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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철학과 역사 유물론 [들뢰즈]

Casey,Riley 2023. 5. 12.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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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뢰즈: ‘사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1.사건이란 무엇인가?

히치코크의 영화 <현기증>의 마지막 장면은 주디가 수도원의 종탑에서 추락해 죽은 것으로 끝난다. 사고(accident), 그리고 죽음. 이는 주디라는 여인의 신체에 불연속적인 어떤 변화가 발생했음을 뜻한다. 뇌가 활발하게 기능하던 상태, 그리고 심장이 열심히 박동하던 상태에서, 뇌나 심장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된 상태로의 변화. ‘죽음’이라는 명사는 이러한 변화 이후의 신체적 상태를 지칭한다. 하지만 ‘죽다’라는 동사는 특정한 신체적 상태를 지칭하지 않으며, 어떤 신체적 상태에서 다른 신체적 상태로의 변화를 지칭할 뿐이다. 즉 죽음이란 ‘사물의 상태’(etat de chose)지만, ‘죽다‘란 ’죽게-됨‘(devenir-mort)이다.
의사는 이러한 신체적 상태를 진단하고, 어떠한 상태인지 확인해 주며(병들었다, 폐가 약하다, 건강하다), 신체적 상태의 변화에 개입한다(치료). 의사의 진단이 없으면 우리는 죽음도 인정받을 수 없다. 의사는 또한 죽음의 원인을 찾아 낸다. 질식해서 죽었는지, 약을 먹고 죽었는지, 뇌혈관이 터져서 죽었는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죽었는지 등등. 
주디의 주검을 두고 의사는 죽음에 관련된 신체적 원인을 다룬다. 이 경우 그것으로 의사의 할 일은 끝난다. 그러나 의사의 판단만으로는 주디의 죽음은 완결되지 못한다. 죽음이 발생한 그 수도원에는 틀림없이 경찰이 찾아올 것이다. 이미 알려진 어떤 치명적 병으로 인해 죽은 것이 아니라면, 다른 경우에도 경찰이 올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확인할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신체적 상태를 확인하는 것으로 경찰의 할 일은 끝나지 않는다. 경찰은 질문한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차라리 바로 여기서 경찰의 할 일은 시작된다.
경찰이 하는 일 역시 죽음을 다룬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신체적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죽음의 원인을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의사처럼 죽음의 신체적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비-신체적인 원인, 죽음을 야기한 다른 차원의 원인을 찾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여자는 죽은 것일까?” 경찰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한다. 
주디가 종루에 올라온 수녀의 발걸음에 놀라서 종루에서 떨어져 죽은 것이라고 본다면, 아마도 경찰은 주디의 죽음을 우연(accident)히 일어난 ‘사고’(accident)라고 답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만약 주디가 죽기 직전에 종루에서 퍼거슨과 심하게 다투었다는 것을 안다면, 더구나 그 다툼이 예전에 종루에서 발생한 어떤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결코 그것을 ‘사고’라고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틀림없이 거기서는 어떤 ‘사건’(evenement)이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여기서 경찰의 업무는 ‘사고’와 ‘사건’을 구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이유와 사건에 관련된 사항들,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로써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건인지, 즉 자살인지, 타살인지, 자살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타살이면 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그 여자를 죽인 것인지를 알려고 할 것이다. 이를 사건의 ‘의미’(sens)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의사가 죽음의 신체적 원인을 알려고 한다면, 경찰은 죽음이란 사건의 의미--죽음의 ‘사건적’ 원인--를 알려고 한다. 의사가 죽음(mort)이라는 신체적 상태에 관한 것을 다룬다면, 경찰은 죽음에 연관된 다른 것들을, 즉 무엇으로 인해 죽게 되었는가(mourir; devenir-mort)를 다룬다.
이처럼 ‘사고’와 ‘사건’은 경험적이고 일상적인 세계에서도 상이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구분된다. 들뢰즈는 좀더 나아가 사고와 구별되는 사건의 개념을 철학에 끌어들인다.G.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68-69쪽(이 책은 이하에서는 LS로 약칭한다); B. Paradis, "Schemas du temps et philosophie transcendantale," Philosophie, n° 47, Minuit, 1995, 9월, 10쪽. 이러한 구별은 이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까지 지속된다. 그리고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이 구별은 명제와 개념의 구별과, 그리고 과학과 철학의 구별과 연결된다(G. Deleuze, Qu'est-ce que la philosophie, Minuit, 1991, 이정임/윤정임 역,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대미학사, 1995, 38-39쪽, 52-53쪽, 162-163쪽, 170-171쪽 등 참조).
 사고란 사물의 상태가 시·공간적으로 유효화(effectuation)한 것이며, 사실(fait)에 관한 범주다. 반면 사건이란 어떤 사물의 상태나 사실을 다른 상태나 사실에 연관짓는, 그런 한에서 ‘관념적’ 성격이 개입된 범주다. 사고로서 다루는 경우, ‘주디가 추락하여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된다. 반면 주디가 죽은 곳은 그러한 추락사가 이전에 동일하게 발생한 곳이었다는 것, 그 때 죽은 것도 같은 얼굴과 같은 복장을 한 여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옆에는 전직 경찰관이 있었다는 것이 표면에 떠오르는 순간 그것은 사건이 된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어떤 사실을 ‘사건’으로서 포착하려는 질문.LS, 79쪽; G. Deleuze/ F. Guattari, Mille Plateaux, Minuit, 1980, 235쪽(이하 MP로 약칭). “그는 교통사고로 죽었어”라는 말에 대해 우리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라고 묻지 않는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데?”라고 물을 뿐이다. “내 다리가 부러졌어”는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며, “돈을 잃어버렸어”라는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 자체로 사고일 뿐이다. 그런데 그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체제에 저항하던 유명한 가수고, 그와 충돌한 버스에는 승객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을 주목하는 순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라는 질문은 유효해지고, 교통사고는 ‘사건’이 된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에서 안토니오는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그것은 단지 사고일 뿐이다. 그러나 그 자전거가 취업을 위해 이불을 팔아 찾은 것이고, 시기가 실업이 매우 심한 시기라는 점을 주목한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리고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나타날 수 있다. 취직한 직후에 자전거를 잃어버린 안토니오, 이제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 질문이 <자전거 도둑>이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이는 방향은 반대지만, 마찬가지로 사건을 예기하게 하는 질문이다. 
여기서 전자는 과거와 결부된 질문이고, 후자는 미래와 결부된 질문인데, 이것의 사건의 시간성이 갖는 양방성과 연관된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전자는 소설(novella)을 성립시키는 질문이며, 후자는 콩트(conte)를 성립시키는 주된 질문 형식이라고 말한다. 장편소설(roman)은 양자 모두와 연관되어 있다(MP, 236쪽). “콩트가 [진행될] 첫 번째 이갸기(conte)인 반면, 소설(nouvelle)은 최근의 뉴스(nouvelle)다.”(MP, 236쪽)

그렇다면 사고와 구별되는 사건은 어떻게 개념화할수 있는 것인가? 사건의 의미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인가? 여러 가지 사건들이 갖는 특징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사건을 이처럼 철학적으로 개념화함으로써 무엇을 새로이 볼 수 있으며, 사고와 사건의 차이를 뚜렷하게 구별함으로써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2.사건과 계열화

사건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계열’(serie)을 통해서 정의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실이나 사고는 ‘계열화’(mis en serie)됨으로써 사건이 되고, 상이한 ‘계열화‘를 통해 하나의 동일한 사실이나 사고가 상이한 사건이 될 수 있다. 
<현기증>에서 모든 이야기는 수도원의 종루에서 떨어져 죽는 매들린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그런데 매들린이 종루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하나의 동일한 사실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를 갖는 사건이 된다. 첫째, 아이를 빼앗기고 버림받아 미쳐서 자살한 증조모 칼로타의 귀신에 사로잡혀 매들린이 종루에서 투신 자살한 것이다. 둘째, 처가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하여 엘스터가 그 유일한 혈족인 아내를 죽여서 종루에서 던져버린 것이다.
이는 여인의 추락과 죽음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사실 내지 사고가 비극적 자살과 치졸한 살인이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 두 개의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서 사고와 사건, 사실과 사건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이 차이는 단순히 그 사실에 부여하는 주관적 의미의 차이도 아니다. 여기서 각 사건의 의미는 전혀 다른 특성을 갖는 두 가지 사실들의 계열화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첫째, 칼로타와 매들린, 그리고 퍼거슨. 둘째, 엘스터와 매들린, 그리고 퍼거슨. 
여기서 두 계열은 서로 동형적인 것처럼 보인다. 죽게 한 자와 죽은 자, 그리고 그것에 관여했지만 죽음을 막지 못한 자.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항들 간의 관계는 매우 다르다.라캉은 포의 소설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글에서 발견되는 두 계열의 동형성을 주목하며, 그것을 반복강박(Wiederholungszwang)이라는 프로이트적 개념을 통해 상징계(le Symbole)라는 질서 내지 ‘구조‘와 연관시킨다(J. Lacan,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 권택영 편, ?자크 라캉의 욕망 이론?, 문예출판사, 1994). 그러나 그 계열화된 항들 간의 관계가 갖는 차이에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다. 반면 들뢰즈는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라캉의 논문에서 언급되는 그 반복적 계열에 대해서 양자가 결코 동일하지 않으며, 상이한 계열임을 강조한다(LS, 52쪽). 이는 계열이란 개념을 통해 사건을 포착하려는 들뢰즈의 입장이 구조주의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것은 구조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고유한 평가와 연관되어 있다(이에 대해서는 Logique du sens, 52쪽, 65-66쪽; “A quoi reconnait-on le structuralisme?", F. Chatelet (ed.), Histoire de la philosophie, tom.VIII, Hachette, 1973 참조).
 퍼거슨은 첫째 계열에선 매들린과 직접 접속되는 반면, 둘째 계열에선 매들린과 접속되지 않는다. 또 첫째 계열에서 퍼거슨과 매들린의 관계는 죽음으로 접속되는 칼로타와 매들린의 관계에 대립적이지만, 둘째 계열에서 퍼거슨과 엘스터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죽음으로 접속되는 엘스터와 매들린의 관계에 이용당하는 만큼 죽음의 벡터에 순행적(順行的)이다.
하지만 퍼거슨의 이러한 위상적 가치의 차이 외에 좀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첫째 계열에서 주디는 자신의 이름을 갖지 않는다. 주디는 없다. 그는 다만 빈 자리일 뿐이며 그 자리를 매들린의 기표가 차지하고 있다. 주디가 주디의 이름으로 나타난다면 계열은 전혀 다른 것으로 구성되고, 그 계열을 통해 형성되는 사건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는 영화의 종반에 가서 유사한 별도의 계열을 형성한다. 
 
