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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객관성

Casey,Riley 2023. 4. 27.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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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객관성

이러한 관점에서, 이른바 상품 물신성에 대한 맑스의 기본적 정식화를 재독서하는 것 또한 가치 있을 것이다. 인간 노동의 생산물들이 상품 형태를 획득하게 되는 사회에서 사람들 간의 핵심적 관계들은 사물들 간의, 상품들 간의 관계들의 형태를 취한다. 사람들 간의 직접적 관계 대신에 우리는 사물들 간의 사회적 관계를 갖게 된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러한 문제 전체는 알튀세적 반-휴머니즘을 통해 의심받게 되었다. 알튀세주의자들의 주요한 비난은 맑스의 상품 물신성 이론이 소박하고, 이데올로기적이며, 인식론적으로 근거가 없는 사람(인간 주체)과 사물 간의 대립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캉적 독서는 이러한 정식화에 새롭고도 기대하지 못한 뒤틀림을 제공할 수 있다: 맑스의 접근의 전복적 힘은 정확히 그가 사람과 사물의 대립을 사용하는 그 방식에 놓여 있는 것이다.
앞서 본 것처럼 봉건주의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들은 신비화되어 있으며, 이데올로기적 믿음과 미신의 거미줄 망을 통해 매개된다. 그것들은 주인과 그의 종들 간의 관계인데, 그로써 주인은 그의 카리스마적 마력을 발휘하며, 등등이다. 자본주의에서 주체는 해방되었으며 스스로를 중세의 종교적 미신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지각하지만, 서로를 대할 때 그들은 합리적 실리주의자로 그렇게 하며 오로지 자신들의 이기적 이해에 의해서만 인도된다. 그렇지만 맑스의 분석은 요점은 사물들(상품들) 자체가 그들 자리에서 그들 대신에 믿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모든 믿음들, 미신들, 형이상학적 신비화들은, 합리적이고 실리적인 개성에 의해 극복된 것으로 가정되고 있지만, ‘사물들 간의 사회적 관계’ 속에 체화되어 있다. 그들은 더 이상 믿지 않는다. 하지만 사물들 자체가 그들 대신에 믿는다. 
이는 또한 기본적인 라캉의 명제인 것처럼 보인다. 믿음은 내적인 어떤 것이며 인식은 (외재적 절차를 통해 검증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외적인 어떤 것이라는 통상적 테제와는 반대로 말이다. 오히려, 사람들의 실천적이고 실질적인 절차 속에 체화된 바 근본적으로 외적인 것은 바로 믿음이다. 그것은 티베트의 기도 바퀴prayer wheels와 유사하다. 당신은 종위 위에 기도문을 적고, 둘둘 말린 그 종이를 바퀴에 놓고서, 그것을 아무 생각 없이 자동적으로 돌린다(혹은, 헤겔의 ‘이성의 꾀’에 따라 작업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풍차에 부착하여 바람에 의해 그것이 돌아가게 하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바퀴 그 자체가 당신을 위해, 당신 대신에 기도를 한다. 혹은, 더 정확히는, 나 자신이 바퀴의 매개를 통해 기도한다. 이 모든 것의 매력은 나의 심리적 내면에서 나는 원하는 무엇이든 생각할 수 있으며, 가장 더럽고 음탕한 환상들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예전의 좋았던 스탈린적 표현을 쓰자면--내가 무엇을 생각하건 간에 객관적으로 나는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심리학이 아니라는 근본적인 라캉의 명제를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이 파악해야 한다. 가장 내밀한 믿음들, 심지어 연민, 울음, 슬픔, 웃음과 같은 가장 내밀한 정서들조차도 그 진실성을 잃지 않고서 타자에게 전이될 수 있으며, 위임될 수 있다. 정신분석의 윤리에 대한 세미나에서 라캉은 고전 비극에서 코러스의 역할에 대해 말한다. 