 있었다는 걸 르빈은 알아차리지 못했어.
"르빈 대신 찌토프와 일을 하면 어떻겠나. 내가
찌토프한테 비쨔 이야기를 했어."
"찌토프는 안돼. 그는 나의 선밴데 KINO를
하겠어요."
"찌토프도 비쨔를 좋아하고 있어. 내가 비쨔를 좀
도와달랬더니, 비쨔만 좋다면 그러겠다고 했어."
아, 그래 찌토프라면 괜찮은 연주자지.
보리스로부터 아크와륨 그룹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레닌그라드에 와 있는 찌토프는 베이스 기타로서
발군의 기량을 지니고 있지. 그 동안 나도 몇 번인가
찌토프의 도움을 받았었어. 그만 도와준다면 KINO는
커갈 수 있겠지.
"보랴가 압력을 넣었지요. 내가 르바를 돌려달라고
했던가. 그러니까, 그런 내가 귀찮아서 찌토프를
희생물로 삼겠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사람이
그래서는 안돼요, 안되지."
"알았어. 내일부터 우리 아크와륨 연습실로 나와
알았지?"
"알았어요, 알았어."
"그렇지만 찌트를 희생양으로 삼으면 안돼.
알았지요?"
"그래, 알았어, 알았다니까."
34. 벨르이 빌레뜨를 받다
늦여름의 긴 장마가 끝나지도 않은 채 가을이 왔다.
며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가 했더니 가로수며
공원의 나무들은 누렇게 변해가던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홀가분한 모습이 되었다. 북극 기류의
영향을 받은 바람은 하루가 다르게 쌀쌀하게 변해
갔다. 곧 눈발이라도 흩날릴 것처럼 하늘은 무겁게
머리 위로 바짝 내려와 있고 해는 더욱 짧아져
있었다.
질기게 계속되던 르빈을 잃은 빅토르의 아픔은
가을에 들어서며 조금씩 엷어져 갔다. 가급적 외출을
줄이고 집에 칩거하고 있는 동안에도 여러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보리스와 마이크, 쓰윈, 쥬사 등 주로 록
음악 관계자들이었다.
보리스는 찌토프를 데리고 빅토르를 방문해 두
사람을 맺어주려고 했다. 찌토프는 가능하다면
빅토르를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빅토르는
찌토프가 만만하지가 않았다. 찌토프는 빅토르보다
5년 연장이었고 음악적으로도 선배였다.
"도움은 받고 싶지만, 왠지 죄를 짓는 기분입니다.
당분간 유리와 둘이서 해보고 정 안되면 그때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보리스와 찌토프에게 빅토르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 우리는 언제라도 비쨔를 도울 생각이니까,
그렇게 알아."
빅토르는 마음의 안정을 회복하고 유리 가스빠란과
왈레리 끼릴로프와 모스크바에서 알게된 구스타프를
차례로 멤버로 받아들여 KINO 그룹의 활동을 전보다
더 활성화시켜 나갔다.
모스크바의 사샤 립니쓰키의 소개로 어느
연주회장에서 처음 만나 음악적 견해를 같이했던
구스타프는 당시 꽤나 명성을 날리는 보칼겸 기타
연주자였다. 구스타프를 얻은 것에 빅토르는 크게
고무되었다. 빅토르와 그의 키노 그룹의 성공을 위해
이제 그들은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활동을
펼쳐가기로 약속했다.
빅토르는 지난날보다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더
기대를 걸었다. 그리고 지난날의 일들은 좋은 것만
기억하고 나쁜 일은 모두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자고
마리안나와 약속했다.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위해
빅토르는 전에 없는 열성을 보였다.
그러나 또다른 복병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복병의 출현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다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어서 애써 덮어두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당의
군사위원회로부터 호출명령이 나왔던 것이다.
소비에트 국민 중 모든 남자는 일정한 연령에
이르면 군에 입대하여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국방의
의무가 주어져 있었다. 국민개병제도가 실시되고
있으므로 누구나 나이가 차면 군에 입대할 각오를
하고 때가 이르면 병역의무를 수행하였다.
복무기간은 2년이었다. 빅토르는 제61
기술전문학교에 다닐 때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때는
재학중이었으므로 징집연기 신청이 받아들여졌었다.
그에게 군징집 관계는 이미 예고된, 피하지 못할
숙제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제 막 KINO 그룹을
재결성한 빅토르로서는 군에 입대할 입장이 아니었다.
만약 빅토르가 군에 입대한다면 KINO의 해체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더구나 빅토르 자신의
가수로서의 생명유지도 불안하고 불투명했다. 무엇이
2년 후의 그를 보장해줄 것인가. 당장 군에
입대한다면 빅토르로서는 장래를 모두 잃어 버릴
우려도 없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빅토르의 물음에 마리안나는 한동안 입술을 깨물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군에 갔다와야 되겠지?"
빅토르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자신이
루스끼라면 이렇게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스끼도 아닌 동양계가 소비에트에서 살아가려면
가장 기본적이라 할 국방의 의무는 마땅히 수행해야
되지 않겠는가. 소비에트 공민으로써의 의무를
수행해야 소비에트 사회가 제공하는 제반 혜택을
정당하게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만약 그렇지 않고
군 입대를 기피한다면 루스끼보다 더 추적이 심할
것이고 자칫 사회로부터 추방 당하거나 매장 당할
위험마저 없지 않을 것이었다.
"르바가 했던 방법대로 하면 어떨까?"
궁리에 잠겨 있던 마리안나가 입을 열었다.
"르바처럼?"
빅토르는 곧 고개를 저었다.
"나는 까레이츠잖아. 그게 통하겠어?"
"까레이츠면 소비에트 공민 아닌가?"
"그래도 어디 한 군데라도 믿을 데가 있어야 그
짓도 해보지."
빅토르는 자신없는 얼굴로 도리질을 했다.
"내가 알아서 일을 꾸밀 테니 비쨔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마리안나는 결연히 말했다.
"다른 방법 없어. 르바가 했던 대로 연기를
하자구."
르빈은 군 당국의 호출을 받은 며칠 후 왼팔을
피투성이가 되게 하여 정신병원을 찾아갔다. 정신과
의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칼을 하나 샀는데, 그것이 제대로 드는지 안드는지
알아보기 위해 팔을 베보았지요."
르빈은 태연히 대답했다. 르빈의 팔에는 가로
세로로 칼자국이 무수히 나 있었고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칼이 잘 드는지 안드는지 알아보기 위해 팔을
벴다!"
의사는 르빈의 끔찍한 팔을 외면했다. 더 다른 걸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당장 그를 입원시켰다. 한달
가량 입원해 있던 르빈은 담당의사와의 끈질긴 투쟁
끝에 끝내 벨르이 빌레뜨(백색카드`:`정신병자
증명서)를 받아 병역을 면제받았던 것이다.
이튿날 마리안나는 빅토르와 함께 쁘랴즈까에 있는
레닌그라드 제2 정신병원의 문을 두드렸다.
마리안나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 빅토르의 정신감정을
의뢰했다.
"결혼한 지 이태가 지났는데, 최근 들어 통 말을
안합니다. 어떤 때는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한마디도 안합니다."
정신과 의사를 만난 마리안나는 빅토르의 증상을
그렇게 꾸며댔다.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말을 하지 않는다?"
"예, 그렇습니다. 제가 하도 답답해 무슨 말이라도
한번 시켜보려고 하면 짐승처럼 광포하게 변해 옆에
있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거나 파손합니다.
날이 갈수록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쉰 살은 넘겼을 것으로 보이는 의사는 침착한
얼굴로 먼저 빅토르의 외양을 검사하였다. 이름과
주소를 물었다. 빅토르는 태연히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는 일이 무엇이며 취미는 어떤 것인지,
담배는 태우는지, 술은 얼마나 마시는지 갖가지 것을
다 물었다. 어떤 질문에도 빅토르는 입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어딘가 아주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아득했다. 의사는 질문에 지쳤던지
이틀만에 빅토르의 입원을 허락했다.
"선생님,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어떤 일을
벌일지 몰라 불안해서 그러는데, 제가 간병을 하면
안될까요?"
"병원에는 전문 간병사들이 있습니다."
냉랭한 음성으로 의사는 대답했다.
"하지만 선생님, 저는 비쨔가 잘못될까봐 집에 가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거예요. 여기서 무슨 일이라도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저를 병원에 있게
해주십시오."
마리안나는 끈질기게 간청했다.
"병실 청소와 환자들의 의복세탁을 할 수
있겠어요?"
의사는 귀찮아 하는 표정으로 빈정거리듯 물었다.
"그럼요. 어떤 험한 일도 해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남편 곁에만 있게 해준다면 성의를 다해
일하겠습니다."
마리안나는 무릎을 꿇고 의사에게 매달렸다.
"좋습니다. 그럼 세탁장에서 일하도록 주선해
보겠습니다."
의사는 귀찮은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렇다해도 환자와 함께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루에 한 차례씩 면회를 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이것도 규정에 위배되는 특별한 배려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 고맙습니다."
마리안나는 정말 의사가 고마웠다. 떼를 써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모두 얻은 것으로 판단한 마리안나는
의사의 가운을 잡고 거기에 머리를 문질렀다.
마리안나가 그렇듯 병원에 남고 싶어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단순한 풍문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모르지만
정신병원에 대한 소문은 좋지 않았다. 음식이
정결하지 못하고 그것도 제대로 잘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질서를 지키고 규율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환자를 구타하거나 벌을 주거나 가혹하게
다룬다 하였다. 게다가 운이 나쁜 경우 밤에 잠든
환자에게 슬그머니 안정제를 주사하여 무기력한
사람으로 만드는 일도 있다 하였다. 그래서 멀쩡한
사람도 들어갔다 나오면 정신병자가 되고 만다는
소문이 있었다. 마리안나는 그런 불행한 일이
빅토르에게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곁에
있으려고 기를 쓴 것이었다.
그날부터 당장 마리안나에게는 힘든 일이 주어졌다.
병원의 세탁장은 규모가 거대했다. 원통의 터빈처럼
생긴 열 대의 대형 세탁기가 쉴새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세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잠시도 손을
쉬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세탁물을 분류하고, 분류한
세탁물을 해당 세탁기 앞으로 운반하고, 세탁기에서
나온 세탁물을 다림질하는 일들로 분주하였다.
마리안나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그 일을 조금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해냈다. 그러다 보니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사귈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을 통해
빅토르의 편의를 봐줄 수 있는 길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 속셈으로 마리안나는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이
빅토르는 잘 해내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입에 대지
않았고 음식도 잘 먹지 않았다. 마치 연기만 먹고
사는 사람처럼 담배만 피워댔다. 마리안나는 오로지
담배만 사 넣어주었다. 날이 갈수록 빅토르의 얼굴은
창백하고 무기력해 보였다. 우울증이 극도에 달한
인상이었다. 외양으로 보아서는 의심할 여지없는
정신질환자였다. 그러나 담당의사는 만만치 않았다.
담당의사는 수없이 같은 질문을 지치지도 않고 되풀이
해댔다. 그러나 처음부터 한번도 빅토르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빅토르는 언제나 태연히 의사를
쳐다보고 있었으며 아무리 해도 그의 말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무슨 약물에 중독된 것처럼 풀려
있었고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가계를 따지고
본인의 병력을 캐고, 실어증 발생의 기제를 찾기 위해
끊임없는 질문을 되풀이했으나 어느 것 하나 분명히
밝혀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환자의 부계는 물론
모계에도 정신병력을 가진 자는 없었다. 다만 어릴 적
친구들로부터 따돌리고 소외되어 성장하는 과정에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학교에서 퇴학 당한 것이 정신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었다.
그리고 직장에서의 잦은 해고와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한 성격이 우울증을 심화시켰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런 심리적 기제들이 오랜 잠복기간을 거쳐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게 되자 어느날부터 갑자기
실어증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추측될 따름이었다.
담당의사 표트르 푸르고프는 한달 반 동안에 걸친
빅토르와의 결투에서 결국 두손들고 말았다. 그는
빅토르를 법정 소비에트 정신병자로 인정하는 벨르이
빌레뜨를 끊어 마리안나에게 주고 말았다.
'백색진단서'를 든 마리안나는 병원을 나오는 길로
곧 빅토르를 데리고 군사위원회를 찾아갔다.
한달 반 동안에 빅토르는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몸이 상해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볼은 훌쭉 들어가고
눈은 쾡하니 패였다. 가위로 아무렇게나 자른 턱과
볼의 수염은 그의 모습을 더 초췌해 보이게 했다.
마리안나는 눈물이 글썽글썽한 얼굴로 담당관에게
백색진단서를 내놓았다.
"빅토르는 지난 몇 달 동안 계속 어떤 무서운
마귀에 시달려왔습니다."
담당관은 빅토르의 위 아래를 근엄한 시선으로
훑어내렸다. 그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백색진단서를 세세히 뜯어보았다.
"이 사람을 군대에 보낸다면 며칠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말 것입니다."
마리안나의 말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던 장교가
눈을 들어 빅토르를 바라보았다. 그 장교는
담당관에게로 오더니 백색진단서를 훑어보았다.
"정신병자로군!"
그 장교는 측은하다는 듯 마리안나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됐어요. 저런 정신병자와 살게 된 아가씨가
딱한 일이요. 우리 군대에는 저런 정신병자가 필요치
않으니 염려말고 집으로 데리고 가시오."
담당관은 병역면제증을 발급해 주었다.
군사위원회를 나온 두 사람의 마음은 맑은 하늘의
구름처럼 가벼웠다.
두 사람에게는 명절과 다름없는 날이었다.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장애를 뛰어넘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제 마음 놓고 연주활동을 펼 수 있게 된 빅토르는
집에 돌아오자 흐물흐물 웃었다. 그는 정신과 의사를
속여넘긴 것이 아직도 잘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의사가 덜 떨어진 작자였어. 아무렴 어설픈 내
연기 하나 간파하지 못하다니......."
벨메니와 야채 수프로 오래 비워두었던 창자를
채우며 빅토르는 담당 정신과 의사를 비웃었다.
"그런 말 말아요. 비쨔가 그 정신과 의사를 속여
넘기기 위해 군대 2년 복무하는 것보다 더 힘든
고비를 넘겼으면서......."
"하기야....... 정말 힘들었어."
"어쩌면 내 우는 모습이 더 애처로와 속아 넘어가
준 게 아닌지 모르겠어."
마리안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하며 웃음지었다.
"글쎄 어떻든 마리안나가 나보다 더 고생했어."
빅토르는 마리안나를 뜨겁게 포옹했다.
35. 캄차카의 임시 대장
1984년이 밝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무슨 특권처럼
새로운 포부와 새로운 기대로 가슴 부풀리며 새해를
맞는다. 빅토르와 마리안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새해에
거는 기대가 남달랐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연초에
그동안 미뤄왔던 결혼청원서를 들고 호적등록소로
찾아가 정식 부부로 등록하였다.
그날, 그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하객들이 줄을 이어
찾아들었다. 축하잔치는 하객들이 붐비는 가운데
유쾌하고 성대하게 치뤄졌다. 레닌그라드 록 음악
관계자들은 거의 한사람도 빼놓지 않고 참석했다.
다만 르빈이 끝내 얼굴을 내밀지 않은 것이 두 사람을
매우 서운하게 했다. 르빈은 모스크바에서 활동하지만
집은 아직 레닌그라드에 있었다. 그는 자주
레닌그라드에 머문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헤어지고 나서 아직 한번도 그들은 조우하지
않았었다.
보리스의 아크와륨 멤버들이 결혼축가를 특별히
불렀고 마이크의 쇼빠르크 멤버들도 질세라 흥겨운
노래로 결혼을 축하했다. 포도주와 보드카는 넘쳐날
정도였고 식탁마다 과일과 삐로그며 꾸리노에 마소며
멀라꼬며 마로졔노에 등이 풍족하게 쌓여 있었다.
하객들은 두 사람의 행복을 축원했고 음식을 들며
흥겹게 놀았다.
두 사람의 결혼은 만 사람의 공인을 받은 것이었다.
결혼식 며칠 후, 라이욘 직업보도소에서 연락이
왔다.
화부자리가 났는데, 임시직이라도 괜찮겠느냐는
것이었다.
지난번, 담당자로부터, 왜 취직자리를 알선해 주면
한 군데 지긋이 붙어있지 못하고 그렇게 자주 해고
당하느냐는 핀잔을 들은 빅토르는 KINO의 레코드 두
장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연주활동을 하다보니, 결근을 자주하게 됩니다.
노래는 포기할 수 없고 그렇다고 노래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죽을 지경입니다."
빅토르의 얼굴이 크게 나와 있는 앨범 두 장을
유심히 뜯어보던 담당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간이 많이 나는 일자리를
알아봐야겠구만."
낯이 익은 담당자는 안됐다는 듯 빅토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자리가 어디 쉽나. 가만 있자. 아파트
보일라실은 어떨까. 사흘에 한번씩 교대하는데, 하루
밤낮을 근무하고 사흘을 쉬는데, 아무래도 시커먼
탄진을 덮어쓰고 종일 석탄 퍼넣는 그런 궂은 일은
못하겠지?"
"예, 그런 자리가 있습니까?"
빅토르는 귀가 번쩍 띄였다.
"당장 있다는 게 아니라, 자네한테는 그런 자리가
좋겠다는 뜻이야. 하지만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그런
험한 일을 하겠나?"
"아닙니다. 그런 자리가 있으면 꼭 저를
보내주십시오."
빅토르는 간곡히 부탁했다. 하루 일해서 밥벌이를
하고 사흘 동안은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일자리라면 그것이 석탄 때는 화부가 아니라 더
험하고 힘든들 어떠랴.
지금까지의 직장은 밤에 마음놓고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밤을 꼬박 새며 노래를 짓고 연습하는 습관이
몸에 벤 그는 밤을 새우고 다음날 직장에 나가면
꾸벅꾸벅 졸기 마련이었다. 볼썽 사납기도 하려니와
높은 사람의 꾸중을 듣는 것도 한두 번이지 할 노릇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루 일하고 사흘을 쉬는
직장이라면 그런 어려움은 겪지 않아도 되려니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부탁해두었던 화부자리가 임시직이지만
생겼는데 그곳이라도 가겠느냐는 것이었다. 궁핍한
처지인지라 임시자리나 정식자리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빅토르는 당장 그날부터 보일러실의 화부
일을 시작했다.
보일러실의 화부 일은 단조로웠다. 탱크에 붙은
수량계기를 때때로 점검하며 물을 채워 넣고 화덕에
석탄을 퍼넣으면 되었다. 얼마 일하지 않으면 온몸이
석탄분진을 뒤집어쓰고 검둥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하는 틈틈이 노래 연습을 할 수 있었고 사흘 노는
동안에는 마음 턱놓고 시를 짓고 노래를 작곡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한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다리부상으로 인해 병가를
얻은 원래의 화부가 완쾌해 돌아오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라이욘 직업보도소의 담당자는 화부자리를 꼭
물색해 주겠노라 약속했다.
그 무렵 빅토르는 아주 인상적인 노래를 한 곡
지었다. 나중에 앨범 표제곡으로 삼게 될 '캄차카의
대장'이라는 노래가 그것이었다. 임시로 일했던
보일러실 화부 노릇에서 얻어진 소출이었다. 그
노래는 당시 어떤 대중음악적 조류의 영향도 받지
않은 빅토르 자신의 조용하고 은밀한 자기 관조의
노래였다. 비관도, 낙관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은유한
것이었다.
'캄차카'란 소비에트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 바보,
얼간이와 동의어로 통했다. 어렸을 적 빅토르는
루스끼 친구들로부터 '캄차뜨끼'라고 늘 놀림을
당하고는 했었다. 루스끼 친구들은 그들과 살빛이
다르고 얼굴형이 다르며 머리색이 검은 빅토르를
걸핏하면 놀려댔다. 그 일로 하여 몇 번이나 코피가
나고 머리통이 깨지도록 쌈질을 했던가. 그럴 때마다
번번이 빅토르만 당하였다. 그들은 싸움의 이유도
따져보지 않고 피부색이 같은 루스끼끼리 한편이 되어
빅토르를 떼거리로 공격하고는 했었다. 선생님도 늘
루스끼들만 역성을 들고는 했다. 싸움질만 하면 늘
손해보는 건 빅토르 쪽이었다. 그리하여 빅토르는
누가 시비를 걸어와도 비켜가는 방향을 취하고는
했다. 그는 날이 갈수록 말수가 적어졌고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그는 늘 외톨이로 지냈다. '캄차카의
대장'이란 바보, 얼간이 대장이라는 뜻이었다.
빅토르의 어릴 적 일을 알 턱이 없는 사람들은 그
노래를 듣고 신비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소비에트 지도자들을 빗대어 노래한 것으로 확대
해석하기도 했다. 어떻든 그 노래는 마리안나의
마음에는 쏙 들었다.
그 무렵 왈레리 끼릴로프는 음악적 감수성이 다소
무디다는 핀잔을 듣고 빅토르의 곁을 떠났다.
끼릴로프가 떠나자 빅토르는, 전에 말이 오고간
적이 있었던 찌토프의 도움을 받고 싶다고 보리스에게
말했다.
보리스의 말을 들은 찌토프는 흔쾌히 빅토르의
제안을 받아들여 KINO 멤버로 가입하였다. 찌토프의
가입은 KINO의 성장을 의미했다. 찌토프는 기타
솜씨뿐만 아니라 드럼 솜씨도 남에게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다만 나이도 위고 연주 경력도
빅토르보다 앞선 선배라는 점이 빅토르에게 부담을
주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음악적 견해를 같이 하고 있었다. 그리고
찌토프는 빅토르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그를 KINO의 리더로 단단히 인정하고 있었다.
그 무렵 KINO에는 또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마리안나에게 KINO 그룹 행정담당 일을 전담하도록
했다. 그렇지 않아도 서커스 극장을 그만둔 이래
마리안나는 KINO 그룹의 매니저 활동을 톡톡히
해왔었다. 그녀는 일을 잘했다. 추진력이 있었고
배짱이 남자 못지않았다. 빅토르를 돕는 일에는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KINO의 활동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모든
록그룹들이 다 그렇듯 노래를 지으면 그것을 록
클럽에 제출해 심의를 받아야 했다. 그 심의를 통과한
노래라야 비로소 세상에 공표할 수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노래를 공연하다
시당국이나 정보부 요원에게 발각될 경우 신체적
제제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빅토르는 근래 지은 노래들을 록 클럽의
심의위원회에 제출했다.
'캄차카의 대장'과 '노치' 등 10여 곡이었다.
심의위원은 꼴랴 미하일로비치, 파인스타인, 게나
자이쩌브, 유리 모로조브 등이었다. 이들 중 게나
자이쩌브나 유리 모로조브는 KINO 그룹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KINO 그룹의 노래를 심의한
심의위원들은 심의결과를 놓고 난상토론을 벌였다.
특히 '캄차카의 대장'을 놓고 의견이 대립되었다.
"'캄차카의 대장'은 현실을 심하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런 노래를 세상에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게나 자이쩌브는 처음 '가린과 쌍곡선' 그룹의
빅토르와 르빈의 노래를 듣고서도 그것들이 '골목의
조무라기들이나 흥얼거릴' 노래라고 혹평하며 그들의
록그룹협회 가입을 회의적으로 보았던 장본인이었다.
그때 꼴랴 미하일로비치와 보리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빅토르의 록그룹협회 가입이 부결될
뻔했었다. 이번에도 KINO는 그때와 비슷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빅토르에게서 그 노래를 짓게 된 내력을 듣지
않았습니까."
꼴랴 미하일로비치는 이번에도 KINO의 편이었다.
"그의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아무리
자신이 화부로 일하는 보일러실을 캄차카로
그렸다지만 그 저의에는 불온한 사상이 숨겨져 있음을
우리는 간파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노래는 분명
현실풍자성이 강한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너무 주관적인 확대 해석이 아닐까요? 자기가
일하면서 느낀 것을 단순하고 솔직하게 그린 것을
가지고 현실풍자니, 현실비판이니 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 신경과민이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니에요. '캄차카의 대장'은 우리 소비에트
지도자들을 빗대어 풍자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는
절대로 심의를 통과시킬 수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빅토르는
보일러실의 화부로 일했던 자신을 그곳의 대장으로
비유하여 노래를 지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
노래에서 꿈과 이상을 쫓는 젊은이의 열망과 건전한
자기 반성적 몸부림을 느꼈습니다. 이 노래는 곡도
특색이 있고 창조적이라 생각합니다."
꼴랴 미하일로비치는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섰다.
사실 게나 자이쩌브나 유리 모로조브같은 인물들을
꼴랴 미하일로비치는 곱게 보고 있지 않았다.
록그룹협회의 간부들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록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소양을 갖추거나 아니면 적어도 록
음악에 애정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마땅하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음악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짙었다. 록 음악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느냐 하는 점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므로 록 음악을 보는 그들의 눈이 도리어
왜곡되어 있다고 꼴랴 미하일로비치는 생각하고
있었다.
"'노치'도 보세요. 마치 세상이 모두 밤과
어둠으로만 되어 있다는 투로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도 우리 사회를 부정적으로 보는 그런
비판적 시각에서가 아니면 나오지 않았을 노래
아닙니까?"
게나 자이쩌브는 '노치'도 걸고 넘어졌다.
"무슨, 그렇게 극단적인 말씀을 하십니까.
젊은이들의 밤에 대한 정서를 아주 적절하게 그린
노래를 두고 현실비판 운운하시다니, 거듭 지적하는
바입니다만 지나친 신경과민입니다. 좀더 대범하게
봐주세요. 그러면 그 노래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될 것입니다."
"노래들이야 아름답게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작의들이 불순하다, 이런 말씀입니다."
"방금 그러셨습니다. 노래들이야 아름답다고?"
꼴랴 미하일로비치는 그렇게 말하며 웃음 띤 눈으로
게나 자이쩌브를 바라보았다.
"그렇죠, 그 점은 인정합니다만 그는 이국인
아닙니까. 우리 현실을 부정적으로 볼 충분한 근거를
가진 젊은이라 생각됩니다."
"너무 비약시키지 맙시다. 그가 동양계라고
소비에트 인민으로서 의무를 소홀히 한 무슨 단서라도
있습니까. 그가 노래를 잘 불러 우리 소비에트
젊은이들에게 공헌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를 받아들입시다. 그가 노래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점은 다 공통적인 것으로 보이니 심의를
통과한 것으로 합시다."
"아닙니다. 아직 어떤 결정을 내리기에는
시기상조라 생각합니다. 시 당국과 정보 당국의
의견을 듣고 나서 결정을 내려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유리 모로조브는 결국 그렇게 발목을 잡아놓는
것으로 회의를 마쳤다.
36. 심의에 걸리다
록 클럽의 심의결과 통보는 지연되었다. 마리안나가
몇 차례나 찾아가 그 결과를 문의했으나 협회에서는
아직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마리안나와 빅토르는 몸이 후끈 달았다. 록 클럽의
정기경연대회가 바로 코앞에 닥쳐 왔는데 그곳에서
발표할 예정인 새노래들이 심의에 걸려 있으니 애가
타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어찌 된 셈인지 록그룹 경연대회 참가
그룹의 명단에서 KINO 그룹은 제외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통고와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마리안나는 록 클럽을 찾아갔다. 마침 게나
자이쩌브 혼자 있었다.
"KINO 그룹이 이번 경연대회 참가 명단에서
제외됐던데, 탈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리안나는 당당하게 나갔다. 그녀는 서커스 극장에
근무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여 사람들을
대하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다. 당당하게 나가지
않고 온순하거나 소심하게 나가면 상대방이 얕잡아볼
우려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건 KINO 그룹 멤버들이 더 잘 알고
있을텐데......."
시들어가는 붉은빛의 머리털과 눈자위에 주름살이
잡혀가는 40대 중반의 게나 자이쩌브는 쌀쌀하게
대했다. 말투도 빈정거리는 투였다. KINO 그룹에
그녀가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적대감을 품고 있지 않나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렇게 둘러대지 말고 바로 가르쳐 주세요. 그래야
앞으로 고칠 것은 고치고 주의할 것은 주의할 거
아니겠습니까?"
"주의할 친구들로 보이지 않던걸!"
"그럼 록그룹협회에서 제명시킬 예정인가요?"
"아직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록그룹협회에서 제명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바로
가르쳐, 바로 크게 해주세요."
"심의란 협회에서만 하는 일이 아니라는 건 잘
알텐데?"
"예......?"
"시 당국에서, 정보부와 의논해서 결정할 일이라고
했어요."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군요?"
"당국의 일이라는 것이 어디 하루이틀에 해결되는
게 있던가요. 우리 예상으로는 통과하기가 쉽지 않을
것같아요."
게나 자이쩌브는 냉랭하게 말했다.
마리안나는 꼴랴 미하일로비치를 찾았다. 두 번
걸음에 겨우 만난 꼴랴 미하일로비치는 걱정부터
하였다.
"어서 심의통과가 되어야 이번 경연대회에 참가할
수 있을 터인데, 게나 자이쩌브도 말했듯 당국에서
하는 일이란 어디 이쪽 사정 따위를 생각해줘야
말이지."
"어떻게 좋은 수가 없을까요?"
"기다려보는 수밖에 무슨 좋은 수가 있겠어요. 다만
한가지 방법이 있기는 한데......."
"무슨 방법이지요?"
"당국에 청원을 넣는 방법을 말하는 거예요.
이쪽에서 해명할 기회를 달라는 내용의......."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전문가들 입회하에 본인의 해명을 듣고 당국이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방법인데, 자칫 잘못하다가는
혹 떼려다 도리어 혹 붙이는 수가 있어요. 거기서
반혁명, 반국가, 반인민의 딱지를 받는 날에는 KINO
그룹의 앞날은 그것으로 끝장이 날 것이거던."
"그럼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마리안나는 속이 바작바작 탔다.
"위험해도 그것이 가장 빠른 방법일 거예요."
"그렇다면 그 길을 택하겠어요."
"좋아요. 그럼 KINO 그룹 이름으로 시 당국에
청원을 내세요."
록그룹협회를 다녀온 마리안나의 말을 들은
빅토르는 화부터 냈다. 목재를 다듬고 있던 그는 칼과
목재를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내 노래가 어디가 어때서....... 그들이 뭘 알아."
빅토르는 눈을 부릅뜨고 마리안나를 팰 듯이
노려보며 악을 썼다.
"내 노래는 내 감정을 솔직히 그린 것에 지나지
않아. 당국에서 의심할 만한 어떤 것도 없어. 어디가
불순하단 말이야. 어디가 문제란 말이야."
빅토르는 양팔로 머리를 감싸안고 주저앉았다.
그러한 빅토르의 모습을 지켜보는 마리안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혼자서 한동안 숨을
씨근덕거리던 빅토르는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태워물었다.
"꼴랴 미하일로비치 씨가 그러잖아. 이번 콩쿨에
참가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고."
마리안나의 말에 빅토르는 강하게 도리질부터 했다.
"난 자신 없어. 내가 내 노래에 대해 해명하라고?
난 내 노래를 남앞에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어.
혼자서 생각하라면, 온세상도 지배할 수 있지만, 여러
사람 앞에서는 혀가 얼어붙어 한마디도 할 수 없어."
"그래도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잖아."
"꼴랴의 우려대로 일이 더 악화될 수도 있어. 내가
서툴게 해명하면 그것으로 끝장 아니겠어?"
"보랴와 의논해 보고 결정하면 어떨까?"
이야기를 들은 보리스 그레벤쉬코프는 한동안 입을
꾹 다문 채 궁리에 잠겨 있었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꼴랴의 말대로 청원을 내지. 나와 마이크가
배석하여 비쨔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테니, 그렇게
해."
"고마워요. 저도 입이 살아있는데 당하고만
있겠어요."
마리안나는 그녀가 바라는 바의 대답을 해준
보리스가 고마웠다.
시청을 방문해 연예담당관에게 청원서를 내고
돌아온 날 저녁이었다.
빅토르는 뜻하지 않았던 전화를 받았다. 놀랍게도
아르까지나였다.
"8학년 여학생 아냐?"
"기억에서 지워버리지 않았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다 잊어도 어찌
아르까지나를 잊을 수 있겠어."
마리안나가 듣고 있는 것도 빅토르는 개의치
않았다.
"레닌그라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이 비쨔였는데......."
"그래 지금 어디야?"
"어딘지 알면 오겠어?"
"그럼. 달려가야지."
"올 형편이 되는 거야?"
"그럼 만사제치고 달려가야지. 어서 있는 곳이나
말해."
"카페 네바에 가 있을게, 만약 사정이 허락지
않으면 안 와도 돼. 부담갖지 말고."
"알았어."
빅토르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마리안나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마리안나도 이미 그의 노래 '8학년
여학생'의 주인공에 대해 빅토르에게서 들은 바
있었다. 마리안나는 자신이 신경쓸 일이 아님을
알았다. 그의 겉옷을 옷걸이에서 떼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빨리 올게."
빅토르는 웃옷을 받아 걸치며 말했다.
"옛친구 만날 때는 시간같은 건 잊어 버린다고
들었어. 공연한 신경쓰지 말아."
마리안나는 그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카페 네바에 들른 지 퍽 오래된 것 같았다. 무대를
향해 언제나 선망의 눈길을 보내며 자학의 시간을
보냈던 지난 일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아르까지나는 언젠가 그들이 앉아서 술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무대 왼쪽 앞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빅토르가 그녀 옆으로
다가가는 동안 그녀는 무슨 생각엔가 골똘히 잠겨
눈을 들지 않았다. 그가 옆에 가서 서자 비로소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금세 눈에 안개같은 뿌연
기운이 감돌았다. 그녀는 일어나 빅토르를 포옹했다.
그녀의 따뜻한 가슴이 닿자 빅토르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세상이 따뜻하게 느껴지던 지난 기억이
되살아났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따뜻하던
사람,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감을 가지게 했던 사람.
아르까지나와 포옹하고 있는 사이 빅토르는 가혹했던
지난 날들이 떠올랐다. 그녀의 행방불명이 가져다주던
그 오랜 불안감으로 인해 방황했던 쓸쓸한 기억도
되살아났다. 그래 이게 얼마 만인가. 그녀의 행방을
알기 위해 헤맸던 절망적인 기억들. 그녀의 부재를 곧
자신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의 부재로 생각했던 무서운
기억들. 그녀의 부재를 믿고 싶지 않아 얼마나
몸부림쳤던가.
"언제 왔어?"
"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했어."
"나도 그랬어. 그래서 떠날 때 알리고 싶지
않았어."
"어떻게......?"
"정치적 조치란 원래 종잡을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것인가봐."
아르까지나는 밝은 표정이었다.
"아, 우리 맥주로 할까?"
웨이터가 옆에 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가
물었다. 빅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에서는 낯선
가수가 나타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기타는
번다하고 노래는 거칠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신선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저렇게 부른다면 이런 카페나 전전하다
말겠지.
"정치적 조치?"
"그래, 우리 아버지는 안드로포프 서기장의 분노의
희생물이었어. 안드로포프 서기장은 식량감산에 따른
조치를 강구토록 했고 그 조치는 우리 아버지를
양곡착복 관리로 낙인찍게 만들었어."
"서기장의 분노 무마용으로 희생되었다는
말이구나?"
"우리 소비에트에서는 필요하면 달나라도 보내지
않아. 못하는 것이 없지."
"자칫 모두 무정부주의자로 만드는 것 아냐?"
"사실 소비에트 인민들 삼분의 이는 무정부주의자들
아닐까?"
아르까지나는 웃음을 머금고 빅토르를 그윽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웨이터가 가져다 놓은 맥주를
잔에 따라 빅토르에게 밀어 놓고 자기 잔에도 따랐다.
"그래, 아르까지나 표정을 보니까 근심걱정없는
얼굴로 보이는데, 가족들 다함께 레닌그라드로 돌아온
거지?"
아르까지나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술로 목을 축였다. 빅토르는 두번째 담배에다
불을 붙였다.
"그래, 안드로포프가 죽었잖아."
빅토르는 얼마 전 안드로포프 서기장의 사망 소식을
텔레비전을 통해 알았다. 그러나 브레즈네프가
집권하고 있을 때나 안드로포프가 집권하고 있던 지난
일년 남짓한 동안이나 어떤 차이도 느끼지 못했으므로
무관심했었다. 그러나 안드로포프의 죽음이
아르까지나를 레닌그라드로 돌아오게 했다니 그것은
소비에트 사회가 바야흐로 겪게 될 놀라운 변화를
예고하는 그런 상징적 사건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안드로포프 시대에는 아버지가 희생물로써
필요했지만, 체르넨코가 집권하자 레닌그라드에 그의
수족이 될 만한 인사가 필요했던가봐. 이건 전적으로
엄마의 표현을 빌린 거야. 어쨌든 그래서 돌아온
거야."
"아버지가 복권됐다는 말이구나?"
빅토르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아르까지나의 손을
잡고 쓰다듬었다.
"축하해."
"축하받을 일은 아냐. 언제 또 당서기장이 바뀔지
모르잖아."
아르까지나는 그러면서 웃었다.
"설사 당서기장이 바뀐다 해도 이번에는
시베리아까지야 가려구."
빅토르는 그러면서 술을 들이켰다. 언젠가 귓등으로
흘려 들었던 농담이 문득 상기되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나이가 몇인지 아세요?' 볼세비키 혁명이
1917년에 일어났으므로 '67세가 되지 않았어요.' 하는
대답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지요, 이제 겨우
일곱 살밖에 안됐어요. 레닌 시절의 6년에다
안드로포프가 집권했던 1년이 고작이랍니다.'하는
반박이 돌아온다. 이 농담은 스탈린, 후루시초프,
브레즈네프 치하의 소비에트 체제를 왜곡된 것으로
여기는 민심이 반영된 농담인 것이었다. 그래 언제
당서기장이 바뀌어 세상의 흐름을 또 다르게 바꿔
놓을지 예측할 수 없지 않은가. 다행히 레닌이나
안드로포프(비록 아르까지나의 아버지는
희생당했으나) 같은 지도자가 나온다면 모르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정치인이나 관리처럼 무상한 신분이
어디 있으랴.
무대의 가수는 여자로 바뀌어 있었다. 여자는
아까의 남자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노래나 연주가
좋은 것이 아니라 여자의 음성이 아까의 남자보다
듣기좋은 정도에 그쳤다. 노래란 누구에게나 한
인생을 걸 만한 것일까.
"그래, 이제 옛날로 돌아왔으니 학교를
계속해야겠구나?"
"그렇게 되겠지. 비쨔는 요새 어떻게 지내?"
"늘 건달이지 뭐."
"아직도 노래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그것밖에 없어."
"그것밖에 없다니, 노래부르는 일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데."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사람 망치는
짓이래."
"엔지니어니까. 손으로 만져지는 것 외에는 믿지
않게 되나보지."
"그런 것도 알았어?"
"유형지라는 데가 사람을 많이 생각하게 하고
어른스럽게 만드나봐."
"그렇다면 나도 유형을 한번 다녀와야겠네. 암튼
우리 아버지는 사람에게 이상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믿지 않아. 젊은이의 꿈도 방황도 이해 못해.
젊은이에게는 어른들의 인생과 다른 미래가 있다는
것도......."
"그래 어른들은 자기 경험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지. 그러면서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하고......."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열 병이 넘는 술을
마셨고 두 갑의 담배를 다 태웠다. 마침내 일어서야할
시간이 임박했음을 둘 다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술을 더 시켜
마시며 아직도 퍼내려면 끝이 없을 이야기 샘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나는 밤새 비쨔 노래나 들었으면 좋겠다."
"어디 노래부를 수 있는 데가 있을까?"
마리안나가 의식의 저변에서 자꾸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켰고 무슨 자력처럼 계속 집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빅토르는 아르까지나를 서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노래를 부르며 밤을 같이 새고
싶었다. 자레치나야 아파트라면 우리를 위해 문을
열어 주지 않을까? 빅토르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하기야 자레치나야와는 오랜 동안 만나지 못했었다.
그의 남자 편력은 여전한 것인가. 자레치나야와 함께
보냈던, 늘 뜻밖의 느낌을 갖게 하던 밤을 상기하며
빅토르는 좀 뜨악한 기분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을 위해 아파트의 문을 열어줄 곳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자레치나야는 아르까지나와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 자레치나야의 아파트로 갈까?"
"그럴까. 거기에는 기타도 있을 거고......."
그들은 합의를 보았다. 아르까지나는 빅토르의 팔을
바짝 끼고 카페 네바를 나왔다. 트롤리버스 안에서도
그들은 팔짱을 풀지 않았고 트롤리버스 정류소에서
내린 그들은 쌀쌀한 밤바람을 맞으며 오래오래
포옹했다. 그들은 다시 다가올 이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처럼 서로 전율을 느끼며 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안돼. 남의 데이트를 방해할 참이야?"
자레치나야는 고래고래 볼멘소리를 하며 아파트의
문을 열어주었다.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어. 노래나 부르자고 왔지."
"전화란 이럴 때 쓰라고 있는거 아냐. 하지만......
만약 전화에 대고 안된다고 거절했다면...... 전화
안한게 다행일까?"
자레치나야가 요령부득의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사이 방에 있던 남자가 거실로 나왔다. 그는 헤쳐진
앞섶을 여미며 빅토르를 쳐다보았다.
"난, 미쨔라고 합니다."
빅토르 또래의 남자는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 손은
따뜻했다.
"저는 비쨔입니다."
"이쪽은 내가 말하던 KINO 그룹의 비쨔야. 그리고
이쪽은......?"
말하다 말고 자레치나야는 웃음지으며 아르까지나를
새삼스럽게 쳐다봤다. 그 사이 빅토르가 말했다.
"오늘 유형지에서 돌아온 아르까지나입니다."
"아, 그래 아르까지나. 잘 왔어."
자레치나야는 수다를 떨었다. 아르까지나는
미하일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다고 생각하며 그와
악수를 나눴다.
"유형지에서 돌아왔다구요?"
미하일은 손을 잡으며 놀라워했다.
"그래요. 유형지 기차는 아주아주 느렸어요. 거기서
여기까지 오는데 꼭 반 년이나 걸렸지 뭐예요."
아르까지나는 쾌활하게 말했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레닌그라드 역에 도착하자말자
비쨔네 연락처 알려달라고 그 안달이었을까. 낮에
마샤한테 전화를 했더니 그러잖아. 그래 내가
미련하기도 하지. 그렇게 정신 나간 애가 결국 여기로
들이닥치리라는 것을 왜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래
만나 실컷 회포 풀었어?"
자레치나야는 두 사람을 거실로 안내하였다.
"회포 다 풀었으면 여기까지 왔을까. 술 있으면
내와."
그 말을 들은 자레치나야는 아르까지나의 팔을
꼬집으며 빙긋 미소지었다.
"비쨔가 좋아하는 붉은 포도주가 있는데, 데우려면
시간이 걸릴 텐데?"
"언제 기다려. 그냥 가져와. 그리고 기타부터
주고......."
"노래하려고?"
자레치나야는 눈을 크게 뜨며 반색을 했다.
자레치나야로부터 기타를 받아든 빅토르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8학년 여학생' 아르까지나를 생각하며 지은
노래였다. 영리하고 구김살없고 명랑한 아르까지나.
술집으로 가자고 하나 영화를 보러 가자고 조르고,
지리 점수를 3점 맞았다고 시들해하며, 화장품은
어머니 것을 훔쳐 바르고 부츠는 언니 것을 실례해
멋을 부리고, 인형과 풍선을 좋아하던, 그리고 언제나
빅토르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던 아르까지나.
빅토르가 노래를 마치자 아르까지나는 이리가 사슴을
덮치듯 빅토르를 덮치고 거칠게 포옹하며 키스를
퍼부었다.
자레치나야가 따뤄주는 술을 단숨에 들이킨
빅토르는 다시 노래를 불렀다. '건달들'이었다.
빅토르 자신을 냉소적으로 희화하여 그린 그 노래
역시 아르까지나가 잘 알고 있던 노래였다. 그
다음에는 '어머니는 무정부주의자'를 이어 불렀다. 그
노래가 끝나자 미하일이 박수를 쳤다.
"어째 바로 내 이야기를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미하일은 술잔을 들고 노래에다 그 술을 바치노라
떠들어댔다.
"비쨔 노래가 곧 세상 사람들을 뒤흔들어 놓을
거야. 사람들이 아직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해
아직은 비쨔가 고생하고 있지만."
자레치나가 술잔을 들어보이며 중얼거렸다.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내 사랑 아르까지나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부른 노래일 뿐입니다."
"아르까지나는 최고의 선물을 받고 있는 거야. 그
사실을 알면 죽고싶어 할 사람 몇이나 되는지 알기나
해?"
자레치나야는 빅토르와 마리안나의 결혼식에 꽃을
들고 가 축하를 했었다. 그녀의 뇌리에는 마리안나가
지워지지 않았다.
"이 기쁨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모르려니와 그렇지
않다면 질투의 대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르까지나는 애매한 말을 했다. 마리안나의 존재를
이미 누구에게선가 들은 것일까.
"한번 받은 축하는 영원히 그 자체로서 생명력을
갖는다고 생각해. 인간에게는 기억력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자레치나야는 술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 네
사람의 잔이 경쾌한 금속성을 내며 부딪쳤다.
"좋아, 좋아. 추억이여, 영원할지어다."
미하일이 연극대사처럼 감정을 넣어 중얼거렸다.
빅토르는 또 한차례 노래를 불렀고 자레치나야는
기타 연주로 무료를 조금 달래기도 했다. 밤은
막바지에 다다랗고 술병은 다 비었고 여자는 남자를
간절하게 갈망하는 그런 시각이 되었다. 자레치나야는
미하일의 손을 이끌고 침실로 들어갔다.
"이별이란 이래서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아르까지나에게 증명해 보이렴."
자레치나야는 침실로 들어가기 전 고개를 틀어
빅토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가능하다면......."
빅토르는 그러면서 아르까지나를 품안에 꼬옥
안았다.
