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미국문화
포스트모더니즘과 미국문화
적어도 한국땅에서는 철늦은 듯한 단어, 포스트모더니즘을 오늘 강의의 표제어로 삼은 것은 단순히 미국문화의 대종을 이루는 미국의 대중문화와 포스트모더니즘은 대단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인식 때문만 아니라 다/초국적 자본주의 세계 체제 속에 깊숙히 편입돼 있는 한국사회/문화와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1990년대 초반 단순히 예찬과 저주의 대상으로만 논의되고 바로 잊혀진 포스트모더니즘은 아직도 정당한 논의와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맑스주의 문예이론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1984년 논문, “포스트모더니즘,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문화논리”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무조건적인 예찬이나 비판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미국과 유럽의 문화적 조건이 얼마나 포스트모던한가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 강의는, 제임슨을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을 개별적인 예술작품이나 문학작품의 스타일을 분류하는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다국적 자본주의 시대의 지배적인 문화현상으로 이해한다. 제임슨의 표현을 빌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다국적 자본주의 시대를 표현하는 “문화적 우세종 cultural dominant"으로서 특정한 예술 형식만을 가리키는 용어일 뿐 아니라 스타일 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작품이 존재 양식에 있어서 일정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일종의 세력장 force field를 가리키는 광범위한 외연을 지닌 용어이다. 오늘 우리의 강의도 문화적 우세종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생각해보면서 미국문화의 탈근대적 조건에 대해서 논의해보려한다. 그러나 이 강의의 목표는 결코포스트모더니즘을 추상화 또는 이론화하려는 데 있지 않다. 이 강의의 목표는 그보다 훨씬 소박해서, 몇 가지 개별적인 미국의 대중문화 현상을 짚어가며 그런 각개의 문화현상들이 어떻게 미국문화의 탈근대적 조건을 충족시키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오늘 강의의 가장 든든한 인도자인 제임슨이 각각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예로 들고 있는 반 고흐의 신발과 앤디 워홀의 신발을 비교해보는 것으로 출발점을 삼아보자.
19세기 후반 유럽의 신발과 20세기 후반 미국의 신발이라는 시간과 공간 상의 비교는 무엇보다도 깊이의 상실로 특징지워진다. 반 고흐의 그림 속에는 척박하고 궁핍한 <대상 세계의 형상>과 대상의 배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환상적인 색채와 뒤틀림> 사이의 괴리가 존재하고 있다. 고흐의 “한 켤레의 구두”는 고흐가 빠리에 와 얼마되지 않은 시점(1887)에서 그린 작품으로서 당시 빠리 화단의 인상주의적 영향을 다소 애매한 형태로 반영한 작품이다. “한 켤레의 구두”는, 허름한 한 쌍의 구두의 형상이 보여주듯이, 초기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과 같은 작품과 마찬가지로 헤이그파 스타일로 농촌의 절대 빈곤, 농부들의 고된 노동 등의 주제를 담고 있다. 그러나 바닥에 멋대로 놓인 구두의 형상과는 달리 구두가 놓여 있는 바닥과 배경을 이루는 벽의 모습과 색채는 다분히 비현실적이다. 바닥 배경을 이루는 붓칠의 흔적이나 색채가 프로방스의 아를르 시절에 나온 풍경화나 정물화에서만큼 환상적이지는 못하지만 충분히 비현실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임슨은 그림 속의 이러한 간극을 일종의 유토피아주의로 설명한다. 비록 그림의 재현 대상의 세계는 척박하고 어려움 많은 현실이지만 예술가는 시각의 영역에서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재현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보상을 시도한다.
반 고흐의 그림에서 제임슨이 지적하는 유토피아주의는 재현 대상의 현실에 덧붙여진 (또는 덧씌워진) 예술가의 주관적 세계의 깊이로 설명될 수 있다. 작품 세계의 깊이는 “한 켤레의 구두”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사유에서도 발견된다. 해석학이란 대상 세계에 대해 해석자가 끌고 들어오는 해석자 자신의 맥락에 의해 대상 세계의 의미가 생성되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인다. 하이데거의 “한 켤레의 구두”에 대한 해석학적 읽기의 경우, 낡은 가죽으로 된 허름한 구두라는 물질이 반 고흐라는 해석자(예술가)의 대상 세계라면 “한 켤레의 구두”라는 예술 작품을 매개로 해서 드러나는 맥락(세계)은 그 구두가 도구로 사용된 농부의 세계 전체이다. 작품 속에 드러나는 대상 세계는 한 켤레의 구두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가 작품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낡은 구두 한 켤레만이 아니고, 예컨대, 허리가 휘는 농부의 고된 노동이나 노동이 끝난 뒤 뒷짐을 진 채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의 느릿한 걸음걸이, 그리고 농부의 발길이 향하는 연기 피어오르는 집 등등과 같은 구두를 둘러싸고 있는 전체적인 맥락이다. 이 경우, 작품 세계는 그 자체로 물질(구두)과 세계(맥락) 사이에서 의미를 드러내는 해석학적 깊이를 지니고 있다.
