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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보다 앞선 동양 문화 91가지

Casey,Riley 2023. 5. 13.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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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보다 앞선 동양문화 91가지

소준섭

      
      제1장 사상과 학문의 발원지, 동양
    지구는 동양의 자연주의 사상을 요구하고 있다
  일찍이 토인비는 '악마 같은 황하'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었다. 황하는 중국인들에게 문명
의 요람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말할 수 없는 재앙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황하는  강바닥이 
주위의 땅보다 오히려 높은 강이다. 이 때문에 과거 3000년 동안  2년에 한 번 꼴로 범람하
여 홍수를 일으켰으며, 이로 인한 피해는 엄청났다. 그리하여 중국은 역사이래 '물과의 전쟁
'을 벌여야 했다. 중국에서 황제의  가장 큰 임무는 치수 사업이었다.  중국인들에게 영원한 
성군으로 추앙 받는 요 임금과 순 임금도 결국 치수에 실패했고, 우 임금 때 이르러서야 비
로소 어느 정도 치수에 성공할 수 있었다. 우 임금은 이 공로로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치
수를 위한 대규모 수리 공사 때문에 중국에 거대한 관료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더구나 황하 유역은 여름엔 극심한 혹서가, 겨울엔 살을 에는 혹한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엄청난 강풍도 불었다. 그 바람은  '뢰스'라고 불리는 황토를 자욱하게  온 천지를 날리면서 
정성껏 이뤄 놓은 일 년 농사를 한 순간에 쓸어 버렸다. 또한  그 바람은 황하 유역에 황토
를 두텁게 쌓아 놓았다. 이 황토층은 평균  두께가 무려 20~30m나 되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70m에 이르는 곳도 있었다. 황하나 황해라는 이름도 황토로 강이나 바다가 온통 누렇게 되
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황하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이나 나일 강 유역,  그리스나 로마의 '안온한' 자연의 도
전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자연 재앙이 존재하고 있었다. 반대로 양자강 유역은 자연 환경
도 양호했고 땅도 비옥했다. 그런데  왜 중국인들은 자애로운 양자강  대신  황하를 문명의 
발상지로 삼았을까? 양자강 유역은 고온 다습하여 밀림이 형성된 곳이었다.   따라서 그 당
시 금속 문화가 시작되지 않은  중국인들이 밀림을 개척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자강 
유역은 그 뒤 중국 민족이 철기 문화를 습득한 뒤에 비로소 개척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인들은 황하를 그들의 주거지로 선택했던  것이다. 비록 황하 유역은  자연  환경이 매
우 좋지 않았지만, 황토층은 매우 비옥한 토양이었다. 만약 적당한 비만 내렸다면 황하 유역
은  인류 최대의 풍요로운 땅으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자연 환경 요인은 중국인들의 성격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인들은 서
양인들처럼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거나 우주의 중심이 인간이라는 오만한 태도를  결코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자연에 대해 끝없는 경외심을 가지고 자연의 은총을 바라는 관점을 
가질 뿐이었다. 그 결과 우주와 인간은 하나의 유기체라는 유기체적 철학이 중국 사회를 지
배하게 되었다. 천명 사상과 불가지론도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  철학의 
기본 사상은 천인상관과 천인합일사상으로 정착되었다.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최근에는 과학의 부정적 측면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과
학의 발달로 인한 생태계 파괴  때문에 이제 인류의 종말까지 예견되고  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과학과 기술이 인간의 삶과 지구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고 지구의 중심은 인간이며, 인간은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서구의  자연 정복적 사고 방식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물론 생태계 파괴가 심각한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이제까지 이뤄 온 과학 문
명을 모두 포기할 수는 없다. 따라서 많은 전문가들은 이  시점에서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인간적 삶의 가치와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탈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해내는 것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제 인류에게는 자연 정복적 사고 방식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과의 공존을 모색하거나 자
연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이  강력히 요청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을 
살아 있는 자연의 일부로 파악하는 동양의 천인합일의 자연주의 사상이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인류의 사상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과정을 살펴보면 무엇이든 절정에 이르면 곧 쇠퇴하는  법이다. 영원한 승자가 없
듯 영원한 꼴찌도 없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절정에 이른  순간 그 결과로 '만개의 피로감'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중심'지역 및 국가가 스스로 변화되는 상황에 적절히 적응해 
나갔던 때는 역사상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간의 역사는  주변부가 갑자기 도약하여 중심부
로 자리잡았던 경우가 더 많았다. 왜냐하면 주변부는 중심부가 절정의 순간 자만과 정체 그
리고 타락을 거듭할 바로 그때 그들의 장점을 흡수하면서 피어나는 꽃송이처럼 비약했던 것
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에 서쪽 지방의 일개  변방 국가에 지나지 않았던 '오랑
캐 나라'인 진나라가 결국  천하 통일을 이뤄  냈다. 또한 섬나라  주변국이었던 일본이 천  
 
년 만 년 최강자 위치에 설 것 같았던 중국을 제치고   아시아의 패자가 된 것이나, 15세기
까지 중국을 비롯한 동양이라는 '당시의 중심부'에 크게 뒤지던 '주변부'인 서양이 산업 혁
명을 거치면서 세계의 지배자로 부상했던 사실은 이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지
금 이 이론대로라면 현재까지 절정기의 위세를  떨치는 서양의 과학 문명도 이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지구 곳곳에서 나타나는 극심한   환경 파괴는 적나라한 증
거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지구와 인류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를 추구한 동양의 자연주의가 재기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천문학의 역사
  우주란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이러한 의문은 태고 이래 인간에게 가장 궁금한 문제였
다. 이 점에 대하여 옛날의 이집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태초에 하늘의 여신 누트와 대지의 신 게브는 사이좋게 몸을 하나로 하고 살았다. 그러나 
대기의 신 슈가 둘 사이를 질투했다. 그리고는 여신 누트의 몸을 떼어 내고 자기가 그 사이
로 들어가 버렸다. 이렇게 하여 하늘과  땅이 분리되었고, 대기가 그 사이를 받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집트인들은, 대지의 길쭉하고 그 주위가 올라간 장방형 접시 모양으로  생겼
다고 믿었다. 중앙부의 가장 낮은 부분이 바로 이집트라 생각했다. 이에 따르면 장방형 대지
는 밑바닥을 알 수 없는 큰  바다에 떠 있었다. 그리고 하늘의 별들은  여신의 가슴과 배에 
달려 있고 해와 달은 그 사이를 흐르는 강을 따라 찬란한 배를 타고 하루에 한 번씩 지나간
다. 밤이면 태양은 죽어 땅 속을 지나 다시 동쪽 하늘에서 재생한다고 믿었다. 이에 반해 메
소포타미아인들은 우주를 다른 모습으로 상상했다.
  그들은 이 세상을 물 속에 있는 종 모양 또는 사발을 엎어 놓은 모습으로 파악했다. 하늘
에는 별이 달려 있고, 별이 빙글빙글 돌면 거기에 창문 같은 것이 달려 있어 이것이 열리면
서 큰 비가 내린다고 믿었다. 또한 은하수는 끊임없이 하늘  밖의 물을 구름에 전해 준다고 
생각했다.
  인도에서도 일찍이 천문학이 발달했다. 특히  고대 인도인들은 어느 곳보다  스케일이 큰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우주의 기본 시간을 겁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겁'이란 43
억 
2천만 년이라는 '정말 겁나게'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인도인들이 최고의 신으로 섬기는 브
라마 신에게는 겁이란 고작해야 하루 낮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주가 한번 생겼
다가 소멸되는 시간은  브라마 신이 100년의  수명을 다할 때까지였는데,  이는 인간에게는 
311조 년이 넘는 어마어마한 시간이었다. 
  인도인들은 인간이 살고 있는 대지를 얇은 접시를 엎어  놓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의 지구설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다. 이는  아마도 히말라야 산맥의 모
양에서 유추해 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이 땅이  세 마리의 코끼리 등에 의
해 지탱되고 있고, 이 코끼리들은 한 마리의 거북 등에 서 있으며, 또 이 거북은  한 마리의 
큰 뱀 위에 앉아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비해 힌두교에서는 우주를 브라마 신의 알이라고 파악했다.  알 모양의 우주는 21개
의 층으로 되어 있는데, 인간이 사는 땅은 위에서 일곱 번째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해서 지
구 위에는 6개의 하늘이 겹쳐 있는 셈이었는데, 위로 올라 갈수록 아름다웠다. 반면 지구 밑
에도 7개의 서로 다른 층이 있었는데, 이 아래쪽에도 7개의  구역이 있었고 그곳이 바로 고
통의 세계인 나락, 지옥이었다.
  불교에서는 땅을 평평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 한 가운데에 커다란 산이 우뚝 솟
아 있다고 보았다. 그 산이 바로 수미산이었다. 그리고 이 수미산은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
고 있었다. 인도인들은 수미산 둘레에는 바다가 있고, 그 밖으로는 4개의 대륙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대륙에서 인간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원래 천문이란 점성술적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천문의 원래 뜻은 '하늘의 무늬를 읽는' 것
이다. 즉, 천변을 보고 군주의 죽음이나 모반,  외민족의 침입, 가뭄 등 국가적 대사를  점쳤
고, 하늘이 인간에게 보여 주려는 무언가의 뜻을 아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렇게 하여  하늘
의 별자리에는 각각 지상의 정치 사회적 구조와 대응하는 이름이 붙여졌고, 그에 따른 각각
의 의미도 주어졌다.
  고대 중국인들은 자연 현상을 주재하는 신이 있어 그것을 통해 인간에게 길흉을 보여 준
다고 믿었다. 하늘이 화와 복을 내릴  때는 반드시 어떤 징조를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일식은 하늘이 왕에게 보내는 경고이며, 혜성의  출현은 전쟁을 예고한다고 믿었
다. 조짐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원래  조란 거북 등을 불에 태웠을 때  나타나는 
갈라진 금이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길흉을 판단했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조의 범
위는 차츰 확대되어 거북 등에 나타나는 금뿐만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여러 자연 현상을 통
해 보여 주는 모든 현상을 통틀어 지칭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천지, 동물, 인체, 기이한  현
상, 꿈 등 다양했다. 또한 짐이라는 말은  원래 하늘에 떠 있는 달에 나타나는 무늬를  보고 
길흉을 예측했던 데서 비롯되었다. 결국 조는 인간의 길흉을, 짐은 인간의 화복과 관계된 것
이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천문학을 천체  생물학이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이는 중국인들이 
자연계와 인간 존재를 서로 독립된 객관적 실체로 파악하지 않고 인간의 생명 및 운명은 우
주의 법칙과 상호 감응하는 관계로 인식하는 자연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들
은 우주가 마치 원추형으로 생겼으며, 모든 것이 그  천극으로부터 방사상의 모양으로 퍼져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천극은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북극성을 의
미하고 있었다. 북극성 주변의 별들은 동서남북에 각각 7개의  별들로 나뉘어 총 28개의 기
본 별자리는 '28수'라고 불렀다(이에 따르면  우리 나라는 동방 7수  가운데 미성과 기성에 

당되고 있었다). 각 '수'에는 사람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별자리가  있었다. 그런데 묘

게 인도에서도 중국과 똑같이 하늘을 28개의 월궁으로 나누었다.  중국과 인도에서 왜 이렇
게 28이라는 숫자로 구분했는가에 대한 정설은 없다. 하지만 아마도 한 달이 28일이라는 일
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
  고대 중국의 우주 형태론에는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있었다. 바로 개천설과 혼천설이었다.
개천설이란 하늘이 마치 삿갓이나 우산을 쓴 것처럼 둥근 뚜껑으로 덮여 있으며, 그 아래에
는 평평한 땅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것이 바로 천원지방이다. 반면 혼천설은 하늘이  달걀 
껍질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땅은 노른자와 같다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후한 시대의 위
대한 과학자 장형의 주장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우주를 유한하게 보지 않았다.그러나  그
가 땅을 구형이라고 본 분명한 증거는 없다. 
  처음에는 개천설이 지배적이었으나 위진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혼천설이 승리를 거두
게 되었다. 혼천설의 강점은 하늘을 회전하는 고체의 구로  파악하여 황도와 적도를 설정하
고 천문 현상의 구면 천문학적 설명에 성공한 점이었다. 사실 이러한 혼천설이 지구설로 발
전할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하지만 이후 우주 형태론 같은  추상적 문제는 등한히 하고 실
용주의적 태도에만 관심을 보여 끝내  지구설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혼천설은 
땅이 평평하다는 현실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상대적으로 앞서 있던 혼
천설은 후대로 가면서 배척당하고 다시 원시적 우주관인 개천설이 대두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서양 천문학이 동양에 전래되었다. 마테오리치, 아담 샬 등의 선교사가  중
국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서양의 발전된 천문학  덕분이었다. 그들은 지도, 시계, 망원
경 등으로 중국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일식과 월식을 정확히 예측해 내는 등 서구의 천문학
을 활용해 많은 중국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서구의 역법이 일식이나 
월식을 예측하는 데는 유효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동양의 역법이 우월했다는 것이  정
설이다. 중국의 천문학은 주극성의 운동을 관찰하여 얻은 극-적도 중심의 시스템인 데 비해 
서구의 천문학은 태양 출몰의 연중 변화를 관찰하여 얻은 황도 중심의 시스템이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4세기부터 10간과 12지가 사용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10간이란 갑을
병정무기경신임계이며, 12지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이다. 이렇게 하여 10간의 10진법과 
12지의 12진법이 널리 쓰였으며, 이것들이 함께 응용되어 60진법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성좌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현상 변화를 관측하려고 천체를 지상과  마찬가지로 
구역을 나누어 식별했다. 천체를 동서남북 네 구역으로 나눈 사상, 성상으로 구분하여  관측
했다. 이러한 방위 천문학은 지금부터 3000년 전인 은나라 때부터 발전되었다. 은허의  갑골
문 가운데에도 이미 사상에 대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시경>에도 8개의 성좌에 대
한 명칭이 소개되고 있다.
  기원전 350년쯤의 뛰어난 과학자였던 석신은 <성경>이라는 저서를 통해 800여 개에 이르
는 별의 위치를 그림으로 표시했다. 그는 월식과 일식이 천체끼리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기
는 현상임을 알아 냈으며, 이에 따라 일식과 월식을 미리 예측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 그는 
원을 일 년의 일수에 일치시키려고 365도 1분으로 분할했다. 이 무렵 <무함>이라는 천문학 
관련 서적도 있었는데, 이는 은나라 때 성좌를 관측하던 관리의 이름을 붙인 항성도의 기록
이다.
  이 세 권의 천문학 저서를  종합해 본 결과 모두 284성좌와  464개의 항성이 확인되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항성도이다. 한편 서양에서는 그리스에서  중국보다 약 1세기 
늦게 항성도가 정리되었다. 어쨌든 별에 대한 관측 방법이  발달함에 따라 중국에서는 역법
이 발전했고, 당시 태양과 달 그리고 별의 운행에 대한  법칙성의 인식을 토대로 달력도 만
들었다. 특히 기원 25년 한나라 말기에 유흠이라는 과학자가 만든 '삼통력'이라는 달력은 정
확함과 체계에서 전에 만들어졌던 어느 것보다  뛰어났으며,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근
거를 둔 수리 천문서 <알마게스트>보다 1세기나 앞선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시대부터 태양, 달, 행성의 위치를  계산했고 일식과 월식을 예보했다. 
또한 물시계를 이용해 시간을 측정하고 있었다. 당시 향을  연소시켜 시간을 재는 향시계도 
있었다. 중국은 역대로 천문이 중시되었다. 농경 사회에서는 청명 때는 무엇을 하고 곡우 때
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등 어떤 시기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때맞추기 문제가 매우 
중요했다. 더구나 중국의 황제는 백성들의  농사를 권장하는 권농의 주체였다. 이렇게  하여 
역법은 필연적으로 생활의 필수 지침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특히 중국에서는 진시황 이래 새로운  왕조가 창건될 때마다 역법을  바꾸었다. 왜냐하면 
하늘의 의지가 천체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중국인들의 천인상관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천명을 
받은 천자가 제도를 바꿀 때 역법의 개정은 가장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했던 과제이기도 했
다. 이때의 역법이란 오늘날과 같이 단순히 실용적인 달력 차원이 아니었고 천체의 운행 질
서를 알아 내려는 일종의 천문 계산표였다. 그리하여 역법은  왕조의 권위의 상징으로 되었
으며, 중국 천문학에서 언제나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 천문학은 천체 관측과 역법 정비에만  초점이 맞춰지게 되었다. 당나라 
시대만 해도 천문 역산을 담당했던 태사국의 직원이 1067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천문 역산
이 이토록 중시되기는 했어도 그것을 담당하는 관리들의 직위는  낮았다. 이들은 단순 기술
자로서 단지 맡겨진 실무에만 충실하도록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는 결국  중국의 천문학이 
크게 발전하지 못했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세계 최초의 석각 천문도는 중국의 '순우천문도'이다. 이  천문도는 1247년 송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하늘의 별자리와 적도, 황도, 은하수가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세계 두 
번째 석각 천문도는 바로 우리 나라의  '천상열차분야지도'이다. 여기에는 가로 1.2cm, 세로 
2.1m, 두께 11.8cm의 거대한 대리석 판에 무려 1464개의 별자리를 정확한 순서와 분야에 따
라 차례로 그려 놓았다. 그리고 별자리들에는 각각의 명칭이 붙어 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제사를 모실 때 흔히 듣게 되는  '학생부군 신위 유세차 모년모일......'에
서 
'유세차'란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는가?
  고대인들은 특히 목성을 중시했다. 고대인들은 하늘을  정확히 12등분하여 이를 12차라고 
불렀는데, 바로 목성이 12년의 공전 주기를 가지고 있는 별이었다. 그리하여 목성은 한 해에 
12차의 한 차씩 도는 별이기 때문에 세성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유세차란 바로 목
성, 즉 세성이 어느 차에 들어 있는냐는 말로서 실제로는  그 해의 간지를 나타내는 말이었
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지구는 둥글고 태양을 중심으로 돌며 자전한다."
  이 말은 오늘날엔 모든 사람들이 평범한 진리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이 사
실이 공인된 것은 유구한 인류 역사 가운데 고작해야 300~ 400년 전에 불과하다. 지구 중심 
및 인간 중심의 사고 체계를 확고하게 가지고 있던 서양에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
실을 16세기에 코페르니쿠스가 비로소 발견했다. 당시 1400년 동안 서양의 우주론에서 자리
를 지켜 왔던 지구 중심설은 일 년의 길이가 정확하지 않고, 별의 밝기가 일정하지  않으며, 
아울러 여러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고쳐지면서 엄청나게 복잡해져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연구는 신이 만든 우주가 이렇게 복잡할 리 없다는 평범한 믿음에서 시작
되었다. 지구 중심설에 대항하는 그의  연구는 30대부터 시작되었지만 60대가  다 되어서야 
태양 중심의 우주 체계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도 자기 주장에 전혀 자신
감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주장을 발표했을 때 괜히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아 머
뭇거리다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출판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렇게 간신히 출간된 코페르니
쿠스의 책은 성서와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판금되었다. 그의 주장은  아무런 지지자도 
얻지 못한 채 1세기 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다. 
  다만 케플러가 코페르니쿠스의 영향을 받아 태양 중심설을 받아들이고 행성의 운행  궤도
에 대한 연구에 들어간 것은 커다란 소득이었다.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플라톤의 이론이 지
배해 왔다.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다.
  "우주는 신의 유일한 창조물로서 가장 완전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다.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모양은 구형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형체가 움직이는 경우에는 원운동을 한다. 왜냐
하면 영원히 반복할 수 있는 운동은 원운동이기 때문이다."
  플라톤 이래 천체 궤도가 완전한 원이라는 사실은 어느 천문학자도 의심하지 않았던 진리
였다. 그러나 케플러가 실증적으로 검토해 본 결과 행성은 태양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을 때 
가장 느리게 운행하고, 가장 가까이 있을  때 가장 빨리 운행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타원 궤도를 발견한 것이었다.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다가 재판을 받은  일화는 유명하다. 로마 교황
청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은 갈릴레오는 고문의 위협을 받고 자기의 소신을 꺾어야 했다. 그
리고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이때 재판이 끝나고 그가  했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
은 그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지어 낸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눈이 멀어 가면서도 혼신
의 힘을 다해 자기 소신을 기술한 저서는 밀추술되어 인류 과학사에 불후의 명저로 남게 되
었다. 
  한편 동양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우선 5세기 때 인도의 천문학자 아리아바타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것은 재미있는 주장으로서 존재했을 뿐 사회적으로 파장이 일어나지 않았고 반향도 없었다. 
이집트는 일찍부터 시리우스 별의 출현을 기준으로 삼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역법을 확립
했다. 그러나 너무 훌륭한 역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후  이집트의 천문학 연구는 쇠퇴하고 
말았다.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진  것이다'라는 천원지방 우주론이 
지배했다. 하지만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언급한 기록도 남아 있다. 
  우선 <상서>는 '땅은 항상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배 안에 앉아 있으면 배
가 
움직이고 있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라는 대목이 보인다. 또한 <
진서>의 <천문지>에는 '하늘은  북극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돌고 해와  달은 오른쪽으로  

다. 이는 이를테면 맷돌이 왼쪽으로 돌고 그 표면을 개미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것에 비유
할 수 있다. 그런데 맷돌의  회전은 개미의 걸음보다 빠르기 때문에  왼쪽으로 도는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해와 달은 실제로는 동쪽으로 가고 있지만  하늘의 운동에 끌려서 서쪽
으로 지는 것이다' 라고 함으로써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춘추>는 '하
늘은 좌로 돌고, 땅은 우로 움직이며' 라며 지구의 자전과 공전 현상을 인식하고 있다.
  케플러가 그토록 힘들게 발견했던 타원 궤도도 중국에서는 이미 3세기 때 장형이라는 위
대한 과학자에 의해 파악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들은  중국 사회를 대대로 지배했
던 자연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 관점 때문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플라톤 학파의 전
통을 이어받은 서양 천문학이 추상화된 하늘의 운동을 먼저 생각한 데 반해 구체적 현실과 
실용적 측면에 모든 관심을 가졌던 중국의 천문학은 하늘의 모양에는 별 관심 없이 각 천체
의 운동을 정확히 관측하고 관측 결과를  바탕으로 미래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데만  몰두했
다.

    태양의 완전 무결성
  중국인은 흑점이 태양 표면의 현상이라는 사실을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알았다. 이에 비해 
서양에서는 하늘을 완전 무결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태양의 흑점 같은 것을 믿지 않았
다. 서양인들은 태양의 불완전성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태양  흑점과 같은 태양의  '

점'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이 태양 흑점을 인정한 것은 16세기 무렵이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태양의 완전 무결성'에 개의하지 않았다. 태양 흑점에 대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은 기원전 4세기 감덕이라는 중국인 천문학자가 기록한 것이다. 그는 흑점은 태양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태양은 표면이 부분적으로 검어지는 특성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
었다. 또한 감덕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또 다른 천문학자 석신과  무함은 최초로 대성표를 
만들었다. 
  중국의 유명한 우주 과학자 추연은 자기 학파의 교육 과정에 흑점 관측 항목을 포함시켰
다. 그런데 기원전 4세기 인물인 추연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도 대단히 놀라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었다.
  중국은 불과 전체 세계의 81분의 1을 점하고 있다. 중국은 적현신주라고 부른다. 그  가운
데 9개의 주가 있으며, 이는 우임금이 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진정한 대륙의 수에 들
어가지 않는다. 중국은 9개로 이루어진 대륙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 대륙들이  진
정한 9주이다. 그 각각의 주를 작은 바다가 둘러싸고 있으며, 사람이나 짐승은 주에서  주로 
옮길 수 없다. 그러나 이 9주는 하나의 영역을 만들고 하나의 큰 대륙을 형성한다. 이와  같
은 커다란 대륙은 9개가 있으며, 그 바깥쪽에는 커다란 바다가 있다. 이 바다는 대륙을 둘러
싸고 하늘과 땅 끝까지 퍼지고 있다(사마천의 <사기>에서).
  중국 정사에서 최초로 흑점  관측 기록이 보이는  것은 기원전 28년 5월  10일이다. 이후 
1638년까지 중국 정사에 등장하는 흑점 관찰 기록은  100군데도 넘는다. 현대 천문학자들도 
중국 기록을 토대로 흑점 발생 주기를 계산하고 있다(태양 흑점은 약 11년을 주기로 증감을 
반복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일본의 한 천문학자는 중국 문헌을 분석하여 흑점 주기가 
975년이라고 주장했다.
  
    음력과 양력
  오늘날 전세계인이 모두 사용하는 달력, 즉 양력은 이집트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
고 음력은 중국과 메소포타미아, 인도에서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이집트인들은 풍요한  나일 
강을 끼고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문명을 꽃피웠다. 나일  강은 태양이 뜨기 직전 시리우스 
별이 나타나는 때 정확히 일 년에 한  번씩 범람했기 때문에 나일 강이야말로 그들의 가장 
정확한 달력이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흔히 음력 하면 비과학적이고 양력은 과학적이라고 생
각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7월과 8월을 나타내는 양력  이름인 July와 August는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와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름을 딴 것이다. 양력은 한 달  길이를 정할 때 30일과 31일을 
번갈아 쓰도록 하고 있었다. 그런데 7월과 8월이 생일인 두 황제가 그것을 축하하려고 연말
에서 하루를 가져다 '제멋대로' 7월과 8월을 계속 31일로  해 놓은 것이다. 이렇게 인위적으
로 달의 길이를 만들어 놓아 요즈음 어린이들은 달의 길고 짧음을 구별하기 위해 손등까지 
동원해야 하는 불편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음력은 달의 움직임을 토대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해의 움직임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정리되었다. 계절의 변화는 태양 운동을  기준으로 하여 별도로 입춘이
니 소한이니 해서 모두 24절기를 정하고 있다. 이미 중국  주나라 시대부터 태양이 지구 둘
레를 15도씩 옮겨 갈 때마다 절기를 하나씩 두어 모두 24절기를 두고 있었다. 

    궤변가의 시대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한비자가 말한 유명한 모순론이다.
  궤변 하면 곧바로 그리스의 소피스트가 연상된다.  그런데 소피스트가 서양에서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과 똑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동양에도 있었다. 바로 중
국 춘추 전국 시대에 활약했던 명가였다. 명가 가운데에서  장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공손룡
과 혜시가 유명했다. 특히 공손룡의 "백마는 말이 아니다"라는 말은 유명하다.
  '마'라는 말은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며, 하얗다는 것은 색깔을 말하는 것일 뿐 형태를 가
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흰 것은 말이 아니다. 말을 구하려는 경우에 검은 말이나  누
런 말을 내놓을 수 있으나, 백마를 구하려는 경우에 검은 말이나 누런 말을 내놓을 수는 없
다. 다만 색깔이 없는 말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하면 말 그 자체만 존재하는 것으로 될 수 있
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백마는 말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
다.
  또한 그는 "소의 다리는 5개이다"라고 주장했다. 소의 다리라는 일반 개념은 하나이다. 그
런데 소에게는 4개의 다리가 있다. 그러므로  "소의 다리는 5개이다"라는 말은 소의 다리라
는 1개의 일반 개념과 현실 개념으로서의 4개를 합하면 5가 된다는 논리인 것이다. 혜시 역
시 유명한 명가였다. 장자는 혜시가 죽었을 때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매우 슬퍼했다. 그는 "하늘은 땅과 마찬가지로 낮다. 산은 호수와 같이 평평하다" 라고 말했
다. 이는 하늘과 땅이 접하는 곳은 반드시 경계가 있으며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지표면의 
요철이란 극히 미미할 뿐이라는 점을 말한 것이다. 그는 또 "오늘 월나라를 떠나 어제 도착
한다"는 말을 했다. 이는 오늘날 최고의 과학적 진리로 알려지고 있는 상대성 이론에서처럼 
장소에서 다른 시간의 척도가 존재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또한 지구가 구형이라는 점을 인
식했다는 증거를 보여 주고 있다. 
  혜시는 "최대의 것은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 없어서 대일이라 불린다. 최소의 것은 소일이
라고 불린다" 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그는 '그 안에서  그 이하의 것을 포함하지 않는 소일'
의 개념을 주창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원자론과  동일한 주장이다. 혜시의  '궤변'을 몇  
개 
더 들어 보자.
  두께가 없는 것은 쌓아올릴 수 없지만 천리 사방을 덮을 수 있다.
  말에는 알이 있다.
  개구리에는 꼬리가 있다.
  불은 뜨겁지 않다.
  산은 입에서 나온다.
  수레바퀴는 대지에 접하지 않는다.
  눈은 보지 못한다.
  거북은 뱀보다 깊다.
  자는 직각이 아니며 컴퍼스는 원을 그리지 못한다.
  날고 있는 새의 그림자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강아지는 개가 아니다.
  백색의 개는 흑색이다.
  한편 그리스의 유명한 소피스트인 제논의 4개의 역설은 다음과 같다.
  1. 너는 경기장 끝에 도달할 수 없다. 너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 무한한 수의 점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아킬레우스는 결코 거북이를 따르지 못한다. 그는 우선 거북이가 출발했던 곳에 도착하
지 않으면 안된다. 그때 거북이는 이미 얼마만큼 앞에 가 있다. 이렇게 하여 그는 계속 접근
은 하겠지만 결코 거북이를 따라 잡지는 못한다.
  3. 날고 있는 화살은 정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정지해 있을 때 그 크기와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날고 있는 것도 항상  그 크기와 같은 공간을 차지
한다고 하면 그것이 움직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4. 2분의 1의 시간은 2배의 시간과 같다.
  이 가운데에서 3항은 혜시의 주장과 매우 비슷하다.  바로 "날고 있는 화살은 움직이지도 
않고 정지하지도 않을 때가 있다"이다. 동양과 서양 사이에  접촉이 전혀 없었던 시대에 우
연히 이렇듯 동일한 내용이 나온 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단계설을 주장한 바 있다. 즉, 식물은 식물적 영혼을, 동물은 식
물적, 감성적인 두 가지 영혼을 그리고 인간은 식물적, 감성적, 이성적인 세 가지 영혼을 가
지고 있다는 주장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순자도 이와 동일한 주장을 했다.  순자는 
기원전 3세기 사람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4세기 사람이다. 이를 두고 누가  누구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을 할  수는 없다. 이는 서로 다른  곳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이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의 쇠퇴와 소금
  그토록 화려한 문화와 선진 문명을 자랑하던 중국은 왜 쇠퇴했을까? 소금과 중국의 쇠퇴. 
겉으로 봐서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 같은  소금과 중국의 쇠퇴는 과연 무슨 관계가 있을
까?
  소금은 예로부터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식품이었다. 중국에서 소금이 국영 
사업으로 된 것은 당나라 말기 때였다. 당시 국가 재정은 완전히 고갈 상태였다. 그러자  일
상 생활의 필수품이었던 소금을 국영화하자는  묘안이 나왔다. 그리고 이를  실제로 시행한 
뒤 소금으로 얻는 수입은 국가 재정의 반에 이를 정도였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다. 당나라는 결국 소금의  전매 제도에 반대하는 소금 장수  황소의 난에 휘말려 
멸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은 국가 전매 제도가  매우 발달한 나라였다. 소금 뿐만  아니라 도자기, 차, 철 
등 중요한 일상용품이 모조리 국영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전매  사업의 엄청난 이익 때문에 
중국의 역대 왕조는 그토록 스케일이 크고 엄청난 부와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매 사업은 중국을 서양에게 뒤지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서양이 근대에 
이르러 발전을 거둔 원인을 한 마디로 말함ㄴ 자본주의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
본주의화에는 이윤 추구를 향한 상인과 생산자  계급의 이윤 추구가 죄악시되는 등  극도로 
억압되었다. 이러한 누적도니 전매 사업 때문에 중국은 결국 쇠퇴하고 만 것이었다. 예를 들
어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상업에서 나오는  이익을 국가나 사회의 이익과 배치되는  것으로 
간주하여 철저하게 억제했다. 
  중국의 강력한 관료 집단은 상인 및 생산자 이윤을 수탈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
고 있었다. 따라서 상인 및 생산자는 자본 축적의 기회를 철저하게 봉쇄당했고 중국은 자본
주의로 결코 전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고 정책화
되어 결국 중국은 서양에게 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의 반상업주의는 세계 무대
에서 중국의 퇴장을 초래했다.

