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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 04

Casey,Riley 2023. 4. 17.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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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가로서의 조광조를 보면 미결의 문제를 해결해 내는 명수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전
에 주장은 되었으면서도 해결을 보지 못한 문제들이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풀리고는 했으니
까.
  이러한 그가 여악의 문제에 달려든 것인데, 그러나 결과로 볼  때 이 문제는 철저하게 그 
목표를 달성한 것 같지가 않다. 그의 이전에 주장은 되었으면서도 해결을 보지 못한 문제들
-소격서의 혁파, 정국공신의 개정 등-이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풀리고는 했으니까.
  이러한 그가 여악의 문제에 달려든 것인데, 그러나 결과로 볼  때 이 문제는 철저하게 그 
목표를 달성한 것 같지가 않다. 한정된 예외를 제외한다면  대체로 지방에서는 기도한 대로 
여악이 폐지된 것으로 보이나, 중앙에서는 그렇지가 못했기 때문이다. 
  당초부터 이 문제에 관한 한  조광조는 평소의 그답지 않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방의 
직업적인 여자들을 없애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너무 완벽하게 할 필요는  없다는 
식의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경 지대를 지키는 장병들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서는 직업적인 여자들의 존재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고 본 것이다. 이에 비하여 같은 자리
에 있다가 이 문제에 관해 언급한 김식의 말은 더 완고한 측면이 있다. 비록 국경 지대라도 
몸파는 여자들은 없애야 한다는 주장인 것이다.(중종실록, 권34, 13년 7월 11일의 내용 참조)
  이 문제는 거론된 이후 갖가지 논의를 거듭한다. 그 핵심은 궁중의 연회에서 여악을 쓰지 
않을 경우 대체 방법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인데, 이를 두고 설왕설래가 정황하게  이어진다. 
남악으로 할 경우 복장이 문제라느니, 궁중에 있는 의녀(여자  의사)로 해야 한다느니, 혹은 
여자 소경을 써야 한다는 등 별스런 얘기가 다 나오고 있다. 여자 소경을 써야 한다는 말은 
사실 조광조에게서 나왔는데, 그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그런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싶은 
남자는 없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이 얘기를 꺼낸 그의 주장은 상당
히 진지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남자 소경들은 점을 치는 등의 일로  생계를 이어 갈 수 있
지만 여자들은 그렇지가 못하니 생계 보호의 측면에서도 그 방법은 괜찮다는 것이다. 
  왕도 여악의 폐지에는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지방에서는 곧 여악이 금지된다 연산군에 
의해서 조성된 구시대의 음란한 풍습은 이렇게 해서 외형상으로나마 어느 정도 고쳐진 것으
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궁중에서는 여악이 철폐되지 못했던 것 같다.  다만 
전보다는 상당히 절제된 상태여서 왕의 모후를 위한 잔치  등에서는 여악이 사라진 듯싶다. 
(중종실록, 권 36, 14년 9월 18일의 내용 참조)
  조광조가 관심으 기울였던 또 한 가지, 즉 향약의 시행도 여악의 폐지와 마찬가지로 철저
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향약은 말 그대로 동리 주민들  사이의 생활규범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향약은 주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증손여씨향약을 가르킨다. 이 향약은 
중국 송나라 때 남전에 살던 여대방 형제가 가문의 약속으로 만든 여씨향약을 가감하여 만
든 것으로 약조는 네 가지로 되어  있다. 즉 덕업상권(효도 등 덕 있는  일을 서로 권하기), 
과실상규(잘못하는 일을 서로 바로잡기), 예속상교(예절이 있는 습속으로 서로 사귀기), 화난
상휼(화재 등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서로 돕기)이 그것이다. 내용에 담긴 정신은 물론 유학
의 그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려 말과 조선조 초에 걸쳐 주자학이 도입되던 때 깥이 들어
온 것이 분명하다.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서면서 특히 이를 중시하여 태조 주원장  때부터 2,3 백호의 가구를 
단위로 향약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향약의 실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김안국이 향약을 실시한 해의 6
월에 유생 김인범이 이의 실시를 촉구하는 상소를 올리면서부터였다. 김은 여기서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향약이 유용하다는 점을 힘써 주장하였다. 왕도 이를 긍정적인 것으로 보아 결
국 실시되기에 이르지만, 그후에도 이에 대한 논난은 끊이지 않는다. 
  "향약은 매우 좋은 것이니 지방의 관찰사들이 권해서 시행토록 함이 좋으리라."
왕이 자신의 재위 14년째이던 5월 19일에 좀더 적극적으로 실시하자는 생각에서 이렇게 운
을 떼었다. 김식이 기다렸다는 듯이 왕의 뜻을 지지하고 나섰다.  
  "중국 주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전국 규모로 실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직 실시가 지지부진한 수도에서도 그것을 실시하자는 뜻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튿날의 조강에서도 다시 이 문제가 거론되자 이번에는 기준이 긍정적인 
방향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진작부터 조광조 등 자기네들끼리  향약의 실시를 좋게 본 
데서 김식과 같은 견해가 나오게 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기준의 말에 남곤은 즉각 반대의견을 제시하였다. 
  "만약 경중에서 향약을 실시한다면 심히 사체에 어그러집니다."
  이것이 그의 첫마디였는데, 이어서 또박또박 다음과 같이 말을 해 나갔다. 
  "경도는 삼공이 예로써 이끌고 형벌로써 가지런히 하여 착한 자는 절로  포장하는 전법이 
있고 착하지 못한 자는 또한 사법 당국에서 금하는 바가  있으니, 연곡 아래에서 일개 향촌
의 일을 함은 심히 옳지 않습니다."
  일견 사리가 분명해 보이고 그의 말에 우의정 안당도 즉각 찬성을 표했으나, 기준의 생각
은 달랐다. 이전부터 내려온 향도(상호부조적인 공동체 조직)를 예로 들면서, 그들처럼 선악
을 서로 권하고 경계한다면 향약을 시행하는 것이 나쁠 게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돈
화문 밖의 몇몇 노예들이 하던 일을 그 예로 들었다. 이들이 착하지 못한 일을 하는 사람들
은 바로잡자고 약속하여 그중 말을 해도 형을 때리는 등 못된 일을 그치지 않는 사람을  사
헌부에 고발하여 징계한 일을 들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기준의 말에 대해서도 남곤은 조리있게 반론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나라에  형조가 
있습니다. 만약 10여 인이 같은 마음으로 서로 규율하여 착한 일을 한다면 괜찮습니다. 그러
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도약정(단위 지영별 향약 실시의 책임자)이니 부약정이니 하고 일걸
으면서 나라에서 법으로 금하는 것은 젗지 않고 도약정의 명령만 따르게 된다면 심히 옳지 
않습니다."
  향약의 실시가 국가 공권력의 약화를 초래할  수도 있으므로 중앙정부의 직할 아래  있는 
수도 장안에서는 하지 말자는 얘기인 것이다. 그가 향약의 실시를 조광조 등 신진들이 자파 
세력의 강화를 위한 계획으로 보고 반대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내용에 일리
가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다소 극단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만. 
  왕도 남곤의 말에 일부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6월 들어  신진들 중의 한 
사람인 안처함이 중앙에서도 실시할 것을 주장하자, 권하거나 금하는  쪽의 어느 것도 바람
직하지 않다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부간에 주민들의 의사를 따라 하는 것이 
좋다는 뜻인 것이다. 
  그럼에도 기준은 향약이 사람들로 하여금 선을 저향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고 끝끝내 주
장, 조광조를 비롯한 이들 신진들의 향약에 대한 열의가 보통이 아님을 보여 준다. 조광조의 
제자인 이연경이 자신의 연고지 충주에서 향약을 실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둔 사실도 이 점
을 확신시켜 준다. (중종실록, 권 36, 14년 7월 26일의 내용 참조)
  조광조도 당연히 향약의 실시를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여러 가지로 볼 때 그는 이것을 적
극적으로 추진해 갈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기존의 유향소 대신 향약의 실시를 
통한 새로운 사회 순화의 조직을 구상했던 것이 분명하다.  경상도 유생 최홍제가 상소문을 
올리면서 유향소의 혁파를 주장했을 때 이를 찬성한  조광조다. (중종실록, 권 34, 13년 7월 
19일의 내용 참조). 그런데 향약의 실시는 적극  수용하는 입장이니 그의 의도는 알기 어렵
지 않다. 본래 유향소는 향사례(마을  사람들이 모여 활쏘기를 하며  친목과 예절을 다지는 
것)와 향음주례(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마시며 예의를 다지는 것)의 방법을 통한 향촌 자
치제의 확립에 있었고, 이것의 당초 추진 세력은 지방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경상도 지역 외
에는 사람들의 세력이 약했기 때문에 여타  지역에서는 훈구 세력이 이를 장악하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측에서는 유향소의 폐지를 오히려 주장하는 입장으로 돌아서게 된
는데, 조광조도 이를 지지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조광조는 대부분이  훈구 계열의 지배로 
하는 향촌사회의 건설을  의중에 두었던  것이다.(이해준, 조선시기촌럭사회사,  민족문화사, 
1996 참조)
  그러나 동료들의 급진적 개혁론에 얼마간 불안을 품고 있던 그는 향약의 실시도 점진적으
로 하는 것이 좋다고 보았다. 38세이던 10월 11일의 조강에서 이러한 말을 하고 있다. 
  향약의 본래 의도는 그렇지 않을  텐데, 지금의 향약 실시는 매우  급박한 듯하니 왕도에 
크게 어그러집니다. 그렇게 된 연유를 보면 감사가 강박해서 행하기 때문입니다. 도성  안도 
그러하므로 신이 5부(중, 동, 남,  서, 북부의 다섯을 말함. 관내  동리 주민의 범법 사건 및 
도로, 교량, 화재방지, 시체의 검안 등을 맡아보던 관청)를 불러서  일렀습니다. 지초는 너무 
급박해서는 안 됩니다. 덕으로 여유를 두고서 백성을 교화시켜야만  올바른 정치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에게 아뢴 조광조의 이 말에는 향약에 대한 일부의 부정적 여론도 작용했을 것이다. 향
약을 실시한다지만, 지방에서는 감사들의 강제로 인한 폐단이 있었고, 경중에서도 일부 관료
들 사이에서 냉소적인 반응이 없지 않았다. 그 예로 찬성직에  있던 최숙생의 경우를 들 수
가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향약이  실시되자 당장 도약정으로 선출되었는
데, 이계맹은 이를 놀리며 마땅치 않게 생각할 정도였다.