반 고흐와 같은 모더니즘 계열의 예술 작품 속에는 이처럼 깊이가 존재한다. 제임슨은 이와같은 작품 속에서의 깊이의 존재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한다. 첫째, “한 켤레의 구두” 속에 존재하는 유토피아적 깊이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노동 분업과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예술 작품은 감각(화가의 경우, 시각)의 영역에서 독자적으로 생산(창작)된 생산품이며 그런 의미에서 예술 작품의 창작 행위는 다른 물질적 생산 행위와는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모더니즘 예술 작품은 물신화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고 체제에 대해 보상적 또는 비판적 실천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둘째, 해석학적 깊이를 지니고 있는 예술 작품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물질성에 대해서 하이데거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하이데거는 대상 세계의 물질성을 넘어서는 예술 작품의 독립적 지위를 지적하지만, 예술 작품 역시 자본주의 체제 내에 존재하는 물질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체제와 예술 작품 사이의 보상적 비판적 거리는 어느 정도 확보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다.
이제 살펴보려는 미국의 대표적인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다이어몬드 가루 뿌린 신”에 오게 되면, 이러한 의문 제기는 더 이상 비평가의 몫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것이 된다. 워홀의 신발은 고흐의 신발과는 달리 유토피아적 깊이나 해석학적 깊이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대상 세계로서의 워홀의 신발은 작품 속에서 어떤 모순이나 간극도 마주치지 않는다. 워홀의 신발은 오히려 그 자체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주의(?)라고 부름직한 어떤 점을 제시하고 있다. 신발의 야릇한 색채나 광택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다. 그것은 상품 소비 자체에서 나오는 즐거움이다. 상품을 소비한다고 해서 반드시 즐겁거나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워홀의 신발은 물신숭배적인 즐거움 또는 욕망을 재현하고 있다. 워홀의 텍스트는 고흐의 작품과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 유통, 소비되는 소비상품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예술 작품 고유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워홀의 텍스트는 오히려 예술의 영역이 자본주의 체제 내로 통합된 것을 예찬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워홀의 신발을 보면서 신발을 둘러싼 맥락이나 세계를 상상하지 못한다. 신발의 주인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물론 워홀의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들이 워홀의 신발을 보고 무슨 상상을 하든지 그것은 자유다. 그렇게 보면 워홀의 신발로부터 맥락을 제거한 것은 작가 자신이다. 워홀은 주관적 표현을 극단적으로 억제함으로써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대상 세계의 맥락을 재구성하려는 보는 이들의 욕망이나 시도를 비웃고 있다. 워홀의 텍스트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쇼 윈도우에 전시되고 있음직한, 말하자면, 그냥 상품 이미지일 뿐이다. 사진의 네거티브 필름 이미지가 배경을 이루고 있는 데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워홀의 텍스트 속에서 재현되는 대상 세계는 죽은 세계이므로 어떤 실체성도 부여받지 못한다. 고흐의 작품 속에서 재현되었던 대상 세계의 물질성은 워홀에 오면 실체가 없는 이미지로 변환되었다. 워홀의 텍스트는 오히려 상품으로서의 자신의 물질성을 의식한다.
깊이의 상실이라는 레토릭은, 일찌기 발터 벤야민이 지적했듯이, 기술을 매개로 한 무한 복제로 인해서 작품 세계의 아우라가 사라지는 데에서도 그 현실성을 발견할 수 있다. 작품 존재의 유일성이나 희소성이 작품의 권위 또는 신비로움을 보장하지만 작품이 기술적으로 무한 복제가 가능하다면 작품 존재의 아우라가 상실되고 만다. 이 말은 아마도 현대 기술 사회에서 작품과 상품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음을 지적하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워홀은 팝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작품의 상품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워홀이 마릴린 몬로나 여성용 파티 슈즈와 같은 일정한 소재를 약간의 변형만 준 채 시리즈로 작품을 발표한 것도현대 기술 사회에서 상품과 이미지가 무한 복제되어 유통, 소비되는 과정을 따른 것이다.