관객인 우리는 근심을 안고서, 일상 문제들로 가득차서, 극의 문제들에 유보 없이 따라갈 수 없는 상태로, 즉 요구되는 공포와 연민을 느낄 수 없는 상태로 극장에 간다. 하지만 문제될 것이 없다. 코러스가 있으니까 말이다. 코러스는 우리 대신 슬픔과 연민을 느낀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코러스의 매개를 통해 요구되는 정서들을 느낀다. ‘그렇다면 당신은 일체의 근심을 덜게 된다. 당신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해도 코러스가 당신 대신 그렇게 할 것이다’(Lacan, 1986, p. 295).
관객인 우리들이 단지 졸면서 공연을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 한 번 예전의 스탈린식 표현을 사용하자면) 객관적으로, 우리는 영웅들에 대한 연민의 의무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원시 사회에서 우리는 동일한 현상을 우리 대신 울도록 고용된 여자인 ‘곡꾼’의 형태에서 발견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타자의 매개를 통해 애도의 의무를 완수하는 한편 우리의 시간을 보다 유익한 일에--예컨대 유산 분배를 논의 하는 데--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가장 내밀한 느낌의 이러한 외재화, 이러한 전이가 이른바 원시적 발전 단계의 특징일 따름이라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 대중적인 텔레비전 쇼나 연속물에서 아주 흔한 어떤 현상을 상기해 보도록 하자. ‘녹음된 웃음’ 말이다. 우습거나 재치 있다고 가정된 어떤 말에 뒤이어, 쇼 자체의 사운드트랙에 포함된 웃음과 박수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고대 비극 코러스의 정확한 대응물인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살아 있는 고대’를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왜 이 웃음인가? 첫 번째 가능한 대답--그것은 우리에게 언제 웃을지 상기시켜준다--은 충분히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웃음이 어떤 자발적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의 문제라는 역설을 함축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대답은 충분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은 안 웃으니까 말이다. 유일하게 정확한 대답은--텔레비전 수상기에 체화된--타자가 우리의 웃어야 할 의무조차도 덜어주고 있다는--우리 대신에 웃고 있다는--것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리석은 고된 일과로 지쳐서 저녁 내내 졸린 눈으로 텔레비전 스크린을 응시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타자의 매개를 통해서, 참으로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나중에 가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의 이러한 객관적 지위를 고려에 넣지 않는다면 우리는, 잘 알려진 농담에 나오는, 자신을 한 알의 옥수수라고 생각한 바보처럼 끝을 맺고 말 것이다. 정신 병원에서 얼마간 있은 후에 그는 마침내 치유되었다. 이제 그는 자신이 곡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퇴원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그는 되돌아와, ‘암탉을 만났는데 그 암탉이 나를 먹을까봐 두려웠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무엇이 두렵지요? 이제 당신은 곡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잖아요.’ 바보는 대답했다. ‘예, 물론 알지요. 하지만 그 암탉은 내가 더 이상 곡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까요?’