  
  14. 폭풍 전야의 모습
  조광조의 생애 말년은 대사헌의  직위를 가졌기에 더욱 빛을  발하거니와, 그는 37세이던 
해의 11월에 처음으로 이 직에 임명된다. 그리고 이듬해 4월에 잠시 부제학으로 전임되었다
가 6월에 다시 대사헌의 자리로 옮긴다. 대사헌은 약칭으로 대헌 또는 헌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정의 잘못을 바로잡고, 관원들의 비위를 감찰하며, 풍속의 교정과 억울한 민원 처리 
등을 담당하는 사헌부의 책임자가 대사헌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여러 별칭도 다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사헌으로서의 조광조는 될 수 있는 한 화해로 일을  해결하려는 것이 특징이었다. 같은 
연배의 진사 한 사람이 자신의  처가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가지  못하자 칠거지악(여자의 
일곱가지 악행, 즉 시부모에게 불순한 거시, 자식이 없는  것, 음란한 것, 질투하는 것, 몹쓸
병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도적질하는 것을 말함)을 내세워 쫓아내고자 하여 친한 사람을 
통해 문의해 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부부는 인륜의 근원이요 만복의 근원으로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대합니다. 부인의 성
격이 음침하고 어두우며 무지하여 비록 잘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남편으로서는 마땅히  바른 
도리로 거느려 감화시킴으로써 가정의 도리를 함께 이룩하는 것이 후덕한 일입니다."
  아울러 가정의 일은 제3자가 개입하기 어려움 점이 있으니 부부의 연이 무거운 것을 알아 
힘써 푸용하여 살기를 간곡하게 말하자 그 진사는 감복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성균관의 유생 한 사람이 어찌된  연유인지 그와 그의 부친이 같은 
여자를 간음하였다는 소문이 돌아 통곡하며  괴로워하던 끝에 사헌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해 
왔다. 윤리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사헌부에세 발설자들을 불러 샅샅이 조사하였으나 전혀 군
거를 밝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조 대헌은 해당 유생을  불러 이 또한 간곡한 내
용의 말로 앞으로의 방도를 알려 주었다.
  " 이 혐의를 벗는 길은 자네에게 달려 있으니 열심히 수양을 해서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
이라고 인정을 받도록 하라구.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절로 전일의 소문이 헛된 일이라고 생
각하게 될 것이네. 그렇지 않고 행동을 마구 해서 나쁜  사람이라는 평이 돌면 사람들은 소
문을 그대로 인정하려고 들겠지. 그러므로 이일은 헌부에서 가려서  될 일이 아니니 자네가 
힘써 착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기에 달린 것이야. 명심토록 하게."
  그의 자상한 권유에 따라 당해 유생은 정말로 노력을 했는데,  결과는 조 대헌얘 말한 그
대로였다. 사람들마다 그의 무혐의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분쟁에 대한 그의 처리 태도가 이처럼 평화적인 점은 그와 이 당시 번갈아 가며 대사헌을 
지내던 김정과 자연 대조가 되어 보였다. 가까운 신진의  동료이면서도 두 사람은 사헌부를 
운영해 가는 자세가 전혀 달랐다. 김정은 우직한 데다가 원칙을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
므로 잘못된 일을 발견하면 관련자들을 불러다가 가혹하게 매를  때리는 일이 잦았다. 적발
과 처벌보다 사건의 방지와 당사자간의 화해를 도모하는 조광조의 태도와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조정의 관원들 사이에서 두 사람의 이같은 차이를 들어  조를 낫게 보는 평가가 있
기도 했지만, 한편에서는 색안격을 끼고 보는 눈길도 없지 않았다. 이들은 조가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으려고 짐짓 화평스러운 방향에서 일 처리를 한다고 입을 삐쭉거렸다.
  평소 향약에 관심이 많던 조광조였으므로, 대사헌이 된 후  당연히 이것의 보급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급하게 억지로 하는 향약의 보급은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중심
으로 하는 신진들은 누구나 향약의 보급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이로 인한 폐해도 없지 
않았다. 한성의 경우 향약과 관련된 모임이 있을 때면 상공인들이 생업을 전폐한 채 참여해
야 했으므로 그들의 불평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또, 동료들 중에는 향약의 효과를  과
신한 나머지 얼마 안 있어 사람들마다 길에  버려진 물건이 있어도 줍지 않게 될 것이라는 
등 허풍을 떠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는 이러한 태도를 별로 탐탁하게  보지 않았다. 향약의 
효과는 꾸준히 장기적으로해 갈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 무렵에는 민간에서도 소학을 많이 읽고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교육열을 더욱 고무, 진
작기켰다. 그 결과 신분의 구별 없이 사람들마다 평소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물론 극진한 
슬픔으로 장례를 지내고, 3년의 시묘살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이 풍습이 되어 차츰 퍼져 가는 것은  조광조의 보람이었지만, 동시에 백성들에
게 그를 더욱 우러러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천부의  훤칠한 풍채에다가 내면의 인격까
지 배어들어 자연히 사람들을 감복시키는 외모까지 지녔던 그다.  따라서 그가 조정에 출퇴
근하는 일로 시중을 지날 때면 사람들은 그가  탄 말 앞에 이르러 진심에서 우러나는 절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참으로 우리들의 상전이시지." 혹은 "성인이시다" 하면서 감격해하는 사람들
도 더러 있고는 하였다.
  예절을 진작시키는 것이 사헌부의 임무중 하나였지만, 그렇다고 그가 과례를 좋아했던 것
은 아니다. 이는 문소전과 연은전에 하루 세 번씩 제사지내는 일을 반대한 데서도 나타난다. 
종묘 외의 이들 사당에 이처럼 자주 제사 지내는 것은 실제로도 시끄럽기만 하여 귀신을 섬
기는 도리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또, 그는 대신들과 간원과의 사이에 견제와 협화가 함께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전자는  집
행기관으러서의 역할을 하고 후자는 감독, 비판 기능을 하여  상호 견제를 하면서도 조정을 
화목하게 만드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들이 매사에 너무 거
세게 비판을 한다고 하여 뒷공론이 없지도 않았으므로 이러한 말이 있었을 것이다.
  평소게 겸손하던 사람도 지위가 높아지고 인망이 한껏 쏠리면  자칫 교만해지기 쉽다. 그
래서인지 조광조에 대해서도 이 시기에 들어 교만하다는 구설이  생겨나고 있다. 사연은 이
러하다. 그가 아침 출근하던 길인데, 앞서 호조판서 고형산(그는  조광조보다 19년이나 연상
이다)이 먼저 가고 있었다. 그런데 고의 수레는 뒤에 바삐 오는 사람이 있음을 알면서도 마
냥 늦장을 부리며 가는 것이었다. 조로서는 당연히 불쾌할 수밖에 없는 일. 그래서 고를  수
행하던 하급 관원들을 구속하였다가 하루를 지난 뒤 석방하였다. 뒤에 어떤 사람이 이 일에 
대하여 물었을 때 조의 답변은 이러했다.
  "그(고형산)가 한 바는 사대부가 길을 양보하는 미풍을  크게 잃은 것이니 정말로 잘못이
지요. 비록 헌부가 풍속을 검속하고 다스리기는 하나 저쪽은  중신으로 내가 규찰해서 바르
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므로 그 수행원을 대신 다스린 것인데, 그러나 지나친 듯해서 곧 
풀어 주었습니다."
  조광조의 처사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던 고형산도 이러한 말을 전해듣고는 고개를  끄덕이
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이에 관한 내용은 실제와 다르게 각색되어 번지고  만다. 조광조가 무례하게 선배 
대신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몰랐다는 등 구설이 생겨난  것이다. 어떻게 하든 그를 욕하고 
싶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좋은 구설거리를 제공한 셈이다.
  이 일의 내막이 어떻든 38세의 한창 잘 나가던 조광조에게는 다소 교만해질 여지가 있었
던 것도 사실이다. 백성들의 그에 대한 숭배열 못지 않게  따르는 신진들 중에도 그에 대한 
기대와 신임을 거의 절대적인 수준으로까지 몰고 가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
준은 왕도 참석한 경연에서 조광조는 재상감이라고 한껏 추켜올렸고, 이연경은 스승인 조에 
대한 존경심을 그대로 드러내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당대 제1의 인물은 조광조라고.
  아마 그래서일까? 문소전과 연은전의 제사 건을 비판하면서 조광조는 세종이 영특하나 학
문은 부족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조선조 5백여 년을 통틀어 둘째가라면 누구라도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의 제1급 지식인인 세종을, 그것도 선대의 뛰어난 임금으로 모셔야 할 입장에서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광조를 비판적으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일은 이 밖에도  또 있다. 천거과가 실시된 해
의 가을에 별시가 치러졌는데,  성수종이 제출한 책문의 답안지를  놓고 대신들간에 의견이 
분분하였다. 안당과 남곤은 정광핑에게 읽기 아주 어려운 대책이 하나 있다고 하였는데,  이
러한 견해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조광조와 친밀한 이자가  보았을 때도 생각은 마찬가
지였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용은 알 수가 없는데."
  그러나 남곤과 함께 시관으로 참여한 조광조는  단번에 그 책을 쓴 수험생이  누구인가를 
알아보면서 이같이 말하였다.