작품과 상품의 경계를 무시하는 워홀의 팝 아트가 그야말로 대중적으로 상업화한 대중문화의 영역이 아마도 텔레비젼 드라마일 것이다. 미국 텔레비젼의 연속 방송극soap opera은 미국의 대중문화의 중심에 있으며 시청자 층도 주부 여성 일변도에서 남성과 전문직 종사자에게 이르기까지 그 폭을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1930년대 15분짜리 라디오 드라마가 나온 이래 오늘까지 참으로 많은 연속 방송극이 방영되면서 미국의 텔리비젼 연속 방송극은 미국인들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다. 미국의 시청자들이 방송극 속의 가상 이야기와 실제 현실을 혼동하는 일이 많이 있다. 드라마의 내용을 일상적인 대화의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은 정도를 넘어서서 드라마의 생산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경우도 흔하다. “General Hospital"에서 류크와 로라의 결혼이 계속 미뤄지자 항의 편지가 쇄도하면서 극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드라마의 제작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에 불과하다. 시청자들이 극 속의 인물 이미지와 실제 배우를 혼동하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앤디 워홀도 고정 시청자임을 고백하기도 한 “As the world turns"라는 드라마에서 악역인 리자역을 16년간 맡았던 여배우가 맨하탄의 한 백화점 앞에서 테러를 당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다.
그러나 드라마가 단순히 일상의 반영이 아니라 일상의 모습을 구성한다는 말은 단순히 TV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대단하다는 차원에서만은 아니다. 드라마는 일상의 다양한 모습을 비추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드라마가 실제로 보여주는 것은 일상의 모습 그자체라기보다는 일상에 대한 어떤 정형화된 이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TV 드라마와는 달리 식구들끼리 모여 식사하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식사하는 장면이 나온다면 그것은 대개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지며 극중인물들은 대개의 경우 TV를 보면서 스낵을 먹거나 커피를 마신다. 여성인물들의 모성은 언제나 예찬되지만 실제로 아이를 돌보는 장면이나 육아로 인한 실질적인 문제점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가정을 배경으로 한 장면에서도 아이들 자체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병원의 모습에서도 병에 걸려 힘들어하는 환자들은 배경에 불과하고 흰 까운의 의사나 간호사들의 모습만 부각된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전문직 종사자들도 자신들의 직업과 업무 상의 이야기보다는 개인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사담에 몰두한다.
이런 식으로 미국의 TV 드라마에서 정형화된 일상의 이미지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마치 예쁜 색상의 필터를 통해서 일상을 바라보게 하는 효과가 있다. 데이비스 소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역사학과 교수인 루쓰 로젠에 따르면, 미국의 TV 드라마를 통해서 반복되는 이미지는 미국의 역사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고 말한다. 미국의 역사는 뿌리뽑힌 유목민의 역사이며 새로운 환경에 대한 도전과 적응을 끊임없이 강요받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미국의 대중들에게 일정한 휴식과 위로를 필요로 하게 만들었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필요성이 미국의 대중매체의 형식과 내용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미국의 TV 드라마에서 재현되는 일상의 세계에서 땀 냄새나는 노동과 잡무가 제거되어 있는 것도 그와 연관이 있다. 드라마에는 일탈적인 사랑과 갖은 음모가 가득하지만 드라마의 결말은 항상 가족과 공동체의 질서와 가치가 복원되는 것을 보여준다. 시청자들은 “All my Children"나 ”General Hospital"의 시간적 배경에 대해서도, 또는 각각의 드라마에 나오는 Pine Valley와 Port Charles가 지리적으로 어디에 있는 곳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Pine Valley나 Port Charles는, 말하자면, 구체적인 시간대에 구체적인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지리적/역사적 지역이라기보다는 공동체적 질서와 가치의 회복을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장 보드리야르는 료따르와 함께 프랑스의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씨뮬라크르simulacra라는 용어를 제시한다. 씨뮬라크르의 사전적인 의미는 모조품이지만 보드리야르는 이 용어에 기술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데 일정한 모델을 설정하여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꾸며놓는 데 쓰이는 모조품이나 그 이미지를 의미한다. 텔레비젼 화면 속에 나오는 Pine Valley나 Port Charles는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정확한 의미에서 씨뮬라크르다. Pine Valley나 Port Charles는 실제의 현실을 모방하거나 반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두 사회가 실제의 현실에 대한 왜곡된 재현이라고 볼 수도 없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현실에 대한 왜곡된 재현은 일정한 허위의식을 낳고 그것은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 또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통용되었다. 시청자들이 Pine Valley나 Port Charles를 상상하는 것은 지배적인 자본가 계급의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 조작되어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신적인 위로와 보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뿐이다. 오히려 시뮬라크르로서의 Pine Valley와 Port Charles가 감추고 있는 것은 눈을 돌려 드라마 밖의 현실을 바라봐도 역시 현실 속에 드라마보다 실제적인 어떤 것(the real)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생은 연극과 같다고 한 이가 셰익스피어였던가? 지난 해 나온 “Shakespeare in love"는 바로 이 점을 적극적으로 의식하고 만든 영화다. 또 비슷한 맥락에서, ”Trueman Show"의 진실은 짐 캐리를 둘러싼 거대한 인공사회와 마찬가지로 실제의 사회도 철저히 관리, 연출되고 있다는 점 아닐까?)
