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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 01

Casey,Riley 2023. 4. 17.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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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암 조광조
 이종호
  
    1. 국방을 논하는 왕도론자
  이제까지 우리에게 개혁이란
  거짓과 무모함으로 얼룩진 것
  그래도 사람들은 무게 없이 오늘도
  외쳐 된다
  개혁을 해야 한다!
  개혁만이 살 길이다!
  아, 그들은 개혁의 의미를 모른다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저
  엄숙한 자기 탈바꿈의 사명과 고뇌를.
  
  5백여 년 전
  오늘을 벌써 보고
  몸으로 말해 준 사람이 있는지
  조광조, 영원한 개혁의 순교자!
  개혁을 함부로 말하는 자
  개혁으로 망하리라.
  
  이제 그는
  입으로 외친다
  너희, 나의 후배들아
  책임감, 정열, 목표 추구에
  앞서는 여유와 너그러움
  그리고 자기 개혁이
  함께 가야 한다
  개혁에 성공하려면.
  
  -정암 조광조를 생각하며 저자가 서두에 쓰는 시 "개혁"-
  
  개혁! 그것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작게는 자기 한몸의 개혁에서부터 크게는 한 나라와 세계의 개혁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때
로 얼마나 의미 깊고 매력적일 수 있는 단어인가?
  그래서 개혁이란 용어는 인간사회의 어느 곳, 어느 때, 어떤 차원에서나 관심을 모으는 화
두로 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개혁도 성공한 경우는 의외로 많지가 않다.  개혁
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개혁이 어렵다면 즉 이유는 무엇일까? 기득권을 지닌 저항 세력  때문에 쉽지가 않아. 많
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어려운 이유는 개혁의 주체, 그 주동자가  가
진 의식과 성향, 개혁의 자세에도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역사가 보여주는 다음의 
한 장면은 우선 관심을 가질 만하다.
  
  조선조 제 11대 임금인 중종 13년의 8월 16일. 궁중에서는 북쪽의 국경 문제와 관련된 사
항을 두고 군신간에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무회의가 열린 셈이다.  용
상에 앉아 있는 30데 초반의 왕을 중심으로 영의정 정광필을 비롯한 의정부의 대신들과 병
조판서 유담년 등 관련 당상관(정3품 이상의 관료)들이 참석한 자리였다.
  사안은 언뜻 보면 대단치 않아 보이는 것이다. 함경도 일대에서 자주 말썽을 일으키는 야
인(고려 때는 여진족이라고 불렀음)들 중의 하나인 속고내란 자의 체포 문제였기 때문이다. 
현지 군 지휘관의 재량으로도 처결할 만한 문제가 이처럼 중앙에서까지 논의가  이루어지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속고내는 그 아비 매화 때부터 조선 정부의 선무 정책에 따라 우리에게 충성을 바쳐 오던 
자였다. 그러다가 자기네 부족간의 세력다툼 과정에서 매하가 피살된 바 있었는데, 속고내는 
여기에 조선 정부의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이후  걸핏하면 난동을 부리기가 일쑤였다. 
6년 전 갑산에 들어와 노략질한 것을 포함하여 그가 국경 일대에서 소란을 피운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교활하고 거칠기도 한 그를 다스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함경도 
절도사를 비롯한 현지의 군 지휘관들도 그를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그가 속한 부족의 추장을 시켜  토벌도 해보았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골치를 썩히고 있는 상태. 이렇게 되자 속고내는 더욱  우리 정부를 우습게 보고 기회만 
있으면 처들어와서 사람이며 가축을 약탈해 가고는 하였다. 거기다가 잡아간 우리측 사람들
을 다른 데다 팔아먹는가 하면 약탈해 간 물건들은 돈을 받고서 생색을 내 가며 반환하고는 
하였다. 조선 놈들, 겁 많은 자식들, 보나마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속고내의 약탈 행
위는 다른 야인들에게도 전염되어 갔으니 이것도 문제였다. 얌전하게 우리측에 협조하며 살
던 자들도 이쪽이 약하다고 보았는지 덩달아서 약탈 행위를  자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망합
이며 주장합 등이 그러한 자들이었는데 그 진원지는 속고내였다.  이러한 속고내가 겁도 없
이 8월에 압록강을 넘어 우리 국경 안으로 들어와 숲 속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으니  기계로 
한번 사로잡을 만한 때가 아닌가.  그렇더라도 만일의 사태를 염려하여  현지에서 처결하지 
못하고 중앙의 결정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제 군신회의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병조판서 유담년이 함경도 절도사의 보고문을 왕에게 아뢴 후 열린 이 자리에서 영의정인 
정광필 이하 모든 신하들의 의견은 속고내를 사로잡자는 데로  모아졌다. 그렇게 되면 망합
이며 주창합등 여타의 야인들에게도 경고를 하는 셈이니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다고 본 것이
다. 다만 그 방법은 소수 정예의 병사들로 하되 중앙에서 별도로 파견하는 장수에게 작전의 
책임을 맡기는 것으로 낙착이 되었다.  그래서 회령부사를 지내고 용맹성을  인정받고 있던 
이지방을 방어사로 삼아 다음날 출발시키기로 하였지만, 만일의 사태를 우려하는 소리도 없
지 않았다.
  "다른 오랑캐를 잘못 사로잡게 되면 북쪽  변방에 커다란 문제가 생겨 성종 때에  허혼이 
평안도에서 일을 낸 것과 같아질 것입니다."
  정광필의 말이었는데, 일리가 있었으므로  다음날 향발에 앞서 왕이  직접 이지방을 불러 
명을 내리기고 하였다. 왕도 동의한 가운데 이미 결정은 되었으나 좀더 신중하게 일을 처리
하자는 뜻에서인 것이다. 
  다음날 방어사 이지방을 출발시키는 의식이 사정전에서 전일 회의의 참석자들이 모두  참
석한 가운데 거행되고 있는데 일은 갑자기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발단은 마침 왕을 뵈려고 
궁중에 들어온 부제학(정3품관) 조광조(자,  호)의 반대 의견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조광조 
자신도 왕을 직접 뵙고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은 아니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문제점을 들어 
반대를 한 것뿐인데, 이를 전해들은 왕이 불러 물어보므로  자신의 의견을 숨김없이 아뢰었
다. 
  이일은 묘당 대신과 지변사재상(변경의 일에 밝은  재상이란 뜻, 병조판서를 의미하는 말
로 생각됨)이 이미 자세히 의논하여 처리한 것이므로 심처럼 우활(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을 
말함)한 유자가 가볍게 그 옳고 그름을 논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일은 작은 듯하면서
도 실은 큰 것이어서 신은 이것 때문에 변경 지역에 일이 일어나는 조짐이 될까 두렵사옵니
다. 속고내에게 죄가 있는지의 유무는 신이 알 수 없으나, 제왕의 거동은 모든 것에  허술한 
것이 없어야 하며 반드시 사리가 바른 뒤에 행해야만 합니다. 지금 속고내가 모역하는 마음
이 없고 다만 사냥을 하러 왔을 뿐인데 우리가 갑자기 습격하여 사로잡으려 한단 말입니까? 
이런 일은 변방의 장수가 혹 제 마음대로 처리하더라도 안  될 일인데, 만약 조정에서 스스
로 도적의 꾀를 내어 재상을  보내서 기습한다면 의리에 어떻겠습니까? 만약  사로잡았다가 
속고내가 아니라면 그 우환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요, 정말로 속고내일지라고 만약 죄
가 있다면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지금 변경에서 난동친 것도 아닌데 비밀리에 
군사를 내어 기습하는 것은 옳지가 않습니다. 비록 장수를  보내더라도 만약 사로잡지 못하
면 호인들이 이후로는 우리를 보내더라도 만약 사로잡지 못하면 호인들이 이후로는  우리를 
믿지 않고 간사하다고 할 것입니다. <권 34, 13년 8월 17일의 내용>
  조광조의 말은 요컨데 정정당당하게 하지는 것이다. 언뜻 보아서는 너무 이상론에 치우친 
감을 주는 말이나 거기에 이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방어사를 보내기로 했으나, 이즈
음 들어 크게 믿고 의지하게 된 조광조의 말에 왕의  마음은 흔들렸다. 그래서 주위의 대신
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을 한다. 
  "이 말이 옳은 것 같소. 사냥나온 것을 갑자기 습격하여 사로잡는 것이 일의 체모에 어떨
까?"
  그러나 방어사 이지방에게 후한 상을  내리며 출발시키려는 참이 아닌가.  여기서 마음이 
바뀌다니. 정광필이 반박에 나선 것도 무리가 아니다. 여기서 마음이 바뀌다니. 정광필이 반
박에 나선 것도 무리가 아니다. 
  광조의 말은 참 유자의 지극한 말이옵니다. 그러나 3대  이후로 변방에 관한 일 처리에서 
한결같이 제왕의 도를 따르지는 못했으니 지금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위와 같음)
  누가 보나 타당한 현실론을 제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은 다시 주저하는 마음이 되
었는지 말이 없었다. 그러자 조광조가 다시 나선다. 
  전쟁의 기회도 또한 한 마음에 있을 뿐이옵니다. 옛날 제왕이 오랑캐를 대함에 있어 도리
에 맞게 하는 것도 반드시 친히 그곳을 가 보고 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일을 다 인과 의로 
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옵니다.  그리고 올해는 북방에 서리가 일찍  내려서 농사에 수확이 
전혀 없으니 만약 변경에서 환란을 만나면 반드시 제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왕자가 오랑캐
를 대하는 데에는 변경을 충실하게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여 일이 일어나지 않
도록 해야 할 것이고, 저들이 먼저 변경을 요란하게 하면서 우리에게 침범하면 부득이 대응
하되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사리에 마땅하옵니다.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의 
병력을 살피고 헤아려야 하며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되는데, 하물며  명분 없는 거사를 함에
서이겠습니까? 비록 주창합 등도 이 거사로 인하여 스스로 버릇을 고치도록 하는 효과가 있
다 하나 아마도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듯합니다. 옛날  성종조에 만포첨사 허혼이 사냥하는 
오랑캐를 몰래 사로잡아 이 때문에 수십년간 변방의 근심이 그치지 않아 백성들이 그 폐해
를 받게 되자 마침내 성종께서 허혼을 베어 앞으로 올 일을 경계하셨습니다. 지금 조정에서 
대신을 보내어 숲속에서 오랑캐를 습격한다면 속이는 술책을 가지고 도적의 방법을  행하는 
셈이니 나라의 일하는 체모에 과연 어떻겠습니까? 신은 변방에 일만 일으키고 국가의 체면
이 크게 손상될까 염려되옵니다. (위와 같음)
  이 말에 다시 좌중이 잠시 조용한 가운데 버럭 고함을  치는 소리가 났는데, 그 주인공은 
병조판서 유담년이었다. 그는 말할 것도 없이 이번 일의  주무 대신이었으니 조광조의 말에 
누구보다도 화가 날 만도 했다. 제가 무슨 국방 문제를 안다고 다 된 밥에 재를 뿌려. 요사
이 상감의 신임을 받는다고 모든 일에 함부로 나서는구나.  그의 마음속은 보나마나 이러한 
생각들이 울분으로 되어 치솟아 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왕 앞이라는 사실도  잠시 잊은 채 
큰 소리로 악을 쓰다시피 이렇게 말을 한다. 
  일이 만약 잘못 처리되면 과연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옛말에도 이르기를 '밭 가는 
일은 종에게 묻고, 베 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한다'고 했으니 이같은 일은 신의 말을 들
으셔야 합니다. (위와 같음)
  그러나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이러한 말에도 왕의 마음은 이제 움직이지를 않았다. 
  "광조의 말도 또한 깊은 뜻이 있으며 일이 가볍지 않으니 쉽게 움직일 수는 없겠다."
  이러한 말이 떨어진 것이다. 대사간 윤은필, 사간 윤자임 등도 조광조의 의견을  지지하자 
왕은 더욱 확신을 얻은 듯 보내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막 출발하려던 방어사이지방
이며 여타의 대신들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기분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의정 정광
필이며 우의정 안당, 이조판서 이장곤, 그리고 힘경도 절도사를 지낸 지중추부사 황형에다가 
조광조의 숙부가 되는 좌참찬 조원기도 나서서 함께 반론을 폈다. 
  이것이 제왕의 도로 말하면 기모(기묘한 꾀로 일을 꾸미는 것)이나. 삼대 이후로는 한결같
이 왕도로 해서는 되지 않을 듯합니다. 만약 속고내를  사로잡는다면 주창합도 진정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변방 전체를 진압하여 복종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속고내가 들어온 땅이 본
래 우리 땅인 압록강 안쪽으로 매양 그곳 지키는 장수들에게 엄히 방비하여 해이치 말고 야
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고 일렀으나 그렇게 해  오지 못했습니다. 전에 '만약 여기에 
들어오는 자는 변경을 침범한 죄로 논하겠다.'고 경고해 왔으므로 속고내가 지금 들어와  사
냥하는 것에 대한 이번 거사가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위와 같음)
  그러자 중간적인 입장도 제기되었는데, 한성판윤 홍숙과 형조판서 이유청 등이 거기에 속
했다. 속고내는 우리에게 귀화했다가 배반한 자이므로 사로잡을 만도 하다. 다만 그가  배반
한 당시에 잡지 않고 이제 와서 잡는 것도 그렇고 하물며 죄 없는 자도 함께 잡히면 분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자  왕은 최종적으로 결심한 듯 
이렇게 단안을 내린다. 
  되풀이해서 헤아려 보아도 그들이 변경을 침범한 갓도 아니고 사냥을 나왔을 뿐인데 잡는
다면 죄 없이 억울하게 사로잡히는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 (위와 같음)
  그러니 결국 속고내를 잡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정광필이  수상으로서 논의를 
확실히 종결짓는 뜻의 말을 아뢰었다. 속고내를 잡기 위한 작전을 해야만 한다는 랖서의 주
장을 되풀이한 후 분명한 말로 매듭을 짓는다. 
  "그렇지만 상감마마의 뜻이 정해졌으니 다시 아뢰지 않게습니다."
  논의는 이로써 완전히 끝이 났다. 조광조와 그의 이견을  지지했던 소장층이야 유쾌한 기
분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속고내를 잡는 계획에  찬성했던 대신들의 마음은 당연히 
편치 않았다. 조광조가 너무 설치는구나, 혹은 상감께서 너무 조광조의 편만 드시는구나, 일
게 3품관의 한마디로 조정에서 이미 정한 내용이 바뀌다니...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는 가운
데 사람에 따라서는 분노의 마음도 앖지 않았을 것이다. 
  전후의 사정을 전해들은 민간에서도 입방아를 부지런히 찧었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부제학 대감의 힘이 그렇게 세다네.
  ---상감마마가 이미 내린 결정을 바꾸도록 했다는거야. 
  이런 말들이 요즈음 들어 더욱 올라가고 있는 조광조의 인기와 함께 분분한 세론을 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조광조 자신은 다른 신하들의 여론이나 세론에 별 관심이 없었다. 모든 것은 
왕도에 따라서 진술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튿날의 조강(아침에 하는 경연의 강좌)에서도 속
고내의 일을 거론하면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전일의  논의 과정에서 정광필을 비롯
한 대신들이 삼대의 일을 그대로 오늘날 행할 수 없다고 한 것을 들어 비판하면서 한심스럽
다는 표정으로 이러한 말을 한다. 
  대저 왕패(왕자와 패자)의 도는 선대의 유자들이 자세히 분별해서 말을 했는데, 중니의 문
하에서는 5패(중국 춘추시대 5 명의 패자, 일반적으로 제나라 환공, 진나라 문공, 초나라 장
왕, 오왕 합려, 월왕  구천의 5명을 말함)에 대하여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겼사옵니다. 패자 
노릇을 한 이들도 인의를 빌어 행힉;는 했으나, 대개 그에 성의가 없었으므로 패라 한 것입
니다. 이번 일은 패도보다 더욱 낮은 것이야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오란캐라도 사람의 
마음은 있는 것이니 성의로 움직이면 복종 안 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 
일을 하면 하늘도 옳게 여겨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도와줄 것입니다. 마야흐로 일을 행하시
겠습니까? [같은 책, 8월 18일의 내용]
  좌중은 조용한 채 모두 조광조의 말을 듣고 있었다. 속고내를 사로잡는 작전에 대하여 그
와 견해를 달리했던 신하들도 오늘은 말이 없었다. 왕도의 타당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시대정신이 아닌가. 비록 그것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부인할 수  있느냐는 점은 둘째로 하더
라도 왕도 자체는 고전적인 이상정치로서  절대적인 무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폭군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 이후 선정을 펴려고 애쓰는 왕이다. 그 이상은 당연히 왕도종치
가 되어야 하겠지만, 이제까지 누구도 왕을 이 방향으로 적극 보좌한 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훌륭한 정치임은 누구라도 인정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도정치가 오늘날의 시대에는 그대
로 실현될 수 없다고 본다. 시대  여건이 달라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고 누군가 생각하더라도 학식이 있고 추진력과 용기가 있어야만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연산조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사화(무오, 갑자의 양사화) 때문에  선비들의 기풍이 
움치러든 탓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여러 사람들의  인망과 함께 왕의 
절대적인 신임이 여기에는 필요한데,  이에 적합한 인물이 조광조의  출현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승진을 거듭하여 올라온 37세의 부제학(조광조를 말함)은 이러
한 요건들을 충족시키면서 지금 조강에서도 왕도를 말하고 있으니 모두가 조용할 수밖에 없
는 것이다. 이번 속고내의 경우에서 보더라도 그에 대한 왕의 신임은 절대적이 아닌가 말이
다. 어느 간사스러운 인간이 있어 왕과 조광조의 사이를 떼어  놓지 않는 한 왕도정치의 이
상은 16세기 초의 조선조에서 이제 꽃을 피워 갈 게 분명해 보인다. 
  그러면 왕도정치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날 만주주의가 하나의 정치적  이상이듯이 
한국과 중국의 군주제하에서 이상적 정치의 전형으로 생각된 왕도정치는 공자의 정치사상에
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논어의 안연편과 자로편에 보면  그는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국민들
을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한 후 교육을 시켜서 그들의 도덕적 수준을 높이도록 하는 취지의 
말을 하고 있다. 제자들에 따라서 정치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을 한 공자지만 정치의 커
다란 목표로 이 두 가지를 언급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를 사숙한 정신적 제자인 맹
자는 그의 달변과 논라성을 참가하여 이것을 더욱 분명히  해 놓았다. 양혜왕이나 제선왕과
의 문답에서 그는 국민들의 생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어 그들의 의식주를  넉넉
하게 해줄 것을 우선 말하고 있다. 다음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도덕의식을 함양하여 사람답게 사는 길을 열어 주도록 요구한다.  그러면 이렇게 되는 마음
을 가지는 것이다. 국민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선왕이  도
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를 불쌍히 여겨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맹자 양혜왕장구 상, 하 참조)
  그런데 후대로 가면서 이론은 더욱 세련되어 갔다. 중국  송나라대에 이르러 도학이 일어
나 우주와 인간의 성품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을 전개하면서 왕도정치에 대해서도 한층 구
체적인 내용을 만들어 갔다. 정치적 이상은 공맹의 그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그에  이
르기 위해서는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하며, 기질을 순화하고 지혜를 체득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등 상당히 세부적인  내용이 갖추어졌다. 이렇게 되
자면 왕이 열심히 자신을 수양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치를 연구하고 터득하는 공
부야말로 왕이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요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고려 시대도 
그랬지만 특히 조선조에서 왕의 학문을 높이기 위해서 자주 열림 것도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도학자들은 본말론적 세계관, 즉 모든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다고 보아 물질보다 마
음, 이익보다 의리에 무게를 두고 소인을 배척하며 군자를 높이는 입장을 나타내었다.  이에 
따라 어진 마음과 유능한 능력을 가진 군자들이 신하로서 주위에 가득 있어야만 한다는 주
장을 편다. 그러나 왕도를 실현하는 근본은 신하가 아니라 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도학
자들이 왕의 마음을 바로잡는데 역점을  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래서 도학을 집성한 
중국 송나라 때의 주자는 이러한 표현을 하고 있다. "군주의  한 마음은 만 가지 변화의 근
원"이라고.
  이러한 왕도정치의 전형을 흔히 고대 중국의 삼대와 결부지어 말을 하지만 더욱 이상적인 
상태는 그보다 이전의 요, 순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당시는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도덕이 잘 갖추어져 모두가 예의를 지킬 줄 아는 모범적 사회가 구현되고 있었다
고 한다. 간사한 신하는 철저히  배척되고 왕의 뜻을 따라 유능한  신하들이 바른 마음으로 
국민을 위해서 봉사를 아끼지 않던 시대! 얼마나 도덕이 최고조에  달했으면 천하를 다스리
는 대권마저 아낌없이 양보할 줄 아는  정치가 이루어졌겠는가. 요는 순, 순은 다시  우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었던 갓이다. 
  조광조는 이러한 왕도정치를 지치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한다면 지극히 훌륭한 정치라는 
의미를 풀이해 볼 수 있는 이 말을 그는 자신의 나이 36세이던 해의 경연에서는 아주  절박
한 의미로 쓰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상하로 합심하여 노력하면 지치를 이룰 것이고,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결국 망하는 길밖에 없다는  식으로. (정암집을 이하에서는 문집이라고 부
를 것임.
  조광조의 열렬한 소망에 왕도 함께 갈 의사가 없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아,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해도 사람이 없더니 과인이 이제야 쓸 만한 인재를 얻는구나! 이러한 생각도 들었
을 것이다. 
  이 당시 이웃나라들을 보자면, 우선 일본의 경우 천황은 유명무실한 채 전쟁으로 날이 지
새는 전국시대여서 애당초 이러한 정치는 생각할 수도 없는 때였다. 또, 중국의 명나라로 보
자면, 환관들이 권력을 휘두르던 무종 연간이라 그 역시 군신간에 지치를 추진할 형편에 있
지 못하였다. 오직 조선조에서만이 제법 해볼만한 여건을 가지고  어떻든 이 고전적인 이상
정치를 실현해 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순진한 이상주의자라고 할까, 아니면  낭만주의자라고 
할까. 현대인들이 그를 어떻게 보든 조광조 자신은 그야말로  비장한 마음을 가지고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한 시대를 일으키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체 어떠한 이력과 과거를 지
닌 인물인가? 어떠한 배경이 그로 하여금  이토록 남다른 길을 가도록 재촉하고 있는  것일
까? 잘못하면 죽음으로 갈 수도 있는 이 길을 말이다. 
  
