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와 천재
바보와 천재
강영계
중. 고생을 위한 철학에세이
바보와 천재
책머리에
1.
중.고등학생은 누구인가?
중.고등학생은 닭도 아니고 오리도 아니다.
아직 성장하고 있기에 확실한 얼굴을 알 수 없다.
몸과 영혼이 꿈틀거리며 '나'는 누구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중.고등학생은
닭도 아니고 오리도 아니다.
2.
중.고등학생은 누구인가?
중.고등학생은 노예이다.
사랑의 노예.
부모와 선생님의 꾸지람의 노예.
공부의 노예.
고뇌와 번민의 노예.
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노예.
중.고등학생은 노예이기에 자유를 갈구하고
해방을 외치며 홀로서기를 갈구한다.
3.
청춘은 아름답다.
소년은 늙기 쉽고 배움을 이루는 것은 어렵다.
젊은날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
어제는 우리의 기억에서 이미 사라져 버렸다.
오늘은 즐기고만 싶고 기쁜 일만 있으면 좋겠다.
내일도 있으니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룬다.
내일이 또 오늘로 되고 다시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룬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일까?
삶이 싱싱하게 꽃피는 밭은 바로 오늘이다.
어제도 내일도 모두 오늘 속에 녹아 있다.
아무리 과거를 찾아보아도 또미래를 찾아보아도 그것들은
아무곳에도 없고 오직 오늘 속에 있을 뿐이다.
4.
젊은날의 사색.
젊은날의 방황과 고뇌.
젊음의 꿈과 도전.
젊을 때 고생은 돈 주고도 못 산다는 말은 되풀이할수록
진한 맛을 전해준다.
홀로 선다는 것.
홀로 설 줄 아는 젊은이의 아름다움만큼 아름다운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5.
젊음은 무한한 가능성이다.
젊음은 모든 것을 용서받으며 모든 것을 꿈꿀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사색하는 중.고등학생
젊음을 합리적으로 키워가는 삶
결단하는 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유를 향하여
도전하는 젊은 나
멋있는 맛
맛있는 멋
맛과 멋과 아름다움을 마음껏 호흡할 수 있는 젊은 시절을
어찌 헛되이 보낼 수 있겠는가?
눈과 눈으로
마음과 마음으로
말과 글로
진하게 대화화고 사색하고
토론하는 젊음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기둥이다.
넓게 보자.
깊게 생각하자.
차례
책머리에
제1장 남자와 여자
남자는 하늘인가
이상적인 여인상
여성의 아름다움
부부싸움
제2장 친구와 고향의 꿈
몇 사람의 친구
고향과 꿈
제3장 공부 잘하는 비결
머리나쁜 아이
공부가 다는 아니다
공부 잘하는 비결
머리는 다 똑같다
제4장 사랑의 승리
사랑의 승리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기적인 사랑
형제간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자기애
인류애
사랑의 숭고함
제5장 젊음의 꽃
젊음을 어떻게 꽃피울 것인가
배우며 사랑하는 삶
사랑의 힘, 배우며 살아가는 자세, 번민의 늪
어른과 아이의 이야기
청소년과 책
반복되는 매일, 근거없는 강요, 불안한 미래, 삶의 창조
젊은날 삶의 긍지
제6장 아름다움에 관하여
아름다움에 관하여
추한 것도 아름다운가
제7장 지혜에 대한 사랑
의심과 놀라움
지식과 지혜
합리적인 생각
질서있는 삶
정의와 평등
제8장 약속의 뜻
'너'와 '나'의 관계
외면적인 약속
내면적 약속의 꽃
제9장 정의로운 삶
삶과 사람다움
늙는다는 것
즐거운 인생
대추씨의 맛
물으면서 살아가는 삶
고스톱 인생
가난도 죄인가
대화와 비판정신
남녀평등과 인간 평등
우리는 숙명의 노예인가
제10장 너 자신을 알라
나는 누구일까
문제의식
너 자신을 알라
제11장 자유를 향한 도전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자유를 향한 도전
제12장 지구촌을 살리다
1차원적 인간
환경과 생명
지구촌을 살리자
제13장 미래의 꿈과 도전
젊은 날의 고뇌와 시행착오
무엇이 될 것인가
미래의 꿈과 도전
제14장 어떤 삶-인간 프로이트
왜 프로이트를 들먹이는가
어두운 그림자
탐구의 시절
하나의 계기
도전과 전진
정신분석
외디푸스 콤플렉스
꿈의 해석
노이로제
무의식의 심리학
정신분석학 운동
죽음의 충동
자아란 무엇인가
모험가의 말년
꿈을 갖고 맑은 눈으로 살아가는 모든 중고생들에게 이책을 바칩니다.
제1장 남자와 여자
남자는 하늘인가
남자들은 자신의 입장이 불리해지면 흔히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야". 또는 "
여필종부를 모르고 어디서 까불어?" 이렇게 억지를 끈다.
우리의 머리 속에는 남자는 강하고 억세며 여자는 연약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늘
박혀 있다. 남자아이들에게 커서 무엇이 되겠느냐고 물으면 여러가지 답을 들을 수 있
지만 대체로 그 답들은 남자다움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남자아이들은 "대통령이
될 거야". "군인이 될 거야", "운동선수가 될거야" 등 씩씩하고 우람한 미래상을 이야
기한다. 그러나 여자아이들에게 커서 무엇이 되겠느냐고 물으면 미스코리아나 간호원
또는 선생님이 되겠다는 답을 많이 들을 수 있다. 여자아이들은 얌전하고 부드러우며
따사롭고 연약한 여인상을 이미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
어른들은 남자아이들이 인형을 가지고 놀거나 또 여자아이들이 탱크, 기관총 같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 야단을 친다. 그렇다면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하다는 생각은
가정과 사회에서 학습되어 습관적으로 몸에 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태아가 여성으로 발달하는 과정은 정상발달이지마, 남성
으로 발달하는 과정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태아는 원래 여성적이고,
어떤 태아는 부수적 호르몬이 개입하여야만 남성기관들이 발달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애화편 '잔치'에 남자와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다. 원래 인간은 세 가지 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남녀
성(중성)의 세 가지 성이다. 또 인간은 누구나 남자의 모습과 여자의 모습을 다 가지
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인간은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인간은 어디서나 우쭐대며 뻐기고
다녔다. 제우스 신은 처음에는 인간들이 그저 그러는가 보다하고 생각을 했지만 두고
두고 보자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우스 신은 인간에게서 남성과 여성을
갈라놓았다. 그때부터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되어 불완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남자와 여자는 원래의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서로 상대방을 찾아서 결합하려고
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결합함으로써 각자의 부족한 반쪽을 메꾸어 완전한 인간이
되려는 것이다. 플라톤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결합하려는 노력을 에로스, 곧 사랑이라
고 불렀다.
물론 플라톤의 이야기에는 신화적인 요소가 다분히 있지만 우리는 그의 말을 어느
정도 수긍한다. 남자와 여자는 둘 다 부족한 인간이고 따라서 반쪽 인간이다. 남자가
여자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하게 우수하다는 생각은 단지 사회적 습관이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이다. 남자나 여자나 똑같은 반쪽 인간이고 따라서 우리들 모두는 똑같은 반
쪽 인간이다. 우리가 남녀평등을 깨달을 때 비로소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엄연한 진
리도 깨달을 수 있다.
이상적인 여인상
우리들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이상적인 남자와 이상적인 여자의 틀이 어떤 것인지를
배운다. 남자아이들은 을지문덕 장군이나 이순신 장군 또는 아인슈타인이나 슈바이처
또는 유명한 야구선수나 축구선수를 이상적인 남자의 틀로 여기고 자기를 그 틀에 맞
추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여자아이들은 신사임당이나 퀴리부인 또는 나이팅게일이나 유명한 여배
우 아니면 가수를 이상적인 여자로 여기고 그 틀에 자기를 맞추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이상적인 남자와 이상적인 여자 등의 관념은 사회의 습관에 의해서 생
긴 것이지 그러한 것은 실제로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나 각자의 고유한 인
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그와 같은 고정관념은 특히 남자
와 여자의 구분에서 너무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가정에서 상당수의 아내가 남편의 폭력 앞에서 비참한 삶을 보내는 예가 많다. 직장
에서 여직원이 똑같은 학력과 경력을 가진 남자직원보다 승진도 더디고 보수도 적은
예가 많다. 그 원인은 여자가 남자보다 못하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에 있다.
이상적인 여자와 이상적인 남자의 틀은 특히 여자와 남자의 구분을 더욱더 강요하
며, 그 결과 여자는 약하고 부드러워야 하며 남자는 강하고 튼튼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고집하게 한다.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 한 걸음씩 자신의 삶을 가꾸어 나갈 때 비로소 우리들은 남자
나 여자로서가 아니가, 이상적인 인간이라는 목표에 가까워질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자라나는 과정을 찬찬히 관찰해 보면 여러가지 몹시 흥미로운 사실들
을 알아낼 수 있다. 아마도 프로이트 같은 심리학자들이 말한 것이 얼마간은 타당한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남자아이는 아빠를 자기의 경쟁상대로 생각한다. 남자아이는 여성인 엄마를 자기만
이 독차지하려고 하지만 힘센 아빠가 늘 엄마와 같이 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남
자아이는 아빠가 자기보다 강하므로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빠의 흉내를
냄으로써 아빠처럼 되려고 애쓴다. 남자아이는 꼭 아빠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엄마
는 시금치국을 너무 짜게 했잖아? 너무 짜면 건강에 해로워. " 정말 아빠처럼 말할때
엄마는 깜짝 놀란다. 여자아이의 경우는 처음에 엄마를 경쟁상대로 여기다가 나중에는
엄마 흉내를 낸다.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는 자주 남을 모방하면서 살아간다. 돈 많은 사람 흉내도 내보
고 권력있는 사람 흉내도 내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개성이 뚜렷한
자아를 소유한 인간이다.
결코 이상적인 여성이나 남성은 있을 수 없다. 구태여 말한다면 모든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이상적인 인간상을 간직하고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의 아름다움
우리 사회에서 보통 여성의 아름다움을 특히 강조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여성
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배경을 찬찬히 살펴보면 아마도 여성의 성적 매력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남성우위의 사회에서, 심하게 말하면, 여성은 한낱 수단으로 취급된 경
향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인형의 집에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노라는 누가 보아도 부러울 것 없는 결혼생활을 한다. 그러나 노라는 누가
보아도 부러울 것 없는 결혼 생활을 한다. 그러나 노라는 차차 자신이 자발적인 인격
체로 대접받는 것을 알고 자신이 인형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과감하게 집을 뛰쳐나
간다.
아름다움이란 여성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그러기에 미스코리아에 당선된 진. 선. 미
의 미녀들이 과연 참다운 의미에서 아름다운 여성인지 의아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 있으면 당연히 남성의 아름다움도 말할 수 있어야 한
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의 아름다움이 앞서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아름다움은 여
러 가지로 이야기될수 있겠으나 '조화로운 사람다움'이 바로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화로운 사람다움의 극치는 남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
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은 어머니일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성
은 아버지일 것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우선 한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이 바탕으로
깔려 있지 않다면 단지 순간적이며 외면적인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우리들이 단지 감각적으로만 느끼는 것이 있는가 하면 또 마음으로 느끼
는 것도 있다. 흔히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할 때, 우리는 여성의 감각적 아름다움만을
강조해서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들이 보통 외면적인 아름다움과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구분하는 이유는 바로 감각적인 아름다움과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구분되기
때문이다.
외면적인 아름다움은 타고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얼마간은 각자의 노력에 의해서
외면적인 아름다움을 갖출 수 있다. 적당한 운동을 해서 균형잡힌 몸매를 유지한다든
가 또는 성형수술에 의해서 얼굴의 아름다움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의 아름다움을 가꾸기를 소홀히 하고 단지 외면적인 아름다움에만 치중
하는 여성이 있다면, 그러한 여성의 아름다움은 단지 순간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된
다. 좀 상스럽지만 "얼굴값 한다" 또는 "꼴값 떤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내면은
볼 줄 모르고 외면만 요란하게 치장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결국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충실하게 성숙시킬 수 있는 여성은 외면의 아름다움도 은
근하고 우아하게 가꿀 줄 안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한 인간의 아름다움이
며 그것은 그 여성의 '사람됨의 깊이'로 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다.
부부싸움
오래전, 텔레비전에 어느 노부부가 나와서 결혼 생활 40여년 동안 부부싸움을 한번
도 한 일이 없다고 자랑하는 것을 본 일이 잇다. 그때 나는 속으로 씁씁한 웃음을 지
었다. 그 노부부는 아마도 치고 받으며 싸운 일이 없다는 뜻으로 부부싸움이 없다고
이야기했을 것이고 모르긴 해도 아웅다웅 의견충돌은 많았을 것이다. 나 자신 속에도
자아가 여럿으로 갈라져서
하루에도 몇 번씩 싸운다. 하물며 남남으로 만나 함께 살게된 부부사이는 어떻겠는가?
그러나 최근에는 부부싸움의 양상이 달라진 것 같다. 이혼율이 점점 늘어가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남편이나 아내나 모두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는
부부싸움을 방지할 길이 없다. 남편이나 아내나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존경이 결여되
어 있을 경우 부부싸움은 막을 길이 없고, 극단의 경우에는 상대에게 정신적으로 육체
적으로 심한 상처를 입히고
이혼에까지 이르고 만다.
누구에게나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이다. 식구들이 함께 모여 오손도손 저녁식사
만이라도 매일 같이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의 지름길이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복잡하고 각박하다 보니 너나 할 것 없이 파김치가 되어 식구들이 모두 함께 모여 저
녁식사 할 기회조차 드문 것이 사실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속 마음을 주고 생명을 줄 때, 그것도 부부가 서로 상대방에게
줄 때, 부부싸움은 오히려 부부애를 위한 활력소가 될 것이다.
서로를 위할 줄 알 때 싸움은 언쟁이 아니라 건전한 비판이 되고 동시에
정감어린 대화가 될 것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다. 자신을 닦고 가정을 일으키고 나라를 다스리
고 천하를 행복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사실 현실적으로는 실행하기 힘들고 이상
에 가까운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깊이 그 뜻을 음미할 때 더더욱
가슴 깊이 와 닿는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중에서도 나는, 가정을 일으키고 돌보는 것이
으뜸이요 알맹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정을 통해서 누구나 원만한 인격을 갖출
수 있으며 각 가정이 건강하고 행복하여야만 나라도 평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신문지상에 불량 청소년들에 대한 끔찍한 기사가 자주 실린다. 본드나 대마초
를 흡입하는 청소년들이 있는가 하면 떼를 지어 폭행을 일삼는 청소년들도 있다. 심지
어는 여자 중.고등학생까지도 패거리를 지어 폭력단을 조직한 경우도 있었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지는 가정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배우며 자란다. 부부가 의견충돌하여 티격태
격하는 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다. 문제는 부부싸움을 어떻게 현명하게 스스로가 해결
하느냐 하는 것이다. 자녀를 그리고 나라를 내 일처럼 생각하는 안목을 넓힌다면 조금
씩 해결의 실마리가 풀려나갈 것이다.
제2장 친구와 고향과 꿈
몇 사람의 친구
어린시절 나에게는 단짝이 있었다. 우리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한동네에서 살았고 같은 학교에 다녔다. 내 친구 별명은 '돼지코'였다. 어려서부터 그
친구는 들창코에댜 콧구멍 근처에 살이 많아서 돼지코라는 별명을 떼어놓은 날이 없었
다. 게다가 머리카락도 뻣뻣하게 항상 하늘로 치솟고 있어서 돼지코라는 벌명이 그에
게는 안성맞춤이엇다.
네 집, 내 집 가리지 않고 자주 함께 잠을 잤다. 어른들은 가끔 "뭐가 좋아서 그렇
게 꼭 붙어다닐까?"라고 말하기는 했어도 우리를 특별히 이상하게 보는 아이들은 없었
다.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밤낮으로 붙어다녔고, 아침에 학교갈 때부터 집에 올 때까지
혼자 있으면 서로 허전함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돼지코가 흰 운동화를 사면 나는 어
머니에게 한사코 졸라서 돼지코의 흰 운동화와 똑같은 것을 사서 신었다. 내가 초록색
가방을 들고 다니면 돼지코도 어느새 초록색 가방을 샀다. 우리는 말 그대로 '짝꿍'이
었다.
우리는 해변가에 살았다. 이른 여름 바닷물의 냉기가 가시기 시작하자마자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는 바닷가로 뛰어나가 알몸으로 갯벌에 뒹굴었다. 바위에 닥지닥지 붙은
생굴을 돌로 쪼아 찝찔하고 상큼한 바닷내음과 함께 굴을 핥아 먹었다.
여름방학이면 온 천지는 우리들 것이었다. 새벽녘에 바닷가로 달려나가 우리는 점심
도 거르고 해가 수평선 너머로 붉고 푸른색으로 사라질 때까지 겁없이 물개처럼 바다
와 하나가 되어 종일토록 놀았다.
돼지코와 나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고등학교 입
학시험은 너무 어려워서 붙는 학생보다 떨어지는 학생이 더 많았다. 아는 것은 엄청
많았지만 시험만 보면 항상 평균 60점대에서 달랑달랑하던 돼지코가 고등학교 입시에
떨어져서 결국 나와 다른 고등학교에 들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돼지코와 함께 있을 시간이 점차 줄어들었다. 돼지코가 자기네 고등학교의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면 공연히 따돌림당한 기분이 들고 심술까지 났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감정도 수그러들었다. 돼지코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매우 바쁜 나날
을 보내고 있었다. 적십자부의 간부도 맡고 교회에서 고등학생부의 간부까지 맡아 매
우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어쩌다 길에서 돼지코를 마주치면 언제 몸에 배었는지 뻐기는 걸을걸이로 나를 보고
웃으면서 일요일에 교회로 나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도 나 나름대로 점점 바쁜 생활에 익숙하여 돼지코를 까맣게 잊고 있을 때가 많았
다.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몇 명씩이라도 좋으니 클럽을 만들어 활동하라고 권유식으
로 강요하여 우리들은 서로 좋아하는 친구끼리 클럽들을 만들었다. 클로버, 남십자성,
독수리, 맹호, 갈매기, 해바라기.... 등 클럽이름들이 많기도 하였다. 구성원이 많은
클럽은 열두 명인 것이 있었는가 하면 가장 적은 클럽은 열두 명인 것이 있었는가 하
면 가장 적은 클럽은 두 명짜리도 있었다.
우리 클럽의 회원은 꼭 열한 명이었다. 고등학교 3년간 클럽활동은 대단하였다. 운
동시합, 소풍,캠핌 등 모두 클럽 단위로 이루어졌고, 세월이 흐를수록 친구와의 정이
흠뻑 들었다. 공부하는 시간과 집에 있는 시간 이외에는 열한명이 항상 똘똘 뭉쳐서
돌아다녔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클럽친구들은 자주 만나면서 지난날을
회상할 때가 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나는 다시 한번 친구병을 크게 알았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냥
알고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그의 별명은'깜상'이었다. 얼굴색이 남들과 달리 유달이
까맣다고 해서 아이들은 그를 '깜상' 또는 '니그로'라고 불렀다. 깜상과 나는 같은 대
학에 들어갔다. 깜상은 음대 작곡과에 들어갔고 나는 철학과에 들어갔다. 우리는 기차
통학을 하였는데 학교에 가다 오다 자주 기찻간에서 옆자리에 않는 일이 많았다.
알고 보면 나쁜 사람 하나도 없다는 말이 있다. 범인이나 악한 사람들은 아마도 외
로운 사람들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들이 많은 사람들과 친근히 사귈 수 있었
다면 그들 역시, 사람은 본래 착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 스스로 선하
게 되었을 것이기 때분이다. 그러나소위 유명한 정치가나 기업인들 중에서 일반 백성
을 못살게 굴고 자기의 배만 채우는 사람들도 외로운 사람들일까? 확실히 그들도 외롭
고 버림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외롭고 버림받은 사람들은진실한 우정을 모르고 따라서
참다운 친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복수심과 원한의 감정에
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거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평범한 사람들을 마음대로 지배함으로
써 외로움을 달래려 할지도 모른다.
어느 여름날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 깜상이 바쁘지 않으면 자기집에 가
서 놀다 가라는 것이었다. 깜상이 어느 파란 양옥집 앞으로 가더니 대문 옆에 달린 쪽
문을 밀치면서 어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호기심에 가득차 그의 뒤를 따라갔다.
마당이 꽤나 넓었고 마당 한쪽에는 온갖 꽃들이 여름날 오후의 강한 햇살 아래 약간은
처진 모습을 하면서도 진한 향내를 품기고 있었다.
"저기 정원 왼쪽 구석에 있는 것들은 달맞이꽃이야. 사실은 야생인데 내가 낙섬 근
처에서 몇 뿌리 캐다 심은 것이 저렇게 많이 퍼졌어.
언제 저녁나절 여기 와보면 달맞이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될 거야."
'기차 안에서 얘기할 때는 떠듬떠듬했었는데 자식, 자기집이라고 그러는지 말도 청
산유수인데'라고 내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 달맞이꽃이라는 것을 가까이 가서 보니
볼품없는 풀 같았다. 별로 깨끗하지 못한 잎을 주렁주렁 달고 키만 큰 풀 윗 부분 여
기저기에 노란색 꽃들이 쪼그라든 채 푹 처져 있었다.
깜상이 마루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나도 뒤를 따랐다. 마루가 넓고 시원하였다.
마루는 정원이 훤히 보이도록 한쪽이 모두 유리문으로 되어 있었도 한쪽 벽에는 커다
란 피아노가 놓여 있었으며 피아노 위에는 작은 그래프가 붙어 있었다. 깜상은 그래프
를 가리키면서 씩 웃었다.
"이것 좀 봐. 이 시간표는 내 제자들의 피아노 레슨 시간표야. 중학생부터 여대생까
지 있는데 지금은 모두 아홉 명이고 모두 여자야. 그안에는 내 애인도 있단 말씀이야.
너 그 중에서 어떤 애가 내 애인인지 알아낼 수 있니?"
나는 깜상의 성격이 보기와는 달리 매우 명랑하다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깜상은 안
방도 구경시켜 주었고 마루를 지나 부엌 건너편에 있는 결혼한 누나의 방도 가르쳐 주
었다.
깜상은 서늘한 마루에 앉아서 자기 이야기를 나에서 털어 놓기 시작하였다. 소주가
한잔 두잔 들어갈수록 깜상은 때로는 진지한 자세로 때로는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하였다.
고향은 충청도 산골 진천이고 아버지는 만주에서 한의사 자격을 얻어 고향에 내려와
한의사를 하다가 깜상이 국민학교 시절에 이곳에 와 정착하였다. 처음에는 산비탈의
무너져가는 판잣집에서 한의사를 하다가 점점 소문이 나서 돈도 벌고, 지금 이 근처로
와서 개업을 하여 깜상이 대학에 들어가자 때를 맞추어 깜상 이름으로 이 파란 양옥집
을 샀다. 남동생 둘과
여동생 둘, 그리고 누나 한 분과 매형이 함께 살고 있다. 깜상은 지금 어느 국민학교
여선생님을 짝사랑하느라 정신차릴 틈이 없으며 이곳에서는 여학생을 레슨하여 용돈을
벌어 쓰고 있다는 것이 깜상의 이야기의 요지였다.
나는 꼬박 2년간 깜상과 거의 같이 생활을 했다. 밤만 되면 여학생들이 우글거렸고
우리는 함께 어울려 이야기하고 노래 했으며 또 다른 남자친구들을 불러들이고 번갈아
가면서 장난삼아 여학생들과 수없이 여러 번 약혼식이랑 결혼식 행사를 치렀다.
매일 밤 늦도록 독한 포도주와 위스키를 마시면서 인생과 철학과 음악과 예술에 관
해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열띤 토론을 멀였다. 나는 아예 깜상 동생의 가정교사로
깜상집에 눌러앉아 버렸다. 깜상 동생이 학교에서 오자마자 가르치고는 양옥집으로 내
려와 마루에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었다. 여학생들이 오면 예술과 철학을 이야기해
주고 인생을 이야기 해주었다. 지금 지나간 날을 돌이켜 보면 쑥스런 웃음이 절로 나
온다.
깜상과의 2년에 걸친 생활을 깜상이 군에 입대하고 나서 막을 고하였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서로 진한 내용의 엽서를 수없이 주고받았지만, 아무래도 서
로 직접 만나는 시간이 적어지니 각자 자기의 삶을 어쩔 수 없이 걸어가야만 했다.
현재 돼지코는 서울 어느 여자중학교의 영어선생님으로 있고 깜상은 미국으로 이민
하여 잘 살고 있다. 어쩌다 간혹 연락이 오고 갈 때 나는 번개같이 스쳐가는 지난날의
너무나도 빛났던 고귀한 시간들을 응시하면서 온몸에 전율을 느낀다.
살아가면서 일생 오갈 수 있는 친구가 몇 사람 있는 것은 축복받은 삶이다. 나는 지
금도 오래 사귄 몇 명의 친구를 자주 대한다.
오래 된 친구는 부담이 없어서 좋다.
참다운 친구는 말이 필요없고 기쁠 때 서로 기뻐해주고 슬플 때 함께 슬퍼해주니 은
은한 호수와도 같다. "된장은 묵을수록 맛이 난다"고 한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나에
게는 일생을 통해 몇 명의 된장맛 나는 친구들이 있고 나는 그 사실만으로도 내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친구들을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내가 그들에게 섭섭하게 대한 적은 없는지, 내가 그
들과의 만남에서 그들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나의 이기적인 욕심만을 챙기려고 한 적
은 없는지 늘 반성해 본다. 물론 나에게도 아쉬움은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좀더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더라면 하는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다. 또 그 시절에 사귀었던
친구들과 좀더 계속 접촉을 많이 가지지 못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국민학교 친구는 너무 철이 없을 때의 친구이고 대학생 때의 친구는 이미 사회에 물
들어 서로의 이익을 따지기 쉬운 친구이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시절의 친구야말로 오
래오래 남는 친구이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중.고등학교 시
절의 친구에게는 누구나 "야, 너 개똥이 아냐?이거 참 오래간만이다"라고 서로 소리치
면서 흉허물 없이 끌어 안을 수 있고 당장 만사를 제쳐놓고 흉금을 털어 놓으면서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다.
친구와의 참다운 우정을 통하여 우리는 성숙한 삶을 살아 갈 수 있으며 이웃을 사랑
하고 인류를 사랑하며 궁극적으로는 종교적인 사랑까지 체험할 수 있다.
중.고등하교 시절의 친구가 나의 인생을 통해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는 이루 말
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친구와의 우정을 통해서 나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고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오래 묵은 된장맛 같은 친구", 그러한 친구를 중. 고등학교 시절에 몇 명쯤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앞으로의 삶 역시 축복받은 사람일 것이다.
고향과 꿈
명절 때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는 고향 가는 인파에 관해서 떠들어댄다. 어느
고속도로가 막히고 몇만 대의 자가용이 서울을 빠져나가고 기차표나 비행기표는 이미
예매가 다 끝났고... 뉴스시간의 아나운서들은 야단이나 난 것처럼 바쁘게 읊어댄다.
고향 가는 인파에 대한 뉴스를 들으면서 나는 찡하게 밀려오는 서글픔을 씹지 않을
수 없다.
내 고향은 어디인가?
이렇게 어디론가 마구 달려가고 싶은 것은 나에게 이렇다 할 고향이 없기 때문이 아
닌가?
때마다 철마다 갖은 고생을 무릅쓰고 고향에 갔다오는 동료들을 보면 마냥 부럽기까
지 하다. 고향의 내음을 맡으면서 어린시절 뛰놀던 시내와 산과 들을 바라보면서, 도
심에서 찌들은 영혼을 신선한 바람으로 가득 채울 그들을 생각하고, 찾아 갈 곳 없는
나 자신을 돌아보면 서러움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하기야 넓게 보면 인간의 고향은 지구이겠지만 가장 직접적으로 아늑한 고향은 어머
니의 품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는 너무 기본적이지 않은가? 고달픈 매일을
살아가다가 자신의 어린시절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향을 찾아가 변화한 자신과 어린
시절의 자신을 번갈아 비교할 수 있고, 어린시절에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코흘리개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참외나 수박서리하다 붙들렸을 때 어린 놈이 벌써부터 도둑질
하느냐며 먹고 싶으면 찾아와서 달라고 하라면서 나중에는, 얼마나 먹고 싶으면 그랬
겠느냐면서 수박 두 덩이와 참외 세 개를 선뜻 내주었던 짝귀 아저씨를 만날 수 있고.
..
고향. 생각만 해도 가슴 뭉클해오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서유럽은 일반적으로 도시나 농촌이 아름답고 모든 면에서 질서가 잡혀 있다. 특히
독일남부나 스위스쪽은 그림같이 아름답고 깨끗한 곳이 많다. 자동차를 타고 아니면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과연 이곳이 천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로 사방에 푸르른 들판이 널려 있고 마시는 공기가 너무 상큼하다. 종일토록 숲길을
산책하여도 피곤함을 모른다.
남의 떡이 커보이기 때문에 부러운 마음이 그토록 큰 것일까? 그러나 "남의 아버지
가 아무리 좋아도 내 아버지는 아니다" 라는 말처럼 이국의 경치가 제아무리 아름답고
깨끗하다고 하여도 그곳은 내 나라 내 땅이 아닌 것을 어이하랴.
독일남부나 스위스의 경치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산뜻
하다. 그러나 내게는 그러한 경치가 정겨움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아름답고 깨끗하지
만 어딘가 낯선 느낌을 준다. 시골길의 기름기 흐르는 도로, 자로 잰 듯 반듯반듯 열
지어 있는 포도나무, 울창하지만 계획적으로 조성된 삼림. 게다가 노랑머리, 흰머리,
빨강머리는 아무리 보아도 고향의 정겨운 맛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그 모두 남의 땅,
남의 것이며 나에게는 낯선 것들이다.
어린시절의 아련한 고향추억을 가슴 깊이 뿌듯하게 지니고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
람이다. 정신분석하자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아시절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은
커서도 남을 끔찍이 사랑할 줄 안다고 한다. 아기 때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마치 용암처럼 철철 흘러넘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유아기에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커서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받은 것이 없으니 마음이 메마르고 남에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으므로 항
상 남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빼앗으려고 한다. 커서 사랑받을 경우 그러한 사랑은 생명
있는 싹이 되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되고 말기 때문에 유아기에 사랑받는 것이 인간에
게는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마찬가지로 어린시절의 정겨운 고향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또한 하나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어린시절의 고향은 마음속에서 지위지지 않고 영원히 남아서 우리의 꿈을 알
차게 키워준다. 도시에서 산 사람은 도시를 고향으로, 시골에서 산사람은 시골을 고향
으로 일생동안 간직하며, 외롭고 괴로울때 고향을 떠올리며 향수를 달램으로서 고독과
고뇌를 해소 시킬 수 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삭막한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아무
래도 더 풍요로운 인간성을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시골뜨기"니 "
촌놈'이니 하는 말로 시골 출신의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말을 한다. 매사에 행동이 민
첩하지 못하고 어리숙하다고 해서 그런 말을 한다. 그러나 이 말을 뒤집어놓고 보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은 얼마나 약고 닳아빠졌는가를 쉽사리 알 수 있다.
나는 중.고등하교 시절 어쩌다 시골 사는 친구네 가서 며칠씩 산과 들을 쏘다닌 적
이 있다. 보리밥에 김치만 먹어도 소화가 잘 되었고 매일같이 쏘다녀서 그런지 우수수
대나무잎 스치는 바람소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저수지에 종일토
록 쪼그리고 앉아 작은 붕어, 큰 붕어를 낚으면서 신바람나서 소리지르기도 하였다.
이랴 쯧쯧 어랴쯧쯧 서툰 솜씨로 낑낑 소를 끌고 풀 먹이러 가기도 하였다. 친구와 산
에 올라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 싱그러운 산바람을 맞으면서 "보리밭 사잇길로 걸
어가면..." 친구와 서로 눈짓하며 마음껏 노래도 불러보았다.
친구와 이별하면서 완행열차에 앉아 멀어지는 친구의 고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친
구가 부러웠고 친구네 고향이 부러웠다. 다시 도시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온몸이 긴장되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도시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향은 마치 어머니의 품과도 같다.
어른이 되더라도 아련한 고향은 따스한 품으로 언제나 우리들을 감싸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마구 고향을 버리게 되었
고 도시가 거대하게 됨에 따라서 요새 사람들은 거의 고향을 상실한 듯한 인상을 준
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정에 메마르고 각박하며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에 가득 차 있
는 것일까?
나는 피셔 디스카우(슈베르트의 연가곡을 전문적으로 부르는 독일의 가수)가 부르는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즐겨 듣는다. 즐겨 듣는다는 것은 이 노래를 들으면 마음
이 흔쾌하다거나 기쁨에 들뜬다는 것이 아니라 이 노래가 가슴에 와닿기 때문에 듣는
다는 것이다.
겨울 나그네는 추운 날씨에 언 몸으로 정처없는 길을 떠나며 어느 마을 동구 밖에서
잠시 쉬려고 하지만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그에게는 따뜻하게 반겨주는 사람도 없고
몸을 녹여줄 작은 방도 없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어디로 갈지 모를 내일과 한겨
울의 추운 날씨 그리고 얼어붙은 땅과 나무들 뿐이다.
고향이 없는 사람, 고향을 잃은 사람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땅과 내와 산만 얼어붙은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 역시 얼어붙어 그에게서는 삶
의 따사로움을 전혀 느낄 수 없다. 현대인은 어쩌면 고향을 상실한 겨울 나그네인지도
모른다. 현대인은 어린시절에 자신의 영혼에 삶의 힘을 일깨워준 고향이 아닌, 돈과
권력과 명예를 삶의 알맹이로 착각한다. 아니 현대인은 오히려 돈과 권력과 명예가 자
신의 고향인 것처럼 환상 속에 살아간다. 고향을 잃은 사람은 삶의 주인이 아니라 노
예나 마찬가지이다. 순간순간에 이끌려서 돈과 권력과 명예의 노예로 전락한 것이 현
대인이다.
나는 평양 근처의 작은 시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5년간 살았다. 하도 오래 된 일이
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버지는 평양에 직장이 있었고 한 달에 한두 번 시골집에
다니러왔다.
햇살 따가운 여름 한낮, 잠자다 깨어보면 아무도 없었고 나는 질겁하여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왕왕 울어대며 먼지 풀풀 나는 신작로를 따라 콩밭 김매는 어머니에게 달
려갔다. 학질이다 이질이다 해서 자주 아팠고 늘 누워서 지내던 기억이 아물거린다.
여섯 살 나던 해에 평양으로 이사왔다. 집도 크고 길도 컸다. 집 앞 길거리의 가로
수가 무척이나 컷고 여름이면 시원한 그림자를 만들어 주었다. 옆집 동갑나기 계집아
이와 자주 싸웠다. 그 아이네 커다란 누렁이가 무서웠지만 악에 받혀 틈잇는대로 돌멩
이로 누렁이를 때리거나 몰래 뒤로 가서 한 방 발로 차고는 옆집 계집아이를 때린 기
분으로 의기양양하였다. 평양에서도 자주 아팠다. 어머니의 손에 끌려 도립병원에 자
주 다녔지만 의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주사를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는 기억에도 없다.
평양에서 6.25를 맞았다. 고모네로 피난갔다가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갔다. 전쟁
이 끝나자 부산에서 서울로 오다가 잘못 되어 인천에 정착하였다. 서울로 이사와서 십
여년 살다 독일로 유학갔다.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전에 전혀 알지 못하던 서울 변
두리에 집을 얻어 정착하였다.
도대체 내 고향은어디일까?
고향이란 우선 어린시절 내 삶에 가장 인상깊은 여러 가지 영향을 준장소일 것이고,
다음으로는 언제나 찾아가서 지난날 모든것을 다시 확인하고 되살려 보고 깊은 곳이리
라. 물론 조상대대의 산소가 있으며 여전히 집안 어른들과 친척들이 살고 있으며 찾아
가면 반겨줄 어릴 적 친구들이 몇 명쯤은 있는 곳이 고향다운 고향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나에게는 정말 고향이 없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억지인지 어쩐지
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고향이 많다. 내가 살았던 모든 곳은 다 나의 고향이다. 태어
난 곳, 피난갔던 곳, 독일의 남부도시 등은 내 영혼을 키워준 곳이며 나의 삶에 힘을
불어넣어 준 잊을 수 없는 나의 고향들이다.
물론 장소는 다르고 그곳의 사람들도 달랐지만 그곳들은 끊임없이 나에게 꿈을 심어
주었고 내 마음 속 깊이 지워질 줄 모른 채 오늘도 살아서 숨쉬고 있다.
세상에 고향처럼 소중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고향이 소중한 만큼 고향의 산촌과 고향친구 그리고 고향의 추억 또한 더없이 소중
하다.
현대인은 고향을 망각하고 있으며 고향을 상실해가고 있다. 고향을 상실하면 삶의
꿈마저 잃고 만다. 꿈이 없는 인간은 더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하기야 허
황된 굼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나 이상과 야망과 동경의 꿈은 우리의
인간성을 풍요롭게 해주는 꿈이다. 고향은 우리의 풍요로운 꿈을 영원히 간직해주는,
어머니의 따사한 품과도 같은 곳이다.
제3장 공부 잘하는 비결
머리 나쁜 아이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할까? 축지법이니 둔
갑굴을 믿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러한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보통 사람과 달리 특
별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은 하루에 몇천 리도 달려갈 수 있고, 남이 보
지 봇하게 몸을 감출 수도 있으며, 다른짐승으로 변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은
옛날 사람들도 가졌던 것이고 특히 옛날 중국에서 심하였다.
사람이 억눌려 살고, 먹고 입는 것이 어려우면 자연히 오만가지 궁리를 하기 마련이
고 자기도 잘 살고 잘 먹는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그는 남보다
몇 배 빨리 달리고 자유자재로 몸을 변형시키기를 꿈꾸고 그러한 환상을 현실에 옮겨
오기를 바란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사방팔방으로부터 '공부'의 홍수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일류
학 좋은 학과에 들어가야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이 너무도 뻔하기 때문에
공부를 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렇기 때문에 '공부'는 천근 만근의 무게로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눌러댄다. 중.고등학교 시절 '공부'는 마치 지긋지긋한 귀신처럼,
아니 떨어질 줄 모르는 찰거머리처럼 우리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잠만 자고 공부는 언제 하니?"
"머리도 나쁜 애가 공부도 안 하니까 더 머리가 나빠지지 않니? 훌륭한 사람이 되려
면 지금보다 몇 배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지 않겠니? 너는 엄마가 그렇게 열심히 공부
하라고 염불을 외도 왜 공부를 남들보다 더 잘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지 도대체
알다가도 모르겠다. "
"네 친구들을 보렴. 반에서 상위권에 들면서도 과외도 하고 학원에도 나가는데 너는
밤낮 이어폰만 귀에 꽂거나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으니 한심한 놈이구나. 언제쯤 정신
차리고 제대로 공부할래? 학급에서 중위권에도 들지못하면서 공부도 하지 않으니 너
는 앞으로 전문대학에도 들어갈 수 없을 게다." 자나께나 그놈의 '공부'가 유령처럼
혀를 널름거리면서 떠날 줄 모른다.
보통 공부를 못하는 것은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반에서 꼴찌하
는 학생은 늘 꼴찌만 차지할 경우가 많다. 또 중간치기는 언제나 중간치기일 경우가
많다.
"현숙이 엄마 아빠는 모두 일류대학을 나왔대. 현숙이도 부모를 닮아서 머리가 좋은
가 봐."
"미영이는 아무리 공부해봐도 쓸데없어. 걔는 원래부터 머리가 나쁜 애니까 별 수
없지 뭐."
정말 머리가 나쁘고 좋고는 정해져 있어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전혀 그렇
지 않다. 사람은 모두 비슷하다. 태어날 때 유전적으로 뇌에 손상이 있거나 아니면 태
어난 후 성장 하는 동안 또는 성장해서 약물에 의한 뇌손상이 있든지 외부에 의한 충
격으로 뇌손상이 있는 경우를 빼고는 모든 사람의 머리가 비슷하다. 그러니까 누구는
머리가 좋고 누구는 머리가 나쁘다는 말은 단지 편견에 불과하다.
공부 잘 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머리와 상관없다. 모든 인간은 약 50억 개의 뇌
세포를 가지고 있으며 일생 동안 그중 약 3퍼센트를 사용한다고 한다. 소위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양보다 조금 더 사용한다. 사춘기 시절 뇌세포
는의 활동이 가장 강하고 5,60세의 나이에 들면 뇌세포의 활동이 둔해지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공부를 잘 하고 어떤 사람이 공부를 못 하는 것일까?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대부분 성격과 학습방법에 의해서 좌우된다. 공부는 못해도
다른 것을 잘하는 학생이 있다. 물론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 있다. 예컨대 어려서부터
음악만 좋아하는 학생은 음악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국어나 산수 등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고 공부를 못하기 쉽다.
공부가 모든 것은 아니다.
공부가 한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공부란 우리들의 성장과정이나 살아가는 데 있어서 단지 삶의 한 방식에 지나지 않
는다.
공부가 마치 모든 것인 양 또는 공부가 한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인 양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병적 편견이다. 세상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인류의
보람찬 현재와 미래를 통찰하고 설계하기 위해서 공부가 우리에게 필요하며 유익한 것
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술이나 기술 또는 종교를 통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자랑스런
삶을 꾸밀 수 있다 그러니 공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생각은 커다란 편견이다.
우리는 왜 공부를 그렇게 중요시할까? 지구의 무수한 나라들 중에서 중국과 한국 그
리고 일본과 한국 그리고 일본, 이세 나라는 입시공부를 최고로 여겨는 나라들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들 세나라는 과거에시험을 통해서 우수한 인재를 뽑아 관리로 임
명하였으며, 과거에 장원급제하면 입시출세하여 가문을 빛낼수 있었고 특별한 실수 없
으면 일생 동안 잘 먹고 잘 살수가 있었다. 이러한 전통이 이들 세 나라 사람들에게는
뼈 속까지 깊숙이 배어 있다. 옛날의 과거준비는 오늘날의 대학입시 준비에 그대로 남
아 있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 수, 국에 통달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중.고등학교의 수업은 알찬 내용이 없고 속 빈 강정에 불과 하다. 영, 수,
국으로 몰아치지만 과연 얼마만큼 한 개인의 삶과사회생활 전체에 그러한 입시준비가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는지극히 의심스러운 일이다. 중.고등학교 6년간 영어를
배운 사람이 얼마만큼 훌륭하게 영어책을 읽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만큼 서툴지 않
게 영국인이나 미국인과 영어로 말할 수 있는지 우리모두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우리
는 산 영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대학입시를 위한 영어학습에 전력투구하는것
이다.
수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중.고등학교의 수학은 한마디로 너무어렵고 형식적이
다. 그것 역시 대학입시를 위한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중.고등학교 6년간 그렇
게어려운 수학을 배우고도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질서있게 행동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오랜 기간 수학을 배운 것인가?