    세계 최초의 대학
  한때 우골탑이라고도 불리던 '대학'.
  지금도 '좁은 문'인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젊은이들의  경쟁이 치열하다. 성적을 비관하여 
꽃다운 목숨을 끊는 경우까지 있다. 모두 학벌을 중시하는 사회 풍조에서 생겨난 비극이다.
  과연 대학은 언제 어디에서 생겨 꽃다운 청춘들을 괴롭히는 걸까?
  세계 최초의 대학은 바로 공자 선생까지 문하에 3000명도 넘는 제자를 모아 학문을 가르
친 데서 기원한다.
  한편 춘추 시대 제나라 수도인 임치의  직문 아래 설치되었던 직하 학사라는  아카데미는 
보다 형태가 다듬어진 것이다. "인사는 만사"라는 말처럼  치열했던 춘추 전국 시대에는 인
재를 얻는 나라는 승리를 거두었고  인재를 뺏긴 나라는 몰락해야  했다. 이를테면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라는 말로 유명한 관중을 얻은 제나라의 환공은 최초로 패자 자리에 군
림할 수 있었고, 법가 시대를 연 상앙을 얻은 진나라는  변방의 일개 소국에서 천하의 강국
으로 비약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각 나라는 모두 인재 등용에 승부를 걸었다. 이러한 때 
제나라는 학자들에게 재상과 맞먹는 대우를 해 주면서 천하의 재사들을 모아들였던 것이다. 
추연을 비롯해 순우곤, 맹자도 이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중국에 직하 아카데미가 융성할 무렵 그리스에는 '소요학파'가 있었다. 그 뒤 중국은 과거 
제도가 체계화됨에 따라 '국자감'이라는 공식적 형태의  대학이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7세기 
중엽에는 국자감에 5000명쯤의 학생이 다니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케임브리지 대학의 수준
과 비슷한 규모이다. 또한 8세기  때 중국에서는 '한림원'이라는 대학이  창립되었는데,  이 

학은 청나라 시대까지 존속했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대학은 최소한 유럽보다 10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왜 유교가 중국을 지배했을까
  중국은 역사 이래 지속적으로 유교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유교는 중국인들의 세계관을 지
배해 온 절대적 기본 원리였다. 유교가 나라의 지배 사상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시기는 한
나라 때부터라고 할 것이다. 당시는 무엇보다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평화롭고 
질서가 잡혀 있던 이른바 3대, 즉 하은주의 고대  시대를 모범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심화되
었다.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과 무질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에 기댈 수 있는 모범적 모델
을 구하려는 욕구를 증폭시켰는데, 여기에 공자가 이끄는 유가 사상이 부합된 것이다.  왜냐
하면 유가는 화이 사상을 주창하는 한편 하은주 3대의 모범 사회를 칭송하면서 중국인들의 
민족주의적 자존심을 고양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가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논리로 
천하의 질서를 강조하여 왕조의 안정화를 도모했는데, 이는 황제들의 이익에 전적으로 부합
되는 것이었다. 특히 유교는 인간  사회의 정연한 질서 추구를 목표로  함과 동시에 우주의 
도덕적 질서를 추구했던 신앙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천명사상으로 연결되어 
땅을 지배하는 천자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논리로 귀결되었다.
  또한 유교는 예절과 군자의 길을 밝힘으로써 개인적 수신의 방법론을 자세히 기술하여 개
개인의 삶에 흔들림 없는 지침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유가는 황제에서부터 
일반 백성 개개인들에게 어필하는 학문, 사상의 지침서가 된 것이었다. 진나라 때부터  통일
된 거대한 중국 대륙은 엄청난 수의 관료 집단을 필요로  했다. 이때 가장 광범위한 지식층 
집단이 바로 유가였다. 특히 공자는 자기가 그토록 열망했던  현실 정치에의 참여는 번번이 
무산되었지만 결코 실망하지 않고 묵묵히 3000명도 넘는 제자들을 양성하는 등 꾸준히 세력
을 키우고 있었다.
  역시 교육은 '백년대계'였다. 결국 공자가  실시한 교육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학은 
'학자'와 '행정관'에 대한 사회적 필요에 부응할 수 있었다. 아직  유방이 항우와 혈전을 벌

고 있을 때 이야기이다. 후에 대표적 유학자가 된 숙손통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유방에게 자기 제자  중에서 아무도 추천을 하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제자들은 
큰 불만을 떠뜨리게 되었다. 그러자 숙손통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 때는 용사가 필요하다. 지금 자네들은 추천해 본들 자네들이 살벌한 전쟁터에서 무
슨 공을 세울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난세가 지나가고 평화가 찾아오면 반드시 학자가 필요하
게 되는 법이다. 그러니 좀 참고 기다리게." 아닌게 아니라 그 뒤 한나라가 건국되어 창업이 
끝나고 수성이 필요하게 되자, 학자들이 나라의 확고한 지도층으로 부상했다. 또한 과거  제
도가 실시되면서 유학자들이 확대 재생산되었고, 이에 따라 그들의  지배적 위치는 더욱 확
고해졌다. 왜냐하면 역대 왕조가 계속 실시했던 과거 제도에서  유교 경전을 시험 과목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불로불사의 비법을 찾아서
  연금술이라는 말을 들으면 신비로운  아라비아 연금술사들이 연상된다.  서양에 아라비아 
연금술이 잘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금술이란 원래 중국의  음양 사상가들에 의해 기
원전 4세기부터 시작된 것이다.
  연금술은 연단술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불로불사의 약으로  달려진 단을 만들려는 신선
술의 일환으로 행해졌다. 특히 중국의 연단술사들은 물과 같으면서도 고체인, 즉 '살아 있는 
금속'인 수은에 주목했다. 그들은 단사를  중시했는데 단사란  바로 적색 황화수은으로  이
를 
재료로 황금을 만들고 나아가 이것으로 만든  음식을 먹으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뒤에 아라비아나 서구에서 유행되었던 연금술은 중국 연금술이 여러 형태로 
전래된 것이다.
  특히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추구한 황제였다. 그는 불로불사의 비약이 있다는 신선의 섬에 
'서시'라는 도사를 500여 명의 동남동녀까지 붙여서  파견했다. 그리고 불로장생술에 뛰어난 
도사들을 궁중에 불러들였다. 결국 이들의  행위가 속임수였고 그들이 자신을  비방을 하고 
다닌다는 사실에 분노한 진시황은 분서갱유의 폭압을 자행했다.
  한편 한나라 무제도 진시황만큼이나 불로불사와 연금술에  관심이 컸던 황제였다. 영웅들
은 영원히 살고 싶은 욕심도 더 많은 것인가.
  한무제는 난대, 이소군, 소옹이라는 방사(불로장생의 비법을  연구하는 도사)를 가까이 하
면서 죽은 황후의 영혼을 만나거나 신기한 요술을 펼쳐 보이도록 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방사들의 행위는 상당 부분 속임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들의 모든 행위가 속임수였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초보적인  마술과 과학에 접근하고 있었
다. 그들의 끝없는 연구와 무수한 시행착오로 화약이 발명된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또한 
이들의 경험으로부터 최면술이 발달했으며 약물학, 즉 '본초학'도 발달했던 것이다.
  음과 양이 서로 합쳐져 있네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광경
  남과 여의 형상으로 서로 꼭 껴안은 채
  용처럼 똬리 위에 다시 똬리를 얽은 채
  <백거이의 시에서>
  중국에서 연금술은 도가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도가 우화에는 '달에서 토끼가  신

을 위해 불로장수의 비약을 맺는 데 필요한 혼합약을 찧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연금술의 고전을  남긴 갈홍은 "도가들이 지고의 비밀로  존경하는 
것. 그것은 충만한 생을 얻는데 필요한 처방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은 피로  봉인
한 서약서 아래에서 처방전을 전수한다. 그러나 좋지 않은  부류의 인간에게 처방전을 전하
는 것은 천벌을 받을 범죄이다"라고 했다.
  중국의 연금술은 원래 불로불사의 비약을 찾으려고 연마되던 것이다. 그들은 당시로서 매
우 신기한 가변적 금속인 수은과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금을 숭상하여 단사와 금을 중시했다. 
한나라 무제는 특히 연금술을 좋아하여 많은 방사를 불러 들였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는 한무제 시대의 연금술에 대한 몇 가지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방사 이소군은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엌 신에게 제사를 모시면 귀신을 부릴 수 있습니다.  귀신을 부리면 단사를 변하게 하
여 황금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황금으로 그릇을 만들면 수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수명이 연장되면 바다 가운데에 있는 봉래산의 신선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신선을 
만나고 봉선을 하면 죽지 않습니다. 황제는 바로 그런 분입니다.
  소신은 일찍이 바닷가에 나가 안기생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소신에게 참외만한 대
추를 주었습니다. 그는 봉래산의 신선으로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은 만나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숨어 버립니다."
  그 날부터 황제는 부엌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또 방사를 동해 바다에 파견하여 안기생을 
찾도록 하고, 단사나 여러 약제를 합하여 황금 만들기에 골몰했다. 그 뒤 제나라 사람  소옹
이 귀신을 부린다는 소문을 듣고 황제가 그를 불러들였다.
  그 뒤 제나라 사람 소옹이 귀신을 부린다는 소문을 듣고 황제가 그를 불러들였다. 그즈음 
황제가 총애하던 왕 부인이 죽었는데, 소옹은 방술을 써서 밤에  왕 부인의 모습을 불러 보
이겠다고 했다. 과연 황제는 그 날 밤 왕 부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
고 소옹에게 벼슬을 주어 문성 장군으로 삼고 그에게 많은 보석을 하사했다. 
  어느 날 문성 장군이 말했다.
  "폐하께서 신과 통하시려면 궁궐과 의복을 신의 형상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에 황제는 움직이는 그림을 그린 수레를 새로 만들게 하고 승일에 맞춘 색깔(오행에 맞
추어 목은 토에, 화는 금에,  수는 화에 이긴다는 것이며, 이기는  날인 승일의 색깔을 쓰면 
악령을 쫓는다고 믿었다)을 칠한 수레를 타고 악령을 쫓고자 했다. 또한 감천궁을 신축하여 
그 안에 흙으로 쌓은 단을 설치했으며 하늘과 땅, 여러  신들의 모습을 그리고 제사 도구를 
갖추어 신이 강림하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일 년 이상을 기다렸지만 방술은 점차 쇠미해지고 기다리던 신은 오지 않았다. 초
조해진 문성 장군은 비단에 글을 써서 소에게 먹이고는 거짓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 소의 뱃속에 기이한 것이 있습니다."
  소를 죽이고 보았더니 과연 글씨가 나왔다. 그리고 글씨의 내용이 괴이했다. 하지만  문성 
장군의 글씨체를 아는 사람이 있어 결국 거짓이 탄로나고 말았다.
  문성 장군은 처형당했고 그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다.
  그 뒤 난대라는 방사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소신의 스승께서는 '황금을 만들 수 있고 황하가  범람하는 것도 막을 수 있다. 뿐만 아

라 불사약도 구할 수 있으며 신선도 불러 올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황제는 난대에게 몇 가지 방술시범을  보이도록 했다. 난대는 장기알들이  서로 부딪치고 
서로 따는 것 등을 보여 줬다. 황제는 난대에게 오리  장군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최고급 저
택과 기물, 1000명의 노비를 하사했고, 고주와 결혼시켰다. 그러면서 황제가 친히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때부터 난대의 집에는 선물을 전하려는 사자가 줄을 이었다.
  오리 장군은 언제나 밤에 자기 집에서 제사를 지내 신이 내려오게 했으나 신이 내려오기 
전에 백귀만 모여들었다. 하지만 오리 장군은 능히 그들을 부릴 수 있었다. 그는 그 뒤 여장
을 하고 동쪽으로 가서 바다 건너 자기 스승을 찾으러 간다면서 떠났다.
  난대는 황제를 뵌 지 수개월 만에 6개의 벼슬을  얻고 그의 존귀함이 천하를 진동시켰다. 
이에 연나라와 제나라에서는 흥분하여 이렇게 떠들었다. 
  "비밀의 방술을 가지고 있으면 능히 신선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난대는 바다로 가지 않고 태산에 있는 사당으로 갔었다. 황제가 사람을 몰래 보내 
그의 행적을 알아보니 그는 스승을 만난 적도 없으면서 자기 스승을 만난다면서 망언을 하
고 다녔던 것이다. 그의 방술도 더 이상 별다른 효험을 보여 주지 못했다. 이에 황제는 그를 
주살했다.

    <회남자>
  <회남자>는 기원전 120년쯤 한무제 시절, 회남 땅의 왕인 유안에 의해  저술되었다. 유안
은 도교의 원시 과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무제에 대한 반역죄에 말
려들어 행방을 감추고 말았다. 어쨌든 그가 지은 <회남자>라는 책에는 도교의 마술적 원시 
과학적 지식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 또한 그 책에는  연금술에 대한 다양한 기록도 나와 
있다. 예를 들어 주철에 산소를  불어 넣어 주철에서 탄소를  제거하는 '백련법'이 소개되고 
있다. 
  <회남자>에는 자연적인 과정을 거쳐  우주의 삼라만상이 만들어  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맑고 가벼운 것은 하늘을 이루며, 탁하고 무거은  것은 땅이 된다." 즉, 세상은 원래 '태시'
라는 원초적 혼돈 상태로부터 시작되어  우주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는 기를 
낳고, 그 기 가운데 말고 밝은 것은 하늘이 되며,  무겁고 탁한 것은 땅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천지는 다시 음양을 낳고 이로부터 사계절이 생기며 사계절은 만물을 
낳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신의 개입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인도와 아라비아의 연금술
  인도의 연금술도 금보다는 불로장생의 비약을 만드는 데 더 큰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영
약, 미약, 독약, 해독제 등을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밀교도 그들의 주술과 관련하여 연금술
을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그들은 수은 등 많은 화학 약품을 실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
라비아에서도 연금술이 매우 발달했다.
  9세기에 아라비아 연금술의 시조라 불리는 자비르는 황, 수은설을 발전시켰다. 그는  금과 
은 등의 비싼 금속은 금속의 원소 구성과 원성 구성의 비율을 바꿔 주기만 하면 된다고  믿
었다. 그는 대부분의 연금술사가 그랬듯이 한밤중에 남몰래 연구를 계속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연구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가 죽은 지 200년이 지난 뒤에야 그
의 집 근처 길을 고치다가 땅 속 깊은 곳에서  그의 연구실이 발견되었다. 놀랍게도 거기에 
커다란 금덩어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연금술의  결과로 만들어진 금덩어리인지 아닌지
는 밝혀지지 않았다. 
  뒤이어 '알 라지'라는 과학자는 황과 수은에 제 3의 요소로 염성을 추가했다. 어쨌든 아라
비아의 높은 연금술 수준은 화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알코올  같은 용어가 아라비아에서 유
래된 것만 봐도 아라비아의 높은 화학 수준을 알 수 있다.
 
    무지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광학은 아라비아에서 크게 발전했다. 아라비아에서 광학이 발달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라비아는 덥고 건조한 사막 기후이기 때문에 눈병이 많았다. 따라서 아라비아인들은 눈
의 구조에 대단히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광학에 대한 연구
가 활발했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 이래 인간들은 무지개에 많은 환상을 품어 왔다. 무지개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설레면서도 무지개가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는 알지 못했다.
  특히 아라비아 사막에서는 무지개에 대한 의문이 깊어진 것  같다. 아라비아의 유명한 과
학자 이븐 시나는 무지개가 만들어지는 이유에 대해 "그리스 철학자들이 말한  것은 납득하
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무지개가 활 같은  모양을 한 이유는 조그만 물방울들
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썼던 글에 나와 
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끝내 무지개가 수수께끼 같다는 결론만 내리고 말았다.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그가 죽은 뒤 250년이 지난 때였다. 
  이븐 알 하이삼의 '광학'을  공부했던 카말 앗  딘은 무지개가 왜 생기는가라는  오래 된  

수께끼를 반드시 풀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굴절의 원칙과 태양으로부터 방출되는 빛들의 행
동을 연구했으며, 유리구에 물을 채우고 습기찬 공기 속에서  그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도록 
하는 실험을 거듭했다. 결국 그는 무지개의 첫 번째 활 모양은 태양빛이 대기 중에 있는 물
방울 속에서 두 번의 굴절과 한 번의 반사 뒤에 관찰자의  눈에 도달할 때 생기며, 두 번째 
활 모양은 햇빛이 물방울에 들어가고 나올 때  생기는 굴절 외에도 물방울 안에서 두 번의 
반사가 일어남으로써 생긴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그리고 두 번째 무지개는 첫 번째와 일곱 
색깔이 반대로 배열된다는 것도 알아 냈다.
  10세기쯤 살았던 알 하이삼은 위대한 과학자였다. 
  그는 본다는 것은 인간의 눈이 물체에 광선을 보내면 그 광선이 반사해 인간의 눈에 돌아
오는 것이라는 유클리드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광선은 물체에서 온다고 주장했다. 그는 눈이 
렌즈 작용을 통해 바깥으로부터의 상을 맺고 이것을 시신경에서 포착한다는 사실을 밝혀 낸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사진기의 원리와 동일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광원
과 상점을 주고 거기에 상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거울의 어느 점에 빛이 입사되어야 하는
가라는 등의 반사에 대한 문제를 많이 만들었다. 서양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알 하이삼
의 문제라 불렀다.
  특히 그는 암실 한 쪽에 작은 구멍을  내고 그곳으로 광선이 들어오게 하여 반대편 벽에 
태양의 그림자를 비추는 방법으로 일식을  관찰했다. 또한 확대경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여 
오늘날의 볼록렌즈와 오목렌즈 이론에 도달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굴절  광학, 반사 광학, 
대기 광학 그리고 시각론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눈의 해부학적 분석에도 
성공했다. 
  해부학 분야에서도 아라비아인들은 놀라운 발전을 보여 주었다. 해부학은 신체를 직접 다
루는 만큼 어려운 문제가 많았으나, 아라비아 의학자들은 이를  묘지에 나가 시체를 관찰하
는 방법으로 해결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라비아에서는 일찍부터 제왕절개 수술 등 복잡한 
수술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아라비아인들은 운동 역학의 이론에서도 커다란 성과를  이뤄냈다. 운동 역학이야말로 뉴
턴의 만유인력 법칙이 출현하기까지 전혀 진전을 보지 못하던,  과학에서 최대 장애물 가운
데 하나였다. 그런데 10세기에 아라비아 과학자인 이븐 시나는 이 문제에 대해 놀라운 견해
를 밝혔다. 즉, '새겨진 힘' 또는 '경향'을 뜻하는 '마일'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
에 
따르면 자연 마일은 자연 위치로 물체가 떨어지는 경향이며, 강제 마일이란 자연 위치가 아
닌 곳으로 물체를 가게 하는 경향이다. 이븐 시나는 추진력을 양적으로 표시하려 했으며, 무
게가 클수록 마일이 크다고 했다. 이는 만유인력의 법칙과 대단히 유사한 견해이다.

    중국 제 1의 과학자
  중국의 '장형'이라는 과학자는 이미 2세기에 바둑판 눈금을 사용하여  훌륭한 지도를  제

하고 있었다. 
  장형(78~139년)은 중국 형주 출신으로 몰락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학문을 익
혔다. 그는 일찍이 15~16세에 비범한 문재를 과시했고 37세 이후에는 천문과 역법을 다루는 
태사령의 직책을 맡았다. 당시 그가 천문을 관측했던 천문대인 고영대의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장형은 태사령이 된  지 4년째 되던  해 '혼천의'라는 자동 천문  관측기를 발명했다.  

것은 톱니바퀴에 물시계를 연결시킨 것으로 지구의를 매일 균일하게 1번 회전시켜 천체 현
상의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다.
  장형은 진실로 뛰어난 과학자였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도참 신앙이  허위임을 주장하고 
이를 금지, 폐지시키자는 상소를 내기도 한 음양가였다. 그는  '과학적으로'  천지만물의 발

과 발전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월식이란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가릴 때 생기는 현상이라고 
정확하게 밝혀 내기도 했다.
  특히 그는 별들이 어떤 때  빠르게 운행하고 어떤 때 느리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별들의 
운행에서 나타나는 완급 현상은 '하늘에서 가까우면 느리고  하늘에서 멀면 빠르다'라는 말
로 
태양과의 원근 관계로 파악했다. 그런데 이는 서양에서 위대한  발견인 케플러의 법칙과 동
일한 것이다. 케플러의 타원 궤도 발견은 서양에서 전환기적 사건이었다. 서양에서는 플라톤 
이래 천체의 궤도는 완전한 원이라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그 '계율'이 17세기가 되어서
야 비로소 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의 장형은 이미 3세기에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국 중원에서 관찰할 수 있는 항성의 수를 2500개라고 주장했으며, 해와 달의 
시직경(관측자가 본 천체 직경의 시각)이 약 49분이라고 측정했다. 이는 오늘날 과학적으로 
파악된 수치와 거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세계에서 최초로 지진계를 발명한 장형은 정확한 지도를 인류 역사상 최초로 만든 사람이
기도 했다. 그는 116년 황제에게  '비조도'라는 지도를 만들어  바쳤다.  당시 그는 '하늘과 

에 좌표망을 치고 그것에 기초하여 계산하는' 방법으로 지도를 제작했다고 한다. 그것은 '지
구에 망을 친다'고 일컬어졌다.
  장형은 천문학 연구를 종합하여 <영현>이라는 저서를 냈다. 여기에서 '영'은 천문대를 가
리키며 '현'은 법칙을 의미하는 것으로,  영현이란 천문의 법칙이라는 의미였다.  이 책에는 

의 뛰어난 우주관이 다음과 같이 잘 표현되어 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달걀 껍질이 노른자를 포함하고 있는 듯한 커다란 둥근 모양이다. 하지만 무
한대로 넓다. 달은 그 자체로 빛을 내지 않으며, 달의 모습이란 태양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빛이다. 
  최초로 성좌표를 만든 사람도 장형이었다.  그는 성좌표에 무려 2500개의  별을 기록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고도의 과학 시대에도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볼 수  있는 별이 고작 
2500개쯤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장형의 정확함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그 뒤 267년에는 건설장관을 지냈던 배수라는 사람은 18매의 대지도를 만들어 황제
에게 바쳤다. 그것의 서문은 다음과 같다.
  지도와 지리학의 기원은 고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3대(하은주)에는 이를 담당하는 특
별 관리가 있었다. 
  한나라가 함양을 점령했을 때 소하는 진나라의 모든 지도와  문서를 수집했다. 그러나 지
금은 기밀 문서국에서 고지도를 발견할 수 없으며, 소하가 찾아 낸 지도도 볼 수 없다. 우리
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전도이든  지방도이든 모두 후한 시대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눈금이 
있는 분율을 이용하지 않았으며, 모눈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더욱이 명산이나 대천을  완전
하게 표현하고 있는 지도가 없다. 
  지도를 만들 때는 지켜야 할 여섯 가지 원칙이 있다.
  1. 눈금이 있는 분율은 그려야 할 지도의 축적을 결정한다.
  2. 평행선의 모눈은 지도 각 부분의 관계르 ㄹ정확하게 그리기 위한 것이다.
  3. 직각 삼각형의 변을 보측하는 것은 구하는 간격의 길이를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4. 고저 측정.
  5. 직각과 예각 측정.
  6. 곡선과 직선 측정.
  마지막 세 가지 원칙은 지형의 성질에 따라 이용하는  원칙으로, 실제로는 평원이나 구릉
을 평면상의 거리로 환산하는 방법이다.
  만약 분율 없이 지도를 만든다면  원근을 구별할 수 없다. 그리고  분율이 있어도 모눈이 
없다면 지도의 한 부분은 정확할지 모르지만 다른 부분은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모눈 원칙
이 정확하게 지켜져 있다면 곧음과 구부러짐 그리고 가까움과 멀리 있음은 그 형태를 감출 
수 없다. 중국에서 지도는 모두 기밀 문서국에 보관되었다. 당시 정확한 지도를 보유하는 것
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성공하는 열쇠였다.
  서양의 경우 중세 암흑 시대에 접어들어 지도 제작이  매우 부진했다. 그리하여 1150년에 
제작된 서양의 세계 지도는 지도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부끄러울 정도의 수준이었다. 15세기
가 되어서야 비교적 합리적인 광역 지도가 만들어졌다. 이는  중국의 장형이 정확한 지도를 
제작한 지 1300년이나 지난 뒤였다.
  
    자동 천문 관측기
  장형은 참으로 위대한 과학자였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 제작자이자 지진계를 만든 장형은 세계 최초로 천문 관측기도 
만들었다. 장형은 태사령이 된 지 4년째 되던 해에 수운 혼천의를 만들어 낸 것이다. 여기에
서 수운이란 물의 힘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수운 혼천의는 가운데가 텅 빈 커다란  동구로서 표면에는 별자리가 가득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천구의라고 불리기도 했다. 천구의 바깥 둘레에는 구리로  만든 바퀴가 여러 겹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이는 각각 지평선과 적도, 황도 등을 표시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혼천의에는 자동 장치가 부착되어 있었다. 이것은 고대에 시각을 재는 데 사용
했던 동호적루(구리로 만든 병에서 물방울이 샌다는 뜻으로, 밑에 구멍이 뚫린 구리병에 물
을 넣고 그 물이 새는 분량을  보고 시간을 측정하는 물시계였다)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
다. 즉, 수력을 이용하여 천구를 회전시켜 천체의 가장 기본적 자연 변화를  재현시킴으로써 
앉아서도 별과 하늘의 변화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

    한의학과 양의학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의사는 누구일까?
  기록에 나타나 있는 최초의 의사는 기원전 3000년쯤의 이집트인인 임호텝이다. 그는 이집
트의 제 3 왕조 시조인 조서왕의 시의였다.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1700년쯤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스미스 파피루스>에 주술적인  설
명 없이 외상에 대한 관찰과 치료 방법이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여기에는 48가지의 외상
과 골절에 대한 설명이 머리에서부터 신체 각 부분에 이르고 있다.
  특이한 것은 13가지의 질병에 대해 치료 불가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만
으로도 이집트인들이 이미 미신이나 주술 차원의 의학을 상당히 극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일찍부터 미라를 만들었던 이집트인들은  해부학과 생리학 분야에서도 상
당히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
  한편 중국 의학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인물은 편작이다.
  편작은 기원전 6세기쯤에 살았던 사람으로  서양에서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리스
의 
히포크라테스보다 이전 사람이다. <사기>에는 그가 기원전  501년에 진찰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이집트인 임호텝과 중국의 편작, 두 사람은 비록 동과 서의 양쪽 끝에서 살았지만, 무속과 
미신이 극성을 부리고 있던 당시의 주술적 질병관을 극복하고 합리적 질병관을 확립한 인물
이었다.
  이집트의 고대 의학에서는 마술의 범주가 많았다. 그들은 병이란 악마가 육체를 소유하여 
일으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의사의 몫은 이  악마를 몰아 내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의사는 
먼저 말로써 의식을 거행한 뒤 주문을 외우고 다시 손으로 의식을 한 뒤 약을 주는  순서로 
치료를 했다. 이집트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치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히포크라테스는 병의 원인을 신이 아닌 자연에서 찾았으며, 미신을 철저히 거부하고 병에 
대한 최종 진단은 조심스러운 관찰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은 기원전 3세기에 편찬된 70권으로 된 <히포크라테스 전집>에 기술
되어 있는데, 이 책은 사실 히포크라테스가 직접 쓴  것이 아니다. 날카로운 관찰, 합리적인 
치료법으로 유명한 이 책은 150여 년 동안 여러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그 일부만 히
포크라테스가 저술한 것이다.
  유명한 '히포크라테스 선서' 역시 히포크라테스가 쓴 것이  아니라 훨씬 뒤에 만들어졌다
고 
한다. 히포크라테스의 가장 큰 업적은 병의 경과를 기록한 임상 기록이다. 이 기록은 17세기
가 되도록 이보다 뛰어난 것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모범적이었다.
  한편 동양 의학의 서막을 열었던 편작 역시 만연돼 있던 당시의 미신적 의학 차원을 극복
한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의 병이 낫지 않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다. 
  1. 잘난 체만 하며 이치를 따르지 않는 것
  2. 몸보다 재물을 더 중시하는 것
  3. 먹고 입는 것이 적당치 않은 것
  4. 음양과 장기가 안정되지 않은 것
  5. 몸이 허약하여 약을 복용하지 못하는 것
  6. 무당을 믿고 의사를 믿지 못하는 것
  또한 그는 의사가 해야 할 네 가지 진찰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 안색과 혀의 검사를 포함한 환자의 신체 상태의 점검
  2. 청진 및 냄새를 맡는 일
  3. 환자의 의학적 내력을 묻는 일
  4. 맥짚기
  한의학과 양의학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무엇일까?
  한의학은 인체를 하나의 우주 및 유기체로 간주하고 몸 전체의 균형을 가장 중시했다.
  인체가 음과 양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파악하는 전통적 한의학은 음과 양의 소통이 
막히면 병이 생기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즉, 질병이란 전체 기능의 장애이자 평형 상태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전신 기능의 평형을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치료법 가운데 
하나는 막혔던 경혈에 침을 놓아 기의 흐름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평형 상태 유지  및 강화라는 예방 의학적 사상이  한의학의 기본 원리였다. 
인체를 유기체로 간주하는 이러한 사고  방식은 우주를 유기체로 파악하는  자연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양의학은 신체를 각각의 기관이 모여서 이루어 진 것으로 보았다. 이에 따르면 
질병이란 각 기관의 장애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의학은 유기체적 사고 방식
인 데 반해 양의학은 원자론적 사고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오래된 한의학의 고전은 <황제내경>이다.
  이 책은 전국 시대 의학이 한나라 때 종합 정리된 것으로 생리학과 병리학을 다룬 소문과 
침구술을 다룬 영추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황제내경>은 중국의 전통적 음양오해  사상을 의학에 연계  시키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오장 육부가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오장은 각각 목, 화, 토, 금, 수의  5행에 상
응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사람이 병에 걸리는 것은 밖으로부터 바람, 차가움, 더위,  습
함 등의 사기가 침입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또 인체는 경락으로 아주 잘 연결되어 있으
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은 인체가 갖고 있는 365개의 혈이라고 파악했다.
  그 뒤 후한 시대의 의학자였던 장중경은 고향에 열병이 돌아 가족 대부분이 죽자 의학 연
구를 시작했다. 그는 그의 저서 <상한론>에서 질병을  모두 양의 질병 세 가지, 음의  질병 
세 가지 등 여섯 가지로 나눠 열이 나는 모양이나 맥이 뛰는 정도를 중심으로 진단하고  있
다. 그리고 증세에 따라 담을 내게  하거나 토하게 하거나 설사를 하게 하는  등 각각 다른 
치료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기절한 사람에게 인공 호흡을 시켰으며, 음식과  질병과의 
관계를 연구했다.
  특히 장중경은 예방 의학을 강조했으며, 관장법을 실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수나라의 전설적 명의인 손사막은 무려 6500가지 이상의 처방이 기록되어 있는 그의 저서 
<천금방>을 통해 질병의 이치를 연구하는 의학과 환자를  치료하는 의술을 구분했다. 손사
막은 의사와 환자 사이의 윤리를 중시했다. 그는 환자가 부르면 언제나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약상자를 둘러메고 나귀를 타고  달려갔다고 한다. 또 멀리에서 온  환자는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면서 직접 약을 달여 먹이는 등 가족과 똑같이 대했다고 한다.

    왜 엉터리 의사를 좋아할까
  중세의 아라비아는 당시의 유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의술을 자랑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신장 결석 제거 수술을 했으며, 결장 수술과 눈 수술에서도 높은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의사는 사회적 지위가 높았으며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아라비아에서 의학에 대한 종합적인 저서를 처음으로 남긴 사람은  알 라지이다. 그는 바
그다드에서 병원을 경영하면서 홍역과 천연두를 처음으로 구별해 내는 등 의학적으로  커다
란 성과를 남겼다. 그는 무려 100여 권의 책을 남겼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은 <의학
대전>으로서 아라비아 최대의 의학서이며, 당시의 그리스, 인도 그리고 아라비아 의학을 종
합하여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양에 널리 보급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현재까지 18권이 번역돼있을 뿐 아직까지 완간되지 못하고 있다.  알 라지는 중국 의학과도 
접촉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아라비아는 중국 당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의학의 심리적 측면을 다룬 <정신적  형이하학>이라는 책도  남겼다. 이 책에는  '
왜 
사람들은 돌팔이와 엉터리 의사를  더 좋아하는가?' '아무리  재능 있는 의사도  모든 병을  

료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하여' 등 흥미로운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10세기의 사람인 이븐 시나는 아라비아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리는 인물로서  아라비아 
최대의 학자이다. 그는 척학과 과학의 방대한 백과사전인 <치료의 서>를 저술했고, 또한 의
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저작 가운데 하나인 <의학정전>을 저술했다. <의학정전>은 의학 백
과사전 같은 책인데, 이 책에는 중국 의학의 맥학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그는 특히  심신 
의학을 강조했다. 당시 한 왕자가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 왕자는 자신을 소라고 믿고 소  울
음 소리를 내면서 자기를 도살해  쇠고기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이 왕자를 이븐 
시나가 맡게 됐다. 이브 시나는 스스로 도살꾼으로 행세하면서 환자가 너무 앙상해 우선 살
이 쪄야 잡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왕자는 열심히 먹기 시작하여 결국 건강이 완전히 회
복되었다. 
  이븐 시나는 뇌막염을 정확히 파악했으며, 알코올을  소독제로 추천한 최초의 의사이기도 
했다. 의학 사상 가장 유명한 단행본인 <의학정전>은  12~17세기까지 무려 500년동안 유럽 
의학도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실로 서양  의학은 아라비아 의학의 토대  위에서 개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외과 계통으로는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

    오장 육부를 해부하라
  <삼국지>에서 화타가 명장 중의 명장인 관운장을 치료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뼈를 깎아 화살 독을 치료했다'는 내용이다. 화타가 관운장의  상처 부분의  뼈를 깎
자 
모두 아연실색하여 어쩔 줄 몰랐으나 정작  수술을 받는 관운장은 너무나 태연하게  바둑을 
두면서 담소까지 나누었다.
  또한 화타가 그 뒤 조조를 치료할 때  머리 뚜껑을 열고 치료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노한 조조의 미움을 받아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화타가 대수술을 할 때는 '마비산'이라는  마취약을 사용했다고 한다. 사실 
마취약 개발도 인류 의술사와 의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화타는 그 마취약
을 사용하여 종양 절제 수술과 제왕절개 수술, 그리고 장  절제 수술 등에 이르기까지 대수
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화타가 길을 가는데  한 뱃사공이 심한 복통으로 배를  끌어안고 뒹굴고 있었다. 
화타가 급히 가서 진찰하니 비장이 짓물러 즉시 수술하지 않으면 안될 위급한 상태였다.
  화타가 뱃사공에게 말했다.
  "비장이 짓물러 있으니 매우 위급하오. 금방 수술을 하지 않으면 위험하니 수술을 해야겠
소."
  뱃사공이 고개를 끄덕이자 화타는 바로 마비산을 먹였다. 그러자  뱃사공은 금방 혼수 상
태에 빠졌다. 화타는 즉시 개복 수술을  시작하여 환부를 잘라 내고 지혈, 봉합하여  수술을 
끝냈다. 그리고 수술 부위에는 새 살이 돋아나는 고약을 발랐다. 뱃사공이 마취에서  깨어나 
보니 죽을 것 같았던 통증이 씻은 듯이 가셨고  화타의 처방에 따라 약을 몇 첩 먹고  나자 
상처도 완전히 치유되었다.
  효과가 좋은 마취약이 많이 개발되어 요즈음은 마비산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화타는 양생술에도 뛰어나 '오금희'라는 보건 체조를 만들기도  했다. 오금희란 다섯 가지
의 동물, 즉 범, 사슴, 곰, 원숭이, 새의 동작을 모방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이 공원
에서 기묘한 모습으로 체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바로 화타가 만들었다는 오금
희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 의학은 음양의 원리와 오행설을 토대로 한 것으로 울, 기, 맥학, 침술, 뜸  그리고 여
러 가지 광물성 약품의 사용 등의 분야에서 세계 제 1의 수준을 자랑했다. 중국인들은 혈액 
순환, 내분비학, 당뇨병, 면역학 등에서 일찍부터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아라비아에서도 해부학은 매우 발달했다. 13세기의 아라비아  의사였던 이븐 안 나피스는 
심장의 격막은 단단하고 구멍이 없으며, 피는 폐를 통해  우심실에서 좌심실로 간다는 주장
을 했다. 그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번역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 세계에 알려질 수 없었다.
  오장 육부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는데, 여러분은 과연 오장 육부가 무엇인지 아는가?
  오장이란 간장, 심장, 비장, 폐, 신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육부란 담, 대장, 위, 소장, 
방광, 3초를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삼초의 정확한 부위와 위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십진법은 열 손가락에서 비롯되었다
  물건을 세고 이를 숫자로 기록하는 것은 인간 생활에서 필수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수학, 
아니 산수와 그 수를 기록하는 방법인 기수법은 인류의 어떤 문명에서나 일찍부터 발전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십진법은 어디에서 
처음으로 고안되었을까?
  십진법은 이집트인들이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십진법을 사용하게 된 원인은 잘 알려
지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손가락이 열 개인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많다. 그
런데 이집트인들이 사용한 십진법은 '0'의 자리가 없는 등  오늘날의 십진법과는 상당한 차

가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십진법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수학에 뛰어난 민족이었다. 특히 나일 
강의 범람으로 경작지 구획 사업이 항상 필요했으며, 일찍부터  피라미드를 건축해 왔기 때
문에 자연스럽게 기하학이 발달했던 것이다. 기원전 17세기에  쓰여진 파피루스에는 92를 2
로 나누는 나눗셈이 기록되어 있고, 원통형 곡물 창고의 용량을 계산하는 문제 등을 비롯하
여 모두 84개의 예제가 나와 있다.
  또한 그들은 분수도 사용할 줄 알았다. 다만 그들은 분자가 1인 분수만 쓸 줄 알았다.  예
를 들어 4분의 3은 2분의 1과 4분의 1을 합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이집트인들은 피라
미드의 외벽을 동일하게 51도 50분의 경사를 두고 쌓는 등 기하학이 매우 발달했다. 
  중국인이 십진법을 사용한 증거는 기원전  13세기에 쓰였던 갑골문자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문자에는 547일이 500과 40과 7일로 쓰여져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계산할 때 산목을 사
용했다. 그렇게 하여 10을 계산할 때 두 번째 칸에 1개의 산목을 놓고 첫 번째 칸은 공백으
로 한다. 11은 두 번째 칸과 첫 번째 칸에 모두 1개씩의  산목을 놓는다. 또 111은 첫째, 둘
째, 셋째 칸에 모두 1개씩의 산목을 놓게 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고대 시대부터 이렇게 십
진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10간이  분명한 증거가 될 수 
도 있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10간을 모든 때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판도 십진법을  이용한 계산기인 셈이다. 서양에서  십진법을 최초로 
사용한 증거는 976년에 어느 스페인 사람이 썼다는 원고에서 발견될 뿐이다.