침실로 들어가자말자 자레치나야의 신음이 곧
들려왔다. 아르까지나는 옷을 벗었고, 자레치나야의
신음은 더 노골적이 되었다. 빅토르의 옷을 벗기며
아르까지나는 그의 어깨며 등이며 가슴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마침내 빅토르는 가슴을
활짝 열고 아르까지나를 받아들이고 가슴을 조여
그녀를 아프게 포옹했다. 자레치나야의 신음은
자극적이었고 거기에 아르까지나의 신음까지 섞이자
지구는 바야흐로 사랑의 물결이 범람하는 듯했다.
밤은 끝났다. 낮이 되었다. 밤은 별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전화벨이 울리고
일렉트릭치카가 파란 불꽃을 일으키며 궤도를 달리고
자동차들은 모두 목적지를 향해 빵빵거리며 자신있게
달리고 있다. 낮은 이별의 시간이다.
"아직 전화번호 내게 주지 않았어."
"내 정신 좀 봐. 이대로 헤어졌으면 전화
기다리느라 얼마나 속을 태우게 됐을까."
아르까지나는 얼른 빅토르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손바닥 펴봐."
빅토르가 손바닥을 펴자 아르까지나는 거기에다
전화번호를 적었다.
"물에 씻어 버리면 안돼."
"머릿속에 옮겨적을 때까지 씻지 않을게."
빅토르와 아르까지나는 트롤리버스 정류소에서
헤어졌다. 게르진스키 행의 트롤리버스가 먼저 왔다.
아르까지나는 빅토르에게 얼른 키스하고 뛰어가
트롤리버스에 올랐다. 그녀는 차 안에서 손을
흔들었다. 빅토르는 트롤리버스와 함께 시야에서
멀어지는 아르까지나와 영영 이별을 하는 듯 안쓰러운
마음이 되었다. 그라스단가 행 트롤리버스에 탑승한
빅토르는 마음이 무거웠다. 아르까지나와의 이별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의 마음 속에서는 노래가
지어지고 있었다.
마리안나는 미소로 빅토르를 맞이했다.
"많이 기다렸지?"
"아내가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는 것, 그건 일반적인
일 아냐?"
"그럼 마리안나는 일반적인 아내는 아니라는
말인가?"
"나는 유능한 가수의 아내거던."
마리안나의 미소 앞에서 빅토르는 자신이 더욱
민망해지는 걸 느꼈다. 너무 관대한 마리안나의 속을
잘 헤아릴 수가 없었다.
"장차 이런 일 한두 번 있겠어."
마리안나의 그 말에 빅토르는 더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는 평소 과묵한 것보다 더 과묵하게
마리안나가 시키는 대로 샤워를 했고 그녀가 차려주는
식사를 하고 그녀가 끓여주는 커피를 마셨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피로가 온몸을 엄습함을 느꼈다. 그러나
머릿속은 알루미늄 문고리처럼 반짝였다.
그는 부엌에 앉은 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까 아르까지나와 헤어져 트롤리버스에서
흔들리며 오는 동안 줄곧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던
노랫말과 멜로디였다. 영영 그대로 정지시켜두고 싶은
밤, 영원한 밤에 대한 갈망과 춤.......
빅토르는 다시 고쳐 부르고, 다시 고쳐 부르기를 몇
번이나 거듭했다. 그의 옆에 놓인 재떨이에는
생담배가 다 타들어가 길게 재로 변한게 몇 개비나
되었다. 마리안나는 세 잔째의 커피를 새로 탔으나
매번 식어 버렸다. 한나절을 그렇게 부엌에 앉아
노래를 부르던 빅토르는 비로소 오선지에다 그것을
기록했다. 악보에다 가사도 적었다. 그리고 그는 지친
모습으로 침대로 가서 쓰러져 버렸다.
그로부터 사흘 후, 빅토르는 보리스를 집으로
초청했다. 그는 지난 3일 동안 여유만 생기면 거듭
고쳐 부르던 '춤을 추고 싶어요'와 '밤을 보았다'를
보리스에게 들려주었다. 그 노래를 들은 보리스는
역시 빅토르다운 감수성이 살아있는 노래라 생각했다.
역시 빅토르는 대단한 재능이야. 밤을 테마로 한
노래들이 그동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단순한 사랑을 담았을 뿐 밤이 주는 열정과 밤의
속살을 저렇듯 친근감 있게 노래한 것이 어디
있었던가.
"어때, 보랴. 너무 어린가요?"
보리스는 강하게 머리를 저었다.
"게나 자이쩌브가 들으면 또 조무라기들의
골목노래라 하지 않을까요?"
"게나 자이쩌브가 뭘 알아야지. 비쨔 노래가 한
뼘은 더 원숙해진 것 같아."
"공연히 비행기 태우지 말아요."
"전에는 정열이 넘쳐나 무대를 마구 뛰어다녔잖아.
그런데 지난번 '마지막 영웅'도 그랬지만, 이 노래도
그런 정열이 안으로 잦아들어 다른 무게를 느끼게
하는데!"
"노랫말도 좀 유치하잖아요?"
"유치하기는, 젊은이들의 헤어지기 싫은 마음과
밤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는데."
"보랴 말, 그대로 믿어도 될까요?"
"비쨔, 매사에 너무 걱정이 많고 겁이 많아 탈이야.
이제 자신감을 가질 때도 되었잖아."
"글쎄, 나는 영영 자신감을 가질 수 없을 것
같아요. 남의 것은 다 좋아보이는데 내 것은 모든
것이 모자라고 어려보이고 나빠 보이거던요. 그래서
늘 기회있을 때마다 고치게 됩니다."
"그게 바로 비쨔를 발전시키는 요체일 거야. 나만
해도 한번 지어놓은 것은 쳐다보기도 싫은데. 그런데
아직 시 당국에서 아무 연락 없었나?"
"아직 없는데요."
마리안나가 대답했다.
"큰일났군. 록 경연대회가 앞으로 열흘도 안
남았는데."
보리스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다시 한번 가볼
생각이었어요."
마리안나의 대답에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자식들 노래의 자연스런 발전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그 자식들은 사람이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그들 방식대로 살아야 하는 것으로 아는 모양이야."
"자유나 발전 같은 것은 요술나라 일쯤으로 여기는
것이겠지요."
빅토르는 냉소와 야유를 담아 한마디 툭 던졌다.
"그러게 말이다. 노래란 시대를 담는 것인데, 시대
따라 변하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다니.......
아무튼 나와 마이크가 가서 제대로 설명하면 알아들을
거야."
보리스의 장담과는 달리 그 소청심사위원회에 나온
연예담당자와 KGB에서 나온 군복차림의 인사는
거만하고 쌀쌀하였다.
"빅토르의 노래를 면밀히 검토했는데, 노래의
내용이 모두 냉소적이고 우리 사회를 왜곡해 보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소. 본인의 해명을 듣고 싶소."
빅토르는 보리스와 마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질문은 빅토르에게 날아온 것이었다. 그가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잠시 우물거리던
빅토르는 재촉을 받고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저는 어떤 노래도 우리 사회를 왜곡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 사회를 냉소적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노래가 왜 이토록 어둡고 칙칙합니까."
"그건 개인적인 취향 때문입니다."
"개인의 취향이라고 했소. 당신 하나가 침울한
성격을 지녔다하여 모든 사회를 침울하게 만들 수는
없는 거 아니오?"
"저는 빅토르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침울해지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습니다."
보리스가 참견하고 나섰다.
"보리스 씨의 생각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KGB에서 나온 사내는 근엄한 표정으로 보리스를
노려보았다.
"노래란 지은이의 개인적 정서이지, 사회적 정서가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 발표되면 개인적 정서가 사회적 정서로
편입되는 것 아니던가요?"
"제 말은 비쨔가 사회를 냉소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 경험을 노래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여기 해명서에, 빅토르가
보일러실에 근무한 경험을 살려 지은 노래라 했는데,
왜 보일러실을 캄차카라고 본 것이지요. 더구나
'캄차카의 대장'이라니, 더욱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군요."
"선생님께서도 시란 상징과 비유로 이루어진 것이란
점은 인정하실줄 믿습니다."
"우리 소비에트 인민은 위대한 푸쉬킨과 톨스토이의
유산을 지니고 있지 않소."
KGB에서 나온 심의위원은 냉랭하게 조소를 날렸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빅토르도 위대한 러시아의
시적 혼을 계승한 젊은이입니다. 그런 빅토르의 시적
재능을 저는 항상 부러워하고 질투해온 바입니다.
재능있는 시인이 상징과 비유로써 작품을 지은 것을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보리스씨의 고상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우리
당국에서는 인민의 정서와 직결되어 있는 노래나 연극
등 대중예술작품을 심의할 때 전체 사회에 끼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보일러실을 캄차카로 보았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는 빅토르를 쏘아보았다. 빅토르는 자기가
해명하지 않으면 안될 순간임을 깨달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많은 사람 앞에서는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할 수 없이 무거운 기분으로 털어놓았다.
"저는 어렸을 때 자주 캄차뜨끼라고 놀림을
받았습니다. 그때의 슬픈 기억이 밤을 새며
보일러실에서 일하는 동안 자주 연상되었습니다. 그
놀림을 당할 때마다 저는 상대방 아이와 싸움을
벌이고는 했는데, 하나같이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러 명이 저를 한꺼번에 덤벼들어
때렸습니다. 심지어 선생님까지도 저만 꾸중했습니다.
그런 내가 그 보일러실에서는 완전히 대장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빅토르는 말을 마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시청 연예담당관은 동정적인 시선으로 빅토르를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싸웠소?"
계급장을 달지 않은 카키색 군복 차림의 KGB 요원은
송곳으로 찌르듯 물었다. 빅토르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눈빛이 날카롭고 입가에는
빈정거리는 듯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런 놀림을 몇 번이나 당했느냐 물었소."
"쉬꼴라에 다니는 동안 내내 당한 일이라 몇 번쯤
되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빅토르는 사자처럼 으르릉거리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자신의 운명의 고삐를 쥐고 있는 저 얄미운
녀석의 비위를 어찌 거스르겠는가. 남의 불행을
즐기는 너, 저주있을지어다.
"쉬꼴라를 다니는 동안 내내 당했다면, 더구나
선생님들에 대한 원망까지 보태졌다면 당신의 성격이
비뚤어진 것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겠군."
KGB 요원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는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빛을 드러냈다. 마리안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보리스가 그때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는 비쨔의 소년시절의 일을 가지고 오늘의 그의
정서나 노래를 판단한다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보리스는 침착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무엇인가 말을 하려던 마리안나는 자기 속마음과
똑같은 말을 하는 보리스를 고맙고 감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리스는 계속했다.
"비쨔의 소년시절이 결코 행복했던 것이 아니라는
건 저도 압니다. 학교에서는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아버지로부터는 공부에 열중하지 않는다고
매를 맞고 자랐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그의 시와 노래는 그의 어린 시절의 고통스런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보리스 씨의, 동료를 사랑하는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개인적인 애정이나 이해가
아닌 사회적 애정과 이해로 발전시켜 보다 넓게
봐주시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KGB 요원은 고깝다는 듯 보리스를 바라보며
경고하였다.
"판단이란 언제나 주관적 견해를 전제한다는 점을
고려하신 지적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런 범주를
결코 넘어설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노래에
저의 인생 전부를 건 사람입니다. 즉 노래라면 가려
듣는 귀가 남다를 수 있다는 말로 들어주셔도
좋겠습니다. 그러한 제가 생각하기에 빅토르의 노래는
지금까지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고 들려주지 못했던
새로운 재능의 노래를 우리에게 내놓았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저는 그의 노래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주관적인 견해라고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견해라고 주장하지 않은 신중함에 저는
감복했습니다. 빅토르의 노래가 우수하다면 이 사회에
어떻게 공헌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 어둡고 칙칙하고
냉소적인 노래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합니까?"
"제가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마이크 나우멘꼬가
입을 열었다.
"저도 빅토르의 노래에 대해 보리스 씨와 견해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빅토르의 노래는 유럽 젊은이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유행하는 록 음악을 러시아화하여
부른 매우 러시아적 록 음악이라 여겨오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록의 러시아화에 가진 재주를 다
기울여왔다고 자부해왔습니다. 그런데 빅토르가
그러한 우리의 자부심을 무색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를 적대시해야할 그런
입장입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우리의 적의까지를
무력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의 정서의 변화는 더욱
급격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젊은이들의 변화에
가장 첨예하게 대응할 수 있는 음악을 빅토르는
창작해 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재능을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우리 사회발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마리안나는 마이크가 고마웠다. 보리스와는 달리
마이크는 왠지 늘 일정한 거리감이 느껴지고는
했었다. 겉으로는 별다른 내색하지않고 내왕을 하고
교제를 해왔으나 마음과 마음끼리 닿는 그런 어떤
교류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왔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말을 듣고보니 그와 다소 소원하게 지내온 것이
잘못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마이크 씨의 주관적인 견해도 동료를 비호하는
쪽으로 흐르는군요. 하지만 노래란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적 자산이라는 사실을 명심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빅토르 씨의 노래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까 보리스 씨도
말씀했듯 빅토르 씨의 유년기, 소년기는 매우
불행했습니다.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아버지로부터는 공부 못한다고 매질이나 당하고
심지어 성적불량으로 학교를 퇴학까지 당한 일이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레닌그라드 제2
정신병원으로부터 벨르이 빌레뜨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그가 사회적응이 매우
어려운 인물임을 짐작하는 데는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의 노래가 반혁명적, 반사회적,
반인민적 성향을 띠게 될 것 또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 저런 식으로 몰고 가다니. 그렇다면 비쨔가
우려했던 대로 루스끼가 아닌 카레이츠가 군 기피를
위해 벨르이 빌레뜨를 받은 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거라고 우려하더니, 바로 이런 경우를
예상했던 것일까. 마리안나는 빅토르를 쳐다보았다.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리스와 마이크는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가장
우려했던 반혁명적, 반사회적, 반인민적이라는
단어까지 튀어나오고 만 것이다. 사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직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비록 불행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해도 그의 노래가 반혁명적,
반사회적, 반인민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유년기와 소년기를 불행하게 지낸
사람이라면 우리는 쉽게 시인 레르몬토프를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레르몬토프의
작품이 유년시절, 소년시절을 불행하게 보냈다하여
그의 작품이 반혁명적, 반사회적, 반인민적인 성향을
띠었다고 평가된 일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보리스 씨는 제게 자꾸만, 올챙이적 일은
개구리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위대한 시인 레르몬토프의 예를
들고 나와 빅토르를 변호하려 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빅토르 씨의 노래와 위대한 시인 레르몬토프의 시와
어떻게 감히 비교할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발전하고 변화하는 사회를 바로 봐주셨으면 하는
생각에서 드린 말입니다."
보리스는 울컥 울화가 치밀었다. 그는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빅토르의 노래는 우리들 생활의 무의미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방식은 모두
엉터리이고, 우리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도
틀려있음을 깨우치는 것이라고. 그러나 어찌 사태를
더 악화시키겠는가. 보리스는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까, 제가 빅토르의 노래 '캄차카의 대장'을
우리 소비에트 지도자를 냉소적으로 풍자한 내용이라
이해한 것이 사회발전을 따라가지 못한 구시대적
발상에서 나온 이해란 지적이군요?"
KGB 요원은 위압적인 시선으로 보리스를
노려보았다. 보리스는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해 도움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으나 도전적인
시선으로 맞받아 쏘아보았다. 더구나 일의 결말은
이미 방향이 정해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마리안나의 소청을 들어 이런 모임을 가진 것도 그들
권력자들이 인민들을 상대로 늘 말하는 '민주적인
일처리의 모양 갖추기'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빅토르가 앞으로 우리 사회를 위해
공헌해주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공헌은 항상
발전적인데 기여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주기
바랍니다. 오늘 소청심의는 이것으로 충분히
의견교환이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결론을 짓듯 말했다. 빅토르의 노래는 더
구제를 바랄 입장이 아님을 빅토르 자신은 물론
마리안나도 보리스도 마이크도 동시에 느꼈다. 시청
건물을 등지고 거리로 나오는 빅토르는 자기도 모르게
허청거렸다.
빅토르는 장래를 차압 당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꼴랴 미하일로비치가 우려했던, 만에 하나가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의 노래는 당국으로부터
반혁명적, 반사회적, 반인민적이란 딱지를 받은
것이었다. 그의 노래는 대명천지 밝은 세상에서는
불려지지 못하게 되었다. 부른다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골방이나 지하실 같은 데 숨어서 부를 수밖에
없을 것이리라.
'빅토르 씨는 앞으로 우리 사회를 위해 발전적으로
공헌해주기 바랍니다.'
그 말은 노래를 그만두고 다른 일에 종사해줄 것을
종용한 발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노래를 빼앗긴
빅토르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보리스와 마이크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다시는 많은 사람 앞에서
부르지 못할 것을 생각하며 슬픈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마리안나도 그에게 어떤 위안의 말도 해주지
못했다. 인생의 전부인 노래를 당국에 차압 당한
그에게 무슨 말이 위안이 되겠는가.
옆에서 그의 '건달들'을 들으며 마리안나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어줄 수 없는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밉기도
했다. 빅토르는 더욱 말이 없어지고 외출도 끊었다.
사흘 동안 외부와의 접촉도 끊고 방안에만 처박혀
지냈다. 그리고 나흘째 되던 날 그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훌쩍 밖으로 나갔다가 해가 지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후줄근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디 갔었어?"
"오랜만에 핀란드 만에 갔었어."
빅토르는 리술 아저씨를 생각하며 그와 대화를
나누고 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리술 아저씨와
오랜만에 만나 눈물을 흘리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빅토르의 일방적인 말로 시작되고,
끝난 것이었지만.
37. KINO, 그랑프리를 수상하다
록 페스티발이 개최되기 이틀 전이었다.
"비쨔, 페스티발에 참가하게 되었어."
록 클럽의 꼴랴 미하일로비치였다. 전화를 건 그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시 당국에서 연락이 왔는데, 까게베에서 빅토르의
KINO 그룹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라는 지시가
있었대."
꼴랴 미하일로비치는 기쁨에 넘쳐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빅토르는
어리둥절했다. 소청심의회에서 보았던 그 오만하고
냉소적이던 비밀경찰요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빅토르의 노래에 대해 반혁명적, 반사회적, 반인민적
낙인을 찍었었다. 소비에트 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반혁명적, 반인민적, 반사회적 낙인이 아니던가.
일단 그 낙인이 찍히면 영화든 소설이든 시든
무엇이든 그 운명은 끝이 나는 것이었다. 그
소청심의회의에서 이미 빅토르의 노래는 그 운명이
끝났었다. 더구나 그런 낙인을 찍고도 다른 처벌이
없는 것에 내심 불안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운명이 뒤바뀌다니, 삼엄하고 냉엄한 소비에트
사회에서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빅토르는 당국의
처사에 납득이 가지 않았다. 도리어 두려움이 앞섰다.
다음에 더 무서운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이번 일은
처벌을 유예한 것인가.
"왜, 아무 말이 없나? 기쁘지 않은가?"
"아니, 왜 기쁘지 않겠습니까. 다만 너무나 뜻밖의
소식이라......."
"나도 시 당국의 연락을 받고 놀랐다네. 이런 일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 직접 당국에 전화를 걸어
확인까지 했었네. 어쨌든 이번 콩쿨에 출전하여 KINO
그룹의 실력을 천하에 떨치게."
"예, 고맙습니다."
"이틀밖에 안남았어. 명심하게."
"예,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연습하겠습니다."
빅토르는 전화를 끊고 마리안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꼴랴야. 이번 콩쿨에 출연하라는군."
"그게 정말이야?"
"당국에서 출연 허락이 떨어졌대."
"아, 정말이야!"
마리안나는 빅토르를 포옹했다.
"나는 무엇인가 더 무서운 형벌을 내리기 위해
유예를 한 것 같아 도리어 걱정되는 걸."
빅토르의 말에 마리안나는 연락을 받고도 별로 기쁜
내색을 하지 않은 빅토르의 속내를 알 것 같았다.
"설마 그럴까."
"어쨌든 이번에 출전해 열심히 노래하겠어. 이번이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모르니까."
빅토르는 보리스와 마이크에게 차례로 전화를 하여
방금 꼴랴 미하일로비치로부터 통고받은 사실을
알렸다. 당국에서도 자네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모양이군. 보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해금을 축하해
주었다. 자네 음악이 당국의 제재를 받는 걸 보고
앞으로 록 음악의 장래가 다 된 것으로 생각했는데,
다행이군. 어쨌든 축하하네. 마이크는 그렇게 말했다.
연습을 하자는 빅토르의 연락을 받은 유리
가스빠란과 찌토프 역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당장
빅토르의 집으로 달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거의 동시에 달려온 유리와 찌토프는 당국의 처사가
미덥지 않았던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싶어 했다.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꼴랴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른다더군. 다만 출전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라더군. 우리 이번이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몰라. 그러니 모두 열심히 해보자구."
빅토르는 가슴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불안감은
내비치지 않았다. 그들은 하룻밤을 꼬박 새며 연습을
하였다.
아침에 아르까지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마리안나는 묵묵히 송수화기를 빅토르에게
넘겨주었다.
"방금 전화받은 사람, 마리안나지?"
"어떻게 알았어?"
빅토르는 잠시 당황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녀의
귀환이 반가워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밤을 함께
보내고 말았으나 며칠 전에 만났을 때는 기회를 잡지
못해 아직 마리안나와 결혼한 사실을 아르까지나에게
털어놓지 못했었다. 그런데 아르까지나 편에서 먼저
알고 있었다니.
"직접 만났어. 그리고 마샤와 자레치나야로부터도
자세히 들었어. 그래도 비쨔, 만나고 싶은데 어때?"
"직접 만나다니, 언제 어디서?"
빅토르는 분주히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아르까지나가 마리안나를
만났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카페
네바에서 술에 푹 절어 정신을 완전히 잃었었는데,
아마 그날 아르까지나가 집까지 데려다 주었던
것인가. 빅토르는 비로소 생각이 거기에 미쳤고 두
사람의 조우가 그때 이루어졌으리라 짐작하였다.
빅토르는 자신의 입으로 그 사실을 아르까지나에게
털어놓지 못한게 무슨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것 같아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날의
일을 왜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그건 알아 뭐하게. 다음에 기회 나면 다 말할게.
저녁에 네바로 나와."
"오늘은 안돼. 내일 콩클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모두 연습 중이거던."
"아, 그랬어. 잘됐군!"
아르까지나는 외치듯 말했다. 팔짝팔짝 뛰어오르는
아르까지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럼 내일 록 클럽 연주장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겠네. 비쨔, 열심히 해. 이번에 꼭 우승해야
해."
"고마워."
아르까지나는 전화를 끊고 혼자서 남모를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 만났을 때 빅토르는 세상의 마지막 날을
맞은 듯 침울하고 신경질적이었다. 아르까지나가 술을
사겠다니까, 마지못해 나온 듯한 빅토르는 카페
네바의 술을 다 없앨 기세로 난폭하게 마셔댔다. 그의
침울과 신경질의 원인을 알 수 없었던 아르까지나는
빅토르의 균형잃은 행동과 폭음이 그의 조울증
탓이려니 여기며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 조심했다.
그런데 빅토르는 술에 취하자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아르까지나는 그의 폭음의 원인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의 절망과 좌절이 전이된 듯
그녀의 가슴은 빅토르에 못지않는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폭음을 조금도 만류하지 않았다. 술로
그의 아픔이 가셔질 수만 있다면 세상에 있는 술을 다
마시게 하고 싶었다. 일찍이 화가의 꿈을 빼앗아버린
그에게서 노래를 빼앗아 버린다면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또 그에게서
노래를 빼앗아버린다면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살아있을 이유를 박탈 당한
가엾은 존재로 전락해 있었다. 그의 아픔을 알지
못하고 그와의 데이트만을 바랐던 자신의 이기심이
그녀는 민망스럽고 부끄러웠다. 고주망태가 된
빅토르를 집에다 데려다준 그녀는 거기서 마리안나와
처음 조우했었다. 그러나 마리안나와 마주치게 된
충격 따위는 아르까지나에게 아무런 동요도 주지
못했다. 다만 노래를 박탈당한 빅토르의 불행에만
마음이 쏠렸다. 아르까지나는 근심과 걱정이 가득찬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밤은 어느 사이 다
가버리고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곱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귀가를 맞았다.
"너, 생활이 너무 무질서한 것 아니냐?"
"아픈 친구를 돌보느라 밤을 꼬박 샜어요."
아르까지나는 그렇게 변명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혹시 들을까 염려하여 더 따져 묻지 않았다. 밤늦게
귀가한 아버지는 아르까지나의 외출을 모르고 있었다.
아르까지나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야
아버지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한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던
아르까지나는 아버지를 뒤따라 들어갔다.
"아버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최근 완전 명예회복과 더불어 레닌그라드 지역
정보담당 책임자로 임명된 예르몰라이 알렉세예비치는
얼굴에 세이브 로숀을 바르다말고 눈을 들어 거울
속에 비친 딸을 쳐다보았다.
"전에 아빠한테 말한 적이 있을 거예요. 비쨔라고,
까레이츠인데요......."
"그래, 기억나는구나. 너가 가끔 그의 노래라며
들려주고는 했었지."
시베리아 유형지에 유배를 간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아르까지나는 몇 번인가 빅토르의 노래를
아버지께 불러드린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노래만 잘하는게 아니었어요. 시도 잘
짓고 그림도 잘 그리고 목각도 잘하는 만능 천재 같은
친구였어요."
"그런데 갑자기 왜 그 이야기는 꺼내는 거냐?"
"그 친구를 어제 만났는데, 그 친구의 앞날이
걱정이에요."
"왜?"
"KGB에서 그의 노래를 심의했는데, 그의 노래가
반혁명적, 반인민적 성향이 짙다는 판정을 내렸다는
것이에요."
"당국에서 그렇게 봤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의 노래가 침울하고 냉소적인 데가 없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가 카레이츠가 아니고 루스끼였다면
과연 그런 판정을 내렸을지 의문이에요. 그의 노래를
심의하는데 그의 어릴적 친구들로부터 소외 당했던
일이며 그의 아버지로부터 매질 당했던 일, 그리고
부당하게 학교로부터 퇴학 당했던 일들을 판정의
근거로 삼았다는데, 그것은 부당하다고 생각되어요."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것은 너의 주관적
판단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음악을 무슨 화약고처럼 생각하는 당국의
신경과민이 찾아낸 구실들일 뿐이라 생각되는 걸요.
젊은이들의 노래가 좀 반항적이고 난폭한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경향 아닌가요. 그런데 그것이
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리라 예단하는 것은
소아병적 방어자세라는 걸 아셔야 해요."
"그래, 나도 아무리 저항적인 노래라 하더라도
사회를 개혁시키는 현실적인 힘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도리어 그런 노래는
저항적인 어떤 기운을 해소시켜주는, 즉 사회적
긴장과 불안심리를 해소시켜주는 안전판 구실을
하기도 하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아빠 생각이 그러시다면 매우 다행이에요.
빅토르의 노래는 자기의 경험을 노래한 것인데,
사실은 듣는 사람 모두의 노래처럼 친근하게
느껴지거던요. 그의 노래를 듣고 과격해질 사람
하나도 없어요. 도리어 젊은이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여 밝은 성격으로 만들어줄 거예요. 아빠께서
가능하시다면 빅토르의 불행을 막아주세요. 며칠 후
당장 코앞에 다가와 있는 음악콩쿨에 출전해 우승하고
싶은 게 그의 꿈이었어요."
"그래, 내가 한번 알아보지."
아르까지나는 그후 아버지로부터 아무 말도 듣지
못했었다. 그녀는 밤늦게 귀가하는 아버지와 며칠
동안 직접 마주치지 못했었다. 그런데 빅토르가
콩쿨에 출전하게 되었다면 아버지의 영향이 아니고
무엇겠는가. 빅토르에게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마음 속으로 아버지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다.
그런 전후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한 빅토르를 비롯한
KINO 그룹 멤버들은 다소 흥분된 기분으로 록그룹
경연장으로 나갔다. KINO그룹이 겪은 시련을 알고
있던 록 클럽 관계자들은 빅토르를 볼 때마다 위로와
함께 따뜻한 격려를 보냈다.
30여개에 이르는 록 클럽 회원그룹들이 모두 참가한
공연은 하루에 열 팀씩 사흘 동안 계속되었다. 공연은
첫날부터 열기를 띠었다. 각 그룹마다 명예를 걸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그룹인들 영예의
그랑프리 수상을 노리지 않겠는가. 각 그룹들은
자기들의 숨은 재능을 한껏 발휘해 청중들을 뜨겁게
달궈나갔다. 아브자쯔 삘리그림 돈빠스 제르깔로
러씨야네 아크와륨 쇼빠르크 그룹 등이 차례로 올라가
연주를 하였다.
KINO 그룹의 연주는 둘째날 세번째 차례였다.
마리안나의 무대의상과 분장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빅토르, 유리 가스빠란, 찌토프, 게오르기
구리야노프 등이 무대에 등장하였다. 청중들은 그들의
출현을 무감각하게 맞았다. 빅토르는 온몸을 까맣게
치장하였다. 모발은 타고날 때부터 쌔까만 윤기가
흘렀고 전과 다름없이 다리에 꼭 끼는 까만 바지에
터질 듯 팽팽히 검은 가죽 자켓으로 가슴을 싸고
있었다. 유리와 찌토프의 의상도 아래위가 다 새까만
천으로 되었고 드럼을 치는 구리야노프는 타는 듯
새빨간색의 자켓과 바지를 입고 있었다. 유리와
찌토프는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하여 마치 무슨
가면무도회에 나간 것 같았다. 그들은 '8학년
여학생'부터 노래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
노동학기에 농장에서 일하다 착상한 '알루미늄
오이'를 그 다음에 불렀다. 그들의 노래는 '파도의
멜로디 바람의 멜로디'를 거쳐 '밤' '캄차카의
대장'으로 이어져 나갔다.
청중들은 처음에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서너 곡을 계속 연주해가자 차츰 그들의
노래에 마음을 싣는 모습이 역력히 보이는 듯하였다.
'밤'을 부를 때는 곧 박수로 연주를 도왔고
'일렉트릭치카'를 연주할 때는 거의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KINO, KINO를 외쳐댔고 그들이 40분의 연주를
마치고 다음 연주자들을 위해 무대를 내려가자 앵콜을
거듭거듭 외쳤다. 사회자가 이번 콩쿨에는 앵콜을
받지 못한다고 안내를 했음에도, 다음 그룹이 무대에
올라와 연주준비를 하는 데도 청중들은 KINO의 앵콜을
외쳐댔다. 끝내 KINO 그룹의 앵콜은 실현되지 않은 채
다음 차례의 팀이 연주하였다.
록 경연대회는 그 다음날도 계속되었고 사흘째
해질녘이 되어서야 모든 차례가 끝났다.
드디어 콩쿨의 결과가 발표되는 시간이 되었다.
"이번 레닌그라드 록 클럽 회원그룹들의 연주는
실로 모두 훌륭했습니다. 모든 그룹에게 다 상을 주어
칭찬하고 격려해야 마땅함에도 우리 주최측에서는
편의상 최우수 그룹을 가려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심사위원들은 최우수 그룹으로 KINO를
선정했습니다."
꼴랴 미하일로비치의 말이 떨어지자 청중들은
연주회장이 떠나가도록 크게 박수를 쳤다. 발표 순간
마리안나가 뛰어들듯 빅토르를 힘껏 포옹했다. 유리와
찌토프, 구리야노프도 빅토르의 손을 잡아 힘껏
쳐들며 우승을 축하했다.
"축하한다!"
보리스 그레벤쉬코프가 다가와 빅토르의 손을
잡으며 따뜻하게 포옹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빅토르는 어안이 벙벙한 채 아무 생각도 없었다. 오래
땅 속에 매장되어 있다 끌어올려진 사람처럼
어리벙벙한 표정이었다. 마이크도 쥬사도 쓰윈도
차례로 다가와 축하인사를 해주었다. 그럴 때마다
다시는 노래부르지 못하게 된 것을 한탄하며 보냈던
지난 10여일 간의 시련이 아주 옛일처럼 까마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이것이 아버지 로베르트가
즐거워할 수 있는 일일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러나 흥, 콧방귀를 뀌고 돌아서는 아버지
모습을 생생히 그려볼 수 있었다. 어머니 발렌치나는
어떨까. 활짝 웃으며 팔을 벌려 포옹하는 어머니
발렌치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어머니는 무엇이나
내가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려 노력했었지.
아버지는 어깨를 덮고 허리까지 치렁치렁 드리운 검은
머리를 혐오했고 다리에 꼭 끼는 바나나 바지를
가위로 갈기갈기 찢어 버렸었다. 더구나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인생의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못하게 막으려 애썼다. 어머니는
펑크 스타일에도, 이해할 수 없는 괴성으로
이루어진(어머니가 듣기에) 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했었다. 어머니는 그러나 오늘의 그랑프리 수상이
어떤 가치를 지녔고 빅토르의 장래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 따위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날 밤, 빅토르와 KINO 그룹은 록 클럽 회원들의
축하를 받으며 꿈 같은 순간순간을 보냈다. 이제
적어도 레닌그라드에서 그들의 가수와 연주자로서의
길은 활짝 열린 셈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공식적인
페스티벌에서 우승을 했으니 KGB 같은 기관에서
시비를 걸어올 염려로부터도 상당히 비켜난 셈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록 클럽에 손님이 찾아왔다.
지난번 마리안나의 소청심사청구회의에 나왔던 KGB
요원이었다.
마침 사무실에 있던 꼴랴 미하일로비치와 게나
자이쩌브가 그를 맞이했다. 그들은 이미 낯익은
사이였다. 그러나 록 클럽 관계자들에게는 늘 거북한
인물이었다. 한번도 반가운 일로 찾아온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KINO 그룹의 우승에 대해 우리 당국에서는 몇
가지 우려하고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어제 록그룹 경연대회의
수상에 대해 시비를 걸고 나왔다. 게나 자이쩌브는
꼴랴 미하일로비치를 원망하듯 쳐다보았다. KINO
그룹의 우승은 전적으로 꼴랴 미하일로비치의 주장의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우리가 KINO 그룹의 노래를 사회에 널리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한 사실을 알고 계실 줄 압니다."
"소청심의에서도 제재쪽으로 결정이 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시 당국으로부터 이번
경연에 KINO 그룹이 참가할 기회를 주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 점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당국자들도 견해를 늘 같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번 KINO 그룹 출연결정은 많은
사회현상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당국자의
진취적인 시각의 소산이었습니다. 그러나 KINO 그룹이
사회에 널리 영향을 미치게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어제 KINO 그룹의 수상에 반대했던 게나 자이쩌브는
자, 보라는 듯 꼴랴를 다시 쏘아보았다.
"당국의 우려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희
심사위원들은 노래의 우열과 함께 정치적, 사회적
영향까지 고려에 넣어 심사에 임했습니다."
꼴라 미하일로비치의 말에 KGB 요원은 미간을
좁혔다.
"우리는 KINO 그룹의 노래가 우리 젊은이들에게
전염병처럼 퍼져나가 나태하고 부도덕한 행동을
부추기지나 않을까 우려합니다."
"저희는 도리어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의욕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리라 믿습니다."
"꼴랴 미하일로비치 씨의 낙관적인 견해가 저는
놀랍습니다. 어찌 지도자를 비아냥거리고 야유하는
내용의 노래가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의욕을
심어준다는 것입니까?"
"글쎄요. 젊은이들은 정직하고 직선적인 성향이
매우 강합니다. 그들은 현상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느낀 대로 그렸다하여 그것이
부정적으로만 작용하리라 생각하십니까. 더구나
젊은이들은 현실을 정직하게 그리지 않은 노래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KINO 그룹은 젊은이들의
정서를 매우 선명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의 노래를 들은 젊은이들은 도리어 그 노래를 통해
자기 불만이나 분노를 해소하고 대리 만족을 느끼며
아울러 세상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대하리라
생각됩니다."
"선생은 대중음악 전문가가 아니라 사회학자 같은
식견을 지녔군요?"
KGB 요원의 비꼬는 말에 꼴랴 미하일로비치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비단 사회학자가 아니더라도 그런 점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심사위원들은 소비에트 대중음악이 유럽이나
아메리카의 대중음악의 질이나 수준에 비해
뒤떨어져서도 안되리라는 점을 감안하여 심사에
임했습니다."
꼴랴 미하일로비치는 일부러 유럽과 아메리카의
대중음악의 수준을 고려해 심사했다는 말을 강조하여
자신들의 심사가 일반적인 예상보다 더 많은
심사숙고의 결과였음을 상대방에게 인식시키려고
노력했다.
"어떻든 좋습니다. 록그룹협회의 견해가 그렇다는
것을 사실 대로 당국에 보고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내가 여기 온 것은 당국의 시각을 록그룹협회가 잘
인식해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였음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KGB 요원은 언짢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냉랭히
사무실을 나갔다.
지난번에도 그랬듯 음악잡지들의 반응도 냉랭했다.
무대는 요란하고 노래는 저속했다며, KINO 그룹의
그랑프리 수상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왔다.
38. 고대하던 화부가 되어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피부에 느껴지는
것, 귀로 들리는 것, 코로 맡아지는 것. 현실은 그런
사실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것들은 원래
존재한 자연적인 것도 있었고 사람들의 두뇌와 기술과
힘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적인 것들도 있었다. 하늘,
강, 바다, 나무, 개, 고양이, 까치, 비둘기......
이런 자연적인 것들과 그리고 빌딩, 광장, 기마상,
다리, 배, 비행기, 전차, 버스...... 이런 인공적인
구조물 등. 이런 것들은 사람들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사람들의 생활에 작용하거나 기능하며 존재했다. 그
작용과 기능을 잘 다루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성공하고
행복을 누리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했다. 그래
현실은 그런 사실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빅토르는 그런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것들에는 어렸을 적부터 관심이 적었다. 그런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것에는 가까이 가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고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는 현실에서
구하기 몹시 힘든 이상만을 지향하고 추구했다.
어쩌다 현실에 관심을 갖는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그
경우에도 자기 생활에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최소한의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은 그의 편도 또 그는 현실
편도 아니었다. 그렇듯 현실을 외면하다시피 살아온
때문일까, 그에게는 현실이 늘 가혹했다. 그래`......
임시직의 화부자리를 그만 둔 지도 오래되었다. 그는
생활이 매우 궁핍했다. 라이욘 직업보도소의 담당자는
보일러실의 화부자리가 나면 곧 연락해준다고
철석같이 약속했으나 벌써 석 달이 다 가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록 클럽의 경연대회에서의 그랑프리 수상도 그들의
생활에 실제적인 도움은 되지 못했다. 그랑프리 수상
이후에도 KINO 그룹은 아직 한번도 어느 공연단체나
전문 프로모터로부터 공연초청을 받지 못했다.
모스크바에는 몇 차례 다녀왔으나 그것은 사샤
립니쓰키와 알렉세이 리젠코가 주선해온 그런
소규모의 골방 공연 정도에 그치는 것이었다.
레닌그라드의 몇몇 카페에서 연주를 하거나 또는 생일
파티같은 데 초청을 받아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생활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보리스나 마이크를 따라 몇 차례
지방공연을 다녀오기도 했으나 그 역시 개런티라야
여행경비 정도에 그치는 것이었다.
빅토르는 늘 담배도 필요했고 술도 마시고 싶었다.
그는 생활의 궁핍이 강요하는 내핍 생활에 지치고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 당시 그들의 궁핍한 생활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빅토르와
마리안나가 마이크의 쇼빠르크 그룹을 따라
스베르들로프스크에 공연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우랄 산맥을 경계로 유럽은 끝나고 아시아가
시작된다. 동유럽 평원이 끝나는 지점을 가로막듯
우랄 산맥이 뻗어있고 우랄 산맥을 넘으면 서시베리아
저지대가 펼쳐진다. 우랄 산맥 초입의 페름을 지나
얼마쯤 가면 타이가를 개간한 약간 높은 언덕에
쓸쓸히 서 있는 오벨리스크를 볼 수 있다. 그
오벨리스크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나타내는
경계비인 것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여행하는
여행객들은 그 오벨리스크를 바라보며 대륙의
경계표시가 던지는 묘한 애수를 느낀다고 한다.
스베르들로프스크는 우랄 산맥을 넘은 서시베리아,
즉 아시아로 넘어가 처음 만나는 도시인 것이다.
레닌그라드에서는 실로 이틀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그곳에서의 공연은 1주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빅토르와 마리안나는 공연을 마치고 곧 돌아올 입장이
되지 못했다. 마이크의 공연 스케줄은 하루 이틀
연장되었고 프로모터측으로부터 출연료를 받지 못해
출발이 늦어졌던 것이다. 빅토르는 다부지게 따지고
들어 출연료를 미리 좀 받아낼 뱃심도 없었다. 그들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다른 주변머리는
없었다. 날이 갈수록 마리안나는 초조해졌다. 집에
남겨놓고 온 고양이 때문이었다.
공연일정이 1주일밖에 되지 않을 것이란 말을 들은
마리안나는, 집을 나설 때 고양이먹이를 1주일분밖에
놓고 나오지 못했었다. 그때 고양이 먹이를 살 돈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런데 레닌그라드로의 귀환이
열흘이 더 지연되었으니 고양이가 굶어죽지나
않았을까 걱정이었다.
뜨로삘로로부터 선사받은 그 고양이를 빅토르나
마리안나는 매우 소중하고 귀엽게 여기고 있었다.
레닌그라드에서 가장 훌륭한 녹음실을 가지고 있고
노래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남다르며, 어쩌면
가수들의 생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그런 영향력을
지닌 뜨로삘로로부터 선물받은 고양이니만큼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윤기 흐르는 까만 털과
하얀 털이 세로로 모자이크된 그 고양이는 사람에게
매우 붙임성있게 굴었다. 모르는 새에 고양이는 그들
부부와 정이 들어 한가족처럼 지내왔었다. 그러한
고양이의 안위가 마리안나는 매우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들은 마이크와 그의 쇼빠르크
그룹의 일정에 맞춰 행동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3주일이 넘어 아파트로 돌아온 그들이 현관문을
열었을 때, 그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문을
고양이가 총알처럼 튀어나왔던 것이다. 문이 열리자
박차고 뛰어나온 고양이는 그러나 멀리 가지 않고
시멘트 난간에 웅크리고 앉아 빅토르와 마리안나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야옹, 야옹 사납게 울어댔다.
고양이는 오랫동안 자신을 굶주리게 한 두 사람을
저주하는 듯하였다. 얼마나 굶주림에 지쳤으면 저러랴
싶으니 마리안나는 가슴이 쓰라렸다. 마리안나는
측은하여 손을 벌려 고양이를 불렀다. 그러자
고양이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리고 곧 뒤돌아
난간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고양이가 먹이를 찾아 얼마나
설쳐댔던지 거실의 책이며 옷가지들이 엉망으로 찢겨
널려 있었다. 부엌에 있는 모든 종이봉지와 팩들도
찢겨져 나뒹굴었다. 그로부터 며칠동안 마리안나는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어놓고 고양이를 기다렸다.
아무리 마음을 태우며 기다렸으나 고양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마리안나는 고양이 먹이를 더 살 수
없었던 가난이 저주스러웠다.
그들의 가난은 언제 끝이 날지 알 수 없었다.
거기에다 설상가상으로 살던 집까지 비워달라는
통고를 받았다. 아파트 주인의 사정에 따라 좌우되는
고달픈 이사의 경험은 빅토르와 마리안나 부부를 더욱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당장 구할 수 있는 집도 없고
돈도 빠듯했다. 마리안나는 궁리 끝에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갔다. 마리안나의 결혼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어머니는 한동안 마리안나 부부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뿐인 딸에게 그 어머니는
결국 설복 당하고 말았다.
그들 부부는 마리안나의 어머니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마리안나 어머니 타치야나가 마냥 거북했다. 국영
마가진에서 회계원으로 일하는 타치야나는 일년만 더
일하면 연금생활자가 될 수 있었다. 타치야나는
아직도 마리안나의 선택을 잘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빅토르와 헤어진다면 더
반가워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마리안나는 빅토르와 헤어질 생각은커녕
매우 헌신적으로 사랑했다. 마리안나가 그러니
타치야나는 어쩔 수 없었다. 일부러 마음을 써서라도
빅토르를 향해 사랑을 베풀려고 애를 썼다.
그러함에도 타치야나의 노력은 부자연스런 상태
이상으로 나타내지지가 않았다. 자연스럽게 사위와
가까워질 날이 있겠거니 기다리며 나날을 보내는데
빅토르는 붙임성이 없고 혼자 고민하는 그런 내향적인
성격이어서 친숙해지기가 어려웠다. 빅토르는
타치야나의 눈치를 보며 거북하게 지냈다. 더구나
생활비 마련이 여의치 않은 빅토르는 자신의 처지를
더욱 못견뎌했다. 자연 밖으로 돌게 되고 타치야나와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보랴, 지금 놀러가도 될까요?"
걸핏하면 빅토르는 보리스나 마이크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론 그런 집에서 문전박대는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늘 반가워하는 손님도 아니었다. 찾아가면
담배와 술은 물론 음식까지 축을 내고 오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빅토르는 보리스의 집으로 놀러가겠다고
마리안나에게 말했다. 마리안나는 빅토르가 하겠다는
것을 막아본 일이 없었다. 빅토르라는 배는 빅토르
자신외의 어떤 다른 선장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키를 맡기는 법이 없었다. 마리안나는 처음
만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빅토르의 그런 고집스런
성품을 파악하고 그의 일에 간섭을 안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빅토르는 전철 토큰 몇 개와
버스값만 주머니에 달랑 넣고 집을 나섰다. 그는 전철
토큰 몇 개와 버스값만으로 얻을 수 있는 작은 자유를
느끼며 보리스의 아파트로 갔다.
