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
‘진보’에 맞선 혁명:
발터 벤야민의 낭만적 무정부주의
“Revolution against ‘Progress’: Walter Benjamin's Romantic Anarchism”
New Left Review, No. 152, 1985
진보에 맞선 혁명: 발터 벤야민의 낭만적 무정부주의
미셸 뢰비
해설: 벤야민은 우리에게 여전히 낯설기만 한, 정체를 알기 힘든 존재이다. 맑스?레닌주의가 정통의 자리를 대신하기 이전 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함께 서구의 좌파 지식인으로, 그리고 하나의 우회로로 소개되었다. 10여년의 기간 동안 잠시 잊혀졌다가 오늘날 그는 여러 문화이론가들과 함께 다시 소개되고 있다. ‘기술복제시대’니 ‘아우라(aura)’니 하는 것들은 친숙한 용어가 되었으나 그의 사상 전모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있는 듯하다.
그러나 벤야민이 오늘날에도 한번쯤 꼭 읽혀야만 하는 이유는 사실 다른 곳에 있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도래 시기에 서구의 많은 좌파들은 서서히 혁명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 갔다. 당시와 같은 암울한 상황에서 진보에 대한 낙관적이며 근대적이고 속류적인 표상들과 철저히 단절하는 일,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원동력을 재발견하는 일은 오히려 주변적 위치에 있던 그에게 맡겨졌다. 이 점이 현재의 우리에게도 벤야민이 유효한 이유이다. 기술, 생산력, 그리고 사회발전이 필연적이며 ‘자신들만이 역사적 흐름을 이끌고 있다고 이에 동참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좌익은 어제의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나 스탈린주의자 뿐만이 아니다. 최근 ‘민족발전전략’이라는―제목에서 맘에 드는 단어가 하나도 튀어나오지 않는 책을 쓴―‘노동자의 친구’ 장기표씨나 신좌파와 유로코뮤니즘을 구별 못하는 주대환씨는 몇년째 해오던 ‘반성’을 더 해야 한다. 주대환씨 류의 이른바 신좌파 논의는 파국론적 시각을 (과거에) ‘승인했다’는 점과 (현재) ‘기각했다’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과제를 권력장악 이후로 돌리며 노동자계급의 전투성이나 새로운 사회를 향한 기획에 게으르다는 점에서는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메시아니즘이니 낭만주의적 전통이니 하는 것들은 일단 접어두고 맑시즘의 틀거리에서 벤야민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라는 20세기의 암흑기에, 무엇보다 ‘진보’에 대한 견해들과 철저히 단절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가 진정 옹호하고자 한 것은 ①동질적이고 텅빈 시간을 통해 일어나는 ‘진보’라는 식의 근대적 이해를 대신한 역사적 시간의 불연속성, ②노동자계급의 파괴의 힘, ③억압받는 자의 전통이었다.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억압된 계급 그 자체만이 역사적 인식의 보고(寶庫)이다. 맑스에 있어서 이 피지배자 계급은 최후의 노예계급으로서 그리고 유린된 세대의 이름으로 해방의 과업을 완수하는 복수자로서 등장한다. … 사회민주주의 사상은 노동자계급에게 미래세대의 구원자 역할을 부여하였고 결과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엄청난 힘이 담긴 힘줄을 잘라버렸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 노동자계급은 그 증오심과 희생정신을 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증오와 희생정신은 해방된 자손들의 모습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노예였던 선조들의 모습에 의해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W. Benjamin, Illuminations, pp. 256-57. 알렉스 캘리니코스, ?역사와 행위?, pp. 367~68에서 재인용.
이러한 벤야민의 고찰은 이른바 ‘몰락 이후’의 세대인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그에게 배워야 할 것은 ‘새로운 문제의식이 필요하다’는 식의 알량한 대안이나 이미지로 대중들을 기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로 피억압계급의 전투적인 역사를 후대에게 끊임없이 선전?교육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관념적 과격성’이라는 말에 두려움을 떨 필요는 없다. 갑오농민전쟁?20~30년대 농민?노동운동?해방공간 당시 민중들의 항쟁?광주민중항쟁?87년 단위노조건설투쟁(<파업전야>가 아직 학원에서 교육적으로 유효하다면 그것은 ‘끝내는 이룩할 승리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운동의 역사가 얼마나 피로 점철되었는가’를 가장 사실적으로, 대중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87년이 이제 역사 속으로 보내져야만 한다면, 제대로 보내져야 한다)?94~95년 민주노총 건설투쟁은 여전히 우리를 의식화시키는 기제들이다. 세째로 운동의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나갈 것! 유대교적 전통과 낭만주의에의 경도는 벤야민의 사상 전반 뿐 아니라 맑스주의의 전통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나갔다. 우리 자신의 상징과 역사를 확장시켜나가는 것은 물론 우리 자신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이며 풍부한 상상력 속에서만 가능겠하지만 말이다.
트로츠키주의 계열의 좌파지식인인 미셸 뢰비의 글은 벤야민의 맑스주의를 그의 성장배경이었던 메시아주의와 낭만주의와의 연관성 속에서 고찰하면서 ‘낭만적 무정부주의’라는 용어로 특징지운다. 또한 그를 종교적 형이상학이나 공산주의적 유물론으로만 일면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시도에 대해 꼼꼼히 비판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1924년 즈음에 이르면 벤야민은 자신이 공산주의 내지 변증법적 유물론 내에서 사고하고 있음을 인정하는데, 미셸 뢰비는 이를 ‘메시아주의의 세속화’라고 칭하면서 이의 폭발력이나 전복적 특성을 강조한다. 몇가지 용어로 요약하기 보다는 이 글 전체를 직접 검토해보는 것이, 즉 벤야민을 직접 검토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벤야민과 관련하여 국내에 소개된 자료는 군데군데 흩어져있다. 반성완 역의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은 벤야민에 관한 1차 자료가 되기에 충분하다. 또한 그의 생애를 다룬 글로서는 전기로서도 정평이 나있는 비른트 비테의 ?발터 벤야민?(역사비평사)이나 베르너 풀트의 ?발터 벤야민?(문학과 지성사)을 읽을 수 있다. 이 책들 마저 길게 느껴진다면 한나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문학과 지성사) 가운데 벤야민 관련 부분을 참조하면 된다. 또한 당시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벤야민과의 관계나 20세기 초반의 분위기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유진 런의 ?마르크시즘과 모더니즘?(문학과 지성사)이나 마틴 제이의 ?변증법과 상상력?(돌베개)을 참조하면 된다. 다만 과거에 나온 책들의 경우 번역용어들이 현재와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자신의 문제의식 속에서 벤야민을 부분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글도 꽤 많다. 임철규의 ?왜 유토피아인가?(민음사)는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이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역사와 행위?(종로서적)는 5장을 따로 내어 벤야민을 고찰하고 있다. 그 밖에도 라이너 그룬트만의 ?마르크스주의와 생태학?(동녘) 등도 그렇지만, 자신의 문제의식 속에서 벤야민을 고찰하고 있는 경우 그의 사상 전모를 밝혀내지 못하는 것이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벤야민의 경우 루카치나 브레히트 등과는 달리 어떠한 정세 속에서 일관된 정치적 입장을 드러낸 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캘리니코스의 비판과 같은 경우 시쳇말로 뒷다리를 긁고 있는 경우라고나 할까. 만약 현재 변혁에 대해 비관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벤야민의 사상과 삶 전반에서 변혁에 대한 극한적인 비관주의가 낳은 성과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변혁에 대한 비관이 아니라 그것을 극한까지 밀어붙이지 못하는 나이브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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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사유 스타일은 독특하여 분류되기 힘든 것이지만, 20세기 초 중부 유럽의 문화적인 분위기와 독일어권 유태계 지식인들의 종교-정치적 조류(religious-political)와 연관시킨다면 보다 잘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다. ‘진보’와 근대 문명에 대한 도덕적?사회적 비판으로서의 신낭만주의―전통문화에 대한 향수어린 충절을 대표하는―는 19세기 말부터 파시즘의 발흥기까지 독일 지식인층에서 지배적인 사조로 자리잡았다. 신낭만주의는 주로 이 시기 동안에 이루어진 강력하고 야만적이고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 시기에 이루어진 산업화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가치와 신념을 해체시키고, 그것들을 상품생산의 냉정하고 합리적인 계산으로 대체하려는 위협이었다. 독일어를 쓰는 유태계 작가와 철학자 중 일부는 신낭만주의적인 세계관(Weltanschauung)에 매료되었으며, 유태 메시아주의의 낭만주의적 판본(version)과 혁명적이고 자유의지론적인 유토피아 사상의 낭만주의적 판본을 선별적으로 결합시켜 발전시켰다. 이러한 결합에서 중심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는 두 가지 정신적 형태가 공유하는 유토피아를 복원하려는 특성이다. 이 특성은 마르틴 부버, 게르샴 쇼렘, 구스타프 란다우어, 에른스트 블로흐, 게오르그 루카치 등등 널리 알려진 중부유럽 유태계 인텔리겐챠들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사상은 에세이 ‘Jewish Messianism and Libertarian Utopia in Central Europe’, New German critique 20, Spring/Summer 1980 에 전개되어 있다.