    2. 태어난 세계
  사람은 누구나 그가 속한 세계 속에서 태어난다. 그에게 정신과 육체를 준 부모, 그  부모
들이 속한 집안이며 그것을 담고 있는 더 넓은 사회와 시대,  이 보든 것이 한 인간의 자아
를 형성하고 세계관을 만들어 낸다.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 누구나가 자신에게 던
질 수 있는 이러한 질문에도 그가 속한  세계가 거의 절대적인 답변을 만들어 주게 마련이
다. 
  조광조의 경우에도 이 점은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간략하게나마 그가 태어
난 집안과 그 당시의 사회, 그리고 시대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를 가지고 조광조를 따라
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가) 집안
  현대인들에게 집안, 즉 가문은 의미가 있다 해도 그다지 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조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문은 그의 커다란 자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의  아들이냐, 
혹은 누구의 몇대손이다 하는 것은 본인에게 커다란 긍지이거나 수치일 수 있고 그의 성공 
여부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한 인간의 인격과  학문을 말할 때도 그것은 무시
할 수 없는 요소로 거론의 대상이 되고는 하였다. 그래서  퇴계 이황은 조광조의 숙부인 조
원기를 훌륭한 인물로 평가하면서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암(조광조의 호) 집
안의 학문적 연원이 우연이 아니로다."(문집, 권 1, 부록)
  과연 조광조를 1482년(성종 13년)에 탄생시킨  한양 조씨 가문은 특히  그의 대로 가까이 
오면서 학문과 가까이하는 집안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부친은  사헌부 감찰과 찰방을 지
냈고, 조부는 성균관 사예를 역임하였으니 당시로서는 보편적 수준의 학문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여기다가 우참찬까지 지낸 숙부는 퇴계의 평가를 받을  만큼 학문이 있는 인물이었
던 것이다. 더구나 조부로 말하면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자  동왕 1년에 일으킨 
계유정난(김종서 등 중신들을 죽인 정치적 변고)의 사관으로서  연산군에게 사료 제출을 거
부하여 유배를 당한 바 있었다. 한마다로 학문과 행실이 겸비된 집안이라고 할까. 누가 기골  
있는 문관의 집안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정작 그 윗대로 거슬러올라가 보면 한양  조씨 가문은 군인의 집안임을 알 수 있
다. 7대조는 고려 때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  부원수로서 출정하였으며 당시의 원 세조 
쿠빌라이로부터 포상을 받은 바도 있다. 5대조 역시 고려  말에 왜구를 물리친 원수급의 장
수였는데,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 조선조의 건국에 참여하게 된다. 조광조에게 고조할아버지
가 되는 이 사람은 지위가 좌찬성(종 1품관)에까지 이르고  공신으로서 부원군이 되기도 하
였다. 
  이렇게 보면 조광조에게는 문무 양편의  피가 함께 있는 셈인데, 뒤에  보게 되듯이 그의 
개혁 과정에서도 이러한 양면성을 함께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왕도정치에의 강한 이념적 
바탕이 학자적인 것이라면 반대파에 대한 전투적 자세의 단호성은 군인이 가지는 무의 요소
로 생각되기도 한다. 
      나) 사회, 시대
  조광조가 태어난 때는 조선조의 성종 13년 8월 10일이다.  그가 태어난 이해를 전후한 성
종 연간의 일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면 조광조의 생애와 관련해서 참으로 의미 있는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성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연산군의 생모폐비 윤씨가 사사된  일이
다. 조광조가 태어난 이해의 같은 달에 있었던 이 일은  질투심이 유달리 강했던 그녀는 왕
에게 걸핏하면 눈알을 빼어 버리겠다는 등 함부로 하는 언행 때문에 왕비로서의 지위를 박
탈당한 채 친정에 쫓겨나가 있었다. 그런 중에 일부의 신하들이 연산군의 대권 승계를 염두
에 두고, 그녀에게 동정적인 언론을 펼치자, 성종은 뒷날 왕이 된 아들을 끼고 그녀가  국정
을 그르치지 않을까 우려하여 죽음을 내린 것이다. 이로써  연산군의 폭정을 예고하는 중대
한 씨앗의 하나가 잉태된 셈이다. 동시에 그를 왕위에서  축출한 이후의 개혁시대를 이끌어
갈 조광조의 임무가 요청되기에 이른다. 
  이때는 또한 조선조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탕녀로 꼽히는 어을우동이 한창 바람을  피우고 
다니다가 사라진 지 2 년이 지난 때이다. 오늘날로 쳐도 대단한 바람둥이에 속할 이 여자는 
왕실의 인척인 방산수를 비롯한 뭇 남자들과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욕으로 나날을 보내 사
람들의 입을 한창 바쁘게 하였었다. 어엿한 사대부 가문의 규수였던 여자가 이런 짓을 하며 
다니고 보니 조정에서도 그녀의 행실이 분분한 논의를 낳은  것은 물론이다. 결국 그녀에게 
교형(목을 졸라 죽이는 형벌)을 내리고 말지만 당시의 사회 기준으로 볼 때 이게 어디 작은 
일인가. 따지고 보면 '동방예의지국'에 그만큼  도덕적으로 헛점이 있었다는 얘기인  것이다. 
평생 동안 여자를 멀리하고 궁긍적으로 이 땅에 도덕사회를 실현코자 했던 조광조의 행적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대조적인 일이 상징으로 벌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경제적으로 보더라도 조선조 사회를 만성적으로  짓누르던 기아문제가 여전히 골치  아픈 
상태로 남아 있었다. 경국대전의 완성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조 사회가 체제상 완성 단계에 
이르고 태평 시대라고 일컬어지던 경종 연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재정 상태
는 참으로 서글픔을 자아내게 한다. 빈민구제용으로 비축해 둔  양곡이 50만 섬에 불과하여 
우려스럽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빈부의 차도 날로 심해져 갔다. 그래서 생활이 어
려운 자들 중에 도적으로 변하는 자들도 늘어가는 형편이었다.  폐비인 윤씨의 집에도 그녀
가 사사되기 직전 도둑이 들어 조정에서도 걱정을 하고 있을 정도로 그들은 낮과 밤을 가리
지 않았다. 
  속고내의 얘기가 앞에서 나왔지만 함경, 평안도 지역에서의 야인들 준동도 국방상의 예사
롭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었다. 이전에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에서 약탈을 일삼는 야인들을 
정벌하여 감히 국경을 넘보지 못하도록 교훈을 주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때 가산을 넘보지 
못하도록 교훈을 주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때 가산을 파괴당하고  부모와 처자식을 잃은 그
들은 원한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같은 책, 권 144, 13년, 8월의 내용 참조)
  그러나 더욱 큰 일은 조정내에서 움트고 있었는데, 그것은 신하들간의 대립이었다. 왜, 무
엇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까? 핵심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의식의 차이에 있었다. 후에 
세조 임금이 된 수양대군을 도와 쿠데타에 참가했거나 동조한 쪽에서는 자신들의 행위를 정
당화한 데 비해 다른 쪽에서는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한 데 비해 다른 쪽에서는 쫓겨난 단
종을 정통으로 보아 이에 비판적이었다. 전자는 후자를 시세에 어두운 천진한 이상주의자로 
보았고, 후자는 전자를 출세하고자 불충, 불의한 짓을 서슴지 않은 비인격적인 소인배로  보
았다. 세조와 예종 때까지는 조정의  신하들이 대체로 전자의 인물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종은 후자의 인물들도 과감히 등용함으로써 양자는 이제 눈에 띄게 대립하는 양상
을 보이게 되는데, 그 현저한 예의 하나가 소릉의 복위 문제를 두고 일어난다. 소릉은 제5대 
문종의 왕비이자. 폐위된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의 능이다. 1478년(성종  9년)에 생원으로 
있던 남효온이 소릉의 복위를 건의한 이래 성종 말년과 연산군 초년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
는 뜨거운 감자가 되어 조정을 양분시킨다. 소릉은 단종의  폐위와 함께 능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해 폐릉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고 명분도 분명히 있는 일이다.  문제
는 소릉의 복위를 주장하는 그 이면에 깔려 있는 의도이다. 거기에 이 능을 폐지하게 된 세
조의 쿠데타와 그에 참여한 공신들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부정코자 하는 의사가 있음을 누가 
모르겠는가. 이래서 사람파의 남효온이며 김일손 등이 이를 끈질기게 주장하자 도승지 임사
홍 등은 이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펄펄 뛰기에 이른다. 
  조광조가 세상에 나오던 시기는  세조의 쿠데타에 참여한 한명회,  정창손 등과 그들에게 
반감을 지닌 김종직과 그 제자격의 인물들이 이처럼 서로 갈등을 빚으며 같이 조정에 있던 
시대였다. 이념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을 소인과 군자라는 극히 단순한 2분법적 틀 위에서 봄
으로써 더욱 갈등을 일으키기 쉬운 유교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시대!  조광조가 세상에 나오
던 무렵의 세상은 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러한 틀 위에서 사고는 작용과 반작용을 하게 
되어 있었다. 
  