①                     ② 
                             P
   K????????? M            E?????????M
            ?                       ?
            ?      P                ?
           ↓                      ↓
  죽음   죽음  
##P에서 M통과 상향 사선      ##P에서 죽음을 향한 하향 사선
 --죽음의 벡터와 안 만남     --죽음의 벡터와 두 번 만남


반면 둘째 계열에서는 주디가 매들린의 대행자로서, 그 기표로서 떠도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표와 분리되는 어떤 순간이 있으며,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죽어야 할 것은 주디가 아니라 매들린이기 때문이고, 주디가 이마저 대행해선 둘째 계열 자체가 아예 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퍼거슨에게 주디는 주디가 아니라 언제나 매들린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죽어야 할 것은 매들린이기 때문이고, 주디 뿐만 아니라 누구도 그것을 대행해선 안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현기증’이 이용된다. 고소공포증은 주디와 매들린의 분리를 봉합함으로써, 주디와 매들린 간의 이율배반적 관계를 성립시킨다. 따라서 둘째 계열은 다음과 같이 다시 그릴 수 있다. 
②‘ 
      P
    E????J?????M
              ?
              ?
             ↓
    죽음
##P에서 죽음을 향한 하향 사선
  --죽음의 벡터와 두 번 만남
이처럼 두 가지 상이한 계열화로 인해 하나의 동일한 사고 내지 사실은 두 개의 전혀 다른 사건이 된다.굳이 기호학적 대비를 하자면, 첫째 계열은 표면에 드러난 기표의 역할을 하는데 반해, 둘째 계열은 기의 역할을 한다(두 계열의 이러한 구별에 대해서는 LS, 51-52쪽 참조). 하지만 이러한 대비는 마치 후자가 전자의 감추어진 의미라는 것을 뜻하는 것같아서 적절하지 않다. 
 각각의 항들을 관계시키는 이러한 계열화를 통해 동일한 내지 유사한 항들조차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 사건을 구성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계열화를 통해 형성되는 사건의 의미는 그 안에 포함된 어떤 항이나 요소들의 개별적 의미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형성된다. 반대로 각각의 요소나 항이 갖는 의미는 그것이 갖는 어떤 지시체나 연관된 논리적 명제들, 혹은 주관적인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계열화를 통해 형성되는 사건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이는 어떤 항의 의미나 가치를 계열 안에서의 위상적(topographique) 가치를 통해 정의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것이 바로 구조주의에 본질적인 것이며, 또한 구조주의의 중요한 업적이라고 본다(LS, 88-89쪽; “A quoi reconnait-on le structuralisme," 304-307쪽).
 “계열 안에서 각각의 항은 오직 다른 항들과의 상대적 위치에 의해서만 의미를 갖는다.”(LS, 87쪽).
예컨대 남편이나 유령이나 모두 그 지시체의 의미와 무관하게 각각의 계열에서 매들린을 죽이는 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퍼거슨 역시 친구 아내의 위험을 막아야 한다는 합의된 의도와 무관하게 그녀를 죽이는 과정에 순행적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의미나 가치는 나중에 만들어진다. 즉 그것은 항상-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계열화의 결과로서 구성되는 것이다. 즉 “의미는 원칙이나 기원이 아니다. 그것은 생산물(produit)이다. 그것은 발견하거나 복원되거나 다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제들(machineries)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고상한 곳이나 심오한 곳에서 나타나는 게 아니라 표면효과(effet de surface)며, 그 고유한 차원인 표면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LS, 90쪽)
그런데 첫째 계열을 좀더 면밀히 자세히 본다면 이는 두 가지 상이한 계열이 결합된 것이며, 또 바로 이러한 결합이 그 계열의 의미를 특징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퍼거슨이 추적 끝에 알아낸 것처럼 돈많은 남자의 사랑을 받다가 결국은 버림을 받고 아이마저 빼앗겨 미쳐버린 칼로타, 결국은 사랑하는 아이를 이승에 남겨 두고 자살해버린 칼로타로 응축되는 ‘소계열’(sous-serie)이 있다(LS, 68쪽). 또한 칼로타의 귀신에 사로잡혀 결국은 사랑하는 남자를 버려두고 자살해버리는 매들린으로 응축되는 소계열이 있다. 
이 두 개의 소계열은 칼로타와 매들린의 겹침을 통해 수렴된다. 달리 말하면 이 두 가지 소계열의 수렴이 첫째 계열 전체를 특징짓는 것이다. 그리고 수렴되는 두 소계열은 서로 소통한다. 이러한 수렴과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그 계열 내에서는 결코 출현하지 않으며, 출현해서도 안되는 주디 때문이었다. 여기서 주디는 결코 주디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때론 칼로타가 오기도 하고, 때론 매들린이 오기도 하는 빈 자리요 ‘빈 칸’(case vide)이다. 이질적인 두 계열이 수렴하는 요소로서 빈 칸(LS, 66쪽). 반면 주디의 이름이 묻혀 있음에도 기표는 빈 자리를 흘러넘친다. 
빈 칸과 그 자리를 차지하는 과잉된 기표. 바로 이것이 두 계열이 절합하고, 소통하고, 공존하고, 분지(ramifier)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LS, 66쪽). 매들린과 칼로타는 번갈아 그 자리를 차지하며, 공존하며, 때로는 마치 꿈에서인양 소통하기도 한다. 퍼거슨은 그것이 결코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번갊의 간격은 짧아지고, 그 빈도는 잦아진다. 수렴된 소계열이 하나의 새로운 계열로 완성된다. 나뉘어 하나가 되는 여인. 
하지만 칼로타와 매들린은 결코 하나로 확정되지 않는다. 죽은 여인도 매들린인지 칼로타인지 확정하기 어렵다. 이처럼 두 계열의 결합이 이것인지 저것인지를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문제를 두고 이루어지는 경우에 대해서 들뢰즈는 ‘이접’(離接, disjoction) 내지 ‘이접적 종합’이라고 부른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혹은 “이것이든 저것이든.“ (soit...soit...)LS, 61, 62, 204쪽; Deleuze/Guattari, 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1, Minuit, 1972, 18쪽. 이 책은 이하에서는 AO라고 약칭한다.

앞서 자살과 살인으로 요약할 수 있는 두 개의 계열 역시 이런 의미에서 이접적이다. 즉 경찰이나 법정은 매들린이 자살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 가지 중 오직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칼로타와 매들린의 두 소계열의 ‘종합’에서는 양자가 서로 수렴하여 서로에 대해 포함적인(inclusive)인 반면, 자살이냐 살인이냐가 문제로 되는 두 계열은 서로 발산하며 각각의 계열은 서로에 대해 배제적/배타적(exclusive)이다. 포함적 이접과 배제적 이접.AO, 89쪽 이하. ?의미의 논리?에서 들뢰즈는 ‘사건의 소통’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두 사건의 양립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본다. 이는 두 계열이 어떤 특이성(singularite)의 주변으로 수렴하는지 아니면 발산하는지의 문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니체와 마찬가지로 이접적으로 결정되는 발산과 탈중심화조차 그 자체로서 긍정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이다(LS, 201-204). ?안티-오이디푸스?에서는 이 문제를 포함적 이접과 배제적 이접으로 구별하면서, 배제적 이접에 대해 비판한다. 
 퍼거슨를 앞에 두고 법정이 하는 일은 이접적 선택을 배제적인 형태로 확정하는 것이다. 
한편 이접과는 다른 종합의 양상이 있다. 접속적(connective) 종합과 통접적(conjonctive) 종합. 접속은 계열을 이루는 항들을 이항적으로 종합하는 것이다. 이 경우 종합은 “이것과 저것”("...et...")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칼로타의 영혼과 매들린의 육신, 퍼거슨의 입술과 매들린의 입술, 퍼거슨의 현기증과 매들린의 투신...... 이는 단일한 계열을 구성하는데 관여한다. 
통접적 종합은 계열들이 수렴하여 어떤 단일한 결과에 이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LS, 203쪽. 여기서 들뢰즈는 접속적 종합에 대해 si...alor...(...라면...다)라는 접속사를 대응시키고, 통접적 종합에는 et(와)를, 이접적 종합에는 ou bien(혹은)을 대응시키고 있다. 그러나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접속에 대해 et...et...를, 이접에 대해서는 soit...soit...(...이든...이든)를, 통접에 대해서는 c'est donc(그리하여 그것은...)를 대응시키고 있다(AO, 11, 18, 27쪽). 접속과 통접의 짝이 두 책에서 바뀌어 있는데, 뒤의 것이 적절하다고 보아 뒤의 것에 따른다.
 이러저러한 계열들이 있었고, 그리하여 그것은(c'est donc) 어떤 하나의 귀결점으로 응집된다. <모던 타임즈>에서 병원을 퇴원하던 찰리는 트럭에서 떨어진 경계(警戒)표시를 하는 빨간 깃발을 가져가라고 따라가며 흔든다. 트럭과 깃발과 찰리의 계열. 그런데 잠시 후 그 뒤에 데모를 하는 시위대가 골목을 돌아나와 접속된다. 시위대와 깃발, 그리고 찰리의 계열. 이 두 계열은 찰리의 깃발을 중심으로 수렴하여 하나의 계열을 이룬다. 그리고 곧바로 들이닥친 경찰은 찰리를 체포한다. “그는 공산주의자야!” 
여기서 두 계열은 붉은 깃발로 수렴되고, 그리하여 찰리는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다. 시위대-계열의 우위 아래 두 계열은 완전히 하나의 계열로 통합된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현기증>의 이접적인 종합과 달리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를 남기지 않는다. 두 소계열의 종합 그 자체가 갖는 효과가 직접 찰리가 들고 있는 깃발의 의미를 일의적으로 규정한다.여기서 채플린은 계열들의 종합에 우연을 이용함으로써, 단순한 사고(accident)조차 경찰들에게는 사건으로 계열화됨을 보여 준다. 이는 경찰이 다루는 모든 것은 사건이며, 그런 만큼 모든 일을 사건화하려고 함을 보여 준다. 그리고 어이없는 사건화를 통해서 경찰들이 사실들을 계열화하는 방식, 사건화하는 방식 자체를 드러낸다.