국어의 경우는 어떤가? 중. 등학교의 국어교육 역시 어렵고 복잡하다. 그런 교육을
받은사람이 얼마나 바른 말을 말하고 쓰며, 또한 대화나 토론을 얼마만큼 합리적으로
이끌어 가는지 우리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중. 고등학교의 교육 내용은 오히
려 부정적인 요소가 긍정적 요소보다 더 많다. 그렇다면 공부잘하는 학생은 오히려 머
리가 나쁘다는 말이 어울리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입시위주의 공부는 참다운 공부가
아니고 인간을 망치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하루빨리 우리 사회에서 입시위주의 풍토를
없애고 각자의 소질과 재능에 맞는 공부를 할수 있는 분위를 구성하는 것이 급하다.
교육이란 인간 중심의 교육이 되어야지, 권위라든가 돈중심의 교육이 된다면 그러한
교육은 이미 썩은 교육이고 자연히 인간과 사회를 부패시킨다.
많은 학생들이 자기는 머리가 분명히 나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잇다.이제 우리
는 그따위 생각을 과감히 떨쳐버리지 않으면 안된다.영, 수, 국이아니라 다른 것에 자
신이 더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부를 못하거나, 아니면 공부에 대한 방법이나
태도가 그릇되었기 때문이지, 결코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가 삶의 전부는 아니다.
공부 이외에도 공부보다 몇십 배, 몇백 배 가치잇고 소중한 것이 우리들의 삶에는
허다하게 많다.
공부가 다는 아니다
우스개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나는 가끔 다음과 같은생각을 하곤 혼자 웃을 때가 있
다.
"예수님이라면 영, 수, 국을 얼마나 공부했고 어느 정도의 실력이었을까?"
"석가모니나 공자는 또 얼마만큼 영, 수, 국을 열심히 했고 대학입시 학력고사를 보
았다면 과연 몇점이나 맞았을까?"
오늘날 우리는 거짓투선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유령을 마치참다운 것인 양 확신하
고 있다. 이처럼 서글픈 삶이 또 어디 있을까? 유령처럼 살 면서 제아무리 참답게 살
려고 해도 또 참답게 산다고 외쳐 보아도 그것은 한낱 유령의 삶이기 때문에 멀리 앞
서가는 선지국의 삶이기 때문에 멀리 앞서가는 선지국의 삶에 비하여 항상 뒤처질 수
밖에 없다.
입시공부가 다는 아니다.
공부는 다양하다.
예컨대 예수는 괴로워하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 공부햇으며 석가모니
나 소크라테스도 어느 누구보다 온 정열을 기울여 삶을 공부한 사람들이다. 이제 아이
나 어른이나 자신의 소질과 재능이 무엇인지, 또 그것들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지
를 공부해야 하며 그러한 공부가 어떻게 사회와 인간에게 밝은 미래를 가져다 줄 수
있는지 또 공부하지 않으면안될 때이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는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공부의 목적은 인간다운 인간, 능력있는인간, 참다움과 아름다움과 선함을 추구
하며 그것들을 사회에실현 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데 있다. 소크라테스의 "너자신
을 알라"라는 말은 공부의 가장핵심적인 의미를 잘 말해주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내
능력과 소질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는 것이 공부의 처음이며 그것들을 조화롭게 실현
하는 것이 공부의 과정이고 인간다운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공부의 끝이
다. 입시공부 중에서 지극히 작은 한부분의 공부에 지나지 않는다.
공부 잘하는 비결
공부를 넓게 말하면 그것은 학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신생아때부터 우리는 이미 다양
한 학습을 통해서 정신과 육체의 발전을 꾀한다. 짐승 통해서 정신과 육체의 발전을
꾀한다. 짐승도 학습을통해서 자연에 적응하기를 배우지만,가장 복잡한뇌세포를 소유
한 고등동물인 인간의 학습은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이다.
인간의 행동은 성숙과 학습에 따라서 결정되며 동시에 변화한다. 우리는 경험의 결
과에 의해서 행동변화를 체험하며 어떤 행동변화는 사라지지 않고 남으면서 우리에게
긍정적 가치를 제공한다. 이와 같은 행동변화를 학습이라고 하고 약물중독 등에 의한
순간적 경험은 학습에서 제외된다.
시행착오를 겪으면 학습효과가 높아진다:우리는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1849-1
936)의 조건반사 실험을 잘 알고 있다. 벨을 울리고 개에게 고기주기를 계속한다. 나
중에는 벨 소리만 나도 개는침을 흘린다. 이 실험에서 개가 침을 흘리는 것은 일종의
학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효과적인 학습은 시행착오에 의한 것이다. 고양이 상자 실험이라는
것이다. 상자안에 막대기가 있고 이 막대기를 당기면 문이 열리게 장치하고 이 안에
고양이를 넣는다. 고양를 처음 상자 안에 넣으면 고양이를 고양이는 좁은 상자에서 나
올려고 상자 여기저기를 할퀴고 물어 뜯으며 상자의 구멍으로 발을 내밀기도한다. 그
러다가 앞발이 막대기에 닿아 우연히 막대기를 당기면 상자 문이 열려서 고양이는 밖
으로 나온다. 다시 고양이를 상자에 넣으면 막대기와 상자 문이 열려서 관계를 몇 번
은 알지 못하다. 나중에는 다른짓을 하지않고 막대기를 잡아당겨 얼른 밖으로뛰쳐나오
게된다.즉 고양이는 시행착오를 통하여 효과적인 학습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공부를 반복하여 실패를 경험할 때, 과연 나
의 문제가 어디에 있으며 어떤 것이 옳은 길이라는 것을 알 수있다. 예컨대 내가 다른
과목보다 특히 수학에 약하다고 하자. 이 경우에는 우선 수학에 집중하고, 수학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을 반복해서 직접 풀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내가 어
떤 점에서 자주 실수하고 틀리는지 발견하게 되고 이와 아울러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
또한 필요하다.
위대한 학자들의 세계적인 발견 또는 발명가들의 발명은 단 한번에 이루어진 것이아
니라 무수한 시행착오의 결과 나타난 산물이다.
학습방법의 변화는 학습능률을 높여준다: 제아무리 공부 잘하는 학생도학습의 한계
에 부딪히게 되어 성적이 떨어지면 좀처럼 만회하기 어려운 경우가있다. 이럴때 는 휴
식을 취하든가 공부하는 방법을 보면 각양각색이다어떤 학생은 모든 것을 노트에 적어
보지 않으면 학습의 성과를얻지 못한다.그런가 하면 어떤 학생은 한자리에 앉아서 공
부하면 효과가 전혀 없고 방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중얼거려야만 효과를 본다. 또어든
학생은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적당히 들어가면서 공부하여야 효과를 느끼는 경우가잇
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한가지 방법만 가지고는 계속적으로 학습능력을 증대시킬 수없
다. 왜냐하면 한가지 학습방법은 반드시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그때 더 이상의 학습효
과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학습이 정지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에는 적당한 휴식이나
가벼운 운동 또는 좋아하는 음악을 택해보는 것도 학습효과를 높일 수 잇는 하나의 방
법이다. 학습방법을 변화시키면 한계에 직면해 있던 학습은 다시 효과가 증대된다.
시험을 앞둔 학생들은 잠도 제재로 자지 않고 책상 앞에 꼼짝않고 한가지 모습으로
는 태연한 척하면서 그렇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위안하려는 심정이 역력하
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도록 같은 방법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오히려 학습 효과
가 한계에 이르러 더 이상 학습효과가 증대되지 않는다. 학습에는 적당한 휴식과 운
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명심하여 꼭 실행해야 한다.
목적의식이 분명할수록 학습효과가 크다: 배고픈 쥐를 미로에 놓고 달리게하여 먹이
통에 도달하게 하는 실험이있다.미로를 다 달리자마자 쥐에게자주 충분한 먹이를 주
면,쥐는 미로를 빠져나가는 방법을 곧바로 배운다. 그러나 먹이를 주다 말다 하면 쥐
는 미로를 제대로 달리지 못하고 꾸물대는 경우가많다. 쥐가 미로를 다 달리고 나면
먹이주는 것을 보강이라고 한다. 연속적인 보강은 부분적인 보강보다 학습효과를 높인
다.
공부도 쥐가 미로를 알리는 것과 유사한 점이 있다. 만일 중학교 1학년이나2학년 학
생에게 일류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한다면 학생은 그말을 잘 이해
할 수없다. 대학 입학은 아직 까마득하게 먼 훗날의 일이기 때문에 실감나지 않는다.
일류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열심히공부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무조건 공부 못
하다는 것처럼 무의미하고 헛된 일도 없을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억압감에 시달리며 싫증내는 가장 커다
란 이유는 그들이 무조건 공부한다는 데 있다. 다시말하면 그들은 그들은 뚜렷한 목적
의식 없이 단지 공부를 위한 공부에 몰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짓눌려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열심히 하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쓸데 없는 짓이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 어른들이 심부름값으로 동전을 주는데, 이것도 보강의
일종으로서 이때의 효과를 동전 효과라고 한다. 심부름하고 돌아와 동전을 받아본 아
이는 심부름하면 응당 동전을 대가로 받으리라고 생각한다. 동전효과는 짐승의 학습
실험에서도, 미로를 달리는 쥐의 경우에서처럼 효과가 있긴 하지만 인간의 경우는 그
다지 가치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인격을 소유하고 자아에 대한 자부심과 궁지룰
가지고 있으므로 제아무리 많은 대가를 준다고 하여도 스스로 판단하여 무가치하다고
생각할때는 전혀 반응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학습할 때 그것이 나에게 유익하다든가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든가 아니면
무지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줄 수 잇다는 확신 내지 목적의식이 있을 때, 나는 그것에
한층 더 집중하게 되고 자연히 학습효과가 높아질수잇다. 예컨대 내가 병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고하자. 어머니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사경을 헤맨다. 나는 어머니
의 고비를 극복할 수 있는약을 어떻게 복용했는지에 대한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처방
전을 가지고 있다. 24시간 안에 내가 그 약을 제대로 어머니에게 투약하지 못하여 어
머니가 돌아가신다고 한다면 나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 온힘을 다하여 처방전을
이해하고자 할 것이다. 물론 이 경우 내가 처한 상황은 외진 산골이나 해변이어서 쉽
사리 남의 도움이 닿을 수 없는 곳이어야 ,할 것이다.
중학생이든 고등학생이든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대한 어느정도의 지식을가지고 장차
자신이 어떤일에 종사함으로써 자신과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명백한 목적
위식이 있다면 그는 다른 학생들보다 어느정도 훌륭한 학습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정교사 밑에서과외를 하고 새벽이나 밤에 입시학원에가며, 밤낮 구분없이 잠을자는
지 마는지 공부에만 매달리는 경우에 입시학원에 가며, 밤낮 구분없이 잠을 자는지 마
는지 공부에만 매달리는 경우엔 거의 학습효과의 향상이없다. 그이유는 지극히 간단하
다, 그러한 학생은 공포정서와 무력감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더라더도 그것이 강요된 것이라면, 그리고 강여의 강도와 빈도
가 크고 잦으면 쉽사리 공포정서와 무력감에 휩싸이기 쉽다. 힘세고 큰개가 어슬렁 어
술렁 지나가면 작은 개들은 길에 발랑 드러워 낑낑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아무리 덤
벼보아야 쓸데없고 큰 개가 무섭기만 하기 때문이다.
목적의식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것이라야 한다.나 자신이 장차 조화로운 인격체가
되고 특정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삶과 세계를 탐구하면서 사회에 봉사하겠
다는 목적의식이야말로 가장바람직한 성질의 것이다.
부모가 공부하라고 끊없이 강요하는 집안의 아이들은 자신의 목적의식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부모의 강요로 인하여 무력감에 빠질 염려가 많다. 자기 자신의 목적
의식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에 임하지 않울 경우 공포정서는 교묘한 형태로
변형될 수 있다.자기 자신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에 임하지 않을
경우 공포정서는 교묘한 형태로변형될 수 있다.시험 때만 되면 감기에 걸리거나 배가
아픈 하생이있다. 이런 학생은 몇 차례 시험에서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고, 따라서 시
험이 싫 고 무섭기 때문에 시험만 다가오면 공포 정서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마련
이다.
공포정서가 심해지면 무력감으로 변한다. 어른이 되어도 아예 수영을 포기 했거나
자전거 타기를 단념한 사람들이 있다.이들은 수영이나 자전저에 대한 과거의 경험에서
심한공포 정서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러한 경험의 결과 그들은 수영이나 자전거에
대한 무력감을 가지게 되었지만 "수영하면 귀에 물들어 가니까"또는 "자전거타면 바지
에 기름이 더럽게 묻으니까"등의 핑계를 대면서 자신들의 무력감을 감춘다
사회에 무력감이 극도로 만연하게되면 그러한 사회는 극도로 만연하게 되면 그러한
사회는 극도로 폐쇠적으로 되고 독재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과거 왕과 대적할 수 없
으며,따라서 '왕소리만 들어도 벌벌 떨고 무력감에 젖어 있었다.
소위 후진국에서 독재자들이 판치는 것은 백성들이 무력감에 익숙하여 있기 때문이
다. 무력감 역시 학습의 결과이지만 그것은 매우 부정적인 학습의 결과이다. 나치 시
절에 독재자 히틀러 밑에서의 독일인들은 극단적인 무력감의 노예가 되어 히틀러와 마
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경우 독재자나 무력감에 젖은 백성이나, 참다운 인간이기를 포
기한 것은 모두 동일 하다고 말할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건설은 넓은의미에서 건전한,그리고 창조적인 학습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눈앞의 지금과 당장의 이곳만을 보지 말고,보다 먼 미래와 보다 넓은세계를
바라보면서 공부할때 실로 보람찬 학습효과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최대한 모든 능력을 동원하면 학습효과가 증되된다: 독일의 철학자 딜타이는"체험과
이해와 표현은 순환구조를 가지고있다"고 말하였다. 이말은 인간의 체험, 이해 및 표
현이 서로 떨어진 것이아니라 긴밀한 상광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각각 영향을 주고 받
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무엇을 배워서 안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획득하며 또한
획득한 것을 기억에 축적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대상을 체험하며, 체
험한 것을 이해하며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은 표현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새로운 체험을 가져다 준다.
혼자 공부할대는 둘이서 서로 물어보고 고쳐주며 공부할 때 효과가 훨씬더 좋을 경
우가 있다.이 경우에는 표현 및 체험 그리고 이해의 강도가 강하기 때문에 학습효과가
증대된다.
나 개인의 경우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새로운 것을 배울때가 많다.학생들을 가르
치기 위해서 준비한 내용 중에는 불확실한 부분들도 있는데,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
또는 가르치고 나면, 불확실했던 부분들의 문제점들이 정확히 어떤것인지 분명하게 드
러나게 되어 그것을 옳게 수정하곤 한다.
학습의 능률을 높이는 데는 무수히 많은 방법이 있기때문에 딱 한마디로꼬집어 그것
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하기는 지극히 어렵다. 여러가지 방법을 차례로 혹은 혼합하
여 사용해보고 각자에게 가장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영어이든 수학이든 어떤 과목에 있어서나, 가장 기본적인 문제점이 어떤것인지를 정
확히 파악하는 것이 공부 잘하는 방법에서 제일 먼저 택해야할길이다. 각 과목에서 가
장 기본적인 것을 파악하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노력은 헛되기쉽다.
우리는 누구나,왜 공부를 하는지, 왜 하지않으면 안되는지 분명한 동기를능률을 올
리 수 있다. 막연히 공부한다면 그것은 억지 공부이며 곧 강박감과 권태감에 싸이게된
다. 나자신의 삶에 관한 확신, 미래의 직업과 사회활동에 대한 기대와 야망들은 훌륭
한 학습 동기가 될 수 있다.
또한 학습에 효과적인 정서 상태를 유지할 줄 알아야 한다. 지나치게 불안하거나 긴
장된 상태에서는 공부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한창 시험공부중인데 부모님이 부부
싸움을 하고있으면 머리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다. 또는 얼마전에 사귄 이성친구의
얼굴만 떠오르고 당장이라도그아이에게 달려가서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 보고 싶은 욕
망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면 모든 것이 나무아미타불에 지나지 않는다.공부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높이자면, 알맞는 각성흥분 상태가 요구된다.
지나치게 아늑한 상태에서는 학습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을뿐 아니라 오히려 감소
한다.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한적이있다. 인간에게 가장 쾌적한
환경을 꾸며 놓고 그안에서 1주일간 견디는 학생들에게 약간의 장학금을 주기로 하였
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빛의 강도,몸에 꼭 알맞는 온도,은은한 음악,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실수 있는 식사와 음료, 가장 편한 침대...몇명의 학생이 지원하여 천국과 같
은 이 실험실에 들어와서 이틀간은 꿈 같은 세월을 보냈지만 3일째 되자 모두 심한 권
태감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4일째 되는날 모든 학생이 더 이상견디지 못하고 실험실을
나와버렸다고 한다
너무 자주는 곤란하지만 가끔 자신이 공부하는 환경을 변화시켜보는 것도좋은 방법 중
의 하나이다.불빛을 바꾼다든지 채상의 위치를 바꾸어 보는것도좋다, 또한 집중학습도
좋지만 분산학습을 주로 택하는 것이 학습효과에 긍정적이다. 어떤 학생을 보면, 하루
는 수학만 집중적으로, 다음날은 영어만 집중적으로 공부한다, 그것보다는 하루는 한
시간씩 영어나 수학 또는 그 이외의 과목을 분산시켜서 매일 공부하는 것이 훨씬 효과
적이다.
그리고 항상 종합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예컨대 한번 눈으로 조용히 읽
고, 다음에는 손으로 써보고 마지막으로 큰소리로 읽으보면 학습의 효과가 매우높은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언어학습의 경우 다섯 살때부터 언어학습이 가능하고 열일곱
서 스무살 까지 가장 증가하며 쉰 살이 지나면 감퇴한다고 한다.이렇게 보면 중.고등
학교 시절의 공부는 두고두고 삶의 양분이 될 양식을 마련하는 것이나 다를 것 없다.
앞에서 나는 학과목의 성적을 높이기 위한 몇 가지좋은 방법을 소개하겠다. 그러나
학과목의 성적을 높이기 위해서는 목적의식이나 학습 동기 또는 환경이나 자신감 등이
필수적이라는 것도 말하였다. 사실 공부는 살아가는과정 중의 하나이며 참다운 삶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그러므로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그렇지만 미래의 꿈과
야망으로 가지고 공부에 임한다면 모든 학생은 그에 맞는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머리는 다 똑같다
국민학교나 중.고등학교 시절우리는 시험을 보고나면 저마다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다.
"며칠 동안 밤 새고 공부했는데도 또 시험을 잡쳤어. 나는 공부할 머리가 못 되는가
봐."
"우리 반 반장과 부반장은 머리가 엄청좋은가 봐. 저 아이들은 어제 늦게까지 학교 운
동장에서 축구했잖아? 그런데도 오늘 다 일찍 다 쓰고미리 나가는 것을 보면 특별히
머리좋은 애들은 따로 있는 곤이 분명해."
이런 이야기들은 흔히 있는 것이다. 요새 광고를 보면 어떤 생선을먹느면 그 생선
안에 머리를 좋게 하는 성분이 있으니 그것을 많이 먹으라고 한다. 또 어떤사람은 심
호흡을 하며 눈을 감고 몇 분간 명상에 잠기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한다.
어떤 때는 영어나 국어를 잘하는 머리가 따로있고, 또 수학이나 과학을 잘하는 머리
가 따로 있지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국어나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 가운데 과
학이나 수학은 잘하지만 영어나 국어를 잘 못하는 학생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분명히 습관과 훈련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말하자면 공부에서 편식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타난다.
음식 먹는 습관을 보면 편식의 원인을 잘 알수있다. 어떤 사람은 김치를 전혀 먹지
못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 돼지고기나 닭고기를 아예 보지도 않으려고 한다. 그런
것을 먹고체한 경험이 무의식 안에 남아 있거나 또 두드러기난 경험이 잠재적으로 남
아있기 때문에 그와같은 반응을 보이는경험이 잠재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음식을 골라 먹는 편식이 건강에 좋지 않은 것과 마찬가
지로 공부 있어서의 편식 역시 좋은 학습효과를 갖져다 주지 못한다.
"바보와 천재의 차이는종이 한 장 차이이다"라는 말이 있다. 근대까지만 해도 괴테
나 쇼펜하우어등이 "천재론"을 주장하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천재와 영웅이 역사를
꾸민, 기둥이고 일반인은 그 장식품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들
어와서 "천재론"은 더 이상 지지받지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회적 환경과
개인의 의지에 의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짜르트가 우리나라의 전라도 어느
시골에서 태어났더라면 과연'음악의 신동'모짜르트가 될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해보자.
또괴 테가 아프리카의 우간다 어느 마을에서 태어났더라면 '문호'괴테가 되었겠는가를
생각해보자.
선천적으로 뇌에 이상이 있거나, 외적 사고(교통사고등)로 인해서 뇌세포가 손상되
어 치료되지 않았거나 또는 만성으로 물이나 알콜올중독에 걸려
뇌세포 자체만 놓고 볼 때 누구의 머리가 좋다고 단정하는 것은 편견에 불과하다.
백인들은 흔히 지구상의 여러 인종 가운데서 백인의 아이큐(I.Q:지능지수 또는 지능
의 성질)가 제일 높고 항인종의 아이큐는 그다음이며 흑인의 아이큐가 가장 낮다고 생
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지금 각 방면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백인이며 인류의
문명이나 문화를 앞장서서 이끌어 온 것이 백인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생긴
생각이다
그러나 과연 백인의 아이가큐가 황인종이나 흑인의 아이큐보다 원래부터 언제나 높
은 것은 사실인가? 이물음에 대한 답은 분명히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의 어느 심리학자는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실제로 실험에착수하였다. 그
는 우선 미국의 대도시에서 같이 교육받은 백인과 흑인의 아이큐를 실험하였다. 그 결
과 백인의 아이큐가 실험하였다. 그러나 다음으로 그는 빈민가에서 자란 백인 아이의
아이큐와 여유있는 가문에서 자라고 정상으로 교육받은 흑인 아이의 아이큐를 실험하
였는데 그결과, 흑인 아이의 아이큐가 백인 아이의 아이큐보다 월등히 높았다. 미국의
이 심리학자는 백인이나 흑인의 아이큐가, 태어날 때부터 인종의 피부색깔에 따라서
결정될수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실험을 계속하였다.
그는,아프리카에서 보통수준 교육을 받은 백인의 아이큐와 미국의 도시에서 보통수
준의 교육을 받은 흑인의 아이큐를 조사하고 비교하였다. 이때도 흑인의 아이큐가 높
았다. 이 심리학자의 관찰과 실험이 말하여 주는 것은 무엇인가? 공부하는 데는 어떤
무엇보다도 습관과 의지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이 심리학자의 실험에서
입증된 셈이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어려서부터 얼마나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집중할수 있는 습관을 가지는가가 중요하다. 더 나아가서, 가치있는 일을 스
스로 과감히 결단하고 끈질기게 밀고 나가는 의지 역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습관과
의지와 환경이 천재나 영웅을 만드는 것이고 천재나 영웅이 태어날 때부터 저절로 이
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 술에 배 부르랴" "시작이 반이다" 중지하면 가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와 같은 우
리 속담들은 의지가 얼마나 중요하며 또한 의지에 의해서 길들여지는 습관이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잘 말하여 준다.
"천재는 노력이 99퍼센트이다고 재주는1퍼센트이다"라는 말도있다. 우리는 바보 온달
의 야기를 다 알고 있다. 평강공주가 온갖 인내력을 발휘하여 바보온달을 가르치고 훈
련시킨 결과, 온달은 더 이상 바보가 아니고 늠름하고 씩씩한 장군이 될 수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좌절과 실패가 우리앞에 가로놓여있다. 좌
절과 실패를 극복하고 그것들을 잘 소화 시키면 어느덧 성공의 문턱에 서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그래서"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말이 있는 것이다.
머리는 다 똑같다.
우리는 공부를 더 이상 영.수 국의 좁은테두리 안에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단지 입시 공부일 뿐이다. 학습의 영역은 무한하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그리고 세
계를 공부하며 일생을 살아간다. 입시공부란 넓은의미의 공부 가운데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우리는 우선 '홀로 서기'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또 미움과 원한을 극
복하고서로 사랑하고 도와주기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불의를 추방하고 불평등을
몰아내며 정의와 평등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나와 너 그리고
인류를 사랑하며 궁극적으로는 우주의원리를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입시공부가 공부의 모든 것이 아니다.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배움이며 공
부이다.
우리가 정상이면 우리들의 머리는 다 똑같다.누가 보다 더 진지하고 성실하게 자신
의 고유한 삶을 이끌어 나가는 가가 가장 중요한 삶의 자세이다. 그러한 자세야말로
진지하고 성실하게 삶을 배우는 사람의 자세이다.
머리가 나쁘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 머리를 탓하기 이전에 자신
의 습관이 얼마나 약한지 그리고 자신의 습관이 얼마나 잘못 되어 있는지 철저히 반성
할 필요가 있다. 그가 냉철하게 스스로 반성할 때 비로 그는 "머리는 다 똑같다"는 진
실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제 4장 사랑의 승리
사랑의 승리
오래 전 '사랑의 승리' 라는 외국의 단편소설을 읽은 일이 있다. 사랑하는 남녀가
등장한다. 남자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연인만을 사랑한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연인이
자기를 그만큼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늘 의심한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남
자는 애인에게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고 묻고 다짐한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자
신이 진정 사랑하고 있노라고 답한다.
그래도 남자는 확신이 철떡같이 서지 않는다. 남자는 티끌만한 의심도 없이 여인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어느날 남자는 애인을 데리고 까마득한 벼랑 위로 갔다. 남
자는 가장 위험한 순간에 과연 애인이 전혀 다른 생각없이 자기를 사랑하는지 확인하
고 싶었다. 남자는 벼랑 근처에서 애인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고 여자는 그렇
다고 답했다. 그래도 믿기지 않아 남자는 저밑에 일렁이는 파도가 보이는 벼랑 끝으로
애인을 끌고 가서 다시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애인에게 다그쳤다. 여자는 왜 그러느냐
고, 이것이 무슨 짓이냐고 남자를 꾸짖었다. 남자는 애인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애인밖에 없노라면서 애인을 껴안고 벼랑 아래로 떨어졌
다.
여기에서 이 남자의 행동은 사랑의 승리가 아니라 사랑의 포기이다. 사람들은 보통
이기적인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랑이라는 말을 둘러댄다. 나와 너가 동
등할 때 사랑이라는 말이 의미를 가진다. 더 나아가서 나를 희생할 때 비로소 사랑의
승리가 열매 맺는다.
꽤 오래된 이야기이다. 심심치 않게 스캔들에 오르내리던 남녀 영화배우
부부가 이혼을 선언하여 화제거리가 되었다. 이혼하면서 그들이 한 말이 걸작이었다.
"우리는 서로 너무 사랑하기에 헤어졌다. 비록 헤어진다고 해도 우리의 사랑은 변함
없을 것이다." 바로 이 말이 그들의 이혼선언을 대변했다.
우리는 사춘기 청소년 시절부터 사랑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
를 쓰다가 찢고 또 쓰다가 찢으면서 수없는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아마도 청소년기처
럼 심한 사랑의 열병을 앓는 시절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확신을 가지고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되겠는가? 자기성찰이 없는 사랑은 다분히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이며 또한
이기적인 욕망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을 다해서 죽도록 사랑한다고 애걸복걸
하던 남자가 자신의 욕망을 다해서 죽도록 사랑한다고 애걸복걸하던 남자가 자신의 욕
망을 거절당할 때는 여자를 학대하고 심한 경우에는 살인까지 저지르는 일이 있다.
참다운 사랑은 조화로운 인간관계와 인간상호의 발전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사랑은 신뢰와 이해와 관심과 배려라는, 여러 가지 요소로 구성되는 복합적인
인간의 노력에서만 비로소 진주보다도 더 영롱한 빛을 발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요즈음 세상을 일컬어 사랑이 메마른 시대라고들 말한다. 사랑이나
선함, 용기, 행복 그리고 희망과 같은 말들은 우리들에게 힘이 나게 하며 자신감을 가
지게 하고 또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가져다 준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전혀 다른 분
위기를 가져다 주는 말들이 있다. 죄악, 미움, 좌절, 불행 그리고 절망과 같은 말들은
우리를 어둡게 하고 침울하게 만든다.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무수하게 많은 여러 가지 말에 익숙해 있고 또 그 말들을
사용한다. 무수히 많은 말들 가운데서 우리가 전 생애를 통해 누구나 가장 많아 접하
는 말은 아마도 '사랑'일 거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유행가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을 노래한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소설이나
시도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남녀간의 사
랑이란 위대한 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내는 고귀한 힘이기 때
문이다. 밤잠을 설치고 방황하면서 마구 타오르는 청소년들의 사랑도 역시 단순한 불
장난만은 아니다. 그들의 사랑 역시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위대한 힘인 것은 사실
이다.
사랑을 철학적인 의미에서 제일 먼저 말한 사람은 고대 희랍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
이다. 그는 세계를 생기게 하는 근원물질이 네 가지 있는데 그것들은 각각 물, 불, 공
기, 흙이라고 했다. 그는 이것들이 혼합되어 만물이 생기고 또 이것들이 분리되면 사
물이 소멸되어 간다고 믿었다. 그런데 엠페도클레슨느 물, 불, 공기, 흙을 혼합되어
만물이 생기고 또 이것들이 분리되면 사물이 소멸되어 간다고 믿었다. 그런데 엠페도
클레스는 물, 불, 공기, 흙을 혼합시키는 힘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그것들을 분리시키
는 힘을 미움이라고 말했다. 결국 사랑은 창조의 힘이고 미움은 파괴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인간의 심층의식을 힘으로 파악했다.프로이
트는 심층의식이,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힘으로 되어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건설하
려는 힘이고 또 하나는 파괴하려는 힘이다. 이들 두 힘은 하나의 심층의식을 이룬다.
말하자면 우리의 심층의식은 이중적인 셈이다. 그런데 사랑과 미움이 균형이 일그러지
면 비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인간이 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생각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사랑과 미움이 합쳐진 것이 바로 심층의식이다. 삶을 건설하려는
경향은 사랑의 힘에서 생기고 파괴하려는 경향은 미움의 힘에서 생긴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이라 하면 흔히 남녀간 사랑만을 생각하지만 자기도취적인 나르시시즘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 모성애 등과 같은 사랑도 분명히 사랑이다. 더
나아가서 인류애나 종교적인 사랑은 그야말로 사랑의 극치이다. 나자신에 대한 사랑은
가장 좁고 미약한 사랑이지만 인류애나 종교적인 사랑은 우리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넓고도 깊은 사랑이다.
이기적인 사랑
젊은 여성들에게, 사랑은 받는 것이냐, 아니면 사랑은 주는것이냐고 물으면,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답하는 여성들의 수가 많지만, 이와 반대로 사랑은 받는 것이라고 답하
는 여성의 수도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은 주는 것이냐 아니면 받는 이냐
는 물음자체의 설정이 잘못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랑은 결코 받는 것이 아닐 것이다.
연애시절의 젊은이들을 보면 참으로 정겹다. 젊은 남녀는 연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 모든 것을,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러나 결혼 후 얼마 지나면 왜태도가 돌변하는 것일까? 연애시절의 젊은 남녀가 가지
고 있는 희생할 각오를 잘 살펴보면 그것은 문제가 많은 것이다.
젊은이들은 감정의 솟구치는 불덩어리를 주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감정의 노예
가 되기 쉽다. 남자는 여자를, 그리고 여자는 각각 상대방을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미화시킨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연인 앞에서 "당신은 나의 태양"이니, "당신은
나의 생명"이니 온갖 아람답고 화려한 말로 연인을 찬양하며 연인 앞에서 비굴한 노예
의 역할도 마다 하지 않는다.
"제 눈의 안경" 이라는 말이 있다. 젊은이는 자기 감정이 앞서기 때문에
항상 감정에 휩싸여서 살아간다. 따라서 연인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자기 멋대
로 자기의 감정이 만들어 놓은 이상적인 연인의 틀에 현실의 연인을 꿰어 맞춘다.
그러나 결혼하면 상황은 말 그대로 180도 달라진다. 젊은이들은 눈을 뜨게 되고 상
대방이 결코 자기가 그리던 이상적인 남자나 이상적인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실
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서로 상대방에게 자기만을 위해 달라고 고집부린
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사랑은 연애시절이나 결혼 후나 모두 자기도취적인, 곧 나르시시
즘적인 이기주의적 사랑이다. 독일의 문학가 헤르만 헷세의 작품 가운데 '나르치스와
골트문트'라는 소설이 있다. 나르치스는 감성 중심으로 살아가는 청년이고 골트문트는
이성 중심으로 살아가는 청년이다. 이소설에서는 두 청년의 갈등과 조화가 잘 다루어
지고 있다.
회랍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기 얼굴에 반하는 그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도취적인 사랑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개념
이다. 나르시스는 우리말로 수선화이다. 물에 비친 자기의 미모를 보고 그것이 자기인
줄 모르고 흠모하다가 물에 빠져 죽고마는 청년이 바로 수선화이다.
인간은 성숙해갈 때 아름다울 수 있다. 받기만 바라며 자기만을 고집하는 사랑은 어
찌 보면 추하기까지 하다.
용기를 가지고 결단하여 이기적인 사랑의 껍질을 과감히 벗어던질 때 인간은 비로소
성숙한 사랑을 향하여 한걸음씩 발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형제간의 사랑
요사이 특히 사회가 물질만늠주의의 풍토에 찌들면서 가정의 중요성이 점차 잊혀져
가고 있다. 물론 많은 남성들이 가정의 중요성도 알고 직장에서 지친 몸을 가정에서
푸근히 쉬고 싶어도 사회구조가 사람들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능률이 인간의 인
격을 대신하고 있따. 얼마나 인간성이 착한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일에서
정확한가가 중요하다. 또 얼마나 인간이 성실한가가 아니라 일의 성과가 얼마나 빠르
고 또 양적으로 많은가가 중요하다.
어느 직장이든간에 한 인간이 얼마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져 있는 틀에 얼마나 잘 들어맞는가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요구되는 틀에
자기를 맞추기에 바쁘다 보니 매일같이 기진맥진 녹초가 된다.이런생활은 일생을 두고
반복하여 악순환을 거듭한다.
승진하면 또 승진해야 하고, 얼마만큼 돈을 벌면 또 벌어야한다. 그러다가 퇴직을
하거나 병에 걸리면 인생은 너무나도 허무하다고 생각하고 좌절하기 쉽다.
대부분의 남편과 아내는 그 어느 무엇보다도 가정을 위해서 모든일을 한다고 주장하
면서도 가정에 대해서는 결국 소흘히 하는 일이 많다.
나는 우리들 인간의 삶의 씨앗은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가정의 첫째 조건은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신뢰와 관심, 배려와 노력이 없이는 가정이라
는 씨앗이 튼튼할 수 없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하늘에서 저절로 굴러 떨어진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는 끊
임없이 배우고 노력해야 한다. 무엇을 배우고 오력하는가? 물론 사랑을 배우고 또 사
랑하기를 노력해야 한다.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는 과정은 힘들고 지루하지만 아름답
다. 그 속에는 아기의 순수한, 살려는 노력이 잔뜩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부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가정의 두번째 조건은 형제간의 사랑과 아울러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라고 생각한
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은 물론 이고 형제간의 사랑이 부족한 가정을 보면 그 가정
에는 불화가 그칠 날이 없다.
자매끼리, 또는 오누이끼리, 아니면 남매가 손에 손 잡고 어깨 나란히 나들이하는
모습은 정겹기 짝이 없다. 다 커서 시집 장가 가서도 형제 중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형제들끼리 서로 힘을 합하여 어려운 형제를 성심 성의껏 돕는 것을 볼 때 흐뭇한 마
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돈에 어두워 형제끼리 다투고 서로 법정에까지 서서물고 뜯는 것을 볼때는
왜 이다지도 삶이 허무할까하고 한숨을 내뱉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형제간의 사랑은 아름답기는 해도 제한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핏줄끼리
만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끝없이 넓은 것이라면 형제간의 사랑은 역시 한계가
있다.
어머니의 사랑
6.25가 지난 지 얼마 안된 어느 겨울날 밤의 일이 갑자기 생각난다. 몹시도 추운 날
이었다. 어찌나 추운지 두 귀에 감각이 없고 콧물이 얼고 발이 시려워 발을 동동 구르
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머니와 나는 시장 점퍼 가게에 들렀다. 나에게 맞는 점퍼가 별
로 없었다. 너무 크거나 아니면 너무 비쌌다. 어머니는 그 춥고 매서운 날씨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 가게, 저 가게를 둘러보았다. 나는 그만 짜증이 나서 금방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발이 꽁꽁 얼어 들어와서 점퍼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어머니는 추위도 잊은 듯 거의 한 시간이나 이리저리 헤매다가 결국 두툼한 털점퍼
를 하나 발견하고 그것을 내게 입혀 주었다. 나는 그날 밤 어머니에게 심통을 부렸지
만 그 점퍼덕분에 몇 년 간 겨울을 포근히 보낼 수 있었다.
6.25를 겪지 못한 세대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실감이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도 여유가 생기면 6.25의 참담한 경험을 여러 가지 생생한 자료를 통해서 후손들
에게 잘 알려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삶의 어두움과 참혹함을 알 때 인간은 보다 바
람직한 삶을 이끌어 나가야 할 이유를 보다 더 분명히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성애는 위대한 사랑이다. 어머니의 사랑이나 아버지의 사랑이나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에 있어서는 다 마찬가지이지만, 모성애가 부성애보다 더 강하게 생각되는
것은 아마도 울산의 고통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든다. 출산의 고통은 동시에 생명
을 탄시키는 기쁨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되어본 여성만이 참다운 여성이라는 말의 뜻
을 이해할 만 하다.
그러기에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적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직접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지만 아버지는 단지 방관자의 입장에
서 출산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이나 아버지의 사랑 모두 자깆중심적인 특징이 있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 무조건 모든 것을 희생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못다 한 이상을
자식을 통해서 실현시키려고 한다. 그러한 태도는 모두 제한된 사랑을 나타낸다.
모성애 또는 부성애가 참다운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자식을 부모와 똑같은 인격체로
깨달을 필요가 있다. 자식을 결코 부모의 소유물이나 수단이 아니다.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이나 수단으로 생각할 경우 끔찍한 불행이 일어날 수있다. 자식이 부모를 학대
하거나 또는 부모가 자식을 구박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난
다. 사랑이란 삶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헌신과 노력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모
성애와 부성애를 한껏 더 바람직한 사랑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친구간의 사랑
우리들은 알맹이가 없고 껍질만 멋있는 것이나 또는 그러한 사람을 가리켜서 "속 빈
강정"이라고 하거나 또는 "공연히 북 치고 꽹과리 치고 다 한다"고 말한다. 매우 드물
긴 하지만 나는 몇 년에 한 번 유명한 대학교수라든가 소설가 또는 정치가를 대할 기
회가 있다. 그리고 어쩌다 방송국에 들를 때가 있으면 이름난 탤런트나 가수와 짧은
순간 함께 자리할 기회가 있다. 물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말할
수 없는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나도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아마도 평소에 유명한
사람들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러한 허무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평소에
마음속으로 기대하고 존경했던 유명인사의 행동이 지나치게 오만불손하고 자만심에 빠
져 있는 것을 볼 때 결국 사람이란 다 비슷한 것이고, 유명해질수록 그만큼 더 인간성
은 알맹이가 없어지고 빈 껍질만 남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아마도 자신의 삶을 가꾸고 꾸미는 노력, 곧 사랑일 것
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사랑 중의 또 하나는 친구간의 사랑이다. 친구간의 사랑
은 핏줄에 묶인 사랑이 아니기에, 그리고 오래오래 은은한 향기를 간직하고 지속될 수
있기에 아름답다.
보통 어떤 사람의 됨됨이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친구를 보면 된다고들 말한다.
유유상종, 곧 끼리 끼리 모인다는 뜻에서 그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청소년들을 보면 우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청소년들뿐 아니라
어린아이나 어른들의 경우에도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우리들
은 친구를 통해서 가정의 우타리에서 겪지 못한 소중한 체험을 배우며 삶을 넓혀가고
또 삶의 깊이를 더 깊게 할 수다 .
그러나 우정도 흔히 폐쇄적일 경우가 많다. 젊은이들의 우정은 더할 수 없이 소중한
것이지만 그 반면에 쉽사리 깨지고 상처받을 수 있다. 우정 또한 자기중심적인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친구가 자기에게 잘 대해줄 때는 모든 것을 다 바칠 각오가 되어 있지
만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대하면 순식간에 뾰루퉁해지기 쉬운 것이 우정이다.
일생을 통해서 몇 사람의 친한 친구를 가진다는 것처럼 값진 일도 없을 것이다. 눈
을 감고 조용히 앉아서 내 친구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 오랜 시간에 걸친 친구들과
의 수많은 대화나 언쟁 그리고 화해와 만남을 생각하면 절로 흐뭇한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우정에도 역시 한계는 있다. 끼리끼리 모이다 보면 친구가 아닌 사람을 소흘
히하고 심한 경우에는 패거리를 만들 우려도 있다. 우정도 역시 다른 종류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삶을 충실히 하려는 인간의 근본적인 노력으로서의 사랑을 바탕으로 깔아
야만 진정한 우정으로 빛날 수 있다.
자기애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외모만을 치장하는 데 유난히 골몰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여성은 외출 전 화장하는 데 적어도 한 시간 이상 걸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또 어떤 남성을 외출 전에 반드시 얼굴과 머리손질을 하고 일일이 옷과 넥타이 및 양
말의 색깔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은 나르시시즘적 성격을 가
진 사람들이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를 끔찍
이 아끼며 사랑한다. 그러나 또 반대로 말하면 매우 이기적인 성격의 사람들이다. 그
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며 자기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모든 사태를 보고자 하기 때문에 독선적인 성격을
가지기 쉽다. 고대 회랍신화에 나르시스가 등장한다. 나르시스라는 청년은 물에 비친
자신의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서 그 아름다운 사람과 결합하려는 욕망 때문에
결국 물에 빠져서 죽고, 그가 서 있던 자리에 피어난 꽃이 수선화라고 한다. "자기를
버리는 자는 살고 자기를 구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이 있다. 또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도 있다. 자기만 본다는 것은, 말하자면 남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남을 이
해하거나 남과 공감하지도 못한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나 지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서 행동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심할 경우 오직 나만의 욕망을 해우기 위해서 수단 방
법을 가리지 않고 행동할 경우가 많다. 그것은 바로 이기적인 사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사랑은 나만을 위하다가 나까지 망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경상도
니 전라도니 지방색을 강조해서 같은 지방 출신끼리 똘똘 뭉치는 것이나, 혈연이나 가
문중심으로 패거리를 만드는 것이나 또는 출신학교별로 뭉치는 것 등은 다분히 이기적
인 사랑을 바탕에 깔고 있다.