발터 벤야민은 이 복잡한 성격을 지닌 집단(complex network) 구성원 대부분과의 개인적인 친분이라는 점뿐 아니라, 신낭만주의적 성향을 가진 유태계 독일 문화를 분열시켰던 모순, 긴장, 적대―유태 신학과 맑스주의 역사유물론, [유럽인종에 대한 인종적] 동화(同化, assimilation)와 시오니즘,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 보수적 낭만주의와 허무주의적 혁명, 신비적인 메시아주의와 세속의 유토피아 사이의―를 일생동안 깊이 고민했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패턴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있다.
‘진보’에 대한 신낭만주의적 비판이라는 배경을 고려하면, 그의 정치철학에는 메시아주의적인 주제와 유토피아적인 주제의 긴밀한 연관은 벤야민의 정치철학 가운데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이 점이 그의 정치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초기저작 가운데 하나인 ?학생생활에 관하여(On Student Life, 1914)?를 살펴보면 이미 그의 사회종교적 세계관 전체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진보라는 ‘무정형적(formless)’ 개념에 반대하며 그는 프랑스대혁명이나 메시아의 왕국과 같은 유토피아적인 이미지들이 지니고 있는 비판적 힘을 찬양했다. 사회와 관련된 실질적인 주제는 기술과 과학이 아니라 플라톤과 스피노자, 낭만주의자들, 니체가 제기한 형이상학에 관계된 것이다. 그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학생공동체는 ‘영구적인 정신혁명(permanent spiritual revolution)'의 선구가 되었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예술과 지식은 ‘국가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국가에 적대적’이라는 그의 진술에서 이미 무정부주의적인 차원이 암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차원은 빈자에게 헌신하는 톨스토이 정신을 언급할 때 가장 명확히 나타난다―이 정신을 가장 진실하게 표현한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무정부주의 공동체와 기독교적 수도원 공동체(monastic communities)의 이념이라는 것이다. W. Benjamin, ‘Das Leben der Studenten’, Illuminationen, Frnnkfurt, 1980, pp. 9, 13, 14, 16.
유토피아주의, 무정부주의, 혁명, 메시아주의는 ‘진보’와 단순한 과학기술적 지식에 대한 신낭만주의적 문화비판과 연금술적(alchemically)으로 결합?연결되어 있다. 과거(수도원 공동체)와 미래(무정부주의적 유토피아)가 낭만주의 혁명 특유의 지름길(short-cut) 안에서 직접 연관을 맺고 있다. 이 문헌은 이후에 벤야민이 몰두하게 될 문제들을 간결하게(in nuce) 내포하고 있으며, 우리는 여기서 후기 저작들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벤야민의 생애 전반에 걸친 작업에 나타나는 특정한 동기들과 주제들―어떤 때는 명백하게 드러나며 어떤 때는 드러나지 않게 깔려있는―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1914년에서 1940년까지 이르는 그의 정신적 궤적에서 기본적인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사상에 변화나 변형이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1924년 이후에는 맑스주의가 점차 그의 세계관에서 본질적인 요소로 되어갔다. 공산주의와 역사적 유물론은 그가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유심론적, 자유의지론적 신념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융합되어 독특한 사상형태를 형성하였다.
20세기 초 많은 젊은 유태계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벤야민에게 낭만주의는 출발점이었고 결정적인 문화적 풍토였으며 가치와 감정의 근본적인 원천이었다. 이를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지금까지의 비평은 (대체로) 벤야민의 신낭만주의적 배경과 그의 사회?종교?역사-철학에 대한 견해―고전적 낭만주의로 축소될 수 없는 벤야민의 독창적인 시각을 보여주는―와의 관련성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도르(Ador)’란 가명으로 초기에 발행된 짧은 평론 ?낭만주의(Romantik, 1913)?에서 그는 학교에서 교육되는 ‘허위 낭만주의(False Romanticism)’를 비판했는데, 거기서 그는 아름다움, 진리, 행동을 향한 낭만적 의지가 현대의 문화에서는 달성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새로운 낭만주의’의 창조를 요구했다. W. Benjamin, ‘Romantik’, Gesammelte Schriften (GS) II, 1, Frankfurt, 1977, p. 46.
역시 1913년에 나왔고 주목을 별로 받지 못했지만 매우 중요한 대화형식의 에세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 모두는 여전히 낭만주의가 발견했던 것들에 깊이 파묻혀 산다. 그리고 자연의 가려진(nocturnal) 측면에 대해 강한 통찰력을 준 낭만주의에 감사해야 한다.” 인간이 일하는 기계로 환원된 것과 모든 노동이 단순히 기술로 저하된 것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그는 진보와 진화의 환상에 반대하는 새로운 종교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이 종교의 예언자는 톨스토이와 니체와 스트린버그, 즉 현대문명에 대한 문화적 차원의 비판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진부한 것과는 매우 다른 새롭고 ‘진정한’(sincere; ehrlichen) 사회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W. Benjamin, GS, Ⅱ, 1, pp. 22, 24, 25, 26, 34. 또다른 특징적인 구절에서 그는 사회적 행위를 ‘전기불과 같은 문명의 문제’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비난한다.(p. 19)
계몽주의의 ‘맹목성(Blindness)’
벤야민 최초의 중요한 문학 에세이(1914-15)는 혁명적 낭만주의자인 횔덜린에게 헌정되었고, 1916년 이후에는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청년기 저작들에 매료되어 그것들을 그의 박사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로 삼았다. 1917년 6월 쇼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초기 낭만주의(fruhromantik) ―프리드리히 슐레겔,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 노발리스, 티크와 슐라이어마허가 언급되었다―의 ‘헤아릴 수 없는 깊이와 아름다움(infinite deepness and beauty)’을 찬양했다. 특히 그는 그들이 종교와 역사를 통합시키는 방식에 마음이 끌렸으며, ‘낭만주의야 말로 우리를 위해서 전통을 다시 한번 구원해준 마지막 운동’이라고 의미심장하게 결론지었다. W. Benjamin, Briefe, Frnkfurt, 1966, vol. 1, p. 138.
1918년 초 ?다가올 철학의 강령에 관하여(Uber das Programm der kommenden Philosophie)?에서 그는 계몽주의의 ‘맹목성’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Neuezeit) 일반의 맹목성을, 낭만주의에 본질적인 문화의 두 차원인 종교 및 역사에 관련지워서 날카롭게 비판했다. 계몽(Aufklarung)에 대한 그의 신낭만주의적 비난은 그것을 ‘세계관 가운데 가장 하위에 있는것’이며, ‘밋밋하고 천박한’ W. Benjamin, GS, II., 1, pp. 158-159.
경험을 가진 문화적 시대라고 지목할 정도였다. 1919년에 벤야민은 논문 ?독일 낭만주의에서 예술비평의 개념(Der Begriff der Kunstkritik in der deutschen Romantik)?을 내놓았다. 이것은 낭만주의적 문학비평 방법의 영감 하에 씌어진 것이다. 이 방법은 잘 알려진 그의 에세이 ?괴테의 선별적 친화성(Goethe's Elective Affinities)?―‘절대로 비교될 수 없는’ 신낭만주의의 중요 저작 중 하나라고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슈탈이 극찬한―에서 다루어졌던 것이다. 20대 시절의 서신에서 우리는 그가 낭만주의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요한 빌헬름 리터의 ‘독특한 낭만주의적 비교(秘敎; esotericism)’, 티크의 소설 ?금발의 에케르트?, 중세의 요정 설화, 그림 형제가 수집했던 독일 현자들의 이야기 등에서 깊이 영감을 받았다. W. Benjamin, Briefe, 1, pp. 381, 383, 342, 394, etc.
심지어 그는 자본주의에 대해 보수적인 신낭만주의 문화비판가들, 즉 신비적이고 비교(秘敎)적인 독일 시인 슈테판 게오르그, 카톨릭이자 왕당파인 프랑스 소설가 레옹 블르와 (“한번이라도 그가 부르조아에 반대하는 혹독한 비평 아니 풍자라도 한적이 있었던가?”), 바호펜에 대한 보수주의 논평자 루드비히 크라게(“의심할 나위없이 위대한 철학적 저작이다’’), 그리고 심지어 끔찍한 말이지만 악시옹 프랑세즈[프랑스의 파시즘적 단체]―1924년 그는 여기에 기고하기도 했다!―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W. Benjamin, Briefe, vol., 1, pp. 349, 358, vol.2, p. 313.
1930년 호프만과 오스카 파니짜에 대하여 강의하면서 그는 파니짜가 지난 백년동안의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표현했고, 삶과 자동기계적인 생활 사이를 종교적?형이상학적으로 구분한 이원론을 일종의 신학으로 간주하였다. 벤야민은 호프만의 공상적인 이야기(story-telling)를 근거로 그를 그리스와 동방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사시 전통의 계승자라고 보았고, “진정한 이야기는 항상 보수적인 특성―그 단어의 가장 좋은 뜻에서―을 가지며, 우리는 위대한 이야기꾼들을 인류의 정신적인 유산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시대와의 효과적인 결합”에 대한 호프만의 신념을 찬양했다. 우리가 보게 되듯이, 후기저작에는 중세에 대한 낭만적 향수보다는 태고?고대?선대에 대한 기대가 보다 중심적이다. W. Benjamin, GS Ⅱ, 2, pp. 642, 644-45, 647.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었던 30년대에 그가 낭만주의에 대해서 점차 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낭만주의적 세계관의 근본적 요소들은 그의 종교사상, 정치철학에 승화되어 있다. 그의 저작에서 낭만주의에 대한 최후의 논의 가운데 하나는 알베르 베귄의 ?낭만주의와 꿈들(Le romantisme et les reves)?에 대한 평론이다. 벤야민은 이 작가가 낭만주의를 사회와 공업발전에 대한 반발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눈부신 통찰력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꿈같은 삶에 대한 낭만주의의 호소는 위험한 신호이다. 그것은 영혼이 고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하는 길을 지시해준다기보다는 이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로 가는 길을 지시해 줄 뿐이다.” W. Benjamin, GS Ⅲ, p. 560.