  3. 성장기의 모습
      가) 조숙한 어린이
  조광조가 출생한 곳은 한성부 동지제이다. 부친과 어머니 민씨에게는 장남인 영조에 이어 
얻은 둘째아들인데, 그는 낳아서부터 이목구비가 반듯한 데다 총기가 넘쳐흘러 사람들의 눈
길을 끄는 아이였다. 얼마 후 그의 아래로 동생 숭조가 생겨 삼형제가 함께 자라지만,  그중
에서도 조광조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다섯 살이 되자 벌써 예절에 관해서 배우기를 좋아하
는 것이었다. 형제들과 장난을 쳐도 그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어른처럼 의젓한 데가  있었다. 
거기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을 보면 참지를 못하였다. 웃사람일지라도 예절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반드시 이를 풍자하는 식으로  해서 고치도록 하였다. 이럴 경우  어른들은 그의 재롱 
어린 지적에 이놈 봐라 하고 대부분 처음에는 맹랑하게  생각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어린
애라도 그의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니므로 오냐, 네가  옳다, 내가 잘못했구나, 이렇게 받아들
이며 자신들의 잘못된 점을 고쳤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다섯 살 때 이미 예기(예절에 
관한 내용을 적어 놓은 책)를 어설픈 대로 읽거나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 불의를 미워하는 소년
  이후 16세가 되기까지 그는 알정한 스승  없이 당시의 양반집 자제들처럼 유교의  경전을 
공부한다. 소학과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사서, 그리고 삼경, 즉 시경, 서경, 역경이며 중국
의 역사책들을 공부했을 것이다. 다만 그 수준은 전체적으로 볼 때 높았으리라고 보시 어렵
다. 책에 따라서는 그저 문장이나 들여다보는 정도의 초보 수준인 경우도 있었으리라.  서체
를 익히고 시작을 배우는 과정도 이 시기에 거쳤을 것이다.  그러나 후일 어른이 된 뒤에도 
문장을 짓는 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은 그이고 보면 이러한 부문에는 애써 매달렸으리라
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 당시 양반가에서는 집안의 학식있는 어른이 문중의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는 경우가 많
았다. 일종의 가학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셈인데, 조광조의 경우 부친보다 숙부에게서  더욱 
많은 배움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후일에 그는 숙부의 학문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언급을  하고 있었다. 학문이란 문장만이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여 일을 마땅하게 잘 처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조정
에 있으면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변경을 지키는 소임에 이르러서는 이를 잘 처리하는 갓
을 말하는데 숙부는 이러한 학문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그는 숙부가 옛사람이 하던 
훌륭한 학문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일마다 의로써 하고, 웃사람
을 존경하는 군자의 도덕이 있으며, 뜻은 정치의 실제에서  익혀져 세상을 경제적으로 풍족
하게 하며 국방의 소임도 잘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문집, 권 1, 경원진으로 부임하는 숙
부를 송별함 참조)
  집안 어른에 대한 언급이니 찬사로 기운 감이 있지만, 그에게 배운 사람이 아니라면 이토
록 구체적으로 그 학문을 말하기는 어려우리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앞에서 보았듯이 퇴계가 
조광조를 높게 평가하는 의미에서 그 집안의 학문적 전통을 조원기와 관련지어 예찬한 것을 
볼 때 조광조가 그의 학문을 배웠으리라고 짐작된다. 
  이같은 숙질(숙부와 조카)간의 사제관계로 볼 때 조광조의  학문이 어떠한 방향에 두어졌
을까는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책 읽기를 좋아한 그이지만 단순히  글이나 짓는 문학적인 
부문에는 크게 뜻을 두지 않았다. 자기를 도덕적으로 완성하는  일에 우선적으로 힘을 쓰고 
다음으로는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기울이고는 하였
다. 그러나 대학에서 "수시, 제가,  치국"(자기 몸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한 뒤에 나라를 
다스린다는 말)이라고 했듯이 자기를 닦은 이후에 나라를 다스리는 일도  있는 것이므로 중
점은 전자에 두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과거 공부에 의도적으로 몰두하지는 않았다.  다
만 세상을 위해서 큰 일을 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는 항상 이 당시의 그를 지배했다. 그가 나
날을 끊임없는 발분 속에 자기 수양에 힘쓰면서 학문에 매진을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나이 열일곱이 되었을 때 정국에 중대한 회오리가  일어난다. 연산군 4년의 그 악명 
높은 무오사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동안 대립 상태에 있던  훈구파와 사림파가 마침내 유혈
극을 벌이게 된 것인데, 발단은 필화 사건의 형식으로 일어났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으로 있으면서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부정적인 관
점에서 세세히 기록한 바 있었다. 아울러 그는 세조의  쿠데타를 비유적으로 비판한 스승의 
조의제문을 사초(역사를 기술하기 위한 기초자료)에  싣기도 했는데 이게 꼬투리가 되었다. 
여기서 의제란 중국사에서 향우와 유방이 천하를  두고 다투던 시절의 초나라 회왕을  말한
다. 그는 역사에 잠시 등장했다가 결국 항우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는데, 김종직은  암암리에 
여기서 단종을 회왕에 비유하면서 왜 세조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는지 안타까워하고 있다. 
게다가 김일손은 훈구파에 속하는 이극돈의 비행도  사초에 함께 실었는데, 마침 실록(여기
서는 성종실록을 말함)을 편찬하는 책임자의 역할을 맡게 된 이극돈은 이 내용을 보고 매우 
분개해였다. 그래서 이극돈은 그동안 김종직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유자광 등과 함께 
조의제문을 빌미로 하여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원래 훈구파와 사림파의 충돌은 그들의 이념상 차이 때문에 어느 때라도 활화산으로 타오
를 가능성이 있었다. 성종대에는 임금이 현명하고 통찰력이 있어  양편의 충돌을 막는 완충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연산군은 그렇지 못했으므로 문제가 크게  일어나고 만 것이다. 사화
의 결과 김일손이 사형당하고, 김굉필은 유배되었으며, 죽은 김종직은 시체로서 목이 잘리는 
등 사림파의 인물들이 죽거나 혹은 유배당하는 비극을 연출하게  된다. 이러한 참화가 일어
난 해가 무오년이므로 사람들은 무오년에 일어난 선비들의 참화라는 의미로 역사에서  무오
사화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제 17세가 되어 사물에 분별이 서 가던 조광조는 사화를 목도하면서 놀라고 한편 분한 
생각이 들었다. 사초의 내용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 것은 누가 보나 부당한 일이다.  역사와 
관련되는 기록은 그 내용을 일일이 문제 삼는다면 역사 기록의 진실성은 무너지고 말 것이
다. 적당히 권력에 아부하는 거짓 기록이 역사를 만들어 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역사
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말할 것도 없이 세조의 왕위 찬탈은 잘못된 것인데, 
그것을 비판한 글이 왜 그토록 엄청난 처벌을 받을 이유가 된단 말인가. 그 곧고 명망 높은 
선비들이 이러한 일 때문에 죽는다면 장차 이 나라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불의가 의를 
이기는 이 현실! 이래서는 안 되지 않는가. 생각할수록 조광조는 안타까울 뿐이었다. 

    4. 한훤당과 사제관계를 맺다
      가) 소학동자 김굉필
  김굉필은 1454년(단종 2년) 지금의 서울인 한성 안의 정릉동(현재 덕수궁 인근 정동)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서흥이며 자는 대유, 스스로 지은 호는 한훤당이데 사옹이라는 또  다른 
호가 있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정의감과 자존심이 강한데다 완력도 상당하여 오만무례한 사
람은 닥치는 대로 채찍을 휘둘러 갈겼다고 한다. 그래서 상인들도 김굉필만 보면 피하기 일
쑤였다니 10세 전후 시절의  한때는 영락없는 망나니였던  셈이다.(한훤당선생님기념사업회, 
삼화출판사, 1984 참조. 이 책에서는 김굉필이 6, 7세에  사람을 때리고 다닌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상인들도 그를 무서워할 정도였다면 10대에 들어서도 한때는 그런 형태를 계속했다
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크게 각성, 책읽기에 몰두하기 시작히였다. 얼마나 공부하기를 좋
아했던지 19세에 장가를 든 후에도 처가(당시는 장가든 후 상당  기간 처가에서 살았음) 옆
에 작은 서재를 지어 놓고 쉼  없이 글을 읽을 정도였다. 그가 지은  한훤당이란 호도 이때 
공부하던 서재의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라고 한다. 
  21세 때에는 정여창과 함께 경상남도의 함양 군수로 재직하던 김종직을 찾아가서  사제의 
인연을 맺는다. 이 당시 김광필은 찬가와 처가의 연고지인  경상북도의 현풍, 합천, 성주 등
지를 왕래하며 친구를 사귀고 학문도  논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가 김종직을  찾은 것은 이 
과정에서 얻은 일종의 정보에 따른 결과로 생각된다. 이 시절 김종직은 절의로 이름높은 그
의 가계와 그 자싱의 학문에 의해서 영남의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우상적인 존재로 떠오
르고 있었던 것이다. 
  김과 정이 찾아갔을 때 40대 초반이었던 김종직은 이들 유망한 청년들을 맞아 매우 기뻐
하면서도 일단은 거절의 말을 하고 있다. 나는 학문과 덕이 부족해서 그대들을 가르칠 만한 
자격이 없으니 다른 스승을 찾아가  보라고 시로써 겸양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물론 의례적인 말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이들은 곧 함께 시간을 내어 공부하는 과정에 
들어갔다. 김종직이 이들에게 특히 무게를 두어 강조한 책은 소학이다. 이 책은 김종직의 부
친인 김숙자(1389-1455)도 그 중요성을 강조한 책인데, 김굉필이 다시 그 뜻을 전수받게 됨
으로써 여기에 소학을 중시하는 학통(학문의 전통)이 성립되게 된다. 뒤에서 소학의 내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요컨대 그것은 실천을 중시하는 데에 그 특징이 있
다. 고려 신하로서 굳게 지조를 지켰던  야은 길재(1353-1419)와 세조의 쿠데타에 항의하여 
관작을 버린 김숙자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핵심적 교재가 바로 이 소학이다. 
  김굉필이 이때 소학을 처음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승의 설명을 들으면서 읽어 
가자니 그 내용 하나하나가 새삼스레 모두 깊은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이후
부터 그는 다른 책들은 젖혀 놓고 나이  30이 되기까지 오로지 소학을 읽는 데만 열중하였
다. 어찌나 이 책에 빠졌던지 스스로를 '소학동자'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을 정도여서 남들
이 학문에 대하여 물을 때면 즐겨 하는 말이 있었다. '소학동자'가 무엇을 알리요. 
  소학은 이름 그대로 주로 어릴 때 배우는 책이었으므로  동자라 자칭한 것이겠는데, 어른
이 되어서도 이런 말을 했던 것을 볼 때 이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열의가 어떠한가를 알게 한
다. 그가 스스로 지은 독소학(소학을 읽고)이라는 시를 보면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학문을 배우고도 천기를 알지 못하더니
  소학의 글 속에서 어제의 잘못 깨달았네.
  