3.사건과 이중 인과성

사건의 개념과 연관된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는 존재와 생성, 좀더 엄밀히 말하면 ‘...임‘(etre)과etre는 영어의 be 동사, 독일어의 sein 동사에 해당하는데, 보통 존재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 말을 사물의 상태에 대응하는 어떤 것을 지칭하며, 따라서 복수(les etres)로도 사용된다. 이 말은 ‘존재자’(Seiende, etang)과 다르지만, 그렇다고 하이데거가 ‘존재자’와 대비하여 사용하는 ‘존재’(Sein)를 뜻하지도 않는다. 하이데거는 존재자 간의 구별인 ’존재적(ontogische) 구별’과 대비해 존재자와 존재 자체의 구별 ’존재론적(ontologische) 구별‘이라고 부르는데, 이 경우 ‘존재‘라는 말은 존재자로 하여금 존재하게 하는 근거지만, 어떤 존재자의 어떤 상태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됨‘과 구별하여 ’임‘이라고 번역하려는 것인데, 어감이 잘 만들어지는 곳에서는 원어를 병기하여 ’존재‘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됨‘(devenir)의영어의 becoming, 독일어의 Werden에 해당하며, 흔히 ‘생성’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그 뒤에 다른 명사나 형용사가 붙어서 ‘동물-되기’(devenir-animal), ‘광인-되기’(devenir-fou), ‘소수-되기’(devenir-mineur, 소수화), '지각불가능하게-되기‘(devenir-imperceptible)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됨을 염두에 둔다면, ‘...되다’라는 동사의 부정법(不定法, infinitif)대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특히 들뢰즈가 다루는 devenir란 개념은 그것을 순수한 차원에서 다룰 때조차도, 예컨대 헤겔이 ?논리학?에서 존재와 무의 통일로서 ‘생성‘(Werden)을 다루듯이 내용없는 형식적 개념으로 다루지는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더욱 그렇다.
 구별이다. ’임‘이 사물의 상태를 나타낸다면, ’됨’은 사물의 상태가 아니라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변화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나뭇잎이 ’붉다’는 것은 그것의 특정한 상태를 지칭하며, 나뭇잎이라는 사물이 갖고 있는 상태적 특성을 가리킨다. 반면 나뭇잎이 ‘붉게 된다’는 것은 이전의 어떤 다른 상태, 예컨대 ‘푸르다‘는 상태에서 ’붉다‘는 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붉게 된다‘는 말에 ’붉다‘라는 상태를 대응시킬 수 없다. 그렇다고 ’푸르다‘는 상태를 대응시킬 수도 없다. ’붉음‘(etre-rouge)와 ’붉게 됨‘(devenir-rouge)의 차이. ’크다’와 ‘커지다’의 차이.
들뢰즈는 루이스 캐롤(Lewis Carroll)이 다루는 가장 근본적인 범주는 이 ‘됨’이라고 한다. 이로써 캐롤은 존재체(les etres)와는 다른 사건의 비밀을 찾아내려고 했다는 것이다(LS, 19쪽). 들뢰즈 자신이 ‘순수한 됨‘이라고 부른 이 범주가 ?의미의 논리?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한다. 그는 사물의 상태에 대응하는 의미--예컨대 지시, 표명 등--가 아니라 ’됨‘으로서 사건에 대응하는 의미(sens)가 어떻게 가능하며, 또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연구하려는 것이다. 결국 사건이란, ‘됨’의 차원에서 의미의 논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밝히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이 경우 의미란 ‘임’이 아니라 ‘됨’의 차원에서 형성되는 것이란 점에서 존재외적인(extra-etre)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구별은 신체적인(corporel) 것과 비신체적인(incorporel) 것의 구분이다. 신체적인 것은 그에 고유한 긴장과 물리적 질, 관계 및 능동과 수동을 가지며, 그에 상응하는 특정한 사물의 상태를 갖는다(LS, 13쪽). 일반적으로 사물의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신체적인 요소의 혼합(melange)이다(LS, 15쪽). 예를 들어 나뭇잎이 붉다는 것은 특정한 색소들 간의 혼합 양상에 의해 결정된다. 키가 크다는 것이나 작다는 것은 뼈와 세포, 근육 등의 신체적 요소가 배열되어 만들어지는 특정한 혼합 상태를 지칭한다. 액체라는 상태 역시 어떤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분자적 상태의 특정한 양상을 가리킨다. 
반면 비신체적인 것은 하나의 신체적 상태와 다른 신체적 상태 간의 관계 내지 신체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효과를 뜻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이를 ‘표면 효과’(effet de surface)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나뭇잎이 ‘붉어진다’는 것은 어떤 색소의 혼합 상태에서 다른 혼합 상태로 바뀌는 것이다. 이는 신체적인 것의 변화를 뜻하지만 결코 신체적인 것은 아니며, 단지 신체적인 것의 표면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를 뜻할 뿐이다. 키가 ‘커지다’ 역시 마찬가지로, 신체적인 것과 관련되지만 신체적인 어떤 상태를 지시하지는 않는다. 물이 ‘끓는다‘는 것은, 액체나 기체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액체에서 기체로 되는 변화를 가리킨다. 말 그대로 물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변화, 혹은 효과.
다른 한편 신체적 변환과 비신체적 변환의 구분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신체적 변환이란 신체적 혼합 상태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고, 비신체적 변환이란 신체적 혼합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변환이다. 의사들은 신체적 상태에 대한 진단과 더불어 신체적 변환을 야기하는 활동을 하지만, 교사들은 주로 신체적 변환이 수반되지 않는 언표들만으로 활동한다. 설계도를 그리는 행위는 공간을 직접 신체적으로 변환시키지 않지만, 벽돌을 쌓는 행위는 공간을 직접 신체적으로 변환시킨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신체적 변환은 기계적 배치와 연관된 것이라면, 비신체적 변환은 언표행위의 배치와 연관된 것이다(MP, 102-105쪽).
그러나 이 양자는 많은 경우 서로 결합된다. 설계도를 그리는 행위는 벽돌을 쌓는 행위와 당연히 결합되며, 벽돌을 쌓는 행위는 수 많은 언표행위(enonciation)를 수반한다. “꼼짝 말고 모두 명령에 따르라”는 게릴라들의 언표행위는 직접적으로는 비신체적 변환이지만, 이 언표는 페루의 일본대사관을 대사관-기계에서 감옥-기계로 변환시킨다. 신체적 변환. 그리고 감옥-기계가 된 대사관은 그 안에서 행해지는 언표행위들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더불어 말하자면, 신체적 변환을 수반하지 않는 비신체적 변환은, 연극의 대사가 아니면 헛소리가 된다. 대사관-기계를 감옥-기계로 변환시킬 신체적 조건이나 능력--예를들면 무기--을 갖추지 못한 사람의 명령이 그렇다.
사건은 어떤 신체적 상태에 대한 지시(designation)가 아니라, 어떤 신체적 상태가 다른 신체적 상태와 계열화됨으로써 만들어진다. 죽은 여인만으로는 어떠한 사건도 구성되지 않는다. 죽은 여인과 이전에 불행하게 죽었던 또 다른 여인, 죽은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 아니면 죽은 여인과 그 남편, 남편의 친구이자 죽은 여인의 애인. 이처럼 둘 이상의 사물의 상태들이 접속됨으로써만, 한 여인의 죽음은 사건이 된다.
여기서 언급된 요소 중 어떤 것도 깊숙한 심층(le profond)의 실체도, 고상한 천상(le haut)의 이데아도 아니다. 그저 그것들 가운데 몇몇 것들이 연결되고 계열화됨으로써 사건은 구성되며, 그것이 다양하게 계열화될 수 있는 만큼 사건 역시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연결 내지 계열화가 심층의 실체나 천상의 이데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모든 여타의 요인들과 언제나 접속되어야 하는 특권적 요인은 없다.모든 다른 항들과 언제나 접속되는 어떤 특권적 항--보통 ‘일자’(l‘Un)라고 부르는 것--을 가정하는 것은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에 고유한 독단론적 특징이다. 사건과 본질의 혼동. 따라서 사건의 의미를 사건의 본질로 혼동하는 위험에 대해 분명한 경계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LS, 69). 들뢰즈/가타리가 ‘리좀‘에 대해 언급하면서, 모든 잔뿌리가 모이는 중심뿌리를 제거하려는 것, 그리하여 일자가 제거된 다양체를  이라고 표시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MP, 13쪽).
 동일한 표면에서 등가화된 요인들 간의 특정한 연결과 접속만이 있을 뿐이며, 그 속에서 각 요소들 간의 위상적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계열화란 표면에서 만들어지는 바로 이러한 위상적 관계의 양상을 지칭한다.
그러나 사건이 단지 비신체것인 만은 아니다. 그것은 비신체적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사물의 신체적인 상태와 결부되어 있다. 사건은 신체적인 것과 비신체적인 것의 경계, 사물의 상태와 그 상태의 변화의 경계에 위치한다. 예를 들어 수도원에서 일어난 사건은 단지 어떤 여인의 죽음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여인의 죽음이라는 신체적 상태가 없었다면 사건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경우 매들린이란 여인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목뼈가 부러져 죽었다”는 사실을 원인으로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칼로타의 귀신에 홀려 죽었다“ 내지 ”남편이 던져서 죽었다“는 것을 또 다른 원인으로 한다. 찰리가 공산주의가가 된 것은 한편으로는 깃발을 흔드는 그에게 시위대가 와서 접속되었다는 또 다른 사건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들고 있던 것이 붉은 깃발이었다는 신체적 상태 때문이기도 하다. 
들뢰즈에 따르면, 사건을 결정하는 두 가지 요인 중 하나가 신체적 ‘원인’(cause)이라면, 다른 하나는 사건적인 ‘준원인’(quasi-cause)이다(LS, 115쪽). 그리고 이런 점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데는 신체적 혼합과 다른 사건이라는 이중의 원인이 개제하는 셈이고, 따라서 이를 ‘이중 인과성’(double causalite)이라고 부를 수 있다(LS, 115쪽). 
그런데 그는 이러한 이중 인과성의 개념을 표면 효과와 연관짓고 있다. 즉 물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한편으로는 물 분자의 운동을 결정하는 법칙에 따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물의 표면에서 나타나는 표면장력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LS, 115쪽). 우리는 이를 다른 경우에 대해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다. 상품의 교환, 아니 상품의 매매가 그것이다. 아담 스미스에 의하면, 상품의 매매를 규정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기회비용으로 간주되는, 그 상품에 투여된 노동시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상품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비율이다.A. Smith,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1776, 김수행 역, ?국부론?, (상), 비봉출판사, 36, 43쪽과 63-64쪽.
 즉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노동시간으로 표시되는 상품의 가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요·공급의 균형점이다. 전자가 그 상품의 신체적 상태를 뜻한다면, 후자는 표면효과에 관련된 것이며, 전자가 신체적 원인이라면 후자는 비신체적인 준원인이다. 
들뢰즈는 실체(subsistance)를 이러한 이중 인과성에서 신체적 원인과 결부시킨다. 실체가 밑에-존속한다(sub-sister)는 것은 단지 이런 뜻에서만이다. 즉 그것은 신체적 차원에서 사건의 의미를 규정하는 신체적 원인이란 것이다(LS, 16-17쪽). 결국 들뢰즈는 원인 내지 실체의 자리에 신체적인 것을 놓고,이처럼 들뢰즈는 비신체적인 것, 사건적인 것을 다룰 때에도 신체적인 것의 위상을 원인, 내지 (비록 역설적인 방식으로지만) 실체의 위치에 둔다는 점에서 관념론과의 구분선을 분명히 한다. 
 의미나 이데아를 결과의 자리에 두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플라톤적 사유를 전복한다. 
다른 한편 그것은 사건적 의미를 결정하는 준원인을 표면에 존재하는 등가화된 요인들에 넘겨줌으로써, 그리하여 모든 것에 관여하는 특권적인 항을 제거함으로써 또 다시 플라톤적 사유를 전복한다.이러한 플라톤적 사유의 전복은 그의 작업 전체에 걸쳐 좀더 넓은 영역에서 좀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행해지는데, 이에 대해서는 ?의미의 논리?의 첫 번째 계열과 부록 ?플라톤과 시뮬라크르?("Platon et le simulacre") 및 ?루크레티우스와 시뮬라크르?("Lucrece et le simulacre"), 그리고 이 책과 ?차이와 반복?(Diff erence et repetition)의 서평으로 씌여진 푸코의 글 ?철학적 극장?(Theatrim Philosophicum)을 참조(들뢰즈 외, 권영숙/조형근 역, ?들뢰즈의 푸코?, 새길, 1996).
 사건의 의미를 결정하는 직접적인 요인은 신이나 본질, 이데아 등과 같은 어떤 초월적인 항으로서 외재하는 것이 아니라, 등가적인 항들의 위상적인 관계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즉 “의미는 계열 안에서 주장한다(insiste)."이는 ‘주장하다’라는 뜻도, ‘내부에-있다’(in-sister)라는 뜻도 포함하여 중의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또 이는 앞서 subsister와 댓구로 사용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의미는 두 가지 측면을 갖는데, 그 중 하나는 방금 말한 insisance의 측면이라면, 다른 하나는 ‘됨’의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것으로서 ‘사물의 상태’--신체적인 것, subsister와 관련되어 있다--이후에 온다(survenir)는 점에서 extra-etre의 측면이다. 반면 무의미(non-sens) 역시 두 측면을 갖는데, 하나는 ‘빈 칸‘(빈 자리)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남아 도는 대상‘(과잉인 기표)의 측면이다. 그리고 들뢰즈는 이러한 의미와 무의미의 양 측면 각각이 기표로서 규정된 계열과 기의로서 규정된 계열과 연관된다고 한다(LS, 99쪽).
 이런 점에서 사건 개념을 통해 들뢰즈는 형이상학과 플라톤에 의해 눈에 안보이는 곳--심층이든 천상이든--에 파묻혀버린 것을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셈이다(LS, 17쪽). 
이중 인과성의 개념은 신체적인 것과 비신체적인 것의 경계선에서 사건의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의미란 이 두 가지 측면의 접경지대에서, 두 가지 측면을 잇는 계열화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가지 측면의 접경지대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의 연속체를 이룬다는 것을, 그리하여 의미의 형성에서 이 두 가지 측면의 연속성이 심층이나 천상을 대체해 버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LS, 21쪽). 이제 “주요한 경계선은 보편과 특수 사이의 천국을 통과하지 않으며, 실체와 사고/우연 사이의 심연을 통과하지도 않는다.”(LS, 158쪽) 이런 맥락에서 그는 발레리의 다음과 같은 말을 누차 인용한다: “가장 깊은 곳은 피부다.”(le profond, c'est la peau)(LS, 20, 126, 166쪽)