보리스의 아파트에 도착한 빅토르는 허겁지겁
담배를 청해 그것을 탐욕스럽게 태웠다. 누가 담배를
빼앗기라도 할까 걱정되는듯 서둘러 그리고 맛을
음미해 가며 쉬지 않고 한꺼번에 다 태웠다.
옆에서 그 모양을 지켜본 보리스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 경연대회에서 보았던 빅토르의
경이롭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경연대회에서 그의 연주를 지켜본 보리스는 자꾸만
왜소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자신의 노래와 연주를
빅토르의 연주와 노래와 비교하며 그는 심한 질투심을
느꼈었다. 그때 그는 생각했다. 이제 언젠가
빅토르에게 말했던 예측이 현실로 드러날 때가
무르익었군, 하고.
그런데, 저 궁상스런 모습이라니.......
보리스는 르빈과 어울려 다니던 무렵의 빅토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무렵 빅토르는 자주 보리스를
놀라게 했다.
보리스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노래와 연주뿐만
아니었다. 빅토르는 보리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교양의 폭이 넓었다. 기술전문학교에서 목각을
전공하는 단순한 예비 목각공이 아니었다. 그의
그림솜씨는 보리스가 보았던 어떤 학교 친구들보다
뛰어났다. 그의 요술 같은 목각솜씨는 눈부실
지경이었다. 그의 손을 거친 나무토막은 망토자락을
휘날리는 푸쉬킨도 되고, 베레모를 쓴 레핀도 되었다.
보리스는 빅토르로부터 선물받은 예세닌 상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보리스가 놀란 것은
빅토르의 동양 여러 나라의 시인이나 사상가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었다.
시인들과 사상가들의 이름이나 외는 피상적인
정도가 아니었다. 시인들의 시를 줄줄 외웠다. 그리고
인생에 많은 시사를 던지는 사상가들의 잠언들을 역시
그만두라고 말리고 싶을 만큼 오랫동안 들려주고는
했다.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 일본, 조선의 시들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러시아 시인들이나
사상가들에 대해 무지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푸쉬킨의 시를 거의 다 외웠고 레르몬토프의 시며,
예세닌이며 부닌의 시도 많이 외고 있었다.
그를 시나 좀 짓고 노래나 좀 부를줄 알 뿐,
기술학교에서 단순한 목각 기술이나 익히고 있는
평범한 학생이겠거니 여겼던 보리스는 빅토르를 만날
때마다 늘 놀라며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고는 했다.
빅토르를 통해 알게 된 중국의 리태백이라는
시인에게 보리스는 크게 매력을 느꼈다. 빅토르는
정치적으로 불행한 길을 걸었던 훌륭한 시인
두보(杜甫)의 이야기도 시와 글에 뛰어나 당대에 그와
겨룰 자가 없었다는 소동파(蘇東坡)며 현대
중국사상을 집대성했다는 호적(胡適)같은 문인에
대해서도 빅토르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나
보리스에게는 리태백이라는 시인이 가장 매력있어
보였다. 리태백은 늘 술에 취해 있다시피 했고 달을
벗삼아 노닐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다 하였다.
빅토르도 그렇게 생각했듯 보리스도 리태백이라는
시인이 어쩌면 자신들과 그토록 닮아 있는지 그것이
사뭇 신기했다. 몇 세기를 사이에 둔 그들 사이에,
더구나 문화적 사회적으로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비슷한 행태로 살았고 살고 있다니 인간의
삶은 시대나 공간을 초월하여 유사한 모양이라
생각되었다.
보리스는 리태백 시인이 달밝은 밤 연못에 술잔을
띄워놓고 시를 한 수 짓고 그 술을 마시고는 했다는
매우 낭만적인 일화를 듣고는 그걸 흉내내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보리스와 빅토르는 만나면 가끔
물을 가득 채워놓은 욕조에 술잔을 띄워놓고 마시기를
즐겼다. 물론 술을 한잔 마시기 전에 반드시 시를
한수 외거나 노래를 한곡 부르고 나서 마시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술이 취하자 보리스는 빅토르를 향해
말했었다.
"이제 빅토르가 최고야!"
보리스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은 빅토르는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우리 아크와륨 그룹은 이미 청중들에게 들려줄
것은 모두 들려주고 보여줄 것은 다 보여주었어.
앞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일이란 우리가 해온 노래나
연주를 더 자세히 들려주고 보여주는 일밖에 더 할
것이 없어. 허나 청중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원하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흡족하게 채워줄 사람은
이제 빅토르밖에 없어!"
빅토르는 기연가미연가 하는 표정으로 보리스를
쳐다보았다. 보리스의 말을 신뢰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이제 우리 아크와륨 그룹은 물러날 때가 왔어.
우리가 물러나면 하나의 커다란 공백이 생길 것이야.
그 공백을 누가 메울 것인가?"
르빈 역시 보리스를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공백을 메울 사람은 빅토르 너밖에 없어. 나는
지금까지 너의 노래를 아주 냉철하게 지켜봐왔어.
너는 청중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창작해왔고
지금도 창작해가고 있어. 그러므로 너는 멀지않아
러시아에서 최고가 될 것이야. 그리고 러시아는
세계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니 너는
세계에서도 최고가 될거야. 그러므로 너는
소비에트뿐만 아니라 세계를 위해서도 책임을 다
해야해."
그때 빅토르는 열아홉 살의, 장차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고 미래는 불투명한 청년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러한 그가 어찌 당시 가장 인기를 누리는 정상의
가수 보리스 그레벤쉬코프의 말을 액면대로 믿을 수
있었겠는가. 그는 의심스런 눈길로 보리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눈길에는 반드시 그 왕좌를
차지하고 말리라는 굳은 결의같은 것이 내비쳤다.
경연대회의 연주를 지켜본 보리스는 바로 그때의
광경이 연상되었고 그때 그가 빅토르에게 했던 말이
현실로 드러날 때가 바야흐로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축하를 해주려 갱의실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그들에 비하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살아있는
스타들인데 비해 자신은 이미 지나간 퇴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격지심이 심지어 빅토르의 연주를
도와주었을 뿐인 알렉산드르 찌토프한테마저도
느껴졌다. 찌토프는 보리스 자신의 아크와륨 그룹
멤버격인데도 말이다.
그러한 빅토르가 저렇듯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
허겁지겁 담배를 빨고 있다니, 보리스는 속이 쓰렸다.
"오늘밤 어디 생일집 같은데 없을까?"
입술이 타들어갈 때까지 담배를 빨고 더 태울 것이
없게 되자 그것을 재떨이에다 버린 빅토르는 그렇게
말하며 보리스의 눈치를 살폈다. 보리스는 물끄러미
빅토르를 바라보았다. 보리스는 그가 순간 한없이
측은하게 여겨졌다. 지금 그의 주머니는 텅텅
비어있을 것이었다. 담배도 없고 한 병의 보드카를 살
돈도 없을 것이었다. 그는 담배를 늘 입에 달고
다니다시피 즐겼고 술로 인해 약간 고양된 그런
기분에 취해 있어야 몸이 활달해진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그의 몸과 정신이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켜줄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없어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저 성깔에 오죽했으면 생일집 같은 데 없을까,
물었을까.
"그래, 마침 잘 됐군. 생일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함께 가서 생일 축하 노래나 불러줄까?"
"그거 좋겠는데. 며칠 노래를 부르지 않았더니 입에
녹이 스는 것같았는데......."
빅토르는 활짝 웃어보였다.
그날 밤, 아크와륨 멤버들을 데리고 생일집에 가서
노래를 불러주던 보리스는 좌중에 빅토르를 소개했다.
록 콩쿨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는 말에 좌중은 잠깐
박수를 쳤으나 그다지 많은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아무렴 보리스의 아크와륨 그룹에 비하랴 하는
반응들이었다. 빅토르는 찌토프와 함께 연주를
하였다.
처음 그는 의례적인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노래를 이어부르기 시작했다. '나의
친구들' '우리는 춤추고 싶어요' '캄차카의 대장'
'노치' 등을 차례로 불러갔다. 술을 마시고 환담을
나누느라 그러는지 손님들은 그의 노래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의 노래를 귀담아
신중히 듣고 있었다. 그의 노래는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 속 깊이 젖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노래는
영혼의 속삭임같았다. 전에는 저런 정도까지 원숙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었다. 전에도 그의 노래를 들으면
그가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각하고 있으며 그는
그 영혼을 통해 시를 짓고 노래부른다고 생각했었다.
그의 목소리는 짙은 우수에 젖어 있었으며 그
우수짙은 목소리는 영혼의 언어를 속삭이는데 가장
적절해 보였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젊음의
정열이 그 어떤 더 소중한 기운을 가리고 있는
듯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 기운을 가리고 있던
안개같은 것이 걷히고, 몇 단계 높은 곳에 다다라
있었다. 보리스는 남들이 모르는 빅토르의 장래를
예감하며 따뜻하고 정겨운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빅토르의 장래는 언제 열릴 것인지. 보리스는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했다.
빅토르는 가난을 아주 친숙한 벗으로 여기고
있었다. 가난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어려움에 비해
빅토르에게 주는 어려움은 그 부담이 덜했다. 그것은
가난의 무게를 액면대로 다 느끼지 않기 때문이었다.
가난의 중량을 다 느끼지 않게 해주는 것은 아무래도
시를 지을 때의 기쁨과 거기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를
때의 기쁨이 가져오는 보상 때문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가난의 중량을 제대로
다 느끼지 않는 또다른 이유로는 그의 끝간 데 없이
무한대로 펼쳐지는 달콤한 상상의 날개를 들 수
있었다. 그는 가만 앉아있을 때면 그의 공상의 금빛
은빛 날개는 흰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라 지구를
덮고 하늘을 덮었다. 그는 화가가 되기도 가수가
되기도 하였다. 아라비아를 여행하고 미국 대륙을
횡단하며 유럽 연주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는
구름처럼 많이 모인 청중들을 열광시키며
노래부르기도 그의 그림이 푸쉬킨 미술관에 전시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한다. 그의 그림 앞에서 찬탄하는
화가들과 관람객들의 모습을 그려보며 흐뭇한 미소를
날리기도 한다. 그는 공상 속에서는 언제나 황홀했다.
그 황홀한 공상의 끝은 언제나 쓰라렸다. 그때
'건달들'이나 '나의 친구들' 같은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달래고는 했다. 그리고 또 있었다. 마리안나도
그에게는 늘 위안이 되었다. 마리안나의 사랑을 그는
수시로 확인하며 안도하고는 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반드시 떠오르는 아르까지나, 그녀는 기쁨의
원천이며 동시에 슬픔을 가져왔다. 빅토르에게
선택하라면 가장 먼저 선택할 아르까지나는.......
그러한 가운데 어느날 작은 행운이 그에게
찾아왔다. 기다리던 라이욘 직업보도소로부터 연락이
왔다. 마침내 보일러실의 화부자리가 났다는
것이었다.
"여기 와서 서명을 하고 내일부터라도 당장
근무하도록 하세요."
담당자의 매마른 사무적인 말소리가 빅토르에게는
마치 천사가 속삭이는 목소리처럼 들렸다.
"예, 고맙습니다. 지금 당장 달려가
서명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난 빅토르는 너무 속을 드러낸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어쩌랴. 그가 근래 가장 바라고 소원했던 일이
성취되었는걸.
"마리안나, 들었지. 내가 취직됐어!"
빅토르는 마리안나의 목을 끌어안고 뜨겁게
키스했다.
그는 당장 아파트를 뛰어나와 라이욘 직업보도소로
나는 듯이 달려갔다.
사무원이 내놓은 서류에 서명하고 근무처와
연락전화와 근무수칙 등이 기록된 서류를 받아들고
빅토르는 그곳을 나왔다. 근무처는 집에서 꽤 떨어진
북쪽 교외 페트로그라드스카야 구역이었다. 그러나
어떠랴. 일하고 노래부를 수 있는 장소가 될 터인 걸.
빅토르는 주머니를 털어 대담하게 담배를 한갑 샀다.
근래 그는 담배를 사는 데도 용기가 필요함을 느끼며
지냈었다. 그는 담배맛이 그때처럼 좋은 것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빅토르가 근무하는 곳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였다.
집을 나서 시내를 관통하여 네바 강의 키로프다리나
에르미타주 미술관 옆의 궁전다리를 건너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를 옆구리에 끼고 달리다보면
어느새 페트로그라드스카야 섬에 다다랐다. 빅토르는
몇 해 전 신축아파트 단지들을 찾아 노래부르며
방황하고 다닐 때 자주 찾아갔던 낯익은 곳이기도
했다. 아파트단지 관리사무소를 찾아가 먼저
직구장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선량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노동에 단련된 단단한 어깨와 넙적한
가슴을 지니고 있었다. 저런 사람도 화가 나면 금방
승냥이처럼 사나워지지. 그런 생각을 하며
직업보도소에서 받아온 서류를 내놓았다.
"어깨가 약해 보이는데, 하루에 몇 톤씩 석탄을
옮기고 그것을 화덕에 퍼넣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서류를 훑어본 직구장이 이쪽을 떠보듯 말했다.
"이 손을 보십시오. 굳은살이 박혔지 않습니까.
어떤 일도 자신 있습니다."
빅토르는 오른손 왼손 다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트레스트에서 목각일을 하는 동안 박힌 굳은살이었다.
그는 노동을 많이 거친 자의 마디 굵은 손을 가지고
있었다. 빅토르는 주먹을 불끈 쥐어 그 단단함을
과시해 보이기도 했다.
"됐어. 우리는 석탄 퍼넣는 일을 소홀히해 보일러를
꺼뜨리지만 않으면 상관 안해. 헌데 전에 일했던 치는
밤중에 불을 꺼뜨려 주민들 항의받는 일이
다반사였거던. 그래서 쫓아버렸으니까. 그 점
명심하라구."
"그런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이틀밤을 하얗게
새고도 자전거로 핀란드에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빅토르는 직구장을 안도시키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과장해 말했다. 직구장은 빙그레 웃더니, 빅토르를
데리고 보일러실로 갔다. 보일러실에는 석탄가루를
뒤집어써 새까만 얼굴을 한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뜰에 야적되어 있는 석탄을
보일러실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눈매가 곱지
않은 사내는, 보는 순간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3일에 한 차례씩 교대로 근무해야하는 그들은 인수를
할 때가 아니면 인계를 할 때 어쩔 수없이 마주치게
되어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피해 버리면 그만인
일반 친구와는 다른 관계를 유지해가야 할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잘 사귀어놓을 필요가 있을
것이었다. 빅토르는 저쪽의 첫인상이야 어떻든 이쪽의
첫인상은 잘 보여놓을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어 석탄분진으로 더러워진
사내의 손을 굳게 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불만 꺼뜨리지 않는다면 누가 입이나 댈까. 지나번
꼰쨔는 석탄 퍼넣는 일보다 자는데 열중하다 번번이
불을 꺼뜨려 애를 먹였어. 이게 한번 불을 꺼뜨리면
다시 살려내기가 힘들고 또 주민들 항의를 감당하기
어려울 테니 명심해야 해."
사내는 자기 이름이 미하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까 직구장으로부터 들었던 주의사항들을 그대로
주절거리며 툴툴댔다.
"그런데 화부일은 해봤나?"
"그럼요. 한 두어 달 근무했었습니다. 당장
교대근무도 할 수 있습니다."
"뭐, 그렇게까지야 할 것 없고, 내일 아침
교대하게."
"뭐 별로 할일도 없는데, 제게 보일러실 구조나 좀
가르쳐주고, 들어가 쉬십시오."
빅토르는 미하일의 환심을 사는 첫발을 그렇게
내딛기로 순간 결정하고 서둘러 말했다. 아무리
악당이거나 철심장을 가진 무뚝뚝한 사람일지라도
호의를 베풀면 친근감을 느끼게 마련인 것이다.
"굳이 그렇다면, 좀 편해볼까!"
미하일은 그렇게 말하며 삽을 빅토르에게 건네주고
앞장섰다. 미하일은 물탱크와 보일러실 기기
조작방법을 일일이 가르쳐주었다. 화덕은 세 개로
아궁이마다 불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첫근무니까 멋지게 해낼 테니 들어가세요."
그날 빅토르는 활활 타오르는 화덕의 불꽃을 보며
밤새 노래를 불렀다.
39. 아르까지나, 아르까지나
아르까지나는 낙천적이었다. 세상이 언제나 꽃으로
덮여 있는 공원이나 되는 것처럼 여겼다. 남자는 모두
성 미카엘처럼 선량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여자는
누구나 따뜻하고 사랑스런 마음씨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세상은 사랑과 평화로 충만한
것으로 알았다. 그녀는 불행도 행복으로 만들어내는
아주 명랑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유형지에서도 불행을 알지 못했다. 정이란 사는 동안
모르는 새에 가슴에 스며드는 수분같은 것이다.
풍경도 이웃도 그렇게 정이 드는 것이다.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든 나무가 있고 새가 날고 꽃이 핀다.
하늘에는 구름이 떠다니고 여름에는 비가 내리고
겨울에는 눈이 내린다. 유형지도 다르지 않았다. 마음
속 깊이 슬픔이 고여 있음에도 그녀는 꽃을 꺾어다
병에 꽂았고 귀여운 고양이를 구해다 정을 붙이고
즐거워했다. 아마 유형지보다 더 험한 곳에 데려다
놔도 그녀라면 즐거움을 잃지 않고 살아갔을 터였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가슴 속에 천사가 들어있지
않고서야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기 마련이었다.
아르까지나는 빅토르가 마리안나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빅토르에게
전화했고 만나자고 제안했으며 거침없이 데이트를
했다.
기술학교에 함께 다닐 때도 그녀는 성질이 온순하고
성품이 조용했다. 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그녀는 항상
다정했다. 그녀의 토실토실한 장미빛 뺨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러한 그녀의 데이트 신청을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빅토르는 마리안나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아르까지나를 만나러 나가고는 했다. 그녀는
카잔 성당에도 가자고 했고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가서
중앙아시아관을 돌아다니며 러시아 풍속과 다른
민족의 사는 법을 눈여겨 관찰하고는 했다. 아마
그녀는 빅토르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빅토르의 가슴에 매달리며
사랑해 주기를 원했다. 그럴 때마다 빅토르는 가슴
속에 가득 차오르는 슬픔을 퍼내지 못해 고통을
당하고는 했다.
"비쨔."
새벽 두 시경이었다. 누군가 낯익은 목소리가
뜨로삘로의 녹음실에서 나오는 빅토르를 불러세웠다.
아르까지나였다.
"이 늦은 시간에, 여긴 왜?"
빅토르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유리 가스빠란과
보리스 등 아크와륨 그룹 멤버들이 일제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빅토르는 초저녁부터 아크와륨 그룹의
도움을 받으며 뜨로삘로의 녹음실에서 그의 노래를
녹음했었다. 그는 '캄차카의 대장' 등 근래 준비한
노래들을 녹음하는 작업에 들어갔는데, 그날은 주로
반주만을 녹음했다. 까다로운 뜨로삘로는 자꾸만
다시, 다시를 외쳐대 여섯 시간 동안에 겨우 두
곡만을 마쳤다. 그들은 모두 지쳐 넝마처럼 되어
있었다.
"그냥, 보고 싶었어."
그녀는 따뜻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보고 싶은 마음은 시간 따위에 구애받는 것이
아닌가봐. 그래 이제 됐어. 저 사람들한테 가봐."
"너가 왔는데....... 그럴 순 없어."
"난 괜찮아 보고 싶은 사람 봤으니까, 돌아가겠어."
아르까지나는 빅토르의 손을 꼭 쥐더니 그렇게
말하고는 재빨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녀의
발소리를 들으며 좀 엉뚱하다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그것이 아르까지나, 그녀다운 행동이다 싶어
웃음이 났다.
"8학년 여학생이군?"
언젠가 빅토르는 보리스에게 아르까지나를 소개하며
그녀가 바로 '8학년 여학생'의 모델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었다. 빅토르는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뒷모습을 보니,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던데!"
그래 회복할 수 없는 사랑,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을
두고 겪고 있을 아르까지나의 아픔을 왜 빅토르가
모르랴. 그러나 그는 마리안나를 배신하고 떠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장차 자신의 운명의 날개가
어떻게 펼쳐져 갈지 당장은 알 수 없지만.
"영리하니까 잘 이겨낼 거예요. 망각이 사람을
구원하는 최선의 장치라고 했던가요."
빅토르는 별이 반짝이는 먼 하늘에다 대고
혼잣소리하듯 말했다.
"글쎄, 망각으로 치유될 수 없는 병도 있다던데."
그래 망각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 이미 화석처럼 굳어있는데, 어찌 거기에
망각이란 부식제가 효험을 나타내겠는가. 망각이란
부식제는 생각이 아직 어떤 형태도 갖추기 전, 어떤
용기에도 담길 수 있는 그런 가변적인 상태에 있을 때
효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움이란 한번 응고되면
10년, 20년을 지나도 조금도 마멸되거나 수축되지
않는 것이다. 못 이룬 그리움이 망친 인생의 예가
얼마나 많던가. 그것은 망각이라는 치유제가 얼마나
효험이 약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자레치나야의 어머니 니꼴라예브나......
아르까지나의.......
아르까지나의 모든 상념은 오로지 빅토르에게로
향해 있었다. 오로지 아래로만 흐르는 강물처럼,
언제나 해를 바래 고개를 쳐들고 있는 해바라기처럼,
늘 같은 양태로 바위를 할퀴는 파도처럼, 잣나무 숲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잣새처럼 아르까지나는
빅토르를 향해 흐르고 철썩이고 날개를 펴고는 했다.
야적장에서 보일러실로 옮기기 위해 손수레에다
갈탄을 퍼싣고 있던 빅토르는 등 뒤에 묘한 충동을,
그러나 어딘가 달콤한 기운을 느끼고 멈칫 동작을
멈추었다. 등을 돌린 그는 거기에 아르까지나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길래, 그렇게 오랫동안
눈치를 못챈 거야?"
아르까지나는 걸음을 떼어 빅토르에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등 뒤로 손을 돌리고 있었다.
"언제 왔어?"
빅토르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훔쳤다.
"한 이십 분은 더 지났을 걸."
"몰래 남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은 숙녀가 할 짓은
아냐."
"난 숙녀가 아니잖아. 비쨔에게서 숙녀 취급 당하고
싶지도 않고......."
빅토르의 옆으로 다가온 아르까지나는 까치발을
하고 얼른 빅토르의 입술에 키스했다. 빅토르는
온몸에 석탄가루를 덮어쓰고 있어 볼도 손도 심지어
입술까지도 새까맣게 더러워져 있었다. 아르까지나는
개의치 않고 그의 볼에 그녀의 장미빛 볼을 비볐다.
그녀의 볼도 새까맣게 더러워졌다. 땀에 젖은
빅토르의 뺨은 끈적끈적했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
아르까지나의 거침없는 성격이라면 마리안나에게
물어서 알았으리라. 빅토르는 그렇게 짐작하였다.
아르까지나는 대답 대신 등 뒤로 돌리고 있던 손을
빅토르 코 앞으로 불쑥 들이밀었다. 새빨간 장미
한송이가 튀어오르듯 빅토르의 눈앞에 나타났다.
빅토르는 장미를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붉은
장미를 미치도록 좋아했다. 그는 활짝 미소지으며
장미꽃의 향내를 맡았다. 그때 아르까지나는 다른
손을 그의 눈앞에다 들이댔다. 두툼하고 커다란
비닐봉지에 포도주병의 주둥이가 몇 개 뒤섞여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빅토르는 그녀의 허리를 불끈 껴안고
들어올려 서너 바퀴 뺑뺑이를 돌렸다.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다 들키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아르까지나를 땅에다 내려놓으며 빅토르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르까지나는 어지럼증 때문에
잠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쫓겨나는 건 둘째치고, 처벌받는다는 사실 몰라?"
"안 마시거나, 안 들키면 되겠네!"
"그래도 봤는데 안 마실 수 있나. 잠깐 기다려. 이
수레만 날라 놓고."
빅토르는 갈탄을 가득 실은 철제 손수레를 밀고
보일러실로 들어갔다. 지표보다 다섯 계단 아래에
있는 보일러실은 예상했던 것처럼 어둡고 침침했다.
석탄이 활활 타고 있는 화덕은 철제문이 육중하게
닫혀 있었다. 천정에 촉수 낮은 알전구가 노랗게
밝혀져 있었으나 조도가 낮아 그것이 무슨 구실을
하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 여기는 어떻게 알았어?"
손수레를 갈탄더미 옆에 세워 놓고 화덕 앞의
의자에 아르까지나를 앉힌 후 자신도 맞은편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바짝 다가앉으며 빅토르는 아까 물었던
말을 다시 되풀이 물었다.
"내가 마리안나한테서 알아냈을까봐, 걱정이군?"
그렇지 않고 어떻게 알아냈겠는가, 하는 눈으로
찌르듯 바라보자 아르까지나는 고개를 저었다.
"바보!"
아르까지나는 비닐봉지에 있던 깔바스와 비스켓과
치즈를 꺼내 빅토르 앞의 작고 지저분한 목제 테이블
위에 펼쳐 놓으며 한숨짓듯 뇌였다. 그녀는 포도주병
마개를 따 빅토르에게 내밀었다. 빅토르는 그것을
받아 병을 거꾸로 기울여 마셨다.
"여자란 사랑하는 사람 행방을 알아내는 데는 능력
이상의 지혜를 발휘하기 마련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몰랐어. 그리고 왜 어렵게 마리안나한테 물어. 내가
오늘로 여기 세번째야. 몰랐지?"
빅토르는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세번째라니?"
"비쨔는 항상 무엇엔가 골몰해 있어 옆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던데. 길을 가도 자기 가는 방향만
바라보고 가고, 전차를 타도 버스를 타도 바깥만
바라보고 다니더군."
"그럼 세 번이나 날 따라왔단 말야?"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여길 어떻게 알았겠어."
아르까지나는 금방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해졌다.
바보. 넌 바보야. 내가 얼마나 너가 보고 싶어 해가
지는 유형지의 들판을 헤맸는지 알아. 너에게 매일 쓴
편지를 다 부쳤다면 너의 침대 시트를 그 편지들로
푹신하게 깔 수도 있었을 거야. 그리고 너한테 그
편지를 다 붙이려들었다면 우리 가족은 연명할
식료품을 구입하지 못했을 거야. 그런 내가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던 너가 있는 레닌그라드로
돌아왔더니, 아,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넌 다른
여자의 품속에 떨어져 안주하고 있었어.
빅토르는 포도주병을 아르까지나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아르까지나는 술병을 기울여 술을
들이켰다. 난 빅토르 널 저주하지 않을 거야. 넌 내가
돌아오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여자를
만난 것이었어. 내가 돌아올 줄 알았다면 넌 나를
반드시 기다렸을 거야. 넌 내가 널 이 세상에서 젤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또
설사 너가 날 기다리지 않았다 할지라도 난 널
저주하지 않겠어. 너에게는 노래가, 내 혼을 다 바쳐
좋아해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그런 노래가 있으니까.
너의 그 노래들은 나만 좋아해서는 안될 운명을 타고
난 것들이거던. 그런데 나의 이기심 때문에 널
저주하여 그 노래들이 제대로 날개를 펴고 세상을
맘껏 날지 못한다면 나는 반드시 후회하게 되고
고통을 받을 것이거던. 넌 내가 널 사랑하기 때문에
겪는 고통이 지옥의 겁화에 결코 못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겠지.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야. 나는 더 견딜 수가 없어. 나는 떠나기로
결심했어. 트롤리버스를 타거나 트란바이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한두 시간 안에 달려가 만날 수 있는
곳에 너가 있다는 사실이 나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모르지. 아니 그런 탈 것들이 아니더라도,
걸어서라도 서너 시간 안에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는
너를 만나지 못하는 내가 얼마나 큰저주를 받고
있는지 모르지. 난 떠나기로 했어. 멀리, 멀리. 내가
아무리 기를 써도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기로
했어. 기차를 타면 일주일이 걸리고 버스를 타면 한
달이 걸리는 그런 먼 곳으로. 그리하여 널 찾아나설
때마다 다시 생각을 고쳐먹고 발길을 돌릴 수 있는
이성적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아주아주 먼 곳으로.
"내게 노래 좀 들려줄 수 있겠어?"
눈에 글썽거리는 눈물을 닦은 아르까지나는
빅토르를 쳐다보며 노래를 청했다. 빅토르는
아르까지나의 눈물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르까지나는 걸핏하면 잘 울었다. 바닷가에 나가
갈매기를 바라보고 있다가 저 갈매기가 몇 개의
대양을 건너 영국까지 날아갈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가엾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아르까지나는 꺼리가 없어 눈물을 흘리지 못해 늘
아쉬워하는 여자 같았다. 그러므로 빅토르는 그녀의
눈물이 자기와의 이별을 준비하는 그런 쓰라린 것인
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무슨 노래를 부를까. 아, 그래 '캄차카의 대장'이
좋겠군."
빅토르는 벽에 걸어두었던 기타를 내려 그것을
가슴에 안고 앉았다. 줄을 조이고 풀며 음을 조절한
그는 전주를 부드럽게 연주해갔다. 그리고 곧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 이상한 곳 캄차뜨카. 그 이름
정다운 캄차뜨카....... 아르까지나는 지난번 록클럽
콩쿨에서 이미 들었던 노래였다. 짙은 슬픔이 깃든
그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쓸쓸하다. 늘 빈 손, 빈
주머니, 의지할 데 없는 우리 세대의 외로움을 그의
노래는 담고 있다. 우리는 다 외로운 사람들임을 그의
노래는 늘 일깨워주고는 한다.
화덕에 석탄을 두 차례 퍼넣고, 포도주 세 병을
비우고, 검은 보리빵과 치즈와 깔바스로 배를 채우고,
담배를 한갑 다 태우고 나자 어느 사이 해가 져
있었다. 보일라실의 작은 창문으로 천천히 밤이
내려앉았고, 다른 날보다 별들이 더디게 모습을
하나둘 나타냈다.
"나, 오늘 밤, 여기 있을 거야."
아르까지나는 빅토르의 노래가 끝나자 말했다.
"열 시가 넘으면 어머니가 찾아나서지 않을까?"
"난 이제 8학년이 아니잖아. 더구나 유형지를
다녀온 후에는 우리 엄마도 불행에 익숙해져 웬만한
일에는 눈도 꿈쩍 안해."
"눈은 꿈쩍 안해도 걱정은 하실 거 아냐?"
"내가 뭐 어린앤가. 내가 옆에 있는 게 싫다면 갈
테니, 귀찮아하는 내색은 안했으면 좋겠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 아르까지나는 빅토르 쪽으로
재빨리 돌아와 그의 목을 껴안았다. 빅토르는
아르까지나가 하는 대로 묵묵히 있었다. 아르까지나는
그의 뺨에다 자신의 뺨을 비볐고, 오랜 갈증을 풀듯
그의 입술과 혀를 빨아들였다. 그녀의 혀는 뜨겁게
달아 있었고 무르녹아 달콤했다. 기타를 옆으로 비켜
놓은 빅토르는 그녀를 불끈 끌어 안았다. 그녀의
풍성한 유방이 그의 가슴에 닿아 그를 달뜨게 하였다.
그의 손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녀의 가슴을 감싸고
있는 블라우스를 벗기고 유방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유방을 애무하기 시작한 그의 손은 마력에 끌리듯
차츰 아래로 내려가며 그녀의 옷의 단추를 벗겨냈다.
통이 넓은 치마는 그녀의 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고
그의 손은 이미 그녀의 가장 은밀한 곳에 닿아 그곳을
자극적으로 애무하기 시작했다. 아르까지나는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자
성급하게 그의 옷 단추를 끄르고 지퍼를 내렸다. 그의
몸이 드러나자 그녀는 다리를 활짝 벌리고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그녀가 걸터앉자 자연스럽게
불끈 일어서 있던 그의 성난 남자가 그녀의 몸속으로
급히 쳐들어오듯 빨려들어왔다. 아르까지나는 팔로는
그의 목을 조여안고 다리로는 그의 하체를 더 힘주어
조여댔다. 그들의 애무는 격렬했고 뜨거웠으며 성난
파도처럼 끊임없이 바위를 물어뜯으며 출렁댔다. 험한
파도에 부대끼며 한동안 계속되던 항해는 아르까지나
쪽에서 더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먼저
항복하고 말았다. 먼 항해에서 돌아온듯 두 사람은
남은 포도주를 나눠 마시며 아득한 표정으로 둘다
한동안 말을 잃었다.
화덕에 석탄을 퍼넣고 물탱크의 수위를 체크하고
노래를 부르고 키스를 하고 포옹을 하고....... 그날
밤, 그들은 온밤을 그렇듯 뜨겁게 보냈다. 그들의
사랑의 잔은 거듭거듭 뜨거운 포도주로 넘쳐흘렀고
그들의 애무의 욕구는 아무리 퍼내도 줄어들지 않는
샘물처럼 계속 솟아올랐다.
아침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왔고 그들은 헤어질
시간을 맞았다. 빅토르는 다음 사람 페도찌끄에게
인계를 해주어야 보일러실을 떠날 수 있었다.
교대시간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가자고 해도
아르까지나는 굳이 먼저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빅토르는 보일러실을 등지고 돌아가는 아르까지나를
간단히 배웅했다. 그는 그녀가 석탄야적장을 반도
지나지 않아 보일러실로 돌아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아르까지나가 보일러실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아파트의 모퉁이를 돌아가기 전 한참동안 서서
석탄야적장이며 그가 일하고 있는 보일러실을
눈물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레닌그라드의 가을은 마지막 '여인네의 여름'을
거쳐야 비로소 감지할 수 있다. 6월의 백야 기간을
지나면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여 두어 달의 여름이
계속된다. 푸른 바탕에 하얀 반점이 널따랗게 번져
있는 자작나무의 가지마다 잎이 무성하고 가로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 키가 큰 토폴리 나무의 잎도
무성해진다. 아파트의 창틀에는 제라늄과 베고니아
같은 화분이 장식되고 그 화분들에 꽃이 피기
시작하면 여름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그리고 레닌그라드 사람들은 덥고 지저분한 여름의
기온을 견뎌야 한다. 지난 겨울의 지긋지긋했던
추위의 기억을 가끔 달콤했던 추억으로 되새기게 하는
여름은 늘 옆에 있어주길 바라는 손님같은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 변덕스러운 사람들은 후덥지근한
공기, 걸핏하면 내리는 비로 질척거리는 거리,
모기들의 극성으로 짜증나는 밤, 이런 것들로 인해
여름이 늘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을을
기다리고 심지어는 꽁꽁 얼어붙은 겨울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여름이 가면 그것을 붙들어두지 못해
다들 안타까워했다. 그래, 여름은 레닌그라드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계속되어 주었으면 하는 기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여름은 때가 이르면 반드시
가버렸고 가을이 왔고 겨울이 왔다.
그러나 '여인네의 여름'은 여름을 보내기 싫은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을 주고 여름을 떠나보내는
마음의 준비를 하게 했다.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사람들은 해마다 으레 겪는 것이지만 '여인네의
여름'은 늘 새삼스러웠다.
꽃다운 20대, 활달한 30대, 원숙한 40대를 지나면
여인은 늙어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50대가 되면
여인으로서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련을 아직도 다
버리지 못한 듯 잠시 화려하게 활짝 피어난다고
하였다. 러시아의 여름은 여인의 그러한 변화과정과
흡사하여 여름이 다 가고 이제 가을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을 무렵 문득 어느날부터 날씨가 갑자기 여름으로
되돌아가 무덥기 시작한다. 그것이 마치 50대에
마지막으로 피어나는 여인들과 같다하여 그 기간을
'여인네의 여름'이라 불렀다. 그 '여인네의 여름'은
아직 여름에 대한 미련을 다 버리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듯 한 일주일이나 열흘 가량 계속되는데 그
기간을 보내는 동안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여름과의
작별을 준비하고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동시에 하게
된다.
빅토르는 '여인네의 여름' 기간을 초조한 가운데
보냈다.
뜨로삘로네 녹음실에서의 녹음은 순조롭다고까지야
할 수 없었으나 대체로 무난히 진행되었다. 매사에
빈틈없고 특히 녹음을 할 때는 작고 사소한 실수도
용납치않는 완벽주의자 뜨로삘로는 한 곡을
녹음하는데 한 열흘씩은 잡아먹고는 했다. 마침
보리스가 프로듀서로서 역할을 자청하고 녹음을
진행하며 탬버린처럼 흔들어 소리를 내는 필통 모양의
까시오톤이라는 새로운 악기로 반주하기를 권해 그
제안을 받아들여 연주를 하는데 뜨로삘로는 그
까시오톤이라는 악기를 영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보리스 그레벤쉬코프의 제안이므로 마지못해 연주를
시키면서도 까시오톤 소리가 자꾸만 귀에 거슬린다고
투덜거리며 다시, 다시를 외쳐댔다. 그리고 온전히 한
곡의 연주를 무사히 마친 것 같은데도 몇 차례나
그것을 반복하여 연주하도록 요구했다. 몇 차례든
뜨로삘로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그가 그 연주들
가운데 가장 잘 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하기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연주뿐만이 아니었다.
뜨로삘로는 노래도 한 곡 취입하려면 열번 스무 번을
되풀이해 부르게 하였다. 그것 역시 가장 잘 부른
것을 선택하기 위한 방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요구에 묵묵히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빅토르는 마음 한 구석이 늘 텅 비어 있는
듯했다.
보일러실에서의 일은 순조로웠다. 그곳에서는
작곡도 노래연습도 잘 되었다. 게다가 유리
가스빠란과 찌토프를 불러다 노래 연습하기에
보일러실은 매우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아파트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고 또 석탄가루가 피어오르는 지저분한
보일러실에 사람들의 발걸음은 거의 닿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놓고 소리를 지를 수도 노래 부를 수도
있었다. 찌토프는 아크와륨 그룹의 연주회 스케줄
때문에 못오는 경우도 있었으나 유리 가스빠란은
빅토르가 근무하는 날 밤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보일러실로 찾아와 늦게까지 또는 밤을 새워가며
빅토르와 머리를 맞대고 빅토르가 지은 시를 검토하고
노래를 다듬는 일을 도왔다. 유리 가스빠란은
빅토르의 시에 대해 비판하거나 어떤 의견을 내놓으며
손질을 바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는 빅토르의
시를 볼 때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고 그가
작곡한 노래들도 거의 다 좋다고 했다. 매번 빅토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하며 이렇게 고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으면 유리는 한동안 검토한 후 그게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유리로서는 어떤
흠도 없어보이는 데도 빅토르는 자기가 지은 시나
노래에 만족해하는 경우를 거의 볼 수 없었다. 그는
무엇이 불만인지 자꾸만 잘 못됐다면서 머리를
긁적이거나 몹시 짜증을 내고는 했다. 하기야 그렇게
짜증을 내며 고쳐놓은 시나 노래는 더 좋아지기는
했다. 그렇더라도 유리의 경우에는 처음의 것도 결코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유리는 빅토르가
필요 이상의 정력을 낭비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는
했다.
거기에다 빅토르는 곡 하나를 만들면 수백 번은 더
되풀이해 연습을 하고는 했다. 주위 사람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는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인사치레로 좋다고 말하는
것으로 여기는 눈치 같았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마음에 든다고 판단될 때까지 연습을 되풀이하며 피를
짜내가듯 사서 고생하고는 했다. 유리로서는 그의
그런 작업태도가 날카로운 성격과 남을 의심하기
좋아하는 성품 때문이려니 여겨지기만 했다. 아무튼
유리로서는 빅토르의 집중력과 몰두력에는 기가
질렸다. 매번 볼 때마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집요할
수 있는 것인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인네의 여름'을 초조하게 지낸 빅토르는 더
견디지 못하고 아르까지나네 집을 방문했다.
보일러실에서 밤을 함께 보낸 이후 아르까지나는
연락이 없었다. 열흘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자 마샤와
자레치나야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샤도 자레치나야도
그동안 한번도 아르까지나를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빅토르는 아르까지나에게 꼭 전할 말이 있으니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도록 시원한 대답이 오지 않았다. 집에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며 마샤나 자레치나야도 그녀의 행방을
궁금해했다.
아르까지나네 아파트는 국치노에 있었다. 주로
고관들이 사는 대형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지역이었다. 초인종을 누르는 데는 많은 망설임과
용기가 필요했다. 초인종을 누른 지 한참 지나도록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두 번을 누른 다음 그래도
기척이 없자 실망한 그가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세요?"
여자의 음성이었으나 아르까지나는 아니었다.
"아르까지나 친굽니다."
"아르까지나 친구?"
"예, 기술학교를 함께 다닌 빅토르입니다."
안에서 잠금쇠를 돌리고 쇠사슬을 벗겨내는
금속성이 차례로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목욕 가운을
걸친 여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눈이며 입이
아르까지나와 많이 닮아 있어 한눈에 아르까지나의
어머니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비쨔구나!"
아르까지나 어머니가 알은 체를 하자 순간 빅토르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아르까지나 어머니의 눈에
반가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아르까지나 어머니 올리가 쎄묘노브나는 한번도
빅토르를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를 보자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고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사람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아르까지나로부터
빅토르가 동양계로 노래를 잘 부른다는 말을 자주
들었었다. 아르까지나는 그가 지었다는 노래를 여러
번 들려주기도 했었다. 그 노래들에 전폭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었으나 아르까지나가 좋아할 만한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는 점은 인정했었다.
"들어오게."
빅토르는 쭈뼛거리며 현관으로 들어갔다. 현관을
지나 그는 거실의 소파로 안내되었다. 지금까지
빅토르가 구경했던 어떤 아파트보다 넓고 호화로웠다.
현관에 들어서자 탁자 위에 전화기가 놓여 있었고
거실로 들어가자 간이 냉장고가 놓여 있고 그 옆
테이블 위에 텔레비전과 전축과 비디오 세트가 차례로
놓여 있었다. 그 옆에도 또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아르까지나를 통 볼 수 없어서, 이렇게 실례를
하게 됐습니다."
"아르까지나가 말하지 않았나?"
"무슨 말을 말입니까?"
"아르까지나는 부다페스트에 가 있다네."
"네, 부다페스트에요?"
빅토르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비쨔 자네한테는 말하고 간 것으로 알았는데."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저는 복교하여 학교에 다닐
것으로 알았습니다."
"아르까지나가 원해 부다페스트로 간 것일세. 우리
부부는 아이를 멀리 보내고 싶지 않아 극구
만류했네만 본인이 죽어라고 부다페스트에 가서
그림공부를 하겠다는 데야 우리가 어떻게 말릴 수
있어야지."
"그림공부를 하러 부다페스트로 갔다구요?"
빅토르는 저도 모르게 도리질을 했다. 아르까지나
본인이 원해서 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로 갔다니,
빅토르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녀가 가지
않으려 해도 부모가 강제로 보냈다면 모르려니와
그녀가 스스로 먼 이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했다면....... 빅토르는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아, 안돼. 속으로 그는 그렇게
외쳤다. 바보,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단 말이야.
"그림이야 이곳 레닌그라드에서 공부하는 것이 훨씬
낫지, 부다페스트라니, 우리 부부도 너무 엉뚱해 그
속을 알고 싶어 거듭 캐물었네만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아이를 떠나보내고 말았다네."
부인의 말은 꾸며낸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글썽거릴 것같은 촉촉히 젖은
눈으로 하는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아르까지나가 레닌그라드를 떠난 이유가 바로
빅토르 자신에게 있지 않았나 여겨지는 터에.......
부인이 내놓는 차를 어떻게 마시는 둥 마는 둥
빅토르는 정신없이 아르까지나네 아파트를 나오고
말았다. 아르까지나의 아픔과 고통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낸 자신의 무딘 감각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이제 아르까지나는 다시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빅토르는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40. 술 없는 세상을...
1985년, 소비에트 연방에는 강력한 금주정책이
실시되었다.
소비에트 인민들은 글라스노스트나
페레스트로이카보다 금주정책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글라스노스트는 인민들에게는 해당되는
사항이 아무 것도 없었다. 정치적, 국제적 정보를
개방하고 그것을 안다고 해서 생활에 달라질 것이
없었다. 페레스트로이카도 마찬가지였다. 인민들이야
무엇을 개혁해야 한단 말인가.
1985년 3월 12일 당 서기장에 선출되어 거대한
소비에트 연방의 권력을 손아귀에 쥔 고르바초프는 두
달 후, 볼세비키 혁명 당시 레닌이 지휘본부로
사용했던 레닌그라드의 스몰리 수도원에서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로이카 정책 실시를 천하에
공포했다. 10월 혁명 당시 볼세비키 군의 작전본부로
사용되어 소비에트 정권 수립이 선언됐고 이듬해
모스크바로 수도가 옮겨갈 때까지 중앙정부로
사용됐던 혁명적 유서가 깊은 스몰리 수도원을 빌어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실시를 공포한
데는 고르바초프로서는 제2의 혁명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나 호사가들은 수군대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소비에트 연방 인민들에게 글라스노스트며
페레스트로이카가 어쨌단 말인가. 소비에트 연방
인민들은 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술을 그들로부터
멀리 떼어놓으려는 음모에 민감하게 반발할
따름이었다.
하기야 인민들은 일찍이 레닌이 '사회주의 국가는
술을 만들지도 팔지도 않을 것'이라 선언한 시실을
잊은 지 실로 오래였다. 레닌에 이어 권력을 잡은
스탈린에 의해 주류가 산업화를 위한 자금조성의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인민들에게 널리 애음이
권장되어 레닌의 선언 따위는 쉽게 망각되기에
이르렀다. 레닌의 금주정책선언이 그대로 시행되었을
경우 레닌의 인기가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을까? 다행히 스탈린의 권주정책시행으로 레닌의
인기에 손상을 입지 않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할 만큼 소비에트에는 술이 일반화 되어 있었고
알콜중독이 만연해 있었다.