  업문유미식천기
  소학서중오작비
  
  그의 가정 법도 역시 소학에 의거하고 있다. 그래서 당시의 양반집들에서는 그의 처세, 복
상(초상을 당해서 옷을 입는 것), 솔가(집안 식구 전부를 데려가거나 데려옴) 등에서 보이는 
생활방식을 '한훤당의 가범'이라고 하여 매우 존중하며 따를 정조였다. 
  27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김굉필의 벼슬길은 매우 늦게 열리고 있다. 41세에 남부참봉직을 
맡은 이래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정6품관직)을 역임하였다. 품계로 보면 크게 빛을 보지 못
한 셈이다. 그러나 김굉필의 학문과 덕성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일 경우 누구나 후한 점수를 
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관직에 오른 계기부터가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에 의해서 성리학
에 밝고 지조가 굳은 유일이라는 명목의 천거를 통해서였다. 그 중에서도 반우형(연산군 말
년과 중종초에 걸쳐 대사헌을 역임하였음)이란 사람은 특히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
래서 관직이 김굉필보다 높은데도 오히려 제자 되기를 청하였다. 자신의 나이가 김굉필보다 
5세 연하였으므로 관직의 고하를 떠나 이렇게 나온 것이나 김굉필로서는 난처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사양했으나 그래도 반우형이  듣지를 않자 생활하면서 지
켜야 할 사항 18 조목을 써 주는 것으로 이를 피하고 있다.  그 내용이 오늘날 전하는 김굉
필의 한빈계인데 역시 성리학자다운 내용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496년(연산군 2년)
에 만들어진 이 18 조목의 내용을 간단히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동정유상   동정가운데 떳떳함이 있도록 하라. 
  2. 정심솔성   마음을 바로 해서 착한 본성을 따르라.
  3. 정관위좌   갓을 바로 쓰고 무릎꿇고 앉아 몸을 바르게 하라.
  4. 심척선불   신선이 되고자 하는 것과 불교를 깊이 배척하라. 
  5. 통절구습   낡은 습관을 철저하게 끊으라.
  6. 실욕징분   욕심을 막고 분한 마음을 참으라.
  7. 지명돈인   천명을 알고 인에 힘쓰라.
  8. 안빈수분   가난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켜라.
  9. 거시종검   사치를 버리고 검소함을 따르라. 
  10. 일신공부  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11. 독서궁리  책을 읽고 깊이 생각하라. 
  12. 불망어    망년된 말을 하지 말라. 
  13. 주일불이  마음을 하나로 하여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라. 
  14. 극념극극  잘 생각하고 부지런하라. 
  15. 지언      말을 잘 알도록 하라.
  16. 지기      일의 기미를 알도록 하라. 
  17. 신종여시  시작할 때와 같이 끝을 신중히 하라.
  18. 지경존성  공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성실함이 있으라.
  
  물론 이들 조목은 김굄필 자신이 누구보다도 지키고자 한  내용들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
리 언행을 조심하고 자기수향에 노력을 하더라도  얽혀 오는 운명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1498년(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되고 그로부터 6년 후인 1504년(연산군 10년)
에는 갑자사화로 죽음을 당하기에까지 이르니 말이다. 
  문집으로 경현록이 있었다고 하나 후환이 두려워 무오사화 때 가족들이 불태워  없앴다고 
한다. 아마도 연산군의 노여움을 살 수 있는 내용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
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경헌록은 남아 있던 약간의 시와 글, 부 등을 담고 있을 뿐이다.)
  김굉필의 업적이라면 조광조와 김안국, 정국 등  제자들에게 소학을 가르쳐 민중들에게까
지 그 혜택이 돌아가도록 한 데에 있을 것이다.(윤사순, 한국유학사상론, 예원서원,1997:정신
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황의동, 한국의 유학사상, 서광사, 1993 참조)
      나) 40대의 스승, 10대의 제자
  한훤당 김굄필의 나이 45세, 그리고 조광조가 17세일 때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다. 계기는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사제의 연을 맺은 것은 조광조가 한훤당을 찾아간 데서 비롯된
다. 
  조광조의 나이 17세 되던 해에 그의 부친은 어천도의 역참 찰방으로 임명을 받아 평안도 
임지로 부임허였다. 여기서 도라고 함은 여러 역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말하는데, 이 당시 평
안도에는 대동도와 함께 어천도가 있었다. 어천더는 총 21 개의 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대체로 개천, 영변, 희천, 강계, 초산, 운산, 삭주, 의주를 연결하는 도로이다. 
  역참은 주로 공문서의 전달과 국경 지역의 중요한 군사 정보, 그리고 사신의 영송과 접대 
등을 위하여 설치되었다. 말하자면 교통과 체신 업무를 함께 맡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찰방이란 이같은 각 도로의 책임을 맡고 있는 종6품의 관원을 말하는데, 오늘날로  굳
이 비교해 말하자면 지방 철도청장이 여기에 해당될 수 있을  듯싶다. 각 도로의 찰방들 중
에서도 어천도 찰방은 특히 중요성이 큰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야인들이 준동하는 데
다가 조선이며 중국 사신의 내왕이 빈번한 교통로이기 때문이다. 
  그런만큼 조원강 찰방(조광조의 부친)은 즉시 세밀한 형황파악에 들어갔다. 도로의 전반적
인 상태며 각 역의 운영 실태, 역장이며 참리(각 역에  소속된 관리), 역에서 일하는 노비와 
조역백성 등 정식 직원과 관련 요원의 근무 실태, 그리고 운송 수단인 말의 확보와 그 수급 
상태 등을 확인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단 업무 파악이 끝나자 그의 관심은 아들 광조에게러 돌아갔다. 아들은 평
안도 지방의 물산도 구경할 겸 관사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많은 책을 가지고 따라온 터이다. 
그러나 아직 17세인 아들이 공부를 하는 데는  훌륭한 스승을 따라 배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스승이 될 만한 인물을 이라저리 알아보고 있었는데 마침 인근에 그
야말로 적임자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훤당  김굉필! 그가 희천에 유배와 있었던 것이
다. 조 찰방도 그의 학식과 인격은  잘 알고 있었으며, 평안도 유배간  사실도 듣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가까운 데에 그가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희천에는 이 당시 
어천도의 21 개 역 중 하나인 장동역이 있었으므로 그도 가끔 들리는 지역이었다. '잘  되었
다. 광조에게는 참으로 좋은 스승이로다.' 당연히 조 찰방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
음 순간 그는 주저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한훤당이 정치적 이유로 유배온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세력이 훈구파라는 사실을 머리 속에 떠올린 것이다. 조정의 
미움을 받고 있는 유배중의 인물에게 현직 관장(한 기관의 책임자)인 내가 아들을 공부시킨
다? 별게 아닐 수도 있지만,  하도 말이 많은 세상이니 문제가  되려면 될 수 있으리라.  안  
겠다, 공연히 흠집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다른 사람을 찾아보고 있는데 아들은 
적극적인 태도로 나왔다. 
  "아버님, 한훤당 어른께서 희천에 와 계시다는데 그분께 가서 배우고 싶습니다. "
  아들의 태도는 아주 진지했다. 
  "내가 지금 더 훌륭한 분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니 좀더 기다려 보아라."
  의어로 완곡하게 반대하는 부친의 반응, 
  "아버님, 저는 한훤당 아른이 이 시대의 가장 훌륭한 학자라고 듣고 있습니다.  꼭 그분에
게 가서 학문을 배우고 싶습니다."
  "알았다. 좀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계속 유보적인 태도로 나오는 부친의 말. 
  이런 시의 부자간 대화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런데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아들의 태도
는 꺽일 줄 몰랐다. 평소에는 그처럼 순종적이고 온순하던 이 아이의 어디에 이처럼 황소고
집이 있었는지... 이렇게 되자 조 찰방도 차츰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자신의 입장만  생각
해서 아들의 뜻을 막는 것만 같아 내심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사실 그 역시 세조의 쿠데타
를 반대한 사람(조광조의 조부를 말함)의 아들이었으므로 한훤당에게 동정과 호의를 가지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아들이 한훤당에 관한 전후의 사정을 알면서도 그에게 가서 공부를 하
겠다는데 끝까지 막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세 아들 중에서도 특히 유망해 보이는 이 아들
이 한훤당을 따라 배운다면 얻는 게 적지 않을 것이다. 좋다, 이런 판단이 내리자 그는 아들
의 청을 들어주기로 결정하였다. 문집의 연보에 이때의 일을 두고 "마침내 (배우러 가도 좋
다는 부친의) 명을 받았다"고 했으니 드 이면의 서정을 알 만하다. 
  조광조가 부친을 통해 마련한 소개장까지 들고 한훤당을 찾아갔을 때 그는 희천에서의 유
배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되어  가던 중이었다. 생활을 돌보아 주는  여종 하나만을 데리고 
형벌의 삶을 견디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아주 힘들 정조로 어려운 상태에 있지는 않았다. 초
하루와 보름 두 번에 걸쳐 실시되는 군 당국의 삭만 점고외에는 책도 읽을 수 있었고  소문
을 듣고 찾아오는 이 지역의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할 수  있었다. 시일이 지나면서는  
나무랄데 없는 언행에 인근의 주민들도 감명을 받아 그에게 정도 이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주고 있기도 했다. 
  "조광조라고 합니다. 일찍부터 뵙고 가르침을 받고 싶었는데, 이제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영광입니다."
  큰 절을 올리며 자기소개를 하는 10대 후반의 소년을 보면서 한훤당도 왠지 흐뭇한 생각
이 들었다. 깨끗한 이마며 수려한 이목구비도 그랬지만 몇마디  대화에서 그의 학문 수준이 
이미 보통이 아님을 알게 되자 한훤당으로서는  좋은 제자를 하나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장래성이 있다, 잘 가르치면 나의 학문을 잇게  할 수 있겠구나. 유배생활의 쓸쓸함
을 후진 양성의 기쁨으로 메우고 있던 한훤당이다. 그런데  이렇게 똑똑하고 심지도 바르게 
보이는 아이를 제자로 얻게 되었으니 이것도 복이 아니고  무어랴. 그래서 흔쾌히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어디 우리 함께 열심히 공부해 보자꾸나. 
      다) 시제간의 공부
  한훤당의 교육은 엄격하고 일과가 빈틈없이 짜여져 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에세 배
우는 학생들은 조광조 외에도 최수성(강릉 출신으로 관직을 가지지 않은 채 생애를 마침)이
며 인근에소 찾아오는 아이들까지 해서  여러 명이 더 있었다. 학생  수가 많지는 않았으나 
그들 모두가 열심히 공부하려는 태도여서 한훤당으로서는 늘 즐거운 마음이었다. 해서, 때로
는 유배 생활이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어떻게 이토록 
보람 있고 즐거운 시간을 가져볼 수 있단 말인가. 그중에서도 조광조의 향학열은 그의 마음
을 더욱 기쁘게 해주었다. 공부 시간에  늦거나 빠지는 일이 없는 점이 무엇보다  기특했다.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았고, 멍청한  태도로 그저 앉아만 있지도  않는 학생! 게다가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종종 던져서 한훤당 자신도 깨우치게 되는  바가 있을 정조이니... 볼수록 광
조란 학생은 보통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재로는 사서와 함께 소학, 근사록을 채택하였는데, 어느 책이나 조광조로서는 처음이 아
니면서도 마치 초학자가 된 듯한 기분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한훤당의 가르침은 
깊고 넓었던 것이다. 
  소학은 주자의 제자 유자징이 편저자로 되어 있는 책이다.  그러나 대유학자인 주자 자신
이 직접 교열하고 가필까지 한 책이니만큼 사실상 주자의 저술이나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
다. 책의 구성은 내편과 외편으로 나뉘어 있는데, 전자에는 입교(가르침을  세움), 명륜(윤리
를 밝힘), 경신(몸을 공경히 함), 계고(옛일을 공부하며  익히는 것)의 네 항목을 두고, 후자
에는 가언(좋은 말)과 선행의 두 가지를 두어 서술하고 있다. 내편의 항목들에서는 중국 고
대의 많은 옛일과 공자 등  성현의 말을 기록하여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외편에서는 역시 
중국의 한나라 이후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효부며 뛰어난 철인들, 예컨대 장재(송나라 
때의 철학자)와 2정의 언행을 기록하여 교훈으로 삼고 있다. 
  소학은 중국과 우리나라 모두에게 중시되어  왔다. 조선조만 하더라도 세종  때에 중앙의 
교육기관에서 나이 8세 이상의  학생들에게 필수과목으로 배우도록 하였다.  그리고 15세가 
되면 대체로 대학을 배우는 과정에  들어가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학은 초보자를 
위한 교과목에 불과한 듯싶지만 그렇지는 않다. 한훤당이 30세가  되기까지 오로지 이 책만
을 읽었다는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의외로 깊이가 있는 책인 것이다. 세종 때의 명
신이자 석학이었던 정인지가 평생을 손에서 이 책을 놓은 적이 없고 늙도록 즐겨 읽었다고 
하니 알 만하지 않은가. 조선조에서 소학은 문무의 어느  쪽을 지망하는 사람에게나 소중하
게 생각되는 책이었다. 
  또, 근사록으로 말하면 일반적으로 주자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책이다. 그러나  실
은 그의 학문적 친구인 여동래와 함께 엮은 책으로 총 14  권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제1권
도체(인간 본성의 근원을 밝힘), 제2권 위학(학문하는  요령), 제3권 치지(지식을 이룸), 제4
권 존양(마음을 함양하여 보존함), 제5권 극치(힘써 행하는 것), 제6권 가도(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것을 논함), 제7권 출처(관직에 나아가도 물러나는 도리를 논함), 제8권 치체(나라 다스
리는 방도를 논함), 제9권 치법(나라 다스리는 법을 논함), 제10권 정사, 제11권 교학(사람을 
가르치는 방도에 대하여 논함), 제12권 경계(경계하고  삼가는 방도를 논함), 제13권 변이단
(이단을 구별함), 제14권 관성현(성현들이 서로 도를 전한 계통을 논함)으로 되어 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통해 듣고 보니  참으로 깊이가 있는 책들이로구나.  조광조는 그러한 
생각을 하며 이들 책에 새삼 빠져들었다. 한훤당의 가르침에는 일관된 점이 있었는데,  그것
은 어느 책에서나 위기지학(자기를 향상시키기 위한 학문)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예컨데 논
어에서는 옹야편에 나오는 구절, 즉 "너는  군자로서의 유자가 되어야하고 소인으로서의 유
자가 되어서는 안 되느니라"하는 내용을 되풀이 설명하는 식이었다. 이 구절은 공자가 문학
에 재능이 있는 제자 자하에게 한 말린데, 얼핏 보면 내용은 별게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학
문을 하면서 자기의 도덕적 향상과 참된 자기의 계발을 떠나 이름을 팔고 이익과 권력을 얻
는 도구로 그것을 이용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해서 자기 한몸에 집안을 망치고 
더 크게는 나라를 그릇되게 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으냐 말이다.  한훤당은 이러한 점을 
때로는 사례를 통해서 때로는 철학적으로 깊이 있게 논하면서 조광조 등의 제자들에게 들려
주는 것이었다. 
  또 정(고요함, 움직임이 없음)을 강조하는  특징도 있었다. 예컨대 소학의  가언에 나오는 
"고요함이 아니면 학문을 이룰 수 없다."는 구절을 그는 몇  번이고 강조하였다. 고요함이란 
움직임의 근본이지. 그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하늘은 둥글어 움직이고 땅은 모가 난 채 움직임이 없다만 그러나 하늘은 땅을 근본으로 
삼지 않느냐? 보아라, 하늘이 바람을 불게 하고 비를  내리며 뇌성벽력을 치는 과정을 거쳐
서 만물을 만들어 내거니와 그것들이 땅 아니면 어디서 그 터를 얻을 수 있단 말이냐, 하늘
의 섭리가 땅을 근본으로 해서 이루어지지 않으냐 말이다.  정지된 상태의 고요한 가운데에 
장차 나타날 움직임의 양상이 있게 마련이다. 천지만물이 모두  그렇게 사람의 마음도 마찬
가지인 것이야. 그러니까 항상 일 없이 고요하게 있을  때에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군자와 소인으로 갈리는 것이다. 인의예지의 움직이는 것도  본체에 한가지 이치로 구
비되어 있으니 그게 다름 아닌 정이야.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이 고요함을 주로 삼아서 절
대 함부로 행동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느니라."
  한훤당의 강의가 이처럼 계속되는 가운데 조광조는 궁금증을 풀 수 없어 결국 질문을 하
게 된다. 
  "그렇다면, 선생님, 고요한 가운데서 어떻게 해야 군자가 되는 길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경이지. 경건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한순간도 이러한  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사람
들이 경이요, 성이요 하는데 그 모두가 사람 마음의 묘한 것을 밝히는 것이지. 성과 경은 대
학에 나오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요결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경은 또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까?"
  "왜 근사록의 제4권 존양편에 이천 선생이  하신 말씀이 있지 않느냐, '오직  하나로 하는 
것을 일러 경이라고 한다'고 말이다. 잡된  생각이 없이 마음을 오직 하나에 기울이게  되면 
거기에 경이 있느니라."(황희동, 앞에 나온 책에서 김굉필의 도학  사상에 관한 부분을 참조
하여 작성한 것임)
  한훤당의 설명이 명쾌한 데다가 조금이라도 의문이 있으면 반드시 질문을 하였으므로  조
광조의 학문은 나날이 성장해 갔다. 그러나 조광조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학과를 마차고 집
에 돌아오면 주위의 일상적인 일을 가지고 배운 것과  비교하여 생각해보고는 하였다. 예컨
대 역참에 관한 일을 보면 늘 관원들의 부정 때문에 부친이 괴로워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
는데, 그럴 때면 조광조는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선생님께서는 근사록 10권 정사편
에 나오는 주공의 지공무사함을 설명하시면서 누구나 이렇게 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왜 이토록 역참에 있는 관리들은 보정을 하게 되는 것일까? 생활의 어려움이 문제라고는 하
지만 근본적으로는 공인으로서의 성과경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편, 도망가는 역원들이  생
기는 것을 두고는 이러한 생각도 해본다. 근래 들어 공물(조정에서 거두어들이는 지방 특산
물)과 임금(연산군)께 올리는 진상물이 많아 일이 더욱 고되어진 탓이리라.  만일 왕께서 경
을 체득하신다면 이런 사태는 좀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겠
는가? 그는 이처럼 연속되는 생각에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
  17새의 나이로 다감한 조광조는 때때로 시며 문장을 짓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지는 않았
다. 다구나 이곳에 있는 묘향산이라니! 이 아름다운  산은 그의 가슴에 자꾸만 시와 문장을 
가져다 주려하고 있었다. 시와 문장! 만약 과거  시험을 보려고 한다면 시문에 관한 연습과 
공부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주위에서 그에게 문학적인 공부도 하도록 권유하
는 경우가 없지도 않았다. 그럴 때면 늘 마음속으로 그가 하는 말이 있었다. 시를 짓고 문장
연습을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사람 사는 이치를  터득하고 나라 다스리는 
방도를 깨우치는 것이야. 거기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문집, 부록 권 5, 연보 참조)
      라)"네가 나의 스승이로구나"
  어느 때인가 한훤당에게 꿩을 선물로 주고 간 손님이 있었다. 고달픈 유배 생활에 몸보신
하라고 주고 갔을 것이다. 그런데 효성이 지극한 한훤당은 꿩을  보자 불현 듯 한성의 집에 
생존해 계신 노모에게로 생각이 달렸다. 어머님께서  꿩고기를 유달리 좋아하시는 드시도록 
해야 하겠다만 먼 길에 이대로는 안 되고... 해서 털을  뽑고 내장을 꺼낸 뒤 고기를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고양이 한 마리가 냉큼 이것을 가져다가 먹어  버렸다. 얼마 후 이것을 알게 
된 한훤당은 그야말로 펄펄 뛸 수밖에 없었다. 고양이는 어디로  갔는지 없는 채 그의 열화 
같은 노여움을 그대로 뒤집어쓸 사람은 여종밖에 없었다. 
  "네 이년, 내가 너에게 그토록 이르지 않았더냐. 혹시 개나 고양이가 와서  먹을지도 모르
니 잘 주의해서 지키라고. 그런데 무엇을 하고 있었길래 그것 하나 못 지켰단 말이냐?"
  옆에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는 펄펄 뛰기를  멈추지 않았다. 당연히 여
종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 울기만 할 뿐이고. 
  그런 상태로 한훤당의 노여움은 한참이나 더 계속되었는데 본인의 심정이야 어떻든  옆에
서 보는 누구에게나 좀 심하다는 생각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큰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
가 하여 몰려왔던 이웃 주민들이며 제자들 그 누구도 감히 나서서 말릴 생각은 못하고 있었
다. 얼마 후 한훤당의 노여움이 좀 가라앉는 기미가 보이자 나선 사람은 조광조였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노모를 봉양하시려는  정성이 비록 간절하다고는  해도 군자가 하는 
말은 잘 살펴서 해야만 할 것입니다. 제자가 마음에 가만히  의혹되는 바가 있어 이렇게 청
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화를 삭이며 앉아 있던 한훤당은 자리에서 일어난 제자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
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도 마침 스스로 후회하고 있었는데, 너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 정말  부끄럽구나. 네가 
나의 스승이로구나. 나는 너의 스승이 아니다."
  이후로 더욱 조광조를 사랑하고  애지중지하게 된 것은 물론이다.(문집,  부록 권 5, 연보 
참조)
  