4.사건과 의미

매들린의 죽음, 그것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혹은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미를 지시(designation)로 정의하고, 유의미함(meaningfulness)을 검증가능성 내지 반증가능성으로 정의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실증주의적 입장에 따르면, 그것은 말 그대로 매들린이 죽었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지시한다. 그것은 의학적인 수단을 이용해 분명하게 검증될 수 있다. 따라서 “매들린은 죽었다“라는 명제는 유의미하다. 그러나 ”매들린이 칼로타의 귀신에 사로 잡혀 죽었다“는 것은 검증할 수 없기에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귀신의 존재를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고, 검증될 수 없는 것이 사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매들린의 정신 내지 심리적인 질병이 사인으로 동원된다. 이전의 ‘이상한’ 행위들은 이러한 정신적 질병 때문인 것으로 간주된다. ”매들린은 자살했다”는 명제는 이런 식으로 간접적으로만 인정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 여인이 죽은 후 법정에서 그 죽음의 의미를 다룬 방식이었다.--그러나 매들린의 죽음이 자살이란 것을 정말 검증 내지 반증할 수 있을까?
좀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아무리 검증가능하다 해도 “매들린이 죽었다“는 명제는 어떤 사실을, 특정한 사물의 상태를 지시하기만 할 뿐이다. 앞서 보았듯이 이러한 사실 자체는 단지 의학적인 관심사는 될 지언정, 영화 전체에서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왜 죽었고, 어떻게 죽었는가, 그리고 그 죽음으로 인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기 때문이다.실증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죽음을 야기한 변수를 추가함으로써 죽음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고 보겠지만, 그것이 적절하게 연결되는 경우에도, 그 연결이 어떤 인과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검증될 수 없다. 다만 흄(D. Hume)이 말했듯이 근접성, 시간적 선행성 내지 계기성만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D. Hume, Treatise of Human Nature, I. Berlin (ed.), The Age of Enlightenment: The 18th Century Philosophers, 1956, 정병훈 역, ?계몽시대의 철학?, 서광사, 1992, 238쪽).
 
더불어 이것은 ”매들린이 죽었다” 내지 “매들린이 자살했다”는 명제의 진위에 관한 문제도 아니다. 이 말은 단지 진위를 가릴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차라리 진위를 뛰어 넘어서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칼로타에 의한 매들린의 자살은, 결국은 진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지만, 그와 무관하게 유의미한 계열을 형성한다. 이로 인해 퍼거슨은 그것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이 점을 이 영화에서 히치코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영화 전체를 그 은폐된 진실을 추적하는 식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주디의 회상을 빌어 답을 미리 알려 준다. 그리고 후반부의 얘기를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사태의 진실이 아니라, 그 진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진실은 은폐했지만, 이를 위해 떠날 수도 있었지만, 주디가 퍼거슨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그리고 퍼거슨의 부탁에 못 이겨 다시 한 번 메들린이 되었던 것은, 진위와는 다른 차원의 어떤 의미를 그와 같은 계열화를 통해 형성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 준다면 정말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나요?” 반면 진실을 찾아내려는 퍼거슨의 욕망--진리의지--은 결국 자기를 사랑했고, 사실은 자기가 사랑했던 여인을 또 다시 죽음으로 떨어뜨린다. 진리의지는 언제나 이처럼 진위의 가치로 다른 많은 의미와 가치들을 제거하고 억압한다.
그렇다면 의미는 주디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어떤 주관적인 욕망이나 믿음의 표명(manifestation)일까? 후설(E. Husserl)은, 주체가 기호를 통해 말하기 이전에 직관을 통해 파악한 대상의 의미(Sinn)를, 말 내지 언표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획득된 의미(Bedeutung)와 구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다. 굳이 말하자면 후자가 ‘기호학적 의미’라면, 전자는 ‘현상학적 의미’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후설은 주체의 직관을 표명하는 것으로서 현상학적 의미가 우위성을 갖는다고 본다.이에 대해서는 J. Derrida, La voix et le phenomene, PUF, 1967, tr. by D. Allison, Speech and Phenomena and Other Essays on Husserl's Theory of Signs,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73 참조. 그런데 데리다는 여기서 의미(Sinn)의 표명에서 기호를 통해야 하며, 기호로 언표된 것이 차라리 주관을 넘어 현실적 우위성을 갖게 되는 역설을 지적한다.

그러나 주디--매들린이 아니라--와 퍼거슨이 만들어낸 계열은 그러한 주디의 욕망이나 의향과 결코 동일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여기서는 오히려 앞서의 계열과 유사한 형태의 계열이 만들어진다. 퍼거슨--주디--매들린의 계열. 죽이는 자와 죽는 자, 그리고 죽음의 촉매자. 사랑의 계열이 아니라 또 다른 죽음의 계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는 또한 퍼거슨의 의향과도 동일하지 않다. 생각지 않았던 죽음의 계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끄러지는 것은 기표만이 아니다. 의미 역시 이처럼 언제나 의도와 의향을 빗겨간다.
③      M
 P???????????J
            ?
                ? 
               ↓
              죽음

## M에서 죽음을 향한 하향 사선
  --죽음의 벡터와 두 번 만남
이제 우리는 <현기증>에서 만들어진 세 가지 죽음의 계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계열 ①에서는 불행하게 죽은 카로타의 영혼이 개입함으로써 죽음의 벡터 자체가 낭만적이며, 그에 반하여 저항하는 퍼거슨의 벡터 또한 사랑의 벡터라는 점에서 모두 낭만적이다. 죽음의 낭만적 계열. 반면 계열 ②에서는 매들린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처가의 재산에 대한 남편의 욕심이며, 사립탐정으로 개입하는 퍼거슨이나 안보이지만 존재해야 하는 주디나 모두 돈에 의해 고용되었다는 점에서 죽음의 벡터나 그것을 보조하는 벡터나 모두 자본주의적이다. 죽음의 자본주의적 계열. 마지막으로 계열 ③은 주디를 죽음으로 직접적으로 내몰았던 것은 진실을 드러내려는 의지와 욕망이다. 물론 거기에는 죽은 매들린에 대한 사랑이 개제하며, 바로 그 점이 죽은 매들린으로 하여금 퍼거슨이 만드는 죽음의 벡터 속으로 끌어들이지만, 결국은 진실을 드러내려는 의지가 그것을 대체하며, 사랑의 벡터를 만들려던 주디의 의지를 무시하고 제거함으로써 죽음의 벡터로 전환시킨다. 죽음의 이성적 계열. 그리고 죽음의 이성적 계열과 자본주의적 계열의 강력한 동형성. 이것이 두 번의 죽음, 두 여인의 죽음으로 짜여지는 <현기증> 전체의 가장 중요한 테마 라인을 형성한다. 
마지막으로 기호학이나 언어학과 같이,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통해 의미를 정의하려는 입장이 있다. 즉 어떤 말이나 기호의 의미는 다른 말이나 기호에 의해, 그 기호들의 관계망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호의 의미는 그것을 조건짓는 다른 기호로 환원된다. 그러나 조건짓는 기호 역시 또 다시 조건지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기호를 필요로 하며, 이는 무한히 소급된다. 조건지어진 기호와 그것을 조건짓는 기호의 악순환(LS, 30쪽). 이 악순한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의미(sens)란 차라리 이처럼 다른 기호에 의해 조건지어지지 않은 어떤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만) “의미 그 자체는 신체에 의해 생산된다.”(LS, 149쪽) 
매들린의 죽음을 둘러싸고 생산되는 무수한 언표(言表, enonce)들이 있다. 칼로타에 관한 전설같은 이야기, 아내에 관한 엘스터의 이야기, 퍼거슨의 이야기, 그리고 매들린 자신의 이야기. 혹은 법정에서 검찰 측의 이야기, 배심원들의 판단, 매들린의 심리 상태에 대한 분석, 퍼거슨의 고소공포증에 대한 진술, 그리고 법원의 판결 등등. 그 언표들은 서로 다른 언표들을 참조하고 언급하며, 각각에 고유한 주장(insistance)을 편다. 예를 들면 퍼거슨의 이야기는 엘스터의 이야기와, 여관주인의 이야기, 칼로타 그림에 대한 설명, 책방 주인의 이야기에 의해 조건지어져 있다. 법정에서의 이야기는 대부분 퍼거슨과 엘스터의 진술에 조건지어져 있다. 달리 말해 앞서의 계열 ①은 이러한 이야기로 구성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를 조건짓지만, 스스로는 조건지어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엘스터의 이야기가 그렇다. 결국 드러나는 것으로 볼 때 그는 퍼거슨에게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이는 아내의 재산과 아내의 생명이라는 신체적 요인과 결부되어 있다. 퍼거슨의 이야기도 그렇다. 그것은 엘스터 등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조건지어져 있지만, 자신이 관찰한 매들린의 행동--아무런 언표를 수반하지 않는 행동--에 의해 동시에 조건지어져 있다. 이런 점에서 계열 ①조차 언표적이지 않은 요소들을 포함하며, 그것에 의해 조건지어져 있다.
나아가 매들린의 죽음에 관한 모든 언표는 매들린의 죽음에, 좀더 신체적인 지점을 말하면 매들린의 시신에 의해 조건지어져 있다. 엘스터는 매들린의 죽음에 대해 조건짓는 이야기--증언들--를 만들어내기 위해 퍼거슨을 고용했지만, 이는 매들린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퍼거슨이 특별히 고용되었던 것은 그의 신체가 높은 곳에 오를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의미란 “명제로 표현된 사물의 속성”(LS, 34쪽)이라는 말은 충분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의미는 명제로 표현되지만 그것으로 표현되는 것은 사물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는 명제와 사물에 동시에 접하고 있으며 양자의 경계에 있다(LS, 34쪽). 이중 인과성은 이러한 접경지대에 고유한 인과성의 개념이며, 사건과 의미는 이 접경지대에 있는 하나의 동일한 것이 갖는 두 개의 이름이다. 의미란 결국 효과(effet)다. 원인에 대한 결과란 뜻에서가 아니라, 접경지대를 이루는 두 측면에 걸쳐, 이중의 인과적 계열화에 의해 생산되는 효과인 것이다(LS, 89쪽).