그러나 친애하는 고르바초프는, 알콜중독을
사회악의 뿌리라 생각했다. 알콜중독은 생산성을
하락시키고 영아사망률과 범죄를 증가시키는 원인이라
판단하고 금주정책을 단호히 실시했다. 친애하는
고르바초프로서는 엄청난 희생을 감수한 눈물겨운
정책이었다. 주류세입이 소비에트 연방 전체 세입의
무려 12퍼센트나 차지하는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알콜중독으로부터 인민들을 구해내려는
일념으로 금주정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금주정책이 완강하면 완강할수록 인민들의 반발은 더
거세갔다. 금주정책을 인민들은 반대하고 야유하고
풍자했다. 고르바초프의 금주정책을 야유한
풍자중에는 이런 과격한 것도 있었다.
고르바초프가 연설을 하려 어떤 마을을 방문했다.
한 농부가 장총을 들고 주류판매점을 지키고 있을
뿐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았다. 고르바초프가
장총을 든 농부에게 물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 어디 있습니까? 연설을 해야
하는데."
그러자 농부가 하늘을 향해 총을 한방 쏘았다.
집들의 문이 삐끗 열리더니 이런 소리들이 들렸다.
"보드카가 도착했소?"
그러자 농부가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고르바초프 동무가 연설을 하러
왔어요."
그 소리에 문들이 거칠게 쾅쾅 닫혔다.
"아니 사람들이 왜 저러는 거요? 어서 다
모아주시오. 연설을 해야겠소."
고르바초프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주류판매점을
지키고 있던 농부는 하늘을 향해 또 한방의 총을
쏘아올렸다. 문들이 다시 급히 삐끗 열렸다.
"보드카가 왔소?"
"그게 아니라니까. 고르바초프 동무가 자네들에게
할 말이 있다네."
잠깐 침묵이 흐른 뒤,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무뚝뚝한 목소리가 소리쳤다.
"아니, 첫방에 그 작자를 날려 버리지 못했단
말이오?"
어쨌든 금주령은 비록 제한적이기는 했으나 단호히
실시되었다. 주류판매점의 숫자를 과감히 줄였고 오전
11시부터 열던 주류판매점의 문을 오후 2시가 되어야
열었다. 개점시간도 매우 짧았다. 다섯시면 문을
닫았다. 식당에서도 저녁식사 시간 외에는 술판매가
금지되었고 공식적인 리셉션이나 연회에서도 심지어
중앙위원회 당기구내에서도 음주가 절대 금지되었다.
특히 직장에서의 음주는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그렇게 되자 주류판매점 앞에는 개점시간 몇 시간
전부터 긴 줄이 늘어서게 되었고 술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올랐다.
친애하는 고르바초프의 애국적인 결단에 의해
강력하게 시행된 금주정책은 음악가들, 특히
대중음악가들에게는 한쪽의 날개를 꺾어버린 것과
다름없었다. 음악가들뿐만이 아니었다.
연금생활자들이나 정신을 태워 재로 만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술이 가져다주는 적당한 마취와 혼몽의
위안이 없이는 인생이 너무 적적하고 쓸쓸했다.
사랑도, 인정도, 우정도, 학교도, 사회도......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것으로부터도 위안을 받지
못하는 시대의 저항아들인 록 음악가들에게는 특히
술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술을 빼앗아
버리다니.
술을 빼앗지 않는다 하더라도, 감히 말하거니와
소비에트에서는 되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안되는 일도 소비에트에서는 없었다. 모든 일이
되기도, 또한 안되기도 했다. 똑같은 일이,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되는 것이기도 또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안되는 일이 되기도 했다.
일은 항상 구호로부터 시작되었다. 시작은 언제나
화려했다. 구호란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대에나
화려하기 때문일까. 구호로 시작된 일은 대개 결과가
빈약하거나 유야무야 되기 십상이다.
소비에트에는 포카쥬카(겉치레)가 유난히 성행했다.
오랜 전통을 지닌 포카쥬카는 어찌나 정교하게
발달됐던지 거의 예술적 경지에까지 이르러 있는
일종의 관습이었다. 소비에트에서는 포카쥬카 없이는
해결하지 못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구호로 시작된
일은 대개 포카쥬카로 끝나고는 했다.
포카쥬카의 대표적인 사례에 이런 포복절도할 것이
있었다.
고르바초프가 권좌에 오른 뒤에 공개된 것이었다.
1974년부터 시작된 바이칼-아무르 철도공사는
화려하게 착공 테이프를 끊었었다. 그로부터 때때로
TV를 통해 소비에트 인민들은 공사현장에서 날아오는
눈부신 희소식들을 접하고는 했다. 시베리아의 혹한을
이겨내며 열성적으로 작업하는 노동자들을 칭송하는
노래가 지어져 불리고, 책을 출간하여 그 영웅적
작업소식을 널리 알리고, 영화로 제작하여 인민들로
하여금 감상하게 했다.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의
기둥인 노력영웅들을 여러 명 뽑아 표창하기도 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치하의 당국자들이 약속했던
1983년이 되어도 완공은 까마득했다. 완공예정일을
일년 더 연기했으나 1984년이 되어도 여전히 완공이
요원해 보였다. 그러자 당시의 최고권력자인 수상
체르넨코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포카쥬카를
택했다. 체르넨코는 완공이 요원한 바이칼-아무르간의
철도 개통식을 미리 갖기로 했던 것이다.
화려한 개통식이 있던 1984년 9월 27일, 수백만의
소비에트 인민들은 TV를 통해, 2천 마일에 달하는
철도의 가운데 구간인 '황금의 철로'를 연결하고 있는
근로자들의 힘찬 작업 광경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두
구간의 철로가 이어지는 감격적인 순간이 TV에 생생히
그려지고, 곧 화려한 개통식이 펼쳐졌다. 수상
체르넨코는...... 이 철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보완해주는 것으로, 분쟁지역인 중국 국경지대를 멀리
벗어나 보다 안전하게 운송사업에 기여하게 될 것이며
시베리아 광물자원 개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리라 공언했다. 그리고 세기의 이 사업이 예정보다
빨리 완공되어 기쁘다고 선언하며 자축의 술잔을 높이
들었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권좌에 올라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펼친 직후 신문들은 그 철도는 실제로는
완공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수년은 더 걸려야 겨우
완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다시 말해 그 완공기념식은 소비에트
특유의 포카쥬카였음을 뒤늦게 밝힌 것이었다.
이렇듯, 구호만 무성할뿐 실천이 없는 소비에트적
풍토에서 술없이 어찌 우울을 견디라는 것인지
보리스도 빅토르도 마이크도 납득하지 못했다. 냉철한
이성을 지니고서는 하루도 살지 못하고 질식하게 되어
있는 소비에트적 상황을 고르비는 먼저 개선시켜 놓고
술병을 빼앗아 버렸어야 했다고 보리스도 빅토르도
마이크도 한없이 투덜거렸다.
빅토르는 이미 오래전부터 무정부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단순했다. 정부와 지도자를 동일시했다.
권력이 인민을 위해 옳게 쓰여지는 경우가
소비에트에서는 거의 없다고 그는 생각해 왔었다.
권력을 창출하는 당대회도 올바르게 운영된 적이
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당대회는 인민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권력을 창출해 그 마의 지휘봉을 교활하고
악랄한 지도자의 손에 쥐여주는 행사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정부가 없어지면, 국가가 없어지면
따라서 그 권력도 없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권력이 없어져야만 소비에트 인민들은 레닌이 약속한
참다운 공산주의적 평등한 자유를 누리게 되리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스탈린과 후르시초프와
브레즈네프가 인민 위에 휘둘러온 권력의 지팡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당하게 탄압받고 죽임을
당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그들의 초상을
그릴 때면 형틀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표정을
그리고는 했다.
그러나 빅토르는 고르바초프는 여러 장 그렸지만
한번도 그 표정을 비틀어서 그리지 않았다. 그는
소비에트를 구할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시대의 악습을 과감히 타파하고 새로운 지도자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빅토르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버리다니,
빅토르는 다시 무정부주의자적인 성향으로
회귀하였다. 그는 무정부주의자적인 노래를 지었다.
"비쨔, 보드카 한 병이 생겼는데, 혹시 함께 마실
시간 있나?"
보리스로부터 그런 전화가 걸려왔다. 유리와
찌토프와 한창 노래 연습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곧 있을 제3회 록 경연대회 참가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빅토르는 눈이 번쩍 띄었다. 술이라니, 먼저
입안에 군침부터 돌았다.
"그 귀한 술이 어디서 났어요? 유리와 찌토프와
함께 지금 당장 뛰어갈게요."
"그럼 한 병 더 훔쳐야겠군. 좋아, 비쨔가 어떤
노래를 새로 지었는지 듣고 싶으니까, 어서
달려오라구."
보리스는 여유있게 말했다.
빅토르와 찌토프와 유리는 각기 기타를 메고
보리스의 집으로 가는 일렉트릭치카에 올랐다. 그들은
모두 술에 굶주려 있었다. 전에는 50코페이카만 주면
살 수 있던 붉은 포도주가 무려 열 배나 올라
5루블이나 하였고 보드카는 더 올라 그들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감히 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거기에다
돈이 있어도 술을 사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다름없었다. 어쩌다 생일 파티에라도 초대받으면
술구경을 할 수 있었으나 전처럼 취하도록 마실 술은
어느 집에서도 구경하기 힘들었다. 술을 매개로 누릴
수 있는 낭만은 이제 다른 세상의 일이되고 만
셈이었다.
보리스는 욕조에다 술잔 삼아 목제 식기를 몇 개
띄워 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 사람이
들어가자 좁은 욕실은 가득찼다. 그들은 욕조 앞에
미리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또 리백 흉내군요?"
"모처럼 구한 술인데, 운치있게 마셔야지."
"그래도 한두 번이면 몰라도 리백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고소를 금치 못하겠습니다."
"쓸쓸한 혼끼리는 서로 통한다는 사실을 모를 리
있나. 어쨌든 이번 콩쿨에 들고나갈 노래
연습중이라며?"
"연습을 하기는 하지만 아크와륨 그룹에게야
당하겠어요."
"공연한 겸양. 노래 좋다는 말 찌트한테서 다
들었어."
보리스는 찌토프를 바라보았다. 찌토프는 잠시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노치'는 이미 들어서 알게고, '이것은 사랑이
아니야', 도 들었잖아요. 아, '무정부주의자
어머니'라는 노래를 새로 지었어요."
"자, 그럼 술을 한잔씩 먼저 마시고 '무정부주의자
어머니'나 한번 들어볼까. 전통을 생각한다면
노래부터 부르고 나서 술을 마셔야하겠지만,
여러분들이 워낙 술구경한 지 오래된 것 같으니까."
보리스는 욕조에 떠 있는 목제 식기에다 투명한
보드카를 하나하나 따랐다. 보리스의 제안에 의해
그들은 일제히 술잔을 집어들었고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술잔을 기울여 아릿한 현기증을 즐기며 술을
체내에다 받아들였다. 목을 태울듯 강렬한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기를 기다리며 그들은 술맛을 음미했다.
"한모금 더해야 노래가 나오겠는데요."
빅토르는 보리스를 향해 웃으며 넌지시 말했다.
"그래 좋아. 보드카 두 잔에 비쨔 노래 들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테니까."
보리스의 의미심장한 말에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보리스는 다른 말은 더 보태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술잔에다 술을 따랐고 다시 건배를 제안했다.
두잔째의 술이 들어가자 속에서는 세잔째의 술을 또
원했다. 그러나 어찌 또 한 잔을 더 달라고 보챌 수
있겠는가. 빅토르는 먼저 기타를 가져와 무릎에
얹으며 찌토프와 유리에게 눈짓으로 말했다. 그들도
기타를 들고 와 앉았다.
군인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아이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너의 부모는 누구냐
군인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무정부주의자
아버지는 한 잔의 포도주
아이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었고
키가 모두 컸다
군인은 아이들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무정부주의자
아버지는 한잔의 포도주
아이들은 군인에게 농담을 걸었다
아이들은 유쾌한 표정이었다
군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했다
군인은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무정부주의자
아버지는 한 잔의 포도주
노래를 들은 보리스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비쨔, 노래는 좋지만 심의를 통과할 수 있을까?"
"왜요? 노래에 문제가 있어요?"
"지난 번 콩쿨이 끝나고 비밀경찰에서 록 클럽을
찾아왔다는 말 못 들었어?"
"들었어요. 우리 KINO에게 그랑프리 준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면서요?"
"알고 있었구나. 그런데 이 노래가 심의를 통과할
수 있겠느냐고?"
"보랴, 그래서 우리는 '비핵지대'란 매우 애국적인
노래를 한 곡 지었어요. 두 곡을 한꺼번에 심의에
넣을 생각이거든요. 설마 그러면 두 곡 다
애국충정에서 만들어낸 곡이라 생각하지 않겠어요."
"비핵지대?"
보리스의 물음에 찌토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매우 건전한 반전 노래야."
"그럼 그 '비핵지대'를 한번 들려주게."
빅토르는 고개를 저으며 그 청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건 노래가 아녜요. 더구나 보랴 앞에선 부르고
싶지 않아요. 다음 콩쿨 때 들어요."
"그건 노래가 아니라...... 그럼 할 수 없지."
보리스는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빅토르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는
술잔에다 술을 따랐고, 각자는 그것을 들고 마셨다.
"이 술, 이렇게 막 마셔도 되는 거예요?"
"왜, 독약이라도 탔을까봐?"
"아니, 이 귀한 것을...... 그래 어디서 난
거예요?"
"궁하면 통한다고, 다 방법이 있어. 앞으로 술이
필요하면 말해. 일주일 안에 구해줄 테니까."
"주류판매소에 끈을 댔군. 좌우튼 인기가수가 되고
볼 일입니다. 그런데, 보랴는 한가지 모르고 있는 게
있어요. 세상이 작년과 달라졌는데 말이에요."
"세상이 달라지다니?"
"고르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실시되고
있잖아요."
"그래서?"
"개혁이 뭐겠어요. 고르비는 술을 빼앗은 대신
인민들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의미 아니겠어요."
"고르비가 자유를 줘?"
보리스는 기가 막히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비쨔, 고르비의 환상을 믿지마."
"왜. 그의 개혁정책은 소비에트 인민들에게 보다
풍족하고 질좋은 생활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
아니에요. 그의 정책 안에는 자유경쟁 시장 원리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런 자본주의적 제도까지 과감히
도입한 고르비가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것 같애요?"
"고르비의 환상이 실제 생활에 적용되려면 맨
하급관리에게까지 그 환상이 급속히 파급되어야할
텐데, 하급관리들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걸."
"어쨌든 두고보세요. 제가 반드시 심의를 통과하고
말테니."
그날 보리스는 빅토르의 장담이 영 미덥지 못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어머니는
무정부주의자, 아버지는 한잔의 포도주라니, 그런
국기(國基)를 뒤흔들 우려가 있는 위태로운 발상까지
용납하겠는가. 바쿠닌, 파르부스, 피사레프를
용납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누가 있던가.
그러나 과연 빅토르의 터무니없어 보이던 장담 대로
일은 귀결되었다.
고르바초프가 술은 빼앗아 갔지만 대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는 풀어놓았던지 빅토르의 노래는
무사히 심의를 통과했다. 당의 연예담당자와 KGB
요원이 참석한 전과 다름없는 삼엄한 자리에서
빅토르는 먼저 '비핵지대'를 그리고 이어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를 부르고 조심스레 '무정부주의자
어머니'를 불렀다. 그는 가버린 계절을 그리워하는
'여름'을 맨마지막으로 연주를 마쳤다. 연주가 끝나자
꼴랴 미하일로비치가 일어나 전체적인 감상을
토로했다. 그의 심사평은 젊은이들의 일반적인 성향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그러한 젊은이들의 성향을
미래지향적이며 저항적이며 진취적으로 수용한
노래들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심의위원들은 꼴랴
미하일로비치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였고
별다른 반대 의견없이 무사히 심의를 끝냈다.
그 과정을 직접 지켜보고 있던 보리스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당사자인 빅토르보다 더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심의를 받은 노래 제목들이
열거된 서류에 심의필 인장이 찍혀졌고, 그것을
받아든 빅토르는 보리스에게 자신있는 웃음을
웃어보였다. 세상이 과연 달라진 것인가.
심의를 통과한 노래들은 그해 전승기념일전에 열린
레닌그라드 록그룹협회의 정기 콩쿨에서 불려졌다. 그
콩쿨에서도 빅토르의 KINO 그룹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그들의 대상 수상은 이미 보리스가 예상했던
결과였다. 아크와륨 그룹은 이번에도 3위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보리스는 서운한 기색없이 빅토르의
수상을 축하했다.
"축하합니다."
록 클럽 회장이 수여하는 트로피를 받아들고 내려와
멤버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 서툰 러시아
말로 말했다. 조안나 스팅그레이였다. 그녀는
미국에서 온 록가수였다. 빅토르나 마리안나와는 이미
구면이었고 그룹 멤버들과도 다 아는 사이였다.
"작년에 이어 또 그랑프리를 탔군요. 정말
축하합니다. 언젠가 사정이 허락되면 미국으로 꼭
초청하고 싶습니다."
조안나는 열성을 기울여 말했으나 그 말을 들은
빅토르는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조안나, 조안나의 생각은 고맙지만 나는
보일러실의 화부야. 내가 미국 갈 비행기 값을 벌려면
한푼도 안 쓰고 꼬박 오년은 모아야 할 걸."
"빅토르는 곧 스타가 될 거야. 그러면 그런 돈은
하루에도 벌 수 있을 걸. 그리고 미국 초청공연을
하는데 설마 빅토르더러 경비를 대라 할까."
조안나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오늘 한 말 결코 잊지 않을게."
빅토르는 수줍은 듯 미소를 지었다. 록그룹으로서
오늘의 대상 수상은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작년에 이어 두번째 수상한 이들 KINO 그룹의
스타로서의 장래는 훤히 열린 셈이었다. 그러한
사실이 실감되지 않는지 우승의 당사자인 빅토르는
아주 무감각하고 담담했다. 우쭐대지도 않고 도리어
수줍은 미소로 사람들의 축하인사에 답례하고는 했다.
그러한 빅토르에게 조안나 스팅그레이는 한없는
호감을 느꼈다. 그들 멤버들이 그녀는 다 마음에
들었다.
이미 지난해, 록 클럽 페스티벌에서 KINO 그룹의
노래를 들은 조안나 스팅그레이는 그들이 스타로
성장하리라 굳게 믿었었다. 그러나 일년이 지나도록
그 예상은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조안나
스팅그레이는 그 이유를 나중에야 알아차렸다.
유럽이나 미국 등지에서는 상업적인 공개연주회를
자유롭게 가질 수 있었고 또 자주 그런 공연이
펼쳐졌다. 그러나 소비에트에서는 그런 공연의 기회를
갖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공연허가를 얻는 것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상업적 성공의 기대도
불투명했다. 그러므로 아무리 훌륭한 가수나
연예인이라도 일반 애호가들과 만날 기회가 쉽게 오지
않았다. 따라서 대중들이 우러러 받드는 스타가
되기란 그만큼 어려웠다. 만약 빅토르가 미국에서
활동했다면 지난 한해 동안에 그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치솟아올랐을 것이라 조안나
스팅그레이는 생각했다.
"언젠가 꼭 당신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우리 집에
올 수 있을 거야!"
조안나는 다짐하듯 그렇게 말했다. 조안나의 이
말은 2년 후에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때 빅토르는
의례적인 인사 정도로 알고 귓등으로 흘려듣고
말았다. 조안나는 그후로 자주 빅토르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녀는 빅토르의 노래를 배우고 KINO
그룹과 작은 연주회같은 데도 어울리고는 했다.
성격이 밝고 활달한 그녀는 마리안나와도 금방
친숙해졌다. 당시 조안나 스팅그레이는 스물셋의
아가씨였고, 미국에서 혼자 단신으로 레닌그라드에 와
있었다.
루빈스타인, 쇼스타코비치, 솔제니친 등 러시아
출신 예술가들의 활동을 지켜본 미국인들 가운데
러시아 음악이나 발레 또는 문학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지고 보면 러시아는 유럽에 비해 그 방면에 있어
뒤늦게 출발한 후발주자였다. 그러나 도이칠란드나
프랑스 등 서구에서 받아들인 음악이며 발레며 연극을
천부적인 재능과 감수성을 지닌 러시아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의 음악과 발레 수준을 뛰어넘는
발전을 이룩했다. 미술, 문학, 연극 등도 그랬다.
프랑스며 도이칠란드 등 유럽 문화를 사대해온 그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서구 예술들을. 그러나
러시아적 혼과 감수성을 지닌 예술가들이 속속 나타나
러시아적 예술을 확립했고 나아가 유럽의 수준을
능가하는 작품을 창작해내고는 했다. 대체로 짧은
기간에 러시아에는 푸쉬킨이며 도스토예프스키며
톨스토이며 체호프며 레핀이며 림스키콜사코프며
차이코프스키며 디아길레프 등 동시대의
유럽예술가들과 비교해 결코 손색이 없는
대예술가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의 예술발전을 서구인들은 경이의
눈으로 바라봤고 미국의 예술가들은 흠모의 정을 품고
바라봤다. 일찍이 예세닌을 통해 러시아의 혼을 자기
예술에 수용했던 이사도라 덩컨의 러시아행의 이유도
사실 그런 데 있지 않았을까. 조안나 스팅그레이 역시
일찍부터 러시아 음악의 혼과 감수성을 흠모하여
무작정 소비에트행을 감행했던 것이다.
조안나 스팅스레이는 KINO 그룹의 성장을 눈여겨
지켜보았다. 빅토르의 초인적인 노력은 훌륭한 노래를
창작해냈고 인간능력의 한계를 자꾸만 돌이켜
생각하게 하는 억척스런 연습은 그들의 노래를 빛나게
하였다. KINO 그룹은 <KINO 45> <KINO 46> <캄차카의
대장> 등 석장의 앨범이 시중에 나와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노래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들이 스타로서 활동하지 못하는 것이
조안나 스팅그레이는 늘 안타까웠다.
당시 빅토르에게는 많은 노래가 창작되어 있었다.
그는 <노치>라는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뜨로삘로
녹음실에서 녹음에 들어갔다.
힘들게 녹음을 했으나 뜨로삘로는 그 앨범의 출반을
차일피일 늦추었다.
새 앨범의 출반을 기대하고 밤낮 고생을 해온
빅토르나 KINO 그룹 멤버들은 그 일로 인해
의기소침해졌다. 그때까지 그들에게 우호적이던
뜨로삘로의 까닭모를 변심은 빅토르를 여간 힘들게
하지 않았다.
처음 보리스의 소개로 알게 되었으니 중간에
보리스를 넣어 중재를 부탁할 수도 있겠으나 빅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몇 년을 함께 일해온
뜨로삘로와의 사이에 분쟁이 생긴 것도 못마땅했고
그런 걸 소문내며 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더구나
보리스가 알면 잘잘못의 모든 책임이 빅토르에게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었다. 빅토르는 대인관계의
어려움을 뜨로삘로를 통해 다시 체험하며 그 앨범의
출반을 포기했다. 그 녹음 테이프를 받는 것마저
단념해버렸다. 대신, 위시냐의 녹음실에서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앨범을 녹음했다. 그 앨범의
녹음은 순조로웠고 출반도 빨리 끝났다. 그는 이번의
앨범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사랑받는 KINO 그룹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 KINO 그룹에는 때가 이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번의 앨범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역시 동업자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질시의 대상이
되었으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널리 사랑받는 것에는
미치지 못했다. 1985년에 빅토르가 기억할만한 일들
중에는 레닌그라드 록 클럽의 페스티발에서 우승한
것과 앨범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출반 정도였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 더 보태려면 키예프에서 경찰에
체포된 일을 더 들 수 있을까.
아, 그리고 또 하나, 마리안나가 어머니가 되고
빅토르가 아버지가 된 사실도 빼놓을 수 없겠다.
우크라이나 공화국 수도 키예프에는 KINO 그룹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로만
알떼르였다. 그는 키예프에 중요 공연을 주선해온
프로모터였다. 그는 지난해에 KINO 그룹의 앨범을
처음 듣고 곧 그들의 초청공연을 주선할 결심을
하였다. 그 결심의 결실은 그러나 일년이 지나서야
겨우 추진되었다. 마침내 로만 알떼르는 공연장소를
물색하고 KINO 그룹 멤버들의 교통비와 체재비를 댈
스폰서를 찾아냈다.
어디서 누가 부르든 많은 청중들과 만나 노래를
들려주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빅토르는 로만
알떼르의 초청을 흔쾌히 수락했고 정해진 날짜에
멤버들과 함께 키예프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어머니, 발렌치나의 출생지인 키예프는
빅토르에게는 낯선 도시였다. 도시를 다 수소문하고
다닌다해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찾을 수 없는
도시였다. 초청한 로만 알떼르가 역에 마중 나와 있을
것이 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날이 밝자 키예프에
내린 KINO 그룹을 맞이한 것은 로만 알떼르가 아니라
뜻밖에도 경찰이었다.
그룹 멤버들이 폼에서 기차를 내려 2층 역사 안으로
이어진 구름다리를 올라가고 있는데 긴 코트를 입은
사내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내는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얼굴색은
냉정하고 파리했다. 빅토르는 한눈에 그가 기관원임을
알아보았다.
"잠깐 조사할 게 있으니, 갑시다."
사뭇 명령조였다. 경찰이라면 으레 여행증명서
제시나 요구하고 말 터였다. 그런데 사무실로
연행하는 걸로 보아 조사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는 가축떼를 몰아가듯 그들을 2층
역사에 있는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먼저, 여행증명서를 봅시다."
빅토르를 비롯한 그룹 멤버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행증명서를 소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하루만에 돌아갈 것이어서 여행증명서를 받아오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찌토프가 대답했다.
"어디서 왔소?"
기관원은 눈쌀을 찌프리고 굳은 얼굴로 냉랭하게
물었다.
"레닌그라드에서 이곳에 공연 초청을 받고
왔습니다."
"공연 초청을 받고 왔어?"
기관원은 가소롭다는 시선으로 일행을 다시
훑어보았다. 일행의 복색이며 머리모양이며 다
유별났다. 빅토르를 비롯한 멤버들은 하나같이 몸에
꼭 끼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모양은 길게 길러
어깨를 덮고 있거나 무쓰를 발라 빳빳하게 공중을
향해 치솟아 있었다. 모두 이른바 펑크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빅토르를 비롯한 일행들은 레닌그라드 록 클럽
회원증을 내놓았다.
"넉장의 앨범을 출반한 KINO 그룹 멤버들입니다."
"KINO? 내가 너희 같은 건달들을 어떻게 알겠어."
경찰은 회원증을 훑어본 다음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그래, 어디서 초청했다고?"
"로만 알떼르라는 사람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너희들은 여기서 바로 레닌그라드로 돌아가야 해.
여행증명서도 없는 너희 같은 건달들을 키예프에
머물게 할 수는 없어."
"그럼 우리를 초청한 사람에게 연락이라도 좀 취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잠깐 망설이던 경찰은 빅토르를 쏘아보았다.
"연락할 데가 어딘데?"
"여기로 전화를 한번 걸어주십시오."
빅토르는 수첩에서 전화번호를 불러주었다.
다이얼을 돌린 경찰은 상대방을 퉁명스레 확인하고
KINO 그룹을 초청한 일이 있느냐고 묻고나더니
송수화기를 빅토르에게 건네주었다.
"괴상한 옷차림에 머리 모양도 귀신 같다니, 당신들
펑크들 모습은 안 봐도 알만합니다."
로만 알떼르는 역에서 찾아헤매다 허탕을 치고 집에
돌아와 있다 전화를 받는다면서 그렇게 말했다.
"어쨌든 우리가 있는 곳을 알았으면 조치를
취해주시오."
"물론이죠. 내가 그리로 곧 가죠."
로만 알떼르가 도착하여서도 곧 풀려나지 못했다.
그가 뇌물을 먹이고 나서야 기관원은 마지못한 듯
그들을 풀어주었다.
"레닌그라드야 그래도 많이 개방되었겠지만 이곳
키예프는 매우 보수적이랍니다. 그런데 펑크차림을
보았으니 기관원인들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더구나
널리 알려진 유명 가수들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검은 머리에 갈색 눈동자의 로만 알떼르는 사교적인
인상이었다. 얼굴에는 늘 미소가 어려있고 언행이
침착했다. 그는 빅토르를 마치 오래전부터 알아온
사람처럼 친숙하게 대했다. 로만 알떼르는 사무실을
나와 역광장에 세워둔 자동차를 향해 걸어가며
빅토르에게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웃어보였다.
"좀더 있다 우리가 유명해지면 부르지, 로만이
성질이 급했던 거 아뇨?"
"과일도 싱싱할 때라야 그 맛이 싱그러운 것
아닙니까."
"무르익은 과일은 과즙이 풍부하고 당도도 높은 것
아니던가요?"
"전, 사실 앨범 <45>를 듣고 바로 KINO를 초청하려
했습니다. 여건 마련이 지연되어 이제야 만나게
되었습니다만."
"우리 KINO를 그렇게 생각해 주었다니 고맙소."
"우리 키예프가 소비에트에서 세번째 큰 도시
아닙니까. 그런데 문화적으로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에 크게 뒤져서야 되겠습니까."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도리어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로만 알떼르의 충실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청중은
그다지 많이 들지 않았다. 작은 카페에서 80여 명의
청중들을 상대로, 그러나 가진 능력을 다 발휘하여
노래부르고 연주하였다. 몇 해 전 모스크바에서
스무남은 명을 상대로 연주할 때보다는 그래도 많이
성장한 셈이었다. 비록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할지라도 키예프 공연은 거점 확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해 8월 5일 마리안나는 꼭 빅토르와 같은
검은 윤택이 흐르는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흑진주처럼
까만 아들을 순산했다. 살결은 마리안나를 닮은 듯
백옥빛이었다.
41. KINO, 하늘을 날다
1986년이 밝았다. 새해는 시무룩하게 시작되었다.
빅토르는 지난해의 기쁜 일로 알렉산드르 사샤의
출생을 가장 첫손가락에 꼽았다.
물론 록 클럽 페스티벌에서 두번째 대상 수상도
기억할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첫번째 우승하고 나서도
그랬지만 두번째 대상 수상을 하고서도 전과 별로
달라진 것 없는 KINO 그룹의 위치며 연주활동에 내심
불만을 품고 있었다. 두번째 대상 수상을 했을 때,
전보다 더 활발히 연주활동을 펴고 더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알았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립니쓰키의 초청과 키예프의 로만
알떼르의 초청공연 외에 기억할만한 공연은 없었다.
거기다 그들의 인기 또한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꿈쩍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연 두 번의
대상 수상의 가치가 빅토르에게는 과소평가 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 한심스런 것은 새해에 기대를 걸만한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새봄에 레닌그라드 록그룹협회에서 주관하는
페스티벌은 또 열릴 예정이었다. 거기서 두 번이나
대상을 수상했는데도 인기나 지명도에 변동이 없는
지금 빅토르는 그 페스티벌 참가마저 망설일
지경이었다.
빅토르는 이제 KINO 그룹이 해야할 일은 무엇이고,
기대할 것은 무엇인지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레닌그라드며 모스크바 시내를 돌아다니며 KINO 그룹
선전 벽보라도 붙이고 다니란 말인가. 그리하여
레닌그라드 록 페스티발에서 두 번이나 대상을 수상한
KINO 그룹의 노래와 연주를 듣고 싶은 사람은
초청하라고 광고하란 말인가. 그러나 그런 벽보나
허용되는 사회라면 그런 기대라도 걸어보겠지만,
불법벽보를 부착하다 적발되었을 때 돌아올 처벌을
생각해보라지. 도무지 안될 일이었다. 우리가 이대로
가만히 앉아 있다가 시들어버리는 것이나 아닐까,
빅토르는 문득문득 불안감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KINO 그룹의 부진한 활동도 문제려니와 빅토르와
마리안나는 당장의 생활도 궁핍을 면하지 못했다.
보일러실의 화부로 꾸준히 일하여 타는 50여 루블의
월급여로 최저의 생활을 꾸려온 그들이었다. 키노의
매니저 노릇을 맡아하는 마리안나에게 다른 수입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이제 한 식구가 늘기까지
했다.
그런 불안감을 안고 맞이한 새해도 어김없이 날은
밤과 낮을 교차하며 이어져 나갔다. 긴 밤과 짧은
낮이 그 길이를 조금씩 반대로 변동시켜가며 1월이
가고 2월이 되었다. 온 세상은 눈으로 덮여 있었고
오후 세시면 어김없이 밤이 찾아오는 그런 계절에
KINO 그룹의 앨범 <노치>가 세상에 나왔다.
뜨로삘로의 녹음실에서 작년에 녹음했던 앨범이었다.
당시 녹음했던 곡들이 모두 다 지워져 버렸다하여
속을 썩이고 마침내 뜨로삘로와 서로 기분까지 상한
채 결별해야 했던 문제의 앨범이었다.
작년 가을, 일차적으로 뜨로삘로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지워졌다고 생각했던 녹음을 찾았다는
것이었다. 마침 레닌그라드 국립 멜로디아
레코드회사에서 출반을 제안해왔는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전화를 받은 빅토르는 황당한
느낌을 받았다. 순간 지난해의 불쾌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두 달이 넘게 밤마다 진땀을 흘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고 노래하며 녹음했던 곡들이 기기 조작
잘못인지 다 지워져 버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말을
들은 순간 얼마나 기가 막혔던가. 뜨로빌로를
원망하고 자신들의 재수없음을 한탄하고, 하나도
제대로 되는 일 없는 세상을 원망하며, 억지로 억지로
서운하고 억울한 마음을 달래지 않았던가. 그런 아픈
기억이 상기되자, 그 건으로 할 말이 있으면 매니저를
담당하고 있는 마리안나와 상의하라고 퉁명스레
쏘아부치고 말았었다. 그리고 빅토르는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노치>가 나왔다고 했어요?"
마리안나가 건네주는 송수화기를 받아든 빅토르는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래, 아주 잘 나왔는데......"
"나와 생각이 다르군요."
"생각이 다르다니?"
뜨로삘로는 뜨악한 음성이 되었다.
"나는 그 곡들을 다시 고쳤어요. 그리고 거기에다
다른 곡을 더 추가해 만들 생각이었어요."
"전에 이야기 했을 때 마리안나와 상의하라고
비쨔가 말했었잖아."
"내가 그랬던가요? 나는 분명히 다른 곡을 넣어
새로 출반하고 싶다고 했을 텐데요."
"그렇지만 몇 달이나 기다려도 연락이 있어야지.
내가 그랬잖나. 앨범을 그대로 내겠다고. 그래서
마리안나와 상의하여 만들었어. 자켓은 꼴랴
뜨레찌야코프의 그림으로 했고. 물론 마리안나가 세
번이나 검토를 했지. 아무튼 앨범이나 한번 보라구."
빅토르는 마리안나와 함께 뜨로삘로의 녹음실로
달려갔다.
"이 자켓 그림은 똥 같군요!"
레코드를 받아든 빅토르는 첫마디를 그렇게
퉁명스레 내뱉았다. 뜨로삘로의 얼굴은 그야말로
똥이라도 씹은 얼굴이 되었다.
"내가 그려도 이보다는 잘 그렸을 겁니다. 게다가
우리 KINO 그룹을 도와주는 화가가 열 명이 넘는데 그
누구한테 부탁했어도 이보다는 낫게 그렸을 겁니다."
빅토르는 전처럼 뜨로삘로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승낙을 받지 않고 함부로 앨범을
만들었다는 것도 불쾌했지만, 언제는 녹음이 날아가
버렸다고 고집부리던 것들을 새삼스레 들고 나온
소행이 괘씸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빅토르 자신이
좋아하는 '무정부주의 어머니' 곡목 밑에다 영국의
야단스런 펑크 록그룹 섹스 피스톨즈의 노래를 모방한
것이라 부기해 놓은 것도 그의 심사를 잔뜩
비틀어지게 하였다. 모방이라니?
뜨로삘로는 화를 참고 있는 듯 상기된 얼굴로
잠자코 있었다.
"'오빠의 사랑'과 '여자친구가 아플 때'는
빠졌군요?"
"그때 녹음한 것들을 다 찾을 수는 없었네.
이것만을 찾은 것도 다행이라 생각하네. 더구나
자네가 좋아하는 '무정부주의 어머니'는 들어가 있지
않나."
언제나 당당하던 뜨로삘로가 한풀 꺾인 궁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요. 그건 다행이군요. 섹스 피스톨즈의 노래를
모방한 것이라고 인쇄되어 있어 지랄이지."
"당국의 주의를 돌리기 위한 배려였네."
처음 녹음할 때 뜨로삘로는 '무정부주의 어머니'의
녹음을 한사코 반대했었다. 비록 록그룹협회의 심의는
통과한 노래라지만 자칫 새삼스럽게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노래니만큼 앨범에서 제외시키자고
강력히 주장했었다. 그러나 빅토르는 그 노래가 담고
있는 정신을 빼버리면 KINO 그룹은 시체와 다름없다고
완강히 반대하여 결국 녹음을 강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뜨로삘로는 앨범에 수록한 후에도 여전히 이
노래로 하여 어쩌다 당국의 제제로 판매가 금지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앨범이 출반된 지금 다른 시비를 걸어봐야
양쪽 다 얻은 것없이 상처만 입을 뿐이라는
마리안나의 속삭임에 빅토르는 감정을 죽이고
뜨로삘로가 내주는 앨범 몇 장을 받아들고 뜨로삘로의
녹음실을 나오고 말았다.
그렇듯 서자처럼 세상에 나온 그 앨범은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빅토르와 KINO 그룹에 크게 효자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앨범 <노치>는 나오자마자 선풍적인,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두어달만에 50만장이라는
놀라운 판매실적을 올렸다.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200만장이라는 경이로운 판매고를 올렸다. 따라서
KINO 그룹의 초청공연은 날로 늘어갔고 그 규모도
점점 커져갔다. 물론 언론에서도 KINO 그룹에 대한
보도가 심심찮게 나가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에서도
지난해 록 클럽 경연대회 때 촬영해 두었던 필름을
소비에트 전역에 방영하기도 했다. KINO 그룹은
마침내 소비에트 연방에 널리 알려진 인기 그룹으로
급속히 부상해 갔다.
보리스는 벌써 왔어야 할 일이 2,3년이나 늦게
도래했다면서 빅토르와 KINO 그룹을 축하하고
격려했다.
"기억나니?"
보리스는 웃옷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흔들어
보이며 빅토르를 쳐다보았다.
"내가 뭐랬어. 비쨔도 오래지 않아 이런 수첩이
필요하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어."
"그때, 우리 같은 애송이한테 당대 최고인기
가수님께서 수첩을 흔들어 보이며 너희들도 곧 나처럼
될 거라고 하다니 너무 심했던 것 아니었어요?"
"내가 어디 틀린 말 했어. 비록 이태 정도
늦었지만, 내 예측이 맞아떨어졌잖아."
"아직 모르지요...... 하느님 마음을 어떻게
압니까."
"아냐, 이제 비쨔 수첩은 이것보다 더 많은
글자들로 빽빽하게 채워질거야! 날짜와 시간과
장소들로......."
"글쎄요. 더 관망해 봐야겠지요."
빅토르는 전과 다름없이 신중했고 겸손했다.
그에게서 우쭐거리는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전보다 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는 벼락처럼
쏟아지는 행운을 겸양과 사려깊은 언행으로 조심스레
받아들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또 하나의 시련이
닥쳐왔다. 그룹의 중심 멤버인 찌토프가 KINO를 떠난
것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발전을 지향한다. 보다 값지고
보람있는 인생을 가꾸기 위해 번민하고 방법을
모색하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장래를
위해 보다 유리한 쪽을 선택해 살 권리를 지닌다.
그러나 그 선택이 어떤 경우에나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선택은 이기심만으로 된 것이 있고 어떤
선택은 도덕적 번민을 바탕에 깐 것이 있다. 전자의
경우는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사회를 보다 밝고 조화롭게 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사회가 바라는 대로 인간은 반드시 살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우정에, 도리에, 정의에 조금씩 금이
간다할지라도 자기발전을 위한 선택을 최종적으로
결행한다. 그런 이기심이 팽배할 때 사회는 조화가
깨트려지고 혼란해지고 불안해진다. 그러나 사회는
양심이라는 최후의 보루, 최종의 정화장치가 작동하여
한때의 혼란과 불안을 치유하고 다시 제궤도로
복원되고는 한다. 만약 인간에게 영원히 도덕적
양심이 마비되어 있었다면 지구는 네로시대나
히틀러시대에 이미 황폐화하여 인간이 살고 있지 않은
행성으로 전락하고 말지 않았을까.
비약이 너무 심한 것일까. 빅토르는 찌토프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 아니며 순전히 이기적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며 분노했다. 물론 그
분노를 밖으로 표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 분노가 분화구를 찾지 못한 화산처럼 용암이
꿈틀거리며 지표를 흔들고 있었다.
"마리안나."
4월 어느 날이었다. 마리안나가 전화를 받자 전에
없이 침통한 음성으로 찌토프가 입을 열었다.
"찌트, 왜 음성이 그래, 어디 아파?"
"아냐, 아픈 게 아니라, 내가 이제부터 하는 말 잘
들어. 제발 화는 내지 말고."
"무슨 일인데, 서두가 그렇게 엄숙해?"
"다름 아니라, 많은 날 혼자서 오래 고민끝에 내린
결론이야."
마리안나는 불길한 생각에 대꾸하지 않고 저쪽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KINO와 헤어져야겠어."
아니나 다르랴, 마리안나로서는 귀를 막고 듣지
않은 것으로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제, 내가 태도를 분명히 할 때가 온 것 같애.
이제 KINO 그룹은 컸어. 현재 음악잡지의 집계에
의하면 인기 1위이고 지방 초청공연도 많아졌잖아."
"그래?"
"이제 내가 도리어 짐이 될거야. 왜냐하면
아크와륨그룹에 일이 있으면 내가 KINO의 연주회를
도울 수 없잖아. 그렇다고 나 때문에 KINO가
초청공연에 안갈 수도 없을 거고."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비쨔가 이 말을 들으면
어떻겠어. 절망할걸."
"그렇지 않아. 비쨔는 현실을 직시할 줄 알거든.
내가 두 그룹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할 입장임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거야. 다만 내가 KINO가 아니라
아크와륨을 선택한 사실에 분노를 느낄지 모르지만."
그동안 KINO 그룹을 돕기는 했으나 찌토프의 마음은
언제나 아크와륨 그룹쪽에 가 있었다. 첫째 보리스가
함께 연주활동을 하자고 제안해와 레닌그라드에
머물게 되었고 KINO를 도운 것도 사실 보리스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사실 나이를 봐도 자신은
빅토르보다 다섯 살이나 위였다. 그런 그가 빅토르의
지시를 받아가며 활동해온 것도 많은 인내가
필요했었다. 거기에다 그동안 두 그룹을 오고가며
연주를 해온 것도 번거로웠다. 오래전부터 찌토프는
KINO와의 결별의 날을 염두에 그려보고는 했었다.
그 이유 가운데 나이 차이가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었다. 록그룹에서 5년의 나이 차이는
신구세대의 차이를 느끼기에 충분한 요건이 되었다.
그 단적인 예로, 가끔 찌토프도 아이디어를 내놓고는
했으나 한번도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다. 찌토프의
의견중 전자악기 사용 정도는 받아들여졌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찌토프가 빅토르의 시나 노래보다
보리스의 시와 노래를 더 좋아한 데 있었다. 찌토프의
생각에 아크와륨의 수준이 KINO 그룹 수준보다 한 수
위라 생각되기도 했었다. 물론 나중에 찌토프의
이러한 생각은 많은 수정이 가해졌다. 그러나 그때는
그의 생각이 그렇게 굳어져 있었고 마침내
아크와륨그룹을 선택하게 되었다.
"마리안나, 비쨔에게 잘 말해줘. 잘 이해할 거야.
그리고 비쨔가 원한다면 찌호미로프가 내 대신 해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만약 비쨔가 찌호미로프의
연주에 만족하지 않을 경우 원한다면 내가 전처럼
도와줄 수도 있어. 그러나 일단 입장 정리는
해야겠어."
마리안나는 보일러실에서 돌아온 빅토르에게
찌토프의 말을 전했다. 빅토르의 동공이 확대되는 걸
마리안나는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그는 적을 만난
짐승 같은 험상궂은 표정이 되었다. 손에 들고 있던
무엇인가를 냅다 던져버렸다. 담배와 라이터였다.
담배와 라이터에 맞아 책장의 유리가 쨍그렁하고
깨지며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는 책장은 쳐다보지도
않고 전화기로 달려가 다이얼을 거칠게 돌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상대방에서 전화를 받지않는지 그는 투덜거리며
송수화기를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입장을 분명히 하고 싶을 뿐이래. 아크와륨의 일을
전적으로 하며 우리를 돕겠다고 했어."
"그게 어디 쉽겠어."
"찌호미로프는 어때?"
빅토르는 대답은 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깨진
유리를 헤치고 담배와 라이터를 찾아 담배를 태워
물었다.
"어디 찌토프만한 연주가가 있겠어."
빅토르는 담배연기와 함께 그런 말을 내뱉았다.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씹어야지."
"아, 나에게는 왜 늘 이런 불운이 따라다니는
걸까."
빅토르는 탄식했다. 그의 우울은 그로부터 사나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찌토프에게 전화를 걸거나 다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빅토르는 혼자 속으로 찌토프와의
이별의 아픔을 삭여내고 있었다. 그리고 찌호미로프와
만나 함께 그룹활동을 하기로 합의를 본 다음 비로소
빅토르의 우울이 엷어져 갔다.
찌토프가 떠나고 KINO 그룹은 유리 가스빠란,
이고르 찌호미로프, 유리 구리야노프로 짜여졌다.
그들은 곧 록 클럽의 경연대회에 대비하여 연습에
들어갔다.
KINO 그룹은 기대밖으로 연주가 지리멸렬이었다.
결과는 입상을 하지 못하고 특별상으로 최우수
노래말상을 수상했을 따름이었다.