낭만적 메시아주의
낭만주의와 메시아주의 사이의 연관성은 독일 낭만주의자 프란쯔 요제프 몰리토(Franz Joseph Molitor)의 유태밀교(kabbala)-철학적 저술에 대한 벤야민의 관심 뿐만 아니라 W. Benjamin, Briefe, 1, p. 134-136.
무엇보다도 초기 낭만주의의 진정한 본질이 ‘낭만적 메시아주의에서 탐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그의 박사 논문에서도 명확히 입증된다. 그는 낭만주의에서 특히 슐레겔과 노발리스의 저작에서 보이는 메시아주의적 측면을 발견하면서 슐레겔의 청년기 저작에 있는 놀라운 진술을 인용했다. ‘신의 왕국을 성취하려는 혁명적 욕망이 근대 역사의 시작이다. 신의 왕국과 관계없는 모든 욕망은 단지 주변적인 것에 불과하다.’ 1920년 베를린에서 발표한 박사학위논문 ?독일낭만주의에서 예술비평의 개념?, p.2에서 인용된 F. Schlegel, Seine Prosaischen Jugendschriften, Vienna 1966을 참고하라. 벤야민은 또한 Ch. Pingaud Grundlinien der asthetischen Doktrin Friedrich Schlegels (Stussgart 1914, p. 52)을 인용한다. 여기에 따르면 ‘신의 왕국’을 현세에, 지금 그리고 여기에 세우려는 열망이 F. Schlegel의 ‘새로운 종교’의 토대이다.
이 테마는 그 저술에서 중심적인 미학적 주제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가 몰두한 문제 중 본질적인 것이다. 에른스트 숀에게 보내는 1919년 4월의 편지에서 그는 ‘낭만주의의 핵심인 메시아주의’를 다루지 못했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이러한 질문들이 비록 ‘매우 적절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학위논문의 ‘관례화된 과학적’ 형식(그가 진정한 형식과 구별한)을 유지 못하게 할 것이기에 다루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W. Benjamin, Briefe, 1, p. 208.
1916년 그의 일기에서 친구와의 대화를 기록하며 게르숌 쇼렘은 다음과 같이 썼다. “벤야민의 정신은 … 신화적 현상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고, 그는 그 현상에 대하여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했다. 역사적 시각에서는 낭만주의로부터 출발했고, 시적인 시각에서는 횔덜린으로부터 출발했으며, 종교적인 시각에서는 유대교로부터 출발했다.” G. Scholem, Walter Benjamin, Geschichte einer Freundschaft, Frankfurt, 1976, p.45.
이 시기 벤야민의 마음은 독특한 문화적 용광로 안에 있었다. 그 안에서 횔덜린 (또는 슐레겔)과 성경, 낭만주의 시와 메시아주의적 신학, 역사와 종교가 혼합되어 새롭고 예기치 못했던 내용이 만들어졌다.
자유의지론적인 벤야민의 유토피아 역시 신낭만주의적 정서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것은 1918년 게르숌 쇼렘에게 보내는 편지에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낭만주의는 현대의 가장 강력한 운동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 이후에, 벤야민은 낭만적 카톨릭의 이상적 측면이 사회적인 요소를 정치권력과의 연관을 반대하는 성격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무정부주의로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W. Benjamin, Briefe, 1, p. 181.
(레온할트 프랑크(Leonhard Frank), 루드비히 루비너(Rudwig Rubiner)) 1914년 학생들에 대한 벤야민의 강연에서 이미 보았듯이 카톨릭 낭만주의의 과거회귀적(restorative)인 성격은 자유의지론적인 측면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수도원 공동체와 무정부주의 집단은 사회적 행동에서 가장 중요한 두가지 모델로 표현된다.
사회에 대한 벤야민의 관점은 자유주의적이며, 무정부주의적 혹은 무정부주의적-생디칼리스트 사상가들 즉, 죠르쥬 소렐, 구스타프 란다우어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러시아 10월 혁명이나 1918-19년 사이의 독일 혁명에 전혀 끌리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시기 쇼렘과의 토론에서 새로운 소비에트 권력을 ‘빈민들의 독재’의 일종이라고 보았던 쇼렘보다 더욱더 소비에트 권력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감은 오히려 러시아 ‘허무주의자들’의 후예인 사회혁명당에 관해서였다. 두 사람은 볼셰비키들이 그러했던 것보다 이들이 더 무정부주의 사상에 근접한 것으로 간주했다. G. Scholem, Walter Benjamin, pp. 100, 204. 그리고 G. Scholem과의 1979년 12월 대화메모.
쇼렘이 ‘신권정치적(theocratic) 무정부주의’ 라고 묘사한 개념은 1919년에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던 것으로써 정치적 중요성보다는 종교적 중요성을 가진 용어였다. G. Scholem, Walter Benjamin, p. 108. 그리고 G. Scolem과의 1979년 12월 대화메모.
그 당시 벤야민을 잘 알고 있던 베르너 크라프트에 따르면, 벤야민의 무정부주의는 ‘상징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그것은 좌익이나 우익이 아니라 ‘다른 어떤 곳’에 있는 것이다. Werner Kraft와의 1980년 1월 대화메모.
20대 시절 벤야민은 그 자신의 정치적 아니 오히려 반(反)정치적 사상을 나타내는데 있어 기꺼이 ‘허무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W. Benjamin, Briefe, 1, p. 335와 G. Scholem, Walter Benjamin, p. 255를 보라.
쇼렘은 그에게 란다우어의 저작같은 자유의지론적 문학작품을 줌으로써 벤야민의 신념 발전에 명백히 기여했지만 G. Scholem, Walter Benjamin, pp.19, 22.
, 그들이 만나기전인 1914년 학생들에 대한 강연으로 볼 때 벤야민에겐 이미 이러한 경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벤야민의 독특한 무정부주의의 핵심은 유태 메시아주의―선별적 친화성의 하나라고 분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와의 관계속에 있다. 동일하게 신낭만주의적 기원으로부터 자라났기 때문에 두 개의 문화적 관점은 유토피아 복원적인 구조와 역사에 대한 혁명적이고도 파국적인 전망,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자유의지론적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다.
벤야민이 자유의지론적이고 혁명적인 견해를 완벽하게 표현한 최초의 경우 가운데 하나는 소렐의 ?폭력에 대한 고찰(Zur Kritik der Gewalt, 1921)?에서 직접 영향을 받은 폭력에 대한 에세이이다. 경찰(‘가장 타락한 폭력형태')와 의회(‘비참한 대표들') 등 국가 기구들에 대해 강한 경멸감을 띠고 말하면서, 무정부주의적 생디깔리스트와 볼셰비키의 (devastating) 반의회적 비평―이들과는 눈에 띌 정도로 관련이 깊었다―과 프롤레타리아의 총파업을 ‘그것의 유일한 임무가 국가에 의한 폭력을 파괴시키는 것’인 행동이라고 보았던 소렐의 사상을 찬양했다. 우리가 명시적으로 무정부주의자라고 기술한 개념이 그에게는 파국적 결과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근원적이고 도덕적이며 진실로 혁명적인’ 것으로 보였다. 어쨌든 여기서 벤야민은 소렐과 결별하고 신학적 메시아주의라는 매우 다른 영역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순수하고(pure)’, ‘즉각적인’ 혁명적 폭력은 신성한 폭력의 발현이며, 그것은 ‘신비적인 법률형태들의 고리를 깸으로써… 국가의 폭력을 깰 수 있는' 유일한 폭력이고 ‘새로운 역사시대(a new historical age)’를 건설할 수 있는 유일한 폭력이다. 그것은 ‘법률을 파괴하는’ 유일한 폭력이며, 신비적 법률을 만드는 폭력과 반동적인 법률을 유지시키는 폭력을 둘 다 근본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폭력이다. W. Benjamin, GS Ⅱ, 1, pp. 190, 191, 194, 202.
이 에세이의 축을 구성하고 있는 무정부주의와 메시아주의의 독특한(sui generis) 변증법적인 결합은 참으로 악마적인 (괴테가 사용한 의미에서) ?신학-정치학 단편(The Theologico-Political Fragment)?―프란쯔 로젠쯔바이그의 ?구원의 별?을 읽고서 영향을 받아 쓴―에서 특히 집중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쇼렘은 1970년 벤야민의 저작들을 불어로 번역한 Maurice de Gandillac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도르노가 이 텍스트가 1937년에 쓰여졌고 생각한 것은 틀렸다고 설명한다. ‘이 페이지들은 1920, 21년에 창작되었으며, ?폭력에 대한 비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것들[페이지들]은 맑스주의적 개념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1924년 이전 저자의 사상에 해당하는 형이상학적 무정부주의의 영역 안에 위치지워집니다.’ (In Walter Benjamin, Mythe et Violence, Paris 1970, p. 149, 역자주) 우리의 의견으로는 그것들을 1921-22년 사이에 위치짓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아마도 로젠쯔베이크 저작의 출판 이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 텍스트의 문장 각각 혹은, 단어 각각이 가지는 의미를 해석할 수는 없지만 그것의 개요만으로도 내용을 얼마쯤은 알 수 있다. 이 텍스트는 역사적인 변화과정의 영역과 메시아의 영역을 근본적으로 구분하는 데서 시작된다. ‘역사적이지 않은 것만이 메시아적인 것과 연관된다.’ 그러나 곧바로 벤야민은 심사숙고 끝에 지상에서 천상으로 가는 특이한 이행을 통해 둘사이에 존재하는 심연 위에 다리를 놓으려 했다. ‘세속에서 타락한 질서가 메시아의 왕국이 도래하기 전에 나타날 것이다. 세속적인 것은 사실 왕국의 범주가 아니지만, 왕국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적절한 범주이다.' W. Benjamin, One Way Street, NLB, London, 1979, p. 155.