나만 생각하고 내 이익만 원하는 사람은 남에게 폐를 끼치며 동시에 공동생활을 깨
뜨리게 된다. 그러면 결국 그 자신의 이익도 그를 멸망의 구덩이 속으로 몰아넣을 것
이다.
소크라테서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나는 이기적인 사랑과 자기애를 구분하고
싶다. 이기적인 사랑이란 본능적 욕망충족에 가까운 것인 반면에, 자기애란 인간으로
서의 자신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참다운 인격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할 때 누구
든지 타인을 자기와 동등한 인격으로 생각할수 있다. 그리고 자기애에 성실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책임지며 자신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수 있다.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결단하고 책임지는 개인주의
에 충실할 수 있다.
인류애
미국의 어떤 심리학자에 의하면 인간의 도덕감정은 대체로 13세 때 정지한다고 한
다. 우리들이 여러 사람을 접하여 보고 또 나 자신을 잘 성찰해 보면 그 심리학자의
말이 상당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만을
사랑하며 이기적인 사랑에 충실하기 쉽다. 그리고 형제간의 사랑이나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 친구들간의 사랑은 당연한 것으로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한 인격 주체로 대하며 또한 그렇게 사랑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흔히 우리는 자기 자신의 핵심되는 부분은 마주치지 않고 가능하면 피
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삶에 어느 정도 본받을 흔적을 남긴 사람들은 어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냉혹하리만큼 자기 자신을 예리하게 성찰한 사람들이다. 우리
들 대부분은 자신의 장점만 바라보며 키워가고 단점은 될 수 있는 한 보지 않고 피하
려고 한다. 그 사이에 내 속에 꿈틀거리는 단점은 순식간에 커져서 끔찍한 괴물의 모
습으로 나 자신까지도 흉칙하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정신분석학자이면서 사회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의 특징을 일컬어 "자유로부
터의 도피"라고 한다. 이 말은 금방 듣기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조금만 깊이 생
각해보면 그 뜻이 곧 밝아진다. 자유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단하는 행동의
힘이다. 그러나현대인은 언제나 부모와 사회 그리고 남들이 하라는 대로 습관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단해서 행동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다고 생각
한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가 지나치게 벅차고 힘들어서 남이 내 코를
꿰어서 끌고 가기를 바라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자유로부터 도망가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인격주체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남들도 역시 인격주체로 사
랑할 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자기애는 인류애와 똑같은 차원에 있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 안에 가득 찬 기쁨과 즐거움만 보지 않고 자기 안에
깊이 숨어 있는 고통과 번민을, 그리고 온갖 단점을 직시하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의 삶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진다. 그러한 인
간만이 타인을 나와 똑같이 생각할 수 있으며 타인의 기쁨을 같이 나누고 또 타인의
번뇌와 한숨을 함께 나눌 수 있다. 모든 인간에게 대하여 공정하고 공평한 인류애를
실천한 예들은얼마든지 있다. 소크라테스는 길거리에서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젊은
이들에게 정의와 선을 가르쳤다. 공자와 석가모니 그리고 예수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이 깊어지고 넓어질수록 그것은 온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순화된다. 우리들 각
자가 자신의 심연을 통찰할 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인류애의 고귀함을 몸소 체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숭고함
자기애와 인류애 그리고 종교적사랑은 모두 다 사랑의 극치로 그것들은 숭고한 사랑
이다. 자신의 삶을 소중히 아끼며 끊임 없이 그것을 갈고 닦아나가는 사람들앞에서 우
리는 숙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또 자신을 돌보지 않고 밀림에 들어가 흑인의 아픔
을 치료하는 슈바이처라든가 맨발로 빈민굴을 뛰어다니며 헌신하고 봉사하는 테레사
수녀의 인류애 앞에서 우리는 경건함을 느낀다. 그러나 자기애와 인류애 그리고 종교
적 사랑 이들 세 가지 사랑 가운데서 가장 으뜸가는 사랑은 역시 종교적 사랑이다.
종교적 사랑은 그야말로 차별이 없다. 성 어거스틴은 열심히 기도하며 교회에 나가
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 사이에 어느 누가 구원을 받을지 우리들 인간은 아무도 모른
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들 인간의 능력은 유한한 반면에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며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유일한 권능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불경의 어떤 구절은 불교도 없고 불타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불교를 고집하거나 또
는 불타만을 고집한다면 참다운 깨달음이 이루어지지 않고 한쪽으로 쏠린 생각만 고집
할 것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또 불경에 보면 깨달음이란 "사해평
등" 이며 "보조광명" 이라고도 했다. ㄲ달음은 치우침이 없이 어느 곳에나 있고 어느
곳에서나 가능하며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춘다는 의미일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새들과 함께 사이좋게 지냈고 드물지 않게 그의 어깨와 손에 새들
이 날아와서 놀았다고 한다. 또 어느 스님에 관한 이런 이야기도 있다. 추운 겨울날
스님 한분이 따스한 양지에 나와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그 스님은 속옷을 벗어서 햇
빛에 쪼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 스님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스님은
옷 속에 있는 이가 너무 햇빛을 쪼이지 못했기에 그 놈들에게 햇빛을 쪼여주고 있다고
답했다.
어떻게 보면 인간중심적인 사랑이란 결국 인간만을 위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인
간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있다. 우주만물에 대한 사랑 그리고 우주
의 원리에 대한 사랑, 곧 절대자나 절대경지에 대한 종교적 사랑이 역시 가장 으뜸가
는 사랑이다. 만일 남녀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인류애 등이 종교적 사랑의 바탕을
망각한다면 그것들은 여전히 불완전한 사랑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불완전함과 유한함을 통찰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만물에 대한 공평한 사랑
이 결여된 사랑은 결코 성숙한 사랑이 아닐 것이다.
이 혼란하고 삭막한 현대사회가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것도 역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알게 모르게 포근하고 은은한 종교적인 사랑을
한없이 베풀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제5장 젊음의 꽃
젊음을 어떻게 꽃피울 것인가
아득한 지구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간은 한 포기 갈대나 한 방울의 이슬과도 같은
하찮은 존재이다. 온 천지가 얼음으로 얼어붙은 빙하기와 빙하기 사이의 몹시 짧은 따
뜻한 시기에 우연히 발생하여 오늘날 생물 중 가장 큰 힘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눈을 들어서 우주를 바라보고 다시 인간을 바라보자. 태양계와 태양계가 모여 우주
를 이루고 우주들이 모여 다시 대우주를 이룬다. 우주에 비하여 지구라는 땅덩어리는
조그만 먼지도 안될 터인데 하물며 인간은 어떻겠는가?
기나긴 역사를 알고 또 넓디넓은 우주를 쳐다본다면 인간은 자신을 옳게 바라보고
성실한 삶을 색칠할 수 있을 것이다. ㄱ러나 대체로 인간은 '우물 안의 개구리'로 지
내다가 죽음이 다가올 순간에야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존재인지
를 깨닫게 된다.
특히 물질만능의 풍조는 인간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창 나이의 청소년을 혼란에
빠뜨린다. 청소년 시절에 자연과 역사와 우주를 볼 줄 모르고 돈과 권력의 우물에 갇
혀버리게 되면, 그러한 젊은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사람됨을 제대로 갖출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어른들이 모인 사회는 숨막히는 닫힌 사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참으로 슬프게 하는 것은 어른의 얼굴과 눈빛을 가진 청소년이다. 많은 수
의 청소년들이 황금만능주의의 야릇한 색깔과 향기에 도취되어 주름진 얼굴에 희미한
눈빛을 하고 있다.
학교 주변에서 학생들의 좋은 옷이나 신발 그리고 금전까지 협박과 공갈로 탈취해가
는 청소년들을 보면 세상이 온통 깜깜해지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황금만능주의의 우
물 안에 갇힌 청소년들은 그 안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들의 미래는
어떤 흉칙한 모습이 입을 커다랗게 딱 벌리고 그들을 삼켜버리려고 하고 있을까?
돈과 함께 오늘날 우리들 인간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두려운 것은 기계문명이다. 황
금만능주의와 함께 기계만늠주의가 인간의 삶을 질식할 정도로 억누르고 있으며 그 두
가지는 제멋대로 인간을 허수아비와도 같이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기계만능주의는 우
리들이 인생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것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컴퓨터를 모르면 바보라는 말이 머지않아 등장할 것 같다. 길거리의 늘비한 자동차
는 쉽사리 우리를 목적지까지 실어다준다. 세탁기가 빨래를 해주고 진공청소기는 쓰레
질을 해준다. 머리 아프게 계산하는 대신 계산기가 척척 계산해준다.
돈과 기계만 있으면 안되는 것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일까? 서로를 아끼고 사랑
하며 존경하고 용서해주는 인간의 따뜻한 사람됨은 이젠 이 세상에 더이상 없는 것일
까?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을 뛰쳐나와 신선한 샘과 넓은 들을 마음껏 돌아다닐 때
기분은 어떤 것일까?
청소년은 젊음의 힘이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극단적인 이기주의자가 되
기 쉽다. 청소년의 비뚤어진 행동은 우선은 돈과 권력과 기계를 으뜸으로 여기는 사회
풍조에 원인이 있고, 다음으로는 넓게 보지 못하고 방향감각을 상실한 젊음의 힘에도
원인이 있다.
만일 청소년들이 자기들이 지닌 무궁무진한 젊음의 힘을 옳게 사용할 줄
안다면, 그들은 축복받은 열린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청소년들은
어떻게 그들의 힘을 옳게 사용할 수 있을까?
청소년들은 아직 성장과정에 있기 때문에 넓게 밖을 내다볼 줄 모르고 자기라는 우
물 안에 갇혀 있다. 따라서 그들은 독단적이며 이기적인 경향을 띠고 그들의 생각과
다른 것은 모두 부정하고자 한다.
중.고등학생의 연령층에 있는 청소년들은 우선 간섭이 싫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멋대로 행동해서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기면 그 책임은 어른이나 사회 또는 부모에게 돌
린다. 청소년을 가리켜소 고삐 풀린 망아지라고 하는 것도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부모가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무관심한 부모를 원망한다. 공부해라,
방 청소해라, 늦게 귀가하지 말아라, 연애는 스무 살이 넘으면 해라..등등 부모의 말
이 청소년들에게는 모두 쓸모없는 귀찮은 간섭으로 생각된다.
"얘, 공부좀 해라, 배워야 남보다 낫게 살고 버젓한 직장도 가질 수 있지 않니?"
"왜 공부, 공부 머리 아프게 말씀하게요? 공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훌륭하게 된 사
람들도 있어요. 엄마 아빠는 공부를 잘했나요?"
젊음의 힘은 참을 줄 모르고 아무 것에나 반항하기 마련이다.
"그래? 그렇다면 매일 놀아라. 아예 책은 집어치우고 잠도 자지 말고 놀아라. 아니,
에라 모르겠다.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엄마는 매사가 저렇다니까. 제가 아무렇게나 되어도 좋단말이군요. 엄마는 자식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벌써 다 알고 있어요."
어쩌자는 말인가? 젊음은 멋대로 부는 바람과도 같으며 끝없이 타오르는 화산과도
같다. 그러나 청소년도 역시 인간이다.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 때, 그
젊은이는 비로소 성숙한 청소년이 될 것이다.
한 술 밥에 배 부를 수 없다. 이글이글 타오르던 불꽃이 저절로 순식간에 사그러질
수 없다. 세차게 불던 바람도 눈 깜짝할 순간에 잠잠해질 수 없다.
청소년들은 남과 사회와 세계에 대하여 불평과 불만을 터뜨리면서 동시에 자기자신
에 대해서도 울분을 토하지 않을수 없는데, 이렇게 청소년들은 성장의 고통을 체험하
면서 한인간으로 성숙하게 된다. 그러면서 청소년들이 삶의 조화롭고 아름다운 면을
볼 줄 알게 될 때, 그들은 열린 사회를 구성하는 참여자가 될 수 있다.
요사이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청소년들의 끔찍한 행동이 부쩍 많이 보도되어 가슴을
섬뜩하게 한다.
황금만능주의와 기계중심의 산업사회가 한편으로는 삶을 풍요롭게 해주지만, 또 한
편으로는 가치관을 1차원적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가치관의 혼란이 사회를 지배 하
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리면 단지 개인의 욕망만을 채우려는 이기주의가 널리
퍼진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개인끼리의 갈등, 미래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사회
그리고 인간 스스로가 가져오게 될 인류의 멸망. 이런 것들을 상상하기란 그다지 어려
운 일이 아니다.
우리들 인간은 한번 살지 두 번, 세 번 또는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인간
이라는 존재는 우주의 역사에서 지극히 짧은 순간 자신의 삶을
장식하다가 자연적으로 소멸할 존재라는 것도 분명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가
해야만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을 최대한으로 노력하여 보람차게 만드는 일이다. 개인
은 사람됨을 찾고 사회는 개방되게하고 나라와 나라가 우호관계를 가지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진정한 의무이다.
젊음의 힘을 밖으로 뻗으면서 문학과 예술과 종교를 직접접하고 남과 가능한 한 많
은 대화를 함으로써 청소년들은 자기들만의 좁은 우물에서 뛰쳐나올 수 있을 것이다.
남과 대화하고, 나아가서 자연과 예술, 종교와 대화하기를 거부하는 젊은이가 있다
면 그러한 젊은이는 삶을 마구 살아갈 뿐이다. 대화 속에서 우리들은 믿음의 관계를
익혀갈 수 있다. 나만 믿는 것이 아니라 남과 자연과 예술 그리고 종교를 믿을 때 비
로소 내 안에서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방황하는 청소년들은 아직 믿음의 사랑을 모르는 젊은이들이다. 참고 기다리며 믿을
줄 아는 청소년들과 그렇지 못한 청소년들을 비교해 보자.
빈 그릇만이 물을 가득 채울 수 있다. 이기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울 줄 아는 젊
은이만이 미래의 꿈과 챠망을, 그리고 아름답고 찬란한 사랑의 샘물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배우며 사랑하는 삶
사랑의 힘
미란이와 철식이는 지금 작은 아파트에서 딸 영애와 함께 어느 누구 부럽지 않게 단
단한 삶을 만깍하며 오손도손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 부부에게도 7년이란 세월의 가시밭 길이 놓여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짐
작하지 못할 것이다. 미란이가 철식이를 만난 것은 지금부터 꼭 7년 전 이었다. 미란
이는 간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종합병원의 간호원으로 들어가 눈코 뜰새 없이 일에 시
달리고 있었다.
당시 미란이를 끔찍이 아끼던 선배 언니가 좋은 남자 한 명 소개할 테니 반드시 결
혼해야 한다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철식이를 소개하였다.
미린이는 철식이를 처음 만나 인사하는 순간부터 바로 이사람이 꿈 속에 그리던 왕
자님이라고 굳게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부모 친척없이 고아로 자랐지만 철식이는 버
젓하게 대학을 나와서 대 기업체 사원으로 남부럽지 않은 사회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
었으니 말이다. 처음 만나던 날 두 사람을 서로 외로운 처지라는 것, 지금까지 온갖
역경을 이기고 자신의 떳떳한 삶을 이끌어 왔다는 것을 서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
다.
신혼살림 6개월, 미란이와 철식이에게는 꿀맛 같기만 한, 그리고 꿈 같기만 한 신혼
6개월이었다. 그간 둘이 적금했던 돈을 몽땅 털고 은행 융자까지 내어, 작지만 내 아
파트를 한채 마련하였다.
미란이와 철식이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서로의 몸과 마음을 확
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둘은 시간이 있을 때면 정답게 미래를 이야기하고 현
재를 즐겼다.
그러나 꿈만 같던 신혼살림도 6개월을 넘기지 못하였다. 친한 친구의 재정보증을 섰
던 철식이가 재판에 불려 다니고 직장에서 쫓겨나면서부터 둘의 불행이 터지기 시작하
였다. 철식이는 술독에 빠져 있었다.
철식이는 미린이만 보면 욕설과 손찌검을 서슴지 않았고 집을 팔아라, 이혼하자면서
미란이를 학대하기 시작하였다.
미란이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당신만이 나의 전부이며, 당신 때
문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 왔으며, 당신 때문에 지금도 살고 있노라고 애원하고 하소연
하며 달래기까지 하였다.
철식이는 변함없이 매일 술냄새를 풍기며 집이라고 어쩌다가 들어와서는 미란이에게
욕지거리와 손찌검을 퍼부었다. 날이 갈수록 철식이가 집에 들어오는 날이 뜸하였다.
가뭄에 콩나듯이 집에 오는 날이면 철식이는 술냄새를 풍기면서 돈을 뜯어갔다. 철식
이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있었다. 미란이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굳게 다짐하
고, 시간 있을 때마다 기도 드렸다.
"내가 철식씨에게 드릴 것이 또 무엇이 있습니까? 줄 수 있는 것을 주게 해주십시
오.
우리들은 외롭고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더이상 버림받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들의
결혼이라는 이 소중한 씨앗이 제발 싹틀 수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러기를 3년. 주변에서는 미란이에게 그깟 남자 차버리라고, 아직 앞날이 창창한
젊은 나이이니 쌓이고 쌓인 것이 남자라며 크고 작은 소리로 헤어질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미란이는 참고 또 참았다.
드디어 철식이는 간경화증에 걸려 미란이가 근무하는 병원에 장기 입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란이는 철식이에게 온갖 정성을 쏟았다. 좀 나아지면 퇴원했다가 다시 술
로 몸을 망치고 입원하는 것이 철식이였다. 미란이는 철식이에게 이미 자신의 생명을
다 바쳤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 없이 철식이를 돌볼 수 있었다.
이러기를 3년. 철식이의 몸이 거의 완쾌외어 퇴원을 앞둔 어느날, 철식이는 미란이
를 앉혀 놓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여보 나는 지금까지 천사를 믿지 않았는데 이젠 믿게 되었오. 당신이 바로 천사요.
당신이 내게 쏟은 사랑을 이젠 내가 당신에게 도로 주어야겠소.
여보, 이젠 나도 사는 동안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위해서 당신만큼 정성을 쏟
겠소."
지금 철식이는 작은 무역회사에 열심히 나가고 있고 미란이는 여전히 병원근무를 하
며, 이들 부부는 1년 전 그동안 못가졌던 딸아이를 낳아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
다.
결국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힘은 사랑의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배우며 살아가는 자세
"우리들은 왜 배울까?"
이렇게 물으면 사람들은 대뜸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알기 위해서 배운다."
이 답이 물론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들은 사랑하기 위해서 배운다."
잠시 정신 분석학자 프로이트의 이론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힘이 우리들의 깊숙한 내면에 숨어 있는데 그것은 곧 파괴의 힘과 사랑의 힘이라고 하
였다. 파괴의 힘은 모든 것을 죽음으로 몰아 넣으려는 충동이고, 이에반하여 사랑의
힘은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 넣으려는 힘이다.프로이트의 이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 보면 전쟁과 평화가 서로 얽히고 설켜 있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다. 또 우리의 현실을 찬찬히 들여다 보아도 싸움과 화해가 뒤범벅되
어 있는 것을 즉시 알 수있다. 부부사이, 부모와 자식, 친구, 선생과 제자... 인간의
모든 관계는 언제나 싸움과 화해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관계인 것 같다.
파괴하는 힘은 미움으로 가득 차 있고 사랑하는 힘은 생명으로 충만하다. 마지막에
가서 인간을 인간답게 할 수 있는 힘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
을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 의해서 스스로 결단하게끔 하는 힘은 역시 사람의
힘이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배운다는 데 있다.
동물은 습관적, 본능적으로 배우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도 물론 남들을 흉내내고
습관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동물과 똑같이 배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인간이 배운다고 말할 때 전혀 다른 것을 부여한다.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가기를 배우며 사랑하기를 배운다.
나는 20년 가깝게 대학에서 선생 노릇을 하고 있지만, 내가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생
각한 적은 거의 없다. 한가한 시간, 나 자신을 돌이켜 보면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지
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나는 일생 동안 미남이라는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다. 다른 남자들을 보면 '여쩌면
저렇게 잘 생겼을까' 하고 항상 감탄하게 되고 동시에 초라한 내 몰골을 돌아보면 자
연히 움츠러들게 된다.
나는 지금까지 권력과 돈을 가까이할 수 없었다. 선생을 천직으로 알고 있는 터에
권력과 돈을 가까이 할 생각도 없을 뿐만 아니라 권력과 돈이 내게 저절로 굴러오지도
않았다. 그러니 남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힘도 없다.
그러면 대학선생이니 만큼 지식에 대한 자부심은 있지 않겠느냐고 누가 나에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실상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철학책이야 늘 읽지만, 읽어도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고 게다가 책에 있는 지식이 내 것으로 되지도 않는다.
어떤 때는 내 머리가 별로 좋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무수히 많은 철학자들이 자신감에 넘쳐서 써놓은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아직도 멀
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지식은 확실한 것이 별로 없다. 그러면 나는 왜 계
속해서 대학에서 선생 노릇을 하는가? 죽을 때까지 배우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지 않고 학생들과 함께 배운다고 생각한다.
삶을 산다는 것은 삶을 배운다는 것이 아닐까?
또한 삶을 배운다는 것은 삶을 사랑한다는 것이 아닐까?
"당신은 왜 배웁니까?"
이렇게 물으면 각양각색의 답이 나올 것이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 배우지요."
"돈을 벌기 위해서 배웁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뭐니뭐니해도 돈이 있어야 자기
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으니까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배웁니다. 삶은 각자가 해결하기 나름입니다. 지식은 어려움
과 불행을 제거하는 능력이 있으니까 배우고, 배우고 나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빨리
찾을수 있을 것입니다."
각각의 답들은 모두 제나름대로의 이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습관적인
배움과 참다운 배움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습관적인 배움을 부분에 관한 것이다. 습관적인 배움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다.
기술자가 되기 위해서 배운다든가, 지식을 가지기 위해서 배운다든가, 돈을 벌기 위
해서 또는 취직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을 습관적인 배움이다.
그러나 참다운 배움을사랑을 배우는 것이다. 사랑을 배우는 사람은 생명을 배울 줄
알며 너와 나와 우리 모두를 생명의 힘으로 충만시키기를 배운다.
예수는 무엇을 배웠는가?
예수는 사랑하기를 배웠다.
석가모니는 무엇을 배웠는가?
석가모니는 마음을 비우고 욕심과 고뇌를 없애는 것을 배웠다.
결국 예수와 석가모니는 삶을 사랑하기를 배운 사람들이다. 삶은 우리들이 사랑만
하기에도 너무나 짧은 순간으로 끝나고 만다.
번민의 늪
나는 어렸을 때 손이나 발을 씻는 것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하기야 6.25 전후에는
목욕탕이라는 말도 들어본 일이 없다.
겨울에는 얼굴만 고양이 세수를 했고 손이나 발은 씻는 척만 해서 때 가끼고 피부가
터질 지경이었다. 여름에는 우물가에서 가끔 목욕을 하고 냇가에 가서 때도 밀었다.
그것마저 하지 않았더라면 때투성이가 되어 드디어는 병에 걸려 죽었을지도 모른다.
씻지 않으면 때가 끼기 마련이다. 거울을 닦아주지 않으면 먼지가 낀다. 기계도 똑
같다. 자주 쓰고 손보지 않으면 녹이 슬어 망가지고 만다.
사람의 생명은 마음이다. 우리는 흔히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을 한
다. 그렇다.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것도 역시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러나 마음먹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마음먹기가 어려워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연민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불경에 보면, 죄 많이 지은 사람이 길고 긴 가느다란 거미줄을 타고 멀고도 먼 극락
에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는 장면이 나온다. 마음먹기가 어려워 우리는 모두 끊어질 듯
한 거미줄을 타고 바둥댄다. 거미줄은 번민의 늪이다.
매사에 무분별한 어린시절을 지나면 누구나 옳고 그릇된 것은 안다. 그렇지만 마음
먹기가 그렇게도 어렵다.
"에라 모르겠다. 이번만 넘기면 나도 마음먹고 살아야지. 정말이야. 꼭 한번만 지나
면 다음부터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거야."
거울에 먼지가 낀다. 이번에는 닦지 않지만 다음에는 꼭 닦겠다고 다짐해도 또 닦지
않게 된다. 어느덧 세월이 지나고 거울은 썩어서 삭아버리고 만다. 맑은 거울을 보기
에는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렸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수시로 닦지 않으면 마음은 번민의 때로 얼룩지고 드디어는
어쩔 수 없는 번민의 늪에서 신음하게 된다.
마음을 무엇으로 닦을까? 마음에 스며든 번민의 늪을 무엇으로 지워버릴 수 있을까?
번민의 늪, 욕망의 그림자, 이기심의 불길을 소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역시 사
랑의 힘이다.
사랑은 결코 받는 것이 아니다. 받으려는 마음은 이기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랑은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 한 사랑이 자기의 생명을 줄 때 해결할 수 없는
일이 과연 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된다. 배울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로만
이 세상이 가득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옥이 아닐 수없다.
어른과 아이의 이야기
(1)
요사이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대하다 보면 머리가 빙빙 돌고 현기증이 나서 도저히
참기 힘들 지경이다.
돈 잘버는 의사가 더 벌려고 몇십, 몇백억 원어치 땅투기를해서 수사 대상이 되었다
고 한다. 외삼촌이 조카를 유괴하여 살해한 후 누나 집에 돈을 요구하다가 구속되었
다. 통화를 빨리 끝내라고 독촉한다고 해서 아기 업은 여인을 그 자리에서 칼로 찔러
서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토록 끔찍한 뉴스를 접하면 망연자실할 뿐만 아니라, 인생의 허무함을 더욱 짙게
하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한 지경이다.
어쩌다 이 모양이 되고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하고 곰곰이 되외이다 보면 아무
런 해결책도 떠오르지 않고 깜깜 절벽인 것만 같아 한숨밖에 나오는 것이 없다.
과연 어디의 무엇이 잘못되었길래 오늘 우리의 삶은 진흙 구덩이 속에서 한없이 신
음해야만 하는 것일까? 정치인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이기적인 욕심에 눈이 어둡기
때문일까? 아니면 기업인이 노동자 생각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자기 배만 불리려고 혈
안이 되어 있기 때문일까?
제아무리 골머리 썩이며 생각에 몰두해보아도 이 커다란 혼란의 근원적인 책임은 사
회구성원 각자에게 있음이 분명하다는 결론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가 남을 탓하고 남을 헐뜯기에 바빠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 같다. 너나 할 것 없이 마치 물질이 삶의 모든 고뇌와 번민을
해결해줄 수 있는 요술단지라도 되는 듯 한결같이 물질(돈)을 향해서 숨쉴 사이도 없
이 달려가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스스로 갖출 때 비로소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다. 남과
자기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구분할 줄
모르는 어른은 겉모습만 어른이고 속은 여전히 미숙한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2)
콜버그라는 심리학자는 인간의 도덕성 발달단계를 7단계로 본다.
첫 번째 단계는 처벌을 피하고 순종하는 단계로서, 인간과 사물의 가치를 구분하지
못한다. 두 번째 단계는 이기적이며 상대주의적인 시기이다. 삶을 욕구충족 과정으로
보며 욕구를 충족시키는 행동이 정당하다고 여긴다. 보통 일곱 살까지의 아이들은 첫
번째 및 두 번째 단계에 머문다. 세 번째 단계는 남의 칭찬을 받으려고 하며, 가정적
이고 남과의 공감을 중히 여긴다. 네번째 단계는 권리와 의무를 존중하고 도덕과 종교
의 질서를 가치있다고 여긴다. 열세 살 정도의 아이들은 세 번째 및 네 번째 단계에
자리잡는다. 다섯 번째 단계는 사회복지는 양심에 따라 행동하며 개인의 인격을 존중
한다. 일곱 번째 단계는 영원한 삶을 추구하며 인간과 우주의 통일을 위해서 노력한
다.
그러나 콜버그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세 살 정도의 수준에서 더이상 발달하
지 못하고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다섯번째, 여섯번째 및 일곱번째의 단계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콜버그의 말은 단지 심리학적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특
정한 사회를 놓고 볼 때, 일곱 살짜리 사회도 있고, 열세 살짜리 사회도 있으며 또 성
숙한 어른의 사회도 있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보면 우리 사회는 일곱 살도 채 되지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처벌을 피하고 상을 받으려고 하기는커녕, 처벌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거의 본능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을 부정하기 힘든 실정이다.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열세 살짜리 행동을 한다면 몰라도, 가장 많이 배
우고 가장 많이 가진 사람들이 대낮에 버젓이 일곱 살짜리보다도 못한 행동을 일삼는
것을 볼 때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3)
"가장 고귀한 것은 드물고 어렵다"고 말한 철학자가 있다. 사실 행복이란 우리들에
게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행복을 "가장 작은 점"이라고 말한 사람
이 있다. 행복이란 과거의 것도 아니며 미래의 것도 아니고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이다.
나의 보람있는 삶을 제외하면 행복이란 무의미하다. 돈이나 물질 그리고 권력이나
명예는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있어도 그것들 자체가 행복은 아니다. 그러나 현
재 우리들에게는 모든 것이 뒤집혀 있다. "착각은 자유"라고 하는 농담도 있지만, 실
은 착각이 삶을 무의미하게 한다. 참답게 성숙하지못한 인간, 곧 미숙한 아이들은 멋
대로 착각하여 끊임엇이 방황한다. 그러나 어른이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그러한
어른은 결코 성숙한 인격을 소유할 수 없다.
아이들은 인간과 사물의 가치를 혼동할 뿐만 아니라 외적인것에만 몰두한다. 아기들
을 보면, 아기들은 고유한 인격이라든가 삶의 가치 등에 관해서 아직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청소년은 자기 자신 속에 갇혀서 헤어날 줄 모르므로 이기주의에 물들
어 있다. 자신이 천재일지도 모른다든가 아니면 이 세상의 모든 고뇌는 자기만이 짊어
지고 있다는 등의 생각에 몰두했던 기억은 청소년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같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지금 이날까지 우리들은삶의 무거운 시련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
러나 현재 우리는성숙한 어른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 맛보았으므로 미숙한 아이의 의식
을 과감히 벗어던질 줄 아는 지혜와 용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시점에 와 있다.
또한 미숙한 아이의 의식을 버리고 성숙한 어른의 의식을 가지기 위해서는 사회구성
원 각자의 실존적 삶의 결단만이 요구된다.
청소년과 책
반복되는 매일
나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까지 독일에서 유학할당시, 그리고 최근 1년간
교환교수로 독일에서 생활할 때 특히 그곳의 청소년들을 유심히 살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독일의 김나지움(우리나라의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합친 형태)은 13학년까
지 있다. 보통수업은 아침 8시부터 오후 1시까지이고, 학생들은 퇴교하여 수영이나 자
전거를 즐기기도 하고, 부족한 과목을 혼자 보충하기도 하며, 학생에 따라서는 음악이
나 미술 등 취미 생활에 몰두하기도 한다.
독일의 청소년들은 학교나 가정에서 무엇보다도 대화를 중요시하는 습관이 몸에 배
어 있다. 대화라기보다 오히려 토론이라고 하느ㅓ 편이 나을 것이다.
유치원 아이들과 며칠을 같이 지낸 적이 있다. 물론 어른들이 계획표를 짜기는 하지
만, 유치원 아이들이 철저히 자신의 계획에 맞추어 생활하는 데에 놀라지 않을 수 없
었다. 아침 7시에 기상하여 침구를 정리하고 30분간 숲 속을 뛰기. 8시부터 식사. 물
론 아침 준비는 어른들이 하지만, 접시나 빵 그리고 우유 등을 나르는 것은 아이들이
하고 설거지도 아이들이 한다. 9시부터 10시까지 놀이와 노래. 10시부터 11시까지 토
론. 토론의 주제는 "부모가 우리를 때렸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엿다. 어린 아이들
이 어쩌면 저렇게 당당하게 온갖 근거를 끌어다 대며 지러있게 토론할까 하고 놀라움
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먼 독일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들의 청소년을 말하기 위해서 끌어냈을 뿐이다.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불쌍하다. 그들은 쓸데없이 시달리기 때문에 불쌍
하다. 그들은 소처럼 강요당하기 때문에 불쌍하다. 그들은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이
불안하기에 불쌍하다.
현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매일을 살아가는 인간의 특징을 일컬어 일상성이라
고 하였다. 일상성의 특징의 반복과 호기심 그리고 지껄임과 불안이다. 일상성은 곧
무의미함이다. 일상성은 다시 말해서 지루함이다.
현대의 실존철학자 야스퍼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무의미함과 지루함은 좌절과 절
망에서 절정에 달한다.
부모로부터 그리고 학교의 선생님들로부터 반복해서 들려오는 소리 "공부해라!"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지루함과 무의미함을 넘어서 좌절을 맛보게 한다.
근거없는 강요
요새 우리 부모들은 자녀에 대해서 대체로 두 가지 태도를 지니는 것 같다. 하나는
무관심이고 또 하나는 강요이다.
"네 인생은 네가 책임지는 것이야."
"부모 탓할 필요 없어. 네가 잘 되어도 네 탓이고 네가 못되어도 네 탓이지."
사실 어른들은 먹고 살기 바쁘고, 또 바쁘다 보니 고단하고 피곤해서 자녀들에게 관
심을 가지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지만 무관심한 부모와는 정반대로, 지나칠 정도로
자녀를 간섭하여, 특히 공부를 막무가내로 강요하는 부모가 의외로 많다.
"너는 밤낮 책상 앞에만 앉아 있으면 최고냐? 옆집 정민이를 보렴. 언제나 반에서 5
등은 하는데 어는 기껏해야 중간도 못하니 앞날이 원하다."
"이놈아, 과외선생한테 한 달에 나가는 돈이 얼만줄 알기나 하니? 또 학원에 갖다
바치는 돈이 얼만줄 알아?
공부를 그렇게 해가지고는 전문학교에도 들어가기 힘들겠다."
부모가 자식에게 대하여 가지는 관심은 당연한 것이고 따라서 자녀가 커서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 또한 당연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방법이 문제이다. 제아무리 바
쁘다고 할지라도 며칠에 한번, 아니 1주일에 한번쯤 부모와 자녀가 대화할 수 있는 시
간이 있다면 이처럼 근거없는 강요는 적어도 사라 질 수 있을 것이다.
쥐도 구석에 몰리면 상대를 문다고 한다. 우리 속담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는 말이 있다. 근거없는 강요는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고, 그 결과 청소년은 비뚤어진
길로 막가기 쉽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와 토론이 얼마나 소중한 삶의 보배인지는
제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삶의 기나 긴 여행길을 걸어가다가 가끔 멈추어 서서 '내가어디만큼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그리고 왜 여행을 떠났는지' 곰곰이 생각할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사람
은 언제나 대화와 토론에 참여할 줄 아는 자세를 가질 것이다.
불안한 미래
삶은 원래 불안에 물들어 있다. 새벽에 학교 가는 길을 나설 때부터 불안이 나를 감
싼다. 등교시간에 늦지는 않을지, 오늘 오후 학교 끝나고 정각 6시에 마드리드 제과점
에서 만나기로 찰떡같이 약속한 현정이가 정처럼 또 나를 바람맞게 하지나 않을지, 내
일부터 중간시험인데 수학시험이 너무 어렵지나 않을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부모들이 늘 말하는 미래가 더없이 불안하다. 반에서 10등을 못
하면 서울에 있는 대학은 아예 들어갈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하며, 좋지 않은 대학이나
전문대학을 나오면 인생은 망치는 것이라는 등의 말은 꼭 나를 두고 하는말 같고 그렇
다면 나는 그렇게 형편없는 인간이 될 미래를 가져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이 일고 그러
한 생각은 나를 극도로 심한 불안에 휩싸이게 한다.
수정처럼 투명하고 명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부분의 청소년에게는 현재는 물론
이고 미래도 불안이라는 물결로 다가온다. 자동차는 날로 늘어나고 도로는 혼잡하며,
날이 갈수록 대기오염이 심해지고, 하루하루 지옥 같은 입시 공포증이 청소년의 유체
와 영혼을 한꺼번에 짓누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소년들은 절규하면서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누구냐?"
"나는 왜 사는가?"
삶의 창조
청소년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사는지를 묻기 시작할 때 이미 지루함과 무
의미함의 사슬은 서서히 끊어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물음은 본래적인 삶을
향한 돌파구를 마련하여 주기 때문이다.
철학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 철학이라면 그것은 바로 '자
기 자신에 대한 탐구'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나 자신을 옳게 탐구할 때 나는 남을 알 수 있으며 그렇다면 다시 나와 남의 관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외와 역사 드리고 자연과 세계에 대한 탐구 및 앎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삼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청소년들이 삶의 무의미함과 지루함의 뜻을 옳게 파악할 때, 청소년들이 삶의 좌절
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자신의 의미를 물을 때 그들은 비로소 의미로 가득 찬 삶을 창
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돈과 권력과 명예는 겉치장이요,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지만 사람됨'은 결코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됨'을 제대로 갖춘 사람들이 사회를 이끌어
갈 때 사회는 사람다운 사람들에 의해서 구성될 것이다.
바람직한 삶, 살만한 사회는 자신을 탐구하는 사람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
청소년들이 단지 호기심이나 흥미삼아 철학책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삶의
무의미함을 돌파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좌절과 절망을 직시하고 타파하기 위해서
철학책을 접한다면 그러한 태도는 매우 긍정적이며 현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이비
철학책이 아니라 혼과 피로 쓰여진 철학책 이라면, 그러한 책은 청소년들에게 삶의 등
대 역할을 충분히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친구들이나 선배 또는 어른들과 충분
한 대화 내지 토른을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제목만 번지르르한 책을 택하
다 보면 다시 절망의 구렁으로 빠질 염려가 있다.
젊은날 삶의 긍지
나의 청소년 시절을 회상할 때 언뜻 떠오르는 것은 "청춘은 아름다워라"와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다"는 말이다.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청소년 시절을
회상해 보노라면 마음이 아련하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비슷하겠지만 나에게도 청소년 시절은 아름다움과 고생으로 점철되어 있
었다. 비록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경제적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빈곤하였지만 나의
청소년 시절은 꿈과 낭만이 넘칠 정도로 충만했었다. 그 당시와 오늘을 비교할 때 나
는 오늘날의 청소년들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맹목적으로 물질만능주의를 추구하는 도시화 속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을 바
라볼 때 미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삶의 위기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
다.
루소는 '에밀'에서 "인생의 초반 30년은 무엇을 했는지 모르고 지나가버리며, 나머
지 30년은 무엇인가를 해보기에는 너무 늦은 채로 흘러가 버린다"고 말하였다. 그렇지
만 한 실물의 경우, 씨와 싹이 얼마나 튼튼한가에 따라서 대체로 그 식물의 장래가 결
정되는 것과 마차가지로, 인간에게 있어서도 청소년 시절이 얼마나 알찬가에 따라서
그의 일생이 좌우되기 마련이라고 생각된다.
사실상 우리들 현대인은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매일을 반복해가며 무의
미하게 일상성에 물들어 살아가고 있다. 특히 오늘날 청소년들마저 일상성에 물들어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그지 없다.
청소년 시절은 꺼질 줄 모르는 활화산과도 같은 가능성과 잠재력으로 충문함에도 불
고하고 청소년들이 그 힘을 사용할줄 모르거나 아니면 전혀 그럿된 방향으로 사용한다
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삶의 손실이란 말인가?
한 그루의 과일 나무가 훌륭한 과일을 맺기 위해서는 긴 세월과 아울러 여러 가지
요소들이 곁들여지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적절한 양분과 물과 태양, 그리고 알맞은
기온이 필수적이다. 어떤 특정한 하나의 요소만이 갖추어져서는 안되고 모든 요소들이
고루고루 갖추어져야만 한다.
청소년에게도 마찬가지로 여러 요소가 적절히 갖추어져야만 뒷날 보람찬 삶이 기대될
것이다. 오늘날 획일적인 청소년의 삶을 바라보고 나의 청소년 시절을 회상할 때, 긍
정적인 생각보다 부정적인 생각이 훨씬 더 나를 지배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청소년 시절은 일반적으로 중.고등학교 시기에 해당된다. 나는 항구도시 인천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북에서 피난 나와서 부산에서 잠시 살다가 우연히 인
천에 정착하게 되어 국만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1950년대 내가 다녔던 중학교에는 피난민 자녀가 많았고 경제적으로는 대부분
곤궁한 처지였으므로 우리들에게는 가정보다는 학교 생활이 거의 전부였으며, 따라서
선생님들과 친구들로부터 받는 영향이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도 인천 중학교와 제물포 고등학교를 자랑스럽게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우선 철저한 수업이 우
선이었다. 시험도 무척이나 자주 보았다. 그 당시 선생님들 중 지금은 이미 세상을 떠
난 분도 계실 것이고 대부분은 은퇴하셨을 것이다. 한결같이 엄하고 철저하신 분들로
기억에 남아 있다.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과외라는 것이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도 당시
의 선생님들을 존경하는 이유는 첫째로, 그분들이 수업을 꼼꼼하고 알차게 했으며 수
업에 게을리 임하는 학생에게는 가혹하리만치 엄한 처벌을 내렸다는 점이다. 두번째
로, 그분들은 우리들에게 언제나 세상을 멀리 보고 넓게 살기를 진심으로 충고했다.
수업이 끝나면 나는 도서관에 가서 늦도록 이광수, 김동인, 이인직 등과 아울러 헤르
만 헤세, 지드 까뮈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내 기억에 현재 남아 있는 문학에 관한
대부분의 지식은 청소년기에 읽은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몇 푼 되지 않는 수업료이었지만 한 반에서 반 수 이상의 학생이
제때에 수업료를 내지 못하여 담임 선생님의 불호령과 회초리에 쫓겨서 수업료를 마련
하러 시간중에 집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지만 선생님들은 수업 시간에는 몹
시 엄했고 교무실에서나 운동장 또는 온실에서는 따스한 부모의 정을 우리들에게 듬뿍
나누어 주었다.
우리들은 한 달에 한번 꼭 소풍을 갔다. 그것은 당시 교장 선생님의 뜻에 따른 것이
었는데, 처음 몇 번은 신바람났지만 소풍이 거듭될수록 지루하고 짜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고 나니 인천 주변에 대하여 여러 가지 것들을 알게 외었고 또한 계절에
대한 감각도 어느 사이에 얻을 수 있었다.
또 매월 한 차례 시험을 치르고 나면, 전교 학생이 모인 조회에서 교장 선생님이 직
접 매 학년 12명씩 상금을 주었다. 일류 고등학교를 만들기 위하여 학생들에게 경쟁심
을 불러 일으키려고 한 시도라고 생각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좀 지나친 것으로 여
겨진다.
요사이 청쇼년들의 경우는 좀 다르겠지만, 나의 청소년 시절의 대부분은 학교생활에
의하여 좌우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지금도 추억으로 가장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클럽제도와 무감독 시험제도이다.
확실하게 기억되지는 않지만 중학교에서 고들학교를 진학 할 때 우리들은 따로 입학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중학교 3년간의 성적을 평균하여 6백명 중에서 2백명을 선발하
고, 나중에 다른 중학교 학생들은 따로 입학시험을 치르고 들어온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는 미리 선발된 2백명에게 10명 이내로 클럽을 구성하면 클럽을 짜맞추어 고
등학교의 반을 편성하여 주이었다.