    '제로'의 기원
  예를 들어 78971이라는 숫자를 보자.
  만약 7,8,9,7,1 등으로 표시되는 이런 기호의 숫자가 없다면 오늘날 우리가  숫자를 알아보
는 데 그리고 수의 기호를 기록하는 데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또 위의 숫자에서 7이라는 숫자를 보면 같은 7이지만 하나는 7만을 가리키고, 또 하나는 70
을 의미하고 있다. 같은 숫자라도 이렇듯 '자리'가 다르면 값이 다른 것이다.
  이와 같은 '자리잡기' 기수법이 만들어지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수학과 현대의 눈부신 과
학은 결코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1,2...9라는 기호의 숫자만으로는 숫자가 완벽하
게 배열될 수 없다. 18, 108, 180 등의 숫자에서 만약 0이라는 기호가 없다면 어떻게 그것들
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너무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0.
  0의 표시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약 0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 0없이 어떻게 계산이 가능하며, 수의 표시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가. 만약 0이라는 기호가 없었다면 현대의  과학 기술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0이란 기호는 수학의  계산을 능률적으로 하는 데 필수적  요소로 0의 발명은 
인류 문화 역사상 위대한 한 걸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0이라는 기호는 그리스, 로마, 이집트 등 모든 나라에서 수천 년 동안 발명되지 못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1억 이상의 큰 수를 나타낼 방법을 결코 알지 못했다. 0이라는  기호
는 인도에서 발명되었다. 인도식 계산법은 '자리잡기' 개념에  기초하여 10개의 기호를 사용
함으로써 큰 숫자들도 얼마든지  표시할 수 있었다. 595년  인도에서 이미 0이  사용되었고, 
78971과 같은 오늘날의 '자리잡기' 기수법이 정착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0이라는 기호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었을까? 그에 대한  정확한 해답은 없다. 다
만 그것이 태양을 상징하는 것이었거나, 아니면 악마를 상징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어쨌든 7세기 초에 살았던 인도의 유명한 수학자 브라마굽타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
이 기록했다.
  "어떠한 숫자에 0을 곱해도 결과는 항상 0이다."
  "어떠한 숫자에 0을 가감해도 그 수의 몫은 변하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수세기 동안 0이라는 구체적 기호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단지 그들은 0
이라는 의미를 산판 위에 공백을  남겨 놓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제로 기호를 공백에 원으로 그렸을 것이다. 어쨌든 중국에서 인쇄물
에 0이라는 구체적 기호가 나타난 것은 1247년이다.
  고대 인도의 최고 수학자인 아리아바타는 6세기에 <아리아바티야>라는 수학책을  저술했
는데, 그는 이 책에서 0의 자리를 설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더하기, 빼기, 곱하
기, 나누기의 가감승제 4칙 계산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제곱근과  세제곱
근을 구하는 방법도 소개되고 있으며, 원주율 값도 3.1416에 해당하는 값을 사용했는데 이를 
분수로 나타내어 20000분의 62832로 썼다.
  일본의 수학도 매우 뛰어난 수준이었다. 17세기에 이르러 일본의 전통 수학인 '와산'이 크
게 성장했던 것이다. 특히 와산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관효화'라는 일본 수학자는 서양의 뉴
턴이나 라이프니츠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원의 면적을 직사각형의 면적을 합하는  방식으로 
미적분을 정리해 냈다고 알려지고 있다.  물론 그들은 수학의 기본을  일찍부터 네덜란드를 
비롯해 서양으로부터 배우긴 했지만, 이렇듯 일본이 일찍부터 근대적  수학에 눈을 떴기 때
문에 근대화에서도 동양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아닐까.

    최고 수준을 자랑했던 중국 수학
  중국의 고전에는 오늘날의 컴퍼스와 자에 해당되는 '규거'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전
설적인 군주인 복희씨가 손에 자와 컴퍼스를 들고 있는 벽화까지 있다.
  조군경이라는 수학자가 2세기에 저술했다는 <주비산경>은 수학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책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놀랍게도 '직각 삼각형의  빗변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사

형의 면적은 다른 두 변을 각각 한 변으로 하는  2개의 정사각형 면적의 합과 같다'는 피타
고라스 정리의 증명을 다루고 있다.
  또한 1세기에 만들어진 <구장산술>이라는 책에는 원의 부채꼴 부분의 면적을 구하는  법
칙이 나와 있다. 모두 9장으로 된 이 책은 246개의 수학 문제가 문제, 해답, 풀이 순서로 수
록되어 있다. 그 대략적 내용은 1. 토지 넓이를 계산하는  38개의 문제 2. 나눗셈 중심의 곡
물 교환 문제 46개 3. 좀더 복잡한  비례식을 다룬 문제 20개 4. 제곱근과 세제곱근의  문제 
24개 5. 토목 공사에 대한 문제 28개 6. 곡물의 수송에 대한 문제 28개 7. 연립 방정식 문제 
20개 8. 방정식 문제(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방정식이라는 용어는 여기에서 비
롯되었다. 즉, 배열한다는 방의 식이 곧 정이었으며, 이들을 비교하여 계산한다는 뜻으로 방
정식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9. 직각 삼각형의 문제 24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고대 수학 문제를 풀어 보도록 하자.
  "지금 도랑이 있다. 위쪽의 폭은 1장 5척이고 아래쪽의 폭은 1장이다. 그리고  깊이는 5척
이며 길이는 7척이다. 과연 이 부피는 얼마일까?
  답은 4375척이다.
  봄철에는 흙을 하루에 766척 파내고 그것을 나르는 일은 그 5분의 1이 걸리기 때문에 1인
당 작업량은 612척과 5분의 4가 된다. 이 도랑을 파는 데는 인부 몇 사람을 써야 하는가?
  답은 7인과 3064분의 427이다."
  이 밖에도 각종 평면 도형과  입체 도형의 면적과 체적을 계산하는  문제, 식량의 교역과 
수송에 대한 문제 그리고 전답 면적을 내는 문제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얼마일까라거나 몇 사람이 필요할까의 질문은 모두 기하라는 말을  사용
하고 있다. 후세의 기하학이라는 용어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구구단 하면 대부분 서양에서 최근세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동
양에서는 이미 중국의 은나라 시대부터 구구단이 사용되고 있었다. 당시의 구구단은 일일여
일, 일이여이, 이삼여육 등 오늘날의 구구단과 완전히 동일한 방법으로 암송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방정식 풀이 방법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천원술이라고 불렸던 중국
의 방정식 해법은 10차 방정식 등 고차 방정식 해법에까지 도달하고 있었다. 13세기의 중국
은 수학자 주세걸이 지은 <사원옥감>이라는 책에 14차 방정식의 해법까지 나오는 등  중국 
대수학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리고 3세기의 <손자산경>에는 무한 급수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중국이들은 마이너스 기호를 기원전 2세기에 사용했다. 중국인들은 그것을 산판에서 검은 
산목으로 나타냈고 양수는 붉은 산목으로 나타냈다.
  3세기의 수학자인 유휘는 네모난 단면의 산목으로 음수를 나타냈고 삼각형 단면의 산목으
로 양수를 나타내기도 했다. 또한 특별한 산목을 사용할 수 없을 때는 산판 위에 산목을 비
스듬히 두어 양수와 구별했다. 양과 음의 부호는 중국  수학의 고전에 부분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299년 주세걸이 지은 <산학계몽>이라는 책이었다.
  이렇게 하여 마이너스 개념에서 중국인들은 서양인을  1700년이나 앞섰다. 인도에서는 수
학자인 브라마굽타가 630년에 처음으로 음수를 사용했다. 유럽에서  최초로 음수 기호를 사
용한 사람은 16세기 중엽에 살았던  제롬 카르뎅이다. 서양에서도 일찍이  그리스 수학자인 
디오판토스가 275년에 지은 저서에서 음수 기호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는 방정식 해법 과
정에서 나타난 음수를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부정했다.
  수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피타고라스는 음조가 현의 길이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달
은 뒤 '수'가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인식했다고 한다.  중국은 고대부터 대단히 수학이 발달
한 나라였다. 기원전 1세기에 지어진 중국 수학의  고전 <구장산술>에는 186만 867의 세제
곱근을 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분수의 4칙  계산, 양수와 음수 개념, 다
원 연립 방정식의 해법을 설명함으로써 세계 수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묵자>에도 기하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놀라운 내용이 나오고 있다.
  점은 넓이가 없는 선의 맨 끝을 나타낸다.
  평행이란 같은 높이를 뜻한다.
  부분은 전체의 일부이다.
  공간은 다른 장소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원이란 중심을 지나는 모든 직선의 길이가 같은 원형이다.
  원의 중심은 원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다.
  직사각형은 모두 4선분과 4직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둘보다 적지만 다섯보다 많다. 그것은 자리(위치) 때문이다.
  <묵자>에는 '정지한 물체는 외부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정지한 채 남아  있고, 운동

고 있는 물체는 변화가 없는  한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운동한다'라는 뉴턴의 관성의 
법칙(운동의 제 1법칙)과 동일한 내용이 보이고 있다.  즉 <묵자>에는 '운동의 정지는 저항
력으로 일어난다. 저항력이 없으면 운동은 결코 정지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 
기원전 4세기에 쓰여진 <묵자>에 이미 이러한 운동 원리가 나와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
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뉴턴의 발견보다 20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11세기의 수학자인 심괄은 극적술이라 불리던 무한 수열을 설명하고 있다. 심괄은 뛰어난 
과학자이자 수학자였다. 그는 일찍이 화북 지방의 산비탈에서 고생물의 화석과 지층을 발견
하여 하천의 침식 작용을 밝혀 냈으며, 바다와 육지의 변천을 지적했다. 또한 그가 나침반과 
지도 그리고 금속의 성질 변화에 대해 기록해 놓은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13세기 송나라 시대의 '진구소'라는  수학자는 <수서구장>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10차 

정식을 풀이하고 있었다. 당나라 시기의 대학이었던 국자감에서도 수학을 공식 과목으로 가
르치고 있었다. 당시 사용되던 수학 교과서는 많이 있었는데, 가장 어려운 수학책은 바로 수
학자 조충지가 지은 <철술>로 학생들이 이 책을 공부하는 데만 4년이 꼬박 걸렸다고 한다.
  또한 주세걸이 지은 <사원옥감>이라는  책에서는 이른바 '파스칼의  삼각형'이 설명되고 

다. 이는 파스칼보다 4세기나 빠른 것이었다.

    왜 동양이 뒤지게 되었는가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분모라든지 분자, 평방, 입방, 방정식 등의 용어는 이미 송나라 때
부터 중국에서 사용되던 것이다. 이에 반해 서양인들은 16세기가  되기까지 아직 고차 방정
식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듯 고대부터 높은 수학 실력을 가지고 있던 중국이 과학의 낙후 지역으로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란 중국인들이 <구장산술>의 문제에서 예를 든 바와 같이 수학을 
지극히 실용적 범주로만 사용하고자 했을 뿐 기호화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
다. 중국 수학은 이론적 추구보다 실용적 계산을 중시했으며, 따라서 기하학이라기보다 대수
적이었다. 기하학이란 공간의 수리적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인 데 반해 대수학은 수 대신 문
자를 기호로 써서 수의 성질과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어쨌든 <구장산술>은 1000년 이
상 중국의 산술을 지배한 뛰어난 책이었지만, 그것은 항상 대규모 수리 공사나 토목 공사를 
해야 했던 지배층 관료들의 현실적 필요성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은 수학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중국에서의 
수학은 다만 산수 차원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산술에서 동양 수학은 오랫동안 우월했지
만 기하에서는 서양이 월등하게 발전했다. 특히 서양에서는 일찍부터 자와 컴퍼스를 이용한 
작도로 수학을 연구하는 경향이 많았다. 플라톤이 아테네 교외에 세운 아카데미의 출입문에
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라는 경고문이 쓰여 있었다. 서양에서 수하그이 발
전은 17세기에 데카르트가 x축과 y축의 좌표축 개념을  도입하여 포물선 등의 기하학적 도
형을 이끌어 낸 데서부터 고급 대수학이 비로소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
한 해석 기하학을 토대로 물리학을 비롯한 현대의 과학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
다.
  
    가장 정확한 원주율을 위하여
  원주율, 즉 파이란 원주의 직경에 대한 비율을 말한다.
  일찍이 아르키메데스는 파이를 소수 셋째 자리까지  계산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소수 넷
째 자리까지 계산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그리스인은 소수를  사용하지 않고 거기에 상당하
는 분수를 쓰고 있었다.
  소수를 가장 먼저 사용한 것도 중국인이었다. 중국인들은 최소한 기원전 1세기에 이미 소
수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다. 기록에 남아 있는  가
장 오래 된 소수 기록은 10세기 다마스쿠스의 수학자였던 알 우클리디시의 저서에서 처음으
로 등장하고 있다. 어쨌든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연구된 원주율 값은 그 뒤 1500년이 지나도
록 서양에서 그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이렇게 하여 파이 값을 먼저 계산했던 것은 그리스인이었지만, 중국인들은 파이 계산에서 
훨씬 앞서 갔다. 3세기에 '유휘'라는 중국인 수학자는 원에 내접한 다각형을 192각형부터 시
작하여 무려 3072각형까지 좁혀 나갔다. 이렇게 하여 구해  낸 파이 값은 3.14159였다. 아르
키메데스도 원에 내접한 다각형의 각수를 점차 늘리는 방법으로  파이 값을 구했으나, 그는 
96각형에서 멈추었고 그렇게 하여 파이 값은 3.140과 3.142 사이의 값이라고 판단했던  것이
다.
  그런데 5세기에 이르러서 중국인 수학자  조충지와 조환지 부자는 소수 열째  자리가지의 
정확한 파이 값인 3.1415929203을 얻어 냈다. 이들이 사용한 방법은 이들의 저서가 몇  세기 
전에 없어져서 알 수 없다. 다만 다각형을 내접시키는 원의 직경이 3m였던 사실 정도가 남
아 있을 뿐이다. 조환지는 구의 부피를 계산하는 방법을 밝혀 낸 수학자로도 유명하다. 그로
부터 900년이 지난 1300년쯤에는 조우흠이라는 수학자가 무려 1만 6384각형인 내접  다각형
을 이용하여 조 부자가 구했던 파이 값이 정확함을 증명했다.
  여기에서 조 부자가 구한 파이 값은 서양보다 1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서양에서는 17
세기가 되어서야 아드리앙 앙토니스즌 부자가 소수점 일곱째 자리까지의 파이 값을 구했다. 
그러나 이것도 조 부자가 구한 것보다 세 자리가 적은  것이었다. 그 뒤 1717년 에이브라함 
샤프는 소수점 아래 72자리까지 구했고, 게오르크 베가는 136자리까지 계산했다. 이렇게  보
면 서양이 중국을 따라잡았던 시기는 17세기였다. 
  최근 영국의 한 기록광 택시 운전사는 파이 값을 소수점 이하 1만 2000자리까지 외워  세
계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파이 값은 컴퓨터에  의해 소수점 이하 10만 자리까
지 계산되고 있다. 과연 원주율은 끝이 없는가?
 
    아라비아 숫자가 아니라 인도 숫자 
  인도인들이 수학에 뛰어났다는 사실은 자러 알려져 있다. 현대인들은 특히 수학의 발전에
서 고대 인도인들에게 너무도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5세기 초 인도의 찬드라굽타 왕조 2세 시대, 당시 인도 천문학자들은 이미 지구가 둥글며 
자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수학자들은 음수(마이너스)와 2차 방정
식, 2의 제곱근 등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0의  개념과 기호, '아라비아 숫자'의 체계도 만들
었다. 이미 4세기의 인도에서는 십진법이 사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수학의 발명은 수
세기 뒤에 아라비아 수학자들을 통해 서양으로 소개되었다. 이  때문에 인도 숫자가 아라비
아 숫자로 둔갑하여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정작 아라비아인들은 아라비아 숫자를 
힌드사라고 하여 인도로부터 건너온 문자라고 인정하고 있다.
  인도의 세계 수학에 대한 기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기원전 2세기에 에파스탐바는 
왕이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제단을 건축하기 위해 기호학을 창시했다.  그는 예각과 직각 
그리고 둔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뒤 아리아바타는 삼각형의 면적을 내는 공식을 밝혀 
냄으로써 삼각법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삼각법의 발전으로 별의 운행 계산이 가능해졌다. 실
제로 아리아바타는 행성의 위치를 계산해 냈고 일식과 월식의  원인을 발견했다. 나아가 지
구의 둘레도 측정했는데, 그 수치는 오늘날의 수치와 거의 유사하다. 또한 그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도 알아 냈다.
  인도에서는 방정식도 일찍부터 발전했는데, 방정식은 아마도  행성 궤도의 주기성을 이해
하기 위한 과정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세 최대의 약학 대사전
  명나라의 훌륭한 식물학자 이시진은 1578년 위대한 약학 대사전인 <본초강목>을  저술했
다. 이시진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대로 의사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과거 시험에  몇 
차례 실패한 다음부터 약용 식물에 대한 연구 분야인 본초학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원래 
중국의 본초학은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 학문이었으며, 이에  관련된 서적만도 당나라 시
대 이후 여러 권에 이르고 있었다. 이시진은 이 전통을  이어받아 무려 1880종의 항목을 다
룸으로써 중국의 본초학을 집대성했다.
  여기에는 1000종의 식물과 1000종의 동물 그리고 많은 광물이 오늘날의 분류법에서  각각 
강과 목에 해당하는 16부, 60류로 구분되어 매우 치밀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각각에 대한 약
물학적 평가도 내리고 있다. 
  <본초강목>의 분석은 오늘날의 분석보다도 오히려 치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당
시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완벽한 약학 대사전이었다.
  이시진은 뛰어난 동식물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화학자이며 의사이기도 했다. 그는 
증류 방식과 천연두의 접종, 수은, 옥소, 고령토와 그 밖의 물질 사용에 대해 훌륭한 논문도 
발표했다.

    원자론
  원자론을 처음 개척한 사람은 인도인들이었다.
  인도인 하면 곧바로 명상이 연상되듯  예로부터 그들은 철학적 품성으로  유명했다. 고대 
인도의 여러 종교적 문학을 지칭하는 '베다 문학'의 '베다'가 '앎'을  뜻하는 데서도 인도인

의 탐구 정신과 철학적 소양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인도인들은  세상을 하나의 환상으로 
보았고 영혼과 신의 관계에 대해 깊게 사색했다. 그 결과 오늘날 인도인은 세계적으로 철학
과 정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대 인도인들은 물질의 근본이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소의 알맹이로 되어 있다고 생
각했으며, 그 근본 요소는 네 가지라고 생각했다. 바로 4원소설로 땅, 물, 불, 그리고 바람이
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이 물질적 최소 단위일 뿐만 아니라 최소 단위 시간 동안만 
존재한다고 믿었다.
  힌두교에서는 4원소 외에 하나의 요소가  더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  다섯 번째 원소는 
'아카사'라고 일컬어졌는데, 중국에서는 이 원소가 불교를 통해 '공'이라고  알려졌다. 그리
고 
이들 다섯 가지 원소는 인간에게 서로 다른 감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으로 이해
되었다. 즉 땅은 냄새, 물은 맛, 불은 색깔, 바람은 촉감 그리고 공은 소리를  느끼게 만드는 
것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인도인들은 이 원자가 영원 불멸이므로 우주가 멸망하더라도 원자는 그대로 있다가  그것
이 다시 조합되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게 된다고 믿었다.  인도에서 가장 대표적 원자론자
는 바이세시카 종파였다. 이들은 세계를 물질과 정신 세계로  나누고 물질 세계에만 철저한 
원자론을  적용했다. 이들도 4원소설을 주장했는데, 그 원자들이 아드리슈타라고 불리는 눈
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둘 또는 셋씩 결합하여  존재한다고 이해했다. 또 이들은 원자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로 크기가 없다고 파악했다.
  당시 서양의 그리스에도 4원소설이 있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불, 흙, 물 그리고 공기라는 
4개의 원소를 내세우고, 이들의 기본  요소로 '한없는 것'이라는 제 5의  요소를  내세웠다. 
그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4개의 원소론을  '물질'로서가 아니라 '성질'로 파악함으로써  건조함
과 
습함, 뜨거움과 차가움이라는 성질론으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서구에서  오랜 
기간 동안 지배적으로 군림했다.
  그런데 인도의 원소론은 기계적 물질관을 발전시키지 못한 채 결국 감각적 범주를 벗어나
지 못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인도의 원소론은  그리스의 원소론보다 내용적으로 풍부했으
면서도 후세의 물질관 발달에는 별로 기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장 위대한 역사서 <사기>
  독자 여러분은 몇 권의 역사책을 알고 있는가?
  <그리스 로마 신화> <삼국사기> <플루타르크 영웅전>...
  자신 있게 쭉 세어 나가 보지만, 결국은 몇 권 안돼서 멈추고 말 것이다.  <사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서 가운데 하나이다.
  <사기>는 기원전 1세기 한나라 무제 때 역사가인  사마천이 저술했다. 사마천은 흉노 토
벌의 영웅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 무제의 미움을 받아 죽음보다 더 치욕적인 궁형(남자 생식
기가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이때 사마천은 죽음에의 강렬한 유혹을 받았으나 위대한 역사
서를 후세에 남기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실행하고자 살아남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마천은 
그 뒤 자기에게 궁형을 내린 무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궁중에서 환관으로 봉사해야 했다. 그
는 그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유언을 실행하여 인류 역사상 최대의 역작이라 할 만한 <사기>
를 완성했던 것이다.
  <사기>에는 사마천이 겪어야 했던 쓰라린 운명에 대한 복합적 상념이 곳곳에 진하에  배
어 있다. 그리하여 첫 장은 '과연 하늘의  도란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절망적 질문을 던지

서 시작되고 있다. 무고한 사람을 무수히 죽이고 엄청난 도적질을 하면서 갖은 악행을 일삼
은 도척이라는 자는 호의  호식하면서 천수를 누렸는데, 절개를  지키면서 깨끗하게 살고자 
했던 백이숙제는 왜 수양산에서 고사리로 배를 채우며 굶어 죽어야 했는가? 과연 하늘은 정
의의 편인가, 아니면 악의의 편인가? 사마천은 통렬한 질문을 통하여 인간과 역사의 뒤틀림
을 고발하고 있다.
  <사기>는 황제 이야기를 다룬 본기, 왕과 제후들을 다룬 세가, 그리고 장군, 재상을 비롯
해 시정잡배까지 뭇 영웅들의 다양한 삶을 소개한 열전으로 나뉘어 있다. 이후 중국의 역사
서는 모두 <사기>의 모델을 이어받았다. 특히 본기와  열전의 명칭에서 유래한 기전체라는 
역사 기술 형식은 중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의 정통 역사를 서술하는 정형으로 되었다.

      제2장 풍속의 역사
    세계 최초의 성 교육서
  고대 인류가 암벽에 그렸던 암벽화를 보면 사냥에 대한 그림과 남녀 성 행위에 대한 그림
이 대부분이다. 역시 인류에게 남과 여 사이에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성이란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관심사인 듯하다.
  성경에는 '아담이 그의 아내 이브를 알았더니 이브가  잉태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히브리
어로 '안다'는 것은 성적 결합을 의미한다고 한다. 진정  인간이란 성적 결합 과정을 통해야 
비로소 서로 알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성교 체위에 대한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무
엇일까.
  바로 이집트에서 지금부터 3300년 전 파피루스 사본에 그려진 것이 가장 오래 된 기록이
라고 한다. 거기에는 열두 가지 체위가 그려져  있다. 즉, 양와, 횡와, 좌위, 입위의 네  가지 
체위를 기본으로 하여 각각 세 가지 체위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과 완전히 동일
하다. 
  세계 최초의 성 교육서는 2000년 전  인도에서 만들어진 <카마수트라>라는  책이다. '카

수트라'라는 말의 뜻은 '사랑의 경전'으로  바챠야나라는 독신승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카마수트라>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나는 베나레스에서 수도승으로서 학습생활을  하는 
한편 세상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성애에 대한 책을 만든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욕망을 만
족시키기 위한 도구로써만이 아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덕, 재물 그리고 관능적 쾌락에  대
한 욕망을 적절히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성에 대한 모든 지식과 가르침을 모아 1150편의 시송으로 여꺼옂 있다. 
1부에는 관능적 쾌락을 습득하기 위한  갖가지 기교를 소개하고 있으며,  아울러 성 생활에 
중점을 둔 생활의 모범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2부에는 성적 결합과 성기의 대소,  욕망의 
강도, 포옹, 키스, 애무, 구음, 태위 등에 대해서도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
라 손톱 자국, 치흔 등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카마수트라>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쾌락은 육체의 존재와 건강에서 음식물과 똑같이 불가결한  것이다. 쾌락은 미덕과 재물
의 목적인 동시에 그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지가 구걸한다고 해서 먹을 것을 장만하는 
것을 중지하고, 사슴이 작물을 망친다고 해서 농사를 포기할 사람은 없다. 미덕과 재물과 쾌
락을 골고루 실천하는 사람은 현세나 내세에서나 언제나 행복할 수 있다."
  <카마수트라>는 인도인들의 성 행위를 종교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이 책은 비록 성에 
대한 갖가지 지식과 정보를 매우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그러한 문제르 ㄹ매우 진지하
고 철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불교는  성에 대해 가장 폐쇄적인 종교
이다. 심지어 불교 경전에는 '설령  무서운 독사의 아가리에 남근을  집어 넣을망정 여성의 

부에 그것을 집어 넣어서는 안된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강한 부정은 역으로 강한 긍정을 내포하는 법이다.  밀교에서는 성에 대한 금령을 
오히려 뒤집고 있다. 그리하여 밀교는 "요니(여성의 성기)에 링가(남성의 성기)를 넣어 불타
의 일체를 사념하라"고 말하고 있다. 밀교는 '불성이란 여음에  머문다'고  믿고 있었다. 그

하여 그들은 신과의 완전한 결합은 성교에 입각한 명상 과정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했으며, 이에 따라 환희불이라는 남녀 결합 불상을 숭배했던 것이다. 
  <소녀경>은 중국 수나라 때 엮어진 성서이다.
  <소녀경>은 중국의 시조인 황제와 방중술의 대가인 소녀를 대화자로 등장시켜 성에 대한 
인간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음과 양의 교감에 의해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생성되고 변화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중국 민족은 당연히 음란하게 보일 
법한 <소녀경>에 한족의 시조로 숭배받는 황제를 내세울 정도로 성을 중요한 문제로  인식
하고 있었다. 
  또한 근엄할 것만 같은 맹자는 놀랍게도 "왕이 여색을 좋아하면 백성과 더불어 함께하라"
고 권고하고 있다. 특히 도교 사상에서는 남녀의 성이란 도의 달성에 방해가 되기는커녕 오
히려 그것을 돕는 것이라고 이해되었다. 그에 따르면 금욕이란  처음부터 불가능할 뿐 아니
라 자연의 위대한 섭리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도교의 방중술은 결국 '음과 양의 기
를 
합하여 생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또한 여성의 오르가즘은 남성의 생명력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때 남성의 사
정은 최대한 억제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남성의 정이란 그야말로 생명의 원천이었기 때문이
다. 여인드로가 교접의 기교는 사정을 참고 정자를 환류시켜서 뇌를 양생시키는 데  있었다. 
상대는 가능한 한 많이 바꾸고, 그리고  가능한 한 젊음 여성이 좋다고 권장되었다.  이렇게 
하여 도교는 성 행위에서 건강과 생명,  즉 불로장생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도교의 
비밀사원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집단적으로 어우러져 춤을 춘 뒤 사원 옆에 이어져 있는 방
에서 집단적으로 교합하는 의식을 갖기도 했다. 이는 사회적으로 맹렬히 비난받았지만 민간
에서는 몰래 전승되었다.
  결국 중국의 방중술은 음과 양의 통하지  못함에 따라 성욕이 극심해지면 가상의  귀신과 
교접하게 된다면서 성욕이란 결코 억압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성 생
활은 일방적인 과정이어서는 안되며 남녀  사이에 조화를 이뤄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횟수까지 구체적을 말하고 있다. 즉 20대는 4일에 한 번,  30대는 8일에 한 번, 40대는 16일
에 한 번, 50대는 21일에 한 번, 체력이 건강한 60대는 한  달에 한 번을 권하고 있다. 그러
나 방중술가들은 최상의 방중술이란 결국 '조용하고 편안한 가운데  정신과 뜻이 서로 감응
하여 양쪽이 상호 조화를 추구하여 함께 쾌감을 얻는 것'임을 강조했다. 
  중국 방중술은 특히 사정 억제술을 강조했다. 남성은 사정을 억제하면서 어디까지나 상대 
여성으로부터 기를 흡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성의 정액이란 생명의 기로  이해되었으며, 
이렇게 억제된 정액은 뇌에 환류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사정  억제술의 효능에 대해서는 오
늘날의 의학에 의해 부정되고  있는 추세이며, 더욱이 철저하게  남성 위주의 관점이었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역시 인간과 성은 분리할 수 없는 모양이다. 문자 형성에도 성 개념은 곳곳에 배어  있다. 
한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자의 예를 들어 보자.
  공: 남성 생식기르 ㄹ상징한 문자로 음경이 강조되고 있다. 이는 남성 지배 사회를 반영하
고 있다.
  토: 음경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토신을 모시는 제단을 뜻한다.
  타: 여성의 외부 생식기인 외음부의 그림으로 존재의 긍정을 의미한다고 한다.
  시: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 태아와 여자의 그림으로 여성의 태아, 즉 시작을 뜻하고 있다.
  불: 줄기에 붙어 있는 꽃 그림으로 이는 '높이  나는 새는  잡을 수 없다'는 추상적 개념
의 
기호였다.