    5. 20세 전후의 청년기
      가) 시묘중의 면학 자세
  18세에 조광조는 이윤형 첨사(첨절제사의 약칭으로 종3품의 무관직)의  딸인 한산 이씨를 
맞아 결혼을 한다. 행불행을 함께 하는 생애를 약속한 것이다. 
  이들 부부는 그러나 불행을 먼저 맛보아야만 했다. 집안 어른인 원강공(조광조의 부친)이 
이듬해에 별세하였기 때문이다. 아버님! 용인의 심곡리(지금의 용인군  수지면 상현리) 선영
에 부친을 장사지내면서 조광조는 몇 번이고 이렇게 불러 보았다.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우셨
던 아버지! 주저 끝에 그러나 아들의 학문을 위하여 소개장까지 마련해 주며 한훤당의 제자
가 될 수 있도록 하여 주신 분이 아니던가. 그는 부친이 아직도 살아 계신 것만 같았다. 
  이후 3 년간의 시묘살이는 온전히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  오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여간
해서는 좀체로 지키기가 쉽지 않았던 주자가례에 따라 사철 변함없이 묘를 대하여 잔을 올
리고 절을 드렸다. 눈비 오고 덥거나 춥다고 아버님에 대한 정성을 소홀히 하랴. 형이며  아
우와 함께 절을 드리며 조광조가 늘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말이었다. 묘 아래에 마련한 여막
에서 잠을 잘 때도 참최복을 벗지 않았고,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젯상의 제기들도 종을 시키
지 않고 손수 씻었다. 밤이 되어 별이 총총한 하늘을 보며 묘소  주위를 돌 때면 사는 것이 
올바른 길인가 하는 데 대한 생각이  머리 속을 꽉 채울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아버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성현의 길을 목표로 해서 살아가야 하느니라. 
  삼년의 시묘가 끝났어고 그는 좀처럼 부친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여막이 있던 
자리에 정식으로 몇 개의 방을 가진 초당을 마련하여 계속 지내면서 못다 한 그리움을 달래
고자 하였다. 집 앞으로는 계단이 딸린 자그마한 연못을 만들고 연이며 잣나무도 심어 놓았
다. 책을 읽다가 나와서 쉬며  생각을 가다듬고자 하는 뜻도 거기에는  있었다.(그러나 지금 
용인군의 이곳 묘소에는 조광조가 마련한 초가며 연못 그 어느  것도 남아 있지가 않다. 후
손들에 의하면 병자호란 때 없어진 것 같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매일 독서를 하며 지냈다. 소학과 근사록, 그리고 사서며 성리대전 등을 읽
어 지식을 넓혀 나갔다. 사람으로서는 살아가며 지켜아 할 예법과 의리, 우주와 인간을 아우
르는 철학적 통찰력을 그는 이  책들을 통해서 더욱 확인하며 체득해  갔다. 아울러 시간이 
있는 대로 자치통감강목을 자주 읽으며  역사에 대한 안목을 키워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책은 송나라의 명신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을 주자가 국가의 정통성을 중시하는 의리적 
입장에서 편찬한 책이다. 그래서 예컨데  중국 삼국시대의 위, 촉,  오를 서술함에 있어서는 
위를 정통으로 보는 종래의 입장과 달리 촉을 정통으로 보고  있기도 한다. 고대 중국의 주
나라 주열왕 24년(BC 503년)부터 이른바 5대의 후주 세종대까지 총 1362 년간을 다루고 있
는 만큼 분량도 엄청나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이 적혀 있는 것은 물론 황제와 신하 등 많은 
등장 인물들이 의리적 입장에서 평가를 받고 현실을 이해하는 안목을 넓혀 주는 점도 있다. 
  그는 이러한 책들을 철거하게 공부해 나갔다. 인근 마을에서 새벽닭이 울면 곧 일어나 세
수를 하고 책장을 펼쳤다. 무릎을 끓은 채 한 줄씩  정독해 나갔으며 때로 의문되는 내용이 
있으면 천장을 쳐다보며 한참 동안  생각해 보고는 하였다. 그래도 안  풀리는 것이 있으면 
책을 덮어 둔 채 온종일 궁리를 거듭하며 알고자 애를  썼다. 어떤 어려운 문제에 봉착해서
더 에라, 골치 아픈데 그만두자하는 생각을 꿈에도 그는  하지 않았다. 성현이 따로 있느냐, 
나도 배우고 노력하면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으므로행동과 일상의 
태도에서도 완벽한 인간이 되고자 노력했다. 집에 홀로 남게 되신 어머님께 자주 들러 문안
을 여쭙고 위로해 드리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맛있는  움식이 있으면 무릎을 꿇고 앉
아 권해 드렸으며, 언짢은 기색이라도 보이시면 그 까닭을 알아서 풀어 드리고자 애를 썼다. 
이제 20대 초반이 된 그는 누가 보나 지식과 덕을 두루 갖춘 유망한 양반집 청년이었다. 
  이런 가운데 현실에 대한 그의 비판의식은 아주 날카로워  갔다. 무오년에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은 이후 조정에서는 바른 소리 하는 사람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왕은 사냥이며 노
는 데 관심을 쏟을 뿐 정사에는 힘을 기울이자 않았다. 자연히 임사홍, 유자광 등의  간신배
들만이 판을 치게 되고 이에 따라 고생을 하게 되는 것은 백성들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정치를 비판하였다. 집과 용인의 선영 사이를 오
가며 보고 듣게 되는 백성들의 고된 생활이 주내용이었으나 얘기가 무오사화에 이르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도대체 사림이 무엇을 잘못했다는 겁니까, 흑을 흑이라고 한 것뿐인데..."
  사림에 대한 탄압은 그에게 참기 어려운 처사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때는 
임금인 연산군을 직접 비판하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상감도 너무 하시는군, 임금은 백성들의  부모이자 스승인데 어디 이럴  수가 있단 말이
요? 그 많은 인재들은 그토록 해치고도 유자광에게 아무 일이 없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러한 말은 하기도 했다. 조광조 자신은 울분을 못 이겨 하는 말이었으나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소수나마 그의 말에 동감을 표시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러나 대부분은 그의 과격성에 놀라 미친놈 취급을 하거나 혹시 함께 연루되어 처벌을 받지
나 않을까 해서 가까웠던 친구들도 그를 멀리하기가 일쑤였다.  눈치를 보고 너나없이 입조
심을 하기에 바쁜 때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조광조 자신은 태연했고, 친구들의 절교
에도 전혀 동요되는 바가 없었다.(문집, 부록, 권 5, 연보 참조)
      나) 한훤당의 부음
  23세의 10월에 조광조는 스승 한훤당의 부음을 듣는다. 한훠당은 4년 전 평안도의 희천으
로부터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는데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연산군의 명에 따라  이
곳에서 죽음을 맞은 것이다. 
  1504년(연산군 10년)에 발생한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원수를 
갚고자 해서 일으킨 정치적 참극이다. 자신의 생모가 사약을 받고 죽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연산군이다. 그랬는데 임사홍과 외조모 신씨를 통해서 자난날의  사정을 알게 되자 그
의 잔학성은 여지없이 폭발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늘어가는 유흥비  등으로 바닥이 
난 국고를 메우기 위해 대신들의  재산 일부를 빼앗고자 하고 있던  연산군이다. 이 기미를 
눈치 챈 임사홍 또한 훈구파의  대신들을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재빨리  여기에 가세하였다. 
그리하여 폐비 문제를 이용, 연산군을 격동시킴으로써 마침내 갑자년의 엄청난 참극이 일어
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죽거나 유배를 가고 노비가 되는 등 해를 입은 사람들은 이루 
셀 수가 넚을 정도이다. 윤씨를 폐출시키는 일에 찬성하거나 이를 적극 막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나 보복을 면할 수가 없었다. 부왕인 성종의 후궁이었던 정, 엄씨의  두 숙의(왕을 모시
는 후궁의 품계로 종2품임)와  그 소생들이 잔인한 방법에  의해서 죽었고,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등 대신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도 예외일 수는 없어서 한명
회와 정창손 등은 부관참시(관에서 시체를 꺼내어 목을 치는 것)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참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무오사화 때 죽거나 유배를 간 사람들도 폐비 문제에 협조한 
자들로 보아 형벌을 가했는데 한훤당은 바로 이 경우에 들어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무오사화 이전에 이미 정치판에 큰 격변이 일어날 것을  예견했던 한훤당이다. 그래서 관
직을 내놓고 낙향한 바 있었으며, 제자중의 한 사람인  진사 신영희에게도 주의하도록 당부
를 했던 터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사악한 성격을 빌어 닥쳐오는 시대적  운명은 끝내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연산군 10년 10월 7일에 마침내 형의 집행을  받은 후 연산군의 명에 따
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 거리에 효수(죽은 사람의 목을  장대에 매달아 놓는 것)되고 
말았다. 
  조광조가 스승 한훤당의 부음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수일 후였다. 아, 선생님,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그는 통곡을 했다. 지난날 희천에서 가르침을 주던 스승의 인자한 모습
이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올라 무엇을 하든 한훤당의 생각만이 가득했다. 고기를 멀리하고 웃
는 일도 별로 없었으며, 벽을 의지해 앉은 채 멍하니 지낼 때가 많았다. 또한 참형을 당하기
까지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던 한훤당의 자세에 깊은 감명을 받기도 하였다. 
  여러 갈래로 밀려오는 난폭한 시대의  아픔! 그것은 조광조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
다. 대체 세상은 어떻게 되려는가? 벌컥 뒤집히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어려움을 견디기 어려
운 백성들은 누구나 그런 생각을  했고, 지식인들은 그들대로 걸을 두고  나온 하나라 시대 
민중들의 탄식을 생각하며 한숨만 쉬고 있었다. 
  