보드리야르가 씨뮬라크르의 예로 들고 있는 여러가지 문화현상 중에 미국 LA에 있는 디즈니랜드가 있다. 디즈니랜드는 그 자체로 모조품임을 내세우고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사람들은 디즈니랜드가 제공하는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놀이 세계로 빠져든다. 그러나 디즈니랜드에는 단순히 환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It's a Small World"나 ”서부개척시대“와 같이 대단히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세계도 존재한다. 그러나 디즈니랜드에서는 이처럼 재현적인 세계도 역사를 전체적인 맥락과의 연관 속에서 제시하고 있지 않다. 한 마을 지구촌을 주제로 한 가상 세계인 디즈니랜드의 <작은 세계>의 모델은 남북 간의 경제적 불평등이나 인종차별 또는 생태계의 파괴와 같은 전지구적 맥락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조화와 다양성의 세계이다. ”서부개척시대“ 역시 관람객들이 서부개척시대를 사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코스이지만 그 역사적 경험의 사실성은, 예컨대, 서부개척이라는 명목 아래 자행된 백인들의 원주민 대학살과 같은 역사적 맥락에 대한 억압을 전제로 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다시 보드리야르의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으로 돌아가보자. 보드리야르는 씨뮬라크르와 한 쌍을 이루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 개념으로서 하이퍼 리얼을 든다. 이 용어의 기술적인 의미는 씨뮬라크르의 이미지가 실제 현실의 모습보다 오히려 더 실제적이고 현실에 가깝다는 뜻이다. 위에서 예로 든 “서부개척시대”의 경우, 관람객들은 증기기관차를 직접 타고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서부의 여러 마을을 돌게 된다. 관람객들은 기차역마다 내려서 마을의 내부를 돌아보게 되는데, 이때 관람객들은 서부개척시대를 매우 사실적으로 경험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어쩌면 이들의 경험은 실제 개척시대의 대중들의 삶보다 더 사실적일 수 있다. 당시 마을의 선술집을 방문한 관람객들보다 술에 만취한 실제의 술집 손님들은 선술집의 모습을 더 사실적으로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끊임없는 관리와 보수를 통해 언제나 새로움을 유지하고 있는 디즈니랜드의 선술집과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이 겪었을 당시의 실제 선술집 중 어느 모습이 더 사실적인가?
몇 해전 미국 TV에 등장한 타이레놀 광고를 예로 들어보자. 아파트의 창 밖을 내다보는 한 여인의 눈에 비친 바깥 세상의 모습은 그녀에게 두통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크고 작은 소요와 전쟁의 모습이 창 밖을 내다보는 여인의 눈에 연속적으로 비춰진다. 짤막짤막하게 순간적으로 비춰지는 소요의 장면들 중에는 김대중과 만델라의 군중집회 장면도 눈에 띈다. 이 시끄러운 세상의 모습들을 바라보며 두통을 이기지 못하던 여인은 타이레놀 한 알을 먹으면서 창문을 닫아버린다. 순간 어지러운 바깥 세상의 소음은 사라지며 여인의 두통도 함께 사라진다. 80년대 민주화 투쟁이나 시위 현장에 있었던 한국의 시민들조차도 아마도 시위를 선도하는 당시 야당 지도자 김대중의 모습을 이처럼 선명하게 본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TV 광고에 비친 김대중의 모습은 실제 현실에서보다 더욱 사실적이다. 그러나 민주화 투쟁이라는 역사적 맥락과 광고 속의 김대중의 이미지는 서로 아무런 관련을 지니지 못한다. 하이퍼 리얼한 이미지 속에서 그 이미지가 원래 갖고 있었던 역사성은 타이레놀과 한 알과 함께 창문 너머로 소멸되고 만다. 미국의 타이레놀 소비자들은 타이레놀 한 알과 함께 김대중의 단지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이미지>를 소비할 뿐이다. (지난 대선 이회창 선거 캠프에서 왜 나를 홍보팀장으로 임명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된다.)