    누가 춘화를 만들었을까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을 도와 역발산 기개세의 영웅 향우를 꺾고 천하를 얻게 만든 꾀주
머니 진평이 춘화를 만든 최초의 사람이라면 믿겠는가?
  춘화는 춘화도, 또는 운우도라고 불렀다. 말이 나온 김에 왜 운우지정이라는 말이  나왔는
지 아는가?
  때는 태고 시절, 전설의 왕 신농씨에게는 요희라는 막내딸이 있었다. 하지만 아리따운  그
녀는 시집 갈 꽃다운 나이에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뒤  고요산 중턱에 노란 꽃이 피
었는데, 그 열매를 따 먹는 자는 누구든 이성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하늘은 요희의 슬픈 운명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를 사천성의 무산으로 보내 구름과  비의 
신으로 만들었다. 그후 그녀는 아침에는 한 조각 구름이 되어 산골짜기를 어루만졌고,  저녁
에는 보슬비가 되어 세상에 내려가 가슴 속의 뜨거운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런데 춘추 시대 남방의 강국 초나라에 회왕이라는 정열적인 왕이 있었다. 어느 날 회왕
은 무산에 있는 아름다운 운몽 호수에서 놀다 깜빡 졸았는데, 어디선가 아리따운 여인이 다
가오는 것이었다. 바로 요희였다. 그리고 그녀는 불타는 정열로 회왕과 뜨거운 정사를  나눴
다. 이후 사람들은 꿈과 같은 남녀 간의 달콤한 정사를 운우지정 또는 운우지락이라 부르며 
자기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기를 동경하게 되었다. 다시 춘화 문제로 돌아가자.
  춘화는 남녀교합지상이나 남녀상교지형을 노골적이며 선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춘흥을 즐
기거나 성욕을 촉진시키려는 최음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춘화는 채색과 담채르 ㄹ사용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이었는데, 시간이 지남감에 따라 판화도 이용되었다.
  춘화는 기원전 2세기 한나라 재상  진평이 처음으로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 당시 한나라 
고조 유방이 죽자 미망인인 여후가 모든 권력을 쥐고 흔들 때였다. 그녀는 자기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은 무조건 죽였다. 그러니 건국 공신 진평의  운명도 바람 앞의 등잔불처럼 위
태로웠다. 이때 진평은 일부러 정사를 멀리한 채 주색에만 빠졌다. 여후는 이러한 진평의 모
습을 보고 그를 숙청하려던 생각을  접었다. 그때 진평은 화가를 불러  춘화를 그리게 하여 
향락을 즐겼던 것이다. 
  당나라 때는 춘화가 창가의  병풍으로 이용되었고, 호색 문화가  범람했던 명나라 시대가 
되면서는 더욱 유행했다고 한다. 일본은 호색 나라답게 춘화가 크게 발전했다. 일본  춘화는 
특히 남성의 성기르 크게 그리는 습성이 있었다. 이는 원래 커다란 성기의 주술력으로 마귀
를 쫓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춘화를 판화 형태로 만들어 대규모
로 유통시켰다. 시집 가는 여자에게도 야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춘화를 가져가게 했는데, 춘
화가 재앙을 물리치는 액막이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혼수 베개'라 하여 
혼숫감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남녀 칠세 부동석'을 강조하고 조금이라도 '야한' 노래는 남녀상열지사로 배

하는 유교 문화가 엄격했기 때문에 춘화가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궁중에서 왕자들의 성 교육을 위해 그리게 했다고 전해지며, 결혼을 앞둔 명문 가문
의 규수들은 빨리 임신하여 아들을 얻기 위해 예비 지식으로 춘화첩을 접했다고 한다. 기방
의 화류계에서도 춘화첩은 널리 퍼져 있었다.

    누구를 위한 매춘인가
  '갈보'라는 비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갈보의 '갈'은 '갈'이라는 한자어에서 비롯되었

고 한다. 그 뜻은 바로 빈대이다. 잘 알다시피 빈대는  밤에 기어 나와서 사람의 피를 빤다. 
이것이 밤에 '활동'하는 창녀에게 비유되었던 것이다. 윤락 행위와 매춘은 인류 역사와 더불
어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과연 매춘은 인간의 본성상 결코 없어질 수 없는 필요악일까? 
매춘은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일까?
  매춘 제도는 제사 의식과 관련이 있다는 설이 유력하다. 고대 바빌로니아나 이집트에서는 
무녀가 제사를 지낼 때 신전에서 제물을 가져오는 남자와 성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들이 낳은 아이는 나라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뒤에  오면서 돈을 받고 몸을 제
공하는 창기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어느 여성이든 반드시 평생에 한 번은 신전에 나가서 매춘을 
해야 했다고 한다. 신전 안에 일직선으로 난  도로에 여자들이 오늘날의 유곽처럼 일렬로 '

열'되면 그 앞을 남자들이 지나가면서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은전을 던지면서 "미리타 여신
의 이름으로 네게 축복이 있으라"라는 주문을 외쳤다. 이때 거절은 있을 수  없었다. 선택받
은 여자는 남자와의 관계가 끝나야 비로소 귀가할 수 있었다. 미인들은 바로 관계가 이뤄졌
지만 못 생긴 여자는 3-4년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관계를  맺은 뒤 남자가 여
자를 다시 유혹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중국에서도 춘추 시대의 초나라에서 재, 정, 색, 예를  두루 겸비한 창기가 존재했던 사실
이 굴원의 시에도 나오고 있다.
  중국의 귀주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  민족인 묘족 (묘족의 '묘' 자는  밭 전 자와 풀 
초 
자를 쓴 것만 봐도 이 민족이 일찍부터 농사를 짓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은 봄이 
되면 남녀가 들판에서 성 행위를 하는 풍속이 있었다. 이를 도월이라고 했고, 그 장소는  월
장이라고 불렀다. 행사를 치르는 때가 되면 남녀 모두 옷을 갈아 입고 치장을 했다. 그런 뒤 
남자들은 대나무를 엮어 만든 악기를 불면서 앞으로 나갔고, 그 뒤를 여자들이 방울을 흔들
며 따랐다. 이윽고 이들은 함께 어울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춤을 추며 빙빙 돌면서 종일 놀
았다. 그리고 밤이 되면 으슥한 곳으로 들어가 밤새도록 즐기다가 날이 밝아서야 헤어졌다.
  국가가 경영하는 창기 제도인 공창 제도는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만들어졌다.
  중국 춘추 전국 시대 때 최초로 패자 자리에 오른 제나라의 환공은 유명한 호색가인 동시
에 공창을 만든 인물이다.
  그는 내정은 포숙에게, 외정은 관중에게 맡긴 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절세 미희들과 환락
을 즐기며 날마다 유곽에서 놀았다. 환락에 빠져 헤매던 환공은 관중이 죽은 뒤 간신들에게 
둘러싸여 수많은 처첩들이 낳은 아들들이 벌이는  권력 투쟁의 와중에 유폐되어 굶어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시체는 60여 일이나 방치돼 있다가 겨우  발견되어 장례를 치를 수 있
었다. 
  또 그는 궁중 안에 여시 7개, 여려 700곳을 두었는데, 바로 이 여시와 여려는 오늘날의 공
창 제도라 할 수 있다. 이로써 국가가 경영하는 공창이 세계 최초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공
창제를 만든 가장 큰 목적은 바로 그곳에서 나오는 화대를 징수하여 국고 재정으로 흡수하
기 위해서였다. 국가 예산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벌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가 보다.
  유럽 최초의 매춘 제도는 그리스 아테네의 법률가인 솔론이 기원전 594년에 만들었다. 이
는 중국보다 50년 뒤진 것이었다. 솔론이 매춘 제도를 만든  목적은 문란한 성 풍속을 고쳐 
보려는 데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제도가 시행된 이후 오히려 성은 더욱 문란해졌다.
  
    식인종 이야기
  명나라 때 대기근이 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중국의 사천성 어느 마을에 젊은 과부가 시부모를 모시며  살고 있었다. 하루는 며느리가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시아버지의 말소리가 들렸다.
  "이제 먹을 거라곤 아무 것도 없소. 며느리라도 잡아먹는 수밖에 없지 않소. 사실 그 애는 
혼자 사느라 이제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겠소. 그 애를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잡읍시다."
  이 말을 들은 며느리는 크게 놀라 그 길로 친정으로  달아났다. 자초지종을 들은 친정 아
버지는 노발대발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 누구 마음대로 남의 딸을 잡아먹어."
  그리고는 자기가 잡아먹었다고 한다.
  식인종은 아프리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닌 모양이다. 식인 풍습은  오래 전 중국의 기록에
도 보이고 있다. <한서> <왕망전>에는 기원전 24년 장안에 대기근이 들어 수십만 명이 잡
아먹혔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인들이 만두 고기에 사람 고기를 사용했다는 소름 끼치는 이야기는 종종 들어 보았을 
것이다(그런데 만두라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원래  만두는 찐빵을 뜻하는 중국의 한자어이
다. 그런데 묘하게도 우리 나라에 들어오면서 내용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원래  만두라
는 말은 교자이다). 제나라 환공 때 간신으로 유명한 역아는 자기 아들을 삶아 환공에게 바
쳤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공로로 높은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중국의 일부  미식가들은 사람 고기를 '생각하는  고기', 즉 상육이라고 
하여 즐겨 먹었다고 한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도 식인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상육을 판매하는 시장은 청나라 말기까지  있었다. 그리고 명나라 때  사천성에서는 사람의 
상육이 남자는 한 근에 7전, 여자는 한 근에 8전을 호가했다고 한다. 이렇듯 여자가 더 비싼 
것이 이채롭다. 또한 1860년대 강소  지방에서는 상육 한 근에 90전  하던 것이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면서 130전까지 폭등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상육은 양고기 맛과 비슷하다
고 전한다.

    동성 연애의 기원
  최근 들어 동성 연애의 정당성 문제가 화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동성 연애는 어제 온르
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중국의 구중 궁궐 속에서는 별일이 다 있었던 모양이다.  한나라의 영걸 한무제는 특이하
게도 남색을 즐긴 황제로 유명하다.  그는 이연년, 등통, 한언 등  미모의 남성을 항상 옆에 
끼고 살았다. 그래서 "나가면 함께 타고, 들어오면 좌우에 모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어느 날 애제는 동현과 함께 낮잠의 단꿈을 즐기고 있었다. 한참 자다가 눈을 떠 보니 옆
에서는 사랑스러운 동현이 자고 있었다. 그런데 동현은 애제의 팔소매를 베고 자고  있었다. 
그냥 일어나자니 동현의 단잠을 깨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애제는 소매 깃을 잘라냈다. 이로
부터 동성 연애를 단수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듯 황제의 총애를 받은 동현의 위세는 대단
해서 실제로는 재상의 지위보다 높았다.
  또한 춘추 시대 위나라 군주는 용양군이라는 미소년을 하루도  떨어질 날 없이 총애했다. 
이로부터 동성 연애를 용양이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궁중 여인들의 동성 연애도 매우 성행했던 모양이다.  특히 궁중 여인들은 오로지 
왕 한 명의 '은총'만 바라고 살았다.  그러나 그 기회는 거의 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중에는 미희들만도 수백 수천 명이 넘었고, 그나마 몇 명의 뛰어난 여인들이 왕을 독점했으
므로 웬만한 여인들은 평생 은총을 받지 못한 채 피지도 못하고 지는 꽃이었다.
  우리 나라에도 궁중 여인들의 뜨거운 동성 연애 사건이 있었다.  그 야한 사건이 우리 나
라의 대표적 성군인 세종대왕 때 있었다면 쉽게 믿기지 않을 것이리라.
  세자의 첫 번째 부인은 질투가 심하다는 죄로 끝내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을 얻었는데 세종은 첫 번째 부인의 경우를 생각해 그녀와는 달리 이번에는 몸집도 작
고 여리게 생긴 여자를 맞아들였다. 세종은 세자의 첫 번째  부인이 잘못된 것은 폐빈이 몸
집도 크고 정열이 넘쳐 몸이 약한 세자가 눌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새로 얻은 세자빈은 겉보기와는 달리 보기 드문 색녀였다. 세자는 약한 몸에도 불
구하고 매일 밤 세자빈의 침소에 들러 성실함을 보였다. 그러나 도저히 세자빈의 욕구를 만
족시킬 수 없었다. 그러자 자연히 세자가 세자빈의 침소에 들르는 일이 점점 뜸해졌다. 세자
빈의 농염한 몸은 계속 타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세자빈의 침소에서 이상한 신음 소리가 계속  흘러 나왔다. 하지만 그 날 
세자가 침소에 들른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상대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세자빈의 파트너는 바로 세자빈을 모시는 시비였다. 두 여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
고 부둥켜 안은 채 뜨거운 정염을 불태우고 있었다. 시비는 남자 역할을 하고 있었고,  세자
빈은 여자 역할을 했다. 둘은 손발이 착착 맞았다. 뿐만아니라 이러한 동성애는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이제 세자빈은 '힘'이 약한 세자에겐 전혀 관심도 없었고 오직 
시비에게 빠져서 그녀와 항상 붙어 지냈다.
  옛날부터 구중 궁궐 깊은 곳에서 일평생을 처녀로 살아야 하는 궁녀들 사이에는 동성애가 
은밀하게 행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드러나지 않게 은밀해야 했다. 
만약 발각이라도 되는 날에는 당장 모진 매를 맞고 쫓겨나야 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마침내 세자빈의 농도 짙은 정사가 탄로나 세자빈은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 앞에 불려 갔다. 왕후가  진노하여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세자빈은 
사건의 모든 진상을 숨김 없이 털어놓는 것이 아닌가!
  "추야장 긴긴 밤에 그리고 춘삼월 꽃피는 호시절에 모든 만물들이 저마다 짝을 이뤄 즐기
건만, 혼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해야 하는지요? 그렇다고 남자를 끌
어들인 것도 아니잖아요."
  결국 세자빈은 폐출되어 친정으로 쫓겨났다. 하지만 세자빈의 아버지는 도저히 딸을 용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딸과 함께 목숨을 끊었다.
  이때의 세자가 바로 문종으로 그 뒤 왕위에 올라 불과 2년만에 어린 단종을 두고  세상을 
떴다. 단종의 비극도 폐출되어 생죽음을 당해야 했던 두 세자빈의  원한이 빚어 낸 것이 아
니었는지...

    1000년의 인물, 칭기즈 칸
  <워싱턴 포스트>는 1995년 12월, 지난  1000년 동안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칭기즈 칸을 꼽았다. <워싱턴 포스트>는 칭기즈 칸을 1000년의 인물로 선정하면서 "칭기즈 
칸은 사람과 과학의 기술의 이동으 ㄹ토앻 지구를 좁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세계를 뒤흔들
고 근본적 변화가 오게 만들었다"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칭기즈 칸은 인류 역사상  영토가 가장 광범위한 대제국을  건설한 주인공이며, 오늘날의 
정보 통신 혁명에  비견될 만한 정보  교통 통신의  혁명을 가져온 인물이다.  칭기즈 칸은 
1162년 몽골의 대초원에서 출생했다. 칭기즈 칸의 원래 이름은  그 아버지가 전쟁에서 사로
잡은 테무친의 이름을 기념하여 지은 테무친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비
참한 생활을 해야 했다. 
  테무친은 용맹스러운 젊은이로 성장했다. 원래 용맹함을  숭상하고 용맹스러운 사람을 섬
기는 몽골족은 점점 테무친에게 모여들었다. 당시 몽골족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가혹한 
통치에 눌려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족은 테무친이라는 영웅이 나타나면서 세력을 떨치
기 시작했다. 그는 차츰 세력을 규합하면서 1206년 몽골의 모든 부족을 통일시켰고 오논 지
방의 하반이라는 곳에서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었다. 몽골어로 '칭기즈'는 '절대적인 힘'이

는 뜻이었고, '칸'은 '군주'라는 뜻이다.
  처음 겨우 1만 명의 정예병으로 출발했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복 방향을  전세계로 
돌리기 시작했다. 칭기즈 칸이 죽은 1227년 몽골의 총 병력은 12만 9000명에 불과했다. 그리
고 당시 몽골의 인구는 100만 명이었다. 그는 놀랍도록  적은 병력으로 세계를 압도했던 것
이다. 
  우선 그는 1209년 탕구트족이 세운 중국의 또 하나의 강국인 서하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
았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이제까지 자신들을 지배해 온 금나라 공격에 나섰다. 이  와중
에 칭기즈 칸은 그가 파견한 상인들을 살해한  호라즘(오늘의 투프키스탄)을 응징하기 위해 
1219년부터 7년 동안 걸쳐 원정에  나섰다. 피해를 받으면 반드시  복수한다는 것이 초원의 
법칙이었다. 몽골군은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카스피해를 건넜고  다시 코카서스를 넘어 남러
시아 제후군과 싸워 각지를 약탈했다.
  그의 정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공격의 예봉을 중국으로 돌려 서하를 멸망
시켰다. 이때 그는 서하의 모든 성을 함락시키면서 모든 사람을 남김 없이 죽였다. 당시  굴
을 파고 들어가 숨은 몇 사람만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역사가들은 이때의 참상을  '

골이 들판을 뒤덮었다.'고 기록했다.
  금나라 정복을 눈앞에 둔 1227년  8월, 칭기즈 칸은 금나라를  정복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육반산 진영에서 숨을 거두었다. 황제가 된  지 22년째 되던 해였으며 향년 66세였다.  그는 
케르렌 강 상류의 기련곡에 묻혔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대장부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적을 정복하고 추격하여 그들의 소유물을 빼앗고, 그들이 사
랑하는 사람들을 울리고, 그들의 말에 올라타서 그들의 처와 딸들을 품에 안는 데 있다."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던 몽골 제국
  인류 역사상 최대 영토를 자랑했던 국가는 칭기즈 칸이 세운 몽골 제국이다. 몽골 제국은 
오늘날 최대 영토 국가인 러시아보다 훨씬  크고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의 상당  부분까지 
석권했던 나라였다. 
  몽골이라는 말은 '용감하다'는 뜻으로 원래  칭기즈 칸이 속한 부족의  이름이었으나  이
후 
전체 민족의 국명으로 되었다. 이제까지 흔히  사용되었던 몽고라는 한자어는 '어리석고 케

묵었다'는 뜻으로 중국인들이 몽골을 비하하려고 일부러  만들어 쓰던 용어이다. 몽골의 전

들은 가죽옷과 털옷을 입고 여섯 마리의 교대용  말을 끌면서 한 번에 열흘에 안장 위에서 
생활했다. 그들은 전투가 벌어지면 집단  전술을 구사했는데, 적이 추격하도록 유인한  다음 
순식간에 반격을 가한 뒤 포위하여 후속 부대와 단절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또는 많은 병
력을 양측에 숨겨 두고 중앙으로 유인되어 들어오는 적을 격파했다.
  몽골군이 이렇듯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에는 그들의 식생활 습관도 한몫 단
단히 했다. 어느 나라건 원정 군대의 가장 큰 애로점은 식량을 비롯한 물자 수송 및 보급문
제이다. 그런데 몽골 민족은 원래 '보르츠'라고 하여 완전히  말린 양고기를 먹는 관습을 가
지고 있었다. 그 고기를 물에 넣고 끓이기만 하면 금방 훌륭한 식사가 되었다. 원래  그들은 
초겨울에 양을 잡아 완전히 말린 뒤 이듬해 가을까지 이것을 먹었다. 몽골군은 공격에 나설 
때 각각 조그만 자루 속에 말린 양고기를 넣어 갔는데, 이것만으로도 수개월의 식량으로 충
분했던 것이다. 결국 이렇게 하여 몽골군은 식량 수송이라는  지극히 번거로운 과정을 혁명
적으로 간소화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이는 그들의 기동력을  극대화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헝가리에서는 불과 사흘 만에 270마일을 점령했다. 이렇게 하여 모스크바, 키예프,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아 다뉴브 강 유역을 침공했고, 아드리아 해까지 진출하여 역사상 전무  후
무한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다. 
  유럽이 몽골족의 말발굽 아래 제압되고 있을  때 쿠빌라이 황제가 갑자기 죽었기  때문에 
몽골족은 하는 수 없이 철수해야 했다. 만약 쿠빌라이가 죽지 않았다면 아마도 유럽 전역이 
몽골에게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당시 유럽은 결코 몽골의 적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몽골 제국은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세계 제국을 건설했다. 이로 인해 몽골 제국의 시기
에는 당연히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동양과 서양의 문물 교류가  활발히 전개될 수 있었다. 특
히 이 시대에는 세계 제국이라는  성격이 반영되어 지리학이 발달했다.  당시 주사본이라는 
지리학자는 '여도'라는 훌륭한 지도를 제작했다. 
  또한 몽골 제국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이슬람 천문학을 도입하여 새로운  역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슬람 정복 지역에 건설되었던  일한국의 수도 타브리즈에는 페르시아계 
천문학자인 나시르 앗딘의 지도 아래 대규모 천문대를 건설했다.  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천문대였다. 또한 이때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본>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등이 전래되었다. 이렇게 하여 천문학에 대한 서양의 많은 지식과 기구들이 도입되었다.
  이 시기의 유명한 천문학자는 곽수경이라는 학자인데, 그는 가장  훌륭한 전통적 중국 역
법인 '수시력'을 만들었다. 이 역법을 만들기 위해 그는 5년에  걸쳐 매우 정교한 관측을 했
을 뿐만 아니라 간의, 고표, 양의 등 열두 가지  천문 기구를 새로이 만들었다. 이후 중국에
서 400년이 지나도록 계속 사용되었던 이 역법은 일 년의 길이도 그레고리력과 동일했다.
  특히 간의란 '간략화한 천구의'라는 의미로 곽수경이 1270년에  만든 것이었다. 원래 산서
성에 세워졌다가 명나라 때 자금성의 천문대로 옮겨졌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 간의는 무
게가 수 톤에 달하고 중앙에 있는 자오환은 직경이 1.8m나 된다. 그런데  이 간의가 중요한 
것은 '망원경의 적도식 설치대의 선구'라는 점이었다. 곽수경은  서양의 황도식이 아니라 중
국의 전통적 방법인 적도식을 채택했던 것이다. 이러한 곽수경의 방식은 17세기에 서양에서 
천문학 관측의 천재로 불리는 '천문학의 불사조' 티코  브라헤에게 전수되었고, 지금도 서양
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무덤에 누워 있는 사람
  세계에서 가장 큰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여러분은 이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피라미드나 진시황릉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큰 무덤은 뜻밖에도 일본에 있다는  사실을 아실는지, 바로 닌토쿠라
는 고대 일본 천황의 무덤이 세계에서  가장 큰 무덤이다. 그 무덤은  5세기 고대 일본에서 
20년에 걸쳐 완공되었다고 전해지는데, 피라미드보다도 크고  중국 진시황릉보다도 큰 세계 
최대 규모이다. 이 무덤을 만드는 데 들어간 흙을  5톤 트럭으로 환산한다면 56만 2300대나 
된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조 건물 또한 일본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조 건물은 
바로 일본 호류사에 있는 본당 건물인 금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은 607년 쇼토쿠 태자
가 지은 것으로 히노키 숲의 나무 들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호류사의 건축 양식은 
백제의 건축 양식을 이어받은 것이다. 또한 호류사 금당에 있는 석가 삼존상은 백제의 기술
자가 만든 것이었으며, 호류사 안에 있는 백제 관음상 역시 백제인의 작품이었다. 아울러 고
구려의 불교승이며 화가였던 담징이 금당 벽화를 그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지상 최대의 불교 국가
  전 국민이 불교를 믿는 불교도의 나라가 있다. 바로 태국이다. 현재 태국에서는 국민 가운
데 무려 96%이상이 열렬한 불교도이다.
  태국에서 불교가 완전히 자리잡게 된 때는 15세기에 건국한  아유타야 왕조 때이다. 당시 
왕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들이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국민에 대한 교육도 불교 
사원에서 승려가 담당했다. 남자 아이들은  14~15세가 되면 모두 불교  사원에 보내져 승려 
수업과 점성술, 제약법 그리고 여러 가지  기술 등을 공부하게 했다. 전국 각지에  자리잡고 
있던 불교 사원은 잔치가 벌어지거나 길흉사가  있을 때 마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회합 장소였다.
  태국의 모든 예술도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태국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름답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는 불탑이 쉽게  연상된다. 사실 
태국에는 불교 국가답게 불탑이 엄청나게 많다. 그 가운데에서도 1424년에 건립도니 라차부
라나 사원의 고각탑이 가장 아름다운 불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태국인들의 국기인 킥복싱 때문인지 대부분 태국 국민들을 매우 거친 민족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태국 국민들은 불교 영향으로 매우 부드럽고  예의바르며 
남을 돕기 좋아하는 자비심을 지니고 있다. 또한 충효 정신과  모든 일을 함께하는 대동 정
신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세계 최대 사원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크메르에 있는 앙코르 와트 사원이다.
  크메르 왕조는 890년쯤 동남 아시아에서 가장 번성한  왕국을 건설했다. 그들은 인도차이
나 반도 끝에서 운남성까지 그리고 베트남에서  벵골 만에 이르는 대제국을 통치했던  것이
다. 이 왕국은 대규모 수리 공사를 통해 일 년 내내 벼농사가 가능하도록 만들었으며,  인도
에서 전래된 시바신과 비슈누신을 섬기는 사원을 짓기 위해 대규모 건축 공사도 진행했다.
  12세기 중반 수리아바르만 2세는 자신의 유해를 안치하고 비슈누 신과 자신을 영원히 동
일시할 수 있는 거대한 소우주의 건축물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앙코르 와트 사원이다. 동서 
길이가 무려 1500m나 되고, 남북으로 1300m나 되는  직사각형 구조로 되어 있으며, 비슈누 
신을 모신 사당의 높이는 34m이다. 앙코르 와트 사원은 광대한 규모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내부 벽에 새겨진 부조나 돌로 조형된 샘물 그리고 십자형 주랑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앙코
르라는 말은 '왕성'을 뜻하며, 와트는 '사원'을 뜻한다.
  그러나 이처럼 전성기를 누리던 크메르 왕국도 13세기가 지나자 쇠퇴했으며, 1431년에 이
르러 태국 군대의 침략을 받아 앙코르가 점령되고 크게 약탈된 뒤 몰락하고 말았다. 앙코르 
와트 사원도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불교  승려들에 의해 간신히 원형이 보존될 수  있었다. 
1970년대 베트남의 침략 때 낮에는 베트남 군이, 밤에는 크메르  군이 번갈아 점령한 채 전
쟁을 벌이는 바람에 크게 파괴되었다. 하지만 근래에 다시 복원 공사를 하여 최고의 관광지
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중국집은 왜 빨간 휘장을 할까
  중국집에는 반드시 빨간 휘장이 있다. '붉은 수수밭'이니 '홍등',  '패왕별희' 등 대부분의 

국 영화 화면은 언제나 짙은 빨간 색조로 자욱이 깔린다.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전쟁에 나
갈 때 붉은 깃발을 휘날리기 좋아했고, 반란군들도 홍건적이니 해서 빨강색을 숭앙했다.  최
근에는 모택동 군대도 빨강색 군대, 즉 홍군으로 불렸다.
  중국인들은 왜 이렇게 빨강색을 좋아하는가.
  중국인들은 옛날부터 빨강색을 기쁨의 상징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축제를 
하거나 그 밖에 즐거움을 표현할 때는 언제나 빨강색을  사용했다. 따라서 모택동이 공산주
의 이념의 이미지 색인 빨강색을 사용했을 때 그것은 묘하게도 중국인의 전통적 심성에 매
우 효과적으로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중국인들은 노랑색도 매우 좋아했다.  중국 민족의 시조로 추앙되는  인물이 황제로 
불리는 데서도 황색의 중요성은 잘 드러난다. 누런 황하 유역에서  누런 황토 땅을 밟고 누
런 황사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문명을 일으켰던 중국인들은 본능적으로 황색을  숭배했
다. 중국인들에게 황색은 힘을 상징했고, 청색은 평화를, 흰색은 슬픔을, 검은색은 파괴를 뜻
하는 색깔이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백색과 흑색을 기피했다.
  
    세계 최초의 공무원 임용 제도
  중국 민족은 영토가 넓은 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
고 할 수 있었다. 광대한 영토와 엄청난 인구를 가지고 있던 중국인들이 그것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시스템이 필요했던  것이다. 바로 봉건제와 군현제  그리고 과거 
제도였다.
  중국인들은 일찍부터 봉건제와 군현제라는 지방 행정 조직 체계를 도입하여 드넓은  영토
와 엄청난 인구를 효과적으로 통치해 왔다. 봉건제는 일찍이 주나라 시대에 창안되었다.  주
나라는 최근세까지 중국 사회에서 흔들릴 수 없는 모델로  추앙받던 고전적 사회였다. 특히 
주공에 의해 완성된 정전제를 토대로 하는 봉건제와 덕치주의를 중심 도덕관으로 삼았던 정
치 사회 체제는 이후 중국 역대 왕조 대대로 숭앙되었다.
  관료제는 중국 사회에서 요구했던 대규모 수리 및 토목  공사 때문에 만들어졌다. 만리장
성이나 대운하, 황하 유역의 치수 사업 등에는 필연적으로 대규모 인력이 동원돼야했고,  따
라서 그들을 관리하는 행정체제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관료제가 자연적으로 만들
어졌던 것이다.
  또한 진시황이 처음으로 실시했던 군현제는 현대 사회에서도 거의 수정 없이 시행되고 있
는 뛰어난 제도였다. 당나라 시대에 창안되어 송나라 시대에  완성된 과거 제도야말로 세계 
문명사상 중국 문명이 만든 위대한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왕족이나 귀족 출신만으
로 관료를 뽑는 제도 대신  세계 최초로 능력 본위로 선발하는  공무원 제도의 출발이었다. 
이 제도는 지금 생각하면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지만, 만약 이 제도가 없었다면 어떻게 
정부 관리들이 충원될 수 있었을까?
  중국은 과거 제도를 통해 권문 세족들의 횡포를 극복할 수 있었고 세계 최초로 능력 본위
의 문인 관료 계급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 02
    점을 왜 그토록 믿을까

  점이란 무엇인가?

  태고 시절부터 중국인들은 국가와 황제에 관련된  사건에 대해 점의 절차를 밟아  가부를 
결정해서 미래를 미리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오래된 방법은 잘 알려진 대로 거북 껍
질이나 소와 사슴의 어깨뼈를 가열하여 그로 인해 생기는  균열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거북 껍질이나 어깨뼈를 이용하여 예언하는 것을 복이라고 했다.
  주나라 시대에 이르러 띠풀을 이용한  방법이 생겼다. 이 방법은 띠풀의  줄기를 말린 뒤 
그것을 무작위로 해서 심지를 뽑는 방식이다. 전국 시대에는 <주역>에 나오는 삼효를 무작
위로 선택하고 이를 조합하는 방법이 생겼다. 이 방법은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 널리 유포되
었다. 그리하여 이때 이미 삼효, 육효에 의한 예언의 체계가 이루어졌다.
  중국의 점성술은 개인의 운명보다는 언제나 국가와 황제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건이라든지 
전쟁의 가능성이나 수확의 예상 등에 대해 이뤄졌다.
  중국의 전통적 음양 사상에 오행관이 결합된 것이 바로  음양 오행설이다. 음양 오행설이
야말로 전국 시대 이후 중국  사회를 지배해 온 기본적 철학이었다.  그리고 음양 오행설은 
우주 만물을 음과 양 그리고 만물의 기본 요소인 오행에 의해 분류하고 사물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며 체계적 인식을 구성하려는 중국인들 특유의 과학적 사고 패턴이었다.
  오행설은 이미 기원전 4세기에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오행이란 이 세상이 영원한 순환 운
동을 하는 화, 목, 금, 토, 수라는 5개의 강력한 기본적 힘에 의해 이뤄졌다는 확고한 믿음에
서 비롯되었다.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라는 행성 이름도 오행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오행은 위계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이다. 목은 토를 이기고 금은 목을 이기
며, 화는 금을 이기고 수는 화를 이기며, 토는 수를 이기고... 이와 같은 순환은 다시 반복된
다. 또한 거꾸로 나무는 불을 낳고, 불은 흙을 낳으며, 흙은 쇠를 낳고, 쇠는  이슬이나 액화 
또는 분비하는 과정에 의해 물을 낳고, 물은 나무를 낳는다.
  이렇게 하여 오행설은 상생설과 상극설로 전개되어 이후 한의학부터 역사 해석에  이르기
까지 동양 사상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고
대 중국인들이 생활 무대로 살아야 했던 황하는 엄청난 비바람과 홍수와 대가뭄이 교차하는 
악조건에 놓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은 여름의 극심한  혹서와 겨울의 혹한을 견뎌
야 했다. 이와 같은 특이한 기상 조건에 대한 비상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바로 중국
의 자연관이었다.
  "천지의 기가 서로 어울려서 비로소 만물이 형태를 이룬다.  남녀의 정이 일체가 되어 생
명이 태어난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기상 현상과 생로병사의 생명 현상 사이에 명확한 대응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전통적  음양 이론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음양가라는  명칭은 
한나라 때 만들어졌다. 
  중국인들은 의기양양할 때는 유교도이지만 인생에서 좌절했을 때는 노장교도가 된다고 한
다. 그런데 도교적 전통은 천 중심의 합리주의적 유교에 대항하여 땅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언제나 샤머니즘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노장교도는 도사 또는 방사라는 이름으로 불렸으
며, 그들에 의해 무속, 복점, 점성술, 풍수도참, 해몽  등 수많은 의사 과학이 행해졌고 이는 
민간 신앙으로 뿌리 내렸다.
  지구가 태양을 어떻게 회전하느냐에 따라 사계절이 분명하게 나뉘며, 만물이 그것의 지배
를 완벽하게 받는다. 인간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사람
이 완전히 다른 체형과 심리적 환경에 놓일 수 있는 것이다.
  40세가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얼굴을 보면 대강 그 사람의 성
격과 환경, 그 사람의 장래를 점칠 수도 있다. 따라서 사주나 풍수, 관상, 수상학, 그리고 해
몽은 완전히 근거 없는 허무맹랑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오히려 오랜 인간의 역사
에서 축적된 통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러나 팔자 타령이나 하면서 점이라든가  음양 오행설에 미혹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 일찍이 <한서> 예문지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하늘을 삼가 순종하고 일월성신을 일일이 본뜨며 백성에게 경건히 때를 내리는  것이 음
양 오행설의 장점이다. 그러나 변통성이 없는 자가 그 일을  하게 되면 금기에 이끌리고 작
은 일에 빠져 인사를 버리고 귀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게 된다."