5.양식, 공통 감각 및 역설

양식(良識, bon sens)은 의미를 생산하는 이러한 계열화에 특정한 하나의 방향성(sens, direction)을sens는 ‘의미,’ ‘방향,’ ‘감각’을 동시에 뜻한다. 여기서 bon sens는 ‘좋은 의미’를 뜻하며, 이 좋은 의미는 ‘좋은 방향’을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 ‘양식’(bon sens, good sense)이란 이처럼 좋은 방향을 선택해 좋은 의미를 갖도록 사실들을 반복적으로 계열화하는 것을 뜻한다. 
 부여한다. 즉 계열화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 가운데 어느 하나를 ‘좋은 방향’으로서 선택하고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현재와의 연관 속에서 설정되지만, 언제나 미리 봄(예견)의 기능을 수행한다. <현기증>에서 엘스터는 이런 ‘양식‘을 형성하기 위해, 사건을 미리 계열화하며, 종종 향후 바람직한 계열화의 방향을 시사해준다. 아내의 이상한 행동, 죽은 사람의 귀신, 그리고 그것에 의해 아내에게 닥쳐올 위험 등. 이것은 이후 퍼거슨이 사건을 계열화하는데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계열화의 가능성에 하나의 일정한 방향을 부여한다. 그리고 매들린이 강에 투신한 사실을 보고받고는 다시 말한다. “매들린은 지금 26세인데, 칼로타가 바로 26세에 죽었지.” 이로써 향후 발생한 매들린의 죽음을 계열화할 방향성을 제공한다. 계열 ①의 의미는 이처럼 엘스터가 반복적으로 부여한 ’양식‘ 안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그것은 법정에서 매들린의 죽음을 ’양식‘에 따라 판단하게 하는 증언으로 이용된다.
깃발을 흔들던 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흔들던 깃발의 의미는 애초에는 경계(警戒)표시였지만, 시위대가 출현함으로써 두 가지 계열화의 가능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경찰은 그것의 의미를 오직 한 가지 방향에 따라서, ‘사회의 안정’과 자신의 직업에 요구되는 양식에 따라서 판단한다. 양식은 단일한 방향/의미의 원리를 일반적으로 결정해 그 방향을 선택하도록 강제한다(LS, 94쪽). 찰리는 이제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다. 
들뢰즈는 양식이 체계적인 특징을 갖는다고 하면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단일한 방향(direction)의 시인(是認); 이러한 방향은 좀더 분화된 것에서 덜 분화된 것으로 진행하면서 결정된다; 특이적인 것(le singulier)에서 규칙적인 것으로, 표나는 것에서 평범한 것으로; 과거에서 미래로 시간의 정향(定向); 이 정향 속에서 현재의 지휘적 역할; 이런 식으로 가능한 예측(previosion)의 기능; 이상의 모든 특징이 재결합하는 정착적 분배의 유형”(LS, 94쪽) 요컨대 양식은 특이한 상황을 평범하고 규칙적인 것으로 바꾸며, 유목적이고 다양한 계열화의 가능성을 정착적(sedentaire)이고 규범적인 것으로 단일화한다. 정신병에 의한 자살, 불순한 의도에 의한 시위 지도. 그리고 이러한 양식이 발생하게 되는 원천은 “증기 기관, 인클로저 목축 뿐만 아니라 소유와 계급”이라고 한다(LS, 94쪽).그러나 양식은 언제나 이차적이다. 그것이 작동시키는 정착적 분배가 언제나 자유로운 유목적 분배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마치 닫힌 문제가 자유로운 공간을 우선 전제하듯이 말이다(LS, 94쪽). 마찬가지로 권력은 언제나 이차적이다. 그것은 길들이고 고착시켜야 할 무엇을, 자유로운 욕망의 흐름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양식이 이차적이라는 명제는 이후 가타리와의 공동 작업에서 권력과 욕망에 대한, 권력의 배치와 욕망의 배치에 대한 그들의 기본 입장과 연속성을 보여 준다(MP, 175-176쪽의 주 36); G. Deleuze, "Desir et plaisir," Magagine litteraire, 1994년 10월).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진경, ?미시정치학의 아포리아?, <서강대학원 신문>, 1995년 5월 17일 참조.

한편 공통 감각/공통 의미(sens commun)sens commun은 흔히 ‘상식’(common sense)으로 번역되지만, 일차적으로는 유기체 전체가 단일한 통일성을 갖게 하는 ‘공통 감각’을 뜻한다. 그것은 각각의 기관들이 ‘공통의 방향’을 취하는 것이고, 이럼으로써 통일된 ‘공통의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다. 공통 감각이라는 말은 원래 칸트가 사용한 것으로, 이성의 분열된 능력들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어떤 능력을 뜻한다. 들뢰즈는 이를 자기 식으로 변용시킨 것이다(G. Deleuze, La phlosophie critique de Kant, PUF, 1963, 서동욱 역, ?칸트의 비판 철학?, 민음사, 1996, 44-50쪽).
에서 ‘sens’는 더 이상 한 ‘방향’이 아니라 ‘기관‘(un organe)을 뜻한다(LS, 95쪽). 감각 기관. 그것이 ‘공통’인 것은 그것이 어떤 다양성을 동일자(le Meme)의 형식에 연관짓는 기관이요, 기능이며, 동일화 능력(faculte)이기 때문이다(LS, 96쪽). “주관적으로 공통 감각은 정신의 다양한 능력이나 신체의 분화된 기관들을 포섭하며, 나(Moi)라고 불릴 수 있는 통일성/단위(unite)에 연관시킨다.”(LS, 96쪽) 따라서 ‘감지하고 상상하고 기억하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나’라는 감각이 만들어진다. “객관적으로 공통 감각은 주어진 것들의 다양성을 포섭하여, 그것을 대상의 특정 형태 내지 세계의 개별화된 형태의 통일성/단위에 연관시킨다. 내가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대상이다.”(LS, 96쪽) 주체나 대상의 동일성(identite)은 이런 공통 감각의 결과물이다.
칼로타의 영혼에 사로 잡힌 매들린이 퍼거슨에게 당혹스런 것은 그녀의 동일성이 분열되어 있으며, 단일한 공통 감각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칼로타-매들린이 칼로타의 영혼에서 벗어나 단일한 매들린이 되기를 촉구한다. 양의성과 단일한 의미/방향으로서 공통 감각의 대립. 또 퍼거슨이 주디를 만났을 때, 그녀의 얼굴에서 매들린의 그림자를 본다. 그녀는 주디지만 동시에 매들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주디-매들린의 양의성. 그러나 그가 여기서 선택한 것은 또 다시 매들린으로 방향을 단일화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 앞에 있는 여자가 매들린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대상이기를 원하며, 이를 위해 매들린이 입던 것과 똑같은 옷을 사 입히고, 매들린과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하게 하며, 매들린이 거쳐간 경로를 밟게 한다. 또 다시 양의성과 공통 감각의 대립. 반면 주디는 자신이 매들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거부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혹은 그의 사랑을 자신의 이름으로 획득하기 위하여 매들린의 모습이 되어 가는 것을 거리끼며 받아들인다. 그녀는 퍼거슨과의 새로운 관계를 위해, 아니 관계의 새로운 의미를 위해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다.
의미가 갖는 다양한 가능성을 하나로 정향하는 양식과 공통 감각은 상호보완적인 두 힘이다. “양식은, 다양한 것들을...주체의 동일성이란 형태에, 대상과 세계의 지속성이란 형태에 연관시킬 수 있는 심급을 통해서만, 어떤 시작과 끝, 방향을 부여할 수 있으며 다양성의 [특정한] 분배를 결정할 수 있다. 반대로 공통 감각 안에 있는 이러한 동일성의 형태는, 여기서 시작해 저기서 끝나는...이러저러한 다양성을 통해 [그 동일성의 형태를] 결정할 수 있는 심급이 없다면 공허할 것이다...이러한 상호 보완성 속에서 나, 세계, 신의 동맹이 맺어진다.”(LS, 96쪽)
반면 찰리의 깃발과 시위대는 어떤 사태가 가질 수 있는 의미 계열의 양방성을 보여 준다. 채플린은, ‘양식'이 지시하는 하나의 방향에 따라 찰리의 깃발을 공산주의자의 적기로 만드는 과정을 웃음거리로 만듦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양식에 따라 고착되는 의미의 일방성을 비웃는다. <모던 타임즈>의 다른 곳에서 찰리는 양식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부랑하던 소녀와 그 손에 들린 빵. 날카롭게 생긴 부인은 이를 도둑질이란 의미로 계열화한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한다. 이는 말 그대로 양식에 따른 행동이다. 그러나 찰리는 이를 배고픔이란 의미로 계열화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도둑임을 자처하며 나선다. 하지만 양식있는 사람들의 무리는 소녀를 체포하게 한다. 그러자 배를 가득 채우는 무전취식과 자진신고로 도둑질에 관한 양식을 비웃는다. 자신의 ’배부른’ 도둑질을 배고픈 도둑질과 대비시킴으로써 도둑질 자체에 두 가지 상반되는 의미/방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양식의 파괴.공통 감각에 관해서도 찰리의 경우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그는 노동자에서 정신병자로, 공산주의자로, 죄수로, 경비원으로, 웨이터, ‘가수’로 끊임없이 바뀌며 흘러간다. 그런데 그 어느 것에서도 공통성을 찾기 힘들다. 말썽꾸러기 노동자와 탈옥을 막은 모범수, 얼치기 공산주의자, 강도와 술먹고 함께 퍼진 경비원, 재능있는 ‘가수’ 등등. 더구나 그러한 인물이 되는 것은 한결같이 우연이다. 그가 탈옥을 막은 것은 어떤 규범적 양식 때문이 아니며,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그런 사상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고, ‘가수’로 성공하게 되는 것도 노래를 잘 해서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찰리는 주체로서의 어떤 동일성도 갖지 않으며, 그것을 형성하는 공통감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의 길게 뻗은 길은 아마도 그를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분열적 ‘여행’을 향해 열려진 무한의 변이 가능성일 것이다. 공통 감각적 주체와 대비되는 분열적 주체로서 찰리에 대해서는 이진경, ?모던 타임즈: 자본주의와 유쾌한 분열자?,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관한 7 편의 영화?, 새길, 1995 참조.

다른 한편 칼로타와 매들린이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죽음의 낭만적 계열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여인이 칼로타도 매들린도 아니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주디는 칼로타도, 매들린도 아니었기에 그 둘 다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 여인이 주디였던 것도 아니다. 그 여인은 이름을, 어떤 정해진 의미를 갖지 않는다. 무의미(non-sens). 또한 그 여인은 어떠한 동일성도, 따라서 어떠한 공통 감각도 갖지 않는다. 무감각(non-sens). 하지만 바로 이 무의미/무감각이야말로 그 자리에 매들린이나 칼로타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의미는 무의미를 통해 가능해지고, 공통 감각들은 무감각 위에서 가능해진다. 무의미/무감각으로서 역설, 혹은 공통 감각의 파괴로서 역설.
역설(paradoxe)은 의미를 하나의 방향으로 고착시키는 양식, 공통감각의 억견(doxa)에 대립한다.LS, 96쪽. paradoxe는 ‘...의 옆에, 위에, 저편에’를 뜻하는 para와 억견의 doxa가 합쳐서 만들어진 말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양식의 반대, 양식에 대한 비판은 단지 양식과 다른 방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의미의 양방성을 통해 어떤 사태가 가질 수 있는 의미의 다양한 가능성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통 감각에 대한 비판이 단지 공통 감각의 부정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상이한 종류의 공통 감각이 공존할 수 있게 하는 무의미/무감각(non-sens)을 드러냄으로써, 하나의 공통 감각에서 다른 것으로 변이할 수 있는 능력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설은 양식과 공통 감각을 동시에 전복한다.동시적인 양방성/양의성으로 인해 더 이상 진행될 방향을 예측할 수 없게 되는 광인-되기(devenir-fou), 무의미/무감각(non-sens)으로서 인지할 수 없게 됨을 뜻하는 동일성의 소멸(LS, 96쪽)은 각각 양식과 공통 감각에 대한 반대 방향의 극한이다. ?의미의 논리?의 다른 곳이나 ?안티-오이디푸스? 등에서 전자는 ‘분열자’(schizophrene)라는 개념으로 나아가고, 후자는 ‘기관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라는 개념으로 나아간다(LS, 101-114쪽; AO, 15-21쪽 등 참조).
 하지만 좀더 엄격히 말하자면, 역설은 양식과 공통 감각의 틈새에서 나타나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있는 것이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세력(puissance)이다. 그것은 양식과 반대로 언제나 의식의 중간(l'entre-deux)에서 발생하며, 공통 감각과 반대로 의식의 등 뒤에서 발생하는 무의식의 능력이다(LS, 98쪽). 그것은 의미를 생산하는 무의미요, 감각이 그 위에서 생산되는 무감각이다. 의식을 생산하는 무의식(프로이트)처럼, 또는 가치를 생산하는 비가치로서 노동(맑스)처럼. 그리고 이처럼 역설의 능력이 언제나 양식과 공통 감각의 파괴를 통해 유효화된다면, 채플린이나 히치코크는 위대한 역설의 예술가임이 분명하다. 
 