당시 꿈과 낭만에 젖은 우리들 청소년은 저마다 멋진 클럽이름을 지어내느라고 고심
하였다. '등대', '희망', '클로버', '야생마', '백호'... 어떤 클럽은 10명이 꽉 찼고
어떤 클럽은 2명밖에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언 30년이 지난 지금도 대부분의
클럽회원은 변함없는 친밀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 것을 볼 ㄸ 그와 같은 클럽제도가 환
상적이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각 클럽은 저마다 특색이 있었다. 운동을 잘하는 클럽, 노래를 잘하는 클럽, 공부벌
레들끼리만 모인 클럽... 내가 우두머리로 이끌던 클럽은 '등대'였고 회원은 모두 10
명이었는데, 우리들은 등산이나 야영을 좋아했으며 운동과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
다. 한두 사람은 이미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나머지는 모두 사회에서 제 몫
들을 착실히 하고 있다.
물론 끼리끼리 모여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폭넓은 우정이 결여된다는 단점
도 없지는 않았지만 몇 명의 동료들 사이에서 진한 우정을 지속시키는 장점이 더 보람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중학교 시절에는 어떤 시험을 보든 감독 선생님이 들어왔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
학하면서부터 무감독 시험제도가 실시되었다. 처음에는 부작용이 조금 있었다. 누가
보아도 상관 없다는 식으로 책을 버젓이 꺼내놓고 답을 베끼는 학생도 있었고 거리낌
없이 남의 답안을 그대로 보고 쓰는 학생도 있었다. 그런 행위를 담임 선생님에게 고
자질하는 학생도 있었다. 학급 토론을 통해서 각자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도록 약속하
고 학기말에 가서 유급자가 생기면 두 번 정도 재시험을 통해서 낙제생을 구제하면서
부터는 무감독 시험제도가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오늘과 같은 경쟁사회에서는 무감독 시험제도란 거의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그리
고 그것이 과연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서 지금도 여전히 실시되고 있는지가 의심스럽
기도 하다. 그렇지만 내 기억에는 무감독
시험제도가 자랑스럽게 남아 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한 인간으로서의 '홀로서기'를
가능하게 했으며 한 개체로서의 긍지와 힘을 갖도록 해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의 동료들과 선생님들에게 감사하고 있는 것은 우선 철저한
수업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점진적으로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
다. 선생님들은 공부와 취미, 그리고 놀이를 엄밀히 구분하기를 가르쳤고 우리들도 그
렇게 하여 역할을 구분하는 것이 가치있고 보람있다는 것을 절실히 체험할 수 있었다.
나의 청소년 시절이 언제나 희망과 보람에 찬 것만은 아이었다. 우선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이 불만이었다. 그래서인지 차남인 나는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걸핏
하면 친구네 집에서 잠을 잤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나는 친구네
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은 꼭 집에 달려와서 먹고는 다시 학교로 달려갔다. 나만의 공
부방도 없었고 식구들이 북적거리는 것이 싫었으며 부모님의 잡안 걱정이 귀찮아서였
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쩌다가 공원 뒷산에 올라가 상급 학생과 한판 붙기도 했고 밤
거리에서 술집에 들러 막걸리 한잔 걸치고 거나하게 취해보기도 했으므로 사실 문제학
생이 될 소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클럽의 왕초 노릇을 해야 했고 집에서는
공부잘하는 둘째였기에 내 위치를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훨씬 더 나를 지배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도 후회되는 것은청소년 시절에 소위 그 흔한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예쁜 여학생
을 보면 가슴이 쿵쾅거렸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학교 가는 길에 마음에 점찍어
둔 여학생을 뒤따라 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너무 내성적이어서 였는지 한마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내이름도 겉봉에 쓰지 않고 몇 차례인가 짝사랑의 편지를 써본
적도 있다. 친구 따라서 교회에도 몇 차례 나간 일이 있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못하였
다. 자연스럽게 남녀가 만나서 서로 위하며 사랑을 건넬 수 있는 만남의 장이 우리 사
회에 건전하게 정착되었으면 하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이 가지고 있다.
청소년 시절 나의 희망은 소설가 아니면 화가였다. 당시 친구들 중 현재 중견화가가
된 사람들도 있고 문단에 등단한 사람도 있다. 나도 그들과 어울려 글도 써보고 그림
도 그렸다. 그러나 당시 나에게 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종교적인 분위기였던 것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님을 따라서 자주 교회에 나갔다. 나야
물론 건성으로 다녔고, 찬송가나 성경봉독에는 경건한 마음을 느꼈지만 노인들의 꿈지
럭거리는 행동과 노랫가락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도 평일에 시간 여유만 있으
면 잠시 빈 교회당에 들르는 것은 그 당시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친구네가 절에
다니기에 친구네를 따라서 관악산에 있는 절에도 가끔 가보았다. 절과 스님, 그리고
예불 모두가 낯선 것이었으나 후일 내가 불교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적어도 나
의 청소년 시절은 '고향'이 있었다고 자부한다. 좋은 친구, 훌륭한 선생님, 그리고 좌
절을 극복할수 있었던 나의 삶에 대한 긍지 등이 바로 나의 청소년 시절의 '고향'이었
다.
현대인은 고향을 상실한 채로 매일을 살아간다. 특히 청소년들은 오로지 출세를 위
한 입시의 노예가 되어 있다. 지금이야말로 어른들은 청소년들의 열린 삶을 위하여 스
스로 깨 닫고 보다 바람직한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청소년은 이 나
라의 주인이다"라는 당연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제6장 아름다움에 관하여
아름다움에 관하여
이씨 조선을 세운 이성계와 무학대사 사이에 오고 갔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두 사
람은 매우 막연한 사이였기에 이성계는 어느날 무학대사에게 대사님은 왜 못생긴 개처
럼 생겼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껄껄 웃으면서 이성계에게, 당신은
꼭 부처님처럼 생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자기도 역시 생긴 것
은 우락부락한데 어째서 대사님은 자기보고 부처님처럼 생겼다고 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무학대사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개 눈에는 개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
만 보인다고 답했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제 눈의 안경"이라는 말을 쓴다. 아름답고 조화로운 마음의 눈으로 사
물을 바라볼 때 비로소 아름다움을 느끼며 구성할 수 있다. 제아무리 조화롭고 멋진
산이나 강또는 그림이나 사람일지라도, 만일 우리들이 맑고 투명하며 아름답지 못한
마음의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결코 아름다움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것이든 모두 아름다울 수는 없다. 악취를 심하게 풍기는 오염된
개천이 아름다울 수 없으며 또한 생선회 갈을 마구 휘두르는 불량배의 소행이나 얼굴
이 아름다울 수도 없다. 아름다움이란, 우리의 마음과 대상이 티없이 순수하게 만날
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고귀한 선물이다.
고속버스나 기차에서 쉬지 않고 딱딱 요란한 소리를 내며 껌을 씹거나, 있는 대로
입을 크게 벌리고 낮잠 자는 여성을 두고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어스름
한 저녁 큰길가에서 곤드레 만드레 술에 취애서 가로수를 붙잡고 소변보는 신사라든가
또는 골목에서 죽는 소리를 내면서 꾸역꾸역 술을 토하는 대머리 중년신사를 아름답다
고 말할 수도 없다.
아름다움은 인간의 영혼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성실함과 노력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자연미와 예술적 미로 구분하는데, 예술적 미는 주로 인위적인 예
술품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또 우리는 자연미나 예술미와 상관없이 아름다움을 우아한
아름다움, 숭고한 아름다움, 해학의 아름다움, 비장한 아름다움, 그리고 추미, 즉 추
한 아름다움 등으로 구분해보기도 한다.
왜 이렇게 여러 가지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우연이다. 태어날 때부터 예쁘게 태어난 여성을 가리켜서 우리는 타고난 미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가장 인간적인 아름다움은 인간 스스로가 창조하는 아름다움이다. 인
간이 창조하는 아름다움은 예술에서 잘 나타나지만, 무엇보다도 우선 인간의 삶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스스로 노력하며 갈고 닦는 인간에게서는 신선한 인간미가 풍긴다. 그러한 인간은
인간다운 맛이 엇있다. 성실함과 노력과 결단이 뒤따르는 인간의 맛이야 말로 가장 아
름다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추한 것도 아름다운가
외모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운 여성이 있다면 그러한 여성은 참으로 아름다운 여성일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은 대체로 공평한 것 같다. 외모가 지나치게 예쁘면 꼭 그것에
걸맞는 짓을 하는 것이 사람인가 보다. 외모에만 지나치게 신경쓰는 여성은 마음을 닦
을 여유가 없고 또 거기까지 신경을 쓰지 못하기 쉬우므로 자칫하면 배치미인이 되기
안성맞춤이다.
예쁘고 고운 모습은 그것으로 그치고 말지만 마음의 성실함이 그것들에 가미되면 아
름다움으로 새롭게 구성된다. 우리들은 여러 가지 아름다움과 장엄한 아름다움을 충분
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추한 아름다움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짧은 핫 팬츠를 입고 전철 의자에 앉아 핫 팬츠가 자꾸 위로 아슬아슬하게 올라가는
것도 모르고 다리를 꼰 채 졸고 있는 젊은 여성의 모습은 추하다. 신사복을 점잖게 차
려입은 중ㅇ년남자가 길거리 아무 데나 가래침을 탁탁 내뱉는 모습 역시 추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추한 아름다움이란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길 만
도 하다.
우리는 대상과 마음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ㄸ 그 대상을 가리켜서 추하다고 말한다.
성형수술로 어색하게 쌍꺼풀 수술을 하고 코를 높인 여인이 짙은 화장을 한 모습은 추
하다 못해 역겹기까지 하다. 자기 정신을 잃고 돈바람과 정치바람에 미친듯이 돌아가
는 학생이나 교수나 경찰 또는 군인은 실로 추하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추한 아름다움에 대해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이 고르고 고른 부인이 천하에 둘도 없는 왕곰보라고 한다. 아마도 그 지방에
서 제일가는 추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은 성실하고 현명한 부인의 역할을 훌륭
히 수행하였다. 결국 그 여인은 자신의 추함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사람일 것이다.
그러한 여인에게서 우리는 추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신체의 회모 때문에 우리들 대부분은 남몰래 고민하는 경우가 많고 심한 경우에는
자살까지 생각할 수 있다. 알고 보면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완벽
하게 절대면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완벽하게 절대적인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오로지 자기만이 추하
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키가 작아서, 너무 뚱뚱하거나 말라서, 또
는 얼굴이 길어서, 코가 납작해서,
눈이 새우눈처럼 찢어져서 자신이 더없이 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성심 성의껏 자신의 영혼을 게을리하지 않고 닦아 나갈 ㄸ 우리는 누구나 추
함을 아름다움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추함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주어진 더없이 소중한 하늘의 선물임이 분명하다.
제7장 제혜에 대한 사랑
의심과 놀라움
"세월이 유수 처럼 지나간다"는 말이 있다. 살다 보면 시간이 매우 빨리 지나가버린
다는 말이다. 또 "젊은이는 늙기 쉽고 배움을 이루는 것은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런
가하면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간다"는 말도 있다. 이 모두 성실하고 알차게 살
지 않는다면 삶이란 허무하며 덧없이 지나가버린다는 것를 뜻한다.
젊은이는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단지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기 쉽다.
그러나 묘하게도 한 가지 쾌락이 오래 계속되면 그것은 불퇘감으로 변한다. 그래서 젊
은이는 또 다른 쾌락을 찾아 날아가고... 그러다 보면 이미 세월이 흐르고 나이들어
일생동안 한 일은 별로 없고 병들어 신음하게 된다. 사람이 사람다수 있는 것은 문제
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과감히 문제에 맞서서 그것을 해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날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로부터 도망갈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고유한 행동
으로부터도 도망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타율에 매우 익숙하여
있다.
국민학생으로부터 중.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부모가 자가용으로 학교까지 태워다 주
는 경우가 많다. 어려서부터 미술학원, 음악학원에 다녀야 하고 조금 커서 청소년이
되면 과외지도를 받고 입시학원에 나가고 과연 내가 내 인생을 사는지 부모님의 인생
을 살아가는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워진다.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보아도 상당 부분 타율이 지배하는 것을 알고있다. 부모의 보
호와 강요 속에 살다보니 장래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또 어떤 직업에 종사해야 할지
에 대한 생각마저 불투명하다. 부모의 권유와 점수에 쫓겨서 학과를 택하고 대학을 택
해서 어정쩡하게 대학에 들어간다.
결혼문제만 해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과연 결혼을 해야 할것인지 또는 일생 동안 혼
자 살 것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남들이 결혼하니까 또 부모가 하라고 하니까 얼떨결
에 결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취직의 경우도 다를 것 없다. 내가 일생 동안 일하며
봉사할 직업을 위하여 취직하기보다는 남보다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직장이라면 우선
들어가고 보자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지나침'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순간순간 무의미하게 단지 '지나침'으로서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
까?
나는 지금, 이곳에서 가연 자발적인 생각과 행동을 전개하고 있는가 아니면 오직 타
율에 의해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나의 생각과 행동의 자발성은 무엇일까? 그러한 자발성이 없을 때 나는 무엇인가?
만일 대다수의 인간이 자발성을 상실할 경우, 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숱하게 많은 물음들을 던지면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들의 근원적인 모습, 곧 자발적
인 인간상을 향하여 한걸음씩 접근하게 된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처음을 의심과 놀라움이라
고 하였다. 의심할 줄 모르는 자는 자신의 삶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를 어
떻게 해결할 것인지도 전혀 알지 못한다. 어떤 대상이나 문제에 대하여 의심하게 되면
의심과 아울러 의심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수없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의심을 해결했을 때 우리는 순수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수학문제를 풀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리 풀어보고 저리 풀어보아도 시
원한 답이 나오지 않다가 드디어 정확한 답을 얻었을 때의 기쁨은 문제를 풀어본 사람
만이 느깐다. 수학문제를 풀었다고 해서 배부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당장 경제
적 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문제를 주는 순간 우리는 순수한 놀라움(경탄)에 접하
고 이 놀라움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 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성상 알려고 한다"고 말하였다. 인간이면 누구나 대상
이나 문제에 대하여 일단 의심하게 되며 드러한 의심을 출발점으로 삼아 문제의식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궁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또 한편 사람은 일상성에 물들
어 스스로를 포기하고 타율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향이 있으므로 자신의 내면에 의심과
놀라움의 싹을 감춘채 매일매일 바쁜 삶에 이끌려 가기 쉽다. 의심과 놀라움이 현실에
서 실행되지 않는다면 인간과 사회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특히 1차원적 사회에서
는 의심과 놀라움이 드러나지 못하고 흔히 인간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경우가 많다.
독재자가 지배하는 사회는 1차원적이고 그러한 사회에서는 인간의 자발성을 일깨우
는 의심과 놀라움이 드러나지 못한다. 현대 산업사회 역시 1차원적 사회이고 돈과 기
수이 인간의 모든 현실을 대변하므로 이곳에서도 역시 의심과 놀라움은 제 기능을 마
음껏 발휘하기 힘들다.
현대의 사회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건전한 사회'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두 저서를 통해서 인간의 자유가 무엇인지, 자유를 어떻게 획득하여야 건전
한 사회를 형성할 수 있는지 호소력있게 자신의 견해를 전개하였다. 프롬에 의하면,
현대에 들어와서 사회와 산업 등이 인간을 대신해서 인간의 모든 일을 해주기 때문에
인간은 무력감에 빠지게 되었다. 현대인은 자신의 견해를 전개하였다. 프롬에 의하면,
현대에 들어와서 사회와 산업 등이 인간을 대신해서 인간의 모든 일을 해주기 때문에
인간은 무력감에 빠지게 되었다. 현대인은 자시의 힘과 결당에 의해서 어떤 일을 행하
는 자발적 행동이 이제는 너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인은 자유로부
터 도피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자유의 획득으로 방향 정환
할 때 인간은 참다운 인간이 될 수 있다.
확실히 인간의 창조적인 측면에서 문화가 성립할 수 있고 문화야말로 인간이 다른
생물과 다르가는 것을 지적해주는 유일한 표시들 중의 하나이다. 인간은 문화를 창조
하면서 자신의 인간다움을 창조한다. 인간은 단지 기계적인 문명만을 발명하는 존재를
넘어서서 정신적인 문화를 창조하기 때문에 "가치있는 삶"을 말할 자격이 있다. 만일
우리들이 쉬지 않고 생활에 유익하고 편리한 도구들만을 발명하여 생산한다면, 우리는
오직 기계적인 것만을 숭상하는 일면적인 의식을 소유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술
과 학문과 종교를 창조하고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안에서 사회
를 구성한다. 인간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우선 대상과 문제에 대해서 의심하
고 다음으로 문제 해결과 함께 놀라움(경탄)을 맛보기 때문이다.
사실 의심과 놀라움이 없는 삶이란 단순한 생명 연장 이외의 아무런 다름 의미도 지
니지 못할 것이다.
지식과 지혜
희랍말 '필로소피아'는 '필로스'와 '소피아'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말이다. 소피아는
지혜를, 그리고 필로스는 사랑을 뜻한다. 그러나까 '필로소피아'는 지혜에 대한 사랑
이다.
고대 동.서양의 학문에 대한 태도는 서로 엇비슷하긴 해도 고대 희랍에서 특히 보다
엄밀한 학문적 태도가 미리 성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대 희랍의 식인들은 사물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그리고 사물들이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또한 세계의
구성은 어떻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깊이 탐구하였다.
특히 플라톤 같은 철학자는 편견(그릇된 지식)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참다운 지식이
무엇인지 구분하려고 하였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변화하는 대상은 어떤 것으로서 어
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불변하는 참다운 것은 무엇인지에 관해서 탐구하였
다.
지식이란 우리의 아는 능력(인식능력)과 대상이 만나서 우리 안에 생기는 앎이다.
우리는 새로운 대상과 환경에 접하고 적응하면서 지식이 쌓이는 것을 경함한다.
지식이 무엇이고 어떻게 지식이 성립하느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입장이 있으나 철
학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입장들은 경험론과 합리론의 두 이론이다. 경험론은 17세기
영국에서 발전하였으며 이 입장을 대변하는 철학자들은 베이컨, 로크, 흄 등이다. 이
에 비하여 합리론은 마찬가지로 17세기 영국에서 발전하였으며 이 입장을 대변하는 철
학자들은 베이컨, 로크, 흄 등이다. 이에 비하여 합리론은 마찬가지로 17세기에 주로
대륙(독일, 불란서, 네덜란드)에서 발전하였고, 그 대변자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
이프니츠 등이다.
경험론과 합리론이 취하는 지식의 이론을 우리는 인식론이라고 부른다. 이들 두 경
향은 주로 "인간은 어떤 능력에 의해서 대상을 아는 것인지, 그러한 앎(지식)은 변하
는 지식인지"의 문제에 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경험론에서는 우리가 오직 감각경험에 의해서 대상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
대 흄 같은 철학자는 지각에 의해서 지식이 설립한다고 말한다. 지각은 두 가지로 이
루어진다. 우선 감각에 의해서 우리는 대상에 대한 생생한 인상을 가지게 된다. 이러
한 인상이 차차 희미해지면 소위 관념이 된다.
장미꽃의 예를 들어보자. 내가 눈으로 장미꽃을 보는 순간 나에게 직접 생기는 것은
장미꽃이라는 관념이 아니라 장미꽃의 모습이다. 제일 먼저 나에게 남는 것은 가시 달
린 초록빛 줄기와 잎, 그리고 검붉은 꽃잎들이다. 이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나에게 남는 것은 '장미꽃'이라는 관념이다.
좀더 간단히 말하면 1.나는 어떤 대상을 감각으로 대하여 그 대상에 대한 생생한 인
상(모습)을 얻게 되고 2.생생한 인상이 희미해지면 그 대상에 대한 관념을 가지게 되
며 관념은 바로 대상에 관한 나의 지식으로 성립한다. 흄에 의하면 우리들의 복잡한
지식도 모두 인상 및 관념의 획득과 마찬가지로 성립하며, 가장 복잡하고 추상적인 지
식은 기껏해야 관념들의 연합 또는 우리들의 습관에 의해서 얻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흄의 입장은 학문적으로 귀납범을 근거로 삼는다.
귀납법이란 오늘날 자연과학에서 사용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예컨대 수소원자 두
개와 산소원자 한 개가 화학적으로 합치면 물이 된다. 이 실험을 계속해서 결국 H2O라
는 식을 얻게 된다. 또는 개별적인 관찰에 의해서 일반적인 원리에 도달할 때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김씨가 죽었다. 이씨도 죽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결국 죽는다."
간단히 말해서 경험에 의해서 개별(특수) 사실들을 관찰, 실험하여 일반적인 결과
내지 원리를 추리할 때 그러한 방법을 귀납법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합리론은 경험론과 정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합리론의
아버지로 부리우는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는, 인간에게는 대상을 참답게 알 수 있는 능
력으로서 이성이 있다고 믿는다. 이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수학과 같이 불변하는 진
리를 알 수 있다. 자연현상도 멋대로 변화하며 오직 감각대상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며 자연의 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자연법칙 내지 자연의
원리가 있고 그것을 아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하여 이성적인 자아(나)가
가장 명료한 철학의 제1원리이고 이것으로부터 수학의 명제와 신의 존재가 불변하는
관념인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합리론자들이 보는 감각경험은 무엇인가?
합리론자들도 감각경험을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감각경험은 단지 불확실한 지식을 전달해준다고 보는 것이 합리론자들의 견해이다.
따라서 합리론자들은 경험론자들과 달리 대상에 대한 절대적 지식, 곧 진리를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합리론자들의 지식이론은 소위 연
역법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연역법은 일반적으로 수학이라든지 또는 신학이나 철학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학
문의 방법론이다. 일반적인 원리나 법칠을 근거로 삼고 그것을 개별 상태에 적용하는
것이 연역법의 방법이다.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신은 전지전능하여 만물을 창조하
였다고 한다면 자연은 물론이고 인간 역시 신의 창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
레스가 창안한 삼단논법에 의한 추리는 보텅 연역법에 의한 추리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연역추리를 볼수 있다. : 모든 삼각형은 세 변과 세 각을 가진다. 이 도형은 삼
각형이다. 그러므로 이 도형도 역시 세 변과 세 각을 가진다.
경험론의 지식이론과 합리론의 지식이론은 근세로부터 오늘까지 서로 대립되는 경향
을 보여왔지만, 독일 철학자 칸트와 같은 사람은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하여 지식이
론을 성립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가 하면 쇼펜하우어나 베르그송같은 철학자들은 경
험론과 합리론 모두를 거부하고 직관력에 의해서 직관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그
러한 지식만이 참답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이 상식의 차원에서 보면 우리는 경험과 아울러 이성에 의해서 지식을
획득하며, 반성과 비판에 의해서 지식의 잘못을 수정하면서 지식을 증대시켜 나간다.
그렇다면 지식은 무엇이고 지혜는 무엇일까? 이들 두 가지는 어떤 점에서 같고 또
어떤 점에서 서로 차이나는 것일까?
학문은(철학도 마찬가지이지만) 1차적으로 지식을 목적으로 삼는다. 우리들이 수학
을 배울 때 우선 목적으로 삼는 것은 수학적 지식이다. 그렇다면 지식이란 특정한 대
상에 대한 앎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생물학을 배울 때 우리가 목적으로
삼는 것으 생물세계에 관한 지식의 획득이다. 우리는 수학에 관한 지식이니 생물에 관
한 지식이니 하는 말을 써도 그것들에 대하여 지혜라는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지식은 우선 부분적인 앎이다. 우리는 기술에 대한 지식, 정치에 대한 지식, 경제에
대한 지식 등의 말을 자주 쓴다. 다음으로 지식은 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앎이다. 우
리가 어떤 대상에 대하여 특정한 앎을 가지는 것은 앎 그 자체로 만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앎을 실생활에 사용하려는 목적의식 때문이다. 따라서 지식은 대부분의 경우
유용성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쉽사리 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깊은 사고와 오랜 역사를 통한 성찰에 의해서, 변하지 않고 보편성을 지닌 앎을 얻으
려고 노력하여 왔다. 모든 학문들과 아울러 철학은 1차적으로 지식의 습득을 목적으로
삼았지만 근본적으로는 지혜의 획득을 목적으로 삼는다. 지식과 지혜를 딱 부러지게
한마디로 구분하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지식은 지혜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자에 나오는 백정의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장자에게 찾아와 도가 어떤 것인
지 물었다. 장자는 그 사람에게 백정 이야기를 해주었다.
젊은 백정이 푸줏간에서 처음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매일 주인에게 꾸지람을 들
으면서 비지땀을 흘렸다. 돼지나 소를 앞에 놓고 뼈에서부터 살을 발라내는데 수시로
칼이 무디어 졌고 벼에는 항상 살이 듬뿍 붙어 있었다. 젊은 백정은 그러기를 3년이나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여전히 불만투성이었다.
"이 사람아, 칼이 그렇게 자주 무디어지고 살과 뼈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면서 자
네가 어떻게 큰소리로 고기를 다룬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젊은이는 꾸중을 들으면서 그래도 열심히 일하였다. 그러기를 또 3년 이상 하였다.
이제 어느 정도는 고기 다루는데 자신감이 생겼다.
"주인님, 저도 이젠 이 정도면 고기를 제법 다루는 것 아닙니까?"
주인은 쳐다보지도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는 아직도 며칠에 한번씩은 칼을 가는 것을 내가 알고 있네. 아직 멀었어. 잔
소리 말고 고기나 다루게."
젊은이는 낙담하지 않고 기운을 내어 다시 열심히 일하였다. 젊은이도 이제 나이를
먹어 어느덧 중년이 되었다. 그 사이에 주인은 세상을 떠나고 중년이 된 젊은 백정이
주인자리를 물려받게 되었고 새 주인은 조수로 한 청년을 고용하였다.
새 주인은 10년이상 고기를 다루어 왔고 이제는 자신이 고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
을 까맣게 잊고 있을 때가 많았다. 조수 청년이 고기 다루는 주인을 바라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주인님, 주인님은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데 어쩌면 칼이 뼈에 부딪치는 소리가 전혀
나지 않습니까? 칼이 뼈와 살 사이를 교묘히 피해다니는 것 같습니다. 주인님은 고기
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마치 칼을 가지고 춤추는 것 같습니다. 주인님이 고기를 다루
면 칼이 무디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칼날이 더욱 예리해지고 번쩍이니 주인님이야
말로 고기의 도를 다 깨친
분이십니다."
물론 젊은 백정이 처음 푸줏간에서 일할 때는 돼지나 소의 해부학적 구조나 칼을 다
루는 방법 등에 대한 부분적인 지식을 충분히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다. 이러한
지식이 쌓이고 거기에다 세월이 흐르고 젊은 백정의 인내와 노력이 가미되어 돼지나
소와 한몸이 되어 칼춤이 가능했다고 불 수 있고 젊은 백정의 이와 같은 경지는 기히
지혜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지식과 지혜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 그리고 지식은
부분적인 앎이며 생활에 유용한 앎이 지만 지혜는 그러한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필로소피아'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철학
(필로소피아)의 1차적인 목적도 물론 지식의 습득이지만 근본적인 목적은 지혜의 획득
이다. 그러므로 철학의 좁은 의미는 지식에 있고 넓은 의미는 지혜에 있다고 말하 수
있다.
우리는 자주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다.
"사람은 올바른 인생관을 지니고 병확한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이때 인생관이니 세계관이니 하는 말은 인생에 대한 지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지혜
를 뜻한다. 인생이니 세계니 하는 것은 전체를 말한다. 전체에 대한 앎이 바로 지혜라
고 할 수 있다.
또 다르게 말하자면, 지식을 갈고 닦으면 지혜가 된다고 말 할 수도 있다. 불교에서
"돈오점수"라는 말을 쓴다. 돈오란 문득 깨닫는다는 뜻이요, 점수란 말 그대로 점진적
으로 또는 쉬지 않고 닦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거울을 한번 깨끗이 닦으면 그 거울이
언제나 깨끗하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사이에 거울을 얼룩지고 때와 먼지가
앉기 마련이다. 정성들여 쉬지 않고 닦아주어야만 거울은 깨끗함을 유지한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을 얻으면 그것은 쉽사리 잊혀진다. 그러나 성실하게 지
식을 돌보고 그 지식을 키워나가다 보면 부분적인 지식은 어느덧 전체를 포함하고, 인
생에 대하여 그리고 세계에 대하여 의미를 전달해주는 지혜로 변하는 것을 알 수 있
다.
우리는 왜 지식을 추구하는가? 1차적으로는 무지를 극복하고 실생활에 사용하기 위
해서 지식을 습득한다.
우리는 왜 지혜를 추구하는가? 인생과 세계에서 나의 위치를 확인하고 보다 명료하
고 풍요로운 인생관과 세계관을 소유함으로써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하여 지혜를 획
득하고자 한다.
합리적인 생각
인간은 다른 모든 식물이나 동물과 달라 자기 자신을 알고 발전시켜 나간다. 그러면
서 인간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참다움과 착함과 아름다움(진, 선, 미)
을 추구하고 결국 삶의 최고의 목적으로서 행복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일까? 오래 전부터 인간을
정의하는 여러가지 말이있다.
"인간은 행동할 줄 아는 존재이다."
"인간은 의심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식일 줄 아는 존재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인간은 도구를 제작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웃을 줄 아는 존재이다."
이 이외에도 인간이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말들을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어떤 말보다
인간의 톡징을 가장 잘 지적해주는 말은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라는 정의 일 것
이다.
인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성적이라는 것이므로 우리들은 혼란 속에서도 질서
를 파괴하고 진리를 밝히며 선과 악의 구분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드러낼 수 있다. 그
렇지만 인간은 충동과 감정도 가지고 있고 외부환경에 쉽사리 좌우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우리의 사고와 행동은 이성을 망각하고 비이성적이고도 충동적이기
쉬어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맹목적일 수 있기도 하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지나치게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으로 기운
과거와 현재의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쟁과 기근이 있었으
며 미신과 독단이 있었고 불의와 불평등이 있었다. 그러한 상황을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네로황제, 히틀러, 뭇솔리니, 스탈린... 등의 독제자가 마치 절대인간인 양 우상숭
배의 대상으로 군림했던 것은 인간의 이성이 충동에 의해서 억압당하고 망각되었던 사
실을 입증해준다. 어디 그뿐이랴? 수많은 후진국의 일반적인 양상으로서 군사정권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것 역시 이성을 은폐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
면에 숨어 있는 이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단지 이기적인 자기방어의 본능에 의해 움직
일 ㄸ, 미신의 노예가 되어 창조적인 자아를 망각하는 것 역시 비이성적인 현상이다.
인간이 비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때 나타나는 현상은 비합리적이며 비논리적인
혼란과 무질서이다.
우리는 자칫하면 이성적이라는 말과 수학적이라는 말을 똑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
다. 그러나 수학적이라는 말은 히성적인 면도 있긴 하지만 형식적인 면이 매우 강하
다. 그러므로 수학적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한 사람은 여유가 없고 좁은 형식에만 치우
치기 쉬운 경향이 있다. 이성적이라는 말은 전체와 부분을 동시에 조화롭게 통찰하는
의미를 가진다.
로마의 황제 네로는 로마시를 불태우면서 기쁨에 넘쳐 눈물 단지에 기쁨의 눈물을
담으려 하였다. 중국의 진시황제는 영원히 살기 위해서 신하들로 하여금 불로초를 구
해 오도록 하였다. 마르크스는 물질적 욕망충족이 행복의 척도라고 보고 공동의 생산
과 분배에 의하여 계급차별 없는 공산주의 사회라는 이상사회를 세우려고 하였다. 히
틀러는 게르만 민족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수백만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일본 역시 대 일본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지금도 도처의 후
진국에서는 자기 아니면 안된다는 사고에 젖은 군사독재자들이 백성을 가난과 공포의
늪에서 허덕이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고와 행동은 모두 비이성적이자 비합리적이
다.
만일 우리들의 개별적인 감정이나 충동을 확고한 신념으로 삼아 생각하고 행동할 경
우, 우리는 삶과 사회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을 전체로 착각함으로써 독단에 빠지
고 말 것이다.
우리들 주변에는 수많은 비합리적인 사고와 행동이 마치 정당한 가치를 가진 양 행
해지고 있다. 예컨대 나이라든가 돈이라든가 권력 등을 살펴보면 비합리적인 생각이
얼마나 우리들 사이에서 무의식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질서를 존중하고 지킬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정의를 손수 실천하는 사람이 사회 지
도층의 자리에 있어야 솔선수범아여 옳은 사회를 이끌어나갈 수 있습니다."
"이 사람아, 나이도 젊은 사람의 주장이 왜 그렇게 제멋대로인가? 이 사회는 전통이
있는 것이야. 제아무리 정의로운 사람이라도 우리 사회는 그런 사람이 높은 자리에서
일하기는 아직 빠르네. 아무래도 나이 먹은 사람이 여러 가지 인생과 사회 경험이 많
으니까 그런 사람이 지도층에 있어야 하네."
우리는 흔히 주변에서 이런 대화를 들을 수 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놈," "
어른을 몰라보는 친구," "젖비린내나는 아이 같은 놈"... 이렇듯 수없이 많은 말들 역
시 합리적인 생각을 담고 있지 못하다.
한 살이라도 더 많으면 무조건 존경받고 대접받으려는 풍토는 사실 한심한 노릇이
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어른이 존경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온경사회는 지극히
단순한 사회였다. 대가족제도에서 어른은 당연히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고 세월이 흐를
수록 가정일과 농사일에 대한 지식과 지혜가 쌓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과거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나이 먹었다고 컴퓨터에
관해서 더 많이 아는가? 나이 먹었다고 젊은 사람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리는가? 나이
먹었다고 해서 회사를 드 잘 경영하는가? 별다른 능력이 없이 나이만 먹으면 늙고 힘
없기 마련이다. 나이만 먹은 사람들은 늙고 힘이 없기 때문에 대접받기 위해서 절ㅁㄴ
이들에게 존경을 강요하는 것일까? "나이 값도 못한다"는 말이 있다. 나이 먹을수록
능력과 노력이 쌓여 간다면, 그러한 사람은 단순히 나이 때문만이 아니라 성숙한 한
인간으로서 누구에게나 존경 받을 것이다.
돈이나 권력도 나이와 크게 다를 것 없다. 단지 돈이나 권력만 가지고 존경받으려고
하고 또 그것들만을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합리적인 생각을 결여한 사람들
이다. 현재 우리사회에서 남녀문제는 과연 어떠한가? 남녀문제에 관해서도 우리들 대
부분은 확실한 근거없이 유교적 전통에 매달린 채 남존여비 사상에 물들어 있다.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니 집안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든가, 남자는 신체적으로 남자보다 연약하니까 여자는 특정한 직업에만 종사해야
하거나 아니면 남자와 함께 근무할 경우 남자보다 적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등의 사
고는 모두 비합리적인 사고임이 분명하다.
선진국에서는 공장이나 학교 또는 정치계나 경제계에서 남자보다 훨씬 더 탁월한 능
력을 발휘하며 일하고 있는 여성들이 얼마든지 있다.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사고는 우리들에게 질서가 무엇인지 그리고 정의와 평등이 무
엇인지 그리고 정의와 평등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다. 현재 널리 퍼져 이는 부정.부패
의 문제는 합리적 사고가 결여 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너무나도 명백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나와 내 핏줄만의 편안함을 생각하는 사고와 행동은 사회를 썩게 만드는 가
장 중요한 원인이다.
어떤 특정한 나라가 오직 자기 민족만을 생각하여 다른 나라에 대하여 테러를 자행
하고 심지어는 원자탄이나 수소탄마저 사용한다면 그 결과는 가고할 만한 것이 될 것
이다. 내 자식만 잘되라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식을 대학에 부정입학시키려는
부모, 그러한 행동에 가담하는 교육자들과 관리들 역시 합리적 사고와 행동이 무엇인
지 전혀 모르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비합리적 사고와 행동은 인간의 가치를 무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를 퇴보시킨다.
합리적 사고는 이성적 사고이자 논리적 사고이기도 하다. 다시말해서 그것은 질서있
는 생각이다. 합리적 사고를 결려한다면 우리는 공상과 착각의 홍수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공상과 착각은 비록 순간적으로는 우리에게 짜릿한 쾌감을 갖다줄지 몰라도 그
것이 지나면 우리는 환멸과 절망을 맛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는 본능적인
충동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며 아무런 문화도 창조할 수 없을 것이다.
질서있는 삶
합리적 생각 및 행동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질
서이다. 질서에 반대되는 개념들은 부질서, 혼란 등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질서'에 대하여 명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
다. 우리는 "자연과 하나가 된다."라든가 "인위적으로 행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함"(무
위자연) 등의 사상에 매우 친숙하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와 세계 그리고 나와
우주는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는 그와 같은 사고방식을 유일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부분과
전체를 동시에 통찰할 수 있는 사고를 요구한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사회도 아무렇게
나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과 겨울
이 차례로 온다. 만일 봄이 지나고 곧 겨울이 온다면 어떨까? 이런 말에 대해서는 어
느 누구든지 도대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마치 봄 다음에 곧 겨울이 오는 것과 같은 현상들이 너무나
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많은 사람들이 질서를 망각하거나 무시함으
로 인하여 사회혼란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교통의 무질서
무계획한 주택건설
일관성 없는 교육제도
경제와 정치의 부조리
멋대로인 상품가격
들쑥날쑥한 상품의 품질
방향을 상실한 가치관
이렇듯 질서를 망각하거나 무시하는데도 어떻게 우리들이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는
지, 어떻게 보면 신기하고 기적 같기만 하다. 하기야 10년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는 생
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사회에서 질서가 이루어지고 있는 속도가 너무 느리기 때문
에 모든 것이 질서 없는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만일 한 인간이 참답게 성숙한다면 그는 질서의시을 몸에 익힐 것이다. 짐승들은 본
능적으로 자연의 질서를 따른다. 얼마간의 젖먹이 시절이 지나 어미 옆에서 생존의 기
술을 익히면 적절한 때 누가 시키지 않아도새끼는 독립하여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
기 시작한다. 단지 인간만이 자연의 질서를 제대로 따르지 못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을 보면 지나치게 의존적인 면이 강하고 질서의식이 모자란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회구조 자체가 젊은이들오래도록 부모에게 의존하게 하는 후진성을 지니고 있
는 것이 사실이 어른들의 의식 역시 자발성이 약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측면
에서 사외 구성원 각자가 질서의식을 철저히 소유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어떤 음식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음식점은 비교적 장사가 잘 되는 편이
다. 그렇지만 주인은 어제나 불경기라서, 그리고 나가는 돈이 너무 많아서,세금이 너
무 많아서 손해만 본다고 투덜거리며 얼굴을 찌푸린다. 종업원들은 꼬치 꼬치 상세한
내용은 잘 몰라도 음식점의 이익은 꽤 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주인은 월
급도 올려주지 않고, 보너스도 지급하지 않으면서, 늘 밑진다고 불평만 한다. 이럴 경
우 종업원들은 주인을 불신하고 성실하게 일하지 않을 것이 너무나도 뻔하다.
어디 이런 일이 음식점에만 국한되겠는가? 회사나 학교, 더 나아가서는 정부의 상황
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구성원들각자가 질서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맡은 이에 성실할
때 비로소 구성원 서로간에 신뢰감이 싹틀 것이며 그때야말로 사회가 개방사회로 발전
할 여지를 가지게 될 것이다.
정의와 평등
요사이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정의와 인간의 평등을 부르짖고 있다. 정의와 평등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 이래로 인간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
한 것들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막상 정의가 무엇이냐 또는 평등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우리는 당장 답하기
어려움을 느낀다. 정의와 평등이 문제되는 것은 사회에서 부정과 부패 그리고 인간의
불평등이 널리 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현실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사회란 바로 질서있는 사회를 말한다. 질서있는 사회란 합리적인 사고가
실현되고 따라서 합리적 행동이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되는 사회를 말한다. 그러한 사
회에서는 인간의 평등이 가능하다.
불의가 판치고 정의가 설 곳을 상실할 때 우리는 당연히 인간성을 상실한다. 극도로
혼란한 사회를 보면 정의와 평등이 망각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독재국가는 물론
이고 저개발 국가들을 보면 그러한 곳에서는 정의와 평등이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부 특정 계급, 군인이나 독재자 또는 재벌이 모든 권력을 기미쥐고 있는 곳에
서는 정의의는 고사하고 평등도 무의미하다. 그러한 곳에서는 질서는 물론이고 조화로
운 사회라는 개념이 존립할 수 없다.
희랍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정의에 관하여 상세히 논하였다. 그는 정의를
최고의 덕으로 보았다. 플라톤에 의하면 가장 바람직한 국가(이상국가)는 질서와 조
화를 갖춘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상국가는
이상적 인간을 확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여러가지 덕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지혜와 용기와 절제, 이 세가지 덕이다. 지혜는 합리적
으로 전체를 생각하는 능력이요, 용기(또는 기개)는 어떤 일에 과감히 직면하거나 물
러날 줄 아는 의지의 힘이며, 절제는 생활의 씀씀이를 알맞게 조절하는 태도이다. 이
들 세 가지 덕을 조화롭게 갖출 때 한 인간은 의로운 인간이 된다는 것이 플라톤의 견
해이다.
이상국가 역시 인간의 경우와 다를 것이 없다. 플라톤은 국가를 구성하는 계급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본다. 그들은 각각 통치자, 무사 및 생산자이다. 국가가 이상국가이
기 위해서 통치자는 지혜를 가진 철인통치자라야 하고, 무사는 용기의 덕을 소유하여
야 하며 생산자는 절제의 덕을 가져야만 한다. 이렇게 세 계급들의 덕이 서로 잘 조화
되는 국가는 정의로운 국가이다.
우리가 덕만 놓고 본다면 지혜, 용기, 절제는 서로 각각 분리된 부분적인 덕임에 비
하여 정의는 이들 세 가지 덕을 통일한 덕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혜와 용기 및 절
제 중 한 가지 덕만 결여되어도 정의는 성립하지 않으며, 또한 세 가지 덕 중 한가지
만 그 정도가 미약하여도 정의는 의미를 상실한다.
지혜, 용기 및 절제는 각각 선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들은 부분적인 선이고 종합
적인 완전한 선은 정의가 아닐 수 없다.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통치자, 무사, 생산자
는 서로 상하의 관계가 분명하기 때문에 아직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현실적인 인간평등
사상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계급이 자신에게 알맞는 역할을 최선으로 행할 때 각각의 덕
이 실현되며, 각각의 덕이 통일될 때 국가의 정의가 실현된다고 하는 플라의 생각은
지극히 합리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정의란 어디까지나 질서와 조화를 전제로 할
때만 의미있다.
그러나 현대에 들이와서는 현실적인 사회를 떠나서 정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별 의
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정의론은 다분히 이상적이면서 관념적인 면
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개인의 정의이든 사회의 정의이든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관연 정의인가 하는 물음이 현대에 들어와서는 중요한 것으로 되었다.