    주역이란
  <주역>은 음양의 원리를 바탕으로 그 활용을 기술한  책이다. <주역>은 주나라 문왕 서
백 창이 유폐 생활을 하면서 정리해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대에 공자는 어찌나 <주역>
을 열심히 공부했던지 <주역>책을 묶었던 가죽끈이 세 번이나 떨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근래 들어서는 <주역>이 어느 한 사람이 지은 책이라기보다는 고대 시대부터  점 
치는 관습을 후대에 집대성한 것이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 있다. 아득한 옛날부터 점을 치
는 데 사용되었던 많은 재료가 오랜 기간  동안 축적되어 부호와 체계로 완성된 것이 바로 
<주역>이라는 해석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들은 진한 시대에  음양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
으면서 유학자들에 의해 정리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주역>은 결국 인간은 소우주이므로 인간의 운명은 대우주의 법칙과 비슷한 
법칙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 새나 벌레, 하늘의 조짐, 그리고  주관적 느낌 등 고대 농민이 해 온  길흉 
조짐에 대한 수집은 선사 시대부터 계속되던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공자가 살던 기
원전 6세기에 이미 성행하고 있었다. 그 수집에 의한  성과는 직업적인 점쟁이의 책들과 합
쳐졌다. 그리고 갑골점과 싸리나무 줄기로 하는 점 및 다른  형태의 예언에 관한 전총적 전
승을 보존해 나갔다. 이 과정은 중국의 우주 과학자  추연이 살았던 기원전 3세기까지 상당
히 발전했다.
  그리고 드디어 음양가와 그들 사상의 많은 부분을 수용한 진한 시대의 유학자들이 그것에 
해설을 추가했다. 이렇게 하여 <주역>에  있는 기호의 추상적 개념이  형성되었다. (Joseph 
Needham, <중국의 과학과 문명>2권).
  주역의 부호는 양효와 음효의 조합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것은 점을 칠 때 사용되었던 길
고 짧은 막대기와 관계가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또는 각각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것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각각 3개씩, 또는 6개씩 결합되어 8괘, 또는 64괘
가 되었다. 여기에 10간과 12지가 4방위를 매개로 다시  5행과 결합하여 옛날 풍수도사들이 
들고 다니던 '역반'이 만들어졌다. 이는  이후 중국, 한국, 일본에서  도읍이나 묘지의 위치, 

축물의 방향을 결정하는 '풍수설'로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음과 양은 어느 쪽이 우월하고 어느 쪽이 열등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상호 순환 관계만 있을 뿐이다.
  <주역>은 상징적 명제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주역>의 계사전을  보면 '글이 말
의 
전부를 기록할 수 없고, 말은 마음의 전부를 나타낼 수 없다'고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
튼 논리적이면서도 비논리적이며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는 <주역>은 사물의 양면성을  인정
하고 '궁하면 통한다'라는 동양적 운명관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또한  '변하면서도  변하
지 
않는다'는 <주역>의 순환론적 변증법 논리는 무궁무진한 변화  속에서도 변화하지 않는 합
법칙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모순을 들추어 냄으로써 부정적 결론을 내리려는 것이 아니
고 오히려 그 모순을 조화시키는 논리를 전개한다.
  이렇듯 <주역>의 변증법은 자연이 인간을  부정의 계기로 하여 다시 자연으로  복귀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헤겔의 변증법은  절대 정신인 이성이 자연을 계기로  자기 부정을 하여 
다시 이성으로 돌아온다. 여기에서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의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즉, 서양
인들은 자연을 매개로 인간이 스스로를 자각하고 인식하는 이성적 인간 중심 사상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동양인들은 대자연의 섭리를 인정하고 그것에 순응하는 직관적 자연 중심 사
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서양은 자연을 인간에  예속시켰지만 동양은 인간을 자연
의 일부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관과 자연관의 차이는  이후 동서양의 의식과 사회 
구조를 다르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포도나무와 장미
  한나라 무제는 '진황한무'라 하여 중국 역사상 진시황과  함께 과감하고 용맹스러운 불세

의 황제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 한무제가 가장 위협을 느낀  세력은 흉노족이었다. 한무제는 흉노족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감행하면서 한편으로는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서역 땅의  월지국(박트리아 지방)이 
흉노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그들과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 임무
를 장건에게 맡겼다. 황제의 어명을 받은 장건은 미지의 땅, 서역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도
중에 흉노족에게 잡혀 억류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10년을 살면서 흉노 왕이 짝을 맺
어준 흉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까지 낳았다.
  그러나 그는 하루도 어명을 잊은  날이 없었다. 드디어 틈을 노려  탈출에 성공한 장건은 
고생고생해서 끝내 목표 지점인 월지국에  도달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탓인지 월지국은 
이미 흉노족과의 적대가밍 사라져 있었다. 장건은 할 수 없이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돌아오
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중에 다시 잡혀 포로 생활을 한  그는 몇 년 만에 가까스로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한 장건은 자기가 겪은 체험과 각국의 사정을 자세히 기술한 
보고문을 황제에게 바쳤다.
  장건은 비록 황제가 내린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지만, 그의  여행으로 중국은 서역에 대해  
처음으로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비로소 중국과 서역의 길이 뚫리게 되었고, 실크 
로드라 불리는 비단길도 장건의  경험을 토대로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실크  로드는 무려 
6400km나 이어지는 길로, 중국 중원지방에서 출발하여  하서회랑 지역-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북지방- 파미르 고원- 중앙 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의  코스를 거쳐 지중해 동북안에 이
르렀다. 
  특히 장건은 이때 서역에서 품질이 매우 좋은 포도나무를  가져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호도, 석류, 참깨, 골파, 고수풀, 오이, 무화과, 잇꽃 등이 몇 세기에 걸쳐서 중국에 전래되었
다. 그런데 이들 이름에 호도처럼 호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것은 이것들이 서역의 '오랑캐' 
땅으로부터 전래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튼 실크 로드를  통해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었으며 중국에 호복, 호악, 호병, 호무, 호모 등 호풍이 전해져 왔다.
  이 무렵 중국의 많은 초목도 서역 지방으로 전파되었다. 감귤은 원래 중국과 티베트 국경
이 원산지였지만 이 시기를 전후하여 서역으로 전해졌고, 복숭아와  배도 이때 인도로 전해
졌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 낭만과 사랑의 이미지로  사람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장미와 국화가 실은 중국에서 서양에 전래된 꽃이라는 점이다. 장건의 여행이 있은 뒤 
몇 세기에 걸쳐서 장미, 작약, 진달래, 동백, 국화 등이 아름다운 꽃이 서양으로 건너갔던 것
이다.

    세계 최고의 미인은 양귀비와 클레오파트라인가
  동양의 미인 하면 양귀비가 떠오르고 서양의 미인 하면 클레오파트라가 떠오른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를 서양인으로 보기에는 약간 무리가 따른다.  그녀 역시 동양의 이집트인이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양귀비는 시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여인이다. 일찍이 '개원의 치'라 불릴 정도
로 정치를 잘 했던 당나라 현종은 사랑하던 아내를 잃고 정치에 아무런 의욕도 없이 하루하
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들의 아내인  양귀비를 보고 한눈에 반해 버렸
다. 현종은 즉시 아들을 다른 여자와 결혼시키고 그녀를 곁에 두었다. 그때부터 정사는 멀리
하고 오직 양귀비 곁에 있었다. 그들은 낮이나 밤이나 떨어질 줄 모르고 나이도 잊은 채 뜨
거운 정염을 불태웠다.
  이렇듯 황제가 향락에 젖어 정사를 게을리하니 그토록 위용을 자랑하던 당나라도  마침내 
국운이 기울었다. 곳곳에서 반란이 속출했지만 쇠약해진 조정은 반란을 막지 못해 서울까지 
빼앗겼다. 실로 양귀비는 나라까지 기울게 한 경국지색이었던 것이다. 현종과 양귀비는 밤에 
수천 명의 호위병들만 데리고 몰래 궁궐을 빠져 나갔다. 그러나 도중에 양귀비 때문에 나라
가 망했다며 분노하는 호위 병사들의 드센 압력 때문에 결국 배나무 가지에 스스로 목을 매
야 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 37세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프롤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이었다. 그녀는 마케도니아인
의 후예로서 이집트인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 그녀는 미인이라기보다 생기 있는 모습이었다
고 전해진다. 또한 그녀는 육감적 입술, 단호한 턱, 부드러운 눈매, 넓은 이마, 높은 코 그리
고 목소리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프크에 따르면  '줄이 많이 달린 현악기가 
울리는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뛰어난 미인들은 역시 보통 여자들과 뭔가 다른 점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양귀비가 시아
버지와 살았듯이 클레오파트라는 동생과 함께 살았다. 그녀는 동생인 동시에 남편이기도 했
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공동으로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뒤에 이
집트 원정에 나선 로마의 시저를 유혹하여 그와 이집트에서 2주일 동안 환락의 시간을 가졌
다. 그러나 그 뒤 태어난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케사리온이  시저의 아들인지는 확인되지 않
는다. 시저의 넋을 빼앗은 클레오파트라는 그  뒤 로마에 건너가 그와 함께 살았다.  하지만 
시저가 브루투스에게 암살 당한 뒤 그녀는 이집트에 귀국하여 아들을 즉위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41년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연인이 되었다.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가 악티
온 해전에서 패배하고 죽자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독사에 물려  목숨을 끊었다. 그녀의 나
이 39세였다.
  미인박명이런가! 동서양의 대표적 미인인 양귀비와 클레오파트라는 이렇듯 30대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다. 
  양귀비와 클레오파트라, 과연 누가 더 예뻤을까?
  양귀비는 날씬한 미인이 아니라 뚱뚱한 정도로  풍만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
도 실제로는 알려진 바와 같이 절세 미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그토록 
높았는지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여인은 나라를 기울게 하고 일세를 
풍미할 만큼 무언가 뛰어난 매력이 있었던 것일까?
  
    일부다처제의 기원
  오늘날 세계인들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크리스트교, 불교, 이슬람교 그리고  유교 
등 이른바 세계 4대 종교는 모두 동양에서 탄생되었다.
  크리스트교는 잘 알려진 대로 이집트의 압제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민족 출신인 예수가 마
구간에서 태어나 창시했고, 불교는 인도의 싯다르타 왕자가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하여 창
시했다. 그리고 종교로 보기에는 애매한 점이 많은 유교는 중국의 군자인 공자를 비조로 하
고 있다. 이 가운데 공자가 기원전  550년에, 석가는 기원전 560년의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것이 매우 흥미롭다.
  오늘날 콧대가 높은 도도한 서양인들도 한꺼풀만 벗겨 보면 그 정신의 고향은 동양인 것
을!
  한편 이슬람교는 한 손에 코란, 다른 한 손엔 칼을  들었던 것으로 유명한 마호메트가 만
들었다. 메카 상인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도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나  고
아가 된 채 할아버지 집에서 매우 가난하게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태양신의 예언자로 자
처했는데, 장성한 뒤 어느 대상 회사에 취직했다. 그런데 주인은 40대 초반의 미망인이었다. 
이미 두 번의 결혼 경력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성실하고 근면하며 총명한 그를 매우 신뢰했
다. 어느 날 여주인은 마호메트에게 시리아로 가는 대상을 인솔하는 책임을 맡겼는데,  마호
메트는 그 일을 훌륭히 수행했다. 그가 돌아오자 그녀는 청혼을 했고, 마침내 두 사람은  결
혼했다. 그때 마호메트의 나이는 25세였다. 
  두 사람은 6명의 아들을 낳았고,  부유한 생활 덕분에 그는  예언자로서의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40세 되던 해 하늘의 계시를 받았으나  처음엔 별 신통력이 없었는지 신도
들이 모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종교가 점차 박애 사상과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면서 세
력을 확대해 나가게 되었고, 마침내  아라비아 전역을 제압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이라
는 
말의 뜻은 '헌신자'이며 다시 말하면 신에게 헌신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코란이란  '읽어
야 
할 좋은 책'이라는 뜻으로 모두 114장의 대시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마호메트가 50세 되던 해 그의  반려자이며 동지였던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하늘의 뜻'으로 재혼을 했다. 하지만 신부는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샤'라는 어린이

다. 신부는 마호메트의 절친한 친구이자 제1심복의 딸이었다. 마호메트는 어린 아이샤가  장
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지켜 보곤  했다. 이후 마호메트는 3명의 여
인을 아내로 맞아들였지만 아이샤를 가장 총애했다. 3명의  아내는 모두 남편이 전쟁터에서 
전사한 여자들이었다. 이로부터 아랍권의 1부 4처제가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모든 남성들은 합법적으로 4명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아랍 남성
을 부러워하고 있다. 그런데 원래 일부다처제는 마호메트의 경우처럼 아랍 유목민들에게 흔
히 발생했던 전쟁으로 생기는 미망인과 고아 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였다. 그에 따
라 둘째, 셋째, 넷째 부인은 반드시 과부여야 했다. 하지만 후대에 오면서 돈 많은 부호들이 
과부보다는 어여쁜 아가씨들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또한 아라비아에서
는 일찍부터 쉽게 이혼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1400년 전에  이혼 제도가 이미 정립되어 있
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호메트는 1부 4처제를 지키지 않았다. 그는 10명도 넘는 여자와 결혼했다.  예언
자만은 예외가 인정되었던 것이다. 마호메트의 '여성 편력'  가운데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었
던 경우는 일곱째 부인이다. 일곱째 부인인 자이나브는 바로 그의 제2심복인 자이드의 부인
이었다. 더구나 두 사람의 결혼  중매자는 바로 마호메트였다. 어느날 마호메트가  자이드의 
집을 방문했을 때 자이드는 마침 외출하고 집에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실오라
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의 자이나브를 보았던 것이다. 그 순간부터 마호메트는 사랑의 덫
에 빠졌다. 이를 눈치챈 자이나브는 마호메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이드와 이혼했고, 이후 
두 사람은 결혼을 했던 것이다.
  마호메트는 참 여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 뒤에도 많은 아내를 맞아들였다. 당시 아
내들에게는 각자 마호메트와 잠자리를 같이할 순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호메트는 이
집트에서 온 노예 출신의 첩인 마리야에게 푹 빠져 순번을 어기고 몰래 그녀의 방을 찾아들
었다. 하지만 이것이 드러나는 바람에  다른 아내들과 심각한 실랑이가 벌어졌다.  코란에서
는, 알라 신은 오직 예언자에게만 원하는 여성과 함께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고 기술하
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코란에는 마호메트의 이러한 여성  관계가 숨김없이 기술되어 있
다. 어쨌든 코란은 인간의 왕성한 성 본능과 일부다처제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교와 유태교, 그 반목의 씨앗
  유태인들과 아랍인들의 적개심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 반목과 적대감의 
기원은 마호메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호메트는 원래 유태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사실 그가 창시한 종교는 유태교와 같은 뿌
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는 유태인들이 자기를 이해하고 협력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나아가 
경제적 지원까지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유태교와 마찬가지로 예배 방향을 
예루살렘 쪽으로 잡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유태인들은  마호메트가 스스로 예언자임을  자처하고 나오자 
그를 적대시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언자란 오직 유일한 선민인 유태인들 가운데서만 나올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구약성서를 인용하여 코란을 공격하
고 마호메트를 거짓 예언자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마호메트는 크게 당황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투쟁밖에 없었다. 그는  예배 
방향을 메카로 돌렸고, 그들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동시에 그만의 독특한 종교 이론을 개
발했다.
  구약성서에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가 아브라함이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호메트는 
바로 그 아브라함이 유태인이 아니라는  점에 착안했다. 또한 유태교나 기독교,  이슬람교는 
아브라함 이후에 여러 예언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였다. 유태교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
하고 있던 열두 종족 가운데 마지막까지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유다족이  확립했던 
종교였다. 여기에서 마호메트는,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의 종교를 복원시킨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이슬람'이라는 말은 '신에게  귀의한다' 또는 '신에게 복종한다'는 뜻

다.
  어쨌든 마호메트가 이러한 점에 착안하고 새로운 논리를 개발한 것은 커다란  행운이기도 
했다. 이 논리는 아랍인들에게 크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즉, 도시인들이 확립한 유태교나 기
독교보다 유목민이었던 아브라함의 종교는 역시 유목민이었던 아랍인들의 정서에 맞았던 것
이다.
  
    연꽃 속에 있는 보석이여
  인도 카주라호 지방에 있는 사원에는 수많은 남녀 조각상들이 있다. 그런데 그 남녀 군상
들이 성애의 향연을 벌이는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환희에 찬 남녀의 얼굴 표정, 각 부위  근
육의 움직임 그리고 지금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갖가지 포즈로 리얼하게  표현되어 
있다. 남녀의 성애와 에로틱한 관능을 표현한 이 미투나 상은 해탈과 창조의 기쁨을 표현한 
탄트라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찍부터 인도인들은 남과 여가 하나가 되는 성 행위를 통
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 불과 4000명 정도의 인구만 살고 있는 사원의 도시, 카주라호에 있는 이 '야한' 조
각 작품들은 지금부터 1000년 전 찬델라 왕국 전성  시대에 100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원래 
85개의 사원이 있었으나, 이슬람교도들의 침입 때 파괴되어 지금은 22개만 남아 있다.
  인도의 민간인들이 가장 널리 섬기고 있는 신은 바로  시바신과 비슈누 신이었다. 그들은 
시바 신의 상징으로 링가(남자의 성기)를 숭배했으며, 비슈누 신은 태양의 활동을 암시하는 
신이었다. <리그베다>는 신을 찬양하는  서정시적 송가로 모두  1028수의 노래를 수록하고 
있다. '베다'라는 말은 인도어로 '지식'을 뜻한다. 또한 인도 고대 서사시인 <바가 바드키타
>
는 힌두교의 철학적, 종교적 교훈을 담고 있다.
  13세기 '자야데바'라는 시인은 엄청난 괴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크리슈나'라는  전설
적 
목동과 젖을 짜는 여인인 라다의 에로틱한 사랑을 '크리슈나의 노래'라는 시로 표현했다. 원
래 크리슈나라는 말은 '검은 것'을 뜻하는데,  그는  목동으로 태어나 소의 파수꾼이  되었
다. 
그는 유괴와 약탈을 능사로 한 의적이었으며, 기혼자인 라다와 간통을 했다. 라다의  크리슈
나에 대한 성적 열정은 영혼의 강렬한 갈망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인간의 본원적 
욕망의 실현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러한 크리슈나는  민간에게 숭앙의 대상으로 영웅시되어 
갔다.
  한편 피의 제식과 섹스의  향연으로 유명한 밀교는  원래 '비밀 불교'라는  말로 6세기에  

작되었다. 그것은 인도 등 북부에서 성행했으며 티베트 종교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밀교  경
전은 <탄트라>로, 오늘날까지 활발한 요가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밀교가 원래
부터 성과 밀접한 것은 아니었다.  밀교는 본래 개체와 전체의 신비적  합일을 목표로 하는 
종교였다. 그러던 것이 좌도 밀교의 종파에서 특히 성적인 측면이 발달한 것이다.
  밀교는 특히 생산력과 결부된 여신을 숭배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생명이 어
머니의 자궁에서 잉태되기 때문에 지모신을 숭배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시바 신을 숭배했으
며, 심지어 '링가야타'라는 남근을 숭배하는 밀교의 일파도 있었다.
  밀교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를 공유해야만 가능했다. 다섯 가지란 술, 생선, 고기, 
볶은 쌀 그리고 무차별 성교였다. 이 공유의 최종 단계에서  비로소 모든 사람과 사물이 평
등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티베트인들이 외우는  가장  유명한 주문은 '옴 마니  밧메훔'인
데, 
그 뜻은 '오, 연꽃 속에 있는 보석이여!'라는 것으로 실은 신적인 성교를 상징하고 있었다.
  이러한 밀교는 인도의 악명 높은 카스트 제도의 브라만 계급 사회와 힌두 의식에 대한 반
발과 저항의 상징으로 유지되었다.
  그리하여 밀교는 당시 인도 사회에서 극한적으로 차별받고 있던 여성과 카스트의 모든 계
층에게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다. 이들은 기도와 신비한  주문을 외웠고 '만달라'라는 도상을 
존중했으며, 특수한 신을 숭배했다. 이렇게 하여 이들은 필연적으로 비밀스러운 집회와 의식
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문화 유산들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은 '강 사이에 있는 땅'이라는  뜻으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지역을 가리키며, 정확한 지형적 위치는 오늘날의 이라크에 해당되는 곳이다. 
  기원전 5000년쯤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수메르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된 문명을 만
들었다. 그리고 이보다 이른 시기인 기원전 8000년의 신석기  시대에 이미 곡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사육했다고 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회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다.  그러한 조건에서 그들은 무언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있다고 믿었고, 자연히 천체 현상과 인가의 운명이 서로 연관
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일찍부터 점성술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지구라트'라는 천문 관측소에서 매일 세심하게 천체를 관측했다.  그들은 별을 신의 모습으
로 이해했다. 그에 따르면 하늘을 지키는 해, 달, 금성의  세 별은 땅의 신인 벨의 사자들이
었다. 그러므로 성서에 나오는 유명한 '바벨탑'은 하늘에 있는  신들의 뜻을 읽기 위해 만들
어진, 실제로 존재한 탑이었다. 또한 이들에 따르면 화성은 죽음의 신이었고, 토성은 전쟁의 
신이었으며 수성은 지식의 신이었다. 그리고 목성은 바빌론을 지키는 시성이었다.
  이러한 기본 논리를 바탕으로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점성술을 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달이 뜰 때 태어난 아이는 일생을 화려하고 행복하게 오래 살 수 있다고  생각
했다. 그리고 화성이 뜰 때 태어난 아이는 곧 병이 들어 죽는다고 믿었다. 목성이  떠오르고 
금성이 지고 있을 때 태어난 아이는 나이가 들어 다복하지만 아내를 버릴 운명이며, 금성이 
뜨고 목성이 질 때 태어난 사람은 공처가가 된다고 점쳤다.
  이러한 메소포타미아의 점성술 예언은 고대 중국의 점성술과 매우 유사했고 별의  이름도 
공통점이 많았다. 메소포타미아 점성술은 이후 서양에  전래되어 오늘날까지 서양 점성술의 
기본이 되었다. 오늘날 서양 별자리에 사용되는 황소 자리나 쌍둥이 자리 등의 별자리 명칭
도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작품이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중국인들이 5행성론을 가지고 있었던 데 반해 일찍부터 7행성론을 가
지고 있었다. 그리고 유태인들이 이를 기초로 하여 신이  6일 동안 세계를 창조하고 하루는 
안식일로 휴일로 한 데서 일주일이 오늘날처럼 7요일로 정착된 것이다.
  정말 기묘한 일은 우리 나라도 옛날부터 일주일 단위로  생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
리 나라도 옛날부터 일주일마다 하루씩 휴일을 두었던 것이다. 즉, 관공서를 비롯하여  모든 
'직장'이 음력 1일, 8일, 15일,  22일, 29일에 출근을 하지 않는  휴일을 두었다. 의사 소통이 
전혀 없던 상황에서도 이렇듯 일치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란 어디에 살든 별수없이  비슷한 
존재인 것 같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이 가장 잘 관찰한 천체는  혹성이었다. 고대인들이 공통적으로 그
랬듯이 그들도 혹성 출현이 국가와 국왕 그리고 개인의 길흉과 연관이 있다고 믿었다.
  또한 반구의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발명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과학자는 오목한 반구 한복
판에 작은 공을 드리워 안쪽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림자의  곡선으로부터 하지나 
동지 등 태양의 운행을 알 수 있었다. 뒤에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천구의는 이 반구의를 개
량한 것이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문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3100년쯤 사용되었던 수메르
의 설형 문자이다. 설형 문자는 이후 이집트 문자나 페니키아  문자를 만들게 하는 등 오리
엔트 문화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고, 이렇게 하여 알파벳을 만드는 데도 결정적 기여를 한 
셈이었다. 그리고 수메르인들이 사용했던 60진법은 오늘날에도 원의 각도나 시간의 분과 초 
계산에 이용되고 있다.
  도시 국가나 왕권 신수설 그리고 법전도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한 것이다.
  특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섬뜩한 계율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은 1901년 발굴되었
는데, 이는 기원전 18세기 기록으로 밝혀졌다. 함무라비 법전이 발견됨으로써 그때까지 성서
에 나오는 모세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입법자로 확고하게 숭앙해 오던 서양인들은 커
다란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모세가 법전을 만들었던  때보다 수세기 전에 이미 함무
라비 법전이 훌륭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 함무라비 법전도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법전은 아니다. 오늘날 증명될 수 
있는 가장 오래 된 법전은 오르남무 왕의 법전이다. 하지만 이것도 언제 바뀔지 모른다.  그 
이전에도 법전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1400년쯤 악기의 현을 나타내는 숫자를 기록했던 점토판도 발견되었다. 이는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음악과 음악 이론에 대한 기록이다. 오늘날 도로  공사를 하는 데 꼭 필요
한 재료인 아스팔트도 기원전 4000년쯤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또한 유리도 기
원전 2200년쯤 메소포타미아인들이 발명한 것이다.
  우리가 현재 매일같이 사용하고 있는 바퀴는 기원전 4000년쯤 수메르 기술자들이  발명했
다. 그들은 바퀴가 달린 운반 기구를 만들었다. 놀라운 사실은 회전 운동을 가능하게 함으로
써 어쩌면 기계 역사에서 최대 발명품이라 할 수 있을 법한 바퀴가 수메르인들에 의해 발명
된 이래 수십 세기 동안 형태나 원리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중일 삼국지, 바둑
  361로의 좁은 반상에서 펼쳐지는 돌들의 미학과 예술.
  바둑이야말로 한중일 삼국이 세계 어느 나라도 따르지 못할 수준을 자랑한다.
  바둑은 중국의 전설적 성군으로 추앙받는 요임금이 우둔한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었
다고 전해지고 있다.
  무궁무진한 바둑의 수는 정교함을 자랑하는 현대 과학 기술의 총아인 컴퓨터도 도저히 따
라잡지 못하는 영역이다. 오늘날 아무리 높은 수를 가진 컴퓨터도 고작 8급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이 신과 바둑을 두면 어떻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해 대만 출신인  일본 기사인 '이중허리' 임해봉 9단은  "만약 신과 두 점을 

는 바둑을 둔다면 승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히 이길 수  있으려면 석 점은 놓아야 한
다" 고 말했다. 역시 인간의 불완전함과 실수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보다.
  한중일 삼국의 기풍은 삼국의 문화적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최근까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던 일본의 기풍은 모양과  기교를 중시하는 형이다. 이
에 반해 한국의 기풍은 실용적이며 전투적이다. 비록 우리  바둑이 오랫동안 바둑 후진국의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실전적인 전투력을 바탕으로 영원히 앞설 것만 같았던 일본
을 누르고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 이제 세계 최강이  우리 나라의 이창호라는 사실은 세계 
바둑인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는  역사의 
진리가 그대로 적용된 것일까.
  중국의 기풍은 한국과 일본의 중간 형태이다. 중용을 택하는  그들의 전통이 그대로 반영
된 터일까?
  잘 알다시피 장기도 중국의 발명품이다. 장기는 유방과 항우가  벌였던 천하 쟁패의 전투
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원리는 음양의 원리이다.

      제 3장 불가사의한 세계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아라
  만리장성은 사람이 만든 지상 축조물 가운데 인공위성에서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것이라
고 한다. 진시황에 의해 만리장성이  만들어지고 있을 무렵, 제나라에 맹강녀라는  아리따운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장성 축조에 강제로 
동원되어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으로 끌려갔다.
  어느덧 겨울이 되자 맹강녀는 남편이 보고 싶고 또 걱정이 되어 남편이 입을 두툼한 옷을 
가지고 남편을 찾아 나섰다. 수천 리 떨어진 곳까지 어렵게  어렵게 장성 공사 현장에 도착
하여 남편을 찾았더니 남편은 이미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너무도 기가 막혀 장성 주위
를 돌면서 대성통곡했다. 그러자 장성이  무너지면서 남편의 유해가 보였다. 그녀는  남편을 
끌어안고 섧게 울었다.
  그녀는 장성을 파괴했다는 죄목으로 관가에 체포되어 끌려갔다. 그러나 그곳에 시찰 나온 
진시황이 그녀가 끌려오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진시황은 첫눈에  그녀의 미모에 반하고 말
았다. 그리고 그녀를 유혹하면서 수청을 요구했다. 그러자 맹강녀는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진시황은 웃음을 머금고 허락했다. 깨끗한 옷으로 단장한 맹강녀는  하늘을 우러러 눈물 짓
더니 스스로 목을 매어 꿈에도 그리던 남편을 따라갔다.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
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는 만리장성은 진시황 때 만든 것이 아니다. 현재의 만리장성은 16세
기 명나라 때 축조한 것이다. 당시 황제가 명나라의 골칫거리였던 몽골에 대한 대책을 신하
들에게 묻자 병부상서 유대하는 "지키는 것이 상책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하여 만리
장성은 다시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진시황 때의 장성보다는 상당히 남쪽으로 후퇴한 것이었
다.
  그런데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던 만리장성이 막상 외적의 침입을 막는 데는 아무
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즉, 만리장성은 위
력적인 공격이나 무역 등을 통한 화친과 같은 더 나은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단지 북방 민족
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무언가 해야 된다는 중국 관료들의 무능력과 불안감 때문에 만들어졌
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책
  중국은 '땅은 넓고 없는 물건이 없다'는 지대물박의 나라답게 항상  큰 걸 좋아하는 민족

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을 천하의 중심, 즉 중화 자리에 놓고자 했기 때문에 그들이  만드
는 모든 것도 이 세상에서 가장 스케일이 크고 웅장해야 했던 것이다. 만리장성이나 자금성, 
대운하 등은 그것을 웅변해 주고 있다.
  책을 만드는 데도 그들의 '큰 손'다운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강희자전>은 세계에서 가장 큰  대사전이다. 이 사전에  수록된 표제 한자는  무려 4만 
7035자이며, 고대 시대부터의 이체자 1995자를 수록함으로써 사전류에서는 오늘날까지도 타
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이 대사전은 청나라 강희제 때 30여  명의 학자가 5년 동안 불철
주야 편찬한 것이다. 1716년에 완성된 이  사전은 12지 순서에 따라 12권으로 되어  있으며, 
214개의 부수가 획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글자 풀이가 정확하고 적절한 고전 용례가 덧붙여
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18세기 당시 중국에서 출판된 서적의 총 숫자는 놀랍게도 전세계 서적을 모두 합한 것을 
능가하고 있었다. 바로 중국에 <영락대전>과 <사고전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락대전
>은 1403 명나라 성조 때 2000명의 학자가 동원되어 만든  대규모 서적으로 총 2만 2877권
이며, 3억 7천만 자로 된 세계 최대의 백과사전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청나라 때 만들어진 <사고전서>가 세계에서 가장 큰 서적으로  꼽
히고 있다. 채록된 서적만 해도 3503종 7만 9333권으로  그것을 완성하는 데 11년이나 걸렸
다. <사고전서>를 완간하는 작업은 360명의 관련 전문학자들과  수천 명에 이르는 각 분야
의 전문가들 그리고 1만 5000여 필사자들이 동원되었던  엄청난 대사업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이 완성된 뒤에는 다시 7부씩 복사하는 작업까지 진행하여 각서공들이 6년에 걸쳐 일
일이 다시 써야 했다. 중국 민족은 기록광으로 알려져 있다시피 언제나 자기들의 문자와 기
록, 역사를 중시해 왔다.
  청나라 건륭제 때 총 17만 2626권, 수십억 자로  정리된 <사고전서>는 중국 5000년 역사
상 최대의 총서로 당시까지 기록으로 남은 중국 문명의 완결판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현재 이 책은 국공 내전 때 장개석의 국부군에 의해 대만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세계 최대의 석굴, 돈황 석굴
  중국의 북서쪽 끝인 감숙 지방과  청해 지방 변경에는 '기련산'이라는  거대한 산이 솟아 

다. 그리고 그곳의 눈이 녹아 내린 물이 모래 속으로  스며들어 돈황 지방으로 흘러 푸르른 
녹지가 형성되었다.
  돈황 지방은 후한 광무제 때 처음으로 중국 영토로 편입되었다. 중국은 돈황 지방을 편입
시킨 뒤 옥문관을 만들고 군대를 주둔시켜 요새화했다. 그 뒤부터 돈황은 중국과 서역을 연
결하는 교통과 교역의 요충지가 되었고 천산  남로와 천산 북로의 비단길을 통해  내륙으로 
들어오는 대상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한편 돈황에서 동남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에는 삼위산과 명사산 사이에  '대하'라는  강
이 
있다. 지금은 흐르지 않는 그 강가에 17m 높이의 명사산 암벽이 3리  이상 펼쳐져 있다. 이 
암벽 속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석굴이 있다. 석굴들의 모든 벽에는 불화가 그려져 있
으며 엄청난 수의 불상이 만들어져 있다. 바로 이 석굴들이 유명한 막고굴이다.
  막고굴은 1.6km에 걸쳐 모두 486개의 석굴이 있는 엄청난 규모이다.  이곳에 석굴이 만들
어진 것은 불교가 융성했던 전진 시대부터였고 특히 북위  시대에 번창했다고 한다. 그리하
여 돈황 석굴의 많은 석굴 가운데에서도 북위 시대에 만든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되고 
있다. 또한 북위 시대에는 돈황 석굴 뿐만 아니라 운강 석굴도 만들었다.
  어쨌든 돈황 석굴은 이후 1000년에 걸쳐 석굴의 축조가  계속되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석
굴만 해도 492개나 되며,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석굴이 많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0세기 말 송나라 초기 돈황 지방에 서하가 침입하자 송나라 관리들은 각종 문서를 이곳
에 넣고 입구를 완전히 닫는 바람에 막고굴은 900년 동안 잠들게 되었다. 이곳에 소장된 문
서의 90%는 불교 경전이었고, 다수의 문학 작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00년 수도승인 '왕도사'라는  사람이 우연히 막고굴을  발견했다. 그는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지만 석실에 거주하면서 열심히 불경을 외우고 수도하여 막고굴의 
도사가 되었다. 그는 돈황 지사 등에게 막고굴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들을 기증하는 한편, 청
나라 관리들에게 그곳에 소장되어 있는 물품들을 운반하여 보관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 물건들의 값보다 운반비가 더 든다고 생각한 청나라 관리들은 다시 막고굴을 닫도록 했
다. 그 뒤 이곳은 영국인과 프랑스인에 의해 다시 발견되어 엄청난 자료들이 영국과 프랑스
로 유출되었다.
  막고굴은 1000개에 이르는 불상이 있다고 하여 천불동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원래 인도
에 있는 아잔타 석굴을 본뜬 것이었다. 아잔타 석굴은 2~7세기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진 석굴
로서 총 길이는 500m이고 모두 30개의 석굴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조각들이 바위를 끌로 
쪼아 만들어졌으며, 입구를 장식하는 조각과 돌기둥 역시 자연석을 쪼아서 만들었다. 이  가
운데에는 특히 여성의 풍만한 곡선과 하복부의  관능적 자태가 매우 육감적으로 잘  표현된 
조각이 많이 있다. 아잔타 석굴은 1000년 동안 묻혀 있다. 1891년 한 영국 군인이 호랑이 사
냥을 하다가 발견했다.