6.사건의 시간성

사물의 상태는 언제나 현재(le present)와 연관되어 있다. 어떤 나뭇잎이 ‘붉다‘는 것은 그 나뭇잎의 현재의 상태에 대한 진술이다. 앞으로 붉게 되겠지만, 혹은 이전에 붉은 적이 있지만, 현재에는 푸른 나뭇잎에 대해 ’붉다‘는 진술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현재의 상태는 과거나 미래의 상태가 아니다. 따라서 사물의 상태를 다루는 한 현재는 과거 및 미래와 분리되어 있다. 이 경우 “시간 속에는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 과거, 현재, 미래는 시간의 세 차원이 아니다. 오직 현재만이 시간을 채우고, 과거와 미래는 시간 속에 있는 현재에 대해 상대적인 두 차원이다.”(LS, 190쪽) 이러한 시간성을 들뢰즈는 ’크로노스‘(Chronos) 내지 크로노스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반면 ‘됨’ 자체는 이와 상이한 시간성을 통해 구성된다. ‘붉어지다’는 것은 붉지 않은 상태에서 붉은 상태로의 바뀌는 것인데, 이는  그것이 두 상태에 걸쳐 있는 것만큼 두 차원의 시간에 동시에 걸쳐 있다. 붉지 않은 상태로서 과거, 붉은 상태로서의 미래. 이런 점에서 됨('생성')이 이루어지는 각각의 순간에 현재는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분할된다. 좀더 극한적으로 말한다면, 차라리 됨에는 현재란 없고 “오직 과거와 미래만이 있다(insistent ou subsistent)”고 해야 한다(LS, 192쪽). 이러한 시간성을 들뢰즈는 ‘아이온’(Aion) 내지 아이온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됨이란 이처럼 과거와 미래의 양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된다. 즉 현재의 각 순간을 무한히 분할하는 과거와 미래가 바로 됨의 동시성을 구성한다(LS, 9쪽). 됨이 언제나 역설과 조우할 운명은 이  두 방향(deux sens, 두 의미)의 동시성으로 인해 피할 수 없다.
사건이란 ‘사실들이 사건들로 됨’이라고 할 때, 사건의 시간성 역시 아이온적인 것이다. 사건은 일어난 것과 일어날 것,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 원인과 결과로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LS, 17-18쪽). 하지만 사건에 관한 두 가지 구별되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고, 다른 하나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다. 전자는 현재를 과거로 분할하는 시간의 방향(sens)을 따라 사건의 의미(sens)를 묻는 것이고, 후자는 현재를 미래로 분할하는 시간의 방향을 따라 사건의 의미를 묻는 것이다. 
친구의 부탁으로 사립탐정이 된 퍼거슨은 매들린의 행적을 두고 두 가지 질문을 동시에 쫓아 다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여인은 이처럼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렇듯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 여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 두 질문이 매들린의 행적을 무한히 두 방향으로 분할한다.
사건을 구성하는 시간의 이 두 방향성을 후설은 ‘다시-당김’(Retention, 흔히 ‘과거지향’으로 번역됨)과 ‘미리-당김’(Protention, 흔히 ‘미래 지향’으로 번역됨)이란 개념으로 표현한다. 내적인 시간의식, 혹은 시간적인 지향성은 언제나 다시-당김과 미리-당김을 통해 ‘지금‘을 구성한다. 끊임없이 운동하며 변화하는 ’생생한 현재‘(lebendige Gegenwart)는 다시-당김과 미리-당김이라는 시간적 지향성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E. Husserl, Zur Phanominologie des inneres Zeitbewußtsein, 1893-1917, 이종훈 역, ?시간의식?, 한길사, 1996 참조.
 매들린의 행적은 칼로타의 행적을 현재로 다시 끌어당겨 표면에 떠오르게 한다. 또한 그것은 칼로타와 유사한 불행한 종말을 현재로 미리 끌어당긴다. 물론 퍼거슨은 그로부터 벗어난 행복한 해결을 미리 끌어당기며, 매들린의 행적을 그 방향으로 이끌려고 한다. 이로써 두 가지 미리-당김에 따른 이접적 기로에 매들린을 위치지운다.
그런데 과거와 현재가 관계지워지는 상이한 양상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현기증>의 계열 ①에서 매들린의 삶에 다시-당겨진 칼로타의 삶은 매들린의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는 사실 계열 ②에서 본다면 엘스터에 의해 매들린의 현재를 칼로타의 과거로 ‘거꾸로-당김’(retro-tention)하는 것이었다. 칼로타의 옷과 장식, 칼로타의 유물, 그리고 칼로타의 행적을 따라 매들린의 현재를 과거로 끌고 간다. 과거로의 회귀 혹은 신경증적 퇴행. 다시-당김이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라면, 이러한 거꾸로-당김은 과거로 끌려가는 현재다. 이는 퍼거슨에 의해 계열 ③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퍼거슨은 주디의 삶에 매들린의 옷을 입히고, 매들린의 장식과 꽃을 들게 하며, 매들린의 행적을 따르게 한다. 주디는 매들린으로 거꾸로-당겨진다. 그런데 바로 그것은 매들린이 거꾸로-당겨졌던 칼로타의 옷이요 행적이었다. 퍼거슨의 신경증. 그리하여 동일한 죽음이 두 번 반복된다. 동일한 옷과 동일한 행적을 따라 동일한 곳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발생한, 동일하게 생긴 여인의 죽음. 계열 ②와 계열 ③의 동형성은 단지 구조적인 것 이상이다.
주디 앞에 나타난 퍼거슨은 양방성을 갖는다. 하나는 자신이 관여되었던 매들린의 죽음을 ‘쫓는’ 사람, 다른 하나는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 그러나 퍼거슨이 사랑했던 것은 매들린이었다는 점에서 주디의 사랑은 동일한 과거를 다시-당기지 못한다. 그러나 동일한 외모는 가능한 사랑을 미리-당겨보게 한다. 여기서 퍼거슨의 출현을 둘러싼 다시-당김과 미리-당김은 두 가지 방향으로 분열된다. 매들린의 죽음와 주디-퍼거슨의 새로운 사랑. 그러나 그것은 수렴하지 않으며, 양립할 수 없는(incompossible) 것이다.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여기서 주디는 미리-당김을 향해 주사위를 던진다. 그러나 칼로타의 목걸이로 인해 미리-당김과 다시-당김의 절단은 실패하고, 퍼거슨은 급속히 과거로 주디를 끌고 간다. 그리고 동일한 과거가 반복된다. 그 반복을 통해 진리의지는 허무주의와도 같은 죽음에 가 닿는다. 니체주의자 히치코크?