  "이것은 성수종의 대책인데, 그 인물이 쓸 만한 사람이니 뽑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곤은 물로 이에 반대했으나 김정, 김식, 김구 등이 조광조의 견해를 적극 지지하여 결국 
성수종은 합격으로 처리된다. 그러나 겉에서 보는 것처럼 모든 일이 그의 의도대로 잘 움직
여 가는 것은 아니었다. 신상, 권벌, 이자 등 동료들간의 불협화가 있는 점도 그렇거니와 정
언 권전이 이조판서인 신상을 자주 탄핵하는 것도 마음에 걸리는 바였다. 권전은 자신이 제
일가는 인물로 여기며 따르는 김식이 신상과 틀어진 사이가 되자 무조건 김식의 편을 들어 
신상을 공격하고 있었다. 신상은 선배들  중 조광조 등 신진들이 가장  훌륭한 인물로 치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권의 태도가 조광조로서는 마음 편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권을 불러 
조용히 타일렀으나 좌충우돌의 성향을 지닌 그는 오히려 조광조를 탄핵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로서는 상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료들간에 이토록 마음이  맞지 않는데 지치를 무슨 
수로 한단 말인가? 이러한 회의가 들었다. 개혁은 좀더 천천히 추진해 갈 필요가 있다. 그런
데 전부들 급하고 과격하게 자기 주장을 펴는 것만을 능사로 알았지 좀더 신중하게 처신한
느 점이 부족하구나. 자신을 포함해 동료들의 단점을 그렇게 헤아려 보기도 하는 조광조!
  잘못하면 지치는 고사하고 무슨 화를 당할지는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어 그동안 왕에게 
소인드로 인한 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을 여러 차례 말씀 드린 적도 있다. 불안했던 것
이다. 그러나 동료들은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불안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얼마전에  있었던 
최수성의 행동에 대한 반응을 보더라도 그 점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최수성은 강릉 출신의 
진사로 희천에서 조광조와 함께 한훤당에게 글을 배운 사람이다. 그 이후 그가 한성에 와서 
사는 것을 계기로 둘은 자주 왕앨하며 지내는 사이가 되어 김정, 김식, 김구 등과도 최는 안
면을 트고 지내는 형편이었다. 최는 특히 시문에 뛰어났다. 그래서 그 자신 시에 능했던  김
정이 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엇는데, 그런만큼 시적인 직감력과  예견력에서도 최는 남다른 
점이 있었던 듯하다.
  어느날 조광조과 이들 김정, 김식, 김구 등 세 김씨와 대화를 하고 있는 자리에 그가 불쑥 
나타났다. 급하게 들어와서는 인사도 없이 잠시 서 있더니 곧 바로 술을 청하였다.
  "노천(김식의 자), 나 술 한잔 마시고 싶소."
  그래서 술을 주자 쭉 들이키고 나더니
  "나는 가라앉을 배를 탔어. 곧 얼마 안 있어 물에 빠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두려워 가슴
이 두근거렸는데, 이제 술을 마시나 확 풀리는구나."
  그리고는 말도 없이 곧 나가 버렸다. 김정 등 세  동료가 괴이쩍게 생각하자 조광조는 다
소 어두운 표정이 되어 말을 하였다.
  "그가 가라앉을 배라고 한 것은 우리들을 비유해서 가리킨 말이요."
  그래서 동료들을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눈치가 아니었다.
  마침내 이해 7월에 기준과의 대화에서 조광조는 은퇴할 의사를 비친다. 물러가야겠어.  조
용한 시골에 묻혀 살면서 학문을 더  연마한 뒤에 나와서 일을 하더라도 해야  될 것 같애. 
전부터 여러 번 생각했던 이러한 결심을 굳히고 왕에게  사퇴를 아뢰었으나, 왕은 들어주지 
않았다. 조광조의 집요함에 차츰 싫증을 느껴 요즈음은 경연에서도  그가 무슨 말을 아리면 
눈을 비비고 자세를 고쳐 앉는등 태도가 완연히 달라지 왕이다. 그렇건만 물러나는 것은 끝
내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15. 좌초, 기묘년의 비극
      가) 한밤의 숙청극
  한 시대의 이상은 이렇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즉, 후세에 중종이라고 불리는 이 임금의 재
위 14년째이던 11월 15일 밤 2고(하오  9시와 11시 사이)에 왕이 새로  임명된 승지를 통해 
"이 사람들을 의금부에 가두라"고 쓴 쪽지를 전하면서부터였다. 거기에는 이날 밤 승정원에
서 당직을 하던 승지 윤자임, 공서린, 주서  안정, 검열 이구, 그리고 홍문광에서 이들  또한 
숙직을 하던 응교 기준, 부수찬 심달원의 이름을 적혀  있었다. 이어서 우참찬 이자, 형조판
서 김정, 대사헌 조광조, 부제학 김구, 대사성 김식, 도승지 유인식, 좌부승지 박세희, 우부승
지 홍언필, 동부슥징 박훈을 체포, 곧 옥에 가두었다.
  11월 15일 친위 쿠데타라고 해도 좋을  이같은 숙청극의 시작은 조광조 등  신진드에게는 
당연히 아닌 밤중의 홍두깨로 받아들여졌다.  지치를 목표 삼아 일을  추진하기에만 바빴던 
그들이다. 반대파에 대한 정보와 그에 따른 대응 전략에는 자연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데다
가 성격상으로도 그들은 이러한 면에 서투른 약점을 지닌 게 사실이었다.
  이날 밤에 시작된 숙청극의 가해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외형상으로는 물론 이제 30대 초
반의 젊은 왕이다. 그러나 왕은 완전한 주인공은 되지 못하였다. 반은 꼭두각시이고 반만 주
인공의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국공신의 개정 문제가 한창 시끄럽던 때다. 그 자신  정국 1등 공신이던 홍경주는 조광
조 등에 대하여 참기 어려운 분노를 삼키고 있었다. 홍  자신은 공신록을 박탈당하게 된 입
장이 아니라도 이리저리 얽혀 있는 공신들 상호간의 친교 관계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치오르
는 분노는 전혀 근거 없는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왕의 총애를 받는 딸 홍빈이 조광조에 대
하여 나타내는 불쾌한 감정의 이입도  그에게 무시 못할 작용을 하고  있었다. 밤 늦게까지 
왕을 가두다시피 하면서 강론을 하는 것이나, 소격서 혁파 등의 주청에서 보여준 조의 집요
함은 대체 얼마나 왕을 괴롭힐 것인가? 지치고 피로한 모습의 왕을 볼 때마다 사적인 면에
서 아내일 수밖에 없는 홍빈으로서는 조가 나로 미워지기만  했고, 이러한 감정은 친정아버
지인 홍빈으로서는 조가 날로 미워지기만 했고,  이러한 감정은 친정아버지인 홍경주에게도 
옮겨가게 된 것이다. 궁중의 환관들이며 여타의 궁인들, 그러니까 왕의 자유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그들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는  않았
다.
  궁중 사정에 누구보다도 밝을 수밖에 없는 홍경주다. 왕이  조광조 등에게 싫증과 의구심
을 느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왕의 눈치도 파악한 뒤 협
의가 될 만한 대신들의 의향을 타진해 나갔다. 먼저 판중추부사인 김전의 뜻을  떠보았으나, 
공감은 표시하면서도 행동에는 난색을 보였다. 그래서 다음으로 생각한 대상이 남곤과 심정. 
이들 모두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들과 결코 호의적일 수 없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
이다. 남곤은 문장파로 알려져 도학을 숭상하는 이들과 체질적으로 화합하기 어려웠던 데다
가, 천거과의 설치나 향약의 보급 문제 등 중요한 고비 때마다 조광조 등과 대립해  왔었다. 
또, 주청사로서 명나라에 가서는 그곳에 잘못 기록된 종계의  일을 제대로 바로잡지 못했다
고 해서 김정으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때 김정은 3년이고 4년이고 기필코 
일을 완수하고 와야지 어떻게 그대로 왔단말이냐고 남곤을 심하게 몰아냈었다. 
  심정은 조광조 등과 소시부터의 악연으로 해서 더욱 심한  알력관계에 있었다. 남곤의 경
우 정국공신의 개정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는 그래도 조광조로부터 간사한 인물은  아니라
는 평을 얻고 있었지만, 심정만은 그렇지 않았다.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 등 그에게 주어지
는 자리마다 조광조 등으로부터 부적격자로 몰려 탄핵을 받았거, 요 근래 그는 사실상 무보
직의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신진들의 그에 대한 배척이 워낙 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슨 
전생의 원한이라도 있는지 조광조는 그를 극악한 인물로 보아 지난해 5월 지진이 일어났을 
때는, 그 원인을 심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심정은 
정국 3등 공신이다. 비록 자신은 삭훈 대상에 들지 않았더라도 홍경주와 마찬가지로 입장에
서 공신록의 개정이 기분 좋은 일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어디로 보나 홍경주가 내미는 공모의  손길에 남곤과 심정이 주저할 이유는  별로 
있지 않았다. 벼르고 있던 참인데, 잘 되었다. 이런 마음이 아니었겠는가. 
  조광조 등에 대한 세 사람의 공통된 적대 감정이 마침내  일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홍
경주는 남, 심과의 공모로 딸 홍빈을 움직여 적극적으로  왕에게 베갯머리송사를 하도록 부
추겼다. 조광조네들이 요직을 독식하려는 것이옵니다. 이러한 일도 꾸몄다고 한다. 즉,  나뭇
잎에 꿀을 발라서 '주초위왕'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들로 하여금 파먹도록 해서 만들어진  글
자를 써 벌레들로 하여금 파먹도록 해서 만들어진 글자를 왕에게 잔뜩 의구심이 일어나도록 
했다는 것이다. 
  조정이나 시정 어디에서도 인망이 높기로 제일가는 조광조가 아닌가. 천거과를 통해 앞으
로 자기들 세력을 얼마든지 확보해  갈길도 열려 있다. 일단 의심의  색안경을 끼기 시작한 
왕은 이러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울러
  "조광조를 지금 처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홍빈이 속삭였을 이러한 말들도 왕의 마음을 더욱 산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평균 수준의 두뇌를 벗어날 수 없던 왕은 자라나는 의구심을 해소하지 못한 채 점점 
감정의 꼭두각시로 전락해 가고 있었다. 거기다가 그가 사랑하는 또 하나의 여인인 경빈 박
씨도 자신과 친면이 있는 심정의 사주를 받아 가면서 홍빈 못지않은 베갯머리송사를 그에게 
자주 보내고 있었다. 모두가 조광조를 좋아하며 그의 뜻대로  정치가 이루어지므로 장차 그
를 왕으로 삼자는 공론도 일어날 것이라는 등의 말로.