    동양 음악의 탄생
  시끄러운 록 음악을  '덩굴손'이라는 식물에게 날마다  들려 주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리창을 타고 벽 너머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런데 속삭이듯 부드러운 발라드 노래를 들려 주
니, 덩굴손은 그 노래가 나오는 스피커를 친친 동여 감았다.
  진정 음악이란 이렇게도 크나큰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음악 이론은 주나라 때 음양 오행의 우주론과 결합되어 생성되었다.
  공자는 윤리의 표현으로 예와 악을 특히 중시했다. 그는  아름다운 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닦고 집안을 정돈하며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악은 사람의 마음 속에
서 나오고 예는 사람의 마음을 밖에서 수식하는 것이므로 예악과 더불어 친지, 군신, 장유의 
순서가 정해 진다고 갈파했다. 나아가 공자는 예악으로 천하를  다스려야 하며 형법이란 예
악의 실행을 돕는 보조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공자는 한 마디로 음악 지상주의
자였던 것이다. 이렇듯 공자가 음악을 중시한 것은 어릴 적 공동묘지 부근에서 어렵게 자라
면서 장례 음악을 많이 듣고 자랐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중국은 음율은 열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바로 양에 속하는  여섯 가지의 율과 음에 속하
는 여섯 가지의 려였다.
  그리고 궁 상 각 치 우로 잘 알려진 동양 음악의 5음은 행성이 수성, 화성, 목성, 금성, 토
성의 5개인 데서 비롯되었으며, 결국 5행의 원리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여섯 가지의 율과 
여섯 가지의 려로 12개월이 이루어지고, 또한 5음계에는 각각 많은 음과 흐린 음이 있어 10
일을 이루게 되는 것이었다.
  유명한 거문고도 5현으로 되어 있어  5음계의 음색을 표현했다. 거문고의  현은 비단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1개의 현은 무려 70~80개의 생사를 꼬아서 만든 것이었다. 이렇게  만든 
거문고는 뜯거나 두드리는 등의 스물여섯 가지 연주법으로 갖가지 미묘한 음색을 표현했다.
  이후 실크 로드를 통해 실크 로드의 음악, 중국인들의 표현에 따르면 호음이 중국으로 전
래되었다.
  이에 반해 서양에서 만들어졌고 오늘날 음악의 기본 음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도레미파
솔라시도의 7음율은 원래 피타고라스가 7개의 행성(수성, 금성, 목성, 토성,  화성 그리고 해
와 달)을 음악에 대응시켰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탬버린이나 팡파르 같은 말은 아라비아에서 전래된 용어이다. 원래 중세 서양의 노래에는 
장단과 박자가 없었다. 이에 반해 이슬람 음악은 박자마다  장단의 시간적 측도가 규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뒤에 서양에 전래되어 리듬의 개념을 개혁시켰으며, 이로부터 온음, 반음,  4
분의 1음 등의 음표를 발전시키게 되었다.

    수컷의 흐르는 눈물과 수태하는 암컷 공작
  가장 아름다운 새. 공작.
  공작새의 원산지는 인도이다. 지금부터 2000년 전  인도인들은 공작을 사유가기 시작했다
고 한다. 공작 하면 눈부시도록 화려한 깃이 금방 연상된다. 화려한 깃을 펼쳐 보이는  것은 
수컷 공작새이다. 그것은 암컷을 유혹하려는 수컷의 안간 힘이다. 하지만 그토록 갖은  애교
를 부리며 열렬히 구애해 보지만  암컷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수컷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인도 속담에 "암컷 공작은 수컷의 흐르는 눈물과 수태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공작의 화려한 깃은 정작 실제 생활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오히려 많은 
수컷 공작이 '쓸데없이 무거운'깃 때문에 호랑이의 사나운 기습을 피하지  못하고 잡혀  먹
고 
만다.
  인간이 만든 건축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건물은 인도의  타지마할 묘라고 한다. 타지마
할 묘가 바로 공작의 화려한 깃이 아닐까.
  인도의 유명한 무굴 제국의 5대 황제인 샤 자한은 1627년 왕위에 올랐다.
  그는 페르시아계의 절세 미녀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녀의  이름은 '왕궁 제일의 꽃'이라
는 뜻인 무무타즈 마할이었는데, 이름 그대로 세상에서 가장 예쁜 미녀였다. 더구나  그녀는 
기품 있고 부드러운 여인이었으며 황제를 잘 섬겼다.
  이 부부는 궁합이 너무 좋아 19년의 결혼 생활 기간에  무려 14명의 아이를 낳았다. 황제
의 사랑이 너무도 정열적이어서 황후는 결혼 생활 내내 누워서 지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역시 인간사란 호사다마인가! 그녀는 14번째 출산에서 치명적으로 건강을 해쳐 39
세의 꽃다운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황제의 품에 안겨 "내가 죽은 뒤에
도 다른 여자를 맞이하지 말고 아름다운 묘지를 만들어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황제는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없는 세상은 하루
도 살 수 없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묘지를 자기가 사는 궁궐  바로 옆에 이 세상 어느 
곳보다 아름답게 꾸미고 항상 그녀 곁에 있기로 결심했다.  그는 500만 루피의 엄청난 자금
을 들여 인도는 물론 아시아  각지와 유럽에서 내로라 하는 솜씨  있는 기술자를 모집했다. 
그리하여 2만 명의 기술자와 일꾼들에 의해 타지마할 묘는 22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타지마할 묘는 전형적인 이슬람 사원이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순백의 대리석으로 만들
어진 완만한 돔은 풍만한 황후를  상징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타지마할  묘의 모습은 마치 
사방에서 황제가 황후를 지켜 주는 듯하다. 묘지 앞의 거울과도 같은 아름다운 연못은 마치 
황후의 모습을 꿈처럼 투영시키고 있다.
  타지마할 묘는 낮에는 찬란하게 빛나고 황혼이 질 때면  따사롭게 작열하며, 달빛 아래에
서는 부드럽고도 영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또 사원 내부에는  황후의 삶을 상징하는 보석
으로 꾸며진 아름다운 문양들이 영롱하게 수놓아졌다.  하지만 이것들의 대부분은 도굴꾼들
에게 훼손당했다.
  타지마할 묘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 건축
물이 완성된 1653년 무굴 제국의 궁정 안에서는 후계자  싸움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 결국 셋째 아들이 샤 자한 황제를 유폐시키고 다른 형제를 살해한 뒤 황제  자리
에 즉위했다. 유폐된 샤 자한은 죽을 때까지 6년 동안 매일  작은 창 너머로 타지마할 묘를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결국 샤 자한 황제는 세상을 떠난 뒤 그토록 그리던 황후 곁으로  갈 수 있었다. 그의 유
골은 황후가 잠들어 있는 관 바로 옆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매춘으로 만든 피라미드
  "어떤 젊은이가 아리따운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의 머리는 칠흑같이  검다. 어두
운 밤보다 검으며, 오얏 열매보다 검다. 그녀의 입술은  새빨갛게 불타고 있다. 홍옥보다 붉
고 익은 대추 야자보다 붉다. 귀여운 것은 그녀의 2개의 유방."
  위의 글은 지금부터 3000년 전 고대 이집트어로 기록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기
록들이 해독될 수 있었을까? 
  1799년 8월 나폴레옹 군대는 이집트에 원정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나폴레옹 부하가 나일 
강 로제타 하구 근처에서 성을 쌓던 중 검은 현무암으로  도니 비문을 발굴했다. 이것이 바
로 '로제타 스톤'이다. 
  그런데 그 돌에는 고대 이집트의 해서체, 초서체 그리고 그리스어가 상중하 3단으로 새겨
져 있었다. 그 문자들은 한참 뒤에야  해독될 수 있었는데, 내용은 신하들이 왕을  칭송하는 
맹서였다. 로제타 스톤의 기록을 해독하면서 찬란했던 고대 이집트 왕국의 수수께끼가 풀리
기 시작했다.
  이집트 왕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왕조이다. 이집트인들은 기원전 5500
년부터 농경 사회를 형성했고 기원전 3000년부터는 통일 왕국을  이룩했다. 이 왕국은 오랫
동안 전성기를 누리다 기원전 341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멸망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금을 
채굴한 사람은 바로 이집트인들이었다. 그들은 바닷가 모래밭에 있는 사금에서 금을 대량으
로 채취해 냈던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자기들의 대왕을 파라오라고 불렀다. 사막에  우뚝 솟은 피라미드는 이집트
인들에게 세상을 떠난 파라오가 승천하기  위한 계단으로 이해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분묘 
대신 석조의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었던 것이다.
  피라미드는 기원전 2600년대에 살았던 고대인들의 거대한 것을 즐기는 관습이 나타난  것
이었다. 피라미드의 바깥쪽 면은 나일 강을 통해 먼 곳에서  수송해 온 좋은 석재를 사용했
다. 현재 이집트에는 모두 80여 개의 크고 작은 피라미드가 있다.
  피라미드 가운데에서 가장 큰  것은 쿠푸 왕의 피라미드인데,  삼각뿔의 정사각형 밑변은 
한 변의 길이가 230m이고 높이는 152m, 밑면적은 6ha이다. 평균 2.5톤이나 되는 거대한 돌
덩이가 무려 250여 만 개나 된다. 정사각형의 4면은 정확하게 동서남북 방향과 일치하며, 각 
변의 길이도 30cm 이상의 오차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피라미드를 짓는 데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다. 그래서 쿠푸 왕은 부족한 재정을 메
우기 위해 심지어 자기 딸을 매춘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교를 가진 남성은 피라미드
를 짓는 데 필요한 2.5톤의 큰 돌을 기증해야 했다.
  피라미드는 순전히 사람의 힘만으로 공사를 마쳤는데, 10만 명의 일꾼이 동원되어 매년 3
개월씩 일을 하여 20년에 걸쳐 완성했다. 피라미드를 만들 때 이집트인들은 구운 돌과 점토
를 섞어 세계 최초로 시멘트를 사용했다.
  그런데 피라미드의 내부를 구경하기 위해서는 9세기에 뚫린 북쪽의 도굴 구멍으로 들어가
야 한다.
  스핑크스는 피라미드 앞에서 파라오를 지키는 수호신이다.  머리는 사람의 형상이고 몸은 
가장 용맹스러운 동물인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집트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상징적 유적인  오벨리스크는 사원 정면에 세워진 한  쌍의 
기념탑이다. 암석을 깎아 만든 각이 진 기둥으로  높이가 47m나 되는데 꼭대기는 피라미드 
모양이다. 그리고 기둥 면에는 상형 문자로 파라오의 공적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거대한 피라미드는 어떻게 만들어 질 수 있었을까?
  엄청난 크기의 피라미드를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는가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인류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에서도 가장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아직까지도 피라미드의   

확한 건축 방법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많은 학자들이  다음과 같이 집작만 하고 있을 
뿐이다.
  "차츰 높아지는 피라미드의 4면을 따라  비스듬한 발판용 언덕길을 나선형으로  쌓아올린 
다음 돌을 비스듬한 언덕길로 끌어올린다. 그렇게 하여 계단 모양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진다. 
그런 다음 꼭대기부터 계단 부분을 메워 경사면을 포장한다.  마무리 공사가 위에서 아래로 
진행되면서 4면의 비스듬한 언덕길은 1단씩 없어지고 최후에 방추형 피라미드가 완성된다."

    미라의 전설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과연 내세는 있을까? 만약 내세가 있다면 어떤 세계일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당연한 의문이다.
  이집트인들은 현세와 같이 내세에서도 생명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유명한 미라는 이
러한 믿음에서 만들어졌다. 즉, 미라는 하늘에서 다시 부활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시체를  잘 
보관하려 했던 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미라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을까?
  이집트인들은 사체에서 뇌수와 내장을 빼내고 두 달 동안 소금물과 아스팔트로 처리했다. 
그런 뒤 아마 포로 사체를 감아 관에 넣어 보존했다. 관은 화려하게 치장했는데, 주로  목조
로 만들었고 3중으로 된 것도 있다. 관의 외장과  내장은 호화롭고 다채로운 그림으로 장식
되었는데, 그 곳에는 재생의 신인 오시리스를 비롯하여 내세의 신들의 그림과 상징물,  주술 
문구들이 가득 쓰여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니스칠로 마무리했다.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은 뒤 어떻게 될까라는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래서 그들은 사후 세계에서 여러 가지 예상되는 위험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주문과 부
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두루마리 모양의 파피루스에 적어 관을 넣었다. 이것이  바
로 '사자의 서'이다.

    자금성과 대운하
  세계에서 가장 큰 궁전은 중국 북경에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는 자금성이다.
  자금성은 명나라 영락제 때 17년 동안 축조한 거대한 성이다.
  북경은 내성의 둘레가 24km의 정사각형이며, 내성 안에 11km의  황성이 있다. 그리고 다
시 그 안에 둘레가 6km에 달하는 자금성이 있다.
  자금성의 자는 원래 자미에서 비롯된 말로 자미란 천자를  상징하는 별자리이다. 최근 높
은 적중률을 올리며 유행하는 자미두수 사주팔자법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금성
이란 왕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시 유명한 천안문은 자금성의 정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자금성이나  천안문은 18세기 
청나라 때 다시 개축한 것이다. 자금성이나 천안문은 경복궁이나  남대문 정도의 크기가 아
니다. 자금성의 크기를 보면 가로가 960m, 세로 750m이며 면적은 72ha나 된다. 60개의 전각
으로 이뤄져 있고, 방의 수를 모두 합하면 9000칸이 넘는다.
  자금성을 둘러싼 호수는 성벽을 둘러싼 호수 가운데 세계 최대 호수로 호수 전체 길이는 
3290m이다. 
  중국은 빈번한 황하의 대범람 때문에 태고 적부터 치수  사업이 중요했다. 하나라를 세운 
우 임금이 임금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치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동
안 중국 황제의 가장 큰 임무는 치수 사업이다. 따라서 치수 사업에 대한 인류 최초의 전문 
서적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초의 치수  전문 서적은 14세기에 원나라
의 사극즙이 저술한 <하방통의>라는 책이었다. 
  중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수리 사업을 했던 나라였다. 그
러므로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최근세까지 세계에서 가장 긴 운하는 중국의 운하였다. 
  그 운하는 중국의 유명한 황제인 수나라 양제가 만든 것이다. 이 운하는 진시황의 만리장
성에 비견하는 대건축 사업이었다. 대운하 공사는 비록 당시에는  백성들의 피와 땀을 쥐어
짠 가혹한 노역이자 착취로 기록되었지만, 북경을 비롯한 황하 유역과 곡창 지대인 강남 지
방의 교통과 교역, 그리고 통신을  혁명적 방식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하여 
이 운하는 이후 중국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인공으로  기록되고 있다. 역시 사물에
는 양면이 함께 존재하는 법이다.
  북경에서 항주까지 이어진 운하의 전체  길이는 무려 1781km나 된다.  그런데 이 운하는 
한 시기에 완공된 것이 아니라 계속 진행된 공사였다.  기원전 540년 공사가 시작되어 1327
년에 1327km의 길이까지 공사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600년 쯤에  이뤄졌던 공사에 연인원 
500만 명이 동원되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전설
  아라비아는 개방적이며 포용적인 문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중국 및 인도의 
동방과 서양을 연결시켜 주는 문화적 교량 역할을 담당했다.
  아라비아는 '아랍인들이 사는 섬'이라는  뜻이다. 연 강수량이 100mm도  되지 않는 극히 

조한 기후이며, 여름 기온은 섭씨 54도까지 올라간다. 대추야자나무 외에는 나무가 전혀  없
는 사막 지대이다.
  오늘날 우리가 봐도 묘하게 '그려진 '  아라비아 문자는 원래 사람들이  읽기 위해  쓰여
진 
것이 아니라 신에게 바치는 상징으로,  통합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사실  아라비아 
문자는 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양으로 보인다.
  아라비아인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했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문화보다  '밑천
'
이 별로 들지 않는 웅변과 시가 발달되었다. 웅변은 오늘날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시
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아라비아인들은 일찍부터 시를 발전시켜 운율과 문장  형태를 정리했다. 그들은 황량하고 
단조로운 사막생활을 하면서도 풍부한 정열과 상상력으로 그들의 베드윈(사막의 유목민이라
는 뜻의 아라비아어) 생활을 묘사했다. 그들은 술과 사막에서의 사랑을 노래했으며, 사막 저
편으로 아련하게 지는 달을 보면서 시를 읊었다. 또한 전쟁, 사냥, 부족의 용맹성 그리고 적
의 비열함 등을 시로 읊었다. 특히 카시다라는 송시가 유행했는데, 카시다의 첫 부분은 애조
를 띤 서시로 시작하여 감상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아라비아의 시 중에서는  <무알라카트
>라는 시집이 가장 유명하다.
  유명한 아라비안 나이트는 원래 인도와 페르시아에서 기원한 설화집이다. 인도 민족과 페
르시아인들이 동일한 종족이라는 사실은 여기서도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을 압바스 왕
조 초기에 아라비아어로 번역했는데 원 제목은  '알프  라일라 와 라일라', 즉  천야일야였
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 된 기록은 879년에 쓰여진  것이며, 몽골이 침입했을 때 이야
기가 더해져 14세기 카이로에서 아라비아어로 기록되어 비로소 오늘날의 아라비안 나이트가 
이뤄지게 되었다.
  단테가 지은 <신곡>은 원래 아라비아의 문장가인 아부 알알 리가 60세가 넘어 지은 <용
서의 서>라는 책을 모방한 작품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 책은 주인공이 낙원과 지옥을  오
가면서 목격한 여러 이야기를 2부작으로 엮은 소설로 <신곡>과 동일한 줄거리인 것이다.
  아라비아는 유럽에 엄청난 선물을 안겨 준 장본인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된 천문
표를 만든 사람은 아라비아의 대과학자였던 알 콰리즈미였다.  그는 2차 방정식과 잉여법을 
연구, 정리했으며 820년 그가 저술한 <적분과 방정식의  계산>이라는 책은 중세의 서양 세
계에서 오랫동안 대수학 부문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던 저작이었다.  이 책은 12세기에 라틴
어로 번역되어 이후 16세기까지 유럽 대학의 공식 교과서가 되었다.
  또한 천문학자 알 파르가니가 저술한  <천체 운동의 서>라는 천문학서는 이후  12세기에 
유럽에 번역되어 유럽 천문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10세기에 살았던 알 파타니는 황도 경사치와 회귀년의 길이 등에 대한 정확한 측
정 및 천문표를 작성했는데, 이는 유럽에서 르네상스 시기까지 천문학에서 유일무이한 권위
를 자랑하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달의 평균 운동의 가속도를 어떻게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가라는 천문학적 난제에 쩔쩔매고 있던 19세기의 유럽인들은 900년 전 이미 이븐 유누
스라는 아라비아 천문학자가 작성해 놓았던 천문표를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해결할 수  있었
다. 
  오늘날 화학을 가리키는 영어인 케미스트리라는 용어도  실은 아라비아어이다. 뿐만 아니
라 파자마, 메트리스, 매거진,  샤베트(청량음료), 알칼리 등의  용어들이 모두 아라비어어인 
것이다. 아편이라는 말도  아피윤이라는 아라비아어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0'을 가리키는  

로, 대수학을 가리키는 알제브라는 말도 아라비아어이다. 알제브라는 부서진 것을  회복한다
는 뜻으로 외과 의사 전문어였다.  이로써 아라비아에서 수학과 의학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라비아 건축물은 황할 자태가 마치 천상의 세계를 보는 듯한 신비감을 주는 것으로 유
명하다. 하늘로 이러질 것 같은 첨탑, 비할 바 없이 아름다운 아라베스크 문양의 타일, 모자
이크 그리고 돔 형식의 유려한  지붕, 이렇게 오묘한 모양으로 이뤄진  이슬람 건축 양식은 
어느 한 곳을 없애더라도 결코 건물의 균형이 깨지지 않는 작은 단위들의 무한한 반복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웅장한 규모 속에 단순미가  연출하는 신묘하고도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다.
  이슬람 양식의 건축물은 아라비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에 있는 환상적인 타지마할 
묘를 비롯하여 유럽에까지 이슬람 양식의 건축물이 퍼져 있다. 이슬람교도들이 스페인을 점
령했을 때 건설하여 우리에게도 '알함브라  궁전'이라는 꿈결 같은 기타  연주곡으로  가슴
을 
촉촉히 적셔 주고 있는 알함브라 궁전도 아라비아 건축 양식이다. 이슬람 건축 양식은 전체
적으로 환상적인 백색 처리를 한  것이 가장 큰 특징으로 모자이크와  타일로 이뤄진 벽면, 
섬세한 조각, 양탄자, 분수, 정원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마치 동화에 나오는 하늘나라 건물처
럼 신비감을 자아낸다.

     풍차는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졌다
  알파벳 문자는 사실 서양인들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서양인들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공용 문자가 된 알파벳 문자는 원래  페니키아인
(오늘날의 레바논인)들이 발명한 것이었다.
  현재 최초의 알파벳으로 인정되고 있는 문자는 기원전 1700~1500년쯤 지중해 동해안 지역
에서 생겨난 북셈 문자라고 한다. 알파벳이 생겨난 계통도를 보면 이집트 문자 - 시나이 문
자 - 페니키아 문자 - 그리스 문자 - 에트루리아 문자 - 라틴 문자 순서로 발전된 것이다.
  특히 페니키아 문자는 가장 오래된  알파벳 체계로 알려져 있다.  페니키아인들은 기원전 
12세기 무렵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알파벳 문자의 기원이 된 22자의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
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17세기말 시나이 반도의 어느 광산에서 이집트인 감독 아래 터키옥을 채굴하던 셈
족 노동자가 이집트의 상형 문자를 간소화시켜 알파벳을 만들었다. 그리고 페니키아 문자는 
이 시나이 문자로부터 발전한 형태라고 한다.
  그런데 페니키아 문자에는 자음만 있었고 모음 형태가 없었다.  그 뒤 그리스인들은 모음 
문자를 추가하여 자모음 체계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리스 문자를  계승한 로마 문자는 원래 
23자의 기본 글자로 되어 있었다. 결국 로마인들이 I에서 J를 분리하고, Y에서 U와 W를 분
리시켜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26자 형태를 만들어 냈다.
  오늘날 유럽 전원 생활의 풍요로운 상징이 된 풍차는 원래 페르시아인들의 독창적 발명품
이다. 페르시아는 오늘날의 이란이다. 
  페르시아인들은 초기에는 세력이 미약했지만  이후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까지 
1000년에 걸쳐 아라비아 세계의 패권을 거머쥐었던  강대국이었다. 이렇게 하여 페르시아인
들은 아라비아 문화의 주류를 형성했던 셈족과 함께 아라비아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하게 되
었다.
  페르시아에서 처음 만들어진 풍차는 원래 수평식으로  작동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네덜란
드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차는 페르시아 풍차가 십자군 전쟁 때 유럽에 전래된 뒤 유럽 
지형에 맞게 개량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14세기에 만들어진  유럽 풍차는 직각으로 교차하
는 전동 장치를 필요로 하는 물레방아 같은 수직식 풍차였다.
  한편 지금은 아득한 옛날의 추억거리로 사라졌지만  말만 들어도 낭만적 서정이 한  폭의 
수채화 같았던 물레방아, 또한 질펀한 사랑의 영화 장면과 소설 대목이 그대로 연상되는 물
레방아는 기원전 1세기부터 중국과 소아시아 지방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인류 최초의 도시 계획
  인도라는 국호는 원래 인더스 강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힌두라는  말과 인도라는 말의 어
원은 동일한 것이다. 원래 이란 민족과 인도의 아리아 민족은 함께 오리엔트 지방에 거주했
던 뿌리가 같은 민족이다. 이란과 아리아라는 말은 똑같이  '고귀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

전 17세기 아리아족이 인도에 침입하여 인도의 원주민인 드라비아 종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아리아족은 자신들의 지배권을 제도화하기 위해 이른바 브라만 사회를 구축했고, 이와 동시
에 엄격한 계급 제도인 카스트를 만들었던 것이다.
  인도인들은 옛날부터 윤회와 업보 사상을 독실하게 믿고  있었다. 이느 s사실상 아리아족
의 지배 이념이기도 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이란 전세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그 업보로 
내세에 일정한 카스트를 가진 집단에 태어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현재 불만이 있어도 현
세의 카스트에 순종하고 기다려야 내세에는 좋은  카스트 계급의 가문에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반대로 이것을 거스르게 되면 벌레나 짐승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기껏해야 최하 계급으로 태어난다고 했다.
  고대 인도 사상의 최고봉은 우파니샤드 철학이다. 독자 여러분도 우파니샤드라는 말은 어
디선가 한 번 들어 본적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원래 '어떤 사라므이 옆에 앉는다'는 뜻으
로 스승이 옆에 앉은 제자에게 은밀하게 전하는 교의였다.  우파니샤드는 뒤에 독일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석가모니가 창시한 불교는 제사 의식 일변도이며 엄격한 신분 차별 제도인 카스트 제도에 
반발하여 만들어진 종교였다. 불교는 초기에 매우 미약했다. 그러다가 카스트를 반대하는 승
가라는 신자 집단이 형성되면서 비로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오늘나르이 승가 대학은 이
때의 승가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불교는 확고한 카스트 제도로 짜여진 인도주의를 극복하는 데 실패했고, 한편으로
는 카스트 제도에 타협하면서 인도에서는 그 존재 자체가 아예 없어졌다.
  인도인들은 염색 기술과 안료 생산에서 매우 탁월했다. 인도에서  만들어진 색은 특히 광
채가 찬란했고 오랫동안 변치 않았다. 코튼(무명)이나 캐시미어 등의 명칭도 인도에서 유래
된 것이다.
  인류사상 최초의 도시 계획은 어디에서 이루진 것일까?
  그것은 바로 고대 인도에서 실시되었다. 모헨조다로라는 고대  도시의 유적을 보며 s급수 
및 배수 시설이 질서정연하게 건설되어 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곡물 창고와 사원,  학교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고대 시대의 대형 목욕탕 하면 대부분 로마의 목욕탕을 떠올린다. 하지만 훨씬 이전에 인
도에 이미 대형 공중 목욕탕이 있었다. 모헨조다로의 유적지에  대형 목욕탕 흔적이 명백히 
남아 있는 것이다. 인도에 이처럼 대형 공중 목욕탕이 있었던  것은 물론 습기가 많은 기후 
탓도 있었지만, 힌두교의 경건하 집단적 종교 의식을 갖기 위한 목적이 더욱 컸다고 알려지
고 있다.

    신이 빚어 낸 그릇
  거무스레한 흙으로 빚어 낸 도자기가 어떻게 해서 눈이 시리도록 투명한 빛깔을 내는 것
일까?
  도자기의 신비로움은 바로 이 점에 있었다. 자기 제조의 핵심 포인트는 순수한 점토인 고
령토를 사용하는 데 있다. 고령토를 고온에서 충분히 굽게 되면 물리적 구조가 변하여(이를 
자기화 현상이라고 한다) 반투명의 완전한 무흡수성으로 된다.
  도공들은 자기를 만들 때 고령토에 '백토자'라 불린 도토를 섞었다. 그리고 여기에 석영을 
포함하여 있는 도석이라 불리는 유약을 섞어서 구으면 유리 형태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과
정을 통해 비로소 유리병처럼 투명한 비취색의 아름다운 도자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도자기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3세기에 출현했다. 유명한 '당삼채'는 당나라 시대에 만들어
진 도자기로 녹색, 갈색, 백색의 세 가지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 만들었다 하여 당삼채라  불
리게 된 것이다.
  특히 송나라 시대은 도자기의 황금 시대였다. 송나라의 도자기는 예술적 차원에서도 매우 
뛰어났다. 당시 수십 만 명이 도자기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자기를 굽는 가마 가운데
에는 한 번에 무려 2만 5000개의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것도 있었다. 명나라 때 유명한 도
요지였던 경덕진은 "천하의 도자기가 모두  모여 있다"고 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자기 제조의 중심지이다. 오늘날 중국을 지칭하게 된 China라는 용어도 원래 도자기를 가
리키는 말이다.
  중국 송나라와 동시대인 우리 나라의 고려시대도 도자기의 전성  시대를 이뤘다. 특히 고
려 청자는 색깔이 아름답고 자기 형태가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상감법을 이용한 문
양이 뛰어나게 미려했다. 이렇듯 고려 상감 청자는  옥도 아니고 비취도 아니면서 '신이 빚
은 
그릇'으로 칭송받았다. 상감법이란  그릇의 바탕흙을 파내고  거기에 여러  가지 색을 메운   

음 사기물을 발라서 구워 만드는 기법을 말한다. 이는 신라 시대 말기에 있었던 흰 상감 질
그릇의 기법을 계승한 것이었다.
   도자기의 제조 비법은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졌다. 특히  서양인에게 도자기 만드는 방법
은 도무지 불가사의였다. 그들은 불투명한 점토를 가지고 어떻게  빛이 통과하는 투명한 자
기를 만들 수 있는지가 다만 요술같이 보였을 뿐이었다.  서양인들이 동양의 신비스러운 도
자기 제조 비법을 터득하여 도자기를 처음으로 만들 수 있었던 때는 18세기 무렵이었다.
  과학은 장기간에 걸쳐 축적된 인간들의 지식 및 정보의 산물인 것이다.

      제 4장 참된 기술이란 무엇인가
    참된 기술이란 무엇인가
  명나라 시대에 이르면 화려했던 중국 문명은 기울어 가는 반면 서양 세력은 급속도로 솟
아오르고 있었다. 이 무렵 서양 기술도 중국에 소개되어 몇  권의 서양 기술 책이 중국어로 
번역될 정도였다.
  이러한 시절에 질풍노도같이 밀려드는 서양 문명에 대응하여 중국의 전통 과학에 대한 자
부심을 북돋으며 중국 전통 과학의 기술 전서를 저술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송응성이라는 
인물이다. 평생 벼슬자리에 오르지 않았던 그는 명나라가 멸망하기 직전 상중하의 총 3권으
로 된 <천공 개물>이라는 저서를 발표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모두 18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1. 각종 곡물에 대한 설명과 수리, 비료, 재해
  2. 양잠, 직조와 직물
  3. 물감과 제조법
  4. 곡식의 타작과 제분까지
  5. 소금
  6. 설탕, 꿀, 엿
  7. 기와, 벽돌, 옹기, 백자, 청자
  8. 종, 거울, 솥, 대포, 동전 등
  9. 배와 수레
  10. 철의 단련과 도구 제작
  11. 석회, 석탄, 반석, 황 등
  12. 기름짜기
  13. 종이
  14. 금, 은, 구리, 철, 납, 주석
  15. 무기와 화약 제조
  16. 인주와 먹
  17. 술의 양조
  18. 진주, 보석, 옥, 수정
  이 책에서 송응성은 집요하게 중국의  전통 기술만 추적하여 정리했다.  그야말로 자존심 
높은 중국 민족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천공 개물>은 중국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품들의 생산 기술을 총망라하고  있으
며, 그림을 곁들여 설명함으로써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은 농업 기술로  시작하
여 사치품인 주옥으로 끝을 맺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 특히 농경 기술 설명에 중점을 두
고 있다.
  '천공 개물'이라는 제목은 참된  기술이란 결코 인위적 기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자의 사상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기술이란 자연 스스로  주재하는 천공을 기다린 다음에
야 비로소 완전하게 개물된다는 뜻이었다. 즉, 인간의 기술이란 하늘이 부여한 자연물을  이
용함으로써 가능하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1000년의 비밀
  영어로 종이를 뜻하는 페이퍼라는  말은 원래 '파피루스'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상 우리들이 알고  있는 종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이다.  파피루스란 기원전 
3000년쯤 이집트에 있었던 파피루스라는 수초의 내피였다. 그것은 무언가  쓸 수 있는 얇은 
물질이었다는 의미 외에는 종이와 관련되어 생각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태초에 사람들은 글씨를 어디에 썼고 그림은 어디에 그렸을까?
  고대 이집트인들은 글자를 파피루스에 기록한 데  반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와에 썼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양가죽에 기록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은나라나 주나라의 고대 시대에
는 거북 등이나 짐승의 뼈에  문자를 새겨 기록했다. 그리고 춘추  전국 시대에 들어오면서 
대나무로 만든 죽간을 사용했다. 역사를 청사라고 하는 것도 역사 기록을 대나무의 파란 죽
간에 기록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죽간은 너무 부피가 컸고 사용하는 데도 불편했다. 한
나라의 유명한 문장가인 삼천갑자 동박삭이 쓴 문장은 죽통이 무려 3000통에 이르러 이것을 
황제에게 바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힘센 장정이 짊어지고 운반해야 했을 정도였다.
  또한 전국 시대의 사상가인 혜시는 유학을 떠날 때 무려 수레 다섯 대 분량의 책(죽통)을 
가지고 가야 했다. 그래서  유명한 '남아수독 오거서'라는  말이 생겼던 것이다.  그 뒤에는  

통 대신 비단이 사용되기도 했지만, 비단은 너무 비싸기 때문에  보통 사람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종이는 후한 시대의 채륜이라는 사람이 발명한 것이다. 채륜은 
원래 환관이었지만 학문이 높고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국가가 직영하는 무기 제
조 공장을 관리하는 책임자였다. 그때도 섬유로 종이를 만드는  방식은 있었지만 매우 조악
한 수준이었다. 채륜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이것을 개량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나무 껍질, 삼, 넝마, 걸레 등 값싼 재료를 이용하여  마침내 가볍고 튼튼하며 값이 싼 종이
를 발명해 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채륜이 만든 종이는 '채후지'라고 불렸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종이는 1957년 한 고고학자가 중국 섬서성 서안의 근교
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것이 만들어진 연대는 기원전  140년에서 기원전 87년쯤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종이들은 두들겨 조각을 낸 마섬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종이는 7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인도로 전해졌고  8세기에는 서아시아 쪽에 전래되었다. 
당나라의 명장이자 고구려 후예였던 고선지 장군이 광막한 사막 지대를 가로질러  탈라스라
는 지방에서 아라비아의 압바스 왕조 대군과 전투를 벌일 때 중국 종이가 아라비아에 전해
졌다. 이때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전투에서 패했는데, 아라비아군에게 포로가  된 
당나라 병서 가운데에는 제지 기술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마르칸트에는 종이 공장이 
세워졌다.
  이렇게 하여 종이 제조법을 알아 낸 아라비아인들은 뛰어난 장사꾼의 후예답게 무려 500
년 동안 제지법의 비밀을 유럽에 넘기지 않고 대신 종이를 비싼 값으로 팔아 넘기면서 톡톡
히 재미를 보았다.
  어쨌든 서양에서 처음으로  종이가 제조된  것은 12세기였다.  채륜이 종이를  발명한 지 
1000년이 지난 뒤였다. 그리고 13세기에는 이탈리아에서 비로소 제지법이 번성할 수 있었다.