‘법은 법이다’

사회적 영역과 관련해 이로부터 이끌어낼 결론은, 무엇보다도, 믿음은 ‘내밀하고’ 순전히 정신적인 상태이기는커녕 언제나 우리의 유효한 사회적 활동에서 물질화된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경우를 보자. 카프카는 그의 소설의 ‘비합리적’ 우주에서 현대 관료제 및 그 안에서의 개인의 운명에 대해 ‘과장되고’, ‘환상적이며’, ‘주관적으로 왜곡된’ 표현을 제공했다고 흔히들 이야기된다.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유효하고’ ‘실제적인’ 관료제 그 자체의 리비도적 기능을 규제하는 환상을 조음하는 것이 바로 이 ‘과장’이라는 중대한 사실을 간과한다.
이른바 ‘카프카의 우주’는 ‘사회적 현실의ㅁ 환상-이미지’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사회적 현실 그 자체의 한 가운데서 작동하는 환상의 미장센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관료제가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관료적 기구 앞에서 우리의 ‘유효한’ 행위는 이미 그것의 전능함에 대한 믿음에 의해 규제된다. . . . 어떤 결정된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형태를 그것의 유효한 사회적 관계들로부터 연역하려는 보통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대조적으로, 분석적 접근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현실 그 자체에서 유효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겨냥한다.
우리가 ‘사회적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윤리적 구성물이다. 그것은 어떤 ‘마치 (~)인 양’에 의해 지지된다(우리는 마치 관료제의 전능함을 믿는 양, 대통령이 국민의 뜻을 구현하는 양, 당이 노동계급의 객관적 이익을 표현하는 양, . . . 행동한다). 이러한 믿음(그것은 ‘심리적’ 층위에서 생각되어야 할 것이 단연코 아님을 상기하자. 그것은 사회적 장의 유효한 기능 속에 체화되고 물질화된다)이 상실되자마자 사회적 장의 바로 그 조직은 허물어진다. 이미 파스칼은 이를 분명히 말한 바 있는데, 이는 알뛰세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들’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려는 시도에서 주되게 참조하고 있는 점들 가운데 하나였다. 파스칼에 따르면 우리의 이성작용reasoning의 내면은 외적인, 무의미한 ‘기계’--주체가 붙잡혀 있는 곳인 기표의, 상징망의 자동성automatism--에 의해 결정된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하여 결코 잘못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신인 만큼이나 자동기계이다. . . . 증거들은 단지 정신을 납득만 시킬 따름이며, 습관은 가장 강력한 증거들을, 가장 신뢰받는 증거들을 제공한다. 습관은 자동기계를 움직이는 바, 이 자동기계는 정신을 무의식적으로 습관에 따르도록 이끈다. (Pascal, 1966, p. 274)

여기서 파스칼은 무의식에 대한 바로 그 라캉적 정의를 산출하고 있다: ‘정신을 무의식적으로[sans le savoir] 습관에 따르도록 이끄는 자동기계(즉, 죽은 자, 무의미한 글자)’. 법의 이렇듯 구성적으로 무의미한 성격으로부터 다음이 따라 나온다. 즉, 우리는 법이 좋거나, 더 나아가 유익하기 때문에 법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것이 법이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 바로 이 동어반복이 법의 권위의 악순환을 조음하며, 법의 권위의 최후 근거는 그것의 언명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조음한다.

관습은 그것이 수용된다는 그 유일한 이유로 전적으로 공정한 것이다. 그것이 관습의 권위의 신비적 토대이다. 그것을 그 최초의 원리로 되가져다 놓으려 시도하는 누구든지 그것을 파괴하고 만다. (ibid, p. 46)

그렇다면 유일하게 진정한 복종은 ‘외적인’ 복종이다. 납득으로부터 나오는 복종은 우리의 주체성을 통해 이미 ‘매개된’ 것이므로 진정한 복종이 아니다. 즉, 우리는 권위에 진정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판단을 따르고 있는 것인 바, 그 판단은 우리에게 권위가 좋고, 현명하며, 유익하며, 등등인 한에서 복종할 가치가 있다고 말해준다. 이러한 전도는, ‘외적인’ 사회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보다 훨씬 더, 믿음의 내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복종에 적용된다. 예수를 현명하고 선하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은 무서운 불경이라고 썼던 이는 바로 키에르케고르였다. 반대로 믿음의 행위 그 자체야 말로 예수의 선함과 지혜로움에 대한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종교적 명령에 대한 우리의 복종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합리적 이유들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핵심적인 종교적 체험은, 이미 믿는 자들에게만 이러한 이유들이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입증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믿기 때문이다. 믿을 충분한 좋은 이유들을 이미 발견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법에 대한 ‘외적인’ 복종은 외적인 압력에 대한, 이른바 비이데올로기적인 ‘야만적 힘’에 대한 굴복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불가해하며’ 이해되지 않는 한에서의, ‘외상적이고’ ‘비합리적인’ 성격을 보유하는 한에서의 명령에 대한 복종이다. 법의 이러한 외상적이고 비통합된 성격은, 그것의 완전한 권위를 숨기기는커녕, 그것의 긍정적 조건이다.# 이는 초자아라는 정신분석 개념의 근본적 특징이다: 외상적이고 ‘무의미한’ 것으로서 경험되는--즉, 주체의 상징적 우주로 통합될 수 없는--명령. 하지만 법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 ‘관습은 그것이 수용된다는 그 유일한 이유로 전적으로 공정한 것이다’라는 이 외상적 사실--법이 그 언명 과정에 의존한다는 것, 혹은 라클라우와 무페가 발전시킨 개념을 사용하자면, 법의 근본적으로 우연적인 성격--은 법의 의미에 대한, 법이 정의와 진실(혹은, 보다 현대적 방식으로 하자면, 기능성)에 토대하고 있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이고 상상적인 경험을 통해, 무의식 속으로 억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법이나 관습을 우리가 법이기 대문에 복종하는 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 . .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교의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진리가 법과 관습 속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그 속에 주재한다는 믿음으로 인해 그들은 법과 관습을 믿으며 그것들의 오래됨을 그것들의 진리의 증거로서 여긴다(진리 없는, 단지 그것들의 권위의 증거로서가 아니라 말이다). (Pascal, 1966, p. 216)