  이 해가 어느 때나 없어질꼬
  내 너(걸을 가리킴)와 더불어 망하리라. 
  시일갈상
  여급여개망
  
  서경의 탕서편에 나오는 탄식의 구절은 그렇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6. 새 시대를 밎는 '수재'
      가)혁명
  연산군 재위 12년이 되던 해. 많은 사람들이 죽지 못해 살고 있었다. 
  원래 학문을 싫어하고 놀기만을 좋아하던  왕이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잔인무도했던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사리분별이 있었고 왕의 할 바가 무었인가를 헤아릴 줄 아는 총명도 있었
다. 그러다가 무오사화를 일으키면서 그의 사악한 본성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하더니 재위 8
년 이후 장록수에게 빠지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기 시작했다. 바른 
말로 간하는 환관 김처선으 활로 쏘아 죽이고, 언론을 맡은 홍문관과 사간원을 없애서 일체 
귀에 거슬리는 말을 못하도록 하였다.  성균관을 놀이터로 삼는 등 그가  욕심 내키는 대로 
산 행적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셈이니 여기서 일일이 언급하는  것을 생략하기로 하자. 
그의 어떠한 성정이 이토록 악명 높은 왕이 되도록 만든 것일까?
  그는 걸핏하면 신하들이 자기를 능멸한다고 트집을 잡으며 문제를 삼았다. 신순문이란 신
하는 단지 올려다보며 말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처벌을 받았다. 의심도 많았다. 귀양가는  신
하가 있으면 과연 가는지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가는지 측근의 신하를 시켜서 확인해 보고
는 하였다. 조금이라도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물론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왕은 절
대자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지만,  그러나 말년에는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안감이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유배간 신하들의 동정에 잔뜩 신경을 써  일일이 이를 확인하는 조처를 
취하고 있을 정도이다. 사실 말년에는 갖가지 유언비어가 장안에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이장
곤이 왕의 미움을 받아 거제도로 유배가 있었는데, 그는 학문뿐 아니라 무예도 있는 인물이
었다. 그러므로 그가 현지에서 군사를 일으켜 한성으로 진격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
게 돌았다. 실제로 이장곤은 유배지를 탈출해서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으므로 그런 소문이 
나돌 만도 했다. 왕 자신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불안감은 나날
이 증폭되어 갔다. 그래서 신하들로 하여금 사모(관원들이 관복에 갖추어 쓰던 모자)에 충과 
성이라는 글자를 앞뒤로 써서 다니게 함으로써 변함없는 충성을 다짐받고자 하였다. 
  한편, 그는 자신이 성리학을 공부하지 않고 유흥에만 빠져  지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
기도 하였다. 그래서 재위 10년 되던 10월의 어느 날엔가는 자가의 부족한 자질을 탓하면서 
부끄러운 마음 금할 수 없다는 뜻을 시로 읊고 있기도 하다. 야생마처럼 날뛸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성정을 스스로도 다스리기  어려웠던 모양이다.(연산군일기 권  63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작성한 것임)
  평범한 남자가 성정이 나쁠 경우에는 '못된 놈'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
러나 한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가 그럴 경우에는 종종 역사를 바꾸는 일이 일어나기 쉽다. 
마침내 참을 수 없었던 시대의 운명이 서서히 왕을 몰아낼  계획을 추진해 가고 있었다. 누
가 그 일을 할 주도자로 선택된 것일까?
  이른바 중종반정으로 전해지는 혁명의 주도자들은 의외로  아주 평범한 인물들이었다. 지
중추부사(종2품관직) 박원종(1467-1510)과 부사용(정9품의  무관직. 실제로 일은  하지 않고 
봉급만 받는 자리) 성희안(1461-1513)이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박은 무예가 있는 장수로  여
자 좋아하고 학문에는 별달리 조예가 없는 사람이었고, 성은 그보다 학문은 있으나 그 역시 
나라를 크게 다스려 갈 위인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어지러운 시대를 만나 이래서
는 안 되겠다는 정의감과 함께 군대 동원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폭군을 몰아내는 시대
적 과업은 맡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일의 시초는 성희안이 먼저 연 셈이다. 그는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왕이 연 어느 연회석
상에서 "석상의 마음이 원래 청류(경치 좋은 곳에서  놀며 즐기는 것)를 좋아하지 않으셨는
데"라는 내용을 담아 시를 지어 바쳤었다. 그러자 왕은  자신을 모욕한 것으로 생각하여 참
판인 그를 하루아침에 부사용으로 강등시켜 버렸다. 이후 성은  울울한 심정으로 나날을 보
내는 가운데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게  되었다. 그러나 혼자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마침 박종원이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으로 판단되어 왕
의 신임을 받는 군자부정(종3품직, 군자감은  군수품의 축적, 저장에 관한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 신윤무를 중간에 넣어 그의 타진하였다. 예상한 대로였다. 그래서 이들은 이조판서 유
순정, 군기시는 병기 제조를 맡아보던 관청) 박영문, 사복시첨정  홍경주 등에다가 모사꾼인 
유자광까지 끌어들여 드디어 거사를 하였다. 
  9월 2일 날이 채 밝기 전에 혁명군은 창덕궁을 완전히 포위하고 돈화문을 통해 입성할 채
비를 차렸다. 주위에는 몰려나온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들은 긴장한 가운데도 군
인들을 격려하기에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술과 음식을 가져다  주는 사람도 있었고 눈물
을 흘리며 박수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촉즉발이 김장감이 감돌았지만, 한 시대의  전환
은 의외로 쉽지 끝나고 말았다. 궁궐의 수비군은 무저항 상태로 모두 도망해 버렸고 당사자
인 연산군 자신도 순순히 현실을 인정하며 무대에서의 퇴장을 서둘렀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덜덜 턱을 떨면서 자기 시대의 종말을 이렇게 확인한 것이다. 
  "내 죄가 중하여 이런 일이 올 줄 알았노라."
  혁명의 주도자들은 곧 경복궁의 대비에게로 가서 사태의 전말을 아뢰고 민의에 따라 진성
대군(연산군의 이복동생)을 왕으로 세우겠노라고 하였다. 이어 승낙을 받고 새 정권을 세우
니 이 사람이 조선조 제11대 종종  임금이다. 1506년, 조선왕조가 16세기로 접어든 지  얼마 
인 된 때였다.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광조도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환영하였다. 신하가 임금을 쫓
아낸 일 자체는 환영할 수 없었지만, 그 외의 다른 해결책이 있지도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 아직 부족하다는 자평
  새 시대를 맞아 지금 당장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이런 자문을 거듭하던 조광조는 기왕
에 해오던 학문을 계속하면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아는 바를 함께 토론하며 경
우에 따라서는 학문을 전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직업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므로 차라
리 자신의 공부도 겸한 학문적 교류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겠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좋은 
편이었다. 한창 나이의 훤한 풍채에다가  넓고 깊은 그의 학문이 많은  선비들의 주의를 끌 
만 했던 것이다. 새 시대를 맞아 지식을 갈구하는 젊은이들은 이제야말로 학문을 할 때라고 
생각했으므로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리지  않고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그를 찾았다. 그는 
이들과 주로 용인의 선영에 지어 넣은 초당에서 만났다. 호젓한 산속이라 학문을 논하며 지
내기에는 더없이 좋은 분위기가 좋은 분위기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능성(지금의 화순군 능주면) 출신의 양팽손이라는 젊은이도 있었
다. 그도 연산군 치하에서 세상을 개탄하며 세상을 구할 학문적 도리를 생각하고 있던 참에 
조광조에 관한 소문을 듣고 용인으로 그를 찾아온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로 조광조보
다 6세 아래였으나, 학식이며 재주와 행실의 어디로 보나 녹녹치 않은  데가 있었다.(권4 참
조, 조광조의 문집에는 양이 7세 아래로 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불치하문'(아랫사람에게 묻는 것도 수치가  아니라는 뜻)을 배움의 수칙으
로 삼던 당시 사람들인 만큼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있었다. 
또 그들 중에는 왕족의 한 사람인 종남부수 이창수도 있었는데, 똑똑한 이 젊은이와 조광조
는 그야말로 뜻이 잘 맞았다.(종종실록 권 28, 12년 5월 2일 참조)
  어떻든 누구나 그와 학문을 얘기하고  토론해 본 사람들은 조광조를  수재라고 생각했다. 
사실 조광조가 수재의 소리를 들은 것은 진작부터이다. 한훤당을  찾아갈 때 소개장을 써준 
양희지(1439-1504)가 이미 그의 뛰어남을 인정하고 '조수재'라고 불렀을 정도이니까. 양희지
로 말하면 임사홍이나 유자광 등의 간신으로부터 학자인 정여창에 이르기까지 두루  사귐이 
좋았던 인물이다. 성종조부터  출사하기 시작하여 연산군  시절에도 동지성균관사(종2품직), 
한성부 우윤(종2품직), 대사간을 지내는 등 관운은 끊이지  않았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그가 
누린 교제의 폭으로 미루어 볼 때  사람을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처하는 능력도  상당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왕인 연산군에게  아부하려는 뜻만 있다는 비평도 있었으나,  꼬장꼬장한 
정여창이 그를 두고 "하얀 칼날이라도 밟고 벼슬마저 사양할  사람은 양가행(가행은 양희지
의 자) 한 사람뿐이다'라고 한 말은 그의 또 다른 면을 생각게 한다. (집문당, 1988 참조)
  이러한 양희지가 증조수재광조(수재 조광조에게  줌)이란 시를 써서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조광조의 부친이 돌아간 뒤 얼마 안 되는 때에 써 준 것이 분명한 이 시의 서
에서 양희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수재 조군은 고인(조광조의 부친을 말함)의 아들인데 아직 나이 20세도 되지 않았다. 일찍
부터 세상이 뜻과 같지 않음을 한탄하여 도를 구하는 생각이  있다가 김대유(한훤당 김굉필
을 말함)가 학문에 연원이 있음을 듣고는 희천의 유배지에 찾아가 배웠다. 그 전에 내게 찾
아와 지극한 예의를 갖추어 대유에게 가지고 갈 소개서를  요청하였었다. 나는 수년래 친구
(조광조의 부친을 말하는 것 같은데 양희지와 조광조의 부친은 추정되는 연치로 볼 때 동년
배는 아니었을 것이므로 이 표현은 편의상 그렇게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와의 왕복이 단절
된 상태였으나 수재 조군이 간절하게 여러 번 부탁하는 뜻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쉬
운 말로 몇 자 소개의 글을 써 주어 대유에게 가져가 보이도록 했다. 
  이로써 볼 때 잠시 만났을 뿐이나 양희지는 조광조의 총명함을 꿰뚫어 본 것이 틀림없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양희지의 높은 평가를 의례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당시 수재란 표현은 젊은 사람에 대한 예우의 차원에서 자주 쓰이는 일종의 유행어이기
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배움을 구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그를 찾게 되면서 양희지의 
수재라는 표현은 제대로 확인된 셈인데, 조광조는 이때 주로 어떤 책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
난 것일까?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바를 가지고 가르치려고 하게 마련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조광조가 특별히 뜻을 둔 책들은 아마도 소학이나 근사록이 주
가 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한훤당으로부터 전수받은  것 위에 자신이 더욱  연구하여 앋은 
지식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났으리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학문에 대하여 묻
고자 찾아온 사람들이 누구며 과연 몇 명이나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지금 알 수가 없다. 
  시대는 달라졌다. 이제는 열심히 배우고 누구나 뜻을 펴 볼 수도 있는 시기일 것이다.  본
래 착한 것을 좋아하여 인격적으로 훌륭한 군자들과 돈독한 교유를 가지기에 힘쓰던 조광조
다. 비록 연산 치세의 돈독한 교유를  가지기에 힘쓰던 조광조다. 비록 연산 치세의  어려운 
때를 만나 자신이나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 모두 고통을 겪기도 했으나, 흘러간 시절의 얘기
일 뿐이다. 이제는 학문과 인격 연마의 어느 면에서나 더욱 자기성장을 꾀할 수 있게 된 것
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렇게 여러 사람들과 학문은 멀었다고 생각하는 조광조다. 열심히  나
름대로 공부한 편이지만 평소에 쌓은 것이 충분치 못해서 더욱 보충하고 잘 정리한다 해도 
아직 부족하다고 자신을 겸손하게 평가하고 있다. 
      다) 박경 사건에서 맺은 심정과의 악연
  25, 6세를 전후한 시기의 조광조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상당히 폭넓은 교유를 하고 있
었다. 왕족의 일원인 종남부수 이창수, 평생의 친구이자 개혁의 동지였던 김식을 비롯해  후
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심정과도  이 시기에 교유하고 있다. 자신의  공부도 겸해 그가 
이 시기에 힘써 추구하던 학문적 교류가 여기에 크게 작용하였을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는 사람들과 넓게 사귀되 특별히 뜻이 맞는  사람과는 온갖 정을 쏟아 가며 깊이 사귀는 
형이었다. 종남부수 이창수가 젊은 나이로 죽자 그를 잊지 못하여 장안(이윤형)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애석해한 바도 있었다.(문집, 부록, 권 1, 사실 참조)
  상대가 교유할 만하다고 생각되면 당사자의  신분을 가리지 않는 것도  그의 특성이었다.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있던 서얼(첩의 소생과 그 자손) 출신의 박경과  이 당시 교유를 트고 
있었던 것도 조광조의 이러한 특성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경은 조광조의 생애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지는 인물이다. 그는 조광조의  정치 이념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조의  죽음에도 본의 아니나마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가 
백우이고 나주가 고향이다. 출생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여러 가지로 미루어  볼 때 조보다 
10여 년 가까이 먼저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김식의 집에 드나들며  밥도 먹을 처지였으므로, 조광조와도  비슷한 수준의 교유가 
가능했으리라고 생각된다. 박경은 떳떳치 못한 그의 출신 때문인지  현실에 매우 불만이 많
았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이 들어서는 등 혁명이 이루어졌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할  수
가 없었다. 그는 훨씬 근본적인 혁명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얼도 등용하고 유능한 인재
는 차서에 구애되지 말고 승진시켜야 하며, 과거는 인재 등용에 적합한 제도가 아니라는 것 
등이 그의 주장이다. 또, 왕족들도 능력이  있는 사람은 참판이며 판서의 자리를 주어  뜻을 
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도 하였다. 대단히 이단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는 이것을 실제로 실현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그의 불만을 자극한 것은 박원종의 행태와 주자광의 존재였다. 박원종은 혁명 
후 연산군의 궁녀들을 자신의 집에 많이 데리고 있었으므로 누가 보나 그 외람됨이 지나치
다고 할 만했다. 아무리 쫓겨난 왕이라도 임금이었음에는 틀림없는데, 그가 거느리던 궁녀들
을 자신의 소유로 한다는 것은 신하 된 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는 혁명  
후 집에서 많은 손님들을 만나는 등 무슨 음모를 꾸미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또, 유자
광으로 말하면 천하가 다 아는 간신으로 무오사화를 일으킨  원흉이다. 이러한 자가 혁명의 
유공자라고 해서 거들먹거리고 다닌다는 것은 박경이 볼 때 언어도단인 것이었다.
  그래서 문종의 외손이자 단종 임금의 조카가 되는 정미수를 내정하고 쿠데타를  모의했으
나 실패하고 만다. 계획을 알고 있던 심정이 내용을 들은  것으로 전해진 친구 남곤을 부추
겨 당국에 고발을 했기 때문이다. 전에 승지를 지낸 남곤은 이때 상중이었음에도 최복을 벗
고 평복으로 궁궐에 나가 전후 사실을 낱낱이 고하였다. 
  이 사건은 본인의 참가 의사 여부와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여기에 오르내리도록 
만든다. 박경, 김공저 등 주모자급 외에도  문서귀, 조광보, 정미수, 공조참의 유숭조(남곤과
는 별도로 이 사건을 당국에 고발했음),  남곤, 심정, 이계명에다가 조광조와 김식의 이름도 
들어가 있다. 
  정도에 차이는 있었지만 이들 모두가 일단 조사의 대상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조광
조도 김식과 함께 일단 구속된 상태에서 사건 내용에 대한 진술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
이었다. 이들은 조서에서 자신들이 들은 박경의 불온한 언동을 사실대로 말하고 있다. 그 내
용은 앞에서 말한 박경의 평소 주장들에다가 쿠데타 계획에 관한 몇 가지 사항들이다. 
  여기서 조광조와 관련해 주목이 되는 것은 그가 이 사실을 알고도 당국에 고발하지 않은 
사실이다. 이것은 적어도 그가 박경의 평소 주장과 그에 따른 쿠데타의 당위성에 대하여 나
름대로 공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뒤에 보게 되듯이 그가 출세하여 여러 가
지의 개혁책을 내놓은 것 가운데는 박경이  주장한 내용이 상당수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모의에 깊이 관여한 조광보는 그의 친척 형뻘이 될 뿐 아니라 이후 평생을 두고 그와 친
말하게 지낸 사실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조광조는  박경의 쿠데타 미수 사건에 공감
을 느끼며 가담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조광조는 이 사건을 실질적으로 실패하게 만든 심정에 대하여 평생  소인으로 
보아 멸시한다. 물론 그렇게 대하게 된 데는 이 시기에  심과 교유하면서 얻어진 그에 대한 
평가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실패하게 만든 심에  대한 부정적 감정도 
작용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는 또한 자신과 사제관계라고  할 수 있는 유숭조(조광조가 성
균관의 유생일 때 유숭조는 대사성으로 있었다)에 대하여도 마찬가지 이유로 호의적인 생각
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박경의 쿠데타 계획은 그 자신과 김공저는 참형, 광인  행세를 하던 조광보는 석방되었으
며, 이계맹과 유숭조는 원방부처, 조광조와  김식은 젊다는 이유로 기소중지의 처분을  받는 
것으로 매듭지어진다. 반면, 남곤과 심정은 포상을 받게 되는데, 그러나 이 사건은 그들에게
도 좋은 결과만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남곤은 상중의 신분임을  잊은 채 직접 고발한 처
사를 두고 여론이 옳지 않게 보았으며, 심정의 경우는 조광조, 김식과 서로 틀어지는 계기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심정은 먼 훗날 분개한 어조로 왕에게 이 사건도 들먹이며 자신과 고, 
김 두 사람과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왈:"저 김식의 무리는 신이 그 뜻을 취할 만한 것을 알았기에 서로 아주 좋아했고, 김식도 
신의 집에 자주 왕래하며 상종했사옵니다. 그 뒤 박경의 사건이 있었을 때에 조광조와 김식
도 모의에 참여했기 때문에 구속되었으나, 나이가 젊다 해서 처벌을 받지 않았는데, 그 사람 
됨됨이를 의심은 하면서도 서로 좋아했습니다. 그러다가 저들이 때를  만나 지위가 점차 높
아지면서 번번이 신과 생각이 다르게 되고  신을 배척하였사옵니다."(중종실록, 권 39, 15년 
4월 16일의 내용 참조)
  조광조와 김식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심정이므로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
러나 전후 사정으로 볼 때 박경의 쿠데타 계획에 이들 양인이 호의적이었음은 부인하기 어
려울 것 같다. 박경이 김굉필의 제자인  정붕(예종 1년-중종 7년, 1469-1512)에게서 배우고, 
조정에서 조광조와 뜻이 통했던 박영(성종 2년-  중종 35년, 1471-1540)을 스승이자 친구로 
삼았던 점을 생각해 보더라도 조광조가 이 사건에 관련된 것은 우연일 수가 없다. 
  