로젠쯔바이그의 논문―그 자체는 ‘신의 왕국에 없지만’ ‘그것의 도래에 꼭 필요한 선행조건’이라 할 수 있는 ‘해방의 행동’을 다룬―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성을 지닌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단문을 결론지으며 벤야민은 정신적이고 현세적인 ‘통합 속에서의 회복(restituto in integrum)’을 요구한다. 그리고 현세의 특정한 정치형태―그 방법이 허무적이라고 불려야 마땅할―에 그 과업을 할당했다. (그는 무정부주의라는 용어가 너무나 ‘세속적’인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쉐어바르트(Scheerbart)의 유토피아
1917년 쇼렘의 도움으로 벤야민은 1915년 가난과 무관심 속에서 죽어간 파울 쉐어바르트의 저작을 발견했다. 시라노 드 베르쥬락과 스위프트의 후계자 중 한사람으로서 별나고 공상적인 유토피아주의자이며 일반적으로 신낭만주의라고 간주되는 쉐어바르트는 자신의 노트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예술적인 측면에서 볼 때 내 작품의 주요 원천은 낭만주의 시대에서 찾아야 한다.” 그는 직접적인 정치적 저작을 결코 출판하지 않았지만 그는 무정부주의 시인 에리히 뮈샴의 친구였고, 그 자신이 구스타프 란다우어가 가담했던 유토피아적 운동 ‘새로운 사회(Neue Gemeinschaft)'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제국주의, 민족주의적 군국주의 국가 제도들에 대한 적대감을 통해 무정부주의와의 친화성을 드러내었다. ‘별과 같은 유토피아(astral utopia)’ Lesabendido (1913)에서 그는 법률도 없고, 정치제도나 행정?국가?사적 소유가 없으며 상호 부조와 자발적인 공동의 행도들로 결합된, 사회를 주민 스스로가 창조하는 팔라스 소행성을 묘사했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주제는 신비적인 천상의 사회에 도달하기 위한 탑을 건설하는 일이다. 건축기술이 저자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지만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건대 그것은 ‘우주일신론(cosmotheism)' (즉 종교적인 열망)에 기여하는 하나의 기구에 불과하다. 이 탑의 궁극적인 목적은 ‘위대한 유일자에 대한 종속’, 즉 ‘탑이 다른 별들의 종교를 표현하고 있다’는 말을 할 위대한 인물에 대한 종속이었다. 1918-19년에 벤야민은 이 작품에 대해 최초로 간략한 평을 썼으며 그 평에서 그는 그 작품의 주요동기(leitmotiv) ‘정신적으로 기술을 극복하는것’ 과 ‘위대한 유일자에 대한 정신적인 증명’을 ‘유토피아의 성취’와 동일시했다. 그러나 쉐어바르트의 소설에 존재하는 정치적인 영역은 논의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적인 영역은 1919년에 썼으나 곧 잊혀져 버린 평론 ?진정한 정치가(The True Politician)?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 해 11월 쇼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두번째 에세이에서는 ‘팔라스’가 ‘가장 좋은 세상’이라 것을 보여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쉐어바르트에 대한 그의 강한 관심은 ―30년대 저작들에서 쉐어바르트가 빈번히 언급되고 있다― 그 자신이 신낭만주의의 종교적인 자유의지론(libertarian) 사상과 정신적으로 가까왔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증거이다. W. Benjamin, GS Ⅱ, 2, pp. 618-19와 GS Ⅱ, 3, p. 1423-25의 편집자 노트를 보라. 또한 Briefe 1, p. 233을 참조하라. 쉬르바르트의 소설 중 일부(Lesabendio를 포함하여)는 P. Scheerbart, Dichterische Hauptwerke, Stuttgart 1962라는 전집으로 재출판되었다. 쉬르바르트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Hubert Bar, Natur und Gesellschaft bei Scheerbart, Genese und Implkationen eine kultir Utopia, Heidelberg 1977을 보라.
1924년 벤야민이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을 통해 접했던 맑스주의, 아샤 라시즈(Asja Lacis) 때문에 알게된 볼셰비즘, 공산주의, 그리고 후기 역사 유물론은 동시에 그의 정치사상에서 중심이 되었다. 그가 ‘나의 허무주의의 기반’ 이라고 불렀던 것과 1923년 루카치로 대표되는 헤겔-맑스적인 변증법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인지하기는 했지만, 그는 ‘의무적인 태도(obligatory attitude)’로 인해 ‘공산주의적인 정치적 실천’에 강하게 사로잡혔다. 1924년 9월 쇼렘에게 보내는 편지. Briefe, p. 355.
2년후 그는 쇼렘에게 공산당에 가입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으나, 이것이 그가 무정부주의를 ‘버리는(abjure)’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편지에서 벤야민은 처음으로 단지 ‘허무주의자’가 아닌 ‘무정부주의자’라고 그 자신의 신념을 명확히 기술했다.) 그에게 있어서 ‘무정부주의적 방법은 쓸모없는 것이고, 공산주의의 “목적들” 은 무의미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공산주의적 행동들의 가치를 감소시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행동들이 자체의 목표를 위해서는 올바른 것이며, 의미있는 정치적 목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926년 5월의 편지. Briefe 1, p. 426.
무정부주의의 목표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요하게 보일 수 있으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공산주의적 행동에 의한 것이다. 리차드 올린에 따르면 이러한 신비적인 공식화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가치있는 목표가 여전히 메시아적이라는 사실이다. R. Wolin, Walter Benjamin, an Aesthetic of Redemption, Cambridge, 1982, p. 177.
이러한 해석은 섬세한 지점을 잘 포착한 것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무정부주의의 목표와 메시아주의적 목표가이 동일하지는 않을지라도 유사하다고 보았다. 쇼렘에게 보내는 같은 편지에서 벤야민은 어떤 방향으로건 ‘서로의 역설적인 전환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드러내는’ 종교행위와 정치행위 사이의 동질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급변(Umschlagen) 이야말로 ?정치-신학적 단편?으로부터 ?역사철학테제(이하 ?테제?; Theses on Philosophy of History)?에 이르는 벤야민의 미묘한 사회-종교적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를 결합?접합하려는 시도가 벤야민의 초현실주의에 관한 유명한 에세이(1929)의 주요 모티브(leitmotiv)이다. 여기서 ‘독일 관찰자’인 그 자신을 ‘무정부주의적 프롱드당(fronde)과 혁명적 규율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위치지우면서, 초현실주의가 자유의지론적인 전통의 가장 뛰어난 후계자라고 찬양했다. ‘바쿠닌 이후로는 자유에 대한 급진적인 사상이 유럽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초현실주의자들이 이것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또한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시한폭탄을 준비하고 다니며 1865-75년 사이 활동했던 위대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도스토예프스키, 랭보, 로트레아몽 등의 엔진은 40년 후 초현실주의의 발생과 함께 동시에 폭발했던 것이다. 벤야민은 브레통의 ‘혁명적 허무주의’ 를 찬양했고, 초현실주의 시인들이 무정부주의의 순교자들 사꼬와 반제티와 연대하여 폭동을 일으켰던 파리에서의 나날들을 다룬 나쟈(Nadja)의 구절에 주목했다.
벤야민이 혁명에서 ‘방법과 규율상의 준비(methodical and disciplined preparation)’ (즉 공산주의)를 희생한채 무정부주의적인 요소들만을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것의 위험성을 염려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그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제들과 관련해서 초현실주의와 공산주의가 매우 근접해 있다고 믿었다. 무지하고 딜레탕트한 사회민주주의적 낙관주의에 반대하며, 초현실주의자들은 유럽 휴머니티(himanity)의 운명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비관적인 견해’를 공유했다. 그리고 만약 ?공산당 선언?이 혁명의 수행을 통해 그것을 초월하기를 요구한다면, ‘초현실주의자들만이 현재 필요한 명령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W. Benjamin, ‘Surrealism’, in One-way Street, pp. 225-39. 벤야민은 조심스럽게 초현실주의를 낭만주의로부터 구분하면서, ‘위험스런 낭만주의적 편견’을 비판한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로는 신낭만주의와 그의 독특한 사회-문화적 비관주의 사이에는 오해의 여지가 없는 유사성이 있다.
1929년 이후 메시아의 시대(the Messianic era)에 대한 언급들과 마찬가지로 무정부주의에 대한 언급은 그의 저작에서 점차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것들[언급들]의 심원한 현존(presence)은 ―마치 숨어있는 용암과 같이― 역동적으로 표면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1929-35년 사이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감은 이 시기 코민테른 ―소위 ‘제3차’ 인터내셔날로서 자본주의의 최종적 위기와 세계혁명이 임박하고 있다는 원칙(doctrine)을 가지고 있던―의 ‘묵시론적(apocalyptic)’ 방향설정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1931년 4월 쇼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독일에서의 볼세비키 혁명’ 이 가까운 미래에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언급했다. 이에 대한 답장에서 쇼렘은 만약 공동체(community)가 혁명에 대한 묵시론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해도 벤야민이 그[공동체]에 대해 가지는 열망에는 위험이 따른다고 지적했다. 1931년 6월 벤야민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가 내전의 발발을 다음 가을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지는 않다.” W. Benjamin, Briefe, 2, pp. 530, 533, 536.