"비쨔, 왜 연주에 그렇게 생기가 없어?"
공연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오자 보리스가 다가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빅토르도 이번 공연에
불만이 많았다. 가스빠란은 이제 제몫을 다 한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구리야노프는 무엇인가 겉멋에
흐르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새로 들어온 찌호미로프도
팀의 호흡을 맞추기보다 자기 멋대로 연주하는
스타일이었다.
"항상 다이내믹하고 터질듯한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것이 KINO 그룹의 특색이었는데, 오늘은 영
단조롭게만 느껴지더라구."
보리스의 지적에 모두 묵묵히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빅토르는 보리스가 고맙기도 한편
얄밉기도 하였다. 멤버들에게 자기 대신 경각심을
심어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KINO 그룹을 얕잡아 보는
듯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죠."
그러나 어쩌랴, 빅토르는 보리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자기 감정을 눌렀다. 멤버들에게도 다른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42. 빅토르, 영화에 출연하다
록 클럽 페스티벌에서의 입상 여부야 어떻게 됐든
KINO 그룹의 인기는 소비에트 전역에서 급격히 상승해
갔다. 그들의 레코드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공연초정은 날로 늘어갔다. 보리스 그레벤쉬코프의
예측은 적중하여 빅토르의 수첩에는 날짜와 장소와
공연초청 단체나 인사의 이름들이 깨알처럼 박혀갔다.
거기에다 빅토르에게는 영화 출연의 교섭이 들어왔다.
"저, 키예프에서 온 로만 알떼릅니다."
"아, 로만. 그래 레닌그라드에는 어쩐 일이죠?"
"빅토르와 KINO라는 이름이 어찌나 하늘을 높이
떠다니는지 키예프에 앉아 구경만 하고 있기가 좀이
쑤셔 레닌그라드로 달려왔습니다."
로만 알떼르는 전에 KINO의 키예프 공연을 주선한
적이 있었다. 그를 만나기 전 뜻하지 않았던
비밀경찰의 마중으로 뜨악하게 시작된 공연이었으나
키예프 록음악 팬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로만 알떼르는 록큰롤뿐만 아니라 무대예술 전반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키예프 젊은이들에게 문화적
경험의 폭을 넓히는데 헌신하고 있었다. 그는 일종의
댄디스트로써 문화예술의 매파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로만, 당신 같은 인사의 관심과 노력없이 우리가
어디 발붙일 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제 KINO는 그런 단계는 뛰어넘지 않았습니까.
어쨌든 한번 만나고 싶은데, 사정이 허락하겠습니까?"
"멀고먼 키예프에서 온 손님을 만나는데 다른
사정이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전에 우리가
신세까지 진 손님인데, 그래 어딥니까?"
"빅토르가 이사를 하는 바람에 옛날 전화번호로
통화를 할 수 있어야지요. 그래서 록 클럽을 먼저
방문했어요. 거기서 전화번호를 알았지요. 록
클럽에서 멀지않은 카페 사이공 알지요."
"알다마다요. 곧 거기로 뛰어가겠습니다."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안되니까. 뛰어오지 말고
천천히 오세요. 우리는 빅토르를 만나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카페 사이공으로 가는 동안 로만 알떼르의,
우리라는 복수형 지칭이 머릿속에서 뱅뱅 맴을
돌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뜻일 터이고, 또 막연히
놀러온 것은 아닐 터였다. 무슨 일로 온 것일까. 카페
사이공은 손님이 많은 편이었다. 로만 알떼르가
입구를 등지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금방 찾을 수가
없었다. 홀을 반바퀴쯤 돌았을 때에야 그는 로만
알떼르를 발견했다. 그는 낯선 사람과 앉아 있었다.
"인사하세요. 여기는 키예프 예술대학 졸업반인
쎄르게이 리쎈코예요. 영화전공이지요."
순간 빅토르와 쎄르게이의 눈이 마주쳤다. 빅토르는
쎄르게이의 눈 깊은 곳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쎄르게이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KINO의 음악을 인상깊게 들어왔습니다."
쎄르게이는 그렇게 말해 놓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아첨의 말을 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맙습니다."
빅토르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저는 이번에 졸업 작품을 제작해야 합니다."
"영화를 만든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로만이 KINO의
테이프를 들려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KINO의 노래와
연주를 칭찬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랬어요?"
빅토르는 쑥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로만의 칭찬 때문이 아니라 저도 금방 KINO의
노래에 빨려들어가더군요. 거기에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젊은이의 에너지가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무기력과 나태를 뚫고 치솟아오르는 새로운
힘, 그것을 자유라고 해야할지, 또는 이상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소비에트
젊은이들에게는 결여되어 있는, 그러나 우리 소비에트
젊은이들이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어떤 새로운
에너지와 가치지향적인 메시지를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다니, 고맙습니다."
빅토르는 반짝이는 쎄르게이의 눈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노래에 대한 견해가 자신의 생각과 의도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영화를 찍을 때 배경음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영화음악으로?"
"그래요. 우리 소비에트 젊은이들의 변화해가는
모습을 담은 영화를 늘 염두에 두어왔는데, 바로
록그룹이 적절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졸업작품을 바로 소비에트 록그룹을 주제로
선택했습니다."
"그것, 흥미있군요."
"변화는 시대의 요청입니다. 젊은이들의 변화는
소비에트 전역에서 노도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페레스트로이카 물결을 타고 정치적 용인 속에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행이지요. 하기야 록도 그래서
받아들여지게 된줄 압니다만`...... 그 점에 있어
현재 우리 젊은이들은 지난 어느 시대 젊은이들보다
행복한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이번에 KINO 그룹의
연주활동을 통해 우리 소비에트 젊은이들의 변화를
그려보고 싶은데......."
로만 알떼르는 빅토르의 대답을 기다렸다. 빅토르는
창졸간에 받은 제안이라 신중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두 달 가량 공연 스케줄은 꽉 차
있었다. KINO 그룹의 연주활동을 통해 소비에트
젊은이들의 변화를 그려보이겠다는 뜻에 호감이
가기는 했다.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쎄르게이의 솜씨로써 그가 말하고
있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그가 말하고 있는
목적을 달성하려면 내 내면의 깊숙한 곳에 꿈틀거리고
있는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분노와 자유의지와
러시아를 사랑하는, 아니 우리 젊은이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아픈 마음을 그가 카메라로 잡아내야할
터인데, 그것이 가능할까. 내가 앓고 있는 속앓이를
투시할 수 있는 눈을 그가 지니고 있을까.
"쎄르게이는, 키예프에서는 가장 촉망받는 차세대
유명 감독 후보생 1호예요. 그는 하겠다고 결심하면
꼭 해내고 마는 야심가이기도 하고. 그런 신뢰가
없었다면 내가 여기까지 모셔왔겠습니까."
로만 알떼르가 빅토르의 궁금증을 알아차렸던지
그렇게 말하며 미소지었다.
"로만의 과대포장에 속지 마세요. 하지만, 비록
학교에 제출할 졸업작품이지만, 매년 한편씩 벌써 네
편의 영화를 찍은 경험은 있습니다."
"그 네 편의 영화들이 모두 교수들의 관심의
대상이었어요. 솜씨는 믿어도 좋을 겁니다. 멋진
필름이 될 거예요. 쎄르게이, 대본 가져왔잖나."
쎄르게이 리쎈코는 옆에 있는 가방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그는 미소를 머금고 그것을 빅토르 앞에
펼쳐놓았다. 제목이 <방학의 끝>이었다. 빅토르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한장 한장을 넘겨가던
빅토르는 마음이 흡족했다. 젊은이들의 '만남'을
줄거리로 KINO 그룹의 노래와 연주로 그것들을
끌어가고 있었다. 쎄르게이는 빅토르의 노래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읽고 있었다. 친애하는 대통령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를 그리고
페레스트로이카를 표방하고 나선 지 벌써 2년째,
빅토르의 노래에서 쎄르게이는 개방과 개혁을 읽었다.
그는 빅토르를 페레스트로이카의 전령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러시아에는, '러시아인은
천동소리를 세 번 들어야 성호를 긋는다'는 속담이
있었다. 아무리 고르바초프가 개혁을 외쳐도 쇠귀에
경읽기로 그치고 말 개연성이 높았다. 지도자란
인민이 따라주어야 그 정책을 펴날갈 수 있는 것이다.
인민들이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고 만다면 그
정책은 생명력을 잃기 마련이다. 그런데, 빅토르는
노래로서 자신들이 앓고 있는 병을 정확히 진단하여
알리고 그 처방을 반성과 파괴와 개혁과 역동적
정진에서 찾으며 그 실천을 촉구하고 있었다.
쎄르게이는 그런 뜻에서 빅토르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의 전령이 아닌가 여기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연주와 노래를 통해 젊은이들의
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그려가고 싶었다.
쎄르게이의 대본을 읽고난 빅토르는 문득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공원 벤치에서'가
연상되었다. 1985년, 즉 지난해 봄부터 공연된 그
연극은 연일 만원을 이루며 성황을 이룬다 하였다.
사람들은 둘만 모이면 그 연극을 화제로 삼았다. 그
연극은, 자기의 아내와 직업을 몹시 싫어하는 한
중년남자와 갓이혼하여 매우 고독하고 이야기할
상대도 없는 여인이 우연히 공원의 벤치에서 만난다.
그들은 서로 신세타령을 하며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고
뜻대로 되지않는 세상을 원망한다. 그리고 조금도
개선될 여지가 없는 자신들의 삶을 더 연장할 의욕을
잃고 낙망한다. 그러는 사이에 의기가 투합된 두
사람은, 둘이서 힘을 합해 그런 불합리하고 불행한
삶을 청산하고 새출발하여 즐겁게 지내자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들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자
남자는 알콜중독자가 되어 죽어간다는 줄거리였다.
어찌 보면 고루하고 재미없는 연극이었다. 그러나
구경꾼은 줄을 이어 찾아든다는 것이었다. 구경꾼들은
그 연극을 통해 자신들을 비춰보며 혹은 위안을 얻고
혹은 분노를 삭였다. 그 연극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비춰보는 거울 구실을 해냈던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실시되기
전이라면 그런 내용의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을 리
없었다.
잘만 만든다면 쎄르게이의 대본도 젊은이들에게
오늘을 깨트리는 자유정신과 개혁의지를 심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시작할 생각입니까?"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렇지만 KINO의 이미 정해진
스케줄이 있을게 아닙니까?"
"다음 달까지는 공연 스케줄이 잡혀 있습니다. 두
달후, 한달간은 비워두겠습니다."
빅토르의 말에 쎄르게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안도의 표정으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쎄르게이는 손을 번쩍 쳐들더니 로만의 어깨를 툭
쳤다.
"내가 뭐랬어. 전에 키예프에 왔을 때 비쨔가
영화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걸 알았었다고
했잖아."
쎄르게이는 사실 로만 알떼르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레닌그라드로 오면서도, 아니 조금전까지만 해도 혹시
그의 기획이나 대본을 탐탁치않게 여기고 거절을
당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었다. 빅토르의 승낙에
모든 시름이 일시에 걷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하게 승낙할 수는 없습니다."
쎄르게이는 금방 얼굴이 어두워졌다.
"KINO는 저 혼자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어봐야 합니다."
"아, 물론 그렇겠지요. 물론 그래야지요."
쎄르게이는 빅토르의 한마디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교대로 겪는 기분이었다. 승낙을 받은 것으로
알고 기뻐했다가 금방 그것을 뒤집는 통에 혼란과
번민을 거의 동시에 겪어야 했다.
다음 날, 쎄르게이는 빅토르와 카페 사이공에서
다시 만났다. 빅토르는 유리 가스빠란과 구리야노프와
찌호미로프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그들은 이미 영화
출연에 합의를 보아, 쎄르게이를 기쁘게 했다.
두 달 후, 빅토르는 유리 가스빠란과 구리야노프,
찌호미로프와 함께 키예프로 떠났다.
그들의 키예프 여행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용기있는
행위였다.
당시 키예프는 여행기피지역이었다. 키예프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용해로에서 방사능 유출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 방사능은 북반구 대부분 지역으로 확산되어 미국과
일본에서도 검출되었고 유럽 여러 국가에서는
생야채와 우유제품의 판매를 한때 금지시키기도
했었다. 방사능 피해사례는 전세계에 과장되어
소개되었고 거기에 놀란 여행객들은 우크라이나에는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사업이나 정치적
목적으로 꼭 방문해야할 사업가나 공직자들도 그곳
여행을 피하거나 다음으로 연기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고도 KINO멤버들은
키예프행을 감행했던 것이다.
"난, 당신들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로만과 함께 마중을 나온 쎄르게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체르노빌이 당신의 졸업 작품을 망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빅토르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게다가 KINO는 키예프 팬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구리야노프의 말이었다.
"구리야노프, 당신의 동포애에 감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KINO 그룹의 키예프 방문소식은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키예프는 신구시가지를 가로지르며 도니에플 강이
유유히 흐른다. 도니에플 강 양안은 마로니에숲이
무성한 공원이 조성되어 짙푸르렀다. 키예프를 두고
러시아의 파리라든가, 러시아 도시의 어머니라 이르는
까닭은 강과 공원과 사원 등 유서깊은 건축물들이
어우러져 풍기는 기품과 아름다움 탓이리라.
쎄르게이 리쎈코는 빅토르를 비롯한 KINO 멤버들을
구시가 도니에플 강안의 레닌스키 콤소몰 광장으로
안내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광장으로 들어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촬영준비를 하고 있던 쎄르게이의
후배가 뛰어와 광장의 사정을 알리고 그들의 접근을
만류했던 것이다.
"광장이 사람들로 꽉 찼어요."
"무슨 사람들이?"
"KINO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지, 누군 누구겠어요."
"구경꾼들이 모였단 말이야?"
"모인 정도가 아니에요. 광장이 꽉
메워졌다니까요."
로만 알떼르와 쎄르게이 리쎈코는 황망히 KINO
멤버들을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쉬게 하였다. 섣불리
일을 시작했다가 당국으로부터 어떤 제재를 받는
불행한 사태를 야기할 우려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쎄르게이는 어떤 집회허가도 받은 바 없었다. 그는
영화 촬영을 하기 위해서 KINO 그룹을 안내해 왔을
뿐이지 어떤 공연을 하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었다.
광장으로 뛰어간 쎄르게이와 로만은 그들의 눈을
의심했다. 저쪽, 광장 안쪽 끝에 우뚝 서있는 레닌
동상의 머리만 바라보일 뿐 넓은 광장에는 뜻하지
않은 인파들로 붐비고 있었다. 대개 젊은
남녀들이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높은
음성으로 담소하거나 노래 부르거나 축구나 복싱 등
운동경기 흉내를 내거나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었다.
어떤 패들은 나무 그늘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다른
젊은이들의 행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젊은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숫자가 늘어갔다.
젊은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젊은이들 가운데는
3,40대의 장년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이들이
KINO를 구경하기 위해 다 모였단 말인가.
쎄르게이는 당황했다. 이대로 촬영을 진행시킬 수는
없으리라 판단했다. 물론 영화촬영에는 구경꾼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러려면 먼저 집회허가를
얻어야했다. 구경꾼을 필요로 하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이미 거기에 필요한 집회허가원을 당국에
제출시켜 놓았었다. 오늘은 강안을 따라 걷다
광장으로 들어와 노래 부르는 장면만을 촬영할
계획이었다. 따라서 저렇게 엄청난 구경꾼은
필요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집회허가원 같은 건
제출할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저 많은 사람들
사이사이에는 비밀경찰들도 섞여 있을 것이리라.
"안되겠어. 촬영을 다음으로 미뤄야겠어."
카페로 돌아온 쎄르게이는 낭패스런 표정을 지었다.
"KINO 그룹이 이렇게 대단한 줄은 몰랐는 걸."
로만 알떼르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KINO가 광장에 나갔다간 당국에 당장
연행되겠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갑시다."
첫날의 촬영은 그렇게 무산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이틀 후 로만과 쎄르게이는 당국으로부터
레닌스키 콤소몰 광장에서의 촬영허가를 받아냈다.
마침내 촬영을 시작했다. 첫날과 다름없이 광장은
구경꾼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구경꾼들은 KINO,
KINO를 연호하였다. KINO 그룹은 광장 초입에서
연주를 하였고 쎄르게이와 그 후배는 촬영을 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구경꾼들은
KINO의 노래가 한곡 한곡 끝날 때마다 미친듯
열광하며 환성을 높이 질러댔다. 아직 KINO로서는
그렇듯 열광적인 많은 청중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예정했던 촬영을 끝내고 로만의 집으로 돌아온
일행은 모두 약간씩 흥분해 있었다. 로만과
쎄르게이는 그들의 영화에 대한 기대로, 그리고
빅토르를 비롯한 KINO 멤버들은 처음 경험한 열광적인
청중들의 반응에 고무되어 있었다.
"키예프 사람들이 우리를 저토록 광적으로 좋아해줄
줄은 몰랐는 걸."
"나도 놀랐어. 이제 KINO는 대단해졌어."
"뭘, 키예프에서 사랑받았다고 모스크바에서도 같은
정도의 사랑을 받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유리 가스빠란은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던지 몇
번이나 고개를 저어 보이기도 했다.
"그래, 오늘의 저 현상을 한번 냉정히 분석해볼
필요가 있을 거야."
쎄르게이 리쎈코가 사려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왜 키예프 사람들이 우리를 저토록
좋아할까?"
"그렇지 않아도 첫날의 인파를 두고 지난 이틀 동안
곰곰 생각해 봤는데, 내 짐작에, 두 가지 원인 때문인
것 같애."
"두 가지 원인?"
"그래.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는 다른 소비에트
사람들과는 다른 묵은 원한이 있거든. 그 묵은 원한
때문에 다른 공화국 사람들보다 한결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는
편이거든."
모두의 시선이 쎄르게이의 입으로 모아졌다. 갑자기
페레스트로이카는 왜 들먹이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빅토르의 노래는 자유주의적이며
저항적이고 개혁지향적이잖아. 즉, 자유와 저항과
개혁의 에너지로 충만해 있잖아."
쎄르게이의 말은 좌중의 누구도 얼른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혁명 이후, 어느 공화국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고통을 당하고 가장 많이 죽어갔는지 알아?"
"아, 난 또 무슨 말이라고......."
로만 알떼르는 비로소 쎄르게이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쎄르게이는 1932년의 대기근과 아사사건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1917년의 볼세비키 혁명이 성공하자, 그들을 열렬히
지지하며 후원해온 우크라이나인들은, 제정 러시아의
오랜 지배를 벗어나 독립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우크라이나인의 그런 소망을
저버리고 도리어 탄압을 강화시켰다. 모스크바 당국은
농민들로부터 농지를 빼앗아 집단 농장으로
국영화하였고 사원을 봉쇄하고 목회자를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등 우크라이나인들이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기독교를 말살시켰다. 모스크바 당국은 이를 위해
당의 최고 선전가, 선동가를 우크라이나에 파견했고
중무장한 군대를 파병했다.
이 농업집단화 정책의 목표는 우크라이나를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모스크바의 지배 아래
단단히 묶어두기 위한 것이었고 아울러
쿨라크(지주)라는 사회적 계급을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독립심이 강한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대부분
토지를 빼앗기고 집단농장에서 일하게 된 것에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그러자 많은 쿨라크들을
체포하여 강제수용소에 수용하거나 시베리아 유형을
보내는 등 크렘린은 그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의 농업 생산량은 급격히
하락하였다. 그럼에도 스탈린은 그들의 생산능력을
훨씬 웃도는 할당량을 강요하고 생산활당위원을
곳곳에 배치하여 농민들이 소유하고 있던 곡물을 한톨
남기지 않고 강제로 몰수해갔다. 그리하여 1932년
겨울을 맞이할 무렵, 세계의 유수한 곡창지대이며
소비에트 공화국 중 최다 곡물생산국인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은 겨울 날 양식이 없었다. 때에 맞추어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주민에 대하여 패스포드 제도를
실시, 여행을 최대한 제한하고 다른 지방으로의
이주를 금지시켰다. 거기에다 국경을 봉쇄하여 식량을
찾아 월경하려는 우크라이나 인민과 다른 공화국에서
우크라이나로 들어가려는 곡물을 물샐틈없이
단속하였다.
그런 결과 그 해 겨울과 이듬해 봄에 걸쳐, 당시
3,000만 명에 이르는 우크라이나 인민 가운데 약
800만 명이 굶주려 죽어나갔다. 이 전대미문의
비극적인 사건을 모스크바 당국은 '기후가 나빠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라 발표했었으나, 50년 가까이
지난 최근, 유럽으로부터 사건의 전모를 밝힌
보고서의 유입으로 그 진상을 알게된 우크라이나
인민들은 분노와 절망감을 느끼고 끓어오르는 용암을
감춘 휴화산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농장 집단화 정책 실시에 반대한 200만
세대의 1,000만명에 달하는 쿨라크들이 살해 되거나
강제노동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집계가 나중에
소비에트에서도 공공연한 비밀처럼 흘러다니기는
했으나 그 비극의 대표적인 경우는 거의가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났다.
"빅토르와 KINO를 키예프 사람들은 아마
페레스트로이카의 전령쯤으로 여기고 환영한 것
같아."
쎄르게이의 결론이었다.
빅토르는 쎄르게이의 말을 듣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로서는 우크라이나 인민들이 당했다는 그
비극적인 사건이 금시초문이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소비에트 연방 유지에, 그토록 많은 인민의
피가 필요했단 말인가. 혁명이 왜 필요했던가. 짜르와
귀족들의 전제정치에 신음하는 노동자, 농민을
해방하기 위해 혁명이 필요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혁명의 성공과 그 정책을 펼칠 이상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의 유지를 위하여, 정작 혜택을 입어야 할 그토록
많은 노동자, 농민이 희생되어야 했다니, 그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혁명도 소비에트
연방도 구호로만 되어 있는 허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그런 아프고 쓰라린
과거가 있다면, 그들의 가슴 속에는 혁명을 다시
바꾸려는 개혁의지와 다른 민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지향적인 성향이 어떤 지방
사람들보다 강하리라 여겨졌다. 그들은 겉으로는,
자유로운 세상의 실현과 생활향상은 현재의 제도나
의식을 과감히 깨뜨리고 오래 묵은 굴레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실현하기 힘든 것이라 외치며
페레스트로이카를 환영하나, 기실 속으로는 오래 묵은
원한을 씻고 그리고 다른 민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기대로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어쨌든 그들에게
페레스트로이카는 바로 그 오래 묵은 비극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어떤 비전을 제시해 주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페레스트로이카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세상, 보다 향상된
삶을 약속하는 것일 터이고 우리 KINO의 노래는 그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고 그것을 널리 인식시키는
구실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었다.
빅토르는 자신의 시와 자신의 노래가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은 아니라는 점은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나 의식을
가지고 노래 부른 적은 없었다. 다만 자신의
대사회적인 내면의 충동과 욕구를 자연스럽게 시로
표현하고 내면의 외침을 반영하듯 거기에 곡을 붙이고
그리고 가진 열정을 다 쏟아 그것을 노래하고는 했을
뿐이었다. 무기력한 행동의 극복, 무의미한 생활에
대한 도전, 이런 젊은이들에게 요망되는 행동과
정신을 그려온 자신의 노래를 정치적인 잣대로만
재려는 비뚤어진 시각에는 거부감을 느껴왔다. 그래서
KINO 그룹에 대해 늘 감시의 눈을 게을리하지 않고 또
검열을 통해 공연을 제지시키려 하는 당국의 처사에
분통을 터트려 왔었다. 따라서 키예프 사람들이
KINO의 모든 노래를 정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데에는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곳
키예프에서 어떤 불길한 일을 당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키예프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모든 행동을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 같애."
빅토르의 말에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야?"
유리 가스빠란이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반드시
그 반대편에는 우리를 감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아냐."
"그럴 수도 있겠지."
구리야노프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이곳 키예프에 머무는 동안 항상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매사 조심해서 움직이는
게 좋겠어."
빅토르의 말에 쎄르게이 리쎈코가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모두들 긴장을 풀지않고 나머지 촬영에 임했고
그들이 모두 조심했기 때문인듯 한달여의 촬영기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달 후, 차례로 레닌그라드로
날아든 로만과 쎄르게이의 편지에는 슬픈 소식이 담겨
있었다.
비쨔, 빌어먹을 세상이다. 지옥 같은 세상이다.
교수나 관리는 모두 악마들이다. 사람들은 모두
관리가 아니면 악마들이다. 필름 <방학의 끝>은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악마들의 눈에는 그것이
맛없는 음식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인민들에게는
생명수 같은 것이지만 악마들의 눈에는 독약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중언부언 다 때려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우리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방학의
끝>은 공개가 금지되었고, 쎄르게이 리쎈코는 졸업
작품에서 낙제를 당했다. 쎄르게이는 스스로 낙제의
길을 택한 것이다. <방학의 끝>을 처음 본 영화과
교수들은 KINO 그룹의 노래 내용이 제국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으므로 그 노래들에 비판적인 해설을 가하고
청년동맹의 회의를 통해 그 노래를 비판하는 장면을
삽입하라는 충고를 하였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리라는 위협적인 경고를 했다.
그러나 우리의 친애하는 쎄르게이는 자기 생각과 다른
교수들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낙제를 감수했다.
그래 이런 불행한 소식을 전해야하는 나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프고 쓰라리다......
로만 알떼르의 편지가 먼저 도착했다.
......지금은 우리가 지고 있네. 그러나 멀지 않아
우리가 이기게 될 것이네. 우리가 이기는 날까지 우리
모두 견뎌나가세. 페레스트로이카여, 반드시
승리하기를!!
로만의 편지보다 사흘 늦게 도착한 쎄르게이의
편지는 그렇게 끝맺고 있었다.
빅토르는 아직 자기들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음을
뼈아프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43. 아냐와의 조우
KINO 그룹은 세 차례의 초청공연으로 가을을 보내고
곧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세 차례의 공연중 리가에서의 공연은 빅토르에게는
뼈아픈 추억으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었다.
에스토니아의 탈린과 리투아니아의 리가 공연을
위해 레닌그라드를 출발하며 빅토르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차를 타고 탈린으로 가는 약 일곱
시간 동안 빅토르는 줄곧 혼자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신들의 KINO 그룹의 인기가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한편 언제나 반대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냉정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였다. 자기들 KINO 그룹을 환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자기들을 경계하고 감시하는
세력이 엄존함을 쎄르게이의 경우를 통해 분명히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젊은이들과 자유지향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KINO를 열광적으로 환영하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모든 인민의 복지나 안락을
생각하기보다 인민들 위에 군림하며 갖은 특권과
안락을 누려온 무리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권한을
위협하는 요소가 짙은 KINO의 노래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세계에 안주하기보다
자기들만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려 한다. 젊은이들은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저항적이며 자유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어른들은 자기들이 그때까지 쌓아올린 성을
지키려하고 젊은이들은 거기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세대간의 갈등과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예정된 것이다. 그런 근본적인 갈등과 충돌요소에
이데올로기나 정치성이 가미될 때 그 대립은
첨예화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늘
비극은 발생하는 것이다. 빅토르는 두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는 적들의 시선이 문득 자신의 온몸을
휘감고 있는 것 같은 순간을 자주 느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몸서리를 쳤다.
탈린의 공연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초청을 한
프로모터측이 학교 운동장을 빌어 그곳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청중이 운동장의 반을 거의 메우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청중은 대개가 1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리가에서의 공연은 콤나르 공원 옆의 청년회당에서
열렸다.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청년회당은 청중들로
가득 찼다.
빅토르는 공연 스케줄을 짤 때 미리 반전 가요를
중간중간에 안배하였다. 그리고 '무정부주의의
어머니' 나 '어머니, 우리는 모두 중환자예요'
'건달들' '우리는 변화를 원해요' 등 당국에서 눈을
부릅뜨고 경계할 우려가 있는 노래들을 사이사이에
짜넣었다. KINO가 연주하는 동안 청중들은 검지와
새끼손가락을 세워 흔들며 끊임없이 환성을 질러댔다.
그리고 연주가 끝날 때마다 그들은 KINO와 비쨔를
연호했다. KINO 그룹은 다섯 차례의 앙코르를 받아준
다음에야 청중들로부터 간신히 놓여날 수 있었다.
분장실로 들어간 KINO멤버들은 모두가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호흡을
고르느라 가쁜 숨을 드내쉬었다. 그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그때 장미꽃을 한아름 든 예쁜 아가씨가
조심조심 분장실로 들어섰다. 아가씨는 분장실의
사람들을 조심스레 살피며 빅토르에게로 다가갔다.
빅토르는 눈을 지긋이 감고 호흡을 고르느라 숨을
크게 내쉬고 있었다. 아가씨가 바로 눈앞에 다가선
것도 그는 모르고 있었다.
"비쨔!"
유리가 빅토르를 큰소리로 불렀다. 유리의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뜬 빅토르는 바로 눈앞에 서서 장미꽃을
내미는 아가씨를 비로소 발견하였다. 빅토르의 눈은
점점 동그랗게 키워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꿈벅였다.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빅토르는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축하해!"
아냐, 아니찌까 듀보피 안드레예브나. 빅토르는
자기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옥에서
살아나온 사람을 쳐다보듯 의아하고 놀란 눈으로
그녀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비쨔의 노래를 좋아해. 비쨔의 앨범은 다 갖고
있는 걸."
빅토르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또 어떻게
그녀를 대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냐의
등장, 그것은 죽었다 깨어난다 해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엉겁결에 받아든 장미다발을 내려다본
빅토르는 점점 제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아픈 과거의
기억들이 키를 세우고 연상되었다. 굴욕과 수치심이
새삼스럽게 그의 가슴을 쓰라리게 하였다. 그는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분노로 가슴이 팽팽하게
팽창되는 것을 느꼈다. 붉어진 빅토르의 얼굴을
쳐다본 아냐는 두려운 기색이 되었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날 기색이었다. 빅토르는 순간 가까스로 이성을
회복했다.
"고마워."
빅토르는 쥐어짜내듯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그는
그 아픈 기억들과 현재 사이에는 10여 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한순간의 숨가쁜 격랑을 그는
견뎌야 했던 것이다.
"KINO 멤버들을 다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은데
가능할까?"
아냐는 어릴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어릴 때도
깜찍했었는데, 그때는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봉오리였다면 지금은 활짝 피어난 꽃송이 같았다.
눈부신 금발에 반짝이는 별 같은 눈, 붉은 장미빛
입술, 발그레 홍조를 띤 볼, 날씬한 키, 쪽 곧은
다리,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고마워. 하지만 안돼. 우리는 계속 일이 있거든."
빅토르는 별다른 생각없이 아냐의 초대를 거절했다.
곧 후회했다. 자신이 너무 옛일에 집착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그의 이성을 질타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공연이 끝났으므로 이제 호텔로 돌아가 술이나 마시며
밤을 지새울 일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언제라도 좋아. 리가를 떠나기 전에 한번 연락줘."
아냐는 초대를 거절하자 서운한 빛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빅토르의 냉담한 거절을 번복시키기
힘들 것임을 알아차린 아냐는 다른 도리없이
물러나기로 마음을 정했다. 서운했다. 무엇인가,
빅토르를 만나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옛날 자신의 짓궂은 행동을 이제
사과하래도 좋고 또 빅토르가 그때의 일로 자신을
공격해도 그 공격을 고스란히 감내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빅토르는 자신의 출현을 반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냐는 자기의
연락처를 적은 쪽지를 빅토르에게 건넸다.
"꼭 연락해."
아냐는 다시 한번 더 그렇게 다짐을 두고 분장실을
나갔다.
"비쨔, 그 아름다운 여인의 초대를 왜 거절한
거야?"
아냐가 분장실을 나가 발소리가 멀어지자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유리가 다가와 힐난조로 말했다.
"그럴 일이 있어."
빅토르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럴 일이 있다니, 자세히 좀 알자."
구리야노프의 추궁이었다.
"저런 미인의 초대를 거절하다니, 빅토르는
알다가도 모를 사람입니다."
그들을 초청한 프로모터 마이크도 한마디 던졌다.
"그럴 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하더라도, 빅토르의 노래를 좋아하고
앨범도 다 가지고 있다면 전폭적으로 좋아하는 팬
아닙니까. 더구나 리가에 저런 미인이
있었다니......?"
빅토르의 무응답에 마이크가 웃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여자가 가져다준 장미처럼 아름다운 모습 뒤에
가시를 감추고 있는지 압니까."
마이크의 말에 유리 가스빠란이 그렇게 빅토르를
감싸고 나왔다.
"그래요, 가시까지 갖췄다면 더 매력적이겠군요.
가시없는 여자를 어디 여자라 할 수 있나요."
마이크는 여전히 웃으며 다시 그렇게 튕기듯
말했다.
"글쎄요, 그건 그렇고 매우 매력적인 초대를
놓쳤으니 호텔에 가서 씻고 잠이나 잡시다."
구리야노프가 마이크의 말을 막으려는 듯 그렇게
말했다.
호텔로 돌아가는 자동차 안에서도 또 호텔에 가서도
빅토르의 머릿속에서는 아냐가 떠나지 않고 줄곧 뱅뱅
맴돌고 있었다. 어둠 속에 함몰되어 있는 도시는
환형으로 점점이 퍼져나가는 불꽃놀이의 섬광으로
밝아졌다 다시 칠흑 동굴 속처럼 어두워지고는 했다.
빅토르의 의식은 명암이 교차하며 혼란을 거듭했다.
아, 마침내 아냐가 내 앞에 나타나다니. 그것도
장미꽃을 한아름 안고서, 나를 축하해 주다니.......
그래, 아냐는 빅토르에게 있어 견줄 수 없는 기쁨이며
또한 저주였었다. 아냐는 한때 빅토르가 살아 있는
이유의 전부였었다. 빅토르의 살아있음의 생생한
조건인 그녀는 번뇌와 고통이었다. 아냐는 최후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독약 같은 존재였다. 빅토르는 그
독약의 마력에 혼취하여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아냐는
기쁨보다 그에게 상처를 더 주었다.
쉬꼴라 3학년. 그때 반 아이들은 하나같이 빅토르가
아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냐의 주위를
줄곧 맴도는 그의 연모의 시선을 왜 다른 아이들인들
눈치채지 못했으랴.
아이들은 아냐를 놀렸다. 아냐는 빅토르의
사랑이라고 놀리며 도망치고는 했다. 어떤 아이들은
학교 벽에다 아냐와 빅토르의 이름을 하트 안에다
묶어 놓기도 했다. 그 일로 인해 아냐는 늘 속이 상해
있었다.
어느날이었다. 교실의 칠판에 빅토르와 아냐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것은 칠판의
중앙에, 몇 백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선명히
식별될만큼 커다랗게 씌어 있었다. 쉬는 시간에
밖에서 뛰어놀다 시작 종이 울리자 교실로 뛰어든
아이들의 눈은 일제히 칠판에 빨려들어갔고 이어 그
시선들은 빅토르와 아냐를 차례로 찾아 바라보았다.
빅토르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어디 쥐구멍이라도
찾아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냐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칠판 앞으로 또각또각 걸어나가더니 당당하게
칠판의 글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누가 이랬지? 이런 짓을 하려면 좀더 똑똑히 알고
해야 해."
아냐는 칠판의 낙서를 지우고 교실 안을 둘러
보았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이상을
지니고 있어. 따라서 내가 사랑할 사람은 매우 훌륭한
사람이 아니면 안돼. 그런데 캄차뜨끼인 빅토르를
내가 사랑할 것 같애."
아냐는 여감독이나 사감처럼 아주 당당했다.
빅토르는 아냐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붉어진 얼굴을
숙였다.
"그리고 너희들은 나를 노리개감으로 잘못 짚은
거야. 나는 저 캄차뜨끼 따위는 옆에 얼씬거리게 한
적도 없으니까 말이야."
아냐는 빅토르를 손가락으로 찌르듯 가리키고
있었다.
빅토르는 수치심과 굴욕감으로 불이라도 덮어쓴 듯
얼굴이 핫핫거렸다. 빅토르는 어디로라도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못했다.
"캄차뜨끼 너, 다시 나를 쳐다보기만 해도 그 눈을
파버릴 거야. 알았지?"
아냐는 단호하게 선언하고 제 자리로 가 앉았다.
빅토르는 그날 학교가 파할 때까지 견디느랴, 혼이
났다.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칼날 같고 모든 아이들의
입이 그를 놀리는 것 같았다. 빅토르는 그러나 도망갈
수가 없었다. 비겁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이 날 턱이 없었다.
아이들을 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역시 비겁자가
되어서는 안되리라는 생각 때문에 학교로 갔고
가시방석에 앉아 지옥의 불길 같은 아이들의 시선을
견디어냈다. 그런 아이들의 경멸섞인 시선이나 놀림은
그러나 아냐의 선언에 비하면 견딜만했다. 아냐는
그가 그녀를 쳐다보기만해도 눈을 파버릴 것이라
했다. 그래 눈을 파버리는 것도 좋다. 그러나 나를
깜짜뜨끼라니. 그 말이 빅토르의 연약한 심장을 찔러
그의 심장은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나는 까레이츠다. 결코 캄차뜨끼는 아니다.
빅토르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캄차뜨끼가 얼마나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대명사인가를 교실에 앉아있는
아이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었다. 물론 다른 곳,
모스크바나 키예프나 카잔이나 노보고로드에 사는
아이들도 다 알고 있을 것이었다.
어떤 아이도 캄차뜨끼같은 놈이란 말을 들으면
수치심과 분노로 이성을 잃고 미친 듯 날뛸 것이었다.
캄차뜨끼란 시베리아 동쪽 끝, 오호츠크해와
베링해를 가르고 태평양으로 깊숙이 빠져있는
캄차카반도 사람들을 이른 것이다. 소비에트사람들은
그곳 캄차카반도 사람들을 미개인 취급하였다.
소비에트 사람들은 캄차카반도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게으른 것으로 알고 있었다.
캄차카반도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면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으면 으레 반은 바다신에게
바치는 것으로 알고 도로 놓아주고, 잡은 고기가
떨어져 더 먹을 것이 없어도 배가 고파야 비로소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간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캄차카 사람들은 글을 배울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데
까닭인 즉 고기잡이에 글이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뿐인가, 결혼풍습도 없이
남자가 발정을 하면 아무 여자나 눈에 띄는 대로 덮쳐
애를 배게 하고 여자가 아기를 낳아도 애비를 가려
찾는 법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 소문의 진위를 따져볼
생각도 하지 않고 소비에트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고 따라서 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보면 으레
캄차뜨끼라고 비웃고는 하였다. 아냐는 빅토르를 그런
미개인이라고 비웃은 것이었다.
그날, 빅토르는 고스란히 당했다. 한마디 항변도
하지 못했다. 그날, 그때, 그 순간 빅토르는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다만 가슴 속깊은 곳에
캄차뜨끼라는 말만 송곳으로 새겨넣고 있었다.
캄차뜨끼, 캄차뜨끼. 그날 이후로 아이들은 걸핏하면
빅토르를 캄차뜨끼라며 비웃거나 놀려댔다.
캄차뜨끼뿐이던가. 빅토르는 죽차라고 놀림을
당하기도 했었다.
죽차. 죽차도 캄차뜨끼에 결코 못지않은 멸시와
비웃음의 대명사였다.
로빠힌, 예르몰라이 알렉세예비치. 빅토르는 한때
그에게 저주 있으라고 믿지도 않는 하느님께 빌고는
했다. 그는 빅토르로부터 그런 저주를 받아 마땅했다.
역시 쉬꼴라 3학년, 아냐와 같은 반에서의
일이었다. 로빠힌은 교실의 대장은 아니었다. 그는
대담하지도 포악하지도 않았다. 성격이 짖궂어 남을
못살게 굴거나 공연히 남을 놀리기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여자 아이들을 잘 울리지도 않았고 다른
아이들에게 시비를 거는 망니니도 아니었다. 그런데
빅토르만 보면 놀리며 못살게 굴었다. 빅토르가
지나가면 발을 걸어 넘어뜨리기도 또 빅토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보자고 하여 돌려주지 않고 애를
먹이고는 했다. 그에게 사탕이며 초콜릿도 많이
뺏겼고 연필도 자주 뺏겼다. 빅토르의 물건은 모두
제것처럼 가져다 쓰고 돌려주지 않았다.
만약 교실의 대장격인 스비스뚜노프가 빅토르에게
그렇듯 망나니짓을 했다면 굴욕감이 덜 했으리라.
다른 아이들도 거의 다 그에게 당했으니까. 그러나
로빠힌, 그는 쌈꾼으로 친다면 중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빅토르보다야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지만
다른 아이들에게는 맥을 추지 못했다.
하루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교실을
나서려는데 로빠힌이 빅토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죽차, 너 오늘부터 36번가 앞을 지나가려면 내게
1코페이카씩 내야 돼."
빅토르는 순간 로빠힌을 태울 듯 쏘아보았다.
1코페이카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를 캄차뜨끼에다 또
죽차라고 부르다니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올랐다.
빅토르는 전에 없이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로빠힌은 빅토르의 저항이 뜻밖이었던지 눈을
부릅뜨고 위협적으로 노려봤다.
"아니면, 36번가는 지나다닐 수 없어. 우리
아버지께서 그러시는데 36번가는 우리 고귀한
표트르대제 후세들이 아닌 죽차들은 지나다닐 수 없게
되어 있대. 지금까지 너는 규정을 어겼어. 하지만
지난 것은 눈감아줄 테니, 오늘부터는 통행세를 내야
돼."
빅토르는 어이가 없었다. 제놈은 러시아를 통일하고
국기를 튼튼히 다진 역대 러시아왕 가운데 가장
위대한 표트르대제의 후손이고 빅토르는 죽차라고.
빅토르는 또 고개를 저었다.
"이 죽차 새끼가 통행세를 못내겠다네."
녀석은 책가방을 팽개치며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고 으르릉거리며 빅토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빅토르는 반사적으로 멱살을 틀어쥐고
있는 놈의 손을 뜯어내고 녀석을 밀어버렸다. 녀석은
힘없이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녀석이 엉덩방아를
찧자 교실을 나가려던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그들의 주위를 둘러쌌다.
"뭐, 이 자식, 나를 죽차라고?"
빅토르는 코를 벌름거리며 항변했다. 녀석은 금세
얼굴이 잘익은 석류빛이 되며 벌떡 일어나 머리로
빅토르의 가슴을 받아버렸다. 빅토르는 피할 사이도
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녀석의 발길이 빅토르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빅토르는 그것을 재빨리
피했다. 그러나 녀석의 발길이 빅토르의 왼쪽 어깨를
찍었다. 그때였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남자아이들의 발길이 별안간 일제히 날아와 빅토르의
머리며 가슴이며 배를 걷어찼다. 빅토르는 뜻밖의
사태에 놀라 양팔로 머리를 감싸고 새우처럼 웅크리며
녀석들의 몰매를 고스란히 맞았다. 그 소동이 어떻게
알려졌던지, 곧 담임선생님께서 달려왔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은 일제히 매질을 뚝 그쳤다.
"선생님, 비쨔가 로빠힌을 먼저 때렸어요."
페브로니야 뻬뜨로브나가 서둘러 일러바쳤다.
"그래요. 비쨔가 로빠힌을 먼저 때렸어요."
페브로니야 뻬뜨로브나가 선창하자 아이들은 일제히
합창했다.
빅토르는 어이가 없었다. 모두 다 시비의 전말을
보고 있었고 알고 있었다. 36번가를 지나다니려면
하루 1코페이카씩 통행세를 내야한다는 터무니없는
시비를 걸며 빅토르를 죽차라고 불러 싸움이
일어났었다. 그런데 억울하게도 아이들은 죄를
빅토르에게 뒤집어씌웠다.
"선생님, 비쨔는 번번이 저를 못살게 굽니다.
러시아 땅에서 온갖 은혜를 입고 사는 까레이츠
주제에 우리 러시아 아이들을 못살게 구는 비짜를
단단히 혼 좀 내주세요."
빅토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둘러보던 안나 안드레예브나 선생님은
모두 빅토르에게 비난의 눈길을 퍼붓고 있는 걸
알아챘다.
"비쨔, 왜 로빠힌을 때렸지?"
빅토르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가 아무리
사실대로 말한다해도 아이들이 아무도 그의 편이 되어
주지않을 것이고 따라서 그는 불량배에
거짓말쟁이까지 되고 말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평소부터 주의깊게 봐왔는데, 비쨔 행실이 다른
아이들 같지 않아 보였다. 가자 교무실에 가서 벌을
좀 받아야겠다."
빅토르는 교무실로 불려갔고 선생님 책상 옆에
두팔을 들고 해질녘까지 서 있어야 했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빅토르는 결코 자신의 속엣말을 선생님께
털어놓지 않았다. 설령 그가 전심전력을 쏟아 진실을
말한다 해도 선생님께서는 구구한 변명으로 여길뿐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입을 닫고 묵묵히 벌을 받는 것이 서운한 마음을 더
보태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선생님은 반성문을
써오라는 지시와 함께 빅토르를 풀어주었다.
그의 반성문은 엉뚱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나 선생님은 반성문으로 다시 빅토르를
부르지는 않았다. 반성문을 검토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읽고도 그냥 넘긴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로빠힌의 통행세 시비는 계속되었다. 그럴 때마다
빅토르는 그에게 당했고 그는 견디다 못해 36번가를
피해 볼로트스키 거리로 멀리 돌아서 다녔다.
아무렴, 나를 죽차라고 하다니. 그것이 두고두고
빅토르의 자존심을 깎아내렸다. 소비에트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것으로 이런 농담이 있었다.
죽차 마을의 사슴 꼴호즈를 조사하려 당의
콤소그(조장 또는 감시원)가 나왔다. 마을에 들어서는
콤소그를 먼저 발견한 죽차 사내는 아내에게 자기는
멀리 출장가고 없노라 말하라 당부하고 방으로 들어가
다락에 몸을 숨겼다. 어찌된 영문인지 콤소그는 해가
졌으나 돌아가지 않고 그날 밤을 죽차 사내집에서
자는 것이 아닌가. 밤중이 되자 콤소그는 죽차 사내의
아내와 요란하고 방자하게 그짓을 벌이기 시작했다.