    추억은 주마등처럼 아련한데
  "어린 시절의 눈물이 핑 도는 그 아릿한 추억이 마치 주마등처럼 뇌리에 스쳐 간다"은 말
처럼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주마등.
  과연 이 주마등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주마등은 중국에서 오래 전부터 신기한 요술 램프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주마등은 등불이 밝혀지면 뛰어오르는 말의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벽에 비쳐져 마치  말이 
실제로 움직이는 듯 보였다. 빛을 통과시켜서 보는 일련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
이 연속으로 나타남에 따라 사람들은 그림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주마등은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노래에도 나오는 요지경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림은 손으로 돌리는 것과 등불에서 올라오는 불의 상승기류로 풍차를 움직여 자동으로 돌
아가는 방식이 있었다. 
  특히 길거리에서 상자를 이용하여 보여주는 주마등은 매우 유명하다.  이것은 한 번에 네 
명이 구멍을 통해 상자 속에서 움직이는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주마등의 기원에 대해서는 기원전 121년 소옹이라는 방사가 당시 황제였던 한무제를 위해 
죽은 영혼을 부를 때 화면에 움직이는 영상을 보여 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주마등이 기원전 207년에 죽은 황제의 소장품 속에서 발굴되었다. 그것은 등불이 밝혀
지면 회전하는 용의 비늘이 빛나도록 되어 있었다.
  그 뒤 180년쯤에 이르러 정완이라는 사람이  상당히 복잡한 주마등을 발명했다. '9층박산

로'라고 불렀던 이 기구는 불을 밝히면  위에 달려  있는 새와 동물 모양이  회전했고, "따

릉"하는 소리도 들렸다.
  17세기 중엽 가브리엘 드 마갈라엔스 신부라는 예수회 선교사는 주마등에 대해 다음과 같
이 말했다. 
  "각각의 등롱 속에 등심이나 양초가  무수히 있는데, 그 배치가  대단히 교묘하여 갖가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연기가 등의 영상을 움직이도록 한다. 그것은 대단히  정
교하게 만들어져 있고, 영상이 움직이거나  돌거나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가 하면 말이 달리고 전차를 끌고 땅을 갈기도 한다. 또 배가 돛을 달고 달리며, 걸어가
는 수많은 사람들이나 말을 탄 사람이며 군대 행진, 희극 그리고  춤 등 그 밖에도 많은 재
미있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이러한 주마등은 당시에는 영화처럼 화려한 회전 영상 쇼였다. 오늘날의 환등기도 주마등
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마등을 영화의 기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란 결국  연속적 
그림의 움직임이 아닌가.
  주마등의 영상은 종이나 운모에 그려진 것에 불과했고 동일한 곳을 회전할 뿐이었지만 당
시로서는 사람들을 완전히 매료시키는 대단한 효과를 냈던 것이다. 주마등은 17세기가 되어
서야 유럽에 전래되었다.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
  어디선가 꼬마들의 천진난만한 노랫소리가 들려 오는 것만 같은데...
  우산은 4세기에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그전에도 우산과 비슷한 것은 있었다. 예를 들
어 주나라 시대부터 기름 칠을 한 방수 비옷이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우산은 값 비
싼 비단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우산이 선보이게 된 때는 위나라 시대에 접
어들어 비단 대신 꾸지나무 껍질로 만든 특수 기름종이를 사용하면서이다.
  이때의 우산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색깔이 달랐다. 황제는 적색과 황색 우산을 사용
했고 일반 백성들은 푸른색 우산을 사용했다. 14세기에는 기름종이  우산과 비단 우산이 함
께 사용되었다. 당시 우산은 각종 의식 절차에 사용됐고, 황제는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만 특
별히 우산을 하사했다.
  중국에서 사용되던 기름종이 우산은 정확한 연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 뒤 유럽으로 건
너가 널리 사용되었다. 고려인들은 접는 부채라는 새로운 모양의 쥘부채를 발명해서 요즈음 
부채춤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는 데 일조했다.
  그런데 혹시 가을 부채라는 말을 아는가?
  가을 부채와 사랑을 잃은 가을 여인.
  사람들은 무더운 여름엔 부채를 애지중지하며  항상 곁에 두고 사용한다.  하지만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채는 한 쪽  구석에 처박히고 만다. 여자의 운명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을 얻을 때는 죽고 못 살 것같아 보이지만  사랑이 끝나면 그 여인은 마
치 가을 부채처럼 버림받은 운명이 되고 만다.

    성냥은 불쌍한 궁녀들이 만들었다
  성냥 하면 쉽게 성냥팔이 소녀가 연상된다.
  아이러니컬하게 성냥이 만들어지게 된 데는  불쌍한 여인들이 연관되어 있다. 즉,  성냥은 
오갈 데 없는 중국의 '성냥팔이 소녀'인 불쌍한 궁녀들이 처음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성냥은 6세기에 중국에서 발명되었다. 당시 북제라는 국가는  이웃의 라이벌 국가인 북주
와 진나라 연합군에게 완전 포위되어  있었다. 그때 궁녀들은 도무지 불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매우 춥고 배고픈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정말 죽지  않기 위해서 불 
같은 것을 만들어 내야 했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에 마침내 성냥을 고안해 낸 것이었다.
  처음에 만들어진 성냥은 유화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 성냥은 '인광노',  즉 '불을 나르는 

래'라 불렸으며, 그 뒤에는 '화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16세기 중반까지 유럽에
는 
성냥이란 게 없었다. 마르코 폴로가 몽골 제국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그 시대에 중국을 방
문했던 서양인들은 중국에서 손쉽게 성냥을  사서 귀국했다. 유럽 최초의  성냥이 유황으로 
만들어져 있던 것만 보아도 중국에서 건너간 성냥을 배워 만든 것이 입증된다고 하겠다.
  1830년에 이르러 비로소 프랑스인과 독일인이 유황, 황인, 염소산 칼륨의 혼합물을 사용하
여 현재 우리가 사용하여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성냥과 같은 것을 만들어 냈다.

    문명 세계로 이끈 인쇄술의 발명
  인류 역사상 많은 발명이 있었지만 인쇄술의 발명만큼 인류 역사 발전에 충실하게 기여한 
것도 없다. 인쇄를 통해 인류의 사고와  지식은 반복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이러헥  하여 
오늘날 인쇄는 인간의 사고와 정신의 성과를 체계적이고 총체적으로  정리, 보존할 수 있도
록 만들고, 그리하여 인류를 문명 세계로 안내하는 데 가장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것이다.
  인쇄술을 처음으로 발명한 곳도 중국이었다.
  최초의 인쇄는 목판 인쇄 형태였다.  목판 인쇄란 종이에 글을 쓰고  이를 뒤집어 나무에 
붙인 뒤 먹물이 없는 종이 부분을 파내어 만든 것이었다.
  목판 인쇄가 처음으로 발명된 시기는 당나라 초기라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은 우리 나라 경주에 있는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다라니경'이다.
  1966년 10월 어느 날 밤, 한 도둑이 석가탑의 사리를 훔쳐 가려고 탑을 움켜잡은 채 젖먹
던 힘까지 다해 용쓰고 있었다. 하지만 석가탑이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에 도둑은 석가탑을 
분해하지 못하고 도망쳤다. 다음날 훼손당한 탑을 제자리로 맞추는 작업을 하다 우연히 <다
라니경>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다라니경은 세로 6.5cm,  가로 52cm의 먹판을 12장 인쇄
한 것으로, 인쇄된 종이 길이는 7m나 되었다. <다라니경>은 8세기 중엽에 만들어졌다고 한
다.
  그런데 중국은 이 <다라니경>이 중국에서 인쇄되어 신라에 건너와 보관되고 있다가 발견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불교 경전이나 부처상을 갖고 싶다는 불교도들의 열망은 인쇄술을 크게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세계 최초의 인쇄물이 불교 경전의 액막이 두루마리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동양인들은 많은 양의 책이나 경전을 생산하는 방법으로 일찍부터 석판 인쇄를 사용
하고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탁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탁본을 갖고 싶은 열망들이  인쇄술
을 발달시키는 요인으로 되었다.
  종이에 인쇄한 최초의 책은 868년에 인쇄된 <금강경>이었다. 이것은 현재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9세기에 들어 서서는 많은 책들이 인쇄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연금술사인 
유홍의 전기는 수천 부나 인쇄되었다. 이즈음 달력도 인쇄되었다. 그리고 10세기에 접어들자 
문학서와 철학서 그리고 시인들의 시를 모은 시가집도 활발히 인쇄되었다. 5대 시대에 다섯 
왕조의 열 군주를 섬기면서 계속 재상을 지냈던 것으로 유명한 빙도는 이 무렵에 무려  130
권의 유교 경전을 인쇄하기도 했다. 이는 정부 차원에서 제작한  세계 최초의 공적 인쇄 출
판이었다. 
  이 시기에 인쇄 문화는 전성기를 맞았다.  어떤 책은 수백만 부나 인쇄되기도 했다.  어느 
불교 경전은 어찌나 많이 인쇄했던지 지금까지도 40만 부 이상이 남아 있을 정도이다.
  중국인들은 목판 인쇄에 과일 나무를 사용했다. 가장 좋은 목재로는 배나무가 꼽혔다.  왜
냐하면 배나무는 결이 균일하고 매끄러우며 단단함에서도 인쇄에 매우 적절했기 때문에  나
무의 결과 관계없이 어느 방향으로든 샛길 수 있었다.
  11세기에 이르러 필승이라는 기술자는 활자  인쇄를 개발했다. 그는 점토와  아교를 섞어 
활자를 구워 만들었다. 이때의 인쇄 방식은 활자를, 납을 부어 넣은 철판에 고정시킨 뒤  그 
위에 종이를 대고 복사하는 방식이었다.

    팔만대장경과 금속 활자
  금속 활자는 고려에서 세계 최초로 만들어졌다. 고려에서는 금속 활자 이전에도 목판인쇄 
기술을 이용, 대규모로 대장경을 조판하여  유명한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원래 
대장경이란 불경을 모아 목판에 새겨 놓은 것을 가리키며, 거란  침입 때 부처님의 힘을 빌
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 보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
는 팔만대장경은 총 8만 1137매로 조판이 정교하고 내용이 방대한 세계 제 1의 대장경이다.
  이렇듯 높은 인쇄 기술을 가지고 있던 고려인들은 목판 인쇄에 이어 드디어 훨씬 정교하
고 견고한 금속 활자를 발명해 낼 수 있었다. 이로써 우리 나라는 서양 금속 활자 인쇄술의 
선구자라 일컬어지는 구텐베르크보다 200년이나 앞선 선진 기술을 보유했던 것이다. 기록상 
남아 있는 것으로는 1234년 강화도에서  <고금상정예문> 28부를 인쇄한 것이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 인쇄라고 알려져 있다. 다만 이것은 지금 남아 있지 않으며, 현존하는 세계  최고
의 금속 활자 인쇄본은 고려에서 인쇄되어 현재 파리  국립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직지
심경>이다. 그것은 1377년 청주 홍덕사에서 인쇄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인쇄 기술이 뛰어나게 발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고려는 불교 국가로서 불경을 인쇄하는 일이 국가적  과제로 부각되었다. 특히 팔만
대장경을 인쇄하는 엄청난 대사업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고도의 인쇄 기술이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금속 활자 발명은 무엇보다 신라 시대  이래 우리 나라의 합금술과 금
속 주조술이 매우 뛰어난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 나라는 삼국 시대부
터 불상이나 종 등의 제작에서 중국과는 다른 성분의 한국식 청동을 만들어 왔던 것이다.
  중국인들은 오래 전부터 몇 가지 색깔로 된 인쇄를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지폐는 위조
를 방지하기 위해 3색으로 인쇄하고 있었으며, 12세기 초에 만들어진 지폐에는 유명한 삼천
갑자 동박삭의 초상화가 4색으로 인쇄되기도 했다. 인쇄는 유성 잉크가 아니라 수성 잉크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대단히 묘한 효과를 냈다. 그리고 이때 사용된 수성 잉크는 흙으로 만든 
천연 잉크였다.
  동양의 인쇄술은 몽골이 세계를 제패했던 바로 그때 투르케스탄의 위그르족을 통해  페르
시아를 거쳐 서양에 전해졌다. 몽골이 폴란드와 헝가리, 독일 국경까지 마치 질풍노도  같이 
휩쓸고 지나간 직후 그곳에서 목판 인쇄술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458년에 이
르러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자를 발명했다. 이는 고려에서  금속 활자를 발명한 지 
200년 뒤의 일이다.

    측우기와 수표교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농사에는 뭐니뭐니 해도  비가 가장 중요하다. 아무리  현대 과학이 
발전하고 농업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해도 막상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망칠 수밖에 없고, 
인류는 식수난에 부딪쳐 위기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원초적 한계라니!
  어쨌든 비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필수적 요소이다. 그러니  비의 양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국가적 대과업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농업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우리 나라에서는 강수량을 정확히 측정하는  측우기
를 세종대왕 때 세계 최초로 발명해 낸 것이다. 이는 서양보다 2세기 가량 앞선 것이다.  그
런데 중국은 목판 인쇄 경우와 마찬가지로 측우기도 원래 중국에서 만들어져 조선에 전해졌
던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측우기는 세종 때인 1441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져 전국의 중요한 지역마다  보급되
었다. 이와 함께 한강과 청계천에는 강물을 측정하는 수표가 세워졌다. 지금도 서울  청계천
에 수표교라는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측우기처럼 자연 현상을 계량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근대 과학의 가장 중요한 방법 가운
데 하나이다. 아쉬운 점은 이러한 발명과  측정이 단지 그 자체로만 그쳤을 뿐,  통계적으로 
이용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돈은 누가 만들었을까
  상인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아는가.
  중국의 고대 국가였던 은나라는 원래 상 지방 사람들이  세운 나라였다. 따라서 은나라는 
상나라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상 지방 사람들은 원래부터 계산에 밝았다고 한다.  어쨌
든 은나라가 멸망하자 계산에 밝은 백성들은 각지에 흩어져 주로 행상을 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분야를 휩쓸게 된 데서 상인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겉으로는 다른 대답을 할지라도 마음 속으로는 모두 돈이라고 대답할 게다. 물론 이와 정반
대의 질문, 즉 "무엇이 가장 싫은가?"라는 질문에서도  돈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이 나올 것
이다. 이와 같은 돈은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돈은 중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
  중국에서 화폐의 기원은 멀리 은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금속 화폐는 춘추 시대 중기에 등장했는데, 칼  모양의 화폐인 도전은 기원전 9세
기 때 사용되었다. 또한 원형 화폐는 기원전 4세기 전국 시대에 나타났다. 한무제 때는 황제
의 사냥터에서만 사육되는 흰 사슴 가죽으로 세계 최초의 가죽돈을 만들었다.
  중국에서 지폐가 처음 사용된 시기는 8세기 말이었다. 그것은 날아갈 정도로 가볍다고 하
여 '비전'이라 불렸다. 그러나  이 지폐는  통화라기보다는  어음 형태였다. 금화로  교환할  
수 
있는 최초의 지폐는 10세기 초에  나타났다. 그 뒤 지폐가 남발됨녀서  실질적 교환 능력이 
저하되면서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는 한편 위조 지폐도 많이 나타나 정부는 상당히 골치가 아팠다. 그래서 당국은 위조
가 불가능하도록 매우 복잡한 제조 비법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다색 인쇄와 극히 복잡
한 도안, 원료 섬유의 특수한 배합 등이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조범들은  끊이지 
않았다. 1183년 한 해만도 6개월 동안 무려 2600장의 위조 지폐를 만든 범인을 체포하여 사
형에 처해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명나라 시대에 이르자 지폐 사용은 거의 중단되었다.  명나라를 세운 태조 주원장
은 처음부터 상업과 이윤을 극도로 증오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대 이후 줄곧 
앞서 달렸던 중국이 서양에 뒤지게 되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그 뒤 지폐는 유럽으로 전래되었다. 서양 최초의 지폐는 1661년 스웨덴에서 발행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서구의 모든 나라가 지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연-비행기의 기원
  동네 꼬마 녀석들
  추운 줄도 모르고
  언덕 위에 올라서 
  할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신
  연을 날리고 있네.
  생각만 해도 낭만적 풍경이 저절로 떠오르는 연은 기원전 4세기에 중국의 유명한 사상가
인 묵적(묵자)이 만들었다고 한다.
  묵적은 수비를 잘 하기로 유명한 장군으로  연을 만들었던 것도 원래 군사적  목적에서였
다. 그는 성을 공격할 때 연을 띄워 공격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연은 군사적 목적을 많이 
수행했다. 이를테면 포위도니 군사들에게 비밀 명령을 내리거나 선전 삐라를 하늘에서 떨어
뜨리는 일 등을 해냈던 것이다.
  원래 연날리기는 도가 사상에서 일종의 명상 과정이기도 했다. 도가에서는 연을 띄우면서
도 하늘의 도를 명상했다고 한다.
  연은 전통적으로 새 모양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외에도 지네, 개구리, 나비, 용  등 수많은 
생물들의 모양도 만들었다. 또한 7~8세기에 들어서는 소리를 내는 연도 만들었다.  그리하여 
휘파람 소리가 거문고 같은 소리를 내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날개가 뒤로 젖혀지는 연도 만
들어 냈다. 이는 오늘날 비행기의 기원인 셈이다. 
  중국에서는 사람을 연에 태운 기록도 보인다. 6세기 중엽 북제라는 나라에서 사람을 연에 
태웠다. 
  북제의 첫 번째 황제인 고양은 탁발씨라는 라이벌을 제압하려고 한 해에만 무려 721명의 
라이벌을 죽였다고 한다. 그것은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말년에 불교에  귀의한 
황제는 독실한 불교도답게 '방생'을 했다. 그런데 그가 한  방생은 보통 방생과는 내용이 전
혀 달랐다. 그는 자기의 강력한 라이벌인 탁발씨 가문 사람들을 100척 높이의 단 위에서 연
에 태운 채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방생'을 했던 것이다.  '방생 행사' 때  대부분 목숨을 건

지 못하고 떨어져 죽었다. 그들이 처참하게 떨어져 죽는 모습을 보고 황제는 크게 기뻐하면
서 웃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토록 기막힌 살풍경한 와중에서도 용케 살아난 사람도 있었다. 바로 원황두라는 
사람이었다. 역시 사람 목숨은 질기기도 질긴 것인가.
  <자치통감>에는 이 사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황제는 원황두와 다른 죄인들을 금봉대 위에서 올빼미 모양으로 된 종이 연에 태워 날게 
했다. 원황두만 용케 목숨을 건져 무사히 땅에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  나온 
그도 결국 어사중승인 필의운에게 발견되어 굶어 죽고 말았다."
  어쨌거나 연에 사람을 태울 정도라면 매우 고급 기술을 가졌던 것이 분명하다.
  한편 도가 사상가였던 4세기의 중국인 갈홍은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연금술사였으며, 
천문학과 지질학에도 뛰어났던 만능 과학자였다. 그는 비행차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어떤 사람들은 대추나무로 비행차를 만들고  순환하는 날개에 소가죽 끈을 달아  기계르 
움직인 것이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섯 마리의 뱀, 여섯 마리의 용 그리고 세  마리의 소
를 만들어 강풍을 향해 그것을 타고 40리 높이까지 쉼 없이 날아오르려고 했다."
  여기에서 그는 일종의 헬리콥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서구에서는 1894년 처음으로 연에 의한 비행에 성공했다. 이는 559년 원황두의 비행
에 비해 1335년이나 뒤진 것이었다.

    콜럼버스와 나침반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나침반이 인류 역사를 소용돌이치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
었다.
  나침반이 없었다면 콜럼버스의 대항해는 물론, 그 뒤 폭풍처럼 휘몰아쳤던 서양의 식민지 
개척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찍이 프란시스 베이컨은 오늘날 현대 시대를 열게 한  결정적 3대 발명품을 화약, 인쇄 
그리고 나침반이라고 갈파했다. 묘하게도 이것들은 모두 중국에서 발명된 것이다.  중국에서 
발명되었지만, 서양인들은 그것을 수입하여 발전시켜 끝내 동양을 정복하고 근대 시대를 연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지남차가 기록에 나오고 있다.  지남차가 처음 기록에 나오
는 것은 중국의 시조라 불리는 전설적 황제 때 일이다.  황제가 숙명적 라이벌인 치우와 대
결할 때였다. 비바람과 안개가 자욱해 도저히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지남차를 
이용하여 방향을 잡고 끝내 적군을 추격해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지남차는 자석과 관계없는 것이었다. 지남차는수레 위에 인형을 세워, 달리는 방향
과는 상관없이 인형 손가락이 항상 남쪽을 가리키게 만든  것이었다. 또한 황제의 지남차는 
실은 후대에 각색된 이야기로 처음으로 지남차를 만든 사람은 후한 시대의 장형이라는 기술
자였다.
  그런데 자석이라는 말의 기원을 아는가.
  자석이란 원래 자석이라는 한자어였으며, 이는  갓난 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 즉  자모에 
이끌리듯 이끌리는 금속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자석을 지자기 방향에 맞춰 사용한 것은 후한 시대의 왕충이라는 사람이 쓴 <논형>에 처
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바로 '사남을 던지면 그 자루가  남쪽을 향한다'라는 기록이다. 여기

서 사남이란 일종의 나침반으로 숟가락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처음의 나침반은 단순히 천연 자석을 이용했던 유치한 수준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중국의 나침반은 수저나 국자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나침반을 
사용했던 목적은 주로 점을 치거나 집을 어디에 지을 것이며 무덤을 어디에 모셔야 하는가. 
또는 어느 곳에 도시를 세울  것인가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에 나침반이 
더욱 발전하면서 7~8세기에 이르면 바늘이 사용되었다. 당시 가장 정확한 나침반은 명당 묘
자리를 보는 풍수, 지관이 사용했던 것으로 가장 바깥쪽은 28수가 표시되어 있고, 그 안쪽으
로 눈금 표시가 된 40여 개의 동심원으로 되어 있었다.
  지리상의 북극을 가리키는 바늘과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반 바늘과의 각도 차이를  편각이
라 부른다. 자침의 북극은 지리상의 북극으로부터 약 1931km 쯤 빗겨나 있는  것이다. 일반
적으로 편각은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횡단할 때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편각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11세기 중국의 과학자 심괄은 자침
의 바늘이 정확한 남북의 방향에서 약간씩 동쪽으로 치우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냈던 것
이다. 

    신의 조화, 지진 탐지기
  별안간 땅이 쩍쩍 갈라지고,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삼켜 버리는 지진.
  고대 사람들은 이 무서운 지진이 인간들이  저지른 잘못을 징계하기 위해 하늘이  내리는 
재앙으로 알고 있었다. 중국도 오랜 옛날부터 지진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당해야 했다. 예를 
들어 1556년에 일어난 큰 지진으로 무려 80만 명이 죽는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중국에는 아주 오래 전에 지진 전문가가 있었다. 바로  앞에서 몇 번 언급했던 장
형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과학적인 지도를 처음 만든 사람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뛰어난 
과학자요 수학자이며 발명가였고, 후한 시대의 궁정 천문관이었다. 그는 우리가 사는 지구가 
무한한 우주에 떠 있는 공 모양의 물체이며 9대륙으로 이루어졌다고 파악했다.
  그런 장형이 132년에는 지진 탐지기도 발명했다. 그가 만든 지진계는 지진이 일어나면 청
동 구슬이 윗부분의 청동으로 된 용의 입에서 아랫부분에 설치된 두꺼비 입으로 떨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은 술독처럼 만든 직경 6척의 청동 용기였으며, 불룩한 뚜껑이 있었다. 겉
표면은 산, 거북, 새, 짐승 그리고 고대 문자 등이  장식되어 있고 용기 주변에는 여덟 마리
의 용 머리가 동일한 간격으로 달려 있으며 각각의 입에는 청동 구슬이 물려 있다. 용이 입
을 벌리면 구슬은 밖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또한 용기  바닥 부분을 둘러싸고 용을 마주 
보는 여덟 마리의 두꺼비들이 입을 크게 벌린 채 위를 보고 있다. 두꺼비들은 바로 용의 입 
아래에 앉아서 구슬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하여 청동 구슬이 청동 두꺼비 입
에 떨어지게 되면 소리가 나는 구조이다.
  이것은 바로 자명종의 원리이다.
  또한 어느 구슬이 떨어졌는가에 따라  지진이 일어난 진원지의 방향을 알  수 있었다. 이 
지진계는 내부 장치가 매우 정교해서 지금도 구조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심부는 
일종의 진자 장치로 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하나의 구슬이 떨어져도 다른 7개
의 구슬은 움직이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장형이 만든 지진 탐지기는 실제로 지진을 탐지해 내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후한서
>에 그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138년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진동이 없었는데도 영대(천문대)에  설치되어 있던 지동의 서
쪽 용의 입이 저절로 열리며 구리로 만든 구슬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빈정거렸다.
  "그럼 그렇지. 장형이 만든 기계란 고작해야 아이들 장난감일 뿐이란 말야!"
  그런데 며칠 뒤 서쪽으로 500km나 떨어진 감숙성에서  사자가 급한 전갈을 가지고 왔다. 
대지진이 일어났다는 다급한 보고였다.
  그러자 이제껏 장형의 지동의를 비웃던 모든  사람들이 크게 놀라면서 신의 조화  같다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장형이 만든 지진계는 그 뒤 중국에 전승되었지만, 원나라  시대에 이르러 지진계 원리가 
상실되고 말았다. 1950년이 되어서야 중국의 과학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기록을 종합
하고 현대의 과학 기술을 응용하여 겨우 장형이 지동의를 만든  원리를 알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지동의 모형을 복원시켜 박물관에 보관했다.
  서양에서는 1703년에 처음으로 지진계가 만들어졌다. 이는  장형이 만든 지진계보다 많이 
뒤진 것이었다.

    하늘이 절, 낙하산 
  오늘날 중국에서는 낙하산을 '하늘의 절'이라 부르고 있다.
  낙하산에 대한 세계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악기라는 사람이 1214년에 지은 <정사>에  남
아 있다.
  1180년, 광동 지방에는 한 회교 사원이  있었는데, 그곳 꼭대기에는 금으로 된 닭이  있었
다. 그런데 도둑이 들어 닭을 훔친 뒤  '낙하산'을 타고 유유히 달아났던  것이다. 그  도둑
은 
나중에 매우 으쓱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손잡이도 없는 2개의 우산에 매달려 내려왔다.  내가 우산을 쓰고 공중에서 뛰어내
리니 그것은 강한 바람을 받고 활짝 펼쳐져 날개처럼 되었다. 그 덕분에 난 상처 하나 없이 
무사히 땅에 내려올 수 있었다."
  그 뒤 태국에서도 낙하산이 사용된 흔적이 남아 있다. 17세기  말 시몬 드 라 루베르라는 
프랑스인은 루이 14세의 사절로 태국에 머무르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태국에 사는 어떤 사람은 몇 년 전 2개의 우산만으로 몸을 지탱한 채 탑 위에서 뛰어내렸
다. 그는 우산 자루를 자신의 허리띠에 단단히 붙들어 맸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자유
자재로 땅 위나 나무, 지붕 그리고 강으로 날아다녔다. 그는 국왕을 매우 기쁘게 했으며  대
영주로 받들어졌다. 국왕은 그를 궁전에 머물게 하고 명예로운 작위를 내려 환대했다.
  1세기 뒤에 이 글을 읽은 르노르망이라는 사람은 이것을 시도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
이 서양에서 최초로 실행되었던 낙하 기록이다. 그리고 그는  몽골피에 형제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고, 그 형제는 1797년 기구에서 낙하산을 타고 성공적으로 뛰어내렸다.

    모든 곡식에 영혼이 있다
  동남 아시아는 감자, 타로 감자,  사탕수수, 바나나 등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뿌리 재배 
농경 문화를 발전시켰다. 벼농사도 동남 아시아에서 기원했다.
  동남 아시아인들은 모든 곡식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쌀을 
지배하는 영혼은 숭배되었고, 논에서 큰 소리를 지르는 행위는  영혼을 괴롭힌다고 하여 엄
격하게 금지했다.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쟁기가 없었다. 그러다가 중국의 쟁기가 전래된 뒤 서양에서는 농업 
혁명이 일어났다.
  중국의 쟁기는 다른 지역보다 수백 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최소한 기원전 6세기에 중국인
들은 쇠쟁기를 사용했다. 이는 나무에  쇠를 씌우거나 전체가 쇠로 된  것으로 세계 최초의 
쇠쟁기였다. 기원전 4세기에는 국가에서 쟁기를  공식적으로 장려하고 있었다. 특히  중국은 
황제의 커다란 임무 가운데 하나가 농업을  장려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국가는 농업  생산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 민족의 시조로 추앙받는 황제가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공식적으로 나오고 있다. 당시 그리스나 로마
에서 사용되던 쟁기 비슷한 것은  고작 나무로 만든 보습 끝에  새끼로 동여맸을 뿐이었다. 
이렇게 하여 서양인들은 매우 좁은 밭을 경작하는 데  6~8마리의 소가 있어야만 했다. 이에 
반해 중국인들은 단지 1마리의 소만으로 넓은  땅을 경작했고 2마리 이상의 소를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태는  1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서양의 농업  생산력은 
동양에 비해 엄청 뒤졌다. 중국에서는 이미 3세기에  황보륭이라는 사람이 파종기를 발명하
여 농사에 유용하게 사용하는 등 농업 기술이 발달된 상태였다. 또한 중국인들은 한나라 시
대에 물통을 줄줄이 달아 그것을 돌림으로써 아래에 있는 물을  위로 끌어올리는  '용골차'
를 
발명하여 널리 보급했다.
  17세기에 네덜란드 선원들은 중국의 쟁기를  가져갔다. 그리고 쟁기는 서양  여러 나라로 
전래되었다. 드디어 1784년에 제임스 스몰이라는 사람이 쟁기를 처음으로 만들게 되었다.

    서양보다 1500년 앞선 중국의 철기문명
  인류를 다른 동물과 확실히 구분시켜 문명사회로 이끈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 
철기문명을 창조했다는데 있다. 철은 히타이트족(터키족)이 기원전 2천년쯤 인류 역사상  처
음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집트에서는 운석 모양의 철로 이루어진 파편이발견되기도  했다. 
철은 기원전 11세기쯤 로마에 전해지는 등 동서로 서서히 보급되었다. 히타이트족은 철제무
기로 무장하면서 전쟁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여 순식간에 주위 나라를 압도하면서  일등
국이 되었다. 당시 철제로 만든 무기는 왕후와 전사들만 소유할 수 있는 귀중품이었기 때문
에 금값의 다섯배까지 호가했다. 강철은 이미 기원전 10세기에  인도에서 가장 먼저 발명되
어 사용되었다.
  철이 중국에 전래된 것은 기원전 7세기쯤이었다. 중국문명은 그때까지 이집트나 메소포타
미아 그리고 인더스와 서유럽 등 다른 문명권에 비해 뒤진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철기 제조 기술은 이때부터 빠른 속도로 다른 문명권을 추월했다.
  기원전 4세기부터 중국에서는 철을  주조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인들은  청동을 아름다운 
금이라는 뜻의 미금이라고 부른데 반해, 철은 좋지 않은  금, 즉 악금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용광로의 벽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내화성 점토를 얻기가 쉬웠다. 또한 중국인들
은 흑토를 섞어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쇠를 녹이는 방법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뿐만 아
니라 수력을 이용한 풀무를 사용함으로써 섭씨 1200도의 고온을 얻을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인들은 철광석을 완전히 녹여 주철을 만들고 그것을 거푸집에 부어 넣는 
방식의 주조법을 전국 시대부터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서양보다 무려 15세기나 앞선것이었
다.
  제철사업이 대규모화되고 철기가 농업과 수공업에 널리 이용된 것은 춘추 전국 시대였다. 
당시 청동기 제작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최근에 발견된 당시 유물들의 정교한 제조 공정
과 기법은 오늘날까지도 해명되지 않고 있을 정도이다.
  청동기는 은나라 유적에서도 많이 발굴되고 있다. 은나라 후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이
는 청동기로 만든 제사 용기는 무게가 875킬로그램에 높이는 1미터나 된다. 또한 이 무렵의 
유적에서는 한번에 13킬로그램즘의 청동을 녹일 수 있는 대형도가니도 발굴되었다.
  그 뒤 한나라는 기원전 119년에 모든 주철소를 국영화하여 독점했다. 여기에서 생기는 엄
청난 재정수입은 역대 중국왕조를 지탱해주는 매우 중요한 물질적 원동력이 되었다. 한나라
때 전국에는 46개의 주철소가 있었다. 그리고 주철기술의 발달로  쇠괭이나 주철로 만든 쟁
기날이 개발되는 등 농업기술도 놀라우리 만큼 발전했다. 뿐만 아니라 창과 칼, 도끼, 톱, 송
곳 등의 유용한 도구가 잇달아 발명되었다. 
  한편 석탄은 중국에서 늦어도 기원전 4세기에는 연료로  사용되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석
탄을 용광로의 연료로 사용함으로써 주철생산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1105년 산동성에 세워진 주철탑은 매우 유명하다. 이 탑은  모든 재료를 주철로 만들었는
데 높이가 27미터나 된다. 954년에 후주의 군주였던 세종이 요나라를 정복한 기념으로 사자
모양의 조각으로 만든 대사자상은 무게가 무려 40톤이나 되고  높이는 67미터. 길이는 55미
터이다. 그 안은 비어 있으며 쇠의 두께는 5센티미터에서 27센티미터까지 다양한 변화를 보
인다. 이것은 단일주조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이다.