파시즘론에 대한 1930년 논문의 유명한 마지막 단락―1960년대 아도르노가 그 자신이 편집한 개정판에서 강조하고자 했던―에서 그는 세계전쟁을 독일 내전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맑스주의적 책략(trick)’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W. Benjamin, ‘Theorien des deutschen Faschmus', Die Gesellschaft, 1936, vol. 2, p. 41. 벤야민은 그의 이전 저작들에서 이미 비난받은 바 있는 이러한 사상들을 대단히 좋아했다. 1929년 군국주의적 연극용 극본에 대한 아티클에서, 벤야민은 전쟁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무장봉기’라고 썼다. ?문학세계 (Die Literarische Welt)?는 이 페이지가 빠진 채 1929년 5월 발표되었다. (W. Benjamin, GS Ⅳ, 1, p. 463와 Ⅳ, 2, p. 1031을 보라.)
벤야민의 독특한 무정부주의적 볼셰비즘(anarcho Bolshevism)은 1935년 이후 증대되었던 소련에 대한 불신을 내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38년 브레히트와의 대화를 기록한 노트를 보면 소련을 ‘뿔이 난 물고기 혹은 다른 괴물의 형상으로 바다 심연에서 끌어 올려진 기괴한 자연의 돌연변이(sports)’에 비유하면서 ‘노동자 군주제(workers' monarchy)’라고 서술했다. W. Benjamin, Understanding Brecht, Verso, London, 1983, p. 121.
1919년 독일―소비에트 협정 이후 그는 확실하게 스탈린주의와 결별하고, 스탈린주의적 지도자를 가리켜 ‘파시즘의 적대자가 되는 것이 그들의 희망이지만 자신의 대의를 배반함으로써 패배를 확인할 뿐인 정치가’라고 ?역사철학테제?에 기술했다. W. Benjamin, Illuminations, New York, 1968, p. 260.
동시에 30대 후반 이후부터 그의 저작에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경멸과 프랑스의 인민전선에 대한 회의를 나타내면서 반의회주의를 여전히 고수했다. 프리쯔 리브에게 보내는 1937년 7월의 편지에서 그는 프랑스 좌파 언론이 여전히 “좌파” 다수파들을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있으며, 만약 우파에 의해 시행된다면 폭동을 부추길 수 있는 정책들을 좌파 다수파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W. Benjamin, Briefe 2, p. 732.
그러나 30대 벤야민이 비교(秘敎)적 무정부주의적 신념을 지켜나갔다는 더욱 직접적인 증거가 있다. 1935년 2월 ―그가 교조적(orthodox)인 공산주의 원칙에 가장 근접해 있던 것으로 보이는 시기― 알프레드 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드리외 라 로쉘(Drieu La Rochelle)의 소설 ?탈영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놀랍게도 내 자신의 정치적 태도(Haltung)를 정확히 표현한 것을 발견했다.” W. Benjamin, Briefe 2, p. 648.
그러므로 1934년에 출판된 이 소설을 연구하면 벤야민의 ‘숨겨진’ 정치철학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혹은 반(反)주인공-은 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라틴아메리카로 탈출하고 있는 탈주병이다. 그는 세게시민적(cosmopolitan) 국제주의자, 반군국주의자였고 그에게 있어 ‘민족주의는 현대정신의 모든 측면중 가장 타락한 것’이었다. 탈주병과 논쟁을 하는 여행자는 ―이 인물은 아마도 드리외 자신의 표현일 것이다― 그 탈주병을 반대로 ‘구시대적 반동분자’, ‘떠돌아다니는 유태인’, ‘무정부주의자’, ‘해롭지 않은 공상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한 탈주병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전쟁을 하는 당신네 유럽 국가들을 원하지 않고, 당신들의 대중 동원, 병영사회화(military socialization)를 원하지도 않소. 이것에 대해 무정부주의자이든 혹은 뭐라고 부르든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불러도 좋소. 그러나 내가 책 한권 읽은 적 없는 이론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이 탈주병의 반정치적, 반국가적 철학에는 자생적인 자유의지론적(libertarian) 기질이 있다. ‘정치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경기 중에서 가장 반칙이 많은 경기이다. 국가에 속하는 모든 것은 아첨꾼들의 과업일 뿐이다.’ Drieu la Rochelle, Le Deserteur, Paris 1960, pp. 220, 222, 224, 226.
이 문학 작품은 의심할 바 없이 ―벤야민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1935년부터 출판된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드리외의 작품에는 1940년 Port―Bou의 생각을 즉시 떠올리게 하는 슬프고 감동적인 구절이 있다. ‘1914년 나는 드문 사람 중의 하나였지만 그 다음 전쟁때에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나와 같을 것이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대변동으로부터 도망쳐서 자신을 방어할 것이며, 자포자기한 주체로서 폭파를 당하거나 가스를 마셔서 죽기보다는 처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저항자로서의 죽음을 택할 것이다.’ Ibid, p. 223.
1938-39년에 벤야민이 쓴 보들레르에 관한 노트와 에세이에는 무정부주의에 대해 뚜렷하게 언급한 것이 없다. 그러나 롤프 티드만(Rolf Tiedmann)은 이 저술들이 ‘거듭쓴 양피지(palimpsest)’처럼 읽힐 수 있다고 파악했다. 명백한 맑스주의 아래서 구(舊)허무주의는 가시적으로 드러나는데, 이 허무주의적 방식이 우리로 하여금 쉽게 무정부주의적 실천을 추상(abstraction)해 낼 수 없도록 한다. R. Tiedemann, ‘Nachwort’, in Walter Benjamin, Charles Baudelaire, Frankfurt, 1980, p. 207.
두 메시지 사이의 관련이 단지 겹쳐놓기만한 기계적(mechanical) 연결이 아니라, 미리 추출된 원소들을 합금시키는 연금술적(alchemical) 결합이기 때문에 ‘거듭 쓴 양피지’라는 표현이 적확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역사철학테제(1940)?에도 동일한 것이 적용된다. 티드만에 따르면 ‘벤야민이 있어서 정치적인 실천을 표상하는 방식은 이성적(sober)인 맑스주의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무정부주의적인 열광적(enthusiastic) 형태의 표상이었다.’ R. Tiedemann, ‘Historischer Materialismus oder politischer Messianismus?' in P. Bulthaup, Materialen zu Benjamins Thesen ‘U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Frankfrut, 1975, p. 109.
맑스주의 자체가 ‘열광적인’ 독해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길 뿐 아니라 자유의지론적인 유토피아와 맑스주의적 유토피아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모순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이런 공식화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비록 그의 에세이의 다른 구절에서 벤야멘이 브레히트의 영향 하에 있던 1930년 이후에는 벤야민이 초기의 무정부주의적 성향과 결별했다고 틀린 주장을 하기도 했지만 하버마스 역시 ‘현시간(Jetztzeiten)의 무정부주의적 개념’이 ?테제?에 나타난다고 언급했다. J. Habermas, ‘Consciousness-Raising or Redemptive Criticism The Comporaneity of Walter Benjamin', New German Critique 17, Spring 1979, pp. 51, 55.
1940년의 ?테제?에는 무정부주의 사상이 암시적으로만 존재한다면, 그것[테제]을 위한 예비적인 노트에는 그것들[무정부주의적 사상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드러나 있다. ‘맑스에게서의 증오의 힘(force of hate), 노동자 계급의 투쟁성, 해방의 사상으로 혁명적 파괴를 엮어내는 것’ (네챠예프. ?악령?) 또 다른 노트에서 ‘역사적 유물론의 파괴적 에너지’ 를 풀어주어야(release) 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W. Benjamin, GS Ⅰ, 3, pp. 1240-41.
파괴의 힘
벤야민의 사상을 지배하는 규정적(regulative) 사상들을 분석하면서, 쇼렘은 ‘파괴의 묵시론적 요소들이 메시아적 사상―그의 사상에서 명백한 역할을 수행하는―에 의해 변형(metamorphosis)되어 보존된다. 고상하고 능동적인 파괴의 힘은 … 이제 해방의 면모가 된다. … 유대 묵시론적 원칙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세속화(secularization)되었다.’는 것을 밝혔다. G. Scholem, ‘Walter Benjamin’, 1964, in On Jews and Judaism in Crisis, New York 1976, pp. 194-95.
쇼렘은 이 사상을 주로 ?파괴적 성격(Der destruktive Charakter)?과 삼십년대의 문학적 에세이들과 연관지었다. 그러나 파괴라는 메시아적?혁명적 개념이 가장 흥미롭게 표현된 곳은 바로 ?역사철학테제?를 위한 예비적 노트이다. [여기서 벤야민은] 계급투쟁과 해방, 맑스와 네챠예프, 역사적 유물론과 도스토예프스키―19세기의 ‘가장 위대한 무정부주의자 가운데 한사람’이라고 벤야민이 평가하는―를 ‘엮어짜고 있다.’