다락에서 그 광경을 본 죽차 사내는 가슴을 치며 분해
한다. 왜 내가 멀리 출장갔다고 말하라 했던가. 멀리
출장갔다고 했으니 당장 뛰어나가 놈을 패줄 수도
없는 일이고, 이 일을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죽차
사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슴을 쥐어뜯고
있는 사이 그짓을 마친 콤소그는 흡족한 얼굴로
담배를 태워 무는 것이었다.
그밖에도 죽차인들에 대한 몹쓸 농담은 여럿이 더
있었다. 하나같이 비열하게 죽차인들을 깔보고 비웃는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로빠힌은 바로 빅토르를 일러
그런 죽차 족속이라고 한 것이었다.
빅토르는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기가 힘들었다.
러시아애들은 저희들끼리는 쉽게 친해지고 가깝게
지냈으나 피부색과 용모가 다른 빅토르는 그들과
아무리 애를 써도 잘 친해지지가 않았다. 빅토르는
그와 피부색과 용모가 비슷한 중앙아시아계
아이들이나 끼다니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빅토르는 늘 외톨이였다.
어쨌든 어렸을 적 빅토르에게는 아냐가 가도가도
닿을 수 없는 신기루 같은 존재였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냉혹한 신 같은 존재였다.
그녀에게 사랑을 구한다는 것은 불속에 던져진 벌이나
나비의 몸부림처럼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빅토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야멸차게 구박하는 개가한
어머니를 다시 찾아가는 천덕꾸러기 자식처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빅토르는 아냐의 꿈을
꾸었다. 빅토르는 그녀의 더러운 발에 키스하며
사랑을 구걸했다. 때와 먼지로 더럽혀진 발가락을
혀로 닦아 윤택이 흐르게 했고, 그가 키스한 발에
걷어차여 엉덩방아를 찧고 뒤로 넘어지기도 했다.
그는 꿈속에서 어렸을 적의 고통과 굴욕 속에서
상상으로써 달콤함을 맛보고는 했던 쓰라린 기억을
그대로 재현해 다시 겪었다.
이틀을 더 머물기로 했던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그들은 황황히 리가를 떠났다. 레닌그라드로 돌아온
빅토르는 그로부터 보름쯤 지났을 때 아냐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난 지난날이 이렇게 그리워질 줄 몰랐어.
쉬꼴라 3학년. 언제나 비짜의 시선 속에서 보냈던
나날들이 무지개빛으로 채색되어 꿀보다 더 달콤하게
회상되고는 해.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은 그
무렵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애. 아,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비짜, 지금도
나는 비쨔를 사랑해. 비쨔의 마음이 아직 변하지
않았기를 바라며, 나는 언제까지나 비쨔를
기다릴거야.
빅토르는 와락 편지를 구겨쥐었다. 그의 몸은
분노로 동력을 넣은 모터처럼 덜덜덜 떨렸다. 그는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아무렇게나 방에다 뿌려버렸다.
책상 위며 침대며 바닥에 분노의 잔해가 흩어졌다.
44. 라시드 누그마노프와의 만남
영화 <방학의 끝>의 개작을 거부하여 낙제의 쓰라린
잔을 든 쎄르게이 리쎈코는 그러나 자부심은 잃지
않았다. 록을 통해 변화와 개혁을 갈망하는 소비에트
젊은이들의 의식과 실상을 잘 그렸다고 생각했다. 그
자부심은 여러 벌의 필름을 복사하여 영화를 사랑하는
자유지향적인 젊은 영화인들에게 돌리도록
충동질했다. 그의 필름을 받아본 영화인들, 장래의
모든 출구가 막힌 듯한 회색빛 소비에트 젊은이들을
염려하여 그들을 위한 돌파구를 모색하며 번민하던
영화를 사랑하는 젊은 영화인들은, 그 필름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의 암시와 예감을 느꼈다. 그것은 아직
어둠을 밝히기에는 빛이 약했으나 그 가능성은 충분히
기대할 만하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그러한 암시와 예감은 빅토르와 KINO 그룹을 계속
영화쪽으로 끌어들였다.
빅토르는 영화와 KINO의 랑데뷰를 결코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 쪽과 KINO 그룹 쪽의 생각이 아주
행복하게 일치를 본 것은 아니었다. 영화 쪽에서는
KINO에게 필요불가결한 보조적 요소로서의 음악적
기능을 담당하게도 하고, 더 나아가 쎄르게이처럼
KINO 그룹의 활동을 테마로 삼아 촬영에 들어가기도
했다. 영화 쪽에서 그렇듯 자기들 필요한 부분의
영양분을 섭취하듯 KINO 그룹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이익을 챙겼다.
무대에서 라이브로 들려주고 보여주는 공연은
생생하기는 하나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받는다.
거기에 비해 필름으로 공연 모습을 담아 배포하면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벗어나 더 많은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다. 그 감상은 그리고 반복적으로 가능한
이점도 따른다. 빅토르는 영화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들 KINO 그룹의 노래와 연주를 알리고
싶었다.
빅토르가 알렉세이 우찌첼리의 영화 <록크>와
극영화 <아싸>에 출연한 것도 다 양쪽의 필요가 어떤
접점에서 행복한 스파크를 일으켰기 때문에 실현된
것이었다. 그 영화들은 대중적 성공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빅토르와 KINO 그룹을 더 널리 세상에
알리는 데는 크게 기여했다.
물론 그 무렵에 출시된 <붉은 파도>라는 앨범이
<밤>에 이어 또다시 밀리언셀러를 향해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다.
몇 차례의 초청공연과 그 두 편의 영화출연으로
겨울이 가고 또 새로운 태양이 레닌그라드에 비치기
시작했다. 의례적으로 누구에게나 고루 희망을
나눠주며 모습을 바꿔서(실제와 하등 관계없이 그렇게
의식하는 사람들의 건조하고 불행한 삶의 슬픔이여)
떠오르는 새해의 태양은 빅토르와 마리안나 그리고
KINO 그룹 멤버들에게는 더욱 찬란한 새 모습으로
떠올랐다. 어느해보다 더 넓게 가슴을 펴고 새해에
희망과 기대를 걸었다. 그들의 예감은 그들을
설레이게 하였고, 그들의 삶에 대한 풍만한 예감은
그들을 더욱 근면하고 활발하게 충동질하고
자극하였다.
그들의 출연료는 나날이 치솟아 올랐고, 그들에게
날아드는 팬레터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음악잡지들은 그들을 소개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신문들에서도 그리고 텔레비전에서도 그들의 공연
모습을 게재하거나 촬영하여 방송하였다. 빅토르가 그
동안 신산을 견디며 뿌려온 씨앗은 움이 트고 점점
성장하여 열매를 맺어가고 있었다.
그 작은 열매는 처음 레닌그라드 록 페스티벌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네번째 참가한 그 페스티벌에서 심사위원들은
빅토르와 KINO 그룹에 그랑프리 수여와 함께, 계관
가수로 추대했다. 계관 가수란 경쟁할 필요가 없는
영원히 불변하는 가수 직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록 페스티벌에서 연주한 노래들은 곧 알렉세이
위시냐의 녹음실에서 취입에 들어갔다. 이듬해,
우여곡절 끝에 그 노래들은 <혈액형>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다. 그러나 그 레코드에 대해 이야기
하기전에 먼저 해야할 이야기가 있다.
라시드 누그마노프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라시드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빅토르와 KINO의
운명은 사뭇 다른 길을 걸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라시드와의 만남은 운명적이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만남은 두 사람 다에게 상승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83년 봄에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알마아타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있던 라시드의 손에 어느날 이상한 테이프가 하나
들어왔다. 녹음의 질은 매우 불량했다. 언더그라운드
공연장에서 소형 녹음기로 녹음한 그 테이프는
찍찍거리거나 잡음이 심했다. 노래말이 잘 들리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그 노래들은 지금까지
라시드가 들어보지 못했던 낯설고 신선한 에너지가
터질 것처럼 충만했다. 자신이 호흡하고 있는 공기가
젊고 새로운 것이라는 자각을 그 노래들은 새삼스레
갖게 하였다. '짐승들' '교외의 블루스' '냉장고를
터는 자'. 자신의 내면에 꿈틀거리며 출구를 찾고
있던 충동들을 그 노래들은 아주 탄복할 만큼 잘
나타내고 있었다. '가린과 쌍곡선'. 빅토르와 르빈의
연주 테이프였다. 라시드는 이듬해, KINO의 앨범
<45>와 <깜차카의 대장>이라는 질좋은 테이프를
간신히 구해들였다. '가린과 쌍곡선'에서 KINO로 그룹
이름이 바뀌어 있고 빅토르를 제외하고는 연주하는
멤버들도 다 달랐다. 그러나 그 노래들은 자신의
핏속을 흐르고 있는 막연한 변화의 욕구에 구체적인
명분과 방법과 행동양식을 제시하였다. 레닌그라드,
기차로 사흘 밤낮을 달려야 닿을 수 있고 비행기로도
다섯 시간이 소요되며 시간 차가 두 시간에 이르고
유럽과 아시아로 그 대륙의 이름도 다른,
레닌그라드가 어느 날부터 라시드의 머릿속에는
언젠가 반드시 가 닿지 않을 수 없는 숙명적인 도시로
자리잡았다.
84년, 라시드 누그마노프는 뒤늦게 건축학에서
영화쪽으로 전공을 바꾸게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
영화대학에 편입하여 연출을 전공하게 되었다.
라시드, 그는 내면의 불타는 욕구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설계하고 목재를 짜맞추고 벽돌을 쌓고, 그의
이상은 그런 구체적인 형상을 갖는 실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구체적인 형상은 갖지 못하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형상없는
무엇에 자신의 재능과 정열을 바치고 싶었다. 자신의
고뇌와 번민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의 길에 빛을
던져주거나 어떤 방법을 제시하고 싶었다.
반드시 이상적인 장르라는 생각은 아니었으나 그는
영화를 통해 그 작업을 하고 싶었다. 그는 일찍부터
음악가들에게 관심을 가져왔고 영화를 통해 제시되는
상징적인 삶들을 바라보며 많은 명상을 했었다.
영화라면 자신의 인생을 바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모스크바 예술대학 영화학과에 편입학하여
연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마침내 라시드는 레닌그라드행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87년 가을, 소비에트 전역이
페레스트로이카의 열병을 앓고 있을 무렵이었다.
소비에트 사람들은 기대와 불안으로 개혁을 바라보며
위축되었다. 어떤 민족 어떤 나라보다 거대한 혁명을
체험한 그들은 또 닥쳐온 개혁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려하지 않았다. 변화를 받아들일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변화로 인해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게 될 것을 우려하고
두려워하였다. 라시드는 자신의 인생의 열쇠를
움켜쥐고 있는 듯한 도시, 언제나 자석처럼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는 거부할 수 없는 도시, 레닌그라드행
열차에 탑승하였다. 알렉세이 미하일로브와
모스크바에서 활동하고 있는 콘스탄틴 낀체브가 그의
동행이었다.
"우리들는 변화를 수용해야 해.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하면 우리는 설 자리를 찾지 못할 걸."
라시드는 알렉세이 미하일로브에게 역설했다.
"나는 그냥 졸업 작품으로 제출할 무난한 작품을
찍고 싶어."
촬영분야를 전공한 알렉세이는 사회의 변화와
새로운 기운에 무감각했다. 그는 파란의 고통을
수반하는 야망을 갖기보다 안주할 땅을 찾으려하였다.
"내 말대로 해. 넌 반드시 우수한 점수로 졸업할 수
있을 거야."
알렉세이는 지난 두 시간 가량 들어온 라시드의
말에 이미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머리를 쥐어짜고
고뇌하는 것은 싫어했으나 그도 잘 팔리는 촬영기사는
되고 싶었다.
"지금 KINO는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어. 그들의
노래가 왜 그렇게 사랑을 받는지, 그 원인이 어디
있는 것같애? 그건 그들이 의기소침하고 무기력한
소비에트 젊은이들이 대망해온 어떤 행동양식을
제시하며 젊은이들의 정서를 그대로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야. 우리가 그들을 찍는 것은 단순한 록음악을
찍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의 정서를
찍는 것과 같은 거야."
라시드는 자기 내면에서 오랫동안 숙성되어온
생각을 알렉세이에게 강요하다시피하여, 촬영기와
필름을 확보한 그를 설득했던 것이다.
"좋아. 라시드 네가 대본을 책임진다니까, 한번
해보지."
알렉세이는 라시드와 같은 카자흐스탄인이었다.
얼굴 윤곽은 감자처럼 둥그스름하고 편평했고
호도나무빛 피부에 검은 모발과 검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의 혈관 속에는 다같이 유목민의
피가 흐르고 있을 터이지만, 새로운 문명 속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해온 그들은 그런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라시드의 의식 속에서는 그가
성장해옴에 따라 나날이 그 기운이 자라고 있었다.
그는 바람을 잡으러 달려가고 구름을 쳐다보며
한나절씩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운명이란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거역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레닌그라드, 지하철 블라디미르스카야 역에서
빅토르를 만났을 때 처음 라시드는 그의 얼굴에서
운명을 거역하며 살아온 사람의 범상치 않은 고뇌를
읽었다. 라시드는 빅토르를 본 순간 자신이 만나고
싶어 찾아 헤맸던 얼굴이 바로 이런 것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출생한 것으로 들었는데?"
빅토르는 라시드를 본 순간 무엇인가 같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동류의식 같은
것을 강하게 느꼈다. 거기에다 유사한 외모의
카자흐스탄 인에게 편안함을 느꼈다.
"그렇지요. 크질오르다에 할아버지와 그 가족들이
지금도 살고 계십니다."
"크질오르다가 고향이군요."
"그렇지만 다섯 살때 레닌그라드로 왔기 때문에
크질오르다에 대한 기억이나 그리움 같은 건
없습니다."
할아버지와 리술아저씨가 그렇게 가고 싶어했으나
두 사람 다 뜻을 이루지 못한 고향, 그 육중한 의미의
고향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입에 담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이라면 다른 나라와는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그럴 테지요."
라시드는 빅토르와 유리와 구리야노프에게 자신의
영화에 대해 설명했다. 키예프의 쎄르게이 리쎈코의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다. 빅토르에게는
낯익은 만큼 쉬우리라 생각되었다. 키예프의 쎄르게이
리쎈코의 필름이 그 지방 사람들에게 KINO의 연주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듯이, 알마아타에서 온 라시드
누그마노프의 필름을 통해 또 알마아타 지방 사람들이
KINO의 연주를 구경할 수 있게 된다면 KINO로서는
그들의 요청을 뿌리쳐버릴 이유가 없었다. 빅토르는
보리스 그레벤쉬코프의 아크와륨 그룹과 마이크
나우멘꼬의 쇼빠르크그룹도 함께 출연할 수 있게
주선하여 라시드를 즐겁게 하였다.
영화 줄거리는 간단했다. 결혼식을 마친 한떼의
젊은이들이 어디로 갈까 의논하다 모두 빅토르가
일하는 보일러실로 몰려간다. 아무렇게나 자유분방한
젊은이들을 배경으로 화덕에 석탄을 퍼넣거나
배화하듯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빛을 바라보며
노래하는 빅토르와 KINO와 아크와륨과 쇼빠르크
그룹의 모습을 찍었다.
"곧 '부로드의 왕'을 찍을 작정인데, 꼭 출연해
줘야 합니다."
2주일간의 촬영을 마치고 모스크바행 기차에
탑승하기 전 라시드는 빅토르의 손을 잡으며 며칠
전부터 계속해온 당부를 거듭 되풀이 하였다. 그들이
찍은 필름의 제목은 빅토르가 주장하여 <야하>라고
명명하였다. 물론 빅토르는 할아버지나 아버지로부터
들은 그들 조선족만이 사용하던 일종의 감탄사를 그
필름의 제명으로 삼기를 권유했던 것이다. 빅토르는
자신과 무관하지 않은 언어를 제명으로 사용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소비에트
젊은이들로부터는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해
가을, 또 한편의 영화에 출연한 그가 그 제목을
<앗싸>라고 한 것도 그와 같은 동기에서였다.
앗싸라는 말도 무엇인가 매우 흡족하고 신나는 일을
보거나 당했을 때 할아버지 가족들이 거의 충동적으로
외치고는 하던 감탄사였었다.
"그러지요. 꼭 연락을 주세요."
지난 2주일 동안 그들은 서로를 충분히 알게 되었고
서로 친숙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음악이나 영화에
대한 두 사람의 열정이며 견해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고 의기투합하였고, 멀지 않은 장래에 반드시 두
사람이 새로운 영화작업을 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들의 약속은 1년 후에 이루어졌다. 처음 라시드는
음악영화 '부로드의 왕'의 출연을 제안하였고
빅토르는 거기에 출연하기로 흔쾌히 약속했으나
그들이 만난 것은 <이글라>라는 영화 촬영을
위해서였다.
영화대학 졸업반 학생이 된 라시드나 음악영화 몇
편에 출연하여 연주하는 모습밖에 보여준 것이 없는
빅토르에게나 순수 예술영화를 감독하고 한편
출연하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들은 둘 다
모험을 감행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참새가 더 많은 모이를 찾아낼 수
있다했던가. 그들은 늘 영화와 음악에 열정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행운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래 그
영화의 연출 기회가 라시드에게 돌아온 것은 행운이라
말할 수밖에 없었다.
빅토르가 알마아타로 간 것은 8월 중순이었다.
그가 알마아타 행을 털어놓자 유리와 구리야노프는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빅토르의 알마아타 행은
비록 잠정적이기는 할 터이지만 KINO 그룹의 활동을
일시나마 정지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유리나
구리야노프는 놀던 물을 잃은 셈이 될 것이었다.
게다가 영화 출연을 위해 빅토르 혼자 행동한다는
것에 그들은 일종의 배반감 같은 것도 느꼈다.
빅토르는 매우 겸손하고 말수가 적었다. 남의
비위를 상하게 하거나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을 범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일부러 하려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성품이었다. 그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 만만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겸손한 듯 하면서도 속으로는
오만했다. 그리고 독선적인 데도 있었다. 상대방을
깔보는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기도 하였다. 즉, 그가 결정한 일은 끝내
해내려는 고집 같은 것이 있었다. 유리 가스빠란은
빅토르의 그런 전제적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인가 헤어질 생각을 했었다. 그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난 3년 동안 빅토르의 그늘에서 그의
연주를 도와온 것은 빅토르의 음악에 대한 능력
때문이었다. 빅토르의 음악은 다른 사람, 예컨대
보리스나 마이크 같은 선배들의 음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유리는 그와 헤어지고
어디 새로 팀을 만들거나 참가할 그룹도 찾기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묵묵히 참아왔는데, 이제
빅토르와 헤어질 때가 이르렀음을 느꼈다.
"한두 달 정도는 걸리겠지?"
유리는 그러나 구리야노프와 공항에 배웅을 나갔다.
그는 그 두 달 동안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기대섞인 예측을 해보며 그렇게 물었다.
"한달 정도 걸릴거야. 라시드는 일을 빨리 하는
스타일이거든."
마리안나가 빅토르를 쳐다보며 대신 대답했다. 아마
두 사람 사이에 그런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마리안나가 바라는 바를 말하는 것으로
유리에게는 들렸다.
"글쎄 어떻든 빨리 돌아올게. 영화도 영화지만 우리
KINO 그룹이 오래 쉬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빅토르는 유리와 구리야노프의 입장을 헤아리며
말했다. 그는 유리와 구리야노프와 팔을 걸며 일일이
이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가 어찌 유리의
마음 속의 파장을 투시할 수 있었으랴. 그는
마리안나와 그녀가 안고 있는, 귀엽게 방긋방긋 웃는
사샤에게도 차례로 키스를 하고 대합실로 들어갔다.
알마아타에는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비행기 창을
통해 아침을 맞이하는 카자흐스탄의 갈황빛 들을
내려다보며, 아침에도 각기 색깔이 있음을 처음
알았다. 레닌그라드의 아침은 늘 잿빛이 아니면
안개빛이었다. 카자흐스탄의 아침은 갈황빛이었다.
모스크바의 아침의 빛을 상기하려 애를 썼으나
모스크바는 자동차들과 경적소리밖에 연상되는 것이
없었다. 대신 파란 물감이 사르르 번져가는 얄타의
아침이 떠올랐다.
항공기에서 내린 순간 빅토르는 건조한 공기가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부서져내릴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계류중인 항공기들의 모습을 뒤로 하고
네모난 콘크리트 박스에 유리창을 즐비하게 단 듯한
공항청사를 향해 걸으며 빅토르는 어떤 쓸쓸한 인생의
한자락을 피부로 느끼는 그런 기분이었다. 수분이 다
빠져나가버린 육신이 메마른 공기 속으로 먼지처럼
흩어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닭다리 하나와 흘레쁘 한쪽으로 긴 밤을 가로질러
오셨겠군."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시드 누그마노프는
달려들어 빅토르를 포옹하며 빠르게 소리쳤다. 그는
아에로플로트의 기내식을 빈정거리고 있었다.
"비스켓 한쪽 준비하지 못한 나그네에게는 꿀맛이던
걸."
"그렇다면 다행이군. 이곳의 식사나 생활도 그
기내식보다 나을 게 없을 텐데."
"편하자고 온 것은 아니니까. 괜한 신경쓸 것
없어요."
라시드를 쳐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악의도 의욕도 없어 보이는 매우 선량한 얼굴이었다.
얼굴은 마음의 창이라던가. 하지만 라시드의 경우는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그의 마음 속에 용암처럼
들끓고 있는 영화에 대한 열정을 눈꼽만큼도 내비치고
있지 않았다.
라시드는 빅토르를 예약해둔 고리끼 공원 옆의
호텔로 안내하였다.
호텔 창문으로 28명의 판피로프 전사공원의
전승탑이 내다보였다.
"비쨔한테 전화로 다 말했지만, 이번 일은 사정이
좋지 않아. 다만 의욕이 앞서 시작한 것이야."
라시드가 방학을 맞아 알마아타로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평소 친분이 있던 카자흐스탄
국립영화제작소의 소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영문 모르고 방문하자 소장은 라시드에게
영화연출을 맡을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영화연출
공부를 하고 있는 라시드에게는 귀가 번쩍 뜨이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이 영화는 두 달 전에
제작에 착수했는데, 감독이 두 달이나 걸려도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아 해고했다는 것이었고, 처음
책정됐던 예산과 시간의 한정된 범위 안에서 일을
진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소장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소상히 설명했다. 먼저
연출을 맡았던 감독에 대해 어찌나 심하게 비난을
하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끈불끈 일어났으나 대형 극영화를 만들 기회가
쉽사리 오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을 더듬으며 라시드는
애써 참고 소장의 욕설로 뒤덮인 넋두리를 다
들어냈다.
"나는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어. 첫째, 마약과 그에
따르는 범죄와 인간성의 황폐화라는 기본 주제는
살려두되, 수정은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해줄 것이고,
둘째 촬영기사는 무라트(라시드의 형)로 할 것이며,
셋째 배우들은 이미 알려진 직업배우가 아닌 나의
친구들로 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제안했지. 처음에는
매우 난처해 하더군.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그 남은
예산의 범위와 시간 안에 영화를 완성할 수 없다고
하자 겨우겨우 승낙을 하더군."
"후진국의 가난한 영화잔치에 우리가 초대된
셈이군요."
"화려한 무대를 꿈꾸며 그 준비를 하는 과정으로
생각하자구. 더구나 '혈액형'이며 '마지막 영웅' 등
비쨔의 노래들과 이 영화 주제가 아주 잘
맞아떨어지니까, 거기에 비쨔 연기를 보태면 아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룰 것 같아."
"라시드는 환상을 쫓는 로맨티스트는 아니던데,
갑자기 어디 다른 나라라도 다녀온 것인가요."
"이번 일은 환상이 아냐. 내일 표트르 마모노프 등
모스크바 패들이 몰려올거야. 그들도 다 내 작업에
찬성했어."
"현실은 늘 가혹하다는 깨우침을 되풀이해주는 그런
사건들로 우리 인간의 삶은 이어지는 것 아니던가요."
빅토르는 언젠가 노트에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두었던 문귀를 떠올렸다. 왜 순간 그것이
떠올랐는지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얼른 덧붙여
말했다.
"내게도 조건이 있는 걸요."
"조건?"
"그래, 난 이런 목제 침대밖에 없는 쓸쓸한
호텔에서는 견디지 못해요."
"우리 예산이......"
빅토르는 얼른 라시드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 뜻이 아녜요. 내가 원하는 것은 화려한
호텔의 푹신한 쿠션의 침대와 술병이 가득 채워진
냉장고가 아니에요. 그런건 개에게나 던져주라지.
내가 원하는 것은 따뜻한 사람의 체온과 정이야요."
감자처럼 둥글넓적한 라시드의 얼굴에 곤혹스런
빛이 감돌았다. 이 바람둥이 녀석이 마라안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기회를 잘 이용하자는 것인가. 그러나
라시드의 그런 짐작은 곧 무참히 짓뭉게지고 말았다.
"얼굴색이 안좋은 걸 보니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퇴짜를 놓을 모양이군요. 내가 바라는 것은 라시드와
무라트 형의 체취와 정을 말하는 거요."
빅토르의 말에 라시드는 금방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속도 모르고 터무니없는 짐작을 한
자신의 넘겨짚음이 미안했다.
"그렇지만 우리 아파트는 너무 좁아. 비쨔가
지내기에 불편한 점이 너무 많을 거야."
순진한 라시드는 속마음을 들키지 않았기를 바라며
필요보다 큰소리로 말했다.
"공간이 좁으면 늘 몸을 부딪치며 서로 체온을 나눌
기회가 많겠군요. 처음에도 내가 말했지요. 편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라고."
"그렇지만 나중에 대접이 소홀했느니 어쨌느니 그런
원망 듣고 싶지 않은 걸."
"그야말로 혼자 호텔에 팽개쳐둔다면 그런 원망
피할 수 없을 걸요."
"비쨔 뜻이 꼭 그렇다면 오늘 하룻밤은 여기서
지내고 내일부터 우리 아파트로 옮기도록 하지. 물론
우리 형 무라트의 동의를 먼저 얻어야 해."
"무라트 형도 나를 싫어하지 않은 눈치던데."
"알았어. 비쨔 생각대로 될 테지."
그들은 서로 쳐다보며 동시에 소리내 쾌활하게
웃었다.
영화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낮에는
촬영하느랴 바쁘게 지냈고 밤이면 영화에 대한 내용과
음악과 배경과 연기 등에 대해 토론을 하느랴
라시드와 무라트 형제와 빅토르는 눈코 뜰 새 없이
지냈다. 서로의 의견이 일치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서로 다투듯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그
아이디어를 두고 갑론을박 난상토론을 벌인 끝에
한갈래로 의견을 모았고 그 의견에 따라 다음 날의
촬영 스케줄을 잡고는 했다. 도전과 열정. 그 두
단어로밖에 그들의 영화작업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들은 혈관을 뛰고 있는 뜨거운 젊은 피를 영화에다
모조리 쏟아부었다. 모르긴 해도 그 영화를 찍는 동안
그들의 피와 의식은 그들이 찍는 필름이 담아내는
총천연색처럼 휘황스런 빛을 띠고 있었으리라.
모스크바에서 온 라시드의 떠들썩한 친구들도 그
영화에 열정을 쏟았다.
처음 마약투여로 검거되어 요양소에서 일정기간
수용되어 있던 청년이 도시로 돌아오는 장면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요양소에서 인솔해온 여간수는
버스에서 내린 빅토르에게 다시는 요양소에서 만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고 빈정거린다. 공중전화박스로
휘청거리며 들어간 빅토르는 여러 군데 친구들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 토큰에다 실을 꿰어 신호가
떨어지면 실을 잡아당겨 토큰을 도로 꺼내는 방법으로
여러 통의 전화를 건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상대방은
하나도 그를 반색하지 않는다. 냉담한 그들의 반응에
기분을 상한 그는 마지막이라는 기분으로 나타샤의
전화번호를 돌린다. 마침 마약에 취해 있던 그녀는
빅토르의 방문을 허락한다. 그들의 만남은 파멸해
가는 젊음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빅토르의
노력은 눈물겹지만 나타샤의 중독은 계속 마약을
필요로 한다. 그녀를 데리고 빅토르는 사막으로
탈출한다. 갈황빛 사구가 끝없이 이어진 사막의
폐가에서 그녀의 중독을 고쳐보려는 필사적인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고 어느날 나타샤는 모습을 감추고
만다. 나타샤를 찾아 사막을 방황하는 빅토르가 가서
닿은 곳은 물이 말라 바닥이 드러나 버린 호수. 그
거북등처럼 죽죽 갈라터진 호수바닥에 스크류와
밑창을 민망스럽게 다 드러내놓고 있는, 다시는
항해할 수 없는 선박. 비도 한방울 내릴 것 같지 않은
하늘. 이런 생명이 고갈되거나 사라져 버린, 영원히
정지해 있는 죽음의 세계. 도시로 돌아간 빅토르는
마약조직과 정면 대결한다. 나타샤를 마약으로부터
구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그는 마약조직원의
칼에 맞아 죽어간다.
영화중에서 나타샤 라즐로고바는 빅토르가
안타깝게도 마약으로부터 영영 구해내지 못한
여성으로 나온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나타샤
라즐로고바, 그녀는 빅토르에게 새로운 사랑의 눈을
뜨게 한다.
"매마른 호수를 등지고 기차가 다니지 않는 외길
철로를 따라 다가오며 부르는 노래 '혈액형'과 비쨔의
허탈한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어."
무라트는 라시드가 그 장면을 가장 잘 찍었노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저는 그때의 비쨔 모습이 어찌나 안됐던지 꼭
안아주고 싶었어요."
그때 옆에 있던 나타샤 라즐로고바는 애정이 넘치는
시선으로 빅토르를 쳐다보았다. 그날부터 나타샤의 그
애정어린 시선은 늘 빅토르를 따라다니며 그의 몸을
친친 감았다. 그 시선은 뱀처럼 영악스럽고
관능적이었다. 그 시선은 종종 빅토르를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마침내 라시드가 영화촬영을 다 마친 날이었다.
편집을 하고 음악을 넣고 자막을 처리하는 작업을
남기고 출연자들과의 작업은 다 마친 그날 카자흐스탄
국립영화제작소 소장은 그들을 오티라드 호텔의
레스토랑에 초대하였다. 그들의 자리에는 술과 음식이
풍성했다. 마음껏 먹고 마시고 춤추게 하였다.
라시드의 작업은 당초의 걱정과는 달리
예산초과는커녕 거의 돈을 쓰지않고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들의 음식과 술과 여흥 비용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그들은 남녀 구별없이 마음껏 먹고 싫토록
취했다.
흥이 오른 그들의 요청에 의해 레스토랑의
피아니스트는 손가락이 아프도록 탄주를 해야 했고
일행중에는 쌍쌍이 플로어로 나가 발을 비벼대는 짝도
있었다. 그날 밤, 빅토르와 나타샤는 플로어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가 했는데 어느 사이 일행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행방을 감추었다.
물론 두 사람의 행방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튿날 나타난 그들 두 사람은 다정스레 팔짱을
끼고 있었고 빅토르는 레닌그라드행 비행기표를 사지
않고 모스크바행 비행기표를 구입했다.
45. 첼리아빈스크에서의 경험
어쩔 수 없이 빅토르는 잿빛 레닌그라드로
돌아왔다. 늘 제자리에 서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과
기마상, 운하와 다리와 흐르다 만 구름과 어깨를 축
늘어뜨린 행인들, 어느 것을 봐도 정적이고 수동적인
레닌그라드의 인상 때문일까, 빅토르는 태풍 속을,
아니 지진의 진앙지를 간신히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알마아타는 태풍의 눈 같고 지진의 진앙지 같았다.
거기 있을 때는 몰랐으나 안개 속 같은 레닌그라드에
돌아와 돌이켜보니 알마아타에서의 나날은 거칠게
용암을 분출하는 활화산처럼 걷잡을 수 없이 자신을
태우고 분출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폭염과
갈증에 시달리고 지진대의 진동으로 죽음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혀 몸서리쳐야 했던 광적인 지대를
간신히 빠져나온 듯 안온한 기분을 느꼈다.
그 안온한 기분은 아주 달콤했다. 그러나 그
달콤함은 아주 짧게 끝났다. 곧 권태가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그 권태는 폭염과 갈증과 지진의 진동보다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빅토르의 의식은 모조리 모스크바로 달려갔다. 눈도
코도 귀도 입도 심지어는 손가락까지도 모스크바를
향해 있었다. 그 의식은 그리움이 조타수가 되었고,
허공같은 마음을 채워줄 대상을 갈망했다.
그는 한때 마리안나에게서 안정을 찾았다.
마리안나가 채워주는 것으로 그는 만족했었다.
마리안나가 주는 사랑의 수액으로 그는, 깊이 대지에
뿌리를 박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고, 세상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유형지에서 돌아온
아르까지나의 등장으로 그 기대는 산산이
무너져내렸다.
'8학년 여학생'. 아르까지나는 그의 가슴을 늘
뜨겁게 달구었던 기억을 너무나 쉽게 생생히
재생시켰다. 따라서 빅토르는 자신이 마리안나를
선택했던 것은 아르까지나의 부재, 그녀의 행방불명이
원인이었음을 아프게 깨달아야 했다. 아르까지나의
귀향은 그의 그녀에 대한 사랑이 조금도 마모되거나
퇴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칼끝처럼 아프게 깨닫도록
했다.
무숙자와 다름없는 생활 속에서 부랑하던 그는
마리안나를 통해 비로소 안정을 얻었고 관습에 따라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피를
나누어 가진 귀여운 사샤를 얻었다. 마리안나에 대한
죄스러움과 자신의 핏줄이 지닌 자력과 보호본능이
겹쳐져 그를 갈등하게 만들었다. 빅토르는 자신이
결국은 아르까지나에게로 돌아가야 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갈등은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로
그에게 남게 되리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고민에
빠져 갈등하고 있을 무렵 아르까지나는 또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영영 가
닿을 수 없는 멀고먼 이국 땅으로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그녀의 달아남은 그리움의 고통을 그녀식의
방법으로 처리한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런
아르까지나의 달아남으로 하여, 즉 빅토르는 또
타의에 의해 마리안나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신의
마음과 감정과 정서에 안정을 회복했었다.
알마아타에서 라시드 누그마노프의 영화 <이글라>에
출연하지 않았다면, 아니 그 영화의 상대역이
아르까지나의 눈을 그대로 닮은 나타샤 라즐로고바만
아니었더라면 그의 안정은 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었다.
나타샤 라즐로고바. 그녀는 아르까지나와 꼭 닮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자신을 바라볼 때면
빅토르는 가슴의 고동이 어찌나 심했던지 옆사람이 그
가슴의 고동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두려워지고는 했었다. 백러시아인의 핏줄과 용모를
지닌 마리안나는 어딘가 무뚝뚝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애로운 성품이었다. 마리안나는 몸피가 굵고 키도
빅토르와 비슷한 1m 80cm에 가까웠다. 얼굴은 둥글고
광대뼈가 약간 나온 통통한 편이었다.
섬세하고 여리고 인형같은 아르까지나와는 그
느낌이 판이했다.
전형적인 러시아계인 아르까지나와 나타샤
라즐로고바는 용모며 날씬한 몸매며 부드럽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도 비슷했다. 거기에 비하면
마리안나는 몸매가 풍만한 편이었고 좀 퉁명스러운
성격이었으며 어딘가 전형적인 러스키마(러시아의
어머니)같은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더구나
마리안나는 빅토르보다 세 살이 위였다.
사랑은 정을 들이기 나름이라 했다. 사랑이 모든
허물을 감싼다고 했다. 빅토르의 마리안나에 대한
사랑은 아주 실제적인 것이었다. 젊은날의 아련한
아지랑이같은 기대와 꿈이 수놓은 그런
사랑이라기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점을
발견하고 맺어졌다고 하는 편이 가장 적절한 해석일
것이었다. 게다가 아르까지나의 부재가 가져온
빈자리를 마리안나가 자연스럽게 차지했다 할 수
있었다. 비록 빅토르의 필요에 의해서였지만.
그러니까 마리안나와의 사랑은 모든 결점을 감싸는
그런 맹목적이고 눈먼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리안나가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까지나를
잃은 빅토르의 마음은 온통 나타샤에게로 쏠렸고 그의
마음은 늘 모스크바로 달려갔다. 그것은 어떤 명의의
의술로도 치유 불가능한 병 같았다.
1988년 봄은 영화 <이글라>와 함께 피어났다.
<이글라>는 소비에트 전역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상영되었다. 영화 <이글라>로 하여 빅토르는 소비에트
젊은이들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초상으로
자리잡아갔다. 그 무렵, 때를 맞추어 <혈액형>이라는
KINO의 레코드도 세상에 나와 판매되었다.
영화 <이글라>는 상영하는 영화관마다 만원을
이루었고 젊은이들은 두 번 세 번 거듭 관람하였다.
<이글라>의 배경음악을 주로 실은 KINO 그룹의 레코드
<그루빠 끄로위>는 내놓기가 무섭게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특히 노래 '그루빠 끄로위'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소비에트 전역에 도도히 퍼져나갔다.
오래 묵은 불만을 폭죽처럼 터트리며 새로운 젊은이의
세상의 도래를 축원하는 내용을 은유로 부르는 그
노래는 젊은이들에게 단순한 노래만으로 들리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빅토르가 노래 속에 은밀히 묻어둔
지뢰를 낱낱이 다 알아차렸다. 그 노래는 세상을 우리
손으로 바꿔 가야함을 외치며 선동하였다.
나의 혈액형은 나의 소매에 적혀 있다
나의 번호도 소매에 적혀 있다
문에 열쇠가 맞지 않으면 어깨로 문을 부숴라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존재할 필요가 없지 않아.
집집마다 그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은 집이 없다시피
했다. 젊은이들은 그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활보했고
그들의 화제는 KINO와 빅토르와 그 노래에
집중되다시피 했다.
KINO 그룹의 공연초청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폭주하였다. 어찌나 많은 공연을 했던지 일일이
기억하기가 번거로울 지경이었다.
첼리아빈스크. 그곳 대학 운동장에서의 공연. 그
무렵 그 많은 공연 가운데 첼리아빈스크에서의 공연이
빅토르의 기억에 가장 또렷이 인각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곳에서 아직도 KINO의 노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세력이 엄존함을 목격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대학생들의 열화같은 사랑을 직접 뜨겁게
경험했기 때문일까. 그 공연은 기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랄 산맥을 넘어 서시베리아 초입에 위치한
공업도시 첼리아빈스크행은 모스크바 기점인 시베리아
철도와는 다른 노선이었다. 굳이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할 경우 모스크바에서 기차를 타고
스베르들로프스크에서 하차하여 남행열차를 바꿔타고
한 시간 정도 내려가야 했다. 그러나 KINO 그룹
멤버들은 레닌그라드에서 볼로그다와 키로프를
경유하여 중앙아시아로 가는 열차에 탑승하였다.
그들이 탑승하자 KINO 멤버들을 알아본 열차의 젊은
승객들이 우루루 모여들어 그들을 둘러쌌다.
젊은이들은 KINO 그룹 멤버들을 잠시도 가만 있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여기 저기서 한꺼번에 여러 가지
질문을 퍼부어댔고 한가지 대답도 듣기 전에 또 다른
질문을 퍼부어 그들을 당혹시키고는 했다.
"비쨔, 우리를 위해 노래를 좀 불러줄 수
없습니까?"
많은 질문들이 순간 뚝 그쳤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의 소녀가 외친 그 소리가 별안간 주위를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조용해지는가 했으나,
그래요, 노래를 불러주세요, 우리는 노래를 듣고
싶어요, 하는 외침소리가 연이어 터져나왔다.
빅토르는 고막이 터질 것 같아 귀를 막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이들의 요청은 맹렬했다. 노래를 부르지
않고서는 그 시끄러움을 잠재울 수 없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한 빅토르와 유리는 노래를 부르기로 결심했다.
"자, 여러분들이 조용히 하면 노래를
불러드리겠습니다."
빅토르는 큰소리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울리자
젊은이들의 소요가 비로소 가라앉았다. 갑자기 철로와
차륜의 마찰음과 차체의 진동소리만 크게 울렸다.
그렇지 않아도 기차 여행은 지루하기 마련이다.
일정한 동안 일정한 공간에 갇혀 있어야 하는
승객들은 시간이 정지해 있는 것처럼 답답한 것이다.
창밖의 변화에 늘 눈을 주고 있을 수만도 없고,
게다가 기차를 타고 낯선 고장을 여행하게 되면 까닭
모를 객수가 몹쓸 병균처럼 가슴을 파고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한데, 그들이 즐겨 부르고 듣는 노래의
주인공들을 만났으니 노래를 청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빅토르와 유리, 찌호미로프, 구리야노프 등 KINO
멤버들은 기타를 꺼내 마침내 연주를 시작했다. 그
소문은 어찌나 발빠르게 다른 칸으로 전해졌던지
그들의 객차는 삽시간에 노래를 듣고자 하는 승객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이어지는 노래에 흥이 오른 젊은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자를 벗어들고 청중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그들이 내미는 모자에 청중들은
아낌없이 지폐나 동전을 던져넣었다. 그들의 모자는
적지 않은 돈으로 채워졌다. 돈을 모은 젊은이들은 그
모자들을 마리안나 앞에다 쏟아놓았다. 초청공연에
나가 연주하고 받은 개런티에 손색이 없을 만한
금액이었다.
그렇듯 신명나는 열차여행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첼리아빈스크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그런
열광적인 팬들의 환영이 아니었다. 그들은 역대합실을
미처 빠져나가기도 전에 검문을 당했다. 긴 카키색
코트의 사내도 유명한 KINO 그룹의 멤버들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 사내의 눈에 비친 KINO
멤버들의 모습은 첼리아빈스크 입성을 허락해야 할지
아니면 막아야 할지 얼른 판단하기 어렵게 하였다.
그들의 행색이 너무 괴상하고 파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치렁치렁 길게 늘어뜨린 것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유행되고 있으니
그렇다쳐도, 푸른 물감을 발라 무스로 뻣뻣하게
세우고 있는 머리며 너덜너덜한 청옷을 너풀거리거나
까맣게 차려 입은 묘한 차림이 여간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사내는 그들이 부른 노래를 떠올려보았다. 그 기억
또한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사내 생각에 그들이
공연한다면 필경 첼리아빈스크 젊은이들에게 필요없는
나쁜 병균이나 퍼뜨리게 되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일단 사내는 그의 사무실로 KINO 그룹 일행을
연행하였다.
비밀경찰의 사무실은 어디나 피냄새와 허파나 심장
썩는 부패한 냄새가 퀴퀴하게 풍기는 것인가.
빅토르는 사무실로 들어선 순간 역겨운 냄새에
치밀어오르는 구토를 참아내야 했다.
"어디, 공대에서 초청을 받았다고 했나?"
"예."
"초청장을 이리 내놔."
"전화로 받은 것이 되어서,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전화로 초청을 받았어. 전화 한 통화 받고
레닌그라드에서 먼 이곳까지 달려왔단 말이지?"
사내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우리들 초청공연은 대개 전화로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정말 공대 학생들로부터 초청을
받았다는 건 믿어지지 않아!"
"못믿으시겠다면, 저 창 밖을 좀 보세요. 저기
웅성거리고 있는 패들이 있지요. 아까 역에서부터
우리 뒤를 졸졸 따라왔는데, 저들 가운데 우리 KINO
그룹을 환영한다는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마 저들이 그 공대 학생들 아닌가
여겨집니다."
사내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경찰서
건너편 길가에 스무남 명은 넘어보이는 젊은 남녀들이
이쪽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서성거리고 있었다.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공연 스케줄을 보여주게."
"따로 공연 스케줄을 잡아둔 것은 없습니다."
"공연을 한다면 한 두어 시간은 계속할게 아냐.
그때 출연할 사람들과 부를 노래들을 적어내라구."
빅토르는 유리와 머리를 맞대고 출연계획을 짰다.
그들은 초기의 그들 노래부터 최근에 작곡하여 연습한
노래들까지 소개할 생각이었다.
제출된 공연 스케줄을 훑어본 사내의 눈이 반짝
빛을 쏘았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돌아온
사내는 선언문의 한 구절을 읽듯 말했다.
"자네들, 레닌그라드로 돌아가야겠어."
"왜요?"
빅토르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치듯
물었다.
"서장님께서 자네들 공연허가를 내줄 수 없다는
말씀이셨어."
"왜요?"
"자네들 노래 내용이 불온하다는 말씀이셨어."
"불온하다구요?"
빅토르는 길이 끝난 절벽 아래를 굽어보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심정이었다. 언젠가 당했던 낯익은
일이었고 낯익은 분노가 가슴 속에 파장을 일으키며
급격히 퍼져나갔다. 이들의 한마디는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레닌그라드로 돌아간다. 허탈감과 분노로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여기서 기다리다 기차 시간이 되면 내가 역까지
안내하지. 아마 타슈켄트에서 올라온 기차가 아홉
시쯤 도착할걸."
사내는 판사의 마지막 언도같은 어투로 그렇게
말했다.
KINO 그룹 일행은 바깥출입도 통제되었고,
연금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분노를 키우고 있는 사이 어느덧 해가 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디엔가 노을이 져 있다는
사실을 막연히 감지하고 있는 사이에 구름 사이를
빠져나온 회색빛 땅그리매가 서서히 세상을
잠식해갔다. 어둠이 맞은편 창고같은 건물을 다
지워갈 무렵, 문득 반딧불같은 작은 불빛이 그
창고편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불은 하나, 둘, 셋, 넷, 다섯 늘어갔다. 그것은
반딧불이 아니었다. 종이로 바람막이를 한
촛불들이었다. 그 촛불의 숫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갔다. 기차 시간이 다 되어가자 그 촛불은 경찰서
마당까지로 번져갔다.