    7. 표류하는 정국
      가) 혁명 세력의 파열
  연산군을 몰아내는 혁명을 일으킬 때 구  주도 세력들은 참여하는 자의 과거를  문제삼지 
않았다. 누구라도 혁명에 참여하는 자세를 보이면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유자광 
같은 간신이나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신윤무, 구수영 등도 혁명 세력으로 둔갑할 수가 있었
다. 신윤무야 혁명의 초기 단계부터  참여하였으니 과거야 어떻든 그런 대로  보아 줄 수가 
있다고 치자. 그러나 유자광이며 규수영은 어디로 보나 혁명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자들
이었다. 유자광은 첩의 자식으로 파격적인 출세를 시작한 이래  장군남이를 역모로 몰아 죽
이고, 한명회를 무고하였으며, 무오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또 구수영으로 말하면 사적으
로 볼 때 연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또, 구수영으로 말하면 사적으로 볼 때 연산군과  사돈
간이 된다. 그의 아들이 연산군의  부마(왕위 사위를 말함)가 되었기  때문이다. 공적으로도 
그는 연산군 말년에 장악원을 맡아 왕의 유흥을 적극 부추기고 미녀를 뽑아 올리는 등의 일
을 부끄러움도 없이 해낸 자이다. 그가 혁명 세력에 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발빠른 동작
에 의한 것일 뿐이었다. 혁명군이 훈련원에 속속 집결하던 시간에 부리나케 달려와 이에 합
류한 것이 잔부였다. 아니, 저 사람이... 갑자기 그가 나타나 혁명을 지지하는 듯이 행동했을 
때 누구나 아연하고 놀랬으나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후에 자싱의 며느리가 된 
휘신 공주(연산군의 딸)를 시세의 변화에 따라 가차없이 버리기도 한  그의 놀라운 치세 솜
씨가 혁명의 열기 속에 재빨리 변신을 시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왕이 9월 2일의 신시(오후 3시-5시)에 경복궁의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
써 외형상 혁명은 성공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이후부터 혁명은  간단치 않은 그의 
생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주체 세력내에 파열음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유자광과 구수
영이 이들 대열에서 배제된 것은 사리상 이미 예정된  것의 진행이었다. 유자광은 유배되었
다가 귀양지에서 늙어 죽었고, 구수영은 파직되는 운명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만이 아니었다. 유순으로 말하면 연산군의 폭정 아래에서도 적당히 처
세하여 두루 높은 관직을 유지했던 인물이다. 혁명에 즈음하여 박원종과 상희안으로부터 참
여의 권유를 받고도 망설이며 거부 의사를 표하다가 성공의 가능성이 보이자 재빨리 합류하
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래서 새 정부하에서도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을 차지했으나 인망이 
따르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적당히 박원종과 상희안의 비위를  맞추며 그럭저럭 세월만 보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침내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지만  혁명 정부의 간판 인물로
는 어디로 보나 부적격자였음에 틀림없다. 
  한편, 박이나 성도 적극적으로 혁명 과업을 추진해 갈 인물은 되지 못하였다. 박은 원래가 
군인이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성 역시 단호하게 새로운 개혁을 추진해 갈 학문이나 성격상의 
특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합리적인 안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혁명의 핵심 주체
로서는 공공의 정신을 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종 2년의 9월 13일에 성희안은 왕에게 이러한 취지의 말을 아뢰고 있다. 지금은 잔학한 
정치를 버리고 반정을 했으니 나라의 정사를 새롭게 하여 사람의 마음을 고쳐야 할 때라는 
것, 그리고 폐조(연산군 시대의 정부)에서 탐욕스럽고 독하게 못된 짓을 하던 사람들도 지금
은 고쳐지고 있으니 과거의 허물을 추급해서 논하는 것은 매우 불가한 듯하다. 그러니 폐조
에서 죄지은 사람들을 일일이 논죄하지 말자는 것이다. 사람들의  과거 잘잘못을 가지고 정
부내에서 하도 시끄러우므로 이러한 말을 한 것인데, 내용만을  본다면 합리적인 면도 분명
히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정치에서 철저하게 사람의 잘잘못을 가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테니까. 
  그러나 혁명 후에 이루어진 이른바 정국공신과 관련된 자기해명에서는 사사로운 면이  드
러나 보인다. 대사간이 그에 대하여  공신을 정하는 데 개인적인 사정을  두었다고 했을 때 
그는 펄쩍 뛰면서 부인하고 있지만 과연 그의 말은 옳은 것인가?
  신수린은 성희안의 매부가 되는 사람이다.  그는 연산군을 몰아내는 혁명에  전혀 가담한 
바가 없었으므로 처음에는 당연히 공신록에 이름이 올라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신의 장모, 즉 성희안의 모친은 노발대발하고 말았다. 
  "네 말 한마디면 네 매부가 공신이 되어 평생 동안 잘 지낼 수 있을 텐데,  그래, 그것 하
나 안 해주었단 말이냐. 내 다시는 너를 보지 않겠다."
  이렇게 말한 뒤 노인은 벌렁 누워 식음을 전폐한 채  농성에 들어갔다. 할수없이 성은 박
원종 등에게 사정을 했고, 그래서 신은 마침내 3등공신이 될 수 있었다. 경위야 어떻든 성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공신을 정한 바가 있음은 누가 보아도 분명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박과 
성이 여러 동료 관원들에게 모범이 되고 인망을 얻는 존재가 될 수 없을 것은 자연의  이치
일 것이다.(이상의 내용들은 중종실록 권 1부터 권 9를 참조하여 작성한 것임.)
      나) 군신들의 개혁 자세
  혁명은 개혁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성균관의 기능을 회복하고 경연
을 다시 열게 된 것이나 무고하게 죄지은 사람들을 복권시킨 것은 현저한 예들일 것이다. 
  그러나 혁명은 그것을 이룬 세력들에게  이익챙기기라는 자기타락의 기회를 주기도  하는
데, 이것을 감연히 극복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연산군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
운 사람들에게 신정권은 정국공신이라는 칭호를 주어 보답한다. 1등부터 4등까지 일정한 기
준에 따라 논공행상이 베풀어진 것이다. 혁명군을 직접 지휘하며 핵심적 역할을 한  박원종, 
성희안, 홍경주, 신윤무 등이 봉해진 것을 필두로 하여 각자 정해진 바에 따라 공신의  칭호
를 받았다. 
  그런데 이름과 실속이 그야말로 같이 가는 것이 공신이다. 공훈의 내용과 각 등위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해도 공신이 되면 이름뿐 아니라 대단히 이익이 주어지는 것이 상례이다. 우
선 본인의 관직이 높아지고, 부모(돌아간 경우에는 추증)나 아들(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조카
나 사위)에게도 관직이 주어진다. 토지가 주어지고 재물로 취급되는 노비도 여러 명씩 주어
진다. 구사와 반당(경호원에 해당)이 내려져 위품을 더하는 데다가 고급 옷감이며 말, 은 등
이 주어져 명예와 경제적 이익이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꼬투리만 있으면 
누구나 공신이 되고 싶은 것이 보통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공신이라면 동을 이룬 주도자, 그러니까 왕이나 새로  왕이 된 사람이 신하들
의 기여한 바를 평가하여 정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 정국공신의 경우  사정은 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왕은 이번 혁명의 실질적인 주도자가 아니었으므로 누구를 공신으로 하느냐
함에 있어서 그의 역할은 다분히 의례적인 데 그치게 된 것이다. 왕은 자세한 내막을 잘 알
지 못할 뿐더러 안다고 해도 집권 초기에는 가타부타  말하기도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러니
까 심하게 말해서 공훈이 뚜렷한 몇몇 공신들이 "전하, 이 사람이 이번 거사에서 공이 많았
습니다" 하면 왕은 알았소 하고는 재결을  하는 식으로 얼마든지 공신이 양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나온 신수린의 경우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거니와  그 외에도 엉터리로 공
신이 된 자들이 많았다. 자신과 가문이 한꺼번에 커다란 이익을  볼 수 있는 기회이므로 공
신들이 저마다 가족이며 친교가 있는 사람들을  함께 공신록에 올리고자 혈안이 된  결과였
다. 
  19세의 왕 또한 이 대열에서 빠지려고  하지는 않았다. 왕위에 오른 지  3주일쯤 지난 뒤 
행여 신하들에게 뒤질세라 슬그머니 자기 뜻을 비치고 있다. 
  "형조참판(종2품관직) 윤탕로는 비록 거의할 때 밖에 있어  모의에 참여치 못했으나 과인
이 잠저(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집)에 있을 때에  배종(신분이 높은 사람을 모시고 따라 다
니는 것)한 수고가 있으니 녹공(공신으로 기록하는 것)하는 것이 어떻겠소?"
  박원종과 성희안 등이 곧 윤을 정국공신록에 올린 것은 물론이다. 이 외에도 왕은 이로부
터 약 두 달여 뒤에는 자신이 왕이 되기 전 이웃에 살던 목사 조한손 등 19명에게도 원종공
신(등급이 있는 공로 외에 작은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공신으로서의 이름)의 칭호를 주
고 있다.(중종실록, 권 1, 원년 9월과 11월 참조)
  이렇게 해서 정국공신이 된 자만도 1백 10여 명에 이르고 원종 공신으로 된 자들까지  합
치면 공신들의 숫자는 더욱 많게 되었다. 
  그런데 공신들에게 주어지는 특혜는 결국 민의 부담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제4대 임금
인 세종대부터 벌써 토지가 부족하여 농지를 보유한 농민들의 숫자가 극히 적다고 하던 판
이다. 관료들에게 줄 토지도 부족하여  마침내 제7대 임금인 세조  때에는 현직 관료에게만 
토지를 주는 직전제가 실시되기에 이른  것도 오래전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실상 세습이 
허용되는 공신전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토지의 분재 상태를 더욱 불균등하게 만들 수밖
에 없는 것이다. 새로 들어선 중종 1년부터 공신전은 전세로 지급하도록 되지만 이 역시 민
의 부담으로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이른바 내수사 장리도 적지 않게 민을  괴롭히고 있었다. 내수사는 궁궐에서 
쓰는 곡식, 포목 및 여타의 일용품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인데, 이곳에서는  오래전부
터 연 5할의 고리채인 장리를 민간에 놓고 있었다.  왕실에서 민을 상대로 돈놀이를 한다는 
것이 떳떳치 못하다 하여 세종대에는 이를 폐지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생겨나 새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민에게 많은 고통을 주고 있었다. 없는 백성들이야 당장 먹고 살려니
까 이러한 고리채라도 할 수없이  빌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원금과 이자를  갚을 때가 되면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참상이 벌어지지가 예사였다. 집과 논, 밭을 파는 등 난리가 나는 것
이다. 그래서 새 정권이 들어선  이후 몇 차례에 걸쳐 내수사가  장리의 폐지가 건의되기도 
하였으나 왕의 대답은 언제나 틀에 박혀 있었다. 
  "유래가 오래 되어 갑자기 그만두게 하기는 어렵소."
  답답한 일이지만 그의 이러한 태도를 용감하게 고쳐 갈 수 있는 신하는 아직 없었다. 
  물론 연산군의 폭정으로 고통을 겪던 민생이 좀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왕은 부지런히 경
연을 아침, 점심, 저녁 혹은 밤에도  열어 신하들의 간언을 듣고 재난을 당한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감면하는 등 선정을 펴고자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도적인 개혁에 이르면 그
는 내수사 장리의 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 한 발 물러서며 엉거주춤한 태도를 취하고는 하였
다. 
  제도 개혁이 뒷받침되지 않는 새 시대의 전개는 따라서 크게 나아진 것이 없었다. 세금과 
노역에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집을 떠나 유랑하기가 예사였고, 그들의 이웃에 그 부담을 지