예컨대 존 롤즈 같은 철학자는 분배의 정의를 가장 중요한 정의로 여긴다. 현대의
자본주의사회에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가장 큰 모순은 공평하지 못한 분배이다. 가진
자는 언제난 넘칠 정도로 가지게 되고 없는 자는 늘 가난에 쪼들리기 쉬운 경향이 있
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기 때문에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정치 교육 등 모든 면
에 있어서 없는 자는 어쩔 수 없이 불이익을 받으며 인간 이하의 생활을 견디지 않으
면 안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극소수에 달한다고는 하지만 오렌지족들의 형태는 가진 자의 횡포를 여실히 입증해
준다. 수천만원짜리 고급 자가용을 타고 몇만원 하는 저녁을 먹고 밤을 낮처럼 술과
춤과 여자에 묻혀 지내는 젊은이들이 있다면 이러한 상황은 확실히 사회적으로 분배가
잘못 된 현상의 결과임이 분명하다.
싼 땅을 사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땅값을 올려서 팔고 그렇게 해서 빈 돈으로
흥청망청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또한 사회분배의 모순이 크다는 사실을 명백히 입
증하여 준다. 그런가 하면 매우 가난한 집의 자녀나 아니면 고아 출신의 사람들이 직
면하고 있는 현실은 어떠한가? 비록 잠재적인 능력은 있다고 할지라도 등록금을 비롯
해서 하다못해 참고서 한 권 사기도 어려운 실정에서 어떻게 공정한 기회를 가질 수
있겠는가? 현재 사회의 각계 각층에 부정과 부패가 케케묵은 때처럼 끼어 있는 것은
공정한 분배에 대한 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인간성, 곧 인간다움을 발휘할 정치, 경재, 사회, 교육 등 각 분야의 기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돌아갈 때 비로소 사회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진다. 만일 모든 사
람들이 똑같이 생산한다고 한다면 그와 같은 사고방식은 단지 상상이나 공상에 그치고
만다.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고 또한 처한 상황이나 위치가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모
든 기회가 특정인들에게만 주어진다면 그러한 사회는 공정성을 상실한 사회다. 인간이
누구나 평등하다고 하는 것은 생긴 모습이나 가문 또는 재력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니라
각자의 '인격'을 보고 바로 인격이 평등하다는 것이다. 남녀평등에 있어서의 평등 역
시 남자의 인격이나 여자의 인격이나 모두 인간으로서 '자발적 존재'인 인격이 똑같다
는 말이다.
따라서 공정한 분배는 각 인간의 '인격'실현을 초점으로 삼아 이루어져야 할 것이
다.
우리 사회는 정의감에 대한 사고가 상당히 부족하며 이와 아울러 인간평등사상도 매
우 약하다. 그 원인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오랜 유교전통이 하나의 원인이다.
왕 중심이며 또한 양반 중심의 사회는 인간의 평등사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가문이 가
치의 기준이며 가문 좋은 것은 또한 옳은 것(정의)의 기준이기도 하다. 과거의 우리
사회에서는 불평등사상이 지배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유교에서도 인성과 인정
을 나누고 인성은 하늘과 닮은 것으로서 완전히 선하다고 하였으며 인정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고 하여 인간의 보편적인 본질을 해명하기도 하였다. 이점에서는
불평등사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사정은 전혀 달랐다. 현실적으로
특히 이조시대는 계급사상이 지배적이었다. 양반가문은 선과 정의의 기준으로 여겨졌
다.
정의와 평등에 대한 생각 및 행동이 우리에게 희미한 것에는 유교뿐만 아니라 일제
하의 식민지생활과 6`25가 또한 중요한 요인으로 잠복하여 있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
아래에서 목숨을 각오한 소수의 독립투사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선량한 백성들은 굴
욕적으로 일본인이 시키는 대로 하지않을 수 없었다. 항상 불안에 떨고 눈치를 보매
커다란 불이익을 보지 않을까 조바심하였다. 우리 백성은 원래 그렇게 눈치빠른 백성
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 눈치보기 시작했고 드디어는 내가 남보다 더 잘살
기 위해서 같은 백성끼리 밀고하고 확대하기까지에 이르렀다.
6`25를 돌이켜 볼 때 분명히 요구되는 것은, 6`25가 발생하게 된 원인을
우리들이 남김없이 파헤침으로써, 과연 우리 민족의 어떤 요인에 의해서 그처럼 불행
한 사건이 벌어졌는지 모든 것을 밝히는 일이다. 우리는 6`25를 전후하여 이승만 정권
과 그 이후 오랜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 불행한 삶을 이끌어 왔다. 일제 식민지시대
이래로 지금까지 우리는 한번도 냉정하고 철저하게 과거의 잘못을 걸러내지 않고 하루
하루를 흘려보냈기 때문에 아직도 여전히 정의와 평등이 구현된 사회를 맞이하지 못하
고 있다.
6`25 한 가지만 놓고 보아도 우리 민족의 자발적 의식이 전혀 결여된 결과 발생한
것이 6`25이다. 물론 세계 제2차 대전이후 국제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남한과 북한의 분단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완용등에 의해서
일본의 식민지로 들어갈 때 이미 우리 민족의 자발적인 의식이 성숙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8`15 해방과 함께 남북분단이 된 것에는 국제열강의 책임과 아울러 우리들
자신의 책임이 있다. 민족이 굳게 단결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소련이 자기
들 멋대로 남과 북을 쪼갤 수 있었다.
6`25는 비극 중의 비극이면서 어처구니없게도 우리 민족의 어리석음이 담긴 비극이
었다. 같은 민족끼리 원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나라들이 자기네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들 형제 보고 서로 싸우라고 하여 죽기 살기로 싸운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 6`25는 우
리에게 무엇을 남겨주었는가? 총과 칼 앞에서 단지 본능적으로 살아남는 것만을 가르
쳐 주었다. 6`25는 우리에게 모든 가치를 버리도록 했으며 정의와 평등마저 팽개치고
가능한 한 아부하거나 도망쳐서 그저 살아남는 기술만을 가르쳐 주었다. 일제 식민지
와 6`25를 거치면서 우리는 눈치가 빨라졌으며, 정의나 평등보다는 우선 남을 누르고,
나만 그리고 내 가족만 살아남는 기술을 체득하였다.
불교에 불각이 시각이고 시각이 본각이니 각이란 묘각이라는 말이 있다. 깨닫지 못
하기 때문에 깨닫기 시작하게 되고, 깨닫기 시작하면 근본적으로 깨달을 수 있으니 깨
달음이란 묘한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부정과 부패가 퍼져 있어서 생각있
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우리는 오랜 기간 정의와 평등에 대하여 희미하게
생각하고 행동하여 왔다. 그러나 이제 도처에서 그리고 각계 각층에서 정의와 평 등에
대한 갈구가 싹트고 있다.
정의와 평등의 여린 싹을 잘 키우기만 한다면 우리도 가까운 장래에 훌룡한 꽃과 열
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도 고구려, 신라시대에 민주주의의 싹을 키운 경
험이 있으며, 삼국시대와 고려 및 이조를 거치면서 찬란한 문화를 창조한 경험이 있
다. 그와 같은 능력을 바탕으로 사회 각 구성원이 정의와 평 등을 각성하고 현실적으
로 그것들을 구현하려는 의지만 강하다면, 비록 시간은 걸리더라도 우리도 더 이상 부
정과 부패를 용납하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 인간평등이 자연스러운 사회를 곧 창조하
게 될 것이다.
제8장 약속의 뜻
'너'와 '나'의 관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고 있을까?
인간은 결코 홀로 살 수 없으며 또한 홀로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는 사회와 상관없이 홀로 살았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난파선에서 꺼
내온 물건들을 사용하면서 그 물건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문명사회를 호흡하면서 살
았다. 종일토록 집안에 있는 여인네가 곱게 화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인은 혼자
있으면서도 타인을 의식하고 정성껏 곱게 화장한다.
우리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각자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사회를 구성하
고 그 안에서 각자가 맡은 유기적인 역할을 행한다. 인간은 사회를 형성한다. 사회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특징으로 삼는다. 예컨대 학교를 들어보자. 커다란 건물만 있
어서는 학교라고 할 수 없다. 선생과 학생과 직원이라는 '인간관계'가 성립할 때 비로
소 빈 껍질이 아닌, 알맹이가 가득 찬 학교가 성립할 수 있다. 크고 작은 기타 단체도
학교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바라는 궁극적인 상태는 어떤 것일까?
"당신이 삶에서 원하는 최고`최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 대하여 우리는
몇 가지 가능한 답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목적은 돈입니다. 현대사회는 경제가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따라서 돈만 있
으면 안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돈을 멸시하는 사고방식은 낡은 시대의 유물입니다.
"
"인생의 최고의 목적은 권력입니다. 권력만 있으면 돈뿐만 아니라 인간도 마듬대로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라는 궁극의 목적은 마음의 안정입니다. 돈이나 권력은 있다가도 없을 수
있으니 고통의 원인입니다. 따라서 돈이나 권력은 2차적인 것입니다. 마음의 안정만
있으면 무엇에도 흔들이지 않으니 고통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안정이란 너무 막연한 말입니다. 그런 막연한 것은 얻을 수 없습니다. 나의
최고의 목적은 화목한 가정입니다. 가족끼리 서로 이해하는 화목한 가정 이상으로 더
바랄것은 없다고 봅니다."
"나의 목적은 예술창작입니다. 내가 예술세계에 흠뻑 빠져서 나를 잊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경지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회봉사를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청소년을 선도함으로써 밝은 미
래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서로 입장이 다른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
간은 인간 서로간의 '관계'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또한 '행복'을 찾기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행복은 인간관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인간관
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관계는 무엇에 의하여 성립하는 것일까? 사회는 '우리들'에 의해서 구성
되고 '우리들'이란 '너'와 '나'를 말한다. 인간관계는 바로 '너'와 '나'의 관계이다.
'너'와 '나'는 바로 내면적인 약속과 외면적인 약속에 의하여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내면적인 약속은 인격에 의한 약속인 반면에 외면적인 약속은 자연적 및 사회적인
약속이다. 외면적인 약속은 인간을 구속시키지만 내면적인 약속은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만든다.
외면적인 약속
사람들의 생긴 모습이 천태만상이듯이 살아가는 방식도 역시 헤아릴 수 없이 각양각
색이다. 인간의 관계 또한 무수히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우리는
약속 속에서, 그것도 수없이 많은 약속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
은 이미 약속이다. 탄생은 자연적인 약속이다. 탄생은 이미 인간을 이 세상에서 살
아가도록 자연적으로 구속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부모형제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그것 역시 자연적인 약
속이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유아는 이름을 가져야 하고 출생신
고가 되어야 하고 어린이로 성장하면 학교에 가야 하고, 소년으로 그리고 청년으로 성
장하면서 온갖 약속의 홍수를 헤엄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이러한 모든 것은 사회적
인 약속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연적인 약속과 사회적인 약속은 겉으로 너무나도 분명하게 나
타나므로 그것은 외면적인 약속이고, 이에 반하여 이간의 자발적인 결단에 의하여 성
립하는 약속은 내면적인 약속이다. 우리는 누구나가 우선 수없이 많은 사회적 약속 속
에서 숨가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오늘도 학교나 직장에 때 맞추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한 달 후에는 동료나 상사의 결혼식에 참석해야 한다.
내일은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아야 한다.
어디 이와 같은 예들 뿐이랴. 명절이다, 성묘다, 생일이다, 기업이다... 사는 방식
자체가 약속일진대 어떻게 일일이 모든 형태의 약속을 열거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들은 현재 우리의 사회를 좌우하고 있는 몇 가지 약속을 분석
함으로써 보다 밝은 미래를 향한 길을 마련할 수 있다고 믿는다.
긴밀한 가족관계, 어른에 대한 공경 그리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것 등은 건전하고
긍정적인 약속의 형태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약속들이 너무나도 우리의
주변을 장식하고 있다.
부정적인 약속은 겉치레뿐인 인간관계를 가져오고 결국에 가서는 폐쇄된 사회를 만
들기 마련이다. 사회적인 약속이 극단적으로 굳어지게 되면 그것은 병든 사회 그리고
신음하는 삶을 초래한다.
돈을 벌기 위하여, 오직 돈만을 벌기 위하여 일하는 삶, 반드시 필요할 때 쓰지 않
고 절약만 하는 삶.
권력과 명예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삶, 자식과 가정마저 돌보지 않고 오로
지 권력과 명예만을 위하여 질주하는 삶.
자신의 쾌락만을 위하여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삶, 과거와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순간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
위에서 말한 삶들은 외면적, 형식적, 사회적인 약속 속에서 괴물과도 같은 거대한
겉치레를 지니지만 드디어는 인간을 질식시키고 만다. 외면적인 약속이 난무하면 인간
의 평등과 자유는 숨쉴 곳이 없다. 겉치레만 화려한 곳에는 약동하는 생명이 자리할
곳이 없다. 남들도 회사의 돈을 조금 빼내는대 나도 조금 빼낸다고 죄 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남들도 청탁을 하는데 나도 청탁한들 어떻겠는가, 남들도 가정교사를 몰래
두는데 나도 둔다고 무슨 이 있겠는가, 남들도 돈을 쓰고 대학엘 들어가는데 나도 그
렇게 한다고 나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러한 약속들은 말하자면 인간의 내면을 망각한, 흘러가는 무의미한 타율적인 삶을
장식한다. 타율에만 의존하여 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편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삶은
자유가 없다. 배부른 돼지는 살기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살겠다는 말이 있다. 살
찐 바보보다는, 가난하지만 생각하는 인간으로 살겠다는 말이다. 외면적인 약속에만
질질 끌려갈 때 삶은 비참해지고 타락해버린다. 형식적인 약속이 사회를 좌우하게 되
면 삶은 부패해버리고 인간성은 마비된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이 있다. 외면적인 약속,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 혀로만 하는
형식적인 약속이 난무하는 사회는 종말에 가서는 썩어버리고 만다. 정치난 사회가 그
리고 문화나 종교가 또는 경제가 개방되어 발전할 줄 모르고, 형식에 얽매어 꼼짝하지
못하고 고여 있기만 한다면, 정치도 사회도 경제도 종교도 그리고 인간도 세계도 모두
썩어버리고 만다. 형식적, 외면적인 약속만이 춤추는 사회는 썩은 냄새가 난다. 썩은
냄새는 인간의 영혼마저 부패시켜버린다.
무엇보다도, 청년이 외면적인 약속에만 매달릴 때 청년은 이미 청춘을 상실한다. 청
춘을 상실한 청년에게는 미래가 없다. 미래가 없는 청년은 허무를 배회하는 한 마리
짐승에 불과하다. 짐승은 단지 이기심과 지배욕에 물들어 자연적 약속, 사회적 약속을
더욱더 확고하게 함으로써 인간을 쇠사슬에 묶어 신음하게 만든다.
내면적인 약속의 꽃
인간이 인격을 가지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결단할 수 있
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결단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자
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율성은 내면적인 약속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
이다.
내면적인 약속에 의하여 인간은 변화시키며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지루한 삶, 속
박당한 삶을 생명력이 넘치는 삶으로 변화시키며 창조할 수 있는 힘은 바로 내면적인
약속에서 용솟음쳐 나온다. 내면적인 약속은 자기결단과 자기반성을 동반한다. 그러기
에 내면적인 약속에 성실한 인간은 전체의 환경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응시함으로써 "
우리는 어떤 약속 속에서 살아가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반성하며, 한걸음 더 나아
가서 "우리는 어떤 약속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을 깊이 음미할 수 있
다. 그러나 사회란 표면적인 형식과 창조적인 내용 두 가지를 모두 필요로 하므로 형
식적`외면적인 약속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단지 형식적인 약속은 어디까지나 내면적인
약속을 바탕으로 삼을 때라야만 바람직한 인간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 인간은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간이 목적이라는 것을 상실하지 말아야 인격을 유
지하며 도야할 수 있다. 결국 사회의 관습이라든가 법 등은 인간의 인격을 바탕으로
삼을 때, 즉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삼을 때 비로소 정의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가 혼란하고 미래가 불투명한 원인은 이디에 있는가? 그것은 외면적 약속만이
범람하고 그것의 뿌리가 되어야 할 내면적 약속이 꽃피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
기결단`자기반성에 의하여 내면적 약 속의 꽃을 피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때 비로소
바람직한 미래사회를 설계할 수 있고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제9장 정의로운 삶
삶과 사람다움
우리들 모두는 너나 할 것 없이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말 그
대로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어쩌다 시간이 나면 잠시 여행을 떠난다. 매연과 공해로
찌든 거대한 도시 서울을 떠난다는 생각만 해도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산내음
과 바다내음이 물씬 풍기는 해변을 걸어본다.
어부들이 작은 통통배 위에서 바삐 일손을 놀린다. 어부의 아낙들은 백사장에서 그
물을 손질하고 있다.
이 한가한 어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을 부지런히 살아가고 있다.
사람 북적대는 도심의 시장과 공장에도 그리고 또 농촌과 어촌에도 사람들은 끈질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잠시 눈을 감아본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풍요
로운 '사람다움'을 가슴과 가슴으로 느낄 수 없는 서글픔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이제 어는 곳에서도 어머니의 젖가슴과 보드랍고 따사로운 인정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나그네는 피로와 서글품으로 뒤법벅되어 무거운 발길을 힘없이 옮긴다. 지난
날의 향수를 달랜다. 산골 작은 마을에서도 서로 나눌 줄 알고 서로 위할 줄 알았던
지난날이 우리들에게 있었지만, 이제는 어디를 둘러보아도 풋풋하고 싱그러운 '사람다
움'을 찾아보기가 정말 힘들다.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너를, 그리고 남자가 여자를, 또 네가 나를,
여자가 남자를 우리 모두가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지 않으면 안될 때이다. 왜냐하면 인
간은 모두 동일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똑같은 '사람다움'을 가졌기 때문에 각자가 자신의 자랑스런 삶을 살
아갈 수 있다고 생각된다. 남녀노소, 가진 자, 못가진 자, 건강한 사람, 병든 사람,
잘생긴 자, 못생긴 자 우리 모두는 자기만의 고유한 '인격'을 가지고 있기에 누구든
보람찬 삶을 이끌어 갈 당당한 권리가 있다.
늙는다는 것
불란서의 계몽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그의 저서 '에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
한다. "인생의 초반 30년은 무엇을 했는지 모르게 지나간다. 그 이후 30년은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나간다. 나머지 30년은 무엇인가를 하기에는
너무 늙어 버렸다."
또 우리가 익히 알듯이 "소년이노학난성"이라는 말이 있다. 젊은이는 늙기는 쉽지만
학문을 성취하기란 어렵다는 뜻이다.
사실 유년기나 청소년 시절은 무엇을 어떻게 하며 보냈는지 모르게 그냥 흘러가버리
는 것만 같다. 젊음은 너무 힘차기에 늙는다는 것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젊음은 너
무 힘차지에 늙는다는 것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그러나 남자나 여자나 서른 살, 마
흔 살이 되면 늙는다는 것을 점점 더 절실히 실감하게 된다. 너도 나도 피부미용에
신경쓰고 테니스다, 볼링이다, 안간힘을 쓴다. 또 어떤 이들은 조깅이나 수영 또는 등
산으로 늙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추어 보려고 발버둥친다.
그러나 세월은 멈추어 서서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생물이기
에 늙음과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없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는 가끔 "사람은 늙으
면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늙으면 신체는 아름다움과 건강을 잃게 되고 정신력이 약
해져서 결국 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늙음과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 아름답게 늙고 멋있게
죽는 길이 바로 그 해결책이다. 노력하며 성실하게 사는 삶은 아름답게 늙는다. 자발
적이며 창조적인 삶은 아름다우며 그러한 삶의 종말은 멋있는 죽음이다.
즐거운 인생
식물이나 동물을 막론하고 모든 생물은 고통을 피하고 쾌감을 찾고자 한다. 인간의
경우도 다를 것이 없다. 사람들은 가난보다 부유함을 택하려고 하고 허기와 갈증보다
는 배부름과 아늑함을 택하려고 한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은 본능에 충실한 반면에 인간은 본능에 충실하지 못하므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인간의 뇌는 다른 동물들에 비하여 월등하게 발달하였지만 눈이
나 귀 또는 신체 각 부분의 능력은 다른 동물에 비하면 휠씬 떨어진다.
동물들은 자연법칙을 철저히 따르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인간을 가리켜서 "신과 짐승 사이의 다리니 또는 신과 짐승 사이의 밧줄"이라고 말했
다. 인간은 신도 될 수 있고 또 짐승도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
지는 것처럼 우리들 인간도 지나치게 약으면 엉뚱한 쾌락의 동굴에 갇혀서 그곳을 빠
져나올 줄 모른다. 오늘날 청소년을 위시하여 성인들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사람들이
알코올, 마약, 환각제를 통해서 즐거움을 찾으려고 한다. 일부 사람들은 땅투기, 아파
트투기를 통해서 많은 돈을 벌어서 즐거운 삶을 누리고자 한다.
말하자면 고통을 전혀 맛보지 않고 고스란히 알맹이로만 된 즐거움을 맛보고자 한
다. 그러나 그와 같은 즐거움은 순간적이며 환상적일 뿐이다. 삶의 온갖 고뇌를 체험
하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그 고통을 극복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즐거운 삶
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매일매일의 생활이 하도 짜증스럽고 각박해서 그런지 너나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재미있는 일과 즐거운 일을 찾아서 헤맨다.
새 친구를 사귀어 본다. 새 친구에게 혹시나 지금까지 내가 아는 친구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도 못할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 하고 큰 기대감을 가져본다. 처음 며칠간은
새 친구의 남다르고 색다른 점에 잔뜩 긴장하고 호기심을 가진다. 그러나 하루가 가
고, 이틀이 가고 새 친구에게서도 별 기발한 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허
전함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오래 사귄 친구도 늘 새 친구로 만날 수 있다. 나 자신이 늘 새로워지면 오
래 사귄 친구도 언제나 새롭고 싱싱하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있
다. 그렇다. 제아무리 무지개를 잡으려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도 무지개는 언제나
아득히 언덕 저 너머에 있어서 영영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지개는 과연 어
디에 있는 것일까? 무지개는 바로 우리들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마음 속깊
이 있기에 누구나 쉽사리 무지개를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참다운 재미와 즐
거움 역시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다. 제아무리 밖에서 허둥대며 즐거운 삶을 찾아도 그
곳에서 발견되는 것은 지극히 순간적인 즐거움뿐이다.
대추씨의 맛
내가 잘 알고 지내는 동료교수 한 분은 언제나 자기 부인의 건강 진단서를 가지고
다닌다. 그 부인은 또 남편의 진단서를 가지고 다닌다. 벌써 나이도50 중반이 넘은 사
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안타까운 마음을 잡을 수 없다. 진단서
의 내용은,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료교수는 부인의 진단서를 보여주
면서 자기가 얼마나 괴로운지 아무도 모를 거라고 하소연한다. 부인은 남편의 진단서
를 보이면서 눈물로 호소한다. 그러면서 서로 감사하고 헐뜯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처
럼 긴장하고 싸우며 산 것이 15년도 넘는다고 한다.
남의 머리카락에 붙은 겨는 보아도 자신의 머리카락에 붙은 커다란 검부러기는 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인가 보다. 하기야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사람들을 볼 경우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저 여자는 어떻게 탤런트가 되었지? 입
은 나오고 눈은 새우눈에다가 돼지코에다 잘도 생겨 먹었다." "저렇게 성깔있게 생기
고도 가정생활이 원만할까?" 모두 자기자신은 보지 못하고 남만 헐뜯는다.
하루에 세 번 반성하라는 말이 있다. 자신을 깊이 알 때 남의 장점을 많이 볼 수 있
으며 그 때 비로소 대추씨의 맛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대추씨 물고 10리 간다는 말
이 있다. 오래 오래 단맛이 나기 때문이다. 어디를 둘러보다도 삭막한 세상이다. 대추
씨의 맛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자신을 갈고 닦지 않으면 안될 때라고 여겨진다.
돈과 권력의 힘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과 친교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번쩍번쩍하는 외제 승용차를 타고 고급 음식점에 가서 돈을 물쓰듯 하면서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또 높은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아는 사람이 매우 어려
운 처지에 당해서 호소하면 쉽게쉽게 해결해주고, 어떤 때는 직장 문제도 가볍게 해결
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성서에 나오는 구절 하나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도 어렵다"는 말이 있다.
어디 부자만 그렇겠는가?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도 이 말이 해당될 것이다.
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이 있다. 돈 많고 권력 많은 사람은 실상
근심 걱정이 떠날 날이 없다. 불교에 서는 촛불을 불어서 끄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마음의 온갖 잡념을 없애버린다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쉬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갈고 닦는 사람만이 대추씨의 맛같이 오래오래 가도 잘
변하지 않는 단맛을 지닐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이 대추씨 맛처럼 은은
한 맛을 풍긴다면 우리의 삶도 한결 밝아질 것이다.
물으면서 살아가는 삶
요사이는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전혀 제대로 정신 차릴 틈도 없이 후딱후딱 지
나가버린다. 월요일인가 하면 또 월요일이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어떻게 지나가는
지조차 모르고 한 해를 넘기기도 한다.
아내도 비슷한 이야기를 가끔 한다. 아내는 아침에 일어났는가 하면 벌써 밤이고,
또 아침인가 하면 어느 사이에 밤이라고 하며, 왜 하루가 그리도 빨리 지나가는지 모
르겠다고 말한다.
소년 시절에 친구네 놀러가면 다람쥐가 있었다. 친구의 부모님이 취미 겸 부업 겸
해서 돼지도 두어 마리 키우고 닭도 몇 마리 키우고 곁다리로 새와 다람쥐도 키우고
있었다. 작고 가여운 다람쥐는 새장 같은 집에 갇혀 있었다. 나와 친구는 다람쥐에게
콩이나 좁쌀을 넣어주었다. 다람쥐는 겁이 잔뜩 난 작은 눈으로 우리를 힐끔 보다가
물레방아처럼 생긴 작은바퀴 속으로 잽싸게 들어가서 바퀴를 열심히 돌리는 것이었다.
그때는 다람쥐가 귀엽고 신통하게 바퀴를 잘 돌린다고 생각했지만, 조금 더 나이가
먹어서 그때 일을 생각해보고 사정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람쥐는 우리들이
무서워 바퀴 속으로 들어가서 죽을 힘을 다해서 도망치는 것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그때 친구네 집 다람쥐 이야기를 가끔 하면서 우리가 아마도 부부 다
람쥐인지도 모르겠다고 푸념을 털어놓았다. 삶이 고달프고 무서워서 마구 도망치면 바
퀴가 한번 굴러가고, 그러면 하루가 지나는 것 같다. 길고도 짧은 지난날을 돌이켜 보
면 정말 어리석게 바보처럼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내딴에는 나 나름대로의 고유한,
그리고 개성있는 삶을 가꾸고 또한 생동감 넘치는 인간이 되어 보자고 늘 다짐했건만
항상 남들이 하는 대로 삶의 바퀴를 무의식적으로 돌린 셈이 아닌가 하고 의심해본다.
지금 이 순간도 항상 새로운 나,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삶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
다. 또한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부단히 답을 찾는 삶을 꾸려나가자고 다짐한다.
물음이 없는 인간과 삶은 아무런 발전도 없다. 물음이 없는 인간은 삶에서 단지 방
관자이며 삶을 무의미하게 '지나쳐 버리는'한낱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 고대 희랍의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철학자는 "나는 나 자신을 탐구하였다"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들
대부분은 내가 무엇인지 그리고 세계가 무엇인지 아무런 물음도 제기하지 않고 그럭저
럭 한세상을 보내기 쉽다. 묻지 않으면 답도 나오지 않는다.
의심하면서 묻는 사람만이 삶의 오묘한 진리를 터득하고 감탄할 수 있다.
진지한 자세로 묻기 시작할 때 세상만사는 모두 수수께끼로 다가온다. 하나하나 답을
찾아나갈 때 수많은 수수께끼는 하나씩 풀려나가면서 우리들의 경탄을 자아낸다. 언제
나 물으면서 사는 삶만이 인생을 풍요롭게 해준다.
고스톱 인생
우리들의 생활에서 놀이만큼 중요한 것도 없을 것이다. 힘들게 일한 뒤 휴식을 취하
기 위해서, 그리고 또 다음의 일을 활기차게 하기 위한 준비단계로서의 놀이만큼 효과
적인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
가벼운 대화로 휴식을 취하는 것도 놀이일 수 있고 운동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아
니면 글씨를 쓰는 것도 넓게 보면 놀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인간과 민족의 모습은
고유한 놀이 문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놀이가 지나치면 결국 패가 망신하게
되고 심할 경우에는 나라자체가 혼란의 늪에 빠지게 된다.
어쩌다 아내와 함께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지방에 사는 장모님 댁에 들린다. 한두
번도 아니고 장모님 댁에 식구들이 모이면 밥상 물리기가 무섭게 화투판을 벌인다.
물론 도박판처럼 판이 큰 것은 아니고 점당 1백원짜리이다. 언제나 고스톱판을 벌이면
새벽 1시나 2시까지 가기가 예사이다. 내가 옆방에서 자다가 깨어 이제 서울로 가야
된다고 하면 아내와 장모님은 입을 맞추어 꼭 30분만 더 하겠노라고 하지만 30분이 1
시간으로, 또 2시간으로 연장된다. 아내나 장모님 그리고 동서나 처남에게 밤낮 똑같
은 짓이 뭐 그렇게 재미있어서, 모이기만 하면 고스톱이냐고 물으면 다 제 나름대로의
의견이 있다. 아내는 돈 잃고 따는 것이 재미있다고 한다. 장모님은 할것도 없이 심심
하니 고스톱이나 치는 거라고 한다. 동서는 오랜만에 식구들이 모였으니 화기애애하게
한판 벌이는 것이라고 한다. 처남댁은 다들 같이 모여 떠들고 소리 지르고 웃으면 얼
마나 좋으냐고 한다.
놀이도 생산직이며 창조적인 것이 많지만 내가 보기에 고스톱은 전혀 비생산적인 것
같다. 화투는 일제 식민지 때 일본의 중산층 이하에서 즐기던 놀음을 일본인들이 한국
인들에게 널리 알려주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화투나 치고 낄낄거리면서 민족이니 독립
이니 등은 아예 생각도 말라는 뜻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고스톱에서 쓰는 말은 몇
가지를 빼고는 모두 일본말이다. 은연중에 일본에 대한 사대주의에 물들게 된다. 또
화투는 바둑이나 장기와는 달리 너무 단순한 놀이여서 거기에 내가 돈이 붙지 않으면
흥미가 없다.
단순한 놀이이므로 고스톱은 비생산적이고, 내가 돈이 붙으니 무의식중에 투기심리
를 조정한다. 아마도 복부인이나 투기꾼들은 고스톱에 이력이 난 사람들일 것이다.
텔레비전의 비생산적인 일일연속극과 마찬가지로 고스톱 역시 우리의 삶에 거의 도
움을 주지 못한다.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의 대화와 토론을 차단시킬 뿐만 아니라 현
실에 대한 비판의식마저 마비시키는 것이 고스톱인 것 같다.
우리사회에서는 사람끼리 정겨운 대화를 나누면서 삶을 보다 더 풍요롭게 해주고 현
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키워줄 수 있는 놀이문화가 절실히 요구된다.
가난도 죄인가
우리 속담에 "가난은 나라도 구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에는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들어 있
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가난이란 그만큼 헤어나기 어렵다는 뜻도 그 말 안에 들어 있
다.
6`25를 겪은 사람들은 전쟁과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잘 안다. 전쟁이 일어
나면 극소수의 사람들을 빼놓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에 시달리게 된다. 배고픔은
인간을 짐승의 상태로 전락시킨다. 6`25가 끝나고 서울 수복이 된 후 사람들이 살아가
던 모습을 돌이켜 보면 지금도 참담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 시장바닥에서 남들이 깎아 버린 참외껍질을 주어 먹던 생각
이 난다.
늘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고 쌀밥을 마음놓고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학교에
서 소풍갈 때도 꽁보리밥에 오랜만에 깨소금을 뿌려가지고 가서 맛있게 먹었다. 흰 고
무신이나 운동화는 꿈에도 신어볼 생각을 못했다. 검정 고무신도 아껴서 신었고 그것
잉 구멍나면 다시 땜질해서 신었다.
너도 나도 모두 가난하기 때문에 하루 일해서 하루 먹고 사는 것이 바빴고, 조금이
라도 잘 살아보려고 모두 입을 악물고 주린 배를 참으며 살아갔다. 모두가 가난하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이제 6`25전쟁이 끝난 지 40년도 더 지났다. 지금은 그 당시와는 상황이 너무나도
많이 달라졌다. 재벌도 생기고 중산층도 있고 저소득층이나 빈민층도 있다. 현재 우리
는 선진국의 대열에 끼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이 그렇
게 쉬운일은 아닌가 보다. 우리들은 아직도 사회의 각계 각층이 서로 깊이 공감하여
협력할 줄 아는 의식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어떤 사람은 "가난도 타고난다"라고 말한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든가
"가난도 타고난다"는 말은 가진 자가 여전히 가진 자로 남아 있으려고 하는 변명이면
서, 또 못가진 자가 좌절한 상태에서 내뱉는 절망의 소리이기도 하다.
가진 자가 사회제도를 통해서 못 가진 자로 하여금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또 못 가진 자는 최대한 노력에 의하여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성실하게 노력한다면
우리에게도 바람직한 사회보장제도가 점차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궁극적으로 사회의 모순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절실히 깨달을 때 비로소 사회 각 계층의 공감과 협력이 꽃필수 있을 것이
다.
부자가 결코 자랑이 아니며 또한 가난은 결코 죄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애쓰
고 함께 노력하는 사회가 된다면 우리 각자는 사회의 공정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
이다. 사회의 공정함과 정의로움이 현실적으로 확립된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힘에서 가
난을 극복할 방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화와 비판정신
남녀평등과 인간평등
나는 우리들 대부분이 가정과 직장에서 생동감 넘치는 대화에 익숙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해본다. 매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많은 수의 남편들이 늦게까지 술 마시고 자정 전후 집에 돌아가서 마치 하숙생처럼
잠이나 자고 다시 일찍 출근한다. 많은 수의 아내들은 언제 보아도 비슷비슷한 텔레비
전의 일일연속극 앞에서 시간을 떼우거나, 틈나면 친구들과 어울려 고스톱판을 벌인
다.
저녁 한 끼라도 식구가 모두 둘러 않아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며 대화할 수 있는 가
정이 있다면 그 가정은 아마도 화목한 가정일 것이다.
강의를 하다가 학생들을 죽 둘러보고 의문이 있거나 또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학생은 말해보라고 하면 모두 꿀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을 고집한다. 학생들이 제대로
알고 있는지 아닌지 궁금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대화가 없이 자란 결과, 사람들은 대개 극단적인 두 가지 경향
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하나는, 나는 별 생각 없으니 듣기만 하겠다는 경향인 것 같
다. 또 하나는, 나는 내 멋대로 할 테니 떠들든지 말든지 멋대로 하라고 하는 경향인
것 같다.
한 인간이 개성있는 인간으로 성장하면 그는 충분히 대화할 줄 알 것이다.그러나 우
리들의 가정을 보면, 아직 아이들을 개성있게 키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이를
무조건 윽박지르고 기를 죽여 놓거나 아니면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오냐 오냐 하면서
무엇이든지 들어 주어서 그야말로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로 키우고 있다. 그 아이들
이 크면 맹종하거나 아니면 무조건 반항하기 쉽다.
어떤 사태의 전체를 충분히 파악하고 장점과 단점을 예리하게 통찰하여 사태를 개선
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을 바로 비판정신이다. 비판정신은 인간과 사회를 발전시키
기 때문에 아무 것이나 무조건 반대하는 비과는 질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만일 우리들
이 비판정신을 착실히 배워나간다면 우리앞에 산더미같이 쌓인 문제를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 불평등이다. 이것의 뿌리는 남녀차별에 있다
고 생각한다. 남자가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한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월
등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이 자연적으로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한 나라가 얼
마나 선진국인가 하는 것은 그 나라에 남녀평등이 얼마만큼 잘 보장되어 있는가를 보
면 잘 알 수 있다.
인간이면 어느 누구든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 그러나 대화와 비판정신이 없다며 행
복하게 살고자 하는 소망은 한낱 공상이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태어나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대화난 비판정신을 잃지 않고 그것들로 삶과 사회를 장식한다면 우리들은 조
금씩 열린 삶과 열린 사회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숙명의 노예인가
참 이상한 일이다. 우리의 지나간 역사를 훑어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자유라든가 평
등에 대한 생각을 찾아볼 수 없다.
양반은 태어나면서부터 전답과 노비를 물려받는다. 특히 이씨조선시대를 볼 것 같으
면 노비는 평생 노비이고 그 자식도 노비이다.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잘들 살아왔다.
남자와 여자의 차별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이었다. 남자가 이
혼 당하는 것은 보기 드물고 이혼 당하는 쪽은 언제나 거의 여자였다. 이혼이라기보다
는 오히려 소박당하고 쫓겨나는 숙명을 감수해야 하는 편은 항상 여자였다.
소위 칠출삼불거라는 명분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여자들을 억압하였다. 시부모를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것, 자식 없는 것, 음란, 질투, 고질병, 말 많은 것, 절도 등은
시가로부터 여자들이 쫓겨나는 일곱 가지 조건이었다.
세상 참 많이 달라졌다.
그래도 여전히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그리고 남녀의 차별이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
고 우리의 내면 의식에 남아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은 그다지 반가운 일일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거야. 사람이란 다 자기 운명을 타고나는 법이지. 제아무리 뛰어 보
아야 벼룩이요, 부처님 손안의 손오공이지 별수 있나?"
한편으로 삶의 숙명을 비난하고 한탄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숙명에 외경심을 가지
고 복종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왜 우리에게는 인간이 자유롭다는 생각이 없었을까?
왜 우리는 인간이 평등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우리는 인간의 자발성에 눈뜨지 못했던 것일까?
왜 우리는 숙명의 쇠사슬을 과감히 끊어버릴 수 없었을까?
우선 우리는 인간과 자연의 합일사상 속에 젖어서 살아왔기 때문에 삶을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거역하여 산을 허물고 바다를 메운다는 것
은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인간의 자발성을 깨달을
여기가 없었을 것이다.
나무는 나무이고 풀은 풀이듯이 양반은 양반이고 노비는 노비였다.
다음으로, 유교의 형식주의로부터 인간의 평등이 도외시되었다. 유교에서 하늘은 완
전한 것이고 사람은 불완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성인과 군자는
하늘의 이치를 깨달은 완전한 인간에 속한다.
핏줄로 대를 잇는 임금과 양반출신 신하 그리고 평민과 노비는 각각 다른 인간일 수
밖에 없다. 인간차별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공자나 맹자 또는 율곡이나 퇴계가 생각한 성인과 군자는 분명히 남자였을 것이다.
만일 공자에게 여자도 성인이나 군자가 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면 그의 대답은 뻔했을
것이다.
인간차별은 부차적으로 남존여비라는 남녀차별을 마련하였다. 지금도 대다수의 남자
들 그리고 상당수의 여자들이 "여자는 남자에게 절대로 순종하고 복종하여야 한다"는
숙명의 소리를 명한 눈으로 매일같이 염불을 왼다.
한심한 일이다.
윤기나는 입술로 인간평등, 남녀평등을 지껄이지만 인간차별, 남녀차별은 암세포보
다 더 무섭게 우리의 대뇌에 요지부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만 그럴까? 나는 대통령이라는 말만 들으면 공연히 주눅이 들고 절대권을 휘두르
는 왕을 연상한다. 우리 나라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으면 몸이 오그라들고 무서운 생각
이 든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 출신 미국 대통령은 별 뜻도 없지만 친근한 느낌이 든다.
서독의 전 대통령과 한자리에 앉아 점심을 먹을 때도 그가 왕이라기보다는 너그러운
할아버지로 보였다.
내 정신상태가 뭔가 잘못된 탓일까?
대학생 때였다. 근엄한 대학원장이 있었다.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기 힘들었다. 어느
날 대변이 급했던 나는 교직원용 화장실 문을 냅다 열어 젖혔다. 대학원장이 일을 보
고 있었다. 기막힌 몰골이었다.
언젠가 주민등록증을 분실하여 신고하러 동네 파출소에 들렀다. 파출소장인 듯한 친
구가 신문을 좍 펴들고 두 다리는 책상 위에 아주 편한 자세로 올려놓고 있었다.
"주민증 분실신고 차 들렀습니다. 처리를 부탁합니다."
그 친구는 신문에 가린 얼굴을 내밀 생각도 하지 않고
"김순경, 이거 알아서 처리해."
그 친구는 자기가 사또라도 되는 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숙명의 노예인가?
참 많이 변해가고 있다.
사람은 너나 나나 대개 비슷비슷하다. 석가나 공자나, 너나 나나 비슷비슷하다. 사
람은 다 슬픔에 울고 기쁨에 웃으며 소망과 희망을 가지고 자신의 소중한 삶을 가꾸고
자 하는 면에서는 평등하다.
우리는 높은 사람의 인격은 고귀하고 낮은 사람의 인격은 하찮다는 숙명 속에서 살
아왔다. 또 남자의 인격이 여자의 인격보다 높다는 숙명 속에서 살아왔다.
우물안 개구리는 자기가 개구리가 아니고 왕이라고 착각한다. 개구리가 우물을 빠져
나와 뒷다리가 땡길 정도로 들과 산을 헤매고 나면 그는 자신이 개구리라는 것을 알
것이다.
백성이 대통령을 사랑하고 대통령이 백성을 존경한다면 그런 사회는 열린 사회이다.
사원이 사장을 감싸고 사장이 사원을 신뢰하면 그런 회사는 앞길이 탄탄하다. 남편과
아내가 하늘을 버리고 서로 땅이 된다면 그런 가정은 큰소리가 적다.
우리는 태어나고 죽기에 숙명의 노예이지만 내면의 자유와 자발성에 의하여 자연을
변형시키며 인간의 평등을 실현시킬 수 있으므로 숙명의 주인이기도 하다.
숙명을 타파하고 극복할 줄 아는 자만이 삶의 진한 뜻을 맛볼 권리가 있다.
제 10장 너 자신을 알라
나는 누구일까
중.고등학교 시절 가장 마음을 괴롭히는 문제들 중의 하나는 "내가 과연 누구이며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사춘기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해당한다. 신체적으로는 너무 갑
작스레 성장하며 미처 익숙하기도 전에 몸의 변화가 놀랄 만하게 다가온다. 신체의 성
장에 비하여 정신은 미처 신체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당황과 불안 그리고 심지어
는 좌절과 절망에 휩싸이기 쉬운 시기가 바로 중.고등학교 시절의 사춘기이다.
도대체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고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하기도 어렵다. 공부에 대한
불안감, 부모님의 기대와 꾸중, 선생님의 지나친 기돼와 요구, 이성친구에 대한 겉잡
을 수 없는 호기심과 애정... 이렇게 허다하게 많은 문제들은 사춘기의 청소년에게 "
나는 과연 무엇이며 누구인가?"를 강하게 묻게 하고 여기에 대한 답을 전혀 찾지 못할
때,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까지 시도하는 청소년들이 있다.