  머리 좋은 남곤과 심정이 볼  때 왕의 마음을 움직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광조 등을 신임하고 그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왕이지만,  정말로 속속들이 그들과 동렬로 
갈 수 있는 성품이 못 됨이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홍문관 박사로 있던 황효헌이 간파하고 
있었듯이 왕이 겉으로는 선을 좋아하는 것  같아도 직언에 대하여 자세를 고치거나  낯빛이 
변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중종실록, 권 37, 14년 11월 18일의 내용 참조)
  이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부드럽게 돌려서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조광조 
등은 말이 굉장히 직설적이고 표현이 날카로운데다가 때로는 왕의 성격적 단점을  지적하는 
적도 없지 않았다. 착하기는 해도 본바탕이  탁 트이지 못한 왕이다. 이러한 일들이  자기도 
모르게 왕으로 하여금 꽁하는 감정을 마음속에서 쌓아 가게  했을 것이다. 경연에서 지겹도
록 되풀이해서 듣는 조광조의 그 금고옥조 같은 말들이 얼마 전부터 떠분하고 신물이 나게
만 들리던 왕이다. 나를 너무 못살게 구는구나. 밤 늦게 조광조와의 대면이 끝나면 이런  불
평과 함께 한없이 그리웠던 해방감을 맛보던 왕! 이러한 왕에게  여인들을 앞세워 집요하고
도 효과적인 심리공작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왕의 마음이 조광조 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굳어진 것을 확인한 음모자들은 유력한 우군
을 확보하는 데 힘을 가울였다. 심정은 홍경주를 통해서 왕이 자신에게 밀서를 내리도록 공
작, 이를 받아 가지고 조신들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지지를 얻는 일에 나섰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왕은 이 밀서에서 벼슬이 조광조 등을 통해서 나가니 자신은 이름만의 왕이지 실권
이 없다는 것, 설령 저들을  처벌하려고 하여도 간원과 홍문관을 저들이  장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경들이 저들을 처치한 뒤  과인에게 알리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강주진,  조정암의 
생애와 사상, 박영사, 1979 참조)
  이와 함께 남곤도 비중 있는 인사의 포섭에 직접 나섰다. 대상은 단연코 의정부 대신들이
라야 할 것이다. 좌의정 신용개는 얼마전 사망하여 현직의  의정부 대신으로는 영의정 정광
필과 우의정 안당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안당은 워낙 조광조 등 신진들과 가까운 사이이
다. 따라서 정광필이 공략 대상이었는데, 그는 인망도 매우 높았으므로 만이 그의 지지를 얻
는다면 이는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이리라. 
  공작은 은밀하게 해야 한다. 조광조 등의 정보망도 있을 터인즉 그들 세력의 이목에 드러
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남곤은 거사  당일에 변복을 정광필의 집 대문
을 두드렸다. 초립에 베옷을 입고 짚신을 신은 차림에다. 호칭은 남서방으로 하고  있었으니 
누가 보더라도 그가 현직 예조판서 남곤이라고는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상하게 여긴 가
운데 남곤의 모습을 알아본 하인을 통해 그를 맞은 정광필은 그러나 남곤의 설득대로 움직
여 주지를 않았다. 
  "영상 대감, 이들이 만약 단 한 명이라도 조정에 남아 있으면 그 해악이 무궁할 것입니다. 
주상께서 반드시 오늘 공을 불러서 의논할 텐데, 공은 힘써  상감의 뜻을 좇아 조광조 일당
을 남감없이 제거한 후 국세가 편안해지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후회가 많을 것이니 
깊이 생각해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어서 그의 말대로 하지 않을 경우의 불이익을 내세워 은근히 겁을 주는가 하면 반대로 
그의 말대로 했을 때 올 수 있는 좋은 점도 내세워 남곤은 한동안 설득을 계속했다. 그러나 
정광필의 태도는 요지부동인 채 정색한 얼굴로 이렇게 말을 하였다. 
  "이제 말씀하신 일에 대하여 나는 못난 사람이라 꾀를 낼 줄 몰라서 감히 할 수가 없으니 
당신네들이 잘 해 보시오." 
  남곤의 안색이 달라지고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그는 한마디를 더 하였다. 
  "공은 재상의 몸으로서 천인의 복장을 하고 온 시내를 지나서 왔으니 이는 크게  깜짝 놀
랄 만한 일입니다. 사림을 모해하는 것은  본래 나의 마음에 없으니 어찌 이를  차마 할 수 
있겠소?"
  그러자 남곤은 몹시 화가 내며 옷자락을 걷어올리고는 홱가 버렸다. 
  원래 남곤 등의 의도는 영의정이자 인망이 높은 정광필과 그 외의 많은 대신들을 포섭하
여 그들이 자기네들의 뜻에 따르도록  하자는 데 있었다. 그렇게 되면  조광조 등에 대하여 
조정에서 죄를 주는 식으로 합법적인 모양새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정상적으로 대낮의 ㅗ
정에서 이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위험천만일 수도 있는 일이다. 간원을 장
악하고 있는 조광조 세력에 의해서 역으로 당할 가능성도  없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재빨리 
다른 수를 써야만 할 판이다. 보안의 누설은 어느 종류의 모사에서든 실패를 불러오는 재앙
일 테니까.
  남곤, 심정, 홍경주는 당초에 생각한  15일의 밤에 행동으 개시하기로  합의, 일과가 끝난 
저녁에 신무문(경복궁의 북문)을 통해 대궐로 들어갔다. 이에 앞서 그들은 왕에게 비밀리에 
밀서를 올렸다. 
  "조광조 등의 변란과 관련해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려  하나 시신(승지를 말함)들이 모두 
저들 무리이오니 열어 주시면 들어가 직소하겠사옵니다."
  남 등의 이러한 청을 왕도 받아들였으므로 마침내 함께 만나게 된 것이다. 원래 궁궐문의 
열쇠는 승정원에서 보관하게 되어 있다. 만일 긴급한 일로 밤에 대궐에 들어올 일이 있으면, 
수문장에게 사유를 말하고 이어 승정원에서 열쇠를  내주어 문을 열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
다. 그런데 승정원의 승지들이 거의 모두 조광조와 뜻을 같이하는 신진들이었으므로 정상적 
경로를 통해서는 남 등이 밤에 대궐에 들어올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신무문
인데, 이 문만은 승정원 아닌 사약방에서 따로 열쇠를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
약이란 왕명의 전달과 왕이 사용하는 문구류의 공급, 궁궐문의 열쇠와 자물쇠의 보관, 관리, 
궁궐내 정원의 도로 포장 및 설치 등을 맡아보는 액정서 소속의 정 6품관직을 말한다. 대단
치 않은 직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날의 거사에서는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사약을 
맡고 있던 사람은 구수복이었다. 남, 심, 홍의 3인이 왕명임으  알리며 알이며 갖은 말로 문
을 열라고 요구해도 거절하다가 뒤늦게 열어 준 장본인인데, 이로 해서 그는 뒤에 관직에서 
쫓겨난다. 
  어떻든 어렵게 궐내로 들어온 이들 3인은 곧 추자정에서 왕과 당이의 거사에 대한 의논에 
들어갔다. 남, 심, 홍은 왕명으로  대신들을 바로 심무문을 통해  들어오도록 하여 조정에서 
긴급하게 결정한 형식으로 신속하게 조광조 등의  제거 조처를 취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
다. 그러나 이 계획에 왕은 반대였다. 신무문을 통해 들어온다는 것은 떳떳치가 못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연추문(경복궁의 서문)을 통해 들어오기로 하고 이들은 다시 궐 밖으로 나가 
왕명으 받고 모여든 다른 대신들(병조판서 이장곤, 판중추부사 김전, 호조판서 고형산, 병조
참지 성운)과 함께 연추문을 통과하여 들어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비현합의 문앞에 이르러 
왕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추문을 통과하는 데 힐요한 열쇠며 왕이 밤에 신하들
을 부르는 표신(긴급한 사유가 있을 때 발부되는 통행허가증)의 발부도 모두 승정원을 거치
게 되어 있엇으나, 윤자임 등 이날의  승지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열쇠는 이들이  마침 
당직중 간의대(왕립 중앙천문기상대인 서운관에 두었던 관측 시설. 경복궁내의 경회루 북쪽
에 있었다.)에 갔던 사이 승전색(왕명 전달의 책임을 맡은 환관)등  환관들에 의해서 궁문으
로 나간 것이고, 표신은 아예 이들을 거치지 않은 채 발부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남곤. 심정. 
홍경주를 비롯한 대신들이 비현합에 이르러  왕명을 기다리던 밤 2고의 시각에야  승지들은 
비로소 이상 사태를 알아차리고 허둥대었으나  일은 이미 벌어진 뒤였다.  이날의 승정원에 
입직하던 관원들은 승지 윤자임, 공서린, 그리고 주서 안정과 검열 이구로 조광조를  지지하
는 쟁쟁한 신진들이었으나, 이처럼 맥없이 당하고 만 것이다. 그나마 이들은 그 자리에서 구
두로 모두 현직을 해임당한 채 구속되고 만다.
  밤 5고(상오 3시부터 5시 사이)에 정광필. 안당을 우시한 여타의 주요 대신들이며 사관까
지 모두 이르자 왕은 조정에서 이미 결정된 것이라며 조광조 등에 대한 유죄 방침을 밀고나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논의가 얼른 결정되지 않자  왕은 초조하게 서둘러 대기 시
작했다. 남곤에게 전지를 받아쓰도록 명한 뒤, 수정을 거듭하던 끝에 조광조 등에대한  유죄
의 내용을 마침내 만들어 냈다.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등 4인이 서로 붕당을 맺어  자기들에게 붙는 자는 관직에 나가
게 하고, 다른 자는 배척하며 성세로 상호 의지하여 권요(권세가 있는 요직)의 자리르 차지, 
후진들을 유인하여 궤격(과격하게 비난하는 것)함이 버릇을 이루도록 하였으며, 국론과 조정
을 날로 그릇되게 하여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그 세력의 치열함을 두려워해서 감히 입을 열
지 못하게 한 일 및 (윤)자임.  (박)세희. 박훈. 기준 등이 이에 화부해서  궤격한 논의 등을 
한 일을 추고(피의자의 죄상을 문초하여 밝혀 내는 것)하라.