    얼굴이 예뻐지는 분수동분
  여러분도 묘하게 생긴 대야에서 물이 분수처럼 튀어 오르고, 그 물로 얼굴을 닦는 중국인
들의 사진을 가끔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분수동분이라는 것이다.
  분수동분이라는 청동 그릇은 매우 정교하게 균형이 잡혀 있으며 적당한 양의 물을 넣어 2
개의 손잡이를 알맞은 속도로 물지르면  물이 튀어 오르게 되어 있다.  물의 높이는 숙달된 
사람의 경우 무려 3.3척까지 튀어 오른다고 한다.
  원리는 이렇다.
  청동 그릇을 리듬 있게 문지르면 진동이  일어나 정상파를 일으키는 데 필요한  진동수가 
생기게 된다. 신비스럽게도 물이 표면으로부터 일제히 튀어 오르는 것은 바로 그 진동 때문
이다.
  중국인들은 분수동분의 튀어 오르는 물로 세수를 하면 얼굴이  예뻐진다고 믿고 있다. 그
래서 중국에 가면 매일같이 분수동분으로 열심히 세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비단 장수 왕서방
  고대 중국은 여러 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앞서고 있었다.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비단을 만드는 방적 기술은 중국이 자랑하던 대표 기술이었다.
  누에를 치는 양잠술은 원래 중국 민족의 시조, 황제의 부인인 누조가 발명한 것으로 알려
져 있다. 
  이미 5000년 전 신석기 시대의 유적에서 명주  조각이 발견되었으며, <시경>에도 비단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특히 산동 지방은 양잠으로 유명했는데, 그곳에서는 특이하게도 뽕나무 
대신 상수리나무 잎을 누에에게 먹였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비단은 일찍부터 매우 유명하여 로마에서도 중국 비단을 구하려는  수
요가 대단했다. 로마인들은 중국 비단을 SERA라고 불렀는데, 이  때문에 당시 중국은 서양
에서 '명주의 나라'라는 뜻으로 SERES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오랫동안 비단이 누에고치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그
들은 뽕나무라는 '신비한' 나무에서 채취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비단을 구하려는 로마인들의 열의는 대단했다고 한다. 당시 좀더 멋지게 보이려는 
로마의 귀부인들은 비단을 구하기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
늘 높은 줄 모르고 값이 뛰어오른 비단은 금과 같은 무게로 거래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엄
청난 로마의 돈이 마구 쓰여져  로마 제국의 재정은 휘청거렸다. 그리고  비단에 대한 높은 
수요는 동과 서를 잇는 실크 로드, 즉 비단길을 뚫게 만들었던 것이다.
  
    기원전부터 사용된 석유과 천연가스
  원래부터 구멍 파기는 중국인들의 특기였나 보다.
  중국인들은 깊은 우물이나 시굴갱을 파는 데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기원전 1세기에 우물을 파는 축정술을 발명했으며  그때 이미 1.5km 깊이까지 파
내려 갈 수 있었다. 중국인들이 착정술을 발달시킨 주요한  동기는 바로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귀중품인 소금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암염이 땅 속 깊이 묻혀 있어 그것을 채굴하거나 그곳에 물을 집어 넣
고 소금물을 뽑아 내는 방법으로 소금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하의 소금물을 얻기 위
해 깊이 파내려 간 우물에서 때로 천연 가스가 나왔다. 중국인들은 이를 '화정'이라 불렀다.
  이렇게 하여 중국인들은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석유와 천연가스를 연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고 한다. 그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가스를 여러 가지  조정 장치와 제어 장치를 설치하여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었다. 천연 가스는 커다란 쇠가마를  가열하는 데서부터 가스등을 켜
는 데 그리고 도시 난방에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천연 가스를 운반하기 위해 오늘날의 부탄 
가스통 같은 용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일부 '화정'에서는 액체, 즉 석유가 솟아올랐다. 석유는 대나무 통에 넣어져 운반된 뒤 사
용되었다. 사람들은 그 액체가 태양의 정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석유는 석
유 램프 등만이 아니라 바위를 쪼개는 대형 공사에 이용하기도 했다.
  고대 시대에 불을 내뿜는 우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신기한 모습이었
을까?
  실제로 17세기 초의 중국 기록을 보면 이러한 표현이 잘 나타나 있다.
  '화정'은 실로 기묘하기 짝이 없다. 우물에는 차가운 물만  있을 뿐 아무리 봐도 불기운은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은 긴  대나무를 연결해 관을 만들고 칠을  이용해 윗부분을 단단히 
덮는다. 이 관의 한 끝을 우물 속에 밀어넣으면 그 관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온다. 그러나 대
나무를 열어서 살펴보면 그을리거나 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불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도 불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정말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었다.

    허공에 떠오른 아치
  성수대교 붕괴사건이 일어 난 뒤부터는 우리는 다리 이야기만 나오면 고개숙인 국민이 되
어야 했다. 왜 우리는 다리란 모름지기 튼튼해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그토록 오랫동안 철
저하게 무시하면서 살아야 했을까?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들은 다리를 만들어 왔다. 그리고 다리  만드는 방법이 발전함에 따
라 여러 형태의 다리가 출현했가. 그 가운데에서도 케이블로  평범한 상판을 달아맨 출렁다
리, 즉 적교는 중국에서 발명되었다.
  가장 간단한 출렁다리인 외줄 로프도 중국에서 처음으로 발명되었다. 그들은 발달된 석궁
기술을 응용하여 화살에 꽤 무거운 로프를 매달아 반대편 언덕으로 쏘아 보내는 방법을 사
용했다. 이러한 외줄 로프는 곧이어 두줄, 세줄로 발전했고 마침내 케이블을 설치 하는 데까
지 이르렀다.
  기원전 25년 험난한 히말라야 계곡에는 출렁다리가  설치되었다. 전한서에는 그에 관계된 
기록이 나온다. 그것은 길이가 약 30리에 이르며 길의 폭은 5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매우 
좁은 길이다. 더구나 곳곳에 단애절벽이 있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서로 손을 잡고 한걸
음 한걸음 걸어간다. 여기에 로프로 된 적교가 깊은 협곡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걸쳐있다. 이 
협곡을 지날 때 아주 끔찍한 느낌을 형용할 수 없다.
  90년에는 원시적 출렁다리에 처음으로 깔판이 등장했다. 원래 중국의 케이블 다리는 대나
무로 만든것이었다. 대나무는 겉으로 보기에 약해 보이지만 튼튼한  강철의 반 정도의 인장
력을 갖고 있었다. 중국의 출렁다리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사천성에 있는  안란색교인데, 
길이가 무려 300미터이며 금속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이  다리는 기원전 3세기에 이빙이
라는 사람이 건설했으며, 발판의 폭은 3.6미터에 달한다.
  본격적 출렁다리는 쇠사슬을 이용함으로써 출현했다. 쇠사슬을  양쪽 끝에 고정시키고 다
리 발판을 거의 수평에 가깝게 만듦으로써 출렁다리 건설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
다. 쇠사슬로 만든 출렁다리 가운데 가장 긴 것은 서강성에 있는 노정교로 그 길이는 361척
이나 된다. 노정교는 1705년에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모택동 
군대가 대장정을 하고 있을때였다. 그때 모택동의 홍군은 다리 발판이 거의 떨어져 나간 상
태였는데도 장개석의 토벌군대가 퍼붓는 빗발치는 포화를 뚫고 치열한 전투를 거듭하며  성
공적으로 다리를 건넜던 것이다.
  중국의 출렁다리는 서양에 신비스럽고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감탄만 
하고 있었을 뿐 오랫동안 그 기술에 대해 전혀 알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비로소 
서양최초의 쇠사슬식 출렁다리가 만들어졌다. 1741년 영국의 티즈강에 건설된 것이었다.  이 
다리는 케이블로만 되어 있었고 차는 다닐수 없었다.
  서양에서 만들어진 적교로 차가 다닐수 있는 최초의 것은 1809년 매사추세츠 강에 세워졌
다.

    환상적 다리, 활 모양의 아치교
  '아치교가 반드시 반원일 필요는 없다.'
  오늘날에는 너무 평범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 말이 옛날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었다. 
  그 어려운 말을 현실화시킨 사람은  7세기에 살았던 이춘이라는 뛰어난 중국인  기술자였
다. 그는 둥근 활 모양의 다리를 만들어 냄으로써 다리가  반드시 반원일 필요는 없다는 사
실을 입증했다. 그가 610년 세계 최초로 만든 궁형 아치교는 지금까지는 그대로 남아  있다. 
바로 중국 북부의 효수에 있는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다리'라는 뜻을 가진 안제교이다. 이 
다리에 대해 중국인들은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있다. 다리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효수 위에 놓은 이 돌다리는 수나라의 기술자 이춘의 업적이다. 그 건설은 실로 비범하며 
그가 어떤 원리에 기초하여 다리를 놓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절묘한 석재 사
용법을 보라. 곡면은 대단히 매끄러우며, 아치의 홍예석은 완벽하게 맞붙어 있다.
  허공에 떠오른 아치는 얼마나 높은가! 또한 교각이 없어도 아치의 구멍은 얼마나 큰가!
  돌의 십자 쌓기와 접합은 정밀하여 석조의 돌들은 물레방아나 우무르이 벽처럼  치밀하게 
맞붙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돌  틈을 메우고 있는 모르타르 외에  중앙의 가느다란 철제 
죔쇠는 돌을 하나로 잇고 있다. 양끝에는 각기 4개의  작은 아치가 홍수의 노도를 누그러뜨
리면서 다리를 강력하게 떠받치고 있다.
 당시 지구상에 있었던 아치교는 모두 반원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춘이 건설한 다리 모양
은 인류사상 최초의 아이디어였다. 마치 커다란 원의 가장 윗부분만 지상에 드러난 듯한 활 
모양의 아치교 원리는 마르코 폴로의 시대에 유럽에 전해 졌고, 13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비
로소 실용화되었다.
  중국 최대의 궁형 아치교는 길이가 210m에  달하는 마르코 폴로교이다. 마르코 폴로교라
는 이름은 당시 중국에 살고 있었던 마르코 폴로가 그 다리를 매우 자세하게 설명했기 때문
이다. 그는 이 다리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다리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다리는 
11개의 궁형 아치가 이어져 있고 정교한 조각이 수놓아진 난간에 283개의 대리석 사자 머리
가 있으며, 열 명이 말을 타고  나란히 달릴 수 있는 '기막힌' 다리였던  것이다.  1189년에 

설된 이 다리는 지금도 트럭이나 버스가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다.

    수레의 발명
  자전거는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인가.
  자전거는 앞바퀴와 뒷바퀴 연결 부분에 쇠사슬 구동 장치가 있기 때문에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쇠사슬 구동 장치를 중국인들이 발명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
의 없다.
  1090년 중국의 유명한 발명가인 소송은 수운혼천의 라는 커다란 천문 시계탑을  만들었는
데, 가로와 세로가 7m이며 높이는 12m나 되는 엄청난  규모였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점은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장치에 '하늘의  사다리'라 불리는 쇠사슬 장치를 이용
했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동력 전달용 순환 사슬이었다.
  서양에서는 자크 드보캉송이라는 사람이 1770년이  되어서야 비단 공장에 쇠사슬  장치를 
이용했다. 그리고 1869년 트레츠가 이 장치를 자전거에 응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자전거를 움직이게 만드는 쇠사슬  구동 장치는 중국이 서양보다 800년이나  앞섰
다. 
  병거는 중국 고대 시대에 가장 기본적 무장 형태였다. 중국  은나라 때 이미 병거가 사용
되고 있었다. 백승, 천승이라는 말은 귀족을, 만승은 왕을 가리키던 용어이다. 이 말은  병거
를 백 대, 천 대, 만 대 동원할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병거는 목재로 만들어졌는데 자
축은 청동으로 되어 있었다.
  특히 바퀴는 평평하게 되어 있지 않고 바퀴살이 바퀴통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이러
한 접시 모양의 바퀴는 곧은 바퀴보다 튼튼했고 속도도 훨씬  빨랐다. 그러나 이 접시형 바
퀴는 유럽에서는 16세기 이전에 결코 구경할 수가 없었다.

    외바퀴로 달리는 차
  바퀴 하나로 달리는 약간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일륜차.
  일륜차는 기원전 1세기에 중국의 갈유라는 도사가 발명했다고  한다. 그는 나무로 산양을 
만든 다음 그것을 타고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우리 국민들의 필독서인 <삼국지>의 영웅인 제갈공명도 훌륭한 발명가였다.
  특히 제갈공명은 목우라고 불리는 외바퀴 손수레를  발명했다. 제갈공명이 일륜차를 만들
었다는 점에서도 암시되듯 일륜차는 오랫동안 주로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런 만큼 
자세한 제조 기술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일륜차는 중국의  험난한 산악 지대에서 전투
하는 병사들에게 보급품을 수송하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품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일륜
차가 기마 부대의 기습에 대비하는 이동식 방벽으로 사용되었으며 진을 치는 데도 이용되었
다. 때로는 돛을 달아 땅 위나 얼음 위를 시속 60km로 달리기도 했다.
  일륜차라도 바퀴가 한가운데 있거나 앞쪽에 붙어 있는 것도  있었다. 바퀴 크기도 다양했
고, 보조 바퀴까지 있는 것도 있었다.
  이러한 일륜차는 11세기가 되어서야 서양에 전래되었다.

    가장 오래된 플라스틱, 칠
  우리에겐 나전 칠기로 이름이 익은 칠.
  그것은 윷나무 줄기에서 나오는 액체를 원료로 한다. 여름에 수액을 채취하는데, 한 번 채
취한 뒤 5~7년이면 나무가 다시 회복된다.  한 그루의 나무에서 채취할 수  있는 칠의 양은 
50g 쯤이라고 한다. 칠 가운데에서도 최상품으로 쳐주는 것은 14~15년  된 나무에서 채취한 
칠이다.
  칠은 가장 오래 된 플라스틱이라 할 수  있으며, 유연한 니스라고 할 수 있다. 칠은  섭씨 
200~260도까지의 높은 열에도 견디며, 대부분의 용액에는 녹지 않는다. 또한 세균에 대한 저
항력이 강하며 전기 절연체로서의 기능도 매우 뛰어났다. 그리하여  칠은 지구에서 가장 견
고한 식물성 물질이라 할 수 있다.
  칠은 가구, 베개, 신발, 칼집, 활, 방패 그리고 각종 함 등의 장식에 이용되었다. 이렇게 칠
을 한 칠기는 값이 매우 비쌌기 때문에 청동보다 값이  더 나갔다. 중국의 황제는 신하들에
게 상으로 칠기를 하사하곤 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  된 칠기는 우리 나라의 낙랑
군 지역에서 출토된 것이다. 그 칠기는 한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어로 칠을 래커라고 부른다. 그런데 래커는 옻나무에서 추출한 것 외에 여러 합성 물질
도 통칭한다. 그리고 합성 래커에  착색을 한 에나멜은 요즈음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원전 2세기에 중국인들은 칠이 굳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칠 속에 게를 집어 넣는 기상천
외한 방법을 사용했다. 미신처럼 보이는  이 방법은 놀랍게도 뒷날 게에  응고 작용을 막는 
강력한 성분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됨으로써 과학적 유효성이 입증되었다.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똑딱
  오늘날 세계인의 필수품이 된 시계.
  그 시계의 원형은 물시계였다.
  물시계는 바빌로니아인들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명했다. 이 물시계는 중국에도 일찍부터 
전래되어 사용되고 있었다. 세계 최초의 기계 시계는 중국의 스님이며 수학자인 일행이 725
년에 만든 것이다. 이 기계 시계는 물시계와 기계 시계 중간쯤의 형태였다.
  1092년 소송이라는 과학자가 만든  수운혼천의라는 시계는 크기가 2.7m나  되는 매우 큰 
천문 시계탑이었다. 그리고 탑 위에는 혼천의라는 천문 기구가 있어 별의 위치를 관측할 수 
있었다. 탑 앞면에는 5층으로 올려진 층계와 문을 가진 탑 모양의 구조물이 서 있었고, 그곳
에 인형이 나타나 종이나 징을  울리면서 시각을 알리는 동물 모형을  올리게 되어 있었다. 
이 기계에는 거대한 물레방아가 있었고, 페달 판마다 물받이통이  달려 있어 물시계에서 물
이 그 안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정확히 15분마다 물받이통에 물이  차서 움직이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디지털 
방식의 물시계는 우리 나라에도 도입되어 조선 시대 세종 때 자격루라는 물시계가 만들어져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이 시계가 중요한 것은 이 시계에 처음으로  이용되었던 탈진기라는 장치 때문이다. 
원통의 변에 붙어 있는 작은 상자들의  운동을 제어하는 장치인 탈진기는 오늘날에도  시계 
부품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이다.
  이렇듯 일찍부터 동양에서 놀라운 발전을 보이던 시계들이 오늘날의 기계 시계로  나아가
지 못하고 멈춘 것은 참으로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저 푸른 물결을 헤치고
  15세기에 세계 최강의 함대는 어느 나라 함대였을까?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대부분 대영 제국이나 네덜란드, 스페인, 콜럼버스 탐험대라고  대
답할 게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정답을 완전히 비껴 나간 것이다.
  15세기 최강의 함대는 결코 서양 함데가 될 수 없었다.  당시 최강의 위용을 자랑했던 함
대는 중국 명나라 영락제 때 정화라는 인물이 이끌었던 대함대였다.
  정화의 1차 항해는  거선 62척에 2만  7800여 장병이  승선했다. 이때 배의  크기는 길이 
150m, 폭은 62m에 달했으며 8000톤이나 되는 세계 최대의  크기였다. 바스코 다 가마가 케
이프타운을 발견할 때의 배는 고작 120톤이었고, 콜러버스가  그토록 위세를 뽐내며 달렸던 
배도 250톤에 불과했다.
  정화가 이끄는 명나라 원정대는 말라카 해협을 건너 인도  서해안을 항해했으며, 이후 멀
리 아프리카 동해안과 아라비아 반도까지 누비고 다녔다. 이 과정에서 한두 건의 무력을 행
사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평화적으로 30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교역을 추진했다.
  중국은 이렇듯 서양보다 훨씬 앞선 조선 기술과 항해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무려 2000년 
동안이나!
  중국은 서양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뛰어난 항해 기술을 개발해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서
양에서 만든 배로는 결코 격랑의 파도가 휘몰아치는 망망대해를 항해할 수 없었다. 키나 돛
은 오랫동안 중국의 독점물이었다. 특히 중국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평형 세로 돛은 인간의 
풍력 이용 가운데 최대 성과라고 평가될 만큼 뛰어난 발명이었다.
  따라서 서양인들은 항해술, 조선술, 조타술 등에 대한 모든 기술을 중국에게 배워야 했다. 
중국의 기술을 배운 뒤에야 비로소 신대륙 발견도 가능해졌던 것이다. 서양인들은 진심으로 
그들의 스승 동양인들에게 거듭 감사해야 한다.

    택시 미터기와 주사위
  택시를 타면 운전석 앞에서 부지런히 찰깍찰깍 돌아가는 택시  미터기, 택시 미터기는 손
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만 하는데...
  택시 미터기가 중국에서 발명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중국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기리고차라는 것이 있었다. 이를 다른 말로 로정차라고도 했다.
  그것은 수레 바퀴의 회전 수에  따라 수레가 움직인 거리를 자동  측정하는 것이었다. 이 
수레는 바퀴가 100번 회전하면 1리가 되도록 되어 있었다. 즉, 1리를 달리게 되면 수레 위에 
마주 보고 서 있는 2개의 인형이 중간에 있는 큰 북을 쳐서 1리를 알렸던 것이다. 기리고차
는 후한 시대 유명한 과학자인 장형이 만들었으며, 삼국 시대부터 널리 사용되었다.  이것이 
개량되어 오늘날의 택시 미터기로 된 것이다.
  중국의 강태공들, 낚시꾼들은 일찍부터 릴 낚시를 즐겼다. 그들은 릴을 '조차'라고 불렀다. 
그들은 최소한 12세기에 릴을 사용하고 있었다.
  릴의 기원은 기원전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묵자>에는 수많은 투창을 적에게 발사
하는 기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창을 그대로 쏘아 소모하기엔 너무 아까웠기 때문에 창에 끈
을 달아 릴식의 감는 기계로 회수하는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물론 적을 맞춘 창은 회수
할 수 없었다. <묵자>에는 기하학, 광학, 역학, 논리학 등의 여러 분야에 걸쳐 흥미 있는 내
용이 실려 있다. 예를 들어 '원은 중심에서 같은  거리에 있다'라든가 오목 거울의 그림자에 
대한 관찰도 들어 있다. 사람을 살상하는 무기에서 물고기를 잡는 기구가 비롯도니 것은 정
녕 아리러니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색종이와 주사위도 중국에서 최초로 발명되었다. 당나라  초인 7세기에 이미 색종이
가 사용되고 있었으며, 조조의 아들인 조자건은 3세기에  주사위를 처음으로 사용했던 것이
다.

    세계 최초의 장갑선, 거북선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압도적으로 일본군을 물리치고 조국을  방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거북선은 당시 돌격선으로 활약하면서 왜구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심어 주었다. 거북선
은 일본군을 꺾기 위해 이순신 장군이 만든 비장의 카드였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징비록>이라는 책을 지었던  유성룡과 절친한 사이였다. 하
지만 조야에서 이러한 주장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순신 장군은 스스로 조국을 지키고
자 결심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끝내 거북선 발명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처음으로 창안 했고 기술자인 나대용의 피나는 노력으로  만들어
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거북선은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장갑선이다.
  거북선은 선상에 나무 덮개를 덮고 쇠못을 꽂아 적이 뛰어들지 못하게 했고, 좌우에 각 6
문, 전후에 각 1문의 대포가 장치되어 있었다. 거북선에 장착한 대포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의 대포보다 월등한 화력을 자랑했다. 앞부분에 있는 용 머리 모양의 입에서는 '공포스
러운'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노는 배의 안쪽에서 젓도록  되어 있었다. 거북선의 크기는 길
이 28m, 폭은 8.75m였다.
  그런데 우리가 쉽게 연상하듯 당시 수많은 거북선이 떼 지어 전쟁을 치른 것은 아니었다. 
거북선은 정교한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많이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다잇 겨우 3척의 거북선만 활약했을 뿐이었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수군이 강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여 한중일 삼국의 해상
로를 완전 장악했던 것은 강력한 수군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
에도 연안을 노략질하는 왜구를 격멸하는 등 강력한 수군을 두고 있었다. 결국 이순신 장군
의 승리도 이러한 전통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중국에서 발명된 최루탄
  몇 해 전만 해도 거리마다 최루탄이 난무하고 우린 맵디 매운 최루탄 때문에 눈물을 하염
없이 흘려야 했다. 그런데 최루탄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발명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중국에서 독가스를 사용한 화학전은  묵자에 의해 기원전 4세기에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묵자의 책에는 적에는 적을 포위한 뒤 소가죽으로 만든 풀무를 화로에 연결시키고 말린 겨
자 씨를 불에 그슬려 그 유독 가스를 날려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중국에서는 이미 기원전 7세기에  짚을 더운 연기에 쐬서  찌는 훈증이 시행되었다. 
그리고 이 훈증 기법이 응용되면서 독가스도 쉽게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루 가스는 최소한 2세기쯤에는 실전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사에는 178년 
농민 반란을 진압할 때 최루 가스를  사용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최루 가스는  27.8%의 초
석, 같은 양의 유황 그리고 44.3%의 탄소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천천히 연소되었으며 비소
나 동물의 배설물을 포함하고 있었다.
  중국의 한 문헌에 따르면 '이리의 똥을 태운 여기는 낮이나 밤이나 붉게 보이므로 경고의 
신호를 보내는 데 이용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540년에 비린구치오는 중국의 고전적 화창 이용법을 자신의 저서인 <화약기술>에 쓴 바 
있다. 그 화창에는 비소와 독극물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화창은  점화가 
되면 2~3m 정도의 강한 불길이 솟아오르는 동시에 크게 폭발하면서 공포감을 준다고 했다.
  1500년쯤 중국인들은 공격 작전을 구사할 때 유황 연기,  깃털을 태운 연기, 유황과 비소, 
나아가 두꺼비와 독거미의 독액을 타액과 섞어 만든 폭탄도  사용했다. 그리고 1580년쯤 유
럽에서는 비소가 매우 선호되었다.

    석궁과 노포
  고대 중국인들은 수렵에 활로 된  덫을 사용했다. 보통의 활은 겨냥할  때 세로로 들지만 
활 덫을 놓을 때는 활을 수평으로  겨냥했다. 활 뒤에는 막대기나 긴 나무  조각을 두고 그 
끝으로 활의 줄을 팽팽하게 당긴다.  그렇게 하여 동물이 지나가다 덫의  끈에 발이 걸리면 
막대기가 끌려가면서 활을 발사시켜 동물에 맞게 된다.
  중국 군대가 2000년 동안 기본 장비로 갖추고 있던 석궁은 활 덫을 응용한 무기이다.
  석궁에 대한 가장 오래 도니 기록은 기원전 4세기에 <손자병법>의 저자로 유명한 병법가
인 손빈의 것이다. 춘추 전국 시대의 유명한 '마릉의  전투'에서 손빈의 강력한 석궁 부대는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또한 묵자도 성을 공격할 때 석궁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기원전 3세기에 지어
진 <여씨춘추>에는 석궁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석궁은 방아쇠 장치가 쌀알갱이만큼이라도 틀리면 아무런 쓸모도 없다.'
  석궁을 만드는 기술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점은 청동으로 만든 방아쇠 장치이다. 당시 금속
을 깎는 선반 같은 기계가 없었는데도 청동 방아쇠 장치는 놀랄 만큼 정확한 기계였다.
  초기에는 석궁을 발사할 때 줄을 잡아당기는 데 매우 강한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강한 힘
을 가진 병사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석궁을 발사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 뒤 발사 방식
이 개량되어 발사가 용이해졌다. 석궁에 사용된 조준기도 중국인이 최초로 고안한 방법이다. 
이 조준기에는 눈금도 그려져 있어 매우 정확하게 목표물을 조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11세기에는 11발의 화살을 연발로 발사하는 연사실, 즉 기관총식 석궁도 발명되었다. 이때
의 석궁은 유효 사정거리가 73m이고 최대 사정거리는 183m나 되었다. 이 석궁의  살상력이 
컸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독화살이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독화살에 살짝 스치기만 해
도 결코 무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연발식 석궁이  나온 뒤에는 독화살을 장착한 석
궁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최강의 무기가 되었다.
  석궁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예를 들어 140걸음이나 떨어진 곳에서 발사된 석궁의 화살
은 두꺼운 느릅나무 판을 완전히 뚫을 정도였다.
  서양에서는 석궁과 비슷한 형태의 노포가 고대  그리스에서 성을 공격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아마 중국으로부터 밀반입되어 온 비밀 병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로마 시대에 휴대
용 석궁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석궁도 돌연 자취를 감추고 말
았다. 그러다가 500년이 지난 10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석궁이 다시 등장했다.  중국에서 
발명된 대부분의 기술들이 서양에 전래되어 활발하게 이용되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석궁만
은 서양에서 별로 이용되지 않았다. 아마 석궁이 서양에 전래된 시기가 매우 늦어서 전래되
었을 때는 이미 총이 발명된 이후였기 때문이리라.

    화약은 연금술사들이 발명했다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화약이 발명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화약이 발명된 것
은 군사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약, 즉 불로불사의 비약을 구하던 연금술사
들에 의해서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화약을 만드는 데서 세 가지 성분이 필수적이었다. 바로 황, 초석 그리고 탄소이다. 그 가
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질산 칼륨, 즉 초석이었다. 초석이라는 광물은 서양에서는  중
세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에서는 그것을 구할 수 있는 자연 광산이 있었다.
  화약을 만드는 또 하나의 성분인 황은 중국에서 이미 2세기 <신농 본초경>에 기록이  나
와 있다. 황과 염초는 한나라 시대부터 연금술사들이 사용하던 약품이었으며, 여기에 숯가루
만 섞으면 화약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수나라의 유명한 의사인 손사막은 초석과 황의 혼합물이 격렬하게 연소하는 사실을  알아 
내고 거기에 목탄을 결합시켜 흑색 화약을 발명했다고 한다.
  초기 중국의 화약은 초석 비율이 50%였다. 이때에는 별로 폭발력이 강하지  않았다. 폭발
력을 가장 강하게 하려면 초석의  비율을 75%로 해야 했다.  이렇게 하여 중국인들은 차츰 
폭발력을 높이면서 각종 폭탄과 수류탄, 지뢰 그리고 기뢰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초석이나 황을 비교적 구하기 쉬웠고 또 목탄 등에서 탄소를 쉽게 구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처음 연금술사들이 화약 제조에 필요한  이들 세 가지 성분을  '우

히' 혼합하여 화약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화약 제조법을 기록한 최초 기록은 9세기  중반에 쓰여진 <진원묘도요락>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도교 경전으로, 저자는 4세기의 유명한  연금술사인 갈홍(갈홍은 포박자로 더욱 알
려진 인물로 도가 사상 최대의 자연주의자이며 연금술사였다)의 스승인 정은'이라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즈음의 화약은 불꽃놀이같은 낭만적 용도로만 사용되었으며, 아직 폭
발용이나 살상용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오늘날과 같은 화약 제조법은 송나라 때인 1040년쯤 증공량이라는 사람이 발명했다. 증공
량은 석궁으로 발사되는 폭렬탄, 목조 건축물에 불을 붙이는  갈고리가 달린 소이탄 그리고 
독가스탄이라는 세 가지 종류의 화약 제조법을 발표했던 것이다.  물론 이때의 화약은 폭발
물 수준이 아니라 소리를 크게 내면서 터지는 폭연물 같은 수준이었다.
  그 뒤 도화선이 고안되어 초석의 혼합 비율이 75%로 되면서 폭발력이 매우 강해졌다. 단
순히 연소하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강하게 폭발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총과 대
포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화염 방사기도 중국에서 일찍부터 사용되었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화염 방사기가 사용된 
것은 904년쯤이었다. 이 무렵에 일어났던 전쟁에서 '연속적으로 불을 날리는' 기계를 사용했
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1044년쯤에는 화염 방사기가  중국 군대의 기본 장비
가 되었던 것 같다.
  오늘날 최첨단 무기인 로켓도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969년에 화약을 
장착한 '불화살'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화살은  화살에 마른 쑥이나 솜을  달아 기름을 적신 
다음 불을 붙여 쏘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불화살은 화약이  발명된 이후에는 화살 끝에 소
형 원통을 부착하고 거기에 화약을 넣어 불을 붙여 날리게  되었다. 일단 발사된 뒤에 뒷부
분에 장착된 화약이 폭발하는 힘에 의해  다시 한 번 추진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불화살은 10세기 송나라 초기부터 사용되었으며, 13세기에  몽골군이 송나라 서울을 포위했
을 때 불화살의 공격을 받고 대패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참고로 15세기 중국의 1개 대대의 장비를 살펴보도록 하자.
  1개 대대는 40대의 포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3600발의  벽력포와 160문의 '진구장군포' 그
리고 포도탄을 발사하는 연발식 연주포 대형 200문과 소형 328문을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
니라 소총 624정을 비롯하여 수류탄 300개와 약 6.97톤의 화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1개 대
대가 지녔던 총탄은 무려 105만 1600발 이상이었으며, 이렇게 하여 병기류의 총중량은  29.4
톤이나 되었다.
  당시 중국 군대는 한 번에 수십 만의 병력을 동원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이에 반해 17세
기에 영국인들이 벌였던 전쟁은 기껏해야 수천 명이 어우러져 벌이는 싸움에 불과한 수준이
었다. 그런데 서양인들이 이 세상에 화약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던 때는 언제였을까?
  바로 용맹스러운 전사의 나라, 몽골 민족이 서양까지 정벌하고  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시
절이었다. 그들은 그때 몽골 군사들이 퍼붓는 화약이라는 치가  떨리도록 무서운 무기를 처
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화약은 그 뒤 일한국을 통해 서구에 직접 전래되었다.
  서양은 이렇듯 뒤늦게 화약을 알았지만, 즉각 그것을 강력한  전쟁 무기로 발전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왜냐하면 유럽은 이미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치열한 전쟁의 와중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보다 무력이 강해야 했고, 여기에  화
약이 가장 위력적인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경쟁적 상황에서  서양 각국은 강력한 화약  개발에 박차를 가했으며, 
드디어 15세기 초에 이르러 화승총을 발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화약을 비약적으
로 발전시켜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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