파괴는 메시아주의와 자유의지론적-공산주의 혁명이 벤야민의 후기 저작들에서 단지 ‘수렴(convergence)’할뿐 아니라, 그것들[메시아주의와 자유의지론적-공산주의 혁명] 사이의 선별적 친화점은 그것들의 복원적(restitutitionist)이고 유토피아적인 구조들―통합 속에서의 회복으로 해방된 미래, 실락원의 재건, 세계의 Tikkum―에 단단히 기초한다. 유대적 전통과 유대교의 신비철학(kabbala)에 대한 Franz Joseph Molitor의 책에서 ―아마도 벤야민의 종교사상의 주요원천인― 메시아의 구원이라는 임무는 아담의 타락 이전의 ‘과거의 국가 재건’으로 묘사된다. F. J. Molitor, Philosophie der Geschischte oder uber die Tradition, Munster 1839, part 3, p. 598.
벤야민의 초기 종교적 저작들에서는 결정적인, 잃어버린 에덴의 조화를 향한 향수는 ?테제?에서 다시 등장한다. 예를 들어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은 ―언어에 대한 에세이(1916)에 표현되어 있는― ‘언어라는 축복받은 아담의 후예[인류, adamite]의 정신’을 상실하고 바벨탑이라는 언어적 혼란 W. Benjamin, One Way Street, p. 121. 또한 F. J. Molitor, op cit, pp. 329-40에는 아담의 언어에 관한 흥미로운 장이 있다.
으로 뒤이어 쇠퇴한 것과 연관되어 있다. 추방은 이제 역사의 천사를 ‘불가항력적으로 미래로 몰아대는’ ‘천국으로부터 불어오는 폭풍’이라는 변증법적 이미지로 표상된다. 천국으로 다가가려는 바벨탑이라는 새로운 형상은 폭풍이 만들어내는, ‘하늘로 향하는 파편더미’이다. 그리고 이 폭풍은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에 다름아니다. W. Benjamin, Illuminations, New York 1968, pp. 259-260.
‘진보’―?테제?에서 ‘파편(wreckage) 위에 파편을 쉬임없이 쌓이게 하는 단 하나의 파국’으로 정의된―에 대한 비판은 벤야민이 그의 불을 붙이는 주요 연료[그의 사상을 전개하는 데 주요 원천] 가운데 하나이다. 신낭만주의적 기원에서 그것[진보에 대한 비판]은 특별히 혁명적이고 전복적인 질을 갖는다. (그의 ?테제?가 쓰여진 직후, 기술적인 진보는 파편더미에 두가지 재앙적인 파멸을 부가하는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라는.) 학생생활에 대한 발언에서 ―브레히트의 영향 아래 있던 1933-35년까지의 짧은 시기를 제외한― 종국까지의 그의 저작에서 기술적인 진보는 앞으로올 혁명적 정치에 대한 기구로 실험된다.
일방통행로(1928)의 변증법적 이미지에서 ‘진보’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불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어떤 경제적?기술적 발전의 계산가능한 시점에서 ―즉, 2천년 동안의 인류 문화를 끝장낼 지도 모르는 폭발 전에― 반부르조아 혁명을 불타고 있는 도화선을 끊어버리는 행위라고 진술한다. One-Way Street, p. 80. 또한 기술의 진보라는 문제는 마지막 부분(‘Toward the Planitarium')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된다. 그것은 발행인의 노트에 따르면 ‘기술에 의한 자연의 지배―이후 프랑크푸르트 맑시스트의 보증서가 되는―라는 관념에 대한, 아마도 처음이자 가장 탁월한 거부―왜냐하면 매우 적절하고도 합리적이기 때문에―의 표현’이다.
그점은 레스코브를 ‘경제적 진보의 부적당함을 지적한’ 최초의 사람 가운데 하나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잃어버린 황금시대의 조화에 대한 믿음을 지킨 이야기꾼의 본보기(prototype)로 (톨스토이의 인용구를 통해) 환영한 이야기꾼(Storyteller, 1936) 에세이에서도 드러난다. W. Benjamin, ‘The Storyteller', Illuminations, pp. 92, 97.
이는 낙관주의―사회민주주의의 낙관주의를 포함하여―가 ‘기술발달에서 자연과학의 진보는 파악할 수 있었으나, [기술발달에] 수반되는 사회의 퇴보를 인식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을 벤야민이 보여준 훅스(Fuchs) 에세이(1937)에서는 긴급한 논쟁거리이다. 그는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적 (다윈주의적) 진화주의와 그것의 천박한 낙관적 허상―그것은 (특히 전쟁과 관련되어 있는) 기술의 위험과, 엥겔스가 영국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인지하고, 맑스가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예언에서 일견한 ‘부상하는 야만주의에 대한 통찰력’을 무시하는데―에 반대한다. W. Benjamin, ‘Eduard Fuchs, Collector and Histoian', in One Way Street, p. 370.
그것은 또한 벤야민이 보들레르에게 이끌렸던 이유이기도 하다. 불문시(詩)에 대한 그의 노트에는 ‘그의 역사적 경험은 상품경제에 의한 인간환경의 가치절하(devaluation)에 깊히 영향받았다. … 이러한 경험에 반(反)하여 진보라는 관념을 끌어들이는 것보다 경멸스러운 것도 없다. … 역사는 이러한 이유로 기술적인 진보에 의존하지 않는 것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얼마나 옳았는지 보여주었다. W. Benjamin, GS Ⅰ, 3, p. 1151-52.
언급할만한 에세이에서 어빙 볼파르트(Irving Wohlfarth)는 벤야민이 혁명을 역사 진보의 변증법을 가속화하며 그것의 구급 노끈(emergency cord)을 잡아당길 수 있다고 파악했음을 주장했다. I. Wohlfarth, ‘On the Messianic Structure of Benjamin's Last Reflection', Glyph 3, Baltimore 1978, p. 168.
이것은 매우 명석한 공식화이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로는 ‘진보’에 대한 비판이 그의 일생의 작업(oeuvre)인 반면, 삼십년대의 간략한 지적인 실험에 첫번째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을 명확히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진보주의’에 대한 벤야민의 단명의 실험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보통 ‘브레히트의 영향’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주장 자체가 ―무엇을 반드시 설명한다기 보다는― 반드시 설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음의 가설을 생각해볼 수 있다. 1933-35년에 쓰여진 글들은 ―기술적인 진보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무비판적인 자세라는 특징을 나타낸다. 2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소비에트 연방의 이데올로기는 어느 때보다도 산업주의적(industrialist)이고 생산중심적(productivist)이라는 맑스주의 중 맹목적인 경향을 지닌다. 1933년까지 벤야민은 ― 소련에 동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적인 시각들에 열려있었다. 우리는 트로츠키의 ?나의 생애(My Life)?와 ?1931-32년의 러시아 혁명사(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in 1932-33)?에 대한 그의 독해에서 ‘숨막힐 듯한(breathless)’ 열광을 추측할 수 있다. W. Benjamin, Briefe, 2, p. 50. 벤야민의 서신에 등장하는 트로츠키에 대한 다양한 업급에 대해서는, One-Way Street의 발행인 노트 가운데 p. 36, note 13을 보라. Moscow Journal에서 이미 그는 ‘국가의 생명력에서 혁명적 과정의 동학(動學)을 멈추려고 시도’한다며 소비에트의 지도력을 비난했다. 이러한 비평은 트로츠키와 좌익 반대파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Moscow Journal, 30 1926년 12월)
벤야민의 작업에서 ‘진보주의적인 간막극(progrssist parenthesis)’의 출발점은 독일에서의 히틀러의 도래와 일치한다. 이것은 많은 좌파 지식인들에게 이제 소련이 파시즘의 마지막 방어벽이라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것의 끝은 벤야민의 첫번재 소련 방문과 일치한다. 벤야민은 소련 방문을 통해 당혹감을 느꼈고, 그는 소련과 소련의 원칙으로부터 더욱 거리를 취하게 되었다. 최근에 발견된 벤야민의 페이퍼에는 ―지금은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있는― GPU[소련의 국가정치보안부]에 대한 날카로운 고소가 담겨있는, 브레히트에 대한 짧고 날짜가 명시되지 않은 노트가 있다. ?브레히트의 시에 대한 주해?에 관한 1939년 이후의 자아비판적 노트들이 이것들이다. 파리 도서관의 Fonds Walter Benjamin. 1937년 벤야민이 Pierre Missac를 만난 직후 트로츠키주의적 사상에 접하게 된다. 그들이 토론했던 주제 가운데 하나는 ?배반당한 혁명?에 대한 Missac의 동정적인 논평이었다. (Pierre Missac과의 개인적인 대화 가운데)
1936년 이후 벤야민은 어쨌든 과학과 기술을 단순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또한 ‘인간의 능력과 지식에 전진(advance)이 있어왔다’는 것을 부인하지도 않았다. (그가 ?테제?에 명시적으로 언급했듯이.) 기술상의 발전 그 자체가 인간의 사회적?도덕적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고, 사회주의자들은 해방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이러한 물질적 진보라는 불가항력적인 움직임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치명적으로 위험한 신화를 그가 열정적으로 또한 굳건히 거부했다. 그는 기술상의 발전―자본주의 아래 존재하는―을 혁명적으로 중단시키지 않고서는 인류의 미래가 위협받을 것이라는 점을 예리하게 깨달았다. 더구나 자본주의적인 산업의 ‘진보’가 상당한 사회적 ‘퇴보’를 낳았으며 인간의 삶을 실락원과 반대되게 만들어왔다는 점―즉, 지옥 그 자체―을 그는 점점 확신해갔다. ?중앙 공원(Zentral Park)?(1938)에서 ‘진보라는 개념은 재앙의 사상 속에 뭍혀간다. “그렇게 가는” 것들이 재앙이다. … 슈트린드베르크의 사상에 따르면 지옥은 절박한 어떤 것이 아니다. 여기의 이러한 삶(this life here)이 바로 그것이다. Walter Benjamin, ‘Zentral Park’, Charles Baudelaire, p. 179. ‘퇴보’라는 용어는 벤야민에게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 용어는 무정부주의적 지리학자 엘리제 레끌뤼(Elisee Reclus)에 의해 주조되었다. 자연에 대한 통제의 진보와 사회적 삶의 퇴보 사이의 모순은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의 11번째 테제의 주요한 테마이다. (Illuminationen, pp. 256-57)
제2차 세계대전의 ―또한 가장 진전된 기술의 정복이라는 도움을 받아― 곧 세속적인 지옥이라는 구체적 형상을 제공했다.