  일종의 기소장인데, 왕은 조정의 청하는 바에 따라 한 일이라는 사실을 애써 강조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대신들이 도착하기 전에 조광조 등의 죄를  청하는 단자가 마련되어 있었으
니 진상은 이미 명백한 것이었다. 
  너무나도 기박힌 사태에 정광필은 왕의 옷소매를 잡고 눈물로 호소했다.
  "전하, 저들이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관대하게  생각하시어 3공으로 하여금 의논해
서 처리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불쾌한 표정으로 이를 뿌리치고 일어나는  왕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전혀  딴사람 
같았다. 그는 만들어진 틀 속에서 감정이 격한 상태로 된 반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다. 그러니 정광필이 옆에 있던 남곤 등을 돌아보며 한 말도 무리가 아니었다.
  "공들은 어찌하여 유자광이 하던 일을 다시 하려는가?"
  유자광은 자기의 음모속에 연산군을 끌어들여 그를  꼭두각시처럼 이용, 수많은 조신들을 
죽인 장본인이다. 그러니 당연히 남은 이에 반론을 할만도 했지만, 누구에게서도 대꾸는  없
었다.
  이보다 앞서 정광필이 왕의 부름을  받고 비현합의 문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미 와 있던 
사람들 중에서 남곤을 발견하고 그는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저자가 우리 집을  변복
하고 오더니만 기어이 일을 저질렀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던지  정은 남곤이 감당하기 어려
운 눈빛으로 빤히 한참 동안이나 그를 쏘아 보았다.그러자 남은  얼굴을 바로 하지 못한 채 
정이 질문을 던지면 매번 이장곤을 돌아보며 그에게로 떠넘겼다.
  "희강(이장곤의 자), 자네가 답변하게."
  이후 남곤은 자기를 쏘아보던 정의 눈을 떠올리며 주위에 말하였다.
  "정광필의 눈이라니!"
  16일에 그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던지 한창 조광조 일파에 대한 유죄가 논의되는 와중에 
몸이 아프다는 구실로 일찍 퇴궐하고 만다.
      나) 유배
  이튿날 아침 전지에서 추고를 명한 8인 외의 구속자들은 석방이 되었다. 이자, 공서린  홍
언필, 유인숙, 이구 삼달원 들 석방된 이들은 자기들만의 석방에 항의하며 조광조등의  석방
도 요청하였으나, 일은 예정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8인에 대한 국문이 시작된 것이다. 
문초 담당관은 병조판서 이장곤과 형조판서로 내정된 홍숙, 그리고 이들보다 상급자로서 판
중추부사인 김전이 함께 자리를 잡았다.
  심문을 받고자 국청(중죄인을 심문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하는  관청)으로 끌려 나왔을 때 
조광조 등은 만취된 상태에 있었다. 어젯밤  갑자기 구속된 뒤 놀라움과 한탄, 그리고  왕에 
대한 일말의 기대와 서로의 굳건한 의리를 다짐하여 맘껏 술을 들었기 때문이다.
  개혁을 추진해 오면서 소인들의 반격에 대한 우려가 전형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왕
의 신임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라고 믿고 있던 이들이다. 급전직하로 이처럼 사태가 변할 
줄 누가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의금부의 관원들이 늦은 밤에  왕명임을 전하며 체포하려 달
려들었을 때 조광조가 믿기지 않는  태도를 보인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건 상감 모르게 
필시 중간에서 누가 꾸민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한동안 주저주저했던 것이다. 그래서  울
며 따라나오는 부인 이씨를 오히려 위로하며 집을 나섰던 그! 수감 후 왕의 뜻임을 알고 한
편 안도감도 들었으나,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이런 마음에다 만취된 상태이고 보니 
국문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다.
  평소 술을 잘 들지 않던 조광조는  8인 중에서도 가장 취해 있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통곡했고, 이장곤이 질문을 하면 희강아, 희강아 하면서 그의 자를 부르며 못난이라는  소리
도 해댔다. 홍숙이 심문할 때는 더욱 엉망이었다. 홍숙의 이름을 마구 불러 대며 주위의  만
류를 뿌리치고 단상으로 뛰어 오르려 했고 자신이 답변한 공초에 서명하기를 거부하기도 했
다. 후에 왕은 조의 이러한 행태를 듣고 크게 분노했지만, 막상 이장곤이나 홍숙 등은  생각
보다 훨씬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 낮까지만 해도  같은 조정의 동료였던 
데다가 조 등에게 동정적인 마음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홍이 김전과 함께 전지에 따라 이들의 죄를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는 각  참형, 윤
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은 장1백대에 유배 3천리로 죄를 정한 후 한 말은 그래서 이러했다.
  "저들이 모두 통곡하며 성명(임금의 명철함)만을 믿고 나랏일을 위하고자 하였을 뿐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는데, 신 등이 이 말을 듣고 대단히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만약 이로써 죄를 정한다면 만세에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냉정했다. 그들이 올린 대로 유죄를 확정하려는 태도였다. 후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원래는 왕명으로 조 등을 불러서 들어오는 대로 무사들로 하여금 쳐죽일 계획이었다
고 한다. 그러나 정광필 등 중립적 입장인 대신들의 반대가 강경하자 이 방침은 취소되었다
고 한다. 그렇다면, 왕은 이 정도의 판결은 자신이 많이 양보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공
초(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는 일)의 내용이나 이와 함께 올려진 공동명의의 옥중 상소도 
별 의미는 없었다. 8인의 공초 내용은 모두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그중 조광조가 진술한 내
용은 이러했다.
  신은 나이 38세로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믿는 것은 군심(임금의 마음)뿐입니다. 나라의 
병통이 이원에 있다고 망녕되이 생각하여 국맥을 영구히 새롭게 하고자 했을 뿐 전혀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8인이 공동으로 작성해서 올린 상소도 뜻은 공초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었다.
  신들은 모두 뜻만 높고 꼼꼼치 못하여 우직한 자들로 성스러운 때를 만나 경연에 출입하
면서 정광(밝은 빛 내지 덕이 훌륭한 모습을 말함)을 가까이에서 얻어 단지 믿은 것은 임금
님의 밝음이라, 우매한 충정을 모조리 말씀드려 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시기심을 불러오기도 
했으나 오직 군이 계신 줄만 알아 다른 것은 헤아리지 않은 채 저희들의 한 몸을 도모한 것
이겠습니까? 하늘의 해가 내려다보는데 정말로 다른 사사로운  마음은 없습니다. 신등의 죄
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겠으나,  선비들의 참화가 한번 발생하면 훗날  나라의 명맥이 장차 
염려되지 않겠습니까? 천문(대궐문을 말함)이 멀어서 생각을 전달할 길이 없으나 길게 아뢰
고 싶은 말을 입다문 채 않는 것도 진실로 참을 수 없는 바이나 행여 몸소 국문을 하여  주
신다면 만 번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뜻이 넘치고 하고  싶은 말ㅇ르 가득 차올라 아뢸바
를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상소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이장곤과 홍숙이 올린 판결  내용에 동의 하는 조신은 
아무도 없었다. 홍경주도 왕의 재고를 요펑했고, 심정은 모호한 태도였으나 중도를 잃지  않
아야 한다는 말을 아뢰었다.
  이어 의정부와 6조, 한성부 등의 조신들도 다투어 가며  그들이 이렇다 할 죄가 없다거나 
크게 감형해야 할 것을 아뢰자 왕은 약간 감형을 하기로 작정하였다. 조광조와 김정은 사사
(약을 먹도록 하여 죽이는 것), 김식과 김구는 장 1백에  절해고도 안치, 윤자임, 기준, 박세
희, 박훈은 고신을 모두 빼앗고 지방에 부처(중앙에서 가까운 곳에 보내어  살도록 하는 것, 
정해진 장소를 떠날 수 없으나 가족들과 함께 살 수는 있음)하라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조신들이 생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사관 채세영이며  승지 김근사는 
물론 여타의 중신들도 선처를 호소하며 신중한 결단을 호소하자  왕도 이에 동의하였다. 내 
다시금 깊이 생각해서 결단을 내리겠노라. 이러한 말을 한 것이다.
  이날은 성균관 유생들이 시위와 격렬한 상소가 잇달았다. 사건의 성격이 그들의 정의감을 
촉발시킨 데다가, 조광조며 김식으로  말하면 그들의 직접적인 스승이  되는 셈이니 잠자코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약수를 대표로 하는 이들 150여명은 성균관에서 궐기대회를 가진 
뒤 곧바로 대궐을 향해 시위행렬을 이어갔다. 문을 지키는 군졸들이 막았으나 허사였다.  이
들은 저지선을 맹렬한 기세로 뚫고 들어가 합문 앞에 이르러 자신들의 상소를 올린 후 통곡
을 마지않았다. 어이, 어이, 우는 소리는 대궐 뜰을 진동했고 자연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게 무슨 소리냐?"
  왕은 짐짓 놀라는 눈치였고 승지가 전하는 유생들의 상소문도 읽어 보았으나 태도에 변함
은 없었다.
  "어찌 궐내에서 통곡할 수 있느냐, 주모자 5인을 의금부에 가두라."
이러한 명령이 떨어졌고, 이번 일은 중간에 간사한 무리들이  참소해서 생긴 것이라는 그들
의 상소 내용에도 동의를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모두 죄주기를 청한 것인데, 참소가 끼어든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군사들을 풀어 이들을 모두 궐 밖으로 내쫓았다. 옷과 갓이 찢어지고 몸에 상처
가 나기도 하는 등 아수라장 같은 난리 속에 유생들은 해산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처를 호소하는 신하들과  유생들의 시위, 그리고 흉흉한  민심의 동향은 왕으로 
하여금 강경한 태도를 조금 누그러뜨리게 만들었다. 조정을 주름잡던 쟁쟁한 인물들이 하루 
아침에 죄인으로 몰려 투옥되지 과연 민심은 뒤숭숭했던 것이다.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돌
아가는 거야? 글세 말이야. 대사헌 대감도 갇혔다네. 홍경주와 남곤, 심정 무리가 꾸민 일이
라네. 아무러나 상감님도 너무하시지, 그들을 죽이려 한 대서야 말이 되나.