우는 폐단으로 인해서 그들 중에서 아예 비상 수단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세력 있고 돈 많
은 사람에게 토지를 맡기고 차라리 그들의 노비가 되어 그  보호 아래 살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도 싫은 사람들은 도둑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도둑이야 벌써부터 적지 않았지만, 새 정
부 들어서는 더욱 기승을 부리는 형편이었다. 도처에서 대낮에  행인을 위협하여 재물을 약
탈하는 것은 보통이고, 당국에 신고하는 경우에는 그 사람을 죽이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경기도에 속하는 인천에서 도둑이 극성을 부려 새 정부가 들어선 3년째 11월에는 삼정승(영
의정과 좌, 우의정)과 6조(이, 호, 예, 병, 형, 공, 조) 판서들이 왕에게 전말을 보고할 정도이
니 다른 지역은 더욱 그 폐해가 심했을 것이다. 
  혁명을 이룬 공신들간에 다툼이 있는 등 조정이 편안치 못해도 올바른 말을 하는 신하들
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언론을 맡은 사간원에서는 인사며  신하들의 잘못된 행동과 내수사 
장리 등 폐단이 되는 문제에  대하여 간언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내수사 장리와 기신재를 
없애야 한다고 신왕의 재위 4년째 되던 여름에는 몇 달여를 두고 사간원에서 주장하다가 받
아들여지지 않자 모두가 사퇴를 한 적도 있었다. 이 밖에도 원론적인 내용, 즉 백성들의  고
통을 덜어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거나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잡고 검약해야 한다는 건의도 여
러 차례 이루어지고 있다. 왕은 언제나  간하는 말을 즐겨 듣고자 하였다. 쫓겨난  이복형인 
전왕 연산군의 처지를 배려하고 그가 죽은 뒤에도 묘소 관리에 신경을 쓰는 등 심성도 분명
히 착한 사람이었다.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 주려는 의욕도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한번 정해진 것은 쉽사리  고치려고 하지를 않았다. 정
국공신의 숫자가 너무 많다고 하여 즉위 초부터 많은 신하들이 그 개정을 청했어도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국 1등공신으로  봉해진 홍경주마저 근자에 정국공신으
로 기록된 사람의 수가 너무 많다고 하면서 개정을 청했으나 왕은 그 특유의 성벽으로 마이
동풍일 뿐이었다.(이상의 내용은 중종실록, 권1-권 12를 참조하여 작성한 것임)
  군주제하에서 이러한 왕을 모시고 정치를 잘 해보려면 누구든 대단한 신념을 지닌 고집쟁
이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누가 무어라든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밀고 나가는 인물,  그러
면서도 많은 사람의 중망을 얻으며 놀라운 카리스마(초인적인  능력)를 천부적인 타고난 인
물, 그러한 인물이라야 왕을 바른 길로 이끌어 무언가 큰 일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8. 높아 가는 명망
      가) 진사시의 일등 합격
  박경의 쿠데타 미수 사건이 일단락된 후 조광조는 자신의  앞길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당장 과거를 보아 관직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조정의 형편도 그렇고 박경의 사건에서 입
은 마음의 상처가 아직은 그러한 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은 성현이 되
는 것을 목표로 해서 자신을 갈고 닦는 일에 힘을 쓰기로 하였다. 다행히 생활은 조상 대대
로 전해오는 농토가 있었으므로 그런대로 해결할 수 있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조광조는 여기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양반의 자제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자
격은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면 과거의 문과 시험은 보지 않더라도 생원이
나 진사는 되어야 한다. 아마도 새 시대가 열리고 얼마쯤 지난 뒤 그는 이러한 결론에 이르
렀으리라고 생각된다. 특별히 들고파는 식의 공부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후부터 그가 진사 
시험을 준비해 간 것을 당연한 수순이었다. 
  진사는 생원과 더불어 이른바 소과 시험을 거쳐 그 자격을 얻는다. 시험은 초시와 복시의 
두 단계로 나누어 실시되는데, 진사와 생원의 어느 분야를  택하느냐에 따라 시험과목이 다
르다. 진사과는 필수로서 부 1편, 그리고 고시와 명, 잠 중에서 하 편을 선택하며,  생원과는 
5경의와 사서의의 두 편을 짓도록 되어 있다. 
  진사와 생원 시험에 합격한다 해도  관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한 단계 높은 
문과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일종의 예비 시험의 성격을 가진 데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양반으로서의 기본적 소양과 학식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받는 자격 시험의 성
격을 가진 면도 있어서 그것의 합격 여부는 결코 작다고 할 수도 없다. 생원과 진사만 되어
도 지방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고장의 크고 작은 일에 참여하여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정계가 어지러울수록 조선조의 많은 양반들이  대과를 포기한 채 생
원과 진사가 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더구나 문과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가문이 빈약하여 좋은 관청에 보직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에는 차라리 이를 포기한 채 생원, 
진사로 남는 것을 택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문과 시험에 합격한 선비들이 일차로 관직을 
배정받는 곳은 승문원, 성균관, 교서관, 홍문관이었는데, 이중 교서관은 가장 인기가 없었다. 
출세가 늦을뿐더러 고위직에 오르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서관으로 배정을 받
는 경우에는 차라리 생원과 진사로  남는 것을 택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속말로 해서 
그런 시시한 곳에 가서 양반으로서의 체통을 상할 바에는 차라리 생원이나 진사로 남는 편
이 낫다고 본 것이다. 
  조광조가 진사 시험에 합격한 것은 1510년(중종 5년)의 봄, 춘부를 지어 그것도 장원으로 
되었으니 이제 공식적으로 명망을 얻게 되는 척 단계에 들어선 셈이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
되는 바가 여기에 있다. 왜 그가 생원과를 지망하지 않고 진사과를 택해서 시험을 보았느냐 
하는 점이다. 시험 과목으로 본다면 그에게는 진사과보다 생원과가 더욱 적합했으리라고 보
이기 때문이다. 진사과의 필수 과목인 부는  분명히 문학의 한 부문이다. 문장을 짓는  일을 
탐탁치 않게 보고 성리의 학문을 탐구하는 데 힘을  기울인 조광조가 아닌가. 그렇다면 5경
의와 사서의를 시험과목으로 하는 생원과가 그에게는  더 적성에 맞는 분야인 것이  분명하
다. 경전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니까. 
  어떻든 조 생원 아닌 조 진사가 된 것은 그의 나이 29세 때, 그에게 학문을 묻고 함께 토
론도 했던 양팽손은 이때 생워과에서 1등을 했으니 용인에서 다져진 두 사람의 학식이 쌍벽
으로 이 한해를 빛낸 셈이다. 
      나) 춘부, 그 형식과 내용
  문학의 한 부문으로서의 부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한부를 떠올리고 금방 이 부문의 대
가였던 시마상여가 십상이다. 이쯤 되면 또 과부의 몸으로  그와 로맨스를 꽃피웠던 탁문군
의 이야기를 마음속에서 떠올리게도 될 것이다.  이렇게 되는 데는 유행을 했고, 걸출한  이 
부문의 작가인 사마상여가 끼친 영향이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가 중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반도에도 정래되어 우리 조상들도 일찍부
터 부를 지어 왔던 것이다. 문헌에 나타난 것만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신라 말의 최치원이서
부터 기점을 잡을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니 꽤나 오래된 셈이다 그의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부를 지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최치원이  지은 영효(새벽을 
노래함)가 최고, 이후 고려 시대의  김부식, 이규보, 이색 등  당대 제일의 지식인들이 모두 
부를 지으며 즐겼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이러한 추세는 그대로 이어졌다. 서거정, 김시습, 신숙주,  김일손 등의 
부가 지금 남아서 전해지거니와 이 밖에도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시와 함께 부를 짓는 것이 
교양의 한 부문일 정도였다. 이렇게 된 데는 고려조와  마찬가지로 조선조에서도 과거 시험
에 부가 과목으로 주어진 점이 작용한 바도 있을 것이다. 조선조에서는 소과뿐 아니라 대과
에서도 부를 부과하여 그 능력을 시험하였다. 이런 사실에서 볼 때 과거에서 어떠한 형식의 
부를 요구하느냐가 당시대의 부 형식을 결정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과부(과거 시험에서 짓는 부)는 문학적 수준에서만 따진다면  우수한 작품이 나오기 어려
운 점도 있을 것이다. 한정된 시간 안에 수정할 시간도 별로 없이 제출해야 되는 여건 때문
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내용에서는 의외로 진실된  면을 보일 수 있는 특성도 
있고 형식도 교과서적인 체제, 그러니까 서-본-난의 방식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
여 줄 가능성이 높다. 
  조광조의 춘부도 부가 가지는 전형적인 형식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처음에 서가 나오
고 본문이 있으며, 끝판에 가서 난에 해당되는 "작가 왈" 식으로 결말을  짓고 있는 것이다. 
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음과 양이 갈마들어 4시(네 계절)의 순서가 되는데 봄은 하늘의 원이다. 4시는 봄으로부터 
시작되고, 4단은 인에서 발단이 된다. 봄이 없으면 4시의 질서가 이루어지지 않고 인이 없으
면 4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은 욕심이 없어 봄을 운행하여 4시를 이루나 사람
은 욕심이 있어서 인을 상실하여 4단이 충분해지지 않는다.
  음양착이사시서 춘자천지원야 사시자춘이시 사단자인이발 무춘서불성 무인단불수  연천무
욕 이춘행사시성 인유욕 이인상단물충)
  네 계절의 자연적 질서와 4단이라는 인간의 도덕성을 대비시키되 각기 그 처음이자 근원
이 되는 봄과 인을 가지고 부를 짓과 있는 것이다. 계절의 특성은 각기 다르다. 그러나 봄에
서 시작되고 봄 속에 다가올 계절들이 내재되어 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인간
의 도덕적인 것, 예컨대 여러 가지의 예의도 인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예의가 다단해도 
  하나의 인에 의거해서 어긋나지 않는도다.
  (수예의지다단혜 자일인이불특)
  그러나 자연이나 인간사 어디에도 작용이 있으면 그에 거슬리는 반작용도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러한 말을 하고 있기도 하다. 
  샘물이 흘러서 끝까지 가려고 함이여
  흙탕물이 섞이어 맑을 수가 없도다. 
  위로 하늘의 밝은 명을 더럽힘이여 
  아래로 사람의 윤리와 기강에 게으르도다.
  즐거이 아래로 흐르면서 깨닫지 못함이여
  수많은 악이 쌓이는 바로다. 
  천위위이욕달혜 피황류이불청
  상설천지명명혜 하만인지윤기
  감하류이불오혜 강중악지소위
  여기에 내포되어 있는 조광조의 바람직한 뜻은  물론 샘물이 끝까지 맑게 흘러가도록  하
고, 하늘의 밝은 명을 깨끗이 하여 지키며 수많은 악이 쌓이기 전에 깨닫는 것이리라.  이상
주의자의 고매한 뜻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방도일 것인데,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한
다. 
  옛적에 공자에게 안자가 있음이여
  인을 구하여 묻는 지극한 방도로다. 
  4대와 5상을 앎이여 
  또한 이에서 말미암아 번창해지도다.
  부지런히 4물에 힘써서 조촐하게 있음이여
  잠깐의 성함도 봄 아닌 것이 없도다. 
  석안자어이부혜 문구인지지방
  지사대여오상혜 역유자이내창
  근사물이조존혜 방촌앙무불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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