좋아하는 음악에 몰두하려 해도 순간순간 불안해서 편한 자세로 음악을 접하기도 힘
들다. 신문광고를 보고 평소 읽고 싶던 소설을 사서 읽으려고 하면 부모님의 "공부는
하지 않고 소설책만 읽으면 장차 무엇이 되겠니?"라는 엄한 꾸지람이 싫어 처음 몇 장
들치다 집어던지고 만다.
어디 그뿐인가? 여드름이 한층 더 고민거리를 안겨다 준다. 과일을 많이 먹어본다,
비누를 바꾸어본다, 참다 못해서 약국에 가서 여드름약을 사다 발라 보지만 하루 이틀
간만 효과 있는 듯하다가 더 심해지기만 한다. 부모님은 속도 모르고 "시간이 지나면
얼굴이 깨끗해지니 신경 쓸 필요 전혀 없다."라고 만 하지, 죽고만 싶은 심정은 알아
주지 않는다. 교회에 열심히 나가면서 점찍어 놓은 여자 친구 또는 남자 친구에게 수
단 방법모두 동원하여 접근하려 해도 왠지 나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고 다른 아이들하
고만 어울린다.
성적이 시원치 않다는 부모님의 꾸지람과 걱정을 더 이상 듣지 않으려고, 아니 나
자신이 요것밖에 되지 못하는가 하고 울화통이 터져서 시험 때만 되면 거의 날밤을 새
어 시험을 치르지만 결과는 마냥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나는 무엇일까?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나는 어째서 매사가 불확실하고 게다가 아무것에도 자신감이 없는
것일까?"
괴로운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저토록 엄하게 나를 야단치는
것은 내가 그분들의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고개 든다. 아예
집을 뛰쳐나가면 부모님을 걱정시키지 않아도 되고 또 내가 부모님 밑에서 고민할 필
요도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꼬리 문다. 그렇지만 하루 이틀은 어딘가에서 머문
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날을 어디에서 어떻게 떠돌 수 있단 말인가?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이 있다. 다른 학생들은 전혀 고민하지 않고, 아니 고
민한다 하더라도 적게 잠깐 고민하고 오직 나만 방황하며 고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날 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다 비슷하기 마련이다.
제아무리 예쁜 소녀라도 미운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청소년은 한창 자라는 나이이
기 때문에 꿈과 환상에 사로 잡히기 쉽다. 따라서 현재 자신의 행동을 정확히 바라보
기 힘들며 또는 장래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도 예리하게 통찰하지 못한다. 청소년들이
방황하면서 "내가 무엇이고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
니고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가장 근본적인 것이
다. 그러기에 희랍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하였고, 불교에서는
"꿈을 깨어나서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원래 뜻은 촛불을 불어서 끈다는 것이다. 촛불은 삶이며 자
아요, 생각에 해당한다. 촛불은 타면서 모든 것들을 생기게 하고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만든다. 촛불을 불어서 끄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있다. 모두 엇비슷하다는 이야기이다. 고등학교 때 반에
서 늘 꼴찌만 하는 "깝데기"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2학년에서 3학년 올라갈
때 낙제를 했지만 낙제생 구제시험에 붙어서 겨우 진급할 수 있었다. 고3이 되자 "깝
데기"는 눈에 불을 켜고 책에 달라붙었다. 3학년말이 되자 "깝데기"는 상위권에 들었
고 드디어는 일류대학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이 예만 보더라도 "매사가 마음먹기에 달
렸다."는 말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눈을 들어 좀더 먼 곳을 보자.
눈을 감고 좀더 깊은 곳을 통찰해보자.
매일매일을 바쁘게 살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지내노라면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도 던지지 못하고 참으로 무가치한 인생을 보내기 쉽다. 적어도 "내가 누구이고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고민할 줄 알 때 정년 내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싹
트기 시작할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들은 어떤 낯선 것을 대할 때 우선 불안감에 휩싸인다. 처음 자전거를 배우거나
수영을 배우는 학생들의 경우, 해본 일이 없으니까 아예 애초부터 포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몇 차례 넘어지면서 자전거를 타거나 또는 허우적거리고 물을 먹으면서
수영해보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곧 자아란 살아가면서 틀이 잡히고 일정한 형태를 가지는 것이지, 태어나면서부
터 불변하는 것으로 정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나는 어느 가문에서 일정한 부모
에게서 태어났다. 그러나 태어난 후 나는 물리적, 사회적, 문화^5,23^역사적으로 많은
것을 흡수하고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나 자신을 형성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누구든지 모자라고 불완전한 나를 탓하면서 완전한 인간상을
생각하고 자신을 그것에 맞추려고 한다. 그러나 완전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만일 완전한 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들의 생각 안에 이상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이상은 우리들에게 힘을 주며 현재의 나를 그곳으로 향하게 하
고 또한 그러한 이상에 따라서 나를 끊임없이 커나가게 해준다.
하기야 완전한 나를 실현 가능하다고 보았고, 더 나아가서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본 철학자들도 있다. 성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였다. 의심하는 주체가 있으니까 의심하는 것이고
따라서 의심하는 주체는 바로 나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불란서의 근세철학자로 합
리론자인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였다. 데카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명석
판명한 관념으로서의 자아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그래야만 보편 .필연적인 학문과 진
리가 성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문장은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가장 확
실한 명제이다. 데카르트는 이 명제를 얻기 위해서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의심
한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태도는 방법적 회의하고 일컬어진다.
이 세상에는 무조건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즉 의심하기 위해서 의심한
다. 고대 희랍의 궤변철학자(소피스트)들은 인간이 대상을 알 수 있는 것은 감각을 통
해서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보니 감각으로 아는 것은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궤변철
학자들은 회의론에 빠진다. 또한 극단적인 경험론자들도 회의론에 빠지는 경향이 있
다. 감각경험에 의해서 유일하게 대상을 지각한다면 감각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변하
기 때문에 확실하고도 보편적인 지식은 얻을 수 없다. 데카르트의 의심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으로서 그것은 확실하고 보편적인 지식 내지 관념을 얻지 위한 방법적 의심
인 것이다. 그는 우선 감각을 의심한다.
비 개인 날 보는 먼 산과, 흐린 날 우리가 보는 먼 산은 떨어진 거리가 서로 다르게
보인다. 또 방바닥의 딱딱함도 어떤 때는 심하게 딱딱하게 느껴지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그다지 딱딱하지 않게 느껴진다. 감각은 확실한 지식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데카르트는 다음으로 꿈을 의심한다. 꿈에서 우리는 나비도 되고 곰도 되며 어려운
시험문제를 척척 풀기도 한다. 그러나 깨고 나면 그것은 말 그대로 한낱 허망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이어서 수학을 의심한다. 우리는 2+2=4라고 확신한다. 그렇지만
데카르트는 나쁜 귀신이 있어서 2+2=5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를 속여서 2+2=4라고
그릇되게 믿도록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수학마저 의심하였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의심하고 있는 사실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다는 생각에 도달하
여, 의심하고 있으면 의심하는 주체가 확실히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의심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존
재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
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명제가 되었다.
오랫동안 데카르트식의 자아의 확실성이 지지 되어 왔으나 현대에 와서는 프로이트
와 같은 정신분석학자에 의해서 자아란, 수시로 현실에 적응하고 또한 변화하는 것이
라는 전혀 다른 견해가 대두되었다. 즉 자아란 정신의 덩어리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의식적인 초자아와 원초아 및 자아로 구성된다. 초자아는 외디푸스 콤플렉스 및 양
심이며 원초아는 가장 본능적인 충동이고, 자아는 이들을 바탕으로 표면에서 성립하는
의식이다. 말하자면 전통 철학에서 주장하던 자아는 프로이트에게 있어서는 단지 껍질
에 불과하고 오히려 그 밑에 은폐되어 있는 초자아와 원초아가 가장 근본적인 정신이
며 그것은 보편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전혀 충동적인 생명의 힘이자 죽음의
힘으로서 항상 꿈틀거린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자아)에 관해서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나'는 우리들
각자의 주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삶의 여로와 아울러 2변형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까지나 우리들 각자를 인간답게 만드는 주체이다.
자아는 생각하고 느끼며 판단하는 주체이다. 물론 절대적이며 완전한 자아란 현실에
는 없고 그것은 단지 이상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러한 이상을 향하여 쉬지
않고 자아를 갈고 닦을 때 비로소 인격체로서의 자아를 소유할 수 있다. 사람이 짐승
과 다른 것은 그가 인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식
어렸을 때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고집 센 친구 어머니는 언제나 부지런히 일을 하
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빗자루, 맷돌, 주걱 등이 모두 낡아서 제 모습이 아니
었는데도 친구 어머니는 그것들을 그냥 상용하고 있었다. 언젠가 나는 보다 못해서 말
을 꺼냈다.
"맷돌 손잡이가 헐렁거리는데 제가 좀 고쳐드릴게요." 친구 어머니는 오히려 화를
냈다. "얘야, 누군 그것을 모르는 줄 아니? 나도 고집이 있어. 손잡이가 빠져서 달아
날 때까지 그대로 쓸 거다. 누가 이기는지 보라지."
우리의 삶은 수없이 많은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문제를 해결하
고자 한다. 지금 우리들은 정치인들의 재산공개파문 및 부정입학, 무사안일주의와 공
무원의 비리문제 등으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들 험난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서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문제의식이다. 단지 일
상적인 의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문제해결보다 오히려 습관적인 고집만을
내세우게된다. 요사이 주변을 둘러보면 너도나도 모두가 참다운 삶을 망각하고 살아가
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우정도 사랑도 찾아보기 힘들
게 되었다.
땅투기, 아파트투기 등으로 떼돈 번 사람들이 번질거리는 차를 몰고 거드럭거리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을 적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그들을 뒤쫓아 가느라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이러한 풍토에서 정치인들의 재산공개파문 및 부장입학, 무사안일주의와 공무원의
비리문제 등이 우리들을 짓누르고 있다. 만일 우리들 각자가 참다운 문제의식을 꽃피
울 수 있다면 이들 문제는 점차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이며 습관적인 의식으로 이 문제
들을 대한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어둠과 파멸뿐이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돈 싫어하는 사람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선 돈을 벌어야 돼. 있는 사
람들은 다 그렇게 해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닌가?" "남들도 모두 그렇게 사는데 당신 혼
자서 정의와 평등을 찾아서 어쩌자는 것이지? 권력이나 돈이 없으면 뭐니뭐니 해다 사
람은 비참한 법이야."
가끔 인간의 문명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퇴보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된
다. 점점 사람들은 본능적인 욕망충족만을 뒤쫓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일찍이 누군가
가 "인간은 인간에게 대하여 늑대이고 만인은 만인의 적"이라고 말했던 것일까?
문명은 인격의 평등과 자유를 바탕으로 삼을 때만 발전할 수 있다. 어떤 문제를 대
하든 간에 평등과 자유를 깊이 새겨볼 줄 아는 정신은 곧 문제의식이다.
솔직히 말해서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우리에게는 문제의식이 희박하였다. 이제 점차
로 우리들 각자는 평등과 자유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맛보기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길
은 멀다. 사업가와 노동자, 정치인가 학생, 남성과 여성은 여전히 서로 선을 그어 놓
고 인간 각자가 평등하며 자유롭다는 엄연한 진실은 외면하고 있다.
나 아니면 안된다는 식의 사고 방식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독재는 더 악한 독재를 낳고 폭력은 더 격한 폭력을 가져온다. 인간의 평등과 자유
를 바탕으로 삼는 끈질긴 대화와 토론만이 문제의 점진적 해결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
일 한 열쇠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참다운 문제의식은 평등과 자유를 바탕으로 삼기 때문에 그것은 문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종합적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미래지향적이다. 우리들은 중
국, 일본, 미국, 구라파 등 멀고 가까운 곳을 냉철히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앞으로 어디에 있을 것인가를 명백히 통찰하여야 한
다. 이제 우리는 허다한 고뇌의 날들을 보내고 소중한 문제의식의 싹을 고이 키우고
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너 자신을 알라
우리는 흔히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그노티 세 아우톤"라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를 자신의 중요한 철학적 문제로 알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이 말은 그가 아테네에 있는 델피신전에 갔을 때 그곳의 무당으로부
터 들은 신탁이었다. 신탁이란 무녀를 통해서 발언되는 신의 말을 일컫는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 플라톤이나 또는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체계
적인 철학자는 아니다. 그는 사회가 혼란하고 윤리적으로 타락한 시대에 그러한 타락
과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출세와 재물에 치우치는 궤변철학자들(소피스트들)에 대항하
여, 옳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대화 통해서 알리고자 한 철인 이었다.
당시 소피스트들은 확실한 것이란 없고 모든 것이 의심된다는 극단적인 말까지 하면
서도 자기들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 오만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항상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그것은 결국 "너 자신을 알라"는 말과 밀접
한 관계를 가진다.
소크라테스는 작고 똥똥한 몸매에 들창코였다고 한다. 그는 길거리에서 젊은이들과
거리낌없이 대화하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그는 언제나 묻는 입장이었으며 한 번도 자
신이 어떤 문제에 대하여 확정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대화형식
이 바로 소크라테스와 젊은이의 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 젊은이는 정의에 대해서 잘 알고 있겠지?
젊은이: 물론이지요. 강한 사람이 행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따라야 하니까
그것은 언제나 정의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강한 자는 사람일까 아닐까?
젊은이: 그것을 말씀이라고 합니까? 강한 자도 역시 사람이지요.
소크라테스: 나는 세상에 정의가 있는가 하면, 불의도 있다고 생각하네. 이 두 가지
를 구분하여야 할 것이네. 만일 강한자도 사람이라면, 사람은 누구나 옳게 행동할 수
도 있고 나쁘게 행동할 수도 있겠지?
젊은이: 그야 물론이지요.
소크라테스: 만일 어떤 사람이 옳게 행동하면 그것은 정의일 테고 옳지 않게, 곧 나
쁘게(악하게) 행동하면 그것은 불의이겠지?
젊은이: 옳은 말씀입니다.
소크라테스: 강한 자가 옳게 행동하면 그것은 마땅히 정의이겠지만, 강한 자도 사람
이니 만큼 악하게 행동했을 때 그것도 역시 정의일까?
젊은이: 그것은 불의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자네가 처음에 강한자가 행하는 모든 것이 정의라고 한 말은
어떻게 되는가?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아테네의 등애(쇠파리)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아테네 젊은
이들의 무지를 깨우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늪에서 잠자거나 허우적거리는 젊은이들을 마치 등애처럼 날카롭게 쏘아댐으로써 그들
을 무지로부터 몰아내어 참다운 지식을 얻게 하고자 하였다.
흔히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방법을 반어법과 산파술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를 흔들면서 젊은이가 알고 있는 것을 털어놓게 한다. 그러면
서 그는 젊은이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젊은이가 스스로 자신의 주장에 반대되는 입장
으로 옮아가게끔 한다. 앞의 짤막한 대화에서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를 잘 알 수
있다.
이 말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로 하여금 허
세와 거짓으로 가득 찬 지식, 즉 무지의 상태를 벗어나서 순수한 영혼의 상태로 돌아
가게 한다는 뜻을 지닌다. 기독교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을 하
고 불교에서 "마음을 비우라"라는 말을 하는데 이 모두 헛된 것을 버리라는 뜻으로 해
석해도 좋다.
산파술이란 긍정적으로 참다운 자기 자신의 지식을 찾는 방법을 말한다. 반어법은
헛된 지식으로서의 무지를 깨뜨리는 부정적 방법이었다. 그러나 산파술에 의해서 젊은
이는 참다운 자기의 세계를 되찾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의 어머니는 산파였다. 산파
는 자기 자신이 아기를 출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산모를 도와줄 뿐이고 아기를 산출
하는 사람은 산모 자신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산파에, 그리고 젊은이를 산모에, 또 한 참다운 지식을 아기에
비유하였다. 모든 헛된 지식을 파괴한 다음에 참답게 얻는 지식은 바로 산파술에 의해
서 얻어지는 것이니 만큼 소크라테스는 젊은이가 마치 산모가 아기를 낳는 것처럼, 자
신 안에서 스스로 참다운 앎을 산출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소크라테스는 궤변철학자들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태도에 대항하여 "나는 내 자신
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을 안다."고 주장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여러 궤변철학자들
의 시기심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의 음모에 의하여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제자들이 도피할 길을 다 마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한 마음으로 독을 마시고 일생
을 마쳤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우선 우리들의 마음이 헛된 것으로 가득 차 있음
을 직시하게 하며, 다음으로는 참다운 지식, 참다운 자아를 형성하여야 바람직한 인
간, 바람직한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넓은 뜻을 안고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어둡고 혼란하기만 하다. 국민학교, 중^5,23^고등학교는 입시학원이나 다를 것
없고 대학은 취직학원 같은 인상을 준다.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며 금전으로 해결되
지 않는 것이 없다는 믿음이 사람들의 영혼을 질식시키고 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것인지
를 알라는 말이다. 더 나아가서 내가 왜,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알라는 것이기도 하
다. 우선 나의 적성과 나의 능력 그리고 나의 사람됨을 철저히 알 때, 나 자신을 적극
적으로 변화시키고 개발시킬 수 있으며 아울러 가치있는 삶을 설계할 수 있다.
희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통 속의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어느 날 대낮 등불을
켜들고 아테네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어떤이가 그에게 왜 대낮에 등불을
켜고 돌아다니냐고 물으니 그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등불을 들고 다닌다"고 답하였
다.
현재 우리들 중 너무 많은 사람이 나를 버리고 가면을 뒤집어쓰고 그것을 서로 '나'
라고 주장한다. 사실 가면이 너무 두껍고 무겁기 때문에 그리고 또 너무 꽉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한꺼번에 벗어 던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너 자신을 알
라"라는 말의 뜻을 두고두고 새긴다면 점차로 가면을 벗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
을 것이다.
우리들 각자가 참다운 자아를 찾기 시작할 때, 지식과 윤리가 빛나는 문화의 꽃이
우리 앞에 만개할 날이 올 것이다.
제 11장 자유를 향한 도전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1)
구속을 싫어하면서도 구속을 따뜻하게 여기고 그 안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 사람인지
도 모른다. 오래 전에 신문지상에 났던 기사가 생각난다. 수없이 감옥에 드나든 사람
이 출옥을 해서 갈 곳이 없으니까 다시 감옥으로 찾아와서 감옥살이를 하겠다고 청했
다고 한다.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먹고 하고 싶은 일은 물론이요, 잠도 편하게 자
지 못하는 감옥의 구속을 찾아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사람은 정신의 역사가 짧을 때 구속을 오히려 더 좋아한다. 아니, 정신의 역사가 짧
을 때 사람은 구속과 자유를 분간하지 못하고 현상유지에만 급급하다.
어떤 양반이 여러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양반은 개화의 물결에 눈을 떠서 성
실한 종들을 차례로 풀어서 평민을 만들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종들은 한사코 양
반 밑에서 소처럼 일하면서 따뜻한 밥과 잠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주인에게 계속 있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고 한다. 이 모두 정신의 역사가 짧은 탓이 아니고 무엇이겠
는가? 이 모두 사람다움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등의 노랫가락은 모두
대강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반영한다. "이 나머지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요?"라고 물으
면 "대강 해두게"라는 답을 듣기가 십상이다. 대강
살아서 무슨 보람이 있겠으며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대강이 나 망치고 가정 망치고,
나라까지 망쳐버린다.
2, 30년 전까지만 해도 시골에 가면 머슴들이 있었다. 개중에 똑똑한 머슴들은 제
실속과 꿍꿍이를 다 차릴 줄 알았지만 상당수는 아예 주인집의 종과 하나도 다를 것
없이 보였다. 머슴과 주인식구들이 마치 한가족처럼 별 탈 없이 어울려 사는 것을 보
면 정겹고 흐뭇하기는 해도 사람다운 삶의 면모를 찾기는 힘들다. 머슴과 주인의 관계
는 자유가 아니라 '자연'을 나타내주기 때문이다. 머슴은 불평 불만이 있어도 있는 날
까지는 꾹 참고 황소처럼 일하고, 주인은 "황소같이 착하고 부지런한 우리 집 갑돌이
놈 장가갈 때 한밑천 두둑이 얹어 주마"라고 큰소리 치면서 나온 배를 두들기며 히죽
거린다. 주인은 주인대로 머슴도 한 인간이고 자기도 한 인간이라는 의식이 없고 , 머
슴이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하여 머슴이 무한히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
기를 바란다. 머슴도 다를 것이 없다. 머슴 역시 주인 잘 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라고 생각한다. 머슴과 주인이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것은 좋다. 그러나 머슴과 주인
모두 개성과 사고를 가지고, 나아가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
각한다면 정신의 역사는 잠자는 자연으로 그치고 만다.
(2)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라는 말은 '대강' 살아가자는 말이고, '대강' 살아
가자는 말은 '그저 좋게 좋게' 살아가자는 것을 말한다. 우리들 주변의 도로나 건물을
보면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의 흔적을 뚜렷하게 찾을 수 있다. 몇 년 전 귀
국하여 대학에 취직하자 연구실을 받았다.
연구실에 앉아 며칠을 지내려니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원래 연구실을 목적으로 지
은 건물이 아니라서 그런지 유리창문이 옆방과 같이 쓰게 되어 있어서 문을 열면 창문
이 옆방으로까지 밀려갔다. 냉방시설까지 바랄 것은 없지만 난방시설은 엉망진창이었
다. 겨울방학 동안 연구실에서 작은 석유난로 한 개를 지피고 일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환경이었다.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연구실을 반 잘라서 비닐로 칸막이를 해
놓고 비닐문으로 들락날락할 수밖에 없었다. 복도에는 비가 새고, 겨울에는 화장실이
얼어터지므로 아예 못으로 화장실 문을 잠그고 3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야 한다.
시설이 제대로 된 대학도 물론 많겠지만 이처럼 엉성한 시설을 자지고 무슨 유명한
대학교라고 허풍을 떠는 자세는 지금쯤 고쳐져야만 할 일이다.
내 연구실이 있는 건물만 해도 애초에 설계도나 설계계획이 그처럼 엉망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건축과정에서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의 심리가 현실을 지
배했을 터이고, 작업과정이 '대강대강'으로 처리되었을 것이다. '이런들 어떠리, 저런
들 어떠리'는 당장 눈앞의 일만을 생각할 때 성립한다. 눈앞의 일을 그저 '좋게좋게'
처리할 때 미래란 암담하다. 눈앞 일만 바라보는 것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안목을 상
실하는 일이다.
사람이란 지나간 날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할 줄 모르면 지금 자신의 모습을 명백
하게 파악할 수 없으며, 현재의 모습이 희미하면 미래의 계획도 모호할 수박에 없다.
과거와 현재 및 미래를 꿰뚫어볼 줄 알 때
"대강대강'이라는 삶의 자세를 버릴 수 있다.
나는 재학에서 가르치는 일에 더 없는 보람을 느끼며 매일을 보낸다. 나의 적성에
맞아서인지 어떤지는 잘 몰라도 연구하고, 연구한 내용을 학생들과 토론하며, 고유한
것 그리고 새로운 것을 찾는 일은 확실히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학생
들이 눈을 빛내며 고뇌하는 자세로 진지하게 문제에 접근할 때 나는 삶에 대한 일종의
기쁨까지 느낀다.
그러나 대학에서 가르치는 내 신세에 대한 서글픔을 씁쓸하게 맛보는 순간도 드물지
않다. 대학 2학년이나 3학년이 되어도 자신의 위치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학생들
이 상당수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털어놓는 몇 가지 이야기를 들어
보자.
"우리에겐 대학 졸업 후 취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렵고 골치 아픈
내용을 아무리 배워도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회현실에 알맞게 적응할
수 있는 내용을 가르쳐 주십시오."
"교수님은 우리들 처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추상적 이론만 전개합니다. 우리는 철
학과에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학력고사 성적을 놓고 따지다가 대부분 성적에 따
라서 철학과에 왔으니 쉽게 쉽게 가르쳐 주시고 점수를 좋게 주십시오. 우리모두가 철
학교수가 되려는 것은 아닙니다."
"강의시간에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지 무르겠습니다. 우리 사회의 현실문제에 대
한 해결책을 왜 하나도 제시하지 못한고 우리와는 상관도 없는 서양의 철학이론만을
소개합니까?"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나는 학생들과 까마득한 거리감을 느끼기 마련이
다. 우리들의 오랜 정신의 뿌리가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에 물들 왔고 지금
도 그와 같은 삶의 방식에 젖어 있지만 냉혹한 현실은 그러한 삶의 방식을 허용하지
않을 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가끔 학생들에게 다음처럼 이야기 한다.
"여러분들 중에서 많은 사람은 첫 번째 잘못을 범하고 그것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 잘못이 무엇인가 하니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철학과를 선택했어야
하는데 학력고사 성적이 철학과를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끌려 다닌다는 말이 성립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문제를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에게는 현재가 가장 중요합니다. 현재 여러분의 학문에 몸과 마음을 바쳐서
몰두하십시오. 왜냐하면 앞으로의 까마득한 미래도 역시 현재로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
기 때문입니다."
"그저 대강대강 점수나 따서 졸업하려거든 아예 학교를 그만두고 지금 당장이라도
사회로 뒤쳐나가서 취직하여 일하고 돈을 버는 것이 오히려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내용은 전혀 없이 허울만 좋은 대학 졸업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가를 깊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수없이 많다. 대학 하나만 보아도 그렇다. 그처럼 수
없이 많은 문제가 더더욱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원인들 중의 하나는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라는 삶의 방식이다.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는 대강
살아가게 한다. 대강 살아가다 보면, 무엇이 발전이고 후퇴인지, 무엇이 장점이고 결
점인지 분간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주변을 분간할 능력이 없을 때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게 되고, 나만을 위하는 이기주의가 가장 가치 있는 것인 양 판치는 세상이 된
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실망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것을 안다. 젊은이들 중 많은 사람
이 우리들의 고질병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대강대강' 살아서는 미
래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고유한 삶을 선택하
여 문화와 역사의 가치를 정립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미래가 자기들의 어깨에 걸려 있
음을 인식하여 더 이상 자유로부터 도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3)
'좋게 좋게 지내자'나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는 마찬가지 말이다. 역사 문
화의 발전이나 사람다움의 성숙을 의식하지 못하는 가장 큰 근거 중의 하나는 바로 '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의 사고방식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차원에서 썩어버린 뿌리가 오늘날 까지도 마치 싱싱한 것인 양 거리를 활보하는 것은
바로 '대강대강, '아무렇게나'와 같은 사고방식이 우리들내면에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아닌가?
적어도 지나간 날들이 옳았는지 아니면 그른 것이었는지 또는 가치 있는 것이었는지
에 대한 냉철한 판단은 있어야 할 것이다.
고구려를 비롯하여 삼국시대, 고려, 이조 오백년, 이정권, 박정권 등 지나간 날들의
정치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경제, 종교 등에 관한 날카로운 가치판단이 서서히
확립되어야만 우리들의 현실과 미래의 모습이 어느 정도 확실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
아닌가!
"그저 그렇게 사는 거지 뭐."
"아무리 비판해보아야 비판하는 놈도 마찬가지더라."
우리들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들이다. 결국 비판정신이 없다는 말은 "이런
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의 사고방식을 낳게 한다. 비판정신이 없을 때 사람은 껍질
로만 살아가게 되고 마치 허수아비처럼 매일을 보내기 마련이다.
예컨대 85년도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친일문학이나 미술 또는 음악을 이
야기할 수 있다. 이름을 들먹이면 한국의 대가로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소설가, 시인,
화가, 학자들이 일본의 앞잡이로서 한국사람을 완전히 일본의 통치아래에서 안락하게
(?) 살도록 하는데 큰 몫을 행한 엄연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그들 중의 많은 수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아직도 대가로 활약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가끔 친우들 몇몇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여러 가지 대화를 하는데, 친일문제도
가끔 대화에 오를 때가 있다. 물론 제정신이 아니고 술에 취해서 나오는 말인지는 몰
라도 저마다 한마디씩 신나서 떠들어댄다.
"사람이란 누구나 다 잘못을 저지르기 마련이야. 우리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니까 아
무 문제도 안되고 이름난 사람들은 한때 조금만 잘못을 저질러도 무슨 죽을 일이나 한
것처럼 비난받기 마련일세. 친일파 친일파 하지만, 확실한 증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한때 친일을 했어도 다음에 그 이상으로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 애쓴 사람들도 많지 않
은가? 우리들은 그 사람들을 욕하거나 비난할 자격이 없는 거야."
"이 사람아, 그건 말도 안돼. 도대체 나라의 운명을 좌우했던 행동이 잘못이면 그것
은 어디까지나 잘못이야. 옳은 것과 그른 것은 분명히 가려야 해. 친일을 했다면 그것
은 천벌을 받을 짓이고, 그 다음에 뉘우치고 훌륭한 일을 했다면 그것은 또 달리 상을
받아야 할 일이지. 이름이 났거나 나지 않았거나 옳고 그른 것은 어느 누구에게 있어
서나 마찬가지일세."
"아무러면 어떻겠는가? 세상 살다보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다 있기 마련이야. 내
갈 길도 바쁜데 친일이다 아니다, 자네들 한가하구만. 그런 것 다잊어버리고 지금 할
일이나 하세."
이 대화에서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들은 무엇이 정당한지 그리고 무엇이 가
치 있는지 아직 확실히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우리는 20세기를 살아가고 있으며
더욱이 좁아진 세계에서 볼 것, 알 것을 어느 정도 거의 접하면서 호흡하고 있다.
어느 누가 정치를 해도 좋다. 단 인간의 본성, 곧 인격을 존중하는 정치를 한다면.
어느 누가 그림을 그려도 좋다. 오로지 일본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 깊이
자리잡은 창조적 상상력으로부터 그림을 그린다면.
어느 누가 소설을 써도, 시를 써도 좋다. 단 일본이나 어떤 특정한 외국을 위하여,
사대주의 사상이나 자기 한 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움과 질서를 표현하려는 마
음의 심연으로부터 글을 쓴다면.
어느 누가 음악을 해도 좋다. 단 어떤 다른 것이 아닌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자신의
영혼을 표현하기 위하여 음악을 한다면.
사실, "한국의 여인들아, 일본을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라."라는 말이나 또는 일본의
후지산 밑에 한국을 작게 그린 그림이나 모두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들임에는 틀림없
다.
정신의 역사가 짧으면 판단이 흐리다. 판단이 흐리면 오로지 자기만을 위하여 나라
를 팔고 가정을 팔고 드디어는 자기 자신마저 팔아버리기 마련이다. 역설적으로 말하
면, 땅을 치고 통곡하며 피눈물을 흘려도 시원치 않을 그놈의 '친일'은 확실히 우리에
게 하나의 계기이다. 우리들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쓰라린 계기이다.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를 과감히 던져버리고 나 자신의 삶을 결단하게 해
주는 하나의 계기이다.
자유를 향한 도전
(1)
우리들은 비난과 비판을 흔히 똑같은 뜻으로 말할 때가 많다. 그러나 엄밀하게 구분
하자면 비난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며 비판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더 확실
하게 말하면 비난은 일상 생활에서 흔히 쓰는 말임에 비하여 비판은 철학적인 의미를
가진다.
"비판하는 자는 비판을 받으리라"라는 말은 "비난하는 자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로
고쳐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비난은 헐뜯는 것이요, 욕하는 것이며, 단점을
들추어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욕구불만의 표현이기 때문
이다.
"누워서 침 뱉기"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비난의 경우에 걸맞은 말이다. 예컨대 어
느 사원이 사장을 일컬어 "배는 맹꽁이처럼 뽈록 튀어 나오고 개기름 낀 얼굴에 번쩍
이는 금테 안경이나 걸친 돼지 같은 인간"이라고 욕한다고 하자. 이렇게 욕하는 배경
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승진을 시켜주지 않는다던가, 봉급을 적게 준다
던가, 잔소리를 한다던가 또는 이 사원의 이상적인 삶의 자세에 어울리지 않는 개인생
활을 사장이 한다던가...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사원의 욕구불만이다.
"예.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 무엇인지 아니?"
"그거야 뭐 돈 많이 가지고 신나게 여행하는 일이지."
"그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있어."
"술 마시고 멋들어지게 춤추는 일?"
"에이, 바보야! 남 흉보는 것, 남 욕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 인줄
모르니?"
이런 대화를 가끔 듣는다. 어떤 사람은 남을 실컷 헐뜯고 비난한 다음, 너무 지나치
다고 생각해서인지 "하기야 남 욕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어디있겠니?"라고 말
하며 머리를 긁적거린다.
인간은 생물이기에 생존욕구를 가지며, 생존하기 위하여 욕망을 한없이 충족시키고
자 한다. 그러기에 인간은 남을, 그리고 남이 한 행동을 비난함으로써 욕구불만을 해
소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비난으로 욕구불만을 해소시키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
지 못한다. 남을 헐뜯음으로써 제아무리 자기 자신을 우월하게 드러내 보이려고 해도
그것은 "누워서 얼굴에 침 뱉기"로 끝나기 때문이다.
비난의 씨앗은 욕구불만이고, 이 욕구불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의 것이다.
"자동차만 큰 것 끌고 다니면 다인 줄 아는 저 친구는 제명에 살지 못할 걸!"
"제 분수도 모르고 책을 쓰네, 번역하네 하더니 이제는 에세이까지 쓴다고 껍적대는
꼴을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어."
"제가 장이면 어쩌자는 가야? 배를 쑥 내밀고 팔자걸음 걷는 저 멍청이 좀 봐!"
우리들은 거의 매일 남을 비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들은 나
자신을 헐뜯으면서 순간 순간 살고 있다. 그러나 비난이 자신에 대한 것인 줄 모르고,
남을 판단하는 것이 비난이며, 비난함으로써 타인의 태도가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이야기보다도 더 우
스꽝스러운 짓이다.
비난은 불안 때문에 생긴다. 남은 많이 아는데, 남은 많이 버는데, 남은 출세하는데
나만 뒤쳐질 때, 불안한 자신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속에서 꿈틀거리는 욕구불
만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밖을 향하여 도전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해결될 것
인가? 비난은 또 다른 비난을 낳고 도전은 또 다른 도전을 낳게 되어 악순환만 계속된
다.
비판정신이 결여된 곳에서는 비난의 악순환만 연속될 뿐이다.
비판은 나와 남을 동시에 볼 때, 성립한다.
우리의 삶은 자유를 향한 도전이었으며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2)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우리들은 임금님에 대한 충성심과 어버이에 대한 효심의 아
늑한 보금자리에서 포근한 잠을 청하여 왔다. 어디 그뿐이랴? 아낙은 지아비를 위하여
대쪽 같은 절개를 지키며 아버님과 남편과 자식을 하늘처럼 우러르고, 그것을 여인네
의 으뜸가는 미덕으로 가슴 속 깊이 간직하여 왔다.
그러나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있었다.
포근한 보금자리와 가슴 속 깊이에는 비판 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
왜 임금은 신하와 백성을 자신과 똑같은 인격체로 볼 수 없었던가?
왜 지아비는 아낙을 똑같은 삶을 즐기려는 인간으로 볼 수 없었던가?
공자왈 맹자왈에 호미자루 썩어문드러졌고 예법과 가문 찾기에 눈이 어두워 보도 듣
도 못한 인종들이 우르르 기어 들어 와도 막을 힘조차 기를 수 없지 않았던가?
비판정신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할 수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나 그리고 너는 인간
이하도 인간 이상도 아니다. 우리들 인간은 공동존재로서 함께 사회를 형성한다. 내가
없으면 너도 없고,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 네가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네가
있다.
아직도 애꾸눈이 너무 않다. 이니 애꾸눈보다는 장님이 더 많다. 마음이 병들대로
병들어 마음의 눈이 모두 멀어버린 장님이 너무 많기에 자유를 향한 도전의 걸음이 이
다지도 느린 것이 아니냐!
너보다 내가 많이 가졌다고 배를 불룩대는 장님.
너보다 못 가졌다고 비실대며 빌붙을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기회를 엿보는 장님.
너보다 높다고 으시대는 장님, 너보다 낮다고 허리 굽실거리는 장님, 너보다 이 안
다고 금테 안경을 번쩍이는 장님, 너보다 적게 안다고 머리 숙이는 장님...
자유는 마음에서 생기고, 의지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에 마음이 병든 곳에서는 자유
의 꽃이 싹틀 수 없다.
나와 너를 동시에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보는 비판정신이 있는 것에서만 비로소 자
유를 향한 도전은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
(3)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자유냐?
어떤 술주정뱅이가 술집에 앉아 게거품을 물면서 이렇게 외친다고 하자.
"이봐, 술 가져와. 왜 먹고 싶은 술도 못 먹게 하는 거야? 술 먹는 자유도 없단 말
이냐?"
또 어떤 게으름뱅이가 일할 생각은 않고 친척집을 차례로 찾아다니며 이렇게 주장한
다고 하자.
"생활비를 좀 주시오. 일자리가 없으니 먹을 것이 없소. 나도 먹고 살 자유는 있단
말이오."
또 어떤 모임에서 입심 센 사람이 이렇게 열변을 토한다고 하자.
"내가 비록 20분간 내 의견을 발표했지만 여러분은 좀더 참고 제발 들어주시오. 나
도 말할 자유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따위 자유들은 자유일 수 없다. 인간과 인간의 참다운 만남이 무시된 자유
는 껍질만 자유요, 말 만 자유에 지나지 않는다. 그따위 자유는 참다운 자유가 아니
고, '제멋대로'요 '될 대로 되라'이니 임의요 자의에 불과할 뿐이다.
자유는 내면의 양심과의 만남이다. 우리들은 낯선 사람끼리 지나칠 때 '만남'을 만
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생명과 생명이 부딪칠 때 비로소 자유가 빛을 발한
다. 자유는 마음의 광채요 의지의 힘이다.
(4)
사람은 왜 사는가? 이렇게 물으면 저마다 다른 답을 말하겠지만, 아마도 가장 궁극
적인 답은 '행복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수많은 종교인, 철인 그리
고 문학가들이 행복을 석교하고 논하고 묘사하였다.
배불리 먹으면 행복하다.
명문학교를 졸업하면 행복하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마치 뱀이 제 꼬리를 물고 돌아가듯이 언제나 불행을 물고 제
자리를 맴돌기 마련이다.
석가모니는 왜 집을 박차고 뛰쳐나와 6년간의 모진 고행을 했던가?
예수는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자신의 목숨을 버렸는가?
소크라테스는 왜 독약을 마시고 죽었던가?
행복이란 자유의 실현이다. 자유의지의 힘이 자유이며, 이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
이 행복이다.
그러기에 행복은 아득한 피안의 꿈도 아니고 현실 속의 몽롱한 수면상태도 아니다.
종일 노동판에서 시달리다 밤늦게 들어와 아내의 정겨운 마음이 훈훈히 담긴 된장찌개
를 먹을 때 그 어느 누가 행복하지 않겠는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인간의 마음에서
어둠이 사라질 것을 바라볼 때 과연 어느 누가 행복하지 않겠는가? 독약을 마시면서
정의가 오래도록 인류의 역사에 진하게 남을 것을 알 때 누가 행복하지 않겠는가?
자유를 향한 도전만이 행복을 맛볼 수 있으며 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자유를 향
한 도전에 정지한 것은 마치 고인 물과 같아서 썩어버리고 만다. 자유를 향한 도전은
역사 흐름의 맥락을 끈질기게 이어주며 나와 너를 인격으로 만나게 해주고 우리들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줌으로써 비로소 열린 인간, 열린 사회를 가능하게 해준다.
제 12장 지구촌을 살리자
1차원적 인간
1차원적 인간이란 현대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늘날의 인간들이 여러 차원을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차원을 전부로 알고 살아간다는 말이다.
현대인을 일컬어 1차원적 인간이라고 부르는 대표적인 철학자는 마르쿠제이다.(마르
쿠제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산 사람으로 2차 대전이후 미국에서 활동하였음.){
{}} 1차원적 인간이란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 곧 자기 가신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을 말
한다.
멀리 볼 필요 없이 가까운 곳을 보더라도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을 수없이 볼 수 있
다. 중,고등학생만 하더라도 대다수가 입시에 정신이 팔려 있고, 비싼 구두나 비싼 옷
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학생도 상당수 된다. 어른들은 어떤가? 어른들은 더 말할 필요
도 없다. 좋은 직장, 비싼 차, 넓은 아파트가 마치 인생의 전부인 양 그런 것들에 삶
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어른들 대부분의 삶의 방식이다.
주변에서 흔히 듣거나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알게되는 온갖 부정부패 역시 인
간성 상실을 간단히 지적하여 준다. 회사 간부, 대학교수와 직원, 고등학교 선생님들
이 앞장서서 대학입시의 부정입학을 저직렀다고 몇 날 며칠 아우성이었다. 도대체 우
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일까?
우리의 앞날은 어떤 것일까?
우리 모두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일까?
현대인이 1차원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들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들 현대인이 1차워적 인간이라
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들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들 현대인을 지배하는 것이 1
차원적이기 때문이다. 무르쿠제는 1차원적 현상을 다음의 몇가지로 나누어 본다. 인구
증가, 전쟁의 위험, 식량난, 공해. 사실 이들 이외에도 허다하게 많은 1차원적 현상을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 2본다. 인구증가, 전쟁의 위험, 식량난, 공해. 사실 이들 이
외에도 허다하게 많은 1차원적 현상이 존재한다. 마음속으로 정말 원하는 대학의 학과
에 들어가서 공부하는 대학생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시험점수대로 아무 대학에나
들어간다. 취직도 전공과 상관없이 택하는 사람이 많다. 결혼도 그렇다.
내가 과연 혼자 살 것인지 아니면 결혼할 것인지. 혼자 살면 어떻게 살 것인지, 결
혼하면 어떤 대상과 결혼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행동하는 청년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남들이 대학가니까, 남들이 취직하니까, 남들이 결혼하니까 그리고 부모나 형제가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허다하다.
현대의 독일 철학자 하르트만은 이러한 인생을 가리켜서 "지나침"이라고 불렀다. 볼
일이 분명히 있어서 꼭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들러도 그만 들르지 않아도 그만이므로 그
냥 지나쳐버리는 인생을 현대인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1차원적 인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1차원적 사회를 과연 어떻게 풍요로운 다차원적 사회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우선 다양한 사고력을 키워야 한다. 수없이 많은 1차원적 현상들을 각자의 삶에서
의지를 통하여, 그리고 사회제도의 과감한 개혁을 통하여 파괴할 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인간성의 가치를 각자가 그리고 사회가 솔직히 인정함으로써 이기적인 본
능을 가능한 한 추방할 줄 알아야 한다. 나도 중요하고 너도중요하지만 나와 너 그리
고 '우리들'이 모두 함께 중요하다는 것을 철저히 알지 않으면, 여전히 이기적 본능이
나만 위하고 우리를 파괴함으로써 결구에 가서는 나와 너 까지도 파멸시키고 만다.