  이러한 여론의 움직임과 조정의 동향을 헤아리며  깊은 생각을 하던 왕은 마침내  조광조 
등에 대한 사형의 명은 거두어들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엿가락처럼  늘였다 줄였다 하는 식
으로 해서 결정된 형벌의 내용은 그래서 마침내 다음과 같이 내려진다.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는 고신을 모두 박탈하고 장 1백대를 가한 후 원방(먼 지방)에 안
치하며, 윤자임, 기준, 박훈, 박세희는 외방(중앙에서 가까운 지방)에 부처하라
  당초보다 상당히 완화된 내용이었으나,  정광필 등 중립적이  s대신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조광조 등에 대한 장 1백대도 과중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왕에게 이를 시행하지 말
도록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튿날 유죄가 확정된 조 등 8인은 모두 유뱃길에 올랐다. 그러나 왕은 그동안 함께 국사
를 논의하던 이들과의 정리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승지를  시켜 그들에게 이러한 말을 
전하고 있다.
  너희들은 모두 시종지신으로 경연에 출입하면서 상하가 같은 마음으로 지치를 보기를  기
대하였는데, 너희들의 인물됨이 어질지 않은 것은 아니로되 근래  모든 일에 과격하여 평온
치 않게 함으로써 조정 일에 잘못이 많았다. 이번 일에 내가 어찌 마음이 편안하리요.  조정 
대신들 역시 어찌 달리 사사로운 마음이 있겠는가. 너희들로 하여금 이에 이르도록 한 것은 
내가 밝지 못하여 능히 미리 대처하지 못한 탓이다. 너희들의 죄를 만약 법률대로 정한다면 
이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에게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고, 말감(가장 가벼운 형
량으로 정함)으로써 죄를 확정한 것이며, 만약 보통의 죄수라면 이러한 교지는 하지도 않았
을 것이다. 너희들이 오래 시종으로 있었으니, 난들 너희들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이번에 나
랏일을 그르친 고로 이러한 뜻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유배형을 받고 지난밤에 귀가한 조광조 등 8인을 대궐로 불러서 이러한 왕의 뜻을 
전하고자 하였으나, 이들은 벌써 유배지를 향해서 각자 떠난 뒤였다. 하염없이 눈물짓는  처
자를 뒤로 하고 김정은 금산, 김식 선산, 김구 개령, 윤자임 온양, 기준 아산,  박훈 성주, 박
세희 상주로 새벽길을 떠난 것이다.
  조광조 역시 이씨 부인과 어린 두 아들의 얼굴을 몇 번씩이나 뒤돌아보며 능성을 향해 길
을 떠난 뒤였다. 승지 성운이  그들의 행방을 수소문하여 찾았을 때는  조광조의 경우 이미 
도성을 멀리 떠나 한강 근처에 다달아 있어 왕의 뜻을 전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조광조
가 왕을 만나 자기를 변호해 볼 기회는 이로써 영구히 가 버린 것이다.
  외로울 수밖에 없는 유배 생활로 가는 길! 그러나 조광조가 떠나는 유뱃길은 외롭지 않았
다. 조정의 많은 관원들이 와서 위로해 주었고 지나는  곳에서 만나는 백성들도 멀리서나마 
옷깃을 여기모 절을 하며 위로와 공경하는 뜻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선산이 있는 용인을 
지날 때는 정말로 괴로운 마음이었으나, 여기서도 이자의 전송을 받을 수 있었다. 이자는 변
고가 발생하던 날 체포되었다가 감옥에서 석방되는 길로 용인에 있는 자신의 초당으로 내려
와 쉬고 있던 때였다.
  또, 전주 부윤으로 있다가 부제학에 임명되어 상경하던 이사균과 우연히 마주쳐서는 깊은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조광조보다 11년 위인 이사균은  조광조의 손을 굳게 잡고 따
뜻한 말로 위로하였다.
  "자네가 아직 중용을 깊지 읽지 못했는데, 항차 당우(요 임금과 순 임금을 말하는 것임)의 
사업을 할 수 있겠나? 중용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어리석으면서도 스스로 쓰기를 좋아하고, 
천하면서도 스스로 오로지하기를 좋아하며, 지금의 세상에  살면서 옛날의 도로 돌아간다면 
그 몸에 재앙이 미치지 않는 자 없다고 말일세. 그러니  자네가 오늘날 화를 면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네. 자네 아직 나이 젊고 독서를 좋아하니 노력하고 자애 하게나."
  듣기에 따라서는 서운한 말도 그중에 없지 않았으나, 모두가  나를 깨우치느라 하는 말이
겠거니 하는 심정으로 조광조는 받아들였다.  유배가서 공부 많이 하여  후일에 재기하라는 
뜻의 말이 무엇보다 고마워 그는 마음속으로 한없이 울었다.
      다) 경화되는 정국
  조광조 등이 유배지로 떠난 후에도 조정에서 그들을 지지하는 논의와 민간에서의  동정적
인 여론은 적지 않았다. 성균관 유생들도 생원 임붕 등 240여  인의 상소로 조광조 등의 억
울함을 호소하고 이미 구속된 5명의 동료들과 함께 자신들도 모두 구속되기를 원한다며 들
고 일어났다.
  그러나 한펴에서는 그들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볍다는 논의도  없지 않았다. 괄괄한 성미
를 가진 일단의 무인들 사이에서 우선 그런 불만이 드러나고 있다.
  간신 유자광에게 아첨하고 지냈던 전 훈련원  첨정 박배근이란 위인은 평소 유력한  신진 
중의 한 사람인 한충에 대하여 사적인 일로 유감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한은 물론 조광조 
등 신진들을 모두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다가 조광조 등이 유배를 가는 것으로 그치자 불만
을 품고 나머지 신진들을 제거할 모의를 하고 있었다. 이 일은 사실로 드러나 박 등 관련자
들은 처벌을 받게 되지만, 벌써 여기에 정국이 경화될 조짐은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조광조 
등에게 감정을 품고 있는 세력에서는 이번의 조 등에 주어진 처벌 내용을 불만스럽게 생각
한다는 증거가 여기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정국의 양상은 조광조가 목숨을 걸다시피하고 개정한 정국공신의  환원에서부터 
이루어진다. 정광필이며 신상등이 반대하였으나, 왕은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다시피하여 결국 
공신록을 개정하지 말도록 조처하고 만다. 이를 반대하던 신하들도 조광조등의 몰락을 눈앞
에서 본 탓인지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정국공신록의 환원에 가장 적극적
인 사람은 남곤이었으니, 이러한  결과는 그가 조정에서 실세로  등장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어서 유배 간 인물들이 건의해서 이루어졌던 감사 구임의  제도도 고쳐진다. 감사의 임
기는 원래 1년이었는데, 지방관으로서 제대로 일을 하기에는 짧다고  해서 조광조 등이 2년
으로 할 것을 주장, 왕도 이를 받아들여 2년으로 한 바 있었다. 그런데 주창자들이 죄인으로 
몰리자 제도마저 밉보여 원상태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복구 작업은 천거과의  경우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12월  들어 이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누가 보나 예정된 일이었다. 그러나 천거과에 대한 논의는 정국에 새
로운 양상을 불러오고 있었다. 아직 조정에 남아 있는 조광조의 동조자들에 대한 숙청 선풍
을 그것은 함께 몰고온 것이다. 그 첫 대상은 좌의정으로 승진된지 얼마 되지 않은 안당. 대
간은 천거과의 폐지와 함께 그가 이 과를 발의한 인물임을 들어 파직을 청하였다. 남아있는 
무리 중 가장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그가 우선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
의 세 아들, 처겸, 처함, 처근이 천거된 일도 이제는 그에게 좋은 공적 자료가  되었다. 집의 
유관이 천거과의 폐지와 함께 안당의 파직을 청하자 정광필이  구원에 나섰다. 안당만의 잘
못이 아니니 그만을 죄줄수 없다는 내용으로 정이 반론을 펴자 이번에는 정언 조침이 가만
있지 않았다. 지난날 일 좋아하는 신진들이 한창 조정을 시끄럽게  할 때 조처하지 않고 남
몰래 한탄만 하였다니 영상은 나라를 지키는 대신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제 안당의 파직은 피할 수 없는 추세, 전복위하라고나 할까? 과연 세상일이란 새옹지마
이다.
  그런데 12월 14일에 생원  황이옥과 유학 윤세정, 이내의  합동상소가 올라오면서 숙청의 
선풍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장문에 속하는 이 글에서  그들이 주장한 것은 
요컨데 이미 귀양간 조광조 등 8인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
에 잔여의 무리들이 조정에 잡초처럼 남아 있으니 최소한 그들의 괴수는 죽여야 한다는 논
조였다. 이 말은 곧 조광조 한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여야 한다는 뜻인데, 그들이 지목
한 이른바 잡초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안당은 물론 유용근, 한충, 정응, 최산두,  장옥, 이충
건, 이희민, 조광좌, 이자, 김안국 등.
  왕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왕권에  대한 위협적 요소로 여겨져온 조광조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그들이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민간에서의 신망과 조정에서의 추종  세력으로 볼 
때 조광조는 안심하고 내버려 둘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보아 늘 마음이 편치 않던  왕이
다. 그런데 황 등이 이제 그를 죽여야 한다고 나왔으니 기다리던 바를 만난 격이었다.  상소
를 올린 세 사람에게 술과 음식을 내린 사실에서 왕의 마음을 잘 알 수가 있다.
  황이옥은 원래 조광조 등 8인이 구속되자 그들을 위해서  상소문을 지은 바 있었다. 그러
다가 얼마 후 왕의 마음을 간파하고 이를 수정, 마침내 조를 죽여야 한다는 글로 내용을 바
꾸어 올린 것이다.