7.사건과 특이성

각각의 사건은 각자에 고유한 계열을 갖는다. 그 계열의 구체적 양상은 계열마다 상이하다. 사건의 의미는 계열화의 양상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때, 그 또한 계열마다 상이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사건은 서로 무한히 다르기만 한 것이고, 그 의미는 무한히 발산하기만 하는 것일까? 동일한 의미를 갖는, 혹은 동일한 의미로 수렴하는 계열들의 집합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처럼 수렴하는 상이한 계열들의 집합을 어떻게 사고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을 사고하려 하자마자 각각의 계열이 갖는 고유한 차이를 보편적 개념으로 환원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앞서 우리는 <현기증>의 계열 ②에 죽음의 자본주의적 계열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런데 재산을 목적으로 하여, 돈으로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죽음을 야기하는 경우는 이런 경우말고도 무수히 많다. 얼마나 많은 영화들이 이런 죽음을 다루어왔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언제나 죽음의 계열을 만드는 자, 죽음을 당하는 자, 그리고 그에 이용되는 자가 있다. 경우마다 다른 사건적 계열화는 이 항들 및 이 항들의 특정한 관계를 축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관계로 계열화가 이루어지는 사건들을 우리는 모두 죽음의 자본주의적 계열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명칭은 그러한 계열들이 갖는 특징을 지칭한다. 이런 점에서 ‘죽음의 자본주의적 계열’은 재산과 돈에 의해 관계지워지는 항들을 축으로 만들어지는 다수의 계열들의 집합인 셈이다. 
이처럼 동일한 특징을 갖는 사건들의 집합을 들뢰즈는 ‘이념적 사건’(un evenement ideal)이라고 부르고(LS, 67쪽), 그 집합을 이루게 하는 특징을 ‘특이성’(singularite)이라고 부른다. ‘이념적 사건’이란 어떤 이념이나 이상에 의해 만들어진 무엇이 아니며, 단순한 관념적 구성물이란 뜻도 아니다. 그것은 특이성을 통해 이념적으로 구성된 사건들의 집합이란 뜻이다. 이 때 특이성은 어떤 사건의 개별적인 특징이 아니며, 해당되는 모든 사건의 보편적인 본질도 아니다. 특이성은 어떤 이질적 계열들이 하나의 집합을 이룰 수 있게 해 주는 특이점들의 집합으로, 각 계열의 항들 사이의 관계에 대응하며(LS, 66쪽), 어떤 곡선이나, 사물의 물리적 상태, 혹은 심리적 도덕적 특성을 표시한다(LS, 67쪽). 
수학적으로 특이점은 미분불가능한 점을 지시한다. 물리학적으로는 지구의 중심처럼 어떤 힘, 예컨대 중력이 작용하는 중심, 혹은 끓는 점이나 녹는 점과 같이 물리적 상태의 비약이 발생하는 점을 지시한다. 예컨대 물이란 액체는 섭씨 0°에서 녹고 섭씨 100°에서 기화한다. 이 때 섭씨 0°와 섭씨 0°는 물의 물리적 상태를 표시하는 특이점들이고, 이 특이점들의 집합, 혹은 이 특이점들의 분포가 바로 물이란 액체의 특이성이다. 이 특이성은 물이란 액체를 다른 액체들과 구별해주는 ‘변별적 특성’이다. 이런 특이성에 의해 정의되는 ‘물’은 개별적인 어떤 것이 아니며, 이 특이성이 물의 ‘보편자’ 내지 보편적 본질이 실현된 ‘특수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특이성이 물의 다양한 상태 근저에 있는 실체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물의 물리적 상태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변화를 표시하는 점들의 분포일 뿐이다.
여기서 특이점들은 특이성이 방사되는 지점으로, 각각의 계열을 구성하는 특이적 항들과 대응한다. 특이성이란 이처럼 계열 내 항들 간의 관계에 대응하며, 계열 내 항들의 관계는 이웃 관계를 통해, 결국은 특이점들의 분포를 표시하는 미분적 관계(les rapports differentiels, 차이적 관계)를 통해 포착될 수 있다(LS, 65쪽). 과거와 미래의 두 방향을 갖는, 그리고 사물과 명제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아이온의 직선은 “그 직선 상의 모든 곳에 나타나는 순간화된 임의점(point aleatoire)과, 거기에 분포되는 특이점들을 동시에 연관짓는다.”(LS, 195쪽)
칼로타, 불행하게 죽은, 그리하여 지금 매들린의 영혼을 사로잡아 죽음으로 끌고 가는 항. 매들린, 많은 재산과 안정된 가정을 갖고 있지만, 칼로타의 영혼에 사로잡혀 죽음으로 끌려가는 항. 퍼거슨, 매들린을 쫓다 사랑하게 되어 그 죽음을 막아보려 하지만 결국 실패하는 항. 이들은 모두 관계를 구성하는 어떤 힘들이 방사되는 지점이고 특이점이다. 첫 번째 계열은 바로 이런 특이점들의 고유한 분포를 통해 포착된다. 통상적으로 하나의 특이점에서 방사되는 힘(하나의 특이성)은 다른 특이점에서 방사되는 힘과 이웃관계를 이루는 지점까지 확장된다(LS, 133쪽). 위의 계열에서 칼로타의 자리에서 방사되는 힘은 그것을 저지하려는 퍼거슨의 힘과 이웃하게 되고, 매들린은 그러한 이웃관계가 충돌하는 지점이 된다. 
이처럼 특이성의 확장은 특이점에 내재되어 있던 포텐셜--이 계열에선 죽음과 사랑--의 현재화(actualise)와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LS, 134쪽). “언제나 세계는 이런 식으로 구성된다.”(LS, 133쪽) 그리고 각각의 항들이 만드는 통상적인 점의 계열 위로 특이성은 확장되고, 수렴의 규칙에 따라 지배적인 어떤 특이성이 선별되며, 이것이 신체 안에서 구현되고 신체적 상태를 이루게 된다(LS, 134쪽). 그리하여 이 계열 안에서 칼로타의 벡터가 지배적인 것으로 작동하게 된다. ‘특이성의 자기-통일’(auto-unification) 과정(LS, 125쪽). 
그렇다면 ‘죽이는 자--죽는 자--관계자‘라는 특이점의 분포는 위의 계열들을 모두 동일한 사건으로 간주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반복되는 죽음의 세 계열. 그리고 구조주의. 그러나 낭만적인 첫째 계열은 자살이란 말로 그 의미가 요약되고, 자본주의적인 둘째 계열은 살인이란 말로, 이성적인 셋째 계열은 그 두 가지 말 모두에 정확하게 부합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모두 상이한 특이성을 갖는 것이다. 
좀더 나아가, 아내를 살인하는 저 자본주의적 계열은 다른 많은 영화나 소설 등에서 다루어지는데, 이 모두 동일한 사건이라고 해야 하는가? 물론 죽이는 자--죽는 자--고용된 자로 항들 간의 관계가 동일하게 포착될 수 있는 경우를 상정하자. 예컨대 보험금을 노리고 청부업자를 이용해 남편을 죽이는 좀 상투적인 계열이 있을 수 있다. 이는 <현기증>의 둘째 계열과 ‘이념적 사건’의 차원에서는 일정한 동형성을 갖는다. 이런 한에서 “특이성은 진정 초험적(transcendentals) 사건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LS, 125쪽). 그러나 ‘초기 조건’의 차이로 인해 각각은 서로 다른 사건을 이루게 된다. 문제를 문제로서 설정하는 초기 조건이 다르면 특이성의 분포를 표시하는 해(解)도 달라진다(LS, 69쪽). 즉 ‘문제설정’(problematique)은 사실을 사건으로서 문제화하는 초기 조건을 구성하며, 이에 따라 사건의 의미는 상이한 것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문제설정이란 인식의 주관적 범주가 아니라 객관적 범주라고 본다(LS, 70쪽). 사건은 어떠한 문제설정의 조건이지만, 사건 또한 문제설정 안에서 파악되며, 그 안에서 의미있는 계열을 이루게 된다. 요컨대 특정한 문제설정 속에서 특이성들의 결합과 분할/분포가 곧 사건이라는 것이다(LS, 72쪽). 따라서 특이성의 수렴을 통해 다양한 사건들이 갖는 동형성을 ‘이념적 사건’의 형태로 묶고 분류할 수 있지만, 이것이 그 각각의 사건이 갖는 고유한 의미를, 사건들 사이에 있는 차이를 그 묶음의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차이가 ‘특수’로서 포착될 때 그것은 ‘보편’이란 동일자 안으로 끌려들어간다. 반면 차이를 ‘개별’로 환원될 때, 거기서 개념적 사유는 불가능해진다. 이 점에서 아마도 들뢰즈는 사건과 특이성이란 개념을 통해 보편/특수란 개념을 가로지르면서도, 차이를 개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지반을 마련하고 있는 셈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특이성 개념을 좀더 밀고 나아간다. 즉 그는 특이성의 수렴을 통해 세계의 구성을 포착하려고 한다. “일차적으로 특이성들은 세계와 그 세계의 일부를 이루는 개체들에 대해 동시에 작용한다." 따라서 “각각의 특이성에 의존하는 계열이 다른 특이성에 의존하는 계열과 수렴하는 한에서 세계는 형성된다(forme).”(LS, 134쪽) 개체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같은 특이성의 수렴을 그는 세계를 종합하는 규칙으로 간주하며, 이를 ‘공통가능성’(compossibilite)이라고 부른다(LS, 134-135쪽). “실행의 첫 수준은 개별화된 세계와 그 각각의 세계에 서식하는 개별적 나(moi)를 상관적으로 생산한다. 개체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enveloppent) 특이성의 이웃관계를 통해 구성된다.”(LS, 135쪽)
이러한 세계 및 개체의 구성을 그는 수동적 발생(genese passive)라고 부르며, 이를 ‘존재론적 측면’과 ‘논리적 측면’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LS, 133-151쪽. 여기서 구별하는 존재론적인 측면과 논리적 측면은 이후 ?카프카?나 ?천의 고원?에서는 기계적인 것과 언표적인 것, 기계적 배치와 언표행위의 배치의 구별로 변화된다(?카프카?, 148쪽 이하; MP, 112-113쪽). 특히 논리적 측면이 언표적인 것으로 바뀌는 것은 의미를 다루는 관점의 변화를 보여 준다. 언표적인 것은 단순히 논리적인 차원에서 의미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화용론적 차원에서 행동 내지 실천과 결부된 것으로 의미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입장은 지시, 표명, 의미작용으로 환원되지 않는 의미의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무의식적인 힘과 권력의 차원에서 다루려는 니체적인 ‘의미의 논리’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긴 하지만, 이것이 구체적인 분석적 차원을 획득하는 것은 그것을 언표행위의 배치 속에서 다룰 때다.
 존재론적 측면에서 수동적 발생은 두 개의 단계를 갖는다. "특이성과 사건에서 시작해서 의미는 그것이 실행되는 첫 번째 복합체를 만든다. 수렴의 원환 안에서 특이성들을 조직하는 환경(Umwelt), 이러한 세계를 표현하는 개체(individu), 신체상태, 개인들의 혼합 내지 집계(agregats), 이러한 상태를 서술하는 분석적 술어 등이 그것이다.“(LS, 140-1쪽) 두 번째 복합체가 첫째 것 위에서 매우 다르게 만들어진다. 즉 ”다양한 사람들(mondes)에 공통된 세계(Welt commun), 이 '공통된 무언가'를 정의하는 인격체, 이 인격체를 정의하는 종합적 술어, 이로부터 파생되는 계급과 속성들이 그것이다.“(LS, 141쪽) 전자에 따라 양식이 형성되고, 후자에 따라 공통 감각 형성된다(LS, 141쪽). 

“신체의 개별화, 혼합의 정도, 변이 속에서 행해지는 인격과 개념의 놀이, 이 모든 질서(ordonance)는 의미와 그것이 전개되는 전(前)개인적이고 비인격적인 중립적 장을 전제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또 다른 측면에서 의미 그 자체는 신체에 의해 생산된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분화되지 않은 심연 속에서, 측정할 수 없는 박동 속에서 포착된 신체다. 그리고 이 심연은 기원적인(originale) 방식으로 작동한다. 즉 표면을 조직하고 표면에 의해 둘러싸이는 권력에 의해서.“(LS, 149-150쪽) 

따라서 신체적인 조건(‘환경’) 안에서 생산되는 양식이나 그러한 환경에 의해 생산되는 ‘공통 감각’ 내지 공통된 인격체(주체)의 문제는 표면 내지 표면효과로서 사건을 특정한 양상으로 반복하여 조직하는 권력의 문제임이 드러난다. 이는 사건들을 반복하여 조직하는, 달리 말하면 사건의 특이성이 수렴하게 하는 ‘특정한 조건’와 결부되어 있다. 사건과, 사건의 반복을 조직하는 이 조건의 문제는 철학적을 차이와 반복을 다루는 문제기도 하다.


8.차이와 반복

사건의 개념은 계열화를 통해 하나의 동일한 사실이 상이한(different) 의미를 갖는 상이한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서 어떤 하나의 동일한 사실을 둘러 싸고 만들어지는 사건들이란 상이한 계열들로 ‘차이화하는 운동’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는 상이한 의미를 뜻한다. 각 계열이 형성하는 의미란 그 계열 안에서 항들 간의 차이적/미분적 관계다. 다시 말하면 의미란 이처럼 차이화/미분화(differentiation)하는 운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건화한다는 것은 이렇듯 차이적 관계를 통해 의미를 포착하려는 것이다. 하나의 동일한 사실을 상이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만드는 이러한 차이의 효과, 차이화하는 운동의 효과를 사건의 개념을 통해 포착할 수 있다. 이로써 “태초에 차이의 운동, 차이화하는 운동이 있었다”라는 선언적(宣言的)인 언표 대신에,데리다의 경우 유사하게 ‘차이의 운동’ 혹은 ‘차연’(differance)이라는 개념을 통해 의미의 생성(devenir)을 설명하지만, 그리고 그것을 시간의 공간화 등의 개념으로 변환시키지만(J. Derrida, "Differance," Marges de la philosophie, Minuit, 1972, tr. by A. Bass, Margin of Philosophy, The Uni. of Chicago Press, 1982, 11-13쪽), 선언적 언표 이상의 어떤 구체적 진전을 찾기 힘들다. 그에게 ‘차연’은 의미를 만들어내지만 그 스스로는 의미를 갖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는 애시당초 ‘차이의 존재론‘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지만, 더 이상 개념적으로 구체화되지 않는 채 ’근원적 개념‘에 머물고 있다(같은 책, 11, 16쪽). 반면 들뢰즈에게 ’차이‘란 범주는 계열화와 사건 등의 일련의 개념들로 구체화된다. 
다른 한편 데리다에게 차연은 기표를 기표가 대체함으로써 궁극적 의미에의 도달을 무한히 지연시키는(differ) 운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지연은 차이화하는 운동으로서 차연이 “존재자에 대한 참조행위의 항상적 지연”으로서(J. Derrida, Positions, 박성창 편역, ?입장들?, 솔, 1992, 52쪽), 바꿔 말하면 기호들 사이에서만 정의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반면 들뢰즈는 이 차이화하는 운동을 ‘임’(etre)와 ‘됨’(devenir), 사물의 상태와 사건, 신체적인 것과 비신체적인 것의 이중성 속에서, 그 경계선 상에서 포착한다. 이 경우 의미는 계열화의 차이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알 수 있으며, 무한한 지연을 도입할 이유도 사라진다. 
더불어 말하자면 기호는 정의상 기호 아닌 무언가를 대신하는 것이란 점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기호가 그저 다른 기호만을 대신한다면 우리는 기호를 사용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언어나 기호의 의미를 소통의 차원에서 포착하는 입장과, 그것을 명령과 행동의 차원에서 포착하는 입장의 차이를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비트겐쉬타인과 마찬가지로 후자의 입장에 선다(MP, 95쪽 이하; L. Wittgenstein, Philosophische Untersuchung, 이영철 역, ?철학적 탐구?, 서광사, 1994 참조).
 차이의 운동이 유효화되는 양상을 구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개념적 고리가 확보된다. 차이의 존재론, 들뢰즈에게 이런 것이 있다면, 이는 이러한 사건의 개념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 점에서 들뢰즈는 하이데거와도 다르다. ‘사건’(Ereignis)이란 말을 처음 개념으로 사용한 사람은 하이데거지만, 그는 이를 언제나 ‘존재가 개현되는 사건’이란 맥락에서 사용한다. 그는 동일성이 차이를 전제한다는 점을 지적하지만, 그리고 사건적 차이에 대해 언급하지만, 이는 모두 ‘존재의 사건’이라는 동일성에 서 유래하는 것이다(O. Poggeler, Der Denkweg Martin Heideggers, 이기상 역, ?하이데거 사유의 길?, 문예출판사, 1993, 170-173쪽). 반면 들뢰즈의 입장은, 차이에 의거해 새로운 ‘존재론’을 구성하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에도(이런 사례로는 M. Hardt, Gilles Deleuze: An Apprenticeship of Philosophy, 이성민/서창현 역, ?들뢰즈의 철학사상?, 갈무리, 1996), 사건의 개념은 ‘존재’라는 하이데거적인 동일성으로 소급되지 않는다. 
이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해석하는 방식에서도 다르게 나타난다. 하이데거에게 영원회귀란 ‘동일한 것의 영원한 되돌아 옴’이요, 존재의 사건이라는 ‘동일성의 반복’이다(O. Poggeler, 앞의 책, 127쪽 이하). 반면 들뢰즈에게 동일한 것은 영원회귀하지 않으며, 오직 차이가 있는 것만이 영원회귀한다. 따라서 그에게 영원회귀는 ‘차이의 반복’이다(G.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신범순/조영복 역, ?니체, 철학의 주사위?, 인간사랑, 1993, 90쪽).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 자신의 사상을 ‘사건의 철학’이라고 요약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의 모든 책에서 내가 연구하려고 했던 것은 사건이었다.” “나는 내 모든 시간을 이 사건의 개념에 대해 쓰면서 통과했다.”(G. Deleuze, Pourparler: 1972-1990, MInuit, 1990, 194, 218쪽; F. Zourabichvili, Deleuze, Une philosophie de l'evenement, PUF, 1994, 5쪽)