우리가 1차원적 인간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유일 하게 남는 것은 오
직 인류생존의 단축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환경과 생명
20세기 초반부터 인류에게 가장 매력적이며 힘있는 것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기계문
명이다. 물론 기계문명의 시초는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전 세계적으로 기계문명이 인류의 미래를 황금빛으로 보장할 수 있을 것처럼 급속하게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부터이다. 생산이 기계에 의해서 이루어짐
으로써 손으로 하던 것보다도 엄청난 속도로 수십 배의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기차, 기선, 자동차, 비행기 등의 발명은 상품의 수송 및 여객운송을 놀라우리 만큼
신속하게 처리하게 되었다. 원자로에 의한 핵발전은 종래
수력이나 화력에 의한 발전보다 훨씬 노력을 줄이고 효과를 증대하였다. 최근의 기계
문명의 성과는 더욱 놀랍다. 컴퓨터에 의해서 지금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복잡한 계산
이 순식간에 처리되며 상점이나 회사의 모든 계산과 아울러 사무처리는 컴퓨터에 의해
서 눈 깜짝할 사이에 처리된다. 공장에서의 인공 로봇 역시 작업능률을 종전보다 비할
수 없을 만큼 높여 주었다.
아직도 이같은 기계문명의 엄청난 효과를 인류문명의 이상으로 여기며 인류의 현재
를 구하고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은 오직 기계문명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들은 기계의 정확성, 효율성 등을 굳게 신봉하며, 인간이 손과 자연에 의존해
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무수한 장애를 기계가 쉽사리 해결해준다고 확신한다. 특
히 인공위성에 의해서 각종 정보를 세계 곳곳에서 입수하여 당면한 문제를 손쉽게 해
결할 수 있는 것 등을 보면, 과연 기계가 우리들 인간의 어려운 문제들을 가장 이상적
으로 해결하여 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의 시야를 한번 넓은 곳으로 돌리기만 한다면 우리는 기계문명의 장점
보다는 단점과 피해를 훨씬 더 잘 간파하게 된다.
수돗물도 마음놓고 마실 수 없다.
콩나물도 농약 때문에 인심하고 먹을 수 없다.
날이 갈수록 공해로 인하여 호흡기 질환자가 늘어간다.
각종 신무기의 개발로 인하여 도처에서 죄 없는 사람들이 비참한 전쟁에 휘말리고
죽어간다.
비와 땅이 산성화되어가고 있으며 강과 바다는 심하게 오염되어 있다.
기계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신의 창조적인 활동보다 자동기계의 작업에 의존하는 경
향이 높아졌다. 모든 것이 획일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며, 어디에서나 1차원적인 인간이
가장 인간적인 모습인 양 가장한다.
기계문명의 홍수 속에서 인간은 지금까지의 어느 때보다 온갖 정신질환에 시달린다.
환경과 생명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시초는 약200만년 전, 현재
아프리카의 케냐 지방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한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은 가장 발달된 뇌세포를 가지고있어서 현재 지구를 지배하고 있으며 보든
다름 생물과 달리 인간만이 고유함 문화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어디까지나 찰나적인 존재이다. 제3빙하기가 끝나고 지구의 온도와
습도 등이 고등동물이 생존하기에 가장 적합한 순간, 진화의 결과로 생존하는 것이 인
간이다. 언젠가 또다시 빙하기가 올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인류는 지구에서 흔적
조차 없어질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연이 인류에게 부여한 생존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
다. 지금 우리들 인간은 기계문명에 의하여 자연이 준 생존기간마저 자청하여 단축시
켜가고 있는 중이다. 물질-기계문명을 가장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전
체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마치 "우물 안 개구리"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자연이 부여한 생명의 생존기간을 누리기 위해서 인류는 이제야 말로 환경문제에 종
래 보다 몇 배, 몇 십 배 신경 쓰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미 선진국들은 환경문제에 일찍 눈뜨고 자연보호라든가 폐기물 처리 또는 환경보
호 등에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고 깨끗한 환경, 생명에 피해를 주지 않는 환경을 가꾸
고 보존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다.
쓰레기 분리수거, 자전거 길을 따로 만들어 자동차를 가능한 타지 않는 것, 상점에
서 비닐백 주지 않기, 폐기물의 재활용, 최소한의 농약 사용과 아울러 유기비료 농법
의 정착, 공공단체와 자치 단체에 의한 환경보존 활동과 광범위한 홍보, 이렇듯 수없
이 많은 노력들은 모두 인간의 생존을 건강하게 연장시키기 위한 환경보호의 노력임에
틀림없다.
예컨대 독일에서는 낚시면허가 운전면허보다 따기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낚시면허
를 따기 위해서는 우선 물고기에 대한 상세한 생태를 알고 이론시험에 합격하여야 한
다. 아음으로는 낚시도구 일체에 대한, 그리고 낚시철과 낚시터에 대한 철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낚시꾼들은 물고기 새끼나 산란기의 물고기는 낚시에 걸렸다 하더라도
자로 재어보거나 세밀히 관찰하여 다시 놓아준다. 낚시터에는 가끔 경찰이 순찰을 돌
며 불법낚시가 행해지는지 감시한다. 불법낚시꾼은 엄청난 액수의 벌금을 물어야 한
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도 도시의 숨막히는 매연, 강이나 바다의 오염 등을 직접 피부로
느끼면서 주부들이 솔선 수범하여 쓰레기 분리수거에 참여하고 각종 자발적인 모임들
이 공해 추방과 환경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정부나 대기업은 아직도 정
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공단의 공장 굴뚝에서는 온갖 독가스가 여전히 분출되고 있
고 버스나 트럭의 매연 단속은 형식에만 그치고 있어서 공해의 피해는 날이 갈수록 엄
청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있다. 우리의 땅과 하늘이 폐허로 된 후
제아무리 환경보존, 공해추방을 외쳐도 때는 이미 늦다.
공해추방과 환경보호가 구석구석에서 거대한 운동으로 일어나서 구체적인 대책이 실
시될 때라야만 우리도 마음놓고 숨쉴 수 있는 자연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우
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 한 장소이다.
지구촌을 살리자
지구는 하나뿐이다. 지구촌 여기저기에서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당장 급한 김에 엄
청난 삼림을 없애거나 댐을 만들거나 또는 바다를 매립함으로써 생태계 파괴가 날이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다.
해가 갈수록 온실효과가 높아지고 있다. 봄, 여름, 가을은 말할 것도 없고 겨울마저
겨울답지 않게 춥지 않은 현상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그 직접적인 원인은 공해에 있다. 공장의 가스, 공장의 폐수나 생활하수, 자동
차 매연, 각종 가전제품에서 나오는 열기 등이 지구의 온실 효과의 직접적인 원인이
다.
게다가 무분별한 토지개발로 인하여 마구 나무를 벌채한 결과 지구촌 곳곳에서는 탄
산가스가 그대로 방치되고 신선한 산소의 공급이 줄어들었다. 지금 대기중에는 프레온
가스, 질소가스, 아황산가스, 탄산가스, 메탄가스 등이 가득 차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지구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으며 아울러 생명의 존속에도 심각한 위험을 가
하고 있다. 지구촌의 온실효과를 가져다주는 온갖 가스의 증가는 약 백년 전에 비하여
세배 이상으로 되었다. 특히 메탄, 오존, 이산화질소, 프레온 등은 탄산가스보다 어마
어마한 온실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상태가 계속된다면 지구는 엄청난 피
해를 면할 길 없다. 지구의 온도가 조금만 높아져도 해수가 팽창하여 조류가 변하고,
남태평양의 산호초 중 많은 부분이 멸종하고,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 현재의 조
개류 역시 멸종하게 된다.
기계문명이 우리의 생활을 편하게 해준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지구의 온실효과와 같은 것은 기계문명이 조래한 가장 좋지 않은
하나의 예이다. 냉장고를 비롯하여 건물과 자동차에서 사용하는 에어컨은 상상하기 힘
든 열기를 뿜어낼 뿐만 아니라 온난화를 가장 많이 촉진하는 프레온가스를 배출한다.
우리들이 눈앞의 이기적인 욕심을 조금만 버리고 미래를 조금만 내다볼 수 있다면
지구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온실효과를 점차 줄여갈 수 있다 방법도 있다. 우선 전기와
가스를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곳곳에 울창하게 나무를 심어야 한다. 또한 공해 물질이
발생하지 않는 대체에너지를 개발하여 자동차의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또한 공해의 주범이 되는 공장을 과감히 폐쇄하고 가능한 한 급격한 인구증가를 방
지하는 것 역시 온실효과를 방지할 수 있는 하나의 방책이다. 인구가 많아지면 생산을
많이 해야하므로 자연히 공해 공장이 증가할 염려가 많다.
프레온가스의 피해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프레온가스가 대기중에 방출되면 그것
은 1백년에서 2백년에 이르는 생명을 지니고 서서히 대기의 상층 부분으로 상승하여
태양에서 오는 자외선과 부딪쳐 준해되어 염소가 생기고 염소는 오존층과 화학반응 하
여 오존층을 파괴한다. 오존층의 파괴는 1970년대부터 시작하여 현재 지구를 위협할
정도로 진행되어 있다.
오존층은 지구를 포근하게 감싸서 보호하는 담요와 겉은 것인데 오존층에 큰 구멍이
뚫리면 지구는 강력한 자외선에 그대로 벌거벗은 몸이 되어 말할 수없이 치명적인 피
해를 입게 된다. 생명체가 자외선에 노출되면 극심한 피해를 입는다. 현재보다 몇 재
더 강한 자외선을 쪼이게 되면 유전인자가 파괴되어 돌연변이를 일으키기 쉽고 피부
암, 세포암 등이 발생한다. 자외선은 바닷물이나 민물을 뚫고 들어가므로 수중의 미생
물들도 자외선의 영향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키게 되고 결국 지구의 생태계는 뒤죽박죽
으로 될 우려가 많다고 한다.
상당수의 현대인은 아직도 여전히 과학문명, 물질 및 기계문명을 가장 이상적인 것
으로 신봉하고 있다. 그러나 냉정히 살펴보면 과학문명에 해한 신봉도 하나의 믿음이
며 그것이 삶과 세계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1차원적으로 편파적인 한에서는 과학 문명
또한 미신의 일종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어떤 것으로부터 피해나 폐단이 극심하게 생길 때, 그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
에 초래되는 것이다. 특히 공해문제는 일면적인 과학문명의 신봉에서 오는 것이므로
이제 우리는 과학문명을 비판하고 과학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엄하게 물을 줄 알 때 비
로소 공해를 추방할 수 있다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사고 방식의 전환을 가져오지 않으
면 안된다. 과학도 안간을 위한 것이며 동시에 자연환경의 보존을 위한 것이라야만 가
치를 가질 수 있다. 단지 눈앞의 이익만 위하고 인간과 지구의 안전을 무시한다면 그
러한 과학은 아예 학문의 영역에서 추방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다.
대기오염, 토양오염 역시 날로 심해지고 있다. 유독가스의 분출과 아울러 각종 폐기
물과 폐수의 무분별한 방류 및 단지 생산증대만을 목표로 삼는 화학비료의 사용은 토
양과 물과 대기를 한꺼번에 오염시킨다. 옛날에는 비를 맞으며 연인끼리 덕수궁 돌담
길을 걷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도 산성비에 노출 되기를 꺼
린다.
우리속담에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다. 정치, 경제, 문화, 사
회, 자연의 모든 문제는 결국 인간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파괴적일 수도 있고 아니면
긍정적일 수도 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눈앞에 있는 이기적인 자기만의 편안
함과 이익만 추구한다면 우리 주변은 눈 깜짝할 사이에 쓰레기장이 되고 폐허로 변할
것이다.
지구는 너와 내가, 나아가서 우리들이 함께 사는 장소이며 오직 하나뿐인 생존의 장
소이다. 각각의 인간이 생명존중 사상을 지니고, 멀고 깊게 전체를 볼 줄 안다면 자연
환경을 보존하고 공해를 추방하는 방법을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
내가 버리는 한 조각의 껌, 내가 버리는 한 방울의 생활하수가 나의 생명을 잠식하
며 끝내는 지구를 폐허로 만드는 원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제 13장 미래의 꿈과 도전
젊은 날의 고뇌와 시행착오
젊은이 또는 젊은 시절과 관계되는 말들은 너무 많다.
청춘은 아름다워라.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
젊음은 한 번 가면 돌아올 줄 모른다.
청춘은 질풍노도의 시기이다.
젊은이는 늙기 쉽고 배움을 이루는 것은 어렵다.
무엇보다도 우선 젊은 시절은 고뇌와 번민의 시절이다. 사랑으로 고민하고, 가정문
제로 괴로워하며, 공부 때문에 짜증나고, 우정으로 인하여 번민하고...모든 것이 확실
한가 하면 갑자기 아무 것도 명확한 것이 없어서 절망과 좌절을 맛보는 것이 젊은 시
절이다.
아침 등교길에서 마주친 여학생의 모습이 몇 날 며칠을 지나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
아 혹시나 그 여학생을 또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설레임으로 시간 맞추어
헐레벌떡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 한참을 기다려도 그 여학생은 보이질 않는다. 흰 얼
굴, 동그란 눈, 오똑 선 코, 늘씬한 허리와 다리... 여학생의 모습이 너무나도 생생하
여 도저히 지워버릴 수 없다. 버스 정류장에서 며칠씩이나 기다리다 드디어 마주친 그
여학생.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여학생이 날렵하게 버스에 올라타자 버스는 야속하게도
멀리 떠나가 버린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책을 펴고 글을 읽어도 무엇을 읽는
지 도저히 알 수 없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어보면 젊음이 얼마나 진한 사랑의 열병을 앓는
지 잘 이해할 수 있다. 베르테르가 우연히 청순한 처녀 로테를 만난다. 둘은 가슴 저
리는 사랑의 날들을 보낸다. 베르테르는 로테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어
느 날 로테는 이미 약혼하였음을 털어놓는다. 베르테르는 하늘이 내려앉는 고통에 휩
싸인다. 드디어 베르테르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만다.
어디 사랑만이 젊은이의 가슴을 끓게 하고 견딜 수 없는 고뇌를 안겨주겠는가? 젊은
이는 수시로 가정의 무의미함, 공부의 허무, 우정의 덧없음, 불확실한 미래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밤을 잠 못 이른다.
젊은이는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고뇌와 번민을 자기 혼자만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
각하기 쉽다. 고뇌의 도가 극도에 달하면 젊은이는 탈선의 길을 치달린다. 본드흡입,
이성친구와의 가출, 흡연과 음부, 불량잡지나 비디오에 심취하기... 이런 그릇된 길을
빨리 깨닫고 제자리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젊은이는 자신의 시행착오를 체험하고 있다
는 사실을 안다. 그리하여 자신의 길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자포자기 할 때 젊은이는 자신의 삶마저 상실하기 쉽다.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돌아볼 때 이미 모든 것은 너무 늦어 다시 돌이킬 수 없다.
고뇌와 번민은 삶의 시행착오이다. 일 생 동안 고뇌와 번민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
는다. 고뇌와 번민은 한편으로 우리를 괴롭히지만, 그것들을 잘 알고 나면 고뇌와 번
민은 우리의 친구이며 스승이다. 우리는 고뇌하고 번민하는 가운데 성장하며 내 삶의
의미를 정성스럽게 가꾸어 나갈 수 있다.
젊은 날의 고뇌와 번민은 시행착오이다. 날이 갈수록 우리는 더 큰 고뇌와 번민으로
괴로워하지만 곧 그것들을 망각하거나 극복한다. 그러나 다시 고뇌와 번민의 수렁에
빠진다. 이와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동안, 만일 젊은이가 현명하다면 그는 쉽사리
고뇌와 번민을 극복하고 자기 자신의 삶의 길을 과감히 개척하여 나갈 것이다.
무엇이 될 것인가
불교에서 공수래 공수거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세상에 빈손으로 태어났다가 빈손
으로 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인간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뜻하는가? 아
니면 이 세상이 허무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이 말은 우선 온갖 욕망이나 욕심이 헛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망이라고 한다면 첫째로 물질적인 욕망일 것이고 다음으로는 사회적인 욕
망일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지식에 대한 욕망일 것이다.
다음으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은 참다운 나와 참다운 삶을 찾으라
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를 깨달으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늘 안개 낀
나, 그리고 먼지 낀 거울과 같은 나를 지니고 정처 없이 방황한다. 만일 우리들이 참
다운 나를 깨닫는다면, 비록 빈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간다고 하여도 참다운 삶을
이 세상에 심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중.고등하교 시절에 가끔 무겁게 억누르는 물음 중의 하나는 "장차 내가 무엇이 될
것인가?"하는 것이다. 아직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소질이나 능력은 뛰어난 것이 없는
상태에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자마자 그 물음으로부터 줄행랑치
기 십상이다. 그러나 도망간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젊은이가 문제에 과감
히 도전할 때 젊음은 알차게 성숙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냉정하게 자신을 관찰하고 동시에 사회를 살피는 일이다.
그러한 자세를 가지면 나의 소질과 능력이 어떤 것인지, 그것들의 정도는 어떤지, 그
리고 사회에는 엄청나게 많은 분야의 직종이 있음도 쉽사리 알 수 있다. 현재 우리 나
라에는 2천 종 이상의 직종이 있고 선진국에는 5천 종 이상이 있다고 한다.
직업의 귀천은 이제 옛말이다. 자기에게 맞는 직업의 직장에 성심 성의껏 최선을 다
할 때, 그 사람은 삶의 보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중.고등학생은 아직 시간의 여유
가 있다. 자신의 소질과 능력을 발견하고 개발하여 가면서 장차 "무엇이 될 것인가?"
를 조금씩 변화시켜 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선한 인간, 정의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렇
다면 부분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는 어떤 직업에 종사할 것인가를 늘 염두에 두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며, 전체적으로는 어떻게 선하고 정의로운 인간이 될 것
인지를 항상 궁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인간이 절제할 줄 알고 용기 있으며 지혜롭다면 그러한 인간이야말로 선하고 정
의로운 인간이며, 그러한 인간은 어둡고 차가우며 추한 이 세상에 항상 밝고 따사로운
빛을 비쳐 줄 것이다.
미래의 꿈과 도전
중.고등학교 시절의 젊은이가 야망과 꿈이 없다면 그는 이미 늙은이나 마찬가지이
다. 많은 젊은이들이 벌써부터 이기주의에 물들어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것
을 보면 한없이 서글픈 마음만 든다. 젊은이들이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기둥인데 그
기둥이 이미 썩어 있다면 우리의 미래 역시 아무런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젊은이는 내일에 살고 중년은 오늘에 살며 늙은이는 과거에 산다는 말이 있다. 미래
의 야망과 꿈은 젊은이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따라서 미래의 꿈과 야망을 위하
여 도전할 수 있는 것도 젊은이만이 가진 권리이다.
삶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고유한 삶이며, 미래 역시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의 고유한 미래이다. 나 스스로 결단할 때 비로소 나는 나만의 삶을 가장 고귀
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단지 '지나침'으로서의 삶만을 살아간다면 그것
은 그야말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에 어울릴 것이다. 남이 살라는 식대로 만 살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짧다.
나의 결단에 의해서 미래의 꿈과 야망에 힘차게 도전할 때 젊은이는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다.
제 14장 어떤 삶-인간 프로이트
왜 프로이트를 들먹이는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동,서양을 돌아보면 인류에게 사상의 양식을 제공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철학자, 사상가들이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
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흄,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 쇼펜하
우어, 니체... 공자, 맹자, 주렴계, 명도 이천, 주자, 퇴계, 율곡... 석가모니, 무착,
세친, 용수, 달마... 굵직한 기둥만 헤아려도 이루 다 열거하기 힘들다. 그런데 왜 하
필 프로이트인가? 20세기를 전후하여 인류의 사고방식을 전격적으로 바꾸어 놓은 대표
적 사상가들이 있으니 그들은 곧 니체,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그리고 프로이트이다.
니체는 기독교 도덕과 아울러 소크라테스의 이성주의를 붕괴시키고 힘의 의지를 복
구하고자 하여 초인사상을 부르짖었다. 말하자면 형식적 삶을 허무주의라고 보아 이를
극복하여 생동하는 삶을 추구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관념의 세계를 깨뜨리고 소위 유
물론적 변증법에 의해서 만인이 평등한 계급 없는 사회를 구성하려고 하였다. 사유재
산이 인정되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사회에 있는 한, 인간은 소외되어 노예상태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사유재산 제도를 철폐하여 공산적 사회를 만들 때 비로소 인간은
해방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이다. 즉 경제적인 계급차별을 없애야만 인간의 평등
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을 적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상대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의 특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운동하는 좌표에서의 시간과 정지한 좌표에서의 시간
은 서로 다르게 흐른다. 따라서 우주여행을 장기간 하고 온 사람은 지구에 머물러 있
던 사람보다 덜 늙는다는 이론이 성립한다. 프로이트 역시 이들 세 사람 못지 않은
공적을 남겼다. 그의 가장 커다란 공적은 역시 정신분석학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이성이나 의식에 의해서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성이
라든가 의식은 단지 껍질에 불과하고, 한 인간을 좌우하는 정신의 핵심은 충동적인 심
층의식 또는 무의식이라는 것을 들추어 냈다. 이와 같은 프로이트의 업적은 가히 혁명
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이트는 정치, 경제적으로 암울한 시대에 살았
으며, 특히 말년에는 암 수술을 받아야 했고, 나치 시절, 히틀러 정권의 압박을 피하
여 영국으로 망명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학문적으로도 제자들로부터 외면 당하여 참을
수 없는 고독 속에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지만 프로이트는 삶의 정복자이며 모험가였다. 그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창조해
나가면서 일생을 산 한 인간이었다. 프로이트는 언젠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말하
자면 전혀 학자도 아니고 관찰가도 아니며 실험가도 아니고 사상가도 아니다. 나는 호
기심과 용기 그리고 인내심 자체를 지닌 정열적 정복자, 곧 모험가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프로이트에 관한 대부분의 내용을 '프로이트 입문'에서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어두운 그림자
프로이트는 1856년 5월 6일 지금의 오스트리아 영토인 프라이베르크에서 출생하였
다. 그의 원래 이름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며 그의 아버지 야콥 프로이트는 모직물 상
인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야콥이 마흔 살 되었을 때 이미 두 아들이 성장하였고
손자까지 두었지만 재혼하였다 아말리 나타손(1835-1930)은 야콥의 두 번째 부인으로
여덟 아이를 출산했으며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 중에서 장남으로 "지기"라는 애칭으
로 불리었다. 어린 시절 프로이트는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프로이트가 네 살 되던 해, 가족은 비엔나로 이사가서 그곳에 정착하였으나 청소년
시절의 프로이트는 비엔나에 아무런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이미 그곳에서는 유태인
에 대한 학대의 분위기가 서서히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유태인인 프로이트는 특히 반
군주제를 주장한 영국의 크롬웰 장군과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을 흠모의 대상으로 여
겼다. 당시 오스트리아가 로마카톨릭국가로서 유태인을 혐오하였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자연히 유태인과 유사한 입장에서 반항한 한니발이나 크롬웰을 자신의 영웅으로 삼았
다. 프로이트가 열두 살 때 그는 아버지로부터 유태인 학대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듣
고 낙담하였다. 아버지 야콥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야콥의 모자를 시
궁창에 집어던지면서 인도를 걸어가지 말라고 야단쳤다. 그러면서 그는 야콥에게 더러
운 유태놈이라고 욕설까지 하였다. 야콥은 아무대꾸도 못하고 모자를 집어 올려 쓰고,
도망치듯 가던 길을 재촉하였다.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 유태인에 대한 학대, 이두가
지는 나중에 프로이트가 자신의 독특한 영역을 목숨 바쳐 구축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19세기 말 비엔나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양자를 다 가지고 있었다. 푸른 다
뉴브강, 왈츠와 까폐, 음악정신과 감성 등은 화려한 면이었다. 그러나 경제적 빈곤이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매음과 도박과 사기가 곳곳에서 난무하고 있었으며 반유태
주의가 공공연히 주장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태인인 프로이트의 앞날은 결코 평탄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탐구의 시절
프로이트는 비엔나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였으며(1873--1883), 비록 여러 가지 사정
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의대생보다 3년 늦게 졸업하였지만, 조직학과 신경생리학에 온
힘을 기울였다. 말하자면 벌써 정신 계통에 간한 기초적인 연구를 전문과목으로 택하
였던 것이다.
프로이트가 의대에서 유기체 조직과 신경계통을 전문과목으로 연구한 것은 그가 의
사가 되려는 야망보다 장차 학자가 되고자 하는 결심이 서 있었다는 것을 반영해 준
다.
프로이트가 의대에서 최초로 영향받은 스승은 에른스트
브뤼케(1819--1892)였는데 그는 독일의 탁월한 생리학자로서 유물론적 심리학의 창시
자이다. 유물론이란 우주 또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것(실체)을 물질이라고 보는 입
장을 말한다. 브뤼케는 살아있는 물질과 죽은 물질 사이의 에너지 교환이 바로 생명이
라고 보았다.
당시만 해도 생명을 신비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일반적이었으나 브뤼케와 같은 유
물론자들에 의해서 생명은 전혀 신비적이지 않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예컨대 브뤼케는
개구리의 생명이 신경세포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 신경의 자극은 신경세포를 통해서
매 초마다 15미터의 속도로 움직인다고 하여 유물로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브뤼케와
같은 유물론자들은 화학이나 물리학에 의지해서 생명을 밝히고, 나아가서 정신까지도
해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의대시절 프로이트는 브뤼케의 연구소에서 수업 받고 실험하면서 브뤼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역시 스승 브뤼케의 영향아래에서 유물론의 입장을 취한다. 특히 신
경세포에 과하여 개척자적인 연구에 몰입하여 고등동물과 하등동물의 차이는 양적인
것이고 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리하여 프로이트는 인간의 뇌나 개구리의
뇌는 모두 신경세포로 구성되어 작용하고 단지 복잡성에서만 차이 난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학문을 계속하여 장차 대학교수로서 안정된 연구에 몰두하려고 하지만
브뤼케는 그에게 진심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충고하였다. 브뤼케는 프로이트에게 우선
대학교수 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렵다는 것, 다음으로 무
엇보다도 유태인 배척으로 인하여 프로이트에게는 대학교수 되는 것이 한층 더 어려
우며 또한 승진도 힘들다는 것을 조용히 말해 주었다.
프로이트는 일시적으로나마 학문을 포기함지 않으면 안되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경제공황 때문에 아버지 야콥이 파산하였고, 아직 독립하지 못한 프로이트의
여섯 동생이 있었으며 프로이트는 마르타 베르나이스(1861--1951)와의 결혼을 생각하
고 있었다.
드디어 프로이트는 개인병원을 개설하여 경제적으로 독립하려고 결심하게 된다. 졸
업을 전후하여 프로이트는 독립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내과이사 노탕겔과 정신병원의
뇌해부학자이며 신경병리학자인 테오도르 마이너트 밑에서 일하였다. 특히 프로이튼
마이너트의 영향으로 신경 계통의 질병에 관한 이론인 신경병리학에 관심을 가지게끔
되었다.
1884년부터 3년간 프로이트는 일종의 마취제인 코카인이 신경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
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삼아서 탐구에 몰두하였다. 당시 코카인은 해
롭지 않은 마취제로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프로이트도 그렇게 믿고 동료들을 도와 코카
인으로 마취하여 아버지 야콥의 눈 수술에 성공하였다. 프로이트는 코카인이 무해하여
국소마취제로 매우 효과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플라이슐-맑쇼브라고 하는 프로이트
의 친구는 손에 심한 종기가 나서 통증을 이기려고 모르핀(아편)을 사용하다가 거의
중독이 되어버렸다. 프로이트는 친구에게 코카인을 써보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점차로
코카인 중독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프로이트의 친구 플라이슐-맑쇼브 역시
매우 절망적인 코카인 중독자가 되었다. 프로이트의 첫 번째 도전, 곧 코카인을 신경
마취제로 안전하게 사용하려던 시도는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은 귀납법이 일반적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특수한 사실을
관찰해서 그로부터 일반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귀납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죽는
다. 공자도 죽는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죽는다."이런 추리는 귀납추리이다. 하나하
나의 특수한 사실을 경험하고 그 결과, 일반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귀납추리이
다. 그러나 위의 추리에서의 결론은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죽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에 반하여 연역법 또는 연역추리는 수학이나 형식논리학의 삼단논법에서 잘 나타
난다. "철식이는 영수보다 키가 크다. 영수는 일윤이보다 키가 크다. 그러므로 철식이
는 일윤이보다 키가 크다." 이렇게 볼 때 자연과학적 귀납법에서는 절대적인 진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결론이 성립한다. 따라서 자연과학에서는 통계가 바람직한 것으로
흔히 적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의 계기
살면서 무엇인가를 이루는 사람은 언제나 삶의 계기를 만나기 마련이다. 그러한 계
기는 적을 수도 있고 무한히 많을 수도 있다. 프로이트가 정신에 간한 본격적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쟝-마르뗑 샤르코이다. 당시 파
리의 유명한 신경학자로서 살뻬뜨리에 정신병원장이었던 샤르코는 히스테리에 관해서
독창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약 다섯 달간(정확히 1885--1886년 사
이의 19주일간) 얼마 안되는 장학금을 받아 샤르코 밑에서 연구하기 위해서 파리로 갔
다.
히스테리는 희랍말 휘스테라에서 온 것으로서 휘스테라의 원래 뜻은 자궁이었다. 당
시 사람들은 오직 여성들만이 마비, 경련, 환상, 언어와 감각과 기억의 상실 및 몽유
와 같은 히스테리 증세를 가진다고 믿었다. 중세 때만 해도 히스테리 증세를 지닌 여
자들은 마녀로 여겨져 박해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당시 신경병학 전문가들은 히스테리를 여자들의 단순한 상상으로 관찰하거나 아니면
여성 성기의 자극으로 보았다. 즉 난소나 난자에 대한 압박과 아울러 클리톨리스에 대
한 외과적 손상에 의해서 신경에 이상이
생기는 증세를 히스테리로 관찰 하였다.
그러나 샤르코는 과감하게 이들 전문가들의 진단에 반대하여 자신의 독자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물론 히스테리는 아무런 신체적, 유기적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샤르
코는, 히스테리는 여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결코 상상이 아니라 신경증,
즉 노이로제라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샤르코는 히스테리가 구조의 장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능의 장애에서 온다는 것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온몸은 멀쩡해도
기억이나 언어를 상실한 경우, 그것은 신경기능의 장애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이런한 사실은 샤르코가 히스테리와 최면간의 유사성을 증명한 것에서
명백해진다. 즉 최면에 의해서 팔이라든가 안면의 마비를 생기게 할 수 있다. 또는 최
면에 의해서 그러한 증세를 제거할 수도 있다. 샤르코는 물리학을 바탕 삼아 유물론적
입장에서 히스테리를 밝히려고 했고, 그것은 다분히 유전적 요인이 있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가 정신적인 요소를 갖고 있지나 않는지 의심하였으나 샤르코는
프로이트가 그렇게 의심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물론 히스테리가 여성의 성기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것, 히스테리와 최면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은 샤르코의 놀
라운 업적에 속하지만, 프로이트는
샤르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정신적 장애인 히스테리가 아마도 성적 배
경과 긴밀한 관계가 있으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의대생 시절과 그 이후 여러 스승의 영향을 바지만, 그가
정신분석학을 창시하는데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스승은 역시 샤르코라고 말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훌륭한 스승을 가지기 마
련이다. 프로이트 역시 샤르코와 같은 스승을 있었기에 현대사상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는 사상적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도전과 전진
프로이트는 드디어 1886년 4월 자신의 개인병원을 개설하고 신경 병리학자로서 환자
를 치료하고 실험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연구를 속행하였다. 물론 수없이 거듭되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그는 점차 정신분석학의 이론을 확립하여가고 있었다.
개원 후 프로이트는 처음으로 여성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하면서 전기요법을 사용하
였다. 몸 전체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여성 환자는 히스테리 증세를 호소하였고 프로이
트는 이 환자의 피부와 근육에 국소적으로 전기자극을 가함으로써 히스테리 증세를 치
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기 요법은 단지 자동암시적 효과만을 자져다 두었으므로 특수한 경우에만
효과적일 수 있었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전기요법을 일반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
요법을 포기하였다.
프로이트는 1886년 10월 15일, 샤르코를 비난하는 전문가들의 반대 견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비엔나 의사협회에 남자의 히스테리에 간한 연구를 소개하였지만 매우 강한
반박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연구를 계속하였다.
1891년부터 프로이트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출판하기 시작한다. 우선 언어능력에 강
한 영향을 미치는 뇌손상이 가져다주는 실어증(언어상실 증세)을 1891년에, 그리고 어
린아이의 뇌성마비를 다룬 연구를 1893년에 출판하였다.
당시 불란서의 낭시와 비엔나에서는 샤르코와 견해를 달리하는 최면이론이 전개되고
있었다. 샤르코는 히스테리 환자만 최면에 걸릴 수 있다고 본 반면에, 낭시의 일부 전
문가들과 비엔나의 브로이어(1842--1925)는 누구나 최면에 걸릴 수 있다고 보았다. 특
히 프로이트의 절친한 친구인 브로이어는 이미 최면요법에 의해서 히스테리 환자를 치
료하였다. 브로이어가 치료한 '안나의 경우'는 프로이트가 후일 브로이어를 설득하여
두사람의 공저로 '히스테리에 관한 연구'(1895)로 출판되었다.
브로이어에게 찾아와 히스테리 증세를 호소한 젊은 여인은 21세로 매우 지성적으로
생겼지만 성장시 가정교육이 너무 엄격하여 성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상태였다. 비교적
자유롭게 남녀교제를 하며 자란 사람은 성적으로 일찍 성숙하지만 엄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자연히 성적 성숙이 늦을 수밖에 없다. 안나라는 이 젊은 여인의 아버지가 큰
병에 걸려 자리에 눕자 안나는 5개월간 밤낮으로 간호하였으며 드디어 안나마저 쇠약
해져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브로이어가 볼 때, 안나는 기침을 자주하고 눈을 쉴 새 없이 깜박거렸으며 아무것도
못 볼 경우가 많았다. 그뿐 아니라 오른 쪽 팔과 목의 마비를 호소하였으며 게다가 독
일어로 물어보면 영어로 답하는 이상한 언어습관을 보였다. 또한 안나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환각으로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브로이어가 안나를 치료하는 동안 상태가 조금 호전되었으나 몇 달 후 안나의 아버
지가 죽자 그녀의 상태는 훨씬 더 나빠졌다. 안나는 저녁이 되면 혼수상태에 빠져 문
장은 문장이지만 사이사이 말이 빠진 문장을 중얼거렸다.
안나가 환각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할 경우 그녀는 남은 밤을 커다란 고통과 함께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브로이어는 환각을 이야기하게 함으로써 환가를 치료하는 방
법을 나름대로 "대화 치료"라고 불렀다.
안나가 가진 또 하나의 증세는 공수병 이었으며 안나는 한달 반 동안 거의 물을 마
실 수 없었다. 물 담긴 유리잔만 보아도 그녀는 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느날 안나
가 최면상태에 있을 때 브로이어는 왜 물을 마실 수 없는가 하고 물었다. 안나는 언젠
가 어떤 영국여자의 방에서 그 여자의 개가 유리잔의 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 구역질을
느꼈지만 예의상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브로이어는 안나에게 지금은 말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안나는 최면상태에서 영국여자를 가리켜 몰상식한 여자라고 큰
소리로 말했고 구역질나는 개라고 소리쳤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안나는 자신이 지금까지 그 개와 영국여자를 잊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브로이어는 안나에게 반복해서 체계적으로 최면을 걸어 혼
수상태에 빠지게 하여 그녀가 마음속 깊이 억누르고 있던 모든 것을 속 시원하게 말하
게끔 하였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끙끙 앓을 때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
는 말이 맞다.
브로이어는 계속 해서 안나의 증세를 치료하기 위해서 안나를 최면상태(혼수상태)에
빠지게 하여 어떻게 해서 눈을 깜박거리게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병든 아버지 옆에서
안나는 슬리 울고 싶었지만 아버지를 불안하게 할 것 같아 눈물을 꾹 참았다. 아버지
가 지금 몇 시녀고 물으면 눈물 고인 눈으로 시계를 볼 수 없고 눈을 깜박거려야만 시
계를 겨우 볼 수 있었다.
브로이어는 안나의 마비된 팔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안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다가 갑자기 새까만 뱀을 보고 팔을 마구 휘두르려고 했지만 전혀 쓸모 없었고 또
외치려 해도 소리가 나오지 않고 늘 익숙하던 몇 마디 영어 기도문을 내 뱉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였다.
브로어어의 이와 같은 치료 방법은 대화치료이면서 동시에 '정화'로서 그것은 카타
르시스(희랍말의 원래 뜻은 설사 또는 정화임)에 해당한다. 마음이 억눌리게 된 원인
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그 원인을 꺼내어 억눌린 마음을 폭발시킬 때, 억눌린 마음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장애가 생긴 것이 자연히 소멸되면 마음은 자연히 깨끗해지기 마련
이다.
프로이트는 샤르코에게 브로이어가 치료한 안나의 경우를 이야기했으나 샤르코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프로이트도 당장은 정화방법을 환자치료에 사용하지 않았다.
안나의 원래 이름은 베르타 파펜하임(1859--1836)이며 그녀는 건강한 정신을 되찾은
후 남녀평등주의자로서 그리고 사회봉사자로서 일생을 헌신하였다. 오스트리아는 그녀
를 위하여 기념우표까지 발행하였다.
프로이트와 브로인어는 '히스테리에 관한 연구'에서 히스테리 환자는 주로 억압된
기억으로 인해서 신체적인 고통에 괴로워한다고 생각하였다.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우며 불쾌한 기억으로 인하여 히스테리 한자는 여러 가지 증세
를 나타낸다. 충격을 뜻하는 희랍말 "트라우마"는 상처를 의미한다. 또한 충격적이며
고통스러운 기억은 질병을 생기게 한다. 이 점에서 프로이트는 완전 한 유물론의 입장
을 완화시켜서 정신과정이 신체의 물리적 과정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는데, 이
런한 입장은 지금까지 프로이트가 견지했던 유물론적 입장에 반대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수없이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질병을 생기게 하는 기억은 강력하
고도 충격적인 성격의 것이다. 자질구레한 기억들은 곧 사라지고 말지만 강렬한 충격
적 기억은 능동적이자 결정적으로 우리들이 행동을 결정하는 무의식적인 힘으로 남는
다.
충격적 기억은 부정적이고 무의식적인 기억이면 이것은 정상적 기능을 행할 수 없
다. 따라서 이 기억의 정서적 힘과 정열은 겉으로 나타나지 못하므로 억압된 기억은
힘은 전혀 다른 것으로, 곧 신체의 물리적 히스테리 증세로 나타난다.
그러나 억압된 정서(기억이 가지는)가 해방되는 순간 히스테리 증세는 치료되어 사
라져버린다. 충격적 기억의 경험을 환자가 다시 한 번 체험할 때 억압된 정서를 폭발
시켜서 해방시키면 환자는 치료단계에 들어간다.
정신분석
프로이트는 친구 브로이어와 '히스테리에 간한 연구'를 쓰고 난 후 히스테리가 충격
적 기억보다 오히려 성에 보다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였고 브로이어는 이러
한 프로이트의 견해에 찬성할 수 없어 두 사람은 결국 서로 갈라서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모든 환자들이 최면에 의하여 치료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일부의 화자에
게만 최면이 도움된다는 것을 알고 나서 최면으로부터 다른 방향을 찾기 시작하여 "유
혹이론"을 정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프로이트는 억압된 기억이란, 성인의 유혹 또는 성적잘못을 근거로 가진다
고 보았다. 어릴 때 가진 이와 같은 억압된 기억은 사춘기가 지난 후 히스테리 증세를
초래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환자의 치료에 있어서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고안해내려고 하
였다. 그는 환자의 이마에 가볍게 손을 재고 화자의 마음을 안정시킴으로써 충격적인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지압테크닉"을 사용하였으나 이 방법 역시 모든 환자에게 도
움되는 것이 아니고 일부 환자에게만 도움된다는 것을 깨닫고 "지압테크닉"도 포기하
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1896년 "정신분석"이라는 개념을 부각시키면서 본격적으로 신경증을 치
료하고 연구하였다. 특히 그는 "자유연사의 테크닉"을 창안하여 환자 치료에 적용하였
다.
만일 환자에게 억압된 기억이 무엇이냐고 꼬치꼬치 캐어물을 경우 환자는 검열 받으
면서도 또한 억압받기 쉬우므로 제대로 충격적 기억을 추적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환자로 하여금 머리 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말하고 지껄이게 놓아두면 환자
는 자유롭게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된다. 즉 환자는 자유롭게 모든 것을 연상하여 말할
수 있다.
히스테리 증세에 대한 근본원인으로서의 핵심은 어느 누구도 아닌 환자만이 무의식
안에 감추고 있다. 그러면서도 환자는 어떤 것을 자신이 억누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오직 환자만이, 치료하는 사람을 자신이 억누르고 있는 바로 그것
으로 이끌고 갓 수 있다.
환자는 자신이 무턱대고 아무 것이나 털어놓다가도 억눌리고 불쾌해하며, 강한 내용
이 명백해지는 순간 매우 힘차게 반항한다. 치료사는 무한한 인내를 가지고 환자를 따
라가면서 가장 핵심적인 열쇠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전문가로서의 치료사
의 경험과 인내 그리고 강력한 충격의 내용을 붙잡아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프로이트의 "자유연상 테크닉"이 이미 "꿈의 해석"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꿈꾼 사람이 제아무리 사실적으로 분명하게 꿈 이야기를 하더
라도 꿈을 옳게 해석할 때 비로소 꿈 속 깊이 숨어 있는 욕구를 알아 챌 수 있는 것이
다.
프로이트는 어느덧 40대에 접어들었다. 그는 비록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환자를 치료
하였지만 부모와 부인 그리고 형제들과 여섯 명의 자식들을 부양하기에는 너무 고달픈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는 언제나 피로에 지쳐 거의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그가 유
일하게 쉬고 즐길 수 있었던 것은 토요일 저녁의 카드놀이와 시골길의 산책 그리고 버
섯다기라든가 어쩌다 하는 골동품 수집이었다.
그 자신도 10년도 넘게 항상 노이로제에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프로이트는
몸이 쇠약해져 자주 병치레를 하였으며 가난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이 시절 프로이트는 연구를 중단하지 않고 '꿈의 해석'(1900)을 출판하였다.
외디푸스 콤플렉스
프로이트는 정신적인 히스테리 또는 노이로제의 원인이 성적인 것에 근거를 두고 있
다는 생각에 몰두하여 외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을 창안하게 되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남자아이들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경쟁자로 생각하고 어머니를
독점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자기보다 어마어마하게 센 사람인 것을 알기 때
문에 감히 경쟁하지 못하고 억압당하는데 그것을 가리켜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
렉스라고 한다. 남자아이는 일곱 살이 지나면 아버지의 강함을 인정하고 강한 아버지
의 모든 것을 흉내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여자아이는 어렸을 때 페니스 선망에 사로잡힌다고 한다.
여자아이는 어머니를 경쟁자로 생각하면서 자기에게는 남자아이들이 가진 고추가 없
는 것을 알고 억압당한다고 한다. 곧 여자아이는 엄마가 자기를 아무것도 달아주지 않
고 밋밋하게 낳아준 것에 대하여 엄청나게 엄마를 미워한다.