역사의 중단(interruption)
진보를 자동적이고 저항할 수 없으며 무한한 발전이라고 여기는 사회민주주의적이고 속류맑스주의적인 신화에 대항하여, 벤야민은 혁명을 역사가 반복되는 중에 일어나는 구원적 단절(redemptive interruption)로, 즉 역사라는 행렬에 갑자기 제동을 거는 하나의 도약으로 인식했다. W. Benjamin, GS Ⅰ, 3, p. 1232.
‘전세기 동안 울려퍼진 집결된 목소리(rallying sound)라는 이름을 가진’ 전설적인 혁명가 블랑키는 진보에 대한 믿음에 경멸을 표했다. 그의 행동은 [진보에 대한] 망상과도 같은 믿음이 아니라 현재의 불의를 끝장내려는 결심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러한 결심은 ―인류(humanity)를 위협하는 긴박한 위기에서 인류를 구원하려는 최종순간에― 다른 어떠한 동시대의 혁명적 정치가들 보다 블랑키에게는 근본적인 기준이 되었다. W. Benjamin, Illuminations, p. 262. 그리고 ‘Zentralpark', C. Baudelaire, p. 183.
혁명은 ‘진보’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를 향해 내딛는 호랑이의 도약(a tiger's leap in the past)' W. Benjamin, Illuminations, p. 263.
이다. 그것은 실락원을 되찾으려는 노력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 뿐만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도 에덴 동산과 같은 조화가 있었던 고대의 황금시대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신학―정치학 단편(1921-22)?에서 제안된 통합 속에서의 회복을 발견한다. 유토피아와 회복(restitution), 미래와 과거는 연금술적으로 언제나 굳게 결합된 것(‘married’: vermahlt)이며 이는 현재의 ‘지옥’에 대비된다. ?파리, 19세기의 수도(Paris, Capital of the Nineteenth Century, 1836)?의 주요 문단에서 벤야민은 미래의 꿈을 언제나 선사시대의 요소들―즉, 무계급 사회―과 굳게 결합시킨다. 그에게 집합적 기억들(collective memories)이 저장된 고대의 경험은 ‘새로운 것과 상호침투하여 유토피아를 생산한다.’ W. Benjamin, In Charles Baudelaire, Verso, London 1983, p. 259.
잘 알려져 있듯이 1935년 8월 벤야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테어도르 아르드노는 ‘과거에 대한 지나친 과대평가’ 때문에 손상되고, 클라게스(Klages)의 신비적인 생각을 생각나게 한다고 이런 공식(formulation)과 에세이 전체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현재의 상업중심 시대(mercantile era)와 ‘지옥’을 동일시하는 것 뿐만 아니라, 과거와 ‘황금시대(golden age)’를 결합시키는 것 역시 거부했다. T. Adorno, in Bloch et al., Aeusthetics and Politics, Verso 1980, pp. 113, 116.
이러한 역사 이전의, 과거 무계급 사회가 벤야민에게 뜻하는 바는 정확하게 무엇인가? 그가 중요하게 참조한 것은 클라게스가 아니라, 클라게스가 반응했던 식으로 나중에 번역했던 죠안 제이콥 바호펜(Johann Jacob Bachofen)의 위대한 고전이었다. 벤야민이 쓴 바호펜에 대한 프랑스어 평론(1935)은 가장 생산적이지만 대체로 잊혀졌던 그의 역사철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다. 바호펜의 작업은 ‘낭만적인 근원들로부터 고무받았으며’, ‘역사가 태동할 시기의 공산주의 사회를 환기’시키기 때문에, 맑시스트와 무정부주의 사상가들 모두의 흥미를 끌었다고 벤야민은 썼다. 무정부주의자인 엘리제 레끌뤼(Elisee Reclus)는 바호펜의 책들에서 ‘그의 자유주의적 이상의 오래된 근원들’을 발견했다. 또한 라파르그(Lafargue) 뿐 아니라 엥겔스 역시 여가장제(女家長制)적인 공동체(matriachal communities)에 대한 그의 연구에 흥미를 보였다. 거기서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와 시민적 평등, 그리고 ‘권위라는 관념이 타파된’ 원시적 공산주의의 형식이 존재했다. W. Benjamin, GS Ⅱ, 1, pp. 220, 226, 230-31. 바호펜을 따라 벤야민은 한편으로 여성정치적(gynocratic) 공동체를 언급한다. 그러나 여성정치제 (혹은 여가장제)와 평등주의적이고 반권위주의적인 공동체 사이에는 분명 모순이 있다. 현대 인류학은 그러한 여성정치적인 사회가 존재하였는지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여가장제’ 혹은 ‘여성정치제’는 단지 ‘성별 간에 평등이 존재했던’ 과거 공동체에 대한, [남성중심의] 가부장제에 사는 남성들의 두려움과 걱정의 신화적 표현이었을까? 이 경우에 ‘가부장제’는 단지 여가장제 사회가 부재했음을 지적하게 된다.
이 평론은 ―드뤼유(Drieu)의 무정부주의적 ?탈영병?에 대한 동시대적 (contemporaneous) 언급과 함께― 벤야민의 자유주의적인 공감대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더욱이 원시공산주의, 반권위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공동체는 유토피아의 근원으로 묘사된, ?파리, 19세기의 수도?에서 정의한 전역사적 무계급사회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아도르노의 격렬한 비판에 고무되어, 벤야민은 보들레르에 관한 다음 에세이에서 ‘고대적 경향(archaic tendency)’을 잔존한다. 그러나 ?보들레르에게 나타나는 몇가지 모티브(On Some Motifs in Baudelaire, 1939)에서 침잠한 형태로 나타난다. 거기서 주의깊게 들여다보면 현재의 ‘지옥’과 실‘락원’ 사이의 대립에 대한 새로운 판본(version)을 발견할 수 있다. 근대적 지옥(modern hell)의 중심적인 특성은 ‘교양받은 대중들의 표준화되고 탈자연화된(denatured) 삶’이나 ‘거대한 규모의 산업주의 시대에 적대적이고 [우리를] 현혹시키는 경험’이 드러내주는 경험의 퇴화(degradation)이다. 특별히 ‘노동이 경험으로부터 차단된(sealed off)’ 미숙련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저하되고(degraded), 삶은 표준화되며 통제되고(regimented), 현대 기계에 의해 자동기계로 환원된다. German original in C. Baudelaire, pp. 105, 128-29에 따라서 수정된 W. Benjamin, Illuminations, pp. 158-59, 178. 벤야민은 이 컨텍스트에서 맑스를 인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E. T. A. Hoffmann― 낭만주의적 작가들의 이야기에서 삶과 자동화 사이의 종교적인 적대를 강조한―에 관한 그의 1930년 에세이를 회상할 수도 있다.
진정한 경험은 ‘의식(ceremonies)과 축제(festivals)들과 함께 의례(rituals)’ 속에 나타나면서, 집합적인 과거의 기억으로 잔존한다. 그것은 보들레르의 저장들(correspondances)이라는 관념의 중심에 서있다. 그것[저장]은 ‘의례(the ritual)의 영역 내에서 가능한’ 경험의 형식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에덴 시절의 형상(figure)이 다시 나타난다. ‘저장은 기억의 자료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자료가 아니라 역사 이전의 세계에 대한 자료이다. 축제의 나날이 위대하고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것이 과거의 삶과 마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의 중얼거림(murmur)을 저장들 속에서 들을 수 있다.’ W. Benjamin, Illuminations, pp. 161, 184.
티드만(Tiedmann)이 통찰력을 가지고 지적했듯이, ‘저장이라는 관념은 실락원이 미래에 투사되어 나타나는’ 유토피아이다. 그것은 ―보들레르의 시 자체에서 언급되듯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화해라는 유토피아이다. R. Tiedmann, ‘Nachwort', pp. 205-6. 또한 R. Wolin, Walter Benjamin, an Aesthetic of Redemption, p. 236을 볼 것. ‘환경에 대한 기술적 지배가 근절시킨 자연의 잃어버린 궤적’을 저장들로 인해 회복할 수 있다. … 저장들로 말미암아 자연과의 조화라는 원시역사적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
푸리에라는 이름은 벤야민에게 이러한 화해의 표상이 된다. 요흐만(Jochmann) 에세이(1937)에서 그는 ‘문명은 필연적으로 그것의 일반적인 타락과 함께 하며, 그 와중에 인류의 사회적 제도 속에서 모든 부분적인 발전’을 발견한 변증가로 언급한다. 그리고 ?파리, 19세기의 수도?에서 그는 욕망이라는 원시적 상징(premeval symbols)에 생기를 불어넣는 유토피아에서는 과거와 새로운 것(new)이 전형적으로 결합한다는 점에서 벤야민과 절친했던 폴 쉬르바르트에 비교된다. 푸리에의 통과작업(Passagenwerk)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에 대한 진정한 형태로 언급된다. W. Benjamin, GS Ⅱ, 2, p. 583. 그리고 R. Tiedmann, ‘Nachwort', p. 205.