지금까지 살펴 보았듯이 씨뮬라크르는 모조품이지만 모조품의 모델 격이라 할 수 있는 원본을 따로 갖고 있지 않다. 모든 재현은 시간적으로 항상 과거에 대한 재현이지만 포스트모던 씨뮬라크르는 이러한 근대적인 선형적 시간관을 무시한다. 씨뮬라크르는 모조품을 통제하는 원본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씨뮬라크르는 원본(이런 표현 자체가 모순이지만)을 규제하고 원본의 모습을 결정한다. 미국의 대중음악계에는 모타운이라는 음악기획사가 있다. 모타운은 1960년대 세워져, 1970년대 스티비 원더, 다이애나 로쓰와 같은 걸출한 흑인 스타들을 배출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둔 기획사다. 모타운과 모타운 출신의 가수들이 성공을 거둔 배경에는 흑인 민권 운동이 큰 몫을 차지한다. 모타운을 세운 배리 골드라는 사람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음성을 흉내내어가며 모타운은 음악적으로 흑인들의 민권운동을 지원한다고 선언했다. 민권운동이후 미국 내에서의 흑인들의 지위가 어느 정도 향상되었고 민권운동 지지를 선언했던 모타운은 70년대 들어서 본격적인 성공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모타운의 상업적인 성공은 단순히 민권운동이라는 거룩한(?) 이념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모타운의 음악은 민권운동의 기층 세력인 흑인 대중들의 정서적 성향에 호소한다. 모타운은 흑인 대중들의 가슴 속 저 밑바닥에는 백인들과 갈라서려는 저항적 정서보다는 백인과의 조화, 나아가, 어느 정도는 백인을 닮고 싶어하는 욕망이 깔려있음을 알아차린다. 모타운의 음악은 결코 대중들보다 앞서지 않고 대중들의 정서적 취향에 눈높이를 맞춘다. 모타운의 음악이 리듬 앤 블루스나 랩 같은 흑인 고유의 리듬보다는 결코 전위적이지 않은 발라드 풍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준다. 모타운의 음악은 철저히 계산되고 기획되어 생산되었다. 모타운의 음악을 들으며 흑인들은 자신들의 취향을 백인처럼 세련(?)되게 조련하여 나갔고 백인들은 흑인들과의 대화의 가능성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모타운은 음악을 통해 당시 흑인 대중들조차도 정확히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정서적 취향을 조직하였다. 모타운의 음악은 흑인 대중들의 정서적 취향에 대한 씨뮬라크르이다. 배리 골드는 단순히 음악을 대중들의 취향에 맞추는 수준을 훨씬 넘어 음악을 직접 생산해내는 가수들에게 자신들의 정서적 취향을 음악적 수준에 맞출 것을 부단히 요구했다. 다이애나 로스의 유명한 일화. 다이애나는 모타운에서 음악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레스토랑에 가면 평소 흑인들의 습성대로 고기를 손으로 집어먹으려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음악을 시작한 이후 배리 골드의 강력한 주문에 따라 우아한 포크질을 배워 포크로 고기 썰기를 습관화 했다. 씨뮬라크르로서의 음악적 색깔은 음악의 기원인 가수의 몸의 색깔까지 바꾸어 놓은 셈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스필버그의 영화 두 편, “쉰들러 리스트”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간략히 언급하고 오늘 강의를 끝마치려 한다. 두 영화는 서로 닮은 꼴이다. 우선 누군가를 구해낸다는 줄거리를 지녔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두 영화는 점대칭으로 닮은 꼴이다. “쉰들러 리스트”는 한 사람의 희생이 여러 사람 (집단)을 구해낸다는 이야기이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거꾸로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희생이 필요한가를 말하는 이야기다. 두 영화는 스타일 상 포스트모더니즘과 직접 연관이 없다. 그러나 헐리우드 영화의 정형화된 영웅 만들기라는 공식을 그대로 따라서 다른 영화들에 등장하는 영웅들을 복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포스트모던하다. “쉰들러 리스트”의 쉰들러라는 개인은 분명히 영웅이다. 쉰들러는 나찌즘이라고 하는 물샐 틈 없어 보이는 전체주의 체제 속에서 체제의 허점 또는 모순을 이용하여 마침내 위대한 일을 해낸다는 점에서 다른 헐리우드 영화 속의 영웅 이미지를 복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쉰들러는 단순히 위대한 일을 했다는 점에서만 영웅이 아니고 헐리우드의 영웅 공식에 따라 만들어진 개인이라는 점에서 영웅이다. “쉰들러 리스트”의 쉰들러는 “야망의 함정 the Firm”에 나오는 톰 크루즈나 “배심원 the Juror"에 나오는 데미 무어 아니면 ”네트"에 나오는 샌드라 블록을 베꼈다.