  이후 천거과의 폐지 문제와 함께 이들이 제가한 논점은 당연히 군신간의 중요한 논의 사
항이 되었다. 간원이 다투어 앞장서 대사헌 이항은 황 등의  상소에서 열거된 외의 더욱 많
은 사람들을 처벌 대상으로 추가하였다. 신광한, 정순봉, 이청, 양팽손, 구수복, 정완, 이약빙, 
이연경, 권전에다가 시산부정 정숙 등 왕실에 속하는 다섯 사람도 여기에 있었다. 왕족인 이
들 5인은 평소 조광조와 가깝게 지내온 사이였다. 이에 따라 대사간 이빈은 이들 잔당을 반
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이 무리들로써야 무슨 일을 하겠는가 하여 그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뒤에 반드시 
큰일이 있을 것입니다."
  타오르는 왕의 감정에 기쁨이 되는 말을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틀후인 12월 16일에 그들은 더욱 많은 처벌 대상자를 추가, 명단에 황색표
를 붙여서 단자를 만들어 왕에게 올렸다. 그 수는 남곤도  난색을 표할 정도로 너무나 많은 
숫자였다. 그래서 하나하나 검토를 거쳐 확정하게 되는데, 남곤과 심정이 주로 왕의  자문에 
응한다. 처벌은 파직이나 고신 박탈 아니면 유배로 정해져, 전자의 경우는 이름 아래에 표를 
붙이고 후자는 이름 의에 표를 붙여 갔다.
  "양팽손은 어떤 사람인가?" 왕이 이렇게 묻자 남곤은 대답하였다. "저들 무리와 상종하여 
좋은 자리를 차지한 자입니다." "유용근, 정응, 최산두, 정완은 그 죄가 같은가?" "이들은 연
소 하여 사리를 알지 못하고 저들의게 의부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숙청된 인원은 총 18명,  유배 4(유용근, 정응, 최산두, 정완), 파직  3명
(안당, 유운, 김안국)에다가 고신박탈 11명(이자, 최숙생, 이희민, 이약빙, 이연경, 조광좌, 윤
광령, 송호지, 송호례, 양팽손, 이충전)이었다.
  이미 파직당한 이자를 빼더라도 총 17명의 인원이 추가로 처벌을 받았으니, 그 숫자는 적
다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들에 대한 처벌 내용은 비교적 쉽게 내려졌고, 왕도 남곤 등 주
위의 의견을 많이 참작해서 결정을 내렸다.
  그런 이에 앞서 내려진 조광조 등 8인에 대한 형의 재조정에서는 왕의 의견이 훨씬  많이 
반영되었다. 특히 조광조의 형에 관한 한 전적으로 왕이 결정을 주도하였다.
  이날 비현합에 나온 왕이 정무를 보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휩싸이기 
시작하였다. 대사헌 이항과 대사간 이빈이  조광조의 남은 무리들도 처벌해야  한다고 하자 
왕은 무언가 결심을 굳힌 듯 했다. 승지를 불러 정광필과 김전의 해임을 일방적으로 통고하
고, 후임으로 남곤을 좌의정, 이유청을  우의정으로 임명하는 것부터가 벌써 예사롭지  않았
다. 정은 그동안 사사건건 조광조 등을 변호하고 있었으며, 김은 이들의 처벌에 미온적인 태
도를 보여 온 점이 원인인 듯했다. 왕은 유배간 8인에 대하여  한층 과단성 있는 처벌을 내
림으로써, 조정에 남아 있는 저들 세력도 뿌리뽀아 버리겠다는 의지를 불타고 있었다.  남곤
과 이유청이 부름을 받고 왔을 때 왕은  일의 근본되는 것을 빼면 나머지 무리들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며 결연한 태도로 이러한 말을 하였다.
  "광조 등을 법률에 의해 그 죄를 명백하고 바르게 다스려야만 하겠다."
  유배간 8인, 그중에도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네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죽이겠다는 의미
일 것이다. 남곤으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종대에 세상이 인정하는 간신  임사홍도 
조정을 어지럽힌 죄가 컸으나 3천리 밖의 유배로 그쳤었다. 그런데 조 등에 대하여 꼭 이렇
게까지 해야만 하나? 그래서 왕에게 그는 이렇게 아뢰었다.
  "광조 등은 임사홍과 같은 무리는 아닙니다. 단지 백성들에게 은택이 미치는 임금을 바란 
나머지 사람들이 이를 저지할까 두려워 자기네들과 뜻이 다른 사람은 배척하여 자신들이 소
인으로 되어 가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어찌 왕법에 의거해서  형을 가하겠습니까? 만일 
이렇게 하신다면 세상 인심도 안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남곤은 그나 조광조 모두가 전에 말한 바 있는 취지를 다시 반복하고 있는데,  '자
신들이 소인으로 되어 가는 것을 몰랐다'고 언급한 내용이 그것이다. 이 말에 따른다면 소인
과 군자는 고정적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소인도 되고 군자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소인이나 영원한 군자도 엄
격히 말하자면 없다고 보는 입장인 것이다. 군자라도 잘못하면 소인이 되는 것이고,  소인이
라도 개과천선하여 훌륭한 인격을 갖추면 군자가 된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남곤이 조광
조등을 소인으로 보면서도 관대한 처분을 바라는 것은 따라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왕은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조광조가 구속된 다음날 국문을 받으면서 보인 취중의 행동까
지 들여 기필코 죽여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광조는 무죄일 수 없어. 이미 저러한 죄가 있거니와  또한 국문을 받음에 이르러 당상의 
이름과 자를 불렀으니 이것도 큰 죄이다."
  "홍숙의 말을 들으니 모두 극도로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어 혹 웃거나 혹 울기도  하여 꼭 
미친 사람 같았다 합니다. 광조에게 죄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마땅
히 불의와 대간의 말을 절충하여 처리하셔야 합니다."
  함께 있던 최숙생까지 이러한 말로 왕의 뜻을 돌리고자 하였으나, 왕은 전혀 달라지는 기
색이 없었다. 오히려 의금부 당상인 심정과 손주를 불러 마침내 이렇게 명을 내린다.
  "광조 등 4인(김정, 김구, 김식 포함한 4인)은 사사하고 자임(기준, 박훈, 박세희를 포함한 
4인)등 4인은 절도에 안치할지니 오늘로 낭관을 출발시키도록 하라."
  온순하던 사람이 한번 화를 내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날뛰는 경향이  있는데, 왕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광조 등 4인은 절도에 안치하고 그 이하의 4인은 먼 곳으로 유배함이 가합니다."
  남곤이 처벌의 완화를 다시 청했으나, 왕은 노기등등한 태도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형벌은 개인적인 의사로 행할 수 없는 것이야. 마땅히 왕법을 밝혀서 인심을 안정시켜야 
한다."
  "전하, 비록 미물이라도 죽는 것을 두려워함이 없지 않거니와  항차 사람의 죽고 사는 것
은 큰일입니다. 깊이 살피셔야 합니다."
  남곤의 이러한 말이 왕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도 네 사람이나 사사시키
는 일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낀 모양이다. 조광조를 포함한  4인 중에서도 죄의 경중이 있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유청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남곤은 더욱 명확한 내용으로 답변을 보충
하였다.
  "그중에 어찌 경중이 없겠숩니까? 나머지는 모두 광조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왕은 또 이러한 말을 하였다.
  "조정에서의 의논이 이미 4인을 같은 죄로 하였으므로  이제 나누어 구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중에 경한자가 있으면 마땅히 말해야 한다."
  이것은 왕이 김구를 의중에 두고 한 말이다. 어느 때인가 김구가 홍문관 당직으로 근무하
던 날 왕은 우연히 그와 시간을 함께 하며 술잔을 나눈 뒤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이다. 눈치 빠른 남곤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즉각 답변을 올렸다.
  "김구는 광조의 같은 율로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8인 중 김구 이하는 절도에 안치하고 광조 등 3인은 사사하면 되겠다."
  왕은 이 말에 그동안 잠자코 있던 심정이 입을 열었다.
  "이제 만약 3인 모두에게 사죄를 가한다면 성덕에 누가 될 듯싶습니다. 오직 그 괴수만을 
다스리시면 됩니다."
  심의 이말을 들으면서 왕은 새삼 조광조에 대한 증오심이 끓어 오른 모양이다. 광조는 죽
여도 아까울게 없으며, 그는 마음이 바르지  않은 자라고 한동안 비난을 늘어놓았다.  9개월 
전인 지난 3월에 조광조가 말을 타다 떨어져  입을 다쳤을 때 의원을 보내 병 문안을  하고 
치료해 주던 왕이 아니던가. 더구나  지난해 11월 5일의 경연에서  조광조와 성리학에 관한 
대담을 하다가 왕은 그러한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즉,  사람은 누구나 7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중용의 상태로 절도 있게 하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과연  왕은 이제 그 말이 사실임
을 스스로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전혀 딴사람이 된 왕 앞에서 남곤은 다시 한번 조광조에 
대하여 관대한 처분을 내리도록 호소한다.
  "국사의 잘못은 모두 광조가 이끈 것이니 절도에  안치하면 됩니다. 옛말에 4이의 땅으로 
쫓아내서 이매(사람을 홀리게 하는 도깨비)를 막는다고 하였으니, 왕자의 도리는 이와 같아
야 합니다."
  이어서 손주도 이들을 모두 절도 안치  혹은 서북변으로의 유배로 그치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었으나, 왕의 뜻은 이미 정해진 뒤였다. 자신의 확고한 주관에 따라 이렇게 최종 결정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광조는 사사해야 하고 김정이하 3인은 절도에 안치하며, 자임이하 4인은 서북방 먼 곳으
로 안치하면 되겠다."
  곧 조광조를 비롯한 8인과 나머지 그들 세력에 대하여 결정된 조처가 공식의 전교로 내려
졌다.