"KINO를 풀어주세요."
처음, 촛불 가운데서 연약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우리에게 KINO를 돌려주세요."
또다른 여자의 음성이 그 뒤를 따랐다.
"KINO를 풀어주세요. KINO를 돌려주세요."
이제 그것은 큰 함성이 되어 경찰서 건물을
흔들었다.
경찰서 안의 공기가 팽팽히 긴장되었다. 경찰관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KINO 그룹을
연행해온 사내는 서장실과 마당을 바쁘게
오락가락하였다. 경찰서 마당을 꽉 채운 젊은
남녀들의 함성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높아갔다.
경찰관들은 당장 해산하지 않으면 불법집회자로
모조리 연행해 엄히 처벌한다고 위협했으나 아무도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은 KINO를
풀어주고 그들에게 연주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를
되풀이했다.
KINO 멤버들을 연행해온 사내와 긴밀히 의논한
서장은 마침내 KINO 멤버들을 풀어주기로 결정했다.
서장이나 사내는 자신들의 견해가 온당한 것인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썽없이
순순히 KINO 그룹을 레닌그라드로 돌려보낼 수만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만약 말썽이 생겨 그들의 조처가
부당했다는 지적을 받을 때 돌아올 불이익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첼리아빈스크의 치안을 걱정해 여러분을 바로
레닌그라드로 돌려보내려 했으나 이곳 젊은이들의
요청이 열화같아 여러분의 공연을 허가하기로 결정을
번복했으니, 체류하는 동안 어떤 말썽도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행사를 끝내도록 하게."
그들을 연행해온 사내는 무슨 큰 선심이이라도
쓴다는 투로 그렇게 말하며 빅토르의 어깨를 툭툭
쳤다. 빅토르는 까닭 모를 구역질이 치솟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경찰서를 나왔다.
빅토르를 선두로 KINO 그룹 멤버들이 경찰서 건물을
등지고 나오자 촛불을 든 젊은이들은 환성을 지르며
그들을 환영했다. 젊은이들은 삽시에 KINO 그룹
일행을 에워쌌다.
"공대로 갑시다!"
누군가 그때 그렇게 외쳤다.
"공연준비가 되어 있는 공대로 갑시다!"
여기저기서 그런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자 촛불을
든 젊은이들은 경찰서 마당을 천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KINO 그룹을 가운데 에워싼 촛불행렬은
시가지 중심인 고리끼 거리를 거슬러 올라가 공대로
향해 진군했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영문 모를 그
무리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고 그 무리가
형성되기까지의 내력을 들은 사람들은 호기심을
느끼며 흥겨운 마음으로 그들을 뒤따랐다. 그 무리의
규모는 거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커졌고 운동장에
도착했을 때는 그 커다란 운동장을 다 채우고도 남을
만큼 숫자가 늘어나 있었다.
빅토르는 경찰서에서 창문을 통해 촛불을 든 무리를
처음 봤을 때부터 묘한 흥분을 느끼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촛불 군중에 둘러싸여 공대의 운동장으로 오는
동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흐뭇한 감동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다시 반추하게 되었고
자신의 존재가 꼭 부끄러운 것만은 아닌 것인가
자문을 해보기도 했다. 지식의 전당인 대학
캠퍼스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연주회를 갖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리를 부랑하는 젊은이들이
아닌, 지식층의 젊은이들이 마련한 공연이었다.
게다가 경찰서라는 공권력에 과감히 맞서 뜻을
관철시킨 과정이 얼마나 이성적이고 아름답고
감동적이던가. 촛불시위와 촛불행렬. 그런 감동은
비단 빅토르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유리 가스빠랸도
이고르 찌호미로프도 유리 구리야노프도 다같이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열어왔던 어떤
연주회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감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공연은 자연 열기를 띨 수밖에 없었다.
연주를 하는 KINO 멤버들이나 연주를 듣는 젊은이들
모두가 약간씩 혹은 매우 고양되고 흥분되어 있었다.
KINO가 노래하면 운동장의 젊은이들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고, 노래가 끝날 때면 KINO를 부르며 환성을
질러댔다.
KINO 그룹이 '그루빠 끄로위'를 연주하고 노래하자
운동장에 운집한 청중들 모두가 따라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노랫소리는 하늘 높이 솟아올라
모스크바로, 레닌그라드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들은 '마지막 영웅'을 연주할 때도 다 같이 그
노래를 힘껏 불러댔다. 앵콜은 거듭거듭 계속되었고
따라서 공연은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청중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려다가는 밤을
온통 노래로 다 채워야 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전설'을 힘껏 불렀다. 청중들도
다 함께 합창했다. 그 합창소리는 첼리아빈스크
밤하늘에 널리 장중하게 퍼져 나갔다.
빠져나가지 못한 함성이 목울대에 끼여 있다
이제 때가 이르러 외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시간이 멀리 흘러간 뒤에도 누군가 기억하리
싸움에 지친 용사들이 간신히 피묻은 칼을 씻는
모습을
시체 위에서 날개를 퍼덕거리는 까마귀 떼들을
웃음짓던 하늘이 혀를 깨무는 것을*
살아남은 사람의 경련하는 손을
한순간이 갑자기 영원으로 변하는 것을
시체를 태우는 노을이 화장장의 화덕처럼 타오르는
것을
하늘의 별들이 늑대의 눈처럼 노려보는 것을
어둠이 삼켜가는 두 손을 펼치고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싸움을 마친 용사들이 뒤엉켜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생명은 하나의 단어이다
그것은 사랑과 죽음을 나타낸다
이봐 모두 잠들어 있으면 노래는 누가 부르랴
죽음 앞에서 우리는 살아있을 가치가 있다
사랑은 기다릴 가치가 있다.
('혀를 깨물다, 혀를 씹다' 는 러시아에서 '말을
끊었다'는 의미)
46. 나타샤 라즐로고바
거듭 말하거니와 레닌그라드는 잿빛도시였다.
네바 강 양안에 즐비하게 서 있는 창이 많은
건물들은 외양이며 색깔이 다양했다. 해군성 건물과
과학박물관은 붉은 벽돌로 지어졌고 에르미타주
국립미술관은 흰기둥과 파란 하늘색 벽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궁전다리를 건너 네프스키 대로를
걸으면 여러가지 다채로운 광경이 시선을 끈다.
이사크 성당의 황금빛 돔도 카잔 성당의 원주도
기마상의 위용도 볼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레닌그라드는 빅토르의 뇌리에
늘 단조로운 회색빛으로만 그려져 있었다. 그는
정신과 육신의 고향인 레닌그라드에 점점 싫증이
났다. 그는 구실만 있으면 레닌그라드를 떠났다. 어떤
때는 일부러 구실을 만들어 질식할 것 같은
레닌그라드를 떠나기도 했다. 그의 여행의 종착지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모스크바에 가 닿는
경우가 많았다.
부조화의 조화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바실리 사원의
양파지붕 때문이 아니었다. 가서 거닐 때마다 정신에
새로운 자극을 받는 풍부한 상념의 거리 아르바트
때문도 아니었다. 갈 때마다, 텐트를 치고 여름을
송두리째 다 보내고 싶다는 갈증을 느끼게 하는
'은색의 숲'의 유혹 때문도 아니었다. 모스크바에는
나타샤 라즐로고바가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빅토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쨔, 언제 왔어?"
"어제, 마르스에서 공연했어."
빅토르는 조금 전 모스크바에 도착했었다. 그는
아직도 도모제도보 공항 대합실에 있었다. 그러나
나타샤에게는 어제 마르스에서 공연했다고 둘러댄다.
나타샤를 보러 일부러 왔다고 말하기가 쑥스럽다.
"왜, 연락 안했어. 구경갔을 텐데."
"나타샤 앞에서 연주를 하면 몸이 굳어지거던."
"아직도 청중 의식해?"
"난 용맹이라면 약에 쓰려도 없거던. 특히 나타샤
앞에서는`....... 지금 나올 수 있지?"
잠시 사이를 둔다.
"그래, 하지만 안 만나는 게 좋을 거야."
"왜?"
"만날 때는 좋지만, 헤어질 때는 죽고 싶단 말야.
영영 레닌그라드로 돌아가지 않겠다면 모르겠지만."
"나타샤가 원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
"정말?"
"그래."
"약속했어. 그래 어디야?"
"30분 안에 스톨레시니키로 갈게."
"또 그 마부들 카페야?"
스톨레시니키는, 옛날 19세기에 문을 연 카페로
당시에는 주로 마부들이 애용했던 유래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현대식으로 말끔히 단장되어
있는 호젓한 카페였다.
"전통의 썩은 내가 풍기는 곳도 운치있잖아. 게다가
늘 어딘가로 떠나고 싶고, 방황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어울리는 곳이고`......."
공항 대합실을 나온 빅토르는 택시를 타고 고리끼
거리로 가자고 했다. 카페 스톨레시니키는 고리끼
거리와 제르진스키 거리의 접점에 있었다.
나타샤는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 옷에 레닌그라드 물 냄새가 난다!"
나타샤의 첫마디에 빅토르는 멈칫 놀란다.
"물 냄새가 이틀 사흘이나 갈까."
그래도 빅토르는 자수하지 않는다.
"난 자기 옷에서 나는 물 냄새가 좋더라."
"다음에는 네바 강에 몸을 푹 담궜다 와야겠군."
"하지만, 네바 강의 강물 냄샌지, 아니면 전에 갔던
꼬마로보 해변의 바다 냄샌지 나는 알 수가 없는 걸."
얼마 전 빅토르는 레닌그라드를 찾아온 그녀를
데리고 꼬마로보의 해변으로 나갔었다. 조개가 많이
밀려와 입을 벌리고 있는 모래톱을 걸으며 그는
나타샤에게 리술 아저씨 이야기를 들려주었었다. 리술
아저씨 이야기를 듣고 난 나타샤의 눈이 촉촉히
젖어있는 걸 보고 빅토르는 당황했었다.
"꼬마로보의 해변을 걷던 날 나는 나타샤의 눈물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리술 아저씨 때문이었어. 이 세상에 그렇게 슬픈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거던."
나타샤는 눈을 가늘게 좁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크렘린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식한 사람들만
모여 있다더니, 그게 사실인가 보군!"
"갑자기 웬 크렘린이야?"
"크렘린의 고관이 가르쳐주는 것이 없으니 그 딸이
그렇게 무식한 것 아냐?"
"학교에서도 못들었다."
나타샤는 빅토르를 흘기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본인이 구제불능의 백치인가?"
"아직 슬픔같은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슬픈 사람이 있었다는 걸 가르쳐줘 정말
고맙다."
"내가 부모 노릇, 선생님 노릇 다 해야 하겠군."
"난 사랑만 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겠어."
"어렵쇼. 나는 그런 밑지는 장사는 안한다."
"나도 야비한 욕심쟁이는 아니다. 받으면 돌려줄 줄
아는 양식은 가졌다."
"돌려주는 정도가 문제지. 나는 조금이라도 보수가
낮으면 금방 철수해 버리는 외인부대 같은 놈이야."
"그럼 잘됐군. 나는 그런 야비한 욕심쟁이는
벌레보다 싫으니까."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는 아랑곳없이 그들은
쉴새없이 지껄이고 마시고 태워댔다. 그들은 아무리
많은 말을 지껄여도 아직 퍼낼 말이 항아리 가득 차
있었고 아무리 바라봐도 서로에게 싫증이 나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의 샘은 물이 콸콸콸 솟아
올랐고`....... 그들은 헤어질 수가 없었다. 나타샤는
빅토르의 만류도 없었으나 스스로 호랑이같은
아버지와 작은 실수도 용서하지 않는 어머니가 눈을
부릅뜨고 기다릴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영화촬영 같은 명분이 뚜렷한 경우에는 몇 달의
외출도 허락하였으나 명분없는 외출은 한 시간에도
인색한 것이 그녀의 부모였다. 빅토르는 바라던
바였으므로 자신의 수고를 덜어준 나타샤의 배려에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나, 엄마한테 말했어."
그들의 침대는 꿀보다 달콤했다. 한 차례 연약한
나무와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허리케인같은 사랑을
치르고 그 아련한 여진 속에서 나타샤가 빅토르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집에서 나와 독립하겠다고 했어."
"독립?"
"그래, 이 나이까지 부모 그늘에 있는 것이
부끄러운 일 아냐?"
"일테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타샤는 아직 학생
아냐?"
나타샤는 모스크바 영화대학에서 시나리오와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두 학기만 채우면 그녀는 학위
논문을 제출할 수 있었다.
"학생도 학생 나름이지. 난 어엿한 영화배우야. 다
성장한 여자가 독립하겠다는데, 그리고 난 공부를
열심히 할 거야."
"내가 공부하게 할 것 같애?"
"비쨔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공부가 무슨
대수겠어."
"나와 공부를 바꾼다고? 후회하게 될 걸."
"기회를 줘보고 말해."
"그럼 오늘부터 실행에 옮겨. 나 레닌그라드로
돌아가지 않겠어."
"그래도 되겠어?"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을 거야."
"진심이야?"
나타샤는 빅토르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그래."
빅토르는 나타샤를 힘주어 포옹했다.
47. 모스크바의 환상
"위쨔, 들려?"
마리안나는 저쪽에서 전화를 끊어버리지 않을까
다급해진다.
"그래, 잘 들려."
잘 들린다는 사람이 그렇게 작은 소리로 말할 수
있나.
"위쨔, 모스크바에 간 지 벌써 석 달째야."
지난달 그녀는 빅토르를 찾아 모스크바에
다녀갔었다. 라시드를 설득시켜 그의 행방을
알아내기는 했으나 만나지는 않고 돌아갔었다.
빅토르와 나타샤가 동거하고 있다는 아파트 부근을
한나절 가량 서성거리고 배회하다 그녀는 죽고 싶은
심정으로 겨우겨우 발길을 돌렸었다. 마리안나는
벌써부터 빅토르의 자신에 대한 사랑이 급격히
식어가는 걸 수시로 섬뜩섬뜩 느끼고는 했었다.
그녀는 그럴 때마다 가슴이라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과 허전함을 느꼈다. 자신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빅토르, 그를 붙들어둘 어떤 것도 가진 게
없는 자신. 다만 귀여운 사샤 하나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궁색한 처지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그렇다고 구걸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알아. 이제 모스크바에서 활동하기로 했어. 당분간
여기 머물러야 할 거야."
사샤와 나도 모스크바에 갈 수 있어, 마리안나는
그렇게 말하려다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이별을
작정하고 있는 그에게 매달려봐야 소모적인 싸움밖에
일어날 것이 없으리란 깨달음이, 그녀의 마음을
걸레처럼 처참하게 만들었다.
"그래, 알았어. 몸이나 건강해."
"사샤 잘 돌봐줘."
이기주의자. 마리안나는 불쑥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도로 삼켰다. 저쪽에서 전화를 두둑 끊었다.
그 소리가 마치 툭, 가슴 속에서 바위라도 떨어지는
소리처럼 절망적으로 들렸다. 한동안 송수화기를 든
채 멍하니 천정을 쳐다보는 마리안나의 머리 속은
재빠르게 안개가 뒤덮여갔다. 안개 속을 휘적이며
사라져가는 빅토르의 등이 어렴풋이 바라보였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그는 떠나간 것이다.
나타샤는 모른 척하기는 했으나 정신은 온통 전화를
거는 빅토르에게 쏠려있었다. 그의 말은 한마디도
곁나가지 않고 그녀의 귀로 솔솔 빨려들어왔다. 그는
그녀가 바라는 바대로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마지막,
사샤를 잘 돌봐줘, 하는 말이 귀에 약간 거슬리기는
했으나 부정까지야 어찌 막으랴, 하는 생각에 그녀의
마음은 너그러워졌다.
"예빠또리아 공연이 언제라 했지?"
"15일."
"사흘 남았군."
"유리와 구리야노프는 오늘낼 온다고 했는데,
찌호미로프는 못오겠다더군."
"알렉산드르 바슬라쵸브가 도와주기로 했다잖았어?"
"그래, 알렉산드르도 있고 낀체프도 있으니 걱정할
것 없을 거야."
"그리고 유리 아이젠스피스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오늘 만나기로 했어."
"그 사람, 눈이 좀 처진 것이 맹해 보이기는 해도
사람은 착한 것 같잖아?"
"이번 예빠또리아 공연이며 알루스트 공연 스케줄
잡는 걸 보면 매니저 노릇 꽤 잘할 것 같아. KINO의
살림은 유리한테 맡겼으면 해."
"그래, 비쨔야 잔 신경쓸 겨를 있겠어. 행정적인
일은 유리 그 사람한테 맡기고 창작과 연주에
열중해야지."
"꼼꼼하고 빈틈없는 라시드가 추천한 사람인데
어련하겠어."
"나이도 마흔을 넘겼고, 체격도 듬직하고, 나는
어쩐지 유리 그 사람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어."
"나도 마찬가지야. KINO의 살림은 그 사람한테
맡기겠어."
알렉산드르 바슬라쵸브는 모스크바 마르스 그룹의
보컬과 베이스 기타를 오래 담당해온 베테랑
뮤지션이었다. 음악적 감수성이 매우 예민해 어떤
노래든 몇 번 듣지 않고서도 어울려 연주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라시드와는 오래
사귀어온 친구라 했고, 빅토르의 노래를 혼자 즐겨
연주하고는 했다면서, 처음 빅토르를 만났을 때
숨김없이 털어놨었다.
"나도 노래를 짓고 그것을 연주하기는 해왔어.
하지만, 빅토르의 노래를 들은 순간 내가 해왔던
것들이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는 소탈했다. 체면 같은 것을 고려하거나 앞뒤를
재거나 하지 않았다.
"만약 사정이 허락한다면 함께 연주를 하고 싶은
생각이 많아."
"언제라도 괜찮아. 우리 KINO 그룹 멤버들은 속좁은
친구 하나도 없어. 언제라도 교대로 연주할 수 있어."
"고마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르의
도움은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만약
알렉산드르에게 다른 연주가 겹친다면 낀체프도
도와줄 것이었다. 낀체프는 알렉산드르보다 더 널리
알려진 보컬겸 기타리스트였다. 그는 여러 그룹을
전전하며 지난 10여년간 연주생활을 해왔었다.
예상했던 대로 레닌그라드에서 유리와 구리야노프
둘만 모스크바로 왔다.
"찌호미로프는 레닌그라드라면 몰라도
모스크바에서는 활동하고 싶지 않대."
"KINO를 떠날 생각이군?"
"그렇게 봐야하겠지."
빅토르는 더 다른 것은 묻지 않고 알렉산드르
바슬라쵸브가 도와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유리
가스빠란과 구리야노프는 알렉산드르 바슬라쵸브의
명성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고 그의 연주를 직접 들은
일도 있었다. 그러므로 빅토르의 말에 다른 감정보다
안도감이 먼저 찾아왔다.
유리 아이젠스피스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완꾼이었다.
예빠또리아의 공연 입장료는 2백 루블로 정해졌다.
현지 프로모터를 설득하여 아이젠스피스가 정한
입장료였다.
"이보세요. 우리 KINO는 이제 떠돌이 연예단이
아니에요. 우리는 이제 싸구려 악단으로 팔려다닐
수는 없단 말이오."
"그래도 2백 루블이라니, 너무 심한 것 아니오?"
"그럼 묻겠는데, 그곳 <이글라> 관객이 얼마나
듭니까? 그리고 거리마다 집집마다 '그루빠 끄로위'
안 들리는 데 있습니까?"
"그래도 그렇지요. 2백 루블이란 보통 사람의 몇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거금 아닙니까?"
"돈이 문젭니까? 지금 사람들은 KINO를 목마르게
찾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KINO가 안겨주는 위안과
희망은 실제 그 금액으로는 살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두고 보세요. 영웅회관 2백 석이 다
팔려나갈 테니까요."
"저는 자신 없습니다."
"자신 없으면 할 수 없지요. 허나 50석도
안팔린다면 우리가 개런티 한 푼 안받고 공연해줄
테니까. 그런 조건으로 하고 싶으면 다시
연락하세요."
유리 아이젠스피스는 그렇게 당당히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몇 시간 뒤 현지 프로모터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고
입장료 2백 루블을 내걸겠다는 약속을 해왔다. 현지
프로모터의 우려와는 달리 200석의 표는 완전히 다
팔려나가고 입석표까지 더 팔려나갔다. 현지
프로모터는 KINO의 인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 사실을 떠벌리고 다녔다.
예빠또리아의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영웅회관에
입장하지 못한 5 백여 명에 이르는 청소년들은
광장에서 희미하게 새나오는 KINO의 노래를
따라부르며 공연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빅토르는 자기를 사랑하는
그들을 그냥 모른체 할 수가 없었다. 회관 안에서의
예정된 스케줄을 다 마친 빅토르는 KINO 멤버들과
밖으로 나왔다.
맨 앞에 빅토르 그리고 유리 가스빠란, 알렉산드르
바슬라쵸브, 구리야노프 등이 회관의 뒷문을 통해
광장쪽으로 나왔다. 그들은 제각기 들고 있는 기타를
연주하며 천천히 청중들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들은
청중을 향해 아무 설명을 하지 않았다. 청중은 곧
그들이 KINO 멤버들임을 알아보았다.
KINO를 외쳐부르는 환성과 탄성이 광장을 왁자하게
뒤덮었다. 영웅회관 안에 있던 청중들도 다투듯
서둘러 밖으로 나와 광장의 인파에 섞였다.
빅토르는 힘차게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공연으로
누적된 갈증과 피로를 다 잊어버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지쳐 있었다. 그의 음성이 자꾸만
갈라지는 것 같았다. 그의 출현에 감격한 소년
소녀들은 일제히 빅토르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 곡이 끝나면 박수소리가 소나기처럼
퍼져나갔다. 빅토르가 노래를 시작하자 그 박수소리는
노래로 바뀌어 광장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그 노래가
끝나자 또 박수소리가 소나기처럼 퍼져나갔다.
그러기를 다섯 차례나 거듭했다.
"예빠또리아 친구들이여, 우리 KINO를 이토록
환대해주어 감사합니다. 우리 다음에 또 가슴과
가슴으로, 마음과 마음으로 다시 만납시다."
빅토르의 작별인사에 청중들은 잔잔한 호면처럼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해졌다. 청중들은
빅토르와 KINO 멤버들의 배려에 모두 감동해 있었다.
짤막한 작별인사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는
빅토르와 KINO 멤버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청중들은
아득한 최면에서 깨어난 듯 갑자기 KINO와 빅토르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지나가자 서로
다투어 길을 열어주었다.
그로부터 한 달쯤 후에 가진 알루스트에서의 공연도
그처럼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KINO의
입장료는 2백 루블 이상으로 선이 그어졌다.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의 어떤 그룹도 그처럼 거액의
입장료를 감히 내걸지 못했었다. 1급 그룹이라 해도
기껏 1백 루블의 입장료가 최고였다.
48. 황금의 쥬크 영화제의 영웅
영화 <이글라>의 성공과 두번째 밀리언 셀러를
기록한 앨범 <그루빠 끄로위>는 KINO 그룹과 빅토르를
록그룹과 록가수 이상의 존재로 부상시켰다
신문과 잡지들은 서로 다투듯 빅토르를 블라드미르
브소츠키 이래 가장 위대한 소비에트 음유시인이라
칭송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이전에 촬영해 두었던 KINO
그룹 공연 필름과 예빠또리아 공연 모습을 담은
필름을 잘 편집하여 방영하느라 열을 올렸다.
소비에트 전역의 젊은이들은 빅토르를 자유의 투사,
페레스트로이카의 전사, 영원한 혁명아로 숭앙하였다.
귀를 가지고 듣고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사람은
빅토르와 KINO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되었다. 축구영웅 알료샤를 모르는 사람도 빅토르와
그의 노래는 알았다. 텔레비전 시청률도 뒤바뀌었다.
전에는 항상 당 제1서기의 연설이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연설보다 KINO 그룹의 연주를 선호하는
시청자들이 더 많아졌다. 이런 현상을 알았기
때문일까, 제1 국영 TV의 아나톨리 리센코는
'관점'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사이사이에
걸핏하면 KINO 그룹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그
프로그램은 진보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다.
어쩌면 KINO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적인 것에서
문화적인 데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구실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듯 KINO에 대한 다양한 사회적
수용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빅토르는 까닭 모르게
말수가 적어졌다. 잇따른 성공은 빅토르를 오히려
소극적인 사람으로 바꿔놓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말수가 적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해 그는 형편없이 낮았다. 그동안 그가 다소
활달해진 것은 그가 생활하고 활동하는 영역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환경이 충분히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그 낯익음에 적응하며 편안함을 느낄
무렵 그는 새로운 변화에 직면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렇듯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또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는 인물로 성장할 줄은
몰랐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이 아직 낯이 익지 않았던
것이다. 즉 스타로서의 적응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그는 아직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알마아타에서 라시드와 영화를
찍으며 뒹굴 때 틈틈이 노트해 두었던 시에다 곡을
붙였고 그것들을 새로 손질하고 또 고치고 하여
노래를 불렀고 그것을 녹음하기로 결심했다. 이번
앨범은 왈레리 레온찌예브가 운영하는 모스크바 프로
스튜디오에서 녹음하게 되었다. 그 표제곡은
'태양이라는 별'이었다. 태양이라는 별도 또 발매되자
말자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1989년, 빅토르와 키노 그룹은 파리와 코펜하겐 등
해외공연을 연달아 가졌다. 프랑스에서 <마지막 영웅>
레코드가 출반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라시드 누그마노프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빅토르는 나타샤와 함께
약속한 스톨레시니키 카페로 나갔다. 라시드는
혼자였다.
전등을 다 끄고 촛불을 밝혀둔 실내가 들어갈 때는
음침했으나 조금 앉아있으니 안온한 느낌이 들었다.
"삐바로 하지?"
세 사람은 맥주 한 병씩을 시켜 마셨다.
"이스베스치야 봤지?"
어느 사이 맥주병을 반이나 비운 라시드가 빅토르를
향해 물었다.
"난 정치 가십엔 관심없어. 그런 내가 이스베스치야
따위를 보겠어?"
빅토르는 무심히 고개를 저었다.
"원, 신문 안 보는 것도 자랑이군."
"자랑이라고까지야 할 수 없지만, 신문이라는 것,
그것 쓰레기통같은 것 아냐? 창작하는 사람은 가까이
해서는 안될 물건이지. 영감이라는 것을 오히려
죽이는 그런 것이니까."
"원, 거창하기도 해라....... 다른 것이 아니라,
오데샤에서 열리는 영화 페스티벌 황금의 쥬크에
우리를 초청했다는 기사가 났어."
"나는 초청받은 사실도 없는데, 신문에 났어?"
"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할까. 내가 영화부에
전화를 걸어봤는데 꼭 참석해야 한다는군."
"강제로 끌고 가겠다는 건가?"
빅토르는 불쾌한 빛을 감추지 않았다. 라시드는
영화제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는
빅토르를 어떻게 설득해서든 오데사에 가고 싶었다.
"강제로 끌고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것 아니겠어."
"선심을 쓰겠다, 이건가."
"어쨌든 우리야 경비 들 일도 없고, 기라성 같은
명배우들과 명감독들 얼굴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라시드 생각이 그렇다면 거기에 따르지. 헌데
나타샤도 함께 가야해."
"누가 뭐래나. 내가 두 사람 떨어지란다고 떨어져
있을 사람들인가."
"그럼, 어떻게 준비를 할까?"
"옷가지 몇 벌만 가져 가면 될 거야. 영화부에서
그러는데, 항공료와 숙식은 다 제공한다니까."
"덕택에 오데샤 구경하겠군!"
오데샤 황금의 쥬크 영화 페스티벌은 그 규모나
권위에 있어 모스크바 영화제에 손색이 없었다.
소비에트 영화 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꼽히는
아이젠슈테인 감독의 대표작 <전함 포템킨>을
기념하기 위해 창설된 이 영화의 제전에는 소비에트
전역의 영화들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 영화들도
출품되어 경쟁을 벌였다.
<전함 포템킨>은, 1905년 제정 러시아의 흑해 함대
소속 전함 포템킨 호의 수병들이 일으킨 혁명적
반란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 시민들 편에 서서
짜리즘에 반대해 반란을 일으킨 수병들이
우왕좌왕하는 시민들과 함께 진압군의 총탄에
하나하나 쓰러져 포템킨 계단은 피로 물들어 간다.
무표정한 진압군은 총을 쏘며 계단을 내려오고
아수라장을 이룬 가운데, 울부짖는 아기를 태운
유모차가 피로 물든 계단을 굴러떨어지는 장면이
끔찍한 전율을 일으키며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고전으로 꼽히는 영화이다.
라시드와 빅토르 일행은 프리모르스키 가로수 길
바로 위쪽에 위치한 오데사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곳은 영화제가 열리는 피오네르 궁전과 가깝기도 한
데다 항구를 내려다볼 수 있는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도착한 날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가로수 길을
산책하고 항구로 내려가는 오데사의 명물 포템킨
계단을 오르내리며 그들은 유쾌한 한때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은 아르카디야 해수욕장에서 일광욕으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물론 빅토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에 신경과민이 되어 있어
선글라스와 챙넓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거리를 걷거나
바닷가를 산책했다.
마침내 영화제가 개막되었다. <사냥꾼>에서
열연하여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주연배우상을 받은 바
있는 인민배우 예브게니 세르게예비치 도른, <죽은
혼>과 <이골 공의 원정> 등의 영화에 출연하여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에카테리나 차이카, <불꽃> <전쟁과
평화>를 감독해 명성을 쌓은 젤르진스키 데이벤코프
등 영화계의 기라성같은 인사들이 차례로 연단을
장식했다.
빅토르와 라시드는 한쪽 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은신하듯 앉아 있었다. 의례적이며 판에 박은
듯한 개막식은 지루하고 답답하였다.
빅토르와 라시드, 나타샤 등 그들 일행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피오네르 궁전을 나오고
말았다. 포템킨 계단을 내려가 항구를 거닐다
영화제에 참가한 작품을 상영하는 영화관을 찾아가
영화를 관람하였다.
일주일에 걸친 영화제 기간이 빅토르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라시드에 비해 영화에
관심이 적었다. 그리고 나타샤에 비해 오데사의
풍광에 관심이 적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영화를
갈증 만난 사람처럼 찾아다니며 관람하는 라시드나
오데사의 풍광에 마냥 가슴 설레이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나타샤와는 달랐다. 어떤 때는 라시드의
권유로 영화를 보거나 또 어떤 때는 나타샤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해 해변으로 일광욕을 가거나 하며 매사
수동적으로 행동했다. 영화는 중도에 일어나 버리고
싶은 지루한 것밖에 없었고, 오데사 관광은 이틀간에
걸친 눈요기로 볼 것은 다 봤다고 생각되었다.
마침내 영화제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다지 관심은
없었으나 어떤 영화가 수상을 하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영화제에 참가한 인사들이 다 모인 피오네르
궁전에서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음악상, 미술상,
각본상, 감독상이 차례로 수여되었다. 그리고
영화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남녀 주연배우상 차례가
되었다.
"이번 황금의 쥬크 페스티벌의 최우수 영화배우
선정은 이곳에 참가한 심사위원들의 심사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영화평론가들의 앙케이트 집계에 의해
이루어진 진지하고 공정한 것입니다. 이번 최우수
남자 배우로는 <이글라>에서 탁월한 연기를 보여준
빅토르 최가 선정되었습니다."
소나기처럼 박수소리가 일어났다. 박수소리에
피오네르 궁전이 떠내려갈 것 같았다. 관람석의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빅토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는 나타샤가 펄쩍 뛰어오르며 즐거워하지 않았으면,
그리고 라시드가 그의 손을 으스러지게 쥐고 흔들지
않았으면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소나기가 지나가듯 박수소리가 잦아들고, 사회자의
호명소리와 앞으로 나오라는 권유가 이어졌다.
얼떨결에 일어서기는 했으나 빅토르는 붉게 물든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으로 생각되었고 아직도 무엇인가
잘 믿어지지 않았다. 라시드를 향해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빅토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씻어버리지 못했다.
다시 재촉을 받은 다음에야 그는 상기된 얼굴로
단상으로 뛰어올라갔다. 인민배우 세르게이 도른이
수여하는 트로피를 받아들고 막막하고 멍청한
기분으로 먼저 여러 장르에서 수상한 수상자들이 했듯
트로피를 높이 들어 전후좌우에 인사를 치렀다.
"내가 뭘 어쨌길래, 이런 상을 줘. 그게 연기야.
뭔가 잘못됐을 거야. 라시드 그렇지?"
만찬까지 이어진 지루한 행사를 다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빅토르는 라시드를 붙들고 그렇게 이죽거렸다.
"누가 뭐래나. 비쨔 생각이 그러면 그런 거지.
하지만 비쨔는 늘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아주 못된
열등의식이 지랄이야."
라시드는 웃음 띤 표정으로 그렇게 비꼬았다.
"그렇지만 전문배우가 수두룩하잖아. 그런데 가수인
내게 연기상을 주다니."
"비쨔는 가수도 가수지만 연기력도 타고났어.
이제부터 연기자로서 열심히 활동하라는 명령이잖아."
"멍에를 하나 더 쓴 것인가."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빅토르로서는 연기상을 받은 것이 다른 연기자의
몫을 가로챈 것 같아 두고두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무렴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영화에 출연이야
할 생각이지만 노래만큼 열심히 할 자신은 없었다.
노래는 자신의 가진 능력을 다 쏟아붓고도 모자란 것
같아 비축해두었던 숨은 에너지까지 또 쏟아붓는
열심을 보이지만 영화는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영화는 여가삼아 심심풀이로 할
생각밖에 없었다. 어쨌든 황금의 쥬크에서
최우수배우로 선정되고 나니 영화계의 빅토르에 대한
관심도 만만치 않았다. 작고 큰 영화제마다 게스트로
초청이 왔고 트로피 시상자로 선정하기도 했다.
게다가 영화 <이글라>는 정부 홍보 성격이 강한
영화 <조국전쟁>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1천 5백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리고 그해 빅토르는 인기인으로서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쌓는다. 빅토르는 나타샤와 라시드와
유리 가스빠란과 함께 미국을 방문한다. 오래 전
조안나 스팅그레이의 약속이 실현된 것이었다.
미국의 유명한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의 초청으로
헐리우드 파크시티에서 열린 영화제에 참가했던
것이다. 그 영화제에서 <이글라>는 스페셜 이벤트로
상연되었다. 영화 상영이 끝나자 주최측의 요청으로
빅토르는 유리 가스빠란과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미국의 내로라 하는 영화계 인사들과
배우를 비롯한 가수들과 연예인들 그리고 안목 높은
청중들은 노래가 끝날 때마다 박수와 앵콜을 외쳐
그들을 오랫동안 무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붙들어
놓았다. 빅토르는 그들의 앵콜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주었다. 청중들의 진지한 관심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래 내용은 알아듣지 못해도 영화를 통해 본
빅토르의 연기에서 청중들은 메시지를 충분히 느꼈다.
유럽의 록에 러시아적 우수를 가미한 듯한 노래도
인상적이었고 연주도 일품이었다. 노래를 부르는
빅토르의 절도있고 멋진 몸짓과 팔다리의 움직임
모두가 흥미의 대상이 되었다. 청중들은 진지하고
열성적인 연주와 노래에 완전히 매료당한 듯하였다.
한 시간 가량 혼신의 힘을 다해 가진 기량을 다
쏟아붓고 나자 빅토르는 기진맥진해졌다. 그는 더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겸손한 태도로 양해를
구하고 무대를 내려왔다. 청중들은 멀리 모스크바에서
온 손님들의 인상적인 노래와 연주에 손바닥에 불이
일어날 만큼 크게 박수를 쳐 보답하였다.
연예 기자들이 빅토르를 경쟁적으로 취재했고
TV카메라도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빠짐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빅토르의 성공적인 미국 데뷔를 조안나
스팅그레이는 뜨거운 포옹으로 축하해 마지않았다.
"레닌그라드 보일러실의 화부가 미국에서 이렇게
환영받을 줄 몰랐지?"
"여기선 그래도 주연상은 줄 것 같지 않던데."
"야, 황금의 쥬크에서 수상하더니 사람이 그렇게
변했어. 전에는 미국에 오는 것만으로도, 또
디즈니랜드에서 실컷 즐겨보는 것이 소원이라더니."
"사람은 하나 주면 둘을 내놓으라는 그런 존재
아냐."
"알았어. 미국은 열 개, 스무 개라도 줄 준비가
되어 있어. 이제 시작인데, 앞으로 자주 미국 공연을
갖게 될 거야."
그 영화제 참가를 계기로 빅토르는 미국과 일본의
비즈니스 맨들과 접촉을 갖게 되었고 영화출연과 세계
순회공연의 제의를 받기도 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며칠 머문 그들은 뉴욕으로
날아가야 했다.
라시드와 데이비드 위런이라는 제작자와 영화 합작
관계의 일을 의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제작비는
데이비드 위런이 대고 연출은 라시드가 맡으며 남자
연기자로는 빅토르가 출연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
영화는 소비에트에서 일어난 사건을 테마로 하고
소비에트 현지에서 촬영하기로 했다.
다만 시나리오는 미국의 극작가 빌 깁슨이 맡기로
하였다. 그는 아카데미상도 수상한 적이 있는 저명한
극작가로 당시 쓰고 있는 '죽음의 요새'라는 작품이
끝나면 바로 작업에 들어가겠노라 약속했다.
그리고 일본의 아뮤즈 코퍼레이션이라는 쇼
비즈니스 회사에서는 빅토르에게 매우 파격적인
대우로 세계 순회공연을 제의해 왔다. 순회공연
개런티 외에 라시드에게 영화제작권과 그에 드는 비용
일체를 부담하겠다는 조건이었다.
49. 루즈니끼 성화대에 점화하고
1990년 여름이 되자 빅토르는 그동안 미뤄왔던
숙제를 해결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난해 줄곧 그의
마음 속에서 암세포처럼 자라왔던 한가지 육중한 짐을
벗어던지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지난해 여름, KINO
멤버로서 열심히 연주활동을 펼쳐주었던 알렉산드르
바슬라쵸브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호텔의
방에서 혼자 쓰러져 숨져 있는 것이 나중에
발견되었는데, 의사의 최종소견은 심근경색으로
나왔다. 그러나 빅토르는 그동안 쉴새없이 계속되어온
KINO의 연주회로 인해 누적된 피로가 그의 죽음에
직접 또는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빅토르는 그의 죽음이 애석하기 짝이 없었다.
빅토르는 알렉산드르 바슬라쵸브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평가해 왔었다. 그는 음률의 마술사 같았다.
같은 연주도 그가 거들면 색채가 선명해지거나 음률이
화려해졌다. 유리 가스빠란도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발전을 거듭하여 음률의 특성을 다 이해하고 그
이해의 정도를 연주에 응용할 수 있는 정도로
능란해졌는데, 바슬라쵸브는 오래 전 어렸을 때 벌써
그런 경지를 터득하여 그것을 연주에 응용해오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도 바리톤 풍으로 훌륭한
편이어서 보컬리스트로서도 빅토르에 손색이 없었다.
빅토르는 앞으로 KINO가 존속하는 한 그와 함께
활동하리라 생각해 왔었다. 그러던 중 그의 죽음을
맞았으니 너무 갑작스럽고 한편 아쉽고 안타까웠다.
"유리, 바슬라쵸브 추도음악회를 열고 싶은데?"
빅토르는 아이젠스피스에게 자기 마음을
털어놓았다.
"바슬라쵸브 추모음악회를?"
"나는 그의 음악적 재능이 너무 아까워."
"그래, 하기야 그는 당대 최고의 베이스
기타리스트였어."
열정적인 빅토르에 비해 아이젠스피스는 좀
심드렁한 말투였다.
"기타뿐만이 아니었어. 그는 노래도 잘 불렀어."
빅토르는 아이젠스피스의 심드렁한 반응이
못마땅했다. 반사적으로 음성이 높아지고 단정적이
되었다.
"어쨌든 아까운 나이에 갔어."
그래도 아이젠스피스의 말투는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의 혼을 달래주고 싶어. 추모공연이니까,
입장료는 안받았으면 해."
"안돼. 무료공연은 안돼!"
지금까지와는 달리 아이젠스피스는 큰소리로 외치듯
반대했다.
"왜 안된다는 거야?"
빅토르도 반사적으로 벌에라도 쏘인 사람처럼 놀라
외쳤다. 그의 음성이 어찌나 단호했던지
아이젠스피스는 움찔 놀랐다.
"자칫 그를 돈벌이로 이용했다는 비판을 들을지
모르잖아."
"그래도 안돼. KINO는 이제 프로야. 프로는
프로답게 행동해야해. 명분이야 어떻든 입장료없이
공연을 한다면 아마추어로 후퇴하는 거야."
아이젠스피스의 완강한 말에 빅토르는 그를
쏘아보았다.
"그럼 최대한 싸게 해."
"아무리 싸게 해도 1백 루블 이상은 받아야 해."
"안돼. 20루블 이상 하지마."
"겨우 20루블?"
"한 달에 50루블도 못받는 공장 아이들도 많아.
나는 그들도 와서 들을 수 있게 하고 싶어."
빅토르는 자신의 불행했던 시절의 일을 늘 잊지
않았다. 아이젠스피스는 얼른 그의 마음을 읽었다.
그의 결심을 돌려놓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알았어. 공연허가를 내가 따내지. 그런데 그렇게
입장료가 싸면 너도 나도 벌떼 같이 모여들 텐데,
웬만한 장소 가지고는 안될 걸."
"어디가 좋을까?"
"모스크바 대학 운동장이면 좋을 텐데!"
아이젠스피스는 '붉은광장'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그러나 그곳은 정부의 집회가 아닌
일반인의 집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붉은광장을 입에
올리려다 아이젠스피스는 생각을 고쳐먹고 얼른
모스크바 대학 운동장을 거론하고 나왔다. 가능하다면
전모스코비치들을 다 붉은광장에 모아놓고 연주회를
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잠시, 인파에 뒤덮인
붉은광장의 장관이 머리 속에 그림처럼 그려진 채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 모스크바 대학 운동장이라면 웬만한 인원은
수용가능할 텐데!"
"내가 알아볼게. 비쨔는 공연 스케줄이나 짜도록
해."
며칠 뛰어다니던 아이젠스피스는 빅토르를 찾아와
힘없이 말했다.
"고고한 상아탑에서는 대중음악을 수용할 수 없대."
그는 낙담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 테지!"
"운동장 사용 결정권이 학생들의 손에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어. 하지만 젊은이들을 세상 망칠
존재로 아는 늙다리 안경잡이는 고개가 떨어질 정도로
머리를 좌우로 크게 젓잖아."
"할 수 없지. 허면?"
"루즈니끼 스타디움을 빌면 어떨까?"
"루즈니끼 스타디움을?"
빅토르는 눈을 커다랗게 키워 아이젠스피스를
쳐다봤다.
"루즈니끼?"
그때까지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나타샤도 놀란 모양이었다. 당치않다는 듯
동그란 눈으로 빅토르를 쳐다봤다. 루즈니끼라면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모스크바 올림픽 주경기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축구 경기라면 모르려니와 우리 KINO 연주회를?"
나타샤는 도리질을 했다.
"모르는 소리. 지금 KINO 인기가 축구에 뒤떨어지는
줄 알아. 두고보라지, 루즈니끼라야 될 테니까."
"창피나 사는 거 아냐?"
"내게 맡겨."
아이젠스피스는 큰소리를 쳤다. 그는 붉은광장
정도를 그리고 있노라 말하려다 그만 두었다.
그의 큰소리는 큰소리에 그치지 않았다. 장담했던
대로 아이젠스피스는 루즈니끼 스타디움의 사용허가를
마침내 받아냈다.
막상 루즈니끼 스타디움 사용허가를 받아냈다는
말을 들은 빅토르는 덜컥 겁이 났다. 만약 청중들이
외면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이젠스피스를 볼
때마다, 지금이라도 루즈니끼를 포기하고 작은 곳으로
장소를 변경하자는 말이 입술까지 기어나오고는 했다.
그러나 어찌나 자신만만한지 아이젠스피스 앞에서
그 말을 입 밖에 내놓을 수가 없었다. 빅토르는
아이젠스피스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어쩌지 못하고
그가 하는 대로 지켜보며 불안한 가운데 연주
준비만을 묵묵히 해나갔다.
아이젠스피스는 KINO 그룹의 바슬라쵸브 추모
음악회 공연 팜플렛을 제작해 그것을 각 신문사와
잡지사,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국에 분주히 돌렸다.
신문마다 그들의 공연소식이 게재되었고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에서도 KINO 그룹의 추모공연에 대한
소식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준비는 그렇듯 마력높은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달리듯 척척 잘 진행되어갔다. 그러나 막상 입장권
판매를 시작하자 빅토르의 불안감이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표를 발매한 지 열흘 가량 지났는데도 매표
실적이 아주 부진했다. 공연을 일주일 가량 남겨둔
6월 15일이 되었는데도 팔린 표는 겨우 수천 장에
불과했다. 하루하루 빅토르의 속은 석탄처럼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6월은 여름이었다. 학교들은 방학에 들어가고
공장이며 회사에서는 휴가철을 맞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어느 철보다 구경꾼이 많을 터였다. 그런데
표가 나가지 않다니, 역시 KINO 그룹의 인기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못한 것일까. 걸핏하면
쏟아지는 비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빅토르는 물론 아이젠스피스도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공연을 이틀 앞둔 시점까지 표는 거의
요지부동이었다. 무정하게도 며칠 사이 비가 더
극성스럽게 뿌려댔다. 하루를 더 지나자 빅토르는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역시 나는 멀었어. 우리 KINO는 아직 먼 거야. 작은
성공에 도취되었던 나날들이 돌이켜 생각나 그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빅토르는 죽고 싶은 충동까지
일어났다. 내, 여기서 피를 토하고 죽어야 하는가.