외디푸스는 희랍의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가 쓴 비극 '외디푸스'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다. 외디푸스에 관한 이야기를 간단히 살펴보면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어느날 예언자가 나타나서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요카스테에게 장차 아들을 낳
으면 그 아이가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결혼할 비참한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경고하고 사라져 버린다.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신하들은 아이의 발을 바늘로 뚫은 후 아직 젖도 떨어지지 않
은 핏덩이를 산에 갖다 버렸다. 외디푸스라는 희랍말은 '부픈 발'이라는 뜻을 가진다.
혹시 아이가 크더라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기 위해서 발에 바늘자국을 낸 것이다.
양치기가 우연히 외디푸스를 발견하여 가여운 생각에 구하여 멀리 떨어진 나라 왕의
양자로 들여 보냈다. 외디푸스는 양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무럭무럭 성장하여 청년
이 되었으나, 어느날 예언자가 나타나서 장차 외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근친 상간할 비극적인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경고한다. 외디푸스는 몇 날 몇 밤 고뇌
에 쌓여 잠 한숨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양부모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외디푸스는 정처 없이 무작정 이 나라 저 나라로 방황하였다. 그러다 어느날 길거리
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서로 언쟁하다 주먹질까지 오고 가
게 되었다. 외디푸스는 젊은 혈기에 그 낯선 사람을 살해하고 만다. 그가 바로 라이오
스왕일 줄이야... 외디푸스는 허기지고 지친 몸으로 다시 여러 곳을 배회하다가 테베
나라에 도착한다.
당시 테베의 모든 사람들은 스핑크스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
었다. 스핑크스는 수수께끼를 내놓고 그것을 풀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삼켜버렸다.
스핑크스가 내놓은 수수께끼는, 아침에는 네발로 걷고 점심에 두 발로 걸으며 저녁에
는 세 발로 걷는 생물이 있는데. 이 생물이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외디푸스는 용감하게 스핑크스 앞에 다가가 어릴 때 네 발로 기어다니고 어른이 되
어서는 두발로 뛰어다니고 늙으면 지팡이에 의존하는 것은 사람 말고는 다른 생물일
수 없다고 수수께끼를 한 번에 풀어버린다. 그러자 스핑크스는 자신의 약속대로 바다
에 빠져 죽어버렸다.
그때 테베는 왕비 요카스테가 다스리고 있었으며, 요카스테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를 풀고 그 괴물을 물리치는 자를 왕으로 삼아 그와 결혼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
약속에 따라서 외디푸스는 테베의 왕으로 추대되어 요카스테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
다. 외디푸스는 요카스테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테베를 평화롭게 다스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나라에 페스트가 퍼져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으며 다시 예언
자가 나타나 경고하는 것이었다. 라이오스왕을 살해한 자가 발견되어야만 페스트의 재
앙이 끝나리라는 것이 경고의 내용이었다.
테베 전체가 라이오스왕을 살해한 죄인이 과연 누구일까라는 의심을 제기하며 들끓
었다. 외디푸스는 결국 자신의 무의식적인 범죄를 알아채고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세상
에서 필요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말았다.
왕비 요카스테는 천하에 있을 수 없는 근친상간을 저지른 여인이 바로 자기라는 것
을 알고 자살함으로써 삶을 끝내고 말았다.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근친상간의 환상, 곧 아버지를 질투하고 어머니를
사랑하는 환상 내지 소망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유아기에 지녔던 외디푸
스적 소망을 성장하여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견해이다.
꿈의 해석
프로이트는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성적인 성격의 것으로 규정하고, 계속해서 성적 바
탕 위에서 꿈에 관한 독자적 입장을 정리하여 나갔다. 프로이트에 있어 꿈은 무의식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한 체계적 암시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꿈은 무의식적 욕구
충족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꿈은 우리의 의식이 가장 힘을 잃어 깊이 잠든
수면상태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꿈은 우리가 정상상태에서 충족시키지 못한 욕구를 충
족시키기 위해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대부분 성적인 것이다. 우리는 꿈속에서 보통 때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을 꿈꾸는데, 그것은 우리의 욕구 자체를 정상상태에서는 우
리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욕구 충족으로서의 꿈도 역시 흔히 우리가 생각하기 힘
든 것이다.
프로이트는 칼이나 뱀 또는 주머니나 구멍과 겉은 것을 꿈꾸면 그것은 욕구에 대한
일종의 상징이라고 본다. 프로이트가 꿈을 어떻게 해석하는 지 살펴보는 일은 매우 흥
미있다.
꿈은 우선 욕구를 표현하고, 무의식적인 성적 욕구를 포함하는 꿈의 내용은 은폐되
어 나타나며, 따라서 꿈의 내용은 일종의 퀴즈나 상징적 암호로 나타난다. 잠재적 욕
구 내용은 꿈속에서 상징에 의해서 모습을 드러내고, 상징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성
적 의미를 소유하지 않은 재상으로 나타난다. 욕구의 잠재적 내용은 꿈에서 그대로 나
타나지 않고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상징이다.
예컨대 칼이나 총, 우산이나 뱀처럼 어떤 것을 관통할 수 있는 대상은 남성의 성기
에 대한 상징이고 밤이나 주머니 또는 구멍이나 보자기같이 무엇을 받아들이는 대상들
은 여자의 성기에 대한 상징이다. 프로이트는 꿈과 노이로제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꿈
의 욕구 내용은 상징을 빌려 성적 욕구를 간접적으로 표현한다고 보았다.
노이로제에 있어서는 질병을 생기게 하는 생각에 의해서 정서의 힘이 신체의 병적
증세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일종의 전이이다. 이러한 전이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어떤 여자아이가 더러운 것을 보고 심한 구역질을 체험했다고 하자. 이 여자아이는 성
인이 된 후 매우 심한 결벽증에 걸릴 수 있다. 비록 자신은 의식하지 못한다고 할지라
도 더럽다는 생각이 그녀에게 노이로제나 히스테리 증세를 가져다 준다면 그녀가 가진
더럽다는 생각이 정서의 에너지를 질병의 증세를 옮겨주는데 이러한 상태를 전이라고
한다. 프로이트는 꿈에 있어서도 이러한 전이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꿈에서 충족을 기
다리는 욕구는 무의식적인 것이고 이 욕구가 뱀이나 칼과 같은 대상의 상징으로 나타
나는 것 역시 무의식적인 것이다. 정상인이면 누구나 꿈을 꾸기 마련이고 환자 역시
꿈을 꾼다. 이제 프로이트는 점차 자신의 혁명적인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무의
식은 전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며 괴물이 우굴거리거나 병들어 이상해진 것도 아니고
인간이면 모두 가지고 있는 심층의식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의식을 표면적, 형식적,
부분적인 것으로 보고 오히려 무의식(심층의식)을 가장 내면적이며 근복적인 것으로
보았다. 예컨대 이는 청년이 처녀에게 "나는 목숨을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다 바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이렇게 말한 것은
의식이다. 그렇다면 이 청년의 무의식은 무엇인가?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지면 청년이
처녀를 성적으로 소유하려는 욕구가 바로 무의식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프로이
트는 병든 영혼이나 정신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의 의식이나 정신에 관한 이론을
분명히 성립시키려는 커다란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꿈의 해석 결과 프로이트는 인간의 영혼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하나는
의식 또는 의식적 영혼으로서, 그것은 의식될 수 있는 모든 생각과 아울러 기억을 포
함한다. 우리들이 정상적으로 깨어 있을 때 가지는 의식이 바로 이것이다. 또 하나의
영혼은 무의식, 곧 무의식적인 영혼인데, 이것은 성적이고 파괴적이며 충동 및 욕구를
함께 지닌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항상 의식과 무의식을 함께 지니고 있고 이들
둘 가운데서 방황한다. 그러나 정상인은 의식과 무의식을 조화시키고 신경증 환자는
이 조화를 상실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꿈의 해석에서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발견하였고 이와 연관하여 쾌락의 원리 및 현실
의 원리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쾌락의 원리란 욕구나 충동을 충족시키려는
원리이고 현실의 원리는 의식에 의해서 현실을 냉철히 관찰하여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원리이다. 말하자면 무의식을 바탕으로 삼는 것이 쾌락의 원리이고 무의식과 의식 양
자 모두를 바탕으로 삼으면서도 의식에 치우친 것이 현실의 원리이다.
프로이트는 쾌락의 원리를 1차적 충동충족의 원리라고 하며 현실의 원리를 2차적 충
족의 원리라고 한다. 1차적 과정의 무의식적 충동충족의 원리, 곧 쾌락의 원리는 충
동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비조직적이다. 특히 갓난아이들을면 쾌락의 원리를 잘 살필 수
있다. 1차적 충동충족의 원리는 멋대로 충동을 충족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의 원
리는 이와 달리 조직적이며 논리적이고 정리된 사고를 지닌다. 밀림에서 배고픔에 시
달릴 때 현실의 원리에 의해서 인간은 함정을 파거나 아니면 나무꼬챙이를 사용해서
먹을 만한 짐승을 잡으려고 한다.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의 사고는 의식체계와 무의식체계 사이의 모순이며
동시에 이들 두 체계 사이의 절충이라고 말한다.
젊은 연인들의 예를 들어보자. 남녀 각각은 한편으로는 무조건 성적 충동을 만족시
키려는 욕구에 휩싸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장래 생각도 하고 주변의 현실적인 사정,
그리고 두 사람간의 관계를 침착하게 생각한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출판한 후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에 대하여'(1901)를 출
판하고 거기에서 망각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 이후 그는 '성적 이론에 관한 세 편의
논문'(1905)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종래의 성관념을 떨쳐버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프로이트는 사람들 중 자기들의 성이나 성기의
일부에만 집착하는 사람들, 성을 정상으로 사용하지 못하여 변태로 취급되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과연 성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파헤치고자 한다.
프로이트는 성행위에 흔히 입과 항문이 동시에 사용되며 또한 정상적인 성교에 앞서
서 남녀가 서로 느끼고, 바라보고, 비비며 보여주는 전희가 필요함을 관찰하였다. 그
리하여 그는 세력의 목표와 생식의 목표는 서로 완전히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사실 남녀가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곧 자식을 낳으려는 본능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시 말해서 성적이라는 말과 '생식기의'라
는 말은 서로 다른 말이다. 성적 쾌락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몸 전체 어느 부분을 통해
서도 나타날 수 있으므로 성을 꼭 성교와 연결해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다.
다음으로 프로이트는 변태성욕자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취급한다. 심한 노출증 환자,
이성의 신체 일부를 보거나 이성을 연상시키는 물건만 보아도 성적 자극을 강하게 받
는 대물음란증 환자들이 바로 변태성욕자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정상인은 그와 같은
필요를 평소에 잠재적으로 가져도 실제의 성생활과 꿈을 통해서 풀어버리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마치 노이로제 환자와 유사한 증세를 보인다.
프로이트는 성과 성도착환자(변태성욕자)에 대한 연구로 부터 "리비도이론"을 발전
시켰다. '리비도'라는 라틴말은 쾌락을 뜻한다. 프로이트는 리 비도를 본능적 에너지
또는 성적충동이라고 보았다. 리비도는 물리적 및 정신적 구성요소를 가지는데, 그것
들은 자극의 내면적`유기적 원천 그리고 극의 일정한 강도 내지 긴장, 이러한 긴장의
완화에서 생기는 쾌감과 그 쾌감을 통해서 성립하는 목표, 그러한 목표를 실현시킬 수
있는 대상 등이다.
물론 리비도이론은 후에 보다 완전한 형태를 띠겠지만 프로이트는 인간이 유아 시절
에 원만한 욕구 발산과 억압을 체험하여야 충동충족도 정상적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변태성욕자의 예는 리비도의 표현이 극히 비정상적을 되는 인
간을 말한다.
프로이트는 개인의 성발달은 출생과 함께 시작한다고 보았고, 신생아의 리비도(원천
적인 삶의 에너지)는 처음부터 제대로 형성되지는 못하고 끊임없는 학습과정을 통해서
접차로 틀을 갖춘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개인의 성적 발달의 단계를 네 단계로 나누어 보는데 그것들은 각각 구
강기, 항문기, 성기기 및 잠복기이다. 아기는 처음 태어나면 젖을 빨아 먹는 데서만
쾌감을 느낀다. 아기에게는 입이 전부이고 세계이다. 아기의 입의 대상은 엄마의 유방
이다. 아기의 유일한 잠재적 불안은 엄마가 유방을 치워버리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개인의 성적 발달의 두번째 시기는 항문기이다. 구강기를 지나면 아이들은 배설기관
을 뜻대로 지배함으로써 쾌감을 얻는다. 아이들은 배설하면서 세계를 멋대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며 동시에 자신이 이 세계에 배설물을 선물로 주고 있다고 생각하며 동
시에 자신이 이 세계에 배설물을 선물로 주고 있다고 여긴다. 배설하기 전에 온몸을
꽉 움켜쥐는 것 그리고 배설할 때 시원하게 쏟아버리는 것은 아이들에게 극치의 쾌감
을 준다.
아이가 성장해서 질서와 청결을 소중히 알고 불결함에 대하여 구토를 느끼는 것 등
은 아기 시절의 배설습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프로이트는 재능, 수치 및 제한된
질서 등을 항문적으로 본다. 프로이트는 항문기를 암시하는 것으로서 프로메테우스 신
화를 예로 든다.
희랍신화에서 나오는 프로메테우스는 진흙에서 최초의 인간들을 창조하였으며 또한
인간에게 불을 선물로 주었다. 인간에게 금지된 불을 준 벌로 프로메테우스는 바위에
꽁꽁 묶이게 되었고 독수리들이 그의 간을 쪼아 먹었다.
이러한 신화는 항문기에 있어서의 지나친 배설은 그에 해당하는 보상을 받는다는 것
을 뜻한다.
세번째 발달단계는 성기기이다. 세 살 내지 네 살이 되면 아이들은 스스로 창조적으
로 될 수 있는 도구를 찾아낸다. 아이들은 성김대의 자극을 통해서 자기만족에 빠지고
쾌감을 느낀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자기들이 엄마를 통해서 아기를 만들어내거나 또는 항문을 통해
서 아기를 출산할 수 있다고 일반적으로 믿는다.
이 때의 아이들은 남녀 모두 남녀의 해부학적 차이에 대해서 호기심도 가지고 불안
해하기도 하며 혼란한 마음을 지니기도 한다.
이 시기 이후 다섯 살에서 여섯 살까지 아이들은 외디푸스 콤플렉스 및 거세 콤플렉
스의 단계를 거친다. 거세 콤플렉스란 아버지가 보잘것 업는 자신의 것을 잘라버리기
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아이의 억압된 심리이다. 물론 여자아이들은 페니스 선망에 빠
진다. 여자아이들은 엄마가 자기를 낳을 때 아무것도 달아주지 않고 밋밋하게 낳아준
것데 대하여 수치심과 원한감을 가진다.
다음 시기는 잠복기이다. 보통 6,7세에서 사춘기에 이르기까지 성적 충동이 사라지
는 것처럼 보이는데, 성적 충동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심충으로 가라앉는다.
성에 관한 유아기적 건망증이 형성되어 우리들이 어른이 되면 아이 때의 성적 경험
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이가 무슨 성적 경험을 하겠느냐고 반박할 정도
로 된다. 어린아이의 성적 충동은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억압과 아울러 끝나고 만다.
6,7세가 지나면서부터 입과 항문과 성기에 관한 생각과 충동은 점차 무의식적으로
배제되고 그것들을 직접 나타내거나 표현하는 것은 더이상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충동은 언제나 리비도(삶의 근원적 힘)가 발전시킨 구조 안에 단지 잠재적으로만 그대
로 남아 있다.
유아기의 성적 발달의 세 단계에서 생긴 기억들은 우리가 장차 어른이 되었을 때 매
우 강한 영향을 미친다. 어른이 되면, 잠재하여 있던 성은 다시 고개를 불쑥 내민다.
어른은 직접 성행위를 할 수 있다.
짐승들에게는 성적 본능은 항상 생물학적으로 고정되어 있지만 인간의 성적 본능은
학습과 현실을 함께 동반한다. 남녀가 서로 보여주고, 비비며, 바라보는 것은 학습이
필요하며 또한 현실의 상황을 고려한다. 또한 인간만이 유아기와 사춘기의 성적 발달
단계를 거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아기에 구강기, 항문기, 성기기의 단계를 조화롭게 지낸 아이
들만이 어른이 되어 원만한 성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성격도 원만하다.
예컨대 유아시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배설하던 아이는 어른이 되면 모든 것에
무질서하고 낭비벽이 심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배설에 관해서 지나치게 꾸지람 듣고
욕먹은 관계로 배설 욕구를 늘 참아야 했던 아이가 크면 매우 인색한 사람이 된다.
노이로제
프로이트는 개인의 성적 발달단계와 연관하여 노이로제 문제를 계속해서 탐구하였
다. 대부분의 정상인은 고뇌에 빠지면 고뇌의 근원을 찾아냄으로써 고뇌의 늪에서 빠
져나온다. 그러나 노이로제 환자는 고뇌의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한없이 고뇌의
깊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다시 말해서 노이로제 환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장
애에 의해서 희생당하고 있는 사람이다.
프로이트는 노이로제 역시 성적 충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유아기의
학습과정에서 무엇인가가 잘못 될때 성적 충동의 구조가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노이로제 증상이 생긴다고 본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아기에 리비도가 일정하게 정해짐으로써 어떤 사람은 정상적
발달이 방해받는다. 이렇게 방해받은 상태로 의식이 거꾸로 돌아갈 때 여러 가지 노
이로제가 발생한다. 유아기에 배설로 인하여 늘 욕먹고 자란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유아시절 이 사람은 항상 "이놈아. 아무데나 싸면 되니? 이 더러운 놈, 좀 깨끗
하게 일정한 곳에 싸지 못하겠니?" 이렇게 억압당했다. 그리하여 이 아기는 가능하면
배설하지 않는 습관을 지니게 되고 어쩔 수 없을 때 깨끗하게 배설하는 습관을 학습한
다. 이 아기가 어른이 되면 "항문적 고착"으로 인한 강박증 노이로제를 나타내기 쉽
다. 즉 인색하며 질서에 엄하다.
유아기의 충동목표의 불완전한 발달은 비정상적 대상에 집착할 수 있으므로 이와 같
은 유아기를 보낸 어른은 대물성도착 환자가 될 경우 구두, 털외투, 몸의 일부분(귀나
손이나 엉덩이 등)을 성적 대상으로 삼게 된다.
성적 목표(충동이 행하는)가 잘못 될 경우 성적 대상은 자신과 같은 대상으로 전위
되며 그것은 동성애로 나타난다. 프로이트는 정상적인 성이란 오로지 발달 가능성일
뿐이고 그것은 학습과 현실에 따라서 정상적으로 또는 비정상적으로 될 가능성들을 함
께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성 이론에 의해서 정신병학계에서 유명하게 되었지만 이에 반하여 모든
것을 성에 근거하여 밝히려고 한다는 심한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무의식의 심리학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는 능력을 정신이라고 불러왔다. 대륙
의 합리론자들은 정신 중에서도 이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를 얻을 수 있게 해준다
고 주장한 반면에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정신(또는 마음)에 이성은 없고 오직 습관적
감각에 의해서 인간은 대상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들과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정신을 빙산에 비유한다면, 물
위에 나와 있는 극히 작은 부분이 의식이고 물에 잠겨 있는 엄청나게 커다란 부분이
무의식(심충의식)이라는 것이 프로이트의 생각이다. 무의식은 충동으로 가득차 있으며
결정적으로 인간의 행동을 생기게 하는 임의적인 힘을 가진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관해서 29세의 청년을 예로 들어서 설명한다. 프로이트는 이
청년을 "쥐 인간"이라고 부른다. 이 쥐 인간은 아버지와 여자 친구가 옛날 중국식의
고문으로 벌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고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고문 당하는 사람의
엉덩이에 쥐를 담은 상자가 움직이지 않게 묶여진다. 쥐는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허기진 것을 참지 못하여 상자를 나와 묶여 있는 사람의 항문을 갉아 먹으면서 들어간
다.
프로이트는 이 청년, "쥐 인간"을 얼한 달간 치료하여 정상인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쥐 인간을 치료하는 동안 이 청년에게서 성적 호기심과 긴밀히 연
관된 유년기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 청년이 아이였을 때 어느날 여자 가정교
사가 아이를 보고 그녀의 비밀스러운 신체의 아랫부분을 찾아보라고 했다.
아이는 강한 욕구를 억누를 수 없었지만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떨까 하는 불안
에 사로잡혔다. 아이의 성적 자극은 아버지가 가할 처벌과 아울러 아버지에 대한 적개
심을 함께 포함하고 있었다.
쥐 인간은 열심히 공부하여 아버지를 감동시킴으로써 아버지로부터 칭찬받고 사랑받
으려고 한 반면에, 남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자주 수음함으로써 아버지에게 도전
하고 반항하고자 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죽은 후 사후의 세계를 믿게 되었고 따라서
자신과 아버지의 적대관계가 계속되리라고 믿었다.
그는 유년기에 처음 발기했을 때 어머니를 찾아가서 호소했으나 어머니로부터 별 신
통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발기된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했
던 것이다. 이것은 항문적 고착으로, 즉 유아기에 배설을 참으면서 "너희들에게는 내
보물을 주지 않을꺼야"라고 외치면서 남들을 괴롭히고 자기만의 쾌감을 얻으려는 학대
음란증적 요구와 결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청년에게는 "쥐 이야기"가 그토록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청년이 정상생
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움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노이로제 환자는 과거의 기억을 정확히 꼬집어내지 못하고 단지 현재 상태에서 맴돌
면서 반복만 하기 때문에 노이로제 증세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가 자신의 무의식을 잡아내는 순간 그의 무의식은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으려고 강
하게 반항할지라도 일단 그가 그것을 분명히 붙잡으면 노이로제 증세는 곧 소멸하고
만다. 왜냐하면 억압되어 비정상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하게 하는 무의식의 덩어리가 해
소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쥐 인간의 경우, 그가 방황하고 고뇌하며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이유를 현재 상황에
서 찾는 것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그의 성적 불안은 전혀 다른 곳, 곧 무의식에 뿌
리박고 있으니 그 무의식은 그의 유년기에 잘못 발달된 성을 뿌리로 삼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잘못된 성적 발달의 참다운 모습을 확실히 회상하여 알게 될 때, 청
년은 성적 발달의 방향을 정상적으로 돌림으로써 성적 불안의 노이로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정신분석학 운동
프로이트는 자신이 정신분석학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연구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하
고 1902년부터 1908년에 이르기까지 아들러, 융과 같은 제자들과 그외의 여러 개척자
들을 규합하여 "비엔나 정신분석학 혐회"를 창립하였다. 프로이트는 1909년 몇몇 제자
와 함께 미국의 클라크대학에 초청받아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에 대하여 강연했으며 1
910년에 들어와서는 국제적 명성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신의 독선적이고 독재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그리고 정신분석학
이론의 차이로 인하여 아들러, 융, 수테켈 등 자신의 오랜 제자들과 갈등을 빚고 갈라
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융 자신의 말대로 융의 프로이트에 대한 스승 존경은 '종교적 열광'과도 같은 것이
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종교적 광신'이 흔히 배반 내지 반역으로 끝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너무 뜨거운 사랑은 쉽게 차가운 증오로 변하며, 마찬가지로 지나
친 충성심을 보이는 신하는 재빨리 간신으로 변하기 쉽다.
융과 프로이트의 관계는 마치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와도 같은 것이었으나 융이 1912
년 미국의 포오담대학교에서 행한 강연으로 인하여 두 사람 사이는 영영 멀어지게 되
었다. 이 강연에서 융은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콤플렉스는 전혀 무의미하고, 유아의 성
에 대한 이론도 잘못된 것이며, 성과 쾌락획득이 동일한 것이 아니고 리비도가 성적으
로 정의되어서는 안될 성질의 것이며 따라서 프로이트는 성을 너무 지나치게 확대 해
석하고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프로이트는 융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아버지를
제거하려는 무의식적 욕구에 대한 갈등에 융이 휩싸여 있다고 보았다.
융은 1912년 12월 18일 프로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신 분석학회가 분열된 책임은
바로 프로이트에게 있는데, 그 원인은 프로이트가 제자들을 어린아이들처럼 취급했기
때문이라고 표현하였다. 프로이트는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토템과 금기'(1913)를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프로이트는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의미를 재강조했으므로, 근친
상간적 환상의 의미를 항상 축소시키고자 한 융과 결정적으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토템은 일정한 종족집단의 혼백이나 조상을 나타낸다. 토템은 부상입혀서도 안되고
죽여서도 안되는 짐승으로 상징되며 토테미즘은 종족 이외의 사람과 결혼하는 습관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같은 종족 안에서는 근친상간이 금기로 되어 있었
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근친상간이 종족 안에서 금지된 이유를 생물학적인 이유가 아니라 사회
학적 이유에서 찾았다. 흔히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같은 종족 안에서 결혼하면 불구자
가 출생하거나 신생아가 질병을 가질 것이기 때문에 같은 종족끼리의 결혼이 금지되었
으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생각은 이와 전혀 다르다. 서로 다른 종
족 사이에서 성이 교환됨으로 인하여 문화가 오가고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매년 사람들은 한번씩 토템 짐승을 죽여서 그것을 먹는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광란하
는 즐거움에 뒤이어 비장한 의식이 따랐다. 프로이트는 다윈을 인용하여 원시인을 예
로 든다. 원시인들은 힘센 가정들과 그들의 여자들로 구성되는 작은 집단의 사회 안에
서 삶을 영위하였다. 남자가 일단 성인이 되면 그는 여자를 얻기 위해서 늙은 아버지
를 살해하여 먹어치웠던 것이다. 이리하여 근원적 성적 범죄에 뒤따라 생기는 죄책감
은 살인과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토템법을 만들도록 하였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러한 근원적 억압이 바로 외디푸스 콤플렉스이며 이 억압은 인
간의 문화, 종교, 예술, 정치, 사회의 근원적 시초에 뿌리박고 있다. 프로이트는 자신
의 성 이론이 근본적으로 옳다고 확신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신경증과 성과의 명백
한 관계 같은 것에 대해서는 자신도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사실 갈
등과 억압의 문제를 명쾌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 이론 이외의 더 많은 것들을 필요
로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프로이트는 이론과 아울러 치료자가 환자의 무의식을 의식으로 돌리도록 하여
정상적인 상태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노이로제
환자가 정신분석학 이론에 관한 책을 제아무리 열심히 읽는다고 할지라도 노이로제로
부터 치료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배고픈 사람이 메뉴만 보고 배부르고자
해도 결코 배고픔을 충족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프로이트는 치료시 환자가 치료에 대해서 매우 강하게 저항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였
다. 환자는 치료를 받을 때 치료자에게 매우 강한 적대감을 표시한다. 즉 환자는 자신
의 무의식적인 성적 감정을 의사에게 전이시킨다. 일반적으로 노이로제 환자는 소파에
편히 누우라는 의사의 말에 저항하며 온갖 욕을 퍼붓기 쉽다. 그와 같은 저항 내지
적대감은 바로 환자의 억압된 노이로제를 잘 나타내 준다.
신경증 환자는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여, 그 뿌리를 캐어내려고 하지 않고 똑같은 행
위와 생각을 반복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과거의 억압된 내용은 계속 숨어 있으려
고 하여 강한 힘을 가지고 회상되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방해한다. 프로이트는 이처
럼 환자가 의사에게 반항하는 것을 전이라고 보고 전이를 수단으로 삼아 환자로 하여
금 무의식을 의식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만일 환자가 저항하지 않는다
면 전이가 성립하지 않으며 상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삼각하다고 할 수 있다. 자
기도취증(나르시시즘)과 같은 노이로제는 환자의 전이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치료가 매
우 곤란한 일종의 신경증에 해당한다. 물론 자기도취증은 정상인에게도 얼마간 다 있
다. 보통 유아기의 아이들은 자기도취적 리비도(삶의 근원적 힘)를 가지고 있으며 이
리비도는 대상이나 다른 인간에게로 전이된다.
또 우리들 성인은 누구나 자아-이상을 가지고 있다. 자아-이상은 가장 정상적인 것
이다. 어린아이는 누구든지 최진실이나 강수연과 같은 배우가 되려고 하거나 아니면
조용필과 같은 가수가 되려고 하거나 또는 특정한 학자나 영웅 또는 과학자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즉 자아-이상을 가지고 세계를 헤엄쳐 나가고자 한다.
우리는 누구나 이처럼 강한 자아-이상에 의해서 정신적 잘병을 극복하여 나아가고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사랑하는 것은 자아-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며 동시에 질병에
걸리지 않고 스스로를 건강한 삶에 몰두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자아가 거친 세계에 도전하지 못하고 세계를 피하여 자기 안으로만 움
츠러들면 변태적 자기도취증에 빠질 우려가 있다. 변태적 자기되취증은 유아적 자기도
취증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심할 경우 고질적인 정신질환을 일으킬
우려가 많다. 예컨대 과대망상증, 우울증, 의기소침, 환각, 망상 및 편집증 등의 증세
들은 자기도취증의 심한 경우들이다.
죽음의 충동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전쟁동안 비엔나의 생활은 누구에게나 말 그대로
비참한 것이었다. 생활필수품이 모자랐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매일을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겨울에는 땔감이 부족하여 프로이트가 원고 쓰기에도
너무 추울 정도였다. 프로이트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담배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
다 어려웠다는 것이다. 1919년 독일-오스트리아는 연합군에 의해서 전쟁에서 패하게
되었고 1920년에는 어마어마한 인플레가 모든 사람들을 괴롭혔다.
프로이트는 전쟁 전에 약간의 저축을 하였으나 그것은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생계유
지에 필요한 수만큼의 환자도 그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가난과 죽음의 불안 그리고 암
흑에 찬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구하고 프로이트는 자기도 취증에 관한 탐구를
계속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죽을 가치도 없고 죄만 짓고 산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멜랑콜리한
사람이다. 멜랑콜리란 일종의 정신병적 우울증을 말한다. 누구나 전쟁통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비탄에 잠기기 마련이고 그것은 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탄 내지 고통이 의식적인 증오감으로 드러날 때 바로 그 상태는 멜랑콜리(정신병적
우울증)이다.
무의식적 증오는 잃어버린 사랑의 대상으로 향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바로
자기 자신으로 향한다. 프로이트는 유아적 자기도취증으로 퇴행한 비정상적 정신상태
를 지닌 19세 처녀를 치료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똥만도 못하므로 자살해야 한다고 외
쳐대었다. 병원에서 이 처녀는 왼쪽 팔을 가위, 손톱 및 면도칼 등으로 찌르고 자살을
몇 차례 시도하기도 하였다.
치료를 통해서 그녀는 과거의 기억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엄마를 많이 닮았고 어느
날 한 병사가 칼로 엄마를 마구 찔러 살해하였다. 그녀는 끔찍한 시체의 왼팔에 있는
점을 보고 겨우 엄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후 그녀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
었다.
이 처녀는 엄마와 자기를 동일시하고 엄마에 대한 증오를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놓았
다. 이러한 동일시는 투사로 일컬어진다. 투사에서는 사랑과 미움이 엇갈린다. 이 처
녀는 우연히 유리창을 깨뜨렸는데, 그때 치료의 효과가 나타났다. 처녀는 유리창에 엄
마의 모습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따라서 엄마를 향한 증오가 해소되었을 때 치료
될 수 있었다.
이제 프로이트는 리비도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성적으로
타인을 학대하는 새디즘(학대증)이나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마조히즘(피학대증) 양자
는 비록 나타난 형태는 달라도 그 근원은 똑같은 리비도라는 것이 프로이트의 입장이
다. 리비도는 또 한편 죽음의 충동을 지니고 있다. 희랍말 타나토스는 죽음을 뜻하고
생명체는 어느 것이든 타나토스의 충동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연어는 거센 물살을 헤
치면서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산란하기 위해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결국에
는 죽기 위해서 온갖 장애를 넘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죽음의
충동과 삶의 충동은 생명을 연장해주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충동은 삶을 연장하는 일종의 힘으로서 바깥 세계에 대한 적응능력을 가지므
로 외적 장애물을 만나면 그것에 대하여 공격한다. 그러나 죽음의 충동(타나토스)이
만일 스스로에게 대립되는 방향의 힘으로 변할 때 타나토스는 스스로를 파멸시켜 버리
고 만다. 우리가 흔히 듣고 보는 자살의 경우는 타니토스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행동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프로이트가 말하는 생명의 본능, 곧 애로스(희랍의 사랑의 신)는 무엇일까?
하나하나 개체의 생명은 자연적인 죽음을 향하므로 개체는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만
다. 하지만 종의 생존은 어떤 일정한 개체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
떤 하루살이는 말 그대로 하루만 살고 죽어버린다. 그렇지만 하루살이 종은 끊임없이
생존을 유지한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특정한 개인들은 결국 죽음으로 생명
을 끝내 버린다. 그러나 종으로서의 인간은 계속 생존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생명은 곧 충동이며 그것은 모든 유기적 생명에 본래부터 있는
힘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의 충동과 사랑의 힘은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근
본적으로는 둘 다 리비도라고 할 수 있다. 단지 그것들이 향하는 방향과 결과가 서로
다들 뿐이다. 이는 마치 새디즘(학대증)과 마조히즘(피학대증)이 나타난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둘 다 성적 충동인 것과 동일하다.
자아란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1920년 이후부터 가정과 건강에 있어서 결코 행복할 수 없는 나날을 보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1920년 프로이트가 가장 사랑했던 딸 소피가 죽었고 3년 후 손
자(소피의 아들)마저 세상을 떠났다. 1923년 4월데 손자가 죽었는데 똑같은 달에 프
로이트는 최초의 구강암수술을 받았다. 프로이트는 위턱 전부와 우측 구강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이 수술 후 그가 죽기까지 16년에 걸쳐서 프로이트는 모두 서른세번
의 구강암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입과 코가 붙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인공으로 입과 코를 서로 떼어놓는 방법이 사용
되었으며 프로이트를 끝까지 간호한 것은 딸 안나였다.
프로이트는 가정의 불행과 고통스런 투병에도 불하고 자신의 연구를 계속했다.
프로이트는 1923년 이후 억압의 원천은 무엇인지 그리고 성적 충동을 억압할 수 있
는 비성적 충동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는지에 자신의 연구를 몰두하였다.
지금까지 프로이트는 의식과 무의식적 억압 사이의 갈등에서 노이로제가 생긴다고
보았다. 즉 성적 충동을 지나치게 억압하고 있으면서도 의식적으로는 전혀 그것을 알
지 못할 때 그 억압이 다른 방향으로 나타나면서 노이로제 증세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억압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다.
계속된 연구를 통해서 프로이트는 억압은 자아에서 생긴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억압은 자아를 보호해주는데 자아가 발달하는 기간에 생긴 결합에 대해서 자아를 보호
해준다. 프로이트는 1923년 드디어 정신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체게적으로 정립시키게
되었다. 즉 정신은 자아와 원초아 및 초자아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자아 : 우리들이 흔히 '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중추
신경이라든가 뇌신경 등도 중요하지만 인간이 무엇인지가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보며
따라서 우리들이 정신이라고 또는 '나'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무엇이며 어떤 요인들로
구성도어 있는가를 깊이 파고들고자 한다.
"나는 음악적 소질이 천재적인 사람이야. 그러니까 음악을 더 연마해서 위대한 음악
가가 되는 것이 나의 꿈이자 야망이야."
"나는 공부도 잘 못하고 그렇다고 뛰어난 예술적 재주도 없어. 그렇지만 나는 내 일
에 최선을 다하고 언제나 성실한 자세를 가지고 있어. 이 점에서는 어는 누구도 나를
따라오지 못하리라고 확신해."
우리는 보통 나의 정신의 전부를 '자아', 곧 '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프로
이트는 이와 같은 상식적인 생각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우선 자아는 현실의
지도자로서 현실에 잘 적응하며 현실상황에 따라서 변화한다. 따라서 의식은 자아의
일부이다. 또한 자아는 의식으로서 무의식을 억압한다. 예컨대 어느 학생이 밤에 자주
자위행위를 한다고 하자. 의식으로서의 자아는 '내가 이러면 안되지, 나는 너무 자주
자위행위를 하는구나, 얼마 안가서 나는 허약해지고 병에 걸릴지도 몰라. 나는 더이상
자주 이 짓을 이 짓을 해서는 안돼'라고 절규하면서 무의식적 충동을 억압한다.
앞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정신 전체를 커다란 빙산 덩어리라고 할 것 같으면 자아는
물 위에 떠 있는 빙산의 극히 작은 일부이다.
초자아 : 프로이트는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유물과 아울러 양심을 초자아라고 말한
다. 정신을 빙산 덩어리라고 하면 물위에 떠 있는 빙산의 일부가 자아이고 물 속에
있는 커다란 부분들이 바로 초자아의 원초아에 해당한다. 곧 초자아와 원초아가 정신
의 원래 모습이고 자아는 정신의 껍질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좀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기도 하자. 직업이 목사나 교수인 사람들은 자아(의식)가
항상 경건하며 윤리적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정신의 껍질이 항상 직업에 걸맞게 도덕
적이며 엄숙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강도나 범인은 언제난 자아(의식)가 거칠고 폭력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초자아나 원초아(무의식)는 어떠한가? 꿈의 내용은 우리의 의식(자
아)에 속하지 않고 무의식적인 것이다. 목사나 교수가 꿈을 꿀 때 그들은 주로 악한
행동을 하며 이에 반하여 범인들은 선한 행동을 주로 한다고 한다.
이 예에서와 같이 자아는 의식적인 것이고 초자아와 원초아는 무의식적인 것으로서
오히려 초자아 및 초아가 정신의 기본적인 바탕이 되어 자아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젖먹이 어린애는 부모에 대해서 사랑과 어울러, 공포로부터 벗어나려고 부모에게 집
착하면서도 극도의 적개심을 가진다.
유아는 부모에게 공격심을 보이지만 그것이 효과가 없으므로 자신에게 방향을 돌려
보기도 한다. 그리하여 유아는 성적 충동을 억압하고 부모의 권위를 최고의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와 함께 유아는 부모들이 말하는 도덕적 교훈을 절대가치로 암
암리에 인정하는데, 이것이 고착되어 소위 양심으로 된다. 우리는 흔히 양심을 아무런
생각없이 가장 절대적인 가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너는 양심도 없니? 그래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혼자만 과자를 먹다니 도대체 네 양
심은 어디에 있단 말이니?"
"아무리 내 양심에 비추어 보아도 나는 하늘 아래 한점 부끄러움이 없어. 만일 내가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면 나는 마땅히 천벌을 받을 것이야."
이런 말들을 볼 때 각자가 말하는 양심이란 자기 나름대로의 마음임으 잘 알 수 있
다. 양심이란 오히려 프로이트의 주장처럼 유아시절에 부모로부터 유아에게 고착된
도덕관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초자아 이론은 지금까지의 도덕
과 양심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린 것이다.
프로이트는 어디까지나 냉철한 이성과 과학적 분석을 자기의 정신분석학에서 사용하
였으므로 자연히 모든 종교를 거부하였다.
프로이트는 '환상의 미래'(1927), '문화의 불안'(1930)에서 양심과 종교를 거부하고
생명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의 갈등으로부터 인간의 문화가 진전되며, 특히 세계1차 대
전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죽음의 충동의 힘이 가공할 만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
을 적시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원초아 : 원초아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무의식적인 정신의 토대로서 그것은 1차적 필
요에 의해서 지배당한다. 갓난아이의 정신이 가장 커다란 부분을 이루는 것이 원초아
이다. 원초아는 다른 말로 본능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성장과 아울러 정신은 원초아
가 내면에 있는 것이고 외면에 또 자신이, 곧 자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원초아와 초자아는 물 밑에 있는 빙산의 큰 부분이고 이것들의 충
동적인 힘에 의해서 물 위에 뜬 작은 부분인 자아가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정신에 관한 견해는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견해와는 정반대 되
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성적 자아가 불변하는 것으로서, 모든 것을 완전히 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중세에는 인간을 신의 모상 내지 그림자로 보았고, 인간의 정신은 신의 전지전능함
과 닮은 것으로 보았다. 적어도 현대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19세기 말) 인간의 이
성적 정신을 완벽한 것으로 보았으니, 그것은 중세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고정된 사고방식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말았
다. 인간의 정신은 현실에 적응하고 변한다는 것, 의식은 정신의 극히 일부분으로서의
자아이며 그것은 껍질에 불과하고 오히려 무의식적인 원초아와 초자아가 정신의 기본
바탕이라는 것이 프로이트의 정신에 관한 혁명적 입장이다.
모험가의 말년
말년의 프로이트는 병고와 아울러 나치(독재자 히틀러가 만든 독일의 민족사회주의
당)의 유태인 학대로 인하여 엄청난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1933년 5월, 나치
는 베를린에서 수많은 현대사상가들의 저술과 아울러 프로이트의 모든 책을 불살라버
렸다. 그 이유인즉 유태인들이 저술한 대부분의 책들은 게르만(독일민족)을 위해서는
해로울 뿐만 아니라 게르만에게 대항하는 것이라는 데 있었다.
게르만 이외의 인종에 대한 나치의 만행과 잔학성은 날이갈수록 도가 심하여졌고,
특히 수백만 명에 달하는 유태인을 강제 포로수용소에 감금하고 그들을 독가스로 살해
하기까지 하였다. 1938년 3월 나치는 비엔나에 진입하여 닥치는 대로 유태인을 체포하
였다. 프로이트의 딸 안나는 비밀경찰에 붙잡혀 종일토록 괴로운 날들을 보냈으며 나
치가 프로이트를 체포하러 왔을 때 당대의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늙고 병들
어 마치 구겨진 유언장과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치는 체포를 포기하고 돌아갔
다. 안나의 노력에 의해서 프로이트는 가족과 함께 1938년 6월 영국으로 망명할 수 있
었다.
프로이트의 건강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악화일로를 달렸다. 프로이트는 암의 고통으로
인하여 생각하기도 힘들었고 움직이며 글을 쓰는 것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마치 초인과도 같은 생명력을 불사르면서 영국으로 온 이후 1
년 3개월간 끊임없이 연구에 몰두하였다. 드디어 1939년 9월 23일 프로이트는 세상의
고통을 등지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프로이트의 생애와 사상을 간략히 살펴보고 난 후 몇 가지 물음을 던지
고 그 물음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프로이트는 누구인가?
프로이트는 인류를 위해서 무엇을 남겼는가?
프로이트는 왜 정신분석학에 자신의 일생을 바쳤는가?
프로이트는 무지를 극복하려고 일생동안 탐구에 몸을 바쳤다.
프로이트는 정신적으로 병든 환자를 치료함으로써 건강한 정신을 회복하고자 하였
다.
프로이트는 정신적 질병이 생기는 근본적 원인을 탐구하기 위하여 사회적 불안과 자
신의 고질적인 암에도 불구하고 혁명적인 정신분석학 이론들을 창안하였으며 건강한
인간과 건강한 사회의 실현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