  문집의 기록에 의하면 한때 조광조와 가까이 지냈다고 하는 피장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
다고 하는데 이제 그대로 되고 만 셈이다.  "공의 재주는 족히 한 시대를 경제(경영하고 구
제한다는 의미)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임금님의 마음을  얻은 뒤라야 그것은 할 수 있
을 것입니다. 지금 주상께서는 명성 때문에  공을 쓰지만 실제로는 공을 잘 모릅니다.  만일 
그 사이에 소인이 끼어든다면 공은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라) 최후
  조광조가 유배형을 살게 된 곳은 능성(지금의 화순군 능주면)의 비봉산  아래 한 작은 민
가였다. 비좁은 초가지만 생활에 크게 불편은 없었다. 집에서 따라온 노자에다가 고을  원이 
보내 준 관동(관청에서 일하는 나이 어린 소년)등 수인이 청소 등 생활에 필요한 일들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제자 장잠이 따라와 함께 있는 것도 그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장잠 외에도 
백인걸이며 성수침 등 여러 제자들이 내려와 스승에게 큰절을 드리며 위로를 드린 바 있어 
마음은 외롭지 않았다. 그러나 슬프고 괴로운 마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한 수의 시를 
지어 스스로를 한탄하기도 한다.
  누가 살 맞아 상한 새처럼 된 신세 가련히 여길까 말 잃은 늙은이 같은 마음을 스스로 웃
노라. 원학은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성을 내지만 복분에서 벗어나기 어려움을 어찌 알랴.
(수련신사상궁조, 자소심동실마옹. 원학정진오불반, 기지난출복분중.)
  여기서 원학(원숭이와 학)은 군자를 비유하는 고사에서 온 말이고, 복분은 자기에게 씌여
진 엄청난 누명과 형벌을 비유한 말일 것이다. 어떻든 능성누수중(문집의 속집 권1)이란 제
목으로 알려진 이 시를 읊던 그의 심정을 말할 수 없이 답답하고 괴로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의 조광조는 하루종일 별로 말이 없었다.  아랫사람들에게 온후한 태도로 대하였
고, 겨울 추위에 와서 일해 주는  그들에게 고마워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바깥 
출입도 하는 일이 없었다. 늘 근신하는 태도로 방에 들어앉아 책을 보거나 장잠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일로 일과를 삼았을 뿐이다. 그가 장잠에게 가르친  내용은 평생을 두고 중요시한 
근사록과 소학이었을 것이다.
  조광조과 사사의 명울 받고 죽기  며칠 전에는 이곳 출신의 양팽손이  그를 찾아왔다. 그 
자신 고신삭탈의 명을 받은 양은 조에게  내려진 사사의 명도 알았으므로 서둘러  이곳으로 
내려온 터이다. 다만 며칠이라도 동료이자 선배인 조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조가 25세, 양이 19세일 때 두사람은  처음 만났었다. 사마시를 같은해에 응시하여 조는  진
사, 양은 생원시에서 각기 일등을 차지한 바도 있었다. 그로부터 둘은 학문과 조정 일을  함
께 논의했고 서로를 인정해 주는 사이로 지내온 것이 어언 13년여! 처음 양팽손이 성균관에 
입학했을 때 동료 유생들은 그를 촌놈이라고 놀려대며 푸대접했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를 가까이 대하며 지내왔던 사이다.
  양팽손의 마음은 무거웠으나 물론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둘 사이에는 조정의 돌아가는 
형편과 왕의 근황, 그리고 민생의  문제며 의리에 관한 논의에 이르기까지  낮과 밤을 이어 
얘기가 그칠 줄 몰랐다. 그러다가도 조광조는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마지않았다.
  "우리가 이 화를 당하는 것이 실로 시운이니 한탄한들 어찌하겠소? 나야 죽음이 있을  뿐
이지."
  양팽손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그가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도 오래 갈 수는 없었다. 한성으로부터  사사의 명이 이르렀기 때문이
다.
  왜, 내가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해? 사사의 명을 접했을 때 조광조의 마음이 본능적으로 자
신에게 던진 말이다.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죽기까지 해야 할 만큼 중죄는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죽음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어떤 변명도 필요없데 된  상황! 하늘, 땅, 나무, 사람
들. 이 모든 것이 제자리에 저다운 모습을 하고 있듯이  왕명도 법식에 맞는 자세로 받아들
여야 하는 게 도리다.
  "나는 진실로 죄인입니다."
  이러한 말을 하면 조광조는 왕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한 뒤 땅에 꿇어앉았다. 다년간 
길러 온 자기절제의 천근같은 침착함이 마침  내리는 사나운 눈발 속에서도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이어 의금부 도사 유엄이 전하는 왕명을 들은 뒤 그에게 물었다.
  "단지 사사의 명만 있고 사사에 대한 글은 없습니까?"
  그러자 도사는 종이 쪽지를 꺼내어 지극히 사무적이 태도로 거기에 적힌 것을 보여 주었
다. 사사의 명을 내린다는 간단한 기록뿐이었다.
  "나는 일찍이 대부의 열에 있었는데, 지금 사사에 이르러 어찌 단지 조그만 종이 쪽지 하
나를 도사에게 부쳐, 그것을 신표 삼아 죽도록 한단  말인가? 만약 도사의 말이 아니었다면 
아마 믿을 수 없었을 겁니다."
  자기에게 내려진 사사가 왕명임을 믿기는 하나 간신들의 농간으로 왕도 모르게  죽이라는 
명이 내려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데서 이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곧 이어서 그는 물었다.
  "누가 정승이며 심정은 지금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남곤이 좌의정이며 심정은 의금부 당상으로 있다는 말을 듣자 조광조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면 내가 죽는 게 틀림없군."
  또다시 묻는 말
  "조정에서 우리를 어떻다고 합디까?"
  "왕망의 일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더군요."
  도사 유엄의 이 말에 조광조는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허, 허, 허, 허, 왕망은 개인적인 야심을 추구하는 자요."
  자신은 왕망과 달리 나라를 위해 일했을 뿐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건 그렇구, 죽으라는 명이 있으니 오래 지체하면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더라도 오
늘 안으로만 죽으면 되지 않을까요? 내  몇줄 글을 써서 집에 보내고  싶기도 하구, 아울러 
분부하고 조처할 일도 있으니, 일의 처치가 끝난 후 죽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소?"
  도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마지못하다는 태도로 허락하자 그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우선 몸
을 깨끗이 씻는 일부터 했다.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몸,  죽더라도 깨끗이 하고 가야 한다. 
이어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자리에 앉아 붓을 잡고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시간은 이제 얼
마 남지 않았다. 마감하는 38년의 생애를 이 붓끝에 온전히 실어 남겨야 하리라. 가장  먼저 
쓴 글은 당연히 부인 이씨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지난 6월에  친정아버지의 상을 당한데다 
이제 감내하기 어려운 이 비극마저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할 아내!  그러나 끓어오르는 슬픔
을 냉정하게 다스리며 그는 편지를 써 나갔다.  부인! 생전에 좀더 당신을 아껴주지 못하고 
어린 두 아들을 맡긴 채 홀연히 떠나게 되는 마음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소. 아마도 이렇게 
시작되었을 그의 편지 사연은 구구절절 가슴 적시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집안 어
른인 숙부를 비롯하여 형제들에게도 글을 남겼겠지만, 지금 모든 것이 남아 있지 않다.
  온갖 정회를 쏟아 가까운 사람들에게 남겨야 할 글을 다 쓰고 난 뒤, 그는 마침내 역사를 
향해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토로하기로 하였다. 밖에는 사납게 울어대는 겨울바람이 눈까지 
몰아 문풍지를 울리는 가운데, 한 수의 시가 그의 마음을 담아 나오기 시작했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했고(애군여애부)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하듯 했노
라.(우국여우가) 밝은 해가 아랫세상을 내려다보니(백일임하토) 거짓없는  이내 정성 환하게 
비추리.(소소조단충)
  쓰기를 마치자 제자 장잠 등 보살펴 주던 주위 사람들을 불러서 일렀다.
  "내가 죽거든 관은 얇은 것으로 해야 한다. 무겁고 두꺼운 것으로는 절대 하지 말아라. 무
거은 것을 쓰면 먼길에 돌아가기 어려우니라."
  이 과정을 마치기까지 그는 방문 틈으로 자주 밖을 살폈다.  마구 재촉해 대는 태도로 보
아 아마도 기다리다 못한 의금부 도사 일행이 자신을 혹시 해치려고 달려들지 않을까 우려
한 때문일 것이다. 모든 유언을 마친 뒤 그는 다시 방밖으로 나왔다. 눈은 여전히 맹렬한 기
세로 마당에서 저대로의 몸짓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그동안 함께 지내온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관동들에게는 
따뜻한 눈길로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움의 뜻을 표시했고, 장잠에게는  계속 학문에 정진할 
것을 당부하였다. 눈물이 가득한 상태로 금방이라도 통곡할 것  같은 양팽손과는 오래 손을 
잡은 채 놓을 줄 몰랐다. 겨우  "양공, 나 먼저 갑니다. 모두가  각자 우리 임금님을 지극히 
편안하게 해 드려야 할뿐이지요. 얼마 있다가 저 세상에서 우리들이 같이 지내게 되지 않겠
습니까?"
  이 말은 한 것이 고작이다. 마지막으로 조광조는 집주인을 돌아보며 한마디 하였다.
  "그동안 참으로 신세가 많았다. 내가 너의 집에 묵었던지라  후일에 꼭 보답을 하려고 했
는데, 보답은커녕 오히려 너로 하여금 흉변을  보게 하고, 너희 집을 더럽히게 되었으니  내 
비록 죽더라도 한이 남는구나."
  대감님! 깊숙이 절을 하며 흐느끼는 집주인이며 멀리서 이를 바라보는  인근 마을 사람들
과 양팽손 등 이 자리에 있게 된 역사의 증인들이 모두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는  가
운데, 조광조는 사약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것은 독주. 그릇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 그는 거
침없이 거기에 담긴 술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셨다.  그러나 곧 절명되지 않자 금부도
사를 따라온 군졸들이 몰을 졸라  죽이고자 달려들었다. 한시바삐 임무를  마치고 떠나려는 
도사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으나, 그들은 곧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성상께서 나의 목을 보존하고자 사사의  명을 내리신 것인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뒤틀리는 온몸의 고통 속에서도 이처럼 침착함을 잃지 않는 사형수의 호통이 있었기 때문
이다.
  곧 이어 다시 가져온 독주를 더 마신 뒤 견디지  못하고 그는 자리에 쓰러졌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에 눈, 코, 귀, 입으로 붉은 피를 쏟는 얼굴! 그 위로 마침내 죽음이 휘감아들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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