마지막으로 ?(U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에서 푸리에의 사상은 일을 ‘자연에 대한 착취’로 파악하는 부르조아적?사회민주적?속류 맑스주의적인 인식과 대조된다. 그[푸리에]의 가장 환상적인 꿈들은, 자연의 창조성을 해방시키려는 목적을 지닌 노동에 대한 실례로 환영받았다. W. Benjamin, Illuminations, pp. 261-62를 볼 것. 벤야민은 푸리에와 맑스를 상호모순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파리, 19세기의 수도? (p. 160)에서, 그는 푸리에의 ‘인간에 대한 거대한(gargantuan) 관념’에 대한 맑스의 호의적인 견해를 인용한다.
전(前)역사 시대에 황금시대를 위치지음으로써, 벤야민은 독일 낭만주의의 주류로부터 자신을 구별지었다. 독일낭만주의[의 주류]에게 중세시대는 향수(Heimat)에 젖은 고향이었다. 이 지점에서 그는 맑스와 엥겔스를 스스로와 비교했던 것보다 더 가까웠을 것이다. 1868년 3월 25일 그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맑스는 계몽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항한 첫번째 반응은 ‘중세적이고 낭만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두번째 반응은 ―이는 사회주의적인 경향에 속하는데― ‘각각의 사람들을 중세를 넘어 원시시대(Urzeit)로 뛰어넘고자 하는데 존재한다’고 썼다. 그러한 원시적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가장 낡은 것 속에서 가장 새로운 것’을, 그리고 특별히 ‘푸르동을 감격하게 할 평등주의자’를 발견할 지도 모른다. Marx, Engels, Ausgewalte Briefe, Berlin 1953, p. 233.
벤야민이 이 편지를 알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우리는 가장 낡은 것과 가장 새로운 것이 ‘굳건히 결합한다(married)’는, 평등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시대에 대한 그의 언급들이 놀랄만큼 유사한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기원은 목적이다.(origin is the goal.) 칼 크라우스의 경구는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의 14번째의 모토이다. 거기에서 혁명은 ‘과거를 향해 내딛는 호랑이의 도약’으로 정의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복권주의적-유토피아적(restitutionist-utopian) 이론과 유대주의적 메시아주의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이 있다. 쇼렘은 쓰기를, 메시아적 관념 속에 ‘설령 복원력(restorative force)이 유토피아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유토피아주의적인 복원력이 작동 중이라고 할지라도… 완전히 새로운 질서는 완전히 낡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낡은 질서는 실제적인 과거로만 구성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유토피아라는 빛이 밝게 비추는 꿈 속에서 변형되고(transformed) 이상화된(transfigured) 과거이다.’ G. Scholem, The Messianic Idea in Judaism, New York 1971, p. 4.
선택적 친화력은 단지 유비(analogy)가 아니라, 각 요소들 사이의 능동적인 상호침투(interpenetration)와 결합의 결과이다. 세속화된 혁명적 유토피아와 성스러운 메시아적 영역에서 사용되는 각각의 용어 사이에는, 그리고 구원의 역사와 계급투쟁의 역사 사이에는 보들레르적인 의미에서 저장들, 즉 밀접한 연관이 있다. 실락원에 조응하는 것은 역사 이전에 존재했던 평등하고 비권위주의적이며, 에덴 동산과 같이 자연과의 조화 속에 사는 계급없는 공산사회이다. 에덴동산으로부터의 추방이나 인간을 낙원으로부터 지옥으로 몰아가는 것(Tempest)은 ‘진보’라고 불리우는 산업 문명과 자본주의적 상품사회, 그리고 현대의 재앙과 참상 등이 조응한다. 메시아의 도래와 조응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역사의 혁명적 단절이며, 낙원과 거기서 사용되던 아담의 언어가 복구되는 메시아의 시대와 조응하는 것은 해방된 공산주의의 새로운 무계급사회와 거기서 사용되는 보편적 언어이다. ?테제?를 위한 예비적 노트에는 메시아적 시대를 보편적 언어―바벨탑의 혼돈을 대체할 수 있는―와 연관시키는 단락이 있다. 마치 아이들이 일요일에 새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은 이[보편적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과 그의 1914년의 신학적 고찰―타락을 원시적인 낙원의 언어를 잃어버린 것으로 파악한―과의 연관성은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벤야민의 최후의 고찰에서 나타나는 메시아적 구조’에 대한 Irving Wohlfarth의 위에 언급된 에세이를 보라.) 또한 Susan Buck-Morss, ‘Walter Benjamin Revolutionary Writer', New Left Review 128, July?August, 1981, p. 57을 볼 것. ‘보편적 언어는 타락 이전의 낙원에만 존재했다. 보편적 역사는 사회의 혁명적 전화라는 형태로 낙원의 복원을 요구한다.’
기원은 목적이다와 통합 속에서의 회복은 이러한 ‘혁명적 신학’의 정신적 정수(quintessence)이다.
많은 인용자들은 벤야민의 작품에서 메시아주의와 혁명과의 관계를 ‘세속화’의 하나로 인식하는 반면 다른 이들(게하르트 카이저)은 ‘맑스주의의 신학화’라고 말한다. G. Kaiser, Walter Benjamins "Geschichtsphilosophische Thesen", in P. Bulihup, Materialien zu Benjamins Thesen…, p. 74.
60년대 독일의 열띤 벤야민 논쟁에서, 몇몇은 그의 종교적 형이상학을 강조했고, 다른 이들은 그의 공산주의적 유물론을 강조했다. 벤야민은 자신의 사상을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것으로 지칭했지만, 그의 인용자들이나 추종자들은 그의 얼굴의 다른 면을 무시 혹은 경시하면서, 한쪽만 보기를 고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류의 논쟁을 지양하기 위해서 로마의 신[야누스]이 사실 두 얼굴과 단 하나의 손만을 가졌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벤야민의 ‘얼굴들[측면들]’은 하나의, 그리고 동일한 사상의 발현인데, 이는 메시아주의적인 동시에 세속적인 표현이다.
사실 벤야민은 1926년 쇼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미 종교와 정치 사이의 동일성의 형식에 관심이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동일성은 ‘오직 전자[종교]가 역설적인 표피(Umschlag) 속에서 후자[정치]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역사철학테제?는 정확히 유대교를 맑스주의적인 계급투쟁으로, 혁명적 유토피아를 묵시록적인 메시아주의로 만드는 그러한 역설적 전환이다.
첫번째 종류의 표피―메시아주의를 정치학으로 바꾸는―는 ‘세속화’로만은 순전히 이해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측면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하였든 이러한 측면은 세속적 의미와 결과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말할 수 있다. ?테제?를 위한 예비노트에서 벤야민은 이렇게 적고 있다. ‘맑스는 무계급사회라는 표상(representation)에서 메시아의 시대라는 표상을 세속화시켰다. 그리고 진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적 철학의 요구와는 대비되어, ‘무계급사회는 역사에서 진보의 최종적인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연속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단절(interruption)을 성취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프롤레타리아 자신에게 혁명적인 정치를 위해 메시아적 얼굴을 무계급사회라는 개념으로 복원해야 한다.’ W. Benjamin, GS Ⅰ, 3, pp. 1231-32.
이 노트를 비판하면서, 티드만은 벤야민에 반대하여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무계급 사회를 건설하려는 이해를 위해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방법을 아첨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후자[혁명]은 혁명을 위한 혁명(a revolution for the sake of revolution)을 이루기 위해 혁명적 정치를 이용하려는 기회일 뿐이다. [벤야민에게서는] 목적과 수단은 ―무계급사회와 혁명은― 혼동된다.’ R. Tiedmann, ‘Historischer Materialismus oder politischer Messianismus', in P. Bulthup, op. cit, p. 109.
그러나 목적과 수단은 ‘혼동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벤야민의 생각에서는 변증법적으로, 또한 분리할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역사적 반복(‘진보’)이 혁명적으로 중단되지 않고서는 무계급사회 역시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만약 (무계급사회라는) 목적을 모든 메시아적 폭발 속에서 결절점(a breaking point)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행동도 있을 수 없다. 벤야민의 목적은 ‘혁명을 위한 혁명’이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혁명없이는 해방 역시 없고 급진적인 혁명적 실천 역시 없다.
그의 최후 저작에서 나타나는 메시아주의의 세속화로의 귀결은 그들의 폭발력을 증가시키는 것에 있다. 그러한 점은 그것들[그의 최후 저작들]에 독특한 전복적인 특성을 부여한다. 또한 ?역사철학테제?는 맑스의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이후 혁명적 사상에대한 가장 급진적이고 선구적이며 생산적인 기록이다. 만약 우리가 화학적 주석자(chemist-commentator)와 연금술적 비평가(alchemist-critic) 사이에서 그가 이룩한 특성을 벤야민의 저작들에 적용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의 저작들의 ‘삼림들’과 ‘재들’을 뛰어넘어 살필 수 있어야 하며, 그의 작업의 타오르는 정신적 불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휴머니티의 혁명적 구원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