최후 점검을 해본 결과 표는 겨우 5천 장 가량
판매된 것으로 나타났다. 10만을 수용할 수 있는
대운동장에 겨우 5천 명이라니. 그러나 일단 공연은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는 나타샤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빅토르는 참담한 패배감에 사로잡혀
휘청거리는 자신을 추스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적은 맑은 하늘과 햇빛과 함께 왔다.
지난 보름 가까이 한 차례도 자신을 열어 보여주지
않던 하늘이 구름을 열고 파아란 제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연을 하루 앞둔 정오 무렵의 일이었다.
바람도 조금씩 숨을 죽여가고 날씨는 쾌청, 사람들
마음을 상쾌하게 씻어주었다.
그런 쾌청한 날씨 때문이었을까. KINO 그룹
연주회의 입장권을 파는 매표소마다 그것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 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꾸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났다. 표를 사고
돌아가는 사람보다 표를 사려고 와서 줄을 서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아이젠스피스는 매표 현황을 체크할 수가
없었다. 어찌나 많이 팔려나갔던지 남은 표를
헤아리는 편이 체크가 더 쉬웠다. 매표 행렬은
다음날까지 계속되었고 마침내 매진이라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빅토르는 지옥에라도 갔다온 기분이었다. 아, 만약
청중이 끝까지 외면했다면 그 무대에서 나는 노래하고
연주하다 죽으리라 작정했는데....... 빅토르는 아직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 어떤 존재의 강한 힘을 느꼈다.
루즈니끼 올림픽 스타디움의 성화대에는 그것이
세워진 이래 네 번째로 점화되었다. 첫번째는
전소비에트 체육대회가 열린 때였고, 두번째는 세계
청년학생체육대회 개최 때였으며, 세번째는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 점화된 이래 오늘 KINO 그룹의
연주회 때 네번째로 점화된 것이었다.
오후 여섯 시,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일곱
시를 넘기자 운동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손에 손에
촛불을 켜들기 시작했다. 온 운동장이 촛불의 바다를
이루어갔다. 촛불은 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장미처럼
현란하게 피어났다.
KINO의 연주와 노래와 함께 춤추는 촛불은
장관이었다. KINO의 연주에 맞춰 촛불은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 광경은 숭고한 종교의식처럼
엄숙하고 감동적이었다.
KINO는 '혈액형' '마지막 영웅' '전설' 등에 이어
'변화'를 힘차게 연주했다. 루즈니끼 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청중들은 촛불을 흔들며, 혹은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며, 혹은 검지와 새끼지를 세운 손을 흔들며 함께
노래했다. 그들의 장중한 합창소리는 루즈니끼
스타디움를 벗어나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영문 모르고
길을 가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그 장중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열기와 함께 녹색 유리가
불꽃과 함께 연기가
달력의 그물로부터 날들을 잡아뺏는다
빨간 태양은 타오른다
날들도 함께 타오른다
활활 타오르는 도시에 그늘이 내린다
우리의 가슴은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의 눈은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의 웃음에, 우리의 눈물에, 그리고 우리의
맥박에
변화! 우리는 변화를 기다린다
우리의 심장은 변화를 갈망한다. 우리는 자신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청중들은
일제히 빅트르의 노래에 자기들의 음성을 보태
노래했다. 꽃처럼 흔들리는 촛불, 스타디움을 울리는
장엄한 노래....... 신의 제전이 이처럼 엄숙하고
신비할까.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빅토르는 청중을 향해 몇 번이나 그렇게 인사했다.
"여러분, 이제 저의 새노래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이 노래는 곧 출반할 새
앨범에 수록된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동안 청중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하얀 눈 회색 얼음
갈라터진 땅에 조각난 담요같이
도시는 거리에 목을 조이고 있다
도시 위에 구름이 흐르고 있다
하늘의 빛을 가리면서
도시 위에는 또 노란 매연
도시는 2천 년이라는 시간을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아래에서 자라왔다
2천 년 동안 전쟁, 이유없는 전쟁
전쟁은 젊은이들의 것
주름살을 방지하는 약, 빨간 피
한 시간 뒤엔 땅으로 화한다
두 시간 뒤엔 꽃과 풀이 자란다
세 시간 뒤엔 또다시 살아난다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빛을 받아
땅은 따스하게 된다
이는 항상 이러했음을 우린 알고 있다
운명은 다른 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더 사랑한다
젊어서 죽을 사람들을
그는 예나 아니오라는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직위와 이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별까지 올라갈 수 있고
그것을 꿈으로 여기지 않는다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빛을 받아 타서 스러진다
50. 대통령의 미소
정치란 아주 크고 넓은 개념입니다. 저는 우리
소비에트에서 가장 뚜렷하게 작용하는 것은 정치적인
활력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치적인 체질을
타고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인민을 지도하고 보다
향상된 생활을 선사할 능력 또한 없습니다.
언젠가 모스크바의 '진리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빅토르는 정치에 대해 위와 같이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에게는 정치적인 관심도 정치지향적인 성향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 말하고는 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게서 정치적인 요소를 자주
찾아내려 애쓰고 또 거론하였다. 특히
페레스트로이카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숫제 '당신은 어떤 정치적 내용의
노래를 부르는가?'하고 빅토르에게 묻기도 했다. 그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든 노래가 다 정치적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가?'라는 매우 포괄적이고
애매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뻬레멘'이라는 노래는 바로 페레스트로이카를
노래한 것이 아닌가?
어떤 사람은 또 그렇게 묻기도 했다. 그 사람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창조하려면 언제나 기존의
낡은 가치와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자면 자연
기존의 것과 대립하게 되고 갈등을 겪게 되지요.
그것은 어쩌면 정치적 양상을 띠었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저는 노래의 낡은 틀을 깨부수기
위해 노력해왔을 뿐입니다,라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물론 그 사람은 그 대답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듯 빅토르는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 흔적이 생애 곳곳에 자주 눈에 띈다. 그것은
록 음악이나 다른 예술작품들이 관계기관의 예의
주시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도피적 성향을 띤 답변이
아니었을까 여기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노래가 당국의 심의를 받는 과정에
반혁명적, 반국가적 낙인이 찍혀 레닌그라드 록
페스티벌에 출연을 할 수 없을 뻔한 위기에 처해
번민하고 곤욕을 치른 적도 있지 않았던가.
여기서 빅토르가 가진 몇 안되는 인터뷰를 통해
그의 노래와 인생에 관한 견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소비에트에서 가장 발행부수가 많고 영향력있는
'아르구멘띠 이 파크트(논거와 사실)'와의 인터뷰를
한 부분 그대로 옮겨본다.
Q.요즘 소비에트 록 음악계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노랫말이 아니라 리듬과 멜로디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뽀프 미하니찌까 그룹의 리더 세르게이
꾸레힌이 그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A.저는 노랫말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노랫말이 음악을 압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Q.록 음악에 대해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록은
유럽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사실을 늘 지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A.서양에서 온 것은 형식뿐입니다. 전자 기타,
드럼, 스타일 등등. 형식을 차용했다고 하여 음악의
전부를 차용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록은
젊은이의 직관이 파악하는 현장성과 사실성을 담은
살아있는 음악이라 생각합니다.
Q.요즘 젊은이들을 주제로 한다면 어떤 노래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A.저에게는 노래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 즉 필요나
의무감에서 지은 노래는 없습니다. 저에게 어떤
문제나 고민이 생겼을 때 노래를 지었습니다. 만약
필요에 의해 의무적으로 짓는다면 진정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절실한 내적 충동이나 욕구가
없으면 저는 노래를 짓지 못합니다.
Q.레닌그라드의 '스메나'신문에서 당신을 88년의
가장 우수한 록 시인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록 시와
일반 시와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A.저는 용어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반
시와 저의 시가 다른 점은 저의 시는 음악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지요. 만약 음악에 싣지 않으면
저의 시는 너무나 많은 뉘앙스와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Q.록이 실제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A.대체로 록은 사회적으로 보면 그 영향력이 매우
강합니다. 록은 역동적이고 진취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성향의 음악입니다. 록을 통해 젊은이들은 새로운
가치창출의 비전을 느낍니다. 만약 우리 록
뮤지션들에게 신문이나 방송 등에서 우리의 관점과
견해를 밝힐 기회를 더 많이 주었더라면 저의
노랫말과 음악은 더 적극성을 띠었을 것입니다.
Q.지금 당신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A.제 마음 속의 자유를 오래 간직하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듯 빅토르를
정치적 시각으로 바라보며 이해하려는 것은 온당치
않은 태도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빅토르는 어느날 예기치 않았던 정치의 핵심에 가
닿게 되었다.
"여보세요, 빅토르 최씨지요?"
"예, 그렇습니다만."
"여기는 오스땅뀌노(국영 TV방송)입니다."
"오스땅뀌노?"
"저희 총재님께서 한번 만나자십니다."
빅토르는 순간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TV
출연관계로 만나자는 것인가. 그렇다면
실무자들에게서 직접 전화가 왔을 것이다.
"KINO 그룹과 라시드 누그마노프 감독도 함께
오십시오."
"어디로 가야 합니까?"
"아, 내 정신 좀 보게. 내일 오후 다섯 시에
아파트로 차를 보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따로
연락하지 않겠습니다. 빅토르 씨께서 연락하여 시간에
맞춰 아파트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모스크바에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리 가스빠란은 레닌그라드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루 전에 연락드리는 것 아닙니까. 가급적
KINO 그룹 멤버들 모두와 함께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피치못할 사정이 있는 사람은 어쩔 수
없겠지요. 그렇더라도 빅토르 씨와 라시드 씨는
빠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상대방은 매우 강압적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빅토르는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마치 수하를 부리는 듯 강압적인 어투가 싫었다.
이쪽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만나자는
강제적인 전언도 기분을 거슬렸다. 오스땅뀌노
총재라면, 당 서기와 정부 대변인을 겸하고 있는
야코프레프를 두고 말하는 것일 것이었다. 물론
그렇듯 높은 직위의 인사니까, 이미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공인으로서 신뢰를 하고 그 부름에 따라야
하리라.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무슨 은총이나
베푸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차를 보내겠다니, 빅토르는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구정물에라도 빠진 그런 더러운 기분인들 어쩌랴.
빅토르는 라시드와 구리야노프, 가스빠란, 낀체프
등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연락을 받은 유리
가스빠란은 조안나 스팅그레이와 함께 그날 밤
모스크바로 날아왔다. 그들은 마리안나가 모아둔 세
자루의 팬레터를 낑낑대며 날라다 모스크바의
빅토르에게로 전해주었다. 팬레터는 모스크바의 프로
스튜디오로도 많이 날아들었으나 레닌그라드로
날아드는 것이 더 많았다. 빅토르와 나타샤는 밤
늦도록 팬레터를 일일이 읽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따로 모아 서로 나눠 읽었다. 빅토르는 팬레터를
읽는 순간보다 행복한 때가 없었다.
다음날 오후, 과연 다섯 시가 되자 빅토르가 사는
아파트 앞에 검은 리무진이 한 대 다가와 정차하였다.
리무진에서 내린 40대의 좀 뚱뚱한 사내가 계단을
올라와 빅토르의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고 문을 열자
그 남자는 정중한 음성으로 오스땅뀌노에서 왔노라고
말했다.
"총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빅토르, 라시드, 구리야노프, 낀체프, 가스빠란
등은 사내의 뒤를 따라 육중해 보이는 검은 리무진에
승차하였다. 리무진은 제르진스키 거리를 미끄러지듯
달려갔다. 리무진은 역사박물관 옆을 끼고 기다란
벽을 따라 나아가다 그 벽이 끝나는 지점에서
정차했다. 리무진 기사는 먼저 내려 도어를
열어주었다. 그때 말없이 리무진으로 다가온
수염자국이 새파란 사내가 팔을 들어 일행에게
출입구를 가리켰다. 출입구는 정복에 집총을 한
군인이 지키고 있었다.
라시드와 빅토르는 순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곳은 방송국 건물이 아니었다. 붉은광장 옆
역사박물관을 끼고 왔으므로 그곳은 크렘린에 딸린
건물로 보였다.
수염자국이 파란 사내의 안내로 그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두 개 오르고 몇 개의 회랑을 지나
그들은 천정이 매우 높은 커다란 방으로 안내되었다.
일행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나같이 긴장한
표정으로 사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눈치들이었다.
세상 일에 달통한 듯 매사를 능수능란하게 처리하고
대처하던 라시드도 꼭 꿀먹은 벙어리처럼 큰눈을
디룩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그들을 안내해온 사내는 그들을 둥근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게 했다. 테이블 위에는 음료수와 과자가
놓여 있었다. 그들이 의자에 앉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오스땅뀌노 총재가 뚱뚱한 몸을 약간
뒤뚱거리며 나타났다. 그는 조국전쟁 때 부상을 입고
다리를 절단해 의족을 하고 다닌다고 알려져 있었다.
볼이 터져나갈 듯 살이 찌고 길게 뻗쳐오른 눈썹은
이마를 덮고 있었다. 그는 TV를 통해 낯익은
야코프레프 총재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일행은 갑자기 불이라도 뒤집어쓴
듯 화들짝 놀라며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행의 얼굴은 모두 일순 상기되었고 육신은 뻗뻗하게
굳어지는 것 같았다. 둥근 얼굴, 시원스레 벗겨진
이마, 그 이마에 어떤 지도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자국이 선명하고 어깨가 쩍 벌어진 다부진 몸매,
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야코프레프 총재와 약간 사이를 두고 걸어오고 있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자, 앉으세요. 내가 여러분들을 진작 한번 만날
생각이었는데,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어요."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테이블을 돌며 일행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목소리에 탄력이 있었고 어떤
에너지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짧은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빅토르는 내심 크게
감동했다. 저렇듯 진심을 보여주는 말투와 밝은
표정이 지도자적 길을 걷게 하는 것일까. 일행은 작은
소리를 내는 것에도 신경을 쓰며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다들 편하게 생각하세요. 나도 여러분을 사랑하는
팬 중의 한 사람이니까."
대통령은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어보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웃음에 따라 웃거나 자세를 편안하게
하지 못했다.
"라이사와 나는 작년에 이글라를 감상했어요.
그리고 또 우리 부부는 '뻬레멘'과 '그루빠 끄로위'도
즐겨 부른다오."
빅토르는 그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였다. 오랜동안
묶여있던 아나톨리 리바코프의 '아르바트의 아이들'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자 '적의 여물통에서 빌어먹는
돼지새끼'라는 굴욕적인 꼬리표와 함께 출판을
엄금했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와
나보코프와 솔제니친의 소설들을 해금하여 출판하게
하고, 그리고 진보적이며 자유주의적 성향이 짙은
쉰기즈 아이트마토프의 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대통령이 아니던가.
"감사합니다."
빅토르는 용기를 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순간 그는
젖먹던 힘까지 짜내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는 오히려 내가 해야 하겠지. 빅토르의 노래가
우리 사회를 개혁하려는 내 의지에 얼마나 힘을
보태고 있는지 나는 잘 인식하고 있어요. 그런데
까레이츠라고 했던가?"
"예, 할아버지 때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와 살게
되었다 합니다."
"우리 고향 스타프로폴 지방에도 고려인들이
많아요. 그들은 농사짓는 기술이 어찌나 뛰어나는지
다른 농장에 비해 수확이 두 배는 되더군."
빅토르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입을 통해 고려인의
칭찬을 듣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고려인들이 경영하는 농장에서 납품하는
알곡이 가장 질이 좋기도 했고. 스타프로폴의 지방 당
책임자로 있을 때 내가 고려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빅토르는 저도 모르게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순간 빅토르는 우즈토베의 김병화
꼴호즈에 대한 레프 삼촌의 말이 상기되었다. 그리고
후르시초프 집권 이래, 소비에트 전공화국 당
제1서기는 반드시 들러야 하는 견학 코스로 정해져
있다는 뽈리따젤 꼴호즈의 황만금 회장의 이야기도
떠올랐다. 고려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니, 그
구체적인 사실을 더 알고 싶었다. 그러나 빅토르는
그곳을 떠날 때까지 끝내 그것을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변화를 노래하는 KINO 그룹을
좋아한다니, 앞으로 우리 소비에트 사회가 긍정적으로
발전하게 될 것으로 보이지요?"
고르바초프는 야코프레프 총재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저는 KINO의 노래가 프랑스나 영국,
아메리카에까지 불려지는 것이 자랑습니다."
"그게 우리 젊은이들의 가능성 아니겠습니까.
텔레비전에서 가급적 KINO 연주를 자주 방영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 방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왕 KINO 그룹을 페레스트로이카의
전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는데......."
"아, 그랬었지요. 페레스트로이카의 전령! 그것 참
좋은 말입니다."
그런 말을 주고 받는 사이 테이블 위에는 식사가
준비되었다.
키예프식의 비프 스트로가노프와 바이칼 호에서
잡힌다는 오무리 생선절임과 흘레쁘와 끄바스 등과
백포도주 한잔씩이 나왔다.
식사를 하는 동안 주인과 손님들 사이에 영화,
음악, 시, 회화 등 예술 전반에 관한 화제들이
끊임없이 오고갔다. 백포도주잔을 든 빅토르는 5년 전
엄격하게 시행되었던 금주정책이 연상되었다. 지금도
그 정책은 변함이 없었으나 단속의 고삐가 헐거워져
술마시는 사람으로서는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않는
편이었다.
"아, 그리고 총재, 빅토르와 KINO 그룹의 필름을
제작한다 하지 않았소?"
"그렇지 않아도 내부적으로 진행하고 있던
중입니다. 곧 당사자들과 의논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말이 나왔으니, 여기서 끝내지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약 일주일 전이었다. 대통령과 야코프레프 총재가
독대한 자리에서 우연히 KINO 그룹의 노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그때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모르지만, 대통령과 야코프레프 총재 사이에 KINO
그룹을 페레스트로이카의 전령으로 삼자는 이야기가
오고갔었다. 그 이야기는 텔레비전을 통해 KINO
그룹의 노래와 연주를 대대적으로 방영하자는
이야기로 옮겨갔고, 그리고 KINO 그룹 필름을 새롭게
제작하여 방영하자는 이야기까지로 발전했었다. 지난
5년 동안 대통령은 글라스노스트를 활성화하고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일관성 있게 펼쳐왔으나
인민들은 마치 독을 마신 것처럼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를 않았다. 그러므로 짧은 기간에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전소비에트를 들끓게 하는 KINO 그룹 활동을
어떻게 페레스트로이카 운동 전개에 이용할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게 된 것이었다. 야코프레프 총재는
이왕 KINO 그룹도 자유와 개혁과 변화를
노래해왔으므로 그것을 이용하면 페레스트로이카를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다 알다시피 대통령께서는, 우리 소비에트 인민의
변화없이 국가발전이 없다는 것을 늘
강조해오셨습니다. 그런데 지난 수십 년 동안
계속되어온 관행을 깨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려니 그
실행이 몹시 어렵습니다."
야코프레프 총재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혁정책
입안에 늘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안드로포프 서기장 재임시 서기국에
재직중이던 고르바초프가 미주 여행 때 캐나다에
들렀을 때 당시 캐나다 주재 소비에트 대사로 나가
있던 야코프레프와 만나 며칠밤을 새며 소비에트
장래에 대한 진지한 의견을 나누었고, 그때의 일을
인연으로 고르바초프는 권좌에 오르자 야코프레프를
중용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세인들에게는 알려져
있었다.
"대통령께서는 정말 우리 소비에트 인민들에게
절실한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발전의 길, 구원의
길, 소망의 길을 제시해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손에 쥐어주려고
노력해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워낙 오랜 관행에
굳어 있는 인민들의 의식이 잘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KINO 여러분들도 비슷한
시기부터 우리 소비에트 인민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노래하며 외쳐왔습니다. 우리는 강해져야 한다,
우리에게 강한 현실을 달라, 열쇠가 맞지 않으면
어깨로 문을 치고라도 들어가야 한다고 노래해
왔습니다. 전쟁은 주름살을 없애는 약이라고도
했습니다. 운명은 젊어서 죽을 사람을 더
사랑한다고도 했습니다. 이 모든 외침이 우리
인민들에게 던져진 개혁을 위한, 참다운 삶과 자유를
위한 것들로 들렸습니다."
육중한 야코프레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말들은 묘한 열기같은 걸 띠고 듣는 사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빅토르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몇 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런 야코프레프 같은 고위인사가
보잘것없는 우리 노래를 저렇게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우리 오스땅뀌노의 능력을 다
기울여 KINO 그룹을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야코프레프는 빅토르를 쳐다보았다. 빅토르는 그
눈빛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기회만 주신다면,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KINO 그룹은
빅토르가 가장 잘 알 터이므로 대본은 빅토르가 쓰고
연출은 라시드가 맡고 그리고 제작은 우리
오스땅뀌노에서 담당하여, 일을 빨리 진행하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번에는 라시드 누그마노프를 바라봤다.
"좋습니다. 최선을 다해 좋은 필름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시드는 차분하게 대답하고 결의를 굳히기라도
하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좋습니다. 그럼 며칠 내로 우리 오스땅뀌노의
제작책임자를 여러분과 만나도록 할 테니 잘 의논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라시드와 빅토르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 일이 아니더라도, 만약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우리 총재를 찾아와 의논하세요. 가능한 한
문제를 긍정적으로 해결해 드릴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세계가 우리 소비에트의 예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수준 높은 작품을 창작해
주세요."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대통령이 나직나직한 음성으로 여러 사람을
둘러보며 당부하듯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번에도 라시드와 빅토르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그들의 식사는 화기애애하게 계속되었다.
차이를 마시는 것으로 식사를 다 끝낸 일행은
드디어 일어날 차례를 맞았다.
"우리, 곧 또 만나도록 합시다."
대통령과 오스땅뀌노 총재는 그들을 입구까지
배웅해 주었다.
그곳에 들어갈 때는 얼음처럼 굳어졌던 일행은
작별인사를 나누고 그곳을 나올 때는 모두 기분이
고양되어 약간씩 의기양양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빅토르와 KINO 그룹, 그리고 라시드 누그마노프는
국가가 인정해 주는 예술가로 성장한 것이었다.
51. 영원한 작별
"무슨 일이 이렇게 한꺼번에 몰아닥치는지 정신을
못차리겠어."
전화선 저쪽의 라시드의 표정이 역력히 그려진다.
늘 여유만만하고 태연자약하던 그의 얼굴에 미소와
근심스런 표정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당장 모스크바로
출발하겠다지. 도쿄에서는 이미 모스크바로 출발했대.
게다가 지난번 고르비가 한국에 잠시 기착한 적이
있었지. 서울에서도 공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어."
"서울에서?"
빅토르는 순간 무엇인가 가슴을 예리한 면도날 같은
것이 북 긋고 지나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 비쨔 마음을 알기 때문에 아이젠스피스한테,
일단 승낙을 하고 일정을 잡으라고 해뒀어."
"서울 초청을 승낙했단 말이지?"
빅토르는 자신의 음성이 떨리고 있음을 감지했다.
별안간 가슴이 낯선 공기로 터질듯 가득 채워진
느낌을 동시에 느꼈다.
"아이젠스피스도 비쨔가 원하리라 생각하고 한국
공연을 시월쯤 잡을까 하더군."
"가능하다면 다른 공연을 미루더라도 서울 공연을
꼭 하고 싶어."
빅토르는 날아갈 듯 경쾌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커튼이라도 축 드리워진 듯 마음이
어두워졌다. 화선지에 먹물이 번져가듯 그의 머리
속에는 어둠과 리술 아저씨의 얼굴이 가득 채워졌다.
뒤이어 스케줄에 밀려 꼬마로보 해변에 나가본지도
오래되었다는 자책이 가슴을 찌리하게 훑고 지나갔다.
꼬마로보 해변이 떠오르자 이어 자기 육신을 화장해
재를 발틱 해에 뿌려달랬다는 리술 아저씨의 그
부질없는 바람이 우울하게 연상되었다. 빅토르는
갑자기 마음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아무리 바다에
뿌린다 해도 자신의 뼛가루가 대서양과 인도양과 혹은
지중해를 지나 고향의 바닷가에 닿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리술 아저씬들 왜 몰랐으랴.
크질오르다의 할아버지의 혼백은 장차 훨훨 날아
고향으로 돌아가기나 할 것인가. 멀리 기름진 대지의
연해주에서 사막과 소금의 땅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 당해 신산의 한 살이를 산 그의 뼈는 마침내
중앙아시아의 갈색빛 사막에 묻히리라. 중앙아시아의
갈색빛 사막에 누운 그의 뼈는 고향의 하늘이라도
꿈꿀 수 있을 것인지. 그들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갈 수 없었던 땅을 나는 갈 수 있게 되다니.
"그리고 어제 오스땅뀌노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었어."
라시드의 말에 긴장감이 문득 묻어났다.
오스땅뀌노라는 말에 빅토르도 불현듯 정신이 반짝
드는 느낌이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야코프레프 총재가 추진하는 작업이 아니던가.
빅토르는 자기도 모르게 송수화기를 고쳐 잡았다.
"그래 어떻게 했어요?"
"어떻게 하기는, 비쨔가 리가에 가 있으니 곧
연락해서 들어가도록 하겠다고 했지. 그래 그쪽 일은
다 끝나가?"
"글쎄, 바닷가와 호수를 휘젓고 다니며 경치 좋은
곳을 헌팅하는 중이에요. 아, 몇 곡 찍기도 했군."
아득히 펼쳐진 하얀 모래사장과 그늘 짙은 소나무
숲의 유르마라 해변은 매번 잘왔다는 상쾌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꿈속에서나 그려볼 수 있을 신비한
에메랄드빛 바다, 쉴새없이 보석가루를 뿌리는 눈부신
태양, 물살을 일으키며 육지를 향해 달려오는 하얀
파도, 먼 항구를 향해 수평선으로 꼬리를 감추는
선박, 그런 것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으면 영영 떠나고
싶지 않았다.
백사청송의 유르마라 해변에서 이틀 동안 작업을
했었다. 유글라스 호수와 키시체제르스 호수를
돌아다니며 하늘을 향해 직립해 있는 붉은 소나무
숲과 울창한 마로니에 숲으로 이루어진 공원에서도
많은 필름을 소비했었다.
"우찌첼리도 여간 욕심이 많아야지. 좀 시달려야 할
거야."
빅토르는 우찌첼리 감독의 뮤직비디오 촬영과
여름휴가를 겸해 나타샤와 함께 리가를 찾은
것이었다.
"한 이틀 하면 되겠지요."
"이틀, 우찌첼리 극성에 이틀로 될까?"
"모스크바 공연이 18일로 잡혀 있거던요."
"아, 그렇지. 아이젠스피스가 그러더군."
"게다가 라시드가 모스크바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제가 휴가가 즐겁겠어요"
"오스땅뀌노에서는 바쁜 눈치였어. 제출한 대본이
통과된 모양이야."
"그렇다면 바로 작업에 들어가면 되겠네요."
"그렇지. 그쪽 말은 그랬어."
"우찌첼리도 여기서 다 못 찍은 것은 모스크바로
돌아가서 찍겠지요. 꼭 필름 쪽으로만 본다면
모스크바 근교 호수도 무난할 테고......."
"그렇다면 곧 만나게 되겠군."
빅토르는 전화를 끊었다. 정말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들이 닥치는 느낌이었다. 유명해지기 전 그
주체할 수 없이 지루하던 시간들, 사람을
질식시키거나 매몰시켜 버릴 것처럼 범람하던
시간들이 돌이켜 생각났다. 그 견딜 수 없던 시간들이
달콤하게 그리워졌다. 다시 그런 한가한 시간으로
되돌려질 것이 두려우면서도 대책없던 그 시기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전화 왔어."
빅토르는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했었다. 나타샤가
송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잠자리 날개 같은 모슬린
잠옷 속의 나타샤의 풍만한 가슴이 내비쳤다.
"비쨔, 놀랄 일이 있어."
여보세요, 하던 빅토르는 급히 송수화기를 귀에서
떼어냈다. 상대방의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프티차 공연 있잖아?"
아이젠스피스였다.
"프티차 공연이 어째서요?"
"며칠 전 내가 입장권이 매진됐다고 했었잖아?"
"그랬지요?"
아이젠스피스는 이틀 전 전화를 걸어 프티차 공연의
입장권이 다 팔려 나갔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었다.
이번 입장권은 한 장당 3백 루블이라는 고액을
내걸었었다. 아이젠스피스의 주장을 끝내 꺾지 못해
3백 루블을 내걸기는 했으나 빅토르는 내심
불안했었다. 그것이 다 팔리지 않는다면 무슨
창피겠는가. 3백 루블의 입장료라면 볼쇼이
오케스트라도 감히 내걸지 못할 고액이었다.
보일러실의 화부로 일할 때 빅토르가 받았던 급료가
50루블이었다. 하룻밤 KINO 공연의 입장료를 그
급료의 여섯 배나 받다니. 그러나 빅토르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입장권은 발매 일주일만에 다
팔려나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암표가 돌아다니고 있어."
"암표가?"
"그래, 암표도 암표 나름이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프티차 입장권 한 장당 5천 루블로 치솟았다는
말이 들리더니 하룻밤 자고나자 1만 루블로 뛰잖아.
그리고 오늘은 2만 루블까지 뛰었대."
"설마?"
"나도 믿어지지가 않아. 여기 저기 여러 군데
알아봤는데, 2만 루블에도 표를 구하지 못해
안달이라는군."
빅토르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설마!"
"사람들이 비쨔한테 단단히 미쳤나봐."
그래 사람들이 미쳤을 테지. 바른 정신 가지고서야
록 음악 공연장 입장권 한 장에 2만 루블이나
지불하려 들겠는가. 빅토르는 아이젠스피스가
무엇인가 계속 지껄이고 있는 데도 전화를 끊고
말았다. 그는 등받이에 체중을 싣고 다리를 뻗었다.
까닭 모르게 외로움과 슬픔이 온몸으로 밀려들었다.
"무슨 일이래?"
기뻐해야 마땅한 소식을 접한 빅토르는 그러나
도리어 매우 슬픈 눈으로 나타샤를 쳐다봤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 무슨 나쁜 소식이야?"
빅토르는 도리질을 했다.
"암표 뭐 어떻고 하더니?"
빅토르는 이번에도 역시 도리질을 하였다.
까닭 모를 외로움과 슬픔은 갈수록 그 농도가
짙어졌다. 이름 모를 혹성에라도 불시착한 우주의
미아처럼 막막한 심경이 되었다.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외로움의 으뜸 단골을 꼽으라면 그를 제외하고
누굴 꼽을 것인가. 외로움보다 그와 친숙한 정서가
달리 없었다. 그는 외로움이라는 것이 여러 종류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한 빅토르였으나
오늘 갑자기 방문한 외로움은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격렬한 것이었다. 이러한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이전의 외로움이 물기가 촉촉한 것이었다면 이번의
외로움은 모래먼지가 풀풀 날리는 팍팍한 것이었다.
까닭은 알 수 없으나 갑자기 존 레논이 그의 뇌리에
새겨졌다. 왜 그는 일찍 죽었는가.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전두엽(前頭葉)에 은신시킨 채 살아간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는 생각과 가장 가까이 있는 그것을
그냥 손쉽게 영접한 것일까. 서른 살을 믿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그는 결국 자기 말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것인가. 노래는 현재를
위무하고 미래를 약속하는 것인데. 노래는 모든
속박을 풀어주고 자유를 향유하게 하는 것인데.
노래는 사랑을 이루고 상승의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인데. 존 레논은 빅토르에게 많은 것을 약속했었다.
그의 미래와 구원과 사랑과 자유를. 그 어느 것
하나 손에 쥔 것 같지도 않은데, 그것을 쟁취하는
수단도 방법도 다 암시하지 않은 채 그는 황황히 이
세상으로부터 그의 목숨을 거둬가고 말았다. 죽은 지
몇 달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 존 레논의 죽음이 그를
얼마나 슬프게 만들었던가.
눈물을 흘리면서 켄트지 위에다 무수히 많은 존
레논의 얼굴을 그리다가 어머니에게 발각되었을 때
얼마나 민망스러웠던가? 책상 위에 수북히 쌓인 존
레논과 비틀즈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머니는
무엇이라 했던가.
"넌 너 자신의 일로 우는 일은 없더니, 누구 일로
그렇게 눈물을 다 흘리고 있냐?"
그의 절망을 알지 못한 어머니는 약간은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그 사람들 중 누가 죽은 모양이구나?"
빅토르가 대답이 없자 어머니는 다시 물었다.
"아뇨."
빅토르는 자신의 속을 어머니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엉뚱하게 부정했다.
"그렇다면 네 마음 속의 누군가를 죽인 게로구나?"
빅토르는 어머니를 쳐다봤다. 마음 속의 누군가를
죽인다! 그렇다고 대답하려다 말았다. 그 다음에
날아올 질문이 번거로울 것이란 생각이 얼른 그
대답을 나꿔챘기 때문이었다.
"눈물은 마음의 상처를 씻는 약이라 했다."
대꾸가 없자 어머니는 혼자 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했던지 방을 나갔다. 그래 마음 속의
누군가를 죽였다. 내가 죽이지 않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으니 장차 자연스레 그는 내 마음 속에서 지워져
나갈까. 아니다. 빅토르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생활이나 정신 속에 늘 그가 동행할 것이라는 예감을
느꼈다. 또 한 장의 존 레논을 그린 그는 다음에 그릴
것을 남겨둔다는 기분으로 그날의 그림은 마쳤다.
그날 이후, 존 레논의 초상을 몇 장이나 더
그렸던가. 그의 죽음을 안 날 눈물을 흘리면서 속으로
맹세했던 결심은 어디로 간 것인지, 그 이후에 그린
것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그가 죽은 지 다섯
해 동안에 열 장의 존 레논도 그리지 않았다니.......
존 레논의 뒤를 이어 예세닌이 떠올랐다.
서른 살, 아직 그가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일을
남겨둔 채 왜 그는 세상을 스스로 떠났던 것일까.
'인생에서 죽는다는 것은 새로울게 없다. 하지만
산다는 것 또한 무엇이 새롭겠는가.' 그는 그렇게
인생을 꿰뚫어 알았기 때문에 세상을 떠난 것일까.
슬픈 이별로 마감한 이사도라 덩컨과의 비극적인 사랑
때문이었던가.
"안 잘 거예요?"
호텔의 창문을 통해 바라보이는 밤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 반짝이고 있었다. 빅토르의 시선은 그
밤하늘의 별들에 닿아 있었다. 아니 그의 눈은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먼저 자."
"어제도 안 잤잖아."
"아냐, 한 시간도 더 잤는 걸."
"한 시간 가지고 돼?"
"알았어. 먼저 자."
모슬린 잠옷 속에 대리석처럼 미끈한 다리가
보였다. 나타샤는 아무 말없이 침대로 가 누웠다.
빅토르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 젊은 사자 짐 모리슨을
만난다. '아버지...... 왜 아들아...... 난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어머니...... 난 당신을......
으으으으윽...... 하고 싶어요.' 짐 모리슨은 그의
노래 '종막(The End)'을 부르며 빅토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노래의 끝에 후렴처럼 '나는 죽지
않았어. 나는 심장마비를 잃으켜본 적이 없었어. 너가
날 기억하고 있듯 세상은 나를 기억하고 있어. 나는
영원히 죽지 않아.' 그는 그렇게 노래했다.
짐 모리슨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빅토르는
그 손을 뿌리칠 아무 이유가 없었다. 그 손을 힘껏
잡았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빅토르, 너는 이제부터야.
너는 이제 시작이야. 너가 할 일이 태산같애. 우리는
너의 메시지를 이제서야 알아차렸어. 너는 그랬잖아.
열쇠가 문에 맞지 않으면 어깨로 부수라고. 너는
우리에게 강해져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외치지 않았어. 너는 그리고 우리가
안고 있는 슬픔의 정체를 밝히려고 애썼어. 몸은
건강하고 젊은 피는 뛰는데, 이제는 생명을 향유할
활기찬 시기인데, 이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차가운 땅에 큰도시가 서 있고, 집이 서 있고,
창문에는 불빛이 보이며, 가로등은 빛나고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며 달리는데, 이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빅토르, 너는 우리에게 소중한 것을 가르쳤어.
우리의 가슴은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의 눈은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의 웃음에 우리의 눈물에
우리의 맥박에 변화! 우리는 변화를 기다린다.
우리의 나태와 의기소침과 무기력을 질타하고
우리에게 대망의 행동양식을 제공했어. 우리는 너가
질타한 무의미한 생활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너는 그러한 우리를 도와야 해.
그러나 다음 순간 빅토르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밤새 꼬박 그대로 있었어?"
나타샤가 눈을 떴다. 빅토르는 어제밤 그녀가
잠들기 전에 보았던 그대로 창문을 향해 등을 돌리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창문은 열려 있었고 하늘은
부윰히 밝아오고 있었다.
"아니, 조금 전에 담배가 피고 싶어 침대에서
내려왔어."
그러나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의 발 밑에 구겨진
담배갑이 세 개나 뒹굴고 있었다. 그의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작은 탁자 위의 재떨이에 꽁초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재떨이가 넘쳐 꽁초는 탁자 위에도
흩어져 있었다.
"오늘, 모스크바로 올라가야겠어. 짐을 싸."
"한 이틀 더 있겠다고 했잖아?"
"일본 프로모터가 왔대. 그리고 오스땅뀌노에서도
급히 찾고."
"우찌첼리는?"
"우찌첼리한테는 나타샤가 적당히 말해."
"말하는 투가 어디 멀리 떠날 사람 같잖아."
"아, 그래. 낚시나 다녀올까 싶어. 앞으로 한동안
낚시할 기회가 없을 것 같거던."
"낚시를?"
"지금 가려던 참이었어."
빅토르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온몸의 관절이
우두둑우두둑 소리를 냈다. 너무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었던가. 다리가 휘청 꺾이려는 걸 얼른 바로
하며 화장실로 갔다. 푸푸, 물소리도 요란하게 세수를
하였다. 세수를 하고 나자 머리 속이 맑아지고 피로가
말짱하게 걷힌 기분이었다.
"오후 세 시 비행기편이 있지. 그걸 예약해."
"알았어. 그런데 몹시 피곤해 보인다?"
"늘 그렇지 뭘."
"얼굴색이 아주 창백해."
"담배 탓일 거야."
"조심해."
"알았어. 낚시도구는 트렁크에 다 있지?"
"그렇겠지. 엊그제 다녀온 후 나는 손대지 않았어."
방을 나가는 빅토르의 뒷모습이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았다. 나타샤는 지금까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불길한 기운을 그의 뒷모습에서 느꼈다. 나타샤는
급히 방문으로 뛰어가 그를 만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복도는 텅비어 있었고 엘리베이터 앞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귀신처럼 재빠르다 싶다는 생각을
하며 나타샤는 방문을 닫았다.
호텔을 나온 빅토르는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레닌
거리를 달렸다. 다섯 시가 안된 거리는 아직 차량이나
행인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속도계의 바늘이
140을 넘어서는 걸 보며 레닌 거리의 마지막 가로수가
뒤로 사라지는 걸 감각으로 느꼈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초원이 나타났다. 초원을 한참
달리자 자작나무 숲이 이어졌고 자작나무 숲 사이를
달리는 동안 줄곧 바다의 징후가 느껴졌다.
자작나무는 왼편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었는데 왼쪽은 육지였다. 자작나무는 바다에서
육지로 불어오는 바람을 이겨내느라 왼쪽으로 몸이
쏠려 있는 것이리라. 어디선가 먹이 사냥을 나선
바닷새들이 무심코 뽑아올리는 노랫소리들이 들리기도
했다. 자작나무 숲 위로 빠르게 지나가는 구름도
왼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서자 기다렸다는 듯 바다가 확
펼쳐졌다. 얼마나 더 달렸을까, 바다는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거듭하였다.
유르마라 해변이 뒤로 사라졌다. 진행방향의 길섶에는
낯선 마을의 표지판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 마을
표지판들이 바람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그루지노보,
뻬뜨르보스꼬예, 이바노보, 오레호보, 라도쥐스꼬예,
슬로까다우씨, 야고드노예, 보리쏘보...... 다시
바다가 나타났다. 도로를 벗어나 해변에 이른
빅토르는 마침내 차를 세웠다. 팽팽히 긴장되어 있던
전신의 근육이 나른하게 이완되며 온몸에 달콤한
피로가 지나감을 느꼈다.
얼마 후 그는 트렁크에서 낚시도구를 꺼내 해변으로
갔다. 해안선은 서남쪽으로 반달처럼 휘어져 뻗어가다
작은 바위들이 서 있는 곳에서 끝났다. 잔잔한 물결이
쉴새없이 핥아내리는 해안은 모래와 자갈이 깔려
있었다. 아직 태양은 떠오르지 않았다. 얇은
솜털구름이 무슨 베일처럼 수평선을 감싸고 있었다.
엊그제 쓰다둔 미끼 상자를 열었다. 뻘흙을 뒤집자
바닷지렁이들이 꿈틀꿈틀 몸을 뒤채며 필사적으로 뻘
속으로 파고들었다.
낚싯대를 던져놓고 수평선에 눈을 주었다.
갑자기 주위가 황금빛으로 밝아지며 바다에서
무수한 황금빛 물고기들이 뛰어올라왔다. 황금빛
물고기들은 빅토르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빅토르는
한마리도 놓치지 않고 황금빛 물고기를 다 품에다
받아 안았다. 오꾸니, 레쉬, 수닥...... 빅토르가
자주 낚아올렸던 물고기들이었다. 레쉬 한마리가 그의
가슴을 가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빅토르는
화들짝 놀랐다. 어느 사이 내가 깜박 잠이 들었던가.
낚싯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물결은 같은 리듬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하늘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태양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마침내 태양이 수평선을 뽑아올리듯 요란스럽게
솟아올랐다.
그의 어망에는 잔챙이 두어 마리가 들어 있었다.
금방 얼굴을 씻고 솟아오른 태양은 도도히 바다를
굽어보았다. 태양은 높이를 더해가면서 차츰
작아져갔다. 낚싯대는 잠잠했다. 어느 사이 태양이
이마 위로 훌쩍 솟아올라 있었다. 햇볕은 날카로운
침처럼 이마를 쏘았다. 그는 낚시도구를 거두어
들였다. 그것들을 트렁크에 넣고 나자 타는 듯한
갈증이 찾아왔다.
담배를 태워 물고 왔던 길을 되짚어 자동차를
달리기 시작했다.
바다 기운을 느끼며 그는 아까 지나왔던 마을들을
뒤로뒤로 보냈다.
태양은 그의 왼쪽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래, 나는 변신해야 해. 이번에 나올 <체르니>
앨범은 지금까지 내가 해온 작업의 검증과 반성적
성찰로 가득 차 있어. 우리에게는 아직 반성이나
자아성찰의 시기가 도래하지 않았어. 우리는 아직도
도전하고 피흘리며 싸워야 하고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적들을 쳐부수어야만 해. 나의 노래는 우리
젊은이들이 행해야 할 다음 시기의 행동양식을
제시해야 해. 내게는 너무 할 일이 많아. 세계 순회
공연도, 오스땅뀌노의 작업도 서두를 필요없어. 우리
소비에트 젊은이들이 대망하고 있는 어떤 행동양식을
찾아 제시하는 것이 보다 급한 일이야. 우리 소비에트
젊은이들에게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생활에 도전하고
승리할 수 있는 어떤 길과 방법을 제시해야 해. 바람
빠진 공에는 바람을 가득 불어넣어야 하고,
원시림에는 도로를 개설해야 하고, 정지해 있는
기차는 달리게 해야 하고, 목표물을 조준한 총은
발사해야 하고, 하늘과 바다에 투망질을 해 희망을
건져올려야 해. 내게는 할 일이 태산 같아. 나는
잠시도 쉴 틈이 없어.
그런 생각을 더듬고 있던 빅토르는 순간 거대한
벽이 앞을 가로막는 것 같은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격렬한 충격과 칠흑같은 어둠이 동시에 찰나적으로
그를 덮쳤다.
때마침 슬로까따우시 도로변에 나와 있던 한 여인은
거대한 이카루스 버스와 아주 작은 승용차 한 대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카루스 버스는
브레이크를 잡았으나 승용차를 밀며 10여 미터 진행한
다음에야 간신히 정지했다. 비명 소리처럼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날카롭게 울리고 있었다.
당황한 듯 그러나 담담한 표정으로 버스에서 내린
운전수는 종이처럼 구겨진 승용차의 운전석에 피를
뿌리고 찌그러져 있는 젊은이를 확인하듯 바라보았다.
젊은이는 핸들에 가슴이 찍혀 있었고 가슴에 눌린
승용차의 경적은 계속 신경질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마을의 여인은 으레 또 자동차 충돌사고가 일어난
것이겠거니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사건사고와는
가급적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불편을 사지 않는
처사임을 그 여인은 잘 알고 있었다. 공연히 호기심을
앞세워 구경한답시고 기웃거렸다가 나중에 관계기관에
불려다니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한 처신이었다.
여인은 나중에야 작은 승용차에서 죽은 사람이 빅토르
최임을 소문으로 듣고 놀랐다.
몇 시간 후 경찰이 나타나 교통사고의 뒷처리를
하고 빅토르의 시신은 리가의 시립병원으로 옮겨졌다.
빅토르의 사망소식은 소비에트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하루 하루, 사고지점에는 꽃이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지고 난 며칠 사이 소비에트
전역에서 자살소동이 벌어졌다. 꽃다운 아가씨들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빅토르의 쓸쓸한
저승길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의 죽음을 애석해한
사람들은 유르마라 해변의 슬로까따우시 도로의
사고지점으로 하나둘 몰려들었다. 그리고
레닌그라드의 보고슬로스까야 클라드비세 묘지에는
그의 유해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찾아들어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 그의 사망소식은 소비에트
젊은이들에게 육친의 죽음보다 더 진한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사고를 낸 운전수는 며칠 조사도 받지 않고
풀려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