정확히 동일한 정식화를 카프카의 심판에서, K와 사제 간의 대화 끝부분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K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저는 그런 관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문지기가 말하는 모든 것을 참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가를 당신 자신이 이미 충분히 증명했습니다.’ 그러자 사제가 말했다. ‘아니지요. 반드시 모든 것을 참인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K가 말하기를, ‘우울한melancholy 결론이군요. 그것은 거짓말을 보편적 원리로 바꾸지요.’ (Kafka, 1985, p. 243)

그렇다면 억압된 것은 법의 어떤 모호한 기원이 아니라 법이 참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법의 권위에는 진리가 없다는 사실 말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법에서 진리가 발견될 수 있다고 믿게끔 몰고가는 그 필연적인 구조적 환영은 바로 전이의 메커니즘을 기술한다. 전이는 어리석고, 외상적이고, 비일관적인 법의 사실 배후에 하나의 진리, 하나의 의미를 이렇듯 가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이’는 믿음의 악순환--우리가 믿어야 할 이유들은 이미 믿는 자들에게만 설득력 있다--의 이름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파스칼의 텍스트는 내기의 필연성에 대한 그 유명한 233절이다. 그것의 첫 번째, 가장 큰 부분은 ‘신에 대해 내기를 거는’ 것이 왜 합리적으로 말이 되는 것인지를 길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논변은 대화에 나오는 파스칼의 상상적 파트너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 의해 반박된다.

. . . 내 손은 묶여 있고 내 입술은 봉인되어 있다. 나는 내기를 강요당하고 있으며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단단하게 붙잡혀 있으며 또한 믿음을 갖지 못하게끔 생겨 먹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가? -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성은 당신에게 믿도록 재촉해도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므로, 만약 당신이 믿지를 못한다면 그건 당신의 정념들 때문이라는 것은 적어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들을 늘림으로써가 아니라 당신의 정념들을 줄임으로써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데 전념하라. 당신은 신앙을 갖기를 원하지만 길을 모른다. 당신은 불신을 치유받기 원하며 치유책을 구한다. 한때 당신처럼 묶여 있었지만 이제 가진 전부를 내기에 거는 사람들로부터 배워라. 이들은 당신이 따르기를 바라는 길을 알고 있으며 당신이 치유되기 바라는 고통으로부터 이미 치유된 사람들이다. 그들의 시작 방식을 따르라. 성수를 바르고 미사를 보는 등 그들은 마치도 정말로 믿는 것인 양 행동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당신이 믿도록 만들 것이며 당신이 보다 유순해지도록 만들 것이다.
  ‘이제 이러한 길을 선택할 때 당신에게 어떤 해로움이 미치겠는가? 당신은 충실하고, 정직하고, 겸허하며, 감사하며, 선행으로 충만해질 것이며, 성실하고 참된 친구일 것이다. . . . 참으로 당신은 유해한 쾌락들을, 영화롭고 편안한 삶을 즐기지 못할 것이지만, 다른 것들을 갖지 않겠는가?
  ‘나는 당신에게 현세에서조차 이득을 볼 것이라고 말하겠다. 그리고 당신이 이 길을 따라 내딛는 매 걸음마다 당신의 이득이 그렇게도 확실하며 또한 당신의 위험이 그렇게도 무시할만한 것이어서 종국에 가서 당신이 아무 것도 지불한 바 없는 확실하고 무한한 어떤 것에 대해 내기를 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하겠다.’ (Pascal, 1966, pp. 152-3)