영화 속에 나타나는 체제의 허점은 바로 부정부패이다. 쉰들러가 그 많은 유태인들을 구할 수 있었던 것도 나찌의 관리들을 뇌물로 매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체주의의 모순이기도 하다. 휴머니즘은 전체주의보다 약해보이지만 우리의 휴머니스트 영웅은 전체주의보다 도덕적으로 한 차원 수준이 높은 인물이며 전체주의의 모순까지 이용할 줄 아는 지혜를 지닌 인물이다. 그런데 영화의 원전이랄 수 있는 토마스 키닐리의 소설 ?쉰들러 리스트?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보다 문제적이다. 쉰들러 리스트란 쉰들러가 구제해주고자 하는 유태인의 명단인데, 소설 속에서 쉰들러 리스트가 작성되는 과정을 보면 쉰들러 리스트 역시 전체주의만큼 부정으로 얼룩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쉰들러의 비서격인 골드버그라는 인물이 쉰들러를 대신해서 유태인의 명단을 적는데, 그 과정에서 골드버그는 필사적으로 접근해오는 유태인들에게 뇌물을 받게 되면서 쉰들러 리스트는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한다. 영화는 쉰들러 리스트가 어떻게 지워지고 다시 쓰이기를 반복했는가 하는 혼돈의 과정을 삭제했다. 감독은 전체주의와 휴머니즘의 경계를 분명히 해서 정형화되어 있는 다른 헐리우드 영화들의 영웅 만들기 공식을 따르고 싶었을 것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왜 라이언 일병을 구해야되는가와 관련된 상황설정은 사실 황당하다. 노르만디 상륙작전에서 희생된 형제의 어머니에게 더 이상의 슬픔을 주지 않기 위해서 국가는 다른 전선에 파병되어 있는 죽은 형제의 동생을 구해올 것을 명령한다. 이러한 상황 설정은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일 지 모르지만 여기에도 일정한 영화적 진실이 깔려있다. 개인의 국가에 대한 일방적인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면 그것은 전체주의에 대한 예찬이지만 국가가 개인의 행복에 대해 책임을 다 해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면 그것은 다가오는 21세기형 복지 국가에 대한 비젼을 제시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국가의 책임 이행이라는 것도 구체적인 사항에 들어가서 보면 결국은 그 책무는 개인의 몫이다. (에이전트도 결국은 개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영화다. 이 영화가 올바른 주제 제시와 전쟁의 참상을 그야말로 사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탁월한 촬영 기술 등 많은 덕목을 지닌 영화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이 영화의 영웅 만들기 기법도 다른 영화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 이 영화는 한 사람의 영웅을 만들기 위해 다른 모든 인물들이 복무하지 않는다. 오히려 총탄에 쓰러지는 군인들의 고통스런 표정 속에서 자기 몫을 다하며 성실히 살아가는 보통 개인들의 진실을 발견한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러 간 분대원들 역시 모두가 자신들의 몫과 역할이 있을 뿐이다. 이 영화는 결코 톰 행크스 개인만을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 덕목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 왜 그 많은 병사들 중에 단 한 명의 흑인 병사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2차 세계 대전에 파병된 흑인 병사는 없었단 말인가? 이 영화의 밑바닥에 보통 사람들의 진실과 아픔 같은 주제가 깔려 있다면, 그리고 그 대열에 단 한명의 흑인도 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나쁜 형태의 인종차별주의 아닌가? 아마도 영웅은 언제나 백인이라는 헐리우드 영화의 공식이 이렇게 고약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