그러나 사건의 의미가 ‘양식’ 내지 ‘공통 감각’을 통과하는 한, 사건화하는 데는 일정한 반복(repetition)이 불가피하게 포함된다. 계열 ①에서 매들린은 칼로타의 행적을 반복하여 통과한다. 계열 ②에서 주디는 반복하여 매들린이 된다. 양식을 형성하는 반복. 계열 ③에서 퍼거슨은 주디에게 반복하여 매들린의 옷을 입히고 매들린의 스타일을 반복하게 한다. 공통 감각을 형성하는 반복. 사건화 자체가 특이한 계열화의 선에 따라 통상적인 점을 반복하여 통과한다. 사건화 자체에 내재하는 반복.
이와는 다른 양상의 반복이 있다. 예를 들어 남북 전쟁 이전의 미국에서 흑인들은 노예가 된다. 거기서 흑인들은 특정한 계열화의 선에 따라 노예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계열화는 모든 흑인에 대해 반복된다. 반복적인 사건의 계열들. 이처럼 반복적인 사건들을 들뢰즈는 스토아주의자들을 따라 ‘운명‘(destin)이라고 부른다. 운명을 긍정하되, 필연성을 부정하는 것, 이것이 스토아주의자들에 고유한 역설이었다(LS, 198쪽). 이는 사건들의 양립가능성, 공존가능성을 필연성의 개념 외부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생산한다. 필연성의 외부에서 정의되는 사건들의 양립가능성, 그것은 ’반복적인 사건‘(un evenement en repete)으로서 운명이며, “비인과적인 상응성의 집합”으로 정의한다(LS, 199쪽). 이처럼 어떤 사건들이 비인과적인 상응성을 갖고 양립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 사건의 특이성이 수렴하는가 발산하는가에 달려 있다(LS, 201쪽). 이처럼 그 특이성이 서로 수렴하는 사건들에 대해 ’반복‘이란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이는 사실 다수의 사건들이 특이성에 의해 복합되어 구성하는 ‘이념적 사건’ 개념에 부분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이런 식의 반복적 계열화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언제나 특정한 시·공간적 한정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야기하는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이러한 반복적 계열화는 발생한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K. Marx, “Lohnarbeit und Kapital,” ?임노동과 자본?,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 거름
 
르네상스 시절, 동 키호테와 같은 광인은 자유롭게 할보하며 자기 나름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가 되면서 그들은 부랑자, 가난뱅이, 게으름뱅이, 거지, 도둑, 강도 등과 더불어 ‘종합병원’에 갇히거나,M. Foucault, Madness and Civilization, Tavistok, 1967, 38쪽 이하 참조.
 ‘구빈법’에 따라 처벌되고 처형되었다.K. Marx, Das Kapital, Bd.1, 김수행 역, ?자본론?, 1권 (하), 비봉출판사, 924쪽 이하; K.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 The Political and Economical Origins of Our Time, Beacon Press, 1957, 박현수 역, ?거대한 변환?, 민음사, 1991, 113-114쪽.
 파리 시민 백 명 중 한 명을 가둔 거대한 감금.M. Foucault, 앞의 책, 38쪽.
 그 감금의 규모가 거대한 만큼 그러한 계열화의 반복은 거대하다. “부랑자는 부랑하는 사람이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그는 수인(囚人)이 된다.” 그리고 이제 감금은 이제 부랑자와 거지, 도둑, 광인 등을 통제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강제되는 ‘처벌’이 된다. 하지만 이 역시 언제 어디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감금은 감금이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그것은 처벌이 된다.”M. Foucault, “Questions of Method,", G. Burchell, C. Gordon, P. Miller (ed.), The Foucault Effect: Studies in Governmentality,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1, 76-77쪽 참조.
 
19세기가 되면서 시행된 ‘대개혁’은 감금되었던 자들 가운데 광인과 범죄자만을 남겨 두고 나머지를 모두 풀어주었다. 그리고 광인들을 따로 분리하여 가두고, 광기를 정신 상에 생긴 질병으로 정의하며, 그것을 치료하기 위한 조치들이 정신의학이란 이름 아래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들을 가두던 수용소는 이제 정신병원이 된다. “광인은 광인이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그는 정신병자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건의 반복적 계열화가 만들어지는 그 ‘특정한 조건’이다. ?의미의 논리?에서 포착되는 반복의 조건, 그것은 반향(echos)과 되풀이(reprises), 공명(resonances)의 체계다(LS, 199쪽). 그러나 반복의 조건에 대한 개념적 전개는 여기서 크게 진전되지 못한다. 한편 ?천의 고원?에서는 이러한 반복의 조건을 ‘지층’(strates)이란 개념으로 표현한다(MP, 54쪽). 노예제 생산양식, 자본주의 생산양식, 정신병원과 정신의학, 형법과 행형법, 범죄학, 학교와 교육학, 공장과 공학...... 
이 상이한 지층들을 서로 구별하게 해주는 층들의 배열 양상이 있는데, 이를 ‘배치’(agencement)란 개념으로 표현한다.Deleuze/Guattari, Kafka: pour une litterature mineure, Minuit, 1975, 조한경 역, ?소수 집단의 문학을 위하여?, 문학과 지성사, 1992, 148쪽 이하; MP, 54, 91, 112, 629-630쪽 등 참조.
 이는 ‘지층화의 표면’으로(MP, 54쪽), 특정한 지층 위에서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계열화되는 양상을 포착한다. 예컨대 생산자와 노동수단, 노동대상의 특이적 관계에 따라 생산양식은 노예제, 봉건제, 자본제 등으로 구별될 수 있다. 노예제적 대농장의 배치와 자본주의적 대공장의 배치의 차이, 근대 사회에서 학교에 고유한 배치와 공장에 고유한 배치의 차이 등등. 이는 지층 안에서 반복의 양상을 특정한 형태로 규정하는 계열적 요소들의 ‘체계적‘ 분포-배치다. 그리고 이러한 배치 안에서 반복되는 사건들이 갖는 특이성을 가장 극도로 추상한 것을 ’추상기계‘(la machine abstraire)라고 부른다.MP, 73-74쪽, 91-92쪽, 636-641쪽 등 참조; F. Guattari, L'inconsient machinique, Recherch, 1979, 13-15쪽 참조.

차이의 존재론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사건의 개념은 이제 반복적인 사건의 계열화를 규정하는 역사적 조건에 대한 이론으로, 지층을 대상으로 하는 ‘지질학’으로 나아간다. 도식화의 무리를 무릅쓰고 요약하자면, ?의미의 논리?가 사건의 철학을 통해 차이의 존재론을 구체화하려는 기획의 소산이었다면, ?천의 고원?은 사건적 계열화의 반복을 규정하는 역사적 조건에 대한 이론을 시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그 내용이나 형식에서 축소할 수 없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일종의 역사 유물론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따라서 ?천의 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수행한 작업을 한편으로는 딜타이나 하이데거의 역사적 존재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맑스의 역사 유물론의 새로운 확장과 변환이라고 보는 네그리(A. Negri)의 주장에 우리는 동의할 수 있다.(A. Negri, "Sur Mille Plateaux," la Revue Chimeres, n°17). 가타리뿐만 아니라 들뢰즈 또한 반복해서 자신이 “오늘날 난 완전히 맑스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단지 의례적인 발언은 결코 아님을 이런 맥락에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Pour parler: 1972-1990, 김종호 역, ?대담?, 솔, 1993, 190쪽; 박철화 편역, ?부정과 긍정?(들뢰즈와 에리봉의 대담(<Le nouvelle observateur>, 1995년 11월 16일)에서의 발췌), ?세계의 문학? 79호, 1996년 봄, 79쪽). 
 사건의 철학에서 역사 유물론으로! 
하지만 이들이 시도하는 역사 유물론은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 도식, 내용과 형식의 관계 도식, 활동을 노동으로 환원하고 생산을 경제로 환원하는 도식을 이미 처음부터 빗겨나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역사 유물론이란 말의 용법에서 벗어난다는 점을 우리는 다시 강조해야 한다. 그것은 기존의 역사 유물론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역사적 구성물로서 지층과 배치에 대한 확장된 이론을 향해 역사 유물론의 닫힌 문을 활짝 여는 것이며, 역사 유물론의 상투적 도식을 횡단하는 것이다. 리좀학(rhizomique), 욕망의 새로운 개념을 통한 분열분석(schizoanalyse), 다양한 지층들의 배치에 대한 분석, 새로운 삶의 형태를 위해 탈주선을 달리게 하는 미시정치학, 기호 체제에 대한 화용론(pragmatiqie)은 이러한 새로운 역사 이론의 동일한 이름이다(MP, 33쪽).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획이 자본주의에서 신체적인 무의식을 규정하고 특정한 형태로 반복하여 행동하게 만드는 배치에 대한 분석을,F. Guattari, L'inconsient machinique, 43쪽이하, 75쪽 이하, 109쪽 이하 참조). 한편 이러한 역사 이론의 연장선 상에서 가타리는 네그리와 함께 ‘새로운 자유의 공간’을 위한 분석적 선언을 쓴다(A. Negri/ F. Guattari, Nouvelle espace de liberte, 이원영 역, ?새로운 자유의 공간?, 갈무리, 1995). 
 그리하여 그 근본을 뒤엎는 혁명을 겨낭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건의 철학을 통과하면서 새로이 창출된 이 사유의 공간을 가장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은 들뢰즈 말대로 “증기기관과 인클로저, 계급과 소유가 만들어내는” 양식과 공통 감각과 그것이 작동시키는 의미의 일방성과 유기화된 동일성을 의문에 부쳐버릴 수 있는 역설을, 그 무의식적 능력(puissance)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양식화(良識化)된 의미를 낳는 자본주의적 배치에서 탈주선을 가동시키고, 근대적 공통 감각을 통해 작동하는 신체적 무의식에 변이를 창출하는 것. 그리하여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대’를 창출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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