그렇다면 파스칼의 최종 답변은 이렇다. 합리적 논법을 버리고 너 스스로를 단지 이데올로기적 의식에 맡겨라, 무의미한 제스처를 반복함으로써 너 스스로를 마취시켜라, 네가 이미 믿고 있는 양 행동해라, 그러면 믿음은 저절로 생겨날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전향conversion에 이르기 위한 이러한 절차는, 카톨릭교에 한정되기는 커녕, 보편적 적용성을 갖는 바, 그것이 어떤 시기에 프랑스 코뮤니스트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내기’ 테제의 맑스주의 버전은 다음과 같다. 부르주아 지식인은 손이 묶여 있고 입이 봉인되어 있다. 겉보기에 그는 단지 자신의 이성의 논변에만 묶여 있으므로 자유롭지만 실제로는 부르주아적 편견들로 물들어 있다. 이러한 편견들은 그를 놓아주지 않으며 따라서 그는 역사감을, 노동계급의 역사적 임무를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대답. 우선 그는 적어도 자신의 무능함을, 역사감을 믿을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깨달아야 한다. 그의 이성이 진리를 향해 기운다 해도 그의 계급적 위치가 산출하는 정념들과 편견들이 그로 하여금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그는 노동계급의 역사적 임무의 진리성을 증명하는 데 진력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는 그의 소부르주아적 정념들과 편견들을 제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는 지금의 그만큼이나 한 때 무능했지만 혁명의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무릅쓸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임무를 믿고 있는 양 행동했던 바, 당에서 활동적이 되었고, 파업을 돕기 위한 돈을 모금했으며 노동자들의 운동을 전파하는 등등을 했다. 이는 그들을 마취시켰으며 그들로 하여금 아주 자연스럽게 믿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러한 길을 선택함으로써 그들에게 어떤 해로움이 미쳤던 것인가? 그들은 충실하게 되었으며, 선행으로 충만하게 되었고, 진지하고 고귀하게 되었다. . . . 물론 그들은 몇 가지 해로운 소부르주아적 괘락들과, 자기중심적인 지식인적 경박함과, 그릇된 개인적 자유의 감각을 버려야만 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그리고 그들의 믿음의 사실상의 진실됨에도 불구하고--그들은 많은 것을 얻었다. 즉, 그들은 의심과 불확실성에서 자유로운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으며, 그들의 모든 일상적 행위에는 위대하고 고귀한 대의에 조그마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양심이 동반되고 있다.
이러한 파스칼적 ‘관습’을 무미건조한 행동주의자의 지혜(‘너의 믿음의 내용은 너의 실제 행동에 의해 조건화되어 있다’)와 구별짓는 것은 믿음 이전의 믿음이 갖는 역설적 지위이다. 관습을 따름으로써 주체는 앎 없이 믿게 되며, 따라서 최종적인 전향이란 이미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을 우리가 깨닫도록 해주는 방편으로서의 형식적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파스칼으; ‘관습’에 대한 행동주의적 독해가 놓치고 있는 것은 외적인 관습이 언제나 주체의 무의식에 대한 물질적 지지물이라는 중대한 사실이다. Marek Kaniewska의 영화 Another Country의 주된 성취는, ‘앎 없는 믿음’의 이러한 불안정한 지위를--바로 코뮤니즘에로의 전향과 관련하여--민감하고도 세심한 방식으로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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